00001 프롤로그 =========================================================================                        “저 녀석을 막아라!” 화려한 마법이 땅바닥을 망치처럼 두들겼다. 마족들이 할 말을 잃었다. 신화가 재현되고 있었다. 마법의 빗줄기, 아니 대포가 끊임없이 전쟁터에 쇄도했다. 대지가 진동했다. 독전관이 병사들 등을 후려치면서 소리쳤다. 저 녀석을 막으라고.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말인가? “대, 대장님. 적군이 너무 거셉니다.” “벌써 제2진까지 돌파당했습니다……미노타우르스 부대가 전멸했어요!” 마인들은 모두 정예병이었다. 전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기꺼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는 마인 정예병도 기겁했다. 마법이 쏟아지는 한가운데로 내달리는 인간이 한 명 있었다. 마치 대로를 질주하듯이. 마법과 화살의 세례에도 개의치 않고 인간은 대검을 휘둘렀다. 대검이 번쩍일 때마다 마인 정예병 열댓 명이 창자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목숨을 바치라면 기꺼이 바친다. 승리를 위해 희생하라면 기껍게 받아들인다. 그러나――저 인간을 막아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런 쫄보 새끼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대왕 폐하의 군대냐!” 독전관이 아군 병사의 목을 뱄다. 평생 적군보다 아군을 더 많이 죽여본 이였다. “싸워라! 죽을지언정 창이라도 한번 찌른 다음에 죽으란 말이다!” 그가 할버드를 꼬나쥐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자 마족 병사들이 이내 독기에 차올랐다. 그들은 양쪽의 동료와 전열을 맞추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시발! 한 번 죽지 두 번 뒈지겠냐!” “저 괴물 새끼 모가지만 따면 다 끝이야! 마족의 긍지를 보이자!”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훕!” 마족 병사들이 특유의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신념이 있었다. 생김새가 달랐으나 그들이라고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내딛는 발걸음, 거기에 실린 용기도 똑같았다. 그렇기에 허무했다. 그들이 나에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내가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일까? 우선은, 맞았다. 나는 강했다. 그걸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한 바닥 놓여 있었다. 그 탓에 마족들이 아무리 용감하게 걸음을 내딛어도, 눈앞에서 지푸라기 흩날리듯 머리가 몸통에서 잘려 날아가는 동료를 보며 발광하더라도, 내 칼끝에 비명횡사했다. 마침내. “크읍! 나 바알이 일개 인간에게 죽으리라고는……!” 대마왕 바알의 던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돌파되었다.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은 그곳이 말이다. 푸욱, 하고 나의 서늘한 대검이 마왕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안심하라, 마왕.” 내가 바알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세계의 악몽이자 전무후무한 대마왕이라 불린 마족이 죽어가고 있었다. 자그마치 120층으로 이루어진 대미궁 또한 이제는 약간 거대한 공동묘지로 전락했다. “그대는 분명히 내 최고의 적수였다.” “…….” “한 명의 전사로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크흐.” 바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인간들 중에서도 아직 긍지를 품은 이가 남았던가.” “아니야.”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대가 우리 인간에게 강요했어. 긍지를 품을 것을. 그만큼 그대는 강했다.” “하! 나 바알의 오천 년 생애가 무의미하지 않았음이라.……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에게 신념이 가닿았다. 필멸자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일찍이 이만한 업적을 이루어낸 마족이 있었는가. 없다. 없을 것이다…….” 바알이 두 눈을 감았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일개 하급마족으로 태어나서 마계를 재패. 인간계까지 넘본 제왕이 생을 마감했다. 나는 제왕의 시체를 향해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 내 주위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대마법사, 기사단장, 대도(大盜), 성녀, 모두 이십 년이 넘도록 고락을 함께 나눈 동료였다. “짜식이!” 기사가 와락 달려들어 내게 헤드록을 걸었다. 내가 아파! 아프다고! 라고 비명을 지르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 또한 열 시간 가까이 전쟁터에서 굴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원, 알 수가 없었다. “축하해, 로리타.” 두 남정네가 툭탁거리는 사이 세 명의 여인이 다가섰다. “헤에. 진짜로 바알의 던전을 공략할 줄이야! 꽤 하잖아.” “무슨 소리예요? 저는 처음부터 로리타 님께서 해내실 거라고 확신했어요. 열두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걸요.” 기사가 토라져서 투덜거렸다. “아이고. 누가 보면 이 자식 혼자 마왕성 깨부순 줄 알겠네. 이거 홀아비는 서러워서 어디 던전에 놀러올 수나 있겠나, 쳇.”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 웃었다. 외진 산골에서 곰탱이랑 이웃사촌 먹으며 십 년은 굴렀을 법한 용모로 그리 중얼거리니 웃지 않고 배기겠는가.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자 드디어 실감이 났다. 아, 끝났구나. 내가 정말로 바알의 던전을 공략했구나. 대마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대륙을 강타했다. 국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이 환호했다. 그들은 인간계가 멸망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대마왕성을 함락하겠다며 수십 개의 군단이 출진했으나 모조리 전멸했다. 대다수의 사람은 희망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용사 일행이 모험자와 용병을 이끌고 대마왕을 토벌한 것이었다. 영웅의 탄생! 대륙 전역에서 축제가 열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마족이 지상에 전염병을 퍼트린 이십 년 전부터,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장례식장과 같았다. 끔찍한 나날이었다. 이제 악몽이 끝났다. 인류는 지난 이십 년을 보상받을 기세로 마음껏 놀았다. 건배 소리와 웃음소리가 도시 상공에 흩날렸다. 거기에는 어쩐지 처절한 구석이 있었다. 당연했다. 보상받고 싶어도 보상받지 못할 이들이 있었으니까. 많은 이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인간들은 웃다가 곧바로 울면서, 다시 웃어재꼈다……. “모험자 로리타.” 여황제가 친히 축제에 왕림하여 영웅을 치하했다. 여황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계를 지배하는 열두 국가의 군주 전원이 참석했다. 그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위대한 영웅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대는 작게는 마왕을 토벌했으며, 크게는 인류를 구원했다. 어찌 대륙의 모든 대왕이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겠는가. 로리타여. 그대는 살아서 만인의 존경을 받을 것이요, 죽어서는 영원토록 이름을 남길지어다.” 여황제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검을 바쳤다. 동시에 다른 군주들도 무릎을 꿇었다. 행사장을 둘러싼 수만 명의 군중이 숨을 죽였다. 만인지상이 무릎을 꿇다니! 하물며 열두 군주가 한꺼번에 무릎을 꿇은 존재 따위, 유사 이래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내가 황제의 검을 건네받았다. “황공하나이다. 폐하.” 거대한 함성이 제도(帝都)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마법사들은 때를 맞추어서 형형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렸다. 로리타! 로리타! 로리타!……영웅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것으로 모든 던전을 공략했다. 나는 모험자 중의 모험자였고, 내가 깨지 못한 던전이란 없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든 던전 바알의 대마왕성을 공략했습니다.』 『전무후무한 업적!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72개의 던전을 모두 공략했습니다.』 ……모니터 속에서만 최강의 모험자이지만 말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잘 부탁드립니다.   00002 약하게 뉴게임 =========================================================================                        엔딩 스크롤이 길게 이어졌다. 시나리오 제작자, 디자인 담당자, 캐릭터 일러스트레이터……모니터에 수백의 이름이 명멸했다. 나는 그저 멍하게 화면을 바라다보았다. 이름이 눈에 비추었지만 머릿속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이걸 붙잡았더라?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뇌수가 개점휴업을 선언한 것 같았다. 나는 삐꺽대는 고개를 돌렸다. 벽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켰다. 저녁인가, 아침인가……그러고보니 창문 바깥이 환했다. 아침 아홉 시였다. 책상에 앉은 뒤로 아홉 시라는 시각을 적어도 세 번은 확인했다. 요컨대 게임이 시작한 지 아무리 적어도 36시간이 흘렀다. “흐으.”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폐인이 따로 없네.”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어젯밤에 페트병째로 들이킨 콜라가 찌꺼기가 되어 입안에 눌어붙었다. 최소 36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입구멍이 열리니까 갑작스레 입안이 텁텁해졌다. 심각했다. 만일 사람들이 지금 내 입 냄새를 맡는다면 당장 시위를 일으켜서 입 냄새 특별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할 것이었다. 나는 법정에 서서 부당하다 항변하겠지만 입 냄새 때문에 판사들이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재판 없이 투옥되겠지……. 아마도 서너 끼를 컵라면과 삶은 계란으로만 버텼다. 컵라면의 기름기가 콧등과 뺨, 두개골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문득 내 몸뚱어리가 거대한 음식물쓰레기 봉투처럼 느껴졌다.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었다. 음식물쓰레기는 누군가가 수거해가는 반면에, 나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 “흐으.” 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모니터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 이름: 로리타 문두스 직업: 모험자(SSS+), 검사(SSS) 레벨: 98      명성: 63050 통솔: 94/100  무력: 132/140  지력: 125/125 정치: 93/95   매력: 100/100  기술: 80/81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SSS, 검술SSS, 작전술S, 설득 S+, 기마술 S, 원소마법 A *스킬: 의용군, 천리지행, 필살무효 [업적 달성: 1088개] ━━━━━━━━━━━━━━━━━━━━ “후우우.” 머리를 뒤로 젖혔다. 나는 의자에 파묻혀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골에서 뇌만 빠져나가 홀라당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나에게는 두개골만 남았다. 그렇게 느껴졌다. 사실상 플레이어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치. “몇 회차……저번이 16회차?” 아예 머리가 맛이 갔는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낱말 단위로 말이 튀어나왔다. 사고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징검다리 건너가듯이 생각이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생각의 선을 억지로라도 이어붙이기 위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던전 RPG <던전 어택>. 이 게임은 처절한 난이도로 유명했다. 1회차만 플레이해서는 중간보스조차 못 잡았다. 최종보스는 꿈도 못 꾸고. 2회차, 3회차, 4회차. 마침내 17회차까지 노가다한 끝에야, 나는 겨우 최종보스 대마왕 바알을 잡아냈다. 대마왕 바알의 군단은 강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는 간극이 놓여 있었다. 회차 플레이라는 간극이. 자고로 노가다에 장사 없었다. 나는 플레이어로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여 그들을 이겼다. 바알 입장에서 보자면 치트이고 꼼수이겠지. 어쩌겠는가. 그것이 플레이어와 NPC의 시스템적인 차이인걸. 그런데 승리의 순간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었다. 결코. 면상에 내려앉은 기름기보다 더 끈적거리는 허무감이었다. “올해 여름방학도 끝났구나.” 단칸방. 제대로 청소한 것이 대체 언제인지 바닥에 머리카락이 덩어리째 굴러다녔다. 전공서적이 방구석 여기저기 쌓여서 피사의 사탑을 연출했다. 기필코 학과 일등을 먹으리라, 기나긴 휴학 끝에 그렇게 다짐했다. 용돈을 쏟아부어서 장만한 자기계발서가……지금은 야트막한 먼지의 언덕을 이루었다. 이게 아니었다. 자취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분명히 의욕에 넘쳤다. “…….”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것이 나의 세계였다.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이것조차 하나의 세계였다. 말라비틀어진 정액 휴지뭉치처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한때의 의욕만이 휘발되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 모니터 속의 세계와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축적된다.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의 레벨업은 반드시 한 번의 레벨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레벨 90이 돌연 레벨 80이 되어버리거나, 능력치가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일단 실재하면 계속 실재한다! 어찌된 것이 이쪽 세계는 무엇이든 남김없이 증발해버린다. 도대체 어디가 진짜인가. “……젠장.” 마우스를 잡았다. 『다음 계승을 위해 데이터를 보존하겠습니까?』 화면에 떠오른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예』를 클릭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취방에서 나갔다. * * * 늦여름. 후덥지근한 공기가 나를 반기었다. 달리 말해, 날 반길 만한 것은 더운 공기 정도밖에 없었다. 수증기가 폐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자취집 앞 편의점에 들어가서 담배를 한 갑 샀다. 어머니가 준 카드를 긁어서. 아르바이트생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나는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편의점에서 나왔다. 외진 골목에 진을 치고 담배를 피웠다.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마도 카드로 담배를 긁었더니 곧바로 어머니 휴대폰으로 정보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담배를 버렸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휴대폰 너머로 어머니가 밝게 말했다. 물론 어머니 목소리라는 게 다 그러하듯 밝지만 슬픈 애정이 서려 있었다. 「아니. 우리 아들 뭐하나 싶어서.」 지금부터 거짓말을 할 차례였다. “공부하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더워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띵해서…….” 이건 내가 들어도 제법 웃겼다. 당연히 머리가 띵하지 않겠는가. 수십 시간 내내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전파와 함께 밤샘파티를 벌였는데 말이다. 그러고도 정신머리가 온건하다면 도리어 신기할 노릇이었다. “네, 맞아요. 그래요.” 참고로 내 목소리에는 영 힘이 없었는데, 어머니께 거짓말해서 죄송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거짓말을 보다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서였다.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분야가 바로 거짓말이다. 농담이 아니다. 올림픽에 거짓말대회가 정식종목으로 있었다면 나는 진즉에 병역을 면제했을 거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아들내미 체력이 떨어졌다는 빨간색 신호등으로 받아들였다. 목소리가 더더욱 상냥해져서 나의 근황을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힘없는 목소리를 연출했다. 네, 잘 지내요. 그럼요. 그럭저럭 공부도 하고 있어요. 실로 청산유수였다. 「먹고 싶은 거 먹어. 살 거 있으면 사. 커피도 마실 거면 비싸고 좋은 거 마시고. 기왕이면 그 어디냐, 시원한 카페 들어가서 공부하렴. 아들이 돈 쓰는 거 부담스럽게 만들 정도로 우리집 곤란하지 않은 거 알지?」 내가 정말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네, 어머니. 그럼 저 다시 공부하러 들어갈게요.”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훌륭한 구라쟁이가 여기 있었다. 나는 담배를 물었다. 다시 공부하겠다니? 언제는 공부를 하긴 했다는 말인가.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나 역시 진심으로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최고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 존중받는 수준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놈의 피해망상이 날 망쳤다. 수능을 위해서 여태까지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부당하게 참았다는 망상이. ……아니. 그런 망상에도 약간만 빠졌으면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보면 억!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방탕하게 놀아재꼈다. 첫 학기에 수업 하나를 제외하고 F로 도배한 놈은 전교를 통틀어서 다섯 명밖에 없었다. 성적표에 내가 뒤에서 여섯 번째 순위를 먹었으니 틀림없었다. 대학에 가서 놀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놀아버린들 뭐 문제가 있겠어. ‘오빠. 정신 좀 차리지?’ 내 모습을 여동생은 한심하게 지켜보았다. 부모님은 말리지 않았다. 그럭저럭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시는 분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가업을 이어서 맨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결국 그 정도 인간이다, 나란 녀석은. 자취방에서 노트북을 챙겼다. 나는 시원한 에어컨을 찾아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내가 종일토록 한 것이라고는 인터넷 서핑이 전부였다. 이 사이트 저 사이트 옮기면서 영양가 없는 글에 웃었고, 역시나 영양가 없는 글을 썼다. 내가 오래 머무르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단연 <던전 어택 팬 사이트>이다. 던전 어택은 지나치게 높은 난이도 때문에 오히려 골수팬을 양성했다. 어려워서 좋다! 어렵지 않으면 싫다! 하는 변태가 세상에는 생각보다 즐비했다. 그런 변태가 모여들어 만든 성지가 이곳이었다. 나는 플레이어 캐릭터 ‘로리타’가 오늘 달성한 업적을 게시글로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회원들이 댓글을 달았다. 빨랐다! 이 인간들은 밥 먹고 인터넷만 하나.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대단했다……. ─골수고어: 대박. 능력치 좀 보소. ─흑장미: 명불허전 데낄라떼. 능력치 죄다 S로 도배한 거 혐오스럽다. 데낄라떼는 내가 쓰는 닉네임이었다. ─자칭소년: 님 이거 도대체 몇 회차임?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17회차라고 답변했다. 다시 회원들이 댓글을 우르르 달았다. ─푸슛사과: 십칠이래. 미쳤다, 미쳤어. ─마유림: 플레이시간 대충 따져도 오천 시간은 즈려밟을 듯. 시발, 바알 대마왕성이 정말로 공략하라고 만들어놓은 던전인지 개발자 정신상태가 심히 우려스러웠는데 이제는 데낄라떼 정신머리를 의심해야 할 판국. ─리챠: 정신병원은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갓름날: 여기가 소문으로만 듣던 정신병원인가요? ─율베리아: 정신병원 찾아왔습니다.(2) ─정육쩜: 님아, 마법사 로우메이 어떻게 공략함? 추천글에 나온 대로 가프 던전 깼는데도 호감도 제한이 풀리지 않음. ─쓰레기김씨: 그래봤자 폐인. 뚝. 마우스 휠이 멈추었다. 시선이 댓글에 걸렸다. ‘그래봤자 폐인.’ 댓글 아래로 여기 폐인 아닌 놈 어디 있냐면서 비아냥거리는 반응이 이어졌다. 회원들이 내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고맙긴 했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저 자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정말로 나는 그래봤자 폐인에 불과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는 내가 별로 개의치도 않는다는 거지.’ 폐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데도 그 처지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단순히 폐인이 아니라 음식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어째서인지 머리와 혀가 달려서 어머니 카드로 6,500원짜리 카페모카를 사먹을 줄 아는 음식쓰레기 말이다. 그때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제목: 데낄라떼는 보시오. ·····닉네임: 비너스빤스』 비너스빤스, 얘는 나랑 곧잘 사이트에서 부닥치는 회원이었다. 누구보다 게임 지식이 해박했는데, 던전 어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와 달라서 부단히도 충돌했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회원이 인정하는 폐인계의 양대산맥이었다. 만약 누가 어느 던전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냐고 질문하면 우리 둘은 즉각 그 자리에서 열일곱 가지의 공략법을 줄줄이 읊을 수 있었다. 요컨대 비너스빤스나 나나 던전 어택에 인생을 바친 놈들이었다. 참고로 비너스빤스의 경우, 오직 게임 개발자만 알 법한 내부사정에도 통달하여 일각에선 혹시 진짜 개발자 아니냐고 의혹이 돌았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00003 약하게 뉴게임 =========================================================================                        게시글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어떻게 바알 대마왕성을 공략했는가? 썰 좀 풀어봐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마도 비너스빤스는 아직 바알 대마왕성을 깨지 못한 것 아닐까. 나는 내심 뿌듯했다. 과도한 친절을 발휘하여 공략과정을 일일이 적었다. ─데낄라떼: 일단 최소 인원 4인 파티로 공략했습니다. 나, 기사, 대마법사, 힐러. ─비너스빤스: 4인 파티는 너무 불안한데. 적어도 25인 파티로 가는 게 정석임.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정석? 지금 내 앞에서 정석을 논하는 것인가? 게임에 정석이란 없었다. 적어도 최고 수준에 이르면 그러했다. 진정한 고수는 정석을 새로이 탄생시킨다. 비너스빤스라고 모르지 않을 터. 그런데도 정석 운운했다는 것은, 누구의 방법이 더 정석에 가깝냐고 나한테 결투를 청한 것이었다. 나보고 음식물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은 상관없다. 진실이니까. 그러나 던전 어택 플레이어로서의 나한테 음식물쓰레기라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이쪽에서 내가 쌓은 노력이 죄다 허무하게 증발해버린 것과 다르게, 그쪽에는 나의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나밖에 모르는 세계이지만 그곳 역시 하나의 세계란 말이다! ─데낄라떼: 마왕성 AI가 끝내주게 쩔어서 파티 인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몬스터가 바퀴벌레처럼 불어납니다. 그럼 몬스터 종류도 많아져서 일일이 대응하기 힘들어집니다. 차라리 몬스터 숫자를 줄이고, 패턴을 최소화해서 공략하는 게 훨씬 편합니다. 댓글이 쭈욱 이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이론과 반론을 주고받았다. 욕지거리만 오가지 않을 뿐이지 숫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토론은 던전 어택의 시스템 자체로 주제가 번졌다. 댓글 숫자가 순식간에 이백 개가 넘어섰다. 바보들아, 그건 아니지! 하고 제3자가 끼어들기도 했다.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팬 사이트 회원들은 비너스빤스 편이나 내 편으로 갈라져서 대판 싸웠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댓글 숫자가 칠백오십 개가 넘었다. 그제야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토론 후반부터 잠자코 말싸움을 관전하던 회원들이 판정승을 내렸다. ─파르테논기둥: 이번에는 데낄라떼가 이긴 듯? ─플러스백: 내가 보기에도 데낄라떼 주장이 맞는데. 혈투가 끝났다. 회원들이 줄줄이 나의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콜로세움의 생존자가 된 나는 그러나 썩 기쁘지 않았다. 아까 전이랑 똑같았다. 허무함만이 남았다. 내 이렇게 시간을 허공에 날릴 줄 알았지, 하고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노트북을 덮으려니까 비너스빤스가 또 댓글을 달았다. 혹시 승부에 불복하는 건가? 댓글을 읽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비너스빤스: 님, 던전 어택 후속작 나오는 거 소식 들었음? 후속작이라고!? 내가 척추반사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데낄라떼: 헐, 진짜입니까? ─비너스빤스: 레알. 기본적으로 던전 어택이랑 똑같음. 근데 딱 한 가지가 다름.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너스빤스가 개발진에 속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걸까. 딱 한 가지 다르다는 것이 대체 뭐냐고 얼른 물어봤다. ─비너스빤스: 그건 비밀. 지금 장난하나! 내가 흥분해서 키보드를 연타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쳤으면 그만 키보드가 망가졌을 것이다. ─데낄라떼: 밀당 쩌네요. 그러다 설렐 뻔. ─비너스빤스: 아무튼 던전 어택에선 마왕들 막고 세계를 지키는 게 목적이라면, 이번 후속작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는 게 가장 주된 목표라고 함. 이거 중요함. 반드시 기억하시오. 비너스빤스는 계속 변죽만 두들겼다. 자잘한 정보뿐이었다. 나는 애가 탔지만 화내지 않았다. 아무리 개발자라도 후속작 정보를 섣불리 풀어버리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핵심 정보가 빠지긴 했어도 이리저리 작은 정보를 긁어모으니 밑그림이 대충 그려졌다. 아마도 신작에서는 용사가 아니라 마왕 시점에서 게임이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세계를 정복하는 게 목적이겠지. 두근거렸다. 던전 어택을 전부 클리어해서 의기소침해진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이제 다시 시간을 투자할 곳이 생겨났다. 머리 한 구석에서 폐인 새끼니 뭐니 자책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지금 당장은 아무 소용없었다. 나는 신작을 플레이할 생각에 정신이 가출했다. 여기서 더 충격적인 소식이 떨어졌다. ─비너스빤스: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님이 베타테스터로 뽑였음.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나의 손가락은 마치 이십 년 동안 주구장창 피아노를 쳐온 음악가처럼 자동적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데낄라떼: 세상에, 진짜 님이 개발자였구나! ─비너스빤스: 님 베타테스터로 뽑으라고 내가 강력하게 추천했음. ─데낄라떼: 우윳빛깔 비너스빤스 사랑해요 비너스빤스 ─비너스빤스: 꺼ㅈ. ─비너스빤스: 꺼져. 얼마나 싫었으면 오타까지 냈을까. 나는 이미 얼굴이 싱글벙글 상태였다. 꺼지라는 욕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었다. ─데낄라떼: 베타 언제 시작합니까? ─비너스빤스: 솔직히 님이 원하기만 하면 오늘 시작할 수도 있음. ─데낄라떼: 대박. 고고. ─비너스빤스: 지금 당장? ─데낄라떼: 고고. ─비너스빤스: 벌써 밤인데. 님 일상생활은 어쩌고? ─데낄라떼: 일상생활이요? 그런 거 저 모릅니다. ─비너스빤스: 폐인이네. 사돈 남 말한다. 오늘 내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마 메일로 체험판 같은 것을 보내줄 생각인 듯했다. 나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자취집에 돌아가 봤자 예의 허무함에 잠길 뿐이겠지. 차라리 일상사를 전부 잊어버리고 게임에 빠져버리는 편이 나았다. ─비너스빤스: 진짜 지금 당장? ─비너스빤스: 후회하지 않을 거임? ─비너스빤스: 네 시간을 전부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내게는 우문처럼 보였다. 당연히 후회할 것이다. 아까 전에도 후회했다. 지금도 후회한다. 앞으로 후회할 거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걸 확신하고 있었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썼다. ─데낄라떼: 전혀 상관없습니다. 상대방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게시글에 댓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파일을 보내고 있는가 싶어서 기다렸다. 삼십 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재촉해볼까 싶었지만 글쎄,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거니 생각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어쩌면 상대방이 나를 낚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카페에 나오면서 들었다. 대학로 넓은 사거리에 자동차가 빠르게 오갔다. 직장인이 대다수겠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을 떠올리면서 건널목에 섰다. 이어폰에서는 유행가가 들렸다. 차로가 하얀빛, 노란빛, 붉은빛으로 번쩍거렸다. 그것들이 잠깐 내 시야에 들어왔다가 빠르게 지나쳤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계속될까.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하면 뭐가 달라질까? 이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끊어지는 걸까. 내 처지는 나았다. 나보다 심각하고 한심한 인간쯤이야 세상에 널렸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안심하자.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그렇게 계속해서 지금이 거듭하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지금을 말할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가서 마지막으로 후회하면 된다. 누구보다 낫다거나 누구보다 못하다거나, 그런 위안을 삼지 못하도록 모두에게 공평한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신호등이 빨간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머릿속을 가득 매운 생각을 발꿈치에 남겨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까지가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풍경이었다. 무척 아팠고. 한 순간 머릿속이 정전했다. 언제 감았는지 모를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아.’ 이어폰에서 나오는데도 음악이 왠지 모르게 멀리서 울렸다. 멍하게 생각했다. 차였다. 트럭에. 그럴 법했다. 귓구멍을 음악으로 틀어막고 머릿속은 딴 생각으로 채웠으니까. 옆에서 자동차가 돌진하는지도 모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나는 최후까지 이쪽 세계에 충실하지 못할 팔자였다. ‘죽기 싫은걸.’ ‘어머니.’ ‘……아프다.’ 시야가 깜빡거렸다.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대신해서 눈을 뜨고 감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그렇다……. 새카맸다. * * *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깨어났다. 어딘지 머리 한 구석이 맹했지만 바로 눈앞에 돌덩이가 떨어지니 없던 정신도 생겼다. 내가 벌떡 일어섰다. 멀리서 폭탄이라도 터졌는지 주변이 요동쳤다. 그것도 연달아서. “이거, 이거 뭐야!?” 나는 난생 처음 보는 방에 서 있었다. 아니, 방이라고 부르기도 뭣했다. 거대한 동굴이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본 종유석동굴보다 두 배는 천장이 높았다. 어디까지 통로가 이어졌는지 까마득한 저편까지 동공이 이어져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차마 의문을 풀 틈새조차 없었다. 지독한 피비린내. 콧구멍에서 뇌속까지 회칠하는 듯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우욱……!” 식도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주변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몸이 퉁퉁 부른 인간, 목이 잘린 인간, 팔다리가 역방향으로 뒤틀어진 인간, 화살이 박히고 내장이 튀어나온 인간――마치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살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시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중간중간에 인간이 아닌 괴생물체의 시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이 쏠릴 정도로 내가 제정신은 아니었다. “우웩! 켁, 우으웨엑!” 한차례 토를 쏟아내고, 본능적으로, 지금이 한가하게 토할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여전히 저 멀리 어디에선가 굉음이 들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동굴바닥과 천장이 심하게 흔들렸다. “젠장, 우욱, 제기랄!” 입가를 훔치며 맹목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여기 있어서는 위험했다. 오른발을 움직인 순간, 나는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제야 내 오른발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삔 수준이 아니었다. 척봐도 뼈 자체가 바스라졌다. 오른발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렁거렸다. “제기랄! 으흑!” 다시 한 번 일어서려다 넘어진 다음, 나는 두 팔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폭발음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굉음과 굉음 사이로 함성소리와 비명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전쟁이라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조차도 그것이 생사를 건 전투의 소리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대체 뭐야. 난 죽지 않았나. 아니, 여긴 어디야. 그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저기 있다! 마왕이 저기 있다!” 마왕. 나와 전혀 연이 없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느낄 수 있었다. 외침은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뒤를 돌아보니, 십수 명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결코 내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순간,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눈앞에 박혀들었다. 화살이었다. 녀석들이 나에게 화살을 쏘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앞으로, 앞으로 기어갔다. “쏘지 마세요! 으흑, 쏘지 마요! 제가 아니예요! 제가 아니예요!” 내가 듣기에도 미약한 목소리였다. 울음기에 파묻혀 목소리는 겨우 숨을 쉬는 수준으로 나왔다. 그래도 나는 소리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금씩 토해내듯, 계속해서 말했다. “후흑, 쏘지, 쏘지 마세요! 흑, 제가 아니예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화살이 끊임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피할 수 있어. 피할 수 있어. 머릿속에 그 한 마디만 고장난 라디오처럼 반복되었다. 그러나 행운은 금세 끝났다. 화살 하나가 내 팔뚝을 스친 것이었다. 살이 잘게 잘렸다. 아프다! 정말로――아프다! “우욱, 우으윽!” 눈앞이 새하얘졌다.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너무 뜨거웠다. 나는 방향감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팔다리를 움직여 애벌레처럼 기어갔다. 동굴바닥의 날카로운 바위에 허벅지가 찔렸다. 그것 역시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기어갔다. 불쑥, 무언가가 등을 묵직하게 눌렀다. 강하게 나를 짓밟았다. 나는 그것이 인간의 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잡았다! 내가 마왕을 잡았어! 나 리프 님이 마왕 단탈리안을 붙잡았어!” “이거 봐! 이 새끼 꼭 벌레 같잖아.” “리프, 이게 네 혼자의 공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허리에 닻이 내려앉은 것마냥 몸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발버둥쳤다. 팔을 내뻗어서 땅바닥을 긁었다. 물장구치듯 다리를 움직였다. 내 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비웃었다. “정말 벌레 같군. 아니, 말 그대로 벌레야.” “개자식보다 개 같은 놈. 우리도 드디어 마왕을 잡는구나.” “잠깐만. 다들 진정해봐. 너무 흥분하지 마라고. 아직 우리는 던전의 재화가 있는 곳을 듣지 못했어. 저 새끼를 족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대로 빈 손으로 돌아가봤자 웃음거리가 될 뿐이야.” “오, 친애하는 애꾸눈이여. 네 말대로지. ” 누군가가 내 허리를 걷어찼다.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굴렀다. 컥, 컥, 하고 숨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물범벅인 얼굴에 땅바닥의 모래가 들러붙었다. 눈을 뜨지도 못하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했다. “좋아, 마왕 전하. 물어보지. 던전의 재화가 저장된 방은 어디지?”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리프. 귀찮으니까 무릎을 쑤셔버려. 참새처럼 조잘댈걸.” “필요없어. 이 정도면 충분해, 애꾸눈.” 살벌한 대화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빌었다. “살려주세요……전 아니에요……정말로 아니에요…….” “오케이. 오케이. 진정하시라고, 마왕 전하. 우리도 필요이상으로 폭력적이고 싶진 않아. 너무 울지 마. 응? 울음을 그쳐보셔. 뚝!” “크하하하!” 주변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나는 울음을 참았다. 어찌되었든 최대한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야 했다. 그게 내 생존의 도화선 길이였으니까. 구역질과 울음기가 한데 섞여 목구멍을 역류하고 있었지만 있는 힘껏 삼켰다. 하지만 딸꾹질 비슷한 무언가가 나오는 것은 어떡해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협상할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군! 그렇게만 하면 된다.” “윽……흐윽, 끄흑.” “다시 한 번 묻겠다. 던전의 재화는 어디에 저장되어 있지?” “명륜동――흐끄윽, 명륜동에 있어요” 명륜동은 내가 자취하는 동네였다. 나는 되든 대로 지껄인 것이었다.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든 말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상대방이 어엉? 하고 반문했다. “메이룬, 뭐?” “명륜, 명륜동이요.” “요상한 발음이군. 누구 알아듣는 새끼 없어?” “마족의 언어인 모양이지. 신빙성이 있어.” “오케이. 마왕 전하. 스마트한 비즈니스가 마음에 들어. 우린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이.” 상대방이 장난스레 내 뺨을 두들겼다. “그래서 그 메이룬토우 방은 어디에 있지? 정확히 말해주게.” “제가 있던 방에서……비밀통로가 있어요.” “마왕방에? 마왕방에 비밀통로가 있다고?” “예, 마왕방에……오직 저만을 생체인식해서 열리는……그러니까 제가 손을 갖다 대야만 열리는 비밀통로가……예, 거기 있어요.” “마법적인 장치로군.” 좋아, 하고 상대방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부러진 오른발에서 끔찍한 통증이 퍼졌다. “아악!” “이런. 다리병신이군.” 상대방이 혀를 찼다. “어이, 신입. 마왕 전하를 부축해주라고. 귀중한 손님이니까.” “알겠습니다, 리츠 선배!” 신입이라 불린 사내가 내 팔을 목에 둘렀다. 나는 그를 지탱하여 걷게 되었다. 그제야 약간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긴 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비볐다. 눈물이 닦이고 시야가 트였다. 눈가에 눈물 혹은 응어리진 찌꺼기가 고여 있었지만 앞을 바라볼 정도는 되었다. 나를 둘러싼 인간은 모두 열댓 명이었다. 다들 활이나 창 등 무기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인상은 하나같이 험악했다. “출발!” 리츠라 불린 사내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서로 잡담을 떠들거나 물주머니를 주고받으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는 거의 신입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운 좋게도, 그들은 마왕방이 어딘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내게 마왕방으로 안내하라고 물었다면 꼼짝없이 거짓말이 탄로났을 거다. “흐흑……끄응…….”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내 죽음에 약간의 유예를 준 것에 불과했으니까. 동굴천장에 마치 조용해서 섬뜩한 진혼곡처럼 일단의 무리가 떠드는 소리가 조곤조곤 울렸다. 거기에는 물론, 내 신음도 미약하게 섞여 있었다.   00004 약하게 뉴게임 =========================================================================                        동굴이 계속 이어졌다. 어림잡아 삼십 분을 걸었는데도 지하공동은 끝날 기색이 안 보였다. 여기 동굴은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걸까. 그러나 내게는 자연의 신비에 느긋하게 감탄할 틈 따위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앞쪽에서 살벌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냥 이쯤에서 죽여버리는 게 어때.” 하고 한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좀도둑도 아니고 말이야, 명색에 모험자잖아. 굳이 재화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어? 저 마왕 새끼 목에 걸린 현상금으로 충분해.” “네놈은 얼굴에도 입구멍 대신 엉덩이를 달아놓았어. 입만 열면 방귀 냄새가 풍기거든.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냐? 이렇게 생고생을 했는데도 일천 골드야. 저 새끼 목을 잘라서 갖다바쳐도――.” 리프가 내게 손가락질했다. “고작 일천 골드야! 게으름뱅이 자식아, 부지런히 발이나 움직여라. 집에 하루 늦게 돌아간다 해서 네놈 마누라 젖탱이가 어디 도망치진 않을 거다.” 사람들이 낄낄거렸다. 나를 대충 부축하는 신입도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미친놈들!’ 녀석들은 내 생사를 한낱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 농담을 떠들어재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리프 대장. 저 녀석 마누라는 젖탱이가 훌륭하기로 마을에 소문이 났거든요. 그 엉덩이만한 젖탱이에 얼굴이 깔려서 한번쯤 숨이 막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랬다는 걸 밝혀야겠는데. 아마 저놈은 마누라 젖탱이가 온 마을을 싸돌아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변태 자식들!” 나는 가만히 쥐죽은 듯 침묵하고 있었다. 목숨의 위협이 당장은 사라지자 상황이 서서히 파악되었다. 일단 저들은 한국말로 대화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쓰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죽었는가 싶었더니 갑작스레 동굴에서 깨어난 것도 그렇고,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비정상적이었다. ‘침착하게……침착하게 생각하자.’ 일부러 심호흡했다. 박자에 맞추어서 천천히. 이렇게 숨쉬기에 집중하면 사고가 충격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정보가 왜인지 지금 떠올랐다. 그만큼 내 두뇌가 필사적이라는 뜻이겠지. 저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노출했다. 아까 전에는 정신머리가 없어 몰랐지만 말이다. - 그들은 이 정체모를 동굴을 던전이라 불렀다. - 그들은 던전을 공략한다고 말했다. - 그들은 자기네를 모험자라고 자칭했다. -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마왕이라 불렀다. 던전, 공략, 모험자……마왕. 왠지 모르게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져도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던전 어택>에 빠져 있었다. 저절로 게임이 떠올랐다. 그 직후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분명히 죽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바를 소리 없이 되새겼다. 입술을 움직여 뻐끔거렸다. 상처가 욱신거려서 이러지 않고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던전, 공략, 모험자, 마왕, 죽음. 그렇게 다섯 개의 낱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좋다. 조금 전보다 머릿속이 훨씬 더 환해졌다. 적어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다만 결정적으로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수학문제를 앞에 두고 마지막 계산에서 뭔가 하나를 놓친 기분이었다. “난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 저게 딴 마음을 먹고 연기하는 거라면 손해 보는 쪽은 우리야. 던전 어디에 아직도 고블린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이구. 언제부터 우리 동지께서 쫄보가 되셨는지, 원. 던전의 괴물들은 무조건 마왕한테 복종한다. 알겠냐? 우리가 마왕을 잡은 이상 놈들은 무용지물이야. 미노타우르스든 오우거든 어디 와보라 그래.” 동굴에 말소리가 두런두런 울렸다. “후우……후욱…….” 나는 상처 탓에 끙끙거리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무엇을 빠트린 것인가. 나는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어떤 광경을.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화살에 맞았을 때,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교통사고. 그러자 한 장면이 의식의 바다에서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후속작. “……!”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비너스빤스, 그 자식은 나에게 던전 어택 후속작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눈앞이 불현듯 뚜렷해졌다. 저 무리의 정체, 저들이 사용하는 낱말이 속속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급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안에서 소리 없이 문장을 되새겼다. - 비너스빤스는 나에게 던전 어택 후속작을 당장 보내준다 얘기했다. - 그는 이상하게도 후회하지 않을 거냐면서 몇 번이고 물었다. ‘미친! 빌어 처먹을!’ 호흡이 가빠왔다. 저것이 전부 우연에 불과할까. 누군가가 나에게 게임의 후속작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직후, 나는 사망했다. 눈을 떠보니 그 게임과 무척 유사한 세계에 떨어져 있었다.――이것이 전부 우연이라고? 심장이 달아오르건 말건 내 머리는 침착하게 판단했다. 그럴 리 없다. 빌어먹을,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을 스무 살 중반이 넘도록 몰랐다! 오른발이 아작나서 병신이 되었는데도 냉정하게 사고하는 능력 말이다. 내 재능을 깨닫게 해주어 고맙다고 당장 이 사건의 원흉을 찾아가 뺨따귀라도 갈겨주고 싶었다. 나는 빠르게 가능한 답안을 내놓았다. 1. 게임의 세계에 들어왔다. 2. 게임과 유사한 세계에 빙의되었다. 3. 환상, 아니면 꿈이다. 4. 죽은 다음 지옥에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네 가지 답안지라. 얼핏 생각하면 경우의 수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겁먹지 마라, 하고 스스로 다독였다.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다. 정말로 어려운지 쉬운지는 상관없다. 이럴 때는 어렵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답안지부터.’ 이걸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 이때 살아가면서 몇 번 접해본 소설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만약 여기가 게임의 세계라면 틀림없이 이 말에 반응하리라. “어이, 마왕 전하. 옥체에 어디 편찮은 구석 없어? 응?” 신입이 말했다. 걱정한다기보다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마왕 전하가 쓰러지면 우린 죄다 공손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지. 우리한테도 나쁜 일이지만, 마왕 전하한테는 정말로 나쁜 일이 될 거야! 리프 대장은 꽤나 잔인하거든.” “괜찮……후욱, 괜찮습니다…….” “그래. 바로 그런 기세가 인생에서 참 중요하지. 하하. 발 한쪽이 조금 부러진 것쯤이야, 응. 침만 발라도 낫는 거 아니겠어. 명색이 사나이라면 꿋꿋하게 견뎌야지.” 어딜 봐서 이게 조금 부러진 거냐!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쳤다. 나는 고통에 신음하는 척하면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척 아팠다. 연기하기 쉬웠다. “상태창.”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당황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자그맣게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그때 경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 띠링!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0) 레벨: 1     악명: 7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1/15  무력: 2/5   지력: 25/25 정치: 10/15  매력: 3/10  기술: 1/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능력이 없습니다. *스킬: 스킬이 없습니다. [업적: 0개] [부하: 0개체/20개체] ━━━━━━━━━━━━━━━━━━━━━━━━━ “…….” 반투명하고 푸른 홀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서 있었다. 신입이 소리쳤다. “뭘 허수아비처럼 넋이 나갔어!”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아마도 그에게 홀로그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겠지. “죄, 죄송합니다. 발이 아파서.” “에잉. 쯧! 마왕이란 작자가 걷는 것도 제대로 못하니 원.” 나는 허둥지둥 발을 움직였다. 이때 내가 느낀 감정이란 절체절명의 순간에 냉정한 사고를 유지해서 자랑스럽다는 것도, 마침내 정답을 알아내서 기쁘다는 것도, 상황이 어처구니없어 당혹스럽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사태의 원흉일 비너스빤스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고, 나에게 화살빵을 먹인 모험자에 대한 살의도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절망감만이 나를 둘러쌌다. ‘우라질.’ 평소에 연이 없는 욕지거리까지 튀어나왔다. ‘존나게……진짜 존나게 망캐잖아, 이거!’ * * * 던전 어택. 한국에서 발매한 성인용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장르는 ‘던전 공략하는 시뮬레이션 RPG.’ 정말로 공식 홈페이지에 그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제작사에서는 맨날 웃기지도 않은 장르를 창조하여 자기네 게임에 붙인다. 자기네 딴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게임 속 주인공은 건장한 산골청년이다. 나쁘게 말하면 촌놈. 어떤 마왕의 군대에 고향이 쑥대밭이 되어버리자 모든 마왕에게 복수하겠다! 라고 맹세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용사 주인공인데……던전 어택의 특징은 바로 난이도에 있다. 용사 주인공이 정말로 힘 좀 센 촌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황제의 숨겨진 자식? 드레곤의 마지막 후예? 우연히 만난 스승이 사실은 대마법사? 그런 거 없다. 주인공은 정말로 시골에서 자라나 글 읽을 줄도 모르는 정진정명 촌놈이다. 당연하게도 1회차에는 마왕을 서너 명 쓰러트리기도 어렵다. 5회차, 6회차는 진행해야 본격적인 시나리오에 진입할 수가 있다. 대략 10회차까지 플레이하면 비로소 거의 모든 시나리오를 관람한다. 숨겨진 시나리오까지 깨고 싶을 경우에는 적어도 나처럼 17회차는 가야겠지. 그것도 나 같은 고수나 할 수 있는 짓이다. 미친 난이도가 아니고 뭔가. 여기서 마왕이란, RPG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바로 그 마왕이다. 주인공이 용사이니까 적은 마왕. 간단한 논리이다. 마왕들은 던전을 짓고 사는데, 몬스터들이 첩첩산중처럼 던전을 지키고 있다. 플레이어는 그런 던전을 실력과 물량, 계략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공략해야만 한다. 흔하디흔한 설정이다마는 던전 어택만의 특징도 있다. 보통 RPG에는 마왕이 한 명밖에 없다. 그런데 던전 어택에는 마왕이 여러 명, 그것도 무려 72명의 마왕이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72명의 마왕을 전부 무찔러야 한다. 서열 제1위 바알, 서열 제2위 아가레스, 서열 제3위 바싸고, 서열 제4위 가미긴…….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게임에서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은 그야말로 최악, 최약, 최저의 약골이다! 제아무리 게임에 재능이 눈꼽만치도 없는 초보자도 단탈리안만큼은 1회차에 깬다. 당연하다. 애시당초 초보자용으로 만들어진 마왕이다. 다른 게임에 비유하자면 초보자 사냥터의 토끼나 다름없다. 클릭만 할 줄 알면 토끼 정도야 누구나 때려잡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단탈리안 취급이 얼마나 나쁘냐면……모든 마왕이 예쁘장하고 멋진 일러스트를 갖고 등장하는 데 반하여 딱 한 명, 단탈리안에겐 일러스트가 없다. 완전히 엑스트라 취급. 이름만 마왕이지 약간 강한 몬스터보다 못하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깨부순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은 능력치가 대충 이렇다. 공략하려고 능력치를 수백 번도 더 봤으니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 이름: 바알 직업: 던전운영자(SSS+), 마왕(SSS+) 레벨: 389 악명: 8700078 통솔: 356  무력: 402  지력: 311 정치: 287  매력: 210  기술: 109 *칭호: 1.대마왕 2.전설의 던전운영자 3.전설의 학살자 *능력: 전술SSS+, 작전술SSS+, 제왕학SSS, 검술SSS+, 마법S *스킬: 마신의 강령, 필살무효(改), 마법무효(改) [업적: 2500개] [부하: 7500개체/7500개체] ━━━━━━━━━━━━━━━━━━━━━━━━━ 휘황찬란하다. 대마왕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 무릇 한 게임의 진짜 보스는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고 말하는 듯한 포스라고 할까. 괴물 같은 능력치에 어울리게 일러스트도 잘 빠졌다. 잘 생긴 중년의 남자이다. 주인공보다 대마왕이 더 멋있다고 얘기하는 게이머도 꽤 있다. 반면에 방금 단탈리안은 능력치가 어떠했는가.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0) 레벨: 1     악명: 7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1/15  무력: 2/5   지력: 25/25 정치: 10/15  매력: 3/10  기술: 1/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능력이 없습니다. *스킬: 스킬이 없습니다. [업적: 0개] [부하: 0개체/20개체] ━━━━━━━━━━━━━━━━━━━━━━━━━ 무릇 한 게임의 샌드백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말하는 듯한 포스……말도 안 된다. 뭐냐 이건. 마왕이라 해서 다 똑같은 마왕이 아닌 것이다. 바알과 단탈리안 사이에는 실로 미국과 네팔 사이 정도의 세력 차이가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해내지 못한다. 참고로 말해서. 1회차가 끝나고 2회차 플레이부터 단탈리안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귀찮아 할까봐 제작사에서 배려해준 것이다. 예를 들어, 레벨 20짜리 검사한테 ‘초보자 사냥터의 토끼를 잡아오세요!’라는 퀘스트가 떨어진다고 해보자.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런 퀘스트는 제작사에서 적당히 생략해주어야 한다. 마왕 단탈리안이 딱 그 짝이다. 차마 상대하기도 귀찮은 토끼……. 냉정하게 판단하여, 던전 어택에서 단탈리안이라는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기껏해야 그 정도 수준이겠지. 문제는 이제 내가 그 토끼가 되었다는 거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선작, 추천, 코멘트는 연참의 원동력입니다.^^ 00005 약하게 뉴게임 =========================================================================                        ‘어쩌지?’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모험자의 마수에서 벗어날까? 단탈리안은 지금 모험대에 생포되어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근처의 도시에 끌려가서 처형당할 판국이다. 모험대는 포상금을 받고 좋아라하겠지. 도시 시장은 작은 축제를 열어서 자기가 마왕을 토벌했다고 자랑스레 떠벌릴 것이다. 그동안 나의 목은 창대에 꽂혀서 도시 광장에 전시되리라. 제기랄.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말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경우에 호랑이굴에 물려간 것은 인간이다. 토끼가 아니란 말이다! 토끼는 제아무리 정신을 차려본들 호랑이굴에서 그냥 죽어버린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 우울하다……. ‘하다못해 서열 제32위 아스데모스. 아니, 제68위 벨리알이라도 되었다면.’ 입맛이 썼다. 날 생포한 모험대는 결코 수준이 높지 않았다. 리프인가 뭔가 하는 모험자의 겉옷을 보니 딱 거지 냄새가 풀풀 풍겼다. 다른 모험자들도 그들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거지스러움이 열렬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최하급. 랭크 F급의 모험대겠지. 나에게 고블린 스무 마리만 부하로 있으면 저쯤 되는 모험대야 얼마든지 쓸어버린다. 이래봬도 던전 어택에서 정점을 찍은 플레이어이다. 누구보다 모험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네 뒷산에 널렸다는 고블린조차 지금의 나에게는 한 마리도 없었다. 이래서야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야. 저거 아무리 다리가 삐었다지만 너무 느리잖아.” “일부러 시간 끌려고 굼벵이처럼 기어오는 거라니까.” 마침 모험자들 사이에서 잡담이 끊겼다. 화제가 일시적으로 떨어진 것일까. 녀석들은 이번에는 나를 대화거리로 삼기로 결정했는지 괜히 험악한 말투로 떠들었다. 모험대의 대장인 리프가 실실 웃었다. “마왕 전하. 이거, 내 동료들이 인내심이 별로 넓지 못해서 말이야.” 나쁜 자식들. 내가 오른발이 병신이 되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더 빨리 걷겠습니다!” 나는 냉큼 고개를 조아리면서 사죄했다. 약한 게 죄였다. 리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이쿠. 대답이 빠릿빠릿해서 좋구만. 그래도 말이지, 이거 모험자란 거에 직업병이 있거든. 아무래도 내 동료들은 마왕 전하께서 우리를 속이고 계시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어. 이대로 시간을 끌어서 혹시라도 마왕 전하의 부하들이 도착할 때까지 뻐팅기는 것 아니냐고.” 나는 서울역에서 제일 억울한 노숙자의 표정을 지었다. “절대로 그럴 일 없습니다!” 정말로 나한테 부하 몬스터가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뾰족한 동굴바닥에 쓸린 허벅지가 죽도록 아팠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저에게도 부하가 있었습니다. 고블린, 림프, 오크……보잘 것 없어도 소중한 부하였습니다.” 나는 적당히 거짓말을 보탰다. 어차피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고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겠지. “하지만 여러분께서 오시기 전에 모험대가 무려 세 개나 연속으로 몰아닥쳤습니다! 여러분이 네 번째로 왔지요. 제 부하는 다 죽었습니다……크흑, 삼십 년 전부터 함께해온 아이들이었는데…….” “어, 어이?” 리프의 목소리가 당황했다. “설마 너 울고 있냐?” “흐흑……아닙니다…….” 나는 마치 울음을 힘껏 참고 있다는 듯 서럽게 말했다. 차가운 볼에 눈물이 흘렀다. 말이야 거짓말이었지만 내가 서럽다는 것만은 진짜였다. 쓰레기처럼 생활하고 있었지만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나 나름대로 애정을 가진 일상이 있었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리지 않나. 일어나자마자 다리병신이 되지 않나. 허벅지엔 화살까지 찔렸다. 무엇보다 생판 처음 보는 남들한테 구질구질하게 싹싹 빌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흐으윽……어머니……크흑.” 어머니 생각까지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아들이 공부에 매진했으리라 믿으실 어머니. 내가 죽었다니 어떻게 생각하실까. 더운 날 아들이 카페에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그만 귀가하는 길에 변을 당했다.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카페에서 공부하라고 권하신 것은 당신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실지 몰랐다. 사실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나는 끝내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한테 평생의 짐을 넘겨버렸다. 못난 녀석. “으흐흑…….” 동굴 천장에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그러자 도리어 모험자들이 당황했다. 리프가 짐짓 화를 냈다. “야, 야. 시발. 누가 얘 울렸어?” “아니. 쟤 사정이 저럴 줄이야 몰랐지.” 내 발걸음이 느리다고 탓했던 이가 우물쭈물 변명했다. “던전치고 몬스터가 너무 적다 싶었더니, 다른 놈들이 먼저 싹쓸이했구나.” “저 녀석은 졸지에 알거지 된 셈이네. 쯔쯧…….” “하긴 마왕도 생명인데 어머니가 있겠지.” 공기가 물렁해졌다. 머릿속에 효과음이 들린 것이 그때였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줄줄이 떠올랐다.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3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나는 눈물이 뚝 멈추었다. 아니, 수컷 놈들한테도 호감도 시스템이 있어? 아무래도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모양이었다. 다소 서럽게 울었다고 몬스터의 군주인 마왕에게 호감을 품은 인간이란 또 무엇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아픈 것을 잊고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한편 모험자들은 자기네가 알아서 내 시선을 해석해주고 있었다. “아휴. 저거 세상 다 잃었다는 눈빛 좀 봐라.” “던전 망했으면 마왕이 신세 조진 것은 맞지, 뭐.” “지금까지 줄창 몬스터만 봐서 그런가, 마왕은 생각보다 인간적이군.” 사람들이 지나치게 순진했다. 시대상이 중세라서 그런가? 게임 설정상 모험자는 대부분이 평범한 농민이었다. 귀족의 수탈이 극심해지자, 어차피 가난하게 죽을 거 인생한방이나 노리고 죽어보자며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 그중 정말 강력한 용병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모험자는 농사를 짓다가 못 살겠다 싶어서 괭이 대신 창을 들었을 따름이다. 중세의 인간이란 게 인권 개념이 없어 잔혹해질 때는 한없이 잔혹해지지만, 또한 감정이 한없이 풍부하기도 한 그런 군상이다. ‘어라.’ 무언가를 문득 깨달았다. ‘이거, 잘만 하면 써먹을 수 있겠는데?’ 머릿속에서 빠르게 주판을 튕겼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모험대의 약점이 무엇인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저들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두려워할 게 무엇인지도 알았다. 확률은 반반. 먹힐지도 모르고 안 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가는 광장에 효수될 게 뻔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못해도 본전이지 않은가. 나는 재빨리 연기에 들어갔다. “그래도 여러분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마왕인 저를 보고도 바로 죽이시지 않았으니까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웠다. “몸이 크게 다친 저를 배려해주시고, 이렇게 부축까지 해주시다니……흐윽. 여러분만큼 선량한 모험자 분을 저는 이백 년 평생 처음 봤습니다. 그나마 여러분 같은 선인에게 잡혔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당연히 구라이다. 저들은 날 보자마자 화살을 무더기로 날렸다. 내 목숨을 살려둔 것도 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단지 던전의 보물창고를 털어먹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진실 따위는 어찌되든 좋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의 호감을 얻어야 했다. ‘어떻게 될까.’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는 없는 행동을 지어서 말하지 않았다. 저들의 행동에 해석을 덧붙이기만 했다. 사람은 무릇 자기가 한 행동을 더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모험자들이 반응했다. “아니, 우리가 하긴 뭘 했다고…….” “자네도 우리들 말에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았는가.”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4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그 외에도 열댓 명의 모험자가 전원 호감도가 올랐다. ‘그렇지!’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까 전에 호감도가 자잘하게 오른 것에 비해서 이번엔 제법 큰 폭으로 높아졌다. 대충 감이 잡혔다. “발걸음을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자아, 어서 보물창고로 가시지요.” 나는 애써 활기차게 말했다. 정말로 활기차게 말한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저 애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만 활기차게 말했다. 모험자들이 헛기침했다. “크흠. 흠. 우리가 굳이 막 서두를 이유까진 없지?” “음, 그렇지. 보물창고에 어디 발이 달려서 도망치는 것도 아닐 테고.” “자네도 발이 많이 아플 텐데 천천히 가세. 어차피 몬스터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은 마냥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요컨대 말이 통하는 짐승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험자라는 짐승이 무엇에 가장 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 하지만…….” 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곤란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시간을 너무 끌면 다른 모험대가 던전에 침입할지 모릅니다. 몬스터가 전멸했으니 그들은 손쉽게 마왕의 방까지 들어갈 거고요. 그러면 여러분께서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뭐!” 모험자들이 깜짝 놀랐다. 던전의 몬스터는 마왕을 해치지 못한다. 나를 인질로 잡은 이상 이 모험대는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하다. 그렇지만 몬스터가 아닌 동족의 인간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험대들은 던전을 두고 때로는 협력하지만 때로는 경쟁한다. 던전의 재화, 현상금이 걸린 마왕의 목……모험자에겐 먹음직스러운 사냥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돈을 벌려고 고향을 떠나 멀리 타지까지 온 이들이다. 돈주머니를 가진 자가 몬스터이든 인간이든 무슨 상관일까. 여차하면 언제든지 도적떼로 변할 수 있다. 모험자란 그런 거다. 이 세계에서 모험자라는 직종은 평판이 나쁘다. ‘어차피 돈을 벌려고 떠돌아다니는 예비 도적단 아니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응당 나고 자란 곳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답게 떠돌이에 대한 취급이 가혹하다. 그러나 아니 뗀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모험대가 다른 모험대를 약탈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모험자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저들끼리 얘기했다. “젠장.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른 모험대가 온다는 보장이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멍청아! 최근에만 모험대가 세 개나 들렸다고 하잖아. 소문을 듣고 다른 새끼들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충분해.” 모험자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던전이 약해진 틈을 노린다……그런 건가. 충분히 있을 법하다.” “마왕이 한 말대로 몬스터가 정말 한 마리도 없으면, 우리는 쌩쌩한 모험대랑 목숨을 걸고 춤을 춰야겠군.” “제기랄! 기껏 다된 밥상을 딴 새끼들한테 넘길까보냐!”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연장자가 동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던전에서 평정심을 잃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박에 인생역전을 노리고 던전에 뛰어든 농부들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여러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모험대가 다가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걱정이 뚝뚝 묻어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보물창고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토론은 걸으면서 해도 좋을 겁니다.” “맞는 말이야.” “먼저 보물부터 챙겨야지! 암!” 사람들이 옳은 소리라며 맞장구쳤다. 「초보 모험대 ‘잘센마을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경계심을 다소 풉니다.」 “싸게싸게 움직이자고. 지체할 시간은 네놈들 거시기 길이만큼도 없다!” “우리 잘센의 사나이가 어디서 눈 뜨고 코 베일 종자냐!” 모험자들이 저마다 고함을 치면서 분주하게 길을 걸어나갔다.   ============================ 작품 후기 ============================ ForSmile// 첫 덧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도 환생트럭에 한번 치여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김조작// 하반신이 먼치킨일지라도 이미 오른발이 망가졌으므로... 물론 망가지면 망가진 대로 플레이(?)가 가능하겠지만요! fewfqew// 첫 쿠폰 감사드립니다. 재밌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00006 약하게 뉴게임 =========================================================================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나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겠지만, 호감도가 착실하게 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적당히 연기하면 생뚱맞게 내 목을 날려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프가 말했다. “신입! 마왕 전하를 아예 등에 업어라. 그편이 훨씬 빨라.” “예엡, 알겠습니다!” 신입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는 냉큼 나를 들어 올려서 들쳐멨다. “가, 감사합니다.” “무얼. 평소에 뭘 먹었길래 수수깡처럼 가볍수?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은 영 비실하구만.” “하하. 끼니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신입이 혀를 쯧쯧 찼다. 농부든 마왕이든 요즘 세상이 살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라며, 신입은 자기 마을이 얼마나 지독하게 가난한지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대체로 자기네 영주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개자식이라는 얘기였다. 그는 내가 정말로 가벼운지 힘차게 걸었다. 덕분에 난 편했다. 오른다리가 여전히 아팠지만 억지로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솔직히 업어줄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휴우.’ 당장 죽을지 말지 오락가락하던 상황에서 벗어났다.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던전에 정말로 보물이 있는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꺼내는지,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마왕의 방에 도착했는데 막상 은화 한 푼 없다고 해봐라. 쥐꼬리만한 호감도는 증발해버리고 분기탱천해서 날 죽여버리겠지.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음 난관을 해결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입술을 조그맣게 움직여서 발음했다. ‘마왕성창.’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아니고. 마왕성 상태창? 이것도 아니고. 마왕성 상황창…….’ 왜 갑자기 상태창 같은 것을 찾는 것일까.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단탈리안의 능력치를 표시하는 알림창이 있었다. 즉, 아마도 다른 종류의 알림창들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세계가 게임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면 겨우 플레이어의 능력치만 달랑 보여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퀘스트 목록창, 동맹창 등, 차례대로 이런저런 알림창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 나중에야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도 당장은 아니었다. 나는 발견된 알림창을 치워두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속삭였다. ‘던전창.’ 그러자 유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 0개체 *재산: 1000골드 ※던전이 엉망진창입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당신의 던전을 놀이터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공략 당할 수 있습니다. 어서 빨리 '몬스터고용' 란에서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고, 태세를 정비하십시오. ━━━━━━━━━━━━━━━━━━━━━━━━━ ‘좋았어!’ 내가 소리 없이 환호했다. 솔직히 던전의 상태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렇게 형편없고 초라한 던전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재산! 까마귀 발톱에 낀 땟국물만큼이라도 재산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전 재산 1000골드…….’ 초중반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지 떨어지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적지만, 아주 적지는 않은 돈. 이 정도만 되어도 꼼수를 발휘할 수가 있다.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알림창에서 재산이라 적힌 부분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수익과 지출, 흑적자 따위의 단어가 나타났다. 당장 수입구조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파산하고 말 거라면서 친절하게 경고까지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알림창은 단연 이것이었다. ━━━━━━━━━━━━━━━━━━━━━━━━━ 던전의 재산을 인출합니다. 너무 인출해버리면 파산할지도 몰라요? 인출금액: ____골드 잔여금액: ____골드 ※인출하실 금액을 결정하신 후 '확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브라보.’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진 지 고작 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여기가 어떤 장르의 게임규칙을 따르는지 그럭저럭 짐작했다. 이건, 아마도 1인칭 운영 시뮬레이션이다. 여기에 RPG 느낌이 가미되었겠지. 플레이어가 던전을 관리하기도 하고 혼자서 돌아다니기도 한다. 제트코스터 타이쿤을 1인칭 시점으로 즐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운영자금을 따로 뽑아서 쓸 수가 있다. 나는 바로 그런 기능을 고대한 것이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은 훌륭하게 나의 예상과 기대를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골드를 빼낼 수 있다. ‘모험자 녀석들이 돈 내놓으라고 협박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저들이 비록 날 살려두고 있지만 그건 놈들이 특별히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 보물창고의 문을 오직 나만 열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보물을 넘기자마자 날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놈들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이야. 설령 이기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아.’ 문득 마키아벨리가 조언한 바가 떠올랐다. 군주는 항상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던가. 상대방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문제가 없다. 내가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딱히 손해를 보지 않는다. 문제없다. 그러나 만약 상대방이 이기적이라면? 내가 방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손해를 본다. 심각한 경우에는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상대방이 이기적이라 상정한다. 상대방이 이기적이지 않다면 상관없고, 상대방이 이기적이라면 적어도 대응할 수 있다. 유비무환이다. ‘좁쌀만한 호감도만 믿을 수는 없어.’ 신기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과제 때문에 읽은 마키아벨리가 떠오르다니. 인간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이전에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조언이 번뜩 생각난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신기하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설마 내가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될 줄이야. ‘어쩌면 내 머리가 아예 쓰레기는 아닐지 모르겠는걸.’ 신입이 눈치채지 못하게 피식 웃었다. 이제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마음이 여유로웠다. 모험자들에게 돈을 주지 못해서 살해당할 일은 없어졌다. 모험자들한테 돈을 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죽지 않을까. 이제 그것이 문제였다. ‘인정에 호소해볼까?’ 재고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몬스터들한테 인질로 써먹을 수 있다고 말해보자.……아니, 이것도 안 돼.’ 나는 던전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다고 울고불고 호소했다. 여기 와서 사실은 몬스터가 있었다고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모험자들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지. ‘잠깐만.’ 그때 기가 막힌 해결책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돈을 주고 몬스터를 고용하면 되잖아!’ 나는 얼른 던전창을 다시 떠올렸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 0개체 *재산: 1000골드 ※던전이 엉망진창입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당신의 던전을 놀이터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공략 당할 수 있습니다. 어서 빨리 '몬스터 고용' 란에서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고, 태세를 정비하십시오. ━━━━━━━━━━━━━━━━━━━━━━━━━ 몬스터 고용란에서 부대를 고용하시오! 따로 발품을 팔지 않고도 몬스터를 고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정말 바보 같았다. 왜 친절하게 주의하라고 써놓은 문구를 무시했는가. 바로 코앞에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줄 동아줄이 내려와 있었는데. 변명거리야 많았다. 나는 조금 전까지 거짓말이 들키지 않을까 끙끙거렸다. 재산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정말로 똑똑하다면 어땠을까? ‘돈을 확인하자마자 몬스터를 고용하자고 생각했겠지.’ 반면에 나는 마키아벨리의 주장 따위를 떠올리면서 내 머리가 쓸 만하다고 자축했다. 정말 머저리였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어버린 위인의 그럴싸한 말 한 마디가 이런 상황에서 뭐 대단한가. 모험자가 이기적이라고? 당연했다.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온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렴 이기적이지 않고 배길까. 마음에 독기를 품었을 거다. 모험자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굳이 마키아벨리까지 운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연한 사실을 그럴듯한 헛소리로 포장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조차 나 자신을 멋지게 포장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귀중하고 또 귀중한 일분일초를.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로리타! 정신 차려라!’ 나는 모험자들이 손에 쥔 무기를 살펴보았다. 창, 쇠몽둥이, 활, 칼. 저것들이 나를 죽일 흉기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방심한 그때 창끝은 나의 심장을 쑤실 것이다. 나는 화살이 스친 허벅지에 일부러 신경을 집중했다. 아팠다. 그 아픔을 육체에, 뇌에, 기억에 새겨놓고 싶었다. 그래야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조금이라도 뜯어고칠 수 있겠지. “이봐.” 신입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무 아파서 목소리도 안 나오는 거냐?” “……아니요. 괜찮습니다. 견딜 수 있어요.” “음. 심하게 아프다 싶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아팠다. 아까 전부터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에 웃음기를 능숙하게 섞어내면서,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하고 말했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야.” 신입이 쑥스러워했다.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순진함이 고마웠다. 이 모험자들은 초짜이다. 확신했다. 험상궂게 생긴 외모에 지레 겁먹었지만, 그냥 시골에서 곡괭이를 휘두르던 양반들이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튜토리얼 연습용 NPC에 불과하다. 정신만 바싹 차리면 허무하게 목이 날아갈 일은 없다. 나는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는 홀로그램을 곧장 떠올렸다. ‘몬스터 고용창.’ 반투명한 목록이 좌르르 펼쳐졌다. ━━━━━━━━━━━━━━━━━━━━━━━━━ [몬스터명]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슬라임       2   2   2    70골드 -최하급요정     4   3   2    160골드 -고블린       4   4   4    250골드 -최하급골렘     7   5   5    400골드 [소지금: 1000골드] ━━━━━━━━━━━━━━━━━━━━━━━━━ ‘…….’ 약하다. 게다가 비싸다. ‘더, 던전 어택에서 마왕들은……싸구려 몬스터를 이렇게 바가지 씌어서 장만한 거냐.’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칼질 한방에 부대 단위로 썰리는 잡몹들이었다. 나는 몬스터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시선을 집중하면 몬스터 개개의 능력치가 조금 더 세세하게 떠올랐다. 능력치라고 해봐야 별 볼 일 없었다. 슬라임의 경우에는 스킬이 ‘회복’ 하나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체력이 차오르는 기술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슬라임의 체력이 고작 3이라는 게 문제였지. 미처 회복 기술을 써먹을 틈도 없이 죽어버릴 게 뻔했다. ‘젠장. 혹시 모험자들도 능력치가 엄청 후달리는 거 아냐?’ 모험자도 약하고 몬스터도 약하고. 그러면 몬스터의 상상을 초월하는 약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모험대 대장인 리프를 노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능력치만 공개됩니다.」 띠링, 하고 효과음과 함께 리프의 머리 위로 홀로그램이 비추었다. 단탈리안의 능력치를 볼 때와 다르게 형식이 아주 간략했다. 아마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한다면 호감도를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듯했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리프     6    5   2 ━━━━━━━━━━━━━━━━━━━━━━━━━ “끄응.”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리프의 능력치는 다 합쳐서 13이었다. 몬스터로 따지면 딱 고블린만큼 강했다. 약하긴 약하다. 하지만……지금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준에서 비추어보면 리프는 충분히 강력했다. 내가 가진 1000골드로는 고블린을 네 마리밖에 고용할 수 없으니까. 그에 반해서 모험자들은 열다섯 명. 모험자들의 능력치를 일일이 확인해봤다. 다행히 리프가 가장 강했다. 다른 모험자는 대체로 능력치 총합이 5에서 8로 고만고만했다. 그렇다고 한들 고블린 네 마리로 감당하기엔 모험대가 너무도 막강했다. 새삼스럽게 실망감이 샘솟았다. 몬스터를 고용해도 승리하기란 요원한 걸까. “이제 다 왔어!” 한 모험자가 소리쳤다. 마왕의 방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었다. 모험자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어휴, 진짜 쓸데없이 넓네.” “네가 던전을 처음 와본 거라서 그렇다, 멍청아. 이 정도는 보통이야. 원래는 중간중간에 몬스터랑 함정이 쏟아져 나오니까 더 넓게 느껴진다고. 우린 엄청 빨리 도착한 셈이야.” “정말 쉬운 던전이었군.” 젠장.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사고에 몰두했다. 게임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고 틀 밖에서 생각해봤다. ‘슬라임을 많이 고용해서 물량을 보충할까? 아냐. 아예 가장 강한 골렘을 고용해서 한방 기습을 노리는 쪽이. 아니면…….’ 마침내 모험자 일행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도착했다! 저기가 마왕의 방이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가까스로 답안을 내놓았다. 나는 입술을 까득 물었다. 핏물이 입안에 흘러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 이 방법으로 간다……!’ 동굴은 변함없었다. 변함없이 거대하고 고요했다. 조명 역할을 하는 이상한 구체만이 통로를 따라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고, 모험자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단 한 사람. 나만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살아남는다!’ 이 순간 나의 생존기가 더없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00007 약하게 뉴게임 =========================================================================                        콰직! 나무 문짝이 산산조각 났다. 마왕방의 정문은 그렇게 애처로이 대형 쓰레기로 전락했다. 리프가 능숙하게 도끼를 들쳐메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흥, 별 거 아니군.” “역시 리프야. 잘센 최고의 나무꾼이지.” “무슨. 이 정도면 콧물 흘릴 줄밖에 모르는 꼬맹이도 할 수 있어.” 리프를 선두로 일행이 한두 명씩 마왕방에 들어섰다. 마왕방은 무척 초라했다. 넓긴 넓었지만 조금 정돈된 동굴이나 다름없었다. 한쪽 구석에 빨간 카펫이 깔렸다. 그 위에 침대가 있었다. 그게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게임에서 화려하게 묘사되는 마왕방의 배경 일러스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과연 D 클래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ABCD 할 때 그 D가 아니었다. 단탈리안(Dantalian)의 앞글자를 써서 D 클라스였다. 능력치와 던전창에서 충격을 먹고 나는 이 꼴지 마왕에게만 통용되는 클래스를 따로 제정하기로 결심했다. 단탈리안에게는 F급도 아까웠다. 던전 어택의 골수팬으로서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바로 내가 마왕방의 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랐다는데, 리프가 별다른 문제없이 문을 돌파했다는 것. 난리통에 그만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내 변명을 모험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다. ‘어차피 나무문인데 부숴버리면 그만이잖아?’ 한 모험자가 내민 의견이었다. 그 말대로 리프가 손도끼를 몇 번 휘두르자 문짝은 쉽게 열렸다. 하지만, 만약 미리미리 호감도를 사두지 않았으면 모험자들이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짜증내지 않았을까?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도 몰랐지만,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지금 상황에선 아까 전의 내 명연기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래. 드디어 도착했군.” 리프의 눈이 번득거렸다. “자네가 말한 그 메이룬토호인가 뭔가는 어디지?” “예. 제가, 제가 알고 있습니다……우흑!” 내가 신입의 등에서 내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오른발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접질려서 그만 넘어져버렸다. 모험자들이 부산을 떨었다. “어이쿠, 자네 괜찮은가?” “야, 야. 제대로 부축해줘야지!” 나는 그들이 부축해주기 전에 얼른 일어나고자 노력했다. 진심이 반, 연기가 반 섞인 행동이었다. 나는 심각한 부상자이다. 당신들에게 한주먹꺼리도 안 된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여기서 핵심은 동정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수고롭게 날 부축시켜서 그들을 짜증나고 귀찮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자력으로 일어섰다. 젠장. 아프기는 진짜 더럽게 아팠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그래서야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나.” 모험자가 걱정 어린 어투로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막다른 벽으로 다가갔다. 등 뒤로 안타까워하는 탄식이 들렸다. 물론 직접 부축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내가 벽에 손을 짚었다. “여러분, 바로 여깁니다.” “응? 하지만 벽밖에 없잖아.” “던전의 주인한테만 작동하는 마법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지요.” 나는 모험자 전원이 들으라는 심산으로 약간 크게 말했다. “이 문양에 대고 정해진 문구를 외우면 던전의 재화가 나옵니다.” “허, 마법이라.” 여기저기서 모험자가 감탄했다. 초짜 모험자들은 마법에 무지했다. 본래 농부거나 나무꾼을 천직으로 삼는 평민이었다. 살면서 언제 마법을 구경해보았겠는가. 마왕인 내가 마법이라 하니까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 수밖에. 나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여러분. 모두 열 걸음만 떨어져주십시오.” “음? 왜인가?” “이 마법은 마왕을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외부인이 가까이 있으면 절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어 있죠. 자칫 잘못해서 오작동이 일어나 여러분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악의 경우, 보물 자체가 봉인될지 모릅니다.” “……!” 모험자들이 나와 똑같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과연 보물을 들먹이자 약효가 바로 나왔다. 그들은 다함께 줄을 맞추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정확히 열 걸음 떨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 감상이 어땠냐면……마치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수달들이 일렬로 대열을 정비하는 것 같았다. “자아.” 리프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말한 대로 열 걸음 물러났네.” “…….” 어찌 들으면 꼭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어투였다. 잔인하게 화살을 날려대면서 또 저렇게 순진하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옛날 중세의 평민이란 다 저랬을까? 여하간 나는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훌륭합니다. 딱 정확하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열 걸음이군요. 그 정도면 만에 하나라도 마법에 휘말릴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자 모험자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흐흐.” “우리가 원래 완벽하지.” “……그럼 이제부터 마법을 시전하겠습니다. 다들 정숙해주세요.” 등을 돌리고 동굴벽과 마주했다. 밋밋하게 평평한 벽면이었다. 나는 그곳에 어떤 신성한 글자라도 새겨져 있고, 오직 나만이 그 문자가 보인다는 것처럼, 잔뜩 위엄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쁜 새끼들!” 당연하지만 한국어로. “개새끼,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어금니로 꽉 물고 또 물어서 염병할 찢어죽일 악어 가죽 같은 새끼! 잡것에 들깨를 말아먹어도 세 달 동안 변비에 걸려 항문이랑 배불뚝이가 터져서 뒈져버릴 잡새끼 같으니라고! 길 가다 괄약근 터져서 똥싸지를, 이 개――같은 개새끼들아!” 내 기세가 심상치 않았음일까. 모험자들이 짐짓 움츠러든 목소리로 뒤에서 수군거렸다. “음, 알아들을 수 없지만……. 뭔가 감정이 잔뜩 실려 있군.” “왠지 모르게 우리 동네에서 미친개한테 좆이 물린 고자새끼가 떠올라. 걔도 지가 고자가 됐다는 말 듣고 저런 식으로 소리쳤어. 뭐랄까, 마족의 언어는 상상하던 것과 좀 다르네. 조금 더 고상하고 요상한 느낌일 줄 알았어. 근데 이제 보니까 아주 상남자스럽구만.” “어딘지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는걸. 게이새키. 흠, 게이새키. 말하면 말할수록 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야.” 나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이 되든 말든 상관않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 시선으로는 한창 '던전재산창'에서 인출금액을 정하고 있었다. ━━━━━━━━━━━━━━━━━━━━━━━━━ 던전의 재산을 인출합니다. 너무 인출해버리면 파산할지도 몰라요? 인출금액: _489골드 잔여금액: _511골드 ※인출하실 금액을 결정하신 후 '확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총재산의 절반가량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쯤이 적당해보였다. 혹시라도 정확하게 딱 500골드를 꺼내면 모험자들이 의심할까봐 대충 인출금액을 그럴듯하게 조정했다. 던전 재산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500으로 떨어진다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내가 두 팔을 높이 벌리면서 웅장하게 외쳤다. “――나중에 두고보자 개새끼들아!” 그 순간, 허공에서 금화들이 나타났다. 황금빛 소낙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험자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금화, 금화다!” “씨발, 저게 다 얼마야!?” “정말로 마법이었어!” 그들은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였다. 내가 얼른 소리쳤다. “아직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저주에 걸릴 수도 있어요!” 처억. 막 달려오려고 준비하던 모험자들의 발이 저주라는 단어에 일제히 멈췄다. 사실 굳이 그들을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다만 보험이라고 할까. 만약을 위해서 호감도를 조금이라도 더 높여두고 싶었다. 지금부터 내가 실행할 작전에는 그들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럼 전문가적인 모습을 연기하는 편이 좋겠지. 동굴바닥에 금세 금화더미가 야트막하게 쌓였다. 모험자들이 멀찍이서 입을 쩝쩝거렸다. “아이고, 저게 다 얼마야.” “이보시게들. 전부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당연하지. 이제 와서 말 바꾸는 놈 있으면 사형이야, 사형!” 목소리에 아주 기름기가 철철 넘치는구만. 욕심의 기름이. ‘자아, 와라.’ 나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마침내 500골드 가량의 금화가 다 나왔다. 마지막 금화가 짤랑, 거리면서 굴러가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공중에서 돈이 생기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아니나 다를까. 이때까지 몹시 초조하게 기다렸을 모험자들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들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목소리였다. “어이, 이젠 아무 문제도 없는 거지?” 바로 지금이다! 내가 냉큼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아아아아아!” 나는 무척 괴로운 것처럼 발버둥쳤다.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연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땅바닥에 일부러 오른발과 허벅지의 상처를 부비고 있다는 사실을, 모험자들은 죽어도 모르리라. “뭐, 뭐야!?” “대체 뭐야! 쟤 왜 저래!” “흐, 흑마법이다! 흑마법의 저주야!” 그리하여 내 생애 최고의 열연기가 펼쳐졌다. “그, 그만둬……제기랄! 가라앉아라……눈……내, 눈이……! 으아아아악!” 내가 양손으로 눈가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모험자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 끔찍하군.” “으으.” 그래도 개중 용감한 자가 있었는지 한 명이 나한테로 다가오려 했다. “어이, 왜 그래? 괜찮나?” “오, 오지 마십시오! 이건……크으윽! 어둠의 마법을 쓴 대가로 얻는 반동……! 제게 다가오면, 당신까지, 크, 크아아악! 휘……휘말려버립니다!” “헉!” 사내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나는 거기에다 추격타를 날렸다. “최소한 열 걸음……아니, 아홉 걸음은 떨어져 있지 않으면……여러분도 저주에 걸릴지 몰라요!” 열심히 바닥을 헤집으면서 슬쩍 모험자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들은 죄다 충격을 먹은 병아리 같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난데없이 금화들이 생겨나는 장면을 목격한 터였다. 마법에 무지한 그들로서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내 말을 믿게 되리라. ‘그런데 왜 제대로 반응을 안 해주냐.’ 내가 뭐하러 이렇게 쪽팔린 짓까지 마다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모르진 않겠지?’ 나는 초조하게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모험대에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양반이 있었다. 한 사람이 뭔가를 깨달은 듯한 소리로 외친 것이었다. “설마 그것을 위해……우리들 보고 열 걸음 물러서라 그랬던 거냐?” 그래. 바로 그 반응이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지금껏 그 어떤 비명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모험자들은 비명소리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충격에 감싸인 채로 중얼거렸다. “난 저 녀석을 죽이려고만 했는데.” “우리를 없앨 수도 있는 기회를 이렇게…….” “잠깐, 정말로 아파보이잖아. 저거 안 말려도 괜찮겠어?” 지금 이 순간 나는 틀림없이 세계 최고의 명배우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사실 허벅지를 자극해서 고통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이었지만, 저들이 진실을 알 리 없었다. “멍청아! 흑마법이라잖아. 흑마법에 걸렸다 뒈진 놈들 이야기 못 들어봤냐? 잠자코 기다려.” “다네프의 말이 옳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안타깝지만, 기다리는 것뿐이야.” “제기랄.” 그쯤해서 예의 유쾌한 효과음이 팡파르처럼 울렸다. 「초보 모험자 다네프의 호감도가 15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리프의 호감도가 16 오릅니다.」 「초보 모험자 루크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졌는데도……내 마음속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겨우 수컷들의 호감도 좀 올리겠답시고 이 난리를 쳐야 했다. 어머니 얼굴이 절실하게 그리웠다. 죄송해요, 어머니. 전 죽고 나서도 변변치 않게 살고 있습니다…….   00008 약하게 뉴게임 =========================================================================                                         잠시 후. “이제, 후욱. 안전합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내가 말했다. “크흠.” “커흠….” 모험자들은 태도가 부쩍 조심스러웠다. 당장 금화를 먹어삼킬 것 같던 아까 전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그들은 너가 먼저, 아니 댁이 먼저, 하고 차례를 양보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에라이!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이내 대장격인 리프가 나섰다. “거 아랫도리에 물건은 뭣하러 붙이고 다니냐! 콱 그냥 볼기짝에 도끼를 쑤셔버릴까 보다. 내 이런 놈들이랑 던전을 공략하겠답시고 의기양양했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그가 으르렁거렸다. “게다가 너, 애꾸눈. 너 임마 나랑 같이 다닌 지 몇 년인데 지금 애송이들 사이에 숨어 있어? 얼씨구. 어째 상판떼기는 아직까지 멀쩡하십니다?” “리프, 그게 나도 흑마법은 처음인지라….” “그럼 엄미 자궁 비집고 나온 건 처음이 아니라서 그리도 능숙했다냐? 세상에 처음 아니었던 게 어디 있어! 어디서 선배가 쫄아서는, 쓰읍.” 리프는 모험자들을 일일이 노려보고 주저없이 금화더미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한 웅큼 금화를 쥐었다. 그가 동료들을 뒤돌아보았다. “봐라! 여기 어디 저주가 있는지. 새끼들…….” 리프가 히죽 웃었다. 곰처럼 생긴 면상이 야비하게 미소까지 지으니 깡패가 따로없었다. 모험자들은 리프의 행동에 기가 죽은 듯 이리저리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반면에 나는 웃음을 참느라 무진장 애썼다. 호감도가 일정 이상 오른 탓인지, 내 눈에는 리프의 상태창에서 그의 심리가 표시되고 있었다. ━━━━━━━━━━━━━━━━━━━━ 이름: 리프 종족: 인간   소속: 잘센 마을 속성: 중립(-15) 레벨: 3    명성: 2 직업: 나무꾼(B), 농사꾼(D), 모험자(F) 통솔: 15  무력: 30  지력: 4 정치: 2   매력: 6   기술: 21 호감도: 21 현재심리: ‘아오 썅, 간뎅이 떨어지는 줄 알았네……난 세상에서 마법이 제일 싫어! 어우, 아직도 다리가 후달거리네.’ ━━━━━━━━━━━━━━━━━━━━ ‘푸핫!’ 리프 역시 마법이란 단어에 벌벌 떠는 저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모험대의 대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나섰을 뿐이었다. 굳이 자존심을 세우는 성격이라고 할까. 그나저나 이거 참, 단탈리안만큼 초라한 능력치였다. 아마 게임으로 치자면 이 모험자들을 격퇴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튜토리얼이 아닌지 싶었다. 모험자들이 은근슬쩍 금화더미에 다가왔다. 리프가 코웃음쳤다. 그들은 멋쩍어 하면서도 탐욕의 눈길로 금화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더 챙길까봐, 모험자들은 서로가 보는 앞에서 금화 하나하나를 새기 시작했다. 리프가 만족스럽게 웃음을 흘려보냈다. “흐, 489골드로군.” 모험자들이 재화를 십오등분하여 32골드씩 챙겼다. 나는 여기 물가를 몰라서 32골드가 어느 정도로 막대한 재산인지 감이 안 왔으나, 사람들 얼굴에 화색이 만연할 것을 보아하니 '단단히 한몫 잡았다' 정도는 되는 듯했다. 나누기가 딱 떨어지지 않아 9골드가 남았는데 당연하다는 것처럼 리프가 쓱 챙겨갔다. 몇몇 사람이 그게 불만이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벌써 기세에서 밀려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바쁜데 실례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어어, 말해봐.” 모험자들이 건성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금화를 가방이나 신발에 집어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이는 바지춤에 금화를 한 웅큼 쑤셔넣기도 했다. 우엑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짓이었지만 난 덤덤하게 할 말만 전했다. “여러분과 제가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금 막 또다른 모험자 파티가 던전에 들어왔어요.” 사람들의 분주한 손길이 멈췄다. “뭐?” “몬스터가 없어서 그런지 빠른 속도로 마왕방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시간만에 도착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애꾸눈이 별명인 모험자가 소리쳤다. 내가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저는 던전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던전의 주인이니까요. 골드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입니다. 제게는 경보 마법도 있습니다. 요컨대…….” 일부러 말끝을 살짝 끌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안타깝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던전에 침입해오면 저절로 제게 알려주는 마법이지요. 방금 경고가 울렸습니다. 총 스물다섯 명의 모험자가 제 던전에 들어왔군요…….” 모험자들이 동요했다. * * * “와. 부장님, 이 플레이어 특이하네요. 쪼옵.” 금발의 미청년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그가 다른 한손으로 사과주스팩을 쫍쫍 소리 내며 빨아마셨다. 미청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여인이 ‘앙?’ 하고 반문했다. 여인은 의자에 몸을 파묻히고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한창 만화책에 빠졌는지라 미청년의 방해가 달갑지 않았다. “누군데?” “그 있잖아요. 부장님이 열 받아서 치어받았다던 인간.” “아, 로리라떼?” 여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며칠 전 일을 생각하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놈이 변태긴 변태지. 자그마치 바알의 마왕성을 공략했거든.” “바알의 대마왕성이요? 던전 어택?” 청년이 대경실색했다. 바알의 대마왕성이라면 자신도 깨보지 못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사실 깨라고 만들어놓은 던전이 아니니 당연했다. “세상에, 특급 플레이어잖아요!” “특급은 무슨. 재수없는 새끼야.” 여인이 만화책을 덮었다. “감히 중역 개발자인 나에게 시스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불평하지 뭐야. 꼴이 같지 않아서 확 한방에 보내버렸지.” “설마… 부장님, 계약도 안 하고 플레이어로 만드신 건 아니겠죠?” “허, 강아지가 호랑이 걱정하네. 내가 장사 한두 번 해보냐.”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청년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거, 저렇게 웃을 때마다 뭐 일 하나 터지는데……그때마다 고생하는 것은 억울하게도 저 여자가 아니라 나인데…….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고 했던가. 여인은 청년이 제일 바라지 않았던 대답을 내놓았다. “당근 야매로 통과시켰지.” “비리다……엄청난 비리를 태연하게 저지르는 사람이 여기 있어…….” 청년은 머리통이 아파왔다. 그의 상사는 무척 유능했지만 때때로 이성을 잃곤 했다. 솔직히 말해 매우 자주 잃었다.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와야 하는 사람이 청년이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사건은 어제 일어났다. 평소처럼 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흥분해서 네 시간이 넘게 키보드를 두들기는 것 아닌가? 또 시시한 키보드배틀이나 하는 것이겠지, 하고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씨! 짜증나!’ 부장이 벌떡 일어서서 괜히 멀쩡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한참이나 괴상한 목소리로 ‘끄으으응’ 하고 신음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키보드로 두들기고 냉큼 사무실에서 나갔다. 부장은 십 분만에 돌아왔다. 또 뭔 사고치고 돌아왔수, 하는 청년의 눈빛에 여인이 해맑게 웃었다. 어딘가 상쾌해졌다는 얼굴로. ‘일하고 왔어.’ 꼭 오 년 동안 고생한 변비가 싹 뚫린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환생트럭――부장의 애차로써 부장 본인이 붙인 이름이다. 청년은 개인적으로 부장의 네이밍 센스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으로 사람 한 명을 보내버렸지 뭔가. 금발의 청년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성격이 저 모양이니 본사에서 좌천됐지.’ 개발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면 뭐하누. 성격이 멍멍이가 형님! 하고 넙죽 엎드릴 만큼 개차반인걸. 그런데 이제 와서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꼼수에 가까운 방법으로 플레이어의 동의를 얻어낸 모양이었다. “부장님, 이거 본사에 알려지면 징계 먹을 수도….” “아 씨. 본인에게 동의도 구했고, 경고까지 친절하게 해줬다니까. 문제없어.” “그건 우리들 생각이죠. 플레이어 본인이 본사에 항의하면 어쩌려고요? 저 사람이 <던전 디펜스> 클리어하면 본사에서 사람 보낼 텐데요.” “클리어?” 여인이 히죽거렸다. “잘도 클리어하겠다. 광란(狂亂)의 모드로 설정했는데.” “헉.” 최약체에다 빙의시킨 것도 모자라서 역사상 최고로 어려운 모드로 했다고!? ‘무, 무서운 여자….’ 청년은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여인은 예쁘장하게 생긴 것과 반대로 용서도, 자비도, 배려도 없었다. 여인이 새로운 만화책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만약 그러고도 클리어한다면 글쎄, 내가 엎드려서 빌어주지. 용서해주세요~ 라고. 발끝에 입맞춤하지 못할 것도 없어. 그땐 진짜로 특급 플레이어가 된 셈이니까.” 뭐 그럴 리 없겠지만, 피식 웃으면서 여인이 다시 만화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청년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오른발을 잃어버린 남자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장님이 선택한 플레이어치고 능력치가 영 구리다 싶었는데, 다 일부러 능력도 스킬도 낮게 설정해버린 것이었다. 불쌍해라. ‘힘내, 이름 모를 인간. 쪼옵.’ 청년은 사과주스팩을 마저 빨아마셨다. 등 뒤로 여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어떻게 하얀수염이 죽을 수 있냐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당장 작가를 트럭으로 치어박겠다고 울부짖는 그녀를 보면서, 이번엔 또 어떻게 화를 달랠지 청년이 고민했다. 더 이상 희생자를 늘릴 수는 없었으니까. * * * 마왕방에서는 치열하게 설전이 벌어졌다. 맞서싸우자는 주장과 도망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아, 그러니까 여기 마왕방에서 농성하자고!” “미쳤냐? 스물다섯 명이야, 스물 다섯. 쪽수에서 상대가 안 돼. 싸울려면 네놈이나 싸우시지. 난 빠지겠어.” “허! 지금 도망치겠다는 소리냐?” 리프가 와락 소리쳤다. 그러나 애꾸눈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리프를 마주 노려보았다. 파티 최고참인 두 명이 언성을 높이자, 나머지 사람들은 일단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던전을 공략하는 데 참여하기로 약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던전을 공략했지. 빌어먹을 몬스터를 때려잡는 일이라면 몰라도, 다른 모험자 놈들이랑 싸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배신자 새끼!” “리프. 진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봐.” 애꾸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둘은 몰라도 나머지 애들은 이번에 처음 던전에 놀러온 애송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밭에서 봄갈이나 준비하던 애들이지. 이렇게 마왕을 잡게 된 게 순전히 우리의 실력 덕분이라 생각해? 헛소리. 다른 파티들이 여기를 쓸고 지나갔으니까 그런 거야. 우리는 손쉽게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을 뿐이지. 얘들 갖고 스물다섯 명의 적과 싸우는 건 무리야. 개죽음이라고.” “겁쟁이가 말은 청산유수군. 예전부터 내시가 말은 잘한다 그랬지.” 리프가 손도끼를 잡았다. “닥치고 내 말에 따라, 쫄보 새끼들아.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모험자의 세계에서 한 번 우습게 여겨지면 끝장이라고. 던전을 공략했는데도 다른 파티가 무서워서 꽁무니를 뺀다? 하. 그 꼬라지를 보고 사느니 차라리 내가 네놈들을 장사 지내주마.” “이 멍청이가…!” 애꾸눈도 창을 꼬나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00009 약하게 뉴게임 =========================================================================                               리프가 손도끼를 잡았다. “닥치고 내 말에 따라, 쫄보 새끼들아.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모험자의 세계에서 한 번 우습게 여겨지면 끝장이라고. 던전을 공략했는데도 다른 파티가 무서워서 꽁무니를 뺀다? 하. 그 꼬라지를 보고 사느니 차라리 내가 네놈들을 장사 지내주마.” “이 멍청이가…!” 애꾸눈이 창을 꼬나잡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싸움이 더 격해지는 것은 지켜볼 수 없었는지, 동료들이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리프가 이거 놓으라고 발버둥쳤다.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서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야야, 너희끼리 싸우면 어떡해!” “이러고 있을 때 그놈들이 들이닥치면 참 좋겠다.” “다네프, 참아. 응? 우리가 싸워서 좋을 게 뭐냐.” 얼핏 보기에는 내분이 일어난 상황. 나는 초조했다. ‘젠장, 무슨 레벨 3, 레벨 2짜리가….’ 내심 내분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계획은 이러했다. 스물다섯 명의 파티가 온다는 소식에 이들이 놀라서 도주한다. 같은 모험자라지만 본질은 약탈자. 골드를 가진 자신들을 가만히 보내줄 리가 없다. 이때 마왕인 나를 미끼로 삼게 한다. 내 몸엔 현상금이 붙어 있다. 모험자 파티가 나한테 정신이 팔렸을 때 여러분은 도망가세요― 하고 뻥카를 친다. 이렇게 얌전히 살아남겠다는 전략인데……상태창에 표시된 두 사람의 심리상태가 겉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 이름: 리프 종족: 인간  소속: 잘센 마을 속성: 중립(-15) 레벨: 3 명성: 2 직업: 나무꾼(B), 농사꾼(D), 모험자(F) 통솔: 15  무력: 30  지력: 4 정치: 2   매력: 6   기술: 21 호감도: 21 현재심리: ‘썅, 스물다섯이나 되는 놈들에게 이길 수는 없지. 도망은 쳐야 하는데, 도망가다가 놈들이랑 마주치면 그날로 좆 되는 거야. 파티를 셋으로 나눠서….’ ━━━━━━━━━━━━━━━━━━━━ ━━━━━━━━━━━━━━━━━━━━ 이름: 다네프 종족: 인간   소속: 잘센 마을 속성: 중립(-10) 레벨: 2    명성: 1 직업: 농사꾼(C), 모험자(F) 통솔: 10  무력: 22  지력: 6 정치: 4   매력: 11  기술: 5 호감도: 20 현재심리: ‘안타깝지만, 누군가는 희생해야 된다.’ ━━━━━━━━━━━━━━━━━━━━ ……놀라웠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냉정히 계획을 짜고 있었다. 던전입구에서 마왕방까지 이어지는 길은 모두 세 개. 그들은 세 개의 길 중 어느 한곳으로 적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도망친다 해도 운이 안 좋으면 적 부대와 맞닥트릴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틀림없이 전멸하겠지. 그렇다면 파티를 세 개로 나누자. 열다섯 명에서 다섯 명씩 조를 짜서, 각각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던전에서 빠져나간다. 어느 한 조는 적과 마주치게 된다. 나머지 두 조는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 리프와 애꾸눈, 두 사람은 이 상황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 안전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순식간에 고안한 것이었다. 갑자기 조를 나누자는 말에 애송이 동료들이 당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열다섯 명이 쭉 함께했으니까. 그래서 리프와 애꾸눈은 일부러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최고 고참인 두 사람이 갈라섰다――이런 상황 아래에선 보다 쉽게 편이 나뉘리라. 두 사람은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고 단지 눈빛만 주고받음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연출했다. 아마 상태창에 심리상태가 나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 홀라당 속아넘었겠지. 나는 소리없이 탄식했다. ‘튜토리얼에서 npc의 인공지능이 왜 이렇게 뛰어나!’ 진짜 게임이었다면 몬스터의 몽둥이찜질 한번에 죽어나갈 저레벨 모험자들이었다. 그러나 여긴 현실과 다름없는 것일까. 그들은 능력치만으로는 표시할 수 없는 삶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내 연기에 속아넘을 만큼 어수룩하고 순진하기도, 주저없이 화살을 쏘아댈 만큼 잔인하기도, 위기상황에서 냉정하게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도 했다. 도저히 인공지능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면모를 가졌다. ‘제기랄, 괜히 발이 쑤시잖아.’ 오른발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과연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가 예상보다 조금 더 똑똑할 뿐이었다.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열다섯 명의 부대가 갈갈이 나뉘게 되었으니 오히려 좋았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리프와 애꾸눈은 어느새 싸움을 그만두고 있었다. 마치 지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리프가 열다섯 명을 다섯 명씩 나누자고 제안했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리프의 제안이 최선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저런 겁쟁이와는 다시는 같이 다니고 싶지 않거든.” 리프가 애꾸눈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애꾸눈이 발끈했지만, 주변에서 얼른 말렸기에 다시 언성이 높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편이 갈렸다. 오른발이 망가져서 진군 속도에 장애를 주는 날 그냥 내버려두고 가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내게 걸린 현상금을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상태창으로 확인해본 결과 나에겐 생포 시 무려 10000골드에 달하는 현상금이 달려 있었다. 젠장, 나 따위한테 왜 이런 금액이 내걸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개새끼들아, 죽어라! 그래야 우리가 사니까.” “너희야말로 뒈져버려라.” 모험자들이 낄낄대며 헤어졌다. 그들은 조장을 따라 각자 통로로 흩어졌다. 나는 애꾸눈의 조에 끌려다니게 되었다. 애꾸눈의 조는 나라는 짐덩어리를 맡았다는 이유로 입구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통로에 배정받았다. 덩치 큰 모험자에게 업혀 실려가면서, 나는 묵묵히 <몬스터고용창>을 보고 있었다. “…….” ━━━━━━━━━━━━━━━━━━━━ [부대명]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슬라임       2 2 2 70골드 -최하급요정     4 3 2 160골드 -고블린       4 4 4 250골드 -최하급골렘     7 5 5 400골드 [소지금: 511골드] ━━━━━━━━━━━━━━━━━━━━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몬스터를 고용하면 정말 모험자들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양자택일이 되어버린다. 실패는 곧 죽음. 다른 작전을 쓸 수 없다. 이 순박한 남자들에게 동정심을 사서 살아남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이들도 죽지 않고 나도 죽지 않는, 최선의 수가 남아 있지 않을까? 아니다. 나는 냉정하게 최하급골렘을 선택했다. 지금 가진 금액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강의 패였다. 이 조에서 가장 센 애꾸눈보다 넉넉히 두 배는 강했다. 곧이어 '최하급골렘을 고용하겠습니까'라고 묻는 홀로그램이 떴다. ‘고용.’ 「최하급골렘을 고용했습니다!」 「최하급골렘을 소환하겠습니까?」 저들이 나를 먼저 공격했다. 그걸 용서할 만큼 나는 자비롭지 못했다. 물론 현실에서 나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종일토록 게임에 빠져살았고, 자기자신을 쓰레기라 여겼다. 그러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게임의 세계, 던전 어택의 세계였다. 나는 던전 어택의 제왕이다. 비록 용사 로리타가 아니라 마왕 단탈리안이 되었으나, 틀림없이 나는 유일무이하게 대마왕성을 공략하고 사상 최고의 능력치 쌓은 영웅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쓰레기였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마저 쓰레기가 되는 것을――나는 단 한 번도 용납한 적 없었다. 그것이 내 '플레이어'로서의 긍지였다. ‘제왕은 자신에게 적대한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저들도 게임의 시나리오에 따라 행동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변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겠는가? '마왕 단탈리안'에게 주어진 설정대로 던전에 침입한 저 괘씸한 인간들한테 죽음의 철퇴를 내려주는 것 또한 게임의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설마 우리한테로 오지 않겠지.” “에잉, 재수가 없어도 그리 옴팡지려구?” “만에 하나 마주치면, 이보게들. 그냥 금화를 다 주자고. 돈이 아무리 귀한들 목숨보다 중요하겠나. 마왕까지 넘겨주면 살려는 주겠지.” 저들은 전투에 임할 준비라곤 하나도 갖추지 않았다. 싸움이 일어나기도 전에 항복할 생각부터 하다니. 이만한 기회가 달리 없었다. 나는 내 몸을 업은 사내의 귀를 있는 힘껏 물었다. 순식간에 사내의 귀가 뜯겨나갔다. “끄아악!” 사내가 울부짖었다. 동시에 내 몸도 떨어졌다. 낙법 따위를 구사할 틈도 없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띵, 하고 주먹으로 강하게 얻어 맞은 것처럼 충격이 머리통을 흔들었다. 모험자들이 당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크? 뭐야, 왜 그래?” “큭, 크어어억! 저 자식, 저 자식이 내 귀를…!” 저들이 아직 제대로 상황이 파악하지 못한 이때. 내가 절규하듯 외쳤다. “최하급골렘――소환!” 동굴이 보랏빛으로 가득 찼다. 한 순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바닥에 그려졌다. 빛은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한 지진을 일으키며, 문양에서 빛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삐져나왔다. 그것은 갈색 바위로 이루어진 팔뚝이었다. 바위손이 땅바닥을 붙잡더니, 마치 지옥구덩이에서 기어오르듯 골렘이 불쑫 튀어나왔다. ─ 크후으으으으오! 골렘이 포효했다. 저 답답한 지하에서 드디어 탈출하게 된 것에 환호하며. 몬스터의 감정이 그대로 나한테 전달되었다. 녀석은 자신의 신고식에 어울리는 전장을 욕구하고 있었다. 내가 명령만 하면, 언제라도 하찮은 인간들을 찢어발기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이 몬스터! 이것이 마왕의 능력인가! 온몸에서 열이 부글부글 끓었다. 냉정함을 되찾으라고, 머리 한구석에서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차라리 흥분에 몸을 맡길 때였다. 나는 골렘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깔아, 뭉개버려라!” 문장을 전부 말하기도 전에 골렘이 팔을 휘둘렀다. 목표는 가장 근처에 있는 애꾸눈이었다. 유일한 고참인 녀석을 죽이면 걱정할 거리가 사라진다. 애꾸눈이 깜짝 놀라 옆으로 뛰었다. 나쁘지 않은 반응 속도. 하지만 어리석었다. 차라리 바닥에 몸을 숙였다면 공격을 피했겠지. 골렘의 두툼한 돌주먹이 그대로 허공에 뜬 애꾸눈을 후려쳤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애꾸눈이 멀리 날아갔다. 애꾸눈은 3미터 넘게 날아가다 하필 동굴의 종유석에 머리부터 부닥쳤다. 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 크후르으으아! 골렘은 처음으로 내려진 명령을 완수해내자 기뻐했다. 던전의 잔잔한 공기가 쩌렁쩌렁 요동쳤다. 내가 미처 다음 명령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골렘은 바닥에 뒹굴던, 나한테 귀가 뜯긴 사내를 발로 짓밟았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내는 뭉개지지 않고 다만 끔찍한 비명을 연신 내뱉었다. 골렘이 화난 것이 느껴졌다. 꼭 개미를 밟았는데 죽지 않아 불쾌한 기분이라고 할까. 골렘은 다리를 크게 올려 대여섯 번 강하게 내리쳤다. 비명소리는 네 번째 발길질을 즈음해서 멈추었다. 돌로 된 골렘의 발에는 희여멀건 뇌수가 묻어 있었다. 욕지거리가 나와야 마땅할 광경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몸은 희열로 가득 달아올랐다. “흐아아아악!” 매가리 빠진 비명이 퍼졌다. 시선을 돌리니 모험자 한 명이 꽁지 빠지라 도망치고 있었다. 다함께 힘을 합쳐 대항해도 쓰러트릴지 의문인 상대를 눈앞에 두고 동료 한 사람이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었다. “씨발! 도망치지 마!” “저 개새끼가 우리를 속였어! 신이시여, 다네프!” 남은 두 사람이 대열을 맞추어 방진을 짰다. 골렘이 비웃었다. 그 비웃음은 나한테까지 전염되었다. 마지막 발버둥치고는 지나치게 어설펐다. 더군다나 두 명 중 하나는 궁수였다. 방패가 없었으며 갑옷의 수준도 한심했다. “약한 상대부터 노려라!” 나의 몬스터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골렘이 느릿하지만 묵직한 주먹질로 궁수를 공격했다. 궁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주먹질이 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다. “하, 피했――.” 그러나 그는 골렘에게 팔이 두 개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궁수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골렘의 왼쪽 팔이 그의 얼굴을 덮쳤다. 궁수의 면상이 움푹 부수어졌다. 그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제 나머지 한 놈. “으, 으아아아!” 모험자가 창을 부여잡고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뭉툭한 창끝이 골렘의 팔관절을 찔렀다. 그곳이 약점이라고 믿은 것일까. 골렘의 체력이 1 떨어졌다는 홀로그램이 떴다.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그만한 분전을 펼친 것은 과연 칭찬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그뿐. 개미와 같은 존재에 물리자 골렘은 분노할 대로 분노했고, 양팔과 양다리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모험자는 필사적으로 주먹질을 피했지만 결국 발길질에 맞아 허리가 부러졌다. 동굴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그를 향해 골렘은 주저없이 주먹을 망치처럼 꽂아넣었다. “하아, 하아…….” 동굴에 내 가느다란 숨소리가 흘렀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조용했다. 골렘은 동작을 멈춘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맞이한 전투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후……후하하.” 어리석기는. 골렘은 강력했다. 하지만 느렸다. 골렘을 상대하는 대신 차라리 나를 노리는 편이 훨씬 좋았다. 날 인질로 잡으면 골렘 역시 공격하길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모험자들은 잊어버렸다. 초반에 고참인 애꾸눈이 허무하게 죽고, 차마 몬스터가 소환되리라 상상하지 못한 탓이리라. 내가 골렘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아직 끝이 아니야.” 나는 F급 모험자들의 능력을 보았다. F급이라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났다. 언제 이 지랄맞은 세계에서 빠져나갈지 모르지만, 앞으로 그들보다 강대한 모험자들이 던전에 침입해올 것이 분명했다. E급, D급, 언젠가는 A급 모험자가 찾아오겠지. 철저하게 방비해야 한다.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고, 던전에 각종 함정을 설치해야만 한다. 그럴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주 많은 돈이! 초반 자금인 1000골드를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다른 조들이 뺏어간 자금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던전지도창.” 던전의 지도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반투명의 홀로그램에는 모험자들이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중엔 아까 전에 도망친 모험자도 나타났다. 그는 빠르게 던전 입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버려두자. 어차피 붙잡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놈들까지 놓칠 필요는 없지. 모험자의 시체를 뒤져서 금화를 전부 찾아냈다. 이제부터 돈이 생명줄이었다. 나는 묘하게 흥분된 감정을 느끼면서――왜인지 감정을 다잡을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골렘에게 나를 업으라고 명령했다. 골렘은 자기 어깨에 나를 가뿐하게 들어 올려놓았다. 시야가 탁 트였다. 나는 모험자들이 향하는 길목으로 움직일 것을 골렘에게 명령했다. 골렘의 발소리가 동굴에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00010 튜토리얼 클리어 =========================================================================                                   * * * 리프가 이끄는 조는 놓쳤다. 골렘이 이동하는 속도가 생각보다 느렸다. 다른 조를 때려잡는 사이, 리프의 조는 벌써 던전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추격을 포기했다. 골렘의 체력이 2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추격을 포기한 이유였다. 결국 맨 처음에 도망친 한 명에 리프의 조 다섯 명을 포함해서, 나는 여섯 명의 적을 놓치고 말았다. 두 번째 전투는 치열했다. 골렘에게 동굴의 어두운 구석탱이에 쭈그려 앉으라 명령한 다음――그렇게 해두니 영락없이 평범한 바위였다――나는 종유석 뒤에 숨었다. 모험자들이 길목을 지나쳐가는 순간, 골렘이 그들을 습격했다. 기습작전 자체는 성공했다. 1분만에 모험자 둘이 죽었다. “왜 몬스터가 남아 있는 거야!” “씨부랄, 자연적으로 생성된 놈인가.” 그 다음이 문제였다. 세 사람은 초보자였으나 몇 번 몬스터를 상대해본 듯했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몬스터에게 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무방패로 공격을 막아냈고 한 사람이 쇠몽둥이로 공격했다. 6이나 남아 있던 골렘의 체력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나는 조마조마해진 나머지 종유석에서 몸을 드러냈다. 자칫 골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박을 걸었다. 나는 주의를 이쪽으로 끌기 위해서 와락 소리질렀다. “와아아악! 모험자, 모험자가 떼거지로 몰려온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내 쪽을 돌아봤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 ‘왜 네가 여기에?’라는 의문이 담기려 하는 순간. 골렘이 방심한 모험자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한 사람이 탈락했다. 모험자들은 갑작스러운 내 출현, 그리고 모험자들이 몰려온다는 말에 갈팡질팡했고 결국 진형이 흐트러져서 전멸했다. 간신히 사태를 파악한 것일까. 마지막에 죽은 자는, 두 다리가 부러져서도 날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마왕――개자식, 배신했구나!” 그가 나를 향해 창을 던졌다. 나는 기겁해서 땅에 넘어졌다. 다리를 사용하지 않은 채 투창했기 때문이지 창은 나한테 닿지 못한 채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창이 바닥에 구르는 것이 멈추기도 전에 모험자의 머리는 골렘의 손아귀에 바스라졌다. 그 직후에 「CLEAR!」 하고 빵빠레가 울렸다. ─ 튜토리얼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 튜토리얼 보상으로 1개의 스킬이 주어집니다. 스킬은 플레이 성향에 따라 종류가 정해집니다. ─ 축하드립니다! 스킬 '연기'를 습득했습니다. 귓가로 기계음과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CLEAR!」 문구가 번뜩였다. 대문자로 된 단어는 카지노 슬롯머신처럼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나는 불빛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잠시 후, '결과를 보고합니다'라는 음성과 함께 홀로그램이 등장했다. 적들을 격퇴한 결과에 대한 보고서였다. ━━━━━━━━━━━━━━━━━━━━ [결과보고] *Level UP 몬스터 수: 1   행동불능 몬스터 수: 0 *포획 포로 수: 0 소지금액: 611골드 강탈금액:  +2골드     약탈금액: -201골드 금액합계: 412골드 *던전 경험치: 0026/1000 (Lv.01) ━━━━━━━━━━━━━━━━━━━━ 동굴에 널브러진 시체. 으스러진 두개골, 뇌수. 그런 으스스한 장면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효과음은 발랄했다. 머리에서 그 간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몸을 쪼그린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툭. 무언가가 발끝에 닿았다. 마지막 모험자가 던진 창대가 또르르 굴러와서 발치에 걸려 있었다. “우욱……!” 그때까지 참았던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역류했다. 전장의 흥분을 마취제로 삼아 겨우 억제하던 토사물이었다. 이번에도 참으려 애썼다. 그러나 한 번 입술이 열리더니 위액과 토사물이 분수처럼 튀어나왔다. 창대 위에 갈빛의 역겨운 액체가 후르륵 떨어졌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선배에게 끌려 집창촌에서 동정을 뗀 적이 있었다. 그때 어렴풋하게 맡은 여자의 아랫도리 냄새가 정말 역겨웠다. 이걸 빨아재끼는 인간이 있다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런데 그건 약과였다. 인간의 머리통에서, 내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냄새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역했다. 피가 그토록 냄새 나는 물건인지 여태까지 전혀 몰랐다. “우웩! 욱, 우으웨엑!” 지금 나의 몸속에도, 저기 바닥에 낭자한 핏덩이와 똑같은 것이 흘러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더더욱 심해졌다. 머릿속의 뇌까지 입밖으로 토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또 다시 띠링 소리가――이제는 혐오스러운 그 효과음이 울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토악질이 쏟아진 곳에 쓰러져서 기절했다.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동굴에선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마법적인 처리가 됐을 법한 조명기구, 동그란 구체가 희미하게 하얀 빛을 내뿜을 따름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였다. 동굴 천장은 까마득해서 어둡게 비추기만 했다. 죽을 것처럼 피곤했다. 계속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가 풍겨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신음하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평소 습관대로 오른발로 땅을 밟고 일어서려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오른발이 안 움직이지.’ 그 사실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아직 머릿속이 무거운 안개가 낀 것처럼 먹먹해서 그런 건지 몰랐다. 주변을 둘러봤다. 골렘이 얌전히 내 곁에 서 있었다. 잠든 주인을 위해 경호를 선 것이었다. “……고맙다.” 하급 몬스터가 언어를 알아들을 리 없지만, 나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골렘은 단 한 명도 내 편이 아닌 이곳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다. ─ 크롸아. 제법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골렘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울었다. 혹시 이것도 마왕이 가진 능력인가. 나는 땅바닥을 기어서 일일이 모험자의 시체들에 다가갔다. 그들이 품에 숨긴 금화를 뺏기 위해서였다. 눈을 뜨자마자 내게 든 생각은 '살아남아야 한다'였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은 '돈이 필요하다'였다. 생애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에 대한 죄책감? 그런 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해, 그런 감정을 느낄 여유 따위가 없었다. 첫 전투에서 모험자 한 명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내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리프 일행에 알릴 것이 분명하다. 리프 일행은 분노하겠지. 그리고 동료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더욱 격분하리라. 언제 그들이 복수를 위하여 다시 던전에 침입할지 몰랐다. 혹은 정말로 또 다른 모험자 파티가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열다섯 명이 아니라 스물다섯 명, 어쩌면 서른다섯 명으로 구성된 파티가. 그날이 오기 전에 최대한 돈을 모아야만 한다. ‘마왕――개자식, 배신했구나!’ 마지막 모험자의 옷속에서 금화를 꺼낼 때, 그런 환청이 들렸다. 나는 이를 꽉 물었다. 비웃음을 날려주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너희가 자초한 일이야. 너희가 방심한 탓이고.” 쳐들어오지 않았으면 죽을 일도 없었다. 핏물과 토사물이 묻은 손으로 금화를 꾹 쥐었다. 때마침 홀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리프를 비롯한 모험자들의 호감도가 제로로 떨어졌다는 알림말이었다. 내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골렘의 어깨에 앉아서, 마왕방으로 향하라고 골렘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알 수 없었다. 여기는 어떤 곳인지, 왜 던전 어택과 세계가 똑같은지, 무엇보다 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내가 종일토록 마왕방의 침대에서 퍼잘 예정이란 것이었다. . . . ─ 튜토리얼 종료. ─ 플레이어 스테이터스. [플레이어: 로리타]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2     악명: 16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4/19  무력: 2/9  지력: 25/25 정치: 10/20  매력: 4/7  기술: 1/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능력이 없습니다. *스킬: 연기 [업적: 0개] [부하: 1개체/30개체] ─ 다음 스테이지(stage no.01)로 넘어갑니다.           00011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카앙! 곡괭이가 돌구덩이에 꽂혔다.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걸까. 인생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나는 도를 닦는 심정으로 하염없이 곡괭이를 휘둘렀다. 달마대사도 동굴에 들어가 죽어라 벽을 바라보며 수련했다지. 이렇게 죽어라 동굴만 파는 나를 수도자라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하하. 마흔 번, 쉰 번 그렇게 돌벽을 두들기니 띠링! 하고――솔직히 이 효과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철광석(2개)을 채취했습니다.」 오오. 과연 도를 닦은 보람이 있었다. 광석이 한꺼번에 두 개나 나왔다. 이런 경우는 꽤나 드물었다. 나는 아이템으로 얻은 철광석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다시 힘차게 곡괭이를 휘둘렀다.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 마왕인 내가 어찌하여 막장에서 철을 캐는 신세가 되었는가.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다. 돈 때문이다. 초기 자금 1000골드에서 200골드를 모험자한테 뺏겼다. 골렘을 장만하느라 400골드를 투자했다. 내게 남은 돈이라곤 달랑 400골드가 전부였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평생 놀고먹어도 문제없을 금액. 하지만 마왕으로서는 어디에 보여주기에도 참 민망한 재산이었다. 차라리 돈을 들고 어디로 튀어버릴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왕이라 그런지 뒤통수에 조그마한 뿔이 달렸지만(어찌나 작은지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걸 제외하곤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생겼다. 나는 원래 세계에서 가진 외모와 체격 그대로 마왕이 된 것이었다. 대충 모자를 쓰고 다니면 그 나름대로 부유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했다. 모든 사태의 주범, 비너스빤스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 비너스빤스: 던전 어택이 마왕들의 던전들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필히 기억하라.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신작 정보를 알려주는구나 싶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일종의 암시였다. 어떻게 해야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였다. ‘세계정복이라.’ 게임이었다면 별것 아니고 시시한 목적으로 여겨질 법했다. 그러나 막상 이 저질스러운 캐릭터로 세계를 정복하라니 암담했다. 단탈리안이다. 최약체 마왕이다. 이런 녀석이 세상을 정복하겠다면 지나가던 슬라임이 깔깔거리겠지. 뭐,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요 며칠 사이에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아무리 다급한 상황일지라도 마음 한구석에 여유를 가지는 편이 좋다는 거다. 나 몰라라 도망쳤다가 어떤 시스템적인 제재가 가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 케르륵, 케륵. 고블린 한 마리가 다가왔다. 없는 살림에 겨우 마련한 몬스터였다. 굳이 고블린을 구입한 까닭은 간단했다. 몬스터창에 동굴을 파내려가는 것이 특기라고 적혀 있었다. 골렘은 강력했지만 채광에는 재주가 없었다. 한마디로 순수한 전사. 지금 나에게는 일꾼이 필요했다. 고블린은 내 기대에 부응하여 양팔 가득 철광석을 안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게 자랑하러 달려온 것 같았다. “어이쿠, 우리 블링이! 오늘도 이렇게 많이 캤어요?” 나는 곡괭이를 놓고 고블린의 양쪽 볼을 부비부비 만졌다. 고블린이 베시시 웃었다. 어쩜 이렇게 깜찍할까. 마왕이 된 이후로 고블린처럼 무시무시하게 못생긴 몬스터도 귀엽게만 보였다. 내 미적 의식이 고장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귀여운걸. ─ 케르르. 고블린이 앙증맞게 웃으면서 두 팔을 뻗어왔다. 나는 녀석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뱅뱅 돌렸다. 고블린이 신 나서 케르륵 웃었다. 처음에 골렘한테서 경험했던 일이 일어났다. 고블린의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한없이 순수하게 기쁨만으로 가득 찬 감정이었다. 마치 감각이 서로 연결된 듯했다. 어두운 땅굴, 멋들어진 종유석, 축축한 흙내음――. 이 모든 것을 깊이,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고블린의 심정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나의 던전을 너무나 좋아했다. 오죽하면 나까지 던전을 약간은 좋아하게 될 정도였다. 다른 존재와 감각이 통한다는 게 이토록 경이로운 것일 줄이야. 한창 고블린과 놀아주고 있을 때였다. “단탈리안 님.” “헉.”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동작이 멈췄다. “광석을 구매하러 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무표정한 여자아이가 한 명. 여자애는 회사원처럼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녀는 딱 각이 잡힌 자세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존경심 같은 것이 있어서 인사한 게 아니라 단지 인사라는 절차가 필요해서 했다, 라는 느낌이었다. “어?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예.” “동굴에서는 시간이 빨리 가서 말이지, 하하…….” 여자애는 반응하지 않았다. 청금석(靑金石) 같은 눈동자로 이쪽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내가 아까부터 고블린을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멋쩍어져서 슬그머니 고블린을 내려놓았다. “하하하.” “…….” 케륵? 하고 고블린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른 가렴. 내가 속으로 말했다. 고블린은 알겠다는 듯 동굴 저편으로 총총 걸어갔다. 몬스터와 나는 마음속으로도 소통할 수 있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었다. 내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고블린한테 보여주지 않게 되어서. “그럼 단탈리안 님. 거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자애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라피스 라줄리. 그녀의 이름이다. 보름 전에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잘센마을 모험대를 물리친 이후로 이 세계의 게임적인 기능을 계속해서 연구했다. 많은 성과가 있었다. 마법연구나 기술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고――가장 값싼 마법연구가 무려 5000골드라서 지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던전에 사치품을 들여놓거나, 각종 함정을 설치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던전 운영에 필요한 기능은 무엇이든 마련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거래창이란 것도 찾았다. ‘거래합니다’라는 버튼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한번 버튼을 눌러보았더니, 갑자기 눈앞의 동굴바닥에 분홍색 마법진이 그려지는 것 아니겠는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더니 마법진에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묶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나 보던 검은색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자애는 등장하자마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탈리안 님. 쿤쿠스카 상회의 라피스 라줄리입니다.’ 그녀가 자신을 5급 직원마(職員魔)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소개했다. ‘단탈리안 님과 쿤쿠스카 상회의 거래는 앞으로 제가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치 노련한 집사와 같이 몸동작이 능숙했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정체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상세하게,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과 고저 없는 목소리를 유지한 채 질문에 답했다. 쿤쿠스카 상회는 마왕을 비롯해서 상위 마족의 여러 잡무를 도맡아주는 회사였다. 고객이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구해준다나. 사무원 전원이 마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본사는 마계에 위치했다. 「드래곤뿔이라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쿤쿠스카 상회의 모토였다. 단, 돈만 제대로 준다면. 라피스의 설명은 이러했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VIP 고객인지라 쿤쿠스카 상회에선 특별히 자기 같은 사무원을 직접 눈앞에 소환시키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내가 살짝 흥분해서 물었다. ‘나도 우대 고객이야?’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라피스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말했다. ‘저는 5급 직원마입니다. 5급은 가장 낮은 계급이지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빌어먹을 D 클래스. 라피스가 보여준 구매 목록에는 그야말로 온갖 아이템이 즐비했다. 고급 마법서부터 신기(神器)에 가까운 검까지. 다만 나는 고객 레벨이 F에 불과했다. 고객 레벨 F가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란 기껏해야 잘 벼린 롱소드나 고블린용 갑옷 따위밖에 없었다. ‘물건을 많이 구입하실수록 랭크가 올라갑니다. A 랭크가 되시면 드래곤뿔이 아니라 드래곤 자체를 구입하실 수도 있습니다.’ 드래곤이라니! 던전 어택에서 드래곤은 마왕 다음가는 몬스터였다. 드래곤 한 마리만 있으면 어떤 모험자가 와도, 아니 왕국의 정규군이 떼거지로 몰려와도 두렵지 않았다. ‘그, 그런데…… 난 돈이 없는데.’ ‘그렇습니까.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의 총재산은 얼마인지요?’ ‘406골드.’ 내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피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단탈리안 님, 던전에 몬스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한 마리.’ 라피스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가 다급하게 덧붙여서 말했다. ‘아니. 고블린도 한 마리 있긴 한데.’ 상대방 얼굴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다만 라피스를 휘감고 있던 차분하고 고요한 아우라가 왠지 모르게 끈적끈적해졌다. 아, 그녀도 마족이니까 몬스터로 취급되는 것일까. 골렘이나 고블린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감정이 전달되었다. ‘실례합니다만. 한 부대가 아니라 한 마리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올바르게 들은 것이 맞는지요?’ ‘마, 맞습니다.’ 어느새 내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그 한 마리는 어떤 종류의 몬스터인가요?’ ‘최하급 골렘입니다.’ 쏴아아아. 난데없이 차가운 바람이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실례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볼품없는 던전은 제 짧은 마생(魔生)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용해 보이는 서비스를 찾았지만 막상 뭘 살 돈이 없었다. 다행히 쿤쿠스카 상회에선 물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마왕이 모험자들로부터 빼앗은 장비 등을 처리해주는 것이었다. 잘만 하면 돈벌이가 될지 몰랐다. 문제는 뭔가 팔아재낄 물건조차 내게는 없다는 것. 라피스가 내 사정을 들으면서 가만히 고민하다가, ‘광석이라도 채취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고 조언해주었다. 마왕이 자리 잡은 던전은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명당이었다. 마나가 풍족하여 때때로 광석에 마력이 깃든다나 뭐라나. 그렇게 마나를 함유한 광석은 제법 비싼 값에 팔렸다. 마왕이 곡괭이나 휘두르다니 낱말 그대로 막장이었다. 어쩌겠는가. 당장 돈을 벌 방법이 없는 것을. 나는 라피스의 조언에 따라 고블린을 고용하여 요 보름 동안 주구장창 땅굴을 파기에 이르렀다. “오늘 매각하실 광석은 몇 개나 되는지요.” “철광석 쉰여섯 개.” 고블린이 파온 광석까지 합쳐서 내가 말했다. 라피스가 자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심호흡이라도 하는 듯한 숨소리였다. 나도 며칠 전에야 알아차렸지만 그것은 항상 무표정한 라피스 특유의 한숨이었다. “단탈리안 님, 아시다시피 철광석은 최하급 광석입니다. 아무리 마나를 머금었다 한들 값을 높이 쳐드릴 수 없습니다.” 그랬다. 철광석은 콩비지처럼 가치가 낮았다. 하나 내게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채광 레벨이 너무도 낮아서 철광석밖에 나오질 않는데 어떡하겠는가! 애당초 마왕이 채광 스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최근 저희 회사에서 제가 영업 성적이 가장 낮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후후후.” 내가 낮게 웃었다.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여, 언제까지고 내가 너한테 민폐만 끼치는 마왕으로 남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그럴 줄 알고 오늘은 비장의 물품을 준비했지.” 짜잔, 하고 내가 품에서 광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로 금색으로 연하게 빛나는 광석을. “봐라! 황금이다! 어때? 이 정도면 썩 괜찮지?” “……흠.” 이거엔 과연 만년 무표정 소녀도 놀란 것일까. 흠, 이라고 감탄했다. 자그마치 흠, 이라고. 그녀는 내게서 황금 광석을 건네받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황금을 캔 것은 우연이었다. 무념무상의 심정으로 땅굴을 파내려가는데 문득 노란 무언가가 보이는 것 아닌가. 대박! 나는 환호의 함성을 내지르면서 당장 황금을 캐냈다. 드디어 내 마생에도 봄날이 오는구나 싶었다. 보름 내내 철을 캐서 팔아봤자 10골드도 벌지 못하던 터였다. 마나를 품은 황금 광석은 적어도 100골드 정도 값이 나가겠지. “라피스, 너무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네가 조언해주지 않았다면 황금도 발견하지 못했겠지. 다 네 덕분이야.” “…….” “솔직히 너에겐 고마운 마음뿐이야.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내겐 진짜 아무것도 없거든. 마왕도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내가 끝없이 떠벌리는 와중에 라피스는 조용히 동굴 벽에다 황금을 긁고 있었다. “우리 던전엔 골렘이랑 고블린밖에 없어.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는 거지. 아, 물론 골렘이랑 고블린은 착한 아이들이야. 내 말도 잘 듣고, 초라한 집에서 지내는데도 불평 하나 없지. 정말로…….” “단탈리안 님, 이거 황금이 아닙니다.” “그렇게 착한…… 예?” 라피스가 한손에 광석을 들고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내가 눈을 깜빡였다. “엉?” “황철석(黃鐵石)입니다. 겉보기 색깔이 비슷해서 자주 황금과 혼동되지요. 바보의 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겉보기 색깔이 비슷한 광물을 구별하려면 표면을 긁어내면 됩니다.” 그녀가 광석을 동굴 벽에 긁어서 나온 돌가루를 내게 보여주었다. 검은색 돌가루였다. “이렇게 표면에 긁어서 나오는 가루 색깔을 조흔색이라 부릅니다. 자연금, 황철석, 황동석은 서로 비슷한 색깔을 띠고 있지만 조흔색은 각각 황색, 흑색, 녹흑색으로 다르지요. 이건 황철석이네요.” “…….” 나는 바닥 모를 부끄러움에 첨벙 빠졌다. “그, 그럼 가격이 얼마나 나가?” “단탈리안 님께서 기대하신 바에 한참 못 미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이, 이제야 사정이 좀 나아지나 했는데…….” “철광석 쉰여섯 개. 황철석 한 개.” 옆에서 라피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냉정하게 주판을 굴렸다. “전부 다해서 2골드 되겠습니다.” “으어어억…….” “오늘도 저희 쿤쿠스카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허어어억…….” 마왕인 내가 하루 종일 일해서 2골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라피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저에 대한 단탈리안 전하의 열렬한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되도록 영업에도 이익을 주시면 더 기쁘겠습니다.” 크아아아아악! 나는 창피해서 한참 바닥을 굴러다녔다.   ============================ 작품 후기 ============================ 쿤쿠스카 상회는 <둥지 짓는 드래곤>에 등장하는 균규스카 상회의 패러디입니다. 이 소설은 둥지 짓는 드래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00012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마음이 진정하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근처의 너른 바위에 앉아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라피스에게 이미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준지라 허세를 부릴 건더기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진지해지고 싶었다.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라피스가 내 얘기를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게 상대방의 감정이 전해지는 능력이 없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살짝. “돈을 대출하실 의향이 있다고요?” “그래.” 쿤쿠스카 상회에선 은행 업무를 겸했다. 마왕에게도 급전이 필요했다. 그런 경우 상회에서 돈을 빌려주었다. 보름 내내 광석을 파내면서 내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모험자의 도끼날에 비명횡사할 게 뻔하다! 하루에 2골드라니. 백날을 쉬지 않고 일해본들 200골드밖에 벌지 못한다. 200골드로는 최하급 골렘은커녕 고블린조차 살 수 없다. 뼈 빠지게 곡괭이를 휘둘러야 간신히 고블린을 더 고용한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겨우 골렘과 고블린 두 마리로 던전을 지켜낸다고? ‘불가능하다.’ 모험자들은 호시탐탐 던전을 노린다. 원수가 되어버린 리프 일행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언제 모험대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다. 한가하게 곡괭이질로 돈이 쌓이기를 기다릴 수 없다. 나는 차라리 큰돈을 대출해서 차근차근 이자를 갚아나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자뿐만이 아니라 단번에 원금을 갚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라피스는 조용히 거부의 뜻을 말했다. “단탈리안 님, 많은 마왕이 저희 상회의 돈을 빌렸습니다. 그중 이자만 겨우 갚아나가는 마왕도 적지 않습니다. 이자는 매달 꼬박꼬박 쌓이는데 반해서 던전의 수익은 비정기적이기 때문이지요.” 라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던전의 최대 수익원은 역설적으로 던전에 침입하는 모험자입니다. 모험자가 강할수록 던전의 수익도 늘어나지요. 강한 모험자는 필연적으로 좋은 무구와 값비싼 아이템을 가지기 마련이고, 마왕은 그걸 약탈할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말해 질 낮은 모험자밖에 오지 않는 던전은 수익 또한 별 볼 일 없습니다.” “…….” “무엇보다도 상회에서 많은 돈을 빌려줄지도 의문입니다. 쿤쿠스카 상회는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곳. 같은 마족도 혀를 내두른다는 냉혈한 집단입니다.” 라피스가 재차 강조했다. “확실하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 시엔 제아무리 마왕이 대출을 요청할지라도 단호히 거부합니다.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마왕의 격은 곧 신용의 격. F급이신 단탈리안 님을 쿤쿠스카 상회에서 얼마나 신뢰할지 의문입니다.” “그렇겠지.” “상회는 다수의 경호 부대를 고용하고 있고, 언제든 더 많은 부대를 고용할 재력이 있습니다. 대출금의 이자를 내지 않는 마왕에게 상회는 무자비합니다. 실제로 협박과 강요가 실행된 전례도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서열 제25위 마왕인 글라샬라볼라스 각하가 10만 골드를 대출했다가 70년 동안 이자를 납부하지 않자, 쿤쿠스카 상회에선 자그마치 36개의 마족 군단을 동원하여 글라샬라볼라스 각하의 던전을 침공했습니다. 마왕의 몬스터 부대는 패퇴했고 결국 글라샬라볼라스 각하는 70년 동안 밀린 이자를 전부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분의 던전은 파산했습니다.” 라피스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쿤쿠스카 상회의 힘입니다. 지난 삼천 년 동안 마계 제일의 상회로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지요. 단탈리안 님, 지금 저는 상회의 일개 직원마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족으로서 조언하고 있습니다. 섣부르게 상회의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상대방의 진심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이 소녀는 정말로 내 제안을 어리석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냉혹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를 속여서 대출을 받게 하는 편이 그녀 본인의 영업 실적에는 도움이 되리라. 푼돈을 빌려주어 마왕 한 명을 꽉 사로잡는 편이 상회의 이익에 부합할 것인데도, 라피스는 나에게 사기를 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적과 조직의 이익을 외면했다.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인내하세요. 지금은 힘들지만 100년, 200년 차근차근 돈을 모아나간다면 단탈리안 님도 반드시 멋진 던전을 이룩해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라피스 라줄리. 싸늘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사무적인 태도를 가진 마족.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순수했다. 순수한 신념으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런 라피스이기에 나는 더더욱 의견을 밀어붙였다. “만일 나한테 확실히 성공할 사업 제안이 있다면?” “…….” 소녀가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물론 저희 상회에선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단탈리안 님께서 확실한 사업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다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라고 그녀는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전염병.” “……?” 라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요?” 좋아, 관심을 가졌다.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연기 스킬 발동.’ 눈앞에 알림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튜토리얼 보상으로 얻은 연기 스킬. 이건 말 그대로 연기 실력을 높여주는 기술이다. 일정 확률로 상대방의 의심을 ‘경미하게, 다소, 많이, 대폭’ 낮춘다. 지금은 내 지력과 정치력이 쥐꼬리보다 형편없어서 기껏해야 경미하게 의심을 흐트러트린다. 어떤 종류의 스킬이 보상으로 떨어지는가는 튜토리얼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튜토리얼을 무력으로 정면돌파했다면 천리행(千里行)이나 만인적(萬人敵)과 같은 스킬이, 계략으로 교묘하게 공략했다면 십면매복(十面埋伏)이나 팔진법(八陣法) 따위의 스킬을 얻었겠지. 예컨대 천리행은 캐릭터의 무력을 꽤나 긴 시간 동안 140% 높여주는 기술이다. 원래 던전 어택 게임에서 내 용사 캐릭터가 가진 스킬이기도 하다. 또한 팔진법은 캐릭터가 속한 파티 전체를 복병으로 만들 뿐더러 파티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25% 올려준다. 어느 쪽이든 사기 스킬이라 평가받는다. 젠장할, 그에 반해 연기 스킬은 쓰레기다. 우선 전투와 직접 연관이 없다. 던전 어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전투이다. 이 점에서 벌써 연기 스킬은 낙제점을 받는다. 더욱이 상대방을 완벽하게 속여내지도 못한다! ‘다소’라느니 ‘많이’라느니 아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 제시될 따름이다. 애당초 스킬이 중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바로 ‘언제든지 믿음직스러운 효과를 발휘한다’라는 점에 있다. 항상 예상되는 효과를 발휘해주고, 그리하여 ‘아, 이때 이 스킬을 쓰면 이렇고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계획을 짜게 만들어준다. 언제 어느 정도의 효과가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는 스킬이라고? 웃기지도 않는다. 차라리 능력치를 조금이라도 높여주는 편이 나았다. 언젠가 던전 어택 팬사이트에서 연기를 비롯해 몇몇 스킬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적군의 지력을 저하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던전 어택에 따로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플레이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각에선 스킬 개수를 255개로 맞추기 위해 명목상 집어넣은 것 아니겠냐는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연기 스킬이 정확히 무슨 효과를 가져오는지 모른다. 이런 스킬이 게임에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던전 어택의 폐인 중 폐인인 나조차 생소한 쓰레기 기술. 그것이 연기였다. ‘뭐, 개미 발톱에 낀 때만큼은 도움이 되겠지.’ 그냥 거기에 스킬이 있으니까 썼을 뿐.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나는 라피스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두 달 안에 인간계에서 전염병이 나돌아.”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 라피스가 꽤 오래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전염병, 입니까?” “검은 죽음(黑死病)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지. 제국력 1505년, 즉 올해 여름부터 대륙에선 전무후무한 사상자가 발생할 거야.”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건 던전 어택 세계관의 설정이었다. 작중 캐릭터가 용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연도, 즉 게이머가 플레이를 시작하는 연도가 제국력 1515년. 그보다 딱 십 년 앞서 흑사병이 온 대륙을 쓸어버린다. 북쪽 대륙부터 시작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진다. 불과 수 년 사이에 대륙 인구의 20%에 달하는 인간과 엘프, 아인종이 병사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여기에 대흉년까지 이어진다. 자그마치 십 년 내내 흉년이 지속된다. 농사지을 사람들이 다 병에 걸려버리고 지하수마저 병에 감염되니 농사가 잘되려야 될 수가 없겠지. 대륙의 인종은 비탄에 빠진다. 그리고 모든 원인을 마왕한테 돌린다. 마왕이 전염병을 불러일으켰고 흉년을 퍼트렸다는 식이다. 물론 진실이 아니었으나, 지식수준이 중세에 머무는 이 세계관의 사람들은 그 말을 확고하게 믿게 된다. 마족이 비교적 전염병에 의한 피해가 적었다는 것도 의심의 원인이다. 마족은 원체 환경이 험한 마계에서 태어나다 보니 면역력이 강했다. 그게 공교롭게도 마족이 퍼트린 질병이라 마족한테는 무해한 거라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들은 대륙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지상에서 모든 마왕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던전을 공략하라!’ 바야흐로 대모험 시대. 조금이라도 창질을 할 줄 아는 이라면 너도 나도 던전에 몰려드는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던전 어택의 설정이다. 특히나 주인공 용사는 유년 시절 마왕의 약탈 행위에 부모를 잃은 자로서 누구보다 마왕을 증오한다. 이 증오도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진실을 깨달으면서 점차 희석되지만…… 음, 지금이랑 상관없는 얘기로군. 게임인 주제에 세계관이 시궁창이라서 골수팬을 만들어내기도 했지. 중요한 건 이거다. 이 세계에는 흑사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존재한다. 흑색 허브라고 불리는 약초인데, 내가 살던 현대에서 대략 더덕보다 조금 더 희귀한 식물이라 보면 된다. 요컨대 별로 희귀하지 않다. 다만 전염병이 발발한 초기에 흑색 허브가 특효약이란 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마구잡이로 블랙 허브를 채취했다. 그 바람에 종자가 어마어마하게 귀해진다. 뒤늦게 국가 차원에서 흑색 허브를 관리해서 재배하기 시작하나 사태는 이미 언 발에 오줌 누기. 수확되는 양이 전염병 환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부족해진다. 결국 한 세기만에 대륙의 인종은 자그마치 절반으로 격감한다. ‘오해와 무지, 성급함이 겹쳐서 만들어낸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지.’ 잔인하다 말할 수 있겠으나…… 내가 떨어진 시간대가 때마침 대륙력 1505년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환호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멀쩡한 다리 한 짝으로 방방 뛰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설정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곧 유례없는 대전염병이 대륙을 휩쓴다. 흑색 허브가 전염병에 특효약이다. 이건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정보야!’ 세상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뒷산에서 나는 흑색 허브, 평범한 질병엔 아무런 소용도 없고 질기기만 해서 음식으로 써먹을 수도 없고, 향신료로 쓸 수도 없는 이 보잘것없는 식물이 사상 최악의 전염병에 유일무이한 특효약이라고. 흑색 허브는 흑사병이 나돌기 전에는 이름조차 없는 잡초였다. 흑사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나중에야 흑색 허브라고 불린다. 흑색 허브의 효능이 발견되는 것도 흑사병이 대륙 전역에 퍼지고 몇 년이 흐른 뒤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지금 흑색 허브를 사재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올릴 수 있어.’ 분명 잔인한 짓이다. 내가 캐내게 될 흑색 허브가 원래대로라면 누군가를 구할 테니까. 그러나 내게는 설령 현실의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게임 속의 인물들보다 나 자신이 소중했고, 골렘과 고블린이 귀중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하여 던전을 비약시킬 기회를 잃어버릴 만큼 나는 착하지 못했다. “나는 전염병의 특효약을 알고 있지. 그걸 미리 독점해두면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어.” 우리 둘은 한동안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전염병이 퍼지리라 확신하느냐, 특효약의 정체는 어쩌다 알아냈느냐, 그런 대화였다. 나는 내가 아는 바에 적당히 살을 붙여서 거짓말했다. 자아, 라피스 라줄리. 어떻게 나올 거냐. “…….”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연한 입술이 열렸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라피스는 눈동자에 망설임이 없었다. 단호한 거부였다.   00013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흠.” 내가 왼발로 땅을 두어 번 두들겼다. 오른발이 망가져서 며칠 쓰지 못하자 생겨난 버릇이었다. 그다지 보기 좋은 버릇은 아니었다. 나는 상대방의 거부를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하지만 이유를 알아야겠다는 투로 말했다. “왜지?” “우선 실제로 돌림병이 발발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선 전염병이 생기리라 지적하셨지요. 또한 대륙 전역으로 돌림병이 퍼져 인종의 삼분지 일이 전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건 주장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 상회에선 예언자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래, 예상한 난관이다. 내가 게임의 설정을 알고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걸로 다른 사람을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상상해보라. 누군가가 두 달 안에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발생할 거고 그 때문에 대륙의 인종 절반이 죽어버린다고. 당장 반란을 선동하는 자로 몰려 잡혀 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내가 라피스의 입장이었더라도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야.’ 그렇다고 이 기막히게 좋은 정보를 썩히면 천하의 멍텅구리이다. 내가 옅게 미소 지었다. “이러면 어떨까. 일단 내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상회에 알려. 그리고 내가 어떤 사업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상부에 보고해. 돈을 안 빌려줘도 상관없어.” “예?” “나는 당장 급전으로 빌릴 수 있는 1000골드만 대출할게.” “단탈리안 님, 급전은 이자가 무척…….” “어마어마하게 높겠지.” 상관없다. “이번에 상회가 돈을 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 말대로 전염병이 확산되면 그제야 상회에서 깨닫겠지. 나 단탈리안이 정말로 정확한 사업을 구상했다는 것을. 그럼 나에 대한 상회의 관심도가 부쩍 높아질 거야.” 아깝지만, 전염병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단념한다. 대신 쿤쿠스카 상회의 신뢰와 기대를 얻는다. 마왕 중에는 때때로 예언력을 타고나는 경우가 있다. 쿤쿠스카 상회에선 ‘어쩌면 단탈리안 마왕이?’하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 오해 어린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 기회, 전염병 다음에 찾아올 대흉년을 노린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단탈리안 님께선 마치――.” 라피스가 제법 격하게 말했다. “마치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조리 아시는 듯한 말투입니다. 진실한 예언가인지 희대의 도박꾼인지,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군요.” 나는 빙긋 웃었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오해는 내버려두는 편이 좋다. 상대방이 알아서 날 과대평가 해준다니 고맙지 않은가. 상대가 돈을 빌려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더더욱. “…….” 라피스가 내 시선을 피했다. 어라? 그녀가 눈길을 회피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피스는 언제나 날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했다. 지금 그녀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상태창으로 심리상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심리상태가 비출 만큼 그녀는 호감도가 높지 않았다. 지난 보름 내내 호감도를 올려보려 애교도 앙탈도 부려보았지만 라피스는 난공불락이었다. 잘센 마을의 수컷들 호감도를 올리는 게 엄청 쉬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난이도가 무지막지했다. 마계(魔界) 대표의 차도녀라고 불러야 할까.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상회에서 가진 발언권은 크지 않습니다. 아니, 무척 적습니다. 그래서 설령 단탈리안 님께서 확실한 사업 아이템을 갖고 계셨더라도 어차피 상부에서는 제 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거야 뭐. 5급 직원이라면서.” 말단인데 당연히 발언권이 적겠지. 라피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5급 직원마라도 최소한의 발언권과 재량권은 갖기 마련입니다. 쿤쿠스카 상회는 철저히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회사. 사원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직원에게 많은 재량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호. 그럼 너도 어느 정도는 재량껏 돈을 융통할 수 있겠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응? “저에겐 최소한의 재량권밖에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상회에서 이단적인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상사와 동료는 저를 좋지 않게 생각하지요.” “의외인걸. 라피스는 무뚝뚝하긴 해도 무척 유능해 보이는데. 사교성이 떨어져서 그런가?” 순간 라피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아, 실력주의라니까 그게 이유의 전부이진 않겠구나.” “단탈리안 님도 알다시피 우리 마족은 본디 개인주의자입니다. 사교성은 권장할 만한 덕목이 아니지요. 저희의 가치는 실력과 성과입니다.” 라피스가 단언했다.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꽤 높은 것 같았다. 어휴, 차도녀 같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의문이 짙어졌다. “잠깐, 그럼 더 모르겠는데. 왜 네가 고립되었다는 거야?” “……저는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니까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라피스는 그 한마디만 내뱉고 싹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걸로 전부 설명했다는 것처럼.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래서 어쨌다고?” “……네?” “아, 그게 끝이야? 마족이랑 인간의 혼혈이라고. 신기하네.” 던전 어택에도 마족과 혼혈인 인간 히로인이 한 명 있었다. 로우메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마법사로 인간사회에서 경원시했다. 아무래도 다른 종족의 핏줄이 섞인 자는 배척되기 쉬웠다. 흑사병이 퍼진 이후로 마족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이 극에 달하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은 마족과 인간 사이에 뭔가 대단한 원한이 생기지 않은 시대이다. 라피스도 아주 심하게 따돌림 당하지는 않고 있겠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혼혈인 게 뭐 어때서. 원래 인간이든 마족이든 자기와 조금 다르다 싶으면 싫어하고 따돌리고 그래. 근본적으로 유치한 짓거리지.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라피스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처음 겪는 눈빛이었다. 오늘따라 라피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구나 싶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서 단탈리안 님께 전해드릴 급전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상부에 내 계획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말고.”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라피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발밑에서 연분홍색 마법진이 빛났다. 빛이 안개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이 사라졌다. 아마 마계로 돌아간 것이겠지. 라피스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허리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음, 믿음직스럽군. 좀 고지식하긴 해도 예의가 바르고 좋은 아이다.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곡괭이를 잡자, 불쑥 효과음이 귓가에 울렸다. 「하급 서큐버스 라피스 라줄리의 호감도가 15 오릅니다.」 “엥?” 입에서 절로 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동안 죽어라 올리려 해도 요지부동이던 호감도가 왜 갑자기 오른다는 말인가.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천천히 되짚었지만, 도대체 어떤 대사가 라피스의 심장에 적중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 낑낑거리며 고민하다가 이내 곡괭이를 들어올렸다. “에라이, 일단 광석이나 파고 보자.”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내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굴을 걸었다. 그나저나 라피스는 서큐버스였구나. 기본적인 상태창에는 종족도 표시되지 않아서 몰랐다. * * * 분홍빛 안개가 라피스를 휘감다가 흩어졌다. 라피스가 생각했다. 마족에게 마법진의 색은 종족을 의미했다. 켄타우로스는 회색, 벰파이어는 붉은색. 그녀의 어미와 같은 서큐버스는 짙은 선홍색. 그러나 그녀 자신은……. ‘한없이 옅은 연분홍색이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이 허름했다. 단정하고 깨끗하지만 장식품 하나 없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이 유일한 사치품이라면 사치품이었다. 여기가 상회 지부에서 라피스에게 배정한 사무실. 상회에서는 5급 직원마부터 개인 사무실이 지급되었다. 이 작은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라피스는 수십 년 동안 수습 직원으로 고생했다. 라피스가 의자에 앉았다. 책상에 수십 묶음의 서류뭉치가 쌓여 있었다. 그녀가 담당하는 고객은 마왕 단탈리안 한 명이 아니었다. 주문은 언제나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다른 고객의 주문 따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은 마왕…… 이라는 걸까.’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 첫인상은, 솔직히 영 미덥지 않았다. ‘그, 그런데…… 난 돈이 없는데.’ ‘그렇습니까.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의 총재산은 얼마인지요?’ ‘406골드.’ 마왕은 단순히 조금 강한 개인이 아니다. 마족 중에서 유일하게 군단을 보유할 수 있는 자들이다. 몬스터의 심리를 장악하고, 읽어내고, 그리하여 언제나 투쟁과 배신이 끊이지 않는 마계에서 유일하게 통합을 이루어낸다. 마왕에겐 남다른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그런 기준에서 단탈리안은 확실히 낙제생이었다. ‘단탈리안 님, 던전에 몬스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한 마리.’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존댓말까지 썼다. 마왕이 한낱 서큐버스에게 경어를 쓰다니, 다른 마족이 들었다면 웃겨서 바닥에 뒹굴어댈 이야기였다. 가끔 서열이 낮은 마왕보다 강력한 마족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마족조차 마왕에게는 경의를 표한다. 마계를 다스리고 재패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마왕이므로. 본사에서 마왕 단탈리안을 담당하라고 지령이 내려왔을 때 라피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5급 직원마 따위로 썩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마왕을 내 고객으로 만든다. 반드시.’ 라피스가 무표정한 까닭은 어린 시절 겪은 비극과 따돌림에서 비롯했다. 변화 없는 얼굴 아래 그녀는 누구보다 치열한 권력욕과 복수욕을 감추고 있었다. 마계에서 인간과 핏줄이 뒤섞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약점이었다. 무력과 계략을 신봉하는 마족에게 있어 ‘허약한 인간에게 임신당해 낳은 아이’라는 꼬리표는 치명타로 다가왔다. 마인의 수치. 라피스가 백 년 남짓한 삶에서 제일 많이 들어본 단어였다. 질척한 열등감이 언제부터인가 딱딱하게 굳어져 그녀의 얼굴을 가면처럼 덮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실례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볼품없는 던전은 제 짧은 마생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마왕 단탈리안의 실상을 깨닫고 그녀가 얼마나 실망했던가.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역시 그렇구나, 하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상회에서 자기 같은 혼혈 잡종에게 대업을 맡길 리 없었다. 제멋대로 기대한 자기가 어리석었다. 단탈리안과 대면한 직후에 라피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고객은 고객이다.’ 라피스는 한순간이나마 고객를 신분상승의 도구로 여긴 것을 반성했다. 그녀는 본성이 성실했다. 사적인 기대를 전부 접어버리고 그녀는 단탈리안의 주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철 마석(魔石)처럼 보잘것없는 물품을 거래할 때도 일일이 마왕성에 찾아갔다. 마족의 삶은 수백 년이 넘는다. 지금 힘든 상황에 처했다지만 언제 처지가 달라질지 모른다. 조급함을 억누르고. 다급함을 잊고. 차근차근,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될 날이 오리라. 정말 그걸로 만족하겠느냐? 그런 반문이 심장의 구석 부근에서 올라왔지만 억지로 쑤셔 집어넣었다. “……오늘은 달랐어.” 라피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그녀는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마왕성을 찾아가니 단탈리안은 고블린과 놀아나고 있었다. 도대체 위엄이란 단어를 알기나 하는 걸까. 일개 고블린을 그렇게 귀여워하는 마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서열 제12위 마왕인 시트리 전하가 그 특유의 성적 취향으로 고블린들을 노리개로 삼는다는 소식은 들어봤지만. ‘돈을 대출하실 의향이 있다고요?’ ‘그래.’ 게다가 오늘은 어리석은 소리까지 해댔다. 돈을 빌리겠다니. 확실히 광석 따위를 파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급전을 빌리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무지의 극치에 달하는 행동이었다. 라피스는 고블린에게도 상냥한 이 이상한 마왕 전하에게 그녀 나름대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설득했다. 관두라고. 쿤쿠스카 상회가 어느 정도로 악독한지도 설명해주었다. 다행히 마왕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전염병.’ 분위기가 급전한 것은 그때였다. 라피스는 동굴의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연못처럼 고요하던 공기가 갑작스럽게 야밤의 파도처럼 몰아쳤다. 긴장감이 등골을 휘감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한 라피스가 아니었다면 크게 당황했으리라. ‘……전염병, 입니까?’ 그런 라피스조차 단어를 끊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짓눌렸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칭찬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마왕은 대담하게 미소 지었다. ‘내 예언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어린 마족의 소녀여.’ 말투가 달라졌다. 단탈리안 전하가 저리 진중하게 말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저것이 원래 말투처럼 느껴졌다. 라피스는 차마 반문할 생각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왕이 선언했다. ‘검은 구름이 대륙을 덮을지어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내, 대륙의 모든 인간이 절망과 비탄에 빠지리라. 이것은 마왕의 예언일진저!’ 라피스의 가슴이 덜컥 가라앉았다.   00014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필멸자가 숨을 쉬듯 자연만물에도 호흡이 있다. 병도 그와 같아 한 번의 쉼이 있다면 한 번의 날숨이 있어 바야흐로 대륙은 돌림병의 날숨에 휩싸일지니. 나는 그것을 검은 구름이라 부른다.’ 예언. 고래로부터 마왕의 전매특허로 널리 알려진 능력이다. 마왕이 신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신탁이라 불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혹은 세계에서 신비가 점차 걷히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마왕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예언 능력을 갖춘 마왕이 적다 못해 사라진 것이다. 마족 학자들은 ‘마왕이 범인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진지라 앞날을 예견한 것을 예언이라 착각한 것 아니냐’하고 중론을 모으고 있다. 단탈리안 전하가 예언력을 품고 있다고? 그럴 리 없다. 라피스의 이성이 곧바로 반론했다. 제아무리 미래를 예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위압감을 숨기고 있었나. 라피스는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왕 단탈리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그녀를 연신 두들겼다. ‘일찍이 수많은 뭉게구름이 대지를 덮고 갔다. 그러나 어느 구름이 모든 대륙을 뒤덮었던가. 거대한 구름, 거대한 재앙이 필멸자들의 역사를 비웃으리라.’ ‘하옵시면.’ 라피스가 말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말투가 바뀌었다. 단순한 존댓말에서 극존칭으로.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한 명의 고객이 아니라 왕이었다. ‘이 대륙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일어나리라 보십니까?’ 단탈리안이 씨익 웃었다. ‘조급하구나. 내 너를 혼동시키고자 비유의 수법을 쓰는 줄 알았더냐? 예언이란 아직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언령의 힘을 빌려 지금 현재로 불러들이는 일. 지나치게 정확하게 재현하면 세계의 운명이 그만 흐름을 착각하여 크나큰 재앙이 발생할 수 있노라.’ ‘소녀가 무지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라피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한다. 작금에 이르러 시간을 관조하는 마왕이 사라졌으니 어찌 예언의 예법을 기억하는 자가 있으랴. 소녀여, 내 말을 새겨들어라. 대륙에 세 개의 화살이 있다면 검은 구름은 그중 하나의 화살을 부서뜨릴지어다. 대륙에 아홉 개의 화살이 있다면 그중 세 개의 화살이 썩어버릴지어다.’ ‘……!’ 대륙 인종 3분의 1이 전멸한다는 뜻. 라피스는 등골에 오한이 달렸다. 말이 삼분지 일이지 수천만 명, 아니 아인종까지 합친다면 수억 명이 몰살한다는 애기였다. 농담으로라도 입에 담기에는 피해 수준이 너무 컸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정말로 돌림병을 예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더 나아가 설령 예언할지라도 작은 돌림병을 지적하는 데 그치리라 생각했다. 전염병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대륙 어느 구석에선 전염병이 돌고 있겠지. 그런 것을 예언이랍시고 꼬집는다면 결과적으로 단탈리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하나 삼분지 일의 인종이 사라진다는 예언이라니? 그것도 두 달 안에? 거짓말로 삼기엔 지나치게 리스크가 크다. 막말로 두 달 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단탈리안은 그녀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변명의 여지 없이. 전담 사무원의 신뢰를 놓친다는 것은 곧 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신뢰를 잃는 것으로 이어진다. 설마 진실일까.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다. 세상에 천적이 없는 사물이란 없으며 검은 구름도 그러하다. 그 위력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천적은 도리어 보잘것없는 물건인 경우가 잦은바. 여느 산골짜기에서나 피어나는 자그마한 잡초가 검은 구름을 무찌를 수 있다. 나는 그 잡초를 미리 모아두고자 한다.’ 그녀는 바로 마왕의 심중을 이해했다. 독과점. 상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것을 마왕이 바라고 있었다. 독과점을 위한 자금력을 상회에서 빌리고자 함이라. ‘두 달 뒤에는 인간계의 왕후장상이 한낱 잡초를 얻기 위해 절규하리라. 그때 나는 약초를 공급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하나니. 라피스 라줄리, 내 제안을 숙고하여라.’ 침묵이 동굴에 흘렀다. ‘…….’ 라피스의 직감은 마왕이 진실하게 말하고 있다며 경고했다. 정말로 유례없는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위기는 기회로 치환할 수 있다. 유례없는 위기에 유례없는 기회가 생겨나겠지. 한편 라피스의 이성은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직감이냐. 이성이냐. 두 갈림길을 면전에 두고 라피스는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오호라.’ 의외로 마왕은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흥미로워했다. ‘이유를 읊어보라.’ 라피스는 꼭 발록의 아가리에 들어간 것만 같았다. 거부는 용납한다. 그러나 하찮은 이유 때문에 감히 마왕의 제안을 무시한 것이라면 죽음을 대가로 치르라. 마왕은 그렇게 눈동자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의 신념을 되새기며, 마왕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또박또박 말해나갔다. ‘우선 실제로 돌림병이 발발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선 전염병이 생기리라 지적하셨지요. 또한 대륙 전역으로 돌림병이 퍼져 인종의 삼분지 일이 전멸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이건 주장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 상회에선 예언자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상인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이어야 한다. 라피스는 그리 믿었다. 만일 신념 때문에 단탈리안한테 죽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마인에게 죽음이란 언젠가 다가올 흐릿한 미래가 아니라,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위협이다. 라피스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러나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까지 마왕이 줄기차게 뿜어내던, 증기와 같은 위압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단탈리안은 다시 조금 전처럼 평범한 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빙긋 웃었다. ‘이러면 어떨까. 일단 내가 대출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상회에 알려. 그리고 내가 어떤 사업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상부에 보고해. 돈을 안 빌려줘도 상관없어.’ 이어지는 그의 말은 예상외였다. 애당초 단탈리안은 그녀가 거부하리란 것을 안 모양이었다. 상회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상회의 신뢰를 얻을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라피스는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래, 정말 예언이 가능하다면 당장 전염병에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가.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마왕이었다. 그는 예언이라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을 이용했다. 라피스, 그녀에게 공포와 신뢰를 심기 위해서. 그리고 목적이 성취되자마자 곧바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니, 진짜로 평범한 모습일까? 혹시 지금까지 내가 평범하게 여겨온 그 모습 역시――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연기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라피스는 자책했다. 뼈아픈 후회였다. 서열 제71위라서 방심하다니! 마왕은 죽어도 마왕이지 않은가. 오히려 마왕이 성실했다. 마왕은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한순간을 위한 칼날을. 라피스는 부끄러웠다. 문득, 마왕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됐다. 자신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형편없는 권력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내가 마왕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왕의 시선에서 눈을 돌렸다.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라피스는 설명했다. 자기가 얼마나 천한 자인지. 마왕 역시 자신을 경멸하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 마왕이 자신에게 헛된 기대를 갖고 있다면 지금 터트려주는 편이 좋았다. 나중에 가서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 것보다…… 인연이 쌓이지 않은 지금 감내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고?’ ――단탈리안은 달랐다. ‘혼혈인 게 뭐 어때서.’ 누구보다 잡종을 혐오할, 지고지순한 마왕인데도 불구하고. ‘그딴 거 신경 쓰지 마.’ 그런 것은 아주 하잘것없는 문제라고 단언했다. 라피스가 멍하게 마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던가. 생애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접근하던 이들도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떠나갔다. 예외는 없었다. 지난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남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별을 생각해야만 했던 삶이었다. 언제나 듣기를 원한 말, 이제 포기해서 무의식에나 비틀어진 형태로 남게 된 열망이었다. 그것을 마계에서 가장 드높은 존재에게 들었다. 아――. 라피스는 전에 없이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의 상태를 상대방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상인은 약점이 잡히면 끝이다. 그러니까 얼른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자기가 뭐라고 변명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무실에 돌아와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좀처럼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잘된 일이다, 단탈리안 마왕이 원래 저렇게 뛰어난 자였다면 자신도 출세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앞으로 성심성의껏 마왕을 대접해야 한다, 라고 끊임없이 스스로 되새겼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의 감정을 뒤덮지는 못했다. 결국 라피스는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한 마왕.” 그래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라피스는 오늘은 이상한 날이라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류는 마왕 단탈리안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문장으로 출발했다. 「철광석(2개)을 채취했습니다.」 “아싸, 또 두 개다!” 그 와중에 어느 마왕은 곡괭이를 열심히 휘두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 * * 라피스에게 으름장을 놓은 지 두 달이 흘렀다. 던전에는 대략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험대가 쳐들어왔다. 아직 게임 초반이라서 그럴까. 모험대는 죄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졌다. 랭크도 하나같이 F급. 여기가 제대로 된 던전이었다면 F급 모험대는 입구를 넘는 순간 전멸했겠지. 물론 내 마왕성, 차마 마왕성이라 자칭하기도 부끄럽고 민망한 던전은 제대로 된 곳이 아니었다. F급 모험대 하나하나가 생명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현재 절찬리에 바닥에 누워 있다. “어? 이봐,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 “정말이잖아. 이보게나. 정신 차리게!” 모험자가 다가와서 내 뺨을 두들겼다. 내가 신음했다. “으으, 무울……물…….” “쯧! 탈수증에 걸렸군.” 얼굴에 물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물주머니를 내게 부은 것 같았다. 싸구려 투구의 틈새로 물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한여름의 개처럼 혀를 내밀어 정신없이 물을 핥아마셨다. “으, 으으. 가, 감사합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돕고 살아야지. 여보게. 어쩌다 이리됐나?” “그것이.” 마음속으로 스킬을 외쳤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제가 던전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사흘 전입니다.” 이후로 나의 구질구질한 사정이 이어졌다. 나는 잘센 마을의 한센이다, 마을사람과 함께 던전을 들어왔는데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그만 동료가 뿔뿔이 흩어졌다, 길잡이 동료가 초장에 죽은 바람에 던전에서 미아가 되었다, 사흘 내내 밤낮으로 동굴을 헤매다가 도저히 몸이 견딜 수 없어서 쓰러졌다…… 내가 들어도 기막힌 연기 솜씨였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흑, 너무 안타까운 사연이야!” “이토록 처절하디 처절한 이야기는 난생처음이로군.” “으허헝. 청년, 부디, 부디 좌절하지 말고 살아가게나. 아무리 지랄맞은 세상이더라도 볕 들 날이 오지 않겠나. 우리 미래를 믿읍세! 암, 믿어야 하고말고.” 동굴 안이 눈물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험자들은 평생을 햇볕과 뒹굴어 얼굴이 투박했다. 그런 갈색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시냇물처럼 흘렀다. 모험자들은 코를 팽 풀고 콧물범벅이 된 손바닥으로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으엑. ‘정말 연기에 약하네.’ 잘센 마을 모험대도 이만큼 연기에 허약하진 않았다. 하긴, 나는 지금 투구를 쓰고 있다. 마왕의 증거인 뿔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이 마왕이냐 인간이냐 하는 차이는 아무래도 거대하겠지. 나는 모험자들 호감도가 올랐다는 알림창이 연달아 뜨는 것을 보면서 납득했다. “청년. 아니, 어린 친구. 여기 던전에 대해 몇 가지 좀 물어봅세.”   ============================ 작품 후기 ============================    왜 갑자기 위압감이 사라졌는가. 라피스가 명확하게 '거부'를 하자 연기스킬에 '실패판정'이 뜨는 바람에 스킬효과가 사라진 것이지만……허허. 우리 라피스 양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죠. 착각은 자유입니다. 선추코 날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00015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청년. 아니, 어린 친구. 여기 던전에 대해 몇 가지 좀 물어봅세.” 사내가 살갑게 말해왔다. 호크라는 자였다. 이번 모험대의 대장이었다. 그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혹여 자네의 안 좋은 기억을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되네만.” “괘, 괜찮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일생의 은인입니다.” “어린 친구가 예의가 무척 바르군.” 호크가 기꺼워하며 주변 동료에게 말했다. “내 자식 놈들이 딱 이만큼 철이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말이야.” “뭔 소리야? 팰릭스 정도면 벌써 제 앞가림은 하지. 내 아들이야말로 인사불성이야, 쯧쯧.” “요새 젊은이는 예의가 없어, 예의가.” 조금 웃겼다. 요즘 젊은이가 무례하다는 명제는 옛날에나 지금에나, 심지어 차원을 막론하고 통용되고 있었다. “동료가 몬스터의 습격에 당했다고 들었네. 먼저 애도를 표하네. 그런데 혹시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주로 있었는가? 또 몇 마리가 있었나?” “골렘이었습니다. 골렘 부대였어요. 무려 열네 마리가 있었어요…….” “뭐? 열네 마리!?” 모험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F급 모험자에게 골렘이란 최소 다섯 명이서 대열을 짜고 덤벼들어야 감당할 수 있는 몬스터이다. 골렘 열네 마리는 그들에게 죽음과 같다. 별 볼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침입한 던전에 그만한 전력이 갖추어져 있다니 놀랄 수밖에. “크흑, 처음에는 골렘 한 마리가 정면에서 등장했습니다. 고작 한 마리였죠.” 내가 눈물을 흘렸다. “저희는 명성도 실력도 부족한 모험대였지만 골렘 한 마리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진 않았습니다. 얼른 진형을 갖춰서 대항했습죠. 그런데, 그런데 그때 측면의 통로에서 골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험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던전을 지킨 병력은 부족하다. 모험자는 계속 몰려온다. 이런 골때리는 상황에서 내가 택한 대전략은 간단하다. 바로 구라를 치는 것이다. 혹자는 꼴사납고 치사하다 욕하리라. 하지만 이 수법은 병법에도 엄연히 허장성세라 불리며 등장한다. 연기 스킬밖에 갖지 못한 나로서는 이게 최선의 한수이다. ‘제발 걸려라.’ 지금까지 작전은 꽤 잘 먹혔다. 저번 주에도 모험대가 나의 명연기에 속아 발길을 돌렸다. 골렘 열네 마리는 허접한 모험대가 감당하기엔 버거웠으니까. 그러나 꽤 잘 먹힌다는 것은 달리 말해, 먹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모험대 대장 호크가 입을 열었다. “친구들, 동료들, 긴급사태일세.” 그는 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자네들에게 이름을 걸고 약속했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난 죽마고우로서, 진창처럼 험난한 삶을 함께 뚫고 지나온 친우로서, 이중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채 살려 보내겠다고 맹세했지. 자네들은 내 말을 신뢰해주었네. 나만 믿고 생전 처음 던전에 나서준 친구도 있지. 하나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야겠네. 나는 약속을 지킨다고 장담할 수가 없게 되었네.” “끄응.” “뭐, 골렘이 열 마리가 넘는데 도리가 있나…….” 모험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공연히 지나쳐온 길을 뒤돌아보는 자도 있었다. 산줄기에 평범하게 자생하는 몬스터 부락민과 다르게 던전의 몬스터는 돈이 많이 나간다. 가죽만 해도 야생 몬스터보다 던전 몬스터가 훨씬 더 고급스럽다. 한몫 노리자는 마음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던전에 왔건만, 지나치게 강대한 적 앞에서 욕심마저 힘을 잃고 있었다. “다행히 여기 청년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었지. 꼼짝없이 당하는 미래를 막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운아일지 모르겠네. 여기서 돌아가고 싶은 이가 있다 해도 결코 말리지 않겠네. 다만!” 불현듯 효과음이 울렸다. 「초급 모험자 호크가 ‘연설’ 스킬을 발동했습니다!」 ‘뭐라고!?’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강아지가 초복에 탭댄스 추는 소리인가. 나는 서둘러서 호크의 능력치창을 확인했다. ━━━━━━━━━━━━━━━━━━━━━━━━━ 이름: 호크 종족: 인간   소속: 레비앙 마을 속성: 선(+25) 레벨: 3    명성: 2 직업: 어부(B+), 모험자(F) 통솔: 20  무력: 12  지력: 3 정치: 15  매력: 10  기술: 10 호감도: 26 현재심리: ‘골렘 열네 마리…… 확실히 무시무시한 적이다. 하지만!’ ━━━━━━━━━━━━━━━━━━━━━━━━━ ‘하지만? 하지만 뭐!?’ 고작 F급 모험자가 스킬을 가지고 있다니 사기다. F급 마왕인 나도 연기 스킬을 갖고 있긴 하다. 그래도 나는 명색이 마왕이지 않은가. 던전 어택의 폐인인 내가 확신에 차서 장담한다. F급 NPC가 스킬을 가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영웅 중에서도 영웅인 NPC마저 다 처음에는 스킬 없이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세계는 도대체…….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 거야!’ 호크가 담담하고 힘차게 연설해나갔다. “우리에겐 부양할 가족이 있네. 지금도 마을의 아낙네와 아이가 입에 거미줄을 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저 죽여 마땅할 영주 놈은 세금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네. 당장 다음 주에 악마와 같은 세금징수원이 찾아올 텐데 우리는 세금의 절반조차 낼 수 없다네.”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들 각자가 자신의 집을 떠올리고 있음을 나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기랄. 아내와 자식을 등에 짊어진 남자는 독해진다. 흐름이 좋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죽어버리면 본말전도일세. 솔직히 골렘 열네 마리는 목숨을 걸어도 절대 이길 수 없지. 하지만 동지들, 나에게 방책이 하나 있다면 어떤가?” “방책? 그런 게 있겠나. 골렘 열네 마리라고.” “반대로 생각해보는 걸세! 청년, 분명히 골렘 열네 마리라고 말했지?” 호크가 질문해왔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 외에 몬스터가 있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습니다.” 호크가 빙긋 웃었다. “거기에 적의 약점이 있네. 오직 골렘 열네 마리만 있다는 것. 모두 알다시피 골렘은 꽤 느리네. 주먹질이 제법 빠르긴 하나 정작 이동하는 속도가 떨어지지. 알겠는가? 우리는 뒤로 후퇴하며 멀리에서 골렘을 저격하면 그만일세.” “아!” “그런 수법이!” 모험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반면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턱뼈가 땅바닥에 키스할 지경이었다. 저 말이 맞았다! “만일 고블린이나 요정이 몇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우리의 작전은 실패하겠지. 그러나 골렘밖에 없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쉬워진다네. 활을 적극적으로 이용합세. 그저 뒷걸음치면서 적당히 화살을 날려주면 되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언젠가 골렘 부대를 전멸시킬 것이 틀림없네.” 모험자들이 신 나서 떠들었다. 그들은 벌써 전투에서 승리한 분위기였다. “그래! 겁나게 간단한 방법이구만.” “천만다행이야. 우리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힐 걱정이 사라졌군. 솔직히 이번에도 공손으로 들어가면 난 뒈진 목숨이거든.” 홀로그램이 떴다. 「레비앙 마을 모험대(F)의 연설 스킬이 성공합니다.」 「레비앙 마을 모험대(F)의 사기가 대폭 증가합니다!」 나도 모르게 욕설이 육성으로 터질 뻔했다. 하급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골렘을 구라패로 사용한 게 도리어 독이 될 줄이야. 나는 천하에 멍텅구리였다. 자살하고 싶었다. 만일 주변 1m에 종유석이라도 있었으면 얼른 머리통을 꼬라박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멍청한 탓이 크긴 해도 호크라는 모험자가 너무 잘났다. 말이야 바른 말이어도 어디 초보 모험대가 투석과 활만으로 골렘 열네 마리를 해치우는 일이 쉽겠는가. 엄청난 용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모험대 대장 호크는 저들에게 용기와 끈기를 불어넣었다. 가족과 자식을 연상시킴으로써 말이다. ‘내가 가진 스킬이 저 정도라도 되었다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최하급 NPC보다 마왕이 못나다니. 어쩌다 던전 어택의 정점 플레이어가 이딴 처지에 몰리게 되었는가.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슬픔과 별개로 내 머리는 쌩쌩 돌아갔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다. 골렘에게 저런 약점이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어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몇 가지 책략을 준비해두었다. “호크 대장님!” 내가 냉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음? 자네……?” “대장님의 연설에 감동했습니다! 부디 저도 파티에 끼워주십시오!” 호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저에게도…… 저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여동생 세 명과 늙은 모친께서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 세 달 동안 변변한 개죽조차 들지 못하고 있어요…… 저희 마을은 작년도 올해도 흉년이라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습니다.” “허어, 그런 사정이.”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삶을 견디다 못해, 이 빌어먹을 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몫 단단히 붙잡기는커녕 동료들이, 마을의 남자들이 죽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렇다 치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쩌죠……? 저마저 돈을 벌지 못한다면, 흐윽. 우리 마을은, 우리 마을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내가 훌쩍이는 소리만 을씨년스레 동굴에 울렸다. 잠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자네…… 자네 정말.” 호크가 코를 크흥, 하고 풀었다. “자네 정말 훌륭한 젊은이군! 나는 기껏해야 내 가족을 생각했을 뿐이네. 그런데 자네는 마을 전체를 걱정하는구만…… 이 얼마나 숭고한 청년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 호크, 마흔다섯의 인생 동안 이토록 부끄러운 순간이 없었다네! 자네와 같은 이가 다음 세대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나의 이번 던전행은 이미 충분히 의미를 가지게 되었어!” 그가 내 두 어깨를 덥석 잡더니, 잔뜩 맹맹해진 목소리로 울었다. “암, 암! 같이 가야지. 함께해야 하고말고! 우리가 남인가! 우리 모두 이 저주받을 세상에 태어난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인생 아니냐는 말일세. 나의 친애하는 동료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 섭섭한 사람일세. 우리라고 자네처럼 생각하지 않을 줄 알아?” “우리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레비앙 마을 사나이다! 저 애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보랏빛 물길을 헤칠 자격이 없지!” 모험자들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한 명씩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나이들 간의 말없는 교감이 오갔다. 내가 배낭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이런 기쁜 날에 술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마침 제가 파티의 짐꾼이었습니다. 양이 적어서 한 사람당 한입 정도밖에 못 마시겠지만, 어디 양이 문제이겠습니까. 우리 함께 전투에 앞서 결의를 나눕시다!” 좋소! 좋아! 하고 모험자들이 호응했다. 나는 술병을 건넸다. 모험자들이 돌아가면서 술로 입술을 축였다. 고래로부터 알코올은 곧잘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약간의 알코올은 병사의 사기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자아, 청년. 자네가 마지막일세.” 호크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나는 공손하게 술병을 받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호크가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우리는 승리한다!” “우오오오오!” “우리는, 살아 돌아간다!” “우오오오오오――!” 다시 한 번 사기가 대폭 올랐다는 알림창이 지나갔다. 이렇게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코앞에서 사나이의 기세가 넘쳐흐르다 못해 폭발하고 있었다. 나도 함성에 동참했다. 입안에 고인 술이 전부 튀어나갈 정도로 열렬하게 외쳤다. 마침내 일행이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좋아. 그럼 출발…… 라제프?” 모험자 한 명이 발을 내딛자 마치 땅바닥이 꺼진 것처럼 픽 쓰러졌다. 동료들이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가고 순식간에 혼란이 들이닥쳤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 어……?” “땅이……?”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모험자 전원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사람은 호크였다. 과연 대장은 대장이라는 것일까. 그는 무릎이 꺾이는 순간까지 당혹감에 혼란스러워했다. 일 분이 지나자 동굴에 선 사람은 나뿐이었다. “퉤.” 입안에 침을 모아 바닥에 뱉었다. 혹시 몰라 해독제인 약초를 꺼내 열심히 씹었다. 비장의 수를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내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바닥에 꺼꾸러진 모험자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푸욱! 푹! 모험자 한 사람을 지나칠 때마다 그자의 목에 칼날을 쑤셨다. 단말마도, 공포도, 경악도 없는 죽음이 이어졌다. 어떤 이는 약발에 저항하는지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신음으로는 칼을 막을 수 없었다. 단검이 목표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헤집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들은 전부 좋은 인간이었다. 그래, 인간이었다. 마왕과 대적하는 종족이었다. 당신들이 살려면 내가 죽어야만 하고, 내가 살려면 당신들이 죽어야만 한다. 이번에는 내가 살았다. 그뿐이었다. 내 발걸음이 호크의 몸뚱어리 앞에서 멈추었다. “차라리 그냥 돌아갔으면 좋았을 거야. 호크 대장.” 호크의 목을 찔렀다. 근육이 뚫리고 뼈가 긁히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동굴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은 높았다. 높을수록 맑은 바깥 하늘과 다르게 동굴 천장은 높을수록 어두웠다. 나는 두통이 일어나서 깡통 투구를 벗어던졌다. 뗑그랑, 하고 투구가 동굴바닥에 쇳소리를 내며 굴렀다. “제기랄.” 나는 제기랄 소리를 연신 내뱉으면서도 모험자의 시체를 일일이 뒤졌다.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을 싸그리 긁어모았다. 언제까지 이딴 짓을 해야 할까. 이 세계에 엔딩은 정말 있는 것일까……. 내 기분을 알았는지 어느 사이에 고블린과 골렘이 곁에 다가와 있었다. 녀석들은 말없이 그저 주변에 서 있기만 했다. 라피스가 흑사병의 발발을 알려온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00016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지난 두 달, 라피스는 인간계를 예의 주시했다. 인맥과 재력을 총동원해서 마왕이 말해준 약초를 구했다. 그녀는 일처리가 정확했다. 마왕이 맡긴 200골드, 그가 상회에서 빌린 1000골드, 마지막으로 라피스가 개인적으로 투자한 300골드, 총 1500골드로 그녀는 인간계의 상회들과 계약했다. 중소 상회들은 다시 도시의 제약사 길드들과 계약했다. 제약사 길드에선 각 마을의 약초꾼들과 계약했다. 그리하여 라피스는 약초꾼 사백 명을 간접적으로 고용했다. 불과 보름 만에 삼중계약이 이루어졌다. 한 달이 지나자 그녀의 수중에는 약초 삼만 뿌리가 들어와 있었다. 중소 상회와 제약사 길드 그리고 약초꾼 모두 이번 의뢰에 기뻐했다. 어떤 멍청한 부자가 쓸데없이 돈을 날렸다고 비웃었다. 그들에게 흑색 허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초였다. 잡초를 캐고 돈을 받으니 이것만큼 쏠쏠한 벌이가 없었다. 라피스는 이제 인간계의 섬 하나를 묵묵히 감시했다. 하얀 바다의 가장 거대한 섬, 시킬리아. 마왕은 그녀에게 전염병이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예언했다. “아가씨,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또…….”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시민목욕탕에서 일하는 의원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온천장에는 의원이 몇 명 상주했다. 남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라피스를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로 알았다. 아가씨 마음이 고와서 환자를 돌보겠다며 나흘에 한 번씩 꼭 봉사하러 온천장에 왔다. ‘가끔씩 이런 아가씨들이 있지.’ 의원이 라피스를 온천장 안쪽으로 안내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때때로 귀족가 여식은 지나친 사랑의 끝에 남자한테 참혹하게 차여버리거나 하면 병자를 돌봄으로써 자신의 마음속 상처를 치유했다. “환자분들은 어떤가요?” “여전합니다. 여전히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여하간 그동안 소리 지를 힘만 아껴뒀어도 지금쯤 펄펄 뛰어다녔을 겝니다!” 의원이 비아냥거렸다. 교사가 학생을 경멸하듯이 이 의원은 어떤 의미로 환자를 혐오했다. 라피스가 적당히 대꾸했다. “그렇군요. 혹시 새로운 환자분도 있나요?” “예, 어제 막 실려 온 사내놈이 한 명 있습지요. 겨드랑이랑 사타구니가 아프다며 아주 난리입니다. 머리통도 아프다, 관절도 아프다, 근육도 찢어진다, 어찌나 칭얼거리는지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열이 심하기는 심하더군요. 아마 여름철 감기일 겝니다.” 라피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예의 무뚝뚝한 어투로 물었다. “그 환자분을 먼저 만나 뵙고 싶네요.” 의원은 마다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두 사람이 온천장 복도를 지나쳐서 객실 한곳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투숙하는 환자가 방문이 열리자마자 꽥꽥 소리 질렀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어! 동네 사람들!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나 죽어요!” “천하에 벌거숭이 같으니라구.” 의원이 씩씩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멀쩡하게 생겨먹은 사내자식이 겨우 감기 때문에 동네 떠나가라 소리치든? 차라리 뒈져버려라, 이 쌍것아.” “아이고! 이젠 의사까지 나보고 뒈지라 그러네.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그래, 죽어야지. 내가 얼른 죽어 지옥에 가서 ‘저 의사놈도 뒈지게 해주십쇼, 사탄 나으리.’하고 빌어재껴야지.” “그 사탄 새끼 때문에 인생 망가진 게 나다, 멍청아. 어디 그놈 뺨따구나 시원하게 때려보면 소원이 없겠나 싶었는데 잘됐구먼.” 의원이 라피스를 돌아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놈이 제 소꿉친구인데 입이 워낙 걸걸해서…… 그냥 못 배워먹은 상것이라 생각해주십쇼.” “아이고야, 살다 보니 의원 샌님한테 상것 취급받는 날도 다 오는구나! 엉? 사르데냐 왕국의 자랑스러운 해군 조타수님께서 상것이 될 줄이야 누가 미처 알았겠어. 야, 이 돌팔이야, 네가 일곱 살 때 사라쿠사 삼거리에서 똥오줌 지릴 때만 해도도…….” “우왁! 우와악! 미친 새끼! 영애 앞에서 못할 말이 없어!” 의원이 우악스럽게 환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환자가 욱욱 소리를 내며 반항했다. 라피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앉아 의원의 진료를 도왔다. 진료라고 해봤자 대단한 것은 없었다. 오늘 어떻게 지냈고, 기분이 어떠하며, 목욕물이 좋았냐고 대화할 따름이었다. 관절이 특히나 아프다는 말에 의원은 환자 팔뚝에서 피를 조금 빼냈다. “온천물이 좋긴 하더구먼그래.” 환자가 노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여쁜 여자들도 많고, 맥주도 맛좋고…….” “이 천하의 멍텅구리가 술 마시지 말라니까 또 마셨네.” “어쩌겠어, 해군이 술 빼면 시체인걸. 참. 목욕할 때 알았는데 내 팔뚝 안쪽에 반점이 하나 생겼네. 여기 봐봐.” 환자가 쓱 겨드랑이를 벌렸다. 그곳에 엄지손가락만 한 검은색 반점이 피어 있었다. “……!” 라피스가 숨을 삼켰다. 의원과 환자는 느긋하게 대화했다. “정말이네. 허, 이건 또 무슨 일일꼬.” “별거 아니겠다 싶긴 한데 아무래도 몸이 영 아프단 말이야. 괜스레 불안해.” “자네 체력이 너무 많이 떨어졌네. 전쟁 다녀온 지 보름도 안 되지 않았나. 몸이 파업할 만도 하지. 감기몸살일세. 푹 쉬고 얼른 나아버려.” “그래? 진짜 감기란 말이지. 좀 이상해. 고뿔에 한두 번 걸려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다 네놈이 늙어빠져서 그렇다, 이 늙은 아저씨야.” “뭐 이 샌님 새끼가?” 관절을 중심으로 퍼지는 통증. 심한 발열. 몸의 부위가 까맣게 변질되는 증상. 라피스는 마왕의 말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갑자기 볼일이 떠올랐어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배웅은 괜찮아요.” 하고 라피스가 일어서려는 의원을 제지했다. 그녀는 의원에게 은화 두 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빠른 발걸음으로 온천장에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의사가 환자를 째려보았다. “네놈 때문에 아가씨가 나가신 거 아니냐!” “엥? 그거 또 왜 나 때문이야?” “네놈 입이 천해도 너무 천해서 귀족께선 견딜 수 없는 거지. 으이구, 이래서 군인 놈들은 안 돼요. 저 잘난 것만 알지 다른 사람 생각은 까마귀 발톱에 낀 때만큼도 못해.” 두 사람이 다시 말싸움을 시작했다. 한편 온천장 복도를 걸어가는 라피스의 마음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녀들이 그녀를 마주치고 역시 귀족인 줄 알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라피스에겐 일일이 대응할 틈이 없었다. ‘정말이었어. 마왕 전하의 말이 맞았어.’ 당장 마왕을 찾아가야 했다. 다음으로는 상회에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비상사태였다! 이틀 후, 환자가 온몸이 까매진 채로 죽었다. 일주일 후에 의사가 돌연 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시의 어느 누구도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열흘이 흘러 온천장을 애용하던 사람들이 깡그리 몰살당하고, 보름 안에 도시 전역에서 사람들의 몸이 까매지자 비로소 모든 이가 사태를 파악했다. 돌림병이 창궐했다. * * * 쿤쿠스카 상회는 무능한 집단이 아니었다. 만약 무능했다면 마계의 정상에 올라서지 못했을 터. 상회의 간부들은 설령 조직에서 괄시되는 말단 직원의 보고서일지라도 진실에 적중하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회의실에 간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상회를 지탱한 최고 간부였다. “설마 단탈리안이 예언자였을 줄이야. 의외로군.” 흡혈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간부가 반박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나는 아직도 그가 애송이 마왕이라고 생각해.” “허, 참. 전염병을 예언했네.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전염병이야.” 하고 늑대족의 장로가 말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인가? 무릇 조직이란 조심할 때는 한없이 조심해야 하고 과감할 때는 끝없이 과감해야 하는 법. 처음에 직원이 보고서를 올렸을 때 우리는 전형적으로 조심스러워하는 자세를 취했네.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지. 지금 증거가 나왔다네. 동지들!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에 집착하지 말게. 집착은…….” “퇴보의 어머니요, 무지의 아버지다.” 흡혈귀가 말을 받았다. “예전에 회장께서 즐겨 말씀하셨지. 회장께서 돌아가신 지 어언 칠백 년. 그동안 우리 일곱 명이 쿤쿠스카를 정상의 자리에서 지켜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마왕들에 친화적이기 때문이었다.” 간부들이 잠자코 흡혈귀의 얘기를 경청했다. 명목상 간부들은 동등했다. 그래도 실질적인 리더는 흡혈귀였다. 그는 누구보다 오래 상회를 지켰다. 흡혈귀가 무표정하게 말해나갔다. “우리는 마왕에 적대적인 마족을 손수 토벌했고, 그 대가로 마왕들은 우리에게 무제한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마왕과 쿤쿠스카는 혈맹 그 이상이다. 단탈리안 역시 서열 제71위라 하나 마왕. 만약 그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다 하면, 쿤쿠스카는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야겠지.” “나는 인정할 수 없어!” 맞은편에서 늙은 고블린이 끽끽 소리쳤다. 그는 미간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하게 잡혔다. “예언이라니? 하이고, 너희도 늙더니 드디어 두개골에서 정신이 가출했구나. 예언처럼 비이성적인 현상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쿤쿠스카 최고 간부들이 믿다니! 여섯 명밖에 없는 동지 놈들이 이리도 순진해서야 내 얼른 뒈질 것을 지금까지 살아남아 괜히 복장이 터지는구나. 도둑놈이 불알 한 짝 훔쳐가도 아이고 도둑님, 아이고 양상군자님 나머지 한 짝도 얼른 가져가쇼, 할 놈이 네놈들인가 하노라. 어디 쪽팔려서 나돌아 다닐 수가 없겠다!” “이보게, 난쟁이 떠벌이 친구.” 늑대족이 으르렁거렸다. “벌써 인간의 도시 세 곳이 당했네. 돌림병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 만에 세 도시가 끝장났어. 내가 수백 년을 살았지만 그토록 전염이 빠른 질병은 듣도 보도 못했다네. 전문가들은 벌써 대륙의 인종 중에 절반 가까이가 떼몰살 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 어떻게 이런 걸 거짓말로 찍어낼 수 있는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튼 예언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암.” 늙은 고블린이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늑대족이 코웃음 쳤다. “우길 줄만 알지 근거를 댈 줄 모르는군. 그게 자네가 말하는 이성이라면 거 대단한 이성일세. 나는 차라리 비이성적이게 되고 싶구만. 혹시 자네 파이몬 전하를 상대할 때도 그딴 식으로 말하지는 않으리라 믿네.” “아, 파이몬 전하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아무튼 예언은 아니라고!” 흡혈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블린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흡혈귀가 고블린에게 말했다. “토르켈, 나의 오래된 친우여.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고블린이 언제 조용했냐는 듯 방방 날뛰었다. “역시 어둠의 귀족인 흡혈귀야! 머리에 달린 거라곤 주둥이밖에 없는 어느 늑대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지! 이봐, 머저리 늑대. 앞으로 누가 네놈보고 ‘누구냐’라고 물어보면 달리 대답하지 말고 꼭 ‘내가 바로 천하의 멍텅구리 머저리요외다’라고 대답하여라. 행여나 우리 상회 이름은 들먹이지 말고!” 주변에서 간부들이 한숨을 쉬었다. 욕을 먹은 당사자인 늑대족도 화를 내지 않고 혀를 찼다. 저 고블린은 쿤쿠스카의 간부치고는 말투가 너무 경망했다. 상재(商材)가 뛰어나지 않았다면 진즉 간부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자아. 단탈리안에게 예언력이 없다고 가정해보지.” 흡혈귀가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그는 전염병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실제로 전염병이 발발했다. 동지들이여. 이것이 만약 예언력이 아니라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응? 그야…… 허억!?” 고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부들도 흡혈귀의 의중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흡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는 경우의 수는 단 한 가지. 마왕 단탈리안이 일부러 전염병을 일으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그럴 리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차라리 단탈리안에게 예언력이 있다면 좋겠다고. 만일 아니라면 그는 사상 최악의 전염병을 자의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셈이니까. 나로서는…… 그런 마왕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군.” 흡혈귀가 토로했다. 그 경우에는 마왕 단탈리안을 대적할 수 없다고. 웬만한 마왕도 한수 접어주고 시작하는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 흡혈귀는 서열 제25위의 마왕 글라샬라볼라스가 이자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왕의 던전을 초토화시켰다. 그런 장본인이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꿀꺽! 회의장에서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00017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말일세.” 역병을 만들어내는 능력의 파급력에 대해 간부들이 골몰하고 있을 때, 은랑이 중얼거렸다. “단탈리안이 바로 앙골모아 대마왕일 수도 있겠구만.” 대마왕 앙골모아(Angolmois)! 마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종의 신앙이었다. 인간계에 널리 퍼진 구원자 신앙과 유사했다. 피와 비명으로 가득 찬 마계를 언젠가 하나로 통일시키는 마왕이 도래한다.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드래곤 등에 의해 마계에만 갖혀 사는 마족들이 자유로이 햇볕 아래를 거닐게 되리라. 흔하디흔한 종류의 전설. 그러나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족에게, 앙골모아는 단지 전설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염원이 담긴 소망 그 자체였다. “아주 헛소리도 일품이구나. 개소리에 또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 놈들을 보자니 내 한 번 터진 복장 또 터지겠다. 자고로 대마왕이느니 대마신이느니 앞에 대(大) 자가 붙는 놈치고 제대로 된 새끼 없다 했노라.” 고블린이 입가를 이죽거렸다. “지난 천 년, 앙골모아를 자처한 마왕이 네 명 있었지. 벌써 잊었나? 차마 동지라 부르기에 민망하고, 솔직히 부르고 싶지도 않은 진상들아. 벌써 까마귀 고기를 처먹었냐고 묻지 않느냐. 네 명 전부 사기꾼이었어! 아니면 몽상가였지.” 고블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키보다 두 배가 큰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 몽상의 제단에 바쳐진 마족의 영혼이 몇이더냐. 불빛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부질없이 죽어나간 마족이 대체 몇이었냐. 만일 영혼이 있다면 구천은 마족의 영혼으로 채워져 있을 거다. 들어라! 네놈들이 깡통일지라도 그냥 깡통이 아니라 들으면 아는 깡통이라면 말이지. 앙골모아는 그저 마왕놈들의 정치적 수단에 불과해.” 아주 낡고 지겨운 수단이지, 하고 고블린이 뒤돌아섰다. 회의장에서 나가는 고블린의 뒷모습에 대고 진조가 물었다. “토르켈. 어디 가는 것인가.” “직접 단탈리안인가 뭔가 하는 마왕을 만나고 오겠어.” 고블린이 지팡이로 바닥을 쿵, 하고 두들겼다.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 문이 저절로 양팔을 벌리듯이 열렸다. “놈이 앙골모아든 뭐든 관심없지만 그 자가 제안했던 사업 계획이 시의적절했다는 것은 사실이야. 우린 그런 사업을 몰라보고 무시했지. 사과해야 하지 않겠어? 머저리들, 쓸데없는 거에 골몰하지 마라. 우리는 어디까지나 상인이야.” 늙은 고블린이 훌쩍 떠났다. 간부들은 앙골모아를 자처한 역대 마왕들에 대해 잡담을 떠들다가 삼삼오오 회의장에서 나갔다. 진조와 은랑만이 남았다. 은랑은 손수 포도주를 가져와 진조에게 한 잔 따르면서 말했다. 아까 전과 다르게 태도가 무척 공손했다. “이바르님. 저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을까요? 단탈리안이 지나치게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하면 언제든 명령하십쇼. 제 이빨은 스테이크나 뜯겠다고 자란 게 아닙니다.” “내가 한번이라도 나의 이빨을 의심한 적 있는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질 이유는 없다. 마왕은 마족의 아군. 변치않는 진리이지. 우리가 마왕을 먼저 적대하지 않는 이상 마왕이 우리를 위협할 일은 없다.” 마왕은 모두 인간계에서 던전을 짓고 살아간다. 마족들이 마계에서 핏물로 얼룩진 투쟁을 영겁에 걸쳐 반복하는 사이. 마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인도하겠노라고, 새로운 꿈을 찾아주겠노라고 선언하는 이들. 그들이 마왕이다. 달리 말해, 마족들은 마계의 이권 때문에 마왕과 다툴 일이 없다. 서로 사는 장소가 다르니까. 진조가 적포도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셨다. “허나 마왕이 우리의 이권을 침해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그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으하하하하! 요새 나에겐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웃음이 나오는 버릇이 생겼다. 입끝이 귓볼에 걸릴 정도였다. 내가 웃을 때마다 근처에 있던 고블린이 '주인님 왜 저래?'라고 갸우뚱거린다든지 골렘이 '나도 몰라 무서워'라고 어깨를 으쓱거린다든지 했지만, 무얼. 녀석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내 두 눈에는 똑똑히 비추고 있었다. 던전의 휘황찬란한 재산이! ━━━━━━━━━━━━━━━━━━━━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부대: 2마리 *재산: 20311골드 ※던전이 엉망진창입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당신의 던전을 놀이터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공략 당할 수 있습니다. 어서 '몬스터고용'란에서 몬스터 부대를 고용하여 태세를 정비하십시오! ━━━━━━━━━━━━━━━━━━━━ 대박! 대박이다! 흑사병에 걸린 인간 중에는 당연히 귀족이나 성직자도 많았다. 라피스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블랙 허브의 효능을 의심했으나 일단 효과가 입증되자 미친 듯이 가격을 올려 구입했다고 한다. 결국 천 골드를 투자하여 자그마치 이만오천 골드를 벌어들였다. 그중 오천 골드는 급전에 대한 원금과 이자로써 라피스에게 돌려주었다. 그래도 스무 배의 이익을 올린 셈이었다. 예전에 강원랜드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하염없이 슬롯머신을 당기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1초가 아깝다는 듯 열심히 당기고 있었다. 왜 저렇게 목숨을 거나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 알겠다. 한번 맛을 들이면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리도 쉽게 돈을 버는데 어떻게 광석이나 캐고 앉아 있어!’ 마석을 파내서 하루에 2골드를 벌었다. 그걸로 2만 골드를 벌려 했으면 단순히 계산하여 10000일, 대략 27년이 걸린다. 빌어먹을 짓이 아니고 뭔가. 반면에 천 골드를 융통해서 과감히 투자한 결과, 불과 열흘만에 2만 골드 넘게 벌어재꼈다. 나는 오늘 하루 내내 싱글벙글 웃고 다녔다. ‘하지만 착각하면 안 되지.’ 재산은 던전을 지키기 위한 자금에 불과하다. 골드가 아무리 많아도 창고에서 썩고만 있다면 날 지켜주지 못한다. 나는 다시 한번 으하하하 웃은 다음, 몬스터고용창을 불러들였다. 재산은 불어났지만 아직 던전 레벨이 F라서 그럴까. 최하급골렘 이상의 몬스터는 고용할 수 없었다. 아마 레벨이 올라갈수록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도 다양해지는 시스템인 듯했다. ‘A레벨 정도 되면 드래곤을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며칠 전보다 희망이 생겼다. 해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마법에 저항하는 능력은 기본 옵션으로 붙어 있고, 브레스라는 대군(對軍)공격을 갖춘 드래곤이 한 마리라도 있다면……. 물론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그 희망사항조차 함부로 상상하기 어려웠던 게 불과 며칠 전이지 않았던가. 호크 대장의 목덜미를 쑤셨을 때 느낀 그 감각을 나는 아마 쉽게 잊어버릴 수 없으리라. 자아, 몬스터를 고용하자. 뭐든지 쪽수가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능력치가 높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상성이지.’ 내가 신중히 몬스터고용창을 주시했다. ━━━━━━━━━━━━━━━━━━━━ [몬스터명]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슬라임       2    2    2 70골드 -최하급요정     4    3    2 160골드 -고블린       4    4    4 250골드 -최하급골렘     7    5    5 400골드 [소지금: 20311골드] ━━━━━━━━━━━━━━━━━━━━ “으음.” 슬라임은 재껴둔다. 이동속도, 공격, 방어, 어느 하나 잘난 거 없는 짐덩이다. 날붙이 공격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나 체력이 저래서야 원. 나는 최하급요정, 고블린, 최하급골렘 중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F급 모험자밖에 안 오지. 기껏해야 창병이랑 궁수가 전부야.”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혼잣말이 버릇이 되었다.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굴리는 것보다 입밖으로 내뱉어야 비로소 사고가 맑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계속 중얼거렸다. “마법공격엔 약해도 물리공격에 내성이 붙는 골렘이 제격이지.” 게임 설정에 따르면 골렘은 최하급에서 최고급까지 막론하고, 마법공격에 200% 데미지를 받고 물리공격에 50% 데미지를 받는다. 사제는커녕 마법사조차 갖추지 못한 F급 모험자에겐 골렘이야말로 제격이다. 그래서 맨 처음에 골렘을 산 것이기도 하고. “아마 E급까지는 마법사가 등장하지 않을 테니 괜찮아. 하지만…….” 호크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이동속도가 느리니 재빠르게 도망치면서 공격을 감행하면 그만이라고. 언제 호크 말고 다른 모험자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릴지 몰랐다. 골렘을 보완해줄 몬스터가 필요했다. 나는 골렘 다섯 마리와 요정 열 마리를 구입했다. 전략은 이러하다. 골렘이 부대의 전방에서 전열을 이룬다. 그리고 체구가 작고 빠른 요정들이 궁수처럼 후방에서 마법을 쏘아낸다. 최하급요정이 만들어내는 마법이래봤자 윈드커터, 바람을 날카롭게 압축해서 발사하는 기술밖에 없었지만 나에겐 또다른 생각이 있었다. “하급 모험자들은 마법에 완전히 무지하다.” 평생 마법다운 마법을 접해보지 못한 평민에게는 윈드커터조차 감당키 어려운 신비로 보일 게 틀림없다. 난데없는 마법의 등장에 모험자들은 당황하겠지. 그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서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골렘 부대가 딜러 겸 탱커로서 돌진한다. 상성, 대열, 심리까지 고려하여 만들어낸 회심의 부대 편성. “그야말로 하급 모험자 전용 부대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떤 몬스터가 모험자에게 가장 괴로운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던전 어택에서 죽어라 고생했으니까. 나에게도 엄연히 초보자 시절이 있었고, 그때 제일 골때렸던 편성이 바로 저 골렘-요정 조합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예 내 파티가 전멸해버린 적도 꽤 있었다. 나는 튜토리얼 때 고용한 골렘(레벨2)을 부대장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언제라도 요격에 들어갈 수 있게끔 마왕방 앞의 큰 동공에 배치해두었다. 골렘들은 절도 있게 부동자세로 열을 맞추어 기립했다. 여섯 마리의 골렘이 일렬로 늘어선 광경은 그 자체로 위엄이 넘쳐났다. ─ 꺄르륵! 꺄르르르! 반면에 요정들은 쉴 새 없이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요정들이 전후좌우로 돌아다니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기뻤다. 요정들은 진짜 귀여웠으니까! 골렘도 고블린도 귀엽긴 마찬가지였으나 뭐라고 할까, 한참 어여쁘게 자라는 딸아이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물장구치듯 날개를 파닥이며 뛰노는 요정들을 보노라니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유, 예쁜 내 새끼!” 요정 한 마리를 붙잡아 찐하게 입을 맞추었다. 요정도 좋은 것인지 동굴 천장이 울릴 정도로 웃어댔다. 아휴, 우리 애기 분위기도 탈 줄 알고. 아빠가 가르쳐줄 거 벌써 하나도 없네! ─ 꺄르륵? 꺄륵? 나는 요정어를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아빠는 우리 새끼가 제일 예뻐요!” ─ 꺄르르르! 요정들이 득달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어떤 애는 내 머리칼로 숨어들었고, 어떤 애는 뺨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친구들이 결혼하고 애 낳고 싶다고 칭얼거릴 때는 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려 하는지 의문이었건만, 우리 요정이들처럼 예쁜 아이라면 낳아서 길러도 후회없을 것 같았다. 모든 고난을 잊고 행복의 낙원에 감싸여 있을 때였다. “흠, 어흠.” 조금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한 고블린이 한 마리 서 있었다. 자기 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누구냐?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탈리안 전하.” 고블린이 허리를 숙였다. 그래봐야 2등신 몸매를 자랑하는 고블린이기에 내 입장에선 고개를 숙인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적의적인 감정은 전달되지 않았다. “누구냐.” 반말로 대응했다. 며칠 전에 라피스가 지적해준 것인데 아무래도 마왕이 마족한테 존댓말을 쓰는 경우는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세게 나가줘야 마족들은 안심한다나 뭐라나. 라피스 말이 맞았는지 늙은 고블린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소인은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인 토르켈이라 합니다. 이번 전염병에 대해 논의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아하. 그런 거로군. 나는 최소한의 경계심만 남겨두었다. 언젠가 오리라 생각한 상대였다. 상회 입장에서는 전염병이 나돌 거라고 예상한 나에게서 어떻게든 정보를 빼내려 할 테니까. 여차하면 손을 잡아 장사하고 싶은 속셈도 있겠지. “방문을 환영한다.” “먼저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전염병을 예견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저희 상회에서 사안을 가벼이 여긴 것, 이는 어딜 보아도 저희측의 실책이었습니다.” “무얼.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러자 고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앞으로에 대한 논의를…….” “잠깐만. 라피스는 어디 갔지?” 내가 말을 끊었다. 고블린이 예? 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라피스 말이다. 나를 전담하는 사무원은 따로 있을 텐데.” “아……물론 그렇습니다. 허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특별히 간부인 제가.” “되었다.” “예?” 나는 라피스의 사무처리에 감동했다. 천 골드를 이만 골드로 불려준 것도 솔직히 내가 잘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뛰어나서라고 생각했다. 라피스가 없었다면 설령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떼돈을 벌었을까? 아니다. 그녀가 내 말을 들어주었고, 또 전력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한 돈벌이였다. 내가 보너스라는 명목으로 500골드 정도를 쥐어주려 하자 라피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딱 잘라서 거부했다. 얼마나 단호했는지 그만 반해버릴 뻔했다, 멋진 차도녀 같으니! 이제 라피스는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조직에서 왕따당한다 그랬지? 넌 앞으로 내가 제대로 키워주마.’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말했다. “나를 전담하는 이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라피스이다.” “하, 하지만 그 아이는 5급 사무원입니다.” “그리고 내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준 자이기도 하지.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 아이를 전담으로 파견하거나, 아니면 함께 오거라.” 나는 뒤돌아서서 다시 요정들이랑 놀기 시작했다. 등 뒤로 고블린이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아쉬운 것은 그쪽일 텐데, 뭐. 아니나 다를까 결국 3분 정도가 흐르자 고블린은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졌다. “흥. 보나마나 내가 좀 귀한 고객이다 싶으니까 지가 나선 거겠지. 돈도 빌려주지 않을 때는 언제고. 하여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작자가 양심도 없이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놈들이야.” ─ 꺄르? “어이쿠, 우리 이쁜이! 아빠가 너무 어려운 말 했어요? 미안해요. 이쁜아, 쭙쭙 하자. 쭙쭙!” ─ 꺄르르르륵! 한동안 동굴에는 요정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저 멀리서 고블린이 '우리 주인님이 소아성애자였어……' 하고 실망에 빠진 감정이 전해졌다. 아니, 그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나는 지극히 평범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 블링이 너, 그런 못돼먹은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 작품 후기 ============================ 리리플은 선착으로 10개만 달겠습니다. 리리플로 본문의 양이 마치 긴 것처럼 보이는 게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서요. 후기 분량으로 독자 분들을 속이면 안 되겠지요! 선추코해주신 모든 분께, 그리고 쿠폰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00018 땅을 열길 파면 돈 한푼 생긴다 =========================================================================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바보입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어깨를 덜덜 떨고 있었다. 내 앞에는 '저 너무 어이가 없어요'라는 오오라를 검붉게 풀풀 내풍기시는 소녀가 한 명. 늙은 고블린을 쫒아내자마자 들이닥치신 이후로 소녀께선 줄곧 저기압 상태였다. “마족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무조건 사과하고봤다. 왠지 모르게 라피스 앞에 서면 마음이 유독 약해졌다. 사람의 관계란 게 첫인상에서 단박에 결정되기 때문일까. 첫 만남부터 마왕답지 않게 어수룩한 면모만 보여주어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위엄 있는 모습을 연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피스한테만큼은 허세를 부리기가 힘들었다. 라피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토르켈 님께선, 아니 토르켈은 쿤쿠스카 상회의 전설적인 간부입니다. 하급마족인 고블린으로 태어났으나 대마법사가 되어 자그마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지요. 살아 있는 괴물이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거 주름살 영감탱이가 그렇게 잘난 놈이었어?” “…….” “계속 말씀하십시오!” 워매, 하마터면 찌릿! 하고 효과음이 들린 줄 알았다. 무슨 여자아이 눈매가 저리 사답다냐. 얘야, 그럼 친구도 못 사귀고 큰일나요. 하긴 라피스는 이미 친구가 없지. 그렇게 마족에서 왕따 당한다는 소녀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내 이익을 위해서 쿤쿠스카 상회와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설파하기 시작했다. 나는 잔소리를 열심히 오른쪽 귀에 넣었다가 왼쪽 귀로 빼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고, 내가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7초에 한 번 꼴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었다. 4초는 너무 짧고 10초는 너무 길다. 대충 7초 정도마자 고개를 끄덕여야 상대방이 속아넘는다. 이거 원, 이러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배우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참. 라피스도 호감도가 20이 넘었지?’ 호감도가 20이 넘어가면 상대방의 상태창에 심리상태가 표시되었다. 나는 문득 라피스의 능력치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 라피스가 참 유능한 마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천 골드를 이만 골드로 되돌려준 소녀. 얘는 어느 정도 능력치로 표시될까? ‘상태창.’ 띠링! ━━━━━━━━━━━━━━━━━━━━ 이름: 라피스 라줄리 종족: 하프 서큐버스  소속: 쿤쿠스카 상회 속성: 중립(-10) 레벨: 23        명성: 122 직업: 상인(A-), 마녀(B), 검사(D) 통솔: 55  무력: 32  지력: 53 정치: 72  매력: 50  기술: 2 호감도: 31 현재심리: ‘이분은 정치에 완벽하게 무지하다.’ ━━━━━━━━━━━━━━━━━━━━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쩔어.” “그러므로 입장이 좋아지신 만큼 지위가 높은 자와 교섭을……단탈리안 님,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 설마라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제가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를 무시하시거나 경시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딱풀처럼 내 얼굴에 들러붙었다. 소용없다. 이미 내 면상은 철면피도 아이구 뻔뻔한 새끼! 하고 울고갈 수준을 돌파했다. 이 정도 연기야 식은 죽 먹기. 라피스가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고 다시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어이구, 조용하고 무뚝뚝한 애가 오늘따라 할 말이 많다. ‘그나저나 어마어마한 능력치네.’ 예상 이상이었다. 50대가 넘어가는 능력이 셋, 심지어 정치는 70대를 넘어섰다. 마이너스 보정이 붙긴 했지만 A급 직업 하나, B급 직업을 하나 갖추었다는 점도 대단했다. 던전 어택 게이머로서 평가하자면 웬만한 왕국의 유능한 중신 급과 비슷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까지는 아니어도 외무장관은 너끈히 해낼 정도라고 할까. ‘이런 인재를 고작 말단으로 썩히다니. 쯧, 마족 사회에도 썩은물이 고였구나.’ 마족은 철저히 실력주의를 표방한다.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존경과 명예가 뒤따른다. 개인의 실력 그리고 사회에서 주어지는 명예. 두 가지가 마족의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중심축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명예가 실력보다 중시되기 시작했다……던전 어택 시나리오 중에 어떤 마왕이 그렇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마족도 마족 나름대로 큰일이구나 싶었더란다. “알았어, 알았어.” 하고 내가 손을 내저었다. 대충 라피스가 뭘 말하려는 것인지 전부 파악했다. “요는 지위도 높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랑 거래하라는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최소한 그런 사람과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헌데 단탈리안 님은 토르켈에게 쓸데없는 반감을…….” “라피스 라줄리.” 그녀가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를 넘었습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 충언해주는 사람을 배척할 만큼 어리석지 않아.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지. 그렇지 않아?” “…….” 약한 자. 그것은 반쪽짜리 마왕인 나를 가리키기도 했고, 하프 서큐버스인 라피스를 뜻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반쪽짜리 삶이라는 점에서 유사했다. 나는 원해서 마왕이 된 것이 아니다. 라피스 역시 원해서 하프 서큐버스로 태어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낙찰 받았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이란 게 결정지어졌다는 것. 우리는 여러모로 비슷했다. 그래서겠지. 알게 모르게 라피스한테 호감이 가는 까닭이. 내가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했다. “라피스. 나는 약자이다. 조울증 환자에다 지독한 겁쟁이지. 그렇기에 약자로서 살아남는 데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철저히 고민하지. 강한 자에게 빌붙어서 살아볼까? 당장 생존을 위한다면 그도 나쁠 것 없어. 하지만 강한 자가 약자의 기생을 허락하는 까닭은 약자에게 무언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순간 약자의 삶은 끝장나지.” 앞으로 간부와 거래하라. 좋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상회의 간부가 등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블랙 허브라는 대박 사업을 기획해서이다. 더 이상 그런 사업을 제안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간부가 미련없이 날 떠나리란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건 안 돼. 시간이 언제가 흘러도 나는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항상 수동적인 자세만 취하다 끝날 거야. 라피스, 약자에게는 상책과 중책 그리고 하책이 있어. 하책은 강자에게 빌붙어서 목숨을 연명하는 거다. 중책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약자끼리 연맹하는 것이지. 상책은 강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내서 강자를 이용하는 것이고.” 나에게는 상책이 없다. 쿤쿠스카 상회의 약점이라니 그런 건 모른다. 하책도 불가하다. 쿤쿠스카 상회가 나를 끝까지 지지해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중책을 사용하고자 해.” “약자와 연맹하는 책입니까. 하지만 누구와……?” “너다.” 내가 손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올곧게, 그녀의 청금석과 같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라피스가 한참을 침묵하고 입술을 열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라피스 라줄리. 너야말로 내게 필요한 인재이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띄게 혼란스러워졌다. “저는 일개 말단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사회적인 위치도 좋지 않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저를 신뢰해주신다는 것에는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단탈리안 님을 도우며 쿤쿠스카 상회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합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얘기를 들려주듯이. 하지만 그뿐입니다,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마왕이 저와 같은 사회의 도태자이자 소수자를 친애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일이 없습니다. 마족에게 마왕이란 어디까지나 고고하고 순수한 지존이어야 합니다. 마족의 염원과 꿈, 무의식을 사로잡아 그대로 투영하는, 티끌 없는 거울과 같아야 합니다. 저는 단탈리안 님에게 거울의 붉은 녹과 같은 불순물에 불과합니다.” 라피스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한없이 오래된 체념이었다. 한때 절망과 복수심, 피해의식, 상처로 끈적끈적했을 감정이 이미 오래 전에 굳고 또 굳어서 바위처럼 웅크리고만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바위를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위 역시 언젠가는 풍화되어 산산이 깨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바람이 되고자 했다. “아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너다. 너 같은 아이가 내 곁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거침없이 말했다.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나에게 부름 받아 달려온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백 년을 기약하면서까지 내 옆에 있어주기로 결심한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때 나를 대신하여 이익을 가져다준 자가 누구냐? 바로 너다. 지금 나 단탈리안의 성공을 위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충언을 바치는 자가 누구냐? 라피스 라줄리, 바로 너다.” “안 됩니다. 단탈리안 님의 장기적인 삶에 있어 저는 결코――.” “어떻게 그걸 자신하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라피스가 연한 분홍빛 입술을 다물었다. 내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다, 라피스 라줄리! 감히 내 삶을 멋대로 기획하지 마라.” 최약(最弱)의 마왕. 그런 내가 살아남으려면 기존 사회의 권력층과 부합할 순 없다. 이미 그들에게는 나 말고 일흔 명의 마왕이 있다. 이제와서 후발주자가 끼어들어봤자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그저 이용당하기만 하리라. 그렇다면 나는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과 연합하겠다. 그들을 설득해서 내 동지로, 부하로 만들겠다. 비록 나는 겁쟁이지만. 비록 나는 최악의 능력치를 가졌지만――수없이 많은 약자의 염원과 한을 무기로 삼아 생존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필사적으로 생각해낸 대전략. 던전을 지키기(Dungeon Defense) 위한 최선의 수. 그 첫걸음이 바로 라피스, 너다. “…….” 라피스가 말이 없었다. 일부러 침묵하는 게 아니었다. 작은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차마 단어와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 모험자가 던전에 침입했습니다! 눈앞에 알리미창이 떴다. 그곳에는 F급 모험자 열다섯 명이 막 던전 입구를 지나쳤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적이 쳐들어왔군.” 마침 잘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골렘 부대와 요정 부대를 불렀다. 십수 명의 몬스터가 회답해오는 감정이 밀물처럼 들어닥쳤다. 개전의 흥분, 주인을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 인간을 몰살하겠다는 환희. 내 마음이 순식간에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라피스, 따라와라. 약자의 전쟁을 보여주지.” 나는 몬스터 부대와 함께 진격했다. 굳이 마왕성 앞마당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부대는 곧 모험자 파티와 마주쳤다. 모험자들은 예상보다 수가 많은 골렘에 당황했다. 제법 실력과 배짱이 있는지 빈틈없이 전열을 이루고 대항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창칼은 골렘이라는 두터운 방벽에 가로막혀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골렘들이 전열을 이룬다니!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시바아알! 어떤 새끼가 여기가 동네 뒷산 수준이라고 떠벌린 거야!” 모험자들이 창을 내밀고 검을 휘두를 때 약간이지만 틈새가 노출되었다. 나는 그 순간을 노려서 요정 부대로 하여금 마법을 쏟아붓게 했다. 바람이 잘게 갈리는 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윈드 커터가 모험자들의 팔뚝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난도했다. 동굴에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끄아아아악!” “마법, 제기랄, 마법이야!” “루크 개새끼야! 도망치지 마, 물러서지 마라고! 시발!” 상처 자체는 얕았다.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침착함을 되찾는 데 필요한 최저한의 시간을, 나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골렘들의 돌주먹이 장대비처럼 모험자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윈드 커터에 팔뚝이 다친 이가 그만 방패를 놓쳐버렸다. 대가는 참혹했다. 골렘의 주먹질은 모험자의 가슴뼈를 통째로 뭉개트렸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 룩스마을 모험대를 격파했습니다. 전멸에 따른 추가적인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 축하드립니다! 던전 레벨이 올랐습니다. ─ 던전 레벨이 2가 됨으로써 던전에 추가적인 시설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한번 전열에 구멍이 뚫리자 나머지는 간단했다. 모험자 파티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도망치려던 두 명도 요정 부대의 일제사격에 난도질 당했다. 나는 열다섯 명의 시체가 널브러진 곳에 섰다. 몬스터들이 승리로 환호하는 감정이 여과없이 느껴졌다. 그들은 다만 주인인 나를 위해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라피스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최하급 몬스터만으로, 아무런 피해없이…….” “나는 약자이다. 하지만 어리석지 않아.”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라피스. 보여주자. 약자의 긍지를.” 그녀가 푸른 눈으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른손을 들었다. 아주 잠깐 멈칫, 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자 라피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졌다. 「하급마족 라피스 라줄리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단탈리안 전하.” “나야말로.” 그 순간, 침묵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내질렀다. 동굴에 환호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날은 어쩌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00019 ending no.01 =========================================================================                        이번 편은 if 외전입니다. 베드엔딩을 혐오하는 분은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                    엔딩 조건 1. 잘센마을 모험대의 평균 호감도가 30 이상일 것. 2. 단탈리안의 악명이 100 이하일 것. . . . ‘아니야. 도저히 승산이 없어.’ 이를 악 물었다. 별 도리가 없었다. 내가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는 고작 고블린 두 마리 정도. 그걸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열다섯 명의 모험자를 이길 수 없었다. ‘차라리……그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되지도 않는 반항을 해서 기껏 쌓아올린 호감도를 까먹느니 그 편이 훨씬 좋았다. 생각해보니, 굳이 던전을 지킬 까닭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살아날 수만 있다면 구차하게나마 적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 뭐 나쁘겠는가. 필사적으로 그들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오백 골드를 넘기자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적어도 비명횡사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를 죽이지 않고 생포한 채 도시로 끌고갔다. 도시의 관리는 모험자들을 치하하며 비싼 값에 내 몸을 사들였다. “저기, 나으리.” “음? 무슨 일인가.” “그럼 이제 마왕은 어찌되는 겁니까요?” 리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요 며칠 사이 모험대와 나는 부쩍 친밀해졌다. 비록 생계를 위해 날 팔아넘기긴 했으나 양심 때문인지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혹시 공개 처형당하는 것은 아닙니까?” “글쎄. 만약 악명이 조금 높았다면 본보기로 삼았겠다마는.” 콧수염이 날카로운 관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단단한 수갑에 양손이 묶여 있었다. “솔직히 마왕이긴 해도 별로 이름이 알려진 작자는 아니지 않은가.” “그, 그렇지요. 그럼 당장 사형은 면하겠습죠?” “아마도 그렇게 될 걸세. 최종적으로는 시장 님께서 결정하시겠지만.” 리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살기 위해 항복했는데 오히려 죽어버린다면 본말전도였다. 한편으로, 관리의 심기를 거스를 위험을 감수하고 내 안부를 물어다준 리프가 조금 고마웠다. 물론 모험대는 나를 붙잡은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이 따위 세계에 나를 떨어트린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지, 고난한 삶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던전에 뛰어든 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사실은 내가 마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모험대가 관청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과 나는 눈빛으로 작별인사 했다. 일주일 가량 함께한 사이치고 담백했으나 제대로 된 작별인사는 어젯밤에 술을 퍼마시면서 나눈 터였다. 그 후, 관리는 병졸한테 시켜 나를 감옥 독방에 가두었다. 콘크리트처럼 딱딱한 비스킷과 약간의 더러운 물만으로 연명하는 생활이 세 달 정도 이어졌다. 위장이 말썽을 부렸지만 금새 괜찮아졌다. 마왕이 된 이후로 회복력이 좋아졌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오른발도 가만히 놔두니까 저절로 나았다. 신기했다. “어이, 나와라.” 병졸이 말했다. 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쇠창살 너머로 땟국물이 잔뜩 긴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세 달만에 들어본 사람 목소리였다. 매일 빵과 물을 가져다주는 소년이 있긴 했어도 벙어리였다. 며칠 감옥에서 지내본 결과, 이곳은 반역자나 음모자처럼 중죄를 지은 이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간직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벙어리 소년이 특별히 배급당당이 된 것이리라. 꼬맹이는 감옥에서 왕이나 다름없었는데 위에서 내려온 빵과 물을 제대로 주느냐 마느냐가 전적으로 그 애한테 달려 있었다. 감옥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꼬마애를 상전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독방을 쓰는, 아마도 귀족 출신의 수감자도 처음에는 소년을 욕하고 삿대질하고 난리를 쳤다. 그가 소년을 가리켜 '공자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데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아 언제나 눅눅하고 축축한 지하감옥에서 죽어나가지 않으려면 더럽게 딱딱한 비스킷이라도 먹어야만 했다. “제가.”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입밖으로 나온 것은 쉰소리였다. 하도 오랜만에 말을 하려니까 목젖이 너무 쓰라렸다. 나는 매마른 기침을 몇 번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언어를 조형했다. “제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든 내가 알 바가 뭐야. 얼른 나오기나 해. 평생 거기서 썩고 싶은 게 취향이라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도중에 몇 번이나 무릎이 풀릴 뻔했지만 겨우 버텼다. 지옥이 어떤지 아직 모르지만 지하감옥만큼 최악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병졸에게 이끌려갔다. 감옥에서 나가기 직전, 내가 병졸에게 말했다. “죄수에게 빵과 물을 전달하는 소년 말입니다. 자의적으로 배급물을 착복하더군요.” “뭐?” “죄수가 받아야 할 빵과 물을 임의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꽤 자주요. 지난 주에 죽은 프랭크 씨는 그것 때문에 아사한 것입니다.” 병사의 인상이 신문지처럼 와락 구겨졌다. 나는 감옥에서 나가 마차에 실렸다.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까맣게 색칠된 마차에 올라타며 나는 벙어리 소년에게 복수한 것을 소리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관청의 물품을 사사로이 착복했으니 적어도 두 눈알이 파이리라. 소녀는 벙어리에다 장님으로서 일생을 감옥처럼 살아갈 게 분명했다. 내가 도착한 곳은 노예시장이었다. 노예판매는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장사로서, 최근 대대적인 전염병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진 부르주아와 귀족은 연일 노예를 구입하느라 바빴다. 덕분에 이곳 노예시장도 성황이었다.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지자 노예의 가격은 일주일만에 두세 배로 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중에도 내가 출품된 노예시장은 오직 희귀한 노예를 취급하는, 귀족 전용의 경매소였다. “언제부터 멸치가 짐승처럼 뭍을 걷게 됐는지 모르겠군.” 경매소 담당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하여간 귀족 놈들은 뭐가 값나가는지는 알아도 그게 어떤 과정을 통해 가치를 얻게 되는지 전혀 모르지. 무식한 것들. 이봐, 한 달 안에 저놈을 좀 볼품 있게 만들어라.” 그날 이후 나에겐 좋은 음식이 주어졌다. 상품으로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 심정을 말하자면 곧 푸아그라가 될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음식을 먹는 거위와 같았다. 허나 당장 썩을 비스킷만 갖고 연명해온 나로서는 눈이 뒤집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경매소 담당자는 적당하게 살이 오른 내 몸집을 보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家)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경매소는 망해버린 오페라의 건물을 사들여 개축한 곳이었다. 귀족들은 좌석과 오페라 박스에 앉아서 무대를 구경했다. 무대에서 노예가 판매된다는 것, 그리고 고객들 전원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오페라와 경매소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무대 한 가운데에는 금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하얀 속살이 전부 비추는 나삼밖에 입지 않았으나 소녀는 당당했다. 오히려 턱끝을 높인 채, 무대 저편에서 자신을 품평하는 귀족들의 눈동자를 하나씩 바라보았다. 귀족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는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지난 번 국화 전쟁에서…….” “과연 신전의 파문령은 두렵군요. 천하의 파르네세가…….” “소문보다 더 아리따운 아가씨네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내 기억에도 남은 이름이다. 던전 어택에서 주인공을 적대하는 인간계 세력의 핵심 인물이다. 덕택에 주인공은 마족과 싸우면서 동시에 같은 인간들과도 정쟁을 벌여야만 한다. 주인공이 속한 프랑크 제국과 앙숙인 브르타뉴 왕국의 군사(軍士)로 등장하지. 툭하면 주인공을 괴롭히는 바람에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샀지만, 아름다운 외모에다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곁들어져 소수의 마니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군. 어린 시절 사르데냐의 어느 노예시장에서 팔렸다는 과거지사는 알고 있었다. 그 노예시장이 바로 이곳이었나……머릿속에 저절로 던전 어택과 관련된 기억이 흘러나갔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게임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다한들 무엇하겠는가. 정작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라우라는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자그마치 2000골드. 최고급 성노(性奴)가 비싸봤자 500골드를 넘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가격이었다. 내가 인간들에게 팔려온 이후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바로 던전에서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가격이 정말 빌어먹게 비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잘 것 없는 고블린 한 마리가 250골드를 호가하는가? 만일 이 세계에도 게임처럼 난이도가 있다면 이런 난이도를 책정한 게임 개발자는 당장 혀를 깨물고 인천 앞바다에 뛰어들어야 마땅했다. 본인이 투신하기 싫다면 기꺼이 내가 등을 밀어줄 용의도 있었다. 라우라가 끝까지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라우라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브르타뉴 왕국의 궁중백에 팔린 것이다. 앞으로 십 년 동안 그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궁중백에게 범해진다. 공중백은 파르네세 가문의 제2위 후계자였던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과거 파르네세의 영지였던 곳을 침탈하려는 동시에, 아름다운 그녀의 육체를 끝없이 탐한다. 결국 십 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라우라에게 배신당해서 객사해버리지만. ‘부디 용사 자식을 괴롭혀줘라.’ 마왕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제 용사는 최악의 적수. 그런 용사를 게임 끝까지 괴롭히는 라우라는 우습게도 내 편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녀의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동안 지켜보았다. “자, 그러면. 신사숙녀 여러분.” 진행자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왕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볐다. 마법도구로 인해 적당히 증폭된 목소리가 오페라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었다. “드디어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몇몇 분께서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오직 이 상품을 위해 저희 경매소에 방문하신 분도 많으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이번 상품은 유례가 없는 희귀상품입니다. 크나큰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관리인 한 사람이 내 등짝을 때렸다. 나는 나지막하게 신음하며 무대로 나아갔다. 열화와 같은 갈채소리가 정원 3500명의 오페라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인간계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운 대악마! 서열 제71위에 당당히 그 흉악한 이름을 올린, 마왕 단탈리안――!” 그 이후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진행자가 끊임없이 가격을 불리기 위해 뭐라고 지껄이고, 귀족들은 불빛에 유혹된 부나방처럼 나를 구입하려고 아우성쳤다. “시작가는 1만 골드입니다!” 1만 골드라. 속이 쓰라렸다. 그 정도 돈이 있었다면 이런 자리에 설 일도 없었겠지. 지하감옥에 틀어박혀 한 달 내내 비스킷을 침으로 녹여서 먹을 일도, 노예시장에서 돼지처럼 사육될 일도 없었으리라. 내가 알 수 없는 회한에 잠긴 사이 몸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2만 골드, 2만 5천 골드, 4만 골드……마침내 누군가가 10만 골드를 부르자 드디어 광란이 끝났다. 사회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10만 골드를 연이어 부르짖었다. 10만 골드! 더 없습니까? 10만 골드! 좋습니다! 낙찰되었습니다!……. 나를 구입한 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실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귀한 손님을 즐겁게 하거나 무도회의 여흥을 돋구기 위한 용도로 나를 사용했다. 나에게는 영구적인 마법각인이 등에 새겨졌다. 노예의 각인이었다. “으하하! 마왕 전하께서 따라주신 포도주 맛이 아주 각별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전하, 소신의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어릿광대. 놀이기구. 때로는, 성노예. 시간이 흘렀다. 아무래도 마왕은 늙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얼굴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나의 그러한 특징은 황실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춘 모양이었다. 아무리 갖고 놀아도 망가지지 않는 장난감이 생겼다고 표현할까. 황실에는 고급스럽고 밝은 무도회만이 있지 않았다. 뒤편의 그림자에 또다른 무도회가 있었다. 귀족의 자녀들로 구성된 궁정시녀와 달리, 뒤편의 무도회에서는 각지에서 실려온 아인종과 엘프가 시중을 들었다. 그중에 엘프 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강간당하자 남편은 참지 못하고 도피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참았다. 그들도 어떠한 처지에 놓였는지 충분히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단순한 강간이 아니라……세상의 온갖 방법으로 아내의 육체가 더럽혀지자 남편은 견딜 수 없었다. 애당초 '의복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무도회의 규칙 따위, 고귀한 엘프에겐 더없는 모욕이었겠지. “도망치지 마시오.” 내가 충고했다. 나는 어느새 궁정노예들의 대변인 비슷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노예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곳에선 평균 생존기간이 오십 일이 채 안 되었다. “충고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습니다.” “저들이라고 엘프의 습성을 모르겠소? 일부러 그러는 것이외다. 당신이 도망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 목숨을 걸고 내기해도 좋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망치려는 거요?”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는 법입니다.” “……절대로 남쪽 방향으로 도망치지 마시오. 되도록 북쪽으로. 내 길을 알려주겠소.” 엘프 부부가 도망쳤다. 여섯 시간만에 붙잡혔다. 황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여섯 시간이나 버틴 것에 감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한 결과가 고작 여섯 시간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워 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내가 뒤편의 무도회에서 공개적으로 강간당했다. 그 자리에서 남편은 죽었다. 아내 역시 그 광경을 보고 혀를 깨물어 자살했다. 나에게도 추궁이 돌아왔다. 성노예를 관리하는 것은 내 담당. 노예가 도망쳤으니 담당자인 나 역시 책임에서 안전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도피로를 알려준 자가 내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절대 아니라고 단언했으나 내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 하긴 내가 그들 입장이라도 믿지 않았을 게다. “처참하군.”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 만에 들어본 목소리일까. 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얼굴에 굳은 핏물 때문에 눈꺼풀이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희미한 시야만이 밝혀졌다. “내가 사과해도 그대는 듣지 않겠지. 썩은 나라이고, 썩은 황실이다. 다만.”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 목소리라는 것,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은색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합스부르크 황실 가문의 상징이었다. “그런 썩은 핏줄을 가진 과인이라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런가. 이 여인이――. “과인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노예 한 명을 과인이 직접 처결했다. 그러면 불만을 입밖으로 낼 무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을 터.” “……감사, 합니다.” “과인은 감사를 들을 일을 한 적이 없노라. 마왕이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 만약에, 만약이지만. 내가 그때 모험자에게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대항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노보고로트 변경백을 조심하십시오. 선황 폐하를 암살한 자는 그 자입니다.” “……!? 선황께서 암살당하셨다는 사실을 네가 어찌, 아니, 그보다.” “그뿐입니다.” 상대방이 침묵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내 어리석었다. 조금 더 일찍 그대를 구했어야 하거늘.” 검집에서 칼이 스르릉 뽑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부디 저편의 세상에서는 편히 쉬기를.” 저편의 세상이라. 내가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의식이 끊겼다. ─ Ending no.01(Dead Ending): <황실의 어릿광대>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가끔 이렇게 외전처럼 엔딩을 써볼 생각입니다. 첫 번째 엔딩이라서 그런지 수위가 상당히 약하네요. 자고로 배드엔딩이란 찢고 쑤기고 담그고 뚫고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00020 인간 사냥 =========================================================================                                          마을이 불타올랐다. 매운 연기와 뜨거운 불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비추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을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빠! 엄마! 데이지!” “안 돼!” 안 돼, 라는 아빠의 한 마디로 소년은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 먼저 저곳으로 달려가면 안 된다. 당장 뒤돌아서 도망쳐야 한다. 안 돼라는 한 마디에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여동생을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음이,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자기마저 속절없이 죽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담겼다. 두 음절짜리의 짤막한 단어에서도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생명이 교차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째서 무시무시한 일인지 아직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다만 공포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쳤다. 몬스터의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뒤돌아서서 숲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아까 전에 들은 단어만이 반복되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얼마나 내달렸을까. 뱃속이 심하게 아려왔다. 마구잡이로 달리는 바람에 속이 꼬여버렸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하고 아득하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소년의 시야에 남자가 비추었다. 혹시 마을을 습격한 무리일지도 몰라! 소년이 순식간에 근처 수풀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남자가 소리친 말에 소년은 안심했다. “나는 순찰병이요! 생존자 없소이까!? 나는 순찰병이요! 제기랄. 생존자, 생존자 없소이까!?” 때때로 순찰을 명목으로 화전촌에 세금을 물러 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세금을 피해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온 화전민 입장에서는 죽일 놈들이 따로 없었지만, 소년의 눈에는 지금 저 병사가 천사처럼 비추었다. 소년이 덤불에서 뛰쳐나갔다. “저, 저요! 병사 아저씨! 여기 있어요!” “오, 이럴 수가! 신이시여, 정말로 있었어!”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그 얼굴에 소년은 완전히 안심했다. 남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반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계속 안심할 새가 없었다. 소년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몬스터, 몬스터가 습격했어요……마을이 불탔어요! 엄마, 아빠가!” “좋아. 넌 용감한 아이야. 진정해라. 진정해.” 남자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지금 토벌대가 마을에 진입했단다. 나는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라는 명령을 받았지.” “토벌대요? 정말이요?” 아이가 껑충 뛰었다. “정말 엄마랑 아빠가 살 수 있는 거예요? 여동생도? 마을사람들도?” “물론이지. 약속해주마. 곧 있으면 넌 모든 마을사람이랑 함께 있을 거란다.” 소년은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자기를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허황된 말을 지어낸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소년 또한 남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어딘가 기대고 싶어지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그렇죠!……으흑, 으흐흑…….” “이런. 긴장이 풀린 모양이구나. 옳지, 이리 오렴.” 남자가 소년을 안았다. “동생 이름이 데이지, 맞지?” “흐윽……아저씨, 데이지를 알아요?” “알고 말고. 그리고 네 이름은 루크이고.”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목덜미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가고 있었다. “맞아요.” “너희 마을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단다.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거든! 심지어 루크 네가 일곱 살 때 고백한 이웃집 여자아이에 대해서도――.” “엑? 와악! 와아악!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공포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세상에! 아빠가 이 순찰병 아저씨한테 자기 얘기를 들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는 자기 얘기라면 뭐든지 떠벌리고 다녔으니까. 남자가 낄낄거렸다. “좋아. 얼굴이 이제 좀 볼 만해졌구나, 용감한 소년!” “하아……아빠도 진짜.” “자, 마을로 가자꾸나. 이제 아버지를 만나야지.” 안 그래도 당장 만나고 싶은걸요, 하고 소년이 남자의 품에서 벗어났다. 소년은 한층 가벼워진 기분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 주변의 숲길은 전부 꿰고 있었으므로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 * * 타악!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가장자리에. 나는 과녁에 꽂아넣었다는 걸로 만족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라피스가 곁에서 말했다. “이것도 못 쏘면 그냥 죽어야지.” 다음 화살을 장전하면서 대꾸했다. 나는 요새 쇠뇌를 연습했다. 자신을 보호할 수단을 하나쯤 갖고 싶었다. 활은 숙련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창과 칼은 근접전 무기라는 점에서 익히기 싫었다. 모험자랑 직접 창칼을 맞대라니! 무섭잖아. ‘쫄보스럽지만 뭐 어때.’ 자기 분수를 알 노릇이었다. 싸움 실력도 없는 애가 괜히 나대봐야 죽기나 더하겠어. 그리고 막말로 마왕방에 꼭꼭 숨어서 관전하는 것보다는 쇠뇌라도 쏘는 편이 훨씬 더 용감한 행동이었다. “어제 주문하신 상품을 가져왔습니다.” 라피스가 말했다. 쇠뇌를 연습하는 시간에 왜 갑자기 찾아왔나 싶었더니 역시 상인이라고 할까. 장사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라피스 녀석이 갑자기 흥정을 시도하는 게 아니겠는가. “장당 오백오십 골드를 받겠습니다.” “뭐, 오백오십?” 화살을 장전하는 것도 잊고 내 목이 휙 돌아갔다. 라피스는 천연덕스럽게도 무표정이었다. 하! 벼룩의 손톱 때까지 달여먹을 것 같으니라고! “어이, 장난하자는 거야? 장당 삼백 골드.” “한 장에 오백 골드입니다. 그 이하로는 절대로 안 돼요.” “그래도 비싸. 한 장에 삼백오십 골드.” 그러자 라피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백오십 골드. 설령 사탄이 강림할지라도 사백오십 골드에 판매하지는 않겠습니다.” 상인의 자존심이 여기 걸려 있습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듯한 어투였다. 쯧. 나는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쇠뇌에 화살을 장전하면서 말했다. “두 장에 칠백 골드로 구입하지.” “……세 장에 천이백 골드.” 흠. 세 장에 천이백 골드라. 권양기(winch)로 화살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쇠뇌를 들어올렸다. 기민하게. 그러나 조급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일순 숨을 멈춘 다음에 방아쇠를 눌렀다. 현이 튕기었고,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타악!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 분에 두 발을 쏘아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 정도 위력이라면 적어도 모험자 한 명은 골로 보낼 수 있겠지. 나는 발치에 조심스레 쇠뇌를 내려놓고 라피스한테 오른손을 내밀었다. “콜.” “좋습니다.” 라피스가 내 손을 마주잡았다. “단탈리안 전하께선 상인이 되었어도 대성하셨을 겁니다.” “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물론 칭찬입니다.”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식으로 라피스가 말했다. 하긴 군인한테 군인답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칭찬이듯이 상인에게 상인답다고 듣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겠지. ─ 케륵! 케르륵! ─ 꺄르르르! 주변에서 고블린과 요정들이 축하하며 환호했다. 마치 두 강대국이 사흘 밤낮으로 토론한 끝에 겨우 대타협을 이루어낸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때를 맞추어서 고블린이 뭔가를 건네주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준 것이었다. ─ 케르르. 허허. 최근 요정들을 너무 귀여워해서 그럴까. 블링이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서비스까지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으이구, 귀여운 것. 이럴 필요는 전혀 없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식이 심부름해온 모습을 본 부모와 같이 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다, 이 녀석.” 블링이 이마에 쫍 하고 입을 맞추었다. ─ 케르! 케르르! 아휴, 좋아서 죽네. 앞으로 더 자주 스킨십을 해줘야겠다. 나는 근처의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잠깐 운동했을 뿐인데 숨이 차올랐다. 원래 세계에서나 여기에서나 체력이 저질스러운 건 어쩜 변하지 않는다. 이마와 목덜미를 열심히 수건으로 닦고 있자니, 어라. 이번에는 요정들이 낑낑대면서 뭘 들고 오는 것 아니겠는가. “와우.” 요정들은 막사발에 물을 담아왔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지 네 마리가 사발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마 단체로 수계열 마법을 써서 만들어낸 생수가 아닐까. 고마워라. 나는 단번에 물을 들이켰다. 암반 지하수처럼 차가운 물이 식도에 흘러내렸다. “캬아.” 서비스에는 마땅히 팁이 뒤따라야지. 나는 네 마리 요정을 차례대로 귀여워했다. 손가락으로 뺨을 쓰다듬었고, 배꼽을 간지럽혔다. 요정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행복해.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림 얼마나 좋을까. “……단탈리안 님은.” “응?” “몬스터한테 무척 상냥하시군요.” “그야 뭐. 이렇게 귀여운걸.” 손가락 끝으로 요정의 머리를 막 문질러주었다. 꺄르르르! 요정은 내 손가락을 붙잡고 철봉에 매달리듯 온몸을 흔들었다. 녀석들에게 내 손은 아마 조금 규모가 작은 놀이터쯤 되는 모양이었다. 짜식들, 난 비싼 남자지만 기꺼이 너희를 허락하마. “단탈리안 님.”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가 무언가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내밀고 있었다. “어? 이건 또 뭐야.” “포션입니다. 상처를 치유해주지요.” “설마 나 주는 거냐?” “예. 서비스입니다.” 자고로 공짜는 마다하지 않는 법. 나는 얼른 포션을 건네받았다. 개당 10골드가 넘어가는 고가 제품이라서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타이밍 좋게 들어오니 저절로 신이 났다. 역시 쿤쿠스카 상회! 고객을 감동시킬 줄 알았다. “고마워, 라피스.” “천만에 말씀입니다.” “와아. 도대체 무슨 원리이지? 마법이 함유된 건가, 아니면.” “…….” “마석을 갈아서 조합한 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물질이 마력을 머금을 수 있다니까, 잘만 하면.” “…….” 응? 라피스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포션.” 하고 그녀가 내 손에 든 포션을 가리켰다. “그거, 꽤 비싸요.” “응. 알아. 그러니까 고맙다고.” “…….” “……?” 여전히 푸른 눈동자가 날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헉, 설마? “혹시 비싼 거니까 다시 돌려달라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엉, 그래? 이거 내 꺼 맞지?” “예.” 기분 탓일까. 라피스의 무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냉냉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비스를 하긴 하되 아깝다는 심정인가……쯔쯧, 배풀 때는 확실히 배풀어야 성공하는 법이거늘. 라피스도 아직 대상(大商)이 되기에는 일렀다. 그녀가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중규모 순간이동 스크롤을 사신 것인지요? 저로서는 값비싼 물품을 팔수록 실적이 올라가니 감사합니다만.” “음.” 중규모 순간이동 스크롤. 정원 스무 명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는 마법도구이다. 대(對)마법 방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요새를 공략하거나, 고위 마족이 근위병만 데리고 어디를 급히 가거나 할 때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값이 비싸다. 고위 마족이라면 순간이동을 할 줄 아는 마법사 한 명쯤은 부하로 두기 마련이었고, 그런 마법사가 없는 마족에게는 스크롤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여러모로 계륵과 같은 아이템이라고 할까. ‘지금 내게는 더없이 쓸모 있지.’ 내가 빙긋 웃고만 말았다. “지난 번에 의뢰한 일은?” “……대답하실 마음이 없군요.” 라피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해하지 마. 단지 곧 있으면 너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하신 바를 보고하겠습니다. 사르데냐 왕국 북부지방에는 총 노예시장이 서른다섯 곳 있습니다.” 하고 그녀가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곳에는 노예 경매소의 주인명과 위치, 규모가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고급 성노가 거래될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은 세 군데뿐입니다. 그곳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단탈리안 전하께서 요구하신 노예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 내가 오른손을 꽉 쥐었다. 벌떡 일어서서 서너 번 껑충 뛰었다. “잘했어! 라피스, 넌 진짜 최고의 인재야!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놈들은 눈꾸녕이 죄다 단추구멍인 게 분명해. 네가 고작 5급 사무원이라니!” 내 반응이 흡족한 것일까,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번에 대대적으로 결의를 나눈 이후, 라피스는 때때로 지금과 같이 미소를 보여주었다. 평범한 사람과 비교하자면 무표정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나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귀여운 것도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경비가 삼엄하고 보안도 철저하더군요.” 어쭈? 정보를 내놓기 전에 간을 보겠다 이거지? 신나서 춤을 추던 발끝이 딱 멈추었다.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보너스로 10골드를 더 지급하지.” “경비병과 내부인을 매수하느라 자금이 꽤 들었습니다.” “……다시 10골드를 추가로.” “이번에도 쿤쿠스카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엑.” 나는 질려버렸다. “야, 넌 진짜 상인이다.” “더없는 극찬입니다.” 라피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할까. 왠지 모르게 통쾌하다는 기분이 느껴진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건가. 꼭 한방 먹였다, 싶은 오오라가 풀풀 풍기는데. “에구구.” 정보 하나를 얻는 데 예상 외로 지출해버렸다. 이로써 그녀와 나는 한 대씩 주고받은 셈이 되었다. 과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쿤쿠스카 상회의 일원, 마냥 당하고 사는 법이 없어요. “파르네세 영애의 정보입니다.” 라피스가 품속에 숨겨둔 나머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치밀함에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원하던 정보를 얻었다는 것에 흐뭇해하며 종이를 건네받았다. 서류에는 한 명의 소녀에 대한 신상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소녀는 자그마한 노예상단에 묶여 있었다. 노예상단이 며칠 후에 거대 경매소가 있는 다른 도시로 옮겨갈 거라는 예정까지 첨부되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통칭 「철혈의 여재상」. 전생에 나를 죽어라 괴롭힌 여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전생의 던전 어택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인 나를 고생시킨 주범 중 한 사람. 마왕들이 인간계의 절대적인 적수로서 플레이어와 대립한다면 라우라는 인간계의 또다른 세력으로서 플레이어와 사사건건 부닥친다. 오죽하면 게이머가 마왕한테 죽는 경우와 라우라의 세력 때문에 죽는 경우가 엇비슷하다. 던전 어택 팬사이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라우라를 욕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곤 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던가. ‘그녀를 반드시 내 편으로 끌어들인다.’ 나는 세계가 어찌 돌아갈지 안다. 그렇다면, 하고 깨달았다. 정보를 이용해서 굳이 돈만 벌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의 아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던전 어택에는 용사와 협력하는 무리만큼이나 대적하는 무리도 많았다. 그중 대다수가 결국 용사의 인간적인 매력에 홀라당 넘어가버리긴 해도, 라우라처럼 끝끝내 적으로 남는 이도 있다. 그런 자들을 모아서 규합한다면 능히 던전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라우라는 영입후보 제1순위였다. 그녀만큼 용사를 증오하는 자가 없으니까. 그녀의 최후는 게임에서도 명장면으로 꼽히는데, 그만 항복하라고 소리지르는 용사한테 가볍게 콧방귀를 뀌어준 다음, ‘천박한 모험자여. 이 몸은 증오, 오직 증오로 살아왔다.’ 하고 성벽에서 그대로 투신자살한다. 깔끔하디깔끔한 최후. 유언으로 이런저런 속사정을 전부 나불거리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자살하는 여타의 적들과는 일선을 달리했다. 즉 그녀는 유능하고, 용사측을 싫어하고, 심지어 마족과의 협력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마왕인 내가 그만한 여걸을 탐내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하리라. 서류를 꼼꼼이 살피는 나에게 라피스가 말했다. “왜 일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개 인간이라.”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글쎄. 그건 두고봐야 알 일이지.”     00021 인간 사냥 =========================================================================                                             라우라를 영입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우선 신분을 위장해서 도시에 잠입했다. 신분패는 라피스가 구해주었다. 그리고 행상(行商)으로 위장해서 마차꾼과 용병 세 명을 고용했다. “잘 부탁드립니다요, 장사꾼 형씨.” “나야말로. 내 안전이 그대들에게 달렸으니 무사히만 넘어가면 돈을 두 배로 주겠네.” 전부 자연스럽게 노예상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노예상인은 커다란 대상(隊商) 행렬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도적떼가 습격할까 두려워서 상인들끼리 무리를 짓고 다니는 것이었다. 노예상인이 낀 대상은 과연 규모가 제법 되어 크고 작은 다섯 개와 용병 사십 명이 몰려다녔다. 멀리서 바라보면 군부대가 움직이는 걸로 착각할 법했다. 웬만한 동네 도적떼로는 건드릴 엄두도 못 내겠지. 나는 그들과 목적지가 같은 것처럼 포장해서 자연스럽게 행상 대열에 끼어들었다. 용병이 세 명이나 있다고 말하니 군소 상회에선 군말 없이 나를 반기었다. 병력이 늘어나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라면서. “로리타 행수께선 어떤 물품을 취급하시오?” “약초를 주로 다룹니다.” “약초라. 별로 돈이 안 될 거 같은데…….” 작은 상회의 회장이라는 자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기껏해야 풀이나 장사한다니까 나를 깔보는 것이었다. 상인끼리 자존심이라도 다투어보자는 얘기일까. 내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하하. 확실히 도시 안에서만 약초를 사고 판다면 돈이 안 됩지요. 하지만! 이쪽 도시에선 흔하디흔한 약초가 다른 동네로 넘어가면 불로초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디다.” “허어? 어째서 그러외까?” “도시마다 서너 명 있는 약초꾼들은 그네가 항상 다루는 약초만 취급합니다. 같은 고뿔에 걸려도 이 도시에서 처방하는 약초와 저 도시에서 처방하는 약초가 또 다르지요. 그러니 약효는 엇비슷해도 모양새가 다른 약초를 보면 사람들은 꼭 새로운 묘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라기 마련입니다.” 오호라, 하고 상대방이 맞장구쳤다. 이쯤 되니 주변의 다른 상인도 내 말에 귀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상인은 이익이 된다면 일단 없던 관심도 한번 가져보는 인종. 약초 행상이라는 건 처음 들어봤을 테니 흥미가 동했겠지. 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연기> 스킬 발동.’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효과음이 울렸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이거 정말 귀한 정보입니다, 하는 어투로 내가 떠벌렸다. “평소에는 그냥저냥 입에 풀칠이나 하면 괜찮은 돈벌이였습니다만. 하, 사정이 달라졌지요. 아주 좋아졌습니다.” “사정이라니? 요새만큼 경기가 안 좋은 때도 없었소만.” “요즘 경기가 나빠진 까닭은 아무래도 '검은 죽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상인이란 물건을 살 때나 팔 때나 인간을 대접하는 직업이었다. 공급자도 고객도 아예 전염병에 걸려 죽어버리니 상인으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든 상인이 불경기에 신음해도 오직 저만큼은 예외입니다. 원인도 모를 전염병에 사람이 떼로 죽어나가니 아무래도 약초에 대한 관심이 부쪽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다른 도시에서 효과가 입증된 약초가 있다는데, 거지부터 귀족까지 득달같이 달려들기 마련이지요.” “……!” 상인의 얼굴에 충격이 서렸다. “설마, 로리타 행수! 검은 죽음을 극복하는 약초가 있다는 말이요!?” “약초꾼길드와 상인길드에 동시에 가입한 상인은 전 대륙을 뒤져봐도 저 혼자일 겁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저만큼 대륙 각지의 약초를 접해본 사람이 달리 없지요.” 내가 능글맞게 웃었다. “저 초원의 나라에선 검은 죽음조차 그리 희귀한 질병이 아닙니다. 하하!” “오, 신이시여! 그게 정말이요?” “길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상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질병에 대항책이 있다니까 놀랍고 기쁠 수밖에. 몇몇 사람은 내가 크게 한탕 잡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부러움이 넘실거리는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중에 내 목표인 노예상인의 얼굴이 섞여 있음을 슬쩍 확인했다. 나는 일부러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방긋 웃었다. 그날밤, 우리는 가도에 앉아 노숙했다. 한여름이라서 밤을 지새우기 어렵지 않았다. 마부꾼은 마차에서 말을 풀어 적당히 방목해두었고, 용병들이 지친 다리를 주무르면서 물이 잔뜩 섞인 맥주를 몇 모금씩 마셨다. 내가 고용한 용병 세 명에게는 특별히 농도가 짙은 맥주를 포상했다. 용병들이 무척 감사해했다. 나는 친목을 명분으로 내친김에 다른 상회들에도 맥주통을 나누어주었다. 각 상회에서는 심부름꾼을 보내 감사하다고 전해왔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있자니, 우리 막사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노예상인이었다. “늦은밤에 실례한 것이 아닌지, 죄송합니다.” 청년. 노예를 사고파는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선하고 예의 발랐다. ‘좋아. 낚였다.’ 내가 천만의 말씀이라면서, 지금 막 자그마한 술상을 차린 참이라며 청년을 환영했다. 청년은 환대에 안도했는지 곧 자연스럽게 술잔치에 녹아들었다. 나이가 젊어도 역시 상인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대인능력과 대화술이 탄탄했다. “로리타 행수 님을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사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행수를 본 것도 처음이에요.” 청년이 살짝 취기가 돈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이름은 잭이었다. “행수란 죄다 나이가 든 능구렁이밖에 없을 줄 알았어요.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십니다.” “잭은 저보다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까. 허, 자화자찬으로 들립니다.” “후후후……저는 애송이입니다. 대상인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이랍시고 작은 상회 하나 차려준 것을 그저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지요.” 잭이 맥주를 벌렁 들이켰다. “물려받은 것이면 또 어떻습니까? 시작은 중요치 않습니다. 저희 상인에게 중요한 것이란 결국에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패기가 있었지요! 가문의 인맥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잭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원하는 대로 장사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당신께서 이루어놓은 사업,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업의 일부분을 도맡으라 명령하시는 겁니다. 결국 저는 조금 믿음직스러운 부하 직원에 다를 바 없어요.” 잭의 얼굴이 우울했다. 아이구, 나이가 많아봤자 이제 스무 살일까. 질풍노도의 시기 아니랄까봐 고민도 새삼스럽지 않았다. 저 나이에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자신의 고민이 무척 특별한 것인양 착각해버리는 일이지. 오히려 그것이 특별하지 않고 보편적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자기만의 특별한 고민을 갖게 되는데 말이다. 아예 고민하길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이지만. 내가 이곳에 상담사로 온 건 아니었다. 나는 듣기 좋은 말, 위안이 되는 말을 골라서 했다. 아버지도 다 자식인 당신을 생각해서 그럴 거라는둥, 요컨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담이었다. 사실 쓸모없는 잡담만큼 쓸모있는 것도 드물었다. 지금도 잭의 호감도가 실시간으로 올라간다는 게 홀로그램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들어가자 호감도 오르는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 이름: 잭 올란드 종족: 인간   소속: 메도라눔 상회(롬바르드 상회 산하) 속성: 선(+45) 레벨: 5    명성: 57 직업: 상인(E) 통솔: 10  무력: 5   지력: 23 정치: 20  매력: 9   기술: 6 호감도: 46 현재심리: ‘로리타 행수 님이야말로 내 우상에 가까워!’ ━━━━━━━━━━━━━━━━━━━━ 호감도가 자그마치 40을 넘어섰다. 수치만 두고 보면 라피스와 비슷했다. 거 참. 이러다 호감도 올리기가 내 최대의 특기가 되는 거 아닌가 걱정 아닌 걱정이 들었다. 술기운이 정점에 이르었을 때, 잭이 본격적으로 자기 얘기를 꺼내들었다. “솔직히……저도 로리타 행수 님처럼 장사하고 싶었습니다.” 요는 자기가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광고하는 것이었는데, 내 감상을 토로하자면 자기가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해왔는지 고백하는 것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오늘밤에 날 찾아온 것도 같은 상회의 부하들이 자기를 묘하게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라나. 아이구! 지나치게 잘난 애비를 둔 탓인지 아주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그래도 속뜻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흔히 장사는 이기심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세상을 위해, 세상에 이익이 되는 장사를……저는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장사하는 상인은 소상이고, 가족과 상회를 위해 장사는 중상이며, 국가를 위해 장사하는 상인은 대상이라고. 그렇지만 세상을 위해서 장사하는 상인은 어떨까요? 그거야말로 무릇 상인이 추구해야 마땅한 이상 아닐까요…….” 젊고, 콤플렉스 덩어리에, 순수하다. 즉, “암, 그렇지요. 잭의 말이 맞습니다.” “역시 로리타 행수 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만큼 벗겨먹기 쉬운 애송이가 없다. “대륙의 만민을 구할 수 있는 약초라니! 그런 물품을 취급하다니! 대단합니다. 정말로 대단해요.” “우연히 운이 맞아 떨어졌을 뿐입니다. 저 역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 적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그렇지요? 상인은 결과로 말한다, 그리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결과적으로 로리타 님은 세상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 셈입니다.” “제 얼굴에 과분한 금칠을 칠하시는군요.” 내가 멋쩍게 웃었다. 쯧, 라피스한테 만날 털리는 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얘는 호구였다. 그것도 아주 큼직한 호구. 지력이랑 정치가 20을 넘겼는데도 왜 상인 랭크가 고작 E에 머무는지 알 만했다. 얘 아버지가 안전한 사업만 맡긴 것에는 아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이유가 절반을 차지할 거다. 세상 전체를 위한 이익이라니? 문장 자체로 이미 형용모순이다. 이익은 누군가의 이익이다. 상인이란 그 '누군가'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자들이고. 형용모순을 진지하게 울부짖는 사람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멍청이 둘 중 하나일 텐데, 잭은 적어도 지금은 후자임에 틀림없다. “잭은 어떤 물품을 다루고 있습니까? 그러고보니 그걸 아직 못 들었군요.” “……남에게 떳떳하게 밝힐 만한 물품은 아닙니다. 아니, 물품인지도 의문스럽지요.” 잭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로리타 님에게 무얼 숨기겠습니까. 이것도 위선이겠지요. 예, 노예입니다. 저는 노예를 운반해서 도시에 공급하는 노예상인입니다.” 내가 다소 놀란 척했다. “노예상인이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혹시……로리타 님도 노예를 물건이라 생각하십니까?” “만약 노예가 물건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물건이어야 하겠지요. 잭, 저는 당신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잭과 같은 이가 노예를 사고판다는 것이 의외였을 뿐입니다. 왜 아버지를 그리 싫어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하고 잭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그 후로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잭이 느끼기로 허심탄회했다는 뜻이었다. 타이밍을 노려서 당신이 어떻게 노예를 관리하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 잭이 마뜩치 않아 했으나, 어쩌면 선배 상인으로서 조언해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해주자 흔쾌히 허락했다. 우리 둘은 꾸벅꾸벅 조는 용병들을 지나쳐서 잭의 막사에로 향했다. “여기가 제가 머무는 곳입니다. 메도라눔 상회에 어서오시지요!” 잭의 막사는 내 것보다 훨씬 그럴듯했다. 화톳불을 네 개나 지피었고, 용병이 열 명이 넘었다. 노예는 스무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화톳불 하나에 둥그러니 앉았는데 발목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략 대여섯 명이 쇠사슬을 공유했다. 우리가 다가오자 용병 두엇이 슬쩍 이쪽을 노려보았다. 용병은 잭을 알아보고 다시 저들끼리 카드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고용주에 대한 태도라기에는 적이 무례했으나 저들도 잭도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이동할 때도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게 보통입니다만, 저는 야밤에만 쇠고랑을 채웁니다. 하루 내내 쇠고랑에 채워진 채 이동하다보면 발이 망가지기 십상이거든요. 아무리 노예라도 그건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잭이 나지막하게 떠들었다. 아마 자기를 칭찬해달라는 의도인 것 같았다. 나는 기대에 부응하여 대단히 자비롭고 인간적인 처사라고 추켜세웠다. 아마 똥구멍을 핥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발명된 것이리라. 겉모습과 다르게 내 속마음은 영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기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잭이 꼭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가려운 구석을 긁어주었다. “로리타 님께는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노예가 있습니다. 아주, 아주 특상이지요! 아무리 로리타 님일지라도 이거엔 깜짝 놀라실 겁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00022 인간 사냥 =========================================================================                                                      “호오, 기대됩니다.” 나도 모르게 혀끝이 입술을 핥았다. 감정이 섣불리 노출되지 않게 유의하면서, 잭이 떠벌리는 말에 차근차근 맞장구쳤다. 그는 이제 완전히 취해 있었다. 똑같은 말을 자꾸 반복했다. 덕택에 맞장구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입니다! 요정이 잠들어 있어요. 노예라 부르기에도 뭣하지요. 이보게들! 보물은 잘 지키고 있겠지?” 잭이 날 데려간 곳에는 꽤 몸집이 큰 마차가 정차해 있었다. 마차 앞에서 용병 두 명이 한창 카드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잭에게 퉁명스레 고개만 슬쩍 숙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밤새서 일하느라 귀찮은데 뭐하러 왔냐는 태도였다. 카드에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예에, 그렇습죠. 제기랄. 한짝이군.” “두짝이다. 네가 졌어, 병신 쪼다야. 돈이나 내놔.” 내가 피식 웃을 뻔했다. 뻔뻔한 놈들. 제기랄이라느니 돈이나 내놓으라느니, 전부 잭 본인이 알아들을 수 없게 우회적으로 쏘아댄 말이었다. 잭은 주정뱅이답게 자기 욕하는 것도 알아먹지 못했다. “아마 자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하. 천천히 열지요.” 그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구석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하고 잭이 얼른 횃불을 가져왔다. 횃불이 마차 안쪽을 샛붉게 비추었다. 여인이 문소리에 잠이 깼는지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턱선이 갸름한 소녀였다. 이제 열일곱 살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잠깐 잭을 살펴보더니 이내 그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실로 쳐다보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사람의 시선에는 보통 여러 가지 의미가 덧칠된다. 아까 낮에 상인도 나를 쳐다보았으나 그것은 비웃기 위해 쳐다본 것이었다. 잭이 나와 눈길을 마주친 것엔 호감을 사고 싶다는 의도가 배어 있었다. 단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혹은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상대를 쳐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몹시 드물다. 산고양이의 눈초리나 그러할까. 다른 사람을 비웃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얻고 싶다, 그 같은 욕구가 시선에 서리기 마련이다. 오직 순수히 바라보기만 하려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짐승처럼 비웃음이나 호감 따위의 욕구가 없거나. 아니면 욕구를 굳이 타인에게서 갈구하지 않을 만큼 본인이 완벽하거나. 소녀는 그 시선으로 벌써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분은 귀족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자그마치 공작 영애지요. 정확하게는 영애였습니다. 국화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거기서 수국(水菊)파를 이끌었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2위 계승자입니다. 하하. 정말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지요. 아니, 분이었지요…….” 잭이 옆에서 한창 떠들었다. 그 와중에 소녀와 나는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돌리면 왠지 모르게 패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소녀는, 비록 어떤 의미에서 그러는지 알 도리가 없어도,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건방지긴.’ 굳이 시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네가 얼마나 잘난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어디 마음대로 평가해봐라. 나 또한 나만의 기준으로 당신이 영웅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테니까. ‘상태창.’ 띠링, 하고 홀로그램이 간략하게 떴다. 호감도가 낮아서 최소한의 정보만 표시됐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라우라      6   15   7 ━━━━━━━━━━━━━━━━━━━━ 음……. 솔직히 실망스럽다. F급 모험자보다야 훨씬 더 강력하지만 그뿐. 아마 등급을 매기자면 E급에서 D급 모험자 중간에 위치하지 않나 싶다. 십 대 소녀로서 그만한 전투력을 갖춘 게 어디냐 싶어도, 그녀는 훗날 반(反) 영웅이 될 인재이다. 적어도 모든 전투능력치가 두 자릿수이기를 바란 것은 과욕일까. ‘애당초 뛰어난 인간이었던 게 아니라, 시련과 고난을 겪어가며 성장한 것이었나…….’ 라우라는 불행한 개인지사로 유명한 NPC였다. 대귀족의 여식으로 태어났지만 성노예로 전락, 십 년의 세월 동안 윤간으로 얼룩져서 지내다가 귀신과 같은 책략과 배신으로 인생을 역전시켰다. 만약 그녀가 천재라기보다 성장하는 유형이라면 지금 그녀를 영입하는 의미가 대폭 사라진다. 내 가슴을 가득 채운 기대감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무슨 의미이지?” 나는 아직 생각에 잠겨 있어서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녀가 말했다는 것도 몇 초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네 시선의 의미에 대해 하문했다. 그런 시선은 처음 받아보는군.” 소녀가 오른손으로 옆머리를 꼬았다. 아, 라우라는 고민에 빠질 때 항상 저런다. 게임에서도 그랬지. 나는 이 세계의 완성도에 다소 감탄하면서 반문했다. 상대방의 낮춤말이 하도 자연스러운 탓인지 내가 저절로 존댓말을 쓰게 되었다. “제 시선이 어쨌길래 그렇습니까?” “그대는 처음에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에게 기대를 품은 이가 적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대는 직후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기대가 배신당한 것처럼, 내가 그대의 기대에 못 미친 것처럼 말이다.” “허어.” 내 목소리에 희미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죽은 줄 알았던 불씨가 용케 살아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잭에게 양해를 구했다. “과연 잭 님이 자랑할 만한 상품입니다.” “그렇지요? 하하. 정말 외모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리 예쁜 여자는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흥미가 동하는군요. 잠시 노예와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잭 님의 자랑거리가 대체 어느 정도 가치를 갖고 있는지 꼭 한번 품평하고 싶군요. 괜찮겠는지요?” 잭이 흔쾌하게 허락했다. 내가 마차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동안 소녀는 줄곧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파르네세 영애. 당신의 주인은 당신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모양이군요.”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도록. 내 가문은 이미 멸망했으니.” 오호라, 게다가 자신의 가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평생을 자랑스러운 대귀족으로서 살아왔을 텐데. 쓸데없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바라본다라. 점점 더 기대가 커져갔다. ‘그래. 설령 그녀가 성장하는 스타일이라 할지라도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잖아.’ 애당초 마음가짐이 특출나지 않았다면 성노에서 철혈재상으로 거듭나지도 못했을 터. 소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저 자를 내 주인이라 칭함은 옳지 않다.” “어째서지요? 당신은 노예이고 그는 노예상입니다.” “어차피 저 자의 역할은 나를 어딘가로 운반하는 것. 나는 다른 사람에게 팔려가겠지.” “그 논리는 이상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금 당신은 잭의 노예입니다. 당신이 누군가한테 팔려갈지라도 또 다시 다른 사람한테 팔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네 말이 옳다. 나를 얼마나 오래 소유하고 있느냐는 결코 내 주인임을 결정하지 못하지.” 내가 유쾌해진 기분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당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없다.” 소녀가 오늘 날씨가 차갑다는 어투로 단언했다. “나는 십오 년 간 파르네세 가문의 영애였다. 그렇다고 내 삶은 파르네세라는 단어로 정의되는가? 아니다. 나는 요 반 년 동안 잭의 노예였다. 그렇다고 내 삶이 잭의 노예라는 단어로 정의되는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군가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어디에 소속된다든지, 누구의 노예가 된다든지, 그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볼 때 한낱 우연에 불과하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무엇이 우연이 아닙니까?” “죽음!” 소녀 또한 씨익 웃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만이 나에게 있어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명제이다. 설령 내 삶이 누군가에 의해 결정될지라도 죽음, 죽음만큼은 오롯이 내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는가? 내가 타인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 없다.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으로 죽는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나는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리고 있었다. 항복을 권하는 용사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주저없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여자. 그때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해도 죽음만큼은 양보할 수 없노라고. 조용한 감동이 찾아왔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증명하는 인간과 마주쳤을 때 생기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자신을 구입하러 온 자라고 생각했으리라. 우회적으로 당신이 날 사더라도 결코 굴복하지는 않겠다고 방금 선언한 것이었다. 자기 신념대로 살아본 적 한번 없는 나에게 너무나도 눈부신 자.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손에서 미끄러집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집니다.」 그러나 나는 '연기'했다. “라우라. 무척 인상적인 철학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도 주인이 없겠군요? 귀족도, 국왕도, 성황도, 사실 따지고보면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죽음 아래 종속된 필멸자이겠군요.” “그러하다.” 소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방금 그걸 긍정한 것은 대단히 위험했다. 귀족모독죄, 국가반역죄, 신성모독죄, 한 개만 위반해도 능지처참을 당하는 죄목을 단번에 세 개씩이나 저질렀다. 어째서 그녀가 공작가의 제2위 계승권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 만했다. 아마 그녀는 명목상으로만 계승권자이고 실제로는 가문에서 따돌림 당했겠지. 이 시대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당신은 그러나 아무도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겹게 고난을 이겨내고 사는 삶이든, 아무런 의미 없이 충동적으로 자살해버리는 삶이든,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흠.” 내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딱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만……왜 지금 당장 자살하지 않는 겁니까?” 소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어두컴컴한 마차, 우리는 창문으로 새어오는 달빛에 의지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잭이 용병들한테 술주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에 라우라가 입술을 열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런, 안 되지. 내가 재빠르게 그녀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읍!……으읍!” 손가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라우라가 이빨로 내 손가락을 씹었다. 그녀는 정말로 혀를 깨물 속셈으로 이를 악물어버린 것이었다. 얼마나 억세게 물었는지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미리 상황을 짐작하고 집게손가락으로 혀를 보호하지 않았으면 사태는 심각해졌으리라. “깨물지 전에 당신은 고민했습니다. 그렇지요? 몇 분씩이나 고민했어요.” “…….” 소녀가 악에 물든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손가락에서 나는 피가 그녀의 입술에 흘러나왔다. 핏방울이 턱선을 따라 흐르면서 똑똑 떨어졌다. “몇 분의 고민, 그것이 당신의 철학에서 해명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걸 삶에 대한 의지라고 부릅니다만. 이 빌어처먹을 세계에서 얼른 죽어버리지 않고 저를 살아가게 만드는, 역시나 빌어처먹을 것이지요.” “…….” “라우라. 당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한테 팔리세요.” 내가 미소 지었다. “만약을 위해 확인해두지요. 면접은 중요하니까요. 음, 혹시 사적으로 마족을 증오하거나 그럽니까?” 라우라의 눈에서 독기가 탁해지고 당혹감이 자리했다.                       00023 인간 사냥 =========================================================================                        내가 천천히 손가락을 뺐다. 피와 소녀의 침이 한데 섞여 있었다. 손가락은 소맷자락에 문질렀다. 상처 따위 전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대충. 마족이라는 말에 당황했는지 라우라가 멍하게 내 몸짓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꼭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해두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담없이 계속 이쪽을 바라볼 수 있게.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요?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족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나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느냐고요. 저는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라우라. 진지하게 대답해주세요.” “없……다.” “훌륭합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움찔했다. “저는 당신의 긍지가 보입니다. 강자의 긍지가. 어디서 썩은 냄새가 풍기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방귀 냄새와 비슷하군요. 아마도 당신은 자기 멋대로 철학을 수립한 다음, 그걸 갖고 타인을 재단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을 겁니다.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당신에게 세계란 마치 연극과 같아 이 사람 저 사람은 그저 당신이 정해놓은 배역에 따라 무대에 올라오고 퇴장하기를 반복하겠지요. 요컨대 당신은 자기를 각본가라 여기고 있습니다. 부럽군요!”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내 목소리에는 적의가 철철 흘렀다. 원래 세계에서 나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다가 한낱 초월적인 존재의 변덕심으로 인해 죽었다. 이 세계에서도 결코 원한 적 없는 마왕이라는 배역을 떠맡았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세계가 언제 엔딩을 맞이할지 몰라도, 적어도 엔딩 직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마왕으로 살아야 하리라. 등장도 퇴장도 단지 누군가의 유흥에 불과한 채. 라우라는 죽음만큼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 사치조차 누릴 수 없는 자가 있음을 이 아가씨가 상상이나 해본 적 있을까. “저는 단 한번도 자신을 각본가로 여길 수 없었습니다. 각오가 없었어요. 어쩌면 그럴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멍청하게 놓쳐버렸지요. 그 대가가 이것입니다.” 나는 머리에 묶은 터번을 풀었다. 수건이 마차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머리통을 살짝 옆으로 돌리자, 라우라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뒤통수에 자그맣게 나 있는 뿔을 목격한 거겠지. “마, 마왕의 증거…….” “밖에서 누가 듣겠습니다.”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갖다댔다. 기분이 유쾌해졌다. 꼭 오래동안 끊은 담배를 연거푸 피어버린 것처럼 머리와 심장이 마비되었다. 나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 있으며 괜히 라우라한테 화풀이한다는 것이 자각됐다. 허나 이상하게도 입구멍에 재갈을 물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확실하게 그녀의 기를 죽여놓아야 한다. 그런 확신이 왠지 모르게 들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또 다른 자아가 있어 나지막하게 조언하는 것 같았다. “제가 앞으로 당신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말해드리지요. 당신은 브르타뉴 왕국의 궁중백작, 비텔스바흐 가문에 팔려갑니다. 그곳 가주(家主) 취미가 당신처럼 영락한 귀족 여식들을 모아서 질펀하게 윤간 파티를 개최하는 것이지요. 당신은 아름답고 어리지요. 게다가 대가문의 계승권자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군침이 흐를 만한 사냥감 아닙니까. 미리 축하드립니다! 분명 비싸게 팔릴 거예요.” “으…….” “궁중백의 저택에는 지하실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중 한 곳에 당신이 감금됩니다. 3년 동안은 밖에 나가보지도 못해요. 궁중백과 그의 부하들에게 돌림질 당하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잠깐만요. 라우라, 왜 고개를 돌립니까? 왜 그러세요?” 상대방이 자꾸 턱끝을 틀려 했다. 나는 그녀의 턱을 잡아세웠다. “그, 그대의 시선이…….” “제 시선이 어때서 그런지요. 대답해주세요.” “그대의 시선이……너무…….” 아무래도 그녀는 사람의 시선에 매우 예민한 듯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끝내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턱을 돌려세웠는데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문득 조금 연기를 심하게 했나 싶었다. 박진감을 넘치게 하려고 일부러 감정을 악독하게 먹은 측면도 있었지만, 이거. 효과가 너무 뛰어났다. 나는 슬슬 <연기> 스킬이 아주 못 써먹을 기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말을 폭포처럼 쏟아낼 수 있는 것에도 <연기> 스킬 덕택인지도 몰랐다. “시선을 피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만 당신을 약자로 오해해버리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 라우라가 힘겹게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그곳에 공포가 숨어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학심이 불거졌다. 내가 이런 성격을 갖고 있었나? 어쩌면 공포의 감정에 환호하는, 마왕으로서의 본성일 수도 있었다. 여하간 당장 판단 내리지 않아도 좋았다. “좋은 눈이군요. 자아.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말 같습니까?” “……아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소아성애자에다 고문이 취미인 변태 귀족한테 팔리고 싶습니까? 아니면 종족이 다소 별나긴 해도 사고방식이 정상적이며 뭣하면 당신을 노예가 아니라 부하로 취급할 생각까지 있는 사람한테 팔리고 싶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 마, 마왕이 왜 나를 필요로 하는가?”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또래에 비해 능력이 출중하고 똑똑하다지만 그래봤자 십대 여자아이. 어디서 마왕을, 아니 중급 마족이라도 접해봤겠는가. “나, 나에게는……파르네세 가문에 대한 계승권과 외모……두 개 정도밖에 없다. 내 영혼이라도 강탈할 셈인가?” “이미 망해버린 가문에도, 당신의 미모에도, 영혼에도 관심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지략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지략……?”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자신을 손쉽게 노예로 넘겨버린 친족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애시당초 내 삶을 이렇게 망쳐버린 세상의 만인에 복수할 마음은 없습니까.” “…….” “저는 당신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음을 압니다. 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낼 거예요.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줍시다. 이것이 당신들이 우리를 버린 결과라고!”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라우라는 무언가 홀린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녀가 자석에 이끌리듯 손을 올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는지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의 처지를 전부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처럼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앞으로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외쳐주세요. 제 이름은 단탈리안입니다.” 나는 머리에 도로 터번을 묶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나왔다. 소녀가 나를 필요로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일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면 당장 몬스터 부대를 소환하여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킬 생각이었으나……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라우라를 얻기 위해 내가 쳐놓은 덫은 한 개가 아니었다. 멀리 수풀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잭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용병들이 심드렁하게 카드를 이리저리 나누었다. 그들은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그들이 나와 교대하듯이 마차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용병들의 천박한 목소리가 마차에서 조금씩 새어나왔다. ‘성노예 교육이군.’ 왜 저들이 잭의 행차를 달가워하지 않았는지 짐작됐다. 그나저나 대단한 소녀 아닌가. 아마 매일 밤마다 교육을 빌미로 강간당했을 것이다. 귀족 여식으로서, 아니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횡포였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소녀는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고작 열여섯 살 정도 된 여자애가. 나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막사로 돌아갔다. 마차가 덜컹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소리가 옅어지더니 이윽고 끊겼다. 빈 공기를 채운 것은 부엉이 울음소리였다. 상인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평원에 어스름이 푸르게 깔렸다. 상인들이 벌써 떠날 채비를 끝내두었다. 오늘 내로 도시에 도착한다면서 사람들이 기쁘게 떠들었다. 행상에게도 노숙은 도통 힘겨웠다. 대상 행렬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곧 도시에 들어가서 신선한 짚단에 누울 거라고 생각하니 허벅지에 없던 힘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로리타!” 잭이 유쾌하게 말했다. 우리 둘은 나란히 가고 있었다. 잭은 천천히 말을 몰았고,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내가 완전히 마음에 들었는지 오늘 아침에 친구가 되어도 좋겠냐고 물었다. 내 입장에서도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내가 원래 술에 약한 편은 아닌데 어째 어젯밤은 그렇게 됐네.” “하루종일 걸었는데 피곤할 만하지. 신경쓸 필요없어.” 잭과 아무래도 좋을 잡담을 나누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마차가 우리 행렬을 뒤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반나절 뒤 도시에 도착했다.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검색했다. 지나치게 경비병이 많아서 잠깐 긴장했다. 하지만 이어서 잭이 들려주는 얘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뇌물을 받으려고 저러는 거야. 평소에는 성벽에서 놀던 병사들이 상인만 오면 경비병인 척하면서 내려오지. 성문을 빨리 통과하고 싶으면 얼른 돈을 내놓으라는 수작인데……쯔쯧.” 잭이 미간을 좁혔다. 고매한 이상을 가진 그에게 경비병의 작태가 곱게 비출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잠시간 경비대 측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이내 타협했다.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경비대는 손까지 흔들어가며 우리를 환송했다. “좋은 상행이었소!” “덕택에 편안하게 여행했습니다.” “헤르메스 신의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성문에 들어서고 상인들은 각각 작별인사를 건네며 뿔뿔이 흩어졌다. 용병들은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대가로 상여금을 두둑히 챙겨받고 해산했다. 잭과 나는 비교적 늦게까지 함께했다. 그러나 도시 중앙의 광장에 들어서자 우리 또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잭과 내가 서로 포옹했다. “로리타, 부끄럽지만……혹시 시간이 되면 내가 참여하는 시장에 와주겠어?” “물론이지. 나는 네가 훌륭한 상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우리가 비록 황금에 들러붙는 파리 새끼로 취급받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면 무슨 문제겠어?” 잭은 무척 감격한 표정이었다. 「하급상인 잭의 호감도가 11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물기 어린 눈망울로 날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래……네 말이 맞아! 아버지의 의중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내 자신에게 얼마나 떳떳하냐가 문제일 뿐이지.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우리는 다시 한 번 포옹을 나누었다. 잭이 여린 팔뚝으로 내 어깨를 꾸욱 감쌌다. 어수룩하지만 순수한 이가 다른 사람에게 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호감이었다. 나는 잭을 마뜩치 않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일지라도 진심을 발휘하는 순간이 몇 번은 있기 마련이었고, 잭의 경우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그것은 인생에서 얼마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꽤 멋진 것이었다. 우리 둘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각자의 길로 떠났다. 나는 모처럼 인간에게서 느낀 감동의 여운에 잠긴 채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북문, 마굿간 옆에 약속한 대로 한 인물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그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높낮이 없이 청량한 목소리. 라피스였다. “아무래도 두 번째 작전을 선택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됐어. 뭐, 어떤 작전이든 별 상관은 없으니까.” “여기 도시에는 총 두 군데, 대(對)소환마법의 방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 곳은 영주의 관저이고 다른 한 곳은 신전입니다. 노예시장이 열릴 경매소는 도시 외곽에 위치하여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경비대가 즉각 대처하기란 어렵습니다.” 역시 라피스다. 내가 알고 싶은 정보를 딱딱 알려주었다. 만족스러웠다. “불놀이를 펼치기에 더없이 적당하군. 의뢰금에 10골드를 추가하겠어.” “오늘도 쿤쿠스카 상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자그마한 의뢰를 덧붙이고 싶은데.”   00024 인간 사냥 =========================================================================                                                 * * * 경매소 정문에 마차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경매소는 예전에 오페라로 이름난 극장이었다. 불경기에 폐업한 이후 어느 거상이 사들여 노예 경매소로 개축했다고 한다. 그곳 앞에서 마차꾼들은 담배를 피우며 어느 댁의 마차가 더 값비싸고 아름다운지 품평회를 열고 있었다. 라피스와 함께 의상대여실에 들어갔다. 여기 노예시장에선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라보도록 분장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내가 고심 끝에 샛노란 드레스를 골랐다. 금빛 가발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했다. 거울을 바라보니 웬 괴물 같은 여자가 비추었다. 어머니라도 이건 못 알아보겠지. 나는 왠지 모르게 흡족해서 아예 가슴에 뽕까지 집어넣었다. 완벽했다. “단탈리안 님, 준비가……?” 라피스는 간단하게 검정색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분장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그녀의 눈이 확 커졌다. 푸른 눈동자가 재빠르게 나를 발꿈치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다. “저……그건 도대체……?” 그녀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 웃었다. “어머나. 라줄리 영애, 평안하셨사와요?” “……읏!”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덥사와요. 부디 기체 건강하시기를, 호호.” “우읏!” 라피스가 두 손으로 황급히 입가를 틀어막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나는 두근거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드디어 이 365일 무표정 꼬맹이가 폭소하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는가, 하고. 그러나 과연 라피스는 난공불락이었다. 그녀는 격하게 몇 번 헛기침 하더니 예의 절대영도 얼굴을 되찾았다. 안타까워라. “하아……단탈리안 님. 부디 신분에 맞게 행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머나. 저는 자랑스러운 단탈리안 일가의 부인으로서 한점의 모자름 없다고 자부하고 있사와요. 만일 영애의 눈매에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부디 아낌없이 지적해주시와요. 호호호!” “읏!……됐습니다. 단탈리안 님의 기행에는 이제 익숙해졌어요.” 잠깐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이 상태에서 <연기> 스킬을 쓰면 더더욱 완벽하게 귀부인을 연기해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환상적인 아이디어였다. 이토록 황홀한 생각이 내 머리통에 떠오르다니 이미 하나의 기적임에 틀림없었다. 난 당장 <연기>를 발동했다. 곧장 스킬이 경미하게 성공했다는 알림말이 떴다. 기술의 효과인지 목소리마저 한 단계 음이 높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호호호! 오늘은 반드시 보물을 손에 넣고 말겠사와요―!”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어재꼈다. “…….” 날 바라보는 라피스의 표정은, 뭐라고 할까. 빡침과 혼돈이 아름답게 칵테일되어 있었다. 저런 감정을 무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아 사실 라피스야말로 천의 가면을 가진 여인이었다. 우리는 잭한테서 얻은 초대장으로 경매소 정문을 당당하게 입장했다. 드넓은 홀에는 이상한 나라가 펼쳐져 있었다. 피에로 복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가 입구에서 떠들었다. “그 작자 논문은 건방지기만 해!” “글쎄. 적어도 플래이토를 모방하지는 않잖아. 난 프리드리히가…….” “개 같은 낭만성, 그것 때문에…….” 무대에선 공작새로 변장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했다. 하마, 젖소, 악마, 난쟁이로 차려입은 연주자들이 바이올린 등을 켰다. 하지만 족히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객석에서 떠들어대느라 음악이 들리지 않았다. 그 오백 명도 가지각색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라피스와 내가 인파를 헤치며 객석 정중앙으로 갔다. 의자 따위가 없어서 우리는 계속 서 있어야 했다. 라피스는 사람이 많은 곳이 싫은지 작게 인상을 썼다. “마계의 초열지옥을 방불케 하는군요.” “마계에 지옥도 있어?” “단탈리안 님은 정말 마계에 무지하네요. 지옥은 물론 별명에 불과합니다. 마족조차 살기 힘들어하는 지역을 그리 부르지요. 총 스물여섯 곳의 지옥이 있습니다. 대체로 지옥을 다스리는 마족을 마왕에 버금간다 하여 대공(大公)이라 부르지요.” 아하, 마계에서 어떤 영지를 다스리냐에 따라 작위가 정해지는군. 던전 어택에도 자기가 남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마족이 곧잘 등장했으나 뭐가 기준인지 명시되지는 않았다. 마왕이 임명한 건가 하고 대충 짐작하고 있었는데 따로 체계가 잡힌 것이었다. “단탈리안 님은 마계로 따지면 아슬아슬하게 훈작사(勳爵士) 정도가 되겠군요. 본신의 능력은 낮지만 몬스터 부대를 거느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훈작사? 그런 것도 있었나?” “기사보다 낮은 작위입니다. 없는 것보다 낫다는 수준이지요.” “…….” 라피스가 날 괴롭혀……. 잠시 후, 오케스트라가 퇴장했다. 연미복을 입은 신사가 무대에 올라왔다. 그는 이러한 소란에 익숙한 듯 능숙하게 관중을 진정시켰다. 소란스러움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어도 다들 속닥거리는 정도로 소리를 낮추었다. 그러자 아마도 마법도구에 힘을 빌린 듯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객석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는 외안경을 썼는데 거기에도 시력을 강화시켜주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라피스가 속삭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자아. 오페라 데 파비아 경매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모두 쉰다섯 개의 상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평소대로 진행된다면 경매 시간은 대략 네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바로 경매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상품은!” 사회자가 무대 오른편을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그곳에서 얇은 나삼만 걸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북쪽 대지의 나라, 모스크바 왕국에서 데려온 설원 엘프입니다! 자아. 저 새하얀 살결을 눈여겨보십시오. 마치 백년설이 그대로 비추는 듯 투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냥 엘프 여종만 해도 가볍게 500골드를 호가합니다만, 이것은 그 드물다는 설원의 아인종. 고객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살색이 갈빛인 엘프를 주로 접하셨을 테지 이처럼 백설과 같은 엘프는 좀처럼 구경하시지 못했을 겁니다. 자아. 오늘의 첫 번째 상품인 설원 엘프. 1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노예 경매가 시작되었다. 몇 사람이 구입의사를 밝히며 숫자가 적힌 판을 들어올렸다. 객석이 드넓었지만 사회자는 기막히게 고객을 알아보았다. 그는 “예, 537번 고객님, 150골드! 76번 고객님, 200골드!”라고 활기차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독순술마저 터득한 것 같았다. 이렇게 규모가 큰 경매소에서 사회자로 있으려면 여러가지 재능이 필요하리라. 사회자의 말솜씨 덕분인지 설원 엘프는 700골드라는 거금에 낙찰되었다. 자기 몸값이 수직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와중에 엘프는 줄곧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이때 처음으로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아인종의 감정도 내게 전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절망하고 있었다. 때때로 마음속에 향수가 밀어닥쳤으나 덧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살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를 낙찰 받은 귀족이 어지간히 선인이 아니라면 700골드를 허공에 날리게 될 듯했다. “700골드! 무려 700골드가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맙소사! 첫 입찰에서 500골드가 넘어간 것은 단언컨대 제 경매소 인생 삼십 년 동안 한번도 없었습니다. 700골드, 감사합니다! 곧바로 다음 입찰로 넘어가지요.” 차례차례 노예가 무대에 나섰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전에 본 적 없던 종족을 여기서 전부 관람하게 되었다. 늑대인간, 묘족(猫族), 호족(虎族), 세이렌, 인어……경매가 진행되어 갈수록 내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인종들이 품고 있는, 질척한 우울이 조금씩 나의 심장통을 까맣게 물들였다. 심지어 그들이 육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까지 약간이마나 전해졌다. 어떤 묘족 소녀는 등가죽이 걸레짝같이 찢어져 있었다. “……단탈리안 전하.” 옆에서 라피스가 조용히 불렀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머? 오호호. 제가 약간 피곤했사와요.” “……하아.” 라피스가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돌연 내 입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하고 당황하고 있을 사이. 손수건에 새빨간 피가 묻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엉? 웬 피야?” “입술을 너무 강하게 깨물었습니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눈치 채지 못했군요.” “헐, 진짜로 몰랐다…….” “비천한 인간종이 다른 종족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지 않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저잣거리 아낙네끼리 나누는 이해도, 법정의 재판관이 내리는 판정도,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왕은 이해하되 판정해야 합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의 조언은 언제나 살과 피가 되었다. 방금 전, 나도 모르게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당장 인간의 왕국에 침략해서 살육을 벌이고 싶었다. 마왕들이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적대하는 까닭도 여기서 비롯하는 것일까? 허나 죽고 죽이는 것은 어떤 종족에게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다. 당장 내가 가장 공감하고 있는 몬스터만 해도 수없이 많은 인간을 도륙했다. “……그래. 고마워.” “천만에 말씀입니다.” 진정했다. 다소 차분하게 아인종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전달되는 것을 막을 순 없었어도 영화를 감상하듯이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상황이 퍽 흥미로웠다. 타인의 심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어떤 호족 소녀는 가관이었는데, 마치 모델이라도 된 양 인간들에게 몸매를 뽐내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쾌할 수 있는 성격이겠지. 마침내 내가 노리는 '물건'이 입찰에 올랐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객석이 술렁거렸다. 무대 가운데로 금발의 여자아이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누구를 찾는 것처럼 오페라 객석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에 질린 듯 얼굴이 하얘졌다. “천하의 파르네세 가문도 여기까지로군요.” “국화전쟁에서 힘없이 패배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후계자의 미모는 익히 들어왔지만 설마 두 번째 아가씨도 저리 예쁠 줄이야.”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하게 된 전쟁이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전쟁에 대해 얘기하면서 슬쩍슬쩍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살결을 탐욕스레 살펴보는 이도 있으리라. 라우라는 이빨을 질끈 물고 꼿꼿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이건 감정을 읽지 않아도 빤히 마음속이 보였다. 공포스럽지만 귀족과 같은 태도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일단의 사람들이 박수까지 쳤다. 그것이 라우라에게는 더욱 모욕적이었을 게 틀림없다. 이제 그녀는 양손으로 나삼의 끝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을 보게 된 관람객같이 시선을 고정했다. 자아. 어떻게 나올 겁니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쪽에서 억지로 강탈할 저의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멋지고 깔끔한 장면을 연출해줄 것을, 나는 기대했다. “실례지만 이번 상품은 시작가부터 비쌉니다. 단연코 경매소 역사상 최고가를 달성하리라 예상합니다. 자그마치 500골드! 500골드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이럴수가! 경매가를 말하자마자 무려 여섯 분께서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가장 먼저 거수하신 213번 손님부터 셈하겠습니다. 231번 고객님, 550골드! 예, 567번 고객님, 600골드! 13번 고객님, 650골드!” 가격이 쉴 새 없이 올라갔다. 그때마나 라우라의 작은 어깨가 움찔했다. 아까 전까지 치켜세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사람의 시선에 민감했다. 자신을 오직 상품으로, 노예로 바라보는 수백 명의 눈초리를――그녀는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을 긍지 높은 인간이라 확신하는 그녀의 자신감이 언제 허물어질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오로지 라우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64번 고객님, 1650골드! 맙소사! 신이시여! 벌써 사상최고가입니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자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790번 고객님, 1700골드!” 멀어서 들리지 않았으나 소녀는 확실히 이렇게 발음했다. “1101번 고객님, 1750골드!” ――단탈리안. 내 입가가 히죽 휘어졌다. “라피스. 축포를 울리자.” “예, 전하.” 라피스가 후드 안쪽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두루마리를 허공으로 던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체시투스(Arcessitus).” 관객석 위에 직경 삼십 미터 가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에서 연한 분홍빛이 아름답게 새어나왔다.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관객들이 난데없는 빛깔에 고개를 위쪽으로 돌렸다. “음? 마법진이잖아.” “주최측의 행사인가?” “연한 분홍색은 알지 못하는 종족…….”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라피스와 나는 서둘러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사회자만은 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매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단한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옆에서는 라우라가 멍한 눈동자로 허공의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일제히 인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와 동시에 건물 전체가 쿠웅, 하고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했다. 뒤를 돌아보니 열 마리의 골렘들이 객석을 깔아뭉개고 서 있었다. 공중에서 소환되었다가 아래에 착지한 것이었다. 골렘들은 갑작스럽게 인간이 나타나자 혼란스러워 했고, 요정들은 무도회라도 열린 줄 알았는지 꺄르르 떠들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자, 몬스터 전원이 샛붉은 살기를 내뿜었다. ‘닥치는 대로 죽여라.’ 골렘의 주먹에 맞아 한 남자가 망토를 휘날리며 저편까지 날아갔다. 그는 무대의 배경장치로 쓰이는 벽에 부딪혀서 투욱, 하고 무대에 떨어졌다. 사회자가 혹여 남자와 부닥칠까 무릎을 굽히면서 소리를 와락 질렀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극장에 울렸다. 살육의 시작이었다.                            00025 인간 사냥 =========================================================================                                        * * * 라우라는 언제나 긍지를 지키라고 교육받았다. 가문이 멸문했을 때도, 자신이 노예로 전락했을 때도, 온갖 추잡한 행위를 몸에 익히도록 강요받았을 때도, 그녀는 긍지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삶이란 어차피 길지 않았다. 언젠가 가문의 정원을 거닐면서 그녀는 상념에 잠긴 적이 있었다. 하녀들이 자기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이 마주치면 마치 청소에 열중하는 것마냥 빗자루를 놀렸지만, 라우라는 알 수 있었다. 시선에 담긴 비웃음을. 어릴 때부터 그랬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만 바라보면 바로 알아차렸다. 무도회에도 사교모임에도 나가지 않은 채 방에 틀어박혀 전술서적이나 뒤적거리는 '파르네세의 별난 영애'에 관한 소문은, 바깥 소식에 귀가 먹은 라우라 본인만큼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가문의 제 2 계승권자였으나 겉가죽밖에 남지 않은 칭호였다. ‘평판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 라우라가 정원의 푸른 산국화를 바라보았다. 산국화가 산들바람에 미약하게 흔들렸다. ‘모든 것은 흐른다.’ 얼마 전,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파견된 마법사가 학교에서 재미난 강의를 펼쳤다. ‘생명을 가진 자연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옳은가’라는 제목의 강의였다. 마법사는 궁극적으로 ‘정지’라는 개념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모든 것은 흐른다. 만약 인간이 생명을 가진 자연에서 무언가가 정지해 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단순히 인간의 착각이라고, 마법사가 단언했다. ‘감각과 운동, 즉 무언가를 어떤 빠르기로 느끼느냐는 순전히 우리의 맥박 속도에 달려 있습니다. 맥박이 빠를수록 세상을 빠르게 인식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집토끼는 소에 비하여 맥박이 네 배나 빠르게 뛰므로 똑같은 시간 안에 소보다 네 배 더 빨리 느낍니다. 네 배 더 빨리 행위를 할 수 있을 테니 네 배나 더 많은 체험을 할 것이고요. 요컨대 집토끼는 소보다 네 배 더 많은 시간을 경험합니다……인간을 비롯해서 여러 다른 아인종, 동물종의 내면적인 삶은 동일한 시공 속에서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흘러갑니다. 만일 인간종의 맥박, 지각능력, 정신적 흐름이 대폭 느려지거나 대폭 빨라진다고 가정해봅시다! 유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을 다 통틀어서 인간의 인생이 원래보다 천 분의 일로, 즉 한 달로 축소되어서 그의 맥박이 천 배를 더 빠르게 뛴다고 생각해보면――사람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아주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겠지요!’ 노년의 마법사가 강단에서 어린애처럼 방방 뛰었다. ‘삶이 다시 한번 천 분의 일로, 예컨대 대략 40분으로 제한된다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에게 산맥이 그렇게 보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풀과 꽃들이 부동불변인 것이라고 느끼게 될 겁니다. 터져 오르는 한 송이의 꽃봉오리에 대하여 우리는 일생 동안 대륙의 지질학적 변통에 관해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많거나 적게 인식할 테지요. 토끼의 움직임, 사슴의 발걸음, 개구리의 널뛰기, 이런 것은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너무 느리니까요! 기껏해야 우리가 현재 저 멀리 행성들의 움직임을 추론하듯이 사슴의 발걸음도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더욱 더 느리게 진행된다면?……우리는 어쩌면 햇빛의 소리마저 들을지도 모릅니다. 자아, 반대로 상상해봅시다. 예를 들어 맥박이 천 배나 느려진다면? 우리의 삶은 잘하면 8만 년이나 지속될 것이고, 우리가 지금 여덟아홉 시간에 경험하는 것들을 1년에 걸쳐서 하게 될 겁니다.’ 마법사가 자그맣게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에 불이 지폈다. 간단한 파이어볼 마법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네 시간 새에 겨울의 눈이 녹아 사라지며, 언 땅이 녹아 풀과 꽃이 싹터 오르고, 나뭇잎이 무성해져서 열매를 맺고 다시금 온갖 초목이 시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낮과 밤은 마치 밝은 1분 그리고 어두운 1분이 교차하듯이 뒤바뀔 것이고, 태양은 화살같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러 내달리겠지요. 이처럼 천 배로 느려진 삶이 다시 한번 천 배로 느려진다면?……낮과 밤의 차이는 아예 완벽하게 없어지겠지요! 태양은 마치 쥐불놀이하는 불덩이가 그렇게 보이듯이 실시간으로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비출 겁니다. 존경하는 롬바디아 학생 여러분. 이것이 '마법사의 관점'입니다. 우리에게 존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사실 시간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생성의 거칠디거친 흐름에 삼켜집니다. 존속, 정지, 멈추지 않음은 우리 인간의 한계로 인해 생겨난 착각입니다. 완전무결한 착각이지요……아름다운 환영.’ 강의는 라우라에게 깊은 인상을 심었다. 모든 것이 흐른다. 간결한 명제로 표현되는 이 사고방식은 라우라의 인생에도 꼭 들어맞았다. 타인에 대한 평판, 타인에 대한 증오, 억울함, 복수심, 사랑까지, 모든 것은 한낱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찰나에 불과하다. 노예에 대한 귀족의 자존심, 국가라는 체계, 신전의 위광마저도. 어차피 백 년 후에 지상에서 살아갈 인간들은 모조리 지금과 전혀 다른 인간이리라. 오직 만물이 흐른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것뿐. 라우라는 그리 믿었다. ‘하, 시발. 이거 살결 야들야들한 것 좀 보소. 흐-읍. 냄새만 맡아도 발기하네.’ ‘아가씨. 눈매가 장난이 아니야? 응? 언제까지 도도할 수 있을련지 우리도 참 관심이 다대해. 고용주가 적당히 하라고 주문했지만, 하, 우리는 적당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쌍놈이거든. 배우질 못해서.’ ‘다만 할 줄 아는 게 딱 하나 있지, 흐흐. 그걸 이제부터 아가씨한테 가르쳐주겠어. 부디 아가씨가 착한 학생이기를 기도하지.’ 노예상인에게 신체가 넘겨진 이후 밤마다 교육을 빙자한 윤간이 이루어졌다. 상품성을 지켜야 한다면서 처녀를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나 처녀를 제외하고 육체의 모든 부분이 더럽혀졌다. 그녀는 인간의 육체가 정말 어느 부분이든 '그런'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암흑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 그것에 물든 탐욕이 라우라는 조금 웃겼다. 실제로 '교육' 도중에 웃기도 여러 번 웃었다. 그때마다 용병들은 자기네를 우습게 여겼다며 더더욱 혹독하게 굴었다. 언젠가 지나치게 우스워서 한마디 안 해줄 수가 없었다. ‘내가 새끼고양이처럼 떨어댈 거라고 기대하는가? 헛수고이다, 천민. 괜한 기대를 접고 너희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만 탐하도록.’ 그날은 밤부터 새벽까지 내내 괴롭혀졌다. 물론 라우라는 끄떡하지 않았다. 용병들도 그녀가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약이 바싹 올라서 일부러 레즈비언 창녀까지 고용하면서까지 라우라를 괴롭혔다. 일부러 레즈와 상대시켰다. 때로는 동료들을 불러 행위를 관람하게 만들었다.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지독한 짓거리를 벌이느냐가 주목을 받는 요건이었으므로, 대귀족의 여식이 레즈에게 강간당한다는 상황은 꽤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라는 굳건했다. ‘어우, 독한 년…….’ ‘대귀족이란 년놈들은 죄다 이딴 식이냐. 육시랄.’ 창을 부르려 해도 맞장구가 있어야 흥이 달아오르는 법.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난공불락에 용병들이 먼저 시들해졌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최소한의 교육만 진행했다. 자기 몸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어대는 사내의 모습이, 라우라는 어딘지 멀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흐른다. ‘이분은 귀족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자그마치 공작 영애지요.’ 그저껫밤에 자신의 임시 주인이 찾아왔을 때도 라우라는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주인과 함께 마차에 들어온 한 사람이 신경쓰였다. 신기한 시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받아보는 눈길이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듯했으나 동시에 아닌 것도 같았다. 그녀는 궁금한 것은 즉석에서 풀어야 만족하는 성미였다. ‘그 시선은 무슨 의미이지?’ ‘예?’ ‘네 시선의 의미에 대해 하문했다. 그런 시선은 처음 받아보는군.’ 그녀는 상대방 역시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인에게 잠시 나가달라고 부탁해서 단 둘이 남은 것이었다. 그가 곧장 라우라를 소유하고 싶노라고 우회적으로 속내를 밝혔다. ‘어떻게 해야 당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라우라는 지금까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어딘지 자신을 광고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왠지 너저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방이 질문하자 이상하게도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생소한 감정에 신기해하며 조금 흥분되어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말동무가 생겨 기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사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소녀여. 그럴듯하게 들리는 사고방식이구나. 네 말에 따르면 만인에게 주인이란 없을 터. 귀족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한낱 필멸자일지니. 아니한가?’ 갑작스러운 하대였지만 라우라는 개의치 않았다. 애당초 노예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편이 이상했으니까. 아마 급격하게 말투를 바꿈으로써 자기를 압박하려는 수작이리라. 어쩌면 임시 주인이 있을 때는 모종의 연기를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좋았다. 기세 싸움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다. 라우라는 우습다는 듯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그대가 방금 모순을 말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 그대는 스스로 긍지 높은 주인이라 천명했다. 그러나 정작 그대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주인일 수 없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가? 소녀여. 내 도저히 풀릴 길 없는 질문이 하나 있으니 어디 답해보아라.’ 사내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지금 당장 자결하지 않는고?’ ‘……!’ 그녀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태까지 예상하고 있던 사내의 말, 그에 대한 반론, 반론에 대한 반론, 다시 재재반론에 대한 재재재반론, 그 계획들이 일제히 엉클어져서 증발했다. 머릿속이 비어버리자 그녀에겐 눈앞의 광경이 그대로 비추어졌다. 사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불쌍한 것을 바라보는 눈초리였다. 그녀는 치욕스러웠다. 노예로 팔려갈 때도 이만큼 치욕적이지는 않았다. 아니,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말에 승복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이빨을 깨무는 데에는 약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마침내 혀를 잘라버릴 기세로 이빨을 악 물었을 때는 그러나 사내의 손가락이 입안에 들어온 직후였다. 사내가 비웃었다. ‘고민했구나, 소녀여.’ ‘……! 읍!’ ‘죽음만은 자신의 것이라고 자부하던 아이야. 네 것을 처분하는 데 실로 몇 분이나 걸렸다. 그렇지 아니한가?’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사내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였다. 분명 손이 크게 다쳤을 텐데도 사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직시했다. ‘그렇다. 그대의 그 대단한 철학은 고작 몇 분조차 견뎌내지 못했다! 그대가 결코 꺾어내지 못한 그것을 나는 삶의 의지라고 명명하노니. 세상에는 그대의 철학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그것을 모르는 채로 죽고자 하느냐? 단지 누군가에게 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라우라. 내가 그대에게 여분의 세상을 보여주마!’ 그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용병들의 눈과는 전혀 다른 빛으로. ‘그대는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단지 죽음을 신으로 모시는 사제에 불과했다. 여태까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왔을 뿐이노라. 그것을 긍지로 여겨 세상만물을 하찮게 여겼으니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구나! 웃음이 나오는구나.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눈앞에서 어릿광대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거늘.’ 사내의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울렸다. 그녀는 마치 텅 빈 머릿속이 다시금 사내의 말로 빼곡하게 채워지는 것 같았다. 저항할 수 없는 언령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들어라. 한때 정신은 신이었다가 다음에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 마침내 천민이 되었다. 산맥을 가는 데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것이라. 그러기 위해서는 긴 발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 짧은 길은 무엇이겠는가? 아예 산에 오르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주인과 노예는 양극단이라 노예조차 사실은 머리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노라.’ 사내가 돌연 터번을 풀었다. 그의 뒤통수에는 뿔이 나 있었다. 라우라가 질겁했다. 그것은 문헌으로만 들어온 마왕의 뿔이었다.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 공포에 휩싸였다. 인간계의 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앞의 저 자는 몬스터의 제왕이었다! 실제로 사내는 미래가 보이는 듯 그녀의 미래를 줄줄이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같은 미래가 두렵지 않았으나 사내의 시선과 목소리에 점점 숨이 막혔다. 마지막까지 존댓말을 쓰지 않은 것이 그녀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긍심이라곤 겉가죽밖에 남지 않았음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대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서라도 삶을 움켜잡을 것이냐? 양자택일하라. 마왕의 제안을 가볍게 여기지 말지어다! 그대 나에게 본연의 지략을 바칠지언저!’ ‘지략……?’ 그녀가 숨이 차서 간신히 발음했다. 그러자 상대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내게 말한다. 삶이 감당키 어렵다고.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대는 아침에 긍지를 품었다가 저녁에 체념하는가? 삶은 감당키 어렵다. 그러나 내게 그처럼 연약한 태도를 보이지 마라! 더 이상 패배를 승리로 위장하지 말지어다. 패배하라! 연이어 패배하라! 그러나 그 끝에 그대가 오롯이 두 발로 서 있다면 그대의 승리이다!’ 그녀는 귀가 먹먹했다. 입안이 말랐다. 식도가 조였다. 오른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어디론가 끈이 연결되어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힘이 없어 오른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상대방이 웃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는 딱 두 문장만 알아들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겠다는 것. 그리고 사내의 이름이 단탈리안이라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본문에 등장한 마법사의 강의는 실제로 페테르부르크 학술원 출신인 폰 배어가 1860년에 연설했다는 내용에서 따왔습니다. 이 연설에 대해서는 니체가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Die vorplatonischen Philosophen> 제 10 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니체전집 1권>으로 출판된 번역본의 313쪽에 나와 있지요.(책세상, 2003) 저는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단탈리안의 대사 중간중간에 <쓰기에 대하여>라는, 역시 니체가 쓴 짤막한 문구도 참고했습니다. 헤헤. 제가 좋아하는 구절들이에요. 판타지 소설에서 보통 마나를 심장에 둘러쳐진 서클로 설명하다보니 왠지 모르게 저 구절이 떠오르더라구요. 만일 판타지 세계에서 마나가 근본적이라면, 서클이 빠르게 회전할수록 마법사에겐 주변 풍경이 느릿느릿하게 비추겠지요? 똑같은 파이어볼을 생성해도 5서클 마법사가 4서클 마법사보다 재빠르게 만들어낼 테고요. 그런 설정입니다. 00026 인간 사냥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소녀는 잘 짐작할 수 없었다. 사내가 나가고 교대하듯이 들어온 용병들에게 몸을 맡길 때, 그녀는 단지 마차의 밋밋한 천장을 보았다. 의식에서 어머니가 항상 들려준 말이 반복했다. ‘긍지를 가져라.’ 파르네세 저택의 복도에는 역대 가주들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딸아이를 저택에 익숙하게 만들 겸해서 가주들의 초상화를 일일이 가리켰다. 초대 가주 피에트로, 2대 가주 프루덴치오, 3대 가주――탁한 물감으로 그려진 그들의 시선에서 라우라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모든 초상화가 뒤섞여 회색 구정물이 되어 휘몰아쳤다. 여태껏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정작 내 시선은 어떠했지?’ 라우라는 귀족 영애였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주 거울과 대면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헤집었다.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기억력이 뛰어난 소녀는 금방 떠올렸다. 기억 속에서 그녀는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천민.’ ‘뭐야? 아가씨가 말을 걸다니 드문 일이구만.’ 용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는 귀족 고객의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라우라의 몸을 이리저리 개조하고 있었다. 보통 귀족 영애는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한다. 몸이 자기 통제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자기 신체의 새로운 일면,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일면에 타락해가는 모습을 용병은 아주 좋아했다. 달리 말해 라우라는 최악의 소재였다. 그런 모습이 눈꼽만치도 없으니. ‘내 눈이 어떠한가.’ ‘엉? 눈? 왜, 어디 눈이 아파?’ ‘아니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묻는 것이다. 내 눈에서 너는 무엇을 느끼느냐?’ 용병이 라우라의 둔부를 만지작거리면서 콧방구 뀌었다. ‘느끼긴 뭘 느껴. 뒈진 놈 시체처럼 아무것도 없구만. 아가씨랑 눈 마주치면 나 하루종일 기분 더러워지니까 행여나 이쪽 바라보지 마쇼.’ ‘……그런가.’ ‘암. 참내, 일하기 싫어진 것도 되게 오랜만이거든. 그것도 아가씨처럼 겉보기에 예쁘장한 소재를 두고 일하기가 싫어진다라. 이거 상상도 못한 일이지. 끌끌. 앞으로 아가씨 주인 될 새끼가 마음이 참 착하기를 기도하쇼. 나라면 이틀도 못 가서 채찍질로 죽일 때까지 때릴 거야.’ 용병이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더 이상의 말은 소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조용히 충격에 감싸였다. 누구보다 시선에 민감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자기가 도리어 본인의 눈이 어떠한지는 바라보지 못했다. 저택 복도에 걸린 초상화의 눈동자와 자신의 눈동자가 다를 점이 무엇인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다만 공간을 차지할 뿐인 초상화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바라던 삶이 고작 그 초상화와 같은 것이었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자아. 오페라 데 파비아 경매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매가 시작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뚜렷한 주제와 논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연하게 단어 몇 개 따위가 마치 코르크 병마개가 바다에 가라앉다가 다시 떠오르듯이 의식에서 부유했다. 라우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그만 지쳤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대 뒤편에서 노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불안한지 칸막이 너머로 관객석을 힐끔 훔쳐보았다. 어떤 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노예 감독관이 매주마다 일어나는 이 지겨운 사태에 길게 하품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삶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다. 라우라는 자신의 철학 또한 그 다양한 모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여러분께 소개드릴 노예는 놀랍게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파르네세 공작가의 제 2 계승권자입니다!’ 감독관이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라우라가 무대로 걸어나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시선의 홍수에 맞닥트렸다. 천 명에 가까운 눈길이 오직 그녀한테 쏠렸다. 라우라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재능은 순식간에 수십수백의 시선에서 의미를 읽어냈다. 웃음, 비웃음, 분노, 불안, 경쟁의식, 성욕―― 갑자기 머리가 피잉 돌았다. 거의 원시적인 욕망이 더운 숨결이 되어 그녀의 전신에 들어붙는 것 같았다. ‘지난 번 국화 전쟁에서…….’ ‘과연 신전의 파문령은 두렵군요. 천하의 파르네세가…….’ ‘소문보다 더 아리따운 아가씨네요.’ 라우라는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이를 악 물었다. 고개를 높이 들었다. 네 살 때부터 배워온 귀족의 걸음걸이로 무대를 밟았다. 지금 그녀를 버티게 하는 것은 십 년이 넘게 배우고 익숙해진 교육이었다. 그러나 시선에 질려버려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사회자가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는지 큰소리로 소리쳤다. ‘이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영애!’ 사람들이 갈채소리를 보내왔다. 이곳에는 파르네세 가문에 적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라우라는 치욕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인가? 이것이 나의 삶인가? 내 삶에서 저들을 그대로 용납해야만 하는가? ‘실례지만 이번 상품은 시작가부터 비쌉니다. 단연코 경매소 역사상 최고가를 달성하리라 예상합니다. 자그마치 500골드! 500골드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한낱 사물로 전락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가. ‘이럴수가! 경매가를 말하자마자 무려 여섯 분께서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가장 먼저 거수하신 213번 손님부터 셈하겠습니다. 231번 고객님, 550골드!’ 라우라의 심장이 조였다. 독기가 물들었다. 도대체 무슨 난리인가.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감춘 아버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는 가문의 가신들, 자신에게 허락된 위치, 그 어디에 나의 의지가 허락되었다는 말인가. 언제까지 내 삶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그저 용납하고 체념해야 하는가. 라우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단탈리안.’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사회자의 소리만 더 거세게 울렸다. ‘예, 567번 고객님, 600골드! 13번 고객님, 650골드!’ 라우라가 다시 한 번 입술을 움직였다. 단탈리안, 하고. 여전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64번 고객님, 1650골드! 맙소사! 신이시여! 벌써 사상최고가입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유일하게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시선, 그것을 가진 자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설령 악마와 계약해도 상관없었다. 저택 복도에 장식된 초상화와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 끔찍한 장소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단탈리안!’ 그리고 빛이 퍼졌다. * * * 기습은 효과적이었다. 극장 내부의 약간 어두운 조명이 몬스터의 실루엣을 더 공포스럽게 연출했다. 덩치가 인간보다 두세 배 큰 골렘이 날뛰자 난생 몬스터를 처음 본 귀부인들이 극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수백 명이 도망치면서 서로 부닥치고 넘어지고 짓밟았다. 그렇게 압사당한 인간이 골렘에 의해 죽은 인간보다 많으리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한다면 열 마리의 골렘쯤이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내겐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거나 도시의 경비병이 몰려오면 곤란했다. 기습으로 인해 충격효과가 생긴 지금이 기회였다. “잭! 어디 있나, 잭!” “로리타!” 관객석 맨 앞줄에서 잭을 찾았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천국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바라보듯 날 반기었다.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얼른 도망쳐야 하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하, 하지만……데 파르네세 영애를 두고갈 순 없어……상회의 미래가…….” 잭이 절망적인 눈으로 무대를 봤다. “내 상회뿐만이 아니야. 아버지의 상회도 큰 타격을 입을 거라고!” 라우라를 파는 것이 그의 노예상회에 매우 중요한 사업이겠지. 공작가의 여식을 구하느라 얼마만한 인맥과 자금이 들었을지 상상만 해도 까마득할 법했다. 내가 그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정신차려! 당황할 필요 하나도 없어. 잘 들어봐. 파르네세 영애를 데리고 침착하게 여기서 빠져나가자. 알았어? 침착하게.” “그, 그래. 그러자고.” 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거의 잭을 끌다시피 해서 무대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무대에서 최대한 관객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대피해주십시오, 하고 연신 울부짖었다. 관객을 내버려두고 먼저 도망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훌륭한 직업인이었다. 성노예 경매소의 사회자한테 훌륭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가 우리를 보고 놀랬다. “여러분! 무대로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주인 상회요!” 내가 소리쳤다. “롬바르드 상회 산하의 메도라눔 상회요외다. 직접 노예를 끌고 탈출하겠소!” “노예각인을 보여주십시오!” 과연 판단이 재빨랐다. 가타부타 증거부터 보여달라는 얘기였다.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한 것이겠지. 문득 사회자의 능력치가 얼마나 될지 궁금했으나, 아쉽게도 그런 걸 확인할 틈이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잭이 한 발자국 앞에 나와서 옷소매를 걷어올렸다. 팔뚝에 기이한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회자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그는 잭의 팔뚝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십시오!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미리 사과드립니다!” 하고 사회자가 성대를 두 번 두들겼다. 그러자 소리 확대 마법이 풀렸는지 사회자의 목소리가 평범하게 작아졌다. “무대 뒤편으로 가면 비밀문이 있습니다. 헤르메스의 가호가 있기를.” “고맙습니다! 헤르메스의 가호가 있기를!” 허, 내가 감탄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거래손님을 챙기다니. 게다가 소리를 낮추어서 비밀문에 대해 알려주었다. 현재 오페라 정문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막힌 상황. 비밀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면 관객들은 순식간에 이쪽으로 몰릴 게 뻔했다.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흐르겠지. 사회자는 그런 상황을 미리 방지한 것이었다. 인간의 진가는 위기가 찾아올 때 발휘된다더니, 일개 사회자로 지내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안타깝군.’ 객석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관객 중에 무예를 좀 할 줄 아는 자가 몇 명 남았다. 그들이 그런 대로 대열을 만들어 골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아직 혼란의 여파가 강하게 남은지라 제대로 된 대처는 못하고 있었지만, F급 모험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한 인간들이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하면 골렘 부대가 전멸할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대로 라우라를 낚아채서 극장 뒤편으로 내달렸다. “대체, 그대는.” “일단 조용히 하시지요.” 라우라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딱 잘랐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이 중요했다. 무대 뒤편으로 주욱 달리자, 아니나 따를까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말했다. “라피스, 이제 됐어.” 그러자 라피스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역소환 주문이었다. 옆에서 잭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저 분은, 후욱……누구야?” “내 동료이자 마법사야. 지금 우리에게 간단히 방어 마법을 걸었지.” “아!” 마법사가 동료라는 사실에 잭이 감탄한 것 같았다. 그는 라피스한테 고개까지 숙여가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자. 언제 상황이 나빠질지 몰라. 계속 뛰자.” “자네 말이 맞아. 하아,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 나, 라피스, 잭, 라우라, 이렇게 네 명은 극장에서 완전히 나왔다. 극장 바깥도 안쪽과 다를 바 없이 난리법석이었다. 귀족들은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기네 마차를 찾아다녔다. 마부꾼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주인의 호통에 얼른 마차를 끌어야 했다. 마차를 지나치게 빨리 모느라 중간에 다른 마차와 충돌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러나 약과였다. “오, 맙소사!” 도시의 광경에 잭이 입을 떡 벌렸다. 노예 경매소와 정반대로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마어마한 연기구름이었다. 도시 상공이 까맣게 뒤덮였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도시를 방화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라피스에게 부탁한 의뢰가 생각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 연기는 매마른 짚단에 지핀 불 때문에 다소 과장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잭이 알 리 없었다. 그건 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난 연기. 경비대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당장 출동할 것이다. 그 사이 노예 경매소에서 내가 몬스터를 소환한다. 경비대가 소식을 듣고 다시 도시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하리라. 조금 있다가 극장에 진입해본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을 테고. 내가 짐짓 매우 심각한 척 말했다. “……계획적인 습격이군. 어떤 단체가 이딴 짓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지금 여긴 위험해. 잭, 이 근처에 나의 마차가 있어. 그걸 타고 도시 외곽으로 향하자.” 잭이 정신이 빠져 동의하기만 했다. 우리는 경매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달려가서 마차에 올라탔다. 승마는 물론이고 마차까지 몰 줄 아는 라피스가 마부석에 앉았다. 라피스가 말고삐를 가볍게 흔들자 두 마리의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도시의 북문을 통과했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 놓고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냅킨김// 단탈리안이 구사하는 언어능력은 사실 스킬입니다. 덕분에 이세계의 언어들을 문제없이 구사하죠. 연기스킬이 발동하면 언어스킬에 중첩됩니다. 그리고 연기스킬의 대상범위는 '나'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즉 단탈리안은 자신의 의중과 다르게 언어가 구사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단탈리안은 여기 사람들 말을 귀로 알아듣는 게 아니라 스킬로 파악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쿠폰 감사감사. 완결까지 달릴 거예욧! 00027 인간 사냥 =========================================================================                                      “후우……네 덕분에 한숨 돌렸어. 고마워.” “뭘,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우리는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느냐에 대한 얘기였다. 잭은 국제적인 식견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사르데냐 왕국의 친왕파와 귀족파의 대립이라느니 신전측의 계략이라느니 열성적으로 의견을 설파했다.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풀린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마차가 멈췄다. 그곳은 도시 근교에 있는 숲의 입구였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풀밭에 앉았다. 멀리 도시의 성벽 너머로는 아직도 연기가 보였다. 잭이 그 광경을 보면서 혀를 찼다. “쯧. 파비아는 전통적으로 신전측과 대립했지. 파비아 백작은 대전염병에 대해 신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어. 신전에선 노예정책에 누누이 반대했으니까, 그 본보기로 테러를 가한 걸지 몰라.” 무척 그럴듯한 의견이라며 내가 매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전부 네 노예를 뺏기 위해서야’라고 말해주고픈 충동이 들었다. 간신히 참았지만 말이다. 우리 둘의 대화를 라우라는 옆에 앉아 앉아 듣기만 했는데 계속해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도 무시하느라 꽤 힘들었다. 인간의 감정은 직접 읽을 수가 없으니까 꽤 귀찮네. 잭이 괜스레 창문 너머를 보면서 말했다. “당분간 노예시장이 침체하겠네.” 확실히 그랬다. 저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설령 주모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더라도 당분간 사람들은 노예시장 근처에 가는 것을 꺼릴 것이었다. 내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네 사업이 곤란해지지 않겠어?” “사실을 말하자면 그래.” 잭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 경매는 아버지가 나한테 거래의 형식으로 위임한 거야. 아버지의 상회는 비싼 노예를 공급해서 평판이 오르고, 내 상회는 그걸 다시 팔아서 평판이 오르지. 너도 알다시피 상인길드에선 실적이 중요하잖아……다 이렇게 주고받는 거지.” 척봐도 알려지면 곤란한 내부사정을 잭이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그만큼 날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잭, 내가 보기에 이거 보통 중요한 거래가 아니야. 아버지는 자네에게 기회를 준 거야. 네가 큰 거래를 완수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보는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젠장, 일이 꼬였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저 노예를 구입하는 것은 어떠한가?”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가? 정말인가?” “상인은 거래에 관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야.” 잭의 안색이 급격하게 초조해졌다. “하, 하지만 데 파르네세 영애는 비싸. 자네한테 심한 부담감이…….” “흐음.” 정말로 거절할 의사를 가지고 한 말일까. 내가 잭의 상태창을 힐끔 확인했다. ━━━━━━━━━━━━━━━━━━━━ 이름: 잭 올란드 종족: 인간   소속: 메도라눔 상회(롬바르드 상회 산하) 속성: 선(+45) 레벨: 5    명성: 58 직업: 상인(E) 통솔: 10  무력: 5   지력: 23 정치: 20  매력: 9   기술: 6 호감도: 50 현재심리: ‘그렇게만 된다면……그래도, 나의 실책을 친우한테 떠넘길 수는 없어. 하지만…….’ ━━━━━━━━━━━━━━━━━━━━ ‘얼씨구? 허허허.’ 이쯤 되니 탄성마저 나왔다. 지금 우정을 염려하고 있는 것인가? 진심으로?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고 상회가 큰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만약 내가 잭이었다면 상대방에게서 최대한의 가격을 불러내려고 고민했을 것이다. ‘잭. 너 뼛속부터 상인에 어울리지 않는구나.’ 그 편이 이쪽 입장에서야 여러모로 좋지만. 처음에는 그저 바보 같았던 상대방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졌다. 이 사람 앞에서는 딱히 연기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듣는 남자, 그가 바로 잭이었다. “설마 자네, 나한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고민하는 거야?”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잭이 허겁지겁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야. 그게 아니라……그냥.” “으이구. 이 진상 같으니라구. 나는 상인일세. 매사에 이윤을 추구하지. 내가 데 파르네세 영애를 구입하려는 까닭은 그녀에게서 그만큼의 상품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야.” 내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물론 자네를 도와주고 싶다는 개인적인 호의도 있지. 부정하지 않겠어. 그러나 자네에 대한 호의는 그저 자그마한 원동력에 불과해. 만일 내 이윤의 길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데 파르네세 영애를 사들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로리타…….” 잭이 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멋진 남자구나!’라는 시선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자칫 날 섬기는 신흥종교라도 만들어낼 기세였다. 혹시 원래 세계에서 잘 나가는 기업을 하는 이들도 심정이 이랬을까. “음, 분명 최고가가 천육백오십 골드였지.” 내가 한턱 쏜다는 느낌으로 툭 말했다. “깔끔하게 이천 골드에 구입하지. 어때?” “이천 골드?!” 잭이 화들짝 놀랐다. “왜. 혹시 액수가 조금 적어?” “아, 아니! 전혀 아니야. 너무 많아!” “원래대로 경매가 진행되었다면 그 정도까지는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럴리가! 설령 그렇다손 쳐도 지금은 경매가 파토났잖아. 경매소에서 인건비를 줄 필요도 없으니 더 싸게 부르는 게 옳지. 천오백 골드로 팔겠어.” 이번에는 내가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상품에는 정당한 값어치가 뒤따라야 해. 이천 골드야.” “경매가 상품에 가장 올바른 가격을 책정한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오히려 경쟁요소를 도입해서 가격을 불리지. 노예 한 명에 천오백 골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한 가격이야.” “데 파르네세가 어디 보통 노예인가?” 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천오백 골드. 그 이상으로는 절대로 못 팔아.” “이거 막무가내로군.” 내가 두손두발 다 들었다. 구매자가 최대한 높은 가격을 부르고 판매자가 최대한 낮은 가격을 부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정말이지 잭의 호구스러움에는 끝이 없었다. 라우라가 걸어갈 미래를 생각해보면 이천 골드는커녕 물경 이십만 골드도 부족한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천육백 골드로 합의하세.” “너, 정말이지……알겠어. 천육백 골드에 팔게.” 이 친구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하는 시선으로 잭이 말했다. 얼씨구.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천하의 호구야. 나는 우습지만 기쁜 마음으로 잭과 악수했다. 잭이 웃으면서 말했다. “거래는 어디서 하겠어?” “뭐, 귀찮은데 여기서 당장 하지.” 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노예를 보유하려면 관청에 신고해야지.” “……어, 그래?” “물론 관청에다 직접 신고하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대충 근처의 상인길드에서 처리하면 좋고.” “…….” 그때까지 말랑말랑하게 데워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렇군. 그랬지.”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식었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다시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적당한 거짓말이 바로 물색되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늘어난 것은 거짓말 솜씨밖에 없었다. “잭. 미안하지만 여기서 계약하면 안 될까.”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내가 흑사병을 고치는 약제를 가진 건 알고 있지?” “그럼. 잊을 리가 잊겠어.” “그거 때문에 파비아의 상인길드가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어. 어떻게 발목 하나를 걸칠 생각인가봐. 딱 봐도 돈냄새가 풍기니까, 욕심이 난 거겠지.” “하, 뻔뻔한 놈들!” 잭이 분개했다. “놈들은 언제나 그러지. 상인을 보호해야 마땅한 자들이 도리어 상인을 핍박하다니!” “안타깝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웬만하면 상인길드에서 거래하고 싶지는 않아. 어떤 명목으로 나한테 빚을 덮어 씌우려는 건지 짐작조차 안 가…….” “크음.” 잭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나는 그가 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려는 것인지 짐작했다. 지금 잭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라기보다 실적이다. 자금은 아버지한테 후원받을 수 있으나, 상인으로서의 실적은 어느 정도 자기가 실제로 이루어야 한다. 상인들의 실적을 관리하는 상인길드가 주관하는 자리에서 이천 골드짜리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잭으로선 더할 나위가 없겠지. 내가 자칭한 상회는 실제로는 없는 유령 상회에 불과하다. 상인길드에서 거래한다 쳐도 그쪽에서 내 신분을 인정할지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조금도 인간의 도시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언제 마족이라는 사실이 탄로날지 모르지 않는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줘라, 잭.’ 어떤 측면으로든 잭은 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이 세계의 인간이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다 해도 순진한 것과 순수한 것은 엄연히 달랐다. 잭은 후자에 더 가까웠다. 비록 내가 순진함을 깔본다 하더라도, 아니 순진함을 깔보기에, 순수함이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고민에 잠긴 잭을 나는 냉정하게 지켜보았다. “……좋아.” 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서 사흘 거리에 있는 도시에 우리 아버지가 경영하는 상회 지부가 있어. 그 도시의 상인길드는 아버지 상회가 거진 장악하고 있지. 그곳에서 거래한다면 행여나 로리타 네가 부당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거야.” 훌륭한 방안이다. 정말로 최선의 해결책이야. 하지만, 잭. 그건 내가 원하는 답안이 절대로 아니다. “친구.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 천육백 골드가 아니라 이천 골드로 계약할게. 대신 이곳에서, 오직 우리 둘이서, 비밀을 간수하자고. 나는 우리 두 명 간의 계약을 원해. 빌어먹을 상인길드에겐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아.” “나는 더 이상의 돈을 원하지 않아.” 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곳의 상인길드는 믿을 수 있어. 정말이야. 내가 자네에게 사기를 칠 사람으로 보여?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로리타.” “…….” “물론 상인길드에 대한 너의 적개심은 이해해. 아니,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할 거야. 그놈들은 직접 장사에 나서지 않은 주제에 뒤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사채업자 같은 자식들이니까. 의리도 상도도 없지. 하지만 나에겐 상인길드의 간계를 막을 뒷배경이 있어.” “삼천 골드.” 잭이 말을 뚝 멈추었다. “뭐라고……?” “삼천 골드로 구입하지. 잭. 이번이 마지막 제안이야. 진심으로,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나는 우리의 우정을 걸고 말하고 있어. 삼천 골드로 여기서 계약하자.” “…….” “자네는 내게 데 파르네세를 넘겨. 나는 자네한테 삼천 골드를 넘기지. 그걸로 계약은 깨끗하게 끝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 우리의 계약을 보증해줄 사람도, 뭐라고 탓할 사람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는 거야. 일 대 일의 약속이지.” 삼천 골드 이상을 지출할 수는 없다. 마법스크롤을 구입하고, 도시방화를 의뢰하면서 많은 재산이 소모했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면 꽤 많은 양의 투자금이 필요하다.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나는 자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삼천 골드는 현재 지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상대방은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간절한지 모르는 듯했다. “로리타……나는 돈에 그리 욕심이 없어. 천오백 골드나 삼천 골드나, 이번 상행에서 천 골드 이상을 뽑아낸다는 것에 만족할 거야. 솔직히 말할게. 아버지한테, 그리고 상회의 사람들한테 보여줄 실적이 필요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고 있어. 그건 사실이기도 해. 하지만 그런 평판을 없앨 기회가 있는데도 놓치고 싶지는 않아.” 잭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어. 대상이 되어서 진정한 상도를 펼치겠다는 꿈이 그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평판과 실적이 필수적이야, 로리타. 나는 그저 꿈만 쫓다가 도태해버리는 꼬맹이가 되고 싶지 않아. 다행히 나에게는 여러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 일단 아버지가 거대 상단의 상주이지!” 그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이야? 짐마차 행상부터 시작하는 보통 상인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조건을 가졌는데도 불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난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이 나에게는 성실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해. 삼천 골드? 당장은 좋을지 몰라. 하지만 나는 차근차근 지반을 다지고 싶어. 로리타. 너처럼 언젠가 대륙 전체에 도움이 되는 장사를 하기 위해서.” “…….” “정 상인길드에 출석하기 싫다면 이렇게 하자. 일단 나와 함께 도시에 가자. 그리고 거래현장에는 네 상회의 부하를 대신해서 보내. 내가 그한테 노예의 각인을 건네주겠어.” 후우. 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네 뜻이 그러한데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지.” 잭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해해주는 거야?” “당연하지. 난 네가 언제나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네 진심이 눈에 선하게 보이거든. 지금 말한 내용뿐만이 아니라 잭 너는 노예거래를 비합법적으로 하는 걸 꺼리고 있어. 그렇지?” “어? 아, 맞아. 그것도 문제야. 노예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청에 신고해두지 않으면 죄가 되니까.”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질리도록 올곧구나, 잭.” “하하. 무얼, 너에 비하면 아직 한참 남았는걸.” “아니야. 삶에서는 정도를 추구하지 못할 때가 많아. 아예 처음부터 정도를 추구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있지. 나도 얼마 전에야 그걸 깨달았어.”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잭 역시 푸근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 둘은 서로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그의 악력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그런데도 로리타 너는 정도를 걷고 있잖아. 대단해.” “글쎄. 참, 노예는 처음 거래해봐서 그런데. 그 노예의 각인이라는 건 어떻게 주고받는 거야?” “간단해. 상인길드에 소속된 마법사가 마법을 써서 전달해주지. 굳이 노예거래에서 상인길드를 애용하는 까닭도 거기 있지. 관청에 신고를 의뢰하면서 겸사겸사. 그쪽 도시에서 거래하면 내가 마법사 인건비는 공짜로 해줄게. 하하.” 우리가 마주보고 웃었다. “그 마법은 어려운 거야?” “어……아니. 마법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우리 상회의 마법사도 익힌 걸 보면 쉬운 것 같아. 아마도.” “그렇구나.”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라피스. 오른팔 어깨를 잘라.” “응?” 잭이 의문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구겨지는 데엔 3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촤악! 장검이 잭의 팔뚝을 일도양단했다. 그는 곧장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경악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먼저 나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자신의 오른팔을 일견했다. 그렇게 1초 정도가 지나고, 잭이 뒤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소리질렀다. “끄허, 끄하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풀밭 위에서 잭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어졌다. 그는 왼팔로 오른팔의 어깨죽지를 잡았다. 본능적으로 피를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것일까. 목에 힘줄이 징그러우리 만치 툭 튀어나왔다. 그 힘줄에 가해진 압력이 그대로 비명으로 이어졌다. “끅! 끄허어어어억! 끄하아악! 끄아, 끄하아아아아악!” 라피스가 칼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깔끔했다. 무력 능력치가 삼십 대에다 검술 스킬까지 터득한 그녀의 자세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적어도 문외한이 보기에는. 나는 수고했다는 뜻으로 라피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 또한 고개를 숙였다. 꼭 ‘별 것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슬쩍 라우라가 앉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왠지 모르게 예상한 것처럼 표정이 덤덤했다. 하긴, 놀라고 있었다면 되레 실망스러웠을 거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절찬리에 바닥에서 전신을 펄떡이는 이 친구밖에 없다. “하아, 잭……정말로 안타깝게 됐어.” “크프으읍! 끄으윽! 로리타!? 로리타흐으으윽!?” “나는 너한테 세 번을 제안했어. 세 번의 제안은, 정말로, 무척이지 관대한 거야. 거부해서는 안 될 제안이기도 했고.” 되도록 잭을 얌전히 보내주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너한테 호감이 없었으면 다짜고짜 죽였을걸. 잠깐만.” 잭의 배를 살포시 밟았다. 잭은 여전히 비명을 질러댔다. “아픈 건 알겠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잭! 잭! 내 말 들리지? 그렇지? 조금 조용해줬으면 해. 여기가 시끄러워서 좋을 거 하나 없거든. 잭! 그만 닥쳐! 만약에 내 부탁을 무시한다면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잘라버리겠어. 알았어? 네 왼쪽 어깨까지 썰어버리겠다고.” 등 뒤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뭔가를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라피스가 알아서 위협을 가한 것이었다. 과연 라피스의 몸짓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잭이 입술을 꽈악 물었다. 그래도 신음이 새어나왔으나 아까 전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끄윽, 흐으윽……끄흐으윽……!” “아주 좋아. 훌륭해, 잭. 바로 그거야.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의 출혈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잭의 배에서 발을 치웠다.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잭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벌써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내가 보이기나 할까 걱정스러웠다. 배려하는 차원에서 손가락으로 잭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닦으니까 드디어 상대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자아. 협상을 시작하자.”                          ============================ 작품 후기 ============================ 00028 인간 사냥 =========================================================================                                       눈물을 닦아준 자리에 계속해서 물기가 차올랐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잭의 눈가를 계속해서 닦았다. 대화란 모름지기 서로 마주보고 해야 하니까. “끄으윽……거짓말……크프흐으읏……!” “우선 내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가져야겠어. 이건 결정 사항이야. 그리고 자네에게는 삼천 골드를 지불할 용의가 있어. 내 생각에 이 정도면 합리적인 거래인 것 같아. 어차피 데 파르네세의 몸값이 대략 이천 골드였어. 천 골드는 자네의 오른팔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줘. 왜, 어디 사는 거지한테 팔 한짝에 천 골드를 주겠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거짓말이야……크릅, 거짓마아알!” 쯧. 내가 혀를 찼다. 안 되겠다, 이거. 상대방은 팔이 잘린 고통에 머리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듯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아프겠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나 또한 오른발이 완전히 잘게 부스러진 상태에서 잘센 마을의 모험대를 상대했다. 혹시 고통이 아니라 출혈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인지 몰랐다. 나는 라피스에게 간단히 치료마법을 외워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소위 치료마법을 구사했느냐면, 이게 또 가관이었다. 라피스가 손바닥에 작은 불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잭의 절단면을 지져버린 것이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엔 나도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귀청이 찢어지라 잭이 비명을 토해냈다. 생살이 불태워지는 감각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아직 불에 태워진 적이 없으니까. “라피스……치료해주랬지 언제 지지랬어?” “실례합니다만, 저는 치료마법에 능숙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치료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치료법을 실행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라피스가 쿨하게 말했다. 이런 터프한 아가씨를 다 봤나. “괜찮아? 미안해. 얘가 무척 똑똑한데 이상한 구석에서 좀 그래.” “그르륵……크푸륵…….” 잭이 개거품을 물었다. 거의 눈이 뒤집혔다. 내심 걱정이 들었다. 진심으로 걱정했다. 이대로 잭이 기절하면 여러모로 일이 난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설령 익숙치 않더라도 잭한테 치료마법을 써달라고 라피스한테 부탁했다. 적어도 고통을 줄이는 효과 정도는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 라피스가 치료마법을 외자 눈에 띄게 잭의 안색이 나아졌다. 요컨대 눈동자가 똑바로 위치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잭은 폐병환자가 기침하듯이 때때로 신음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띠링!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하급 상인 잭 올란드의 호감도가 50 하락합니다.」 「하급 상인 잭 올란드가 당신을 적대합니다!」 나는 이걸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상대를 싫어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돌아왔다는 뜻 아니겠는가. 잭은 허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왼팔로 오른팔의 어깨를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잠시 후에 잭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어째서……?” 아직 사태가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새삼 잭과 내가 천성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잭은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더 궁금해하고 있다. 반면에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모험자들한테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내가 가장 처음 소리친 문장들은 무엇이었던가. 쏘지 마세요. 제가 아니에요. 살려주세요――.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나선 것은 그 이후였다. 당장은 상대방에게 애원하고,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게 급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보통이 아닐까. 아니, 굳이 잭을 비방하고 싶지는 않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그것은 언어가 다른 두 사람에 비유할 만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차이가 잭과 나 사이에는 놓인 것인지 몰랐다. 나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풀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땅바닥에 누운 잭을 향해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너는 팔이 잘렸어. 그것도 내가 잘랐지. 만약 여기에 거짓말이란 게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고 말해야겠지.” “……왜? 어째서?” 잭이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내가 데 파르네세를 얻고 싶어서야.” “아니야……모르겠어……모르겠어.” “생각을 바꿔봐. 잭, 간단한 논리야. 왜 상대방이 정식으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을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왜냐하면, 하고 곧바로 논리가 성립하지.” “정식으로……거래할 수 없는 신분……?” 내가 짧게 박수를 쳤다. 꼭 외지인이랑 처음으로 바디 랭귀지가 통한 원주민과 같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거야. 사실 도시에 제대로 출입하기도 힘들지.” “상인이 아니었구나……로리타!” 잭이 벌떡 일어섰다. 증오에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가 내게 꽂혔다. 그가 괴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내 옆에 서 있던 라피스가 재빠르게 검집째로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제법 뾰족한 검집 끄트머리에 가격 당하자 잭은 속절없이 쓰러졌다. 라피스에게 제압당한 잭을 내려다보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예.”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그 다음에 이어진 수순은 똑같았다. 신음, 치료를 명목으로 한 불고문, 비명 그리고 안정화 단계. 팔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것에 비해서 약지를 잃은 고통은 다소 덜했는지, 아니면 벌써 익숙해졌는지, 잭이 예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것도 못해먹을 짓거리로군.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상인이 아니야.” “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제가 있다는 것도, 큭! 전부 거짓말이었어!” 잭은 눈동자에 증오가 더 진하게 서렸다. 고통이 여전한지 곧잘 이빨을 물었는데 그 탓에 발음이 살짝 뭉개지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듣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아닌데. 그건 진짜야.” “장난치지 마! 저주 받을 악마 새끼! 뒈져라, 죽어버려!” “잭, 멍청한 친구야. 거짓말을 하려면 적당히 진실을 섞어줘야 하는 법이야.” “그랬어! 그랬던 거야! 경매소에서 몬스터를 소환한 것도 네 새끼였어!” 잭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맞아. 인정하지.” “도시에 불을 지핀 것도!”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그가 욕지거리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세상의 모든 욕이 전시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마음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왜 저렇게 자신의 명줄을 줄이려고 발악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잭을 지켜봤다. “좋아.” 내가 말했다. “자네가 요 1분 동안 내민 의견을 종합하자면 나는 악마에다 사기꾼이고 천하의 쌍놈이자 미친개자식이며 지옥에 떨어질 후레자식이군. 전적으로 인정하겠어. 그러니까 이제 생산적인 논의에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 “일단 내가 데 파르네세를 가져간다는 건 확정된 사항이야. 명심하길 바랄게. 이것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 우리는 협상할 필요가 있어. 잭, 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야. 너는 내 얼굴을 알 뿐더러 내 범죄행각까지 알고 있어. 즉 너를 이대로 살려두면 이쪽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 문제는 내가 웬만하면 널 살려주고 싶다는 것이지. 한 마디로 네 목숨을 두고 협상하자는 얘기야.” “악마 새끼……!” 내가 쓰게 웃었다.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군. 원하는 게 뭔가? 자네를 동정해주길 바라나? 내 끔찍한 행위를 반성하길 원해? 진심 어린 사과가 고프나?” 나 역시 마음이 쓰라렸다. 모험자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에게 해를 끼치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몇 년 지나지 않아 인간계의 거의 모든 사람이 마왕을 증오하게 되겠으나 아무튼 지금 그들은 마왕에 대해서도 적당한 경계심과 적대심을 가질 뿐이었다. 아마 이웃나라에 대해 품는 적대심과 비슷한 정도의 감정이리라. “미안하지만 나한테 그런 걸 기대하지 마.” 만약 내 팔이 소중하다면 바로 그만큼 다른 사람의 팔도 소중하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윤리이다. 죄책감이란 윤리를 지키고자 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명백히 윤리를 어겼고, 앞으로도 거리낌 없이 어기고자 한다. 그런 내가 죄책감을 입밖으로 낸다? 표현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마음의 군살에 불과하다. “잭, 난 내가 한 행동에 추호도 후회하지 않고 있어.” “…….” “미래에도 되도록 후회하고 싶지 않아. 지금 자네를 놓아줬는데 만일 자네가 혹여라도 내 삶에 위협을 가한다면, 나는 지금의 결정을 무척 후회하겠지. 음. 그러니까 나를 설득해주었으면 좋겠어. 설혹 내가 미래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 자네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뭔가를 제시해봐.” 잭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곧바로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겠지. 오늘 그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생애 가장 큰 거래를 성사시킬 뻔했고, 경매소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고, 친우와 같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또 동경하는 친우에게 배신당해 한쪽 팔을 잃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적이 용량이 과다한 하루였다. 그의 입장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우리가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잭의 손발에는 쇠사슬을 채웠다. 마차가 도시의 영향권에서 아주 벗어날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저녁이 되고 우리는 야영했다. 라피스가 맛깔나게 수프를 끓였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재주를 발견한 듯해서 신나게 수프를 먹었다. 다만 잭은 식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마차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 라피스, 라우라가 모닥불 주위에 누웠다. 나는 팔베개를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무리가 반짝거렸다. 원래 세계와는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하늘의 색깔이 다채로웠다. 밤하늘에 녹색빛, 붉은빛, 분홍빛, 파란빛, 보랏빛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기 세계에 와서야 깨달았다. 중학교 시절 천문부로 활동한지라 별자리에는 빠삭했다. 그러나 하늘의 어디를 보아도 내가 아는 별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라피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기분 좋게 흘러들었다. 그때 하루종일 조용히 입을 다문 라우라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이해할 수 없다. 왜 당장 죽이지 않는 게냐.” “음.”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곧장 떠오른 문장부터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글쎄, 우연한 변덕입니다.” “……쓸데없이 적군을 만드는 것은 모든 병법에 있어 하책이다. 노예상이 이대로 살아돌아간다면 이번 사건의 전모를 밝힐 것이 틀림없다. 그대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자가 없다 하더라도, 더 이상 맨얼굴로 이 부근의 도시를 돌아다닐 수는 없게 된다.” “하하. 제가 그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럴듯하게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까 고민하면서 밤하늘을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째서지. 될 수 있는 대로 위협을 줄이는 것. 그것이 생존을 위한 최선책 아닌가.” “맞습니다. 사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오, 저건 오리온자리 허리띠와 쏙 빼닮았다. 하긴 오리온의 삼태성이랑 비슷하게 생긴 별자리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슬슬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라우라. 당신은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이유로 삶을 곧 죽음이라 결정했습니다만……아직 더 살아가기를 원하는 저로서는 오히려 삶의 나머지 부분……우리에게 우연하게 다가오는 일들이 오히려 내 삶의 의미를 결정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간 감각이 흐릿해져서 이윽고 멈출 무렵에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그대가 그날 밤에 말한 삶이라는 것의 의미였군.” 그러자 내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하지만 웅얼거림일 뿐이었다. 곧 있으면 잠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다음날 새벽, 상쾌하게 일어났다. 밤새 모래 따위가 들러붙어서 얼굴이 뻑뻑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막 비볐다. 머릿속은 시원한데 면상이 찝찝하니 뭔가 아쉬웠다. 크흠, 완벽한 아침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우라는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 반면에 라피스는 벌써 아침준비를 끝마쳤다. 사실 라피스가 누구보다 늦잠을 자는 모습 자체가 상상되지 않았다. 쟤는 분명 한국의 고등학생으로 태어났음 열두 시에 자서 네 시에 일어나서 공부했을 거다. 징그러워라. 라피스가 국자로 수프를 덜면서 내게 말했다. “단탈리안 님. 노예상이 도주했습니다.” “어, 그래?” 다소 의외였다. 도망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정말로 도망칠 줄은 몰랐다. 잭에게 별로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라피스에겐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새벽에 일어나보니 마차에 없었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발로는 어차피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추격할까요?” “내비 둬. 거 살아보겠다고 뻘뻘거리는데 굳이 족칠 이유가 없지.” 라피스한테 수프 한 그릇을 넘겨받으며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 “이렇게 큰 노예 경매를 놓쳤는데 아버지나 상회에 어디 낯이나 들 수 있겠냐. 잭이 상인의 세계에서 권력을 쥘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그의 아버지는 대상입니다. 이용할 방법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무능한 애를 이용하다가 내가 먼저 암 걸리겠다. 난 딱 라피스 너처럼 유능한 애가 좋아.” 수프를 한입 머금었다. 묘한 향신료와 함께 닭고기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크으, 맛있다!” 꼭 맵지 않은 똠얌꿍을 먹는 것 같았다. 중세에는 향신료를 거의 쓰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어젯밤 내가 의문을 표시했더니, 인간과 달리 마족들은 향신료를 무척 즐겨 쓴다고 라피스가 알려주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음식을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라피스, 넌 진짜 못하는 게 뭐니? 너 너무 잘났다!”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 상행에서 제공한 숙박과 이동, 식사 전부 다 합쳐서 10골드 되겠습니다.” “…….” 라피스는 어디까지나 라피스다웠다……. 아침을 먹고나자, 입맛이 즐거웠던 것과 별개로 피부가 항의를 해왔다. 안 그래도 퍽퍽했던 얼굴이 더 짜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영 거슬렸다. “혹시 이 근처에 시냇물 그런 거 없어?” “저 방향으로 팔십 걸음을 걸어가면 연못이 나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인간계의 지리를 전혀 모르므로 이번 작전에선 순전히 라피스의 계획에 따랐다. 그녀는 도망 경로에서 숙박까지 고려한 게 틀림없었다. 이런 완벽함이라니! 거금 10골드가 아깝지 않았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라피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이름 모를 풀이 높이 자라나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뱀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몬스터 및 짐승 등에게 마왕은 명령권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내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행진할 때처럼 당당하게 걸어갔다. 마지막 수풀에서 빠져나가자, 마치 숨어 있듯이, 잭이 죽어 있었다. “…….”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놀라움? 안타까움? 아니었다. 도리어 경탄에 가까웠다. 잭이라면 이럴 수도 있었구나, 그런 감정이 뒤늦게 따라나왔다. 시체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바위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몇 번이고 묻어 있었다. 그것과 함께, 잭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무튀튀한 피가 응고되었다. 자기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박아서 자살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종에 머리를 투신한, 어느 이야기의 까치처럼. “……죽었구나. 잭.” 그가 밤새 어떤 고민에 시달렸는지. 어떤 사고를 거쳐서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오직 시체와 바위라는 결과물만이 수수께끼처럼 남아 나의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될 것이다. 되도록이면 그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나처럼 비열한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이용당할지라도, 꿋꿋하게 살아주었으면 했다. 그것은 아직 마왕으로서 이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한 내가 어느 마음 한구석에 자그맣게 품은 소망이었다. 아침 햇빛이 숲의 나무 지붕을 뚫고 그 주변에 비추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시체를 바라보았다. 바위 너머에서 시냇물이 흘렀다. 하지만 시냇물로 가지 않고 발길을 되돌렸다. 잭 근처에 다가서는 것이 그의 죽음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기에.       00029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여가시간을 요구한다.”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때는 한낮. 장소는 마이 프리티 홈, 이른바 마왕성. 늦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동굴이라는 공간이 적당하게 시원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던전이라는 최고의 피서지에서 여름을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우중충하기만 했다. “……예?” 블랙 허브를 집단재배하는 것과 관련하여 상담차에 들린 라피스가, 이 마왕 전하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지,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쉬고 싶다. 놀고 싶다. 게으름 피고 싶다.” “하아…….” 그녀의 눈초리가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을까' 정도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쪽의 진지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않았다. 던전 어택의 세계에 들어온 지 어언 서너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성실하게 지냈다. 지나치게 성실하게. 모험대를 격파하고, 광석을 캐고, 상행을 위장하고, 인재를 모집하고. 원래 세계에서 백수나 다름없이 지내던 나에게 충분히 과부하로 느껴질 만한 작업량이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애당초 성실이라는 명사와는 거리가 제법 먼 부류에 속했다. ‘내일 죽을까 말까 걱정하던 때에는 마음이 급해서라도 견딜 수 있었다지만……어휴.’ 최근 들어서 모험대에 의한 위협 또한 약해졌다. 어차피 겨우 F급밖에 오지 않으니까. 전술을 단련해보라는 의미에서 라우라한테 몬스터 부대의 군권을 맡겼더니 그야말로 능수능란하게 모험자들을 요리했다. 요새 내가 할 일이 부쩍 줄어든 것이었다. 여기에 묘한 조울증까지 겹쳤다. 잭이 죽은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였다. 매사에 감정기복이 심했다. 하기사 이렇게 사람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있는데――보름에 한 번 꼴로 꼭 모험대가 던전에 방문했다――정신질환이 찾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지금 본인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이런 취지를 설명하자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증후군이군요.” “응?”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임의로 별명이 붙은 증상입니다. 아시다시피 마왕은 아인종과 몬스터 등의 감정에 가감없이 공감합니다. 그 때문에 마왕들은 주기적으로 조울증에 걸리곤 합니다.” 세상에. 이제보니 마왕이란 3D 업종이었다. 항시 목숨 노려지랴, 돈 벌랴, 던전 관리하랴, 여기에 아예 직업병으로 조울증까지 있다고? “혹시 최근에 전혀 생뚱맞은 감정이 생기거나 하지 않습니까?” “……맞아. 막 뜬금없이 기운이 솟고 슬프고 그래.” “마왕은 타자의 감정을 생생히 느끼는지라 자아의 경계가 무척 불안합니다. 자신 안에 여러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 있는 것이니 당연하지요. 그래서 다른 마왕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자아를 유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은 그런 방책을 갖고 있지 않았군요.” 거기다가 약한 다중인격증상까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이 우울감 또한 직업병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우울해졌다. 난 안 될 거야 아마……. “흐하하. 난 쓰레기 자식이야. 원래 세계에서도 누구한테 도움이라곤 한 웅큼조차 안 되던 새끼가 뭐 잘 살겠다고 잭 같은 인간을 죽이나. 쓰레기보다 더한 쓰레기, 더 킹 오브 쓰레기. 히히, 내가 쓰레기왕이다……어머니, 죄송해요…….” 마왕방 구석에서 땅을 파고 있자 라피스가 담당의사처럼 말했다. “중증이군요.” “그러니까 여가시간을 요구한다!” 내가 꽥꽥 소리질렀다. “우울해도 너무 우울해! 삶이 삶 같지가 않아. 모험자 새끼들은 먹을 게 파리 다리털밖에 없는 곳에는 왜 만날 처들어오고 난리야! 너희들이 뒈질 때마다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팍팍 깎이고 있단 말이다!” 그때 라우라가 마왕방에 들어왔다. 리프의 도끼날에 문이 날아가버린 이후, 마왕방은 여태까지 상쾌하고 편안한 출입구를 자랑했다. 소녀는 오른손에 둥그런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라줄리 공, 오랜만이다.” 그녀가 간단하게 라피스에게 인사한 다음 손에 든 물건을 나한테 훅 던졌다. 둥그런 물체가 내 발밑까지 굴러왔다. “침입자를 격퇴했다.” 인간의 머리였다. “녀석이 대장이다. 제법 끈질기게 저항하더군. 훗.” 물론 나에게는 못 당했지만 말이다, 하고 미소 짓는 라우라. 향년 열여섯 살에 세 달의 소녀는 어떻게 자기가 물경 스물다섯 명의 모험대를 전술적으로 전멸시켰는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더니 냉큼 뒤로 빠지려는 게 아닌가. 미리 숨겨둔 복병으로 뒤를 후갈기니 녀석들의 전열이 금방 붕괴했네. 작전대로였다. 솔직히 소녀가 병법에 이토록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탈리안, 소녀는 그대의 혜안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방긋 웃으면서 말하는 소녀의 금발에는 인간의 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액체가 응고되어 엉켜 있었다. 내가 모험자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고통과 절규로 범벅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절망했다. “싫어……이건 삶이 아니야, 이런 게 삶일 수는 없어…….” 내가 마왕방의 침대에 뛰어들어 이리저리 굴렀다. 뒤에서 라우라와 라피스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런데로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못난 상사를 둔 부하직원 간의 공감대라고 할까, 그런 게 성립한 모양이었다. “음? 소녀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단탈리안 전하가 가벼운 우울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란 것이 무엇인가?” “……인간계에는 아직 정신질환의 개념이 없었지요. 마계에서는 신체가 병에 걸리듯 정신도 병에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우울증이란 정신의 어떤 측면이 왜곡되거나 비틀려서 당사자에게 우울감을 유발시키는 증상을 뜻합니다.” 라우라가 자그맣게 탄식했다. “허, 괴이하다. 어찌 신체와 정신을 둘로 나누겠는가. 정신의 문제는 신체의 문제이다. 정신이 허약하다는 것은 곧 육체가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녀가 다가와서 내 목덜미를 낚아챘다. “일어나라. 대체로 그대는 운동을 너무 안 한다. 하루 운동량이 기껏해야 쇠뇌만 몇 발 쏘고 끝나니 언제 근육이 붙고 지구력이 좋아지겠는가.” “싫어요! 일어나기 싫어……!” 내가 이불을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뻐팅겼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자아, 단탈리안. 소녀와 운동하자.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운동법을 알려주겠다. 그대와 같이 비실한 자도 두 달만 열심히 운동하면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근육남이 될 것이다.” “뭐든지 운동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뇌가 근육질입니다! 저는 지금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라고요. 휴식이 필요해요!” 그러자 라우라가 쿨하게 말했다. “죽은 다음에는 영원히 휴식할 수 있다.” “난 살아서 휴식하고 싶다고!” 침대를 두고 사투가 벌어졌다. 무력 능력치가 비슷하기에 우리의 공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한참이 지나서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흐엑, 그러는 라우라도, 허어억, 별 거 없잖아요, 허억.” “남자와 여자가, 후윽, 후읏, 어떻게 같은가, 후으으.” 복날에 닭싸움을 마치고 난 닭들처럼 헉헉거렸다. 라피스만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 우리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싶어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근무처가 정신병원이어서 주변에 미친 인간만 가득하게 되어버린 사람 같았다. “……블랙 허브의 재배지에 대해서는 저희 쿤쿠스카 상회가 전적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단탈리안 님은 자문위원으로서 블랙 허브 전체 수확량의 5%를 차지합니다. 계약기간은 2년입니다. 이것으로 괜찮으련지요.”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손바닥을 저었다. 라피스 말에 따르자면 쿤쿠스카 상회에선 흑사병이 여느 돌림병처럼 아주 오래가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약초길드를 통하여 무제한으로 블랙 허브를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흑사병이 앞으로 십 년 가량 줄기차게 대륙인을 괴롭히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당장 블랙 허브를 내다파는 것보다 차라리 집단재배로 중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 어떻냐고 쿤쿠스카 상회에 제안했다. 그쪽에서 곧바로 긍정적인 답변을 해왔다. 이로써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가 마련된 셈이었다. ‘대충 순조롭게 모든 일이 풀리고 있는데.’ 문득 코앞에서 숨을 가다듬는 라우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살결 때문에 땀방울마저 색깔이 새하얀 것 같았다. 제대로 성욕을 풀어본 지 꽤 오래된 탓일까. 가까이서 살만 봤을 뿐인데도 아랫도리가 근질거렸다. 내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살만 하니까 난리도 아니로군.’ 라피스도 라우라도 나이가 어릴 뿐이지 미인이었다. 그런 소녀들이 거의 같이 살다시피 들락날락거리니 내 한심한 인내심에 벌써 한계가 느껴졌다. 만일 지난 번 상행에서 도시에 들렸을 때 창관을 써먹지 않았다면 폭발해도 진즉에 폭발했겠지. 시선을 느꼈는지 라우라가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알아차리진 않았겠지.’ 쪽이 팔려도 바가지까지 박박 팔릴 터. 혹시나 몰라 라우라의 심리상태를 확인했다. ━━━━━━━━━━━━━━━━━━━━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7    명성: 520 직업: 학자(D), 책사(E), 성노예(E) 통솔: 30  무력: 10  지력: 33 정치: 9   매력: 49  기술: 1 호감도: 21 현재심리: ‘음, 내일은 반드시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켜야겠다.’ ━━━━━━━━━━━━━━━━━━━━ 레벨이 한 자릿수인데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능력치였다. 장래에 대륙 전역에 이름을 떨칠 책사답게 통솔과 지력이 삼십 대였고, 약간 뜬금없지만 매력 수치도 오십에 가까웠다. 능력치만 보면 전형적인 팜므파탈이었다. 원래 중립(0)이었던 성향이 최근 인간을 죽여서 중립(-10)으로 떨어졌지만 이건 내가 알 바 아니었고. ‘오케이. 아무 문제없어.’ 라우라의 심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도 혹여나 속마음이 들킬까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때 라피스와 똑바로 눈이 마주쳤다. “…….” 헉. 의심하고 있다! 약간의 경멸과 무시가 섞인 감정이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반푼이 서큐버스래도 과연 정욕을 관장하는 마족이라서 그런가. 라피스는 곤란하게도 이쪽 방면에 눈치가 재빨랐다. 겉모습이 열여섯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녀한테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아본 적 있는가? 쉽게 말해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방구석폐인이 되고 싶었지만, 이대로 인정했다가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질 것 같아 뻔뻔하게 말했다. “왜 그래? 계약에 관련해서 더 할 말 있어?” “……확실히 단탈리안 님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군요.” 라피스가 묘하게 휴식에다 방점을 찍으면서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괜히 구차스럽게 발뺌하지 말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으윽. “다음달에 마계에서 마왕들 간의 대회합이 열립니다.” “응? 그런 것도 있어?” “전통적으로 어느 마왕에도 영합하지 않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중립을 자처하며 회합을 열지요. 십 년마다 한번 열립니다만, 이번에는 단탈리안 전하께도 정식적인 초청장이 날아갈 것입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노려봤다. “그때 파르네세 영애의 노예각인을 처리할 겸해서 마계에 들리는 것 어떻습니까. 마침 인간의 노예각인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를 물색했습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휴식시간이 될 것이라고 제가 장담합니다.” “……어어. 그냥 지금 마계에 가면 안 될까. 생각해보면 나 마계에 가본 적도 없고, 다음달까지 정신머리가 견뎌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시든지요,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그렇게 스케줄에 여름철의 마계 휴가가 들어가게 되었다.                              00030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마계라 하니 여전히 우락부락하고 잔인한 이미지가 떠올랐으나 그동안 라피스한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서 안다. 마계에도 고급스러운 문명의 도시가 많다는 사실을. 아무렴 라피스가 나를 살벌한 장소로 안내해줄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휴식하겠다 싶었다. 나는 본격적인 휴가에 앞서 던전의 앞마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자 마음먹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어찐 일로, 누추한 장소에 행사하셨나이까?” 백발의 노인이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고 오들거렸다. 노인의 뒤로도 백 명 가량 사람들이 오체투신하고 있었다. 화전민들이었다. 짐승과 몬스터로 가득한 산중턱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그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강력하고 대담했다. 그런 이들이 내 앞에 무릎 꿇은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도 사람들 주변으로 삼십 개체 가까운 골렘이 기립하고 있었다. 재산의 여유분까지 탈탈 털어서 장만한 몬스터 부대였다. 내가 연기 스킬을 사용한 채 말했다. “누추? 지금 누추한 장소라고 말했느냐?” “그,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인간.” 노인이 매우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갈빛 얼굴에 주름살이 계단식 논두렁처럼 차곡차곡 들어섰다. 성실하고 힘든 세상살이가 그대로 박힌 얼굴이었다. 다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목적을 위해 공격적인 어투를 썼다. 첫만남이 인상을 결정한다. 지금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됐다. “이곳은 나의 영토이다! 감히 짐의 영토를 누추하다 불렀으니 그 죄가 무겁다.” 노인의 얼굴이 경악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웬 사내가 몬스터를 이끌고 마을을 에워싸더니 '여기 원래 내 땅' 이러고 있는데 어이가 실종하겠지. 일종의 교통정리였다. 던전 주변에는 화전촌을 비롯해서 몇 개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모험대가 이런 마을에서 며칠 숙박하고 피로를 푼 다음에 내 던전으로 진군했다. 마을사람들은 모험자들에게 소소한 숙박비를 챙겨받으면서 용돈벌이를 했으니, 간접적으로 나한테 위협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해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마계로 떠나기 전에 한번 으름장을 놔줄 생각이었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거기에다 무단으로 짐의 영토에 상주했으니 죄의 무게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미처 몰랐습니다.” 노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땅바닥에 박았다. “이곳은 몬스터의 군집지라 모든 나라가 꺼리는 곳. 제국의 흡혈귀 같은 세금징수관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높은 세금에 시달리다 가렴주구를 피해 이런 산맥까지 도망쳐온 저희를 용서해주십시오…….” “허, 자기네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역겹기 그지없다. 그대들은 이 근처에 짐의 터전이 있고, 모험자가 그곳으로 행군함을 알았을 터. 그런데도 그대들은 모험자에게 숙박을 제공했다. 그러하지 않았느냐?” 촌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헉. 그, 그것은.” “진실만을 고하라!” “위대한 존재이시여……산맥에서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어렵나이다. 때때로 외부인이 찾아와 내주는 숙박비가 아니라면 한 철을 버티기도 힘듭니다. 사,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대들이 살기 어려우면 짐에게 위협을 가해도 좋다는 것이냐? 감히? 네놈이 아직 상황이 덜 파악된 모양이로구나.” 오른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마을사람을 에워싼 골램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서른 마리의 골렘이 한꺼번에 발을 내딛자 땅이 쿵, 하고 진동했다. 마을사람들이 질겁했다. 아낙네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흐윽,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십시오!” 아이구야. 마음이 다 짠해지네. 하긴 인간 입장에서 마왕을 토벌하러 간다는 모험대한테 적대적일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인간계에서 마왕을 몬스터의 끝판왕쯤으로 여긴다는데 딱히 잘못된 인식도 아니었다. “제발, 위대한 존재이시여! 죄송합니다, 다시는 아니 그러겠습니다…….” “너희를 여기서 싸그리 멸살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나!” 촌장의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빤히 보였다. 내가 짐짓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를 주겠노라.” “오오!” 촌장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심하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이가 아니다. 너희가 씻지 못할 죄를 범했으니 그에 대한 반성이 먼저 필요하다.” “물론입니다. 당연합지요! 무엇이든 하명해주십시오.” 내가 품에서 푸른색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가볍게 던지자 촌장이 얼떨결에 받았다. “이것은……?” “앞으로도 모험대가 종종 너희 마을을 들릴 터이다. 지금껏 해온 대로 모험대를 재워주고 먹여주어라. 단, 모험대가 오자마자 그 수정구슬을 손으로 네 번 두들겨라.” 내가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밤이 되고 나의 충직한 부하들이 마을에 잠입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모험대를 암살하라. 그리 되면 그대들이 수익을 잃을 일도 없을 것이요, 날 배신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죽음으로 사죄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앞으로 모험대는 더 레벨이 높아져서 공격해올 거다. 그러기에 앞서 던전 주변의 마을들과 이렇게 협력 체제를 마련해놓는다면 모험대에 대응할 방법이 훨씬 더 많아진다. 촌장이 감읍한 표정으로 몇 번씩이나 나의 관대함을 칭송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추가적인 이익이 없는 이상에야 사람은 간단하게 계약을 파기한다. 만일 모험대가 마왕을 토벌할 만큼 강력하다고 판단하면, 마을사람은 모험대의 편에 들러붙을 게 틀림없다. “이것은 짐과의 계약이다. 만일 계약을 어긴다면 죽을 것이고.” 떡고물이 필요하다. 날 배신하지 않아야만 얻을 수 있는, 모종의 이익이. “계약을 준수하면 나 역시 그대들에게 안전을 제공할 것이다.” “아, 안전이라 하옵시면?” “이 마을은 항시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들었노라.” “예에. 당장 이번 주만 해도 장정이 고블린에 물려 명을 달리했습죠.” “짐과 계약을 지키는 이상 몬스터가 그대의 마을을 노리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저, 정말입니까!?”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꼼짝없이 골렘한테 맞아 죽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몬스터로부터 보호해주겠다니 꿈만 같으리라. 내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짐은 모든 몬스터의 제왕이다. 짐의 언사를 의심하는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다, 다만 너무나 황송한 제안인지라.” “지금부터 알아두어라. 짐은 공정하다.” 숨을 들이키고 큰소리로 외쳤다. “짐의 이름은 단탈리안! 서열 제71위의 마왕이자 모든 질병과 몬스터의 주인일진저! 신민에게 관대하되 적에게 잔혹할지어니, 그대들이 짐의 충실한 신민이 된다면 그만한 이익과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니라!” 연기가 먹혀든 것일까. “이제 몬스터에 습격당할 일이 없어!” “살았다!” “단탈리안 폐하 만세!” 화전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걸쳐서 던전 근처의 마을을 모조리 돌아다녔다. 열두 개의 작은 마을이 내 발밑으로 복속했다. 골렘 서른 마리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감당키 어려운 적이었고, 무엇보다도 몬스터의 위협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것이 크나큰 매혹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을들이 앞으로 침입자에 대한 조기경보로써 기능할 거라고 기대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마을뿐만 아니라 몬스터 부락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몬스터들한테 ‘이제부터 얘네들 습격하지 마!’라고 언질을 해두어야 했지만, 본래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수고가 들어가는 법이었다. 몇몇 몬스터 부락에서 반항했다. 내가 고용한 몬스터와 다르게 야생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험악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반항하는 몬스터는 나의 골렘 부대로 깔끔하게 쓸어버렸다. 서열 제71위 마왕의 던전 근처라서 그런지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기껏해야 질 낮은 고블린 부락이 즐비할 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니까 <던전 어택>에서 단탈리안의 마왕성이 프롤로그용으로 등장했지. “에구구, 할 일 다 끝냈다!” 모든 몬스터 부락에 다짐을 받아놓고 내가 쭈욱 기지개를 폈다. 큰일을 끝마쳤다는 성취감이 가슴에서 피어올랐다. 이제 쉬어도 돼! 단지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이상하게도 고블린들이 영 힘을 못 썼단 말이지.’ 아무리 레벨이 낮은 고블린 부족이라 할지라도 최대한 반항하거나 그런 모습을 보일 줄 알았는데, 싸움이 시작하자 왠걸 나한테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골렘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할 뿐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만큼 골렘 부대의 위력이 대단해졌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현재 내 휘하의 골렘은 평균 레벨 5를 자랑하고 있었다.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능력치가 렌덤으로 1씩 오르니까, 기본 능력치가 7/5/5(체력/공격/방어)인 최하급골렘이 대충 7/7/7 가량의 능력을 보유했다. 참고로 잘센 마을의 모험대장 리프가 능력치가 6/5/2였다. F급 모험자 중에 가장 잘 나가는 축에 속하는 리프가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 골렘 부대는 이제 E급 모험대도 너끈히 상대할 만큼 강해진 것이었다. 여기에 요정 부대도 평균 레벨 3을 찍었으니 웬만한 E급 모험대는 피해없이 전멸시킬 수 있었다. ‘마계에 내려가 있는 동안 설령 E급 모험대가 출현해도 라우라가 잘 막아내겠지.’ 근심걱정이 싹 사라졌다. 설마 F급 모험대만 오는 던전에 곧바로 D급이나 C급 모험대가 출현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라우라에게 던전 관리를 몽땅 일임한 채 마계로 휴양을 떠났다. 나는 이 사건이 어떤 파장을 불러들일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라피스가 침을 삼켰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그녀로서도 긴장되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반백의 노신사가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온몸을 검은 망토로 감추고 있었으나 노신사의 창백한 얼굴은 그가 깡마른 체격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거의 병적인 무언가가 남자에게서 풍겨졌다. 다만 침착한 어투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신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 노인이야말로 쿤쿠스카 상회의 정점. 이바르 로드브로크. 흡혈귀 중에서도 그 드물다는 진조(眞祖). 이천 년을 넘게 살아온 괴물 중 괴물이었다. “라피스 라줄리. 무슨 일로 네가 나와 대면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예, 상주.” 라피스가 절도 있게 상반식을 숙였다. “마왕 단탈리안에 대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아이는 아니군.” 라피스가 정확한 각도를 맞춰 인사한 것이 흡족스러웠는지, 이바르의 입끝이 살짝 올라갔다. 거기에는 푸근하거나 자비로운 인상 따위가 없었다. 되레 을씨년스러웠다. 입가만 움직였을 뿐이지 얼굴의 다른 부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 번에 토르켈이 직접 파견되었다. 그러나 문전박대를 당했지. 라줄리, 너와만 거래하겠다는 이유로 말이다. 과연 반푼어치라도 밤의 일족은 밤의 일족이라는 얘기이겠지.” “…….” 밤기술로 마왕을 꼬셔낸 게 아니냐, 하고 이바르가 비꼬고 있었다. 하프 서큐버스인 라피스를 대놓고 모욕한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피스의 얼굴에선 그러나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같은 모욕은 일상다반사나 마찬가지였다. 마계의 창녀 서큐버스. 그중에서도 더러운 인간의 피가 섞인 잡종. “호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군.” “저는 쿤쿠스카의 사무마입니다.” 그러자 이바르가 웃었다. “당연하지. 쿤쿠스카의 상인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추구하되, 상대방의 마음까지 얻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합격이다. 일개 4급 사무마가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여 마왕의 마음을 얻었으니 어찌 칭찬하지 않겠느냐.” 툭, 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라피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바르의 발 앞에 묵직한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 사용하는 돈주머니였다. 크기를 보아 백 골드 이상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포상이다. 받아라.” 이바르는 현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돈주머니는 그의 사타구니 아래에 놓여졌다. 그것을 포상이라면서 가져가라는 얘기는, 즉 라피스 보고 사타구니까지 '기어와서' 돈주머니를 받으라는 소리였다. 길거리의 창녀한테도 이만한 무례는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더없는 치욕. “예.” 그러나 라피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바닥에 엎드려서 네 발 짐승처럼 진조한테 기어갔다. 쿤쿠스카의 검은색 정복이 착 달라붙어 라피스의 엉덩이를 부각시켰다. 그녀가 엉금엉금 기어오는 광경을 이바르는 턱을 괸 채 여유롭게 구경했다. 이윽고 이바르의 사타구니 사이로 그녀의 머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공손히 돈주머니를 잡은 다음에 그렇지 않아도 숙인 고개를 다시 한 번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라피스가 뒤쪽으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이바르가 말했다. “벗어라.” 그녀의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00031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천박한 것, 벗으라고 말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라피스가 상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치마가 종아리를 따라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 마광등이 그녀를 가느다랗게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소녀의 여린 윤곽이 연하게 빛났다. 이바르가 일어섰다. 그는 라피스의 주위를 맴돌면서 오른손에 쥔 지팡이로 그녀의 신체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지팡이 끝이 그녀의 가슴을, 목덜미를, 둔부를 꾸욱 눌렀다. 마치 상품이라도 품평하는 것 같았다. “처녀인가?” “예.” “비천한 하프 서큐버스 주제에 잘도 정조를 보존했군.” “자기 한몸을 호신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처녀가 가진 상품가치를 아무데나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바르가 피식 웃었다. “상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럼 지금 나에게 처녀를 바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예.” “상황 판단도 재빠르군.”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라피스는 이바르가 애당초 자신을 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큐버스의 피를 이른 자로서 그녀는 상대방의 정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시험임을 알아차리고 순수히 행동한 것이었다. 이바르가 지팡이를 짚으며 라피스 주위를 걸었다. “나는 마계에도 다섯 명밖에 남지 않은 진조이다. 수천수만 년을 이어온 고귀한 핏줄의 태생이지. 마계에서 핏줄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단지 시답잖은 권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유구한 세월을 돌파해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성공하는 것은 쉽다. 지금도 수많은 자가 성공을 이루고 있지. 두 세대 동안 성공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 앞선 세대가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게다. 하지만 세 세대는? 네 세대는? 오십 세대, 백 세대, 이백 세대는 어떠한가?” 이바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나 자신이 첫 세대인 것처럼, 가문에서 미리 성취한 바에 자만하지 아니하고 끝없이 자기 자신을 단련해야만 한다. 고통과 인내가 수만 년에 걸쳐서 단 한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그것이 가문이 갖는 위대함이다. 고작 한 세대의 성공 따위로 견줄 게 아니지.” 한때 뱀파이어는 모두 순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순혈 뱀파이어는 다섯 개체밖에 남지 않았다. 마족들은 존경을 담아 그들을 진조, 진정한 핏줄이라 불렀다. “마왕이래봤자 후손도 남기지 못하는, 단지 찰나에 반짝이는 영광일 뿐. 우리 마족의 진실한 긍지는 그런 것에 기대어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자만이 진정토록 위대한 마인이 되는 것이다. 라줄리. 마왕을 이용해라. 결코 마왕의 빛에 이끌려 희생되는 불나방이 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마왕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야.” 이바르가 생각에 잠겨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 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라피스로부터 몸을 돌렸다. “너를 4급 사무마에서 2급 사무마로 승진시킨다.” “……!” 실로 파격적이었다. 라피스가 수습직원에서 5급 사무마로 올라가는 데 장장 백 년이 걸렸다. 마왕 단탈리안에게서 실적을 뽑아내더라도 최소 오십 년이 지나야 4급 사무마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흑사병 건으로 4급으로 승직하더니 이제는 심지어 2급 사무마가 되었다.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쿤쿠스카 상회에도 2급 사무마는 많아야 이백 명 정도밖에 없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것이었다. ‘드디어――.’ 라피스가 조용히 전율에 감싸였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어.’ 여태까지 핍박 받아온 기억들이 한순간에 뇌리를 스쳤다. 하프 서큐버스라는 이유로 서큐버스 집단에 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서큐버스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치했고 따돌렸다. 강자생존이 법도인 마계에서 동족한테조차 기대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이음동의어였다. 쓰레기통을 뒤졌다. 창녀로 위장하여 뒷골목에서 부랑자를 살해했다. 구걸했다. 애원했다. 살기 위해 검술을 익혔고 마법을 배웠다. 겨우 한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을 갖추자마자 쿤쿠스카 상회에 투신했다. 백 년 동안 온갖 잡다한 일을 떠맡았다. 그러고도 제대로 된 기회 하나 얻지 못했다. 이백 년의 시간. 어느 순간부터 표정을 잃고, 목소리의 고저를 잃고, 패배로 점철되어 세월을 보내온 끝에, 드디어 그녀에게도 기회가 내려왔다. 기회인 동시에 시험이었다. 이바르 상주는 지금 그녀한테 마왕 단탈리안을 이용하라고 주문했다. 철저하게 상회의 편으로 만들라는 얘기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쩌면 육체까지 써가면서. ‘할 수 있어.’ 자신도 단탈리안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상대방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 그 호감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단탈리안이 정욕에 휩싸여 파르네세를 바라본 적이 있었다. 성욕은 있는데 풀 대상이 없어서 곤란하겠지. 라피스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단탈리안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상회에서 성공을 거둘 방법을 고안했다. 문득 그것이 정말로 단탈리안이 원하는 바였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담당자인 그녀가 쿤쿠스카 상회에서 요직을 차지하면 단탈리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감사의 말이 아니다.” “예. 단탈리안은 우리 상회의 영원한 아군이 될 것입니다.” 이바르가 웃었다. “영리하군. 나는 영리한 부하가 싫지 않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이바르가 지팡이로 강하게 바닥을 내리쳤다. 축객령이었다. 라피스가 그의 등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가 방을 나간 이후 이바르는 한참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인 니블헤임이 눈에 비추었다. 그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그래. 마왕은 다 사기꾼이야.” 중얼거림은 아무런 메아리도 만들지 못하고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가 앉은, 호화스러운 의자 옆에는 흡혈귀 전용의 관짝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 * * 휴가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던전 방비를 라우라에게 일임하고, 라피스한테 받은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었다. 화아악! 시야가 녹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귀가 멍멍했다. 눈을 뜨자 내가 새로운 장소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눈앞에 널찍한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하얀 돌이 가지런히 뒤덮인 포장도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니,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텔레포트를 하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미노타우르스나 어인족처럼 몬스터들이 저마다 배낭을 맨 채 녹색빛에 휩싸여 순간이동되었다. “거기! 얼른 나오지 않고 뭐하세요!” 암컷 고블린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가 했더니 나한테 하는 소리였다. 녀석은 왼팔에 완장을 차고 있었는데 아마 이곳 대규모 순간이동소의 안내원인 것 같았다. “당신 때문에 뒷사람이 이동하지 못하잖아욧!” “아.” 내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러자마자 뒤쪽에서 녹색빛이 피어올랐다. 작달막한 드워프가 자기 키보다 네 배는 큼직한 짐을 들쳐매고 등장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코를 훌쩍이면서 내 곁을 지나쳤다. 마음속으로 나를 무진장 욕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니, 또 뭘 멍하게 서 있어요! 교통체중 만들 일 있어욧!?”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녹색빛이 터졌다. 넓은 대로에는 대략 스무 개의 발판이 주르르 튀어나와 있었다. 텔레포트 장치였다. 몬스터들이 그곳에서 나와 검문소를 지나쳤다. 검문소에서 고블린들이 통과비를 받았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어휴. 이래서 촌사람들은.” 암컷 고블린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신, 니블헤임에 처음 온 거죠?” “어? 아. 예에.” “도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것부터 읽어요.” 고블린이 팜플릿 비슷한 뭔가를 건냈다. 앞면에 『니블헤임의 모든 것! 단 10쪽으로 니블헤임 달인이 되어보자!』라고 과장스러운 폰트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베이는 게 여기예요. 당신 같은 촌뜨기가 암것도 모르고 도시에 가면 장담하건대 삼 초만에 골수까지 탈탈 털릴걸요!” “어, 어.” 고블린한테 촌뜨기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멍해졌다. 길쭉한 코를 휘둘러대며 '요'자 체를 쓰니 정말 안 어울렸다. 설마 너 그 말투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령 고블린들 사이에서 매력 터지는 말투라 할지라도 지극히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나의 시각에서는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위장을 자극하는 말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구나. “어느 여관이 안전하고 어느 골목이 안전한지 알려주는 책자예요. 이거 하나만 달달 외우고 다니면 적어도 팔다리 한쪽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릴 일은 없어요. 원래 2골드 받는 물건인데 저희 도시에 처음 오신 거 같으니까 깎아드릴게요. 자, 단돈 1골드. 얼른 내놔요.” “에? 응. 어, 고마워.” “천만에요. 교육실습비라고 여기세요.” 교육실습비? 고개를 갸웃거리려니까 고블린이 헐레벌떡 저편으로 달려갔다. “아싸, 1골드 벌었다! 호구 등처먹는 재미 없으면 텔레포트 안내원도 못할 짓이야!” 고블린이 양팔을 벌리면서 환호했다. 녀석의 등이 순식간에 멀리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나는 멀뚱하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멍한 정신이 아예 가출해버린 기분이었다. 방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쯔쯧. 자네, 사기당했구만.” 늙은 은랑족이 옆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사, 사기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지. 얼뜨기 여행자한테서 도시 정보를 알려주겠답시고 시시한 안내책자를 바가지 씌워서 팔아재끼는 거 말일세.” 머리 위로 오 톤짜리 돌덩이가 떨어진 듯했다. “하지만 쟤는 도시의 정식 안내원이잖아요! 어떻게 안내원이 여행자한테 사기를 칩니까!” “딱 봐도 자네는 니블헤임 주민이 아니구만. 같은 도시 주민도 아닌데 사기 좀 치면 어떤가? 어차피 니블헤임의 법도 니블헤임 시민한테만 적용되거늘. 쯧!” 즉 마계에는 국가법이 없고 도시법만 있다는 얘기였다. 아까 전에 고블린이 한 말이 떠올랐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베이는 게 여기예요. 당신 같은 촌뜨기가 암것도 모르고 도시에 가면 장담하건대 삼 초만에 골수까지 탈탈 털릴걸요!’ 정말 그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삼 초가 아니라 삼십 초라는 것이었다. 왜 고블린이 '교육실습비'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녀석은 손수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사기를 친 것이었다. 그것도 안내라면 엄청나게 친절한 안내였다. 빌어먹을! 비 오는 날에 자빠져라! “자네처럼 어수룩한 젊은이를 보니 내 불안해서 못 견디겠군. 어떤가, 자네? 한동안 나와 같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은. 어디서 등골 빠지지 않게 옆에서 조언은 해주지.” “아, 감사…….” 잠깐만. 이 녀석도 의심스러웠다. 안내원한테도 당한 마당에 생판 모를 은랑족에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내가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모르는 분께 폐를 끼칠 수 없죠.” “어허, 이 시퍼런 놈 보소. 어디서 어른을 의심해?” 은랑족이 인상을 바락 썼다. “꼭 손자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거야. 그놈도 작년에 니블헤임에 왔다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빼앗겼어. 자네에게 하는 말이지만, 여기 도시놈들은 다 도적 새끼야, 도적 새끼. 우리 같은 외부인끼리 서로 도와야지 피해를 보지 않…….” “오오. 이거 누구야? 빌헬름 아니야!” 뒤에서 또다른 은랑족이 말을 걸어왔다. “이웃도시에 상행은 잘 다녀왔는가? 자네 없는 니블헤임은 영 재미가 없어서 혼났네. 자네 애인들도 똥줄 타게 기다리더군 그래. 역시 고향이 최고지?” 리저드맨이 은랑족의 팔뚝을 친근하게 쳤다. “오늘밤은 언제나 보는 그 술집에서 만나자고. 지각하면 사형일세!” 리저드맨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길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빌헬름이라 불린 은랑을 쳐다보았다. “…….” “…….” “외부인이 뭐가 어쩌고 저쨌다고요?” 은랑족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00032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헛, 헛. 마침 급한 용무가 생각났군. 안타깝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세나, 젊은이.” 그 말을 끝으로 은랑족이 빠르게 경보로 떠나갔다. 리저드맨을 큰소리로 욕하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호구 벳겨먹을 기회를 놓쳤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은랑족이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넓은 대로에서 수백 명의 몬스터가 꾸역꾸역 도시로 향했다. 크고 작은 난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새끼야! 왜 어깨를 치고 지랄이야!” “괜히 시비를 걸고 앉았네요. 프로그맨의 창자에선 돼지 냄새가 난다더니 정말인지 확인해보고 싶은걸요.” “아앙? 창녀 같은 여우 년, 똥통에다 처박은 다음 썰어버려주마.” “염병이 문둥병 도져 발광하는 소리하고 있네요. 저질스러운 바보에다 돼지우리 같은 냄새가 진동하는 양서류 님, 대가리를 오픈 카페로 만들어줄까요? 그 멍청한 머리통도 한번 숨을 쉬어보면 조금 쓸 만해질지 누가 알겠어요.” “창녀 년이 보드카에 절어 대가리가 삐꾸가 되어버린 모양이군. 흐리멍덩한 낯짝에 칼질 한방 갈겨줄까? 앙?” 각각 머리가 여우처럼 생긴 몬스터와 개구리처럼 생긴 몬스터가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렸다. 여타 몬스터는 일상적인 광경을 지나치듯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당사자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끼리 여우와 개구리 중 누가 이길 것인지 소소하게 내기판을 벌였다. 오케이. 대충 마계란 게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 알겠다. 비유하자면 대항해시대의 리베르탈리아, 버마의 앵글로타운, 엘 레이, 요하네스부르그, 원래 세계의 악명 높은 도시처럼 이곳도 무법자들이 법률을 만들고 무법자 중의 무법자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오가는 대낮에도 사기와 싸움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낮이 가고 밤이 찾아왔을 때 이들이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교활해질지 예상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구역질 나는 파벌싸움을 산소인 양 호흡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하. 고블린 안내원이 정말로 좋은 교육을 시켜줬네.’ 숨을 돌릴 겸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법의 도시일수록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한다는 사실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다. 라피스는 진심으로 내 휴식을 도와주겠지. 하지만 라피스와 만나기 전까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비호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모자를 바로잡았다. 마왕의 뿔을 감추려고 쓴 모자. 내가 마음을 새로하고 검문소로 걸어갔다. “눈빛이 좋아졌네요.” 검문소 직원이 통행료를 받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푸근한 너구리처럼 생긴 랫서맨이었다. “아까 전에는 영락없이 순둥이였는데 지금은 마치 노련한 건달패가 된 것 같군요. 아, 참고로 칭찬이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니블헤임에서 웬만큼 잘 나가는 건달패는 중급 마족보다 위세가 좋거든요.” 하고 그녀가 주소 적힌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제가 속한 조직에서 운영하는 여관이에요. 조무레기가 건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죠. 평범한 여관보다 숙박비가 두 배 비싸지만 적어도 잠자고 일어나니까 내장이 사라질 일은 없습니다.” “감사히 받지요.” 랫서맨이 찡긋 윙크를 날렸다. 검문소에서 빠져나오자 저 멀리 수평선에 도시가 서 있었다. 거대한 항구도시였다. 바다에서 쉴 새 없이 함선이 돌아다녔고, 땅에서는 열 몇 개의 대로가 도시까지 이어졌다. 내가 서 있는 장소는 대로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도 수천 명의 몬스터가 각 대로를 따라 우글우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찌이익, 찌익. 나는 랫서맨이 건네준 종이를 갈가리 찢었다. 대화를 하면서 그녀의 감정이 전해졌다. 바로 탐욕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안내원으로 활동하며 부업 삼아 나 같은 뜨내기들을 자기와 맥이 닿은 여관에 소개시키는 것이리라. 대가로 소정의 의뢰비를 받으면서 말이다. 그 소정의 의뢰비가 여관 손님의 신장 한짝을 팔아서 마련한 게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타지인이라서 살인멸구해도 찾을 이 하나 없어 묻히기 딱 좋다. 라피스 측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북쪽 대로를 따라 쭈욱 걸어갔다. 잠시 뒤에 나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파견왔다는 인물과 조우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는데, 그는 자기 자신을 뱀파이어라 소개했다. 도시 입구에서 『단탈리안』이라고 큼직하게 적힌 팻말을 들고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전하. 상회에서 마련한 숙소까지 전하를 안내할 3급 사무마 부프에라고 합니다. 먼저 니블헤임 안에서 전하에게 신변의 위협이 생겨날 일은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없음을 약속드립니다.” 악수한 손에서 친근함을 전달하기에 적당한 악력이 전달되었다. 실제로 느껴지는 그의 감정도 친근함이었기에 나는 부담없이 기쁜 마음으로 악수했다. 뱀파이어이기 때문일까? 손바닥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서열 제71위의 단탈리안이다.” 지금까지는 혹시나 소동이 일어날까봐 정체를 숨겼으나, 마왕은 모름지기 최소한의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고 라피스가 신신당부 조언해준 바에 따라 반말을 쓰기로 했다. 지금의 상대에겐 마왕임을 숨겨야 할 까닭도 없었다. 허나 되도 않게 마왕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 또한 없지. “니블헤임은 처음이니 본인이 모르는 바가 많다. 이 도시에 관해서는 그대가 한참 전문가일 테지. 모쪼록 잘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청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이윽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호감도가 1 올랐다고 홀로그램이 알려주었다. 생각과 달리 마왕인 내가 겸손하게 나오니까 호감이 생긴 것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는 마왕 전하들 중에 단탈리안 님께서 제일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행사가 열리려면 아직 일주일 가량이 남았지요. 그동안 불편하시거나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쿤쿠스카 상회에서 진심을 다해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고맙다. 그런데 라피스 라줄리는 어디 있나?” “단탈리안 님께서 묵게 되실 숙소 근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본래 전담원인 라줄리 님이 전하를 보필하는 게 당연합니다만…….” 부프에가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다. “여성이 남성을 안내하는 데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뒤따르기 마련이지요. 니블헤임은 마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이자 최고의 휴양지입니다. 휴양지에 으레 그러하듯 니블헤임에도 금녀(禁女)의 구역이 적지 않습니다.” 다소 직접적인 화법에 낯이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기대되는군.” “이를 말씀입니까. 우선 숙소부터 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장을 푸신 이후에 괜찮으시다면 좋은 레스토랑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차로…….” 젊은 뱀파이어 부프에가 날 안내하려는 참이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마차는 타지 않겠다.” “예?” “그리고 본인은 여장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 숙소에 먼저 갈 필요도 없다.” 내가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이곳은 도시 입구에 차려진 간이 시장이었다. 식료품을 사려는 몬스터, 파는 몬스터, 대낮부터 병나발을 불며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는 몬스터 등, 폭력적이지만 생기가 넘쳐흘렀다. “도시를 조금 둘러보고 싶군. 맨발로 말이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유흥지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선 몬스터들이 어찌 생활하는지 보고 싶다. 지금 본인에게 수많은 감정이 전달되고 있구나. 기쁨, 흥분, 권태, 피곤함, 역겨움, 수없이 많은 감정이. 저들 역시 본인과 다를 바 없이 하나의 생명임이 느껴진다.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곳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 생생하게 바라보고 싶다.” 원래 내가 여행에 대해 가진 생각이 그러하다. 명승지나 유적을 중심으로 관광하는 것도 좋다. 거기에도 큰 의미와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몸으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추앙하는 하나의 유적지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지겹고 역겨운 공간일 수 있다. 내게 따분한 공간이 그곳 사람에겐 성스러운 장소일 수 있다. 하나의 장소를 둘러보아도 단지 겉모습을 향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섞여 들어간 사람의 심리까지 즐기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뭣보다 몬스터들이 어떻게 도시를 이루고 있는지 궁금하고.’ 이곳 몬스터들은 대부분 높은 지성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주점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지, 데이트는 또 어떻게 하는지, 주거 공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전하의 의중이 짐작됩니다. 오늘 예정을 변경해야겠군요.” 부프에가 조금 놀랍다는 듯 말했다. “2지구와 4지구를 다니겠습니다. 모두 니블헤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입니다. 토착민들이 주로 살아서 니블헤임의 지역성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근처엔 전통음식점밖에 없어 전하의 입맛에 다소 거칠지 모릅니다.” “어차피 본인은 영양 섭취가 필요없는 몸이다.” 그렇다. 마왕이 된 이후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본래 <던전 어택> 설정에서 마왕은 생명체인 동시에 정령이다. 대지에 있는 마력으로 신체를 구성하고 유지한다. “생애 처음으로 이곳의 음식을 맛볼 생각을 하니 오히려 기대되는군. 자, 안내해라.” “…….” 부프에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상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응? 이게 뭐지?’ 호감과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분노? 지금 상황에서 상대방이 내게 느낄 법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내가 살짝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가.” “송구합니다, 전하. 보통의 마왕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습니다.” 부프에가 고개를 숙였다. 뭐, 그동안 들은 얘기에 따르면 아마도 마왕들은 제멋대로에다 성격파탄자이자 권위주의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라피스가 나한테 놀랐다. 다른 마왕들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지만. ‘여타 마왕과 달라서 호감을 느꼈군.’ 분노는 다른 마왕들에 대한 것이겠고. 감정의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그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언제 이상한 감정을 느꼈냐는 듯이 부프에한테서 나에 대한 호감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가 방긋 웃으면서 나와 나란히 대로를 걸어나갔다. ‘그리움은 뭐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해서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참. 전하, 이곳 시민들을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시민들은 문명권 바깥에서 본능적으로만 살아가는 동족을 가리켜서 몬스터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그들 자신은 마족 혹은 마인이라고 지칭하지요.” “마족? 그렇다면 몬스터와 마족 사이에는 종족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사실 몬스터와 마족을 구분하는 기준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써…….” 나는 부프에의 상세하고 재치 있는 안내를 들으면서 니블헤임 관광에 나섰다. 길이 점차 좁아졌다. 번화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니블헤임은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얼마 전까지 니블헤임은 그저 덜떨어진 어촌에 불과했지요. 다 썩어가던 일개 항구마을이 악덕의 도시로 변한 지 고작 삼백 년이 흘렀을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씩 주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석재로 지어진 2층 주택이었다. 옥상에 올라와 한가로이 빨래를 걷는 몬스터, 아니 마족의 모습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저건 그냥 대한민국 아줌마랑 똑같았다. “이 거칠고 법을 모르는 도시가 마계의 무시무시한 귀족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지난 삼백 년 동안 이곳에 모여든 마족들이 생각과 뜻을 한데 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호이익을 위해, 우리들의 전문적인 '직업'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합쳤습니다.” 부프에는 니블헤임이 일종의 도시공화국이라고 설명했다. 다섯 개의 거대 상회가 모여 있고, 그들이 도시의 우두머리를 자처했다. 쿤쿠스카 상회도 다섯 상회 중 하나였다. “물론 저희도 사사건건 반목하고 대립합니다. 조직 간의 거대 항쟁도 적지 않게 일어나지요. 하지만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만큼은 굳건하게 연합합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도박과 사기, 폭력의 도시가 바로 이곳 니블헤임입니다.” 부프에가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내부의 대립을 극복하고 서로 협력해왔기 때문에 삼백 년의 번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00033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부프에의 말씨에 자부심이 한아름 담겨 있었다. 마치 자기가 도시를 일으켜세운 당사자라는 듯이. 조직에다 자신의 정체성을 투사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간부도 아니고 일개 직원이 그런 자부심을 갖는 것이 다소 우스꽝스러웠으나, 그냥 넘어갔다. 지금은 상대방의 심리구조보다 도시 풍경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희여멀겋게 회칠한 빌라가 줄지어 섰다. 빌라는 골목 양옆으로 늘어섰는데, 골목이 좁은지라 건물과 맞은편 건물 사이로 빨랫줄이 거미줄처럼 추욱 처져 있었다. 옷가지와 담요가 어디를 한참 날아다니다가 우연히 여기에 걸렸다는 듯 나풀거렸다. 그렇게 미로와 같은 골목을 걷다보면 가끔씩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나기도 했다. 대부분 늙은 마족들이 벤치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이! 대접이 엉망이잖아!” 광장 한구석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거기엔 작고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 오픈 카페를 겸업하는 동네 술집이었는데, 그곳에서 묘족(猫族) 노인이 사내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저희 가게가 많이 미흡해서…….” “망할 고양이 새끼. 깡촌 술집 따위가 별 볼 일 없다는 거야 당연하지. 나는 말이야, 모처럼 토속적인 향내를 맡고 싶어서 여기까지 행차한 거란 말이다. 어? 그런데, 어? 서비스는 엉망이고 술은 미지근하고 탁자는 더럽고, 아주 기분이 망가졌다 이거야.” 서비스가 엉망이고 술이 미지근하고 탁자는 더러운 것이 바로 토속적인 향내일 텐데, 하고 내가 마음속으로 딴지를 걸었다. 노인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술집주인인 노인에게서 실시간으로 맹렬한 적개심과 증오가 전달되고 있었다. 옆에서 부프에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서 내게 귓속말 했다. “……제가 길을 잘못 안내했습니다.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보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 자는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사과할 필요없다. 이곳으로 오자고 제안한 것은 본인이었으니. 왜, 저 자가 권력자인가?” “권력자라기보다는, 그. 저 자의 머리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때 깨달았다. 묘족 노인의 감정은 전달되는데 저 난봉꾼의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부프에 말대로 머리를 살펴보니 자그마한 뿔 하나가 뒤통수에 솟아 있었다. ‘아하. 그렇군.’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했다. 나는 인간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하고도 내가 감정을 읽지 못하는 종족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또 하나 있는 것이었다. “저 분이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입니다.” 우와, 나 말고 마왕은 처음 본다. 그런데. “말로만 사과하지 말고 진심을 보이란 말이다, 진심을! 묘족 아니랄까봐 야밤에 발정 난 고양이마냥 시끄럽게 앵앵거릴 줄만 아는구나. 어?” 안드로말리우스가 묘족 노인의 옆구리를 뻥 찼다. ……어째 꼬락서니가 동네 불량배랑 다를 바가 없다. 나도 마왕이라 자칭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위엄이나 권위 이런 게 부족하다마는, 저 안드로말리우스인가 안드로메다인가 하는 녀석보다는 낫다. 그렇게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부프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름한 동네술집이라도 모두 조직 한두 개를 뒷배로 갖고 있습니다. 본래 저렇게 술집주인을 핍박하면 조직 차원에서 보복에 들어갑니다만.” “마왕이라서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부프에가 진절머리를 치며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는 이곳 니블헤임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거의 언제나 말썽을 피고 있지요.” “여기서 거주한다니? 마왕성은 어쩌고.” “아랫사람한테 맡겨준 채 자신은 휴양지에서 노는 것입니다. 소문에 따르자면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의 마왕성은 거대한 탄광과 같다고 하더군요. 고블린들이 끊임없이 마광석을 채취하여 벌어들이는 돈으로 여기 니블헤임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깁니다.” 세상에. 전형적인 악덕이었다. 저런 마왕도 있구만. “특히 카지노를 즐기는데, 며칠 전에는 카지노에서 일만 골드를 날렸다고 합니다. 그 일만 골드를 모으기 위해서 고블린들이 밤새서 곡괭이를 휘둘러야 했음은 물론이지요.” “쓰레기 버러지로군.” “적절한 표현입니다.” 게임 <던전 어택>에서 안드로말리우스는 튜토리얼에 등장한다. 용사의 칼질에 손쉽게 죽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하라고는 약해빠진 고블린 몇 마리밖에 없어서 레벨 1짜리 용사한테도 당하는데, 이런 사정이 숨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최악의 마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보니 나는 양반이었다. 저거 살려둬봤자 괜히 용사한테 경험치나 가져다바칠 텐데 그냥 여기서 죽여버리면 안 되려나. 안드로말리우스의 이벤트가 주인공을 본격적인 용사로 각성시키기도 하고. ‘상태창.’ 혹시 몰라서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해보았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안드로말리우스   5    3    3 ━━━━━━━━━━━━━━━━━━━━ ‘푸핫!’ 겁나게 약하잖아! 맙소사. 최하급골렘 레벨 1짜리가 가진 능력치가 7/5/5(체력/공격/방어)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쉽게 말해 최하급골렘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능력치를 가졌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저렇게 허약한 놈을 왜 니블헤임 주민들이 방관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기 어려웠다. “왜 저 따위 애벌래 새끼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냐.” “실례합니다만, 전하. 안드로말리우스 전하 또한 명색에 마왕입니다.”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떠받든다는 얘기라면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왕이든 아니든 누구나 자기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법. 저 자는 마왕의 호칭이 아까운 돼지 자식에 불과하다.” 부프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족은 천성적으로 마왕에게 대항할 수 없나이다.” “천성적으로?” “모르셨군요. 마족이 마왕을 적대하려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피어오릅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지요.” 뭐시라.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마왕은 적어도 마계에서 누구한테 해꼬지 당할 일이 없다는 뜻 아닌가. 마계까지 인간이 쳐들어올 리는 없고, 설령 쳐들어올지라도 니블헤임까지 함락시키지 못할 공산이 크니까. 한 마디로 마계에선 마왕이 낱말 그대로 왕이라는 소리였다. <던전 어택>에 그런 설정이 있었나? 게임 폐인인 나에게도 금시초문인 정보였다. ‘어……아니.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한데.’ <던전 어택>에서 대략 중후반부에 한 마왕의 간부가 주인공 일행에 합류하는 이벤트가 있다. 간부가 인간들과 싸우는 와중에 용사한테 그만 애정을 품어버린다는, 아주 쉬어빠진 이야기이다. 간부가 미녀라는 건 당연하고. 간부가 '난 마왕에게 저항할 수 없는 몸이다'라며 용사한테 울고불고 늘어지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용사는 특별히 강력한 노예각인의 마법을 써서, 간부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명령에만 복종하게 만든다. 그 이후로 간부는 용사한테 시시때때로 몸을 들이대면서 섹스 어필을 해대는데……아무튼.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였냐.’ 나는 그저 간부한테 모종의 저주가 새겨졌겠거니 여기고 있었다. 마왕한테 적대할 수 없는 저주라느니 뭐 그런 것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주연 히로인도 아니고 조연 히로인이라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까 중대한 설정이 숨어 있었다. ‘얼마 전에 고블린 부락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었군!’ 화전촌 주변의 고블린 부락을 토벌할 때도 고블린들이 영 맥없이 쓰러졌다. 내 골렘 부대가 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왕인 내게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정보였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 단박에 늘어났다. 예컨대 고블린 부락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블린들을 협박해서 특정 마을을 습격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명령을 거부할수록 고블린들은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고통이 무서워서라도 결국은 복종할 수밖에 없겠지. 허, 휴양차 들른 도시에서 어마어마한 걸 얻어가네. “술집주인인 묘족도 일신의 전투력으로는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압도합니다. 하지만 저렇듯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마왕이란 저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이지요.” 부프에는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묘족 노인에게서 점점 더 짙은 적개심이 느껴질수록 나 또한 안드로말리우스에 대한 증오가 생겨났다. 평소라면 적당히 감정을 관망하겠으나, 상대방이 송사리 중의 송사리라는 사실을 알아서 그런지 굳이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다. “궁금한 점이 있다. 마족은 마왕에게 대항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인가?” “통상은 그렇습니다. 마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같은 마왕뿐이지요. 아, 물론 하등한 인간종도 전하께 반항할 수 있습니다만.” 부프에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 내가 잠깐 고민에 잠겼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는 <던전 어택>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잡몹이다. 고블린 부대를 이끌고 겁대가리 없이 주인공의 마을을 습격해서, 주인공의 부모님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마을사람을 학살한다. 주인공이 사는 마을이 안드로말리우스의 던전에 가깝게 위치한 것이 불운이었다. 그것이 분명히 게임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7년 전. 앞으로 대략 3년 뒤에 벌어질 일이다. 졸지에 가족과 마을사람을 잃어버린 주인공은 우연히 『하얀 날개』라는 A급 모험대에 주워지고, 모험대의 막내로서 실력을 쌓고 동료를 얻는다. 그리하여 7년이 흐른 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의 던전에 쳐들어간다. 당연히 잡몹에 불과한 안드로말리우스는 그대로 썰려버리고. “부프에.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를 비호하는 세력이 따로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가 단탈리안 전하를 보조하듯, 예전에는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보조하는 상회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흐음. “안드로말리우스를 좋아하거나 그와 친분이 있는 마왕은 없는가.” “역시 없습니다. 마왕 전하들 사이에서도 안드로말리우스는 좋지 않은 취급을 받지요. 방금 전에 단탈리안 전하가 쓰레기 버러지라고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전하.” 부프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 하문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 것 아니다.” 내가 너털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애도하지 않을 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재밌어서 말이다.” “……전하.” 부프에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인해 한 옥타브 높아졌다. “설마……?” “아니, 이게 누구야! 위대하신 쿤쿠스카 상주 나으리의 꼬붕 아니신가.” 그때 안드로말리우스의 목소리가 우리 쪽을 향했다. 아마 자신을 두고 멀리서 쑥덕거리는 우리 두 사람이 눈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묘족 노인의 머리를 오른발로 걷어찬 다음, 땅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부프에가 고개를 숙였다. “안드로말리우스 전하를 뵈옵니다.” “딱딱하기는. 어? 불철주야 박쥐 새끼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시느라 고생 많겠어. 그러고보니 댁도 박쥐 새끼였지! 내 참, 그걸 까먹고. 미안해. 뱀파이어들을 박쥐 새끼라고 부르는 버릇이 하도 입술에 붙어버려서 나도 모르게 박쥐 새끼라고 불러버렸네. 내 작은 실책을 용서해주겠나? 어?” 와우, 옆에서 부글부글 끓는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부프에는 현재 한 시간 내내 물 끓인 냄비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실책을 논하겠습니까.” 그러고도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으니 과연 상인은 상인이구나 싶었다. 라피스도 그렇고 쿤쿠스카 직원들은 표정 관리에 도가 텄구만. 아니, 라피스는 애당초 표정이 없는 거지만. “그래, 그래.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야. 어? 자기가 좁쌀만한 권력을 가졌다고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그러면 안 돼요. 박쥐 새끼야. 내가 너를 오래동안 지켜봤는데 말야, 너 아주 인성이 못 됐어. 건방지단 말이지. 황금 조금 만지작거렸다고 감히 마왕을 우습게 보고 말이야. 어?” “……새겨 듣겠습니다.” 부프에의 감정이 냄비에서 가마솥으로 진화했다. “근데 옆에 이 양반은 누구신가? 멀대처럼 생겨서 표정이 뚱하구만. 속도 아주 텅 비었고. 어? 내 무슨 현자 나으리라도 되는 줄 알았네.”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곧 있을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행차했습니다.” “뭐? 전하?” 안드로말리우스의 눈빛에 경계심이 들어섰다. 그가 몸을 완전히 내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악수를 건넸다. “크흠, 미안합니다. 제가 미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실례를 범했습니다요.” 말투도 대번에 바뀌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느낄 순 없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손바닥 보듯 뻔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최하위의 마왕. 행여나 자기보다 서열이 한참 높은 마왕을 건드렸다가 곤혹을 치룰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방긋 웃으면서 손을 마주잡았다. “아니오. 안드로말리우스 님의 명성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 언제 한번 찾아뵙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리 우연히라도 만나 반갑소.” “무슨 명성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 실례지만……단탈리안 님은 서열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동지들의 사정에 관심이 적어 미처 단탈리안 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씨구. 칠십일 명밖에 안 되는 자기 천적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했다. 하긴 본인도 그걸 아니까 인간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니블헤임에서만 죽치고 있는 것 아닐까. “부끄럽게도 서열 제7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소외다.” “뭐? 71위?” 안드로말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서열의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럴까, 태도 또한 다시금 일변했다. “하, 쓰레기였잖아!”                  00034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안드로말리우스 전하! 말씀이 지나칩니다!” 부프에가 말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와 악수한 손을 얼른 빼내서 오물이라도 묻은 양 탁탁 털어댔다. “지나치긴. 71위? 그럼 내가 이름을 못 기억하는 것도 당연하지. 어이, 친구. 뭐 좋을 거 보겠다고 이 촌구석까지 오셨나? 얼른 꺼지게.” “단탈리안 님은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손님입니다.” 부프에가 안드로말리우스와 내 사이로 끼어들었다. “더 이상의 모욕은 저희 상회에서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좌시하지 않을 거면, 어? 날 잡아서 곤장이라도 치시려고? 어이구야. 아무런 명분도 없이 마왕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상회라고 소문 나면 다른 마왕들이 참 좋아라 하겠다. 그래서 네놈이 건방지다는 거야, 박쥐 새끼야.” 안드로말리우스가 부프에를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네깟 것들이 꼼수로 언령(言靈)에서 벗어나본들 누군가의 노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그래, 네놈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 아마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냐. 그 이름으로 자기를 지칭하는 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어?” “…….” “하찮은 노예 새끼들. 천한 벌레들 같으니라고. 결국 너희는 우리 마왕의 노예야. 그걸 기억해라.” 부프에가 침묵했다. 마음속으로는 절찬리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프에는 모종의 방법을 써서 마왕에게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 같았다. 별로 자랑스러운 수법이 아니어서 모욕을 당하는 것이고. 마왕의 힘에 대항하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웠으나, 잠시 머릿속 한켠에 호기심을 밀어두었다. 노예니 뭐니 하는 단어를 들으면서 대충 진실이 유추되기도 했다. “퉷.” 안드로말리우스가 침을 뱉었다. 도중에 나를 한번 꼴아보고, 술집으로 다시 걸어갔다. 뒷모습이 무척 왜소했다. 부프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그대는 소신을 다했다.”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하문할 것이 몇 개 있다. 마왕들 사이에도 법률이 있는가?” “없습니다. 마왕이 법을 전해도 오직 본인의 영토에 적용될 따름이지요. 마왕 위에는 그 어떤 것도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마법을 쓸 줄 아는고?” “예.” “아주 좋군.” 결심이 섰다. 나는 품속에서 마법스크롤을 꺼냈다. 예전에 라피스한테 석 장 사들인 물건이었다. 노예경매소에서 한 번 쓰고 아직 두 장이 남아 있었다. 그중 한 두루마리를 부프에한테 건네주었다. 부프에가 얼떨결에 마법스크롤을 받았다. “이것은……?” “중규모 소환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여기서 거행하라.” “저, 전하.” 부프에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송구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니블헤임에서 소환마법은 엄격한 제도 아래 금지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하께서 지금부터 하실 일은…….” “마왕 위에 그 어떤 법률도 군림할 수 없나니.” 내가 그를 빤히 보았다. 굳이 연기 스킬을 쓸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강하게 밀어붙이면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묘하게 확신이 들었다. “그대가 그리 말했다. 본인이 잘못 들었는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더 이상의 반문은 허가하지 않겠다. 거행하라.” 부프에의 눈동자에 내 눈동자가 고스란히 비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난장판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묘족 노인이 죄송하다는 말만 고장 난 기계처럼 반복했다.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광장에 모인 몇몇 마인들이 느끼고 있는 억울함, 분개, 적대심까지 전부.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프에가 스크롤을 펼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술집 방향을 쳐다보았다. 안드로말리우스, <던전 어택>의 플레이어에게 조작법을 알려주는 데 소모된 마왕. 튜토리얼용 적군이 필연적으로 그러하듯 주인공 용사한테 곧바로 죽는다. 어째서 자신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냐고 묻는 용사에게, 안드로말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벌레를 밟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하지? 용사가 마왕에 대해 적대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데 지대한 공언을 한 발언이었다. 안드로말리우스 때문에 용사는 마왕이란 존재 자체를 이 지상에서 몰아내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되니까. “아르체시투스(Arcessitus).” 부프에가 중얼거렸다. 직후, 광장 한가운데에 붉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종족에 따라 마법진은 색깔이 달라진다. 붉은색은 아마도 흡혈귀의 상징이겠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했다. 부프에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여유롭게, 조금 두근거리면서 마법진을 관망했다. 곧이어 마법진에서 골렘 부대와 요정 부대가 붉은 빛에 휩싸여 소환되었다. “소환마법이잖아!” “미친, 어떤 새끼가 저 따위 마법을 써갈겨!?” “쿤쿠스카 상회 자식이 썼다네. 스크롤을 찢는 걸 내가 봤어.” 사람들이 광장 한구석에 급히 모여들었다. 각양각색의 종족이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바로 전열이 완성되었다. 품속에서 능숙하게 단검 따위를 꺼내드는 모습이 싸움에 아주 익숙해보였다. ‘야아.’ 조금 감탄했다. ‘저거, 기습해도 별반 성과가 없겠네.’ 노예경매소에서 인간들이 보여준 태도에 비하면 이곳 주민들은 능숙한 전사와 같았다. 만일 내가 이번에 노리는 목표가 저들이라면 크게 고생할 것이 분명했다. 안드로말리우스만 홀로 동떨어져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 듯했다. 어이쿠야, 입까지 떠억 벌리고 계셨다. 저러다 입에 파리가 들어갈 텐데. 두 번째라서 익숙해진 걸까. 갑작스러운 소환에도 몬스터들은 침착했다. 이번에도 마음껏 날뛰면 되는 거냐, 하고 골렘과 요정이 맹렬하게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미 급한 요정 서너 마리가 벌써부터 날개짓하며 광장 상공을 날아다녔다. 귀여운 것들. “윈드커터.” 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일제 사격.” 손가락 끄트머리가 가리킨 곳에는 안드로말리우스가 멀뚱하게 서 있었다. 요정들이 즉각 바람의 칼날을 쏘아냈다. 열 마리의 요정이 발사한 마법은 이미 안드로말리우스에겐 오버킬이나 다름없었다. 최하급요정의 기본 공격력이 3. 여기에 내 요정들은 평균 레벨이 3이니까, 대략 평균 공격력이 4 정도 된다. 안드로말리우스의 방어력은 3이다. 공격력 4에서 방어력 3을 빼어서 마지막엔 공격력 1이 남는다. 즉 이번 한번의 공격에 모두 10 가량의 데미지가 안드로말리우스에게 들어간다. 체력이 고작 5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말리우스는 한 번의 공격조차 감당하지 못하리라. 당장에 그가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나는 팔다리같이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를 노리라고 우리 귀여운 요정들에게 주문했다. “히, 히이이익!?” 안드로말리우스가 기겁했다. 녀석은 곧바로 뒤돌아서서 뛰어갔다. 하지만 바람보다 더 빨리 뛸 리는 없었다. 윈드 커터가 녀석의 허벅지 등에 명중했다. 녀석이 넘어지면서 비명을 터트렸다. “끄아아아악! 시바아알!” 그래도 근성이 있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엉금엉금 기어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요정들과 함께 술집으로 돌입했다. 요정들이 나를 중심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날았다. 골렘은 덩치가 커서 건물에 들어올 수가 없으므로 바깥에 대기시켰다. “으, 으으. 이거 뭐야, 어? 이거 뭐야!” 안드로말리우스는 술집 구석탱이에 주저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기어가는 와중에 피를 제법 많이 흘렸는지 바닥에 붉은 액체가 묻었다.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너 이 새끼, 뭐냐고!”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군.” 약간 유쾌해져서 내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일단 무척 멍청한 질문이라고 말하겠네. 내가 뭐냐고 묻는다면 마왕이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지.” “끄으윽! 마왕 새끼가 왜 나를 죽이려 들어!?” “그것도 우문이로군. 벌레를 밟는 데 무슨 이유가 달리 필요하나? 음, 대화를 나누기 앞서 일단 그 못돼먹은 말투부터 고쳐먹게나. 무얼.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동으로 말투를 교정하게 해주겠네.”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무, 무슨――끄하아아아악!” 요정들이 윈드 커터를 정확하게 상대방의 팔뚝에 쏘았다. 핏방울이 튀겼다. 안드로말리우스는 한손으로 다친 팔뚝을 잡고 바닥에 굴렀다. 그의 얼굴이 금방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자. 비명만 지르지 말고 본인 말도 좀 들어보게.” “끄윽, 끄으으윽…….” “본인은 요사이 꽤나 피곤했어. 조금이라도 심신에 안정을 취하기 위해 모처럼 마계의 도시로 휴양을 왔지. 그래서 기분 좋게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웬 깡패 새끼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 아닌가. 이거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자네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죄송합니다, 끄윽! 죄, 죄송…….” 드디어 상황을 파악했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다리와 팔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빌어대는 것이니 지각해도 한참 지각한 것이었다. 나는 조금 전에 안드로말리우스가 묘족 노인에게 한 말을 그대로 똑같이 들려주기로 했다. “말로만 사과하지 말고 진심을 보여주게. 진심을.” “도, 돈을 드리겠습니다! 끅!” 안드로말리우스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내 발치에 가져다 놓으려 했다. 나는 사정없이 그의 손등을 짓밟았다. 그 손에서 돈주머니가 아래로 떨어졌다. “끄흐으으윽!” “지금 본인을 한낱 불량배로 모는 것인가? 실망스럽군. 만일 내게 보여줄 수 있는 진심이 이것이 전부라면 본인은 그대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어.” “무엇,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목숨만은…….” 이제 그는 아예 이마통을 바닥에 꼬라박은 채 중얼거렸다. 고통에 침이 계속 흐르는지 침에 의해 발음이 다소 막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잭에게 이와 똑같은 짓을 했을 때는 우울함과 죄책감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통쾌했다. 하긴 잭은 애송이 호구였으나 결코 쓰레기가 아니었다. 이 놈은 쓰레기였다. “본인이 그대에게 알고 싶은 바가 한 가지 있다네.”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대가 정직하게 대답해준다면 그대의 목숨에는 안전을 보장하지. 어떠한가. 대답할 마음이 생기는가?” 안드로말리우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다기보다 발버둥친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지만. 내게는 그 정도 제스처도 만족스러웠다. “안드로말리우스. 자네의 마왕성이 어디에 있는가?” “프랑크, 끄으으……프랑크 제국에 있습니다. 로렌 지방의……라엘리아 산중턱입니다.” “훌륭하군.” 내가 만족스러워서 미소를 지었다. “마왕성 근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무엇인가?” “포메트라, 깜파뉼……그 외엔 이름 없는 마을밖에…….” 아주 좋다. 이것이 내가 노리는 바였다. 얼마 전부터 내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십 년 후에 용사가 되어 마왕들을 족치고 다닐 용사, <던전 어택>의 주인공 캐릭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시나리오에 따르면 안드로말리우스 다음에 바로 내가 용사한테 토벌당한다. 그런 미래를 막기 위해서라도 용사에 대한 사전준비는 어떤 측면에서든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용사가 어디에 사는지 모른다는 것.’ 게임에는 용사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만 나왔지 상세하게 어느 지방,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사실상 용사를 직접적으로 견제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드로말리우스를 보자 좋은 수가 떠올랐다. 튜토리얼에 따르면 안드로말리우스의 마왕성 근처에 용사의 마을이 있다. 그렇다면, 안드로말리우스 마왕성 주변 일대를 집중적으로 수색하면 용사의 마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지금 꼬맹이에 불과한 용사를 미리 처리하면……내가 이 세계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대폭 올라간다.’ 본격적으로 적이 성장하기 전에 애당초 싹부터 제거해버린다. 약간 치사한 짓이었으나 겨우 약간의 치사함에 내가 지레 물러설 리가 없었다. 여하간 마왕인 내게 용사란 무서운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끄허어어억!” 안드로말리우스의 손등을 깔아뭉개고 있는 내 오른발에 힘을 더 주었다. 또 비명이 터졌다. 역시나 듣기 좋은 비명소리였다. 스트레스가 풀려가는 게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졌다. 이러다가 스트레스를 남 괴롭히는 것으로 푸는 변태가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될 정도였다.      00035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듬뿍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네가 성실하게 대답해주어 무척 흡족하다네.” “살려주십쇼……끅, 목숨만은…….” “물론이지. 본인이 자네를 굳이 죽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포션, 회복포션을…….” 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안타깝게도 본인에게 포션 따위는 없네. 다른 사람에게 구해보게나. 하지만 먼저 일어나서 술집 주인장에게 사과하게! 노인을 공경해야지 어디 그래서야 쓰겠나.” 허벅지에 상처가 있는 탓에 안드로말리우스는 일어나면서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에게 '저런, 괜찮은가' 하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렇다고 발걸음 속도를 늦추거나 그러지 않았음을 물론이었다. 아마 상대방은 속으로 나를 무진장 욕하고 있겠지. “이제 본인이 바라는 것은 그것뿐일세.” “아, 알겠습니다.” 그를 부축해서 술집 바깥으로 나왔다. 마족들이 여전히 전열을 이루고 있었으나 내 목적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골렘들을 심각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전열에 뒤섞여 있는 이들 중 묘족 노인을 향해서 걸어갔다. “주인장! 이 사람이 그대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고 한다.” 묘족 노인네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마족들이 수군거리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구경꾼이 몰려와 술집에 들어가기 전보다 두 배는 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예, 예에.” “아직 세상 경험을 많이 하지 못해 실수한 모양이다. 그대가 너그롭게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자아. 자네는 무엇하나. 얼른 사죄하지 않고.” 내가 예고도 없이 부축했던 팔을 빼냈다. 그러자 안드로말리우스가 허벅지의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신음을 참으면서 느릿느릿 땅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죄송하오……내 실수했소.” “허어!” 안드로말리우스의 손등을 꾸욱 밟았다. “끄읍, 끄으으읍!” “사죄하는 사람이 말투가 그게 무엔가! 조금 더 정성을 담아서!” “끅,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 이마를 땅에 바싹 갖다 붙이고. 그렇게.” “죄송합니다, 히끅, 죄송합니다…….” 사죄가 계속되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하도 머리를 땅에 박아 이마에서 자갈과 피 그리고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다. 평소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지 구경을 하러 온 마족들이 낄낄 웃어댔다. 웃음소리를 들은 안드로말리우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마족들을 노려보았다. 마족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내가 손등을 짓밟자 비명소리와 함께 안드로말리우스는 오체투지할 수밖에 없었다. 묘족 노인이 보다 못해 이만 됐다고 말할 때까지 사죄가 계속되었다. “사과를 받아준 주인장한테 감사의 말을 올려야지.” “감사합니다. 흐끄윽, 감사합니다…….” 묘족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살펴보니, 상대에 대한 적의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런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으윽, 끅……흐윽.” 서러움이 밀어닥쳤는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울었다. 아이고야,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자기가 잘못해서 자기가 벌 받는 일에도 억울해하는 게 어린애의 특징이었다. 어쩌다 이런 애가 마왕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지 모르겠다.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안드로말리우스   1/5   3    3 ━━━━━━━━━━━━━━━━━━━━ 체력이 1밖에 남지 않았다. 허벅지에서 출혈이 지속되고 있으니 얼마 뒤면 바닥날 것이었다. 나는 다시 그를 잡아서 몸소 일으켜세웠다. 그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좋네. 됐어, 그만 하면 충분한 것 같군. 이제 자네 갈 길을 가게나.” “……감사합니다…….”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와 무릎을 쓸어주었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출혈에 낯빛이 쌀뜨물처럼 허얬다. 그가 나에게 고개를 푸욱 숙여 인사하더니, 이윽고 광장에 모인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호, 혹시 포션을 가진 사람 없습니까……?” 서른 명은 족히 넘는 마족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일부러 침묵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항쟁과 폭력이 일상사인 니블헤임의 주민에게 포션 하나가 구비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침묵했다. “제발, 포션을……나중에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회복마법이라도……누가…….” 싸늘한 눈초리가 집중되었다. 뭐라고 쑥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내용은 아니리라. 안드로말리우스의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도움을 구하기가 글렀음을 깨닫고 망가진 다리를 이끌면서 광장 저편으로 갈팡질팡 걸어갔다. 몇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넘어졌다. 딸꾹질과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며 안드로말리우스가 기어갔다.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바닥에 길게 붉은 선분을 그리고 있었다. “흐끄윽……끅……흐끅…….” 나는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타깝거나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냥 이런 순간에는 담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왕의 감정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저 작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기 싫다는 감정밖에 없을까? “전하.” 부프에가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에게 포션이 있습니다.” “주지 마라.” “허나 저런 죽음은 너무나 외롭나이다.” “몇 분 보지 못한 사이에 박애주의자가 되었군.” 내가 피식 웃었다. “죽음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마는.” “…….” “잠자코 지켜봐라.” 안드로말리우스는 얼마 기어가다 그만 멈추었다. 광장 끄트머리까지 갔다는 점을 칭찬해줘야 할까. 등이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아 아직 숨이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간이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상태창.’ 홀로그램이 뜨지 않았다. 죽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뒤돌아섰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아무 골목 하나를 잡아서 걸어나갔다. 부프에가 말없이 쫓아왔다. 장소를 벗어나자마자 마족들이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었다느니, 꼴보기 좋다느니 하는 말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거닐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부프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어, 굳이 죽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침묵하는 분위기가 싫었기에 쾌히 대답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본인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강자가 모욕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인내하겠으나, 약자의 모욕에 가만히 당해줄 수는 없다. 그보다 더한 약자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벌써 소문을 듣고 맞은편에서 마족 아이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마왕이 죽었다고 서로 소리치면서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얼른 가자는 아이와 조금 기다려달라는 아이가 차례대로 뛰어갔다. “두 번째로, 이곳 니블헤임에서 좋은 명성을 얻을 기회였다. 주민들에게 수시로 민폐를 끼치는 자를 처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본인에게 호감을 가질 이가 생기겠지. 그중엔 본인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고로 왕에게 인상이란 중요한 법이지.” “……맞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부프에가 약간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대에겐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공범이니까.” “고, 공범이요?” “포션이 있는데도 살리지 않았잖은가.”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전하께서!” “어허. 그대가 무슨 나의 신하인고. 눈앞에 죽어가는 이를 살릴지 말지는 온전히 그대가 판단하는 것인바, 죽게 내버려둔 것도 최종적으로는 그대의 책임일세. 쿤쿠스카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치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까 꽤나 궁금하군.” 부프에가 입을 떠억 벌렸다.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 그가 소리쳤다. “궤, 궤변입니다!” “농담이다.” “…….” 차디찬 공기가 절묘하게도 우리 둘 사이를 지나갔다. 겁나게 질색하는 감정이 상대방한테서 느껴졌다. 음, 방금 내가 우회적으로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한 것을 이 친구는 알려나 모르겠다. 부디 눈치 채줬으면 한다. 아니면 라피스를 통해서 협박을 전달하는 수밖에 없거든. 라피스한테는 곤란한 역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내가 싱긋 웃었다. “비밀이다.” “예에?” “비밀이라고 말했다. 어찌 본인의 뜻을 사사건건 헤아리고자 하는고? 그대가 제량껏 추론해보아라.”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로 원망의 감정이 맹렬히 전달되었으나 알 바 아니었다. 용사를 죽이기 위해, 또는 훗날 용사를 각성시키지 않기 위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믿어주겠는가. 저 혼자 열심히 머리에 열을 올리며 추론해주기 바란다. 원래 남자는 비밀이 한 개 정도 있어야 매력적인 거다. * * * 저녁, 부프에가 쿤쿠스카 상회의 본부에 도착했다. 막 단탈리안과 함께 니블헤임 전통 레스토랑에서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해산물 요리가 맛있었지만, 솔직히 부프에는 음식 맛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부프에 님.” 상회 본부의 1층 접수대에서 안내원이 말했다. 풍성한 금발이 아리따운 호족(虎族) 아가씨였다. 상회의 간판으로 삼기에 적절히 아름답고 유사시에 전투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인재로, 특별히 부프에가 인사에 개입하여 고용한 자였다. 부프에가 습관적으로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늦은 시간에 수고하십니다.” “아뇨, 이게 제 일인걸요.” 호족 여인이 뺨을 붉혔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부프에는 진작부터 알았다. 그러나 그는 여자관계에서 깨끗할 필요가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엔 그런 인물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상회의 주인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회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여인의 표정에 선망이 스며들었다. 상회 회장, 이바르 로드브로크. 그 전설적인 진조는 쿤쿠스카 상회의 일곱 간부 중에서도 필두를 차지했다. 명목상 회장은 일곱 간부와 동등하며 회의에서 의장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지만, 그것이 정말로 명목이라는 사실을 여인도 알고 있었다. 간부 중에 로드브로크 회장에게 대립하는 자도 있긴 했다. 그러나 소수파에 불과했다. 눈앞의 사내는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할 만큼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여인이 부프에와의 만남이 짧은 걸 안타까워하면서도 텔레포트 장치까지 그를 안내했다. 부프에가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내들자, 텔레포트 장치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텔레포트가 승인되었다는 표시였다. “그럼 이만. 수고하십시오.” “저기, 부프에 님. 혹시 시간이 되시면……그.” 여인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언제 저녁을 한번 대접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저녁, 말입니까.” “예! 항상 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또, 그……그러니까,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시하고 싶기도…….” 이런, 하고 부프에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처럼 묘령의 여성이 고백해온 적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프에는 어디까지나 유망하고, 예의바르고, 실력이 있는 미청년으로 머물러야만 했다. 그런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과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따로 있었다. 예컨대 순수한 미청년을 선호하는 마계의 귀족부인에게 접근할 때라든가. 이 때문에 부프에라는 존재가 허락되고 있었다. ‘이런 역할이 필요하긴 해도, 조금 귀찮군.’ 부프에가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아…….” 여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호족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이 차였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운 것이리라, 하고 부프에가 짐작했다. 그 치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부프에는 즉각 그럴듯한 변명을 떠올렸다. “안델리나 양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관심을 보이시고 계시는 지금, 저에게 내려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렇군요. 그렇지요.” 여인의 표정이 다소 침착해졌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의 미래를 생각했다. 확실히 쿤쿠스카 회장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요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약간이나마 방해했다는 생각이 들자, 도리어 그녀는 자책감이 들었다. 부프에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회장님을 이 이상 기다리게 만들면 후환이 두렵거든요.” “아, 네! 당연하죠!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시간을 잡아서…….” “아닙니다. 안델리나 양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저도 즐거웠습니다.” 하고 부프에가 텔레포트 장치 안의 마법진으로 걸어 들어갔다. 1인용 텔레포트였다. 부프에의 작업멘트에 여인이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부프에는 다시 한번 미소를 날려주고 주저없이 마력을 발동했다. 그러자 눈앞에 붉은빛이 점멸했다. 상회 본부 최상층. 오직 극소수의 텔레포트 장치를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장소였다. 부프에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목재로 된 문이 서 있었다. 고급스럽지만 흡혈귀의 취향에 따라 다소 기괴한 문양이 문짝에 새겨져 있었다. ─끼이이익.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부프에가 익숙하다는 듯 거침없이 걸어갔다. 넓은 방을 가로질러 창가에 당도하자, 그곳에는 흡혈귀 전용의 관(棺) 열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요즘에는 흡혈귀도 촌스럽다고 침대로 쓰지 않는 관이었다. 하지만 부프에는 관에서 자는 것이 좋았다. 지금도. 천 년 전에도. 부프에가 여러 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관짝이 소리없이 열리고 닫혔다. 잠시 후, 부프에가 들어간 것과는 다른 관에서 문이 열렸다. 거기서 초로의 신사가 일어섰다. 남자가 세수하듯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그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니블헤임의 붉은 저녁이 골목과 골목에 번지고 있었다. “마왕 단탈리안……흥미로운 인물이군.” 노인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00036 발푸르기스의 밤 =========================================================================                                       “마지막 이유가 무엇일까.” 이바르가 중얼거렸다. 그가 넓은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고민, 그중에서도 유쾌한 고민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썩 불쾌한 고민에 빠질 때는 그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바르는 오랜만에 두뇌가 자극되어 약간 들떠 있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레 건넨 말이 떠올랐다. ─그대에겐 말해도 좋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공범이니까. 이바르가 피식 웃었다. ‘감히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하다니.’ 그는 단탈리안이 무슨 속뜻을 품고 자신에게 '우리는 공범이다'라고 말했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다만 순진한 청년을 연기하느라 얼빵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당혹스러워 하며 단탈리안한테 소리를 꽥 지를 때조차도 이바르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렸다. 이건, 충분히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다. 마왕을 살릴 수 있는데도 가만히 넋을 놓고 있었다? 마왕을 전문으로 대접하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제아무리 쿤쿠스카가 마계 제일의 상회라 할지라도 이를 대신할 상회는 꽤나 많았다. 쿤쿠스카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마왕들은 곧바로 파트너를 갈아치울 것이다. 여차하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회와 누가 거래하겠는가. 상인에게 신뢰란 생명보다 무거운 법. 상대방 쪽에서 상회의 생명줄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부프에, 아니 이바르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필 상대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 대적할 수 없는 마왕임에야. 그러나 상대측은 간단하게 말해버렸다. 농담이라고. ‘즉, 마왕 단탈리안은……우리를 협박하기보다는 보다 긴밀한 상호관계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번 실수를 넘어가주마. 대신 너희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라. 이바르는 동시에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마왕 단탈리안은, 자신의 협박을 상부에 전하라고 모조인격인 부프에한테 말하지 않았다. 희미한 암시만 줄 따름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 상회의 능력을 시험했다.’ 자기가 협박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과연 상회에서 파견한 자의 능력이 그 정도가 되는지 안 되는지……단탈리안은 시험했다. 웃으며 농담이라고 넘어가면서. 도대체 왜? 협박을 전달하기만 했으면 쉽게 풀릴 일을 왜 굳이 어렵게 풀어나가는 것일까? 마왕에게는 마족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그 힘을 협박에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도 난해한 길을 선택했다. 거기에 단탈리안의 진짜 의중이 있노라고, 이천 년을 살아온 흡혈귀가 생각했다. ‘만약 우리의 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면, 쿤쿠스카가 아니라 다른 상회와 거래하겠다는 의미다…….’ 이바르는 미소를 지었다. 강자의 미소였다.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이를 향해서 기꺼이 미소를 보일 만한 여유가 이바르에겐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정보는 비싼 값에 팔릴 게 분명했다. 경쟁 상회들이 앞다투어 단탈리안을 모시고 가겠지. 쿤쿠스카 상회에서 그저그런 고객으로 대접받던 것과 다르게 그는 경쟁 상회에서 최고급 고객으로 환대받으리라. ‘이것이, 마왕이 말한 세 번째 이유.’ 꽤 치밀하다. 더욱 더 재미난 점은 상대측에서 이 치밀함을 가볍게 처리해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단탈리안 본인이 말했다시피 쿤쿠스카 상회를 협박하는 것은 첫 번째 이유도, 두 번째 이유도 아니었다. 마지막 이유에 불과했다. 다른 걸 처리하다가 내친 김에 협박도 해보았다는 얘기였다. 자신을 모욕한 자에게 보복함으로써 권위를 지킨다. 도시에 민폐를 끼치는 자를 처리함으로써 명예 및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실수를 범한 파트너를 위협함으로써 이득을 챙긴다. “후후.” 이바르가 웃었다. 웃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마치 거장의 깔끔한 붓칠을 눈앞에 두고 모종의 숭고심을 느끼는 것처럼. 단 한 수,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여서 권위와 명성 게다가 이득까지 쟁취하다니. 그 짧은 순간에 마왕 단탈리안은 모든 것을 계산했다. 좋다. 그 협박, 기쁘게 받아주겠다. 이바르가 미소를 지었다. 마왕이면서도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않고 순전히 지략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마왕답지 않은 마왕이라. “저번에는 최악의 전염병, 이번에는…….” 이바르가 혼잣말하며 눈앞을 바라보았다. 방안이 어두웠다. 흡혈귀인 그에게 어둠은 더없이 안락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안락함뿐만이 아니라 왠지 모를 기대마저 어둠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그렇게까지 우리의 조력을 얻으려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바르가 대답을 들은 양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어떻게 단탈리안을 절대적인 아군으로 삼을지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면서. 그와 똑같은 시간대, 단탈리안의 숙소에서는――. “왜 마왕을 죽였습니까? 미쳤습니까?” “아, 아니. 라피스! 그러니까, 내 얘기를.” “마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합니다. 그걸 전하 스스로 깨부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혹시 일부러 고통을 즐기시는 변태입니까? 그런 겁니까? 솔직히 가증스럽습니다. 실망스럽습니다. 절망스럽습니다.” “으윽……죄송합니다…….” 만일 단탈리안이 라피스에게 실시간으로 와장창 깨지고 있음을 알았다면, 이바르는 어쩌면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 * * 일주일 동안 실컷 놀았다. 이곳 니블헤임이 지구의 요하네스부르그 뺨따구를 십육분의 일 박자로 신나게 후갈겨댈 정도로 범죄와 폭력이 넘실거리는 도시라 해도, 결코 마왕이 위협당할 일이 없었다. 마왕은 말하자면 니블헤임이라는 이름의 다소 살벌한 놀이공원을 마음껏 쏘다니게 해주는 자유이용권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니블헤임 시민들이 남녀노소, 상인에서 깡패에 이르기까지 나한테 호의를 표시했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도시의 맨 구석탱이에 쳐진 거미줄까지 퍼져 있었다. 안드로말리우스 그 자식이 오죽 원한을 많이 사고 다녔는지, 어딜 봐도 어깨인 마족들이 다가와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내 살다가 조폭한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머리가 늑대 모양인 조폭한테 말이지. 특히 나는 카지노를 애용했다. 마계도 늦여름 더위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카지노에선 하루 내내 공기가 시원했다. 카지노측에서 고용한 마법사들이 교대로 얼음계열 마법을 써준다고 하는데, 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덕택에 제대로 여름 피서를 했다. “웨이타.” “예, 전하.” “여기 시원한 맥주 한 잔.” “알겠습니다, 전하.” 말끔하게 생긴 고블린 웨이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카지노에선 마실 것도 공짜였다. 본인이 직접 떠올 필요도 없었다. 카지노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웨이터 한 명을 불러서 살짝 혀 꼬인 발음으로 '맥주 한 잔'이라고 말해주면 그만이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시선이었다. 살짝 눈을 뜨면서 미소를 지으면 아무리 고블린일지라도 나의 매력에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홀라당 반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내가 기품 있게 맥주잔을 잡았다. 시원한 밀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절로 탄성이 튀어나올랑 말랑 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보는 눈이란 게 있어 최소한의 권위를 차리느라 참았다. 시원하고, 게임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혹시 여기는……천국인가? 왜 나는 원래 세계에서 카지노와 담을 쌓고 소위 모범적인 생활을 영위한 거지? “후우.” 과거의 어리석은 모습에 비웃음이 나왔다. 이미 마왕으로서 격심하게 겪던 스트레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안녕, 과거의 나. 안녕, 지옥 같은 던전 생활. 그리고 어서오렴, 천국의 나날들아. “전하. 슬슬 수가 다 떨어지신 모양입니다요?” 테이블 맞은편에서 리저드맨이 히죽 웃었다. 그는 테이블에 카드 두 장을 뒤집어 놓은 채, 오른손으로 배팅칩을 솜씨 좋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누가 연필을 잘 돌리는지 자랑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내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면서 응수해주었다. “글쎄. 수가 다 떨어진 것일 수도,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일 수도 있지. 그러는 자네야말로 투 페어밖에는 답이 없어보이는데.”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흠. 과연, 스트레이트를 노리고 있는가.” 리저드맨의 안색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왼쪽 눈끝이 살짝 미동한 것이었다. 저런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줘야 할 텐데. “적중했나? 본인에게 웬만하면 말로 이기려 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군.” “흐흐,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요.” 리저드맨이 능글맞게 웃었다. 나 역시 마주 웃었다. 그리고 내 카드를 테이블 정중앙을 향해 던졌다. “죽겠다.” “쌰아아아앙!” 리저드맨이 벌떡 일어났다. “스트레이트! 스트레이트였는데, 고작 5골드라니! 5골드라니! 얼마만의 스트레이트였는데!” 리저드맨이 방방 날뛰었다. 주변에서 플레이어들이 껄껄 웃었다. 모두 카지노 단골손님으로서, 우리는 벌써 오래된 친구처럼 친했다. 종족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외양까지 할아버지에서 꼬맹이로 다양했으나 도박꾼이라는 점에서 다 똑같았다. “포기해. 전하는 못 당해.” “그래, 저 전하께선 마왕이 아니었음 천생 타짜였을 양반이여.” 현재 나는 이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다. 사실 카지노에 와서 대부분의 시간을 포커에 쏟아부었다. 순수하게 운빨이 중요한 여타 게임에 비해 포커는 사람의 실력으로 좌지우지되는 면이 비교적 더 많았다. 도박인 이상에야 포커도 운에 의해 승부가 결정나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예외였다. “하아. 전하, 정말로 독심술이나 그런 거 터득하신 거 아닙니까요? 무슨 양반께서 게임하는 족족 족보를 꿰뚫어보셔 그래?” “생사람 잡는군.” 내가 넉넉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세상에 독심술이란 게 어디 있는가? 다 미신이다.” “그건 그렇지만……에잉!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리저드맨이 투덜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다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 나, 정말로 독심술을 쓰고 있으니까. 바로 눈앞에 매우 선명하게. ━━━━━━━━━━━━━━━━━━━━ 이름: 라이칼 종족: 리저드맨  소속: - 속성: 중립(-15) 레벨: 31    악명: 72 직업: 겜블러(B+) 통솔: 7   무력: 25  지력: 24 정치: 11  매력: 10  기술: 47 호감도: 32 현재심리: ‘제기랄, 오늘도 흑자 내긴 글렀군!’ ━━━━━━━━━━━━━━━━━━━━ 안드로말리우스를 해치운 일로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날 좋게 보았다. 도박꾼도 마찬가지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녀석, 카지노에서도 깽판을 수백 번이나 벌였다고 한다. 게임에서 져도 마왕의 권능을 사용하여 막무가내로 돈을 따갔다나. 도박판이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그건 쓰레기를 뛰어넘는 쓰레기, 요컨대 초대형 쓰레기였다. 덕분에 나는 아주 손쉽게 호감도를 20까지 찍을 수 있었다. 반사효과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안드로말리우스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쌓은 만큼, 내가 게임에서 깔끔한 매너를 취하자 기하급수적으로 호감도가 올라갔다. 그것 때문에 자기들이 패배한다는 사실은 죽어도 모르겠지, 으하하. “몰라. 다음판! 다음판 가자고!” “괜시리 없는 허세 부리기는. 쯧쯧. 저러다 있던 운도 도망치지.” “장담컨대 쟤 카드 받자마자 죽을걸.” “이거 우연이구만. 내 생각도 그러네.” “아니 이런 후라질 놈들이!?” 다시 웃음이 터졌다. 우리 테이블만이 아니라 옆 테이블 사람들도 웃었다. 흡혈귀 딜러가 끅끅 웃음을 참으면서 우리 모두에게 카드를 배분했다. 나는 적당히 어른스러우면서도 또 적당히 유머러스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게임을 이어나갔다. 내 마음은 비유하자면 한없이 청정하고 고요한 연못. 여유 그 자체. 이 사람들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적어도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고 난 다음 도전해주었으면 한다. 그런 경지에 올라서도 여전히 도박을 하고 싶다면 말이지. 딜러가 첫 번째 커뮤니티 카드를 오픈하려는 순간이었다. “자, 그럼 오픈…….” “전하! 똡니다! '그분'이 또 왔습니다!” 고블린 웨이터가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속으로 뜨악했다. 얼른 도망쳐야 했다. 겉으로나마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나를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쉬움 반 기쁨 반의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쉬운 것은 내가 썩 재밌는 양반이라서 그런 것일 테고, 기쁜 까닭은 만만치 않은 적수가 사라져서 그런 것이리라. “미안하다. 이만 가봐야겠다. 이번 판은 죽은 것으로 치지.” “미안할 게 뭐 있습니까요!” 리저드맨은 마냥 싱글벙글했다. 아이구야, 상태창을 볼 필요도 없이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정말로 독심술이라도 터득한 기분이었다. “얼마든지 또 오십쇼, 전하. 전 금요일만 아니면 여기 죽치고 있으니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도 칵테일 쏴주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웨이터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서둘러 걸어갔다. 우리가 카지노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이어졌다. 웨이터는 발걸음이 조급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자신만만했다. “이쪽이 비상구입니다. 직원들만 아는 통로죠.” “오호. 그거 다행일세.” “아무리 그분이라도 여긴 모를 겁니다. 자아, 다 왔습니다. 여기 코너만 돌면 출구가…….” 따악, 하고. 구부러진 길목에서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웨이터가 경악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러나 웨이터의 감정 따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앞쪽에서 어마어마한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중해서 더 공포스러웠다. 현재 그녀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아주 잘 알았으니 말이다. 가히 불가사의에 가까운 카오스가 라피스의 가슴을 차지하고 있었다. 적의, 분노, 증오, 경멸, 실망, 절망, 안타까움, 세상의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란 감정은 거기 다 있었다. 그리고 라피스는 무표정이었다. 한점의 빈틈도 없이 무표정이었다. 대리석 조각상 같은 무표정이었다. 겁나게 무서웠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지되던 포커 페이스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아, 아. 라피스. 수고하네?” “예. 제법 수고하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 저도 다소 궁금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웨이터는 그 시선을 마주치고 어깨까지 움찔거렸다. “저, 전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본인을 두고 지금 도망가겠다는 건가!” 내가 헐레벌떡 웨이터를 붙잡으려 하자, 라피스가 냉랭하게 말했다. “도망이라니요?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것인지요, 단탈리안 님.” “에? 아, 그, 그것이…….” “설마 저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의미는 아니리라 믿습니다만.” “물론! 물론이지! 당연한 얘기 아니겠어. 하하!” 내가 라피스에게 휘말린 틈을 타서 웨이터가 줄행랑을 쳤다. 저런 치사한 새끼, 나한테 팁으로 얻어먹은 골드만 해도 황금산을 쌓을 놈이! 결국 좁은 통로에 라피스와 나만이 남겨졌다. “하핫, 으하하.” “…….” “하하…….” “…….” 침묵이 찾아왔다. 마치 도박으로 돈을 날린 사실을 어머니한테 막 들켜버린 듯한, 지극히 괴로운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 더해 날려버린 돈이 사실은 대학교 등록금에 쓰라고 부모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이었다. 나는 고통을 참지 못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하아아.” 길고 긴 한숨이 내 귓구멍을 관통했다. 그와 함께 죄책감이 내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실로 어머니의 한숨이었다.            00037 발푸르기스의 밤 =========================================================================                                        “아무리 어지러운 심신을 달래러 휴양 왔다 해도 정도를 지켜주십시오.” “하지만 봐봐. 돈도 꽤 벌었고…….” “자랑이 아닙니다.” 라피스가 노려보았다. 히익,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취해버렸다. “마왕이 일개 도박꾼과 어울리고 다니면서 그들의 돈을 빼앗다니요.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면 누가 되었지 결코 이득이 될 리가 없습니다.” 여기엔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라피스는 도박이 잘못되었느니 하는 논조로 비난하지 않았고, 단지 내 이름값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맞는 말이었다. “만약 단탈리안 님이 훗날 좋지 않은 처지에 놓인다고 해보세요. 그때 일부 사람들은 당신께서 도박이 빠지신 바람에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반대로 단탈리안 님이 성공을 거두어도 똑같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렇게 성공한 사람이 도박끼가 있다면서 흉을 볼 것입니다.” “으으.” 구구절절 옳은 주장. “총 얼마를 벌었습니까?” “대, 대충 사천 골드.” “……많이도 땄군요.” 라피스가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그녀는 삼천 골드를 시민들에게 기부하라고 조언했다. 별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대로 삼천 골드를 고아원에 쾌척했다. 의외로 돈을 기부한 게 아깝지는 않았다. 심리상태창을 이용해서 도박꾼들을 홀라당 벳겨먹은 것이 스스로도 조금 치사하다고 느껴서 그런 듯했다. 기부로 인해서 니블헤임 시민들은 더더욱 날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카지노에서 탈출하여 다시금 니블헤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부프에가 안내해줘서 마족의 창녀촌을 가보기도 했다. 온갖 종족의 창녀가 테라스에 서서 길손을 유혹하는데, 고블린 창녀가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어머 마왕 전하! 잠깐 쉬다 가세요!'라고 말하면서 윙크를 날렸을 때는 정말이지……설명을 생략하겠다. 다만 마왕 중에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섭취해대는 변태도 있다는 정보를 새롭게 입수했다.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는 성적 취향이 독특하기로 유명하여 한꺼번에 여러 종족과 난교하는 것을 즐긴다나 뭐라나. 그렇게 휴식의 시간이 흘러갔다. 마왕들의 회합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오늘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안 돼, 싫어. 그걸 입으라고? 차라리 혀 깨물고 죽지.” “최근 마계에서 유행하는 색입니다. 대체로 단탈리안 님은 너무 복장에 초연합니다.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나, 이런 행사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란 것이 있습니다.” 의상실. 수많은 옷이 진열된 이곳에 나는 라피스와 함께했다. 많고도 많은 의상 중에서 라피스가 고른 것은 하필이면 상아색 코트였다. 그걸 껴입고 안에는 핑크색 조끼를 입으라면서. 상아색 코트, 게다가 핑크색 조끼라니! 라피스의 심미안을 심각하게 의심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복장이라는데 얼척이 없었다. 로코코 시대의 명화에서나 볼 법한, 우스꽝스러운 귀족 의상이지 않은가. “너처럼 차라리 깔끔하게 단색 양복을 입을게.” “제가 평소에 입는 검은색 양복은 평민 전용입니다. 마왕 전하가 입을 물건이 아닙니다.” 라피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도 히피 스타일을 애용하던 나로서는 쓸데없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복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매스끄러울 지경이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단탈리안 님의 옷 고르는 눈은 최악입니다.” “…….” 아니야! 옷 고르는 눈이 이상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시대라고! “아무튼 코디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우선 옷의 색깔을 고르고 마왕 전하가 파트너로 삼을 여인에게 쪽지를 보내겠습니다. 본래 옷은 남성이 여성에게 맞추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마왕은 예외이지요.” “응? 파트너?” “회합 첫날에 무도회가 있습니다. 당연히 마왕 전하도 한 분의 여인을 에스코트해야 합니다.” 금시초문이었다. “야, 야. 나 춤은 완전 잼병이야. 게다가 파트너라니, 그런 걸 어떻게 구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도회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연회입니다. 춤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요. 파트너 역시 심려치 마시기를. 쿤쿠스카 상회에서 이미 적당한 여인들을 물색해두었습니다.” 하고 라피스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거기에는 여인들의 인적사항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녀가 여인 한명한명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설명했다. “저는 이 분을 추천합니다. 독사지옥 대공의 따님입니다. 대공의 영애가 파트너가 되기에는 단탈리안 님의 위상이 약간 부족합니다만, 어째서인지 쿤쿠스카 상회 상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선했습니다. 인맥을 만들 기회입니다.” “어, 음.” “아니면 이 분도 좋습니다. 흑암지옥 대공의 수하에 있는 변경백작의 딸로, 미모가 출중할 뿐더러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을 애첩으로 삼는다면 단탈리안 님의 미래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내가 질겁했다. “뭐시라, 애첩?” “마왕이 애첩을 여럿 거느리는 건 추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랑거리이지요. 또 다른 후보로는…….” 여인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나는 정신이 쏙 빠졌다. 난데없이 무도회라니, 도대체가 내 인생에서 인연이라고는 파리 손톱에 낀 음식물 찌꺼기만큼도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난생 처음 본 여자를 파트너 삼아서 하루종일 돌아다니라고? 애첩? 그건 또 뭐냐? “잠깐만. 잠깐만! 라피스, 일단 말 좀 멈춰봐라. 나 숨 넘어간다. 애첩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쳐. 무도회에 참석한다 치자. 파트너를 정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이해하겠어. 그런데 쿤쿠스카 상회에서 왜 나의 파트너를 결정해?” 라피스가 뭐라 말하려고 입술을 열었으나 내가 손을 내저었다. 대충 예상가는 일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안드로말리우스 건으로 협박했다는 사실이 쿤쿠스카의 상부에 알려진 모양이었다. 나를 유력자와 이어줄 테니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눈감아 달라, 이런 의도이겠지. 자기들 딴에는 보상이랍시고 대안을 내놓은 듯한데 송구스럽게도 나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유력자의 딸인가 뭔가 하는 애들도 죄다 쿤쿠스카 상회의 아군인 게 분명했다. 애첩 하나를 붙여두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제어하려 들 것이다. 요컨대 겉모습만 탐스러운 독사과였다. “……하지만 단탈리안 님.” 나의 추론을 듣고도 라피스는 여전히 파트너를 고르라고 말했다. “이로써 유력자는 물론이고 쿤쿠스카 상회를 거의 완벽하게 단탈리안 님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블랙 허브로 거금을 벌었다 하나 단탈리안 님의 세력은 아직 미약합니다. 이때 유력자의 비호를 암묵적으로 얻어내면 그 누구도 단탈리안 님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그녀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민에 잠겼다. 내 일차적인 목표는 생존이고, 두 번째 목표는 이 세계를 '클리어'하는 것……즉 비너스빤스의 암시에 따르자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목표에 비추어볼 때 누군가의 강력한 비호를 받는 것이 현명해보이기도 했다. 유력자의 딸을 애첩으로 삼고, 그녀를 이용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녀마저 배신하여 더욱 거대한 세력을 비축하고……그런 방법도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나한테 이용해 먹을 건덕지가 있다고 봤으니까 접근했을 터.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관계에 불만을 표할 순 없겠지. 하지만. “라피스. 지금부터 내 진짜 심정을 말할게.” “경청하겠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누구보다 가까이서 나를 지켜본 너라면 알겠지만, 난 기본적으로 인격이 불안정한 사람이야.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어. 마왕증후군이라 했던가? 맞아. 마왕으로서 다른 이의 감정까지 느끼다보니 이렇게 되더군. 나에게는 내가 분노하는 감정과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감정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완전 뒤죽박죽이야.” 라피스의 무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지만……니블헤임에 오고 난 이후로는 안정되지 않았습니까?” “임시방편이지. 내가 예상하기로 조울증은 시작에 불과해. 언제까지 내 자아가 이렇게 카오스나 진배없는 감정의 상태를 견뎌낼지 원.” 내가 착잡한 마음으로 털어놓았다. 이러는 사이에도 라피스가 걱정하는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착잡함과 걱정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서로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는가. 거의 같은 감정이었다. 격차가 얼마 크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내 감정이고 어디서부터 라피스의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단지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건 확실하지.” “균형, 입니까?”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야. 바깥에서는 다른 놈들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읽어가면서 전투를 치루든 정쟁을 치루든 다 해야 돼. 그건 맞아. 하지만 내 마왕방 안에서는 다른 이의 감정에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쉬어야 한다. 잔뜩 지친 마음의 그릇을 어느 정도 식혀주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카지노가 꽤 좋았다. 내가 승리하면 나는 기뻐했고 상대는 슬퍼했다. 승부의 결과에 따라 나와 타인의 감정이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애써 자타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나 혼자 숙소에 틀어박히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지나치게 심심했다. “그런데 속마음이 어떨지 모르는 녀석을 애첩으로 삼는다고? 녀석이 자기 집안을 위하는지, 아니면 쿤쿠스카를 위하는지 알 도리가 없어. 그러니 나는 다시 녀석의 감정에 신경을 쏟아부어야 해.”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별안간 말을 끊었다. 그녀가 이러는 적은 무척 드물었다. “어?” “혹시 저와 함께 계실 때도……그럽니까?” 초조함. 그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라피스가 예의 무표정 너머로 수없이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제법 오래 전에 알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냉철한 그녀였지만 가끔씩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항시 냉정하기에 그녀 곁에 있으면 편하다. 별다른 감정이 전해지지 않으니까. 아예 인형처럼 무미건조하지 않기에 때때로 마음이 통한다. 그녀는 나에게 적당하게 멀리 있었고, 적당하게 가까이 서 있었다. 내가 약하게 웃었다. “아니. 내 곁에 계속 있어라.” “알겠습니다.” 라피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속으로는 안도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굳이 지적해서 창피를 줄 이유는 없겠지. 이래 봬도 난 무척 배려심 깊은 남자였다. 사람들이 그걸 잘 몰라주더라고.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허면 내일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정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참. 그것도 문제이지……음, 뭐. 어때. 라피스 너가 파트너 해주면 되잖아.” “…….” 잠깐 침묵이 있었다. “예……?” “그럼 됐네. 자, 이제 이 문제는 끝이다.” 방금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되돌이켜 보아도 괜찮은 해결법이었다. 어찌되었든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나를 아군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무조건 파트너를 거부하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상회의 직원인 라피스를 파트너로 삼는다면 '난 당신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소'라고 의도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쪽에서 정해준 대로 움직일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사실을 피력할 수도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는 내가 그들과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알아서 좋고, 나는 내 입지를 손상시키지 않아서 좋고, 또 괜히 낯선 여인네랑 돌아다니지 않아서 정신건강에도 좋았다. 실로 완벽했다. “남자가 여자 옷에 맞춰서 입어주는 게 관례라고 했지? 얼른 드레스 골라잡아봐. 본인이 친히 네 옷에 맞춰주지.” “전하. 저는 하프 서큐버스입니다. 순혈 서큐버스를 대동해도 마왕으로서 평판이 염려되는 마당에, 저같은 이를…….” “아이고. 또 그놈의 순혈이니 혼혈이니, 앞으로 딱 한 번만 더 말하면 질리겠다.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잠자코 따라.” 나는 의상실을 가로지르면서 대충 라피스한테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찾아나섰다. 라피스가 당황해하면서 내 뒤를 쫓아왔다. 마왕의 체면인지 뭔지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그냥 무시했다. “이건 어떠냐. 순백의 드레스. 고급스러운데다 청초해서 딱 좋네.” “……연회에는 지나치게 점잖은 복장입니다. 아니, 그보다 단탈리안 님. 저는 아직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 검은색 드레스는. 장식도 들어간 게 화려한 듯하면서도 진중하네. 마왕의 파트너가 입기에 제격이구만.” “전하.” 라피스는 어조가 꽤나 다급했다. 난 모르쇠로 일관했다. 세 시간이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라피스가 백기를 들어올렸다. 계속 반항하면 콱 파트너 없이 가버리겠다고 협박하자 항복해 왔다. 결국 나는 라피스한테 반 억지로 검은색 드레스를 안겨준 다음, 파트너한테 맞춰 입는다는 명목으로 더없이 단아하고 평범한 검은색 코트와 검은색 조끼를 입게 되었다. “하아아……중요한 회합의 자리가 이렇게…….” 라피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건 말건 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의상을 입지 않아도 되어서 매우 즐거웠다.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도 상인의 중요한 임무라고, 라피스?        00038 발푸르기스의 밤 =========================================================================                                     다음날 저녁이었다. 우리가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길에 마차가 계속해서 흔들렸기 때문에 차분히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말이 없기는 라피스도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니블헤임의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 정문에 내리자 노파가 우리를 맞이했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져서 얼굴이 무릎에 닿을 지경인 마녀였다. 머리에 쓴 고깔모자는 어찌나 큰지 매부리코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얼굴 전체를 덮을 정도로 쑤욱 내려왔다. 그녀가 쥐처럼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전하?” “그러하다.” “으음, 단탈리안……단탈리안……오, 여기 있군요.” 마녀가 양피지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맨 꼬라비라서 찾기 쉬웠습니다. 애매하게 32위이니 46위이니 하는 분들보다 전하가 훨씬 더 위치가 좋군요. 자고로 사람은 찾기 쉬운 위치에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히히. 자아, 전하. 이제부터 이 꼬맹이를 따라가시면 되겠습니다.” 하고 마녀가 가리킨 곳에는 검은 고양이가 서 있었다. 고양이가 우리를 보자마자 두 다리를 쭉 뻗어서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마치 인형놀이의 병정처럼 빨간색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이런 귀여운 생명체를 보았나. 나는 왠지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들어 고양이에게 마주 경례했다. 그러자 라피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마왕의 위엄을 지키라는 뜻이겠지. “꼬맹아, 잘 들어라. 히히.” 마녀가 고양이의 턱을 장난스레 만졌다. “저쪽 골목에 들어가서 오르막길을 내려가고 내리막길을 올라가며 돌고 돌아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다해서 총합 아홉 번을 돌고 돌아 좁다란 길을 넓은 듯 거닐고 널따란 길을 비좁은 듯 빠져나가서 박차를 밟아 박차를 잊고 이윽고 걷는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박차의 박차를 밟아 네 박자로 춤추는 지경에 이른다면 어느새 골목의 끄트머리에 도착할 것이요, 그 끄드머리의 끄트머리까지 이 분을 안내하거라.” 고양이가 알아들었다면서 다시 경례했다. “……저 장대한 헛소리는 뭐냐?” “정교한 마법입니다.” 라피스가 속삭였다. “미로를 뚫고 지나갈 수 있게 해주는 주문이군요. 저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빠져나갈 수 없게 길을 꼬아 놓았을 것입니다.” “음, 딱히 마법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마력을 쓰지 않고도 마법을 발현시킬 만큼 대단한 마녀라는 뜻이지요.” 저 노파가? 호기심이 생겨났다. 사실 지금까지 강자다운 강자는 한번도 마주친 적 없었다. 라피스 말대로 노파가 대마녀라면 여태껏 만나본 그 누구보다 휘황찬란한 능력치를 보여주리라. ‘상태창.’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떴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훔바바      65   109   51 ━━━━━━━━━━━━━━━━━━━━ “…….” 죄송합니다. 사기캐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아니, 우리 던전은 무슨 얘 한 명만 처들어와도 싸그리 멸망하겠다. 마법 한방에 골렘이고 뭐고 부대 단위로 썰릴 게 뻔했다. 이 정도 캐릭터가 마왕들의 회합에서는 단순히 안내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새삼 내가 F급 마왕이고 내 던전은 F급 던전이라는 사실이 시리게 느껴졌다. “히히. 부디 요 꼬맹이가 걸어간 길만 뒤따라 가시기를. 혹여라도 행로에서 벗어나시면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습니다.”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 재미난 일이란 게 무엇인가?” “입에서 팔이 돋아나는 정도로 재밌는 일이지요, 히히히.” 단언컨대 재미라곤 전혀 없다. 검은 고양이가 호두까기 인형의 병정처럼 척척걸음으로 앞장섰다. 나는 긴장감에 마음을 졸이면서 고양이가 밟은 곳을 정확하게 따라 밟으며 뒤따라갔다. 옆에서 라피스가 한심해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두 팔이에서 세 팔이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을뿐더러 하물며 입속에서 팔뚝이 솟아나는 것만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궁전의 화려한 정문, 어두컴컴한 정원, 어딘지 모를 복도, 길목과 길목을 지나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척! 여기입니다, 라고 말하려는 듯 고양이가 무도회장의 계단 앞에서 경례를 취했다. 너무나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녀석의 턱을 잔뜩 만져주었다. 고양이가 냐옹거리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뭐냐 이거? 고양이 요괴 인간적으로 너무 귀여운 것 아니냐? 가히 법적으로 위험할 정도로 귀엽다. 법적인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일단 내 마왕성에 감금해두겠다. 내 하찮은 욕망 하나를 채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전히 세상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겠다는 거다. “단탈리안 님.” “윽, 알겠습니다.” 라피스에게 보채져서 무도회장의 계단을 올랐다. 경비병이나 안내원이 없었다. 이미 열려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문을 지나자 어디로부턴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전하 입장이요오오! 무도회장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세계에서 영화로나 책으로 접하던 것과 다르게 드넓은 홀은 무척 어두웠다. 중간중간에 사람만큼이나 큼직한 촛불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샛노란 촛불에 사람들의 얼굴이 비추었다. 그들은 막 입장해서 들어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기이한 장면, 유령들의 회합이라 불릴 법한 모습에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나는 곧바로 연기 스킬을 발동시켰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이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 쇳소리같이 불쾌한 효과음이 귓가를 가득 매운 것이었다. 「다수의 스킬이 당신의 스킬 발동을 저지합니다!」 「당신은 주사위를 던졌으나 마침 하늘을 날아가던 까마귀가 주사위를 낚아챘습니다. 스킬 발동 실패!」 뭐, 뭐라고? 기계음이 쉴 새 없이 처음 듣는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 차이로 인해 스킬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동 스킬을 발동할 수 없습니다.」 「패널티에 따라 당신의 지력 능력치가 5 저하합니다.」 「패널티에 따라 당신의 매력 능력치가 5 저하합니다.」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았다.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라피스가 남몰래 구두로 발을 밟아준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헛, 하고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충 기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애 맞지? 영 맹해 보이네.” “어떤 정신 나간 마왕이 같은 마왕을 살해했다 싶었는데 의외로 평범한 이로군요.” “그러게 언젠가 죽을 줄 알았다니까. 흥, 멍청한 노숙자 녀석.”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 같기도…….” 나에 대한 험담이 많이 오갔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연기 스킬은 미덥지는 못해도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이었다. 그것이 깨지자 나는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 만일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굳건하고 냉정하게 곁에 서 있어주지 않았다면 무도회 내내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연출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무릎을 지탱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에 대한 관심은 금새 사라졌고, 마왕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소곤소곤거렸다. 그중 나한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 * * 내 뒤로 마왕이 서너 명 더 왔다. <던전 어택>을 통해 이름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들이었다. 마지막 마왕이 들어온 것을 끝으로, 커다란 대문이 닫혔다. 홀 한가운데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새하얀 정복을 말끔하게 입은 노신사였다. 노신사는 사방을 향해 한 번씩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느릿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해주신 모든 마왕 전하를 환영합니다. 과분하게도 이번 회합의 진행을 맡은 쿤쿠스카 상회 일곱 간부 중 한 명, 이바르 로드브로크입니다.” 매우 작은 갈채가 이어졌다. 대충 여섯 명 정도만 박수를 친 것 같았다. 사회자를 환영하는 것치고는 적이 부끄러운 박수소리였으나, 이바르는 대단히 황공하다는 듯 허리를 다시 한 번 숙였다. 내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던전 어택> 중후반에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그러나 내가 알던 외모와 너무나 달랐다. ‘이바르는 저런 노인네가 아니었을 텐데?’ 같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일하는 라피스한테 사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쉬이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확실히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도 늦지 않겠지. “먼저 이번 회합의 의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초열지옥에서 발생한 후계자 다툼에 대해…….” “잠깐만.”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난 여기까지 와서 마계의 일에 대해서 왈가불가하고 싶지 않아. 그딴 건 어차피 사흘 내내 이어질 이 썩어빠질 회합에서 자연스레 해결되기 마련이야. 오늘만큼은 먹고 마시고 싶은걸.” 이바르가 곤란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여자의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가 못 배운 년 아니랄까봐 천박하군. 회의에는 절차란 것이 있다.” “싸구려 도발은 그만두시지, 나으리. 다른 사람이 들으면 댁이 회합에 무척 열성적인 줄 알겠어? 꺄르르. 저번 회합에서 댁이 중간부터 꾸벅꾸벅 조는 걸 내가 다 지켜봤는데에.” “당치도 않은 모함이다.” 어두운 조명 탓에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입술만이 톡 튀어나와 까만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또 다른 방향, 나와 맞은편 쪽에서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또 두 분께서 싸우려 하시네요.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문명인다운, 마왕다운 회의를 이루어낼 것인지 소녀는 의문스럽답니다. 뭣하러 쿤쿠스카 상회의 진조를 일부러 사회자로 고용한 것인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와요.” “으게엑, 그 토나오는 말투 좀 그만해.” 처음으로 말을 한 여자가 질색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하는 문명인의 회의라는 게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목소리로 어머나 어머나 해내는 거라면 난 차라리 고블린 부락의 야만인이 되겠어. 네 년이 밤에는 미노타우르스들이랑 질펀하게 놀아대는 것을 내가 모를까봐? 창녀 씨, 아랫입만큼이나 윗입도 싸구려로 바꾸든지 아랫입을 윗입만큼 정숙하게 바꾸든지 둘 중 하나는 해줘.” “발정 난 물소처럼 씩씩거리는 여자에게 제가 뭘 말하겠어요. 친애하는 마왕 여러분.” 정숙한 말투의 여인이 홀 한가운데로 걸어나왔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누구인지도 알아냈는데, <던전 어택>에서 자그마치 서열 제9위를 차지하는 파이몬이었다. 찰랑거리는 적발이 매력적인 서큐버스 퀸으로서 수많은 플레이어를 물 먹인 장본인이었다. 나 역시 저 마왕한테 걸려서 게임오버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일러스트로만 알던 것을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저 역시 첫날 밤의 무도회부터 지루한 의제를 토론하는 것은 다소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우선 친교를 나누는 것이 먼저겠지요. 지금까지 원한이 쌓인 분들께서는 더더욱 원한을 쌓을 것인지 아니면 풀 것인지 결정하실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마치 이쪽을,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지요. 이중에서 동족을 죽인 살해자가 한 명 끼어 있으니까요. 그 사람과는 친분을 나눌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그녀는 확실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족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안드로말리우스는 우리의 동지였습니다. 세계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리 마왕의 일원이었어요. 그런 마왕이 죽었다는 것의 의미가 어느 정도 무게를 갖는지, 이곳에 모인 여러분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사와요.” 그녀의 시선에 따라 수많은 눈초리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회의와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을 추궁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하옵니다. 이를 위하여 서열 제9위의 마왕인 저 파이몬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문회를 요청합니다.”             00039 발푸르기스의 밤 =========================================================================                                   “…….”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뭐라도 만지작거릴 물건이 손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사건을 이리 걸고 넘어질 줄은 몰랐다. 마왕이 동족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저 창녀 또 헌소리 하고 앉았네. 청문회라니 그딴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서열 제10위부터 청문회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는 하다.” “에? 진짜로?” “실제로 쓰인 것은 벌써 오백 년이 훌쩍 넘은 듯하다마는. 파이몬, 고작 부랑자 새끼가 하나 죽은 것 갖고 일을 크게…….” 마왕들끼리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생각. 생각을 하자.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저들이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어떻게든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몇몇 마왕이 청문회에 반대하는 까닭은 내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파이몬이 싫어서이다. 그들이 나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어린애처럼 유치한 말투를 써가면서 앵앵거리는 여자는 아마도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 진중하게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남자는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 저마다 <던전 어택>에서 한가닥하는 양반들이다. 제9위의 파이몬이 인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마족 세력을 대표하고, 제8위의 바르바토스는 무조건 인간에게 적대적인 축에 속한다. 제5위의 마르바스는 중립이다. 성향 간의 차이가 여기서도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째서 초면에 불과한 나를 파이몬이 공격하는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기랄, 지력 능력치가 떨어진 탓인지 평소보다 머리 회전이 느렸다. 나는 얼굴에 있는 주름이란 주름은 죄다 구겨 가면서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의 계파에 속했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지금 청문회 어쩌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계파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제스처를 표하기 위해서? ‘게임에서 파이몬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만한 위인이었나?’ 내 머릿속에서 '아니다'라고 대답이 나왔다. 파이몬은 능글거리는 어투답게 변태적인 캐릭터이다. 인간으로 분장하고 인간의 도시로 가서 남녀를 헌팅하는 게 취미일 정도로. 게임 시나리오상 파이몬과 주인공이 처음 맞닥뜨리는 곳도 인간의 도시인데, 놀랍게도 주인공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그만 마왕이란 사실이 발각되고 만다. 이후 파이몬은 제 미모에 넘어가지 않은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라는 컨셉으로 끈질기게 주인공한테 들러붙는다. 그 들러붙는다는 의미가 통상적이진 않고 쉴 새 없이 몬스터 군단을 보내온다는 것이지만. ─ 죽는 순간인데, 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용사에게 들이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용사는 허둥지둥 고민하다가 결국 여인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못 이겨서 파이몬한테 키스한다. 그것이 주인공의 첫키스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수십 명의 하렘에서 역설적으로 마왕이 먼저 첫키스를 따낸 것. 언젠가 플레이어들이 과연 파이몬이 희대의 순정녀인가 혹은 단순한 걸레인가 열띠게 논쟁한 적도 있었는데, 아무튼 간에 역대 히로인 인기투표에서 단 한 번도 10위권 바깥으로 퉁겨나가지 않았으며,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더불어 공략 가능 캐릭터로 만들어달라고 주기적으로 요구가 이루어지곤 했다. 참고로 나는 파이몬을 싫어했다. 그녀 때문에 게임오버를 두 번이나 당했거든. 다른 마왕에게 패배할 시 죽임을 당하는데 파이몬한테 패배하면 그녀의 성노예가 된다는 점이 색달랐지. ‘파이몬은 변태이지만 행동 원리가 간단하다.’ 요컨대 친인간주의.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을 따라하고, 인간을 보호하려 한다. 마족과 인간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내달릴 때도 파이몬만큼은 소수의 마왕과 함께 무분별한 학살을 자제했다. 인간이 멸망하면 자기가 즐길 거리가 사라진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마왕 된 자로서 학살을 즐기면 위엄이 사라진다'라고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자기가 마치 권위나 품격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하는 여인. 여하간 특이한 마왕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안드로말리우스는 대표적으로 인간을 벌레로 취급하는 놈.’ 나는 판단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의 계파에 속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따라서 파이몬이 청문회를 열자고 제안한 것도 사실은 안드로말리우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인 게 분명했다. 즉――목표는 안드로말리우스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 어째서? ‘내가 파이몬에게 적대적인 짓을 했나? 그럴 리 없는데.’ 애당초 다른 마왕과 조우한 것 자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바에 따르자면 안드로말리우스는 현재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파이몬과 내가 직접적으로 얽혀들 일은 아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니까 마치 심해의 가오리처럼 어두컴컴한 바다 밑바닥을 헤엄치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제기랄, 대체 어디에서…….’ 그때였다. 작은 무언가가 살그머니 내 오른손을 감쌌다.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라피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투명하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에 놀라운 일을 겪었다. 일생에 많아봤자 대여섯 번 정도밖에 일어나지 않을 그런 일 말이다. 당신이 지금 무슨 심정인지 아무런 과장도 축소도 없이, 당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당신을 이해하고, 바로 그 까닭에 나로서는 당신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노라고, 두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말도 표정도 제스처도 없이 라피스는 그렇게 웅변했다. 말이 없기에 오해가 없었고, 표정이 없기에 감정의 과다가 없었으며, 제스처가 없기에 오직 진심만이 자리했다. 일순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한없이 부드러운 마음이 대신 생겨났다. 그것은 겉과 속이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상대방, 그것도 나에게 호의적인 상대방을 만났을 때 생겨나는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마왕의 능력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만 있게 하지 않았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일치시킬 수도 있었다. “…….” 라피스와 내가 잠시간 마주보았다. 그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문득 파이몬의 성향이니 무엇이니 하는 생각이 갑자기 우습게 여겨졌다. 지금까지 한 생각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위쪽에서 그 생각을 관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 파이몬이 날 적대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미소 지었다. 당연했다. 내가 여태껏 누군가의 눈에 띌 만하게 행동한 적이 딱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의 행동과 파이몬이 가진 성향을 연결시킨다면, 왜 안드로말리우스를 명목으로 내세워 날 압박하려 드는지 쉽게 이해되었다. 마왕들 사이에서 벌어진 설전도 슬슬 정리되고 있었다.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예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중에서 서열이 제일 높은 것은 나다. 내가 청문회의 진행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서열이 낮은 이가 진행자가 되면 어떤 사고가 연출될지 걱정스럽군.” 그가 쿤쿠스카 상회의 이바르를 힐끗 쳐다봤다. 이바르가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본래 사회자는 이바르였다. 그가 마왕들의 소란을 전혀 무마시키지 못했던 것을 마르바스는 힐책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마 쿤쿠스카 상회에선 일부러 사태를 방관했어.’ 내가 조용히 라피스에게 물었다. “파이몬도 쿤쿠스카 상회에서 담당하지?” “예. 상회 최고 간부 중 하나인 토르켈이 전담자입니다. 단탈리안 님도 한번 본 적 있는 인물이지요.” “그 늙은이 고블린이로군.” 한 달 조금 전, 전염병에 대해 논의할 게 있느니 뭐니 불쑥 찾아온 고블린이 있었다. 그 녀석이 파이몬의 전담자라 이 말이지. 라피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얘기 나눌 생각이 없다고 문전박대했더니 이딴 식으로 보복해올 줄이야. 마르바스가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서열 제9위, 파멸을 관장하는 마왕 파이몬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는 서열 제5위, 지배를 관장하는 나 마르바스의 이름으로 승인된 것이다. 대상은 서열 제71위, 이면(裏面)의 마왕 단탈리안.” 그가 나를 보았다. 나 역시 그곳으로 나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라피스의 손을 놓았고, 약간 긴장하면서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등 뒤에서 라피스가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라피스. ‘게임 속의 NPC 따위에게 발릴 정도로 무성의하게 게임을 한 적 없다.’ 마르바스를 사이에 두고 파이몬과 내가 마주섰다. 파이몬이 변태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날 꼬아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이쪽도 미소로 응대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고, 단탈리안은 파이몬에게 대답할 권리가 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청문회는 길게 이어지지 않도록 하겠다. 고로 양측에선 되도록 긴 연설보다 짧은 즉문즉답의 형태로 청문회에 임해주길 바란다. 둘 중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겠다.” 무도회장 이곳저곳에 널려 있던 마왕들이 천천히 몰려왔다. 복싱을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서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저 청문회를 요청한 파이몬에게 질문의 권리를 부여한다. 파이몬은 질문하라.” “소녀의 요구를 들어주어 감사하와요.” 파이몬이 주위에 눈웃음을 쳤다. 어느 때건 교태를 부리는 게 그녀의 버릇인 것 같았다. 내 오른쪽 방향에서 '어휴, 창녀 년' 하고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회합이 시작하고 나서 큰소리로 말한 마왕은 모두 서열 제10위 안에 드는 이들뿐이었다. 그보다 서열이 낮은 마왕들은 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이란 의미겠지, 내 눈앞에 계신 파이몬께서도. “우선 사실관계부터 확인하고 싶사와요.” 파이몬의 미소가 날 향했다. 눈웃음 속에 적의가 넘실거리는 것이 빤히 보였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흐레 전에 서열 제72위,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를 살해했습니다. 맞나요?” “맞습니다.” 내가 덤덤하게 수긍했다. “당신은 상대방이 마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해했습니다. 그렇지요?” “그것도 맞습니다.” “즉 당신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마왕을 살해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마왕임에도 불구하고요.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하신 여러분, 세상의 그 누구보다 우리는 잘 알고 있사와요. 마왕이란 빌어먹을 직업이란 사실을 말이지요.” 파이몬이 돌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와서 사람의 인격이 하나라느니 하는 논쟁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사와요. 그래도 이건 확실하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 많아요. 나와 타인의 감정이 뒤섞이고 또 뒤섞여서 누가 나이고 누가 타인인지 당최 구분할 수가 없지요. 마왕인 우리에게는 '나'라고 부를 만큼 확고한 무언가가 전무하며――.” 무도회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로 '너'라고 거리낌 없이 부를 만한 무언가도 없어요. 오직 우리라는 이름의 인칭대명사가 유일하게 허락되었지요. 그것이 마왕의 숙명. 마왕 된 자로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업이라고 소녀는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지요. 바로 우리와 똑같은 마왕이 그것이와요.” 그녀가 과장스럽게 팔을 벌려가며 역설했다. 그같은 제스처가 그녀에겐 자연스러웠다. 몸짓이 연설에 무척 익숙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 내 것인지 아닌지 노심초사해야만 하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른 마왕 곁에서는, 다른 마왕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마치 평범한 사람이라도 된 양 평범하게 자신을 느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끼리 함께할 때만 비로소 '나'를 느낍니다. 그렇기에 마왕은 소중해요.” 파이몬이 목소리에 박차를 가했다.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고, 싸울지언정 우리는 서로를 인정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세상에서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니까. 그래요. 안드로말리우스는 마왕 중에서도 쓰레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구도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이자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당연하지요! 우리는 같은 마왕, 똑같은 업을 지고 이 세상에 떨어진 종자 아니겠사와요.” 그녀가 제스처를 거두고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주위에 보란 듯이 나를 성토하고 있었다. “헌데 단탈리안은 주저없이 안드로말리우스를 격살했습니다. 소녀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답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마왕의 일원일까? 만일 마왕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쉽게 다른 마왕을 살해할까. 소녀는 단지 한낱 개인으로서 단탈리안을 추궁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왕을 대표하여, 그에게 과연 애시당초 마왕의 자격이 있는지 추궁하고 있사와요.” 약간이나마 숙덕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우리를 지켜보는 가운데, 파이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녀는 단탈리안을 삼백 년 동안 영원한 동토(冬土)의 감옥에 가둘 것을 제안합니다.”                           00040 발푸르기스의 밤 =========================================================================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목소리가 앵앵거리는 여자가 대놓고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삼백 년은 말도 안 된다는 얘기였다. 소란 속에서 파이몬은 할 말 전부 했다는 자세로 잠자코 눈을 감았다. 나같은 하위 마왕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면을 무척 중시한다는 게 느껴졌다. 본인이야 제법 쿨한 태도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도, 내 감상을 말하자면 그저 재수없었다. “조용. 조용하라.”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손을 저으며 소란을 잠재웠다. 무도회장이 잠잠해졌다. “파이몬. 그대가 할 말은 끝났는가?” “예, 소녀는 더 이상 부연할 것이 없사와요.” “그렇다면 단탈리안측의 반론을 들어보겠다. 단탈리안은 파이몬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고,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대답할 권리가 있다.” 좋아, 하고 내가 숨을 들이쉬었다.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이라, 변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 상태를 살펴봤다. 이곳 마왕들이 가지고 있을, 정체 모를 패시브 스킬들 때문에 능력치가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4    악명: 253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5/15  무력: 5/5   지력: 20(-5)/25 정치: 13/15  매력: 5(-5)/10  기술: 4/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전술(F),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0개] [부하: 42개체/50개체] ━━━━━━━━━━━━━━━━━━━━ 한심한 능력치. 그래도 라피스의 말없는 응원에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내게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 중에 자그맣지만 또렷하게 날 걱정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리고――잘센 마을 모험대가 쳐들어왔을 때는 이보다도 상황이 안 좋았다! 지금도 바닥인 능력치가 그때는 땅을 뚫고 지하 암반수를 퍼낼 지경이었다. 막 이 세계에 떨어진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력으로 정보를 모아야만 했다. 익숙치도 않은 연기를 펼쳐가며 생존을 갈구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나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충분히 알고 있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파이몬은 수십수백 번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맞닥뜨린 보스 중 한 명이다. 당신이 어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눈에 빤하다 이 말이다. “단탈리안은 질문하라.” 마르바스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약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주변을 향해 말했다. “먼저, 저로서는 무척 난감하다는 사실을 밝혀야겠습니다. 첫 번째로 지금 여기 계시는 파이몬 전하께서 저 따위보다 훨씬 더 고귀하시고 강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콧방구 소리가 들렸다. 아마 회합 초반부터 사사건건 파이몬과 대립하던 제8위의 바르바토스이리라. 내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로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 전하께서 이토록 신경 쓰실 만큼 품격 높은 인물이었는지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파이몬 전하의 위상과 안드로말리우스의 인격 사이에는 도무지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저는 지금까지 정말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파이몬 전하께서 그 간극을 뛰어넘어, 다른 마왕도 아니고 하필이면 안드로말리우스, 우리 일흔두 명의 동지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차마 동지라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자를 옹호하시니……저로서는 파이몬 전하의 행동에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싸해졌다. 여전히 입가가 올라가 있었으나 눈빛이 차가웠다. 마계 최강의 무표정 소녀인 라피스를 만날 보고 지내온 나에게 이 정도 표정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내가 거의 직접적으로 자기의 명성을 모욕했음을 그녀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소녀는 그 점에 대해 분명히 말했사와요. 마왕은 마왕이란 이유만으로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요.” “그렇습니까?” 내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정말로 그렇다는 말입니까? 파이몬 님. 설마 진심으로 그리 믿고 계십니까?” “예, 진심이랍니다. 혹시 소녀가 실없이 공언했다고 생각하는지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전 파이몬 님을 모욕할 의도가 눈꼽만큼도 없어요. 파이몬 님께서 실언하실 일이 전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놀란 것입니다.” 하고 내가 육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자아. 그렇다면 제게 주어진 권리대로 파이몬 님께 감히 질문하겠습니다. 파이몬 님. 마왕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다소 모호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다시 물어보죠. 마계에 있어 우리 마왕의 존재의의는 무엇입니까?” “소녀를 지금 무시하는 건가요? 그야 당연히 마인을 인도하고 통합하여 지상계로 이끄는 것이와요.” “훌륭한 대답입니다. 무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파이몬 님께서 약간의 수고를 마다하시어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해주시면 더없이 영광이겠습니다.” 내가 두 손바닥을 내보이고 살갑게 미소 지었다. “파이몬 님. 마왕은 마인을 인도하고 통합하여 지상계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인을 인도하거나 통합하지 않고, 지상계로 이끌지 않는다면 마왕으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이겠군요?” “그래요.” “사실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거짓말이었다. 마왕의 직분이 뭔지 알게 무엇인가. 내가 잘 살아남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거짓말하는 데엔 돈이 들지 않았다. “마계에 있어 마왕의 존재의의란 사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실례합니다만, 마계의 지옥을 다스리는 대공들에 비하자면 마왕 중에는 도리어 세력이 약한 분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작과 대공보다 윗줄인 제왕으로 대접받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실로 파이몬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고개를 주위로 돌렸다. “강자존(强者存)이 법도이고 이기심이 진리인 마계에서 오직 우리 마왕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고 또 타인을 이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만 마인이 기꺼이 고개를 숙입니다. 지옥의 대공이 제아무리 수십 군단을 이끈다 할지라도 그들 중 누가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자신밖에 모르는 이 아귀 소굴에서 마왕은 마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오롯이 빛납니다.” 절대적인 상징. 마인이 현실적으로는 피 튀기는 싸움을 수천 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가 될 날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증거. 그것이 <던전 어택>의 마왕이다. “자아. 그런데 여기 한 마왕이 있습니다. 그는 마인을 통합하지도 이끌지도 않습니다. 수백의 고블린을 그냥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애당초 인간계에 머물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유흥과 쾌락을 위해 마계에서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사치에 들어가는 유흥비가 고블린들의 피와 땀에서 나왔음은 물론이지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그자는 그러한 상징과 희망을 배신했다. “이 자가 과연 마왕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잠깐의 휴지(休止)를 두고 입을 열었다. “이 자가 과연 우리의 동지라 할 수 있습니까?” 무도회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여태까지 이런저런 몸짓을 동원하던 것과 정반대로, 무척 진중하고 느릿느릿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여러분. 저는 오히려 감히 여러분을 성토하고 싶습니다. 한낱 대공보다 못한 우리가 누구보다 존귀한 대접을 받은 까닭은 우리가 마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왕이기를 포기한 자가 생겨났습니다. 그자를 방치하고 용납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이대로 가다가는 기세에서 밀릴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파이몬이 말에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박할지라도 세상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오, 파이몬 전하.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흔두 명의 마왕이란 말입니까?”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마왕이 마왕을 위해서 마왕이었습니까? 언제부터 마왕이 마인을 위하기를 그만두고 그들만의 계급을 만든 것입니까?” “…….” “우리는 외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타인도 자아도 불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함께' 있다는 감정 또한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나와 타인이란 단순히 덩어리에 가깝지요. 좋습니다. 우리는 외롭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마왕은 무조건 살려두어야 합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파이몬. 내 첫 번째 질문에 대답했을 때부터 너는 끝장났다. 마왕의 직분이 마인을 이끄는 것이라고, 지극히 교과서에 가까운 답안지를 제출하면 안 되었다. 차라리 낯짝을 두껍게 회칠하고 마왕의 직분 따위는 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것은 이기심입니다! 파이몬 전하께선 너무나도 명백한 모순을 저질렀습니다. 전하께선 마치 안드로말리우스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다는 듯한 어투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지 자신의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낯짝이 두껍지 못한 네 성격이 패배의 원인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두 가지의 대죄를 범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울분이라도 토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첫 번째, 그는 마왕의 직분을 어겼다. 명분을 잃는 이상 마왕은 모든 마인의 위에 군림할 자격을 잃게 된다. 고로 그는 마왕이 아니다. 두 번째, 그는 마왕 전체에 대한 마인들의 기대와 희망을 적잖게 훼손했다. 우리가 훗날 대의를 도모하기 위해 마인들에게 호소해도 일부 마인들은 안드로말리우스의 예를 떠올리며 우릴 의심할 것이다. 이것이 마왕 전체에게 해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는 안드로말리우스를 멈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부끄러운 짓입니까. 마왕들 스스로 마왕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서열 제9위나 되시는 분께서 마왕과 정반대되는 가치, 이기심을 옹호하다니!” “……읏.” “저는 이 자리에서 요구합니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는 마왕이라는 이름을 명분상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더럽힌바, 오로지 죽음만이 그에게 어울리는 대가입니다. 또한 더불어서 요구합니다. 스스로 위엄을 지켜야 마땅한 고위 마왕이 자신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한바, 마왕 파이몬으로 하여금 니블헤임 시민 전체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이제 파이몬은 입가의 미소조차 유지하지 않았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이쪽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녀와 내가 시선을 부닥치는 와중에 주위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조용한 침묵이 아니라 흥분에 찬 침묵이었다. 양쪽이 서로에게 죄를 추궁하고 있으니 결론이 어떻게 나든 구경꾼들 입장에선 그만큼 재미난 일이 없었다. 그때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꺄하하! 쟤 말이 맞네, 저 애송이 말이 맞아. 저 창녀 년은 평소에도 마왕은 모름지기 격이 높아야 한다느니 뭐니 떠벌리고 다녔잖아.” 내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로만 듣던 바르바토스를 눈으로 보았다. 게임에서 나온 것과 똑같이 바르바토스는 키가 작은 소녀였다. 붉은색이 도드라지고 프릴이 잔뜩 장식된 드레스를 입었는데, 꼭 인형놀이에 등장하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 “평생토록 지가 해온 말을 여기서 부정해버리면 저 년 꼬라지만 나빠지니 이거 영락없이 마인 찌그래기들한테 사과해야겠어. 꺄르륵, 그거 참 꿀맛이네!” “바르바토스.” 진행자 역할을 맡은 마르바스가 그녀를 흘겼다. “부외자는 허락없이 문답에 끼어들지 마라.” “하, 문답은 끝났는걸. 더 볼 것이 있나? 창녀 년, 냉큼 도시로 달려가서 그 풍만한 엉덩이를 바닥에 깔아뭉개고 사죄해버려. 혹시 몰라? 색에 굶주린 부랑자 새끼들이 친히 육봉을 박아줌으로써 네 죄를 사해줄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의 음색이 거새졌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면서 여린 입술을 닫았다. 도가 지나친 빈정거림이었지만, 파이몬은 바르바토스 쪽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 나도 지지 않고 마주보았다. 내가 삼백 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감금될 것이냐, 댁이 자기 권위를 짓밟아가며 시민들에게 사과할 것이냐, 이제 양자택일이다. 기세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다. 가만히 있는 나를 당신이 건드렸다. 만약 이렇게 공적인 장소에서 청문회씩이나 열어가며 날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나도 굳이 강자인 당신에게 적대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눈 좀 깔아라.’ 게임에서 나한테 열두 번 넘게 썰린 년 주제에. 난 댁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왕을 죄다 싸그리 죽여본 적 있는 플레이어란 말이다, 인간성애자 쩌리 마왕아.        00041 발푸르기스의 밤 =========================================================================                                   “이쯤에서 청문회를 끝마쳐도 좋을 듯싶군.” 사회자인 마르바스가 말했다. “청문회의 승패 여부는 전통에 따라 투표에 의해 정해진다. 진행자인 본인을 포함해서 파이몬과 단탈리안은 투표에서 제외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잠시만요!” 파이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르바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흠, 더 할 말이 남았는가?” “소녀에겐 아직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 남았어요!” “파이몬. ” 마르바스가 안경을 빼서 비단 손수건에 닦았다. 그는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비록 친우는 아닐지라도 수백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대가 본인을 알고 있듯 본인 또한 그대를 아는바. 진행자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나, 본인의 감정을 토로하자면…….” 마르바스가 천천히 안경을 다시 썼다. 그가 파이몬을 슬쩍 노려보았다. 만사가 귀찮다는 눈초리였다. “그대가 솔직하게 의도를 밝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녀는…….”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파이몬, 발푸르기스의 밤이야. 한때 모든 마왕이 의무인양 모였던 회합이 현재에 와서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간신히 과반수나 만족시키고 있다. 본인이 누구인가? 서열 제5위의 마왕이다. 바알, 아가레스, 바싸고, 가미긴. 본인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가.” 파이몬이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대가 누구보다 우리에게 헌신적임을……잘 알고 있어요.” “회합에 참여하지 않은 마왕들이 우리를 비웃게 만들고 싶지 않다. 만일 그대가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라는 것이 시시하거나 가당치 않은 종류라면, 나는 독단적으로 청문회를 여기서 끝낼 심산이다.” “소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 제가 안드로말리우스의 사건을 진심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에 대해서는 그대와 단탈리안 그리고 이곳에 모인 모든 분께 사죄드려요.” 파이몬이 드레스 끄트머리를 잡고 동서남북으로 한 번씩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고위 마왕이 솔직하게 사과한 게 의외였는지, 마왕들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흠.”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의미였다. 파이몬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더 이상 미소를 짓거나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지한 자세로 날 직시했다. 괜히 여유로운 척을 하던 방금 전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드디어 본론이로군.’ 1차전은 내가 이겼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승리할 수밖에. 안드로말리우스를 옹호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제부터 펼쳐질 2차전이 중요했다. “소녀가 쿤쿠스카 상회를 상담원으로 두고 있음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와요. 소녀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쿤쿠스카 상회에서도 고위 간부가 전담원으로 배정되어 있지요. 그 간부한테서 얼마 전 놀라운 얘기를 들었답니다.” 설마했더니 역시, 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예상한 그대로 파이몬이 화제를 꺼냈다. 그녀가 마왕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얼마 전부터 대륙을 휩쓸고 있는 하나의 재앙에 대해 여러분도 익히 들어 아시겠지요. 검은 죽음, 그 가공스러운 저주가 인간, 아인종, 마인을 가리지 않고 숨결을 앗아가고 있사와요. 소녀의 충성스러운 부하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요.”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나타냈다. 이때쯤 흑사병은 본격적으로 대륙 전역에 퍼졌다. 유일하게 피해가 적은 지역이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의학 지식이 전수되어 남아 있는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초반에 감염지를 격리시키고 불태워버리는 등 적극 조치를 취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반면에 원래 세계의 중세와 같이 의학 지식이 왜곡되어 있는 여타 지역에서는 피해가 속출했다. 고양이가 감염원으로 여겨져서 때아닌 고양이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주 감염원은 고양이가 아니라 쥐였다. 즉 인간들은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몰살시킴으로써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을 되레 도와주었다. 블랙 허브가 치료제로써 각광받았으나, 한 뿌리에 몇 골드 가량이 나가는지라 웬만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민들은 영주에게 내년 추수량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돈을 빌렸다. 그나마 자기 농토를 갖기 못한 민초들은 돈을 구할 방도조차 없었다. 세계사적인 대재앙 속에서도 영주와 약제사 길드만 떼돈을 벌고 있었다. 마인은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강해서 인간종에 비해선 피해가 적었다. 그것도 인간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 인간계에서 상주하는 마왕들로서는 몬스터 부대의 피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들에게도 흑사병은 크나큰 관심사였다. “불운 중 다행이라고 대재앙에도 특효약은 있었지요. 그런데 블랙 허브가 흑사병을 치료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냈는지 아시나요? 바로 여기 있는 단탈리안입니다.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저에게 알려준 사실이지요.”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애써 무표정을 연기했다. “단탈리안은 어떻게 역사상 처음 발생한 전염병의 특효약을 그리도 금방 발견했을까요? 소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청문회에서 왜 그런 것을 공론화시키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약초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발병했을 때 이런저런 약초를 잡다하게 써봤지요. 그중에 블랙 허브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소녀가 들은 것과는 이야기가 꽤나 다른걸요.” 파이몬이 내 쪽을 지긋이 바라봤다. “제가 들은바에 따르면 당신은 흑사병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블랙 허브를 비축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흑사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짚었다지요.” 마왕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파이몬이 부채의 끝으로 날 가리켰다. “즉, 단탈리안. 당신은 흑사병이 언제 퍼질지 알았을뿐더러, 우연치 않게도 흑사병의 특효약이 무엇인지도 알았어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탈리안, 당신이 바로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얘기예요!” “…….” 하, 웃기는군. 내가 힐끗 무도회장 가운데에서 살짝 왼편으로 떨어진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 쿤쿠스카 최고 간부, 이바르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이 무척 험악해졌다. 당연했다. 고객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지키는 것은 상인의 기본 중 기본. 파이몬은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한테서 정보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달리 말해, 쿤쿠스카 상회에서 고객 정보를 마음대로 빼돌렸다고 말한 셈이었다. 망신살도 이런 망신살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바르가 의심스러웠다. ‘저 표정이 연기인지 아닌지…….’ 내가 예측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쿤쿠스카 상회와 나는 안드로말리우스 사건으로 인해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내가 행했다.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관했음을 폭로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그러자 상회에서는 자신의 세력에 동조하는 유력가의 딸을 내 애첩으로 들이라고 제안했다. 나를 아예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협박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이 제안을 나는 거부했다. 다만 상회 직원인 라피스를 파트너로 대동함으로써 '너희와 척을 질 생각은 없다'라고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그런데 쿤쿠스카 상회 입장에서는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협박의 위험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이에 마왕들 중에서 친인간주의를 표방하는 마왕 파이몬에게 접근했다. 다름아니라 나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상회 쪽에서 파이몬한테 파견한 인물은 토르켈. 그 늙은 고블린은 나와 껄끄러운 사이였다. 아마 기꺼이 날 곤궁에 처하게 만들었겠지. 친인간주의인 파이몬으로서 흑사병은 인간들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중대 사태였고, 당연히 돌림병을 퍼트린 장본인한테 적대심을 품었다. 쿤쿠스카 상회는 토르켈을 통하여 파이몬을 부추겼다. 마침 안드로말리우스라는 껀수도 있겠다, 나한테 한번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이리라. 나는 조용히 분노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이딴 짓거리를 벌인단 말인가? 설령 이바르 본인이 정보를 팔아넘기지 않았을지라도 쿤쿠스카 상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네놈이 장본인이든 아니든 이번 일은 톡톡히 대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바르.’ 물론 지금 나에겐 대가를 치르게 만들 힘이 없었다. 설령 청문회에서 승리할지라도 약간의 보상을 받아내는 게 전부겠지. 그러나 먼 훗날까지도 나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도회장이 떠들썩했다. 파이몬의 폭로에 마왕들이 난리쳤다. 그게 진실이냐면서 나한테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진행자인 마르바스만이 한결같이 심드렁한 눈동자를 유지했다. “파이몬, 이 자리에 유언비어는 어울리지 않음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소녀는 공언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예언했음을 어찌 일개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알 수 있는가?” “단탈리안도 저와 마찬가지로 쿤쿠스카 상회를 조력자로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단탈리안은 쿤쿠스카 상회를 통해서 블랙 허브를 모았고, 그로써 이만 골드에 달하는 이득을 챙겼사와요.” “이바르.” 마르바스가 이바르를 불렀다. “사실인가?” “……송구하옵니다만, 마르바스 전하. 저희 상회에서는 고객의 정보를 결코 유출하지 않사옵니다.” “사실이로군.” 마르바스 역시 마왕,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쉽게 읽어낸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이바르가 가능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마왕이 감정을 읽어낼 테니, 입으로만 상인의 의무이니 뭐니 떠들어댄 것 아니냐는 말이다. 마르바스가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았다. 탁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또렷한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단탈리안. 사실인가?” “…….” “참고로 말하자면 그대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또한 있다. 청문회에서 마왕은 서열에 상관없이 동등하다. 그대가 파이몬의 질문에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내가 그를 마주보았다. 무도회장은 다시금 조용해져서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지금 여기서 대답하길 거부한다면 청문회는 흐지부지 끝날 것이고, 나에 대한 의심과 오해만이 남을 것이다. 그것이 쿤쿠스카 상회와 파이몬이 노리는 바이다. 상대편에 끌려다니는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초강수를 두기로 했다. “전하. 그 전에 저도 이바르에게 한 가지를 하문해도 좋겠습니까?” “허락한다.” “제가 여쭐 것은 다소 비밀을 요하는 일입니다. 이바르에게 귓속말로 대화할 수 있도록 허해주십시오.” “그 역시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이바르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가 대뜸 사과부터 건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 측에서 누군가가 대죄를 저지른 듯합니다.” “초면인데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무척 안타깝소.” “반드시 범인을 색출하여 처단하겠습니다.” “그렇소?” 범인이야 뻔히 정해져 있는데 발뺌하기는. “그거 참 안심이오외다. 헌데, 내 이바르 상주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피식 웃고 허리를 숙였다. 이바르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그대의 본체는 잘 있는가 모르겠구려.” “……!?” 경악이. 생생하게 경악이 전달되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금발이 무척 아름답더군. 알아서 잘 처신하시오.” 딱 그것만 말하고 내가 허리를 들었다. 눈동자에 비춘 이바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이 자의 정체를 모를 리 없었다. <던전 어택>에서 마왕을 배신하고 용사 측으로 돌아선, 유일무이한 마족이 바로 이 작자였으니까. 이바르는 옛날에 한 마왕을 진심으로 섬겼으나 그 마왕이 자신을 한낱 도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 대륙의 모든 마왕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특기인 인형술과 강신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분신을 여럿 만들어내고 진짜 진심, 마왕에 대한 역심을 마지막까지 숨기는 데 성공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왕군을 배반해서 주인공인 용사가 승리를 거두는 것에 크게 일조하지. 처음에 이 노신사가 이바르라는 걸 알고 놀란 까닭이 여기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점잖은 할아버지가 아니라――외양으로 보면 갓 열 두살은 되었을까 싶은, 완전히 꼬맹이 여자애 캐릭터거든. 무얼 숨기랴. 나는 녀석의 전용 시나리오와 전용 엔딩까지 다 봤다. 이바르의 본체가 모스크바 왕국의 설원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어딘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지금 이바르가 그런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어째서인지 최하위 마왕이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마왕은, 일찍이 전염병을 예측한 적도 있다. 단언컨대 이바르 입장에서 지금 내가 무시무시한 대마왕으로 비출 게 틀림없다. 내가 한 말도 너의 본체를 당장에라도 없앨 수 있노라는 협박으로 들렸을 거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몇몇 마왕의 볼멘소리가 무도회장에 울렸다. 흑사병의 진범이 밝혀질지도 모르는 순간에 침묵이 이어지고 있으니 답답하리라. 마침내 이바르가 입을 열었다. “파이몬 전하의 말씀은 거짓입니다.” 파이몬이 충격에 의해 그 여린 입술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이바르의 말은 곧바로 무도회장에 폭탄을 터트렸다. “저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박쥐 새끼,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가!” 마왕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외쳐대며 소란을 일으켰다. 개중에 당장 이바르한테 달려들 기세로 욕지거리를 퍼붓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바르는 눈을 감은 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난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손을 들어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흠.” 마르바스가 오른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 쿠웅. 무도회장 전체가 흔들렸다.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마왕들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방금 그것이 마르바스가 건낸 경고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들이 멍청하진 않았다. 서열 제5위의 마왕은 여기 모인 마왕 절반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정숙. 앞으로 진행자인 본인이 허락하지 않은 자가 떠드는 것을 금한다.” 마르바스가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쿤쿠스카의 상주여. 그대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전하. 송구하오나 저는 무도회장에 들어선 이후로 단 한 마디도 거짓이라곤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에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저 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사와요, 마르바스.” “파이몬 전하. 마왕의 능력은 가히 대단하나 그렇다고 감정을 속속들이 구분하여 파악할 수는 없는 걸로 아옵니다. 단탈리안 전하가 흑사병을 대비하여 블랙 허브를 사들인 것은 맞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흑사병을 퍼트렸다니……소인으로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마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만한 업적을 달성하겠나이까.” 마르바스가 생각에 잠긴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바르가 금방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느껴서겠지. 내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바르는 말을 묘하게 꼬았다. '그렇다고 흑사병을 퍼트렸다니, 소인으로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매우 어중지간했다. 당연히 이바르로서도 내가 흑사병을 퍼트렸다고 의심을 할 뿐이지, 실제로 내가 퍼트린 장면 따위는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알지 못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마왕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능력을 신뢰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면서. 바로 그 점을 파고들어서 이바르는 마왕의 의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제법이었다. 마르바스가 침음을 뱉어내듯 말했다. “이바르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소녀는 분명 그렇게 들었사와요.” 파이몬이 말했다. “증인을 요청합니다.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인 토르켈을 증인으로 요청해요!”      00042 발푸르기스의 밤 =========================================================================                              마르바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곧바로 참석할 수 있는가?” “예. 토르켈은 무도회장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사와요. 부르면 언제라도……!” “승락한다. 단, 오 분 이내로 증인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청문회는 폐한다. 그리고 본인의 임의대로 단탈리안이 승리했음을 선언하겠다.” 파이몬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도회장 출구로 바삐 나갔다. 어디에선가 대기하고 있을 자신의 전담원을 찾으러. 마왕들은 수군거리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청문회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멍청하기는.’ 파이몬은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다. 생각해보자. 토르켈은 상인의 의무까지 저버리면서 파이몬에게 정보를 건네주었다. 요컨대 토르켈은 파이몬의 비밀 공작원이다. 정보를 제공해준 자가 '상회의 간부'라는 애매한 명칭에서 '토르켈'이라고 특징지어지면, 그 순간부터 상인의 의무를 어긴 것은 쿤쿠스카 상회 전체가 아니라 토르켈 개인이 되어버린다. 지금 그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상인으로서 토르켈의 생명을 무참하게 끝장낸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종의 생존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자기 아군이 되어줄 마인 하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여인, 그것이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었다. <던전 어택>에서도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 용사가 위험에 처하자, 파이몬은 군세를 이끌고 나타나서 애써 다른 마왕이 정교하게 마련해둔 함정을 깨부수고 용사 일행을 탈출시켰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역시 파이몬! 희대의 순정녀!' 하고 환호하는 장면이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마인 입장에서 용사는 흑사병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악몽 덩어리이다. 일흔두 명의 마왕이 한 인간의 손에 죽어나가다니, 블랙 조크라기에는 적이 재앙스러운 일 아닌가. 주인공 일행이 서열 30위 권을 돌파하는 시기부터 게임 난이도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설정에 따르면 마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대대적으로 인간계를 침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열 제9위나 하는 파이몬이 몇몇 마왕과 함께 도리어 같은 편을 방해해버리니, 마인은 인간종보다 훨씬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뿔뿔이 세력이 나뉘어 그만 인간-아인종 연합에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결국 마인은 지상계에 거점을 상실하고 마계로 완전히 후퇴한다. 그리고 마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 통합과 평화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린 채 영원히 양육강식의 수레바퀴에 갇힌다.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자취를 감춘 아수라장에. 플레이어 입장에서 순정녀이고 뭐고. ‘매국노. 아니, 한술 더 떠서 매종노(賣種奴).’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이몬은 창녀보다 더한 년이다. 차라리 쿤쿠스카 상회의 이바르처럼 정당한 이유가 있어 작심하여 마왕군에 배신 때린 것이라면 또 모른다. 파이몬은 그냥 인간이 재밌어서, 용사가 마음에 들어서 분탕질을 쳤다. 그래서 난 예전부터 파이몬이라는 캐릭터가 싫었다. 파이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솔직히 라피스한테 돌아가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진행자인 마르바스가 바로 옆에서 눈을 딱 감고 무게를 잡으면서 서 있는데 마음대로 행동하기가 껄쩍지근했다. ‘젠장. 하다못해 만지작거릴 물건이 있어야겠어.’ 내일이라도 상점가에 가서 지팡이 같은 것을 사두어야겠다. 그렇게 뻘쭘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고맙게도 말상대가 저절로 나타났다. “이봐, 너. 서열은 낮은 주제에 말빨은 꽤 되네.” 청문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줄기차게 파이몬한테 시비를 건 마왕 바르바토스였다. 빨간색 위주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에 걸어왔다. 외양은 어린데도 걸음걸이나 분위기가 어른스러워서 살짝 무언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송합니다. 바르바토스 전하.” 아무튼 서열로 따져서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이몬과 대적하게 된 지금, 조금이라도 나에게 호의를 품어주는 고위 마왕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됐어, 됐어. 나 그런 예의 딱 질색이야.” 그녀가 '에엑' 하고 입가를 비틀면서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마왕들은 패기가 없어! 예전에는 만나자마자 인사 대신 파이어볼부터 나눴는데. 도무지 친교하는 방법이라는 걸 모른다니까.” ……겉모습이 꼬맹이에 불과한 아가씨가 요즘 젊은이 운운하니 묘했다. 참고로 바르바토스도 팬층이 제법 두꺼운 캐릭터였다. 공략 팬사이트에서 SM 로리라나 뭐라나 찬양하는 글이 곧잘 올라오곤 했는데 솔직히 무슨 헛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즐겼어. 아아, 고 창녀 년이 분해하는 꼬라지란!” “파이몬 전하와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아. 전하가 뭐야, 전하가?” 바르바토스의 조그맣고 옅은 눈썹이 찡그려졌다. “새끼가 되도 않는 예의를 차려서는. 기둥에 머리라도 박았어? 야, 너 마왕 아니야?” “맞습니다.” “그래. 대답은 빠릿빠릿해서 좋네. 야, 너도 마왕이고 그 년도 마왕이야. 왜 같은 급수끼리 서로 존댓말을 써?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네가 그 년 신하야?” “아닙니다.” “그래, 아니잖아! 여기서도 전하 저기서도 전하 그러니까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에 온 건지 내 마왕성에 온 건지 도대체가 모르겠어.” 외관이 여린 소녀인데 말투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험상궂었다. 뭐라고 할까. 이렇게 표현하면 바르바토스의 외모와 정말 동떨어지지만……꼭 조폭 두목, 마피아 보스 같았다. “앞으로 바르바토스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냥 반말 써, 애송이 새끼야. 지금 내가 네보다 나이 많다고 깔보는 거야? 경로우대 따위 엿이나 처먹으라지.” “하핫.” 내가 재밌어서 웃었다. 게임 속에서도 태생부터 반골 기질인 캐릭터였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권위를 깨부숨으로써 오히려 자신만의 권위를 수립한다. 나는 권위를 깔아뭉갤 정도로 강하다, 라는 인상을 주변에 심어줌으로써. 바르바토스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알겠어, 바르바토스. 나는 단탈리안이야.” “헤에? 그렇다고 정말로 말 놓네?”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하얀 손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면의 촉감이 부드럽게 나의 손안에 들어왔다. “아무렴 서열 제8위의 발언을 헛소리로 들을까.” “뭐?” 바르바토스가 꺄르르 웃었다. 존댓말을 쓰지 않는 편이 도리어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결과다, 라는 내 의도를 곧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거 애송이 자식, 정말 혓바닥에다 올리브 기름을 처발랐나.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파이몬 그 년의 뺨따귀에 쓴맛을 보여주지. 좋아. 내 이름은 바르바토스. 좋을 대로 부르라고, 애송이.” 악수에 힘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홀로그램이 떴다. 「마왕 바르바토스의 호감도가 5 오릅니다.」 그렇다. 바르바토스는 용감하고 솔직한 자를 좋아했다. 아무런 잡념 없이 올곧게 싸움을 걸어오는 용사 또한 바르바토스는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딱히 호의를 품는 데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 역시 로리콘들의 지지도와 별개로, 나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싫지 않았다. 가장 적극적으로 용사 일행에 맞서 싸운 마왕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사 일행을 곤경으로 몰아붙였다. ‘얼른 죽여라. 개 같은 자식.’ 그녀는 최후마저 파이몬과 여러모로 대조되었다. 파이몬이 마지막 순간까지 입맞춤을 요구하며 용사한테 될 수 있는 한 짙은 인상을 남기려 했다면, 바르바토스는 화까지 내며 빨리 죽이라고 보챘다. 개 같은 자식, 하고 말하는 순간 게임화면에 일러스트가 뜨는데 놀랍게도 바르바토스는 시원하게 웃고 있다.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조폭 아가씨가 아니고 뭔가. “잘 들어. 파이몬 걔가 재수없긴 해도 뒤끝 때문에 남 괴롭힐 년은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뒤끝 걱정하지 말고 확실하게 파이몬을 끝장내라는 소리겠지.” “와아!” 바르바토스가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마르바스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영감탱이! 얘 봐! 말귀 겁나게 잘 알아듣는데.” “……생각에 잠기고 있다. 방해하지 마라.” “와 씨발, 이런 새끼가 왜 여태까지 고작 71위지? 그 눈치로 밥을 빌어먹고 살았어도 진즉에 40위는 됐겠다. 뭐하고 살았니? 영감탱이야. 댁이 좀 키워봐. 요즘 50위 권 애새끼들이 영 마뜩치 않다고 비온 날 영감탱이처럼 투덜거렸잖아.” “마왕은 홀로 서는 존재여야 한다고 그대가 주장해왔을 터.” 마르바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방해하지 마라.”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쌍놈아. 정박아 같은 새끼들만 상대하다가 좀 싹수 있는 애송이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랬다. 무게 잡는 거 졸라게 좋아해요.” 아, 눈썹 또 꿈틀거렸다. 그래도 꿋꿋하게 눈을 감기는 감았다.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 대결을 펼치네, 이 사람. “하여간 그래. 뒤는 걱정하지 말고 저질러. 만에 하나라도 창녀 년이 보복할라치면 내가 막아줄 테니까. 응? 알았지?” “고마워.” “얼씨구. 내가 네 좋으라고 이러는 줄 아냐? 재수떼기라곤 콧구멍에 쑤셔넣을래도 없는 창녀 년 물 좀 맥이려고 이러는 거지. 잘 해봐, 단탈리안인가 뭔가. 인격도 꽤나 안정되어 보이는 것이 너 잘하면 오래 살겠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등을 휙 돌려 저편으로 걸어갔다. 올 때만큼이나 갈 때도 쿨했다.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완벽한 자기만족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녀가 다 가버리자 돌연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음, 대충 둘 사이에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겠다. 아까 전에 마르바스와 파이몬이 나눈 대화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이 양반은 전통을 무척 중시하는 듯했다. 그런 성격에 저기 바르바토스 같은 파천황은 독약이지. “……슬슬 오 분이군.” 마르바스가 눈을 떴다. 세상에. 이제보니 눈을 감은 것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속으로 딱 정확하게 오 분을 센 모양이었다. 점점 더 이 양반의 성격이 손에 잡히듯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증인이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청문회는 폐해야 마땅하나.” 마르바스가 슬쩍 무도회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추었으므로 넘어가도록 한다.” 그 순간, 대리석 정문 아래로 두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파이몬. 나머지 한 명은 파이몬보다 한참 키가 작은 고블린 토르켈이었다. 토르켈은 무척 진중하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파이몬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자! 여기 이 자가 토르켈이에요.” 파이몬이 마치 이제 다 이겼다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무거나 이 자에게 물어보세요.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토르켈이 보장해줄 테니까요!” “흠.” 마르바스가 고개를 이바르 쪽으로 향했다.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맞느냐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바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늙은 고블린이여, 그대는 이번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앞으로 나오라.” “이렇게 전하 여러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토르켈이 무도회장 가운데로 나왔다. 그는 저번에 봤을 때처럼 자기 키보다 두 배는 큼직한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그 지팡이에 기대어서 사방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매우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흐음.’ 나는 다소 궁금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토르켈이 상황을 역전시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단 내가 흑사병을 퍼트리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라고 해봤자 없는 일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세계 최고의 거짓말 탐지기들이 눈앞에 있는 곳에서. 그런데도 토르켈은 전장에 나선 기사처럼 가슴속에 용기를 품고 있었다. 이미 어떤 단호한 결정을 내린 듯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파이몬으로 인하여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번 사건의 책임이 쿤쿠스카 상회에서 토르켈 개인에게로 넘어갔다. 여기에 더해 쿤쿠스카의 또 다른 최고 간부인 이바르는 현재 내 협박에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토르켈로서는 상회의 조력도 얻지 못할 판국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토르켈이 할 수 있는 짓이 떠오르지 않았다. 판은 결정되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저 멍청한 파이몬을 포함하여 고작 몇 명에 불과하리라.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비장의 수를 토르켈이 가진 것 아닌가 불안감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회자인 마르바스를 협박해서 청문회를 강제로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문하겠다. 흑사병 발발의 장본인이 여기 단탈리안이라고 그대가 말했는가?” “예, 소인이 그렇게 말했사옵니다.” “어떠한 경위로 그렇게 말하였는가? 증거가 있다면 증거를 말해보아라.” “예에.” 토르켈이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가 마르바스를 보고 또박또박 읊조렸다. 그 모습을 뒤편에서 파이몬이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가 충격으로 바뀌는 데엔 채 십 초가 걸리지 않았다. “저는 틀림없이 단탈리안 전하가 흑사병을 일으켰다고, 파이몬 전하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새빨간 모함이었지요.” “뭐, 뭐라고요!” 파이몬이 경악했다. 마르바스는 표정에 미동도 하지 않고 토르켈을 노려보았다. 아마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건 말건, 토르켈은 자기가 할 말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저와 단탈리안 전하는 작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전하가 흑사병에 효과가 있는 약제를 찾아내자, 저는 전하에게서 상품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전하에게 접근하여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의 전담원이 되겠노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자신에겐 이미 전담원이 있다면서 저를 거부하셨지요.” 토르켈이 지팡이를 들어 무도회장 구석을 가리켰다. “그 전담원이 바로 저기에 있는 소녀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하급 직원에 불과하지요. 저는 하급 직원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지독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래봬도 누 백 년을 헤쳐온 상인. 단탈리안 전하의 거부는 상인으로서의 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토르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토르켈!” 파이몬은 이제 아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녀를 보세요! 어서! 당장 소녀를 보라고요!” “……그래서 단탈리안 전하에게 감히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쿤쿠스카의 상인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쯤에서 토르켈의 의중을 파악했다. ――무서운 녀석. 한번 이바르가 뭘 하고 있나 시선을 돌려봤다. 이바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빌어먹을! 방귀라도 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다 이거지. “저는 파이몬 전하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탈리안이 인간을 싸그리 멸종시키려고 한다. 전무후무한 전염병을 만들어낸 것도 단탈리안이다. 마침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의 살해사건이 있으니 그걸 적극적으로 걸고 넘어지면 단탈리안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마르바스 전하. 소인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요?” “으음.” “감히 없으리라 사료하옵니다. 그야 당연합니다. 소인은 진실만을 말했기 때문이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홀로 실행한 계략이었습니다. 소인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전하에게 원한을 품었고, 또한 단탈리안 전하에게 해를 가하기 위하여 행동했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고객인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파이몬 전하에게 누설한 것도 저였습니다. 만일 파이몬 전하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이 늙은이의 말을 신뢰해주신 죄밖에 없나이다. 이렇듯 모든 과오가 저에게 있는바, 지극히 미천하오나.” 손 쓸 틈도 없었다. “제 목숨으로써 이번 일을 사죄드리고자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토르켈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자신의 목 정중앙을 찔렀다. 단검은 늙은 고블린의 얇은 목줄기를 너무나도 쉽게 꿰뚫었다. 검끝이 마치 가시처럼 목덜미로 튀어나왔다. 자그마한 고블린의 몸뚱어리가 서늘한 무도회장 바닥에 쓰러졌다.                  00043 발푸르기스의 밤 =========================================================================                         정적. 마르바스가 피곤해하며 외알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바르바토스가 무도회장 한켠에 마련된 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먹고 피식 웃었다. 여타의 마왕들이 고블린 늙은이가 연출해낸, 진귀한 광경에 말없이 감탄했다. 놀랍도록 멋진 콘서트 음악이 끝나고 나서 관중들이 잠시간 숨을 들이키듯이. “아……아아……?” 파이몬은. 파이몬은 시체 곁에 주저앉았다. “아……아, 아…….” 그녀가 드문드문 신음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망가진 스피커의 언저리에 남는 기계음같이.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녀에게 몰아닥쳤다. 동정심이나 애틋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본래 행운은 빠르게 가고 불운은 빠르지 오지 않는가. 나는 다만 토르켈이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자살해버린 바람에 꼬여버린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토르켈, 녀석은 언사가 교묘했다. ‘저와 단탈리안 전하는 작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정말로 있었던 일을 서술했다. 흑사병 건으로 인해 우리 둘이 만났다는 것, 라피스와 관련해서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는 것. 전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입에 담지 않음으로써 초장부터 마왕들의 신뢰를 확보했다. 일단 신뢰를 얻은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단탈리안 전하의 거부는 상인으로서의 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단탈리안 전하에게 감히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아무튼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에 대해 진술하다가 어느새 심리에 대해 묘사했다. 자존심의 상처라느니, 마음을 먹었다느니, 몽땅 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래, 아마 토르켈은 진짜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수백 년을 살아온 상인이다. 자기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지 상관없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무엇을 느끼느냐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별개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입장을 밝히는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게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압권인 것은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라는 부분이었다. 도대체가 여러모로는 무엇이고 일종이란 또 무엇인가. 그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구체적인 단어에서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로 갈아탔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홀로 실행한 계략이었습니다. 소인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전하에게 원한을 품었고, 또한 단탈리안 전하에게 해를 가하기 위하여 행동했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고객인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파이몬 전하에게 누설한 것도 저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지능적이게도 홀로 '실행'했다고 말했다. 홀로 '계획'했다가 아니었다. 그야 행동하는 것은 한 명이 할 수 있다. 여러 명이 계획에 참여했어도 실행하는 자는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 토르켈의 수사학은 이러했다. 첫 번째,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자기가 진실한 것처럼 위장한다. 두 번째, 그리하여 심리를 서술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을 서술하는 것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느껴지게 만든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사실관계를 애매모호한 단어로 얼버무린다. “……완벽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능구렁이 상인은 그토록 짦은 시간을 활용해서 수십 명의 마왕을 완벽하게 속인 것이었다. 화룡점정은 자살이다. 자칫 추궁을 허용했다가는 자기가 애매모호하게 덮어놓은 진실이 폭로될 수 있으니 아예 추궁이 불가능하도록 죽어버렸다.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이라면 응당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서열 제9위의 마왕이 서열 제71위의 마왕에게 당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도 토르켈은 침착하게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일지 알아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실책은 자기 개인의 실책으로. 파이몬의 실수는 일개 상인이 기획한 계략으로. 이같은 둔갑술을 성공시킬 수 있으면 목숨 정도야 타당한 대가라고 계산한 것일까. ‘이것이 마계 최고의 상인 중 한 명.’ 만일 내가 처음부터 상대해야 했던 자가 파이몬이 아니라 토르켈이었다면……결코 쉽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리라. ‘좋아.’ 파이몬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고블린한테 경의를 표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게 아까웠지만, 고블린의 필사적인 계책에 이대로 넘어가주고 싶은 마음이 어디엔가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와 파이몬은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세력.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도 후환이 두렵겠지, 하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판결을 집행한다.” 마르바스가 저녁이라도 먹겠다는 어투로 말했다. “서열 제9위, 파멸을 관장하는 마왕 파이몬이 요청했으며 서열 제5위, 지배를 관장하는 나 마르바스의 이름으로 승인한 이번 청문회에서는 두 가지 사안이 논의되었다.” 평탄한 목소리가 무도회장 구석까지 흘러들었다. 음이 낮은데도 마르바스의 말소리는 한마디한마디가 똑바로 들렸다. 그 와중에 파이몬은 여전히 멍하게 시체 주변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사안은 서열 제72위, 겁을 관장하는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에 대한 것이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파이몬은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에게 삼백 년의 감금형을 청구했다.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는바.” 마르바스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여기서 단탈리안이 유죄라고 생각하는 자는 오른손을 들라.”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거나 해서 주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행동하면 남한테 얕보일 거라 생각했으므로. 확신을 품고 잠자코 기다렸다. 마르바스가 대략 십 초 정도를 기다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0표. 첫 번째 사안에 관하여 단탈리안의 무죄를 선언한다.” 기쁜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결과.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었다. 얼마나 압도적으로 승리하느냐가 문제였다. 투표 결과는 암묵적으로 나에 대한 지지도로 이어진다. 여기 있는 마왕들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갖느냐 안 갖느냐와 상관없이, 앞으로 혹시나 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할 자는 청문회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그자에게 나는 타 마왕들한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마왕으로 기억될 테니까. 마르바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두 번째 사안은 흑사병에 대한 것이다. 파이몬은 흑사병을 일으키고 퍼트린 장본인이 단탈리안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오른손을 들라.” 다시 십 초의 시간이 흘렀다.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0표.” 내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최고다!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제부터 적어도 마왕들과 척을 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곳에 자리한 마왕은 물론이고 결석한 마왕 또한 그러했다. 서열 제71위가 서열 제9위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서열 제71위가 너무나도 잘나서 제9위가 쪽도 못 썼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럴 확률은 낮았다. 서열이 높은 마왕일수록 실력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크다. 그렇기에 자신과 서열이 비슷한, 혹은 자신보다 높은 파이몬이 패배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리라. 다른 마왕이 도와주었다든지. 그들은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고위 마왕 간의 신경전으로 해석할 게 분명하다. 청문회의 쉬는 시간에 바르바토스가 나한테 접근했다는 얘기라도 떠돌면 더할 나위 없다! 바르바토스는 그저 혹시 모를 보복에서 지켜주려는 의도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다른 마왕들 눈에도 그리 비추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파이몬과 바르바토스가 옛날부터 철천치원수였다는 점을 기억해내고,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바르바토스가 암중에서 계획한 것 아닌가 의심할지 모른다……. 허허실실과 의심암귀의 묘략. 마왕들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나의 배후세력에 주의하는 동안, 나는 안심하고 던전을 발전시킨다. 휴양이나 즐길 속셈으로 온 니블헤임에서 뜻하지도 않게 좋은 방패를 얻었다. 전부 파이몬이 나댄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에게 없던 호감까지 생길 것 같았다. 농담이지만. “…….” 파이몬이 초점 없는 눈으로 토르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낼 힘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옆에서 진행자인 마르바스가 다소 냉정하게, 그러나 그에게 어울리는 태도로 판결을 마무리 지었다. “두 번째 사안에 관하여 단탈리안의 무죄를 선언한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고개를 돌리니, 바르바토스가 작고 하얀 손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두세 명이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절반이 넘는 마왕이 박수를 쳤다. 나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사방을 향하여 한 번씩 허리를 숙였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무도회장 한가운데 놓인 시신과 그 곁에 주저앉은 여인, 그리고 인사하는 남자라는 구도에 묘한 구석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승리한 검투사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파이몬이 치를 형벌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마르바스 전하. 그에 대해서는 제가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윤허한다.” “감사합니다. 소인이 비록 억울한 모함을 당했으나 여러분께서도 보셨다시피, 파이몬 전하는 쿤쿠스카의 상인에게 속았을 따름입니다. 파이몬 전하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호오, 하고 마르바스가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그 말인즉슨.” “예. 저는 청문회의 당사자로서 파이몬 전하에게 어떠한 형벌도 내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애당초 우리는 신성한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형벌이란 축제의 공기를 망칠 뿐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서 마왕들이 웅성웅성거렸다. 의외라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반대하거나 그러는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고변을 당한 내가 도리어 이렇게 나오는데 부외자가 뭐라 할 수 없었다. 저어기 구석에서 바르바토스 아가씨가 불만스러운 듯 입가를 비트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표시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듯싶었다. 「마왕 마르바스의 호감도가 12 오릅니다.」 ‘예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걸 노렸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르바스 이 아저씨가 전통적인 행사를 꽤나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해봤자, 자기가 주도적으로 개최한 행사가 뜬금없이 청문회 때문에 망가지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청문회 중간중간에 그런 제스처를 드러내기도 했고. 자그마치 서열 제9위가 요구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행사는 열어야겠고……그런데 당사자인 내가 청문회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행사에 집중하자 제안했다. 마른 밭에 물 뿌려준 격이었다. “좋다. 단탈리안의 의견을 받아들여 처벌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도 단탈리안 그대의 관대함에 감사하는 바이다.” 아니나 다를까, 낚싯밥을 물었다. 다른 사람 눈에 단탈리안은 더 이상 서열 제71위의 날파리가 아니라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 두 명의 고위급 마왕에게 비호 받는 인물로 비출 터이다. 내 생존 확률이 오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군 그래. “허나, 아무리 파이몬에게 잘못이 없다한들 완전히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는 법.” 마르바스가 한결 경쾌해진 말투로 말했다. “파이몬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단탈리안에게 사과하라.” 그때까지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파이몬이 어깨를 움찔했다. “사……과……?” “그렇다.” “…….” 파이몬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실패했다. “거짓말……토르켈이 그럴 리가…….” “그대 역시 고블린의 감정을 읽었을 터. 저것이 그대를 속였음에는 일고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소녀를……배신한 거예요?” “아아.” 파이몬이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상태로는 그 정도 몸짓이 최선인 듯했다. “……무, 죄?” “예. 파이몬 전하.” 내가 말했다. “저는 흑사병을 만들어낸 적도, 고의로 퍼트린 적도 없습니다.” “…….” 파이몬이 일시정지했다. 잠깐인 것 같기도, 한참인 것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죄……합니…….”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 무슨 말인지는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연거푸 소리내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대리석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파이몬은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고, 힘없이 무도회장을 걸어나갔다. 도중에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한 늑대인간이 아마도 파이몬의 무도회 파트너이리라. 기묘한 침묵이 공기를 눌렀다. 마르바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오늘 본제가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그 순간, 야트막한 어둠에 덮인 무도회장이 갑자기 밝아졌다. 천장에 무수하게 달린 샹들리에가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어디에선가 온갖 악기가 날아오더니 허공에 떠오른 채 저절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마왕들이 웃어댔다. 그들은 아까 전에 침묵한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파이몬의 궁색 맞은 사죄에 대하여 떠들었다. 고위 마왕이 보인 추태는 무도회의 분위기를 달아올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나 역시 긴장을 풀었다. 이바르에게 블러프로 협박한 것, 쿤쿠스카 상회의 과오를 응징하는 것, 마르바스와 바르바토스에게 조금 더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 등, 아직까지 꽤나 많은 일이 남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선택한 일은, 무도회장의 기둥에 서서 날 걱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라피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라피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어.” “…….” “기껏 파트너로 데려왔는데 벽에만 둬서 미안해. 봐줄 거지?” 라피스는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지만 그쯤이야 이제 눈 감고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다가도, 분노하다가도, 고민하다가도, 여하간 몇 초 사이에 수없이 감정을 바꾸더니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라피스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런 과장이 없었지만, 아무런 과장이 없었기에 아름다웠다. 지금 가볍게 감동하는 것은 틀림없이 나의 감정이겠지. 나는 한손으로 라피스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쓰다듬었다. 그렇게 청문회가 끝났다.           00044 Quest Breaker =========================================================================                        “부장님. 보고서 좀 검토해주십시오.” 터엉, 하고 청년이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책상에 쌓인 종이의 산맥을 보고 여인이 눈쌀을 찌푸렸다. 한참 재미난 만화를 읽는 참이었다. 여태까지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던 주인공이 어찌된 영문인지 여자로 바뀌어서, 정반대로 여자에게 공략 당할 처지가 되어버린 부분――만화에서 가장 두근거리면서도 흥분되는 장면을, 지금 막 읽고 있었다. 여인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만화를 읽다가 방해하는 놈이었다.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인간이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는 놈이었다. 우연하게도 눈앞의 청년은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고로 여인이 절간의 사천왕처럼 얼굴을 와락 구기고 “아앙? 시방 요단강에 코 박고 싶어 지랄 났냐?” 하고 청년을 노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아…….” 금발의 청년이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꽤나 공들여서 만든 보고서라구요, 이거.” “네가 공들여 탑을 쌓건 똥을 퍼지르건 내가 그걸 봐줘야 하는 의무가 어디 있는데. 대갈통에다 핑크색 페인트를 부어주랴? 그럼 네놈 회백색 뇌수탱이도 조금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겠지, 앙?” “부장님. 일이라는 게 기일을 정해서 딱딱 처리하지 않으면…….” 여인이 만화책을 덮었다. “하 요거 요 새끼 봐라. 기일을 정해서 딱딱 처리해? 네놈은 애미 뱃속에서 아따 어머니 지 몇월며칠몇시몇분에 딱 맞춰서 나갈라요 입구 딱 벌리고 대기 타쇼 요렇게 통보하고 나갔냐? 새끼가 때가 무르익으면 만사가 형통이거늘, 시간 정하지 않으면 좆탱이 발딱 세우지도 못할 자식이 요 새끼네. 기일이 그렇게 좋으면 네 새끼 까꾸라질 기일도 내가 정해주마. 앙? 네 새끼는 지 기일이 언제인지 궁금해서 그동안은 어떻게 숨쉬고 살아왔냐? 면상이 참 안녕하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댁의 불알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심히 궁금한데 직접 확인해봐도 될련지요? 아앙?” 청년이 속으로 생각했다. 겁나게 무섭다. 여자는 미인이었다. 검은색 생머리가 자기는 단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꽤나 고급스러운 분이니 알아서 모시라 주장하고 있었다. 도저히 근무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회색 후드티를 입었으나 그것도 그녀의 몸에 걸쳐지니 왕비의 드레스가 부럽지 않았다. 그런 미인이 새끼이니 불알이니 욕지거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란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오, 오늘은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청년이 침을 삼켰다. 성격이 저따구니까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밀려날 대로 밀려나 여기 촌구석까지 좌천된 것이리라. 평소라면 지금쯤 독서를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얼른 사과한 다음 물러갔겠으나, 오늘만큼은 승부를 보고 싶었다. “부장님! 그럼 도대체 언제 보고서를 봐주실 겁니까.” “나도 몰라. 네 어머니는 언제 네가 태어날 줄 알아서 널 낳았겠다, 불효자 같은 새끼야? 일단 내가 책 좀 읽고나서 생각해볼 테니 얌전히 입구녕에 지퍼 채우고 저기 구석에 처박혀 있어.” “어제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 그제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 그그저께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의 책은 언제까지 읽어야 다 읽는 건데요!” 여인이 쿨하게 대답했다. “내가 읽을 만화책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아니, 만화책은 매달 매년 새로 나오잖아요…….” “그럼 세상에 만화가가 사라질 때까지 읽지 뭐.” “일할 생각이 있기는 합니까!?”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뭔가 일을 시키지 마라.” 확실했다. 자신의 상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다. 인천 앞바다에 빠트리면 바다가 식겁해서 퉤 뱉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우주에 내던지면 이게 무슨 쓰레기냐고 경악하며 지구만 버려둔 채 은하계가 안드로메다까지 줄행랑치겠지…….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청년은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옛날엔 여인이 상사라는 것에 자긍심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체념과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 지구와 우주의 환경을 위하여 내 한몸 희생한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진즉 전신주에 목을 매달았으리라. 그러나 왜 하필 내가 희생해야 하는가?……청년은 벌써 수천수만 번 자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신의 장난이든 운명이든, 이 썩어빠진 상사의 엉덩이를 두들겨줄 사람은 자기뿐이었다. 청년이 책상에 엎어진 만화책을 낚아챘다. 여인이 어, 하고 입을 벌렸다. “보고서 읽으실 때까지 만화책은 압수이지 말입니다!” “…….” 여인이 지긋이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만화책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났다. “좋아.” 하고 여인이 말했다. “봐주지.” “저, 정말입니까!” 자신이 거둔 성공이 믿기지 않아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시에 감동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인간 쓰레기에다 욕쟁이이며 월급도둑이자 방구석폐인인 여인이었어도 역시 열 번, 아니 백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전 언젠가 부장님이 제 진심을 알아주실 거라…….” “별 내용 아니면 너 죽는다. 진짜로.” “…….” 그 나무가 넘어오면서 아무래도 나무꾼을 깔아뭉갤 것 같아서 문제였다. 여인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고개를 살짝 당긴 다음, 그녀가 양손으로 서류를 들고 한장한장 넘겼다. 초반에는 한 장의 서류를 넘기는 데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더니 중반에 이르러서 한 쪽에 오 분 넘게 머무르기도 했다. 청년은 혹여 여인이 질문하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게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났다. “……흐음.” 여인이 마지막 장에서 시선을 땠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청년을 올려다봤다. “수명이 늘어나서 좋겠네.” “감사합니다.” “연기 스킬을 활용해서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이야.” 여인이 서류뭉치를 책상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허리를 기대었다. 거의 눕다시피 할 정도인 둔각으로. 여인은 하얗고 밋밋한 천장에 무언가 흥미로운 물건이라도 붙은 것처럼 위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것이 생각에 깊이 잠긴 상태임을 청년도 알았다. “언제부터 관전했냐?” “튜토리얼 때부터요. 그때부터 이 플레이어는 자기 특징을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진즉에 죽은 줄 알았는데.”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하긴 예전부터 말빨은 좋았지.” 라고 말한 다음에 또 입을 닫았다. 청년이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여인이 천장을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이십 분이 넘어가자 청년은 조급해졌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플레이어는 충분히 상위권 랭크로 등록될 만합니다. 그건 그대로 우리 지부의 실적으로 이어지고요.” “…….” “아무리 홧김에 보내버렸다고 해도 애프터 케어도 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더더욱 배려를 해야죠.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플레이어한테 필요한 정보 알려주고 그러겠습니다. 포인트 떨어지지 않게 할 자신 있습니다.” “안돼.”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부장님!” “오해하지 마. 네 보고서는 흥미롭게 읽었으니까.” “예?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곁눈질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마. 최소한의 정보도. 우리가 플레이어와 접촉한다는 사실만으로 포인트가 깎인다. 앞으로 이 플레이어의 포인트를 깎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겠어. 아예 개입을 하지 마. 내버려둬.” “네, 네에?” “난이도가 지금 광란의 모드이지. 흐음. 더 난이도를 올릴 구석이 없나.” 여인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지려 하자, 청년이 당황해서 말했다. “저기, 부장님.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습니까?” “말귀 못 알아먹네. 정보를 제공하려고 접촉하는 즉시 10 포인트 나가잖아.” “……겨우 10 포인트잖아요.” “아이고, 밥팅.”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역대 1위 플레이어랑 2위 플레이어 점수 격차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냐? 132점이다. 고작 132점이야. 최소한의 정보를 주겠답시고 개입하기 시작하면 100점은 금방 날아가.” “하지만 그건, 진짜 최상위 플레이어들 아닙니까. 어차피 100점 1000점 따위는 천 위권 안에서도 별 거 아닌데…….” 청년이 말을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 설마 이 플레이어가 백위 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쳤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십 위권도 들어갈 거다. 밥팅아, 이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보고서 쓰기는 지가 전부 써놨으면서 정작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아보질 못해.” “허억. 시, 십 위권이요!?” 여인이 일어나서 청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네놈 생각은 뻔하지. 야, 얘가 파이몬한테 왜 죄과를 묻지 않은 건지 알겠냐?” “그거야……파이몬이 워낙 불쌍해서 동정심이 든 거 아닐까요?” “뭐? 동정심?” 여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전신을 떨어대며 웃어서 그만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크하하하하! 동정심이라니! 끄하하, 하필, 하필 동정심이라니!” 그녀가 한참을 웃었다. 청년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낯을 붉혔다. 그가 다소 분이 치밀어서 되물었다. “우씨. 그럼 뭡니까?” “하이고, 부처님 할아범이 와도 구제할 도리가 없는 중생아. 낫 놓고 기역도 모른다니너 딱 네가 그꼴이야. 야, 얘가 파이몬을 족쳐서 얻을 게 뭐냐? 자존심? 금전적인 보상? 그딴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게 옆에 있어. 바로 고위 마왕의 지지야. 당장에야 자존심 세우고 보상 챙기면 좋겠지. 그렇지만 고위 마왕한테 면박을 준 하위 마왕을 누가 고운 눈으로 쳐다보겠어? 마왕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전부 계산된 행위라는 말씀이에요?” “당근이지.” 청년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전 플레이어가 그렇게 계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잭 올란드의 경우를 보세요. 죽일 수도 있는데 죽이지 않았잖아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죽이든 죽이지 않든 상관없는 잔챙이였으니까 굳이 죽이지 않은 거다.” 여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인간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착하다는 보장이 있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가 악한이라는 보장이 있어? 심리이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심리를 읽어라.” “하지만 보세요. 잭이 죽고 난 다음 플레이어는 분명히 슬퍼했다고요!” “네가 죽으면 나도 슬퍼할 거야.”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이어 그녀가 자신을 아낀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청년이 얼굴을 붉혔다. “에, 예에?” “하지만 죽일 필요가 있으면 죽여.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미소 지었다. “…….” “성격은 다채로운 거다. 척 보기에는 사리에 맞지 않아 보여도 그 사람 내부에서는 완성되어 있어. 누구든 그렇지. 아후, 오랜만에 처웃었네. 동정심? 끄흐흐. 파리 새끼 간뎅이 붓는 소리하고 앉았네.” 여인이 다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래서 인간이 재밌다니까. 대체로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아주 가끔씩 생각지도 못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거든. 그걸 보고 배팅을 거는 거고. 감히 나한테 <던전 어택>의 시스템에 딴쭉을 걸길래 어느 정도 놈인가 했더니 생각 이상이네……야, 난이도 높일 수 있는 거는 전부 다 올려버려.” “그, 부장님? 그렇지 않아도 루나틱 모드예요.” “얘는 할 수 있어.” 그녀가 단언했다. “내 눈은 틀림없어. 얘 물건이야.” “그럼 적대적 관계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고, 이벤트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뭐, 이미 만난 인물들과 호감도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또…….” “까라면 깔 것이지 뭐 잔말이 많아? 요단강에서 샤워하게 해주랴?” “하아. 알겠습니다.” 청년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겼다. 난이도를 상향시키기 위해서. 그가 속으로 플레이어한테 사과했다. 미안, 네가 마음에 들어서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줄까 했는데 오히려 짐을 얹혀버렸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양해해달라……. 청년이 작업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여인이 책상에다 발을 올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만화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자기만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에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또 또 만화책이에요? 그만 좀 읽으시죠.” “난 지루할 때는 만화책을 읽어.” “부장님은 맨날, 항상 만화책만 읽잖아요!” “그러게.” 그뒤로 여인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릴 따름이었다.   00045 Quest Breaker =========================================================================                          * * * 니블헤임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났다. 휴가 후유증이라는 것일까, 나는 돌아오자마자 껌딱지가 된 심정으로 마왕의 침대에 퍼질러 누웠다. 집, 그중에서도 집의 침대에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이곳을 벌써 집으로 여기게 된 데에는 쓴웃음이 나왔다. 물론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 보지 못한 몬스터들을 잔뜩 귀여워 해주는 것이었다. “요기, 요기가 간지러운 거지!” ─ 꺄르르르르! 검지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살살 비벼주자 요정이 자지러졌다. 간지럽히지 말라면서 위쪽으로 휭 날아가더니, 또 가만히 있으면 살그머니 다가왔다. 아마 무섭지만 재밌는 놀이기구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하여 요정들을 마사지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 꺄하? 꺄하. 다른 요정이 다가와서 왼손 검지를 잡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는 눈초리로 이쪽을 똘망똘망하게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해줄 거야? 해줄 거야? 하는 눈빛이었다. 이거에는 아무리 나라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요정이 아니라 천사 아닐까? 내가 직접 애를 낳더라도 요정만큼 귀여워할 자신이 없었다. “좋아. 필살기……<투핸드 어택>이다.” 자뭇 비장하게 선언했다. 궁극의 필살기.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조차 차마 쓰지 못한 육참골단(肉斬骨斷), 이대도강(李代桃僵)의 비법. 한 번 사용하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마궁이요, 라플레시아의 아가리일진저. ─ 꺄하아? 이쪽의 진지함을 느꼈는지 요정이 빤히 날 올려다봤다. 후, 알아차린들 늦었다. 너는 이미 깨워서는 안 될 괴물을 깨워버렸다. 내가 손을 들어올렸다. 이제 막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서 카덴짜를 연주하려는 피아니스트처럼 내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에 한 마리씩 요정을 골라잡아 마구마구 간지럽혔다. ─ 꺄르르륵! 꺄르르르륵! 두 마리의 요정이 침대보에 몸을 비틀어댔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연기> 따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나의 진정한 기술. 백발백중의 확률로 적을 제압하지만 투핸드 어택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손으로 다른 짓을 못한다. 양손이 봉인되는 것이다. 하물며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은 양발 또한 쓰지 못한다. 혹자는 침대에서 일어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자는 침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임에 틀림없다. 침대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건이 아니다. 침대는 눕는 물건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침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해버린 소산이요, 일단 침대에 누우면 더 이상 누워 있으면 영원히 누워버리겠다 싶을 때까지 버텨야 비로소 침대를 제대로 사용하는 거다. 방금 왜 내가 원래 세계에서 백수로 지냈는지 강렬하게 암시된 것 같았지만 정신건강의 차원에서 무시하고 넘어갔다. 결론적으로 내가 양팔과 양발이 묶였다는 게 중요했다. 적들이 먼저 백기를 들 때까지 후퇴하지도 못한 채 간지럽히기라는 이름의 영겁회귀, 원환의 이치에 빨려 들어감으로써 영원토록 시지푸스의 수레바퀴를 굴려야만 한다……. 새삼 인생의 비극에 회한에 젖어 있자, 어느새 다른 요정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 아이들한테 지금 놀이가 무척 재밌게 비춘 걸까.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고 보채오는 것이 꼭 문방구 앞의 오락기에서 초등학생들이 순번을 다투는 것 같았다. 내가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다. “설마 네놈들……나에게 이것보다 심한 극한의 상태를 강요하는 거냐!” 상대방의 강력한 공격에 쪽수로 맞선다.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전술이 지금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마왕성 마왕방 침대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요정들이 내 표정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러하다, 우리는 너를 패배시킬 악몽이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라 어리석은 자여' 하고 들린 것은 비단 내 착각만이 아닐 터. 나는 안시성 위에 서서 당나라 군대가 끝없이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고구려의 양만춘과 같은 심정이었다. “크윽, 치사한 짱깨 놈들! 쪽수가 아니라 실력으로 붙자.” ─ 꺄하아? 꺄르르. “뭐? 인해전술도 어엿이 전술이라고?” 내가 침음을 흘렸다. 누구 몬스터인지 몰라도 정말 치사하고 비열한 애들이었다. 이런 몬스터를 키우는 주인 놈은 분명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변태적이고 악질적이리라. 간지럽히기에 모든 정력과 체력을 쏟아부었다. 필사의 각오였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 마리의 요정이 탈락하면 다시 새로운 요정이 교체해서 들어오고, 새로운 주자가 나가떨어지면 또 다시 한 마리가 들어왔다. “요, 요정이 쓰러지지 않아……!?” 이게 뭔가. 불합리하다. 마치 우리팀 선수는 이제 지쳐서 헉헉거리는데 어째서인지 심판이 저쪽팀한테만 선수를 세 번이 아니라 무한히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셈이었다. 스포츠맨십이라곤 파리의 새끼발톱에 낀 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이런 경기가 월드컵에서 일어난다면 당장 전세계적인 폭동이 일어나 FIFA를 쑥대밭으로 만들 게 분명했다. 그 선봉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깃발을 치켜들고 있겠지. 스포츠에서 생겨날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진다는 점에서 이토록 현실은 부조리했다. “너희가 그렇게 나오겠다면, 좋다.” 간지럼을 멈추었다. 꺄아? 하고 요정들이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우면서 날 쳐다봤다. 가히 살인적인 깜찍함이었으나 유혹당하지 않았다. 저 귀여운 얼굴 뒤에 숨은 것이 가증스럽고도 끔찍한 비열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치켜세우고 코웃음을 쳤다. “최후의 최후까지 이 수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사태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장본인은 너희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 꺄하? “배덕의 날개가 별을 잊은 하늘을 가르고……운명은 찰나의 틈새에 갇혀 영겁의 시간을 방황하노라. 헤라클레이토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초저녁에 웃음 짓는 이율배반과 엔들레스, 패러독스의 명칭으로 지금 이 자리에 전설을 소환할지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의 나는 실로 마왕 그 자체.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에 등장하여 영문 모를 외국어를 중얼거리면서 주인공 일행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공포의 대명사. 이 자리에 능력치 총합이 백을 넘기지 못하는 쩌리 마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고, 어두우며, 무시무시한 한 남자가 자리할 뿐이었다. 더더욱 무서운 점은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도 혀를 씹지 않았다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단체로 연합해서 쳐들어온들 나의 혓바닥에는 당해내지 못하고 치욕에 휩싸인 나머지 죄다 지중해의 푸른 바닷속으로 투신자살할 지경이었다. 완전무결한 자아도취가 그곳에 있었다. “한 개가 두 개로, 두 개가 열 개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라. <더 나이트 댄스 오브 텐 골든 핑거즈>!” 그렇다. 한손에 손가락 '하나'만을 간지럽히는 데 사용하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열 명의 요정이 달려온다면――똑같이 열 개의 손가락으로 대응해주면 그만이다! 그것이 <더 나이트 댄스 오브 텐 골든 핑거즈>. ─ 꺄르르륵!? 꺄하, 꺄르르르르! 효과는 대단했다. 열 마리의 요정이 한꺼번에 제압당해 속절없이 간지럽히기에 무너져내렸다. 과연 새끼손가락으로 요정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꽤나 어려웠으나 나는 최대한 섬세하게 아이들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요정들이 쉴 새 없이 웃어댔다. 웃음의 바겐세일이었다. “크하하! 비열한 짱개놈들, 너희는 쪽수를 믿고 덤볐겠지만 강물이 평소보다 얕았다는 걸 파악하지 못한 게 통한의 실책이다―!” “호오.” 옆에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가 많은 적군은 한꺼번에 각개격파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비장의 병법. 나 단탈리안이 끝끝내 감춰온 한수이다!” “그대는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군. 감탄스럽다. 그대와 함께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대의 진면모는 끝이 없구나. 마치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와 같은 남자이다.” “무얼, 그렇게 칭찬해도 남는 건……?” 요정들을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걸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침대 옆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무색무취의 눈동자로 이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에 온 뒤로 꽤나 많은 모험대를 격파했다. 나에게도 전술에 재능이 있는 것 아닌가 자부하게 되었지만, 그대에 비하면 아직 새발의 피였군. 부끄럽다. 계속해서 정진하겠다.” “어……언제부터 봤습니까?” “음? 무슨 소리인가, 언제부터냐니.” 내가 침을 삼켰다. “그, 그러니까. 제가 요정들이랑 놀기 시작한 걸 언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 라우라가 금발을 어깨로 넘기면서 말했다. “정확하게는 그대가 <투핸트 어택>이다, 하고 소리칠 때부터였다마는.” “처음부터 다 본 거잖아!”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질렀다. 계속 엎드려 누운 탓인지 침대 옆에 라우라가 앉은 것을 보지 못했다. 마왕방은 후줄근한 주제에 침대만 쓸데없이 호화로워서 키가 높았다. 그게 틈새가 될 줄이야. 바깥에서는 비정한 마왕. 그러나 안에서는 따뜻한 남자가 내 이미지였다. 적어도 라우라에게는 그런 이미지라는 말이었다. 라우라는 먼 훗날 대륙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거듭날 인재. 웬만하면 그녀에게 멋진 인상을 남겨주고 싶었다. 그래야 배신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몬스터들과 놀아나는 팔불출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심지어 라피스한테도 이 정도로 망가진 모습은 보여준 적이 없는데! ‘아니다. 침착해라.’ 순간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라우라가 하는 말투를 들어보니……그녀는 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역할극을 벌였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 즉 아직까지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이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때는 최대한 뻔뻔하게 나가는 게 중요했다. 마치 내가 단순히 논 게 아니라는 듯이, 마치 여태까지 한 행동에 크나큰 의미가 있다는 듯이. “그런데 단탈리안이여.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무,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이 정도는 합격점에 들어갔다. “배덕의 날개가 별을 잊은 하늘을 가르고 운명은 찰나의 틈새에 갇혀 영겁의 시간을 방황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다.” “크허어어억!” 내가 절규했다. 이, 이건 직접 들어보니까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당장 어디 쥐구멍에 숨어들고 싶었으나 계속되어 이어지는 라우라의 질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와 아낙시만드로스, 초저녁에 웃음 짓는 이율배반과 엔들레스…….” “끄악! 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주세요!” “패러독스의 명칭으로 지금 이 자리에 전설을 소환한다는데 전설과 손가락 열 개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만치 깊은 속뜻이 숨겨진 걸로 보인다.” “흑역사가! 흑역사가 실시간으로!” 초등학교 시절, 내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비밀결사대원이라는 망상에 빠져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또 괴인 놈들이 서울을 침략하려 하는군'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때 나와 함께 등교하던 여자애가 '무슨 소리야?'라고 물었다. 나는 평범한 대중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알면 다친다고. 너를 이 가혹한 세계로 끌어오고 싶지 않다고. 그때 여자애가 지은 표정이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피라도 토하고 싶었다. 한편, 라우라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그대의 병법에 숨은 의미를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병법이란……병법이란…….” 머리가 새하얬다. 어떻게 대답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뇌와 심장과 배가 혼열일체가 되어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 연기 스킬 발동!’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소리친 덕분일까. 튜토리얼 이래 처음으로 화려한 효과음과 함께 연기 스킬이 발동되었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책상 모퉁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춥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제법' 낮아집니다.」 지금까지 의심할 확률이 '경미하게' 낮아진 것에 비교하면 아무래도 한 단계 높이 스킬이 성공한 것 같았다. 하필 이럴 때 크리티컬이 터지다니! 발푸르기스의 밤처럼 정말로 필요할 때는 안 터지고! 아니, 쓸데없이 후회할 틈이 없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 아닌가. 눈앞에 산사태처럼 몰아닥친 재앙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내가 입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횡설수설했다. “병법이란 삼십육 가지의 계책과 백여덟 가지의 모략이 합쳐지는 것입니다……그중에는 이율배반과 패러독스, 엔들레스가 포함되죠……처음 들어보신 용어인 건 제가 비밀리에 이름 붙인 계략이기 때문입니다…….” “호오.”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아군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하지요……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되, 그 행동이 쌓이고 중첩되어 이윽고 마지막에 가서는 한 덩어리의 계책으로 승화하는 것……상대방은 잔뜩 방심했다가 최후에서야 그때까지 일어난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렇군.” 라우라가 감탄했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그대의 문장에는 사실 심오한 계책이 배후에 숨어 있었다. 그것들이 조합되어 마지막에 가서는 열 개의 손가락이 된 것이고.” “마, 맞습니다. 그걸 알아채다니 라우라도 대단하네요…….”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초저녁에 웃음 짓는 이율배반과 패러독스가 어떠한 경위를 거쳐서 간지럽히기로 이어지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내 이성이 닿지 않는 곳에 그대의 심오한 뜻이 자리한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 앞으로 더욱 더 정진하겠다.” “하하, 노력은 언제나 좋은 것이지요. 하하, 하…….” 헛웃음을 짓는데 불쑥 효과음이 들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2 오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50에 도달했습니다.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호감도는 더 이상 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되었다. 어떻게 어떻게든 된 것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어떻게든 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려는 순간,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허나 본시 배움이 부족하여 홀로 의미를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부끄럽지만 사실이지. 그래서 말이다만 나중에 라피스가 오면 그대의 뜻이 무엇인지 의견을 구해봐도 되겠는가?”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내 절규가 던전 동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00046 Quest Breaker =========================================================================                           * * * 라우라의 노예각인. 니블헤임을 방문한 데에는 그것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 이후, 마왕 바르바토스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온갖 장소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자기 던전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나를 시종으로 부려먹었다. 하루를 꼬박 말이다! 그녀는 레즈비언 전용 창관에 날 데려가기도 했는데 우선 그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다음으로 나를 노리개로 삼아 즐기려 했다는 것에 경악했고,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가 양성애자라는 점에 기절했다. 필사적으로 반항하지 않았으면 나는 레즈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으리라. 하루 내내 재미나게 놀아준 대가라고 해야할까. 바르바토스는 고위 마법사를 소개해주었다. 그녀가 중개해준 덕택에 나는 물건을 쉽게 구했다. “자아.” 황금 마석의 파편을 돌멩이로 잘게 빻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금빛 가루에다 물을 조금 섞어내자 도자기 유약같이 끈적끈적거리는 액체가 완성됐다. 노예각인을 해주하는 데 사용하는 마석 액체였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겠다. 여기면 되는가?” 라우라가 얌전히 동굴 바닥에 앉았다. 하얀 드레스가 곱게 바닥에 퍼졌다. 저것 역시 니블헤임에서 선물로 사온 물건으로써 딱히 빨래를 하지 않아도 청결한 상태가 유지되는 옷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우라가 던전을 수비했으니 당연히 보답해야 마땅했다.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에 기하학적으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두루마리를 힐끔거리면서 땅바닥에다 그림을 배껴 그렸는데, 처음에는 분필을 썼다. 혹시라도 그림을 잘못 그리면 다시 니블헤임까지 가서 마석부터 구해와야 할 판국이었다. 참고로 이 마석, 특수한 마법으로 처리된지라 겁나게 비쌌다. 먼저 분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다 금빛 액체를 붓칠했다. 천천히 라우라를 중심으로 해서 둥그런 마법진이 그려졌다. “음.” 한참이 지나고 내가 기지개를 주욱 폈다. 전부 완성했다. 작품에 대해 솔직한 감상을 토로하자면, 미적 센스가 넘쳐났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태어났더라면 일약 스타덤에 오를 게 확실한 회화적 재능이었다. 재료가 갖추어졌다. 노예로 종속된 라우라. 노예각인을 해주하는 마법진. 그리고 노예각인이 새겨진――인간의 팔뚝. “…….” 침대 밑에서 상자를 꺼냈다. 철재로 된 곽을 열어재끼자, 라피스가 보존마법을 걸어둔 잭의 팔뚝이 나타났다. 마치 조금 전에 자른 듯 근육이 도드라졌고 살색이 짙었다. 약간 슬펐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슬픔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기가 살았다는 증거를 이런 식으로밖에 남기지 못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연유하는 감정이었다. 그 인간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당사자가 느끼기에는 적이 사치스러운 감정임에는 확실했다. “고대의 것은 고대의 것에. 먼지의 것은 먼지의 것에. 원인이 아닌 것은 원인이 아닌 것에. 감옥에 갇힌 정령에게 명하노니, 이제 그대가 왔던 장소로 되돌아가라.” 노예각인이 새겨진 팔뚝을 마법진 정면에 내려놓은 다음, 마법사가 알려준 대로 주문을 외웠다. 소절을 덧붙일수록 마법진에서 환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미리 준비한 단검으로 잭의 팔뚝을 찍었다. “읏, 우으으읏……!” 라우라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녀의 등에도 노예각인이 그려져 있다. 잭의 팔뚝에서 각인과 함께 그녀의 것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법사 말에 따르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과정이었으므로 계속해서 주문을 읊었다. “아윽, 흐으읏……으으읏……!” 라우라의 하얀 이마와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가끔씩 고통을 견딜 수 없었는지 스프링처럼 허리가 튀어올랐다. 그때마다 아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겨우 주문이 끝났을 무렵, 그녀는 기력이 다 빠져서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잭의 팔뚝에서 문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라우라한테 다가갔다. 라우라가 미약한 숨결을 연신 내뱉었다. 오 분 정도가 흘러서야 그녀가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했다. “……문제없다.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이 정도야.” “미안합니다. 최대한 편한 방법을 찾았지만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알고 있다.” 라우라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나도 알고 있다. 각인이 새겨질 때는 이것보다 다섯 배는 아팠으니……단탈리안, 이제 그대가 나의 주인인 것인가?” “저는 당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주인입니다. 우리 둘은 각자가 주인된 자로서 정당하게 계약을 맺을 따름이지요.” “계약…….” 그녀가 멍하게 말을 따라했다. “예. 라우라, 다시 한번 제안하겠습니다. 당신의 지략을 저에게 바치십시오. 저는 당신을 충실한 가신으로 예우하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제가 당신을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니, 당신을 버리고 모욕한 세상에 함께 보복할 것을 저 단탈리안이 약속드립니다.” “우둔한 제안이다.” 라우라가 실낱처럼 가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대의 부하임을 받아들였다. 각인이 없을 따름이지 내 머리, 내 몸, 나의 영혼은 오로지 그대의 영광을 위해 쓰일지어니. 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영원토록 그대 단탈리안의 것이다.” 그 순간, 여태까지 들어본 어느 효과음보다 화려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부하로 영입했습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상태창에 충성도가 추가로 생성됩니다.」 「지고지순한 충성! 상대방은 처음부터 당신을 완전한 군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충성심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환희가 가슴에 벅차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던전 어택> 최강의 캐릭터 중 한 명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이제 라우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좋았다. 칭호마저 새로 생길 정도의 충성심이라니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상태창!’ 당장 라우라의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호감도가 50 초과여서 이전보다 한결 상세하게 정보가 표시되었다. <던전 어택>의 호감도 시스템은 까다로워서 모종의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호감도가 일정 한계선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의 정보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라우라는 이제 나의 부하가 됨으로써 50이라는 최초의 한계선이 깨진 것이었다. ━━━━━━━━━━━━━━━━━━━━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5) 레벨: 10    명성: 492 직업: 책사(D), 학자(D), 성노예(E) 통솔: 41  무력: 10  지력: 44 정치: 9   매력: 54  기술: 1 호감도: 51 충성도: 95 *칭호: 1.공작 영애(廢) 2.천재 3.충신 *능력: 승마술B, 수사학C, 음악C, 전술C, 기하학D, 작전술E *스킬: - 현재심리: ‘그대가 보고자 하는 곳을 나 역시 볼 것이요, 그대가 걸어갈 길을 나 역시 뒤따라 걸을 것이다. 그대의 시선을 산맥이 막는다면 산맥을 부수겠다. 그대의 발길을 대양이 막는다면 대양을 메우겠다.’ ━━━━━━━━━━━━━━━━━━━━ 훌륭했다. 흠 잡을 구석 없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레벨이 고작 10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세 개의 능력치가 40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칭호의 효과를 받았으리라. 예컨대 천재라는 칭호는 캐릭터를 키우는 초중반에 아주 좋게 작용하는, 대표적인 사기 칭호였다. <던전 어택>에서 저 칭호를 붙이고 시작하는 캐릭터는 아군과 적군을 통틀어 많아봤자 열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칭호가 꼭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마왕인 내가 아직도 칭호 하나 얻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칭호라 써진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따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칭호] 1. 공작 영애(廢). 멸문한 대귀족의 영애. 사교계에서 추방되었다. 성노예 직업을 얻음으로써 현재 디메리트 효과 적용 중: 정치-20, 매력-10, 명성-500 2. 천재. 유례없이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 능력치와 숙련도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레벨업 시 능력치 +4, 숙련도 성장 속도 x2, 직업 레벨 성장 속도 x2 3. 충신. 지고지순한 충성심의 보유자. 군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통솔+5, 지력+5, 매력+5 ━━━━━━━━━━━━━━━━━━━━ 아니나 다를까 초반에 한정해서 최고급의 칭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작 영애(폐)가 옥의 티였으나, 당장은 쓸모없는 정치력과 매력 그리고 명성에만 효과를 미치니 상관없었다. 내가 라우라에게 기대하는 바는 정해져 있었다. 통솔과 지력! 책사에게 필요한 두 가지 능력만 출중하면 다른 요소는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내가 언제 라우라를 영입하면서 초패왕 항우와 같은 무력을 기대했는가, 팜므파탈처럼 적군을 싸그리 매혹하는 매력을 기대했는가. 내게 부족한 책략과 모략의 부분을 채워주길 바라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우라는 훌륭하게 기대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내가 한창 감동에 감싸여 있을 때였다.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던전 어택>에서도 본 적 없는 알림말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 이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곧바로 음울한 효과음과 함께 서너 개의 홀로그램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나는 정신없이 현란하게 반짝거리는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좀체 알아먹을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A급 시나리오 <철혈의 여재상>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S급 시나리오 <인간계의 분열>이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B급 시나리오 <적의 적은 아군>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A급 시나리오? S급 시나리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철혈의 여재상이란 물론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파괴되다니? 여태까지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알림말은 기본적으로 <던전 어택>과 똑같았다. 게임에선 모니터에 뜨던 것이 여기선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떠오른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런 알림말은 오직 <던전 어택>으로 향하는 외길을 고집해서 걸어온 나같은 폐인조차 처음 봤다. 제일 황당한 사건은 직후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음울한 효과음과 정반대로 활기차고 당당한 빵빠레가 울려퍼진 것이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뭐라고? 턱뼈가 빠질 정도로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똑같은 소리가 무수하게 중복되어 울릴 때 그러하듯, 효과음이 빠바바방 하고 내 귓가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직업 레벨(마왕)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  ·  · 「레벨이 올라갑니다!」 “…….” 나는 완전히 얼이 빠져서 홀로그램의 행진곡을 듣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효과음이 멎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비벼봤지만, 연한 푸른색의 홀로그램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홀로그램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일곱, 여덟……열넷, 열다섯……. 열여섯. 한꺼번에 기본 레벨이 열여섯 개 올랐다. 지난 몇 달 동안 개고생해도 고작 서너 개밖에 오르지 않은 레벨이――생전 처음 보는 문구와 함께, 단 한순간에 열여섯 개가 올랐다. 이것 또한 끝이 아니었다. 이미 그로기에 빠져버린 나에게 마치 어퍼컷이라도 먹이겠다는 듯 효과음이 웅장하게 터졌다. 과장 좀 보태서 두개골까지 흔들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축하드립니다! B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습니다. 이 놀라운 업적으로 인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칭호 <유능한 마왕>이 생성됩니다!」 「축하드립니다! A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업적으로 인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칭호 <공포의 마왕>이 생성됩니다! 기존의 칭호가 새로운 칭호로 대체됩니다.」 ……. “단탈리안. 왜 그런가? 아까부터 멍하게 있고.” 아득히 머나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그 목소리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신하가 군주에게 하대하는 것도, 군주가 신하에게 존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대에게 경어를 쓰겠다. 그대도 부디 나를 거리낌없이 대해주었으면 한다.” 끼이익. 내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잡하게 떠오른 홀로그램의 장벽 너머로, 금발의 소녀가 살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가 부끄러운지 볼에 홍조까지 띄우고 있었다. 그제야 내 입밖으로 간신히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헐.” 그것을 한마디 말로 취급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 도대체……무슨 짓거리를 저지른 겁니까, 라우라?       00047 E급 모험대 =========================================================================                          일단 생각에 잠길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라우라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다. 굳이 존댓말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대충대충 대화했다. 라우라가 존댓말을 쓰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사실 나이로 위아래를 따질 시엔 라피스가 내게 반말을 써야 옳은데……. 한번 상상해봤다. ‘단탈리안? 또 왜 이랬어? 생각이 있는 거야? 정말 한심하다. 그러고도 마왕이라고 말할 수 있어? 아예 나를 실망시키려고 작정하지 그래?’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웠다. 라우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군신 사이에는 확고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경어를 쓰십시오. 하지만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편히 말을 나누는 겁니다.” “그렇다면 좋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군주가 사적으로 고민하는 바를 풀어주는 것 역시 신하된 도리. 부족한 몸이다만 단탈리안, 공사 양쪽에서 주군을 전력으로 섬기겠다.” “의욕이 넘쳐서 좋네요…….” 그때 던전에 모험대가 침입했다는 알리미가 떴다. 라우라도 그걸 알아챘는데, 그녀는 던전에 누군가가 쳐들어오면 자동으로 비상음을 내는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내 품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흠, 다녀오겠다.” “각인을 해주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수고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주군이 걱정해준 덕택에 벌써 쾌유했다. 왕은 함부로 거동하지 않는 법, 소녀가 냉큼 적의 목을 따올 테니 기다려주게. 가신이 된 이후로 맞이하는 첫 번째 전투를 내 멋지게 장식하겠다.” 라우라가 정말 건강해졌는지 당찬 걸음으로 마왕방을 나섰다. 어딘지 신나보이기도 했다. 여하간 감사한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절실했으니까. 현재 상황부터 확인하자.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이 있는 곳에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하지만 홀로 남았는데 혼잣말을 가릴 것도 없었다. “사, 상태창.” 현 상황의 심각함과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게 띠링! 하고 소리가 울렸다. 이 세계에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을 하나 뽑으라면 설정창이 있어 저 빌어먹을 효과음을 당장 바꾸는 것이었다.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20    악명: 112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E) 통솔: 25/30  무력: 7/10   지력: 29/30 정치: 24/30  매력: 15/20  기술: 4/10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F),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2개] [부하: 42개체/210개체] ━━━━━━━━━━━━━━━━━━━━ 예전과 비교해서 능력치 자릿수가 달라졌다. 직업레벨(마왕)이 상승함으로써 능력치 한계선이 대폭 올라갔다. 직업레벨은 한 단계 올라갈수록 플레이어의 성장 한계치를 높여주었다. 그렇다 쳐도 지나치게 한계치가 높아진 감이 있었다. 직업레벨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가 영향을 끼쳤다는 뜻. 얼른 칭호란을 열어보았다. ━━━━━━━━━━━━━━━━━━━━ [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 “역시나!”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상당히 좋은 칭호였다. 캐릭터가 노가다를 뛰든지 퀘스트를 깨든지 해서 기본레벨을 아무리 높여봤자 한계치 이상으로는 능력치를 올릴 수 없다. 가령 무력 능력치의 한계치가 30이라면, 기본레벨이 99여도 절대 30 이상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직업레벨을 적절히 올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직업레벨은 F, E, D, C, B, A, S, SS, SSS, 총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직업레벨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특정 능력들의 한계치를 5씩 올려준다. 기본레벨이 실질적인 능력치를 높이고, 직업레벨이 능력의 한계치를 높인다. 무조건 노가다를 뛴다고 좋은 게 아니다. 한계치가 꽉 찬 상태에서 기본레벨을 올려봤자 아무 능력도 오르지 않고, 다만 잠재적인 능력치로 저장되기만 한다. 플레이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업그레이드 해주듯 양쪽의 레벨을 끊임없이 신경써가며 캐릭터를 육성해야 한다. 이같은 점에서, 통상 직업레벨로밖에 올릴 수 없는 한계치를 대폭 상승시켜주는 <공포의 마왕> 칭호는 너무나도 좋았다. 원래대로라면 직업레벨을 올리려고 별에 별 생쑈를 다해야 한다. 예컨대 직업레벨(검사)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유파의 무술인과 대결해야 하고……으으, 예전의 캐릭터를 키우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자니 치가 떨린다. 간단히 계산해서 <공포의 마왕>은 직업레벨을 2개나 공짜로 올려준 거다. “이거, 원.” 허탈했다. 놀라웠으나 기쁘지 않았다. 기본레벨과 직업레벨이 높아진 것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대체 왜 올랐는지 모르겠다. 원인도 모르는 행운을 마음놓고 기뻐할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일억 원을 준다고 제안한다. 왜 일억 원을 주냐고 물어도 타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그 타인을 전혀 모르고, 어떤 목적으로 일억 원이나 되는 돈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순수하게 기뻐하며 일억 원을 덥썩 물겠는가. 문제는 내가 이미 일억 원을 받아버렸다는 것. 이제 어떻게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차례였다. ─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 A급 시나리오 <철혈의 여재상>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 B급 시나리오 <적의 적은 아군>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 S급 시나리오 <인간계의 분열>이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데…….” 가만히 네 개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고민은 의외로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자 네 개의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곧바로 깨달았다. 까다로운 추리를 거칠 이유도 없었다. “이거 게임 시나리오네.” 라우라를 부하로 만들자마자 알림말들이 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장들은 전부 라우라와 연결지어서 해석해야 했다. 철혈의 여재상은 라우라를 뜻한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것 또한 라우라와 관련된 시나리오일 텐데, 아마도 라우라가 일부 마왕과 합심해서 용사측 세력을 공격한 이벤트를 가리키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인간계의 분열>은 말 그대로 인간계가 용사가 속한 제국 그리고 라우라가 이끄는 왕국을 중심으로 해서 뿔뿔이 갈라지는 걸 뜻하리라. A급, B급, S급은 아마 어느 사건이 더 메인 시나리오에 가까운가에 따라 정해지지 않았을까? 즉 라우라를 부하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원래 게임상 일어날 예정이었던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하는 얘기였다. “왜 이렇게 당연한 일이 나한테 도움을 준 거냐.” 의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이 역시 답안을 제출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알리미가 떠올랐다는 것은, 바꿔 말해 게임에서의 '나'와 이 세계에서의 '나' 사이에 놓여져 있는 차이점이 새로운 알림말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였다. 용사는 볼 수 없고 마왕만이 볼 수 있는 알림말을. 용사는 무엇인가? 용사란 퀘스트를 진행해나가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마왕은 무엇인가? 다름아니라 퀘스트를 방해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용사의 사명이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마왕의 사명은 퀘스트를 해결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고로 용사가 퀘스트를 통해 경험치를 얻는 반면에――. “마왕은, 퀘스트를 깨부숨으로써 경험치를 얻는 거로군.” 사태가 명확해졌다. 왜 게임과 달리 이 세계에는 퀘스트 같은 게 발생하지 않은지 이해했다. 예전에는 그저 게임과 현실이 다르니까 그런 것 아니겠냐고 납득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왕에게는 애시당초 퀘스트가 뜨지 않았다. 오히려 시나리오와 관련된 퀘스트를 찾아내서 파괴하는 것이 마왕의 '보이지 않는 퀘스트'였다! 퀘스트를 깨는 것이 마왕 본연의 임무. 역설적으로, 퀘스트를 '깨다'라는 표현에는 해결한다는 의미도 정말로 깨부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그럼 안드로말리우스 때는 왜 아무것도 안 뜬 거야?”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자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안드로말리우스였다. 만일 퀘스트를 깨부숨으로써 내가 경험치를 얻는다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사건이야말로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설마 안드로말리우스는 용사가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데 생각보다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젠장. 뭐가 뭔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항복! 더 이상 모르겠다.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했다. 언젠가 메인 시나리오와 관련된 인물을 또 하나 찾아내서 족치든가 부하로 만드든가 해봐야지 나머지 의문점이 해결될 듯했다. 그렇게 머리를 박박 긁고 있을 때였다. 라우라가 마왕방으로 돌아왔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생겼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모험대가 전멸했다는 알림창도 아직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금 마왕성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 “대기한다고요? 쳐들어오지 않고?” “그렇다. 침입자가 아니다, 단탈리안.” 침입자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내가 궁금한 얼굴로 라우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결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신단이다. 그들 말에 따르면 인근 마을들을 대표해서 찾아왔다 하네. 주군에게 중대히 드릴 말이 있다는군.” * * * 사신단은 주요 인원이 노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제외하고는 전원 촌장 혹은 촌장에 버금가는 이들인 듯했다. 내가 골렘 서른 마리와 요정 열 마리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노인들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말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지 지팡이에 기대어 몸을 아래로 낮추기만 했는데, 그것이 나이든 이가 내보일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예의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예를 거두어라.” “황공하나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선두에 선 노인이 느릿느릿하게 상체를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니블헤임에 가기 전 복속시킨 마을들의 촌장 중 한 명이었다. 화전촌이 아니라 제법 번듯한 마을의 촌장인 걸로 기억했다. “용건만 간단히 듣겠다. 짐의 거처에는 무슨 일로 방문했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노인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보는 내쪽이 무릎이 깨질까 놀랄 정도로 급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아이구, 노인장. 그러다 황천행 열차가 정시에 도착하지 않고 일찍 와버리겠습니다! 허나 의도조차 모르는 상대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되었기에 나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용건을 듣겠다 했노라.”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나이다! 소인은 라우크 산아래 마을의 촌장이옵고, 여기 있는 노인들 역시 저와 같은 촌장이옵니다. 위대한 존재께서 요구하신 대로 저희 마을들에선 모험자들을 철저히 박멸했나이다. 하지만 그중 한 모험대를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야 마을사람들로는 감당치 못하는 모험대도 있으리라. 아마 E급 모험대쯤 되는 모양이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구나 실수는 저지를 수 있다. 지금 너희가 내게 보이는 사죄는 실수의 무게에 비해 무겁구나.” “그, 그 모험대가 몇몇 마을을 규합해서 일종의 연합군을 만들었사옵니다.” “뭐라고?” 내가 인상을 썼다. 노인이 안 그래도 낮춘 몸을 이제는 아예 땅바닥에 갖다댔다. “송구하나이다……대부분의 마을은 위대한 존재께서 명하신 바에 복종했습니다만, 몇몇 마을은 처음부터 역심을 품고 있었사옵니다. 그들이 모험대의 꾀임에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 무엇이냐.” “위, 위대한 존재의 재산을……노린다고…….” “하.” 어이가 없었다. 상황은 대충 짐작됐다. 아마 모험대가 마을사람들에게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을 게다. 던전에는 산더미 같은 금화가 있다던지, 뻔한 레퍼토리를 사용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마을놈들은 거기에 넘어갔겠고. 그래봤자 마을사람들과 E급 모험대. 약간 불쾌했지만 그 사실을 알리러 온 노인장들을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도의 무리를 이끄는 자는 잘센마을의 리프라고 하옵니다.”              00048 E급 모험대 =========================================================================                                    “…….” 리프라.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어버렸다. 새삼 회한에 젖었다. 잘센마을의 리프, 그 남자를 어떻게 잊을까. 가장 처음으로 격파한 모험대의 대장이자, 가장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이다. “……정확히 몇 개의 마을이 모험대에 넘어갔는지 말하라.” “다섯 마을입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모두 자경단을 보유하고 있나이다.” “그놈들이 우리를 제멋대로 협박하고 있수다!” 별안간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터질 듯한 근육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구리빛 상반신을 드러내고 내쪽으로 고개를 슬쩍 숙였다. 눈동자에 투기가 넘치고 있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하외다! 하지만 거 늙은이한테만 맡겨둬서야 해가 져도 말이 안 끝날 거요. 소인이 다 설명해드리겠소.” “여기 노인장은 한 마을의 지도자이다. 너에게 그를 대신할 자격이 있느냐?” “어린놈이라지만 나도 한 마을을 이끌고 있소.” 사신단 중 아무도 반발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이었다. 내가 노인장을 쳐다보니 그가 한숨을 쉬며 스스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신에 청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마왕 나으리! 나같이 어린 자식이 우두머리가 된 게 바로 모험자 새끼들 때문이오. 그놈들이 자경단과 함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자기네한테 합류하라지 않소? 촌장인 우리 아버지야 단박에 거절했지만.” 청년이 이를 빠득 갈았다. “놈들도 단박에 아버지의 목을 날려버리더라 이 말씀이요. 나으리, 무슨 말인지 알겠소? 거절하자니 우리 모가지가 몸덩어리랑 작별할 참이고, 승락하자니 변변한 자경단원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나으리와 싸우는 거에 목숨을 걸어야 하오. 어느 쪽이든 재수탱이라곤 없는 것이외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노인장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 미천한 아이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배운 게 없는지라 말이 험하나, 본시 천성이 악하게 타고나진 않았나이다.” “거 노인네 뭐 그렇소? 지금 말투 따위가 중요할 때요?” “떼끼! 이 천하의 벌거숭이 같은 자식아!” 노인장이 어디서 그런 목청을 뒀는지 버럭 소리질렀다. “언제 어디서나 윗분께 예의와 절차를 지켜야 하는 것이야!” “흥. 난 예의도 모르고 절차란 건 배운 적도 없소.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알겠소.” 청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마왕 나으리한테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이요. 그럼 지금 상황이 어떤지 얼른얼른 알리는 게 마왕 나으리한테도 좋지 않겠소?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 아니오? 누가 노인네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것만 찾는구랴.” “허, 이 놈이 그래도!” 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청년과 노인은 낡아빠진 주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흥미 깊은 토론이었고 청년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시기와 장소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쿠우웅. 서른 마리나 되는 골렘이 한꺼번에 발을 굴렸다. 갑작스레 땅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비틀거렸다. 넘어진 이도 있었다. 그들이 황망하게 날 바라보았다. “누구 앞에서 감히 허락치도 않은 논쟁을 벌이는가.” “송구하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위대한 존재이시여!” 스무 명에 가까운 사신단이 일제히 땅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어느 때건 적법한 예의가 있음은 물론이다. 시기가 다급하여 상황을 빠르게 전달해야 함도 옳다. 짐이 보아하니 젊은 촌장이여, 너는 달리 예를 배운 적이 없으니 나에게 예를 갖추고 싶다한들 어쩔 도리가 없음이라. 오늘만큼은 예를 생략하는 것을 허하노라.” “역시, 말이 통하는구랴!” 청년이 엎드린 자세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이구, 인간이라기보다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허나 옳은 말로 너에게 조언한 노인장을 핍박함은 그릇되었다. 짐에게 상황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노인장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어억?” 청년이 정말로 싫은 듯 인상을 구겼다. “그, 나으리? 소인도 명색에 같은 촌장이온데.” “짐이 친히 하나의 예를 너에게 가르쳐주마. 짐의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마라. 앞으로 만일 짐의 말을 쓸데없이 되풀이하게 만든다면 응당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나로서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노인장이 설명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노인장이 뭔가 스스로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청년의 의견이 옳았다. 지금은 그런 대화법이 어울릴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청년을 두둔해줄 경우, 마을 촌장들 간의 서열이 어그러진다. 아마 노인장이 사신단 대표로 선출된 까닭은 그가 나이가 제일 많기 때문이리라. 즉 나이란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이고 전통적으로 정해진 기준이었다. 그런 기준이 무너진다면 촌장들은 누구를 대표자로 내세워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절충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할 게 뻔했다. 그같이 혼란을 초래한 나에게 반감을 품겠지. 그들이 권위로 인정하는 바를 나 역시 권위로 인정한다. 청년에게 사죄를 명령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다만 노인장보다 청년이 설명을 훨씬 더 잘할 것 같으니까, 설명은 청년한테 듣고 말이다. 명분과 실리 둘 다 얻는다고 표현할까. “그……죄송하오, 노인네.” “쯧.” 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예의 진동이 다시금 땅에 울렸다. 그러자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아예 넙죽 엎드려서 노인을 향해 큰절했다. “건방지게 말해서 죄송하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외다.” 노인장이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몸소 체면을 챙겨줘서 황공하다는 낯빛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한 짓이 아니지만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가 없었다. 뒤쪽에서 사신단의 나머지 촌장들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내 행동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네가 자신 있다는 설명을 해보아라, 젊은 촌장.” “으. 소인이 말했다시피 리프인가 뭔가 하는 잡놈이 모험대와 자경단을 이끌고 있소외다. 다 합쳐서 적어도 일흔 명은 넘소. 나으리, 아시련지 모르겠소만 잘 단련된 전사 일흔 명이면 병사들도 토벌하기 어렵수다.” “일흔 명이 몰려다니면서 식량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눈을 치켜세웠다. 칠십 명이나 되는 전투 집단이 위협하는 가운데, 이들 마을이 살아남았다. 나에게 대항하는 것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생명을 부지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제공한 거다. “어떻게 된 것이냐.” “먹을거리를 바쳤소. 목숨과 밀을 양자택일하라는데 어쩌겠수까. 그거 사죄할 겸해서 온 것이오외다.” 사신단 일행이 또 다시 엎드렸다. 용서하라느니 사죄하라느니 떠들었다.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자기네 마을을 살리겠다고 식량을 바친 것에 대하여 뭐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들이 내 신하인가 뭔가. 이들의 마을이 내 영지인가 뭔가. 이렇게 사과하고 정보를 알려주러 온 걸로 그들은 의리를 다했다. 대충 겉모습으로 겁을 주고 돌려보내면 그만이겠지. 촌장들도 그걸 알고 온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의리를 다했다. 그러니 설령 모험대와 당신의 전투에서 당신이 승리하더라도, 우리를 따로 벌하지 말아달라. 대신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식량은 상대쪽에 바칠 수밖에 없다. 사신단은 자신의 마을을 위해 최선의 수, 즉 모험대가 이기든 내가 이기든 어찌되었든 생존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냈다. 만일 여기서 내가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겁박한다면? 보나마나 태도가 돌변하여 우리도 모험대에 합류하겠다고 협박해올 거다. 간단한 비즈니스였다. “…….” 내 눈길을 끈 것은 그처럼 당연하고 시시한 거래를 암묵적으로 제시해오는 사신단 일행이 아니라 청년이었다. 오직 청년만이 허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양발로 서 있었다. 내가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청년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소. 난 현재 상황이 진짜 마음에 안 드오.” “네, 네놈이 정녕!” 노인장이 경악했다. “아, 노인장. 조금만 가만히 있을 수 없소? 난 이런 수작이 영 싫단 말이외다.” “수작이라니 그 무슨…….” “아 그만. 일단 내 말부터 합세다. 보소. 아재들, 보소! 그놈들한테는 일 년 내내 고생해서 일군 밀알을 바치고, 마왕 나으리에겐 정보를 꼰지르고. 그렇게 해서 댁들이야 잘 살았다 똑똑하게 처신했다 그렇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거든!” 청년이 사신단을 주욱 둘러보았다. “모험대 놈들이 이긴다손 쳐보자고. 그럼 끝이요? 거 다섯 마을이 연합해서 만들어낸 자경단은 그대로 순순히 헤어져서 다시 남남이 될 것 같소? 놈들은 이미 한번 우리를 호구로 만들었소. 염병할, 지들이 직접 수확하지도 않은 밀알을 챙겼다고! 칠십 명이 모이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놈들은 벌써 맛본 거요. 과연 놈들이 해산하겠소, 아니면 계속 작당질해서 우릴 벳겨 먹으려 들겠소?” 내가 다소 놀랐다. 아까도 그랬고, 청년은 거친 말투로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연기> 스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아재들. 아니라고 말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딴 짓거리에 언 놈보다 이골나지 않았소외까? 거 죽여도 시원찮을 영주 새끼들이 만날 하던 짓이 그거요. 우리는 지금 영주 새끼를 한 마리 더 키우고 있는 거나 진배없소.” “…….” “그놈들은 마을 간에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겼소! 규칙을 어긴 자에겐 징벌이 필요하오. 알겠소? 호구가 안 되려면 놈들을 족쳐야 하오. 그렇다면 우리끼리 힘을 합치는 게 좋겠소까, 아니면 여기 마왕 나으리와 힘을 합치는 게 좋겠소까?” 촌장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혹스러워 하는 얼굴이었으나 머릿속에서 한창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거 살아온 세월은 뒀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소. 만약 마왕 나으리가 이겨도 사정은 나빠지지 않겠소? 여차하면 이쪽에 붙고 저쪽에 붙는 박쥐 새끼란 게 밝혀졌는데, 마왕 나으리가 우리를 신뢰하겠소? 언젠가 큰코 다칠 거라고 내 불알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외다.” “크하하하하!” 내가 크게 웃었다. 청년과 사신단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젊은 촌장. 짐에게 이름을 밝히라.” “파, 파르시라고 하오.” 청년이 어딘지 겁 먹은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씨익 웃었다. “파르시. 예의법도를 모르는 애송이인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작은 범이었도다. 그렇다. 네 말 그대로이다. 짐은 그대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허나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 젊은 촌장이여.” “무, 무엇이오?” “짐이 그대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은 모험대를 토벌한 다음이 아니다. 토벌하기 전이지. 적군의 보급을 끊는 것은 병법의 기본 중 기본. 그대들이 병참을 맡는다는 게 알려진 터에 짐이 그대들부터 노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짐은 그대들의 마을을 먼저 궤멸함으로써 적군의 식량을 메마르게 할 것이다!” 노인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또 다시 사죄의 행진이 이어졌다. 그러건 말건 그들의 머리 위로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되었다. 그대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짐에게 조력할지, 아니면 모험대와 함께 역도의 무리가 될지. 지금 선택하라!”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설령 저희가 당신께 보, 복종할지라도……당장 역도의 무리로부터 마을을 지킬……방도가 없나이다!” 노인이 오들오들 떨었다. “통촉……통촉하여주시옵소서……!” “걱정하지 마라. 짐이라고 그대들을 단순히 화살받이로 쓰겠는가.” 죽음의 위협을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살 길을 터주어야 했다. “하, 하옵시면?” “짐에게 조력할 것을 맹세하라. 짐이 친히 그대들에게 광명을 보여줄지어다.”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00049 E급 모험대 =========================================================================                                  * * * 사신단을 돌려보내고. 마왕방으로 걸어갔다. 요정 서너 마리의 웃음소리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동굴에 자그맣게 울렸다. 마왕방까지 가는 데에 대략 한 시간이 걸리는데 오고가면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험대에 어떻게 대항할지 깊이 생각에 빠져서 그렇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의 느릿느릿한 시간관념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어느새 나는 마왕방에 들어섰다. “…….” 구석의 바윗돌. 라우라가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다. 바위에 붉은 담요를 깔고 앉았다. 집게손가락이 한장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빨간 담요 한장과 책소리, 단 두 개만으로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그녀가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간이 길게 기지개 폈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거기 있을 줄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다는 듯, 마치 지금까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지금 자연스럽게 다음 화제를 꺼냈다는 듯,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인간들이 뭐라 말하던가?” 인간들이라니. 꼭 자기는 인간이 아니라는 어투 아닌가. 라우라는 그녀 나름대로 자기 종족과 일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수수께끼라도 내는 심정으로 말했다. “자아. 우리 마왕군은 칠십 명의 적군에 어떻게 대항해야 좋을까요?” “간단한 전투이다.” 라우라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주군에게는 몬스터를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능력이 좋은 몬스터일수록 소환에 고가의 재료가 필요하다지만, 우리 마왕군에 아직 재정적인 여유가 충분할 터. 적군을 압도할 만큼 많은 병력을 소환해내면 그만이다. 인해전술에는 똑같이 인해전술로――이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라우라는 우리측도 병력을 충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실로 가능한 전략이었다. 나에게 현재 약 일만사천 골드가 있는데, 최하급골렘을 서른 마리나 더 충원하고도 재산에 여분이 남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왕군은 무려 일흔 마리의 골렘 부대를 보유한다. 여기에 요정 부대까지 섞어주면 그야말로 웬만한 모험대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대부대가 된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답안은 그런 게 아니었다. “라우라. 하책입니다.” “…….” 라우라는 의문을 표시하거나 불만 어린 눈초리로 항의하거나 하지 않았다. 곧장 내 대답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왜 내가 그렇게 말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면모에서 그녀가 얼마나 이쪽을 신뢰하는지가 엿보였다. 내가 충분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라우라는 전적으로 믿는 것이었다. 라우라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병법에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헤아리라 말한다. 나는 오로지 사람만을 고려했다. 단순하게 칠십 명이라는 적군의 숫자를 판단 재료로 삼아, 그렇다면 우리도 칠십 명에 이르는 부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전투가 벌어질 지형도, 전투에 얽힌 도리도 고려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사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는 사람, 자기가 뭘 잘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 방금 라우라가 한 대답은 제가 기대하는 합격선에 미치지 못했네요.” 이제 라우라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옆머리를 빙빙 꼬았다. 본격적으로 고민에 들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실 그녀가 하책이나 다름없는 계책을 내놓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여태까지 그녀는 소규모 단위의 전투밖에 겪지 못했다. 서른 마리쯤의 몬스터를 이끌었고, 스무 명쯤의 모험대를 격파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고려해야 했던 사항은 기껏해야 어느 순간에 골렘 부대를 앞장 세우고 어느 순간에 요정 부대로 하여금 일제사격을 가하느냐 정도였다. 열여섯 살 소녀가 전투에 익숙해졌다는 사실도 대단하겠으나……. ‘지금 수준으론 어림도 없지.’ 나는 열여섯 살 소녀가 아니라 열여섯 살의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영입했다. 내 기대치에 걸맞게 그녀는 자기 재능을 입증해줘야 했다.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믿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더욱 내가 그녀를 믿는다. 세계에서 라우라를 제일 신뢰하는 인간이 나다. 그녀가 어떤 인재인지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제게 보여주십시오. “알겠다.” 라우라가 숨을 들이켰다. “먼저 소녀가 어떤 점에서 부족했는지 짚어내고,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모험대를 효과적으로 무찌를지 말하고 싶다.” “기대하겠습니다.” “우선 병법의 첫 번째 차원인 천(天)을 논하자면.” 라우라가 검지손가락을 펼쳐보였다. “하늘이란 세상만사를 비유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병법에서는 전투를 전쟁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전쟁을 국가의 차원에서 바라보라고 권고하는 의미로 쓰인다. 즉 우리 마왕군은 칠십 명의 모험대라는, 현재 맞닥트린 난관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마주치게 될 일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많은 숫자의 골렘 부대를 고용하면 필히 당장의 난관은 극복할 수 있다. 허나.”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올바른 결론을 추적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미소에 자신감이 더했는지 라우라가 한층 쾌활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훗날에도 지금처럼 허약한 모험대만이 공격해올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모험자들 중에는 골렘 정도는 수십 마리도 너끈히 감당해내는 자가 많다. 만일 마법사라도 고용해서 침입해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라우라가 옳게 지적했다. 우리 마왕성의 상태는 이러했다. ━━━━━━━━━━━━━━━━━━━━ [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부대: 42마리 *재산: 13900골드 ※던전에 어떠한 방어시설도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막 도둑이 된 인간이 당신의 던전을 산책길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돌파 당할 수 있습니다. 기술과 마법을 연구하여 던전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십시오! ━━━━━━━━━━━━━━━━━━━━ 최하급골렘은 두당 사백 골드. 서른 마리 더 고용하면 만이천 골드가 들어간다.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고레벨 모험대를 맞이하고, 그때 가면 최하급골렘은 모험자의 손풀이 연습용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고레벨 모험대를 대비해야 할 판국에 대부분의 자금을 최하급골렘한테 쏟아붓는다? 무척 어리석다. “우리 마왕군은 미래를 위해 군비를 비축해야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군을 물리침이 마땅하다. 고로――.” * * * “소개하겠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라피스가 말했다. 그녀 뒤편에 난쟁이 두 명이 서 있었다. “이들은 마계에서 실력 높은 지도장인입니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이나이다.” 손을 내밀어 그들과 악수했다. “환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난쟁이들은 쓸데없이 격식 차리기를 천성적으로 혐오했다. 그들은 근본상 예술가이자 장인이었고, 자기들이 진심으로 열의를 바치기에 적합한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마왕성 주변의 지도를 제작해달라.” “황송하옵니다. 전하께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달리 있으리라고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않았나이다.” 난쟁이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전하께서 필요하신 지도를 그릴 것입니다. 하온데 전하께서 확언해주셔야 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사옵니다.” “질문을 허하노라.”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지도에 포함시키기를 원하시는지요?” “우선 본인이 여러 장의 지도를 원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난쟁이와 마주봤다. “본인은 모두 다섯 장의 지도를 원한다. 첫 번째, 대륙 전도(全圖)가 필요하다. 두 번째, 튜튼 왕국 전도가 필요하다. 세 번째, 튜튼 왕국 중에서도 본인의 마왕성이 위치한 지방의 지도가 필요하다. 먼저 이 세 가지 지도를 구할 수 있겠는고?” “물론입니다.” 난쟁이가 약간 놀라워했다. “세 가지 모두 기존에 제작된 물건이 여럿 있사옵니다.” “본인은 최고급 수준만을 원한다.” “명심하겠나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무엇이옵니까?” “네 번째로 마왕성 인근의 마을과 성을 포함하여 지도를 그리라. 이 지도에는 땅의 높낮이, 넓은 길과 좁은 길, 지형의 특징, 마을의 규모가 모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난쟁이가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본격적인 지도가 되리라 사료되옵니다.” “다섯 번째로 마왕성 내부의 지도를 제작하라.” “여부가 있겠나이까.” 난쟁이가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땅의 높낮이까지 요구하시매 지도에 대한 전하의 안목이 하늘과 같음을 헤아렸습니다. 과분하오나 저희 역시 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문가, 요구하신 바에 따르겠나이다.” 장인 난쟁이는 앞선 세 가지 종류의 지도를 곧장 매각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마왕성 인근의 지도부터 먼저 제작해달라고 요구하자 비록 완성본은 아니어도 부분적인 지도를 빠른 시일 안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해왔다. * * * “――우리 마왕군은 마왕성에서 벗어나 적군을 요격해야 한다. 본디 수비하는 측이 공격하는 측보다 세 배 유리한 법이나, 그것은 제대로 된 성채가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나 그러하다. 마왕성에는 이름과 달리 성책은커녕 번듯한 목책도 없다. 더군다가 통로가 지나치게 넓어 소수로 방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라우라가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공격할 수 있는 적군이 훨씬 더 유리하다. 일단 마왕성에 들어오면 적군은 얼마든지 퇴각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그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적에게 그만한 자유를 허락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쪽에서 그들한테 불리한 전장을 강요해야 한다.” 라우라가 나를 직시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군은 별동대를 운영한다. 모험대가 머무르는 마을들을 향해 오히려 우리가 공격해 들어간다. 이를 위하여 인근 마을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지도가 필요하다. 지도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도움이 될 터이니 투자해서 마련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잠시만요. 모험대가 마을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녀가 단언했다. “왜입니까?” “모험대의 과반수 이상이 현지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모험대가 마을을 버린다는 것은 곧 마을 출신의 자경단원들을 모조리 배신함을 뜻한다. 전력이 단숨에 악화되는 것을 모험대는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칠십 명의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굳건하게 마을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몸집을 불리느라 마을 자경단원을 흡수한 것이 도리어 그들의 기동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지당한 의견이었다. “마을을 포기하자니 병력이 대폭 줄어버리고, 마을을 수비하자니 마왕성에 처들어오지 못하니, 결국 모험대는 목적을 상실하고 자기 것을 지키기에 바빠지겠군요!” “정확하게 말해 '자기' 것이 아니다. 마을 자경단의 것이다. 모험대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경단을 끌어들였다고 여겼겠으나――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자경단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모험대가 도와주는 격이 되어버리는 게다.” 상대방이 강점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약점으로 전환시켜라. 보병은 근접전에 강하다. 이에 궁병을 내세움으로써 보병의 강점을 '근접전밖에 하지 못한다'라는 약점으로 둔갑시킨다. 기사는 두꺼운 장갑을 갖추어 완벽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화살도 창날도 결코 기사의 갑옷을 뚫지 못한다. 이에 진창늪과 같은 전장을 선택함으로써 기사의 강점을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진창에서 이동하지 못한다'라는 약점으로 바꿔버린다. 병종, 군대, 국가. 어떤 것이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국토의 대부분이 험한 산지라는 것은 보통 약점일 수밖에 없다. 수확량이 적고 교통이 불편하니까. 그러나 병법에선 험악한 산지라는 약점을 수비에 사용함으로써 강점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병법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라우라가 말했다. “허나 모험대에게 수비를 강요하는 데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골렘 부대를 충원한다면 본말전도이다. 우리의 전략은 골렘을 더 이상 추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여기까지가 지(地)의 차원이었다.” 그녀가 겁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인(人)의 차원을 논할 차례이다.”    00050 E급 모험대 =========================================================================                        그녀가 꺼내든 카드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우리 마왕성 근방에 여러 채의 고블린 부락이 있다. 그 고블린 부락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고블린 부락을 원군으로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다소 놀라서 되물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대화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라우라는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한 지점을 찔렀다. 확실히 근처에 고블린 부락들이 있었다. 니블헤임으로 휴가를 가기 전, 나는 자리를 비운 사이 모험대가 침입하는 것을 걱정하여 인간 마을을 회유했다. 회유를 위한 떡밥으로 내건 것이 ‘더 이상 고블린들이 마을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우라. 길들여지지 않은 몬스터를 군대로 활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마왕인 저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휘하의 몬스터처럼 그들이 절 위해 목숨을 바칠지 의문이군요.” “자경단원이라고 해서 모험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닐 터.” “흐음.” 자경단원이 모험대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무언가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네 이익을 쫓고 있다. 꼭 그처럼 고블린에게 이익을 안겨준다면 고블린 역시 전투에 참여할 것이다.――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군은 고블린 부락들에 인간 사냥을 금지시켰다. 인간의 마을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허면 간단한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이제 적군으로 돌아선 인간 마을을 얼마든지 사냥해도 좋다고 말이다.” “사냥과 전쟁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냥을 허락한다고 해서 고블린들한테 전쟁에 나서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라우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제가 잘못되었다.” “전제라고요?” 내가 흥미롭게 되물었다. “무슨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어째서 몬스터들에게 전쟁을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주군. 이것은 소녀의 간언이다. 주군은 몬스터한테 지나치게 상냥하다. 방금도 주군은 부지불식간에 몬스터를 싸움으로 내몬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가.” 라우라가 내 어깨에 앉은 요정 한 마리를 척 가리켰다. “잘못 생각해선 안 된다. 몬스터는 주군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몬스터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흉폭한 맹수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에 뛰어들 전사이다.” 그녀의 일갈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불현듯 예전 노예경매소에서 라피스가 건넨 조언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아인종을 제 마음대로 부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분노했다. 그때 라피스가 말했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저잣거리 아낙네끼리 나누는 이해도, 법정의 재판관이 내리는 판정도,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왕은 이해하되 판정해야 합니다.” 그 말을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몬스터를 무조건 나의 편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던가? “장담해도 좋다. 적절한 이익을 제시한다면 고블린들은 설령 우리가 하지 말라 자제시켜도 알아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주군, 부디 냉정해지길 바란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전쟁이라는 이름의 장기판 위에서는 한 개의 말에 불과하다.” 나는 라우라의 말이 백번 옳음을 인정했다. 마음속 어느 한 구석엔가 몬스터를 무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을들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칠십 명의 모험대가 자멸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몬스터를 이용할 계획 따윈 고려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기보다 기뻤다. ‘군주가 간과해버린 부분을 보충하는 것 또한 책사의 역할.’ 어차피 내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해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애시당초 라우라를 영입하지도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보다 불안함이 더 많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 불안감을 지금 라우라가 채워주고 있었다. “주군.” 라우라의 초록색 눈동자가 똑바로 향해왔다.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블린 부락을 이용한다 가정해보지요. 어떤 이득이 그들을 움직이겠습니까?” “그 역시 간단하다.” 라우라가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남의 것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 * * 질서없이 울창하게 자라난 숲. 젊은 촌장인 파르시가 지팡이로 수풀을 훅훅 걷어내며 나아갔다. 나무의 잔가지나 날카로운 풀 끄트머리에 살갗이 스칠 때마다 파르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우, 엠병할. 이놈의 벌레 새끼들!” 그가 내쪽을 돌아보았다. 앞머리가 딱풀 묻은 것처럼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으리! 제발 뭣 좀 물어보겠소.” “질문을 허한다.” “왜 하필 나요?” 파르시가 뚫어놓은 길을 편하게 뒤따라가면서 내가 말했다. “그대가 제일 젊고 힘이 쎄니까. 노인장을 길잡이로 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 그럼 마을에서 아무 사냥꾼이나 골라 잡으면 될 것을…….” “그리고 본인은 그대가 제법 마음에 든다.” “엑.” 파르시가 질색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따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애꿎게 지팡이만 휘둘러댔다. 남한테는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 전부 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한테 솔직한 말 한 마디가 들어오면 부끄러워 하는 것이었다. “귀엽군.” “귀, 귀엽다고? 귀엽다고 했소, 방금?” 파르시가 대경실색했다. 아예 그 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산골청년답게 행동이 유치했다. 그게 또 나를 웃게 만들었다. 파르시처럼 과감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을 볼 보면 흐뭇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 그대 자신은 모르겠으나 꽤나 귀엽노라.” “시발! 내 어머니도 평생토록 나보고 귀엽다 한 적이 없수다! 눈이 삐었소? 나으리가 눈이 안 삐었다고 이제 와서 말해도 난 나으리가 눈이 삐었다고 굳게 믿겠소!” 헉, 하고 파르시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혹시……나으리, 그, 그쪽 취향이신 거요?” “그쪽 취향이라니?” “거 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그런 사람도 있다지 않소.” 으이구. 내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파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본인도 머쓱했는지 뒤통수를 긁었다. “허, 험. 아니라서 다행이구랴. 혹시나 싶었수다.” “설령 본인이 남색가일지라도 그대의 뒷구멍만큼은 노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 “뒷구멍? 뒷구멍은 또 무슨 소리요?” 아무래도 이 산골청년, 남색이 있다는 사실만 알지 어떻게 남색이 이루어지는지는 일자무식인 듯했다. 내가 씩 웃었다. “자고로 남자 두 명이서 진실하게, 정말로 진실하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남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지식인적 사명과 산골청년에 대한 배려심으로 남색이 이뤄지는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대학교에서 성(性)에 대한 교양과목을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기에 나의 설명은 구체적이고도 섬세했다. 정말이지, 여기엔 사심이라곤 요만큼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에겐 순전히 지식인적인 사명과 배려심밖에 없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파르시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그럴수가!” 그가 거의 졸도할 기세로 소리쳤다. 마치 여자에겐 꼬추가 없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깨달은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와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러니까, 거기를 그것으로 뚫는다, 이 말이요외까!?” “정확하게 순화해서 말하자면 항문을…….” “그만! 그마아안!” 파르시가 비명을 지르면서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요 녀석, 숫제 총각이었다. 말투는 건방진 주제에 아직 여자 맛도 보질 못했구만. 더더욱 귀엽게 보였다. “제발 그렇게 저속한 말은 쓰지 말아주시오!” “본인도 잘 모르지만 전해 듣는 이야기로 쾌감이 매우 크다 하더군.” “믿고 싶지 않소! 나의 상식이, 상식이!” “상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쿨하게 말했다. “청년이여,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라.” “그런 세계는 싫소!” 푸른 숲속에 순박한 청년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야기하다 알게 됐는데 이 털복숭이의 거한은 고작 열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다. 라우라와 동갑이었다. 어마어마한 노안이었다. 숲에는 녹음이 무성했다. 며칠 전 비가 내려서 녹색이 무섭도록 피어났다. 이끼가 끼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나뭇잎으로 제 몸을 가리지 않은 나무가 없었다. 곧 끝날 여름을 애써 붙잡아 두려는 것인지 숲은 더더욱 집요하게 녹색을 고집했다. 이 세계에 온 것이 봄이었는데 벌써 늦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 케르륵, 케르. ─ 케르르륵. 우리 뒤쪽으로 무수한 발걸음이 뒤따라왔다. “내 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속셈일까. 파르시가 우리 뒤편을 슬쩍 쳐다보았다. “내 평생 고블린이랑 편 먹을 줄은 몰랐소.” 백 마리 가량의 고블린. 대부대가 두 줄에 맞추어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손도끼나 돌창같이 꽤 원시적인 무기를 꼬나쥐었다. 특이한 점은 투석병이 많다는 것이었다. 돌팔매질에 쓰는 투석구(投石具)를 털레털레 흔들면서 걸었는데, 행군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토끼나 매를 쏴잡았다. 참고로 내가 든 무기는 쇠뇌였다. 여기서 가장 고급스러운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아까 전에 농담삼아, “저걸로 어떻게 싸울 수나 있으련지 모르겠다.” 하고 말하자 파르시가 인상을 쓰면서 반박했다. “무슨 소리요? 난 다른 고블린은 안 무서워도 줄팔매하는 놈들은 사양하고 싶소만.” “돌멩이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다고 그러는가?” “이거 나으리, 의외로 돌맛을 모르는구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돌이요외다. 저거 한방 맞으면 제아무리 억센 놈이라도 황천길로 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오.” 나는 그런가? 싶었다. 솔직히 돌팔매질이 그렇게 위력적일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파르시가 하도 당당하게 말하는 터라 그냥 넘어갔다. 파르시의 호언장담이 맞는다면 전투에 이익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게 없으므로 부디 고블린 투석병들이 분전해주기를 바랐다. 아무튼 무장 상태를 떠나서 고블린 백여 마리의 행군은 장관이었다. “몬스터와 한편이라니 기분이 묘하오.” “무서운가?” “무섭다기보다 이상하구랴.” 파르시가 무언가 못 마땅한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인간과 몬스터가 같은 편이 되어 싸운다니 누가 믿겠소? 그딴 망상 집어치우라고 타박이나 듣고 말겠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소.” 망상이라. 내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진지하게 망상을 논하는 자가 세상에 두 종류 있다. 하나는 혁명가이고, 다른 하나는 바보이다. 지금껏 나는 두 가지 부류를 모두 만났다. 잭이 후자에 해당했다. 그는 죽었다. 전자에 속하는 인물은――. “누가 오는구랴.” 파르시가 말했다. 내 뒤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돌아보니, 라우라가 당나귀를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고블린 부대를 지나쳐서 금방 내게 도착했다. 라우라가 내 앞에서 우아하게 하마했다 “주군.” 문외한이 내가 봐도 그녀의 승마술은 경지에 이르른 것 같았다. 문제는 기술에 비해 탈 것이 지나치게 비루하다는 점이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당나귀는 너무했다. 라우라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내 발앞에 부복했다. 그녀 주변을 날아다니던 요정들이 내게로 옮겨왔다. “지금까지 대열을 이탈한 고블린 부족은 전무하옵니다.” 라우라가 경어를 썼다. 옆에 파르시가 있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나 또한 공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터라, 그녀의 존댓말이 약간 어색했지만 티내지 않았다. “수고했다. 파르시, 마을까지 앞으로 얼마 남았는가?” “어? 어? 아, 얼마 안 남았수다.” 라우라의 얼굴에 푹 빠져 있던 파르시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산골짜기에 살다가 공작영애의 미모를 보니까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그, 대충 한 식경만 더 걸으면 나올거요.” “좋다. 라우라. 이것을 마지막 보고로 삼는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제부터는 짐의 곁에서 행군하라.” “존명.” 나는 고블린 부대로 하여금 조용히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과연 파르시가 예고한 대로 잠시 후에 숲길이 끝났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무꾼인 듯했다. 그는 하늘이 떠나라 비명을 지르더니 날래 줄행랑을 쳐버렸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쇠뇌나 돌팔매로 저격할 수가 없었다. “기습은 물 건너갔구랴. 괜찮겠수?” “걱정없다.” 제깟 것들이 이제와서 준비한다고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대로 마을 앞까지 나아갔다.   00051 E급 모험대 =========================================================================                         “고블린, 고블린이 쳐들어왔다!” “목책으로 붙어! 시발, 도망치지 마! 목책으로 붙어!” “세파르 개새끼야! 너 이 개새끼 도망치기만 해봐, 네놈 처자식을 분질러버릴 테다!” 마을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목책 너머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목책에 바짝 붙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목책에서 떨어지려는 사람, 이도저도 못하고 비명만 지르는 사람, 공방전을 대비하여 미리부터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줍는 사람, 온갖 부류의 인간이 혼란을 연출했다. 우리는 멀찍이서 마을을 지켜보았다. 마을 주변에 계단식 논밭이 펼쳐져 있어 낭만적이라고까지 말하기엔 뭐해도 풍경이 제법 목가적이었다. 논밭을 가로지르며 허겁지겁 마을로 뛰어가는 인간들만 없다면 말이다. 내가 느긋하게 말했다. “의외로 도망치는 자가 없군.” “산에서 사는 인간만큼 억척스러운 족속도 없소. 평지에서 사는 겁쟁이와 달라도 한참 다르거든.” 파르시가 우쭐거렸다. 산사람과 평지사람 간에 자존심 싸움이 있는 것일까. 하여간 쓴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란 겉보기에 차이가 있다면 일단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그 차이를 고정시키기 마련이었다. “저들은 하층민 중에서도 떠돌이들이옵니다.” 라우라가 옆에서 말했다. 그녀는 바람에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었는데, 그만 그녀가 당나귀에 탔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동작이 멋졌다. 달리 말해 우스꽝스러웠다. 언젠가 반드시 명마를 구해다 선물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세금징수관과 영주를 피하여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산맥까지 내몰린 것이지요. 저들은 자신의 것을 스스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그들로 하여금 각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민중을 공격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가?” “감히 전하에게 먼저 칼날을 겨눈 이들입니다. 소신은 전하의 적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법을 배우지 않았나이다.” 믿음직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때쯤 고블린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한 원숭이 떼거리가 음정박자 전부 무시하고 합창하는 것 같았다. 고블린들은 제멋대로 발을 굴렀고, 알 수 없는 언어――대충 '꾸르구르구르구르!' 하고 들렸다――로 노래를 불렀으며, 흥에 겨워 손짓발짓 다 써서 춤을 추었다. 어떤 녀석이 초록색 가죽으로 된 북을 울리면서 그나마 박자를 맞춰주었다. 고블린의 군가였다. “기선 싸움입니다.” “흥미롭군. 본인이 지금껏 들어본 음악 중에 제일 마음에 든다.” “송구하오나 주군, 특별히 총애하시는 음악이 있는지요?” “난 음악이 싫다.” 라우라가 키득거렸다. 마을측이 맞서서 목청을 돋우었다. 산에서 수확하는 옥수수의 풍요로움과 그것을 결단코 지키겠다는 게 노래 줄거리였다. 풍물놀이처럼 각종 악기가 동원되었다. 확실히 고블린에 비해 음악수준이 한 단계 높았다. 소리꾼들이 선창하면 대다수의 마을사람이 똑같은 구절을 뒤따라 불렀고, 중간중간에 악기를 잡은 자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마을사람들이 쓰는 악기 중에 꽹과리랑 비슷한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나는 모든 악기 중에서 꽹과리가 가장 싫었다. 도대체 꽹과리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공헌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세계에서 풀릴 길이 안 보였던 미스터리가 지금 해결되었다. 꽹과리는 전쟁에 전문적으로 이용되던 악기임에 틀림없었다! 고블린과 인간이 꽥꽥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에도 꽹과리 비스무리한 악기의 소리는 그 모든 소음을 뚫고 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뒈지랄 것들 뒈지라고 디벼 잡이라윽!” “얼쑤우!” “뒈지랄 것들 뒈지라고 디벼 잡이라아아악――!” 마을 목전의 구릉이 금새 노래가락과 악기소리로 가득 찼다. 사실 노래라는 적이 부드러운 낱말로 표현하기에는 거의 악바라지에 가까웠다. 아니, 그냥 소음이었다.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내가 소리쳤다. 말소리가 노래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송구하나이다! 본래 인간의 군대끼리 맞붙을 때는 군가에도 법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기고, 어떻게 하면 지는 것인지 암묵적으로 합의가 있나이다! 허나 소신은 몬스터와 인간이 군가로 겨루는 모습은 처음인지라 아는 바가 없습니다!” “파르시!” “간단하외다악!” 파르시가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중 한쪽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하면 되오!” 그거 참 룰이 간단해서 좋군. 이 빌어먹을 소음을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만 없었다면 그같은 룰을 만든 사람을 칭찬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어쩌는가!” “길어지면 길어지는 대로 불러재끼는 거요! 거 심심하시면 춤사위라도 한판 땡기는 게 어떻소외까! 벌써 고블린들은 난리가 났구만!” 파르시 말마따마 고블린들은 아예 단체로 춤을 추고 있었다. 장담컨대 그건 아무리 봐도 대악마를 소환하는 흑마법사들의 의식이었다. 저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허리를 흔들라고? 죽어도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히 우려와 다르게 기선 싸움은 금방 끝났다. 마을사람은 대략 오십 명에 불과했다. 백 마리에 이르는 고블린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블린 군가에 인간들의 목소리가 묻혔고, 마침내 마을 쪽에선 예의 꽹과리 소리만이 들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지쳤다. ─ 케르르르르르! ─ 키루륵! 케르, 키루르르륵! 고블린들이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녀석들도 한참 동안 소리를 질렀긴 매한가지인데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전쟁터란 묘해서 일단 기세를 타면 흥분감에 피로를 잊어버렸다. 반면 기세에서 밀릴 시엔 스트레스와 피로 그리고 중압감에 말려들어 전투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마을사람들 꼴이 그러했다. 자경단원은 모험대로 차출되었다. 몬스터에 비해 병력도 부족했다. 하물며 사기까지 떨어졌다.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를 만들어놓은 이후 전쟁에 나선다. 이번 전투는 아직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으나 누가 봐도 승패가 명백히 결정되어 있었다. “주군, 때가 되었사옵니다.” “아아.” “전투에 앞서 한 말씀을.”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블린 대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블린의 키가 작은 탓이었다. 푸른 구릉에 짙은 초록빛의 고블린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꼭 애벌래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확성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찢었다. 얼굴 앞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나는 <연기> 스킬을 발동했다. 그리고 버럭 소리질렀다. “전사들이여!” 이백여 개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한 박자 쉬고 연설을 이어나갔다. “저 울타리를 보아라!” 내가 마을을 향해 손을 벌렸다. 마을사람들도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 산맥의 인간놈들이 건방지게도 울타리를 짓고 있다. 마치 여기가 그들의 땅이라는 듯이. 그들은 마을을 짓고 목책을 쌓아 어느새 산맥의 주인인 양 행세하고 있다……이 산맥의 주인이 인간이었는가?” ─ 케르르르륵! ─ 끼룩! 끼루룩! 나의 질문에 고블린 무리가 성난 원숭이마냥 방방 뛰었다. 짐승들의 분노가 공간에 찌르르 퍼졌다. 마왕인 나는 그들의 말을 여과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간이 목책을 쌓기 전에도 고블린은 있었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전에도 고블린은 있었다. 인간이 감히 신성한 산자락에 발을 내딛기 전에도 고블린은, 이미 고블린은 수백수천 년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 끼루루루루루! “좋다. 허면 그대들, 긍지 높은 산맥의 종족에 묻겠다.” 내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그대들은 신성한 산맥을 사랑하는가!” ─ 케르륵! 케륵! 케르륵! 고블린들이 일제히 발을 굴려대며 회답했다. 내가 있는 힘껏 외쳤다. “그대들이야말로 산맥을 지배하는 전사의 일족인가!” ─ 케륵! 케륵! 케르륵! “우리의 위대한 영토를 침범한 저 건방진 암퇘지 새끼들을 응징할 것인가!” 고블린들이 울부짖었다. “그렇다! 죽여라!”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의 밥상에 흙탕물을 묻히는 돼지 새끼들을 결코 용납하지 마라! 살갗을 뱃겨라! 근육을 헤집어라! 창자를 끊어버리고 모가지를 썰어버려라! 이 산맥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하라! 저들이 주제 모르는 암퇘지 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만들라! 누가 포식자이고――누가 사냥감인지 떠올리게 만들라!” 고블린 대부대에 등을 보이면서 말했다. 바로 그 순간, 미리 약속한 대로 라우라가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중규모 소환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이었다. 새하얀 빛줄기와 함께 골렘 부대가 나타났다. 그들이 한꺼번에 땅바닥을 밟자 약한 지진이 울렸다. 고블린 부대는 원군의 출현에 하늘이 떠나가라 포효했고, 인간들은 비명을 질렀다. 내가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전군! 돌격하라!” ─ 크후르와아아아아! ─ 끼르르르르룻! 지금까지 울려퍼진 어떤 노래보다 웅장하게 함성이 터졌다. 골렘 부대가 선두로 걸어나갔다. 골렘들이 묵직한 바위주먹으로 후려갈기자 목책이 부서져 성냥개비처럼 흩뿌려졌다. “도, 도망쳐!” “전선이 밀리면 죽는다! 전선이 밀리면 죽는다――!” “시부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안 돼! 목책에 붙어! 죽든 살든 울타리에 붙으라고, 병신 새끼들아!” 그 한방에 마을사람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평균 레벨이 7이 넘어가는 골렘 부대는 다소 억센 산골마을 사람들이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고블린만 있었다면 목책 사이로 죽창을 찌르면서 한동안 수비해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골렘에 대한 대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골렘이 충차와 같이 목책을 부숴버리자, 그 틈새로 뚝방 무너진 물살마냥 고블린이 떼거지로 밀어닥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일부 마을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남아서 마지막까지 대적하려던 이들도 전의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도망치려는 자와 사수하려는 자가 얽히고 설켜서 혼란을 일으켰다. 거기에 고블린과 골렘이 돌진해오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살려줍――커헉!” “으에엥, 으에에엥!” 손속에 자비란 없었다. 나는 고블린 부대에 약탈을 허용했다. 고블린에게 약탈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살점을 뜯는 것이었다. 청장년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노인, 어린애 가리지 않고 살육이 이루어졌다. 나는 도륙의 현장을 천천히 걸었다. 양옆으로 라우라와 파르시가 나를 호위했다. 파르시가 때때로 혀를 내두르며 질겁했다.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따라오는 걸 보니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겉모습 때문에 아직도 믿기지 않았지만 파르시는 열다섯 살이었다. “곡물창고를 확보하라. 제1대는 저쪽으로, 제4대는 이쪽으로.” 라우라는 걸어가면서도 골렘들에게 척척 지시를 내렸다. 내가 그녀의 작전권을 인정한지라 골렘들이 군말없이 움직였다. 참고로 라우라는 전투가 시작한 이래 단 한번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믿기지 않게도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다. ‘역시 옛날에는 나이가 어려도 어른스러웠던 건가.’ 마음속으로 이 시대 인간들에게 감탄했다. 솔직히 마을사람들이 수적으로 압도적인 몬스터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고블린들을 보자마자 도망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골렘 부대의 출현을 미루었다. 인간들은 예상보다 더 끈질겼다. 물론 자기 살 길을 찾아 가족과 동료 전부 버리고 도망가버린 이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발 이 아이만큼은 살려주세요!” 한 여자가 고블린의 장벽을 뚫고 내 앞에 넙죽 엎드렸다. 오른팔은 이미 어디에 두고 왔는지 없었고, 왼팔로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내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이는……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제발……!” “라우라.” 부연 설명도 필요없었다. 라우라는 허리에 찬 장검을 꺼내 단번에 여인의 가슴팍을 찔렀다. 세검이 여인의 연한 가슴을 뚫고 등 뒤로 삐져나왔다. 라우라가 휙, 하고 검을 거둬들였다. 핏방울이 땅바닥에 튀었다. 여인은 땅에 까꾸라져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부탁이니 제발이니 하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여인의 시체와 그 품안에서 우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파르시가 내 옆구리에 바싹 달라붙었다. “거, 얼라 한 명 굳이 죽일 필요가 있수?” “죽일 필요는 없다.” 인간이 무더기로 학살당하는 광경은 분명 슬펐다. 비극이라 해도 좋았다. 특히 팔 한쪽이 잘렸는데도 필사적으로 고블린들을 뿌리치고 내 앞까지 당도한 여인의 모성에는 가슴이 아릿해졌다. 그러나 내 감상은 별도로 이것은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 몬스터의 우두머리인 내가 인간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를 담아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애써 살릴 필요도 없다.”    ============================ 작품 후기 ============================    제가 설정상 실수를 저지른 부분이나 오타 등을 지적해주는 분들이 계신데요, 따로 리리플은 달아드리지 않고 있지만 제가 확인하는 대로 곧장 수정하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52 E급 모험대 =========================================================================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내리지 않는 걸 보아 본인도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었다. 던전에 쳐들어온 모험대도 그랬다. 잔인함과 순수함을 동시에 가졌다. 망설임 없이 화살을 날려대는가 하면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열기도 했다. 언젠가 중세의 농민이란 이미지와 다르게 무법자처럼 언제든 필요에 따라 도적으로 변모한다고 들은 적 있었다. 그같은 양면성이 이 시대 인간의 특징이겠지. ─ 키르르륵! 마을은 금세 거대한 식당으로 전락했다. 쉰 구에 이르는 인육은 고블린 전원을 배불리 하고도 한참 남았다. “대승이옵니다. 이로써 고블린 부락이 전투에 참여하는 정도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아아. 허나 저번에 논의한 대로 위장작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예, 골렘 부대에 명령하여 시체를 운반하겠습니다.” 우리는 마을광장에 서서 한가로이 앞으로 할 일을 얘기했다. 딱히 새로운 화제거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전투에서 이긴 장병들에게 약간의 연회를 즐기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근방 산맥에는 열네 채 남짓의 고블린 부락이 분포했다. 부족을 전부 합치면 너끈히 오백 마리를 헤아렸다. 그들 전부가 전투에 나설 수는 없겠으나, 오늘 전투에 동원된 백 마리보다야 훨씬 더 많은 숫자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겨우 백 마리밖에 끌고오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고블린 부족은 자기네가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당연했다. 고블린들은 산적같이 인간마을을 기습하여 약탈한 적은 있었어도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동수의 고블린과 산사람이 맞붙을 경우 유리한 쪽은 후자였다. 특히 목책 등의 방어시설을 갖춘 인간마을을 공격하기란 고블린들에게 무척 어려웠다. 인간을 토벌하자는 내 제안에 고블린 부락은 다소 시큰둥했다. 골렘 부대를 앞세워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요지부동했다. 고블린들에게 인간은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일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가끔씩 약탈해보는 대상이었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아니 몬스터이기에 더더욱 과거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몬스터한테 천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마왕이라서 백 마리라도 끌어왔지, 아니면 얄짤도 없었을 거다. 라우라가 지도를 꺼내들었다. “곧바로 다음 마을로 쳐들어가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완성본은 아니었으나 파르시 등 우리측에 우호적인 인간한테 도움받아서 대충이나마 만들어낸 지도였다. 그곳에는 인간마을과 고블린 부락의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 마왕군은 시계방향 순서대로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험대가 알아차리는 것은 최소 두 번째 마을이 점령된 이후일 터. 전쟁에서 기습이 기본적인 묘리라 해도 우리에겐 약간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라우라가 지도상의 고블린 마을을 하나씩 짚었다. “고로 지금 당장 고블린 군단을 해산합니다.” “에, 뭐요?” 파르시가 어리둥절해 했다. “기껏 며칠 내내 고생해서 백 마리 모았는데 해산하라니 뭔 소리외까!” 아무리 지도가 있다 해도 미완성본일뿐더러 라우라나 내가 산길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파르시가 안내원이 되어 산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그 고생을 한 파르시로서는 이제 와서 다시 부대를 해산하라니 기가 찬 것이었다.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마왕 전하께서 발품을 팔아가시며 고블린들을 모아야 했던 까닭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다릅니다. 오늘 공방전에서 고블린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녀 말대로 마을에는 인간의 시체가 즐비할 따름이었다. 목책 근처에나 고블린 시체가 두어 개 널부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피해가 아예 없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오로지 이득만 얻었습니다. 수십 구의 인간시체는 고블린들로서는 감히 기대해본 적도 없는 수확입니다. 묻겠습니다.” 라우라가 파르시를 봤다. “여기의 고블린들에게 다음 전투까지 어디에서 모이라고 지시한 다음, 그들을 해산시킨다고 합시다. 다음 전투에는 얼마나 많은 고블린을 동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 어……그렇게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겠수?” 파르시가 좀체 라우라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라우라는 귀족영애 아니랄까봐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해서 아무래도 산골청년이 상대하기에 버거웠다. 으이구, 마왕인 나한테는 할 말 다하던 인간이 정작 미인한테는 힘을 못 쓰네. “오늘 크게 한탕 했으니 관두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소.”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이 있다면 언제고 달려들기 마련입니다. 고블린들은 자기 부족에 가서 오늘 전투가 얼마나 쉬웠고, 얼마나 많은 시체를 얻었는지 자랑하겠지요. 그걸 들은 나머지 고블린들이 어떻게 나오리라 생각합니까?” 라우라는 더 이상 파르시와 대화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감히 장담하옵니다. 주군께서 다음 전투에서 거느리실 부대는 족히 삼백에 이를 것이나이다.” 나는 그녀의 진언을 받아들여 부대를 모두 해산시켰다. 그 와중에도 파르시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틀 뒤. 라우라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 마을로 가는 길목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수백 마리의 고블린이 득실득실거리고 있었다. 산골짜기가 녹색 물결로 넘쳤다. 파르시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군대를 지휘했고, 우리는 두 번째 마을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하게 점령했다. * * * “개 같은 새끼가!” 리프가 나무탁자를 뒤엎었다. 탁자가 요란하게 뒹굴었다. 모험대 간부가 머무르는 주택. 원래 이곳에 살던 마을주민에게 협박하다시피 얻어낸 곳이었지만, 집안의 가구를 마음대로 집어던지는 데 리프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생존자에 의해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지자, 리프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했다. “니미, 개육시랄 시버럴 놈! 감히 제깟것이, 개새끼가!” 동료 간부들이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불과 몇 달만에 별 볼 일 없는 시골마을 모험자 떨거지를 수준급 모험대로 키워내고 여기에 타 지역의 자경단까지 포섭시킨 리프는 절대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 지금처럼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대장을 말려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씨발, 연장 챙겨! 당장 던전으로 쳐들어간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간부 중 한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을이 두 개나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자경단원이랑 애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기를 추스르는 편이…….” 리프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먹으로 사내의 배를 때렸다. 사내가 신음을 참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다른 간부들이 더더욱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등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뭘 모르겠다는 표정인 간부들을 향해 리프가 소리쳤다. “병신 머저리 새끼야! 지금 아니면 언제 쳐들어가! 마왕 새끼가 마을을 공격하잖아! 그럼 씨바알, 지금 던전은 비었냐 안 비었냐!” “아!” “대가리 비우고 사는 새끼들……! 쳐나가서 애들한테 말해.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 간부들이 허겁지겁 집에서 나갔다. 딱 한 명, 우락부락한 남정네로 이루어진 리프의 모험대에 어울리지 않게 여인이 집안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리프가 그녀를 신경쓰지 않고 생각에 들어갔다. 불과 수십 초 전에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쉽게 화내는 겉모습과 달리 생각이 깊었다. 방금도 마을이 떼로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질려버린 간부들을 정신차리게 하려고 일부러 분노하고 난리쳤다. 동료들은 실력에 있어서 꽤나 믿음직스러웠지만 머리 쓰는 일에 관해서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럴 때 애꾸눈 그 자식이 있었다면.’ 지난 번 단탈리안의 마왕성에서 잃은 동료가 생각났다. 그와 리프는 절호의 콤비였다. 리프가 분위기를 잡으면 애꾸눈이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그처럼 역할분담이 딱딱 이루어져야 머리 나쁜 모험자들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지금은 리프가 모든 역할을 떠맡았고, 그로 인해 리프의 피곤함은 날로 더해갔다. 이것이 전부 그 마왕 새끼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열이 뻗었다. 마을 두 개가 전멸된 것은 뼈아팠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한테 피해가 생긴 건 아니다.’ 그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리프에게는 믿을 구석이 세 개나 되었다. 첫 번째, 마을이 사라졌다지만 그렇다고 모험대에 인명피해가 나진 않았다. 자경단원은 모두 모험대와 같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리프로서는 솔직히 자경단원이라는 전력만 무사하다면 마을 따위 몇 개가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자기 마을도 아닌데 신경쓸 것이 뭐 있겠는가. 두 번째, 마법사를 고용했다.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인이 바로 마법사였다. 그것도 1서클, 2서클 같은 초짜가 아니라 자그마치 3서클! 제대로 된 전투마법사로서 최하급골렘 정도는 우습게 상대할 수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마왕군은 골렘, 고블린, 요정, 총 세 종류의 몬스터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모험자들이 골렘과 고블린을 방어해내는 사이 마법사가 골렘들을 처치해주면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이다. 리프처럼 급이 낮은 모험자가 마법사를 고용한 데에는 행운이 함께했다. 하급 마법사들은 자신의 공방을 갖지 못하고 마탑에서 배우고 일하는데, 서클이 올라갈수록 마법을 배우는 데 드는 교육비가 기하급수로 올랐다. 하급 마법사들은 한철 장사를 노리는 식으로 모험대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리프가 판단하기로 여인도 그런 마법사에 속했다. ‘저런 얼탱이가 걸릴 줄은 나도 몰랐지. 크흐.’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할까. 때때로 마법사 중에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 사회가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 무지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마법사를 모험자들은 호구라 불렀다. 여인은 호구의 대표주자였다. 모험자 길드에 들어와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딱 '저는 호구입니다 어서 낚아가세요'라고 광고하는 꼬락서니여서, 리프는 주저없이 여인에게 접근했다. 단탈리안 마왕성은 재화는 넘치는데 함정도 없다느니, 몬스터라곤 최하급밖에 없다느니, 온갖 사탕발림으로 불공평 서류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데까지 불과 오 분이 걸렸다. 여인에게는 총 수익의 5푼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3서클 마법사의 고용비로는 거저나 다름없었지만 여인은 좋다고 따라왔다. 리프는 속으로 그녀를 백 번은 비웃었다. 결국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을 속이는 자였다. ‘그 마왕 새끼처럼 말이지.’ 까득, 하고 리프가 이빨을 갈았다. 그놈의 연기에 홀라당 속아넘은 것을 생각하니 아직도 속이 쓰렸다. 돌이켜보건대 자기가 얼마나 멍청했던가! 상식적으로, 마왕이 발 벗고 나서서 모험대를 위해 행동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리프를 비롯한 잘센 모험대는 마왕을 철썩처럼 믿었다. 말 그대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육시랄 놈. 창자를 도려내서 회쳐주마.’ 그쯤에서 리프가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지금 느끼는 분노를 곧 갚아줄 거라 확신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대, 대장님.” 간부가 돌아왔다. 아까 전에 리프에게 한 대 얻어맞은 사내였다. 그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엉? 왜 벌써 돌아와? 준비 다 끝냈냐?” “그게, 저어……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썅, 무슨 문제?” 리프가 당장이라도 씹어먹을 기세로 되물었다. 사내는 왜 자신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세상을 원망하면서 대답했다. “그것이……자경단원들이…….” “자경단원들이 뭐 이 새끼야!” “자, 자경단원들이 절대로 던전에 가지 않겠다 그럽니다!” 리프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00053 E급 모험대 =========================================================================                         “무슨 개놈이 지랄발정하는 소리야?”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자경단원들이 절대로…….” “썅, 누구 귀가 병신인 줄 아나.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좋다고 따라온 놈들이 왜 가자니까 안 간다 지랄이냐는 말이다.” 사내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경단원들이 출정하길 거부한다는 것만 알았지 어째서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대장한테 알려줘야겠다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리프는 사내의 낯빛에서 알아냈다. 요컨대 그는 자기 동료들이 어느 정도로 무능하고 무식한지 또 한번 확인해야만 했다. 리프가 한숨을 참고 말했다. “너 진짜……젠장, 왜 안 간다는 건지 알아와.” “알겠습니다.” 사내가 풀죽은 모습으로 뒤돌아섰다. “아니, 아니다. 그냥 자경단원 대빵 새끼한테 직접 오라 그래.” 리프가 서둘러서 말을 정정했다. 사내의 태도를 보자니 이유도 제대로 알아오지 못할 듯싶었다. 대장이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전혀 모른 채,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본부에서 나갔다. ‘빌어먹을. 이 모험대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 리프가 신경질적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사내가 나가고 잠시 후, 남자 다섯 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각 마을의 자경단을 대표했다. 그중 두 명은 고블린 군단에 고향을 잃었다. 동향 친구와 부모 그리고 처자식까지 죽어버리자 그들은 가슴이 새까만 분노로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지상에서 고블린을 멸종시키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리프가 영리하게도 그들의 심정을 파악했다. ‘불난 집에 기름기를 퍼부을 필요는 없지.’ 그는 즉각 자기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제일 처량하고 처참한 표정을 만들었다. 원래 천직이 나무꾼인 리프는 생김새가 투박했다. 투박한 자의 처량한 얼굴만큼이나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리프가 형님, 하고 운을 뗐다. 리프와 자경단 대장끼리는 형아우 하는 사이였다. “소식은 들었수다……뭐라 드릴 말씀이 없구랴.” “드릴 말씀이 없다고? 지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나?” 마을을 잃어버린 남자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듣기로 아우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던데!” “형님, 진정하십쇼. 뭐 때문에 화나셨는가 몰라도 분명…….” “뭐 때문에 화났는지 몰라? 뭐 때문에 화났는지 모른다고!” 남자들이 리프에게 삿대질했다. “네 자식이 말했어, 던전을 털면 크게 한몫 챙길 거라고! 팔자를 고칠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뭐야! 네 자식의 꾐에 넘어가니까 마왕이 보복했잖아. 팔자를 고치기는커녕 완전히 망가졌어! 완전히!……그분을 화내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자네가 우리를 끌어들이지만 않았으면 이딴 일도 없었을 걸세. 모두 자네 잘못이야!” 리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뭔.’ 아니, 마왕에 대적하면서도 자기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말인가. 심지어 자신들은 군량미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마을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 마을들이 마왕에게 빌붙어서 무언가 계략을 세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정녕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요?” 리프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우가 사죄라도 해드릴까? 그러면 분이 풀리겠소?” “뭐?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버르장머리는 개 시버럴 후장에 쑤셔넣을 버르장머리요. 나도 마왕 자식한테 동향 친구 절반을 잃었수다.” 리프가 으르렁거렸다. 웬만하면 존대해주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왕을 털어먹으려는데 그럼 저쪽에서 아이고 모험자님 아이고 인간님 얼른 제가 모은 금화를 챙겨드시고 가십시요 할 줄 알았소. 하이고 허파에 쉰바람 들어가고 앉았네, 뭔가를 뺏으려면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도 안 배웠어?” “하, 개만도 못한 자식! 이제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본성은 니미 네 새끼들이 노출하고 지랄입니다.” 리프가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들더니 단번에 바닥에 던졌다. 도끼날이 와직, 하고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자들이 움찔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프가 한 발짝 걸어나가 자경단 일행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돈 좀 만질 수 있다는 말에 좋아라 하면서 따라온 건 언제고 이제 쫄리나 봅니다, 형님들? 응? 사내 새끼들이 한번 입에 담으면 뒈질 때 뒈져도 뒷말은 없어야지 뭐하는 거요? 하, 그쪽만 피해자인 척하니 시발 역겨워서 내 혓바닥이 형님 소리를 못할 지경이구만.” “네놈이 뭐라 씨부려도 던전에는 못 간다.” 한 남자가 리프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했다. “다음에는 어떤 마을이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 설령 부자가 되더라도 고향이 없고 가족이 없는데 소용이 무에야. 갈려면 네놈이나 가라. 우리는 고향을 지킬 것이야.” 화제를 바꾸어야 한다. 리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흐름이 좋지 않았다. 자경단이 자기 마을을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했다. 리프 자신도 만약 고향이 위험에 처한다면 만사 제치고 고향으로 달려갈 것이었다. 이방인만큼 서러운 작자가 어디 있는가. 가족과 동료, 집을 잃은 채 정처없이 떠도는 것은 모든 남성이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리프는 희생양을, 저들이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았다. “형님들, 누가 보면 아우가 죽을 죄라도 지은 줄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보십쇼. 여기 계신 형님들 마을을 조진 게 누구입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그야 마왕 아니냐. 네놈이 그분을 진노하게 만들었어.” 그분이라니! 리프는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분이라니! 어째서인지 이 작자들은 마왕을 증오하면서도 묘하게 존중했다. 살기 위해 울고불면서 달라붙고, 철면피가 되어 인간을 속이고, 비겁하게도 등 뒤에 비수를 날리는 그딴 개자식을 말이다! 리프는 바닥에 꽂힌 손도끼를 잡아들어 남자의 두개골에 박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으로 내버려두고,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거 참 신기하구랴. 궁금하지도 않소? 마왕이 어떻게 자경단원 형님들의 마을만 싹 골라서 조졌는지?” “……무슨 소리냐.” “형님들 보고 일자무식이라는 거요. 하, 머리통이 있으면 굴려보쇼. 언 개새끼가 형님들이 나한테 붙었다는 사실을 꼰지르지 않았다면 마왕놈이 어떻게 형님들의 마을만 딱딱 공격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남자들이 충격을 받아 눈이 커졌다. “그, 그러면?” “배신자가 있소! 우리 인간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거요! 보나마나 뻔하지. 우리한테 군량미를 바친 마을 중에 어떤 한곳이 마왕한테 빌붙은 거지.” 리프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아니, 혹시 모르오? 한곳이 아니라 싸그리 배신자 짓거리를 했는지.” “지옥불에 타죽을 개자식들!” 자경단 대장들이 분노했다. “그놈들이 그럴 줄 알았어!” “지들만 살겠다고 똑같은 인간을 몬스터한테 팔아넘겼어!” 리프가 적당히 남자들에게 맞장구쳤다. 그들 사이에 어느새 공감대, 즉 마왕이나 다른 자가 아니라――그 다른 자 중에는 물론 리프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적군에게 정보를 팔아넘긴 동족이야말로 천하의 원수라는 견해가 굳어졌다. 리프가 보기에 한몫 벌어보겠다고 다른 마을을 핍박하여 식량을 뜯어낸 자경단도 배신자이긴 마찬가지였으나, 굳이 그런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불이익을 자초하지 않았다. “형님들. 사나이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리프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찌됐든 그 배신자 새끼들의 마을에는 병력이 없습니다. 우리랑 맞붙어서 백이면 백 지는 것은 저쪽이요. 놈들은 마왕 새끼를 믿고 그렇게 까부는 것인데, 마왕만 일단 처리해버리면……예? 그놈들 죽여버리는 거 닭모가지 비트는 일보다 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우. 고블린이 물경 수백이라고 하네.” 남자는 분노와 슬픔, 무엇보다 걱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무장해 있다고 해도 고블린 수백을 무찌를 수는 없어.” “허, 왜 피곤하게시리 고블린 새끼들이랑 싸웁니까?” “뭐?” 리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쳤다. “썅. 아까 전부터 생각 좀 해보라고 말하지 않았수까. 보십쇼. 고블린 그 새끼들이 어디 원래부터 수백 마리씩 뭉쳐다닙디까?” “아, 우리도 그게 이상했어.” 남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거 고블린 놈들은 지네들 부족끼리만 다녀서 아무리 많아봐야 오십이 안 되는데 어떻게 수백 마리가…….” “그게 다 마왕 때문입니다. 마왕이 몬스터들을 규합해서 이끄는 게지. 달리 말해 마왕만 없으면 고블린 놈들은 언제 모였냐는 듯 뿔뿔이 흩어지든가 예전처럼 지들끼리 싸우고 자빠질 겁니다.” 즉, 하고 리프가 손가락을 세웠다. “마왕은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고블린들이랑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지. 수백 마리나 되는 놈들을 이끌고 댕기는데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고. 바로 그걸 노려서 우리는 빈집을 털러 던전에 쳐들어가야 합니다.” “잠깐만. 문제의 초점을 자꾸 흐트러트리지 말게.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 마을이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는 말일세.” “하, 진짜…….” 리프가 입가를 험악하게 비틀었다. “형님들, 대가리는 뒀다 어디 씁니까? 형님들 마을사람들 전부 이동시키쇼. 한 마을에 몰아넣으라 이거요. 그러면 적어도 수백 명은 한 마을에 모일 거 아니겠수? 그 정도면 고블린 수백 마리쯤이야 며칠이고 막아낼 수 있을 테고, 우리는 그 사이 던전을 턴 다음에 다시 마을에 합류하면 되오.” 리프가 마룻바닥에서 손도끼를 빼냈다. 그리고 신묘한 손놀림으로 도끼를 연필이라도 굴리듯이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놀렸다. “마을에서 고블린 부대랑 치고박고 싸우면, 응? 고블린 부대가 아주 지치겠지. 안 그렇겠소? 놈들이 마을에 신경이 팔렸을 때 우리가 그놈들의 헐거워진 후장을 뒤에서 박아주는 겁니다. 앞뒤로 공격을 받는 데 지깟 것들이 뭐라고 버티겠습니까요?” “오오!” 남자들이 손뼉을 쳤다. 그들이 듣기에 리프의 주장이 사리에 맞았다. 리프는 자기가 설득을 거진 성공시켰다 판단하고 계속 말해나갔다. 여기에 그럴듯한 용어까지 섞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휘어잡을 생각이었다. “이게 소위 망치와 모루라 불리는 작전입니다. 마을이 모루가 되고 우리 모험대와 자경단이 망치가 되서 고블린 애새끼들을 쑤셔받는 거지. 어때 형님들도 들어보지 않으셨소?” “확실히 들어봤지! 그래, 괜찮아. 정말 괜찮구만.” 들어보긴 개뿔이 잘 들어봤겠다, 리프가 속으로 비웃었다. “우리 작전에서 중요한 건 속전속결이요. 다들 얼른 연장을 챙기십쇼. 예? 한 시간 뒤에 다들 광장에 모여서 출발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요?” 남자들이 저마다 좋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던전의 재산을 가로채고 나중에 배신자의 마을에 복수하리라 다짐하면서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리프는 그들을 문가까지 배웅했다. 리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여자 마법사가 그 난리에도 상관하지 않고 잠자코 책을 읽고 있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전부 미쳤어. 리프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왠지 모르게 마법이 싫었고, 마왕 단탈리안이 흑마법이랍시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더더욱 싫어했다. 그가 차분히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무문이 열리고 예의 간부인 사내가 들어왔다. “대, 대장님.” “시부럴 개 같은 새끼.” 리프는 이제 사내만 보면 욕이 나왔다. 또 무슨 소식을 전해주려고 저리 말을 더듬는가 말이다. 이번에는 제발 자신을 화나게 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심정으로 리프가 물었다. “뭐야? 응? 또 뭐야?” “세 번째입니다. 또 마을 하나가 당했어요…….” “제기랄.” 안 좋은 소식이었다. 망치와 모루 작전이 성공하려면 모루 역할을 해주는 마을사람들 쪽수가 최대한 많아야 했다.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마을 중 하나가 전멸했다는 것은 그만큼 작전이 불리해진다는 뜻이었다. 리프가 한숨을 쉬었다. “으휴. 어디 마을이냐?” 사내가 마을이름을 읊어주자 리프의 표정은 기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마을은 자경단이 없는 마을――마왕한테 들러붙었다고 추정되는, 배신자의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00054 E급 모험대 =========================================================================                                 * * * “모험대는 분명 혼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라우라가 옆머리를 꼬면서 말했다. 산맥의 무더운 햇살이 그녀에게 비추었다. 여자아이라면 으레 피부 탓에라도 신경쓰기 마련인 햇볕에 그녀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라우라는 녹색빛 눈동자에 지도만을 담고 있었다. “배신자라 생각했던 이들이 도리어 적군한테 당해버렸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둔한 자라면 그저 무시하고 넘어갔으나, 리프라는 사내는 인근 마을을 규합할 정도로 썩 머리가 좋은 인간입니다. 그 남자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겠지요.” 마왕군이 배신자마저 해치워버렸나? 어쩌면 사실 배신한 것이 아니었나? “적군이 자기 살을 갉아먹으리라 생각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고로 그 남자는…….” * * * ‘배신자가 없었다.’ 리프의 눈에 참혹한 광경이 들어왔다. 리프 일행이 마을을 쑥 둘러보았다. 마을, 아니 마을이었던 공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목책 주변에는 고블린 시체 몇 구가 놓여 있었다. 울타리를 제외하고는 마을 안의 건물 중에 크게 손상을 입은 곳은 없었다. 군데군데 참혹하게 널브러진 살덩이와 핏자국이 없었다면 마을사람 모두 일터에 나갔다고 착각할 법했다. 그것이 더 으스스했다. 고블린들이 인간의 시체를 남김없이 해치웠다는 뜻이니까. 일행 모험자가 혀를 내둘렀다. “고블린 새끼들이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으면 어째 제대로 된 시체 하나 없냐.” “으휴, 거진 뼈밖에 안 남았네. 그래도 사람 숫자가 오십은 넘었을 텐데 이 자리에서 다 먹어버린 거여?” “그게 아니지. 다 못 먹은 인간은 지네 부락으로…….” “하이고, 신이시여!”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리프 일행이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자경단장 한 명이 리프에게 말했다. “아우. 당최 영문을 모르겠네. 마왕이 왜 여기 마을까지 공격했을까?” “아마도……끄응. 배신자가 없었던 것 같구랴. 적어도 자경단이 없는 모든 마을이 배신한 건 아니었수다. 내 형님들을 혼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요.”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하필 자경단이 있는 마을이 공격당한 것은 단순한 우연인 듯싶었다. 리프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형님들. 이건 오히려 기회요!” “기회?” 자경단장들은 마을의 참상을 목격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분위기를 쇄신할 겸 리프가 밝게 소리치자, 사람들이 물음표 섞인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프가 한번도 헛소리를 지껄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이 사내라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고. “멍청하게도 마왕 새끼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르고 닥치는 대로 마을을 습격하는 거 아닙니까요. 이 사실을 다른 마을들에 뿌려보십쇼. 걔네가 어떻게 반응하겠소?” “아!” 자경단장들과 주변의 모험자들이 뭔가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수다.” 리프가 씩 웃었다. “당장 우리와 함께 힘을 합치려 들겠지. 안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콧구멍 하나 안 풀고 아군을 만들게 된 겁니다요. 지금까지야 식량 좀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바람에 관계가 영 불편했지만,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어디 과거지사가 중요하겠소.” “맞아. 무릇 공통의 적이 생기면 연합하게 되지!” 사람들이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끌끌, 마왕이라더니 멍청하구만 그래!” “알아서 우리를 도와주고 말이야!”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악마 자식.” 리프가 혀를 찰 뻔했다. 자기가 없었다면 현재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했을 양반들이 희희덕거리니까 심기가 뒤틀렸다. 호사는 호사였으므로, 리프는 굳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모험대에선 곧바로 소식을 퍼트렸다. 마왕군이 미친 듯이 인간의 마을을 공격하고 있으며 거기에 예외는 없다고. 리프가 기대한 대로 마을들은 격하게 반응해왔다. 마왕타도를 울부짖으면서 자기네 편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홀로 막을 수 없다면 여럿이서 막으면 되오!” “아쉽지만 지금 마을을 버리고 한곳으로 모입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생각합시다.” 촌장들이 속속들이 리프의 모험대에 지휘를 받겠노라고 약속했다. 이같은 호재가 달리 없었다. 합류하지 않은 마을이 딱 두 군데 있었지만 리프는 개의치 않았다. ‘그놈들이 배신자였군!’ 리프는 마왕군이 산맥의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음을 이미 파악했다. 우연치 않게도 합류하지 않은 두 군데의 마을은 동쪽 방향으로 맨 끝에 위치했다. 그제서 만사가 명확해졌다. 산맥에 있는 열두 개 마을 중에서 두 곳이 배신했다. 마왕군은 배신자 마을이 밝혀지지 않도록 일부러 서쪽부터 행군한 것이었다. ‘그게 네놈의 패착이다, 겁쟁이 새끼야.’ 리프가 단탈리안을 비웃었다. 그가 생각했다. 만일 자기가 단탈리안이었다면 자경단이 없는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을 것이다.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의심암귀에 빠트렸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자그마치 일곱 마을――열두 마을에서 세 마을이 초토화됐고 두 마을이 배신했기에, 남은 마을은 일곱이었다――이 연합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물경 사백 명에 이르는 인간이 집합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드는 일도 없었으리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행군할 시 차례상 네 번째 관문에 해당하는 마을로, 리프가 모든 인간을 집결시켰다. 견고한 목책이 겹겹이 세워졌다. 해자 역할을 하는 구덩이까지 팠다. ‘이제 망치와 모루가 완벽해졌다!’ 망치는 칠십 명에 이르는 모험대-자경단. 전원 중장갑으로 무장했다. 고블린쯤이야 백 마리이든 이백 마리이든 두렵지 않았다. 망치의 핵심이 공격력에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모루는 사백 명에 이르는 마을사람. 장비가 형편없어도 그들에게는 굳건한 목책과 깊은 해자가 있었다. '모루가 적군을 방어해내는 사이에 망치가 기습한다'라는 작전의 핵심에 비추어볼 때, 사백 명의 인간-목책-해자는 충분한 방어력을 갖추었다. 고블린 사백 마리?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얼마든지 막아낸다! 리프가 목책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려 4중으로 된 목책은 웬만한 정규군조차 막아낼 것처럼 튼튼했다. 그는 뿌듯함과 흥분, 그리고 얼마간의 서글픔에 젖어들었다. “……다네프. 이제 네 복수를 할 수 있게 됐다.” 간악한 마왕에게 속아서 희생당한 마을 동료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복수의 다짐으로 지새웠던가. “마왕 단탈리안의 모가지를……우리 잘센 마을의 영정에 갖다바치마!” 리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날 새벽, 태양이 뜨기 전에 리프는 칠십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던전에 침입했다. 리프가 예상한 그대로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들은 마음껏 마왕방을 약탈하고, 어떠한 사상자도 내지 않은 채 유유히 던전에서 빠져나갔다. 리프가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이겼다!’ * * * “이겼다고 생각하겠지요.” 라우라가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주군, 얼마 전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아군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행동을 보여주되 그 행동이 쌓이고 중첩되어 이윽고 마지막에 가서는 한 덩어리의 계책으로 승화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라에 의해 레벨을 광업한 날, 내 흑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되는 대로 횡설수설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우라는 거기서 무언가 대단한 진리를 찾은 듯했다. “상대방은 잔뜩 방심했다가 최후에서야 그때까지 일어난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나,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주군께서는 그리 가르침을 베푸셨사옵니다. 소신 라우라 데 파르네세, 주군의 혜안에 감탄할 도리밖에 없나이다.”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크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뭐든지 드릴 테니, 제발――.” “엄마! 으아앙! 엄마! 엄마!” 아비규환. 수백 명에 이르는 인간이 역시 수백 명에 이르는 고블린에 의해 도륙되었다. 어떻게든 마을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향해 고블린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허벅지가 쑤셔지고, 팔뚝이 잘리고, 목덜미가 물리자 제아무리 힘쎈 장정이라도 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몸의 반쪽이 시체가 되어 사람들이 땅에 꼬꾸라졌다. 죽이는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소리와 환성이 동시에 이루었고, 대지에는 피가 개천을 이루었다. 나와 라우라는 마을 정문에 서서 인세의 지옥을 관람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용자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골렘과 고블린의 벽에 막혀 결국 오다가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다. 그들의 용기에 대가로 주어진 것은 흉악한 고블린의 이빨뿐이었다. 와그작, 와그작――거의 통뼈까지 씹어먹을 기세로 고블린 두세 마리가 시체 하나에 달라붙어 쉬지 않고 살점을 뜯었다. “모험대의 패배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사옵니다.” 라우라가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살점과 뼈가 씹히는 소리가 그녀에게는 새소리쯤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라. 어디서부터를 얘기하는 것이냐?” “모험대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마을을 핍박했을 때부터입니다. 모험대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지요. 그 결과 모험대에 참여한 인간과 모험대에 갈취당한 인간, 이렇게 인간이 두 부류로 갈렸습니다. 애시당초 내분이 생긴 것이옵니다.” 그것이 지금의 광경을 만들어냈다. 과연 네 겹의 목책 그리고 해자로 이루어진 방어선은 두터웠다. 설령 골렘 부대를 동원하더라도 해자에 걸려 쉽사리 돌진하지 못했을 터. 골렘의 돌파력이 상실된다면 믿을 것은 고블린밖에 없는데 사백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 대부대도 저만한 요새를 뚫기란 요원했다. 내 마왕군은 인간의 격렬한 대항에 돈좌했을 것이고, 리프 모험대가 돌아올 때까지 지지부진하게 공방전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왕군이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나 그러했다. 공방전은 지극히 쉬웠다. 우리는 고블린을 돌격시켰다. 몬스터 대부대가 목책에 당도했을 쯤――정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마을에 섞여들어간 소위 배신자들이 안에서부터 내응한 것이었다. ‘뭐, 뭐야!?’ ‘시발 왜 문이 열렸어!?’ ‘배신자가 있다!’ 수비측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을 두 개 인원에 달하는 인간들이 파르시를 선두로 하여 일구간의 목책을 점령했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놓여진 목책이었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유유히 정문까지 통과했다. 누가 배신자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맞서싸울지 도망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무리들로 순식간에 몬스터가 밀어닥쳤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할 수밖에. 강인한 산사람 사백 명――그중 백 명은 배신자였지만――이 지키는 요새였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전투가 빠르게 끝났다. “마왕 나으리이이! 하하!” 파르시가 마을 대로를 통해 걸어왔다. 그가 촌장으로 있는 마을의 인간들이 파르시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양쪽 팔뚝에 노끈을 묶었는데 그것이 고블린에게 '먹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들이 잔뜩 늙은 노인들을 줄줄이 끌었다. “보소! 이 늙은이들이 마왕 나으리한테 창을 겨눈 촌장들이외다. 마왕 나으리 집안의 재산에 관심이 다대하여 모험자 나부랭이한테 홀라당 넘어갔지. 우리 마을의 소중한 밀을 빼앗아간 천하의 후레 자식들이기도 하고 말이오! 개새끼들!” 파르시가 촌장들의 등을 빵 찼다. 촌장들은 노인답지 않게 몸이 강건했지만 팔이 묶인 상태로 등뒤가 차이자 맥없이 넘어졌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목청이 찢어지라 소리질렀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용서해주십소서!” “마귀, 마귀가 우리 눈에 끼었나이다! 감히 위대한 존재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파르시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 도끼나 창 따위로 촌장들의 등허리를 찔렀다. 날카로운 창날이 노인들의 가슴팍으로 튀어나왔다. 노인들은 피를 쏟아내며 머리를 땅 위 먼지 속으로 떨구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밤이 그들의 눈을 덮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진절머리 쳤다. “어리석다. 어찌 공생의 길을 버리고 멸망을 택했는가.” “심려치 마시옵소서. 주군의 자비심을 모욕한 이들에게 응분의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겠나이다.” 라우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한치 망설임 없이 참혹한 미래를 예언했다. “모든 것은 주군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들은 최후에서야 이때까지 일어난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할 것이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달을 것이옵니다.” 나는 가을의 산자락을 바라보듯이 피바다가 된 마을을 지켜보았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비명소리가 사라지는 데엔 아직 여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00055 E급 모험대 =========================================================================                             해가 중천을 지나 점점 서산에 몸을 뉘일 즈음해서, 모험대가 돌아왔다. 그들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구릉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고블린과 인간을 나누어서 서로 싸우는 것처럼 연출했다. 약 백 마리의 고블린들 뒤꿈치에다 노끈으로 짚단을 달아놓았는데, 그 덕택에 마치 대단히 치열한 전투라도 벌어지는 것마냥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먼지구름 속에서 인간은 예의 꽹과리 악기를 동원하여 군가를 부르짖었고, 고블린은 고함을 질렀다. 철과 철이 맞부닥치는 소리도 요란하게 울렸다. 라우라가 옷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말했다. “적들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한창 전투가 이루어지는 줄로 착각하겠지.” “허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나이다.” 내가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우라가 몬스터 부대에 명령을 하달했다. 나처럼 즉각적으로 명령을 전달하진 못했으나――내 경우, 던전에서 정식으로 구입한 골렘이나 요정에게는 마음속으로 명령할 수 있었다――그녀 나름대로 깃발 등을 사용하여 몬스터를 이끌었다. ─ 케르르륵! ─ 끼루, 끼루룩! 고블린들이 허겁지겁 마을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갑작스러운 적의 출현에 당황하여 후퇴하는 패잔병처럼. 미리 약속한 대로 인간들이 몬스터 부대를 득달같이 쫓았다. 나와 라우라는 마을 한켠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와아아아! 몬스터가 후퇴한다!” “놈들을 죽여라! 놈들을 잡아라!” 모험대 입장에서 보기에 전황은 다음과 같았다. 몬스터와 마을사람이 한창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양측이 치열하고 싸우는 와중, 몬스터 부대의 후방에 자신들이 등장했다. 몬스터 부대는 갑작스럽게 적의 원군이 출현한 것에 놀라 후퇴한다. “미끼를 물었군요.” 모험대-자경단 연합부대가 패주하는 고블린 부대를 향하여 돌격했다. 후퇴하는 도중의 군대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다. 모험대는 마을의 추격군과 함께 앞뒤로 몬스터 부대를 압박함으로써 전투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몬스터 부대는 후퇴하는 게 아니라 모험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몬스터를 추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도 실은 모험대를 공격할 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라우라와 내가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끝났습니다.” “끝났군.” 마을 앞 평원에서 고블린 부대와 모험대가 맞닥트렸다. * * * “크하하, 생각보다 마을 애들이 잘해주었어!” 마을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목격하자마자 리프는 주저없이 돌격 명령을 내렸다. 먼지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치열한 싸움이 이루어지는 게 틀림없었다. 시끄러운 소음, 고함, 비명, 모든 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의미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목책이 돌파당했다. 리프는 처음엔 마을이 불리한 상태에 놓였다고 생각했다. 마을측이 전멸하기 전에 얼른 합류하여 모루와 망치 작전을 실행할 속셈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부대가 움직이자마자 고블린들이 마을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백중지세!’ 마을은 불리하지 않았다. 목책이 돌파됐어도 여전히 마을 안쪽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 네 겹의 목책을 뚫느라 몬스터 부대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겠지. 그런 상황에서 리프가 이끄는 부대가 후방에 출현하자, 마왕군이 당황해서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상황이 바뀌었다. 마을이 모루가 되고 자신들이 망치가 될 필요가 없었다. 도리어 자신들이 모루가 되어 후퇴하는 고블린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마을사람들은 거대한 망치가 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고블린들의 후방을 때려친다! 리프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형님들, 보이오!? 고블린 자식들이 후장에 불 붙은 개새끼처럼 도망치고 있소!” “아아! 잘 보이고 말고!” “저 좇만한 애새끼들을 때려잡는 데엔 우리가 가진 창으로 충분하외다!” 모험자들과 자경단원들이 그렇다고 소리질렀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돌격 함성을 부르짖는 자도 있었다. 고블린 부대와 리프 부대, 양측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둘 사이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때부터는 악악 함성을 질러대는 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전투의 공포를 악으로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달리기가 심장을 가열했다. 함성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 순간, 모험대는 순식간에 진정한 의미에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죽자, 죽어버리자!” “흐웁! 흐웁! 흐웁!” “개새끼들 족쳐버려어억!” 고블린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와 함께 몬스터의 무시무시한 울음소리가 터졌다. ─ 끼르르르르륵! ─ 케룩! 케룩! 케르륵! 리프가 창끝을 앞으로 쑤욱 들이밀었다. 도시에서 모종의 자산가에게 후원 받아 마련한 창이었다. 단창보다 길고 장창보다 짧은 그것은, 비록 인간의 군대에 맞서기에는 다소 길이가 부족했으나 인간종보다 키가 한참 작은 고블린을 찔러죽이기엔 넘치고도 남았다. “거차아앙!” “우아아악! 뒈져불자!” “끼효오오옥――!” 리프의 거창 신호에 따라 부대원 전원이 창을 들었다. 근육질의 팔뚝, 고블린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신체, 통나무처럼 굵은 가슴팍과 허벅지가 창대를 굳건하게 지탱했다. 마침내 두 부대가 충돌했다. “끄아아아악!” 거대한 비명이 평야에 울려퍼졌다. 리프의 손아귀에 쿠웅, 하고 강한 진동이 전달되었다. 무려 두 마리의 고블린을 창끝으로 한꺼번에 꿰뚫었다. 손바닥이 아프게 쓸렸다.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럼에도 리프는 오른쪽 발에 힘을 꽉 주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쿠웅! 쿠웅! 하고 창대에 충격이 전해졌다. 불길에 날아오는 부나방처럼 멍청한 고블린 새끼들이 날카로운 창끝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죽여봐라, 씨바아알!” “돌격! 돌겨어억! 멈추지 마! 멈추지 마라!” “한스 개새끼야 계속 달리라고!” 모험대-자경단 연합부대는 움직이는 바위해안선 같았다. 고블린들이 쉴 새 없이 쿠웅! 쿠웅! 하고 밀어닥쳤지만 이내 바윗돌에 부닥친 거품처럼 나가떨어졌다. 고블린에게 중장보병의 거창 돌격은 기사단의 돌진만큼 위력적이었다. 고블린은 기껏해야 가죽 갑옷, 그것도 몸 대부분을 맨살로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에 인간들은 질 좋은 천갑옷을 입고 그 위에 사슬갑옷을 껴입었다. 비록 값비싼 사슬갑옷을 전신에 걸칠 순 없었지만 상반신과 허벅지는 제대로 방어했다. 몇몇 고블린이 창으로 이루어진 숲을 겨우 헤쳐나오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사슬갑옷 너머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가 어려었다. 운이 안 좋은 소수의 인간, 부대원 일흔세 명 중에 고작 여덟 명만이 돌격 과정에서 죽었다. 나머지 예순다섯 명의 중갑보병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달리기 속도가 완전히 죽어서 돌격이 멈출 즈음에는 벌써 백여 마리의 고블린이 한순간에 궤멸했다. “아그들아! 싸게싸게 붙어라악!” “혼자 나대지 말고 함께 싸워! 야! 한스! 너 이 새끼 죽을래!” 부대가 빠른 속도로 밀집 진형을 꾸렸다. 지나치게 흥분하여 멀리 돌격해버린 부대원은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승냥이떼한테 잡힌 사슴처럼 몸의 이곳저곳을 고블린 이빨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인원은 예순 명이었다. 그들은 방진을 짜서 침착하게 고블린들을 찔렀다. “크하하! 식은 죽 먹기라니까!” “호흡을 맞춰. 흐웁! 찌르고! 후읍! 거두고!” “흐웁! 흐우웁! 흐웁!” 평생 고블린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온 자경단이 특히 활약했다. 고블린에게 포위되지만 않으면 일단 큰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자경단원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게 돌격의 흥분이 약간 가라앉았을 때였다. “흐웁! 흐웁!……?” 모험대 간부인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끈덕지게 정면을 노려본 채로, 그가 옆에 서 함께 창을 휘두르고 있는 리프한테 말했다. “대장님! 흐웁! 뭔가 이상합니다!” “훕! 뭐 이 새끼야! 헛소리하지 말고 찔러!” “고블린이 너무 많습니다!” 고블린을 죽이는 데 모든 정신을 쏟아붓느라 그때까지 멈춰 있던 두뇌가 가동했다. ‘……고블린이 너무 많다고?’ 리프의 시선이 순간 넓어졌다. 눈앞으로 달려드는 고블린뿐만이 아니라 그 옆, 그 뒤, 그 너머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사내 말이 맞았다. 고블린이 지나치게 많았다. 1차 돌격에서 기백 마리를 죽였을 텐데도 녹색빛의 몬스터가 여전히 징그럽게 넘쳐났다. ‘잠깐만. 마을에서 공방전을 치르느라 숫자가 줄어들었어야 하는데?’ 어림짐작으로 대충 삼백 마리에 이르는 고블린이 있었다. 이상했다. 모험대와 맞붙기 전에 고블린 부대는 지난한 공성전을 벌였을 터. 사백 마리의 부대가 최소한 이백 마리 정도로 줄어야 했다. 무엇이지, 혹시 마왕 새끼가 더 많은 고블린을 동원했나, 몇 가지 생각이 뇌리에 스치는 순간에 동료들이 소리쳤다. “어이! 이거 이상해! 마을놈들이 왜 양옆으로 쏟아지는데!?” “고블린놈들 뒤쪽을 안 때리고 우리랑 합류하려나봐!” “저 겁쟁이 새끼들이!” 동료들은 우락부락 성을 내면서도 성실하게 창을 찌르고 빼기를 반복했다. 리프도 기계적으로 동작을 따라했다. 머릿속은 동료들이 소리지른 내용으로 가득했다. ‘마을놈들이 고블린 뒤쪽을 후려치지 않는다고?’ 리프가 고개를 빠르게 움직여 전장을 확인했다. 확실히 마을사람들이 고블린을 양옆으로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양쪽에서 마을사람들이 고블린 부대 그리고 모험대를 감싸안는 형국이었다. ‘육시랄? 뭐하자는 거야?’ 단독으로 고블린과 싸우기보다 이쪽 모험대와 함께 싸우고 싶어하는 것은 이해할 만했다. 모험대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니까. 하지만 지금 고블린은 마을사람을 향해 적나라하게 등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등을 내보인 사냥감을 굳이 때려잡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만큼 마을 놈들이 겁쟁이였는가? 그보다 고블린 새끼들은 패주하는 주제에 왜 이렇게 끈찔기게 싸워대는가. “……!” 리프가 깨달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지금 일어나는 기현상을 해명했다――마을 놈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씨팔!” 리프가 자기도 모르게 욕했다. 그랬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마을 놈들이 마왕군한테 들러붙었다. 고블린들은 후퇴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공격해오는 것이었고, 마을 놈들은 지금 모험대를 양옆으로 감싸려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여태까지 유리하다고만 여겨지던 상황이 돌연 정반대의 형태로 비추었다. 모루와 망치는 이쪽이 펼치는 게 아니었다. 고블린이 모루가 되어 모험대를 붙잡아둔 사이 마을 놈들이 망치가 되어……우리 모험대를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리프가 거의 비명 지르듯 외쳤다. “후퇴! 후퇴해! 후퇴!” “훕? 대장님, 후퇴라니 무슨…….” “잔말 말고 후퇴해! 씨발!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리프는 그대로 대열을 이탈하고 뒤로 달려갔다. 동료들이 비명을 질렀다. 리프를 욕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리프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다. 모험대는 함정에 빠졌다. 완벽하게. 허나 아직은 마을 놈들이 모험대를 감싸안지 못했다. 시간문제이긴 해도……아직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모험대는 정면의 고블린과 양익의 마을사람에게 포위되어 전멸해버릴 것이다. 그 전에 도망친다! “헉!”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리프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프를 따라 무작정 같이 도망쳐온 모험자들도 함께 발을 멈췄다. 그들도 슬슬 무언가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망치려던 모험대의 후방에는 약 백 명의 인간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다름아니라 리프가 배신자 마을이라고 여겼던 동쪽 끄트머리의 마을들. 두 개 마을 분의 인간들이었다.     00056 E급 모험대 =========================================================================                                  “…….” 리프는 물론 눈앞의 방해자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 몇 개 있긴 했다. 먼저 인간 백 명의 추격을 따돌리고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중갑을 입어 몸이 무겁다는 것. 방금까지 전투를 치르느라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 결국 자기가 죽을 확률이 무척 높다는 것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리프가 오른팔을 늘어놓았다. 창끝이 땅바닥에 툭, 하고 부딪쳤다. 전장의 흥분에 도취된 바람에 힘든지도 몰랐던 근육통이 슬금슬금 기어왔다. 온몸이 피로로 신음하고 있었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저기 있는 애새끼들은 뭐하는 놈들이라요!?” 모험자들이 리프 주변으로 달려왔다. 도망치라는 리프의 외침을 듣고 대열에서 부랴부랴 이탈해버린 자들이었다. 몇몇은 책임감 없이 전열을 망친 리프에게 욕지거리를 한바가지 퍼부었다. 리프가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불안과 초조가 섞인 눈동자들. 일부의 모험자가 빠져나오자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는, 중갑보병들의 전열. 그 사이로 뛰쳐나오는 고블린들. 핏물이 튀는 허공 너머로 수백 명의 인간들이 점점 더 조여오고 있었다. 리프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후방에는 고블린 대부대가, 양옆에는 마을사람들이, 눈앞에는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백 명의 인간이. “……방진.”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방진을 짜…….” “방진을 짜라!” 대장의 말을 알아들은 간부 사내가 외쳤다. 곧이어 명령이 퍼졌다. 삼십 명 남짓하는 모험자와 일부 자경단원이 리프를 중심으로 네모나게 진형을 짰다. 고블린들의 파상공세에 견디다 못해 전열을 이탈하고 도망쳐온 자경단원들도 끼어들었다. “싸게싸게 움직여!” “시발 이게 당최 뭔 난리여!” 무사히 방진(方陣)에 합류한 부대원은 그러나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동료들의 무책임한 도주로 인해 전열이 헝클어져 죽었다. 그들이 죽어가는 순간에 모험대 대장을 향해 내뱉은 저주의 말들을, 리프는 물론이고 부대원 전원이 들었다. “리프 개새끼야아!” “좇 같은, 끄에엑! 끄악!” 결국 부대원 절반이 전열을 사수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마른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바퀴벌레 같은 고블린 떼거리가 시체에 달라붙었다. 살점이 찢기었고 피가 낭자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방진이 완성되었으나 사기가 형편없었다. “대장님, 시방 뭔 난리라요……!” “마을 새끼들은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야! 언제까지 지켜볼 생각이냐고! 대장님!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에요, 전멸!” “형니이임!” 리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진 한 가운데에 리프와 마법사가 서 있었다. 마법사는 중갑보병 돌격 때도, 전열 공격 때도 부대 맨 뒤에 위치했기에 쉽게 방진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항상 다른 생각에 잠겨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았던 그녀도 지금만큼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이곳저곳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호구년이 마지막 희망이다.’ 리프가 이를 빠득 갈았다. 골렘을 상대시키려고 마법사는 고이 아껴두었다. 덕택에 마법사는 지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꽤 위력적인 마법을 부담없이 써재낄 수 있으리라. 그것을 '송곳'으로 삼는다. 포위망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향해 마법을 있는 대로 토해내게 만든다. 적군이 난데없는 마법의 향연에 혼이 싹 달아나면 그 틈새를 단박에 일점돌파한다. ‘육시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촉박했다. 벌써 고블린들이 들이닥쳤다. 당장은 튼튼한 방진에 막히고 있지만 고작 삼십오 명 정도가 이룬 진형이 길게 버틸 순 없었다. 되든 안 되든 밀어붙여야 했다. 리프가 마법사에게 물었다. “어이, 제일 크고 센 마법으로 준비할 수 있겠냐.” “으으응. 있긴 있는데 그거 가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긴 힘들걸.” 마법사가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양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일대일 전투는 특기여도 대군(對群)마법은 몰라서. 뭐어, 대군마법 자체가 5서클은 돼야 써먹을 수 있지만서도. 일단 그렇다고 알아둬.” “시발, 쓸데없는 군소리는 닥쳐. 얼른 준비나 해.” “이미 했어. 댁이 꽁지 빠진 개처럼 도망치다 멈췄을 때부터 미리 주문을 외워뒀는걸.” 리프가 놀라서 여인을 쳐다봤다. “이 빌어먹을 전투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듣는 희소식이군.” “하아암. 한수두수 앞을 내다보는 건 기본 소양이라구, 무식한 모험자 씨. 당신 같은 족속과 다르게 마법사는 조금 똑똑하거든. 그중에서 특히 나는 똑똑한 축에 속하지. 결론적으로 당신보다 나는 훨씬 더 똑똑해. 이거 중요하니까 밑줄 쫘악.” “제길.” 마법사 년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하고 리프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소모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눈동자를 번득거리면서 포위망 어느 부분이 가장 허약한지, 단 삼십여 명의 부대원으로 뚫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았다. 옆에서는 마법사가 끊임없이 흥얼거리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 나도 여기 몬스터를 이끄는 양반에겐 조오금 못 미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심리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용해먹네. 일부러 마을 두 군데를 모험대에 합류시키지 않은 건 그 마을들에 의심을 집중시키려는 책략이었어. 걔네들이 배신했으니까 합류하지 않는 거다, 하고 믿게 만든 거지.” 그녀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삶 속에서 드디어 흥미거리를 찾아내 흥분했다. 긴 속눈썹 뒤편에서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반대인데 말이지. 배신자라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합류해와서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노리겠지. 만일 네 개의 마을이 전부 모험대에 호응했으면 의심이 들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영리하게도 두 개의 마을은 합류시키고, 두 개의 마을은 잔류시켰어……헤에. 심리적이야. 무척 심리적이야.” “정신 사나우니까 닥쳐!” “당신이야말로 닥쳐. 입냄새가 나잖아. 입냄새가 너무 심해서 솔직히 당신이 인간인지 음식물쓰레기인지 헷갈릴 정도인걸. 그나저나 왜 골렘을 동원하고 있지 않을까? 그게 궁금해. 인간의 중갑보병은 물론 강력하지만 골렘으로 대응하면 충분할 텐데. 흐으응.” 리프가 여자 마법사의 입을 닥치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도저히 포위망의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병력이 세워져 있었다. 어림잡아서 인간만 이백 명……고블린은 삼백 마리가 훌쩍 넘었다. 그 와중에도 모험자가 한명한명 죽어나갔다. 어떤 부대원은 고블린 투석병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머리통이 깨졌다. “대장님! 더 이상 못 버텨요!” “혀, 형니임!” 드디어 그들도 양옆에서 다가오는 마을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군이 저렇게 살기등등할 리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입밖으로 뱉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리프는 이판사판 해보자는 식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아그들아! 마법이 터지자마자 저쪽으로 내달려라! 절대로 멈추지 말고, 누가 뒈져도 신경쓰지 말고 달려! 알았냐!” “예! 대장!” “쏴갈겨!” 리프가 여인한테 소리쳤다. 그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인이 땅바닥에 내리꽂은 지팡이 끝에서 검은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땅바닥에 마법진이 조그맣게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방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넓게 퍼졌다. “저주로 저주를 씻기리라.” 그녀가 마법을 발동하는 데엔 한 소절밖에 소요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열두 개의 불덩어리가 생겼다.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방향을 가리키자, 투석기에서 쏘아진 바위같이 불덩어리들이 튀어나갔다. 그 방향에 있던 고블린과 인간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어?”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 사람 몸체만한 불덩어리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가속도가 붙은 불줄기들이 쭉쭉 뻗어나갔다. 삼십 마리의 고블린과 열 명의 인간이 불살라졌다. 순간적으로 포위망 한곳이 엷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본능적으로 불길을 두려워하는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골에 살며 평생 마법을 본 적 없는 인간들도 크게 당황했다. 그들에게 마법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리프가 포효했다. “우아아아악!” 그는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곧장 내달렸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대원들도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스물다섯 명으로 줄어든 전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러대며 오직 한 방향으로 뛰었다. “크아아아!” 마법에 당황하지 않고 용감하게 모험대를 막아서는 인간도 있었다. 그런 작자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리프는 자동적으로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들었고, 길목을 막아선 인간한테 던졌다. 손도끼가 빙글빙글 날아 상대방의 이마에 푸욱, 하고 명중했다. 상대는 목뼈가 꺾어지면서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그 시체 위를 스물다섯 명의 부대원이 우르르 밟고 지나갔다. “씨이이발 한번 죽지 두번 죽냐!” “뒈져! 뒈져어억!” 진형 따윈 없었다. 막무가내였다. 그저 경험과 본능만이 살아움직였다. 그들은 팔이 가는 대로 창을 휘둘렀고, 동료와 협동했으며, 눈앞의 몬스터와 인간을 처죽였다. 마법사 또한 자기 재량에 따라 불덩어리를 만들어내 가장 위협이 되는 방해물을 향해 쏘았다. 앞으로, 그들은 꾸역꾸역 앞으로 뛰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대원이 한 명, 또 한 명 스러졌다. 마법은 제대로 공포심리를 일으켰지만 병력에서 지나치게 밀렸다. 투석병이 던진 돌멩이에 등뼈가 바스라져서, 고블린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넘어져서, 상대편 인간들이 내지른 창끝에 팔뚝이 째여서, 수없이 다양한 이유로 인해 부대원들이 쓰러졌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동료의 죽음을 밟고 포위망을 뚫어낸 이도 있었다. 인의 장벽을 뚫고 나왔을 때 생존자는 고작 세 명이었다. 리프, 마법사 그리고 간부인 사내.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나고도 한참 달려나갔다. 뒤편에 있는 몬스터와 인간이 언제라도 자신들을 쫓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 * * “놀랍군. 마법사를 고용했을 줄이야.”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세계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보통 마법사는 여러 세대를 거쳐서 체내에 가문의 비기를 축적했고, 그에 따라 강력한 마법을 발휘했다. 한 명의 쓸만한 마법사가 탄생하려면 수 세대에 이르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라우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적군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은 온전히 소신의 실책이옵니다.” “짐이라고 어찌 마법사의 존재를 파악했겠는가? 상대방이 예상 외의 한 수를 숨겨두었을 따름이라. 그대는 지나치게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마을 아래의 평원을 가리켰다. “도망쳤다 하나 고작 세 명에 불과하다. 아니, 이젠 두 명으로 줄었군.” 멀리서 세 사람 중 한 명이 마침 쓰러졌다. 고블린이 쏘아낸 돌멩이에 맞은 모양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얼른 근처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도망치는 데 숲속이 유리하기 때문이리라. “네 겹의 목책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함락시켰다. 삼백에 이르는 인간을 도륙했다. 두 명을 제외하고 중갑보병대 전원을 몰살했다. 이것이 대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평원에서 몬스터와 인간이 함성을 질렀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저녁하늘만큼이나 대지가 빨갛게 물들었고, 그 지상에 선 쪽은 적이 아니라 우리였다. 심지어 내 직속 부하인 골렘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라우라. 짐은 그대가 부하인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그녀를 손수 일으켜세웠다. 진심이었다. 이 놀라운 전적을 겨우 열여섯 살 소녀가 해냈다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이번 전투를 통해 그녀가 바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임을 증명했고, 내 전적인 신뢰를 얻어냈다. 몸을 일으켰는데도 라우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약하게, 아주 약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랬다. 십 년 후에 철혈의 재상이 될 운명이었다 해도 지금의 그녀는 영락한 귀족영애였고, 얼마 전까지 성노예로 취급받은 여자였고, 일생토록 군대를 이끌어본 적 없는 소녀였다. 중압감이 있었으리라. 내 믿음에 보답하고자 참았으리라. 표현하지 않고 심장 한구석에 묻었으리라.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 한꺼번에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밀려온 것 아닐까. 그렇기에 단 두 명을 놓쳤는데도 내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을까. 내가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했습니다, 라우라. 정말로 잘했어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대가 무릎을 꿇을 일이 없도록 하라.” 라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예. 나의 주군이시여.” 그녀는 웃고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힌 채로. 다섯 마을이 연합하고 칠십 명의 모험자-자경단원으로 이루어진 E급 모험대의 침략은, 우리 마왕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00057 E급 모험대 =========================================================================                              * * * “헉……허억, 헉…….” 리프는 숨이 목청까지 차올랐다. 태어나서 이렇게 달려본 적이 언제 있었을까. 어릴 적 산골짜기에서 나무를 할 때 승냥이를 마주쳐서 죽도록 도망쳤을 때, 그러니까 수십 년 전의 곰팡이내 나는 기억을 떠올려야 할 만큼 리프는 있는 힘껏 달렸다. 숲속 깊은 곳으로, 더 깊숙한 곳으로. “이쯤이면 될 거 같네.” 리프와 대조적으로 마법사는 여유로웠다. 몇 마리 쫓아오던 고블린도 그녀가 처리했다. “허억!” 그 말을 듣자마자 리프가 풀숲에 주저앉았다. 거의 구르다시피 땅에 누웠다. 나무뿌리와 돌멩이가 섞여서 바닥이 울퉁불퉁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심장이 부풀다 못해 터지려 했다. 아랫배가 칼에 날카롭게 째인듯 아팠다. 달리기 박자를 지키지 못한 탓이었다. “쯧쯧쯧. 남자가 칠칠치 못하게. 이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우월하다니까.” “히끅……흐억, 헉…….”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제일 열등하고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지.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중간쯤에 위치할 수 있는데, 적어도 여자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보다는 한결 낫거든. 옛다.” 여인이 낚싯대를 드리우듯 지팡이를 리프의 얼굴 위에 갖다댔다. 그녀가 조그맣게 뭐라고 속삭이자 지팡이 끝에서 물줄기가 내렸다. “아. 입 벌리려무나. 아.” “우프픕……퍼흡.” “옳지 잘한다. 거 입 뻥긋하는 게 꼭 붕어새끼 같네.” 리프가 힘없이 손을 저었다. 여인은 손짓이 뭘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오 초 정도 계속 물을 퍼부었다. 하지만 손짓 이상의 반응이 없자 시시해졌는지 쳇, 하고 지팡이를 거두었다. ─ 매앰, 매앰, 매애앰. 막바지 매미 소리가 숲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리프는 의식이 아득했다. 평형 감각이 흐릿했고, 머리가 뜨거운 증기로 들이찬 것 같아 어지러웠다. 옆에서 여인이 계속해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마신 덕분일까, 느릿느릿하게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여인의 재잘거림이 인식됐다. “처음부터야. 처음부터 전투의 양상에 대해 다르게 판단했어. 어이, 대장 양반. 댁은 마왕성을 공략해서 함락시켜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봤지?” “허억……그야, 당연하지…….” “그래. 그랬겠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대에게 마왕성이란 애시당초 그런 물건이니까. 반대편에게도 마찬가지야. 마왕에게 마왕성이란 공략을 당하지 않고 지켜야만 하는 것, 뭐 그쯤 되겠지. 하지만 말이지. 단탈리안 그놈은 달랐어!” 그녀가 흥분해서 빠르게 속닥거렸다. “모험대가 마왕성에 집착할 때, 단탈리안은 마왕성 너머를 쳐다봤어. 바로 모험대를 말이야. 모험대만 쓰러트릴 수 있으면 어디서 싸우든 별로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지. 깔깔, 인식의 차이라고 할까. 생각의 수준이라고 할까. 애시당초 나무꾼 출신 따위가 감당할 만한 적수가 아니었네.” “개쌍년이…….” 리프가 힘없이 이를 물었다. “생각의 수준 좋아하시네. 시벌, 마왕 새끼는 그냥 겁쟁이라 지한테 불리한 전장에서 도망친 거에 불과해.” “얼씨구.” “봐라, 덕분에 우리는 마왕 새끼의 금화를 털어버릴 수 있었지. 내 몫을 제외하고는 다들 뒈져버리는 바람에 허공으로 날려버렸지만……아무튼 그놈은 머저리 쫄보 새끼다.” “절씨구.” 여인이 뚱뚱한 파리라도 보듯이 짜게 식은 눈으로 리프를 내려다봤다. “이래서 남자는 안 돼. 상대방이 잘나서 패배한 게 아니라 자기가 실수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걸. 야, 대갈통이라곤 세숫바가지로밖에 못 쓰는 밥팅아. 자기가 불리한 전장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가 유리한 전장을 선택한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 쯔쯧. 게다가 내 마법이 없었으면 마왕성 금고도 못 열었을 새끼가 입만 뚫려 갖고는.”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리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녀가 주변의 전나무처럼 쭈욱 기지개를 폈다. “응. 오랜만에 바깥 공기 좀 쐬니까 상쾌하네. 적어도 오늘만큼은 나도 상쾌한 말, 바른 말만 쓰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건 좀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도 항상 우아하게 바른 말만 쓰면서 살고 싶어. 사실은 그래. 오랜만에 멋진 전략을 봐서 기분이 좋아.” “…….” 리프는 지금까지 마법사를 머릿속이 꽃밭인 호구라고 여겼다. 그는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방은 끊임없이 수다스럽게 대화했으며, 심각하게도 딱히 대화 상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잣말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험대의 패착은 거슬러 올라가면 딴 마을들을 괜히 약탈한 거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 전투에서 마을들이 주요 전장이 되리라 예상치 못한 탓이고, 그건 결국 마왕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지. 흠, 지금 생각해보니까 고블린들을 주력으로 삼은 이유도 대충 알겠어.” “으구구.” 리프가 힘겹게 일어섰다. 가만히 놔두면 여인이 언제까지고 복기를 명분으로 떠들 것 같았다. 대충 정신머리가 돌아왔으니 혹시 추격조가 올 것을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쳐야 했다. “이 전투가 끝나고나면 산맥에서 사는 인간마을이 겨우 일곱 개 정도로 줄어들잖아. 게다가 일곱 마을은 전부 단탈리안에게 복종한, 말하자면 단탈리안의 아군이라고. 이렇게 되면 인간에 비해 고블린 개체수가 너무 많아져. 일곱 마을을 다 합쳐봤자 삼백 명 정도에 불과할 텐데, 고블린들은 전사의 숫자만 해도 사백 마리. 승부가 안 되지.” 단탈리안은 의도적으로 고블린의 숫자를 줄이려고 애썼다.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모험대가 당장의 전투를 좁은 시야로 바라보는 와중에 단탈리안은 한 수, 두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어. 심지어 몬스터와 인간 간의 생태계까지 신경 쓰다니! 깔깔, 정말이지. 일개 모험자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그래. 그래. 마왕 새끼께서는 겁나게 잘나셨고, 너는 더 잘나셨다. 잘난 년놈들끼리 서로 똥꼬나 빨고 있으시라고. 난 먼저 간다.” “응?” 리프가 터덜터덜 숲길을 걸어갔다. 우선 꽤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 위치를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정상에서 지리를 파악하고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걷다보면 며칠 안으로 도시에 도착할 터. ‘씨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가.’ 이번 전투로 인해 리프는 동향 출신의 동료 모험자를 깡그리 잃었다.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내장을 까맣게 물들이며 번져 올라왔다. ‘아니다, 아직 아니야. 지금은 딴 생각하지 말고 도시로 귀환하는 거에 집중한다.’ 다른 생각에 빠지고도 살아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산맥이란 공간은 우습지 않았다. 나무꾼인 리프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단 지옥과 같은 전쟁터에서 생존한 것을 감사하자, 나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민하자, 그래도 늦지 않는다, 리프가 그리 다짐하면서 걸어갔다. “야. 어디 가?” 등 뒤에서 여인의 볼맨소리가 들렸다. 리프가 수풀에 침을 뱉었다. “어디 가긴 썅. 지랄맞은 산맥에서 나갈 거다.” “흐응? 너 나가면 안 되는데.” 여인이 길게 콧소리를 냈다. “좋아. 기분이다. 오늘은 기분도 좋고 하니. 며칠 동안 함께 다닌 정도 없지는 않고……어이. 무식한 나무꾼 자식아. 거기서 다섯 발자국 이상 움직이지 마라.” “예이예이. 아주 자알 나셨습니다요. 따라오려면 네 마음대로…….” “나는 다섯 발자국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였다. ─ 싹둑.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가던 리프의 발목이 '무언가'에 잘렸다. “……어?” 리프가 맥없이 넘어졌다. 꼴불견 사납게 엎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갑자기 오른쪽 발목 아래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왼발과 양손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낙법을 펼쳤다. “어? 크흥? 웬 힘이…….” 전쟁터의 피로가 뒤늦게 밀려왔나, 하고 리프가 인상을 썼다.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려 시도했다. 그러나 오른쪽 발목과 발바닥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바닥이 대지를 굳건하게 밟아 온몸을 지탱하는 감각도, 뒤꿈치부터 종아리로 전달되는 근육의 긴장도, 아무것도. “씨발, 이게 무슨.” “난 분명히 경고했어.”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프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이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히죽 웃고 있었다. “인간들 대부분이 귀를 가졌는데도 이상하게 그 귀가 뇌까지 이어진 경우는 얼마 없단 말이지.” “썅, 네 년이 장난친 거냐?” 리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으르렁거렸다. “당장 원상복귀 해둬라. 안 그러면 그 잘난 머리팍이 도끼날 구경하는 줄 알어.” “흐응. 난 당당한 놈이 좋긴 한데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애송이까지 좋아하진 않아서. 패배한 개가 월월 짖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더라. 뭐, 기분이야. 이번에도 친절하게 미리 말해줄게. 존댓말 써.” “개후라질 년이 어디서 되도 않는 수작질을――.”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오른손 검지를 휘둘렀다. ─ 싹둑. 또 다시 무언가가 허리를 지나갔다, 하고 리프가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별안간 바닥에 뒹굴었다. 종아리, 허벅지, 허리까지 하반신 전체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어? 어?” 아픔이나 고통이 없었다. 단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하반신이 아예 사라진 것처럼. “아우, 역시 나한텐 이게 적성이 맞는다니까. 존나 평생 배워본 적도 없는 사대원소 마법 쓰느라 대가리 터지는 줄 알았네. 좇 같은 사대원소 마법 같으니! 애새끼들이 낭만을 몰라, 낭만을. 응? 옛날에는 사대원소 마법은 마법 취급도 안 했어.” “……개 씨발 호구 썅년, 지금 뭔 짓거리를 처짓거리 한 거냐.” “영혼을 잘랐지.” 여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세히 설명해봤자 쌀벌레 같은 두뇌로는 절대 못 알아먹으니까 대충 그렇게 알아둬. 지금 네 자식의 하반신은 죽어 있어. 반죽음 시체지.” “너 이 년, 대체…….” “그래 그래. 우리 애새끼, 궁금한 거 많지?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까짓 거 다 말해줄게.” 땅바닥에 누운 리프를 향해 여인이 허리를 구부렸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한 번만 말해줄 거니까 잘 들어. 뒈지기 전에 너 새끼만큼 내 친절을 받은 새끼가 달리 없어요. 자아. 나는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이고요, 파이몬 빠돌이 정박아 새끼가 단탈리안한테 괜히 헛짓거리 하는 게 눈구녕에 띄었고요, 혹시 단탈리안이 좇 될까봐 몰래 도와주려고 했고요, 인간으로 둔갑한 다음 너 새끼한테 일부러 접근했고요, 다행히 넌 내가 호구인 줄 알고 덥썩 미끼를 문 호구였고요.” “뭐? 마왕? 무슨.” “의외로 단탈리안이 잘 싸워서 등장할 차례가 없었고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마왕 후배 만나서 지금 기분이 참 좋고요, 사자가 새끼 무럭무럭 자라라고 벼랑에다 처넣듯이 나도 앞으로 그럴까 생각 중이고요, 이 기회에 마왕 같지도 않은 별 쓰레기들을 단탈리안한테 청소해주라고 부탁할 생각이고요. 됐지? 다 말했다.” 잠깐――하고 리프가 손을 들었다. 여인,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싫어. 내가 존댓말 쓰라고 했지, 썅놈아.” 바르바토스의 검지손가락이 장난스럽게 까닥거렸다. 약한 바람과 비슷한 것이 이마를 관통하는 것을 리프는 느꼈다. 그것이 끝이었다. 리프는 무언가를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죽음이었다. “끄으으읏.” 바르바토스가 일어서서 허리운동을 했다. 목운동까지 끝마치고, 그녀가 리프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흐음. 어떻게 단탈리안 애기한테 힌트를 준담.” 그녀가 턱을 괴고 고민했다. 한참 뒤에 아, 하고 그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여인은 자신을 천재라고 노래하면서 리프의 가슴팍에 모종의 문양을 새겼다. 그녀는 문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시체 주변에 짐승과 벌레를 쫓는 마법을 풀어놓았다. “좋아. 완벽해. 오늘따라 기분 좋은 일만 생기는군. 이런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만 있어도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시발.”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걸음걸이로 숲속을 향해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여인의 모습은 곧 숲의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매앰, 맴, 매애앰. 시체를 둘러싼 전나무 숲에는 매미소리만 무성했다.      00058 ending no.02 =========================================================================                        이번 편과 다음 편은 if 외전입니다. 베드엔딩을 혐오하는 분은 건너뛰어도 무관합니다. ======================================================== 엔딩 조건 1. 라피스 라줄리의 호감도가 30 이하일 것. 2. 단탈리안의 악명이 150 이상일 것. . . . 제국력 1506년 1월 22일 아침. 그러니까 21일이어도 23일이어도 아무 상관없고, 심지어 12월이어도 2월이어도 상관없는 어느 하루였다. 다만 그날은 눈이 내렸다. 폭설이었다. 비가 오듯 눈이 내렸다. 마차 바퀴가 눈에 파묻혔고, 마차꾼들은 웬만큼 비싼 품삯을 제시받지 않는 이상 손님을 태우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리란 보장이 없수.” 웬만큼 비싼 품삯을 제시받고도 마차꾼이 꼭 그렇게 말했다. 그는 몸집으로 눈과 바람을 막고 파이프담배에 불을 붙였다. “흠, 이 정도 폭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구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작년까진 아니지만 재작년에도 이만한 눈이 내렸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마차꾼도 손님도 '태어나서 처음 본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즉 그건 '엄청', '무진장', '매우'라는 부사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관없네.” 털옷을 뒤집어쓴 소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테네브리스 오페라 극장까지!” “끄응. 알겠수다.” 마차꾼이 말들에게 씌운 거적때기를 벗겼다. 이런 날에는 마차꾼도 여유롭게 파이프담배를 피면서 좀 쉬고 싶었다. 하얀 눈이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고, 따라서 신께서, 적어도 천사가 뿌리는 것 아니겠는가? 거기에 어떤 거대한 의도가 숨겨져 있으리라. 그런 의도에 반해서 마차 따위나 몰다니 여간 불경한 짓이 아니고 뭔가!……. 마차꾼은 아내 몰래 창관에도 자주 갔고 그럴 기회만 있다면 얼마든지 바람을 피울 용의가 있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이 성실한 신자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세금과 함께 공동체의 세금도 지불했으며, 마차꾼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선기금에 기부도 했다. 그는 자기를 잘난 인간으로 정당화할 근거 몇 가지를 갖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마차꾼에게도 자기 삶을 정당화하는 데엔 세 가지 이상의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디 부잣집 딸내미가 외유라도 나가려나보지.’ 마차꾼이 손님을 힐끗 봤다. 털옷에 달린 모자에 얼굴이 가렸다. 그러나 털옷과 장갑의 고급스러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가씨는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호신용으로 유행하는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는데, 그녀가 검술교습을 받을 정도로 유복한 가문의 딸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검술까지 배워야 할 정도로 지켜야 할 무언가가 많다는 뜻이었다. ‘흥! 부자들이란. 어차피 인생에 아무 쓰잘데기나 없는 오페라나 보지 않겠어.’ 마차가 눈 덮인 도시를 가로질렀다. 모든 것이 느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느렸다. 마차가 느렸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렸다. 짐승이 다니는 길처럼 좁다란 길목,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놓은 길목으로 사람들이 외투를 스치며 오갔다. 거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유하는 모닥불도 느리게 넘실거렸다. 그들이 이따금 길게 내뿜는 입김이 느리게 올라갔다. 지붕과 지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느렸다. “…….” 소녀는 손님석에 앉아――손님석이 바깥으로 노출된 종류의 마차였다――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느린 것들을 눈동자에 담았다. 차가운 공기를 내장까지 옮기려는 듯 그녀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분홍빛의 작은 입술로 숨결이 들어갔다. 소녀는 병을 가지고 깨달음을 실행했던 한 수도승을 생각하고 있었다. 폭설에도 극장이 사람들로 붐비었다. 오늘 도시에서 돌아다니는 마차란 마차는 전부 여기 모였다. 오페라에는 한창 이름값을 올리는 배우가 출연했다. 더군다나 초연이었다. 귀족, 명망 높은 시민, 상인, 상류층에 새끼발가락 하나쯤 걸친 사람들은 몽땅 몰려왔다. 누군가 소개해서 왔다고 초대장을 내밀면 안내인들이 입에 한가득 미소를 띄우고, 하지만 초대장이 제대로 된 것인가 눈으로 예의주시하며 맞이했다. 안내인 중 한 명이 소녀를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소녀의 외투와 장갑 그리고 구두를 확인하여 그녀가 틀림없이 상류층이라고 판단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늘 각별한 공연을 한다지.” 신분 높은 여자가 갖고 있는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소녀가 말했다. “<단식광대의 묘기>를 보러 왔네.” “……!” 안내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프로답게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묘기>를 보러온 사람치고 소녀가 지나치게 어렸으므로 놀랐지만, 이 정도 나이 아가씨들이 호기심에 못 이겨 찾아오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다. 안내인이 아까 전보다 한껏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금일 저희 극장에 행차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영광이라는 겐가.” “예? 아, 저…….” 소녀가 코웃음쳤다. 어서 안내나 하라는 의미로 그녀가 손을 저었다. 안내원은 오랜만에 받아본 모욕적인 언사――이곳 오페라의 안내원은 남 부러울 것 없는 직업이었다――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결코 상대방의 심기를 거슬릴 만한 표정이나 몸짓을 드러내지 않았다. <묘기>를 관람하는 손님은 전원 상류층 중에서도 상류층, 귀족 중에서도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내원이 소녀를 극장 안쪽으로 인도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로비를 지나, 고용인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통로를 걸었다. 그 끄트머리에 철문이 있었다. 안내원이 열쇠로 문을 열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즐거운 관람 되시기를.” 안내원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철문이 쿠웅, 하고 닫혔다. 계단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마광석들이 줄줄이 박혀 빛을 발했다. 연한 푸른색을 내뿜는 것이 최고급 마광석임에 분명했다. ‘돈낭비로다.’ 저 돌덩이 하나를 팔아 수백 명에게 몇 끼를 대접할 수 있었다. 소녀가 오페라 극장의 존재, 그것을 보러온 사람들, 그들이 옷에 치장한 장식들, 마침내 자신이 입은 털옷을 역겨워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여우의 겨드랑이 털만 가지고 제작한 외투라 했던가. 자신의 방에서 가장 값싼 겨울옷을 챙겨온 것인데도 너무나 사치스러웠다. “어서오십시오. 각하.” 계단 끝.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신사가 소녀를 맞이했다. 그는 지배인으로서 이 극장의 표면적인 오페라가 아니라 뒷편의 공연을 담당하고 있었다. “저희 극장에 찾아주셔서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이곳 사람들은 죄다 같은 말밖에 할 줄 모르는군.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나 알고 무한한 영광을 느끼는 것인가?” “물론이옵니다.” 신사가 소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소녀의 장갑에 입을 맞추었다. “에바트리에 백작 각하.” “흥.” 소녀가 입 끝을 일그러트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전통에 따라 왕실의 일원한테 작위를 부여했다. 황자와 황녀는 각자 태어난 순서대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대부분 실제 영지는 없고 이름뿐인 작위였으나, 황제의 아들딸이 아니라 제국 귀족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중에서 에바트리에 백작은 대대로 제국의 두 번째 황녀에게 주어지는 칭호. 소녀는 대륙에 세 개밖에 없는 제국의 황녀였다. “내가 오늘 이곳에 왔음을 아무도 몰라야 할 것이야.” “이를 말씀이옵니까, 백작 각하.” “자네에게는 지금부터 오 년 동안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지배인이 침을 삼켰다. 황실의 그림자에 대해선 그도 얼핏 들은 적 있었다. 백 년 전에 비해 위세도 국력도 하찮을 정도로 몰락해버린 황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구가하는 까닭은, 소위 그림자들이 암약하기 때문이라고. 황실에 대립하는 귀족, 왕정제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 이교도적인 주장을 펼치는 사제, 그들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곤 한다는 사실을 지배인은 잘 알았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우습구나. 무엇을 명심한다는 게냐?” “…….” “한심한 것.” 소녀가 작게 혀를 찼다. 만일 지배인이 현명했다면 소녀가 '지금부터'라고 한 말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지금부터'를 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명심하겠다느니 따위처럼 간접적으로나마 그림자의 존재를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배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자기를 안내했으면 그만이다. ‘두 달 안에 죽겠군.’ 소녀는 경험상 이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자가 두 달 넘도록 그림자의 시험을 통과하기란 무척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한심한 것, 하고 말함으로써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지배인이 고민하도록 계기를 쥐어준 게 소녀의 마지막 자비였다. 지배인이 아리송해하는 낯빛을 보아하니 그 자비심조차 쓸모없는 것 같았지만. “안내하거라.” “예, 각하. 외투를 저에게.” 소녀가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로 넘겼다. 그 순간, 이십오 년 동안 귀족가의 아가씨들을 무수히 많이 본 지배인이 감탄했다. 지배인은 성공한 남자가 으레 그러하듯 몇 가지 지적인 이유로 인해 여자라는 인종을 경멸하고 있었고, 얼마간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싫증까지 나 있었다. 그러나 지배인은 완벽한 미(美)가 현실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색,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모자로부터 흘러나왔다. 자칫 병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은색이 소녀에게는 아름다운 장신구에 불과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소녀의 눈동자에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은 짙은 속눈썹 때문에 까맣게까지 보였다. 찻물처럼 눈이 깊으면서도 동시에 투명했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약간의 경멸을 담고 지배인을 쳐다보았고, 마치 누군가가 한번 발견한 과학법칙을 새로이 또 발견할 필요는 없다는 듯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 눈과 여린 입술 사이에서 숨길 수 없는 생기가 날뛰고 있었다. 분명히 과잉된 힘이 그녀의 표정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그것을 표정으로, 즉 세세한 눈짓과 입술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본능과 이성의 완전무결한 조화가 그곳에 있었다. 은색 머리카락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핏줄을 상징했다. 이 머리색을 지키기 위해 황실에서 근친상간이 수시로 이어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지배인은 소문을 진실이라 믿었고, 여태까지 그딴 짓거리를 자행하는 황실을 미치광이 소굴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 정도 머리카락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안내하라 그랬더니 내 얼굴이 뚫릴 지경이구나.” “헛! 죄, 죄송합니다. 당장 모시겠습니다, 각하.” “쯧.” 황녀는 지배인이 생존할 기간을 두 달에서 보름으로 줄였다. 황녀를 따르는 그림자들은 대개 성미가 급했다. 그중에는 황녀의 열렬한 추종자도 있었는데, 그자는 황녀에게 반한 사람을 살려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배인이 안내한 곳은 유리로 이루어진 객실이었다.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만 바깥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유리방이었다. 방안에는 최고급 소파가 놓여져 있었고, 언제 준비했는지 탁자 위의 홍차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참고로 침대도 있었다. 침대가 왜 있는지 바로 깨달은 황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썹을 찡그린 모습조차 대가가 절묘하게 포착해낸 명화와 같았다. 지배인은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면서――이것은 지배인이 앞으로 살아남을 기간이 보름에서 이틀로 줄어들었음을 의미했지만, 지배인 본인은 결코 알지 못했다――저토록 완전무결하게 얼굴 표정을 제어하는 것에 또 한번 감탄하고 말았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탁자 위의 마석을 만져주십시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백작 각하.” 지배인이 문을 닫고 나갔다. “후우.” 소녀는 소파에 앉았다. 겨울날 공기에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서서히 풀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벽 너머, 또 다른 유리벽이 있었다. 옆방이었다. 지금 황녀가 들어간 유리방과 똑같은 객실이 수십 개 있었다. 그속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지 상상하자, 황녀는 가벼운 구역질에 시달렸다. 그만큼 오늘 공연이 인기 있다는 뜻이겠지. ‘하긴 나도 그에 끌려왔음이 아닌가.’ 황녀가 자조했다. 그녀는 조용히 소파에 몸을 묻혔다. 잠시 후, 객실 전체를 비추던 마광석들이 일제히 암전했다. 어디에선가 지배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늘 공연을 보러와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녀는 그같은 말에 귀를 열지 않았다.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윽고 지겨운 인삿말이 끝나자, 모든 객실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구조 지어진 무대가 밝혀졌다. 그곳으로 한 남자가 끌려나왔다. 남자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말랐지만 탄탄한 몸을 지녔다. 그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소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단탈리안, 서열 제71위의 마왕이었다.     00059 ending no.02 =========================================================================                          “…….” 황녀가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뒤통수에 자그맣게 나 있는 뿔이 없었다면 평범한 사내로 여겼을지 몰랐다. 무대 위에서 남자는 채찍질을 맞았고, 조교사들에게 범해졌다. 몬스터의 잔혹무도한 제왕이 한낱 인간 남성에게 뒷구멍이 뚫리는 광경은 과연 뭇 귀족 영애의 여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살결이 하얗고 몸이 호리호리하여 보는 맛이 있었다. 마왕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간드러져서 또한 일품이었다. 이같은 쇼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평생 제왕학을 공부해온 황녀는 냉정하게 상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있었다. 제도(帝都) 최고위 귀족만이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공연'은 여기 오페라극장에서만 열리지 않았다. 제국의 상류층은 도덕적으로 끝없이 타락했고, 풍요하지만 지루한 일상을 자극할 만한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극장주들은 귀족의 후원과 돈을 얻기 위하여 앞다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곳은 마왕이 비역질을 당한다, 라는 선전문구를 앞세워서 최근 인기를 석권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마왕만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프, 인어, 세이렌, 고위요정 등 노예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종족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들은 난교나 고문을 당하다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손님에게 초이스된 것이었다. 쇼를 구경할 수 있을뿐더러 즉석에서 원하는 종족과 성교――혹은 그보다 더한 무언가――할 수 있다는 것이 이곳 오페라 극장의 인기 요소라고 했던가. “유리아. 그대라면 이 공연을 돈 주고 보겠는가?” 아무도 없을 터인 유리객실에서 황녀가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황녀가 재차 말했다. “대답해보거라. 명령이다.” “……백작 각하.” 한 여인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희 그림자에겐 입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인데 어찌 입이 없겠는가.” “……이렇게 그림자와 사적으로 얘기를 나누시는 것은 각하께도, 또한 저희 그림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생기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칫 각하께서 저희를 냉정하게 잘라버리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흐응, 하고 황녀가 여인을 바라보았다. “유리아.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말이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는가?” 유리아라 불린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소녀. 네 살에 고대제국어를 터득했고, 다섯 살에 고대공화국어에 능통했고, 일곱 살에 현존하는 모든 기하학에 통달했으며, 열 살에 제도의 학술원 전원에게 '건국 이래 황실 제일의 천재'라고 찬사 받았다. 열여섯 살인 현재 4서클 마법사이자 3급 검사이며 동시에 제도학술원 명예회원으로서 문무양도(文武兩道), 지용겸비(智勇兼備), 출장입상(出將入相),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제국 황실의 괴물. 엘리자베트 아타나시아 에바트리에 폰 합스부르크. 이미 백작의 작위를 앞세워 궁정회의에 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자기 세력을 일궈냈다. 썩어빠질 대로 썩어빠진 제국이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지사가 소수나마 남았고, 그들은 여지없이 엘리자베트 황녀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황녀파'라 불리었다. 작금에 이르러 황녀파 없이는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를 암살한 것도 황녀 전하의 계략이라는 소문이 있지.’ 황실에는 네 명의 황자와 세 명의 황녀가 있었다. 그중 엘리자베트 황녀는 제3황녀였다. 언니들이 어릴 적에 폐병으로 죽었고, 세 번째 오라비와 친동생이 차례대로 죽었다. 세 번째 오라비는 갑작스러운 전염병에 걸려서, 세 번째 오라비는, 네 번째 황자이자 친동생은 사냥 도중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서. 오라비들의 죽음에 엘리자베트 황녀가 깊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한때 떠돌았다. 평소 건강했던 제3황자가 그렇게 갑작스레 병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뿐더러, 황족들이 주로 다니는 숲에서 미노타우르스 같은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엘리자베트 황녀의 황위 계승권이 두 단계나 올라갔으니 이게 전부 그녀의 계책 아니었겠는가. 음모론에서 그렇게 떠들었다. 하지만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엘리자베트 황녀는――고작 열세 살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황녀는 어릴 적부터 도덕적으로 완벽했다. 부모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그녀의 인덕은 유명했다. 저잣거리의 창부에게도 비웃음 당하는 제국 황실이었지만, 그런 뒷담화가 오갈 때마다 ‘하지만 황녀 님은 예외이지’라는 단서가 꼭 붙었다. 독보적인 천재에다가 자신만의 세력이 강력하다. 도덕적으로 완벽하여 학자와 민중의 전적인 지지를 받는다. 결정적으로, 그녀 외에 다른 황위계승권자인 제1황자와 제2황자는 인간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황녀가 황위계승후보 제3위에 불과하지만……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이들은 모두 그녀가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황제에 등극할 거라고 점쳤다. 만일 그녀가 아무런 수법도 쓰지 않는다면 신민들 스스로 봉기하여 그녀를 여황으로 떠받치리라. “…….” 유리아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황녀가 사사로운 정에 발목을 붙잡히는 장면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황녀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되었다. 그대가 지키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유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각하.” “용서한다. 그보다 내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구나. 그대라면 돈을 주고 이 공연을 기꺼이 관람하겠느냐고 물었다.” “저에게는 다른 이가 강간 당하는 광경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가 없습니다.” “흠. 그대는 세상만사에 호기심을 느끼는 마법사 아닌가. 자그마치 마왕이 비역질하는 모습이란 적지 않게 구미에 당길 텐데.” ……그리 말씀하시는 백작 각하께서도 4서클 마법사이지요. 속마음을 삼키고 유리아가 말했다. “각하께서 오늘 공연을 보신다 하셨기에 저 개인적으로 마왕 단탈리안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호오.” 황녀가 흥미롭다는 표시를 내보였다. 유리아가 머릿속으로 정보를 취합했다. 어떻게 얘기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순식간에 판단했다. “마왕이나 되는 자가 인간에게 쉽게 잡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왕은 몬스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자신의 마왕성에 틀어박혀 요새를 구축하므로 포획하기가 극도로 힘듭니다. 즉.” “저 마왕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얘기이렷다.” “그렇습니다.” 황녀가 한 모금 홍차를 마셨다. 이야기를 듣겠으니 계속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유리아는 그림자로서 너무 수다스럽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 천재 황녀의 마음을 꺾기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호감을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유리아는 7서클 고위 마법사였지만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었다. 마족의 혼혈만큼 인간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족속이 따로 없었다. 황녀에게 잘 보이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그녀가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해나갔다. “제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마왕 단탈리안은 어리석게도 직접 인간의 도시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도시였다고 하더군요.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탈리안은 그 도시의 노예시장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노예시장에?” “예.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사실입니다만…….” 유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비웃음이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노예 한 명을 탈출시키고자 노예시장을 습격했습니다.” “성노예? 지금 성노예라 했느냐?” “예. 각하, 혹시 파르네세 가문을 아십니까?”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한때 사르데냐 왕국을 양분하던 공작가 아닌가.” “파르네세 가문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식들이 있었습니다. 수국전쟁에서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하자, 그중 둘째 영애가 성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하여 마왕 단탈리안이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황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멍청하군. 제왕이 고작 성노예 한 명을 위해 거동했다니.”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로 우둔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왕은 국가와 도시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의 대적. 정체가 들키면 성히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을 텐데도 가볍게 움직였다. 본인이야 자기 나름대로 신변보호에 신경을 썼다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저렇게 잡혀서 한낱 극장의 볼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마왕의 어리석음을 증명한다. 흐응, 정말로 납득할 수 없구나.” 황녀가 입가를 쓰다듬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녀가 물었다. “혹시 파르네세의 영애가 그토록 절세미인이라 하던가? 마왕이 마음이 동하여 움직일 정도로?” “각하께서 궁금해하실 줄 감히 짐작하고.” 유리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며칠 전에 직접 파르네세 영애를 보고왔습니다.” “오호.” 황녀가 작게 감탄했다. 단지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눈앞의 여인은 기본적인 정치를 할 줄 알았다. 기본적인 정치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알아채고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보력과 지력이 필요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인맥과 행동력이 필요했다. 정치란 정보력, 지력, 인맥, 행동력의 싸움이었다. ‘그림자로 썩혀두기엔 아까운 인재로군.’ 황녀는 신민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녀를 아니꼽게 여기는 세력도 많았다. 대표주자가 제1황자와 제2황자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암살자를 파견했다. 그림자들 사이에서는 황녀의 수비를 맡는 것을 가장 기피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어나가기 일쑤였으니까. 아무리 그림자들 개개인의 실력이 높다 할지라도 제1황자와 제2황자가 보내오는 암살자의 실력 또한 가공할 만했고, 결국 피로 피를 씻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황녀가 생각했다. 이 마법사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야겠다고. 여인은 암투의 희생양으로 내버려두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황녀는 인재를 아끼고 사랑했다. 유리아는 자기가 점수를 얻었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말했다. “파르네세 영애 역시 제도의 고급창관에 묶여 있었지요. 과연 그녀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뽐냈습니다! 각하께 제 진심을 말씀해드리자면, 저는 각하를 뵙고 다시는 다른 여자의 미모에 감탄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유리아가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제 믿음이 며칠 전에 깨지고 말았음을 고백하겠습니다. 파르네세 영애는 각하의 옆에 놓여도 아주 빛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갖추었습니다.” “마왕이 이성을 잃고 행동할 만했다 이거로군.” “예. 제왕이 한낱 미색에 이끌려 패망한 것이 확실히 한심합니다만……그같이 한심한 짓거리를 벌인 제왕이 역사에도 여럿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마왕 단탈리안은 전무후무한 멍청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황녀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흥미가 식었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왕이 몬스터와 소통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왔다. 혹시 앞으로 거사를 벌이는 데 있어 마왕이란 자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었지. 몬스터의 조력을 얻는다면 내가 그리는 거국적인 그림에 큰 이득이 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또한, 보거라. 저 자의 얼굴을.” 황녀가 유리벽 너머의 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서 마왕이 조교사의 육봉에 박히고 있었다. 형편없는 신음소리가 마법도구에 의해 증폭되어 유리방까지 울렸다. “모든 희망을 잃은 표정이지 않은가? 절망에 지치고 패배한 자의 얼굴이다. 나는 희망을 모르는 자를 내 휘하에 두고 싶지 않다. 그자가 여색 때문에 신세를 망친 자라면 더더욱이나 그러하지.”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 하고 황녀가 유리방에서 나갔다.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유리아가 투명마법을 시전했다. 유리아는 유리방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번 무대 위의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고통과 신음으로 절여진, 평범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저 역시 반은 마족이니까 당신을 도울 사명이 있지만……당신처럼 멍청한 자를 주군으로 모시기는 싫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조금 더 나은 분을 따르려 합니다.’ 유리아가 미련없이 방에서 나갔다. 텅 빈 유리객실에는 그후로도 한동안 남자의 연약한 신음이 울려퍼졌다. ─ Ending no.02(Bad Ending): <극장의 인기 아이돌★>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이번 엔딩에 라피스의 호감도가 제한으로 걸린 까닭은, 단탈리안이 노예시장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라피스의 호감도가 높으면 라피스가 단탈리안을 도와주고, 호감도가 낮으면 도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본편과 달리 단탈리안은 노예시장에서 도망치는 데 실패했습니다. 00060 두 개의 음모 =========================================================================                          어느 날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 “…….” 라우라와 내가 굳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본다고 할까. 다른 곳으로 미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움직이려 해도 근육이 돌이 되버린양 꼼짝하지 않았다. 황당함, 경악, 놀라움, 자괴감, 부끄러움, 질척한 감정이 밑물과 썰물처럼 오갔다. 단순히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런 뻘쭘함을 느낄 이유가 없겠지. 즉 라우라와 나는 지금 단순히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알몸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잠깐. 일단 변명해두자.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하게 생겨난 사건이었다. 나에겐 유일한 가신(家臣)의 나체를 훔쳐보겠다는 파렴치한 목적 따위 전혀 없었다. 설령 라우라가 아주 아름답고, 가끔씩 그녀에게 두근거리거나 성욕이 치밀어올랐다 해도, 솔직히 말해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 그랬다 할지라도, 어거지 써서 알몸을 볼 의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맹세할 수 있다. 그녀는 내 신하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지 않은가. 당연히 의사를 존중받아야 한다. 부하랍시고 마음대로 부려먹는다면 그야말로 쓰레기 폭군, 신하에게 등 뒤를 찔려도 변명할 거리 따위 하나 없겠지. 누가 폭군을 진심으로 따르겠는가.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도 라우라는 소중하게 지켜야 했다. 아니, 무엇보다 라우라는 고작 열여섯 살이다! 원래 세계로 따질 경우 이제 중학교 3학년……나는 어린애를 탐하는 취미가 없다, 정말이다……. 나의 더없는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던전 시설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성에는 목욕시설이 전무했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나한테도 딱히 목욕이 필요없었다. 땀과 같은 노폐물이 아예 나지 않았으니까. 마왕이 된 이후 나는 음식을 먹을 필요도 씻을 필요도 사라졌다. 잠은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무척 편리했다. 내가 음식을 먹거나 몸을 씻는 이유는 오로지 일종의 사치를 부리고 싶어서였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 밤새도록 우리 마왕군이 앞으로 걸어갈 행보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기분을 전환할 겸 던전의 지하연못으로 향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지하연못은 물이 맑았고 해충이나 수중생물이 살지 않았다. 마력이 지나치게 고여서 그러는 거라는데 여하간 목욕하기에 딱 좋았다. 어디에서 굴러떨어졌는지 물 속에는 마광석들이 있어, 연못 바닥에서부터 수면까지 파란 빛무리가 연하게 올라왔다. 마광석이 발하는 열 때문에 수중온도가 딱 적당히 따뜻했다. 푸른 빛깔의 연못에 뛰어들어 수영하면서 샘 주위에 자라난 종유석을 느긋하게 구경하노라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극락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신비하고 기분 좋은 체험을 즐길 수 있었다. 푸른 연못이 보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왠지 모르게 신이 나서 얼른 옷을 벗어버린 나를 누가 탓하리오――. 그리고 연못가에 다가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중에서 퐈아! 하고 라우라가 올라왔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그러나 물밑에서 비쳐오는 파란 빛무리가 여자아이의 나신을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드러냈다. 라우라의 긴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나는 굳어버렸다. 냉철한 두뇌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내 머릿속에 기거하는, 벌레 같은 자아들이 현재 사태를 두고 제각기 소리높여 의견을 개진했다. 리프의 모험대를 맞이했을 때와 버금가는 속도로 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라우라는 여기서 목욕을 하고 있었어.’ ‘아무리 천재라도 신체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그야 목욕할 필요가 있지.’ ‘어떻게 맨날 피부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나 싶었더니 매일 씻고 있었구나…….’ ‘멍청한 새끼! 지금 그딴 걸 생각할 때냐! 위급 상황, 긴급 상황이라고! 당장 데프콘 2단계를 발동해야 한단 말이다!’ ‘하긴 던전에 딱히 목욕시설이 없어. 생각해보면 인간인 라우라를 배려하지 못했네. 이제부터라도 인간들을 위한 시설을 고려하는 것이 어때.’ ‘내 생각으로는……일단 잠자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잖아? 이 기회에 마음껏 즐기자고.’ ‘잠깐만. 지금 의견이 너무 중구난방이야. 선택지는 세 가지야. 도망치거나, 변명하거나, 이대로 같이 목욕하거나.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 번째 선택지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하겠어. 이 의견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여주지 말아줘.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니까.’ ‘이제서야 네놈들이 전부 병신 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군. 닥치고 그럴듯한 변명부터 생각해내. 상대방은 자그마치 공작 영애라고, 무식한 놈들아. 네놈들이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태평하게 살다와서 얼마나 이 세계에 무식한지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흠, 회의 도중에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얘기들이 죄다 월월! 왈왈! 깨갱깨갱! 정도로 들린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군.’ ‘월월! 왈왈! 깨갱깨갱!’ ‘좋아. 우리들이 대체로 개새끼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겠어.’ ‘그거 최근 들어 들은 소식 중에 가장 희소식이네!’ ‘이건 그냥 감상에 불과한데 말이야. 우리 지금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라우라의 알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감각이 병신이 아니라면 대충 1분 정도 흘렀어. 축하해. 결국 세 가지 선택 중에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최악의 선택지, 그냥 가만히 서 있는다를 선택했군. 나 자신의 멍청함에 대해선 더 이상 감탄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다시피 훌륭하리 만치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었다. 관념적인 존재자끼리 의사소통을 시킨다는 점에서 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신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얘기이겠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 “…….” 라우라의 나신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완만한 곡선을 따라 푸른 빛이 비추었다. 비 내린 날의 수국 같은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열여섯 살인데도 불구하고 라우라의 몸은 소녀의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벌써부터 제대로 굴곡이 져 있었다. 새하얀 살결이 별미였다. 눈빛 살결은 적당히 근육이 붙어 탄력이 있었다. 그런 탱탱한 피부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슬그머니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주군.” 라우라가 이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올수록 수면 위로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다시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부푼 엉덩이, 그 아래로 어릴 적부터 승마에 의해 단련된 것임에 분명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탄탄하게 이어졌다. 소녀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연못의 빛에 언뜻 비추었다. 마침내 라우라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살짝 파인 쇄골에 물이 고여 있었다. 소녀의 몸에서 물이 작디작은 실개천을 그으면서 미끄러졌다. 유두, 손끝, 엉덩이에서 방울져 떨어져서는 동굴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물기에 막 젖은 소녀의 향기가……물씬 풍겨왔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주군.” 자그맣게 열린 입술 사이로 또 한 번 빗물 내음이 새어나왔다. 코가 아니라 귀로 맡는 향기였다. 종유석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라우라의 목소리가 동굴벽을 때리고 더더욱 낮게 퍼지었다. 방금 들린 것은 종유석 물소리였던가, 아니면 내가 침을 삼킨 소리였던가. 고요와 긴장 속에서 라우라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주군도 목욕하러 온 것인가?” 엥?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여기는 물이 좋다. 눈도 즐겁고 몸도 즐겁다. 과연 주군이 마음에 들어할 만하다.” 라우라는 소녀답게 비명을 지르지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뺨따귀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로 기쁜 듯이 싱글벙글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군한테 이곳을 알려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숨겨진 명소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섭섭하지만 주군과 마음이 통한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하다. 후후.” “어……아…….” 이 무슨 절호의 기회인가. 그때까지 시끌벅적 떠들어대던 자의식 애벌래들이 한 목소리로 한 마음으로 합창했다. ‘물타기를 시전해라!’ 지금껏 나온 어떤 의견보다 유효하고 적절했다. 라우라는 내게 알몸을 보인 것과 내 알몸을 본 것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왜인지 몰라도 아무튼 나에게는 구원과 같은 반응이었다. 내가 말을 더듬거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알몸 같은 것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는 듯이. “마, 맞습니다. 오늘따라 뭔가 깨끗해지고 싶어서.”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다! 목욕은 영혼의 세탁. 몸이 깨끗해지면 마음도 저절로 깨끗해지지. 모험대를 무찌르고 인근 마을을 복속한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기에 적시이다.” “그렇습니다. 저, 전쟁이란 단순히 싸움의 반복이 아니지요.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우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주군의 말씀은 한마디한마디가 금과옥조로 삼을 만하다.” “하하하. 과찬입니다…….” “주군은 지금부터 목욕할 생각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이 풀릴 모양이었다. 눈보신은 눈보신대로 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으니 최선의 결과가 나왔다. 안심하는 나를 향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그럼 소녀와 함께 목욕하는 것은 어떠한가.” 네? * * * 쿤쿠스카 상회 제2급 사무마이자 단탈리안의 전담원, 라피스 라줄리. 그녀는 최근 들어서 할 일이 부쩍 늘어났다. 일단 제2급 사무마로 승진했다. 제4급에서 단번에 제2급으로 올라가자,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출세가도에 들어섰다면서 놀랐다. 이에 따라 온갖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접근, 다시 말해 인사와 청탁과 권유로 얼룩진 추파가 그녀에게 던져졌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관심없습니다.” 라피스는 모든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과 자원을 단 한 가지 일에 쏟아부었다. 즉, 단탈리안을 보좌하는 일에. 그녀는 단탈리안이 앞으로 상회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리라 확신했다. 라피스의 독단이 아니었다. 쿤쿠스카 상회 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가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진 사건은 단연 모험대-자경단 연합부대와 단탈리안이 맞붙은 일이었다. 라우라도 단탈리안도 더 이상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긴 전투에 더 미련을 둘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라피스는 생각이 달랐다. ‘일개 하급 모험자들이 중장갑을 갖추다니 믿기 어려운 일.’ 단탈리안이 모사꾼이고 라우라가 책사라면, 라피스는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녀는 전투의 상세한 원리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도 전투 바깥의 분야에 대해서 누구보다 능통했다. 식량은 어떻게 배급할 것이고, 병참은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무장과 병력은 어디서 동원할 것인가 등등. ‘사슬갑옷, 그것도 네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갑옷. 인간계의 평민이 장만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모험대와 자경단에 지급된 무장은 값비쌌다. 그들이 가진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단탈리안 전하의 얘기를 듣자하니 리프는 옛날에 마왕성에서 200골드 가량의 돈을 약탈했다. 거금이긴 해도 칠십 명이 넘는 부대 전원에게 튼튼한 사슬갑옷과 잘 버려진 강철창을 지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을사람들에게 단탈리안을 배신하라고 부채질하면서 리프가 뇌물을 동원한 것이 밝혀졌다. 대략 백 골드. 즉 리프의 수중에는 최대 백 골드의 돈만 남아 있었다. 이걸로는 도저히 중갑보병을 준비할 수 없었다. ‘뒤가 의심스러워.’ 라피스는 혹시 모험대의 대장이라는 작자가 은행에서 거액의 사채를 빌려쓴 것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철저한 조사 끝에 리프가 어디에서 돈을 빌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유력자나 영주가 후원해준 것 같지도 않았다.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리프는 어디서 거금을 마련했다는 말인가? ‘분명히 모종의 인물 혹은 세력이 모험대를 도와줬어. 하지만 대체 누가……?’ 라피스가 전용 탁자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다.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는 그녀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그녀의 분홍색 양갈래 머리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라줄리 님.” “말씀하세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라피스가 말했다. 별 볼 일 아닌 일로 자신의 업무를 방해했다가는 응당의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그런 압박감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라피스는 절대영도의 무표정 상관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 모험대 대장의 시체가 있지 않습니까. 숲속에서 발견된…….” 자세한 조사를 위해 라피스는 단탈리안으로부터 몇몇 모험자의 시체를 양도받았다. 자그마한 증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서.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게 저기, 정말 곤란한데 말이지요…….” 직원이 우물쭈물거렸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본론은 간단히. 결과는 간결하게.”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받지요. 리프의 시체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직원이 울상을 지었다. “그 인간의 가슴팍에 검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마법적인 각인입니다.” “마법적인 각인?”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녀는 그것이 어쩌면 배후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될지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냉정한 눈초리로 직원을 쳐다보았다. “어떤 각인입니까?” “그러니까……그게……서열 제68위 마왕 전하인 벨리알 님의 징표였습니다…….” 라피스는 누군가가 쿵, 하고 머리를 친 것만 같았다. 불길한 전율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단탈리안 전하를 적대하는 자의 배후에 다른 마왕이 있어!’    ============================ 작품 후기 ============================   00061 두 개의 음모 =========================================================================                         * * *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연못가에 몸을 담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에서 라우라가 푸른 물살을 부드럽게 헤엄쳤다. 수영법 중에 가장 멋없다는 평영이었는데, 라우라가 하니까 그렇게 우아할 수 없었다. 하얀 팔뚝이 수면을 갈랐다. 그녀가 만드는 잔물결이 천천히 이쪽까지 퍼져와 이내 나의 가슴에 닿았다. “후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니, 불가항력적이었다……목욕하러 왔다고 말해놓고 갑자기 안 하겠다며 거절할 수도 없었고, 자기가 목욕하겠다는데 하지 말라고 명령하거나 부탁하기도 뭣했다.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라우라와 나는 서로 알몸인 채로 연못에 들어왔다. 한점의 흑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그 증거로, 지금 하복부의 우람찬 존슨 님께서 절찬리에 존재감을 과시하시는 중이었다.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가라앉아라…….’ 니블헤임에서 창관에 들린 이후 한 번도 성욕을 풀지 못했다. 자위조차도. 리프의 모험대를 깨부수느라 한가하게 그거나 만지작거릴 겨를이 없었다. 사실 오늘 아침 연못에 온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선 마음껏 자위를 해도 괜찮겠다 싶다는 것이었다. 그놈이 아침부터 탱탱하게 달아올라서 ‘새끼야! 만져! 날 만지라고!’ 하고 비명을 지르는 통에 어찌 버틸까. 마왕방에서 하자니 입구가 훤히 뚫려 있어――다름아니라 옛날에 리프 녀석이 출입문을 도끼로 쳐부수었다――라우라가 불쑥 찾아올까 무섭고, 대충 아무 동굴 끝자락에 숨어서 하자니 영 볼품이 없고. 지하연못의 운치를 즐기고 성욕도 풀 겸해서 여기 왔더니 이럴 수가, 호랑이굴에 제 발로 기어든 꼴이었다. 그나저나 라우라, 몸매가 참 매끈하다. 턱선에서 쇄골, 가녀린 어깨, 유연한 등,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마침내 발꿈치까지 이어지는 곡선이 매끄럽다. 군살 하나 없는 허리에는 갈비뼈들이 보일락 말락 언뜻 드러났다. 푸른 빛무리가 사랑스러운 배에 어렴풋하게 머물렀다. 저게 이른바 슬렌더 형인가. 살결은 틀림없이 탱탱하면서도 부드럽겠지. “……!” 시선이 마주쳤다. 가장 깊어 보이는 못 정중앙에서 라우라가 수영을 멈추었고, 바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물 탓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라우라가 가늘게 눈을 뜨면서 살풋 웃었다. 저편에서 인어처럼 물을 가르는 것은 파르네세 공작영애라든지 천재 전략가가 아니었다. 한 명의 여자아이였다. 더 정확하게는 여자아이의 젖은 육체였다. 자그마한 육체가 내게 다가와, 살짝 기대었다. “주군도 오늘부터 아침마다 수영을 하는 건 어떠한가.” 그녀가 하얀 숨결을 내뱉었다. “으음. 그럴까요?” “운동이 된다. 균형 있게 몸을 다듬는 데도 좋다. 봐라.” 하고 라우라가 일어섰다. 약하게 물방울을 튀기면서 그녀의 몸이 수면 바깥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약간 자랑이 담긴 목소리로 허리를 앞뒤로 비틀면서 내게 자신의 신체를 보여주었다. “소녀는 가문에 있던 시절 승마를 즐겨했다. 가문이 몰락한 이후에는 제대로 된 운동을 하지 못했지. 하지만 수영과 함께 주기적으로 운동하니 금세 근육이 돌아왔다.” “확실히 탄력적으로 보이네요. 만져봐도 좋습니까?” “물론이다.” 그녀의 허리에 손바닥을 갖다댔다. 물기, 미끄러움, 피부의 감촉이 손바닥에 쓸려왔다. 약간의 마찰과 얼마간의 부드러움을 느끼면서 나는 손을 위아래로 짧게, 천천히 놀렸다. 위쪽에 있는 가슴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아래쪽에 있는 둔부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짧게, 천천히, 기계적으로. 그리고 그녀의 적당한 근육에 놀란 것처럼 탄성했다. “호, 과연. 딱 좋네요. 자랑할 만합니다.” “그런가?” 라우라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발간 입술 너머로 작은 이빨이 가지런하게 자라나 있었다. “너무 근육이 많아도 너무 근육이 적어도 보기 싫다. 소녀는 이 수준의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군이 칭찬해주니 지금까지 노력한 게 보상을 받은 듯하군. 솔직히 기쁘다.” “무얼요. 다 라우라가 노력한 건데요.” “흠, 주군은 심리에 통달했는데도 이런 일에 무지하군. 본래 몸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이가 봐주었을 때 비로소 완벽해진다. 나에게 주군의 칭찬만큼 기쁜 것은 없다. 주군이 허언을 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눈앞에 오직 소녀의 하얀 살결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살을 만졌다. 하지만 이 이상 오래 만지면 이상하게 여겨진다. 근육을 확인하는 것 이외의 목적이 있다는 게 들켜버린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손바닥으로 그녀의 피부를 유독 크게 쓰다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손끝으로 아주 살짝 엉덩이 주변을 스치면서. “으으응.” 라우라가 기지개를 켰다. 등허리가 활처럼 굽었다. 그녀의 풋가슴이 앞으로 부각되어 나왔다. 등쪽의 탄탄한 긴장과 가슴쪽의 살덩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손을 갖다대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작은 몸집에 내 것을 쑤셔넣으면, 정말로 전부 터져버릴 것 같았다. “…….” 어떤 소리를 내면서 터질까. 어떤 신음일까. 기분 좋은 듯 미소 짓는 그녀의 표정은 어떻게 일그러질까. 기품으로 세련되게 채색된 그녀의 목소리는 어떻게 망가질까. “으응, 그럼 소녀는 이만 나가보겠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주군 덕분에 꽤 오랫동안 운동했으니 말이다.” 다시 방긋 웃고 라우라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발이 어디론가 떠날 채비가 되었는지 막 물결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 손목을 잡아서 잡아당겼다. “아?” 바로 품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떠받쳤기에 갑자기 뒤로 자빠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내 몸에 닿았다. 라우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봤다. “주군?” 나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작은 체구. 그녀의 잿빛 눈동자에 고스란히 내 얼굴이 담겼다. “무슨 일인가?” “우리가 처음 나눈 대화가 떠오르는군요. 그때 라우라가 질문했었지요. 기억하나요?” 그녀의 갸느다란 턱이 움직였다. “어찌 잊겠는가. 그 시선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그렇게 질문했었다.” “맞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질문하고 싶네요. 지금 제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리고 곧 다시 작아졌다. 아, 하고 라우라가 말했다. 어쩌면 말이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서로 닿았다. 어긋나지 않도록, 가볍게 달라 붙었다. “응……응…….” 가벼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숨소리를 주고받았다. 나는 혀를 넣어 그녀의 잇몸을 핥았다. 살짝 놀란 듯 라우라가 아, 하고 소리냈다. 그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혀를 집어넣었다. “으읍……응, 아……으응, 으으응…….” 라우라가 입가에 타액을 흘렸다. 천천히 목덜미로. 혀끝이 목을 미끄럽게 흝자 라우라의 소리가 약해졌다. “후읏……하으.” 목덜미인데도 감도가 좋았다. 문득, 그녀가 성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감각이 개발된 것일까……. 불쾌하거나 혐오스럽지는 전혀 않았다. 단지 몸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나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내 손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올라갔다. “흐읏.” 입술과 혀, 콧등으로 목덜미를 애무했다. 손으로는 천천히 조급하지 않고 가슴을 만졌다. 만진다고 해야 할까, 문지른다고 해야 할까. 손바닥에서 가슴으로 열을 전달하는 느낌으로 어루만졌다. 손가락과 손사락 사이로 유두가 스쳤다. “응, 응……으응, 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이 되었는지 라우라의 신음에 열이 섞이기 시작했다. “간지럽습니까?”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라우라가 부끄러운 듯 말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렇게는, 아니다.” “다행이군요.” “응, 아……아읏…….” 내가 쇄골을 핥고 손을 움직이자 우리 주변으로 물결이 퍼져나갔다. 물소리가 찰랑거렸다. 라우라가 두 팔로 내 등을 꾸욱 감았다. 이쪽에 온전히 몸을 내맡긴다는 것. 나는 애무에 박차를 가했다. “흐읏……앗, 아……으으응……주군…….”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아서……흐응……주군이 뜨거워서…….” 문장이 헝클어졌다.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장난기가 더 샘솟았다. “글쎄요. 뜨거운 건 라우라인 것 같은데요.” “그런 말은……얄궂다, 흣, 주군이…….” “그럼 더 입맞추겠습니다.” 쇄골이 그리는 골짜기에 혀를 뻗었다. 물맛이 느껴졌다. 아까 헤엄치다 우연히 쇄골의 도랑에 들어가버린 물이겠지. 그것을 핥았다. 살냄새가 강하게 올라왔다. “꺄읏……응, 하아, 하응…….” 그와 함께 손가락 사이로 유두가 들어가는 경우도 잦아졌다. 어쩌다 걸린 것처럼 검지와 중지가 유두 끄트머리를 스치었다. 라우라의 헐떡임이 조금 더 빨라졌다. 손을 조금 더 아래로. 적당히 탱탱한 복근을 쓰다듬으면서 꼭 아래쪽을 정찰하려는 듯 하복부를 오갔다. “아…….” 라우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내 손끝이 그곳의 끝자락에 닿았다. 혹시라도 긴장이 되돌아오면 안 되었다. 쇄골에서 입을 떼어 귓가에 대었다. 내가 속삭였다. “무섭습니까.” “무서운 게, 읏!” 라우라의 턱이 젖혔다. 그녀의 귀에 혀가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귓바퀴를 핥았고 귓볼을 깨물었다. 일부러 숨결을 과장되게 불어넣었다. “으응! 흐응! 아, 안 된다, 이건…….” “이건? 이건 뭡니까?” “이, 이상……앗.”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다는 얘기일까. 속으로 웃으면서 유두를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너무 강하게 잡아당기지 않고 집게손가락으로 콩을 굴리는 것처럼 유두를 만졌다. “아, 아……! 주군……아앙…….” 귀에는 내 숨결소리와 침소리, 아래에는 그녀의 성역을 두리번거리는 손길. 가슴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쾌감이. 아마 그녀는 정신이 없겠지. 성노예로서 받은 교육은 결국은 폭력적인 종류였을 거다. 지금처럼 감각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깨워주는 손길은, 귀한 집안의 영애에게 처음 겪는 일이리라. 귓바퀴를 삼켰다. “아? 아아……?” 자그마한 귀가 입안에 들어왔다. 그 오돌토돌한 느낌을 즐기면서, 약하게 물었다. 라우라의 턱이 또 한번 꺾였다. 목덜미에 닭살이 돋아났다. 그녀는 꽤 잘 느끼는 편이었다. 유두를 괴롭히는 손이 격해질수록,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매만질수록, 내 등을 껴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모든 신체에서 힘이 빠져나가 팔에만 집중되는 것 같았다.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 이번에는 혀로 유두를 핥았다. “흐아, 흐으읏……주군……하응, 주군…….” “여기가 질척질척하네요.” 클리토리스 부근을 애무했을 뿐인데도 손가락이 미끌거렸다. 연못의 물과는 확연히 다른 점성. 아직 손가락을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커널링구스나 손가락 삽입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내가 다소 야비하게 웃었다. “이제보니 야했군요, 라우라.” “아니다!……그, 그건 주군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유두를 꽉 문질러주었다. “으읏! 으으으……하아아……앗, 하앙……으으…….” 가운데 손가락 세 개를 붙여서 클리토리스를 애무했다. 우리 두 사람의 몸 주변으로 물결이 계속 첨벙거렸다. 물결이 강해질수록 내 손도 빨라졌다. 클리토리스를 애무하는 척하면서 그녀의 성기 입구를 문질렀다. 입구에서 조금 안쪽을. “햐읏!” 옥타브가 하나 올라갔다. “주군, 거긴, 하윽……거긴, 안 돼…….” 질척질척했다. 입구 안쪽을 상하로 계속 문질렀다. 수중인데도 불구하고, 액체가 질질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잔뜩 흐르는군요.” “아아아아…….” 추욱 젖은 눈초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군이 나쁘다.” “…….” 키스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했다. “응, 으읍……읍…….” 혀와 혀가 뒤섞였다. 아까 전엔 수동적으로 농락당하기만 하던 라우라의 혀가 이리저리 얽혀들었다. 입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가슴과 국부를 쓰다듬는 손을 더 격렬하게 했다. “……! 으으으읍!?” 위아래로 질의 가장 바깥쪽 벽을 쓰다듬었다. 빠르게. 나에게 입이 막힌 라우라는 속절없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등이 활처럼 휘었다. 첫 번째로 간 것이었다. “으읍! 으으읏, 흐으으읏……!” 오르가즘은 길지 않았다. 등이 천천히 펴졌다. “응, 으읍, 으으응, 하, 하응…….” 혀를 뗐다. 그녀의 입과 내 혀 사이에 침으로 된 아치가 길게 늘어졌다. “라우라. 예쁩니다.” “…….” 라우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00062 두 개의 음모 =========================================================================                        할 말이 없어졌는지 라우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예쁘다는 소리 따위 공작가의 영애로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이 들어봤을 텐데도. 어쩌면 말을 할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읏, 흐으……아앙, 으, 아앗, 으으…….” 중지가 그녀의 질을 쓰다듬었다. 라우라의 등이 움찔거렸다. 허리가 허공에 체류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애액을 윤활유로 삼아 입구 근처를 요란하게 괴롭혀주었다. “으아……안돼, 뭔가, 안 된다! 읏, 주군! 뭔가가, 흐아아아앙!” 손가락을 더 빠르게 놀렸다 “읏, 안 된다, 읏, 응, 하아앗……! 아아, 아아――.” 목소리가 풀렸다. 잠깐 호흡이 멎는가 싶더니, 질이 전에 없이 강하게 손가락을 꽉 조여왔다. “핫, 하아앗, 응, 앗, 아아아아아아아!” 신음이 비명처럼 몰아닥쳤다. “하, 앗……이상해, 이상하……다……이렇게, 느낄 리 없는데……느낄 리 없는데, 흐앙――.” 여진과 같은 쾌감에 그녀가 꿈틀거렸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재미가 없어졌다. 나는 아까 전과 똑같은 기세로 손가락을 상하로 움직였다. 오르가즘의 여운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라우라가 다시 시달렸다. “히윽!? 으읏! 아, 안 돼!” 그녀가 도망치려고 꿈틀거렸다. 유두와 질이 나한테 단단히 잡혀 있는 이상에야 의미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지만. “으읍……하아, 읍…….”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녀를 무릎에 올리자, 소녀의 작은 체구가 품속으로 들어왔다. “응……하으……하앙, 주구운…….” 그녀는 무작정 양팔로 나의 등을 꼭 껴안고 내게 입술을 내밀었다.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 마주한 채 침을 흘리고 핥았다.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부터 라우라의 이곳에 박을 겁니다.” “하아……하아……주, 군. 응.” 라우라가 헐레벌떡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습니까.” “하읏……주군이 아니면, 싫다…….” 그녀가 애원하듯이 매달려왔다. 창녀가 의례적으로 애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 한 여자아이, 누구보다 찬란한 능력과 꿈을 가진 여자아이가 내게 자진하여 처녀를 바치는 것이었다. 정복감에 머리가 짜릿해졌다. 허벅지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쳤다. 유두에 올려둔 손가락을 떼어 양손으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팔뚝의 힘만으로 들어올릴 수 있을 만큼 라우라는 가벼웠다. 세심한 애무 끝에 활짝 열린 틈새로――천천히, 집어넣었다. “으응, 읏――, 으으으으.” 저항이 느껴졌다. 미끌미끌한 거미줄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애액에 도움을 빌어 꾸욱 눌러넣었다. 아직 발길 하나 닿은 적 없는 구석까지. “흐, 흐아아앙.” 6할 정도 밀어넣으니 끝에 도착했다. 후끈후끈한 질벽이 음경 전체를 자극했다. 소녀의 질은 내 것을 전부 받아들이기에 무리였다. 지금부터 박아봤자 아픔밖에 느끼지 않겠지. 그녀의 질내가 육봉에 익숙해지기까지 잠깐 기다리기로 했다. 그 편이 낫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아, 아아아……꽈, 꽉 찼다…….” 라우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찡그림조차 사랑스러웠다. 나는 서서히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응……주, 군…….” 질벽이 한치의 틈새없이 찰싹 달라붙었다. 아직 아무도 닿지 않은 그곳이 천천히 나의 모양대로 짓이겨지고 있었다. 나는 무리해서라도 라우라의 끝까지 쑤셔넣었다. “흐윽!” 딱딱하게 응어리 진 부분이 귀두에 닿았다. 이 순간 나는 틀림없이 라우라의 전 생애를 통틀어서 그녀의 가장 안쪽까지 도달한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이물질에 놀랐는지 질벽이 서둘러 감싸오는 게 느껴졌다. 뜨거웠다. “앗, 앗…….” 부드럽게 왕복했다. “아읏……으응, 하앙…….” 라우라의 찡그림에 발간 무언가가 섞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변화를 주었다. 살짝 비틀어 중간중간에 리듬을 깨트렸다. 조금씩 강도와 속도를 높였다. 움직임이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흐앗, 응, 앗, 앗, 앗앗앗……읏!” 허리를 움직이자 라우라의 목소리가 한 층씩 올라갔다. 주변으로 물이 격하게 첨벙거렸다. 날씬하게 빠진 등허리가 이쪽의 움직임에 맞추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색하여 그녀와 나 사이가 약간씩 어긋났다.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흐읏!” 라우라의 목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했다. 어쩌면 연못 물방울일지도. 신음이 강해졌다. 숨이 급해졌다. 소리가 단락적으로 짧게 끊어졌다. “후아, 아읏, 앗, 앗앗, 아, 흥, 끄읏……아아앙!” 내 등을 안았던 라우라의 팔이 풀렸다. 몸이 뒤로 넘어가려 했다. “저런.” 나는 그녀의 양손을 잡아당겼다. 팔뚝에 힘이 완전히 빠져 있어서, 라우라가 인형처럼 끌려왔다. 그 기세에 맞춰서 다시 몸을 찔러넣었다. 철퍽, 하고 물소리가 격하게 울렸다. “하으으으으읏!” 질 입구가 강하게 조여졌다. 라우라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느낍니까? 라우라, 느끼고 있습니까?” “네, 느껴요……느껴요……앗, 흐응!” 라우라가 존댓말을 썼다. 본능적으로 복종하고 항복하여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고 싶은 것일까. “어디가 가장 좋나요? 여기입니까?” “으응! 흥, 하앗, 하앙!” “아닙니까? 여기가 가장 좋은 겁니까?” 자궁 방향으로 쑥 밀어넣었다. “하으으윽!” 짧은 경련. “몰라요……모르겠, 아……흐아앙!” “여기도 아닌가보네요. 곤란하군요. 그럼 여기는 어떻습니까? 여기가 가장 좋습니까?” “으으응, 응……읏, 모른다, 모르겠어요, 아아앙……하으읏!” 나는 라우라의 작은 엉덩이를 붙잡아서 아예 그녀를 마음대로 들었다가 놓았다. 쑤욱, 하고 아까에 비해 조금 더 깊숙하게 음경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힉! 아, 으으으으응!” “방금 갔습니까?” “흐윽, 세 번째, 벌써 세 번째……!”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꽤 가버렸네요.” “많이 갔어요, 흐으읏……많이 갔으니까, 잠깐만……주군, 잠깐……하윽!”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빙글 회전시켰다. “……꺄아아앗!?” 라우라의 다리가 쭉 직선으로 펴졌다. 온몸이 진동했다. “또! 또, 갔다――, 아아아아, 또, 하읏, 앗, 으응, 또――.” “후우. 흐읍. 흡.” “후웃, 핫, 아앙, 하앙, 앗, 흐앙, 흐으읏! 흐끅, 아앗……! 안돼, 나, 이제 안 된다, 히으으읏! 그거, 안 돼, 하아아앙!” 물건을 거의 입구 끄트머리까지 빼었다가 다시 강하게 박아넣었다. 짧은 간격으로 빠르게 왕복했다. 무리한 운동에 팔뚝이 저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으으읏!” 깊숙하게 삽입. 안쪽을 꾸욱 때렸다. “하앙!” 뒤로 빼면서 또다시 깊숙히. “읏, 읏, 읏……흐앙! 이제, 주군, 하으으윽! 안 된다, 소녀가, 소녀는――으으으읏!” 라우라의 신체가 크게 경련했다. 턱이 튀어올랐고 허리가 휘었다. 가녀린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땀투성이가 된 소녀의 몸이 통제권을 완전히 잃고 불쌍할 정도로 후들후들 떨렸다. “으으으으응, 아앗, 으으으으으응――!” 등이 점점 더 활처럼 휘어졌다. 질내가 조여들면서 날 짜부러트리려 압박했다. 그녀한테 남은 힘이 온통 하복부에 몰린 것 같았다. 그곳 외에는 제대로 움직이는 부위가 없었다. 내 것이 들어갈 때마다 라우라는 여지없이 신체가 꺾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대로 빠질 터였다. 나는 라우라의 양팔로 억지로 붙들어 잡았다. 꺾어지고, 끌어당기고. 꺾어지고, 다시 끌어당겼다. 라우라의 폐에서 관능이 새어나왔다. “읏, 앗, 흐그윽, 흑……으긋, 아아아……아아…….” 조금만 있으면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이쯤에서 당근을 제시할까. “앞으로 한 번입니다. 딱 한 번만 가면 봐주겠어요.” “흐아아앙……? 앞으로, 한 번……?” 그녀가 어린애가 옹알거리듯 말했다. 입가에는 침이 제멋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 여린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바로 그겁니다. 라우라. 한 번입니다. 그러니까 갔을 때는 갔다고 제대로 말하세요. 안 그러면 라우라가 갔는지 안 갔는지 제가 모르겠지요?” “응, 응. 알겠다……갔다고 제대로 말할 테니까……흐끄으으읏!?” 라우라가 말을 끝내기 전에 허리를 스윽 밀어올렸다. 간당간당하게 입구에 걸쳐 있던 음경이 벽의 틈새를 강제로 헤집었다. 그것만으로 소녀의 등골이 떨어댔다. “으으읏, 한 번이니까……하응, 한 번이니까아……!”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얼른 가버릴 생각인지 라우라가 마지막 체력을 쥐어짜내 허리를 스스로 움직였다. 그 노력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봤자 무릎에 힘이 없어 엉덩이를 문지르는 정도였지만. “흐끅!” 질이 수축했다. 내 것을 타고 수중으로 애액이 흘러내렸다. 라우라가 이제 전부 끝났다는 표정으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갔다……주군, 소녀 방금 갔다…….” “네? 뭐라고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립니다.” 나는 라우라를 안은 채로 일어섰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일까, 무의식적으로 라우라가 허벅지와 종아리로 나를 뱀처럼 휘감았다. 나는 그녀의 몸을 안아서 힘껏 올려쳤다. “하, 으으으윽?”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내 물건이 좁다란 질 안을 무규칙적으로 찔렀다. “흐그읏!?” 라우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주군, 갔다! 소녀, 하으으응! 방금, 갔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으으읏, 웃, 앙, 으앙? 주군, 앗? 하윽, 꺄으읏……갔다, 갔는데! 왜, 으으응!”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라우라. 곤란하군요. 아직까지 안 갔으면 계속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말……흐아아앙! 거짓말쟁……아, 아, 아아아아아아! 간다, 또, 가버려, 아아앗!”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초 단위로 끊임없이 오르가즘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도 슬슬 한계였다. 팔과 다리가 아렸다. 그래도 상대방을 괴롭힐 정도의 여유는 남아 있었다. “약하게라면 이렇게 말입니까?” “히이이잇!?” 허리가 튀어올랐다. “계속, 계속 가버린다……계속――으앙, 아, 응…….” “아직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아, 아…….” 나에게 매달린 라우라의 몸이 땀으로 찰싹 붙었다. 질벽이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라우라 본인의 지배를 벗어나 날뛰었다. 소녀는 몸이 반응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주, 주군……제발……지금……움직이면, 소녀가 죽어버린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직 한 번을 가지 못했잖아요.” “아아아아아…….” 절망적으로 탄식했다. “……읏, 으읏, 녹아……히으읏……녹아버려…….” 왔다. “……라우라. 저도 갈 것 같습니다.” “……흐아, 응, 주군, 으응, 빨리…….” “그럼 가겠습니다.” 라스트 스퍼트를 올렸다. “응! 응! 흐읏――읏!” 뿌리까지 쑤셔넣을 정도로 억지로 박았다. 소녀의 섬세한 주름이 음경 전체를 자극했다.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읏, 으으으, 가……아, 아, 아……가, 간다……또, 주군, 하아아, 흐으윽. 주군, 주군, 가, 가고 있어……아아……지금 가고 있는데……흐아앙, 히익…….” 몇 번째일까. 내 물건도 차올랐다. 끝이 다가왔다. 힘차게 흔들어서 최후로 제일 안쪽까지 밀어넣었다. 뿌리에서 끝으로 터져나왔다. “……하앗……하으읏……으으…….” 라우라가 어깨를 떨었다. 질벽이 꿈틀거리면서 내 액체를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하으으……으으응…….” 십여 초 동안 정액이 라우라의 안쪽을 채워나갔다. 자지를 빼내니, 그녀의 질에서 주르륵 백탁액이 흘러내렸다. 액체는 허벅지를 경유해서 연못으로 떨어졌다. “흐, 아…….” 라우라가 자기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무리하게 일으켜세우는 대신에 그녀와 함께 나도 천천히 물에 가라앉았다. 첨벙, 하고 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 두 사람은 연못가에 몸을 뉘이고 숨을 헐떡거렸다. “…….” 라우라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기절하듯 내 가슴에 기대었다. 이대로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내게도 말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멀쩡한 척 목소리를 내고, 섹스하는 내내 그녀를 떠받치느라 체력이 방전되었다. “……라우라.” 잠자는 동안 행여나 물에 빠지지 않게 그녀를 껴안았다.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작은 가슴이 약동하고 있었다.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지금의 만족과 평안이 되도록 오래 이어지기를 바랐다. 딱 좋게 따스한 연못물과 그녀의 체온, 야트막한 숨결을 느끼면서.   00063 두 개의 음모 =========================================================================                        * * * “……십시오.” “……일어나십…….” 까마득한 의식 너머에서 잡다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단락이 끊긴 목소리가 연달아 두개골을 노크했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힘겹게 눈을 떴다. 피부가 무거웠다. “일어나십시오, 단탈리안 님.” “으으. 라피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양복 입은 하프 서큐버스 소녀가 있었다. 라피스였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자 연분홍빛 양갈래머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내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매우 긴급하게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라피스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 보고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웬만한 사건은 자기 선에서 전부 처리해버리고 내 결정과 의사를 물었다. 그녀의 유능함을 내가 신뢰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젠장, 심각한 일이군.” 라피스는 절대로 표현을 과장하거나 일의 중요성을 부풀리지 않았다. 비록 무표정으로 아무 감정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해도, 그녀가 매우 긴급하다 하면 정말로 매우 긴급한 사안이었다. E급 모험대를 격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사건인가. 골치가 아파오려는 순간, 라피스가 한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 긴급사안도 지금 상황에 비해서는 심각해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우선 옷을 입어주십시오. 마왕으로서 체통을 지켜주시기를.” 아. 그제야 내가 알몸으로 물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거기에 더해, 역시 알몸인 라우라가 내 품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는 것을. 적나라한 애프터 장면을 타인에게 들킨 셈이었다. 내가 입을 벌렸다. “꺄…….” “꺄?” 라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꺄아아아아아!” 지하연못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남녀 역할이 뒤바뀌지 않았습니까’라고 라피스가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 * * 마왕방 탁자에 라피스와 내가 마주앉았다. 우리는 드워프 장인이 완성시킨 지도들을 펼쳐두고 현재 상황을 토의했다. 라우라는 저편의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는데, 첫 경험을 치르느라 고생했기에 내가 배려한 것이었다. “크흠. 아까 전에 일은 부디 잊어줘.” “벌써 잊었습니다. 기억할 가치가 없으니까요.” “…….” 이쪽 몸매 따위 관심없다는 얘기이렷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라피스, 정말 독설가구나……. 혹시 내 형편없는 작태에 실망했나 싶어서 라피스의 심리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상태창.’ ━━━━━━━━━━━━━━━━━━━━ 이름: 라피스 라줄리 종족: 하프 서큐버스  소속: 쿤쿠스카 상회 속성: 중립(-10) 레벨: 24        명성: 134 직업: 상인(A-), 마녀(B), 검사(D) 통솔: 59  무력: 32  지력: 55 정치: 74  매력: 50  기술: 2 호감도: 50 현재심리: ‘……바보.’ ━━━━━━━━━━━━━━━━━━━━ ‘여, 역시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침음했다. 아침부터 여자랑 놀아대면 그야 바보라 생각할 만했다. 다행히 호감도가 내려가거나 하진 않았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앞으로 라피스 앞에서는 더더욱 건전하고 모범적인 마왕으로, 결코 여자에게 놀아나지 않는 인물로 있어야겠다. 어찌되었든. 잡담은 그만두고 우리는 논의를 시작했다. 라피스는 리프에게서 증거를 찾았다는 얘기했다. 그리고 내가 나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과 맞붙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마왕의 서열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60위권이 50위권을 이기는 경우도, 40위권이 30위권을 이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라피스의 가는 손가락이 양피지 한장을 짚었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로, 마왕 일흔두 명의 문양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었다. “서열 제29위 아스타로트 전하입니다. 백오십 년 전에 서열 제23위 아이니 전하와 전쟁하여 항복을 받아냈지요. 칠십 년 전에는 서열 제32위 아스모데우스 전하가 서열 제30위 포르네우스 전하를 물리쳤습니다. 보통으로 싸우면 패배하기 마련인 전장에서 두 마왕 전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파벌 싸움이구나.” “…….” 라피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맞습니다. 파벌의 힘을 빌려 자신보다 강력한 마왕과 대적하는 것이지요.”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철저히 깨달았지. 마왕들 간에도 알력 싸움이 굉장히 크다는 걸 말이야. 나한테 망신을 당한 파이몬도 한 파벌의 수장이었을 거야. 그리고 아마도.” 내가 양피지 한 부분을 가리켰다. 서열 제68위 마왕 벨리알. 리프의 시체에서 발견되었다는 그 문양이었다. “이 벨리알이라는 녀석은 파이몬이 이끄는 파벌에 속해 있겠지.” “그것 역시 맞습니다.” 라피스가 놀라워했다. 남들한테는 아까 전부터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래야 이야기가 그럴듯해지니까.” “이야기, 말입니까?” “아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라피스 네 말이 맞아. 생각해보니 이상했어. 어떻게 하급 모험자에 불과한 리프가 중갑보병 장비를 마련할 수 있었는가? 어떤 재력자의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하지. 리프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후원받았다는 공식적인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시체에서 서열 제68위 마왕 벨리알의 문양이 발견되었다――.” 누구라도 의심하게 된다. 벨리알이 바로 리프를 그림자에서 후원하던 장본인이었구나, 하고. “왜 벨리알이 리프를 지원했는가. 이 의문도 쉽게 해결돼. 벨리알은 파이몬 파벌에 속했고, 파이몬은 얼마 전 고작 서열 70위권의 마왕한테 창피를 당했지. 벨리알이 자기 파벌의 수장이 겪은 모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나 단탈리안을 공격했다.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알 전하는 파이몬 전하의 열렬한 추종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파이몬 전하의 심성과 사상 그리고 미모에 푹 빠졌다고, 마계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단탈리안 전하를 적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흐음.” 내가 미소 지었다. “이상하지 않아?” “예?” “범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리프는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섰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거지. 그런 인간의 몸에다 과연 적나라한 증거를 남기고 싶어할까? 자칫 잘못하다 자기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이쪽에서 알아채게 될 텐데 말이야. 실제로 지금처럼 우리는 범인을 알게 되어버렸고.” 라피스가 손으로 턱을 받쳤다. 생각에 잠긴 것이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계략이군요.” 내가 방긋 웃었다. 계속 말해보라고 눈짓했다. “마왕 전하들의 사이를 분열시키려는 계책입니다. 범인은 마왕이 아닙니다.” “계략인 건 맞아. 범인이 마왕이 아니라는 얘기는 틀렸어.” “……어째서입니까?” “간단한 논리야. 발푸르기스의 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리프가 쳐들어올 당시에 진상을 꿰뚫고 있던 인물들은,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한 마왕들뿐이었어.” 본래대로라면. 파이몬은 날 모함한 죄과로 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행사를 망치지 말자는 뜻에서 파이몬한테 관용을 베풀었다. 진짜 의도야 당시 청문회에서 사회자 역할을 맡았던 서열 제5위 마왕 마르바스한테 호감도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파이몬은 무도회장에서 내게 한 번 사과하는 것으로 퉁치게 되었다. 그 사건이 끝나자마자 리프의 모험대가 들이닥쳤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하지 않은 마왕 혹은 세력에 '파이몬이 단탈리안에게 망신당했다'라는 소문이 퍼지려면 아무리 적어도 하루이틀이 걸릴 터. 청문회 사건이 있고나서 내가 니블헤임에 일주일 머물렀고, 던전에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나고 곧바로 리프의 모험대 소식을 들었다. 그 시점에서 이미 리프는 마을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프가 연합군을 형성하는 시점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청문회가 끝난 직후였다! 외부인이 불과 사나흘 안에 발푸르기스 밤의 진상을 듣고, 그것과 관련하여 음모를 내놓는다? 음모를 만들어낼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리프 모험대를 후원한다? 내가 단언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언제 어디서나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초능력을 가진 고등학생과 같은 기분을 맛보며 선언했다. “범인은 발푸르기스의 연회에 참가한 약 서른 명의 마왕들 안에 있어.” “놀랍습니다.” 라피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단탈리안 님의 말이 실로 옳습니다.” “뭐, 네 상회의 회장인 이바르 로드브로크도 용의자 명단에 올라가긴 하지만…….” 이바르, 겉으로는 노인이지만 실상은 로리 흡혈귀인 그 녀석은 현재 나한테 단단히 약점이 잡혀 있었다. 그녀의 본체를 두고 내가 협박했다. 자기 분신을 몇 개씩이나 갖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이바르는 지극히 신중한 성격. 청문회에서 쓴맛을 본 그녀가 경거망동하게 음모를 펼쳐올 가능성이 희박했다. 나는 과감하게 그녀를 경우의 수에서 배제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경우의 수를 줄여보자고. 라피스, 발푸르기스 밤에 참여한 마왕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누가 어느 파벌에 속했는지도.” “예. 목록에 표시하겠습니다.” 라피스가 품에서 깃펜을 꺼냈다. 그녀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양피지 목록에서 참가인물을 체크해나갔다. ‘역시 라피스.’ 흡족스러웠다. 그녀가 알아챘는지 모르겠어도 방금 나는 일종의 시험을 던진 것이었다. 어떻게 일개 상인이 발푸르기스 밤에 누가 참여했고, 또 그들이 전부 어떤 파벌에 속했는지 항상 기억해두고 있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라피스는 자연스럽게 목록을 체크하고 있었다. 연회에 참석한 인물이 누구인지 파벌은 어떻게 되는지, 나한테 달려오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완벽하게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약간 무리하다 싶은 내 요구사항에 바로바로 응답한 것이 그 증거였다. 훌륭한 준비성이 아니고 뭔가. 만약 라피스가 무능했다면 굳이 번거롭게 모든 마왕이 개제된 목록을 가져오지도, 발푸르기스 밤에 누가 참석했는가 기억하지도, 파벌의 관계도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단지 엄청난 음모를 발견했다며 헐레벌떡 뛰어왔겠지. 그런 머저리들과 라피스는 일선을 달리했다. ‘전형적인 비서 스타일이야.’ 섬기는 사람이 뭔가 궁금해하면 곧바로 대답할 능력과 준비를 갖춘 자. 그게 라피스 라줄리였다. 세력이 확장할수록 이런 인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라우라도 나도 정보를 활용하여 추론하는 데 능했지, 정보 자체를 마련하는 데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쿤쿠스카 상회에 발이 묶여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정식으로 마왕군에 영입할 생각이었다. “완료했습니다.” 이 분도 지나지 않아 요구사항이 이루어졌다. 라피스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처리한 것인양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라피스가 더 탐났다. 어휴, 조금만 기다려라. 내 마왕군이 쿤쿠스카 상회보다 매력적인 직장이 되는 순간 넌 내 중신이야. 목록에서 체크된 인물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 서열 제5위 마르바스  · · · (중립)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 · · (평원) 서열 제9위 파이몬   · · · (산악) 서열 제10위 부에르   · · · ( - ) 서열 제12위 시트리   · · · (산악) 서열 제14위 레라지에  · · · (평원) 서열 제16위 제파르   · · · (평원) 서열 제20위 푸르손   · · · (중립) 서열 제21위 모락스   · · · (산악) 서열 제22위 이포스   · · · ( - ) 서열 제27위 로노베   · · · (산악) 서열 제31위 포라스   · · · (산악) 서열 제33위 가프    · · · (산악)    ·    ·    · 서열 제50위 푸르카스  · · · (평원) 서열 제55위 오로바스  · · · (산악) 서열 제57위 오세    · · · (산악) 서열 제62위 발라크   · · · (산악) 서열 제68위 벨리알   · · · (산악) 서열 제70위 세에레   · · · ( - )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 · · ( - ) ──────────────────────── 오른쪽에 중립이니 뭐니 적힌 것은 짐작컨대 파벌 명칭이 아닐까. “총 서른두 명의 마왕이 발푸르기스 밤에 참석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파벌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줘.” “예, 먼저 마왕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의 파벌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평원파는 이 파의 거두인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전하가 평야 일대에 마왕성을 두고 있는 데에서 비롯했습니다.” 바르바토스는 인간계를 정복하자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마왕. 즉 평원파는 이야기에 나오는 마왕처럼 정말로 인간을 증오하고, 멸종하고, 정복하려 드는 이들이 모여서 만든 파벌이었다. “실제로 평원파에 속한 마왕들 대다수가 평야지대에 마왕성을 두고 있습니다. 평원에는 인간이 거주하기 일쑤입니다. 마왕성이 평원에 위치하면 필연적으로 인간과의 불화도 잦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랑 묵은 원한의 때가 많다는 뜻이로군.” 이들은 또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세력이기도 했다. 바르바토스의 숙적인 파이몬을 내가 깔아뭉갰으니 말이다. 아직 나는 명시적으로 특정 파벌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다른 마왕들이 보기에는 반쯤 평원파에 속한 인물로 보지 않을까 싶었다. 대부분의 마왕은 설마 제71위에 불과한 내가 단신의 힘으로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을 무찔렀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내 뒤에서 바르바토스가 암약한다고 추론할 거다. 이런 착각이 내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말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따라 결정되리라. “다음은 산악파입니다. 파이몬 전하가 이끄는 파벌입니다. 일흔두 명의 마왕 중에 무려 서른다섯 명이 산악파에 속해 있습니다. 명실상부 최대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나의 잠정적인 적대 세력이었다. “산악파의 마왕들은 대부분 산맥에 기거합니다. 몬스터들이 장악하는 장소이고, 인간의 세력이 가닿지 않는 곳이지요. 산악파의 마왕들은 굳이 피를 흘려가며 인간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요컨대 자기네는 안전하고 편한 곳에 있으니까 전쟁 따위는 싫다, 관심없다, 하는 부류였다. 바르바토스가 그들을 현실에 안주하는 쓰레기라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 있겠지. “몬스터들이 사는 곳에 마왕이 군림하는 것은 당연지사. 산악파가 최대세력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산악파를 적으로 돌리게 된 것은,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해도 별로 현명한 태도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라피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목록을 훑었다. “최대세력이라고 해서 최강의 세력이라 할 수는 없지요. 거기에 단탈리안 님이 뚫고나갈 활로가 있습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 작품 후기 ============================   참고로 리리플은 주기적으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50화가 올라가면 47화와 그 이전 연재편에 적힌 리리플이 삭제됩니다. 세 편 이전의 리리플은 모두 삭제하는 것이지요. 이는 리리플로 인해 본문의 길이가 늘어나는 것을 막고자 함입니다. 저 역시 조아라 소설을 즐겨 보는 한 명의 독자로서 리리플 때문에 분량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도 독자 여러분과의 소통 또한 중요하니, 세 편 이전의 리리플만 삭제하고 있습니다.   00064 두 개의 음모 =========================================================================                        라피스가 양피지에 쓰인 목록을 손가락으로 쓰윽 흝었다. “보시면, 서열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산악파 인사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세력이 약한 마왕일수록 몬스터가 기거하고 인간종이 없는 위치에다 마왕성을 마련합니다.” 라피스가 지적한 그대로였다. 서열 제1위에서 제20위까지는 산악파, 평원파, 중립파, 아무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은 자들이 비교적 균등하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서열 제20위 미만부터 급격하게 산악파의 비중이 늘어났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했다. “이거, 인간과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네.” “그렇습니다. 제7차 월맹군(月盟軍) 원정 이후로 마왕 전하들은 인간의 왕국과 전쟁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월맹군은 <던전 어택>에서 마왕들이 꾸리는 연합군을 가리켰다. 역사상 마왕들은 몇 번이고 인간계를 정복하고자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켰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적도 많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원정 실패.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왕연합군이 무려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군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딱 그짝이었다.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몬스터 군세를 갖고 있는데도 마왕연합 월맹군은 번번이 인간의 계략과 이간질에 휩쓸려 각개격파되었다. 게임 설정에 따르면 인간이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해산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던가. 하여간,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월맹군 원정이 거듭 실패함으로 인해, 천 년 전까지만 해도 두어 명에 불과하던 산악파가 순식간에 과반수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백오십 년 전에 있었던 제7차 원정에서는 심지어 출정 자체를 거부한 마왕도 다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왕답지 않게 꼴불견이다!……이렇게 호통치고 싶지만.” 내가 쓰게 웃었다. “손익을 고려하자면 당연한 행동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피스가 상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동의했다. 패배할 것이 뻔한데 무엇하러 막대한 군비를 써가며 출전하겠는가. 하물며 적군이 아니라 아군 때문에 패배할 텐데. 마왕 본연의 의무가 마인들을 인간계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라 한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도 정도가 있었다. 문제는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월맹군 원정이 실패할 때마다 마인, 인간 입장에서 몬스터라 불리우는 종족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그러자 도리어 인간종이 급속도로 세력을 불리게 되었다. 마왕연합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 것이었다. 천 년 전부터 월맹군 편을 들었던 아인종들, 요정족이나 난쟁이족 등도 최근 백 년 사이 영구중립을 표명하고 있었다. 마왕들은 아인종의 이탈에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월맹군이 패배하고 나서 몰아닥칠 인간종의 보복 전쟁을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라는 명분에 마왕들은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인종에서 주장하는 바는 솔직하게 변역해서, ‘너희 마왕들이 자꾸 멍청하게 패배하니까 애꿎게 우리만 손해보지 않느냐.’ 이것과 같았으니까. 제1차 월맹군에서 제7차 월맹군까지 참가하고 희생해준 아인종 앞에서 마왕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못난 것은 아인종이 아니었다. 마왕측이었다. 그들이 패배를 자초했고, 아인종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마왕군은 피폐해졌다. 마인들은 점점 마왕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인간계에서 마왕군을 도와주던 조력자들까지, 등을 돌렸다. 예컨대 <던전 어택>에 개인 시나리오 배정되어 있는 쿤쿠스카 상회의 회장 이바르 로드브로크. 그녀 역시 무의미한 월맹 원정군에 실망하여 마침내 마왕측을 배신하고 용사한테 붙게 된다. 게임 후반부에 마왕들이 제8차 월맹군을 결성하여 마지막으로 용사에 대항하지만 그 역시 파이몬을 위시로 한 산악파의 내분으로 인하여 파멸. 월맹군은 지상에서 모든 마왕이 전멸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왕측에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다. 결국 요새 대다수의 마왕은 본진 지키기로 전략을 정하고 있었다. 산악파는 자의로, 평원파는 어쩔 수 없이. 즉――. “산악파 마왕 전하들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수동적입니다.” 아무리 가장 많은 마왕이 포진되어 있는 파벌이라 해도 군대를 동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청문회에서 파이몬 전하가 굳이 단탈리안 님께 정쟁(政爭)을 걸어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령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오는 경우에도 무력적으로 나서지는 않습니다.” 라피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파악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쟁은 자고로 명분 싸움이지. 불과 얼마 전에 파벌의 수장격인 파이몬이 나한테 패배했어. 날 공격하고 넘어질 명분이 사라졌지. 웬만한 시간이 지나지 않는 이상 직접 무력을 동원해올 리 없겠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직 범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서열 제68위의 벨리알이 몰래 리프 모험대를 지원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 있지 않을까요.” 흐음. 상황은 이러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은 마왕군 최고 파벌이다. 단신으로 맞서싸우면 하루조차 버티지 못하게 패배하겠지. 그러나 이들은 매우 수동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고, 나를 공격할 명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벨리알인가 뭔가가 내게 해를 끼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할지라도 증거가 남을 만큼 대대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요컨대 내가 크나큰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이제 안심하고 천천히 던전을 방비하면 되는 것일까? 적당히 바르바토스의 평원파에 아부를 떨고, 적당히 중립파의 마르바스에게 중재를 요청하면서, 또 적당히 적들의 계략을 격파하며 모험자들을 물리쳐서 느긋하게 나의 세력을 확장하면 만사형통인 것일까? ‘아니다.’ 단호하게 부정했다. 적대하는 이들을 가만히 놔둘 정도로 내가 호구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쪽을 건드렸다면 두 배로 갚아준다. 두 배를 갚을 수 없다면 이자로 남겨둬서 훗날 네 배로 갚아준다. 죽일 수 없다면 치명상을,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면 허리라도 물어뜯는다. 관용은 강자에게나 허락된 사치이다! 약자는 결코 적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다. 그렇게 놓아준 적이 언제 다시 성장하여 보복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적들이 수동적이라고? ‘고맙군.’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온다면 기꺼이 이쪽에서 치고 나가주겠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심이…….” “아니, 프랑크 제국의 성향을 고려하면…….” “알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트려서…….” 오랫동안 라피스와 토론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나에게는 <던전 어택> 최고참 플레이어로서 막대한 정보가 있었다. 인간계의 각 세력이 무슨 약점을 가졌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모르는 사항에 대해서는 라피스의 조언을 받아가며, 나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전략을 짜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진실로 무서우신 분입니다.” 마라톤 토론 끝에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 누구도 이처럼 장대한 계략을 짜내지 못할 터입니다. 감히 어떤 자가 상상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두뇌에서 비롯했음을.” “성공하면 말이지.” “저 따위가 어찌 보장하겠습니까마는.” 라피스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백 년의 생을 걸고 확신합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성공하시리라고.” “든든하네. 그래, 나도 웬만하면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아닐까 생각해.” “그럼 당장 마계로 돌아가서 첫 번째 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 라피스가 일어서서 내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호감도가 50이 되었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예의에 엄격했다. 그녀의 한결같은 자세에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헌데 단탈리안 님. 이 총체적인 작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정하시겠습니까?” 작전명이라. 그런 게 필요하나 싶어도 분위기상 라피스의 장단을 맞춰주는 것 또한 마음에 끌렸다. 내가 머리에 떠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미네르바 작전이라고 부르지.” 음모가 시작했다. * * *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의 던전, 통칭 「죽은 자들의 궁전」. 바르바토스가 바윗돌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만사가 심심하다는 얼굴로 언데드 몬스터들의 재롱을 관람했다. 리프 모험대에 엮인 이후로 그녀의 삶에서 재미난 일이라고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아――. 됐어, 됐어.” 그녀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재미없구나. 냉큼 꺼져라, 너희.” 언데드 몬스터들이 송구해서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들은 슬금슬금 바르바토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같은 반응을 포함하여 그녀는 모든 것이 따분했다. 오로지 술과 섹스만이 그녀의 권태를 약하게나마 달래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술도 여자도 그닥 내키지 않았다. 오롯이 바르바토스만이 살아 숨 쉬는 궁전에서 그녀가 혼잣말했다. “제기랄. 혹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나…….” 으으, 하고 바르바토스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리프 모험대가 격파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구경한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단탈리안이 움직였다든지 하는 소식이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심란했다.……설마 증거를 발견해지 못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그 정도 바보였으면 파이몬 개년이 쪽박쓰지도 못했을 거라고. 혹시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나? 겁쟁이로는 안 보였는데. 제68위 정도는 그래도 덤빌 만하잖아! 사내 새끼라면 배짱을 보이라고!……. “에잉, 시발. 모르겠다.”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단탈리온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거나 뭔가 알아냈다 해도 행동하지 않는다면……결국 그 정도 인물이었다는 얘기이다. 바르바토스 본인이 기대를 걸어볼 가치조차 없겠지. 그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로 배신하는 것이 익숙했고. 배신당하는 것 또한 익숙했다. “…….” 그녀가 하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딱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그렇게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하아, 그럼 쓸 만한 새끼가 나타날 때까지 또 무작정 기다려야…….” “바르바토스――전하아아――바르바토스――전하아아아――.” 마왕방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직후, 바닥에서 희끄무레한 유령이 솟아났다. 하필이면 바르바토스의 발 바로 앞에서. 마침 회한에 잠겨 있던 바르바토스가 깜짝 놀랐다. “헉, 어머나 시발!” “전하아아――드릴 말씀이이이――.” “야 이 후장에다 꼬치 박아넣어서 십이지장을 꿰뚫어도 시원찮을 새끼야!” 그녀가 버럭 소리질렀다. “나 알현할 때는 정문으로 공손히 들어오라고 말했어 안 말했어!? 시―발, 오백 년 동안 그 더러운 귓구녕에다 딱지가 쌓이고 쌓여 산맥을 이룰 정도로 말해줬으면 슬슬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송구하오나――드릴 말씀이이이이――.” “뭔데! 육시랄, 별 거 아닌 거면 존나 이번에야말로 성불시켜주마!” “그것이이――그것이이이――.” 바르바토스가 야트막한 가슴에 손을 얹혔다. 아후, 심장 떨어질 뻔했네. 심장이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게 최고위 마왕이라는 족속이었지만 그래도 가히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3차 월맹군 원정에서 용사에 의해 심장이 뚫려본 적 있는 바르바토스로서는 더더욱이. 그러나 유령 전령이 전해준 말에 바르바토스는 심장이 떨어지는 감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단탈리안――전하가아아――방문했사옵니다아아――.” 뭐? 바르바토스가 멈칫했다. “단탈리안이 찾아왔다고?”   00065 두 개의 음모 =========================================================================                        “예에에――확실히――단탈리안 전하라고오오――.” 바르바토스가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왜 이런 시점에서 나를 찾아왔지? 각종 추론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판단을 내릴 때도 복잡한 논리보다 단순한 직관을 선호했다. 지금 단탈리안이 방문한 것에 틀림없이 흥미로운 내막이 깔려 있으리라 보고, 그녀가 말했다. “당장 들어오라 그래! 아니, 네가 직접 데려와.” “명으을――받듭니다아아――.” 온몸이 희여멀건 유령이 말끝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유령이 땅 밑으로 쏙 들어갔다. 평소와 같았다면 기껏 멀쩡하게 지어놓은 통로가 아니라 땅속을 쏘다니는 부하의 작태에 한숨이라도 쉬었겠으나, 바르바토스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물었다. ‘혹시. 정말로 혹시지만……내가 한 짓을 눈치 챘나?’ 바르바토스는 등골이 짜릿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럴 리 없음을 알고 있는데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 것만으로 흥분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었다. 숨결에 미약한 열기가 섞였다. 물론 단정 짓기에는 일렀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커지는 법이었다. 적당히 체념하는 법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나는 아주 크게 만족할 거야, 애송이.’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히죽 올라갔다. 샛붉은 혀가 입술을 적셨다. 잠시 후, 검은 망토를 두른 단탈리안이 정문에서 걸어왔다.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에는 손님용으로 지어진 텔레포트 장치가 있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단탈리안이 그녀를 보고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한 태도였다. “오랜만이야, 바르바토스.” 그녀는 아주 잠깐 말문이 막혔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저렇게 허물없이 행동할 줄 몰랐다. 단탈리안과 바르바토스가 말을 놓기로 한 것은 맞았다. 그렇지만 서열 제8위와 서열 제71위이다. 인간사회의 계급에 비유컨대 황제와 훈작사만큼 서로 위상이 달랐다. 말을 놓으라고 해서 진짜 친구처럼 대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이런 인삿말을 들어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그녀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무례한 새끼, 예의는 보리빵에다 잼 처발라 먹었나. 숙녀의 집에 방문할 거면 적어도 오기 전에 연통이라도 줘야 할 거 아냐.” “저런, 실례했네. 하지만 봐줘. 아름다운 숙녀를 보러가겠다는 마음에 너무 설래여서 그만 예의차리는 것도 깜빡 잊었지 뭐야. 자고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온갖 겉치레와 예의를 한 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마련이지.” “깔깔깔.” 그녀는 아부를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부를 빙자한 농담은 좋아했다. 농담이란 지긋지긋한 삶에서 소금과 같았다. 삶이 더럽게 퍼석퍼석하더라도 소금을 약간 뿌리면 그나마 먹을 만했다. “가히 듣기에 달콤한 언변이야. 파이몬 년의 낯짝을 눌러버린 그 솜씨, 내 인정해주마. 하지만 나는 그 창녀랑은 급이 다르신 분이거든.” “호오. 말씀인즉슨?” “고작 말빨로 실례한 걸 봐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이거야. 네 말마따마 진정한 아름다움을 갖추신 이 몸께 성의를 보여봐.”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단탈리안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술병이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술병에는 옛날 딱 한 번 구경해본 상표가 붙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녀답지 않게 말이 떨렸다. “서, 설마? 설마 아니겠지?” 단탈리안이 씨익 웃었다. “마계에서 고급 포도주를 만들기로 유명한 화탕지옥(火湯地獄). 그중에서도 용암 백작의 영지에서 일 년에 한 병만 생산하는 포도주 중의 포도주, 발레르뇽 대륙력 505년 산이다. 마침 올해로 정확하게 천 년이 되었지.” “말도 안 돼!” 바르바토스가 절규했다. “바알 아저씨도 구하기 어려운 최고급 포도주잖아!” “에헴. 힘 좀 썼지.” “미친, 아니 세상에! 진품이야!? 진품은 아니겠지!?”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옥좌에서 엉덩이를 반쯤 일으킨 상태였다. 그녀는 마왕들 중에 최고의 술꾼을 자처했고 다른 마왕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에게 저 포도주는 성배와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예의고 체통이고 전부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헐레벌떡 아래로 뛰어갔다. “그거 나 좀 줘봐!” “당연하지. 자아.” 단탈리안이 술병을 던졌다. 공을 던지듯 공중으로 높이. 그 어마어마한 횡포에 바르바토스가 경악했다.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애주가 눈앞에서 던지다니! 차라리 화가를 앞에 두고 세기의 명화를 갖고 저글링한다 해도 이보다는 예의바른 행동일 것이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미친 새끼!” 그녀는 무심코 마법까지 발동해서 허공에 뜬 술병을 낚아챘다. 세 겹의 흑마법이 무영창(無詠唱)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길>, <안락사의 날숨>, <귀신 발걸음>, 세 개 모두 5서클 이상의 대마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땅바닥을 밟아 십 미터 이상을 도약했다. 허공에 마법적인 안개를 발생시켜 술병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병을 잡았다. 만일 인간계의 마법사가 방금 펼쳐진 장면을 목격했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턱을 쩌억 벌렸을 것이다. 첫 번째로, 마법을 두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를 겹쳐서 발동했다는 것. 두 번째로, 세 겹의 마법을 아무런 영창도 없이 즉시 시동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위대한 마법의 향연이 단지 술병을 잡기 위해서 이용되었다는 것.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르바토스에게 인간계 마법사의 시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온 신경은 허공에 부유하는 발레르뇽 505년 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천 년을 헤아리는 삶 속에서 단련하고 또 단련한 마법은,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직경 45cm의 유리병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그런 집중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바르바토스의 손안에 술병이 착 들어왔다. 그녀는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아즈아아아아아아!”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술병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시합의 결정적인 순간 리바운드에 성공한 농구선수처럼 포효했다. 그녀는 분명 그라운드의 지배자였다. “보았냐, 시발! 이게 존나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님의 위엄이다아아!” “……잘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게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것 같네.” “단탈리안 개새끼야! 네놈은 이 술에 입 한모금 댈 자격이 없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획 돌려서 단탈리안을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열세 살이 되었을까 싶은 외견으로 눈을 부라리는 것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박력이 풍겨졌다. “어떻게, 세상에! 믿을 수 없어! 천 년을 묵은 포도주를! 제조장인이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마법, 오로지 술을 보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을 보름마다 한 번 걸어줌으로써 세대와 세대를 거쳐 완성시킨 걸작을! 시중에 풀리지도 않고 화탕지옥 대공이 판단하기에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한테 선물한다는 이 보물을 던지다니! 개자식처럼 던지다니! 까마귀 발톱에 낀 뗏국물만큼도 못한 새끼!” “음. 네가 지독한 술주정뱅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겠어.” “주정뱅이가 아니라 애주가다, 머저리야!” 바르바토스가 떨리는 손으로 포도주병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헉.’ 대흑마법사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유리병도 보통 유리병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최고의 온도보존마법과 대충격마법이 반영구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설마 진품이냐, 하는 그녀의 심정이 어쩌면 진품일지도, 정도로 바뀌었다. “너, 너……이게 진품이 아니면, 진짜 날 기만한 죄로 가만히…….” “제일 처음 한 모금은 너에게 양보하지.” “딸꾹.” 바르바토스가 저도 모르게 딸꾹질했다. “제일 처음 한 모금이……가, 가장 맛있는데?” “그러니까 양보하는 거야.” 단탈리안이 방긋 웃었다. “우리 친구 아니냐.” “너……개새끼지만 진짜 좋은 개새끼구나.” “욕으로 들리지만 일단 예의상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바르바토스가 감격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자그마치 발레르뇽 505년 산의 첫 한 모금을 마셔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바르바토스가 허둥지둥했다. “이, 이럴 게 아니지! 포도주잔! 포도주잔을 어디 놔뒀더라!?” 그녀가 팔을 빙빙 휘둘렀다. 그러자 정문 쪽에서 잡다한 쓰레기가 무더기로 날아왔다. 창고에 잠들어 있던 물건들이 바르바토스의 소환마법에 끌려온 것이었다. 드넓은 마왕방이 잡동사니로 꽉 찼다. 한참이 지나서야 바르바토스는 그중에서 크리스탈 포도주잔을 찾아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가, 간다?” “그래. 제발 좀 가라.” 주정뱅이의 진상에 지쳐서 단탈리안이 한숨 쉬듯 말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그 무례한 태도에 보복했겠으나, 그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바르바토스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간다'라고 말한 것도 단탈리안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린 것이었다. “조, 좋아. 발레르뇽 505년 산……어디 그 응큼한 속살의 냄새를 나에게 내보여봐라.” “응큼한 건 포도주가 아니라 네 머릿속 같은데…….” “시끄러워!” 바르바토스가 마법을 영창했다.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도구 없이 뽑아내는 마법이었다. 아무리 좋은 병따개라 해도 마개를 따는 도중 코르크 찌꺼기가 조금은 술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코르크 찌꺼기는 술맛을 미묘하게 떨어트렸다. 그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천일백삼 년 전에 바르바토스는 이른바 <병따개-마법>을 개발했다. 바르바토스는 이것이 전생을 통틀어서 그녀가 이루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자부했다. 고작 2서클 마법, 쓸 구석이라고는 포도주 병따기밖에 없었지만 여하간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방금 전에 5서클 이상의 대마법을 아무런 영창 없이 세 겹씩이나 펼쳐낸 바르바토스가 2서클에 불과한 병따개-마법은 세심하게, 아주 느릿하게, 최대한 신경을 집중하여 영창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가 마법영창을 중얼거릴수록 코르크 마개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조금씩. 또 조금씩. 그리하여 마침내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천 년 묵은 포도주 향이 바르바토스의 코에 화악 풍겼다. “…….” 그녀는 감동했다. 정신이 상공 오백 미터쯤까지 날아갔다. 확실했다. 이건, 진품이었다. 빼도박도 못하게 진짜 <화탕지옥 용암영지 발레르뇽 505년 산(産)>이었다. 압도적인 향――그윽하면서도 황홀하고, 다채로우면서도 깊은――향기. 바르바토스는 아직 술도 안 마셨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알딸딸했다. “처, 천국은 실존하는 것이었나?” “냄새만으로 그렇게 좋아해주니까 기쁘네. 이제 마셔보지 그래?” “마시라고……? 이걸……?” 그녀가 덜덜 떨었다. “단탈리안……너는 이것의 가치를 전혀 몰라……어, 어떻게 이걸 마셔? 보물은 마시는 게 아니라구……?” “너 술 좋아하잖아. 여기 최고의 술이 있어. 그런데 안 마셔?” 옳은 말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절망했다. “크윽!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기에 이 발레르뇽을 원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술을 좋아하기에……그렇기에 더더욱, 이 발레르뇽을 마실 수 없다! 역설! 부조리! 번뇌! 이것이 삶이냐!” “조금만 더 있으면 포도주 한 병으로 우주의 진리를 깨닫겠네. 야, 병 이리 줘봐. 내가 따라주마.” “으, 응.” 바르바토스가 얌전히 포도주병을 넘겼다. 도저히 자기 손으로는 술을 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크리스탈 술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포도주병을 잡은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임마! 그게 뭐야!” 병을 두 손으로 쥔 단탈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병을 쥐는 자세가 잘못되었잖아, 자세가!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 “이렇게?” “아니, 시발! 손바닥으로 꽉 잡지 말고, 바닥에만 살짝!” “……이렇게?” 바르바토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썅! 손바닥으로 잡지 말라고! 엄지랑 검지, 중지만 사용해서――.” “그냥 대충 좀 처마셔라 주정뱅이 알콜 중독자 년아.” 단탈리안이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답 없는 여자였다.   00066 두 개의 음모 =========================================================================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아무렇게나 술병을 잡아서 포도주를 부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커졌다. “야, 야!” “술이 즐기라고 있는 거지 뭐 잡는 법 따로 있고 따르는 법 따로 있어. 그런 거 신경 쓰다가 인생이 퍼석퍼석해져.” “이래서 남정네란! 무엇이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해!” “예이예이.” 단탈리안이 적당하게 대답했다. 바르바토스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그가 따르는 술을 얌전히 받았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움직였다가 자칫 황금보다 귀한 포도주가 한 방울이라도 쏟아질지 몰랐으므로. 단탈리안은 자신의 잔에도 대충 술을 따라넣었다. “건배.” “거, 건배.” 짜앙, 하고 크리스탈이 맑은 소리를 냈다. 단탈리안이 단숨에 잔을 기울여 마신 것에 반하여 바르바토스는 옴짝달싹 못했다. 그저 향기조차 제대로 감상하지 않고 맥주 마시듯 발레르뇽을 꿀꺽꿀꺽 넘겨삼키는 단탈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햐아.” “맛……있어?” “맛있네. 진짜 맛있어. 흐으음, 개인적으로 포도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기가 막히네.” 그녀의 황금빛 눈이 반짝거렸다. “어떤 맛이야? 응? 맛이 어떻냐니까?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봐.” “……직접 마셔보면 되잖아.” “그, 그렇지.” 바르바토스가 쉼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그녀는 자기암시를 걸었다. 이것은 단지 붉은색 알코올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붉은색 액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혼잣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바르바토스는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다. 바로 옆에서 단탈리안이 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드디어. 잔이 기울어지고. 포도주가 흐르고. 입술과 혀끝을 적셨다. “……!?” 찰나, 바르바토스는 생명체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두개골이라는 이름의 단칸방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그곳은 어두컴컴하여 두 눈구녕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만 뭔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뭐지, 하고 의식에서 아득히 머나먼 저편에서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멀리서 어느 신이 속삭였다. 이것은 뭐지? 빛 그 자체이지 않은가? 보아라, 저 너머에서 빛이 새어오고 있지 않은가? 놀랍도다, 더더욱 빛이 거세지고 있구나! ‘아아, 아아아.’ 그녀는 환상을 목도했다. 자신이 유목민이 되어 질주하고 있었다. 진짜 유목민이었다.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땅에서 울려퍼져 전달되어 오는 진동에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끼고, 마침내는 박차도 없는 박차를 내딛고, 마침내 고삐도 없이 고삐를 휘두르고,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고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일 따름이며, 벌써 말의 목덜미도 말의 머리도 없이, 오직 한 줄기의 갈기만이 휘날리게……. “흑, 으흑흑. 흐윽.” 구원이었다. 참된 구원이 여기 있었다. 단탈리안이 식겁했다. “뭐, 뭐야. 너 지금 설마 우냐?” “살아있기 잘했어, 으헝헝.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천 년은 힘들었지마안, 헝헝. 살아있길 잘했어.” 그녀는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포도주를 홀짝거렸다. 바깥으로 배출하는 수분을 술로 보충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그 와중에도 향기를 맡고, 술을 혀안에서 굴리고, 식도에 넘어가는 식감을 느끼는둥, 와인을 즐기기 위한 모든 절차를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고 준수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 지나치게 포스트모던적인 광경에 단탈리안은 멍 때렸다. “이리 내놔.”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워버린 바르바토스가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는 술병 바닥의 홈에 오른손 엄지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포도주병을 손에 고정시키고 왼손에 든 잔에다 술을 따랐다. 포도주를 따른 다음에는 행여나 방울이 튀지 않도록 술병을 우아하게 살짝 돌려주었다. 편집증이나 다름없는 주도(酒道)였다. 그 광경이 반복되었다. 울고, 술 따르고, 마시고. “훌쩍, 훌쩍.” ─ 또르르륵. “으헝헝, 맛있어, 너무 맛있다고 시발.” ─ 또르륵. 단탈리안은 자기 술을 마시는 것도 잊어버렸다. 울고불며 술을 따라마시는 겉모습 열두 살짜리 소녀의 모습은, 좋게 말해서 초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해서 조금 미친 것 같았다. 단탈리안은 게임 설정을 통해 마왕 바르바토스가 유명한 술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궁금한 점이 있어. 왜 맛있다면서 시발거리는 거냐?” “으흑. 이렇게 맛있는데 마셔버리면 마시는 만큼 양이 줄어들잖아. 그건 정말로, 정말로 시발스러운 거야. 흑. 자고로 눈물 들어간 발레르뇽을 마셔보지 않은 자와는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 그랬지.” 명언의 출처가 누구인지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단탈리안은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이쯤에서 운을 떼고자 했다. 바르바토스를 놀리는 것이 예상치도 않게 재미난 탓에 시간이 꽤 지나갔다. “그래?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고?” 단탈리안이 아쉽다는 어투로 혼잣말했다. “곤란하네.” “으헝헝. 뭐가 곤란해, 자식아?” “네가 리프의 시체에 남겨둔 표식에 대해 논하려고 왔거든. 눈물 들어간 발레르뇽을 마셔보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니, 나로서는 곤란할 수밖에.” 그 순간에. 바르바토스가 손에 쥔 술잔을 떨어트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의외로 냉정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해서가 아니었다. 손가락에 힘이 풀리는 정도의 작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술잔을 들어올려 막 입에 털어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이 정지했다. “……으흥.” 그녀가 즉각 상황을 파악했다. 이천 년 동안 벼리고 다듬은 습관과 직관이 알려주었다. 속수무책으로 일격을 얻어맞았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훌륭하지 않은가. 황금빛 눈동자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암사자와 같은 눈빛이 대신 자리잡았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바르바토스에서 서열 제8위의 최고위 마왕으로 둔갑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그녀는 마비에서 풀려나 포도주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래서, 발레르뇽 505년 산인가.” 맥락이 없는 문장. 눈앞의 남자는 그 비약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아. 서열 제8위의 마왕 전하이니까. 긴장을 풀어재끼는 데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지.” “슬슬 이해되기 시작하는군. 처음에 발레르뇽을 공중에 내던진 것부터 포석을 쌓은 거였어. 그 어마무지한 횡포에 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그녀는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했다. 이상하지 않았는가. 세상에 어떤 자가 뇌물을 주면서 그 뇌물을 던져버릴까. 심지어 그것이 뇌물을 받을 상대방에게 더없이 소중한데도 말이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해 기껏 장만해낸 보물을 일부러 던져버림으로써 호감을 떨어트리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폭거였다. “거기에 더해 술을 깔보는 식으로 발언했지. 즉 나한테 이런 인상을 심어준 거야. 아, 단탈리안 이 개새끼는 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바르바토스가 숨죽여 웃었다.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돼지. 이 포도주를 구한 사람은 다름아니라 너다. 당연히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철저히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고작 술이 아니냐며 쫑알거렸어. 나를 주정뱅이 취급하면서. 그게 전부 이몸을 방심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거지……흐으응. 꽤 대단한 책사잖아.”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정하지 않을게.” “자랑해도 좋아.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어, 애송이. 흑마법의 주인이자 십만 영혼의 군주요, 인간종 살해자인 나 바르바토스를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결국 네놈이 기습적으로 리프의 시체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잠깐 멈칫거리고 말았지. 암묵적으로 그것이 내가 한 행위임을 인정해버린 거야.” 황금빛 눈동자가 단탈리안을 슬쩍 흘겨보았다. 맹수가 자신의 적수를 노려볼 때 취하는 눈빛이었다. 한없는 경계심이 그곳에 서려 있었다. “단탈리안. 서열 제71위의 나약하디나약한 마왕아. 그 단 한순간을 위하여 도대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어느 정도의 연기를 해온 것이냐? 그래. 처음 만난 순간에 허물없이 반말을 쓴 것도 연기였고 가장이었나?” 그녀의 경계심에 단탈리안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온갖 겉치레와 예의를 한 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듦이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말한 문구였다. “저기, 바르바토스. 네가 지금 입에 대고 있는 포도주는 진실로 아름답지 않아?” “호오. 내 한 순간을 빼앗을 정도의 가치를 이 포도주가 갖고 있다는 얘기로군.” 바르바토스가 감탄했다. “실로 맞는 말이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어. 하, 패자로 하여금 패배에 승복할 뿐만이 아니라 패배를 기껍게 받아들이도록 하다니. 좋아. 순수하게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하겠어. 완벽한 연극이었어.” 그녀가 크리스탈 잔을 내밀었다. “나 바르바토스가 그대를 위하여 건배하지. 단탈리안을 위하여.” “단탈리안을 위하여.” 챠아앙.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르바토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나 환상적인 맛이었다. 이같은 술이라면 한 번 정도 속아넘을 가치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굳이 발레르뇽이 아니라 다른 최고급 포도주를 가져왔더라도 단탈리안은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게 계략이었음을 깨닫고 나서 자기는 단탈리안을 미워하겠지. 허물없이 반말하라고 한 배려, 파이몬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응원, 무작정 찾아왔는데도 기꺼이 환영해준 친절, 그것들이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단탈리안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술을 대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당신을 속이는 데엔 이 정도 가치가 있습니다.’ 최상의 배려가 아니고 뭔가. 최고의 응원이고, 최대의 친절이 아닌가.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는 속아넘은 이 순간에도 유쾌하게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부를 싫어했다. 대체로 아부란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대담하게도 바로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목적을 이루었고, 그녀를 치켜세웠다. 부패한 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아부가 아니었다. 진심을 다해 싸운 검투사가 치열한 전투 끝에 상대를 치하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전사들만이 교감할 수 있는 우정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승리를 거두었을뿐더러 상대의 마음까지 얻었다. 진정한 승리였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내가 한 짓인 걸 알았냐?” “지금은 술을 즐기는 데 집중해도 좋을 텐데.” “새끼, 나 궁금한 거 있음 못 사는 성격이야. 말 안 해주면 천하의 발레르뇽을 마시면서도 네 자식이 어떻게 알아냈을까 궁금해서 딴 생각이나 처할 거다.” 단탈리안이 키득거렸다. “그래. 곤란하네. 모처럼 고생해서 준 선물인데 친구가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야.” “그걸 아는 놈이, 어휴. 됐고. 얼른 잘난 아가리 좀 털어봐.” “이것만 좀 마시고.” 단탈리안이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상대방을 안달 못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의 같잖은 수작에 분노하면서도 잠자코 기다렸다. 승자가 복기(復棋)에 참여해주겠다는데 패자가 된 입장에서 닥달할 수도 없었다. “캬아. 맛있다.” “우쒸.” “알았어, 알았어. 말해줄게.” 단탈리안이 웃었다. “우선 발푸르기스 밤에 참여한 사람이 용의선상에 올랐지. 시기로 따져보면 청문회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아닐 경우 리프의 모험대를 후원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시발, 좋아. 그건 나도 이해했어.” 바르바토스의 하얀 미간에 인상이 졌다. “그런데 발푸르기스 밤에는 서른두 명의 마왕이 참석했다고. 그중에서 어떻게 날 골라?” “간단한 논리야.”   00067 두 개의 음모 =========================================================================                        “……호오.” 바르바토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간단한 논리, 그 말이 바르바토스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완전무결한 추리에 의해 이루어진 패배였을까? 허점이 있지 않았을까. 약간의 운과 직감에 의존해서 단탈리안은 그녀가 범인이라고 어느 정도는 때려맞힌 것 아닐까. 바르바토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전사끼리 벌이는 결투에서는 운에 의해 승부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경우는 적을지라도, 어느 정도 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야 비일비재하다. 바르바토스도 알고 있었다. 운 역시 승부의 요소임을.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천성적으로 전사의 기질을 타고 났다. 완전하게 운을 배제한 승부를, 진정한 건곤일척의 실력 싸움을 바랐다. “좋아!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빈 술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크리스탈 잔이 산산조각 났다. “네 자식이 승리했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해. 그에 대해 어떤 불만도, 심지어 아쉬움도 분함도 없다. 오히려 기쁘다. 네가 나의 기대에 걸맞게 꽤나 뛰어난 새끼였다는 것이. 나는 너놈한테 99점을 매기겠어. 무슨 뜻인지 알겠냐?” “……백점만점이 아니라는 소리로군.” “깔깔깔! 그래! 100점과 99점 사이에는 대양과 하늘 사이의 간극이 있음이라.” 그녀는 오른손을 번쩍 올려들었다. 위대한 흑마녀의 손짓에 영령들이 응답했다. 공기가 음산하게 떨어댔다. ─ 고오오오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버섯과 같은 무언가가 솟아났다. 최고위 몬스터 <죽음의 기사>였다. 단탈리안이 보유한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최하급골렘 레벨 10짜리 따위는 칼질 한번에 무더기로 죽일 수 있는 괴물.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죽음의 기사>가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오로지 주인의 부름에 대답하기 위하여. ─ 그르르르……. ─ 고오오오오. 그들은 순식간에 마왕방의 드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바르바토스가 들어올린 오른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오백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장검을 빼들었다. 오백 자루의 검이 발도하면서 내는 쇳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멈추었다.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몬스터들이 완벽하게 대열을 이루었다. “…….” 단탈리안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압권이었다. 여기 도열한 오백 마리의 몬스터를 이길 수 있는 군대 따위,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겠지. 인간계와 마계를 통틀어서 틀림없이 최강의 부류에 속하는 군대가 소리없이 압박을 보내오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부하들이다!” 바르바토스가 입가에 한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나와 함께 전장을 돌아다니지 않은 이 여기 없으며, 명예로운 승리의 피를 맛보지 아니한 자 여기 없다. 이들이 내 영광이요, 이들이 내 역사이다. 나는 그 어떤 마왕일지라도 이들을 존중하는 만큼은 결코 존중하지 않는다. 단탈리안! 무엇보다도 소중한 나의 부하들 앞에서 나를 논파시켜 봐라!” 그녀가 단탈리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결투다. 검이 오가고 피가 튀기지 않으나 엄연히 내 자존심과 네 자존심이 교차하는 결투야. 무릇 재미난 경기에는 그만한 관람객과 배당이 뒤따라야 하는 법. 단탈리안, 내 승부를 받아들여라. 네놈이 이긴다면 나의 명예로운 기사 열두 명을 건네주겠다.” 죽음의 기사 열두 마리! 단탈리안은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현재 그는 던전 레벨이 아직 3에 불과하여 F급 몬스터밖에 구입할 수 없었다. A급 몬스터 죽음의 기사가 열두 마리나 가세한다면 계산할 필요도 없이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잔뜩 달아오른 심장과 정반대로 단탈리안이 냉정하게 사고했다. 그녀는 승부라고 말했다. 승리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기에 당연히 패배에 대한 대가도 상정될 터였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거 구미에 엄청 당기네. 그래서, 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데.” “내 부하가 되어라!”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벌렸다. “난 네놈이 마음에 들었어. 남자인데도 내 마음에 들었다는 건 시발, 엄청난 대사건이야. 그 정도로 네 녀석의 마음가짐과 능력이 끌려. 약속하지. 결코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을게. 너는 서열 제8위의 마왕군에서 명실상부한 이인자로 인정받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지금 마왕들은 태반이 쓰레기야! 마왕으로서의 존재이유까지 망각해버린 채 자기 한 몫의 목숨, 한 몫의 안전만 챙기고 있어. 녀석들을 따로 마왕이라 불러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녀석들이 저 인간계의 수많은 영주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나는 녀석들이 쓰레기 중의 쓰레기라고 단언해. 단탈리안, 나와 함께 지상에서 모든 쓰레기를 불태워버리자.” 바르바토스가 음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인간계를 지배한다. 마인을 위한 세계를 구축한다.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제국을!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 대제국의 영원한 재상은 네놈이 될 것이야.” “크흐.” 단탈리안이 웃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군. 그 승부, 받아들이지.” “좋아!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바르바토스가 팔을 휘저었다. 그녀와 단탈리안의 옆으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바르바토스의 키보다 세 배는 거대한 목록이었다. 거기에는 서른두 명의 이름이 한 줄씩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발푸르기스 밤에 참석한 총 서른두 명의 마왕! 그중에서 왜 하필 나 바르바토스가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넣은 범인인지 설명해라.” “먼저 산악파 전원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한다.” 단탈리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유는 간단. 산악파가 같은 산악파인 벨리알을 모함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 “하, 우스워라!”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왜 하필 제3자가 표식을 남겼다고 생각하지? 정말로 벨리알 본인이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남겼을 수도 있다. 단탈리안, 이곳은 신성한 결투장이다. 단 하나의 비약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설명해라!” “이건 비약도 뭣도 아니야. 리프의 시체에 표식이 남아 있다――'그 자체'가 표식을 남긴 자가 벨리알이 아님을 증명한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리프의 모험대를 뒤에서 도와준 자를 후원자라고 부르자. 왜 후원자는 나와 직접 싸우지 않았을까? 왜 인간의 모험대 따위를 몰래 지원했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야.” 그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이리저리 걸었다. “그렇다면 '몰래 리프를 도와준다'라는 행동과 '리프의 신체에 자기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증거를 남긴다'라는 행동은 명백하게 서로 모순되지. 고로.” 그가 거대한 목록에서 벨리알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끝으로 그었다.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긴 자는 후원자가 아니야. 여기에서 리프와 후원자를 제외한 또 다른 '제3자'가 등장하지. 그가 바로 리프의 시체에다 벨리알의 표식을 새겨넣었어.” “깔깔. 좋아, 인정한다.” 바르바토스가 팔을 한번 휘둘렀다. 목록에서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열 제68위 벨리알'이라 적힌 부분의 정중앙에 가로로 길게 획이 그어졌다. 단탈리안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른두 명에서 한 명이 용의자 혐의를 벗었다. 어쩌라는 얘기인가? 그래봤자 한 명. 아직 서른한 명이나 남아 있다! 그중에서 제3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특정 짓는 것은 여전히 아득하게 어렵다. “그렇지만 단탈리안 네놈의 논리에는 허점이 있어. 단순히 파벌이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산악파 전원을 용의선상에서 지워버리려 하다니!” 바르바토스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똑같은 파벌일지라도 얼마든지 서로한테 원한을 품는 게 가능하다. 평원파 내부에서도 치고박고 싸우는 게 마왕이란 종자야. 산악파라고 다를까! 벨리알이 존나 싫어서 어떤 산악파 놈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반론이야. 하지만 쓰잘데기 없지.” 단탈리안이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다녔다. “난 반론을 위한 반론을 제법 싫어해.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듯한 반론이 실제로는 트집잡기에 불과한 경우가 부지기수란 말이지. 벨리알은 서열 제68위야.” 그가 강조해서 되풀이했다. “겨우 68위에 불과하다고. 만약 68위한테 진지하게 계략을 꾸며야만 하는 누군가가, 그것도 이렇게 빙빙 돌려서 계략을 꾸며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는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68위조차 공격할 수 없는 그런 녀석일 거야. 68위보다 약한 녀석 말이야. 따라서 69위부터 72위까지 총 네 명이 용의자에 들어가게 돼. 저런, 안타깝게도.” 단탈리안이 네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가 검지를 구부렸다. “제72위 안드로말리우스는 내가 죽여버렸군. 용의선상에서 제외, 세 명이 남는다. 다음으로 제71위 나 단탈리안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야. 용의선상에서 제외, 이제 두 명이 남는다.” “흥.” 바르바토스가 손을 저었다. 거대한 목록에서 '서열 제71위 단탈리안'이라고 적힌 곳에 획이 그어졌다. 단탈리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제70위 세에레는 청문회에 참여도 했고 살아도 있었지만 산악파가 아니야. 아무 파벌에도 가입해 있지 않지. 용의선상에서 제외. 마지막 한 명, 서열 제69위 데카라비아가 남는군.” 단탈리안이 소리쳤다. “그런데 데카라비아는 청문회에 참석하지 않았지! 범인이 될 수 없어. 고로 똑같은 산악파의 누군가가 벨리알을 모함에 빠트렸다는 네 반론은 무효해.” “……크. 하지만 서열 제68위 이상의 마왕이 벨리알을 모함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거야말로 억지야. 한번 봐보시지.” 단탈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목록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찍히 라피스가 단탈리안에게 제출한 양피지 목록과 똑같은 이름들이 그곳에 나열되어 있었다. ──────────────────────── 서열 제5위 마르바스  · · · (중립)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 · · (평원) 서열 제9위 파이몬   · · · (산악) 서열 제10위 부에르   · · · ( - ) 서열 제12위 시트리   · · · (산악) 서열 제14위 레라지에  · · · (평원) 서열 제16위 제파르   · · · (평원) 서열 제20위 푸르손   · · · (중립) 서열 제21위 모락스   · · · (산악) 서열 제22위 이포스   · · · ( - ) 서열 제27위 로노베   · · · (산악) 서열 제31위 포라스   · · · (산악) 서열 제33위 가프    · · · (산악)    ·    ·    · 서열 제50위 푸르카스  · · · (평원) 서열 제55위 오로바스  · · · (산악) 서열 제57위 오세    · · · (산악) 서열 제62위 발라크   · · · (산악) 서열 제68위 벨리알   · · · (산악) 서열 제70위 세에레   · · · ( - )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 · · ( - ) ──────────────────────── “벨리알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마왕은 발라크, 서열 제62위이다. 서열이 육 위나 차이가 나지. 파벌에서 두 사람이 갖는 발언권은 천지차이일 터. 62위가 68위를 모함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험대를 뒤에서 후원하고, 한 시체에다 표식을 새겨넣는 그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한다고? 그것도 다름아니라 자기보다 서열이 까마득하게 낮은 제71위, 나 단탈리안에게 복수를 대행시키기 위하여?” 단탈리안이 웃었다. “말이 안 된다! 벨리알을 모함한 것은 같은 산악파가 아니다. 산악파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벨리알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하여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놓았다. 제3자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 첫 번째 반론이 논파당했다. 바르바토스는 서른두 명이나 참석했으면 그중에서 정확하게 범인을 골라내지 못하리라 안심했다. 방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발푸르기스 밤에 참여한 마왕, 총 서른두 명. 그중 산악파에 속하는 자, 열일곱 명. 그녀는 단탈리안이 산악파 전원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버리는 것을 잠자코 지켜봐야만 했다. 바르바토스는 입가를 비틀면서 손을 휘저었다. ─ 촤자자자작! 한순간에, 열여덟 개나 되는 이름에 획이 그어졌다. 서른한 명, 이라는 용의자 숫자가 건네주던 안정감은 단박에 사라졌다. “자아. 용의자가 서른 둘에서 고작 열다섯으로 줄어들었어. 나도 용의자에서 빠졌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열네 명이로군. 여전히 많은 숫자이지만 범인을 골라잡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걸.” “……크.” 바르바토스가 침음을 삼켰다. 단탈리안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빛났다. “자, 다음 경우의 수를 지워보자……그 전에 목 좀 축이고 말이야.” 00068 두 개의 음모 =========================================================================                        “자, 다음 경우의 수를 지워보자……그 전에 목 좀 축이고 말이야.” 단탈리안이 포도주를 머금었다. 그는 첫 번째 난관을 넘어갔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불만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놈 말이 그럴듯하긴 해. 그래도 여전히 빈틈이 있어. 치즈에 난 구멍처럼 숭숭 뚫려 있다고. 만약 어떤 산악파 새끼가 훼까닥 돌아버린 거였다면? 파벌의 이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불합리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저 단탈리안 네놈을 놀리기 위해서 장대한 장난을 벌인 거였다면?” 단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난 어느 정도 용의자들이 합리적인 행위자라고 가정하고 있지.” “맞아, 애당초 말이 안 돼. 마왕들은 절반이 미친 새끼야. 까놓고 말해 벨리알이 지나치게 멍청하거나 머리가 맛이 가서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겼을 가능성도…….” “그러니까 요컨대 바르바토스 너는 '우연'에 기대고 싶어하는 거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단탈리안이 술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안에서 붉은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쟤가 정말로 순전히 추리에 의거해서 날 범인으로 때려맞힌 것일까? 운 좋게 우연히 범인으로 지목한 것 아닐까? 발레르뇽 505년 산은 추리에 자신이 없어서, 자기가 맞게 찍었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려고 동원한 꼼수 아니었을까?……그걸 확인하기 위하여, 바르바토스. 너는 나한테 승부를 제안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비합리적인 것에 기대어 나를 논파하려 하는구나.” 그가 바르바토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야. 어떤 미친 작자가 완전히 비합리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지. 어떤 우연적인 것에 의해서 리프의 시체에 표식이 남은 걸지도 모르지. 이건 어떻게 생각해? 서열 제7위 아몬은 천리안의 능력을 갖고 있지. 그는 발푸르기스 밤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천리안으로 청문회를 지켜봤을지도 몰라. 안 그래?” “그건…….” “우리는 아몬 또한 용의선상에 추가시켜서 서른두 명의 마왕이 아니라 서른세 명의 마왕을 의심해봐야겠네. 왜 아몬이 서열 제71위인 나에게 관심을 가졌고, 왜 서열 제68위인 벨리알을 모함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아몬이 조금 미쳐서 그딴 짓거리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이 모든 게 나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지. 내가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놓은 다음 엉뚱하게 너한테 떼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아몬보다는 내가 범인에 가까워보이는군.” 바르바토스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스스로 승부의 목적을 부정할 셈이냐고. 어떤 우연한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론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반론해버리면 애당초 우연을 배제하고 싶어하던 네 목적은 어디로 가버리는가. 우리 두 사람의 결투를 부정해버릴 텐가. “미안해. 내 실수였어.” 그녀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것은 무작정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추리극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규칙과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는 결투 시합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망각했다는 것에 바르바토스는 한숨을 쉬었다. 반절의 용의자가 목록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조급해졌을지 몰랐다. 그렇게 두 번째 반론이 제지되었다. 단탈리안이 싱긋 말했다. “다음으로, 평원파 전체를 용의자에서 제외한다. 물론 널 빼고.” “뭐, 뭣!?” 바르바토스가 눈이 커졌다. 현재 용의자로 남은 열네 명의 마왕 중에 평원파가 아홉을 차지했다. 바르바토스를 제외함으로써 총 여덟 명의 평원파까지 목록에서 지워버리면――용의자는 불과 여섯 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말도 안 돼!” “아니, 가능해. 평원파는 평원파라는 이유 때문에 곧바로 용의선상에서 사라진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청문회에 참석한 평원파 전원은 알고 있어. 바르바토스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공언했음을. 청문회가 끝나고도 네가 날 데리고 종일토록 도시 관광에 나섰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자아. 만약 평원파 일당이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남겨두었다고 가정하자.” 왜 그랬을까, 하고 단탈리안이 자문했다. “벨리알이 정말로 범인이라면 굳이 나한테 보복을 맡길 필요가 없지. 불과 며칠 전에 파이몬이 설전에서 패배했어.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산악파의 누군가가 애꿎게 단탈리안을 공격했다? 그 증거를 잡았다?……잘만 하면 산악파한테 큰 일격을 먹일 기회야.” 그런데도 평원파는 침묵했다. 그들은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심지어 단탈리안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한 달을 보냈는데도, 평원파에서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단탈리안에게 접근하여 우리가 도와줄 테니 산악파를 추궁하자고 제안이라도 할 수 있었음에 불구하고. “'산악파에 적대한다'라는 행동 그리고 '산악파를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행동은 서로 모순이다. 따라서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그들은 산악파를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할 수 없어. 즉, 그들에겐 벨리알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다!” 단탈리안이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알을 모함했다. 어째서인가? 왜 벨리알을 공격하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 고작 서열 제68위의 마왕을 공격하기 위해 이토록 장대한 계략이 필요한 까닭이 어디 있는가? 아까 전과 똑같은 논변이 여기에 적용돼. 바로 벨리알보다 약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단탈리안이 거대한 목록을 검지로 가리켰다. “보다시피 벨리알보다 서열이 뒤떨어지는 평원파는 전무! 가장 서열이 낮은 평원파 일당이 서열 제50위 푸르카스야. 자그마치 열여덟 단계나 서열이 차이나지. 그런 자가 최약의 마왕인 나 단탈리안에게 보복을 맡긴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이의 있어!” 바르바토스가 바득 이를 갈았다. “네놈은 지금 평원파의 목적이 벨리알 개인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어!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만약 평원파가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겼다면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벨리알 개인이 아니라 산악파 전체일 거야! 고로 서열이 얼마 차이나는지와 상관없이 산악파에는 벨리알을 모함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전적으로 동의해.” 단탈리안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바르바토스가 불길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네가 말한 그대로야. 평원파는 벨리알 개인을 목표하지 않았어. 산악파 전체를 목표한 거지. 궁금하군,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왕이길래 제대로 된 증거 하나도 없이 산악파 전체를 공격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 바르바토스가 숨을 삼켰다. 당했다! 단탈리안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만약 평원파가 벨리알을 모함했다면, 그 평원파 인물은 산악파 전체를 증거도 없이 적대할 만큼 강력한 자'라고 인정하게끔 유도했다. 이렇게 되면――. “산악파는 명실상부 최고의 세력. 그들을 감당이라도 할 수 있는 세력은 평원파 전체밖에 없어. 그중 평원파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마왕은 단 한 명.” 단탈리안이 그녀를 가리켰다. 평원파의 수장. 누구보다 산악파를 증오하는 자. “바르바토스, 너밖에 없지.” “…….” 그녀는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처음에는 서른두 명의 용의자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열네 명, 열다섯 명, 천천히 용의자가 제외되더니 순식간에 표적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평원파가 범인이라면 오로지 바르바토스 단 한 명만이 주범일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단탈리안이 결투에서 이길 것이라는 직감이 슬며시 다가왔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녀를 구해준 직감이. 아직 반론할 거리가 남아 있긴 했다. 결정적인 반론이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이겨내고 말겠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그녀는 명예를 내건 전투를 바라왔다. 마왕으로서 자신의 명예란 인간계를 정복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월맹군의 선두에 섰다. 패배하고, 또 패배해도 끝없이 나아갔다. 그곳에 명예로운 결말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결말이 승리이든 죽음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오로지 전투를. 명예로운 대전쟁을. 이천 년이 지났다. 단 한번도 그녀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월맹군은 번번이 무너졌다. 자중지란으로. 그곳에 명예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겁함과 두려움, 시기와 질투, 무엇보다도 어리석음만이 지배했다. 동지들은 점점 지쳐나갔고, 등을 돌렸으며, 아예 떠나기도 했다. 그녀라고 어찌 지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바르바토스의 입 끝이 올라갔다. 눈앞의 녀석이 옆에 같이 있어준다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의 이천 년을 견딜 것이다. 철저하게 본능과 직관을 따라 움직이는 자기와 다르게, 단탈리안은 그 영민함과 음험함으로 월맹군을 보좌해줄 것이다. 어쩌면 꿈에도――그리는 대전쟁을 한판 펼치게 되리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시험해보자. 최후의 반론까지 깨트려봐라. 너에게 십만의 마왕군을 보좌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시험해주겠다. “어림도 없는 개소리!” 바르바토스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녀는 흥겨워 웃고 있었다. “네 자식의 모든 주장은 평원파가 범인이라는 가정 아래 이루어지고 있어! 이걸 어쩐담! 산악파와 평원파가 모조리 의심에서 벗어난다 한들 아직도 여섯 명! 날 포함해서 여섯 명이나 남아 있어!”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촤자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목록에서 평원파 전원의 이름에 획이 그어졌다. 오직 바르바토스의 이름만이 무사했다. “서른두 명을 여섯 명으로 줄인 그 재치, 진심을 담아 칭찬하지! 그러나 어떻게 여섯 명 중에서 나를 골라낼 거냐! 중립파 혹은 무소속 인물은, 그저 산악파와 평원파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넣은 것일 수 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섯 명의 남은 용의자 중에는 벨리알보다 약해빠진 서열 제70위 세에레가 있다! 네가 표현하듯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를 밟아서 계략을 짜낼 이유가 넘치고도 흐르지. 약자는 강자에게 계략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혹시 모르지, 이번 기회에 단탈리안 네놈과 벨리알을 이간질시켜서 이득을 보려는 것인지. 또한!” 바르바토스가 목록의 가장 꼭대기를 지목했다. “중립파의 수장 서열 제5위 마르바스 늙은이는 예전부터 산악파와 평원파를 꼴보기 싫어했다. 그 늙은이 새끼한테는 아무런 증거 없이도 산악파를 모함할 배짱이 있지! 있고 말고! 양대파벌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 중립파가 세력을 불린다, 그런 시나리오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단탈리안이 휘두른 논리의 축 두 개, '한참 서열이 높은 자가 굳이 벨리알을 모함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한참 서열이 낮은 자가 산악파 전체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가 막혔다. 전자의 경우에 서열 제70위 세에레가 포함되었고, 후자의 경우 서열 제5위 마르바스가 포함되었다. 바르바토스를 포함하여 최소한 세 명의 용의자가 남게 되었다. “왜 하필 나 바르바토스가 범인이냐!” 그녀가 흥분에 차서 말했다. “네놈이 이 몸을 패배시킬 수 있겠냐!” 그녀의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쳤다. “네놈의 가능성을――능력을 나에게 보여봐라!” 드넓은 홀.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까지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죽음의 기사 오백 마리가 주인이 흥분한 것을 알았는지 그르릉 울어댔다. 거대한 손을 폈다가 구부렸다. 주인이 명한다면 당장이라도 저 오만불손한 녀석을 물어뜯겠다는 듯이, 십이지장을 끄집어내 도륙하겠다는 듯이. 바르바토스의 마왕궁에 흥분과 살기가 차올랐다. 그녀 역시 발끝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녀의 모든 신경은 단 한 곳, 단탈리안의 입술에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받아칠 것이냐. 아니, 받아치는 게 정말로 가능한가. 만약 받아친다면……어떻게. 입술이 열렸다. “우리가 여태까지 간과한 사실이 있지. 실로 중대한 사실 한 가지가.” 차분한 목소리가 마왕궁에 스며들었다. “바로 누가 리프를 죽였냐는 것이다.” “…….” 바르바토스의 몸이 멈추었다. “더불어서 도대체 언제 리프의 시체에 각인이 새겨졌냐는 문제도 있지. 시체가 발견된 당시, 리프 주변에는 동물과 벌레를 쫓아내는 마법이 걸려 있었어. 아마 범인은 그 마법을 거는 것과 함께 시체에다 표식을 그렸겠지.” 그녀가 멍하게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것이 이용되는구나. “누가 리프를 죽일 수 있었고, 누가 마법을 펼칠 수 있었는가? 간단해. 따로 생각해볼 것도 없어. 리프의 모험대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오직 두 명, 리프 본인과 정체모를 마법사밖에 없었어. 마법사가 리프를 죽였으며, 시체에 각인을 새겼고, 시체 주변에 마법을 펼쳐둔 거야.”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천 년 동안 그토록 바래온 진짜 승부를. 그 결말을. “이제 질문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돼. 마법사는 누구인가? 나는 곧바로 리프가 머물렀던 도시의 길드를 뒤졌지. 하지만 리프가 고용했다는 마법사는 서류에만 표시되어 있었어. 실제로는 마탑에 가입되지 않은 인물이었지. 명부상의 존재. 의심스러운 냄새가 풀풀 풍겼지.” 비록 칼날과 핏방울이 오가는 전장터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마법사는 대략 4서클 마법사로 보였어. 고위 마도사였지. 문제는 마법사의 마나색이 검은색이었다는 거야. 나는 당장 지금 남은 여섯 명의 용의자를 조사했어. 역시 최소한 수백 년을 활동한 마왕들이라서 그런지, 마왕들 본인에 대한 자료는 물론이고 그들의 심복에 대한 자료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어.” 긴 세월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마법사가 약 백일흔 명. 4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스물한 명. 여기서 마나색이 검은색인 마법사가 세 명. 자, 후보자가 좁혀졌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세 명 모두 인간이 아니었지. 리프의 모험대에서 활약했던 마법사는 틀림없이 인간 여성이었는데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어. 아.” 제법 잘 견뎠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둔갑 마법을 썼구나. 둔갑 마법은 7서클 대마법이야. 하! 이야기가 무척 간단해졌지. 총 백일흔 명의 마법사 중에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는 고작 세 명밖에 없었거든.” 말을 놓고 마음으로 사귀는 친구 한 명 없었다. 약해져가는 파벌을 단신으로 이끌어가면서 진흙탕 같은 전쟁과 정쟁을 헤쳐나왔다. 그렇게 지난 날을 떠올리면서, 바르바토스가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세 명 중에 마나색이 검정인 대마법사는 오로지 한 명.” 단탈리안은 미소 짓고 있었다. “바로 너야.” 정적. 침묵이 마왕궁을 메웠다.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가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목록에서 다섯 명의 이름에 획이 그어졌다.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그녀의 이름만이 덩그러니 온전히 남았다. “후우.” 단탈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세 번째 반론이 논파되었다. 힘겨운 운동 끝에 찾아오는 고양감 비슷한 것이 그의 전신에 퍼졌다. 그는 온통 죽음의 기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A급 몬스터 열두 마리가 얼마나 이득을 줄지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퍼졌다. “뭐, 그렇게 됐어. 여기까지 알아내는 데 꽤 시간이 많이 걸렸지. 나라고 바로 알아챈 건 절대로 아니야.” “…….”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 하하. 사실 죽음의 기사를 열두 마리까지……? 바르바토스?” 단탈리안이 멈칫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숙인 채 한발자국, 한발자국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한테로 다가갔다. 마침내 바르바토스가 그의 코앞에 섰다. “…….” “왜 그래, 이제와서 승부라도……어?” 그녀의 작은 양손이 단탈리안의 머리를 붙잡았다. “――으읍!?”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그녀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키 차이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바르바토스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바르바토스가 여전히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입술을 살짝 떼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거 알아? 너 지금 존나 멋있어.”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딥키스였다. 죽음의 기사들이 차마 주군의 남사스러운 장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들끼리 알아서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넓디넓은 마왕궁에 읍, 읍하고 신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약하게 울렸다.   00069 두 개의 음모 =========================================================================                        * * *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데 십 분이 걸렸다. 키스만으로 자그마치 십 분.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안이 얼얼했다. “더럽혀졌어……엉망진창으로.” 바르바토스는 테크니션이었다. 기술이 몇 가지 사용됐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드릴, 바이브, 진공까지는 알겠다. 그후로 기억이 삭제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나 역시 나름대로 한 기술 한다고 자부하는데 그녀는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바르바토스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사내 자식이 정어리처럼 비리비리하기는. 내가 네 나이 때는 인마, 사흘 밤낮으로 질펀하게 성교 파티를 벌였어. 깔깔, 그땐 나도 어렸지. 도대체 몇 번까지 갈 수 있는가 궁금해서 실험해봤거든. 삼백 번까지 세고 포기했지만.” “…….” 외양이 로리인 여자애가 어릴 적 어쩌고 그러면서 자신의 섹스 편력을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었다. 무서운 년, 누가 마왕이 아니랄까봐 성윤리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아직 소녀에 불과한 라우라와 자버린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얘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교섭은 성공했다. 예상보다 훨씬 크게. ‘상태창.’ 나는 성공의 결과를 확인했다 ━━━━━━━━━━━━━━━━━━━━ 이름: 바르바토스 종족: 마왕   소속: 바르바토스 마왕군, 평원파 속성: 악(-40) 레벨: 357   악명: 6985200 직업: 대흑마녀(SS), 마왕(S), 던전운영자(A+) 통솔: 330  무력: 460  지력: 153 정치: 159  매력: 209  기술: 301 호감도: 50 현재심리: ‘흐응, 남정네 새끼랑 입을 맞춘 건 처음이네.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걸. 확 덮쳐버릴까?’ ━━━━━━━━━━━━━━━━━━━━ ‘오케이. 호감도 오십을 찍었어.’ ……현재심리에서 무언가 불길한 내용이 비추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호감도 오십. 여기까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 이상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모종의 제한 조건을 깨트려야 했다. 제한조건은 캐릭터마다 천차만별로 바르바토스한테 정확히 어떤 조건이 숨겨져 있는지 당장 알아낼 수는 없었다. 라우라의 경우야 부하로 영입하자 덩달아서 조건까지 달성되었지만, 그런 행운이 두 번 반복하긴 어려웠다. 하긴 바르바토스를 부하로 영입하는 것 자체가 한없이 망상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만족해야지, 뭐.’ 나는 초조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단연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그만한 강자를 아군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순수히 기뻐해도 좋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능력치가 높아.’ 바르바토스는 압도적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경탄을 넘어서서 절망까지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 내 능력치를 전부 합쳐도 백오십 될까 말까한 상태에서 그녀의 능력치는 총합 일천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수치였다. 게임에서 그녀는 이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레벨이 357이라니! 서열 제4위는 되어야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레벨 250 부근을 서성였다. 아무리 높아도 260 이하였다. 350이니 뭐니 어이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숫자가 결코 아니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거, 난이도가 이상해.’ 서열 제8위 마왕의 레벨이 게임에 비해 백이나 뛰어올랐다. 그녀가 이럴진대 서열 제1위 마왕은 어떻겠는가. 본래 게임에서 최종보스 서열 제1위 마왕 바알은 레벨이 389였다. 헌데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영 불길했다. 바알마저 레벨이 부쩍 상승했을 것이 확실했다. 아마 최소한 레벨이 500에 이르지 않을까 싶었다. 레벨 500.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설령 내가 게임에서 키운 용사 캐릭터가 온다할지라도 이건 공략하지 못했다. 던전 어택 펜사이트 회원들이 보면 기절해버리고도 남으리라. ‘비너스빤스 이 개새끼가……제기랄. F급 모험대, E급 모험대가 왜 그리 강한가 했는데 그냥 전체적인 난이도가 높았어.’ 나를 이딴 세계에 집어처넣은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작자, 비너스빤스가 말한 얘기를 한순간이라도 잊은 적 없었다. 어찌 잊을까. 녀석은 나에게 정말로 신작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거냐고 질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던전 어택이 마왕들로부터 세계는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 이번 신작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 빌어먹을.’ 당시엔 쓰잘데기 없는 정보라 생각했지만 이젠 생각이 달랐다. 녀석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해졌다. 녀석은 그때 이 세계에서 내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해야 하는지 알려준 것이었다. 세계정복. 어린시절 우스개소리로 주고받던 낱말이 이토록 무겁게 다가올 줄 몰랐다. 게임에서 세계를 정복한다, 이건 쉬울뿐더러 지겹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현실에서 세계를 정복하라고 요구하면 그놈은 미친놈으로 취급되어야 마땅했다. 나는 그런 미친놈의 미친 헛소리를 진지하게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니고 뭔가. 문제가 심상치 않았다. 비너스반쓰는 '인간계'가 아니라 '세계'라고 표현했다. <던전 어택> 세계관에는 인간계는 물론이고 마계도, 설정상이지만 신계도 존재했다. 혹시 세계란 그 모든 세계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설마 그럴까 싶어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만일 세계가 인간계와 여타 세계까지 포함한다면……절망적이었다. “바르바토스. 사실 내가 오늘 찾아온 이유가 또 하나 있어.” “흐응? 뭐, 나랑 존나게 떡치겠다고? 발레르뇽 한 병만 더 주면 대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좀 봐줘라아.” 그렇기에 지금부터 대대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마왕들은 무시무시한 적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게임 속 스토리에서 마왕들은 인간종에 토벌당한다. 진실로 막강한 적은 마왕이 아니라 인간계 전체이다. 용사 일행에는 바르바토스만큼 강력한 동료가 수십 명이나 소속되어 있었다. 평범한 수단으로 현재의 내가 용사 일행을 넘어트리기란 불가능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하. 나 한번 박아보겠다고 밤마다 자위해대는 년놈이 수천 깔려 있단다. 발레르뇽 한 병이면 아주 싼 거야, 새끼야.” “우리 마계에 소녀성애자가 적어도 수천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네. 됐어, 진지한 얘기야. 치맛자락 올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흐응? 알았어.” “그렇다고 은근슬쩍 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지 말고!” 내가 식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바르바토스가 입을 삐쭉거리면서 치맛자락을 다시 올렸다. 새하얀 스타킹이 치마 속으로 달아났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는가. 너 같은 년은 전생에도 현생에도 처음이다. “쳇, 나중에 좆탱이 잡고 울고불며 사정해도 안 대줄 거다.” “저한테도 언제든 같이 놀아줄 상대가 있거든요?” “아앙? 그년이 나보다 매력적이라는 소리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골을 때려도 두 번 때리는 년이었다. “내 기술이 얼마나 죽여주는지 단탈리안 넌 모르지? 천하에 이름난 석녀(石女)도 내 손가락에 걸리면 시발 이십 초만에 분수를 뿜어내지 않고 못 배겨. 입까지 쓸 것도 없지. 손가락도 두 개 필요없어. 요거.” 그녀가 장난스럽게 검지를 까닥거렸다. “요거 하나면 충분하고도 넘쳐. 석녀가 색녀가 되고, 색녀는 창녀가 되지. 오로지 내 전용의 창녀 대부대에 소속된다 이 말이야. 너 삼백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다면서 고민상담을 해온 호족 여자가 생전 처음으로 내뱉는 신음소리가 어떤지 알아? 죽여줘요, 시발. 앙, 앙, 하응! 이런 건, 처음이에요! 전하! 흐읏! 사, 살려주세요! 하응! 하면서 마구마구 비명을 질러대는데 캬아. 교향곡도 그런 교향곡이 따로없지.” “으어어어…….” 귀를 틀어막았다. 여자아이 얼굴로 능글능글한 아저씨나 씨부릴 법한 음담패설을 속삭포처럼 쏘아대니 버틸 수 없었다. 성대모사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녀석은 아주 생생하게 꼭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신음을 따라했다. 문제는 묘한 배덕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랑거릴수록 하반신이 단단해졌다. 귀를 막아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걸로 판단하건대 아무래도 색욕을 일으키는 마법을 목소리에 섞은 것 같았다. 아까 전에 코르캐-따개 마법도 그렇고 이 녀석은 세상에 쓸모없는 마법이란 마법은 죄다 꿰뚫고 있었다. “짜식아, 눈 딱 감고 일 분만 나한테 맡겨봐. 천국을 무료로 관광시켜주지. 아니, 일 분도 필요없다. 너 새끼 하는 꼬락서니가 딱 고자니까 삼십 초면 충분해. 남자는 보통 한 번밖에 못 간다면서? 불쌍하고도 열등한 족속이지. 하지만 내게 맡기면 적어도 열 번까지는…….”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결론적으로 말해, 강철과 같은 이성이 유혹을 견뎠다. 그렇지 않아도 열여섯 살인 라우라와 자서 약간 마음이 찔렸다. 하물며 외견이 열두 살, 열세 살 정도인 바르바토스랑 자라니. 백 일 정도 성욕을 풀지 못해 짐승이 되어버린 상태면 또 모를까 지금은 결단코 거절하고 싶었다. “이상하네, 내 <꼴림-마법>에 버티는 경우는 잘 없는데.”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색정 마법을 썼다! 게다가 이름 붙이는 센스가 최악을 달렸다. 나는 어이가 두개골에서 가출해버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진심으로 저런 이름을 지은 것이라면 바르바토스의 정신머리를 심각하게 고찰해야 했다. “하아.” 내가 겨우 목소리를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한 달 동안이나 널 찾아오지 않고 게으름 피운 거엔 이유가 두 가지 있었어. 한 가지는 리프의 시체와 관련해서 평원파가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나 지켜봤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인간계에 소문 하나를 퍼트리기 위해서야.” “소문?”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만큼은 어린 얼굴이 순수해보였다. “그래. 지금 인간계에는 한창 불길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 바로 마왕이 흑사병을 퍼트렸다는 유언비어야. 내가 쿤쿠스카 상회를 경유해서 대대적으로 유포했지.” “아앙? 그딴 짓을 왜 했어?”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설마 파이몬 년이 말한 대로 진짜 네 자식이 흑사병을 만든 거냐? 아니지.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네놈이 사상최악의 질병을 만들 순 없을 텐데. 질병 제조가 특기인 마왕 놈도 흑사병 같은 것은 개발하지 못해.” “네 말이 맞아. 서열 제71위에 지나지 않는 내가 흑사병을 만들기란 요원하지.”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이 전무후무한 전염병이 자연적으로 생겼을 리 없다, 어떤 약한 존재가 만들었을 리도 없다.” “오호. 우리 마왕이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거냐.”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이란 항상 그 따위지. 지들이 불행하면 어떻게든 불행의 원인을 다른 곳에 갖다붙이려고 해. 신령을 향해 기도하고 마왕을 욕하지. 지들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업보임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흥미로운 견해이나.” 내가 고개를 저었다.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엉?” “흑사병은 현재 인간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있어. 초기 진압에 성공한 사르데냐 왕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가 전염병에 신음하는 중이지.” 일부 도시는 돌림병을 방역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블랙허브를 뿌린 덕분이었다. 몇몇 현명하고 용감한 영주는 자신의 재산까지 총동원해서 블랙허브를 사들였고, 그걸로 영지를 효과적으로 지켰다. 하지만 그같은 영주는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은 그저 값비싼 블랙허브를 자기 몸과 자기 식구를 구하는 데 사용했다. 나한테 블랙허브를 사들여 값을 배로 불린 다음 되팔아버린 영주와 대상인도 있었다. 결국 흑사병은 원래 게임에서 그러했든 무수한 피해를 내고 있었다. 블랙허브가 특효약인 것이 밝혀지고 이곳저곳에서 집단 재배가 시작했지만 첫 수확이 이루어질 때까지 몇 달이나 남은 상황. 효과를 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아들이 죽어 있다……인간들은 인세의 지옥에 빠져 있었다. “바르바토스, 인간계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똑바로 대처하지 못한 영주와 신전, 국가에 대한 불만이 역사상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어. 벌써 도시급 반란이 아홉 차례나 일어났다. 그중엔 대도시급 반란까지 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내 말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던전 어택>의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나만이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왕이 전염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흐른 거야. 인간의 지도자들이 이걸 어떻게 이용하리라 생각해?” “……!”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제대로 반응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소문을 활용할 수밖에 없어. 나쁜 것은 영주가 아니다, 신전이 아니다. 나쁜 것은 마왕이다. 책임을 회피하려 들겠지. 인간들은 더더욱 소문을 신뢰할 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왕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저잣거리와 궁중을 가리지 않고 떠들썩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너 이 새끼……?”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맹군을 다시 결성할 때가 되었어. 바르바토스, 전쟁이다. 전쟁이 다가온다.”   00070 두 개의 음모 =========================================================================                        바르바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제정신이냐. 심하게 질책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녀만큼 월맹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왕도 달리 없었다. 내 멋대로 월맹군이 결성될 만한 상황을 꾸몄다는 것에 분노를 느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기분 좋게 나의 기대를 날려주었다. 도리어 웃은 것이었다. “어디 배알이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봐.” 금빛 눈에 호기심과 흥미가 넘실거렸다. 나에게 어떤 심오한 계략이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멋쩍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기대 이상의 신뢰를 받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우리는 유령 집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수천 년 동안 월맹군은 번번이 실패했어. 인간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군대를 가졌는데도 말이지. 그 원인이 마왕들의 내분과 경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는 뻔할 뻔자. 그녀는 마왕들의 어리석음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바르바토스. 내가 네 스트레스의 주범들을 한꺼번에 멸망시켜줄 테니. 너는 겉모습에 어울리게 행복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라. 소녀에게 스트레스는 가슴이 자라지 않는 원인이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자고. 왜 마왕들은 전쟁에서 내분을 일으켰지? 그런 미친 짓거리를 어떻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냥 멍청한 게 아니라 존나게 멍청한 거지.” “흥미로운 가설이지만.” 내가 피식 웃었다. 바르바토스는 다른 마왕을 격렬하게 증오하는 듯했다. 조금은 머리를 식혀주길 바랐다. 이제부터 냉정함이 뚝뚝 떨어져 호수를 이룰 정도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했다. “그만큼 마왕들이 멍청했다면 지금까지 생존하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 월맹군이 패배한 이유는 하나야. 월맹군이 지나치게 강력하기 때문이지.” “야. 족제비.”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썼다. 족제비라니? 나한테 붙인 별명이냐? 나처럼 호리호리하게 잘 빠진 청년도 달리 없는데 족제비라니 중상모략도 수준급이었다. 하다못해 여우라고 불러주기를 소망했다. “네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거 알겠어. 혓바닥에 올리브 기름을 상시 처바르고 다니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너무 강력해서 패배한다고? 무슨 쉰소리야.” 사정은 이러했다. 웬만한 인간 국가는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아봤자 3만, 4만을 넘기지 못한다. 대군이긴 하나 마왕군을 막을 순 없다. 저들이 3만 대군을 휘몰아치고 온다한들 이쪽에서 10위급 마왕을 서너 명만 출진시켜도 간단하게 막아낼 수 있다. 그만큼 몬스터는 인간종에 비해 한없이 강했다. 인간계의 모든 나라가 합심하여 동맹군을 꾸려봐도 30만 대군이 한계. 그중엔 싸구려 징집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월맹군은 적어도 10만을 헤아린다. 그들 전원이 몬스터이다. 중과부적이란 이럴 때 쓰라고 고안된 표현이겠지. 후대를 위하여 그런 단어를 개발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라도 표하고 싶다. “솔직히 말할게, 바르바토스. 월맹군에서 진지하게 마인의 승리를 바라는 마왕은 너 정도밖에 없어. 나머지 마왕들에게 인간의 국가는 언제든지 깨부술 수 있는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오히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마왕이다.” “……마왕이 마왕을 두려워해?” “성가시다고 생각한 적 없나. 왕은 백성을 인도하는 정점. 왕이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국가 따위, 누구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어.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가 용납되는 까닭은 인간계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서다.” 내가 얕게 웃었다. “거의 모든 마왕들은 한번쯤 생각해봤을걸. 인간계를 점령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서열이 높은 마왕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지 항상 불안에 떨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하, 하아!?”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언가 반론하고 싶어 보였지만 내가 앞질러서 말했다. “얼마 전에 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 그리고 너는 나를 두둔했지. 다른 마왕들 눈에 그게 어떤 식으로 비추었을까?” 바르바토스는 일개 마왕이 아니었다. 평원파를 이끄는 거두였다. 실제로 그녀가 나한테 단지 호감을 품어서 접근했든 접근하지 않았든, 그것을 지켜보는 주변에서는 세력 관계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 살해자 단탈리안을 평원파 전체가 옹호했다, 평원파는 예전부터 산악파를 증오했다, 어쩌면 상대편 일파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여타 마왕들은 그렇게 생각할걸. 특히 산악파 마왕들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넌 평소부터 산악파를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말소해야 한다느니 죽여버리겠다느니 떠들었잖아.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는데.”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르바토스, 너는 강자였다. 강자이기에 약자의 입장을 눈꼽만치도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과 벌이는 전쟁에서 다른 마왕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그들을 겁쟁이에 멍청이라고 비난했다. 멍청해서 인간 따위도 이기지 못했다면서.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상대는 바르바토스와 같은 고위 마왕이다.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72위, 그 사이에는 무한이라 표현해도 허용될 만큼 간극이 놓여져 있다. 지금이야 인간계로 진출한다는 명분 아래 일흔두 명의 마왕이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 만약 마왕이 같은 마왕을 공격한다면 '자기 의무도 잊어버린 채 인간이 아니라 동족을 공격하는 파렴치'라고 비난받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인간계에 진출한 다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이라는 최대의 적이 사라진다. 이제 마왕만 남게 된다.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군주가 사이좋게 하하호호 하며 제국을 함께 다스릴까? 불가능하다. 결국 마왕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고위 마왕이 살아남으리라……. “대다수의 마왕은 인간계 정복을 바라지 않아.” 보다 정확히 말하여, 자신의 군대가 인간계 정복 전쟁에서 소모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종을 무찔렀다 해서 군대가 필요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그러므로 마왕, 특히 서열이 낮은 마왕일수록 자기 군대를 철저하게 보호하려 든다. 아마도 처음에는 소수의 마왕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거다. 월맹군이 실패해도 그들은 피해를 받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점차 다른 마왕도 똑같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천 년 전에는 극소수에 불과하던 전쟁반대파, 소위 산악파가 현재에 이르러서 과반수 가까이 차지하게 되었다……. 바르바토스가 침묵했다. 내 설명을 듣고 짐작가는 부분이 떠오른 것 같았다. “하아.” 그녀가 깊이 탄식했다. “시발, 그랬구나. 그래서 좇 같은 새끼들이 죽어도 군대를 움직이지 않은 거였어. 제4차 때도……제6차 때도……제기랄!” 약자에겐 약자 나름대로 생존하는 방법이 있다. 강자는 그것을 단순하게 겁이 많아서, 무능해서, 라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강자는 자기 자신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강해졌다고 여기지 않고 되도록이면 자신이 용감해서, 유능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약한 타인을 필요 이상으로 깔볼 필요가 있다. 간편한 심리 구조이다. “소수의 마왕으로 인간계 전체를 정복하기란 불가능해. 단 한 명의 마왕이 침략할지라도 인간계는 곧바로 단합할 테니까. 고로 최대한 많은 수의 마왕이 연합하여 월맹군을 꾸려야 하지. 하지만…….” “최대한 많은 수의 마왕이 모일수록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지고, 당당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새끼들이 늘어나겠지! 염병할.” 그렇다. 이것이 마왕 전체의 역설이었다. 동족이 지나치게 강대한 탓에 눈앞에 있는 공공의 적을 헤치울 수 없었다. 아니, 해치워선 안 되었다. 그러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자기가 죽어버릴 테니까. 상황이 이렇기에 마왕들은 인간계 침략은 고사하고 마왕성에 틀어박혀 쓸데없는 정쟁(政爭)에 세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던전 어택> 시나리오에서는 대모험시대를 맞이하여 마왕 개개의 세력이 조금씩 약화되다가, 이윽고 용사 일행한테 각개격파당한다. 어쩌면 그 와중에도 마왕들은 현재의 동족이자 미래의 라이벌이 사라졌다면서 기뻐했을지 모른다. 마왕이 용사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작 인간의 모험대에 죽다니 한심하긴' 하고 비웃지 않았을까. 결국 마인의 전체적인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었고, 깨닫고 나니 이미 절반의 마왕이 용사에게 죽어버렸다. 뒤늦게 헐레벌떡 월맹군을 조직해서 인간계에 대항했지만 중과부적. 한 명씩 속수무책으로 용사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다……어리석기 이를 데 없었다. 문제는 그 어리석음이 정말 무능에서 비롯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일흔두 명의 마왕'이라는 구조 자체에서 비롯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우울한 이야기였다. “이 고착상태를 타개하려면 한 가지 수단밖에 없어.” “말해봐.” 바르바토스가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아랫도리를 쓰다듬으면서 장난스럽게 작업을 걸던 여자아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눈앞에는 자신의 미래, 더 나아가 마계의 미래를 염려하는 한 명의 마왕이 앉아 있었다. 내가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우리가 침략하는 게 아니라, 인간종이 우리를 침략하게 만들어야 해. 그리고 마왕의 수를 대폭 줄여. 적어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단탈리안.” 그녀가 나를 직시했다. 냉엄한 군주의 눈빛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아? 너는 방금 전세계에 일흔 명밖에 없는 동족을 절반이나 죽여버리자고 말한 거야.” “안 그러면 일흔 명의 동족 전원이 죽어……!” 내가 경고했다. “늦든 빠르든 인간종은 흑사병을 계기로 마왕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돼! 어쩌면 일부 아인종도 유언비어에 휩쓸려 마왕을 적대할지 몰라. 그들은 산발적으로 마왕성을 공략하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자랑스러운 동족들께서는 경쟁자가 약해지는 광경을 신나게 구경하겠지!” 그것이 <던전 어택>에서 이루어질 미래였다. 현재 순간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 알고 있고, 마인에게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미래. “그때 가면 늦는다. 마계의 세력이 온전한 지금, 바로 지금 연합해서 인간계의 세력을 최대한 줄여야만 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야!” 물론 노림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정복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상, 인간은 물론이고 마왕마저 정복의 대상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번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인간과 마계, 양측의 세력을 일거에 약화시킨다. 사상최대의 인간-마인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양측은 심대한 피해를 입으리라. 전쟁의 참화를 복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게 틀림없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나는 세력을 키운다. 어쩔 수 없다! 통상적인 수단만 갖고서는 내 세력을 일궈내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바르바토스가 레벨 357인데 반하여 나는 능력치가 어떠한가.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악(-20) 레벨: 21    악명: 375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E) 통솔: 26/32  무력: 7/10   지력: 30/32 정치: 24/30  매력: 15/20  기술: 4/10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E),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2개] [부하: 42개체/210개체] ━━━━━━━━━━━━━━━━━━━━ 서열 제8위인 바르바토스의 레벨이 357이다. 그녀보다 강한 마왕이 일곱 명이나 된다! 어느 세월에 내가 레벨을 쌓아 그같은 괴물들을 상대하겠는가. 언제 세계정복을 이루어낼까. 내가 강해지는 동안 다른 마왕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인간들은? 앞으로 10년 후 용사와 함께 맹활약할, 훗날의 대영웅들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경쟁상대의 세력을 깎아버리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마왕뿐만이 아니었다. 용사 그리고 용사와 함께할 영웅들도 똑같았다. 미래에 산맥을 뒤엎고 바다를 메마르게 할 만치 강력해진다 할지언정, 어디까지나 십 년 후의 이야기. 현재 시점에서 그들은 아직 능력의 절정기를 맞이하지 못했다! 용사 본인조차 지금은 일곱살배기 꼬맹이일 터. 작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도박이라 해도 좋다. 승산 없는 미래까지 기다리느니 차라리 가능성이 보이는 현재에 내가 가진 모든 패를 걸겠다. 아니, 가능성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다. <던전 어택>의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는 나라면 확실히 가능하다! 마계의 세력을 깎고, 인간의 세력도 깎고, 철저하게 나만의 시간을 벌어들인다. 그 모든 것이 이번 전쟁 한 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바르바토스, 언제나 산악파 놈들을 겁쟁이라 비웃지 않았어?” 내가 처절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희생될 마왕은 대부분 산악파일 거야. 어차피 자신의 이익에 눈이 팔려 마인의 염원, 마왕의 의무를 저버린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신경 써주느라 마계 전체의 희망을 깔아뭉갤 속셈은 아니겠지!” “……처음 희생양은 누구냐.”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물었다. “마왕 전원을 단합시키려면 인간계의 침공이 거대해야 돼. 대규모의 원정군이 마왕들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 거고, 마왕들이 월맹군을 조직하기 이전에 최소한 한 명의 마왕이 원정군에 당할 게 뻔해.” 그녀의 말이 옳았다. 마왕들은 코앞까지 위험이 닥치지 않는 이상 서로 협력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명, 두 명, 운 나쁘면 세 명까지 동족이 희생되어야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리라. 단합하지 않으면 인간의 대군대에 한 명씩 당해버린다, 그런 위기의식이 공유되어야만 한다. “미안하지만……평원파에서 먼저 희생을 해줘야 해.” “크흐. 역시 그렇군.”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내가 무얼 의도하는지 알아챘음이라. 평원파 일원이 제일 먼저 인간의 군대에 당한다, 그러면 바르바토스의 발언력이 저절로 강해진다. 마음 놓고 인간에 대한 복수를 울부짖을 수 있다. 더불어서 혹시 흑사병에 대한 유언비어를 평원파에서 퍼트린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원천봉쇄한다……. 바르바토스가 일어섰다. 그녀가 내게 걸어왔다. “잔혹하구나, 단탈리안. 정말로 잔혹해.” 그녀의 목소리에 음울한 색기가 스며들었다. 그녀가 나의 배, 가슴, 목, 그리고 뺨을 어루만졌다. 당장이라도 그 손아귀로 내 목숨을 취할 것처럼. 나는 담담하게 손길을 받아들였다.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넣을 때까지만 해도, 난 그저 네놈이 약간이나마 성장하기를 기대했지. 벨리알과 다투고, 산악파와 경쟁하고, 무수한 세월을 거쳐 번듯한 마왕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이제보니 애송이는 나였네. 깔깔…….” “바르바토스.” “좋아. 협력하지. 전쟁? 바라던 바야. 희생? 그딴 거에 연연할 성격이었으면 진즉에 포기했겠지. 단 한 순간의 명예로운 전쟁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감당하겠어. 나는 마왕이니까.” 바르바토스가 내 턱을 살짝 돌렸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가 작은 입술 사이로 내쉬는 숨결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부딪쳤다. “하지만 놀랍고도 재밌구나. 단탈리안, 네놈은 분명히 내가 이런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행동한 것이겠지……어디까지 예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냐? 네놈이 앞으로 내딛을 행보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 이거 봐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허리 아래로 가져갔다. 치마를 헤집고 그 속으로 내 손을 이끌었다. 이윽고 얇은 천이 손끝에 닿았다. 질척했다. “나, 젖어버렸어……네가 일으킬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상상만 해도 흥분돼. 너처럼 악마적이고, 비열하고, 개 같은 새끼는 처음이야.” 아. 또 그거였다. 색욕 마법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내 귓등을 혀로 핥으면서, 바르바토스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머리가 띵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색정이 귓구멍을 쑤셨다. 뇌수를 흔들었고, 척추를 경유하여 아랫도리에 파고들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필사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려는 가운데 의식 저 멀리서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주 예전부터 개 같은 새끼한테 박혀서 개처럼 헐떡이고 싶었는데……한번, 박아볼래?”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끊겼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은, 드넓은 마왕궁을 짐승처럼 헤집으며 교합해대는 그녀와 내 모습이었다. 탁자든 의자든 무엇이든 이용해서 갖가지 자세로 교미했다. 그녀가 신음으로 헐떡거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일종의 계약이라고. 앞으로 동족을 지옥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들 음모에 가담해버린, 두 사람만의 비밀계약이라고 말이다……. 겨울이 다가왔다. 해가 바뀌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맞이한 그해 봄. 서열 제49위이자 평원파 소속의 마왕 크로셀이 인간종의 침공에 패사(敗死)했다.   ============================ 작품 후기 ============================   ─ 챕터 <두 개의 음모> END. ─ 제1부 끝. 제2부 시작.   00071 필리버스터(filibuster) =========================================================================                        서열 제49위의 크로셀이 전사한 무렵. 인간계의 열두 국가는 여느 때처럼 정력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천장이 높은 돔형 회의건물. 지금 이곳은 난장판에 가까웠다. 귀족들 낯빛이 우락부락했다. 그들은 날붙이만 안 들었을 뿐이지 상대방한테 모욕이란 모욕은 죄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들 전원이 제국의 최고위 중신이었으나 체면 따위는 차리지 않았다. 오늘 그들은 군제도와 관련해서 한바탕 맞붙었다. 황녀파에선 정 안건을 통과시키고 싶다면 황실에서 고용한 외국인 용병 부대를 즉각 해산시키라 요구했다. 이에 황자파에서는 “지극히 곤란한 문제”라고 대답했다. 이는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엿이나 처먹어라” 정도의 의미를 가졌다. 이에 대해 황녀파에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답변했는데 대략적으로 “그럼 꺼져라 새끼들아”라고 번역해도 무방했다. 당연히 군제도 안건은 공중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귀족들이 지금 서로에게 소리쳐대는 것은 요컨대 화려한 불꽃놀이의 잔해였다. “당신 아내에겐 젖탱이도 없소!” “무슨 헛소리요? 내 아내에게는 훌륭한 젖이, 당신 아내보다 열 배는 훌륭한 젖이 달려 있소외다. 그러는 댁의 부인이야말로 엉덩이에 꼴보기 싫은 점을 달고 살지.” “뭐?” 콧수염을 기른 귀족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러자 뚱보 귀족이 말했다. “왜냐하면 내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외다. 눈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고, 손으로 직접 만져봤을 뿐만 아니라 혀로 핥아도 보았지. 솔직히 형편없는 여자였소! 나는 어떻게 댁처럼 형편없는 남자가 신성한 결혼생활을 꾸리는지 항상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댁의 아내를 보고나더니 그제사 궁금증이 풀리더군. 가히 천생연분이오.” 뚱보 귀족이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콧수염 귀족이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니 이 년이, 왜 요즘 바가지를 긁지 않는가 싶었더니 뒷구멍에 황소바람이 새고 있었어……? “그러는 댁의 아내도 썩 훌륭하지 않던걸. 가슴은 컸지만 그게 다였지. 가슴만 컸다 할 뿐이지 얼굴은 영 아니었어. 게다가 몸무게는 왜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 젖소가 따로 없었지. 그짓을 하는 동안 나한테 쉬지 않고 열렬하게 입을 맞춰오는데 그만 깔려 죽을 뻔했지 뭐야.” 제3자, 대머리 귀족이 끼어들어 한 말이었다. 그는 콧수염 귀족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었다. 졸지에 아내가 바람 핀 사실이 공적으로 까발려지자 콧수염 귀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대머리 귀족이 보다못해 구원에 나선 것이었다. “지, 지금 내 아내를 모욕하는 거외까?” 뚱보 귀족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에 개의치 않고 대머리 귀족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댁도 저 사람 아내를 모욕했잖아.” “결투를 신청하외다!” “좋아.” 대머리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 저 사람과 결투부터 하고 오쇼. 내가 보기에 순서가 그래야 맞거든.” 이 모든 광경을 상석에 앉은 황녀가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아타나시아 에바트리에 폰 합스부르크. 그녀는 이미 백작의 지위를 받았고, 열여섯 살에 전무후무한 천재로 불리우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희망이라 칭송되었다. 은발이 아름다운 황녀는 그러나 현재 절찬리에 절망하고 있었다……. 저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끄는 최고 수뇌부였다. 어릴 적부터 최고급 교육이란 교육은 다 수료 받은 인재였다. 말하자면 저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선'이었다. 악몽이 아니고 뭔가. 제국최고회의는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아니……한꺼번에 두 사람을 상대하라니, 비겁하오.” “비겁하다는 건 별 문제가 안 되는걸. 난 비겁하다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하거든. 솔직히 말해서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짝 유두 주변이 짜릿하기도 해.” “세상에, 끔찍하군……. 저 대머리 후작이 피학적인 변태일 줄이야.” 그러자 대머리 귀족이 별안간 버럭 소리쳤다. “피학성을 모욕하지 마――!” 주위에서 잡담하고 떠들던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대머리 귀족을 쳐다보았다. 대머리 귀족은 평소에 능글맞게 말하여 재수없기로 유명하긴 했으나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뚱보 귀족 또한 놀랐다. 그가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위가 같은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요.” “말투가 나쁜 건 너겠지!” 대머리 귀족은 대머리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를 모욕해도 좋아. 내 아내를 모욕해도 좋아. 하지만 피학성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여, 여보시오……미쳤소? 피학성이니 뭐니……그런 건 다 변태스러운 것 아니오외까!” 주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파 황녀파 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학성은 변태적이다, 거기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기적의 대동단결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뚱보 귀족이 힘차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즐기고 더구나 성적으로 느끼다니, 그게 변태가 아니면 뭐란 말이외까. 차라리 저 뚱보처럼 남의 부인과 놀아나는 쪽이 점잖게 느껴질 정도요. 아니, 다른 사람의 부인과 놀아나는 것에는 최소한 낭만이라도 있지! 피학은 단순한 변태요외다!” 또 다시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황자파 황녀파 가릴 것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인을 서로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하나의 당파에 속했다. 그들은 귀족 남성이었고, 남의 부인을 사냥하는 것이야말로 귀족 남성다운 유흥거리라 여기고 있었다. “흥.” 대머리 귀족이 기죽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치고 말했다. “낭만? 거 어이가 없어서. 낭만의 낭 자도 모르는군. 진정한 낭만이 뭔지 전혀 몰라! 어린애 장난 같은 짓거리나 벌이는 주제에 지들은 낭만적인 삶을 구가한다고 생각하겠지.”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안색이 심히 불쾌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부정당하는 것은 어쩌면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성적인 낭만을 부정당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저 새끼를 끌어내!” “감히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평의회를 농락하다니!” “제국모욕죄로 당장 고소해야만 한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졌다. 그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목을 붉혔다. 이 넓은 돔형 건물 안에서 오로지 딱 한 명, 엘리자베트 황녀만이 고개를 점점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평의회를 농락하는 것은 대머리 귀족뿐만이 아니라 너희 전부다, 이 발정난 개자식들아……. 물론 황녀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절대다수는 당장이라도 대머리 귀족의 머리 살갗을 발라버릴 기세로 소리치고 있었다. 대머리 귀족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아테네 법정에서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나선 소크라테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머리 귀족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수호자라 느끼면서――한점의 의심 없이 투명한 눈빛으로――또박또박 연설했다. “피학성, 그것은 선언하건대 성적 낭만의 정점이다. 그에 비교해서 외도는 성적 낭만의 밑바닥 너머 밑바닥, 그야말로 천박한 행위이지. 어리석은 놈들! 그저 사회의 법도를 파괴할 뿐인 외도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말이야. 거기에는 사랑이 없어.” 대머리 귀족이 불끈 손을 쥐어올렸다. “그렇다. 사랑이다. 외도에는 사랑으로 착각되는 이기심만 가득하다. 반면에 피학은 어떠한가? 피학은? 피학을 즐기려면 맨 먼저 가학을 해주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기꺼이 나를 때려주고, 결박해주고, 밟아주는 가학적 파트너 말이다. 그런 파트너는 실로 희소하고 귀중하지……다음으로 피학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결박을 생각해봐라. 지금 당장 노끈으로 내 두 손이 묶인다고 상상해보란 말이다!” 그가 절절하게 외쳤다. 실로 그는 절절했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다……가슴이 철렁한다! 그래,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무서운 게 결박이다. 하물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묶어버리고 풀어주지 않는다……그 공포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지! 이를 허락한다는 것. 상대방에게 완전무결한 신뢰를 내보인다는 것. 아니,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것! 이게 바로 피학인 것이다!” 귀족들이 얼빵하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논변이 생각보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들이 대머리 귀족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기세를 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괴롭힘 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복해주길 바라고,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범해주길 바라는 욕망이 약간은 있다……그렇지 않은가, 위선자들아!” 그건 그래.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합스부르크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다고. 나도 가끔씩 누가 짐승처럼 뒤에서 박아주길 바라기도 하지, 그 육중한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말야……하고 어느 백작이 몽롱한 눈빛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남작이 경악하는 것도 모르고. “왜 우리는 법률을 존중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윤리를 따를 때 양심의 환호를 듣는가? 우리 모두에게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본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러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모든 윤리에 약간의 피학이 들어 있듯, 모든 피학에 약간의 윤리가 들어 있을지언저! 상대방이 간절히 바라는 행위를 들어주고, 기꺼이 상대방의 엉덩이를 때려준다. 이것이 사랑과 존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뚱보 귀족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그럴수가……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거요? 피학은 변태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대머리 귀족이 입가를 이죽거렸다. “그렇다. 피학은 성적 낭만의 정점이다! 이렇게 사랑에 가득 찬 행위를 변태라고 부르다니 당신이야말로 변태야. 정말로 불쌍하군.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정말로 불쌍해.” 회의장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귀족들은 어느새 감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간만에 멋진 연설을 들은 것에, 특히나 성적인 주제로 이토록 훌륭한 논변을 감상한 것에 심히 만족했다. 근래 최고회의에서 들은 연설 중 최고라고 평하는 이도 있었다. 오직, 오직 황녀만이 두개골이 지끈지끈거려 머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정할 수 없소외다.” 졸지에 변태에게 변태로 몰려버린 뚱보 귀족이 부들거렸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피학은 성적 낭만의 정점이 아니오.” “흥, 패배자가 발악하려 드는군.” “아니! 성적 낭만을 추구하는 그대의 진지한 마음가짐은 알았소. 그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외다……그렇지만, 성적 낭만의 정점이 피학이라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이요.” 대머리 귀족이 눈썹을 찡그렸다. “동의할 수 없다고? 하. 그럼 바람이나 피워대는 외도 따위가 성적 낭만의 정점이란 말인가? 그거 엄청나게 대단한 정점이로군 그래.” “아니!” 뚱보 귀족이 분노에 달아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성적 낭만의 정점은 근친상간! 그것도 형과 남동생이 정답게 나누는 근친 간의 사랑이외다――!” …….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귀족들이 경악하여 입을 쩌억 벌렸다.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해야 하는 경비병들마저 입을 쩌억 벌렸다. <경악 교향곡>이라 이름붙일 법한, 소리없는 합창이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쩌억 벌린 입에서 노래되고 있었다. 이 경천동지할 발언에는 과연 자칭 피학의 수호자 대머리 귀족마저 얼이 빠졌다. “그만 좀 해라, 미친놈들아…….” 이제 두개골이 빠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황녀가 중얼거렸다. 열여섯 살 소녀가 내뱉은 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뇌와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찬란한 은발이 왠지 모르게 희여멀겋게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황녀의 중얼거림은 지나치게 미약했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실 들었더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것이다. 방금 근친상간을 주장한 뚱보 귀족을 포함하여. 뚱보 귀족이 연설해나갔다. “성의 묘미는 다름아니라 배덕감에 있소.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행위! 남들이 윤리적으로 불쾌하다고 여기는 행위! 그것들이 난공불락의 성벽이지. 성적 낭만은 바로 사랑을 위하여 그 험난한 성벽을 넘는다는 데에 가치가 있소외다. 귀족과 평민의 사랑 이야기를 보시오. 그 두 사람의 사랑은 어째서 고귀한 것이오?……간단하오. 가문이 반대하기 때문이외다. 가문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랑이 가문이라는 이름의 성벽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고귀한 거요.” 귀족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맞는 소리로 들렸다. 그 반응에 뚱보 귀족이 힘을 얻어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소. 성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가 손에 넣는 사랑의 가치는 더더욱 높아지오. 성벽의 험난함이 도리어 사랑의 가치를 증명하지. 사랑하는 이가 자기보다 가난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고귀해지오. 보시오. 오늘날 동성애만큼 거대한 장벽이 또 있겠소? 근친상간은 어떻소? 근친상간만큼 어마무지한 장벽이 있소외까? 그렇다면――동성애와 근친상간이 합해진, 형제 간의 사랑만큼 거대하고 거대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이 존재하외까? 없소. 그럼 형제 간의 사랑만큼이나 위대한 사랑이 있을까? 없소. 절대로 없소!” 뚱보 귀족이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형제끼리 사랑할까……? 상상해보시오, 그 사랑이 얼마나 격렬하지. 아마도 대륙의 무게에 버금가는 고뇌가 그 사랑을 짓누르고 있겠지. 그들은 번민하고 또 번민할 거요.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형을 사랑할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뚱보 귀족의 어조가 너무도 절실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사랑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사랑하는 이에게 일부러 매정하게 대해보기도 하겠지. 신전으로 달려가 사랑의 신에게 기도해보기도 하겠지.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습니까. 이같은 사랑이라면 차라리 증오가 황금과 같을 것을. 제발 저에게서 이 사랑을, 불타는 심장을 앗아가주십시오……그렇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오……!” 뚱보 귀족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애절한 목소리에 귀족들은 마음이 동했다. 아, 그것은 실로 위대한 사랑이 아닐련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홍수와 같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여름의 태풍과 같이! 두 형제의 사랑은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소. 무슨 일이 그 둘에게 벌어지는 것이외까? 그들은 그들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사랑보다 위대한 윤리, 법률,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소! 사랑이 무엇보다 위대함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외다! 이 삭막한 시대에,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동지도 날파리처럼 죽여대는 이 시대에, 형제 간의 사랑이 어찌 눈부시지 않을 수 있겠소……?” 뚱보 귀족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회의장이 침묵에 감싸였다. 무거운 침묵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감동하고 있었다. 그래, 맞다.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회와 타인이 아무리 반대해도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 하고 사람들이 감동에 휩싸여 대화했다. 나도 이제부터 형을 사랑해보겠어. 나는 남동생을 귀여워해주겠어. 침대에서 말이지. 그래, 맞다. “…….” 피학이 성적 낭만의 정점이라 주장했던 대머리 귀족이 발을 옮겼다. 그가 뚱보 귀족에게 다가서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가 패배했어. 그대의 승리야.” “아니. 이 자리에 패배자는 없소.” 뚱보 귀족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십대 남자의 얼굴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서로의 신념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승자요외다.” “훗, 그도 그러한가…….” 두 사람이 악수했다. 그와 동시에 큰 박수갈채가 터졌다. 어떤 귀족이 휘파람을 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는 확실히 황자파도 황녀파도 없었다. 오로지 관용만이 있었다. 제국이 쇠락해가는 시대, 그들은 수없이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린 끝에 드디어 서로 화합한 것이었다. 기적의 대단합이 그곳에 있었다. 단 한 사람. 황녀를 제외하고. “……샤를.” 황녀는 자신의 뒤편에 기립하고 있는 기사를 불렀다.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연설에 감동하여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황녀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고서야 기사는 정신을 차렸다. “샤를.” “헛? 예, 예! 각하!” “저 머저리들을 여기서 끌고 나가라. 당장.” 기사 샤를이 곤란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저어……각하. 저기 한 명은 우리 황녀파의 실세인데요.” “본인이 그걸 모르고 있겠는가.” 엘리자베트 황녀가 훗,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만사 다 포기한 눈초리였다. 아무리봐도 열여섯 살 여자아이가 짓기에 적당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더없이 어울렸다. “아니, 사실은 모르고 싶군……근친상간에다 동성애까지 저지른 남자가 황녀파의 실세라니. 신전 놈들이 알면 당장 옷을 벗어재끼고 춤을 추겠지. 오늘을 기념일로 제정해버릴지도 모르지. 샤를. 저 머저리들을 쥐어패라.” “그……맨손으로 말입니까, 각하?” 황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몽둥이로.” “부, 분부 받겠습니다.” 샤를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바로 소란의 주범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사람들이 어어, 하는 사이에 끌어버렸다. 기사의 괴력에 두 귀족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회의실 바깥까지 끌려나갔다. “끄아아아아악!” “크헉, 크허허헉!” 회의실 너머에서 멱 따는 비명이 들렸다. 처참한 소리였다. 회의장에 남은 귀족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휘몰아친 감동과 사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싸늘한 북풍만이 자리했다. 잠시 후 기사가 돌아왔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황녀의 뒤에 기립했다. 오른쪽 뺨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그걸 지적할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황녀가 말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흑사병에 대해 논의하지.” 귀족들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제2부 시작. 00072 필리버스터(filibuster) =========================================================================                        회의가 끝나고. 엘리자베트 황녀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머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도저히 못해먹겠다!” “고,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본인이 고정하게 생겼나? 뭐, 성적 낭만이 어쩌고 저째? 개 같은 놈들, 너희를 씹어먹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인육성애자가 되겠노라!” 황녀는 분을 이기지 못해 벽을 찼다. 쾅, 하고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오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검사이기도 했으며, 벽은 그녀의 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기사 샤를이 눈을 찔끔 감았다. 그녀가 흥분하면 설령 황제가 친히 방문해도 말릴 수 없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제국 신민이 나날이 죽어나가고 있다! 저들의 유흥에 재정은 파탄난 지 오래, 오로지 군부만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 그런데 저 개자식들은.” “성스러운 입에 비천한 낱말을 입에 담지 마시옵소서…….” “저 개새끼들은 회의에 모여서 음흉하게 노가리나 까고 있다!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영지 관리는 대리인에게 전부 맡겨버리고, 지들은 제도(帝都)에 모여 방탕한 나날만 보내는 주제에!” 황녀가 씩씩거렸다. “이 나라는 글러먹었다. 시궁창이나 다름없어.” “가, 각하.” 기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망조가 들었다는 사실이야 비단 제국 신민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인간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는 제국의 심장인 황궁. 함부로 국가를 모욕했다가 어떤 죄목이 씌워질지 몰랐다. 기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녀가 소리질렀다. “본녀가 회의에 참여한 것이 그리도 아니꼽단 말인가!” 그녀는 빤히 알았다. 귀족들은 무능했지만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귀신처럼 약삭빨랐다. 성적 낭만이니 뭐니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버리는 까닭은――다름아니라 황녀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최고회의에 제1황자와 제2황자가 참석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아마 지금쯤 아무 시녀나 잡아서 질펀하게 허리나 놀려대고 있겠지. 그런 상황에서 황녀가 회의에 참석했다. 제1황자와 제2황자의 편에 가담한 귀족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했다. 자칫 의제가 황녀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불륜이니 근친상간이니 정숙한 여인에게 한없이 곤란한 주제로 끌고들어 갔다. 황녀가 개입하지 못하게끔. 잘못하다 ‘황녀께서 동성애와 근친상간에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면 정치적 파장이 어디까지 번질지 가히 짐작하기 어려웠다……끝끝내 황녀는 그 지난한 성적 담론이 마무리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엘리자베트 황녀한테 우회적으로 항의한 것이었다. ─ 저희는 바보가 되어봤자 잃을 명예도 체면도 없습니다. ─ 그렇지만 고상하신 황녀 전하께서는 잃을 것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 이곳은 오직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는 회의실. 황녀 전하께서는 괜히 귀를 더럽히지 마시고 모쪼록 퇴청하십시오. 국가의 대중소사는 저희가 알아서 합의하겠나이다. 철저하게 황녀를 회의에서 배격했다. 심지어 황녀파에 속하는 귀족까지 그에 동조했다. 아마도 아랫것들에게 일을 맡기고 편히 계시라는 의도였다 변명하겠지만 어찌 그 속내를 황녀가 모르겠는가.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기네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시간을 넘겨서 회의가 종료. 단 하나의 의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귀족들이 해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황녀가 귀족 두 명을 부당하게 폭행했다는 소문이 시녀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었다.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이익집단이 어디까지 꼴불견사납고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황녀는 새삼스레 절감했다. “저런. 각하의 발길질 소리가 궁중 구석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넉살좋게 웃었다. 남자는 외무부상서(外務副尙書)로서 황녀파의 일원이었다. 황녀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히델베르크 경. 들으라고 하는 걸세, 들으라고.” “그래봤자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시지요? 신경줄이 굵기로는 자타공인 대륙 최고인 그들입니다.” “돌아버리겠군.” 그녀가 고급스러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나니 분이 풀렸다. 그녀가 탄식했다. “본녀는 아직 열여섯 살이야. 그런데 새치가 날 지경이네……십 년 안에 본녀가 화병으로 죽을 것임을 내기해도 좋네.” “각하께선 머리카락이 은색이지 않습니까. 새치가 난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건넨 건가?” 황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외무부상서가 웃었다. 그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전령이 당도했습니다. 브르타뉴-바타비아 동맹군이 서열 제49위 마왕 크로셀의 성을 함락했습니다. 병력 삼천을 동원했다 그러는군요. 동맹군이 떠드는 바에 따르면 마왕성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병사들에게 두당 10골드가 배분되었으니, 아주 헛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황녀 역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국내의 불만을 마왕에 떠넘겨서 해결하려는 심산인가. 꽤나 더러운 짓이군.” “발이 빠른 자들이지요. 흑사병은 어디까지나 마왕이 퍼트린 것. 그에 대해 왕실은 응징했다, 그러니 왕실에게 죄를 묻지 마라……죄송합니다만, 각하.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군부는 뭐라 하는가?” “황제 폐하의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라고.” 황녀가 한숨을 쉬었다. “외무부상서.” “예, 각하.” “이 썩어빠진 나라가 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외무부상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미간으로 모았다. 그가 저어하며 입을 열었다. “신성하신 황제 폐하의 은덕과 신들의 가호가 있기에…….” “그대는 입으로도 방귀를 뀌는군. 이유는 단 한 가지일세. 군부가 지나치게 유능해서야.” 엘리자베트 황녀가 탁자에 놓인 포도주를 병째로 마셨다. 도무지 황족이 보일 법한 예의범절이 아니었으나 외무부상서 히델베르크나 기사 샤를은 뭐라 말리지 못했다. 그녀가 단숨에 포도주를 반쯤 비웠다. “크으. 국내에는 끝없이 불만이 쌓여가네. 거듭되는 흉년, 파탄난 경제, 정책적 과오, 올해는 게다가 돌림병까지. 이런 불만이 쌓일 때마다 우리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반드시 어딘가를 침략하지. 그리고 승리한다네. 제국 신민들은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고, 현실의 괴로움을 잠시간이나마 잊는다……이딴 식일세. 국가적 실패를 군사적 성공으로 무마하고 있어.” 운의 연속인지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계속해서 명장들이 탄생했다. 최근 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배한 전쟁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마저 대단치 않은 패배였다. 제국의 강대함에 신민들은 긍지를 가졌고 힘든 삶에도 다른 나라보다는 낫다며 위안했다. “지나치게 기형적인 구조일세. 궁중 귀족들은 어차피 군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믿고 있어. 평민들도 마찬가지야. 정치적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 노력하기보다 군대에 투신하지……제국에서 군대만큼은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으니 말일세.” “군대가 유능하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스러운 일입니다.” “알고 있네!” 그녀가 탁자를 내려쳤다. “그 유능함이 도리어 제국을 갉아먹고 있어. 중신들은 정책이 실패해도 전쟁으로 무마하면 된다고 여기지 않는가! 이번에도 그렇다네. 흑사병으로 인한 불만을 마왕과의 전쟁으로 해소하겠다면서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놓고 있어!” “각하.” “방역 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은 어디로 갔는가. 블랙허브를 대량으로 확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어디로 갔는가……진절머리가 나네, 책임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 침묵이 찾아왔다. 외무부상서와 기사는 할 말이 없어 멀뚱하게 서 있었다. 황녀는 여기서 분풀이를 해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자네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어.” “천만에 말씀입니다. 각하께서 누구보다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심을 알고 있나이다. 다만 우리도 어서 마왕성 토벌에 가담함이 옳은 줄 아룁니다.” 외무부상서가 목소리를 밝게 했다. “제가 적당한 마왕성을 미리 조사해두었습니다. 각하, 혹시 쿤쿠스카 상회라고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쿤쿠스카 상회?” 황녀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기억하는 약 삼백 개의 상단 중에 쿤쿠스카라는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군.” “오로지 극소수만이 이름을 아는 상회입니다. 마계에서 운영하는 상회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구할 수 없는 물품도 손쉽게 구해내어 최상위 귀족들이 애용한다지요.” “호오.” 황녀의 눈빛에서 권태가 사라졌다. 마계에서 운영하는 상회라니 제법 흥미로웠다. 그녀의 기분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외무부상서가 더 느긋하고 밝게 떠들었다. 그는 마계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뽐내면서 황녀의 귀를 즐겁게 했다. 남자는 이십 대의 젊은 신진귀족으로서 능력과 야심을 겸비했으며, 황녀에게 제국의 미래가 있음을 파악한 뒤 그녀한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군주가 기뻐한다면 기꺼이 표정과 어투를 연기할 의향이 있었다. 황녀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속으로 기뻐했다. ‘불행 중 다행이로다. 젊은 귀족 중에는 인재가 많다.’ 현재 제국을 다스리는 중신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달랐다. 아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이 명예를 알았으며 유능했다. 딱 십 년. 십 년만 지나면 그들이 작위를 이어받으리라. 제국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겠지……. ‘제국에 필요한 것은 십 년의 시간뿐이다.’ 황녀가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외무부상서의 입담에 웃으면서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형편없는 귀족들에게서 그처럼 유능한 자식들이 태어났을까?’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 없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으나 곧이어 생각하길 관두었다. 자기만 하더라도 색욕에 미쳐버린 황제의 딸이지 않은가.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속설은 아무래도 거짓인 모양이었다. 단지 아리송했다. 완벽하게 무능한 현세대와 완벽하게 유능한 차세대의 간극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시대를 이렇게 구분해놓은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지만.’ 황녀가 자조했다. 아무튼 희망은 있었다. 십 년만 지나면 작금에 제국을 뒤엎고 있는 무책임주의, 이기주의, 무능의 극치도 빠르게 사라질 것이었다. 국내의 정치적 병폐를 전쟁으로 무마시킨다――임시방편에 불과했으나 십 년 정도는 너끈하게 견딜 수 있으리라. “쿤쿠스카 상회에서 비밀리에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곳, 서열 제68위 벨리알의 마왕성에 특히나 금은보화가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68위? 지나치게 서열이 낮지 않은가? 통상 서열이 높을수록 마왕성에서 약탈할 수 있는 재화가 많을 터.” “소신도 그것이 걱정되었으나 쿤쿠스카 상회측에서 알려주길…….” 약간의 토론을 거쳐 황녀는 군대출병안에 도장을 찍었다. 별 고민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궁중의 신료와 다르게 지극히 유능했다. 서열 제68위의 마왕 따위 제국군 천 명만 동원해도 쓸어버릴 수 있었다. 황녀에게 있어 마왕이란 어리석은 작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단합하지 못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마왕성 한 곳을 공략하는 것 정도로 그들의 태도가 갑작스레 바뀔 리 없지, 하고 엘리자베트 황녀가 확신했다. 그녀의 동의에 힘입어 군대출병안은 바로 다음날 귀족회의를 통과했다. 귀족들로서도 흑사병으로 인한 평민층의 불만을 마왕에게 돌릴 수 있기에 군대출병안을 환영했다. 이미 출병을 준비하고 있던 제국군은 명령이 전달되자 곧바로 움직였다. 엘리자베트 황녀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간과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합스부르크 제국뿐만 아니라 인간계의 모든 나라가 제각기 적절한 마왕성을 향해 출병했다. 황녀의 생각과 다르게 총 열두 곳이나 되는 마왕성이 전화에 휩싸였다. 두 번째로――쿤쿠스카 상회가 퍼트린 정보가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마계에선 원래 음식이 맵다지 뭡니까! 정말이지, 혓바닥이 입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후후.” 외무부상서의 과장스러운 몸짓에 어린 황녀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한 명의 마왕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열두 국가의 수뇌부 중 어느 누구도.   00073 필리버스터(filibuster) =========================================================================                        * * * 니블헤임 시장(市長) 관저. 얼마 전에 청문회이 열린 그곳에서 다시금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발푸르기스 밤이 사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모임이었다면, 지금 마왕들은 인간계에서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급히 모여들었다. 규모도 달랐다. 서른두 명이 참석한 발푸르기스 밤과 달리 여기엔 자그마치 예순 명의 마왕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상 마왕 전원이 참여한 것이었다. “프랑크 제국을 불태워버려야 한다! 어린애와 여인 가릴 것 없이.” “퇴장해라! 그딴 말만 지껄일 거면 당장 꺼지라고!” “나가! 평원파 놈들의 헛소리는 들을 것도――.” “지상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종의 창자를 끄집어 헤쳐!” 관저의 회의장이 소란스러웠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떠들었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어 나에게는 회의장 자체가 하나의 큼직한 입구멍처럼 보였다. 그 커다란 입구멍이 쉬지 않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귓속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군.” “흥. 마왕들이 진지하게 벌이는 회의란 대체로 이 짝이야.” 바르바토스가 화난 얼굴로 대답했다. 나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표정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평원파의 거두로서 참가했고, 그만한 위엄을 내보여야 했다. 평원파는 자기 소속의 마왕을 한 명 잃었다. 그 사실에 매우 분노했음을 주변에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슬쩍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회의장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었다. 건물 왼쪽에 대다수의 마왕이 서 있었다. 산악파. 그중 파이몬은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건물 오른편은 우리 평원파가 차지했다. 바르바토스를 중심으로 평원파 마왕들은 양옆으로 길게 섰다. 입구 쪽에는 열 명 남짓하는 중립파의 마왕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저번 청문회에서 사회자를 맡은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입구 맞은편, 상석. 다섯 명의 마왕이 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뚝뚝하거나 심심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는데, 그들이야말로 회의장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명의 제왕이었다. 서열 제2위 아가레스. 서열 제3위 바싸고. 서열 제4위 가미긴. 서열 제6위 발레포르. 서열 제7위 아몬. 회의가 시작하고 나서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지금 떠들썩하게 고함치고 소리지르는 자들은 전부 여섯 명의 제왕을 눈치 보고 있었다. 여섯 제왕은 침묵하고 있는데도 무형의 압박감을 발산했다. 나 또한 살에 닭살이 돋았다. 무시무시한 아우라였다.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속삭였다. “야, 쟤들은 왜 벙어리 흉내를 내고 앉았냐?” “바알 아저씨가 안 왔잖아.” 바알은 서열 제1위의 마왕을 가리켰다. “지금 아무리 떠들어봤자 바알 아저씨가 오면 말짱 도로묵이거든. 괜히 뭘 주장했다가 아저씨가 싫다고 해봐, 시발. 체면만 구기는 꼴이지.” “바알이 올 때까지 이 시장통 꼬락서니를 견디라고? 끔찍하군.” “흐응. 그래, 그건 끔찍하긴 해. 한번 정리를 해줘야겠네.” 바르바토스가 벌떡 일어섰다. 평원파 소속 마왕들이 입을 다물었다. 작은 몸집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성량으로 바르바토스가 소리 질렀다. “그만!” 회의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한 순간에 소란이 잦아들었다. 말다툼을 벌이던 마왕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흘겼다. 마왕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토스가 평소와 다르게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열 제49위의 크로셀이 죽었다. 서열 제50위의 푸르카스도 마왕성을 잃었다. 인간계에서 마인의 우방을 자처하던 아인종 부족들은 간단하게 우리를 버렸다.” 그녀가 오른손을 휘저었다. 공중에서 거대하고 투명한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에는 인간계 대륙이 그려져 있었고, 일흔두 개의 마왕성이 각각 표시되어 있었다. '크로셀'과 '푸르카스'라고 표시된 두 군데에 가위표가 쳐졌다. “가장 최근에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북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진 자, 있는가?” “합스부르크의 제도에 있는 제 정보원이 말하기를.” 중립파에 속한 마왕 한 명이 대꾸했다. “제국군은 발렌시아 지방을 향해 떠났다고 하는군요. 서열 제68위의 벨리알 혹은 서열 제61위의 자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의 침략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말도 안 되오!” 산악파의 마왕이 버럭 소리쳤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움직이지 않았소. 우리 마왕군은 제국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소. 인간종들은 침략하고 있는 게 아니요, 아인종 부족들을 회유하고 있지! 이 틈을 타서 동맹군을 구하는 것이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요정 부족과 난쟁이 부족이 인간계의 사신을 접견하고 있소! 대륙 전체에 걸쳐서 대(對)마왕동맹군을 결성하려는 게요. 우리는 또 다시 인간계의 아인종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지 모르오.” “헛소리!” 이번에는 평원파에서 한 마왕이 대응했다. “요정과 난쟁이는 결코 중립을 어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 마왕들의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동맹군을 결성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군대를 움직인 나라는 합스부르크 제국만이 아닙니다! 열두 국가 전부 군대를 동원했어요. 그들은 검은 사막 입구에서 군대를 모을 속셈입니다.” 쿠웅, 하고 회의실이 울렸다. 바르바토스가 발을 내리쳐서 약한 지진을 일으킨 것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가 말했다. “먼저 정보를 취합한다. 서로 알고 있는 정보가 달라서야 토론조차 못 될 터. 파이몬.” “……소녀를 부르셨사와요?” 산악파의 수장 파이몬이 대답했다.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자신을 부른 것에 의뭉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원수로 유명했다. 바르바토스 역시 파이몬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싫어했으나, 내 간절한 부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평원파에서는 인간계의 열두 국가가 모두 군대를 동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각 군대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지. 산악파에서는 어때?” “…….” 파이몬이 턱에 팔을 괴었다. 어떻게 대꾸할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그녀가 평원파와 똑같은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았다. 그녀에게 정보를 흘리라고 지시한 사람이 다름아니라 나이기 때문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나를 참모로 발탁했고, 내 계획 아래 평원파는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소녀도 열두 국가의 군대가 움직였음을 파악했사와요.” “군대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꽤나 잘 알겠지.” “……부정하지 않겠사와요.” 바르바토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오른 지도상에서 직선들이 굵게 그어졌다. 총 열두 개의 직선들은 인간계의 군대를 의미했다. 직선들이 각 나라의 도시에서 출발하여 어디론가 향했다. 그 도중에 이미 멸망해버린 크로셀과 푸르카스의 마왕성이 있었다. 마침내 직선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대륙 북쪽. 절대다수의 마왕성이 위치한 곳이지.” “…….” 파이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을 뜻함을 여기 모인 모두가 알았다. 회의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마왕들이 요동쳤다. 고함소리가 홍수같이 쇄도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파이몬 님!” “단순한 침공이 아니다! 인간 놈들이 연합하고 있어!” “쓰레기 버러지 새끼들이! 감히 우리의 영토를 노린다는 얘기인가!” 내가 마음속으로 웃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나는 인간계의 행보를 제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바르를 협박함으로써 쿤쿠스카 상회를 움직였다.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제법 많은 뇌물을 써가면서 인간계의 수뇌부들에 접근했고, 정보를 유포하는 데 성공했다. 열두 군대의 경로가 겹친 것이 그 결과였다. 인간의 국가들은 자국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적당히 약한 마왕성, 그리고 최대한 약탈거리가 많은 마왕성을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쿤쿠스카 상회에서 슬쩍 건네주었다. 딱히 거짓된 정보를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요구조건에 걸맞는 마왕성들을 내 나름대로 선별했을 따름이었다. 인간들은 자기네의 경로가 서로 겹친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나 침략당하는 마왕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열두 군대의 진로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인간계가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하는 것 아닌가 걱정되겠지. 실제로 벌써 경로에 위치한 마왕성 두 개가 함락되었다. 그중 한 명의 마왕은 전투 중에 죽기까지 했다. 인간계의 침략이 심상치 않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법했다……. “도와주십시오! 제 마왕성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마왕이 비명을 질렀다. 바르바토스에게 귓속말로 물어보니까 서열 제68위의 벨리알이라고 알려줬다. 나와 여러모로 악연이 깊은 자였다. 벨리알이 허둥지둥거리는 이유는 간단했는데,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행군하는 경로에 바로 자기의 마왕성이 자리한 탓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이천 명. 서열 제68위에 불과한 벨리알이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벨리알은 지금 발등에 도끼가 떨어진 기분이지 않을까.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 “인간들에게 우리의 대의가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맹수이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먹잇감, 사냥하는 자가 사냥당하는 것에 먹히는 경우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여러분, 제발!” 마왕들이 귀찮은 듯 벨리알을 외면했다. 당장 자신에게 불길이 닥치지 않는 이상 미래의 경쟁자가 줄어드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마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벨리알이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파이몬한테 다가갔다. 같은 산악파의 수장인 그녀에게 기댈 의도인 것일까, 벨리알이 무릎을 굽히고 파이몬에게 손을 뻗었다. “파이몬 님. 저, 저를 구해주십시오. 천 명, 아니, 오백 명이라도 군대를 파견해주신다면! 이 벨리알, 영원토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파이몬이 침묵했다. 과연 현명했다. 이곳에서 파이몬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말해버리면 산악파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산악파로서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일단 가만히 있으세요.” “파이몬 님!” 벨리알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파이몬은 방금 산악파 전체를 위하여 벨리알 한 사람을 내버렸다. 파벌의 수장으로서는 이성적인 선택일지 모르겠으나, 정작 버림당한 벨리알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지금이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벨리알. 나 바르바토스가 그대를 도와주겠다.” “저, 정말입니까!?” 마왕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서로 대적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평원파 수장인 바르바토스가 직접 산악파의 일원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파이몬 또한 인상을 찌푸리고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건 말건 바르바토스는 나와 상의한 바대로 말해나갔다. “우리는 동포이다. 평소에 적대할지라도 인간계 정복이라는 단 하나의 천명 아래 살아가고 있지. 작금에 인간 놈들이 우리들의 영토를 넘보는 터에 어찌 평소의 은원에 얽매여서 대의를 외면할까! 나 바르바토스는 즉각 죽음의 기사 오백 명을 동원하겠노라!” “오, 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리알이 감격했다. 죽음의 기사 오백 명이면 단독으로 제국군 이천 명을 압살할 수 있었다. 벨리알은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바르바토스에게 절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파이몬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지나치게 조심했다, 파이몬. 이로써 산악파에 속한 마왕들은 파이몬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편이 멸망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파이몬, 다른 편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원군을 내주는 바르바토스. 어느 쪽이 더 믿음직스러운가는 명약관화하겠지. 첫 라운드에는 평원파가 점수를 챙겼다. 바르바토스와 내가 그려놓은 밑그림대로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던 차였다. “서, 서열 제1위!” 회의장 입구에서 문지기가 외쳤다. 문지기는 겁에 질려 있었다. “마계 최초의 군주이자 대공! 육십육 개의 군단을 이끄시는 영도자요, 모든 검의 주인이신! 바알 폐하 납시오――!” 회의장의 육중한 대문이 먼지를 일으켰다. 마왕들이 입구를 향하여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석에 앉은 여섯 명의 최고위 마왕마저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마계의 진정한 주인이 행차하고 있었다.   00074 필리버스터(filibuster) =========================================================================                        바르바토스가 속삭였다. “절대 눈 마주치지 마. 질질 싼다.” 약간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 마왕들은 대체로 유아독존의 성격을 가졌다. 자기보다 서열이 높다고 해서 상대방한테 무조건 존댓말을 쓰거나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법도 드물었다. 그런데 바알이 등장한다니 모든 마왕이 허리를 숙이지 뭔가. “인사하는 게 아니야. 인사하는 척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바알 아저씨랑 눈을 마주치면 공포를 느끼거든. 겁나게 쫄려. 그 기분을 느끼기 싫으니까 대충 인사하는 척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넘기려는 거야.”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마왕들은, 바알과 시선이 마주치느니 차라리 극진하게 예의를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공포를 느끼길래 자존심이 히말라야 산맥에 오줌을 싸갈길 정도인 녀석들이 인사하는 척하면서 눈길을 피할까. “그렇게 무섭냐?” “궁금하면 쳐다보시든가.” 바르바토스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말리진 않겠는데 기저귀는 미리 차라.” 회의장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경첩이 삐꺽였다. 쇠가 쇠를 긁는 소리가 음산하게 찢어졌다. 그와 함께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 스무 개가 요란하게 깨졌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대문이 열린 틈새로 미약하게 새어나오는 빛, 그게 유일한 조명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발자국씩 느릿하게 걸어왔다. 자신이 밟은 그곳을 영토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듯 확고한 발걸음으로. 그것은 회의실 대문에서 맞은편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직진했다. 발걸음이 내딛을 때마다 공기가 진동했다. 그 자는 하나의 발걸음으로 드넓은 건물을 꽉 매웠다. 발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가 이내 옅어질 즈음해서 다시 발소리가 울렸다. 이어지지 않을 듯 이어지는 음악처럼. 그는 마치 발자국 소리에 회의장이 버티지 못해 부서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같았다. 그가 회의장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우뚝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탓에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위치를 짐작컨대 중립파 일원이 모인 곳에 가까웠다. “마르바스. 잘 지냈는고.” “……덕분에. 바알.” “중립이란 외로운 길. 그대의 외로움이 바다에 포류하는 일개 선원의 외로움이 아니라 홀로 바닷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선장의 외로움이기를 기대하노라.”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산악파가 모인 장소 근처에서 발소리가 중단되었다. “파이몬.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미모로다.” “황공하와요……바알 님.” “전략이란 비단 전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대 역시 멀리 내다보는 이상이 있을 터. 비록 느리더라도 확실한 걸음으로 이상에 다가가기를 응원한다.” 발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발소리는 바로 가까이 다가와서 멈추었다. 그가 바르바토스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영원토록 순수한 전사여.” 소름이 끼쳤다. 귓가에, 아니 귓속에서 목소리가 지잉 울렸다. 귓구멍을 통해 뇌수를 흔들어버리는 듯했다. 발끝부터 균형 감각이 어긋났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세를 유지했다. 사전에 바르바토스한테 경고를 듣고 하반신에 꽉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꼴불견 사납게 넘어졌을 것이다. 「마왕 바알이 스킬 <문무격하(文武格下)>를 발동합니다.」 「당신이 무력과 지력 능력치에 따라 스킬에 저항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떨어지다가 어떤 기적적인 확률에 의해 공중에서 멈추었습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 차이로 인해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시겠지.’ 딱히 경악스럽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던전 어택>에서 바알한테 문무격하라는 이름의 스킬 따위 없었다. 아마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바알은 게임과 다르게 훨씬 더 많은 스킬을 보유한 모양이었다. 얌전히 능력치 패널티를 받아들이려는 때, 무언가가 내 앞을 감싸었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였다. 그녀가 나한테서 바알을 슬쩍 가려주었다. “오랜만이야, 아저씨. 여전히 정력이 펄펄하네?” 「마왕 바르바토스가 스킬 <전법무효(戰法無效)>를 발동합니다.」 「스킬 상쇄! 패널티 효과가 지워집니다.」 깜짝 놀랐다. 이 멍청한 로리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비록 공적으로 평원파에 속하기로 마음먹긴 했어도 타인의 눈에 띄어서야 곤란했다. 나는 약자였다. 약자는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할 권리가 없었다. 강자의 뒤편에 숨어서 약삭빠르게 생존을 추구하는 게 약자 본연의 자세였다. 바르바토스가 지나치게 나를 감싸고 돌면 그녀와 내가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었다고 주변에다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르바토스의 행동에 바알이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를 뱉었다. “호오.” “부인도 없으면서 불타는 몸으로 어떻게 밤을 지새우나 참 궁금해. 혹시 이거야, 이거?” 바르바토스가 상스럽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볼 순 없었어도 아마 외설적인 손짓이라도 만들어서 노는 것 아닌가 싶었다. 바알도 낮게 웃었다. “적어도 남한테 밝히기에는 그닥 떳떳하지 않은 성생활을 영유하고 있다. 그대가 내 성생활에 관심을 가져주니 놀랍고도 흥미롭다. 내 과오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성생활은 유복한지 하문해도 되겠는가.” “오, 적어도 이쪽 방면에 있어서는 저기 파이몬 창녀보다도, 아저씨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재미있는 성생활을 즐기고 있어. 솔직히 난 아저씨가 성교를 하는 광경을 잘 상상하지 못하겠어. 박고 빼고, 박고 빼고, 찌익, 그러다 끝나는 것 아닌가 싶거든.” “크하하하!” 웃음소리가 회의장을 때렸다. 건물 구석구석까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등줄기에 불쾌한 무언가가 저릿저릿하게 느껴졌다. 바알의 웃음에 동조하며 주변의 마왕들이 조심스레 히히덕거렸다.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 모습을 보고 저들 하나하나가 인간계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마왕임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나 바알,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었도다. 나에게 농을 던지는 자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순수한 전사여. 내 어찌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목소리가 한층 그윽해졌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나에게는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필멸자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가 인생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고, 아저씨야. 아저씨는 다 좋은데 가끔 말을 하는 건지 시를 읊는 건지 모르겠어.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니까. 우리 둘이 사실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기적적인 확률에 의하여 서로가 하는 말을 우연히 알아듣는다고.” “어쩌겠는가. 내 삶이 지나치게 오래되어 요즘 아해들과 말투가 다른 것을.” 나도 이천 년은 살았는데, 하고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바알이 또 한번 웃었다. “그대의 재롱을 보아 넘어가겠다.” “…….” 무엇을 넘어가겠다고 말한 것인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나를 보호한 것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바알이 우리 곁을 훌쩍 떠나서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제 여섯 명의 최고위 마왕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묻고 대답을 구하는 것이 인사라면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흐으. 뒈지는 줄 알았네.” “야, 너 진짜 왜 그딴 짓을.” “밥팅아. 입 닥쳐. 저 아저씨가 너 노려본 거 모르냐.” 뭐? “……나를 노려봤다고? 왜?” “썅, 내가 알겠냐.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너 찌부라졌어. 약해빠진 주제에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틱틱거리기는.” 바르바토스가 입을 삐죽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바알에게 관심을 끌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었다. 애시당초 접점 자체가 있기라도 했는가. 기껏 생각나는 것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사건, 즉 동족살해인데 서열 제1위가 그 정도로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알의 성격을 대략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 바알은 바르바토스보다 더한 주전론자였다. 아니, 투쟁 예찬론자라고 표현해야 마땅하겠다. 삶의 의미는 오로지 투쟁에 있으며, 마인이 쇠퇴한 이유가 다름아니라 투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피로 얼룩진 전쟁터를 누구보다 신봉하는 대마왕. 그것이 바알의 본질일 터. ‘설마 내가 흑사병 유언비어를 퍼트린 걸 알아챘나?’ 안 되겠다. 정보가 너무 적었다. 판단할 재료가 부족했다……적어도 바알의 호감도가 20 이상이라면 심리상태라도 엿볼 텐데, 상태창을 불러봐도 홀로그렘에는 괴물 같은 체력과 공격력 그리고 방어력밖에 표시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제기랄, 머리 한구석에 새까만 이무기 한 마리가 눌러앉은 기분이었다. “시절이 다망함에도 한 자리에 모여든 그대들한테 수고의 말을 건넨다.” 바알이 상석의 정중앙에 앉았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덩어리 대여섯 개가 생겨났다. 샹들리에를 대신하여 불빛이 회의장을 어렴풋하게 비추었다. 바알이 잠시 휴지(休止)를 두고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나는 차마 그를 정면으로 마주볼 수는 없어서 약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다수의 마왕이 나처럼 자세를 취했다. 중립파의 마르바스, 산악파의 파이몬, 평원파의 바르바토스……극히 일부만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서 바알이 앉은 쪽을 직시했다. 시선이 권력이다. 이 명제가 이토록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본래 마왕들의 행로는 기나긴 토론과 깊은 숙고 끝에 결정 내려야 할 사항. 최고위 마왕들은 되도록 토의에 간섭하지 않고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나 바알이 의사를 표명하고자 하노라.” 침묵이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중력이라도 거세진 것 같았다. 회의장에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개전(開戰)!” 단 한 마디로 제8차 월맹군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와중에 바알이 마왕들을 일일이 거명하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이 이곳에 모인 예순 명의 마왕 전원을 휘어잡았다. “서열 제9위 파이몬.” “예.” 파이몬이 우아하지만 빠른 발걸음으로 회의장 가운데로 걸아나갔다. 그녀가 드레스의 양쪽 끄트머리를 잡아올리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소녀 파이몬. 명을 받들겠사와요.” “그대를 제1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산악파를 이끌고 튜튼 왕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으로 진군하라! 인간종이 다시금 살아서 대기를 맛보지 못하도록 그 폐를 갈갈이 찢을지언저. 그대에게 산악파를 독자적으로 통솔할 권리를 인정한다.” “예.” 파이몬이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반주전론과 친인간주의의 대표주자인 파이몬이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부복한 것이었다. <던전 어택>에서 그녀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인간종에 친화적인 전략을 펼쳤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파이몬이, 아무런 반항도 없이 인간 국가로 침공하겠노라고 긍정했다! “서열 제5위 마르바스.” “아아.” 마르바스가 진중한 걸음걸이로 회의장까지 나아갔다. 그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으나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두었다. 군례였다. “고귀의 마르바스. 군명을 구한다.” “그대를 제2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중립파를 통솔하여 아나톨리아 제국과 폴리투니아 왕국 방면으로 행군하라. 대륙 동부를 유린하도록.” “대륙의 동쪽은 앞으로 사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울 것이다.” 마르바스가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 “예엡.” 같이 상석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일어났다. 그녀가 장난스러운 팔자걸음으로 회의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는 척, 하고 이마에 손을 갖다댐으로써 군례를 갖추었다. “지진의 아가레스. 뭐든지 말해보라 이거야.” “그대를 제3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소속이 없는 마왕들을 이끌어 모스크바 왕국과 칼마르 연맹국을 격파하라! 대륙의 북쪽이 본디 만년설의 영토였음을 인간들에게 알려주거라.” “에엑, 추운 건 싫은데……별 수 없지. 대륙의 북쪽에서 앞으로 인간이 눈을 구경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다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팔을 벌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서열 제3위의 바싸고. 그대를 제4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서열 제6위의 발레포르와 더불어 버니시아 왕국의 해군을 초토화해라!” “충분하다.”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 가운데에 기립했다. “서열 제4위의 가미긴. 그대를 제5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서열 제7위의 아몬과 함께 모든 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라! 그대들은 우리 마왕들의 영토에 머물도록.” “어머머. 저만 재미없는 일 시키시고, 어쩌엄. 바알 님도 얄궂으셔.” 여인이 살풋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군례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로 회의장 가운데에 섰다. 이윽고 바알의 목소리가 우리를 향했다.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언제 부르시나 조마조마했다고.” 바르바토스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기라성 같은 마왕들 곁에서도 그녀가 쾌활하게 떠들었다. “내가 갈 곳은 뻔하네. 그치?” “그대를 제6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합스부르크 제국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그대에게 평원파 전원의 통솔을 인정한다.” “시발, 좋다 이거야! 인간들을 죄다 씹어 죽여주지!” 그녀가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리함으로써 산악파, 중립파, 무소속, 최고위 마왕, 평원파까지, 모든 인원이 거론되었다. 남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마왕들 사이에서 열기가 고조되었다. 전의가 들끓기 시작했다. 모든 마왕이 참여한 월맹군은 이천 년만에 처음이었다. 유린, 정복, 파멸. 무엇보다도 마왕을 위하여 고안된 단어들이 지금 이 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피냄새를 감지하고 군침을 흘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 바알은.” 바알이 말했다. “제7군단 군단장이자 총사령관임을 선언한다. 본인은 단독으로 프랑크 제국을 섬멸하겠다. 마왕군은 총 일곱 군대로 나뉘며, 일곱 갈래의 파멸과 일곱 갈래의 비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동지들! 인간들에게 본디 세계의 주인이 누구였는가 깨닫게 만들라.” 그가 일어서서 등에 찬 검을 빼들었다. “월맹군이여! 진군하라!” 그 직후, 짐승들의 포효가 회의장에 울려퍼졌다.   00075 인류의 번견 =========================================================================                        제국력 1506년. 늦봄. 영문도 모른 채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1년이라니, 무슨 농담 같았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을 지금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다. 아직 노인이 되기에는 멀었는데 말이다. 리프의 모험대에 죽을 뻔했다. 흑사병 건으로 돈을 왕창 벌어들였다. 라우라를 구출했다. 잭을 죽였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 그 건으로 니블헤임에서 한바탕 소란에 휘말렸다. 이제 와서는 바르바토스를 설득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함으로써 인간계 전체가 공포에 떨 전쟁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다……어딜 보아도 고작 1년 간의 스케줄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워커 홀릭이 깜짝 놀라서 줄행랑칠 지경이었다. 딱 1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나에게 미래를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방구석 폐인 자식아, 넌 앞으로 <던전 어택>과 세계관이 똑같은 곳에 떨어져 최약체 마왕으로서 생고생을 할 것이라고. 아마 미친 놈 취급을 당하겠지. 바로 그 미친 짓거리가 실제로 일어났다. 아이구야.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도 벚꽃이 있었다. 부대가 진을 친 이곳에는 벚꽃 무리가 왕창 피었다. 새하얀 벚꽃잎 아래에서는 무엇이든 눈부셔서, 심지어 오크조차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서 꽃구경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주군. 제파르 대장이 회의를 소집한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내 부관으로서 월맹군에 참여했다. 인간을 부관으로 삼았다고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무리도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무얼, 나는 실력주의를 애호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생존시켜줄 수만 있다면 마인이든 인간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고작 오십 명밖에 이끌지 않는 지휘관입니다. 제가 가봤자 의미가 있을까요?” “제파르 대장은 선봉대 소속 마왕 전원을 소집했다. 주군도 얼굴을 비출 겸해서 가봐야겠지.”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꼭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이런, 아무래도 라우라가 나보다 정신연령이 높은 모양이었다. 무심코 그녀에게 불평을 토로해버렸으니 말이다. 서열 제71위. 그런 내가 받는 취급이란 정말 눈물이 겨웠다. 간판만 마왕이지 통솔하는 부대가 고작 오십 명을 헤아렸다. 그것도 대부분이 최하급골렘, 최하급요정. 다른 마왕들 입장에서는 '이 새끼 뭐야?' 싶으리라.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쪽에 시비 걸어오는 것을 마냥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의외로 쪼잔하다고. “미안합니다. 이래저래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이 많아져서…….”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라우라가 초록 눈동자로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주군을 믿는다.” 어이쿠, 정말로 라우라가 어른스러웠다. 인간인 그녀에게는 나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질 나쁜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을 텐데. 둘이서 다른 마왕들 뒷담화나 실컷 까볼 생각으로 운을 띄웠다가 도리어 응원을 받아버렸다. 몸이 이어진 이래로 라우라와 나는 유대가 더욱 공고해졌다. 머쓱해서 그만 웃어버렸다. “그럼 얼굴을 비추러 가볼까요.” “아아.” 나는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제6군단의 선봉대에 배속되었다. 월맹군 결성이 이루어지자마자, 바르바토스는 재빠르게 제6군단을 조직했다. 평원파 소속의 마왕들은 바르바토스의 명령 아래 일사분란하게 조직 개편에 동참했다. 명령계통, 부대, 군령까지 순식간에 하나의 군단이 완성되었다. 당연히도 제일 먼저 진군하게 된 군단은 제6군단이었다. 우리가 진군하는 광경을 파이몬은 재미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평원파는 전쟁꾼 소굴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 소굴의 대빵쯤 되었고. 자기네가 평소부터 얼마나 전쟁을 준비해왔는지 직접 증명했다. 장담컨대 월맹군이 결성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날 회의장에서 환호성을 터트린 자들은 죄다 평원파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산악파는 열심히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명령계통조차 수립되지 않았다던가.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목소리가 불거지진 않았어도 아무래도 제1군단의 군단장 파이몬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흐. 아무래도 제1군은 꽃구경이나 갈 생각인가봐?’ 결정타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의 면전에 대고 날린 대사였다. 다른 군단들이 열심히 닦아놓은 길을 제1군은 뒤늦게 따라가기만 할 속셈 아니냐,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비난했다. 파이몬이 잔뜩 달아오른 것은 당연지사. 매섭게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으나 정작 대꾸할 수는 없었다. 벨리알 건으로 인해 평원파가 선취점을 딴 상황에서 제2라운드도 우리 평원파에 점수를 넘겨주었다. 부디 분발해주기를 빌었다. 그쪽이 분발해야 모처럼 대전쟁을 기획한 나도 보람이 생기지 않겠는가. “왔는가, 단탈리안. 라우라를 대동하고 막사에 들어섰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노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가 제6군단 선봉대 대장으로 임명된 마왕, 서열 제16위의 제파르였다. “예, 제파르 님. 명을 받들고자 왔습니다.” “음. 편히 대기하도록.” 제파르가 내 공손한 군례에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수염이 멋들어져서 나이가 좋게 들었다는 느낌이 났다. 행동거지나 말투가 진중하여 화려한 면모는 부족했지만, 노련한 숙장(宿將)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었다. ‘저러고도 바르바토스보다 나이가 적다니까, 원.’ 마왕은 도무지 겉보기로 나이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배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라우라는 내 뒤에서 기립.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지 막사 안에는 제파르와 제파르의 부관, 나, 라우라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르셨습니까, 제파르 님?” “명을 받듭니다.” 시간이 지나자 마왕들이 한두 명씩 들어왔다. 그중에는 군례를 취하는 자도 있었고, 적당히 생략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자가 이전에 월맹군에 참여해본 마왕이었다.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좋겠지. 후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월맹군에 참여하는 신출내기 마왕이었다. 신출내기들은 인간 군대를 가리켜서 겁쟁이니 애송이니 비웃으면서 월맹군의 위엄을 조금만 보여주어도 도망쳐버릴 거라고 떠들었다. 머저리 같으니! 애송이는 바로 너희들이다. 인간군이 정말로 겁쟁이였다면 월맹군이 지금까지 일곱 차례나 실패할 일도 없었다. 신출내기들은 마왕군의 한심함과 인간군의 무서움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흠.” 슬쩍 살펴보니 제파르도 안색이 불편했다. 눈치 채기 힘들지만 오른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는 제4차에서 제7차까지 월맹군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왕군이 인간군에 패배했는가 뼈저리도록 알고 있으리라. 지금 신출내기 마왕들이 보이는 태도는 기존에 마왕군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였다. 마음에 안 들겠지……바르바토스가 선봉대의 대장으로 임명한 만큼 제파르는 꽤나 유능한 인사인 듯했다. 기대해볼까. “그나저나 단탈리안 님은 특이한 자를 부관으로 데리고 있군요?” 이런, 나에게 화살촉이 돌려졌다. 신출내기 한 명이 내쪽을 보고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서열 제58위의 마왕 아미였다.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로 몰렸다. 화제가 떨어졌는가. 나를 씹을거리로 선정한 것 같았다. “인간을 부관으로 삼다니, 전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례라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 부관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그 능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미색이 능력이라면 확실히 비범한 부관인 듯싶습니다만.” 신출내기들이 재밌다면서 웃었다. 라우라의 미모를 보고 혹시 색욕을 풀기 위한 용도로 데려온 것 아니냐며 놀린 것이었다. 아이구야, 머저리들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조금 어울려야겠다. “무얼요. 귀하의 부관보다야 여러모로 쓸 만합니다.” “……지금 저를 모욕한 것입니까?” “천만에요. 듣자하니 아미 님의 부관이 서류업무를 전부 저의 부관한테 일임하고 있다 하는군요. 제 부관을 신뢰해주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만, 혹시나 아미 님의 부관이 서류업무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아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일종의 따돌림인지 두세 명의 마왕 부관들이 라우라한테 일감을 몰아넣고 있었다. 인간 주제에 마왕군의 업무를 잘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 뭐 그런 의미겠지. 의도는 둘째 치더라도 자기 부대의 업무를 동급의 타 부대에 맡긴다니 잘하는 짓이었다. 만약 내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장부를 조작해버리면 어쩔 텐가.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제파르 대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미. 방금 지적된 것이 사실인가?” “……죄송합니다만 저는 들어보지 못한 사항입니다. 단탈리안 님! 군중에서 쓸데없는 모함은 삼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라.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미 님의 부대는 타 부대에 비해 보급량이 2할 가량 많더군요. 특히 술과 같은 보급품이 말입니다. 전쟁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축제 분위기입니까? 자신만만한 모습이 엿보여서 부럽습니다.” “네 자식이!” 아미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십의 마왕 주제에 감히 나를 욕보이는 게냐!” 아니, 부럽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아무리 머리가 이상해져도 전투를 앞두고 술독에 빠지진 못할 거다. 당신과 같은 정신머리로 세상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나에게도 그런 정신력을 전수해주기를. 오십의 마왕은 내 별명이었다. 겨우 오십 명의 부대를 이끌고 월맹군에 참여했다고 붙은 명칭이었다. 짓궂게도 오십은 백의 절반이므로 '오십의 마왕'에는 반쪽짜리, 반푼어치라는 의미가 같이 담겨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단탈리안보다 반푼어치라고 불리는 날이 많아졌다. 참 나, 마왕이란 종자는 어지간히도 시비 거는 것을 좋아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제파르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만. 이것이 무슨 추태인가?” 서열 제16위의 위엄을 거스르기는 두렵겠지. 아미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앉았다. 솔직히 바르바토스에 비하면 귀엽기까지 한 상대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 녀석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을 듯했다. 마지막 마왕이 막사에 들어왔다. 그는 험악한 공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파르는 잡담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 제6군단이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진군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제6군단의 선봉대, 즉 이번 월맹군에서 최선두를 맡고 있다. 우리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에 따라 역사가는 제8차 월맹군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나 제파르는 개인적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막사에서 박수가 터졌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낱말에 몇몇 마왕이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제파르가 오른손을 척 들었다. 자연스레 갈채가 잦아들었다. “알겠는가? 우리의 실책은 비단 일개 부대의 실수가 아니라 제6군단의 과오, 더 나아가 월맹군 전체의 과오가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제6군단 선봉대는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여야만 한다. 단독행동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과연. 당근을 내민 다음에는 채찍을 인지시키는가. 제파르가 대장이라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다 똑같이 마왕이자 군주였다.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폭주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명령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군대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제파르는 이번 기회에 위엄을 바로 세울 의도였다. 실패하면 다른 마왕들에게 끝없이 조롱을 당하게 될 거다, 그러니 내 명령에 얌전히 수긍해라, 그런 이야기였다. 여기 모인 마왕들도 말귀를 알아들었다면 앞으로 자중하겠지. 문제는 말귀조차 못 알아먹는 바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간 놈들 따위, 오우거의 숨소리만 들어도 땅바닥에 주저앉을 겁니다!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미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두 명의 마왕이 맞장구를 쳤다. 인간은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면서. 요컨대 회의에 참석한 여섯 명의 마왕 중에 세 명이나 꽝이었다. 자그마치 절반이 꽝……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이번 전쟁. 유능한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무섭다. 내가 그 진리의 산 증인이 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00076 인류의 번견 =========================================================================                        회의가 끝났다. 결국 인간종이 얼마나 열등한가 성토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한심했다. 적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패착으로 이어지지만 과소평가하는 것보다야 한결 나았다. 신출내기 마왕들이 스스로 착실하게 패배 요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들에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아군의 사기를 북돋워야 마땅하다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다.” 제파르 선봉장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랬다. 꽝을 뽑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수하로 딸려온 자들의 절반이 저 모양이니 전의가 떨어질 만했다. 만약 신출내기 마왕들이 적군의 선봉대였다면 훌륭하게 전초전을 완수한 셈이었다. 명장들이 아니고 뭔가.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쪽의 사기를 떨어트렸으니. 한숨을 참으며 막사에서 나가려는 참이었다. 제파르가 나를 불렀다. “단탈리안. 자네는 남게나.” “예? 알겠습니다.” 반쯤 들린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무슨 일일까. 마왕들이 퇴장하고 금세 막사 안이 썰렁해졌다. 제파르와 그의 부관, 나, 라우라, 이렇게 네 명이 남았다. 제파르가 진중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제6군단 군단장께서 나에게 귀띔하셨다. 자네가 믿음직스러운 자라고. 용병술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어도 지략은 확실하다 말씀하셨다.” 내가 쓰게 웃었다. 또 바르바토스인가. 말괄량이 여동생 같다가 요염한 애인 같기도, 때로는 든든한 누나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방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곤란한 마왕 전하였다. “저는 일개 모략가일 따름입니다.” “그대가 발푸르기스 밤에서 파이몬 님을 격파할 때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서열 제71위가 파이몬 님을 옭아매는 광경이 제법 인상적이었음을 밝혀두지.” 칭찬인가? 이 노인은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라피스처럼 천성적인 무표정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위엄과 원숙함이 굳어져서 생겨난 무표정이었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솔직히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지. 아니, 약간 겸손하게 구는 편이 나을까……보아하니 바르바토스를 단지 파벌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제파르 본인을 칭찬해봐야 아부하는 소리로 들릴 공상이 컸다. 여기서는 상대방의 숭배심을 이용하자. “감사합니다. 허나 청문회는 순전히 제 힘으로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긴밀히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감히 파이몬 님에게 반항하지도 못했겠지요.” “으음.”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색이 만족스러웠다. 한 번 더 치고 들어가도 될 듯싶었다. “청문회를 계기로 군단장께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진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경박한 말투를 쓰시는 것 아닌가, 타 파벌이 방심하기를 노리시는 것 아닌가……행동력과 심모원려를 동시에 갖추신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계 토벌이라는 명분, 평원파라는 세력까지 있습니다. 바르바토스 님만큼 군주에 어울리는 분도 없겠지요.”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네.” 오랜만에 띠링!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마왕 제파르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성취감이 가슴에 얕게 퍼졌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내쪽에 유리하게 이용한다. 간단한 승부인데도 성공하면 뿌듯해졌다. 예전부터 생각해오건대 나의 진정한 주특기는 호감도 쌓기였다. 여태까지 호감도 사냥에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제파르가 말했다. “나는 군단장을 신뢰하며, 군단장께서 신뢰하시는 자 또한 신뢰한다. 그러나 내 휘하에서 활동하려면 그 나름대로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탈리안, 자네에 대한 따돌림을 조장한 것은 나일세.” “그렇군요.” 나는 덤덤했다. 도리어 제파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놀라지 않는군?”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제파르 각하께서는 선봉대의 임무를 자각하고 계십니다. 아군의 불화는 가장 경계해야 할 사건이지요. 하지만 진군이 시작하고 일주일 동안 각하께서는 마왕들 사이의 신경전에 일절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령을 바로 세우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바로 맞혔다.” 「마왕 제파르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제파르가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자네는 전술가이기보다 전략가, 전략가이기보다 모략가이겠지. 그런데 군단장께서는 자네를 선봉대에 배속하셨다. 전술적인 승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전초전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디 한번 무훈을 세워봐라, 그 정도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앞으로 적어도 두 달 동안은 내가 군사행동에 개입하지 않아도 좋았다. 여유로운 시간인 것이었다. 제71위라는 서열은 아무래도 마음껏 책략을 펼치기에 불리한 자리이니 군공으로 지위를 만들 수밖에 없다……이거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가. 생각에 잠긴 나를 향해 제파르가 넌지시 말했다. “서열 제58위의 아미 말이네만.” 왜 갑자기 아미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잠자코 들었다. 지금부터 의문을 해결해주리라. “본래 무소속이었다가 월맹군이 결성할 즈음해서 평원파에 자진 합류했다. 새로 들어온 마왕이니 우리 파벌 내의 입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선봉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우고, 그걸로 입지를 강화시켜라.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배려하신 게지.” “아. 그래서 과격하게 발언했던 거로군요.” 중요한 선봉대에 왜 신출내기가 세 명씩이나 배속되나 싶었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다. 확실히 바르바토스와 나는 입장이 서로 달랐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월맹군의 전반적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평원파 수장으로서 파벌원까지 신경 써주어야 했다. 이해했다. 그렇지만 세 명이라니. 너무 많다. 제8차 월맹군의 초전을 결정 지을 선봉대이다. 이런 허섭한 구성원으로도 괜찮으리라 낙관하는 거냐, 바르바토스. 제파르는 내 표정을 살펴보더니 슬며시 미소 지었다. 주름살이 자연스럽게 보조개로 밀렸다. 멋있게 나이가 든 남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내가 댄디 취향의 여성이었다면 웃음 한방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군단장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군.” “예?” “자네한테 부하를 만들 기회를 하사하신 것이다.” 부하라고? 무슨 소리냐?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제파르가 말했다. “군단장께서 자네에게 건네는 진언이다. 언제까지 그림자에서만 나를 도울 셈이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네 세력을 만들어라.……정말로 경은 군단장 각하의 신뢰를 받는 모양이로군, 단탈리안.” “……!” 내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런가! 그랬는가! 바르바토스는 단지 무공이나 세우라고 나를 선봉대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최근에 평원파에 들어와서 입지가 약한 세 명의 마왕, 그들을 내 세력의 밑거름으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만약 세 명의 마왕을 선봉대가 아니라 뿔뿔이 다른 부대들로 나누어서 소속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비호해줄 사람,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을 찾아서 스스로 복속했겠지. 평원파라고 해서 바르바토스가 황제처럼 군림하지는 않았다. 바르바토스 아래에 또 다시 여러 마왕이 작은 세력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출내기 세 명은 순식간에 그 세력들로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 명을 일부러 뭉뚱그려서 선봉대로 보냈다. 선봉대는 대장 제파르를 합치더라도 고작 여섯 명의 마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섯 명 중에 세 명, 게다가 처지가 비슷한 마왕들……당연히 끼리끼리 놀게 되었다. 대장인 제파르는 따로 세력을 만들지 않고 바르바토스의 심복으로 지내는 데 만족했다. 나머지 한 사람의 마왕도 딱히 고위 서열이 아니었다. 신출내기 세 명한테 자기 세력으로 들어오라 권유할 만한 인물은 적어도 선봉대 안에 없었다. 이제 세 명의 목적에는 어느 세력으로 들어가 비호를 받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최대한 군공을 많이 세워 입지를 강화시키자, 그것이 최대의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임에 틀림없다. 달리 할 일이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즉, 이미 세력 구도가 완성된 평원파 내부에서 입장이 정해지지 않은 마왕이 세 명이나 생겨버린 것이었다. 새로운 세력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보다 절묘한 기회는 없었다. 아니, 바르바토스가 그 기회를 만들었다! '신참들한테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라는 실로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서. ‘내가 그 세 명을 먹어치우라는 거냐. 세력을 만들어, 그림자뿐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너를 보좌하라는 것이냐……!’ 전율이 일었다. 바르바토스의 섬세함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쩌면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바르바토스를 얕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포도주에 취하여 이쪽의 계략에 넘어온 소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여겼을까……멍청하긴! ‘제기랄. 전쟁의 밑그림을 다 그려놨다고 해서 방심했어.’ 솔직하게 인정했다. 세력 따위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추구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바르바토스의 눈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세력을 키워야만 하는, 키우지 않으면 곤란한 입장으로 비추었다. 당사자보다 타인이 상황을 더 절박하게 인식한 것이었다. 신출내기 마왕들은 적어도 자기네 입지를 스스로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머저리에 불과하다면 나는 무엇인가? 머저리를 뛰어넘는 머저리, 바보 멍청이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만 했지 왜 그토록 어리석은 자들이 선봉대에 속했는가 한 번도 숙고하지 않았다……. “눈빛이 달라졌군.” 제파르가 말했다. 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저리로 남았겠지요. 이 빚은 반드시 군공으로 갚겠습니다.” “개의치 마라. 군단장께서는 자네에게 전술을 구경시켜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기회에 인간과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일견하도록.” 이런, 심지어 제파르는 나를 위해 파견된 가정교사였는가……내 인식은 바르바토스에 비해 어지간히도 물렀다. 나에게 선봉대가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면 바르바토스에겐 전쟁의 시작 그 자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문득 회의 도중에 제파르가 강조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실책은 비단 일개 부대의 실수가 아니라 제6군단의 과오, 더 나아가 월맹군 전체의 과오가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제6군단 선봉대는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여야만 한다. 단독행동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저것을 신출내기 마왕들한테만 내던진 경고라고 생각했다. 정반대였다. 누구보다도 내가 뼈아프게 새겨 들어야만 했다. 자괴감이 등뼈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나는 대체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 레벨 21에 불과한 녀석 주제에 '나는 저들과 달라' 하고 우월의식이라도 품었는가? 쓰레기 자식 같으니. 제파르의 말 그대로였다. 우리 선봉대는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아군을 깔보는 일 따위 용납될 리 없었다. 나는 이번 선봉전에서 군공을 세워야 함은 물론이었고, 세 명의 마왕까지 내 세력으로 회유해야 했다. 이런 일에 방심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아서 제파르에게 경례했다. “소인, 반드시 각하의 지휘를 학습하겠습니다.” “음. 이만 나가보아도 좋네.” 나는 막사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그렇다. 이건 바르바토스의 깜짝 선물이다. 선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서야 제대로 된 어른이라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소녀가 준 선물임에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좋다. 어디 한 번 네 기대대로 성장해주겠다고, 바르바토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마……그게 너에 대한 나의 깜짝 선물이자 가장 멋진 답례가 되겠지.   00077 인류의 번견 =========================================================================                        * * * ‘또 오는군.’ 한스는 노련한 병사였다. 멀찍이서 오크 무리를 발견하고 그가 생각했다. 한스는 벌써 십오 년 동안 산맥 부대에서 생활했다. 소규모 전투를 수십 번 겪었다. 정예병이었다. 그가 보기에 저기서 다가오는 오크 무리는 수십 번의 전투 경험에 한 번을 더해줄 사건에 불과했다. 마왕성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대륙 북부. 그곳에서 인간계의 대다수 국가들이 위치한 대륙 중앙으로 침공하기 위해서는, 이곳 검은 산맥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검은 산맥에는 몬스터의 침략을 대비하여 무수히 많은 초소와 여러 개의 산성이 지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스는 최전방 초소에 소속되었다. 최전방이란 고독한 곳이었다. 탈영해봤자 막을 사람도 없었다. 동료들이 있다지만 그 동료들과 함께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한스와 동료들은 십오 년 동안 초소를 지켰다. 자발적으로, 군인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군인의 직업을 남성적이라 여겨서가 아니었다. 한스는 군인을 최고의 직종이라 떠벌려대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자신의 조국을 특별히 사랑해서도 아니었다. 한스가 태어난 합스부르크 제국은 유난히 귀족의 권력이 강했으며, 평민인 한스는 피지배층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을 사랑했지 조국을 사랑하지 않았다. 군인의식이나 애국심 따위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견고한 사명감이 한스에게 있었다. 인류의 번견(番犬). 최전선을 맡은 자기가 얼마나 빠르게 마왕군의 침공을 발견하고 얼마나 정확하게 침공 경로를 짐작하는가에 따라서, 검은 산맥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주둔군이 움직였다. 주둔군이 궤멸해버리면 마왕군은 곧바로 대륙으로 진출한다. 끔찍한 일이었다.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임무에 달려 있다고, 한스는 물론이고 검은 산맥 최전선의 초소병들 모두가 믿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초계를 벌여왔다. 설령 자기가 침공을 눈치 채지 못하더라도 제2선이, 제3선이, 제4선이 알아차릴 것이었다……그들은 자신과 동료를 신뢰했다. 때때로 변경백 영주들이 보급을 늦게 보내오더라도, 초소병들은 자력으로 사냥을 하면서까지 버텼다. 초소병이 된 이들 중에는 재빵사도 무기장인도 있었다. 심지어 2서클이지만 마법사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지만 강력한 군대였다. 지난 이천 년, 대륙에서는 수십 개의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쳤으나 이곳 검은 산맥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산맥 너머를 지켜본다. 몬스터가 다가온다. 그것을 신속하게 보고한다……초소병의 임무는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인간과 몬스터가 영원히 서로 적이듯이, 초소병의 임무 또한 영원하겠지. 한스의 핏줄에는 유구한 정신적 유산이 흐르고 있었다. ‘일단 초소에 합류하는 편이 좋겠어.’ 다행히 지금 정찰하는 곳에서 초소는 멀지 않았다. 한스는 재빨리 산을 타고 초소에 돌아갔다. 돌로 이루어진 건물――이것 역시 지어진 지 이백 년이 지났다――, 동료들이 바깥에서 산림욕을 즐기면서 전쟁장기를 두고 있었다. “몬스터 부대가 몰려왔다.” “제기랄. 또야?” 동료들이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입과 다르게 몸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한스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갑옷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오크 부대야. 고블린과 하급골렘도 섞여 있어. 오우거까지 다섯 마리나 있더군. 전부 합쳐서 대략 오백 마리.” “본격적이군. 오백 마리 급의 침공은 이 년만인가.” 초소장인 프리드리히가 말했다. 오크와 고블린, 하급골렘은 하찮은 상대였다. 근방에 위치한 오십 개의 초소가 연합해서 무찌를 수도 있었다. 초소장 프리드리히만 하더라도 사십 평생 오크를 서른두 마리 사살했으며, 고블린을 백이 넘게 도륙했다. 두려워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료들이 장비를 챙기면서 대화했다. “오백 마리면 몇 놈이나 연합한 거지?” “두세 명이겠지. 한스, 깃발이 몇 개나 있었냐?” “세 개. 세 개의 깃발을 확인했다.” 프리드리히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세 명의 마왕인가. 서열이 높은 마왕이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지, 비슷비슷한 마왕끼리 연합을 이룬 것인지,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군.”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가 멀어서 깃발의 문양을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했어. 하지만 오우거 다섯 마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어. 한 마왕의 수하일 가능성이 높아.” 동료들이 침음을 흘렸다. 오우거는 위험했다. 녀석은 산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보통 야산에 한 마리 정도밖에 서식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구역을 명확하게 나눠 먹었다. 인간 국가로 따지자면 작은 영주나 다름없었다. 오우거에 비하면 오크나 고블린은 영주민에 불과했다. 한 병사가 불안함을 감추고 말했다. “어떡할까, 대장? 우리끼리 해결할 일이 아니야.” “부대를 셋으로 나누자. 파비안, 너는 올리버와 함께 주변 초소들한테 오크 부대의 출현을 알려. 우리 동네만 돌면 된다.” “알겠어.” 병사는 곧바로 사슬갑옷을 벗었다. 두 명이서 정찰을 하는데 사슬갑옷이나 방패와 같은 중장비를 가져가봐야 쓸모가 없었다. 여차하면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최대한 몸무게를 가볍게 해두어야 했다. “그 다음에는?” “산성으로 퇴각해. 아마 산성에서 오크 부대를 맞이할 테니까. 브루노, 너는 니콜라스와 함께 장비들을 짊어지고 곧바로 산성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대장.” 초소장 프리드리히가 투구를 썼다. 햇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까맣게 숯칠을 한 투구였다. “나는 나머지 인원과 함께 오크 부대의 뒤를 쫓는다. 한스, 길을 안내해.” “아아.” “제군들. 단위가 오백이 넘는 침공은 이 년만에 처음이다. 우리 인류의 산성이 고작 오백의 부대에 뚫릴 일은 없으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만일 우리 초소가 이번 침공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면 우리의 임무는 실로 막중하다.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열 명의 초소부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했다. 프리드리히가 부대원의 훈련도에 만족하며 구호를 읊었다. 이천 년 전부터 초소부대에 내려져 전해오는 선조의 구호를. “――모든 악이 멸하는 그날까지.” 부대원들이 한 목소리로 회답했다. “우리야말로 인류의 사냥개일진저!” * * * 제파르 대장의 막사. 어제 회의가 가볍게 끝났다면, 오늘은 본격적으로 작전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분위기 때문인지 어제 제멋대로 흥분한 신출내기 마왕들도 조용히 작전 개요를 경청하고 있었다. “선봉대의 임무는 인류 최전선의 방벽을 함락하는 것이다. 바로 이곳.” 제파르가 막대기로 지도를 짚었다. “녹색의 산성이 우리 목표이다. 녹색의 산성을 무시하고 진군할 경우, 선봉대는 본군과 나뉘게 된다. 인간들은 산성들끼리 연계하여 선봉대와 본군에 산발적인 전투를 강요할 것이다. 안전한 진군을 위해서라도 녹색의 산성은 반드시 점령해야만 한다.” 검은 산맥. 마왕의 영토와 인간의 영토를 자연적으로 갈라주는 산맥이었다. 대규모 군대가 진군할 만한 통로는 세 군데. 세 통로는 각기 튜튼 왕국, 폴리투니아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이어진다. 대륙 중앙 정벌군의 대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1) 서열 제9위의 파이몬. 그녀는 월맹군 제1군단, 산악파를 이끈다. 제1군단이 산맥의 첫 번째 통로를 경유하여 튜튼 왕국으로 향한다. (2)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그는 월맹군 제2군단, 중립파를 이끈다. 제2군단이 산맥의 두 번째 통로를 경유하여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향한다. (3)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그녀가 월맹군 제6군단, 우리 평원파를 이끈다. 제6군단이 산맥의 세 번째 통로를 경유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향한다. 여기까지가 대전략의 첫 번째 작전. 작전 목표는 검은 산맥 일대를 월맹군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다. 한꺼번에 세 경로로 진군하는 까닭은 적의 전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기 위해서이다. 제1차 월맹군에서 제3차 월맹군에 이르기까지, 마왕군은 전력을 집중하여 단숨에 검은 산맥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부 실패했다. 검은 산맥은 지나치게 넓었다. 월맹군이 통로를 돌파하는 시간보다 인간의 군대가 집결하는 게 더 빨랐다. 월맹군이 험악한 산악 지대를 거쳐야 하는 반면에 인간군은 평야 지대로움직이니 당연했다. 그렇게 인간의 변경백 영주들이 통로 한쪽을 수비하는 동안, 각 국가의 군대가 동맹군을 조직하여 월맹군에 맞섰다……. 월맹군 수뇌부는 수차례의 패배를 통해 깨달았다. 인간의 군대를 분산시켜야 한다. 그리고 마왕군의 군대를 분산시켜야 한다. 인간이 집결하면 집결할수록 강해지는 반면, 마왕군은 모이면 모일수록 내분을 일으킨다……파벌을 중심으로 군단들이 결성된 이유도 여기 있었다. 같은 파벌끼리 군단을 이루면 아무래도 내분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차 월맹군에서 제7차 월맹군까지 내분은 어김없이 일어났지만. 자, 그러면 우리 제6군단에 집중해보자. 우리는 검은 산맥의 세 번째 통로를 돌파해야 했다. 세 번째 통로는 가장 굳건한 수비를 자랑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경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그마치 네 개의 산성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관문, 녹색의 산성. 두 번째 관문, 청색의 산성. 세 번째 관문, 황색의 산성. 마지막 네 번째 관문, 적색의 산성. 정말이지, 빌어먹게 난이도 높은 난관이었다. 뒤로 갈수록 산성이 굳건해짐은 물론이었다. 어찌어찌 황색의 산성까지 전부 돌파해봤자 네 번째 적색의 산성만큼은 난공불락이었다. 앞선 세 개의 산성을 돌파하는 시간이 문제였다. 그때쯤엔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대한 변경백들이 벌써 군대 소집을 끝마친 채, 적색의 산성에서 기다린다……이쪽은 산성들을 거쳐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마왕군. 저쪽은 방금 소집되어 상태가 최고조인 인간군. 승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전력을 적색의 산성에 도달할 때까지 보존해야만 했다. 우리 선봉대의 역할은 첫 번째 관문인 녹색의 산성을 뚫어버릴 것, 거기에 더해 청색의 산성에 피해를 강요할 것. 그 정도였다. 나머지는 본대에 맡기라는 얘기였다. 제파르가 말했다. “녹색의 산성에는 약 오백 명의 군대가 머무르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이천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설령 적군이 산성을 끼고 방어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열 마리의 오우거가 있다.” “우리의 필승이로군요!” 서열 제58위의 아미가 소리쳤다. 전투에 앞서 승패를 간단하게 논하는 모습이 좋지 않았으나, 나 역시 녹색의 산성이 쉽게 돌파되리라는 것에 동의했다. 오우거 열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녹색의 산성이 버틸 리가 없었다. 제파르 또한 생각이 똑같은 것일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다. 허나 명심하도록. 단순히 승리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정도로 압승하느냐가 중요하다. 적색의 산성에서 결전을 벌이기 전까지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 허투르게 병력을 낭비하는 일은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마왕들이 알겠노라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벌써 승리한 분위기였다. “저에게 오우거 부대를 맡겨주십쇼!” “아니, 부디 저에게! 제파르 대장. 단 한 명의 오우거도 손상시키지 않고 성문을 부숴보겠습니다!” 이런, 군공 다투기에 들어갔다……대체로 너희는 혈기가 조금 지나치다. 제파르는 방금 전력을 보존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경고했다. 어떻게 하면 제파르의 요구를 만족시킬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라고. “흠. 달리 좋은 생각을 가진 자는 없는가?” 거봐라. 제파르도 저렇게 묻지 않는가. 상관의 마음을 미리 읽어서 대답해주는 부하가 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전면으로 뚫어버립니다. 무려 열 마리의 오우거입니다! 인간들 따위 오줌이라도 지리면서 도망치겠지요.” 나머지 신출내기 마왕 두 명이 그렇다고 동조했다. 아이구야, 도무지 대답이 안 되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만약 적군이 평범한 인간 군대라면 아미의 말이 옳았다. 징집병 따위 오우거의 머리털만 보여도 줄행랑칠 게 뻔했다. 그러나 검은 산맥에서 주둔하는 인간 병사들은 징집병이 아니었다. 상비군, 그것도 절반 정도가 지원병으로 꾸려져 있었다. 인류를 지키겠노라고 일부러 최전선까지 달려온 정예병. 오우거가 많다고 해서 도망칠 정도면 아예 검은 산맥 주둔군에 지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출내기 마왕들은 적군이 어떤 녀석들로 이루어졌는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또 다른 제안을 가진 이는 없는가?” 제파르가 한숨 쉬듯 물었다. 기분 탓인지 그가 내쪽으로 시선을 보내온 것처럼 느꼈다. 내가 공손하게 말했다. “각하.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군대를 둘로 나눕니다.” “군대를 둘로 나눈다?” 제파르가 인상을 썼다. 그러자마자 아미가 비아냥거렸다. “하! 전술도 모르는군요. 아군을 모아서 일점타격한다, 이것이 전술의 기본입니다. 단탈리안 님은 아무래도 적을 지나치게 우습게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속으로 웃었다. 적을 우습게 여기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이제는 아미가 귀엽게 보일 지경이었다. 네 녀석의 재롱을 보는 것도 제법 즐겁지만 지금은 조금 입을 다물어주라고. 여기서 인간군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는 <던전 어택>에서 다름아니라 저 산성들에서 마왕군에 맞서싸웠다. 당연히 인간군의 약점에도 빠삭했다. 겉보기에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네 개의 산성에도 꽤나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거기를 파고들면 된다. 이건 <던전 어택>에서 실제로 성공한 수법이다. 00078 인류의 번견 =========================================================================                        아미의 선동에 마왕들이 술렁거렸다. 군을 나누다니 비상식적이라는둥,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둥 말하고 있었다. 제파르가 어수선한 기류를 제지했다. “잠깐만. 단탈리안, 자네의 의견을 계속 말해보게.” “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선봉군을 두 부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다시 두 부대를 둘로 쪼개어, 총합 네 부대를 구성합니다.” 아미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노골적으로 주변에 어필했다. 다른 사람들도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두 부대도 모자라서 네 부대로 나눈다고요?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나는 단탈리안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말했네.” 제파르가 경고하자 아미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가 조용하게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한테 사과할 생각 따위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보게.” “우리는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총 네 개 보유하게 됩니다. 이중 한 개의 오백인대가 산성을 무시해버리고 진군합니다.” 제파르는 의아스러운 얼굴이었다. 감정을 읽지 않아도 속내가 훤했다. 산성을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본대가 최대한 손실을 입지 않고 무사히 관문들을 통과하도록 미리 길을 닦아놓는 것. 산성을 무시하고 넘어가봤자 작전 목표에 위배되었다. 내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다스렸다. “각하. 소인이 지도를 통해 설명해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네.” 침착하자.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몇 번이고 라우라와 상의했다. 장래에 대륙 최고의 전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보장했고, 게임 플레이어로서 내가 작전이 성공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실패할 리 없었다. “먼저 합스부르크 방면으로 통하는 이 네 개의 산성 말입니다만.” 내가 막대기로 산성들을 가리켰다. “녹색-청색-황색-적색까지, 각 산성 간에 공조가 제법 훌륭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중에서 녹색의 산성은 대략 오백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청색의 산성 또한 오백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황색과 적색에는 각기 천 명이 주둔하고 있지요.”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산성의 병력쯤은 알고 있었다. 도합 삼천 명의 적군. 이천 명으로 이루어진 아군에 비해 1.5배 많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인간군은 여러 개의 산성을 만들어두고 병력을 분산시켰습니다. 만일 방어가 목적이라면 하나의 산성에 병력을 모조리 집중시키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오백이 지키는 산성과 이천오백이 지키는 산성, 어느 쪽이 난공불락의 요새일지는 명확합니다.” 네 개의 관문은 부대 배치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간군 오백 명이 지키는 관문을 뚫는 데엔 몬스터 정예부대 천 명이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만일 인간군이 방어를 목적으로 했다면 차라리 녹색의 산성에 주둔하는 오백 명과 청색의 산성에 주둔하는 오백 명을 하나로 합치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데도 인간군은 비효율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어째서인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인가. 아니면……. 제파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는 산성들의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바로 그렇습니다.” 단번에 내 의도를 파악해주었다. 과연 바르바토스가 선봉대장으로 임명할 법했다. “산성들은 월맹군을 막기 위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월맹군을 고작 산성 하나로 방어해내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네 개의 관문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인간군이 대규모 병력을 조직할 때까지 마왕군의 발목을 잡아두는 것입니다.” 산성들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지연이다. 적당하게 마왕군의 진격 속도를 늦춘다, 그것만으로도 산성은 제 임무를 다한다. 녹색의 산성을 고작 오백 명의 수비군이 지킨다할지라도, 공성전을 위해서는 마왕군이 잠시나마 진군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하루가 소모되겠지. 그 하루 동안 마법 수정구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보고가 날아간다. 제국의 변경백들은 즉시 군대를 조직한다. “산성들은 희생양에 불과합니다. 녹색, 청색, 황색은 단적으로 말해서 적색의 산성을 위한 들러리입니다. 제국 변경백들이 적색의 산성에 원군을 보낼 때까지 우리 발목을 잡아두는 희생양.” 마왕군이 제아무리 쾌속으로 진경해본들 녹색의 산성까지 오는 데 하루, 녹색의 산성을 공략하고 마무리하는 데 하루, 황색의 산성까지 하루, 황색 산성을 공략하는 데 하루, 적색 산성까지 가는 데 하루……여기까지만 해도 최소 닷새가 걸린다. 닷새면 이미 변경백들의 강력한 기사단이 적색 산성에 도착해 있다. 어쩌면 징집병들까지 동원되어 있을지 모른다. “각하, 저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성들에 주둔하는 군인은 자기가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왕군에 맞서 싸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시당초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전원이 최후의 순간까지 분전하겠지요. 오직 우리의 진군을 하루 늦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이들이 지키는 요새에 공성전을 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이해했다.” 제파르가 말했다. “그러나 적이 용맹하다는 것이 싸움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각하. 저는 싸움을 피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성전을 피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제파르, 당신은 아무래도 전략가가 아니라 전술가인 모양이다. 전술이란 전략이 정해진 상태에서 승패를 정하는 전투. 반면에 전략적 겨루기에서 중요한 점은 상대방의 전략 자체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선봉대를 넷으로 나누고, 먼저 한 부대를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의 중간에 위치시킵니다. 그 부대로 하여금 진지를 구축하게 하십시오. 산성의 수비군은 어리둥절해할 겁니다. 그때 전방에서는 또 다른 한 부대가 공격하게 합니다.” “양동작전인가.” 후방에서 오백, 전방에서 오백, 도합 천 명의 부대가 산성을 앞뒤로 공략한다. 녹색의 산성쯤은 쉽게 공략된다. “물론 전면을 공격하는 것보다야 효과적이다. 그렇지만 의문이군. 나머지 오백인대 두 개는 왜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런, 제파르 대장. 양동작전은 책략의 목적이 아니라고. 수단이다. “산성들에게 우리의 전력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양동작전에 의해 녹색 산성이 함락되면 나머지 산성에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에 침공해온 마왕군의 전력은 천 명이다. 그 천 명을 최대한 보존시키기 위해 양동작전이라는 수단을 썼다, 라고…….” 마왕들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는가. 내가 말했다. “겨우 천 명의 부대입니다. 나머지 산성들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터. 제국 변경백들은 움직이지 않겠지요.” “……!” 제파르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런가, 양동작전은 미끼인가!” “예. 초록 산성 다음에는 청색 산성입니다.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합니다. 오백인대로 하여금 산성을 무시한 채 산지로 진군시키고, 청색 산성과 황색 산성 중간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합니다. 서두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틀 정도 걸쳐서 여유롭게 움직이면 딱 좋겠군요.” 내가 얕게 미소를 지었다. “적들은 우리가 느긋하게 움직일수록 우리의 목적을 혼동할 것입니다. 이번 마왕군의 목적은 산성을 끝까지 돌파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황색 산성 정도까지만 만족하고 세력을 굳히는 게 목적일 수 있다. 그렇게 조바심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적들은 우리의 계책을 망치와 모루 전법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슬쩍 아미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인상이 험악했다. 이야기를 전혀 따라오고 있지 못했다. 기다려라. 너희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줄 테니. 오늘 나는 관대하거든. “인간군 수뇌부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마왕군의 전력은 약 천 명. 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최대한 전력을 보존시키면서 산성을 함락하는 것.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산성에 병력이 밀집되어 난공불락이 형성되는 것.” 고로 인간들은 우리 마왕군이 무엇보다도 산성들 사이의 연계를 끊고자 노력한다고 파악하리라. “천 명의 공격부대는 공성전에서 기껏해야 천 명의 수비부대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왕군은 수비부대가 천 명 이상으로 불어나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혹여나 산성이 다른 산성으로 원군을 보낼까봐 오백인대로 하여금 통로를 막았다……인간들에게는 산성과 산성 사이에 위치한 오백인대가 모루로, 산성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오백인대가 망치로 비출 겁니다.” 이제 인간들 입장에서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가. 내가 히죽 웃었다. 이런, 안 좋은 버릇이 또 튀어나왔다. 나는 무언가가 내 생각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예감하면 꼭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래서야 마왕의 위엄 따위는 찾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웃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각하. 천 명에 불과한 마왕군이 무리해서 산성들을 함락하려고 부대를 나누었습니다. 인간군이 어떻게 나오리라 예상하십니까.” “우리를 각개격파하려고 산성에서 나오겠군……!” 제파르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명백히 흥분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색 산성에는 오백 명이 주둔한다. 후방에서 몬스터 오백, 전방에서 몬스터 오백이 공격해오면 버틸 수 없다. 그러면――인간군은 오히려 자기들 쪽에서 양동작전을 펼치자고 결심할 게 틀림없다. 황색 산성과 적색 산성의 주둔군, 도합 이천 명이 후방의 몬스터 오백인대를 덮친다. 전력 차이가 무려 네 배이다. 몬스터 부대는 빠른 시간 안에 전멸하겠지. 그 시간 동안에 청색 산맥이 전방의 몬스터 부대를 방어한다. 정리하자. 마왕군의 양동작전에 인간군은 각개격파로 대응할 것이다. 먼저 청색 산성이 전방의 몬스터 부대를 방어한다. 황색과 적색의 주둔군이 후방의 몬스터 부대를 급습, 전멸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청색 산성에 합류하여 압도적인 병력 차로 나머지 몬스터 부대를 밀어붙인다. 인간군은 필승의 전략이라고 자신할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만일. “만일 우리 선봉대의 전병력이 정말로 천 명에 불과하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숨겨둔 나머지 천 명까지 동원하여 청색 산성을 공략합니다. 인간들의 예상과 다르게 총 천오백의 몬스터 부대가 전방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 “각하. 이게 이번 작전의 백미입니다.” 제파르는 눈동자에 흥분감이 넘실거렸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웃어주었으면 했다. 꽤나 재미있는 기만작전이 아니고 뭐냐는 말이다. 적들은 이번 전투를 년 단위로 으레 일어나는 소규모 침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이것은 월맹군의 전초전이다. 월맹군 선봉대라면 저렇게 느긋하게 행동할 리 없다고, 장기전으로 나아갈 리 없다고 적군이 생각하게끔 만든다. 적들은 우리가 전략적으로 장기전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우리는 단기전을 꾀하고, 적들에게 단기전을 강요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를 끝내지 않으면 청색 산성이 양동작전에 넘어간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어 그것을 이용한다. 적들은 우리가 양동작전을 펼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양동작전은 미끼에 불과하며, 산성 수비군이 이쪽의 병력을 착각하게 한다. 결국 제국 변경백들은 '겨우 천 명이라면 우리까지 동원될 필요는 없다'라고 오판하리라. 저들은 모든 산성의 병력을 동원하면 우리를 손쉽게 헤치울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적들은 우리를 각개격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저들은 청색 산성이 우리의 전방 부대를 붙들어둔다고, 또 적색과 황색이 우리의 후방 부대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로 우리의 후방 부대가 적들의 적색과 황색을 붙들어두고, 또 우리의 전방 부대가 청색 산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적은 우리를 진창으로 밀어넣는다 자신하겠으나 사실인즉 그들 스스로 진창에 발을 늘여놓는 것입니다. 산성 본연의 전략적 임무를 방폐한 순간, 우리 선봉대는 주둔군이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산성들을 피 한 방울 들이지 않고 함락하겠지요. 그리고, 프흡.” “…….” “시, 실례했습니다. 기껏해야 황색 산성까지 점령하리라 기대하셨을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막상 본대를 이끌고 와보시니, 짜잔! 적색 산성까지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뭐라 반응하실까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와서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소리내어 웃었다. 막사에 내 웃음소리가 울렸다. 예전보다는 덜했지만 나는 조울증이 있었다. 아무래도 조증이 빵 터져버린 것 같았다. “흐하하하!” 제파르 대장도 이번에는 웃음기를 참지 못했는지 나와 함께 따라 웃었다. 역시나, 겉으로는 엄격하고 근엄하기만 한 양반이지만 이 정도 유머감각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유머감각이 없으면서 바르바토스 같은 녀석의 아래에서 심복을 자처할 리 없었다. 그 녀석은 정신머리가 꽤나 돌았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신출내기 마왕들이 어쩐지 약간 하얘진 얼굴로 나와 제파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들 아연질색한 얼굴이었다. 뭐냐? 방금 전까지 호언장담하던 기세는 어디로 도망친 거냐, 아미? 이건 제법 진미한 농담이라고. 부디 마음껏 웃어달라. 너처럼 정색하고 있으면 모처럼 농담을 꺼낸 당사자가 무안해지겠지. 바르바토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배꼽을 부여잡고 폭소했을 거다. 아미한테 그 정도 개그 센스를 기대하는 건 글러먹었나. 진심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좋다. 단탈리안이 세운 계획대로 간다. 전군, 우선 녹색의 산성을 깨부수라!” 그날 제파르 대장은 전격적으로 내 작전안을 발탁했다. 작전명 <개미지옥>. 대장이 붙인 이름이었다. 적절한 작전명이 아니고 뭔가. 오백인대의 알박기는 그대로 개미지옥이 되어 산성에 주둔하는 이천오백 명의 인간군을 빨아들일 것이다. 산성 수비군들이 스스로를 인류의 번견이라 부른다던가. 개를 자칭하다니 좋은 취미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너희 번견들은 단 한번의 울부짖음도 주인에게 알리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는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든다…….   00079 인류의 번견 =========================================================================                        “변경백 각하.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초로의 남성이 서류작업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이었다. 검은 산맥 일대를 관장하는 두 명의 변경백(邊境伯)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록의 산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호오.” 폰 로젠베르크가 외알 안경을 벗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적의 병력은?” “보고에 따르면 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라고 합니다. 세 명의 마왕이 연합했으며, 그중 적어도 서열 30위 이내의 마왕은 없습니다. 다만 오우거가 다섯 마리 포함되었습니다.” “오우거 다섯 마리.” 변경백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위협적이군. 하지만 산성들이 자체적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산성의 지휘관들은 뭐라고 말했는가?” “우리가 막을 테니 변경백 각하는 안심하시오.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군공을 세울 기회이다. 그들의 공을 가로채서야 산성 지휘관들과 사이가 나빠질 뿐. 그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변경백 군대는 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 그리 전하라. 붉은 산돼지 기사단장에게도 기사단을 모으라고 전해두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집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에서 떠났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잠시간 천 명의 몬스터 부대가 나머지 세 개의 산성, 청색-황색-적색을 위협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 마리로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자기가 할 일은 이번 전투가 끝나고, 산성의 수비군이 입었을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다. 변경백이 다시 서류작업에 몰두했다. 검은 산맥은 안전했다. 문제는 외적이 아니라 내적이었다. 제도(帝都)의 정쟁이 최근 들어 더더욱 가열되고 있다고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과연 승리하실지 어떨지, 변경백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책략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오백인대가 녹색 산성을 우회하여, 산성의 후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를 구축하자마자 또 다른 오백인대로 산성 전방을 공격. 앞뒤로 관문을 공략했다. 손아귀로 토마토를 찌부러트리는 느낌이라 할까. 녹색 산성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보통 공성전에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세 배 이상 병력이 많아야 한다지만 그건 인간 군대끼리 싸울 경우였다. 고블린이라면 모를까 오크는 인간보다 기본적으로 체격이 월등했다. 잘하면 똑같은 숫자의 공격군으로 공성전이 가능했다. 오우거 다섯 마리를 포함하여 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 마왕들이 직접 지휘하여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게다가 앞뒤로 공격해들어왔다. 아무리 수비군이 정예였다 해도 오백의 인간 군대가 지키는 성벽 따위 큰 피해 없이 점령했다. “전쟁이란 의외로 허무하군요.” “소수의 모험대를 격파하는 것과 다르니 말이다.” 내 감상 섞인 토로에 라우라가 성실히 대답했다. “군주는 최전선이 아니라 중진(中陣)에서 지휘한다. 전쟁의 참상을 지휘관이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와 라우라가 나란히 군마를 타고 진중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작전안에 개입했으나 전술적인 차원에서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다. 공개적으로 월맹군에 참가한 나의 군대는 골렘 서른두 마리에 요정 열 마리, 총 마흔두 마리에 불과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열외되었다. 내가 쓰게 웃었다. “전쟁의 참상입니까. 저희가 지금 지켜보는 것도 충분히 끔찍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몬스터, 그러니까 아군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군대운용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병참이다. 어떻게 아군에게 식량을 포함하여 배급품을 지급할 것이냐, 이에 따라 전쟁의 흐름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와 달리 제대로 된 병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이 시대, 군대의 병참전략은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조달한다'였다. 인간의 경우 현지조달은 구입이나 약탈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몬스터의 경우 어떠할까. ─ 크르릅, 크츠읍.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크가 고깃덩어리를 물어뜯었다. 그는 먹는 데 방해되는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마치 생선가시 발라내듯 세심하게 벗겨냈다. 그리고 한입 물었다. 군침 튀기는 소리가 성대히도 들렸다. 고깃덩어리는 인간의 다리 한쪽이었다. 마왕군이 취하는 현지조달이란 폭력적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생겨난 시체를 식량으로 제공한다. 인간의 시체뿐만 아니라 고블린이나 오크의 시체까지 식량으로 취급되었다. 지금도 진지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수십 자락이나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부 시체를 훈제구이로 만드는 연기였다……인간들 입장에서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이겠지. 세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땅바닥에 구역질을 쏟아내고 있었다. 인간의 고약한 내장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콧구멍을 타고 올라와 두개골에 진득하게 눌러붙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전달되는 감정, 즉 몬스터들이 느끼는 감정은 식욕이었다. 제기랄! 감각은 저주스러우리 만치 끔찍한 냄새를 맡고 있는데 마음속으로는 식욕이 피어났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상황이 아니고 뭔가. 자신 있게 단언하겠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낸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인육에 식욕을 느끼는 것 따위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주군의 말이 옳다. 저것 역시 전쟁의 참상이다. 그러나 군주가 짊어져야 할 멍에는 따로 있다고 소녀는 생각한다.” “군주한테만 내려지는 멍에…….”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병사라면 참혹한 전쟁터를 보고 울부짖어도 좋다. 민초라면 세상의 부조리에 한탄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좋겠지. 그러나 군주는 다르다.”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나 또한 멈추었다.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은 마상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라우라의 시선이 아무런 망설임을 담지 않고 곧장 이쪽으로 향했다. “지휘관은 참상의 원인을 다른 누군가한테 떠맡길 수 없다. 세상한테 떠맡길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자, 지휘관이 전쟁을 책임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주군. 이곳에 널린 시체들을 보라. 인간, 고블린, 오크, 종족을 가릴 것 없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그들에게 전쟁터를 강요한 자는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내가 그들에게 전쟁터를 선사했다. 제파르, 아미, 그외에 마왕들도 전투의 주범이긴 했다. 그러나 공범이 많아진다 해서 내가 장본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특히 이번 작전은 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만일 전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지금 죽은 누군가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라우라가 강철과 같은 눈길로 말했다. “괴로울 것이다. 힘들 것이다. 괴롭고 힘들어해도 좋다. 그러나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일만큼은, 군주에게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제가.” 내가 입을 열고 놀랐다.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슬퍼하는 것인가? 라우라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지금에도 나는 슬픔을 느꼈다. 우습게도 그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지금 수백 마리의 오크가 풍겨대는 식욕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 감정이 아니었다. 이 지옥의 도가니와 같은 감정들 속에서 나는 무엇에 안주해야 하는가? 오로지 슬픔, 이것만이 나의 감정이었다. 나는 나로 성립하고 있었다……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자아였다. 언제까지 타인들이 쏟아내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은 조울증을 겪는 데 그쳤다. 그러나 언젠가는 라피스가 알려준 마왕증후군, 인격의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라우라 말이 맞다. 군주는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 당사자가, 당사자의 인격이 부서지면 어찌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제가 지나치게 괴로우면 어떻게 될까요? 도저히 멍에를 짊어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면 말입니다. 아니, 제가 더 이상 단탈리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다면…….” “소녀가 있다.” 라우라가 말했다. “소녀는 결코 주군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 잊었는가? 나는 주군한테 내 모든 것을 바쳤다. 그것은 나의 성공과 실패가 온전히 주군의 성공과 실패로 이어진다는 맹약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주군의 성공과 실패는 똑같이 나의 성공이요 실패이다.” 일말의 미혹도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멍하게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천 명을 살해했다. 나는 그런 주군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천 명을 살해한 책임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주군이 겪을 괴로움을 나 또한 괴로워하겠다. 주군이 느낄 고통을 나 또한 고통스러워하겠다.” “…….” “소녀가 노예일 적 주인이었던 자를 기억하는가?” 당연하다. 잭 올란드. 어리석기에 아름다운 노예상인이었다.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다. “그때 주군은 노예상인을 죽일 수 있었고, 당연히 죽여야 했다. 상인을 살려두면 장차 주군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내 질문에 주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에게 삶이란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기억한다. 어찌 기억하지 않겠는가. “주군은 어째서인지 노예상인을 살리고 싶었다, 그렇기에 훗날 어떤 위협이 되어 돌아오든 상관없이 살리고자 했다. 주군, 만약 노예상인이 나중에 복수하기 위해 나타났다면 후회했을 텐가?” “……아니요.” 라우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했기에 노예상인을 살리려 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오든, 주군은 후회없이 받아들였겠지. 소녀는 그 삶의 방식에 매혹되어 주군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다……그것을 주군은 보여주었다.”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소녀는 주군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너무하는군요, 라우라.” 내가 다소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식으로라도 장난 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라우라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책임져야 할 것은 비단 이번 전투뿐만이 아닙니다. 제8차 월맹군은 제가 추동한 것입니다. 선봉대, 제6군단, 월맹군 전체, 이들이 일으킬 수많은 전쟁……따지고보면 결국 제가 일으켰습니다. 라우라는 지금 그것들을 전부 멍에로 짊어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십 만의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수십 만의 생명을 짊어지라는 얘기입니까?” “그렇다.” 그녀가 주저없이 말했다. 아니, 심지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보통 한 사람은 하나의 목숨을 짊어지기에도 버겁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보고 수십만의 목숨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주군은 성군이 아니다. 마왕이지 않은가. 마왕이라면 응당 그런 방식으로 삶을 책임지는 것이겠지. 주군, 마왕의 길을 걸어라.” “마왕의 길입니까……지옥이군요.”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라우라가 옳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란 그런 것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막사에서 구역질에 시달리는 나를 왜 라우라가 끌고나왔는지, 왜 지금처럼 말을 타고 진중을 둘러보게 했는지 깨달았다. 도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체가 널린 들판, 그것이 구워지면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수십 개의 검은 연기들. 그것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누구보다 네가 두 눈으로 직접 받아들여야만 한다――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 광경을 감당할 것임을. 나에게 다가오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라우라는 맹세했다. 나는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군주를 지옥에 떨어트리는 신하라니. 저는 아무래도 터무니없이 불충한 신하를 가져버린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저와 같이 지옥에 떨어져주겠습니까, 라우라?” “물론이다.” 즉답이었다. 나는 그것이 가벼운 대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소녀에게 이 살육의 현장은 끔찍하게 비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라우라는 대답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보다 한참 어른스러웠다. 우리는 다시 말을 몰았다. 시체를 태우는 연기와 고깃덩어리를 뜯어먹는 몬스터 사이로 나아갔다. 월맹군 원정이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살육이 일어나리라. 지금의 광경조차 짊어지지 못해서야 앞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되도록 천천히 말을 몰았다. 라우라가 보조를 맞추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눈앞의 광경을 망막과 뇌에 새겨넣기 위해서. 불이 타닥이는 소리와 고기가 씹히는 소리가 한동안 나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00080 인류의 번견 =========================================================================                        * * * 정치는 질색이다! 귀족은 더더욱 질색이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절실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금 상관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었다. 쿠르츠의 상관은 귀족 군인이었다. 금발이 아름답다는 것 빼고는 장점 따위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봐봐. 자고로 병법에서 요지는 먼저 이겨놓고 상대방과 싸우는 거잖아.” 애송이 귀족이 떠들었다. ‘이 녀석은 단 하루라도 굶어본 적이 있을까.’ 언젠가 쿠르츠는 부대원과 함께 적군의 포위에 둘러싸여 배고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군인이란 그런 것이다. 병법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그것을 눈앞의 도련님은 머리로라도 이해하고 있을까……쿠르츠는 마음속으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 놈들은 필사적으로 산성을 함락하려 발버둥치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 제국군에게는.” 꽝, 하고 귀족 상관이 탁자를 쳤다. “아직 세 개의 산성이 있지! 천 년 전부터 안배해놓은 관문이야. 말하자면 우리 제국은 이미 천 년 전부터 이기고 있었다는 얘기야. 제3황녀 전하께서도 이를 가리켜서 실로 병법의 극치라고 극찬하셨어.” “그렇군요. 소인, 각하와 전하의 혜안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쿠르츠가 말했다. 여기서 대놓고 불평해봤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쿠르츠는 그러나 지금 이 삐뚫어진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각하의 혜안에 감복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투가 승리 요인이 천 년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눈앞의 상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저 말은 아부를 위장한 비아냥이다. “무얼. 나 또한 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야. 이 정도도 못해서야 부끄러워.” 상관이 웃었다. 역시나, 하고 쿠르츠가 비웃음을 감추었다. 애송이 각하께서는 자기가 비아냥거렸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아, 질 높은 부대를 지휘한다. 그것이 귀족 상관이 걸어온 인생의 전부겠지. 평민인 쿠르츠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쿠르츠는 질투심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부러웠다. 인간들 중에는 두개골에 뇌를 들고다니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족속이 있다. 그 사실이 놀라웠다. 쿠르츠가 생각했다. 만약 사람이 마음대로 두개골에다 뇌수를 비웠다가 채워넣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잠깐 뇌수를 빼놓을 순간이라고. 애송이 귀족 상관의 병법론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되었다. “급보입니다, 각하!” 그때 막사로 전령이 뛰어왔다. 쿠르츠는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고급 군인으로 지내온 경력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에 위엄을 불어넣었다. 덧붙여서, 즐거운 대화 도중에 방해받았다는 느낌이 풍기도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관에게 잘 보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소란 떨지 마라. 여긴 사령관 각하의 막사이다. 무슨 일인가?” “예, 예. 청색 산성에서 봉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봉화는 삼 거! 3단계입니다!” 시작했는가! 쿠르츠가 가슴이 떨려왔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하여 여러 왕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봉화 체계를 선택했다. 제1단계. 열 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제2단계. 백 명에서 오백 명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제3단계. 오백 명에서 천 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혹은 진입. 제4단계. 천 명 이상의 외적이 봉화대를 공격. 전령은 봉화가 세 개 피어올랐다고 보고했다. 오백 명 가량의 적군이 시야에 포착되었다는 얘기였다. 쿠르츠를 비롯해서 각 산성의 지휘관-대리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번 마왕군의 총 병력은 약 천 명에 이르렀다. 고작 천 명으로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 두 난관을 점령하기 위하여 양동작전까지 동원했다……적군의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확실히 녹색 산성은 힘없이 함락되었다. ‘마왕군 녀석들 중에도 제법 머리를 쓰는 작자가 있군. 그러나 이제부터는 네 녀석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쿠르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마왕군은 산성들 간의 연계를 우습게 여긴 듯했다. 기본적으로 녹색-청색-황색-적색은 각각 따로 움직인다. 산성들의 목적은 마왕군을 격퇴하는 것이기보다 마왕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군 속도를 지연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보다 적에게 여러 방해물을 강요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적군의 목적이 내륙 침공이 아니라는 걸 알아낸 이상, 굳이 산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지.’ 이번 마왕군은 겨우 천 명에 불과했다. 일단 병력 면에서 내륙 침공을 노린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 진군 속도가 무척 느렸다. 적군은 녹색 산성을 점령하고도 자그마치 사흘이나 머뭇거렸다. 만약 마왕군이 내륙 침공을 목적으로 했다면 무엇보다 속전속결을 노렸을 것이다. 제국의 변경백들이 원군을 보내오기 전에 산성을 함락한다, 그것이 지난 천 년 동안 마왕들이 취해온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쿠르츠는 고심 끝에 결론 지었다. 적군의 목적은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쿠르츠가 판단했다. 적군이 청색 산성을 점령하기 전에 전멸시켜버린다. 때마침 적군은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천 명의 부대를 두 개로 나누었다. 각개격파의 기회였다. 청색 산성이 적군의 부대 하나를 막고 있는 사이, 황색-적색 수비군이 연합하여 단숨에 나머지 부대 하나를 때려부순다. “각하. 아무래도 출격할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으음. 전군에 출격 명령을.” “예. 우리 적색 산성 수비군은 이대로 쾌속 진군하겠습니다.” 귀족 상관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였지만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자기가 열심히 설명하면 전략의 요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부관.” 귀족 상관이 어딘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산성에서 적을 맞이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굳이 산성 바깥으로 나가서 몬스터 부대와 격돌할 필요는 없잖아. 난 아무래도 불안해.” “……각하.” 또 그 소리인가. 쿠르츠가 진절머리를 쳤다. 이미 작전이 정해졌는데도 저 애송이는 자꾸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 같기는! 쿠르츠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몬스터 부대가 두렵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대로 적군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으음.” “적군은 산성을 점령하고 그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을 것입니다. 검은 산맥의 산성이 점령되어버립니다. 우리 제국군은 다시 그것을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면 안 됩니다.” 즉, 이번에는 제국군이 마왕군을 향하여 공성전을 벌이게 된다……통상 공성전에선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세 배의 병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물며 이때 수비군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의 병력을 쏟아부을 필요가 생긴다.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상상하기 힘들다. 이십 년 전에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 그때는 녹색 산성이 점령된 채로 남아버렸다. 결국 산성 수비군은 변경백들과 연합하여 산성을 공략했다. 몬스터 퇴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때는 변경백의 손을 빌린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괜찮지 않아? 본래 변경백들의 임무는 우리를 지원하는 거야. 아군이 아군을 돕는 거다. 어디에 마뜩치 않은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어.” 쿠르츠는 결국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귀족 상관은 지나치게 멍청했다. 아군이 아군을 돕는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군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부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돈이 든다. 하물며 공성전을 준비하는 데 얼마만한 재원과 식량이 필요할지. 산성 수비군에는 따로 영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 가난하다. 결국 재원을 준비하는 쪽은 변경백들이 되어버린다. 변경백들만 돈을 쓰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산성 수비군은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투에서 산성 수비군은 주도권을 변경백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 군지휘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이다. 그것을 저 애송이는 인지하고 있을까……쿠르츠가 속앓이를 하며 말했다. “산성을 잃어버리면 우리 수비군의 실책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산성을 탈환하는 것은 변경백의 공훈이 됩니다. 각하, 저는 두렵습니다. 제국군 상부에서 산성 수비군의 지휘관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귀족 상관이 탄성을 질렀다. 쿠르츠가 속으로 비웃었다. 이제야 깨달았는가. “실례하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산성 수비군의 지휘관들은 승진이 막혀버립니다. 실제로, 이십 년 전에 녹색 산성을 잃어버린 지휘관들은 결국 은퇴할 때까지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네. 회전에서 결판을 낼 수밖에 없겠어. 변경백들에게 공훈을 넘겨서는 안 돼……녀석들은 황자파니까.” 귀족 상관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쿠르츠는 상관이 설득되었다고 직감했다. 그는 더욱 더 상관이 한심스러웠다. 전략적인 이점을 들어서 설득할 때는 아득바득 반항하더니, 정치적인 결점을 꺼내서 설득하자 간단하게 납득했다. 병법이니 뭐니 떠들어도 결국 눈앞의 애송이는 출세에 눈이 먼 전형적 귀족이었다. 쿠르츠는 이런 인물들에 익숙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최고급 엘리트 군인을 꼭 이곳 검은 산맥의 산성들에 파견시켰다. 산성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꼴로 몬스터와 격전을 치룬다. 자연스럽게 지휘관도 군공을 세우게 된다. 군공을 세우면 승진한다……. 검은 산맥의 산성들은 결국 엘리트 귀족 군인들이 출세하는 데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쿠르츠가 자문했다. 십 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산성 지휘관에는 가장 유망한 인재가 배속되었다. 인류의 최전선을 지킨다. 그런 사명감에 걸맞는 자가 발탁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황자와 황녀가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고, 어떻게든 자기 파벌을 군부에 꽂아넣기 위해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여전히 강력하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쯧쯧.’ 쿠르츠는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군인이 지나치게 정치에 밝아서야 좋지 않았다. 군인은 황제폐하와 제국신민을 지키고, 마왕이라는 악을 전멸시킨다. 그것이 임무의 전부였다. 쿠르츠는 자랑스러운 제국군으로서 자신에게 내려진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애송이를 구슬러야겠네.’ 쿠르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군이 천 명인데 반하여 아군은 이천오백에 이릅니다. 게다가 적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 제국군이 패배할 요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으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냥, 이상하게 불안해서.” 정말인가? 쿠르츠가 속으로 비웃었다. 목소리가 떨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무래도 눈앞의 애송이는 전략적인 요소에서 안심을 찾을 만큼 군인정신이 뛰어나지 않은 듯했다. 이럴 때는 전략 외에 다른 요소를 미끼로 꺼내들어야 했다. “적에게 회전을 걸어서 각개격파하는 것입니다. 무려 천 명의 몬스터 부대를 섬멸하게 됩니다. 각하의 명성은 제국 전체를 요동칠 것입니다.” “부관의 말이 옳아.” 귀족 상관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명성을 떨친다는 것이 젊은 애송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라고, 쿠르츠가 확신했다. 귀족 상관은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 나이의 군인은 무엇보다 명성과 명예에 배가 고프기 마련이었다. 쿠르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애송이들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다니……으이구.’ 무능한 귀족은 하여간 골치 아팠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귀족 상관이 자기 주제를 알아서 쿠르츠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실질적으로 적색-황색 수비군을 이끄는 사람은 쿠르츠였다. 쿠르츠가 이름 모를 적군의 참모에게 동정심을 보냈다. 양동작전은 꽤나 훌륭했다. 하지만 산성 수비군이 오로지 산성을 수비하기만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선입견에 사로잡힌 것이 네 녀석의 패착이다, 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제국군 이천오백의 정예병에 얌전히 찌부러져라, 마왕 녀석들.’ 쿠르츠가 수비군 전체에 진군 명령을 하달했다. * * * “각하. 제국군이 움직였다는 보고입니다.” 내가 제파르에게 말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걸려 들었군. 단탈리안, 봉화를 올려라.” “예. 후방의 부대에 진격 명령을 내리도록 하죠.” 라우라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라우라가 군례를 표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청색 산성을 바라보았다. 한참 공성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간군이 우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사실은 달랐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적극적인 공세는 후방의 부대가 합류하고 나서 이루어진다. 총합 천오백의 몬스터 부대로 단숨에 밀어붙인다. 적군은 이쪽에 오우거가 없다고 안심하고 있겠지. 우리에게는 오우거가 다섯 마리밖에 없고, 그놈들을 전부 전방 부대로 보냈다고 생각할 거다. 불쌍하게도. 우리에겐 오우거가 무려 열 마리나 있다. 나머지 다섯 마리가 후방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 녹색 산성과 마찬가지로 청색 산성도 손쉽게 함락될 것이다. 이번 작전의 승패는 후방에 숨겨둔 부대를 들키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나는 들키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아니, 적으로 하여금 정찰부대를 파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인간군 입장에서는 청색 산성에 최대한 많은 숫자의 병력을 배치하여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정찰병력도 모조리 수비병력으로 돌렸다. 그들이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겠지만……불쌍하군. 적들은 우리의 의도를 완전히 착각했다. “자네도 지독한 사내이다.” “무슨 뜻인지, 소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크흐흐.” 제파르가 약하게 웃었다. 거의 언제나 무표정인 양반이었으나, 저번 회의 이후로 자주 웃게 되었다. 내 앞에서 유독 자주 웃는 듯했다. 호감도도 20이 넘었다. 심리상태를 읽어본 결과, 제파르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자네를 맡으라고 할 때만 해도 약간 귀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생 전사이다. 모략가에게 전술을 가르치는 과외수업은 다소 귀찮았다……하지만 모략가라 생각했더니 이런 인물이었는가. 단순히 모략가가 아니라 모장(謀將)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지, 자네는.” “과찬입니다.” 제파르가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 아니다. 군단장께서 자네를 총애하시는 이유를 알겠다. 인간 놈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자네가 역사서에 어떤 전투들을 기록해나갈지, 본인은 실로 궁금하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멋쩍게 웃기만 했다. 제파르도 더 이상 잡담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군령을 내렸다. 그가 지휘한 덕분에 현재 공성전에서는 큰 피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견실한 지휘였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나저나 적군의 수뇌부에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있다는 정보를 캐내고 놀랐다. 포로로 잡힌 인간을 심문해서 알아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던전 어택> 플레이어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 남자는 노련한 숙장으로서 훗날 용사 일행에 우호적인 군부 인사로 활동한다. 평민에서 시작하여 장군까지 출세한 군인이다. 같은 평민 출신인 용사에게 호감을 품는 것이다. 십 년 후에 활약할 인사. 지금은 적색 산성에서 지휘관-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소속된 선봉대와 맞붙게 되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저 자는 미래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급갈등을 약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장군, 그런 이미지가 이용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그를 이끌어들임으로써 평민 세력의 지지도를 한층 높인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둘까보냐. 엘리자베트 황녀는 극히 위험하다. 그녀는 <던전 어택>에서 최강의 우군이었다. 마왕들을 죽인 것은 용사이지만, 용사를 뒤에서 도와준 것은 황녀이다. 황녀가 없었다면 용사는 진즉에 정쟁에 휘말려 사형당했을 것이다. 마왕 입장에서 황녀는 최악의 적군이다……. 조금이라도 황녀의 세력을 깎아야 한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죽이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문득 그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하필 적색 산성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니 지독하게도 운이 없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쿠르츠,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 미래에 명장으로 이름 날리게 될 군인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죽는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오히려 게임 플레이어 시절 나는 쿠르츠를 좋아했다. 멋진 캐릭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용사도 뭣도 아니다. 지옥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마왕이다. 라우라가 내 결심을 도와주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장군.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희생당해라. 게임에서 자주 말했지. 본인은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라고. 마왕군과 맞서다가 전사한다. 군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다. 당신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곧 마련해주겠다.   00081 인류의 번견 =========================================================================                        밤이 되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공성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몬스터들을 마냥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 크르우우우, 그르르르. ─ 그라라라. 오크와 고블린이 박자를 맞추어 군가를 불렀다. 일찍이 E급 모험대를 궤멸할 때 동원했던 고블린 부락들의 노래와는 또 달랐다. 여기서는 뿔피리와 같은 악기가 사용되었다. 어두운 밤하늘로 긴 뿔피리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몬스터들이 쿠웅, 쿠웅, 쿠웅, 천천히 발을 굴렀다. 아군의 군중에서 횃불을 키지 않았다. 사방이 깜깜했다. 성벽 위의 인간들이 보기에는 저 멀리 어두운 너머로부터 몬스터들의 노래가 스멀스멀 기어오는 것이었다. 사기가 저하되는 것을 노린다, 적군의 지휘관은 그렇게 판단하겠지. “각하, 발람이 이끄는 후견부대가 도착했습니다.” “인간군은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제파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진중하게 느껴지니 세월의 연륜이란 얕볼 게 못 되었다. “우리가 헛짓거리를 한다고 여기고 있겠지요.” 청색 산성을 지키는 인간군은 정예병이다. 일반 잡졸도 몬스터를 토벌한 경력이 있다. 밤새도록 군가를 불러봤자 인간들은 코웃음칠 것이다. 자장가로 삼아서 새근새근 졸지도 모른다. 우리쪽의 피로가 가중되고 있다고 기뻐하면서. 그만한 담력이 저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여유를 갖고 있었다. 여유를 가질 만한 희망도 품었다. 당장 내일이 되면 후방의 몬스터 부대를 격파하고 도착할 적색-황색의 원군. 그것 때문에 인간군은 시종일관 드높은 사기를 유지했다. 언제까지 희망이 이어질까. 희망을 잃고도 인간은 죽음에 맞서싸울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았다. 승리뿐만이 아니라 생존조차. 잠시 후. 후견부대를 이끄는 마왕이 다가왔다. 발람. 서열 제51위. 신출내기 마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잘해주었다. 우리 본군과 하루 이상의 거리를 두고 착실하게 쫓아왔다. 적군은 치열한 공성전을 대비하여 정찰부대까지 모조리 산성에 집합했다. 그게 실책이었다. 적은 우리의 후견부대를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월맹군의 선봉임을 미리 알았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정찰부대를 유지했겠지.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여느 때처럼 소규모의 침공이 재현되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제7차 월맹군이 조직된 지 어언 이백 년이 지났다. 이백 년의 세월이 인간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발람이 군례를 올렸다. “명을 받들고자 도착했습니다. 사령관, 군대는 이미 도열하고 각하의 공격명령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수고했다. 군가를 멈추도록.” 제파르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나와 발람도 따라서 오른팔을 들었다. 순식간에 진중이 조용해졌다. 우리의 사념이 몬스터들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몬스터들은 언제 노래를 부르고 발을 굴렀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고요해진 탓일까. 성벽 위에서 인간군의 경비병들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아마도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들 또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고요가 단순한 침묵이 아니며 지극히 불온하다는 사실을. “아르테미스여. 그대의 찬란한 밤이 우리의 안식처일지니.” 제파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래와 같은 기도였다. 그가 선창하고 발람과 내가 뒤따라서 읊조렸다. “아르테미스여. 그대의 찬란한 밤이 우리의 안식처일지니.” 목소리 자체는 미약했다. 우리가 인간이었다면 개전을 알리는 신호 치고 지나치게 허술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마왕이고 우리의 부하는 몬스터였다. 우리가 속삭이는 그대로 몬스터들이 상념을 느꼈다. “고난에 마주쳐서는 우정을, 적 앞에서는 평등을,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유가 내려질지언저. 전쟁터에서 우리 맹세하나니. 우정의 맹세를. 평등의 맹세를. 죽음의 맹세를.” 제파르와 우리의 목소리가 땅바닥에 어스름처럼 깔린다. “아르테미스여. 그대 앞에서 우리 붉은 피로 맹세하나니. 인간의 영원한 적이 될 것임을. 마인의 명예로운 미래를 위해 개처럼 충성할 것임을. 언제는 승리하고 언제는 패배할지라도, 오늘 이 순간이 이름할 언제란 패배의 시간이 아니게 하소서.” 제파르가 우리에게 유리잔을 나눠주었다. 거기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는 손수 자기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전투의 총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술을 따른 다음 자작(自酌)하는 것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다. 그러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들었다. “정복을 위하여.” “정복을 위하여, 제파르를 위하여!” “바르바토스를 위하여!” 단숨에 술을 비우고 유리잔을 땅에 내리던졌다. 쨍그랑, 하고 세 개의 유리잔이 깨졌다. 제파르가 여태껏 조곤조곤 속삭인 것과 다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밤, 검은 산맥은 우리의 것이 된다! 전군, 공격!” “공격하라!” “전군, 공격하라――!” 몬스터들이 포효했다. 오우거, 오크, 고블린, 골렘이 울부짖었다. 밤공기를 찢어발기고 구름마저 헤집을 기세로. 신중한 진군 따위 필요없었다. 단 한 방에 기습적으로 성문을 깨부술 속셈이었다. 천오백 마리의 몬스터가 한 몸체를 이루어 진격했다. 오직, 자기 손발을 다루듯 몬스터를 부리는 마왕만이 내보일 수 있는 용병술이었다. 발람이 말했다. “사령관! 부디 오우거 부대를 선두로!” “각하한다. 인간 놈들이 기습에 대비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먼저 오크 방패병을 진군시킨다.” 제파르는 전세를 정확하게 읽었다. 멀리 성벽에서 꽹가리 소리가 들리더니,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횃불들 사이로 궁수들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궁수의 수효는 눈짐작하건대 삼백이 훌쩍 뛰어넘었다. 압도적이었다! 사실상 산성 수비군 전원이 활을 쏠 줄 아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궁수는 기사만큼은 아니어도 최정예 병종으로 취급되었다. 궁수를 육성하는 데 끔찍하게 많은 시간이 투자되기 때문이었다. 검은 산맥의 산성을 지키는 인간들이 평소부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오크 방패병들이 성벽에 가까워지자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들이 일제히 공중 높이 화살을 쏘았다. “밀집대형으로!” “방패병 전원, 밀집대형!” 제파르가 소리치고 발람이 따라 소리쳤다. 앞서 가던 오크 방패병들이 로마 군단병처럼 빽빽하게 귀갑진(testudo)을 형성했다. 방패들 위로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오크들은 인간용보다 두 배 정도 거대한 방패를 쓸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우산들을 화살이 뚫기란 쉽지 않았다. 수백 궁수의 일제사격에도 아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이 마왕군이 강력한 이유였다. 인간군은 일일이 깃발이나 신호를 동원해가며 군대를 통솔해야 한다. 마왕군은 다르다. 부하 몬스터와 정신적으로 이어진 덕분에 명령이 중간단계를 생략하여 곧바로 전달된다. 마왕과 마왕이 서로 다투지 않는 이상에야 이론적으로 완벽한 통솔이 가능했다. 평범한 몬스터 떼거리와 마왕이 이끄는 몬스터 부대는 차원이 달랐다. 발람이 흥분해서 말했다. “다시 일제사격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 틈에 방패병뿐만 아니라 전군을 진군시키지요.” “아니다. 일부러 사격을 한 것이다.” 제파르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정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는데도 사격했다.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술책이다.” “각하. 지금은 밤입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인은 밤에도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만, 인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저놈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야습을 대비하여 밤눈이 밝은 병사를 배치해두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사정거리 바깥으로 화살을 쏘았다. 계략이다. 전군, 귀갑진을 해제하고 최대한 넓게 퍼져라.” 발람은 불만 어린 기색이었으나 군말없이 제파르의 지휘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파르의 판단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투석기가 출현한 것이었다. 한꺼번에 열 개의 바위가 공중을 가르고 몬스터 부대에 격돌했다. 바위들은 보통 투석기가 날리는 것에 비해 월등하게 거대했다. 바위에 오크들이 속절없이 뭉개졌다. 거대한 방패도 과연 바위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제파르가 신음했다. “사정거리를 포기하는 대신 위력을 높혔는가. 제법이로군.” “……각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밀집대형을 이루었다면 피해가 더 커졌을 겁니다.” “지금이 기회이다. 전군, 앞으로 나아가면서 귀갑진을 형성하라.” 제파르는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명령했다. 발람이 말한 그대로였다. 나 역시 진심으로 감탄했다. 작전대로 전투가 흘러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무리 작전을 잘 짜봤자 십 분이 흐르면 기존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겨버린다. 이번에는 인간군이 준비한 투석기가 그것이었다. 활보다도 사정거리가 짧은 공성병기를 준비했으리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먼저 투석기를 활용하고 그 다음에 궁수를 운용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전술이었다. 제파르는 순간적으로 적의 실책이 기만임을 간파했다. 왜 사정거리 바깥으로 화살을 쏘았는가. 목적은 하나였다. 다시 일제사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어서 돌격하라고, 우리를 유혹한 것이었다. 적은 우리가 밀집한 채로 다가오기를 원했다……무엇 때문에? 제파르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적이 원하는 것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괜찮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적이 밀집대형을 원한다면 이쪽에선 부대를 산개시킨다. 그 결과, 공성병기의 집중적인 사격에도 몬스터 부대는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놀라웠다. 이것이 월맹군에 세 번이나 참가한 마왕의 실력인가.……만약 내가 지휘관이었으면 방금 제파르처럼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의문스러웠다. 못했겠지. 먼저 적군이 실수한 게 아니라 기만술을 펼친 거라고 알아차릴지 의문이었고, 설령 알아차리더라도 적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제파르와 나는 장수로서 격이 달랐다……. “인간 놈들은 다시 화살비를 쏘아댈 것이다. 소나기가 멎은 직후, 오우거를 전진시킨다.” 내가 고심하는 와중에도 전장의 시간은 가열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적군, 다시 일제사격을 가해옵니다.” “지금이다! 오우거 전원을 돌격시킨다!” 아까 전처럼 화살이 오크 방패병들에게 쏟아졌다. 그 빗줄기가 채 멎기도 전에 거대한 무언가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다섯 마리의 오우거였다. 신장이 4미터에 달하는 오우거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바윗덩어리였다. ─ 크르하아아아아아아! 오우거들이 아군을 짓밟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내달렸다. 한 고블린이 오우거의 발에 짓눌려서 압살당했다. 오우거들은 도리어 속도를 더했다. 성벽까지는 오백 미터의 거리가 있었다. 오우거 다섯 마리가 포환처럼 오백 미터를 한 순간에 질주했다. 녀석들은 일렬을 이루었는데, 한 마리씩 옆구리에 송곳 모양의 어마무지한 나무를 끼고 있었다. 나무의 앞쪽은 강철로 마감되었다. 충차에 쓰이는 나무공이였다. 인간들은 오우거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겨우 다섯 마리의 오우거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다섯 마리가 전부 청색 산성을 우회하여 넘어갔다고 파악했기에. 우리는 애당초 열 마리의 오우거를 갖고 있었다. 너희는 완벽하게 속아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광경이 속아넘어간 것에 대한 대가이다! ─ 쿠우웅! 가장 맨 처음으로 달려간 오우거가 나무공이를 성문에 쑤셔박았다. 성문이 진동했다. 오우거는 곧바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두 번째 오우거가 나무공이로 성문을 때렸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마침내 다섯 번째 나무공이가 온몸이 근육질로 이루어진 오우거의 완력, 거기에 오백 미터를 달려오는 동안 붙은 가속도에 의해 내리꽂혔다. ─ 쿠우우웅! 틈새가 열렸다. 성문이 파괴되었다! 인간들로서는 오우거의 등장에 경악하자마자 난관이 돌파당한 것이었다. 천재지변이 아닐까 의심하겠지. 그러나 결국 너희는 기만당한 것에 불과했다! 제파르 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포효하라! 적을 살육하라!”   00082 인류의 번견 =========================================================================                        * * * 쿠르츠가 야습 보고를 받은 것이 새벽 두 시였다. “지, 지휘관-대리. 큰일입니다.” “그래. 네 뛰어오는 꼴딱서니를 보니까 어지간히 큰일인 모양이다.” 쿠르츠가 귀족 상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영 삐딱하게 말했다. 이것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본래 모습이었다. 귀족 상관을 대접할 때는 성실하게 마음에 없는 말을 토해냈으나 자기 부대원만 있는 군중에선 동네의 편한 아저씨처럼 돌아다녔다. 산성 수비군의 특성 때문이었다. 십 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는 사이다보니 단순히 군인으로서만 생활할 수는 없었다. 부사관은 억울했다. 확실히 전령에게 보고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꼴딱서니가 가관인 걸로 치자면 자기보다 쿠르츠가 더하지 않은가. 쿠르츠는 책상에 두 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입으로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인간이란 게 어디까지 불량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가 어디 마음껏 시험해보겠다는 식이었다. 다만 잔뜩 인상 쓰고 서류를 보는 것이 아마 군무를 처리하는 듯했다. 늦은 시각에도 촛불을 켜놓고 말이다. 부사관은 상사가 성실한 것인지 불성실한 것인지 아리까리해하면서 보고했다. “적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청색 산성에서 거화가 피어올랐습니다.” “야습인가!” 쿠르츠가 벌떡 일어섰다. 언제 한량처럼 지냈냐는 듯 대번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풀어헤친 군복을 여미었고 사슬갑옷을 챙겨입었다. 부지런히 무장을 하면서 쿠르츠는 적군이 야습해온 까닭을 헤아리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 전부 깨워. 황색 산성 놈들도.” “알겠습니다.” “막사를 거둘 필요가 없다고 말해둬라. 이건 시간싸움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수비군이 신속하게 반응했다. 밤중에 출격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오 분이 안 되어 도열했다. 단순히 정예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혹시 야습을 할지도 모른다고 쿠르츠가 미리 부사관들에게 말해둔 덕분이었다. 가장 늦게 준비를 끝마치고 온 사람은 다름아니라 귀족 상관이었다. “슐라이어마허 부관! 오밤 중에 이게 무슨 난리야.” “야습입니다. 각하, 마왕군 놈들은 우리가 합류하기 전에 전광석화로 청색 산성을 함락할 속셈입니다.” “뭐, 뭐라고! 큰일이잖아!” 귀족 상관이 와락 눈을 떴다. 눈곱이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얼른 지적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쿠르츠가 상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도열해 있는 장병들도 똑똑이 들으라는 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성을 나와서 각개격파할 생각이라는 것을 적이 알아차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하기 전에 청색 산성을 공격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적은 조바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홰가 타오르는 군중에서 쿠르츠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말에는 조리가 있었고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내용에 타인을 설득하는 데 충분한 논리가 뼈대로 심어졌다. 장병들은 예기를 불태우며 자신이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 왜 이 전투에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새겨들었다. “우리의 작전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적들의 두 부대가 지금쯤 청색 산성을 압박하고 있겠지요. 그중 한 부대가 바로 우리 앞에, 저 어둠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놈들의 후장을 후려갈겨 줍니다!” 병사들이 웃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앞으로 맞서게 될 몬스터 부대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약 오백 마리, 그중에 오우거가 다섯 마리나 포함되었다. 그런데도 장졸들이 웃었다. 한 마리만 나타나도 소규모 영지에서는 전쟁규모의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몬스터를 앞에 두고서도 그들은 배짱을 부릴 줄 알았다. 쿠르츠는 새삼스럽게 제국군이 자랑스러웠다. ‘정치는 언제든지 개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제국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킨다. 그렇다면 언제고 나라는 안에서 바뀔 수 있다. 우리의 분전이 제국의 찬란한 미래로,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외쳤다. “오늘밤, 우리는 막사를 거두지 않고 출격합니다. 이번 전투의 핵심은 속전속결입니다. 청색 산성이 적의 양동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적을 압살합니다. 빠른 진군을 위하여 식량도 챙기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몬스터를 전멸시키고 청색 산성에서 보급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귀족 상관도 쿠르츠의 의지를 느꼈다. “……슐라이어마허 부관.” “이 전투에 두 번은 없습니다! 성공하면 적을 전멸시키고, 실패하면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습니다. 궁수는 정확하게 몬스터의 눈을 찌를 것이고, 창수는 단 한 번의 전열이탈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각하!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귀족 상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깨어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사라지고 귀족적인 위엄이 얼굴에 자리잡았다. 과연,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망각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는가. 쿠르츠가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애송이는 머저리였으나 괜찮은 머저리였다. 귀족 상관이 울부짖었다. “진군하라!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병사들이 포효했다.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지크 합스부르크――!” 황제 폐하 만세, 합스부르크 만세! 전군이 하나된 의지로 소리쳤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산성 수비군 전통의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십 년 동안 훈련한 그대로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어둠은 행군에 전혀 지장을 주지 못했다. 이곳은 검은 산맥, 그들이 주인인 땅이요 앞마당이었다.――패배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으리! “슐라이어마허 부관. 혹시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청색 산성이 함락되면…….” 쿠르츠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귀족 상관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 말고 없었다. 부사관들은 정찰병을 파견하는 것과 부대전열을 맞추는 일로 분주했다. 쿠르츠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보 녀석! 사령관이 마음 약한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제아무리 허수아비 지휘관이라 해도 사령관은 사령관. 군 지휘부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병사들 사이로 퍼지면 안 되었다. 설령 패배를 눈앞에 두고서라도 지휘부는 굳건해야 했다. 다행히 귀족 상관은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아주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다, 하고 쿠르츠가 생각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정찰병을 파견하여 적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전방의 몬스터 부대가 영채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양동작전을 위하여 녀석들이 움직인 것은 길어봤자 한 시간 전입니다. 한 시간이면 녀석들은 아직 청색 산성에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쿠르츠는 철두철미했다. 마왕군의 참모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이쪽이 각개격파를 노리고 진출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그쪽에서는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는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전격적으로 후퇴하든가, 아니면 이쪽이 각개격파를 위해 움직이기 전에 청색 산성을 기습한다.……적은 후퇴하지 않았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쿠르츠가 조소했다. 전쟁이란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상대편은 먼저 패배했는데도 전술적인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려 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오우거가 다섯 마리나 있다고 해서 자만했는가. 어찌되었든 어리석은 작자였다. 물론 그도 인정했다. 전쟁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며, 전략적 패배를 전술적 승리로 뒤엎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러나 도박과 똑같다. 평범한 도박이 아니라 병사의 목숨을 배팅칩으로 삼아 벌이는, 지독히 이기적인 도박. 마왕군이란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몬스터를 부하가 아니라 한낱 내기거리로 취급한다. 이기면 좋고 지면 그만이다. 그렇게 여기는 것 아닐련지. 그 따위 놈들에게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패배할 리 없다고 쿠르츠는 확신했다. 강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군대로서 격이 달랐다. “아군을 믿으십시오, 각하. 청색 산성 수비군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예입니다. 적어도 여섯 시간은 적의 파상공세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여섯 시간. 여섯 시간인가.” 귀족 상관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었다. 쿠르츠는 만족했다. 귀족 상관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대규모 전투이다. 불안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천오백의 장병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위엄을 보여야 할 순간에는 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애송이에게 전술적인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쿠르츠를 비롯해서 아무도 없었다. “전방에 몬스터 부대 발견!” 정찰병이 보고했다. 진군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약간 안 된 시점이었다. “몬스터 부대가 청색 산성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쿠르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산성은 버텨주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한 사실이 어긋나기도 하는 게 전쟁터였다. 이로써 불안정한 요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육안으로 확인했는가.” “시야가 어둡기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함성과 병장기 소리가 확연히 들렸습니다.” 좋다, 하고 쿠르츠가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귀족 상관은 형식적으로 쿠르츠의 지휘를 승인할 뿐이었다. 지금 제국군 이천오백 명을 통솔하는 남자는 잡졸 출신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였다. 각 산성의 수뇌부가 모여들어 상의했다. “기습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몬스터의 밤눈이 우리보다 좋습니다. 우리가 당도하기 전에 알아차리겠지요.” “몬스터를 이끄는 마왕에게 혼란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고…….” “거화를 해서 우리가 도착했음을 산성에 알리겠습니다.” 적색이든 황색이든 사령관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피와 땀으로 검은 산맥을 사수해온 지휘관-대리 및 부사관들이 얘기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쿠르츠가 말했다. “적은 오백입니다. 우리의 양익이 적을 압박하는 동안, 중앙이 적의 전열을 일도양단합니다. 두 조각으로 내는 것입니다. 그때 양익이 단숨에 기세를 올려서 한 조각씩 섬멸하십시오.” “중앙의 돌파력이 요체입니다. 누가 중앙을 맡습니까?” “소장이 기대대를 이끌고 중앙을 돌파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정교한 지휘보다 제장과 장병의 분전이 중요합니다. 적을 전멸한 후에 그대로 청색 산성에 합류합니다.” 작전은 그뿐이었다. 어차피 청색 산성이 모루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강력한 망치가 되어 후갈기면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틀림없었다. “공격하라!” 지휘관들이 말을 몰고 최선두에 섰다. 야간전투에서는 지휘관이 전선에 위치할 필요가 있었다. 낮보다 병력을 통솔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장수가 앞장서니 병사들이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뒤따랐다. 어느새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고 있었다. 기습의 효과가 다소 사라지겠지만 전투력은 상승할 터였다. “각하! 소장이 지휘를 맡겠습니다! 각하께서는 후방으로 물러나주십시오!” “나 역시 제국의 군인이야! 부관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수는 없지! 이래봬도 제4급의 무사이다! 내 한몸은 지킬 수 있어!” 귀족 상관이 소리치면서 거세게 말을 몰았다. 쿠르츠가 큰소리로 웃었다. 괜찮은 머저리를 뛰어넘어 용감한 머저리이기까지 했는가! 나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인맥이 얽혀 산성에 부임해온 상관이었으나 적어도 겁쟁이는 아니라는 점에서 쿠르츠가 합격을 주었다. 순식간에 몬스터 부대와 거리가 좁혀졌다. 밤인데도 시야로 적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우리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오크 방패병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전장의 흥분이 삽시간 쿠르츠를 휘감았다. 눈이 불타올랐다. 어리석다! 그걸로 제국군의 돌격을 막아내리라 보았는가! 주인의 분노를 느꼈는지 말이 더욱 힘차게 앞발을 내딛었다. 쿠르츠가 창을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찢어발겨라아아아!” 병사들이 늑대떼처럼 포효했다. 이백의 기마병이 오크 방패병과 격돌했다. 잘 훈련된 방패병도 그러나 기마돌격을 막기엔 무리수였다. 오크 한 마리를 방패째로 짓밟아버리자 쿠르츠는 예의 야성이 폭발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쟁의 야성이었다. 입에서 연신 짐승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쿠르츠는 창에 오러를 실었다. 그리고 기마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이루려는 제2선의 오크 방패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오러에 감싸인 강철창이 방패를 두 쪽으로 가르면서 오크의 가슴을 양단했다. 그렇게 쓰러지는 몬스터의 시체를 군마가 밟고 지나갔다. 찰나에 방패병의 전열이 뚫렸다. 그 틈으로 나머지 기마병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졌다. 쿠르츠는 알았다. 자기가 홀로 적의 전열을 돌파해버린 것이었다. “크하하하하!” 지휘관으로서의 쿠르츠가 사라지고 제국군 제3급 무사로서의 쿠르츠가 전장에 나타났다. 강철창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의 팔다리가 밤하늘로 치솟았다. 고블린은 상대할 필요조차 없었다. 군마가 알아서 고블린의 가슴을 으깨버렸다. 오우거, 오우거는 어디 있는가! 쿠르츠가 본능적으로 적수를 찾아나섰다. 어둠에 시야가 제한된 탓인지 오우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앙이 아니라 양익이 오우거를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문제없었다. 병력면에서 이쪽이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각 천일백 명으로 이루어진 양익의 군대가 두 조각 나버린 몬스터 부대에 짐승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쿠르츠는 전투에 이겼음을 직감했다. 마왕군은 속전속결로 산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오히려 오백인대가 속절없이 격파당하게 생겼다. 이제 마왕군에게 남은 병력은 청색 산성 너머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 오백 마리의 몬스터, 그것도 오우거와 같은 고위 몬스터가 없는 부대였다. 끝났다! 제국군 이천오백을 막아낼 방법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츠가 주변의 기마병과 함께 몬스터 소탕에 나서려는 때였다. 귀족 상관이 그에게 다가와서 소리쳤다. 그가 든 검에도 피가 흥건했다. 쿠르츠는 처음으로 상관에게 호감이 느껴졌다. 전쟁터에서 함께 뒹구는 것만큼 전우애를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크흐흐, 사령관 각하도 제법이십니다!” “부관! 아무래도 이상해! 이놈들은 정말로 산성을 공략하고 있었던 거냐!?” 무슨 소리인가. 쿠르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생겨난 호감이 도로 꺼졌다. 그가 오크를 한 마리 더 해치우면서 소리쳤다. “성벽에 사다리도 놓여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정작 성벽 근처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다!” “우리가 후방에 접근한 것을 알고 성벽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제기랄!” 쿠르츠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는 그러나 멍청이라고 소리지르지 않은 것만으로 용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지금 그는 전쟁터의 흥분에 마비되어 있었다. 상관에 대해 깍뜻하게 예의를 취할 정신머리는 진즉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봐봐! 성벽 위에도 아군이 없다! 우리가 온 것을 알면 적어도 함성으로 맞이하는 게 정상이잖아!” “아군이?” 쿠르츠가 성벽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위로 드문드문 밝혀진 횃불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아니, 횃불 자체가 지나치게 적었다. 야밤에 벌어지는 공성전이었다. 최대한 횃불을 많이 밝혀놓아야 했다……쿠르츠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애송이 상관이 말한 그대로였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함성으로써 우리에게 호응해주어야 하는데……어째서인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가. 멀리 사방에서 몬스터의 함성이 퍼졌다.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고작 몇 백 마리의 몬스터가 내지를 수 있는 함성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천 마리! 천 마리가 한꺼번에 포효하고 있었다! “부관!” 귀족 상관이 새하얘진 얼굴로 쿠르츠를 바라보았다. 쿠르츠는 등골이 쩌릿쩌릿하게 울렸다.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쿠르츠의 본능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이곳은 곧 지옥으로 변모한다! “각하!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졌습니다! 당장 후퇴해야만 합니다!” 그때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산성에서 성문이 열렸다. 쿠르츠가 고개를 홱 돌아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일단의 병력이 쏟아져 오고 있음을 보았다. 인간이 아니었다. 몬스터였다.   00083 인류의 번견 =========================================================================                        “어째서냐! 왜 청색 산성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거냐!” 쿠르츠가 경악했다. 성문에서 빠져나오는 몬스터 중에는 오우거가 있었다. 어둠 때문에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어도 틀림없이 오우거였다. 4미터가 넘어가는 몬스터 따위, 쿠르츠는 오우거 외에 보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해야 한다. 설령 매복에 당했을지라도 '매복인가, 그 정도는 예상했다'라는 투로 혼란에 빠진 부대를 지휘할 필요가 있다. 지휘부가 허둥지둥대서야 장병들이 안심하고 싸울 리 없다. 그런데도 쿠르츠는 경악했다. 경악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청색 산성이 두세 시간조차 버티지 못했다는 것인가. 전방에는 불과 오백 마리의 몬스터밖에 없었을 터다. 높이가 15m가 간단하게 넘어가는 성벽이다. 그 성벽이 두세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고?……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크윽! 사령관 각하, 소장을 따르십시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쿠르츠가 이빨을 질끈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생각 따위 없다! 그는 당장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과 기마대가 적진에 고립되어 있었다. “일단 빠져나갑니다! 기마대! 전원 반전한다! 사령부까지 길을 뚫는 거다!” 기마대는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쿠르츠의 명령이 즉시 하달되었다. 각 산성에 백 명밖에 없는 기마대는 각각 제7급 무사 이상으로 이루어진 명실상부 최고급 부대였다. 그들이 당황하지 않고 소리쳤다. “황색 산성 기마대 지휘관 라켄베르크입니다! 제가 전열을 뚫겠습니다!” “적색 산성 기마대 지휘관 루브르크, 후위를 맡습니다!” 명령은 재빨랐으며 실행은 거침없었다. 기마대가 반전하여 뒤쪽으로 달려나갔다. 전열이 무너졌지만 살아남은 오크와 고블린이 기마대를 막아섰다. 이쪽의 창칼을 몬스터가 막아내진 못했지만,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잃어버리는 시간만큼 사방에서 착실히 포위진을 형성해왔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오, 오우거가 따라잡았습니다!” 오우거! 쿠르츠가 말을 몰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바위처럼 무언가 거대한 것이 기마대를 뒤에서부터 잡아먹고 있었다. 도끼였다. 사람보다 큰 도끼가 밤공기를 찢어발기면서 기마병을 군마째로 양단했다. 격류와 같은 기세였다. 도끼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병사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후위가 먹혔습니다!” “루브르크, 전사!” 철퇴전의 악몽이었다. 오크 방패병의 전열을 뚫을 때 기마대는 스무 명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오우거 한 마리가 들러붙자 순식간에 부대의 일부분이 궤멸당했다. 쿠르츠가 분노에 떨었다. 한 명의 기마병을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던가. 정면에서 상대할 수만 있다면 오우거 한 마리쯤이야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빨리 적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양익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지금, 적진에서 고립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돌파하라!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다!” 삼 분. 겨우 삼 분이었다. 기마대는 조금 전에 돌파한 곳을 다시금 돌파했다. 그러나 악몽과 같은 삼 분이었다. 오우거가 사냥개처럼 후위를 물어버렸고, 그것을 내팽개치기 위하여 서른 명에 이르는 기마병이 자진하여 멈춰섰다. 덕분에 기마대가 적의 전열에서 빠져나와 아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귀족 상관이 말했다. “부관. 성공했네! 우리가 빠져나왔어!” “성공이 아닙니다. 희생양을 바친 것뿐입니다!” 쿠르츠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삼 분 동안 기마대의 사분지일이 전멸했다. 이때쯤에 쿠르츠는 대강 전황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마왕군은 두 개의 오백인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아마 이천 마리 정도의 병력을 가졌다. 자신은 철저히 기만당한 것이었다. 기마대가 인간군의 중진에 복귀했다. 쿠르츠가 예상한 대로 사령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예상보다 두 배나 많은 적군이 튀어나왔다. 당황해하지 않는 편이 이상했다. 그나마 쿠르츠가 돌아오자 사령부는 한결 안정되었다. “상황을 보고해주십시오.” 쿠르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말에서 내리고 군의에 참여했다. 쉴 틈이 없었다. 사령부의 참모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적이 우리의 삼면을 포위했습니다.” “양익이 서로 고립된 채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당장 구원해야 합니다.” “파악된 오우거 숫자만 해도 일곱 마리에 이릅니다. 가증스러운 어둠 너머로 몇 마리가 더 있을지 모릅니다.” 쿠르츠가 이를 갈았다. “한 마리 더 추가하십시오. 지금 막 그 새끼한테 쫓겨온 참이니.” “오우거 여덟 마리…….”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무형의 압박이 사령부를 짓눌렀다. 현재도 사방에서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 인간과 몬스터가 내지르는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군은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기습적인 공격으로부터 언제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사령부는 이미 절망적인 결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쿠르츠가 말했다. “철퇴합시다.” “슐라이어마허 지휘관-대리.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야밤에 후퇴라니,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 죽을 셈입니까? 소수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지휘관들이 신음했다. 아군을 버리고 도망가라, 쿠르츠는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지휘관은 하나같이 군인정신과 전우애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철퇴가 유일한 해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당초 철퇴할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소관이 후미를 맡겠습니다.” “슈, 슐라이어마허 지휘관-대리!” 쿠르츠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작전은 소관이 입안했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차라리 끝까지 맞서싸웁시다.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도…….” “산성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쿠르츠가 버럭 소리쳤다. “여기서 전멸당하면 적색 산성까지 적에게 내주게 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변경백의 군대가 원군으로 올 때까지 적색 산성에서 농성합니다. 최대한 병력을 많이 살려보내야만 합니다. 소관이 후미를 맡는 동안 후퇴하십시오!” 지휘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 어쩌면 철퇴가 불가능할지도 몰라.” 그때 귀족 상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지휘관 한 명이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각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자신은 없지만……지금 상황에서 짐작해보면 마왕군은 총합 이천 마리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어. 그런데 녹색 산성을 공략할 때도, 청색 산성을 공략할 때도 우리에게 천 마리만 내보였지. 우리를 속여서 이끌어들일 생각이었다는 얘기야.” 금발의 귀족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우리에게 각개격파를 노리도록 만들었어. 적의 계략대로 우리가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둔 나머지 병력으로 급습했다. 그, 경들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처음부터 우리가 놈들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그런 말씀입니까, 각하!” “안타깝지만 그래.” 그가 양손으로 눈가를 꾸욱 문질렀다. 눈에 피로가 몰려 있었다. 야간작전은 인간에게 심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몬스터는 그 정도가 덜했다. 녀석들은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전에서도, 그러한 인간종과 몬스터의 차이가 점점 더 부각될 게 분명했다. 귀족 청년은 머릿속에서 인간군의 패배를 단정짓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까지 버티느냐는 것이었다. 앞으로 삼십 분, 잘하면 한 시간인가……그후에는 일방적인 소탕이 이루어지리라. 세 시간 안에 이천의 제국군 정예병은 문자 그대로 몰살되겠지. 그렇게 계산하면서 청년이 말했다. “으음……지금 소수의 병력이 철퇴한다고 해도 늦었어. 기껏해야 삼백 명 정도가 빠져나가겠지. 하지만 보병으로는 오우거의 추격을 당해내지 못해. 삼백 명은 전열도 유지하지 못하고 오우거들의 도끼에 희생될 거야. 내,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각하의 의견이 지당합니다.” “설령 삼백 명이 적색 산성에 돌아간다 해도 농성전을 벌이기엔 무리야. 몬스터들에게 간단히 함락당할 거야. 우리는 패배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색 산성은 지키지 못해. 검은 산맥은 월맹군에 돌파당했어…….” 한 지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워, 월맹군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으음. 적군의 의도를 생각해봐. 겨우 약 이천의 몬스터로 적색 산성까지 함락하려 들고 있어. 여기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 글쎄, 아주 잘해서 몬스터를 천 마리 정도까지 줄일 수 있겠지……?” 지휘관 전원이 숨을 죽이고 청년의 말을 들었다. “그, 그럼 공평하게 계산하여 천오백의 몬스터가 남았다고 해보자고. 적색 산성이 함락되면 당연히 변경백들이 대군을 일으키겠지. 그 대군을 천오백의 몬스터가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 금발의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고. 그런데도 적들은 적색 산성을 먹어치우려 하고 있어. 왜 그럴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변경백들의 군대를 막을 자신이 있는 거야.” “――후속부대! 후속부대가 있습니다!” 쿠르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질렀다. 청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적들에겐 대규모의 후속부대가 있는 거야. 이천의 몬스터를 선봉대로 삼을 만한 본군이라면 규모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 어려워……월맹군, 혹은 월맹군에 버금가는 대군이야. 인류는 다시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겠지…….” 쿠르츠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적은 장기결전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단기결전을, 단 한 순간의 섬멸전을 바랐다. 그렇기에 산성 수비군을 한 곳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자신은 이천의 병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소관은…….” 억누른 목소리였다. 쿠르츠는 도저히 자기 입밖으로 나온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귀족 상관이 말했다. “자책하지 마, 부관. 귀관의 작전을 승인한 건 나야. 나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모두가 귀관의 작전이 최선이라고 인정했어. 제국군을 나락으로 빠트린 것은 귀관 혼자가 아니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지휘관이 쿠르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쿠르츠는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자책감, 분노, 병사들에 대한 끝없는 죄악감을 참아내면서, 쿠르츠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사령관 각하. 기마대를 이끌고 철퇴하십시오.” 귀족 상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지금 후퇴해봤자 적색 산성은 끝났어. 소용없어.” 쿠르츠가 자신을 책망했다. 눈앞의 애송이는 이곳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적색 산성을 지킬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끝까지 발악하는 것이 옳다, 마치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양 생각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생각 따위 파편조차 없다……그는 이미 완성된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을 머저리라고 생각했는가. 귀족에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인맥에 의해 출세했다고 판단했는가……아무래도 자기는 사람 보는 눈이 어지간히도 없는 것 같다고, 쿠르츠가 자책했다. “누군가는 이 사태를 변경백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건 초전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전쟁은 제국군 전체와 월맹군 사이에서 일어나겠지요. 변경백들이 먼저 군대를 조직하는가, 월맹군 본대가 먼저 적색 산성에 도달하느냐가 전쟁의 귀추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쿠르츠가 고개를 들어 귀족 상관을 바라보았다. “기마대와 함께 변경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소관이, 제국군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이 이곳에서 발악하는 것에도 의미가 생깁니다. 우리가 적의 발목을 길게 잡아둘수록 변경백들이 군대를 완비할 시간이 확보됩니다. 당장 패배할지언정 월맹군과의 전쟁에서는 유리하게 됩니다.” “잠깐만. 그건 이상해.” 귀족 청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변경백들한테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굳이 나일 필요는 없어. 그, 기마대만 도망치게 해도 충분하겠지.”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주 어리석은 지휘관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어린애 다루듯이 농락했습니다. 마왕군에는 무시무시한 참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자가 오늘밤의 참변을 만들어냈습니다…….” 쿠르츠는 정체모를 모략가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저 모략가는 오히려 병력을 줄임으로써 상대를 몰락시켰다. 평범한 모략가가 이루어낼 위업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마왕군이 이만한 계략을 짜낸 적은 없습니다. 단지 강력한 몬스터를 동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마왕군에 이제는 모략까지 더해졌습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저것이 월맹군의 선봉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오로지 각하만이 적의 의중을 간파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국에는 각하와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살아남아서 저 간악한 모략가와 맞서 싸워주십시오.” “슐라이어마허 부관…….” 청년의 푸른 눈동자에 근심이 섞였다. 작전의 책임을 지고 부하들과 장렬하게 전사할 것인가, 앞으로 일어날 대전쟁을 위해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저도 똑같은 의견입니다.” 한 지휘관이 나섰다. “사령관 각하, 이곳은 저희가 막을 테니 부디 살아남으시기를.”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라켄베르크 소위. 무슨 말인가. 그대도 도망치게. 후미를 맡는 사람은 나 혼자로 충분해.” “바보 같은 의견이로군요. 지휘관-대리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길게 몬스터 새끼들의 발목을 잡아두어야 한다고.” 그러자 다른 지휘관들도 동조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수로 이천을 한 명이 지휘합니까?” “보나마나 순식간에 궤멸되겠지요. 그래서야 본말전도입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멍청이 같은 놈들!” 쿠르츠가 소리쳤다. 어차피 여기 있는 지휘관들은 전부 쿠르츠의 아래에서 성장한 이들이었다. 사석에서는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에 쿠르츠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이 있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썩 꺼져!” “그러는 형님은 작전도 말아먹은 주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 거라고 난리입니까. 똥을 쌌으면 주변에서 도와줘야지요. 형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암요. 후미가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서 어디 도망이나 치겠는지 원.” 지휘관들이 웃었다. 쿠르츠가 아연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시선이 확고했다. 죽음을 직시하는 자만이 보낼 수 있는 눈길이었다. 쿠르츠는 어떤 말로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머저리들이…….” “사령관 각하.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어서 기마대를 이끌고 가십시오.” 청년이 침묵했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혼자 도망치다니, 그런 행위를 용납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희생을 자처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니, 제국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에게 오욕을 뒤집어쓰라는 것이군.” “예, 죄송합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하여 각하께서는 살아주셔야겠습니다.” “……좋아. 책임을 지는 방식이 꼭 죽음일 필요는 없겠지.” 청년이 지휘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난 출세가 목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모시는 분을 돕고 싶었지. 이번 전투에서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첫 번째 전투라서, 귀관들이 나보다 더 전문가이니까 맡기면 되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책임이기도 해.” 쿠르츠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산성에서 나가지 말자고 말한 것도 귀족 상관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몬스터에 겁을 먹어서 진군에 반대했다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작전에 동의한 것도 단순히 출세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아니었다. 청년에게는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겠지. 그걸 자기가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귀관들에게 맹세하겠어. 이천의 장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 모략가를 반드시 죽이지. 녀석의 목을 귀관들의 무덤에 바치겠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지휘관들이 경례했다. 청년도 뒤따라서 경례했다. 평소보다 경례가 오래 이어졌다.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지크 합스부르크.” 만약을 위해 쿠르츠와 청년은 투구와 옷을 바꿔 입었다. 최고 지휘관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면 적이 끝까지 추격해갈 위험이 있었다. 쿠르츠가 최고 지휘관의 복장을 입음으로써 적을 기만하려는 것이었다. 청년은 잔존한 기마병 백여 명을 이끌고 철퇴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 사령부에서 쿠르츠가 마음을 다잡고 외쳤다. “머저리 새끼들, 도망칠 수도 있는데 굳이 독배를 마셨겠다. 하지만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지금부터 오우거 한 마리 이상 해치우지 못한 새끼는 죽지 못한다!” “한 사람당 오우거 한 마리입니까. 그거 대단한 교환비율이군요.” 지휘관들이 키득거렸다. 쿠르츠도 웃음을 머금었다. “아아. 살기는 쉬워도 죽기는 어려운 거다. 이제부터 그걸 적들한테도 각인시킨다. 몬스터를 한 마리라도 더 땅바닥에 처박아라! 우선 양익을 합치는 거다! 오우거는 제5급 이상의 무사들로 분대를 만들어서 해치운다! 뭐하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머저리 새끼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사령부를 울렸다. 쿠르츠가 생각했다. 그렇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인류의 번견이 얼마나 지독한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사령부 전원이 그렇게 결의를 다졌다.   00084 인류의 번견 =========================================================================                        * * *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당초 이천 명이었던 인간군은 이제 천 명 정도가 남아서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병력을 놓고 보면 5할이 전멸했다. 궤멸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여기에 더해서 적군은 사방이 포위된 상태. 저들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럴 터인데……. “끈질기군.” 제파르가 재미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인간군은 사냥개처럼 끈질겼다. 이쯤 되어서야 자기네가 된통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헌데도 절망적인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사태가 호전되리라 기대하는 걸까요?” 서열 제58위의 아미가 불만을 이어받았다. 그는 전방의 오백인대를 이끌다가 우리와 합류했다. 제국군을 여기까지 유인해내는 미끼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이번 전쟁의 공로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어서 무훈을 올려야 한다는 조바심이 사라진 것일까. 아미는 예전에 비해 성질이 많이 죽었다. 다만 가끔씩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무섭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나쁜 남자로군, 아미. 그렇게 노골적으로 두려워하면 오히려 내가 상처받는다. 이래봬도 나는 마계 제일의 상냥남이다. 너무 피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말했다.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겠지요.” “의도를 간파했다고?” 제파르가 반문했다. 반면에 아미는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살살 시선을 피했다. 또 그런다. 정말로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별 수 없다. 신출내기 마왕 전하들과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진득하게 얘기를 나눌 수밖에. “우리가 월맹군 선봉대임을 짐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적색 산성을 넘겨줄지언정 조금이라도 발목을 붙잡겠다, 그런 의지를 불태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절망적이나 희망은 남았다는 것인가.” 제파르가 예의 무표정하고 위엄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는 그들에게 제파르 나름대로 호감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인가……. “마치 판도라의 항아리 같군요.” 마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이 세계에는 판도라 신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 전쟁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시간이나 때울 겸 이야기라도 풀어볼까.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삶을 버틴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고대의 신화 작가는 되레 그것을 비꼬아서 <판도라의 항아리>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사실 희망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신이 장난 삼아 만든 항아리에 꼭꼭 숨겨져 있다. 그것도 모른 채 인간들은 희망을 희구하며 마치 희망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삶의 먼지를 기꺼이 들이마신다고……. “희망 그 자체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재앙이라는 얘기로군.” 제파르가 약간 감탄한 어조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희망에 대한 찬가 따위가 아니었다. 희망 자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재앙임을 경고하는, 적잖게 시니컬한 신화 작가의 비웃음이었다. 마왕들의 감수성에 잘 들어맞았는지 다른 이들도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웃고 있었다. 아이구야, 역시 마왕들은 하나같이 삐뚫어진 싸이코 새끼들이었다. 이런 작자들과 아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련지. '나의 착한 아들이, 이렇게 질 나쁜 깡패들이랑……' 하고 눈물을 흘리실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근묵자흑이라 그랬다. 혹시라도 이 작자들에게 순진무구한 내가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들에게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가지는 것이 허락될 정도로 허약한 재앙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내가 키득거렸다. “마왕이야말로 재앙 중의 재앙이 되어야 하는 법, 희망 따위에게 뒤져서야 군단장 각하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호오. 단탈리안, 자네에게 좋은 수가 있는가?” 제파르가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 양반, 얼굴에 위엄이 깃들어 있어서 알아차리긴 어려워도 상당한 변태였다. 어머니가 한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별 수 없었다. 그는 내 상사였고 나는 가련한 부하직원이었다. 얌전하게 명령을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 “송구하오나 이런 때가 있을까봐 숨겨둔 한 수가 있습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용서해주신다면 그 한 수를 드러내볼까 합니다.” “좋다. 이번에 한하여 무엇이든 용서하겠다. 자네의 한 수가 무엇일지 흥미 깊다. 제군도 궁금하지 않은가?” 제파르가 주변에 동의를 구했다. 발람과 아미 등 다른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나의 행동을 용납하는 것은 제파르 개인이 아니라 선봉대 사령부 전원이 되어버렸다. 능숙하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신출내기 마왕들은 알고 있을까? 방금 고개를 한 번 끄덕임으로써 제파르의 약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겠지. 영원히 모를 거다. 이빨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아미가 또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 태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게 재밌었다. 점점 중독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불효자는 벌써 나쁜 물에 아주 약간 물들었습니다……. 비장의 한 수란 물론 바르바토스에게 건네받은 <죽음의 기사>였다. 이들은 평상시에 영체(靈體)가 되어 나의 주변을 맴돌다가 내가 지시하면 곧바로 몸을 드러냈다. 열두 명의 흑기사가 등장하자 마왕들이 자그맣게 탄성을 내질렀다. 죽음의 기사는 오우거에 버금가는 무력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체구는 인간만큼 작고 은신이 자유로우니 오우거보다 뛰어난 병종임에 분명했다. “훌륭하다! 사자는 전력을 다할지라도 발톱 하나를 숨겨둠인가.” 제파르가 손뼉을 쳤다. 그런데 목소리가 열띤 것에 반하여 눈이 매서웠다. 아군에게 전력을 감추어 보존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죽음의 기사를 내보였다면 산성을 보다 쉽게 공략했으리라. 약간 과장하면 이적행위나 진배없었다. 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적의 마지막 발악을 감히 제가 끝장내고자 합니다.” “좋겠지. 허락한다.” 나는 곧바로 라우라를 시켜서 적의 지휘부를 일격에 섬멸할 것을 주문했다. 죽음의 기사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굳이 라우라를 거친 까닭은, 이래야 경험치가 라우라한테 몰빵되기 때문이었다. E급 모험대를 격퇴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라우라한테 경험치를 몰아주고 있었다. 덕분에 라우라는 현재 눈부신 능력치를 자랑했다. ━━━━━━━━━━━━━━━━━━━━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1    명성: 512 직업: 책사(B), 학자(D), 성노예(D) 통솔: 81  무력: 11  지력: 84 정치: 10  매력: 57  기술: 1 호감도: 76 충성도: 99 *칭호: 1.공작 영애(廢) 2.천재 3.충신 *능력: 승마술B+, 수사학B, 음악C, 전술B+, 기하학D, 작전술C *스킬: - 현재심리: ‘흐음, 닭 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약간 쉬울 듯싶다.’ ━━━━━━━━━━━━━━━━━━━━ 아직도 레벨이 24에 머물고 있는 나와 대조적이었다. 언제 봐도 든든했다. 나는 라우라에게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라는 지휘관은 반드시 생포해올 것'이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듬직하게 군례를 올리고 열두 명의 기사와 함께 나섰다. 뭐, 그후로는 간단했다. 전방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더니 순간 전열에 빈틈이 생겼다. 말이 열두 명이지 몸집만 작은 오우거가 군집을 이루어서 돌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죽음의 기사에겐 물리 내성(-80%)이 붙어 있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오우거와 똑같은데 날붙이로 공격해봤자 20%의 피해밖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마법사 부대가 없는 적군 입장에서는 사신이 강림한 셈이었다. 죽음의 기사가 만든 틈으로 몬스터 대부대가 공격해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포위섬멸에도 사십 분 가까이 버틴 인간군이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잠시 후, 라우라의 레벨이 올랐다는 홀로그램이 연달아 다섯 개 떠올랐다. 전열을 붕괴시킨 공로와 지휘관들을 몰살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레벨이 오른 듯했다. “이 자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입니다, 주군.” 기사들을 대동하고 라우라가 돌아왔다.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에 샛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그것마저 아름답다고 느끼니 내 눈에 콩깍지가 씐 것 같았다. “저주받을 문둥병 새끼들!” 죽음의 기사 두 명이 인간종의 남자를 양옆에서 붙잡고 있었다. 그가 입에서 피를 흘려대며 쌍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보니까 이 녀석, 오른쪽 팔이 잘렸다. 라우라가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반항이 격심하여…….” “아아, 괜찮다. 어차피 팔 따위 자르면 또 난다.” “…….” 신출내기 마왕들이 혀를 내두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팔이 무슨 머리카락이냐, 하고 그들의 시선이 말해오고 있었다. 섭섭했다. 가벼운 블랙 조크였는데. 방금 전까지 문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울부짖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벙찐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귀관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은 나일세,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나는 예전부터 그대에게 관심이 많았지.” “……예전부터?” “그래. 꽤나 오래 전부터.”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5/65   43   34 ━━━━━━━━━━━━━━━━━━━━ 빙고.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본인이 맞았다. 게임 일러스트와 다르게 얼굴이 다소 투박했지만 그 정도 차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지. 다만 이상한 것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분명 지휘관-대리라고 들었는데 복장을 보면 꼭 귀족 같았다. 흉갑에 가문 문양까지 그려져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는 평민이었던 걸로 아는데.” “……사령관 각하께서 난전 중에 전사하셨다.” “아하, 일개 평민 부관이 사령관 흉내를 낸 것인가.” 사정을 파악했다. 난전에 사망한 사령관, 지휘부는 둘째치고 장병들이 혼란에 빠지겠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하여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사령관의 갑주를 훔쳐 입었다. 과연 <던전 어택>에서 장병들에 대한 책임감이 높기로 유명한 장군다웠다. “그렇다면 귀관이 현재 인간군의 사령관인 셈이로군. 이미 패배가 결정된 군대이지만.” “퉤에!” 쿠르츠가 침을 뱉었다. 툭, 하고 내 왼쪽 눈에 명중했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으로 스윽 침을 닦았다. 핏물이 가득 섞인 침이었다. 끈적끈적했다.……뭐, 되었다. 본인임을 확인한 이상에야 그에게 흥미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단검을 빼들어서 쿠르츠의 이마에 꽂아넣었다. 두개골이 아스라지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쿠르츠의 몸뚱어리가 힘을 잃고 갸우뚱거리다 땅바닥에 콧대부터 처박았다. 먼지가 그의 눈을 덮었다. 결국 그의 마지막 유언은 퉤에! 였다. 거 참 멋진 최후가 아니고 뭔가. 주변에서 보는 눈만 없었다면 손뼉이라도 쳐줬을 거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던전 어택>에서 제법 중요한 시나리오를 몇 개 맡고 있었다. 그를 죽임으로써 내게는 막대한 경험치 보상이 주어지리라.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 수십 초를 기다려도 홀로그램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죽지 않았나 싶어서 쿠르츠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이마가 관통되어서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데 저게 죽지 않았다면 쿠르츠는 인간이 아니라 좀비일 것이었다. 이상했다. ‘뭐야? 왜지? 왜 퀘스트 브레이크가 안 떠?’ 내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는 게 이상해보였을까. 제파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별 일 아니라고 대답했다. 달리 답할 방도가 없었다. 퀘스트를 깨트렸는데 보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승리 선언을 하시지요.” 전투는 끝났다. <개미지옥>이라고 이름붙은 작전은 대성공했다. 이쪽은 고작 오우거 세 마리와 기타 몬스터 오백여 마리가 죽은 반면, 인간군은 녹색-청색-황색-적색 수비군을 전부 합쳐서 약 삼천 명이 전멸했다. 새벽이 다가왔다. 어스름이 땅을, 인간의 시체로 뒤덮인 땅을 비추었다. 몬스터들은 밤새 시체들을 훈제구이로 만드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새벽빛에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로 검은 연기 수십 개가 피어올랐다. 어찌보면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자문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냐.” 당연하게도 대답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결국 전쟁에 이긴 것에 족하면서 막사로 돌아갔다. 제파르도 신출내기 마왕들도 대승에 기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나만 뚱해서야 분위기만 망칠 뿐이다. 하지만, 겉으로 기쁨을 표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예상치 못한 찝찝함이 그림자처럼 진득하게 내 뒤를 따라붙었다.   00085 인류의 번견 =========================================================================                        * * * 적색 산성에 무혈입성한 지 사흘이 지났다. 멀찍이서 기사단이 몰려와 있었다. 붉은 산돼지 기사단.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방군을 총괄하는 두 명의 변경백, 그중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기사단이었다. 폰 로젠베르크 백작은 꽤나 성가시다. 게임에서는 시시각각 주인공 용사와 대립각을 내세웠다. ‘마왕을 섬멸하는 것은 국가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사명이다. 결코 개인의 공훈이 아니다.’ 폰 로젠베르크의 주장이었다. 그는 용사 한 명에 기대어 마왕들을 격파해버리면 인간들이 더 이상 전쟁을 자기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게 되리라 염려했다. 대륙의 만민이 용사 일행에 환호할 때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위험성을 경고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그 대표주자였다. ‘제국은 현재 지나치게 영웅주의에 심취해 있다.’ 모난 소리를 하는 사람은 돌을 맞기 마련. 용사 일행이 착실히 마왕들을 단독 격파해나가는 사이, 제국 변경백 군대는 한 명의 마왕조차 죽이지 못했다. 군대는 대체 뭘 하고 있느냐. 용사의 눈부신 위업에 질투를 품고 영웅주의 운운하는 것 아니냐. 그같은 비난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오백 년 가까이 대륙의 북방을 수호해온 백작가 입장에선 더없는 모욕이겠지. 결국 변경백들은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켰다. 방어적인 전략을 버리고 도리어 검은 산맥 너머로 원정을 감행한 것이었다.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여 과거의 명성과 위엄을 되찾는가 싶었으나,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와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을 주축으로 한 동맹군에 의해 싸그리 전멸당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인간계는 더더욱 혼란에 휩싸였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 제국과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감, 실질적인 군세……여러모로 벅찬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저 자와 격돌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아가레스와 가미긴한테 전멸당하긴 했어도, 달리 말해 저 자를 전멸하려면 서열 제2위와 서열 제4위 정도가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리 마왕군은 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성문 밖으로 출격하지 않았다. “기사단이라 해봤자 고작 백 명 아닙니까. 한판 붙어볼 만합니다.” 유일하게 아미가 한소리 했다. 아무래도 작전이 대성공하자 실력에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귀염둥이에게 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기사는 한 명이 오우거에 버금갑니다.” “하, 한 명이?” “저기엔 오우거가 백 마리 있는 셈이지요. 뭐, 저중 절반은 견습기사일 테니까 오우거 일흔 마리라고 해둘까요. 놈들이 저기서 알짱거리는 이유는 우리를 유인해내기 위해서입니다. 평야에서 오우거 일흔 마리와 회전을 벌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응원하겠습니다, 아미 동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의 뼈는 제가 주워드리지요.” 아미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기사단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기사단은 이해하겠는데 왜 날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걸까. 세상에는 불가사의가 참 많다. 불평불만은 그걸로 끝이었다. 백 명의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도 월맹군 선봉군은 산성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고작 이천의 군세로 녹색-청색-황색-적색을 닷새만에 점령했다. 월맹군 역사상 최고의 진군속도였다. 그 무공에 신출내기 마왕들은 얌전히 제파르 대장의 명령에 따랐다. 평원파 수뇌부들에게 눈도장 찍을 만한 공을 충분히 세웠으니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 계산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기사단과 신경전을 벌인 게 이 날로 사흘째. 제파르 대장이 말했다. “오늘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왕림하신다.” 우리는 다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여라도 기사단이 공성전의 불리를 무릅쓰고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탓이었다. 그날 오후, 일만칠천의 몬스터 본대가 산성에 입성했다. 일만칠천 마리의 몬스터가 대열을 맞추어 진군하는 광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우리는 모두 성문 바깥까지 나가서 본대를 마중나갔다. 그러자 본대의 수뇌부가 다가왔다. 검은 망토를 나부끼면서 척척 걸어오는 모습이 마피아 패밀리를 연상시켰다. 가운데에 신장이 4미터에 이르는 거한이 있었다. 그가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평원파에서 순위가 높은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였다. 꼭 화난 것처럼 인상을 구겼는데 원래 표정이 그랬다. 본인이 말하기로는 인간계나 너무 싫어서 발자국만 들여놓아도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된다는데, 달리 말해 자기가 천하의 또라이 새끼임을 은연 중에 밝히는 것이었다. “수고했네, 제파르 선봉장.”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면서 거인 벨레드가 말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와주었군.” “경이 앞길을 닦아주어서 유람이라도 나온 기분이었지. 군단장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지. 기뻐하게. 자네는 명실공히 군단장 각하의 부하 제2호이니까.” “……제2호?” 제파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귀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자네의 입이 삐뚫어진 모양이로군. 나 제파르는 분명히 군단장 각하의 부하 제1호이다.” “웃기는 소리. 바르바토스 님의 부하 제1호는 자네가 아니라 본인이지. 자네는 이제 이천 살이 될까말까한 꼬맹이지만 본인은 이천사백 살이 넘었어. 자네가 태어나기 사백 년 전부터 나는 바르바토스 님을 추종했지. 크흥.” 거인 벨레드가 코웃음을 쳤다. “부하 제1호를 자처하기에는 사백 년이 일러, 꼬맹이 제파르.” “무슨 쉰소리를 지껄이는가 싶었더니 나이 자랑인가. 자고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이다. 군단장 각하를 향한 내 충심은 사백 년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일만 년 하고도 이천 년은 초월할 마음이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왼손으로. 손등에 혈관이 부릅 튀어나왔다. “이 겉늙은이 꼬맹이가――.” “덩치만 산만한 돼지 놈이――.” 다른 마왕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인지 다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얼른 산성에 들어가서 쉬고나 싶다. 그런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 감상을 말하자면, 글쎄. 저 치들이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숨쉬는지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월맹군이 왜 일곱 차례나 망했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서열이야 어떻든 간에 외양이 열두 살짜리 소녀였다. 요컨대 저 두 마왕은 누가 열두 살짜리 소녀의 충실한 팬이냐를 두고 열렬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로리콘들이었다. 평원파의 최고 수뇌부가 로리콘 집단이라니. 인간들이 들으면 그거 대단한 농담이라고 폭소하지 않을까. ……마음 어디에선가 정작 그 로리와 떡을 친 사람은 누구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했다. 그걸 인정해버리면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품격이 한참 떨어져버릴 것 같았다. 뭐, 이미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지. 제파르가 말했다. “됐다. 우리는 자네 같은 산멧돼지를 마중하러 나온 게 아니다. 군단장 각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흐음.” 벨레드가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얼굴을 더더욱 구겼다. 이쯤되면 저것이 면상인지 알루미늄 김밥 포장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십팔 초 뒤에 도착하신다.” “십팔 초?” “이제는 십육 초이지.” “……아아. 그렇게 왕림하시는 것인가.” 무언가 알아들었다는 듯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에 벨베드의 말을 이해한 것은 제파르뿐이었다. 아미가 물었다. “각하. 십팔 초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음, 그대는 신입이라 모르겠군. 이제 십 초 남았다네.” 하고 제파르가 손가락으로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손짓에 이끌려 마왕 전원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푸른 하늘에 까만 점이 생겼다. 점은 순식간에 입체적으로 커졌다. 아니, 거대해졌다. 그것은 뼈로 이루어진 드래곤이었다. “뼈, 뼈의 군주!” 아미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소리만 내지 않았을 따름이지 깜짝 놀랐다. 본 드래곤이라니, A급을 뛰어넘어 S급 몬스터였다! 녀석은 웬만한 하위 마왕쯤은 점심 끼니로 때울 만큼 강력했다. 몬스터들이 공포에 떨어대는 감정이 내게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심지어 오우거도 전신을 부들거렸다. 드래곤이 우리 바로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먼지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칫 발에서 힘을 뺐다가 당장 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마왕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갔다. 그렇게 생겨난 맨땅에 드래곤이 천천히 착지했다. 날개짓이 멈추었다. 먼지구름이 사방을 뒤덮었다. 갈빛 먼지 너머로 드래곤의 거대한 그림자만이 어렴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위에서 누군가가 드래곤의 뼈를 밟으면서 내려왔다. 바르바토스. 서열 제8위의 마왕이었다. “아아. 미안, 미안.”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그녀가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내가 약간 늦었지? 분명히 한 시에 깨워달랬는데 말이야, 시발. 그 멍청한 집사 새끼가 한 시간이나 늦게 깨우지 뭐야. 늦을까봐 존나 후달렸다니까.” 어디까지나 가벼운 말투. 그러나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열여덟 명의 마왕, 일만팔천오백의 몬스터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땅이 진동했다. “군단장을 뵈옵니다!” 열여덟 명의 마왕이 소리쳤다. 바르바토스가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찌푸렸다. “생지랄을 해요. 일어나. 너희가 그러면 조금이라도 예뻐 보일 줄 아냐? 아, 물론.” 바르바토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쳐다봤다.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주아주 가끔이지만 예쁜 녀석이 있긴 하지. 야, 제파르. 너 임마 한 건 했다? 응?” “황송하옵니다. 각하.” “짜식. 너 제6차 월맹군에서 존나 무식하게 돌격할 때가 어제 같은데! 깔깔깔!” 바르바토스가 웃으면서 제파르의 등을 세게 두들겼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때릴 때마다 제파르가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여기서 제6차 월맹군 기억하는 년놈? 야아, 그때 장관이었지. 웬 애송이가 인간놈들 기사단을 향해 닥돌하는데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 새끼가 얘야, 얘. 서열 제16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봉대장 제파르!” 마왕 여럿이 낄낄 웃었다. 본 드래곤의 등장에 적막해진 분위기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기사단도 어디 보통 기사단이어야지. 브르타뉴 왕국의 초록장미 기사단이었어요, 그게 또. 천하의 나도 그 돌격을 보고는 입이 떠억 벌어졌거든. 그리고 깨달았지. 와, 존나 저 새끼 또라이 중에 상또라 새끼구나. 시발, 병신 같지만 졸라 멋있다.” 마왕들의 웃음소리가 한층 거세졌다. 졸지에 놀림거리가 된 제파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파르의 근엄한 모습만 봐온 나로서도 거기엔 폭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벨레드가 험상궂게 물었다. “그래서 돌격은 성공적이었습니까?” “내가 말했잖아, 병신 같지만 멋있다고. 깔깔! 멋있긴 해도 병신은 결국 병신이거든. 아 완전 대차게 말아먹었지 뭐야. 너희 그거 아냐? 이 새끼가 그때 거기서 병력을 죄다 꼴아박아서 지금까지도 오우거가 스무 마리밖에 없어요. 서열 제16위 새끼가 오우거 스무 마리리야!” 바르바토스가 장난스럽게 제파르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하, 내가 쪽팔려서 어디 이 놈이 우리 평원파에서 세 번째로 강한 놈입니다 하고 자랑이나 할 수 있겠냐. 응? 으이구, 병신 또라이야. 그때 왜 그랬어? 이제 말해봐, 짜샤. 오백 년 동안의 수수께끼를 오늘 한번 풀어보자.” 제파르가 대역죄인처럼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딸도 아니고 손녀뻘의 소녀가 장난을 치는데 영락없이 당하는 모양새였다. 주변에서 또 다시 폭소가 터진 것은 물론이었다. 웃음기가 잦아들자, 바르바토스가 품에서 부채를 꺼내들어 부쳤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파르, 서열 제16위의 마왕은 단연코 우리 평원파에서 자랑하는 전사라고. 닷새만에 검은 산맥을 돌파하는 위업을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이 제파르가 이루어냈다고.” “……각하.” 제파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너는 작게는 개인의 영광을. 크게는 월맹군의 위엄을 바로세웠다. 이번과 같은 대업에서 첫 출발을,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잘 끊어주었어. 나의 동지들이여. 여기 제파르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거인 벨레드마저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제파르가 군례를 올림으로써 답례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바르바토스는 제파르에게 공훈에 대해 마땅히 보상을 내릴지니. 천이백 년 간 나와 함께한 동지, 뼈의 군주를 제파르에게 하사하노라.” “……! 가, 각하!” 제파르가 경악했다. 그만 놀란 게 아니었다. 마왕 전원이 헛숨을 들이켰다. 벨레드에 이르러서는 턱이 빠질 기세로 입이 벌어졌다. S급 몬스터의 가치는 감히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 그것이 보상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소인의 미약한 군공에 반해 지나치게 과한 보상입니다!” “이론은 받지 않겠어.” 바르바토스가 엄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베파르, 발람, 무르무르, 아미에게도 각기 일만 골드를 하사한다. 이외에도 월맹군이 끝나는 그날 공훈에 따라 적절하게 보상 받을지어다.” “화, 황공하옵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불린 마왕들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군령을 세우고 있었다. 군령의 기본은 신상필벌. 마왕들의 자존심이 제아무리 태산을 우습게 여긴다한들 눈앞에서 S급 몬스터가 하사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욕심 때문에라도 바르바토스의 명령에 따르겠지. 저번에 우리는 과거의 월맹군이 패배한 이유를 논했다. 월맹군이 성공하고 난 이후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한 걱정, 그것 때문에 월맹군은 내부에서 분열했다. 그런데 여기서 S급 몬스터를 취할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설령 인간계가 정복되더라도 충분히 살아남을 여력이 생긴다. 실리적인 목적이 부여되는 것이다. 마왕들은 필사적으로 바르바토스의 은혜에 구애하게 되리라.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지.” 바르바토스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단탈리안. 내 친애하는 친구.” 주변에 선 마왕들이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친구. 바르바토스가 누군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본 드래곤이 하사되었을 때보다 더한 경악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이렇게 주목을 받는 것은 딱히 달갑지 않은데. “제파르가 실행자이고 그대는 계획자였지. 천 년 동안 우리 월맹군을 지독히도 괴롭힌 검은 산맥이 그대의 손안에 놀아났어. 어떤 찬사를 그대한테 바칠까? 어떤 보상이 그대에게 어울릴까?” 저 녀석, 일부러 말투를 저 따구로 쓰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다른 마왕이 경악하면 경악할수록 녀석의 가학심이 충족되겠지. 심술궂은 로리 년! 네 녀석은 새디스트에 싸이코다. 내가 침을 삼키면서 미소 지었다. “……과찬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깔깔. 마왕들이 너처럼 자기 할 일을 했으면 인간계가 진즉에 다섯 번은 정복됐을걸. 자, 가까이 와봐. 가까이.”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별 수 없이 녀석한테 다가갔다. “본래대로라면 훌륭한 병사를 하사하거나 거금을 내려줘야 마땅하나, 어쩌나. 내가 그러기가 싫은데. 단탈리안 얘가 요새 너무 잘 나간다 이 말이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아주 내가 샘이 날 지경이야.” “…….” 바르바토스가 예의 성격 나빠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내리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아. 어쩐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 그리고 역시 내 머리는 천재적이라고 할까, 딱 좋은 상이 떠올랐지 뭐야. 단탈리안.” “어?” 그녀의 양손이 내 머리를 잡았다. 어째서인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기기 어려울 정도의 힘이 내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여린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두 번째. 두 번째였다! 또 당했다! 이번에도 혼란에 빠질 내가 아니었다. 입술이 닿은 상황에서 내가 눈을 확 부라렸다. 바르바토스도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확신범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순식간에 말없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 너 이걸 어떻게 감당할 거야! ─ 왜? 싫냐? ─ 이 여파를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 몰라. 대충 살아. 입맞추고 싶으면 맞추는 거지. ─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야! ─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혓바닥이나 좀 내밀어. 죽음과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적당히 입술을 떼고 싶었으나 도저히 바르바토스의 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전세계 키스대회가 열린다면 볼 것도 없이 그녀가 우승후보였다. 장담해도 좋았다. 제기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한테서 풀려났다. 바르바토스가 개운하다는 듯 숨을 쉬었다. “후우. 내 입맞춤이 보상이야. 시발 어때, 죽이지?” 그래. 죽여준다. 진짜 낱말 그대로 죽여줘. 내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의 종말을 마주한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근엄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십수 명의 마왕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을 먹으면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 싱글벙글 떠들어댔다. “아, 동지들. 보다시피 내가 얘 찜했거든? 미리 침 발라뒀다. 혹시라도 누가 뺏으려 들면 내가 친절하고 자상하게 두들겨패줄 테니, 나랑 다이다이깔 자신 있는 새끼만 등판해. 오늘부로 단탈리안은 내 첩이야.” 누가 누구 마음대로 첩이냐!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겨우 미소를 지었다. 문득 어디선가 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파르와 벨레드가 실로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누구 한 명 비틀어버릴 기세였다. 아무래도 난 로리콘 양반들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았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한숨이나 쉬는 수밖에.   ============================ 작품 후기 ============================   ─ 챕터 <인류의 번견> END.   00086 모략의 시대 =========================================================================                        “후퇴한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말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본 드래곤이 비추었다. 붉은 산돼지 기사단 백 명이 폰 로젠베르크의 한 마디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아무런 의문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부관이 말했다. “각하, 바르바토스입니다. 월맹군이 거의 확실하군요.” “효율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뼈의 군주를 이끌고 왔다.” 백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말발굽 소리에 묻힐 만큼 목소리가 작았으나, 일반적인 인간에 비해 오감이 월등하게 발달한 기사단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효율이 아니라 명분을 노린다. 명분이 필요한 전쟁에 바르바토스가 끼어들었다.” “과연. 그렇기에 월맹군이라는 말씀입니까.” “황제 폐하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부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제대로 대응하시겠습니까?” “중앙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허나 제도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지. 그분께서 군권을 장악하실 필요가 있다.” 부관이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 보고하기 전에 황태자 전하한테 보고하라는 말씀입니까?” “세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고한다. 세 시간이면 황태자 전하께서 중앙군 사령부와 접촉하시기에 충분해.” 변경백. 국경을 수호하는 대가로 변경백 가문에는 막대한 자유가 허락되었다. 그들은 국법이 허락하는 수준 이상으로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고, 각종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한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제국 중앙에서는 변경백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경백이 지난 오백 년 동안 반란의 혐의를 입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변경백은 언제나 정통 후계자를 지지했다. 황태자가 인성이 아무리 쓰레기 같아도, 무능력의 극치일지라도, 변경백들은 황태자를 제1계승권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지했다. 이렇게 시종일관 처신함으로써 변경백은 중앙의 정치 싸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제3황녀 전하가 실각하겠군요.” “황녀 전하가 아니다. 에바트리에 백작이지.” 로젠베르크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1황자, 제국의 황태자는 제 아비를 닮아서 무능했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인격이 글러먹었다. 극소수의 고위 귀족들끼리 공유하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제1황자가 동생들과 함께 자신의 누나를 강간했다는 것이었다. 연이은 강간 끝에 황태자의 누이, 제1황녀는 자살하고 말았다. 세간에는 병들어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 합스부르크 제국은 멸망할까요?” “멸망할 수도 있겠지.” 중앙의 문벌귀족이 대화를 엿들었다면 경악했으리라. 당장 황족모욕죄와 국가모반죄가 적용되어 삼대가 멸문해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관도 로젠베르크 백작도, 백 명의 기사 중 어느 누구도 눈썹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제국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제국이 살아남는 길이다. 에바트리에 백작이 황태자 전하를 추월하여 황위를 찬탈한다. 제국은 혼란에 빠지겠지만 어렵사리 재생할 것이다. 단, 이 경우 우리 변경백은 멸문한다.”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제국이 멸하는 길이다.” 로젠베르크 백작이 어디까지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황위를 이어받는다. 제국은 내부에서 썩어 문드러져 이윽고 쓰러지겠지. 그러나 우리 변경백은 끝까지 국가에 반역하지 않았다는 명분, 오로지 인류의 수호에만 주력한다는 명분을 얻는다.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어도 우리의 진심은 인정받겠지.” 제국의 미래인가. 아니면 가문의 미래인가. 혹은 인류의 미래인가……부관이 고민하면서 말했다. “만에 하나 에바트리에 백작이 정권을 잡으면, 각하께선 어쩌실 생각입니까?” “반역자의 가문으로 취급될 바에야 차라리 장대한 최후를 연출하는 편이 좋겠지.” 백작의 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다른 변경백과 연합하여 검은 산맥 너머를 공격한다. 꼼짝없이 포위되어 섬멸할 것이다. 하지만 변경백 가문은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인류의 수호자로 남는다. 그때는 그대들에게도 신세를 지게 되겠지. 멸문해도 좋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어차피 단 한 번의 인생이다. 화려하게 멸문하는 것이다.” * * * 금발의 청년. 일찍히 적색 산성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낡은 마구간에 들어갔다. 도시 외곽에 있는 마구간은 다 낡아서 누구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위장이었다. 그곳은 한 단체의 회원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 거점이었다. 청년이 건물 구석에 숨겨진 수정구를 꺼냈다. 주문을 외우자 수정구가 밝아졌다. 잠시 후, 수정구에서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빛은 얕은 장막을 형성하면서 그곳에 한 명의 여인을 투영했다. 청년이 말했다. “누님. 폰 로젠베르크가 귀환했어요.” “지금 방금?” “어,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대충 이십 분은 지났죠.” 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황녀 전하께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 결국 폰 로젠베르크는 망나니를 섬기기로 작정한 모양이네. 구시대의 유물다운 행동이야.” “어, 음……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요.” 여인이 찌릿 하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이 곤란하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그.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하아……. 황녀 전하께선 일단 기마대와 함께 행동하라고 명하셨어.” “서, 설마 월맹군이랑 싸우라는 명령은 아니겠죠?” 청년이 그건 제발 좀 봐주라면서 애원조로 말했다.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기마병 백 명으로 뭘 하겠니. 월맹군은 적색 산성을 넘어서 대륙 북방을 휘저을 거야. 당연히 유민이 발생하겠지. 그 유민을 규합해서 의용군을 만들어. 너는 이제부터 의병장이 되어 활동해야 돼. 거기에 필요한 자금은 일주일 안에 준비해주겠어.” “아니, 누님. 어디 의병장이 아무나 하나요?” 청년이 울상을 지었다. “민초를 이끌려면 어느 정도 명성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명성이라고는 동네 암캐보다 없는걸요. 게다가 패장이에요, 패장. 적색 산성을 잃어버린 패장.” “신분을 위장하면 간단해.” “예?” 여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너랑 기마대 빼고 산성 수비군이 모조리 몰살되었다면서. 그러면 신분 하나 위장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거기 수비군에서 대충 유명했었던 사람 이름을 빌려서 활동해. 적색 산성에서 유일하게 부하를 이끌고 생존한 역전의 명장. 그런 인상으로 밀고나가면 되겠네.” “…….” 청년이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러게요. 그러면 되겠군요. 음, 기마대한테는 의용병을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인의 이름을 빌린다고 설명하면 되겠고요. 이게 결국 수비군의 복수로 이어질 거라고 덧붙여주면 어렵지 않게 설득되겠네요.” “그래. 누구 마음이 동하는 이름이 있어?” “쿠르츠.” 청년이 멋쩍게 웃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로 할게요.” “적색 산성 지휘관-대리? 뭐, 적당하네. 자금 전달할 때 신분증도 같이 줄게. 네 성격에 비해 이름이 조금 너무 귀엽긴 하지만.” “너무해요. 제 성격이 뭐 어떻다고…….” 여인과 청년. 두 사람은 황녀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제국의 존립과 황녀의 패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에게는 이름과 신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상인이 되었고 연금술사가 되었으며 암살자가 되었다. “가증스럽게 순진한 척하지 마. 어차피 적당한 때에 처리할 생각이었잖아?” “그야 그렇지만요……아까웠어요.”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황녀 전하에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제국의 주인에 충성하지 않는 군인은 안타깝지만 배제할 수밖에 없지요.” 그가 중얼거렸다. “마침 월맹군이 적절하게 움직여줘서 다행이지 뭐예요. 덕분에 제가 움직이기도 전에 수비군이 전멸했어요. 음, 자칫 잘못했으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혼자만 후미에 남아서 희생할 뻔했지만요. 적이 월맹군 선봉이라는 사실을 슬쩍 알려주니까 글쎄……다들 남아서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여인이 질린 눈빛으로 청년을 쳐다봤다. “결국 말 한 마디로 수비군을 다 죽인 거잖아. 하여간 음흉하기 짝이 없어요.” “그,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그들이 죽음을 자처한 거죠.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가지 말아주세요…….”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보기에 청년은 겉은 멀쩡해도 근본부터 썩어 있었다. 하지만 유능했다. 황녀 전하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능력과 충성심만 있다면 인성의 하자쯤이야 봐줄 수 있었다. “아무튼 수고했어. 앞으로도 조금만 더 수고해. 폰 로젠베르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변경백의 군대가 월맹군에 의해 난전을 면치 못하고, 군권을 장악한 황녀 전하께서 등장하여 일거에 사태를 해결한다라……변함없이 황녀 전하께서는 능숙하시네요. 난세의 간웅이란 황녀 전하를 위한 단어예요.” “뭐, 그렇고 그런 거지. 괜히 어디서 칼빵 맞지 말고 잘 지내려무나.” 여인이 수정구에서 사라지려는 것을 청년이 붙잡았다. “아, 누님.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황녀 전하 말이예요. 어떻게 월맹군이 침공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일찍 아셨어요?” 청년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해요.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요. 저희 그림자가 유능하긴 해도 마왕군에 첩자가 있지는 않은데.” “쿠르츠.” “네?” 여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신경 꺼. 알면 다쳐.” 수정구에서 빛이 꺼졌다. 마구간이 적막해졌다. 청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월맹군 제6군단이 검은 산맥의 통로를 점령.――소식은 빠르게 마왕군 전체를 강타했다. 아직 절반도 넘는 군단이 출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제6군단이 일찌감치 대륙 침공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자존심 드높은 마왕들에게 썩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늦장을 부리던 마왕들도 서둘러 군대를 준비했다. 제2군단과 제3군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병식을 치렀다. 제4군단은 후방 지원이 임무였기에 조용했다. 제5군단은 단 두 명의 마왕으로 이루어졌기에 요란한 출병식 없이 출진했다. 바알이 단독으로 구성한 제7군단을 제외하고, 이제 남은 것은 제1군단. 파이몬이 이끄는 산악파의 군단이었다. 그녀는 유심히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서는 산악파에서 파이몬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서열 제12위 시트리가 쫑알쫑알 떠들고 있었다. “아, 언니. 진짜 애들이 열받게 한다니까. 산악파는 쪽수만 많아서 움직임이 둔하나느니, 마계의 자존심은 어디 갖다 팔았냐느니. 녀석들 후장을 쪽쪽 뚫어주고 싶더라.” 시트리는 성욕이 괴상하기로 유명했다. 우선 그녀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전부 가졌다. 본래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정교한 수술을 거쳐서 남성의 생식기까지 가지게 되었다. 여기까진 크게 흠 잡힐 일이 없었다. 시트리처럼 일부러 양성이 된 경우는 마계에서 꽤나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그녀가 고블린이고 오크고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성교하길 즐긴다는 것이었다. 환락에 너그러운 마인들도 여기에는 질색했다. 마계에도 몬스터에게 박히기를 좋아하는 마인은 남녀를 불구하고 많았다. 그러나 몬스터에 박는 것을 좋아하는 마인은 과연 극소수였다. 여기에 대해 시트리는 ‘박히는 자, 응당 박기 또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라고 발언함으로써 현재 마계의 세태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물론 시트리의 비판은 마인 사회를 경악시키는 것 이외에 어떠한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언니! 내 얘기 듣고 있어?” “그럼요. 제가 시트리를 왜 무시하겠사와요.” 시트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가끔 언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월맹군이 결성됐다는 얘기를 인간들한테 몰래 알려줘서 얻을 게 뭐야?” “얻을 거라.” 파이몬이 방긋 웃었다. “많죠. 아주 많아요.”   00087 모략의 시대 =========================================================================                        파이몬이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시트리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트리는 방금 전까지 켄타우로스 세 마리와 질펀하게 놀아재끼다가 슬슬 질려서 파이몬을 찾아온 참이었다. 색욕의 대명사인 시트리였으나 파이몬도 어디 가서 꿀릴 위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파이몬 언니와 함께 음란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볼까 했더니, 웬걸. 파이몬은 조용히 지도만 관찰하고 있었다. 시트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언니 생각쯤이야 간단하지.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어머나.” 파이몬이 키득거렸다. ‘놀아주지 않으니까 삐진 모양이와요. 귀여워라.’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간이라도 봐볼까, 하고 파이몬이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시트리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딴 놈들이 멍청하다 멍청하다 그러지만 내가 이래봬도 서열 제12위의 마왕이라 이거야. 남들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거든.” “어머나, 어머나. 우리 시트리가 그렇게 똑똑한 줄 미처 몰랐사와요.” “흐흥―. 언니는 그러니까, 그 뭐지? 차두살인을 하려는 거지?” 파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차두살인이 아니라 차도살인(借刀殺人)이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충분히 전달되었다. 파이몬이 대답하지 않자 시트리는 그걸 말없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신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그 재수탱이 꼬맹이 년이 인간들이랑 치고박고 싸우느라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우리 산악파는 편하게 진군한다. 그런 거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꼭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네요. 파이몬이 그렇게 생각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사와요.” “으, 으응?” 시트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해달과 같은 표정이었다. “반은 맞고……반은 틀려? 맞으면 맞은 거고, 틀리면 틀린 거 아니야? 으으. 어떻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릴 수 있지?” 시트리는 일신의 무력과 통솔력으로 고위 마왕까지 오른 자였다. 그런데 고강한 무위에 비하여 지략은 아무래도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일단 전쟁터에 들어가면 언제 멍청했냐는 듯 완벽히 본능적으로 전투를 지배하였으나, 전장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두개골에 혹시 뇌수가 살짝 부족한 것 아닌지 의심을 받기 일쑤였다. 바르바토스가 지략과 모략을 총동원하여 전쟁터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전사였다면, 시트리는 무력과 본능으로 전쟁터를 지배하는 전사였다. 어느 쪽이든 전쟁보다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한테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라고 파이몬이 생각했다. 파이몬이 생각하기에 그녀 자신은 군주(軍主)가 아니라 군주(君主)였다. “우리 마왕군이 대륙을 정복하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응? 마인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파이몬이 웃었다. 순진무구한 대답이 싱그러웠다. 시트리가 뺨을 부풀리면서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파이몬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붉은 눈으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을 고른 다음 부드러우면서도 뚜렷하게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요. 시트리처럼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간직하는 경우는 참 드물어서, 무심코 웃고 말았사와요. 말 그대로 막 피어나는 아가씨는 오랜만에 보는걸요.” “…….” 그것이 진심이 담긴 칭찬임을 알고 시트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얼굴이 화악 빨개졌다. 이런 면에서 언니는 반칙적이야, 하고 시트리가 생각했다. 파이몬은 언제나 성실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같은 성실함은 적어도 마왕의 세계에서 극히 드물었다. 배신과 모략이 횡횡하는 가운데 파이몬만은 아군과 적군을 분명하게 갈랐다. 아군을 아군으로 적군을 적군으로 대했다. 자기가 인간과 아인종을 사랑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파이몬은 바르바토스와 구분되었다. 바르바토스 역시 아군과 적군이 명확한 인물이었으나, 그녀는 아군의 주인으로 군림하고자 했다. 반면에 파이몬은 아군을 동포로 받아들였다. 그런 차이 때문에 평원파보다 산악파의 인원이 훨씬 많은 것이리라. “아, 아무튼! 반 틀렸고 반 맞았다는 게 뭔데!” “마인이 살기 좋은 세상. 맞사와요.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인간종에는 그만큼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겠지요.” 파이몬이 대륙 지도를 손바닥으로 스윽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봐요. 인간은 이렇게 많사와요. 마왕군이 대륙을 정벌해도 인간을 전부 멸종시키진 못할 거예요. 아마도 인간은 노예로 전락하여 마인의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계층으로 전락하겠지요.” “흐음. 그게 뭐 어때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잖아.” 파이몬이 쓸쓸한 눈동자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인을 위한 세상일까요? 시트리.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와요. 그건 마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마왕을 위한 세상이예요.” “어?” “마왕은 모든 마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사와요. 즉 마왕에게 마인이란 단순한 타자가 아니와요. 타인을 자신처럼 대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마왕……그렇기에 마왕이야말로 마인의 위에 군림하기 적절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마왕도 마인도, 심지어 아인종조차 그것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설령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마왕이 절대국가를 건설하지 못할지라도, 마왕이 다스리는 절대국가가 만인의 이상향임은 틀림없다고. 이상을 받아들이건 말건 그것이 올바른 방향임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파이몬 또한 그러했다. 사실 누구보다 이상을 신봉했다. 제1차 월맹군에 그녀보다 열성적으로 참군한 마왕이 드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이몬과 바르바토스는 하나의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동지였으며, 거의 모든 마왕이 그러했다. 그러나 제2차 월맹군을 거치면서 파이몬은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그럴까? 마왕이 다스리는 세계야말로 가장 올바른 형태의 세계일까? 그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단지 인간종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왕들은 인간 국가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완전무결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인간종은 방해물에 불과했으므로. 그러나 파이몬은 몇 번의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 또한 마인과 그리 다를 바 없음을 목격했다. 제3차 월맹군에서 이윽고 파이몬은 바르바토스와 충돌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뿐이와요. 인간과 마인이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죠? 바르바토스, 저들도 피를 흘려요. 저들도 괴로워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아요.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와 대화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시발,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바르바토스의 살벌한 눈길에도 파이몬이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관철했다. ‘생각해보세요……만약 세상에 우리 마왕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마왕이 감정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유일하게 인간과 마인을 구분시키는 기준이라면……마왕이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이나 마인이나 똑같지 않을까요? 바르바토스. 이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인간종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마왕이 아닐까요?’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날 이래로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결별했다. 마왕의 존재의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파이몬은, 바르바토스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계는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마계에서 살아가는 마인들은 풍요로운 대지에서 평등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그 꿈을 짊어지는 자가 바로 마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마계의 염원을 대신하고자 열망했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종이 지워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마왕은 만 백성의 감정을 굽어살펴 정당한 통치자로서 군림한다……. 반면에 파이몬은 의문스러웠다. 만일 인간종과 마인이 다를 바가 없다면, 이상사회를 세우겠답시고 인간종을 멸망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 진정한 이상사회란 오히려 인간과 마인 그리고 아인종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 아닐까? 현재 세계 간의 갈등에는 마왕이 있었다. 마왕이 있기에 마인과 인간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종으로 여겼다. 진정으로 이상적인 세계란 '마왕이 없이도'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마왕 아래 평등한 세상. 듣기에는 정말로 좋사와요. 하지만 진실은 이러해요. 마왕이 만인 위에 제왕으로 군림하고, 만인 아래 인간종이 노예로 봉사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로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인지, 소녀로서는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 시트리는 파이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가 파이몬의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이번 월맹군에서 우리 산악파는 튜튼 왕국와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맡게 되었사와요. 다행이지요. 바알 님께서 소녀를 일부러 신경 써주신 거예요……바타비아 공화국과 협력할 기회를 주겠다……바알 님께는 항상 신세만 지네요. 이번엔 그분의 배려를 쓸모없게 만들게 되어버렸네요.” 파이몬이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시트리가 잔뜩 울상을 짓고 파이몬을 바라봤다.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 나 언니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간과 마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려면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사와요. 시트리, 마왕을 중심으로 한 절대군주정이 아니와요. 만인이 주권을 가진 인민으로서 활동하는 국가. 즉 민주공화정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예요.” 바타비아 공화국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화국을 채택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도 공화주의 사상은 널리 퍼져 있었다. 파이몬은 공화파와 협력하고 왕정파와 적대할 속셈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국가를 이끄는 수뇌부는 왕정파였다. 이번 월맹군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자도 역시 왕정파였다. 마인 쪽도 마찬가지. 전쟁에 가장 적극적인 평원파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군주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파이몬이 내심 비웃었다. ‘군주정을 신봉하는 이들끼리 제 살을 갉아먹으면서 싸우는 거죠.’ 마왕군과 왕정파가 신나게 치고박는다. 그 사이에 산악파는 공화파들과 협력한다. 전쟁이 끝난 직후, 마왕군이든 인간계든 군주정 지지 세력은 크게 약화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겨난 틈을 노린다. 마계의 산악파와 인간계의 공화파가 협력하여 단번에 정세를 역전시킨다! 차도살인지계. 시트리의 추측은 그렇기에 반만 맞았다. 인간과 평원파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만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왕정파와 평원파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에게 월맹군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 이유도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이상, 제3황녀는 정통 후계자인 제1황자에게 군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군권을 잡은 황태자가 경쟁자인 황녀를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황녀는 어떤 수단을 취할 것인가……파이몬은 대략적으로 그녀의 선택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바로 그 선택을 황녀가 취하도록 파이몬은 유도할 계획이었다. 파이몬이 양피지 지도를 돌돌 말았다. “어려운 얘기는 이쯤으로 해두겠사와요. 시트리, 오랜만에 저희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볼까요?” “응? 아, 응. 히히. 오늘은 나한테 맡겨, 언니. 내가 언니 천국으로 보내줄게.” 시트리가 그 말만 기다렸다는 기세로 파이몬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침대에 파이몬을 눕혔다. 파이몬이 웃었다. “어머나. 소녀는 난폭한 건 싫은데…….” “언니가 난폭함의 진면모를 몰라서 그래. 지금부터는 날 주인님이라고 불러.” “역할극인가요? 그것도 좋죠. 주인님. 부디 소녀를 상냥하게 대해주시와요.” “어허. 어디서 감히 미천한 하녀가 상냥함을 바라는 것이냐! 고귀한 육봉을 네 년의 더러운 보지에 박아주는 것만으로도 황공히 여기거라.” 시트리가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고 애무를 시작했다. 절묘한 손길을 느끼면서 파이몬이 생각했다. 인간군과 마왕군이 조금 더 치열하게 싸우기를 바랐는데, 단탈리안, 그 남자가 기묘한 수작을 부렸다. 설마 이천 정도의 병력으로 검은 산맥을 완전히 돌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을 조심하라고 인간군에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정보를 흘릴지 고민하면서, 그녀가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자, 잠깐만요. 흐윽, 너무 강해요! 주인님, 조금만, 읏, 약하게……!” “닥쳐. 후우. 아랫입은 이렇게 젖었으면서 정직하지 못하군 그래.” “으읏, 흐아아앙!” ……일단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고민해야겠다. 파이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소설 설정란에 대륙 지도를 올려두었습니다.   00088 왕과 장군 =========================================================================                        새벽이었다. 눈꺼풀 너머로 어렴풋하게 푸른 어스름이 비추었다. 이때쯤 일어나야 옳았다. 하지만 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파고들었다. 무언가가 옳다는 것은 달리 말해, 내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는 소리이므로……궤변인가? 아니다. 무언가가 그릇될 수 없다면 옳을 수도 없다……요컨대 더 자고 싶었다.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무얼, 선봉대에서 제일 높은 공로를 세운 이가 누구인가. 이 정도 게으름이야 다들 눈 감아줄 거다. “주군.”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고 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탐구했다. 답은 간결했다.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요 본질이며 이데아였다.모든 인간은 게으르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즉, 새벽임에도 모포를 뒤집어쓴 나의 현재 행위는 쇼펜하우어적으로 정당화되어 있었다……. “주군, 일어나라.”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로 거짓말인가. 뉴턴이 콧수염을 벌렁거리면서 소리쳤다. 사과가 거꾸로 올라가버렸다! 사과는 떨어지는 데 지쳐 이따금씩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다……새로운 진리에 뉴턴이 흥분하면서 사정했다. 파트너는 놀랍게도 제파르 대장이었다. 그런가. 제파르와 뉴턴이 파트너였는가. 내 무의식은 제파르와 뉴턴을 파트너로 인식했는는가. 나의 창의력에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다. “허. 주군은 오늘 늦잠쟁이가 될 모양새로군.” “어째서 제파르 대장이 수(守)……으흠냐.” “일어나지 않으면 야한 짓을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애첩인가……훌륭한 케미…….” “알았다.”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불이었다. 이불은 때때로 움직이기도 했다. 사과가 하늘로 올라가는 세상에서 이불이 다소 꿈틀거리는 거야 이상하지 않았다. “으응……으읍…….” 따뜻한 것이 하반신을 감쌌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악!?” 두개골이 저릿했다. 강렬한 쾌감이 올라왔다. 등골이 섬칫했고, 허리가 강제로 붕 떴다. 아직 뇌가 신체에 명령을 내릴 만큼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몸은 갑작스럽게 둑방을 뚫고 몰아친 쾌감의 급류에 그대로 휩쓸렸다. “쭈우웁……츄릅, 으응.” “뭐, 뭐, 대체, 으으으윽!”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이불을 들추었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내 하반신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발기도 되지 않은 나의 그곳을 핥고 있었다. 펠라티오 방식이 무척 특이했는데 자지의 껍질을 양손 손가락으로 벌렸다. 껍질이 꽃잎처럼 활짝 벌려지자 그 속을 혓바닥으로 핥았다.――이런 오랄 섹스는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이만한 쾌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라, 라우라. 잠깐만요. 침착하세요. 우리 대화로, 잠깐!” “으읍, 응, 으으응, 으으읍……츄읍.” “끄이이이이잇!?” 또 다시 쾌락이 폭발했다. 내 등이 새우처럼 팔짝 튀어올랐다. 나는 정신이 어벙해져 침대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였다. 마치 허리가 꺾이고 땅바닥에 내버려진 한 떨기 꽃처럼. 어째서인지 머릿속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의식이 새하얘진 나를 향해 라우라가 말했다. “꿀꺽.……좋은 아침이다, 주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평한 목소리였다. “간밤에 편하게 잤는지 모르겠다.” “누구 덕분에 무, 무척 편하게 잤네요.” 안 되겠다. 발음이 떨렸다. 혀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건 뭡니까?” “그거라니. 그게 무엇인가.” “방금 그거요.” 라우라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침 말고도 하얗고 탁한 액체가 라우라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깨끗하게 단장했다. “음, 펠라티오 아닌가.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데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 그저께도 막사 뒤에서 한 걸로 기억한다마는.” “보통 펠라티오가 아니니까 그렇죠!” “아하. 과연.”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은 처음이었나보군. 아까 그건 소녀가 개인적으로 껍질 펠라티오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꺼, 껍질 펠라.” 나도 모르게 따라했다. 공작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귀족 영애가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니었다. 내가 아연실색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우라가 껍질 펠라가 무엇인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일단 껍질 펠라티오는 남성이 발기되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다. 껍질을 이렇게 벗겨내서 속을 핥는 것이 껍질 펠라티오인데, 발기해버리면 육봉과 함께 껍질이 탱탱해지므로 따로 껍질을 벗겨낼 수가 없다. 즉 껍질이 군살처럼 늘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펠라티오이다.” “자지, 육봉, 껍질…….” 소름이 끼쳤다. 누구냐. 어떤 녀석이 열일곱 살 소녀가 주저없이 저딴 단어를 내뱉게 만든 것이냐. 열일곱 살은커녕 서른일곱 살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어법을 지금 라우라가 쓰고 있었다. “이 펠라티오는 여타 펠라티오와 다르게 특별한 쾌감을 선사한다 들었다. 그래서 오늘 시험해봤다. 주군이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기쁘군.” “지나치게 쾌감이 강해요. 게다가 자지 껍질이라니. 불결하지도 않습니까? 소녀로서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체통을.”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은 대소변을 보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는다. 불결할 게 어디 있겠는가.” “아.” 확실히 그랬다. 마왕이 된 이후로 웬만큼 많이 먹거나 하지 않고서야 대소변을 볼 일이 없었다. 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뛰어야 겨우 몇 방울 땀이 흘렀다. 하도 신기하여 왜 이러는가 찾아보았더니 마왕의 신체는 절반 이상이 마나로 이루어져서 그렇다나 뭐라나. 즉 펠라티오할 때 불쾌감을 유발하는 지린내와 때가 나에게는 없었다. 쾌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눈앞의 상황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중에 무언가가 떠 있었다. 홀로그램이었다. 파란 홀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직업 레벨(성노예)이 올라갑니다!」 “…….” 망연자실하게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성노예 직업레벨이 레벨D에서 레벨C로 상승해 있었다. 그러니까, 껍질 펠라인가 뭔가를 했더니 라우라의 직업레벨이 올라갔다는 얘기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무척이나 포스트모던적인 레벨 올리기 방식이었다. “어서 일어나라. 닭이 운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들고,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생활습관에서 비롯하는 법이다.” “으으. 알겠어요.” 내가 일어났다. 사실 마왕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자도 괜찮았다. 나흘 연속으로 밤을 새도 쌩쌩했다. 요새 며칠이고 밤을 새버렸는지라 오늘 조금 많이 자고 싶을 따름이었다. 채근에 떠밀려서 옷을 갈아입자니, 등 뒤에서 라우라가 섬뜩한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음, 효과가 좋군.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깨워야겠다.” “…….” 광렙하시겠어요, 라우라. 몸단장을 끝마치고 막사에서 나왔다. 막사 입구에 놓인 세숫대야로 얼굴을 가볍게 씻었다. 새벽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기지개를 쭈욱 핀 다음,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넓은 평원. 수천 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몬스터 부대에는 따로 천막이나 막사가 필요없었다. 모닥불만으로 충분하고 넘쳤다. 몇몇 몬스터는 모닥불조차 너무 덥다고 싫어했다. 그들은 종족마다 구획을 나누어서 자신의 가족과 동료끼리 살갗을 맞대고 잠들었다. 수만 마리의 흐리멍덩한 감정이 내 마음을 적셨다. 나는 몬스터들의 감정을 잠시간 느끼다가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최근 들어서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능숙해졌다. 읽기 싫으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흥분과 같이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은 외면하기 어려웠지만. 뭐든지 익숙해지려면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때 건너편 공터에서 거한이 걸어왔다. 누구인지 따로 짐작할 필요가 없었다. 4미터가 넘는 거인은 오우거를 제외하고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거인이 짐짓 반가워하며 나에게 왼손을 흔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인지. 바르바토스 님께서 총애하시는 애첩 아니신가.”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였다. 내가 속으로 으겍 질색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정말 좋은 아침이지. 자네의 얼굴을 보니까 안 그래도 좋았던 아침이 더더욱 좋아지려는 것 같군. 카악! 퉤엣.” 벨레드가 땅에 가래침을 뱉었다. 정말 알기 쉬운 태도였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공개적으로 나를 애첩으로 삼겠다고 선언해버린 그날 이후, 벨레드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해왔다. 세상에서 제일 쪼잔한 로리콘 새끼였다. “어이.” 벨레드가 허리를 잔뜩 숙이고 얼굴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오우거 멧돼지야. 네 녀석의 로리콘 냄새가 내 몸에 배어버리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 “예. 무슨 일입니까?” “크흠.” 산멧돼지가 코로 숨을 뱉었다. 뭐지, 이 녀석? 배고픈가? 지금 나한테 밥을 달라고 애교를 떨고 있는 건가? 저기 천막에 훈제인육이 수백 구 있으니까 그거라도 집어먹어라. 이제 와서 나한테 애교를 떨어봤자 곤란할 뿐이다. “큼.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여기 있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제 심복입니다. 아무쪼록 사양하지 마십시오.” “아니, 크흠. 여성이 들어서 좋을 게 없어서 그렇다.” 벨레드가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그 정도는 눈치껏 알아차려!” 내가 깜짝 놀랐다. 머릿속이 절반은 근육으로 된 것처럼 보이는 벨레드에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할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니! 논문으로 발표하면 학계가 한바탕 뒤집어질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이 멧돼지는 '눈치'라는 고급 어휘를 사용했다……어쩌면 녀석은 자기 스스로를 하나의 인격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학계에서는 멧돼지를 과연 아인종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심각하게 토의하겠지. “라우라, 잠깐 벨레드 님과 얘기를 나누겠다.” “알겠습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우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멀찍이 공터 너머로 걸어가자 벨레드가 얼굴을 더 가까이 갖다댔다. 참고로 녀석의 콧구멍은 내 머리만큼 거대했다. 거기서 뜨거운 숨이 쉴 새 없이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다. 무슨 선풍기 바람이 나오는 줄 알았다. “야, 너. 그거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큼. 크흐흠, 그게 말이다. 그거다. 그거냐?” 내가 미친 놈 보는 눈빛으로 벨레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눈앞의 오우거-멧돼지 혼혈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특수한 언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지시대명사로 이루어진 언어 말이다. 녀석은 '그거'라는 한 마디로 의사소통을 전부 해내는 것이었다. 하긴 머릿속을 뇌 대신 근육으로 채운 양반이니까 '그거'라는 단어 이상의 언어를 창조하기도 어려울 만했다. “똑바로 말씀해주세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님이랑 잤냐는 말이다!” 아이구야. 두통이 몰려왔다. 천오백 살 넘게 나이를 처먹은 녀석이 누가 누구랑 잤는가 자지 않았는가 물어보려고 말까지 더듬거렸다. 알 거 다 알 양반이 뭐 이렇게 쑥맥처럼 나오시나. 너 참 한심하구나 하는 목소리로 내가 쏘아붙였다. “그렇게 궁금합니까? 어제도 똑같이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면 벨레드 님이 동정인 줄 알겠습니다.” “누, 누가 동정이라는 거냐!” 벨레드가 펄쩍 뛰었다. 4미터짜리 거한이 발을 구르니까 순간 땅이 약하게 흔들렸다. 멧돼지도 보통 멧돼지가 아니었다. 얘 하나를 구워잡으면 이만 대군이 사흘은 배부르게 먹겠지. 벨레드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단지 지난 천사백 년 동안 금욕해왔을 뿐이야.” “……예?” “바르바토스 님을 영접한 이래로 나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안지 않았다. 그건 바르바토스 님을 향한 내 마음을 모욕하는 짓이기 때문이지.” 벨레드는 몹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씨부리는 것인가, 이 오우거 혼혈아는? “나는 천사백오십육 년 사십육 일 전에 맹세했다. 바르바토스 님과 내가 만난, 진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 바르바토스 님에 대한 나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날까지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겠노라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벨레드 님, 제가 잘 이해가 안 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뭐냐? 내가 얼마나 남자다운지 막 얘기해주려는 참이거늘.” 벨레드가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내밀었다. 솔직히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요컨대 벨레드 님은……천사백 년 동안 성교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게다가 바르바토스 님과 만난 시간을 년 단위가 아니라 하루 단위로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 벨레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만큼 나의 마음은 진짜인 것이야.” “…….” 확신했다. 이 자식은 진짜 또라이였다.   00089 왕과 장군 =========================================================================                        “……대단하군요. 한 명의 남자로서 존경합니다.” “크흐흠. 뭐 이런 걸로 존경씩이나.” 벨레드가 헛기침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구릿빛 뺨에 홍조가 옅게 떠올랐다. 맙소사. 고작 칭찬 한번 했다고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전사로만 등장하던 벨레드가 사실은 세기의 로맨티스트, 아니 밀레니엄의 로맨티스트인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로맨티스트라는 단어를 멍청한 순둥이로 이해했다. “아무튼 그 뭐냐. 그래서 바르바토스 님과 한 거냐?” 벨레드가 초조하게 날 보았다. 눈망울이 참으로 똘망똘망했다. 눈동자만 얼굴에서 따로 편집하면 강아지 시츄의 눈으로 보이겠지. 오우거 몸집에 멧돼지 얼굴, 여기에 시츄의 눈동자……나는 자꾸 헛구역질이 나오려 하는 것을 참아냈다. “그럴 리가요. 벨레드 님도 알지 않습니까, 군단장 각하의 취향을. 그분은 여자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다시피 저는 남자지요.” “하지만 말이다.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너를 애첩이라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건 무슨 뜻이냐?” 벨레드가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뇌근육도 의심이라는 걸 할 수 있는가. 곤란했다. 애첩이니 뭐니 웃기지도 않은 말 때문에 고위 서열의 마왕한테 반감을 사다니, 결단코 사양하고 싶었다. ‘연기 스킬 발동.’ 알리미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책상 모퉁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춥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제법' 낮아집니다.」 스킬 성공을 확인하고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른바 장난감입니다.” “장난감?” “예. 알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대단히 귀중한 정보라는 듯한 몸짓으로 내가 벨레드한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벨레드가 자연스럽게 귀를 이쪽으로 기울였다. “군단장 각하께선 어마어마한 사드입니다.” “그, 그래?” “아무렴요. 군단장 각하께서 여인들과 놀아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 없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이요, 밧줄로 꽁꽁 묶는 것은 전채 요리에 불과하지요. 삼각목마에 태운 다음 세 시간 내리 고문하는 게 기본이고, 촛농 떨구기는 디저트입니다.” 벨레드가 침을 삼켰다. 꿀꺽 소리가 무슨 꿀꺽이 아니라 꿀꺼어억 수준이었다. 멧돼지 혼혈아는 뭐든지 스케일이 컸다. 녀석은 내 말에 따라 생생하게 상상하고 있는지 입가에 침까지 흘렸다. 이놈의 뇌내망상에서는 바르바토스가 현재진행형으로 발가벗은 채 채찍을 휘두르고 있겠지. 변태 자식. “거기서 저는 소위 관람객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요리에 각별한 맛을 더하기 위한 조미료라고나 할까요. 군단장 각하께서 여인들과 즐기시는 동안 저는 계속 벽에 묶여 있습니다.” “벽에 묶여?” 이해하지 못했는가. 과연 천사백 년의 동정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동정은 아니었지만 세상만사 유통기한이 있는 법이었다. 섹스 유경험자라는 타이틀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도 아무리 길어도 천 년보다는 짧으리라. 전차원적 유통기한법에 따라서 벨레드 네놈은 동정이다. “생각해보십시오. 군단장 각하가 얼마나 아름다우십니까.” “음.” “또 각하의 애인들은 또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그런 여인들이 눈앞에서 난잡하게 뒤엉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발딱 흥분한 저를 군단장 각하께선 놀림감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군!” 벨레드가 돌연 진리를 깨달은 달마 대사마냥 탄성을 질렀다. “애첩이라는 말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물론 군단장 각하의 대리석 조각과 같은 몸매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행운아일지도 모릅니다.” 대리석처럼 몸매가 평평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대리석 조각과 같은 맨살을 코앞에 두고서 저는 무력하게도 아무 짓도 못합니다. 박고 싶어도 못 박습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그거 참……천국 같은 지옥이로군.” 벨레드는 나의 처지를 부러워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아리까리한 얼굴이었다. “치욕적이며, 무기력하고, 절망적이지요. 벨레드 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같은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양손으로 벨레드의 오른손을 덥썩 붙잡았다. “겨우 제71위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저 역시 한 명의 마왕입니다. 한낱 노리개로 취급당하다니요. 벨레드 님처럼 전사의 명예를 아는 분이라면 저의 심정을 이해하겠지요!” “으음? 물론이다. 나야말로 진정한 전사이니까.” “제가 지옥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군단장 각하께서 진정한 반려자를 찾는 것입니다. 군단장 각하께서도 한 남자를 진정토록 사랑하게 되신다면 저를 놀림감으로 삼지 않으시게 되겠지요!” 내가 울먹거렸다. 실로 열연기였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보았다면 당장 대회규정을 뜯어고쳐서라도 나한테 남우주연상을 안겨줄 것이었다. 오우거 혼혈아 한 마리 속이는 것쯤이야 일거리도 되지 못했다. “크흠,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느냐? 바르바토스 님이 바람 따위를 피울 리가 없고.” 놀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결혼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만에 하나 결혼한다손 치더라도 신혼여행에서 남자를 서른 명 정도 꼬셔서 남편과 함께 섹스 파티를 벌일 거다. 심지어 남편을 고깃구멍으로 만들어버린 다음 남자들한테 돌림빵 당하도록 만들겠지. 장담해도 좋다. 벨레드가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바르바토스 여신과 내가 아는 바르바토스 년 사이에는 250만 광년의 거리가 놓여 있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벨레드 님, 저는 당신을 본 순간부터 직감했습니다. 벨레드 님이야말로 군단장 각하께 어울리는 천생연분이라고!” “뭐, 뭐시라?” “벨레드 님은 우리 평원파에서 둘째가는 분입니다. 군단장 각하와 함께 평원파를 이끌어나가기에 이보다 더 적합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무려 천사백오십육 년 동안 군단장 각하를 사모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느 한 사람이 천사백오십육 년 동안 짝사랑을 지켜왔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조차 벨레드 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항복할 게 분명합니다.” 내가 침을 튀겨가며 설파했다. “지위와 마음. 두 가지 면에서 벨레드 님을 당해낼 만한 후보자가 없습니다. 단언컨대 벨레드 님이야말로 군단장 각하의 반려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는 분명히 수천 년 전부처 운명적으로 결정된 사항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벨레드 님을 남몰래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도와주다니……무엇을 말이냐?” “뭐긴 뭐겠습니까. 벨레드 님의 짝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드린다는 말씀이지요. 노리개에 불과하다 해도 저는 군단장 각하의 애첩입니다. 군단장 각하가 어떤 남자가 취향인지,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모든 정보를 캐내서 당신한테 전달하겠습니다.” 벨레드의 두 눈동자가 수박처럼 커졌다. “진심이냐?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겠다고?” “저 단탈리안. 이래봬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거짓을 입에 담은 적 없습니다. 저만큼 거짓말과 거리가 먼 작자는 세상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겁니다.” 단지 그 세상은 나 혼자만 존재하는 세상일 뿐이다. “믿어주십시오. 제 진심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면, 저의 불행을 믿어주십시오. 박고 싶은데도 결코 박지 못하고 여섯 시간 내내 벽에 묶여서 바르바토스 님의 맨살을 지켜봐야만 하는, 저의 불행을 믿어주십시오. 벨레드 님! 당신이 군단장 각하와 결혼하는 것만이 저를 무간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줄 해법입니다!” “너……너, 진정…….” 벨레드가 부르르 떨었다. “너 진정 좋은 놈이로구나!” 그리고 두 팔을 활짝 벌려서 나를 안았다. 우득, 하고 뼈가 아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팔뼈가 약간 부서진 것 같았다.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굴에 스마일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하네. 내 여태 자네를 오해했어!” “군단장 각하께서는 꽤 짓궂으시니까요……크읏, 여러 사람을 골려먹으려고 일부러 오해를 사게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바르바토스 님께는 짓궂은 구석이 있지!” 짓궂은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 짓궂음 그 자체이다. “단탈리안. 아니, 형제여! 자네가 나의 연애사업을 도와준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어. 설령 우리의 진심을 여신께서 굽어살피지 아니하시어 천사백 년의 진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나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 결코 형제의 조력을 잊지 않겠네.” “실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팔뚝에서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입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앞으로 벨레드 님을 형님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호형호제의 연을 받아주십시오.” “아아, 그러하지. 동생! 잘 부탁함세! 우리가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나기를 구할 수는 없을지언정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맹세하지!” 우리는 뜨겁게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뼈가 삐걱이는 소리가 다시금 느껴졌다. 오우거 혼혈아의 악력을 버텨내기엔 내 팔뚝이 지나치게 섬세했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귓가에 효과음이 울렸다. 「마왕 벨레드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마왕 벨레드와 특수관계 의형제가 됩니다! 위대한 존재와 특수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신의 명성(악명)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리하여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벨레드와 나, 여기에 나중에 제파르 대장까지 가세하여, 우리 세 명은 평원파의 삼형제라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는 왜곡되어 또 왜곡되어서 '한 명의 무인, 한 명의 장군, 한 명의 책사가 대의를 위해 결의하였다'라고 퍼지기에 이르렀다. 실상은 두 명의 로리콘과 한 명의 범인이 있을 따름이었다. 삶이란, 참. * * * 적색 산성 앞마당에 군진을 차린 지 나흘이 흘렀다. 그동안 변경백들은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우리가 기다려준 것이었다. 여기에는 마왕군과 인간군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마왕군에게 식량이란 우선 인육이다. 긴 시간 동안 소규모 전투들을 거치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대규모 전투를 겪는 게 이롭다. 그래야 손쉽게 식량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인간군에게도 소규모 게릴라보다 대규모 회전이 좋다. 소규모 게릴라전을 강요할 시에 마왕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군을 해산하여 사방으로 퍼트리는데,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몬스터가 뻗어나가면 인간의 마을들이 초토화 되어버린다. 설령 전투에서 이길지라도 촌구석의 백성까지 씨가 말라버려서야 도저히 영지를 재건할 수 없다. 영주한테 마을은 단순히 세금을 징집할 단위가 아니다. 각 마을은 몬스터에 대항하는 최전선이기도 하다. 딱히 마왕군이 이끄는 몬스터 부대가 아니어도 대륙에는 몬스터가 넘쳐난다. 하다못해 마을 뒷산에도 고블린이 산다. 이처럼 작게 무리를 지어사는 몬스터들을 억제하는 것이 다름아니라 마을이다. 마을은 자경단을 육성하여 자체적으로 주변의 몬스터를 소탕한다. 만일 많은 숫자의 마을이 일거에 사라진다면, 몬스터들은 자기네를 억제하는 마을 자경단이 사라진 틈을 타서 순식간에 세력을 불릴 것이다. 영주 입장에서 마을이란 세금을 얻는 재원일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몬스터의 확장을 제어해주는 군사적 단위. 손쉽게 버림패로 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원래 세계와 다르게 이곳에서는 평민들의 발언권이 꽤 강하다. 중앙집권력이 어마무지하게 강한 국가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평민을 억압할 수 없다. 다만 반작용이라고 할까. 영주 또한 '마을에 문제가 생겼다고?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지 그래' 하고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잦다. 복지정책이 상당히 약하다. 흑사병이 좋은 예시이다. 대륙에 흑사병이 창궐하기 시작하자 인간 영주들은 곧바로 자기 식구부터 챙겼다. 평민층에 보급해도 기껏해봤자 직속의 성하(城下) 마을에 뿌리는 정도였다. 소문에 따르면 흑사병을 도리어 기회로 여긴 영주마저 있다던가. 블랙허브를 얻기 바란다면 마을의 자치권을 상당 부분 넘기라면서 협박하는 영주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상황이 이럴진대 하나의 국가에서 살아갈지라도 지역과 지역, 귀족과 평민, 도시와 시골 사이에 어떤 유대감 따위가 생기기란 요원했다. 어디 평민한테 물어봐도 자기 자신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민'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보다 '어디 마을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리라. 이들이 다함께 연합하는 경우는 월맹군처럼 몬스터의 대규모 침공이 있을 때였다. 검은 산맥을 지키던 수비군들은 극히 드문 반례에 속했다. 여하간, 마왕군이나 인간군이나 대규모 회전을 바라고 있었다. 우리는 변경백들이 군대를 집합시켰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병력은 약 3만 5천. 그중 기사가 물경 천오백 명에 달한다니 매우 비정상적인 군대였다. 이에 월맹군 제6군단에서 군의가 열렸다. “건방진 가축 새끼들이 슬슬 한자리에 모이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거대한 군막이었다. 열여덟 명의 마왕이 각탁 양옆에 앉아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상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래봤자 돼지가 갑자기 오크가 되는 것도 아니지.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때가 다가왔어. 하지만 불쾌한 소식이 하나 있군.” 그녀의 입끝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파이몬, 제1군단의 창녀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지. 그 허벌보지 년은 보나마나 인간과 우리가 서로 자멸하기를 바라고 있다. 여전히 음흉하기 그지없는 창녀야. 인간군을 싸그리 전멸시키는 것은 이쪽에서 바라던 바이나, 그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걸.” 바르바토스가 주위를 스윽 바라보았다. “인간군을 섬멸하면서 동시에 파이몬 년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고 싶다. 이에 대해 어디 좋은 의견 없어? 사양치 말고 말해봐.” 막사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당연했다. 바르바토스의 저 말은,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변경백을 물리칠 방도가 있느냐고 질문한 셈이니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바르바토스도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다른 마왕들이 멋쩍은 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손을 들어올린 마왕이 있었다. 내 오른손이었다.   00090 왕과 장군 =========================================================================                        “흐응.” 바르바토스가 이쪽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콧소리까지 곁들이면서. 꼬맹이 주제에 눈동자에 묘하게 색기가 있어 곤란했다. 부디 공적인 자리에서는 섹스 어필을 자제해줬으면 한다마는……봐라. 벨레드 형님도 제파르 형님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애가 어른들을 놀리면 못 써요. “우리의 꾀주머니 족제비 마왕, 단탈리안. 이번에는 얼마나 질 나쁜 수작을 생각해왔길래 그리 당당하게 손을 드실까?” 내가 멋쩍게 웃었다. “인간을 앞세웁니다.” “인간을 앞세워? 무슨 뜻이냐?” “변경백의 군대는 크게 기사단과 징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징집병은 우리 마왕군이 두려워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촌민입니다. 이 촌민들을 설득합니다. 우리 마왕군은 항복하는 인간에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가도록 허용하겠다. 다만 우리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라. 안전만 보장되면 그들로서도 전쟁은 피하고 싶겠지요. 변경백의 군세는 크게 약화될 것입니다.” 농민들이라고 영지에게 대단한 충성심이 있어서 군대로 집합한 게 아니다. 마왕군에 마을단위로 대항하느니 한곳에 모여서 집단적으로 대항하는 편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철저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조직된 군대, 그렇기에 강한 결집력을 발휘하는 군대.……만약 이쪽에서 더 큰 이득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기도 한 군대이다. “인간놈들이 우리를 쉽게 믿을 리가 없는데.” “그렇기에 같은 인간을 앞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동족이 설득하면 인간들도 귀를 기울이겠지요. 마침 저에게 적당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합니다.” 내 던전 주변에 사는 마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파르시를 위시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일종의 사신단을 꾸리게 만든다. 그들이 변경백 영지의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다. “대체로 촌민들은 반신반의할 겁니다. 설득에 호의적인 마을이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마을이 있겠지요. 그때 별동대를 동원합니다. 투항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인 마을들을 본보기 삼아 쓸어버리지요.” “인간종이 자네의 말처럼 쉽게 협력하겠는가.” 제파르 대장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증오한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인간종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인간종은 기꺼이 우리에게 복속하겠지요.” “그게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 내 말이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는지 마왕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단지 시도해봐도 손해볼 게 없었으므로 일단 채택되었다. 결과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항복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친 마을이 무사한 반면, 권고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마을이 초토화되자 많은 촌민이 앞다투어 항복해왔다. 닷새가 지나자 변경백의 군세 3만 5천 중에 2천 명 가량이 탈영했다. 변경백들은 깜짝 놀라서 탈영한 마을――탈영은 마을 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서너 개를 인류를 배신했다는 명목으로 쓸어버렸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그들이 마을을 공격할 때 도리어 우리 제6군단에서 마을의 원군을 파견했다. 우리는 마을들과 약속한 바를 실제로 지켜보였다. 반면에 명목상으로라도 영지민 보호의 책무가 있는 변경백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마을을 공격했다. 징집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대규모로 탈영했다. 최종적으로 변경백들의 군대는 1만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제대로 된 결전을 펼치기도 전에 군대가 반쪼가리 나버린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피를 토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불쌍하게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것은 마왕군도 마찬가지였다. 마왕군은 정말로 별 대단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다만 사신단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항복문서에 적힌 바에 따라 마을을 보호해주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적군이 붕괴되자 마왕들은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무슨 요술사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미소 지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여러분은 두 가지 사항을 간과했습니다. 첫 번째는 편견에서 기인합니다.” “편견?” 벨레드가 다른 마왕의 대표자가 되어 내게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인간군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의 집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허나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저 많은 숫자의 인간이 하나로 똘똘 뭉치겠습니까? 저들에게도 계급이 있고, 지역이 있으며,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로 뭉친 까닭은 오로지 우리 마왕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음이 밝혀진 바에야, 굳이 민초까지 우리한테 대항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한테도 똑같이 편견이 있다. 마왕들이 이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마왕군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하겠지. 그러나 이쪽에는 평원파니 산악파니 서로 대립하는 내부집단이 당연히 있다. 어찌 없겠는가. 마왕들도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인간들을 하나의 인간종으로 여겼고, 인간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편견은 검은 산맥 수비군에서 기인했다. 검은 산맥의 산성 수비군들은 특이하게도 인류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마왕은 무조건 인류의 적이며, 그런 자들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는 자들만이 산성 수비군에 지원했다……마왕들이 대륙을 침공할 때 항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인간군은 산성 수비군이었고, 그것이 선입견을 제공했다. <던전 어택>에는 인간계가 분열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원래 스토리에서도 저러한 선입견이 무너지면서 인간계가 두 갈래로 나뉜다. 적당히 마왕에 협력하면서 생존을 추구하자는 쪽, 그리고 마왕을 몰살해버리자는 쪽. 나는 본래 예정된 시나리오를 조금 앞당겼을 따름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이 간과한 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여러분은 '월맹군'이라는 단어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안겨주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보통 길어봤자 60년입니다. 제7차 월맹군이 200년 전에 있었습니다. 저들에게 월맹군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과거의 악몽과 같습니다. 그 악몽이 재래한 것입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겠지요.” 마왕은 수명이 무한하다. 어디가 다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살아간다. 마왕에게 이번 월맹군이 '어이구, 또 월맹군이네' 정도의 인식으로 다가온다면, 인간들에게는 '세상에! 마왕들이 연합해서 침공한다고?' 정도의 인식으로 느껴진다. 몬스터 스무 마리만 몰려와도 인간의 마을에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런데 몬스터 수만 마리가 침략한다는 것이다. 공포 이외에 무엇도 아니다. 검은 산맥에서 산성 수비군이 보인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녀석들은 우리가 월맹군의 선봉대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최후에 가서야 알아차렸다…….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촌민 입장에선 인간 영주나 마왕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편견과 인식인가……제국군이 불쌍해지는군. 전투 한 판 없이 군대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렸으니 말일세. 전술이란 모략일지니. 자네와 같은 모략가가 있음은 우리 마왕군에는 축복이요, 인간군에는 저주로군.” 제6군단은 거침없이 진군했다. 이제 제국군은 병력 면에서도 제6군단에 뒤쳐졌다. 제국군 일만칠천, 마왕군 일만팔천. 원래부터 병사의 질에서 몬스터가 압도적이었다. 이래서야 공성전을 벌여도 마왕군에 필패할 수밖에 없었다. 변경백들은 분루를 흘리며 후퇴했다. 그들은 성하 마을까지 포기했다. 제도의 중앙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내륙 깊숙한 곳까지 달아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탈영병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충 탈영병의 정보를 종합해보니 변경백들을 끝까지 따라간 군대는 도합 8천 명도 안 되었다. 대승이었다. “씨발, 이게 뭐야.” 자신이 거둔 승리에 바르바토스가 욕을 내뱉었다. 현재 우리는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머물던 영주성에 모여 있었다. 값비싼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접견실. 바르바토스는 변경백의 옥좌에 앉아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존나 뭐냐고! 변경백이 이렇게 쉬운 새끼들이었어!?” 바르바토스의 포효에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마왕들도 바르바토스와 심정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혈입성입니다. 조금 더 기뻐하셔도 좋을 텐데요.” 나는 바르바토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자타를 불문하고 제6군단의 최고 작전참모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시켰으니 당연했다. “아니, 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가 개고생한 건……? 여기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게 세 번밖에 없었고, 그것도 좆빠지라 전투해서 겨우겨우 얻은 거였는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지요.” 바르바토스는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실시간으로 멘탈이 붕괴하고 있었다. 사실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여기 접견실에 모인 대다수의 마왕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뭐야? 우리가 이천 년 동안 개지랄한 게 전부 삽질이었다고……?” “삽질이란 표현은 다소 경거망동하군요, 백작 각하.” “……백작 각하? 그건 또 뭐야?” 내가 품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이 땅의 신민들은 각하를 정당하고도 유일한 변경백 영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백작 각하께는 이제부터 영지민을 굽어살필 의무가 뒤따르며, 영지민에겐 백작 각하의 소집령에 부응할 의무가 생깁니다.” “어, 어……?” “경하드립니다. 마왕으로서 최초로 마인과 인간, 양 종족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셨군요. 지난 역사를 통틀어서 이만한 업적을 달성하신 분은 바르바토스 님뿐입니다. 오늘부로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서열 제8위의 마왕이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서 군림하십니다.” 내가 깍뜻하게 허리를 숙였다. “잠깐만! 시발, 무슨 개소리야. 내가 인간놈들을 왜 보살펴!”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나는 은근한 어조로 바르바토스에게 말했다. “영지민을 다스리는 자가 귀족인 것은 당연하겠지요.” “야, 단탈리안 너 개새끼야. 솔직히 불어. 너 새끼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백작 각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파이몬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폰 로젠베르크를 물리치길 원한다고. 저는 각하의 요구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륙 정복이 끝나는 그날까지 임시로 인간을 다스릴 뿐입니다. 온 대륙을 마인의 세상으로 만들고난 다음에 인간종을 팽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인간종을 이용해먹죠.” “하아. 이상하다. 뭔가 이상한데, 시발. 이긴 건 맞는데 왜 이리 찜찜하지.”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이런 의미없고 귀찮은 일을 하기는 싫다고, 영지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몽땅 나한테 떠넘겼다. 내가 첫 번째로 시행한 정책은 부대를 동원하여 영지의 야산에 서식하는 야생 몬스터를 싸그리 토벌하는 것이었다. 인간군과 전투하여 인육을 얻지 못한 이상, 대용책으로 몬스터 고기가 필요했다. 몬스터가 몬스터를 토벌하는 광경에 영지민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새로운 영주의 과감하고 자비로운 정책에 만세 삼창을 연호했다. 군대 식량도 공급하고 민심도 얻고 일거양득이었다. 일만팔천의 몬스터 부대는 성하 마을에 주둔케 했다. 성하 마을 출신의 인간들은 변경백을 따라갔기에 마침 주둔지로 적당했다. “주군은 음험하다.” 탁자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날 보고 라우라가 말했다. “결국 이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과찬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저 <던전 어택>에서 벌어질 일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세간에서는 그걸 치트라고 부르겠지만, 뭐 어떤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00091 왕과 장군 =========================================================================                        집무실에 깃펜이 종이를 훑는 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과감하게 잉크병에 펜을 쑤셔 넣어 굵은 글씨로 검게 썼다. 어찌나 힘 좋게 펜끝이 내달려 가는지. 문서는 당연하게도 내가 배운 적 없는 언어, 합스부르크어와 고대제국어로 써 있었다. 의미가 자연스럽게 저절로 파악되었다. 읽기는 물론 쓰기까지, 나는 자유자재로 이 세계의 언어를 구사했다. 만일 마왕이 아니라 인간으로 환생했으면 외교관으로 활약했을지 모르겠다. “주군과 군단장은 파이몬이 차도살인지계를 획책한다고 판단했다.” “예, 그렇습니다.” 서류를 찬찬히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일견 타당해보이는 파이몬의 계략에는 허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호오.” “제6군단은 합스부르크 방면의 인간군을 상대한다. 반면에 산악파 제1군단은 튜튼 왕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의 인간군을 대적하지. 여기서 파이몬이 차도살인을 노려봤자,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약화될지언정 딱히 튜튼과 바타비아의 군세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제1군단이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차도살인일까……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글쎄. 단순히 우리 제6군단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을 노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기엔 제1군단의 태도가 지나치게 허술하다.” 라우라가 단언했다. “그들은 아직 출병하지도 않았다. 책사라면 누구든 자기의 계략을 숨기려드는 법, 만약 파이몬 군단장이 오로지 제6군단이 약화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하다못해 제1군단은 검은 산맥으로 출병하여 전투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다……이쪽도 인간군과 열심히 싸우고 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명분을 취했겠지.” 파이몬은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마계사회에서는 파이몬과 산악파를 가열차게 비판했다. 동족이 피를 흘려 싸우는데도 이기적으로 처신하는 자들, 이라고. “굳이 비난을 자초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혹시 파이몬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닌가? 모종의 이유가 있어 지금까지 꼼짝하지 않고 있다……그렇게 판단해야 옳다.” “재밌군요.” 나는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깃펜을 놀렸다.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을 변경백 산하의 남작으로 봉신한다는 문서였다. 이로써 제국의 공문 형식에 맞추어서 한 명의 백작과 두 명의 남작이 탄생했다. 마을 촌장들한테 혈서까지 얻어냈다. 마왕 벨레드와 마왕 제파르를 정정당당한 영주로 옹립한다는 혈서를.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파이몬의 진정한 의도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실로 간결하게 해결되는 답안이 있다. 마왕군에 평원파와 산악파가 있듯이,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역시 내부집단이 따로 경쟁하는 것이다. 주군은 지난 번 회의에서 지적했다. 마왕군이든 인간군이든 서로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거대한 집단에서는 응당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상충하기 마련이며, 많은 파벌이 대립한다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서류작업은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서류작업이 체질에 맞는 것 같았다. 단순히 형식에 맞추어 수사학을 발휘하여 글자를 적어넣는 것 뿐인데도, 무언가 뿌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사람을 속일 때와 비슷한 쾌감이 느껴졌다. 본래의 처지보다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다는 점에서 서류 또한 일종의 거짓말 아니겠는가.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적당히 중간관리직이 되어 서류놀음이나 했을 텐데……아쉬웠다. 마왕은 근성이 썩어빠진 로리콘에게나 알맞지, 나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성격과는 원체 어울리지 않았다. “라우라. 위스키 좋아합니까?” “주군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서랍에서 위스키와 유리잔을 꺼내왔다. 폰 로젠베르크의 창고실에서 냉큼 쌔벼온 물건이었다. 변경백은 애주가였는지 창고에는 보물 대신 희귀한 술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대다수는 창고실의 진풍경에 눈이 홱 돌아버린 바르바토스가 가져갔지만, 나도 네 병 정도는 가로챌 수 있었다. 라우라에게 유리잔을 건네어 쪼르륵 술을 따랐다. “건배.” “단탈리안을 위하여.” 째앵, 하고 유리잔이 기분 좋게 떨렸다. 잉크 냄새가 들러붙은 숨구멍으로 위스키의 독한 향기가 물씬 스며들었다. 나는 혓바닥을 술로 적시었다. 두개골이 개운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데 파르네세는 사르데냐 왕국의 공작 가문이지요. 그곳에서 자라난 라우라는 아마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떤 내부적 상황에 놓였는지도 자세히 알 겁니다. 아닙니까?” “맞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소녀의 가문에선 귀동냥만 해도 능히 대륙 정세를 알아보는 것이 가능했다.” 덕택에 마왕들은 느끼지 못한, 석연치 않은 구석을 파악했는가. 왠지 모르게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뜨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기분이 쉽게 다운하고 쉽게 업하는 조울증 증상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여기엔 지금 내가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아인종이 없었다. 이 기분 좋음은 전적으로 나의 감정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 라우라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현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누구든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몰락해도 제국은 제국, 절대군주의 자리를 놓고 황위계승권자 세 명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황태자이자 본처 소생의 제1황자. 둘째 아들인 제2황자. 마지막으로 셋째 딸이자 후첩 소생의 제3황녀. 본래 황제에게는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었으나, 세 명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공식적으로는 전염병과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었다고 발표되었지만 그걸 순순히 믿는 사람은 꽤나 적었다. 대부분의 식자층은 황족들이 정쟁에 희생되었다고 믿었다. 그건 진실이기도 했다. 게임에 제3황녀 엘리자베트를 히로인으로 삼은 루트가 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이른바 진히로인 루트라고 불리는 시나리오인데, 주인공이 용사이자 제3황녀의 애인이 되어 대륙을 호령하게 된다. 거기 시나리오 후반쯤에 가면 제3황녀 엘리자베트가 고백한다. ‘셋째 오라비와 친동생을 죽인 사람은 본녀다.’ 달빛이 처연하게 비추는 창가에 서서 엘리자베트 황녀가 웃는다. 제법 유명한 게임 장면이다. ‘그때 본녀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에 오라비와 동생을 직접 이 두 손으로, 피를 묻히며 죽였다. 그리고 사고사로 위장했지. 참으로 악독한 여인이 아니더냐? 악마가 기생하지 않았다면 어찌 여아가 그처럼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겠는가?’ ‘그때 황자들을 살해한 것은 악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비추는 사람은, 저주 받은 인생을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에 슬퍼하는 한 명의 여인입니다.’ 주인공의 대사에 제3황녀가 홀라당 넘어간 것은 당연지사. 이후에는 그렇고 그런 장면이 이어진다. 덧붙여 말하자면 제1황녀와 제2황녀는 집단강간을 당하는데, 치욕을 참지 못하여 자살한다는 설정이었다. 다름아니라 친아빠와 친오빠, 즉 황제와 황자들한테 돌림빵 당했다. 막장 드라마 뺨 때리는 황실이 아닐 수 없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황실부터 썩어빠졌다. 파벌 싸움도 치열했다. 이에 제3황녀가 우국충정의 신민들을 규합하여 제국을 뿌리부터 재생시킨다……이것이 던전 어택의 주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때 주인공 용사는 황녀의 세력에 명분을 더해준다.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를 민중이 지지하고, 용사가 황녀를 지지하여, 결과적으로 민중은 황녀를 지지하게 된다. 나쁘게 말하면 주인공 용사는 프로파간다용 간판에 불과하다. 뭐,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니 상관없을지 몰라도 그 해피엔딩이란 게 지금 시점에서 15년 뒤 일어날 이야기. 게다가 이 세계에는 나라는 이레귤러까지 끼어들었다. 황녀가 해피엔딩을 찍기란 요원했다. 라우라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들었다. “소녀가 알기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권은 대부분 황태자가 쥐고 있다. 중앙군은 황자파와 황녀파로 나뉘어 있지만 변경백들이 절대적으로 황자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고 소녀는 추측했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직시했다. “혹시 파이몬 군단장은 제3황녀와 모종의 동맹을 맺은 것 아닌가.” “…….” “만약 소녀의 추측이 옳다면 지금 변경백들의 군대와 합류하고 있는 중앙군은, 황녀가 아니라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임에 분명하다.” 나는 맞장구치지 않고 위스키잔을 기울였다. “황태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중앙군과 변경군을 합치면 물경 5만 대군이 생겨난다. 제국군 5만이 고작 월맹군의 일개 군단에 패배할 리 없으리라 낙관하겠지. 일단 승리에 확신이 들면 군지휘권에 있어 황녀를 철저히 배격할 것이다. 당연하다. 황태자는 홀로 군공을 독식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음. 단독으로 마왕군을 섬멸한다면 그 위명이 천하를 흔들겠군요.” “그렇다. 귀족과 민중은 하나가 되어 황태자를 지지하게 된다. 황위경쟁에서 단숨에 제3황녀를 제치고 선두에 올라서는 것이다. 황태자에게 이번 월맹군의 침공은 위기가 아니라 천금 같은 기회로 보일 터.” 내가 흐음, 하고 일부러 간을 봤다. “재미있는 추측입니다. 그럴듯하군요.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그럴듯한 추측만으로 우리 제6군단의 방침을 정할 수는 없지요.” “주군이 그렇게 말하리라 예상했다.” 라우라가 품안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변경군과 합류하는 합스부르크 중앙군의 장군 목록이다. 어디에도 제3황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언제 이런 정보를 입수했습니까?” “지난 번, 주군이 바르바토스 군단장한테 인간을 앞세우라 간언했을 때부터.”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때 이미 주군이 수상쩍게 행동함을 느꼈다. 민초들이 우리 마왕군에 복속할지라도 당장의 위험을 넘기려 할 따름이지, 진심으로 마왕을 섬기진 않는다. 약간의 위기만 들이닥쳐도 민초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배신할 터. 실로 이상했다! 소녀는 주군이 사악하고 음험하며 겁쟁이에다 약자 중의 약자임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쓰게 웃었다. “충신이 입에 담았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악담이네요.” “아니, 칭찬이다. 약자이니까, 약자이기에, 무엇이 위험으로 다가오는지 누구보다 철저하게 감지한다. 언제든지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 따위, 주군이 방치해둘 리 만무하다. 주군은 위험에 한하여 짐승과 같은 후각을 지녔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방을 처저하리 만치 물어뜯는다. 주군이 바르바토스 군단장한테 건넨 조언은 단적으로 말해 주군답지 않다.” 어이쿠야. 라우라는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해서 사람을 멋쩍게 만들었다.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생각은 이러하다. 황태자는 황위계승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군권을 독점했다. 반면에 파이몬 군단장은 제3황녀와 손을 잡았다. 목적은 단 한 가지. 황태자의 원정군이 우리 제6군단에 의해 섬멸될 경우, 제3황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내가 다시 위스키를 머금었다. 맛있었다. 음, 확실히 비싼 술은 달랐다. 바르바토스한테 졸라서 몇 병 더 얻어놔야겠다. “제3황녀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선언할 것이다. 신생 합스부르크 제국은 월맹군에 어떠한 적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전쟁에 신음하는 민초를 위하여 당장 휴전할 것을 제안하노라고. 대륙의 모든 인간과 마인이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파이몬 군단장이 응답한다.――나 파이몬, 서열 제9위의 마왕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여 신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휴전 요청을 승락한다.” 라우라가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제법 어울렸다. “주군. 우리 제6군단은 어떻게 되겠는가?” “제1군단과 합스부르크 제국군, 양쪽에 포위되는 꼴이 되겠지요.” 내 입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라우라, 훌륭합니다. 제 추론을 따라잡았군요. 맞습니다. 파이몬 제1군단 군단장이 여태까지 출병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게을러서도, 멍청해서도 아닙니다. 승냥이처럼 천천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1군단의 목적지는 튜튼 왕국 방면이 아니겠군.” “예.” 내가 유리잔을 치켜들었다. “제1군단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합스부르크 제국입니다. 파이몬은 제국군과 연합하여 우리 군단을 포위할 속셈입니다.”   00092 왕과 장군 =========================================================================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온도가 하나 내려간 것 같았다. 창밖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유리창을 열어 내려다보니, 성 안마당에서 벨레드 형님이 술독을 껴안고 몇몇 마왕과 작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벨레드 형님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훨훨 흔들었다.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성벽 너머로는 낮은 구릉의 전나무밭들과 붉은 황토가 한나절 햇살로 빠져드는, 한없이 나른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위스키를 머금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연 속에 정지된 어떤 영원감 같은 것이 있었다. 잔치의 웃음소리가 그것을 길게 잡아당겼다. “파이몬 군단장은 마계를 배신하게 된다. 동족을 공격하는 것이다. 굳이 평원파가 아니더라도 중립파나 무소속 마왕 또한 분개하지 않겠는가?” “명분을 만들어내면 간단합니다. 마계인은 벌써 이천 년이나 원정의 실패를 겪고 있습니다. 월맹군에 의문을 갖는 마계인도, 아니,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마계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쿤쿠스카 상단의 주인이자 진조 흡혈귀인 그녀는 마왕들의 실태에 깊이 실망했다. 결국 이바르는 마왕군을 배신했다. 용사가 이끄는 용병단에 투신했다. 마왕들한테 학을 뗀 마계인이 비단 그녀 한 명뿐이겠는가. “성공할 가망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원정하는가? 매번 월맹군이 실패할 때마다 수많은 오크와 오우거, 그외 종족이 죽어나갑니다. 마왕들은 마인의 생명을 담보로 도박에 뛰어드는 것 아닌가……그런 불안감이 분명 있습니다.” 산악파가 평원파를 제치고 마왕군 제일의 파벌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산악파의 대두는 마계사회의 동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마인의 생명과 군자금을 낭비할 바에야 적당히 인간종과 타협해서 살아가자――그같은 온건파가 현재 강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평원파와 제3황녀가 손을 잡습니다. 평원파는 제3황녀의 휴전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제3황녀는 마왕군이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 점유하고 있는 영토를 인정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로써 마왕군은 비록 대륙을 정복하진 못해도 일정한 영토를 확실하게 점령하게 됩니다.” 가망이 없는 대륙 정벌인가, 확실한 영토 점령인가. 마계사회에서 어느 쪽을 더 선호할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마계사회는 명백히 이천 년의 원정에 지쳤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면 기꺼이 파이몬의 영단에 박수갈채를 보내리라. '케케묵은 명분보다 확고한 실리를 쟁취한 마왕.' 파이몬은 그렇게 찬사받겠지. 내가 미소 지었다. “월맹군 이천 년 역사상 첫 번째 업적이로군요. 파이몬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제로 피를 흘려가며 싸운 것은 파이몬이 아닙니다. 우리 평원파지요. 그런데 파이몬은 제3황녀와 밀약을 나눈 것만으로 모든 공로를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모략일지니. 백 명의 주먹보다 한 사람의 혓바닥이 두렵습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이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우라, 우리는 예전에 전쟁의 요소로 천지인(天地人)을 거론한 적 있습니다. 제6군단은 제1군단에 비하여 세 가지 요소 모두에서 뒤처집니다.” 먼저 명분. 제6군단에는 대륙정벌이라는 실로 옛날옛적의 명분만이 있는 반면, 제1군단에는 마계인을 대륙으로 이끄는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다. 전자가 명분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실리까지 겸한다. 다음으로 지세. 파이몬의 시나리오대로 사태가 흘러가면 제6군단은 앞뒤로 포위된다. 제1군단과 제3황녀파의 군대에 의하여.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영지민의 민심은 단숨에 흔들릴 것이고, 나중에 이 땅을 차지할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겠지. 삼면초가에 이어서 자중지란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적 차원. 평원파 제6군단은 일만팔천의 병력을 가졌다. 변경백-황태자의 제국군과 싸우고 난 뒤에는 병력이 급감하겠지. 반면에 마왕군에서 제일가는 세력인 산악파 제1군단은 삼만의 병력을 가졌다. 여기에 제3황녀파의 군대가 추가된다. 평원파는 최소 서너 배가 넘는 적군과 싸우도록 강요된다. 결과는 자명. “포위되어 섬멸되겠군…….” 라우라가 탄식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군단장이 휴전협정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에 들어서면 오히려 마계인의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대륙에 영토를 얻을 절호의 기회를 자질구레한 명분에 홀려 놓치고 있다, 라고.” 파이몬은 거짓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동족과 싸우게 되어 슬프고 또 슬프지만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우리는 나아간다. 마계의 비원을 위하여 비극을 무릅쓰자, 동지들이여……. 그 결과 평원파는 전멸한다. 산악파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일대를 점령한다. 산악파가 명실상부 마왕군 유일의 거대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럼 중립파도 무소속 마왕도 오피니언 리더인 산악파에 이끌려갈 수밖에 없다. 파이몬은 서열 제9위이자 실질적으로 마왕군을 지배하게 된다. 산악파에 의한 절대패권. 그것이 목표이리라……파이몬은 자기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한다는 단점을 빼면 꽤나 하는 작자였다. “심각한 사태이지 않은가.” 라우라가 다소 다급하게 말했다.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다. 어찌할 생각인가?” “뭐. 파이몬의 계략에 갈채라도 칩시다.” “……주군.” 라우라가 눈을 가늘게 떠서 노려봤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전투를 하지 않고도 전쟁을 승리한다, 실로 훌륭한 계책이었다. 전투들의 집합이 곧 전쟁이라 믿는 바르바토스와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솔직히 나는 바르바토스보다 파이몬의 방식이 취향에 맞았다. 어디까지나 음험하고, 음흉하고, 조용하며, 용서없이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까는 그런 방식 말이다. 이런, 라우라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장난은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 제6군단에는 한 가지 수밖에 남지 않습니다. 황녀의 휴전협정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전쟁하는 것을 바로 관둬야지요. 본래 파이몬이 얻고자 했던 명분을 우리쪽에서 가로챕니다.” “음.” 라우라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둘둘 말았다. 그녀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렇군.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제1군단이 아니라 제6군단, 그러므로 마계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도 제6군단인가……나쁘지 않다.” “대륙정벌을 외치던 평원파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겠지만요. 뭐, 평원파 여러분께는 이참에 세상살이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시라고 말씀드리죠.” 대체로 바르바토스 로리 백작께서는 욕심이 너무 컸다. 그녀는 뭐든지 얻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허면 파이몬 군단장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터인데.” “아니요. 우리 제6군단이 휴전협정에 동의하더라도 파이몬으로서는 손해볼 게 전혀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되물었다. 라우라는 금빛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튜튼 왕국인가!” “맞습니다.” 역시. 라우라와는 대화하는 맛이 났다. 내가 원하는 질문과 대답을 쏙쏙 던져주었다. 자고로 대화에 적당한 긴장감이 흐르려면 라우라 정도의 식견을 가져야 했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대화가 뭐 흥미롭겠는가. “제1군단은 그저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로 진군하기만 해도 크나큰 이득을 얻는다. 원래 제1군단이 튜튼 왕국으로 진군하려면, 우리 제6군단이 그러했듯 검은 산맥의 수비 거점을 돌파해야만 한다. 허나 제1군단은, 우리 제6군단이 미리 뚫어놓은 통로를 이용함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검은 산맥을 넘어오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흥분해서 말했다. “휴전협정이 무사히 성사되면, 제1군단은 그대로 기수를 돌려서 튜튼 왕국으로 침공한다. 그것도 대(對)마왕군 수비 거점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튜튼 왕국 남부 방면으로! 제1군단은 잘만 하면 튜튼 왕국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내가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턱을 살며시 끄덕였다. 그렇다. 파이몬으로서는 제6군단이 휴전협정을 거부해도 그만, 찬성해도 그만이었다. 거부하면 제3황녀파와 연합하여 제6군단을 섬멸,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한다. 찬성하면 방향을 반전하여 튜튼 왕국을 침공한다.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과 튜튼 왕국은 우방이었고, 튜튼은 합스부르크 방면의 국경에 별다른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 거기로 제1군단이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것이었다. 튜튼 왕국은 형편없이 유린되겠지. 결과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석을 점령했을 뿐인 제6군단에 비해, 왕국 하나를 통째로 점령하는 제1군단이 훨씬 더 위대한 군공을 세우게 된다. 산악파의 입지는 더더욱 공고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3황녀와 휴전협정을 주체적으로 이끈 파벌은 평원파가 아니라 산악파. 평원파는 뒤늦게 협정을 인정했을 따름이다. 평원파의 공로마저 어느 정도는 산악파가 앗아가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파이몬한테 이득이 돌아간다. 바르바토스의 패배……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대실패이다. 라우라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그녀는 약간이지만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모략인가.” “예. 전쟁입니다.” 승리하는 군대란 먼저 승리를 구해놓고 그 다음에야 싸우는 족속일지니……. 본질에서는 리프가 이끌던 70인 모험대에 강요한 전투와 하등 다르지 않았다. 라우라는 산간 마을들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내분시켜 리프의 모험대를 붕괴시켰다. 제6군단은 검은 산맥을 뚫고, 변경백을 물리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상대를 단순히 적으로만 바라보았다. 파이몬은 달랐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세를 세심하게 파악하여 자신에게 아군이 될 자와 적군이 될 자를 구분했다. 그리하여 제6군단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아군에게 유리해지도록 판을 짰다. 앞서 생각하는 자가 앞서 행동하고, 앞서 행동하는 자가 앞서 승리를 쟁취한다. “……소녀는 전쟁을 바라보는 눈이 갑작스레 커진 듯하다.” “축하드립니다. 무럭무럭 커주세요.” “허나 주군이 설명한 전국(戰局)에는 거대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바로 주군이다.” 그녀가 척, 하고 위스키잔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분명 주군을 제외하면 제6군단의 어느 누구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제1군단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자는 파이몬 외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주군이 알아채버렸다. 주군이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판국은 얼마든지 뒤바뀔 터. 그런데도 주군은 아무한테도 이 사실을 고하지 않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만 있다. 도대체 주군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 나는 무표정하게 라우라의 술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술잔이 금새 채워졌다. 나는 위스키를 거두지 않았다. 술이 넘쳐흘러 바닥에 줄줄 떨어졌다. 술병이 텅 빌 때까지 나는 위스키를 쏟아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난세(亂世)입니다.” “난세……?” “라우라. 더 넓게 보십시오. 더 크게 느끼십시오. 월맹군 제1군단의 군단장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와 협정을 맺는다, 제6군단의 군단장이 조인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내가 작게 웃었다. “마왕이 대륙의 국제정치에 뛰어들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마인과 인간은 단지 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인과 인간이 서로 협력할 수도 반목할 수도 있는 상대임이 온 천하에 알려집니다. 이제 종족 전쟁은 종결됩니다. 마인과 인간은 종족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득에 따라 합종연횡하기에 이릅니다.” 라우라의 여린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의 숨결에 경악이 스며들어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즐거움이 북받쳐서 말했다. “난세입니다, 라우라! 전무후무한 난세가 도래합니다. 종족의 숙원이라는 명분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의 세력, 자신의 이익,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투쟁하는 군웅할거가 펼쳐집니다. 아직도 들리지 않습니까?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00093 왕과 장군 =========================================================================                        이 세계에는 불편한 점이 잔뜩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음악이었다. 삶에는 음악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게 가끔 나타난다. 지금은 비제의 <사랑은 자유로운 새>가 장난스럽게 울려퍼져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라벨의 <볼레로>라도! 라우라와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며 허리라도 흔들고픈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음악을 들을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을. 나는 아쉬운 대로 콧노래나 흥얼거렸다. “어째서 난세인가? 주군은 왜 난세를 바라는가?” “다만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나는 음악의 리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집중하면서 말했다. “라우라도 알다시피 저는 약합니다. 세력이라 부를 것도 없어요. 그에 비해 다른 마왕은 어떻습니까? 다른 인간 국가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강대합니다. 그들은 한바탕 늪에 빠져 혼란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이, 주군은 세력을 일군다…….” 바로 그렇다. 바르바토스는 내 의도를 완전히 잘못 알았다. 월맹군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왕의 숫자를 줄이는 게 목표라고 생각하겠지. 틀렸다. 내가 왜 월맹군을 성공시키겠는가, 멍청하게! 월맹군은 적당히 성공하고 또 적당히 실패해야만 한다. 인간의 세력과 마왕의 세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게끔. 평원파-산악파-제3황녀 간에 휴전협정이 성사하면 즉시 마왕 바르바토스는 대륙에 자그마한 영토를 소유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마왕과 인간 군주는 멍청하지 않다……난세의 간웅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비출 게 틀림없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의 영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인간이건 마인이건 가리지 않고 협력하게 된다. 시작이 어렵지 그 이후는 간단하다. 제3황녀와 제6군단장이 서로 협력하여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내면,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군주들이 앞다투어 주판을 두들길 것이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선뜻 난세에 뛰어들지 못하는 군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걷어차주마. 특별 서비스다. 모쪼록 공짜로 즐겨주시라. 라우라가 수해(樹海)처럼 깊은 눈동자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이, 마인이 죽어나갈 것이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죽고, 또 죽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비극이 생겨날 것이다. 민초들은 가족과 동료를 잃고 떠돌 것이야.” “안타깝군요. 눈물은 흘려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흘려서 금세 매마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저의 눈물은 귀족의 눈물이 아닙니다.” 민초는 약자가 아니다. 난세란 민초에게도 기회의 장이다. 마음껏 반란을 일으켜라. 얼마든지 혁명을 일으켜라. 봉기하라. 그만큼 시대는 격렬해질 것이고, 그만큼 나에겐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던전 어택>에서 인간계는 왕당파와 공화파로 대립한다. 그쪽에도 거대한 불을 지펴주겠다. 예컨대 익명의 저자로서 공산당 선언 비슷한 책을 출간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시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저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쩌면 간단하게 사장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예상 외의 결과를 자아낼 수 있다……실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실험이다. “저에게 질렸습니까?” “아니. 주군의 각오를 확인해봤을 따름이다.” “어이구. 주군을 시험하는 신하라니 불경하기 짝이 없군요.” 하긴 얼마 전만 해도 인육이 태워지는 냄새에 아찔해하던 나였다. 라우라로서는 한번 내 각오를 시험해보고 싶었겠지. “주군은 어긋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잔혹한 짓도 서슴치 않는 주제에, 정작 그 참상을 보고는 눈물을 흘린다. 사람이 자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뻔뻔해져야 한다. 이건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다, 저들이 못나서 자초한 비극이다, 그렇게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라우라가 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허나 주군은 내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말했다. 그것은 강자의 오만함이라고.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약자에게는 어떤 처세술이 남는가……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거기에 어떤 변명도 어떤 정당화도 덧씌우지 않은 채, 비극을 비극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비극에 짓눌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태도가 정녕 가능한가? 유지될 수 있는가?” 그녀가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주군은 혼자가 아니다. 나 역시 주군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아무도 걸어본 적 없는 울창한 숲길이요, 가시에 짚신이 쓸리는 행로이다. 주군. 소녀는 우리 두 사람의 미래가 결국에는 그럴듯한 수사학에 얼룩진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그렇기에 난세입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을 딛고 일어설,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유리잔이 부딪쳤다. 유리소리는 집무실의 정적을 깨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정적이 더욱 깊어졌다. 그 가운데서 그녀와 내가 읊조렸다. “단탈리안을 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위하여.” 우리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안에 술을 잔뜩 머금은 채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달콤한 술이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지금부터 우리는 난세의 정중앙을 가로지른다. 혼자라면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여기에 또 누군가가 더해져서 세 사람, 네 사람,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간다면 분명 수해의 숲길은 밟아지고 또 밟아져서 이윽고 하나의 어엿한 대로가 되겠지. 안 됐구나, 바르바토스. 너는 나를 단순히 마왕이라 생각했다. 전적으로 신뢰했다. 너의 이상을 함께 나누면서 걸어갈 동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월맹군이 성공해봤자 내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너는 간과했다……부디 계속해서 간과해주기를 바란다. 원래 애첩이란 군주에게 있어 아름다운 장미나 마찬가지다. 애첩 때문에 패망한 군주 따위 역사서에 차고넘칠 만큼 많다. 나를 애첩으로 삼은 이상 너 역시 역사서에 한 줄의 이름을 남길 각오 정도는 해줘야 한다. 무얼, 아직 우리는 든든한 아군이다. 당장은 변경백-황태자 연합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다같이 물리쳐야 한다. 이 전투가 난세의 개막을 알리는 전초전이 되겠지. 당분간 사이좋게 지내보자. * * * “오라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소녀가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 엘리자베트였다. 경비병들은 차마 황녀를 말리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다. 황태자의 집무실은 설령 황족이라 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앞을 가로막거나 그녀를 제지하려 하면, '본녀는 제국의 중대사를 논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감히 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이냐!'라고 호통이 쏟아졌다. 여기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에바트리에 백작. 귀족으로서 체통을 좀 지켜줬으면 한다마는.” 의자에 앉은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방을 모욕하는 의도가 들어간 한숨이었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 된 은발의 청년이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 황태자,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였다. “백작이 그리 경거망동하니 황실에 대한 민심이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는 것 아닌가.” “경거망동의 수준을 논하자면 소녀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에 미치겠습니까.” 엘리자베트 황녀가 황태자한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탁자에 쾅, 하고 손을 내리쳤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서류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오른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엇이냐?” “대(對)월맹군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구성입니다. 이번 원정군에 소속된 장성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요. 오라버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중앙군의 반절이 목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루돌프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않느냐. 중앙군 전원이 출진해서야 누가 이곳 제도(帝都)를 수비하겠는고. 절반을 본진에 남겨두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전술이다.” “제도를 수비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황녀가 비웃었다. “대륙의 모든 열국이 월맹군의 침략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어느 나라가 실성하여 타국을 침범하겠나이까? 마왕군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제도가 안전한 때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루돌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노라. 월맹군이 침공해오는 이때, 같은 인간의 국가를 공격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라고. 그게 상식이라고 말이다. 허나 이리와 같이 야비한 군주에게는 지금이야말로 국경 확장의 호기로 보일 터. 단지 상식만을 믿고 제도를 비웠다가는 뒤통수를 얻어맞기 십상일 것이다.” “하! 자기 나라를 보존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타국을 침략한다라. 도저히 제정신이 박힌 군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작자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나라가 있다고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황녀의 명백한 비아냥에도 황태자는 느긋하게 받아쳤다. “과인도 그리 생각하지만 세상사를 어찌 속속들이 꿰뚫어 보겠는가. 만에 하나, 라는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일지라도 섣불리 간과하지 않는 것이 제왕 된 자로서의 책임. 에바트리에 백작은 더 이상 이번 건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덤벼들지 말거라.” 일말의 가능성이라. 엘리자베트 황녀가 코웃음쳤다. 눈 가리고 아웅거리는 데도 정도가 있었다. 이번에 황태자가 발표한 원정군에는 황녀파에 속한 장성들이 싸그리 제외되었다. 말이야 제도를 수비한다지만 그곳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음을 삼척동자가 다 알았다. 황태자의 속셈은 뻔했다. 마왕을 물리쳤다는 위업을 독식하려는 것이었다. 이백 년만에 다시 일어난 월맹군이었다. 인류의 위기를 구해낸 황족――그런 눈부신 징표를 움켜쥘 기회가 이백 년만에 생겨났다. 황태자는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보통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황녀파의 장군을 두세 명이라도 포함시킬 텐데, 황태자는 원정군을 죄다 자신의 파벌로 구성해버렸다. 인류의 위기에 맞서서 제국 전체가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군공에 눈이 멀어 내부분열을 자초한 것이었다. 그 어리석음에 황녀는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좋습니다. 오라버니의 전술적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소녀도 매우 잘 아니까요. 얌전히 승복해드리지요.”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게냐!” 황태자가 양손으로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다. 그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삼 년 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황태자가 총사령관이 되어 진격한 적이 있었다. 반란군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병력을 가졌는데도 황태자는 패배했다. 반란군이 더없이 기세등등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에 제3황녀, 당시 열네 살에 불과했던 그녀는 적보다 세 배가 적은 병력을 갖고도 반란군을 격파했다. 황태자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황녀의 군사적 명성이 하늘까지 치솟은 사건이었다. 엘리자베트는 그때 사건을 암시하면서 루돌프를 비꼬고 있었다. “과인이 적을 약화시켜두자 승냥이처럼 쓸어먹은 주제에, 기고만장해서는……!” “흥미롭군요. 그때 오라버니가 패배하고 난 뒤 반란군에는 네 명의 남작과 일곱 명의 자작이 더 합류했습니다. 단순히 병력만 따져도 두 배 가량의 군세가 되었지요. 세상의 어느 병법서에서 적군을 키워준 것을 가리켜 약화라 부르는지, 지식이 일천한 소녀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루돌프가 손바닥을 휘둘렀다. 살이 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 주변의 관리와 경비병이 경악했다. 루돌프는 방금 황녀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루돌프가 있는 힘껏 뺨따귀를 날린 것에 반하여, 황녀의 고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한없이 싸늘한 눈빛이 황태자를 직시할 뿐이었다. “썩 꺼져라! 군략은 국가의 중대사! 조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 달린 거사에 앞서 세 치 혀를 놀림으로써 천리를 거스른 죄, 당장 처벌해도 시원치 않으나 남매의 연으로 넘어감이라!” 한동안 엘리자베트와 루돌프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시선을 거둔 쪽은 황녀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고, 드레스 자락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황태자가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울분을 토했다. “위선자 년 같으니!” 어차피 제깟 년도 군공이 탐나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전술이니 뭐니 그럴듯한 단어를 붙여가면서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황태자는 엘리자베트가 얄미워서 심장이 달아올랐다. 제국에는 멍청한 장님이 너무나 많았다! 저 년이 뭐가 대단해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라 추켜세우는가! 머리가 조금 똑똑하다 한들 그래봤자 여자. 얌전히 황태자인 자신에게 복종하면 그만이었다. 저 년의 언니도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랐다. 그 천박한 보지구멍에 육봉을 몇 번 쑤셔넣어주니 그제서야 자기 처지를 깨닫고 자살했다. 그 언니에 그 여동생이라, 황태자는 똑같은 수법을 동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원정이 성공하면 자신의 파벌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다. 황녀를 두둔할 우인도 없어지겠지. 그때 가서 그년에게 주제를 파악하게 해준다. 건방진 년이지만 미모만큼은 뛰어나다. 친히 교육을 하사하는 보람이 있으리라. 황태자는 분노를 가다듬으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00094 왕과 장군 =========================================================================                        황태자가 황녀를 시녀 다루듯이 때렸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온 궁전으로 퍼졌다. 합스부르크의 황궁은 작았다. 궁정 정원이 기껏해야 천여 명을 수용하는 크기였는데, 제국이 갖춘 영토와 위신을 고려하면 수준 미달이나 다름없었다. 현 황제는 번번이 궁전을 확장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황실의 위엄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황실은 단독으로는 건축사업에 뛰어들 만큼 재정이 풍족하지 못했다. 절대왕정은 몰락했다.……엘리자베트 황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대리석 회랑에 멈춰서서, 기둥 건너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골목마다 짙노란 어스름 같은 것이 스며들었다. 이 세상이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한 저편이 석양빛 커튼 너머로 슬그머니 열렸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중얼거렸다. “저물면서 더 빛나는 것이 있다더니……제국은 아니었는가.” 백오십 년 전만 해도 절대적인 위명을 자랑하던 국가는 이제 사라졌다. 제국은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멸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루돌프 황태자를 도발했으나, 설마 저토록 인내심이 부족할 줄은 몰랐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이런 소문이 나돌아봤자 그에게 득이 될 게 하나 없었다. 제국 만민이 알게 되었다. 황녀는 출진하길 원했으나 루돌프 황태자 측에서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행여나 ‘황태자가 패배하도록 황녀가 일부러 군사를 내지 않았다’ 같은 소문이 떠돌 가능성이 봉쇄된 것이었다. 제국에는 대대적인 외과수술이 필요하다. 군살을 도려내어 썩은 부위를 단호하게 끄집어내야 한다. 어쩌면 과도한 수술로 인해 환자 자체가 죽어버릴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변경백-황태자 원정군에 동원되는 병사 5만, 그들이 희생된다……이 또한 의사가 짊어져야 할 멍에겠지. 열일곱 살의 황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을 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 * * 제국의 대군이 움직였다.――소식이 평원파를 진동시켰다. 중앙군 2만, 용병 2만, 변경백군 1만, 총합 오만 대군이 이곳 브란덴부르크 영지를 향하여 진군했다.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르바토스 군단장은 군의를 소집했다. 영주의 회의실에 제6군단 소속 마왕 열아홉 명이 집결했다. 오만이라는 병력에 당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 것이 왔다, 그런 분위기였다. 벨레드를 비롯하여 몇몇은 명백히 흥분했다. 우리들은 한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르바토스가 일일이 따라준 포도주가 고여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에피타이저는 생략하고 곧바로 본요리야. 집주인이 호화롭게 대접해주겠다는데 거절하면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공성전은 필요없어. 단 한 번의 회전으로 모든 것을 끝장낸다.” 이번에는 자잘한 전략회의를 거치지 않았다. 제6군단은 일만팔천의 병력으로 적군 오만을 철저하게 깨부술 의도였다. 이쪽에 유리한 전장을 미리 선정해두었고, 편제도 완성했다. 제6군단은 바르바토스의 부대, 벨레드의 부대, 제파르의 부대 등으로 나뉘어서 적군을 요격한다. 나는 물론 제파르 대장의 부대에 속했다. “동지들. 군대에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바르바토스가 오연히 말했다. “군대에는 승리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승리가. 압도적인 승리가. 동지들, 나는 평범한 승리를 원하지 않아. 어떤 면에서는 이겼고 어떤 면에서는 패배하는 그 따위 전투를 바라지 않아. 철저한 승리를!” 그녀가 소리쳤다. “다시는 우리를 넘보지 못할 승리를! 나는 제국의 인간 전원이 사지가 찢어지고 혀가 잘리며 내장이 쏟아지는 광경을 원한다. 나는 제국군 오만 명의 피가 흘러 산천초목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원한다. 나는 인간종이 마인에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이번 전투가 깨닫게 해주기를 원한다. 동지들――내가 기대해도 좋을까. 후퇴하지 않는 발걸음와 불굴의 의지를.” 누군가가 “우리에게 피를!”이라고 외쳤다. 그에 호응하여 마왕들이 소리질렀다. 나 역시 큰 목소리로 입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피를! 우리에게 피를! 우리에게 피를!……. “좋다.” 바르바토스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동지들이여, 그대들의 군단장은 언제고 선두에 설 것이다. 그대들의 전열이 무너지고 기사단의 말발굽이 천지를 뒤흔들 때, 그대들이 후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며 절망적으로 눈앞을 바라볼 때, 바로 그곳에 나 바르바토스가 서 있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돌격 명령이 내려졌을 때 눈앞을 바라보면 바로 그곳에 나 바르바토스가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와인잔을 들이켰다. 나머지 열여덟 명의 마왕도 포도주를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한입에 술을 마셔버린 바르바토스가 바닥을 향해서 유리잔을 내팽개쳤다. 유리조각이 산산이 흩날렸다. “승리를 위하여!” 진군이 시작되었다. 나흘 후, 월맹군 제6군단은 아우스터리츠 구릉 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에서 수도 쪽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만일 황태자-변경백 원정군이 이곳을 무시하고 지나칠 경우, 우리는 곧바로 수도로 침공해 들어갈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충지였다. 우리는 진군하는 와중에도 계속하여 적군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적군에 어떤 장성들이 포진되어 있는지, 각각의 부대가 어떻게 편재되어 있는지 알아냈다. 정보에 따르면 적군은 명목상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가 총사령관을 맡고 있으나, 실질적인 군지휘는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쥐었다. 1급 첩보가 생각보다 쉽게 얻어지자 제6군단 수뇌부는 도리어 의심했다. 연막 작전을 위해 거짓된 정보를 뿌린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거짓 정보가 아닙니다.” “왜지?” 제파르의 반문에 내가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이 첩보가 제3황녀의 묵인 아래에 의도적으로 입수된 것임을 알았다. 쿤쿠스카 상회를 경유하여 얻어낸 정보에서는 요즘 제도 사교계가 하나의 사건, 황태자가 황녀를 폭행한 일로 떠들썩하다고 했다. 사교계 인사들은 어쩌다 이런 황망한 사건이 일어났냐며 떠들었고, 귀족다운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사건의 원인이 원정군 참여 여부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 과정에서 원정군에 참여하는 장군 목록이 나돌아다니게 되었다. 즉 이 장군 목록은 합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인증을 거친 셈이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 황녀가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겠지. 목적은 우리에게 정보를 주기 위함이고……변함없이 수작이 음험했다. “적군의 지휘권을 중앙군이 아니라 변경군이 쥐었습니다. 이 사실에 적의 중앙군 장군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어찌되었든 패장(敗將), 우리에게 속절없이 영지를 빼앗긴 장본인입니다. 어째서 무능한 패장이 총사령관 행세를 하는가……중앙군 장수들은 폰 로젠베르크의 지휘권을 잘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탁의 지도에는 체스말처럼 생긴 점토인형이 놓여 있었다. 각각의 인형이 적군의 부대를 상징했다. 나는 그것들을 양쪽으로, 중앙군과 변경군으로 나누었다. “여기에 용병군 2만이 변수로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황태자에게 고용된 자들. 설령 지휘권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한테 있다한들, 황태자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고용주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부대입니다. 중앙군 2만에 용병 2만, 이러면 4만 명입니다. 1만 명에 불과한 변경군이 지휘권을 맡아서야 아무래도 세력에서 밀립니다. 중앙군 장수들은 여차하면 황태자를 설득하여 폰 로젠베르크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으려 들 겁니다.”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요컨대 놈들은 지휘권조차 불안한 오합지졸이로군.”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적군의 상황을 파악하여 해설하는 것이야 할 수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전술적인 승리를 거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것은 바르바토스나 여러 상위 마왕의 몫이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겪은 역전의 용사이니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적군의 분열을 이용한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지휘권이 흔들리기 전에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얼른 승리를 취하고 싶어할 터다. 발정기의 숫말처럼 달려들겠지. 우리군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보이면 그곳에다 전력을 집중시킬 게 뻔해. 따라서.” 그녀가 지도 위의 인형을 움직였다. 아군을 표시하는 인형이었다. “우리는 적에게 유리한 고지를 내준다. 이곳, 정중앙의 고지를 일부러 내버려두겠어.” 아우스터리츠 지역에는 정중앙에 고지대가 있었다. 지도에는 프라첸 고지대라고 적혔다. 제파르가 침음을 삼키면서 바르바토스에게 고했다. “각하, 고지대를 넘겨주면 적군의 기사단이 활개를 치게 됩니다.” 이 시대에 기사단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 집단이었다. 본래 세계에서도 최종병기쯤으로 인식되었는데, 여기에선 기사의 무력에 오러까지 겹쳤다. 평범한 군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전쟁은 항상 기사단을 위주로 돌아갔다. 적군에 고지대가 넘어가면 기사단 입장에선 당연히 오르막길보다 돌격하기 유리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장의 각 부대를 한눈에 담을 수도 있으며, 부대끼리 보다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왕군에는 고지대를 선점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알아. 활개 좀 치라고 내버려두는 거야.”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상식적인 전술안을 거부했다. 그녀가 지도상의 지형을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호수들이 위치했다. “난 이백 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이 부근에서 전투했어. 꽤나 잘 알고 있지. 주변에 호수가 많아서 아침마다 제법 짙은 안개가 껴. 나는 전투를 새벽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끝낼 생각이야. 기사단 놈들은 시야가 방해되어 좀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하지만 각하. 뒤집어서 말하면, 혹시라도 전투가 지연될 경우 기사단은 자유롭게 돌격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짜식아. 정오에 끝내버릴 거라고.” 바르바토스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어라. 내가 그대들을 믿는 만큼. 장담해주지. 여기 아우스터리츠는 제국군의 공동묘지가 될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회의 내내 의견을 강고하게 유지했다.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경고하는 마왕들도 있었지만,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이 그녀한테 동의하면서 토론의 추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우리 제6군단은 프라첸 고지대에 부대를 배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중앙, 좌익, 우익으로 군을 나눈다. 중앙은 나 바르바토스가 맡는다. 좌익은 벨레드가 맡도록. 그리고 우익은 제파르한테 맡기지. 이번 전투의 승패는 다름아니라 우익에 달려 있다.” 바르바토스가 제파르를 바라보았다. “제파르. 우익에는 병력을 최소한으로 배치하겠어.” 제파르 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소장은 미끼 역할이군요.” “아아, 인간놈들한테 가장 허술한 곳으로 비추어야 해. 그래야 놈들의 좆이 빳빳하게 굳어서 달려들 테니까. 제파르. 너의 임무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청년막을 고이 남겨두는 일이야. 만에 하나라도 인간놈들한테 후장이 뚫리지 마라.” 제파르가 군례를 올렸다. “소장, 죽을 각오로 우익을 사수하겠습니다.” “동지들이여. 우리의 전투는 단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끝날 것이다. 건곤일척의 싸움이야. 서투름은 용납되지 않아. 다들 마왕으로서 긍지를 품고 맞서싸워라.” 우리는 다함께 경례했다. 바르바토스가 응답하며 군례를 바쳤다. 이틀 뒤, 아우스터리츠 일대에 제국군이 당도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프라첸 고지대에 자리잡았다. 바르바토스의 예상대로 전투가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지극히 상식적인 수순에 따라 전투가 이어질 것인가. 나에겐 그것을 가늠할 전술적 안목이 부족했다. 라우라조차 바르바토스의 전술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제파르 대장과 함께 우익에 섰다. 힘겨운 전투가 펼쳐질 예감이 들었다…….   00095 왕과 장군 =========================================================================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군의 작전안은 초장부터 삐꺽였다. 원인은 맥빠질 정도로 단순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의 예측은 전부 맞아들었으나 너무 과하게 적중해버렸다. 안개, 아우스터리츠 일대 전체에 안개가 지나치리 만치 짙게 낀 것이었다. 안개는 늦저녁부터 끼기 시작하여서 자그마치 다음날 정오까지 도통 개지 않았다. “……으음. 적군이 코앞에 닥쳐도 못 알아볼 판이다.” 라우라가 걱정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전장은 순식간에 시야가 제한되었다. 안개는 꼭두새벽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겨우 백 미터 앞을 넘겨볼 수가 없었다. 심한 곳에선 시계가 오십 미터조차 되지 않았다. 아마 잠시 자리를 뜬다고 말해두고 저편에 가서 라우라와 떡을 한판 친다 해도 아군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아니, 그렇다고 굳이 떡을 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때와 장소를 구분할 머리는 라우라한테나 나한테나 완비되어 있었다. 백 미터의 시야. 이건 심각했다. 기사단에게 백 미터는 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군마를 타고 순식간에 백 미터를 질주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우리는 기사단의 돌격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게 생겼으니, 원. 철저하게 방비해도 막아낼까 못 막을까 싶은 것이 기사단 돌격이었다. 그걸 준비하지도 못하고 얻어맞는다라……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당연하게도 마왕들은 불안에 잠겼다. 제파르 대장이 직접 사태를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의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가관이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네? 마법이 실패했다는 말씀입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 성공해버렸다.” 사태의 경위는 이러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은 혹시나 아우스터리츠 일대에 안개가 충분히 끼지 않을까 걱정하여,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엿새 전부터 방책을 마련했다. 바로 군중 마법사 부대에 기상마법을 펼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마왕들은 저마다 서너 명씩 소수의 마법사를 휘하에 두었다. 제6군단에서 모든 마법사를 긁어모으자 약 오십 명의 마법사 부대가 만들어졌다. 3서클 이상의 고위마법사가 무려 오십 명. 그들은 아우스터리츠 일대의 호수에 미리 도착하여 엿새 내내 인위적으로 기상을 조작했다. 그리고……마법사들은 너무나 유능한 나머지 이 근방 일대를 죄다 안개의 늪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군단장 각하께서도 당황하셨다더군.” “그야, 그렇겠지요.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 “개중 몇몇 마법사는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폭주해버렸다.” 제파르 대장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모처럼 기상마법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흥분한 게지.”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법사란 인종은 정말이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떻게 정신교육을 시켜도 마법사에겐 집단보다 개인이 우선했다. 그들이 전쟁에 열심인 이유는 아군을 승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법을 마음껏 시험해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괴짜를 오십 명이나 모아뒀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만했다. 제파르 대장의 말에 따르자면 마법사 부대는 자기네가 뭔 짓을 한지도 모르고, 바르바토스한테 달려가 '저희 잘했지요? 잘했지요? 칭찬해주세요' 하는 태도로 잔뜩 뻐겼다고 한다. 바르바토스가 폭발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전투를 앞두고 마법사 같은 고급전투인력을 팽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씩씩거리기만 했다던가 뭐라던가. 불쌍하게도. 내가 작은 기대를 담아 말했다. “작전이 바뀌지 않을까요, 형님?” “본인도 그것을 기대하네마는……군단장 각하께서 워낙 주관이 뚜렷하신 분인지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상부에 연락해보지.” “시야가 제한된 전장은 수비측보다 공격측에 유리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상대측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먼저 움직이는 자가 주도권을 쥐지요. 제국군에 공격권을 넘겨주면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에 이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제파르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 중에 상식이었다. 공성전이 아닌 이상에야 공격측은 수비측보다 유리했다. 공격측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지점을 타격할 수 있는 반면, 수비측은 저쪽에서 공격하고 나서야 움직이게 되니까. 이천 년 동안 전쟁터를 뒹굴어온 바르바토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각하되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군단장 각하께서 작전의 속행을 명하셨다. 우리 우익은 이대로 방어 태세로 들어간다.” “하지만 제파르 경.”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마왕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래서야 아군끼리 협조나 제대로 할 수 있을련지 걱정이외다.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오손도손 지휘부에만 모여 있을 수도 없지 않소. 각자가 구역을 맡아 유기적으로 적군을 요격해야 할 터. 허나 안개가 이래 짓궂어서는 아군과 아군의 공조가 이루어지기 어렵소.” 내심 올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적군의 장수였다면 양동작전을 구사할 것이다. 주력부대로 이쪽의 우익을 공격한다. 우익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기사단을 송곳으로 삼아서 우익의 전열 일부를 단숨에 꿰뚫는다. 안개가 이 정도로 짙으니까 기사단을 몰래 이동시키는 것은 쉬우리라. 그렇게 기사단은 일순간에 전열을 돌파하고 곧바로 반전,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이쪽의 우익을 앞뒤로 압살시켜버린다.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전술이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군끼리 협조와 소통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가 어느 정도로 공격받고 있는지, 아군의 어느 부대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혹시 한순간에 전열이 뚫려버렸다면 거기가 어디인지, 항상 정확하게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제군의 염려는 타당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군단장 각하께서 아군의 공조를 위해 급히 마법사를 파견하셨으니.” “마법사 부대를 말이오?” “아니. 한 명이다.” 아리까리했다. 부대단위도 아니고 한 명의 마법사가 어떻게 교신 문제를 해결할까? 혹시 바람마법이라도 일으켜서 안개를 지우려는 것인가. “마법사는 우리 우익뿐만 아니라 아군 전체의 유기적인 소통을 담당한다. 마법사가 기르는 사역마를 모든 마왕에게 한 마리 분배하지. 제군들은 부대에 알릴 것이 생기면 곧바로 사역마를 이용하여 보고하도록.” “죄송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서열 제58위 아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검은 산맥 공략전에서 군공을 세운 이후 발언권이 생겼지만 아직 신참이라 자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신참이 아니어도 서열 제16위의 제파르한테 막 나가기는 어려울 거다. 평원파의 중위권 마왕들도 반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걸로 보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요?” “제군이 사역마에게 보고를 한다. 그러면 사역마와 심상이 이어진 마법사에게 즉각 보고가 전달되지. 이제 마법사는 중개자가 되어 보고를 다른 부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본인의 군진에 위치하며, 명령도 마법사의 사역마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아, 그런 수가.” 아미가 감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역마는 무전기가 되고, 마법사가 중계국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한 단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래 세계의 무전기보다 불편했지만 이게 어디인가. 오히려 상위부대에서 항상 전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장점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새삼 마법사의 전략적인 가치에 놀라고 있자니 제파르 대장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전장 상공에 마조(魔鳥) 삼백 마리를 풀어둔다. 제군은 마조를 통하여 전장을 보다 자유롭게 관측할 수 있다. 제군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도 사역마를 동원하여 정찰에 나선다.” 나는 바로 제파르 대장의 말을 알아들었다. 즉 마왕이 몬스터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을 이용한다. 만약 제국군이 우회기동이나 일점돌파를 시도해올 경우, 상공에 위치한 몬스터 새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경고한다. 경고는 곧바로 마왕한테 전해진다. 일종의 경보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안개가 짙으므로 새들도 전쟁터를 넓게 파악하진 못하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당연히 훨씬 더, 수백 배는 더 좋았다. 안개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적군한테 당할 가능성은 이로써 대폭 줄어들었다. 어쩌면 도리어 우리군에 꽤나 유리한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겠다. 인간군도 안개에 대해 이 정도의 대비책을 갖추었을까? 만일 그러하지 못했다면 아우스터리츠는 제국군에게 거대한 회색의 무덤이 되어줄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라우라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군, 이건 획기적인 방법이다!”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얼마 뒤에 나를 비롯하여 우익의 모든 마왕한테 사역마가 한 마리 배분되었다. 사역마는 놀랍게도 슬라임이었다. 푸른 점액질로 이뤄진 이 자그마한 몬스터는 내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었다. 평범한 슬라임과 다른 점이라면 입구멍처럼 생긴 기관이 있다는 것일까. 나는 시험 삼아서 이 슬라임 통신을 한번 이용해봤다. “여기는 단탈리안 부대. 전선에 이상 없습니다.” 몇 초 뒤에 슬라임의 작은 입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여기는 우익 본진. 알았다. 자네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장이 현재 전선에 이상이 없음을 열심히 알려주고 있다. 앞으로는 중요한 일만 보고하도록. 나는 피식 웃었다. 슬라임 통신의 성능을 시험해보는 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른 마왕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슬라임 통신을 사용하고 있겠지. 제파르 대장은 지금쯤 마왕들한테 일일이 답신을 내려주느라 어이가 없지 않을까. 라우라가 옆에서 교신 내용을 엿들으며 말했다. “제국군은 절대로 이 방법을 쓰지 못한다.” “응? 저들도 마법사를 활용하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사역마이다. 사역마에게 어느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보고를 이해하며 또 전달하겠는가. 질이 매우 뛰어난 사역마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마법사가 한 마리의 사역마에 집중하여 정신적인 일체를 완전히 이루어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대규모 의사소통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부대마다 마법사가 한 명씩 따라붙는다면 또 모를까, 어림도 없지.” 그녀가 미소 지었다. “마왕에게는 모든 절차가 폐기된다. 몬스터에게 직접적으로 심상과 명령을 전달하니 말이다. 결국 한 단계를 건너뛰어 마법사 본인한테까지 심상이 전달되는 셈이다. 이제야 군단장의 의도가 이해되는군……안개에 휩싸인 전장은 단연코 마왕군에 유리하다.” 라우라의 설명은 이러했다. 제국군에는 지휘부의 권위가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고, 중앙군과 변경군 간에 알력이 있다. 이곳 아우스터리츠처럼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전쟁터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적군이 안개를 뚫고 바로 백 미터 앞에 등장할지 모르는 판국인데 어느 세월에 상위부대의 명령을 기다리겠는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총사령관으로서 무언가 명령을 내리더라도, 지휘관들이 ‘죄송하지만 현장의 상황에 맞추어서 임의로 행동했습니다’라고 말할 명분이 생긴다. 총사령부는 실제로도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없으니 지휘관의 임의행동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명분마저 성립된 상황에서 중앙군 2만과 용병 2만이 총사령부의 지휘에 순순히 따를까? ‘현장은 다르다’라는 말을 앞세워서 시시때때로 돌발적으로 행동할 게 분명하다. 총사령부의 존재의의 자체가 무색해지겠지. 제국군은 따로 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 제6군단은 빈틈없는 교신체계와 정찰체계를 완비했다. 이 차이가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기대되었다. 제국군과 마왕군의 하루가 지났다. 제국군은 프라첸 고지대를 중심으로 진영을 세웠고, 마왕군은 안개 대비책을 고안하고 다듬었다. 양군이 대치한 첫 번째 날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다섯 시쯤부터 제국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우리로서는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공격 방식이 워낙 특이했다. 웬 땅바닥이 쿠웅, 쿠웅, 하고 진동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막사에서 뛰어나왔지만 어두운 밤인데다 안개까지 끼어서 도통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쓰라고 슬라임을 나눠준 것이겠지. 나는 제파르 대장에게 어떤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 기다려라. 본인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는 얌전히 대기했다. 어느새 라우라도 막사에서 나왔다. 그 와중에도 안개 너머로 쿠웅, 쿠웅,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군의 어느 부대가 공격 받고 있는 것인가? 무슨 공격이길래 이렇게도 멀리 소리가 들려오는가.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뒤, 슬라임의 입구멍이 열렸다. 제파르 대장의 전언에 나는 아연해졌다. ─ 제군들에게 알린다. 굉음의 정체는 투석기다. 반복한다. 굉음의 정체는 투석기다. 제국군이 공성무기 수십 기를 동원해서 사방에 바위를 날려대고 있다.   00096 왕과 장군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었다. 시계가 확보된 상황에서도 명중하기 어려운 게 투석기였다. 기껏 바위를 쏘아봤자 안개와 어둠에 삼켜져 제대로 날아가는지 확인할 수도 없을 텐데. 적군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야밤에 말입니까? 시야도 확보되지 않았는데요. 설마 저 공격에 피해를 입은 아군 부대가 있습니까?” 혹시 제국군에는 야밤의 안개를 꿰뚫고 명중을 확인할 방법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백팔십 도 달라진다. 우리는 적의 공성무기를 공격할 방법이 없으나 적은 신나게 우리를 두들길 수 있으니까. 모처럼 기사단 돌격을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했는데 어쩌면 써보지도 못하고 투석을 피해 도망가야할지 모른다……. 제파르 대장이 내 우려를 없애주었다. ─ 현재 우리 우익 쪽의 피해는 전무하다. 전원, 여유를 잃지 말고 대기하게. 제파르 대장은 그 이후로도 여유를 잃지 마라, 진지에서 벗어나지 마라, 하고 누누이 강조했다. 아마도 대장은 적군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목적으로 투석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뭐, 나 역시 대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딱히 적의 의도랄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우라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가 금발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면서 말했다. “뚜렷한 의도가 없이 투석기를 운용할 리 없다.” “하지만 명중하지도 못하는 투석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굳이 명중하지 않아도 좋다, 제국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멀리서 쏟아지는 투석은 단지 타격용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라우라의 진지한 분위기에 감염되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타격용이 아니라면.” “소녀가 생각하기에 우리군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적의 목적이다. 비록 명중 확률이 한없이 낮다 해도 계속해서 바위가 쏟아지고 있다. 아군은 자연스레 움츠러든다. 섣불리 군을 이동시키지도 못하지. 제국군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우리군을 현재 자리에서 묶어두려 하고 있다.” 내가 이마를 짚었다. 라우라의 추측이 그럴듯했다. 그리고 라우라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곧바로 적군의 의도가 짐작되었다. 대규모 군단급의 전쟁을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라우라는 모르는 것이겠지. 머리가 아파왔다. “제국군은 지금부터 총공세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음? 어떻게 그걸 아는가?”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전 전선에 걸쳐 제한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쪽의 부대들을 잡아둔다. 이때 전선의 한 지점을 골라서 그곳에 전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 그렇게 전선의 일부가 붕괴되면 예비대가 없는 이상 끝장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제국군이 선택한 '전선의 한 지점'은 바로 우리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우익에만 바위들이 직접 날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그곳으로 이미 제국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제국군의 투석 솜씨가 제아무리 신의 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아군이 움직이는 곳에다 바위를 날려대진 않으리라. 아무래도 제국군은 어제 낮에 이쪽을 관측한 다음, 우리 우익이 가장 허술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상위부대에 보고했다. 제파르 대장은 나의 추측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어떤 감상에 잠겼는지 말끝을 길게 늘였다. ─ 우익이 가장 가열찬 전장이 되겠군. 군단장 각하께서 바라신 대로……. 새벽 다섯 시 무렵. 우익에 배치된 전 부대에 비상사태가 떨어졌다. 주변이 깜깜하고 안개 때문에 밤눈이 밝은 몬스터조차 백 미터 너머를 분간할 수 없었다. 제국군은 바로 지금이 공격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골렘 서른 마리, 요정 열 마리. 죽음의 기사 열두 마리. 총 쉰두 마리의 몬스터가 내 부대였다. 골렘과 요정은 최하급 몬스터가 찍을 수 있는 레벨 한계인 레벨 10까지 전원 도달했다. 어지간한 중하급 몬스터보다 강력했다. 여기에 레벨 50짜리 죽음의 기사들. 인간군의 분류에 따르자면 보병, 궁병, 최정예 기마병이 완비되어 있었다. 숫자는 적어도 자신이 있다! 어차피 칠흑처럼 어둡고 고약한 전쟁터이다. 수가 많다고 꼭 유리하리란 보장은 없다. 다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올지가 관건이었다. 원칙적인 전술에 따라 보병을 앞세울 것인가, 아니면 기습을 노려 처음부터 기사단으로 돌격해올 것인가. 보병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만약 기사단이라면……진지 앞에다 구멍을 파두었고 말뚝을 수백 개 박았지만, 솔직히 기사단이 저지될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우는 척하면서 안개를 방패 삼아 도망쳐야겠지. 주변의 다른 부대와 연합해서 격파해야 한다. ─ 사역마가 적을 발견했다. 상위부대에서 정찰을 보고했다. 라우라와 내가 예측한 대로 전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국군은 우익을 향해 다발적으로 진군했고, 우익 전체에 공세를 걸 작정이었다. 우리군 우익을 붕괴시키고, 좌익과 중앙은 차례대로 헤치우겠다. 그런 속셈이겠지. 보고에 따르자면 제국군은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다. 단순히 기습으로 끝날 공격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처절한 전투가 되리라. 아우스터리츠의 언덕들은 때 아닌 핏물로 겨울과 봄 내내 메마른 수풀을 적실 것이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전히 몇 분 간격으로 바위덩이가 대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안개의 늪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십수 개였다. 그것들은 휙, 하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면서 이쪽으로 떨어졌다. 그중 하나가 마침 내 앞에 박혔다. 화살이었다. “…….” “…….” 무심코 라우라와 내가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 둘 다 얼굴에서 어이가 실종해 있었다. 화살이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저 멀리, 백 미터보다 더 되는 거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화살과 말발굽 소리.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라우라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뇌까렸다. “……저건 기병 아닌가?” 적군은 궁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 * * 제국군, 아니 이 경우에는 총사령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일까. 변경백의 전술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참신했다. 오죽하면 라우라가 일순이나마 평정을 잃었겠는가. “야밤에 궁기병을 운용하다니!” 투석기로 우리군의 중앙과 우익을 붙들어맨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러나 궁기병을 동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 때문에 그러했다. 궁기병이 적군을 향해 일거에 화살을 날려버린 다음 반전하여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궁기병 간의 빈틈없는 공조가 필요했다. 화살을 쏘고 방향을 돌릴 때 잘못하면 아군끼리 부닥치기 십상이었다. 기병들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었고, 궁기병 특성상 명중률을 높이기 위하여 한 순간에 맞추어서 화살을 쏘아올려야 했다. 말 위에서 화살을 쏘아본들 명중률이 높을 리 없으니 적군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기 위하여 한꺼번에 화살 숫자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한 마디로 마상궁술이란 익히기 어려울 뿐더러 그걸 부대 단위로 실행하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전장은 엄청나게 어두웠다. 약간만 삐긋해도 아군끼리 충돌사고를 거하게 일으킬 정도로. 이런 상황에서 최고정예인 궁기병을 운용한다고? 미친 짓거리였다. 문제는 그 미친 짓거리가 우리군에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저 미친 놈들은 화살값이 아깝지도 않나…….” “사비로 충당한 화살이 아니라 기사단 차원에서 배분된 화살일 거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궁기병을 전문적으로 양성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다. 폰 로젠베르크 기사단의 시종 기병들이 아닐까 한다.” 라우라와 내가 엄호물에 몸을 숨긴 채 대화했다. 기마 돌격에 대비하여 우리 부대는 진지를 최대한 튼튼히 지어놓았다. 당연히 화살비를 피할 엄호물도 잔뜩 배치했다. 영지에서 징발한 짐마차라든지, 브란텐부르크에서 여기까지 진군할 때 지나쳐온 마을들에서 떼어온 집문들이라든지. 항상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곳 세계에서 주민들은 대체로 집의 대문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사시 훌륭한 차폐막이 되어주었다. 주민 여러분의 안전정신 덕택에 우리 부대는 궁기병이 쉴 새 없이 사격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골렘 두 마리에 화살이 박힌 것이 유일한 피해라면 피해였다. 물리내성 -50%가 적용되는 골렘에게 화살은 그야말로 모기침이나 다를 바 없었고. 참고로 죽음의 기사는 물리내성이 자그마치 -70%. 요정이야 크기가 콩알만해서 화살에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었다. 우리 부대는 뜻하지 않았지만 사격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방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꼼짝할 수가 없다.” 라우라가 탄식했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 부대야 물리내성이 강해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지만, 다른 부대들은 사정이 달랐다. 대다수의 부대에 주전력은 오크와 고블린이 담당했다. 오크와 고블린에겐 물리내성 따위가 없었다. 지금처럼 화살비가 쏟아질 때엔 얌전히 엄호물 뒤에 숨어 있어야 했다. 궁기병의 사격은 우리부대뿐만 아니라 우익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우익의 행동반경이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제국군의 의도는 명확했다. 자기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우리의 발목은 꽁꽁 잡아두겠다는 것이었다. 사역마들이 정찰해오는 바에 따르면, 제국군은 보병 병력을 우익의 일부분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궁기병의 사격에 아군이 꼼짝없이 붙잡혀 방어하는 가운데, 저들은 우익의 일부분을 섬멸할 생각이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과연 폰 로젠베르크입니다. 단순하지만 지극히 효과적인 전술이군요.” 첫 번째는 투석기 공격, 두 번째는 궁기병 공격.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고 있었다. 투석기로 끊임없이 공격함으로써 마왕군의 중앙군과 좌익군을 봉쇄한다. 그리고 궁기병으로 우익 전체를 봉쇄한다. 마지막으로 우익의 일부분에다 병력을 집중시킨다.……‘아군의 기동력은 살리고, 적군의 기동력은 죽일 것’이라는 병법의 기본을 문자 그대로 재현했다. 곤란한 것은, 우리가 제국군의 전술을 파악했다 한들 딱히 할 게 없다는 점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일단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제기랄. 적군은 안개 속에서 십분 주의하며 천천히 보병을 전진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나무문 뒤에 숨어서 한숨이나 쉬고 있다. “군단장에게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가?” “아마도 불허될 겁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바르바토스는 우리 우익이 적군을 최대한 끌어모으기를 원합니다. 우익을 지키기 위해서 중앙군이나 좌익의 병력을 빼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립니다.”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러다 우익의 어느 한 부분이 속절없이 돌파당하게 생겼다. 외부로부터 원군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우익의 부대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나의 부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꽤나 빌어먹은 선택지 말이다. “우리 부대가 자력으로 궁기병을 궤멸하지요.” “……괜찮은가? 주군의 병력이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본의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병력 아낀답시고 가만히 있다가는 적 보병에게 돌파를 허용해서 나중에 쌈싸먹기 당할 겁니다.” 정말이지, 귀찮기 그지없는 적군이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확실히 검은 산성의 쿠르츠 슐라이마허보다 급수가 높았다. 쿠르츠도 그랬지만 폰 로젠베르크, 이 사람은 내 미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멸살해야 했다. 내가 갑옷을 여미며 말했다. “준비하십시오, 라우라. 아무래도 오늘밤 아우스터리츠 무도회의 호프는 우리 부대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시선이 콩밭에 가 있었다. 뭘 생각하는 것일까?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에 나서게 된 것에 대해 회한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의 적인 월맹군 소속이 되어 제국군과 맞서싸우게 된 것에 대해 아이러니를 느끼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아우스터리츠 전황 설명: 제국군의 좌익이 마왕군의 우익을 공격하기 시작. 한편, 고지대의 이점을 활용하여 제국군은 마왕군 중앙군 및 좌익에 집중적으로 투석. 마왕군 우익에는 기사단의 시종 기병들을 분산 운용, 궁기병 전술을 감행하고 있다. 00097 왕과 장군 =========================================================================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제파르 대장에게 독자적인 반격에 들어가겠다고 보고했다. 제파르 형님 역시 지금 상황을 무척 답답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신속하게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작전안이 수립되었다. 평원파의 대표적인 숙장(宿將)답게 제파르는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소부대 단위의 게릴라를 펼치자는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크흐, 이래서 사람은 상관을 잘 만나고봐야 한다. 만일 제파르가 무능했으면 함부로 작전을 변경하는 것에 망설였을 거다. 결과는? 우익이 망할 때까지 서서히 말라죽었겠지. 확실히 폰 로젠베르크가 이끄는 제국군은 유능했다. 야간에 궁기병을 활용할 정도로. 그러나 제파르 형님이 지키는 아군 또한 유능했다. 그 사실이 나한테 더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 허나 단탈리안. 소부대 단위의 게릴라를 운용하느니 차라리 대대적인 반격을 꾀하는 게 어떠한가. 제파르 대장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약간 무리해서라도 우익의 모든 부대로 하여금 일제히 반격하게 하는 것이다. 이쪽의 시야가 제한되는 만큼 적군 또한 맹인이나 다를 바 없으며, 우리가 신속하게 돌격하면 궁기병에게 근접전을 강요하게 된다. 궁기병이 근접전을 버텨낼 리 만무. 저들은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추격하면서 동시에 보병 병력을 포위. 단숨에 포위섬멸전을 시작한다. “과연! 그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감탄했다. 제파르 대장의 수가 그럴듯하지 뭔가. 그럼 적군의 의도는 곧바로 좌절된다. 우익은 자유로워지며, 적군 보병 병력에 지극히 난잡한 혼전을 걸 수 있다. 전장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인간종보다 몬스터가 유리하다. 몬스터는 밤눈이 밝은데다 우리 마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들이니까. 심지어 지금은 마왕들끼리 통신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성공적으로 포위섬멸이 달성될 가능성이 크다……. ─ 그럼 곧바로 반격에 들어가기로 하지. 자네는 잠시만 대기하게나. 내가 예, 하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라우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월맹군 제6군단에서 작전참모를 맡았고, 그런 나의 최측근 참모인 라우라에게는 참모보좌관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있었다. 라우라가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제파르 대장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총사령관. 소인은 작전참모보좌관, 라우라 데 파르네세입니다. 망극하오나, 소녀가 판단하기에 반격 작전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나이다.” ─ 음? 무엇인가, 데 파르네세 참모보좌. “제국군 후방에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놀랐다. 기사단이라니? 보병 병력이 단독으로 행군하는 것이 진작에 확인되었다. 기사단이 함께 움직인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제파르 대장도 뜻밖이었는지 목소리 옥타브가 한층 높아졌다. ─ 기사단이라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소녀가 감히 생각하기로 제국군은 단순히 아군의 우익을 붙잡는 것만을 의도하고 있지 않나이다. 제국군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라우라가 정확하고 빠르게 자신의 예측을 설명했다. 그녀는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전투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먼저, 궁기병 공격.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 우익이 시종 기병들의 사격에 조금씩 피해가 축적된다. 마왕군은 전황이 이대로 유지되면 결국 제국군의 보병 병력이 일점돌파를 시도하리라 판단, 전황을 뒤집기 위하여 일제히 반격한다.――라우라는 바로 이때 후방에서 기사단이 돌연 출현하리라 예상했다. 내가 심각해져서 말했다. “……만일 라우라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기사단과 회전(會戰)을 펼쳐야 합니다.” ─ 동의하네. 아무런 방비책 없이 기사단과 맞붙는다니, 끔찍하군. 제파르 대장은 질색한 어조였다. 그러고보니 그는 과거의 월맹군에서 기사단을 향해 닥돌했다가 병력을 완전히 꼬라박은 경력이 있었다. 기사단의 위력에 대해 제파르만큼 경각심을 가진 이도 달리 없겠지. 제파르 대장은 당장 사역마 정찰조를 동원해서 제국군의 후방을 집중적으로 탐색했다. 만약 라우라의 예측이 틀렸다면, 우리는 전장에서 귀중하디 귀중한 시간을 지나치게 신중히 정찰하느라 쓸데없이 소모한 셈이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국군의 보병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으니까. 라우라의 실책은 곧 나의 실책. 전투에 패배할 경우 내 책임을 묻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라우라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대륙 역사상 최고의 전사집단인 용사 일행과 수 년 동안 용호상박으로 싸운 그녀이다. 라우라의 본래 운명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절대로 그녀의 경고를 허투로 넘길 수 없었다. 정말로 궁기병은 유인책일까. 제국군이 비장의 카운터로 기사단을 준비하고 있는가……라우라가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할 것인가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언제든지 돌격을 감행할 수 있도록 부대를 정비했다. 오 분 정도의 시간이 초조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슬라임이 입을 슬그머니 벌렸다. 제파르 대장의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흘러나왔다. ─ 단탈리안. 제국군 후방에서 기사단이 발견되었다. 시야에서 사각지대인 구릉 뒤편에 위장하고 있더군. 자네의 보좌관이 예상한 그대로일세. “……!” 나도 모르게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새벽의 어둠을 온전히 받으면서도 눈동자를 깊게 빛내고 있었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자신의 예측이 적중했음에도, 고작 몇 마디 말로 아군을 패망의 위험으로부터 건져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감흥도 내보이지 않고 차분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괴물인가. 고작 열일곱 살이다! 그녀 나이 때에 나는 야자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라우라는 열일곱 살에 한 군단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두개골이 오싹했다. 방금, 어떠한 칼싸움도 없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라우라 데 파르네세 참모보좌관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라우라가 승리했다……. ─ 본인은 자네가 대단한 모략가라 생각했으나, 이제보니 군주로서의 자질도 충분하군. 군주의 자질은 신하의 자질로 결정되는 법이니 말이다. 자네와 자네의 부하를 백 마디로 칭찬하고 싶지만 사정상 생략하겠다. “예.” 이제 우리는 적군의 작전을 완전하게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궁기병의 전술적 목표는 두 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마왕군 우익 전체의 움직임을 봉쇄시킬 것. 두 번째는 바로 유인책이었다. 내가 무심코 엄폐물 저편을 슬쩍 바라보았다. 궁기병은 화살이 남아도는지 분당 수십 발을 쏟아냈다. 이쪽을 향해 신나게 날아오는 화살비, 저것은 유혹의 손길에 다름아니었다. 저들은 사격으로써 말하고 있었다. ‘약이 오르는가? 그러면 우리를 물리치러 어디 한번 나와보아라. 기사단 돌격을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그 튼튼한 진지에서 빠져나와라. 아무것도 없는 구릉에서 한판 제대로 붙어보자!’ 약삭 빠른 새끼들. 라우라가 상황을 정리했다. “제국군 입장에서는 우리군이 어떻게 반응해도 괜찮습니다. 만약 이대로 아군이 화살비를 버티고 있으면, 제국군은 보병을 전진시킵니다. 우리의 우익은 일부가 꿰뚫립니다. 만약 아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오면, 궁기병은 일시에 퇴각. 이와 교대하듯이 기사단이 돌격합니다. 아군의 우익은 붕괴합니다.” ─ 으음.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지극히 불리하다. 이번 대의 제국변경백도 무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로군……. 반격안이 좌절된 이상에야 우리에게는 한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원래 제시한 작전안, 즉 소부대 단위의 게릴라 말이다. 우리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데 즉각 합의했다. 여기서 소부대는 물론 물리내성에 특화된 단탈리안 부대였다. 내 부대에 새로이 내려진 작전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우리 부대 정면의 궁기병 소부대를 섬멸할 것. 두 번째. 소부대 섬멸 이후, 우리 부대는 즉각 게릴라가 된다. 그리하여 다른 부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궁기병 소부대들을 하나씩 붕괴시킬 것. 세 번째. 이 과정에서 주변의 아군 부대와 수시로 협력할 것. 제국군은 궁기병을 소부대로 쪼개어 운용하고 있었다. 당장 내 부대의 전방에서 치고 빠지는 궁기병도 대충 화살 숫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스무 명쯤에 불과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제국군은 우익의 일부가 아니라 우익 전체에다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궁기병을 최대한 넓게 퍼트리고 또 퍼트려서 활용할 수밖에. 즉, 궁기병이 전체적으로는 천 명에 이르는 대부대라 할지라도 정작 우리가 맞닥뜨릴 적은 스무 명에서 쉰 명 사이의 소부대이다. 승산이 있다. 아니, 승산을 만들어낸다. 전쟁터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 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승산 따위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 자네의 분투를 빌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부디 우리들이 승리의 건배를 나누기를 바라네. 교신이 마무리되었다. “후우.” 내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새벽 특유의 찬 공기가 폐를 식혔다. 지금부터 내 부대를 제외하고 우익 전체는 고수방어에 들어간다. 궁기병이 아무리 괴롭혀도 결코 군진에서 나가지 않는다. 지난 며칠 동안 대(對)기사전을 고려해서 세워진, 일종의 요새와 같은 진지들. 그곳에서 끝까지 버틴다. 제국군의 유인책은 라우라에 의해 좌절되었다. “시간 싸움이군요.” “아아. 시간 싸움이다.” 제국군의 보병이 이쪽 우익의 일부분을 공격하는 게 먼저인가, 아니면 내 게릴라 부대가 궁기병을 퇴각시키는 게 먼저인가. 이것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서전을 결정짓는다. 하여간, 터무니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뭐냐? 그거냐? 나는 운명적 차원에서 이미 구르는 것이 결정되어 있는 거냐. 제기랄. 도대체가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없다.……이 억울함을 누구한테 토로하면 좋을까. 새삼 비너스빤스에 대한 적의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 자식은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죽일 수 있다면 말이지. 유일한 위안거리는 제국군이 극히 제한된 시야를 염려하여 보병 전열을 매우 천천히 전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진군속도가 느린 데에는 시야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의도, 즉 궁기병이 우리군을 유인시킬 시간을 충분히 주려는 의도까지 포함되어 있으리라. 제국군은 아직 우리가 유인책을 간파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무지가 나에게 일말의 여유를 남겨주고 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당신의 실책은 우리군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천재이다. 아직 미숙하지만 분명 전장을 지배하는 능력이 그녀에게 잠재되어 있다. 그걸 보여주지. “주군, 지금이다.” 궁기병이 화살을 퍼붓고 반전했다. 안개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나와 라우라가 엄폐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안개를 향해 뛰어갔다. 단 둘이서 무모하게 돌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기사 열두 마리가 보이지 않는 영체가 되어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까지 뛰어간 다음, 포복 자세로 엎드렸다. “…….” 새벽 이슬에 축축하게 젖은 수풀이 뺨을 따갑게 찔러댔다. 풀벌레가 돌아다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귀를 땅바닥에 살며시 갖다대었다. 궁기병대의 말발굽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서. 삼십 초 정도 기다렸을까. 땅이 가볍게 약동했다. 말소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아우스터리츠 전황: 마왕군의 우익(=제국군의 좌익)에 궁기병 공격이 지속되고 있다. 궁기병을 섬멸하러 마왕군이 치고 나올 것을 노리고, 제국군 기사단이 구릉의 사각지대에 매복하고 있다. 마왕군은 상대편의 의도를 간파하여 고수방어 중. 그리고 단탈리안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왕군의 좌익(=제국군의 우익)에서도 전투가 발생하기 직전. 다만 우익과 다르게 좌익에서는 양편 모두 지극히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00098 왕과 장군 =========================================================================                        “이리야아!” “워어, 워어!” 우리가 엎드린 곳에서 채 이십 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곳을 궁기병들이 내달렸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다소 요란하게 소리질렀는데, 부대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상대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충돌사고가 일어나기 십상이니까. 기마병들이 나와 라우라를 지나쳤다. 그들은 측면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전방을 주시하는 것만으로 이미 그들은 집중력을 전부 소진하고 있을 터였다. 야간 전투가 되도록 지양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이다. 시각이 봉인된 채로 목숨을 위협받으며 전투에 나선다, 이것이 병사 개인한테 얼마나 심력을 소모하게 만드는지.……어느 군대가 야습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정예병임을 증명하며, 심지어 운용하기 까다로운 궁기병을 야습에 동원한다는 것은 그들이 징집병 따위가 아니라 전문군인임을 뜻한다. 무슨 상관인가. 전문군인이라 해서 목뼈가 부러져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내가 말없이 오른손을 꾸욱 움켜쥐었다. 어떤 정해진 신호가 아니었다. 단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 동작. 그러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땅바닥에서 어두운 것들이 스멀스멀 솟아나왔다. 마치 그림자로 이루어진 점액질 같았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흑기사의 형체를 이루었는데, 빈틈없는 갑옷으로 무장했음에도 여전히 몸의 반절쯤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주변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압도적인 사기(死氣)에 귀뚜라미조차 숨어들었다. 열두 명의 흑기사. 그들은 안개에 휩싸인 밤 그 자체였다. 저것들을 죽여라. 죽음의 기사들이 숨결을 뱉었다. 지독히 차가운 숨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생체활동의 일환으로 내쉬는 숨처럼 따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데드 몬스터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마나, 그것의 잔재였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흑기사들이 차갑게 살기를 가다듬고 있음을. 지금이다. 궁기병들이 내 부대의 군진에 사격을 가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병종이나 공격 직후에 가장 허약했다. 기마병들이 말머리를 돌려 반전하는 그때, 죽음의 기사들이 탄환처럼 빠르게 질주하여 그들을 덮쳤다. 단 일격이었다. 열두 명의 흑기사는 열두 명의 궁기병을 일도양단했다. 궁기병들은 애마와 함께 통째로 두짝으로 갈라졌다. “어, 어엇――.” 운 좋게 첫 공격의 대상으로 선점되지 않은 궁기병 몇 명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두운 탓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을까. 그들이 비명을 지를 틈은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은 당연하게도 칼을 휘두른 다음에 또 휘둘렀으며, 이격째에 나머지 궁기병 전원이 죽어나갔다.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궁기병 소부대가 격멸됐다. ─ 그오오오. 죽음의 기사들이 대검을 늘어트리고 내쪽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것인가? 우리의 적은 이것으로 끝났는가? 녀석들은 그렇게 불평하고 있었다. 고위 몬스터답게 녀석들은 일단 형식적으로 내 부하였으나 시도때도 없이 자존심을 세웠다.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해야 할까. 내 마왕 레벨(E)에 비하여 몬스터 레벨(A)이 지나치게 높은 탓에 이쪽을 깔보는 것이었다. 뭐, 아무튼 명령은 들으니까 괜찮았다. 모든 몬스터와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교감을 나눌 필요는 전혀 없었다. 블링이나 요정들과 저들은 달랐다. 죽음의 기사들은 강했다. 그거면 됐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우리는 신속하게 다른 곳의 궁기병 부대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나는 열두 명의 흑기사와 열 마리의 요정을 이끌면서 이동했다. 세 번 정도 접전을 펼친 결과, 역시나 궁기병은 아무리 많아봤자 마흔 명 이상으로 몰려다니지 않았다. 그 정도 숫자는 내쪽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궁기병 부대를 솎아냈다. “어이, 큰일 났네! 적들이 반격에 들어갔다고!” 말을 타고 궁기병들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내가 나타나자 궁기병들이 경계했다. “누구냐? 소속을 밝혀.” “프리데리츠. 레프하임 경의 시종이라네.” 방금 처치한 군인의 이름이었다. 죽이기 전에 상태창을 통하여 신분을 알아냈다. “이보게들, 우리 부대는 지금 전황을 알려주려고 한 명씩 나뉘어서 여름날 개새끼처럼 뛰어다니고 있네. 몬스터 놈들이 드디어 발정이 나서 무작정 돌격하기 시작했거든.” 궁기병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서로 쳐다보았다. 일단 인간처럼 생겼고, 인간 전용의 갑옷을 입었으며, 합스부르크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나를 보고 의심이 적지 않게 사라진 듯했다. “허나 우리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도…….” 그때였다. 영령의 상태로 궁기병들 바로 뒤편까지 접근한 죽음의 기사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솟구쳤다. 말들이 놀라서 앞발을 들어올렸다. 궁기병들이 당황해하며 허리춤의 칼을 뽑으려는 순간, 그보다 빠르게 흑기사의 대검이 날아들었다. 붉은 피가 공중에 튀었다. 머리통을 잃은 시체들이 갸우뚱거리다가 이윽고 힘없이 마상에서 떨어졌다. 털썩, 털썩, 하고 시체가 차례대로 풀밭에 고꾸라졌다. 허리가 자유로워진 군마 몇 마리가 안개 저편으로 도망쳤다. 나머지 대여섯 마리의 말들은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프르르 투레질을 했다. “주군, 계속해서 휘몰아쳐야 한다.” “동의합니다.” 라우라와 나는 말을 한 마리씩 잡아탔다. 궁기병이 죽음의 기사한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이상, 기습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느니 차라리 최대한 빠르게 적들을 해치워나가는 것이 현명했다. “기사들이여, 들으라!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나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어 그대들이 불만에 차 있다는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이다!” 내가 호기롭게 일갈하고는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자존심은 뒷전에 밀어넣어라. 승리하지 않은 병사가 논하는 명예일랑 개밥으로나 줘버려라. 그대 자신의 진정한 의무를 위해, 지금도 적들의 서슬을 힘겹게 버텨내고 있을 아군을 위해 검을 휘두르라! 그것조차 못한다면, 너희를 나에게 하사한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 그오오오오. 내 외침에 흑기사들이 불만스럽게 포효했다. 녀석들은 명백히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말에 납득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었다. 너희는 잠자코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을 모시다가 갑작스럽게 서열 제71위 쩌리를 받들게 되어 불만스럽겠지. 알게 뭐냐. 바로 그 서열 제8위와 승부를 해서 이긴 사람이 나 단탈리안이다. 감정상의 불복 따위 배려해줄 만큼 전장은 녹녹하지 않다. 그건 전투의 프로인 너희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영체화 할 필요도 없다! 달려라!” 나는 군마를 몰고 다음 지점으로 달려갔다. 라우라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 양옆으로 흑기사들이 초인적인 빠르기로 뒤따랐고, 요정들이 날아왔다. 곳곳에서 사역마들이 공중으로부터 나에게 적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곧이어 우리는 한 무리의 궁기병 부대로 치달았다. “마왕 단탈리안이 여기 있다!” 궁기병들이 깜짝 놀라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빠르게 화살을 장전하여 직사했다. 놀라운 반응 속도였다. 나는 요정들로 하여금 바람마법을 일으키게 하여 내 전방에 일종의 바람막이를 형성했다. 쉬시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나와 라우라를 비껴나갔다. ─ 그롸아아아아! 죽음의 기사들은 화살을 몇 발 맞은 모양이었지만, 끄떡없이 달리기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궁기병에겐 화살을 한 번 더 날릴 기회가 없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대검을 휘둘러 제국군의 머리를 쪼갰다. 순전히 힘으로 밀어붙인 일격이었다. 검이 찌르고 휘두르고를 반복하자 순식간에 스무 명 가량의 궁기병이 절단되었다. 마치 전차가 보병을 깔아뭉개는 듯한 기세였다. “어찌된 것이 허약한 나보다도 느려터졌군! 바르바토스 군대의 훈련이 그리 가혹하지 않았나보지!” 부대 하나가 날아가버린 것을 확인하고, 내심 흐뭇한 마음을 감추며 크게 비웃었다. 흑기사들은 뻔한 도발에도 분노했다. 수백 년 동안 바르바토스와 함께해온 그들로서는 무엇보다도 서열 제8위 마왕의 군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했다. 그때 이곳의 소란을 들었는지 일단의 궁기병 부대가 이쪽으로 쏟아졌다. 지금까지 기습적으로 당한 부대와 다르게 그들은 작심하여 공격했다. 먼저 일제 사격을 가한 다음, 허리춤에서 장도를 빼들어 돌격해왔다. “마왕이다! 마왕을 격살하라!” 이번에는 규모가 꽤 컸다. 얼핏 보아서 마흔 명 가까이 되었다. 소부대 두 개가 합친 것이든지, 아니면 제법 지위가 높은 장수가 이끄는 부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궁기병에서 자연스레 경기병으로 전환한 병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칼을 치켜들었다. 그중 두 명이 내게 세이버를 휘둘렀다. 그러나 칼날이 나한테 닿는 일은 없었다. 칼이 반원을 그리면서 내 가슴에 부닥치기 직전, 한 개의 대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채애앵,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자루의 대검이 기병의 세이버 두 자루를 한꺼번에 막아냈다. 죽음의 기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대검을 내밀어 날 보호해준 것이었다. ─ 그롸아아! 흑기사는 기병의 칼들을 흘려막고 곧바로 대검을 돌려 휘둘렀다. 대검은 기마병 두 놈의 허리를 일직선으로 베었다. 갑옷이 부서지면서 뜨거운 내장이 터져나왔다. 내 몸에 핏방울이 대거 튀었다. ─ 그오오오. 죽음의 기사가 내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뿐이었다. 바라본다고 해야 할지, 투구 너머로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녀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기마병 무리로 뛰어들었다. 대검이 새벽공기를 가를 때마다 기병의 턱이 터졌고, 허리가 갈라졌다. 마흔 명으로 이루어진 기마부대가 빠른 속도로 전멸했다. “후, 후퇴하라!” “저놈이 대장이다!” 명령조로 후퇴 운운하는 기마병을 향해 내가 소리쳤다. 죽음의 기사 한 명이 투창하듯이 대검을 날렸다. 2미터짜리 투핸드소드가 기마병의 어깨죽지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병사의 오른팔이 팔뚝째로 찢어졌다. 병사는 비명을 지르면서 낙마했다. 미처 낙법을 취하지 못하고 목부터 땅에 부닥쳤으니 십중팔구 즉사했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경기병으로는 최고의 중장병인 죽음의 기사를 결코 당해낼 수 없었다. 제국군은 과감하게 접근전을 걸어왔으나 과감함은 단지 과감함으로 그쳤고, 자신들의 용기에 목숨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여기는 일단락되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음 지점으로!” 약 삼십 분에 걸쳐 우리는 궁기병 열두 부대와 조우했다. 때로는 그들과 접근전을 벌였고, 때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접근전에서는 그들을 무참하게 격멸했고, 추격전에서는 적당히 놓아주었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국군으로 하여금 궁기병 전술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순순히 후퇴해준다면야 굳이 추격할 필요까진 없었다. 전투 와중에 요정들의 바람막이를 피하여 화살 하나가 내 허벅지에 박혔다. 그것이 내가 열두 번의 소규모 접전에서 입은, 유일한 피해였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으나 그뿐이었다. 마왕의 신체는 회복능력이 대단했다. 겨우 이 정도로 죽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에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흐음, 기묘한 불운이로군. 마지막 전투에서는 안타깝게도 죽음의 기사를 한 명 잃었다. 기마부대에 지휘관으로서 진짜 기사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궁기병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관이었겠지. 군기(軍旗)까지 있었으니 확실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군기를 노획하는 것으로써 이번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라우라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병사 한 명도 죽이지 못했다. 다만 나와 더불어서 죽음의 기사와 요정을 지휘했을 뿐이다. 나 역시 약간 지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대로 물러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만…….” 어림잡아서 이백사십 명에 이르는 병사를 죽였다. 그에 버금가는 숫자의 병사가 후퇴했다. 제국군의 현장 지휘관은 지금쯤 궁기병 전술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겠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에게 보고할 테고. 즉, 우리 제6군단 우익은 그만큼의 시간을 벌게 되었다……. 멀리 지평선에서 해가 밝아왔다. 태양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져서 뿌연 빛깔로 비추기만 했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시야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적군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궁기병으로 아무리 공격해본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너희가 바라는 회전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제 어떻게 나올 셈이냐, 제국군.   00099 왕과 장군 =========================================================================                        * * * 궁기병, 후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일선 부대의 보고를 접했다. 제국군에는 하위부대와 상위부대 사이로 연락장교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이들 덕택에 제국군은 부대들 간에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었다. “마왕군이 반격 태세에 들어갔는가?” “아닙니다, 각하.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여 궁기병을 각개격파했습니다.” 장교가 딱딱하게 굳어서 대답했다. 지금 군막사에는 프리츠 로젠베르크 변경백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1황위계승권자인 루돌프 합스부르크 황태자, 미카엘 콜로브라트 장군, 요한 쿠투소프 장군, 페르디난트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제국군의 최고지휘관들이 자리했다. 연락장교 입장에서 실로 기라성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아군의 철수를 보고해야만 했다.……어쩌면 형편없는 보고에 분노하여, 예컨대 황태자가 연락장교인 자신에게 발길질 세례를 퍼부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앞으로 평생 '황태자 전하에게 밟힌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군문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출세는 물 건너가는 셈. 연락장교는 몬스터 놈들에게 패배한 아군의 궁기병이 원망스러웠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자기가 보고해야 한다는 운명이 저주스러웠다……. “그것 보시오, 백작!” 루돌프 황태자가 큰소리로 말했다. “소극적인 작전안은 쓸모없다고 누누이 경고하지 않았소외까. 미래에 과인의 기사가 될 동량들이 땅바닥에 버려진 셈이 되어버렸군. 인재가 곧 국력이오. 혹여 백작은 병사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 아니오?” “송구하옵니다.” 변경백이 황태자를 향하여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자세였으나 동작에 절도가 배어 있었다. 황태자는 너그럽게 사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손을 저었다. 허나 속으로는마뜩치 않았다. ‘제국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바퀴벌레 놈.’ 루돌프 황태자는 강력한 절대군주를 꿈꾸었다. 언젠가 황제로 등극하여 변경백을 모조리 폐지하고자 했다. 그에게 변경백이란 지나치게 막강한 군권을 지닌 잠재적 반역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나의 군주, 하나의 상비군, 하나의 국가――절대군주로 향하는 도정에 지방군벌 따위 방해를 줄 뿐이었다. 황태자의 속내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었다. 비단 그의 일그러진 얼굴만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하기에 앞서 황태자는 중앙군을 앞세우지 않고, 변경백으로 하여금 먼저 군대를 움직이라 명령했다. 심지어 용병을 뒤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봐도 변경백의 군대를 소모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변경백은 당연히 군무에 정쟁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상식적인 논리를 들어 반박했다. 이에 대하여 황태자 및 중앙군 소속 장군들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싫으면 군 지휘권을 넘겨라.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머리가 아팠다. 어쩔 수 없었다. 총사령관인 만큼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저들의 논리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1만에 불과한 변경군이 2만의 중앙군과 2만의 용병군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행세하려면 어느 정도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현재 마왕군 우익에 맞서서 배치된 보병과 기사단은 순전히 변경군 1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변경백의 과감한 결단에 일단 황태자와 중앙군 장수들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디 한번 네가 얼마나 군을 잘 지휘하는지 관람해보겠다는 태도였다. 변경백이 연락장교에게 말했다. “궁기병은 전원 기사의 시종으로 이루어졌다. 쉬이 패배하지 않았을 터. 마왕군이 어떤 병종을 동원했느냐?” “검은 갑주를 입은 몬스터였습니다. 사람 키보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죽음의 기사로군.” 변경백은 할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떠올리면서 즉각 연락장교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침음을 삼켰다. 변경백의 조부 역시 변경백이었고, 지난 수백 년 동안 마왕군에 맞선 전투를 일일이 적어서 남겼다. 거기에선 ‘백오십 년 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죽음의 기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가를 세세하게 묘사했다. 변경백은 선대의 기록물을 어릴 때부터 수십 번 반복해서 읽었으므로 죽음의 기사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다른 장군들이 흥미가 동하였다. 죽음의 기사. 무척 생소한 이름이었다. 다만 체면이 문제여서 누가 섣부르게 질문할 수 없었는데――변경백이 아는 몬스터를 자신은 모른다고 내비추면, 장군 개인의 체면이 아니라 중앙군의 체면이 문제되었다――마침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주변 분위기를 능숙하게 읽어냈다. 용병대장이 물었다. “총사령관 각하. 죽음의 기사란 몬스터는 처음 들어보는군요. 대륙의 구석을 죄다 돌아본 소장으로서도 생소합니다. 어떤 몬스터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불사의 몬스터, 그중에서도 영체(靈體) 몬스터라네. 오로지 7서클 이상의 흑마법사만이 사역할 수 있다고 알려졌지. 가히 일당백의 무력을 갖고 있어서 개체 하나 하나가 최정예 기사와 맞먹는다네.” “어이쿠.” 용병대장이 어깨를 움츠렸다. “꽤나 무시무시한 놈들이로군요.”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의 근위기사대라고 보면 된다네. 아직까지 바르바토스가 아닌 마왕이 죽음의 기사를 부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 마왕군은 우익도 만만치 않게 견고한 듯하네.” “호오. 그렇다면 적의 우익에 마왕 바르바토스가 있다, 그렇게 판단해도 좋을련지요?” 변경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네. 소규묘의 별동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아하니 극히 적은 숫자만 배치되었겠지. 연락장교, 별동대의 규모에 대해서 보고하게.” “예. 다소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궁기병 부대들이 맞닥뜨린 몬스터는 약 예순 마리에 이르렀습니다.” “예순 마리라.” 변경백이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예순 마리, 많은 병력이 아니었어도 대단히 적은 숫자 또한 아니었다. 죽음의 기사는 본드래곤을 제외하자면 단연코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병종. 그런 몬스터가 마왕군 우익에 배치되어 있었다.……즉, 마왕군에게 우익이야말로 가장 허약한 약점이며,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마왕 바르바토스가 근위대의 일부까지 추려냈다는 얘기이리라. 예순 마리나 보충해야 할 정도라면 우익이 예상보다 훨씬 허약할지 모르겠다고 변경백이 생각했다. 궁기병을 쓰는 유인책이 실패했을지언정 전황이 반전되거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보너스가 사라질 따름이었다. 이쪽이 유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꿀꺽. 연락장교가 침을 삼켰다. 죽음의 기사 예순 마리, 이것은 일선부대 지휘관이 잔뜩 숫자를 과장한 것이었다. 현재 마왕군의 우익을 상대하는 제국군 1만은 변경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체를 통솔하는 사단장은, 변경군이 아니라 중앙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변경백이 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앙사령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자, 그를 대신하여 중앙군 장수가 파견된 것이었다. 여기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병폐가 노출되었다. 단탈리안이 예측했다시피, 제국군의 상층부는 두 패로 나뉘었다. 중앙군과 변경군. 이들은 서로 전투에서 지휘권을 잡으려고 사사건건 다투었으며, 이것은 일선의 현장지휘관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행보하게끔 만들었다. 중앙군 장군의 실패는 중앙군의 지휘권 약화로, 변경군 장군의 실패는 변경군의 지휘권 약화로 이어졌다. 따라서 궁기병 전술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단장은 자신이 무능해서 패배한 게 아니고 적군이 지나치게 많아서 패배한 것이라고 어느 정도 과장을 섞어서 보고했다. 애시당초 명목상의 총사령관과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따로 있다는 것부터 문제였다. 한 몸에 머리를 두 개 달아버린 셈이니 군대가 잘 돌아갈 리 없었다. 지독하게 효율이 떨어지는 체계가 이루어진 까닭은, 만일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훈은 명목상의 총사령관 루돌프 황태자가 독식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면 책임을 실질적인 총사령관 변경백한테 전부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을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또한 꿰뚫고 있었다. 그는 가문의 입장을 고려하여 루돌프 황태자한테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지금의 행태에는 약간이나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장 가증스러운 자는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자 곁에 앉아서 호시탐탐 군지휘권을 노리는 중앙군 장수들이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귀족들은 죄다 바퀴벌레 같은 작자뿐이로군.’ 중앙군은 변경군을, 변경군은 중앙군을 바퀴벌레로 취급해버리는 사태가 연출되었다. 중앙군은 황태자가 친정하는 전투에서 일개 변경군이 총사령관의 감투를 썼다는 사실, 심지어 자기 영지를 꼴불견스럽게 잃어버린 패장이 지휘권을 잡았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변경군은 대(對)마왕군 전투에 있어 누구보다 전문적인 자신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깔보는 중앙군의 행태에 분노했다. 이 와중에 황태자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한답시고 중앙군 장군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일이 지휘권에 간섭하려 들었고, 용병대장은 중간다리가 되어 각 장군 간의 신경전을 최대한 무마해보았으나 마지막에 가선 자신의 고용주인 황태자한테 이끌려다녔다. 결과는 단순했다. “소장은 처음부터 불만이었소. 투석기로 찔끔찔끔 공격한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오!” “이제와서 무슨 소리외까. 우리 모두가 지난 회의에서 동의한 일 아니오.” “투석 공격은 적군뿐만이 아니라 아군의 움직이까지 제한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멈추고――.” “궁기병은 실패했소, 이는 명백하오.” “그러니까 근위기사단을 투입하겠다는 거요, 말겠다는 거요!” 우선 회의가 무척 길어졌다. 몇 시간이고 회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물론 총사령관인 변경백은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길게 회의해봤자 아군에 득이 될 게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으며. “알겠습니다. 우익은 이대로 1만이 단독 공격하기로 하지요.” 회의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모든 작전의 책임을 자신이 홀로 뒤집어 쓰기로 결심했다. “크흠.” “뭐, 그렇게 합시다. 흐흠.” 황태자와 중앙군 장군들은 마뜩치 않게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총사령관이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겠다는데 반대 의견을 낼 명분이 마땅히 없었다. 물론 총사령관의 단독 공격이 혹여 실패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들개처럼 달려들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을 물어뜯을 태세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우외환을 맞이했음에도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강경하게 나서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절대적인 자신감! 그는 자신의 군대를 믿었다. 그리고 마왕군 중에서 우익이 제일 허약한 지점이라는 사실 또한 파악했다. 강한 아군이 약한 적군을 타격한다, 그렇다면 패배할 리가 없노라고 변경백은 확신하고 있었다. “자네는 명령서를 들고 즉시 출동하게.” “예, 총사령관 각하!” 사령부의 명령은 곧바로 전방의 제국군에 전달되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친필로 서명한 명령서였다. 황제가 정계에서 사실상 은퇴한 이상,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이보다 무거운 명령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중앙군 소속의 키엔마이허 사단장이 즉각 예하 장병에게 큰소리로 호기롭게 소리쳤다. “전군, 전진하라!” 8천 5백 명의 보병과 1천 5백의 기사단이 짙은 안개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는 마왕군 우익이 며칠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구축해놓은 군진이 자리했고, 그 너머에는 4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가 대기했다. 제국군에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적의 우익을 돌파하라는 것이었고, 마왕군에 내려진 명령은 기필코 우익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제국군의 창날과 월맹군 제6군단의 방패, 폰 로젠베르크의 공세와 서열 제16위 마왕 제파르의 고수방어가 맞붙기에 이르렀다.   00100 왕과 장군 =========================================================================                        * * * 유인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제국군은 재빨리 공격해왔다. 사역마 정찰 덕분에 우리는 제국군이 어느 지점을 타격하려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곳을 향해 우익의 모든 부대가 집결했다. 한 시간 정도 흐르고 드디어 양군이 격돌했다. 나와 라우라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정석적으로 오는군요.” “정석이기에 강력하니 말이다.” 먼저 돌격한 것은 역시나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이 이쪽의 전선을 헤집으면, 뒤이어서 보병을 투입하여 결단을 내버리려는 속셈이겠지. 기사단이 목책과 뾰족한 말뚝이 겹겹이 박힌 우리의 진지로 겁없이 달려들었다. 백 미터 바깥에서 불쑥 안개를 뚫고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기사단의 파도는 과연 무지막지했다. 그들은 전차처럼 밀어닥쳤다. 어찌나 거센지 첫 돌격부터 제1진이 무너질 뻔했다. “멍청한 돼지 새끼들! 창을 들어! 창을 들라고! 육봉으로 인간년들 강간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쫄보처럼 떨어대고 앉았냐, 돼지 새끼들아!” 리저드맨 부사관이 고레고레 소리 지르면서 오크 병사들의 궁뎅이를 빵빵 걷어찼다. 오크 몇 마리가 넘어졌다. 그들은 헐레벌떡 투구를 고쳐쓰고 장창을 붙들어 잡았다. 마왕이 명령을 전달한다지만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용감해지거나 두려움 같은 감정이 증발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르릅, 그루훕, 그르릅!” 오크들이 장창을 세웠다. 보통 인간이 5미터에서 6미터 길이의 장창을 쓰는 반면, 힘이 훨씬 좋은 오크병사는 9미터가 넘는 장창을 썼다. 무려 약 10미터에 이르는 장창들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빽빽하게 들어서는 것이었다. 여기에 인간용보다 창대가 두꺼웠다. 아무리 기사가 오러를 써대는 인간병기라 할지라도 이 두터운 가시나무 숲을 뚫기란 쉽지 않았다. “크야아아아!” 물론 괴물 같은 인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 기사가 일순 오러를 폭발적으로 일으켜서 단 한 번의 칼질로 장창 예닐곱 개를 파괴했다. 순식간에 틈이 생겨버렸다. “제일 공훈자는 나, 산돼지 기사단의 프리드리히다!” 기사가 함성을 내지르면서 그곳으로 말머리를 치박았다. 곧바로 뒤에서 대기하던 오우거가 급히 달려들었다. 쿠웅, 하고 기사의 랜서와 오우거의 도끼가 부닥쳤다. 오우거는 기사를 대비하여 일부러 거대한 도끼를 장비했다. 웬만큼 두꺼운 강철도끼가 아니고서야 기사의 오러에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기사의 돌격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잠시의 틈으로 충분했다. “크르릅, 그루후웁!” 제2진으로 대기하던 오크병사들이 일제히 몰려와서 장창을 찔렀다. 기사가 탄 말을 향하여. 이 세계에서 기사들은 특별히 몬스터의 피가 섞인 말을 양성하여 타기에, 기사전용의 군마는 이미 하나의 훌륭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장창이 무수로 쏟아지는데 몬스터 핏줄의 군마인들 버틸 수 없었다. 장창이 넙적다리를 꿰뚫고 나와 쑤욱 허리살을 찔렀다. ─ 이히이잉! 말이 날뛰면서 눈앞의 오우거한테 머리를 박았다. 평범한 말보다 덩치가 두어 배는 큰 군마가 전력으로 박치기를 하니 오우거의 자세가 약간 흐트러질 정도였다.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대는 강철일진저! 노바이코피아(novae copiae)!” 일정 간격마다 배치된 마법사가 달려와서 서둘러 마법을 영창했다. 창칼의 절단력을 일시적으로 대폭 강화하는 술식이었다. 마법에 힘입어 오크 장창병들이 다시 한번 힘차게 창끝을 내밀었다. 그것들은 기사의 가슴팍이나 허리를 뚫었다. 그중 한 개가 군마의 머리통에 정확히 찔러 들어갔다. 피가 낭자했다. “으, 크흐읍!” 오러로 신체가 강화된 탓일까. 기사는 가슴과 허리에 창날이 박혔음에도 장검을 빼들어서 창대를 베었다. 무시무시한 생명력이었다. 그러나 분투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전사했다. 그가 장창을 상대하는 사이에 오우거가 도끼를 휘두른 것이었다. 도끼날은 기사의 투구를 머리통째로 분쇄했다. 사방에 뇌수가 튀었다. “흐르아아아아!” 오우거가 포효했다. 강한 사냥감을 잡아내고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과시했다. 오크 장창병들이 그에 호응하여 소리를 질렀다. 제1진에 뚫린 틈은 어느새 제2진의 예비대가 메꾸고 있었다. 진지는 굳건했다. 저 기사는 제국군에서 가장 처음으로 마왕군의 제1진을 돌파했다는 명예를 얻었으나, 대가는 결코 값싸지 않았다. 첫 번째 기사단 돌격이 그렇게 끝났다. 진지 이곳저곳이 허술해졌다. 다행히도 완전히 돌파당한 구역은 전무했다. 기사단이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가자 몬스터들이 벌써 승리한 것처럼 함성했다. “힘차게 돌격한 것치고 꽤나 가볍게 물러가네요.” 나는 제4진에 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죽음의 기사들은 이미 제1진에 영채로 잠복해 있었다. 아직 그들이 나설 때가 아니었다. 덕택에 내가 할 일도 없었다. 우리편의 분투를 기도하며 이렇게 바라봐주는 수밖에. “첫 번째이지 않았는가. 아마 우리쪽에서 어떻게 방비하고 있는지 알아볼 겸 시험삼아 돌격한 것이겠지. 이제부터 혹독해질 것이다, 주군.” 나는 라우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돌격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은 적 기사단이 위력정찰의 목적을 가졌고, 또한 전방에 무수히 많은 목책과 말뚝을 박아놓은 탓이었다. 기사들은 목책과 말뚝을 제거하거나 피하기 위해서 속도를 약간이나마 줄여야만 했다. 그것이 기사단의 돌파력을 제법 상쇄했으리라. “뭐하냐, 개새끼들! 좆 빠지게 튀어나가지 않고!” “농땡이 피우다 우리 죽여버릴 속셈이지, 앙!?” 부사관들이 고블린에게 발을 놀렸다. 고블린은 오크 뒤에 숨어 있다가 부사관이 독촉하자 얼른 앞으로 뛰었다. 한꺼번에 백여 마리의 고블린이 뛰쳐나갔다. “케르르륵!” “케릅, 케흐르륵!” 고블린은 세 명씩 한 조를 이루었다. 한 명은 말뚝들을 지게에 졌고, 한 명은 말뚝을 건네받아 땅에 꽂았고, 나머지 한 명은 망치를 크게 휘둘러서 말뚝을 땅 깊숙이 박아넣었다. 이번 전투에서 공병(工兵) 역할을 맡은 고블린이었다. 말뚝 박는 소리가 난데없이 전쟁터를 가득 메웠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금 전방에 뾰족한 말뚝들이 주르륵 늘어섰다. 고블린들은 할 일을 다하고 뛰쳐나갔을 때만큼, 아니 뛰쳐나갔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지에 복귀했다. “훌륭하다.” 라우라가 감탄했다. “완벽한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블린을 운용하여 말뚝을 박아, 기사단의 돌파력을 최대한 상쇄한다. 오크 장창병들로 기사단에 대항한다. 혹여 전선이 뚫릴 경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오우거가 급히 출동하여 일단 저지. 제2진의 오크가 합류하여 포위, 마지막으로 마법사가 처리를 도와준다……제파르 장군은 실로 유능하군.” “음. 공격보다 방어에 특화된 분이지요.” 내가 게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는 서열 제13위의 벨레드와 유형이 정반대였다. 벨레드가 무지막지한 무투파라면 제파르는 전술가, 그것도 방어전의 귀재였다. 제파르가 상위 마왕에 등록된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간단했다. 마왕성이 빌어먹게 공략하기 어려웠다. 상위 마왕일수록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마왕들이 각자 총애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고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에는 언데드 몬스터밖에 없다. 그래서 보스 몬스터인 바르바토스를 잡기는 힘들어도, 마왕성 자체를 돌파하기란 제법 쉽다. 언데드 몬스터에 극도로 효율이 좋은 성녀들을 끌고 가면 되니까. <던전 어택>에서는 먼저 상대 마왕의 유형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공략조를 짜야 한다. 그런데 제파르는 딱히 총애하는 몬스터가 없다. 전혀. 10위권 마왕 중에 오크병사를 쓰는 마왕은 저 양반밖에 없다. 다른 마왕들은 명색에 10위권이라 다들 오크보다 두 급수는 높은 몬스터 위주로 부대를 구성한다. 심지어 고블린까지 있다! F급 몬스터인 고블린이! 오크든 고블린이든 제파르는 각 몬스터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배치했고, 난공불락의 마왕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매우 짜증난다. RPG 류에서 플레이어가 NPC보다 유리한 이유가 무엇인가. 플레이어가 상성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슬라임이 나오면 불계열 스킬을 쓰면 되고, 불도마뱀이 나오면 물계열 스킬을 쓰면 그만이고. 반면에 저쪽에는 종족의 속성과 일치하는 기술밖에 쓰지 못한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제파르는 몬스터 종족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플레이어의 속성적 유리'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플레이어는 벙찌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열나게 머리 쓰면서 전술 대 전술의 싸움으로 몰고가는 방법밖에 없다. 아니면 레벨을 넘사벽으로 키우든가. 뭐, 달리 말해 마왕성을 돌파하기만 하면 정작 보스 몬스터 제파르는 쉽사리 죽일 수 있지만……. “저것 봐라. 기사단이 되돌아왔다.” 라우라가 손가락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새로운 말뚝들에 당황한 모습이다. 첫 번째 돌격과 달라진 점이 아무것도 없군.” 그러했다. 기사단은 용감히 돌격했고, 몇몇 군데를 실제로 돌파했다. 그러나 말뚝 탓에 기사들은 아무래도 서로 간격이 떨어진 채 돌격해야만 했고, 설령 돌파에 성공할지라도 틈새로는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기사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오우거의 긴급출동, 제2진 장창병의 원호, 마법사의 강화마법. 방금 전과 똑같은 시나리오가 두 번째 기사단 돌격에서 재현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 돌격에서는 타이밍을 잡지 못해 대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오크 투창병과 고블린 투석병이 매섭게 창과 돌을 날렸다. 오러를 익힌 기사는 자신의 눈앞으로 날아드는 창을 칼질 한번으로 튕겨냈다. 그러나 시야 바깥에서 우연히 날아드는 것까지 잡아챌 수는 없었다. 몇 개의 창이 군마에 명중했다. 한참 기세 좋게 달리던 군마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기사가 속절없이 낙마했다. 무섭게 내달린 만큼 기사는 낙마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낙마해서 죽거나 다친 기사가 내 눈에만 여섯 명이 잡혔다. 참고로 어떤 기사 한 명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터벅터벅 제국군 쪽으로 뛰어가는 것 아닌가. 나는 어이없어서 그가 안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무슨 몸이 강철로 이루어졌나……. 제6군단 우익은 두 번째 기사단 돌격을 완벽하게 방어했다. 몬스터 부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올라갔다. 안개 탓에 아군의 진형도 백 미터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방천지가 몬스터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고블린 공병들이 신이 나서 다시 말뚝을 박으러 출동했다. 그때 군악단이 음악을 울렸다. 뿔피리와 꽹과리 등으로 이루어진, 고약하기 그지없는 군가였다. 요컨대 몬스터의 군가로는 딱 제격이었다. 오우거, 오크, 고블린, 리저드맨, 호족, 묘족,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들이 땅을 힘차게 밟으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종족과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군가를 꽥꽥 소리쳤다. 그것은 기괴하고 음산한 합창 교향곡이었다. 제국군의 세 번째 공격은 기사단 돌격이 아니었다. 궁기병들이 재등장했다. 아마 내 부대가 미처 잡지 못하여 놓쳐버린 궁기병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멀리서 화살을 쏘고 퇴각하기를 반복했다. 기사단 돌격에 대부분의 목책이 무너진지라 몬스터는 화살세례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내가 혀를 찼다. “저런. 죽음의 기사를 다시 활용해야 할까요?” “아니다. 주군, 저쪽을 봐라.”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던 궁기병 전술은, 그러나 곧바로 좌절되었다. 몇 시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그때는 마왕의 부대들이 넓게 퍼져 있었으나 지금은 집합했다. 즉 오우거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마법사까지 합류했다. 마법사가 전방에 발광 마법을 걸어 시야를 넓히자 궁기병의 모습이 뚜렷하게 비추었다. 그 기회를 산의 주인은 놓치지 않았다. “크라알라!” 오우거가 투창병의 창을 냉큼 뺏어들더니 궁기병을 향해 홱 던졌다. 창은 총알처럼 날아가서 궁기병의 몸통을 꼬치처럼 뚫었다. 그러고도 속도가 죽지 않아 창은 시체를 꽂고 한참이나 멀리 날아갔다. 그 광경이 전선 전체에서 연출된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궁기병들은 손실을 견디다 못해 꼬리를 말고 후퇴했다. 오우거의 포효가 전장에 길게 울려퍼졌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은 모르는 진실 하나. Q. 제파르는 왜 마왕치고 저리 특이하게 몬스터를 운용하나요? A. 제85화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제파르를 골리면서 한 말인데요. “내가 말했잖아, 병신 같지만 멋있다고. 깔깔! 멋있긴 해도 병신은 결국 병신이거든. 아 완전 대차게 말아먹었지 뭐야. 너희 그거 아냐? 이 새끼가 그때 거기서 병력을 죄다 꼴아박아서 지금까지도 오우거가 스무 마리밖에 없어요. 서열 제16위 새끼가 오우거 스무 마리리야!” 제파르는 제6차 월맹군, 그러니까 비교적 신세대 마왕이던 시절에 엄청나게 큰 전술적 착오를 했습니다. 대륙에서 세 번째로 강력하다는 브르타뉴 왕국 근위기사단 <초록장미 기사단>에 오우거로 닥돌한 것입니다. 기사단이 돌파력이 강해봤자 오우거만 하겠어! 하고 실로 젊은 마왕답게 호기로이 전군 돌격을 외쳤습니다만. 바르바토스가 얘기했다시피 결과는 폭망. 오러를 활용하고 몬스터 핏줄의 군마를 타는 기사들한테 발렸습니다. '절대로 회전에서 기사단과 돌격으로 맞붙지 마라'라는 병법서의 교훈에다 제파르 본인의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입은 피해로 제파르는 거의 재기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당연히 있는 몬스터 없는 몬스터 바리바리 끌어다가 마왕성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즉 제파르가 방어전의 귀재가 된 까닭은 그냥 오우거 같은 고급 몬스터를 싸그리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패배는 승리의 어머니라더니, 아름답군요.   00101 왕과 장군 =========================================================================                        “…….” 내가 침을 삼켰다. 이제부터 난전이 펼쳐지리라 직감했다. 기사의 돌파력을 이용한 일점 공격도, 궁기병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도 먹히지 않았다. 제국군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첫 번째는 이대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후퇴함으로써 어떠한 이득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후퇴를 선택할 장군은 없었다. 그러니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였다. 안개의 장벽에서 새까만 그림자의 파도가 몰려왔다. 인간종 특유의 정련한 군악과 함께. 언젠가 산골마을 촌민들이 꽹과리로 요란하게 울부짖은 것과 다르게, 제국군은 나팔과 북을 위주로 썼다. 안개 천지에 뿔나팔 소리가 가느다랗게 울었다. “시작했군요.” 보병을 앞세운 근접전. 제국군 장창병들이 항오를 이루어 차근차근 이쪽에 다가왔다. 오크 투창병과 고블린 투석병이 쉴 새 없이 무기를 투척했다. 그러나 가시나무숲처럼 촘촘히 곤두세워진 장창들에 한 번쯤 부닥쳐서 창이든 돌이든 위력이 한결 초라해졌다. 연못에 돌을 떨어트려도 금세 잠잠해지듯 제국군은 투척 공격에 끄떡하지 않았다. 제기랄. 그때 아군 후방에서 투석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산맥의 산성들에서 우리를 깨나 애먹인 바로 그 투석기였다. 사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진 대신 무거운 바윗돌을 날려보낼 수 있었고, 공성무기로 쓰기보다 지금처럼 야전에 쓰기에 제격이었다. 제파르 대장은 이때를 위해 산성들에서 투석기를 죄다 약탈해서 가져왔다. 열 개의 바윗덩어리가 한꺼번에 공중을 가로질렀다. 그것들은 안개의 장벽을 넘어 적진에로 쏘아졌다. 장창병은 병종의 특성상 매우 밀집하여 대형을 이루었는데, 이런 진형은 포격에 무척 취약했다. 이 세계에는 아직 대포가 발달하지 않았으니 투석기가 장창병의 천적이었다. “끄아아악!” “피, 피해라!” “피하지 마! 시발 놈들아,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바위덩어리가 마음껏 제국군의 장창병진을 휘저었다. 실질적인 피해도 크겠으나 심리적인 위축이 가장 심각했다. 상상해보라. 안개 낀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듯 바위가 내리꽂는다. 머리 위로 바윗덩어리가 들이닥치는데 엄중한 대열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라우라가 간단하게 평했다. “흐음, 우리 마왕군의 중앙과 좌익을 붙잡아두느라 투석기를 전부 놓고 온 것이 패착이었다.” “전략적인 승리를 고집하다가 전술적인 피해를 입게 된 거죠.” 제국군에도 당연히 투석기가 있었다. 그러나 안개 탓에 시계가 제한된 상황에서 투석기를 활용하기란 어려우니, 마왕군의 중앙과 좌익을 묶어두려고 차라리 무차별 사격에 들어가 있었다. 제국군은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 대신 현재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어떤 전략에든 일장일단이 있다고 할까. 내가 가만히 적군을 관찰하다 혀를 찼다. “쯔읏.” 나는 투석기가 적의 전열을 흐트러트리는 효과를 낳으리라 기대했다. 내 기대는 간단히 배반되었다. 제국군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전열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고 점차 아군의 진지로 다가왔다. 저런 미친놈들을 봤나. “산성수비군도 그렇고 저놈들도 그렇고, 제국 군대는 무슨 초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답니까? 도대체 물러서는 경우가 없군요. 비상식적입니다.” “징집병이 아니라 상비군일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비군은 용맹하기로 정평이 났으니.……어쩌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직속 부대일지도 모른다. 인류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항시 훈련에 임한 자들이다. 평범한 군인과 일선을 달리하겠지.” “그놈의 인류!” 내가 으르렁거렸다. “인류를 위해. 인류를 지키기 위해. 전부 썩은내 풍기는 선전구호입니다. 제가 진실을 알려드리지요, 라우라. 조금이라도 이익이 없다면 명분은 결코 대규모의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번 원정에서 장병들한테 제대로 먹을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따지고보면 내가 연출했다. 몇 개월 전부터 나는 쿤쿠스카 상회의 정보망을 빌려서 대륙 정세를 되도록 세세하게 파악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뇌부가 어떤 프로파간다를 동원했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었다. “올해부터 대륙 열국은 블랙 허브를 대량으로 수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민초는 여전히 흑사병에 신음하고 있어요. 왜인지 압니까? 블랙 허브를 군대에 우선적으로 분배하기 때문입니다. 각 정부가 필사적으로 재배한 블랙 허브입니다. 상비군을 전부 치료하고도 창고에 여유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창고를 열지 않습니다……블랙 허브를 얻고 싶으면 군대에 지원하라는 것입니다!” 상비군만으로 전쟁을 치루는 나라는 없다. 이 시대엔 징집병이 장창병으로든 고기방패로든 쓰인다. 군대를 징집하려면 마을들의 억센 불만과 저항에 직면해야 할 뿐더러 지방의 모든 마을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라리 블랙 허브를 미끼로 지원병을 받자, 하고 대다수의 국가가 결정했다. 결국 사람들은 블랙 허브를 얻으려 마을을 등지고 군대 집결지로 걸어간다. 가족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마을을 지키기 위해. 그중에는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 엉기적 기어나가는 병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병자가 먼 거리를 걸어서 집결지까지 당도할 가능성은 무척 적다. 길가에서 힘이 떨어져 객사할 뿐. 대륙의 모든 가도에서 지금 병자들의 덧없는 행군이 연출되고 있다……. “인류의 수호고 뭐고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영주들이 초기에 대응만 잘했다면 영지민들이 흑사병에 신음할 일도 줄어들었겠지요. 세금을 투입하여 블랙 허브를 재배해놨더니, 이제는 병사가 되지 않을 거면 약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합니다. 모든 책임과 피해를 영지민이 입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류라는 이름으로 치장하다니……그만한 개소리도 없습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조건 기사단과 정예병에 블랙 허브를 나눠주었다. 변경백이 영지를 잃고 퇴각하는 가운데 정예병이 거의 탈영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은혜를 배풀어둔 것이었다. 변경백 입장에선 현명한 선택이었겠지. 그러나 남겨진 백성은 어떤가? 인류를 지킨답시고 자신들을 내버린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인류인가.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국과 변경백이 지키고자 하는 인류라는 것에 백성이 없다면――남은 인류는 하나뿐이다. 바로 귀족정의 국가이다. 왕실이다. 그게 뭐가 인류인가! 웃기지 말라고 백성들은 소리치고 싶겠지. 그래서 영지민은 간단히 주인을 인간귀족에서 마왕으로 갈아탔다. 변경백이 주지 않은 블랙 허브를, 우리 제6군단은 나의 주도 아래 분배했다. 쿤쿠스카 상회는 마계의 약초밭과 계약하여 작년부터 블랙 허브를 대대적으로 키웠다. 나는 상회와 계약한 바에 따라 전체 블랙 허브의 5%에 대해 소유권을 갖고 있었다. 그걸 풀었다. 당장 죽을 날만 기다리던 가족이 기사회생한 것이다. 영지민은 우리 군단에 환호했다. 자발적으로 바르바토스 군단장을 백작으로 받아들였다……누가 인류를 지켰는가.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은 입에 발린 명분을 앞세워서 흑세무민할 뿐이다. 내가 너희의 그럴듯한 가면을 깨부셔주겠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그닥 먼 미래도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너희처럼 명분을 앞세우는 강자의 긍지를 진흙발로 뭉개주는 것이다. 그때가 무척 기다려진다. 라우라가 내 표정을 보더니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음. 주군이 무언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 “모함하지 마십시오. 저처럼 언제나 순수하고 밝은 생각만 하는 마왕도 없습니다.” “방금 주군과 가장 어울리지 않은 단어를 들은 기분이 든다마는, 소녀의 착각인가?” “착각입니다. 완전히 착각이에요.” 라우라가 훗, 하고 비웃었다. 점점 더 군주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실로 건방지고 불경스러운 신하가 아니고 뭔가. 아무래도 전투가 끝나고 진득하게 침대 위에서 군신의 예를 가르쳐야겠다. “그르흐크읍――!” “밀어붙여! 밀어붙여어억!” 드디어 오크 장창병과 제국군 장창병이 맞닥트렸다. 개싸움이었다. 빤히 상대가 장창을 뻗들고 있는데 그 창날의 늪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이 경우, 장창의 길이가 긴 쪽이 당연하게도 유리했다. 창대의 길이나 두께에서 오크용 장창은 인간용 장창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이런 불리함을 뒤집기 위해서 제국군에선 하마(下馬)기사를 대거 동원했다. 랜스 대신 양손검을 잡고 기사들이 장창병의 선두에 섰다. 그들은 오크의 장창을 오러소드로 무 썰듯 잘라내면서, 어떻게든 아군 장창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들려고 발버둥 쳤다. 이 방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기사에는 오우거로 대응해야 마땅했지만, 기사가 잽싸게 창대를 자르고 병사와 병사 사이를 누비는 반면에, 덩치가 큰 오우거는 그런 묘기를 보여주기 어려웠다. 제국군은 기사의 활약에 힙입어 오크 장창병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명령을 받은 즉시, 오크 장창병들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죽음의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흑기사에 제국군 기사들은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기사들은 허무하게 몸통이 꿰뚫려 절명했다. 열 명의 제국기사가 땅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얼굴을 처박았다. 적군에서 즉시 새로운 기사대가 돌입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오크가 장창을 찔러오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기사와 결투하기 위해 용감히 뛰어들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헛수고입니다.” 나는 명령을 내렸다. 잠입하라고. 제국기사가 도착하기 직전에 죽음의 기사는 전원 영체가 되어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제국기사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비겁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상투어였다. “최고의 칭찬이네요. 비겁해서 이쪽은 이기고, 비겁하지 못해서 저쪽은 패배한다. 패배의 대가는 휘하 장병들의 떼죽음. 어느 쪽이 미덕일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저들도 진심으로 내뱉는 말은 아닐 터다.……그나저나 주군, 바로 조금 전에 순수하다고 자칭한 사람이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닌 듯하다.” “저는 순수하게 비겁합니다.” 내가 떳떳하게 말했다. 라우라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뭐 어떤가. 세상사가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었다. 기사들은 애꿎게 칼끝으로 그림자를 찍어댔으나 그야말로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고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갔다. 오크 장창병의 창대를 열심히 잘랐다. 그러자 제국군 장창병이 마왕군을 압도하는 듯했지만――. “다카포.” 내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기분으로 명랑하게 중얼거렸다. 그림자에서 죽음의 기사들이 솟구쳤다. 오크 장창병에 정신이 팔린 제국기사는 다시금 기습을 허용했다. 제국기사들이 열에 뻗쳐 비명을 질렀다. 그같은 광경이 반복했다. 제국기사는 오크들이 자신을 찔러대는 와중에 언제 죽음의 기사가 습격할까 예민하게 신경 써야만 했다. 기사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눈앞으로 수십 개의 장창이 쇄도하는데 발밑까지 주의한다?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오러가 떨어져서 오크의 장창에 타격당하거나, 죽음의 기사한테 살해되었다. 오러라는 게 무한히 유지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짧은 시간 동안에만 오러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오크의 두꺼운 창대를 일도양단하려면 오러를 동원해야만 했다. 제국기사는 오러를 급속도로 소모했다. 오러가 떨어진 기사는 별로 두려울 게 없었다. 제국기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끊임없이 양손검을 휘둘렀다. 제국기사는 과연 위명에 걸맞게 분전했다. 그들의 용맹무쌍에 오크 장창병 대열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딱 5미터. 처음 지점에서 오크들은 5미터 물러섰다. 그 5미터를 위하여 내 전방에서만 제국기사가 오십 명 넘게 죽어나갔다. 간단히 계산해서 기사 열 명이 희생해야 겨우 1미터 전진하는 셈이었다. 제국군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기사를 투입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기사 열 명에 1미터 전진은――제국군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교전비가 아니었다.   00102 왕과 장군 =========================================================================                        그런데 모든 전선이 이곳처럼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나야 죽음의 기사로 신나게 재미를 보았으나, 당연하지만, 다른 마왕들에겐 죽음의 기사가 없었다. 그들은 제국기사의 육탄돌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호족 전사나 리저드맨 전사로 대응하긴 했으나, 기사를 상대하기엔 적잖게 약했다. 슬라임 무전기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전열 일부가 돌파당한 것이었다! 제파르 대장은 즉시 그곳으로 오우거를 집중시켰으나, 도미노가 무너지듯 연달아 우익의 전열이 돌파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제1진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전열이 무너진 장창병은 기사에게 탐스러운 한끼 점심식사에 불과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 오러가 깃든 양손검에 오크 장창병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을 거다. ─ 제2진으로 후퇴한다. 전군, 제2진으로 후퇴하라. 제파르 대장의 판단은 신속했다. 오크 장창병들은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 뒤로 물러섰다. 장창병 병진이 한 발자국씩 후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십 마리의 오크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가 박자를 맞추어야 하니까. 결국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크를 제법 많이 잃었다. ─ 서둘러라! 후퇴를 끝내지 못한 부대가 있는가? 반복한다. 후퇴를 끝내지 못한 부대가 있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물러선다. 잠시 뒤. 제1진의 오크 부대가 제2진의 오크 부대와 합류했다. 후퇴가 시작한 지 5분만에 우리는 자그마치 20미터를 뒷걸음질 쳤다. 바로 조금 전 1시간에 고작 5미터 물러선 것에 비하여 대단한 쾌속후진이었다. “오크 새끼들이 도망친다!” “거세게 밀어붙여라, 아그들아! 여기서 좀만 고생하면 이긴다!” 제국군은 아주 기세등등했다. 부사관들이 장창병에게 쉼없이 전진을 명령했다. 기세를 탔다고 생각했겠지. 전쟁에서 기세만 잘 잡으면 순식간에 승리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파악했다. 제국기사와 인간 장창병이 더더욱 악착스럽게 들러붙었다. 그때 제파르 대장이 소리쳤다. ─ 마법사 부대, 공격하라! 여태껏 얌전하게 보조마법에만 주력하던 마법사들이 돌변했다. 열 명의 마법사가 후방에서 일시에 화염구 마법을 쏟아냈다. 화염구 마법은 제국군의 머리 위를 날아가서 약 30미터 전방에 내리꽂혔다. 불길이 화르륵 솟았다. 본래 목책이 있던 장소인데, 방어용처럼 보이게 짚풀을 잔뜩 쌓아두었다. 사실은 목책에다 기름을 정성스럽게 발랐고 짚풀도 바싹 마른 짚풀만 갖다놓았다. 안쪽 짚풀에 기름을 넉넉하게 먹인 것은 물론이었다. 그곳으로 화염구가 쏟아지자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바로 이때를 위하여 제파르 대장은 마법사라는 가장 강력한 병종을 아끼고 또 아꼈다. 불길이 가로 방향으로 길게 장벽을 이루었다. 제국군 전체가 불길에 의해 양단되었다. 눈치가 기막히게 빠른 병사들은 불이 막 거세지는 틈을 타서 얼른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우리 오크 장창병이 후퇴할 때 그러했듯, 제국의 장창병 또한 후퇴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후퇴할 수 있지 않았다. 장창병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니까. 결국 우리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든 제국군들은 꼼짝없이 불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그들은 명백히 혼란에 빠졌다. 난데없이 배수진, 아니 배화진(背火陣)을 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리떼의 본능을 가진 몬스터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과감하게 제국군을 밀어붙였다. 오크 장창병은 리치의 차이를 이용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갔고, 고블린은 오크들의 다리 사이를 넘나들며――키가 작은 고블린이기에 장창 아래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제국군의 무릎을 난도질했다. 제국기사들이 분전했으나 그뿐. 오러는 지속적으로 쓸 수 없다. 후방의 대기조와 계속해서 교체해주든지, 아니면 기마돌격처럼 한 순간에만 파괴력이 필요한 전법을 써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지금 불의 장벽에 갇힌 제국기사에겐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빠르게 오러를 소모했다. 오러가 사라진 뒤에는 피라냐처럼 몰려드는 몬스터한테 얻어맞아 차례대로 쓰러졌다. “으, 으아아아악!” 결국 제국군의 장창병 전열이 무너졌다. 소위 말하는 모랄빵이었다. 전방으로 선도해주던 하마기사가 죽어나갔고, 후방에선 시뻘건 불길이 연차 혀를 내밀어댔다. 이런 상황에서 전열을 유지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겠지. 제국군은 전열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가망 없는 돌격을 감행하거나, 살 길을 찾겠답시고 불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뻔했다. 오크용 장창에 의해 꼬치가 되든지 불에 의해 바베큐가 되든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벌벌 떨면서 어머니를 연호하든지……전열을 잃은 장창병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죽었다. “참혹하군…….” 라우라가 뇌까렸다. “천 명? 어쩌면 이천 명은 전멸했을지 모른다.” 불길이 타닥, 타닥거렸다. 화끈한 열기가 수십 미터를 넘어서 우리한테까지 왔다. 진지를 구축할 때 제1진에서 제2진 사이의 공간은 완벽하게 제초작업을 해두었다. 불은 자신이 태울 것을 찾아서 마왕군이 아니라 제국군 방향으로 타들었다. 안개가 심한데다 수풀이 새벽 이슬을 머금어서 본격적인 대화재로 번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저쪽의 마법사들이 화재를 진압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우리는 그 사이, 제1진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방에 말뚝을 무수히 박아두었다. 그리고 제1진이 후퇴하느라 꽤나 흐트러진 장창병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럴 땐 확실히 마왕군이 인간군보다 유리했다. 이쪽에선 마왕들이 '내 몬스터 놈들 이쪽으로 모여!'라고 명령하기만 하면 곧바로 부대가 재정비되니. 우리는 아예 몬스터들한테 식사까지 명령했다. 식사는 실로 효율적이고도 간단하게 이루어졌는데, 눈앞에 널린 인간 시체들을 바로 그 자리에서 가져다가 포식한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오우거는 제딴에 풍미를 챙기겠다는 듯 불길에 다가가서 시체를 구워먹었다. 어디서 뺏었는지 장창병에다 시체들을 꼬치처럼 줄줄이 꿰어서 말이다. 그 광경에 라우라와 내가 할 말을 다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심히 포스트모던하군……. 후방에서 바위를 날리던 투석기도 멈추었다. 제국군이 멀찍이 뒤로 물러섰노라고 사역마가 정찰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하긴 불길이 잦아들 때까지 투석기에 맞겠다면 바보천치이다. 양군에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 * * “무능한 놈들 같으니!” 제국군이 마왕군의 우익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루돌프 황태자는 탁자를 거세게 내려쳤다. 황태자뿐만 아니라 미카엘 폰 콜로브라트 장군, 요한 폰 쿠투소프 장군 등 중앙군 소속의 장성들이 불같이 화냈다. “정예병 팔천오백에다 기사단까지 천오백까지 달렸는데도 돌파를 못했다고? 변경백, 어디 해명해보시오. 그대가 만 명이면 우익을 점령하고도 남는다 아주 자신하지 않았소외까!”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이를 갈았다. 보고에 따르면 전투가 시작하고 삼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들 모두 변경백 자신이 평생을 걸쳐 키워낸 병사였다. 지금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장본인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변경백이었다. 심지어 황태자나 다른 장군이나 병력을 지원해주지도 않았다! “…….” 변경백은 황태자의 책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기만 했는데, 그것이 황태자의 질책에 대해 말없이 반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총사령관으로서의 발언권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 또한 자명했다. “하! 부하는 장군을 닮는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군.” 황태자는 곧바로 명목상의 총사령관에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비록 돌파할 수는 없었지만 마왕군 우익도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판단했다. 처음부터 황태자는 이런 상황, 즉 적군이 피해를 입었지만 중앙군의 병력은 고스란히 보존된 상황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 병력을 투입하여 승기를 거두면, 전투의 공훈은 오롯이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차지이다.’ 황태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이번 전투는 자신에게 안겨주는 것이 넘쳐난다고 그는 생각했다. 당장만 해도 제국의 잠재적인 반란군인 변경군이 약화되었다. 더불어 이번에 중앙군을 소집하면서 군부에 대한 황태자의 장악력이 높아졌다. 이이제이(以夷制夷). 황태자가 생각했다. 군주의 소양이 바로 이것이라고. 문벌귀족이든 변경군이든 백성이든 무엇이든, 겉으로야 충성을 맹세할지라도 결국은 자기 이익을 노리는 승냥이였다. 자고로 군주란 그 승냥이들끼리 싸우게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지금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변경군을 손상시키지 않았는가. 만약 여기서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여 마왕군 우익을 뚫어내기만 하면, 자신은 인류를 마왕의 마수에서 지켜낸 수호자요 합스부르크의 유일하게 합당한 계승자로 떠오를 것이다……그 꿈과도 같은 일이 눈앞에 잘 익은 사과처럼 떨어졌다. 손을 뻗어서 사과를 줍기만 하면 된다! “폰 콜로브라트 장군! 폰 쿠투소프 장군! 즉각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장병 1만을 이끌고 적군의 우익으로 향하시오.” “예. 전하의 기대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나이다.” 두 명의 장군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군막사에서 나갔다. 그동안 변경백은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용병대장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군 우익을 향하여 제국군 1만이 행군했다. 그들은 화려한 깃발을 휘날리면서 프라첸 고지를 내려갔다. 그 광경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는, 작은 마조(魔鳥) 한 마리가 있었다. 마조는 날개를 퍼득이면서 안개 구름을 비껴 날았다. 그리고. 프라첸 고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소녀가 눈을 감고 있었다. 백발. 나이가 들어 색이 빠지고 힘없는 백발이 아니라, 원래부터 찬란한 하얀색으로 자라난 백발이었다. 소녀는 히죽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황금빛 눈이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됐다.” 바르바토스, 서열 제8위의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제파르! 그 녀석이 기대를 만족해주었다. 그녀 또한 슬라임을 통해서 우익의 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제파르는 훌륭하게 방어전을 수행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을 듯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냄으로써 제국군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게 만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재차 믿었다. 우리 마왕들은 무능하지 않다. 아니, 우리 평원파는 무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일곱 차례의 월맹군에서 마왕군이 패배한 까닭은 결코 평원파 잘못이 아니다――우리는 유능하고, 용감하며, 무엇보다도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을 지금부터 자신이 보여줄 차례였다. 따로 명령을 하달할 필요도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자신 외에 다른 모든 마왕을 우익과 좌익에 보냈다. 중앙군을 지키는 마왕은 오직 바르바토스 그녀밖에 없었다. 즉 지금 이곳에 자리한 몬스터들은 모두 그녀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었으며. ─ 뚜벅. 그녀가 중앙의 전군에 전진 명령을 내리는 데는, 단지 하나의 발걸음만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걸어나갔다. 그 뒤를 좀비, 해골병사, 온갖 언데드 몬스터가 뒤따랐다. 화려한 군악도 없었다. 흥분에 찬 함성도 없었다. 그들은 전사였으며, 죽어서도 전사였고, 고요하게 싸울 줄 알았다. 이천 년 전부터. 바르바토스 직속 몬스터 부대 오천은 그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나갔다.   00103 왕과 장군 =========================================================================                        그것은 말없는 진혼곡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사뿐히 풀을 밟을 때마다 대지가 약하게 울렸다. 오천의 몬스터가 일부러 한치의 어긋남 없이 바르바토스와 보조를 이룬 것이었다. 비록 기습을 노리기 위해 큰소리로 울부짖지 못했어도, 이렇게 발걸음을 함께함으로써 그들의 주인에게 주장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바르바토스가 미소 지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애새끼들.” 그녀는 원래부터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무사였다. 자신의 병기에 의지하여 창검의 지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강했다. 동료와 부하가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어느새 그녀와 함께 영원한 전쟁을 맹세했던 동지들은 전부 죽었고, 그녀만이 생존했다. 그때부터 바르바토스는 동료들을 되살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생전 처음으로 마법을 접했다. 재능이 없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더군다나 흑마법은 지극히 까다로웠고, 마계와 인간계를 가리지 않고 전승이 희귀했다. 그래도 바르바토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더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에. 전쟁터에서 우연히 날아든 화살, 동료를 지키기 위한 희생, 어리석은 명령에 의한 죽음――그런 하찮은 원인으로 죽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눈부셨고, 강했으며,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영원히 살아숨쉬게 만든다. 바르바토스는 그들을 위해 검을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여태까지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병기 대신,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동료를 선택했다. 그녀는 손수 한명한명의 병졸을 죽지 않는 몬스터로 부활시켰다. 지금 아우스터리츠의 안개를 걸어나가는 몬스터 중에 제아무리 하찮은 좀비일지라도 그녀의 손끝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 없었으며, 언젠가 그녀와 함께 명예로운 전장을 헤쳐나가지 않은 이 없었다. 얼마나 안개의 바다를 걸었을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해가 떠올랐다. 그때 언덕 위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은 군막사에서 전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한 연락장교가 헐레벌떡 막사로 뛰어왔다. 그는 군례하는 것조차 잊었다. “화, 황태자 각하!” “무례하다. 언제부터 제국군의 기강이 이리 해이해졌는가.” 연락장교가 팔을 번쩍 들어올려 예를 취했다. 그는 긴 거리를 뛰어왔는지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지도 않고 연락장교가 말했다. “적이……적군이 전방에 출현했습니다!” “적군이 출현했다고?” 황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누가 이런 멍청이를 연락장교로 뽑았는지 분이 치밀었다. “정신차려라! 어디서 출현했는지, 적의 병력은 얼마나 되는지 보고해야 할 것 아닌가!” “밖으로……서둘러 밖으로……!” 황태자가 혀를 찼다. 눈앞의 사내는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황태자는 망토를 펄럭이며 막사에서 나갔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언덕 끄트머리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보인다는…….” 사방이 안개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안개 구름이 걷혔다. 그리고 태양빛이 아우스터리츠를 비추기 시작했을 때, 안개에서 몬스터의 새까만 정강이가 드러났다. 살점이 문드러져 보기 흉악한 발이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발이었다. 곧이어 두 개가 되었다. 그것이 백 개의 발, 천 개의 발이 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벅, 하고 땅이 부르르 진동했다. 이윽고 몬스터들은 안개를 완전히 꿰뚫고 온몸을 드러냈다. 수많은 군기(軍旗)가 펄럭거렸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을 나타내는 징표가 거대한 군기로 앞장서고 있었다. 죽음의 왕관이 그려진 군기에는 고대제국어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발퀴레들이여, 영원히 행군할지언저――. 그 뒤로 열한 개의 군기가 펄럭였다. 마왕군 군기가 아니었다. 한때 인간계 국가의 근위기사단을 상징하던 깃발들이었다. 청마 기사단, 붉은 독수리 기사단, 십자 기사단, 황금마 기사단, 철방패 기사단, 은빛 백합 기사단, 철혈 기사단, 라인연맹 기사단, 자유-명예 기사단, 녹사슴 기사단, 헬베티카 사자 기사단. 지금은 멸망하고 사라진 제국과 왕국의 근위기사단들――그들의 상징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평원파 수장,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 군단의 자긍심. 언제나 월맹군 최전선에 섰으며,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근위기사단과 맞붙었으며, 그중 열한 개의 기사단을 전멸시키고 군기를 쟁취했다. 그중에는 멸망한 지 어언 천육백 년이 넘은 제국의 군기도 있었다. 말하자면 저곳에서 안개를 들이키며 흉흉하게 펄럭이는 깃발들은, 지난 이천 년 간 마왕군과 인간군이 자아낸 역사를 그대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한 좀비가 으르렁거렸다.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이리니. 해골병사가 마나의 파동으로 화답했다. 여기 우리, 영원토록 행군하는 발퀴레일진저. 오천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가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지극히 낮은 목소리로 군가를 불렀다. 두개골 가장 깊숙한 속까지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칠백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쳤으며, 열하나의 국가를 멸망으로 몰아넣었고, 이제 다시금 열하나를 열둘로 늘리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여기 우리, 죽었기에 죽는 도리 없으며, 죽지 않았기에 패주 또한 모를지어니.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발할라는 바로 이곳 지상에 있나이다――. “이, 이게 대체!” 루돌프 황태자가 숨을 들이켰다. 오천 마리의 몬스터가 지극히 장중하게 프라첸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황태자는 처음에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지나치게 몬스터 부대가 근접해 있었다. 이런 것이 애당초 가능하단 말인가. 아우스터리츠의 안개라는 기후, 고지대에선 오히려 저지대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는 지리적 문제, 그리고 발자국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정예 언데드 몬스터 부대――이 모든 요소가 겹쳐서 제국군은 바로 앞마당까지 적군이 접근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몬스터들은 장례식을 치르는 듯 장엄했다. 시체에서 풍겨나오는 죽음의 기운이 삽시간에 언덕 위쪽까지 풍겨왔다. 누구를 위한 장의행렬인가? 저들은 누구를 위해 미사를 올리고 있는가? “자아, 친애하는 나의 장의사들이여.”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례식을 치르자.” 몬스터들이 포효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고요하게 걸을 필요가 없었다. 기습은 성공했으며, 고작 육백 미터 앞에서 인간군이 공포에 떨어대고 있었다. 일개 장병만 혼란에 시달린 것이 아니었다. 부사관, 지휘관, 장군, 심지어 황태자까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불멸의 바르바토스!” 오로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만이 이빨을 악 물고 소리쳤다. 그는 대번에 바르바토스의 전체 전략을 눈치 챘다. 만약 여기서 물러설 경우, 제국군 전체가 좌우로 양분당해서 각개격파 당할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변경백이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태자는 입을 벌리고 어딘가 혼이 빠져 있었다. 저런 상태로 제대로 군대를 지휘할 리 없었다. 여기서는 자신이 나서야 했다. “당장 투석기를 교정하여 전방을 공격하라 이르라!” “예, 예에?” 주변에 기립해 있던 지휘관들이 얼 빠지게 대답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평소 성미에 맞지 않게 폭력을 동원했다. 발끝으로 지휘관의 종아리뼈를 쳤다. 지휘관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가! 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리친다. 그것을 위한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아닌가! 대답하라!” “그, 그렇습니다!” 지휘관들이 허둥지둥 열을 맞추었다. 십수 년 동안 훈련하면서 배운 제식이 효과를 발휘했다. 아직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몸동작을 맞추었을 뿐인데도 그들은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변경백에겐 일단 그것으로 충분했다. “명령을 하달하라. 투석기는 당장 방향을 교정하여 전방을 공격한다!” “예!” “폰 발렌슈타인 대장!” 변경백이 용병대장을 불렀다. 그때까지 멍하게 안개를 바라보던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정신을 차렸다. “예, 백작 각하. 부르셨습니까.” “지금 아군의 중앙을 담당하는 병력은 그대의 용병부대 2만뿐이다. 절대로 저놈들에게 전방이 뚫리면 안 된다. 알겠는가? 죽을 각오로 아군의 진지를 사수하라.”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군례를 올렸다. 이런 때를 위해서 고용된, 합스부르크 최고의 용병부대였다. 용병대장은 또한 겉으로는 고용주인 황태자를 따랐으나 내심 변경백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기꺼이 명령을 받들였다. “란츠크네히트의 위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각하, 저희는 대륙 최강입니다.”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바로 지금이 전투의 승부처이다! 아군의 1만 병력이 지금 마왕군 우익을 돌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들이 우익을 뚫기만 하면 우리 제국이 승리하는 것이다.” “아.”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고기방패가 되어 적군을 막아내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제대로 전략적인 목표까지 알려주었다. 아군이 우익을 뚫을 때까지 이곳을 막아내면 우리가 승리하고, 아군이 우익을 뚫기 전에 이곳이 함락되면 우리가 패배한다. 일단 목표가 생긴 것만으로도 지휘관과 장병의 자세 자체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여차하면 근위기사단이 출동할 것이다. 알겠는가? 우리에겐 아직 예비대가 있다. 전력으로 수비에 전념하라.” “명을 받듭니다!” 용병대장이 힘차게 외쳤다. 변경백은 비단 용병대장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주변에서 지휘관들이 두 장군의 대화를 빤히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말해준 것이었다. 우리가 언제까지만 버티면 되는지. 우리는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잘만 하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면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고위 지휘관들이 빠르게 혼란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로 달려가서 방금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말한 바를 그대로 소리내어 읊었다. 그 내용은 지휘관에서 부사관으로, 부사관에서 장병에로 퍼져나갔다. “시바알, 한번 죽지 두번 죽냐!” “어디 한번 디벼 와라, 해골바가지 새끼들아!” 용병들이 장창을 꼬나쥐고 소리쳤다. 그들은 어디 동네 한량처럼 굴러다니는 용병이 아니라, 폰 발렌슈타인의 지휘 아래에서 대륙의 전쟁터를 누벼온 정예병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고용주에 대한 충성심, 더 정확하게 금전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용병대장은 적절하게도 ‘이번 방어전을 성공리에 수행할 시 전 장병에게 100골드를 하사한다!’ 하고 알렸다. 즉흥적인 발상이었지만 병사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여타 용병대장과 다르게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임금 약속을 어긴 적 없었다. 그가 100골드를 하사하겠다면 정말로 100골드가 떨어졌다. 용병들이 용기백배하여 군가를 불러재꼈다. “백작 각하! 송구하오나 투석기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각도가 안 나오는가.” 변경백이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적군이 지나치게 근접했다. 이래서야 투석기는 바위를 날릴 수 없었다. 적군과 함께 아군까지 바윗덩어리로 깔아뭉갤 생각이 아니라면. “하지만 막아낼 수 있다. 후방에 근위기사단을 대기시켜라.” “예, 각하!” 연락장교가 수시로 각 부대의 상황을 보고해왔다. 정작 중요한 소식, 마왕군 우익으로 향한 중앙군 1만에 대한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지금쯤 전투에 돌입했겠지. 대충 어림잡아서 마왕군 우익에만 2만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그들이 분발해주어야만 했다……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00104 왕과 장군 =========================================================================                        “백작……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옆에서 황태자가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근위기사단은 과인의 수하이외다. 백작이 마음대로 부릴 권리 따위 어디에도 없소!” 이런 시국에도 지휘권 타령인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아예 질려버렸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지극히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 지금은 소관에게 지휘권을 일임해주십시오. 기필코 적군을 저지하겠나이다.” “저지? 저지한다고? 저 시체들을?” 황태자가 날뛰었다. “미쳤소외까! 저, 저건 몬스터가 아니오. 악마……그래, 악마가 틀림없소. 인간이 악마에게 어찌 대항한다는 말인가!” “진정하십시오. 저들은 한낱 몬스터에 불과합니다.” “당장 근위기사단을 동원해서 후퇴하시오!” 폰 로젠베르크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 “귀가 멀었소? 근위기사단에 얼른 후퇴 명령을 내리란 말이오. 이런 곳에서 근위기사단을 잃을 수는 없어……용병 놈들이 방패가 되어주는 동안, 우리라도 후방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오!” “……어떻게 전열을 가다듬는다는 말입니까. 아군의 주력은 적의 우익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가 후퇴해버리면 아군은 전멸합니다.” 변경백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전하,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버텨준다면 곧 아군이 마왕군의 우익을 섬멸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버티지 못하면!?” 황태자가 고함을 질렀다. “중앙군은 전멸하고 과인도 패사(敗死)하겠지! 로젠베르크, 그대가 지금 무엇을 저당으로 삼아서 내기를 걸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가. 합스부르크의 미래이다!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황제를 내기돈으로 삼고 있단 말이다!” “…….” “아군이 우익을 돌파할 때까지 버티면 승리라 말했으렷다? 허면 만일 그때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어찌할 테냐. 감히 네놈에게 합스부르크 전체의 명운을 쥐었다 폈다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 촌놈이!” 황태자가 뒤돌아섰다. 그가 씩씩거리면서 걸어갔다. “내기를 걸려면 네놈의 목숨이나 걸어라. 과인은 일개 필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유일무이한 주권자이니! 네놈이 저 악마들을 막고 있는 사이 나 합스부르크는 퇴각하겠노라.” “……송구하오나, 그건 안 되겠습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황태자의 앞길을 막아섰다. “뭐?” “전하께서 퇴각하시는 것은 불가하다 말씀드렸나이다.” “아니, 이 역신이 진정!” 황태자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손이 더 빨랐다. 변경백은 황태자의 오른팔 손목을 낚아챘다. 지휘관이기 전에 한 사람의 건장한 무사인 변경백의 악력에 황태자는 당해내지 못했다. “으, 으으――!” “저 앞에서 병사들이 군진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총사령광인 전하가 도망쳐보십시오. 당장 사기는 바닥에 떨어지고 군대는 꼴불견 사납게 패주할 것입니다. 우리의 중앙군은 스스로 붕괴하고, 우익과 좌익은 각개격파를 당할 것입니다. 아우스터리츠는 제국의 수치로 영원히 기억되겠지요…….” 변경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수치스러운 제국입니다. 이제 와서 부끄러운 역사가 하나 추가된다 한들 크게 바뀔 것도 없습니다.” “네놈――이 반역자 새끼가!” “중요한 것은 제국의 위신이 아닙니다. 전하, 인류의 수호입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손에 한층 힘을 더했다. 황태자는 신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오른손을 빼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요지부종이었다. 마치 거목의 뿌리처럼 변경백의 손아귀는 단단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한번 이기고 한번 지는 것은 의외로 대단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그 신념을 등불로 삼아 모여드는 부나방이기 때문입니다.” “무, 으윽, 무슨 소리를…….”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전하의 안녕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허나 그렇기에 더더욱 전하께선 여기서 물러나셔서는 아니됩니다.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태자가 마왕군을 눈앞에 두고 도망쳤다, 그것도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아서……그런 얘기가 나돌아보십시오.” 변경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야말로 제국은 끝입니다. 장병은 더 이상 싸우지 못할 테고, 백성은 더 이상 국가를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병은 우리와 계약하려 들지 않겠지요. 아니, 합스부르크 제국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국가의 신민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 것입니다. 엄청난 민폐이지 않사옵니까. 저는 전하께서 그런 민폐덩어리로 전락하는 모습을 신하된 도리로서 지켜볼 수 없나이다. 충신이라 칭찬해주셔도 모자릅니다.” 변경백이 자기 말에 자기가 웃겼는지 미소를 지었다. 눈빛만은 처음부터 싸늘했다. 부엉이의 눈동자와 같은 것이 두 쌍으로 황태자를 무감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제국을 위해 죽으십시오, 전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 노신(老臣)은 진심이었다! 황태자는 안개를 뚫고 언데드 몬스터 군단이 출현했을 때보다 더 심한 공포를 느꼈다. “지휘관으로서의 소양은 눈꼽만큼도 없는 전하이옵니다만, 다행히도 제국의 황태자라는 꼬리표는 적당히 쓸 만하옵니다. 자그마치 황태자가 극악무도한 마왕군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이 소식을 접하면 열국의 백성이 분노할 것입니다. 만민이 일치단결하여 마왕군에 맞서 싸우겠지요.” “네, 네, 네놈이 죽으면 될 것 아니냐!” 루돌프 황태자가 턱을 덜덜 떨면서 간신히 소리쳤다. “네놈이, 이럴 때 죽으라고 네놈이 변경백인 것 아니느냐……!” “송구하옵니다. 소신 혼자만 죽어서야 약발이 약합니다.” 변경백이 소리없이 웃었다. “어찌 충신된 자로서 전하를 홀로 피안으로 보내겠나이까?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인, 미흡하오나 전하를 저편까지 전송해드리겠습니다.” 그때 장교 한 사람이 칼을 뽑고 변경백한테 달려들었다. “배신자 자식!” 장교는 호기롭게 외치고 기병용 검을 들어올렸다. 변경백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허리춤에서 단칼을 뽑아들어 던졌다. 막 검을 내리치려는 장교의 이마에 단칼이 박혀들었다. 장교는 짧게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수풀에 코를 처박았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황태자는 변경백의 무위에 놀란 개구리처럼 눈을 크게 뜰 뿐, 그 이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제국에 이백 명밖에 없는 제2급 기사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떠올렸다.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병사는 들으라.”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장교들을 향해 말했다. “본인은 그대들이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는지 모른다. 다만 판단해주기를 바란다. 흐림 없는 눈으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총사령관이 도망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멀리서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 부대 5천과 용병 부대 2만이 드디어 맞닥트린 것이었다. 네 배의 병력 차이. 그런데도 변경백은, 또한 장교들은 어딘지 모르게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대가 제국에 충성한다면 무엇이 제국을 위한 길인지 생각하라. 황제 폐하께 충성한다면 무엇이 폐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하라. 이곳에서 물러서면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목숨을 아우스터리츠에 뿌리는 셈이 되어버린다.……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는 윽박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장교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떤 장광설보다 효과적인 설득이었다. 장교들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었다는 것,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훗날을 도모할 단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합스부르크의 병사에게는 그 정도면 상관과 생명을 함께 불사르질 이유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장교들이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여기 자리한 군인 전원이 옥쇄를 각오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 반역자 놈을 처치하고 제국의 공신이 되어라!” 황태자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가련하게 소리쳤다. 변경백이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의 임무는 간단하옵니다. 발할라에서 제국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에게 잘 싸웠노라고 치하해주시옵소서.” “과인은……과인은 합스부르크 그 자체야!” “농담이 심하시군요.”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중후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일개 한 개인이 국가 전체와 동일하겠나이까? 합스부르크는 바로 여기에, 그리고 저기에 있습니다. 국가와 인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바로 저들이 합스부르크입니다.” 그리고, 하고 변경백이 말했다. “주권을 대리하여 행사하는 자는 필요합니다. 허나 심려치 마십시오. 전하께서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 할지라도 우리 제국에는 황위계승권자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네, 네놈! 엘리자베트 년의 하수꾼이었는가!” 황태자가 온몸을 흔들면서 발악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진즉에 그럴 줄 알았음이야! 엘리자베트 그 매국년이 언제나 대사를 그르치지! 끄으으윽!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 황태자가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그는 두 팔이 묶였고 입에 천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막사 깊숙한 곳에 유폐되었다. 변경백이 황태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물론, 우리군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목을 바치겠노라. 변경백이 장교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병력의 질은 저쪽이 높을지언정 양은 우리쪽이 월등하다. 위아래가 합심하여 저항하면 너끈히 며칠이고 버틸 수 있을 터. 그 어느 때보다 제군들의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 사람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어 분투하기를 소관은 기대한다.” “예, 장군!” 장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임무에 따라 급히 일선 부대에 파견되거나, 연락을 주고받거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아예 군막사에서 탁자를 옮겨와서 바깥에다 설치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현재 전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실시간으로 지도에 표시했다. 연락장교가 보고했다. “장군, 제1진이 돌파되었습니다. 그대로 제2진에 합류. 퇴각 시의 혼란은 다행히도 적었습니다.” “그대로 수비하라. 우리가 버티기만 하면 승리한다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다시 한번 알리도록.” “예!” 잠시 후, 연락장교가 보고해왔다. 그는 아까 전에 보고한 장교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 연락장교가 죽었으므로 다른 장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2진이 돌파되었습니다. 제2진과 제3진이 합류하여 적군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아군의 사기는 아직 건전합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최후까지 함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함성으로 화답했습니다.” “좋다. 병사들이 버림 받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령 효과가 미비하더라도 투석기와 궁병을 계속해서 활용하라. 결사의 항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 다시금 연락장교가 보고해왔다. 그 역시 또 다른 인물이었다. 재차 연락장교가 전사하는 바람에 급히 인원이 바뀌었다. 그는 각이 잡히게 군례를 올린 다음, 또박또박 전황을 말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 또한 변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3진이 돌파되었습니다. 마지막 군진에서 전군이 항전하고 있나이다.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용병대장이 전사하여 명령체계에 차질이 생겼습니다만, 빠르게 복구되었습니다.” “근위기사단을 우회 투입하라. 적군은 기세를 타느라 전열이 흐트러졌을 터. 기사단이 적군의 측면을 후려갈기는 틈을 타서 제3진을 완벽하게 방비하라.” “예, 장군. 부디 무운을.” 그리고 다른 장교, 또 다른 장교……. 마침내.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주위에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란츠크네히트 용병대는 대륙 최고의 위명에 걸맞게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했다. 합스부르크 근위기사단은 적군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기사단장부터 최하급 시종기사까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장교들 역시 전멸했다. 최후에 로젠베르크 변경백한테 보고를 올린 사람은 장교가 아니라 일개 계급 없는 병사였다. 그는 제3진이 돌파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곧바로 전선으로 되돌아갔다. 뚜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다. “흐응. 네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러하다.” 변경백은 여전히 책상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변경백의 앞에 선 소녀가 몹시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 “전투는 끝났어. 인간의 아이야,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냐?” “전투를.” “그 전투마저 끝났다면 무엇을 바라보겠느냐?” “전투를.”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거대한 낫이 번쩍였다. 낫은 허공을 가르면서 인간의 연약한 살덩어리를 갈랐다. 털썩, 하고 무언가 묵직한 것이 수풀에 떨어졌다. 그것은 잠시간 뎅그르르 굴러가다 이윽고 멈추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의 두 눈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눈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지된 시선만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마치 그곳에서 끝없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 작품 후기 ============================   ─ 챕터 <왕과 장군> END. 00105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대륙력 1506년 3월 30일, 아홉 시 경.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몬스터 정예부대는,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지휘하는 제국군을 격파. 마왕군이 프라첸 고지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바토스는 전열을 정비하자마자 그대로 기수를 돌려서 마왕군 우익――제파르 대장과 내가 필사적으로 수비하고 있는 지점에 전 병력을 투입했다. 이제 압도적인 병력으로 마왕군 우익을 공격하던 제국군 약 2만은 양쪽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 황태자가 포로로 잡혔다! 변경백이 전사했다! 사령부가 전멸했다는 소식 앞에서 제국군의 지휘부는 명백히 당황했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후퇴하자는 의견과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전자는 합스부르크 중앙군 소속 지휘관이, 후자는 변경군 소속 지휘관이 지지했다. 마왕군 우익은 새벽부터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탓에 병력이 4천에서 1천 5백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바르바토스의 부대 또한 2천 5백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제국군은 아직도 2만에 이르는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군이 이도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바르바토스는 이번 전역에서 최초로 <뼈의 군주>를 동원했다. 본드래곤은 움직이는 데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비되었고, 마법사 부대 전체가 연료를 공급하느라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효과만큼은 대단했다. 이십 미터짜리 본드래곤이 전장에 내려앉자 제국군은 삽시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전열 전체가 일시적으로 붕괴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파르 대장과 바르바토스 군단장은 부대를 돌격시켰다. 무려 쉰 명의 마법사가 마나를 퍼부었음에도 <뼈의 군주>는 고작 십 분밖에 날뛰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의 명운을 가르는 데 십 분이면 충분했다. 제국군은 마왕군의 협공을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다. 파벌 다툼과 상관없이 제국의 지휘관은 하나같이 용맹했다. 그들은 끝까지 몬스터의 파도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콜로브라트, 쿠투소프, 키엔마이어, 랑제론……<던전 어택>에서 이름 깨나 날리는 맹장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이것만으로 나의 의도는 절반이 달성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제부터 극심한 인재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설령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권력을 휘어잡더라도 그녀를 뒤에서 물심양면 뒷받쳐주는 인재가 없다면야 크게 두려울 것 없었다. 제3황녀가 게임 최고 먼치킨이라 해봤자 혼자서 국가를 관리하기란 불가능했다. 인간계는 확실히 약화되었다. 이로써 마왕군은 중앙과 우익에서 승리했다. 좌익도 곧이어 승전보를 울렸다. 애당초 벨레드가 맡은 좌익에는 가장 많은 병력인 8천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렵지 않은 전투였다고 한다. 석양이 아우스터리츠의 구릉과 평야를 비출 즈음. 전투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마왕군은 후퇴하는 제국군을 쫓아서 짤짤한 부수입도 올렸다. 본래 전장에서 가장 큰 피해는 전투 자체가 아니라, 퇴패하는 와중에 적의 추격전에 의해서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뭐, 이번에는 제국의 정예병이 비정상적으로 용맹해서 전투 자체의 피해도 어마어마했지만…….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마왕군은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의 전과를 상찬했다. 전투에 참여한 열아홉 명의 마왕 전원이 무사했다. 마지막으로 돌격을 감행할 때 제파르 대장이 그만 지나치게 앞으로 나와 어깨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게 가장 큰 부상이었다. “하여간 쟤 돌격본능은 개도 못 준다니까.” 바르바토스가 혀를 찼다. 제파르 대장은 부끄러운지 잔뜩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벨레드 형님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월맹군 제6군단 총참모로서 교전 결과를 정리했다. ───────────────────────── 아우스터리츠 전투 날짜: 대륙력 1506년 3월 30일 장소: 합스부르크 제국 북부 모라바의 브르노, 아우스테를리츠  《월맹군 제6군단》    《합스부르크 연합 원정군》 주요 지휘관: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포로)  서열 제13위 벨레드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전사)  서열 제16위 제파르     페르디난트 폰 발렌슈타인 남작(전사)  그외 마왕 16명       미카엘 폰 콜로브라트 남작(전사)                 요한 폰 쿠투소프 백작(전사) 병력:  몬스터 16,325        변경군 약 1만(기사단 약 1천 5백)                 중앙군 약 2만(근위기사단 1천)                 란츠크네히츠 용병단 약 2만 피해규모:  몬스터 8,031 사상      제국군 약 4만 5천 사상 ───────────────────────── 제국군의 완전한 전멸로 막이 내렸다. 월맹군 제6군단도 전체 병력에서 절반이 피해를 입어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결과에 직면했으나, 바르바토스 직속 부대는 곧바로 흑마법으로 인해 복구되었다. 그 결과 제6군단은 아직도 1만의 병력을 유지했다. 새삼 바르바토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전투가 끝나서 아무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한들, 그냥 일주일에서 이주일에 걸쳐서 흑마법을 주구장창 써대면 곧바로 병력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서열이 한 자릿수인 마왕들은 이래서 사기였다. 쓰읍. 제6군단에 남은 병력 1만에서 절반인 5천을 바르바토스 부대가 독차지하게 되자, 다른 마왕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제각기 친위대를 이끌고 인근의 산맥과 숲을 샅샅이 뒤졌다. 몬스터 부락을 찾으러. 그들은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몬스터 부락민들에게 설득과 무력을 총동원했다. 그렇게 마왕들은 병력을 보충했다. 변경백 영지에선 오히려 우리가 몬스터 부락을 토벌했다. 식량을 충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지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제 사정이 완전히 바뀌어서 일종의 징집병을 뽑아버린 것이었다. 아, 식량은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우스터리츠에는 제국군의 시체가 4만 구나 널렸으니까. 그들은 얌전히 훈제고기가 되어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다. 식량창고를 지나칠 때마다 무언가 먹음직스러운 훈제향이 풍겨올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인간성과 부단히 싸워야 했다. 아니,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향기란 말이다……. 몬스터 부락의 징집병들은 인간 훈제고기를 맛보더니 대번에 마왕들한테 충성을 맹세했다. 이쪽 지방엔 정예병이 많아서 몬스터 부락민들은 그동안 감히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지 못했다나 뭐라나. 인육을 맛본 지 하도 오래된 참에 우리군에 입대(라고 쓰고 강제징집이라 읽는다)하니까 갑자기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었다.……오죽하면 소문이 퍼져서 징집을 피해 달아난 몬스터 무리까지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끝나고 2주일 뒤. 월맹군 제6군단은 다시금 1만 8천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전투를 치르기 전보다 되레 병력이 늘어버렸다! 나는 어이가 가출할 수밖에 없었다. 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정말로 상식 밖이다. 인간에 비해 마왕은 참으로 군대를 운용하기 쉽다는 걸 깨달았다.” 반면에 나는 어떠한가. 고블린을 사는 데만 500골드가 들었다. 다른 마왕은 이렇게 간단하게 병력을 충원할 수 있는데! 물론 단기간 계약 같은 것이어서 적당히 전투가 끝나면 풀어줘야 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휴.” 됐다.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다음부터는 나도 참고해야지. * * * 새로이 징집한 몬스터를 마왕들이 한참 훈련하던 때였다. 급한 정보가 월맹군 제6군단에 날아들었다. “헤에? 합스부르크 제국에 정변이 일어났다는데.” 바르바토스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참고로 그녀는 지금 소파에 알몸으로 엎드려 있었다. 아까 전에 갑자기 안마를 받고 싶다고 말하더니만 냉큼 나를 오늘 하루 전용안마사로 고용해버렸다. 나쁜 로리 년.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라는 황녀가 쿠데타를 일으켰대. 하루만에 황성을 점령하고 제도까지 장악했다라. 제법 유능한 애인가봐.” “걔 이제 열일곱 살이야.” “흐응. 천재인가, 아니면 단순히 주위에 휘둘린 걸까, 으읏. 하응, 야. 손놀림이 야하잖아.” 일부러 그랬다. 오늘은 월맹군 부대를 재편하느라 바쁘단 말이다. 고작 안마나 받겠답시고 막무가내로 끌고왔겠다……조금이라도 반항하지 않으면 속이 안 풀렸다. 나는 올리브기름으로 바르바토스의 전신을 정성스레 닦았다. 대리석처럼 하얀 살결이 윤기로 환하게 미끌거렸다. “아……하응. 이러면 얘기를 못하잖아, 새꺄.” 내가 코웃음쳤다. “놀고 있네. 어차피 떡 치려고 부른 거면서.” “어라, 눈치 챘어?” “제가 댁이랑 떡친 게 벌써 수십 번입니다. 시나리오 뻔하거든요?” 바르바토스가 깔깔 웃었다. “짜식. 동정처럼 목석이던 녀석이 이제 아주 선수가 됐어요. 꼭 얌전한 남동생이 바람둥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서 찝찝하구만.” “남동생? 내가? 오빠겠지.” “내가 생긴 건 이래봬도 이천 살이란다, 단탈리안 꼬맹아.” 으음. 실제 나이로 따지면 맞는 말이다만, 그러면 누나가 아니라 할머니라 불러야 옳지 않을까. 물론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세상 어느 여자가 섹스 파트너한테 할머니 소리를 듣고 좋아하겠는가. 나는 매우 상냥한 남자였다. 안마는 자연스럽게 섹스로 넘어갔다. 우리는 각자 서른 번 정도 가버렸다. 마왕이 되고나서 좋은 점은, 남자인데도 연속으로 몇 번이고 절정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가 절반은 마나로 이루어져서 그렇다는데 나는 마법적인 논리에 영 꽝이라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두 시간 정도 지나고, 우리는 숨을 색색거리면서 소파에 누워 있었다. 내가 아래에 눕고 샌드위치처럼 바르바토스가 위에 누웠다. 내 성기는 여전히 그녀의 속에 넣어져 있었는데, 굳이 빼는 것도 귀찮아서 우리 둘 다 그냥 드러누웠다. 바르바토스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하아……흐으……그래서, 지금이 합스부르크로 진격할 기회일까?” “아니.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해.”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들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눈동자가 똘망똘망했다. 문득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르바토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한동안 말랑말랑하고 포근한 시간이 흘렀다. “왜냐하면 쿠데타로 인해서 제국이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 “혼란에 빠져 있으니까 이쪽에서 공격해야 하잖아.” “아니야. 첩보에 따르면 제3황녀는 중산층과 서민층을 지지세력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해 공화주의자를 대거 끌어들였어. 그만큼 귀족층의 지지도를 많이 잃었겠지. 중산층과 서민층도 무조건 황녀를 지지하지는 않고.” 합스부르크의 제도는 지극히 난해한 정국에 돌입했다. 기존에 황태자파를 이루던 문벌귀족과 중앙군부가 지난번 아우스터리츠 전투로 인해 궤멸했다. 수장인 황태자가 포로로 잡혔으니 당연했다. 그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제3황녀는 근위대를 이끌고 단번에 제도를 점령했다. 이미 명목상의 군주였을 뿐인 합스부르크 황제는 별궁에 유폐되었고, 제2황자는 엄중한 경계 아래 저택에 갇혔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틈타 황실에 위해를 가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녀파는 신속하게 제도를 접수했다.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스스로 군무상서, 통수본부장, 제도방위군 사령관을 겸임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했다. 군정과 군령 그리고 실행부대의 정점에 오른 것이었다. 황녀파는 승리했다. 그건 확실했다. 그래도 완전한 승리를 논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황태자파의 문벌귀족은 투옥되었어도 자기 영지에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2황자파도 건재했다. 적이 알아서 내분에 휩싸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겠지. 나는 그러나 바르바토스한테 확실하게 말했다. “지금 쳐들어가면 우리가 져.”   00106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다. 상대편은 현재 절찬리에 내부 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마왕군, 듣기만 해도 인류 공동의 적이라는 느낌이 풀풀 풍겨대는 군대가 진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제3황녀는 이때다 싶어 군권을 한층 독점하여 '인류를 위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겠지. 그 앞에서는 어떠한 명분도 파리해질 뿐이다. 문벌귀족이든 뭐든 황녀파에 협조하지 않은 인물은 인류의 이름 아래 처형된다. 지금 우리가 합스부르크 수도로 진군하면 황녀에게만 좋은 일 해주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도 황녀가 몸이 달아오를 거야. 뭐라 치장해도 황녀는 비합법적인 군사 정변을 일으켰어. 정통성이 극히 취약해. 이런 때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명확한 업적이 필요하지.” 모든 쿠데타 정권의 숙명이다. 약한 정통성은 당장 무리를 해서라도 뚜렷한 업적으로 무마하는 수밖에 없다. 시민의 권리를 확대한다든지, 경제를 개혁한다든지. 황녀는 마왕군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군권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루어야 할 업적이란 뻔했다. 군사적 승리다. “우리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수록 황녀의 정당성은 약해져. 마왕군을 무찌르겠다고 했는데 정작 마왕군이 안 다가오니 말이지. 정적들에게 공격당하겠지.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반드시 다가와. 황녀 쪽에서 출병하게 되는 거야.” “호오.” 바르바토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가 쳐들어가는 대신 적을 유인하는 거냐.” “그래. 더불어서 유언비어를 좀 퍼트려주는 편이 좋지.” 황태자는 최전선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용맹분투했다. 황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애초에 제국군이 출병할 때 황녀는 참여하지조차 않았다. 황태자가 패배한 것도 황녀가 공공연히 방해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깔깔깔.” 내 작전안은 곧바로 수용되었다. 바르바토스의 막사에서 나오면서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방금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 모든 이야기는 파이몬의 제1군단을 고려하지 않을 때만 성립했다. 지금도 파이몬과 산악파가 이끄는 3만 몬스터 대군은 이곳으로 열심히 행군하고 있다. 황녀는 빠른 시일 안에 휴전을 제안해온다. 바르바토스야 '휴전? 인간놈들이 단체로 약을 빨았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바로 그때 우리 제6군단의 배후에 등장한 제1군단이 정식으로 휴전 협정을 받아들인다. 졸지에 바르바토스는 닭 쫓던 개가 된다. 황녀 입장에선 그러니 지금 우리가 공격해와도 그만, 공격해오지 않아도 그만이다. 공격해오면 그걸 빌미로 군권을 독점하여 대항하고, 공격해오지 않으면 파이몬의 제1군단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린다. 만만치 않은 여자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비장의 수가 몇 개 있다.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착오이다, 엘리자베트 황녀. 그리고 파이몬. 뭐라 해도 나는 신사이니까. 여자들한테 모든 일을 맡겨서야 신사의 체면이 서질 않는다. 점잖게 에스코트 해줘야겠지. * * * 미리 예상해둔 대로, 사태가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다짜고짜 우리 군단에 휴전을 제의했다. 바르바토스는 제3황녀가 보내온 휴전제안서를 받아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우리군 후방에 무려 3만의 몬스터 대부대가 출현하자 제아무리 바르바토스라 할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산악파 애새끼들이 왜 저기 있는 거냐?” 제6군단 내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검은 산성을 무혈로 통과하기 위해서 우리가 뚫어놓은 길을 지나친 것 아니겠느냐, 튜튼 왕국으로 향하기 전에 우리와 함께 합스부르크를 밟아두려는 것 아니겠느냐. 어떤 의견도 썩 그럴듯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길길이 화내면서 제1군단에 사신을 보냈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 것이냐고. 최대한 얌전히 표현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쌍욕을 가득 담아서 전언을 보냈다. 파이몬이 회답해온 바는 평원파의 마왕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제깟 년이 뭐라고 휴전을 하고 말고 지랄이야!” 휴전결의안.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 양쪽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문장에서 시작하여, 끝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인장과 파이몬의 인장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웃긴 점은 바로 옆에 바르바토스의 인장을 위한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검은 산성을 건너고 고생고생해서 아우스터리츠를 뚫고온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갑자기 웬수가 나타나서 적과 화해하란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바르바토스는 당장 몬스터 군단을 휘몰아쳐서 제1군단을 공격하겠노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전방에서 엘리자베트 황녀가 직접 4만 군대를 통솔하여 진군해오자 비로소 바르바토스는 깨달았다. 상황이 무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잠깐만. 시바알,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게 저 혼자입니까? 아앙?” 그날은 비가 심하게 내렸다. 바르바토스가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얼굴이 심각한 자는 비단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열여덟 명의 마왕도 표정이 구겨진 알루미늄 봉지 같았다. 그들은 막사로 걸어오느라 온몸이 비에 젖었는데, 그 탓인지 더더욱 분노에 차 보였다. “제국년은 왜 난데없이 휴전을 운운하고, 산악파 새끼들이 왜 가라는 튜튼 왕국으로 안 꺼지고 여기로 쳐오고, 좋아. 여기까진 뭔가 이유가 있다 해. 그런데 존나 왜 제국년이랑 산악파 새끼들이 우리를 앞뒤로 가로막는 건데? 씨발, 이거 협공하겠다는 거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바닥을 쾅 내리쳤다. 오른발이 형태 그대로 땅바닥을 깊숙이 눌러버렸다. “파이몬 저 창녀가 인간놈들 빌어서 우릴 쌈싸먹으려는 거 아니냐고!” “저 개 같은 새끼들을 당장 불지옥에 처넣어버립시다!” 벨레드가 으르렁거렸다. 그 말에 호응하여 평원파 마왕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배신자 놈들을 싸그리 때려죽여야 한다는 둥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한 마디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돌격할 기세였다. 내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여러분. 파이몬은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마왕들의 시선이 나한테로 쏠렸다. 하나같이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들의 눈동자는 살기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경악으로 물들었다. 종장에 이르러선 언제 고레고레 고함이 오갔냐는 듯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허나 단탈리안.” 제파르 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싸우든 말든 파이몬이 이득을 본다는 것은 이해했네. 싸우면 이참에 우리 평원파를 전멸시키고, 싸우지 않으면 그대로 '인간계의 땅을 점령했다'라는 실적을 챙긴다고. 그렇지만 파이몬은 비단 우리 군단뿐만 아니라 마계 전체를 배신하는 셈이지 않는가? 우리의 동족들이 가만히 만행을 지켜보겠는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 이천 년입니다. 월맹군은 이천 년이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마계인이 월맹군의 존재의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지쳐 있겠지요. 만약 이번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면 마왕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공적으로 인정한 영토를 보유하게 됩니다.” “으음.” “성공할지 말지 모르는 대륙 정벌보다는 차라리 어느 정도의 영토를 확고하게 차지한다……이것에 마계인들은 더 매력을 느낄 겁니다.” 이 업적을 이루어낸 파이몬을 위대한 마왕이라 칭송하겠지. 월맹군 이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결실을 맺었다면서 말이다. 제파르 대장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침음을 삼켰다. 다시금 막사 안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니까, 뭐야.” 잠자코 앉아 있던 바르바토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싸우든 휴전하든 파이몬 년이 이득을 본다고? 심지어 마계에서 우리를 지지해줄 가능성도 적다, 지금 그렇게 씨부린 거냐?” “…….” 내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 어떻게……배신자는 산악파 년놈들이잖아. 어째서? 왜 우리가 무시를 당해야 하는데? 응?” 그녀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막사 안의 마왕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우리가 제일 열심히 싸웠잖아. 얘들아, 우리가 가장 많은 피를 흘렸잖아. 마계의 염원을 이루어주겠다고……얼마나 많은 동지와 부하가 이국의 땅에서 쓰러졌는데……왜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파이몬이 지지를 얻는다는 거야? 동지들. 우리는 그저, 열심히 싸웠을 뿐이잖아.” 마왕들이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이천 년이 너무 길어서 지쳤다고? 그러면 우리는? 그 이천 년 동안 지쳐도 쉬지 않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투쟁해온 우리는……우리의 각오와 피는 어떻게 되는 건데? 적당히 권세를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어. 군세를 조련하는 대신 그냥 놀 수 있었다고. 하지만 그 빌어먹을 마왕의 의무라는 것 때문에 이천 년 동안 쉬지 않고,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이제 멈추라고? 잘못된 것은 배신자 돼지 새끼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그녀가 탁자를 내리쳤다. 주먹이 내리친 곳이 산산조각되어 파편으로 흩날렸다. “웃기지 마! 감히! 감히 어떻게 우리의 긍지를! 우리의 피와 땀을!” “……각하.” “제1차 월맹군에서 나는 육천의 병력을 모두 잃었다! 제2차 월맹군에서 나는 팔다리가 잘렸어! 제3차 월맹군에선 두 달이 넘도록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군대가 와해되었고, 제4차 월맹군에서는 아군의 외면에 전멸당했다! 제5차도! 제6차도! 제7차도!” 그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일곱 번의 비극에서서 정작 피를 흘린 장본인은 누구냐. 마계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놈들이냐? 아니면 머릿속에 든 거라곤 자기 이익밖에 없는 산악파 놈들이냐? 아니야. 아니라고! 우리――우리가 최전선에 있었어! 우리는 가장 헌신적이었고 가장 용맹했다! 이천 년의 헌신과 용맹의 대가가 고작 이것이라고――웃기지 말라 그래!” 바르바토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파이몬 개씨발 쌍년……그래, 죽고 죽이는 전투를 바란다 이거지. 좋다 이거야! 감히 나를, 우리의 긍지를 호구로 보았겠다……죽여버리겠어.” 그녀는 막사 바깥으로 훌쩍 떠났다. 그녀의 발걸음이 너무도 단호하면서, 또 어딘지 위태로워서, 나를 비롯해 다른 마왕들은 차마 바르바토스를 붙잡지 못했다. 우리는 막사에 남았지만 대화라곤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간간이 누군가가 한탄 섞인 숨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한참 뒤에야 제파르 대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휴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였다. 마왕들은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들도 똑같은 생각에 잠긴 것이 눈에 보였다. 다만 동족인 마왕의 계략에 빠져서 전쟁을 멈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망연자실하여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벨레드 형님이 이를 갈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였는지 모르겠는데.” “진정해라, 산돼지. 너도 알고 있다. 휴전 말고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 제파르 애송이. 네놈 말대로 나는 무식하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바로 우리가 모욕을 당했고, 우리는 전사라는 것이다. 전사는 모욕을 참지 않는다!” 벨레드가 포효했다. 그러자 제파르도 지지 않고 말했다. “모욕을 참지 않으면 어떡하겠다는 얘기인가.” “질문이라고 한 거냐. 싸운다!” “싸우면? 제1군단의 3만 군세를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제1군단뿐만이 아니다. 제국군 4만에 의해 협공을 당한다. 3만의 몬스터 군단에 4만의 인간군이다. 전투는 불가능하다.” “싸우다 천운이 다하면 죽는 것이 전사의 운명이다! 네놈은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전투만을 해왔는지 몰라도 응당 전사에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야! 쳐부시고, 또 쳐부신다. 그게 전부다!” 제파르 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전쟁광이……평원파를 몰살시킬 셈이냐!” “긍지를 잃어버린 평원파는 더 이상 평원파가 아니다!” 논쟁이 과격해졌다. 마왕들은 순식간에 화평론자와 주전론자로 나뉘었다. 훗날을 도모할 줄 모르는 머저리, 싸워야 할 때를 모르는 겁쟁이 등, 양쪽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대세는 화평론이었다. 벨레드를 포함해서 일부 과격파만이 죽음의 결전을 부르짖었다. 당연하다, 패배할 게 분명한 전투를 누가 반길까……. “크, 큰일입니다!” 그때 호족 장교가 막사에 뛰어들었다. 그는 마왕들의 험악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말했다. 장교의 보고는 과열된 열기를 단숨에 잠재울 정도로 시급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홀로 출격하고 계십니다!”   00107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연락장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레드 형님이 뛰쳐나갔다. 곧장 제파르와 내가 뒤따랐다. 등 뒤에 발소리가 우르르 들려오는 것을 보니, 한 타이밍 늦게 다른 마왕들도 연락장교가 한 말을 깨닫고 뛰어오는 모양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땅이란 땅은 온통 진흙 뻘밭이 되었다. 우리는 진흙을 튀기면서 앞으로 뛰었다. 몸이 비에 후줄근하게 젖었지만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빗줄기와 뻘밭을 뚫고 아군의 진지에서 빠져나가는 부대가 있었다. 언데드 몬스터였다. “세상에, 바르바토스 님!” 평생 진중한 표정만 지을 것 같았던 제파르 대장의 얼굴에 경악이 스며들었다. “당장 막아야 하네! 고작 오천으로 제1군단에 돌격하다니, 미친 짓거리야!” “그냥 이대로 공격해버립시다!” 뒤따라붙은 한 마왕이 소리쳤다. 빗물에 눈이 감겨 얼굴이 순간 보이지 않았다. 제파르 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적은 삼만이고 우리는 이만조차 되지 않는다! 하물며 군진을 차려놓은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자살은 자네 혼자서나――.” 천둥이 쳤다. 제파르 대장의 목소리가 묻혔다. 젠장, 지독한 날씨였다. 근처 아무 도시나 함락시켜서 편안하게 쉬고 싶었는데 몬스터들이 '도시가 불편하다'라고 항의해서 무산되었다. 짐승 같은 놈들이다. 어차피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언데드 몬스터를 향해 달렸다. 무슨 난리라도 난 줄 알았는지 몬스터들이 두런두런 몰려나와 떠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언데드 몬스터 부대는 막 군진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다 멈춰섰다. 행렬 맨 앞에서 벨레드 형님이 떡하니 가로막은 것이었다. 벨레드 형님은 한참 바르바토스와 뭔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신장 4미터짜리 거인과 소녀가 서로 윽박지르는 모습이 가히 볼 만했다. 아니, 윽박지른다고 해야 할까……소녀가 일방적으로 거인을 때리고 있었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동원해서 벨레드 형님의 정강이, 허벅지를 마구잡이로 구타했다. 그들 곁에 다가서자 빗소리를 뚫고 대화가 들려왔다. “비켜! 비키라고, 시발!” “…….” “개새끼야! 비켜!” 겉보기엔 저래도 바르바토스의 무력 수치는 몹시 높았다. 주먹 하나하나에 파괴력이 상당했다. 그런데도 벨레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그저 바르바토스의 구타를 받아들였다. 그는 얼굴에 흐르는 빗줄기에 상관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 이――!” 바르바토스가 대낫을 소환했다. 그녀의 상징과 같은 무구였다. 사신(死神)의 무기를 들이밀면서 바르바토스가 소리 질렀다. “얼른 꺼져, 확 담가버리기 전에!” “…….”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녀는 정말로 대낫을 휘두를 기세였다. 제파르 대장이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양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출격은 불가합니다, 바르바토스 님.” “이 새끼들이 단체로 약 빨았나……뭐, 불가? 군단장은 나야!” “일부러 전멸하기 위해 싸우는 군대는 없나이다.” 뒤에서 벨레드 형님이 입을 열었다. “싸우더라도 제대로 싸워야지. 이대로 개돌하면 제파르 애송이처럼 군대 말아먹는 거밖에 더 되겠수. 군단장 각하. 이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제파르 대장이 말을 이어받았다. 머리카락이 빗물을 잔뜩 머금어 축 쳐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벨레드 형님도, 다른 마왕들도, 바르바토스도 물에 젖어 있었다. “각하는 언제나 냉정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할 때입니다. 계획 없는 전투는 아무것도 낳지 못합니다.” “모든 계획은 끝장났어!” 바르바토스가 울부짖었다. “대의는 무너졌다. 긍지도 모욕당했다! 제파르, 이제 남은 것은 개싸움뿐이다――방향을 잃어버린 전사에게 무엇이 남는다는 거냐! 그저 살육기계이다. 저기서 우리를 깔보고 있을 개년들을 살육한다!” “바르바토스 님……!” “지금 산악파의 암퇘지들이 협공 같은 건방진 짓을 위해 우리 눈앞에 닥쳐왔다!” 소녀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빗소리와 천둥소리 사이로 울려 퍼졌다. “전쟁은 우리의 긍지이다. 그것을 년놈들이 추악한 돼지발로 밟아서 망치려고 하고 있다! 허락할 수 있겠냐! 마왕놈들아, 친애하는 개새끼들아! 너희에게 묻는 거다. 허락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울분으로 가득찬 외침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기에 동조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대륙정벌의 꿈도, 목숨도. 바르바토스는 씩씩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형태를 잃어버렸다. 난공불락의 성채와 같았던 바르바토스의 얼굴이……허물어졌다. 소녀의 얼굴에는 비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빗물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대낫이 떨어졌다. 어떤 절망적인 전투에서도 결코 떨궈진 적 없는 그녀의 무구가 힘없이 진흙에 쳐박혔다. “아, 아아…….” 그 순간,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망토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바르바토스의 주위를 감쌌다. 망토가 장막처럼 펄럭이면서 바르바토스를 보이지 않게 가로막았다. 붉은 망토 너머로 소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흐아, 아……으흑…….” 평원파의 수장이란, 자고로 가장 굳건한 마왕이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마왕은 서열 제1위 바알이다. 가장 강력한 마왕은 서열 제2위 아가레스이다. 가장 현명한 마왕은 서열 제3위 바싸고이다. 그러나 가장 굳건한 마왕, 언제나 최전선에 서며――그 깃발이 부러질 날 없고, 그 발걸음이 멈출 날 없고, 그 함성이 잦을 날 없어, 모든 마계인의 등을 떠밀며 그들을 대륙으로 이끄는 자는, 언제 어느 때나 서열 제8위의 마왕이었다. 불멸의 왕 바르바토스. “으으읏……흐윽, 으아앙…….”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는 울면 안 된다. 그녀가 우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한 명의 전사이기 전에 대륙정벌을 열망하던 과거의 마계인과 지금도 열망하는 마계인을 대표하는 마왕이니까. 그녀가 절망해서 운다는 것은, 지금까지 피를 흘려온 마계인 전부가 좌절한다는 뜻이므로. “흐으윽……끄, 흐아앙……아…….” 벨레드와 제파르는 망토로 뒤를 가린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앞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바르바토스한테서 등을 돌렸다. 그저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벨레드와 제파르가, 그 다음에는 우리 마왕들이, 마지막으로 몬스터들이. 일만팔천의 무리 전원이 발끝을 돌렸다. 사방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들 귀에는 빌어먹을 빗소리만 들렸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 * * “이상하네요.”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천막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히는 것을 싫어하는 파이몬은 막사보다 천막을 선호했다. 지금처럼 바깥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언니, 뭐가 이상해?” 옆에서 서열 제12위의 마왕이자 파이몬의 애첩인 시트리가 말했다. 시트리는 자신의 무구인 사복검(蛇腹劍)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언제 제6군단이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요. 이쯤이면 이성을 잃고 돌격해와야 하는데…….” “응? 걔는 머리가 얼음덩어리로 되어 있잖아.”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월맹군에 여러 번 참전했다. 바르바토스와 같은 군단에 소속되어 전투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바르바토스는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게 부대를 이끌었다. 함성과 포효로 가득찬 여타 부대와 달리 아무 소음 없이 고요하게 행군하는 것이 바르바토스의 특징이기도 했다. “자주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바르바토스는 다혈질이와요.” 파이몬이 키득 웃었다. “그저 감성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성을 쓸 뿐이지, 언제든지 과격하고 험악한 본성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애당초 대륙정벌이라는 허무맹랑한 꿈을 이천 년 동안 추구하는 것만 봐도 그렇사와요. 아주 감성적인 아이지요.” “헤에. 언니는 바르바토스를 잘 아는구나?” “……동료였으니까요.” 그것도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료. 중앙군을 마르바스가 통솔한다. 좌익을 파이몬이 지휘한다. 우익을 바르바토스가 이끈다. 그것이 제2차 월맹군 제1군단의 진용이었다. 천칠백 년 전, 그들은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며 인간의 왕국 두 곳을 멸망시켰다. 후방에서 아군이 보급을 끊어버리지만 않았다면 대륙 끝까지 진군했으리라. 그 이후, 월맹군에서는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는 방식이 퇴보했다. 1만에서 3만의 군대만 운용하고 보급은 현지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대두되었다. 아군이 언제 보급을 끊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10만 대군은 악몽이었다. 제2차 월맹군에서 마르바스, 파이몬, 바르바토스는 대륙 깊숙한 곳에 포위되어 무려 삼주일 동안 보급 없이 후퇴를 감행해야만 했다. 식량이 없어 오우거는 오크를, 오크는 고블린을, 아군을 먹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사방에서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기사들……. 13만 대군에 이르렀던 제1군단이 삼주일 뒤에 불과 2만으로 줄어들었다. 최고의 성공이 최악의 실패로 굴러떨어졌다. 무투파를 대표하던 세 마왕은 월맹군에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무엇을 위한 월맹군인가?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는 중립파를 창설했다. 그는 마왕들 사이의 이기적인 투쟁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최우선 목표라고 생각했다. 마왕들의 회합 <발푸르기스의 밤>을 주최하는 자도 마르바스이다. 정치적인 해결을 노린 것이다.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은 산악파를 창설했다. 대륙정벌은 불가능한 낭만이다. 그러니 최대한 마왕군의 피해를 줄이면서 인간계와 타협하며 살아가야 한다. 현실적인 타협에 나선 것이다.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는 평원파를 창설했다. 더 이상 아군은 믿지 못하겠다. 그러니 서로 믿을 수 있는 마왕들만 모인다. 이들은 바르바토스의 카리스마 아래서 마치 기사단처럼 단결했으며, 제3차 월맹군부터 독자적인 군단으로 움직였다. 과격파에서 더더욱 과격파로 나아간 것이다. 천오백 년이 흘렀다. 한때 하나의 군단에 모여 있던 이들이 이제는 각자 제2군단, 제1군단, 제6군단의 군단장이 되어서 각자의 행로를 걷고 있었다. 더군다나 파이몬 자신은 아군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진군했다……. ‘제2차 월맹군에서 후방의 마왕들이 했던 짓을 지금 제가 하네요.’ 파이몬이 자조했다.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소녀 같은 웃음소리를 떠올리면서 문득 자괴감에 빠졌다. 바르바토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파이몬도 알고 있었다. 월맹군이 실패하는 이유는, 어느 마왕 한 사람이 잘하거나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마왕의 필사적인 생존본능, 월맹군이 성공해버리면 자신의 존재의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에서 비롯했다……. 고로, 월맹군은 영원히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파이몬은 이미 천오백 년 전에 확실했다. 대륙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종족은 마인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 될 것이다. 그때 가면 늦는다. 기껏해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에게 아부를 떨고 몸을 바쳐가면서 대륙에 마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자치도시 한곳 정도를 허락받는 것이겠지……. 파이몬은 자신의 미모와 매력을 믿었다. 인간을 구워삶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굴욕적이다. 어떤 한 종족이 다른 종족에 절대적인 우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모든 종족이 절묘하게 평균을 이루어야만 한다. 또한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존중해야만 한다.……그러기 위해서 휴전협정이 필요한 것이다. 일단 제1군단과 제6군단만이 합스부르크 제국과 협정을 맺는다. 이것이 시작의 축포가 되리라. 다른 마왕들은, 그리고 인간들은, 서로가 '여차하면 협정을 맺을 수도 있는 상대'임을 깨닫게 된다. ‘여태까지 죽기 살기로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전투하는 시대는 사라져요. 아니, 사라지게 만들겠어요……!’ 파이몬은 인간과 마인의 이기심을 믿었다. 그것에 의해 한번 처절히 배신당했으므로 역설적이게도 더더욱 신뢰했다. 마인과 인간은 전쟁을 벌이다가도 자기한테 불리하다 싶으면 얼마든지 협정을 맺으려 할 것이다. 차근차근, 더없이 차근차근 마인과 인간이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천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월맹군 이천 년 역사처럼, 다시 한번 이천 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상관없어요.’ 그만한 각오를 파이몬은 하고 있었다. 이미 이천 년을 살아온 몸. 또 이천 년을 살아간다 한들 두려울 것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자신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인간과 마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그 세계를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 바르바토스를 짓밟는 것이다. ‘바르바토스. 당신은 지나치게 과격해요. 인간뿐만 아니라 마인에게도 당신은 공포를 불러일으켜요.’ 파이몬은 내심 바르바토스가 얌전히 당하는 대신 이성을 잃고 공격해오길 바랐다. 얌전히 있어도 그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겠지만, 이참에 평원파 세력을 멸절해두는 편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천막 아래에서 전방을 노려보았다. 거센 빗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저 너머에 바르바토스가 있음을 알았다. ‘과거의 정을 생각해서 죽이지는 않겠지만……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해드리지요.’ 하지만 그날 바르바토스는 공격하지 않았다. 빗줄기가 거세게 양군의 진영을 때릴 뿐이었다. 파이몬은 바르바토스를 꾀어내기 위해 일부러 도발적인 언사가 적힌 편지를 전달했다. 조롱조로 가득했다. 앞으로 이틀 이내에 휴전협정에 서약하지 않을 경우 어찌될지 모른다는 최후통첩이었다. 파이몬의 계략은 간단했다. 먼저 제3황녀가 바르바토스한테 '우리 영토에서 물러나주면 당장 휴전하겠다'라고 통보한다. 바르바토스가 그것을 수락할 리 만무. 제3황녀는 우리 영토에서 물러나라 부탁하기 위해 '시위'한다. 말만 시위이지 실제로는 공격이다. 여기에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이 맞서싸울 것이다. 이제는 파이몬의 제1군단이 휴전협정을 '종용'하기 위해 참전한다. 어디까지나 명분은 휴전이라는 것이다. 그 실상은 물론 협공이며,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게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전투할 능력을 전부 상실해버린 제6군단에 강제로 휴전협정을 밀어붙인다. 전형적인 정치적 전쟁이다. 파이몬은 여유롭게 기다렸다. 이 책략에서 바르바토스가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하루이틀을 기다린 다음에 무력시위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파이몬은 실수했다. 그녀의 책략을 이미 한참 전에 꿰뚫어본 자가 한 명 있었으며――불행하게도 그자는 산악파가 아니라 평원파였다. 마왕들이 '설마 마왕이 같은 마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할까'라고 방심한 탓에 파이몬의 계책을 알아차리지 못했듯이, 파이몬은 '설마 마왕이 같은 마왕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리라는 것을 꿰뚫어볼 마왕이 있을까'라고 방심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미래를 보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방심의 대가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00108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그날 파이몬은 마침내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황녀측과는 이미 마법수정구로 통신선을 마련해두었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알기 어렵도록 매우 이른 새벽에 진군하기로 합의했다. 여차하면 바르바토스가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사실 이것이 파이몬에게는 불행 중 행운이었다. 새벽에 진군하려고 정찰병 또한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이 부지런한 늑대기병의 짐승과도 같은 눈동자에 일단의 무리가 비추었다. 그는 처음에는 몬스터 부락이 이동하는가 싶었다.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에선 계속해서 지원군을 받고 있었고, 그 대가로 향기롭기 그지없는 인육의 넙적다리를 보장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으으, 넙적다리 한입만 물어봤음 니미럴 소원이 없겠다.’ 설마 모든 지원병에게 넙적다리를 하사할 정도로 제6군단 놈들이 풍요롭진 않으리라. 그래도 군침이 고이는 선전이었다. 자신이 속한 제1군단에선 인간과 전투를 치르지 않았기에 인육이 없었다. 심지어 파이몬 군단장은 인간 마을을 약탈하는 것조차 군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높으신 분들 생각이야 모르겠으나, 제1군단의 몬스터들은 인간의 마을과 도시를 지나칠 때마다 무던히도 정신 수양을 해야 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저건 인육이 아니다……. 늑대기병은 빌어먹게도 신앙심이 부쩍 굳건해졌다. 꿩 대신 닭이었다. 제1군단은 근처의 몬스터 부락을 싸그리 전멸시키면서 행군했다. 고블린 고기나 오크 고기도 제법 먹을 만했다. 늑대기병은, 아마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으로 향하는 몬스터 부락 지원병을 발견한 모양이라면서 신중하게 그들을 추격했다. 행선지만 알아낸 다음에 얼른 본부로 돌아가서 자기가 식량감을 발견했노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오크일까, 고블린일까. 덩치가 좀 되어보이니까 오크겠지. 끌끌. 귓살은 내 꺼……허억!?’ 다크엘프 늑대기병이 본능적으로 어둠에 은신했다. 그는 늑대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여서 최대한 몸을 굽혔다. 얼굴만은 전방을 향했는데, 그의 시선이 심하게 떨렸다. 고작 몬스터 부락민이 아니었다. 수십 명인 줄 알았던 인파는 수백, 아니 수천에 이르렀다. 그들은 야밤인데도 깃발을 펄럭이면서 엄중한 항오를 이루며 걸어가고 있었다. ‘기, 기, 기사단이잖아!?’ 척후병들은 출진하기 이전에 대륙의 주요 기사단 문장을 전부 외웠다. 특히 제1군단 척후병은 그들이 본래 진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튜튼 왕국의 기사단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밝은 밤눈은 순식간에 저 일단의 무리에서 나부끼는 깃발이 <붉은 뾰족방패 기사단>의 군기(軍旗)임을 알아보았다.――튜튼 왕국의 근위기사단이었다! ‘시발, 냅따 토끼자……아니. 잠깐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려던 다크엘프가 생각에 잠겼다. 기사단은 두려웠지만 그 이상으로 호기심, 그리고 척후병으로서의 사명감이 앞섰다. 이곳은 튜튼 왕국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였다. 어째서 튜튼 왕국의 기사단, 그것도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기사단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다크엘프는 실로 현명하게도, 이것이 어쩌면 이번 전쟁의 행방을 결정할 만큼 중대사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는 재빨리 연필을 꺼내들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 후방 약 90킬로미터. 튜튼 왕국의 군대 발견. 최소 일천 이상. <붉은 뾰족방패 기사단> 포착. 다크엘프가 종이를 둘둘 말아서 늑대의 목에 달린 목걸이통에 집어넣었다. 그는 늑대로 하여금 빠르게 본부로 돌아가서 이 명령서를 전달하라 명령한 다음, 자신은 그대로 기사단의 뒤를 몰래 쫓았다. 이 늑대기병의 신속한 행동으로 인해 월맹군 제1군단은 난데없이 튜튼 왕국군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두 시간만에 입수했다. 여기에다 늑대기병은 과감하고 신속한 정찰을 통하여, 적군이 튜튼 왕국군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변경백 군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적어도 아홉 개의 기사단과 이만의 보병으로 채워졌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늑대기병은 이렇게 충분히 정보를 알아냈다고 생각하자마자 최대 속력으로 달음질쳤다. 그 결과 제1군단은 적군의 대략적인 규모를 그날 아침에 알 수 있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늑대기병이 '대단히 영민한 판단과 용감무쌍한 담력을 겸비했다'라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물론 그가 그리도 염원하던 인육의 넙적다리도 부상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늑대기병 개인의 행운과 별도로, 제1군단 수뇌부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튜튼 왕국군이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새벽에 예정되었던 공격 예정은 전격적으로 파기되었다. 파이몬을 포함하여 스물여덟 명의 산악파 마왕들이 단잠에서 깨어나 본부 천막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중엔 세수도 하지 못해서 표정이 어리버리한 마왕도 있었다. 파이몬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일이 아니와요. 왜 튜튼 왕국군이, 게다가 근위기사단까지 우리군 후방에 등장한 것이죠?” 마왕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이라고 이유를 알 리 만무했다. 다만 이 자리에 모인 누구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 있었다. 튜튼 왕국군이 결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마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합스부르크의 황녀가 지원군으로 불러들인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한테 비밀로 숨기고요?” “예. 사실 황녀가 우리를 온전히 신뢰할 거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인간놈들이 보기에는 제6군단이든 우리 제1군단이든 다 같은 마왕군이잖습니까. 만일 우리가 놈들을 배신하고 제6군단이랑 붙어먹어서 합스부르크를 공격하면 어떡한가, 그런 불안감이 있을지도…….” 파이몬이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럴싸했다. 즉, 황녀는 제1군단과 연합하여 제6군단을 격파하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이쪽을 배신하여 튜튼 왕국군과 연합, 제1군단을 격파한다.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파이몬은 배신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2차 월맹군에서 아군한테 뒤통수를 당한 이후로――그네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고, 실제로 증거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를 순순히 믿을 만큼 파이몬은 멍청하지 않았다――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배신을 예방했다. 이번에 황녀와 협조하면서 파이몬은 수십 개의 마법적인 장치를 걸어두었다. 그중에는 군사적 사안에 관련하여 절대로 정보를 차단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포함되었다. 전설의 10서클 대마법사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에야 맹세를 깨부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구만요.” 다른 마왕이 말했다. “저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후려까려고 왔다는 거 말입니다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고…….” “……그러게 말입니다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침쯤에 늑대기병이 도착하여 후방의 적군에 합스부르크 변경백군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변경백이 외국의 군대를 이끌어들인 것 같다'라고 추측했다. 이 변경백은 검은 산성 일대를 수호하는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다르게, 합스부르크-튜튼의 경계선을 지키는 폰 베스트팔렌 변경백이었다. 어찌되었든 적군이 등장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제1군단은 시급하게 후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황이 묘해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엘리자베트 황녀의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월맹군 제1군단이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을 포위하는 양상이었다. 이제는 제6군단과 튜튼왕국군이 파이몬의 제1군단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파이몬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하루이틀만으로 고급 정보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바로 그 하루이틀 사이에 또 다른 첩보가 들어왔다. “프랑크 제국군이 나타났다고요!?” ─ 그렇다. 본인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군. 마법수정구가 띄운 막에서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오늘 아침에 프랑크 제국군 4천 명이 측면에서 접근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경이 아니라 아마도 튜튼 왕국의 국경을 돌파하여 온 듯하다면서. ─ 일단 우리쪽에서 급히 사신을 파견했네. 그때 가야 전후사정을 파악하겠지……허나, 합스부르크의 영내를 침범하면서도 아무런 통보도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우리한테 유리한 일은 아닐 것일세. “그렇다면……적이라는 뜻인가요?” ─ 적어도 각오 정도는 해두어야겠지. 마법수정구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꺼져들었다. 상황이 급박해졌다. 튜튼 왕국의 2만 병력에 비해 프랑크 제국의 4천 병력은 분명히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여러 국가의 군대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심각했다. 무언가 거대한 협조가 있었다. 파이몬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모종의 계략이 펼쳐지고 있다고, 아주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다국적 군대가 서로 보조를 맞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십 가지의 이해와 수십 가지의 명분이 합쳐져야만 가능했다. 아니, 그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진군하는 것인가?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협조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애당초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은 합스부르크가 해결해야 마땅하다. 이건 명백한 주권 침해였다. 자신의 제1군단을 섬멸하기 위해서? 아니, 제1군단이 이곳에 도착한 지 불과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사이에 군대를 정비하고 출진시키고 심지어 당도까지 했는가. 불가능했다. “…….” 파이몬이 수시로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산악파 마왕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불안하게 진지를 쏘다니거나 척후병을 독촉했다. 무엇보다도 전력이 백중세가 되어버렸다. 파이몬의 제1군단이 삼만. 여기에 황녀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일만. 총 사만 명의 군대였다. 이들이 상대해야 할 적군은 바르바토스의 제6군단 일만팔천, 튜튼 왕국군 이만, 프랑크 제국군 사천, 총 사만이천 명의 군대였다.……병력 숫자로만 따지자면 도리어 황녀-파이몬 동맹군이 열세에 놓였다. 그러나 파이몬은 병력의 열세에 대해 고민할 틈이 사라졌다. “군단장 각하!” 척후병 대장이 허겁지겁 천막으로 뛰어들었다. 전통적으로 척후병은 다크엘프가 맡았고, 지금 뛰어든 자도 다크엘프였다. 새까만 얼굴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파이몬이 그 얼굴을 보자마자 예의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지요?” “또, 후방에 군대가 출현했습니다.” “하아.” 파이몬이 이마를 짚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이번에는 어디 군대인가. 바타비아 공화국? 폴리투니아 왕국? 아니면 튜튼 왕국이나 프랑크 제국에서 증원군을 보냈는가?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머리 잘린 황소의 문양입니다. 깃발에 머리 잘린 황소가 그려져 있습니다!” “……예?” 파이몬은 그녀로선 드물게도 얼빠지게 대답해버렸다.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그녀는 차근차근, 눈앞의 다크엘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곱씹었다. 이윽고 그의 말이 이해되자 파이몬은 입술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말도 안 되요!” “정말입니다. 게다가 문양기도 발견했습니다. 초원 늑대의 문양기가.” “아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어떻게――마르바스의 제2군단이 여기에 왔다는 건가요!” 중립파를 통솔하는 마르바스의 월맹군 제2군단. 총 이만의 몬스터 부대가 후방에 출현한 것이었다.   00109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사건은 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험대장 리프의 시체에서 마왕의 문양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 단탈리안과 라피스는 마라톤 회의에 들어갔다. 마왕과 하프-서큐버스는, 어찌되었든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고 또한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모든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합의했다. 동굴 천장의 마왕방에서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했다. “정말로 벨리알이 리프를 후원한 것인지, 파이몬의 꼬붕이 농간을 친 것인지, 일단 우리는 알 수가 없어. 최악의 경우에 파이몬 본인이 한 걸 수도 있고.” “옳은 지적입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한 낯빛으로 동조했다. “무엇보다도 단탈리안 님이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마왕을 직접 죽인 마왕.……누구나 단탈리안 님을 껄끄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마왕들과 마계사회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지. 이참에 아예 잠재적인 적대 세력까지 짓밟아야 해. 나 같은 놈은 신경 쓸 여력조차 없게.” 월맹군 전쟁이 단 두 사람에 의해 조작되는 순간이었다. “블랙허브를 최상위층 인간들한테만 판매해. 그편이 수익도 나고 민중과 상위층 사이를 이간질시킬 수 있어.” “마인들이 흑사병을 퍼트렸다는 소문, 그리고 그런 소문을 인간계의 귀족들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트렸다는 소문을 뿌리겠습니다.” 전무후무한 전염병으로 인해 국가에 대한 신뢰는 한없이 낮아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각국의 군주는 '저주의 근원인 마왕을 처단한다'라는 명분 아래 출군했다. 개개의 군세만 따지자면 이천에서 오천에 불과한 병력이었으나, 그만한 군세를 모든 국가가 한꺼번에 동원하니 마계사회는 '인간놈들이 작정하고 쳐들어온다' 하고 불안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마왕들은 방어전쟁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인간군이 공격하기 전에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평원파의 마왕 중 한 명이 인간군과 교전하면서 전사하자, 마왕들의 불안감은 더더욱 커졌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단계. “이번 월맹군은 어디까지나 방어전쟁이야. 인간의 공세가 펼쳐지기 전에 먼저 행동한다는 개념이지. 즉, 바르바토스의 평원파를 제외하고는 마왕들이 밍기적거릴 공산이 커. 적당히 싸우다 말겠지.” “그때 단탈리안 전하께서 평원파에 입당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평원파가 맡은 방면을 돌파하시는 겁니다.――이번에는 인간계의 군주들이 불안에 잠기게 말입니다.” 평원파는 합스부르크 제국 방면을 맡게 되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에게 반드시 합스부르크 제국 방면을 맡으라고 주문했고, 바르바토스는 그대로 서열 제1위 바알에게 부탁했다. 월맹군 결성을 부르짖었던 순간, 바알과 바르바토스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언제 부르시나 조마조마했다고. 내가 갈 곳은 뻔하네. 그치?’ ‘그대를 제6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합스부르크 제국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그대에게 평원파 전원의 통솔을 인정한다.’ 두 마왕 사이에선 이미 행선지가 합의되어 있었다. 단탈리안이 계획한 대로. 월맹군 제6군단은 합스부르크 쪽으로 출진했다. 여기서 단탈리안은 <던전 어택>에서 한번 활용된 작전을 따라하여 성공적으로 검은 산맥을 돌파했다.……불과 수천의 몬스터 부대가 검은 산맥을 나흘만에 꿰뚫었다는 소식은, 마계사회보다 도리어 인간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그 다음부터는 즉각 새로운 소문을 퍼트려. 마왕군이 점령지의 인간을 학살하기는커녕, 도리어 블랙허브를 무상으로 나누어준다고 말이야.” “실제로도 그러셔야 합니다.” “아아. 물론이지.” 이에 따라 단탈리안은 로젠베르크 변경백과 직접 교전하는 것을 일단 피했다. 무혈로 영지를 점령하도록 바르바토스를 설득했고, 영지민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블랙허브를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 부락을 토벌했다. 영지민은 자발적으로 바르바토스를 백작으로 옹립했다. 마왕군이 검은 산맥을 이례적으로 빠르게 돌파했으며, 심지어 백성을 신민으로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인간계를 강타했다. 월맹군 제6군단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열국의 군주들에게 이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민심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 당장 아들과 남편이 병으로 타죽어가는 와중에, 마왕이든 누구든 블랙허브를 나누어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지금까지 인간계는 황제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단합해서 월맹군을 무찔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결력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귀족과 평민 간의 적대심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블랙허브를 내놓으라며 평민과 노예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귀족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어쩌고 운운한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특히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자기 영지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3만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1만으로 줄어들었다. 기사단을 제외하고 징집병들은 조국에 충성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마침내 대륙의 열두 국가는 제8차 월맹군이 이천 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험하다는 의식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단계.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마왕군과 인간군의 세력을 최대한 깎느냐…….” “예. 두 세력을 한곳에 완전히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무제한 총력전! 단탈리안은 자신이 성장할 시간을 벌기 위해 마왕군과 인간군, 양측 모두 궤멸적인 타격을 입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서는 양측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했다. 마왕측에는, 이곳을 뚫어내지 못하면 패배한다는 인식을. 인간측에는, 이곳을 막아내지 못하면 멸망한다는 인식을. 그렇다면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월맹군이 조직되었다는 첩보를 접하면, 인간의 국가들은 자기들한테까지 마왕군이 침입하기 전에 전쟁을 치르고 싶을 거다.” 모든 나라가 국경이 마왕의 영토에 맞닿은 것은 아니었다. 튜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폴리투니아 왕국, 모스크바 왕국, 이 네 국가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마왕의 영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일 마왕군이 프랑크 제국을 침범하고 싶다면 먼저 합스부르크 제국을 점령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프랑크 제국은 되도록 합스부르크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자국의 영토가 아니라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에서 마왕군을 요격하기를 원한다. 전쟁은 국토에 심대한 피해를 입힌다. 자국에서 전쟁하는 것보다 타국에서 전쟁하는 것이 월등하게 좋다. 검은 산맥의 산성들이 맥없이 무너지자 프랑크 제국, 바타비아 공화국, 브르타뉴 왕국, 카스티야 왕국, 사르데냐 왕국, 총 다섯 국가가 곧바로 군대를 동원했다. 그들은 운 좋게도――그들이 생각하기에 운이 좋다는 것이다――이미 선봉대격의 부대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바로 월맹군이 시작하기 전에 마왕성을 토벌하러 보낸, 이천에서 오천에 이르는 부대였다. 국가들은 일단 저 선봉대를 출동시킨 다음 시급하게 대군을 조직했다. 각국의 소부대는 여차하면 합스부르크 영토로 진입하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국경 지대까지 진군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국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황태자든 제3황녀든 외세의 요청을 거절했다. 황태자는 군공을 오롯이 독차지하기 위해서. 제3황녀는 이번 기회에 마왕군과 휴전을 맺기 위해서.……타국의 군대들은 어이가 없었다.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마왕군이 쳐들어왔는데 국경 통과를 불허하다니! 단탈리안은 확신했다. “명분만 생기면 걔네는 반드시 합스부르크 제국을 침범해.” “그렇겠습니다만, 어떻게 명분을 마련하실 생각입니까?” “굳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선택한 이유가 있지.” 그가 싱긋 웃었다. “제국은 현재 황자들과 황녀 사이에 정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권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황족들이 나설 가능성이 커. 군주에게 전쟁은 항상 위기인 동시에 합법적으로 군사 권력을 가로챌 기회이니까.” “……이해했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든 황녀든, 일단 한 사람만 붙잡아도 명분을 만들어낼 수 있겠군요.” “아아.” 합스부르크 제국과 타국의 신경전이 거세지는 가운데,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발발했다. 단탈리안이 예상한 대로 황태자가 몸소 출전한 이곳에서 제국군은 완벽하게 전멸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특이점 중 하나는 마왕군 측에서 기병이 전혀 활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단탈리안과 바르바토스는 만에 하나 적군의 수뇌부를 놓칠 것을 대비하여 기병 병력을 따로 별동대로 만들었다. 별동대는 전장을 우회하여, 적의 수뇌부가 퇴각할 경우 그들을 요격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얌전히 잡혀버리는 탓에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이제 모든 일이 간단해졌다. 바르바토스가 불사의 군대를 되살리고, 다른 평원파 마왕이 몬스터 부락민을 징집하는 동안, 단탈리안은 다름 아니라 열국의 군주들에게 통신을 보내었다. 마법수정구에 황태자의 모습을 담아 전송했다. ─ 과인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당한 통치자, 유일무이하고도 신성한 주권자로 예정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이다. 슬프게도 제국은 현재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다. 이에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인류애와 우정에 기대어 열국의 군주들에 청하노라……. 파병 요청이었다. 기실 황태자는 이미 살해당했고, 바르바토스의 흑마법에 의해 되살아난 인형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법수정구 너머의 영상을 통해 그런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아니, 알아차렸다 해도 열국의 군주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망하면 다음은 자국의 차례라며 전전긍긍하던 국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법수정구와 함께 보내진 서류에는 틀림없이 황태자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들은 현재 합스부르크 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이가 엘리자베트 제3황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요는 명분만 갖춰지면 그만이었다! 단탈리안은 영리하게도 타국의 군대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의 변경백들한테도 서신을 보냈는데, 대대로 제1위 황위계승권자에게 충성하는 변경백들은 즉각 반응했다. 그들은 길잡이를 자청하면서 타국의 군대와 함께 진군했다. 여기까지가 세 번째 단계.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진실로 무서우신 분입니다.” 마라톤 회의 끝에 라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누구도 이처럼 장대한 계략을 짜내지 못할 터입니다. 감히 어떤 자가 상상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두뇌에서 비롯했음을.” “성공하면 말이지.” “저 따위가 어찌 보장하겠습니까마는.” 라피스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백 년의 생을 걸고 확신합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성공하시리라고.” “든든하네. 그래, 나도 웬만하면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아닐까 생각해.” “그럼 당장 마계로 돌아가서 첫 번째 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헌데 단탈리안 님. 이 총체적인 작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정하시겠습니까?” “미네르바 작전이라고 부르지.” 이 장대한 계획의 핵심은 쿤쿠스카 상회에 있었다. 각종 소문을 빠르게 퍼트리고, 각국의 수뇌부에 뇌물과 함께 정보를 전달할 매개로는 쿤쿠스카 상회를 따라올 곳이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설령 라피스가 전격적으로 도와준다 할지라도, 쿤쿠스카 상회 전체가 단탈리안의 작전에 동조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단탈리안은 그러리라 생각했다.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이자 진조 흡혈귀인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누구보다도 마왕들을 증오하는 자였으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단탈리안은 은밀하게 만났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바르의 표정은 처음에는 경악으로 물들었다가, 그 다음에는 고심으로, 마지막으로 냉혹함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 계획이 마왕들 전체에 막강한 피해를 입히리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바르가 불쑥 중얼거렸다. “……앙골모아 대마왕.” “음?” 단탈리안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약간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이바르 로드브로크, 미력하나마 단탈리안 전하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물론, 바르바토스를 꾀어내기 위해 마계에서 제일 귀한 포도주를 구해다준 이 역시 이바르였다. 사실 단탈리안의 계략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인간군을 이끌어들일 계획은 완벽했으나, 어떻게 해야 제6군단 이외의 마왕군을 이끌어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저 인간군에 쫓겨서 검은 산성까지 후퇴하는 방안을 고려했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파이몬이 마왕군을 배신할 속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단탈리안은 흥분했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포도주를 꺼내서 라우라와 함께 마셔버릴 정도였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마지막 네 번째 단계가 저절로 완성되었다! “파이몬! 멍청한 년 같으니!” 그가 파안대소했다. “넌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도와주는구나!” 단탈리안은 즉각 제2군단의 마르바스, 제3군단의 아가레스, 제4군단의 바싸고, 제5군단의 가미긴에게 정보를 흘렸다. 제1군단의 파이몬이 제6군단의 바르바토스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대다수는 단탈리안이 흘린 정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허무맹랑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열린 청문회를 통하여 호감도가 충분히 쌓인,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는 단탈리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마르바스는 무엇보다도 파이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 판단했다. 마르바스는 제2군단의 진군을 멈추고 가만히 제1군단의 동태를 살폈다. 제1군단은 실제로 움직임이 이상했다. 아무리 산악파가 전쟁을 기피한다 해도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 제1군단이 마침내 움직였을 때, 그들은 튜튼 왕국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 쪽으로 진군했다. “……단탈리안의 말이 맞았군.” 마르바스가 침음을 삼켰다. 마르바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군단장들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첩보원 하나쯤은 제1군단에 붙여두었다. 제1군단이 합스부르크 방면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곧바로 월맹군 각 군단장에게 전달되었다. 마계를 주름잡는 최상위 마왕들은 결정을 내렸다. “전군, 기수를 돌린다. 합스부르크로 향하라.”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제2군단의 통솔자. “캬아아. 파이몬 요 년, 아주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네? 그 년만 좋은 짓 하게 내버려둘 수 없지! 얘들아, 가자!” ─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 제3군단의 통솔자. “진군의 방향을 바꾼다.” ─서열 제3위의 바싸고, 제4군단의 통솔자. “아휴. 골치 아픈 일이 되었네. 왠지 운수가 안 좋더라.” ─서열 제4위의 가미긴, 제5군단의 통솔자. 제2군단, 제3군단, 제4군단, 제5군단, 사실상 월맹군의 모든 병력이 즉시 방향을 비틀어서 합스부르크로 향했다. 그들은 파이몬이 월맹군의 군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파이몬은 지금 왜 마르바스가 등장했는가 경악하고 있었지만, 만일 마르바스 이외에도 세 명의 군단장이 가열차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기절해버릴지도 몰랐다. 단탈리안이 그토록 열망하던 대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00110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 * * 도박에서 승리했다. 마르바스가 제2군단을 이끌고 평야에 나타났을 때, 무심코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실 적당히 시기를 봐서 검은 산맥으로 후퇴하자고 건의하려 했다. 아무래도 인간군이 집합하는 것보다 월맹군이 도착하는 것이 늦어질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마르바스는 내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호감도는 쌓아두고 볼 일이었다. 청문회 때 파이몬에게 굳이 죄과를 묻지 않고 좋게 좋게 넘어간 것이, 결과적으로 청문회 사회자였던 마르바스의 호감을 샀다. 그 호감이 이번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청문회에서 모든 것이 비롯했다……. 무소속에 불과한 내가 바르바토스와 인연을 맺어 평원파가 되었고, 그것이 제8차 월맹군으로 이어졌다. 세상사가 참 얄궂지 않은가. 지금 파이몬이 맞이한 불운은 어찌되었든 본인이 자처한 셈이었다. “네 자식이 마르바스 영감을 불러들였다 이거지.” 바르바토스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정보를 털어놓았다. 나중에 가면 내가 모든 일을 기획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질 터였다. 그러느니 어느 정도 바르바토스한테 미리 고백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평원파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아니라고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바르바토스는 훌륭한 버팀목이었다. 다른 마왕들의 공격을 대신해서 막아줄 버팀목. “그래.” “……왜 나를 속였어?” 내가 피식 웃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웃어? 지금 웃었냐?” “아, 당연하지. 웃기니까.” 바르바토스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찰싹, 하고 내 뺨을 강타했다. 그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무력 능력치가 수백에 이르렀다. 나는 꼴사납게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입안이 저릿저릿하고 피맛이 느껴졌는데, 혓바닥에 무언가가 토돌토돌하게 굴러다녔다. 이빨이었다. “웃지 마.” 지극히 무감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감정을 제어하는 것일까. 아예 감정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화가 들끓는 것일까. 나는 퉤, 하고 이빨을 뱉었다. “내가 속였다고? 너야말로 웃기지 마라, 바르바토스. 단 한 번도 너를 속인 적 없어.” “개새끼가 지금 어디서 궤변을――.” “닥쳐!” 내가 몸을 일으켜서 바르바토스를 직시했다. 아, 이제는 확실히 그녀의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노였다. 그녀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믿었던 이에게 속아서 치를 떨고 있었다. 너답지 않구나, 바르바토스. “네 마왕성에 처음으로 찾아간 날, 기억하냐? 빌어먹을 발레르뇽 포도주를 처마신 날 말이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월맹군을 조직하자고 결의했지. 대단한 음모였어. 안 그래?” 그녀가 나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나는 개의치 않고 얘기했다. 그때 우리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대다수의 마왕은 인간계 정복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계를 정복해버린 다음엔 최상위 마왕들이 하위 마왕들을 어떤 의미로든 말살해버릴 테니까, 이것이 내분의 원인이다, 고로 월맹군이 성공하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마왕의 숫자가 적어질 필요가 있다…….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그래서 씨발! 네놈이 말했잖아! 어차피 마왕놈들이 싸우지 않을 바에야 인간 새끼들을 쳐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분명히 그랬다. 흑사병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마왕을 극도로 증오하게 된다. 용사를 필두로 마왕들 정벌이 이루어지겠지. 그전에 인간의 세력을 잔뜩 약화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 공격해오게 만들어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면 이기적인 마왕놈들도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다.――나는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냐, 바르바토스?” “뭐?” “내가 얘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을 텐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난 분명히 얘기했어. '마왕의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라고.” “……!” 바르바토스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런가. 이제 조금 깨달았는가.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한테 맞은 뺨이 욱씬거렸다. 내가 계속해서 지껄였다. “월맹군을 일으키기만 하면, 응? 마왕의 수가 줄어든다고 생각했어? 내가 고작 그 정도 수단만 고안했다고 보았냐. 네 애첩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걸……크으.” “너…….” “그래. 전부 내가 했어.” 일부러 변경백의 영지를 먹으라고 했다. 그래야 인간계의 수뇌부가 초조해하므로. 일부러 황태자를 잡으라고 부탁했다. 그래야 다른 나라들도 끌어들이므로. 일부러 파이몬이 올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그래야 다른 마왕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내가 흥분되어 소리쳤다. “평원파는 미끼다! 마계와 인간계의 모든 군사를 끌어들이기 위한 개미지옥이지! 여기, 합스부르크의 부르노에서 대륙의 군세는 모조리 집결한다. 바로 여기서 악몽이 시작되는 거다.” “…….” “내가 너를 속였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지.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애시당초 너는 마왕들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데 동의했어. 이번 월맹군의 목적 자체가 그거였다.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이야. 안 그러냐?” 바르바토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기에, 더 이상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옳다는 사실을.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러면……나한테 미리 말해줘도 됐잖아.” “안돼.” 내가 즉답했다. “우리 평원파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에 놓여야 한다. 행여라도 우리가 일부러 계략을 파놓았다는 얘기가 나돌아서는 절대로 안돼. 잘 봐. 내가 말하지 않은 덕분에 너는 진심으로 울 수 있었어. 그걸 지켜본 마왕들과 몬스터들은 널 절대적인 피해자로 여기겠지.” 나 단탈리안이 파이몬을 의심한 탓에 우연히 그녀의 계략을 알아차렸다. 어디까지나 그런 시나리오가 성립해야만 한다. 제8차 월맹군이 끝난 이후에 평원파는 명분을 쥐게 된다. 가장 선두에서 마계를 위해 싸웠다는 명분이. 반면에 산악파는 '마계를 위해 동족을 공격했다'라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동족을 공격하려 했다'라는 오명만 짊어지게 된다. 잘만 하면 산악파가 평원파보다 우세한 현재의 정국이 뒤바뀔지 모른다……마왕군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든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병법의 기본이야. 칭찬받지 못할망정 뺨다귀를 맞을 일 따위, 나는 하지 않았어.” “…….” 또 다시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르바토스가 불쑥 물었다. “너의 그……인간 참모는?” “어?” 너무 뜻밖의 내용이라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인간 비서, 즉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뜻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왜 라우라 얘기가 나오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재차 말했다. “인간 참모는 알고 있었냐고. 네가 전쟁을 전부 조작했다는 거.” “……아니.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전부 알지는 못하지. 난 부하라고 해서 뭐든지 다 알려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럼, 다른 사람은?” 머릿속에 라피스가 떠올랐다. “있는데.” “한 명? 여러 명?” 점점 더 질문의 의미가 알쏭달쏭해졌다. 아니,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두 명. 아마도.” “두 명이라.” 다시 침묵. 도대체 뭐냐. 내가 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자코 있자니,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더니 무언가 중얼중얼 속삭였다. 알아듣진 못했어도 그게 마법주문이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좋아.” 하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여긴 완전히 봉쇄됐어. 여기서 비명을 질러도 바깥에선 전혀 못 들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존댓말로 지극히 공손하게 질문했다. “……저기, 바르바토스님. 왜 그런 마법을 부린 겁니까?” “후우.” 그녀가 음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남이 절망하고 또 절망했는데, 네놈은 혼자서 마음 편하게 놀고 있었다 이거지. 심지어, 뭐? 나는 모르는 걸 세상에서 두 사람이나 알고 있어?” “어, 어?”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 지랄하네. 시발. 그러면 나는 그냥 아군이고 그 두 년놈은 진짜 아군이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바르바토스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아우라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나한테 뺨따귀를 날릴 때보다 심기가 더 불편해진 것 같았다! “나는 네 새끼가 처음이었는데……단탈리안 주제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바람을 피워? 앙?” “자, 잠깐만! 바람? 바라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내가 식겁해서 소리쳤다. “우리가 언제 정식적으로 사귀기나 했냐!” “시발 새끼야. 난 이천 년 동안 처녀였어. 세계적인 처녀를 따먹었으면 응당 그에 걸맞게 책임을 져야지, 엉?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주지 못할지언정 감히 속여?” “내가 언제 널 따먹었어! 네가 나를 따먹은 거지!” “하. 난 처녀였고 넌 아니었잖아.” 얘가 돌았나! 내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네가 처녀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색정 마법까지 걸어서 졸라 발정시킨 게 누구신대!”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분명히 웃는 낯빛인데도 어딘지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치 너 방금 내 역린을 건드렸다, 라는 느낌이었다. “헤에. 뭐야? 나랑 떡쳐서 싫었다는 얘기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좋았냐?” 내가 매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좋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대번에 사신의 낫이 소환되어 내 모가지를 댕겅 날려버릴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도……나쁘지 않았고. 바르바토스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컨대 너는 겉모습이 열두 살 소녀를 기분 좋게 따먹었고, 심지어 그 소녀는 네가 첫 남자였는데도, 너는 남자답게 책임을 지지 못할망정 속여 먹었어.” “…….” “세간에서는 보통 그런 남자를 개새끼라고 부르지. 개새끼야.” 아니다, 정말로 뭔가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아무튼 아니었다. 무척 억울했다. 게다가 바르바토스 저 년은 남자만 처음이었을 따름이지 여자랑은 질펀하게 놀아대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청순한 척, 남자한테 처음을 빼앗긴 척 굴면 어쩌자는 얘기인가. 어째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거냐. “그리고 개새끼는 개새끼처럼 쥐어패야 마땅하지.” 솨아악, 하고 바르바토스의 손아귀에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채찍이었다. 식은땀이 등에 흘렀다. 입술을 열었지만 혀가 제멋대로 떨었다. “바, 바르바토스. 왜 화났는지 몰라도, 우리 제발 이성적으로 대화하자. 응?” “병신아. 왜 화났는지 모르니까 화내는 거다.” 바르바토스가 양손으로 채찍을 잡아 당겼다. 마치 채찍이 얼마나 질긴지 확인해보겠다는 것처럼. 적어도 내 쪽에서 보기에, 채찍은 무척이나 단단해보였다. 나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정보였다. “참고로 네 자식이 입을 열어서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내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거든? 그러니까 얌전히 입 닥치는 편이 네놈 신상에 이로울 거야.” “미안해. 내 계획을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일단 무조건 사과해보기로 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여하간 여자에겐 무조건 사과하는 게 정답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헌데 어째서인지 바르바토스는 차갑게 비웃을 뿐이지 않겠는가. “병신은 끝까지 병신이지. 하, 내가 존나 뭐에 씌였다고 이딴 놈한테!” “으, 으아아아악!?” 채찍이 매섭게 날아왔다. 그 다음 일은, 나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생략하겠다. 다만 내가 살아남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빌었으며, 최종적으로 바르바토스의 마음이 풀어졌다는 사실을 말해둔다. 물론 왜 바르바토스가 그토록 화났는지는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언제는 개새끼 같아서 좋다고 껄떡였으면서 이젠 개새끼 같다고 쥐어패다니. 조심스럽게 추측하건대, 아마도 쪽 팔리게 부하들 앞에서 울어버린 것을 내 잘못으로 돌리려는 것 아닐까 싶다. 바르바토스는 자존심이 엄청 강하니까. 부하들이 듣는 앞에서 울었다는 걸 평생의 치욕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럼 날 그렇게 때릴 만도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부당하지 않는가? 불합리하다……내가 마음이 대해(大海)처럼 넓은 남자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삐져서 평원파를 탈퇴했을 거다. 못돼 처먹은 년 같으니라고.   00111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마르바스 영감이 회합을 열었어.” 바르바토스가 채찍을 거둬들이고 말했다. SM 플레이를 강요받은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바지춤을 올렸다. 바지가 엉덩이에 닫자 무진장 쓰라렸다……. “회합?” “마르바스 영감이랑 창년, 나, 이렇게 삼자대면하자는 거지.” 창년은 파이몬을 뜻하는 말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을 단순히 창녀라고 부르는 데 만족하지 못했는지 특별히 창녀 + 년, 이라는 용어를 개발했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가지 마. 마르바스는 파이몬이랑 너를 중재시키려고 할 거야. 굳이 지금 나갈 필요가 없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바르바토스, 너가 훨씬 더 유리해지거든.” “흐응.” 제2군단만이 아니라 제3군단, 제4군단, 제5군단. 이들이 전부 도착할 때가 바로 회합을 열어야 할 기회이다. 마왕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산악파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놀아나지 못한다.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어디까지나 서로 적군이니까. 마왕군인 동시에 제국군의 아군이기도 한 산악파는 입장이 한없이 곤란해진다……반면에, 우리 평원파는 입장이 유리해지겠지. “그럼 그냥 대기해야겠네.” “어. 시간은 우리 편이야.”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평원파에 소속한 마왕들도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명예롭게 닥돌할까 비겁하지만 일단 살아남을까' 하고 고심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진영을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특히 벨레드 형님이 곧잘 웃었다. 브란덴부르크의 영주성에서 그랬듯이 마왕들 몇몇을 모아서 자그맣게 연회를 벌이기도 했다. 진중에서 술을 마신다라……뭐, 과하지만 않다면야 상관없다. 하지만 나한테 억지로 술을 먹이는 것은 제발 그만해주기를 바란다. 서열 제13위 마왕 벨레드, 이 양반은 삼국지연의로 따지면 장비 같은 양반이라서 세상 사람이 죄다 자기처럼 말술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이 신장 4미터의 오우거 혼혈아는 역도 선수마냥 1미터짜리 술독을 그대로 들어올려서 원샷해버린다! “크아아. 인간놈들도 좋은 술을 담글 줄 안단 말이지.” “…….” 나는 1미터짜리 술독이 텅 비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위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1미터 가량의 술이 들어가도 괜찮을 정도로 위장이 거대하다면, 그건 이미 위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아닐까. “꺼륵.” 벨레드가 트림질을 했다. 끔찍한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나는 실신하고 싶었다. 근처를 지나가다 억지로 붙잡힌 것만도 억울한데, 딴 사람의 입냄새까지 관람해야 하다니……세상사란 정말이지 요 모양 요 꼬라지다. “자아. 단탈리안. 자네도 들이켜!” 술잔에 벨레드가 술을 콸콸 따랐다. “너무 많은데요…….” “어허, 사나이라면 이 정도는 콧구멍으로 마실 수 있어야지!” 댁의 기준에서 사나이라면 일단 오우거 핏줄을 타고날 필요가 있어보인다. 안타깝게도 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눈앞의 오우거 혼혈아는 눈알이 삐었는지, 나를 자기 동족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서 단번에 들이켰다. “오오.” 주변에서 마왕들이 과장스럽게 탄성을 내질렀다. 한 마왕이 말했다. “괜찮은데? 허우대처럼 생긴 것치고 술은 꽤나 마시는구만.” “허우대는 또 뭡니까.” 웬만하면 귀공자 스타일이라고 불러주기를 부탁한다. 대세는 너희처럼 근육 마초가 아니다. 나처럼 선이 가느다란 미소년 스타일이다. 정말이다. 난 방구석폐인이 아니라 그저 은둔생활을 애호하는 귀공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큭, 베파르도 졌다! 벌써 네 명이나 쓰러졌다고!” “하하하! 감히 나를 술싸움에서 이기려면 이보다 세 배는 더 갖고 와라!” 서열 제42위의 마왕 베파르가 꼬꾸라졌다. 그 말고도 땅바닥에 마왕 세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벨레드 형님과 술내기를 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 실로 한심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주정뱅이들은 왜 져도 꼴불견이고 이겨도 꼴불견일까. “그 다음은 자네 차례야, 단탈리안!” 벨레드가 입에서 술을 튀겨가며 나를 지명했다. “엑!? 왜 접니까?” “자네가 나의 아우이기 때문이지. 나의 아우라면 응당 나만큼 마셔야 해!” 나한테 강제로 술잔이 주어졌다. 주방에서 혹시 술잔이 아니라 대접을 착각해서 가져온 것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큼직한 사기그릇이었다. 거기에 벨레드가 술을 쏟아부었다. “혀,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으으음? 뭐라는지 안 들리는걸――?” 우라질, 설마 지금 귀여운 척한 건가? 당장 혀 깨물고 자살해줬으면. ……아니다. 침착하자. 제아무리 벨레드 형님일지라도 일단 위장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을 터. 내 앞에서 네 명이랑 술마시기 싸움을 했으니 위장의 상당 부분이 들이찼을 거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벨르드는 더 이상 체내에 액체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즉, 승산이 충분하다! 내가 훗, 하고 웃었다. 몸만 쓸 줄 아는 전사와 다르게 머리까지 쓸 줄 아는 자의 여유였다. “좋습니다. 평원파 최고의 주당이라는 명성, 제가 뺏어드리지요.” “바로 그 기세이지. 크하하, 덤비게나, 아우!” 나는 기합을 지르면서 대번에 술을 들이켰다. 기억이 날아갔다. 힘겹게 눈을 뜨자, 거기엔 땅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일곱 명의 마왕과 내가 있었다. 그중에 벨레드는 없었다. 아마 내가 쓰러진 직후에도 연달아 두 명이 더 패퇴한 듯했다. 전멸이었다. 인생, 익숙하지 않은 것에 모험하면 안 된다. 이처럼 작은 사건사고가 있었지만……대체로 평원파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인간군과 마왕군, 양측의 대치가 계속되었지만 불안함이나 패배심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치게 마음을 풀어둔 것도 아니었다. 징집병을 훈련시켰다. 군진을 보강했다. 마음에 여유를, 그러나 경계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평원파의 마왕들은 대개 전쟁에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 언제 어떻게 긴장을 풀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가 진영을 차린 브루노 평야에 군대가 속속 모여들었다. 우선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도착했다. 그들이 합류하자 평원 저편의 인간군이 환호성을 질렀다. 합종연횡을 공모하는 지휘부와 다르게, 일개 병사들 입장에선 인간은 인간의 편이었고 마인은 마인의 편이었다. 속 편하게 환영할 수 있겠지. 다음으로 사르데냐 왕국군, 폴리투니아 왕국군이 거의 동시에 들이닥쳤다. 각각 2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위용이 대단했다. 평원 저편이 인간군의 막사와 깃발로 수해(樹海)를 이루었다. 이로써 인간군은 합스부르크-프랑크-바타비아-사르데냐-폴리투니아, 다섯 국가가 연합하여 무려 8만 대군을 이루었다. 인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딱 나흘 동안만. “주군! 얼른 밖으로 나가봐라!” 라우라가 막사에 허겁지겁 들어왔다. 뭔가 사단이 일어났나 싶어서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요새?” 엄청나게 커다란 요새가 '움직이고' 있었다. 대략 오십에서 팔십 미터 상공에 떠다니는 그것은, 몸체에 비해 몹시 가느다란 집게발 여섯 개가 지탱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저절로 떠올랐다. 물론 움직인다는 점만 제외하면 비슷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요새는 몸체가 홀쭉했고 다리들도 길었다. 게다가 몸체만큼 거대한 톱니바퀴 세 개가 성채에 박혀 있었다. 톱니바퀴들은 끊임없이 털털털 돌아갔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라서 몬스터들이나 마왕들이나 막사에서 뛰쳐나와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이 냉정하게 말했다. “저거, 발레포르야.” “발레포르? 서열 제6위?”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발레포르의 마왕성이야. 기동성채(機動城砦) <라비린토스>.” 세상에! 내가 입을 떡 벌렸다. 게임상에는 저런 괴물 같은 던전이 없었다. 발레포르는 분명히 여느 최상위권 던전과 마찬가지로 으리으리한 궁성을 지어놓고 살았다. 다만 평지가 아니라 바다에 궁전이 있다는 게 특이점이었는데……잠깐만. 바다? 내가 물었다. “야. 혹시 저 마왕성 평상시에는 어디에 있냐?” “게르마니아 바다에 짱박혀 있지. 발레포르 쟤가 바다를 엄청 좋아하거든.” “아이고.” 상황이 파악되었다. 저 무시무시한 마왕성은 원래는 바다에 위치해서 겉으로만 보면 꼭 수면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처럼 걸어다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던전 어택 폐인인 나도 저런 설정이 숨겨져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서열 제6위 발레포르의 마왕성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빌딩 같은 게 없는 시대였다. 평생 살아도 10미터보다 높은 건물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갑자기 자그마치 육칠십 미터짜리 건축물이, 그것도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축물이 등장했다. 인간군의 사기는 당연히 떨어졌다. 참고로 서열 제6위 발레포르는 서열 제3위 바싸고와 함께 월맹군 제4군단을 이루었다. 단 두 명이서 하나의 군단으로 취급받는 것이었는데, 저 정도면 가히 군단급이라 할 만했다. 생각해보라. 난공불락의 성이 직접 이리저리 움직인다. 전술적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날. 서열 제2위 아가레스가 이끄는 월맹군 제3군단이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할 무렵에 프랑크 제국의 본대도 당도했다. 마치 순서를 앞다투는 달리기 시합처럼 대륙의 모든 군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슬슬 교통이 정리되었다. 인간군의 병력은 이러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 이만 명, 튜튼 왕국군 이만 명, 바타비아 공화국군 오천 명, 프랑크 제국군 삼만 오천 명, 사르데냐 왕국군 이만오천 명, 폴리투니아 왕국군 이만오천 명, 브르타뉴 왕국군 오천 명.――도합 13만 5천의 병력. 마왕군의 병력은 이러했다. 제1군단 삼만 명, 제2군단 이만 명, 제3군단 삼만오천 명, 제4군단 오천 명, 제5군단 오천 명, 제6군단 일만오천 명.――도합 11만의 병력. 양군의 병력을 전부 합치면 물경 20만 병력 단위의 전쟁이었다. 인간계든 마계든 이번 한판 승부에 판돈을 전부 걸었다. 파이몬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인간군이랑 한편을 먹는다? 일단,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인간군의 실권을 쥐지 못한 것이 분명하므로――이제 열일곱 살짜리 여자, 그것도 황제가 아니라 고작 '유력한 후계자'인 그녀가 어떻게 저런 대군의 우두머리로 인정받겠는가?――인간군 수뇌부들이 파이몬과 어디까지 협조할지 불분명하다. 뒤통수를 갈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게다가 이쪽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디 배신할 테면 해보라 이거다. 평원파의 제6군단만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마계인들도 납득하겠지만, 제2군단에서 제6군단까지 싸그리 희생양으로 삼는답시면 세상에 누가 그걸 고작 희생양으로 여기겠는가. 명분을 내세울 수도 없다. 그냥 불구대천의 배신자가 되어버리는 거다. “마르바스 영감이 회합을 또 요청했는걸.”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으면서 내게 서신을 넘겼다. 거기에는 정중한 필기체로 '각 군단의 군단장 및 최고참모가 한 자리에 모일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이제는 참석해도 되겠지?” “물론이지. 가서 파이몬의 죽빵을 날려버리자.” 우리 둘이 마주보면서 음흉하게 낄낄거렸다. 정말 마왕다운 모습이었다. “참. 하지만 넌 되도록 울상을 지어야 해.”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주의를 줬다. “우리 군단장 각하께서는 사악한 파이몬의 계략에 휩쓸려 희생되실 뻔한, 순진무구한 소녀이니까. 억울한 티를 팍팍 내라고.” “깔깔깔. 걱정하지 마, 짜식아. 내가 또 한 순진하걸랑.” “세상에 순진이 다 뒈졌습니다.” “너부터 뒈지고 싶냐?” 우리는 서로 툭탁거리면서 회합 장소로 향했다.   00112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 * * 발푸르기스의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왕들과 대면하게 된 것은. 그러고보니 청문회로부터 대충 반 년이 조금 더 넘었는가. 그때 나는 피고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서열 제72위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죄과를 추궁당했다……이제는 입장이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내가 파이몬의 죄과를 캐물을 차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겠지. 군단들 사이의 중간지점에 비단으로 된 장막이 겹겹이 둘러쳐졌다. 미소녀와 미소년이 발가벗고 손님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눈이 호강했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녀――알다시피 얘는 레즈다――의 알몸을 관람하면서 즐겁게 흥얼거렸다. “헤에. 임시 회합인 줄 알았는데 꽤 본격적인걸.” 종족도 다양했다. 이런 자리에 약방의 감초라 할 수 있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는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마인들 사이에서 높은 계급으로 존경 받는 호족(虎族)과 묘족(猫族)도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로 따지면 브라만이라고 할까. “소인들이 안내하겠나이다.” 천막 입구에 다다르자 미소녀 여섯 명이 오체투지했다. 새하얀 엉덩이가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미소년이 아니라 미소녀를 배치한 까닭은 아마도 바르바토스의 취향에 맞춘 것 아닐까. 어찌되었든 바르바토스는 무척 흡족해했다. “확실히 마르바스 영감이 손님 접대하는 법도를 알아.” “끄응. 너무 화려하지 않아?” 나에게도 따로 소녀 두 명이 따라붙었다. 무기 검사를 할 겸해서, 미소녀들은 내 옷을 벗기고 온몸에 향료를 발랐다. 그리고 고대 로마인의 토가 같은 천옷을 입혔다. 가슴팍과 허벅지가 훤하게 다 드러나는 옷이었다. 옛날에는 꿈에서도 바라지 못한 미남 미녀가 지극히 공손하게 대해준다.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는 구름 너머의 계급이 바로 마왕이었다.……이러니까 안드로말리우스 걔도 기고만장한 성격이 되었겠지. “왜, 사치스러운 거 싫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아예 즐기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묘족 소녀의 귓볼을 어루만지면서 놀았다. 묘족 여자애는 마왕이 손수 만져주자 너무나 황공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순진무구한 반응이 바르바토스의 가학심을 불태운다는 사실을 알까 모르겠다. 불쌍하게도. 꼭 돈 많은 아줌마가 초짜 영업녀를 갖고 노는 것 같군. 아니, 겉으로만 보면 묘족 여자애나 바르바토스나 같은 또래로 보인다는 게 곤란했다. “글쎄. 별로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가 보기에도 넌 좀 마왕스럽지 못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당연했다. 살아남기 위해 엄숙한 말투도 쓰고 그랬지만 어디 그게 내 천성이었던가. 맨날 반말만 쓰고 사는 게 지겨워서 라우라한테 일부러 존댓말까지 쓰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였다. 우리는 선남선녀의 안내를 받아서 천의 장막 깊숙이 걸어갔다. 장막은 산들바람에 살랑거렸고, 햇빛에 성스럽게 빛났다. 천과 천 사이의 미로와 같은 길을 굽이쳐 들어가자, 곧이어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장막의 중심이었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야~.”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여자였다. 그녀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바람에 젖가슴이 천옷 틈새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맹세컨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본 어떤 젖가슴보다 거대했다. 거유(巨乳)를 뛰어넘어 폭유(爆乳)였다. G컵? 아니, H컵?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던전 어택> 유저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 마왕, 서열 제4위의 가미긴이었다. 금발이 풍성한 이 미녀는 비스듬히 누워서 포도를 먹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먹는 게 아니라, 옆에서 백발이 성성한 집사가 포도를 까고 있었다. 그가 포도를 껍질 벗겨서 주면 가미긴이 낼름 받아먹었다. 빨간 혓바닥으로 포도가 뎅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꽤나 요염한 광경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아예 풀어졌네, 풀어졌어. 좋냐?” “어어엄청 좋은걸~. 솔직히 나, 이번 회합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든. 지루하고 살벌한 모임이 될 줄 알고 한숨이나 쉬었는데 웬걸. 물이 너무너무 좋아.” “으이구, 머리야. 말하는 뽄새 보니까 벌써 한 판 뛰었구만.”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주라~.” 우리도 각자에게 배정된 침상에 올랐다. 시종들이 다가와서 바르바토스와 나의 맨발을 물로 씻었다. 발가락 틈새가 시원해졌다. 그들은 곧바로 향기 좋은 술을 종류별로 진상했다. 천막 너머에서 은은하게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아마 음악가들이 이곳 중심지를 둘러싸고 연주하는 것 같았다. 피리 소리가 허파를 간지럽혔다. 미남 미녀, 고급 술, 거기에다 음악까지. 이래서야 누구든지 적의가 사라지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겠지. 대단했다. 회합을 주최한 마왕 마르바스는 작정하고 연회를 연출한 게 분명했다. “근데 그쪽 신사 분은? 내 기억에 없는걸.” “서열 제71위 단탈리안입니다. 금발이 아름다운 마왕이시여.” “아아!” 가미긴이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네가 단탈리안이구나! 와아. 뭐 되게 음흉하고 썩어빠진 할아버지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젊게 생겼네.” 내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되게 음흉하고 썩어빠졌다는 거냐. 재차 강조하지만 나처럼 순수한 인간이 따로없다. “아! 걱정하지 마. 난 음흉하고 썩어빠진 할아버지가 취향이거든!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박히면 나도 꼭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이 좋아. 막 달아올라!” “…….”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깐이지만 매우 고민했다. 바로 내 옆의 침상에 자리 잡은 바르바토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녀석 마조히스트야.” 새디스트 바르바토스에 마조히스트 가미긴인가. 마왕들은 성적 취향이 실로 다채로웠다. 댁들이 얼마나 신나는 사생활을 즐기는지 관심도 없고 딴죽 걸고 싶지도 않았지만, 웬만하면 초면의 인간한테까지 자기 성적 취향을 나불나불 떠들어대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하잖아. 혹시 그거냐? 일종의 관음증이냐. 자기 취향을 적나라하게 밝힘으로써 뭔가 쾌감을 느끼는 것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로군……. 내가 마왕 중에서 가장 순수하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헤에. 막막 신기하다. 얘, 반말해도 괜찮지?” “물론입니다.” “응, 응. 그럼 이제 우리 친구니까 거리낌없이 뭐 좀 물어볼게!” 반말하면 친구인 건가. 심플한 인간관계였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려 할 때, 가미긴이 싱글벙글한 안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뜸 말했다. “파이몬 내가 죽여도 돼?” “…….” 뭐라고 할까. 정말로 단도직입적이군.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만 띄우고 있자, 가미긴이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 “예전부터 진짜 죽이고 싶었거든, 파이몬! 과반수가 넘는 마왕을 자기 파벌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싫었어. 게다가 그 아이, 만날 마계사회의 명분을 뒤에 업고 행동해~. 차암. 죽이면 죽이는 대로 내가 엄청 욕 먹을 게 뻔해서, 나 진짜 진짜 많이 참았는데에.” 그녀는 하얀 이빨을 내보이면서 웃었다. “이젠 죽여도 되겠지?” “…….” “이거 비밀인데, 너희 둘한테만 말해줄게.” 가미긴이 오른손으로 입가를 막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주변의 시종들한테 다 들리니까 의미가 없을 텐데도. “지금 여기 천 미터 상공에 와이번 삼백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거든~? 내가 명령만 내리면 바로 와악! 하고 공격해올 거야. 헤헤. 귀엽지만 그럭저럭 강한 아이들이라서.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파이몬 한 명은 몰이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아!” 등골이 서늘했다. A급 몬스터 와이번 수백 마리. 회합에 참가해서 평화롭게 연회를 즐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죽음의 함정을 파놓았노라고 밝혔다……표리부동의 간웅인가. 아니다. 자기가 지닌 힘에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명분만 갖추어지면 서열 제9위의 마왕 따위 단번에 멸살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그러니 저토록 여유로우면서도 누군가의 죽음을 논할 수 있다. 그런 거다. 나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얘기했다. “산악파는 마왕군에서 제일가는 세력입니다. 섣불리 건드리면 가미긴 님한테 이익이 되지 않을 텐데요.” “으응? 잘 모르겠는걸. 원래 명분만 있으면 짓밟아도 괜찮은 거 아니야?” 금발의 가미긴이 정말로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산악파라고 해서 딱히 파이몬을 황제처럼 받들어 모시는 것도 아니잖아. 시트리를 포함해서 대여섯 명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을 텐데, 걔네들 정도는 충분히 뭉개버릴 수 있어! 자랑은 아니지만 나 제법 쎄거든!” “…….” “파이몬이랑 걔네만 모가지를 잘라버리면 나머지 산악파 애들은 적당히 타협할걸. 뭐, 타협하지 않으면 걔들도 없애버리자. 헤헤.” 나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새로운 손님들이 속속 들어왔다. 서열 제3위의 바싸고, 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와 서열 제10위의 부에르, 주최자인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그들은 서로를 반기거나 예의상 인사하거나, 대놓고 적대했다. 그러나 마르바스가 앞장서서 중재에 나서자 대체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 들어왔다. 그녀는 부관으로 서열 제12위의 시트리를 대동했다. 파이몬은 의례적으로 마왕들과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나와도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은 그저 눈인사를 나누었다. 파이몬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도 발푸르기스의 밤을 떠올리면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것일까. “와아, 이 년이 어디서 온 년이야.” 바르바토스가 즐겁게 말했다. “파이몬. 너 되게 반갑다. 그치? 깔깔.” “…….” “야, 그래도 지가 뻔뻔한 줄은 아나보네. 저거 입 꽉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 좀 봐. 지 정조도 저렇게 단단하게 지켰으면 창녀라고 불릴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러냐, 이 창녀 새끼야?” “입 닥쳐. 거 싸가지 없게 말하네.” 파이몬을 대신해서 말대꾸한 사람은 서열 제12위의 시트리였다. 게임상에서 그녀는 파이몬과 의자매를 맺고 있었다. 여기서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너야말로 입 닥쳐라,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는 창녀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내가 무슨 하하호호 사이 좋게 화해하겠답시고 여기 놀러온 줄 알아? 너희 산악파 새끼들 조질려고 온 겁니다, 양성애자 버러지야.” “하, 우리가 만만해 보여?” 시트리가 이죽거렸다. “너희 평원파 좁밥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어. 바르바토스, 너 며칠 전에는 아주 찔찔 울었다면서? 한번 울고났더니 정신이 나갔냐? 어디 한판 붙어볼래?” “깔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아군 뒤통수 까는 것밖에 없는 새끼가 잘도 나불거리네.” 바르바토스가 황금빛 눈동자로 싸늘하게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오냐, 한판 붙어주마. 네 년 좆대가리를 잘라서 파이몬 저 창녀의 입구멍에 박아줄 테니 감사히 여기라고. 죽어서도 펠라를 받을 수 있으니 존나 좋겠네요.” “이 새끼가……!”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면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대체 자네들은 내 예상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군. 한 번쯤은 벗어나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어. 여기에 어디 산악파와 평원파만 모인 줄 아는가? 자제하게.” “아니, 자제하지 못하겠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마르바스 할아범. 난 할아범의 태도를 존중해. 하지만 파이몬 저 썅년은 도저히 두고볼 수 없겠다 이거지. 여기서 내가 그냥 물러가면, 응? 내가 아주 물로 보일 거 아니야? 안타깝지만 난 곱게 그런 취급 당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그녀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파이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선언했다. “연회고 뭐고 다 나중 이야기다. 나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동족을 배신한 건에 대하여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을 추궁하겠어. 이를 위하여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문회를 요청한다!”   00113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시트리가 얼굴을 구겼다. 말도 안 된다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파이몬 본인은 태연했다. 대세가 이미 이쪽에 있음을 아는 것이겠지. 여기서 아니라고 변명해봤자 판도가 불리하게 돌아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시트리가 소리쳤다. “애시당초 말이 안 된다고! 뭐, 우리가 평원파의 뒤를 치려고 왔어? 거기 너. 그래, 단탈리안인가 뭔가 하는 너 말이야. 너가 그딴 모함을 써재껴서 투고했다면서? 증거가 있으면 어디 대봐.” 이런, 화살촉이 나한테로 돌려졌다. 바르바토스보다 내가 더 상대하기 쉽다고 여긴 걸까. 게임에서건 여기서건 시트리는 말재주가 있는 마왕이 아니었다. 순수한 무투파였지. 그런 무투파한테 나는 어지간히도 얕보인 것 같았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늘어선 마왕 전하들께서도 흥미진진하게 여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이들은 나의 밀서 때문에 움직였다. 그들 중에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한 이는 마르바스밖에 없다. 즉, 그들 입장에서는 지금이 바로 나 단탈리안의 데뷔전인 것이다. 뭐, 좋다. 마르바스가 이번 모임의 주최자라면 나 역시 그림자 주최자이다.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즐겁게 할 의무가 있다. 적당히 낚싯밥을 뿌려볼까. “증거라면 충분합니다. 그쪽에서 우리 평원파한테 보낸 편지만 봐도 명약관화하죠.” 내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들어 보란 듯이 흔들었다. “마계의 불구대천 원수인 인간군과 휴전을 협상하라, 그러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어딜 봐도 이반행위입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겠지요.” “흥. 그거야말로 배신이 아니었어.” 시트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 쳤다. “우리는 단지 대의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야. 마계인이 살아갈 영토를 대륙에 마련한다. 그게 우리 마왕의 존재의의야. 그때 거기서 휴전했다면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거할 수 있었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라.” 내가 비죽거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몸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표출했다. “그건 누구의 피입니까?” “뭐?” “검은 산맥의 산성들을 힘겹게 뚫고, 로젠베르크 변경백을 물리치고, 북부 일대를 평정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제국군 5만과 겨루어 이겨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수많은 마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나 역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적어도 이 대지는 나의 자그마한 핏방울도 머금고 있었다. “시트리, 당신이 말하는 '우리'란 산악파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거기에는 월맹군 제6군단의 무수한 인명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왕이 월맹군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이전에 일개 파벌의 입장에서 바라보다니, 직무유기로군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변에서 몇몇 마왕이 웃었다. 바르바토스와 가미긴이었다. 마왕군 최고의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인가. 나는 정상인보다 변태들한테 호감을 주는 듯했다. 유유상종이라는 옛말도 그러고보면 틀린 것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시트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뒤로는 지리멸렬한 자기 변명만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래서야 대화에 재미가 없다. 적어도 거기 뒤쪽에서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파이몬은, 발푸르기스의 밤에 나를 정말로 거의 죽일 뻔했다. 내가 게임 지식을 동원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회유하는, 일종의 꼼수를 쓰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당했으리라. 그 정도 실력은 보여주었으면 한다마는……머리가 근육질로 이루어진 무투파에게는 무리였는가. “아무튼 네 녀석 주장에는 증거가 없는 거야!” “산악파와 합스부르크는 서로 내통한 적이 없다. 그런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우리 산악파는 오로지 마계를 위해 행동했어.” 내가 흐음, 하고 고심하는 척했다. “그럼 산악파 여러분도 우리 평원파를 충분히 동지라고 여기고 있겠군요. 맞습니까?” “물론이야. 우리는 다 똑같은 월맹군 소속이잖아.” “음, 좋습니다.” 내가 순순히 인정했다. 시트리가 눈썹을 째푸렸다. 초반에 기세 좋게 공격하던 것과 다르게 너무 쉽게 물러서니 의심스럽겠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미 낚싯밥을 훌륭하게 회수했다. 거기에는 산악파라는 대어가 살이 통통 불어오른 채 잡혀 있었다. “저 또한 산악파가 무죄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남들이 어떻게 바라보겠냐는 겁니다.” “남들이?” 시트리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무슨 소리야.” “의도가 뭐였든 간에 산악파는 평원파를 위협했습니다. 여기 계신 군단장 각하들께서 왕림하시지 않았다면 정말로 평원파는 멸망했을 터. 마왕군과 마계사회에선 이미 파이몬 님을 반쯤 배신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아? 어떤 새끼가 감히…….” 내가 말을 중간에 끊었다. “가미긴 님. 개인적인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만. 파이몬과 산악파가 마왕군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응. 배신했다고 생각하는데에.” 금발의 가미긴이 싱글벙글하며 즉답했다. “나 같은 새끼가 그래서 미안해~.” “…….” “그런데 말이야, 오히려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까아? 명분이야 갖다붙이면 그만이고, 결국 땅바닥에 코 박게 될 애들은 평원파였잖아. 마계인을 위한다 뭐한다 떠들어대지만 어쨌든 월맹군의 전력을 깎아먹는 일인걸.” 시트리가 할 말을 잃었다. 가미긴이 나한테 대놓고 윙크를 보냈다. ‘나 잘했지? 칭찬해줘!’ 하는 표정이었다. 저러니까 꼭 금색털의 거대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뭐, 그런 겁니다. 시트리 님이 아무리 증거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청문회가 열리면 산악파는 유죄판결을 얻겠지요. 이 경우 고소측과 피고소측인 평원파와 산악파를 제외하고……대충 스물다섯 명의 마왕이 청문회에 참석할 수 있군요. 그중 몇 명이나 산악파의 고귀하고 순결한 대의명분을 믿어주겠습니까?” 마왕들은 이기적이다. 코 한번 풀지 않고 상대측의 전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단언컨대 절대적인 표 차이로 산악파에는 유죄가 선고될 것이다. 시트리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약간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청문회를 요청하지 않으면…….” “싫습니다. 산악파가 유죄라는 증거가 없다고 말씀했죠? 똑같이 되돌려드리지요. 산악파가 무죄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시트리가 대답하지 못했다. “양쪽에 증거가 없으니 부디 청문회에서 투표로 판가름을 나눕시다. 공평해서 좋군요.” “…….” 장내가 조용해졌다. 가미긴과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속닥거렸는데, 아무도 대화하고 있지 않은지라 그네들 대화가 빤히 다 들렸다. “나 쟤 마음에 들어~. 가지면 안돼?” “꺼져, 마조 새끼야. 내가 침 발라둔 지 일억사천만 년은 지났어.” “히잉. 바르바토스 너무해.” ……남을 무슨 물건 다루듯이 얘기하지 마라. 중립파의 수장인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주름살이 고와서 멋진 중년이었다. “이면(異面)의 마왕 단탈리안이여. 본인도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산악파와 평원파는 영원히 건너지 못할 강을 사이에 두게 된다. 산악파와 평원파는 마왕군의 제1세력이고 제2세력. 사실상 마왕군 전체가 양분되는 것이다.” “이미 양분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도의 차이이다. 단탈리안, 세상의 모든 일은 정도의 차이야.”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벗어서 비단 손수건으로 닦았다. “인간과 전쟁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기를 보아 물러서야 하는가……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에 대해서는 어차피 절대적인 답안이 없다.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다. 허나 우리는 비록 불멸자일지라도 무엇이든 알지는 못한다. 상황과 때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그가 자문했다. “그렇기에 파벌이 필요하다. 한쪽은 왜 전쟁이 옳은지 주장한다. 다른 한쪽은 왜 전쟁이 그른지 주장한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주장에 필요한 증거들을 모으겠지. 그러함으로써 우리 마왕군은 총체적인 의견과 증거를 가지게 된다. 일종의 분업이라 할 수 있다. 알겠는가? 투쟁의 목적은 투쟁 자체가 아니다. 투쟁함으로써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 중립파의 거두다운 발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파벌 투쟁은 좋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나아가면 곤란하다. 정도를 지키라. “한쪽 날개를 잃은 새는 결국 날아오르지 못한다. 단탈리안이여, 산악파가 평원파를 공격하려던 것이 잘못이라면 지금 평원파가 산악파를 모조리 멸하려는 것 또한 잘못이지 않겠는가. 본인은 적절한 타협점을 바란다. 물론, 평원파가 관용을 베푼다면 그에 대해 중립파는 적극적인 지원을 보낼 것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이고 물질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말이다. 흐음. 본래 나한테는 산악파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그러면 인간한테만 좋은 일 하는 거니까. 비록 내가 형식상 평원파에 속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내 최종적인 목적은 생존, 거기에 더해서 정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계와 마계가 적당하게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문제는 바르바토스를 어떻게 설득하는가였다. 아마 청문회가 열린다면 중립파가 일부러 산악파의 편을 들어줄 거다. 중립파는 아슬아슬하게 찬반 논쟁을 이끌고 가서 마지막에 적당히 타협하자고 제안했겠지. 그때 '이쯤에서 물러나자'라고 바르바토스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가.……마르바스는 아예 여기서부터 타협을 제안해왔다. 내가 듣기에는 꽤나 그럴듯하게. 이 정도라면 바르바토스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몇 명이나 마르바스의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를 알아차렸을지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알아들었다. 청문회 열어봤자 중립파의 지지를 기대하긴 어려웠다.……투표권을 가진 약 스물다섯 명의 마왕 중에 중립파는 열 석 정도를 차지한다. 여기선 한 발자국 물러나야 한다.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마르바스 님의 고견은 알겠습니다. 청문회는 물론 시급한 문제입니다. 중립파가 중립파이기 전에 마왕군의 일원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평원파이기 전에 한 사람의 마왕이지요.” 실제로 마르바스는 '중립파는 중립파이기 전에 마왕군의 일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까닭은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먼저 '청문회는 물론 시급한 문제'라고 그냥 들으면 외교적인 언사에 불과한 말을 앞에 갖다놓는다. 청문회라는 단어를 교통표지판 세워두듯이 앞에 배치해두고, 그 다음에 맥락을 이어붙인다. 이렇게 하여 '그대들 중립파가 마왕군 전체의 입장을 고려해서 청문회에 참석하리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들었다' 하고 표시한다. 표면만 봐서는 상대방의 말을 단순히 맞장구치는 것처럼 보이는 말도, 맥락으로 살펴보면 훌륭하게 정치적인 거래가 된다. 마르바스는 천 년이 넘게 산악파와 평원파 사이를 중재한 위인. 이 정도 뉘앙스는 손쉽게 이해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마왕 마르바스의 호감도가 10 오릅니다.」 효과음이 울리면서 안내창이 떠올랐다. 자기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었고, 또한 원하던 바를 적절하게 받았다는 데 마르바스는 만족한 것이었다. “물론 잘못한 쪽은 산악파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인은 단지 이번 회합의 주최자로서 지나치게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고 싶었을 따름이다. 청문회에 대한 건은 조금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겠지.” 뭐라고 할까. 나는 눈앞의 마왕 영감이 싫지 않았다. 평원파를 배려해서 '잘못한 쪽은 산악파'라고 딱 잘라서 못을 박아두었고, 우리 둘 사이에 오간 대화의 맥락을 숨기려고 '분위기를 식히고 싶었을 따름'이라고 연막을 뿌렸다. 이렇게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고 밀담을 숨긴 다음에는, 봐라. 다시 자연스럽게 '청문회에 대한 건은 조금 뒤에'라고 말을 덧붙였다. 바르바토스와 상의하고 오라는 얘기였다. “그럼, 우선 본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준 여러분을 환영하겠다.” 마르바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천막들 사이에서 미녀와 미남이 일렬종대를 이루며 서서히 춤추면서 등장했다. 맨살이 기름에 반들반들거렸다. 일부는 옷을 입었고 일부는 나체였는데, 아마 다양한 취향을 배려한 것 같았다. 세상에는 은꼴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천막 너머의 연주자들이 음악 소리를 흥겹게 키웠다. 파이몬과 시트리를 제외하고 마왕들이 기분 좋게 연회를 즐겼다. 나는 이 호화로운 잔치를 즐기면서 바르바토스와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어떡할까. 청문회 열어, 말아?” “뭔 개소리야? 당연히 열어야지.” 음. 바르바토스는 아까 전에 오간 대화의 속뜻을 잡아채지 못했다. 내가 조용히 설명하자,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어머나, 시발.”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드러내면 안 되니까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00114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저 영감탱이가 정말 죽고잡나.” “내가 생각하기에 적당히 타협해야 돼. 이번 기회에 중립파에 빚 좀 만들어두고.” 그 적당한 타협이라는 것을 논의했다. 내가 미리 준비해온 대안을 마치 즉석에서 떠올린 것처럼 얘기했다. 바르바토스는 청문회에 대한 미련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지만, 중립파를 설득시킬 재료가 없는 마당에 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의 의견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내가 마르바스에게 눈짓했다. 상의가 다 끝났다고. 마르바스는 이쪽을 보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시종일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눈짓하자마자 침상에서 일어섰다. “모두들 연회를 즐겨주는 것 같군. 주최자로서 기쁘기 그지없다. 여기서 건배를 올리는 영광을 본인에게 허락해주길 바란다. 월맹군을 위하여!” “월맹군을 위하여!” 마왕들이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자연스럽게 음악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나체로 춤사위를 벌이던 소년소녀들이 천천히 천막으로 빠져나갔다. 마르바스가 그들한테 모종의 신호라도 보낸 것이겠지. 새삼스럽게 정치에 특화된 마왕의 정교한 계획에 놀랐다. “본인으로서는 여러분과 영원토록 잔치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마르바스가 마왕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연회의 목적은 앞으로 보조를 맞추면서 전쟁터에 나서야 할 수뇌부들끼리 안면을 익히는 것이다. 즉, 목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치장 한가운데에 별안간 입체그림이 떠올랐다. 마왕군과 인간군이 현재 대치하고 있는 브루노 평야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월맹군 제1군단에서 제6군단, 합스부르크 제국군에서 브르타뉴 왕국군, 각 군단이 어디에 배치되었는지 명쾌하게 나타났다. “인간군 도합 14만 병력. 우리 월맹군은 도합 11만.” 마르바스가 말했다. “병력의 질로 따지자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허나 인간군에는 기사단이 최소 스물다섯 개 참전했다. 그중에는 <검의 주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터. 결코 만만한 전투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군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패망할 것이다. 고로 본인은 회합의 주최자이자 중립파의 대표로서 여러분에게 요청한다. 내분을 그만둘 것을. 본인의 제안을 숙고해주겠는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이 평원파를 대표하여 말씀드립니다. 산악파의 의중과 상관없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산악파에 정말로 배신의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합니다.”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어떻게 증명할 텐가? 증거가 불충분하다.” “없는 증거는 만들어내면 됩니다. 산악파여!” 내가 파이몬과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펼쳐질 대전쟁에서 그대들이 선봉에 나서십시오! 그대들이 인간군과 분투하는 것 자체가 마왕군에 충실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시트리는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전투에서 맨 선두에 서는 것은 무시무시한 피해를 불러일으킨다. 하물며 양군 총합 20만 대군이 맞붙는 전투인데 그 피해가 오죽하겠는가. 우리는 쉽게 말해 너희가 무죄임을 피로써 증명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너 이 자식…….” “우리의 제안이 몹시 관대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그대들에게 배상금을 요구한 것도, 산악파의 공식사과를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월맹군의 선봉에 서는 명예를 제안했을 따름이지요.” “하, 명예? 개죽음이겠지!” 시트리가 또 날뛰려고 했다. 정말 혈기 좋은 녀석이다. 하지만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미리 말씀드리지요. 협상의 여지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평원파는 즉각 산악파에 선전포고를 할 것입니다.” 허언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공격당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 월맹군 원정이 실패할지라도 복수를 원했다. 조직의 체면이라는 물건이었다. 시트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너희야말로 월맹군을 배신하는 거야!” “월맹군, 월맹군……그렇게 월맹군을 소중히 여긴다면 행동으로 증명하십시오. 산악파가 지금까지 내보인 행동은 명백히 월맹군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세워서야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내가 웃었다. “정작 앞장서서 싸우기는 싫어하고, 입으로는 마왕군을 위한다고 떠들고……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휴전협정이니 뭐니 꼼수를 부리는 겁니까? 정말 팔자가 좋군요. 부럽습니다.” 모략은 양날의 검이다. 실패한 모략이란 통탄할 사건으로, 이는 쏜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화살과 같다. 아니면 적어도 활시위를 떠나면서 살갗을 벗겨놓는 화살이거나. 탄환이 튀면서 모략가를 죽일 수도 있는 총알이다. 그렇기에 모략가는 언제나 무덤을 두 개 파두어야 한다. 상대방을 죽이려 한다면, 자신 역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파이몬. 너는 그런 각오를 해두었을까? “좁밥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아주 기고만장해져서는――.” “기다리세요.” 시트리가 뭐라고 소리치려 할 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파이몬이 제지했다. 시트리는 불만이 가득한 안색이었지만, 파이몬이 막아세우자 얌전하게 물러섰다. 그제서야 파이몬이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탈리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사와요.” “어, 언니!?” 시트리가 경악했다. “가만 있으세요.……월맹군의 선봉에 선다. 그걸로 우리 산악파의 무죄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거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향후 이번 건에 대해서 평원파는 별다른 보상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리지요.” “좋아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대전쟁은 개전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하는 절차가 있사와요. 상대편의 사기를 무너트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대표자 한두 명이 나가서 연설을 하는 것이지요. 기습적인 작전에는 불필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회전에서는 유용한 절차예요.” 아아. 뭔지 알겠다. 이건 <던전 어택>이란 세계관에 마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표자를 엄청나게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띄우고, 목소리를 증폭시켜서, 상대측에 연설을 건다. 대체로 너희가 얼마나 약하고 우리는 얼마나 강한지, 왜 이번 전쟁의 명분이 우리에겐 있고 너희에게 없는지 지껄인다. <던전 어택> 주인공이 이거에 재능이 있었다. 인류여, 일어서라! 함께 맞서싸워라! 하고 주인공이 울부짖으면 모든 인간군이 호응했다. 게임상에서는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주사위를 던지는데, 이 주사위 눈금이 높을수록 아군의 사기가 올라가고, 낮을수록 사기가 내려간다. 쉽게 말하면 버프 효과이다. 게임의 시스템이 여기서는 '의례'라는 걸로 구현되어 있었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그 대표연설자를 단탈리안, 당신이 맡아주세요.” “예?” “우리 산악파의 조건은 그것입니다. 저희 역시 이건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사와요.” 파이몬이 자기는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설대표자로 나선다는 게 어째서 조건이 되는 것이지? 나는 잠시 기다려줄 것을 요청하고, 바르바토스와 밀담을 나누었다. 나 혼자서 판단하기에는 적잖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다시 천막 너머에서 음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이 음악소리,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몰래 나누는 대화가 주변에 들리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철두철미한 마르바스였다. “아마 파이몬 저 년은 합스부르크 황녀랑 마법적인 맹세를 나누었을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하. 그러니까 지가 먼저 선전포고하기 곤란하다는 거로군.” 바르바토스의 지적에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황녀든 파이몬이든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싸워온 종족과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안전장치를 해두었겠지. 예컨대 상대방이 약속을 깨고 공격해오면 저주에 걸리게 했다든지. 흐음. 아직 마법이라는 것이 생소해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군. 뭐, 정확히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상관없지만…….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너한테 복수하려는 거겠지, 멍청아.” 바르바토스가 거 참 고소하다는 식으로 키득거렸다. “지금까지 넌 막후에서 음모나 짰잖아. 그런데 이런 대전투에서 똬악, 하고 나가서 선전포고해봐라. 인간이든 마인이든 단탈리안 네 얼굴을 기억하게 될걸.” “젠장. 뒤끝 쩌네.” 이해는 간다마는 납득하기 어렵다. 고작 나 개인에 대한 복수를 조건으로 넣다니?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쪼잔하고 유치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파이몬이 실패한 까닭은 내가 음흉해서가 아니라 지가 잘못해서다. 난 그저 녀석의 계략에 발맞추어 행동해주었을 뿐이고. 내가 한숨을 쉬었다. “뭐……어쩔 수 없나.” “어라. 받아들이려고?” “거 선전포고 연설 좀 했다고 뭐 피해를 보겠어.” 까놓고 말해 내가 서열 제71위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인간도 적을 거다. 아니, 거의 없지 않을까? 대표연설자로 나간 이후에는 이름값이 오르겠지만 고작 그 정도. 사람들은 침략군의 장수를 기억하지 침략군의 사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악명이 조금 오르는 것에 불과하리라. 아니, 마왕군 내부에서 내 발언권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는 도리어 명예로운 자리라 할 수 있겠지. 순간적이지만 좋은 아이디어도 떠올랐고. 내가 바르바토스와 상담을 마치고 대답을 내놓았다. “좋습니다. 여기 계신 군단장들께서 동의해주신다면, 기꺼이 제가 월맹군의 대표연설자로 나서겠습니다.” 군단장들이 쉽사리 동의했다. 마르바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조를 구했기 때문이다. 금발의 가미긴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끝까지 뻐겼지만, 마지막에 가서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마 가미긴은 이 기회에 산악파를 밟아두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협상이 타결되었다. 우리 평원파는 결과적으로, 손에 때 하나 안 묻히고 산악파한테 피해를 강요하게 되었다. 중립파는 평원파와 산악파를 중재함으로써 다시금 자기 파벌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나머지 무소속 마왕들은 행여나 산악파가 이번 월맹군에서 공훈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산악파는 자기네의 무죄를 관철시켰다. 각 파벌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우리는 하루 빨리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이 모였다. 식량, 그러니까 인육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전투는 필수였다. 마왕군은 다소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진형을 새로 조직했다. 산악파의 제1군단이 선봉. 중립파의 제2군단, 바싸고와 발레포르의 제4군단, 우리 평원파 제6군단이 중진. 나머지가 후방. 이렇게 진형을 조직하는 데 이틀이 꼬박 걸렸다. 그 사이에 인간군도 질서정연하게 진용을 갖추었다. 평원 멀리에서 프랑크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인간군의 선봉은 프랑크 제국이 맡은 모양이었다. 전쟁이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막사에 틀어박혀 연설문을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대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대사를 맡은 것이었다. 말하다가 혀라도 씹으면 곧바로 인간군과 마왕군 20만 대군한테 비웃음을 사겠지. 그런 쪽팔림을 당할까보냐! “그쯤 준비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라피스가 말했다. 참고로 이쯤해서 쿤쿠스카 상회의 직원이자 내 전용 상인인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는 게 왠지 모르게 오랜만이라고 느껴졌다. 사실 두 달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도 말이다. “모름지기 준비는 몇 번을 해도 모자른 거야.” “하아. 그렇습니까.” 그녀는 여태 나의 지시를 따라서 인간계와 마계에 각종 소문을 퍼트렸고, 때에 따라 뇌물을 사용하여 인간군의 수뇌부에 접촉했다. 말하자면 이번 전역에서 내 손발이 되어 움직여주었다. “파이몬 전하 말입니다. 그분도 저희 쿤쿠스카 상회와 계약을 맺은지라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만,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중점적으로 모으더군요.” “응? 나를?” “예. 벌써 한 달은 되었습니다.” 한 달 전이라면 꽤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정보를 모았다고? “……내가 뒤에서 움직인다는 낌새를 알아챈 걸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파이몬 전하는 명색이 최고위 서열의 마왕. 저희가 모르는 어떤 수를 숨겨뒀을지도 모릅니다.”   00115 저주하려는 자, 무덤을 두 개 파두어라 =========================================================================                        * * * 양군이 평야를 사이에 두고 전열을 완비했다. 인간군은 언제든지 기사단을 돌격시킬 수 있도록 좌익과 우익에 기사들을 일렬로 주르륵 늘여놓았다. 육안으로 어림잡아서 기사의 숫자가 적어도 1만이 넘었다. 1만 명의 기사라! 장관이었다. 이 세계에는 오러라는 게 있다. 나라마다 아우라, 오라, 아우하 등, 부르는 방법이 다르지만 여하간에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놈이다. 이거 때문에 군사제도가 내가 살던 세계와 많이 다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극단적으로 기사를 육성한다. 제아무리 장창병이 튼튼하게 방진을 짜둔다고 해도, 기사가 오러 입힌 칼을 휘두르면 장창이 대나무 썰리듯이 우수수 잘린다. 창날로 찌르고 화살을 쏴도 기사의 신체를 뚫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인간병기이다. 각국의 군사력, 각 영주의 군사력은 얼마나 많은 기사를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군왕들은 자신의 신하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기사를 다스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기사단을 한 개 더 창설했다고? 너 반란 일으키려는 거 아니야?……이런 식이다. 이토록 기사라는 병종이 중요하다보니 오러에 자질이 있다 싶으면 몰락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 소영주들은 군왕의 견제를 받아서 차마 등용할 수 없고, 보통 오러에 자질이 있는 자들은 왕국이나 공국의 수도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기사를 집중 육성하여 이른바 수많은 친위대를 만든다. 이른바 아카데미의 탄생이다.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게 무척 중요하다. 소영주들에겐 아카데미-권리가 당연히 없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아카데미-권리를 허락받는다. 그 결과, 변경백은 물경 수천 명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군왕들은 결코 아카데미를 좌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세계에서는 장창병이나 궁수 같은 병종이 쇠퇴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몬스터라는 괴이(怪異)가 있으니까. 대영주의 영지에선 몬스터도 얌전히 살아간다. 너무 날뛰면 기사단이 토벌하러 밀어닥치기 때문이다. 적당히 날뛰고, 적당히 토벌되고, 적당히 산다. 특히 영주 입장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 가령 산간마을 따위를 털어버린다. 알고보면 몬스터도 영악한 놈들이다. 반면에 소영주의 영지에선 사정이 전혀 다르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영주에겐 기사가 매우 적다. 몬스터들이 미쳐 날뛴다고 해서 기사를 마음껏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몬스터들도 마음 놓고 인간의 마을을 약탈한다. 사회모순이다. 소영지니까 기사가 없다. 기사가 없으니까 몬스터를 토벌하기 어렵다. 몬스터를 토벌하기 어려우니, 그 피해는 대부분 평민들이 입는다. 평민들은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이사갈 권리가 없으니 말이다. 대영지가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지는 반면에 소영지는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진다. 평민은 혹시나 자신에게 오러의 자질이 있지 않을까, 혹시나 자기 아들딸에게 오러의 자질이 있지 않을까, 그것만 기대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재밌지 않은가. 오러가 존재하는 세계인데도 원래 세계와 핵심적인 부분에선 똑같다. 다만, 오러가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차별 없이 대접받는다는 게 다를까. 저 평야 너머에 나열한, 무수히 많은 숫자의 창병과 궁병은 바로 그들 하층민이다. 기사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몬스터와 맞서겠는가. 답은 하나뿐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마을주민 스스로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 장창을 든다. 활을 든다. 무시무시한 오크와 고블린에 대항한다. 자연스럽게 각 마을마다 정예병이 생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월맹군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몬스터 침공이 발생하면, 인류를 지키라는 명분 아래 '소집'된다. 말이 소집이지 강제징집이나 다름없다. 여기까지 알았다면 나의 의도는 이제 명확해진다. 파이몬. 너는 날 월맹군의 대표로 내세워서 인간군의 공분을 받게 할 속셈이었겠지. 하지만 너는 인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다. 그것이 아마도 마왕으로 태어나 마왕으로 살아온 자의 한계이리라.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았다! 인간사회는 결코 하나가 아니며, 하나인 적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엔 귀족이 있다. 평민이 있다. 노예가 있다.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며,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억압하는 자가 있고 억압받는 자가 있으며, 저항하는 자가 있고 수긍하는 자가 있다. 통제가 있고 반란이 있다. 물리학과 같이 섬세하고도 미세한 조작이 있는가 하면, 그런 조작을 알아차리는 사람마저 있다. 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왕들 중에서 오로지 나만이. 그런 나에게 대표연설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그걸 보여준다. “주군. 시간이 되었다.” 라우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막사에서 가만히 구석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다고 표현하면 약간 틀렸다. 그저 눈을 뜨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서. 라우라의 말에 내 의식이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발의 라우라와 홍발의 라피스가 서 있었다. 인간과 마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이었다. 라우라는 나의 애인이자 능신(能臣)이고, 라피스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나를 믿어준 소녀이자 충신이다. 그렇다. 저 둘이 나란히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지금 일개 가능성에 불과한 것을 현실로 끄집어내고자 한다. “좋습니다. 가볼까요.” 두 사람을 대동하고 막사를 나섰다. 오크 병사들이 양편에 벽처럼 열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걸어갈 길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연설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내가 월맹군의 대표자였다. 이 정도 대접을 받을 날은 다시 오기 힘들겠지. 온다 하더라도 매우 먼 훗날이리라.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몬스터들의 감정이 조류처럼 밀어닥쳤다. 흥분, 초조, 따분함, 격정, 불안, 허기, 존경……. 익숙해졌다. 그것들은 내 마음의 모래사장을 살며시 적셨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눈앞이 훤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가 나타났다. 군중을 완전히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곳에는 마왕들이 모여 있었다. 파이몬, 마르바스, 아가레스, 가미긴, 바르바토스……. 최고위 마왕들만이 의자를 마련해두고 앉았다. 그들쯤 되면 거대한 전쟁터 자체를 제어할 수 있다. 어디에 자신의 부대가 있든지 명령을 내린다. 서열이 낮은 마왕들은 그만한 통제력이 없으므로 자신의 부대와 함께 움직인다. 여기에 여유롭게 앉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들이 마왕군의 최고 실력자라는 것을 증명한다. “기분은 어때,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왜인지 즐겁게 흥얼거렸다. “쫄보 새끼처럼 잔뜩 움츠러들지는 않았겠지?” “아아. 그러기에는 내 삶이 다소 혹독해서 말이야.” “앞으로 더더욱 혹독해질 거야.”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산악파의 제안에 굳이 딴죽을 걸지 않은 것은, 비단 협상을 위해서만이 아니야. 단탈리안. 네가 그림자에서 양지로 나오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무대가 없다고 생각했어.” 바르바토스답지 않게 상냥한 미소였다. 어린아이를 보는 시인처럼. “왕이란 이끄는 자. 신민의 총의를 대신하는 자일지니. 모략과 계략만으로는 왕이 될 수 없어. 만인을 이끌 자격이 있는가. 명분이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매순간마다 증명해야 해. 지금부터 너의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만인의 의지야. 자아, 단탈리안.”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보고.”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봄비가 물러나고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늘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뒤를 보고.” 그녀가 뒤편을 가리켰다. 십만의 몬스터가 우글거렸다. 전투가 시작하기만을, 혹은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는 십만의 감정이 있었다. 날붙이 소리가 재잘재잘 자그맣게 울렸으며, 어디선가 고함이 들려오기도 했다. 붉은 깃발이 무수하게 휘날렸다. “앞을 봐.” 그녀가 앞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평야가. 앞에 보이는 땅이라고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뿐이었다. 장애가 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량하지만 평화로웠다. 그러나 저 너머. 멀지만 분명한 움직임으로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작은 점과 같은 것들이 평야 저편을 가득 메웠다. 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완벽한 무음. “이게 왕이 바라보는 전장이다.” 바르바토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친우여. 왕이 되고 와라.” 그런가. 그녀는 언제나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살아왔는가. 천 년 동안 이만한 고독을 마주보고 살았는가. 그녀는 내가 단지 평원파에서 써먹을 만한 모략가, 책략가, 부하로 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발을 딛고 함께 앞을 바라볼 동지를 원했다. 한때 파이몬과 마르바스가 그녀의 동지였으리라. 언젠가 다시 동지가 나타나리라 믿었겠지. 그리고 기다렸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때 내가 나타났다. 싹수가 보이는 인재라 여겼다.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나를 시험했다. 나는 기대를 넘어서보였다. 그녀는 무슨 감정을 느꼈을까.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단순히 애정을 품은 것이 아닐 거다. 애정이라는 낱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그녀에게 나는 천 년의 기다림 끝에 간신히 나타난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애정을 주긴 주되 월맹군의 선봉으로 내세웠다. 작전참모로 삼았으면서도 전쟁터에 내보냈다. 이제는 왕이 되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정말 곤란한 마왕 전하가 아니고 뭔가. 나는 기껏해야 모략가나 될 그릇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엉엉 울면서 땅바닥에 수백 번 절을 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왕이 되라니. 나는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곤란해서, 그만 멋쩍게 웃어버렸다. “그러다 나 죽는다?” 바르바토스도 웃었다. “위험도 고난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설령 그런 삶이 있다 해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가라. 발걸음을 내딛고 고난에 맞서라. 많이 내딛는 자가 보다 많은 위험을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단탈리안. 이 두 손에 거머쥘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위험 너머에 있다.” 생존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라고. 이제 너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바르바토스는 말했다. 엄격한 선생님이 아닐 수 없다. 라피스처럼 당신을 신뢰하노라고 응원을 보내는 것도, 라우라처럼 당신과 끝까지 함께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도 아니라, 원래 세상은 그렇게 생겨 처먹었으니 땡강 부리지 말고 얌전히 나아가라고 질책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옆에서 마법진을 준비하던 마법사 열 몇 명이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했다. 마르바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시작해도 좋겠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바스가 수를 셌다. “슬슬 시작하지. 십, 구, 팔…….” 마법진이 새하얗게 빛났다. 여러 사람의 마법이 중첩되면 마법진은 색깔이 하얗게 된다. 마법진은 땅바닥에 선명한 빛을 그리면서 순식간에 나를 포위했다. 새하얀 빛 사이로 마르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사, 삼, 이, 일……. 되었다. 지금쯤 상공에 거대한 입체영상이 떠올랐을 거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막 비슷한 것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지만 위를 올려다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야 꼴사나울 뿐이다. 지금 수십 만의 인간과 마인이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인류여, 들으라.” 그런 가운데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자아. 세상에 독을 뿌릴 차례이다.   00116 가장 긴 십오 분 =========================================================================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3황녀는 따분했다. 그녀는 인간연합군에서 이미 실권을 잃어버렸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다른 국가에서 파견된 공작들은 나이 어린 황녀를 은근슬쩍 무시했다. 그녀는 어차피 휴전협정이 물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십만 대군이 대치하는 이 순간에도, 그저 전쟁이 대충 정리되기만을 기다렸다. 열국에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지원군을 보내고 있었다. 인간군은 이번 월맹군도 어렵사리 물리치리라. ‘전쟁 자체도 중요하지만 전후 처리과정이 더 중요하다. 도대체 다른 나라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들고나올지.’ 아마도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원했다고 으스대겠지. 사실은 자국의 영토에서 싸우기 싫어서 억지로 합스부르크를 전쟁터로 삼은 것이면서 말이다. 승냥이 같은 놈들! 엘리자베트 황녀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때 평원에 거대한 인물이 투영되었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였다. 의례적으로 연설을 하러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한숨을 쉬었다. 인간군에서 대표연설자로 선출된 것은 황녀 본인이었다. 실권은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얼굴 마담으로 내세워질 뿐인 대표연설자……저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황녀는 남자의 처지가 다소 가여웠다. 어떤 얘기를 할지 뻔했다. 마왕군은 강력하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니 얌전히 항복하라. 역사서에 기록된 월맹군의 대표연설은 항상 그 모양이었다. 인간은 어리석지만 그 정도 연설에 패주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다. 결국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 인류여. 들으라. 그래서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황녀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평원에 크게 메아리쳤다. ─ 세상에는 두 개의 전쟁이 있다. 하나는 인간군과 마왕군의 전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질긴 전쟁이 있었음을, 그것도 지난 이천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일어났음을 그대들 인류는 아는가. 남자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긴장하지 않았으나 위엄이 서려 있었고, 과장하지 않았으나 신뢰가 있었다. 목소리에 굴곡이 져서 사람들의 귀를 세우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괴이한 소리를 하는군요.” “뭐라 지껄인들 인류의 단합은 철옹성이오.” 주변에서 장군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이 예상하던 연설과 형태가 썩 달랐다. 무엇보다도 내용이 이상했다. 월맹군에 버금가는 전쟁이라니? 그런 것은 배운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저도 모르게 흥미를 내보였다. “호오.” 저 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황녀는 이처럼 사태가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했으며, 만약 자신의 예상을 초월해버린다면 더더욱 좋아했다. ─ 말하자면 그것은 영원한 대전쟁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웅성거림을 꿰뚫고 울려퍼졌다. ─ 그에 비하면 인간군과 마왕군 사이의 전쟁이 차라리 우스워보일 지경이다! 월맹군 전쟁은 이천 년 동안 단 여덟 번밖에 없었으나 저 대전쟁은 매 년마다, 매 달마다, 매일 그리고 매초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차례대로 호명했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남작과 농노.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전쟁이다. 설령 대륙에서 월맹군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대들은 투쟁하리라. 대륙에 이천 년이 흘렀으나 다시 이천 년이 흘러도 계급투쟁, 오로지 계급투쟁만은 바뀌지 않으리라. 들으라, 세상에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이여. 남자가 바로 눈앞에 병졸들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소리쳤다. ─ 이천 년 전, 대륙에 처음으로 월맹군이 진군했다. 그날 고대공화국의 지배자들은 전 인류의 보존을 울부짖었다. 헌신스럽게도 그대들의 조상은 목숨을 바쳐가며 전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전투했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고 노예는 여전히 노예였으며, 농노는 여전히 농노였다. ─ 천팔백 년 전, 대륙에 두 번째로 월맹군이 진군했다. 그날 고대제국의 황제는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서라고 명했다. 그대들의 조상은 다시 한번 목숨을 바쳤으며, 경이롭게도 이겨냈노라.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고 노예는 여전히 노예였으며, 농노는 여전히 농노였다. ─ 천오백 년 전, 대륙에 세 번째로 월맹군이 진군했다. 그대들의 조상은 또다시 삼십 만 몬스터 대군에 맞서싸워 이겼노라. 놀랍도다. 대단하구나! 실로 그대들은 인류를 지킨 방패였으며,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대륙은 진즉에 우리 마왕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리라. 그대들은 수천 년 간 인류의 수호자였다. 그대들이야말로 대륙의 주인이었다. 나는 대륙의 역사에서 항상 승리를 거둬온 그대들과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 남자가 박수를 쳤다. 난데없는 갈채 소리가 평원에 북소리처럼 울렸다. 병사들은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같은 것이 한점 담겨 있지 않았다. ─ 천오백 년이 흘렀다. 이제 우리는 여덟 번째로 이 땅에 도래했노라.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남자가 손짓을 멈추고 돌연 말했다. ─ 대륙의 주인이여. 인류를 수호한 이들이여. 그대들은 여전히 노예이고, 농노이며, 평민이고, 굶주림에 허덕이며 전염병에 죽어나가는 약자 중의 약자이다. 어찌된 일인가. 도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가? 이때쯤해서 엘리자베트 황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남자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했다.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찬 시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단지 입술을 벌리고, 경악으로 물든 눈동자로 남자의 거대한 영상을 바라보았다. 황녀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변에서 마법진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마법을 가동하라!” “저, 전하?” “무엇을 들었는가. 당장 가동하라는 말이다!” 나긋나긋하게 마법을 영창하던 노인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송구하오나, 대규모 마법인지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 십오 분 정도는 더 남았나이다.” “십오 분이라니…….” 황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된다! 십 분이면, 남자가 연설 하나를 끝마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말로 모든 것이 늦어버린다! 대표연설은 앞서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게 유리해서 느긋하게 준비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인간군은 마왕군이 연설하는 것을 보고 그 뒤에야 천천히 마법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황녀의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사들은 섬세하고 엄격한 절차에 맞추어 영창했다. 그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멀리 우레가 울리듯이 퍼졌다. ─ 그대들은 분명히 대륙을 지켰다. 그 대륙이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일어난 후에도 전혀 바뀌지 않는 대륙이었다. 그대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부모가 흑사병에 신음하며 죽어가도, 치료제로 쓰이는 풀 한 포기조차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가? 무엇을 위한 희생이었는가? 그대들은 자신의 가난을 수호하기 위해 이천 년 동안 목숨을 바쳤는가? ─ 결코 아니리라. ─ 인류여. 진실이란 이러하다. 공화국의 지도자, 제국의 황제, 귀족들이 울부짖는 인류에는 그대들이 들어가지 않는다. 귀족들이 수호하자고 외치는 대륙에는 그대들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민중의 재산과 땅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 자신의 부유를 수호하기만 원했노라. ─ 그대들의 조상이 피땀 흘려 지켜낸 것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 즉 귀족의 소유물이었다. 그러니 전쟁이 끝나고도 여전히 가난한 것이 당연하다! 귀족은 여전히 귀족으로 남았으며, 평민은 여전히 평민으로 남았다. 바로 그대들이 귀족을 도운 것이다! 남자가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 통탄할 노릇이다! 대저 귀족이란 어떤 작자인가. 마을에 몬스터가 침략해와도 귀족은 그대들을 위해 기사단을 파견하지 않는다. 그대들, 인간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월맹군이 다가오자 귀족은 그대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인류를 위해서! ─ 마을에 흑사병이 창궐해도 귀족은 그대들을 위해 흑색 허브를 베풀지 않는다. 그대들, 인간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월맹군이 다가오자 귀족은 그대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인류를 위해서! ─ 흉년이 들어도 귀족은 그대들을 위해 세금을 줄이지 않는다. 당장 논밭이 메말라 아들딸이 빵 한 가루를 먹지 못해 죽어가는데도.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결코, 결코 그대들을 위해 수리권(水利權)을 내놓지 않는다. 그대들, 인간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월맹군이 다가오자 귀족은 그대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 인류를 위해서! ─ 이제 귀족들이 말하는 인류가 무엇인지 명확하다. 그들이 말하는 인류란 다름아니라 귀족이라는 이름의 인류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륙이란 오로지 귀족이 소유한 토지이다. ─ 무엇을 위한 인류였는가? 오직 억압하는 자를 위한 인류였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오직 억압의 보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무엇을 위한 이천 년이었는가? 그대들은 우습게도 자신의 가난을 대물림하기 위해 천 년 그리고 다시 천 년을 죽어온 것이다! ─ 인류여. 귀족이 거짓된 사탕발림으로 호명한 인류가 아니라, 그대들, 평민과 농민, 농노, 노예, 진정으로 피땀을 흘려온 자들이여. 그대들, 대륙의 주인이여!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정말로 그대들이 노예인가? 대륙의 진정한 주인은 그대들이고――오히려 귀족이야말로 그대들의 피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노예가 아닌가? “무슨 저딴 망발을!” “저주 받을 마왕 새끼가!” 그 말에 주변의 장군들이 격분했다. 그들은 고레고레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허공에 욕을 쏟아붓는 대신 냉정하게 군중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병사들……병사들은 멍하게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 왜 그대들이 거둔 곡식을 그대들이 아니라 귀족이 가로채는가. 왜 귀족은 그들이 먹을 것을 스스로 수확하지 않는가? 그들이 주인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왜 마을이 침범했을 때, 마을의 주인인 귀족은 정작 전투에 나서지 않는가? ─ 이유는 간단하다. 마을이 귀족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당연하게도 마을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그대들, 곧 민중의 것이다. 귀족은 단지 민중의 것을 강탈할 따름이다. 요컨대 마을을 침범한 몬스터와 귀족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도 없다. 둘 모두 그대들의 재산을 노리는 도적이다. 도적이 집주인을 대신해서 집을 지켜줄 리 만무하다. 고로, 귀족은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 귀족은 다만 그대들을 강탈한다. 그대들이 수확한 곡식을 먹으며, 그대들이 만든 집에서 살고, 그대들이 지은 옷을 입는다. 어째서 인류에 이처럼 기생충과 같은 작자들이 생겨났는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난 이천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가? ─ 왜냐하면, 인류여. 그들이 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 그대들이 세금을 내놓지 않으면, 몬스터가 침공했을 때는 그토록 갈망해도 오지 않던 기사단이 들이닥친다. 요컨대 다른 도적이 그대들의 집을 터는 것은 용납할지언정 자신이 집을 털지 못하게 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대들이 정당하게도 이 곡식은 내 것이요, 이 집은 내 것이고 이 옷도 내 것이라고 항변하면, 저들, 기생충이자 도둑인 작자들은 어김없이 무력을 동원한다. 그렇다. 귀족들이 계속해서 기생충으로 남을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그들에게 무력이 있기 때문이다. ─ 인류여, 들으라. ─ 그대들 자신의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 도적들로부터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장군들의 고함이 더더욱 격해졌다. 그와 반대로 병졸들 사이에는 무서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황녀는 아직도 십오 분이 지나지 않았는지 마법사를 질책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음을, 엘리자베트는 마음 한구석에서 느끼고 있었다……. ─ 그렇다! 무력에는 무력으로 맞서싸우는 수밖에 없다! 남자가 소리쳤다. ─ 창을 세우라. 활을 들라. 그대들이 가진 것을 그대들이 경작하도록 하라. 당연한 것이 당연한 방식으로 굴러가게 만들어라! 더 이상 그대들이 노예라고 속지 마라! 그대들이야말로 이 땅의 주인들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나는 것은 당연히 그대들의 것이다! ─ 투쟁하라! ─ 아무도 그대를 대신해서 그대의 것을 되찾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 스스로 일어서는 수밖에 없다. ─ 투쟁하라! ─ 아무도 그대를 대신해서 그대의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 ─ 투쟁하라! ─ 인류여. 민중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그대들만이 정당하게 인류라고 자칭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천 년 역사에서 민중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들, 유일무이한 인류는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 모든 것이! ─ 나 단탈리안, 한 사람의 마왕이자 월맹군의 대표로서 선언하노라. 우리는 그대 민중들의 전쟁에 영원한 동맹군으로서 참여하리라! 이미 합스부르크 북부의 인민들은 우리와 대의를 함께하고 있다. ─ 그대들은 속고 있다. 우리는 귀족을 죽이지 민중을 죽이지 않는다. 합스부르크 북부 인민 전원에게 우리는 흑색 허브를 지급했다. 전원에게 말이다. 우리는 인민을 위해서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몬스터를 토벌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 합스부르크 북부에는 세금이 존재하지 않는다. ─ 세금이 존재하지 않는 땅. 이것이 바로 이상향임이 느껴지지 않는가? ─ 우리 월맹군에서 인간과 몬스터는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한다. 그대들이 마을을 이루고, 몬스터가 부락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고요히 살아가노라. 이것이 바로 이상향임이 느껴지지 않는가? 드디어 마법사가 마법진이 전부 준비되었다고 보고했다. 황녀는 그러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이미 늦었다. 이제부터 자신은 대표연설자로서 방금 저 남자가 말한 것이 전부 거짓이라고 공언해야만 한다. 그러나 벌써 의심의 싹은 인간군 깊숙한 곳에 심어졌다. 무엇을 위한 인류인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만약 전쟁이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징집병 부대는 금방 사기를 잃고 패주하겠지. 마왕군에 투항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단탈리안이라고 했는가. 터무니없는 자가 마왕군에 나타났군.” 황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멀리서 남자가 웅변했다. ─ 이상향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대들이 본래 가져야 할 토지문서를 실현할 때이다. 지금이 바로 어둡고 외진 거짓의 계곡에서 벗어나 햇살이 환히 비치는 정의의 길에 들어설 때이다. 지금이 바로 신의 모든 자손들,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때이다. ─ 정의를 노래하라. 모든 이여, 모든 이를 대신하여 모든 이로써 분노하라. 귀족들에게 누가 원래 주인이었는지 일깨워라. 그 노래는 다시는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지 않겠노라는 맹세가 되어야만 한다. 그대들이 함성을 지르고 창칼을 바로 세울 때, 비로소 내일이라는 이름의 찬란한 삶이 시작할지언저. ─ 우리는 주인인 척 행세하는 노예를 경멸한다. 우리는 진실로 주인인 자를 존중하며, 다함께 주인으로서 살아가기를 열망하노라.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민중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그대들에게는 거짓된 족쇄 말고는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대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 얻어야 할 모든 것만이 있다. ─ 인류여, 투쟁하라!   ============================ 작품 후기 ============================   00117 가장 긴 십오 분 =========================================================================                        * * * 평원이 조용해졌다. 비단 인간군뿐만이 아니었다. 월맹군, 마인들도 숨을 죽였다. 특히 단탈리안 뒤편에서 연설을 들은 다섯 명의 마왕――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 서열 제4위의 가미긴,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은 전원 침묵했다. “와아. 말 잘한다아.” 가미긴의 느긋한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깨트렸다. 그녀가 어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쟤 연설 준비한 거 고작 이틀밖에 안 됐잖아. 대단해.” “뭐, 말빨 하나는 확실히 먹고 들어가는 녀석이니까.”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거 긴 연설문을 다 외우기도 벅차겠다.” “의외로 즉석에서 지어낸 연설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폴리힘니아 여신에게 사랑받는 자가 종종 있으니 말이다.” “마르바스 영감, 그건 절대로 아니라는 데 전재산을 걸겠어. 만약 저게 즉석으로 지어낸 거라면 세상에 모든 연설가들이 혀 깨물고 죽어버릴걸.” 마왕들이 속닥거렸다. 그들은 대체로 단탈리안의 연설이 인간군을 훌륭하게 혼란으로 몰아넣으리라고 말했다. 마왕군은 대개 지휘관과 병사가 일심동체가 되어 싸운다. 그들이 자주 접하는 인간군은 검은 산성 수비군 혹은 변경백군이었는데, 이들도 내분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므로 마왕군에게 군대 내의 내분은 꽤나 낯선 개념이었다. 마왕들이 대체로 계략이나 모략에 정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들은 일치단결한 아군을 이끌고 역시 일치단결된 적군과 맞선다. 전술적인 차원의 속임수에는 누구보다 정통했으나, 상대편 군대를 내분으로 몰고가거나 정치적인 쪽에서 공략한다거나 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미숙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여러분은…….” 평소부터 인간에 관심이 다대했고, 마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 한 명의 마왕만은 사정이 달랐다. 파이몬이 격정을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여러분은, 저 연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건가요?” “으응?”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의미라니? 훌륭한 계책이잖아.” “그것만이 아니에요! 저건, 혁명이와요!” 파이몬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인간은 마계사회와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마계에도 계급이 있지만, 순전히 실력에 의해 계급이 뒤바뀔 수 있지요! 고블린으로 태어나도 마법사로서 수양만 쌓으면 얼마든지 최고위 계급이 될 수 있사와요!”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였던 고블린 토르켈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는 고블린임에도 불구하고 재능과 노력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에요……혈통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려요! 설령 본연의 실력을 타고나서 기사가 된다 할지라도 그 한계는 기껏해야 훈작사. 핏줄을 뛰어넘을 수 없어요. 그런 인간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단탈리안이 지적한 거예요!……하!” 파이몬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랬나요……그랬던 건가요! 그래서 흑사병을 퍼트렸어요……인간계의 상위층에만 흑색 허브를 공급한 것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영을 영토로 삼은 것도, 몬스터 부락을 토벌한 것도……전부 이 순간을 위한 계책이었나요!” 그녀는 온몸이 싸늘해졌다. 단탈리안이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자신의 인맥과 재력을 동원하여 단탈리안에 대해 조사했다. 파이몬은 여기 있는 마왕 중에서, 심지어 바르바토스보다 단탈리안의 행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재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현명하다고 감탄했다. 이런 자를 섣불리 청문회에서 공격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리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 청문회는 너무나 이상했다. 단탈리안이 뭔가를 속삭인 직후, 쿤쿠스카 상회의 회장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뒤바꾸었다. 심지어 자신의 심복이었던 토르켈마저 자결했다.……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었다. 지금 파이몬은 확신했다. 흑사병을 창궐하게 만든 자는 틀림없이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었다! 그러나 흑사병 따위는 진정한 전염병이 아니었다. 진정토록 무서운 전염병은 방금 단탈리안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 전염병은 순식간에 온 대륙을 집어삼키리라. 그리고 수백, 수천 만의 인민을 사지로 내몰겠지. 그것도 자발적으로! 파이몬은 몸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동시에 기뻤다. 지금까지 적의 충복이라고 생각해온 자가 사실은 자신과 비슷한 사상을 품고 있었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실. 이성적인 존재자라면 누구나 평등해야만 하고, 누구나 자신의 주인이어야만 한다는 것. 현명하게도 단탈리안은 직접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단어를 아꼈다. 그저 귀족에 대한 분개를 설파했다. 그렇기에 마왕들도 단탈리안의 연설은 단순히 '귀족과 평민을 분열하게 만드는 계책'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파이몬이 어찌 모르겠는가. 저 아래에 용암처럼 평등에 대한 사상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는 자신과 같은 자였다. 산악파의 마왕들조차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던 사상의 동지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급해졌다. ‘얼른 연설을 그만두게 해야 돼요!’ 파이몬은 이번 대표연설에 계략을 심어두었다. 치명적인 계략을. 단탈리안이 그 계략에 빠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마왕들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단탈리안을 이쪽으로 불러들어야――. “어이, 창년.” 그때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네가 혼자 정박아처럼 구는 건 상관없는데 말이야. 흑사병 단탈리안이 퍼트린 거 아니거든? 청문회에서 존나게 망신살 뻗었으면서 아직도 그러냐? 좋은 말로 할 때 의심하는 거 관둬라.”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와요! 무려 십오 만 명의 인간이 저 연설을 들었어요. 십오 만 명, 게다가 무장을 한 인민들이 말이예요! 당장 대륙의 역사가…….” 다시 열변을 토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파이몬이 알아차렸다. 네 명의 마왕은 지극히 무표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녀는 깨달았다. ‘제가……제가 단탈리안을 모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명백히 단탈리안에게 가장 적대적인 마왕이었다. 단탈리안이 처음으로 마왕군에 데뷔한 발푸르기스의 밤부터 현재 대표연설까지. 파이몬은 줄기차게 단탈리안의 발목을 붙잡았다. 흑사병 청문회 사건은 공식적으로 단탈리안의 무죄로 판결났다. 파이몬은 그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사과로 끝난 것만으로도 파이몬은 무척이나 관대한 처사를 받은 것이었다. 단탈리안에게 은혜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파이몬은 단탈리안을 곤경으로 몰아세웠다. 다른 마왕들 입장에선 저절로 '이제 그만 좀 하지?'라는 말이 나올 법했다. 바르바토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단탈리안한테 대표연설자를 맡긴 거냐.” “네?” “단탈리안이 무슨 말을 하든 그걸 꼬투리 잡아서 힐난하려고? 하, 창년이 정신을 못 차렸네. 야. 우리 평원파를 우롱한 걸 적당히 봐주니까 이젠 아주 내가 핫바지로 보이냐. 진짜 한판 붙어볼래?” 파이몬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소녀는 그런 의도가――.” “의도고 뭐고 가만히 닥치고 있어, 썅년아. 당장 네 년 모가지를 따버려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바르바토스.” 파이몬이 간절하게 라이벌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의 말을 믿어주세요. 단탈리안이 연설하는 걸 지금 당장 멈춰야 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그가 위험해져요.”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파이몬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말했을 텐데. 닥치라고.” “…….” 파이몬이 고개를 숙였다. 평원파의 수장조차 설득하지 못해서야 가능성이 없었다. 단탈리안은 이대로 대표연설자로서 인간군 측의 연설자들과 맞붙게 된다……. 공교로웠다. 이 드넓은 평원에 모여든 이십 만의 인간과 마인 중에 오로지 두 사람,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황녀와 산악파 수장 파이몬만이 단탈리안의 저의를 꿰뚫었다. 단탈리안의 강적인 자들이 도리어 그를 이해한 것이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을 의심하고 또 의심한 끝에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때가 늦어버렸다. 단탈리안을 위험에서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연설이 모두 끝난 후에 단탈리안과 그녀는 완전히 원수로 돌아서겠지. 그가 곧 빠질 함정은 다름아니라 파이몬, 그녀가 파놓은 것이니까. 파이몬이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더――조금이라도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간측의 대표연설자가 나온 모양이로군.” “와아, 쟤 예쁘게 생겼다아! 누구야?” “글쎄. 여자면서도 인간군을 대표할 만한 인물은 합스부르크의 황녀나 브르타뉴의 여왕뿐이니까. 아마 이 상황에선 황녀가 나온 거 아니겠냐? 햐아. 그나저나 정말 예쁘긴 예쁘다. 존나 꼴리네. 따먹고 싶다.” “……바르바토스. 그대의 취향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싶진 않지만, 조금 더 말투에 위엄을 갖추는 게 어떤가.” 마왕들이 인간군 대표연설자의 미모에 대해 수군거렸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은발이 마치 여신의 머리카락처럼 찬란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마왕마저 황녀가 간직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파이몬만이 대화에서 제외되어 홀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단탈리안이 이 위기에서 현명하게 벗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함정을 마련해놓은 장본인이 빌 소원은 아니었다. 파이몬에겐 그러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 * * 엘리자베트 황녀가 거대한 영상체가 되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세 번째 황녀로 태어나 훗날 제국의 여황제가 되고, 대륙의 절반을 정복하는 패왕으로 거듭난다. 군사와 정치, 결투와 계략, 민심과 외교. 어느 것에나 정통한 천재. <던전 어택> 팬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최고의 히로인으로 인정한다. 그녀가 없었다면 주인공인 용사는 일개 힘 좋은 장정으로 살다 죽었겠지. 이 시대에 가족과 마을을 잃은 민초의 신세란 가엽기 짝이 없다. 심지어 주인공은 화전민 출신이다. 노예나 마찬가지이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그런 주인공을 오직 재능만 보고 중용한다. 주변에서 격하게 반대해도 황녀는 끝까지 주인공을 밀어준다. 그 결과, 대륙에서 마왕군을 완벽하게 축출한다……. 범상한 군주라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다.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를 눈앞에서 바라보니 감개무량했다. 게임에 나오는 일러스트에 비해 훨씬 더 어려보이지만, 저 새하얀 이마와 은발, 굳게 다문 입술, 날카로우면서도 시원한 눈초리는 틀림없이 엘리자베트 황녀를 나타냈다. 미처 날개를 펼치지 못한 붕새. 혹은 아직 때를 얻지 못한 교룡. 그러나 이제는 내가 철저하게 무너트려야만 하는 적에 불과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이자 에바트리에 백작인가. 과연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소문날 만한 미모이다. 눈이 즐겁군.” 엘리자베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신을 알고 있어서 놀란 것일까.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함없이 늠름했다. 아쉬웠다. 아주 조금이라도 당황해주었으면 했는데……호랑이는 어려서도 호랑이인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위기 자체가 딱딱했다. 하긴, 아까 전의 연설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조금 더 여유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나한테 주도권을 빼앗길 거다, 합스부르크의 황녀. 각오는 되어 있는가. “그대의 장대한 거짓말은 잘 감상했노라.” “호오.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대의 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과 거짓만을 토했노라.”   00118 가장 긴 십오 분 =========================================================================                        내가 작게 웃었다. 뭐라고 할까. 궁지에 몰린 토끼가 필사적으로 앞니를 내세우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저렇게 다짜고짜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은 그녀의 화법과 거리가 멀었다. “열국의 장병들이여!” 그녀가 내 웃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저 자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지어다. 그대들 모두 괴물의 사악한 이빨에 부모를, 친구를, 동지를 잃어본 적 있지 않은가. 저 자는 마왕이다. 괴물의 군주이다.” 여유롭게 기다렸다. 여기서 말을 끊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책. 나는 지금 말싸움을 벌이는 게 아니다. 연설을 하는 것이다. 대중을 끌어들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연설 내용이 아니라 연설자 본인의 태도이다. 상대방의 말을 일일이 끊어서야 자기 이미지에 타격을 준다. 적당히 들어주고, 그후에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그것이 상책이다. “저 자는 말했다. 마왕군이 민중을 죽이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이만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는가. 이천 년 전에 대륙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은 누구였는가? 천팔백 년 전,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은 누구였는가?” 황녀는 타고난 카리스마로 평원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름다우면서도 굳건한 목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 한명한명 사이로 목소리가 마치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천오백 년 전, 붉은 장벽 아래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칼을 휘두른 자들은 누구였는가? 천사백 년 전, 울름 평야에서 오우거 일만 마리를 향해 돌격한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바로 오늘. 십 만의 괴물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가족을 위하여, 아들을 위하여, 신을 위하여 이곳에 두 발로 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엘리자베트 황녀가 팔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그렇다! 바로 그대들이다! 자랑스러운 열국의 아들딸이여. 용사들이여. 저 괴물들이 학살한 것은 언제나 민중이었다. 한 정의 밭을 일구어 평화로이 돌아가려 할 때 바로 저 괴물들이 마을을 침략했다. 한 아이의 어버이로서 사랑스럽게 웃고자 했을 때 바로 저 괴물들이 우리의 자식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 살아가려 할 때, 바로 저 괴물들이 우리의 삶을 짓밟았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저들이 말한다. 자신들은 결코 민중을 위협한 적 없다고. 본녀는 그대들에게 묻는다.――정말로 그러했는가?” 사방이 고요해졌다. 황녀는 고개를 돌려 인간군의 일부를 바라보았다. “보이오티아인이여. 본녀는 그대들이 오백 년 전, 바위투성이의 아울리스에서 오크 이만 마리에 맞서싸워 사흘을 넘도록 인간군의 방어선을 사수한 것을 기억한다. 그대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왕자, 페넬레오스가 그대들과 함께 언덕 아래에 잠든 것을 기억하노라.” 그녀가 시선을 돌려 다른 부대를 쳐다보았다. “미뉘아이족이여. 본녀는 그대들이 이백 년 전, 비둘기의 고장 티스바이에서 삼만의 고블린 무리가 쳐들어왔음에도 단 오백 명으로 도시를 지켜냈음을 기억한다. 도시의 관리, 귀족, 평민, 노예,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오백 명은 하나가 되어 싸웠다. 인류는 그대들의 분투를 영원히 잊지 않는다.” 황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플레돈인이여! 어떻게 그대들이 칠백 년 전에 보여준 그 전설적인 전투를 잊겠는가!” 그때부터였다. 황녀가 호명하는 부족과 도시의 부대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로크리스인이여! 고귀한 케피소스 강변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천칠백 년 전, 신성한 에우보이아에서 자그마치 용 두 마리를 물리쳤다. 천상의 여신들도 그대들의 위업에 감탄했노라!” 한 부대가 열광하며 로크리스 만세를 부르짖었다. “아반테스족이여! 알페이오스족이여! 그대들의 영광스러운 분투는 아직도 고대공화국이 남긴 장성의 돌벽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본녀는 여섯 살 때 장성의 돌벽을 만지면서 다짐했노라. 여기 적힌 이들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겠노라고. 아드라스토스, 메네스테우스, 엘레페노르, 스튀라, 오푸스, 스카르페, 아우게이아이, 타르페――.” 그녀가 정말로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부른 이름이 열 명이 넘어서자 한 부대의 인간군이 함성을 질렀다. 그녀가 부른 이름이 스무 명이 넘어서자,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부른 이름이 서른 명, 쉰 명이 넘어서자――어느새 인간군 전체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대륙이여!” 황녀가 소리쳤다. “과거에 수만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던 그대들이 이제는 합스부르크인, 프랑크인, 브르타뉴인, 바타비아인, 튜튼인, 카스티야인, 사르데냐인, 아나톨리아인, 모스크바인, 칼마르인, 버니시아인이라 불린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원래 우리는 하나였다!” 그녀가 등을 돌렸다. 마왕군을 향해서가 아니라, 인간군을 향해서 말했다. “때때로 우리는 분열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를 원망했고, 서로를 죽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였다. 저 괴물들이 우리의 사랑스러운 대지를 짓밟고, 우리의 가족과 동료를 죽일 때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가 되어 투쟁했다! 경멸과 증오조차 우리를 막아서지 못했다. 오우거의 억센 이빨조차 우리를 막지 못했다! 그렇다. 우리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최후의 순간까지 기꺼이 인간으로 죽고자 했기 때문이다!” 황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화려한 레이피어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오늘 이날, 다시금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했노라. 적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또한 간악하다. 그들은 우리가 분열해야만 승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를 분열하고자 사악한 거짓을 흩뿌린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였음을!” 그녀가 검을 치켜세웠다. “이천 년 동안 저들은 무수히 많은 계략을 동원하여 우리를 분열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였음을!” 십 만 명의 인간이 창날을 공중으로 뻗으면서 환호했다. “오늘 저들은 또 다시 한번 우리를 분열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오늘 역시 하나일 것임을! 후세는 우리를 기억해줄 것이고, 그리하여 이천 년이 흐르고 다시 한번 이천 년이 흘러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의 인류로서 존재하리라!” 황녀가 검날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은발이 싹둑 잘려나갔다. 그녀는 왼손에 은발을 움켜쥐고 외쳤다. “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맹세한다. 오늘 펼쳐질 수호전쟁에서 언제나 선두에 설 것임을. 그대들이 괴물의 무자비함에 무릎을 꿇고 절망적인 눈으로 앞을 바라볼 때, 바로 그곳에 본녀가 서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인류의 강함에 의문을 품고 무기를 손에서 놓으려 할 때, 바로 그 옆에서 본녀가 그대의 어깨를 잡아줄 것이다.” 그녀가 왼손을 놓았다. 은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오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으리라. 인간의 핏물이 브루노 평원을 적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겠는가? 열국의 장병들이여! 그대,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손들이여!――오늘 다시 한번 저 간악한 괴물들에게 우리가 인간임을 본녀와 함께 증명할 텐가! 다시 한번 대륙의 역사에 남을 각오를, 그대들은 이미 끝마쳤는가!” 온 평원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군악대들은 일제히 북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박자도 음정도 필요없었다. 폐에서 토해낸 소리들은 하나가 되어 요동쳤다. “…….” 나는 아까 전에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황녀는 토끼 따위가 아니었다. 스물일곱 살의 엘리자베트든, 열일곱 살의 엘리자베트든……그녀는 대륙을 호령하는 위인이었다. 현명했다. 황녀는 내 주장을 직접 물고늘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모든 사상 중에서 가장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는 영웅주의를 꺼내들었다. 여기에 각 인간부대를 일일이 호명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고향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일깨웠다. 인간이 개인이 아니라 마을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시대이다. 고향에 대한 자긍심만큼 그들에게 단단한 것도 없겠지. 그걸 황녀는 훌륭하게 건드린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광고하기까지 했다. 은발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자신과 함께 나아갈 것인가' 하고 물었다. 귀족과 함께 나아가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그녀를 믿을 것이냐고 질문했다. 병사들은 그에 환호성으로 응답했다……. 엘리자베트 황녀의 정치적 위치는 순식간에 상승했다. 이제 그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자가 될 자격이 충분함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설령 이번 월맹군이 끝나고 계급투쟁이 일어날지라도, 엘리자베트 황녀만큼은 민중의 지지를 잃지 않겠지. 다른 귀족들이 위험해질수록 황녀는 도리어 강력해질 게 분명했다.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가. 이 연설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청중의 어디를 공략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작 몇 분의 시간. 내가 연설을 시작하고 겨우 몇 분 남짓하는 시간에,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저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해버릴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천재. 그녀야말로 진정한 천재였다. 태어나기를 황제로 태어났고, 자라나기를 패왕으로 자라났다. <던전 어택>에서 마왕군이 패망한 것은 결코 용사 때문이 아니었다. 황녀가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야말로 틀림없이 최악, 최흉, 최강의 적이다. ─ 짝, 짝, 짝. 평원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짧게 끊어지는 소리가. 사람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진심으로 감복했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무얼, 감출 이유가 없었다. 바로 나였다. “대단하다. 과연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국이 마지막으로 낳은 영웅인가.” “……비아냥거릴 속셈이라면 소용없다, 마왕. 우리의 의지는 단호하노라.” “비아냥이라니!” 나는 진심으로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감복했다. 정말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입장에 섰더라면 결코 저런 식으로 연설하지 못했을 거다. 당황해서 말을 버벅이거나 이십 만 병력 앞에서 창피를 당했겠지. 내가 장광설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뜬 홀로그램창에 연설문이 빼곡하게 적힌 덕분이었다. 반면에 황녀는 그런 속임수 하나 없이 즉석에서 연설을 읊었다. 훌륭했다. 안타깝게 되었다, 엘리자베트 황녀. 여기 선 사람이 나만 아니었다면 당신이 모든 영광을 거머쥐었을 텐데. 내가 싱긋 웃었다.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엘리제 누나.” “누나……?”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엄하다. 본녀를 모욕할 생각이냐.” 이런. 기억나지 않는가. 하지만 아쉽지 않다. 대륙의 모든 역사를 머리에 저장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당신이다. 조금만 힌트를 주면 금방 기억해주겠지. “옛날에 그대를 엘리제 누나라고 부른 소년이 있었다.……이래도 기억나지 않는가?” “……!?”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들어서, 여린 소년의 표정과 목소리를 연기했다. “엘리제 누나. 오늘은 어디로 놀러가는 거예요? 검은 사냥터요? 와아, 신난다! 저도 말을 탈 수 있을까요? 안 돼요? 기대했는데……누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참을게요. 그런데, 루돌프 형은 왜 저희랑 놀아주지 않는 걸까요?” “무슨…….” 황녀의 눈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난공불락의 성벽이 서서히 무너지듯이. 천천히, 그녀의 철옹성 같던 얼굴이 벗겨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저 예쁜 입술에서 경악의 비명이 새어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주고 싶었다. 세상에 약점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영웅. 그녀에게 유일하게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은――바로 어린 시절, 친오빠와 친동생을 자기 손으로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친동생. 즉 제4황자는 어리고 순수했음에도 정치적인 위험성 때문에 죽었다. 당신은 그것 때문에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아마 오늘 아침도 친동생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식은땀에 젖어서 깨어났겠지. 당신이 스물아홉 살이 되는 해, 주인공인 용사가 침대 옆에서 함께 잠들어준 그날, 비로소 당신은 악몽이 없는 밤을 처음으로 보내게 되니까. 오로지 이 세계에서 나만이 아는, 그녀의 유일무이한 약점. “어, 누나? 그쪽은 사냥터가 아니잖아요. 에?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했다고요? 와아! 거기엔 뭐가 있어요? 멧돼지? 설마 유니콘이 있는 건 아니겠죠! 좋아요. 빨리 가요!……어떤가. 이래도 떠오르지 않는가?” 이제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황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들린다.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인간군의 병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황녀를 바라보고 있을 거다. 병졸들뿐만 아니다. 귀족들도 동요하리라. 나는 일부러 '루돌프 형'이라는 말을 썼다. 엘리자베트 황녀를 누나라고 부르고 루돌프 황태자를 형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사 년 전 숲속에서 의문사 당한 한 명의 소년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귀족들로서는 황녀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끼겠지. 내가 상냥하게 웃었다. “저런.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가보군. 좋다, 특별히 자비를 베풀겠다.……엘리자베트. 사 년 전이다. 기억하는가? 그대가 아직 열세 살이었을 때다. 바람이 따스한 봄날이었지. 그대는 오랜만에 숲속에서 함께 말을 타자고 소년에게 제안했다.” 소년은 누구보다 자신의 누나를 신뢰했다. 의심 한점 없이 그녀를 따라서 숲속으로 갔다. “하지만 사실 그대의 목적은 사냥이 아니었지. 응? 그렇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사냥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냥감도 그만한 사냥감이 없었지.” “……그만.” “벚꽃이 아름다운 숲이었다.” 황녀의 표정이 굳었다. “소년이 말에서 내려 감탄사를 내뱉었지. 누나! 너무 아름다워요! 이걸 보여주려고 절 여기로 데려왔군요! 와아,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봐요!” “그만……더 이상의 모욕은 좌시하지…….”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버럭 소리쳤다. 황녀가 움찔했다. “소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어. 기억나는가? 너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방금 전 연설에서도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않았는가. 그대는 영원토록 기억한다고. 하,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고 뭔가. 세상에서 오로지 그대만이 아는 풍경인데 말이다!” “아, 아…….” “그래, 소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커졌지.……누나? 뭐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소년의 눈동자에서 나타났다. 그러건 말건, 그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양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것도 모잘라서――오러까지 동원했다! 소년이 그대를 보며 대단하다고, 아름답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푸른 오러를 내뿜으면서!” 황녀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는 계속해서 떨렸다. 그 순간, 평원에 거대하게 자리하던 입체영상이 꺼졌다. 인간측의 마법사가 독단적으로 마법을 중단한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너희는 이걸로 끝내고 싶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이건 전쟁이다. 관두고 싶다고 해서 멋대로 관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소년이 말했지! 목구멍이 막혀서 식도를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숨소리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아파――누나, 아파――왜――왜……. 왜.” 나는 오 초의 간격을 두고 허탈하게 말했다. “그게 소년이 마지막까지 내쉰 숨결이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에게, 끝끝내 분노도 원망도 쏟아내지 않고……단지 왜냐고 물었다. 소년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게지. 왜 사랑하는 누나가 자신을 죽이는 것인지. 소년은 진심으로 누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알겠는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네 년은 더럽고 역겨운 쓰레기 살인자이다.” 침묵. 평원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환호를 지르던 인간, 황녀 만세를 부르짖던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의문과 혼란이 가득할 따름이었다. 이로써 엘리자베트 황녀의 정치적 입지는 대폭 줄어들었다. 내 생존을 가로막는 방해물 하나가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껏 인간계의 세력을 줄이려고 지금까지 생고생을 했는데 도리어 황녀한테 힘을 실어주게 되어서야 본말전도였다. 다소 무리하더라도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밟아두는 편이 좋았다. <던전 어택>에서 그녀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다소 안타까웠지만……뭐,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침통한 얼굴로 인간군을 향해 말했다. “인류여. 민중이여. 이제 깨달았는가? 저것이 그대들이 환성을 보낸 귀족의 맨얼굴이다. 그대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으며, 뒤에서는 자신의 친동생마저 죽여버린다.” 내 목소리는 외로이 부르노 평원에 가라앉았다. “천인공노할 일이도다. 노예도 부모를 사랑하며, 짐승도 자기 자식을 애정하노라. 자신의 가족조차 살해하는 금수가 어찌 감히 인류를 논하는가…….”   ============================ 작품 후기 ============================   91화에 황녀의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00119 가장 긴 십오 분 =========================================================================                        그 순간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프랑크 제국 병사 미셸의 호감도가 13 올랐습니다.」 그것이 기점이었다. 「바타비아 공화국 병사 니콜라의 호감도가 30 올랐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 귀족 알렉산더 폰 바이에른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샤르데냐 왕국 병사 파비아의 호감도가 11 올랐습니다.」 ……. 눈앞에 푸른 쓰나미가 밀어닥쳤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호감도가 올랐고, 누군가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알림창이 넘쳐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도 아니었다. 상태창이 수천, 수만 갈래의 파도가 되어 밀어닥쳤다. 띠리링, 띠리링, 하는 효과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알림창들은 순식간에 평원을, 내 양옆을, 마침내 하늘까지 뒤덮었다. 그 압도적인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확신했다. 지금, 역사라는 이름의 거인이 한걸음 나아갔다. 등골에서 쾌감이 저릿저릿했다. 온몸이 흥분되었다.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고양감이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자그마치 십 만의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느낌이 심장을 달구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배할 때만 느끼는 충만이었다.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B급 시나리오 <만인의 희망을 짊어진 자>가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A급 시나리오 <왕당파와 공화파의 동맹>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퀘스트를 깨는 자(Quest Breaker). 라우라의 노예각인을 지워버린 이후 다시 보는 이벤트였다. 만인의 희망을 짊어진 자는 굳이 숙고할 필요도 없이 엘리자베트 황녀를 가리키는 것이겠지. 황녀는 귀족과 평민, 노예, 실로 만민의 희망을 등에 짊어지고 일어선 제왕이었다. 제왕으로 향하는 그 길이 이제 가로막혔다……훌륭했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동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약간 애매했다. 프랑크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가. 어느 쪽이든 인간계가 단합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나는 해낼 수 있다.’ 마음이 떨렸다. 서열 제71위의 마왕. 총합 능력치 100 이하. 쓰레기 중의 쓰레기. 무력으로는 시골 마을의 일개 나무꾼에게도 당해내지 못하는 캐릭터. 그런 몸뚱어리로 여기까지 끌고왔다……훗날 대륙의 패자가 될 엘리자베트 황녀를 좌절시켰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단탈리안이! ‘어떤 영웅이든 오기만 해봐라.’ 나는 <던전 어택>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의 흥망성쇠를 죄다 꿰뚫고 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마음만 따지자면 어디 하나쯤 부러진 절름발이다. 대륙 최강의 소드 마스터이든, 나중에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을 통합시킬 여왕이든, 암살자의 군주이든, 약점은 있다. 그래서 평원 저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도 나는 여유로웠다. “……마왕 단탈리안. 무시무시한 언변입니다.” 인간측에서 대표연설자를 새로 보낸 것일까. 하긴 이대로 전투를 시작했다가는 마왕군이 유리할 게 뻔했다. 인간군도 필사적으로 사태를 무마하고 싶겠지. 과연 누구를 다음 타자로 내보냈을지 궁금했다. 알림창을 일거에 꺼트렸다. 그러자 푸른 장벽이 사라지고 상대방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예복을 입은 여자였다. 머리카락이 회색이었다. 나는 그녀가 성녀 그라시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게임에선 주인공 일행에게 허구한 날 퀘스트를 내려주는 NPC인데, 여신의 뜻이라면서 푼돈으로 주인공을 부려먹는지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예컨대 오우거 대군을 토벌하라면서 보상으론 고작 아이템 하나밖에 안 준다. 성녀라는 직함을 이용해서 용사를 거의 공짜로 부려먹는 것이다. <던전 어택>에서 용사는 고아 출신에다 용병단원이다. 여타 RPG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세상사에 빠삭했다. 주인공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가열차게 항의했다. 그러자 그라시아 성녀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대꾸했다. ‘제 고귀한 얼굴을 접견하는 영광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대단한 보상은 없겠지요?’ ……유저들이 그녀를 성녀가 아니라 마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뭐, 여신의 축복을 받아 백 년 넘게 이십 대의 미모로 살아가는 양반이니까. 확실히 평범한 인간 입장에선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일지 모른다. 그나저나 성녀를 다음 타자로 보냈는가. 좋은 선택이다. 민중에게 사제, 특히 성녀란 경외의 대상. 귀족들의 위신이 무너진 이상 성녀만큼 현재 인간군을 잘 다독일 자는 없겠지. “이거. 성녀 그라시아, 여신께 사랑받는 존재 아닌가. 귀하신 분께서 어찌 험난한 전쟁터에 나왔는고.” “……신께선 지옥이란 인세에 있나니 성직자는 언제나 가장 낮은 바닥에 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 저에게 이곳만큼 어울리는 장소는 없습니다.”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안다는 것에 그라시아는 눈썹을 쨍그렸지만 순탄하게 대응했다. “마왕 단탈리안이여. 그대의 실력은 잘 보았습니다. 언령(言靈)에 마법을 실어서 상대방을 홀리다니. 설마 황녀 전하의 정신에 타격을 입힐 정도로 고강한 마법을 쓸 줄이야……대단하군요.” “호오.”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 “내가 한 말이 거짓이었다, 이 말인가.” “예.” 정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잘도 말했다. 권위 높은 성녀가 단언한 것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친족살해의 의심을 벗어재낄 순 없겠지만 적어도 공공연히 비난받는 일은 적어지리라. 신전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철면피에다 무표정. 그러면서 이쪽의 약점을 파고든다. 내가 게임상에서 기억하는 성녀 그라시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훌륭하다. 하지만 성녀여, 잘 선택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에게 진정한 신앙이란 언어도단이다.” “또다시 언령의 마법을 쓰는군요. 뭐라고 속삭여도 여신께서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사악한 수작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크흐.” 계산된 조소가 아니었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차피 사제도 제1계급. 여차할 때는 귀족의 뒤를 봐주는가. 이런, 자칫하다 마왕인 나마저 세상에 절망할 판국이도다. 겨우 한 겹의 기만이다. 그 한 겹을 벗기 위해서 인류는 얼마나 더 많은 비극과 얼마나 더 많은 피를 자아내야 하는가.” “……기세가 좋은 것도 지금뿐입니다, 마왕.” 그녀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자그마한 단추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까?” “……?” 내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저런 소품을 꺼내들었을까. 설전의 방향이 짐작가지 않았다. 혹시 물건을 비유로 삼아서 무언가 멋들어진 명언이라도 내뱉을 속셈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의 연설은 아니었다. 여기서는 한번 간을 봐볼까……. “글쎄. 나에겐 생소한 물건이로군.” “저에게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인 물건입니다. 왜냐하면 매우 고가의 아티펙트이기 때문이지요. 대륙의 거부들이나 장만할 수 있습니다.” 성녀가 손바닥에 단추를 올려서 펼쳐보였다. “여기에 걸린 마법은 메모리아. 주변의 풍경과 소리를 입체적으로 저장하는 아티펙트입니다. 마법 자체가 고난이도 마법일 뿐더러, 그걸 겨우 이만한 크기의 물품에 구현해야만 합니다. 대마법사가 아니라면 감히 만들지도 못하지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물건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왜 그런 것을 꺼내들었는가. “성녀여. 나는 마법 강의를 들으러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재촉하지 마시길. 마왕, 이 물건은 새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용이 끝났지요. 누구의 것인지 도저히 짐작가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마왕이지만 가난뱅이라서 말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값비싼 물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음?” 그라시아 성녀가 담담하게 얘기했다. “그 아버지에겐 아들이 한 명 있었지요. 재능은 있지만 미숙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상을 경험시킬 겸해서, 약간 억지로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어찌 아비가 자식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아들에게 이 메모리아 아티펙트를 선물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요.” “…….” “불행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타지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인은 의문사. 도적에게 습격이라도 당한 것인지, 아들은 숲의 가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아들은 현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을 잊지 않고, 최후의 그날 메모리아 마법을 가동한 것입니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자신이 왜 죽었는지 증거를 남겼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아들이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있었지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라시아 성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아들의 이름, 잭 올란드.”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불안감이 명확한 정의가 되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 빨갛고 검은 것은 순식간에 두개골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뇌수를 채웠다. 잭 올란드. 노예상인, 잭――. 그 멍청한 순둥이의 이름이, 어째서 지금 등장하는가? 성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이쪽을 꿰뚫어보았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 하고도 조금 전.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도시 베르니아에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용병길드를 주축으로 해서 일어난 사건이었지요. 도시에 화재가 크게 일어났고, 많은 시민이 인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설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어린 아들, 잭 올란드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베르니아 근처의 숲이었습니다. 큰 바위에 몸을 기대고 죽어 있었지요. 바위에는 잭 올란드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등으로 가리고 있던 바위에는 붉은 피로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복수를(di vendetta)'.” 등골에 전류가 내달렸다. 시체 뒤편의 바위에――글자가 써 있었다고? 잭은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자살했다. 나에게 반항할 수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신념을 욕보이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살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체를 내버려두었다. 경의를 표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그뿐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죽는 순간에 다잉 메세지를 남겼단 말인가! 잭 올란드――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가! “무엇을 위한 복수일까요. 당연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시체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단추로 위장해서 상의에 붙여놓은 메모리아 아티펙트도 건재했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아버지는 마법사를 고용하여 아티펙트를 해독했습니다.……마왕 단탈리안. 아니, 약초상인 로리타.” “……!” “이것이 그 최후의 광경입니다.” 성녀의 손바닥에 올려진 아티펙트로부터 화면이 생성되었다. 그 화면은 마왕군과 인간군, 양측에서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 끄허, 끄하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먼저 영상에서 새어나온 것은, 찢어질 듯한 비명.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비추었다. ─ 끅! 끄허어어어억! 끄하아악! 끄아, 끄하아아아아악! ─ 하아, 잭……정말로 안타깝게 됐어. ─ 크프으읍! 끄으윽! 로리타!? 로리타흐으으윽!?” ─ 나는 너한테 세 번을 제안했어. 세 번의 제안은, 정말로, 무척이지 관대한 거야. 거부해서는 안 될 제안이기도 했고. 그리고……나의 모습이 비추었다. 화면 속의 내가 잭을 발로 밟았다. ─ 아픈 건 알겠는데 너무 시끄럽잖아. 잭! 잭! 내 말 들리지? 그렇지? 조금 조용해줬으면 해. 여기가 시끄러워서 좋을 거 하나 없거든. 잭! 그만 닥쳐! 만약에 내 부탁을 무시한다면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잘라버리겠어. 알았어? 네 왼쪽 어깨까지 썰어버리겠다고. ─ 끄윽, 흐으윽……끄흐으윽……! ─ 아주 좋아. 훌륭해, 잭. 바로 그거야. 그렇게만 하면 더 이상의 출혈은 없을 거야. 약속하지. 풍경이 흘러갔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생각을 바꿔봐. 잭, 간단한 논리야. 왜 상대방이 정식으로 상인길드에서 거래하는 것을 거부했을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왜냐하면, 하고 곧바로 논리가 성립하지. ─ 정식으로……거래할 수 없는 신분……? ─ 바로 그거야. 사실 도시에 제대로 출입하기도 힘들지. ─ 상인이 아니었구나……로리타! ─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 ─ 예.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고문이 이어졌다. 불고문, 비명, 협박. 정상인이라면 차마 눈에 담기 어려울 광경이 계속되었다. 화면 속의 나는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했다. 팔 하나를 잃은 잭이 땅바닥을 구르면서 울부짖었다. ─ 전염병을 치료하는 약제가 있다는 것도, 큭! 전부 거짓말이었어! ─ 그랬어! 그랬던 거야! 경매소에서 몬스터를 소환한 것도 네 새끼였어! ─ 그건 맞아. 인정하지. ─ 도시에 불을 지핀 것도! ─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 어디에선가 고함을 질렀다. 이 사태를 방관해선 안 된다고.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한다고. 그러나 그 고함은 너무나 아득했다. ─ 자네가 요 1분 동안 내민 의견을 종합하자면 나는 악마에다 사기꾼이고 천하의 쌍놈이자 미친개자식이며 지옥에 떨어질 후레자식이군. 전적으로 인정하겠어. “……메모리아 마법은 여기까지입니다.” 영상이 꺼졌다. 그라시아 성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시에 불을 지르고. 거짓말을 일삼고. 잔악무도한 고문을 거리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마왕.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 중의 괴물, 금수 중의 금수.” “…….” “그것이 당신의 정체입니다, 마왕 단탈리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한 가지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끊임없이 멤돌았다. 한 노예상인의 순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잭……. 잭. 잭, 올란드! 네놈이 나의 적이었는가. 대륙의 패자 엘리자베트도 아니고――대마왕 바알도 아니고, 게임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네놈이, 한낱 애송이 낭만주의자에 불과한 네깟 녀석이――. 네놈이, 나 단탈리안의 적이었는가!   00120 가장 긴 십오 분 =========================================================================                        “……확실히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내 혀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머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가만히 과시할 정도로 혓바닥을 얌전히 키우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마는, 얘기를 들어보니 저 자는 노예상인이로군.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자. 그런 자를 대접해준다는 것은 오히려 민중에 대한 이반일 터. 민중을 위한다는 성녀가 노예상인을 두둔하다니 놀랍구나.” 그래. 잘 말했다! 여기서 저 마법영상이 조작이 아니냐고 발뺌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다. 무슨 수로 로리타라는 가명을 나에게 이어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저리 당당하게 나오는데 진실을 입증할 수단 정도는 마련……잠깐만. 어떻게 로리타가 나인 줄 알았지? 나는 철저하게 가명을 썼다. 라우라한테는 이름을 밝혔지만, 잭한테 내가 단탈리안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단지 인상착의만 갖고 나인 것을 알아냈다고? 불가능하다. 난 한낱 이름없는 마왕에 불과했다. 조사할 방도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 파이몬. ‘네 년인가.’ 사고가 찰나에 마비에서 벗어났다. 머리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래, 라피스가 말해주었다. 파이몬이 나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다고. 잭 올란드. 저 녀석의 아비는 분명히 사르데냐 왕국을 주름잡는 거부라고 했다. 재력을 총동원해서 로리타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보고 있었겠지. 파이몬, 잭의 아비, 두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투자해서 나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그때 양측의 정보선이 맞닿았다. 그랬는가. 파이몬은 내가 흑사병을 퍼트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때 내가 약초상인으로 둔갑해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블랙 허브를 미끼로 용병길드 등을 회유해서 도시에 화재를 일으켰다……파이몬 입장에서, 나는 흑사병을 퍼트린 후에 블랙 허브를 가져다쓰며 마음대로 활보하는 자로 비추었겠지. 멍청한 년이! “물론 당신이 한 청년을 잔인하게 고문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 좋다. 너의 그 공격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성녀 그라시아. 마왕으로서의 잔혹한 이미지를 광고한 다음에 흑사병의 건을 나한테 덤터기 씌울 셈인가. 거기에 파이몬이 지금까지 쌓아둔 증거를 갖다댈 생각이냐. 젠장, 끝내주는군. 기가 막힌 원투펀치이다. 안 된다. 흑사병 건으로 이야기를 길게 끌고가서야 나한테 득이 될 게 없다. 대중에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흑사병에 대한 의혹을 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설전에서 불리해진다. 흑사병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민중이다. 그들의 어그로를 끌어버린다.……저 영상을 부정해야만 한다……어떻게? ‘조작했다고 공격하자.’ 안 된다. 아티펙트가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해보자고 나오면 어쩔 텐가. 나는 마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아티펙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내는 마법적인 절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겠지.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역공을 받아버리면 정말 기세를 빼앗겨버린다. ‘내가 아니라고 발뺌해.’ 저건 내가 아니라 나를 연기한 누군가의 짓이다. 이 세계엔 폴리모프 마법이 있다. 나를 똑같이 연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 아티펙트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밝혀내는 마법이 있을지라도, 그 아티펙트가 투영하는 인물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밝혀내는 마법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니,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군에서는 고작 나 한 사람을 물 먹이겠다고 폴리모프 마법을 동원, 이렇게 당대한 거짓말을 꾸며냈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대표연설자로 누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나 하나만을 저격했다고? 파이몬이 인간군에 정보를 흘린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당장 이 자리에서 입증할 방법이 없다! 억지 논리가 되어버린다. 나에게 진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가 된다……제기랄,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다 있나! “우리는 단탈리안, 당신이 흑색 허브의 효능을 최초로 발견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장부에 따르면…….” 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러나 속으로 필사적으로 수단을 고안하고 있는 사이, 성녀 그라시아는 제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상하던 바 그대로였다. 쿤쿠스카 상회라느니 뭐니, 뻔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하. 파이몬은 쿤쿠스카 상회의 오랜 고객이다. 상회에 연줄이 있겠지. 그걸로 장부 등을 빼돌려서 저들한테 넘겼다……저 년, 진짜 작정하고……아니. 파이몬은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분산시킬 여력이 부족하다. ‘저 장부가 거짓이라고 말하자.’ 안돼, 똑같은 논리로 각하다! 마법으로 확대된 저 장부들에는 빼곡하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필기체로 적혀 있다. 쿤쿠스카 상회와 내가 계약한, 블랙허브 농장에 대한 건이다. 저만한 문서를 설전이 시작한 직후에 전부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여기서 조작이라고 말해봤자……'당신이 대표연설자라는 것도 모르는데, 오로지 서열 제71위인 당신을 모함하기 위해 이만한 조작을 했다는 소리입니까'라는 식으로 받아치겠지. 그걸 어떻게 우길 방도는 없는가? 마법으로 조작했다고……아니, 서류에 마법이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 검증하는 마법이 또한 있지 않을까? 어떡할까. 흑사병 건을 계속 부정하기란 쉽다. 그냥 전부 네놈들 조작이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며, 아무튼 아니라고 잡아떼면 된다. 하지만 저 정도 증거들을 본 대중은 어찌하는가. 나를 믿어줄까? 바로 앞에서 잭 올란드를 잔인하게 고문한 나를? 아니면 성녀의 말을 믿을 텐가. 답은 분명했다. 당연히 성녀의 말을 신뢰하기 마련이다! 젠장, 잭 올란드! “당신은 흑사병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전염병이 퍼지기도 전에 치료제를 알아냈다는 것, 심지어 대륙의 약초길드를 총동원해서 치료제를 수집했다는 게 무엇보다도 명백한 증거입니다. 당신이 흑사병을 일으킨 주범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병의 특효약을 알았겠습니까?” “…….” “당신은 병을 창궐시키고 그걸 기회로 삼아 이득을 챙겼습니다. 지금도 대륙의 만민이 흑사병에 신음하며 죽어나가고 있습니다……당신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륙을 희생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군. 어떻게 그런 전염병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 주제를 얼른 끝내야 한다. ……그래. 여기서는 다시 한번 인신공격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라시아 성녀의 치부를 낱낱이 밝혀서, 그녀가 당황한 틈을 타, 이번 건을 알게 모르게 묻어버리자. 나에 대한 의심은 어쩔 수 없이 남겠지만 그래도 상황은 반전시킬 수 있다……. 그때였다.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섰다. 이 난리의 주범, 파이몬이었다. “너…….” 하마터면 그녀에게 쌍욕을 날릴 뻔했다. 설마 이 녀석,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몰아세우고 저편의 성녀를 두둔할 속셈인가. 그러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마왕이 같은 마왕을 범인이라 지목하는 것의 파장은 어마어마하리라. 하지만, 그럼 파이몬 너는 빼도 박도 못하고 평원파의 적이 되는 것이다……그런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나를 몰락시킬 거냐. 현명하지 못하다, 파이몬! 산악파의 미래를 생각해라! 너는 마왕군 최대 파벌의 우두머리겠지! 당장 네 년의 계략에 물을 먹인 내가 얄밉더라도 그딴 감정 때문에 대국을 그르쳐서야 우군(愚君)을 뛰어넘어 암군(暗君)이다.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못 챘는지, 파이몬이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내놓은 물건은 전부 조작되었어요.” 그녀가 내뱉은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상대편 성녀도 놀라서 눈이 커졌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정황상 파이몬과 성녀는 서로 밀약을 나눈 게 확실했다. 파이몬은 자료를 건네주고 날 대표연설자로 세우며, 성녀는 준비된 자료를 쏟아내서 날 매장해버린다. 그런 것 아니었나? “……조작이라니. 이 분량의 증거가 전부 조작되었다는 말입니까?” “예. 전부 조작이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한낱 개인이 대륙을 풍비박살 내는 전염병을 창조하겠사와요?” 파이몬이 작게 웃었다. “더군다나 여기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 마왕 중에서도 가장 약하답니다. 그런 자가 흑사병을 마음대로 제조해낼 수 있다면 이미 대륙은 우리 마왕의 손에 들어왔겠지요. 저는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 여기서 선언하건대, 단탈리안에겐 그런 능력이 전혀 없사와요.” “…….” 그라시아 성녀가 파이몬을 노려보았다. 약속한 것과 다르다. 그런 시선이었다. 파이몬은 여유만만하게 웃고만 있었다. 나는 도저히 파이몬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녀가 나를 옹호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위장전법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와 나는 적이니까. 성녀가 말했다. “……어차피 마왕이 마왕을 두둔하는 꼴. 당신의 말을 신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위증이라고 했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위증일 수 있습니까?” “일단 단탈리안이 인간을 고문하는 영상부터가 조작이와요. 저기 나온 인물이 진짜 단탈리안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요?” 성녀가 코웃음쳤다. “목소리도 똑같고 용모도 똑같습니다. 의심할 건덕지 따위는 없습니다.” “폴리모프 마법을 쓴 거겠지요.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용모로 완벽하게 둔갑하는 마법이 가능합니다. 7서클 원소술사인 저 역시도.” 파이몬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녀가 세 문장 정도 되는 길이의 주문을 외우자 붉은 빛이 그녀를 감쌌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든 그 자리에는 파이몬이 아니라 성녀 그라시아가 서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용모를 배끼는 일이 가능하지요.” 그라시아 얼굴을 한 파이몬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다시 팔을 휘저어서 마법을 해제했다. “인간계에도 저만한 마법사는 꽤 많사와요. 제 추측을 말해볼까요. 당신들은 마법사를 동원해서 단탈리안의 얼굴을 한 배역을 준비했어요. 적당한 숲속에 들어가서 연극을 펼쳤겠지요. 그게 진실이랍니다.” “그럼 당신들이 단탈리안을 대표연설자로 세우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어야만 하겠군요!” 성녀 그라시아가 소리쳤다. “설마 배역을 찾고, 마법을 장만하고, 영상까지 찍는 이 모든 과정이――고작 하루이틀 안에 끝날 일이라고 주장할 셈입니까! 저 자가 모습을 드러낸 지 한 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한 시간 안에 이 모든 자료를, 마법 아티펙트와 서류장부를 전부 마련한 것인가요?” 그녀가 조소를 뱉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마왕들이 어떤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내가 예측한 반론이 똑같이 튀어나왔다. 맞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저 증거들이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그렇다고 저 증거들이 가짜라고 공격할 수도 없다.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고 분량이 많으니까. 진퇴양난이었다.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그저 억지스럽게 자기 변호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왜 이제 와서 파이몬이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라시아의 논리를 이겨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나는 파이몬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쩔 생각이냐? 이건 네 녀석이 짜놓은 함정이잖냐. 나를 두둔해봤자 행여나 감읍해서 고마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아하, 그런가. 이렇게 날 도와주는 척해서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게 계획이군.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미련한 수법이다. 그런다고 바르바토스와 내가 널 봐줄 것 같은가. 어리석다. 파이몬이 입을 천천히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여러분은 오래 전부터 자료를 조작했사와요.” “하. 우리한테 예언력이 있다는 겁니까?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대표연설자로 나올 거라고 미리 예측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웃기는군요.” “물론 여러분께는 예언력이 없지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대표연설자로 나올 거라는 정보는 미리 갖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바로 저,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 그 정보를 여러분께 몰래 드렸으니까요.” 내 입이 떡 벌어졌다.   00121 가장 긴 십오 분 =========================================================================                        당황한 것은 성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면서 매섭게 이쪽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인가요, 하고 그녀의 시선이 질책하고 있었다. 파이몬이 시선을 미소로 받아넘기면서 말했다. “삶이란 공교롭군요. 성녀 그라시아.” “……신들께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오, 그럴리가요. 그분들은 소녀를 신경 쓸 만큼 자애롭지 않답니다.” 파이몬이 오른손을 휘저었다. “메모리아-레코르다치오네(memoria-recordatione).” 허공에 영상이 투영되었다. 내가 잭을 고문하던 장면이 비추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파이몬과 그라시아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야트막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석조실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았다. ─ 마왕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고……. ─ 예, 그렇사와요. ─ 증거는 확실해보이는군요.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저희에게 이런 자료를 제공하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풍경 속에서 파이몬이 예의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그라시아. 소녀는 그대들의 습성을 알고 있습니다. 희생양이 필요하겠지요? ─ ……. ─ 평민층의 불만은 점점 극에 달하고, 귀족 사이의 분열은 격심해지며, 군대조차 유지되기 힘들어지고 있사와요. 이런 상황에서 왕실의 권위, 더 나아가 신전의 권위를 지켜나가야 한다……쉬운 일이 아니에요. 성녀 그라시아가 차갑게 대꾸했다. ─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 ─ 맞아요. 똑같은 대답을 돌려드리지요. 왜 소녀가 단탈리안을 몰락시키려 하는지,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소녀가 제안한 것이 당신의 이익에 들어맞는가. 그것만 고려해주시와요. ─ ……좋습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 예. 맹세하죠. 거짓 없는 약속을. 마법 영상이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두 사람이 밀약을 나누는 광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파이몬이 인간계에 대체 얼마나 뿌리 깊은 인맥을 갖고 있는지 소름이 돋았다.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협력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유명한 성녀와 보조를 맞추었다……. 여태까지 나는 파이몬이 그저 인간이라는 종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용사를 위해 행동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인류애가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그 뿌리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치적인 암약이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만한 인맥이다. 이만한 맨파워다. 그걸 단지 나의 무죄를 밝혀주기 위해서 전부 깔아 뭉개버렸다. 이제 그 어떤 인류의 지배자도 파이몬을 신뢰하지 않겠지. 그녀가 신뢰를 회복하기란 절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 자기가 함정을 파두고 왜 나를 도왔는가. 병 주고 약 주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말하자면 파이몬은 나를 구해내는 데 아마도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의 기간을 걸쳐서 인간계에 쌓아둔 신뢰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이성적인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마왕 파이몬.” 성녀 그라시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공존. 그것이 당신의 대의라 생각했건만……아무래도 제가 크게 착각해온 모양이군요.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끝났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사와요.” 성녀가 코웃음쳤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성녀의 모습이 평원에서 사그라졌다. 연설용 마법이 종료되었다. 내 연설을 통해서 인간군의 귀족이 타격을 입었다. 구원투수로 나선 엘리자베트 제3황녀도 쓰러졌다. 마지막 소방수로 등장한 그라시아 성녀마저 무너졌다. 연설전은 인간군의 삼연패로 끝났다. 이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참패였다. 파이몬이 오른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소리쳤다. 그녀의 검은 망토가 화려하게 펄럭였다. “인간들이여! 이것이 귀족 그리고 성직자의 참모습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거짓된 사탕발림으로 민중을 희생시키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거짓된 증거로 누군가를 공격합니다. 그런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것입니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기에 퍼졌다. “신들께서는 여러분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결코 거짓된 삶을 보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살에 흐르는 붉은 피는 거짓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두 손은 거짓을 붙잡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두 발은, 기만에서 눈을 돌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 손은 진실을 붙잡기 위해 있습니다. 우리의 두 발은 진실로 나아가기 위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짊어지고, 반드시 도래해야만 하는 진실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파이몬이 단호하게 외쳤다. “귀족은 기만자이다. 이것이 누구나 아는 진실입니다! 만인이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세계가 도래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입니다! 이 명확한 진리를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으며, 그 어떤 강대한 귀족도, 그 어떤 날카로운 창날도 결코 우리의 진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류여! 민중들이여!――신의 이름으로 투쟁하세요!” 하얀 빛무리가 파이몬과 나를 감쌌다. 우리측의 연설마법도 끝난 것이었다. 나는 파이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내가 뭐라고 힐난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손수건 갖고 계신가요.” “뭐?”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파이몬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나약한 미소였다. “앞으로는 부디 손수건을 상비하세요. 신사의 소양이랍니다.” “뚱딴지 같은 헛소리를…….” 그때 파이몬이 격렬하게 기침했다. 불길한 기침소리가 연신 터지더니 그녀의 입에서 핏덩어리가 토해졌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땅바닥을 향해 각혈했다. 평범한 핏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침할 때마다 검붉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당황해서 녀석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것도 잊고 그녀를 부축했다. 잔뜩 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입구멍을 통해 나와도 괜찮은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파이몬이 내뱉는 것은 더 이상 기침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비명이 섞여 있었다. “어, 어이. 왜 그래? 이게 뭐야.” “마나 역류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바르바토스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마법사에겐 죽을병보다 무서운 놈이지. 서클이 주기를 벗어나서 지 멋대로 날뛰는 건데, 서클이 많은 고위 마법사일수록 존나 좆같이 꼬여버려. 지금 저 년 몸안에선 일곱 개의 서클이 광란의 연회를 벌이고 있을거다. 쯧. 병신 같은 년.” 바르바토스가 지극히 싸늘한 눈초리로 파이몬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전부 이해했는지 몰라도 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젠장, 쉽게 좀 말해! 마나고 서클이고 난 하나도 모른다고!” “한마디로 마법사 인생 쫑 난 거야. 이천 년 동안 수련해온 게 한방에 날아간 거지.……인간이었다면 진즉에 시체가 되고도 남았어. 뭐, 저딴 고통을 견딜 바에야 차라리 뒈지는 편이 낫겠지만. 오장육부가 쌩으로 난도질 당하는 느낌일걸.” “무슨…….”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마법사가 아닌 나로서는 체감하기 힘들었지만 그게 보통 사태가 아니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요컨대 전사로서 살아온 이가 팔다리를 모두 잃어버린다는 얘기 아닌가. 아연실색하는 와중에, 나의 팔에 안긴 파이몬이 재차 피를 토했다. 내 옷이 그녀의 검은 피로 흥건해졌다. 혈향이 코를 가득 메웠다. 인간의 내장과 다르게 악취라곤 전혀 느끼지지 않았다. 오로지 피냄새뿐이었다. “도대체 왜…….” “몰라. 성녀인가 뭔가하는 년이랑 밀약할 때 서클을 내걸고 맹세했나보지. 그래서, 어쩔 거야?” 어쩌긴 뭐를? 내가 시선으로 물었다. 입밖으로 의문을 낼 여유가 없었다. 품안에서 누군가가 실시간으로 내장을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머리상태를 냉정하게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바르바토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창년이 너 물 먹인 거 확실해졌잖아. 뭣하면 여기서 즉결처분해도 괜찮은데?” “즉결처분이라니. 산악파의 반대가…….”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단호한 목소리였다. “며칠 전에야 증거가 없다니까 넘어갔어. 하지만 이젠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증거가 손에 들어왔다. 단탈리안, 너는 고작 서열 제71위에 불과하지만 대표연설자로 발탁된 순간에는 월맹군 자체를 대신하게 된 거야. 즉 너를 모함한 시점에서 파이몬은 월맹군을 배신한 거다.” “…….” “이건 나 혼자의 뜻이 아니야.” 그녀가 턱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르바스와 가미긴을 비롯하여 최고위 마왕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 가미긴. 마르바스 영감까지 동의했어. 제아무리 영감이 중재자 역할을 고집한다 할지라도 이건 너무 명확하거든. 다만 조건을 내걸었다. 단탈리안, 바로 너의 선택에 모든 걸 맡기겠다는 것이다.” 바르바토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는 더없이 무정했다. 재촉하거나 애원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단지 조용히 이쪽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배신당한 것도 너고, 구해진 것도 너다. 판단할 당사자도 어디까지나 너야. 네가 파이몬을 처단하기를 원하면 당장이라도 내가 이 년의 모가지를 따버리겠어.” “…….” “단탈리안.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별히 설명해주지. 이건 절호의 기회야. 지금 기회를 놓치면 파이몬을 처단할 가능성이 낮아져.” 왜, 라고 소리내어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조곤조곤 이유를 말했다. “파이몬 입장에서 변명할 거리가 생기거든. 성녀와 밀약을 맺은 것도 다 적군을 혼란에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성녀가 이쪽을 믿어서 널 모함할 때, 짜잔 하고 파이몬이 등장하여 성녀를 규탄. 결과적으로 인간군의 사기를 대폭 깎아버린다. 그런 시나리오가 생겨버려.” 파이몬의 산악파는 비록 공개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혐의를 벗지도 못했다. 그래서 월맹군의 선봉에 나서는 것이다. 무죄를 입증하고 싶다면 손수 피를 흘려서 증명하라, 그런 결론이었다. 여기서 파이몬이 아군을 위해 자신의 마력까지 포기하면서 적을 속였다. 시나리오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산악파는 완전무결하게 무죄 판정을 받게 된다. 선봉에 섰을 뿐더러, 파벌의 대장이 희생했다.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가. 아직 누구도 그런 시나리오를 주장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진실은 단 하나, 파이몬이 적과 내통했다는 것뿐이었다. 파이몬을 처단하려면 지금이 호기……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기회……. “선택은 네 몫이야.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파이몬을 죽이는 게 이득일까. 아니, 하지만 애당초 파이몬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를 도왔는가.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동정심이라도 느끼리라 기대했을까. 제기랄, 그래. 동정심은 느껴진다. 눈앞에서 시뻘건 내장을 토해내는데 일말의 동정심이 없다면 거짓이다. 동정심이 느껴진다고 해서 나는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다……그럼에도, 동정심이 아니라, 순전히 파이몬의 행동에 너무나도 큰 의구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파이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항, <던전 어택>과 이 세계를 통틀어서 여태껏 몰랐던 점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절호의 기회인가. 아니면 의문의 해명인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가 남겠지. 그렇다면 어느 선택지가 후회를 덜 남기느냐가 문제이다……. “나는…….” 내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00122 가장 긴 십오 분 =========================================================================                        * * *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마왕군은 발레포르의 기동요새를 앞장세웠다. 수십 미터짜리 거성이 움직이면서 돌격하자, 인간군의 전열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애초에 그들은 사기가 밑바닥을 파헤쳤다. 초전은 깔끔하게 월맹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적에게 기사단이 적었다면 초전만으로 승부가 결정됐을 거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감상을 남겼다. 인간군의 징집병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전황이 약간만 불리해지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패주했다. 부대가 패주한다는 것은 단지 한 부대의 퇴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대는 도망치면서 뒤쪽에 있는 아군과 맞닥트리기 마련이다. 전열과 전열이 엉켜서 혼잡해진다. 앞에 있어야 하는 아군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뒤쪽의 부대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혼란을 틈타서 부대를 탈영하는 자도 속출한다……그 결과, 적어도 세 부대 가량이 마비된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전략적 후퇴'라는 구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달았다. 기사단, 혹은 검은 산성 수비군 정도의 정예병이 아니라면 전략적 후퇴 따위는 불가능하다. 후퇴하는 것만으로도 아군의 진용이 간단하게 붕괴해버린다. 한번 뒤엉켜버린 부대들을 다시 나누고 배치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겠지. 그 며칠을 적군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 만무하다. 퇴각하는 군대에게 미래란 없다. 그런 대참사가 곳곳에서 연출된 것이었다. 몬스터에게 죽은 인간보다 독전관에게 죽은 인간이 더 많을 거라나. 인간측 수뇌부들은 지금쯤 연설전의 패배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달았으리라. 오늘 일어난 일을 남 얘기하듯 말하는 데 이유가 있다. 나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줘.” 어림잡아 한 시간 정도 설전을 치른 직후였다. 머리가 띵했다. 게다가 잭 올란드의 반격이라든지 파이몬의 이반이라든지, 나에게는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머리통을 식힐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너무 시간을 끌면 안돼.” “한나절만……한나절이면 되니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파이몬은 마나 역류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감금되었다. 산악파도 평원파도 아닌 중립파의 진중에 실려갔다. 치료보다 격리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았다. 나는 막사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웠다. 잠자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싶었다. 멍멍한 시간이 흘러갔다……. 잭.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버려두었다. 죽이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웬만하면 살아남아서 그 녀석이 어떻게 살아갈지 지켜보고 싶었다. 녀석이 자살했을 때, 최소한의 예우로 시체를 가만히 냅두었다. 그것이 화가 되어 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물러터졌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나는 어딘지 모르게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지냈는지 모른다. 살아남겠다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한 구석에는 그런 느낌이 남아 있었다.……허나 생각해보면 날 죽을 위기로 몰아세운 자는 엘리자베트 황녀도 바알도 아니다. 작센 마을의 리프. 노예상인 잭. <던전 어택>에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놈들. 그런 녀석들이 항상 내 목숨을 위협했다. 물러터졌는가. 정말로 마음 어디에선가 녀석들을 깔보았는가……. 나는 잭을 진짜 인간으로 바라보았다고 여태껏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잭 올란드가 <던전 어택>에서 유명한 캐릭터였다면? 그때도 녀석을 살려두려 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 역시 잘 모르겠다. “상태창.” 하고 중얼거렸다. 일단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내 복잡한 심정을 비웃는 것처럼 띠링,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4    악명: 451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D) 통솔: 34/37  무력: 7/12   지력: 32/37 정치: 35/35  매력: 20/20  기술: 4/12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E), 사격술(E),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3개] [부하: 54개체/260개체] ━━━━━━━━━━━━━━━━━━━━ ━━━━━━━━━━━━━━━━━━━━ [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 레벨이 한꺼번에 10 올랐다. 들인 노력에 비해 조금 적은 것 같았지만, 뭐 단탈리안이다. S급 시나리오와 A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을 때도 레벨이 16밖에 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A급 시나리오를 완파했다. 이 정도로 만족할까. ……그나저나 악명이 엄청나게 올라버렸군. “아이고.” 이건 뭐. 한방에 3000 가까이 상승했다. 아직 악명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했다. 현상금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모험자들도 나를 노리게 된다. 어그로가 끌리는 것이다. 레벨은 고작 10 올랐는데 악명은 3000. 경이로운 교환비가 아니고 뭔가. 이 따위 게임이 현실에 출시되었다면 바로 다음날 누군가가 개발사 빌딩에 불을 지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안 그러면 내가 직접 그럴 거다. 제기랄. 유일하게 위안을 삼자면 직업 레벨. 마왕 레벨이 E에서 D로 올랐다. 능력의 성장한계치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의 종류가 늘어났으리라. 시험 삼아서 오랜만에 몬스터 고용창을 열어보았다. “몬스터 고용창.”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F급, E급, D급, 하고 몬스터 종류를 선택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F급에서 E급으로 승강했을 때는 약간 실망했다. 고블린 투석병, 고블린 창병 등, 대체로 고블린의 종류가 많아졌을 뿐이었다. 나는 D급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선택폭이 조금 더 넓어졌다. ━━━━━━━━━━━━━━━━━━━━━━━━━━ [몬스터명(D)]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고문 슬라임      20    1    2    500골드 -노움(하급 요정)    7    2    5    500골드 -고블린 기병      10   10    8    800골드 -고블린 주술사      5   20    5    1000골드 -좀비(*)        2    5    5    100골드 *마왕 바르바토스(어둠)의 호감도가 50이 되어 특별고용(좀비)이 가능해졌습니다! [소지금: 6102골드] ━━━━━━━━━━━━━━━━━━━━━━━━━━ “으겍.” 비싸! 여전히 비싸다! 고블린 주술사. 허접해보이지만 드디어 마법사 유형의 몬스터가 생겨났다. 거기에다 처음으로 기병 유형의 몬스터까지 나왔다. 이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마법사와 기병이 추가되면 내가 펼칠 수 있는 전술의 종류가 엄청나게 넓어지니까. 이제 전방 골렘-후방 요정으로 버티는 전술을 고집할 필요가 없겠지. 상황에 맞추어 모험자를 유연하게 요격할 수 있으리라……하지만 그래도 비싸! 내가 가진 전재산을 쏟아부어도 고블린 주술사를 겨우 여섯 마리밖에 고용하지 못한다. 이래서야 모처럼 다양해진 병종을 제대로 쓸 수나 있으련지 의문이었다. 단, 특별고용이란 게 새로웠다. 이건 처음 보는 사항이었다. 나는 '좀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좀비에 대한 상세설명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알림창이 띠링! 하고 나타났다. ━━━━━━━━━━━━━━━━━━━━━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특별고용 기능을 활성화 했습니다. 특별고용 몬스터는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고용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특정한 인물과 호감도가 높을 경우에만 고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수행하는 퀘스트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당신에 대한 상대방의 호감도가 높을수록, 더욱 더 특별한 몬스터를 고용하게 될 것입니다! 퀘스트의 유형 및 상대방의 속성에 따라서 당신이 고용하는 몬스터의 종류가 결정됩니다. 원한다면, 당신의 던전을 특정한 속성의 몬스터로만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둠> 속성의 몬스터만 고용할 경우 당신에겐 특별한 효과가 부여될지도……? 단, 특정한 속성의 몬스터가 고용되면 생각지도 못한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몫입니다. 오로지 당신만의 던전을 꾸며보세요! ━━━━━━━━━━━━━━━━━━━━━ “헤에.” 이런 기능이 있었구나. 꽤 재밌다. 마왕들에겐 저마다 특색이 있다. 저기 어마어마한 기동요새를 보유한 발레포르는 <물> 속성에 특화되어 있다. 바르바토스는 당연히 <어둠>이고. 그에 따라서 마왕들이 가진 던전들에도 개성이 있다. 특별고용은 나에게도 그런 개성을 선택할 여지를 준다. 아니, 굳이 개성을 찾지 않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를 고용한다는 것 자체가 좋다. 지금 활성화된 좀비의 경우만 보더라도 능력치야 평범하지만 고용비가 고작 100골드에 불과하다. 거의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다. 돈이 딸리는데 모험자가 들이닥쳤다, 이런 상황에선 응급대책으로 좀비를 무더기로 고용해볼 수 있다. 음. 나쁘지 않다. 파이몬에 대한 일로 흐리멍덩해진 머리가 서서히 맑아졌다. 이런저런 기능이 튀어나오니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악명이 높아지든 말든 나는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조급해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던전 어택>에서 정점을 찍은 플레이어였다. 충분한 재력과 몬스터만 갖추어진다면 세상 어느 영웅이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월맹군이 끝나면 마이 스위트 홈,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지긋지긋한 정치 싸움과는 당분간 작별하는 것이다. 던전을 운영하면서 착실히 나의 힘을 길러야겠지. 말하자면 자숙의 시간……그렇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제법 잘 해나가고 있다. 혹시 엘리자베트 황녀의 호감도를 높이면 근위기사 같은 것을 고용할 수 있지 않을까? “끌끌.” 그럴 리 없지만. 근위기사는 몬스터가 아닐 뿐더러, 애당초 엘리자베트 황녀의 호감도를 올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녀와 나는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은색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시야에 들어오면 부리나케 도망치자. 나의 던전을 꾸밀 생각에 즐거워하던 때였다. “단탈리안 전하.” 막사 바깥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경비병으로 세워둔 묘족의 목소리였다. 웬만하면 날 방해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두었다. 그래서 라우라도 라피스도 이 자리에 없는 것인데. 내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쿤쿠스카 상회의 회주,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접견을 청하나이다.” “음.” 과연. 웬만한 일이라고 판단할 만했다. 쿤쿠스카 상회는 현재 월맹군의 보급을 대주고 있었다. 제1군단에서 제6군단까지, 무려 여섯 개의 군단이 이곳에 집결했다. 약탈만으로 유지하기에는 몸뚱어리가 지나치게 거대해졌다. 내가 자세를 바로하고 말했다. “들라 하거라.” “예.” 이번 모략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철저하게 나를 지원해주었고, 이렇게 군단들이 모일 경우에 보급을 담당하기로 미리 합의했다. 어느 군대에서나 물주는 소중한 법. 이바르의 지위는 암묵적으로 고위 마왕급으로 대접받았다. 그런 자가 접견을 청하는데 함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막사의 휘장이 걷어지면서 늙은 신사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탈리안에게 영광을.” “예는 생략하도록. 로드브로크.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전하. 전하께서는 소인의 소망을 훌륭하게 들어주셨습니다.” 이바르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제 소망은 마왕군의 분열.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소망을 전하께서는 한번에 꿰뚫어 보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여전히 의문스러우나, 전하께서 소인과의 약속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이행하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삼천 년의 생애를 허망하다 여기며 하루하루를 시체처럼 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지난 삶이 한 순간을 위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소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전하께 가신의 예를 올리고자 합니다.” 이바르가 벌떡 일어나더니 땅바닥에 오체를 투신했다. “군신의 예를 허해주시옵소서.”   ============================ 작품 후기 ============================   00123 가장 긴 십오 분 =========================================================================                        내가 눈을 깜빡였다. 이바르가 부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이바르는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에다가 그 본인은 강력한 진조 흡혈귀였다. 재력과 모략,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내 막부에 들어온다면 틀림없이 큰 이익을 안겨주겠지. 하지만……이야기가 너무 좋은데. ‘상태창.’ 이바르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돌다리를 두들겨보는 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바르의 상태창은 단지 체력-공격력-방어력만 간단하게 표시하는 형태로 떠올랐다. 호감도가 20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거짓말이로군. 현재 내 막부에 들어온 인물은 라우라와 라피스. 둘 다 호감도가 50을 찍은 다음에야 아군으로 영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스템상의 문제였다. 호감도 50은커녕 20도 채우지 못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갑자기 신하가 되기를 청하다니, 꿍꿍이가 뭔지 의심스러웠다. ‘하아…….’ 도대체가 내 주변에 있는 놈들이란 왜 다 이따구로 생겨먹었냐. 어떤 년은 자그마치 일 년 전부터 내가 안 했다고 안 했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건 네가 한 짓이라면서 모함하지 않나, 어떤 녀석은 진실을 알면서도 파벌의 균형을 맞추겠답시고 은근히 압박하지 않나, 또 어떤 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살인을 권유하지 않나. 죄다 뱃속에다 구렁이를 키워도 열 마리는 키울 것 같은 위인 투성이였다. 이제는 또 한 녀석이 속엔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감복했다느니 삶이 어쨌느니 구라를 까고 있었다. 제발 단 한 순간이라도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을까? 아니, 내가 할 소리는 아니군……때때로 나는 라우라나 라피스 앞에서도 교묘하게 군다. 바르바토스는 말할 것도 없고. 나만큼 정치적인 새끼도 없겠지. 결국 까마귀 옆에 까마귀인가……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이보게. 로드브로크 경.” “예, 전하.”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삼천 년을 살아온 지혜는 가히 경이로울 터. 마왕에게 무조건 승복해야 하는 마인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자네는 혼을 인형에 옮김으로써 자유의지를 되찾았네. 적당히 마왕에게 굴복하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마인과는 차원이 다르지.” “황공하옵니다.” “허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에 실망스럽군. 왜 나에게 거짓을 고하는가?” “…….” “지난 반 년 동안 우리는 실로 멋들어지게 춤을 추었네. 자네와 쿤쿠스카 상회가 없었다면 월맹군이 이곳에 집결하지도 못했겠지. 알겠는가?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마왕과 마인이 아닐세. 동반자야.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동료이지.” 이바르는 여전히 몸을 엎드리고 미동하지 않았다. “만약 자네가 진심으로 가신이 되고자 했다면, 그 몸이 아니라 진실된 육체로 찾아왔을 것이다.” “전하, 오해입니다. 시기가 다급하여 미처 본래의 육신으로 찾아뵙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시기가 다급하긴 왜 다급한가.” 내가 약하게 웃었다. “지금 당장 군신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제라도 여유가 생긴 다음 예를 갖추어 찾아오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런데도 이런 시기에 다급히 왔다라……자네의 목적은 지금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다른 무언가에 있겠지. 아닌가?” “…….” “파이몬이군.” 뻔할 뻔 자였다. 사실 이바르는 나에게 책 잡힐 게 하나 있다. 파이몬이 장만해서 성녀에게 넘겨준 장부가 그것이다. 장부는 어디까지나 쿤쿠스카 상회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서로, 당연히 타인에게 함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엔 단지 흘러가는 수준을 초월해서 계약자인 날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네를 부하로 삼는 대신 파이몬을 죽여달라. 그렇게 청탁할 속셈인가? 그녀는 쿤쿠스카 상회를 통해서 장부를 얻었다. 하긴, 증거를 박멸하고 싶겠지.” “전하, 사실무근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소리 질렀다. “자네는 언제나 그런 식이야! 청문회 건도 그러했다. 그 늙은 고블린이 감히 혼자서 날 물 먹이려 들지 않았을 터, 보나마나 자네가 중간에 개입했을 것이다. 헌데도 책임은 고블린이 혼자서 다 떠안고 자결했어. 자네가 청문회에 대해서 나한테 진지하게 사죄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나 몰라라 외면했지!” 말을 내뱉다보니 속에서 열이 뻗쳤다.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을까? 아니다. 지금은 흥분해야 할 때가 맞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게 약점이 될까봐 그토록 두려웠는가? 나를 살인멸구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이번에는 파이몬까지……하! 그대의 처신술이라는 것도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소인은…….” “자기 잘못은 전부 남에게 떠맡기고, 떠맡기기 곤란하면 아예 누군가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여왔는고? 마왕이 괴물이라면 자네는 무엇인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생명체로군! 흡혈귀! 다른 자의 피를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박쥐 자식이!” 이바르가 상체를 들었다.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 전까지 정숙하고 냉정한 노신사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증발했다. 이바르의 눈은 용암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다면, 어찌하라는 말인지요!” 이바르가 억눌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손한 감정을 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간파당하고, 반항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그것이 마왕에 대한 마인의 선천적인 한계입니다! 당신은 마인으로 태어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릅니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노와 슬픔, 억울함. “한때는 당신 같은 이들에게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배신뿐! 마왕에게 마인이란 어차피 자신보다 격이 떨어지는 애완동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인을 위해 대륙을 정벌한다 소리높여 주장하지만 그 대륙에서도 마왕은 지배하고 마인은 영원히 지배 당하겠지요!” 이바르가 수천 년의 한이 담긴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말해보십시오! 마인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까! 누군가가 죽으라 명령하면 아무리 두려워도, 아무리 무서워도 죽어야만 하는, 그런 기계와 같은 존재입니까! 수백 년 동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익혀도……소중한 가족이 생겨나도……단지 상대가 마왕이라는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내가 이바르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코앞까지 갖다대고 으르렁거렸다. “마인으로 태어나서 억울한가? 웃기지 마라. 태어난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나라고 해서 이런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아는가!” “크……!” “네가 얼마나 불행한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어. 완전히 관심 밖이다. 네놈이 네놈의 불행에만 허덕이듯이 나 또한 나의 불행을 짊어지기에 바쁘다. 하지만 말이지, 네놈처럼 자기 불행을 완전히 엉뚱한 사람한테 덧씌우는 녀석을 보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다!” 쿵, 하고 그의 이마에 박치기했다. 엄청나게 아팠다. 나보다 무력 능력치가 높은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방 날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난 네놈을 배신한 그 마왕이 아니다! 나는 단탈리안! 오직 단탈리안이다! 네놈이 어떤 마왕 새끼한테 속아넘어서 일족의 목숨을 갖다바쳤든, 첫사랑을 잃어버렸든――그 마왕 새끼랑 나를 똑같이 여기지 말란 말이다!” 이바르의 눈에서 경악이 번졌다. “어, 어떻게…….”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해라. 결점이 생겼으면 덮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함께 나아갈 생각을 해라. 그게 동료를 대하는 방법이겠지! 그 정도 태도도 취하지 않으면서 군신이니 뭐니 떠드는 것은 역겨운 자기기만이다!” 멱살을 잡은 손으로 이바르를 힘껏 밀었다. 그는 몸이 뒤로 넘어졌다. “썩 꺼져라! 물렁한 우정을 논할 거면 차라리 완벽한 적의로 대하는 편이 낫다.” “…….” 이바르와 나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한동안 서로 노려봤다. 이바르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시선에 분노뿐만 아니라 당혹감까지 서렸다. 그런 눈길로는 아무도 제압하지 못한다. 결국 이바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일어서서 힘없이 막사를 나섰다. “후우…….” 내가 깊이 심호흡했다. 레벨이 오르면서 새로운 기능을 찾았다고 즐거워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기랄, 그렇지 않아도 파이몬 때문에 심란한데 별 녀석이 뒤통수를 때리려 온다. 어차피 이익과 이익으로 얽힌 사이다. 반대로 말해, 더 큰 이익이 보인다면 얼마든지 배신할 관계이다. 어쩌면 쿤쿠스카 상회에서 의도적으로 흑사병 관련 장부를 유출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이몬을 정치적으로 말살하는 한편, 나까지 한데 묶어서 처리해버리자……그랬을지 모른다. 정치란 게 이렇다. 더럽다. ‘파이몬은 살려둔다.’ 지금 결심했다. 이번 월맹군 전역, 라피스와 내가 미네르바 작전이라 명명한 전쟁에서 쿤쿠스카 상회는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라피스는 몰라도 이바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언제 배신을 때릴지 모를 놈, 아니 년이다. 목줄이 하나 필요하겠지. 파이몬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이바르를 얌전하게 만들 거다. 파이몬은 산악파의 수장이고, 나는 평원파의 핵심인사. 언제고 바르바토스를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아무리 쿤쿠스카 상회가 마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할지라도 산악파와 평원파 양쪽의 압력을 견뎌내기란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면 파이몬도 이바르에게 물 먹은 신세 아닌가. 청문회에서 이바르가 배신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날 이겼을 거다. 그 점을 부각시켜서 한번 설득해보자. 무얼,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거다.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지 못하면 이쪽이 손해이다……. 척추에 고인 골수까지 빨아먹어주지. 막사 바깥에서 묘족 호위병이 말했다. “전하. 마왕 시트리가 접견을 청하나이다.” “확 모가지를 비틀어버릴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쉴 팔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이 녀석들은 상식이 없나? 설전도 말로 하는 진검승부이다. 나는 요컨대 월맹군의 선봉전을 치르고 막 돌아온 장수였다. 이제 휴식을 취하겠다고 들어온 사람을 뭐 이리 달달 볶으려고 쳐들어오는가? “나중에 다시 찾아오라 말하거라!” “예, 전하……시트리 전하. 죄송하지만.” 시트리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정말로 상식을 모르는 작자였다. 막사 바깥에서 말싸움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시트리가 막무가내로 안에 들어왔다. 나는 손님의 예의를 전혀 모르는 작태에 크게 소리칠 뻔했으나, 시트리의 모습을 보고 그만 어이가 상실했다. “용서해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시트리는 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덥썩 땅에 절했다. 요즘은 날 만날 때 절부터 하는 것이 유행이냐?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저기, 시트리 님……?”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되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파이몬만은……파이몬 언니의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녀가 땅바닥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예의상 박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온힘으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무심코 이쪽이 겁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성노예가 필요하시지 않나요? 저, 이래봬도 그쪽 방면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어요. 정말이예요.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파이몬 언니만은!” “……일단 옷부터 입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트리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 작품 후기 ============================   00124 가장 긴 십오 분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시트리는 거대한 가슴과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나이스 바디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폼이 불쌍해서, 나는 근처의 담요를 주워 덮어주려 했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시트리는 아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막사에 들어와 이 광경을 본다면 마치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게 말이다. 그리고……나는 보았다. 무언가가 달려 있다! 시트리의 아래에――여자라면 결코 갖고 있지 않아야 할 것이, 그것도 엄청나게 큼직한 물건이, 자신의 존재감을 우렁차게 드러내고 있었다! “흐억!”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펠라티오인가요? 펠라티오를 바라시나요?” “아니, 됐습니다만!?” 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러고보니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는 양성애자라는 설정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본인이 '양성'일 줄은 전혀 몰랐다. 그 따위 설정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시트리는 흑발이 풍성한 미인이었다. 가슴이 크고, 허리가 가늘고, 엉덩이가 부풀어오른, 말 그대로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여자였다. 다만 나온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그 이질적인 거포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길이, 약 15cm……원래 세계의 흑형조차 식겁할 만한 크기……. 시트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반짝이면서 말했다. “펠라가 아니라면……섹스, 오로지 섹스를 바라시는 거군요. 괜찮아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뚫는 게 취향이든, 뚫리는 게 취향이든, 아니면 양쪽 모두 취향이든, 냉큼 말씀만 해주세요!” “히이이익!?” 바로 눈앞에서 가슴이 출렁거렸다. 실로 훌륭한 가슴이었다. 그 아래에 파묻히면 분명히 천국의 기분을 느끼겠지. 하지만 성욕이 끓어 오르긴커녕 생명의 위기를 맛보았다. 저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학창시절 모종의 따돌림으로 인해 여성혐오증에 걸려버린 미친 과학자가 세상 모든 여성들의 생식기를 파멸시키고자 악의적으로 창조해낸 괴물이었다. 여성의 생식기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또한 남성의 그곳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는 그만 간과해버린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류의 재앙……창조자 본인조차 파멸로 몰아가는 핵무기와 같았다. “죽어도 싫습니다!” “어, 어째서죠? 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데요!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라면, 저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핫.” 시트리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몹시 껄끄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설마해서 여쭙는 거지만, 혹시 동물에 성적인 흥분을 느끼시나요……? 아무리 저라도 그 취향까지 만족시켜 드리긴 어려운데……아니, 이해는 하지만요. 죄송하지만 동물옷을 입는 걸로 타협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동물 울음소리도 열심히 따라할 테니까요.” “전 완전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습니다!” 시트리의 얼굴에 의문이 한가득 떠올랐다. “그러면 왜 저를 마다하시는 거죠? 하나만 있는 것보다 두 개가 전부 있는 게 당연히 더 좋은데…….” “세상사를 덧셈하듯이 단순히 재단하지 마십시오!” 무슨 1+1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저기, 자랑은 아니지만 제 여성기는 훌륭하다구요?” 시트리가 내 허벅지에 가슴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제 의지대로 주름 하나하나를 제어할 수 있어요. 호두껍질을 파괴할 정도로 강하게 조일 수도 있고, 푸딩처럼 부드럽게 감싸안을 수도 있어요! 한번만 맛보시면 다른 애랑은 절대 못 주무실걸요. 진짜, 진짜예요!” “…….” 아주 잠깐. 정말로 아주 잠깐 끌렸다. 하지만 고개를 젓고 얼른 정신 차렸다. 설령 시트리가 지상 최고의 명기(名器)라 할지언정 15cm짜리 거포가 달린 여자와는 자고 싶지 않았다. 이건 쾌락 이전에 인식의 문제였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싫습니다.” “아! 방금 망설이셨죠? 그랬죠? 제 얘기에 혹하셨지요?”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당장 제 막사에서 나가주십시오.”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애당초 파이몬은 최고위 마왕입니다. 그런 인물의 목숨을 단지 몸뚱어리로 무마해보려 하다니 언어도단. 오늘 얘기는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다, 단탈리안 님.” 시트리가 나의 신발에 머리를 조아렸다. 쫍, 쫍 하고 그녀가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발에다 입술을 갖다대다니. 서열 제12위의 마왕이 서열 제71위의 마왕한테 애걸복걸하는 수준이 지나쳤다. 그래서 난감했다. “부탁드립니다. 파이몬 언니는……단탈리안 님이 잘 모르실 뿐이지, 지금까지 마왕군에 많은 공헌을 했어요. 염치를 모르는 분이 아니에요. 단탈리안 님이 은혜를 배푸시면 틀림없이 몇 배로 갚을 거예요…….” 만약 파이몬을 죽이면 산악파 전체가 복수하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당당하게 나왔으면 난감하지 않았으리라. 서열 제12위의 마왕에게는 이쪽을 협박할 만한 지위와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트리는 파이몬과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어떻게든 용서해달라며 지극히 낮은 자세로 청해왔다. 한 나라의 군주가 일개 평민한테 발에 입을 맞춘 셈이었다. 게다가 알몸으로. 이렇게 나오면 설혹 내가 파이몬을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을지라도 재고해봐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저쪽에선 내가 이미 파이몬을 살리자고 마음먹은 걸 모른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까. “으음.”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고심에 빠진 척 연기한 것이었다. 그러자 시트리는 내가 파이몬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는 거라 믿고, 더더욱 애처롭게 애원했다. “파이몬 언니만이 아니에요. 당연히 저도 보은하겠습니다. 제 육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수단으로, 금전이든 뭐든 마련해서 드릴게요.” “…….” “훌륭하게 교육받은 시녀처럼 당신을 받들겠습니다. 믿어주세요!” “시트리 님.” 내가 목소리를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파이몬은 예전에도 저를 모함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공개적인 사과와 배상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파이몬의 위상을 생각해서 단지 사적인 사과만을 받았습니다. 이미 한 번 용서한 상대입니다.” “그, 그게…….” “한 번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또 한 번 일어나기 마련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절대로 그럴 일이 없게 만들겠습니다!” 시트리가 다시 땅바닥에 이마를 망치질했다. “후우.”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시트리 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이번 건에 대해서는 넘어가지요.” “저, 정말입니까!?” 시트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이마에서 피가 잔뜩 흘러내렸는데 만면에 미소를 지으니 다소 무섭기도 했다. 그녀는 이제는 양손으로 나의 신발을 붙잡고 거기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감사합니다! 단탈리안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당연하지요!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저 시트리,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이, 제가 말한다면 소원을 두 개 들어주십시오.” “소원 두 가지요?”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시트리 님한테 원하는 것이 딱히 없습니다. 그저 성심성의를 다해서 사죄하는 모습에 파이몬을 용서하고자 결심했을 따름입니다. 지금 당장 뭐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훗날, 제가 시트리 님의 도움이 필요해졌을 때 저를 두 번 도우십시오.” 시트리가 자신만만하게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 정도야 너끈히 들어드릴게요!” “아시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들어주어야 합니다. 설령 제 소원으로 인해서 파이몬과 적대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어, 그건…….”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제딴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말 그대로 무엇이든. 무엇이든 두 가지의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좋습니다. 기대하지요.” “저의 힘이 닿지 않아서 소원을 들어드리는 데 실패하면 죽음으로 보상하겠어요. 파이몬 언니가 없다면 어차피 제 삶에도 의미가 없어요.” 시트리가 지극히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단탈리안 님은 파이몬 언니의 목숨과 제 목숨, 두 개의 생명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원 하나에 목숨이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제 이름과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요. 단탈리안 님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두 개를 실현시키겠다고.” 시트리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흐뭇했다. 단지 공짜로 막강한 마왕의 언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다르게 시트리는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그저 파이몬을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행동했다. 그 순수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까 전까지 이바르와 벌인 정치적 수싸움에 질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이지 않은 인물은 없겠는가, 하고 우울해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시트리가 이렇게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여주니――칭찬도 욕도 아니다――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순진한 상대방한테서 정치적인 이득을 얻어낸 나는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는 쓰레기겠지. 하하하. “하지만, 정말로 제 몸은 필요없어요? 끝내줄 텐데. 눈 딱 감고 한번만 즐겨보는 것이…….” “필요없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그건 진짜로 싫다! * * * 밤이 되고 청문회가 열렸다. 피고는 물론 파이몬. 그녀는 마력이 꼬여 척봐도 상태가 심각했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청문회에 참석했다. 안색이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는데, 그녀는 청문회 내내 말을 한 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마왕들이 한자리에 모인 곳에서 나는 원고로서 파이몬의 죄과를 물었다. 놀랍게도, 내가 청한 파이몬의 죄과는 무죄.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시, 비록 파이몬이 소인을 적대한 것은 확실하나 정상참작의 이유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산악파는 오늘 전투에 선봉에 섰으며 마왕군의 승리에 일조했습니다. 파이몬은 나중에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마왕군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내가 마왕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든 용서하지 않든, 죄는 죄로서 그대로 남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얼룩과 같습니다. 그러나 죄와 똑같은 무게의 선행을 베풀어 보상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저는 산악파와 파이몬에게 자비로운 무죄가 선언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끝마쳤다. 산악파와 중립파가 모인 방향에서 박수가 터졌다. 대조적으로 평원파는 심드렁했다. 장본인인 내가 이렇게 나오니까 참고 봐준다, 라는 아우라가 적나라했다. 특히 벨레드 형님은 청문회 내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바르바토스는……아예 하품을 하고 있군 그래. 저 녀석은 진짜 거물이야. 존경스럽다. “실로 관대한 처사에 나 개인적으로도 감사한다.” 사회자인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말했다. “아가레스, 가미긴, 바르바토스 그리고 본인은 여기 단탈리안이 내리는 결정을 무조건 존중하기로 결의했다. 혹시 반대 의견을 가진 자 있는가?” 최고위 서열의 마왕들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소리였다. 그 얘기를 듣고도 간 크게 딴죽을 걸 양반은 아무도 없었다. 마르바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본 청문회에서 파이몬의 무죄를 선언하는 바이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오늘 우리 월맹군이 승리한 것도 사실. 약소하지만 본인이 연회를 준비했다. 모두 마음 편하게 즐겨주기를 바란다.” 청문회가 순조롭게 끝났다. 산악파와 중립파 모두 기뻐할 만한 결과였다. 그들이 나에게 장차 호의적으로 대접해주리라 기대해도 좋겠지. 무엇보다도 이로써 나 단탈리안을 적대하는 세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산악파는 나에게 은혜를 입었고, 중립파도 나한테 빚을 졌으며, 평원파는 그냥 내 아군이었다. 생존하는 데 적이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벨레드 형님이 내 어깨를 안으면서 평원파 쪽으로 데려갔다. 그 전에 문득 파이몬 쪽을 바라보니, 마침 파이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한다는 뜻일까……. 그렇게 나의 첫 전쟁이 끝났다. 월맹군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쟁은 이제서야 초입에 들어간 것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내 입장에선 끝이다. 더 이상 내가 발벗고 나설 일이 없다. 인간군과 마왕군의 주력을 부딪히게 한다는 계획은 이미 성공했고――그게 이번 전쟁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초전에서 인간군이 패배했지만 저들은 아직도 전부 집결하지 않았다. 프랑크 제국의 원군, 사르데냐 왕국의 원군, 버니시아 왕국의 군대 등, 넉넉 잡아서 십 만의 군대가 지금도 열심히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월맹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쳐줄 것이다……. “자아, 단탈리안! 우리의 영웅! 영웅답게 쭈우욱 들이켜보라고!” “들이켜라! 들이켜라! 들이켜라!” 설전에서 약간 과하게 이겨버렸다 싶기도 했지만, 무얼. 살다보면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지금은 벨레드 형님이 대접에다 따라준 이 포도주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보자.   ============================ 작품 후기 ============================   ─ 챕터 <가장 긴 십오 분> END. ─ 제2부 END. 00125 (단행본 제6권 이후) 로마의 아침 =========================================================================                      단행권으로 <던전 디펜스>를 보신 분께서는 125화, 즉 이번 편부터 이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누군가는 죽는다.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중에 분명히 죽어야 할 상황인데도 살아남고, 계속해서 살아남는 인간이 극히 드물게 있다. 피로 된 진창에서 헤어나와 호젓하게 두 발로 선 이들을 가로되 영웅이라 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발 밑바닥에 핏물을 진득하게 묻힌다. 월맹군 전쟁은 평야를 피로 물들였고, 필연적으로, 영웅들의 향연을 불러 일으켰다. “또, 또 그 황녀 새끼냐!” 바르바토스가 흥분해서 지휘봉을 두 쪽으로 부러트렸다. 마왕들이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일찍이 초전의 연설전에서 무참하게 패배한 그녀는――마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전장에서 미쳐 날뛰었다. 처음에는 별달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소수의 근위대만 이끌고 움직였다. 마왕들은 애송이 황녀가 부하 장병의 신임을 죄다 잃어버렸고, 간신히 근위기사만 통솔하고 있다며 비웃었다. 비웃음에 동참했던 마왕 중에 세 명이 죽었다. 황녀가 이끄는 별동대는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가장 절실한 순간을 노려서 나타났다. 인간군의 약한 부분을 메꾸었고 월맹군의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왔다. 처음에 월맹군의 마왕들은 애송이 황녀가 꽤나 한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어서자 월맹군의 모든 마왕이 깨달았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괴물이라고. “절대로 세 배 이하의 병력으로는 저 년이랑 맞붙지 마라!” 바르바토스가 다급하게 선포했다. 고작 천 명 남짓한 별동대에 삼천에 가까운 병력이 희생된 직후였다. 황녀의 비정상적인 강력함을 알아차린 것은 월맹군뿐만이 아니었다. 인간들도 아군에 희대의 천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녀의 별동대는 날이 갈수록 몸집이 불어났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만약 엘리자베트 황녀가 인간군 전체를 통솔했다면 월맹군은 무너졌으리라. 그녀가 귀족들 사이에서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마왕들에게 천운이었다. 황녀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제국군에만 영향을 끼쳤다. 그것만으로 전황을 뒤집기란 힘들었다. 월맹군도 무능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크흐.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보실까!” 제파르와 벨레드가 황녀를 전담하기 시작했다. 명실상부 평원파의 에이스인 두 마왕이었다. 제파르가 방패, 벨레드가 창이 되어 황녀를 상대했다. 일진일퇴의 혈전이 이어졌다. 전쟁터에 다시금 균형이 찾아들었다. “젠장. 저 년을 진즉에 밟아뒀어야 하는데……!” 바르바토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그래봤자 배는 떠난 지 오래였다. 황녀를 제외하고도 전장의 꽃은 여럿 피었다. 그중에서 가장 화려한 꽃은 단연 브르타뉴 왕국의 젊은 군주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소가 멋진 이 여왕은, 이제 열아홉 살의 나이로 친히 왕림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역시 던전 어택의 주요 인물인데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꽤나 깊다. 딱히 좋아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음……. 원래 라우라의 주군이 될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게임에서 라우라는 브르타뉴 왕국의 철혈재상에 오르니까. 당연히 브르타뉴의 여왕인 앙리에타를 군주로 섬기는 것이다. 나는 앙리에타가 활약한다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올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꼭 남의 것 훔친 도둑이 집주인 소식을 듣는 기분이었다……. 여하간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나는 전쟁통에 부상을 심하게 당했다. 말에서 낙마하여 오른쪽 다리가 제대로 부러졌다. 이 부상 때문에 나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지위하는 부대라 해봤자 기껏해야 오십밖에 안 되었다. 이십 만 대군이 격돌하는 장소에서 오십 따위는 한줌의 모래에 불과했다. 마왕들은 '지금까지 수고했으니까 쉬어라' 하는 분위기로 날 떠나보냈다. 물론 말에서 낙마한 것은 내 자작극이었다. “전쟁터에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하하.” “……가끔 보면 주군은 다소 사악하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아예 마왕성으로 돌아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마왕성에 모험대가 쳐들어왔다고 변명하면서. 실제로도 쳐들어왔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모험대라는 것이 실은 비밀리에 나한테 부탁받은 마을사람들일 따름이었다. 아니, 목적도 달성했겠다. 더 이상 험난한 전장에서 수고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눈을 빛내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자고로 들어갈 때와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얼른 도망치도록 하죠.” “하아…….” “자아, 라우라. 떳떳하게 걸으십시오. 우리의 사랑스러운 고향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숨 쉬는 라우라를 억지로 끌고 귀경했다. 안녕, 바르바토스. 안녕, 엘리자베트! 부디 열심히 싸워주려무나. 너희가 열심히 싸울수록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높아지니까. 진심으로 너희의 건투를 빈다. 우리는 거의 반년만에 마왕성에 돌아왔다. * * * 마왕성에 돌아오고 이주일은 두문불출했다. 스스로 나에게 자그마한 휴가를 준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 일 년 동안 너무 열심히 일했다. 난 원래 천성이 게을렀다. 목숨이 위험하다 싶을 때만 허둥지둥 일한다. 그리고 이제 목숨의 위기가 지나갔다! “으읏, 주군……아, 아까도 했는데. 또오.” “내 잘못이 아닙니다. 라우라의 몸이 너무 예쁜걸요. 해도해도 또 하고 싶은걸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흐응, 그건, 억지……흐읏!” 그래서 섹스 삼매경에 빠졌다. 군중에 있을 때도 적당히 남의 눈을 피해서 바르바토스나 라우라와 떡을 쳤지만, 역시 전쟁통이라 그런지 속전속결로 끝냈다. 자주 하지도 못했고. 왜 병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적군의 도시를 잔인하게 약탈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그동안 쌓인 욕구를 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전쟁터에 창녀가 꽤나 많이 따라다니긴 한다. 병사들은 창녀를 통해서 성욕을 푼다. 그럼에도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중압감이 그들을 억누르겠지. 보름 내내 라우라와 나는 아예 알몸으로 다녔다. 옷을 입어봤자 곧바로 벗기 마련인데 굳이 입을 필요가 없었다. 마왕방에서도, 던전의 동굴에서도, 지하 연못에서도, 우리 둘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교접했다. 어떤 날에는 일곱 번 섹스하기도 했다. “이건 이성적 존재자의 생활이 아니다!” 결국 라우라가 폭발했다. “섹스는 아무리 많아도 하루에 한 번! 일주일에 여섯 번! 적어도 하루는 쉴 날을 달라! 이래서야 소녀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하지 않는가. 최근 들어서는 배가 저릿해서 걸어다니지도 못할 지경이다!” 내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니……너무 적습니다.” “애, 당, 초! 주군의 정력은 지나치게 비범하다! 비상식적이다!” 라우라가 암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무슨 발정기에 걸린 오우거인가, 주군은? 가장 적은 날에도 아침저녁으로 네 번은 몸을 섞는다……소녀가 아무리 주군 이외에 다른 남자와 잔 적이 없다 해도 이게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봐라, 주군!”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성기를 벌렸다. 그녀는 지금도 알몸이었다. 털 하나 없이 새하얀 생식기에서 탁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줄줄이 흘러나왔다. 동굴 바닥에 정액이 떨어져 홍수를 이루었다. “이게 주군이 한 짓이다! 소녀의 뱃속에 주군의 정액이 마를 날이 없다. 복부에다 온수를 한 바가지 집어넣은 기분이라면 이해하겠는가. 시도때도 없이 박아대니 소녀의 배는 이제 곧 터져버릴 지경이다.” “에이, 과장인 거 같은데요.” 그보다 라우라. 당신은 공작 가문의 귀하디 귀한 아가씨 아니었습니까? 공작영애가 직접 손가락으로 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니. 어쩌다가 이리도 천박하게 타락했는지, 저는 라우라의 군주이자 교육자인 어른으로서 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주군이 날 이렇게 만들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내 팔뚝을 붙잡았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농담도 뭣도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 소녀는 복상사해버린다! 주군은 유일한 가신인 소녀를 죽일 셈인가. 적당히 펠라티오로 만족할 줄도 알아달라는 말이다. 오늘 아침도 네 번! 무려 네 번이나 입으로 빼줬는데도, 이 발정난 오우거 남자는……!” “하, 하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험악한 안력에 밀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라우라가 너무 맛있어요. 속은 쫄깃쫄깃하고, 가슴은 부드럽고. 엉덩이도 만지면 반들반들해서 기분 좋고……일단 한번 박으면 막 쪼여오는 기분이라니까요?” “소녀가 알 게 뭔가!” 사실 정말로 알 게 아니긴 했다. 나는 억울해서 항변했다. “나만 좋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라우라도 실컷 즐겨놓고는 이쪽만 탓하다니, 비겁합니다.” “물론 소녀도 좋다. 너무 좋아서 문제인 거다! 일단 한번 했다 하면 서른 번은 가볍게 가버리니 도대체 소녀보고 어쩌라는 얘기인가! 주군, 알겠는가? 자그마치 서른 번이다. 하루에 세 번만 성교해도 소녀는 그날 백 번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라우라가 머리를 쥐어잡으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백 번 가면 어떤 느낌인지 아는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하지 못한다……아까 전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내가 밥을 먹기나 했는지도 아리까리하게 된다는 말이다……그런 상태가 벌써 보름……천국 같은 지옥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아니, 백 번은 차라리 낫다. 이백 번 가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 혼잣말하면서 암울한 아우라를 내풍겼다. 끄응. 저렇게까지 나오니까 왠지 내가 잘못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라우라는 아직 열일곱 살. 확실히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랑 보름 내내 밤낮 가리지 않고 섹스했다고 어디 가서 밝히면, 십중팔구 죽일 놈이라고 욕을 얻어먹지 않을까. “바르바토스 군단장……아니, 하다못해 라피스 경이라도 있어야 한다.” 라우라가 서글픈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최소한 두 명이라도 되어야 주군의 막돼먹은 하반신을 감당할 수 있다. 솔직히 소녀로서는 서너 명은 원한다마는……으으. 라피스 경은 언제 오는 것인가?” “글쎄. 라피스는 일단 쿤쿠스카 상회의 직원이니까, 음. 그쪽 일이 끝나야겠죠.” 라우라가 털썩, 하고 동굴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좌절하면서 말했다. “라피스 경, 제발 빨리 돌아와주게. 이토록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린 적은 소녀의 짧은 생애에서 여태껏 없었다네…….” 으음. 애초에 라피스와 나는 그런 관계도 아니고……뭐라고 할까. 지금 라우라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자세가 마침 엉덩이를 들어올린, 그러니까 후배위와 비슷했다. 잘 익은 사과처럼 엉덩이가 딱 좋게 둥실했다. 나는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봐라. 내 잘못이 아니다. 라우라는 천성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교태를 품고 있다. “좋습니다. 성교를 제한하죠. 하지만 그럼 저는 뭘 합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마왕성은 초라하다고요. 라우라랑 자는 것 외에는 딱히 즐길거리가 없습니다.” “주군은 마왕성 주변의 마을들을 복속시키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여전히 좌절 포즈를 취하며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주군은 그들의 영주가 된 셈이다. 주군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마을들도 발전하거나 쇠락하겠지. 이참에 마을들을 통폐합하면서 본격적으로 영지를 키워보는 게 어떠한가.” “헤에. 영지라.”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라우라의 말을 들어보니 어딘지 모르게 흥미로울 것 같았다. 마왕성, 그리고 그 주변에 널린 마을인가……. 어쩌면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덥썩. “……주군?” “말하세요.” “소녀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지금 주군은 내 엉덩이를 잡고 있다마는.” “착각이 아닙니다.” “설마 또 한판 뛸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음. 정액이 윤활유 역할을 해주겠네요.” 라우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오늘도 벌써 네 판을 뛰었다! 제발, 하다못해 두 시간 후에!” “엉덩이가 예쁘게 생긴 라우라가 잘못한 겁니다.” “흐, 흐아아앙!?” 나는 힘껏 허리를 밀어넣었다. 음침한 동굴에 교성이 가엽게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00126 로마의 아침 =========================================================================                        그 후로 라우라와 두 번을 더 하고, 나는 마왕성에서 빠져나왔다. 라우라는 내가 무슨 성교에 환장한 발정기 오크인 것마냥 비난했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즉, 갑작스럽게 마을에 행차해봤자 거기 화전촌 인간들이 당황하기나 더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미리 이쪽이 방문할 것임을 알렸다. 이 방문에 뭔가 거대한 의미가 없고, 그냥 요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어서 갈 뿐이라고 말까지 해놓았다. 음. 정말 다정하지 않은가? 방문을 미리 알려준 데다 괜히 부산스레 대접하지 말라고 주의해주었다. 나처럼 상냥한 마왕은 정말 없을 거다. 나는 다음날 느긋하게 마을로 향했다. * * * 단탈리안은 모르겠지만. 그가 행차한다는 예고는 화전민들 입장에서 날벼락과 같았다. 상대방은 마왕. 게다가 일전에 리프 모험대와 함께 방해한 주민들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참수시켜버린, 무자비하고 냉혹한 폭군이었다. 마을사람 입장에서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자기가 방문할 거라고 마법수정구를 통해 알려오자 마을들이 발칵 뒤집혔다. 각 마을의 촌장들이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여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이들은 마을에 몇 마리 없는 말을 타고 힘겹게 집합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지 않다가 갑자기 방문하겠다는 것은……여, 역시 그거 아니겠소?” “으음. 아마도 그렇겠지.” 평생 농삿일로 몸이 우락부락하게 가꾸어진 남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공물을 내놓는 것을 바라시는 거로군…….” 촌장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물. 일종의 세금과 같은 것이었다. 원래 이들이 마왕에게 세금을 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왕은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전적인 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리프 모험대 사건이 문제였다. 던전 주변에 정착한 마을은 열두 개였다. 그중 무려 다섯 개의 마을이 반란을 일으켰다.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마왕 단탈리안은 전적인 자유를 보장하면서 단지 충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을들은 그 충성조차 지키지 못했다……. 계약은 깨진 것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중에는 모험대 사건 때 박쥐처럼 이도저도 아닌 처세술을 보여준 곳도 꽤 많았다. 조금만 삐끗했다면 자기네 마을도 몰살했을 거라는 자각이 촌장들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바로 내일이 조금 삐끗할 날이 될지도 몰랐다. 촌장 회의는 분위기가 점차 우울해졌다. “그분께서 요구하시기 전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공물을 바칩시다.” 한 촌장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요구해서 마지못해 내놓았느냐, 아니면 스스로 바쳤느냐. 이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마왕 전하께서도 우리의 체면을 어느 정도 봐주시겠지요.” “정말로 그럴까? 난 작년에 마왕 전하께서 군을 이끄시는 걸 직접 봤네. 그건 악귀였어.” 다른 인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떠올린 것은 고블린 대군 앞에서 열광적으로 연설하는 단탈리안의 모습이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환호하던 광경이란! 그는 왜 마왕이 몬스터의 군주라 불리는지 깨달았다. “체면이고 뭐고 상관할 분이 아닐세. 공물 목록에 우리의 목을 포함시켜야 할지도 모르네…….” “그, 그러니까 공물을 최대한 많이 준비하자는 것 아닌가.” 촌장들의 회의가 점차 심각해질 무렵. “흐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젊은 촌장 파르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단탈리안을 따라 직접 모험대 사건 때 종군한 자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단탈리안을 지켜보았고, 따라서 그가 굳이 공물을 뜯겠답시고 깡패처럼 동네를 순회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랑 별반 상관없는 얘기구만.’ 설령 정말로 단탈리안이 공물을 바치라 으름장을 놓을지라도, 파르시는 자신의 마을만큼은 면제될 거라고 생각했다. 모험대 사건에서 자기가 가장 열심히 마왕의 편에 서서 싸웠으니까. ‘솔직히 영감탱이들이 알아서 쫄아버린 거 같은데. 도둑이 제 발 저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이걸 한번 찔러봐, 말어?’ 파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촌장들 얼굴을 한 명씩 살펴봤다. 구린 냄새가 났다. 파르시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어딘지 예리한 감을 타고났다. 단탈리안의 눈에 든 까닭도 바로 그 직감 덕분이었다. 지금 그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 촌장들에게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고. “여보쇼, 영감님들.” 젊은 촌장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까발리쇼. 댁들, 지금 마왕한테 들키면 곤란한 짓 했지?” “뭐, 무슨 소리인가.” 한 촌장이 딱 잡아뗐다. 훌륭한 대처였다. 그러나 그외에 표정이 움찔거린 촌장이 세 명 있었다. 사냥꾼으로 살아온 파르시의 매서운 눈매가 그 이상을 놓치지 않았다. 이 영감탱이들이 진짜 뭘 저질렀구나! 파르시의 입밖으로 형식상 예의를 갖추던 말투가 사라지고 흉폭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시발, 얼른 불어. 뭔 짓을 한 거야?” “……그러니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나. 괜히 윽박지르지 말게.” “아이고, 멍청한 양반아. 딱 보니까 마을들 몇이서 뭘 짜고 쳤구만. 댁들 중에서 한 명이 마왕한테 꼰지르면 일이 파토나는 것도 모르겠수?” 파르시가 비아냥거렸다. “안 그래도 지금 공물을 얼마나 많이 바쳐야 할까 꽁알거리고 있구먼, 거 고자질 한방으로 공물 양 좀 줄여보자고 생각하는 녀석이 정말 없을 거 같어?” “…….” 남자의 표정이 무너졌다. 낭패였다. 파르시가 한 말이 옳았다. 막대한 공물을 고자질 하나로 대신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마을들 사이에 거대한 우정 따위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최저한의 신뢰를 나눌 따름이었다. 다시 말해 필요만 하다면 언제든지 서로를 배신할 수 있었다. 작년만 해도 일부 마을들이 자경단원과 모험대의 쪽수를 등에 업고 다른 마을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았던가. 네 명의 촌장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무척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게 말일세. 사실은…….” 잠시 후. 파르시가 고함을 질렀다. “이런 천하의 멍청이들을 봤나!” 파르시 이외에도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촌장들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주모자 무리를 쳐다보았다. 미친 놈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주모자 무리에 속한 촌장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래도 멀쩡한 밭을 놀려두기도 아깝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씨부리는 거요! 거 논밭들이 어떻게 댁들 소유요!” 네 명의 촌장이 저지른 짓은 다음과 같았다. 리프 사건에 휘말려서 초토화된 마을들. 하지만 마을들이 경작하던 논밭까지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촌장들은 번듯하게 살아남은 논밭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다. 저것들을 우리가 좀 이용할 수 없을까. 마을에는 자기 농지를 갖지 못한 차남과 삼남이 넘쳐났다. 가문을 잇지 못하니 일개 인력으로 쓰이는 이들이었다. 촌장은 그들을 꼬셔서 텅 빈 농지를 선심 쓰듯이 던져주었다. 마치 자기 논밭인 양 말이다. 대가로 연간 5할의 수확량을 요구하면서. “대가리에 화살 맞은 새끼들!” 파르시는 분통이 터졌다. 이 놈들이 저지른 짓 때문에 자기네 마을까지 덤태기를 씌게 생겼다. 생각해보아라. 지금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을, 단탈리안이 방문한다니까 허겁지겁 고해바친다고? 마치 단탈리안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까지 고의적으로 숨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너희 전부 공범 아니냐고 의심받을 판국이었다. 반란 사건으로 인해서 사라진 마을들의 영토는 마왕 단탈리안이 가지고 있었다. 반란자의 영토는 반란을 진압한 주인에게 되돌아간다, 이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저 촌장들이 저질러버린 일은――한마디로 영주의 영토를 제멋대로 점유한 다음, 자기 마을주민한테 나눠주고 세금까지 떼먹은 셈이 되어버린다. 훌륭한 반란죄였다. 영주 참칭죄, 세금권 침탈죄……도대체 죄목이 어디까지 불어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촌장 서너 사람의 목 가지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마을주민 모두가 사형되어도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도, 도와주시게. 그대들이 모른 척하면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미쳤소? 우라질. 자살에 취미 붙인 적 없소외다.” 파르시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걸 보고 촌장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뭘 하려는 것인가!” “이거 가만히 두었다가는 애꿎은 우리 마을 애새끼들까지 피 튀길 판이거든. 미안하지만 여기서 뒈져 주셔야겠소, 영감들. 이보쇼! 댁들도 살아남으려면 나한테 붙어!” 파르시의 행동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그는 날쎈 짐승처럼 달려들어 주모자 무리의 촌장을 찔렀다. 칼날이 정확하게 목에 들어갔다. 촌장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촌장들도 단검을 꺼내들었다.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파르시의 활약에 힘입어서 무고한 마을의 촌장들이 승리했다. 파르시가 단검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왕한테는 일단 요놈들 목이라도 바쳐야겠지.” “공물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크흥.” 상황이 난감해졌다. 원래는 바치지 않아도 될 공물이 이젠 반드시 필요해졌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연대책임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기가 직접 저지르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처벌을 안 받는 것이 아니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가족이 책임을 진다. 이웃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주변의 다섯 집안이 책임을 진다. 그런 것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마왕 입장에서 이번 사태는 각 마을이 다른 마을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아서 일어난 불상사. 파르시는 이를 바득 갈았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마왕 곁을 따라다니는 인간 소녀가 떠올랐다. 라우라인가 뭔가 했던가. 분명히 자신과 나이가 똑같았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댁들 마을에 처녀가 몇 명이우?” “두 명 있네.” “우리 마을에는 세 명…….” 다 모아보니 열 명 남짓했다. 파르시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일단 그거라도 모아서 마왕한테 진상하자고 제안했다. 처녀들을 꽃치장 하고 공물들을 바리바리 붙여서 보내면 그럭저럭 외관상 괜찮은 공물이 될 것이었다. “아이구야. 마을 총각들이 뭐라 불평할지 벌써부터 골이 아파오는구만.” “바깥에서 노예를 사와야 하나. 쯔쯧.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일이 이렇게 됐누.” 모두 착잡했다. 원래 열두 개의 마을이 있었던 것이 반란 사건 때 일곱 개로 줄어들었고, 이번에 다시 세 개로 줄어들 기세였다. 인간의 가장 위험한 적은 몬스터가 아니라 바로 동족인 인간이라는 격언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개새끼들!” 파르시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시체를 짓밟았다. 예의에 한참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촌장들은 곧바로 자기의 마을에 돌아갔다. 시간이 촉박했다. 밤새 마을주민을 닥달하면서 공물을 준비했다. 별안간 마왕한테 시집 가게 생긴 마을 처녀들이 눈물을 터트렸다. 가족들이 분기탱천했으나 마을을 위해서라는 말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협조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깊은 밤에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내렸다. * * * “용서해주시옵소서!” “부디 성의를 보아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마을에 당도하자마자 내가 본 광경은, 마을 앞까지 나와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곡식 따위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다. 곡식 앞에는 웬 오크녀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분명히 이번 방문이 별 거 아니라고 통고했는데도.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뻥긋거렸다. 너희 뭐하고 있냐?   ============================ 작품 후기 ============================   00127 로마의 아침 =========================================================================                        어디 설명해보라며 파르시를 내려다봤다. 다른 마을사람과 마찬가지로 파르시는 엎드렸는데, 고개만 슬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내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 녀석……역시 정치적인 센스가 있다. 생겨먹은 건 영락없이 불독인 주제에. ‘문자 좀 배우면 어디 써먹으련만.’ 조금 아까웠다. 아예 작정하고 유학이나 보내줄까도 싶었다. 파르시는 라우라와 동갑. 즉 열일곱 살이었다. 어리면서도 또 배움을 시작하기에는 애매했다. 뭐, 사람은 서른 살이 되기 이전에는 뭘 배워도 늦지 않다. 천천히 생각해보자. 파르시가 일어섰다. “먼저 안으로 모시겠수.” “좋다. 안내하라.” 나는 근처 목조집에 안내되었다. 촌장집이었다. 마을의 권력자가 지내기에는 꽤 초라했다. 쓸데없이 사치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흐음. 더 마음에 든다. “자아. 설명해봐라.” 내가 방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파르시는 편하게 정좌를 한 다음에 푹푹 한숨을 쉬었다. 도통 예의범절을 모르는 행색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했고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비굴하게 굴겠다. 하지만 거기에 진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나는 당신과 진심으로 지내고 싶은데, 왜냐하면 나의 진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당신에겐 있기 때문이다.――파르시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런 인상을 주었다. “일이 꼬였수다.” “모험대가 또 분탕을 친 것 같지는 않은데.” “딴 마을들이 지들끼리 작당해서 나으리의 땅을 부쳐 먹었소.” 파르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땅이라니? 설마 마왕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겠지.” “지난 번에 모험대랑 엮여서 패망한 마을들 말이오. 그네들이 경작하던 논밭이 있지 않소. 그걸 딴 마을사람들이 찔끔찔금 먹어버렸수다.” “흐음.” 손에 턱을 괴었다. 사태의 경중을 따져보았다. 나는 모험대에 붙은 마을들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빼앗은 식량은 내 편에 붙은 마을들에 적절하게 분배했다. 상벌은 그걸로 끝났다. 그외에 언급되지 않은 모든 재산은 당연히 나의 것. 즉, 마을주민이 나의 재산을 멋대로 침탈했다는 것인데……. “당사자만 처벌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보아하니 이 마을의 주민은 범죄에 동참하지 않은 모양이군. 음. 죄과에 비하여 사죄의 크기가 지나치게 큰 것 같다만…….” “젠장. 거 몇몇 놈들이 몰래 도둑짓한 거면 오죽 좋겠수? 아예 촌장들이 앞장서서 나으리 땅을 일구라고 부추긴 거요. 촌장 놈들은 그게 지들 땅인양 연공(年貢)까지 거두었소.” 으아. 내 표정이 짜게 식었다. “미친 놈들 아닌가?” “미친 새끼들이지.” 파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야 얘기가 심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정좌 자세를 풀고 다리를 편하게 내놓았다. 마음이 불편해진 만큼 몸이 편해져야겠다. 그런 의미였다. “연공의 비율은 얼마였냐.” “수확량의 7:3.” “지랄……진짜 돌아버린 놈들이었군.” 연공으로 소득의 7할이나 떼어먹다니, 도둑놈도 보통 도둑놈이 아니다. 물론 이 시대에 수확량의 7할을 빼앗는 것은 매우 흔하다. 평범하다고 봐도 좋다. 소득의 5할만 세금으로 거두어도 '우리 영주님은 신께서 내리신 천사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질 정도이다. 문제는 그런 폭거가 오로지 땅주인한테만 허락된다는 것이다. 촌장들은 내 소유의 토지를 갖고 주인 행세를 했다. 요컨대 영주참칭죄. 반역죄다. 내가 혀를 찼다. “쯧. 마을주민이라 해도 한두 명이 아니다. 수백 명이 한 마음이 되어 나를 속이려 들지는 않았을 거야. 혹시 촌장들이 중간에서 구라를 치지 않았는가?” 파르시의 눈이 개구리 눈알처럼 커졌다. “어찌 알았수? 햐아. 나으리는 점집 차려도 대성하겠구만.” “됐고, 설명이나 해라.” “촌장 놈들은 세금을 거두면서 나으리한테 바칠 거라고 말했다고 하오.” 공문서위조까지? 점입가경이었다. 산간 마을들은 전체가 나한테 복속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가 어디를 개간했는지 보고할 의무가 있다. 이걸 개간신고라고 한다. 중세에는 모든 땅은 왕의 토지(王土)라고 하는 사상이 있다. 영지에 땅이 많다고 해서 무작정 개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디를 얼만큼 개간했는가, 언제 개간했는가, 누가 개간했는가, 전부 상세하게 적어서 신고해야만 한다. 이 시대, 영지가 농토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는 곧 영지의 국력……신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개간사업을 벌이다가는 '너희 반란하려는 거지?' 하고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마을에 괜히 촌장이라는 직위가 있는 게 아니다. 출납대장을 기록하고 영주한테 개간신고를 하는 자가 바로 촌장이다. 그런데 촌장이라는 작자들이 아예 대놓고 개간신고를 무시했다. 심지어 영주한테 바쳐야 하는 연공을 지들끼리 떼어먹었다. 두개골에 뇌가 들었다면 차마 못할 짓. 말할 필요도 없다. 사형이다. “본인을 아주 만만한 새끼로 취급했군.” 심장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주모자는 촌장들로 확정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번 사태는 한도 끝도 없이 커질 수가 있다. 당장 떠오르는 죄목만 해도 두 개가 있다. 옆동네 촌장이 반역질을 자행하고 있을 때 너희는 뭘 하고 있었는가? 촌장이 거짓말했다 해도 알게 모르게 마을주민이 협력했을 터. 그 마을주민들은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마을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가?……장난이 아니다. 자칫하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산간 마을이 연좌죄에 걸려버린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일손이 줄어든다. 현재 나의 산하에 있는 마을은 총 다섯 개. 이중 마을 한 개 분의 인간을 처벌하더라도 전체 수익에서 1/5이 증발해버린다. 지금까지 전쟁하느라 바깥을 싸돌아다녔다. 이제 영지 좀 관리하라고 라우라한테 잔소리를 듣자마자 이런 사건이 터졌다. 이 무슨 날벼락이냐는 말이다. 연좌죄를 적용하면 일손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촌장만 처벌하면 영주로서의 내 위엄이 손상된다. 영주는 곧 영지의 법. 영주의 위엄은 곧 법의 위엄이다. 법이 바로서지 않은 영토에 국력이란 생기지 않는다……어찌해야 좋을까. 끙끙거리고 있자니 파르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 촌장 놈들 모가지는 우리가 죄다 땄소.” “뭐? 그거 잘했다!” 내가 손뼉을 쳤다. 연좌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정황을 볼 때 얘네는 한통속이 아니다, 하는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파르시가 범죄를 저지른 촌장들을 처단했다. 반역죄인을 손수 처리했다. 그럼 이제 어떤 정치적인 해결이 가능한가? 반역죄인을 처단한 것은 잘한 짓이다. 하지만 영주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로 처벌을 행한 것은 잘못한 짓이다. 공과(功過)가 함께 있으니 이제 파르시를 어떻게 처분할지는 영주이자 판관인 나에게 달렸다. 여기서 파르시를 칭찬해주면 안 된다. 자칫하다 영지민에게 사법권을 넘겨주는 셈이 되어버리니까. 이럴 때는 무조건 파르시를 처벌해야 한다. 단, 겉으로만 처벌하고 실상은 죄를 용서해주는 식으로. 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은 이제 그대에게 근신하라 명하겠다.” “나는 나으리한테 너그러이 용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백 번 절하고 말이지.” 파르시도 히죽 웃었다. “이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영주의 권리를 강조해야겠군. 응큼한 놈! 어서 솔직히 불지 못하겠느냐. 뭘 내놓을지 벌써 다 상의해뒀을 게 틀림없다.” “수리권(水利權)을 넘기겠소.” 파르시가 쿨하게 말했다. 수리권이란 저수지처럼 농삿일에 쓸 수 있는 물길을 사용하는 권리이다. 농민에게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예컨대 어쩌다 흉년이 들었다 해봐라. 이때 농민들은 수리권을 가진 영주나 사제한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영주나 사제는 물길을 허락하는 대신, 내년에 세금을 2할 더 올려받을 것을 주문한다. 농민들은 일단 올해를 살아남아야 하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다. 하천을 가진 것만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다. 그토록 중요한 수리권을 나한테 넘겨준다니 얼핏 충성심이 대단해보이나……. “이 근처에 저수지가 어디 있다고? 아주 가증스럽구나.” 당연하지만 내 마왕성 주변은 가난한 산동네, 저수지 따위의 인프라는 전무하다. 조그마한 시냇물이 몇 줄기 흐를 따름이다. 그런 시냇물은 설령 내가 갖게 되더라도 암묵적으로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시냇물에다 세금을 붙이겠다면 당장 반란이 일어날걸. 그저 농민들이 이번에는 시냇물을 내가 쓸 차례다, 아니다 내가 쓸 차례다, 하고 쌈박질이 일어났을 때 나는 중재자 역할만 해줄 수 있다. 빛살 좋은 개살구. “변명거리로 삼기에는 최고로 좋지 않겠수? 흐흐.” 파르시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나도 똑같은 표정이겠지. 반역죄에 가담하진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방치해버린 자들. 본래라면 연좌죄에 묶여서 싸그리 멸족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반역죄인을 빠르게 처단했다. 영주인 내 입장에서는 적당히 처벌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근신을 명령한다. 너그러운 처벌에 대하여 그들은 전원 감복. 재차 충성을 맹세하며 관용의 대가로 수리권을 진상한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앞으로 이번 사건에 대하여 추가적인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 파르시와 영지민은 목숨을 부지한다. 나는 영주의 권위를 지킨다. 윈-윈이다. “여기에 더해 좋은 생각이 있네만.” “호오. 어디 말씀해보시구랴.” “거기 멸망한 마을들이 남긴 농토들 말일세. 이제부터 7:3의 연공을 받는 조건으로 그대들한테 넘겨주는 건 어떠한가. 누구한테 나눠줄지는 촌장인 그대들이 알아서 하고.” 파르시가 감탄했다. “캬아. 근신에 처해서 입장이 나빠질지도 모르는 우리를 배려해주시겠다?” “물론 명목상 그대들이 나눠준다는 것일 뿐이다. 제대로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자네들의 체면이 서겠지.” “더불어서 사유지를 농민에게 개방해준 나으리의 명성도 하늘을 찌를 테지. 우리는 땅 부쳐 먹어서 좋고, 나으리는 세금이 늘어서 좋고.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구만. 내 이제 나으리가 왜 마왕 전하인지 알겠수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얼. 이 정도는 기본일세.” “하지만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았소. 반역죄에 가담하지 않은 마을이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손 쳐도, 반역죄에 가담한 마을들은 어쩔거요? 거기 촌장들 목이 날아갔다지만 아무래도 처벌에 부족한 감이 있수다.” “흐음.” 그건 나도 고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흐.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긴 한데.” “기대되는군. 고하라.” “솔직히 나으리가 영주로서 한 일은 하나밖에 없소. 고블린의 침입을 막아주겠다는 거. 그거 하나요. 저쪽에서 나으리와 한 약속을 무시했으니, 이번에는 나으리가 약속을 무시하면 되지 않겠소?” 내가 탄성을 내질렀다. “고블린을 시켜 마을을 습격하면 되겠군!” “그렇수다. 너무 강하게 공격하진 말고, 흐흐. 적당히. 적당히 놀아주면 지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파악할 거요. 아이고 마왕 전하, 우리가 잘못했으니 한번만 봐주십쇼오, 하고 넙쭉 엎드릴 거외다.” “아아. 본인이 그때 가서 너그러이 용서해주면 된다. 세금을 1할 올리고, 부역을 조금 많이 할당하면 그만이겠지.” 그쪽 마을주민 입장에서도 반역죄를 탕감받는 거다. 싸게 먹힌다 싶겠지. 결국 실질적으로는 그쪽 촌장들의 목만 베어버리고 아무도 연좌죄에 걸리지 않은 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명안이다! 명안이야! 자네,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군!” “허허. 과찬이외다. 어디 마왕 전하만 하겠수까?” “흐흐흐.” 남정네 두 명이서 집구석에 모여 앉아 음흉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변태라 욕할지 몰라도 우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자고로 정치란 이런 맛에 하는 거지. 안 그런가?   ============================ 작품 후기 ============================   00128 로마의 아침 =========================================================================                               * * * 판결은 파르시와 미리 상의한 그대로 내렸다. “옆마을에 반란의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홀했던 것, 영주인 나에게 보고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허나 반역자를 신속하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그대들한테 역모의 의도가 없음을 알겠노라. 이에, 촌장 세 명에게 근신을 명하노라. 아울러 세 명의 재산을 환수한다.” 나는 촌장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마을에서 공물로 바친 것은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관대한 처사라며 소리높여 나의 판결을 칭송했다. 마을주민 입장에서 볼 때는 촌장들이 자기네를 대신해서 희생한 것이었다. 내가 반납한 공물의 상당부분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눈 가리고 아웅거리는 느낌이지만, 덕분에 촌장의 체면이 살았고 영주인 내 체면도 살았다. 그외에 나머지 마을들에 고블린 무리를 보냈다. 사흘 후, 마왕성에 마을의 사신단이 찾아왔다. 그들은 마왕성 입구에서 오체투신하며 나에게 싹싹 빌었다. 제발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몬스터가 침략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맛보았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농사에 집중하면 된다. 자경단원도 필요없다.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란 죽어도 싫겠지. “연공은 7:3으로 정한다.” 아무리 이 시대에 일반적인 세율이라지만 중세(重稅)임에 분명하다. 지금이야 용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을 장로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빠르게 불평불만이 터져나올 거다. 고블린의 침략을 막아주는 것만으로 소득의 7할을 바쳐야만 하는가.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여기서 편법을 썼다. 치수공사처럼 부역과 같은 잡일에 참여할수록 세금을 없애주기로 한 것이가. “영지를 위해서 일하면 세금이 줄어든다. 모쪼록 모두를 위하여 일하도록.” 실질적인 세금은 사공육민(四公六民). 소득의 4할만 나에게 바치면 된다. 사공육민이면 영주님 우리 영주님 하는 노랫가사가 만들어질 만큼 관대했다. 이후로도 내 영지는 실질 세금을 사공육민으로 밀고 나갔다. 뭐, 반역에 참가하지 않은 마을에는 세금이 전혀 없다. 적당한 처사겠지. 더불어 그루갈이한 보리에 대해선 손을 대지 않았다. 보통 농삿일은 한 해에 밀을 심어서 수확하고 또 보리를 심어서 수확한다. 두 번 수확하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해 수확한 밀에 대해서만 세금을 실었다. “대충 이쯤하면 굶어죽지는 않겠지?” 나는 라우라에게 상의하면서 말했다. 라우라는 공작가의 영애. 세금 따위에 빠삭하지 않을까 싶어서 의지하려 했지만. “미안하다, 주군. 소녀는 영지를 통치하는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 그러고보니 라우라는 공작가 안에서도 따돌림 당했다. 후계자 교육에서도 배제되었다. 통치 같은 고급업무에 참여했을 리 만무. 의지할 구석이 전혀 없었다……. “명색이 유일무이한 가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능해서야. 실망입니다.” “읏……소, 소녀는 군략에서 주군을 도울 따름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얼굴이 빨개져서 대꾸했다. 하지만 말이지. 당신은 원래 브르타뉴 왕국의 재상까지 오를 인재이다. 한 나라의 재상이 군무에 통달했으면서 정치에는 영 잼병이라니. 그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아, 하긴 <던전 어택>에서 브르타뉴 왕국은 멸망하는구나. 왜 멸망하나 싶었네. “지금 당장은 군략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전쟁에 참여할 일은 먼 얘기겠죠. 그 먼 훗날까지 라우라는 쓸모없다는 뜻입니다. 훌륭한 식객이군요.” “으으으.” 라우라가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귀여웠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군요. 지금 라우라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뭔가? 주군. 당장 말해다오. 소녀가 분골쇄신하겠다.” “라우라의 머리가 쓸데없어진 이상, 라우라에겐 몸밖에 남지 않았지요.” 라우라는 표정이 싸해졌다. 나라를 잃은 선비의 얼굴이었다. “그, 그럴 수가.” “엉덩이를 이쪽으로 들이미십시오.” “안 돼!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주군은! 으, 흐읏!” 라우라는 필사적으로 반항했지만 결국 한끼의 식사로 전락했다. 그때 귓가에 띠링, 하고 유쾌한 효과음이 들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직업 레벨(성노예)이 올라갑니다!」 라우라의 직업 레벨 중 하나인 성노예가 C급에서 B급으로 상승한 것이었다. 정치 능력치와 매력 능력치에 디메리트 효과를 주는 쓰레기 직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노예에 숨겨진 장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즉……아마도 성노예 레벨은 섹스와 관련하여 당사자의 품질을 결정한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맛이 좋아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벨이 오르자마자 내 아랫도리를 감싸는 압력이 꾸욱 하고 강해졌다. 마치 뜨거운 슬라임이 있는 힘껏 감싸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날은 여섯 시간을 내리 박았다. “…….” 라우라, 전사(戰死). 침대 한구석에 쓰러졌다. 장렬한 최후였다. “후. 적장, 물리쳤다.” “…….” 회심의 대사를 뱉었지만 라우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한창 쌩쌩한 열일곱 살 여자애를 기절시킬 정도의 정력. 나는 왠지 모를 정복감을 느끼며, 바가지로 물을 떠마셨다. 한바탕 성욕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니 남은 것은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영지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으음.” 나도 전체적인 그림이야 그릴 줄 알지만, 실질적인 업무에는 자신이 없었다. 이곳은 폰 로젠베르크의 변경백령이 아니다. 거기엔 이미 세율이니 하는 절차가 수백 년의 전통을 거쳐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나는 단지 올라오는 서류에 사인을 하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내 마왕성 주변의 산간마을은 사정이 다르다. 영주의 폭압과 몬스터의 침략에 쫓겨서, 겨우 여기까지 도달한 인간들이 이룬 마을이다. 영주의 권력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 동시에 몬스터는 고블린밖에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입지조건은 없겠지. 이때 내가 등장한 것이다. 세금이니 뭐니 하는 체계를 처음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내 영지의 그림이 결정된다.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월맹군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지 삼 주째. 분홍빛 머리를 한 서큐버스 소녀가 마왕성에 방문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보급업무가 밀려 이제 오게 되었습니다.” 라피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오늘부터 다시 단탈리안 님 전용의 상인으로 활동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 “라피스으으으!” “라피스 공――!” 나와 라우라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우리는 라피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라피스는 언제 어느 때도 무표정한 얼음 가면을 자랑하는 차도녀. 주인과 가신이 나란히 울고불며――심지어 둘 다 알몸이었다――난리치는 사태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영지가! 세금이! 율법이!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주군이 색마이다! 하루에 수십수백 번 소녀를 박아댄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라피스 공, 주군의 발정을 부디 막아달라!”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나부터 천천히 하지요.” 그녀가 영지업무의 최고참에 선정되는 순간이었다. 라피스는 먼저 내가 판결을 통해서 짜놓은 구상을 들었다. 그녀는 차분히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고칠 점이 더러 있군요.” “역시 그렇겠지?” 내가 슬그머니 웃었다. “우선 감면이 문제입니다. 부역을 통하여 세금을 줄인다는 발상은 좋습니다. 하지만 영지민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부역을 했는지, 어떻게 측정할 생각입니까? 일일이 감독관을 임명해서 보고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 맹점이었다. 부역이란 공사. 예컨대 저수지를 만드는 일을 생각해보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일한다. 이때 저수지를 만드는 데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정확히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는가. 십중팔구 주먹구구식이 되어버린다. “촌장에게 맡기는 것은……안 되겠군.” “예. 권력을 분산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촌장에게 그 업무를 맡기면 촌장의 권한이 지나치게 커진다. 마을주민은 촌장에게 잘 보이는 데 혈안이 되겠지. 똑같이 일을 했는데도 촌장과 친한 사람은 부역을 더 많이 한 걸로 계산되고, 결국 더 많이 감면을 받는다. 감면 받은 사람은 그럼 어쩌겠는가? 감면 받은 분의 1/2 정도는 촌장에게 바치겠지. 결국 촌장이 마을의 업무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토호까지 되어버린다. 이래서야 재주는 내가 부리고 돈은 촌장이 독식하는 꼴이다. “어쩌지?” “효과적이면서도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감면을 개인 단위로 하지 말고, 마을 단위로 하십시오. 감면율을 한 마을 전체에 매기는 것입니다.” “아하!”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끝내주는 해결책이었다. 요컨대 나는 이거 공사하라 저거 공사하라 명령을 내려둔다. 그걸 해내면 마을에 일괄적으로 감면해준다. 이러면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불어 누구 한 사람이 게으름 피우는 일도 사라집니다.” “마을 전체를 위해서 일하는데 너는 뭐하고 있냐, 그런 식으로 나올 테니까. 과연!” “누구 한 사람이 잘못하면 마을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연대책임이 되지요.” 계산도 쉬워지고, 부역의 고질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게으름도 사라지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한 수였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어떻게 그런 수법을 생각했어?” “과찬입니다. 별 거 아닌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피스는 정책의 방향을 살짝 바꾼 것만으로 수많은 폐해를 예방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부릴 묘기가 아니다.……파르시와 내가 권모술수를 동원한 것이 꽤나 어두운 의미에서 정치라면, 방금 라피스가 보여준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 정치이다. ‘상태창.’ 나는 라피스의 능력치를 알아보았다. ━━━━━━━━━━━━━━━━━━━━ 이름: 라피스 라줄리 종족: 하프 서큐버스  소속: 쿤쿠스카 상회 속성: 중립(-10) 레벨: 25        명성: 194 직업: 상인(A-), 마녀(B), 검사(D) 통솔: 59  무력: 32  지력: 57 정치: 76  매력: 50  기술: 2 호감도: 50 충성도: 82 *칭호: 1.자수성가 2.쿤쿠스카의 상인 *능력: 거래B+, 회계B+, 산술B, 보급C, 검술D *스킬: - 현재심리: ‘……칭찬해주셨어.’ ━━━━━━━━━━━━━━━━━━━━ ━━━━━━━━━━━━━━━━━━━━ [칭호] 1. 자수성가. 사회의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위를 손에 넣었다. 정치+10, 매력+10, 숙련도 성장 속도 x1.2 2. 쿤쿠스카의 상인. 마계 최고 상회에 소속된 상인이다. <거래> 능력 +0.5, <회계> 능력 +0.5, 명성 +50 ━━━━━━━━━━━━━━━━━━━━ 정치력이 70이 넘었다. 라우라의 정치력이 10인 것에 비해 찬란한 능력치였다. 아마도 라피스의 정치력은 대부분이 실질적인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겠지. 나는 권모술수와 모략에 특화되어 있겠고. 정치력이 똑같이 70이라 해도 캐릭터가 정작 어디에 특화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다 다르다. 예컨대 바르바토스는 짐작컨대 정치력의 대다수가 파벌 통치에 맞추어져 있을 거다. 파벌 간의 알력, 파벌원 사이의 중재, 이런 것에 귀신처럼 능숙하겠지. 하지만 영지 통치에는 거의 쪽을 못 쓸 거다. ‘라피스를 진작 동료로 영입해서 다행이야. 내 안목은 틀림없다니까.’ 내가 흐뭇해하고 있는데 라피스가 조심스레 말해왔다.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있었다. “단탈리안 님. 확실히 제가 말씀드린 안건은 별 거 아니긴 합니다.” “응? 아니야. 대단해. 잘했어. 이야, 덕분에 살았다니까.” “그럼, 자그마한 보상을 바래도 되겠는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거나 말해봐! 뭐든지 들어줄게.” “……뭐든지 말입니까.” 순간 라피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00129 로마의 아침 =========================================================================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삶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백지수표를 남발하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불쑥 떠올랐다. ‘특히, 아들. 그럴 리가 없지만 말이야. 만에 하나라도 아들 주변에 여자가 다가오면.’ 하고 어머니가 말씀했다. ‘절대로 <뭐든지>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단다.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질지 몰라.’ ‘큰일이요? 정확히 무슨 일이요? ‘으음. 아들 같은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거지.’ 한참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부들거렸다. 당시에 나는 반항기스러운 풍류를 즐기는 고등학생 청춘. 목소리를 높여서 항변했다. ‘너무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나도 내 자식이 아들 같을 줄 알았으면 낳는 게 아니었는데.’ ‘…….’ 나는 무참하게 격침되었고, 쓸데없는 반항을 접은 다음 수능공부에 열중했다.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지. 그 다음부터 다시 쓰레기 백수 생활을 듬뿍 즐겼지만 말이다. 왜 갑작스레 어머니의 충고가 떠오른 것일까? 분명히 어떤 무의식적인 직감이 나로 하여금 발언을 철회하라고 종용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뒤늦게나마 말을 바꾸려고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 등이 싸해졌다. 상대방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했다. 지금 말을 바꾸면 그쪽 배떼기에 들어 있는 게 내장인지 똥물인지 직접 확인시켜주겠어요――. 그런 눈초리였다. 내 입에서 뚝방에 물 새듯이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어, 어. 뭐든지.” “좋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절도 있는 동작으로 끄덕였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 무표정한 얼굴이 어딘지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풍기는 것 같았다. “저야 자그마한 보상으로 만족합니다만 단탈리안 님께서 굳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말씀하니 어쩔 수 없군요. 저는 쿤쿠스카 상회의 직원이나 동시에 단탈리안 님을 섬기는 몸. 단탈리안 님의 후의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쩔 수 없지만 그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 응……? 그, 그래.” 점점 더 불안감이 무거워졌다.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연막을 무슨 스컹크 뺨따구 후려칠 정도로 뿌려대냐. 이바르한테 밀명이라도 받았나. 내가 소심하게 사족을 덧붙였다. “미리 말하지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어야 한다?” “당연합니다. 단탈리안 님의 역량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소원을 제가 원할 리 없지요.” “음. 그렇지.” 라피스는 내가 동굴을 파서 하루에 2골드 벌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연이었다. 황철석을 황금으로 착각해서 잔뜩 잘난 척하던 것도(지금도 그걸 떠올리면 심장이 당장 생각을 중단하라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마계의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놀아댄 것도, 그녀는 전부 알고 있다. 비록 마왕과 마인이라는 관계에 묶여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라우라는 다르지. 솔직히 라우라는 나한테 콩깍지가 좀 씌어 있다. 내가 뭘하면 '역시 주군. 대단하다!'라는 식으로 나온다. 눈에 초롱초롱 빛이 난다. 반면에 라피스는 놀랐다는 듯 두 눈을 치켜세우며 '대단하군요'라고 말하겠지. 당신이 그런 일을 해내다니 의외라는 어투로. 하는 말이 같아도 그 밑에 깔린 감정은 천지차이다……. 뭐, 나는 라피스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든다. 편하단 말이지. 이쪽을 무조건적으로 두둔해도 곤란할 따름이다. 아무리 친해도 멍청하면 멍청하다고 지적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친구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라피스와 나는 친구이다. 세상에는 여자와 남자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지만. 절로 비웃음이 나올 소리이다. 인간이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남녀 간에 섹스밖에 없겠는가. 다 진정한 우정을 공유할 수 있다. 라피스와 나의 관계가 대표적인 사례이겠지. 나는 반쪽짜리 마왕이고, 라피스는 마계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반인반마이다. 그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동지가 되었다. 색정 따위는 끼어들지 않았다. 실로 플라토닉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 내가 기분을 바꿨다. 어차피 약속한 거 즐겁게 이루어주자. “좋아. 기왕 공언했으니 당장 들어주지. 소원이 뭐야? 응? 네 따돌렸던 새끼들 싸그리 죽여줄까? 이바르한테 얘기해서 1급 사무마로 승진시켜줄까?” 라피스가 슬쩍 옆에 있는 라우라를 살펴보았다. “……아뇨. 아직은 생각나는 게 없군요.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언제든지 말하라고. 내가 이제 라피스 소원 하나 들어줄 정도는 된다 이거야.”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피스 경? 원한다면 자리를 비켜줄 수 있다만. 보시다시피.” 라고 라우라가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참고로 라우라는 발가벗고 있었다. 그녀의 아래쪽에서는 조금 전까지 내 육봉이 쑤신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정액이 잔뜩 엉겨붙었다. “어차피 소녀는 목욕을 해야 해서 말이다. 지하연못에 가서 몸을 푹 담글 생각이다. 소녀가 씻는 동안 승부를 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하아.” 라피스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뵙지 못한 사이에 라우라 경도 짐승이 다 되었군요. 초열대공의 하렘도 이렇게 문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래 그랬습니까?” “음……경이 요 보름 동안 주군과 함께 있었다면 소녀의 처지를 이해할 터이다.” 라우라가 왠지 모르게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부끄러움이란 적의 욕구를 돋구어주는 향신료에 불과하다. 훈제고기에 양념을 바르는 꼴이지. 차라리 뻔뻔해지는 것이 그나마 차선의 전략안이다. 소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체면을 버렸다.” “그 정도입니까?……구체적으로 하루에 몇 번을.” “으음. 날마다 다르지만 대충 네 번이 평균일까.” 라피스가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네 번이나 가다니 제법이네요. 하지만 그 정도라면…….” “라피스 경? 뭔가 착각하고 있군.” 라우라가 히죽 웃었다. 눈가에 그늘이 져 있었다. “네 번 가는 게 아니라 네 판을 행하는 거다. 가는 걸로 따지면 어림잡아도 최소 열 번이겠지. 한 판당 열 번이다. 즉, 도합 마흔 번. 하루에 최소 마흔 번이라고 봐야 한다.” “마흔……번?” 그때 매우 희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라피스의 무표정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나는 대충 그녀들이 나의 정력에 대해서 논한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마왕방 구석에 놓인 물통으로 가서 바가지를 잡았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소녀도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상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철저하게 깨달았지……. 후후. 지금 돌이켜보건대 살아남은 게 용하군. 후후, 후후후…….” “하지만, 남성이 보통 그렇게 갔다면 여성은……조루가 아닌 이상 세 배를.”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여자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자기 정력이 대화의 도마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창피한 일이구나. 나는 안 들리는 척 모르는 척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아아. 넉넉하게 세 배는 된다.” “그렇다면 한 판마다 서른 번, 하루에 백스무 번이라는 말씀입니까? 믿기지 않습니다.” “평균을 잡아서 말이다. 가끔은 이백 번도 훌쩍 넘어버리지.” “…….” “알겠는가, 라피스 경? 그런 나날이 보름이나 지속된 것일세.” 두 사람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단어와 단어만 드문드문 들리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여자들은 무척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둘……분담……불가능하다.” “하지만 각오가……예상치…….” “더 이상은 기다릴 수……그 전에 먼저 부서져 버릴 거다!……냉큼…….” “……결행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아아. 좋다. 소녀에게도 희망이 찾아왔군.” 무언가를 합의한 분위기였다. “하하. 둘이서 얘기 다했어?” 나는 여자들의 대화가 드디어 끝났다고 기뻐하며 다가갔다. “…….” “…….”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괴물을 쳐다보는 것처럼 싸늘한 눈빛이었다. 아니, 어째서? * * * 내 마왕성 주변에는 일곱 개의 인간 촌락이 있다. 고블린 부락은 여덟 개. 다해서 열다섯 개의 마을이 이른바 나의 영지에 속한다. 영지민 숫자는 대충 인간 사백 명에 고블린 천백 마리. 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수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두 종족을 합쳐도 이천이 안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영지민이 이천 명 이하라는 것은 어디 가서 남작령이라고 자랑할 수도 없는 수치. 인구가 국력인 시대이다. 본래라면 내 마왕성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게 앞으로 확 늘어날 거야.” 라우라, 라피스, 내가 원탁에 모여 회의했다. 우리는 단탈리안 마왕군의 최고 관리이자 유일한 관리였다. 즉 조촐하지만 국정회의가 열린 셈이었다. “내가 연설전에서 하도 멋들어지게 말해서 말이지.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의 땅에 가면 경작한 대로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언비어가 십중팔구 나돌 것이거든. 예컨대 탈영병. 인간군 쪽에서 탈영병이 생기면 꽤 높은 확률로 여기로 올걸.” “타당합니다.” 라피스가 동의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합스부르크 북부 지역에서 이곳 튜튼 왕국까지는 걸어서 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열 명에 두세 명 정도는 이쪽에 도착하겠지요. 이백 명쯤은 빠른 시일 내로 이주해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 숫자는 문제없다. 내 영지에는 멸망한 마을의 터가 다섯 군데나 남아 있다. 다섯 마을이 일구던 논밭도 그대로 남았다. 거기서 길러지던 농작물이야 당연히 사라졌지만, 두둑과 고랑 등 논밭의 형태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따로 힘들게 개간할 필요가 없다. 그냥 누가 와서 가꾸기만 하면 된다. 그런 논밭이 어림잡아서 삼백 명분. 즉, 우리 영지에는 삼백 명을 수용할 여력이 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주민이 계속 늘어나리라는 점이지.” 내가 말했다. “인간계에다 내가 뿌려놓은 독은 질겨. 월맹군 전쟁이 길어질수록 귀족들은 백성한테서 혈세를 뽑아내겠지. 흑사병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중이다. 전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언젠가 반드시 와.” 아마도 상당히 가까운 시일에. “그때가 되면 많은 인간이 마왕의 영토로 도망칠 거야.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유혹에 이끌려서.” “주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라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인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좋은 것 아닌가.” “뭐든지 과식하면 체하는 법이니까. 지금부터 과식을 소화할 수 있게 위장을 단련해두어야 하는 거야.” 하물며 오는 것은 이주민뿐만이 아니다. 마왕으로서 악명이 부쩍 올라간 만큼, 이곳을 노리는 모험자의 수도 대폭 늘어날 터.……F급, E급 모험대가 아니라 D급과 C급, 어쩌면 B급까지 밀려올지 모른다. 대륙이 월맹군 전쟁이라는 전화에 몽땅 휩쓸려 있는 이때가 기회이다. 머지 않은 미래를 지금부터 대비해야만 한다. “그래서 말인데. 던전 특별도시를 세우고자 한다.” “던전 특별도시……?” 라우라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던전이란, 모험자들이 마왕성을 부르는 용어이겠지? 하지만 던전 특별도시라니. 소녀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던전과 모험자에 의존해서 성장하는 도시이지.” 내가 미소를 지었다. “보통 마왕들은 모험자를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모험자만큼 훌륭한 봉도 없거든. 그놈들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면 그럴듯한 소도시 하나를 세울 수 있어.” 모험자는 하나하나가 병사. 아무리 가난해도 무기와 갑주를 갖추고 있다. 철로 된 무기와 가죽으로 된 갑주만 털어도 짭짤한 상품이 된다. 이건 최저한의 수입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험자들을 이용해서 소도시를 세운다고?”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님. 이해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단언컨대, 마왕 단탈리안의 영지는 전무후무한 모험의 도시가 될 것이다.   00130 로마의 아침 =========================================================================                        * * * “……어때?” 장장 한 시간. 내가 그리는 마왕성의 미래도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라피스와 라우라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터무니없습니다.” “아아. 허황된 얘기이다.” “돈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도를 정비하는 데만 해도…….”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위험하다. 모험자를 요격하지 못할망정 끌어들이다니, 자칫하면 주군이 위험에 처한다.” 내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재미있지.” 두 사람이 다시 침묵하고 생각에 잠겼다. 라피스가 하나씩 정리해보자는 어투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은 차치해두고. 일단 현실적인 얘기부터 차근차근 해결해보지요. 단탈리안 님, 마왕성을 대폭 재건축한다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래.” 아무래도 내 마왕성은 너무 초라했다. 사실상 동굴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되었다. 딱히 궁전처럼 화려하게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몬스터 군대가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저런 시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 내가 구상하는 마왕성의 최종 규모는. “……아무리 그래도 지하 10층이라니. 그런 규모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라피스가 질려 했다. 지하 10층의 던전! 내 마왕성이 있는 동굴은 거대하다. 입구에서 마왕의 방까지 걸어오려면 몇 시간이나 걸린다. 그런 크기 때문에 우리는 마왕의 방 근처에서만 생활한다. 기껏해야 몸을 씻기 위해 조금 구석진 자리에 있는 지하 연못에 들락거릴 뿐이다. 그만한 규모의 동굴을 10층 크기로 확대한다. 라피스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이야기겠지. “어디까지나 최종적인 모습이 10층이라는 거야. 처음에는 1층부터 준비해야지. 아무튼 지금보다 마왕성의 규모가 훨씬 더 거대해야 돼.” 나의 계획은 간단하다. 몬스터를 마왕성 안으로 무진장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세계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마왕성 안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몬스터 개개에게 굉장히 커다란 영광이다. 단순히 마왕의 근처에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마왕성 자체가 몬스터에게는 천국과 같은 환경이다. 해골 병사나 좀비 등, 본래라면 당장 활기를 잃고 해골과 시체가 되어 허물어져야 하는 몬스터의 신체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다름아니라 마나이다. 마나는 자연의 어디에나 떠돌고 있다. 그러나 신체를 유지시킬 정도로 많은 양의 마나를 섭취하려면, 적어도 동물쯤의 생물을 먹어 헤치워야 한다. 먹이사슬에서 꼭대기에 가까울수록 그 종이 몸안에 축적하는 마나도 많다. 몬스터에게 인간이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인 이유도 여기 있다. 한평생 온갖 동식물을 먹어온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하면 마나 덩어리이니까. 마나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 마나를 소비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몬스터……두 종족이 싸우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만약 몬스터가 마왕성에 있으면? 마왕성은 일 년 내내 마나가 압도적으로 풍부하다. 동굴에서 광석을 캐기만 해도 마석(魔石)이 튀어나오는 곳이다. 일단 몬스터가 마왕성에서 살면 굳이 힘들게 인간을 사냥할 이유가 없어진다. 가만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 만약 마왕이 몬스터에 대해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몬스터들은 진즉에 마왕성을 약탈하고 자리잡았겠지. 그 정도로 탐스러운 보금자리이다. ――이걸 개방한다. 고블린, 오크, 리저드맨, 좀비, 뭐든 상관없다. 어떤 종족이든 가리지 않고 나의 던전에 받아들인다. 자격도 필요없다. 굳이 내 부하가 될 필요도 없다. 그냥 몸뚱어리만 들고 오면 되는 것이다. “모든 마왕들이 소수정예를 지향하지. 마왕성은 마나의 보고. 보물을 누리는 자는 오로지 실력이 뛰어난 자뿐이어야 한다.……지극히 그럴듯한 논리이지만, 나의 마왕성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내가 손바닥을 모으고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물량. 오로지 인해전술로 밀고 나간다.” 10층의 대미궁을 건설한다. 그 한층한층을 죄다 몬스터로 꽉꽉 채워버린다. 그리고 나 자신은 지하 10층, 맨 아래 층에 마왕의 방을 위치시키고 한가롭고도 평화롭게 살아간다. 건설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로 멋진 해결책이다. 라피스가 신음했다. “마왕성으로서의 위엄이…….” “위엄은 무슨. 서열 제71위가 위엄 찾다가 뒈지겠다, 야.” “주군. 인해전술이라 말했다마는 거기엔 큰 약점이 있다.” 라우라는 어떻게든 나의 계획안을 막아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질 낮고 양 많은 군대보다 소수정예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이런, 전술가는 이래서 곤란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소수정예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으니까. “말해보세요.” “물량작전으로 나가면 분명히 어지간한 적은 마왕성에 침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상대편이 매우 강력한 소수정예를 끌고오면 어쩔 텐가?” 라우라가 이건 어쩔 수 없을걸, 하고 자신만만한 어투로 얘기했다. “그토록 거대한 마왕성이다. 굳이 몬스터 전부를 토벌할 필요가 없다. 마왕성 입구에서 마왕의 방……거기까지 이어지는 최단경로를 돌파하기만 하면 된다. 속전속결을 노리겠지. 반면에 이쪽은 오합지졸밖에 없다. 지나치게 강대한 적이 등장하면 서로 살기 위해서 도망칠 게 뻔하다. 마왕성은 간단하게 함락되고 만다.” “흐흐.” 내가 웃었다. “바로 그겁니다, 라우라. 그래서 대규모 재건축이 필요합니다.” “음?” “저는 마왕성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미궁으로 만들 것입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 입장에서는 마왕성에 대해 논하는데 뜬금없이 미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던전을 미궁 형태로 짓는 것은 당연한 선택지였다. 모험자들의 이동경로를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우선 이동경로는 이렇게 됩니다.” 나는 바닥에다 분필로 대략적인 설계도를 그렸다. ──────────────────── 던전 입구(1층)―――지하 1층 입구―――지하 2층 입구―――지하 3층 입구 … 지하 10층 입구―――-마왕의 방 ──────────────────── “이때 이동경로의 양쪽을 단단한 벽으로 감쌉니다.” “아. 그래서 미궁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나 벽을 뚫고 나아갈 수 없도록 아주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야겠죠. 여기서 조건은 각 입구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 지하 1층 입구――――――――――――――――――――――――지하2층 입구 ──────────────────── “이렇게 미로를 꼬고 또 꼬아서 한 층을 꼬박 돌아다니게 만들면, 모험자들은 차라리 벽을 뚫고 이동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며칠만에 벽을 전부 뚫을 순 없을 테니 입구에서부터 조금씩 땅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나오겠죠. 그럼 안 됩니다.” 지나치게 짧으면 의미가 없다. 모험자들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을 테니까. 지나치게 길어도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공 들여서 세워놓은 미궁의 벽을 모험자들이 깨부수려고 들 테니까. “적당히 길어야 합니다. 약간 길다 싶어도, 이걸 조금 더 빠르게 가겠답시고 벽들을 뚫으면 쌩고생이겠구나, 싶을 정도의 길이여야 하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몬스터의 주거공간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몬스터들은 미궁의 통로에서 사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통로는 꽤나 좁게 만들 겁니다. 구간마다 다르겠지만요. 아무튼, 통로처럼 좁은 곳에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거주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고로 몬스터의 거주지역은 미궁의 벽 너머에 마련합니다.” 내가 땅바닥에 그림을 추가했다. ────────────────────  □ □ □ □ □ □ □ □ □ □ □  ■■■■■■■■■■■■■■■■■■■■■■ 지하 1층 입구――――――――――지하 2층 입구 ■■■■■■■■■■■■■■■■■■■■■■  □ □ □ □ □ □ □ □ □ □ □  ■: 미궁의 벽 □: 몬스터 거주 지역 ──────────────────── 라우라가 내 설계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래도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험대와 몬스터가 아예 격리되어버리지 않는가! 싸움 자체가 안 일어난다.” “아이고, 라우라. 편의상 그림만 이렇게 그려둔 겁니다. 통로를 잘 배치해야지요. 몬스터 입장에서 지켜야만 하는 부분을 군데군데 지나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흐음.” 그렇게 되면 특정한 골목에서만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나는 설계도에 약간 손을 보았다. ────────────────────  □ □ □ □ □ □ □ □ □ □ □  ■■■■■■■■■■ ■■■■■■■■■■■ 지하 1층 입구――― (☆) ――――지하 2층 입구 ■■■■■■■■■■ ■■■■■■■■■■■  □ □ □ □ □ □ □ □ □ □ □  ■: 미궁의 벽 □: 몬스터 거주 지역 ☆: 전투지역 ──────────────────── 모험자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싸움을 겪게 된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통로에 계속해서 몬스터가 생성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물론, 미궁의 벽에 틈새가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어야겠고 말이다. 이른바 리스폰 지역이다. “예컨대 이 근처에다 버섯을 대규모로 재배할 수도 있겠지요. 버섯은 자라면서 던전 내의 마나를 흡수할 겁니다. 공기 중의 마나가 적어지고, 몬스터는 버섯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겠지요. 모험자들 입장에선 마나가 제법 쌓인 버섯은 돈이 됩니다.……몬스터는 여기를 지키기 위해, 모험자는 여기를 약탈하기 위해 부딪힐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악랄한 수법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마 수많은 몬스터가 비록 아주 풍족하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버섯 따위를 재배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모험자와 싸워야만 한다. “그래봤자 모험자입니다. 이대로 야생에서 살아가며 인간의 마을을 침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가, 아니면 마왕성에서 살아가며 이따금 열 몇 명의 모험자와 맞붙는 것이 더 효율적인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기대되는군요.” 게다가, 하고 내가 덧붙였다. “각 층의 마나 농도도 다릅니다. 여기 동굴은 깊은 곳일수록 마나가 짙어지더군요. 모험자를 잘 격퇴한 몬스터에게는 이주의 권리를 줄 겁니다. 잘 살고 싶으면 잘 싸워라.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습니까?” “…….” 라우라가 무언가 불만인 얼굴로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하 10층에 이르러서는 정예 몬스터만이 남겠군.” “머나먼 훗날의 얘기지만 말입니다. 시작은 지하 1층. 즉 한 층입니다. 제가 기대한 대로 일이 굴러가는지 여러모로 시험해봐야 하니까요.” 라피스가 그때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단탈리안 님. 전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응?” “돈 말입니다.” 라피스가 무척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벽이라고 표현하니 마치 간단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처럼 거대한 공간에 미로와 같은 통로를 놓는 일입니다. 어마어마한 공사입니다. 한두 푼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만한 돈을 얻으실 생각입니까?” “아아. 그거?” 내가 가볍게 대꾸했다. “빌릴 거야.” “……예?” “빚 몰라, 빚? 화끈하게 땡겨쓸 거라고.”   00131 로마의 아침 =========================================================================                        라피스가 표정이 싸늘해졌다. “단탈리안 님.” “아,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아. 압니다요. 함부로 대출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내가 손사레를 쳤다. 일 년 전에 라피스한테 대출을 의뢰한 적 있었다. 블랙 허브를 사들이기 위해 종잣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때도 라피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백 년, 이백 년, 차근차근 돈을 모으라고 나한테 조언했지. 상인이면서 이상하게도 대출이란 걸 싫어했다. 큰돈을 만지려면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야 하는데 말이다. 아니, 상인이기에 더더욱 대출에 조심스러운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예. 물론 단탈리안 님은 신용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측근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느 상회에서든 돈을 빌려주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대책없이 빚을 져서야 결국은 패망할 따름입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세상에 다 방법이란 게 있지. 후후. 뭐, 천천히 두고봐. 아무튼 예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하아.” 라피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돈과 관련하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일단 믿어보는 것이겠지. 라피스는 잔소리꾼이지만 나를 믿어주는 잔소리꾼이었다. 라우라가 말했다. “주군. 마왕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해했다. 소녀가 생각하기로 주군은 단순히 모험자를 격파하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인해전술이라 말했지만 몬스터 부락 전체를 끌고들어와서 주거지를 형성하겠다니. 그건 이미 마왕성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도시라 부르는 편이 낫다.” 과연 라우라. 정치에 재능이 없어도 직감이 살아 있다. “즉……주군은 그저 마왕성이라는 요새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도시를 만들어서 그곳에 군림하고 싶은 거다. 소녀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훌륭합니다. 맞아요. 저는 단순히 몬스터 몇 명을 수하로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생태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러했다. 예컨대 인간의 마을에 몬스터가 쳐들어왔다고 해보자. 그 마을에는 촌장이 없다. 마을의 주인격인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몬스터에 맞서 싸우지 않을까?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항쟁할 것이다. 딱히 그들이 숭고한 도덕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곳이 파괴되면 자신의 삶까지 파멸해버리니까. 마을을 지키는 것이 곧 자기 삶을 지키는 것이므로 싸운다. 마을이 멸망할 판국인데도 도망을 쳤다고? 그럼 마을이 없어도 살아갈 자신이 있다는 거다. 마을의 유무와 자신의 삶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내가 월맹군 제6군단의 일원으로서 변경백령을 침략했을 때, 영지민들은 일단 생존권을 보장받자 간단하게 항복해버렸다. 변경백의 자리에 폰 로젠베르크가 있든지 바르바토스가 있는지 자기네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끝까지 저항했다. 월맹군을 패퇴시키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자 했다. 어째서인가? 폰 로젠베르크는 자신의 삶을 변경백이라는 지위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제대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느냐는 사회구성원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행동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폰 로젠베르크는 훌륭한 군인이었을지 몰라도 훌륭한 영주는 아니었다. 아마 지금 이 시대, 아니 대부분의 시대에 군주란 그런 자들이겠지. 나는 몬스터들이 던전을 자발적으로 지키기를 원한다. 구태여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다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럼에도 모험자가 침입해 들어오면 몬스터들 스스로 송곳니를 들이밀고 손톱을 내세우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도 편하다. 앞으로 내가 몇 년을 살겠는가. 인간과 다르게 마왕은 수명이 없다.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천운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살아간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모험대가 침입하겠지. 그때마다 이번엔 어떻게 모험대를 격파할까 고심하라고? 그런 중노동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그냥 몬스터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그중에서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지하로 이주시킨다. 마나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 만에 하나 부조리한 사건이 생기면 공명정대한 판관으로서 재판해준다. 상벌과 재판, 두 가지만 맡아도 이미 과업이다. 여기에 통치까지 하라니 제정신이 아니다. 라우라가 옳게 지적했다. 나는 단지 마왕의 성을 건설하려는 게 아니다. 몬스터를 위한 도시, 나의 안락을 위한 도시를 세우고 싶다. 실로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 * 다음날, 마왕성에 손님이 찾아왔다.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였다. 그녀는 내 밀명을 받고 움직인 라피스에 의해 초대되었다. 순간이동 스크롤이 사용되었기에 오가는 시간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 “헤에. 여기가 주인님의 성이구나.” 시트리가 나의 방을 두리번거렸다. 처음엔 눈이 반짝거렸는데 금방 식어버렸다. 내 마왕방은 검소한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여 초라할 지경이니까. 화려한 마왕성을 갖고 있을 시트리의 심미안에는 한참 수준이 뒤떨어졌다. 내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초라하지요?” “응. 주인님은 좀 귀공자처럼 지낼 줄 알았는데 의외인걸.” “저만큼 귀공자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마왕도 드물 겁니다만.” 대신에 거지라는 단어와 제일 잘 어울릴 자신이 있었다. 시트리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튼, 무슨 일로 불렀어? 미안하지만 아직 전쟁이 한창이거든. 주인님이 불러서 오긴 했어도 한 시간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그녀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나랑 한판 하고 싶은 거라면 아쉽지만 나중에 하는 걸 추천하겠어. 적어도 네 시간은 여유롭게 잡아야지 제대로 된 쾌락을…….”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무슨 종마입니까, 전쟁하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서 떡을 치게!” “에? 아니야?” 시트리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급하게 부른다고 해서 영락없이 그쪽 부탁인 줄 알았는데.” “시트리 님의 머릿속에 제 인상이 도대체 어떻게 박힌 것인지 심히 궁금하군요.” 내 입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 하지만……주인님이 그렇게 성교를 잘 한다면서. 나 소문 들었는걸.” “소문? 소무우운? 제가 섹스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났다는 말입니까?” “응. 바르바토스가 만날 여자 마왕들한테 자랑하고 다니거든.” 금시초문이었다. “하루만 같이 있으면 백 번을 보내주네, 온갖 체위에 정통해서 잡아먹히는 재미가 있네,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 뭐네 그러는걸. 애인 자랑하는 꼴이 같잖았지만.” 바르바토스으으으! 여자 마왕들 앞에서 아저씨 미소를 지으며 음담패설을 늘여놓는 바르바토스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무척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외설스러운 손짓을 동원해가며 그저께 섹스가 무척 만족스러웠다는 둥 떠벌렸겠지. 우라질 로리 년! “아, 그 얘기도 들었어. 최근에는 SM에 눈을 떴다면서.” 좋았어. 지금 다짐했다. 언젠가 그 로리 년을 기필코 죽여버리겠다.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죽을 때까지 간지럼 피워주겠다. 그 하얀 겨드랑이에 땀방울이 송송 맺힐 때까지 간지럼 피워주겠다. 시트리의 폭로는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설마 바르바토스가 마조 역할을 할 줄이야. 난 걔가 평생 사드만 할 거라고 확신했었거든. 바르바토스 본인도 놀라하더라! 뭐라더라?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당하니까 자기가 쓰레기보다 못한 년이 되는 것 같아서 쾌감이 쩔어준대.” “…….” 입구멍에 모터가 달린 암퇘지 같으니라고. 감히 둘 사이에 내밀하게 주고받은 플레이 내역을 다른 사람한테 신나게 까발려? 만일 내가 마왕들한테 거 바르바토스가 울고불며 용서해달라고 빌어재끼는 모습이 참 꼴릿하더라, 하고 낄낄거렸다 해봐라. 보나마나 다음날 바르바토스가 들이닥쳐서 네놈이 젯밥을 먹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하면서 채찍질을 해대겠지. 그런데 정작 그 녀석은 한낱 음담패설의 도마에 날 올려버린 것이었다.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어서 각별하다 말했겠다. 오냐, 옴팡진 것아. 특별히 요망을 받아주마. 다음번에 부디 기대해달라. 그 귀여운 엉덩이가 새빨개져도 용서하지 않을 테다. 나는 머릿속으로 절찬리에 <쓰레기 특별 코스>를 개발했다. 그 사이에 시트리가 의자에 앉았다. 문득, 그녀가 입은 갑옷 가장자리에 핏물이 묻은 게 보였다. 마왕씩이나 되는 사람이 갑옷을 제대로 닦지 못할 정도로 월맹군 전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었다. 내 앞에서 시트리가 지금 느긋하게 행동하고 있지만……어쩌면 상당히 무리를 해서 여기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당연하다. 시트리는 산악파의 돌격대장. 파이몬이 부상을 당한 지금, 시트리는 사실상 산악파의 우두머리이다. 이번 월맹군 전쟁에서 산악파가 선봉에 서게 되었으니 그녀는 누구보다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나는 현재 마왕들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을 불러들인 셈이다. “성교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야? 잘 모르겠는데.” “단도직입해서 말씀드리지요. 돈이 필요합니다.” “응, 좋아.” 시트리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그녀가 손을 턱에 괴고 중얼거렸다. “나 전재산이 육십만 골드야. 이백 년 전에 정리했을 때 그랬으니까 지금도 대충 비슷할 거야. 으응, 현물까지 합치면 백오십만까지 갈지 모르겠는걸……보석창고랑 거기 창고까지 털어서……빠듯하게 백육십만은 될지도.” 그녀가 계산을 끝마쳤는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응. 얼마가 필요해? 말만 해줘. 백육십만까지 가능해.” “…….”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음속의 강물이 약간 불어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서열 제12위의 자리는 카드놀이로 따는 것이 아니다. 본신의 강력함. 의지. 약간의 운. 그런 것들이 겹치고 겹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야만 한다. 타락하려고 마음먹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타락할 수 있다.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들어준다. 시트리의 생각은 이러하겠지. 하지만 저 '그러니까'가 가능한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하물며 마왕 정도의 권력자 중에서……. 나는 지난 1년을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작 1년을 살아남는데 말이다. 시트리는 수백 년을 살아왔을 텐데도 어떤 의미로든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강력해서 굳이 야비해질 필요가 없었음일까. 아니면, 추악한 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꿋꿋하게 바른 길을 걸었던 걸까. 아니면 순수함과 추악함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현명하고 또한 우둔한 것일까.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 눈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여인이 지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유지해온 인격이라는 사실이었다. 명화를 감상하는 데 굳이 그 그림이 어떤 경로로 그려졌는가 따질 필요가 없듯이, 시트리의 태도에 자그맣게 감명받는 데에도 굳이 그녀의 삶까지 알 필요가 없었다. “백만 골드를 빌려주십시오.” “알았어. 으음. 그런데 곤란하네. 내 마왕성에 재산이 있어서 말이야. 당장 건네줄 수가 없어.”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전쟁이 일단락되고 주면 안 될까?”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천연이야, 천연. “제 말을 잘못 이해하셨군요. 저는 돈을 주라고 부탁드린 게 아닙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지요.” “……응?” “백만 골드를 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시트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냥 줘도 되는데?”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시트리 님과 제가 동등한 위치에 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시트리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단순히 이용하고 이용되는 사이가 아니라, 진정한 동료로서 함께하고 싶었다. 험난하디험난한 세상이다. 시트리처럼 순수한 마왕이 나의 동지가 되어준다면 더없이 든든하겠지. 내가 시트리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에, 에에?” “시트리 님. 저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왜인지, 그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00132 로마의 아침 =========================================================================                        “자, 잠깐만. 얘기를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이해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모두 진심입니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력하면서도 이쪽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만큼 아군으로 삼기에 적절한 이가 또 있겠는가. 파이몬처럼 이상한 녀석이 이만한 인재를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시트리 님의 인품에 반했습니다.” “하……하아? 인품?” “예. 자기가 마음을 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치는 그 열정.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신의. 두 가지만으로 벌써 시트리 님께서는 모든 마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것이 분명하겠지요.” 칭찬의 세례를 받은 탓일까. 시트리가 손부채로 열심히 자기 얼굴을 부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뺨뿐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빨개졌다. 아하, 아무래도 시트리는 칭찬에 엄청나게 약한 성격인 것 같았다. 순수해서 칭찬에 더 약한가……그럴 수가 있지. 나는 이참에 아예 시트리의 호감도를 쭉쭉 올리고자 마음먹었다. “물론 인품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시트리 님은 매력적이지요.” “으……!?” “탐스러운 머릿결에 바르바토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육감적인 몸. 하하. 솔직히 저도 한 사람의 남자로서 동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말이다. “시트리 님처럼 아름다운 분과 함께한다면 제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갈 겁니다.” 그쯤해서 띠링, 하고 효과음이 울렸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6 오릅니다.」 시트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언제부터……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든 거야?” “물론 처음 본 그 순간부터입니다.” 파이몬을 용서해달라며 알몸으로 내 막사에 들이닥쳤을 때. 나중에 알고보니 이 녀석, 옷을 다 벗은 채로 월맹군의 진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내쪽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체면이고 뭐고 안 가리고 달려든 것이었다. 나에게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종류의 사람을 보면 마음이 물렁해진다. 얼마든지 더 벗겨먹을 수 있는데도 자제하게 된다. 되도록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잭 올란드의 경우도 그러했고. 아마 나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겠지. 벌레가 빛을 동경하듯이 나 또한 어딘지 모르게 순수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순수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더러운 방법을 동원하는 부류. 파이몬이 대표적인 경우이지. 순수하게 인간을 사랑한다 말하는 주제에 정치적인 여자이다. 무얼 숨기겠는가. 나 역시 이 부류의 대표주자이다. 파이몬을 싫어하는 것에는 동족혐오라는 면도 조금 있다. “으으으……저기, 이런 건 처음이라서…….” 시트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나, 평판이 안 좋다구?……몬스터랑 성교도 하고, 더럽다는 말 무진장 많이 듣는데……매력적이라는 말, 별로 들은 적 없는데……파, 파이몬 언니라면 모를까 내가 매력적이라니. 말도 안 돼.” “풉. 파이몬이요?”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아서라. <던전 어택> 플레이어 시절부터 파이몬은 내가 싫어하는 여자 캐릭터 투톱을 달린다. 저번 설전의 막판에서 나를 도와준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해야겠으나, 아직도 파이몬은 내 마음속에 비호감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 비하면 시트리는 천사이다.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당신이 파이몬을 경애한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걸 용서해주시길. 저에게는 파이몬보다 당신이 열배백배는 더 멋집니다.” “흐아아?” “누가 저에게 파이몬과 시트리, 둘 중에 누구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열 번의 질문에 열 번의 대답으로, 백 번의 질문에 백 번의 대답으로 말할 것이니 오로지 시트리 님, 당신을 고를 것입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인류를 위한답시고 동족인 월맹군의 뒤통수를 후려깐 여자이다. 동지로 삼을까보냐.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절대다수의 마왕이 시트리를 선택하겠지. 시트리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부끄러움에 물들다 못해서 퐁당 빠져 있었다. “하지만……나는 이미 파이몬 언니한테 몸과 마음을 바쳤는걸. 게, 게다가 너한테도 바르바토스가 있잖아!” 음. 과연. 파이몬은 앞으로 어찌될지 몰라도 명색이 산악파의 수장이다. 반면에 나는 평원파의 실세 중 한 명. 그런 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산악파인 시트리에게 꽤나 정치적인 부담으로 다가올 거다. 일단 파이몬과 사이가 나빠질지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 나빠진다. 시트리는 마음이 괴로워지겠지. 자기가 배신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닐지 고심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딱히 시트리를 평원파로 영입하려는 게 아니다. 애시당초 내가 평원파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진력할 이유가 없다.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면 평원파든 산악파든 파벌을 가리지 않고 포섭한다. 이 부분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르바토스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의 측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마왕입니다. 제가 마음에 든 사람과는 거리낌 없이 사귀고 싶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파벌이 예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일종의 간판, 명분으로 전락하리라. 합스부르크 제국은 끝났다. 적어도 제국의 중부-북부 일대는 월맹군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많은 마왕들이 자작령과 백작령을 하나씩 꿰차고 인간계에 자리 잡겠지. 영지 단위로 세력이 잘게 쪼개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마왕들은 인간 타도를 울부짖으며 미우나 고우나 겉으로나마 협력했다. 그것은 마왕의 세력과 인류의 세력이 딱 명확하게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부-북부에 똬리를 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일단 산악파는 영지민인 인간들에 친화적으로 접근한다. 산악파 마왕들은 '이제 전쟁은 끝! 인간계에 영토 마련했으니까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에 싱글벙글하겠지. 더 이상 마왕의 영토가 늘어나버리면 고위급 마왕들을 견제할 세력――즉,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먹는 것쯤이 딱 적절하다. 고위급 마왕들을 적절하게 견재해서 좋고, 풍요로운 인간계에 자리를 잡게 되어서 좋고, 산악파에겐 최상의 시나리오가 실현된다. 반면에 평원파는? 영지민인 인간을 탄압한다. 평원파는 최종적으로 대륙 정벌을 노린다.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 그렇게 여기고 있다. 평원파의 영지에서 마왕은 귀족이 되고, 마인은 평민이 되며, 인간은 노예가 되리라. 당연히 온갖 말썽이 일어날 거다. 인류도 서서히 마왕이 단순히 '마왕'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와는 협력하고 누군가와는 싸운다. 어제 적이었던 자가 오늘은 아군이 된다. 지극히 혼란스러운 정세가 도래한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이제 각 마왕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길을 걷는다. 예를 들어 산악파인 마왕이 한 명 있다고 해보자. 자기 영지가 평원파 바로 옆에 있다면 어쩌겠는가? 끝까지 산악파에 의리를 지킬까? 그럴 리 없다.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한번 타협하면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또 다시 그 다음에도……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생존이 되어버린다. 산악파의 일부 마왕과 평원파의 일부 마왕이 연합해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지도 모른다. 지역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야말로 난세. 유럽의 30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시대가 다가온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부디 파이몬을 잊어주십시오. 저 역시 바르바토스를 잊었습니다. 오로지 한 사람의 마왕으로서, 한 사람의 마왕인 저를 바라봐주십시오. 저 개인이 믿을 만한 자인지 아닌지 흐림 없는 눈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아, 으……으으?” “시트리 님.” 그런 훗날을 대비하여 서열 제12위의 마왕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11 오릅니다.」 알림창이 또 떠올랐다. 순풍만범(順風滿帆)이었다. 내가 다시금 시트리의 손을 꾸욱 쥐었다. 그러자 시트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사과처럼 빨간 낯빛에 눈가에는 눈물이 약간 맺혀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시트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곁눈질로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게 빤히 보였다. “제가 바르바토스를 버리겠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시트리 님, 당신도 파이몬을 등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바르바토스는 바르바토스. 파이몬은 파이몬. 그리고…….” “그, 그리고……?” “시트리 님은 시트리 님이고, 저는 저이겠지요.” 그녀가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기색도 잊었는지 뚫어지게 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것이 마지막 난관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진심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는 말없이, 다만 그녀의 눈동자에 나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귓가에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마왕 시트리의 호감도가 8 오릅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습니다.」 시트리가 왠지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잘 부탁해…….” 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예. 부디 오랜 만남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후에 시간이 다 되어 시트리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마왕성에 도착한 지 벌써 한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직 전황이 급박했다. 시트리는 자기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슬퍼하는 것 같았다. 동료가 되고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저랬다. 과연 나의 눈썰미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배신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마왕이었다. “나, 얼른 전쟁을 끝내버릴 테니까!” 텔레포트 주문서를 손에 꽉 쥐고 시트리가 말했다. “파이몬 언니가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해둘게. 걱정하지 마. 전쟁이 끝나면 돈도 보내주고, 자주 놀러오고……아니, 아예 여기로 이사와버리는 것도…….” “하하. 지금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모쪼록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으, 응. 알겠어.” 시트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마왕 전하였다. 아래에 거포가 달렸지만. “주인님도 몸 건강히 있어야 돼?” “단탈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시트리.” 시트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기쁜 듯 만면에 미소를 짓더니, “응! 단탈리안!” 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법진이 발동했다. 노란 빛이 시트리의 몸을 휘감았다. 빛은 마왕방을 가득 메웠다. 잠시 뒤에 빛이 사그라들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지금쯤 시트리는 삭막한 막사에 서 있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건투를 빌었다. “후우.” 만족스럽게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로써 한 명……나의 아군이 되어줄 사람을 마련했다. 동맹 관계라고 할까. 내가 위험에 처하면 시트리가 도와주고, 시트리가 위험해지면 내가 구원에 나선다. 상호이득이었다. “…….”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마왕방 구석에 라피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내 명령에 따라 시트리를 안내해온 이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립하고 있었다. 마왕들 사이의 밀담이다. 일개 서큐버스인 그녀로서는 당연히 입을 닫을 수밖에. “아아, 라피스. 수고했어. 덕분에 일이 잘 풀렸네.” “……말솜씨가 대단히 능숙하시더군요. 감탄했습니다.” 음? 웬일로 라피스가 칭찬을 다 하냐. 그녀가 보기에도 내가 시트리를 기가 막히게 설득한 모양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라피스에게 인정을 받으면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내가 씨익 웃었다. “뭐, 이런 일을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니고.” “……그렇습니까. 한두 번이 아닙니까.” “내가 이래봬도 한가락 하는 양반이야.” 혀가 발랄하기로 치면 마왕 중에서 상위권에 들겠지. 자신이 있었다. “미처 몰랐습니다. 다시 봤습니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칭찬하는 말과 다르게 표정이 싸늘했다. 그날 라피스가 유난히도 쌀쌀맞게 굴었다. ……아니, 그러니까 어째서?   00133 풍요의 가을 =========================================================================                        그해 가을은 배고팠다. 황금빛 밀이 넘실거려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농밭은 거무튀튀했다.……저잣거리에 병사자, 아사자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한 효자는 아비의 시체를 매장하려고 힘들여 묘를 팠다. 다음주, 그 남자는 송장이 되었다. 시체에서 흑사병이 옮았다. 반면에 가족을 버리고 제 한몸 살겠다고 도망친 이들은 살아남았다. 가족과 이웃에 충실한 인간이 제일 먼저 쓰러졌다. 도시에 이웃애와 시민애가 넘칠수록 흑사병은 활개를 쳤다. 윤리가 희박한 곳일수록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여 대륙의 이쪽으로, 저쪽으로 도망을 쳤다. 악덕은 미덕이 되었으며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되어버렸다.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곡식은 제대로 경작되지 않아 채 자라기도 전에 메말랐다. 흑사병에 뒤이어서 대흉년……이 유례없는 대참사에 인간계의 군주들은 당황했다. 전염병으로 농민이 떼거지로 죽어나갔다는 것은 알겠다. 일손이 줄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그만큼 식구(食口)도 줄어들지 않았는가. 열 명의 식구를 먹여살리는 것과 세 사람의 식구를 먹여살리는 것. 어느 쪽이 편할지 명약관화하다. 어째서 전 대륙에 아사자가 떼거지로 속출하는가? 문제는 군주들 자신에게 있었다. 월맹군이 침략할 당시, 각국의 군주들은 징집병을 효과적으로 모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군대에 흑색 허브를 우선적으로 분배한다. ─ 특효약을 얻고 싶다면 자원해서 군인이 되어라! 군인이 인류를 위하여 마왕과 싸우는 만큼 당연히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논리 자체에는 결함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룻밤 사이에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나가는 와중에, 저러한 선언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군주들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오늘도 보급이 도착하지 않았소!”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황녀가 탁자를 치며 흥분했다. “그쪽에서 본군을 지원하기로 약조했을 터. 이는 국제적인 공조를 위반한 것이나 다름없소!” “죄송합니다, 전하.” 아나톨리아 제국의 대사가 식은땀을 흘렸다. “사흘만 더 시간에 말미를 주신다면…….” “지난번에는 나흘, 지지난번에는 일주일. 오늘은 또 사흘이요? 하. 아예 전쟁이 끝나고서 보급품을 전달하겠다고 말하시지.” 비단 합스부르크 제국군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연합군의 모든 진영에서 이 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월맹군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것이 늦봄. 전쟁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가을의 수확을 노린다면 쉽게 버틸 수 있다. 그런 계산 아래 각국에서는 보급 계획을 짰다. 하지만 계산해둔 것에 비하여 실제 수확량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농촌에 인력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흑사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터에, 그나마 건장한 일꾼들조차 흑색 허브를 배급받겠다며 군에 입대했다. 농촌에 남은 것은 대부분이 힘없는 노인과 아낙네였다. 수확량은 작년과 비교해서 절반……아니, 2할까지 줄어든 곳마저 수두룩했다. 현명한 군주들은 자신들이 지독한 악순환에 빠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월맹군에 맞서려면 군대가 필요하다. 군대를 유지하려면 농촌에서 인력을 뽑아내야 한다. 농촌에서 인력을 뽑아내면 수확량이 적어진다. 수확량이 적어지면 보급이 줄어들고, 결국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대사를 돌려보내고 난 후, 엘리자베트 황녀가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아름다운 은발은 예전과 다르게 퍼석했다. “안 된다. 월맹군이 문제가 아니야. 이대로 가다가는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고 만다……!” 그녀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요새 황녀는 밤새도록 고민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월맹군과의 전투, 보급 문제, 제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근황, 제2황자파의 반란 움직임 등, 고민거리는 무수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악몽 때문이었다. 잠이 들면 반드시 동생이 꿈에 나왔다. 눈알이 빠지고 그 자리에서 피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동생이 비명을 지르면서 '누나, 앞이 안 보여, 누나, 도와줘'를 반복했다. 그녀가 당황해서 동생의 빠진 눈알을 찾으려고 땅바닥을 뒤진다. 하지만 이미 땅은 온통 피눈물에 잠겨 있다. 어디에 눈알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필사적으로 눈알을 찾으려고 헤집으면 어느새 그녀의 두 손, 두 팔, 온몸이 피로 흥건하게 젖는다. 마침내 눈알을 찾아서 동생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 동생은 이미 피바다에 익사하고 난 뒤……끔찍한 악몽이었다. “전하. 브르타뉴 여왕께서 방문하셨나이다.” 막사 바깥에서 경비병이 말했다. 황녀가 내심 기뻐하며 대답했다. “아아. 어서 들어오시라 전해드려라.” “딱히 전할 필요는 없어. 벌써 들었으니까.” 막사의 휘장을 걷으면서 여인이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브르타뉴 왕국을 통치하는 여걸이었다. “무척 피곤해보이는걸. 잠은 잤어?” “아니……잠을 잘 때가 아니네.”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녀와 브르타뉴 왕국의 여왕. 두 사람은 이번 전쟁에서 친구가 되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 것이었다. 만약 대륙에 인간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다면, 두 영웅은 서로 패권을 다투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인류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내우외환, 안으로는 흑사병이 곪아 들어오고 바깥에서는 월맹군이 침략한다. 여기에 이제 대흉년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어쩌면 이번 월맹군 전쟁에서야말로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 두 명의 영웅은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적으로 삼으면 불안하지만 아군이라면 이보다 더 든든한 상대가 없었다. 여왕과 황녀가 둘 도 없는 친우가 되는 데에는 불과 일주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솔직히 물어볼게. 엘리제, 남은 군량이 있어?” 군말이 없었다. 그녀는 탁자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들었다. 여왕 역시 자신과 똑같이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겠지, 하고 황녀가 생각했다. “아니. 여유분이 전혀 없네……최대한 아껴도 한 달이 빠듯하겠지.” “한 달이라, 비슷하네. 이쪽은 한 달하고 보름일까. 이것도 내 왕국까지 돌아가는 기간은 제외하고 계산한 거야.” 두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약속한 것처럼 타이밍이 똑같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풋, 하고 웃었다. 황녀는 묘하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심복들보다도 이 사람 앞에서 훨씬 솔직해질 수 있었다. 똑같이 한 나라의 명운을 짊어진 처지라서 그럴까. 왜 이제서야 그녀를 만났는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에게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안 남았어.” “아아. 단기결전이겠지.” 앙리에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들은 월맹군의 고질적인 약점이 바로 보급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인간의 시체가 없는 이상 몬스터 군대는 버티기 힘들다. 저들이 거대한 덩치 때문에 자멸해버릴 때까지 최대한 전투를 피하자.――그것이 본래 계획이었다. “설마, 보급량이 예상보다 절반이나 밑돌다니. 상상하지도 못했어.” 앙리에타 여왕이 재미없다는 듯 입끝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간군이 도리어 보급 문제에 시달리게 생겼다. 아무리 길어도 한 달. 한 달 안에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 병사들에게 비정상적인 손해를 강요하게 되겠지.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앙리에타 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황녀를 쳐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어때, 합스부르크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 같아?” “헉명이라…….” 엘리자베트 황녀가 신음했다. 말도 안 된다, 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상대방이 평범한 군주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부정했겠지. 하지만 브르타뉴의 여왕은 특별했다. 그녀 앞에서는 허세를 부려도 소용이 없다. “위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녀는 5년 전부터 공화주의자들과 손을 잡아왔네. 현재 제도에 있는 공화파는 거의 모두 본녀를 지지하고 있어.” “위험하지만, 통제는 할 수 있다. 그런 거구나……부럽네. 이쪽은 영 사정이 안 좋아.” 앙리에타 여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다시피 나는 여인의 몸으로 왕이 되었어. 그 과정에서 귀족들과 협력하는 건 필수적이었지. 내 세력은 귀족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하긴,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그녀가 탁자 위에 있는 와인을 잔에 따랐다. “괜찮은가? 술을 마셔도.” “이럴 때 마시라고 신이 술을 창조했을걸.” “흠. 그렇다면 본녀도 마시지.” 앙리에타 여왕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에, 밤에 술을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면서.” “친구를 외롭게 만들면서까지 건강을 지킬 의리는 없지.” “친구? 친구라.” 그 단어를 언제 들어봤는지 까마득한걸, 하고 여왕이 황녀에게 포도주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건배했다. 여왕이 입술을 와인으로 적시고 말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사람들과 비밀리에 만나봤어.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공화국이란 게 어떤 형태인지,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 대략적인 설명을 들어봤는데……무리야. 귀족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어. 당장 반란이 일어날 거야.” 황녀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적어도 개혁을 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평민 병사들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간다. 지휘관인 귀족들은 점점 더 불안에 떨고 있지. 병사 차원에서 항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쪽도 마찬가지구나.” 앙리에타 여왕이 한숨을 쉬었다. “평민은 변화를 바라고, 귀족은 현상유지를 원해. 군대 안에 서로 다른 군대가 있는 셈이야. 도저히 제대로 된 군대라고는 말할 수 없어. 알고 있어? 훈련도 이전의 문제야. 병사들이 싸울 의지 자체가 희박하다고. 난 지금도 탈영병 세 명의 목을 베고 오는 길이야.” 사실은 열두 명이었지만, 하고 여왕이 덧붙였다. 탈영병 숫자가 많으면 그 자체로 사기를 저하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세 명만 공개처형하고 나머지 아홉 명은 은밀하게 매장해버렸다. 여왕 본인이 지시한 내용이었다. “탈영병의 숫자를 위조해야 하는 군대라니, 농담이 아니야…….” 두 사람이 말없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황녀는 입안이 무척 썼다. 입맛이 쓴 건 포도주 때문만이 아니리라. 군대의 사기가 오르지 않는다. 누구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 정말로 자신들은 인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인가.……병졸들 사이에서 의문이 버섯처럼 피어나고 있다. 의문이 많을수록 군대는 둔해진다. 전투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나마 흑색 허브를 우선적으로 배분해서 다행이었다. 병사들은 그걸 은혜로 여기고 있었다. 귀족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하지만 흑색 허브를 나누어준 나랏님에게 반항하지는 않겠다, 그 정도 분위기였다. “개혁을 선언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개혁을 선언하지 않으면, 언젠가 평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겠지. 병사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려. 진퇴양난이야.” 여왕이 침음을 삼켰다. “하다못해, 내 왕권이 강력했을 때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면.” 여왕의 고민에 황녀도 공감했다. 왕권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개혁을 밀고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여인의 몸으로 즉위한 앙리에타나, 제3황녀의 지위로 쿠데타를 일으킨 엘리자베트나, 강력한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인의 카리스마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10년. 앞으로 10년만 있었다면 권력을 안정시켰을 거다. 평민층에서 영웅을 한 명 만든다. 귀족들도 뭐라 불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훈을 세우게 만든다. 그 영웅을 얼굴마담으로 삼아 개혁을 조금씩 진행시킨다면 귀족들도 크게 반항하지 않겠지. 왕권은 강화되고, 평민들의 지지도는 높아진다. 나라가 부강해진다. 왜 하필 지금인가. 황녀는 몇 번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지만 너무나 애석했다. 고작 10년이다. 10년만 있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다. 왜 하필 지금인가…….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뭔가를 회의한다기보다 서로 고충을 털어놓는 것에 가까웠다. 여왕과 황녀 모두 국가의 톱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껏 고민을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오직 서로에게만 솔직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나, 내 군대를 전멸시킬 거야.” “뭐라고?” “어차피 개혁은 불가능해. 귀족의 반란이 일어날 테니까. 차라리 전투를 빌미로 평민들을 죽여버리겠어. 내 왕국에서 '그' 연설을 들은 사람은 아직까진 병사들밖에 없어. 혁명의 싹을 제거할 거야.” 하지만 그래서는, 하고 말하려다 황녀가 입을 다물었다. 여왕의 눈이 슬프리 만치 분노에 물들여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부강한 나라를 원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그런 백성을 제 손으로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에, 여왕은 강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임금은 만 백성의 어버이. 말하자면 나는 자식을 죽이게 된 셈이야. 단탈리안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 나에게 패륜을 저지르게 만들었어.……이 원한, 언젠가 반드시 갚아주겠어.” 여왕은 그 말을 남기고 막사에서 떠났다. “…….” 엘리자베트는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방금 여왕이 언급한 인물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그게 소년이 마지막까지 내쉰 숨결이었다.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는 자에게, 끝끝내 분노도 원망도 쏟아내지 않고……단지 왜냐고 물었다. ─ 소년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게지. 왜 사랑하는 누나가 자신을 죽이는 것인지. 소년은 진심으로 누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 네 년은 더럽고 역겨운 쓰레기 살인자이다. 천재인 그녀는 단탈리안의 말을 단 한 마디의 생략 없이 기억했다. 그렇기에 상처 또한 생생했다. 남동생에 대한 악몽을 꾸고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날 때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그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가? 도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단탈리안.” 그녀가 중얼거려보았다. 하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고 더욱 더 깊어질 뿐이었다. 황녀는 단탈리안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부지불식간에 잠이 들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남동생이 꿈에 나타났고, 황녀는 손바닥에 끈적한 핏물을 느끼며 깨어났다. “로베르트, 미안하다. 누나가 잘못했다. 미안해, 로베르트. 미안…….” 엘리자베트가 배게에 얼굴을 갖다대고 눈물을 훔쳤다. 그 와중에도 황녀는, 자신의 울음소리가 행여나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이를 악 물어야만 했다. 그 다음날, 브루노 평원에서 접전이 펼쳐졌다. 월맹군의 제1군단과 인간군의 브르타뉴 왕국군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마왕 시트리가 이끄는 몬스터 군대는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브르타뉴 왕국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 왕국군을 섬멸시켰다. 브르타뉴의 여왕과 측근 몇 명만이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여왕은 그날로 인간연합군에서 이탈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는 길에서 브르타뉴의 여왕은 몇 번이나 병사들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앙리에타 여왕과 엘리자베트 황녀가 피눈물을 삼켰을 때, 단탈리안은 라우라와 함께 음란하고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00134 풍요의 가을 =========================================================================                        * * * 던전에 대한 청사진이 짜이고 난 후,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 던전을 지으려고 해도 시트리가 돈을 지원해줘야 한다. 월맹군 전쟁이 끝나야지만 시트리는 자금을 움직일 수 있다. 고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완전히 한가한 셈이었다. 시트리와는 수정구를 통해서 자주 통신을 나누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마왕군에 전황이 썩 유리했다. 단지 월맹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고 할까. 병력에 비해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 기껏 모였는데 다시 군단들이 따로 놀고 있다니까. 마법수정구에서 투영된 시트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얘기에 따르면 몬스터 십 만 마리가 소비하는 보급량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여태껏 월맹군 제6군단이 모아둔 식량을 순식간에 동내버렸다. ─ 약삭빠른 인간 놈들, 한판 싸우자니까 계속 피하고……으으! 몬스터 군단이 식량을 얻으려면 아무래도 큰 전투가 필요했다. 전투에서 생겨나는 인간 시체는 곧바로 몬스터의 먹이로 사용되니까. 당연하게도 인간측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인간군은 최대한 마왕군과 대대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지연전을 강요했다. 월맹군 입장에서 매우 기분 나쁜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인간군은 천천히 전선을 뒤로 물리면서 인근의 농토 일대를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십 만 마리의 몬스터가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으니 얼른 도망치라면서 농민들을 쫓아낸 것이었다. 그 와중에 농민들에게 푼돈을 넘겨주고 식량을 약탈한 것은 물론이었다. 푼돈이나마 받은 백성은 사정이 낫겠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일가 재산을 빼앗긴 자가 수두룩했다. 심지어 인간군은 마을을 아예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내가 전쟁의 양상을 듣고 불쑥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청야전술이군요.” ─ 응……? 맑은 들판 전술? 그게 뭐야? 아하. 이 세계에는 청야전술이라는 낱말이 없는가. 보통 내가 쓰는 말은 자동적으로 의역되어 상대방에게 전해지는데, 지금처럼 문자 그대로 엉뚱하게 번역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시트리에게 청야전술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시트리가 설명을 다 듣고 눈썹을 찌푸렸다. ─ 에에? 그렇게 되면 자기네 사람들은 나중에 어쩌고? “기본적으로 나중을 생각하지 않는 전략이지요.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인간의 군주는 우리 마왕과 다릅니다. 그들은 자기 종족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요. 그만큼 자기 종족을 배려하는 면모가 뒤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나는 상당히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몬스터가 먹어해치울 것을 없앨뿐더러, 자기네 비축식량을 늘려둘 수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 민중이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재산을 강탈하느냐는 것이다. 마왕군이 침략했다, 몬스터 대군이 다가오고 있다……이보다 강력한 명분은 달리 없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군.’ 당장 인간군의 노림수가 두세 개 떠올랐다. 만약 내가 인간군의 수뇌부라면……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단탈리안이라는 작자가 설전에서 거하게 독을 뿌렸다. 장병과 지휘관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있겠지. 이럴 때 군대 내의 불화를 봉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공범' 의식을 불어넣으면 된다. 장병들이 민간 마을을 마음껏 약탈하도록 내버려둔다. 가난한 병졸들이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약탈에 참여할 거다. 주린 배를 채우면 당장 기분이야 좋겠지. 하지만 약탈을 하고 난 뒤에는? 과연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귀족들만 탓할 수 있을까…….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다. 그 점에서 병사들은 귀족과 똑같아진다. 귀족들을 신뢰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불평불만을 토로하기는 어려워진다. 아마도 항명 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군대의 사기가 나빠질 일은 일단 없다. 더 나아가서. ‘만약 나라면 약탈당한 마을 주민들에게 흑색 허브를 나누어주겠어.’ 지난 해, 인간의 국가들은 총력을 다하여 흑색 허브를 재배했다. 비록 전 국토를 구원하기에는 턱없이 수확량이 부족하겠지만 군인을 치료할 정도의 수효는 모였다. 거기에 약간의 여유분이 남아 있겠지. 그걸 지금 쓴다. 민간 마을이 병사들에게 약탈당하면 당연히 농민들은 군 책임자를 탓하게 된다. 그때 군주들이 선심 쓰듯이 흑색 허브를 분배한다. 어느 정도 보상이 이루어질 뿐만이 아니라, 군주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귀족인 지휘관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자비로운 군주만은 믿을 수 있다……대충 그 정도 분위기가 형성된다. 병사들은 군주가 직접 내리는 군명이 아닌 이상에야 좀처럼 열심히 움직이지 않겠지. 군권이 자연스럽게 군주 한 사람에게 모인다. 군대 전체를 고려할 때, 지휘관과 일반병 사이에 신뢰가 사라지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해악이다. 하지만 만약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 미래를 볼 줄 아는 군주라면……이 위기가 동시에 기회임을 간파할 것이다.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다. 군주가 이런 방법을 쓰기 시작하면 곧바로 알아차린다. 즉, 이런 방법을 감행할 수 있는 군주는 귀족과 정면승부할 자신과 각오가 갖추어진 자뿐. 어느 나라의 군주가 이와 같은 수단을 써먹을 것인가? 어느 나라가 도박에 뛰어들 만큼 강한가. 그 점에 주의해서 앞으로 전쟁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군. 나는 개인적으로 브르타뉴 왕국의 앙리에타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엘리자베트를 높게 평가한다마는, 이번 전쟁에서 두 사람의 격이 엿보일지 모른다. <던전 어택>에서 대륙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두 군주이다. 여기서는 과연 어느 쪽이 앞설련지……. 자아, 그럼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나는 시트리에게 정보를 흘리기로 했다. “시트리 님. 어쩌면 인간군은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 아니 중부 일대를 전부 포기해버릴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 어? 무슨 소리야? “만약 이쪽의 식량을 고갈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마을에 불을 지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몬스터에게 마을은 필요없습니다. 건물 안보다 바깥에서 지내는 걸 좋아하는 족속이니까요. 그런데도 불을 질렀다……이건 영지로서의 기능 자체를 말살하겠다는 뜻입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백성을 사랑한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혹한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여리다. 권력을 위해 친족을 살해하는 게 당연한 시대이다. 그런데도 남동생 한 명을 죽였다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만 보아도,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의 인성을 알 수 있다. 그런 황녀가 무의미하게 자국의 영지를 파괴할 리 없다. 파괴되도록 허락할 리 없다. 즉, 황녀는 이미 합스부르크 북부-중부 지역을 포기한 것이다. 그녀는 월맹군에게 합스부르크의 절반을 넘겨주고, 대신 남부에서 제국을 새롭게 혁신하자고 마음먹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쯤 합스부르크 남부에선 대대적인 방어선이 조직되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최종적인 저항을 펼칠 계획이겠지요. 빠르면 올해 가을, 늦으면 겨울일까요……월맹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받을 것입니다.” 국경선을 뒤로 물리면 물릴수록 타국에서 지원군이 오기 쉬워진다. 현재 인간군이 남부로 물러가는 동시에, 타국의 지원군이 추가로 합류할 것이다. 얼마가 모일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시대에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 으응? 하지만 단탈리안 네 말이 맞다면……인간들은 반격한다기보다 공성전에 들어가지 않겠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는 철옹성인걸. 거기 틀어박혀서 몇 년이고 방어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합스부르크를 포기해야 할 텐데. “아. 그건 안 됩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식량이 부족하거든요.” ─ 에, 식량이?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 하지만 곧 가을인데……. “가을이라고 해봐야 수확할 인간이 남아 있어야죠. 흑사병으로 인구가 사정없이 깎이는 와중에 건장한 성인 남성은 군대에 차출되었습니다. 농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제가 장담컨대 인간군은 심각한 식량난에 마주하게 될 겁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남부 전선에서는 반격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아마 회전을 노리지 않을까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만……시트리 님. 당신은 최대한 빨리 전쟁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 우으? 시트리는 이제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겠는지 거의 울상이었다. 귀여워라. 나는 왠지 마음이 포근해져서 상냥하게 설명해주었다. “생각해보세요. 인간군이 자기가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상관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마왕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진심으로 월맹군 원정의 성공을 바라는 마왕은 꽤나 적다. 기껏해야 평원파 마왕, 그리고 최고위 마왕들과 맞서싸울 자신이 있는 전쟁광뿐이다. 다들 적당히 싸워서 적당히 이기기를 바란다. 이번 제8차 월맹군은 이미 적당히 이겼다. “누가 먼저 독박을 뒤집어쓸 거냐, 하고 뒷짐지고 있다가 된통 당할 겁니다. 아니죠. 다들 어느 정도 당하기를 원합니다. 피해가 생겨야지 그걸 변명으로 삼아 월맹군에서 슬쩍 빠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자기네가 세운 공훈을 강조하면서 땅따먹기를 시전하겠지. “그런 곳에 있어봤자 피해만 커집니다.” ─ 으……미안.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솔직한 게 당신의 강점입니다, 시트리.” 내가 방긋 웃었다. “대충 아무 인간군이랑 싸우십시오. 거기서 또 대충 피해를 입으세요. 웬만하면 화려하게 전투를 하는 편이 좋습니다.……그렇지요, 포위 섬멸전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그런 전투를 해냈다면 먼저 월맹군에서 이탈할 수가 있습니다.” ─ 좋아. 포위섬멸전이라 이거지? “적당히 피해를 입으셔야 합니다. 적당히.” ─ 알았어! 시트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반드시 나의 계획을 실현시키겠다는 듯이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의욕적인 것 같아서 보기에 흐뭇했다. 시트리의 세력이 온전해야 나도 든든하다. 어차피 우군이지 않은가. 기억해둘 만한 사건은 이것뿐이다. 나는 월맹군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할 일이 없어서 또 다시 라우라와 질펀한 밤낮을 즐기게 생겼는데, 여기서 라우라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허구한 날 동굴에 틀여박혀 있으니까 머릿속에 야한 생각밖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농사라도 지어라! 땀을 흘리면 차마 성교할 기력도 없어지겠지.” “저는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데…….” “주군은 소녀가 목을 매달아도 좋은가?” 라우라가 극히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정말로 목을 매달 기세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나갔다. 파르시의 마을에 별장을 지어 여름 내내 그곳에서 지냈다. 나는 농밭을 따로 얻어 경작했다. 하는 김에 몬스터들도 데려가서 곡괭이를 휘두르게 했는데 이게 효과가 죽여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을 농사꾼들은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농부의 활약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거 장정 여섯 명이 할 일을 괴물 한 마리가 해내는구만!” “저, 전하. 혹시 여유분이 있으면 저희 집에 한 마리 빌려주심이…….” “예끼! 이 불경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대단한 건 몬스터뿐이었다. 파르시가 나에게 농삿일을 가르쳐주었는데, 그는 내 곡괭이질을 볼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나으리는 몸 쓰는 일은 영 잼병이구만?” “…….” 파르시의 표현에 따르자면 나는 동네 열두 살 꼬마보다 효율이 안 좋은 듯하다. 우라질. 그러나 효율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주격인 내가 몸소 밭일에 나갔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의외로 큰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어딘지 어렵게 대해오던 마을 사람들이 점차 진심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마왕 전하. 지금 나가십니까요?” “아아.” “아침은 잡수셨습니까요? 이따 점심에 소인들과 함께 드시는 것은 어떻습니까요. 제 안사람이 이래봬도 빵에는 도사지 말입니다.” 새벽에 밭일을 나가면서 농부들과 마주치면 공손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인사를 받았다. 뭐라고 할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착실하게 자라나는 밀알을 바라보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돌아다닌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빨빨 기어다녔는지, 원.……이것이 농부가 바라보는 세계인 걸까. 그렇게 여름이 지나갔다.   00135 풍요의 가을 =========================================================================                        온 대륙이 흉년에 앓고 있는 와중, 나의 영지는 풍년을 맞이했다. 밀밭이 바람에 부끄러워하며 황금빛을 흩날렸다. 그 위로 농부들의 웃음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성스러운 종소리처럼. 아낙네들이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낫을 휘둘렀다. 마치 노란 바다를 헤엄치는 돌고래들 같다……이런, 지나치게 감상적이게 되었나. 요즘 농삿일을 하더니 독기가 많이 빠졌다. 생애 처음으로 '내가 길러서 수확한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마음이 조금 물렁물렁해져도 이상하지 않겠지. 자그마한 밭. 텃밭보다 조금 크다, 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밭이지만 이래봬도 순전히 나의 힘으로 일군 곳이다. 이삭이 빽빽하게 들이차서 넘실거리고 있다. 가슴속이 찡― 하게 울렸다. “흐흐흐.” 말없이 감동하고 있자니 옆에서 파르시가 웃었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소인도 첫 수확 때 무진장 감동했지.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오. 나리도 똑같구만.” “아아. 밀알들이 꼭 고블린처럼 사랑스럽군.” 파르시가 으엑,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낫을 건네주었다. “……그 미의식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아무튼 수고했소, 나으리. 이제 마지막으로 수고할 차례요.” “후, 내 농부력은 이미 천원(天元)을 돌파했다.” 내가 코웃음 쳤다. 실제로 나는 자신만만했다. 처음에야 어리버리했지. 파르시한테 이것저것 배운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농부야말로 내 천직이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참고로 능력창에 농부 직업까지 생겼다. 단순히 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직업 가운데 월등하게 등급이 높았다! ━━━━━━━━━━━━━━━━━━━━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6    악명: 4543 직업: 농부(C), 마왕(D), 던전운영자(F) 통솔: 34/37  무력: 11/22  지력: 32/37 정치: 35/35  매력: 20/20  기술: 8/17 *칭호: 1.공포의 마왕 2.천부적 농사꾼 *능력: 농기술(C), 전술(E), 사격술(E),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3개] [부하: 54개체/260개체] ━━━━━━━━━━━━━━━━━━━━ ━━━━━━━━━━━━━━━━━━━━ [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2. 천부적 농사꾼.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직업(농부)과 능력(농기술) 레벨을 상승시킨 자에게 부여된다. 해당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무력 한계치+10, 기술 한계치+5, 직업 <농부>를 가진 이들에 한하여 호감도 +10 ━━━━━━━━━━━━━━━━━━━━ F급 던전운영자, D급 마왕에 비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그 이름. 입에 담기도 차마 거룩하여 조심스러운 등급……레벨 C. 제아무리 석궁을 쏘아대도 사격술은 죽어라고 E급에서 꿈쩍하지도 않았는데, 농기술은 고작 여름이랑 가을에 고생했을 뿐인데도 F급에서 C급까지 수직선을 그리며 상승했다. 덕택에 무력 능력치까지 요 몇 달 사이 무려 4나 올랐다. 실로 농삿일에 타고난 자. 천재, 아니 귀재(鬼材)……그렇게 표현해도 무방하겠지. 심지어 칭호까지 생겨났다. 이 세계의 시스템마저 나를 천부적인 농사꾼이라 인정했다. 세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라니. 소름이 돋는다. 나 자신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무시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마왕 단탈리안! 후후후.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옆에서 파르시가 '얘는 왜 또 이럴까'라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무얼, 그래봤자 우민이다. 중세의 머리로는 과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통치자의 관용으로 너그러이 이해해주겠다. “그거 아쇼? 나리는 가끔 무척 재수없소.” “너 너무한다!” 설령 그렇게 느끼더라도 그냥 넘어가주는 것이 영주에 대한 예의잖아!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재수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하지만……잘난 척 좀 하는 게 어때서!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일 년 반이 흘렀는데도 가장 높은 능력의 한계치가 37이다. 40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요 몇 달 사이에 무력의 한계치를 20대까지 높인 것이다. 속도가 엄청나다. 조금쯤은 자랑해도 괜찮잖아! “성장이 빠르다고 말해본들 말이외다. 나리, 올해로 춘추가 어찌되오?” “어……다음달이면 딱 스물다섯 살인데. 그게 왜.” “소인이 열일곱 살이오.” 파르시가 콧방귀를 뀌었다. “소인보다 자그마치 여덟 살이나 많은 양반께서 성장이 빠르니 뭐니 해봤자 솔직히 공감하기가 어렵구료. 스물다섯 살이면 못해도 일 정(町)은 수확해야 사나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수?” “…….” 그래, 나 늙었다. 이 곰보다 곰 같은 곰탱이 새끼야. “네놈이나 많이 개간해라. 네가 땅을 경작하는 동안에 나는 사람을 경작할 테니.” “지금 속으로 '나 멋진 말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솔직히 하나도 안 멋있으니까 그만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소외다.” “너 진짜 너무하는구나!” 안 그래도 라피스랑 라우라가 만날 구박하는데 이젠 파르시까지 나를 씹어댄다. 나 이래봬도 마왕인데……영주인데……. 뭐, 서열 제71위에다가 영지라곤 마을 일곱 개에 부락 여덟 개밖에 안되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흥. 누가 뭐래도 나는 이제 숙련된 농사꾼이야. 밀을 키우는 게 어렵지 거 낫질하는 게 어렵겠냐? 이따위 수확이야 하루 만에 해보이마.” “소인이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하겠구랴?” “물론이지.” “오호라.” 어째서인지 파르시가 재밌다는 듯 짖궂게 미소를 지었다. “모쪼록 기대하겠수다, 숙련된 농부 나으리.” “암. 뒤에서 지켜나봐라!” 나는 오른손에 낫을 꽉 쥐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밀밭을 향하여 용감무쌍하게 나아갔다. 파르시의 미소가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고작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잠시 뒤――. “드, 등이! 나의 등이!” 나는 등허리를 부여잡고 밀밭을 굴렀다. 장난이 아니었다. 허리를 숙여 밀을 베고, 대충 모였다 싶으면 꽁꽁 묶어서 한곳으로 옮기고. 이런 작업을 세 시간 반복하니까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런 내 모습을 곁에서 몬스터들이 걱정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골렘은 밭을 가는 데엔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수확과 같이 섬세한 작업에서는 영 손을 쓰지 못했다. 그나마 블링이가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도와준다고 할까……블링이가 나보다 작업효율이 더 좋았다. 고블린은 인간보다 키가 작다보니 보다 편하게 낫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내가 밀단을 다섯 개 쌓는 동안에 블링이는 무려 열 개나 쌓았다. 비교할 수가 없었다. “안 돼, 주인으로서의 위엄이……!” 내가 억지로 일어서려 했다. 그 순간 격렬한 통증이 덮쳐왔다. “크허헉.” 나는 그대로 밭바닥에 꼬꾸라졌다. 어째서냐. 라우라와 섹스할 때는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멀쩡하게 버텨주던 허리가 왜 낫질 세 시간만에 완전히 퍼졌는가. 사용하는 근육부위가 다르다 할지라도 너무했다. ─ 꺄르르르! 주인이 죽어나가는데 요정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다. 365일 범죄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우리 요정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웃음소리가 엄청나게 얄미웠다. 너희는 골렘과 다르게 경작할 때도 도움이 안 되었으면서! 요정들은 새로운 놀이터를 발견했는지 밀밭을 아예 숨바꼭질 특구로 지정했다. 황금빛 밀밭으로 쏙 들어가서 나 잡아보라며 도망쳤다. 그렇게 밀과 밀 사이로 고개들을 빼곰빼곰 내밀면서 술레를 놀려댔다. 재밌어보인다……나도 요정들이랑 숨바꼭질하면서 놀고 싶다……. 요정을 껴안고 밀밭에 드러눕고 싶다……. 이렇게 고생했는데도 아직 전체 면적의 1/4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아, 앞으로 적어도 아홉 시간.” 절망적인 숫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늘은 이미 틀렸다. 허리가 이래서야 일하고 싶어도 더는 못한다. 아마 내일도 근육통으로 죽어나가겠지. 하루 만에 밀베기를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했거늘, 하루는커녕 나흘이 걸릴지도 모른다. ‘거 보쇼. 소인이 뭐랬수? 숙련된 농부? 껄껄껄.’ 머릿속에서 파르시가 비웃는 모습이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나쁜 새끼. 머리 좀 좋다고 귀여워해줬더니 이젠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든다. 언제고 그놈 코를 밟아줘야 하는데……크윽. 더 기고만장해지게 생겼다. “주군? 땅바닥에서 뭘 하는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리자 그곳엔 라우라가 서 있었다. 꼭 어느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아가씨처럼 노란색 평민복을 차려입었다. 라우라에겐 세 종류의 옷이 있었다. 하나는 드레스. 라우라가 나한테 납치될 때 입고 있던 옷인데 귀족적인 매력이 흘렀다. 이것 외에도 내가 선물로 드레스 몇 벌을 사주었다. 다른 하나는 검은색 군복(軍服)으로 월맹군에 종군할 때 입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평민복이다. 마을에 지어둔 별장에서 나와 라우라가 머물기 시작하자, 마을의 아낙네들이 귀한 옷감으로 지어서 갖다 바쳤다. '우리 동네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문양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걸 넣었습니다.' 여인들이 그리 말했다. 산골마을에서 옷감이 고급스러워봤자 얼마나 고급스럽겠냐마는 확실히 정성이 남달랐다. 주황색 바탕에 흰색이 들어간 처녀 옷인데 금발의 라우라와 잘 어울렸다. 라우라는 무척 기뻐하면서 이 진상물을 받았다. ‘이토록 멋진 선물을 받은 여자는 세상에서 소녀밖에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라우라는 평민복을 제일 자주 입었다. 지금 입은 옷도 그것이었다. 음, 솔직히 내가 드레스를 선물했을 때보다 기뻐했지……여자는 어렵고 그중에서도 라우라는 되게 어려웠다. 여자의 마음은 꼭 독일어와 같지. 전혀 알 수 없거든. “땅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땅의 기운……? 거기에 노움이라도 있는가?”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을 선물해주는 것도 전부 땅이지요. 저는 항상 땅에 감사하고 삽니다. 그걸 이렇게 몸짓으로 표현하는 거죠.”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이 데메테르 여신을 숭배할 줄은 미처 몰랐군. 신앙심도 중요하나 일단 점심을 먹는 게 어떠한가?” “오오. 기다렸습니다.” 라우라는 품안에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마다 이렇게 새참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에구구, 에구구, 하고 신음을 뱉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였다. 원래 세계에서 흔히 먹던, 새하얀 삼각빵으로 만든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밀빵에 베이컨과 야채를 끼워 만든 샌드위치였다. 라우라는 요리 솜씨가 결코 좋지는 않았으므로 이렇게 원재료를 사용한 음식을 주로 만들었다. 한창 일하고나서 먹는 새참은 꿀맛이었다. “맛있습니다! 훌륭해요, 라우라.” “……주군이 기뻐하면 나도 좋다.” 라우라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이럴 때 라우라의 미소는 정말 예뻤다. 밀빵에 목이 약간 메어오자 라우라가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물통을 건넸다. 나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막 우물에서 길러온 지하수였을까.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땡볕 아래 달구어진 내 몸을 식혔다. 캬아! 식사시간이 끝나고 내가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재충전되었다. “에구, 에구구.” 아무리 못해도 이틀 안에는 수확을 끝내야지. 안 그러면 파르시가 뭐라 비아냥거릴지 모른다. 라우라가 말했다. “혹시 등이 아픈가, 주군.” “밀을 베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끄응…….” “흐음. 그 낫으로 밀베기를 하고 있었는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우라가 흐음, 하고 의외라는 듯 턱에 손을 괴었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자처할 줄이야. 소녀는 지금까지 주군이 어쩔 도리가 없는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주군은 진심으로 농부들의 마음가짐을 배우고자 하는군.”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은 고맙긴 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그도 그럴 것이, 요정을 쓰면 간단하게 밀을 벨 수 있지 않은가? 헌데 고생을 자처하니 소녀, 다시금 주군의 자세에 감탄한다.” 요정? “요정을 쓰긴 어떻게 씁니까? 걔네들 팔힘이 약해서 낫도 못 드는데.” “……주군, 마법을 잊었는가. 바람 칼날로 한꺼번에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 내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요정들은 밀밭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녀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제 사격.’ 요정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들이 날개를 파닥이며 밭 구석에 집결했다. 그리고 보조를 맞추어 바람의 칼날을 쏘았다. 투명한 칼날이 빠르게 날아가면서 말끔하게 밀들을 베어넘겼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밭 전체의 1/3이 처리되었다. “시바아아알!” 내가 머리를 잡고 절규했다. 왜 진즉에 이런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거냐!? ─ 꺄르르륵. 절찬리에 좌절하는데 요정들이 날아와서 웃어댔다. 내 꼬락서니가 퍽 재밌게 비춘 것 같았다. 젠장, 머리카락 잡아당기지 마. 허리에 올라타지도 마. 괜히 더 처절해지잖아! 라우라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눈치 채지 못했는가? 주군도 참……어쩔 때는 똑똑하면서 이럴 때는 영락없이 멍청하군. 하긴, 왠지 주군이 열심히 일한다 싶었다.” “내 허리가, 세 시간 피땀 흘린 노력이!” 라우라가 코웃음을 쳤다. “본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주군이 입에 즐겨 담던 명언으로 기억한다만?” 무척 재수없었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00136 풍요의 가을 =========================================================================                        * * * 단탈리안과 라우라에게 올해 여름과 가을은 행복했다. 겉보기에는 하루에 몇 번 자느냐 따위로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만족스러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정쟁과 전쟁을 전전하면서 그토록 얻고자 했던 평온을 손에 넣었다. 그렇지만 이 평화는 폭풍의 핵이었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겨우 작년에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함으로써 모습을 드러낸 신출내기 마왕은, 불과 일 년 사이에 마왕군의 핵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물론, 이따금씩 서열을 뛰어넘어 힘을 발휘하는 마왕이 생겨나곤 했다. 지금은 몰락하고 있는 마왕 파이몬도 서열상으로는 제9위에 불과하나 영향력으로 따지면 마왕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하지만 서열 제71위……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가 격살 당한 이상, 사실상 최하위. 그 정도로 하찮은 마왕이 월맹군 전체에 손을 뻗은 사례는 드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신진 세력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계사회는 언제나 마왕군의 행보에 촉각을 기울였다. 단탈리안은 꽤나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단탈리안이 대체 누구야?”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동안 서열 제71위에 관심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단탈리안에 대한 정보는 극히 희귀했다. 약간의 진실, 대다수의 거짓, 여기에 뒷소문을 빙자한 음모론이 뒤섞였다. 마계사회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듣자하니 바르바토스 전하의 오른팔이라던가. 단순한 수하가 아니라, 보다 내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머저리 같은 놈! 바르바토스 전하는 동성애자야. 남성을 애인으로 삼을 리 없어. 그보다 평원파의 최고 참모라고 하던데. 사실상 평원파의 두뇌야.” 특히 지난 이천 년 동안 처녀성을 지켜온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의 열애설에 마계는 후끈 달아올랐다. 바르바토스는 원래부터 마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누구보다 마계를 위하여 헌신한 마왕으로 유명했을뿐더러, 비록 동성애자이긴 해도 처녀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뭇 남성에게――그리고 소수의 여성에게――마니악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느 평민 집에도 바르바토스의 초상화는 심심치 않게 걸려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마침내, 드디어 남성과 사귀는 것인가? 서열 제8위와 서열 제71위. 사랑이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 수 없는 격차. 그런 두 마왕의 로맨스가 마인들의 심장에 명중했다. 세기의 사랑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하는 부류가 있었다.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도둑놈!” “감히 우리 모두의 바르바토스 전하를 농락했겠다!” “그 새끼 거시기의 껍질을 식칼로 도려버리겠어.” 한 마인 작가는 이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나, 바르바토스의 첫 남자>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집필했다. 저잣거리에 흔하게 널린 기사도물을 약간 변형한 물건에 불과했으나 이 이야기책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다. 마계사회의 모든 필사가들이 <나, 바르바토스의 첫 남자>를 배껴서 팔아재끼느라 한동안 끼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인들은 가십거리에 흥분할 따름이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사태를 바라보고자 한 이들은 로맨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생각했다. “제71위가 거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겠지. 잘 생각해봐라. 단탈리안이 부각된 이후로 평원파와 산악파가 정면으로 대결하기 시작했어. 이게 뭘 뜻하겠냐.” “……마왕 단탈리안은 평원파가 산악파의 공격을 집중시키기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라고?” “암.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아마도 단탈리안은 머지않아 희생될 걸세. 산악파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평원파에서 선심 쓰듯 건네주겠지. 결국 부나방에 불과해.” 이들에게 현명함이란 대다수의 대중과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즉, 그들은 일반 대중과 의견이 다르기 위해서라면 어떤 논리로든 간에 특이한 주장을 만들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자기만족이 중요했으며, 더 정확히 얘기해서, 자기를 만족시켜주는 진실만을 원했다. 오로지 극소수의 마인. 그들은 권력자였다. 진실을 추론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을 직접 입수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 정말로 월맹군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다. 벨레드, 제파르와도 친밀하다. 의형제까지 맺었다더군. 사실상 평원파 내부에서는 최고위급 인사로 대접받는다고 한다.” “게다가 마르바스까지 한편인가. 허! 말이 안 되는군.” “평원파와 중립파뿐만이 아니다. 전해 듣기로는 가미긴도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고…….” “아니, 심지어 시트리까지…….” 초유의 신진이었다. 단순히 무력이 어마어마해서 급부상했다면 얘기가 간단해진다. 그런 마왕은 드물지만 가끔 있었다. 당장 현재 서열 제1위를 차지하는 대마왕 바알도 삼천 년 전에는 하급 마인이지 않았던가. 이 신진은 달랐다. 무력이든 재력이든 그런 것은 별 볼 일이 없었다. 경악스러운 것은 그 정치력. 정치적인 파장이 무시무시했다. 단탈리안은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무소속의 마왕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었다. “하, 하지만 그래봤자 서열 제71위이다. 대단한 권력은 행사할 수 없겠지.” “멍청하기는. 단탈리안 본인이 권력을 행사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단지 각 파벌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면 돼. 그것만으로 마왕군의 판도는 180도 달라져!” “독자적인 힘은 미약하지만 정치력은 비할 데 없이 광범위……앞으로, 마왕군의 행보는 단탈리안에서 시작하여 단탈리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맥을 쌓아두어야 한다. 마계사회의 권력자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곧이어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단탈리안과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어떻게 단탈리안과 안면이 있는 자가 없는가!” “작년에야 데뷔한 마왕이다. 안면이 있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단 한 명도 행방을 알지 못하다니, 이건 조금 심각하군…….” “정보부를 총동원해라! 무능한 놈들! 제1순위로 해결하란 말이다!” 권력자들의 집념은 집요했다. 한여름이 될 즈음해서, 그들은 단탈리안이 쿤쿠스카 상회와 전속 계약했으며 상회의 대리인이 라피스 라줄리라는 일개 하급 서큐버스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수천 년에 걸쳐서 상회의 보안을 철통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더라면 권력자들은 이틀 만에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그리하여. “라줄리 공! 독사지옥의 대공께서 전하시는 말씀이오. 부디, 올 가을에 열리는 추수제에 단탈리안 전하께서 참석해주시기를 바라며…….” “월맹군의 드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후원회 행사에 꼭 단탈리안 전하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라줄리 님을 위해 준비한 수고비입니다.” “니라부타 지옥의 후작 각하께서 친히 둘째 따님을……!” “아니, 그보다 올발라 지옥의 공작 각하께서.” 라피스에게 온갖 청탁과 뇌물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반인반마로 태어나 평생 따돌림을 당한 라피스는 하루아침에 신세가 바뀌었다.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순한 양이 되어 라피스에게 달라붙었다. 1년 전만 해도 하급 서큐버스 따위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을 권력자들, 그들의 대리인들이 이제는 갖은 아양을 떨어가며 다가왔다. 그중에는 남작 작위를 내려주겠다고 꼬시는 이들까지 있었다. 단탈리안의 측근이라는 것만으로 단숨에 신분이 상승해버린 것이었다. “…….” 라피스는 짜릿함을 느꼈다. 비천하게 태어났다. 비루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 끝마저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피와 땀으로 살아왔다. 마침내 자신의 노력이 보답을 받았다……. 만약 여기서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버렸다면 라피스 라줄리는 그저 그런 인물로 남았겠지. 그러나 라피스는 그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에 단탈리안이 그녀를 기용한 것이었다. 라피스는 먼저 권력자들의 청탁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했다. 뇌물을 잔뜩 받아챙겼다. 모처럼 저쪽에서 공짜로 주었다. 사양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권력자들은 곧 있으면 단탈리안과 만날 것이라 기대하며 기꺼이 막대한 뇌물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들이 단탈리안과 대면할 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라줄리 공. 분명 이번 달에는 단탈리안 전하와 만남을 주선해주겠다 약조하지 않았소외까!” “죄송합니다.” 라피스가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월맹군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마계에 방문하실 여유가 도저히 생기지 않습니다.” “저번 달에도, 저저번 달에도 그리 말씀하셨소!” 어느 지옥의 대공이 대리인으로 보내온 은랑(銀狼)이 붉그락푸르락 표정을 구겼다. “이제 초가을이오. 벌써 가을이 되었다는 말이외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단탈리안 전하를 접견할 수 있겠소?” “9월 중순에는 반드시 자리를 마련하지요.” “크으.” 은랑이 입가를 벌렁거렸다. 만남을 부탁한 게 6월이었다. 어느새 세 달이나 약속이 미루어졌다. 지금 단탈리안을 노리는 마계의 세력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다른 곳보다 빠르게 단탈리안과의 인맥을 선점해야 하는데, 눈앞의 서큐버스가 중간에서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다. ‘얼굴만 무표정하지 속에 독사를 수백 마리 키우는 년이다!’ 감히 비천한 반인반마 주제에 고귀한 은랑족을 멸시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가리를 벌려 저 년의 모가지를 씹어먹고 싶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칼은 저쪽에서 쥐고 있으니까. 은랑이 분노를 삼키면서 겨우 말했다. “알겠소. 9월에는 반드시!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만나뵙겠소!” “예. 너그럽게 양해해주셔서 단탈리안 전하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라피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동작이 또 어찌나 공손하고 깔끔한지, 은랑은 다시 한 번 살의가 치솟아오르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그가 미리 준비해온 금속상자를 내밀었다. 금속상자에는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것은 대공이 단탈리안 전하께 바치는 작은 성의요.”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재화를 앞에 두었으면서도 라피스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다. 다만 담담하게 상자를 넘겨받을 뿐이었다. 은랑은 내심 이 서큐버스의 담력에 질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라피스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9월이 되어도 결코 단탈리안을 만날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왠지 모르게 들었다……. 라피스는 은랑을 배웅하고 보물상자의 값어치를 매겼다. 최근 들어 보석을 접하는 일이 부쩍 늘었기에 안목이 덩달아 높아진 라피스였다. 라피스가 장갑 낀 손으로 보석들을 하나씩 감정했다.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거기에 약간의 금화입니까. 2천 골드는 되겠군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중박이네요, 하고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 마계의 권력자들과 한창 밀당을 하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단탈리안과 만나기를, 그것도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만나기를 열망했다. 라피스는 그런 열망을 이용했다. 그녀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그대들을 단탈리안과 연결시켜줄 수 있다. 하지만 맨입으로는 안 된다. 간단하게 만남을 주선해주지 않겠다. 돈을 내놓아라. 가장 돈을 많이 낸 자에게 선착순 1번을 부여하겠다. 1만 골드를 냈다고? 부족하다. 이번에는 2만 골드를 가져왔다고? 그래도 부족하다. 돈, 더 많은 돈을 진상하라. 요컨대 라피스는 감히 마계의 권력자들을 경주마로 삼아 경쟁시키고 있었다. 권력자들은 그녀의 속셈을 깨달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경쟁자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뇌물을 갖다바쳤다. 라피스가 보물상자를 봉인하고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녀는 깃펜을 놀려 종이에 액수를 적었다. “이제 팔만 골드……이 정도면 되겠지요.” 지난 세 달 동안 권력자들로부터 강탈한 금액이 자그마치 8만 골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단탈리안을 위하여 모으고 있었다. ‘지금이 돈을 벌어야 할 때입니다. 단탈리안 전하에 대해 너도 나도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라피스는 단탈리안의 허당끼를 익히 알았다. 월맹군 전쟁으로 인해서 단탈리안의 가치가 실재보다 한없이 높아져버린 현재가 기회 중의 기회라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즉, 지금 벗겨먹어야 합니다.’ 라피스의 푸른 눈이 빛났다. 그녀의 상인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 또 다른 권력자의 대리인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이번엔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우락부락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줄리 님! 이번 달에는 틀림없이 단탈리안 전하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잖소!”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현재 월맹군의 밀명을 받아서…….” 능수능란하게 드워프를 구워 삶으면서 라피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딱 2만 골드만 더 모으죠.’ 그렇게 마음먹는 와중에도 라피스는 더없이 덤덤했다. 마계의 모든 권력자는 이 하급 서큐버스의 사악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 작품 후기 ============================   라피스: 혼수로 적어도 10만 골드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자s: …….   00137 풍요의 가을 =========================================================================                        * * * 결국 하루 만에 수확을 끝마쳤다. 다음날, 나는 느긋하게 마을을 쭉 둘러보았다. 어디든 흥겨운 풍년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라우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백성들이 기뻐하니 소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다 제 재산이지요.” “……삐딱하기는.” 라우라가 동태눈깔로 나를 쳐다봤다. “그거 아는가? 주군은 가끔 일부러 고약하게 말한다. 위선은 경멸받을 것이지만 위악(僞惡)도 그만큼 한심스럽다. 자신의 진심을 위장하고 변명하기 때문이다.” “크흥.” 내가 멋쩍어져서 입가를 실룩거렸다. 최근 들어서 라우라가 날 비판하는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섹스러운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 것과 정확히 때가 겹쳤다. 보통 남자가 힘을 쓰면 여자의 잔소리가 줄어든다는데 어째 우리는 완전 정반대야……. “헌데 주군. 왜 골렘을 농민들에게 빌려주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주제를 바꾸었다. 얄미운 것! 라피스와 다르게 라우라는 잔소리를 길게 끌지 않는다. 한 마디 촌철살인을 던져두고 마치 잊어버렸다는 듯 다른 얘기로 옮겨간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쪽에서 뭐라 반항할 수가 없다. “농사에 관해 골렘이 압도적인 효율을 보여준다는 게 증명되었다. 농민들에게 대여해주면 그만큼 수확량이 많아질 터인데.” “물론 효율은 좋아지겠죠.”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형평성이 안 맞습니다.” “형평성?” “예.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부농(富農)이 거금을 들여 제 골렘을 빌립니다. 놀랍도록 농사가 편해지겠지요.” 거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농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영주님은 돈 있는 자를 우선시한다, 돈이 있고 없고가 영주의 판단 기준이다……그렇게 받아들이겠지. “곤란한 일입니다. 효율만 추구해서야 정작 영지의 단결력이 떨어지니까요. 영지민을 두 집단으로 나눠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돈 몇 푼 벌겠다고 영지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다니, 도저히 군주가 할 짓이 아닙니다.” “으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영주의 힘이 곧 영지의 힘 아닌가? 어차피 주군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은 빈민이 아니라 부농이다. 그렇다면 부농에게 약간 유리한 정책을 펼치는 편이 오히려 장차 주군에게, 영지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다만.” 그럴 수도 있다. 공화주의자를 제외하고 이 시대 사람들은 영지가 곧 영주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우라는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사색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공화주의니 뭐니 사회와 관련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 한 사회를 책임지는 재상이 될 인물이었는데 말이지―. <던전 어택>에서 브르타뉴 왕국이 패망해버린 데 다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말했다. “뭐. 사실 뭐든지 효율의 문제입니다. 사회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있습니다. 이때 지배하는 자가 많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저 지배자를 따르고, 또 이 사람은 다른 지배자를 따르고……겉모습만 하나이지 실상 여러 사회가 있는 셈입니다.” 여차할 때 국론이 분열해버린다. 나의 영지에는 단 한 명의 지배자, 마왕 단탈리안만 있으면 된다. “부농이 대접받는다고 해보십시오. 당장 여러 개의 부작용이 떠오릅니다. 먼저, 영지민들이 무엇이든 돈이 출세의 수단이라 생각해버립니다.” 저수지를 만들거나 성벽을 쌓을 때 모두가 함께한다. 외적이 침략해도 모두 동등하게 목숨을 걸고 싸운다. 왜 부농만이 혜택을 받는가. 우리 영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충성이 아니다. 헌신이 아니다. 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 “결국 저에 대한 헌신이 적어지고 재산을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어버립니다. 라우라, 알겠습니까? 영지에 두 명의 군주가 생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왕 단탈리안과 '돈'이라는 이름의 군주가.” 그래서야 안 된다. 재산이 많고 적음은 순전히 개인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재산을 많이 모았는가? 축하한다. 마음껏 즐겨라. 하지만 그것이 군주인 나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데엔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는 일개 영지민이고, 나는 유일한 군주이므로. “저는 절대적인 군주가 되고 싶습니다. 딱히 제가 만사에 개입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영지민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도 편하거든요!” “과연.” 라우라가 감탄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얼마나 주군을 위해 헌신했느냐, 오직 그뿐이군.” “저는 곧 영지이니까요. 얼마나 영지 전체를 위해 헌신했는가. 그렇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으음.” 라우라는 내 말에서 무언가 단초를 찾았는지 말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멀리 밀밭 사이에서 아낙네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오른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것이 뭐 그리 좋은지 아줌마들이 저들끼리 와락 깔깔거렸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풍경이었다. 우리가 길을 따라 다가가니까 아낙네들이 낫질을 멈추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어우, 왕비님 너무 예쁘세요!” “두 분이 있는 거 보면 정말 천생연분이라니까!” 라우라가 퍼뜩 놀랐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와, 왕비라니……그런 게 아니다.” “아니라뇨? 마왕 나으리의 아내시잖아요. 그럼 왕비 전하이죠.” 주변에서 여자들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쳤다. “아, 아내라니…….” 라우라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손을 마구 흔들면서 변명했다. “소녀는, 단지, 뭐라고 할까. 아내가 아니라 신하라고 해야 할까……아니, 주군의 동반자라 해야 할까……. 아, 아무튼 아내가 아니다! 왕비라니 당치도 않다!” “예에? 저희는 지금까지 아씨가 마왕 나리의 부인인 줄 철썩처럼 믿고 있었는데.” 아낙네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어디 한번 설명해주십시오, 하는 눈빛이었다. “…….” 라우라도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푹 숙이고 슬그머니 날 쳐다봤는데, 눈길이 마주치니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오호라. 굳이 상태창에서 심리를 읽을 필요도 없다. 라우라는 꿈많은 열일곱 살 소녀. 특유의 죽음관(觀)으로 세상사에 시니컬했다지만, 누군가의 부인이 되는 것은 라우라에게도 큰 의미를 갖겠지. 실제로 우리 둘이 부부인가 아닌가를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부부로 보였다……그것만으로도 라우라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실로 나이에 걸맞게 귀엽지 않은가. “라우라. 여길 보십시오.” “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오른팔을 둘렀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목 뒤를 받쳤다. 라우라가 뭐지, 하고 표정에 물음표를 띄웠을 때――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우읍!?” 기습적인 키스에 라우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지 계속 웁웁거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녀의 반항에 상관하지 않고 아예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딥키스. “어머나, 어머나!” “꺄아아악! 세상에나!” 아낙네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움이 한 가득 배어묻은 경악이었다. 남사스럽다고 타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소리 지르면서 이벤트를 만끽했다. 라우라가 양손을 휘저으면서 반항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을, 이라고 초록색 눈동자가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남들이 보는 앞이라서 하는 거다, 소녀여. 나는 더더욱 열심히 혀를 움직였다. 쑤기고. “으프읍, 으읍, 프흣!? 어루만져주고. “으읍, 으브븝, 큽……으으으읍, 흐아, 흐읍, 읍!” 빨아주고. “흐아아앙, 주군, 으읍! 흐으으읍……아, 하아, 으읍, 아, 흐프으!” 섞어준다. “우으읍, 흐으읍……으응, 흐으으응……주군, 아……싫, 으으으읍, 하읍, 안돼, 으으으으읍……!” 라우라가 무릎에 힘을 잃고 내 가슴팍으로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그녀는 호흡곤란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숨을 색색거렸다. 나는 라우라를 한팔로 안은 채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 “…….” 아낙네들은 더 이상 꺄악꺄악 거리지 않았다. 나이 많이 먹은 아줌마도 부끄러운지 볼이 빨갰다. 다들 내 시선을 피하면서 우물쭈물했다. 그중에 처녀처럼 보이는 아가씨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디 왕이란 삼첩, 사첩을 거느리는 법. 이 여자는 과인의 것이다. 다른 말이 또 필요한가?” 아낙네들이 쥐죽은 목소리로 아닙니다 전하,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무안했는지 농기구를 챙겨서 부리나케 달아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일거리를 놓고 도망친 것이었다. 농민들의 순수함이 재밌어서 내가 키득거리는데 라우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주, 주군…….” 그녀가 내 옷가슴을 잡고, 물기 섞인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숨결에 열이 담겨 있었다. 이런, 조금 지나치게 놀려먹었나……아무래도 스위치가 켜진 모양이었다. “하고 싶군요?” “…….” 라우라가 딱 0.1cm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창 때의 소녀. 격렬한 키스 탓에 발정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걸 놀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내 책임이 아니겠는가. “벗으세요.” “흐에?” 라우라의 눈이 왕방울이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별장에 가서…….” “저는 여기서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 하지만 여기는 바깥…….” “지금 당장.” 내가 라우라를 살짝 끌어안았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여기서, 곧장, 일직선으로. 라우라의 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시, 시, 싫다!” 라우라가 내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전혀 없어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짐승! 오크! 발정난 개! 어, 어떻게 바깥에서 그런 짓을……믿을 수 없다!” “허어. 방금 전까지는 하자고 졸랐으면서 알겠다 말하니까 화를 내다니, 앞에서 하는 말이랑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군요.” 나는 그녀를 더욱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나오면 아무리 관대하고 상냥한 저라도 화가 납니다!” “흐, 흐아아앙.” 그녀가 정말로 울상을 지었다. “안 된다, 주군……그러면 정말로 짐승이 교미하는 거랑 뭐가 달라지는가. 부디 마왕으로서 체통을 지켜달라!” “인간이든 마인이든 본디 짐승. 짐승처럼 교미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절대 아니다――!” 라우라가 절규하든 말든 내 의지는 확고했다. 나는 그대로 라우라를 발가벗겨서 밀밭 한 가운데서 뒤치기했다. 밀대가 땅을 푹신하게 덮고 있어서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처음하는 야외 플레이에 흥분하여 그만 노을이 지고도 주변이 깜깜해질 때까지 해버렸다. 석양에 빛나는 라우라의 하얀 맨살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이번만큼은 라우라가 완전히 대노하여 기분이 풀리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훔쳐봤을 거라나 뭐라나. 훔쳐봐서 더 기분이 좋은 것 아닌가, 하고 내가 내심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 * * 온 마을에서 수확이 끝날 즈음해서 라피스가 찾아왔다. 슬슬 올 무렵이라 생각해서 반갑게 맞이했는데, 이게 웬걸. 라피스는 몸만 들고 오지 않았다. “……이게 뭐냐?” “단탈리안 님의 것입니다.” 눈앞에는 그야말로 보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보석함, 금화상자, 각종 값나가 보이는 장식구와 무구까지. 세상에, 이게 대체 뭐야? “정확히 10만 3천 504골드입니다.” “…….”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니까 라피스가 서류를 건넸다. 서류에는 뭔지 모를 이름들이 짜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이, 이건 또 뭐야?” “단탈리안 님께서 앞으로 만나보셔야 할 마계의 주요인사 목록입니다.” 라피스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동안 평안하게 지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단탈리안 님께서 지루해하실까봐 염려되어 일거리를 만들어드렸습니다.” 이 년이? “나 조금 더 쉴 거야!” “유감이로군요.” 전혀 유감이 아닌 어조였다. “이 10만 골드는 단탈리안 님과 만나게 해드리겠다는 걸 빌미로 받아낸 것입니다. 이제 와서 만나지 않으시겠다니 전부 돌려줘야 합니다만……돌려줄까요?” 라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왔다. 실로 악랄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너 같은 강적은 처음이다.   ============================ 작품 후기 ============================   라피스: 동생, 일하지 않는 남자는 이렇게 다루세요. 라우라: (눈을 반짝거리면서) 언니……. 단탈리안: ……. 전 편에 100만 골드라 적은 것을 10만 골드로 수정했습니다.   00138 풍요의 가을 =========================================================================                        모처럼 십 만 골드를 얻었다. 시트리가 빌려주기로 약속한 백 만 골드에 비해 한참 적은 액수일지라도, 던전을 공사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계획이 앞당겨진다. 초기 자금, 비유하자면 장사 밑천……그걸 돌려주라니 말도 안 된다. 애당초 나는 일단 한번 받은 것을 남한테 돌려준 적이 없다. 침을 발랐으면 내 것이겠지! ‘하지만, 일을 하기는 싫다……!’ 섹스하고 싶을 때 섹스한다. 놀고 싶을 때 논다. 농사가 하고 싶을 때는 농사를 하고, 오늘은 기분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몬스터한테 맡겨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천국. 제아무리 십만 골드라는 돈이 좋다고 해도, 천국에서 제 발로 걸어나가라니 언어도단이다. 내가 몹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받아먹고 생까는 것은 어때?” 라피스의 눈이 싸늘해졌다. 이런 음식물 쓰레기 같은 놈, 하는 눈빛이었다. 크으. 역시 무리였는가. 당연하지만 말이다. 마계의 실력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해오겠지. 젠장. “애당초 왜 내 허락없이 마음대로 움직인 거야.” “제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단탈리안 님께서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셨을 테니까요. 어차피 평원파의 실세가 되신 이상, 마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라피스가 고개를 숙였다. “얼마든지 저를 책망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 간언을 들어주시기를. 단탈리안 님. <미네르바 작전>에서 단탈리안 님께서는 분명히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적들이 수동적이라면 감사할 일이다. 저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오면 이쪽에서 공격할 따름이다.” 미네르바 작전. 바르바토스를 끌어들여 제8차 월맹군을 봉기하게 만드는 계략. 나는 라피스와 모략을 짜내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다른 이들이 잠잘 때 오직 나만은 날아오르겠다는 의미를 담아서. “실로 단탈리안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허나, 작금에 단탈리안 님께서는 어쩌고 계십니까? 휴식을 빌미로 음란하고 방탕한 나날을. 아직 자금이 모이지 않았다는 핑계로 소일거리나 하고 있습니다.” 처억, 하고 라피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 수동적인 자는 다름아니라 바로 단탈리안 님입니다. 대륙의 모든 세력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마왕군은 마왕군 나름대로, 인간군은 인간군 나름대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마음이 덜컹했다. 라피스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정작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영지에 눌러앉아 소위 평화로운 한때를 보냅니다. 제 눈에는 그것이 평화가 아니라 폭풍전야의 고요로 비춥니다. 단탈리안 님께서도 아시겠지요.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 여유가 찾아오면 필시 인간계의 세력은 단탈리안 님을 본격적으로 적대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 내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미래를 대비하겠다고 던전 건축을 계획했다. 돈이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가하게 지냈다. 정말로 미래를 대비했던 것인가? 영지민의 민심을 얻었고, 영주로서 지위를 다졌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는가?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진실을 잘 알고 있다. “어리광부리지 마십시오. 단탈리안 님의 세력은 여전히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신뢰가 없다면 당장에 무너질 만큼 허약한 세력입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라고, 단탈리안 님께서 말씀하셨을 터입니다.” 그것은 내가 라피스에게 일 년 전에 한 말이었다. 내 편이 되어달라고 설득하면서, 하급 서큐버스 따위는 도움이 안 된다며 거절하는 라피스에게, 나는 분명히 그리 말했다. ─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다, 라피스 라줄리!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했으면서 지금 나는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그 모습이 라피스에게 어떤 식으로 비추었을지.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탈리안 님. 부디 스스로 일어서주십시오.” “…….” 내가 침묵했다. 백 번 옳은 지적이었다. 리프의 모험대에 사로잡혀 죽을 뻔 했던 게 고작 일 년밖에 안 되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에 떨며 반드시 생존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고작 일 년이 지나서 물렁해졌다. 모략이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했는가. 조금은 쉬어도 상관없겠지, 하고 방심했는가. 한심하다. “네 말이 맞다, 라피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를 멸시한 자들.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들. 그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것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 있지.……다른 누구도 아니라 이 내가 그걸 까먹을 줄이야. 마음에도 군살이란 게 생기는 법이네.” 라피스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허리를 숙였다. “주제를 뛰어넘어 간언했습니다. 벌해주십시오.” “네가 없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고, 앞으로의 나도 없을 거야.” 나는 그 말로 라피스를 용서했고 또한 그녀에게 감사했다. 라피스는 한층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적막하지만 더없이 가열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무언가가 시작된다. 아니, 시작하게 만든다. 흑사병을 이용하자고 결심했을 때도, 대륙을 지옥에 떨어트리자고 결의했을 때도 이런 공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시작하는 자에 속했다. 어느새 이 공기에서 멀어졌다. 그걸 라피스가 되찾아주었다……그녀에게 고마워할 것이 계속 쌓여만 간다. 라피스가 바라는 것은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지.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행동으로 보여준다. “마계의 권력자들이라 했어? 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십만 골드를 내준 거다. 기대에 응해주지 않으면 섭섭해하겠지.”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라피스. 누가 돈을 더 많이 냈는가를 알려줘. 차례대로 접선해보자.” “그렇게 말씀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라피스가 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란 미소였다. 라피스는 품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재화를 투자한 자들을 적어둔 목록입니다. 마계에 현존하는 스물여섯 명의 대공(大公) 중에 총 스물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우선적으로 만나셔야 합니다.” “훌륭하군.” 나는 그녀의 수완을 칭찬했다. 마계에는 스물여섯 개의 지옥이 있다. 여기서 지옥이란 단순한 비유로, 단순히 영지를 가리킨다. 즉 마계는 기본적으로 스물여섯 개의 영지로 이루어져 있다. 라피스가 건네준 양피지에는 지옥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에게 투자한 자들이 다스리는 영지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흑승지옥(黑繩地獄). 규환지옥(叫喚地獄). 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초열지옥(焦熱地獄). 무간지옥(無間地獄). 그외 이십 개의 영지명이 주르륵 이어졌다. 지옥을 다스리는 자를 대공이라 부르며,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이름에 칭호를 붙인다. 예컨대 초열지옥을 다스리는 대공은 초열대공이라 부르는 식이다. 인간계인 대륙에 거점을 둔 일흔두 명의 마왕. 마계를 다스리는 스물여섯 명의 대공. 이들이 마족을 이념적으로,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최고위층이다. 마왕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태어날 때부터 마왕일 수도 있고, 평범하게 마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왕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줏대가 없다. 반면에 대공이 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적자생존.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대공이 된다. 출신도 상관없다. 신분도 상관없다. 끊임없는 무한경쟁의 틈바귀 속에서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대공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당연히 배신과 계략, 합종연횡이 들끓는다. 마왕 중에는 서열 제72위의 안드로말리우스처럼 정신머리가 썩어빠진 놈도 있다마는……지옥의 대공들은 다르다. 순전히 실력파이다. 언제 자세를 굽혀야 하는지, 언제 뒤통수를 후려갈겨야 하는지 본능으로 승화시킨 녀석들이다. 지금 그들이 나에게 고개를 숙일 때라고 판단했다. 어째서인가. 내가 강력해서가 아니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시트리 등, 마왕군 파벌들 한가운데에 내가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생각했겠지. 그만한 핵심 인물이 아직까지 어느 대공과도 연줄이 없다.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서 단탈리안과 인맥을 쌓아두어야 한다. 나를 포섭하기만 한다면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까지 영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이 정도 계산이 있었을까. 발 빠른 대처이다. 라피스는 이걸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시간을 질질 끌면서 대공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으리라. 대공들은 그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다 다른 대공보다 뒤처지면 안 되니까. 유능한 권력자일수록 경쟁자에게 뒤떨어지는 것을 극심하게 경계한다. 이번에는 그 유능함이 도리어 이용되었다. 제 발에 자기들이 걸려 넘어졌다. 과연 라피스이다. 돈이 관련된 일에 한해서 라피스는 틀림없이 일급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 안목은 둘째치더라도, 하급 마족 태생으로서 지옥 최고의 권력자들을 감히 등쳐먹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다. ‘어쩌면 날 배려한 걸지도 몰라.’ 라피스는 어리석은 워커홀릭이 아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왕증후군에 한창 시달릴 때 니블헤임으로 휴가를 가라고 권유한 이가 다름아니라 그녀 아니었는가. 그러니까 단 한 마디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쉬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동안 라피스는 나를 대신하여 물밑에서 움직였다. 약간의 휴식을 인정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이쯤 쉬었으면 괜찮다 판단하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를 독촉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나는 양피지를 차근차근 읽다가 문득 라피스를 쳐다보았다. 청금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하신 점이라도?” 틀린 걸 틀리다고 판단할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한다. 나에게 체력을 재충전할 시간을 주고, 어떻게 해야 내가 설득될지 계산하여 움직인다. 그처럼 현실적으로 행동하기에 하급 마족에서 여기까지 출세한 것이리라. “아니, 그냥.” 내가 웃었다. “네가 내 곁에 있어서 참 좋다 싶어서.” “…….” 라피스가 불의의 일격을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평소대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확인하셔야 할 서류는 그거 한 장이 아닙니다. 각 지옥대공의 성향, 대공들 간의 관계를 조사해왔습니다. 그중에는 평원파와 친밀한 대공도, 산악파에 협조적인 대공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사항을 확실하게 파악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어이구야. 나 죽네, 나 죽어.” 앓는 시늉을 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감사했다.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점들이었다. 나는 그날 하루종일 서류를 검토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라피스의 보고서는 핵심적인 부분만 짚고 있었다. 자기가 이만큼 조사했고 이만큼이나 알고 있다, 라고 자랑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만 중요한 사항을 논리적으로 착착 썼다. “좀 이상하네. 아무리 그동안 산악파가 강세였어도 친산악파 대공이 너무 많은걸.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예. 거기에는 대다수의 지옥대공이 인간계 정벌에 회의적이라는 뒷배경이…….” 게다가 궁금한 점을 물으면 바로 대답해준다. 이보다 더 유능하기란 힘들겠지. 덕분에 나는 단 하루 만에 마계의 권력구조를 통달했다. 중간에 라우라가 들어와서 우리 둘의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금방 질렸는지 침대에 가서 곯아떨어졌다. 라피스와 나는 촛불을 켜가면서까지 밤새도록 얘기를 주고받았다. “좋아.” 새벽쯤에 내가 말했다. “이 정도면 계획을 실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이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라피스가 또 옅게 웃었다. 저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디 지옥의 대공 나으리들을 영접해볼까.” 어디까지나 '단탈리안'에게 어울리는 수단과 방법으로.   00139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독사지옥(毒蛇地獄)의 대공은 요즘 들어 소문을 들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자. 서열 제71위의 최하위 마왕……허나, 기세가 좋은 모양이지 않은가.’ 최근 마왕 단탈리안이 지옥의 대공들을 차례대로 만났다. 그것만 보면 대수로울 게 없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을 만나고 난 이후로 대공들이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졌다. 소문의 그 단탈리안과 만났다고 들었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그렇게 물어봐도 대공들은 하나같이 침묵했다. 말하고 싶지 않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런 분위기였다. 지옥의 대공들은 마인을 통치하는 명실상부 최고 권력층이다. 그런 자들이 얘기하기를 꺼려한다. 보통 일이 아니다. ‘흥미롭군.’ 독사대공은 더더욱 궁금해져서 대공들을 캐물었다. 그러자 대공들은 장시간 침묵하며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구체적인 어조는 다르지만 그들은 한결처럼 이렇게 말했다. 얕보지 마라. 솔직히 독사대공은 그 한마디에 흥이 떨어졌다. 단탈리안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얕보지 마라――달리 말해, 다른 대공들은 처음에 단탈리안을 얕보았다는 얘기이다. ‘어리석은 놈들.’ 서열 제71위라서 방심했는가. 오히려 서열 제71위 주제에 돌풍을 몰아치며 월맹군의 핵심으로 떠올랐으니 더더욱 방심하면 안 되겠지. 대공들이라는 작자가 그것조차 몰랐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독사대공은 생각했다. 자신은 단탈리안을 얕보지 않는다. 틀림없이 무언가 '한 수'가 있을 터. 자신에게는 그 한 수가 무엇인지 파악할 방법이 없다. 적어도 현재 그러하다. 한 수를 알아낼 때까지 사자와 같이 경계심을 가져야만 한다. 자아, 그렇다면 상대방의 격을 시험해보자. “가장 성대하게 무도회를 열어라.” 아마도 다른 대공들은 단탈리안과 일대일 독담을 나누었다. 어리석었다. 마왕은 마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혼자서 상대해서야 이쪽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들킬 따름이다. 최대한 인원을 많이 준비한다. 이쪽의 감정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독사지옥에서 이름난 영애들을 모조리 불러들여라.” 호족(虎族), 묘족(猫族), 사슴족, 엘프까지. 독사대공의 휘하에는 수많은 백작과 자작이 있다. 그들의 딸내미 중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들을 소집한다. 설마 단탈리안이 여인들의 미색에 홀려 어리버리해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성은 기본적으로 여성에 약하다. 주변에서 미녀들이 끊임없이 재잘재잘 떠든다. 그런 상황에서 냉정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설령 유지한다 하더라도 작게나마 빈틈을 보이게 된다. 그 빈틈을 십분 이용해준다.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요리사를, 광대를 모아라.” 청각, 미각, 시각,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정신은 결국 육체에 영향을 받는다. 육체가 풀어지면 정신도 풀어진다. 독사대공은 이번 무도회를 준비하면서 무려 5천 골드를 쏟아부었다. 대공 자신이 직접 무도회 준비를 주도했다. 대공 아래의 휘하들이 어쨌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실상 대공가 전체가 무도회에 주력했다. 단 한번의 함정을 마련하는 데 5천 골드를 아끼지 않는다. 토끼를 잡을 때도 사자가 전력을 다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무도회 날이 다가왔다. 독사지옥 전역에서 유력 마족들이 모여들었다. 무도회의 명분은 '월맹군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십시일반하는 모음회'. 마왕 단탈리안은 월맹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다, 그런 설정이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대공 전하. 그동안 안녕하셨사옵니까.” “오오. 롬바흐 백작. 무도회에 참석해주셔서 고맙소.” “전하! 건강하신 것 같아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바뤼흐 자작도 날이 갈수록 훤칠해지니 부러울 따름이오.” 식상한 인사치레. 덧없는 웃음과 말소리. 독사대공은 모처럼 열리는 대규모 무도회에 들떠하는 귀족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저들은 이번 무도회의 진정한 목적을 모른다. 이 기회에 단탈리안에게 잘보이고 싶어하는 부류는 극히 희박하리라. 마계는 마계. 대륙은 대륙. 마계에서 권력을 향유하는 귀족 마인들한테 월맹군은 어차피 남의 이야기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영원히 너희가 백작과 남작 따위에 머무는 것이다.’ 얼마나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었을까. 마침내 문지기가 높은 목소리로 기다리던 이름을 불렀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마왕 전하 납시오!” 사람들의 이목이 무도회장 입구에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을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서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에스코트를 받았다. 분홍빛 머리카락. 저 여자가 단탈리안의 측근이라는 서큐버스인가. ‘이런 자리에 하급 마인을 데려오다니.’ 독사대공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고급 인사들이 모이는 무도회이다. 작위도 명성도 없는 하급 서큐버스를 파트너로 삼는 것은 예의도 아니었고 상식도 아니었다.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판단해야겠지……독사대공은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단탈리안 전하.” 그가 한껏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소인의 조촐한 무도회에 발걸음을 해주시니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나이다.” “본인이 조촐함이라는 단어를 지금까지 미처 잘못 알았소.” 단탈리안이 마주 웃었다. “입구를 들어서는 데도 화려하며 깊은 멋이 있으니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소. 대공! 이런 자리에 초대해주어 본인 또한 기쁘기 그지없소.” “황공하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고 독사대공이 생각했다. ‘예상보다 평범하군 그래.’ 마왕이라기에는 위엄이 부족하다. 풍채가 미덥지 못하다. 어깨가 좁아 듬직하지 못한 느낌이 들고,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여 보기에 썩 좋지 않다. 귀족적인 예법에도 익숙치 않다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런 자가 월맹군의 새로운 핵심이라고? 독사대공이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연. 얕보지 마라고 신신당부한 까닭이 있었군.’ 겉모습이 이리 비실해서야 저절로 얕보게 된다. 아마도 다른 대공들은 단탈리안의 외관에 방심하여 그만 한방 먹었겠지. 한심한 이야기이다. 외면에 속지 않고 내면을 주의하라. 정치의 기본 중 기본 아닌가. 독사대공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나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왕.’ 그가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전하. 부디 마음껏 무도회를 즐겨주십시오.” “환대에 감사한다.” 단탈리안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어디 즐겨볼까.” * * * 무도회가 시작하고 네 시간. 독사대공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가 무도회 한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단탈리안이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하하 웃고 있었다. 영애들도 무언가 재미난 농담을 들었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저 자……정말로 대단한 놈인가?’ 네 시간 내내 단탈리안은 진심으로 무도회를 즐겼다. 파트너인 서큐버스와 첫 춤을 추더니 이윽고 영애들에게 차례대로 권유하여 무도회를 만끽했다. 매번 파트너를 바꾸었다. 한 파트너와 춤을 연이어서 추는 법이 없었다. 절조 없는 녀석이었다. ‘언제까지 여자들이랑 놀아재낄 셈이냐!’ 호색한에도 정도가 있었다. 지금 무도회에는 마계의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마왕이라면 여자들이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려 들 것이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영애들에 푹 빠져서 도통 마계의 실력자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남자들이 단탈리안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저 모습은 정말 무도회를 즐기는 것처럼……. ‘아니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것도 술책이다. 이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계략……그런 것에 넘어갈까보냐.’ 독사대공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언젠가 여자들에서 벗어나 독사대공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리라 믿으면서. 무도회가 시작하고 여섯 시간이 지나도 단탈리안은 꿈쩍하지 않았다. ‘제기랄! 저건 연기가 아니다!’ 독사대공이 이를 악 물었다. 이제는 무도회를 파할 시간이 다가왔다. 귀족들도 영애들도 지쳤다. 설령 지금 와서 단탈리안이 무언가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실례하겠소.” 결국 독사대공이 먼저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단탈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영애들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다급하게 예를 갖추었다. 단탈리안은 뒤늦게야 독사대공을 발견했다. “오오. 대공, 실로 훌륭한 무도회요.” “황공하옵니다. 소인이 혹여 전하를 방해하지 않았는지 염려되는군요.” “그럴 리가. 자아, 대공도 여기 앉으시오.” 대공이 미소 지었다. 머저리가! 내가 새파란 여자애들이랑 환담이나 나누겠다고 행차한 줄 아는가. “그거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전하. 소인이 긴히 말씀드릴 바가 있나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조금 더 흥미로운 곳에 안내해드리고자 합니다만…….” “그렇소? 흐음. 어쩔 수 없군.” 단탈리안이 영애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들. 즐거웠소. 언제 대륙에 들리면 내 마왕성에 놀러오시오. 멋진 밤을 선물해주지.” 영애들이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단탈리안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 광경을 보면서 독사지공은 속이 뒤틀렸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서큐버스를 파트너로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정말로 '그런'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밀실로 안내했다. 사방 십 미터 정도 되는 방이었다. 사치품이 전혀 없고 나무탁자와 의자만 덩그러니 놓였다. 방음마법이 철저하게 걸려 있어서 밀담을 나누기에 제격이었다. “누추한 곳입니다만.” “아니. 본인도 마침 휴식하고 싶었네.”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전하, 이번 모금회에서 족히 6천 골드를 모을 듯싶습니다.” “잘됐군. 그대들이 쾌척한 자금은 내 필히 유용하게 쓰겠네.” “…….” 그게 전부인가? 마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자신을 눈앞에 두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는가. 독사대공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먼저 치고 들어갔다. “전하께서는 아무래도 마계의 귀족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무도회에서도 줄곧 영애들과 함께하시니……허허. 제 주변에서 많은 귀족들이 아쉬워했습니다. 다들 전하와 대화를 나눠보기를 기대했습니다.” “아아. 그런가?” 그거 미안한 짓을 저질렀군, 하고 단탈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본인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니 말이다.” “……예?” 단탈리안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목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가 너무도 평범한 어조였기에 독사대공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 말했다, 대공.” 그 순간, 독사대공은 공기가 순식간에 적막해졌음을 느꼈다. 바로 전까지와 전혀 달랐다. 미소는 똑같았다. 한없이 느긋한 어조도 똑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질이 바뀌었다. 독사대공은 놀랄 틈도 없이 표정을 관리했다.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니……하긴 마인들은 언젠가 죽습니다. 수명이 길다해도 마왕 전하들에 비하면 필멸자나 다름없지요.” 단탈리안이 씩 웃었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뭐, 아무래도 좋다마는.” 그가 손수건으로 목을 계속 닦았다. 그후로 아무런 말을 잇지 않았다. 독사대공이 속으로 속삭였다. ‘침착해라.’ 허장성세이다. 협박이다.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예상대로 단탈리안은 무도회장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 사실이 드러났다. 단지 그뿐이다.――그러나 어차피 죽을 자들이라는 얘기는 도대체 무엇인가? “전하. 혹여 소인에게 노하신 부분이 있다면 말해주시옵소서. 사죄하겠나이다.” “대공은 현재 월맹군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가?” 갑작스러운 질문. 독사대공은 당황하지 않았다. “영광스럽게도 우리 마왕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경축드리옵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예?”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명백히 싸늘한 비웃음이었다. “마왕군은 이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 마왕군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무엇을 경축한다는 것인가.” “송구하오나……소인, 미진하여 전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마왕군은 결코 경의 한편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대공.” 단탈리안이 독사대공을 흘낏 노려보면서 말했다. “마왕군이 대륙을 정벌하고 나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마계이다. 마왕군은 마계를 정벌하여 세계에 유일무이한 통치권자는 오로지 마왕밖에 없음을 천명할 것이노라. 가장 먼저 토벌될 경이 '우리'라고 말하다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 독사대공의 심장이 경직했다.   ============================ 작품 후기 ============================   00140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드디어 상대쪽에서 비장의 한패를 내보였다. 독사대공은 여기가 승부의 갈림길임을 직감했다. ‘패의 종류는 협박.’ 대공이 생각했다. 협박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위협적이다……그러나 본질은 교섭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 무언가를 양보하게 만들고 싶다. ‘달리 말해――정말로 마계를 정벌할 생각은 없다.’ 만약 진짜 마계를 정벌하고자 했다면 애시당초 협박해오지 않았을 터. 여기서 파악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이다.……상대방에게 마계를 토벌할 힘이 있는가? 일단 이것부터 알아내야 한다. 만약 그럴 힘이 없다면 블러프. 허장성세이다. ‘만에 하나 그럴 힘이 있다면?’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고려해둬야 한다. 이 경우 사정이 약간 더 골치 아프다. 상대측은 마계를 정벌할 힘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 왜인가. 마계를 정벌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이 무엇인가. 자그마치 마계보다 더 큰 이득이 뭔가. 그 점을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허장성세인지 아닌지 시험해볼까. 독사대공이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허허. 단탈리안 전하, 소인을 너무 놀리시는군요. 제가 직위에 비해 담이 약하여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깜짝 놀라옵니다.” “본인이 뭐 할 일이 없다고 대공을 놀리겠는가.” “허면,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옵니까?” 단탈리안이 만면에 웃음기를 지웠다.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그대가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본인은 절대로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 “송구하오나 소인의 미천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나이다.” 애송이가 제법 화술이 뛰어나군, 하고 독사대공이 생각했다. 녀석은 주변의 공기를 능수능란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아마 햇병아리 귀족 마인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곧바로 속았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마계에 스물여섯 명밖에 없는 대공. 무한경쟁의 지옥도에서 살아남아 정점을 거머쥔 자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온전히 줘본 적도, 빼앗겨본 적도 없다. 독사대공은 정치가로서 호승심이 치밀었다. 마왕이란 어차피 대다수가 운으로 된 자들. 녀석들은 평생 몬스터와 싸워본 적도 없다. 너희가 오크의 주먹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은랑족의 이빨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아는가. 그것을 일일이 헤쳐나온 자신을 이겨낼 수 있을까! ――칼 없는 결투를 치뤄보자, 최약체! 독사대공이 양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최근에 월맹군의 기세가 좋다해도 아직 전쟁은 초입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일대만 점령했지요. 대륙의 절반은커녕 반의 반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계 정벌을 논한다……재차 송구하옵니다만, 도저히 현실성이 있다고 보지 못하겠나이다.” 독사대공은 확신이 있었다. 인간과 마인은 철천지원수이다. 단순히 땅만 점령했다고 해서 인간이 마인에게, 마인이 인간에게 고개를 간단히 숙일 리가 없다. 어마어마한 반란이 이어지겠지. 영토를 점령하는 것보다 안정시키는 것이 압도적으로 어렵다. 현재 월맹군은 영토를 점령하지도 못했다. 전황이 약간 유리하다고 해서 여유를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계를 정벌하겠다고? 언어도단이었다. 단탈리안이 독사대공의 안색을 살피더니 피식거렸다. “왜 마왕군이 대륙을 다 정벌해야 하는가?” “……예?” 대공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것이 무슨 뜻이옵니까.” “이런. 아무래도 대공은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단탈리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마왕군은 하나가 아니다. 대공도 잘 알지 않는가?” “평원파와 산악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소인도 물론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그게 지금 얘기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온지…….” “파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대공, 조금 더 간단한 내용이다. 마왕군에는 상위 마왕이 있고 하위 마왕이 있다. 그러하지 않은가.” 단탈리안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이쪽을 시험해보는 것 같았다. 그대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흘러나왔다. 독사대공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월맹군이 실패한 원인이 바로 하위 마왕들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대들, 지옥의 대공들과도 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지?” 대공은 온몸이 잠깐 굳었다. 설마, 이 자? 수백 년 동안 갈고 닦아온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내는 어디까지 알아낸 것인가. 지레짐작인가? 이쪽의 속을 떠보는 것인가. 만약 아니라면……이런, 안 된다. 주도권이 저쪽에 넘어가지 않는가. 독사대공이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가 반문했다. “아까부터 미처 단탈리안 전하의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 월맹군이 실패한 원인이 마왕 전하들에게 있다니요?” “호오. 뭐, 좋다. 오늘처럼 호화로운 무도회에 초대해준 것이다. 귀여운 영애들을 보아서라도 약간의 무례는 용서해주마.” 단탈리안의 목소리에는 즐거워 하는 기색이 넘실거렸다. “대륙 정벌이 온 마인의 염원이라 흔히들 말하지만……글쎄, 대륙이 점령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세력은 마족에도 있지. 누구인지 짐작되는가, 대공? 아니.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네. 자네의 입장은 대충이나마 이해하고 있으니까.” “…….” “바로 하위 마왕들과 지옥의 대공들이다.” 독사대공은 손가락 사이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대륙이 정벌된다. 인간의 군주는 사라지고 마왕들만이 통치자로 군림하겠지. 그러나 일흔두 명의 통치자는 지나치게 많다. 지금까지 협력해온 마왕들은 이제 제각기 권력을 앞세워서 서로 싸울 것이다. 그 와중에 강력한 상위 마왕들이 살아남는 것은 필연.” 알겠는가, 하고 단탈리안이 말했다. “하위 마왕들은 대륙 정벌을 바라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인간계가 건재해야만 그 마왕들은 생명과 지위를 부지할 수 있다. 무얼, 본인은 가장 허약한 마왕이다. 본인의 말만큼 믿음직스러운 것도 없을걸세. 이미 아는 내용이겠지만 말이야.” “…….” 독사대공은 표정이 굳었다. 상대방은 지금 마왕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써 이쪽에서 뭐라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무슨 일인가. 이 내가 주도권을 쥐어잡지 못하다니. 독사대공은 초조해졌다. “너무 겸손하시군요. 마왕 전하들께서 서열이 높고 낮음에 상관하지 않고 그동안 월맹군에 헌신하셨다는 사실, 누구보다 소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헌신? 헌신이라고?” 단탈리안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다른 의미로 헌신적으로 노력했지.” 그리고 단탈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침묵이 독사대공의 신경을 아프게 쥐어짰다. 대공은 상대방의 화술이 단지 '애송이들을 속여먹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회를 잡았음에도 이쪽을 무조건 공격하지 않는다. 때때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아는 것이다. 만약 방금 단탈리안이 대공의 말을 부정했다면 대공은 지난 월맹군 역사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분투했던 하위 마왕들을 일일이 언급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단탈리안의 논지는 크게 뭉개졌겠지. 적어도 기세를 빼앗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인정하고 넘어가면. “그러하옵니다. 제2차 월맹군의 사례만 보아도…….” “본인에게 지루한 역사 강의를 하사할 생각인가? 집어치우게. 본인은 그대와 현재의 월맹군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논의의 방향을 왜곡할 수 없게 된다. 독사대공의 손바닥에 땀이 묻어나왔다. “하위 마왕뿐만이 아니다. 마계를 통치하는 대공……그대들도 대륙이 마왕의 아래에 통일되면 곤란하겠지. 지금까지 마왕들은 대륙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인간계에만 머물렀다. 허나, 인간이 멸망하면 어찌되겠는가?” “…….” “마왕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마계로 넘어간다. 곧이어 그대들의 통치권도 끝장난다. 본인의 말이 맞는가.”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대공은 어물쩡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기 영지에 대해 마왕이 간섭할 구석을 만들게 된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마왕에 대한 반역죄가 되어버린다. 진퇴양난. 독사대공의 머리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하위 마왕들도, 마계의 실력자들도 대륙이 정벌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이천 년 동안 삽질만 한 것도 이해된다. 한심하기 그지없어.”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헌데 말일세. 아무리 그래도 상위 마왕들이 바보는 아니라서, 똑같은 시나리오가 이천 년씩이나 반복되니까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월맹군이 실패하도록 뒤에서 암약하는 무리가 있다고.” “…….” “뭐, 그 무리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도록 하지. 본인은 진실을 말할 뿐만이 아니라 관대하기까지 하거든. 이거 목이 마르는군.” 단탈리안이 품속에서 물통을 꺼내 마셨다. 무도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물통을 챙겼다. 항상 독살을 의심하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하필 지금 타이밍에 자기 물통을 꺼내보였다. 무슨 뜻인가. 네놈이 나를 독살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네놈들이 바로 월맹군의 실패를 조장했다고 소리없이 규탄하고 있었다. 독사대공은 입안을 넘어서서 목구멍이 갈증에 잠겼다. 이게 호색한이라고?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다. 이 자는 전사, 집안에서 잠잘 때조차 머리맡에 검을 올려두는 전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심했네. 대륙의 정벌은 나중. 먼저 집안을 청소하자, 라고.” 단탈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실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인류라는 공적을 두고도 파벌을 나눠서 싸우던 우리가 도리어 마왕과 마인에 맞서서 손을 잡았다. 과연, 역사의 여신께서도 농담을 할 줄 아시는 게지.” “……아까부터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정확히 어느 분들을 가리키는 것인지요?” 독사대공이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단탈리안이 대공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대공은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졌다. “바알, 바르바토스, 파이몬, 마르바스, 가미긴. 가장 유력한 협력자는 이 정도일까.” 대공이 헛숨을 들이켰다. 말도 안 된다! 서열 제1위, 평원파의 수장, 산악파의 수장, 중립파의 수장, 무소속 상위 마왕――그들이 전부 협력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각 파벌의 실세들이 참여했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사실상 대다수의 상위 마왕이 협력체제를 이룩한 것이다! “왜, 믿기지 않는가?” 단탈리안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동안 죽도록 싸웠으니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보게. 그렇게 죽도록 싸워온 원인이 사실은 전혀 엉뚱한 제3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어느 정도로 분노했을지.” 독사대공은 마음속으로 전력을 다해 부정했다. 거짓말이다. 증거가 없다. 단순한 협박에 불과하다.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 단탈리안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반년 전, 파이몬이 본인을 구하려다 마력을 전부 상실했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산악파의 수장이 고작 평원파의 일개 하위 마왕을 구하기 위해 희생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각자 따로 움직이던 파벌들이 왜 합스부르크 제국에 집결했다고 생각하는가? 산악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러나 정작 산악파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누구보다 산악파를 증오하는 바르바토스가 어째서 양보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단탈리안이 비웃었다. “무르군. 지옥의 대공이여, 한없이 무르다. 아직까지도 서열 제1위의 대마왕 바알이 월맹군에 본격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이유조차 그대는 모르고 있다.” 독사대공은 이제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인가. 바알 대마왕은 프랑크 제국 방면을 맡았을 터. 그 길목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고보면……현재 합스부르크 전역에는 프랑크 제국군도 참여하고 있다. 바알이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말인가? 지옥의 대공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의도가? 혼란스러워 하는 독사대공에게 단탈리안의 말이 천둥처럼 떨어졌다. “바로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대들――지옥의 대공들이 다스리는 마계를 토벌하기 위한 전력을 말이다.” 마계 토벌. 대륙을 정벌하려면 먼저 안방을 정리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바알이 준비하고 있다. 바알뿐만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전역이 일단락되면 평원파는 물론이고 산악파, 중립파, 무소속 마왕까지 참여한다――.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상위 마왕들이 진심으로 마계를 정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 얕보지 마라. 그제서야 독사대공은 다른 대공들이 경고한 바를 깨달았다. 다른 대공들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도 농락당했다. 아니, 사냥당했다. 방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포식자와 피식자……상대편은 이미 이쪽을 물어뜯을 준비를 전부 끝마쳤다. 얕보지 마라. 상대와 내가 같은 수준이라고 아예 생각하지 마라. 대공들의 경고는, 그런 뜻이었는가! 독사대공은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asd메이지// 단탈리안의 이명이 슬슬 기만의 마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실농축액2//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엘리자베트 황녀를 헤쳐온 단탈리안에게 지옥의 대공은 탐스러운 먹잇감이었습니다. 에르시리나// 옙, 3등입니다. 의욕제로// 일단 히로인이 추가될 예정은 없습니다. 지금도 많아요! NineBreaker// 꽁냥이들과 노는 걸 방해받자 분노한 단탈리안.(...) 시크리트으// 라우라가 이미 너무 강한지라 형평성 차원에서 다른 히로인을 밀어줘야 할 판입니다. woomee9// 연기 스킬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단탈리안 본인의 솜씨도 많이 늘었지요. TheDaybreak// 감사합니다! 뱃살냥이// 저도 매번 속도에 놀라고 있습니다. 할레데임// 알 수 없는 불합리가 지옥의 대공들을 덮친다... 설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든 히로인을 골라주세요! 역시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1위를 달리고 있네요. 바르바토스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트 황녀와 라피스 라줄리도 만만치 않군요. 우리의 산골촌장 파르시가 의외로 선전.(...) 곧 표지를 바꿀 예정입니다. 표지가 바뀌어도 놀라지 말아주세요!   00141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고금 이래……마왕이 마계로 칼날을 향한 적은 없나이다.” 독사대공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마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탈리안의 얘기가 어디까지나 흥미를 돋군다는 식으로 여유롭게, 탁자 위에 놓인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얘기는 실로 포도주 한입거리에 어울리는 안주이다. 그런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공은 필사적이었다. “전무후무한 사건에 마인들이 많이 동요하지 않을련지요. 도리어 대륙의 월맹군까지 혼란이 퍼질지 모릅니다. 월맹군의 후방을 안정시키자는 계획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사옵니다.” “호오. 상당히 월맹군을 걱정해주지 않는가, 대공?” 단탈리안이 비아냥거렸다. 독사대공은 표정이 변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소인 역시 미천하나마 마인의 일원이므로.” “다소 혼란스러워져도 상관없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군을 미리, 철저히 깨부순다. 어차피 바알 전하의 군대는 건재하다. 마계를 정벌하기에는 충분하겠지.” 그렇다. 바알의 군대는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최강이다. 무엇보다 바알은 마인들 사이에서 드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그럴듯한 명분……예컨대 마계를 해방한다는 명분 따위를 들고 공격해오면 어찌될 것인가. 독사대공이 포도주를 한모금 마셨다. 안 된다. 이쪽이 필패한다. 대공들의 철권통치에 마인들은 언제나 불만을 가져왔다. 서열 제1위 마왕의 강림에 두 손 벌려 환호하는 자들이 넘쳐나리라. 애당초 마인은 기본적으로 마왕한테 반항할 수 없다. 사력을 다해 저항해본들 어디까지 버틸련지. 아무리 잘해봤자 2년, 3년이겠지. 마계는 마왕의 아래에 통일된다. 거기까지 상상하고 독사대공은 참담해졌다. “무얼.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게. 마인은 마왕이 통치한다. 당연한 진리 아닌가? 본래 마계도 응당 마왕의 것이어야 했다. 다만 잠시간 그대 대공들에게 맡겨두었을 뿐이지. 맡은 물건을 주인에게 되돌려준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할 것도 없을걸세.” 단탈리안이 유쾌하게 웃었다. ‘감히, 최약체 주제에.’ 독사대공은 부아가 치밀었다. 뭐가 맡은 물건을 되돌려줄 뿐인가! 마계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황량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박토(薄土)에 불과했다. 밀알 하나를 심으면 두세 개를 얻기 힘들었고, 지하를 파도 우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족이 고향을 증오하며 가로되 지옥이라. 마왕들은 이 땅을 버렸다. 세계를 등졌다. 보다 비옥한 세계로, 대륙으로 나가겠다며 떠났다. 수많은 마인이 그 뒤를 따랐다. 현재 대륙에 무수하게 퍼진 몬스터들은 바로 이주민의 후손이었다. 반면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든 지옥에 적응했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 끔찍한 사회원리가 거의 영원으로 느껴질 정도의 긴 시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굴러갔다. 지옥의 대공들은 바로 톱니바퀴를 필사적으로 헤쳐나온 장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마계를 되찾겠다고? 원래 자신의 물건이었으니 돌려받아 마땅하다고? 독사대공이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장난하지 마라!’ 대륙에서 월맹군이니 뭐니 쓸모없이 희생만 거듭한 주제에 어디 감히 마계의 진정한 주인을, 살과 뼈를 다해 황무지와 함께 굴러온 이들을 부정하는가. 바알의 군대, 좋다. 얼마든지 와봐라. 기꺼이 멸망해주마. 그러나 우리에게 비장의 패 한두 개조차 없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세계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저주를 퍼부어주겠다. 세상 온 천지를 지옥으로 만들어주마……. 독사대공이 여유로운 낯빛 아래에 최악의 사태에 대해 마음을 준비했다. 그런데 결사항전을 부르짖기 이전에 확인해야만 하는 점이 있었다. 바로 단탈리안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상대편에는 실제로 마계를 토벌할 힘이 있다. 명분도 있다. 헌데도 냉큼 공격해오는 대신 지옥의 대공인 자신과 교섭해왔다. 어째서인가. 만약 상대편에 이쪽과 타협할 의지가 있으면 최고이다. 최악의 경우는 목적이 단지 최후통첩일 때……그러면 멸망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 단탈리안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대공, 분위기가 너무 굳었군. 긴장을 풀게.” “허허. 송구하옵니다. 너무도 뜻밖의 소식을 접하여 그만 놀랐사옵니다.” “그대들에게 섭섭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라네.” 이제 본론인가. 독사대공이 긴장했다. “……그 말씀은?” “말했지 않은가. 자네가 제일 잘 알다시피 마왕군에는 여러 파벌이 있다네. 마계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저 권고의 수준에 그치자는 입장도 있지.” “……!” 독사대공은 시야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마계에 대해 한없이 우호적인 마왕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르바토스가 그러할 터. 우연치 않게, 눈앞의 사내는 바르바토스의 측근이었다. ‘그런가! 그랬는가!’ 대공은 순식간에 사건의 전말이 이해되었다. 상위 마왕들이 모종의 동맹을 맺었다. 목적은 단순했다. 월맹군의 실패를 몰래 조장하는 지옥대공들을 처리하자.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의 의견은 비교적 온건하지.” 단탈리안이 다시 우리라는 단어를 썼다. 대공은 그 단어가 아까 전과 또 다른 의미로 쓰였음을 직감했다. 달리 말해 평원파의 의견, 바르바토스의 의견이다. “대공이 마왕에게 변함없이 충성한다는 증거를 보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마는.”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네.” “월맹군의 성공을 기원하며 백만 골드를 기부하겠습니다.” 대공이 즉답했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기회가 닿는대로 충심을 다해, 단탈리안 전하를 전력으로 도와드리겠나이다. 전하라면 백만 골드를 틀림없이 현명하게 처리하시겠지요.” 독사대공은 유독 단탈리안 전하를 강조해서 발음했다. 백만 골드는 순전히 당신에게 전달하겠다. 중간에 얼마든지 마진을 떼어먹어도 좋다. 이쪽에서 상관하지 않는다. 그같은 의미였다. 단탈리안이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물통을 들어 입을 축였다. 독사대공은 단탈리안의 몸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충분한가? 부족한가? 눈앞의 남자는 도저히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대공. 걱정이 팔자로군. 우리는 그대들에게 세금을 떼어먹으려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군주에게 매일마다 충성을 맹세할 필요는 없다. 안 그런가?” 즉 상납은 이번 한번을 끝으로 다시 없을 것이라고. 독사대공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과연, 상위 마왕들은 현명했다. 협박이 여러 번 중첩되면 효과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지옥의 대공이라고 해서 백만 골드 같은 거금을 무한정으로 뱉어낼 수는 없었다. 빠른 시일 안에 상납금은 큰 부담이 되어버린다. 대공들은 겉으로 순종해도 점점 더 불만에 차겠지. 반란이 일어난다. 폭발해버리고 만다. ‘이건……진심으로 우리와 협력하려 든다고 봐도 좋을까.’ 만약 지옥대공들을 멸살할 계획이었다면 차라리 연달아 상납금을 요구했으리라. 일부러 폭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반란군을 정발한다는 명목으로 지옥에 침공했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단 한 번의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 단탈리안은 신뢰할 수 없다. 바알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라면, 하고 독사대공이 생각했다. 대륙 정벌을 평생의 염원으로 안고 살아가는 그 마왕이라면 믿음직스럽다. 아마도 그녀는 후방의 안정이니 대공들에 대한 보복이니 하는 소리가 오가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모처럼 인간계를 토벌할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동족과 싸울 때가 아니다……마왕 바르바토스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그러니까 심복인 단탈리안을 파견했다. “백만 골드를 추가로 후원하겠나이다.” “훌륭하군.” 그제야 단탈리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허나 전하. 이백만 골드는 소인에게도 꽤 버거운 금액입니다.” “흐음? 설마 아깝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물론이옵니다. 다만 소인이 비루하게 사백 년을 살아오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세상만사 확실을 기한다고 뭐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사대공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만일 소인의 충심이 만족스러우시다면 감히 청하옵건대, 전하께서도 최소한의 증거를 보여주시옵소서.” “요컨대 바르바토스와 내가 정말로 한속인지 증명하라?” “……예, 전하.” 대공은 등줄기에서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소름을 느꼈다. 눈앞의 사내는 거리낌 없이 대화를 비약한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쪽의 속내를 파악한다. 서열 제71위, 그런데도 실질적으로는 평원파의 최고 참모. 이것이 단탈리안인가. “뭐, 좋겠지.” 단탈리안이 선뜻 대답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탁자에 올렸다. 독사대공은 오래된 안목에 의지하여 그것이 마법 아티팩트임을 알아보았다. “이것은?” “메모리아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이다. 위조물인지 확인해보도록. 검증 마법쯤이야 꿰고 있겠지.” “분부대로.” 독사대공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부하는 많았다. 그는 오른손에 착용한 반지들 중에서 약지에 낀 반지를 아티팩트에 갖다대었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시동구어(始動口語)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반지에서 초록빛이 새어나왔다. “…….” 반응이 전무했다. 아티팩트에 마법적인 흔적이 없었다. 여기에 담긴 영상이 어떤 종류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실이라 믿어도 무방했다. 독사대공이 반지의 마법을 거둬들였다. “실례했사옵니다, 전하. 틀림없이 위조품이 아니옵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히죽거렸다. “정말로 확신하는가? 꽤나 자극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서 말일세. 나중에 놀라지 말고 지금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걸 추천하네만.” “허허. 소인을 기대하게 만드시는군요.” 독사대공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띄웠다. “황송한 제안입니다만, 이 반지는 마계에도 몇 없는 8서클 마법사가 제작한 도구이옵니다. 구태여 전하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좋네. 모쪼록 만끽해주게나.” “예.” 대공이 아티팩트를 가동시켰다. 부으응, 하고 아티팩트가 진동했다. 물건에서 영상이 투영되려는 순간 단탈리안이 말했다. “본인은 분명히 경고했네.” 밀실에 영상이 펼쳐졌다. 어떤 풍경이길래 저리 경고하는가, 하고 독사대공이 긴장했다. 마침내 영상에서 첫 소리가 터져나왔다. ─ 아흣, 흐으으윽! “…….” 독사대공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깨졌다. 여태껏 단탈리안의 맹공에 함락되지 않은 표정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그도 그럴 것이. ─ 하윽! 싫어! 안돼! 제발, 흐으윽! 그만……! ─ 닥쳐, 더러운 암퇘지 년. 내가 언제 언어를 말하라고 허락했냐. 돼지는 돼지답게 꿀꿀거려라. 아티팩트가 정사 장면을 담고 있었으니까. 대공이 당황하여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저, 전하. 이게 대체.” “조용히 하라.” 단탈리안은 지극히 싸늘한 얼굴이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다, 집중하라. 그런 기세가 살기처럼 내풍겼다. 독사대공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여기까지 와서 단탈리안이 자신을 우롱할 리 없었다. 이 영상에 어떤 의미가 담겼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언인가. 독사대공은 비록 아티팩트에서 연신 울려대는 신음이 귀에 거슬렸지만, 고개를 돌려 영상에 집중했다. ─ 꿀……꿀꿀, 꾸울……. ─ 그래. 그거다, 더러운 암퇘지 년아! 네놈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쓰잘데기 없는 육노예이다. 알겠냐, 더러운 암퇘지 년아. 네 년은 바닥에서 뒹굴기 위해 태어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독사대공은 곧바로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영상에는 남자와 소녀가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눈앞의 사내, 단탈리안이었다. 그는 폭군처럼 군림하여 소녀를 희롱했다. 발가락을 핥으라. 자위하라. 자기는 천박하게 발정이 난 암퇘지라고 스스로 말해라. 끊임없이 불합리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소녀는――. ─ 좋아. 나는 뭐냐? 더러운 암퇘지 년아. 아랫구멍이 허벌창인 네 년한테도 입구멍이 있겠지. 어디 그 음란한 혓바닥으로 지껄여봐라. 나는 네 년의 무엇이지? ─ 주인……단탈리안 님은, 흐읏. 저 암퇘지 바르바토스의 주인님입니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이자 평원파의 수장. 바르바토스였다.   ============================ 작품 후기 ============================   둘이서 저러고 놉니다. 무척 오붓하고 다정하지요. [리리플] TheDaybreak// 다시 첫코를 탈환하셨군요. 시크리트으//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가 월등한 차이로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asd메이지// 기만에서 시작해서 기만으로 끝나는 단탈리안입니다. woomee9// 예, 그 부분을 후술할 생각입니다. 루니엔ㅁ// 안 늦었습니다! 의욕제로// 단탈리안이 자기 집 마련하겠다며 여리고 착한 대공들을 삥 뜯고 다니고 있습니다. 할레데임// 이 세계에 오고나서야 자기 재능을 깨달았습니다. 로나프// 일단 참고 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나중에 표지를 제작할 때 영향이 있을지도 몰라요! 헬룬// 감사합니다. 창공까마귀// 처음부터 끝까지 구라일 확률도 높습니다.(...) 설문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곧 소설 표지가 바뀔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요.   00142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 독사대공이 침묵했다. 하얗지만 노인의 머리카락과 다르게 생생하게 윤기 있는 백발, 머리색만큼이나 새하얀 살결, 마지막으로 작은 몸집. 영상에 등장하는 소녀는 틀림없이 마왕 바르바토스였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 표정은 독사대공이 아는 바르바토스와 너무도 달랐다. 굴욕과 굴복, 그러면서도 쾌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르바토스, 언제나 자신만만한 마왕은 얼굴이 온통 모멸감으로 일그러졌다. 입술의 자그마한 틈새에서 연신 갸날픈 신음이 새어나왔다. ‘주인님이라니.’ 독사대공이 침을 삼켰다. 그가 조심스럽게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은 무표정했다. ‘설마 두 사람의 관계……바르바토스가 위쪽인 것이 아니라, 단탈리안이 위쪽이라고?’ 대공도 이래저래 수백 년을 살았다. 성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 않게 해박했다. 특별한 놀이에서 주인 역할을 하는가 노예 역할을 하는가, 실제 관계는 그것과 상관없다. 놀이에서 노예처럼 행동할지라도 실제에선 상대보다 우위에 서 있다. 그런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성관계에서나마 우위를 점한다면…….’ 아마도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동등한 관계. 엄청난 신뢰가 두 사람 사이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리라. “전하. 메모리아는 이쯤이면 충분하올 듯싶습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 잠자코 지켜보라.” 여기서 더 무엇이 등장한다는 말인가? 독사대공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탈리안에게 완전히 기세를 제압당했다. 그러나 어떻게 저항하고 싶어도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영상에서 남녀가 놀이를 끝냈다. 둘은 침대에 누웠다. 아니, 누웠다고 표현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는 아직 여운이 남은 듯이 침대에 벌러덩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여린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 바르바토스. ─ 으응……. ─ 네 사신의 대낫 있잖아. 그거 정확히 어떤 무기인 거냐? 바르바토스가 몹시 피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독사대공은 자기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서열 제8위가 서열 제71위와 반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은 파벌의 수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파벌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자인데도. 두 마왕은 서로 대등하다……적어도, 당사자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 ─ 상대방의 마나를 흐트러트리지. 인위적으로 마력을 폭주시켜. ─ 세상에. 파이몬이 그런 것처럼? 완전 사기네. ─ 뭐, 그 화냥년처럼 실력 있는 마법사나 검사라면 크게 영향을 주긴 힘들지만. 으으. 야, 시발놈아. 오늘 너무 지독했잖아. 아무리 나라도 네놈 오줌으로 몸을 씻기는 싫거든? 썅. 오줌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또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메모리아로 저장하기 이전에는 그런 짓도 했지. 자네가 성적으로 어디까지 관대한지 몰라서 말이야. 그 부분은 제외했네.” “…….” 아무래도 아티팩트에 담긴 것은 변태짓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모양이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단탈리안에게 전부 승복하지 않았으나 최소한 이쪽 방면으로는, 대공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 윗구멍은 그렇게 말하지만, 글쎄. ─ 닥쳐. ─ 알겠습니다요.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렇지만 독사대공이 보기에도 아기 고양이가 우는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바르바토스의 눈가에는 아직도 물기가 마르지 않았다. 남성의 가학심을 건드리는, 무언가 간드러지는 부분이 소녀에게 있었다. ─ 다른 마왕들도 사신의 낫처럼 사기스러운 물건을 갖고 있냐? ─ 흐응, 뭔가 착각하는데. 사신의 낫은 나랑 동떨어진 물건이 아니야. 내 능력이 물체화된 거지. 나에게 '영혼을 잘라버리는 능력'이 있으니까 사신의 낫도 소환되는 거야.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검은색 마나가 울렁거리더니 그곳에 전투 대낫이 나타났다. ─ 설명하기는 좀 거시기하지만. 뭐라고 하지, 끄응. 감각? 그런 게 있어. 너처럼 존나게 약한 놈과 다르게 나같이 존나게 잘나면 제6감 비스무리한 게 생기거든. ─ 존나게 약해서 죄송합니다. ─ 아무튼, 그 감각을 펼치는 거야. 더 이상 표현하긴 어려운데. 딴 놈들도 그럴걸. 잘나가는 마왕들한테는 그런 제6감이 저마다……. 영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대공은 왜 단탈리안이 잠자코 구경하라 말했는지 이해했다. 메모리아가 거짓일 가능성을 더더욱 낮춘 것이었다. 영상에 등장한 소녀는 익명의 인물일 수도 있다. 폴리모프 마법을 써서 바르바토스로 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방금 영상에 등장한 사신의 낫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깨졌다.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의 교섭 능력에 감탄했다. ‘철두철미하군.’ 모든 마법은 발동될 때 마법진이 그려진다. 무영창 마법도 똑같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소녀가 대낫을 불러들이는 순간에 마법진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환마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대낫이 출현했다……소녀가 진짜 마왕이라는 증거였다. 대공은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진품임을 확신했다. “이거 원. 팔불출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적이 부끄럽군.” “두 분 전하의 비밀스러운 광경을 훔쳐본 것 같아 황송하옵니다.” “훔쳐본 것 같은 게 아닐세. 훔쳐본 거지.” 단탈리안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입을 단속하는 게 좋을 거야. 본인이야 상관없지만 말이지, 자네가 이 메모리아와 관련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을 바르바토스가 알게 되면……과연 어떻게 될련지.” “…….” “자네가 잘 이해하리라 믿네.” 적나라한 협박이었다. 영상에 대해서는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무덤에 들어가게 될 테니까. 단탈리안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이옵니다.” 굳이 협박해오지 않아도 독사대공은 그럴 셈이었다. 당연했다. 도대체 이걸 누구한테 말하라는 말인가? 월맹군의 상위 마왕들이 죄다 동맹하여 호시탐탐 지옥을 노렸다. 그중에서 바르바토스는 유일하게 지옥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생명의 동아줄이었다. 메모리아의 광경을 흘리고 다니는 것은 독사대공 스스로 동아줄을 싹둑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제 단탈리안과 독사대공은 공범이 되었다. “좋네. 이만하면 본인이 자네에게 충분히 증거를 보여주었는가?” “이보다 더 확고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하게 보여주셨나이다. 전하, 감히 소인이 의구심을 품은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훌륭한 무도회를 열었으니 용서해주겠다고.” 단탈리안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대공은 황송해하며 두손으로 마왕의 오른손을 잡았다. 무도회가 끝났다. 마왕과 대공이 밀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상당수의 손님이 나가버린 뒤였다. 몇몇 영애들은 마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단탈리안이 나타나자 활짝 웃으면서 그를 반겼다. 마계는 인간계에 비하여 성(性)에 너그러웠다. 멋진 남성, 그것도 자신보다 신분이 고귀한 남성과 즐기는 것쯤이야 여자에게 흠집이 안 되었다. 영애들은 정말로 단탈리안을 마음에 들어했든, 아니면 모종의 목적이 있든 간에 그와 하룻밤을 보낼 속셈이었다. “미안하네.” 단탈리안이 깔끔하게 거절했다. “안타깝지만 오늘 본인의 파트너를 너무 홀대해서 말이다. 밤까지 그랬다가는 후일이 두렵군.” “파트너라면……저 서큐버스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한 영애가 눈쌀을 찌푸리며 뺨을 부풀렸다. 단탈리안이 데려온 라피스는 무도회장 구석에 홀로 서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두꺼운 책을 들었다. 자그마치 대공의 무도회에서 대놓고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등장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저런 여자의 눈치를 보다니 마왕 전하답지 않아요! 차라리 제가.” “영애.” 단탈리안이 말했다. 그의 눈빛이 단호했다. “본인의 파트너를 욕보이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 좌중이 싸늘해졌다. 방금 불만을 표시한 영애는 호족(虎族) 귀족의 딸이었다. 마계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에 속했다. 그런 영애보다 자신에게는 일개 하급 서큐버스가 중요하노라고, 단탈리안이 단언한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영애가 바로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독사대공은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아마도 저 아가씨는 아비한테 밀명을 받았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탈리안과 친해지라고.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었겠지. 영애는 아비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무도회가 시작하고 네 시간 동안 단탈리안에게 갖은 애교를 부렸다. 어쩌면 단탈리안의 초라한 겉모습에 실망했을 텐데 터럭만큼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단탈리안의 정치적 중요성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다소 무례할지라도 단탈리안에게 다가섰다. 훌륭했다. 대담했다. 마계의 귀족다운 현명함이었고 용기였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독사대공은 지금에 이르러서 확실히 깨달았다. 단탈리안은 호색한이 아니다. 단지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서 호색한인 척했을 따름이다. 안타깝게도 영애는 단탈리안의 연기에 놀아났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귀족 아가씨 전원이……. 그렇지만, 하고 독사대공이 의문을 품었다. 지나치게 면박을 주었다. 조금 더 좋게 말해서 거절할 수도 있었을 터. 어째서 거의 모욕을 주다시피 딱 잘라서 거절했는가? “…….” 그때 단탈리안이 독사대공한테 눈짓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 서큐버스를 존중하라는 의미였군.’ 다름 아니라 대공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앞으로 대공은 반년에 걸쳐서 이백만 골드를 단탈리안에게 보내야 한다. 그때 창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하급 서큐버스, 라피스 라줄리이다. 이제 독사대공은 단탈리안과 직접 만나지 않고 라피스와만 상대한다. 이에 단탈리안은 영애한테 면박을 줌으로써 말없이 경고했다. 신분이 미천하다고 해서 얕보지 마라. 나는 그녀를 더없이 신뢰한다. 그녀를 무시할 경우 내 분노를 사게 되리라. 이쯤 되자 독사대공은 아예 헛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이 자, 철저해도 너무 철저하지 않은가. 도대체가 틈새라는 것이 없다. 행동 하나와 말투 하나에 전부 정치적인 의도가 배어 있다. 단순히 승리를 거두려고 하지 않는다. 적당히 승리하려고 든다. 이쪽의 입장을 훤히 꿰뚫어보고 네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일일이 알려준다. 아까 전도 그러했다. 계속해서 상납금을 받는 대신에 딱 한번의 진상만 요구했다. 증거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증거를 사이에 두고 공범의 관계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단탈리안은 서큐버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서큐버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곧 단탈리안에게 잘 보이는 것과 똑같다.’ 이제부터 독사대공이 어찌해야 하는지 지시한 것이다. 아무리 공범 관계가 되었을지라도 면대면으로 만나는 일이 사라져서야 신뢰도 금세 식어버린다. 여기서 단탈리안은 서큐버스를 자신의 대리자로 내세웠다. 서큐버스에게 잘 대해라. 그러는 한 우리의 관계는 굳건할 것이다……. ‘이 정도로 계획적이어서야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겠군.’ 독사대공이 단탈리안을 배웅했다. 그는 단탈리안을 태운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제서야 대공은 안심하고 자신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대공은 한 영애가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단탈리안에게 모욕을 당한 바로 그 소녀였다. 대공은 흥미가 생겨서 영애한테 다가갔다.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독사대공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듯 잔뜩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 “아아. 예는 되었다. 그대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전하!” 영애가 다짜고짜 땅바닥에 엎드렸다. 아름다운 드레스에 흙이 묻는데도 상관치 않는 기색이었다. “소녀가 감히 죄를 저질렀다면 부디 이 목숨만을 거둬주시옵소서! 소녀가 못났을 뿐, 소녀의 아비와 가문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호오.” 대공은 흡족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만 가득한 줄 알았더니 귀족들 중에도 쓸 만한 가문이 있었다. 이런 딸을 키워낼 정도라면 아비도 틀림없이 유능하겠지. “걱정을 거두라. 영애를 칭찬하고자 함이니.” “예?”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예사로운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린 이가 내 수하에 있었다. 이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대공 전하…….” 영애가 감격했다. “저에게도 가문에게도 지고의 칭찬이옵니다. 소녀는 게른하이트 백작가의 둘째 딸입니다.” “호오. 게른하이트에게 둘째 딸이 있었는가. 언제 한번 나를 찾아오라 전하게나. 훌륭한 딸을 두었다는 말도 전하게.” 영애는 다시 한번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가며 예를 표했다. 독사대공은 만족해하며 처소로 돌아갔다. 그가 밤길을 거닐며 생각했다. 확실히, 단탈리안은 강대한 적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은 완패했다. 그렇다고 이 내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마계는 약하지 않았다. “얕보지 마라, 인가.”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얕볼 수 없다. ‘……게다가 아래쪽 물건도 상당히 우람했다.’ 독사대공은 메모리아 영상을 떠올렸다. 역시나 그 정도는 되어야 바르바토스 같은 마왕을 함락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로, 얕볼 수가 없다…….   00143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 * * 무도회에서 돌아가는 길. “크흐흐.” 나는 마차에 올라타고 줄곧 히히덕거렸다. 라피스가 맞은편에 앉아서 이쪽을 뚱하게 쳐다보았다. 드레스가 불편한 것일까. 라피스는 자꾸 가슴골의 옷섶을 만지작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이야아. 메모리아를 펼칠 때 그놈 얼굴이 말이야. 그때까지 점잖은 신사인 척 굴었으면서 확 표정이 깨지더라니까.” “…….” 라피스가 말없이 질색했다. 그러건 말건 나는 손가락으로 셈하는 데 열중했다. 어디 봐보자. 바르바토스가 대략 열다섯 명의 여자 마왕한테 '놀이'에 대해 까발렸다. 내가 지금까지 지옥의 대공을 열일곱 명 만났다. 그중 일곱 명한테 메모리아 영상을 풀었으니까……. “앞으로 딱 여덟 명한테 유출하면 되겠구나.” 내가 키득거렸다. 내 귀에도 웃음소리가 실로 사악하게 들렸다. 무얼. 마왕이란 대저 사악해야 마땅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만큼 성실하고 착실한 마왕이 없었다. 성실과 착실의 대명사, 가로되 단탈리안이라. 만인에게 칭송을 받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딱 받은 만큼만 돌려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지나치게 양심적이야.” “……예?” 라피스가 혼란에 빠졌다. “실례했습니다. 방금 양심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제가 알기로 단탈리안 님만큼 양심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들었어. 생각해봐! 얼마든지 받은 것보다 많이 돌려줄 수도 있거든. 하지만 나는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받은 그대로 상대방한테 돌려주지.” 감탄스러웠다. 나 자신의 공명정대함에 스스로 반해버릴 것만 같았다. “정의로운 집행자, 현명한 재판관, 신실한 파트너. 내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정도 칭호가 필요하겠지.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새로운 칭호를 개발해야 할 판국이야.” 나는 감탄하는 와중에도 약간 씁쓸했다. 마치 너무나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으나 미처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한 사람과 같이, 이윽고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여 쓸쓸해진 사람과 같이. 내가 착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겠지.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다. 몇 번이고 시도해보아도 도저히 전부 표현해낼 수가 없다. 도전과 진부함을 끊임없이 오가는 좌절……나 역시 사람들에게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함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비극이로군.” “…….” 라피스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혼돈과 빡침이 칵테일 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척 답답하다는 듯이 드레스 목깃을 펄럭였다. 내가 마차 창문에 손을 갖다대면서 물었다. “왜, 답답해? 창문 열까?” “창문으로 단탈리안 님이 뛰어내릴 것이라면, 예. 부디 열어주시길.” “아니. 그건 좀 싫은데.”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뭐라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둥, 언제부터 뻔뻔해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둥,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할 넋두리였다. 장난은 이쯤으로 해둘까. 내가 옷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거기에 ‘독사대공, 200만, 6개월’이라고 한글로 적었다. 종이에는 독사대공 이외에 원조를 약속한 대공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제 천만 골드를 약속받았다.” “……당초에 목표했던 금액이 달성되었군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라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라피스는 분위기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다. “앞으로도 대공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실 생각입니까?” “생각보다 잘 먹혀들고 있으니까.” 나는 순전히 거짓말로 대공들을 협박했다. 상위 마왕들이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인간계를 정벌하기에 앞서 마계를 손봐주기로 합의했다, 바르바토스가 이의를 제기했다……전부 거짓말이었다. 동맹이라니. 그런 것이 성사될 리 만무했다. 월맹군의 상태가 불가능한 가정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어째서 군단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가, 어째서 평원파는 산악파의 이반을 두루뭉실 넘어갔는가, 어째서……. 대공들에게 현재의 사태는 예상에서 벗어났다. 정보에 민감한 자일수록 무엇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왔는지 파악하고 싶어 안달복달하겠지. 그때 내가 그럴듯한 답안을 제시해주었다. 현재의 사태는 사실 너희 대공들을 없애버리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대공들이 유능해서 다행이었어.” “유능해서 다행이라니요? 상대측이 유능하면 곤란한 것 아닙니까?” “뭐,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달라. 대공들이 자기네의 유능함에 스스로 발이 걸려 넘어진 꼴이거든.”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이럴 때 유능한 사람은 사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마치 바둑과 비슷하다. 두 고수가 서로 맞붙는다고 해보자. 그때 상대편이 전혀 뜬금없는 한 수를 둔다.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가 모르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방심했다가는 언제 큰코 다칠지 모른다. 주의하자. “만약 대공들이 무능했더라면 어디 쳐들어올 테면 쳐들어와라, 하고 배짱을 부렸을 거야. 내 책략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대공들이 유능해서 다행이었다.” “유능함은 때때로 독이 된다.” 라피스가 약간 멍하게 혼잣말했다. 그녀는 평생 유능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말이 와닿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사람은 유능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더해서 자신을 믿어야 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다름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같은 자신만만함이 함께해야 한다. 상위 마왕들이 동맹해서 쳐들어온다고? 헛소리! 그렇게 일갈해버리는 면모가 이따금 필요하다. 내가 슬쩍 헛웃음을 지었다. ‘정작 나는 그런 인물이 절대로 못 되지만.’ 난 안타깝게도 대공들 쪽에 가깝다. 무엇이든 의심해버린다. 똑같은 부류이기에, 대공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예측해냈다. 내가 부릴 수 있는 묘기란 기껏해야 이 정도에 불과했다. 진정한 영웅이라는 수식어는 저 엘리자베트 황녀에게나 어울렸다. 그녀는 유능함과 대범함을 모두 갖추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재능이었다. 부럽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의심해버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따로 있다. 황제에게 단검을 쑤셔넣는 자는 언제나 가장 비천한 노예일지어니. “단탈리안 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지 물어봐. 내 속옷 색깔만 빼고 다 말해줄 수 있어.” “……단탈리안 님이 항상 속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뭐시라. “그, 그걸 어떻게.” “여태까지 단탈리안 님이 입은 옷을 누가 준비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걸친 옷. 망토. 바지에다 조끼까지 전부 제가 마련했습니다. 유독 속옷만은 주문하지 않으시더군요.” 라피스가 정말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물론 마왕이 선천적으로 신진대사를 적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아예 땀이 흐르지 않는 날도 수두룩하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 한 벌의 속옷도 주문하지…….” “죄송합니다. 질문을 해주세요.” 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냥 순순하게 질문을 받았으면 됐을 것을, 괜히 한번 놀리겠답시고 농담을 던졌더니 어마어마한 반격이 들어왔다. 독사대공한테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반격을, 라피스는 거의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낸 것이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여자인가. “단탈리안 님은 지금까지 열일곱 명의 대공을 만났습니다.” “음.” “하지만 그중에서 여섯 명에게만 원조금을 요구했지요. 저로서는 이유를 짐작하기 힘듭니다. 열일곱 명 전원에게 원조금을 요구하는 편이 단연 좋지 않습니까?” “안돼.” 내가 즉답했다. “라피스 네 말은 열일곱 명한테 백만, 이백만씩 뜯어내면 더 좋다는 얘기이지?” “네. 여섯 명한테 받았을 뿐인데 벌써 천만 골드를 모았습니다. 열일곱 명에게 받았다면 얼마나 많은 금액이 모였을지…….” “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대공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야.” “경각심……?” “그래. 대공들은 바보가 아니야. 자그마치 백만에서 이백만 골드이다. 그만한 거금을 나한테 내야 하는데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을 리 없지.” 대공들은 정보력을 총동원할 것이다. 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더 확실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주변의 다른 대공들을 탐색하겠지. 그리고 깨닫는다. 단탈리안에게 원조금을 바친 자가 있는가 하면――아예 원조금을 내놓으라는 말조차 듣지 못한 대공들도 있다는 사실을. “무슨 뜻인지 알겠어?” “죄송합니다.” 이런, 라피스는 역시나 맹한 구석이 있었다. 재정적인 부분에서 지극히 유능하면서 본격적인 권력 놀이에는 약했다. 약간 힌트를 줘볼까. “대공들에게 원조금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봐. 녀석들은 분명히 이렇게 여기고 있을 거야. 나는 거금을 투자하여 나의 '안전'을 사들였다고.” “……!” 라피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마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설마, 골라내기가 있었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마왕들은 모든 대공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수의 대공에게만 충성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충성을 요구받지 않은 대공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어떤 대공에겐 돈을 받고, 어떤 대공에겐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을까…….”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원조금을 약속한 대공들이 어떻게 판단할지 상상이 가?” “본보기……입니까.” 라피스가 숨을 간신히 토해내듯 말했다. 정답이었다. “마왕들은 결코 마계 정벌을 완전히 단념한 게 아니다. 그저 충신과 간신을 가려냈을 뿐이다. 단탈리안은 원조금을 거둬들이러 파견된 세금징수원이 아니다. 그 진짜 모습은, 어떤 대공을 죽이고 어떤 대공을 살릴지 골라내는 사신……. 대공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리고 공포에 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숙청의 칼날에서 빗겨났다는 사실에. “그걸 깨달은 순간에는 모르긴 몰라도 목덜미가 좀 서늘할걸.” 내가 작게 웃었다. 광경을 상상하니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위해서 좀 수고했지.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놓고 적대적인 대공들은 일부러 제외했어. 그냥 적당히 협박만 들려주고 밀담을 끝냈거든. 마왕에 온순한 무리한테만 원조금을 뜯었다.” “혹시, 지난 한 달 동안 세작을 고용해서 마계의 정보를 끌어모은 것도.” “대공들의 평소 태도를 알아보는 게 목적이었지.” 그 결과 겨우 아홉 명의 대공만이 마왕을 비교적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머지 대공들은 죄다 마왕에 비협조적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월맹군 원정에 비협조적이었다. 그중 몇몇은 아예 하위 마왕들한테 금전적인 원조를 해주고 있었다. 산악파 마왕들이 기세등등한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적나라해서야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뭐, 내 목적은 이것뿐만이 아니야. 다른 대공들도 곧이어서――.” 그때였다. 전방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진동이 전해지더니 마차가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마차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라피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덮쳤다. “단탈리안 님. 고개를 숙이십시오.” 내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라피스는 나의 얼굴을 최대한 자기 품에 감싼 뒤, 일부러 마차 바닥에 뒹굴었다. 그 직후에 또 한번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바로 마차 근처에서 터진 것이었다. 나는 라피스의 몸에 덮힌 채로 직감했다. ‘테러다!’   00144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오늘 후기를 확인해주세요^^ ==============================================   마차가 고꾸라졌다. 라피스와 내가 짐짝처럼 튕겼다. 마차의 벽 너머에서 마부가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은 빠르게 멀어졌는데 아마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날아간 모양이었다. ─ 끼이이익! 마차가 옆으로 드러누워 길바닥을 긁었다. 몸이 뒤집히면서 마차벽에 부닥쳤다. 라피스가 안아준 덕택일까. 나는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라피스의 얇은 등은 고스란히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짧게 비명을 토해냈다. “라피스!” 젠장! 얼른 몸을 일으켜서 그녀를 안았다. 혹시 크게 다친 것은 아니겠지.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눈빛만큼은 뚜렷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그렇게 말했다. 놀랍도록 차가운 시선. 가슴이 순식간에 진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마차에서 벗어나야 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적은 마차를 노리고 있었다. 나는 발로 마차의 바닥문을 차서 열어재꼈다. 라피스가 내게 몸을 기댄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탈리안 님, 먼저…….” “닥쳐.” 먼저라니! 들으나 마나 나 먼저 빠져나가라는 얘기였다.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었다. 라피스가 내게 부축된 채 뭐라 계속 지껄였다. 들리지 않았다. 논외였다. 그딴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니 차라리 다른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서둘러 마차에서 벗어나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밥값을 해라, 덩치 큰 멍청이들아!’ 죽음의 기사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녀석들은 평소엔 영체(靈體)가 되어 내 그림자에 머물렀다. 내가 외치자마자 그림자에서 꼭 검은 점액질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곧바로 그림자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열 마리의 흑기사들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었다. ─ 곤란한 모양이군, 임시 주인. 죽음의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나의 <마왕> 직업레벨이 E급에서 D급으로 올라간 이후, 죽음의 기사들은 더 이상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이따금 말을 걸어오곤 했다. 하나같이 건방진 어조였지만. “습격이다. 나와 라피스를 지켜라.” 지금은 위급상황이었다. 말투를 지적할 틈이 없었다. 죽음의 기사가 뒤집어쓴 검은색 투구 너머로 비웃음이 들려왔다. ─ 바르바토스 주군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단지 임시 주인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비천한 서큐버스 따위를 수호하고 싶지는 않군. 우리를 용병으로 취급하지 마라. “명심해라, 멧돼지 새끼들아. 네놈들의 썩어빠진 머리통에도 구멍이 뚫려 있으면 알아쳐먹어라. 만약 라피스가 죽으면 나는 곧바로 자살할 거야. 멧돼지 새끼들아, 알겠어? 내 명령에 토를 달지 마. 나와 라피스를 지켜.” 흑기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녀석은 더 이상 군말을 씨불이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저편에서 화염구들이 날아왔다. 습격자들이 쏘아낸 것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대검을 꺼내들어 화염구를 일도양단했다. “죽음의 기사들이다!” “거리를 벌려라! 가까이 접근하게 내버려두지 마!” 멀리서 호통소리가 오갔다. 마차는 마침 인적이 적은 황무지를 지나치고 있었다. 일부러 노린 것이겠지. 습격자들은 죄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썼는데, 어림잡아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끊임없이 소리쳤다. 적어도 서른 명은 되어보였다. 죽음의 기사가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 어둠의 엘프인가. 마법의 일족이지. 짜증나는 놈들이다. 죽음의 기사는 물리공격에 강력하다. 마법공격에는 내성이 붙지 않는다. 제기랄. 이것까지 노린 것은 아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라피스를 눕혔다. 라피스는 자꾸 미약하게 신음을 뱉었는데 아마 어디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녀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습격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씹어죽일 새끼들! 내가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들었다. 마족 전용 포션이었다. 마개를 열어서――좀처럼 열리지 않아서 짜증났다――와인빛 포션을 천천히 라피스의 입에 흘려넣었다. 라피스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 걱정하지 마시길. 눈길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분노가 더 거칠어졌다. 어떤 쳐죽일 새끼가 라피스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와 생사를 함께한 동료를, 감히. 죽음의 기사가 얼마나 피해를 입든지 상관없었다. 우리를 습격한 저놈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겠다. 배를 갈라서 내장을 한땀씩 꿰어버리겠다. “기사들. 돌파할 수 있겠나?” ─ 우둔하기는. 돌파는 답이 아니다. 놈들에게 원군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이 지역을 벗어나는 편이 낫다. 벗어난다. 다시 말해 도망치라는 뜻이다. 도망친다. 라피스를 다치게 만든 새끼들을 눈앞에 두고.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가……. 입을 열어 후퇴를 지시하려는 때였다. 우리 마차가 지나온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숫자는 약 마흔! 다가오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설마 적의 원군인가. 심장이 덜컹했다. 옆에서 죽음의 기사가 말했다. ─ 우리가 목적이 아니다. “뭐?” ─ 임시 주인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군. 아쉽게도, 앞으로 당분간은 임시 주인을 따라야 하는 듯하다. 흑기사가 한 말 그대로였다. 새롭게 출현한 무리는 마차를 지나치더니 곧바로 습격자들이 위치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죽음의 기사들도 거기에 합류했다.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당장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군이 적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원군이라니. 어디에서 원군이 솟아났는가. 나는 의구심과 불안함에 시달리며 잠자코 전투를 지켜보았다……. 소요는 금방 진정되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마흔 명의 원군, 거기에 죽음의 기사 열 마리가 더해지자 어둠의 엘프들은 별다른 저항을 못해보고 쓰러졌다. ─ 상당히 정예로 훈련받은 암살자들이다. 죽음의 기사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은 오른손에 엘프의 머리를 쥐고 있었다. 목 아래가 싹둑 잘라진 머리를. 고통과 경악으로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자, 화가 가라앉기는커녕 더 타올랐다. 고통과 경악만으로는 부족했다. 놈들에게는 세계에서 제일 참혹한 죽음을 선사해야만 했다. ─ 포로로 잡았는데 자살해버리더군. 무영창 마법으로 자살한 것이다. 가슴을 째보니 심장이 박살나 있었다. 심장에다 마법을 설치했다는 소리인데, 흥. 이 정도로 악랄한 수법을 써대는 암살자 집단은 그리 많지 않지. “어떤 놈들인지 짐작이 가는가.” 입에서 무척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흑기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암살자 집단이 어디인지는. 하지만 의뢰주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다. 임시 주인이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은 의뢰주 아닌가. 하긴, 암살자 집단이든 의뢰주이든 임시 주인에게는 버겁겠지. 복수할 힘조차 없으니. “상관없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 왼손을 갖다대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거기에 호신용 단검이 꼽혀 있었다. 그것을 꺼내들었다. 흑기사가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임시 주인? 대체 무슨 짓을――. 단검으로 내 왼손을 찍었다. 정확하게는 검지 손가락을. 목구멍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튀어나갔다. 끔찍한 격통이 온몸의 신경을 달구었다. 내가 이빨을 악 물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단검을 찍어내렸다. 이번에는 중지의 뼈가 박살나며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비명. “후우, 흐으읍……! 후우우…….” 눈물이 흘렀다. 마치 눈가에서 용암이 터진 것 같았다. 나는 아득한 고통에서 겨우 숨소리를 유지했다. 격통을 억지로 쑤셔넣은 숨소리였다. 고개를 들었다. 옷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았다. ─ ……. 전투의 흥분은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죽음의 기사들, 그리고 누군지 모를 원군들이 멍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씹었다. “건방진 새끼야. 지금 당장 텔레포트를 타고 바르바토스한테 가서 전해. 단탈리안이 암살자 집단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그 와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손가락도 두 개나 잃었다고.” ─ 서, 설마……그걸 위해 일부러 자해를. “닥쳐. 내 말을 끝까지 들어.” 흑기사가 침묵했다. 나는 왼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의뢰주는 아직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지만 지옥의 대공 중 한 명으로 예상된다고 말해. 바르바토스가 네놈에게 군사를 떼어줄 거다. 암살자 집단을 진짜 지옥에 빠트리라면서. 그 군세를 이끌고 나한테 와라. 최대한 빨리. 알겠냐?” 나는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좀처럼 원하는 물건을 잡지 못했다. 겨우 내가 바라는 물건, 텔레포트 두루마리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흑기사한테 던졌다. 그리고 여전히 떨리는 오른손으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손가락, 나의 왼손 검지와 중지를 녀석한테 집어던졌다. “바르바토스한테 꼭 보여줘라.” ─ ……. 흑기사가 허리를 굽혀 두루마리와 손가락을 집었다. 녀석은 어딘지 멍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눈을 부릅 떴다. “씨발 새끼야. 두개골에 구멍 하나 더 뚫어줘야 말을 알아처먹을 거냐?” ─ ……분부대로. 죽음의 기사가 허리를 숙였다. 그는 두루마리를 펼쳐서 시동(始動)어구를 속삭였다. 검은색 마법진이 나타나서 죽음의 기사를 뒤덮었다. 곧, 녀석이 사라졌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내가 원군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너희는 누구냐?” “존안을 처음 뵙나이다, 단탈리안 전하.” 무리에서 한 명이 걸어나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머리에 회색 로브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나에게 지극히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저희는 니블헤임에 터를 잡고 운영하는 암살 길드입니다. 의뢰주에게 명을 받아 일곱 개월 전부터 단탈리안 전하를 몰래 호위하고 있었나이다.” “일곱 개월?” 젠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일곱 개월 전이라면 아직 내가 월맹군에 몸을 담고 있을 때였다. 누가 의뢰했기에 그때부터 나를 호위했다는 말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행히 마왕의 변태적인 생명력 덕택인지 출혈은 금세 멎었다. 여기서 대화를 조금 나눈다고 해서 출혈과다로 죽을 일은 없었다. “의뢰주가 누구야. 바르바토스냐?” “본래 의뢰주를 밝히는 것은 금기에 해당하나 이번엔 특별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의뢰주 본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닥칠 경우, 단탈리안 전하께 자신의 이름을 알리라고 요구했으니까요.” 여인이 로브를 벗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외모가 아름다웠으나 얼굴의 반쪽에 화상이 심하였다.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당장 왼손의 고통에 휩싸인 나로서는 상대방 얼굴이 불에 구워졌든 기름에 튀겨졌든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덤덤하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인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소인의 얼굴에 놀라시지 않는군요.” “관심없다. 의뢰주가 누구인지나 어서 고하라.” “……바르바토스 전하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앙숙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분이 저희 길드에 의뢰를 넣었습니다.” 암살자 여인이 고개를 한껏 숙이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의 앙숙이라고?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시트리냐?” “시트리 전하도 아닙니다. 단탈리안 전하. 저희는 다름 아니라 파이몬 전하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파이몬!” 내가 경악했다. 파이몬. 그 창녀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가!   ============================ 작품 후기 ============================   <던전 디펜스>가 종이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시중에 1권, 2권이 배본되었습니다. 모두 독자 여러분께서 응원해주신 덕분입니다^^ <던전 디펜스> 종이책은 인터넷 연재본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문장을 조금 더 말끔하게 다듬었고, 연재본에 등장하지 않은 조연이 등장했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출판될 3권, 4권에서는 인터넷 연재본에서 다소 루즈했던 부분을 깔끔하게 다잡을 예정입니다. <던전 디펜스>는 대여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제 글이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다면 저에게 그보다 기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종이책 출판과 상관없이 인터넷 연재는 계속됩니다! 궁금하신 점은 언제든지 쪽지로 물어주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00145 매국노 =========================================================================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근방의 폐허에서 노숙했다.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불빛이 옛 성터를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림자들이 울퉁불퉁하고 낡은 성벽을 따라 조용히 살랑거렸다. 이미 예전에 끝장나버린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만이 홀로 남아 다시는 펼쳐질 일 없는 대본을 연습하듯이. “의뢰주……파이몬 님은, 단탈리안 전하에게 무척 관심을 쏟고 있어요.” 그중 한 개의 그림자가 검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말이지요.”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 거냐.” “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일 년. 발푸르기스의 밤, 청문회가 열린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산악파의 수장 파이몬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저희는 단탈리안 전하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습니다. 노예시장에서 인간 한 명을 탈취하셨다는 것도, 대상인의 적자를 살해하셨다는 것도……혹시 담배를 싫어하시나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송구합니다.” 하늘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파이프 안에 담뱃잎을 꾸겨 넣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의외였어요. 저희는 마계에서도 꽤나 이름값이 높은 집단입니다. 한 달 정도 고용하는 것도 아니고 장기계약을 맺은 거예요. 고작 서열 제71위의 마왕을 뒷조사하라는 게 의뢰내용……불경기에 일이 들어와서 저희야 좋았지만요.” 여인이 해맑게 웃었다. 나에겐 여인의 웃음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나는 마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그녀는 지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얼굴 반쪽이 극심하게 화상을 입은 여인은, 나머지 반쪽의 얼굴조차 가면에 불과했다. “재미없어서 실망했겠군.” “예에. 반년 전까지는요.” 여인이 담배연기를 후우, 하고 불었다. “반년 전부터 쿤쿠스카 상회가 '이쪽' 업계에 발을 들여놓더군요. 어찌나 조심스럽고 영악한지. 저희도 단탈리안 님을 시종일관 조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저희는 곧 의뢰주, 파이몬 님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요.” 여인이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단탈리안 전하는 그때부터 약 다섯 개월 동안 틀림없이 천하의 중심이었습니다.” “…….” “도대체 세계에서 몇 명이나 알았을까요? 마계와 인간계에 제각기 다른 소문을 퍼트리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인간군을 출병시키고.” 그녀는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인간군의 출병을 또다시 왜곡하여 이번에는 월맹군을 부추기고. 그 모든 사건의 뒤에 일개 서열 제71위의 마왕이 있었음을, 과연 몇 명이나 알겠습니까? 장담하지요. 단 열 명도 몰랐습니다. 인간계와 마계. 모든 세계를 통틀어서 단 열 명. 저희는, 그 열 명 안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여인이 웃었다. “정말. 암살자로 태어나서 삶에 보람을 느낄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이에요. 파이몬 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몇백 년을 더 살아도 지난 반년처럼 흥분에 가득한 나날을 보낼 날은 다시 찾아오지 않겠지요.……단탈리안 전하, 알고 계십니까? 소인은 드디어 단탈리안 전하와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무척 흥분하고 있습니다.” 내가 물병을 꺼내 한모금 마셨다. “그런 것치고는 별다른 감정이 안 느껴지는군.” “소인, 태어나서 지금까지 감정이라는 걸 죽여보기만 했어서.” 여인이 또 웃었다. 웃음이 헤픈 여자였다. “사막에 사는 사람과 호숫가에 사는 사람. 둘에게 물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극히 적은 감정이라도 너에게는 크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인가.” “송구합니다.” 확실히. 마왕을 기습하려면 그녀처럼 감정이 희박해야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방식으로 암살자를 키워내는 걸까. 내가 넌지시 물어보자 그녀는 담배를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꼭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내는 것처럼. “일단 마왕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예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어떤 한 사람에게 종속되면, 설령 마인일지라도 마왕에게 적대할 수 있지요.” “그래서야 자유가 없어지지 않는가?” “글쎄요. 어릴 때는 자유보다 빵 한 덩어리가 더 급했으니까요.” 대충 여인의 신세가 짐작되었다. 인간계든 마계든 굶주린 이는 넘쳐났다. 그중에는 당장 한끼 식사가 없어 아사하는 고아도 많았다. 아마도 암살자 집단의 수장, 혹은 암살자 길드에서는 그런 고아들을 모으겠지. 고아들은 노예계약에 동의했다. 아니, 동의할 수밖에 없는 고아들만을 모집했다……. “노예각인을 파괴할 수는 없나.” “아, 조금 곤란해요. 심장에 새겨져 있어서요. 수술할 때 일부러 그렇게 합니다.” “심장에?” 그러고보니 죽음의 기사도 심장을 운운했다. “어떻게 심장에다 마법각인을 새기지?” “어릴 때 말이죠, 일종의 입단(入團) 의식인데. 치료 마법진을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가슴을 갈라요. 포션을 쏟아부으면서 살을 째고 심장에다……뭐, 이것저것.” “으음.” 내가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치료마법과 포션으로 산송장을 살려둔 채 심장을 만지작거린다는 얘기 아닌가. 말이 수술이지 고문이었다. 여인도 내 심정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험한 시대로군.” “예에, 정말로.” 그녀가 미소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험한 시대. 그 단어가 가진 무게를 곱씹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파이몬 님의 의중이 바뀐 것은 얼마 안 됐습니다. 브루노 평원에서 월맹군과 인간군이 일전을 치른 직후, 파이몬 님은 갑자기 의뢰를 바꾸었습니다. 단탈리안 님을 철저하게 엄호하라고요.” “왜지?” “의뢰주는 단탈리안 전하의 호의를 얻고 싶어했습니다.” 호의. 월맹군 때도 그러했다. 설전에서 위기에 처하자 파이몬은 나를 도와주었다. 그 대가로 수천 년 동안 모아온 마력을 상실하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즉, 파이몬에게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도와주고자 한다. 어째서인가. “의뢰주는 자신을 공화주의자라 칭했습니다.” “뭐?” “그렇게 말씀드리면 알아들을 거라고, 의뢰주가 말하더군요.” 공화주의자라니, 파이몬이? 망치가 머리를 후갈긴 기분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단어를 들었다. 단순한 변태녀. 그것이 파이몬 아니었는가. <던전 어택>에서 파이몬은 주인공 용사에게 반한다. 그래서 끈질기게 용사한테 달라붙는다. 대쉬 방법이 남달라서, 용사 일행한테 끊임없이 몬스터 군단을 보내지만. 시나리오에서 마왕군과 인간군이 서로 종족 말살 전쟁을 감행할 때도 파이몬만은 인간을 학살하지 않는다. 인간을 죽이면 자기가 즐길 거리가 사라진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변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공화주의자라니?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단순한 인간성애자,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고? “……이해할 수 없다.” “의뢰주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알고 싶었다고. 왜 어떤 자는 지배하고, 어떤 자는 지배당하는가. 어디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는가……그걸 알고 싶었다고.” 불평등. 부조리. 불합리. 태어날 때부터 지배하는 자가 정해지고, 지배당하는 자가 정해지는 시대.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어떤 원인이 거기 숨어 있다고 생각하며, 원인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혁명의 조용한 맹아였다. 내가 물었다. “설마, 마인들에게 공화주의란 친숙한 사상인가?” “아니요. 전혀 모르지요.” 여인이 웃었다. “소인도 파이몬 님에게 의뢰를 받기 전에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인간계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요. 파이몬 님의 의뢰 때문에 조사하기 시작했지요.” “……공화주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잡아서 죽이기 딱 좋아보이는걸요.” 그렇겠지. “하지만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구든,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칠 정도로.” 여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웃고 있는 입과 다르게 눈초리가 무심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부르노 평원에서 울부짖은 연설이 여기저기서 돌아다니는 것, 알고 계십니까?” “아니.” 전혀 몰랐다. “아직은 인간계와 마계의 일부에만 조심스레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응이 열광적입니다. 연설문은 금세 수백의 도시, 수천의 마을로 퍼지겠지요. 단탈리안 전하. 소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여인이 담뱃대를 아래로 늘어트렸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단지 인간계의 불평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하. 소인은 어릴 때부터. 빵 한 조각, 마나 한 줄기를 얻지 못한 그 시절부터 쭉 궁금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슴을 열어재끼고 심장을 드러내놓았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왜 저는 가난하게 태어났지요?” “…….” “소인이 게을렀다면 이해할 수 있어요. 소인이 무언가를 잘못했더라면, 그래요.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힘들게 사는 거다. 대가를 치르는 거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소인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난했습니다. 무엇을 잘못한 것이지요? 태어난 것 그 자체가 잘못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하고 여인이 말했다. “왜 어떤 이는 저토록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인지요.” “…….” “누군가에게 삶은 처음부터 축복이고, 누군가에게 삶은 처음부터 저주입니다. 소인은 정말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왜 저는 그중 후자에 속했을까요? 전생(前生)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 그래서 이렇게 살아가는 건가요.” 여인에게서 처음으로 감정다운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점액질처럼 끈적한 증오였다. “소인은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거짓말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이 진실일 리 없습니다. 진실이어서는 안 됩니다.……설령 세계가 그런 것을 용납하더라도, 소인만큼은 그걸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소인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것은 세계입니다.” “…….” “파이몬 님은 말했습니다. 전하께서 자신과 동류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저 역시 의뢰주와 똑같은 소망을 안고 있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부르노 평원에서 자유를 울부짖은 것인가요? 저희……하급 마족으로 태어나, 세상의 쓰레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저희는……단탈리안 전하를 진정한 왕으로 받들여도 되는 것인지요?” 여인이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 예, 라고 말하면 아마도 나는 그녀를 통해서 파이몬과 만날 수 있겠지.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그대로 물러날 것이다. 나는 침묵했다. 생각에 빠졌다. 여인의 삶이 어떠했는가. 그것은 나에게 적잖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마왕은 마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녀가 얼마나 삶을 증오하고 얼마나 비탄에 빠졌는지, 곧이곧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다. 하급 마족을 끌어들이는 데서 오는 이득. 손해. 평원파인 내가 산악파인 파이몬과 밀담을 나눌 경우 생겨나는 이득과 손해. 그 모든 것을 고려해야만 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글쎄, 모르겠군.”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예?” “왜 굳이 그걸 그대한테 말해야 하는가. 내 생각이 어떠한지 그대에게 말해야만 하는가? 좋다. 내가 그대와 똑같이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그대가 나에게 충성을 바친다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마계의 모든 하급 마족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인이 당황했다. “하지만…….” “불행한가. 삶이 어려웠는가. 그래서 자기가 마계의 모든 하급 마족을 대신한다고, 그들의 불행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내가 미소 지었다. “건방 떨지 마라. 그대는 누군가를 대신할 수 없다. 그대가 설령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다고 해서 그 불행이 남을 대신하는 신분증명표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암살자, 네 불행은 네가 처리하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앞을 지옥의 대공이 가로막고 있다면 대공을 죽여라. 마왕이 가로막고 있다면 마왕을 죽여라. 국가 자체가, 대륙 자체가 가로막고 있다면 국가를 죽이고 대륙을 죽여라.” 그 와중에 나와 연합할 수 있다면 연합하는 것이고, 갈라서야 한다면 갈라서는 것이겠지. 어차피 영원한 아군이란 없다. 영원한 충성이란 것도 없다. 나에게 영원히 공명정대한 왕이 되어주기를 요청해봤자, 이쪽 입장에서는 곤란할 따름이다. 나는 그저 때에 따라 나에게 좋은 선택을 할 뿐이니까. “파이몬에게 전해.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감정 말고 거래품목을 가져오라고.” “단탈리안 전하.” “피곤하군. 자겠다.” 나는 마차에 들어갔다. 뒤에서 여인이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정말로 피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만 봐도 독사대공과 신경전을 겨루었고, 습격을 받았고, 게다가 파이몬이 공화주의자라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들었다. 피곤하지 않으면 이상했다. 두뇌에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마차 안에서는 라피스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는 마닥에 대충 모포를 깔고 누웠다. ‘파이몬이 공화주의자……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무엇이…….’ 그나저나 여인에게 너무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더 수사학을 섞는 편이 좋았을까. 그쪽이 더 현명했을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저렇게 솔직하게 나오는 부류의 사람한테 약했다. 정말 거추장스러운 성격이다……. 피곤했는지 곧바로 잠이 들었다.   00146 매국노 =========================================================================                        * * * 눈앞에 파이몬이 있었다. 아래를 살펴보자, 나는 신발을 신었다. 그것만으로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찌된 일인가. 나의 머리가 재빠르게 해답을 찾아냈다. - 서큐버스 퀸. 파이몬의 종족이다. 그녀는 마인으로 태어나서 마왕으로 각성한 부류에 속한다. 서큐버스는 인간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한다. 그 능력은 파이몬이 마왕이 된 이후로도 이어지고 있다. 게임에서도 용사가 몇 번 파이몬과 꿈속에서 대화했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 녀석, 암살자 집단에 숨어들어 있었군.’ 서큐버스의 능력이 만능은 아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의 꿈까지 다룰 수는 없다. 근처에 있어야만 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파이몬은 암살자 집단에 몰래 섞여 있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놈들 중에 그녀가 있었겠지. 그리고 평범한 암살자인 척 가장해서 나를 지켜보았다. 하늘색 여인과 내가 나눈 대화도 전부 들었으리라. 제기랄. 나의 실착이었다. ‘감정이 극도로 적은 암살자들 사이에 끼어서 자신을 숨겼어.’ 마왕은 마왕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 암살자들이 평범한 몬스터, 가령 오크였다면 나는 금세 파이몬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른 몬스터와 다르게 유독 한 녀석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상하다고 여겼을 테지. 암살자들은 감정이 매우 무미건조했다. 나뭇잎을 수풀에 숨긴 격이었다. 제법이다, 파이몬……. 나는 얼굴에 예의 바른 미소를 띄우면서 얼굴을 까닥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파이몬 전하.” “역시, 당황하지 않는군요.” 파이몬이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소곳하게 웃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놀라는 얼굴을 한번쯤 눈앞에서 보고 싶었어요.” “충분히 놀라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에 벌써 수십 차례 놀라버려서 말입니다. 더 이상 호들갑을 떨 여력이 없습니다.” 그녀가 드레스 끝자락을 들어올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요. 단탈리안.” “예. 이런 식으로 재회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리 둘 사이에 탁자가 나타났다. 하얀 탁자보가 깔렸고 도자기 다기(茶器)가 놓였다. 다가가서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요, 하고 파이몬이 의자에 앉았다. “꿈이란 놀랍군요.” 내가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엇이든 가능합니까? 예컨대 드래곤을 소환한다든지.” “소녀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만 재현할 수 있사와요.” 파이몬이 도자기 주전자를 잡아 잔에 찻물을 따랐다. 녹차였다. 잔에 천천히 찻물이 고여가는 동안 주변 풍경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황금빛 비늘의 드래곤이 탁자 바로 근방에 나타나서, 꼭 졸린 강아지처럼 땅에 턱을 박고 잠들었다. “대단하군요!” 내가 감탄했다. 진심을 다해 놀란 것이 아니었다. 왜 파이몬이 꿈속에 침입했는가, 나는 그것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파이몬에게 이리저리 말을 건 까닭은 생각할 틈을 벌기 위해서였다. - 하늘색 여인은 내 속마음이 어떠한지 떠보았다. - 십중팔구, 파이몬이 여인에게 그러하라고 지시했다. - 나는 거기에 대뜸 걸려버렸다. 만약 내가 진짜 공화주의자였다면 여인의 말을 반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파이몬 입장에서는 내가 정말로 공화주의자인가, 혹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상을 이용한 것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 법했다. “서큐버스가 밤의 종족이라 불리는 이유가 다 있었군요. 제 부하도 서큐버스입니다만, 이런 재주를 보여준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서큐버스의 피를 강하게 타고나지 않았을 거예요. 반드시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순혈 서큐버스만이 꿈을 거닐지요.” 그런데도 나에게 접촉해왔다. 사상적 동지가 아니라며 실망하고 떠났을 수 있었는데, 굳이 꿈속에 들어와서 나와 얘기하고 있었다. 단순히 내가 자신과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만 의도하지 않았다……목적이 무엇인가. 그걸 알아내야만 했다.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사와요, 순혈이 아니라는 것은.” “호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가정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무슨 뜻일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파이몬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보다시피 서큐버스는 아주 많은 것을 꿈속에서 만들어요. 남자들은 거기에 매력을 느끼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서큐버스와 짝을 짓게 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거기에 빠진답니다.” 풍경이 바뀌었다. 드래곤이 사라지고 주변을 수십 명의 미인이 채웠다. 하렘의 광경이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 하나만 걸치고 여인들이 농염한 살색을 드러냈다. “결국 남성은 현실을 등지게 되지요. 완전무결한 꿈과 비루한 현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명약관화……아내도 무시하고, 아들딸도 무시합니다. 꿈속에는 현실의 아내보다 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현실의 자식보다 완벽한 자식이 있는걸요. 그래서 대다수의 서큐버스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지 않사와요.” 어차피 배신당하니까요. 파이몬이 찻잔을 내 쪽으로 놓았다. 나는 공손하게 잔을 들여올렸다. 녹차의 맛은 훌륭했다. 적당히 씁쓰름하고 따뜻했으며, 혀에 묻은 때를 말끔하게 벗겨주었다. “소녀는 오래 전에 생각했사와요.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있다. 가장 맛있는 음식도 있다. 그럼 어쩌면――가장 완벽한 사회를 꿈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완벽한 사회라.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설마요.” 파이몬이 웃었다. “불가능하겠지요. 적어도 그때는 불가능했고, 지금도 여전히 불가능해요. 하지만 소녀는 서큐버스. 한밤의 꿈을 사람들에게 파종하는 종족. 소녀 자신에게 하나의 꿈을 허락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는 일은 아니라고 믿었어요. 단탈리안. 소녀도 삶을 계속하기 위해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꿈이 필요했답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래요. 이천 년 전이지요. 마왕이 다스리는 세계야말로 가장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사와요.” 또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 우리는 병사들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탁자 주위를 오크, 오우거, 트롤이 쉴 새 없이 지나쳤다. 수만 마리의 대군. 그들은 대열을 이루었고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을 맨 앞에서 이끄는 자 세 명이 있었다. 소녀와 여인, 초로의 남성이. ─ 군대여! 마인이여! 그대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중 백발의 소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은빛 투구와 갑옷을 입었다. 햇빛이 그녀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파이몬이 그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예요. 지금이랑 별로 다르지 않죠?” “저때는 갑옷을 입고 있었군요.” “저 당시 바르바토스는 흑마녀가 아니라 무사였으니까요.” 그렇다면 소녀의 양옆에 선 여인과 남자는 각각 파이몬과 마르바스일까. 지금은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로 갈라진 세 사람이 이천 년 전에는 같은 곳에서 군대를 지휘했는가. 바르바토스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외쳤다. ─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는 정복의 귀신이다. 그러나 승리를 이용해먹지 못하는 멍청이 새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군인이여. 사탄의 위대한 후손들이여. 다시 무기를 들어라. 안락한 휴식 따위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 우리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잃어버릴 수 없다. 나약한 인간은, 겁쟁이 마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충분히 싸웠다. 이제 쉬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종족과 신분을 뛰어넘어 오직 진정한 전우애로 하나가 된 우리는, 입을 모아 소리친다. ─ 더 많은 전투를! 더 많은 피를! ─ 영원한 영광이 아니라면 차라리 영원한 죽음을! 몬스터들이 함성을 지른다. 제멋대로 뿔나팔을 불어재낀다. 북이 울린다. 발을 구른다. 대지가 진동하고, 멀리 평원 너머에서 인간들이 그 진동을 느끼며 공포에 질린다. 월맹군 제1군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회전에서 패배해본 적이 없는 군단이다. 불멸의 바르바토스와 승리의 파이몬 그리고 고귀의 마르바스――세 마왕이 이끄는 정예군단에 인간들은, 심지어 기사조차, 심장이 질겁하고 무릎이 떨린다. ─ 내가 약속한다. 우리가 약속한다. 그대들과 함께하는 마왕은 결코 뒤에 숨지 않으리라. 우리는 겁쟁이와 다르다. 우리는 전사이며, 따라서 전사인 그대들과 함께 살며 함께 죽는다. ─ 우리는 최전선에 있다! ─ 그대들이 기사의 오러에 쓰러져서 절망하며 고개를 올려 들었을 때, 그곳에 우리가 서 있으리라. 그대들이 무릎을 땅에 처박고 도저히 어찌할 도리 없는 무력함에 시달릴 때, 그대보다 바로 한 걸음 앞에 우리가 서 있으리라. ─ 전사들이여! 우리는 최전선에 있다!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치켜든다. 검은색 마력이 요동치며 그녀의 손에 전투 대낫이 소환된다. 마력은 그대로 공중으로 용오름치며 울부짖는다. 그와 동시에 여인과 남자, 파이몬과 마르바스도 손을 들어올린다. 파이몬의 손에는 백색 지팡이가. 마르바스의 손에는 장검이. ─ 인간들에게 보여주라! 누가 이 대지의 진정한 죽음인지! 수만의 몬스터들이 팔을 들어재낀다. 창칼이 하늘 높이 찌른다. 햇빛이 날붙이를 반사하여 수천수만의 빛무리가 해일을 이룬다. 고블린은 고블린의 언어로, 오크는 오크의 언어로, 트롤은 트롤의 언어로 고함을 지른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이 동료의 말을 알아들을 필요가 없다. 주군이, 위대한 마왕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아줄 테니까. ─ 사탄의 후예들이여――전군, 전진하라! 바르바토스가 등을 돌린다. 붉은 망토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녀는 더 이상 남길 말이 없다는 듯,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뛰어간다. 일개 병사처럼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고 뛰어간다. 그 뒤를 따라 몬스터 수만 마리가 노도처럼 밀어닥친다. 인간들은 장창을 들이밀며 대열을 짠다. 그러나 어딘가 어수선하다.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대열과 대열 사이를 불길하게 오간다.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위대한 전투였어요. 우리는 완벽하게 승리했지요.” 파이몬이 찻잔에 입을 갖다댔다. 소리없이 찻물이 그녀의 입술 틈새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빈 잔을 조용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십이만 명의 군단으로 인간군 약 이십오만 명을 전멸시켰어요. 전투 한 번으로 인간계의 왕국 두 곳이 멸망했답니다.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 그리고 저는 확신했지요. 우리는 무적이라고. 절대로 패배할 일 없고, 대지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그렇지만 제2차 월맹군은 실패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월맹군 원정으로 기록되었다. “동족이 우리를 배신하기 전까지는.” “…….” “우리는 왕국 두 곳을 점령하고 곧바로 대륙 깊숙이 진군했어요. 인류의 연합군이 궤멸한 직후였습니다. 인간들이 연합군을 미처 재조직하기 전에 전광석화와 같이 대륙을 휘젓는다. 그것이 작전 개요였어요. 아마도, 우리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후방에서 보급 업무를 담당하던 마왕들이 배신했다. 그들은 주로 하위 마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위 마왕은 병력이 적었다. 선두에 나서기보다는 보급에 전념해주는 편이 좋았다. 상위 마왕들이 선두에 서고, 하위 마왕들이 뒤를 받쳐준다. 지극히 합리적인 배치였다. 하지만, 하위 마왕들은 배신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위엄에 가득 찬 군대는 온데간데 없었다. 보급이 끊겨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군대. 십만 대군이라는 덩치는 오히려 짐짝에 가까웠다. 식량은 금세 동나버렸다. 인간들은 철옹성에 들어가 굳건하게 버텼다. 철옹성을 깨드려도, 그 다음에는 무한정의 청야전술이 펼쳐졌다. 이미 대륙 깊숙한 곳까지 진출해버린 제1군단은 최악의 후퇴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기사단들이 게릴라처럼 물어뜯었다. 그것에 대항했다가는 또 후퇴가 늦어버린다. 바르바토스는 피눈물을 삼켰다. 그녀의 입술은 이미 마나부족 현상으로 인해 부르텄다. 입술을 이빨로 꽉 물자 피가 새어나왔다. ─ 후퇴……무시하고, 후퇴하라. 아군이 기사단에 물어뜯기는 것을 바라보며 바르바토스가 등을 돌렸다. 파이몬도, 마르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최대한 많은 아군을 살려보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 십이만 중에 몇 명이 살아남았을까요?” “…….” “지금도 정확히 기억해요. 이천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이만육천팔십사 명. 십이만 대군 중에서 오로지 이만육천팔십사 명의 전사만이 살아남아서 고향땅을 밟았사와요.” 풍경 속에서 바르바토스는 울고 있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헤질 대로 헤져서 구멍이 뚫린 망토를 뒤집어쓰고, 소리내어 울었다. 옆에서 파이몬이 고개를 숙인 채 바르바토스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정말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요…….” 서큐버스 퀸은 탁자에 앉아 이천 년 전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때 친우였던 소녀를.   00147 매국노 =========================================================================                        모든 풍경이 사그라졌다. 몬스터의 시체도 평야도 전부 사라졌다. 주변이 온통 하얘졌다. 남은 것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뿐이었다. 끝없이 새하얀 공간. 그곳에 소녀가 쥐어짜는 울음소리만 나지막하게 깔렸다. 현실과 지독하게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마냥 하얗기만 한 공간이 파이몬에게 도리어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원초적인 형태의 기억이겠지. 누구나 그런 기억을 하나쯤 놔두고 살아간다. “소녀는 저때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앞으로 다 잘 될 거라고, 바르바토스를 위로해줄 수 없었어요. 아마 어느 정도 직감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싸울 날은 다가오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이때쯤 해서 파이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내가 순전한 공화주의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구애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마왕이었다.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결코 완전무결한 신뢰를 얻지 못했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설득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꿈이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자신이 어떤 삶을 겪었는지.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는지. 그걸 전부 꿈속에서 생생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정말 숭고한 태도네.’ 자신의 삶을 낱낱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재낀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묻는다. 이런 나에게 협력해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아, 파이몬.’ 내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보아라. 청문회에서 진 빚을, 너는 월맹군의 설전에서 날 구해줌으로써 충분히 보답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제 감정의 응어리 말고는 아무런 은원도 남지 않았다. ‘대등한 관계인 거다.’ 너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얼마나 정교한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가. 거기에 한몫 보탤 경우 나에게는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가.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다. 제대로 설득해야 할 것이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마 이유를 알고 있겠지요. 왜 월맹군이 계속 실패했는지.” “마왕이라고 한들 상위 마왕과 하위 마왕의 힘은 천차만별. 대륙이 통일될 경우, 상위 마왕은 하위 마왕을 압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는 인간과 마인이 아니라, 마인과 마인 사이에 대전쟁이 일어나겠지요…….” “정확해요.” 파이몬이 기쁘다는 듯 웃었다. “소녀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 전까지는 단지 보급선이 인간군에 의해 파괴된 줄로만 알고 있었지요. 동족인 마왕이 설마 인간군에 몰래 정보를 흘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뒤늦게 그들을 추궁해보려 했지만, 역시라고 할까요.” 증거가 전혀 없었다. 하위 마왕들은 필사적으로 보급선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신출귀몰하게 몰아치는 기사단의 습격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끝까지 보급기지를 사수하려다 목숨마저 잃은 하위 마왕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월맹군에 충실했던 자들이겠지요. 인간군과 내통하기를 거절했다. 혹은 거절하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숙청당했을 거예요……아니, 차도살인지계에 당하여 인간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을지 몰라요.” 상위 마왕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위 마왕들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인간군이 잘했다. 혹은, 대륙 깊숙이 진군해 들어간 상위 마왕들이 잘못했다. 그들의 작전 때문에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졌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바르바토스를 비롯해 우리 상위 마왕들은 도리어 하위 마왕들에게 사죄했어요. 우리의 잘못된 작전 때문에 월맹군 원정을 실패해버렸다고요.” 그러나 파이몬은 한 발자국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일개 서큐버스에서 마왕까지 올라선 그녀이기에 하위 마왕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위 마왕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하지만 파이몬 님. 저로서는 아직 왜 파이몬 님이 산악파를 만들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하위 마왕들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러면 제3차 월맹군, 제4차 월맹군에서 함정을 파놓고 기다려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라면 그랬을 거다. 대륙 깊숙이 진군한 척하면서, 하위 마왕들이 배신하는 순간을 노려 급습한다. 하위 마왕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지. 저쪽에서 배신을 획책했다고 밀어붙이면 명분까지 거머쥔다. 이게 상책 아닌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와요.” “더 중요한 문제?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대륙 통일 이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파이몬이 말했다. “소녀는 대륙통일이야말로 마인 전체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어요. 인간계를 정벌하기만 하면, 마인들이 평화와 풍족을 만끽할 거라고 믿었어요. 그렇지만 대륙통일은 오히려 전화의 시발점. 지금까지 인간계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하나가 되었던 마인은 뿔뿔이 나뉘어서, 각자 자기가 신봉하는 마왕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겠지요.” 한 사람의 제왕. 한 사람의 마왕을 위해서 마계 전체가 전화에 휩싸인다. 무엇을 위한 대륙통일인가. 마인 전체를 위해서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말 따위,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과연. 파이몬은 월맹군 원정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것인가. “소녀는 깨달았어요. 인간은 필요악이었어요. 인간에게도 마인은 필요악이었습니다. 만약 세계에 인간이나 마족, 어느 한쪽이 없었다면 그 종족은 자신들끼리 끝없이 전쟁을 벌였을 거예요.” “…….”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지 않아도, 대륙을 통일해도 전쟁은 일어나요. 이상한 일 아니겠어요? 어느 백성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재산이 보장된다면 인간도 마인도 구태여 죽음의 전장에 발을 들이지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파이몬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지배자들 때문입니다.” “…….” “만약 전쟁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려면 백성들이 찬성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백성들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모든 고난을 스스로 떠맡아야 합니다. 스스로 창칼을 쥐어 살인해야 하고, 스스로 전쟁비용을 지출해야 하고, 전쟁 때문에 쑥대밭이 된 도시와 마을도 스스로 복구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당연히 전쟁에 쉬이 찬동하지 않겠지요.” 파이몬의 목소리에 열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달라요. 그들은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의 주인이에요. 더 큰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지금 가진 재산을, 백성의 목숨과 백성의 터전을, 마치 도박에서 돈을 거는 것처럼 내걸지요. 소녀는 깨달았습니다.――인간계이든 마계이든, 사회가 누군가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이상, 전쟁은 결코 단절될 수 없사와요!”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가 조용히 분노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그녀가 소리쳤다. “우리 마왕은, 얼마나 우둔했었나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정작 죽어나간 것은 마왕이 아니었어요. 오직 극소수의 마왕만이 전사했습니다. 전쟁에서 희생된 것은――수만, 수십만씩 죽어나간 것은――마왕이 아니라 마인이었어요!” 파이몬이 이빨을 으드득거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어요! 위선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어도 위선과 기만은 끊기지 않겠지요. 더더욱 화려하게 불타올라, 인간계, 마계, 이윽고 세계 전체를 태워버릴 게 분명합니다. 단지 우리 마왕이 인간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단지 그들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했고, 수십만의 마인을 희생시켰습니다!” 주변 풍경이 일변했다. 새하얀 공간이 사라지고 전쟁터가 펼쳐졌다. 오크가 마을에서 인간을 학살하고 있었다. 비명과 신음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이 고블린 부락을 몰살시켰다. 어린 고블린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다 그 여린 가슴에 화살이 박혀 절명했다. 학살, 끝없는 학살이 이어졌다. “우리 마왕의 잘못이었어요!” 파이몬이 울부짖었다. “인간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마인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완벽한 군주가 만인을 통치하는 이상국가. 그 허울 좋은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우리 마왕이 모두를 속였어요……!” 지난 이천 년 동안 여덟 번의 월맹군 원정이 있었다. 제3차 월맹군 이후 산악파는 줄곧 월맹군 원정에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산악파 마왕을 따르는 마인들은 대부분 생존했다. 반면에, 평원파 소속의 마인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갔다. 평원파는 산악파를 배신자라 불렀다. 산악파에서는 도리어 평원파야말로 마족에 대한 배신자라 비난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가……. 내가 말했다. “그래서 공화정을 세우기로 결심했군요.” “예.”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은 결국 모조리 사라져야 마땅해요.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들은 서로의 감정을 읽지 못해요. 그럼에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처럼 사고하고, 우리처럼 행동합니다.” 마왕은 잘못된 존재이다. 파이몬은 그렇게 단언했다. “인간이, 마인이, 스스로 사회를 세우고 스스로 사회를 다스려야 해요. 그래도 다툼은 끊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해할 거예요.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이성적인 존재자라고.” 그녀의 두 눈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 흥미 깊은 이야기였다. 원래 세계에서 역사가 어찌 흘러갔는지 아는 나로서는, 절반은 동의하고 싶었고 절반은 반대하고 싶었다. 파이몬의 말이 옳다. 결국에는 공화정이 승리한다. 하지만 저 '결국'이라는 낱말 하나를 발음하기 위하여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가? 수십만 단위가 아니다. 수백만 단위조차 아니다. 수천만이. 그것도 몇 번이고 학살하고 학살당한다……그 피의 무게를 '결국'이라는 단어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정적이었다. “파이몬 님. 실례지만, 저에게는 파이몬 님이 단순한 이상주의자로 보이는군요.” 당신의 의견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 “제가 단언하겠습니다. 파이몬 님의 이상대로 공화정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그것도 인간과 마인이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정말로 무수한 핏물이 필요합니다.” “……예. 소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인가? 정말로 어느 정도의 피가 흐를지 각오하고 있는가. 내가 말했다. “대륙통일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 마인들이 흘리는 피. 공화정을 이룩하기 위해 인간과 마인이 흘릴 피. 양자를 비교해보면, 아마 별반 다를 바가 없겠지요. 어느 쪽이든 마인들은 희생됩니다. 알겠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이상을 쫓든 파이몬의 이상을 쫓든 어차피 마인들은 피의 대가를 치른다. 그럼 말이다, 파이몬.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왜 바르바토스는 안 되고 당신은 됩니까?” “…….” “그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저 또 한 명의 마왕에 불과합니다. 마왕이라는 이름의 불이지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세계 전체를 불태우며, 불빛에 눈이 먼 마인들이 부나방처럼 뛰어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이들을 괴물이라 부릅니다.” 다른 말로 강자(强者)라 부른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 거리낌 없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자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고고한 이상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라고 스스로 속이는 자들. 나는 아니다. 누군가를 살해할 때 변명하지 않는다. 어떤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호크, 잭 올란드, 리프……모두 순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에 죽었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당신의 사상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솔직히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바르바토스 역시 똑같은 의미에서 숭고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저를 설득하고 싶다면 단지 사상을 울부짖지 마십시오. 이득을 제시해주세요. 적어도 청사진을 제시하십시오. 공화정, 좋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룩할 생각입니까? 가능성이 있습니까?” 파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물끄러미 지켜볼 따름이었다. 잠시 기다렸다. 역시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실망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으로 이상을 바라보되 현실에 발을 딛어주시길. 저는 당신을 속일 수도 있었지만, 당신은 지난 월맹군에서 절 구했습니다. 이번 습격에서도 저를 도와주었지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다음에도 제가 오늘처럼 솔직하게 말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여긴 꿈속이었다. 걸어봤자 어디로 나가진 못하겠으나, 나 나름대로 어서 꿈을 끝내달라고 말없이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걸었을까. “청사진이라면 있어요.” 파이몬이 등뒤에서 말해왔다. “소녀 역시 우둔하지만은 않사와요. 천칠백 년 전, 아직 공화정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했던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소녀는 이것을 지극히 신중하게 실험해야만 한다고 결심했어요.” “호오.” 나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맞장구 쳤다. 그래서? “소녀는 생각했지요. 마왕처럼 이질적인 존재가 있는 마인사회보다는 오히려 인간사회에서 공화정이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고. 공화정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아보려면 먼저 인간계에서 실험해보자고.” “……!” 그 말에는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이몬은 여전히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확신이 넘쳤다. 설마, 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 “바타비아 공화국.” 파이몬이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계에서 유일무이한 공화국이지요. 혹시, 그런 유별난 국가를 인간들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셨나요?”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00148 매국노 =========================================================================                        내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서열 제9위.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여 끝내 동족을 배신하고 만 마왕. 던전 어택의 플레이어들이 말하기를 희대의 창녀, 혹은 순진무구한 짝사랑의 여인. 마족 입장에서는 최악의 매국노. 그것이 내가 지금껏 생각해온 파이몬이었다. 바타비아의 건국에 그녀가 개입했다는 얘기 따위……게임 시나리오는커녕, 설정집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내가 간신히 목소리를 다듬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인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야 당황해주는군요.” 파이몬이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여태까지 누구를 상대하고 있었던 거냐.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어요. 모든 것이 새로웠지요. 과장해서 말하면, 소녀는 사실상 세상을 다시 창조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 정말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요.” “…….” “하지만 성공했어요.” 주변 풍경이 마을을 비추었다. 한적한 어촌이었다. 갯벌과 나룻배, 허름한 오두막 몇 채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파이몬이 손을 흔들자, 시간이 빠르게 가속했다.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부두가 세워졌다. 항구가 세워졌다. 높다란 건물들이 들어섰고, 하얀 성벽이 쌓였다. 그것은 도시가 되었다. 돌바닥이 평야와 늪을 덮었다. 십수 개의 수로가 도시 한복판을 지났다. 그 위로 사람들이 곤돌라를 띄워 오갔다. 대신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푸른 바다 도시의 하늘에서 아득하게. “비타비아 공화국의 수도, 암스텔이 세워지는 데 이백 년.” “…….” “그동안 축적한 재산과 정보력,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거기에 오십 년. 고대 공화국의 이념을 물려받는다는 명목으로 혁명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육십 년. 마지막으로, 아인종을 해방한다는 대의명분으로 해방전쟁을 부추겼습니다. 제4차 월맹군까지 가세, 여기에 다시 육십 년.” 파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앞의 풍경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수십 척의 거선(巨船)으로 이루어진 대함대가 암스텔 앞바다를 헤쳐 나아갔다. “마침내 사백 년. 소녀는 열세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도시연합체, 바타비아 연맹공화국을 만들어냈어요.” 그녀가 한동안 자신이 이루어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파이몬은 침묵함으로써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이상은 자신을 실현시키는 힘을 지닐 때 더 이상 망상이기를 멈춘다. 잭 올란드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파이몬은 이상을 가졌으며, 그것을 실현하고자 행동했으며, 심지어 정말로 성공했다. 왕과 기사가 판치는 이 중세 한복판에――오롯하게 혼자서 공화국을 세운 것이었다. 이 무슨 과업인가. 위대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한참 부족했다. 원래 세계의 역사를 어깨 너머로 배운 나조차도,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며 허무맹랑한 망상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걸 파이몬은 실제로 이룩했다. ‘……!’ 그때 뇌수가 전율에 떨었다. 한 가지, 말도 안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이 떠올랐다. 서열 제1위의 대마왕 바알. 그는 어째서 파이몬과 월맹군 제1군단에게 하필 튜튼 왕국-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맡겼는가. 최악의 가설. 지금까지 생각해본 그 어떤 가정보다도 흉악한 가설 한 가지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조직되었다. 목이 몹시 탔다. 내가 차를 마셨다. 최대한 침착하게 찻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바알 대왕과 파이몬 님은……어떤 관계입니까.” 파이몬이 시선을 바다에서 이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놀라워요. 하지만, 그래요.” 그녀가 면목없다는 듯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말해버리면 조금 주제가 넘는 것이랍니다.” 그 한 마디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대답해주었다. “…….” 나는 안간힘을 다해 평정심을 찾았다.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서열 제1위의 바알. 마왕군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 서열 제9위의 파이몬. 두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종의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다. ‘제기랄. 바르바토스, 너는 알고 있었냐.’ 아니다. 바르바토스는 모른다. 그녀는 바알을 존중한다.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부르기도 한다. 파이몬과 바알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태도가 달라지겠지. 평원파는 둘 사이의 동맹을 모른다……아마도, 산악파의 다른 마왕들조차 모른다. 이야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파이몬이 어떤 이상을 가졌는지 따위, 여기까지 와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파이몬은 실제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 산악파를 통솔할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계의 국가 하나를 막후에서 조종할 수가 있었다. 그 영향력은 바타비아 공화국을 넘어서서 대륙 이곳저곳에 암약하는 공화주의자들까지 포섭하리라. 심지어……정확히 어떤 동맹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대마왕 바알이 파이몬을 후원하고 있었다. ‘협력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침을 삼켰다. ‘반드시 협력해야만 하는 거다.’ 이건 결단코 이용해먹어야만 했다. 사상에 설득력이 없다? 알 바 아니었다. 마왕군과 인간군 전체에 손길이 닿은 권력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녀에게 호의를 얻어내어 나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든 나의 이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나는 이미 파이몬과 밀월 관계를 맺기로 마음먹었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까 소녀에게 과연 마인의 공화정이, 더 나아가 인간과 마인의 공화정이 실현될 수 있겠느냐고 질문했지요. 이것이 소녀의 대답입니다.” 그녀가 팔을 벌려 도시를 가리켰다. “예. 가능해요.” 파이몬이 단언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에서는 아인종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만 명의 엘프와 삼만 명의 난쟁이가 도시에서 인간과 섞여 살고 있어요. 이천 년 전에는 엘프와 난쟁이도 똑같이 마족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단탈리안, 오늘 우리가 현실이라 여기는 것이 한때는 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노래하듯 말했다. “이천 년을 살아온 소녀는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서 때때로 우리의 눈을 속이지만 그것은 지금도 일초일분, 단 한뼘도 생략할 수 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혹자는 그것을 역사의 흐름이라 부르겠지요. 혹자는 그것을 여신이 자아낸 운명이라 칭송할 거예요.” 파이몬이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그것을 꿈의 실현이라 부릅니다. 삶이란 가혹하고 비루하여 언제나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소녀와 당신이, 이윽고 모든 인간과 마인이 삶에 절망하고 더 이상 꿈꾸기를 포기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닙니다. 언젠가 이상이 천박한 농담거리로 전락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더 이상 소리높여 울부짖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닙니다.” “…….” “언젠가 모든 위대한 깃발이 쓰러지고 모든 전사가 죽어나가, 신들이 대지를 떠나고 오로지 복수와 기만만이 남아 대륙을 유령처럼 떠돌게 될지도 모릅니다. 산맥은 더더욱 가팔라지고 골짜기는 더더욱 낮아지며, 이윽고 만인이 만인의 노예로 전락하는 그날이 정말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닙니다.――오늘, 우리는 멸망의 그날이 결코 오늘이 아니며, 내일 역시 아닐 것이라 믿으면서 한 발자국 나아갑니다.” 파이몬이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발은 어디로 향하기 위해 있고, 우리의 손은 무언가를 붙잡기 위해 있어요. 소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니라면 어째서 마왕인 우리, 인간도 아니고 마인도 아닌 우리에게 여전히 두 발과 두 손이 있을까요.” “…….” “단탈리안. 소녀와 함께 오늘을 걸어주세요. 그리고 내일을 잡아주세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새하얀 손을 쳐다보았다. 몽마(夢魔). 사람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종족. 갖가지 쾌락으로 사람을 희롱하고 만족시키며 상대와 함께 꿈속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거주한다. 그러나 내 앞에 선 여인은 꿈속에서 안주하기를 버리고, 직접 현실에서 나아가고 있다. 현실 자체를 꿈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기에 그녀는 마땅히 서큐버스의 여왕이라 불린다. “한 가지……질문이 있습니다.” 나에겐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입을 열었다. 던전 어택에서 파이몬은 마족을 배신했다. 어째서 그랬는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얼마든지 물어주세요.” “약간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파이몬 님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무척 중요한 질문입니다. 되도록 진지하게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심스레 단어와 문장을 골라가면서 말했다. “예컨대……아주 강력한 인간이 있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강력하지요?” “매우 강력합니다. 우리보다 열 배, 백 배 더 강합니다. 제국의 제1급 검사, 소드마스터조차 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 인간이 나아가는 길에는 마인의 시체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알 대마왕조차 그를 단신으로 격파할 수 없습니다.” 파이몬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뭐라 토를 달지 않았다. 되도록 진지하게 대답해달라. 나의 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믿기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던전 어택의 세계에는 정말로 그 같은 용사가 생겨날 예정이었다. 그 칼날에 제파르 대장이 죽는다. 벨레드 형님이 죽는다. 바르바토스마저 목이 잘리고, 파이몬, 당신조차 싸늘하게 죽는다. 그리고 대륙에서 마왕군은 쫓겨난다. “그 인간은 교묘하게도 우리 마왕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상대합니다. 우리는 차례대로 격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마왕 전원이 전사하고 말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파이몬 님은……그러니까 만약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파이몬 님은 어쩌겠습니까?” “…….” 파이몬이 턱에 손을 괴었다. 그녀가 두어 번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마왕군이 연합해서 그를 공격할 수가 없나요?”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는 군대를 통솔하지 않습니다. 한 명. 아무리 많아봤자 열다섯 명 정도의 소부대를 이끌고 이쪽을 공격해옵니다.” “즉……고작 열다섯 명만으로 우리들 전원을 차례대로 격파할 수 있는 집단. 그런 집단을 상정해보라는 얘기로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몬이 고심에 빠졌다. “정치적으로 말살할 수는 없을까요?” “인간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가 그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으음. 인간계가 통일되어 있나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상정한 상황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는 어느 나라를 통치하고 있지요? 합스부르크 제국인가요? 아나톨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입니다. 지금처럼 월맹군에 패퇴한 제국이 아니라, 온전히 강대한 국가로 거듭난 제국이지요.” 파이몬이 입가를 씰룩이면서 흐으으음, 하고 신음했다. “그럼 소녀라면 인간계를 분열시키겠어요.” “…….” “합스부르크 제국은 대륙의 중원에 위치하지요. 강대할 경우에는 그만큼 대륙 전역에 권력을 행사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주변에 적이 많답니다. 그래요. 가령 소녀라면 프랑크 제국이나 브르타뉴 왕국을 부추기겠어요.” 나는 조용히 감동했다. 파이몬은 어느새 내 시나리오에 열중하여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가 이대로 성장하면 위험하다. 그대들이 적극적으로 합스부르크를 견제해야 한다. 두 국가 중에 한곳은 걸려들겠지요. 잘만 하면 두 국가의 동맹을 유도할 수 있어요. 그렇게 인간들 간의 전쟁을 유도합니다. 인간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그 강력한 인간을 해치워요.” 그런가. <던전 어택>에서 인간계의 분열을 일으킨 배후의 장본인이 파이몬, 당신이었는가. 대부분의 마왕들이 속수무책으로 용사에게 당하고 있을 때――. “어때요, 단탈리안. 이러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파이몬. 당신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용사의 정치적 말살을 계획하고 있었는가. “……확실히, 훌륭하기 그지없는 한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법도 실패했습니다. 합스부르크를 통치하는 군주는 실로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막강하여,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단탈리안.” 파이몬이 이쪽을 흘겨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군주가 있겠어요? 바알 님보다 강한 인간이 있다는 것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전제인데, 대륙을 거의 통일시킬 정도로 고강한 군주라니. 불가능해요. 그거, 설령 그 강하다는 인간을 죽이더라도 오히려 군주 쪽이 무서운 거 아닌가요? 강한 인간을 죽여도 문제가 남을 것 같은걸요.” “그 불가능을 전제로 받아 들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으음.” 파이몬은 몇 번이고 으음, 하고 신음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가 한숨을 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뭐, 그러면 소녀가 몸이라도 팔아야겠지요.” “…….” “그 인간이 남자든 여자든 이래봬도 소녀는 서큐버스의 여왕. 인간 한 명쯤이야 함락할 자신이 있답니다. 최대한 그 인간에게 호의를 배푸는 척해서 신뢰를 얻어요. 그런 다음에는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해서 소녀를 사랑하게 만들겠어요.” 그렇게. “그것도 안 되면, 항복이와요. 후후. 소녀는 더 이상 수를 생각할 수 없겠는걸요.” 나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00149 매국노 =========================================================================                        지금까지 나는 게임에서 얻은 정보를 아주 신뢰했다. 평원파라느니 산악파라느니, 하나로 보이던 마왕군이 사실은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런 정보가 생소하긴 했다. 허나 생소할 따름이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게임 내용과 상반되지는 않았다. <던전 어택>에 등장한 내용, 이곳에서 직접 체득한 지식. 두 정보는 서로 오류를 일으키지 않았다. 덕택에 흑사병을 이용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물을 먹일 수 있었다. 파이몬은 달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주인공 용사와 파이몬은 인간계의 도시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서열 제9위의 마왕이 어느 도시에 들렀고, 우연치 않게도 거기엔 용사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쳐서 친분을 쌓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우연이 있었는가. 정말로 우연이었는가……. 나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게임이니까, 시나리오니까. 그 정도 우연은 얼마든지 허용될 만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세계는 단지 게임에 불과하지 않았다. 현실이었다. 현실에서도 그같은 우연이 쉽게 벌어질까? 산악파의 수장이자 가장 유력한 마왕 중 한 사람이 어쩌다 인간의 도시에 마실을 나갔고 하필 어쩌다 용사를 만났다고? 파이몬이 만남을 의도했다. 의도적으로 용사에게 접근했다……이쪽 가설이 훨씬 더 그럴듯했다. 나는 다시금 등줄기가 싸해졌다. 게임 속에서 파이몬이 주인공에게 내던진 말들이 대략이나마 떠올랐다. 그녀는 용사한테 얼마나 달콤하게 속삭였는가. ─ 예, 소녀는 마왕이에요. 용사님을 속였어요. 하지만 그것이 뭐가 문제지요? 소녀는 용사님을 사랑합니다. 종족과 신분, 적군과 아군, 갖가지 은원을 뛰어넘어 당신을 일직선으로 사랑해요. 처음 당신을 본 그 순간부터 그랬듯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듯이. ─ 아휴, 정말. 소녀가 아니었으면 용사님, 벌써 죽었을 거랍니다? 하여간 인간들도 꼴불견이네요. 당신은 용사. 대륙을 구해낸 장본인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인간이란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우둔하네요. 저희 마인은 적어도 동족을 배신하지 않사와요. 그게 전부 기만이었다. ─ 인간은 정말 멋져요! 대륙에는 공화국이란 게 있다면서요? 그곳에선 인간종과 요정족, 난쟁이족이 아무런 차별을 가하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평등하게 살아간다고 들었어요. 종족의 구별을 뛰어넘어 평등하다……언젠가, 마인과 인간도 그렇게 살아가는 날이 다가오겠지요. 분명히. ─ 죽는 순간인데……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결국 그녀는 용사의 첫키스를 차지했다. 주군인 황녀가 아니었다. 소꿉친구 역할의 마법사도 아니었다. 용사의 적, 마왕이었다. 파이몬은 죽는 순간까지 원수에게 사랑을 애원했다. 숨이 끊어지면서 그녀가 느낀 것은 용사의 입술이었겠지. 대체 어떤 심정이었는가. 사랑과 연모의 고백,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힌 모습, 최후의 입맞춤, 백 가지의 문장과 천 가지의 몸짓. 그것들을 연기하며 한 명의 서큐버스는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느꼈는가. 지금 나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문제예요. 그 강한 인간을 이쪽 편으로 섭외하거나, 간신히 죽인다 가정하더라도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 않아요. 어떻게든 둘 사이를 이간질해야……솔직히 소녀, 정략(政略)에 자신이 있어도 모략에는 자신이 없어서요. 문제네요.” 파이몬이 계속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전혀 모르겠지. 내가 웃었다. “예. 확실히 파이몬 님은 모략에 둔해보입니다.” “……소녀를 놀리는 건가요? 모처럼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는데.” “아니요. 진심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화국을 설립했다. 대단합니다. 하지만 뭡니까, 그 어수룩한 방식은. 지나치게 주변국과 마찰을 빚었지 않습니까. 저라면 대륙을 먼저 혼란에 빠트렸을 겁니다. 가령 월맹군 전쟁이 발발한 시기를 노리면 건국이 쉬웠겠지요.” “하, 하지만.” 파이몬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인간연합군에 노려질 거예요.” “인간군의 돈줄을 잡아버립니다. 암스텔이 인간군의 군자금을 댑니다. 파이몬 님은 산악파를 통솔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을 끝없이 길게 이어지게 하는 거지요. 인간군이 점점 더 군자금에 압박을 받겠지요. 암스텔은 자금을 원조하는 대가로 여러 권리를 하나씩 얻어갑니다.” “…….” 그래. 파이몬이 바알과 협조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혁명전쟁이라니? 그렇게 지난한 짓을 뭣하러 벌이는가. 도리어 전쟁을 이용해야 마땅했다. “특히 기사단은 강력하긴 해도 돈 먹는 하마입니다. 기사단에게 빚을 지게 해서 적당히 이쪽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만들지요. 참. 보아하니 파이몬 님은 인간계의 신전들과도 인연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그걸 이용해야지요!” 이런, 이번에는 내가 재밌어졌다. 파이몬의 입장은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더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마계에도 권력이 충분하다. 인간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금도 넘치고 인맥도 탄탄하다. 그야말로 즐기는 기분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신전들도 월맹군 전쟁을 후원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재정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그걸 노립니다. 신전들에게 면죄부를 발행하게 만듭니다.” “면죄부요……?” “당신의 죄를 사하겠다는 증명서입니다. 이걸 구입하면 당신이 그만큼 신에게 충실했다는 뜻이다. 사악한 월맹군을 막아내는 것은 신의 뜻, 그것에 동참하는 것 역시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대충 그런 식으로 광고하면 되겠네요.” 파이몬의 입술이 벌어졌다. “신전들이, 그토록 부패할 리가.” “인간이란 적당한 명분만 갖추어지면 얼마든지 부패합니다. 이건 인류를 위해서다. 대륙을 위해서다. 결코 돈이 탐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뭐, 간단하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해야 순탄한 법입니다. 하지만 점점 빠지겠지요. 신의 이름을 팔아먹으면 이토록 손쉽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 이 세계에는 신성력이 있었다. 신심이 두터울수록 신성력이 강해졌다. 사람들이 신의 권능을 직접 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강력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자들일수록 광신도로 만들기 쉽다. 사악한 마왕으로부터 인류를 수호한다. 이보다 더 고귀한 이념이 있을까? 사제들은 거리낌 없이 귀족과 민중에게 군자금을 내놓으라 요구하겠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돈의 마력에 빠질 것이다……. 전쟁이란 이토록 훌륭한 비즈니스이다. “면죄부를 팔아봤자 끊임없이 군자금을 충당할 순 없습니다. 한계가 옵니다. 거기서 암스텔이 나서는 것입니다. 면죄부를 대량으로 구입합니다. 백만 골드건 천만 골드건 쏟아붓습니다. 아마 신전에선 이렇게 찬사하지 않을까요? 그대, 암스텔. 인류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도시여! 영원토록 축복받을지언저!” 내가 웃었다. 음, 또 조울증 끼가 도진 것 같다. 기분이 달아오른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던전 어택> 팬이다. 수많은 플레이어들 중에서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뒷사정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무진장 기쁘다. 독립전쟁. 혁명전쟁. 그리고 또 뭐였는가. 해방전쟁이라고 그랬는가? “그럼 다 끝났습니다. 다 끝났어요. 아인종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종족해방전쟁을 펼친다뇨! 정말 최악의 수단입니다. 그냥 신전한테서 두 번째로 면죄부를 대량으로 구입할 때 이렇게 말하세요. 이번에는 도시 내의 아인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기부금을 냈다고요.” “…….” 크으. 그래, 그러면 되겠지.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돈은 폭군이 된다. 아인종의 권리를 금화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한다. 인류를 도왔다는 명분과 신을 위해 일했다는 명분이 생긴다. 실질적으로는 암스텔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진 기사단들, 대륙의 정신적 지주인 신전들이 아인종을 인정하게 된다. 명분과 권력이라는 양날개가 있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게 없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 외교전을 펼칩니다. 아마 인간군 지도자들은 이때쯤 전쟁이 끝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할지도 모르겠는걸요. 빚을 전부 갚아야 할 때가 다가오니까요. 그때 속삭여줍시다. 고작 도시 몇 개만 독립시켜달라. 빚을 모두 탕감해주겠다.” 아아. 끝이다. 어차피 암스텔은 어느 국가 하나에 소속해 있었겠지. 프랑크 제국인가? 튜튼 왕국인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하나의 국가이다. 수많은 기사단과 신전이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해오면 그 국가로서는 반항할 수 없다. 무얼, 국가 권력층에 로비를 잔뜩 해두자……그들에게도 체면을 차릴 기회는 줘야 한다. 암스텔이 지금까지 사들인 면죄부를 공짜로 그 국가에 기부하면 어떨까? 그래봤자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하겠지. 인류와 신을 위하여 자신의 영토마저 기꺼이 포기한 국가. 그들도 뒷목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게 된다. 봐라. 누구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신전들은 돈을 모아서 좋고, 국가들과 기사단들도 군자금이 줄어들어 좋고. 무엇보다 암스텔은 대륙의 모든 권력층과 사이가 아주 좋아진다. 강력한 외교력을 발휘할 거다. 뭐,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겠지만……독립전쟁이니 해방전쟁이니 수십 년 동안 전쟁을 치루는 것이나 이런 방법이나, 소모되는 자금이야 엇비슷하겠지. 한번 시작하면 간단하다. 월맹군은 수차례나 있었다. 그때마다 군자금을 명목으로 도시를 하나둘씩 독립시킨다. 열세 개의 도시쯤이야 금방 채워진다. 아마도 역사서에서 파이몬의 공화국은 이렇게 불리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인류의 수호자, 신의 봉사자――위대한 바타비아 연맹공화국. 남들은 싸우도록 놔둬라. 그대, 축복받은 바타비아여! 돈으로 사라! “멋지군요……훌륭합니다. 아니, 여기서 그치면 곤란하죠. 대륙 곳곳에 질투와 불만을 심어둡니다. 귀족과 민중의 시기심이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똑같이 면죄부를 샀다. 인류를 지키려고 희생했다. 왜 바타비아만이 독립하는가? 왜 바타비아 시민만이 자유를 만끽하는가?……멋집니다, 실로 훌륭해요.” 월맹군이 거듭할수록 인류의 단합은 서서히 무너진다. 틀림없다. “시기심과 질투만큼 공화주의를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는 비료는 없습니다. 적당히 공화주의자들을 포섭해서 혁명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혼란이 대륙을 휩쓸겠지요. 인간계의 왕국은 결코 혁명을 좌시하지 않을 터……귀족이 내분하고 민중이 궐기합니다. 아, 여기서 월맹군 원정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모처럼 내분이 일어나는데 괜히 외부의 적이 초를 치면 곤란…….” “단탈리안.” 차가운 손바닥이 살며시 내 양볼을 감쌌다. “어?” 내가 퍼득 정신을 차렸다. 파이몬이 두 손으로 나의 뺨을 잡고 있었다. 그녀와 눈길이 직선으로 교차했다. 상대방은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몽롱했다. “그거 아세요? 바르바토스와 소녀가 아직 친구일 무렵에 있었던 일이에요. 알다시피 바르바토스는 지독한 동성애자랍니다. 소녀도 그쪽 부류에 가까워요. 그래서 이따금 우리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지요.” 충격이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옛날에 커플이었다! 나는 파이몬이 공화주의자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 스물여섯 배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그, 그랬습니까? 뭐라고 할까, 무척이나, 무척, 의외로군요.” “애인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웠어요. 살내음이 고플 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었지요. 그때 우리가 농담 삼아서 얘기했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말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어라. 왠지 모르게 데자뷰가……? “바르바토스가 남자 애인을 두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천하의 바르바토스가, 라고 생각했지만요. 후후. 설마 이런 곳에서도 맞수라니. 정말이지, 바르바토스랑 소녀는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까 궁금해요. 기이해도 이보다 기이한 운명이 없어요.” “네?” “눈을 감아주세요, 단탈리안.” 눈을 감을 틈조차 없었다. 파이몬은 쓰윽 뒷발을 들어올려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대항하지 못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몸짓이 엄청나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녀의 눈 감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경악했다. 아니, 마왕 년들은 진짜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가. 서로 원수원수 거리는 주제에 어떻게 하는 짓은 똑같은가! 네놈들, 사실 사이가 의외로 나쁘지 않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나마 파이몬은 혀를 집어넣지 않았다. 입술의 감촉만 즐기는 듯했다. 바르바토스에 비하면 양반이지 않은가.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아니, 파이몬은 서큐버스 퀸이다. 바르바토스가 색정 마법을 걸었듯이 이 녀석도 뭔가 수작을 부려올지 모른다. 제기랄. 제발 나에게도 체면을 차릴 기회를 달라……나는 별 저항도 못한 채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00150 매국노 =========================================================================                        한참이 지나고 파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촉촉한 감촉이 머물렀다. “소녀는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입장이지만요.” 그녀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한번도 이쪽에서 애원한 적은 없답니다. 서큐버스 여왕으로서 자존심이 달려 있으니까요. 단탈리안이 먼저 부탁한다면 기꺼이 소녀의 육체를 내줄 텐데……어때요?”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컷놈이 가운데 다리 함부로 놀려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뭐냐?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동시에 취하는 남자가 되라고? 미친 짓이었다. 단번에 정치적인 파국이 일어난다. 난 요단강행 특급열차 티켓을 자발적으로 끊고 싶지 않았다. “으음. 의외로 방어가 단단하네요.” 파이몬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혹시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 같은 유아 체형이 취미인가요? 여긴 꿈입니다. 소녀가 체형을 바꿔줄 수도 있사와요.”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바르바토스와 라우라, 유아 체형의 여자애들이랑 애인이 되어버렸지만 결코 내가 의도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어떤 빌어먹을 운명이 작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성취향을 갖고 있다. 정말이다. 제기랄. 파이몬이 입을 삐쭉였다. “뭐, 좋아요. 난공불락의 성채를 함락했을 때야말로 격조 높은 즐거움을 만끽하니까요. 바르바토스가 생애 처음으로 사귄 남자가 소녀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후후. 멋진 광경이와요. 기대하겠어요.” 제발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이제 확신했다. 산악파고 평원파고 상위 마왕들은 죄다 제멋대로에다 뇌수를 핑크색 페인트로 물들인 색정광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변태적인 SM 로리년이었고, 무소속 마왕이자 서열 제4위인 가미긴은 금발 마조히스트였으며, 눈앞의 파이몬도 지 옛날 애인 못지 않게 변태였다. 너희들이 왜 파벌이 갈렸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냥 다 같이 변태파라고 해서 새로운 당을 창설하지 그러냐? 장담해도 좋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마왕군이 통합될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마왕이란 년놈들은 죄다 그 모양 그 꼬락서니다……누누이 강조하건대 나처럼 착실하고 성실한 마왕이 어디 없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파이몬 님.” “예, 단탈리안.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지요.” 우리가 오른손을 마주잡았다. “더불어서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와요.” “……그거 참, 영광입니다.” 끈질기구만! 난 성욕을 절제할 줄 아는 남자였다. 냉철한 이성을 갖추었다. 파이몬이 아무리 꼬리를 흔들어봤자 넘어가지 않겠다. 다만 약간 궁금했다. 파이몬은 나에 대해 호감도가 낮았다. 성격을 보건대 그녀가 아무한테나 키스를 해댈 것 같지는 않았다. ‘상태창.’ 나는 혹시나 해서 파이몬의 상태창을 확인해보았다. 아마도 호감도가 낮아서 가장 기본적인 체력/공격/방어만 표시되겠지. 그 경우, 정말 무서운 가설이지만, 파이몬은 나까지 속여먹고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용사한테 그러했듯이 지금 나에게 연기를 하는 것일지 몰랐다. 하지만 나의 불안은 깔끔하게 깨졌다. ─ 띠링! ━━━━━━━━━━━━━━━━━━━━ 이름: 파이몬 종족: 마왕   소속: 파이몬 마왕군, 산악파, 해방동맹 속성: 악(-34) 레벨: 349   악명: 5354100 직업: 마왕(S), 던전운영자(A+), 대마법사(廢) 통솔: 300  무력: 224  지력: 107 정치: 448  매력: 572  기술: 349 호감도: 44 현재심리: ‘그냥 여기서 덮쳐버릴까요? 흐음.’ ━━━━━━━━━━━━━━━━━━━━ 이유를 모르겠으나 파이몬은 호감도가 44씩이나 되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파이몬이 호감도 올랐다는 알림창을 본 적이 없는데?’ 그나저나 능력치가 참 편중되었다. 정치랑 매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본인 말마따마 모략이 아니라 정략에 특화되었다는 게 여실하게 보였다. 하긴, 이런 정치력과 매력이 있었기에 마왕군 최대 파벌을 일군 것이겠지. ……심리상태가 무척 불길했으나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데자뷰가 느껴졌다. 나는 애써 진정하고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파이몬 님. 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겁니까?” “그건 또 갑작스러운 질문이네요.” 파이몬이 흐음, 하고 말했다. “글쎄요. 월맹군에서 연설할 때 보고 강렬하게 느꼈어요. 당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소녀의 아군이 되어줄 사람이라고.” “아, 그때입니까.” 연설전 도중이었나. 아마도 황녀를 깨부순 직후에 발생한 일이었다. 적어도 수천 개의 알림창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면서 저 사람 호감도가 올랐느니 이 사람 호감도가 올랐느니 떠오른 적이 있었다. 홀로그램창 수천 개를 일일이 확인해볼 수도 없어서 나는 대충 한꺼번에 꺼버렸다. 그중에 파이몬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알림창이 하나 있었는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더 이상 질문은 없지요? 좋아요. 그럼 당신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예? 소개라니요.”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파이몬이 뜻 모를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단탈리안.” 따악, 하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내가 눈을 떴다. 새하얀 공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앞는 마차의 천장이 까맣게 있었다. 밤이었다. 상반신을 허겁지겁 들었다. 마차 맞은편에서 라피스가 잠들어 있었다. 조용한 마차 안에 라피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내가 꿈에서 깨어난 것인가? 이상했다.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아주 짧은 찰나가 흐른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상쾌하게 숙면하고 일어났을 때처럼 머릿속이 청명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려 천천히 좌석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열고 나갔다. “어서오세요, 단탈리안.” 그곳에는 단정하게 흑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파이몬이 있었다.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파이몬의 뒤로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로브를 입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사제와 같이 그들은 장엄하고 정숙하게 섰다. 폐허가 된 성터. 모닥불이 꺼져 오로지 창백한 달빛만이 내리비치는 그 한가운데에서――파이몬은 마치 시간을 비껴간 성의 안주인처럼, 드레스 양끝을 공손하게 잡아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저희는 해방동맹(解放同盟). 유일무이한 인간계와 마계의 연합단체.” 처억. 파이몬을 따라 뒤에 기립한 자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세상에 살아숨쉬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 믿으며, 그리하여 이 세상을 근본의 형태로 되돌리기 위해 결의한 자들. 약속의 그날이 오는 순간까지 피와 땀을 다하여 혁명에 투신하겠노라고 결의한 동지들.” “…….” 나는 넋을 놓고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바라보기에 오른쪽에 있는 사람부터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깨끗하게 녹아들었다. 턱수염이 북실북실한 아인종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탈리안 전하. 소인은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 초원 엘프와 인간의 혼혈입니다. 해방동맹 모스크바 왕국 지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돈 코사크 기병대의 통수(統帥)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땅딸막한 난쟁이가 말했다. “소인은 자크 보놈. 녹색 턱수염 난쟁이족 출신이옵니다. 해방동맹 프랑크 제국 지부에서 지부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양날도끼 용병단을 이끌고 있습지요. 전하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사옵니다.” “반갑습니다. 소인은 와트 타일러라 합니다! 해방동맹 버니시아 왕국 지부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한 명씩 자신을 소개해나갔다. 모스크바 왕국, 프랑크 제국, 버니시아 왕국, 브르타뉴 왕국, 카스티야 왕국, 사르데냐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튜튼 왕국, 칼마르 연맹국, 폴리투니아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마지막으로 탁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소인은 안나 더 빗이라고 합니다. 해방동맹 총지부장이자 바타비아 공화국 지부장을 맡고 있지요. 바타비아 공화국의 13위원회 중 말석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총 열두 명. 대륙에 현존하는 모든 왕국에 그들은 뿌리박고 있었다. 누구는 거대 유목민족의 수장으로. 누구는 왕국의 고위관리으로. 누구는 공화국의 핵심 권력층으로. “…….” 파이몬이 말한 공화주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그것도 각 사회의 요직에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준동한다면 능히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지. 나는 그 위력을 상상하면서 할 말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파이몬이 입을 열었다. “소녀는 해방동맹의 수장. 서열 제9위의 마왕 파이몬입니다.”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입니다.” “단탈리안. 당신은 설령 죽음의 칼날이 목을 조여도 해방동맹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한 맹세 선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마법적인 계약이 걸려으리라. 파이몬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나는 게임에서조차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겠지. 내가 여태까지 가진 정보는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즉 온전히 나의 실력에 따라 생사가 결정된다. 그런 갈림길의 앞에서. “예. 맹세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해방동맹의 영원한 동지입니다. 단탈리안, 당신을 환영해요.” 미리 준비해왔는지 술병과 술잔이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피만큼 붉은 포도주가 잔을 채웠다. 나는 그들과 맹세의 건배를 나누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이젠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흑사병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기세가 약해졌다. 월맹군은 십 년이나 빠르게 발발했고, 역시 게임과 다르게 마왕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륙의 패자가 될 엘리자베트 황녀는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귀족과 농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혁명을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파이몬이 조용히 건배를 선창했다. 해방동맹의 구호였다. “혁명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혁명을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나를 포함하여 열네 명이 단숨에 포도주를 비웠다. 그리고 유리로 된 술잔을 바닥에 내리쳐서 깨트렸다. 마왕군의 관습은 이 조직에서도 유지되고 있었다. 쨍그랑, 하고 유리들이 맑게 깨지면서 달빛을 하얗게 반사했다. ‘평원파든 산악파든, 뭐든지 이용해주마.’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 * * 새벽이 다가왔다. 혁명동맹의 당원들은 사라졌다. 그들은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저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파이몬은 끝까지 남아 있다가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주었다. “혁명동맹은 인간계에만 지부가 있는 게 아니랍니다.” “마계에도 있군요.” “당신이 지옥의 대공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다니는지, 소녀는 알고 있어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즉, 지옥의 대공들에도 누군지 모르지만 공화주의자가 있었다. 파이몬과 바알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파이몬을 배웅했다. 나는 바윗돌에 앉아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새벽의 느긋함에 잠시 마음을 풀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라피스 역시 말없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지평선을 보고 있으리라.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아니, 이쪽이야말로 미안했다. 네가 감싸줘서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제 당연한 역할입니다.……라피스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었다. 다만 한 마디. “고마워.” “예. 감사합니다.” 그 정도 감사를 주고받으면 충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새벽의 미약한 햇빛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 매국노 챕터 END.   00151 폭군의 시대 =========================================================================                        “전황은 우리에게 극히 불리하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가 입을 열었다. 막사에는 제국의 장군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젊었다. 본래 제국군을 이끌던 노장들은 지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싸그리 전사했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들어온 것이 지금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젊디젊은 소장파 장수들이었다. 무표정하게 황녀의 작전 설명을 듣는 자. 진지하게 받아적는 자. 밀껍질을 씹으면서 아예 각탁에 두 발을 올린 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여미지 않은 사람조차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버릇없다며 지적하지 않았다. 이들은 순전히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므로. “마침내 청야전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여, 마왕군의 군단들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요격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탁, 하고 엘리자베트 황녀가 작전지도를 은막대로 두들겼다. “우리 인간군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녀의 말대로 마왕군은 구심점을 잃었다. 제2군단에서 제6군단까지 군단들은 서로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일정한 보급부대를 두지 않고 대부대를 운용할 경우 전형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보급품이 없으므로 현지에서 식량을 약탈해야만 했다. 부대는 잘게 쪼개어져 각자 살 길을 찾아나섰다. 그때 표정이 서글서글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지요, 전하.” “먼저 허락을 받고 발언하도록.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의용장.” “아차.” 청년이 모르고 까먹었다는 듯 자신의 금발 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아직 예에 익숙치 못하여……발언을 청합니다, 전하.” “허락한다.” “예. 마왕군이 찢어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 좋은 소식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인간군도 마찬가지이죠.” 청년의 발언에 몇몇 장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이 부족한 것은 마왕군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군도 거의 절대적인 식량난에 시달렸다. 용병들은 금화 대신 밀포대를 고용비용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각 국가의 군대는 하루가 멀다 본국에 보급을 요청해댔다. 이 상황에서 엘리자베트 황녀는 초강수를 두었다. ─ 청야전술을 명목으로 삼아 백성을 약탈하라. 군대에 자국의 민중을 약탈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이 시대, 아직 군대가 백성을 수호해야한다는 사상은 희박했다. 병사는 누구보다도 왕의 병사이며,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 역시 백성이기보다 왕조였다. 그러나 황녀를 따르는 무리에는 공화파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들은 황녀의 명령에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 시민을 공격하는 군대에는 존재의의가 없습니다! ─ 인류를 지키지 못하는 군대에게도 존재의의가 없지. 대답하라. 지금 우리에게 청야전술 이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는지. 그렇다면 본녀 역시 결정을 물리겠다. ─ ……. 황녀의 인재들은 유능했다. 유능했으므로 별다른 답안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이곳에 가만히 있다가는 사악한 마귀무리들에게 처참히 죽는다’라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말이 이주이지 강제 퇴거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죽더라도 고향땅을 지키다 죽겠노라고 촌민들이 반발했으나, 황녀는 단호했다. ─ 저항하는 이는 군법으로 다스린다. ─ 전하! ─ 경. 본녀에게도 심장은 있다. 신하가 황녀의 눈빛에서 거무튀튀하게 눌어붙은 고통을 발견했다. 그것에 신하는 간언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백성을 위하던 주군이었다. 그녀에게도 인간의 심장이 있었다……. 황녀의 군대는 합스부르크 중부 일대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마왕군의 추격에는 게릴라로 대응했다. 최대한 길게 지연전을 강요하면서, 황녀는 중부 일대에 밀알 한 톨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청야전술을 펼쳐나갔다. 한 발자국 더 뒤로. 한 발자국만 더 뒤로――. 마침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 제국의 수도에 이르렀다. “현재 마왕군의 군단들은 이곳 제도(帝都)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제2군단이 일주일 뒤쯤에 먼저 도착하고, 그 뒤로는 대동소이하게 줄줄이 도착하겠죠. 으으음. 그거, 곤란하지 않을까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라 불린 청년이 볼을 긁적였다. “비록 적들이 당장은 뿔뿔이 흩어졌지만요. 저들한테는 제도라는 명확한 목표 지점이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모여들 거란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군에는 그런 하나의 목표가 없죠……글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제도를 지키는 데 얼마나 열심일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장군이 손을 들었다. “발언을 청하옵니다.” “허한다.” “예, 전하. 송구하오나, 타국의 군대는 우리에게 보급의 책임을 떠맡기리라 사료되옵니다. 마왕군은 지금까지 각지에서 보급품을 충당하고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보름에서 한 달은 버틸 재량이 마왕군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하고 장군이 말했다. “우리 제국군에는 그만한 식량이 없사옵니다.” “무슨 소리인가. 제국군은 아직 석 달을 더 버틸 수 있노라.” “……제국군만을 고려한다면 그러할 것이옵니다.” 장군이 침을 삼켰다. “허나, 제도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원군이 필수……우리에게는 타국의 군대까지 먹여살릴 여유가 전혀 없사옵니다. 고로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선택지가 단 한 가지밖에 없나이다.” 황녀가 흥미로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게 무엇인가?” “제도를 지켜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야 하옵니다.” 장군이 목소리에 힘을 넣어 말했다. “마왕군 군단들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동시에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각 어느 정도 시간차를 두고 도착할 터……그 시간의 틈새를 노려,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적을 각개격파합니다.” 각개격파한다. 그것도 마왕군의 다섯 군단을. 오로지 그것만이 제도를, 더 나아가 제국의 명운을 지키는 방법. “…….” “…….”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들은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작전인지 잘 알았다. 현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아슬아슬하게 일만 명의 군세를 유지했다. 반면에 마왕군은 군단 하나하나가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렀다. ‘으음. 불가능하지 않을까.’ 금발의 청년,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병사 한 명과 오크병사 한 명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강력했다……즉, 설령 마왕군 군단의 병력이 수천에 불과하더라도 그 전력은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낙관적으로 평가해도 무승부에 불과하겠지. ‘아군과 전력이 똑같은 적군을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이기라니……아이고야. 여신님들이 도와줘도 그건 무리라고요, 주군.’ 쿠르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월맹군과 인간연합군이 처음으로 격돌한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실로 잘 싸웠다. 분투했다. 칭찬해도 좋았다.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전술의 천재였으며, 그 천재성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거의 모든 인간군이 패퇴를 거듭할 때도 황녀가 이끄는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했다. 그녀가 연설전에서 입은 타격을 고려하자면 대단한 위업이었다. ‘세상엔 그래도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잖아요―.’ 엘리자베트 황녀조차 마왕군을 차례대로 요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쿠르츠는 확신했다. ‘큰일이야, 큰일. 하하.’ 그는 조국이 멸망하는 것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인류가 멸망할지라도 그는 ‘아이고야, 큰일이네’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 것이었다. 그에게 어차피 국가라느니 인류라느니 하는 것은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런 말장난은 대부분 심각하게 지루했다. 다만 궁금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녀 전하?’ 그가 슬쩍 황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황녀는 쿠르츠가 알기로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천재였다.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었다. 쿠르츠에게――황녀는 인류의 정점이었다. 제일 가치가 높은 인간이었다. 세계의 정점은 이 사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쿠르츠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황녀가 불가능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좋다. 쿠르츠는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기꺼이 황녀와 함께 최전선에 뛰어들어 오크의 모가지를 베어버리고 고블린의 가슴을 으깨버릴 것이다. 어쩌면 거기서 자신은 죽으리라……어쩌면 황녀조차 죽고, 수도가 함락당하고, 인류가 멸망하리라……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인류의 한계인데. 겸허하게 결국 인간이란 그 정도 종족이었노라고 받아들일 일이었다. ‘설마, 하고 생각하지만요. 절망하거나 한숨을 쉬고 계시진 않겠지요, 전하.’ 그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 기대도 되었다. 자그마치 인류의 정점이 절망하는 표정이라니! 그야말로 인류 자체의 절망이요 고독이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예술작품이며, 그렇기에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리라. 쿠르츠가 황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 그는 소리없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이라고……이럴 때?’ 황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감정의 파편조차 담기지 않았다. 지극히 냉정한 무표정만이 그곳에 자리했다. ‘말도 안 돼.’ 쿠르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황녀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민중을 사랑하는지, 더 나아가 인류를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요컨대 지금 제국군이 마주하는 상황은, 황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송두리째 파탄나버릴지도 모를 위기였다. 누구나 자기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파괴되는 걸 두려워한다. 어쩌면 인간은 목숨의 위험 앞에서 초연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한테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예컨대 사제에게는 여신이. 그렇다. 우습지만 여신이 눈앞에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그럴 때도 사제는 무표정할 수 있을까? 효자의 눈앞에서 어버이를 고문하고, 충신의 눈앞에서 임금을 도륙낸다. 그때도 사람이 무표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다. 헌데 황녀는 덤덤했다. 모든 것을 포기해서 덤덤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어하기에 덤덤한 것이었다. 그런 초인적인 인내와 절제가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고작,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에게? ‘무언가가 있다!’ 쿠르츠의 등골에 전류가 질주했다. ‘전하에게는 마왕군을 격파할 계책이 있는 거다!’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은 비단 쿠르츠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황녀가 침묵하고 있자, 장군들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약간 당황하면서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 와중에 황녀가 입을 열었다. “마왕군을 저지시킬 방도가 본녀에게 있노라.” 높낮이가 전혀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제도를 포기한다. 합스부르크의 장병들은 전군, 즉시 제도에서 떠나 후방으로 퇴각한다.” 경악하는 숨소리가 막사 곳곳에서 터졌다. 쿠르츠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발언을 요청하는 것도 잊었다. “저, 전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수도를 포기하라니요?” “다시 한번 말하지. 오늘부로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제도 빈드보나를 버린다.” 틀림없는 확인사살에 제장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전하! 불가하옵니다!” “제도는 합스부르크의 심장입니다! 심장 없이 살아숨쉬는 국가는 없습니다!” 그러나 황녀는 끄떡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해나갔다. 아니, 끄덕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었다. 쿠르츠는 황녀의 입가에 미약해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한줄기 미소가 떠오른 것을 발견했다. “제도가 우리 합스부르크의 심장이라면, 그 심장을 옮기겠다.” “소인, 도저히 전하의 의중을…….” “모든 백성을 퇴거시켜라. 강제로 이주시켜라. 더불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역대 황제들의 묘를 파헤친다. 그리고 마왕군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기 위하여――.” 황녀가 말했다. “퇴거 이후, 수도를 모조리 불에 태워버린다.”   00152 폭군의 시대 =========================================================================                        압도적인 폭거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오백 년의 영광을 간직한 제도를 버린다. 그 영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수도의 시민들을――마치 들짐승을 내쫓듯이 이주시킨다. 더 나아가 역대 황제의 무덤을 파헤쳐서 재정에 보탠다. 폭군. 쿠르츠가 침을 삼켰다. 막사에 앉은 장군들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단어가 스치고 있었다. 싸늘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병사를 얼마나 현명하게 아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쿠르츠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료부총감, 비텐마이어 남작이 있었다. 아직 젊은데도 머리가 하얗게 탈색하여 유명한 자였다. 눈가에 항상 피로가 가득하여 거무튀튀했다. ‘범생이 장군님이잖아.’ 쿠르츠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곳에는 황녀파만 자리하지 않았다. 황태자파였던 이, 제2황자파였던 이, 파벌싸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던 이까지, 각계각층의 인재가 모였다. 그중에서도 비텐마이어 남작은 열렬한 황태자파에서 황녀파로 전향한 청년이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아무래도 비텐마이어 남작이 껄끄러웠다. 남작은 조금 지나치게 도덕적이었다. 여태까지 여자를 한 명도 사귀지 않았다는데, 도대체 남자로 태어나 무슨 재미를 보는 것일까 쿠르츠는 의심스러웠다. “전하께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시고 누구보다 늦게 주무십니다. 병졸들이 굶주림에 신음하는 이때, 타국의 지휘관들은 돼지를 구워삶고 향락을 즐기나 오직 전하께서는 병졸과 똑같은 음식을 입에 대십니다.” “자그마한 위선이다.” 황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감탄했다. 자기가 베푼 선행을 당당하게 위선이라 칭한다. 세상에 어느 지도자가 그럴 수 있겠는가. 바로 자신의 위선을 위선이라 부르는 곳에서 진정한 선(善)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쿠르츠는 알고 있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말했다. “예. 전하께선 화려한 군복을 거절하고 평사제처럼 헤지고 검은 옷을 입으십니다. 막사의 침구 또한 하급장교와 같은 종류……물론 소인은 그것이 일종의 보여주기식 군정(軍政)임을 압니다.” “비텐마이어 남작!” 늙은 장수가 노호를 터트렸다. “됐다.” 황녀가 오른손을 들어 장수를 제지했다. 계속 말하라. 황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모든 진실에 약간의 거짓이 섞였듯, 모든 거짓에도 약간의 진실이 섞였다고 소장은 믿습니다. 그 진실됨과 거짓됨을 능수능란하게 조정하는 것……전하께서는 그것을 위선이라 부르실지 모르겠어도, 소장은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군주의 덕목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니, 범생이가 제법 좋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쿠르츠의 눈빛이 달라졌다. 범생이 비텐마이어는 황녀에게 수도를 버리면 안 된다느니 제국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느니 정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남작이 말했다. “제 견식이 짧을지언정 감히 단언합니다. 전하께선 누구보다 군주다우십니다. 그런 분께서 폭군의 행위를 당당하게 선언하셨다……틀림없이 어떤 이해득실이 거기에 담겨 있겠지요. 소장은 전하께서 이해득실을 어떻게 따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타 제장 여러분께서도 저와 마찬가지이리라 믿습니다.” 남작의 말에 막사 안 분위기가 일변했다. 황녀의 폭언을 성토하는 공기에서 어째서 현명하신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는지 들어보자, 하는 공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저마다 진지한 낯빛으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와. 역시 범생이야.’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솔직히 감탄했다. 남작은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앞장선 것이었다. 먼저 황녀의 덕성을 비아냥거렸다. 약간의 무례를 저지르면서. 그러자 황녀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분노했다. 이것만으로 막사의 공기가 약간 변했다. 직후에 비아냥이 사실은 칭찬이었음을 밝혔다. 적절하게 진실을 보여주되 또한 적절하게 거짓을 감추는 것, 그것이 군주의 덕목이라고 말이다. 이곳에 모여든 자들은 전부 세상을 현명하게 바라볼 줄 알았다. 정말로 그것이 군주의 덕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은연 중에 비텐마이어 남작한테 동의했다. 그리고 똑같은 의문을 내던지게 되었다……왜 황녀 전하께서는 척 들어도 자충수에 불과한 작전을 천명했는가? 거기에 무슨 이득이 담겨 있는가? ‘너무 정석적이라 오히려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라니까.’ 쿠르츠는 범생이 덕택에 분위기가 일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쿠르츠 역시 충격에서 이제 충격에서 헤어나와 황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말했다. “비텐마이어 남작. 본녀의 질문에 답하라. 수도를 버림으로써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어떤 피해를 입게 되는가?” “존명. 수도를 포기하는 작전에는 단기적인 피해, 중기적인 피해, 장기적인 피해, 총 세 가지 범주의 피해가 있습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먼저 단기적인 피해를 거론하자면 당장 민심이 이반하리라는 것입니다. 청야전술을 펼침으로써 이미 절반에 가까운 국토가 소거되었습니다. 고향을 잃은 백성 중 상당수가 수도 근처에 모여들어 난민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도 인근의 민심은 이미 극도로 불안정합니다……여기서 제국의 상징인 수도마저 버리겠다 공언하면, 더 이상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다른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백성의 반란이 가장 두려웠다. 평소에야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가히 좋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마왕군이 다가오고, 내부에선 백성들이 준동합니다. 거기에다 아직 적게나마 잔존하는 황태자파와 제2황자파가 편승합니다. 제국은 멸망합니다.” “중기적인 피해는 무엇인가.” “제국의 행정이 거의 완전히 파괴됩니다.” 남작이 진지하게 말했다. “행정이란 단순히 신료와 신료 사이에서 처리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디로 보고가 올라가야 하는가. 어디에서 일을 집단적으로 처리하는가. 어느 경로를 거쳐서 정책안이 펼쳐지는가. 그 모든 것이 정해진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수도를 버리고 떠날 경우……설령 반란군을 진압해낼지라도 제국은 한동안 지극히 혼란스러운 정황에 직면합니다.” 과연 군정을 맡은 막료부총감다운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황녀가 물었다. “장기적인 피해는 무엇인가.” “인간이 더 이상 마왕군에 저항할 힘을 잃습니다. 그 저주받은 마왕이 연설을 한 이후 반년……우리 제국군은 그나마 사정이 낫습니다만. 타국의 군대에선 이미 공공연하게 장교와 병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항명은 분란 수준에도 끼지 못할 지경이라고.”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병사가 장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사태를 누구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들은 병사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최전선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유시 따위에 맞아 전사한 장군도 적지 않았다……. 재능과 천운을 겸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곳에 앉는 일조차 불가능했으리라. 비텐마이어 남작이 자그맣게 숨을 쉬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이 수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천도인가. 백성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제국이 오로지 황실을 유지시키기 위해 도주한다……국가의 위엄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합스부르크만이 아닙니다. 대륙의 전 백성이 그 광경을 보고 실망할 것입니다. 어차피 귀족이란 그런 것이라 말이지요.” 마왕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결국 인간은 명분에서 밀립니다, 하고 남작이 말했다. “소장은 제장 여러분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자고 건의하고 싶었습니다. 백성들은 대피시킵니다. 제국의 황실과 귀족은 전원 수도에 남습니다. 그중 도망치려는 귀족도 있겠습니다만, 강제로 붙잡아둡니다. 그리고 마왕군과 맞섭니다. 제국의 귀족은 모두 전사하겠지요. 제국도 멸망할지 모릅니다.” “…….” “하지만, 인류의 긍지는 남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최선의 한수라고 생각했다. 황제에서 기사까지 모든 귀족이 수도를 지키다 전사하는 것이었다. 그 숭고한 멸망에 다시금 귀족과 평민은 단합하겠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단지, 이번에는 살에 해당하는 것이 자신들……그뿐이었다. 이것 이외에 달리 방법이 있을까. “훌륭한 의견이었다. 비텐마이어 남작.” “황공합니다.” “허나 세 가지 피해 모두, 본녀는 극복할 수 있다.” 제장들이 놀랐다. 황녀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좌중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눈앞이 아니라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마왕 단탈리안은 본녀가 패륜을 저질렀다 말했다. 본녀의 평판은 곤두박질쳤다. 그런데도 제장들은 본녀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주었다. 고로, 그대들에게는 진실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노라.” “…….” “본녀는 합스부르크의 제4황자……내 남동생인 로베르트를 살해했다.” 막사가 얼어붙었다. 다들 믿기지 않는 얼굴로 황녀를, 그리고 주변을 쳐다보았다. “그럴수가……전하, 그게 무슨…….” 누가 말한 것인지 쿠르츠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전원을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녀는 볼 수 있었다. 허나 내가 보는 것을 대다수의 타인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판단했다. 제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막사가 조용해졌다. 불길하게 조용했다. 아직 합스부르크의 주인은 황제였다. 황제는 그러나 황녀파에 의해 유폐되었다. 제2황자도 외딴 탑에 감금되어 있었다. 현재 엘리자베트 황녀는 사실상 제국의 통수권자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가 입에 멸망을 담았다……. “마왕 단탈리안이 한 말 그대로이다. 귀족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책임도 의무도 없다. 정책은 그저 자기 파벌에 이익이 되면 좋을 따름. 황실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간신을 대우하며, 충신은 배척당하거나 시골 영지로 추방당한다. 호칭만 제국이지 그 실상은 썩어 문드러진 송장.” 황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나는 먼저 후계자 다툼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당시 황가에는 본인을 제외하고도 계승권자가 여섯 명이나 있었다. 지나치게 많았지.……그중 두 명을 내가 처리했고, 또다시 두 명은 루돌프 오라버니가 처리했다.” “무슨……!” 다시 한번 막사가 경악으로 진동했다. 황녀가 자조했다. “역시 같은 핏줄이었다. 오라버니는 나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한 가지는 똑같았다. 똑같이 패륜아였다. 오라버니도 나도, 필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져 신음할지언저.” 황녀의 자조 섞인 얼굴 너머에는 고독이 서려 있었다. “로베르트……나의 동생은 외척이 강했다. 브라운슈바이크 대공이 뒷배로 서 있었다. 대공은 필히 로베르트를 앞장세워 황위쟁탈전에 뛰어들 터. 강력한 외척 따위 제국의 안위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고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로베르트를 죽였다.” “…….” “순수한 아이였다. 제국이니 외척이니, 그런 것을 아직 접하지 않은 아이였어. 로베르트에게 나는 단지 친절한 누이였다. 즉, 로베르트는 합스부르크의 제4황자로서 죽은 게 아니었다. 나, 엘리자베트의 남동생으로서 죽었다…….” 황녀가 메마르게 웃었다. “실로 마왕이 옳게 말했다. 나는 역겨운 쓰레기 살인자이다. 오로지 산송장 제국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괴물. 그것이 내 본질이다.”   00153 폭군의 시대 =========================================================================                        장군들 사이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유능한 귀족이었다. 달리 말해, 경쟁자들을 짓밟고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정당하게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남몰래 가족을 죽인 이가 드물지 않았다. 하물며 엘리자베트에게 걸린 작위는 황제였다. 제국의 안정인가, 남동생의 생명인가. 고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린 혈육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귀족은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죄악에 대해 변명하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권력을 바라보며 질주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패악을 저질러 이윽고 견디지 못하여 쓰러진들, 결국 그것뿐인 삶이다. 피할 수 없다면 짊어진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또한 그러했다. “나는 왜 패륜을 고백했는가. 그대들은 의문스러울 터. 여기서 선언하노라. 본녀는 앞으로도 패륜을 저지를 것이니라.” 그녀는 바닥까지 가라앉은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수도를 소거한다. 허나 소거를 명령하는 것은 본녀가 아니다. 황제 폐하이다.” “폐하께서……? 설마 폐하께서 이번 작전안을 제시하셨습니까.” 비텐마이어 남작이 눈썹을 찌푸렸다. 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모든 것은 본녀의 독단. 오늘밤, 나는 친위대를 이끌고 황궁을 급습한다. 아바마마께서는 이미 유폐되어 있다. 간단하게 신변을 접수한다. 그리하여 명령서를 위조한다.” “위조!” 남작이 헛숨을 들이켰다. 여타 제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바마마뿐만이 아니다. 제2황자, 페르디난트 오라버니의 신변도 전격적으로 확보한다. 황제가 수도를 불태우라 명령하고 제2황자가 그것을 실행한다. 민심이 격동하겠지. 그때, 유일하게 본녀가 수도를 지켜야만 한다고 항의한다.……물론 본녀는 아비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 효녀이다.” 엘리자베트가 코웃음을 쳤다. “제국의 긍지를 사수해야 한다, 백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무효.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결국 아버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항의하는 뜻으로 황녀 본인은 두문불출한다.” “……민중의 분노를 전부 황실로 돌리겠다는 말씀입니까?” 비텐마이어가 물었다. 그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포함하여 모든 장수가 똑같은 심정이었다. 황녀가 말했다. “부유한 평민을 약탈하라. 상단도 약탈하라. 황릉도 파헤쳐라.……그러나 여기 모인 제장들은, 그렇게 모인 재화를 은밀하게 백성들한테 되돌려준다.” “즉……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귀족과 장교가 약탈하는 사이……저희, 황녀 전하의 수하들이 민심을 독차지한다…….” “그렇다.” 막사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까 전과 같았다. 그러나 아까 전의 정적이 막사에 가라앉았다면, 이것은 막사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의 핵이었다. “허나, 황녀 전하. 그럼 저희는 폐하와 황자 전하를 버림패로 쓰게 되나이다.” 비텐마이어가 조심스럽게 고했다. “황실의 위엄이 손상된다는 점에서는 악수입니다.” “본녀가 말하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계속하여 패륜을 저지를 것이라고.” 설마, 하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생각했다. 황명을 위조한다. 거기에 더해 황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이미 훌륭하리 만치 대단한 패륜이었다. 황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시 패륜을 저지르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수도를 버리고 퇴각하는 즉시, 본녀는 황자를 참살한다.” “……!” “민심은 천심. 천심을 거스른 자에게는 마땅히 천벌이 주어져야 할 터. 나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하늘을 대신하여 둘째 오라버니, 아니 죄인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를 벌한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제정신입니까, 하고 쿠르츠는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당신은 어린 시절에 남동생들을 죽인 일로 아직까지 괴로워하지 않는가. 황녀의 비밀 공작원이자 측근인 쿠르츠는 알고 있었다. 황녀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이따금 천막 너머까지 신음이 들려온다. 로베르트. 미안하다, 로베르트……대개 그런 소리였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육친을 살해하겠다니. ‘부서지고 말 겁니다, 주군.’ 십중팔구 황녀의 마음은 죽어버린다. 육체도 견디지 못한다. 오러를 쓰는 제3급 검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과로사했을 황녀이다. 제아무리 시대의 괴물이 되고자 결의한 황녀일지라도 어찌 마음이 없겠는가. 설령 겉보기에 멀쩡할지라도 안쪽에서 천천히 부식하여, 마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신전이 먼지로 바스라지듯이, 쓰러질 것이다. 아직 황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 황제를 겁박하여 제위를 물려받는다.” “강제로 양위를…….” 패륜에 패륜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직후. 수도의 피난민들을 한데 모은 곳에서 소리높여 천명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합스부르크 제국은 멸망했으며,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탄생했노라.”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 그 낱말에 담긴 파괴력에 장수들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방금, 다른 누구도 아니라 제국의 최고 통수권자가 스스로 제국을 끝장내겠다고 말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핏줄을 끊어버리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니요. 거기에 어떤 이점이 있습니까!’ 쿠르츠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청야전술을 확대한다. 수도까지 버린다. 황자를 말살하고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야 정치적인 이득이라손 쳐도, 거기까지 초강수를 둘 만큼 황위에 가치가 있는가. “전하, 무모합니다! 지나치게 부담이 큽니다.” “공화국이라니요. 제국의 역사를 등지면서까지 공화국을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통촉하여주십시오!” 막사가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었다. 부디 재고해달라. 의미를 모르겠다. 차라리 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며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낫다. 장수들은 저마다 진심이 되어 소리쳤다. 쿠르츠는 소란의 한가운데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황녀 전하가 내놓은 작전이었다. 일견 무모해보여도 그 속내는 누구보다 음험할 터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수도가 없어지는 이상 행정력과 경제력이 일순 저하됩니다. 간신히 민심은 다독인다 해도, 국력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져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군 개인적으로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간다……도대체 제도를 소거하는 작전에 어떤 이점이 있는가……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지면서도, 공화국을 설립하는 이유……다른 왕국들과도 사이가 악화일로로 뻗을……. ‘잠깐――타국들이라고?’ 그 순간, 전류가 쿠르츠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있다……! 있습니다, 수도를 버리고 공화국을 선언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막대한 이익이 있습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입을 제어할 수 없었다. 멋대로 경악성과 함께 말이 튀어나왔다. 제장들의 시선이 쿠르츠한테로 쏠렸다. 그 시선을 알아차릴 정신머리도 없이, 금발의 젊은 의용대장은 잔뜩 달아올랐다. “먼저, 민심과 군심을 동시에 다독일 수 있습니다……민심의 불안은 청야작전 및 수도를 퇴거시킨 데서 비롯하고, 군심의 불안은 그 저주받을 마왕이 퍼트린 사상에서 비롯합니다. 황자를 처벌하는 동시에 신생 공화국을 건국한다……그렇다면 민심과 군심은 한꺼번에 황녀 전하를 지지하게 됩니다.” “슐라이어마허 장군, 민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반박했다. 그도 흥분하고 있었다. “당장 국가의 행정과 경제가 파탄납니다.” “행정……과연, 행정은 다소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하지만, 행정과 경제는 오히려 전화위복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이라니, 무슨 말씀을…….” “생각해보세요. 비텐마이어 남작.” 쿠르츠가 열광하며 말했다. “현재 마왕군이 우리 인간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저들이 대의명분을 쥐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수호한다는 우리의 명분을 깨부수고, 자신들이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해방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합스부르크가 공화국임을 천명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왕군은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쳐들어오더라도, 그건 자신들의 명분이 한낱 명분에 불과한 거짓임을 천하에 알리는 꼴이지요.” “……마왕들이 고작 명분에 연연하리라 보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전황은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마왕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쿠르츠의 입가에 희열이 번졌다. “집단으로 군을 유지하지 못해서 군단 단위로 분리된 마왕군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현재 우리 수도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식량이 부족한데도 진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 하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식량을 보충할 속셈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도를 버렸습니다……적들은 식량을 보급할 수 없습니다……더 이상 우리를 쫓아올 수 없게 됩니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인세에 지옥도를 펼쳐놓은 청야전술이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마왕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할 겁니다. 장렬하게 전사한답시고 우리의 육신을 그들에게 고깃덩어리로 헌상해봤자, 그들에게 이득이 될 뿐입니다. 수도를 버려야 합니다.” “슐라이어마허 장군, 아직 제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의 행정과 경제는 어찌할 계획입니까.” 쿠르츠가 미소를 지었다. 거기엔 약간의 광기마저 담겨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남작. 우리 합스부르크는 공화국이 됨으로써 마왕군을 저지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마족에 대항하여 인류의 방파제로 거듭납니다.” “……!” “현재 왕국들은 월맹군을 막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합스부르크가 공화국이 되어 마왕군의 명분을 앗아간다……공격하지 못하게 만든다……열국들은 우리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쿵,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는 눈과 입을 크게 떴다. “그런가. 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는가!”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합스부르크는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멸망하면 대륙의 나머지 국가도 무너진다. 마왕군에 맞서기 싫다면, 왕조를 지키고 싶다면 우리 공화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제한으로 지원하라.” “합법적인 협박……배수의 진을 역이용한다…….” 비텐마이어 남작이 신음했다. 이쯤에 이르자 다른 장군들도 서서히 작전을 파악했다. 그들은 그리고 흥분의 대열에 합류했다. 황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비텐마이어 남작은 세 가지 단점을 지적했다. 민심의 이반, 행정과 경제의 파괴, 마지막으로 인류의 명분이 사라지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트 황녀가 계획한 대로 굴러가면 세 가지 단점이 전부 극복된다. 민심은 회복된다. 더불어 군심마저 회복된다. 행정과 경제는 타국의 무제한적인 원조로 극복하며, 마지막으로,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인류의 명분을 지킬 뿐만 아니라――인류의 수호방패, 인류의 명분 그 자체가 된다. 본래 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뀌는 것 따위를 대륙의 열국이 인정할 리 없다. 지금은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열국이 그것을 바라고 있다. 월맹군의 진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어느 왕실 하나가 희생하기를 열국의 군주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다. 민중. 귀족. 왕족. 그야말로 전 인류가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탄생을 축복할 것이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고개를 돌렸다. 제장들의 떨리는 시선도 황녀에게 쏠렸다. ‘언제부터입니까.’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루돌프 황태자가 잡혔을 때입니까? 부르노의 연설전에서 패배하셨을 때입니까? 브르타뉴의 여왕을 배웅하셨을 때입니까? 도대체……언제부터 수도를 버리고, 새로이 나라를 세우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까.’ 엘리자베트 황녀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빛났다. “어리석다! 그걸로 끝인가!” 그녀가 노호를 터트렸다. 열일곱 살의 소녀가 내뱉은 일갈에 장군들이 움찔했다. “이제부터 제장들은 단순히 합스부르크의 일개 장군이 아니라, 최전선에서 인류를 수호하는 전사가 된다. 우리가 무너지면 열국이 무너진다. 우리가 패배하는 것이 곧 인류가 패배하는 것이다.――그 책임을, 제군들은 깨닫고 있는가.” 황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에게 더 이상의 분열은 용납되지 않는다. 천민에서 황족에 이르기까지, 군인에서 상인, 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단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 장차 우리 조국이 될 국가의 정체이다!” 그녀가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녀의 머리만큼이나 장검은 은빛으로 빛났다. “페르디난트 황자를 처단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제국을 좀먹은 간신들을 처단한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부패를 처단하라. 백성들에게 보여라. 이 나라에 당신의 목숨을 헌신할 가치가 있노라고.” 각탁에 둘러앉은 장군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동자를, 엘리자베트 황녀가 바라보았다. “황태자파와 황자파를 처단하면 그 빈자리에 그대들이 들어가게 된다. 앞으로는 그대들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역인 것이다. 그대들에게는 실력이 있으며, 실력을 받쳐줄 민심 또한 함께한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수도의 약탈을 방관한다. 약탈된 물품을 백성들에게 돌려준다.”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한다. 앞에서는 누구보다 고귀한 것처럼 행동한다. 거짓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지옥도를 펼쳐낸 악마들이 도리어 천국의 수호자가 된다.――그 역설에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전율했다. 황녀가 선언했다. “오늘. 바로 이 시간부터, 우리는 전 인류와 전 역사를 속인다.”   00154 폭군의 시대 =========================================================================                        * * * ─ 다행이야.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 아름다운 소녀였다. 아름다움이라든지 소녀라든지 남자는 그런 단어가 쑥스러웠다. 남자가 입에 담기에 적당한 낱말이 아니다. 다소 생각이 난폭했지만, 그만한 난폭함을 갑옷처럼 입고 다녀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였다. 남자는 마족 중에서도 긍지 높은 호족(虎族)의 일원이었다. 전쟁터에서 백 년을 뒹굴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기사의 칼날에 심장이 뚫려 즉사했다.……틀림없이 그랬을 터. 어째서 눈앞에 소녀가 비추고 있는가? 소녀의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고여 떨어졌다. ─ 살아나서……진짜, 다행이야. 눈물은 분명히 남자의 뺨에 떨어졌다. 그는 감촉이 낯설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무언가가 떨어지더니 자신의 뺨에 부닥쳤다, 그 정도 감상만이 남았다. ─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미안해……. 소녀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되었다. 곤란하다, 하고 남자가 생각했다. 이제 슬슬 기억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는 주군이었다. 아름다운 긍지를 가진 주군. 그 신념의 끝까지 함께 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안을 뛰어나와 소녀의 군기(軍旗)를 짊어지었다. ─ 소인 때문에 우시는 것입니까, 전하? ─ 아니야. 물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그녀가 웅얼거렸다. 소녀는 더 이상 얘기할 수 없었다. 울음에 목소리가 잡아먹혔다. 곤란하다, 하고 남자가 재차 생각했다. 자신이 불민하여 그만 소녀를 울려버린 것 같았다. 군주를 울게 만들다니. 빼도 박도 못하고 신하 실격이었다. ─ 나, 너의 죽음을 욕보였어. 전사의 신념을 모욕했어. ─ 무슨 말씀이온지? ─ 넌 훌륭하게 싸우다 훌륭하게 죽었어. 그대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야말로 전사인 너에게 어울리는 최후였어. 하지만……나는 너를 되살렸어. 미안해……. 남자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일찍이 자랑스럽게 구릿빛을 흩날리던 오른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르게 썩어문드러진 시체의 손등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가, 하고 남자가 생각했다. 나는 죽었으며 다시 살아났는가……. ─ 너의 삶과 신념, 죽음까지 모욕했어. 미안해……정말로 미안해……. 가로되 전사란, 평생 우직하게 달려가다 한점 의혹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자. 소녀는 그런 자들의 군주였다. 전사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소인이, 다시 필요해지신 것입니까? ─ 응. 미안해. 지금까지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멍청한 꼬맹이였나봐. 소녀가 웃었다. 입끝이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넘치는 얼굴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간신히 유지되었다. 엉망진창이었다. ─ 너희가 없으니까 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아. 너희의 함성과 너희의 웃음소리가 없는 대기는 나에게 그저 차가울 뿐이었어. 미안해. 내 이기심을 위해서……다시 한 번만, 살아줄 수 있을까? 눈앞의 소녀가 의외로 마음이 여리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언젠가 동료들끼리 몰래 얘기한 적도 있었다. 매우 불경스러운 생각이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주군께선 차라리 마왕으로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 모른다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속일 줄 모르는 분이었다. 마왕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며, 마왕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했다. 이런저런 마왕들이 권력을 만끽할 때 소녀는 전투대낫을 치켜들고 오직 앞으로, 앞으로를 외쳤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산송장이 되었을 자신이 미소 같은 것을 지을 수 있을까. 자신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소녀에게 이제 그만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반하여 언제까지고 전사로서 살겠다며 다짐했으니까. ─ 백 년 전에, 이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군을 보필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만……소인은 운이 좋군요. 삶이 끝나고도 주군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주군.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도, 두 번이 아니라 백 번, 천 번이라도. 소인 울라인은 오직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아달라고 남자는 부탁했다. ─ 저희의 자랑스러운 주군, 바르바토스이시여. 소녀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상이 구겨지더니 이윽고 소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 전처럼 얌전하게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었다. 사방에 다 들리도록 처절하게 울어재꼈다.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서였다. ─ ……. 남자는 자신의 손이 무척 흉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관두었다. 그는 이제 좀비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소녀의 백발은 무척 찬란했다. 지고한 예술품을 더럽히는 짓 따위 사내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앞으로 영원토록, 자신은 소녀의 머리조차 쓰다듬지 못하겠지. 남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못내 씁쓸했다. 덥썩. 그때 무언가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소녀가 자기 손을 겹쳐온 것이었다. 남자가 놀랐다. 그러고보니, 주군께선 우리 마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아셨다. 소녀는 엉엉 울면서도 기어코 남자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곤란하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른손을 꾹 쥐었다. 여전히 온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온기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무런 손실 없이, 그대로 여기 이곳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원 오백 명. 그들은 칠흑처럼 어두운 갑옷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진실은 달랐다. 산송장이 된 육신을 주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여린 주군은 자신들의 몸을 볼 때마다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싫었다. 같은 군주를 두 번 섬기게 된 이들은 자랑스럽게 검을 들어올렸다. ─ 자아. 나아가자 형제들이여, 발퀴레(Walküre)들이여. ─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이리니. 여기 우리, 죽었기에 죽을 도리 없으며, 죽지 않기에 패주 또한 영원토록 모를지어다. ─ 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발할라는 바로 이곳 지상에 있나이다. 주군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예전처럼 농담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죽음의 기사들은 만족했다. 그렇다. 그들에게 또 다른 천국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군이 웃을 수 있다면. 그녀의 곁에서 싸울 수만 있다면 바로 이곳이 천국이었다. 여신들께서 운명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아니하여 주군께서 쓰러지시는 날, 주군의 마법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자신들도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 동료, 더불어 주군과 함께 여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충분했다. 바랄 게 없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빌어먹을 애새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 * “…….” 죽음의 기사 울라인이 침묵했다. 만약 자신이 진짜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겠지, 하고 그가 생각했다. 죽어서 다행이었다. 진심이었다. 그만큼 눈앞의 소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이게……단탈리안의 손가락, 이라고?” 소녀가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대하여 죽음의 기사 울라인은 곧장 완벽한 대답을 떠올렸다.――예, 그렇습니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의 손가락입니다, 전하. 뭐 그리 화내십니까. 전쟁터에서 손가락 한두 개쯤 잃어먹는 것이야 일상다반사 아닙니까? 오히려 잘 됐습니다. 애당초 소인은 그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전하의 첩치고는 너무 유약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저는 처음 그 새끼를 봤을 때 그만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요. 나 참! 그래서야 어디 지 먹을 거나 챙기겠습니까? 어이가 없는 겁니다. 확 나가 뒈져버렸으면. 잘 잃어버렸어요, 손가락! 부상이 있어야 기생오라비처럼 생겨먹은 그 자식한테도 조금은 남자의 관록이란 게 붙겠지요. 내친 김에 소인이 놈의 면상에다 칼자국이나 거하게 쭈욱 그어주고 싶습니다. 그거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답이. 부디 소인에게 그 새끼를 진정한 남자로 만드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전하. ――이렇게 답안이 완성되는 데 불과 2초가 걸렸다. 쉬운 일이었다. 죽음의 기사는 어떻게 하면 소위 빌어먹을 애새끼를 가장 효과적으로 족칠 수 있을까 맨날 고민했다. 울라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죽음의 기사들한테도 단탈리안은 공공의 적이었다. 자그마치 이천 년 동안 순결을 간직해온 주군이었다. 그런 주군을 접수하다니! 심지어 주군께선 겉모습이 열두 살, 열세 살에 불과했는데! 죽여도 평범하게 죽여서는 안 되었다. 오백 명의 기사 전원이 동의했다. 다만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튀겨 죽이자, 구워 죽이자, 살갗을 발라 죽이자, 오장육부를 능지처참해서 죽이자, 오크들한테 돌림빵을 시켜 죽이자, 심해에 빠트려 죽이자 등등, 모두 더해서 서른여섯 가지의 다양한 살인방법이 고안되었으나, 울라인은 그냥 얼굴을 죽을 때까지 패갈겨서 죽이자는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다르게 울라인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 예, 전하. 틀림없이 단탈리안의 왼손 검지와 중지입니다. 바르바토스의 어깨가 자그맣게 떨렸다. “어떤 개새끼가……이딴 짓거리를 벌였어?” ─ 단탈리안은 전하께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습격하도록 의뢰한 장본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지옥의 대공들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스럽다고. 바르바토스가 책상을 내리쳤다. 나무로 된 각탁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그녀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참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나는 분명히 선언했어. 단탈리안은 나의 측근인 동시에 애인이라고. 그를 습격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 바르바토스의 비호를 무시했다는 뜻이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옥을 선사해주지.” 아아, 하고 울라인이 속으로 절망했다. 주군께선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다. 그런데 썩어빠진 기생오라비에게 걸리시더니, 주군께서……아아,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군께서……. 그는 당장 진실을 고하고 싶었다. 그 손가락은 습격자가 아니라 단탈리안 스스로 잘랐으며, 고로 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 버거지를 쓴 것이라고. 안타깝게도 그는 이제 단탈리안의 수하가 되었다. 아직까지 단탈리안을 진심으로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주인인 작자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울라인은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단탈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라는 방식으로 고했다. 단탈리안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울라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산악파 휘하의 대공들이 저질렀겠지, 후레 썅놈들. 수도공방전이 코앞에 다가오지만 않았다면 내가 몸소 지옥에 강림해주었을 테지만……시발, 그래서 지금을 노린 거냐. 발정난 들개새끼들.”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렸다. “기사 백 기를 내어주겠어. 범인을 조지고 와라.” ─ 전하! 너무 많습니다! 울라인이 항의했다. 현재 바르바토스는 오천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었다. 그중 죽음의 기사가 약 오백 명. 여기서 백 명을 차출한다면 사실상 전체 전력에서 일할을 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있으면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걸고 인간군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이때 일할의 병력을 내주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됐어.” 바르바토스는 직언을 단호히 거부했다. “어차피 이번엔 내 군단만 싸우는 것도 아니야. 다른 군단장들도 엉덩이에 불 붙은 개구리마냥 튀어오고 있으니 그거 머릿수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패배할 일 없어.” ─ 하지만 전하, 만사에는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야, 야. 너희가 단탈리안한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건 나도 알아.”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새끼야. 생각 좀 해라. 응? 측근이 어디 가서 얻어터지고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내 체면은 어떻게 되냐? 다른 마왕들이 소식 들으면 씹을 거리 생겼다고 존나게 좋아할걸.” ─ ……. “물론 단탈리안이 다쳐서 화나기도 해. 인정할게. 하지만 내 체면이 더 중요한 거야. 벌레 새끼들은 적절하게 밟아주지 않으면 지들이 벌레인 줄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큼은 거 단탈리안이 아니꼬와도 늬들 원래 주군을 위해서 봉사한다 생각해주라. 응?” ─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울라인이 군례를 취했다. 주군이 옳았다. 군주의 위엄은 항상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했다. 단탈리안에 대한 사심 때문에 그걸 경시하다니 크게 질책을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주군은 질책 대신에 위로를 건네주었다.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울라인은 동료 백 명과 함께 지옥으로 향했다. 중요한 결전을 앞에 두고 바르바토스의 곁을 떠나게 되자 죽음의 기사들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주군의 위엄을 지키는 것 역시 전투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들은 명령에 충실했다. 바르바토스가 그들을 전송하면서 말했다. “참. 혹시나 노파심 때문에 말해두는데. 너희 난전(亂戰)을 핑계로 단탈리안 죽여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너희가 나한테 죽어요.” ─ ……. 칫, 하고 울라인을 비롯하여 죽음의 기사 전원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단탈리안의 명줄은 꽤 긴 모양이었다. 매우 안타깝게도.   00155 폭군의 시대 =========================================================================                        * * * 바르바토스 휘하 월맹군 제6군단이 진군했다. 꽤나 많은 병력을 떼어주었다지만, 군단장 바르바토스는 속도를 늦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전술 교리는 무척 간단했다. 적군보다 신속하게 움직여라. 이것 하나뿐이었다. “다른 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진군하는 것은 어떨지요?”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가 진언했다. 그는 신중한 숙장(宿將)이었다. 드문드문 하얗게 탈색한 머리카락도 이 남자를 초라하게 만들지 못했다. 백발에는 수백 년 동안 거쳐온 격전의 향내가 서려 있었다. “앞으로 사나흘만 더 기다리면 하다못해 제2군단이 합류합니다. 전력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 셈이지요. 인간군을 더 용이하게 제압할 수 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군이 채비를 갖추는 동안 적군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 아군이 미처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해 들어간다면 적군 또한 미처 완벽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받지. 이때 아군과 적군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군은 자기가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아는 반면, 적군은 전투의 시기와 장소에 무지하다는 것이야.”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라. 인간놈들은 우리가 한 덩이로 뭉쳐서 진격해오리라 예상하고 있을 터. 그 무지가 틈새를 만들어. 제파르의 의견은 기각한다. 벨레드!” “예, 군단장!”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벨레드는 신장이 오우거만큼 큼직한 사내였다. 그가 소리를 내자 담력이 약한 마왕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맹수와 같은 울림이 벨레드의 목소리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휘하 죽음의 기사 사백 명을 맡긴다. 나의 기사들한테는 군량도 휴식도 필요없다. 그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라.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단검을 꺼내어 던졌다. 단검이 땅바닥에 꽂혔다. 땅에는 바르바토스가 마법으로 재현해놓은 작전 지도가 투영되고 있었다. 단검이 꽂힌 자리에는 크램스라고 적혀 있었다. “크램스를 급습하여 함락하라.” 요새도시 크램스. 그곳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요새 뒤편에선 다누비우스 강줄기가 대륙 한복판을 길게 가로질렀다. 이 강줄기를 넘어가면 곧바로 빈드보나――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다. “크흐으으.” 마왕 벨레드가 더운 숨결을 토했다. 벨레드의 구릿빛 근육이 마치 구렁이 살갗처럼 요사스럽게 번들거렸다. 그는 명백히 흥분하고 있었다. 다누비우스 강줄기. 지난 이천 년 동안 월맹군은 이곳을 고작 두 번밖에 넘어서지 못했다. 다누비우스 강을 처음 건넌 마왕은 현재 서열 제1위인 바알. 두 번째로 건넌 마왕은 다름 아니라 눈앞에서 군단을 지휘하는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였다. 이제 세 번째로, 서열 제13위 벨레드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군단장 각하……아니, 바르바토스 님. 보이십니까? 제 육체가 흥분에 떨고 있습니다.” 자그마치 바알과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서는 것이었다. 벨레드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전멸. 격멸. 격퇴. 저 벨레드, 군단장께서 어떤 종류의 승리를 바라시든지 상관없이 바로 그 승리를 진상하겠습니다.” “나 바르바토스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마왕인 소녀가 히죽 웃었다. “전멸.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전멸을. 인간종이 다시는 우리 마인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우리의 발끝만 보아도 두려움과 공포에 절규하여 땅바닥에 쓰러지도록, 그들에게 이제 삶이란 오로지 잿빛 하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의미도 없도록. 바로 그러한 전멸을 나는 바란다.” “그 명령――확실히 들었습니다!” 벨레드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구름이 가득 낀 회색하늘에 마왕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벨레드는 곧장 죽음의 기사 사백 기를 인솔했다. 본래 마왕에겐 많은 휴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투파인 벨레드는 더더욱 그러했다. 피로라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는 듯 벨레드와 죽음의 기사들은 사흘 밤낮을 내달렸다. 도리어 그들을 태운 늑대 몬스터, 흑랑(黑狼)들이 먼저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벨레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럴까봐 한 사람당 세 마리의 흑랑을 대동했다. 흑랑 한 마리가 지치면 다른 한 마리로 갈아타는 식이었다. 사흘 밤낮 달린 끝에, 그들의 시선에 대지에 우뚝 솟은 도시 크램스가 들어왔다. 강줄기를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해자까지 만들어놓은 요새였다. 벨레드의 군세는 실로 질풍처럼 진격한 것이었다. “뭐, 마왕군이 벌써 나타났다고!” 요새 지휘관이 놀라 소리쳤다. 전령이 말했다. “예! 적, 약 사백 기. 사백 기 전부 죽음의 기사들입니다.” “죽음의 기사 사백 기…….” 지휘관이 침음을 삼켰다. 바르바토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제국군은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뒤에나 적이 도착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현 제국군 총지휘관인 제3황녀 엘리자베트는 전술의 천재였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라는 마왕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그것까지는 엘리자베트조차 몰랐다. 다만 황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수를 써놓았다.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예기사들을 미리 요새에 집결시킨 것이었다. 그녀는 크램스에 실력 좋은 기사들을 배치하며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했다. ─ 어떤 적군이 휘몰아쳐도 사흘을 버텨라. 알겠는가. 그대들의 목숨을 바쳐서 사흘 동안 요새를 사수하라. 단 사흘. 그 시간을 벌기 위하여 요새에 집결한 기사들의 전력은 가히 화려했다. 제국 제1급 무사인 <검의 주인>이 두 명 있었다. 제2급 무사가 서른 명. 제3급 무사와 제4급 무사가 오백여 명. 전부 합쳐서 오백오십에 이르는 무사들이 요새에 주둔했으며, 이들은 숫자가 적을지언정 강력한 군세를 이루었다. 요새를 지휘하는 남자 또한 <검의 주인>. 단신으로 일개 군단에 버금간다는 최고급 전력이었다. 만약 요새 앞에 나타난 적군이 죽음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콧방귀를 뀌면서 여유롭게 대처했으리라. 지휘관이 이를 악 물었다. “나흘……나흘만 더 있었다면, 지원군이 도착했을 터이거늘.” 계획이 모조리 일그러졌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지금 수도에서 한창 자신의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다. 수도 시민 전체를 옮기는 작업이었다. 어마어마한 병력이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었다. 앞으로 나흘만 더 있었으면 엘리자베트 황녀는 요새에 지원군을 보낼 것이었다. 그러나 벨레드, 아니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빨랐다. 요새는 오직 기사 오백으로 벨레드를 막아야 했다. 백 명에 이르는 경비병력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일반병사. 죽음의 기사가 내지르는 칼날 앞에서 단 일 초도 견디지 못하겠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휘관이 빠르게 판단했다. 요새 전체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막사에서 편히 휴식하던 기사들이 서둘러 갑옷을 챙겨 입었다. 이날 시종들은 평생을 통틀어서 가장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단단한 갑옷을 입기란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요새지휘관은 자기 이외에 또 다른 소드 마스터를 요새 바깥으로 내보냈다. 일대일 결투. 장군전(將軍戰)를 빙자한 지연책이었다. “잡졸 마귀들아! 어디 내 검을 받아볼 놈이 있는가!” 검의 주인이 성밖의 너른 평야에 우뚝 서서 소리쳤다. 요새지휘관이 노리는 바는 간단했다. 검의 주인을 출격시켜서 일기토를 유도한다. 저쪽에서 일기토에 응하여 차례대로 죽음의 기사를 내보내면 그만큼 인간군은 시간을 벌게 된다. 그래봤자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벌기란 요원했다. 지휘관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푸흐.” 그러나 요새지휘관의 속셈은 먹혀들지 않았다. “제군들! 아무래도 인간놈들도 예의란 것을 아는 모양이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친히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내와서 영접하니 말이다.” 마왕 벨레드에게는 인간군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는 전사였지만 동시에 장군이었다. 결투에 집착하여 전투를 망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벨레드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상대편에서 기껏 예의를 차려준 것이다. 누구보다 신사적인 마인들이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우리 마인들이 예의에 어떻게 대답해주는지 보여주지 않겠는가!” 벨레드 주위로 검붉은 마력이 요동쳤다. 직후, 공중에서 거대한 도끼가 소환되었다. “가자! 마계의 신사들이여!” 죽음의 기사와 흑랑이 울부짖었다. 철이 철을 긁는 소리처럼 몬스터의 포효는 인간들의 두개골을 긁었다. 죽음의 기사는 구강이 아니라 마력을 통해서 소리를 냈다. 제국군 검사 역시 체내에 마력을 담아낸 자들. 몬스터의 포효에는 그 마력을 요동치게 만드는 불길한 무언가가 있었다. ─ 크후아아아아아! 벨레드와 죽음의 기사 사백 기가 돌진했다. 연설전도, 일기토도, 통상 전투에 따라오는 예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 따위 한참 전에 잊어버렸다는 듯 죽음의 기사들은 야만족마냥 함성을 질렀다. “이, 이건 전장의 예법에 어긋난다!” 검의 주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마나에 담긴 목소리가 평원에 울렸다. “무례한 놈들! 네놈들도 전사라면 마땅히 내 결투에 응하여――.” “흐하하하! 인간의 아가씨! 우리에게 최대의 예의란 바로 상대방을 신나게 겁탈해주는 것이다!” 벨레드가 도끼를 치켜들면서 환호했다. “어디 내 육봉의 맛을 친히 감상하시라!” “이, 천하의 비겁한 개새끼가!” “내 의형제가 알려준 바에 따르자면 개새끼 같은 남자가 요새 인기라더군! 크하하!” 검의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그녀는 성벽을 툭, 툭, 밟고 요새에 올라갔다. 일정한 경지에 이른 무사이기에 펼칠 수 있는 묘기였다. “크윽.” 요새지휘관이 이를 빠득 갈았다. 지연책이 통하지 않았다. 저 마왕은 오우거처럼 생겨먹은 주제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지휘관으로선 당장에 별다른 수단이 없었다. 이제, 황녀 전하께 명령받은 대로 사흘 동안 이곳을 피와 땀으로 지켜낼 뿐이었다. 인간 지휘관과 벨레드의 고함이 교차했다. “전원, 요새를 사수하라!” “마음껏 유린하라!” 죽음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성벽에 접근했다. 그들은 서로가 지난 수백 년 간 파트너였다. 흑랑에서 뛰어내려 완벽하게 똑같은 순간에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온몸을 흑색 갑옷으로 두른 죽음의 기사들은, 역시 검은색인 망토를 박쥐 날개처럼 휘날렸다. “막아내라! 옆의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지형상으로 우리가 유리하다! 놈들에게 휘둘리지 마라!” 제국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들은 성벽에 의지하여, 사냥매처럼 자신들을 덮쳐오는 죽음의 기사들에 맞서 싸웠다. 인간계의 기사와 마계의 기사가 격돌했다. “크으아아압!” “뒈져버려!” 이곳에 실력이 무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 일합만에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들은 성벽 위에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몇몇은 인간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깔끔하게 포기했다. 성벽에 올라가는 데 성공한 자가 너무 적었다. 그들은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성벽 아래로 재차 뛰어내렸다. “막았다! 막을 수 있다!”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잊지 마라! 동료와 보조를 맞추어라!” 기사들 사이에서 자그맣게 환호가 일어났다. 그들은 작은 싸움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전투의 초반이었다. 일부러라도 사기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기운을 돋아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환호한 것이었다. 요새지휘관의 머릿속에 황녀의 명령이 스쳐 지나갔다. 사흘을 버텨라! ‘할 수 있습니다. 황녀 전하, 사흘이고 나흘이고 며칠이든지 소인의 목숨을 다하여 막아내겠습니다!’ 그는 약간 흥분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음의 기사들이 두 번째로 성벽에 오르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득, 그는 적군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마왕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때였다. 요새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요새지휘관은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면서도 어디서 진동이 발생했는지 신속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진동이 울려 퍼진 곳은――바로 요새의 성문 쪽이었다.   00156 폭군의 시대 =========================================================================                        “말도 안 된다!” 요새지휘관이 비명을 질렀다. 요새 정문에는 온갖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되었다. 그중에는 이백 년 전부터 내려져온 8서클 등급의 최고위 마법, 개념 마법까지 있었다. 《어떤 종류의 공격을 받더라도 단 한 번 견뎌낸다》. 설령 상대방이 얼마나 강력하게 성문을 공격할지라도, 그것이 공격인 이상, 반드시 한 번을 견딘다. 그처럼 고급스러운 개념 마법이 성문에 일곱 겹이나 둘러쌌다. 단적으로 말해 메테오 마법을 쏟아붓더라도 일곱 번은 쏟아부어야만 했다. 메테오도 한 번의 공격으로 취급되므로. 그러나 요새지휘관의 눈에는, 형편없이 동강 나버린 성문 그리고 도끼를 들쳐맨 한 명의 마왕이 비추었다. “이거, 뭔가 잔뜩 장난을 쳐놓은 것 같은데. 미안하군 그래.” 먼지가 뿌옇게 낀 성문으로 벨레드가 걸어 들어갔다. 성문 뒤에서 대기하던 문지기 병사들은 문이 파괴되는 것과 함께 인육의 파편이 되었다. 철조각과 나무조각이 튀어 하필 관자놀이에 틀어박힌 병사,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희여멀건 내장을 땅바닥에 흘리는 병사. 그중에는 불행하게도 목숨이 질겨 괴롭게 신음하는 남자도 있었다. “흐흐…….” 벨레드가 발자국에 맞추어 도끼를 흥겹게 흔들었다. 인육과 신음, 이 두 가지가 만들어내는 인세의 도살장. 이것이 바로 마왕 벨레드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었다. 이때 비로소 벨레드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대저 마왕이란 자아가 불안정했다. 다른 마인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탓이었다. 어디까지가 내 영역인가. 어디부터 타인의 영역인가. 그 경계선이 마왕들에게는 흐릿했다. 마왕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유지했다. 벨레드가 선택한 방법은 학살이다. 대지에 자신 말고 아무것도 서 있지 않다. 전쟁터를 헤쳐 가다보면 반드시 그런 순간이 있다. 승리의 순간이다. 강자만이 만끽하는 순간이다. 세상에 나만이 오롯하게 두 발로 선 그 절대적인 순간에 비로소 벨레드는, 그렇다, 이것이 '나'이다, 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하고 말한다. 반시체들이 고통스럽게 내뱉는 신음은 벨레드에게 다만 감미로운 협주곡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벨레드는, 최대한 신속하게 돌파해야 마땅할 성문에서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길게 잡아당기기 위해서. “네놈, 어떤 사악한 수작을 부렸는가!” “흐음.” 음악과 같은 시간에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벨레드가 혀를 찼다. 아까 전 평야에 혼자 나와서 일대일 결투를 울부짖은 검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귀족 출신인지 절도 있는 발음으로 마왕을 매도했다. “에잉, 아가씨. 운치가 뭔지 모르는구만. 지금 내가 음악을 즐기는 게 안 보이는가?” 검의 주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음악? 무슨 헛소리냐. 여기에는 참혹한 죽음밖에 없다.” “오, 잘 말했어. 이곳에는 죽음밖에 없노라. 오늘 음악에는 제목을 그리 붙여야겠군. 으음. 시(詩)적이야. 매우 시적이야. 음.” 벨레드가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검의 주인은 상대방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느껴 분노했다. 그녀는 이번 전투에서 더 이상 예법을 취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불문곡직으로 검을 빼들었다. ‘놈은 덩치가 크다. 그만큼 둔중하다.’ 검의 주인이 허리를 숙이면서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리치가 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대일 결투에서도 리치의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아직 상대방이 제대로 자세를 갖추지 않은 이때가 최고이자 최후의 기회였다. 리치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상대방이 호락호락 허용할 리 만무했다. ‘첫 번째 일격만 피한다.’ 분명히 이쪽을 견제하는 공격이 들어올 터. 견제에 휘말리면 끝장이었다. 상대방은 리치의 우세를 지키면서 서서히 이쪽을 조여온다. 사자 무리가 느긋하게 상처 입은 동물을 몰아세우듯이. 결국 이쪽이 말려들어 괴사해버린다. ‘어?’ 그러나 벨레드는 간단하게 파고들기를 허락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끼를 치켜들지도 않았다. 마치 재밌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듯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만 있었다. ‘함정인가.’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이 솟았다. 아니다, 하고 검의 주인이 빠르게 판단했다. 자신은 이미 상대방의 자세에서 다음 수, 그 다음 수를 읽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우거 같은 거한은 정말로 무방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속셈을 갖추고 있겠지. 그녀는 눈앞의 마왕을 경시하지 않았다. 허나, 몇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지금 자신이 검을 찔러넣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은 그녀의 칼날에 아무런 대비도 갖추지 않았다는 것. 망설일 필요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히야아아!” 그녀가 기합을 지르면서 장검을 비스듬히 찔러넣었다. 여전히 벨레드는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전하. 실례지만 여쭙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가 말했다. 바르바토스가 응? 하고 대답했다. “뭔데? 말해봐.” “어째서 소인이 아니라 벨레드에게 선봉을 맡기셨나이까?” 현재 월맹군 제6군단 본대는 월맹군 제2군단과 무사히 합류하여 진군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평원을 지나쳤다. 바르바토스는 특별히 군마나 흑랑이 아니라 백곰에 올라탔다. 새하얀 백곰과 역시 머리카락이 하얀 바르바토스는 잘 어울렸다.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뭐야? 얌생이처럼 삐졌냐? 사내 새끼가 원.” “흠흠.” 제파르가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바르바토스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 있었다. 삐졌다고 인정하자니 지나치게 부끄러웠고, 삐지지 않았다고 말하자니 맹세를 어기는 꼴이었다. 제파르의 심정을 잘 아는 바르바토스로서는 이 반백의 노장이 무척 귀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르바토스는 제파르보다 서너 배는 더 오래 살았다. 그녀가 보기에 제파르는 아직 한참 어린 마왕이었다. 소년이라고나 할까. 그런 아이가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머뭇거리니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깔깔. 정말로 삐졌구나? 응? 야, 대답해봐. 우리 제파르 삐졌어요?” “……전하. 소장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제파르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투조차 귀엽다고 생각하는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일부러 벨레드랑 너를 경쟁 붙이는 건 사실이야. 어느 조직에나 이인자는 있어야 하거든. 이인자가 한 명밖에 없으면 조직이 생기를 잃어버리니까. 너희 두 명을 경쟁관계에 놓아서 다른 평원파 애들한테도 말하는 거지. 봐라, 존나 열심히 뛰지 않으면 이인자도 없어.”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파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소장이 군단장 각하께 이용될 수 있음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으에엑.” 바르바토스가 메스꺼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그 하녀의 마음가짐은. 모처럼 사나이로, 그것도 마왕으로 태어났는데 좀 기개를 가질 수 없냐? 이용될 수 있어서 기쁘다느니 그런 거 말고. 내가 세계를 재패해보겠다는 거 말야.” “군단장 각하야말로 모든 마인의 소망을 등에 짊어지신 분. 말하자면 마인들의 염원을 체현하시는 분입니다. 각하께 봉사하는 것이 곧 마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요, 마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마왕된 자의 직분이라 생각합니다.” “으으. 성실해, 너무 성실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조금 더 마왕다운 자세를 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단탈리안은 특별했다.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복종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이번에도 그래.’ 마왕성에서 휴식하겠다는 녀석이 왜 난데없이 마계를 싸돌아다니는가? 보나마나 음험하게 흉계를 꾸미는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조금도 쉬지 않고 성실하고 착실하게 음모를 꾸미는 놈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차라리 단탈리안이 마음에 들었다. 벨레드나 제파르처럼 완벽하게 신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벨레드와 제파르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하로 머무르는 반면, 단탈리안은 주종관계를 뛰어넘어서 친구가 되었다.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며 기꺼이 이용당해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바르바토스에겐 단탈리안 이외에 없었다. 예전에는……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설령 두 사람이 목적이 다르더라도 두 가지의 목적이 공존한다면 친구로 지낼 수가 있었다. 세상에는 그러나 공존할 수 없는 목적들이란 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허울 없는 친구란 한 순간에 적나라한 원수가 되기도 하는 사이였다. 혹시 단탈리안과도 그렇게 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난다면 단탈리안도 예전의 그녀처럼 자신을 배신할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녀와 갈라서고 단탈리안이라는 친우가 생겨날 때까지 천오백 년이 필요했다. 다음에는 또 어느 정도의 천 년이 필요할까……. “그렇게 되면 존나 두들겨패서 내 하인으로 만들어버려야지.” “예? 죄송합니다, 전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냐. 말 안 듣는 녀석에겐 매가 약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제파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의 의문을 무시했다. “흐으음. 벨레드랑 널 경쟁시켜야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해줘. 제파르 너는 저번에 검은 산맥을 돌파하느라 공훈을 졸라 많이 쌓았잖아. 게다가 아우스테를리츠에서도 적군의 파상공세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고.” “모두 군단장 각하의 은혜입니다.” “네, 네. 대륙이 생겨난 것도 하늘이 푸른 것도 전부 내 덕택이지. 아무튼 넌 이번 월맹군 원정에서 너무 튀었어. 제1공훈자이니까. 심지어 제2공훈자인 단탈리안까지 표면상으로나마 제파르 네 부대 소속이잖아.” 바르바토스가 두 팔을 X자로 가로질렀다. “더 이상 공훈을 세우면 곤란해. 평원파 내부에서 네 녀석 발언권이 지나치게 강력해져. 그럼 나는 제파르 너를 불합리한 방식으로 깔아뭉개야 해. 그러긴 싫걸랑. 벨레드한테 적당히 공을 주는 편이 훨씬 보기 좋지.” “이해했습니다.” 제파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어차피 바르바토스의 총애가 중요했다. 벨레드한테 선봉을 맡긴 까닭이 혹여나 자신보다 벨레드를 더 총애하셔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것이 제파르가 걱정하는 바였다. 제파르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걱정거리가 사라진 이상 벨레드가 선봉을 맡든 뭘 하든 상관없었다. 솔직히 바르바토스만 건재하다면 평원파 내부 정치적 질서 따위는 제파르의 안중에도 없었다. “뭐, 그리고 벨레드가 너보다 선봉에 어울리긴 해.” “예?” “군사를 통솔하는 점에서야 제파르 네가 훨 뛰어나지만 말야. 뭐라고 할까.”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었다. “그 녀석, 생긴 거랑 다르게 음흉하거든.” * * * “…….” 검의 주인이 멈추었다. 그녀는 앞으로 발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뻗은 장검은 바로 벨레드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한 발자국.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장검은 오러를 휘두른 채 마왕의 머리를 파괴할 것이었다. 검의 주인은 바로 그 한 걸음을 나아가지 못했다. “크, 흐으억.”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검붉은 핏물은 비단 입에서만 분출되지 않았다. 발등, 종아리, 허벅지, 허리, 흉부, 어깨――신체의 여섯 부위를 여섯 개의 대검이 찌르고 있었다. 대검들은 바로 땅 아래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여, 그림자에서 솟아나왔다. 검의 주인이 벨레드에게 일격을 먹이려는 순간 여섯 개의 대검은 기다렸다는 듯 용솟음쳐서 그녀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죽음의 기사. 그들이 평상시에는 그림자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검의 주인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다만 참아낼 뿐이었다. 대검들은 교묘하게 그녀의 신체를 유린하여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비, 겁한……전사로서의 긍지가……네놈에게는…….” “아아. 없지. 없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벨레드가 느긋하게 도끼날을 바로 세웠다. 그는 도끼를 치켜들고 씩 웃었다. “요새는 개새끼 같은 남자가 대세라니까.” 그리고 장작을 쪼개듯이 도끼를 내리쳤다.   00157 폭군의 시대 =========================================================================                        여자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단면은 결코 과도에 잘린 과일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도끼날은 뭉툭하게, 사정없이 여자의 신체를 위쪽에서 아래로 파고들었다. 온갖 희여멀겋고 샛붉은 덩어리와 액체가 튀었다. 그중 도끼에 툭, 툭, 하고 걸리는 것이 여자의 뼈였다. 벨레드는 손바닥에 전해지는 진동을 즐겁게 느꼈다. 이윽고 육체는 두개골에서 가랑이까지 흉칙하게 갈렸다. 대검들이 그림자에 도로 들어갔다. 그러자 반 쪼가리 몸이 서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하나는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마치 붉은 꽃이 활짝 핀 것 같지 않은가. 벨레드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밖에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흐흐흥, 흐우으. 크루프 크루프,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훕.” 벨레드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여자의 두 동강 난 육체 사이를 걸었다. 프즉, 하고 벨레드의 맨발이 내장을 밟았다. 성문이 무너지면서 피어난 먼지를 향하여, 벨레드는 어디 동네를 산책하는 것처럼 나아갔다. 여검사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검주(劍主)라는 명예에 비추어보면 지극히 허망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죽음만은 아니었다. 약간이나마 마왕 벨레드의 발을 붙잡았다. 그 약간의 시간 덕분에 제국군은 성문 앞에 집결했다. “대열을 맞춘다!” 요새지휘관도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마왕이 온 것이었다. 검의 주인인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는 무사들을 다독이면서 성문을 주시했다. “크루프 크루프,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훕.” 먼지구름은 아까 전보다 짙어졌다. 뿌연 먼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느리지만 확실히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걸음마다 목소리는 늘어나 이윽고 한 사람의 콧노래에 불과하던 것이 불길한 합창곡으로 번졌다. 먼지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훕. ─ 크루프 크루프,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 라일라 파를리아, 크훌라 크훌리. 오래된 군가였다. 아직 악기가 발명되지 않아 인간의 성대만이 세상 유일한 악기였던 시절. 악보도 악법도 없는 고대에 마인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오로지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선율은 마치 신전의 성악처럼 성스러웠으며, 한편으로 지나치게 투박하여 화음과 화음이 어긋났다. 그 원초적인 군가에 합스부르크가 자랑하는 제국 무사들이 긴장했다. 터벅. 먼지 너머에서 발끝이 빠져나왔다. 마왕의 발이었다. 이후로 수십, 수백의 발끝이 황색 먼지를 뚫고 나왔다. 온몸이 검은색 갑옷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기사들은,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먼지구름마저 틈새를 발견하지 못해 그들의 갑옷을 힘없이 비껴갔다. “…….” “…….” 양측이 대치했다. 제국군의 대열, 마왕군의 대열,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요새지휘관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엇보다도 선두에 선 마왕, 오우거처럼 거대한 작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성교를 하던 와중 절정에 도달한 남자처럼 마왕은 기분 좋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1급 무사, 비오팔트 폰 라그란츠이다.” 요새지휘관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소리쳤다. “그대, 일검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는 마왕이라 생각하는 바. 이름을 고하라!” “으이구야. 한심한 화상 같으니라구. 제국의 무사란 죄다 꼬락서니가 이런가.” 벨레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제국 소속이든 제1급 무사이든 그 따위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놈도 전사가 아닌가? 대저 전사란.” 벨레드가 도끼를 쥐지 않은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머리 위에 하늘이 있으며, 발 아래 대지가 있고, 이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 그 외에 명성과 명예, 예법이란 한낱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다.” “…….” “나는 이미 자신이 마왕이라는 것을 잊었음이라. 내 이름은 벨레드. 네놈과 싸울 것이고, 네놈을 쓰러트릴 것이며, 네놈을 모욕할 장본인이다! 크하하하!” 벨레드가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거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포탄이 되어 질주했다. 죽음의 기사 수백 명이 벨레드를 뒤쫓아 돌격했다. 그들은 바닷새 떼거지가 먹이를 향해 자신의 몸을 쏜살같이 내려꽂으며 사납게 울부짖는 것처럼 달렸다. 이제 질세라 제국군도 고함을 지르면서 내달렸다. 무사들은 밀집대형을 이루어 흙먼지 자욱한 결투장으로 뛰어들었다. “크하아아아!” “밀어붙여라! 쳐죽여라!” 성문 앞의 좁다란 길목은 순식간에 격전지가 되었다. 창과 방패, 검과 검이 서로 들이치자 대기를 찢어버리는 듯한 쇠소리가 울렸다. 전사들은 방패로 상대의 몸을 밀어넣으면서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질러댔다. 인간들의 고함 소리에 대기가 떨었고, 마인들의 고함 소리에 마나가 요동쳤다. 귀가 멍멍해졌고 가장 굵은 근육에서 가장 미세한 근육까지 흥분에 꿈틀거렸다. “벨레드, 내가 상대해주마!” 요새지휘관이 쇠몽둥이를 바로잡았다. 그는 애당초 마왕을 상대할 목적으로 왔다. 상대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이상 이쪽도 검이 아니라 다른 무구로 맞설 필요가 있었다. 마나를 가득 담은 지휘관의 목소리는 곧바로 직진하여 벨레드의 귓속에 울렸다. “크흐!” 벨레드가 웃음으로써 포효했다. 벨레드는 마침 팔꿈치로 어느 검사의 흉갑을 짓뭉개버린 참이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오러로 방어했음에도 갑주는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검사는 피를 토하여 땅바닥에 거꾸로 쓰러졌다. “나를 벨레드라 불러주었는가――인간!” 벨레드는 갑옷을 걸치지 않았다. 구리색으로 빛나는 상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벌써 빨간 생채기가 몇 줄기 그어졌지만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마왕의 가공할 만한 치유력이야말로 벨레드에게는 갑옷이나 다름없었다. 요새지휘관과 벨레드, 두 전사가 서로를 향해 뛰었다. 두 사람에게 간격이란 무의미했다. 한 번 땅을 내딛는 것만으로 그들은 격돌했다. 도끼와 몽둥이는 각자 적의 신체를 밀어붙이며 불꽃을 튀겼다. “크하하하하! 좋다!” 벨레드가 광소(狂笑)했다. 그는 도끼날이 가로막히자 능숙하게 몽둥이를 흘러보내며 도낏자루를 찔러넣었다. 요새지휘관은 도낏자루가 미처 추진력을 얻기 전에 팔꿈치로 막았다. 두 사람의 간극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벨레드는 요새지휘관의 얼굴 바로 코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를 적대하라! 나를 증오하라!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이 나, 벨레드에게 이빨을 드러내라!” “헛소리!” 요새지휘관은 오른손 주먹으로 벨레드의 복부를 후려쳤다. 쇳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이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다――지휘관이 예상한 그대로, 괴물과 같은 육체였다. 벨레드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계속하여 폭소하고 있었다. 공격이 막혔다는 것을 알고 요새지휘관은 재빨리 약간 뒤로 물러섰다. “나는 너희 인간에게 증오를 받음으로써 살아 있다 느끼노라!” 벨레드가 열렬하게 고백하는 소녀처럼 외쳤다. 그는 도끼를 들어올려 힘껏 내리쳤다. 요새지휘관이 서둘러 몽둥이를 세워 막았다. 도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산사태가 되어 몽둥이를 후려갈겼다. 지휘관은 충격을 흘리기 위하여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크으읍!” “온 천지에 오로지 너희 인간만이 나를 증오해준다! 오로지 너희만이 순수한 증오심과 순수한 미지로서 곧게 부닥쳐온다!” 마왕이란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여 공정하게 심판하는 제왕. 인간, 그러나 인간 앞에서만큼은 마왕의 의미가 사라졌다.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절대적인 타인 대 타인으로 바로설 수가 있었다. 벨레드는 세상에 인간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 영원토록 인간과의 전쟁에 투신하리라 맹세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고로 정복할 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고로 굴복시킬 가치가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고로 죽일 가치가 있다. 인간은 마인과 전혀 달랐다. 벨레드가 평원파에 들어간 까닭은 다만 평원파가 가장 인간과 적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랑 타협하라니!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벨레드가 생각하기에, 마인과 인간은 단지 서로 맞서싸우기 위하여 존재했다. 아니라면 왜 세상에 마인이 있고 또 인간이 있겠는가. “아아! 나는 실로 인간을 사랑하노라!” 마왕은 마왕의 감정을 읽을 수 없다. 마왕은 인간의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즉――벨레드에게 인간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동급의 존재였다. 마인을 복종시켜봐야 아무런 재미도 뭣도 없었다. 오직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의의였다. 성문의 길목에서 시체가 시체를 뒤덮었다. 살육의 비명들이 엇갈리며 공기를 뒤흔들었다. 승리한 자가 목이 쉬도록 외치는 포효, 패배한 자가 끔찍하게 내지르는 신음, 그것들이 얽히고설켜 인세에 지옥도를 펼쳤다. 바로 지옥이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의 고향이었다. 벨레드가 폭풍우처럼 도끼를 내리꽂았다. “고작 그것인가! 인간! 네놈의 증오는 고작 그 정도인가!” “크으읏!” “나는 네놈들의 고향을 파괴한다! 아이, 노인, 아녀자, 가장 약한 자에서 가장 강한 자까지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살육할 것이다. 너희가 추수하는 밭은 태워질 것이고, 너희가 수백 년 동안 일구어낸 마을은 폐허로 전락할 것이다. 아아! 맹세한다!” 벨레드가 외쳤다. “나는 네놈들이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한다. 네놈의 아내를 강간하고 네놈의 자식들은 오장육부를 도려내 전시할 것이다. 네놈의 군주는 특별히 개돼지들에게 진상해준다!” 요새지휘관이 전신에서 오러를 피워내며 도끼를 받아쳤다. “벨, 레드――!” “구하고 싶다면 전력으로 부딪혀라, 인간이여! 나를 죽여라!” 요새지휘관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아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벨레드의 손을 얼얼하게 마비시켰다. 지휘관은 아껴둔 오러를 전부 소모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사수하라고 명령한 사흘의 기간, 그것을 무시했다. 벨레드가 미친 듯이 웃었다. 이것이었다. 자신은 이런 전쟁을 바랐다. 그는 한 명의 인간이 검주(劍主)가 되려면 얼마만한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잘 알았다. 틀림없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리라. 수천수만 번 근육이 파열했으리라. 그럼에도 곧은 정신으로 검을 휘둘러 마침내 경지에 도달했으리라. 말하자면, 지금 자신이 받아내는 일격과 일격은 전부 상대방의 인생을 담고 있었다. 무겁다! 삶이란 여기까지 무거울 수 있는 것이었다! “크하하하!” 네 녀석은 어떤 새벽과 어떤 밤을 지세웠는가. 때로는 자신의 재능을 회의했는가. 주군을 위해 충성하며 환희를 느꼈는가. 칼질 하나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는가. 그것이 너의 인생이었는가. 벨레드는 그 모든 염을 담아 전투도끼를 들었다. “비오팔트 폰 라그란츠! 그 생――내가 끝내주마!”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놀란 것일까. 지휘관의 눈이 커졌다. 벨레드가 혼신의 힘을 담아서 베었다. 요새지휘관은 그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아직 한 번 막은 것에 불과했다. “부서져라!”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곧게, 벨레드는 끊임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요새지휘관은 공격을 쳐내고 또 쳐내었다. 이쪽의 공격을 예상해서 막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팔을 들어서 아슬아슬하게 막는 것이었다. 이 나약한 인간이 천오백 년을 살아온 마왕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었다. 언젠가 정말로 마왕의 일격을 견뎌낼 인간이 등장할지 몰랐다. 서로가 인생의 무게를 내걸어 격돌했을 때, 언젠가 인간이 승리를 거머쥐는 그런 날이 정말로 다가올지도 몰랐다. 그러나. “부서져라, 인간!” 오러째로 몽둥이가 절단났다. 요새지휘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도 전에, 도끼는 그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도끼날은 참혹하게 머리를 분쇄하고 그 기세를 살려 목과 가슴까지 파고들었다. “――크라아아아!” 벨레드가 도끼를 빼들고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러나, 아직 인간이 승리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천오백 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오늘 살아남은 쪽은 인간이 아니라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였다. 대지는 마왕의 승리에 공포와 경의를 보내며 떨었다.   00158 폭군의 시대 =========================================================================                        * * * 월맹군 제6군단 선봉대, 합스부르크의 요새 크램스를 함락! 함락했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학살이 일어났다. 검주가 두 명 배치되었음에도 마왕 벨레드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요새를 유린했다. 제국군은 자신들이 최정예 병사라는 것을 입증하듯이 최후의 일인까지 대항했다. 살아남을 희망을 잃고 짐승처럼 발악하는 게 아니었다. 한 사람의 적군이라도 더 저승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집요하게,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자신들이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제국의 명줄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믿으면서. “오오.” 장렬한 투혼에 마왕 벨레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투박한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벨레드는 감성이 풍부한 사내였다. 머리로 생각할 줄은 몰랐어도 가슴으로 느낄 줄 알았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서 명령했다. “요새의 민간인을 전부 몰살하라. 저들의 최후를 더욱 비극적으로, 고로 더욱 영웅적으로 치장해주겠다.” 벨레드는 천 년을 넘게 살았다. 어떻게 해야 인간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지 제법 잘 알았다. 그는 진군을 늦추면서까지 손수 요새 안에 머무르던 인간들을 죽였다. 대부분의 백성은 이미 피난을 갔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집안에서 단지 정복자의 실날 같은 자비심만을 기원하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다. 여기서 벨레드는 단순하게 살해하기만 해서야 무언가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음. 시체들을 이어붙여서 뗏목을 만들자.” 오백 명의 제국무사와 사백 명의 민간인. 그들은 도륙하여 열댓 명씩 묶었다. 인육의 뗏목들이 완성되었다. 벨레드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특별히 머리통들은 따로 떼어서 또 다른 뗏목으로 만들었다. 그는 예술작품을 보는 눈초리로 살육의 결과물을 감상했다. “기가 막히게 멋있군 그래!” 벨레드는 만족했다. 그는 시체 뗏목들을 지극히 정중하게 다누비우스 강줄기에 흘려보냈다. 불행하게도 그중 몇몇 개는 침몰하였다. 대다수는 순풍을 받아 돛이 불룩허니 도도하게 나아갔다. 마계인들이 공포심을 담아 《마왕의 미학(美學)》이라 부르는 종류의 짓거리였다. 시체 뗏목들은 다누비우스 강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때로는 도시에 도착하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인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그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마왕 도래. 어느 월맹군 원정에서나 가장 과격한 자들은 평원파였다. 그들은 전쟁의 신사임을 자칭했으나 어디까지나 자칭에 불과했다. 그들의 사명은 오로지 학살. 역사서에 잔뜩 과장스럽게 서술되어 있는 온갖 학살의 주도범이 바로 평원파 마왕들이었다. 하지만 제8차 월맹군에는 단탈리안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학살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쓸데없이 피를 보는 것을 꺼렸으며, 만약 인간종을 회유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회유하자는 입장이었다. 평원파가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영토를 점령했음에도 학살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탈리안, 그리고 단탈리안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바르바토스가 평원파 마왕들을 제어하기 때문이었다. 부르노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평원파는 학살을 자제했다. 단탈리안이 '민간인을 죽이지 않을수록 우리 마왕군에 승기가 돌아온다'라고 당부했으므로. 하지만 이제 단탈리안이 평원파를 이탈한 지 반년이 흘렀다. 평원파 마왕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이여! 우리가 그대들에게 선사할 자유는 오로지 공포이며, 그대들에게 선물할 해방은 군림뿐이며, 그대들에게 허락할 진리는 무지밖에 없다!” 벨레드는 곧장 다누비우스 강을 도하했다. 중간중간에 인간의 마을들을 착실하게 청소하며. 이 살육으로 인하여, 벨레드가 기대했던 바 그대로, 요새를 지키다가 전사한 제국무사 오백 명은 비극적인 영웅으로 역사서에 길이 남게 되었다. 벨레드가 마냥 미학에 취해버린 자는 아니었다. 살육에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다. 벨레드는 마을들에서 살육한 시체들을 긁어모아 진군했는데, 곧이어 벌어질 합스부르크 제도 공성전에서 써먹기 위해서였다. “시체는 써먹을 데가 많거든.” 벨레드가 싱글벙글 웃었다. 시체가 잔혹하게 손상된 모습은 그 자체로 인간군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적군의 사기를 깎아먹을 수 있다. 여차하면 흑마법을 걸고 투석기에 담아 쏘아버린다. 운이 좋으면 성안에 전염병이 발생한다. “살아 있을 때는 나를 즐겁게 해주고, 죽고 나서는 나를 위해 봉사하지. 인간만큼 우리 마왕에게 도움이 되는 놈들이 따로 없다니까.” 벨레드는 흑랑들의 등허리에다 시체를 잔뜩 실었다. 죽음의 기사들도 시체를 하나씩 짊어지고 진군했다. 천여 구에 이르는 인간 시체를 기어코 날랐다. 이것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늦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벨레드는 선봉대에 불과했다. 제도에 일찍 도착해봤자 할 일이 없었다. 합스부르크의 제도는 대륙에서 가장 튼튼하게 지어진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가 세워지고 여태까지 월맹군은 단 한 번도 그곳을 점령하지 못했다. 아무리 짧아도 한 달은 걸리겠지. 월맹군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했다. 벨레드도 똑같았다. 자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가 재빠르게 진군하는 것 대신에 인간의 시체를 모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인간군에 평범한 지도자밖에 없었다면. 요새를 점령하고 사흘 뒤. 벨레드의 군세가 제도에 도달했다. “……어이, 어이. 이건 또 무슨 난리야.” 벨레드는 멈춰섰다. 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평원 한 가운데 대도시가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을 시선에 담으면서 벨레드가 실없이 웃었다. “어느 약삭빠른 새끼들이 우리보다 먼저 제도(帝都)를 함락하기라도 한 거냐?” 이미 타버려서 갈색빛이 되어버린 평야. 검게 그을린 성벽. 도시 안쪽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 몇 가닥. 제도는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합스부르크의 수도가 남김없이 타올랐다! 벨레드가 곧바로 마법수정구를 통하여 보고했다. 월맹군 수뇌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제도가 불타다니, 무슨 소리인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다름 아니라 제도였다. 월맹군은 반드시 함락해야 했고 인간군은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그런데 월맹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타버린 것이었다. 처음에 월맹군 수뇌부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마르바스 영감탱이. 댁이 저지른 짓이야?” “헛소리. 우리 제2군단은 너희보다 하루 늦게 움직이고 있다.” “어이. 친애하는 동지들.” 바르바토스가 싸늘하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우리 중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고. 어이, 시트리. 내 눈을 봐.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네가 했어? 제1군단이 움직였냐?” “몸집이 작으니까 머리통도 작은 모양이네, 바르바토스.” 시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현재 파이몬을 대신하여 월맹군 제1군단, 산악파 마왕들을 이끌고 있었다. “뇌세포가 적은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기억할 건 기억해야지. 우리는 저번에 브르타뉴 왕국군을 전멸시키느라 전력을 죄다 소비했어. 빼돌릴 군대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빼돌린다고 해도 합스부르크의 제도를 떨어트릴 수는 없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발의 마왕이 느긋하게 포도를 따먹고 있었다. “가미긴.” “어머나, 싫다아. 동지를 의심하면 못 써요. 우리 제5군단이 이중에서 제일 늦게 합류했는걸? 난 너희들처럼 뒤에서 콩깎지 까먹거나 그러는 사람이 아니야아. 게다가 우리가 뭐 제2군단처럼 쪽수가 많은 것도 아니구. 어떻게 제도를 단독으로 함락하니?” “흥. 단독이 아니라면 가능하겠지.”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아가레스, 바싸고, 가미긴. 너희가 짜고친 거 아니야? 솔직히 불어, 뇌수가 면발로 된 년놈들아. 어쩐지 전쟁 내내 전력을 아낀다느니 뭐니 하면서 게으르게 싸운다 했어. 씨발, 지금까지 뒷구멍으로 병력을 빼돌려서 제도를 공격한 거 아니냐고.” “얼씨구. 건방 떨지 마, 애송이 아가씨.”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머리색이 하늘색이라 눈에 쉽게 띄었다. “애초부터 합스부르크 방면은 네 년의 제6군단이 맡고 있었잖아. 안 그래? 우리는 아주아주 특별하게, 네 년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몸들이야. 응? 네 년한테 추궁을 당할 입장도 아니거니와, 서열 제9위 주제에 목소리를 높여도 될 만큼 가소로운 분들도 아니야.” “난 서열 제9위가 아니라 제8위이다, 머리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새끼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아가레스가 어머나, 하고 입을 가렸다. “정말 미안해! 서열이 너무 낮아서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네. 하지만 너도 나빴어. 응? 적어도 제5위 안에는 들어야지 상대방도 기억하기 편할 거 아니야. 제8위라니. 너무 숫자가 커서 나 같은 멍청이는 외우지도 못하겠다, 야.” “오호. 내가 그 머저리 같은 두뇌에다 직접 각인시켜줄 수도 있는데.” 두 마왕이 서로를 보며 살벌하게 미소 지었다. “까볼 테면 까보던가, 마드모아젤 씨발 양.” “네 년, 죽여버리겠어.” 바르바토스가 전투대낫을 소환하려는 순간이었다. 마르바스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가 여기는 평온하게 회의가 굴러가는 법이 없군. 바르바토스. 아가레스. 만약 너희 둘이 이곳에서 결투를 벌이겠다면, 좋다. 나에게는 결투를 주최할 권리도 말릴 권리도 없으니 얌전히 물러가지. 하지만 다시는 연회에 초대하지 않을 줄 알도록.” “흥.” “씨발.” 바르바토스와 아가레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르바스는 마왕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중재자를 맡을 만한 인물이었다. 서열 제1위의 바알은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 아닌 바에야 철저하게 마왕들을 방관했다. 나머지 상위 마왕들은 전부 제 콧대가 높아 남의 말을 안 들었다. 오직 중립파의 수장인 마르바스만이 마왕들을 조율하고 다독였다. 그는 서열상으로 제5위였어도 실질적으로는 마왕군 최고의 권위자였다. 마르바스가 나서면 예의라도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마르바스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면 끝이 없다. 지난 수 개월 동안 우리들은 각자 동떨어져서 행동했다. 그 동안 군대를 어떻게 굴렸는지는 본인들만 안다. 완벽하게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군단은 한 군데도 없다. 바르바토스. 제6군단도 마찬가지이다.” “…….” “무엇보다도 숨길 일이 아니다. 합스부르크의 제도를 함락했다. 이건 군공이지 결코 흠이 아니다. 누군지 몰라도 제도를 떨어트린 마왕은 영원토록 칭송을 받겠지. 그걸 숨겨서 얻을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마르바스가 천천히 마왕들을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만약 생각나는 바가 있으면 발언해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마르바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지금 의심해본들 그 의심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중상모략이다. 그렇다면,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 수도를 불태웠다고 판단하는 편이 옳다.” “으으응. 합스부르크가 자국의 수도를 불태웠다고?”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발이 찰랑거렸다. “그것도 난 전혀 이해가 안 가는걸. 수도는 수도잖아. 나라의 심장이잖아. 거길 불태워서 무슨 이득이 있는 거야아?” “…….”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왕조는 극히 드물긴 해도 있었다. 그중 어느 왕조도 수도를 철저하게 불태우지는 않았다. 분노에 찬 백성이 궁전을 태워버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수도 전체가 불탄 것은 전대미문이었다. 인간들에게 도시란 되찾아야 할 보물이다. 당장 월맹군에 밀려도 언젠가 도시를 수복할 수 있다. 지난 역사에서 인간은 수없이 그런 과정을 반복했다. 왜 뜬금없이 수도를 전소시켰는가? “……아무래도 대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군. 일단 진군을 계속해볼까. 정답은 그 이후에 찾아도 좋을 것이다.” 마르바스의 제안에 모두가 끄덕였다. 월맹군은 이미 불타버린 제도로 진격했다.   00159 폭군의 시대 =========================================================================                        닷새 후, 군단들이 합스부르크 제도에 도달했다. “…….” 드높은 성문을 지나치면서 마왕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 처음으로 합스부르크의 수도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보다 영광스럽고, 보다 환희에 가득 찬 승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시커먼 연기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짐승도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화염이 남기고 간 탄내가 콧구멍 깊이 찔러 들어왔다. 마왕들은 검게 타버린 땅바닥에 대충 군진을 차렸다. 바르바토스는 허망하게 수도의 풍경을 둘러보다가, 무언가 깨닫고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다른 마왕들한테 서둘러 말했다. “이건 계획적으로 퇴각한 거야. 젠장.” “계획적으로 퇴각했다니이?” 가미긴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는 수도에 돌입한 이후 줄곧 비단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있었다. 그 탓에 목소리가 맹맹하게 울렸다. “제5차 월맹군 기억하나? 아가레스. 네 년이 모스크바 왕국 방면을 맡았잖아.” “그때는 모스크바 왕국이 아니라 키예프 왕국이었지만.”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불쾌한 듯 입끝을 이죽거렸다. “왜 갑자기 남의 안 좋은 추억을 건드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인간군은 청야전술을 써먹었어. 하필 또 겨울이었지. 네 년이 죽을 똥을 싸가면서 키예프에 도착했더니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잖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수도를 버렸다고?” 아가레스가 턱에 손을 괴었다. 언제나 입가에 웃음기가 감돌던 그녀가 모처럼 진지해졌다. 바르바토스는 마왕들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봐봐. 황릉들이 전부 도굴되었잖아. 황궁은 아예 해체해서 들고 갔어. 수도를 옮기겠다는 의도이지. 시발,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당장 정예를 추려내서 추격해야 돼.” “마지막 기회라니?” 마르바스가 반문했다. “무슨 뜻인가, 바르바토스.” “자그마치 수도를 들였다가 딴곳으로 옮기고 있는 거야, 제국놈들은. 백성들이 예 알겠습니다 옮기라면 옮깁지요, 하고 얌전히 따랐겠어? 존나 강제로 철거시켰을 게 분명해.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겠지!” 바르바토스가 흥분했다. “그런 백성을 다독이면서 후퇴하고 있는 거야. 움직이는 속도가 굼벵이 엉덩이 수준일걸. 지금이야말로 제국이 무너질 순간이지. 추격해서 놈들의 뒤꼬랑지를 조져버리면 합스부르크 전역이 우리의 영토가 된다! 자아. 동지들. 깃발을 들어올려 당장 공격하자!” 그녀가 어때, 하고 마왕들을 쳐다보았다. “…….” “…….”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뭐야?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아? 그럼 말을 해.” “바르바토스. 제2군단은 합스부르크의 수도를 점령했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마르바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고의 전술은 무혈입성이다.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륙 중앙부에서 가장 명망 높은 도시를 점령했다. 이 이상으로 쓸데없이 전투를 자초할 필요가 있겠는가.” “으응. 나도 마찬가지인걸.” 가미긴이 동조했다. “보니까 이거, 인간군의 수뇌부가 백성을 등졌다는 소리잖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는 편이 심리적으로 우리한테 유리해지지 않을까아?” 여타 마왕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이, 친애하는 동지들. 무슨 소리야?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싶은데. 다시 한번 말해줄게. 지금 우리가 합심해서 쫓아가면 합스부르크 제국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놈들은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고, 게다가 거추장스러운 백성들까지 덕지덕지 끌어안고 있어.” “그거 말인데.” 아가레스가 피식 웃었다. “제국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우리가 쫓아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겠어? 응? 내 생각에는 우리한테 미끼를 던져두고 어서 물어주십쇼, 하고 광고하는 것 같은데. 일부러 미끼를 물어줄 의리 따위 없잖아.” “……함정을 파놓았든 매복을 해놓았든 아무 상관없어, 아가레스.” 바르바토스가 분노를 목구멍 속으로 구겨넣으면서 간신히 말했다. “중요한 건 두 가지뿐이야. 적은 약하고, 우리는 강해.” “그러니까, 놈들이 비장의 한수를 숨기고 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 바르바토스는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마르바스, 아가레스, 가미긴, 월맹군의 수뇌부들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적군이 함정을 설치해두었을 경우 압도적인 힘으로 깨부수면 그만이었다. 그 사실을 여기 모인 마왕들이라고 모를 리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마왕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즉 그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너 이 년놈들――설마, 대륙을 정벌할 생각이 없는 거냐.” 마왕들은 제8차 월맹군이 대륙을 토벌하리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금발의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말했다. “에에?” 마치 이상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네 쪽이라는 것처럼. “월맹군 원정이 성공할 리가 없잖아.” “…….” “차암, 바르바토스도. 이상한 말을 한다니까.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했으면 됐지, 뭘 또 욕심을 부려어? 그러다가 위장이 체해버릴 거야. 헤헤.” 아가레스가 이어서 말했다. “차라리 잘됐네. 수도까지 버리면서 후퇴한 이상 합스부르크는 차마 반격할 만한 기력이 없을걸. 이대로 기수를 돌려서 제국의 남은 영토를 청소하면서 느긋하게 전리품이나 챙기겠어.” “…….” “본인의 제2군단은 원래 폴리투니아 왕국 방면을 맡았다. 바르바토스. 그대와 여기까지 함께 행동한 까닭은 검은 산맥을 돌파하지 않고도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향하는 길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후방을 염려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제2군단은 본래의 목적지로 향하겠다.” 하고 마르바스가 말했다. “어차피 대륙 정벌은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작업이다. 굳이 한 번에 끝내려고 초조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바르바토스.” “……초조해하지 말라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이 병신들이……지금 그게, 마왕 된 녀석들이 뱉어대는 소리야? 인간의 제국 하나를 멸망시킬 기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우리의 사명은 인간을 멸종시키고 마인들에게 대륙을 선물하는 것이다. 네놈들은 그걸…….” “아, 아. 그놈의 사명! 진짜 못해먹겠네.” 아가레스가 소리쳤다. “그 잘난 사명은 너나 찾으세요, 꼰대 년아. 마인들 중에 진지하게 대륙 정벌을 외치는 새끼는 천 년 전에 다 뒈졌어. 이젠 네 년 주변에 있는 새끼들 빼고는 아무도 그딴 헛소리를 믿지 않아. 응? 알겠어? 우리는 그냥 우리를 따르는 마인들을 배불리 먹여줄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너……서열 제2위라는 년이, 어떻게.” “미안. 바르바토스.” 가미긴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나도 굳이 피해를 보기는 싫어. 그야,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제국군을 괴멸시킬 수 있겠지만 말이야. 제국군도 지금 뒤치기 당하면 멸망할 거 빤히 아니까 어어엄청나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잖아. 헤헤. 그럼 지금까지 싸우는 척하면서 아낀 병력을 전부 잃어버리게 되거든!” 가미긴이 손수건으로 코를 풀었다. “으응. 파이몬도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바르바토스, 네 평원파도 가장 적극적으로 싸우느라 병력을 꽤 잃었잖아. 나로서는 현재가 최고의 상태라고 할까―. 이보다 더 바랄 건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할까―. 헤헤.” “…….” “참. 그렇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중북부를 너 혼자 다 차지해버리면 안 된다아? 병력을 아꼈다지만 아무렴 우리도 함께 싸웠는걸! 공명정대하게 영토를 배분해줄 거라 믿고 있어.” 바르바토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토 배분……?” “응. 우리가 여태까지 뭘 위해서 바르바토스가 맡은 방면으로 군사를 움직여줬는데에.” 가미긴이 빙그레 웃었다. “힘들었다고오, 언제 군량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했어. 응, 인간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우리한테 막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았지만. 어느 군대였지? 튜튼 왕국? 우리 군단에는 걔네들이 따라붙었는데, 우리가 조금 나아가면 걔네도 조금 물러서고 그러지 뭐야. 헤헤. 걔네도 딱히 열심히 싸우긴 싫었나봐!” 실제로. 제8차 월맹군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싸운 군대는 정해져 있었다. 마왕군에서는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제6군단. 인간군에서는 엘리자베트 황녀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군. 제6군단은 올곧게 대륙 정벌을 위하여 분투했고,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자국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마왕군의 나머지 군단들은 애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움직였다. 즉, 마왕군 최대의 파벌인 산악파를 실각시키려고 움직였다. 그 목적이 달성된 이상에야 군사를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군의 나머지 군대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연설전으로 인하여 사기가 낮아진 가운데, 그들로서는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굳이 맞서싸울 이유가 없었다. 장병들의 사기를 다독일 겸해서 인간군은 합스부르크의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청야전술이라는 명목 아래, 합스부르크를 지키기 위해 파병왔다는 명분 아래, 인간들은 같은 인간의 재산을 빼앗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약탈하지 않는다면 마왕군이 먹어치운다. 거리낄 구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해관계가 마왕군과 인간군 사이에 떨어맞았다. 정면에서 바르바토스와 엘리자베트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여타 마왕군과 인간군은 마치 미리 약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경계선을 존중했다. 이쪽은 마왕군이 약탈했다. 저쪽은 인간군이 약탈했다. 전투는 극히 드물게 발생했으며 그것도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로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토에서 단물을 빼내는 데만 집중했다. 그나마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한 군대는 역설적이게도 산악파였다. 산악파는 동족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벗어던지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브르타뉴 왕국군을 전멸시키면서 산악파의 군대는 손상되었다……일부러 전투의 손해를 크게 부풀려서 광고한 것은 물론이었다. “맞아. 우리한테도 정당하게 몫을 주장할 권리가 있지.” 아가레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뭐, 난 욕심이 그렇게 크지 않아. 적당히 공국(公國) 크기만한 영토만 떼어줘. 합스부르크 수도는 바르바토스 네가 가져도 돼. 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자비롭단 말이지.” “아. 난 웬만하면 검은 산맥 부근이 좋아. 바알 님이 출진하지 말랬는데 무시하고 나온 거니까아. 멀리 떨어진 영토를 받으면 모양새가 별로야. 응. 브란덴부르크 영지 정도면 만족할게.” “맞다. 위치도 중요하네. 쓰읍. 난 어쩌지.” 바르바토스가 침묵했다. “…….” 분노보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런 것들이 자신과 동격이라는 사실이 차마 끔찍하여 인정할 수 없었다. 긍지라고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찾아 움직이는 승냥이 무리였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자리에서 떠났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평원파의 마왕들만이 그녀 뒤를 따랐다. 그녀가 지극히 차가워진 얼굴로 말했다. “당장 추격조를 꾸려.” “우리 군단만으로 추격하실 생각입니까?” 제파르가 조심스레 말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승기를 장담할 수 없나이다.” “승기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여 잡아내는 것이다.” 바르바토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마왕들이 쓰레기일지라도 우리만큼은 마족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아직도 마왕은 그대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노라고. 제왕이란 그런 것이야.” “……존명.” “개새끼들.”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등 뒤를 슬쩍 노려보았다. “좋아. 네놈들이 그리 바란다면 대륙 정벌은 뒤로 미룬다! 그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 새끼들을 청소해주지.” 이 순간, 평원파는 여타의 파벌들과 사실상 결별했다.   00160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예전부터 쭈욱 고민해온 것이 하나 있다. ……나 말이지, 마왕인 주제에 위엄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심각한 고민이다. 무력 능력치도 매력 능력치도 뒤떨어진다. 눈앞의 사람을 저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제왕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소위 카리스마라는 물건이 나에게는 전무했다. 아마 머리 뒤통수에 뿔이 달려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내가 마왕인 줄도 몰라볼 거다. 1년 전 애송이였던 시절에 비해서야 뭐, 관록이 붙었겠지. 인간이 떼거지로 죽는 광경에도 익숙해졌다.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대충 알겠다. 하지만 카리스마는 도통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말일세, 이게 참 문제라네. 안 그런가?” 내가 흐음, 하고 신음을 흘러보내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본인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까먹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무리가 생겨난다네. 허. 왜 제왕들이 쓸데없이 궁성을 화려하게 짓고 그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내 이제 알겠네. 그야 대리석으로 지어진 궁전에서 황금으로 된 옥좌에 앉아 있으면 없던 위엄도 생길 거야. 세상사, 겉으로 보기엔 쓸모없어도 사실은 다 깊은 의미가 있지.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예……예, 전하!” 초로의 남자가 내 발밑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오체투지하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색 비단옷에 먼지와 핏물이 엉겨붙었다. “소, 소인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뜻이 통하니 기쁘군.” 내가 방긋 웃었다. “애석하게도 본인에겐 쓸데없이 화려한 궁성을 지을 생각이 없네. 안 그래도 돈 쓸 구석이 많아서 말이야. 허, 문제도 큰 문제이지. 암. 큰 문제이고 말고. 본인한테는 선천적인 위엄이 없어. 그러니 후천적으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네. 어떻게 해야 본인이 후천적인 위엄을 몸에 두르겠는가?” “전하께는……이, 이미 위엄이 넘치옵니다.” “오. 칭찬해주어서 고맙네.” 나는 오른발을 들어서 남자의 머리통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마치 손바닥으로 쓰다듬듯이 천천히. 남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겐 위엄이 없어. 만약 있었더라면 왜 무뢰한의 습격 따위를 받겠는가? 실패하면 자신들이 싸그리 멸족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구태여 습격했다. 즉, 본인을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이지.” “저……전하.” 남자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나는 그의 머리통을 꾸욱 밟았다. 몸이 진동하는 것이 신발 너머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상대방은 현재 지독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남자가 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로 울었다. “살려주시옵소서……모, 목숨만은 살려주십쇼!” “그래서. 본인은 일종의 상징을 만들어내자고 결심했네.” 내가 발을 치웠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죽음의 기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사가 남자의 허리를 붙잡아서 벌떡 일으켜세웠다. “히, 히이이이익!” 남자가 어린애처럼 가볍게 공중에 매달렸다. 바짓가랑이에서 짓노란 물이 줄줄 떨어져내렸다. 시큼하게 악취가 풍겼다. 나는 왼손을 들어서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잘 보게나. 검지와 중지가 없는 것이 보이는가?” “예! 예! 흐으윽, 잘 보이옵니다…….” “자네의 충실한 부하들이 본인에게서 잘라갔다네. 솜씨가 훌륭하더군. 미처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지 뭔가. 하하.” 남자의 안색이 새파래지다 못해서 하얘졌다. “저, 전하……용서……부디, 요, 용서를…….” 내가 웃었다. “뭐.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일세. 본인은 무척 너그러운 사람이라네. 자네의 부하가 실수 한두 개를 저질렀다고 해서 다짜고짜 아무런 이유 없이 자네를 죽이거나, 그렇게 야만적으로 행동하진 않을걸세.” “감사합니다……흐끄윽, 전하……감사합니다!” 남자가 양손을 싹싹 빌면서 수십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양손을 빌면서 사죄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 보았다. 상상보다 훨씬 비굴한 모습이었다. 하긴, 남자의 손가락 열 개가 몽땅 분질러져서 유독 추악하게 보이는 것일지 몰랐다. “그나저나 자네. 오른손 중지에 낀 반지는 무엇인가?” “예? 예, 예. 대공의 직위를 상징하는 반지이옵니다.” “빼내어서 나한테 주게.” 남자가 딸꾹질을 했다. “이, 이건 영원히 뺄 수 없는 반지라서…….” “잘라.”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죽음의 기사가 남자 손가락을 비틀었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남자의 오른손 중지가 땅속에서 무 뽑듯이 쑤욱 뽑혀나왔다. 죽음의 기사가 반지를 빼내어 나한테 진상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비명과 신음에 정신이 없었다. 그를 향해서 말했다. “자네에겐 이제 필요없는 물건이지. 안 그런가?” “예……흐끄으윽.” 내가 일어서서 그의 뺨을 토닥거렸다. 남자 입구멍에서 제멋대로 침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내 손이 추욱 젖었다. 조금 더러웠지만 괜찮았다. “본인은 이 상처를 굳이 치료하지 않을 계획이야. 생각해보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는 상처를, 그것도 이렇게 눈에 띄는 상처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라네. 본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이 상처를 눈여겨보겠지. 그리고 떠올릴걸세. 본인에게 저항한 자의 말로를.” “예……?” “저승에서 후회해라, 머저리.” 나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곧장 녀석의 턱에 꽂아넣었다. 목과 턱이 맞닿은 부위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어갔다. 커억, 하는 단발마가 울리더니 녀석이 각혈했다. 새빨간 피가 내 얼굴에 튀었다. 나는 눈을 감지 않고 남자의 최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부르르 짧게 경련하더니 이윽고 힘이 사라졌다. 단검을 뽑아들어서 천에 닦았다. 바르바토스가 선물해준 단검이었다. 소중하게 다루어야겠지. 핏물 같은 이물질을 제깍제깍 닦아야지 무기의 수명이 늘어난다. 여차하면 자살할 때 써먹으라고 선물한 것이었지만 뭐. 바르바토스의 입이 더러운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궁성 꼭대기에 이 놈의 목을 효수하라.” 죽음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마계를 다스리는 스물여섯의 대공 중 알찰타지옥(頞哳陀地獄) 대공이 죽었다. 대공이 머무르는 궁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궁신 이백 명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궁성의 첨탑에는 대공과 궁신의 목들이 줄줄이 매달렸다. 나는 그곳에다 특별히 문구 하나를 적어서 걸어놓았다. ─ 네 자신을 알라. * * *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왕성에 돌아왔다. 본래 예정대로 움직이자면 대공들 몇 명을 더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성이 사라졌다.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니 놈들한테도 머리통이 달렸다면 저들 스스로 공물을 바치리라. 무엇보다도 내 전략 자체를 뜯어고칠 필요가 생겼다. 파이몬이 공화주의자라는 게 밝혀졌고, 심지어 공화파가 대륙 곳곳에 잠복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나는 그들의 협력자가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새로이 전략을 짜야 했다. 따뜻한 지하 연못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좀 취했다. 그러나 휴식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경악스러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바르바토스가 패퇴했다고?” 마법수정구에는 시트리가 비추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패퇴라고 해서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큰 건 아니지만서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아니,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애가 어쩌다 패배했어?” ─ 그게 그러니까……. 시트리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합스부르크 전역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수도로 진격했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수도는 이미 비어 있었다. 제국이 자신의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얼른 추격하여 제국군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제안. 다른 파벌의 마왕들이 협조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이에 바르바토스는 단독으로 제국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제국은 마왕군이 뒤쫓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격군은 협곡을 지나치면서 제국의 매복에 걸렸다. 앞과 뒤, 사방이 틀어막혔다. 시트리의 얘기에 따르면 자그마치 검의 주인이 스무 명이나 달려들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의 검주뿐만이 아니라 여타 인간군에서 검주를 파병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재빠르게 추격하느라 많은 수의 병력을 대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소수의 병력조차 수도에 막 도착했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행군한 애들이었다. 함정을 파놓고 호시탐탐 기다리던 인간군에 당해낼 리 만무했다. 바르바토스는 패배. 간신히 자기 한 몸만 협곡에서 빠져나왔다. 검의 주인 다섯 명이 끝까지 바르바토스한테 달라붙는 바람에 그녀는 왼팔이 잘리고 말았다. 바르바토스 정도의 마왕이면 팔 하나쯤이야 어렵지 않게 재생하겠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 정도나 되는 마왕이 팔 한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패배를 뛰어넘어 참패라 표현해도 부족했다. ─ 하아. 꼴불견인 녀석이지만 부하 전부 잃어버리고 외팔이 신세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까, 뭐라고 할까. 왠지 미안해지더라고. 시트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라도 따라가줄 걸 그랬어. 그래도, 걔가 이번 전역에서 제일 열심히 싸웠는데. 가장 열심인 애가 가장 피해를 많이 보니까 뭔가 싫어. 그렇다고 걔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으으으. 어쩌지, 어쩌지, 하고 시트리가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시트리가 전해주는 얘기를 전부 듣고 딱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시트리는 전혀 모르겠지만, 바르바토스, 그 녀석은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일단 성적으로도 그러했다. 누가 봐도 녀석은 사디스트였다. 하지만 실제로 나랑 떡을 칠 때는 녀석이 마조히스트가 되는 경우가 잦았다. 바르바토스가 내 가랑이에 파묻혀 암퇘지처럼 꿀꿀거리는 메모리아 영상을 관람하고서 대공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그만큼 의외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입담이 걸걸하여 주변에서는 아 저 년 성격이 무진장 사납구나, 하고 생각하지만……글쎄. 녀석은 또 의외로 여렸다. 파이몬의 계략에 빠져 사면초가에 몰렸을 때, 바르바토스는 부하들 앞에서 꼬맹이처럼 엉엉 울었다. 요컨대 표리부동한 놈이다. 말투와 표정만 보면 다혈질도 이런 다혈질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부하를 아끼는 바르바토스가 뻔히 적군이 함정을 쳐놓은 걸 알면서도 사지에 들어갔다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보나마나 아주, 아주 음흉한 속내가 숨겨져 있으리라. 내가 잠시 고민하고 물었다. “시트리. 바르바토스의 추격조가 대략 몇 명이었어?” ─ 응? 마법수정구에서 투영하는 시트리가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 으으응……아마도 천오백 명? 천 명 조금 넘은 것 같았는데. 바르바토스는 대략 오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다. 평원파 전체를 고려하자면 약 일만오천 명. 그중에서 고작 천 명만을 추격조로 재편했다……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매우 구리구리한 냄새가 풍겼다. “그중에 죽음의 기사도 있었냐?” ─ 응. 수백 명 좌르르 있었어. 아하. 시트리가 물어왔다. ─ 근데 그건 왜?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바르바토스의 속내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녀석의 의중을 알아차려서 기쁘다는 마음보다 오히려 어이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여간 진짜 음흉한 녀석이었다. 조금쯤은 눈앞에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시트리의 순진무구함을 본받았으면 했다. ‘짜식. 구라를 쳤구만.’   00161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바르바토스는 한 마디로 말해 보여주기 용으로 출격했다. 죽음의 기사는 그림자에 두고 다닐 수 있었다. 추격과 같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당연하게도 그림자에 넣어서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진심으로 제국군의 뒤를 쫓고자 했다면, 차라리 벨레드와 같은 마왕만 대동하고 극소수의 정예로만 움직였을 것이다. 제국군이 밤을 지새는 동안 틈을 노려 기습했겠지. 죽음의 기사는 그야말로 기습에 최적화된 병종이니까. 그런데 보란듯이 죽음의 기사들과 함께 진군했다. 나는 확신했다. ‘죽음의 기사는 한 기도 안 죽었을걸.’ 실제로는 그닥 고급스럽지 않은 병종, 오크나 해골병사 따위만 이끌고 추격했으리라. 그마저도 병력이 고작 천 마리……글쎄. 그 천 마리도 과연 전부 소모했을지 어땠을지 의문이다. 천 명 미만의 병사를 투자하여 바르바토스는 명분을 얻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군을 쫓아간 마왕, 이라고. 다른 마왕들이 본색을 드러내며 주저앉은 순간 오로지 바르바토스만이 진실하게 월맹군에 참여했음을 널리 알린 것이었다. 마인들은 바르바토스를 굳건하게 지지하겠지. 설령 대다수의 마인이 대륙 정벌을 불가능한 이상이라 생각할지라도, 아무튼 간에 바르바토스에겐 명분이 있었다. 그 명분에는 마인들이 마땅히 존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깔깔깔. 머릿속에서 바르바토스의 웃음소리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하여간 비열하게 머리를 쓰는 녀석이었다. 나는 가끔 궁금했다. 저토록 비열하게 삶을 살아가면 피곤하지 않을까? 조금 성실하고 조금 착실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전달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바르바토스는 인성이 글러먹었다, 인성이. 쯧쯧.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웬만해서 엮이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다. 내가 시트리에게 말했다. “고마워. 시트리. 너 덕분에 월맹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어.” ─ 헤헤. 아니야. 이런 것 가지고 뭐. 시트리가 방실방실 웃었다. 조금 전까지 바르바토스한테 사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모습은 금세 증발해버렸다. 시트리처럼 단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 한결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단탈리안. 몸이 참 안 좋다! 시트리가 뜬금없이 일침을 가했다. 지금 나는 지하연못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당연히 알몸이었다. 수정구의 각도를 조절해서 내 상반신만 비추게 만들었는데, 시트리는 그걸 보고 한 마디 말한 것이었다. 내 입가가 약간 떨렸다. “몸이 안 좋다니. 중상모략이 따로없군. 내 체격은 지극히 평범해.” ─ 응? 시트리가 정말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시트리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아니야, 단탈리안. 네 체격은 평균이 아니라 평균 이하야. 이건 확실해. “…….” ─ 근육도 없어. 팔뚝은 가녀려. 어깨도 좁아. 가슴도 들어갔어. 어딜 봐서 단탈리안 네가 평균이야? 이건 확실하게 해야지. 그 정도 체격으로는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전쟁터에서 구를 수도 없어. 시트리의 표정과 말투에는 악의가 없었다.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서술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 저녁식사에서 우리가 오리고기를 먹었지, 라고 말하듯이 담담하게. 그녀는 순진무구했으며 순진무구한 그만큼 나에게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내가 변명했다. “나, 나는 전방에서 칼 휘두르는 종류의 마왕이 아니야. 후방에서 고상하게 전략과 전술을 논하는 사람이니까 근육 따위는 불필요해. 맞아. 나한테 중요한 것은 몸의 근육이 아니라 뇌의 근육이라고.” ─ 으응? 아니야. 최소한 몰골이 볼 만은 해야 하잖아. 단탈리안은 군주로서도 책사로서도 볼품이 너무 없는걸. 솔직히 말해봐. 너 운동 전혀 안 하지?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마왕이 평범한 마인보다 재생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기본 체격까지 저절로 높은 건 아니야. 아, 무언가 무척 익숙한 데자뷰가 느껴졌다. 그리우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항감이 치솟는 이것은, 내가 잘못 떠올리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것이었다. 거의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반항감을 안게 되는 바로 그것――어머니의 잔소리였다. ─ 이제 단탈리안도 명망 높은 마왕이 되었으니까, 마왕답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나야 파이몬 언니의 수하이니까 대놓고 난봉꾼처럼 다니고 있지만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의 수하로만 있을 생각은 아니잖아. 그치? 그러면 남들이 보기에도 아, 저 사람은 역시 마왕이니까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싶을 만한 인상을 줘야 해! 우와아아……내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내 주변에는 잔소리꾼밖에 없을까. 라피스는 물론이었고, 라우라도 운동 문제에 관련해서만큼은 나한테 만날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이제 여기에 시트리까지 추가되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 살았다고 다들 연합해서 쪼아대는지 모르겠다. 알고 있다. 이 시대는 근육형 남성. 이른바 마초를 숭상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농사를 짓는 데도 마초가 유리. 전투를 벌이는 데도 마초가 유리. 생존이 지상최고의 목표로 여겨지는 이 시대, 사람들은 오로지 마초 그리고 마초만을 연호했다. 마초가 아닌 남자는 살아남기도 힘들었다. 이처럼 불합리한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당당하게 선언한다. “대세는 가녀린 남성상이다!” ─ 에? “근육은 폭력과 억압의 상징에 불과하다. 왜 남자는 전부 마초여야 하는가. 매우 지독한 편견……시대를 병들게 하고 사람을 병들게 하는 편견이다. 아름다움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자도 얼마든지 가녀릴 수 있다!” ─ 잠깐만, 단탈리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하기 어려운데. “후우. 시트리. 순진무구하지만 그렇기에 시대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가. 너 역시 시대의 아집에 붙잡힌 망령이었는가. 통재라. 더 이상 너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어쩔 수 없군. 오늘 통신은 여기까지.” ─ 단탈리안? 단탈리안! 기다려봐, 나 아직 할 이야기 끝나지……. 마법수정구를 껐다. 시트리를 투영하던 막이 사그라들었다. 지하동굴이 조용해졌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시트리, 그녀와는 진심으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대의 편견이란 이토록 단단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삶이란 이런 것이겠지……결코 이해할 수 없는 장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놓여 있었다. 나는 연못에서 나왔다. 몸에 옷을 걸치지 않았다. 마왕 레벨이 오르면서 내 던전의 온도를 약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이 딱 적당하게 서늘하고 적당하게 따스했다. 어차피 던전에는 라우라랑 내 몬스터밖에 없기에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무방했다. 마왕방에 돌아왔다. 라우라가 책을 읽고 있었다. 금발의 소녀가 독서하는 광경은 그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우우, 라우라! 라우라!” 나는 알몸으로 라우라한테 달려들었다. 라우라가 비명을 지르면서 기겁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책을 보호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는데, 나한테 허리가 붙잡혔다. “흐아앗! 주군!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세상이 저를 괴롭힙니다, 흑. 막 저한테 몸이 안 좋다느니 체격이 볼품 없다느니 놀려대요. 라우라! 우리 라우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제 체격은 딱 평균이지요?” 라우라가 무척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주군은 말 그대로 볼품 없는 사나이의 대명사이다.” “…….” “으앗!? 왜 가슴을 주무르는가, 주군! 앗, 으, 왜 치마를 벗기는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다오! 적어도 애무는 해주고 삽입해주길 바란다! 아니, 그렇게 당장은, 하윽!? 주군, 아프다! 흐윽, 주군!” 네 시간 후. 나는 침대에 자빠져서 색색 숨을 몰아쉬는 라우라를 내려다보았다. 라우라의 엉덩이가 아직도 경련에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라우라. 제 체격은 딱 평균이 맞습니까?” “주군은……세상에서 가장 멋진 몸을 가진……사내…….” “후후후.” 내가 씨익 웃었다. 승리의 도취가 가슴에 부풀어올랐다. “이제야 진실을 말해주는군요. 자아.” 나는 아랫도리를 라우라의 얼굴에 갖다댔다. “사죄의 의미로 깨끗하게 핥으세요.” 라우라가 질색했다. “으으. 애액이랑 정액이 뒤섞여서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묘한 냄새가…….” “라우라의 애액입니다. 자기 것은 자기가 청소해야죠.” “그, 그럼 정액만이라도 주군이 처리해라.” “주군의 뒷처리는 마땅히 신하가 하는 법.” 내가 쿨하게 말했다. 라우라가 눈물을 흘렸다. “어쩌다가 소녀의 신세가 여기까지 추락했는가. 어디서부터 소녀의 인생은 잘못되었는가. 인생이란 애시당초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인가. 여신이시여, 여린 필멸자를 부디 동정하여주소서.” “여신께선 당신이 지금 제 귀두를 핥을 것을 운명으로 정해주셨습니다. 이건 태초부터 결정된 사항입니다. 자아, 얼른 핥아요.” “언젠가 반드시 여신을 죽이겠다……흐윽.” 불경하기 그지없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 라우라가 나의 귀두를 혀로 할짝거렸다. 그녀는 탐색하듯이 혓바닥을 놀리더니 이윽고 입술 속으로 육봉을 집어 넣었다. “음.” 가볍고 부드러운 쾌감이 하반신에 스며들었다. 라우라는 침으로 애액을 닦을 속셈인지 계속해서 침을 흘렸다. 육봉이 금방 미끌미끌해졌다. 질퍽질퍽하게 침소리를 내면서 라우라가 자지를 빨았다. 여전히 펠라 솜씨가 일품이었다. “계속 빨면서 들으세요. 월맹군의 전황입니다.” “으읍, 츄릅……하으읍. 읍…….” “월맹군이 합스부르크의 제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혈입성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자국의 수도를 버리고 후방으로 퇴각했다고 하더군요. 소문에 따르자면, 황제가 직접 수도를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라우라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머리를 앞뒤로 흔들면서 음경을 정성스레 빨았다. 네 시간 내내 섹스하여 지칠 법도 했건만, 나의 아랫도리는 다시 딴딴해져서 라우라의 따뜻한 입안을 유린했다. “지금까지 제국군을 통솔하던 엘리자베트 황녀는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반쯤 실각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수도를 정리하고 후퇴시킨 인물은 황녀가 아니라 제2황자……애당초 민중과 군부의 지지도가 높았던 황녀에 비하여, 제2황자는 궁정귀족의 지지를 등에 업은 후계자입니다. 즉 현재 합스부르크 황실은 제2황자를 중심으로 한 궁정귀족이 장악하고 있다. 그렇게 봐야겠지요.” “흐읍, 으으음……하음……츄릅.” 아. 라우라가 약간 이빨을 세웠다. 실수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이빨 끄트머리로 육봉의 살갗을 아주 살짝 긁었다. 나는 이 감촉을 싫어하지 않았다. 쾌감이 저릿하게 올라왔다. 라우라는 이제 손까지 동원했다. 자지의 윗 부분은 입으로 감쌌고, 아랫 부분은 손으로 쥐어서 흔들었다. 부드러운 쾌감과 자극적인 쾌감이 한데로 섞여서 진동했다. 정액이 꾸물꾸물 올라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싸라. 얼른 싸서 내 입안을 탁하고 비릿한 정액으로 가득 채워달라. 라우라는 그렇게 말하듯이 격렬하게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흐음.” 이대로 싸버리는 것은 뭔가 분했다. 나는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는 구슬들을 집어 들었다. 이 구슬들은 서로 노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름칠이 되어 있어서 번들번들했다. 나는 그것을 라우라의 엉덩이에 가져다 댔다. “라우라. 문제입니다.” “하읍?” 라우라가 입에 자지를 문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녹색 눈동자에는 어서 행위가 끝나기를 바라는 염원만 나타나 있었다. 벌써 네 시간째 섹스했다. 지친 것이었다. “맞추면 오늘 성교는 여기까지로 하죠. 하지만, 틀리면 이걸 엉덩이에 집어 넣을 겁니다.” “…….” 기분 탓인지 라우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애널을 희롱하는 것 자체는 라우라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한테 영입되기 이전에 성노예로서 잔뜩 교육을 받았고, 소위 교육과정에는 애널을 조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 이상 행위가 길어지는 것이 끔찍하다. 라우라의 심정은 그 정도였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마음대로 질의응답을 시작했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는 여러 개입니다. 그중 하나만 맞추면 됩니다. 어때요. 쉽죠?” 라우라가 시선을 내리고 다시 나의 육봉을 빨았다. 주군 마음대로 하라. 그런 의미였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 소문에 따르자면 황제와 제2황자에 의해서 엘리자베트 황녀는 유폐되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앞으로 실각할까요, 실각하지 않을까요? 자아. 실각할 것 같다면 귀두를 혀로 살짝 핥으시고, 실각하지 않을 것 같다면 육봉을 깊숙이 빠세요.” “…….” 퀴즈쇼 진행자가 된 기분으로 유쾌하게 떠들었더니, 라우라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입에서 자지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라우라의 봉사정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보였다. “제한 시간은 십 초입니다! 시작! 십, 구, 팔, 칠…….” “…….” 라우라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내가 사를 셀 즈음해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움직였다. 자그마한 혓바닥으로 귀두를 할짝 핥았다. 애완동물 같아서 귀여웠다. 내가 싱긋 웃었다. “아쉽군요. 틀렸습니다.” 나는 첫 번째 구슬을 라우라의 애널에 쑤욱 집어 넣었다. 그때까지 입에서 자지를 빼지 않은 라우라가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신음을 내뱉었다. “흑, 핫, 하으으으윽!” “아.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문제를 틀릴 때마다 구슬 하나씩 넣을 거예요. 과연 라우라의 뱃속에 구슬이 몇 개까지 들어갈까 무척 궁금하군요.” 내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 으이구, 음흉하게 썩어빠진 로리 같으니라구. 바르바토스: 어휴, 남 조져버릴 생각밖에 안 하는 변태 같으니. 라우라: …….   00162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나,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달라.” 라우라가 말했다. 불쌍할 정도로 목소리가 가녀렸다. 본인도 별 의미없는 발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내가 빙그레 웃었다. “생각해보세요. 황녀는 군권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후방의 변경백들을 제외하면 제국군 전체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지요.” “황실의 궁정대신들도 만만치…….”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일수록 군권은 곧 권력입니다. 알겠습니까, 라우라? 황녀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예요.” 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뱃속에 들어간 이물질 때문인지 라우라가 이따금 얼굴을 찡그리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군권에는 군권으로. 황녀를 실각시키려면 그녀보다 강력하거나 적어도 비등한 전력이 필요합니다. 궁정대신들에게는 병력이 전무해요. 그렇다면 황녀의 부하들을 회유하거나, 변경백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소식은 전혀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황녀는 스스로 칩거했습니다. 수도의 백성 전체를 퇴거시키라고 황제가 명령하자, 차마 황명에 따르지 못하여 물러섰다……후후. 빤히 속내가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만약 정말로 궁정귀족들의 힘이 강력했다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엘리자베트 황녀에 대하여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을 것이다. 황녀가 퇴직하는 것은 당연하다. 올바른 일이다.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했겠지. 그러나 황녀에게 유리한 소문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도리어 백성들은 궁정귀족, 황제, 제2황자에게 분노하고 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비추겠습니까? 마왕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것을 엘리자베트 제3황녀가 지금까지 막아냈다. 그런데 궁정귀족파가 나서자마자, 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수도를 잃어버렸다. 그런 식으로 보일 겁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영지에서 쫓겨났다. 루돌프 황태자는 아우스테를리츠의 언덕에서 참패했다. 변경군과 중앙군이 전부 궤멸해버린 상태. 이때 제3황녀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마왕군에 맞섰다. 심지어 마왕군에는 십만 대군이 집결했는데도, 제3황녀는 소수의 병력을 운용하여 실로 기적적인 승리를 이어나갔다……. “백성들은 전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왜곡도 이것처럼 기가 막힌 왜곡이 없었다. 사실 제3황녀가 전투에서 거둔 승리들은 자그마했다. 전술적 승리들에 불과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3황녀는 끊임없이 뒤로 후퇴했으며, 제국의 수도까지 내어주게 되었다. 그 같은 사실이 전술적 승리라는 빛살 좋은 개살구에 숨겨졌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승리에 환호하고 있었다. “제가 추정하건대 황제와 제2황자는 이미 엘리자베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습니다. 진짜로 유폐된 사람은 황녀가 아니라 그들이겠지요…….” * * * “도, 동생아. 부탁이 있다.” 남자가 지극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탁자에 앉은 여인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대답했다. “예. 말씀하세요, 오라버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바마마와 만나게 해다오.” “죄송해요. 그건 안 되겠어요.” 즉답이었다. 남자가 이를 악 물었다. 합스부르크의 제2황자,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 스물네 살의 청년은 딱히 황제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황위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처럼 막중한 직책을 맡게 되면 도리어 삶이 피폐해진다, 하고 페르디난트는 생각했다. 다만 권력은 소중했다. 인생을 호화롭게 즐기는 데 어느 정도의 권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페르디난트는 형님인 황태자에게 협력하는 동시에 자신의 파벌을 키웠다. 딱 적당한 크기의 파벌이었다. 형님인 루돌프 황태자든 여동생인 엘리자베트 황녀이든, 계승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황위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제2황자 파벌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스스로 황제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황제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페르디난트는 스스로 킹 메이커의 역할에 만족했다. 누가 계승권을 이어받는지 상관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단, 그 같은 처세술은 어디까지나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때에나 유효했다. 그는 고작 황녀를 만나기 위하여 몇 차례의 검문이 있었는지 아득했다. 몸수색은 기본이었고, 반(反)마법-마법까지 걸렸다. 제국의 황자에게 차마 저지르기 힘든 무례였다. 그 무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페르디난트의 처지였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이대로 가다가는 반란이 일어날 것이야. 동생아. 아바마마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자 장차 합스부르크의 명운이 달려 있다……나는, 합스부르크의 황자로서 아바마마께 백성을 다독여달라 간청할 의무가 있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 중 한 명이 차가운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간에는 칩거하고 있다고 알려진 황녀에게.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대경실색하리라. 그러나 황녀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라비가 무릎을 꿇은 것 따위는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서류에 비하여 아무런 가치가 없다. 황녀의 태도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저조차 지난 번에 쫓겨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폐하의 존안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든…….” 거짓말이었다. 페르디난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앞의 누이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궁정대신들은 가족이 인질로 붙잡였다. 황자 자신의 부인과 아들도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황명'이라면서 계속하여 명령이 떨어졌다. 수도를 퇴거하라느니, 황릉을 파헤치라느니, 정신 나간 명령들이었다. 대신과 황자는 당연히 항의하러 황실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냉랭하게 살기를 내뿜는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은 '폐하의 호위'를 운운하며 자신들을 내쫓았다. 그제야 귀족들은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각본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아무도 그 누군가의 눈앞에서 진실을 지적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없어졌다. 반항한 귀족들은 철저하게 살해되었다. 가문 자체가 멸문했다. 백성들을 몰아내느라 수도에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가문 몇 개가 멸문하는 것 따위는 난장판에 파묻혔다. 제2황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었다. 자식들은 전부 황녀파에게 '호위'되고 있었다. 백성들이 분노에 휩싸여 습격할 것을 대비하여 삼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황자는 지금처럼 우회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이라.” 황녀가 피식 웃었다. 사막처럼 건조한 웃음이었다. 오라비가 방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흥미를 내보인 것이었지만, 황자는 그 반응이 반갑기는커녕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몇몇 귀족가문을 본보기 삼아 멸문하라 명령할 때조차 메마르게 웃었으리라. “저에게 너무나 과중한 청탁을 맡기시는군요, 오라버니. 제가 황제가 되지 않는 이상에야 어찌 감히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겠습니까?” “…….” 페르디난트는 공포에 떨었다. 그도 십 년을 넘게 궁정에서 살아왔다. 상대방이 어떤 의중을 내비쳤는지 모를 리 없었다. 방금 여동생은 황위를 찬탈하겠노라고 적나라하게 선언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스스로 황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며, 오라비, 당신이 나를 황위에 옹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 전하.” 여동생을 부르는 방법이 달라졌다. 황자는 무릎을 꿇은 걸로도 부족하여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비록 우리 가족에 우애가 깊지 않았다고 하나,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남매라고 믿습니다……당신의 오라비인 저에게 진실을 알 권리를 조금이라도 허락해주십시오.” “오라버니. 물론 저는 오라버니의 충실한 여동생이에요.” 상냥한 말과 다르게 황녀는 아직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존칭을 거두라고 얘기하지도 않았고, 권리를 허락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황자의 속이 타들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아니, 저희 가족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라버니는 이미 한 가정의 주인이지요. 주인이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위기를 넘기기도, 위기에 좌초되기도 할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의 생명이 자신에게 달렸다. 황자는 더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전하께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도록……제가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당신의 쿠데타를 도와주면 되는 것인가. 그 말이었다. 황자로서는 자기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비를 배신하고 여동생을 옹립한다. 그 대신 가정의 안정을 보장받는다. 이보다 더 헌신적인 행동이 가능할까. 상대방은 간단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제가 오라버니한테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오라비한테 다가가서 자신도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황녀가 오라비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최근에 백성들 사이에 무도한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늘이 분노할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합스부르크 제국은 끝장이다, 우리 백성의 손으로 황실을 쳐부수어야 한다…….” 황자도 알고 있었다. 지금도 백성의 분노를 빌미로 삼아서 접견을 청하지 않았던가. “오라버니께서 그들을 벌해주셔야겠습니다.” “무슨…….” 황자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백성들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때 폭력적으로 대처하면 백이면 백 반란이 일어날 터. 현명한 누이동생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어째서――. 여동생의 시선과 마주쳤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 눈동자를 보고 황자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목덜미에 소름이 지나갔다. 황자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는 문장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내가……내가, 버, 버림패로……?” “제 호위대는 반드시 오라버니의 가족을 사수할 것입니다.” 황녀는 오라비를 사수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제2황자가 백성을 탄압한다. 백성이 폭발하려는 찰나, 황녀가 나서서 오라비를 차단한다. 모든 분노를 황자가 껴안은 채 죽어버린다. 반면에 황녀는 지지도를 얻고 그 다음 단계를 노린다. 토사구팽이다. 페르디난트 황자가 여동생의 손을 잡으면서 애걸복걸했다. “에, 엘리제……용서해다오……제발, 용서해다오……우리는 가족이 아니더냐……같은 피를 나눈 남매 아니더냐…….”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섬뜩하리 만치 냉정한 시선이 황자를 노려보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신들과 같은 핏줄을 타고났음을 축복으로 여긴 적이 없다. 페르디난트. 네놈이 루돌프와 함께 어떤 짓거리를 자행했는지 벌써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합스부르크에는 엘리자베트 말고도 황녀들이 더 있었다. 그 황녀들은 수 년 전에 병사했다. 진실은 달랐다. 루돌프 황태자와 페르디난트 황자가 작당하여 황녀들을 강간했다. 한 번도 아니었다. 몇 년에 걸쳐서 끈질기게 윤간했다. 결국 황녀들은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자결했다. 세간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졌다……. “이제 와서 나에게 인정을 바라지 말도록. 우리 가족에 언제는 인정이 있었는가?” “…….” “확실히 네놈과 나는 똑같은 핏줄이다. 똑같이 저주받은 괴물이지. 네놈은 누이를 강간했고, 나는 네놈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정말이지 훌륭한 가족이 아닌가.” 황자는 여동생의 눈동자에서 샛붉은 광기를 엿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며, 아내와 자식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여동생의 말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대뿐만이 아니다. 궁정대신들도 함께 백성을 탄압할 것이다.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겠지. 무얼, 오라비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정이다. 마지막이나마 가족으로서 예를 다하지.” 엘리자베트가 웃었다. 황자는 힘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황녀의 웃음소리가 등에 달라붙어서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는가……. 사흘 후, 황자파의 폭거가 일어났다. 제2황자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는 궁정귀족 수십 명과 함께 사병을 동원, 수도에 거주했던 백성들을 무차별하게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삼백 명이 사살되었다. 그동안 조용히 칩거하던 엘리자베트 황녀는 귀족들의 횡포에 분개. 은거생활을 벗어던지고 직접 병력을 지휘하여 귀족들의 사병을 궤멸시켰다. 사태에 가담한 궁정귀족을 모조리 사형시켰다. 황녀 자신의 오라비인 페르디난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황자는 효수되었고, 곧이어 황자의 아내와 자식들도 목이 잘려 백성들 앞에 던져졌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일어선 황녀의 결단을 칭송했다.   00163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                        * * * “그래봤자 합스부르크는 거진 망했습니다.” 나는 라우라의 맨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국토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린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황녀가 신도 아니고 말입니다. 간당간당하게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버티다 못해 생명줄이 끊어지겠지요. 마왕군에 의해서든, 인간군에 의해서든…….” 결국 나의 월맹군 원정은 성공했다. 인류 중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엘리자베트 황녀의 팔다리를 끊어냈다. 더 나아가 마왕들 사이의 분열이 드디어 겉면으로 명백하게 드러났다. 평원파를 멸살하기 위하여 파이몬이 계략을 꾸몄고, 마지막 전투에 앞서서 바르바토스를 제외하고 마왕들이 추격을 포기했다. 여기에다 지옥대공들의 배반까지. 멋진 난장판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입니다, 라우라.” “으음.” 라우라가 신음했다.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귀여워라. “저는 이제 시간을 벌었습니다. 대륙은 이제 사분오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목상으로나마 단결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인간군이다.” 라우라가 바로 대답했다. “합스부르크를 제외하고 여타 국가들은 여전히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 있다. 주군이 비록 연설전에서 귀족과 평민의 분열을 꾀했다 하더라도, 아직 그 분열이 군대를 벗어나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진 않았다.” “오오.” “인간군이 합스부르크 일대에서 전전하는 이유도 그것이겠지. 병사들의 단합력을 다시 이끌어올리기 위하여, 혹은 예비 반란분자인 병사의 숫자를 아예 줄어들이기 위해서.” “맞습니다. 맞아요.” 내가 손뼉을 쳤다. 정답이었다. 과연 라우라는 군사에 관련해서는 척척박사였다. “혁명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흑사병과 흉년이 겹쳤습니다. 여기에 제가 연설전에서 독을 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지막 한 방이 부족해요.” 아직도 겉으로나마 연합하고 있는 인간의 국가들을 완벽하게 해체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마인을 위한 대륙 정벌이라든지, 마왕에 맞서서 단합하는 인류 전체라든지, 그딴 대의명분은 싸그리 죽어야 마땅하다. 오로지 자기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그처럼 세력들은 아주 이기적이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두 가지 대전략을 수행할 겁니다.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까?” “…….” 라우라가 머뭇거렸다. 나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일 분을 넘게 끙끙거리다가 항복했다. “모, 모르겠다.” “예에. 다음 차례 들어갑니다―.” 라우라의 엉덩이에 구슬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라우라가 히끅! 하고 기묘하게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두 가지 질문 전부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추가로 하나 더.” “자, 잠깐만? 주군. 그건 조금 이상한 계산법……하끄읏!” 라우라가 온몸을 떨어댔다. 음. 실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가 나체로 내 품에 안겨서 몸을 떠는 것은 나에게 지극한 만족을 안겨주었다. 딱히 성욕이 치솟는다기보다 소녀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뭔가를 두려워하고, 신음을 내뱉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과 같이 아름다웠다. 요컨대 나는 변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의 예술작품을 구경하는 관객……그렇다. 마치 전시회를 전전하는 한 명의 댄디한 파리지엥에 불과했다. 그러고보니 새롭게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 중에 <고문 슬라임>이 있었다. 그걸 조금 재밌게 활용할 수 없을까? 흐음. 슬라임에 찐득찐득하게 능욕당하는 라우라, 금발의 미소녀……먹힌다. 이건 먹인다. 파리의 신사들도 감격하여 기립박수를 칠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적극적으로 고려해보자. “뭐, 그건 차근차근하게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라우라도 언제까지나 정치에 무관심해서야 안 됩니다. 군사는 결국 정치의 일환이라구요? 노력해주세요.” “으으……알겠다.” 두 가지 대전략 중에 첫 번째. 그것은 물론 지금까지 마계의 지옥들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게 된 목적, 즉 마왕성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곧 있으면 대공들이 후원금――이라고 읽고 자진납세라 부른다――을 잔뜩 보내올 것이었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 * * 보름 뒤. 라피스가 대공들의 후원금과 함께 건축기사를 데려왔다. 마계에서 건축업은 고블린과 난장이가 꽉 잡고 있었다. 다른 종족은 발도 들여다 놓지 못할 정도로 건축업계는 폐쇄적이었다. 대체로 난장이가 지분의 7할, 고블린이 지분의 3할을 차지했는데, 나는 일부러 각 업계의 대표자들을 불러모으게 되었다. 원래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가장 잘 나가는 업계한테 맡겨버리려고 했다. 십 년은 계속될 대사업이지 않은가. 당연히 신뢰할 만한 업계에 맡겨야 했다. 그런데, 난장이족에서 운영하는 <붉은 대리석 건축소>에 문의를 넣었더니 엄청나게 큰 금액을 요구해왔다. 나는 견적서를 읽으면서 침음을 흘렸다. “으음. 아무리 적어도 이천만 골드가 소모된다라.” 곤란했다. 대공들에게 전부 뜯어낸 금액, 여기에 앞으로 뜯어낼 금액을 다 합쳐야 아슬아슬하게 이천만 골드가 모인다. 어차피 사기로 뜯어낸 금액. 공짜로 던전 하나를 으리으리하게 짓는다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지만…….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붉은 대리석 건축소>에 의뢰하자.” 하지만 라피스가 강하게 반발했다. “제정신입니까, 단탈리안 님? 한 군데에만 견적서를 넣으면 당연히 바가지를 씌우겠지요.” “응? 어? 그런 거야?” “그런 겁니다.” 라피스가 단언했다. 내가 어수룩하게 대답하니까 라피스는 무언가 용납하지 못할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이 분노했다. “업자들이 부르는 값에 그저 순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이쪽에서 예산안을 제시해둡니다. 이 예산안을 모든 업자들한테 돌려서, 자신들이라면 어떻게 예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제안해오라고 명령합니다.” “어, 어?” “저쪽은 어차피 돈을 버는 게 목적입니다. 서로 경쟁시켜서 조금이라도 값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상업의 기초적인 기술 아닙니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 그럼 건축 예산이랑 업체 선정에 대해서는 라피스한테 맡길게.” “모쪼록. 게다가 이제 단탈리안 님은 어마어마한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라피스의 눈이 무섭게 반짝거렸다. 잔소리가 시작될 때 어김없이 반짝거리는 바로 그 눈짓이었다. “단순 자산만 천사백만 골드. 시트리 님한테서 곧 도착할 현금이 약 백만 골드. 여기에 대공들이 추후로 지원할 금액이 오백만. 무려 약 이천만 골드를 최종적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단탈리안 님은 지금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자금을 운영했습니다만, 더 이상 그런 조잡한 방법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조잡하다니…….” 라피스는 가끔 단어를 선택하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나에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난 지금까지 가계기록부도 한번 써본 적이 없었다. 상업이니 금융이니 하는 것과 인연이 없이 살았다. “갑작스레 자금 운용의 방식을 정교하게 만들라고 해도.” “거기에다가.” 라피스가 말허리를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단탈리안 님은 올해부터 마왕성 근처의 마을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세금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세금출납부터 체계화시켜야 합니다.” “체, 체계화?” “마을 촌로들로부터 세금출납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합니다. 지주들에게도 마을의 소작인을 관리하도록 의무를 지웁니다.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창고도 신경써야 합니다. 기본입니다.” “…….” 네. 무척이나 복잡한 문제가 산재했다는 것은 알아들었습니다. “그, 그럼 마을 관리도 라피스 너한테 일임할게.” “제정신이십니까?” ─ 쿠웅! 우와아. 방금 내 말이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라피스, 자그마치 라피스가 두 손으로 탁자를 쳤다! 쿵, 하고 크게 쳤다. 언제 어느 때고 냉정하고 침착함이 상징이었던 라피스……심지어 지옥에서 암살자들이 마차를 습격했을 때조차 냉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탁자를 두 손으로 쿵 쳤다! “미……미안.”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몸이 쭈그러들었다. 라피스 앞에만 서면 안 그래도 조심스러워지는데 저렇게 화까지 내니 마치 친척들한테 혼날 때처럼 마냥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영주는 어디까지나 단탈리안 님입니다. 저는 반쯤 단탈리안 님의 가신(家臣)이 되었으나 여전히 쿤쿠스카 상회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영주의 업무를 일제히 맡기다니, 도저히 책임감 있는 영주의 발언이라 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영지 업무는 제가 혼자 맡을 수 있을 만큼 손쉬운 물건이 아닙니다. 관리를 등용하세요. 가신단을 가꾸세요. 애당초, 단탈리안 님에게 제대로 된 가신이라고는 라우라 양밖에 없습니다.” “음?” 구석에서 호밀빵을 깨작이며 먹고 있던 라우라가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양쪽 볼이 빵으로 가득차서 볼록하게 불어올랐다. 꼭 햄스터 같아서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그녀가 얼마나 귀엽건 지금의 상황에서 나한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래요. 라우라 양. 당신도 여기로 오십시오.” “소, 소녀 말인가?” 라우라가 라피스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까. 라우라가 모기처럼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다시피 소녀는 참을 먹고 있다만…….” “먹으면서 들으세요.” “아, 알겠다.” 라우라가 쪼르륵 달려왔다. 그녀와 나는 둘이서 탁자에 앉아 고개를 푸욱 숙였다. 마치 어머니에게 혼나는 오빠와 여동생 그 모습 그대로였다. 라피스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보십시오. 대륙에 위명을 떨치시고 마계에 위엄을 세우신 마왕, 그게 단탈리안 님입니다. 그런 단탈리안 님께 가신단이 고작 한 명. 그것도 말이 가신이지 사실상 군사 업무밖에 담당하지 못합니다. 평소에는 애첩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극히 비정상적입니다.” “미안…….” “죄송하다…….” 라우라와 내가 사과했다. 왠지 모르게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세력이 커졌으면 마땅히 격에 어울리는 가신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왕성을 증축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누가 마왕성을 관리합니까? 주변 마을을 영지로 삼은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누가 마을들을 관리할 것입니까? 세력의 덩치만 커진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항상 중요한 것은 내실입니다. 당연합니다.” “미안해…….” “죄송합니다…….” 라우라의 말투가 존칭으로 바뀌었다. 주군인 나한테도 반말 쓰는데……. “지금 단탈리안 님께 필요한 것은 깔끔하고 명확한 관리 체계입니다. 세금출납서, 영주의 명령서, 법령실행서, 방문(榜文), 포고령, 외교문서, 이것들의 문체와 형식을 전부 통일해둡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단탈리안 님은 율법을 만들지도 않았군요.”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화나기 이전에 어이가 상실되었다. 그런 느낌의 한숨이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신 겁니까, 라우라 양? 당신은 단탈리안 님의 제1신하. 가신필두입니다. 주군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여 보완하는 것이 보좌관의 역할이겠지요.” “죄, 죄송합니다…….” 라우라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라우라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마음이 푹푹 찔렸다. 라피스는 라우라를 책망함으로써 사실상 바로 옆의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바를 기본적인 구조로 삼은 다음, 실제로 마을들에서 어떤 관습들이 있는지, 그 관습들이 어떻게 영지민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지, 모두 조사하여 율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기.”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라우라만 혼나서야 너무 불쌍해서 조금이라도 어그로를 끌어보기 위함이었다. “예, 단탈리안 님. 말씀하세요.” “왜 굳이 율법을 만들어야 돼? 관습법으로 알아서 돌아가게 만들고, 문제가 생길 때만 내가 개입하면 되는 거 아니야?” “단탈리안 님이 영주로서 재판권을 독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답이었다. “관습법은 말 그대로 관습법. 문제가 생길 때 영지민들이 자기네가 해오던 바대로 처리합니다. 실상을 들여보면 영지민들에게 재판권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야 한 영지에 재판관이 두 개 있는 것입니다. 관습은 충분히 존중하되, 재판권은 어디까지나 영주의 소관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첫 걸음입니다.” 실로 옳으신 말씀이었다. 라피스 님께서 재차 한숨을 쉬셨다. “어쩔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하게 하나씩 실행하지요. 단탈리안 님, 언제까지나 정치에 무관심해서야 안 됩니다. 모략도 결국은 정치의 일환입니다. 부디 노력해주세요.” “으응……노력할게.” “열심히 주군을 보좌하겠습니다…….” 나와 라우라는 고개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어쩌겠는가. 결국 슬프게도 우리 세력의 상관관계가 몬스터들 < 라우라 < 나 < 라피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나저나 관리를 새롭게 등용한다라. ‘흐음.’ <던전 어택>에는 물론 유능한 인재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나는 라우라만 콕 집어서 등용했다. 여태까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충분했고. 하지만, 그렇다. 라피스가 옳게 지적했다. 가신단을 확충할 필요가 생겼다. 누구를 끌어들일지 지금부터 고민해볼까…….   00164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신전은 절벽에 있었다. 검푸른 파도가 절벽에 부닥쳐서 산산이 부서졌다. 파도들이 아무리 팔을 뻗어도 가닿을 수 없는 위쪽, 새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나열했다. 기둥들은 형편없이 허물어져 있었다. 지붕은 반쯤 무너졌다. 허리부터 잘려나간 기둥도 있었다. 그들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잃어버린 여분의 공간을, 바람이 바다의 냄새를 실어 가볍게 떠받치고 있었다. 그렇게 신전은 몸의 절반을 햇빛에 노출했고, 나머지 절반은 푸른 그늘에 맡기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햇빛과 그늘에 잠기어서 신전 정중앙의 텅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정중앙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채우기를 기다리면서. “드디어, 때가 왔어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에 응답하여――마왕 파이몬이 입술을 열었다. 바다의 햇빛과 바다의 그늘이 이 여인을 슬그머니 덮고 있었다. “인간계의 열국은 분열되었습니다. 마계의 마왕군은 사분오열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평원과 산맥, 계곡까지 배회하던 유령들이 죽었습니다. 인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인의 풍요를 위하여. 그와 같은 거짓된 명분들이 드디어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파이몬이 흘려보내는 말과 말 사이로 파도소리가 작게 들렸다. 지금도 아래에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절벽을 두들겼다. “지금. 천명(天命)은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러나 파이몬의 목소리에는 파도를 한낱 평화로운 변주로 들리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그 천명은 우리에게 거짓된 명분에게 참혹한 최후를 선사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천명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왕관과 모든 옥좌를 파괴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천명은.” 파이몬이 한 마디 말을 더해갈 때마다 마치 신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때 찬란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로지 평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단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이며, 오로지 그것이 당연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쳐부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그 외의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가 존재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수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이유와 수만 가지의 변명을 덧붙여서 정의를 끝없이 아래로 추락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의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파이몬이 유리잔을 앞으로 들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수십의 사람들이 뒤따라서 유리잔을 치켜들었다. “사람은 때때로 혐오스럽습니다. 군중은 때때로 악합니다. 고로,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도 군중을 위해서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지 귀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연달아 입을 열었다.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은 무용하다는 듯, 유리잔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포도주가 투명한 유리를 따라 그녀의 입술 틈새로 흘러들었다. 그중 한 줄기의 포도주가 딴길로 새어 파이몬의 새하얀 턱선에 흘렀다. 파이몬이 유리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혁명을 위하여!” 곧이어 수십 개의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 던져졌다. 유리잔들은 수십수백의 찬란한 파편이 되어 산산이 깨졌다. 바다의 냄새, 생명이 썩어가는 냄새가 잠시 유리파편들을 감싸안아 부유하였다. * * * 던전 건축은 라피스의 조언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녀가 말한 대로 건축업자들을 잔뜩 불러들여서 예산안을 제시해보라 그랬더니, 세상에나. 처음에 2,000만 골드를 호가하던 건축비가 놀랍게도 1,400만 골드까지 줄어들었다. 자그마치 600만 골드까지 줄어든 것이었다. 처음에 이천 만 골드를 부른 <붉은 대리석 건축소>의 대표 난쟁이는 안절부절못해서 나랑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 쏘아주지 않을 내가 아니었다. “이보게, 소장. 내 평생 이런저런 일을 다 겪어보았지만 사흘 만에 육백 만 골드를 벌어본 것은 또 처음일세. 이게 전부 소장 덕분이네만.” “……소, 소인의 건축소는 총합 1,350만 골드에 전하의 처소를 만들 수 있나이다!” 난쟁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얼. 사람이란 본디 이기적이어야 하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무척 훌륭한 사람이야, 난쟁이 소장. 멋진 인격자라네. 본인한테서 인격을 칭찬받는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으니까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토,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긴 뭘 더 통촉할 것이 있겠는고. 자네를 이해하네. 하하하.”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올렸다. 난쟁이는 이제 이마에서 땀줄기가 주르륵 흘러서 덥수룩한 수염까지 적실 지경이었다. 그날 종일토록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자그마치 열 층짜리 지하 던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디자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통로는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나의 요구사항을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일종의 미로처럼 던전을 건축할 것. 그리고 두터운 미로의 벽 너머에 마족 마을을 건설할 것. 수천 년 동안 건축업에 종사해온 고블린과 난쟁이한테도 이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토론이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의견이 나뉘었다. 고블린 파와 난쟁이 파로. 한 고블린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삿대질을 했다. “케르륵! 멍청한 딸땅보 놈들! 왜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중앙통로의 층을 높게 만들어두지 않으면 덩치가 큰 마인들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된단 말이다!” “흥, 녹색 두더쥐가 아니랄까봐 하나만 생각하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군.” 난쟁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찌나 콧바람이 거센지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천장을 높게 지어버리면 강도가 약해진다. 천 년도 견디지 못하고 마왕성이 무너질걸.” “그건 네놈 사무소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지. 케륵, 오리칼코스로 층을 지지하게 하면 그만이야.” “허, 대갈통을 토마토즙으로 채운 족속답구만. 오리칼코스로 층을 지지해? 도대체 예산이 몇 배로 뛸지 상상도 못하겠군. 이천만 골드가 아니라 삼천만 골드가 있어도 부족하다.” “어차피 제련할 필요도 없어. 케르륵, 원석 통째로 함유시키면 돼! 네놈들은 항상 상상력이 부족하지. 여긴 마왕성이야. 마력이 넘쳐난다고! 다른 장소와는 강도 자체가 달라.” 나는 하품을 참으면서 두 종족의 열띤 싸움을 지켜보았다. 오리칼코스니 뭐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마도 건축 전문인에게는 무척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자고로 전문인에게 중요한 문제만큼 일반인에게 가소로운 문제는 없었다. “라피스. 쟤네 뭐 저리 피 터지게 쌈박질 하냐?” 내가 조용히 물었다. 라피스는 내 옆에 기립해 있었다. 그녀는 나의 비서이자 이번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로 참석했다. 라피스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부터 고블린과 드워프는 서로를 마뜩잖게 여깁니다. 두 종족이 마계에서 담당하는 전문영역이 상당히 많이 겹치기 때문이지요. 서큐버스와 님프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과 똑같지요.” “음? 님프가 마계에서 뭘 주로 담당하길래?” “물론 매춘업입니다.” 아하, 그런가. 재밌는 일이었다. 종족에 따라 종사하는 직종이 대체로 구별되다니. 내가 흥미로워 하는 것을 느꼈는지 라피스가 부연해서 설명했다. “매춘부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지옥마다 기준이 약간 다릅니다만 대략 3등급, 2등급, 1등급으로 나뉩니다. 3등급은 고객에게 육체적 만족만을 줍니다. 반면에 1등급 매춘부는 고객을 따라서 무도회 등의 사교계에도 참석하지요. 잔치의 꽃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헤에.” “서큐버스족은 주로 3등급 2등급 매춘부입니다. 대다수의 1등급 매춘부는 님프족에서 배출하지요. 그렇기에 같은 매춘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모욕하고 경시합니다.” 경멸과 시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시니컬한 기분이 들어서 말을 툭 하고 내뱉었다. “어리석네.” “예. 지극히 비합리적입니다.” “흐음. 남들을 경멸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부류가 있는 것이겠지.” 우리 둘은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블린들과 난쟁이들이 이제는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떠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장인으로서의 자존심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 있으리라. 내가 라피스를 슬쩍 바라보고 웃었다. “그래서 일부러 고블린이랑 난쟁이를 불러들였구나, 라피스.” “예?” “쓸데없이 자존심이 얽히면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게 되지. 건축소끼리 단합해서 가격을 올리면 난 어쩔 수 없이 이천만 골드를 지출해야 할 거야. 고블린족만 부르거나 난쟁이족만 불렀다면 아마 비슷하게 흘러갔겠지.” 그러나 라피스는 일부러 적대적인 두 종족을 불러들였다. 우리 고블린은 저놈들보다 뛰어나게 건축할 수 있다! 우리 난쟁이는 저놈들보다 효율적으로 건축할 수 있다!……각 사무소에서 이익뿐만이 아니라 자존심까지 걸고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종족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집단의 자존심이 끼어들면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기려 든단 말이지. 훌륭한 수법이야, 라피스. 나중에 추가로 급여를 지급하지.” “……신기하군요.” 라피스의 청금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응?” “단탈리안 님께선 상업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무지하십니다. 제가 알기로 군략에 대해서도 결코 뛰어나시지 않습니다. 헌데 상업이든 군략이든, 그곳에 모략이 끼어들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통찰력을 발휘하십니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역시 단탈리안 님께는 실무진이 필요합니다. 유능한 전문가들이 단탈리안 님의 휘하에 모여들었을 때, 그들은 단탈리안 님의 지휘를 받아 공포스러운 오페라를 연주하겠지요.” “아. 안 그래도 이번 업무만 마무리되면 바깥에 좀 다녀오려고.” 던전 건축은 하루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일단 시작해둘 필요가 있다. 그 후에 나는 인재를 찾기 위하여 대륙을 쏘다닐 예정이다. 대충 네 명 정도를 영입하고 싶다. 잘 되면 말이지. 뭐, 마침 파이몬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다. 겸사겸사란 거다. 고블린과 난쟁이 간에 폭발한 토론은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서 겨우 마무리되었다. 중간에 종족들끼리 개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말리기도 귀찮아서 라피스와 함께 포도주를 주고받으며 흥미롭게 싸움판을 구경했다. 나는 고블린이 이길 거라는 데 5골드, 라피스는 난쟁이가 이길 거라는 데 5골드를 걸었다. 참고로 난쟁이가 이겨버렸다. 라피스와는 절대로 돈내기를 해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전하. 저희는 1,700만 골드에 전하의 처소를 진상해보이겠나이다.” “소인은 1,200만 골드에 세상의 어느 곳보다 멋진 마왕성을 짓겠습니다.” 예산안은 크게 두 축으로 갈렸다. 첫 번째. 돈을 크게 쓰더라도 통로를 널찍널찍하게 짓는다. 대다수의 고블린이 첫 번째 예산안을 지지했다. 대형 몬스터가 이동하기에 용이하거니와, 천장이 높아야지 던전 안의 생활환경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최대한 돈을 아낀다. 난쟁이들이 두 번째 예산안을 지지했다. 대형 몬스터가 거주할 지하층만 넓게 만들고 나머지는 천장이 낮게 건축한다. 두 가지의 제안을 눈앞에 두고. “본인의 마왕성은 10층으로 지어진다. 본인은 각 층마다 다른 사무소에게 일을 맡기겠노라.” 나는 두 종족을 모두 끌어안았다. 이것 역시 라피스가 조언한 바에 따른 것이다. 한 업체에 일을 몰아주면 경쟁이 사라진다. 이곳에 모인 건축소들은 어차피 마계에서 일류를 내달리는 곳뿐. 부실설계의 위험 따위는 없다. 문제는 저들이 얼마나 열과 성의를 다받쳐서 일하느냐였다. 라피스를 총책임자로 맡긴다. 건축자재 구입과 건축인력 동원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중개한다. 이 모든 과정을 라피스――그리고 그녀 뒤에는 마계의 전설적 상인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다――감독하는 이상 행여나 딴 짓거리를 벌이기란 어려울 거다. “혀,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고블린과 난쟁이는 똥씹은 표정이었지만 복종했다. 중간에 삥땅을 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로서도 납득할 만한 결과였다. 던전 건축은 그 자체로 큰 이득을 약속할 정도로 막대한 사업이었으니까. 이렇게 던전 건축의 초석을 마련했다. 나는 임시적으로 영지 업무는 파르시에게, 마왕성 업무는 라피스와 라우라에게 맡긴 다음, 훌쩍 떠났다. 목표지는 프랑크 제국. 파이몬의 <해방동맹>이 날 기다리는 곳이었고. ――동시에, 던전 어택의 주인공인 용사가 사는 나라였다.   00165 마왕만이 아는 세계 =========================================================================                        * * * 나는 이번에 파이몬의 <해방동맹>과 함께 움직인다. 이미 해방동맹에선 대규모 농민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규모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해오는 것을 보니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가 되겠지. 해방동맹의 일원들은 지도부가 되어 농민반란을 이끌어갈 예정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도부와 함께 행동하면서 적절하게 지원사격을……그래. 무엇을 숨기겠는가. 적나라하게 말해서, 해방동맹에선 나한테 '선동질'을 요구했다. 아무리 흑사병에 흉년이 겹쳐 세상이 흉흉해졌다고 한들, 직접 창과 낫을 쥐어들고 귀족들과 한판 붙어불자고 생각하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귀족에겐 기사가 있었다. 오러를 쓰는 기사는 농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광기가 필요하다. 연설은 광기를 심어주는 데 매우 탁월한 도구이다……확실히, 제8차 월맹군의 연설전에서 두각을 드러낸 나만큼 적절한 인재가 없으리라. 파이몬과 나의 목적이 일치했다고 봐야겠지. 저쪽에선 인간계의 왕국들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나는 아무튼 간에 인간계가 혼란에 빠지기를 원한다. 프랑크 제국에서 내 가신단이 될 인재들을 포섭하는 한편 가끔씩 연설로 민중을 선동해준다. 그게 내 일정이다. 나는 텔레포트 마법서로 프랑크 제국에 도착했다. 새하얀 빛이 휘감았다가 잠시 후에 사그라들었다. 눈을 뜨자, 너른 공터에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땅딸막한 난쟁이가 섞여 있었다. 난쟁이는 나를 보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녹색 턱수염의 자크 보놈이 위대하신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난쟁이 자크 보놈은 이미 나와 한번 만난 적 있었다. 폐허의 성에서 하룻밤 머무르면서 파이몬에게 해방동맹을 소개받은 날, 자크 보놈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를 파악할 만큼 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지금이 사실상 첫만남이었다. 흔히들 첫인상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고 한다. 정말로 그럴까? 대답부터 하자면, 맞다.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자크 보놈을 살펴보면 이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인사하지 않았다. 일단 고개를 까닥이고 걸음속도를 늦추면서 뜸을 들였다. 내 뒤를 따라서 추가로 텔레포트해오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다. 더불어서 옷이 낡았다. 자크 보놈의 뒤편에 선 사람들은 척봐도 용병이었다. 허리춤에 칼을 찼고 옷은 푸른색과 노란색, 보라색 따위로 화려하게 꾸몄다. 턱수염까지 길다랗게 기른 것이 있는 멋 없는 멋 전부 부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이끄는 대장인 자크 보놈은 평범하게 헤진 옷을 입었다라? 절대적으로 자신감이 있다는 얘기였다. 본래 자신감이 없는 지도자일수록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 낡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지도자의 특권이나 다름없다. 이 용병대에서 아마도 자크 보놈은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겠지. 그런 자가 나에게 지극히 공손하게 인사했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부하들 앞에서. 즉, 외부인에 불과한 나를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본보기를 보여 부하들도 날 존중하게끔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종합하자면. 자크 보놈은 신중한 성격인데다 자신의 집단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쓸데없이 사치를 부리지도 않으며, 앞으로 오랫동안 여정을 함께할 사람인 나를 정중하게 맞이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개념찬 놈을 보았나! 내가 의도적으로 활짝 웃었다. “오랜만일세, 자크 보놈 동지.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겼다. “여전히 대단한 체격이네. 시간조차 자네의 몸을 감히 손상시키지 못하겠지. 앞으로 자네가 이끌어줄 여행이 얼마나 안전할지 벌써부터 안심이 되는군. 잘 부탁하네, 자크 보놈 대장!” 자크 보놈이 정성스럽게 나를 존중해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위계서열을 제대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나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마왕이긴 하나 <해방동맹> 입장에선 제일 막내이다.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이번 여정의 목적을 달성하는지도 모른다. 완전 어린애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단지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대접해주려 하고 있다. 이때 내가 그의 상관처럼 행동하려 들면 끝장이다. 자크 보놈은 나를 진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들여야 하고, 부하들은 그런 관계에 불만을 품어 날 적대하게 된다. 집단이 아작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쉽다. 내 행동이 의외였을까. 난쟁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는 곧장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난쟁이인데도 천박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약간 기쁜 감정만이 나에게로 전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꽤나 마음이 잘 맞을 것 같군 그래. “황송합니다. 이번에 전하를 호위하며 두어 달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아 으슬으슬 춥습니다만, 최대한 편안한 여정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이! 뭐하고 있나.” 자크 보놈이 뒤에 옹기종기 모인 병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용병들이 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하면서 내 앞에 도열했다. 다들 가슴팍에 판금갑옷을 입고 있었다. 정예병인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프랑크 제국에서는 일류 용병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을까. “양날도끼 용병단!” 자크 보놈이 뒷짐을 쥐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랄 뻔했다. 지금까지 조곤조곤 말하던 목소리가 별안간 커져서 언덕 전체를 울렸기 때문이다. 용병들이 일렬로 기립하여 도끼창을 처억, 하고 내밀었다. 대략 서른 명이었다. 도끼창이 늦겨울의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단탈리안 전하께, 경례!” 용병 서른 명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장관이었다. 이 시대, 기사를 제외하고 이 정도까지 제대로 단합된 군대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본인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이다. 앞으로 본인이 우리의 여행에 도움을 줄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할 생각이다. 앞으로 잘해보자.”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소인을 부를 때는 자크리라 불러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자크 보놈, 아니 자크리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꺾었다. 하하.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음?” 그런데 용병들 말고도 아직 사람들이 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회색 로브를 뒤집어썼다. 이쪽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가만히 서 있었는데, 용병들과 다르게 저쪽에선 감정이 거의 전해져오지 않았다. “저들은 누구인가? 일꾼들인가?” “그것이.” 자크리가 처음으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의외였다. 무슨 일일까. 내가 그의 해명을 들으려고 할 때였다. 회색 로브의 집단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 자는 내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었다. “재차 존안을 뵈옵나이다. 단탈리안 전하.” “재차?”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기억 속에서 누구일까 뒤지고 있는데 상대방이 천천히 머리에 쓴 로브를 뒤집었다. 로브에 싸였던 하늘색 머리카락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아, 그대는…….” “이번에도 의뢰주가 전하의 호위를 명령했어요.” 여인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쪽이 심한 화상으로 흉터져 있었다. 지난 번 마계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파이몬의 명을 받고 라피스와 나를 구해준 암살자, 그녀가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한테 진정한 왕으로 모셔도 되겠냐고 물었다가 잔소리만 듣고 물러난 여자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헌데…….” 내가 슬쩍 자크리를 쳐다보았다. 용병대와 암살단. 두 집단이나 함께한다는 얘기는 사전에 듣지 못했다. 정확히 위계가 어떻게 되는가? 용병단이 위쪽인가, 암살단이 위쪽인가? 누가 누구의 명령을 듣는가? 그것에 따라서 나의 대응도 달라져야만 했다. 자크리가 인상을 찡그렸다. “소인은 해방동맹 프랑크 제국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파이몬 전하께 개인적으로 고용된 집단입니다.” “…….” 무심코 으엑, 하고 소리를 내버릴 뻔했다. 한 마디로 명령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절대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여차할 때 누가 지휘권을 잡아서 이 많은 인원을 통솔하라고? 나는 시선으로 자크리를 책망했다. 이런 건 내가 도착하기 이전에 현장의 책임자가 미리미리 알아서 처리할 문제였다. 노련한 용병대장인 자크리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경시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뭐가 문제냐? 내 눈짓의 의미를 알아듣고 자크 보놈이 죄송스러워했다. “이번 여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해방동맹. 고로 소인은 지휘권을 양해받고자 하였으나…….” “의뢰주는 저희에게 단탈리안 전하의 명을 받으라고 말했어요.” 여인이 끼어들어 말했다. “의뢰를 받아들인 이상, 저희의 명령권은 당연히 단탈리안 전하께서 가지셔야 합니다. 애당초 땅딸보의 명령을 들을 생각도 없구요.” “……이쪽도 여리여리한 계집의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다.” 자크리가 여인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뭐라고 할까. 당장 쌍욕을 바가지로 쏟아붓고 싶은데 여기에 내가 있어서 간신히 인내한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자크리 이 양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실은 꽤나 난폭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여인이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양날도끼인지 썩은 도끼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기껏해야 인간계에서나 놀아보았겠지요. 저희는 말 그대로 지옥에서 올라온 암살단이에요. 여리여리한 계집년의 단검에 목이 긁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요?” “글쎄. 네 녀석의 대가리에 도끼날이 박히면 그나마 멍청한 뇌가 조금쯤은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이윽고 양 집단의 수장이 절찬리에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잘 보니까, 자크리는 난쟁이족이었고 여인은 엘프족이었다. 난쟁이와 엘프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은 유명했다. 명령권을 두고 다투는 데다가 종족의 은원까지 섞였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하아.”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도 불만이 남겠지. 자그마한 불만이 결국은 집단의 분열을 일으킨다. 이번 여정이 편할 것이라는 나의 예감은 이미 하늘 너머로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어쩔 수 없군. 자크리.” “예, 전하.” 자크리가 당장 말싸움을 멈추고 이쪽에 예를 취했다. 사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본인은 그대의 경험과 실적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여유가 안 되는군.” “송구하옵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양날도끼 용병단의 명령권은 본인이 가지겠다.” 자크리가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렇다. 제각기 따로 노는 집단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인물에게 지휘권을 전부 양보해버리는 것뿐이다. 아마도 자크리는 이런 결과를 예상했겠지. 그래서 초장부터 나한테 매우 공손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끄응, 그것도 모르고 나는 모처럼 개념인을 만났다고 신났군. 내가 암살자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제레미라고 불러주세요, 단탈리안 전하. 소인이 이끄는 암살단의 이름은 붉은 흉터 암살단입니다.” 여인이 싱긋 웃었다. 여전히 얼굴 표정과 다르게 감정은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좋다. 제레미, 이 시간부로 붉은 흉터 암살단의 명령권은 본인이 가진다.” “존명. 주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늘색 머리카락에 얼굴 반쪽이 화상 자국인 여인, 제레미가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제레미 뒤편에 서 있던 암살자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내 휘하에 서른 명의 용병과 스무 명의 암살자, 대략 쉰 명의 전투원이 들어왔다. 요컨대 용병단의 업무랑 암살단의 업무, 양쪽에 전부 익숙해질 필요가 생겼다……이게 뭔가? 분명히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에 불과했을 터이다. 깨닫고 보니 외부인은커녕 집단의 톱이 되었다. 빌어먹을. “하아.” 도대체가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쉽게 풀리는 경우가 없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세상이 원망스럽다…….   00166 마왕만이 아는 세계 =========================================================================                        * * * 우리 일행은 제국로(帝國路)를 따라 움직였다. 수천 년 전, 고대제국이 대륙의 절반을 호령하면서 곳곳에다 깔아놓은 돌길이 아직도 건전했다. 덕택에 우리는 짐마차를 끌고다니면서 쭉쭉 달려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주변 풍광에 놀랐다. 프랑크 제국은 원래 세계의 프랑스에 대응했다. 프랑스, 하면 내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너른 벌판에 평화로운 경치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제국로를 지나치면서 보게 된 모습은 전혀 달랐다. 숲.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 앙상하게 매마른 겨울나무가 사방을 뒤덮었다. 수만 마리의 구렁이가 추위에 얼어붙어 그대로 꼬불꼬불 굳은 것 같았다. 벌목이 이루어진 평야는 정말 드문드문 보일 따름이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지평선 너머까지 빼곡하게 숲이 이어져 있었다. 여태까지 자연의 풍경을 보고 크게 감흥을 느낀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압도당했다. 자연이란 내버려두면 징그러우리 만치 번식하는 것이었다. 내가 혀를 내둘렀다. “합스부르크와 풍경이 상당히 다르군.” “영주들의 권력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용병대 대장 자크리가 대답했다. “벌목권과 개간권은 대체로 영주의 권리입니다. 영주가 얼마나 강한가, 촌민들이 얼마나 약한가, 그것에 따라서 숲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마을에 들르시면 재미난 광경을 보게 될 겁니다.” 자크리의 목소리에 연한 비웃음이 묻어났다. 이 난쟁이는 자기를 별로 표현하지 않는 편이라서 때때로 이렇게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낯설었다. “주변에 나무들이 수두룩한데 정작 겨울에 땔감을 사지 못해서 얼어죽는 영지민이 항상 나옵니다. 차남과 삼남에게 물려줄 농토가 없어도 나무를 베어 개간할 수가 없습니다. 몰래 은전(隱田)을 만들어내면 팔다리가 잘리기 일쑤입니다.” “…….” 자크리가 크흥, 하고 코를 먹었다. “겨울도 막바지입니다. 이젠 거의 초봄이지요. 올해도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죽어나간 자 중에 영주 일가가 포함되진 않겠지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로군.” “예. 말씀 그대로입니다.” 자크리의 말을 들은 이후로 사방을 뒤덮은 자연이 다르게 비추었다. 그것은 기형적이고 기괴했다. 나뭇가지가 꼭 인간의 팔이 거꾸로 꺾인 것처럼 보였다. “워이, 워이.” 무리를 선도하는 자크리가 속력을 늦추었다. 제국로 저 앞편에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크리가 눈을 좁혀 그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상단이군요. 호위대는 열 명 정도입니다.”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가?” “저들이 단체로 미쳤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일부러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단의 사람들은 우리가 멀리서 접근할 때부터 벌써 난리였다. 잔뜩 긴장해서 길가로 물러섰는데, 어떤 이들은 아예 숲속으로 뛰어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제레미가 말했다.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네요.” “당연하다. 이쪽은 쉰 명에 이르는 전사 집단이니.” 자크리가 그것도 모르겠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제레미가 방긋 웃었다. “그거 알아요? 당신, 되게 아름답게 재수없어요.” “치워라. 엘프한테 칭찬을 들어봤자 내 귀만 더러워진다.” “어쩜 말하는 모양새까지 이렇게 아름다우실까.” 두 사람이 툭탁거리면서 말을 몰았다. 그 뒤로 나와 쉰 명의 군인이 뒤따랐다. 자크리 말이 맞았다. 정예병이 이 정도씩이나 있으면 소규모 영지 따위는 단번에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저 상단 입장에서는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과연 상단은 이쪽의 규모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상단 대표로 보이는 노인이 앞으로 나와서 우리를 영접했다. “헤르메스의 축복을.” 노인은 가타부타 말을 하는 대신에 공손하게 돈주머니를 올려바쳤다. 이른바 통행세였다. “음.” 자크리가 말에 올라탄 채로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짤랑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속에 금화가 몇 개나 들었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대여섯 번 주머니를 흔들더니 자크리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도 헤르메스의 축복이 있기를.” “관용에 감사합니다.” 늙은 상인이 허리를 한껏 낮추어 우리한테 인사했다. 자크리가 말했다. “그대의 지혜가 그대를 구했을 뿐이오. 혹여 바라는 것이 있소?” “실례가 아니라면 기사님들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드 메디시스 황태후 폐하의 소집령에 응하는 길이오.” 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루테티아 파리시오룸이 정녕 피로 물들 운명입니까.” “그대도 되도록이면 루테티아 파리시오룸으로 장사를 가진 마시오.” 상인이 재차 한숨을 푹푹 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판단하여 파리에서 무구를 팔고자 했습니다만……. 하늘께서 제 뜻을 허락하시지 않는군요. 아니, 천금과 같은 충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흐음.” 자크리가 상단의 짐마차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전하. 약간 이르지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도 괜찮을련지요?” “괜찮은 수가 생각난 모양이로군.” “예. 썩 괜찮습니다.” 자크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물정에 밝기로는 나보다 용병대장으로 대륙을 전전한 자크리가 훨씬 더 밝았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자크리가 상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대가 괜찮다면 이쪽에서 무구를 매입해줄 수 있소만.” 늙은 상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입니까?” “아아. 어차피 우리는 황태후 폐하께 합류하오. 무구는 많을수록 좋지.” “…….” 상인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고민에 빠진 기색이었다. 자크리가 몇 초 뜸을 들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오.” “그 말씀은?” “어차피 슬슬 야영할 때가 되었소. 통행비도 받았으니 보초를 서주지. 하룻밤 동안 느긋하게 생각해보시오.” “……실로 관대하기에 이를 데 없는 처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크리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상단과 함께 노숙하게 되었다. 늙은 상인이 큰소리로 기사님들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겠다 말씀하셨다고 외쳤다. 그러자 숲에 숨어든 사람들이 슬그머니 기어나왔다. “못난 놈들! 네놈들을 어찌 대해주었는데! 배은망덕한 놈들!” 늙은 상인이 작은 채찍을 꺼내어서 사람들의 등을 후려쳤다. “히익! 용서해주십시오, 나으리!”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용서를 빌었다. 군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상단의 일꾼들 일부가 도망친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품삯이 절반 이하로 깎였으리라. 우리 일행은 그 광경을 모른 체하며 군막을 세웠다. 병사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재를 조립했다. 대략 한 시간 만에 막사들이 전부 세워졌으니 정예병들이었다. 용병들의 얘기에 따르면 원래 본격적으로 군진을 만들려면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하나, 대단한 속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늦저녁. 일행의 수뇌부가 모닥불에 모였다. 우리는 뜨겁게 데운 브랜디를 나눠 마시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곳 말고도 주변의 모닥불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크리가 말했다. “왜 여기서 노숙하기로 결정했는지 해명할 기회를 구합니다.” “허락한다.” “황공합니다. 전하, 현재 프랑크 제국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세하게 설명해라.” <던전 어택>의 설정집을 통하여 대충 이때쯤 각 나라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의 지식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나는 제8차 월맹군을 십 년 이상 앞당겨서 일으켜버렸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프랑크 제국은 두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황제와 황태후가 제각기 강력한 파벌을 이루어서 대립하고 있지요. 전하께서 우선 아셔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황태후에게 협력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있는가?” “황태후는 공화주의에 호의를 품고 있습니다.” 과연. 충분한 이유였다.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프랑크 태생이 아닙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공작가에서 시집을 왔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겉으로 왕국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 도시들의 자치권이 상당히 강력합니다. 황태후에게 공화주의는 낯선 사상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친근합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 <해방동맹>의 일원은 결코 아닙니다만.” 이해했다. 이건 나도 <던전 어택>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황태후는 벌써 삼 대째 섭정을 했다.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가자, 임시로 황태후가 황권을 거머쥔 것이었다. 황태후는 꽤나 유능하여 나라를 잘 운영했으나……. “어린 황제가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있지요.” 문제는 모친과 아들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데 있었다. “현 황제, 앙리 3세는 한창 젋습니다. 일찍 병사한 형제들과 달리 몸이 펄펄하지요. 올해로 열여덟 살입니다.” “자기가 권력을 쥐어서 직접 나라를 운영해보고 싶겠군.” “말씀 그대로.” 프랑크 제국의 젊은 황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생에서 절정기를 찍고 있었다. 그러나 국정은 벌써 삼 대째 황태후 중심으로 돌아갔다. 황제 주변에는 충신도 권신도 적었다.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황태후는 종교와 사상에 관대합니다. 여성의 몸으로 나라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요. 그 덕에 프랑크 제국은, 바로 옆에 바타비아 공화국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당파와 공화파가 꽤나 사이 좋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공존하고 있었다. 과거형이었다. 현재형이 아니었다. “황제는 어미를 닮지 않은 모양이로군.” “예.” 자크리가 브랜디를 한 모금 삼키고 말했다. “앙리 3세는 프랑크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잠시간 폴리투니아 왕국의 왕위를 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폴리투니아 왕국은 귀족들의 권한이 대단히 거대하여서…….” “귀족 공화정에 가까운 국가이지. 알고 있네.” 왕권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국가이다. 그곳에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 출신의 왕 앙리 3세가 얼마나 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겪었을련지.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하기보다 자신의 권익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고, 왕명을 좀 내리려고 해도 항상 귀족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름만 왕이지 실상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는다. 야망이 넘치고 젊은 국왕에게 공화주의는 끔찍한 사상으로 보였겠지……. “전 황제, 즉 형제가 병사하자 앙리 3세는 폴리투니아에서 거의 도망치다시피 돌아왔습니다. 프랑크 제국의 황위를 이어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프랑크 제국에서도 공화주의가 공공연하게 성립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 명분이 충분했다. 실력이 검증되진 않았지만 젊었다. 혈기가 넘쳤다. 그런데 국왕이 되어도 황제가 되어도 권력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수아비 황제였다. 이윽고 젊은 황제는 공화주의에 분노하며, 자신의 권리를 어머니한테서 되돌려받고자 일어섰다. “이미 내전은 일어나기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으음.” “황태후는 외국인인데다 일찍 남편을 잃었습니다. 헌데도 평생을 프랑크 제국에 헌신했습니다. 지금의 제국은 사실상 그녀가 지키고 만들어낸 것. 자신의 나라를 아들이 망치려는 것에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웃었다. 대단한 콩가루 집안이로군. “이에 황태후는 영지귀족들의 병력과 용병대를 소집. 지금도 각지에서 병력이 프랑크 제국의 수도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전하. 우리는 그중의 한 부대로서 제국 내전에 참여할 것입니다.”   00167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이해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섭정과 황제, 어머니와 아들, 자국민과 외세, 왕당파와 공화파. 여러 입장이 뒤섞여서 혼돈을 자아냈다. 귀족들도 필시 어느 쪽에 붙어야 할까 주판을 열심히 두들기고 있겠지. 어쩌면 국소적인 영지전은 이미 일어났을지 모른다. “그럼 궁금하신 점이 없다면 이제부터 우리 일행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제국로를 경유하여서…….” “으음?”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임의 설정을 통해 알기로 프랑크 제국 내전에는 보다 복잡한 정황이 얽혀 있었다. 아직 중요한 지점이 설명되지 않았다. 자크리는 나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질문했다. “전하. 혹시 소인의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자크리가 물어왔다. 난쟁이는 정말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하. 나는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그랬다. 지금 시기에는 '아직' 비밀이었다. 십 년 후에야 공공연한 사실이 되겠지만 현재엔 진실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각지에 비밀요원을 펼쳐놓은 파이몬의 해방동맹조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 내장의 깊은 곳에서 뜨거운 흥분이 서서히 밀려왔다. 나는 알고 있다. 프랑크 내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것이 대륙의 판도를 어떻게 뒤바꾸는지. 십 년 후에는 그저 역사서에 무미건조하게 적힐 사건의 개요. 그러나 지금은 천금보다 값진 정보였다. “하하.” 미약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크리와 제레미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좋았다. 때마침 두 집단의 지휘권이 나한테 있어 다행이었다. 이쪽 마음대로 집단을 움직일 수 있다. 왜 명령체계도 일치시키지 않은 채 집단들을 나한테 보냈는지 솔직히 파이몬한테 엄청 따지고 싶었으나……사정이 달라졌다. 고맙다, 파이몬. 내게 뭘 기대했는지 상관없이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지. “자크리. 브르타뉴 왕국의 정세에 대해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 “브르타뉴 왕국 말입니까? 여왕인 앙리에타가 월맹군에 패배하여 귀국했다는 것밖에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해방동맹은 프랑크 내전에 대하여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 당장 해방동맹의 브르타뉴 지부장에게 연락하도록. 왕국 변방에 군대가 움직이는지 확인해보라.” “예? 전하, 소신으로서는 전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프랑크의 황제가 브르타뉴의 여왕에게 파병을 요청했을 것이다.” 자크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막 황제가 된 애송이와 수십 년째 나라를 운영한 황태후. 두 사람 중에 누가 유리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더군다나 황태후는 모국인 사르데냐 왕국의 지원을 받는데다, 바타비아 공화국과도 친밀하다. 이대로 내전이 일어나면 결국 황제는 황태후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실을 황제라고 왜 모르겠는가.” “설마, 외세의 군대를 빌려서 대항한다고……?” 그렇다. 외세에 손을 뻗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폐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만, 젊은 황제가 보기에는 약간의 국익이 빼앗기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권력을 쥐어잡는 편이 좋겠지. 하물며 브르타뉴 왕국은 대륙에서 가장 공화주의에 적대적인 국가. 저번 월맹군 전쟁에서도 앙리에타 여왕은 단지 공화주의가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국의 군대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황태후에 충성하는 공화파 귀족 따위보다야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할지 몰랐다. 자크리가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아니, 전하께선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마라. 중요한 것은 브르타뉴 지부에 확인을 해보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크리, 자네는 해방동맹의 프랑크 지부장이다. 여차할 때 간부들과 연락하는 수단 정도야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 자크리가 일어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밤의 숲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잠시 뒤에 자크리가 돌아왔다. 그는 표정이 부쩍 심각해져 있었다. “여왕 앙리에타가 현재 수도를 비웠습니다. 귀족들과 함께 대규모 사냥을 떠났다고 합니다. 변방에 오우거가 출현했다고 하더군요. 왕족과 귀족이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사냥에 나서는 것은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만…….” “종종 전쟁을 숨기고 싶을 때 변명으로 사용하지.” 자크리가 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황태후는 본격전으로 내전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을 걸세. 어차피 자신이 유리하다는 것을 아군도 알고 적군도 알아.” 그저 군대를 왕창 소집하여 아들을 위협한다. 용병을 고용할 돈이 전무한 황제에 비하여 황태후에게는 막대한 자금력이 있다. 이미 쪽수에서 상대가 안 된다. 아들은 겁을 먹고 별 수 없이 어머니한테 복종한다. 아마 이 정도가 황태후의 시나리오 아니였을까. “그러나 만약에 황제가 브르타뉴의 군대를 끌어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황태후는……감히 외세가 간섭해오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아아.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것일세.” 자크리가 브랜디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전쟁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리라 내다보시는지요?” “흐흐. 시궁창 밑바닥에도 시궁창이 있음을 증명하겠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저절로 올라갔다. 내장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흥분은 점차 심장을 데웠고, 이제는 식도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 “자크리,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게나! 프랑크의 판도가 어떻게 돌아갈지 상상력을 총동원해보게.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는 황제야. 게다가 황태후는 외국인 출신일세. 황태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매국노이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하고 내가 말했다. “정작 그 황제는 외세를 잔뜩 끌어왔어. 브르타뉴는 프랑크와 오래동안 숙적이었네. 진정한 매국노는 황제가 아니냐는 말이야. 귀족들은 어느 쪽에도 쉽사리 충성을 맹세할 수 없지!” “…….” “결국 귀족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사람은 이쪽으로, 저 사람은 저쪽으로, 사분오열되어 각자가 각자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겠지.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망한 지금, 또 하나의 제국이 혼란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을 향하여. 예컨대 여기 왕당파 귀족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황제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황제에게 충성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브르타뉴 왕국과 협력해야 한다. 브르타뉴라고 맨입으로 황제를 도와줄 리 만무하다. 제국의 권리 중 상당부분이 브르타뉴한테 넘어간다. 황제에게 충성하면 도리어 원수 브르타뉴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브르타뉴에 대적하기도 난감하다. 브르타뉴의 침략에 맞서싸운다는 것은 황태후와 협력한다는 것. 따라서 공화파 귀족들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럴 수도 없다. 저럴 수도 없다. 개판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나는 웃었다. “결국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어미와 아들의 정도 없다. 국가적 원수도 상관없다. 내전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를 흘려도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권력.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인간의 피 묻은 비명이 사해에 낭자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당한가. 이 얼마나 솔직한가! 강자의 품격이 뼈속까지 느껴진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나는 강하다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기꺼이 희생시킬 '자격'이 있다고. 나는 이토록 자신의 강력함을 의심하지 않는 자들을 볼 때마다 매번 경이롭다.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꼭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다! 그들이 더 이상 강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자신들이 약자라고 정해놓은 사람들에게 반격을 당했을 때, 약자들에게 모욕당하고 능욕당했을 때, 그들이 예전처럼 당당하고 고귀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아아. 벌써부터 즐겁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월맹군 전쟁에 브르타뉴는 수천 명밖에 동원하지 않았다. 반면에 프랑크는 벌써 수만 명을 투입했다. 국력에 있어서 브르타뉴가 프랑크에 밀린다 한들, 우연찮게도 지금은 백중지세.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겠지.”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프랑크의 수많은 백성들은 약탈당한다. 제국군, 왕국군, 용병, 탈영병, 도적. 국적과 소속을 불문한다. 병사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또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전국의 마을들을 유린한다. 흑사병에서 살아남고 흉년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텨낸 민중들에게, 다시 한번 전쟁의 참화가 덮쳐온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으리라.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전염병을 퍼트리기에 실로 적절하다. 정확하게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이 시대의 민중이다. 멍청하다.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좋다. 나는 그들의 귀가 원하는 단어만 골라내어 들려주면 그만이다. 자유! 평등! 억압에 반항하라. 원래 그대의 것인 권리를 되찾아라. 치장에 불과하다. 백성들은 귀족을 미워한다. 귀족의 위엄을 존경하는 한편 증오한다. 자신이 힘들게 일구어낸 농토를 빼앗고 전쟁에 동원시킨다. 그 증오심에 불을 지핀다. 하지만 증오심에는 약간의 치장이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귀족을 증오하기 때문에 봉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의를 위해 봉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자유! 평등! 억압에 반항하라, 원래 그대의 것인 권리를 되찾아라. 이 수식어들은 충분히 증오심을 치장하고도 남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보인다. “자크리. 파이몬에게 어떤 명령을 받았는가.” “……그것이, 황태후에게 합류하여, 최대한 공화파에 힘을 실어주라고.” 하하. 무르다. 파이몬, 한없이 무르다. 그게 무슨 명령이냐. 너무 추상적이지 않은가. 공화파에 힘을 실어주라니? 정확히 무슨 뜻인가. 왕당파를 최대한 죽여버리라는 뜻인가, 아니면 공화파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설하라는 뜻인가. 역시 너에게는 모략이 어울리지 않는다. 모략은 약자의 도구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울 힘이 없는 자를 위하여 신께서 친히 모략을 창조하셨다 이 말이다. 이천 년 가까기 살아온 파이몬에겐 약자의 조급함도, 약자의 불안함도 생소하겠지. 그녀는 천성적으로 모략가가 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금부터 명령을 구체화시킨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허약한 종족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왕이 되었다. 모략이란 나 같은 겁쟁이한테나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서열 제71위의 마왕, 이면(異面)의 단탈리안으로서 내리는 명령일지니. 양날도끼의 자크리. 붉은 흉터의 제레미. 그대들, 고귀한 마인으로서 마왕의 명령을 들으라.” 한 사람의 난쟁이와 한 사람의 엘프가 벌떡 일어서서 내 앞에 부복했다. “우리의 목적은 프랑크 제국에 내전을 촉발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전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먼저 자크리.” “예! 명령을!” “프랑크 제국에도 마왕성들이 분포해 있다. 그곳의 마왕들과 협력한다. 마왕들로 하여금 왕당파 귀족의 영지를 침략하게 한다.” 우리는 영지 내부에서 여타 마왕의 군세에 호응한다. 귀족들은 패배하게 만든다. 반면, 우리 용병대는 승리하게 조작한다. 귀족에 대한 민심은 떨어지고 공화파 소속의 용병대인 우리의 명성은 높아진다. “마왕들을 설득하는 것은 내가 맡는다. 그 다음, 제레미.” “존명.” “공화파의 소귀족들을 위주로 암살한다.”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도 암살의 임무를 맡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명령이라면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백작이나 자작과 같은 거물을 암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스무 명의 정예 암살단이다. 준남작 정도는 어떻게든 된다. 내전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특정 파벌의 귀족들이 연달아 살해되는 것이다. 당연히 의심은 왕당파한테, 더 나아가 황제한테 쏠린다. 권력을 위하여 외세를 동원했을뿐더러 자국의 귀족까지 암살한 황제. 평판이 말도 안 되게 떨어지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기대된다. 그날밤. 나는 모닥불 근처에 앉아 쉴 새 없이 연필을 놀렸다. 꽤 두툼한 원고들이 하룻밤 만에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내가 연설전에 써먹었던 논리와 수사학이 들어가 있었다. 이걸 쿤쿠스카 상회한테 맡겨서 대량으로 찍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뿌려버린다. ‘합스부르크 제국. 그 다음에는 프랑크 제국인가.’ 나는 아무래도 제국이란 것과 전생에 악연을 쌓은 모양이었다. 무얼,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전생에 당한 것을 단순히 되갚아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제국의 귀족들로서는 마음이 편하리라.   00168 마왕만이 아는 세계 =========================================================================                        “후우.” 기지개를 쭈욱 폈다. 새벽의 시원한 바람이 폐를 청소했다. 가슴에 달성감이 차올랐다. 지금 내 손 안에는 종이가 수십 장 있었다. 밤새서 프랑크 내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이었다. 일생의 역작이라 해도 좋았다. 내전과 혁명. 이것들은 결코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극도로 섬세한 장치들이 필요했다. 나는 이 장치들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조립하였다. 첫 번째 장치. 대략 열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원고였다. 여기에는 <영원한 국가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 원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속박하고 있는 이 허위를 깨트려 없애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체의 진실을 말해서 그대로 행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문서는 고대제국어로 작성되었다. 내가 앞으로 뿌릴 책자는 결코 일반 백성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논리가 아니라 강렬한 감정이었다. 반면에 귀족 중에서도 교양이 있는 자, 젊은 학자를 설득해내려면 논리라는 이름의 가면이 필요했다. 어차피 교양인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들도 어디까지나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다만 소위 '끓는점'이 일반 백성보다 높을 따름이다. 논리란 이른바 교양인들이 쉽게 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 농민들은 귀족에 노예처럼 예속되어 있다. 때로는 대지주에 예속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또 사실 모를 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입은 그 노예제도 위에 의존해 있으며, 우리 스스로 그러한 제도에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잔혹하다는 것조차 알고 있다……. ─ 일찍이 젊을 적에 ‘내가 작위를 물려받는다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리라’ 하고 다짐해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새벽에 긍지를 품었다가 저녁에는 다시 체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인은 우리의 생활에 있다. 일 년에 300리브라나 되는 돈을 낭비하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금 노예제도에 협력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 현재 우리 고귀한 이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며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 이것이 기가 막힌 역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지금까지 노예제도란 오직 귀족을 위하여 일반 민중을 예속시키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도리어 귀족이 노예제도에 예속되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지조차 못하게 되었다. ─ 오늘날 ‘우리 지배계층의 위엄과 수준이 날이 갈수록 형편없어진다’라는 우려의 소리가 곧잘 회자된다. 이 현상의 원인은 다름아니라 저 노예제도의 역설, 즉 주인인 자가 도리어 노예인 자에게 예속된다는 역설에서 비롯한다……. “캬아! 문장 좋고.” 여기까지 원고를 검토하고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이었다. 이건 학술서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연설문이나 다름없었다. 연설문은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기술이며, 고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철두철미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 원고의 청자는 젊은 귀족이었다. 젊은 귀족이란 명예에 껌뻑 죽는 새끼들이다. 그들은 노예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자신들 스스로 인생을 개척한다고 굳게 믿는 놈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귀족의 삶에도 자유 따위는 없다.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무조건 후계를 물려받아야 한다. 군주가 전쟁을 벌이면 무조건 소집령에 응해야 한다. 차남이나 삼남으로 태어났으면 기껏해야 이류 기사로 떠돌아다닌다. 그들에게는 온갖 의무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 나는 이 지점을 찌르고 있다. ─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토지의 주인이 되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수천 년에 걸쳐서 대지를 경작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토지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라 다만 토지의 노예로 전락한 것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면서도 외면한 결과이다. ─ 우리는 학회나 정부기관에서 농민들이 왜 빈곤한지, 생활을 증진시키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무수히 많이 논의했다. 그러나 농민의 생활을 올바르고도 유일하게 진흥시키는 방법, 즉 농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토지를 농민들에게서 그만 빼앗을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먼저 귀족들의 긍지를 인정한다. 그리고 왜 긍지를 스스로 저버리는지 비판한다. 다음에는 긍지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설교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꾸짖는다. 단, 당신은 얼마든지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을 불어넣는다. 자존심을 자극한다. 행동을 부추긴다. 감정을 달아오르게 만든다.――고대제국어로 쓰인 이 글줄은,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럴듯한 논리를 조미료로 뿌려놓은 선동문구였다. 장담컨대 여기에 넘어가는 귀족들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 토지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물이나 공기나 햇빛과 마찬가지로 매매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 모든 인간은 토지에 대하여 또 토지가 인간에게 주는 온갖 이익에 대해서 평등하게 권리를 갖고 있다. 마치 당연한 진실을 얘기하듯이 단언조로 얘기한다. 마치 지금까지 말한 것들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처럼.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단지 선동문구에 불과한 문장을 논리적인 귀결로 받아들인다. 물론 여기에 넘어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몇 가지 도구를 더 추가했지.’ 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원고를 계속 검토했다. 신기하게도 오자(誤字)가 전혀 없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맞춤법이 틀려먹은 적이 없었다. 내 언어능력에 모종의 힘이 더해진 것 같았는데, 어찌되었든 좋은 일이었다. ─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여러 사람이 평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받아서, 공동협정에 따라 지대(地代)를 지불하고, 그 지대는 공동기금으로 납입한다. 이 공동기금은 물론 농민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된다. ─ 지대를 결정하는 것은 농민들의 자치기구인 민회(民會)에서 결정한다. 그렇다.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내가 무슨 정치 전문가는 아니다.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겠는가? 그러니까 '공동협정'이라느니 '공동기금'이라느니, '자치기구'라느니 '민회'라느니, 무척 멋들어진 고유명사를 써먹는다. 마치 대단한 얘기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원래 고유명사에는 사람을 기죽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삶이란 원래 빌어처먹었다'라는 문장을 '삶이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다'라고 바꿔 말할 경우, 마치 대단한 진리라도 발언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귀족들은 그런 수사학을 좋아한다. 젊은 귀족일수록 그렇겠지. 귀족들의 긍지를 자극시킨 다음, 선전문구에 불과한 것을 논리적 귀결인양 위장하고, 그 논리적 귀결을 현실에 이루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멋진 고유명사로 치장한다. 이쯤 되면 꽤나 많은 귀족이 설득되었을 거다. 마지막 어퍼컷으로는. ─ 그렇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우리는 그 문제의 의의를 알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다. 왜 친척들은 살고 있을까? 왜 한스라는 남자가 태어났을까? 나는 왜 몹쓸 짓을 했을까? 왜 누군가는 죽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인가? 왜 나는 진실을 외면했을까? ─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즉 신들의 운명과 섭리를 이해하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신들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 따라서 끊임없이 숙고해보면 숙고해볼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양심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눈앞에서 보고 느끼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하여, 무한하게 광대한 세계들 너머의 세계들로, 신들의 참된 뜻에로 나아간다……. “세시봉! 세시봉!” 나도 모르게 프랑스 신사가 되어 감탄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 태어났더라면 일약 스타덤에 오를 것이 확실한 문학적 재능이 바로 여기 있었다. 마지막은 역시 종교와 도덕이다. 누구나 종교와 도덕에 열광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아무리 냉소적인 인간일지라도 일단 한번 도덕심에 불이 지피면 어쩔 도리 없이 활활 불타오른다. 여태까지 기껏 논리적인 어조로 말했다가 마지막은 도덕적이게 된다, 크흐. “나 자신의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군…….” 나는 감격에 둘러싸여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새벽의 어둠이 내 재능에 깜짝 놀라 서둘러 산맥 너머로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런가. 나는 마침내 하늘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는가……이 무슨 재능……이 무슨 천재……때때로 나 자신이 두렵다……. 첫 번째 원고를 전부 검토했다. 이걸 책자로 인쇄하여 귀족들한테 전부 뿌린다. 왕당파와 공화파를 가리지 않고. 민회의 공동기금을 일시적으로 귀족이 맡는다느니 하는 내용도 원고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귀족들에게도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의협심에 불타오르는 몇몇 왕당파 귀족은 꽤나 혹할 것이다. “으흐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또 다른 종이뭉치를 집었다. 내전과 혁명을 위하여 내가 준비한 두 번째 장치. 이것도 원고였다. 다만 브루노 평원에서 연설한 내용을 아주 약간만 각색했다. 귀족이란 죄다 싸잡아 죽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마찬가지로 이걸 책자로 인쇄해서 귀족들한테 뿌릴 것이다. 단, 공화파한테만. “미리 분열의 싹을 심어두어야지.” 행여나 인간들이 공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대동단결하면 난감했다. 애당초, 왕국에서 공화국이 되면 국력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마련이었다. 원래 세계의 프랑스가 그러했다. 국민들 스스로 혁명을 위하여 일어섰다. 자기 국가를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일어선 병사, 황제를 지키려고 억지로 동원된 병사. 어느 쪽이 더 강력할지는 뻔했다. 그럼 곤란하다. 설령 공화주의가 승리할지라도 인간들은 계속 분열되어 있어야 한다. 기껏 열심히 뛰어다녀 제국을 무너트렸더니, 그 다음에 더욱 강력한 공화국이 나타난다고? 웃을 수 없는 농담이겠지. 공화주의 아래에도 여러 파벌이 생기게끔 유도한다. 과격파인가 온건파인가, 귀족을 전부 말살하는가 아니면 관용을 베푸는가, 귀족공화정인가 민주공화정인가……하나의 파벌에 수만 가지의 이념을 갈라놓아 서로 싸우도록 한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딱 사백 년 정도만 이념으로 치고박고 싸워주면 고맙겠는데.” 사백 년보다 더 길게 싸워주면 고맙고. 무얼, 어느 쪽이든 일반 백성의 권리는 올라간다. 대륙의 인간들은 나한테 감사해야 마땅하다. 너희를 대신하여 언젠가 일어날 혁명을 앞당겨주는 것이다. 게다가 파벌까지 미리미리 정해주지 않는가! 성인(聖人) 단탈리안의 조각상을 도시 광장에 세워줘야 할 정도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장치였다. 앞선 장치들이 귀족과 교양인을 목표로 삼았다면, 마지막 세 번째 장치는 일반 백성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건 연설문이 아니었다. 학술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노래에 불과했다.   크레시에서 수국전쟁까지   푸아티에 그리고 아쟁쿠르여   눈물과 핏물로 얼룩진 검의 언덕을   우리는 오로지 맨발로 지났다네   진격하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타는 목마음으로 울부짖으라,   영광의 순간이 왔도다!   붉은 성에서 울름 평야까지   보외티아 그리고 미뉘아이여   언덕과 계곡에 울려 퍼지는   적군의 지옥과 같은 함성을 들으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적들이 우리 아내와 연인의   목을 자르러 다가오고 있다!   창칼을 잡으라, 시민 동지들이여!   그대 부대의 앞장을 서라!   여신이시여, 모든 언덕과 계곡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여신이시여, 이제 정의를 노래함을 허락하소서!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이거면 그럭저럭 먹히겠지.” 내가 방긋 웃었다. 혁명가였다. 정확하게 노래가 어떻게 작곡될지는 모르겠어도, 쿤쿠스카 상회에 의뢰하여 마계 최고의 작곡가에게 맡겨보자. 부디 인간 혁명 동지들께서 내 자그마한 선물에 만족하시기를 바란다.   00169 마왕만이 아는 세계 =========================================================================                        * * * 새벽에 사람들이 일어났다. “팔겠습니다.” 상단의 노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그는 밤을 새서 고민한 것이 분명했다. 하룻밤 만에 얼굴이 홀쭉해졌다. 아마도 우리와 거래하느냐 마느냐가 그의 상인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고비였겠지.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쪽의 자크리가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현명한 결정이오. 어느 정도를 팔 생각이오?” “모쪼록 기사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두 사람은 거래를 타결했다. 본래 이 정도 물건과 돈이 오갈 때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기 마련이었으나, 저편은 무구 상인이었고 이편은 용병. 모두 무기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다. 금세 적절한 가격이 나왔다. 우리는 상단 행렬과 헤어지고 제국로를 따라 나아갔다. 다시금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짐마차를 이끌면서 느긋하게 이동했다. 자크리가 검은 말을 몰면서 얘기했다. “저쪽으로선 행운을 잡은 셈입니다. 내전이 벌어지는 도중에 무기를 잔뜩 실은 짐마차가 보이면 거래고 뭐고 나중에 대금을 치른다면서 약탈하기 일쑤입니다.” “자크리, 황태후에게 무구를 진상하여 눈도장을 찍을 생각인가?” 전쟁에는 언제나 무구가 부족하다. 그때 무기를 잔뜩 진상하면 발언권을 얻게 된다. 단지 전쟁에서 부려지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입장으로 형편이 좋아진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전략을 결정하는 수뇌부가 될 수야 없겠지. 자기 부대의 위치를 결정할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이다. 우익인가 좌익인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생존율이 확 달라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자크리의 판단은 올바르다. “그렇습니다.” “좋다. 그러나 상책은 아니야.”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자크리는 별로 감정이 상하지 않아보였다. 어젯밤에 회의를 끝낸 이후로 자크리의 태도가 더 공손해졌다. 어제는 마치 용병이 고용주를 대접하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기사가 주군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나에겐 반가운 변화였다. “황태후 진영에 무기를 넘기는 대신에 백성들한테 무기를 쥐어주게.” “예?” “민란을 유도하라는 말일세.” 자크리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전하. 민란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프랑크는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촌민의 자치권이 약하고, 기사가 많습니다. 민란이 진압되기에 아주 적합하지요. 게다가 프랑크의 공화파는 어디까지나 귀족공화정을 두둔하는 자들. 결코 민란을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자크리는 해방동맹의 지부장이었다. 프랑크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공화주의가 가능한지, 정말로 혁명이 가능한지 수없이 고민해왔겠지. 그는 혁명동맹의 수뇌부로서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리라. 아직 민란은 시기장조라고. “민란의 규모가 보잘 것 없다면 금방 진압됩니다. 의미가 사라집니다. 즉 대대적인 민란을 유도해야 합니다만……이 경우, 자칫 잘못하다가는 왕당파에게 빌미를 제공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결국 공화주의의 목적은 백성들이 상전을 뒤엎는 것 아니냐. 왕당파는 그렇게 공격해올 것이다. 공화파는 흔들리게 된다. 그들도 어차피 귀족. 민중 봉기에는 대다수의 공화파 귀족들도 찬동하지 못한다. “어쩌면 왕당파와 공화파가 내전을 멈추고 타협할지 모릅니다. 말짱 도로묵이 되어버립니다. 전하. 소인은 백성들에게 무구를 나눠주는 것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허나 브르타뉴 왕국이 끼어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예?” “프랑크와 브르타뉴는 철천지원수. 브르타뉴에 대항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섰다.” 귀족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브르타뉴의 침공군에 대항한다. 귀족들이 이것을 막을 명분이 있을까. “백성들에게는 의병(義兵)이라는 칭호가 주어지겠지.” “……!” 자크리가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저절로 열린 것이었다. 자크리가 어느 때보다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는 고민에 잠기면 표정을 와락 구기는 습관이 있었다. “가능합니다……아니, 반드시 먹힙니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목소리에서 뜨거운 흥분이 울렁거렸다. “황태후와 공화파 귀족이 의병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겁니다!” “아아. 자고로 민심을 등에 업은 정치세력만큼 무시무시한 것은 없으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다. 공화파의 입지가 단숨에 상승한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명분 싸움에서 추가 황태후에게 기울어버린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민란 봉기는 거세진다. 의병이 외적에 승리하는 경우가 잦아지겠지. 틀림없이 귀족들도 의병의 무훈을 무시하지 못하는 지경에 도달한다. 하급 귀족과 평민의 발언권이 강력해진다. 수많은 전투로 인하여 정예가 된 의병들. 여기에 발언권까지 더해지면――. “질문하지. 공화파 귀족들이 평민의 성장을 두고보리라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평민을 탄압할 것입니다.” “옳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다. 공화파 귀족이 자기네를 탄합하는 것을, 평민들이 가만히 두고보리라 생각하는가?” “…….” 의병들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없었다. 조국을 위하여 피땀 흘려 싸웠다. 지금까지 후원해주던 귀족들, 평등이니 자유니 멋들어진 단어를 남발하던 귀족들이 정작 전쟁이 끝나니까 등을 돌린다. 명백한 토사구팽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에게 전투 경험이 없다면. 또한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지 않다면, 분노는 단지 분노로 끝나겠지. 하지만 이때쯤이면 상당수의 의병이 정예로 길러졌을 것일세. 게다가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창칼이 있지.” “대규모……혁명이…….” 그렇다. 혁명이 일어난다. “프랑크의 황제는 권력에 사로잡혀서 외세까지 끌어들였네. 외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유린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 여기서 이미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네. 설령 황태후가 내전에서 승리할지라도, 태후는 황실의 정당한 주인이 아니야. 제국에는 명분이 사라진다.” “…….” “이제 우리가 백성들에게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생기네.” 그것을 위하여 어젯밤을 꼬박 바쳐 원고를 썼다. 까막눈인 절대다수의 민중을 제외하고, 혁명파에는 하급 귀족과 부유한 평민도 참여할 것이다. 그들이 내 책자를 읽고 이론적으로 단단하게 무장한다. 그리고 민중들에게 글이 아니라 말로 연설하겠지. 어째서 우리가 정의로운지. “뭐, 아직은 먼 이야기일세. 아무리 빨라도 이삼 년은 지나야겠지.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서 제법 열심히 움직여야 하네.” 내가 웃으면서 뒤를 쳐다보았다. 자크리와 제레미가 이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표정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황태후에게 협력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곤란해. 프랑크에 제국의 깃발이 쓰러지고 방방곳곳 혁명의 깃발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하게나. 자네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지.” * * * 우리 일행이 처음으로 마을에 당도했다. 베르시는 작은 준남작령이었다. 힘겨운 겨울을 겨우 버텨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제국로 주변에 시체가 꽤나 쌓여 있었다. 마을에서 운반해온 시체였다. 노인과 아이의 시체가 가장 많았다. “마계의 지옥에선 별로 드문 광경도 아니에요.” 어쩌면 가족들이 일부러 살해한 것일지 모른다, 하고 제레미가 말했다. 어린아이와 노인은 당장 쓸모가 없는 인력에 불과했다. 전염병에 흉년이 겹친 지금 가장 먼저 군입이 처리되어야만 했다. 쉰 명에 이르는 집단이 말과 마차를 끌고오자 영지에 비상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자, 수십 명의 병사가 이쪽을 경계하면서 창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중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그가 준남작이겠지. “멈추시오!” 준남작의 근처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오면서 외쳤다. 영주의 종사(從士)였다. 영주의 측근이자 유사시 영주를 대신하여 군대를 이끄는 부관이었다. 아마 준남작령에 포함된 어느 마을의 촌장이거나 지주일 것이다. 병사 수십 명이 모인 것을 보아하니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 듯했다. 영주의 통치가 꽤나 견실하다고 봐야겠지. 병사들도 농기구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창과 활을 들고 있었다. “이곳은 베르시 준남작께서 황제 폐하께 하사받아 다스리는 영지이외다! 정체를 밝히시오!” “나는 녹색 수염의 자크 보놈, 양날도끼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대장이오.” 자크리가 말을 앞으로 몰아가며 품속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황태후 폐하의 소집령을 받들어 제국로를 통과하고 있소. 이곳 영지에서 하룻밤 체류하고자 하오. 부디 황태후 폐하의 의지를 무시하지 말기를 바라오.” 종사가 이쪽으로 걸어나왔다. 종사는 자크리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준남작한테 전달했다. 베르시 준남작은 투구를 벗어 두루마리를 찬찬히 읽었다. 밝은 금발이 멋진 남자였다. 베르시 준남작이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분명히 제도(帝都)에서는 용병단의 통행에 편의를 봐달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이제 서른 살을 갓 넘겼을까. 딱 중심이 잡혀서 목소리가 묵직했다. 귀족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익힌 티가 났다. 준남작에다가 영지귀족이라면 어중이떠중이 기사들과 일선을 달리하는 상위 귀족이었다. “그중에는 양날도끼 용병단의 이름도 확실히 들어 있다. 하지만 자크 보놈, 용병대장이여. 본인은 중앙의 쓰잘데기 없는 정치 싸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필요 이상으로 중앙의 명령, 하물며 황제 폐하가 아닌 다른 이의 명령에 복종할 이유도 없다.” “호오.” 내가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말투가 사나운 양반이 아니고 뭔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든지 뒷배로 강력한 귀족을 두고 있으리라. 하긴, 생각해보면 제국로의 중간 거점을 차지한 작자였다. 실력이 없을 리 만무한가……. 자크리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쪽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오. 우리는 황태후 폐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대는 우리를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할 따름이오. 물론 준남작 각하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황태후 폐하께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실 거요.” 아주 대놓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시 준남작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마. 우리 영지에는 애석하게도 쉰 명이나 되는 군인을 먹이고 재워줄 여유가 없다. 그대들은 불청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말로 솔직하구려.” 여기에는 자크리도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양반께서 나오셨다. “그럼 어쩔 거요? 우리를 이대로 내쫓을 거외까? 중앙의 분노를 두려워하시오.” “물론 두렵다. 허나 시치미 떼지 마라, 용병대장. 프랑크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그대들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중앙의 분노는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다.” 요컨대 황제파가 되기도 싫고 황태후파가 되기도 싫다는 얘기였다. “마을 앞에서 하룻밤 머무르는 것은 허락한다. 따뜻한 스프도 제공하겠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 이쪽의 사정을 이해했는가, 용병대장이여.” “세상에 이해되지 못할 사정은 아무것도 없소, 준남작 각하.” 자크리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거래였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제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서로를 설득하느냐였다. “벌써 며칠을 꼬박 노숙했소. 근육은 빳빳하게 굳었고 허리도 굽었소. 언제 전투에 돌입할지 모르는 몸을 하룻밤이라도 따스한 곳에 머물게 해주고 싶은 이쪽의 심정, 준남작 각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소외만.” “그쪽 형편을 이해하는 대가로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 “우리 용병단은 약간의 흑색 허브를 배달하고 있지.” 사실이었다. 흑사병은 아직도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염병이 군대에 돌면 끝장이었다. 만약을 위하여 흑색 허브를 마차에 충분히 실었다. “흐음.” 베르시 준남작이 팔짱을 끼고 오른발을 굴렀다. “매력적인 제안이군. 내 영지에는 흑색 허브가 필요하다. 흑색 허브를 어느 정도 제공해준다면 스프에다 닭고기를 몇 점 섞어줄 의향까지 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사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 좋은 방법이 없는가?” “여기 계신 이분은 용병이 아니라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제님이오.” 자크리가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부터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제레미가 나를 위해 준비해둔 위조 신분이었다. 마왕인 내가 신전의 사제가 되는 것만큼이나 웃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웃긴 일을 좋아했다. 내가 영주를 향하여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어려운 시대에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순례하는 분이지.” “즉, 우리는 그대들 용병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단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라?” “바로 그렇소.” “으음…….” 베르시 준남작이 이쪽을 쓰윽 훑어보았다. “훌륭하다.”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르테미스의 사도여! 그리고 그를 보호하는 신성한 전사들이여! 베르시 영지는 그대들을 환영한다!”   00170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우리는 로렌 지방의 베르시 준남작령. 그중 포메트라 마을에 들어갔다. “이것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주시오.” 베르시 준남작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대했다. 그는 허언을 입에 담는 족속이 아니었다. 준남작이 정성스럽게 숙박(billet) 명령서를 써서 넘겨주었는데, 이건 말하자면 자유이용권이었다. 병사가 명령서에 적힌 대로 집을 찾아가면 집주인이 군말없이 하룻밤 병사를 재워주어야 했다. 이 시대 농민들이 영주한테 당연하다시피 지는 의무였다. 자국의 군대이든 외국의 군대이든 이런 식으로 숙박을 해결했다. 단, 모든 의무가 그러하듯 숙박 제공도 결코 달가운 의무가 아니었다. 아내와 딸이 정답게 머무르는 집에 갑자기 외지인이 들어온다.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험상궂은 병사를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어야 하니 민폐가 따로 없다. 더군다나 우리측은 대다수가 난쟁이나 엘프……마을주민에게 더없이 낯선 이방인이다. 영주의 명령이니 일단 복종해도 불만이 가득할 거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용병 및 암살자 제군. 나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들면서 브레시 남작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준남작 나리. 은화와 동화가 충분합니까?” “음? 미안하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질문하도록.” “일백 리브라입니다. 동화로 바꿔주시면 제 순례단의 호위대에 나눠주고 싶군요.” 브레시 남작이 숙박 명령 쪽지를 써재끼다가 뚝, 하고 멈추었다. “……일백 리브라? 잠깐만. 그만한 거금을 교환해줄 동화는 없다.” “교환하지 못한 나머지는 적당히 현물로 바꿔주십시오. 밀가루도 좋고, 약간의 고기도 좋고, 채소도 좋습니다.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 스튜를 펄펄 끓일 재료라도 들고 가는 편이 마을주민한테나 우리한테나 좋겠지요.” 내가 준남작의 종사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종사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헉.” 이십 대 중반의 종사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확히 일백 리브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그, 금화가 잔뜩 있습니다. 경화(硬貨)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봅니다, 주군.” “음.” 브레시 준남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체면 때문에 차마 돈주머니를 확인하지 못해 안면이 근질근질거리고 있었다. 그랬다. 공짜가 아니라 돈을 지불하게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브레시 준남작은 이제까지 손님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는데 별안간 봉을 붙잡은 타짜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고작 하룻밤 묵는 데 일백 골드를 흔쾌하게 건네는 자가 봉이 아니면 뭐가 봉이겠는가. “종사. 지금 당장 마을 젊은이 열댓 명을 데리고 백도(伯都)까지 달려가도록. 짐마차를 두 개 가져가는 것을 허락한다. 밀가루 포대와 고기, 야채를 되는 대로 사와라. 반나절의 기한을 주지.” “바, 반나절이라구요?” 백도란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의 수도를 일컫는다. 아마 이 부근에서 제일 큰 마을이거나 도시일 것이다. “나리. 그건 아무래도 좀…….” “내 개인의 군마들을 빌려주마. 행여라도 상처가 나면 죽었다고 복창하도록.” “헉!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종사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주택들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병사를 모집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마을 광장에 마흔 명 가량의 병사가 모여 있었다. 그가 광장에서 뭐라뭐라 외치니까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와아! 하고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잘못 판단했군요. 불청객이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주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실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베르시 준남작은 말투부터 통째로 바뀌었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려보이는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 이쪽이 신전의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썹 한번 까딱이지 않고 말투를 바꾸다니……신경줄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일찍이 푸른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출가한 몸입니다. 여신의 아래에 서기를 자청한 자,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임할지어니. 부디 말을 낮추어주시길 바랍니다.” “그 편이 자네에게 편하다면.” 어이구, 이것 봐라? 또 아무렇지도 않게 어투를 평대로 되돌렸다. 푸른 피란 귀족의 혈통을 의미했다. 내가 귀족 태생이라고 말했는데도 생까버린 것이었다. 점점 더 눈앞의 양반이 마음에 들었다. 젊을 적에 미남이었을 게 분명한 베르시 준남작의 얼굴은 그 나름대로 풍파를 현명하게 거쳐서, 딱 곧게 자라난 거목처럼 든든한 구석이 있었다. 일백 골드가 눈앞에 오갔는데도 벌써 심신이 안정되었는지 여유로웠다. 준남작령은 척봐도 가난해보였다. 그런데도 영주귀족은 영주귀족이라는 것일까. 남자는 살갗에 안정과 위엄을 자연스럽게 두르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집안의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벼락 출세한 귀족이 아니었다. 준남작의 사람들과 이쪽 사이에 부드러운 공기가 흘러갔다. 역시 돈은 언제 어디서나 기름칠을 해주는 도구였다. “양날도끼 용병단이라 했는가? 무척 신사적이군.” “우리는 용병단이 아닙니다. 여신을 위하여 이곳저곳 방랑하는 순례자에 불과하지요.” “과연. 내가 그만 실언을 범했다.” 우리는 광장 구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었다. 정오였다. 집안에 들어가봤자 춥기만 하니 이렇게 따사로이 햇빛을 쬐는 편이 나았다. 어디서 들고 나왔는지 광장 한켠에 큼직한 나무 탁자가 놓였고, 영주 일족과 우리측 수뇌부가 거기 둘러앉았다. “멀리서 오느라 몸이 굳었을 터. 부족하나마 즐겨주면 좋겠다.” 사람들이 가마솥째로 수프를 날랐다. 방금 끓였는지 국물이 걸쭉했다. 하얀 빵은 없었지만 충분히 부드러운 빵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쌓였다. 우리 일행은 게걸스럽게 수프와 빵을 헤치웠다. 여기에 꿀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까지 돌았다. 가히 만찬이었다. 때아닌 마을축제가 열렸다. 베르시 준남작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마을주민에게도 빵과 수프를 공짜로 제공했다. 집안에 죽치고 있던 노파와 어린애까지 광장에 몰려들었다. 젊은이들은 무구를 벗어던지고 맥주를 주고받으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으하하하! 내 녹색 수염 난쟁이족의 위엄을 보여주지!” 축제만큼 이방인이 섞여들기에 좋은 자리가 없었다. 용병들은 금세 마을주민에 녹아들었다. 큰소리로 건배가 오갔고, 당장 누가 제일 말술인지를 두고 대회가 열렸다. 난쟁이들은 전투에선 도망치더라도 술싸움에선 죽어도 안 물러서는 족속이었다. 따뜻한 겨울 햇빛 아래, 마을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고맙다. 덕분에 겨울을 기분 좋게 끝내게 되었어.”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씁쓸한 기색이 묻어나왔다. “우리 영지는 작더라도 풍족하다. 최근 이백 년 동안 가문이 바뀐 적도 없어. 흉년을 견딜 만큼의 식량은 미리 비축해두었지. 그럼에도 아사자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힘겨운 시대입니다.” 내가 묵념을 했다. 사제인 내가 묵념을 올리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따라했다. 마치 내가 지휘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라? 이거 의외로 재밌다.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다. 사제란 것도 심심하기만 한 직업이 아니었네. “최대한 피해를 막아보려 했지만 이 마을에서만 일곱 명이 죽었다. 올해 흑사병으로 죽은 자까지 합치면 스물세 명이나 명을 달리했어. 믿기는가? 한해에 스물세 명이 죽은 것이다. 지난 번 전투에서도 이만큼 죽진 않았어. 암. 이만큼은…….” 베르시 준남작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에 묻은 피로가 공중에 흩날리는 것 같았다. 영지민을 걱정하고 피해를 막으려 노력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괴로워한다. 심지어 정치적인 압력에 부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일행이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긴, 마을의 자산이 곧 영주귀족인 베르시의 자산이었다. 자기 자산을 지키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영주귀족의 본분이겠지. 본분을 지킨다는 점에서 베르시 준남작은 더없이 훌륭했다. 세상에는 그 본분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까. “솔직히, 마을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지난 번 전투라니. 근방에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준남작의 말투를 들어보니 예전에 일어난 전투가 아니었다. 최근에 전투가 일어났다면 왕당파와 공화파가 충돌한 것일지 몰랐다.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준남작의 얘기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아아. 근방에 도적들이 들고 일어섰다. 불과 사 개월 전 일이지.” “도적…….” “초기 정찰에 따르면 스무 명 정도 되는 도적떼였다. 인근의 다른 영주들과 합쳐서 토벌할 작정이었지. 그런데 전투에 돌입해보니 스무 명이 아니라 쉰 명이 넘어갔어. 상상이 가는가? 이 자그마한 지방에 쉰 명이 넘는 도적떼가 발생한 것이다.” 베르시 준남작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나중에 알아보니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농민에다 화전민까지 끼어 있었다. 빌어먹을 이웃동네의 양반들이 영지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도적이 되어버렸어.” 베르시 준남작이 처음으로 말이 격해졌다. 아마 근방에서 제대로 된 영주귀족은 준남작 혼자인 듯했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과하다고 느껴졌다. 준남작령은 제국로(帝國路)를 거느렸다. 프랑크 상업의 젖줄기에 발끝을 슬쩍 담은 것이었다. 상단들이 마을에 머무르면서 지불하는 숙박비만으로도 벌써 다른 영지와 차원이 다르게 부를 축적할 수가 있었다. 이런 행운을 누리는 영지는 극소수……전염병과 흉년이라는 원투펀치에 당해낼 영지는 거의 없었다. 준남작의 비난은 약간 불합리했다. 뭐, 말도 안 되게 늘어난 도적무리 때문에 소중한 영지민을 잃게 된 준남작의 처지는 이해하더라도. “어느 곳이든 사정은 비슷하다. 저주받을 월맹군 때문에 군역을 진 영주도 수두룩하다. 전염병, 흉년, 대전쟁까지, 요즘 들어서는 흉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아, 그거 제가 일으킨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포도주가 맛있다. 음. 꿀을 듬뿍 넣어서 그런지 몰라도 풍미가 깊었다. 훌륭하군……주변에 좋은 포도 과수원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중에 조금 사가야겠다. 합스부르크의 포도주는 죄다 쉬어버린 식초 같아서 입에 댈 만한 물건이 못 되었다. 바르바토스한테 건네준 발레르뇽 505년산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최소한 물에 타먹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포도주가 고프다……난 마왕이라서 잠도 음식도 거의 필요없단 말이다. 혀를 즐겁게 해줄 포도주 정도만 있으면 된다. 으음. 훌륭하다. 다시 마셔도 맛있군……. 옆에서 제레미가 왠지 모르게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는 월맹군의 전말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준남작한테 '바로 이 분께서 저주받을 월맹군을 획책한 장본인이에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리라. 조용히 해라, 제레미. 그런 얘기를 들어봤자 준남작도 곤란하겠지. 세상에는 예의란 것이 있다. 이럴 때 가만히 넘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너희는 배려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나를 본받아라. 우리 둘 사이에 모종의 시선이 오간 것을 알지 못한 채, 준남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께선 이제 내전까지 벌인다고 한다. 실로 빌어먹을 소리이지. 왜 내가 왕당파든 공화파든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는지 이해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예, 이곳 빼고 대부분의 영지민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매우 잘 이해했습니다. 앞으로도 서열 제71위의 마왕으로서 노력하겠습니다. 포도주로 식도를 적시면서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00171 마왕만이 아는 세계 =========================================================================                        우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마도 준남작은 상념에 잠겼겠지. 내전이 프랑크의 운명을 어떻게 망가트릴 것인가, 거기에 휘말려서 자신의 영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침 마을은 이제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어 떠들썩했다. 떠들썩해서 되레 준남작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지금의 평화가 이어질까……. 나는 그리고 스프가 참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닭고기가 들어갔으니 이건 치킨 스프이겠지. 그렇지만 온갖 야채란 야채는 전부 떠다닌다. 이중에서 닭고기의 비중은 정말 얼마되지 않는다. 이런 음식을 과연 치킨 스프라 불러도 좋을 것인가? 실로 그것이 문제이다……. “자네들 덕분에 한숨 돌렸다. 이대로 겨울이 끝나봤자 마을의 분위기는 한없이 저조했을 것이다.” “저희의 순례가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왜 하필 고기의 이름에 따라서 스프에 이름을 붙이는가……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국물을 한 입 더 떠먹었다. 맛있었다. 좋다, 이 녀석에게는 그냥 맛있는 스프라고 이름을 하사하자. “자네들이 찾아온 덕분에 주민들 모두가 가벼워진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게 되었어. 행운이라 말해도 좋다. 감사를 표하마.” “천만에 말씀입니다.” 내가 불성실한 게 아니다. 준남작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편견에 맞서서 야채들의 권익을 지키려는 것이다. 프랑크의 운명 따위보다 한없이 중요하다. 이게 바로 준남작과 마왕의 수준 차이란 거다. 흐음, 이번엔 빵조각을 찍어서 먹어볼까. “자네들에게 의뢰하고 싶은 바가 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 양반은 왜 계속 말을 걸어오는 거냐. 나는 지금 눈앞의 스프를 통하여 야채와 고기 사이의 불평등한 인식에 관해 절찬리에 사념하고 있다. 방해하지 마라. “이상하게도 작년부터 고블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원래 이 근처에는 괴수들이 거의 출몰하지 않았다. 마왕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지.” “괴수들은 마왕성 근처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니 말입니다.” 마왕성에는 마나가 잔뜩 고여 있다. 마나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몬스터에게 마왕성이란 요컨대 치킨 스프와 같다. 떠나고 싶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 헌데 갑자기 괴수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월맹군에 발을 맞추어서 이쪽의 마왕도 괴수를 움직인 것이겠지.” 베르시 준남작이 재미있는 의견을 꺼내들었다. 즉, 월맹군이 인간군의 전선을 공격한다. 그동안 내륙에 위치한 마왕들이 후방을 교란한다. 이 근방의 마왕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 아니겠냐는 얘기였다. 미안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몬스터들이 날뛰는 이유는 말하자면 치킨 스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거야 화날 만도 하지. 일찍이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자가 있었다. ─ 자네의 마왕성이 어디에 있는가? ─ 프랑크에 있습니다……로렌 지방, 라엘리아 산중턱에……. ─ 훌륭하군. 마왕성 근처에 어떤 마을들이 있는가? ─ 포메트라, 깜파뉼……. 로렌 지방, 베르시 남작령, 포메트라 마을. 이곳은 서열 제72위의 마왕――안드로말리우스가 기거하던 땅이다. 인간들은 아직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은 것을 모른다. 마왕이 죽는 바람에 마왕성의 마나가 일거에 사라지고, 그 탓에 고블린들이 날뛰는 것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인간계가 아니라 마계의 도시에서 죽었다. 준남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안드로말리우스는 자기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블린들을 광산에 처박아두고 종일토록 일하게 만들었다. 그 고블린들이 던전에서 쏟아져 나왔겠지.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던전 어택에서 주인공 용사의 마을이 고블린들에게 쑥대밭이 된다. 용사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는지 입지 않았는지 그걸 확인하는 것이 먼저로군…….’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을 때 퀘스트 브레이커(quest breaker)가 작동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마왕이 퀘스트를 깨부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안심했다. 하지만 나중에 퀘스트를 부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용사 퀘스트를 파괴했다고 알림창이 뜨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용사가 되는 계기는 마왕 안드로말리우스한테 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주인공의 마을, 화전촌을 무참하게 짓밟아서 주인공은 마왕이란 존재에 대해 원한을 품는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라지면 주인공이 용사가 되는 일도 없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퀘스트는 파괴되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상관없이 주인공은 용사가 될 운명인가. 아니면, 굳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다른 인간들이 대신해서 용사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인가……. 가능성은 여러 가지이다. 정답이 무엇이건 간에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용사가 될 싹을 뿌리부터 제거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해방동맹과 협의해서 일행의 경로를 이쪽으로 잡았다. 베르시 준남작령에 도착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왕군의 세력과 인간군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가는 지금 이 순간, 용사가 될 인간이야말로 미래의 안위를 위협하는 제1위험분자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리도록 하자. “좋습니다. 고블린 부락을 토벌하겠습니다. 이것 역시 여신께서 뜻하시는 바이겠지요.” 내가 포도주로 마지막 입가심을 했다. “단, 지리에 유능한 길잡이를 붙여주십시오. 산자락에는 도적떼나 화전촌도 있을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의도치 않게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피처럼 붉은 액체가 잔에 담긴 채로 이쪽의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 포도주에 반사된 나의 얼굴은 정말로 신실한 사제처럼 그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하루를 푹 쉬었다. 영주의 종사가 백도(伯都)에서 먹을거리를 잔뜩 사왔기에 축제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난쟁이 용병들은 앞장서서 축제를 주도했다. 덕택에 마을주민들이 숙박 명령을 거리껴 하기는커녕 저마다 자기네 집에서 자라며 성화였다. 정오 무렵. 우리는 마치 원정을 나가는 자국의 군대처럼 주민들에게 함성을 받으면서 출발했다. 길잡이로 고용된 남자 두 명은 중년의 사냥꾼이었는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두뇌에다 그대로 지도를 그려놓은 사람들이었다. “화전촌 말입니까요? 그야 한 군데 있습죠.”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은데 내버려두면 저들이 알아서 괴수랑 싸워주니 영주 나리께서도 내버려두고 계십니다요.” 그곳이 틀림없었다. 나는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자크리에게는 용병단을 이끌게 하여 고블린 부락으로 향하게 했다. 나머지, 그러니까 제레미와 암살자들은 나를 뒤따르게 했다. 왜 부대를 둘로 나누냐는 자크리의 말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들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진군이 늦어졌네. 고블린 부락이래봤자 스무 명밖에 되지 않을 터인데, 함께 행군하면 하루종일 고생해도 기껏해야 한 군데의 부락만 토벌할 수 있어. 비효율적이야.” “으음.” 자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을사람들에게 성원을 받았으니 그만한 결과를 내놓아야겠습니다.” “이건 우리의 신용이 걸린 문제네. 우리가 앞으로 영주들에게 고용되기 위해서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해. 다른 마왕들과 협력해서 기만책을 펼치는 것은 나중 일이야. 일단은 성실하게 일하도록.” “알겠습니다.” 반은 거짓말이었고 반은 진담이었다. 나는 앞으로 내륙의 마왕들과 협력해서 영지들을 파괴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쪽의 본색을 드러내면 안 되었다. 서서히, 영주들이 우리 용병단을 크게 신뢰할 때까지 참아야만 했다. 고블린을 토벌하는 일은 쉬우면서도 신뢰도를 쌓기에 적절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자크리를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자크리는 열성적인 공화주의자였다. 이념과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자였다. 만약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화전촌을 싸그리 쓸어버린다고 하면 당장 반발하겠지. 화전촌에 훗날 용사가 될 남자아이가 섞여 있고 그러므로 지금 없애야 한다고 설득해본들 자크리가 납득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제레미와 암살대가 더 사용하기 편했다. 암살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했다. 고용주가 명령하면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화전촌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야겠다고 말하니까 제레미는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게 있음을 믿습니다.” 제레미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믿음직스러운 수하가 아닐 수 없었다. 길잡이를 따라 세 시간쯤 걸으니 멀리 수풀 사이로 화전촌이 보였다. 장작을 떼는 연기들이 창백한 하늘로 꾸물꾸물 올라가고 있었다. 다 헤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천막과 같은 집을 느릿느릿하게 오갔다. “제레미. 이제부터 눈앞의 목표를 말살한다.” 내가 숨을 죽이고 명령을 내렸다. 제레미가 화전촌을 슬쩍 쳐다보았다. “간단하네요. 많아봤자 서른 명, 젊은 남자는 열 명 정도밖에 안 돼요. 저에게 오 분만 시간을 주신다면 깔끔하게 처리하겠어요.” 그녀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여전히 얼굴 표정과 다르게 감정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상대방의 목덜미를 찌르는 순간조차 제레미는 살기 한 점 풍기지 않으리라. “혹시 지금 마을에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였던 주인공은 마왕 안드로말리우스가 화전촌을 습격했을 때도 때마침 마을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몬스터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지금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는 이 마을에 적을 둔 모든 인간이 말살되기를 갈망한다.” “그럼 어떡하죠?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 나에게 좋은 수가 있지.” 내가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몇 번이고 나에게 기회를 안겨준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이었다. “이걸로 내 골렘들을 소환할 것이다.” “골렘으로 마을을 공격하고, 저희는 사방에 산개해서 혹시나 모를 생존자를 확보하라는 말씀인가요?” “이해가 빨라서 좋군.” 제레미가 미소를 지었다. “전문 분야거든요.” “명심해라. 방심은 금물이다. 적들 중에는 아직 어리지만 미래에 대륙을 재패할 괴물이 숨어 있다. 남자아이다. 혹시 녀석을 발견하면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우선 나를 불러라. 알겠는가? 절대로 마음대로 교전을 일으키지 마라.” “…….” 제레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가벼운 사냥감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사자를 사냥하는 하이에나의 눈초리가 되었다. 고작 남자아이가 무엇을 하겠느냐 따위의 항의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존명.” 제레미를 포함해서 스무 명의 암살자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길잡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과연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암살대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용사. 화전민 출신에서 용병이 되고, 황녀의 눈에 들어서 점차 군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을 멸망시키고, 일흔두 명의 마왕을 모조리 참살하는……괴물 중의 괴물. 예전에 플레이어로서 내가 조종했으며, 그렇기에 나는 녀석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강력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금부터 그를 죽인다. 용사였던 내가 이제 마왕이 되어 그를 멸한다. 모든 것은 나의 생존을 위하여. “아르체시투스.” 스크롤이 찢어지면서 하얀 빛을 내뿜었고. 적막한 산자락에 거대한 바위의 투사들이 강림했다. 이제는 소환에 익숙해진 나의 부하들에게 나는 손가락으로 보잘 것 없는 화전촌을 가리켰다. ─ 크롸아아아아! 사냥이 시작되었다.   00172 마왕만이 아는 세계 =========================================================================                        골렘들이 포효를 내지르면서 전진했다. 우지끈 소리를 내면서 나무들이 사정없이 꺾여나갔다. 그 뒤를 요정들이 뒤따라서 날아갔다. 골렘과 요정의 부대는 벌써 수차례나 보조를 맞추었다. 최하급 몬스터의 레벨 한계치인 10에 모두 도달해 있었다. 라우라가 직접 육성시킨 덕택에 능력치도 꽤나 보기 좋게 자랐다. 안심하고 전투를 맞길 수 있었다. 나는 뒤쪽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참고로, 되도록 인간을 살해하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움직일 수 없게만 만들어두면 되었다. 만약 용사가 될 남자애가 없을 경우 녀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화전민들에게 물어봐야만 했다. 어차피 화전민……난데없이 기습을 받은 시점에서 제대로 대항해올 리 없다. 팔다리를 하나씩 분질러버리면 항전을 단념할 수밖에.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목을 자른다. 그뿐이다. “후우.” 어쩐지 지쳤다. 근처의 바위에 털썩 앉았다. 멀리 마을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린아이, 여자의 비명소리도 상당히 많이 들렸다. 아직도 나에게는 동정심이란 게 남아 있었다. 마음의 군살이었다. 한동안 이 빌어먹으리 만치 사치스러운 감정이 가슴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잠깐이다. 나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돌멩이를 이리저리 굴렸다. 잠깐이면 끝난다. “전하. '전투'를 보고드립니다.” 잠시 뒤, 제레미가 위쪽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일까. 착지할 때 거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보고하도록.” “화전촌 안에는 총 서른네 명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중 세 명이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다섯 명이 도망치려다 사살되었습니다. 남은 스물여섯 명이 현재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놓친 인간이 없었다. 용사가 될 남자아이는 지금 마을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전투가 시작하기 전 이미 바깥에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로서는 간절히 첫 번째 경우를 바라고 있었다. “수고했다. 경계망을 절대로 늦추지 마라. 제레미, 넌 나를 따라와라.” “존명.” 나는 배낭에서 가면을 꺼내어 얼굴에 썼다. 만에 하나라도 용사를 놓칠 수가 있었다. 행여나 나의 진짜 얼굴을 용사에게 보여서는 안 되었다. 제레미에게 방심은 금물이라고 엄포를 놓았으나 그건 나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골렘이 천막들을 부셔놓은 바람에 마을에는 자연스럽게 너른 공터가 생겨났다. 그곳에 수십 명의 인간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깨져서 피가 흐르는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울음소리……갓난아기도 끼어 있었는가. 잘도 험난한 겨울을 버텼다. 이곳 마을의 인심이 좋다는 뜻이었다. 어린애도 노인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정이 끈끈했다. 하긴, 영지민과 다르게 화전민은 언제 어디서나 장작을 패다가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것이 도리어 행운으로 작용했는가……. 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섰다. 인간들이 두려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겉보기엔 자기네와 다를 것 없이 인간처럼 생겼는데도 함부로 적의나 호의를 표현하지 않았다. 몬스터를 거느리고 온 자,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비명을 터트렸다. 비명이 중간에 끊긴 것을 보아하니 옆의 사람이 황급하게 입을 막은 듯했다. 현명했다. 이럴 때는 소란을 피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본인이 어째서 너희를 겁박하는가. 어째서 너희를 습격했는가. 그런 의문일랑 전부 내려놓아라. 지금부터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한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맨앞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내가 제레미에게 눈짓했다. 제레미는 어디에선가 단검을 뽑아들어――손놀림이 정확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그대로 던졌다. 단검은 남자의 목에 적중했다.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꺄아아악!” “촌장님!” 방금 남자가 촌장이었는가. 이 정도 규모의 화전촌을 이끌었으니 틀림없이 유능했겠지. 나는 팔짱을 끼고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의외로 사람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서 공포가 손에 잡힐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이 질문하는 바에 대답할 의무만이 주어진다. 만일 본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경우 본보기로 한 사람씩 죽이겠다.” 나는 주머니에서 나무공을 꺼내어서 손바닥에 쥐었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힐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나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이중에 루크라는 소년이 있는가?” 루크. 게임에서 남자 주인공한테 자동으로 주어지는 이름이었다. 플레이어가 굳이 이름을 바꾸지 않는 이상 주인공의 이름은 루크로 고정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침묵만이 대답을 대신하여 돌아왔다. “흠…….”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이 마을에는 루크가 없는 것인가? 설마 마을을 잘못 고른 것일까. 주인공 용사의 이름이 루크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설정되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마을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르쇠로 감싸주고 있는 것일까. 내가 말했다. “마리아의 남편 피에르. 피에르의 아내 마리아.” 두세 명의 인간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입끝이 비틀어졌다. 걸렸다, 네놈들. 피에르와 마리아는 주인공의 부모였다. 그런가. 이곳 마을에는 상상 이상으로 끈끈하게 정이 이어져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서로를 감싸주다니 말이다. 훌륭하다고 칭찬해야 할까, 나를 우습게 보았다며 조롱해야 할까. “감히 본인의 명령을 귓가로 흘리다니 멋진 배짱이다.” 마을사람들이 더더욱 거세게 떨어댔다. “네놈들의 우정에 본인은 심히 경탄했노라. 좋다. 누가 루크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이지.” “루크는 냇가에 물놀이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남자가 소리쳤다. “부르츠!” “마을 동료를 밀고하다니 제정신이냐!” “네가 어떻게 배신을!”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남자를 비난했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공포에 질겁했던 얼굴들이 분노로 물들었다.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미안하네……하지만, 어린애들을 전부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네 자식, 재작년에 피에르네가 호밀을 빌려준 걸 새까맣게 잊은 거냐!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하늘이시여! 깊이 분노하소서!” “미안하네, 정말로 미안하네……이 대가는 목숨으로 갚겠네…….” 인간들은 한동안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말소리가 하나둘씩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은 깨달았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왜 다른 마왕들이 인간불신증에 걸리는지 알겠군. 감정이 읽히지 않을 뿐인데 이토록 불편할 줄이야.” 그러자 제레미가 미소로 대꾸했다. “다 조져버릴까요, 전하?” “아니. 약간의 관용을 베풀지.” 인간들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다시 두려움이 내려앉았다. 방금 한 마디에서 그들의 명줄이 오간 것이었다. 여차하면 여기 있는 전원이 간단하게 죽어버린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기를 바랐다. “담배가 있는가?” “있습니다만……제 물건은 조금 질이 나쁜데 괜찮을까요? 중독성이 매우 강합니다.” 쯔읏, 마약인가. 예전에 대마초를 피워본 적이 있다. 내 몸에는 도저히 맞지 않았다. 이 세계의 마약이 어떤 물건일지 모르겠어도, 제레미 정도의 암살자가 대마초보다 약한 걸 피진 않겠지. “다음부터는 내 전용의 담배도 갖고 다녀라.”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헤헤, 제 몸은 이미 그 정도 담배가 아니면 약빨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내구성이 생겨서…….” 제레미와 내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죽음처럼 침묵했다. 겨우 조용히 있는 법을 배워주었다. “부르츠.” 남자는 당황하면서 이쪽을 올려보았다가, 다시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예, 예……예!” “루크는 혼자 나갔는가?” “예,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혼자서 냇가에 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두루뭉실하게 모두한테 질문하는 것보다 특정한 개인한테 질문하는 편이 대답을 돌려받기에 좋았다. 내가 밀고자를 콕 집어서 부른 이유였다. “언제쯤 그 아해가 돌아오겠는가?” “소, 소……송구합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라. “이곳에 피에르와 마리아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부복하라.” 인간들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남자는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흉하게 으깨져 있었다. 골렘에게 격렬하게 저항한 증거였다. 여자는 남자를 부축하면서 간신히 나왔다. 두 사람은 최대한 공손하게 땅바닥에 절을 올렸다. 흐음. “소중한 자식의 이름이 거론되었음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마.” “…….” 화전민 남녀는 여전히 절을 올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질문한 것에만 대답하라는 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임 시나리오상에서 두 사람은 아들인 루크를 끔찍하게 아꼈다. 사랑하는 아들이 위협에 처하게 생겼는데도 침착했다. 아니, 대체로 이곳 마을의 모든 인간이 침착했다. 골렘에 의해 이웃이 죽어나갔거늘……. 다른 쪽을 바라보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필사적으로 달래는 여인네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 아기가 울어버리면 어떤 불행이 덮칠지 알고 있겠지. 감히 나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으나 그것은 이웃에 대해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배신 따위가 당연하다시피 횡행하는 세상이다. 마을주민들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우.” 한숨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눈앞의 사람들에겐 살아갈 '가치'가 있었다. 잭 올란드와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자신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이유를 들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쁜 습관, 즉 마음에 든 부류에게는 자비를 허락하고 마는 나의 경향이 또 머리를 내밀었다. “피에르와 마리아. 그리고 숲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또한 루크라는 소년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알려주겠다.” “…….” 루크의 이름이 나왔을 때 여자가 어깨를 떨었다. 기어코 말대꾸를 하거나 울음소리를 흘리지는 않았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니 용사를 낳은 여자인가……. “예언이 내려왔다. 마계에서 가장 영험한 무녀가 예언을 접견했지. 여신들께서 경고하시기를, 지금부터 십 년이 흐르면 차례대로 마왕들의 심장에 차가운 칼날이 박힐 것이요, 이윽고 대륙에 자리하는 모든 마왕이 스러지고 말 것이라.” “…….” “십 년 후에 우리 마왕의 운명을 잘라낼 그 인간의 이름이 루크이다.” 마을사람들이 소리없이 웅성거렸다. “대륙에 얼마나 많은 숫자의 루크가 있는가, 그렇게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허나 예언은 전례없이 정확했노라. 로렌 지방의 라엘리아 산 근처. 포메트라와 깜파뉼의 근방, 하나의 이름없는 화전촌에 바로 그 루크가 태어났다.” 내 발앞에 부복한 남녀가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어졌겠지. “고로, 본인은 루크라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왕림했다. 그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이리라. 본인도 군말을 더하지 않겠다. 본인과 여타 마왕들, 더 나아가 마족의 미래를 위해 그대들은 여기서 죽어주어야겠다.” “잠깐만요.” 인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리지만 당찬 목소리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00173 마왕만이 아는 세계 =========================================================================                        땅바닥에 주저앉은 무리 한가운데 일어선 아이가 있었다. 화전민 주제에 말투가 고풍스러운 것이 낯설어서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아이였다. “…….” 흑요석처럼 까만 시선에서 생기가 번들거렸다. 눈동자가 미처 다 가두지 못한 생명력이 사방으로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를 뻗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시계침과 달리 음악이 또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소녀 주변에는 어떤 다른 공기가 흘렀다. 나는 검은 눈동자의 그물망에 걸려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소녀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허리를 깍뜻하게 숙였다. 내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자애와 시선을 마주친 시간은 사실 얼마되지 않았다. “데이지!” 지금까지 울음소리 한 가닥조차 흘리지 않은, 용사의 어미가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절망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여자는 강물에 홍수를 더하듯 다시 울었다. 여자의 무례를 질책해야 마땅했으나 나는 망치가 두개골을 까부순 기분이었다. 데이지. 그것은 용사의 여동생 이름이다. 주인공이 게임상에서 몇 번이고 ‘엄마, 아빠, 데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에게 데이지라는 이름이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방금 여자가 보인 반응으로도 미루어보건대, 소녀는 틀림없이 용사 루크의 동생이다. 만일 데이지가 단순히 루크의 여동생이라면 내가 당황할 일도 없다. 정작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데이지는……플레이어가 성별을 여성으로 선택했을 때, 용사가 된다!’ 여타 게임과 마찬가지로 던전 어택에서도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성별을 골랐다. 남자를 선택할 경우, 몬스터에 의해 마을이 침략당할 때 여동생이 죽는다. 여자를 선택할 경우 반대로 오빠가 죽는다. 나는 루크를 선택했다. 게임에서 여자 캐릭터를 선택하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당연히 이 세계의 용사도 남자이겠거니 생각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야말로 제멋대로 넘겨짚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시나리오상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죽어야만 해. 왜, 어째서 루크와 데이지가 둘 다 살아남은……아.’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나 때문에 안드로말리우스의 습격 이벤트가 사라졌다! 안드로말리우스가 고블린을 이끌고 화전촌을 짓뭉개지 않았다. 당연히 오빠든 여동생이든 죽을 일이 없었다. 아니, 성별을 고르는 것은 게임상에서 이루어지는 절차가 아니었다. '이름을 정해주세요'처럼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이루어지는 설정 작업이었다. 설마 설정 절차까지 이 세계에 반영되었다고는……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싹했다. ‘내가 여길 방문하지 않았으면 용사가 두 명이나 생겨날지도 몰랐다.’ 용사는 단신으로 마왕들을 참살하는 괴물이다. 그것이 두 명이나 된다. 용사의 탄생을 막겠답시고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여놨더니 도리어 위험분자를 늘려버린 셈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마왕군은 절체절명의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침착. 침착해라. 머리를 굴리는 것 빼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탈리안, 네 썩어빠진 뇌수에다 석탄을 가득 퍼부어라. 증기가 날 때까지 생각해라. 여기서 네놈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얼른 떠올려내란 말이다. “산골에서 자라난 아해치고 행동거지가 제법이다.”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감히 본인이 질문하지 않았음에도 입을 연 것은 처벌해야 하지만…….” 발앞에 부복한 여자, 두 용사의 어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시선으로 선처를 구하고 있었다. 제발 용서해달라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 점에서 대단한 인간이었다. “짐작하건대 네 녀석은 루크라는 소년과 혈연으로 맺어 있을 터. 가족의 죽음에 대해 항의할 권리가 네 녀석에게 있다.” 어미가 감격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찧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다섯 번, 여섯 번, 여자는 계속해서 머리로 땅을 내리쳤다. 말문이 금지된 이상 그쪽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였다. 그 옆에서 아비 역시 나란히 이마를 박아 절하고 있었다. “명심하라. 본인은 기회를 여러 번 베푸는 선인이 결코 아니다. 소년을 위하여 항변할 기회는 오로지 단 한 번 주어질 것이다.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라난 아이여, 너에게는 그 유일한 기회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데이지가 고개를 숙인 채 즉답했다. 목소리는 과하게 자신이 넘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주군과 마주하여 신하가 충언을 올릴 때 그러하듯이 소녀의 목소리에는 절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애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천부적인 재주가 그녀에게 있으리라. 과연 세계의 운명이 정해놓은 이. 용사로 성장할 인간이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곤란하다 이것인가……. 내 온몸의 신경이 깨어났다. 생명을 위협하는 자와 부닥쳤을 때처럼 가장 작은 신경세포까지 가느다랗게 눈을 떠서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았다. 나는 남자 용사 루크에 대해 정통했다. 그러나 여자 용사 데이지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어떤 성격인가. 습관은 무엇인가. 전례 없는 경계심으로 파악해야만 했다. “좋다. 말을 허락하노라. 그대에게는 내가 질문하는 것 이외에도 자유로이 발언할 권리가 주어진다. 허나, 먼저 본인의 질문에 답해보아라.” “예.” “앞으로 나오도록.” 데이지가 발을 들어올리자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그 사이로 소녀는 걸어나와 내게서 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약간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 화전민 부부의 딸 아니냐. 어떻게 예법에 익숙한 거지? “……그대는 나의 관용에 기대어 아뢰겠다 말하였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내가 관용을 베풀 것이라 생각했는가. 만일 단순한 수사학이요 아첨이었다면 벌이 주어질 것이다.” “왕께서 이미 저희 미천한 것들에 두 번이나 관용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자애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미 관용을 두 번 베풀었다라? 금시초문이로군.” 내가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 상대로 치졸하게 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간은 어린애이기 전에 용사 후보였으니까. “그래, 여기 마을사람을 수 명이나 살해했으며 촌장까지 죽인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관용이 있었는가 심히 궁금하다. 어디 말해보아라.” “예. 왕께서는 첫 번째로, 루크가 시내에 있음을 들으셨는데도 군사를 풀지 않았습니다. 왕께서는 당장 군사를 풀어 루크를 잡아오라 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관용입니다.” 나는 손바닥 안에서 나무공을 굴렸다. “……두 번째 관용을 고해보아라.” “예. 명령을 내리지 않으신 다음, 왕께서는 루크의 부모를 대령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왜 아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왕께서는 미천한 저희의 의문을 굳이 풀어주고자 말씀을 내리신 것입니다.” 데이지가 말했다. “왕께서는 그저 저희를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만한 권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권능을 잠시 보류하시고 저희의 의문을 풀어주셨으니, 저는 이를 관용 말고 달리 부를 말이 없습니다.” “실로 어리석구나. 어차피 본인이 너희를 죽이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의문 한두 가지가 풀렸다고 해서 관용이라 부른다면 이 어찌 과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데이지가 머리를 한층 깊이 숙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희는 화전민. 노예보다 천하며 하늘에 저주받은 족속입니다. 저희에게는 의문을 품을 권리조차 없고, 하물며 의문을 풀 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왕께서 베푸신 것은 틀림없이 관용입니다.” “…….” “왕께서는 저에게 말을 허락하신 것 이외에도 방금 한 가지 더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한 가지 더 있다고?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나는 감정을 갈무리하면서 물었다. “그것은 또 무엇인가.” “저를 '그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공기를 맑게 울렸다. “말을 허하시기 이전에는 녀석이라 부르셨으나, 허하신 이후에 왕께서는 자비롭게도 저를 그대라 부르셨습니다.” 그녀는 분명히 고개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도. “위대한 존재이시여. 영주조차 자신의 신민을 그대라 부르지 아니하며, 저주받은 화전민에게 그대라 부르는 귀족은 감히 장담하오나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왕께서는 단지 말을 허락하셨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한없이 청정한 눈동자가 이쪽을 곧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왕께서 저를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 “저뿐만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제 앞에 부복한 두 남녀를 단지 두 명의 화전민이 아니라, 어느 소년의 아비이며 어미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왕께서는 제 뒤에 부복한 사람들을 단지 화전민이 아니라 죽음 이전에 의문을 풀 권리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내 실책이었다. 무의식 중에 호칭을 바꾸었다. 그것이 눈앞의 소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빌어먹을. 형편없었다.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이렇게 금방 방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화전민이라 하여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로서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난 개돼지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살해해온 것들 전부가 인간이었다. 매번이 전투이고 또 전투였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내가 천하의 쓰레기 새끼임을 인정한다. 쓰레기에게는 쓰레기 나름의 긍지가 있다. “왕께서는 고민하고 계십니다. 저희를 이대로 죽여도 좋은 것인지 아닌지.” 겨우 열 살의 여자아이가 그것을 간파했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따라서 저는 왕의 관용에 기대어 아룁니다. 예언에서 얘기하는 소년이 루크 한 사람이라면 저희를 모두 죽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루크 한 사람만을 참하소서.” 데이지는 또 내 감정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오라비를 구명해달라 말할 줄 알았더니 그냥 걔 하나만 죽여버리라고 말했다. 내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데이지가 말을 덧붙였다. “단, 루크는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을 부디 허락해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녀의 부모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만큼 어처구니 없거니와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이었다. 오라비를 죽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패륜인데 이젠 자기가 죽이겠다고, 그걸 또 간청한다고 얘기했다. 마을사람들도 아연해져서 데이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네가 알던 소녀가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평소엔 오라비를 지극하게 따르는 아이였겠지. <던전 어택>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었다. 방금 그 말은 그녀의 평소 성격에도,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았다. 마을사람도, 부모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오로지 나만이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데이지의 곧은 목소리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확신을 담아서 질문했다. “한 가지 질문하겠다.” “무엇이든지, 위대한 존재이시여.” “친족을 죽이는 것은 가장 크나큰 죄악이다.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열 살짜리한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게 비릿한 자조였다. “왜냐하면,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눈앞의 소녀는 나와 동족이었다.   00174 마왕만이 아는 세계 =========================================================================                        “……고개를.” 목이 막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하나의 무대에서 열 가지 역할을 떠맡은 배우가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마음이 강하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라.”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질문한다. 왜 그대는 자신을 영원히 쓰레기라 여기고자 하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는 제가 미치도록 소중하기에 그렇습니다.” 소녀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곡선을 그었다. “제가 너무 소중하기에 저 자신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루크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은 잘못된 일이야. 그래도 마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다. 저는 루크를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루크의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저 자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니까 친오빠를 직접 죽이겠습니다. 그 붉은 핏물로 제 영혼을 염색하겠습니다. 영원히 쓰레기인 채로 살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를 너그러이 용납하시리라 감히 믿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똑같은 족속이니까. 데이지의 눈동자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어째서 화전민에 불과한 마을사람과 나를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했는가? 어째서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벌였는가? 나는 그걸 알고 있다. 이곳에서 나만이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고 있다……당신은 마을사람들의 죽음을 온전히 짊어지고자 했다. 안 그런가. 피하려 들지 않았다. 자기가 얼마나 불합리한 이유로, 제멋대로인 이기심으로 너희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 설명했다. 당신은 자기가 소중하고 소중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작자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족속이니까. “…….” “…….” 이곳 세계에 오래도록 내려 전해오는 신화에 따르면. 아주 옛날, 사람의 영혼은 조금 더 넓었다. 살아가는 데 굳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넓었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전했다. 누군가를 달리 사랑할 필요없이 단지 자신을 사랑하면 되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완벽하자 신들이 두려워했다. 신들은 사람의 영혼을 억지로 찢었다. 모든 사람이 두 갈래, 때로는 세 갈래 네 갈래로 찢어졌다. 사람의 영혼은 왜소해졌고 타인을 잡아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 자신의 남은 영혼이 세계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며 영원히 헤메어 다닌다. “그대는, 지극히 위험하다.” “예. 그렇습니다.” 소녀가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내가 루크를 죽인다면……그대는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내게 복수하리라.” “맞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번에도 소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제 삶이 다할지라도 저는 다른 이에게 운명을 맡길 것이고, 그 다른 이로 하여금 다시 다른 이에게 운명을 전하도록 하여, 세세만손 감히 왕의 목숨을 빼앗을 그날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데이지의 부모가 몸을 크게 떨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두렵다.” “예.”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왕이 두렵습니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대를 죽이면 되겠는가?” 위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서 솔직하게 물었다. 데이지가 말했다. “왕께서는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인간 전원을 도륙하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왕께 복수할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어쩔 것이냐.” “실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다만, 저희가 전원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허락해주시길.” 마을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경악의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와 상관없이 나와 소녀는 오로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끝맺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 하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인간이 왕 때문에 자결한다. 남자들이 분노하고 울면서도 자기 목을 찌르겠지요. 어미는 울면서 갓난아기를 죽이고, 아이의 피가 묻은 칼날로 제 목을 쑤실 것입니다.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우리를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해버린 당신은, 그 몇 시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하룻밤이 꼬박 걸릴지도 모르고, 이틀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며칠이 지나서 결국 몇몇 사람은 갈증에 타서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방해하지 못한다. 결코. 절대로.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짊어진 신념 때문에. “그 광경을, 위대한 존재이시여. 영원히 안고 가실 수 있겠습니까?” 데이지가 비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골렘들과 요정들이 동요했다. 골렘들이 낮은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요정들이 당황해서 요란하게 공중을 날아다녔다. 몬스터들이 동요하자 그에 둘러싸인 마을사람들도 낮게 비명을 지르거나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이다. 소녀여, 그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소녀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택권은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몸짓이었다.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마음의 군살인가. 어리석은 녀석. 잭 올란드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그것을 반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하지만……. 슬쩍, 발앞을 바라보았다. 데이지와 루크의 부모가 여전히 부복하고 있었다. 그중 부친은 골렘과 맞서싸울 때 크게 상처를 입었다. 보기에도 흉물스럽게 팔다리가 꺾였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나는 죽어서도 멍청이로 죽을 팔자였다. 또 다시 도박판에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제레미. 이 남자를 치료하라.” 루크의 아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레미는 군말하지 않고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녀는 수건에 포션을 적셔서 남자의 상처 부위를 닦았다. 꺾인 뼈를 제대로 고정하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팔다리를 도로 꺾었다. 남자가 신음했다. “그외에도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도록.” “존명.” 제레미가 마을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행했다.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도 자신들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내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소녀여. 내가 왜 저들을 치료하는지 알겠는가?” “제 호의를 얻고자 함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 빌어먹을 꼬맹아.” 내가 으르렁거렸다. “너는 나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내가 네놈을 죽이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네 자신의 목숨과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서 잘도 도박을 했구나!” “과찬이십니다.” 소녀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대꾸했다. 젠장맞을 녀석. 열 살짜리가 못하는 말이 없었다. 내가 진절머리를 쳤다. “네놈과 내기를 할 것이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루크의 마음을 얻어보이겠다. 만약 루크라는 소년이 나에게 진심으로 복종을 맹세한다면, 빌어먹을 꼬맹아. 루크는 죽지 않을 것이요, 네놈도 죽지 않을 것이고, 네놈의 부모도 마을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말했다. “만약 내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끝끝내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면……모든 여신들께 맹세하건대 루크도, 네놈도, 네놈의 부모도, 여기 모인 자 전원이 싸늘한 주검이 되리라.” 나는 데이지에게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너의 오라비는 위험분자 중의 위험분자이다. 평범한 충성서약으로는 곤란하다. 몸과 영혼을 전부 바치는 마법적인 노예계약이 아니고서야 인정할 수 없다. 또한 너는, 네 오라비에게 이러한 나의 목적과 의도를 절대로 발설해서도 안 된다.” “…….” 데이지가 진지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위하여 너는 임시로나마 나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노예입니까?” “그렇다. 예의 마법적인 노예각인을 새겨넣어, 나의 의사에 반하는 짓이라면 그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내가 금지한 것은 넌 결코 하지 못한다. 만약에 이것을 동의하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 모두를 죽이겠다.” 이건 정말이지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느낀 것일까. 데이지가 즉답했다. “알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는 왕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설령 루크가 충성을 맹세하게 되어 내기가 너의 승리로 끝날지라도, 나는 네 노예각인을 해제해줄 생각이 없다. 너는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 이해합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진 애새끼 같으니라고. * * * 나는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을 두 장이나 찢어야 했다. 골렘들과 함께 마을사람들을 내 마왕성으로 옮기기 위해서. 수백 골드가 순식간에 왕창 깨졌다. 마을사람들은 촌장 파르시의 아래에서 살아갈 예정이었다. 다만 루크와 데이지의 가족만은 잠깐 남겨두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획하여 연극무대를 만들었다. 먼저 화전촌을 불태웠다. 숲속 어디서든 매서운 연기를 볼 수 있도록 크게 불질렀다. 그것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한 소년이 헐레벌떡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소년이 소리쳤다. “아빠! 엄마! 데이지!” 그러자 미리 약조한 대로 루크의 아비가 외쳤다. “안 돼!” 안 돼, 라는 한 마디 말에 소년은 뛰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곧장 뒤로 뛰었다. 사실 안 돼 이후에 또 다른 대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겨우 한 마디 말에서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과연 용사가 될 녀석이었다. 소년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렸다. 어린애 주제에 무슨 늑대처럼 숲속을 종횡무진했다. 만약 암살대가 소년의 뒤를 쫓지 않았더라면 놓쳐버릴 뻔했다. 마침내 소년의 달리기 속도가 줄어들었고, 나는 병사로 위장하여 그 근처에 나타났다. 사제복 아래에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위장하기가 쉬웠다.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이 되도록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 질렀다. “나는 순찰병이요! 생존자 없소외까!? 나는 순찰병이요! 제기랄. 생존자, 생존자 없소이까!?” 그러자 덤불 속에서 소년이 뛰어나왔다. “저, 저요! 병사 아저씨! 여기 있어요!” 걸렸다. 나는 환하게 웃었다. “오, 이럴 수가! 신이시여, 정말로 있었어!” “몬스터, 몬스터가 습격했어요…….” 소년은 나를 구세주쯤으로 여기는지 두서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떠들었다. 얼른 구해달라고 울부짖는 격이었다. “마을이 불탔어요! 엄마, 아빠가!” “좋아. 넌 용감한 아이야. 진정해라. 진정해.” 내가 허리를 숙여 녀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루크. 용사가 될 소년. 나의 심장을 도려낼 후보 중 한 사람인 녀석의 뺨을 상냥하게 어루만졌다. “지금 토벌대가 마을에 진입했단다. 나는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라는 명령을 받았지.” “토벌대요? 정말이요?” 루크가 껑충 뛰었다. “정말 엄마랑 아빠가 살 수 있는 거예요? 여동생도? 마을사람들도?” “물론이지. 약속해주마. 곧 있으면 넌 모든 마을사람이랑 함께 있을 거란다.” 내 위안에 긴장이 풀렸는지, 소년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겠지. “이런. 긴장이 풀린 모양이구나. 옳지, 이리 오렴.” 나는 소년을 들어올렸다. “동생 이름이 데이지, 맞지?” “흐윽……아저씨, 데이지를 알아요?” “알고 말고. 그리고 네 이름은 루크이고.” “맞아요.” 내가 피식 웃었다. “너희 마을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단다. 얘기를 아주 많이 들었거든! 심지어 루크 네가 일곱 살 때 고백한 이웃집 여자아이에 대해서도――.” “엑? 와악! 와아악!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네놈의 숙적이기 때문이다, 용사여. 나는 루크를 가슴에 안은 채로 숲을 걸었다. 묵직했다. 몸무게 때문에 묵직한 것만은 아니리라. 거기에는 목숨의 무게가 달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한번 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00175 악의 꽃 =========================================================================                        흑사병이 대륙을 휘몰아치자, 각국의 군주는 병사를 소집. 전염병에 민심이 흔들리기 전에 칼끝을 마왕들을 향해 돌린다. 열두 국가의 군대가 마왕 타도를 부르짖으며 진군한다. 이에 서열 제49위 마왕 크로셀이 패사(敗死)한다. 마왕들은 경각심을 느끼고 대대적인 반격을 천명. 연맹군을 결의한다. 마왕군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인간군을 격파.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전멸하고, 엘리자베트 황녀가 이끄는 합스부르크군은 수도까지 내어주며 후퇴하기에 이른다……. “좋아. 네놈들이 그리 바란다면 대륙 정벌은 뒤로 미룬다! 그 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 새끼들을 청소해주지.” 마왕군의 최선봉을 자처하던 평원파의 우두머리,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적군을 지나치게 깊이 추격하다가 패퇴. 바르바토스를 필두로 평원파는 월맹군에서 사실상 이탈한다. 대륙력 1507년. 평원파가 합스부르크 중북부 일대를 점거한다. 바르바토스는 영리하게도 마왕이 직접 영토를 통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황태자 루돌프, 그 시체를 흑마법으로 조종하여 앞세운다. 루돌프 황태자가 선언한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첫 번째로 아비와 형제를 죽인 희대의 패륜아요, 두 번째로 수도와 신민을 버린 폭군이요, 세 번째로 제국 그 자체를 멸망시킨 역적이다. 세 개의 대역죄를 범한 마녀에게 영원한 저주가 있기를!” 수천 명의 인간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불타버린 황궁. 앙상하게 뼈대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서 루돌프 황태자는 번듯하게 화려한 제복을 입었다. 휘황찬란하게 붉은 복장이었다. 이미 멸망해버린 제국의 황궁에서 황태자가 입은 옷이 기괴하게 빛났다.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당한 황위계승자이자 수호자로서 천명하노니. 오로지 본인만이 제국을 통솔할 자격이 있으나, 불운하게도 대지에 만연한 역도를 토벌할 힘은 없구나. 이에 본인은.” 황태자가 두 손으로 은관(銀冠)을 집어들었다. “수호자로서의 의무, 역도를 토벌할 의무, 더해서 합스부르크 섭정의 의무를――여기 바르바토스에게 위임하노라.” 백발이 아름다운 소녀가 은관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그것을 대충 아무렇게나 왼쪽 팔뚝에 찼다. 예법에 어긋나는 폭거였으나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소녀는 씨익 웃으면서 황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 그오오오오오! ─ 케르륵, 키르르륵! ─ 크훌라 크르훕! 크후흡!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몬스터들에 둘러싸인 인간들이 공포에 질려 떨었다. 그들은 이 자리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억지로 끌려나왔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달은 소수의 인간만이 몬스터를 따라서 ‘섭정 전하 만세!’를 외쳤다. 바르바토스. 불멸의 마왕이자 마왕군 서열 제8위, 평원파 수장인 그녀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아우스테를리츠 공작, 마지막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섭정으로 등극한다. 이와 똑같은 날.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합스부르크 제국 제3황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가 수만 명의 인민과 병사가 모인 앞에서 선언한다. “신들께서는 타인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을 지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것은 결코 깨질 수 없는 황금 중의 황금이다.” 엘리자베트 뒤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장군들이 기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수십 일 동안 궁정귀족들을 처결했다. 만민이 보는 앞에서 처형식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인민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오로지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류는 정부를 만들었다. 이 정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렇다. 그대들, 인민들이 동의했다는 사실에서 권력은 비롯한다. 세상의 그 어떤 정부이든 감히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려 할 때, 우리는 정부를 무너트릴 수 있으며――기꺼이 무너트리고자 한다!” 사람들이 ‘그렇다!’와 ‘옳소!’를 부르짖었다. 수만 개의 그렇다와 옳소가 마치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도시 상공을 화려하게 울렸다. “자랑스러운 합스부르크의 시민들이여. 묻노라. 제국은 그대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인민들이 한 목소리로 연호했다. 그들은 기나긴 창대를 들어올렸다. 창끝에는 시체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궁정귀족과 그 가족들의 목이었다. 도시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팔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제국은 그대들의 자유를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제국은, 귀족들은, 그대들의 행복을 지켜주었는가!” ─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제국은 그대들의 생명도, 자유도, 행복도,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그리하여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정부가 아닌 정부를 무너트린다. 오래된 약속을 실현시킨다. 바로 신들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권리들을 우리 인류 스스로 실현하리라는 약속을!” 엘리자베트가 허리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서 있던 장군들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 태양이 찬란하게 비추었고, 수십 개의 장검이 허공을 높이 찔렀다. “나, 엘리자베트는 오늘부로 합스부르크라는 성을 버리고 그대들과 같은 평민이 되어, 평민을 위하여, 평민을 대리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을 선언할지어니――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건국되었음을 천명한다!” 수만의 함성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이자 군무상서, 통수본부장, 최고사령관을 역임한 그녀는,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국민 의회의 대표, 혁명의용군 대장군, 마지막으로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종신 통령(統領)에 등극한다. 북부를 다스리는 제국 섭정 바르바토스. 남부를 다스리는 공화국 통령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가 둘로 쪼개지고 대륙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돌입한다. “씨발 꼬맹이 년이……지 혼자서 인간계를 독식하시겠다? 그렇게는 못하지.” “욕심이 과하면 배가 터져버릴 텐데에. 헤헤, 파이몬에게서 구해준 은혜를 잊어버리면 곤란한 거야.” 대다수의 마왕들은 평원파가 대륙의 이권을 독점하자 분노한다. 그들은 각자 군세를 이끌어 합스부르크 북부의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한다. 인간계 군주들은 두 개의 합스부르크 중 공화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마왕군을 저지하는 조건으로 공화국에 원조금을 보낸다. 그러나 여태까지 인간계의 멸망만을 목표할 줄 알았던 마왕이 제국의 섭정 따위를 천명했다는 사실에 군주들은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마왕이란 존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을 보고, 어쩌면 마왕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전염병과 기아, 전쟁과 약탈, 연합과 분열. 대륙이 전례없는 혼란 속으로 질주하는 이때. 모든 혼란을 연출한 장본인――마왕 단탈리안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 * * 데이지에게 노예각인을 새기는 시술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내 곁에 노예각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전문가인 사람이 있었다. 암살대의 대장인 제레미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직접 시술을 당하였고, 이후 수십 명의 시술을 담당했다. 그녀 말에 따르자면 이 수술은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노예각인은 자그마치 심장에 새긴다. 심장은 마나의 중심지. 그곳이 빼앗기면 노예는 절대로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제레미가 작게 웃었다.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도 못하고, 심하면 주인을 죽이겠다는 생각만 떠올려도 극심하게 고통에 시달리지요. 후후.” 제레미가 끓는 물에 칼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노예가 처음에는 반항적입니다. 주인을 죽이겠다,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 밤을 새며 꿈에 꿈을 더하듯이 원한을 더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다보면……후후, 어느새 반항심 따위는 사라지기 마련이죠.” “…….”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열 살의 소녀는 알몸으로 나무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였다. 목과 허리, 허벅지까지 족쇄로 단단히 묶였는데, 행여나 수술 도중에 마취가 풀리면 극심한 고통에 온몸을 비틀어대기 때문이었다. 심장에다 각인을 새기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무식했다. 심장이 드러날 때까지 살을 째면서, 환자가 죽지 않도록 포션을 끊임없이 퍼붓는다. 이미 탁자에는 수십 병의 포션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제레미가 미소를 지었다. “영광으로 아세요. 당신은 황금 수 덩어리 어치의 수술을 받는 거니까요. 당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인님께서 인정해주신 겁니다. 노예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죠. 안 그래요?” “…….” 데이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감정 없는 눈초리로 제레미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부터 자기 심장이 열린다는 데도 두려워하거나 몸서리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레미가 자꾸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제가 어릴 때랑 반응이 똑같을까.” “…….” “자아, 입을 벌리세요. 포션을 잔뜩 먹어둬야 하거든요.” 데이지가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제레미는 포션병을 들어서 소녀의 입구멍에 갖다대었다. 붉은색 액체가 순식간에 여자아이의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 병 더.” 제레미는 빈 포션병을 치우고 새로운 병을 들어올렸다. 데이지의 목이 꿀꺽거리며 울렁거렸다. 한 병이 비워졌다. 제레미가 다시 병을 하나 들었다. “한 병 더.” 순식간에 다섯 병이 비었다. 여섯 병째 포션을 마시자, 데이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포션을 비우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소녀는 괴로운 듯이 야트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으으읍……으읍…….” 제레미가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포션의 효과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느림보처럼 마시다다가는 수술 도중에 죽어버릴 수도 있어요? 한 병 더.” “우읍, 으으읍……! 하아, 후으……!” “닥치고 마셔요.” 한 병, 한 병, 또 다시 한 병. “……우웁, 으으읍! 하아! 우으읍…….” 포션이 열 병이 넘어가자 데이지의 얼굴은 명백히 고통으로 가득 찼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처 삼키지 못한 포션이 잔뜩 흘렀다. 하지만 제레미는 상관하지 않고 포션을 한 병 더 꺼내들었다. “토하지 마요. 그거 다 황금입니다.” “하아, 흐읍…….” “당신의 몸값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입을 열어요. 얼른.” 결국 열두 병을 전부 비우고서야 끝이 났다. 데이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차가웠다. 인상이 찡그러지고 입가가 떨리더라도 데이지는 한없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 한켠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지.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내가 말했다. “너는 평생 나의 명령만을 듣고 살아가는 인형이 된다. 너의 몸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나한테 종속된다.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삶이 약속되어 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 대꾸가 없었다. 지금 무언가를 말하면 바로 토할 것 같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의 시선으로 그녀가 충분히 대답했음을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제레미를 향해서 말했다. “제레미. 계속하라.”   00176 악의 꽃 =========================================================================                        “존명.” 제레미가 뿔모양으로 된 술잔을 들었다. 거기에는 만다라케 분말을 섞은 포도주가 담겨 있었다. 만다라케, 흔히 만드라고라라고 불리는 식물에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었다. 그걸 분말로 정제해서 포도주에 타서 마실 수 있게 해놓았다. 이 세계의 연금술사들이 가장 짭짤하게 벌어들이는 품목이라던가. 미약으로 써먹을 수도 있었고, 당연하지만 마취제로 써먹을 수도 있었다. 아마 제레미는 포도주에다 분말을 꽤나 많이 탔을 것이다. “읍……우우욱.” 데이지가 괴로워하며 포도주를 마셨다. 마셨다고 표현해서 좋을지 모르겠다. 절반은 입술에 들어가지 못하고 턱선을 따라 옆으로 주르르 흘렀으니까. 제레미가 그 모습을 보면서 헤실거렸다. “이거 마취제인데, 마시지 않으면 그쪽만 아플 거예요?” “…….” “생살이 찢어지고 피가 끝없이 흘러요. 전 책임지지 않습니다.” 데이지가 제레미를 무표정하게 노려보았다. 입에서 흘리는 액체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래도 이미 데이지의 위장은 한계선을 아득하게 넘어섰는지, 도저히 포도주를 다 받아내지 못했다. 뱃속에 들어간 포션의 양을 생각하면 벌써 토하고도 남았다. 다음으로 제레미는 향초를 켰다. 연한 잿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 참. 정말, 복 받은 줄 알아요. 제가 어릴 때는 이런 것도 없었어요.” 대여섯 개의 향초는 침대를 둘러쌌다. 이것 역시 환각제이자 마취제 역할을 한다고 하는데, 마계의 대규환지옥에서만 나는 약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레미가 촛불을 키면서 투덜거렸다. “시술하다가 쇼크로 죽으면 그냥 끝장이었습니다. 제 동기들은 여섯 명 중에 절반이 암살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전에 골로 갔다구요. 어휴……이게 대체 얼마람?” 성대하게 궁시렁거리고 있었지만 별다른 감정이 전해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암살자였다. 어쩌면 제레미가 언제나 과하게 웃고 과하게 표정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잃어버린 감정을 겉모습으로나마 재현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 나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고블린 부락을 두 개나 토벌하고 돌아오자, 준남작은 우리를 더더욱 특별하게 대접해왔다. 이것은 진상품으로 받은 포도주였다. 달콤하기 그지없어야 할 명주가 지독하게 쓰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눈앞에서 해부된다. 심장을 드러낸다. 오직 나의 노예로 만들어지기 위하여. 단지, 어쩌면 미래에 나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미친 짓거리였다. 아니다.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다! 여기는 <던전 어택>이 그대로 옮겨진 세계이다……누구보다도 용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저 아이는 용사가 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죽었는데도 퀘스트가 깨지지 않은 것을 보아라. 운명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최소한의 안전장치, 그렇다. 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저기, 단탈리안 전하?” “……아아.” 생각에 잠긴 탓인지 대답이 늦어졌다. 향초의 기기묘묘한 냄새가 콧구멍을 아예 회칠하고 있었다. 향초의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퍼득 정신을 차리자, 제레미가 손에 수술용 칼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수술이 시작되어 있었다. “으……하, 으읏…….” 침대에 묶인 데이지가 신음을 연거푸 흘렸다. 맨살이 붉게 갈라져 있었다. 앞을 뚜렷하게 바라보던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갈피를 잃었다. 입가에서 침이 대량으로 흘렀다. 소녀는 자기 몸의 제어권을 완전히 잃었다. 향초의 연기가 매서운 가운데 제레미만 평소와 다름없이 태평했다. “이거 꽤나 강력한 환각제이기도 합니다. 면역이 없으면 힘들어요. 마왕이시니 후유증은 남지 않겠지만요. 여기까지 지켜보셨으면 충분하니까, 이만 나가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제레미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려왔다. 물고기가 퍼덕이는 것처럼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조차 아주 약간 먼 곳에서 들려왔다. “아니다. 끝까지 지켜보겠다.” 그것이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어도 지금 여기서 나가버리면 안 된다, 하고 강하게 확신했다. 제레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등을 돌렸다. 수술용 칼이 움직였다. “하, 으…….” “와아. 전하, 이 아이 장난이 아닌걸요? 마나가 포션 때문에 발현하고 있는데 엄청 짙어요. 아니, 이렇게 마나가 짙은 애는 처음인데……거의 괴물이네요. 세상에나.” “크……으윽, 하크읏…….” “어린애 주제에 벌써 마나에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주인을 보호하려고 하잖아요. 와아, 미쳤어요. 정말로 타고난다는 게 있었군요. 어디 마탑(魔塔)의 영감탱이들이 보면 눈이 발칵 뒤집히겠네. 당신, 뭘 먹고 자랐길래 이래요? 저도 떡고물 좀 얻어먹고 싶은걸요.” 제레미가 뭐라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마도 데이지가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말을 거는 것이리라. 입이 분주하게 떠드는 것과 반대로 제레미의 손은 정확하고 신중하게, 소녀의 살을 자르고 헤집었다. “마나 덕분에 전염병은커녕 잔병치레도 없었겠네요. 살도 뽀얗고. 하지만 안 됐어.” 말과 손짓이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흘러갔다. 눈앞에서 시간이 마치 무성영화처럼 기이하게 흘러갔다. “지금만큼은 마나를 천성적으로 품고 태어난 걸 후회하세요. 그것 때문에 수술이 엄청나게 어려워지고 있으니까요, 후후. 정신 바짝 차리세요. 자칫하다 정말 죽을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새하얀 살결에 지나치게 짓붉은 액체가 범람했다. 데이지는 이제 숨쉬는 것마저 괴로워하고 있었다. 폐부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흐크으읏, 으, 아……흐아아악! 아악! 흐, 카…….” 비명이 귓가에 크게 울렸다. 하얀 살, 붉은 덩어리, 자욱한 연기, 지나치게 강렬한 향내와 거기에 희미하게 뒤섞인 피냄새……. 소녀가 극심하게 괴로워하는 광경에 느껴진 것은 동정심이 아니었다. 다만 기이했다. 기괴하고 이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호크 대장, 잭 올란드, 리프,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모두가 신음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며 죽었다. 왜 사람은 고통스러워 하는가? 왜 조금 더 깔끔하게……그러니까, 조금 더 보기 좋게 고통을 당할 수는 없을까. 왜 하필 고통인가. 사고가 점점 둔해졌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향내가 두개골까지 스며들었다. 왜 나를 죽이려 드는가? 나는 그대들한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마왕이란 이유만으로 죽어야 한다니 농담이 아니다.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먼저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들지 않는가. 왜 전부 책임져야 하는가? 왜 내가 자초하지 않은 것까지 내가 전부……. “끄, 하아아악!” 그러니까 입 좀 닥쳐라, 잭. 생살이 조금 태워진다고 해서 남자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잖냐. 난 허벅지에 화살이 박혔을 때도 이를 악 물고 모험자들한테 구걸했다. 머리를 써라. 필사적으로 생각해라.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 새끼 콧등을 후갈긴다. “악마 새끼……!” 아니, 단순한 비즈니스이다. 단지 모든 비즈니스가 그러하듯 불공평할 따름이다. 너도 이제는 그걸 이해하겠지. 메모리아 마법의 건은 훌륭했다. 한방 먹었다. 파이몬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고작 애송이, 던전 어택에 등장하지도 않는 무명 상인 때문에 몰락했을 거다. 우리는 멋진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끄으윽……크릅, 우윽, 우웨에엑……!” “토하지 마요! 삼켜요! 빌어먹을 포션을 삼키란 말이에요! 그거 지금 토하면 당신 십중팔구 뒈져버려요. 알겠어요? 죽기 싫으면 삼켜요.” “크프르흡……끄읍, 끄으읍…….” 대충 몇 명이 죽었지? 십만 명? 검은 산맥에서 대략 이천 명……글쎄, 그쯤은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오크 새끼들은 더럽게 많이 처먹는다. 수천 명의 시체를 훈제구이로 만들어도 금세 동이 난다. 가끔은 귀여워도 대체로 빌어먹을 놈들이다. 속전속결, 몬스터는 빨리빨리 죽어주는 편이 전쟁에 이롭다. 반면에 인간은 다르다……. “염병할!” 바르바토스가 옳게 지적했다. 염병할 짓이다. 인간군에게 병사는 단지 병사가 아니라 영지민, 즉 노동력이다.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엘리자베트 황녀의 측근이라든지 뭐 그런 비슷한 배역에 당첨되었다고 해봐라. 지금보다 골을 싸매겠지. 최하위 마왕이래도 아무튼 마왕이 되어서 다행일지 모른다……. 십만 명은 죽었다. 십만 명이면 거의 세계이다. “흐끄아아아아악――!” 그러니까, 내 마음은 앞으로도 언제나 십만 명의 세계보다 약간 더 크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어휴, 눈 뒤집혔네. 야! 야! 정신 차려! 죽고 싶어? 네 뒈지기 전에 내가 먼저 칼빵 넣어줄까, 씹년아? 개 같은 년아, 눈 떠! 눈 떠! 네 년 죽으면 오라비인가 뭔가 하는 꼬맹이 새끼도 죽는다. 네 부모 씹새끼도 뒈진다고. 시발, 야!” 그런가. 왜 데이지를 살려야겠다고 강렬하게 느꼈는지 알겠다. 그녀가 나와 똑같은 족속이 되기를 바란다. 나와 똑같은 처지에 처하기를 바란다. 쓰레기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있으면 서로를 위안할 수 있으리라. 나는 누군가를 위안하고 싶어진 것이다. 선배가 되어, 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위안해주고 이끌어줄 수 있을 만한 강자(强者)가 되기를 원했다. 어느새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쓰레기가 아니고 뭔가. 나와 같은 족속을 보아서 위안을 해주다니――무슨 소리인가. 내 안에는 호크 대장이, 잭 올란드가, 리프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십만의 인간이 십만의 사정으로 들어 있다――그들이 나에게 위안을 받아야 한다고? 살인된 자가 살인범에게? 웃기지 마라. 변명보다 더 저질스러운 변명이다. 귀족이 농노를 동정하는 것과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너는 살아남는 대신 차라리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너는 자살하지 않았다. “단탈리안 전하?” 내 몸이 어느새 일어서서 제레미의 옆에 섰다. 눈앞에 소녀의 나신이 그대로 늘어졌다. 처참하게 파헤쳐진 살갗, 희여멀겋게 뻐끔거리는 속살, 핏물, 너무나 많은 핏물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 데이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빛이 순식간에 거세졌다. 시종일관 덤덤하고 무표정했던 소녀의 시선에 맹렬한 분노가 섞여들었다. 자신에게 지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내가 그녀의 원수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내가 싸늘하게 웃었다. “겨우 이 정도로군.” “…….” “잘나게 떠들어대서 얼마나 강한가 싶었더니 고작 수술 하나를 버티지 못하는가. 결국 열 살짜리 여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 녀석은 네 오라비와 부모, 마을사람, 전부 합쳐봐야 서른 명쯤 되는 인간도 짊어지지 못한다.” 데이지가 입술을 열었다. 숨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갓난아기처럼 몇 번을 옹알거리더니, 몇 번이나 실패한 다음, 간신히 문장을 소리내어 말했다. “당신을……죽여버리겠습니다.” “…….” “맹세코.” 나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향초에 쩌든 뇌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렇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렇게나 명백한 적의였다! 십만 명을 살해한 자에게는 마땅히 십만 명의 적의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내가 죽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에게 복수할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쓰러졌다. 너무나도 불공평하지 않은가. “부디 열심히 죽여주시게나.” 내가 십만 명을 죽였다면 너는 십만 명보다 더 무거운 의지를 갖추어라. 나는 앞으로도 십만 명을, 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너는 그 광경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 봐주어야겠다. 나에게 살해된 자들은 너무나도 약하고 무지하여 도저히 나한테 대적할 수 없으니, 너가 살해된 자들 한명한명을 대신해라. “나는 너를 옆에 놔두기를 원한다.” 너를 볼 때마다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리게 될 테니까. 내가 한 짓에서, 나의 인생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위안이라느니 동정이라느니 하는 도피처를 찾지 못하도록. “너는 나의 영원한, 산 증인이 될 것이다.”   00177 악의 꽃 =========================================================================                        * * * 이후 수술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데이지는 더 이상 괴롭게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이따금 짐승 소리 같은 신음을 흘려내기만 했다. “크, 으.” 이빨이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찢어져서 새빨간 피가 흐르는데도 정작 데이지 본인은 몰랐다. 격통이 지나친 탓이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아픔보다 수술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압도적으로 강하겠지. 방이 조용해졌다. 제레미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침묵했다. 차분하고 말없이 수술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데이지와 나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우물처럼 깊은 눈이었다. 하수도 역류하듯이 맨 밑바닥부터 원한이 토해지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데이지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지금까지 내 눈동자는 몇 개의 수라장을 담았다. 원한 몇 방울이 더 들어온다고 해서 넘칠 구석도 없었다. 그녀와 나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 끝났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제레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데이지의 가슴을 봉합하고 식초에 절인 수건으로 소독했다. “이제 이 아이는 전하의 노예입니다. 무엇이든 명령하세요.”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나는 그녀의 눈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너의 생명보다 나의 생명을 우선하라. 이것이 내가 네 년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들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네 년은 첫 번째 명령들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라.” “……예.” 예,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지가 고개를 떨구었다. 소녀는 눈을 뜬 채로 기절해버렸다. 「데이지를 노예로 종속시켰습니다!」 「당신은 호감도와 상관없이 노예의 상태창을 완전하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노예의 상태창에 '종속도'가 추가로 생성됩니다.」 「극악의 종속도!」 「강력한 마법각인에 의해 종속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당신을 전혀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극악의 종속도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효과음과 함께 홀로그램 알림창이 떠올랐다. “흐.” 우스웠다. 라우라를 부하로 영입할 적에는 곧바로 지고지순한 충성이 달성되더니, 이제는 데이지를 노예로 종속시키니까 곧바로 극악의 종속이란 게 생겨났다. 나에겐 언제나 극단적인 것밖에 일어나지 않는군.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한테 반항하지 못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나머지 문제는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자. 프랑크에 내전을 일으키기 위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시간은 넘쳐나도록 많다. 알림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노예를 획득하였습니다. 노예에 한해서 '조교'란이 활성화 됩니다.」 「데이지의 반발각인(Lv.3)이 올랐습니다!」 「데이지의 고통각인(Lv.3)이 올랐습니다!」 「데이지의 치욕각인(Lv.1)이 올랐습니다!」 ……이건 또 낯선 알림창이었다. 던전 어택에는 NPC를 노예로 종속시키는 기능이 없었다. 조교란이라니? 처음 보았다. 게임에는 전혀 없는 기능을 목격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퀘스트 깨부수기였다. 아무래도 용사와 마왕의 입장이 달라서 차이가 빚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나중에 천천히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수술의 최대 공훈자를 칭찬할 때였다. “수고했다. 제레미.” 내가 제레미의 어깨를 두들겼다. “과외의 일로 고생을 시켰군.” “별 말씀을요. 저희는 전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보상을 내리고 싶다.” 수술이란 시술자에게도 지독하게 피로를 강요한다. 더군다나 심장에 마법각인을 새기는 고도의 묘기이다. 어중이떠중이가 해낼 만한 수술이 아니다. 직접 수술을 당해보고 여러 번 해보기도 한 제레미라서 가능했으리라. “포션, 만드라고라, 향초, 수술도구까지 전부 네가 준비했다. 이런 인력을 공짜로 부려먹어서야 내 명예만 손상될 뿐이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주겠다.” 제레미가 턱에 손을 괴고 고민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소인이 분수 넘치는 소원을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아아. 아르테미스 여신께 맹세하건대.” 내가 사제처럼 두 손을 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푸흡. 저, 전하. 정말로 신전 사제에 어울리세요.” “내가 마왕만 아니었으면 대사제장이 되었을걸.” 제레미가 유쾌하게 웃었다. 열 살 소녀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밀실에서 한 쌍의 남녀가 키득거렸다. 어느 쪽이든 제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만 웃을 뿐이지 감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제레미가 말했다. “단탈리안 전하. 이 여아가 누구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혹시나 돈을 바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그렇게 나오는군…….” 나는 방구석의 탁자에서 포도주잔을 가져왔다. 사방에 배어든 향초 냄새 때문에 포도주맛이 영 쓰게 느껴졌다. “소인은 전하께서 월맹군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소인은 평생 손 꼽을 법한 쾌감을 느꼈어요.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노리시는지. 그거야말로 소인에게 제일 강한 호기심입니다.” 그렇게 궁금했는데도 제레미는 여태껏 얌전했다. 화전촌을 습격했을 때도, 화전민을 겁박했을 때도, 루크를 꾀어냈을 때도, 제레미는 단 한 마디의 의문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했다. 호기심을 억누른 것이었다. 질문하는 것을 주제에 넘는 짓이라 생각하고. 나에게 권리를 얻은 다음에야 질문했다.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언제 다가올 수 있는지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실로 프로다웠다. 마계 제일의 암살대라는 간판은 헛것이 아니었다. “좋다. 제레미, 지금부터 네가 듣는 것은 극비 중 극비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언제 어디서도 발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용사(勇士)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들었다. 수술에 사용한 환각제 분말을 그대로 파이프에 짓이겨 불을 지폈다. “예. 황송합니다만, 마왕을 참살한 자에게 붙는 칭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여자아이와 그 오라비는 용사가 될 인간이다.” “호오.” 제레미가 위쪽으로 연기를 후욱 불었다.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지져진 그녀가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에서 얻으신 정보인지……그것까지 소인이 알 수 있을까요.” “예언이라고 하면 믿겠는가?” “물론입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레미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포도주 한 모금을 입구멍에 털어넣었다. “마왕을 한두 명 참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마왕이 목숨을 잃었겠지……나는 그것을 막고자 여기 프랑크 제국에 왔다.” “확실히 괴물 같은 마력을 품고 있어요.” 제레미는 그녀 나름대로 무언가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걸로 흥미가 해결된 것 같았다. 아니. 다른 곳으로 관심이 옮겨간 것처럼 보였다. 질문을 마구마구 해올 줄 알고 조금 각오하고 있었는데……. 뭐, 그녀가 알아서 납득했으면 이쪽에서 간섭할 이유가 없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진 나무침대,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의 나체가 힘없이 구속되어 있었다. 수술 내내 어찌나 사지를 뒤틀어댔는지, 수갑이 차인 손목은 아예 살갗이 벗겨졌다. ‘상태창.’ 띠링, 하고 더럽게 유쾌한 효과음이 울렸다. 눈앞에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상세하게 상태창이 표시되었고――나는 경악했다. ━━━━━━━━━━━━━━━━━━━━ 이름: 데이지 종족: 인간   주인: 단탈리안 속성: 중립(0) 레벨: 1    명성: 1 직업: 모험자(-), 검사(-) 통솔: 9/100  무력: 13/140  지력: 13/125 정치: 9/95   매력: 10/100  기술: 8/81 호감도: 0 종속도: 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 검술(-), 작전술(-), 설득(-), 기마술(-), 원소마법(-)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호감도와 종속도의 영향으로 인해 표시되지 않습니다. ━━━━━━━━━━━━━━━━━━━━ “…….” 말문이 막힌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머리 꼭대기부터 핏기가 싸악 빠져나갔다. 온몸이 순식간에 석화하는 기분이었다. 이 능력치를,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아니다. 단지 본 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익숙했다. 능력치들과 칭호들, 능력들 그리고 스킬들……모조리, 전부 나에게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충격에 나의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팬사이트 사상 처음으로 일흔두 개의 던전을 공략하고. 대마왕의 히든 던전을 찾아내어 바알을 차단하고. 수천 번이 넘는 실패를 극복하고, 십수 번의 회차 플레이를 거듭하여, 인간계의 군주들에게 문두스(Mundus)라는 성을 내려받은 자. ‘이건 내 캐릭터의 능력치다.’ 유일한 자랑이었고 유일한 긍지였던 것. 내가 피땀으로 가꾸어낸 캐릭터의 능력 한계치와 스킬, 능력, 호칭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상태창을 보다 세세하게 열어재꼈다. ━━━━━━━━━━━━━━━━━━━━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직업(모험자) 계열의 최상위 호칭. 세계의 모든 모험자를 대표한다. 그가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은 없으며, 그가 물리치지 못하는 몬스터는 없다.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레벨업 시 [무력] 능력치 +6, [지력] 능력치 +1, [매력] 능력치 +4, 직업 [모험자] 레벨 성장 속도 x4 2. 전설의 용병(-). 직업(용병) 계열의 최상위 호칭. 세계의 모든 용병을 대표한다. 그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용병은 없으며, 그가 섬멸하지 못하는 군대는 없다.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레벨업 시 [통솔] [무력] 능력치 +6, [정치] 능력치 +2, 직업 [용병] 레벨 성장 속도 x4 3. 던전 브레이커(-). 모든 던전을 공략한 용사에게 내려지는 칭호.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던전에서 전투에 돌입할 경우 [통솔] [무력] 능력치 140% 효과 ━━━━━━━━━━━━━━━━━━━━ “…….” 그 다음으로. ━━━━━━━━━━━━━━━━━━━━ [스킬] *의용병(-). SS급 범위 강화계 액티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본인 제외, 자신이 소속한 부대의 아군 전원에 대하여: 공격력 140% 효과, 방어력 140% 효과, 부상에 의한 공격력 및 방어력 저하 무효 *천리행(-). SS급 개인 강화계 액티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자신에 대하여: [통솔] [무력] 능력치 140% 효과, 병종 패널티 및 지형 패널티 무효 *필살무효(-). SSS급 개인 강화계 패시브 스킬. 현재 활성화 되지 않음. 자신에 대하여: 적의 스킬에 피격되었을 경우, 최대 피해치가 잔존 체력의 50%를 초과하지 않는다 ━━━━━━━━━━━━━━━━━━━━ “……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 극악의 난이도를 감내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예컨대 칭호 <던전 브레이커>는 스킬 <천리행>과 맞물려서 돌아갔다. 캐릭터의 무력이 100이라고 해보자. 이 캐릭터가 던전 내부에서 싸운다면, 칭호 <던전 브레이커> 덕분에 무력이 140으로 상승하고, 스킬 <천리행>까지 중복되면 196으로 상승한다. 능력치가 두 배나 뻥튀기되는 셈이다. 어떤 호칭을 얻어야 최고의 효과가 생겨나는지. 어떤 스킬이 중복되어야 최적의 효율을 얻어내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겨우 만들어낸 결과였다. 용사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될 뻔했던 것만 해도 아찔했는데……. ‘이제는 아예 내 플레이 데이터까지 계승하시겠다?’ 나는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아무래도 이 세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빌어처먹은 모양이었다.   00178 악의 꽃 =========================================================================                        아마 데이지 혼자 능력치를 계승받지는 않았을 거다. 루크와 데이지, 둘 중 한 사람이 무조건 용사가 되어야만 하는 시나리오상 양자 모두 능력치를 계승했겠지……끔찍했다. 내가 혼자서 웃어대자 제레미가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은 아니었다. 왜 웃는지 자뭇 궁금하나 지금 질문해본들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으니 참겠다, 그런 표정이었다. “제레미. 이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잘 부탁한다.” “네. 어차피 사흘 정도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거예요.” “계속 신세를 지는군.” “아뇨. 전하께서 앞으로 대륙을 얼마나 휘저으실지.” 제레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걸 상상하면 이 정도는 수고도 아닙니다.” “자네도 어지간히 변태야.” “세상에나. 전하께 변태 소리를 듣다니 이만한 영광이 또 있을까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제레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호들갑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마왕을 통틀어 제일 성실하시고 착실하시다는 말씀이지요? 예, 물론이지요. 벌써 수십 번은 들어서 소인의 귀에 딱지가 붙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이 여자아이인 바르바토스 전하와 열애하고 계시는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아동성애자가 아닙니다.” “이 녀석이…….” “오늘은 또 열 살짜리 인간 소녀와 한 시간 내내 서로를 빤히, 그보다 더 열렬할 수 없게 열렬히 보았어도, 전하께선 결코 변태가 아닙니다. 당연하죠. 어휴. 어찌나 두 사람 시선이 뜨거운지 옆에 있던 제가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니까요.” 반박하려다가 깨달았다. 제레미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내 분위기가 지나치게 심각해지자 의도적으로 마음을 풀어주려고 농지거리를 던진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 덕분에 잠시나마 용사한테 달라붙은 주의집중을 풀어재낄 수 있었다. 정식 부하도 아닌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게 했다. 한심하다……. 내가 한숨을 쉬면서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레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늘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을 기분 좋게 감쌌다. “아?” 제레미가 놀라서 눈을 활짝 떴다. 그녀는 마약과 환각제에 찌들어 눈이 항상 반쯤 감겨 있었다. 감정이 거의 없는 제레미가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감사를 손바닥에 담아 상냥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트린 것도 노예각인이었어. 너를 진창에 처박게 만든 짓거리를, 나는 너한테 명령하고 말았다. 쓰레기 짓거리야. 너에겐 이제부터 나를 쓰레기라 욕할 권리가 있어.” “……아뇨, 저는.” “네가 폐성(廢城)에서 물어본 적이 있었지.” 제레미가 그녀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때 폐허에서 노숙했다. 제레미는, 자신은 하급마족으로 태어나서 결국 쓰레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냐면서, 이 억울한 세계를 당신께서 바꿔주시고 당신께서 왕이 되어주시지 않겠냐고 부탁했다. “내 대답은 아직도 다르지 않아. 난 너의 불행을 대신해서 짊어질 수가 없다. 제레미. 네가 쓰레기 인생이라면 나 역시 똑같다.” 내가 웃었다. “그렇지만 옆에서 함께 걷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앞으로 한 세상을 살아가자. 똑같은 쓰레기 동지로서 말이야.” “…….” 그녀는 라피스의 목숨과 내 목숨을 구했다. 여기에 더해서 용사 한 명을 노예로 만들어주었다. 은혜는 언제고 반드시 갚으리라. 제레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뒤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다음 방에서 걸어나왔다. * * * 그날 저녁, 준남작령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베르시 준남작령은 오늘뿐만이 아니라 벌써 나흘째 축제를 이어갔다. 영주의 종사가 도시에서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잔뜩 사와서 마을에다 풀었기 때문이다. 고블린 부락을 두 채나 전멸시킨 우리 일행은 당연히 스타로 대접받았다. 지금도 난쟁이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더 이상 술싸움으로는 분위기가 달아오르지 않는지, 난쟁이들과 마을 남자들은 기가 막힌 대회를 열었다. 이건 진짜 광란의 도가니였다. 이른바 베르시 준남작령 공인 <누가 제일 먼저 사정하느냐 대회>. 광장으로 남자들이 일렬로 주르륵 나란히 선다. 그리고 바지를 벗는다. 통째로. 우람한 물건을, 물론 때로는 우람하지 않은 물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회의 이름대로……싼다. 누구보다 빠르게 싸기 위해서, 싼다. 이 미친 대회가 자그마치 베르시 준남작의 공적인 허가를 따냈다. “음. 재미있지 않은가.” 심지어 준남작은 우승자에게 돼지 한 마리를 선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씨돼지를. 남자들이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종족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십 명의 수컷들이 참여했다. 자신들이 갈고 닦은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며. 대회는 네 번의 예선전과 두 번의 본선전, 마지막 결승전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광장에서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로라 하는 조루들 열 명이 모였다. 그들은 지극히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일생일대의 위험에 마주한 수달과 같았다. 돼지 한 마리에 눈이 멀어버린 아내들이 응원을 펼쳤다. 그중에는 대회에 나가기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떠민 아내가 적지 않았다. “꺄아아악! 여봇! 더 빨리! 빨리 싸란 말이에요!” “저 남정네는 집안에선 겁나게 빨리 싸재꼈으면서 바깥에선 왜 저런담! 우라질!” “야, 야! 내 가슴을 보고 얼른 싸란 말이야, 못돼먹은 비실아!” 한 여자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여겼는지 옷가슴을 확 열어재꼈다.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여자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그녀의 남편은 거시기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아내와 남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크하하! 저거, 아내를 보니까 오히려 쪼는 거 봐라!” “레이지네 부부의 밤생활이 심히 걱정되는구만! 하하!” 조롱과 야유가 쏟아졌다.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가슴까지 보여준 여자는 본전도 뽑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녀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구경꾼들이 또 한 차례 웃었다. 웃음소리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되어 밤하늘을 맑게 울렸다. “껄껄껄.” 베르시 준남작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미 술이 많이 들어가서 얼굴이 온통 발갰다. 준남작은 근엄하고 엄격한 영주였지만, 영지민들의 일상을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이해하는 자였다. 이런 영지귀족에게 통치받는 것은 행운이리라. “그럼 내일 떠난다는 말인가?” “예. 영주님의 의뢰도 완수했으니 말입니다.” “안타깝군.” 준남작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대들 덕분에 겨울을 무사히 났다. 고블린 부락까지 토벌해주었지.” “모두 여신께서 인도하신 바입니다.” “후후, 여신인가…….” 그가 포도주 뿔잔을 들었다. “본인은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다. 흉년이 들어도, 전염병이 들어도, 아무리 애원해도 신들은 우리 인간을 돕지 않았다. 굶주림은 결국 인간의 굶주림이며, 뼈를 깎는 아픔도 결국 인간의 아픔이었다. 신은 굶주리지도 아프지도 않은 게야…….”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한번에 들이마셨다. 이 시대에 성실한 영지귀족으로, 그것도 자그마한 영지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겠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진지하게 자청하는 순간 영지귀족은 순식간에 3D 업종으로 변해버린다.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재판, 기록, 결혼, 건설 등등,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촌장이나 지주가 도와준다고 해도 결국은 영지귀족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근처 대귀족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물론이요, 근처 소귀족과 협력하거나 다툰다. “한번도 배고파본 적도 아파본 적도 없는 신들께서 어찌 인간을 동정하겠는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옳습니다.” 난 마왕이라서 늙어죽을 일은 없지만. 준남작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기하군. 본인은 방금 신성을 모독했다네. 분하지 않은가?” “인간이 입에 담는 신성도 다만 인간의 신성일 따름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칭송하고 애원해도 신께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욕할지언정 신께서는 분노하시지도 않겠지요.” 나는 두 손을 잡고 기도문을 외듯이 중얼거렸다.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그곳에 그냥 가만히 계소서. 우리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하겠나이다.” 베르시 준남작은 한방 먹었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맞는 말일세. 본인이 한 말에 본인이 걸려 넘어진 꼴이로군. 그래, 우리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서 건배하지!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위하여.” 우리는 뿔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광장 한가운데서도 환호성이 유독 크게 터졌다. 예선전을 통과한 선수들이 정해졌다. 저 대회의 악랄함은 예선전, 본선전, 결승전까지 총 세 번이나 자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저런 대회를 떠올렸는지 감탄스러웠다. 준남작이 미소를 머금고, 하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쟝 볼레 사제를 보고 본인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 쟝 볼레는 내 가명이었다. “신과 상관없이 사제는 세상에 희망을 안겨줄 수가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아니, 전혀 아닐세. 자네는 벌써 수백 명의 영지민에게 희망을 주었네. 나에게도.” 쟝 볼레가 사실은 마왕 단탈리안이며 수십수백만의 인간을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마 눈앞의 귀족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그게 재밌었다. “게다가 고블린들에게 짓밟힌 마을의 생존자까지 거두었다지.” 루크와 데이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예. 저의 양자와 양녀로 기를 셈입니다.” “양자와 양녀로?” 준남작이 또 한번 놀랐다. 화전민은 농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반면에 사제는 계급 피라미드의 정점을 차지한다. 가장 고귀한 자가 가장 비천한 자를 가문으로 받아들인다니 놀랐으리라. “아니, 그들은 화전민이 아닌가. 몸종으로 들여도 충분한 선행이거늘, 꼭 양자로 거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준남작 각하.” 내가 빙그레 웃었다. “신들의 일이 결국은 신들의 일이듯이, 인간의 일 또한 결국은 인간만의 일입니다. 사제라느니 귀족이라느니 노예라느니, 인간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신들께서는 알지 못하십니다.” “…….” 침묵이 찾아들었다. 준남작의 눈동자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평소처럼 진지하고 근엄한 귀족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한껏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황태후 폐하께서 지지하신다는 공화주의인가?” “아니요. 아마도 폐하께서는 귀족 계급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오늘 얘기는 듣지 못한 걸로 하겠네. 자네도 내 신성모독을 넘어가주었으니.” 역시 베르시 준남작은 선량한 인물이었다. “각하께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계급 역시 믿지 않으셔야 합니다. 계급이란 신이 정해놓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니까요.” “…….” 준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준남작은 삶을 진지하게 사는 인물이었다. 내가 이 자의 머리에 심어놓은 의심의 싹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라나서 언젠가 개화해버리겠지……. 프랑크 내전은 한두 해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십 년이 넘도록 이어질지 모른다. 그때 베르시 준남작이 공화파에 가담한다면 나로서는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성실한 귀족들한테 차근차근 밑작업을 깔아두는 것 역시, 내가 이번 여정에서 스스로 맡은 임무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귀족이란 것에 대해서, 부디 열심히 의심해주기를 바란다.   00179 동족혐오 =========================================================================                      <던전 디펜스> 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위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용병대장, 자크리였다. 그는 시합이 시작하고 불과 십오 초 만에 정액을 발사했다. 이 기염에는 아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수컷>이라는 칭호가 자크리에게 내려졌다. 영광스럽게도. 다음날, 우리가 마을에서 떠날 때까지도 준남작은 표정이 줄곧 심각했다. 영주가 조용해지자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그들은 마을 입구까지 나와서 우리를 성대하게 배웅했다. 제국로에서 노숙한 지 사흘째. “전하. 보통이 아닙니다.” 자크리가 흥분해서 말했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누가 말인가?”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남자애 말입니다. 그런 재능은 여신께 맹세코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 가지를, 열을 알려주면 백 자리를 헤아립니다. 녀석은 무사로 타고난 게 틀림없습니다!” 매사에 엄숙한 자크리치고는 호들갑스러웠다. 내가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흐음. 그렇게 뛰어난가?” “예. 단순히 천재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합니다. 마치 검술에 통달한 용병이 오랜 시간 무기를 만지지 않았다가 다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처럼……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하나씩 되새긴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놀랍습니다.” 나는 루크의 교육을 용병단에 일임했다. 처음에 용병들은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웬 거지처럼 생긴 남자애를 화전촌 생존자랍시고 데려오더니 검술을 가르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다. “검술이란 게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놀이가 아닙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 마왕 전하께서 말씀하시니까 해보죠, 뭐.” 분위기가 대충 이러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방을 경계하느라 용병들은 심신이 피로했다. 언제 어디서 도적들이 습격해올지 몰랐다. 여기에 생뚱맞게 꼬맹이 교육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아마 나한테 직접 불평하지 않았을 뿐이지 무척 귀찮았을 거다. 첫째 날. 용병단에서 제일 말단인 난쟁이가 루크를 맡았다. 막내한테 귀찮은 짐을 떠넘긴 것이었다. 명령이 내려왔으니 시행하긴 하겠는데 도저히 납득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용병단 나름대로 항의를 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꼬맹이. 어디 한번 휘둘러봐라.” 막내 난쟁이가 루크한테 검을 던져주었다. 싸구려 목검이었다.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이요?” “사내로 태어났으면 제 한 몸은 지킬 줄 알아야지.” “에이, 귀찮은데.” 난쟁이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곁눈질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쟁이한테서 '이거 진짜 귀찮은데 젠장'이라는 감정이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나는 물에 포도 식초를 타마시면서 빙그레 웃었다. 까라면 까. 난쟁이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더 귀찮아, 요 맹랑한 짜식아.” “저도 귀찮고 아저씨도 귀찮은데 왜 해요? 귀찮아하는 사람이 귀찮은 짓을 해봤자 죽도록 귀찮을 뿐이잖아요.” “네놈도 커보면 알겠지만 세상엔 귀찮지 않은 일이 없어. 자고 일어나는 것도 귀찮다, 이 놈아.” 난쟁이가 루크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예를 들어 늑대나 도적이 확 공격해온다고 해봐라. 어떡할 거냐?” “느, 늑대요?” 남자아이의 뻔질뻔질한 얼굴에 공포가 끼었다. “아, 아저씨들이 지켜주면 되잖아요!” “물론 지켜줄 거다.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지켜준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어. 우리가 늑대를 한 마리라도 놓치면? 그 한 마리가 하필 네놈한테 달려들면? 앙? 그냥 아이고 늑대님, 춥고 배고픈 겨울을 버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 가슴살이라도 한점 드십쇼, 하고 잡아먹힐 거냐?” “으으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루크가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제스처가 무척 풍부한 꼬맹이였다. 보고 있기만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짜샤, 좋은 말로 할 때 배워. 여동생도 아파서 드러누웠는데 여차하면 네가 지켜줘야지.” “으……맞아요. 데이지는 내가 지켜줘야지.” 그제야 할 맘이 들었는지 루크가 목검을 들었다. 참고로 루크는 우리를 진짜 황제의 군대로 여겼다. 변경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루크네 마을이 습격받는 것을 보고 급하게 도와주었다, 다른 부대가 화전민을 새로운 마을로 인도하는 동안 뒤늦게 발견된 루크를 우리 부대에서 따로 맡는다……그런 시나리오였다. 황제의 직속 부대가 뭣하러 저딴 촌구석을 돌아다니겠는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이제 열한 살인 루크는 그저 병사들과 함께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뭐라고 할까. 어린애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해야 하나. 한 살 어린 여동생이 나이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분명히 루크의 반응이 당연한 것인데도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긴 데이지 같은 녀석이 둘이나 되면 그건 그거대로 무섭겠지.’ 자기 살이 파헤치고 심장이 쑤셔지는데도 이를 악 물고 노려보는 데이지였다. 이런 어린애는 세계에 한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루크가 어설프게 목검을 휘둘렀다. 생전 처음 검을 쥐어본 게 분명했다.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어엉. 위에서 아래로. 그랴, 그렇게. 두 발은 쫘악 벌리고. 옳지.” “이렇게요?” “오냐. 잘 한다. 그대로 백 번만 내려쳐봐.” 난쟁이의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가득했다. 그는 행군 중간중간의 쉬는 시간에 내려치기 연습을 시켰다.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동작이었는데 문외한이 보기에도 검술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느긋하게 내버려두면 되겠지. 나는 관심을 끄고 자크리와 함께 어디로 행군할 것인지 상의했다. * * * 둘째 날이 밝았다. 나는 특별히 마차에서 잠을 잤다. 마차에는 대(對)마법용 주술이 걸려 있어서, 만에 하나 누군가가 습격해와도 충분히 대항할 수 있었다. 병사들과 동거동락하고 싶었지만 호위상의 문제이니 부디 양해해달라며 자크리와 제레미가 동시에 부탁했다. 마차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데이지도 있었다. 단, 그녀는 수술이 끝난 이후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도 마차 한 구석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제레미 말에 따르면 아직 이틀은 더 있어야 깨어난다고. 마차에서 나오자 일행들은 벌써 아침을 만들어놓았다. 모닥불에 펄펄 끓인 스프였다. 밀가루에 버터까지 발라 제대로 요리했다. 노숙자가 먹는 음식으로는 거의 최고급이었다. “내일은 네 년이 요리하는 거다. 알겠는가?” “알겠어요, 알겠어. 하여간 고작 스프 하나 끓여놓고는 되게 유세네요.” 자크리와 제레미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아침을 먹었다. 두 명의 간부는 식사를 어느 쪽에서 맡느냐 따위로도 신경전을 벌였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암살대가 아니라 용병단에서 담당한 모양이었다. “으이구. 이 화상들아. 그거 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 가지고 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어이가 없어서 타박을 주자, 자크리와 제레미가 똑같은 타이밍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심각했다. 천상 험악하게 생겨먹은 자크리와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짓이겨진 제레미가 그러니까 살짝 무서웠다. “송구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건 난쟁이와 엘프 사이의 문제입니다.” “맞아요. 삼천 년 분쟁의 역사가 여기 걸려 있습니다.” "…….” 삼천 년의 분쟁 좋아하시네. 미쳤냐? 나는 용병대와 암살단을 화해시키는 걸 반쯤 포기했다. 나중에 전투가 일어났을 때 서로 반목하지나 않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수뇌부끼리 한자리에 모여 스프를 떠마시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기, 전하. 송구합니다만…….” “음?” 막내 난쟁이였다. 그는 무척 죄송한 듯이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마왕의 아침식사를 방해하는 것이었으니 그야 죄송스러울 만했다. 자크리가 '아니, 이런 미친 새끼를 보았나?' 하는 시선으로 막내 난쟁이를 노려보았다. “레칸. 실성했나? 언제부터 나의 부대가 예의를 땅에 처박았지?” “죄, 죄송합니다요, 대장. 하지만 아무래도 빨리 보고드려야 할 것 같아서…….” “되었네.” 내가 한손을 들어 자크리를 제지했다. “일단 얘기나 들어보지.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맡겨주신 인간 아이 말입니다만…….” 막내 잔쟁이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그, 소인이 맡을 수 없겠습니다.” “아니. 네놈이 정녕?” 자크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커졌다. “제아무리 과외의 일이라도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레칸.” “대장. 그런 게 아니옵고…….” “문답무용이다. 전하께서 너희를 편하게 대해주시니 눈이 삐었나보구나. 감히 마인이 된 자로서 왕께 무례를 범한 죄, 감히 병사가 된 자로서 군기를 망가뜨린 죄. 네놈의 목에 묻도록 하마.” 자크리가 도끼를 손에 쥐고 벌떡 일어섰다. 아이고야. “아, 아. 잠깐 기다려보게, 자크리 대장. 죄는 영원하니 처벌은 언제 내려도 상관없을 터이다. 레칸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항변이라도 들어보세.” “……전하께서 그리 명령하신다면.” 자크리가 입끝을 일그러트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크리도, 막내 난쟁이도, 나도 알고 있었다. 전부 연기였다. 여기 용병은 모두 프로였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식사 시간까지 방해하면서 보고할 리 없었다. 단지 자크리는 용병대장으로서 규율을 엄격히 세우기 위해 위협한 것이었다. “자아. 레칸. 말하라. 왜 루크를 맡을 수 없겠다는 것이지?”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단도직입적으로 아뢰겠습니다. 저 아이는 저한테 너무 분에 넘칩니다.” “분에 넘친다?” 막내 난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이. 처음에는 그냥 산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체력이 꽤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꼬맹이 주제에 감이 좋다 싶었지요. 하지만 점점 확신이 들었고, 어제 밤 늦게까지 살펴보고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슨 결론인가.” “전하. 저 녀석은 천재입니다.” 막내 난쟁이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멋쩍은 기색이었다. “아주 가끔 가다 그런 놈이 있습니다. 오직 검을 쥐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놈 말입니다. 저 녀석이 딱 그 짝입니다요. 내려치기랑 비스듬히 내려치기만 가려쳤는데도 벌써 다리와 배, 머리, 팔의 균형을 잡는 법을 깨우쳤습니다.” “하?” 자크리가 인상을 확 찡그렸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레칸. 설마 귀찮은 짓 떠맡기 싫다고 거짓을 고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이고, 자크리 형님. 아무렴 제가 실성했다고 그러겠습니까?” 막내 난쟁이도 답답해하며 말투를 바꾸었다. “뭣하면 형님이 직접 손 좀 봐주시오. 나도 아리까리해서 밤새도록 시험해봤다니까요.” “몸의 균형은 재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연습과 훈련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다. 그걸 어떻게 인간 꼬마가…….” “아, 그러니 지금 내가 미친 척하고 전하한테 고했지 않습니까. 저라고 전하의 아침식사를 방해하고 싶었겠어요? 안 그래도 저기서 형님들이 죽여버릴 기세로 절 노려보고 있는데.” 슬쩍 막내 난쟁이 너머를 바라보니, 공터에 모여 있는 용병들이 하나같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이 막내 난쟁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몸져 누울 때까지 밟아버리겠다는 기세였다. 막내 단쟁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이것도 제가 축소해서 보고하는 겁니다요. 제가 보기에는 그 꼬맹이……마나까지 호흡으로 돌리는 것 같습니다.” “뭐, 마나?” 자크리의 목소리에서 옥타브가 올라갔다   00180 동족혐오 =========================================================================                        “네놈이 멋대로 토납법을 가르쳐준 건 아니고?” “아이고, 나 억울해서 죽어불겠네. 형님! 제가 어디 누구한테 심법(心法) 가르칠 짬밥이 됩니까.” 막내 난쟁이가 땀을 뻘뻘 흘렸다. 호흡법은 마나 심법의 첫 단계였다. 방법 자체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해내느냐 못하느냐는 문제가 전혀 달랐다. 나도 언젠가 라피스한테 무술을 배우겠다며 설친 적이 있었다. 그때 라피스가 호흡법을 수업해주면서 짜게 식은 눈으로, ─ 단탈리안 전하께선 무예와 관련된 것에는 절망적으로 재능이 없으시군요. 하고 단언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얌전히 쇠뇌를 쏘아대는 법이나 연습했다. 정작 내가 뼈빠지게 키워놓은 능력치로 루크는 천재이네 뭐네 찬사를 받고 있었다. 세상이란 부조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내려치기를 사백 번쯤 하더니 저 혼자서 후욱, 후욱, 하고 숨을 쉬는데 거 소리가 익숙하지 않겠습니까요? 잘 들어보니 이게 제대로 호흡을 하고 있더랍니다. 젠장.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형님은 모를 겁니다.” “어찌 산구석 꼬맹이가 스스로 심법을 홀로 터득할꼬.” 자크리는 믿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막내 난쟁이가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아, 제가 아무렴 거짓부렁이를 하겠습니까? 말했지 않수. 형님이 두 눈으로 봐보래도. 이 아우를 족치더라도 나중 가서 족쳐도 되는 일 아니오.” “레칸의 말이 옳다.” 내가 옆에서 지원사격을 가해주었다. “이게 진실이라면 적잖게 흥미로운 일 아닌가. 자크리, 자네가 한번 루크를 맡아보게.” “……알겠습니다. 만에 하나 레칸이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자크리가 막내 난쟁이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엄격하게 군법으로 다스리겠나이다.” “좋수다. 목탱이를 자르든가 채찍질을 하든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막내 난쟁이가 호기롭게 받아쳤다. “하지만 형님도 곧 있으면 저랑 똑같은 심정이 될 겁니다요.” “흥, 두고 보아라. 나는 천재 따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크리는 잠시 수뇌부의 일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용사 남매 때문에 자그맣게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요컨대 강줄기의 잔물결에 불과했다. 잔물결이 아무리 요란하게 철썩인다고 해도 강은 자기가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흘렀다. 꼭 그처럼 우리 일행은 <해방동맹>의 공작 부대로서 계속 나아갔다. 원래 제도(帝道)로 가서 프랑크의 황후에게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일행의 지휘를 휘어잡고 계획을 변경시켰다. 우리는 프랑크의 북부로 향했다. 프랑크 제국 북부는 풍요롭기로 유명하다. 동북부와 달리 개간사업이 상당히 폭넓게 이루어져, 가을이 되면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황금빛 밀밭이 펼쳐진다. 인구도 가장 많다. 프랑크 제국의 젖줄이라 해도 좋겠지. 이 지역에 마왕성이 두 개 있다. 우리는 그들과 협력해서 프랑크의 영지들을 뒤집어버려야 한다. 그들이 바깥에서 공격하고 우리가 안쪽에서 내응하면, 제아무리 강한 영지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레라지에 전하는 평원파의 핵심 간부예요.” 먼저, 서열 제14위의 마왕 레라지에. “바르바토스 전하, 벨레드 전하, 두 분을 다음으로 레라지에 전하가 강력하지요. 전통적인 강자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보시다시피.” 제레미가 양피지 지도를 보여주었다. 프랑크의 지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군사용으로나 쓰일 법한 최고급 지도. 최고급 암살대의 대장쯤이나 되니까 구했지 귀족들도 구경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지도에는 잉크로 굵게 십자가 표시가 된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마왕 전하들과 달리 본거지가 이처럼 대륙 한복판에 있어요. 세력을 크게 불리기에는 매우 안 좋은 위치입니다. 후후, 그래서 레라지에 전하보다 서열이 낮은 제파르 전하가 오히려 평원파 내부에서는 발언권이 높죠.” 벨레드 형님은 서열 제13위, 레라지에는 서열 제14위, 제파르 대장은 서열 제16위. 서열로 따지자면 벨레드와 레라지에가 평원파에서 이인자 경쟁을 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이번 월맹군에서도 그랬고, 이인자 경쟁을 주도하는 마왕은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대장이었다. 나는 가슴이 불안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파벌 내에서 대접받는다. 이런 상황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으음, 현 상황에 불만이 제법 많겠어.” “예. 레라지에 전하는 월맹군이 결성되어도 본대에 참전하지 못했어요. 본대가 전방에서 인간연합군과 거하게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 레라지에 전하는 별동대로서 후방을 교란했지요.” 덕택에 프랑크 제국은 전력을 다하여 월맹군과 싸우지는 못했다. 고작 한 명의 마왕에 불과했지만 서열 제14위이면 최고위 바로 다음이었다. 거느리는 몬스터 군세가 못해도 이천, 삼천에 달했다. 마왕이 지휘하는 아래 수천의 몬스터가 한몸이 되어 후방을 휘젓는 것이다. 북부 일대의 영주귀족들 상당수가 발이 묶인다. 자칫하다 자기 영지가 쑥대밭이 될 판국인데 어느 영주가 섣불리 군사를 차출할까. 레라지에는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다. 단지. “들이는 품에 비해서 공훈은 꽤 적군…….” “확실히 화려한 면이 부족하죠. 전쟁의 꽃은 역시 회전(會戰)이니까요.” 이거, 지나치게 보답을 받지 못하는 역할이다. 제파르 대장을 보자. 선봉장을 맡아서 검은 산맥을 돌파했다. 여기엔 온갖 찬사가 따라붙을 수 있었다. 월맹군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평원파의 전력을 보여주었다, 명예로운 서전을 장식했다……. 레라지에는 어떠한가? 사실 레라지에는 혼자서 프랑크 북부를 반쯤 마비시켰다. 레라지에한테 붙잡혀서 출병하지 못한 인간군 병력이 적어도 일만오천은 되리라. 무려 일만오천의 병력을 단독으로 감당해낸 것이고, 월맹군 전체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는 틀림없이 거대한 공로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게릴라 전투. 레라지에의 목표는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적들에게 '언제 어디서 습격해올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심어주어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레라지에는 위협사격만 가하고, 인간측은 영지를 지킨다……필연적으로 큰 전투가 발생하지 않는다. 당연히 눈에 띄는 전공도 적어진다. 이래서야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레라지에한테 공훈을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다. 만약 레라지에가 제1공훈자로 책정되어봐라. 당장 다른 마왕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오겠지. ─ 전선에서 소중한 부하를 잃어가며 싸운 우리는 제3공훈자인데,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마왕이 제1공훈자인가? ─ 이러면 우리가 피땀 흘리면서 싸울 이유가 어디 있는가. 보나마나 이렇게 흘러간다. 물론 마왕들도 알고 있다. 별동대도 본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은 별개이다. 자기는 수십 년 넘게 키워온 몬스터를 수백이나 잃어버렸는데, 저쪽은 아무런 피해가 없다. 그런데도 내 공로가 뒤떨어진다고? 대부분은 납득하지 못한다. 전공 분배는 상상 이상으로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어쩌면 레라지에는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어라? 혹시 레라지에 전하와 만나신 적이 있었나요?” “아니, 초면이나 다름없지만 말이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쪽은 묵묵하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난데없이 벼락출세한 사람이지 않나. 상대방 입장에서 서운할 수밖에. 자기가 노력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단탈리안 전하께선 누가 뭐래도 가장 큰 공훈을…….”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야. 감정의 문제다.” 아마도 레라지에는 그동안 느낀 서운함과 서러움을 나한테 풀려고 들겠지.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다 화풀이하는 격이다. 민폐가 따로없다. 감정의 문제이니까 더더욱 질이 나쁘다. “바르바토스의 측근이라는 이름값으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볼까 했는데……쓰읍. 호가호위는 불가능하겠어.” “헤에. 그럼 어쩌죠?” 제레미가 흥미로워했다. “지금이라도 행로를 남쪽으로 돌릴까요? 프랑크에는 남방에도 마왕성이 있습니다.” “안 돼. 남방은 북방에 비해서 한참이나 가난하다. 거길 들쑤셔봤자 내전에 심각한 영향이 나오지 않아. 우리는 북으로 향한다.” “역시. 단탈리안 전하라면 그렇게 나오실 거라 믿었어요.” 제레미가 방실방실 웃었다. 내가 어려운 길을 자처하니까 되레 기뻐하고 있었다. 쯧, 변태적인 여자 같으니라고. 어째서 내 주변에는 정상인이 없을까? 날이 가면 갈수록 변태들만 꼬여든다. 유유상종이란 옛말도 다 쌩구라다. 제레미가 지도에서 다른 곳을 짚었다. “다음은 로노베 전하입니다.” 서열 제27위의 마왕 로노베. “로노베 전하는 산악파입니다. 파이몬 전하가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두었겠지요. 손쉽게 협력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군.” 아이고, 운까지 지지리 없었다. 하필 두 명의 마왕이 평원파와 산악파에 따로 속했다. 가까울수록 사이가 나쁘다고, 레라지에와 로노베는 서로 견원지간일 가능성이 다대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진작에 버릇이 되어버린 한숨이었다. 이쪽을 질시하는 마왕과 함께해야 하는데다, 상대방들의 관계까지 개선해야 했다. 별로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어떻게 해야 두 마왕과 협조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겠다……. 게다가 용사 남매라는 혹덩이까지 있다. 이게 뭔가. 평화로웠던 나날이 격하게 고파진다. 나는 농사나 지으면서 한가로이 살고 싶은데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라우라, 잘 지내고 있습니까? 라우라의 귀여운 신음이 벌써부터 그립습니다. 제가 돌아가면 부디 사흘밤낮 화기애애한 시간을 선물해주세요……. * * * 그날 저녁에도 우리 일행은 노숙했다. 결국 자크리는 루크한테 정신이 팔려 하루종일 간부일을 내팽개쳤다. 제레미와 내가 모두를 통솔해야 했는데, 그 바람에 암살대가 점심식사랑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쉰 명한테 먹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그 코딱지만한 조루 새끼!” 제레미는 이게 전부 난장이의 간악한 수작이라고 분개했다. 연못처럼 감정이 평온한 그녀로선 드물게 진심으로 화를 냈다. 자크리고 제레미고 평소에는 지독하게 마이 페이스이면서 일단 서로 얽혔다 하면 흔들렸다. 천생연분이로군. 내가 웃으면서 농을 했다. “야. 나중에 내가 주례 서주랴? 이래봬도 여신님 사제인데.” “…….” 농담 한번 했더니 진심 어린 살기가 돌아왔다. 쫄았다. 숙련된 암살자의 살기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나는 곧바로 항복하고 저녁식사용 스튜를 받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죽는 줄 알았네! 스튜와 빵을 헤치우자 금세 주변이 어둑해졌다. 나는 당직병들에게 몰래 일당을 챙겨주고――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숲속의 늑대들과 밤새도록 눈싸움을 벌이지 않겠는가――그네들 어깨를 두들겼다. 당직병들은 무척 황송해했다. “수고하게. 비록 고루한 일이지만 마왕의 목숨이 자네들한테 달렸네. 오늘 밤만큼은 자네들이 마왕을 지키는 친위대인 셈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철통처럼 지켜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역시나 용병들에게 돈이란 곧 충성심이었다. 품속에 금화가 한 푼씩 들어가자마자 눈초리부터 싸악 바뀌었다. 말년 병장이 순식간에 신병으로 바뀌는 기적이 펼쳐졌다. 나는 씩 웃어주고 마차로 들어갔다. “…….” 마차에 데이지가 잠들어 있었다. 소녀의 작은 몸이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수술이 끝난 지 이틀이 넘었지만 아직 깨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 깨지 말고 영원히 잠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렇게 끝장날 아이라면 애당초 용사가 되지 못하겠지. 실없는 희망이었다. 나는 마차에 마련된 좌석 겸 침대에 담요를 깔고 누웠다. 온종일 말을 타고 다녀서 상당히 피곤했다. 폭신폭신한 침대에 눕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멀리 숲속에서 밤새가 울어댔다. 기분 좋은 자장가였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릿한 의식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마치 산들바람에 하얀 커튼이 한없이 나긋럽게 펄렁거리듯이.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의 의식을 노크했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주변의 어둠과 함께 인영이 시선에 들어왔다. 밤보다 새까만 여자아이가 코앞에 있었다. 소녀는 나의 몸을 깔고 앉았다. 감정이 없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예리한 것이. 예리한 단검이 이쪽에 향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잠기운이 채 떨어지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 데이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는군요.” 그녀가 두 손으로 단검을 잡아 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00181 동족혐오 =========================================================================                           “――윽!?” 급하게 무릎을 들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얼떨결에 차올린 무릎이 데이지의 배에 직격했다. 소녀가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녀는 마차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단검도 바닥 어딘가로 내팽개쳐졌다. 그녀가 멀어지고서도 여전히 날붙이의 차가움만은 목덜미에 남았다. 칼날이 정말 바로 나를 찔러올 양 가까이 있었다. 명확한 살기가 그곳에 서려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나는 뭐라도 묻은 것처럼 손으로 목을 쓸어내렸다. 개 같은 애새끼가. 이를 꽉 물었다. 공포가 사라지자 분노가 치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데이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릎이 운 좋게 명치라도 때려버린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 여자아이의 자그마한 몸이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몇 초 전에 나를 죽이려고 든 꼬맹이의 표정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 무덤덤함이 내 분노에 기름을 퍼부었다. ─ 차악! 나는 손바닥으로 데이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마치 수수깡이 부러지듯이 소녀의 얼굴은 가볍게 옆으로 꺾였다. 그렇지만 잠시 후, 데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다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애새끼. “네 년이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아니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눈초리에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반항적이었고 변함없이 재수없었다. 그러나 하찮았다. 내가 소리내어 비웃었다. “그래서? 어디 나를 죽여볼 수 있더냐? 하, 유감이로군.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네 년은 이제부터 숨을 쉬는 것까지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다.” “그런 것 같군요. 유감입니다.” 유감이라곤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데이지가 말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뺨을 후려쳤다. 이번엔 더 강하게. 살과 살이 부닥치는 소리가 비좁은 마차에 울려 퍼졌다. “당장 불어.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냐?” “오늘 햇빛이 났을 때부터.” 낮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얘기였다. 사흘밤낮 동안 깨어나지 못했으니 목이 타도록 마르고 배가 꺼지도록 굶주렸을 텐데, 그걸 한나절 내내 참았다. 오로지 나를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기 위하여. 독한 새끼. 가슴이 뜨겁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 눈동자에서 분노가 흐르는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데이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니 틀림없이 일부러 상황을 무시하고 그 작은 입술을 열었다. “잭은 누구입니까.” “뭐?” “항상 악몽을 꾸십니까? 사람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이름이 있더군요. 잭, 호크, 올란드, 리프……그리고 어머니.” 데이지의 입끝이 살짝 올라갔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 뚝, 하고. 이성이 끊어졌다. 나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데이지의 뺨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몇 번이고. 정말로 몇 번이고. 그때마다 데이지는 고개가 꺾였다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와서 나를 무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기꺼이 폭력을 휘둘렀다. 강렬하게 폭력을 원했다. 당연하게도, 며칠 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여자아이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독기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흐를 지경이 되자 과연 데이지라도 더 이상 머리를 움직일 힘이 없는지, 고개를 옆으로 추욱 늘어트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다만 색색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들었다. 얼굴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속눈썹 숫자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으르렁거렸다. “네 년의 애비랑 애미를 끔찍하게 조져버리겠다. 알아처먹었냐? 네가 내 손가락을 자르면 난 네 애미의 팔을 자를 것이고, 네가 내 발가락을 자르면 네 애미의 내장을 끄집어내어 도륙해버릴 것이다. 애비 눈깔을 파내서 네 년 아가리에 처넣겠다. 알아서 사리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당한 치욕의 열 배를 되돌려주지 않으면 성이 안 차는 부류이니까.” “…….” 반쯤 게슴츠레 잠긴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녀석은 폐에 남은 숨을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데이지가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약해졌다. 제멋대로 지껄이더니 제멋대로 기절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잡아든 내 손이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심하게 떨었다. 그녀야 정신을 잃으면 그만일지 모르겠어도 이쪽은 전혀 아니었다. 나의 분노는 이제 검은 화산재를 토해낸 수준이었다. 아직 채 폭발하지도 못한 용암이 식도와 위장을 넘어서 십이지장까지 부어터질 만큼 들어차 있었다. “좋아.” 내가 중얼거렸다. “눈에는 눈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꼬맹이.” 나는 데이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열기를 조금이라도 토하지 않으면 당장 윗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숨을 씩씩거리면서 마차 바깥으로 나갔다. 한밤이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웠다. 샛붉은 모닥불이 이곳저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레미가 머무는 모닥불이 마차 가까이에 위치했다. 거기로 걸어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느꼈는지 제레미는 슬그머니 일어나 있었다. 암살자는 언제 어디서든 인기척을 감지하여 잠에서 깰 수 있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시라고 그녀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요, 단탈리안 전하.” “애가 깨어났다.” “아.”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많이 쇠약해 있겠네요. 바로 꿀물을 먹여야겠어요.” “쇠약하기도 엄청나게 쇠약했지. 이 나를 암살하려고 들었으니.” “예?” 내가 코웃음 쳤다. “오늘 낮에 일어난 것을 숨기고 내가 마차에서 잠들 때까지 매복했다. 내 품에서 단검을 찾아 꺼내서 여기를 찌르려고 했지. 빌어먹을 년.” 나는 목덜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기하는 와중에 화는 더 부풀기만 했고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하, 노예각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리 당부했는데.” 제레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악독한 아이네요. 전하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요?” “처절하게 고문을 퍼부어줄 생각이다. 육체적인 고통을 주진 않겠어. 녀석의 정신머리를 발끝부터 잘게 썰어주어야 이 분노가 풀리겠다.” “허면?” 제레미가 자뭇 흥미로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몬스터 고용창.’ 조용히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F급, E급, D급의 몬스터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인지 선택란이 등장했다. 그중에서 D급을 선택했다. 고용 가능한 몬스터가 목록으로 좌르륵 펼쳐졌다. ━━━━━━━━━━━━━━━━━━━━━━━━━━ [몬스터명(D)]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고문 슬라임      20    1    2    500골드 -노움(하급 요정)    7    2    5    500골드 -고블린 기병      10   10    8    800골드 -고블린 주술사      5   20    5    1000골드 -좀비(*)        2    5    5    100골드 ※마왕 바르바토스(어둠)의 호감도가 50이 되어 특별고용(좀비)이 가능해졌습니다! ━━━━━━━━━━━━━━━━━━━━━━━━━━ 소지 금액이 약 구백만 골드라고 떠올랐다. 마왕성을 짓느라 선금으로 오백만 골드를 쏟아부은 탓이었다. 지금쯤 한창 라피스가 라우라와 함께 목공들을 지휘하며 마왕성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겠지. 나중에 대공들이 보내올 오백만 골드 등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몬스터를 원하는 대로 고용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대부대가 아니었다. 목록에서 오직 하나의 몬스터에만 내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문 슬라임. 한 마리.’ 정말로 몬스터를 고용하겠느냐는 알림창이 떴다. 나는 주저없이 '예'를 선택했다. 그러자 내 발앞에서 보라색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투명한 점액질의 괴생물체가 소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몬스터 중 하나라지만 나와는 인연이 거의 없는 슬라임이 그곳에 나타났다. 옆에서 제레미가 헛숨을 들이켰다. “연금술? 아니, 소환마법……? 게다가 무영창(無詠唱)……?” “나의 유일무이한 재주이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마라.” “물론입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이런 한 수를 숨기셨다니…….” 제레미가 다시 봤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도대체 몇 개의 발톱을 감추고 계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군요. 이면의 마왕이라는 칭호는 실로 단탈리안 전하를 위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소환마법은커녕 파이어볼 하나도 쏘아내지 못하는 것이 나의 실력이었지만, 상대방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저쪽에서 알아서 착각해주면 나는 편했다. 설명할 방법도 없었고. “던전에 죽치고 앉아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을 적에 만든 놈이다.” 나는 손으로 슬라임을 집어들었다. 투명색 슬라임은 자유자재로 몸을 웅크리거나 퍼트릴 수가 있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명령하자 슬라임은 곧바로 작게 오므라들었는데, 손바닥 하나에 올라올 정도였다. “순전히 고문용으로 개발된, 특수한 슬라임이지. 이 아이를 사용한다.” “아하. 그렇군요.” 제레미가 감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감히 전하께 자랑해도 된다면 소인은 이 방면의 프로입니다. 슬라임은 기본적이고 또 정석적인 고문 도구이지요. 전하께선 데이지라는 꼬마애를 성적으로 농락하실 계획인 것이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는 입끝을 음흉하게 들어올리면서 눈웃음을 쳤다. “소인도 살을 째고 뼈를 깎는 고문보다 이쪽이 더 취향입니다. 하지만, 전하. 그 꼬마애가 함락될까요? 수술할 때 보여준 태도도 그렇고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아. 여간내기가 아니지.”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다른 방향에서 공격한다.” “다른 방향이요?” “귀를 가까이에.” 나는 어떻게 데이지를 고문할 계획인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얘기를 들을수록 제레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처음에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가,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고, 종국에는 놀란 얼굴로 바뀌었다. “과연. 소인,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한없이 우아하고 끝없이 마왕답습니다. 오늘 하룻밤에 단탈리안 전하의 여러 면모를 보게 되는군요.” “한방에 나가떨어지지 않겠지만 착실하게 정신을 깎아나가겠지.” 제레미의 귓가에서 얼굴을 때며 말했다. “나는 내일 너와 함께 레라지에를 만나러 떠나야 한다.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할 사람이 따로 선별할 필요가 있어.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이 끝나 있기를 빌지.” “꼬마애가 지금 기절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레미가 키득거렸다. 전형적인 악인의 웃음소리였다. “그냥 지금 끝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야. 자신의 두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기를 나는 바란다.” “단탈리안 전하도 참. 취향도 나쁘셔라……그럼 제가 어디 꼬마애를 깨워보겠습니다.” 제레미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이렇게 흥분되는 건 꽤 오랜만이에요. 위대하고 귀족적인 마왕이시여. 오늘밤 안에 끝낼 테니 부디 소인한테 맡겨주세요. 전하께서는 최고급 관람석에서 느긋하게 지켜봐주시길.”   00182 동족혐오 =========================================================================                        제레미가 행장에서 각종 장비를 꺼내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비장의 물약들이죠.” 맑은 유리병들이 나무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병마다 다양한 색깔의 액체가 찰랑거렸다. 물약 이외에도 지난 번에 보았던 수술칼, 향초, 약초 분말이 상자 칸칸마다 다소곳하게 담겼다. 뭐라고 할까. 약초꾼-의사-조향사를 한꺼번에 섞어놓은 차림이었다. “음. 이제보니 단순한 암살자가 아니라 거진 연금술사구만?” “웬만한 암살대에서 부대장이라도 맡으려면 기본적으로 약제에 밝아야 하니까요.” 독약과 독향, 그런 지식이 필수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암살자는 문무 양쪽에 밝하야 했다. 내가 암살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꽤나 달랐다. 우리 두 사람은 준비를 끝마치고 마차에 들어갔다. 데이지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제레미는 데이지를 곧바로 침대에 눕혀서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데이지의 입안으로 무언가 샛노란 물약을 흘려넣었다. 무엇인가 물어봤더니 약초 몇 가지를 녹인 꿀물이었다. “포션을 지나치게 사용한 후유증에다……어휴, 단탈리안 전하. 심하게도 때리셨습니다. 입술 까진 것 좀 봐요. 후유증보다 오히려 이쪽이 심각한 것 같은데.” 촛불이 마차를 붉게 밝혔다. 제레미가 데이지의 누더기옷을 벗겼다. 그리고 끓인 약물에 수건을 담가서 데이지의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닦았다. “그래도 여자인데 얼굴을 망가트리면 안 됩니다.” “네가 말하니까 말의 무게가 다르군.” “후후.” 제레미는 얼굴의 절반이 화상에 흉하게 지져 있으니까. “그 녀석이 나를 도발했어.” 털썩, 하고 내가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더럽게도 앙큼한 꼬맹이다.” “헤에, 도발했다고요? 무슨 말로 도발했길래 전하와 같은 분께서 넘어가셨어요? 언제나 냉정하시고 침착하시면서. 그거 소인도 알고 싶네요.” “쓸데없는 관심은 끊어라.” 내 어머니를 언급했지. 나 자신이 놀랄 정도로 격분했다. 아직도 화가 줄어들지 않았고. ‘저 년은 내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꿰뚫고 있다.’ 맞은편에서 치료행위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지난 번 화전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 살짜리 소녀는 마치 이쪽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눈에 훤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내 호의를 얻는지, 어떻게 해야 나의 이해와 자비를 이끌어내는지, 마치 오래된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꼭 그처럼 꿰뚫어 보았다. 만약 데이지가 암살을 시도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간신히 분노를 삭혔을 것이다. 어차피 용사, 아니 용사의 찌꺼기와 같은 것.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죽이려 든 것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정작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 따위, 결코, 절대로, 다시는 더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저 꼬마는 일부러 내 신경을 건드렸어. 수술이 어지간히도 아팠나보지, 빌어먹을 년…….” “전하의 신경을 일부러 건드려요? 거기에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곧 뒈져 나자빠져도 미안하다 말하긴 싫다는 거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녀석은 이쪽의 마음을 읽어서 기고만장할지 모르겠어도, 그깟 어린애가 생각하는 수준이야 나한테도 훤했다. 그럼. 뻔하고 말고. 그러나 제3자인 제레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죄송하지만, 전하. 무슨 얘기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존심 싸움이다. 암살을 시도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하기는 싫다. 그럼 다시는 내 암살을 시도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관용에 기대어서 손쉽게 용서받기도 싫다.” 저 자식은 나랑 심리적으로 대등한 관계에 놓이려는 것이다. “……설마 자기가 이렇게 맞을 걸 알면서 그랬다는 말씀이에요?” “말했지 않는가. 알면서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도했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한테 선전포고를 날렸어. 주인과 노예가 되었으니 평탄하게 관계를 하나씩 쌓아나가거나, 그딴 것은 눈꼽만치도 바라지 않는 거다. 서로가 서로의 신경을 긁어대며 사이좋게 지옥 같은 나날에 떨어지자……그런 얘기겠지. 빌어먹을 년.” 게다가 나한테 주도권을 뺏기기 싫다는 계산까지 끼었을지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내 계획대로라면 수술 직후 몸이 약해진 데이지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했다. 그게 진심이 담긴 은혜이든 거짓부렁이든 상관없다. 친절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데이지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나는 데이지에게 수많은 친절을 강요할 수 있는 반면, 데이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친절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데이지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나한테 밀리겠지. 그게 시나리오였다. 즉, 관계역전을 노린다면 바로 오늘밤이 기회였다. 나를 도발해서 실컷 쥐어패도록 만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녀석을 노예로 만들었고, 무시무시한 수술을 강요했을뿐더러, 마지막으로 병자이자 환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내가 심리전에서 불리해졌다. 이제 웬만큼 많이 친절을 베풀어도 그건 순수하게 친절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보상이 되어버렸다. 발칙하기 짝이 없는 년! “…….” 제레미는 나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른 한편으로는 떨떠름하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단탈리안 전하. 혹시 전하께서는 상대방과 마주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심리구조상 어찌해야 우위를 점하는지……? 더군다나 이 꼬맹이도 그런다구요?” “당연하지.”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서열 제71위의 최약체 마왕이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 의중조차 파악하지 못해서야 곧장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야. 지피지기 백전불태이다. 기본 중 기본 아니냐?” “물론……의중을 파악한다고 간단히 표현해버리면 당연히 그렇지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어느 누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자신의 말투와 신체를 전부 바쳐서……아닙니다. 아니에요.” 제레미가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게 모략가의 방식이라는 거군요. 소인도 이해했습니다. 참, 터무니없는 삶의 방식이 있었네요. 그런데 이 아이가 전하와 동류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척 보면 알아. 아주 썅년이야.” “…….” 제레미가 치료하는 손을 멈추고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고 도로 치료에 집중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뭐라 중얼거리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자, 데이지는 완전히 눈을 떴다. 약초물의 효과인지 입술이 터진 부분도 말끔하게 나았다. 예전처럼 새하얀 살결이 돌아왔다. “…….” 데이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제레미를 차례대로 훑더니, 제레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나. 별 말씀을.” 또 다시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진짜 정진정명 우라질 꼬맹이였다! 방금 인사는 제레미에게 한 것이라기보다 나한테 대놓고 보여준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당신에게는 감사 인사 따위를 절대로 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왼손으로 겨우겨우 품속에서 나무공을 꺼내들었다. 이걸 손안에서 굴리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차악 하고 손바닥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자 그나마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 바로 이거다. 진정해라, 단탈리안……나보다 열 몇 살 어린 꼬마다. 뻔한 수작에 넘어가지 마라. 일시적인 기습에 주도권을 뺏겼을 뿐이지, 녀석에겐 이제 별다른 수가 없다. “장래가 유망하신 암살자 나으리께서 깨어나셨군 그래.” 내가 미소를 지었다. 분노를 미소로 덮어씌울 정도는 여유가 돌아왔다. 그래도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튀어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는지 모르겠어. 네가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진 사이 네 부모님의 왼팔과 왼다리가 무사한지 궁금하지 않은가?” “……후.” 여자애가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코웃음이라니. 이건 진짜 사람 꼭지 돌아버리게 하는 짓거리였다. 얼굴은 무표정한 주제에 콧소리로만 비웃으니 더더욱 열받았다. 나는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서 나무공을 꽈악 쥐었다. 다시 한번 저 재수없는 놈에게 싸대구를 날리고 싶었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 코웃음을 흘리는 자식들은 죄다 단두대에 매달아 사형시켜야 마땅했다.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건 흉기였다! 흉기에 반응해서 싸다구를 날리면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란 말이다. 내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좋아. 서로 불필요한 말은 생략하지.” “저는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습니다.” 데이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살인충동이 일어났다. “……네가 간밤에 저질러준 짓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멋진 선전포고였다. 그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준비했지. 이게 무엇인지 보이나?” 내가 오른손을 들이밀었다. 투명한 점액질이 둥그런 모양새로 꿈틀거렸다. “슬라임이군요.” “이제부터 이걸 네 몸안에 집어넣을 거다. 부디 마음에 들어하기를 바라마.” “원하시는 대로.” 대답이 대답마다 짧게 끝났다. 죽어도 기세에서 밀리기 싫다는 얘기였다. 아주 도도해서 멋지다, 용사 후보 데이지. 어디 며칠 후에도 그 표정이 유지되는지 일일여삼추의 심정으로 기대하겠다. “제레미.” “예.” 제레미가 슬라임을 넘겨받았다. 그녀가 슬라임의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자, 슬라임이 자연스럽게 두 덩어리로 갈라졌다. “자아, 데이지 양. 다리를 벌리세요.” “…….” 데이지는 그제야 슬라임이 어떤 용도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시선으로 슬라임을 바라보더니, 재차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보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인 것 같았다. 심장에 마법각인을 새길 때 이미 볼 것 못 볼 것 전부 나눈 사이인데 왜 그런가? 하지만 왠지 귀여워서 적당히 고개를 돌려주었다. 머리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앞으로 데이지 양의 교육을 담당할 예정입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곤란해요.” “……알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러하다. 제레미는 둘로 나눈 슬라임 중 하나를 데이지의 '안'에 삽입한다. 아마도 투명한 슬라임은 머뭇거리면서도 꾸물꾸물 서서히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기어들어가겠지. “…….”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데이지가 숨을 삼키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물질, 그것도 몬스터의 일종이 자기 몸안으로 들어가는 감각은 지극히 생소할 것이다. 일 분 정도가 흘렀다. 나는 심심해서 발로 땅바닥을 두들기고 있었다. 제레미가 말했다. “예, 됐어요. 그럼 다음 걸 집어넣을 게요.” “……?” 지금쯤 안쪽으로 들어갔던 슬라임이 틈에서 빠져나왔으리라.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예상 외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겠지. 눈초리가 이쪽의 속내를 파악하려고 열심히 내 얼굴을 쏘아봤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건 말건 제레미는 두 번째 슬라임을 흘려보냈다.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첫 번째 슬라임과 달리 두 번째 슬라임은 빼내지 않았다는 것. 즉 두 번째 슬라임이 데이지의 몸안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혹시 불편한 느낌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데이지는 이걸로 정말 끝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거의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머나, 잘 됐네. 그럼 성공한 거예요.” 제레미가 상냥하게 말했다. “자아. 일어나서 망토라도 걸치세요. 며칠 잠잤더니 엄청 배고프죠? 솥에 따뜻한 스프가 남아 있으니까 얼른 가서 한 접시 먹으세요.” 제레미가 데이지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망토로 데이지의 몸을 둘러쌌다. 낡아서 헤졌지만 방한마법이 걸린 상등품이었다. “아, 그리고 저를 부를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예,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제레미가 데이지를 데리고 마차에서 나갔다. 퇴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데이지는 의뭉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뭘 알겠는가. 나는 마차에 홀로 남아 작게 웃었다. 아무리 똑똑해도 그래봤자 열 살이다. 이런 방면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점을 노린다……. 상대의 약점을 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겠지.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 어떤 표정을 지어줄지 진심으로 기대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일단은 마왕들을 만나고 와야 한다……. 접견을 끝내고 돌아오는 즉시 오늘밤의 복수를 해주지.   00183 동족혐오 =========================================================================                        * * * 평원파에 속한 마왕이라 해서 만나기 쉽지는 않다. 며칠 전부터 서열 제14위의 레라지에와 접촉을 시도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곱지가 않았다. 상대측에서는 뚜렷하게 난색을 표현했다. 왜 공식적인 통로를 이용해서 만나려 하지 않는가, 하고. 비공식적인 창구로 다가오는 저의가 무엇인가. 애시당초, 합스부르크 전역에 참가하고 있어야 할 마왕이 왜 뜬금없이 프랑크에 있는가……. 요컨대 수상쩍다 이거였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엔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엇이든 생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값어치가 있었다. 현재 평원파에서 나는 실세로 떠올랐다. 파벌 권력투쟁에서 한 끗발 밀렸을지언정 마왕군 서열 제14위라는 자리는 카드게임으로 얻는 물건이 아니었다. 레라지에가 나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예상대로, 레라지에는 신속하게 우리가 어디서 만나면 좋을지 알려왔다. 접견 장소가 상당히 특이했다. “인간의 도시에서 만나자니. 저쪽 전하도 상당히 엉뚱하네요.” “게다가 잘 봐라. 오페라 초대장까지 정중하게 끼어 있어.” “어머나, 정말. 오페라 극장에서 밀회라도 나누자는 것일까요.” 제레미가 초대장을 읽으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마왕이라면 보통 마왕성에서 회견을 열기 마련이다. 자기 홈그라운드이니까. 반면에 인간의 도시는 마왕들에게 꽤나 위험한 장소이다. 언제 어디서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 “저희 암살대가 먼저 도시에 가서 잠복해 있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없다. 아마 레라지에는 나의 배짱을 시험해보려는 생각이야. 수행원은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가는 편이 낫지.” 나는 제레미만 데리고서 도시로 이동했다. * * * 저녁이었다. 우리는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마차를 타고 오페라 극장에 도착했다. 극장 앞에서 거지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동냥질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자리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이 멀찍이 쫓겨났다. 오페라 극장으로부터 희미하게 연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한 여자애가 얼른 뛰어왔다. “마담, 한푼만요.” 여자애가 두 손을 벌린 채 제레미한테 들러붙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어머나. 저 같은 사람을 축복해주다니 고마워라.” 제레미가 아이 손에 동전을 올려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담, 신의 축복이 함께할 거예요.” 여자애는 과장스럽게 인사한 다음,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눈빛으로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웃으면서 아이의 손바닥에 은화를 떨어트렸다. 어둑어둑한 저녁에도 은화는 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자애가 깜짝 놀랐다. 내가 아이한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난 파리시오룸에서 이름난 포주이다. 널 잡아가서 창녀로 키울 거다. 평생 노예로 써먹어주마, 꼬맹아. 대신 일주일마다 은화를 한웅큼 안겨주지. 어떠냐?” “꺄, 꺄아아악!”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면서 냅다 줄행랑쳤다. 나는 꼬마의 등이 점점 길거리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그러자 제레미가 옆에서 어이없어했다. “방금 왜 그러셨어요?” “꼬마애는 이제 은화를 볼 때마다 경계하겠지. 상대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약간의 의심을 적선했을 따름이다.” “……저는 가끔 무슈가 대인배여서 평범한 사람 눈에 미친 것처럼 보이는 건지, 아니면 미쳐서 마치 대인배인 것처럼 보이는 건지 헷갈려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였다. “알 게 뭐야. 미친 대인배겠지.” 제레미가 작게 웃었다. “우문에 현답입니다. 저의 멋진 신사 님.” 하고 그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왔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은 귀족 남성과 그 애인 역할을 연기했다. 나는 가발을 써서 뒤통수에 조그맣게 난 외뿔을 감추었고, 제레미는 모자에다 망사를 달아서 흉터 난 얼굴을 가렸다. 주변에서는 그저 평범한 커플로 보이겠지. 상류층 인간들이 극장 입구를 번잡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 의하면, 이번 오페라는 초연인 데다가 대단한 배우까지 출연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시 사교계에 들락날락거리는 거리는 남녀노소는 전부 극장에 몰려왔다. 극장의 시종이 초대장을 받고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객실이었다. 바로 정면에서 무대가 보이고 있었다. “헤에. 가장 비싼 자리네요.” “그래?” “무슈는 오페라에 흥미가 없나봐요?” 내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오페라를 보러 온 건 처음이었다. 공연이 기대되거나 그런 마음은 단언컨대 일절 없다. 내 예술적 취향이 얼마나 저질스러운지는 스스로 잘 안다. 나는 자그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면서 졸아본 경험이 있는 남자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 교사가 나를 경악스러운 눈동자로 쳐다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음, 낮잠 자기 참 좋은 수업이었어. “레라지에 전하는 언제 올까요?” “사람들이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에 오겠지.” 반면에 제레미는 이런 게 취향인 것 같았다. 아까 전부터 촐랑촐랑 흥분하는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오페라 공연은 덤이고 레라지에와 비밀리에 접선하는 것이 본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외의 면모라서 약간 재밌었다. 이런 문화 활동은 나보다 라우라가 어울릴 텐데. 공작가의 차녀인 그녀라면 분명히 예술적인 소양도 상당하겠지. 영화나 연극 따위를 보고 나오면서 ‘이번 공연은 이런 면에서 좋았다’, ‘다만 연출이 조금 과하더군. 더 담백하게 하는 편이 좋다’, ‘연출가의 해석은 다소 주관성이 강해서……’, 이렇게 자기 소감을 열심히 늘여놓는 부류일 거다. 십중팔구. 라피스는……지극히 냉정한 비평가처럼 공연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할 것 같군. ‘주인공 배우, 제3막 제2장 열다섯 번째 대사에서 혀를 씹었습니다’라든지, ‘여자 배우는 3년 이내 연기 방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배우 생명이 길지 않을 것입니다’라든지. 그리고 실컷 비평해놓은 다음 마지막에 가선 ‘평범하게 좋은 연극이었습니다’라고 말하리라. 바르바토스는 그냥 곯아떨어진다. 틀림없다. 녀석은 영화관에서 엄청 크게 코를 골면서 자는 민폐 관객이다.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기지개를 쭉 펴고 ‘잘 잤다!’ 하고 씨익 웃겠지. “저거 봐요, 무슈. 이제 시작하나봐요!” 지루한 시간을 상상으로 떼우고 있자, 제레미가 나한테 바짝 몸을 붙였다. 두 개의 큼직하고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내 팔뚝을 눌렀다. 그녀는 평소보다 확실히 더 들떠 있었다. 그렇게 오페라를 좋아하나? 오페라는 예상대로 재미가 없었다. 버림받은 왕자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은 나라도 멸망시키는 이야기였다. 제레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평소에 연기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무대를 바라보았다. 글쎄. 내 개인적인 감상은, 왕자가 천하의 멍텅구리라는 것이었다. 왜 자기가 반역하리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가? 왜 여동생이 외국에 시집을 갔다고 해서 분개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동생을 통해서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면 쿠데타가 한결 쉬워지겠지.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모습만 보여주어야 했다. 저렇게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니 애비도 당연히 왕자를 경계한다. 조잡하군……너무나 조잡하다.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닌가. 저 녀석을 왕세자로 지목한 왕도 어지간히 정신머리가 돌아버린 양반이다. 귀족들은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지 않고 뭘 하는가? 저 나라엔 멍청이밖에 없는가? 얼른 죽어라. 너 같은 정치인은 얼른 죽는 편이 인민과 국가를 위한 길이다. 이 연극이 베드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폭동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얼른 목을 매달고 이 지루한 공연을 끝장내라. ‘……그나저나.’ 내가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관객들은 모두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레라지에가 안 오는군.’ 오페라는 중후반을 내달리고 있다. 레라지에가 도착해도 진즉에 도착했어야 한다. 밀담을 나누는 데 넉넉하게 잡아서 세 시간은 확보해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하고 벌써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레라지에는커녕 그의 수하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함정인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레라지에가 나를 인간들한테 넘겨버릴 가능성. 그런 것이 있겠는가? ……없다. 바르바토스의 분노를 두려워 하면 그럴 리 없다. 레라지에는 이쪽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공격해올 가능성은 극히 적다. “저기, 단탈리안 전하.” “음.” 제레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인간의 도시에서는 위험하니까 가급적 전하라 부르지 말기로 약속했는데도. 아마 제레미도 나처럼 현재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지만 제레미의 말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엇나갔다. “빨아드릴까요?” “……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레미를 쳐다보자, 그녀는 평소처럼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얘가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 “아무래도 단탈리안 전하는 공연을 전혀 즐기지 못한 것 같아서요. 주인님이 지루해하는데 어떻게 시녀인 저 혼자서 마냥 신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전하도 즐길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바르바토스 전하와 적잖게 고급스러운 취미를 즐기셨다는 사실,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밀폐된 야외에서 하는 것도 분명히 전하의 마음을 만족시켜드릴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극장에서 펠라티오를 시키겠는가. 바르바토스가 제멋대로 마왕군에 염문을 뿌려댄 탓에 나의 이미지가 영 이상한 방향으로 성립되었다. 나에게는 노출증 따위가 없었다. “난 됐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손사레를 치려던 때였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진지하다는 걸 깨닫고, 내 머리에 좋은 아이디어가 스쳤다. “……아니. 의외로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어.” “그렇지요?” 제레미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입끝이 따라 올라갔다. “좋다, 제레미. 허락하지. 최대한 음란하게 빨아재껴봐.” “분부대로. 이래봬도 온갖 기술에 통달했습니다. 실망하시지 않을 거예요.” 제레미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허리춤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깥으로 나온 나의 물건을 제레미가 낼름 핥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뜨거운 입안이 내 것을 완전히 감쌌다. “읍……아읍, 하읍…….” 아랫도리에서 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두 눈으로 극장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자아. 어디에 있냐, 마왕 레라지에여.’ 우리가 자리한 객실 좌석에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레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극이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 객실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눈치 챌 터.’ 손님이 갑작스럽게 상스러운 짓을 한다. 엄청난 무례이다. 그러나 손님을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상당한 무례. 즉, 우리는 지금 레라지에한테 항의하고 있다. 우리를 초대해놓고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극장에서 이곳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좌석들의 양쪽 날개 끄트머리 정도일까. 나는 눈을 왼쪽 오른쪽 차례대로 돌려가며, 어디에서 반응이 나오는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노래가 중간에 끊겼다. 악단의 음악은 계속해서 연주되고 있는데, 남자 주인공이 별안간 노래를 멈춘 것이었다. 물론 잠깐뿐이었다. 주인공은 다시 서둘러 노래를 이어나갔다. 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과연. 거기 있었는가.’ 나의 시선은 무대 위. 가면을 쓴 남자 배우로 향해 있었다.   00184 동족혐오 =========================================================================                        “의외의 장소에 있었군.” “츄으읍……으응.” 제레미가 조심스럽게 내 물건에서 입을 뗐다. 귀두가 입술에 살짝 걸렸다. 제레미는 하아, 하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의 절반이 흉터에 덮여 있었다. 누군가는 흉칙하다고 꺼려하겠지. 나에겐 색다른 매력으로 비추었다. “반응이 나왔나요, 전하?” “아아. 어디인지 알면 놀랄걸. 레라지에 전하께서는 자그마치 무대 위에 계셨다. 그것도 조연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야.” “어머나. 그분도 취미가 꽤 특이하네요.” 제레미가 웃으면서 다시 얼굴을 숙였다. 뜨거운 혀가 음경을 집어삼켰다. 입 전체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마치 저절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펠라 솜씨에서는 제레미가 라우라보다 한 수 앞섰다. “오페라 배우라는 게 취미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으응, 응, 흐으응…….” 제레미가 교성이 섞인 콧소리로 대답했다. 절대 아니지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긴 오페라에 출연하려면 연기는 물론이고 음악까지 배워야 하리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흐음. 그럼 레라지에는 제법 진지하게 오페라에 몰두한다는 얘기인데……. “좋지 않은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제레미.” “하웁?” “아. 멈추지 말고 듣기만 해. 기분 좋으니까.” 내가 무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랫도리에서 쾌감이 한층 강해졌다. 제레미가 얼굴을 앞뒤로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귓가에 오페라 배우들의 노래와 제레미의 질퍽한 침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아까 전에 비하면 음악의 수준이 훨씬 높아진 게 분명했다. “처음에 레라지에가 우리랑 만나는 것을 꺼려했잖아. 나는 그냥 단순히 우리의 의도를 모르겠어서 간을 재보는 거다 싶었는데……만약 레라지에가 열광적인 오페라 배우라면, 자기가 나오는 오페라의 초연을 포기할 수는 없을 거 아냐?” “……으응, 응, 으으읍.” 제레미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혹시, 만에 하나의 이야기지만. 그냥 공연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우리와 만나는 걸 망설인 걸지도 모르겠다. 듣자하니 공연은 내일도, 내일모레도 열리는 모양이지 않냐. 그때가서야 시간이 빈다는 얘기인데, 레라지에 입장에서 우리를 사흘씩이나 기다리게 만들기는 곤란했을 테고…….” 내가 곤란함을 얼버무리려고 웃었다. “오페라 공연을 포기하기도 싫다. 우리와 만나는 걸 거절하기도 싫다. 그렇다면 차라리 초연 공연에 초대해서 '제가 바로 남자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깜짝 놀랐지요!' 하고 자그마한 유흥을 안겨주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어……아, 슬슬 싼다?” “응, 흐흥, 응, 응――으읏, 흐으읍.” 음경이 대여섯 번 떨면서 정액을 뱉어냈다. 제레미는 정액이 전부 나올 때까지 입을 멈추지 않았다. 꿀럭, 하고 모조리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사정의 쾌감이 짜릿하게 흘렀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나는 레라지에의 장단을 아예 무시해버린 꼴이 되는 거야. 내 예술적 취향이 이런 데서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상대방에게 최악의 인상을 심어주게 생겼네요.” 제레미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얘기했다. “어쩌죠? 단탈리안 전하, 그렇지 않아도 공연 내내 열일곱 번이나 하품하셨잖아요. 오페라 배우로서 레라지에 전하의 면목이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우물 구덩이를 팠을걸요.” “젠장할.” 나는 억울했다. “애당초 왜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을 나까지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지루한 공연에 이끌려와서 도리어 불평하고 싶다고.” “원래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상대방도 좋아해주기를 바랍니다. 배우처럼 자존심이 높은 직종, 타인의 관심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일에 종사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아마도 레라지에 전하는 단탈리안 전하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래와 연기를 보여준 것 아닐련지…….” 제레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녀석은 지금도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라고 좋아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근성이 뿌리부터 썩은 여자였다. “이게 어디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들어? 먼저 빨아주겠다고 한 건 너잖아.” “허락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전하랍니다. 중간에 멈추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하께선 진상을 깨닫고 나서도 결코 멈추시지 않았지요. 실컷 즐기셨으면서 이제 와서 소인을 책망하려는 것인지요.” “우와, 요 년 봐라.” 그럼 한번 시작한 것을 관두겠는가?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적어도 남자가 그러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시작하면 태풍이 몰아닥치든 테러리스트가 총을 쏴갈기든 끝내야 하는 것이었다. “으휴. 됐다, 됐어. 널 욕해서 내가 뭐 좋은 걸 얻겠냐. 아무래도 구라를 까야겠다.” “구라요? 누가 봐도 무례한 짓을 저질러버린 게 분명한 이 상황에서 거짓말이 통할 것 같지 않습니다만.” “소인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지요, 제레미 님. 야. 한번 더 빨아.” 제레미가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또요? 정말요?”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빨라면 빨아.” “아니, 그보다도……사정한 지 몇 초 지났다고 또 합니까.” 제레미는 퍽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내 정력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붉은 흉터 암살대의 엘프 대장이여. “내가 마왕성에서 일박이일 내내 밥만 먹고 박아본 적도 있는 양반이야. 오페라 끝날 때까지 네가 빨아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간다.” “헤에.” 그러자 제레미가 헤에, 하고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 승부욕이 자극된 듯했다. “소인이 이래봬도 화상을 입기 전까지는 암살대에서 주로 미인계를 맡았습니다만.” “아서라. 방금도 별로 기술이 대단하지 않더구만, 뭘.” “그야 공연 도중이었으니까요. 실례합니다만, 단탈리안 전하. 소인이 진심으로 나서면 전하께서는 신음을 주체하실 수가 없어서 그만 주변에 폐를 끼치고 말 겁니다.” 별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서 시합이 시작되었다. 과연, 제레미는 아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음경을 애무했다. 마치 입 전체가 빨판이 되어 흡입해버리는 느낌이었다. 차원이 달랐다. 공연이 끝나기까지 고작 한 시간 동안 어림잡아 일곱 번을 사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목소리를 참는 데 성공했다! 일곱 번 사정할 때까지 단 한번도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나의 입술은 난쟁이족이 만든 성문마냥 굳건했다. 공연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제레미도 스퍼트를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하마터면 흑, 하고 신음할 뻔했지만 참아냈다.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막이 내렸다. “마, 말도 안 돼요……이럴 리가 없어요. 이건 꿈이에요!” 갈채 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제레미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한때 프란타판스의 흑장미라 불렸던 제가……아무리 그래도, 정말 한번도 소리를 내지 않다니…….” “이게 마왕의 격이라는 물건이다, 어리석은 마인이여.” 쿨하게 말해주었다. 내가 바지춤을 올리고 일어서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동안 제레미는 바닥에 주저앉아 절찬리에 좌절하고 있었다. 뭐, 그녀 덕분에 지루하기만 한 오페라를 한껏 만끽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해주겠다. 나는 박수 시간이 끝나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이미 관객이 잔뜩 몰려 있었다. 사람들은 공연에 무척 감명을 받았는지 배우들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극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환호했다. 그 정점은, 레라지에로 추정되는 배우가 등장했을 때였다. “쟈키 베르나르!” “오, 베르나르! 여길 봐주세요! ” “꺄아아악! 제홈므! 여섯 번째 베르나르!” 레라지에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코 아래의 입가만 드러났다. 가명이 쟈키 제홈므 베르나르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배우라는 느낌이 풍겨났다. 레라지에가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나 오늘 기절하기로 단단히 마음 먹었으니 말리지 말라는 기세로 마음껏 비명을 질러댔다. 대단한 인기였다. 레라지에의 양팔은 금세 꽃다발로 가득 찼고, 한발 늦어서 꽃다발을 선물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우나마 배우를 향해 꽃송이를 흩뿌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다.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는군.” “소인이 더더욱 안 좋은 정보를 드려야겠는데요. 프랑크의 오페라 배우 베르나르라면, 마계에서 사는 저한테도 익숙한 이름이에요. 대대로 음악이나 연기에 종사하는 가문이라 들었어요.” “인간계를 뛰어넘어 마계까지 명성이 드높은 배우 양반이시라.” 볼 것도 없었다. 자존심이 높다 못해서 하늘을 찌르는 성격이었다. 대대로 배우를 했다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이겠지. 마치 후손이 선대를 이은 것처럼 레라지에 본인이 위장했으리라. 그 선조와 후손이 사실은 모두 레라지에가 혼자서 연기한 것이고. 이렇게 되자 자신의 감식안이 조금 절망스러웠다. “나는 세계 최고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하품했던 거냐…….” “어쩐지 너무 잘한다 싶었어요. 전하만 아니었으면 소인도 끝까지 봤을 텐데, 아휴.” 어쩌겠는가. 물은 이미 쏟아져도 한참 쏟아졌다. 나는 제레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레라지에는 천천히, 군중의 파도를 겨우겨우 헤쳐나가면서 극장 출구로 다가왔다. 이윽고 그가 우리 앞까지 접근했다. 우연히 다가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의도적으로 우리한테 온 것이었다. 내가 활짝 웃었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무슈 베르나르.” “이거, 이거. 귀한 손님께서 찾아오셨군요.” 레라지에 역시 환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렇게 봐주셨다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무슈 볼레.” 겉으로 듣기에는 아무런 억하심정이 들어 있지 않았지만, 일단 말 자체가 불안했다. 정말로 훌륭한 연기였다 생각하느냐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서열 제14위의 마왕은 단언컨대 괴물 중 괴물에 해당했다. 나 따위는 주먹 한방에 골로 가겠지. 그런 괴물이 나를 나쁜 방향으로 비꼬고 있었다. 어이구야. 두개골이 지끈거렸다. 정말이지 삶에서 쉽게 풀리는 일 하나 없었다.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물론 진심입니다. 마드모아젤 바르바께서도 귀하의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신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계십니다. 아시겠지만, 그분께선 이곳에 올 만한 사정이 안 되니까요.” “호오, 그렇습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바르바란 물론 바르바토스를 가리켰다. 내가 단지 개인적인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 바르바토스의 의도를 배달하러 왔다고 암시한 것이었다.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들으면 조금 얌전해질까 싶었는데, 레라지에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레라지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우리 사이에 쌓인 회포를 풀기에 썩 적당하지 못하군요. 어떻습니까, 무슈 볼레?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 마차에 동석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런. 올해 들어 받아본 초대 중에 가장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해야겠군요.” 심장에 영 좋지 않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당연히 수락하겠습니다, 무슈 베르나르. 다른 관객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당신의 곁을 차지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제 뒤를 따라오시지요.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하하.” 레라지에는 바로 등을 돌려서 출구를 빠져나갔다.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얼굴 표정과 다르게 화가 엄청나게 쌓였다는 증거로 보였다. 나는 제레미와 함께 그의 뒤를 졸레졸레 쫓아갔다. 우리는 군중을 뚫고 간신히 마차에 올라탔다. 붉은색의 화려한 마차였다. 무려 네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었는데 이 도시에서 레라지에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하게 했다. 설마했는데 출신마저 귀족으로 위장해놓은 것 같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레라지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배우를 휘감던 화사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우리 평원파의 최고 참모 나으리.” 레라지에가 가면을 벗었다. 가면 너머에는 조각상처럼 생긴 미남이 있었다. 까만 곱슬머리가 포도처럼 주렁주렁 자라 있었다. “미천한 소인의 연기는 잘 관람하셨는지 모르겠군. 하긴 사정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겠지. 배우로서 이만한 영광은 겪어본 적이 없다네.” 레라지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명백히 이쪽에 적대적이었다. 입맛이 썼다. 자아, 변명이 먹혀들어야 할 텐데…….   00185 동족혐오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슈 베르나르.”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 게냐? 하. 바르바토스의 총애를 받아 아주 기고만장하도다.” 내가 의도적으로 가명을 입에 담자, 레라지에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모른다고 잡아떼니 분노할 법했다. “썩은 돼지 내장의 악취가 풍기고 있다. 네 녀석의 자만심이 아니더냐. 합스부르크에서 재미 좀 봤더니 프랑크도 마찬가지라 여겼다면 어리석은 오판이다, 어린 마왕아. 이곳에는 마왕의 성역도 없으며 검은 산맥도 없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레라지에가 내뿜는 기세가 대단히 사나웠다. 자칫 이쪽의 눈가가 떨릴 정도였다. 그동안 내가 수많은 상위 마왕을 상대하지 않았다면 오금을 저리고 당장 엎드렸겠지. “레라지에 전하. 지적하신 대로 저는 어리고,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허나 단 하나의 진실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몸이 공포를 느끼는 것과 무관하게 혀를 굴릴 줄 알았다. 마치 전국시대에 제왕들을 상대하며 한평생 전전하던 유세객이 그러했듯이. “합스부르크든 프랑크든 그곳이 어디인지 상관없이 마왕은 마왕이요, 인간은 인간입니다.” “뭐라?” “마왕은 인간의 적이고 인간은 마왕의 적……그렇지 않습니까?” 레라지에가 인상을 더욱 더 구겨졌다. 나는 다만 예의바른 청년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백하건대 저는 레라지에 전하를 만나기를 제법 기다렸습니다. 평원파의 다른 마왕들은 레라지에 전하를 다소 무시하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지요. 전쟁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 그래봤자 기본이지만, 그래도 기본입니다.” “…….”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 눈에 띄지 않거니와 전공마저 적습니다. 레라지아 전하께서 자처하신 임무는 그런 종류입니다. 틀림없이 전하께선 마왕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시고, 월맹군에 헌신적이시겠지요……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레라지에는 표정이 잠잠해졌다. 그의 격정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전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적잖게 실망스러웠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의 문화에 열의를 다하시는 그 모습은? 인간은 우리의 적입니다.” “흥.” 레라지에가 코웃음을 쳤다. 흥이 식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들어 이름 깨나 날리기에 어떤 놈인가 싶었더니……단순한 '마왕'이었는가.” 레라지에는 마차에 놓인 상자에서 포도주를 꺼냈다. 맨손으로 코르크 마개를 따더니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단순한 마왕이라니요?” 나는 더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까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네놈이 재미없다는 뜻이로다, 어린 마왕아. 진지함이라는 햇빛을 쐬어 세상의 미묘한 그늘과 그림자를 모두 쫓아내버리고, 청소라는 명목 아래 모든 사물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만들어버리지. 내 이래서 평원파의 동지들을 적이 싫어하니라.”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라지에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레라지에는 젊은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노인처럼 말했다. 미남이 늙은 어투로 말하는데 그것이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눈앞의 마왕에게는 젊은 청년과 늙은 현자의 공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던지마.” 레라지에가 비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은 브란덴부르크의 영지를 약탈하지 않았을뿐더러 영지민의 안전과 자유까지 약속했다. 단순히 인간을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다. 어째서 그리했는고?” “숙원은 사사로운 감정에 앞서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브란덴부르크의 인간을 죽이면 지금 당장은 통쾌하겠으나, 대륙 정벌이 이루어질 날은 그만큼 멀어지겠지요. 우리의 염원을 위해서라면 저는 얼마든지 인간의 더러운 악취를 참을 수 있습니다.” “크크. 우리의 염원이라…….” 레라지에가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렇게 평원파스러운 꼴통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바르바토스가 키워둘 만도 하다. 자기 대신 열심히 짖어대는 개새끼 한 마리가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을꼬.” 내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레라지에 전하. 송구합니다만, 혹시 지금 군단장 각하를 비판하신 것입니까?” “크하하하!” 레라지에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주인님에게 충실하기까지! 실로 가관이로다. 왜 아주 바르바토스 앞에서 멍멍거리지는 않았더냐. 크크. 네 같은 놈에게 합스부르크가 절단났다니 대륙 중부의 꼬락서니도 알 만하다.” “…….” “오냐. 바르바토스가 왜 네 녀석을 나한테로 보냈는지 알겠도다. 머리 돌아가는 수준이 어린애나 다름없으니 바르바토스인들 오죽 답답했겠는고.” 레라지에가 이제 반쯤은 경멸이 섞이고 나머지 반쯤은 동정심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경멸과 동정심,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완벽하게 깔본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 한 가닥을 지었다. ‘먹혀들었군.’ 지난 몇 년 동안 능글맞고 음흉한 마왕들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납득시키는 것만이 유세술에서 능사가 아니었다. 화술에도 전술이 있고 전략이 있어, 전투에서 패배할지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상대방을 감탄시키지 않아도 괜찮다. 상대방에게 호의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 전형적인 꼴통을 연기한다. 어리석고 생각이 짧은 인물인 것처럼 군다. 상대방은 '이놈도 그런 놈이구나' 하고 간단하게 납득해버린다. 이렇게 되면. “네 녀석, 단탈리안이라고 했더냐. 인간의 도시에서 보름이라도 머물러본 적이 있는가?” “……아니요. 없습니다만.” “크흐. 보름조차 살을 맞대보지 않고서 인류를 멸절하겠다고 떠들어대니, 이만한 어릿광대 연극을 구경한 적이 없도다. 한번도 보지 못한 산맥을 등정하겠다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상대는 자기가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한다. 상대에겐 더 이상 이쪽을 탐색할 필요가 없다. 정찰이 전부 끝난다고 여긴다. 그는 이쪽이 경계할 만큼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시해도 좋다고 판단한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노출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레라지에 전하. 그런 것은 현재의 대국(大局)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국? 지금 대국이라 했더냐? 크하하. 어찌나 내 어린시절과 이렇게나 닮았을꼬.” 레라지에가 포도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예전에 생각없이 쏘아댄 화살이 이제서야 거꾸로 내 심장에 처박히는 듯하여 가히 흥미롭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녀석이 대국을 논하자니 꽤나 볼 만하지 않은가. 좋다. 어디 대국을 논해보거라.” “아시다시피 우리 마왕군은 다시금 내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레라지에의 경멸에 기분이 상했지만 간신히 견뎠다는 분위기를 내풍기면서. 레라지에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시종일관 입가에 비웃음을 내걸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애가 힘껏 애를 쓰는 광경처럼 보이겠지. 레라지에 입장에서는 이만큼 유쾌한 일이 없었다. 자기는 변방에서 외로이 고생하고 있다. 중앙에서는 웬 듣도 보지도 못한 신출내기 마왕이 한창 명성을 떨친다. 어떤 놈인가 해서 봤더니, 인간은 악이고 마인이 선이라며 아주 유치한 이분법을 맹신하고 있다. 애송이 중 애송이……그동안 중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쌓인 섭섭한 감정까지 뒤섞여서, 레라지에는 마치 지금의 나를 비웃음으로써 중앙 전체를 비웃는 것처럼 느낀다. 겉으로 나타나는 전공에서는 자기가 확실히 중앙에 밀린다. 허나, 마왕의 격으로 따지자면 자기가 한참 위이다. 중앙은 대단하지 않다. 제8차 월맹군이 거둔 성과도 역시나 운에 불과하다……무의식적으로 위안을 얻겠지. 내가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바르바토스 전하와 우리 평원파가 피땀을 흘려 합스부르크를 점령했지만, 그외 마왕들이 무도하게도 영토 분할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바르바토스 전하의 성정으로 미루어볼 때 타협이란 불가능합니다. 즉, 이제부터 월맹군 원정은 단순히 인간군 대 마왕군의 도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레라지에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쪽을 흘겨보았다. “문제는 인간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인간군이 일찍이 가증스러운 파이몬과 협력한 적이 있음을 말입니다. 인간군과 파이몬은 서로 협력해서 우리 평원파를 전멸의 함정에 빠트리려 했습니다…….” 내가 이를 바득 물었다. 파이몬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이. 스스로 보기에도 기가 막힌 연기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인간과 마왕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왕군이 내부에서 분열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흐음…….” “마왕군이 분열한 반면에 아직 인간군의 동맹은 건전합니다. 지금 상태에서 마왕들이 인간군을 이끌어들여 동족을 해하고자 하면, 결국 인간만이 이득을 챙기게 됩니다. 레라지에 전하. 월맹군은 또 다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레라지에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월맹군의 실패를 막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고?” “마왕군을 통합시키기란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적군을 아군과 똑같이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레라지에 전하. 우리는 인간계를 분열시켜야만 합니다.” “인간계는 또 어찌 분열시킨다는 말이냐?” 레라지에의 눈동자에서 권태로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서서히 내가 단순히 '생각이 얄팍한 신인'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이 얄팍하지만 머리가 제법 굴러가는 신인' 정도로 수정되었으리라. “대륙에서 합스부르크 다음가는 국가는 단연코 프랑크입니다. 사탄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어, 때마침 프랑크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황태후는 황제와 진심으로 승부를 벌일 생각이 없다.” 레라지에가 단언했다. “세상에 어느 어미가 아들을 죽이려 들겠는고.” “허나, 황제의 생각은 다릅니다……그렇지 않습니까?” “…….” 레라지에가 포도주병을 내려놓았다. 지금쯤 나에 대한 인상은 '생각이 얄팍하지만 머리가 제법 굴러가고, 정보력이 만만치 않은 신인'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걸 유도하고 있었다. “내전은 일어납니다. 문제는 이 내전을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있습니다. 단지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결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프랑크의 백성들을 선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선동한다고?” “흑사병에 기근, 여기에다 영주까지 본연의 의무를 져버린다……어리석은 인간 민초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요.” 레라지에가 손으로 앞머리를 매만졌다. 생각에 잠길 때 드러나는 버릇인 것 같았다. 오케이, 앞으로 기억하자. “영주가 본연의 의무를 져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간단합니다. 저는 신뢰도 높은 용병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레라지에 전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영지를 공격해주십시오. 그때, 우리가 내부에서 호응하겠습니다.” “흥. 결국 영지를 점령하겠다는 얘기로군. 일고할 가치조차 없다. 마왕은 모든 인간의 적. 내전이 무마될 빌미만 제공되겠지.”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실례지만, 레라지에 전하께서는 격퇴되셔야 하겠습니다.” “뭐라?” “다만 영주의 군대가 아니라 바로 저의 용병단에게.” 내가 말했다. “용병대가 물리치는 마왕의 군대를 영주는 감당하지 못한다. 용병단이 지키는 지역에는 거의 아무런 손해가 없는 반면, 영주군이 지키는 지역에는 막대한 손해가 발생합니다. 영주에 대한 신뢰는 한없이 떨어지겠지요.” “…….” “이때 저의 용병단이 영지를 떠난다면……영주에 대해 불만이 극심하게 쌓인 백성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하께선 상상이 가십니까?” 레라지에가 침묵했다. 그가 한참이나 앞머리를 만지작거린 다음 입을 열었다. “쯧, 과연. 애송이지만 실력은 확실하다 이 말이렷다.” “……과찬이십니다.” 내가 석연치 않게 대답했다. 애송이, 라고 불려서 기분이 나쁘다고 티를 냈다. 물론 본심은 정반대였다. 애송이라 생각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바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나는 모욕을 인내할 수 있다. 쓰레기를 가리켜서 쓰레기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당신은 내가 보기 좋게 차려진 밥상을 즐겨주기만 하면 된다. 그쪽은 심리적으로 우위를 만끽해서 좋고, 이쪽은 목적을 달성해서 좋다.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윈-윈이다. 그저 나 하나가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진다. 멋진 비즈니스가 아니고 뭔가. 다만. 마음이 싸늘했다. 지금처럼 나보다 압도적인 강자를 속이고, 능멸하고, 그래서 겨우 나의 자리를 마련해나갈 때마다 점점 더 무언가가 마모되었다. 그것은 마음의 각(角)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라우라와 라피스가 필요하다. 연기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 곁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돌아가면, 그녀들은 기꺼이 잘했다며 웃어주겠지……그거면 충분했다. 나는 애송이와 같이 어설픈 표정을 연기했다.   ============================ 작품 후기 ============================   참고로 작중에서 '인간'은 인류를 뜻하지만 '사람'은 마인과 인간 양쪽을 전부 통칭합니다.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인간이나 마인이나 똑같기 때문이지요. 00186 순례의 길 =========================================================================                        비텐마이어는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그에게 일찍이란 요컨대 정시에 퇴근한다는 소리였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 성실하였는데, 오로지 성실하다는 이유만으로 정부 각처에 소문이 쫙 퍼질 정도였다. “불면(不眠)의 총감.” 사람들이 경외하며 그렇게 불렀다. 말 그대로 비텐마이어는 잠을 자지 않았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늦게 퇴근했다. 심지어 당직을 선 관리들조차 그가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막료총감부의 비텐마이어는 잠들지 않는다, 그는 미네르바의 부엉이, 엘리자베트 통령의 충실한 파수견으로 모든 것을 지켜본다……마치 유령에 관한 소문처럼 정부에 떠도는 이야기였다. 그런 비텐마이어가 정시에 재깍 퇴근했다. 막료총감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게을러빠진 우리 관료들을 말없이 질책하시는 거야……!” “전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도록. 오늘 우리는 모두 야근한다.” 관리들이 비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정시에 맞추어 퇴근한 것만으로 관리 전원을 야근하게 만들었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정부에서 새로운 전설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정작 비텐마이어 본인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전혀 모른 채 술집으로 향했다……. “여어, 막료총감 남작 나리! 여기입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미 일단의 무리가 술집 한 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면면을 확인하고 비텐마이어는 한숨을 쉬면서 걸어갔다. “슐라이어마허 장군,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저는 더 이상 남작이 아닙니다. 귀족의 칭호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차. 그랬지, 그랬어. 제가 그만 까먹었습니다. 하하.” “앞으로 부디 조심해주시길.”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넉살좋게 웃었다. 그것을 보면서 비텐마이어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 쿠르츠라는 남자, 유능하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어째서인지 친해질 수가 없었다. 단순히 성격이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 자신과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느낌에 불과하다면 좋으련만……하고 비텐마이어가 탁자에 앉았다. 곧이어 술잔으로 건배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섯 명이 모인 건 건국식 이후로 처음 아닌가?” “음. 아마 그럴걸요. 제 기억력은 별로 신뢰할 만한 물건이 아니지만.” “맞습니다. 제 기억력은 신뢰하셔도 좋아요, 외무상서 님.” “하델베르크라고 불러주게. 미인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 없거든.” 탁자에는 쿠르츠, 볼프람, 샤를, 유리아가 있었다. 비텐마이어를 포함해서 다섯 명. 모두가 엘리자베트 황녀의 측근 중 측근이었다. 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려움과 공포로 떨어댈 인간이 적어도 수백 명 되었다. 지금도 술집에는 이들 다섯 명과 술집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통령근위대 사령관.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 샤를 리히트호펜 친위기사단장. 유리아 통령 제1비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공화정부의 실세가 전부 모였다. 당장 쿠데타를 모의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서 누구 한 명을 죽이자고 얘기하면 바로 다음날 그 자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궁창에서 발견되리라.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까. 별로 믿기지가 않는군요.” 유리아가 포도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미인인 그녀는 목소리에도 어떤 마력이 담긴 것 같아, 조곤조곤 얘기하는데도 사람들의 귀를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아아. 한 달이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빨랐지. 솔직히, 아직도 정리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렇습니까? 하델베르크 씨, 저희 기사단은 딱히 바쁘다는 느낌이 없는데요.” “요즘만큼 군인이 부러운 적이 없었다네, 샤를 기사단장. 나에게 팬 대신 검이 쥐어질 수만 있다면 당장 마왕군과 동맹이라도 맺어오겠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나라와 관계를 맺는 것만도 어려운데 나는 지금 열한 개 국가의 모든 외교관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 다들 어떻게 하면 지원금을 적게 줄까, 어느 정도로 원조해야 딱 우리 공화국의 목숨만 살려줄까 고민하고 있지! 빌어먹을 놈들이라네. 차라리 마인들과 협상하는 쪽이 마음에 편할 거야.” 그가 익살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이 작게 웃었다. “군인이라고 해서 다 샤를 기사단장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쇼.”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는 죽을 상입니다. 귀족들이 죽어나가니까 장교 숫자가 급감했습니다. 어떻게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서 장교 자리를 떠넘기고 있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라고 고백해야겠군요. 군은 아슬아슬하게 외형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도 자원입대자가 크게 늘었다고 들었네만?” 슐라이어마허가 한숨을 쉬었다. “물론 크게 늘었지요. 당장 소집령을 때리면 십만 대군도 그럭저럭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빛살 좋은 개살구입니다.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오합지졸로 뭘 하겠습니까?” “훈련을 시키면 되지 않는가.” “바로 그 훈련을 시킬 장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에구구.” 얘기를 들으면서 비텐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슐라이어마허는 통령근위대 사령관이었고, 비텐마이어 본인은 막료총감이었다. 둘 다 군인이었다. 샤를 리히트호펜도 군인이긴 똑같았지만 친위기사단은 특수한 면모가 강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에게 공감이 더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대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델베르크가 인상을 썼다. “역시 아우스테를리츠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나…….” “황태자파에도 유능한 장군과 장교가 많았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텐마이어?” 비텐마이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원래 황태자파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그걸 암시한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콜로브라트 장군, 쿠투조프 장군, 키어마이어 장군, 랑제론 장군……모두 지극히 유능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실례지만, 황태자가 무모하게 지휘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시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죽었고, 막료총감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텐마이어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일부러 놀리는군. 좋지 않은 습관이야.’ 바로 이런 점에서 자신은 슐라이어마허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고 비텐마이어가 생각했다. 슐라이어마허는 틈만 나면 다른 사람을 놀리려고 들었다. 이래서 솔직하게 공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딱히 제가 그분들보다 유능해서 살아남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신께서 저를 총애해주셨을 뿐이지요.” “즉, 운명이라는 말씀입니까…….”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피식 웃었다. “여러분, 마왕 단탈리안에 대해서 제가 재미난 정보를 갖고 왔습니다.” “단탈리안? 브루노 평원에서 연설을 했다는 그 자 말인가?” 하델베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문관이라서 월맹군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가 다르게 전해졌다. 하델베르크뿐만이 아니었다. 문관 전체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에겐 한 전투에서 멋들어지게 연설한 서열 제71위의 마왕보다 당장 합스부르크 제국의 섭정에 오른 바르바토스가 훨씬 더 중요했다. 군인들은 정반대였다. 바르바토스는 가공할 만했지만 대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에서 엘리자베트 통령, 당시 제3황녀는 몇 번이고 바르바토스의 군대와 부딪쳤다. 그때마다 황녀는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에 단탈리안은……유일하게 황녀한테 패배를 안겼다. “새로운 정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슐라이어마허 장군?” 비텐마이어의 눈빛이 빛났다. 언제나 피곤에 가득 잠긴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음, 검은 산맥의 전투에 대한 정보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미소를 지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알다시피 검은 산맥의 방어선은 사흘 만에 뚫렸습니다. 그때 누가 마왕군의 선봉을 맡았는지 아십니까?” “보고서에 따르면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비텐마이어 상서. 그렇지만 작전을 입안한 마왕이 따로 있었다, 라면 어떻습니까?” 비텐마이어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예, 단탈리안입니다. 그 자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검은 산맥의 산성들을 통과한 장본인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 어딘지 즐겁다는 목소리였다. “바로 어제서야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에 대한 정찰이 끝났는데, 이거 보고서가 재미난 내용을 담고 있더군요. 아직 통령 각하께도 올라가지 않은 내용입니다. 브란덴부르크 영지에선 의외로 백성들이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하델베르크가 놀라서 물었다. “브란덴부르크령이면 전쟁 초기에 점령당한 지역이 아닌가. 어떻게 마왕군에 의한 피해가 적겠나?” “그게 재밌습니다만, 아예 법률을 제정해서 영지민에 대한 약탈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약탈을 금지해?” 이번에는 유리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왕군이 인간을 약탈하지 않았다고? 왜?” “일반 백성과 귀족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려는 수법이죠. 떠올려보십시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전쟁 초기, 단 한번도 싸우지 않고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징집병의 대량 탈영.” 하고 비텐마이어가 대답했다. “수만 명의 징집병이 탈영했다고 들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겨우 일만 남짓한 병력만 추슬러서 간신히 퇴각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바로 거기에 단탈리안이 개입해 있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미소를 지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흑색 허브를 자그마치 무상으로 분배했다고 하더군요. 괴수들의 부락까지 손수 토벌했다는데……민심이 변경백에서 마왕군으로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더군요. 하하. 결국 아우스테를리츠까지 후퇴한 것도 단탈리안의 노림수였습니다.” 사람들이 침묵했다. 오직 샤를 기사단장만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맥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유리아가 팔꿈치로 그를 쳐서 주의를 주었다. “음? 뭐요? 술이 떨어졌어?” 샤를이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유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어두운 것을 알아차렸는지 샤를도 조심스럽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비텐마이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브루노 평원의 연설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일반 병사와 귀족 장교 사이를 분열시키는 계책이었지요. 만약 단탈리안이 처음부터 이걸 의도했다면, 변경백령에서 백성들에게 관용을 배푼 것도 전부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슐라이어마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텐마이어는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검은 산맥이 돌파된 것에서 변경백령의 무혈입성,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브루노 전투, 섭정 사건까지……전부 한 명의 마왕이 계획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더군다나 그 계획이 실제로 이루어졌고요. 사실상 혼자서 대륙을 조종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술집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제국을 패배시킨 것은 운명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어느 마왕의 소행이라고 밝혀진 것이었다. 하델베르크가 침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자네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통령 각하께는 터무니없는 작자가 적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로군……마왕 단탈리안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워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비텐마이어는 공화정부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00187 순례의 길 =========================================================================                        * * * 어느 나라가 단 한번도 타국과 원한을 쌓은 적이 없겠는가? 어느 나라가 단 한번이라도 타국의 제왕을, 귀족을, 더 나아가 국민 자체를 증오해본 적이 없겠는가. 여러 국가가 비집어 살아가는 대륙에서 은원(恩怨)이란 새삼스럽지 않았다.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 두 국가는 단순히 한번의 원한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아예 원과 한을 대대로 쌓아올려 앙숙이 되어버렸다. 프랑크 제국이 다른 국가들과 싸울 때면 어김없이 그 배후에 브르타뉴 왕국이 전쟁을 획책하고 있었다. 프랑크는 브르타뉴를 증오했다. 그렇기에. “이거 보시게, 자클린 성녀. 황제가 나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왔어.” 브르타뉴의 여왕 앙리에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에 올라탄 채로 편지를 읽더니 한바탕 파안대소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여왕인 그녀는 자기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했고, 주변 신하들은 이런 앙리에타를 매력적이라 여겼다. “호오. 그거 흥미롭습니다.” 자클린 롱그위, 아테네 여신의 성녀가 편지를 넘겨받았다. “어디, 황제 폐하의 연서를 소신이 일독해볼까요…….” 성녀는 멋들어지게 꼬불꼬불 늘어트린 옆머리를 오른손으로 매만지면서 편지를 큰소리로 읽었다. 즉, 자클린 성녀는 자그마치 제국의 황제가 보내온 서신을 무례하게도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주위에는 열두 명의 대귀족이 기마에 올라타 있었지만 아무도 성녀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여왕이여! 최근에 발칙한 난동자들이 본인의 제국과 여왕의 왕국에 질나쁜 소란을 벌이고 있을 때……이런. 발칙한 난동자들이라는군요. 후후, 누가 많이 섭섭해하겠습니다.” “하하하!”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프랑크의 황제에게 발칙한 난동자란 다름 아니라 자기 어머니였다. 이 편지가 외교적이고 공식적인 문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황제는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자클린 성녀가 목청을 가다듬고 재차 서신을 읽었다. “……질나쁜 소란을 벌이고 있을 때, 여왕은 본인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여왕은 단호하게 본인의 편을 들어주었다. 비록 난동자들이 갖가지 입에 발린 명분을 떠들어대고 있으나, 결국 난동자들은 본인의 신하들과 황권을 좀먹고 있을 뿐더러, 본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이용하여 자기네의 재산으로 써먹고 있다고.” 황제의 어투는 그가 소위 공화주의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요컨대 공화주의자는 황권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제국의 재산을 갉아먹는 좀도둑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난동꾼들이 본색을 드러내어 제국을 차지하려 드니, 실로 고슴도치가 뱀의 굴을 강탈하는 꼴이요, 강도가 집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라. 본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역적과 간신뿐이라, 암흑과 같은 심장에 암흑을 끼얹고 있다.” “흐응, 황제 폐하께선 별로 좋은 문필가가 되지는 못하겠어.” 앙리에타 여왕이 피식 웃었다. 자클린 성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인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지내왔고, 신분과 직책을 내버려두고 때때로 남자들과 기분 좋은 한때를 보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받은 연애편지를 헤아리면 사백 통이 훌쩍 뛰어넘으리라. “……그리하여 하늘 아래 오로지 본인과 여왕 둘 만이 친구로 남게 되었다. 지난 역사에서 비록 여신들께서 제국과 왕국을 대립하게 만드셨다 하나, 이제 본인과 여왕이 서로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 어찌 하늘이라고 무시하겠는가. 본인은 친구의 손길을 간절하게 바라노라…….” 자클린 성녀가 서신을 갈무리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편지를 도로 받아챙겼다. 그녀가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여왕의 주변에는 열두 명의 대귀족이 가벼운 갑옷 차림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이 첫 번째 성벽으로 말하자면 내성(內城)이었다. 주변에는 다시금 대귀족의 기사들이 둘러쌌다. 기사들은 높다란 창을 꼬나쥐었는데, 창대에 각각의 가문을 나타내는 깃발이 호기롭게 펄럭였다. 이것이 여왕의 두 번째 성벽이었다. 다시 그 주변의 주변, 널따란 평원에는――물경 일만 명의 병사가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섰다. 이것이 여왕의 세 번째 성벽으로, 어떠한 외적도 처참하게 분쇄시킬 외성(外城)이었다. “브르타뉴의 아들딸이여!”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세 개의 성벽을 내려다보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가 여왕의 목소리를 확장시켰다. 앙리에타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평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우리는 제국을 넘는다. 침략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고, 약탈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며, 하물며 반역자로서 넘는 것도 아니다. 여기 프랑크의 우두머리가 우리의 진격을 인정하는 서신이 있노라!”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이 손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그대들이 거리낄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노라. 때때로 망설임이 그대의 우악스러운 손을 풀어재끼리라. 의혹이 그대의 강력한 함성을 풀죽이리라. 그럼에도 브르타뉴의 아들딸이여! 나 앙리에타가 바로 그대들이 정의임을 보증하노라! 망설임 없이 적을 토벌하라. 의혹 없이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단결뿐이리니! 브르타뉴여――단결하라!” 병사들이 환호성으로 그들의 아름답고 강력한 여왕에게 호응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귀족과 타협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어코 그녀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귀족에게는 칼날을 내리쳤다. 일만의 병사 중에 상당수는 여왕이 적도를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앙리에타를 전쟁의 여신이 지상에 현현한 자라고 믿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불타는 적발의 여왕을 경애했다. “단결하라! 단결하라!” “브르타뉴 만세!” “여왕 전하 만세――!”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말머리를 정면으로 향했다. 타박, 하고 앙리에타의 군마가 앞발을 움직였다. 여왕은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었다. 대지에 국경선은 그어져 있지 않았으나, 분명 지금 이 순간에 여왕은 제국의 땅을 밟았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곧이어 열두 대귀족이, 기사들이, 다음으로 수천 명이 국경을 넘었다. 성녀인 자클린 롱그위가 노래를 불렀다. “아아――.” 성녀의 입술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성스럽고 우아하며, 그러면서도 강직했다. 마치 여전사의 자태와 같았다. 아테네 여신에게 올리는 찬양가는 곧 군가였다. 마법의 힘을 빌려 노랫소리는 모든 병졸들의 머리 위에 울려퍼졌다. 여신이 그들을 축복하고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군 구천 명.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영도 아래, 진군. * * * 한바탕 레라지에와 신경전을 벌이고 돌아와서 나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생각보다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마차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다들 배려해준 것일까……. 약간 멋쩍어서 슬그머니 마차에서 기어나왔더니, 그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군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자크리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약 일만 명의 브르타뉴군이 진격을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휘하에는 성녀까지 합류했더군요. 자클린 롱그위, 아테네 여신의 성녀입니다.” “이런 정치적 진흙탕에 끼어들다니 평범한 성녀 아가씨는 아니로군…….” 롱그위 성녀는 <던전 어택>에서 적편으로 등장했다. 용사가 몸을 담근 합스부르크 제국에 브르타뉴 왕국이 맞서싸웠으니 당연했다. 그렇지 않아도 라우라의 병력을 상대하느라 귀찮은데, 거기에 롱그위 성녀가 쉴 새 없이 버프를 쏟아부어 무진장 성가셨다. 피똥 싸면서 겨우겨우 적 유닛을 거의 죽여놨더니 회복 마법을 걸어서 멀쩡하게 되돌려놓았지……어느 RPG에서나 성직자 유닛은 찢어죽일 사냥감 제1호였다. 여기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아니, 더더욱 귀찮을 것이 틀림없었다. “후우.”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씻었다. 이러니 잠기운이 좀 달아났다. “성녀가 대동했다는 것은 브르타뉴에게 명분이 있음을 만천하에 떠벌리는 꼴인데.” “정보에 따르면 프랑크 황제가 직접 서한을 보냈다고 하는군요.” “멍청한 녀석, 황제나 되어서 스스로 외적을 불러들이다니.” 그저 간단히 공화파를 인정해주면 될 일이었다. 황제의 자존심이 대국을 망쳤다. 내가 비웃으며 가죽주머니에 담긴 식초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설령 브르타뉴의 힘을 빌려 공화파를 압도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외세에 기대어서 성립된 황권이다. 아무도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을 거야. 황제는 제 목을 자기가 졸라버렸어…….” 심지어 공화파를 감싸주는 인물은 황태후, 자신의 어머니. 나라를 망하게 하는 김에 패륜까지 저지르는 셈이다. 역시 황제씩이나 되니까 1+1도 스케일이 다르다고 할까. 어찌되었든 황제의 이름은 역사서에 길이길이 암군(暗君)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예정대로 프랑크 북부를 순례한다.” “예.” 아마도 앙리에타 여왕은 전쟁이 장기화되기를 기대하진 않을 거다. 이득을 챙겨먹은 다음에 슬쩍 빠지기를 원하겠지. 왕당파가 승리하고 공화파가 몰락한다. 그 공로로 프랑크 제국의 변방을 약간 나눠먹는다든지, 기껏해야 그 정도가 앙리에타 여왕의 노림수이리라. 하지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그럴 수 없다……나는 프랑크를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속셈이다. 어디 마음껏 사이 좋게 진흙탕을 뒹굴어보자,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그리고 전하, 보통이 아닙니다.” “누가 말인가?”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남자애 말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루크의 일도 있었나. 아직 레라지에의 일에 정신머리가 팔려 있었다. 잠기운이 덜 달아난 것이겠지. 고개를 흔들어서 남은 잠을 내쫓았다. 별다른 효과는 없겠지만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브르타뉴의 문제도, 내전의 문제도, 용사의 문제도,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야 했다. “루크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제 수하들이 맡아서 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흐음.” 내가 뺨을 쓰다듬었다. “자크리. 열한 살 남자애라면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이지?” “예?” 자크리가 눈을 깜짝거렸다. “……이를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참나무도 여체로 보일 나이죠.” “좋아. 제레미를 불러주게.” 자크리가 떠나고 잠시 뒤, 제레미가 내 마차에 다가왔다. 그녀 옆에는 데이지가 따라붙어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은 이후로 데이지는 제레미의 시종이 되었다. 데이지는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 얼굴이 유지될지 궁금했다. 제레미가 말했다. “전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래. 어제 말한 이야기를 진행시키자고.” “어머나. 성급도 하셔라.”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다소곳한 웃음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사악한 기운이 풍기는 것은 내 기분 탓이 아니리라. “그럼 소인은 이만 자리를 떠나야겠네요. 바로 오늘 실행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자크리에게는 나의 명령이라 해놓고 네 마음대로 해라.” “후후, 전하 덕분에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하겠네요.” 제레미는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스승을 따라서 데이지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제레미가 손을 저었다. “아, 당신은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요. 오늘 하루 전하를 따라다니세요. 당신이 필요하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명령이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가 사뿐하게 자리를 떠나자, 결국 데이지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머릿결을 음미하듯이. 데이지는 더더욱 무표정해졌는데, 아마 약간이라도 반응하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정말 맹랑한 꼬맹이가 아니고 뭔가. “네 년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 “기다려봐라. 제법 재미난 일이 벌어질 테니.”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00188 순례의 길 =========================================================================                        데이지가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말했다. “무엇이 당신의 이름입니까?” “응?” “처음 마을에서 뵈었을 때 당신께선 안드로말리우스라 자칭하셨습니다. 다음은 단탈리안. 그 다음은 쟝 볼레.” 그녀는 눈초리가 반항적이었다. 단순히 나에게 순응하기 싫어서 반항하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확신이라 할 무언가가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저는 당신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다만 단탈리안이라고 불러라.” “단탈리안.” 데이지가 입술을 자그맣게 열더니, “그게 정말로 당신의 이름입니까?” “그래.” “……단탈리안.”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발음을 자신의 혓바닥과 입안에 똑똑하게 새기겠다는 듯이.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만큼 자존감을 채워주는 일은 없었다. 설령 상대방이 나를 죽이고 싶어하더라도. “그래, 단탈리안이다. 라엘리아 산마을에서 온 꼬맹아.” 나는 작게 웃으며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제레미에게 부탁해서 얻은 물건이었다. 향초잎을 꾹꾹 눌러담아 부싯돌로 불을 지폈다. 쌉싸름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후우, 하고 연기를 흘려보냈다. 향기로웠다. 연금술사가 손수 제조한 최고급 향초라느니 뭐라느니 제레미가 선물하며 잔뜩 생색을 냈는데 과연 자랑할 만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단, 너는 일단 내 양녀로 되어 있다. 필요할 때는 아버님이라고 불러라. 기본적으로 도시나 마을에 갈 때, 주변에 낯선 인간이 있을 때 아버님이라 부르면 된다.” “아버님이라.” 데이지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일찍이 산골 화전촌에서 보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즉, 당신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안다는 미소였다. 노예각인 수술 이후로 불과 며칠 만에 소녀는 자기 페이스를 되찾았다. “왜, 내가 아버지라니 마음에 안 드냐?” “딸아이를 그리 폭행하는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잠자는 도중에 암살하려 드는 딸년도 없지. 거 멋진 집안이로군.” 잡담을 떠들고 있자니 슬슬 시간이 되었다. 나는 성직자용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집었다. “입을 열고 혀를 내밀어봐라.” “무엇인지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미약이다. 세 방울만 마셔도 웬종일 발정한다지.” 데이지가 어이없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딸아이에게 미약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로 대단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군요. 개인적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네가 굳이 칭찬하지 않아도 나 대단한 건 세상이 다 안다. 입이나 열거라.” “…….” 데이지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틈새에서 발간 혀가 나왔다. 나는 허리를 굽혀 키를 맞춘 다음, 정밀하게 물약 두어 방울을 혓바닥에 떨어트렸다. 또옥, 또옥, 하고 보라색 물방울이 스펀지에 빨려들듯이 바로 녹아서 사라졌다. 맛이 이상한지 데이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목소리를 내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녀석은 단탈리안, 주인님, 아버님이라는 세 가지 호칭 중에 마지막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물론 나를 진짜 아버지로 모시겠다는 갸륵한 마음가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순전히 비꼬는 의미였다. 너까짓 것이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니 어떤 기분이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징글징글한 꼬맹이가 아닌가. 나는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제국로 길변의 숲속으로 끌고왔다. 용병 몇 명쯤은 우리가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련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아무도. * * *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제 막 봄이 움트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거미줄처럼 뒤덮었고, 미처 줄에 걸리지 않은 햇볕이 가느다랗게 땅바닥에 떨구어졌다. 깊은 숲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살인과 강간, 핏물이 몇 번이고 숲을 적셨겠지. 나무들은 실로 많은 것을 봐왔다. 무엇보다 멋지게 침묵하는 법을 안 덕택이리라. 사람들은 나무가 말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데 왜냐하면 나무가 대화를 걸어온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한테 말을 건네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이 나무에게 생각하는 능력조차 없다고 확신한다. 말할 줄 아는 존재라면 당연히 자기들한테 말해오리라고, 정말이지 그들은 한치 의심 없이 믿는다……. 그리하여 남들 앞에서는 못할 짓을 나무가 보는 앞에서 많이도 행했다. 키스와 맹세, 거짓말, 모략, 살인, 강간……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루어진 그 많은 일을 어떻게 전부 열거할까. 숲이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인간 중에 누군가가 만약 나무가 되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짙게 정액 냄새와 피 냄새를 맡는다면 이윽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수밖에 없으리라. “……하아.” 어느새 데이지는 숨소리가 가빠져 있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었다. 단지 걸을 뿐인데도 이따금씩 몸을 쭈뼛거렸는데, 그 횟수가 점차 눈에 띄게 늘어났다. 얼마 가지 못해서 결국 데이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땅바닥을 밟으면 진동이 척추 끝까지 흔들어대는 것일까. 데이지는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정전기라도 느끼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신음은 이빨과 입술의 틈마저 비집고 튀어나왔다. “제대로 찾아왔군.” 내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추었다. 그러는 김에 데이지의 등을 눌러서 녀석도 내려앉혔다. 손바닥으로 등을 꾸욱 누르자, 데이지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또 한 번 신음이 흘렀다. “자아. 데이지. 저쪽을 보아라.” 내가 수풀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데이지는 풀린 눈으로 그곳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눈앞의 광경이 지각되지도 않은 듯했다. “……!” 약간의 시간차가 있고 난 뒤, 데이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온몸에 쇄도하는 정전기를 잠시간 잊어버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그녀의 귀에도 저쪽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수풀 저편에는 제레미와 루크가 있었다. “누나, 잠깐만요, 흐윽, 더 이상은……!” “어머나. 꼬마 주제에 커져서는, 응? 누구를 골려먹으려고 이렇게 커졌을까요?” 루크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바지춤을 내렸는데 열한 살치고는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물건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루크와는 반대로 상반신을 벗어재낀 제레미가 가지고 놀았다. 그녀는 두 가슴 사이에 루크의 물건을 껴서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정말이지, 한창 때의 소년은 다르네요. 벌써 두 번이나 가버렸으면서 전혀 기죽지가 않아요. 괴롭히는 보람이 있는걸요.” “아까 전에도, 쌌는데……! 흐윽, 왜……!” “갈 것 같아요? 갈 것 같은 거죠? 후후. 여기 끄트머리가 기분이 좋은 거죠?” “또, 또……흐윽, 또……!” 루크. 이 소년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쾌락의 파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기 얼굴에 침이 줄줄 흐르는지도 모른 채, 그저 절정에 시달렸다. 데이지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여자와 놀아나는 모습을 본 탓일까. 데이지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것이 당신의 노림수였습니까.” 뚜렷하고 맑게 개인 시선이었다. 고요한 분노가 그곳에 있었다. “여자한테 명령해서 제 오라비를 놀리고, 이제는 당신이 저를 범할 생각입니까? 남매를 한자리에서 따먹는다. 위대하신 존재에게는 지나치게 얄팍하고 어수룩한 수작이라고 생각되는군요.” “크흐.” 어린아이가 거침없이 따먹느니 마니 하는 단어를 썼다. 데이지에겐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 “착각하지 마라. 저건 어디까지나 루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오빠는…….” “너희 오빠는 사춘기이지. 제레미처럼 성숙한 여자가 유혹하면 네 오라비가 단칼에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데이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루크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걸 저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친오빠의 개인적인 생활을 훔쳐보는 악취미 따위, 저는 가진 기억이 없습니다.” “오오. 걱정하지 마라. 이건 나의 악취미이니까.” 내가 데이지의 뺨을 쓰다듬었다. “……!?” 소녀의 몸이 퍼뜩 소스라쳤다. 예민해진 신경이 그녀를 깜짝 놀래킨 것이었다. 데이지는 이를 악 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꼭 사나운 짐승 같았다. “잠자코 지켜보아라.”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소녀의 뺨을 잡아서 그대로 돌렸다. 데이지는 온몸을 떨면서도 물기가 맺힌 눈동자로 루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레미와 루크가 그곳에서 한창 놀고 있었다. 아니, 한창이라는 표현은 과했다. 루크는 벌써 기진맥진했다. 그 나이또래에게는 너무 강력한 쾌락이었겠지. “우리 귀여운 루크. 이게 뭔지 알아요?” 그때 제레미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제부터가 본방이었다. “뭐, 뭔데요, 누나?” “후후. 루크, 원래 이 물건은.” 짜잔! 하고 제레미가 과장되게 말했다. “놀랍게도 여자의 그곳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물건이랍니다!” “네?” “으응. 그러니까 이걸 사용하면 말이죠, 루크. 정말로 여자한테 집어넣은 기분을 느낄 수가 있어요. 루크는 아직 어리니까 언니랑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가 없어요! 아쉽게도. 그러니 진짜 여자 대신에 이것처럼 정교하게 제작한 모조품으로 즐기는 거랍니다. 원래 남자아이들은 전부 그래요!” 제레미의 한 마디에 전세계 소년들의 성생활이 왜곡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데이지는 지금 저편에서 오가고 있는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내 옆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소녀가 의문을 풀든 풀지 못하든 상관없이, 제레미는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자아. 오늘 루크랑 여기에 온 건 바로 이 물건을 선물하고 싶어서예요. 루크는 깡촌 시골마을에서 자라나 잘 모르겠지만 원래 이런 건 여자가 선물하거든요! 자기 마음에 든 남자애한테 선물하는 것이 오래된 전통입니다.” 그런 전통이 있는 국가라면 망해도 진즉에 망했겠지. 순진한 소년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 그래요?” “네. 저는 루크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제레미가 미소를 지었다. “어, 어?” “제가 열심히 준비한 선물을 루크가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정말로 기쁠 것 같아요.” 루크는 기본적으로 선인이었다. 자기를 좋아해준다는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상대방은 조금 전에 자신과 쾌락을 나누던 사이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이 거절할 리 만무했다. 루크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누나가 저한테 선물하는 거라면……좋아요. 저도 기뻐요.” “와아아! 정말요!” 제레미가 루크를 와락 껴안았다. 루크 역시 피부가 민감해져 있는지 비명 비슷한 신음을 질렀다. 그런데도 제레미를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누가 포식자이며 누가 피식자인지 이미 결정된 모양이었다. “그럼 루크! 제가 손수 이 물건의 첫경험을 안겨줄게요.” “네?” “엄청 기분이 좋으니까 루크도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이쯤 되니 무언가를 깨달았을까. 옆에서 숨소리를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데이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루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했던 눈빛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만이 거기서 떨고 있었다. “설마…….” 내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설마이다, 꼬맹이 아가씨.” 데이지가 공포에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웃고 말았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요 꼬맹이의 시선에 공포가 담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데이지의 입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데이지에게 속삭였다. “몸통이 분열된 슬라임에는 특이한 성질이 있지. 한쪽이 고통을 받으면 다른 한쪽도 그대로 고통을 받는 거야. 물론, 고통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통각이라도 충실하게 전달하지……아아. 부디 마음껏 즐겨주기를 바란다.” 코앞에는 경악하는 소녀의 눈동자가. 멀리서는 제레미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아, 우리 루크! 제 선물을 마음껏 즐겨주세요!” 슬라임 오나홀. 데이지의 뱃속에 심어놓은 그것과 똑같은 슬라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물건을, 제레미가 루크의 하반신에 쑤욱 밀어넣었다. “……!” 데이지의 허리가 활자로 꺾였다.   ============================ 작품 후기 ============================   조아라의 권고 조치에 의해 수정된 내용입니다.   00189 순례의 길 =========================================================================                        간단한 계획이었다. 슬라임을 반쪽으로 나눈 다음에, 서로 신경을 공유하도록 한다. 하나는 데이지의 몸안에 심는다. 다른 하나는 데이지의 몸속을 완벽하게 재현한 오나홀로 만든다. 그리하여 루크에게 오나홀을 선물하는 것이다. 루크에게는 단순히 '엄청나게 기분이 좋은 물건'이겠지만……데이지에게는 전혀 달랐다. 슬라임을 통해서 전달해오는 진동, 움직임, 가장 미세한 꿈틀거림까지, 완전하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빠의 진동이었다. “――, ――!?” 데이지가 영락없이 쾌감에 홀렸다. 나의 손길이 틀어막아준 덕분에 신음이 새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소녀의 등이 활처럼 휘어져 계속 허공을 활공했다. 소녀는 뭍으로 꺼내진 물고기처럼 온몸을 퍼덕거렸다. 수풀 너머에서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흑! 너무, 이건 너무……!” “왜요? 우리 루크, 그렇게 형편없는 얼굴로 입을 헤벌레 벌리고, 저한테 뭐라고 말하려는 거예요? 너무, 라니 뭐가 너무하다는 거예요? 응? 정확하게 말해주세요.” “너무, 기분이……좋아요!” 제레미가 깔깔 웃었다. “그래요? '이게' 기분이 좋은 거로군요?” “네, 흐윽……누나, 조금만 느리게, 윽, 미칠 것 같아요!” “어디가 어떻게 기분이 좋아요? 네? 자아. 루크가 바라는 대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여줄 테니까요……여기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를 음미해보세요. 후후. 어디가 좋아요?” “모, 몰라요. 진짜 모르겠어요. 그냥, 전부 좋아요…….” 제레미는 확실히 들떠 있었다. 루크를 희롱하며, 오나홀의 어느 부분이 어떤 감촉인지 생생하게 말해보라고 강요했다. 가엽게도 루크는 어디가 어떻게 좋다고 술술 불어버렸다. 오나홀의 입구에 들어갈 때는 숨 막히게 좋았다. 주름이 기둥에 스칠 때는 의식이 날아가버릴 정도로 좋았다. 오나홀 끝부분에 닿을 때는 등골이 떨릴 만큼 좋다고 고백했다. 그것이 무엇을 모조한 물건인지, 지금 풀숲에서 누가 발버둥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 소녀에게 있어 연옥과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루크는 제레미에게 농락당해 세 번을 갔다. 이미 그 전에도 두어 번 사정했으니 적어도 연속으로 다섯 번 절정해버린 것이었다. 뿌리까지 쥐어짜냈다고 할까. 꼬마 남자애한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장래에 용사가 될 인재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완전히 항복하여, 루크는 제레미의 등에 업힌 채로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다른 용사 후보생에 비해서는 약과였다. “하아, 하아…….” 데이지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소녀는 새하얀 원피스(casosock)를 입었다. 신을 섬기는 아이들이 입어 경건한 분위기를 풍기는 옷이었다. 그런 천옷이 지금은 땀에 흠뻑 젖었다. 젖은 옷주름에 흙까지 묻는 바람에 옷이 엉망으로 더러웠다. 루크가 한 번 사정할 때마다 데이지는 열댓 번 넘게 절정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림잡아 서른 번이나 가버렸다. 절정이 멈추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 꼴이었다. 그녀는 견디지 못해 중간에 기절하기도 했다. 기절한 채로 갔다. 그러면서 소녀는 오빠의 얘기를 들었다. 오나홀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그 얘기를 전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 오빠가 상당히 만족하는 모양인데.”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기가 막힌 명기라는 얘기 아니더냐. 기쁘겠군.” “당신은……쓰레기 개자식이에요.” 데이지가 물기 젖은 눈동자로 쏘아보았다. 아직 살결에서 땀이 식지 않았다. 가녀린 팔뚝에서 갈비뼈, 허벅지까지 어디에서나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극도로 민감해진 신경, 뺨을 쓰다듬기만 해도 떨어대는 상태에서 실시간으로 그곳이 뚫리는 느낌이 몰아닥친 것이었다. 단순히 쾌락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녀는 심장에 새겨지는 고통까지 감내한 적 있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마저 공략당했다. 자신이 느낀 쾌락들, 질벽을 들쑤기고 휘저으며 두들기는 감촉 하나하나가 전부 다름 아니라 루크에서 비롯한다……바로 이러한 생각이 데이지를 괴롭혔다. 실제로는 아무런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데이지 본인에게는 그렇게 생각될 수 없었다. 그녀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쾌락의 격류에 무너졌고, 더군다나 그 격류가 오라비의 것이라는 생각에 붕괴되었다. 지금 데이지는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느낌이겠지. “네 실책은 죽음을 너무 쉽게 처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암살이라니, 더군다나 잠자는 사이에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게 만들려고 했다니! 그딴 것이 너의 방식이었나. 어디 나에게 말해봐라, 네놈.”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심장에 각인을 새기는 작업은 고통스러웠으리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 증오심은 한없이 올바랐다. 하지만 게임의 '룰'을 벗어나서 증오심을 표출하면 곤란했다. “나는 너와 약속을 지키는 척하면서 네놈과 네 오라비를 죽일 수도 있었어! 언제든지, 얼마든지! 너를 죽여버리고 오라비만 챙길 수도 있었다! 나는 네 녀석과 일종의 계약을 채결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루크는, 상관없잖아요!”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면 제대로 처신해라!”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네가 끌어들여도 괜찮다고 해줄 사람과만 관계를 맺든지. 이런! 그러고보니 가족이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관계를 맺어버리는 것인가. 그거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구나!” “당신은, 정말이지…….” “무엇을 그리 걱정하느냐? 어차피 루크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웃었다. 웃고 싶을 때 웃는 것, 그것도 권력이었다. “네 오라비는 심성이 꽤 착해보이던데. 아주 순수해. 누구와 다르게 말이야. 자기가 사실 친여동생과 성교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깨달으면, 글쎄. 어떻게 될련지 모르겠군.” 데이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담뱃대에 불을 지피고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네 녀석의 마을을 파괴하려 했고, 마을사람 일곱 명을 사살했다. 그렇지만 너의 청원을 들어주어 학살을 중지했지. 더 나아가, 마을사람들에게 나의 영지를 새로운 터전으로 선물했다. 여기까지 우리의 거래는 적절해.” “…….” “그런데 네 녀석이 나를 죽이려 들었다. 전혀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이걸 잊지 않을 것이다. 오라비한테 진실이 알려지기 싫다면, 앞으로 제대로 행동하라. 알겠느냐? 내 목숨을 빼앗으려면 말이다.” 그녀에게 얼굴을 갖다대서 후우, 하고 담배연기를 불었다. “내가 깨어있을 때. 눈앞에서, 당당하게 빼앗도록 해라. 내가 네 년을 죽여야 할 때가 다가온다면 나 역시 그러할 테니.”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었다. 그저께 밤의 습격에서 시작한 신경전에서 누가 승리를 거두었는지. 화전촌에서는 데이지가 완승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완패를 안겼다. 나는 우리 두 명이 언젠가 질척질척한 늪에 빠져버릴 것임을 직감했다. 이미 종아리쯤은 진흙탕에 잠겨 있었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늪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 * * 용병단은 파죽지세로 프랑크 북부를 휘저었다. 마왕 레라지에가 군세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침략해오자 군소 영주들은 혼란에 빠졌다. 영주들은 이미 제8차 월맹군에 원병을 파견했고, 황태후 및 황제의 소집령에 응하여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황태후와 황제 양편에다 군사를 파견한 영주들도 꽤 많았다. 어느 쪽이 이겨도 변명할 거리를 남겨두기 위해서 술책을 부린 것이었다. 영주들 나름대로 내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피처를 마련해둔 셈이었으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기책(奇策)이 도리어 생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애도를 표할 수밖에. “팔백 골드! 팔백 골드를 내겠소. 우리 영지를 도와주시오!” “우리는 천 골드를 지불하겠습니다! 부디 라로웨 영지에 구원을…….” “천일백 골드……이 이상은 여력이 없습니다. 제발, 아르테미스의 사도이시여. 곤궁에 처한 자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영주들은 부리나케 시종과 집사를 보내서 애걸복걸했다. 브레시 준남작령에서 우리 용병단이 발휘한 용맹, 특히 보통 용병과 다르게 지극히 신사적인 태도는 백도(伯都)를 통하여 사방에 퍼졌다. 자크리가 이끄는 양날도끼 용병단은 그렇지 않아도 명성이 높았다. 얘기로만 듣던 용병단의 실력이 근처 영지에서 명백하게 증명되었으니, 영주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영주의 종자들이 접견을 청할 때마다 나는 곤란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는 여신의 뜻에 따르는, 한낱 미천한 하인일 뿐입니다. 여신께서는 세상 만민을 도우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곤란하군요…….” “무엇이 곤란하다는 말씀입니까, 성스러운 사도이시여? 야만스러운 괴수들이 우리 백성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곤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한숨을 쉬었다. “마침 가르시벨만이 아니라 라로웨, 라시아렐, 트로인에서도 사자(使者)가 와 있습니다. 그들 모두 괴수의 치떨리는 이빨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어느 곳의 백성이나 모두 백성이기는 매한가지. 저로서는 누구를 먼저 도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자 백이면 백, 영주의 시종들은 얼굴을 구기면서 떠났다. 그러다 다시 다음날이 되면 어제보다 더욱 애처롭게, 더욱 불쌍하게, 더욱 절절하게 도와달라 청했다. 정말로 다른 영주들도 구원을 요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시종들은 세상 살아가는 방법에 통달해 있었다. “여신께서 자그마한 진상품에 흡족하시기를 바랍니다.” “천백 골드를 선불로, 토벌이 성공했을 경우 다시 오백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천사백 골드를 일시불로 지급하겠습니다……정말로 이 이상은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나는 더욱 더 곤란한 표정을 내보였다. “여러분의 성의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어찌 백성을 구하는 데 있어서 여신께서 순번을 정해 놓으셨겠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사제님!” “미천한 저로서는 도저히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고견을 나누시지요.” 나는 시종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슬쩍 혼자서 빠졌다. 문 너머에서는 우리 영지가 더 급하다느니, 네 영지는 그대로 백작의 비호를 받지 않느냐느니 다투다가 이윽고 십 년 전에 수조권을 놓고 영지전을 벌였던 얘기까지 튀어나왔다. 다음 날. “천육백 골드, 아니 천칠백 골드를!” “선불로 천오백 골드를 내고 후불로 오백 골드를 내겠습니다!” “제발, 사도이시여……천육백 골드를 한번에 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로 더 이상은 여력이 없습니다!” 용병단의 몸값이 성층권을 뚫고 치솟았다. 그들은 만약에 자기 영지를 제일 먼저 구원해준다면 웃돈까지 끼얹어주겠다며 딜을 제시했다. 나는 물론 상냥했다. 상냥하니까 살그머니 다른 시종들한테도 정보를 알려주었다. 눈덩이가 눈덩이를 불리듯이 딜은 딜을 불러들였다. 대략 용병단의 의뢰금이 이천 골드를 약간 밑돌 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말하자면 성모강림. 실로 신의 어미만이 짓는 게 가능한 미소가 그곳에 있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여신의 자비로우신 손길이 함께하기를. 자아, 손을 모으십시오. 무도하기 짝이 없는 마왕의 침략에 견디게 해달라고 우리 모두 기원합시다.” 악부, 악자, 악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작품 후기 ============================   조아라의 권고 조치에 의해 수정된 내용입니다.   00190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그날 궁전은 요상하게 소란스러웠다. 하인들이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가 하면, 하녀들은 틈만 나면 서로 모여서 속닥거렸다. 궁전 전체가 긴장감으로 들썩거렸다. 이 복도에서도 속닥속닥. 저 복도에서도 소곤소곤. 언제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곳 합스부르크 황궁이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세바스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요한나 전하…….” 초로의 남성이 아차 했다. 남자는 수십 년 동안 황궁에서 일해왔으므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런 일류 시종조차도 눈앞의 꼬마 황녀님에 대해서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앗, 그 표정을 보니까 정말로 뭐가 있었구나!” 은색의 롤빵머리가 아리따운 여자애가 껑충 뛰었다. “틀림없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야!” “무슨 섭섭한 말씀을. 소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틀림없다는 것인지요?” “헤헹. 시치미떼봤자 이미 물잔은 엎어졌어, 세바스찬.” 여자애가 검지손가락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세바스찬이 아무리 여기 궁전에서 삼십칠 년씩이나 근무해온 시종 중의 시종이라 할지라도 작은 버릇이 하나 있거든. 세바스찬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허리를 아주 약간 앞으로 굽혀.” “헉, 정말입니까?” 남자가 대경실색했다. 큰일이지 않은가! 궁전의 베테랑 시종은 공식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업무, 즉 황제나 황자의 밀명을 받아서 움직이는 경우가 꽤나 잦았다. 자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눈앞의 어린 황녀님이 지적한 대로 그런 버릇이 있다면……자기도 모르는 사이 몇 명의 귀족들한테 정보를 들켜버렸을지 몰랐다! “당연히 구라지. 바보 멍청이 세바스찬. 그걸 믿었어?” “…….” “아무렴 지엄한 황궁 내무부에서 그런 치명적인 습관이 있는 남자를 일급 시종으로 승진시켰을 리가 없잖아. 변변찮은 남작가에서 사남(四男), 거기에 서출이라서 제대로 된 연줄 하나 없는 세바스찬을 말이야.” 여자애가 헤벌레 웃었다. “달리 말해 세바스찬은 그만큼 자기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성장했다는 거야. 뇌물이랑 연줄이 판치는 여기 황궁에서 세바스찬만큼 자수성가한 남자가 또 없어요. 대단해, 진짜로 대단해.” “가, 감사합니다……황녀 전하.” “그렇지? 감사하지?” 남자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예.” “감사해서 막막 전하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지? 그치?” “예, 예이……물론입니다. 소인은 언제나 황가를 위해 투신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애가 감탄했다. “캬아. 우리 세바스찬의 충심은 내가 진즉에 알아봤어. 그러니까 합스부르크 내무부의 자랑이요 양심인 세바스찬. 남작가의 사남에다 서자였으면서도 독보적인 성실함과 재기발랄함으로 취업에 성공한 세바스찬 나으리.” 여자애는 자기보다 키가 두 배 커다란 남자를 붙잡더니 웬 아저씨마냥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얼른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해봐. 집사장한테 오늘 세바스찬이 황녀 전하 앞에서 얼마나 꼴불견이었는지 꼰질르지는 않을 테니까. 흐흐.” “…….”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서부의 프랑크 제국, 동부의 아나톨리아 제국과 더불어 인간계를 호령하는 절대강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2황녀이자 황궁에서 근무하는 수백 명의 하인과 하녀에게 '공포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열네 살의 아가씨였다. 결국 베테랑 시종인 세바스찬이 항복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와아! 해냈다! 세바스찬을 물리쳤다――!” 요한나 황녀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세바스찬이 쓰게 웃었다. 요한나 황녀 전하는 분명히 막무가내에다 말괄량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이 넘쳐났다. 상대방을 저절로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할까. 하인들과 하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요한나 황녀에게 시달리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도 그것이겠지. 이런 면에서 요한나 황녀는 그녀의 여동생, 즉 엘리자베트 제3황녀와 무척 달랐다. 엘리자베트 전하는 천재로 이름났지만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웠다……. “혹여라도 다른 누구한테 말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전하?” “응, 좋아. 세바스찬의 양심과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어째서 전하의 양심과 명예가 아니라 소인의 양심과 명예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쯔쯧. 사내대장부가 시시한 일에 신경 쓰지 마.” 세바스찬이 한숨을 푸욱 쉬었다. “어젯밤, 황궁에 침입한 남자가 발견되었습니다.” “뭐, 여기에!?” 황녀가 깜짝 놀라서 개구리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한 그대로 소란스러운 반응이어서 세바스찬은 웃음이 나왔다. “흠. 흠. 그렇습니다. 어제 새벽에 황궁 서쪽의 연못에서 무언가가 빠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하녀가 소리를 들었지요. 그녀가 대경실색해서 경비병들을 불러들여 연못에 가봤더니, 웬 젊은 남자 한 명이 연못에 빠져 있더라지 뭡니까.” “대, 대박……겨우 혼자서 황궁의 방벽을 뚫은 거야? 수천 개의 경비마법과 수백 명의 근위병을 피해서?”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난리가 난 것입니다. 혹시 황궁이 자랑하는 절대방벽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닌가 하고요. 더군다나, 이건 아직 하녀들 사이에 퍼지지 않은 비밀입니다만…….” 그는 황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놀랍게도 연못에 떨어진 남자는 검의 주인도, 마법사도, 하물며 암살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마나 적성이 완전히 꽝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무력이나 마력을 하나도 쓰지 않은 채 합스부르크 황궁의 절대방벽을 넘어온 것입니다!” 요한나 황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무서워할 만도 하지, 라고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공포의 지배자'일지라도 그 본질은 온실에서 키워진 열네 살 소녀였다. 무력도 마력도 평범한 인간이 하마터면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은 제법 큰 충격으로 느껴졌으리라. 그렇지만 세바스찬의 추측은 순전히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대단해――!” 황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궁전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복도 끝을 지나가던 하녀가 깜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건 말건, 소녀는 마치 황궁의 예법을 전부 까먹은 것처럼 오도방정을 떨었다. 세바스찬이 당황해서 소녀를 말렸다. “저, 전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대체 왜…….” “대단해! 오러도 쓰지 못하고 마법도 외지 못하는, 진짜로 평범한 남자가 여기 코앞까지 넘어오다니 대단해! 옛날 이야기 같아서 대단해! 영웅이 될 뻔해서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전하, 목소리……제발 목소리를.” 요한나 황녀가 흥분에 찬 함성을 뚝 그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체모를 오한이 세바스찬의 등줄기를 짧게 스쳐갔다. 언제 어린애처럼 굴었냐는 듯 눈앞의 소녀는 매섭게 시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왕의 피.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들을 부리고 다스린 자만이 가지는 위엄이 그곳에 있었다. 세바스찬은 아까 전과 다른 의미로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혹시――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충고한 것이었는가? 눈앞의 여자애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 그런 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는가? 맹수와 같은 시선에 세바스찬의 심장이 조일 즈음해서 황녀가 입술을 열었다. “어디인지 불어, 세바스찬.” “……예?” “연못의 영웅 말이야. 어디 감옥에 처박았을 거잖아. 거기가 어디인지 얌전히 불어.” 세바스찬의 입구멍이 경악으로 인해 떠억 벌어졌다. “서, 설마 황녀 전하. 침입자를 만나뵈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설마가 아니라 당연히 그럴 속셈이야. 세상에 이렇게 재미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내가 모른 척하고 넘겨버리는 게 말이나 돼? 반드시 만나야겠어.”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세바스찬이 주저하지 않고 궁전의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침입자는 궁성의 폭탄과 같은 사안이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나의 폭탄이 되어버렸지.” 황녀가 기세에서 지지 않고 말했다. “그 남자를 보지 못하면 내가 먼저 폭발해버릴 거야. 세바스찬, 내가 폭발하는 그날이 바로 합스부르크가 멸망하는 날인 줄 알아.” “전하.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사건에 분노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중대한 일에 혹여 황녀 전하가 단지 호기심만으로 다가가신다면, 이는 작게는 궁정인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것이요, 크게는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요한나 황녀가 침묵했다.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끝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성실하고 충심이 갸륵한 나의 세바스찬. 미안하지만, 이건 오히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나서야 하는 문제야.” “……네?” “흐흥. 하나는 생각하는 주제에 둘은 생각 못하는구나.” 황녀가 코로 웃었다. “잘 봐, 세바스찬이 그랬잖아. 연못의 영웅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하녀였다고. 하녀는 곧바로 경비병들을 불렀고.” “그렇습니다. 헌데, 무엇이 문제이옵니까?” “더 들어봐. 지금 누군가가 황궁에 침입했어. 그것도 엄청나게 무능력한 평민이야……도대체 누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요한나 황녀가 왼쪽 손가락들을 펼치더니 하나씩 접었다. “제도(帝都)의 치안경비대? 집단범이 아니라 단독범이 저지른 소행이니까, 경비대가 제대로 일하지 않아 치안이 나빠진 탓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탈락. 황궁에 삼천육백팔십 개의 경비마법을 아로새긴 마탑(魔塔)? 그럼 존귀한 마법사들이 한낱 무능력한 평민보다 못하다고 발표해야 하는데, 그런 귀찮은 분쟁을 일으킬 순 없지. 탈락.” 어머나, 하고 열네 살의 황녀가 연극조로 말했다. “외부에 문제가 없으니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겠어?” 아, 하고 세바스찬이 탄성을 질렀다. “내부……내부의 동조자가 있다고 몰고 가겠군요, 전하!” “바로 그거야. 바보 멍청이 세바스찬.” 요한나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내명부와 황궁 근위대 사이에 피 튀기는 신경전이 벌어지는 거야. 하필 처음에 목격한 하녀가 자기 상관에 보고하지 않고 경비병부터 찾은 바람에 문제가 꼬였어. 내명부의 하녀들이 알아서 처리했다면, 순조롭게 경비병들한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연못의 남자를 감금하는 데 있어 내명부와 근위대가 절반씩 공로를 차지했습니다……즉, 어느 누구도 한쪽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게 되었군요!” “흐흐. 잘못하다가는 시녀장이나 근위대장의 목이 날아가버릴 판이지.” 세바스찬은 이제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황제는 틀림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몰랐다……. “장담하는데 지금쯤 연못의 영웅은 초죽음을 당했을걸. 내명부랑 근위대가 번갈아서 밤새도록 고문을 때렸을 거야. 누가 내부의 동조자였는지 얼른 토해내라면서. 쯧쯧……에르시 근위부대장이 어쩐지 오늘 아침훈련에 보이지 않더니만. 뭐, 이럴 때 내가 나서줘야지 또 누가 나서주겠누.” 요한나 황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 “응, 궁금해?” “예이.” 황녀가 씨익 웃었다. “궁금하면 잠자코 내 영웅님이 어디 계신지나 불어. 공포의 지배자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주실 테니까.” “하아, 근속 삼십칠 년 만에 이런 난리에 휘말릴 줄은…….” 성실한 시종은 울상을 지었다. 황녀가 개의치 않고 시종의 등을 떠밀었다. 세바스찬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참. 우리 영웅님 이름은 어떻게 되신대?” “이제는 내 영웅님이 아니라 우리 영웅님입니까……알겠습니다. 음, 그것이 상당히 특이한 이름이더군요. 어느 나라의 이름인지 저로서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응? 무슨 이름이길래?” 세바스찬이 머릿속으로 지하 감옥의 지도를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로리타라고 하더군요. 황녀 전하.”   00191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정말 최악이다. 지난 열두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인 부분이었다고 자신한다. 아무래도 나의 인생은 이미 한번 끝나버린 것 같지만 알 게 뭔가. 눈을 뜨자마자 왠 물속에 빠졌다.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빠져나왔더니, 그 다음에는 고문특급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고문당했다. 이쪽이 사정사정해서 제발 봐달라고, 용서해달라고, 하다못해 왜 날 찢고 째는 것인지 알려주라 빌어도 사람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범행을 뒤에서 지원한 사람이 누구냐!” “지난 수요일에 네놈은 에르시 부장과 만났다. 틀림없는가?”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헛소리만 남발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생존본능은 절대로 '예' 혹은 '아니오'를 말해서는 안 된다며 맹렬하게 경고했다.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하는 순간 내 목숨이 정말로 끝장날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했고, 녀석들은 무조건 고문해왔다. 놀라운 점은 그거였다. 포션이었다. 뭔가 퍼런 액체가 흐르더니 상처가 죄다 회복했다. 나는 그쯤에서 완전히 별세계에 떨어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죽기 전에 비너스빤스와 나눈 채팅, 거기에다 포션이 존재하는 세계……. 결정타는 요한나 황녀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감옥에 쳐들어오더니 나를 데려갔다. 상당히 막무가내로 행동했는지 간수들이랑 대판 싸운 모양이었다. 여기서 모양이었다, 라고 말한 까닭은 당시에 내가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심문이 고통스러운 나머지 나는 혼절해버렸다. 요한나 황녀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죽었겠지……고문을 버티다 못해 에르시 부장이고 나발이고 전부 예, 예, 하고 대답했을 테고 나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죄목이 붙어 능지처참 당했을 거다. 황녀 전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몸은 좀 괜찮아졌는가?” 침실에서 쉬고 있자니 세바스찬이 들어왔다. 이 사람 역시 나의 은인이었다. 명령한 것은 요한나 황녀였어도 실제로 간수들을 회유한 자는 세바스찬이라고 들었다. 여기 침실을 수배해준 것도 그였다. “예, 세바스찬 님께서 보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무얼. 나는 황녀 전하의 명령에 따를 뿐일세.” 세바스찬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제국의 일급 시종이었으며, 나는 연고 따윈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었다. 신분상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세바스찬은 나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남자가 어느 정도의 인격자인지 짐작할 만했다. “자네에겐 미안한 일이네만…….” “문제가 발생했군요.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재빨리 말하자 세바스찬이 살짝 놀라워했다. “침착하군. 불과 한 시간 전에 감옥을 빠져나온 것에 비해서.” 내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사정은 모르겠어도 고문형에 처한 자를 일국의 황녀가 독단적으로 빼돌렸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리 없었다. 포션이라는 기물 덕분에 체력은 회복했다. 남은 것은 정신적인 각오뿐이었다. “맹수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훌륭한 태도일세. 그래,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세바스찬은 나에게 현재 황궁의 상황을 얘기해주었다. 설명이 간략하고 선명해서 알아듣기 쉬웠다. 정말이지, 날 고문한 새끼들이 반의 반만 세바스찬을 닮았어도 기꺼이 자백했을 것이다. “대충 그렇게 되었네.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한 목소리로 요한나 황녀 전하를 성토하고 있다네.” 세바스찬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황녀 전하께선 시녀장을 만나고 계시지.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터인데 걱정이로군.” “그렇군요.” 자존심이 걸린 부서들과 철없는 공주님. 확실히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하물며 나의 입지는 더더욱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내명부와 근위대인가……. “세바스찬 님. 혹시 전하들 중에 특별히 내명부와 친밀하신 분이 계십니까?” “음. 아무래도 루돌프 황태자 전하께서 내명부에 가까우시지.” 본래 내명부, 시녀들을 총괄하는 사람은 황궁에서 가장 존귀한 여성인 황후였다. 루돌프 황태자는 황후의 적자.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 비해서 내명부에 가까웠다. “그럼, 근위대에서 지지하는 전하도 혹시 따로 계십니까?” “아아. 근위대원들은 대체로 엘리자베트 황녀 전하를 지지한다네. 몇 백 년을 통틀어서 가장 무예에 정통한 전하이시니 말일세.” 그리고 기사도를 숭상하는 근위병들은 사상 최고의 천재 엘리자베트를 지지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분명히 엘리자베트의 언니가 그런 이름이었다. <던전 어택>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게임이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죽어 있다. 사인은 자살. 황태자와 황자, 그러니까 친오빠들이 수 년에 걸쳐서 윤간하자 견디다 못해 목을 맸다. 사실상 타살이라 보아도 무방하겠지……. 좋게 말하면 희생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패배자이다. 세바스찬에게 간단하게 얘기를 들었을 뿐이지만, 이곳이 권력투쟁의 지옥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 장소에서 약하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아니,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았기에 엘리자베트 황녀는 던전 어택에서 승자가 된 것이다. 강자가 미덕이고 약자는 죄악.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약자에 속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결국 대단치 않은 인물. 대륙을 일통하고 마왕을 토벌한 저 미래의 엘리자베트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존재……그렇지만, 바로 그 사람이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세바스찬 님. 제가 황녀 전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가?” 내 목소리에서 단단한 자신감을 느낀 것일까. 세바스찬이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왜 구해주었느냐 따위를 질문하느라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아서 높이 평가한 것인지 몰랐다. “예. 상당히 위협적인 상황입니다만, 놈들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지 모릅니다.” 그렇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나를 구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정해져 있다……. 잠시 뒤, 세바스찬은 나를 대동하고 황녀의 접견실에 갔다. 제2황녀의 직위라는 것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지 접견실도 조그마했다. 세바스찬이 정중하게 방문을 두들겼다. “전하, 세바스찬입니다.” “들어와.” 문 너머에서 명백히 심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능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그리고 나의 불안함은 방물을 열자마자 현실로 드러났다. 은색의 롤빵머리가 인상적인 소녀가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앉았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몸을 파묻었다. '지금 무척 지루하다'라는 오오라를 내풍기고 있었다. “와아아! 벌써 깨어났네!” 그런데 이쪽을 바라보자 별안간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제국의 황녀치고는 상당히 몸가짐이 어리숙해보였다. 솔직히 첫인상은 꽝이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삼가 존안을 처음 뵙겠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아름다운 명예이시여.” “응, 그래. 내 존안이 조금 잘났긴 하지.” 소녀가 헤프게 웃으면서 자랑했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첫인상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아, 여기로 가까이 다가와봐! 난 너에게 무척 관심이 많거든. 그래, 어떻게 황궁의 절대방벽을 뚫었지? 정말로 무술도 마법도 하나도 모르는 평민이야? 목적은 뭐고? 수단은? 정말로 내부에 동조자가 있었어?” 요한나 전하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자, 옆에서 세바스찬이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황녀 전하. 그는 고문실에서 빠져나온 지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으응? 흐음. 그것도 그렇지만.” 요한나 전하는 자신의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우리에겐 별로 시간이 없는데.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일까. 두 시간 뒤에는, 그래. 이름이 로리타라고 했지? 로리타는 내명부든 근위대든 아님 둘 다든 어디로 끌려갈 거야.” 고작 두 시간……식도가 껄끄러웠다. 누군가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요한나 전하가 미소를 지었다. 솔직한 미소였다. “일단 미안하다고 말해둘게. 로리타, 미안해. 너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네 생명을 구해줄 수 없어. 그냥 죽는 시간을 세 시간 정도 뒤로 미루었을 뿐이야.” “…….” “하지만 적어도 너의 복수는 약간이나마 해줄 수 있어. 내가 너를 납치한 것 때문에 이제 궁내부(宮內部) 사람들은 물론이고 궁정귀족들까지 전부 이번 사건을 듣게 되었거든. 내명부나 근위대가 너를 처벌하면, 모든 사람이 네가 부당하게 희생당했다는 걸 알 거야.” 내명부와 근위대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약간이지만 복수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눈앞의 황녀가 꾸밈없이 말했다. “자아. 그러니까 우리에겐 친해질 시간이 별로 없어. 나는 내가 궁금한 것부터 들어야겠어. 어떻게 이곳을, 오고 싶어도 평범한 사람은 결코 도착하지 못하고, 나가고 싶어도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이곳에 와버렸어?” “황녀 전하.” 내가 길게 읍했다. “전하께선 틀림없이 소인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응?” 요한나 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만. 지금 나한테 아부해도 정말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시간낭비야.” “소인에게 방도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헤에.” 황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기꺼이 흥미를 가져줄게. 하지만 로리타, 조심하는 게 좋아.” 여태까지 악동의 눈동자였다면 지금은……상대방을 시험하는 시선. 악의 없는 호기심이 사라지고 태어날 때부터 군림하는 자의 눈높이가 자리했다. “만약 네가 그럴듯한 방도를 제시해주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가졌던 흥미까지 잃어버릴 테니까. 그건 너에게 보장되어 있던 두 시간마저 빼앗기는 것을 의미해. 너는 다시 그 지옥 같은 고문실로 돌아갈 거야.” 내가 머리를 조아렸다. 각오하는 바였다. “소인이 고문받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시녀장과 근위부장이 고문실에 다녀갔습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으나 간수장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알았지요.” “흐응? 그게 뭐 어때서? 시녀장이나 근위부장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해도 말입니까?” 요한나 전하의 얼굴에서 악의적인 표정이 사라졌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그건 너무 비정상적인걸.” “예. 지나치게 초조해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젯밤에 연못에 침입자가 떨어졌다면서. 아직 반나절밖에 흐르지 않았다구. 근위대장과 시녀장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심초사하는 이유가 뭐겠어?”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러했다. 루돌프 태자는 내명부를 장악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 제3황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무재(武材)를 보임으로써 근위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차기 황위를 두고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리라는 것은 정계에서 이미 자명한 사실이었다. “즉, 이번 정쟁은 황위계승전의 전초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을 재촉하는 상급자가 있다……그런 말이구나. 그 상급자란 다름 아니라 루돌프랑 엘리자베트이고.” 요한나 전하가 침음을 삼켰다. “루돌프랑 엘리자베트는 승부수에 나선 거야.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궁내(宮內)의 주인도 정해지겠어. 끄응, 이거 호기심 풀겠다 나섰다가 터무니없는 뱀의 꼬리를 밟아버렸는걸.” “그것이 뱀의 꼬리가 아니라 머리라면 어떻겠습니까, 전하?” “하아?” 요한나 전하가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께서는 나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친오빠들에게 강간당해서 자살하는 그런 미래를 막겠다. 설령, 그 결과 제국의 황태자와 미래의 절대군주를 적으로 돌려야 할지라도…….   00192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황제가 노발대발했다. 원래 현 합스부르크의 지존은 정무에 관심이 없고 별궁에 틀어박혀 유흥만 일삼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자기 신변에 위험이 미칠 뻔하자 분노한 것일까. 드물게도 별궁으로 시종장과 집사장을 불러들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네놈들이 감히 지존의 옥체를 손상시킬 생각이냐!” 하고 시계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옹졸하다고 해야 할지, 기막히다고 해야 할지, 원. 저런 아비의 핏줄에서 엘리자베트 같은 위인이 용케도 태어났다. 그렇지만 제왕은 제왕. 내명부와 근위대는 황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유력한 황위계승자들을 섭외한 것이 그 일환이었다. 황제의 분노에 황위계승전까지. 황궁은 빠른 속도로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향해갔다. 여기에 단 하루만 있었다면 궁정대신들까지 끼어들었겠지. 제국 자체가 요동쳤을 거다. 그러나 사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끝났다. “이번 사건에서 소위 침입자는 제가 후원한 인물입니다.” 요한나 폰 합스부루크 황녀가 폭로했다. 가라사대, 최근 들어 황궁의 전체적인 경비가 약화된 것 같아서 돌파를 시험해봤다고. 당연히 난리가 났다. 일국의 황녀가 무슨 얼빠진 짓을 벌였는가, 아무리 말괄량이로 소문난 제2황녀라 할지라도 황실의 일원으로서 자각이 부족한 것 아닌가……그러자 공식적으로 준비된 석상에서 요한나 황녀가 발표했다. “저는 설령 황실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궁내부의 모든 신민이 합심하여 사태에 대처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침입자로 하여금 일부러 연못에 빠지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태가 터져도 궁내부에선 누구 책임이느냐를 두고 싸울 뿐이었습니다…….” 열네 살의 아름다운 황녀가 눈물을 흘렸다. “저희 제국은 수많은 위험에 겪을 때마다 일치단결하여 극복했다고 배웠습니다.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저는, 이런 일이 될 줄 몰랐습니다…….” 사태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궁정대신들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황실이 위험에 처했는데 무슨 짓거리냐!”, “책임 떠넘기기에 혈안이 되어 본분을 잊어버리다니!”, “장난하지 마라!” 하고 궁내부를 질타했다. 어차피 내명부든 근위대든 황실의 측근. 내명부와 근위대의 위축은 황권의 약화이고, 황권의 약화는 곧 신권의 강화이다. 게다가 차기 황제인 루돌프와 엘리자베트에게 경고까지 줄 수 있다. 대신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비추었겠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내명부와 근위대도 파워게임을 계속할 수 없었다.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오직 황제만이 사의를 막을 수 있으나 명분이 없었다. 황제 본인이 격분하여 벌어진 일 아닌가? 이제 와서 말을 되돌릴 수 없다. 체면 이전에 권위가 문제된다. 궁정대신들은 손도 쓰지 않고 코를 풀어버린 기분이겠지. 철없는 황녀와 우둔한 황제가 만들어낸 참극.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될 예정이었으나……요한나 황녀가 공식석상에서 다시 한번 발표했다. “소녀는 시녀장과 근위대장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두 분이 과오를 깨달았다면 이제야말로 서로 협력하여 대처할 때가 아닌가요? 소녀는 제국의 신하들을 믿습니다.” 지난 번 발표가 원투 펀치였다면 이번엔 어퍼컷.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령했다. “당사자인 황녀의 마음씨가 실로 갸륵하니 어찌 신들이라고 감복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비록 실수했으나, 제국의 명예를 다시 회복할 기회도 오로지 그대들에게만 있도다. 필사의 각오로 임하라.” 근위대장과 시녀장, 궁내부의 실세는 그날로 요한나 황녀를 찾아가 감사의 말을 올렸다. 전형적인 병 주고 약 주기였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속에서 울분이 터지든 말든 얼굴로는 감복해야지. 그들은 나한테까지 사죄했다. 빌어먹을 년놈들, 꼴 좋다! 졸지에 궁정대신들만 닭 쫓던 개가 되었다. 대신들은 내부불화를 명목으로 궁내부를 공격했었다. 이제 와서 근위대장과 시녀장의 협력에 초를 칠 수는 없다. 도리어 대신들이 내부불화를 불러일으키는 꼴이니 말이다. 결국 근위대장과 시녀장은 1년의 감봉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대신들은 울상을 지었다. 별 도리가 없었다. 그 정도 성과에 만족하고 물러설 수밖에. 사건은 정리되어 외부에 발표되었으며, 사람들은 황제 폐하의 은덕과 황녀 전하의 심성을 찬양했다……. “최근에는 음유시인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세바스찬이 전해주었다.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제국의 명예를 울부짖는 장면이 가장 인기라고 하더군요.” “푸하하하!” 요한나 황녀가 폭소했다.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배를 붙잡고 웃었다. 어찌나 요란하게 굴렀는지 치맛자락이 헝클어져 하얀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세바스찬이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이것이 '제국을 위해 눈물 흘린 황녀',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제2황녀의 실체……. 진실이란 참 무서운 법이지. “전하, 아무리 그래도 예법이 아닙니다.” “뭐, 세바스찬 님. 괜찮지 않겠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일이 완전히 일단락된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마음껏 웃고 싶으시겠지요. 오늘만큼은 전하의 웃음소리가 저희에게도 포상일 것입니다.” “흐음.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오늘만큼은 넘어가지.” 세바스찬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저씨, 성실하고 깐깐한 사람이긴 한데 묘하게 무른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얼마 전, 세바스찬은 아예 요한나 전하의 집사로 전속되었다. 황녀의 최측근으로 발탁된 것이니 승진이었다. ‘명목상의 승진이지만 말이야.’ 세바스찬은 나를 감옥에서 빼내는 과정에 개입했다. 비록 이번 사건이 미담으로 끝났다고는 하나, 권한을 뛰어넘어 행동한 시종에게는 일종의 제재가 필요했다. 그런 것이다. 사실상 출세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보아도 좋겠지. 그러나 세바스찬은 단 한번도 나에게 아쉬운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저씨에겐 감사한 일뿐이다. 과연, 평생을 걸치더라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련지 어떨지……. “그래.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로리타밖에 없다니까!” “전하. 소인은 오늘만큼은, 이라고 확실히 말씀드렸습니다.” “아아아―, 어째서 내 주변에는 샌님인 시종밖에 없을까.” 요한나 전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여전히 방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꼭 버릇 없는 여동생을 돌보는 느낌이라서 저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참고로 나는 요한나 전하 전속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황제가, 이런. 이게 아니지……황제 폐하께서는 전하의 재치에 크게 흡족하셨다. 황제께선 일련의 사건이 연극임을 알고 계셨다. 요한나 전하가 발표를 터트리기 전에 전부 계획을 말씀드렸으니까. 폐하께선 요한나 전하와 일대일 독담하며 무엇이든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전하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로리타를 제 전속 시종으로 삼아주세요, 아바마마.” “가납하노라. 평민 로리타에게 황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디펜소르의 성을 하사한다.” 그리하여 나는 로리타 디펜소르가 되었다. 귀족은 아니어도 지엄한 황제 폐하께서 성을 내려주신 것이다. 반쯤 귀족으로 취급받았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하감옥에서 모질게 고문을 당했으니 뭐, 엄청 출세했다고 기뻐해야 할까……. 우리 황녀 전하 만만세다. “참, 아바마마가 나한테 일을 하나 맡겼어.” “일이라니요?” 요한나 전하가 벌떡 일어서서 드레스를 손으로 털었다. “올해 열리는 대사냥회를 나보고 준비하고 주관하라던데. 어지간히도 내가 귀여웠나봐, 아바마마.” “대사냥회!” 세바스찬이 놀랐다.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 내가 물었다. “실례지만, 세바스찬 님. 대사냥회가 무엇입니까?” “사 년에 한 번씩 변경백들이 모여서 여는 사냥대회라네. 황실과 변경백들의 단결을 공고히 해서 외부에 알리는 용도이지. 물론, 수도의 대소신료도 대거 참석하네.” 변경백……그러니까 <던전 어택>의 폰 로젠베르크 같은 인물인가. 대충 짐작이 간다. 합스부르크의 국경은 변경백들이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최고의 군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절대로 가벼운 행사가 아니리라. 세바스찬 집사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체로 대사냥회를 주관하는 인물은 차기 황제일세. 지금까지 루돌프 황태자 전하께서 맡으셨지. 그런 중요한 행사를 요한나 전하께서…….” “으으.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귀찮네.” 반면에 요한나 전하는 그저 질색이라는 얼굴이었다. “사냥회 준비하려면 황궁의 하인이랑 경비대를 죄다 지휘해야 할 거 아냐. 하녀들 배치에서 병사들 배치까지……아, 저번에 시녀장이랑 근위대장한테 지워둔 빚을 이때 써먹어야겠다. 역시 난 천재야!” 전하가 싱글벙글 웃었다. 아무래도 요한나 전하는 실무 작업에만 관심이 가는 듯했다. 시녀의 우두머리들을 어떻게 중재하고 지휘할지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당연하게도, 하인들 사이에도 파벌은 존재했다. 그걸 다스려서 행사를 완성시키는 것도 대단히 커다란 일이었다. 세바스찬과 나는 황녀 전하의 별실에서 빠져나왔다. 우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세바스찬 님. 전하께서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아아. 황태자 전하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이야. 엘리자베트 전하도 문제로군.” 세바스찬이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야. 후계 경쟁은 두 분 전하로 차근차근 좁혀지고 있었네. 거기에 갑작스럽게 요한나 전하가 끼어들게 되었어. 지금까지 요한나 전하에겐 별다른 견제가 없었네만, 앞으로 어찌될 것인지…….” 연못 사건은 단순한 미담이 아니다.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지만,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려 있다. 승자는 물론 요한나 전하이다. 일단 내명부와 근위대에 빚을 만들었다. 각 부서의 탑이 감봉형에 처해졌긴 했도, 만약 서로가 끝장을 볼 때까지 치달았다면 어느 한쪽은 아예 파멸해버렸을 터이다. 누구도 치킨런은 바라지 않는다. 적절하게 중재해준 황녀 전하에게 은혜를 느끼겠지. 다음으로 황제 폐하의 호의를 샀고, 제도 시민들의 인기까지 얻었다. 궁정대신들은 약간 불만족스럽긴 해도 약간이나마 궁내부에 타격을 입혔다. 아직까지 요한나 황녀 전하와 척을 질 일이 없다. 패배자는 루돌프 황태자와 엘리자베트 제3황녀. 두 사람은 이번 기회에 후계경쟁에서 앞서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뚱맞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습격을 당해버렸다. 그 둘에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란 존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커였다. 기습은 뼈아팠다. 내명부와 근위대를 결국 구해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서들의 분란을 뒤에서 획책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수하에게는 믿음을 잃었으며 잠재적 적들에겐 의심을 샀다. 손해밖에 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들은 요한나 전하를 극도로 경계하겠지. 진심으로 나올 거다. 특히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제3황녀는 요주의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히 장래에 정적이 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남동생을 암살했다. 별로 인연이 없는 언니를 살해하는 데 망설일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요한나 전하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유능하고 위험할 사람에게 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막아내는 것이야말로 나 로리타 디펜소르에게 내려진 사명이겠지……. “세바스찬 님. 그 두 분 전하와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으음?” “요한나 전하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극히 중요합니다.” 기껏해야 범재에 불과한 내가 천재인 엘리자베트를 막는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권력싸움에서 패배한 요한나 전하에게 남는 미래란 간살(姦殺)뿐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00193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시종의 아침은 빠르다. 새벽 다섯 시 무렵, 눈이 뜨자마자 벌떡 일어선다. 재빨리 움직인다. 의복을 정중하게 차려입는 데 대략 십오 분. 어젯밤에 먹다 남은 호밀빵을 깨작이면서 방문을 나선다. “어머나, 로리타 씨.” “로리타 씨. 좋은 아침이에요.” 벌써 시녀들이 일어나서 나를 반기었다. 궁전 서쪽에는 시녀 전용의 방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지내는 큰방이 있었다. “숙녀의 방에 너무 함부로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아침마다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다보니 저절로 잠이 깨더군요” “깔깔깔.” 시녀들이 작게 키득거렸다. 웃는 데도 격조가 있었다. 이들은 전원 귀족 가문의 삼녀나 사녀였다. 방이 꽤나 호화로워서 벽난로까지 있었는데, 바로 이 벽난로가 나의 관심사였다. 밤새 벽난로에 뜨겁게 달구어진 돌멩이들. 이걸 집개로 들어서 나무통에 옮겼다. 금세 나무통 두 개가 돌멩이들로 가득 찼다. 내가 양손으로 나무통을 들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숙녀 여러분.” “잠깐만요. 저도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방문을 나서려는 데 어여쁜 시녀 한 명이 따라왔다. 이런, 최근에 이런 일이 많아졌다. 등 뒤에서도 “어머, 에리엘 대담해!”라든지 “어쩜 좋아!”라든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너희, 그런 거 아니야!” 시녀가 뒤를 돌아보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도 될까요, 하고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가……내가 속으로 질려하면서 싱긋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에리엘 님. 에스코트를 할 순 없겠지만 기꺼이.” “……고마워요.”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궁전의 복도를 총총 걸어갔다. 등 뒤로 다른 시녀들이 놀려대는 소리가 또 울렸다. 휘파람까지 부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오늘 저녁쯤에는 에리엘 시녀와 나 사이의 염문이 황궁 전체에 퍼지리라. “로리타 님은 상냥하시네요. 도저히 평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요.” “그건 약간 편견이 섞인 견해입니다, 에리엘 님. 저보다 예의바른 평민은 세상에 넘쳐납니다.” “그런가요? 저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걸요.” 에리엘이 귀엽게 웃었다. 이것도 데이트라고 해야 할까. 합스부르크의 황궁은 무척 넓었고, 인적이 드문 곳 따위는 넘쳐흘렀다. 서로 마음이 맞는 시종들끼리 '즐거운 한밤'을 보내는 것쯤이야 비일비재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두 남녀가 몰래 섹스한다라……. 분에 넘치는 호화라고 해야 할련지. “오늘 아침은 다행히 따뜻하네요. 약간 더운걸요.” 하고 에리엘이 슬쩍 목깃을 잡고 흔들었다. 노골적인 섹스 어필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그렇습니까? 하긴 여성 분들은 저희보다 옷이 두껍지요. 여름에는 얼마나 더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시녀 여러분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아뇨, 저희는 그래도 힘을 덜 쓰는걸요.” 에리엘이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마라. 꼭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잖냐. 그래도 이 시녀는 얌전한 편이었다. 대놓고 오늘밤을 같이 보내자고 추파를 던져온 여자도 있었다. 으이구, 루돌프 황태자이니 엘리자베트 황녀이니 궁정대신들이니 신경 쓸 게 많은 판국에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딱히 섹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의도가 너무 빤해서 꺼리는 거다. 황제 폐하께 성을 하사받고, 순식간에 요한나 전하의 전속으로 발탁된 평민. 수도에서 최근 유행하는 음유시인극의 주연. 묘령의 여성들에게 이처럼 군침이 도는 사냥감은 없겠지. “나 그 남자랑 잤어!”라는 한 마디의 말만 있어도 일약 궁내부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버블경제이다. 내 원래 가치 이상의 거뿜이 신나게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처구니없다.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은 벌써 그 자체로 위험하다. 한때의 쾌락을 쫓겠다고 내가 위험부담을 감수할 리 없지 않은가? 나의 취향은 그거다. 인기라든지 소문이라든지, 그런 것에 초연한 여자가 좋다. “소문 따위 알 게 뭐야. 꺼져! 그것보다 너, 마음에 든다. 잠깐 좆대가리 좀 세워봐!” 하고 똑바르게 자기 길을 향해 질주하는 여성이 매력적이다. 스스로도 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어쩔 텐가. “그러고보니, 요한나 전하께서는 단 과자를 좋아하신다고요?” “맞습니다. 항상 저를 닥달해서 과자를 구해오라 하시지요. 곤란합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참고로 내 마음속에서 요한나 전하는 완전히 여동생이 되어 있다. 과자가 먹고 싶어! 스파이제아이즈(Speiseeis)가 먹고 싶어! 하고 시도때도 없이 졸라댄다. 단 것만 먹으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면 아예 방바닥을 굴러버린다. 이건 수사학이 아니다. 말 그대로 온몸으로 장렬하게 바닥을 구른다. “과자! 과자! 과자!”라고 울부짖으면서. 진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짓이다. 입맛도 행동도 영락없이 꼬맹이다! 본래 주방에서 과자를 가져오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나의 입장이 좋지 않다. 벼락출세한 녀석,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 주방의 하인들한테 사정사정해야 그날의 과자를 확보한다. 피로한 발을 이끌고 과자를 전하에게 내밀면……요한나 황녀 전하는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고는. “고마워, 로리타!” 하고 내 몸을 껴안는다. 우리 황녀 전하께선 아무 사람이나 껴안는다. 노인이든 천민이든 상관없이 정말로 원한다면 부둥킬 수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건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하의 미소가 보이는 방사선상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피격당하여 침몰한다. 세바스찬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용서하고, 전하는 행복해진다. 결국 다음번에 또 다시 전하의 억지에 말려든다……. “이렇게 말하면 불경하겠지만, 요한나 전하께선 귀여우시니까요.” “예. 전하께는 아무래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맞아, 묘하게 매력이 있는 분이시지. 나의 주인님은. 그래서 더더욱 내버려둘 수 없다……. “제가 시내에 좋은 과자가게를 알고 있어요. 소개해드릴까요?” “시내에 말입니까?” “주방 하인들이 로리타 님한테 못살게 군다고 들었어요.” 과연, 배려해준다는 명목인가. 데쉬에 실패했다고 해서 간단히 물러나는 여자가 아니었는가. 에리엘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속 시종인 로리타 님이 계속해서 주방 하인들한테 고개를 숙여서야……시종의 얼굴은 곧 주인의 얼굴. 그렇지요?” 배려에다가 하인의 의무까지. 이래서야 거절할 명분이 없다. 상대방은 어떻게든 나한테 빚을 만들어두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선 물러서야 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요. 아직 여러모로 미숙합니다. 앞으로도 지도편달,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얼요. 서로 함께 고생하는 처지인걸요.” 잠시 뒤 우리는 요한나 전하의 별실에 도착했다. 문앞에 당도하자 에리엘이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승리자의 발걸음이었다. “후우.” 이제 알겠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궁전은 마경(魔境)이다. 황태자와 엘리자베트뿐만이 아니다. 손쉬운 상대가 한 명도 없다……정말로. 내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전하. 디펜소르입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해도 여전했다. 이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스무 번 가까이 노크를 하자, 그제서야 문 너머로 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들어오라는 말인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방문을 열었다. 온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방에 붉고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값비싼 채광창에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내 볼품없는 숙실과 천양지차였다. 뭐, 당연하지만. “우으으응……로리타아……?” 방의 주인인 요한나 전하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이불이 구석에 밀리다 못해 침대 옆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탓에 나는 황녀 전하의 잠옷차림을 그대로 구경하는 영광을 누렸다. 옷 사이로 종아리며 뱃살이며 훤하게 드러났다. 이것도 익숙하지만. “예, 디펜소르입니다. 전하. 간밤에 평안하셨는지요?” “느으으……태야앙……태양을 가려줘어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커튼을 활짝 열어재꼈다. 아직 아침이지만 제법 햇빛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제국에서 제일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궁전, 거기에서 제일 좋은 곳에 자리잡은 황녀의 별실다웠다. “그어, 우워어어어……!” 요한나 전하가 좀비처럼 신음했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는 방 한가운데의 욕조로 향했다. 새하얀 욕조는 이래봬도 전하의 침실에서 가장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목욕물에 독극물이 있을 경우 자동으로 발견해서 정화했다. 덕분에 굳이 매일 아침마다 물을 퍼나를 필요가 없었다. ─ 퐁, 퐁, 퐁. 밤새도록 달궈진 돌멩이를 욕조에 넣었다. 모락모락 수증기가 일어났다. 내 하루일과는 이처럼 요한나 전하의 목욕물을 데우는 걸로 시작했다. “태양, 태양이……감히 본녀를 죽이려 들고 있다아아. 로리타, 태양을 물리쳐줘……!” “곤란하군요. 제아무리 저라도 아폴론 신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전하, 어젯밤은 무엇 때문에 늦게 주무셨는지요?” “요새 프랑크에서 유행하는 서사시를 읽다가…….” 쉽게 말해 소설책을 읽다가 밤을 꼬박 샜다는 얘기이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욕조물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음, 딱 적당하게 뜨거워졌다. 전하의 침실에도 벽난로가 있었다면 수고를 덜었겠지만. 여태껏 황실에서 찬밥신세를 받아온 전하여도 침실만큼은 최고급이었다. 여긴 방 자체가 하나의 마법 아티팩트여서 온도 조절이 전부 이루어졌다. 방금 문안에 들어온 것도 그러하다.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시종이 들어왔다면 그 순간 혼절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황금을 쏟아부어 방을 만들었을지, 상상하기만 해도 아연해지는군……. “전하, 다 준비되었습니다. 아침 목욕 시간입니다.” “어째서 사람은 매일 씻을 필요가 있는 거야아……? 들에서 살아가는 동물은 며칠이든 안 씻잖아. 인간이란, 잘못되어 있어……세상은 불합리해애…….” “인간이 동물과 다르고자 발버둥치기 때문이겠지요. 자아, 전하.” 결국 침대에 가서 직접 전하를 일으켰다. 요한나 전하가 비틀비틀거리며 욕조로 향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잠옷용 원피스가 흘러내렸다. 소녀의 여리고 하얀 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욕조에 발끝부터 집어넣었다. “하아아아―.” 온몸을 담그고 요한나 전하가 기분 좋게 한숨을 토했다. 전하는 양손으로 어푸어푸 얼굴을 씻었다. 꼭 어린 고양이 같았다. 전하가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어쩌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아직 열네 살이신데 삶의 의미를 찾으시다니 역시 전하입니다.” 나는 욕조 옆바닥에 앉았다. 전하의 오른팔을 잡아 정성스럽게 꽃향기 향유를 발랐다. 향유에 소녀의 살결이 투명하게 매끈해졌다. “으응? 칭찬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전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시고 현명하신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전하. 소인이 어찌 칭찬 이외에 다른 말을 입에 담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렇지? 하하하. 난 역시 대단하다니까.” “자아, 전하. 이제 왼팔을.” 요한나 전하가 얌전하게 왼팔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귀여워라. 당연하지만, 귀엽다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열네 살 꼬맹이의 속살을 관람한들 뭐 다른 생각이 생기겠는가?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었다. 애당초 그런 낌새가 있었다면 전하가 나를 발탁하지도 않았겠지. “사흘 뒤가 드디어 대사냥회입니다. 전하,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맞아! 진짜 고생했대두. 으으, 아바마마가 부탁해도 다시는 맡지 않을 거야.” 요한나 전하가 욕실물에 잠겨 부르르 떨었다.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요한나 전하는 계획만 짰다. 실질적인 교섭과 준비는 세바스찬이 다 했다. “다시는,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은 사양일세!” 바로 어젯밤에 세바스찬이 절규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세바스찬은 요 몇 주일 사이에 머리카락이 부쩍 빠졌다. 그나마 내가 옆에서 조력했으나 실무적인 부분에선 아직 초보자. 별 도움이 안 되었다. 불쌍한 세바스찬 아저씨……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부족하다며 걱정하던데. “앞으로 사흘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딱 사흘이요.” “으윽, 사흘……. 사흘…….” 머리를 감기고 거기에도 향유를 바른다. 요한나 전하가 욕조에서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살결을 내가 최고급 수건으로 닦았다. 머리까지 말리면 완벽. 이 다음부터는 치장 전문 시녀들에게 맡길 차례였다. 내가 막 뽀송뽀송해진 요한나 전하에게 천옷을 둘렀다. “하지만 전하께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 하얀 천옷을 망토처럼 펄럭이며 요한나 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나는 대단하니까. 로리타, 행여라도 날 쫓아오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이를 말씀입니까, 나의 주인이시여.” 내가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허리를 숙였다. 창밖에선 이제 환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요한나 전하의 은빛 머리카락이 빛났다.   ============================ 작품 후기 ============================   렛츠 연참 나이트. 00194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사냥회 당일. 다행히 날씨가 화창했다. 대사냥회는 사실상 황녀 전하가 합스부르크의 정계(政界)에 데뷔하는 자리였다. 세바스찬과 나는 최고의 무대를 바랐다. 하늘이 우중충하기라도 했으면 사냥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거다. 귀족들이 제도의 숲에 모여들었다. 주최자인 요한나 전하에게 귀족들이 차례로 인사했다. 첫 번째 차례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황태자인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였다. “날씨가 좋구나, 동생아. 축하한다.” 루돌프 황태자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척 봐도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거긴 네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하고 눈동자가 맹렬하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바보스럽다. 축하한다니? 뭘 축하한다는 것인가. 날씨가 좋은 것을? 꼭 날씨가 안 좋기를 원했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황태자 노릇이나 하겠는가. 속이 좁더라도 주위에 드러내지 않는 정도의 요령은 발휘해라. “그러는 오라버니는 기분이 안 좋아보이네. 혹시 몸이라도 편찮아?” “…….” 루돌프 황태자가 잠시 침묵했다. 황태자는 어투가 직설적이었지만, 우리 황녀 전하는 상상을 초월하여 직설적이었다. 말문이 막혔겠지. 안 됐습니다, 루돌프 황태자 전하. 우리 전하는 조금 파천황입니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여동생이라서 성격도 몰랐겠지요. 무지가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감내하십시오. “……아니, 아픈 곳은 없다. 걱정해주어서 고맙다.” “다행이네! 혹시라도 몸이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요한나 전하가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나도 이거 준비하느라 지금 몸상태가 말이 아니야. 이런 걸 두 번이나 개최했다니, 오라버니가 대단한 줄 내가 며칠 전에서야 깨달았다니까.” “……고맙군. 너도 몸이 건강하기를 바란다.” 루돌프 황태자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건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 심정은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도 세바스찬도 자주 그러거든요. 황태자 전하는 결국 반쯤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주변에서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누가 보아도 첫 라운드에선 요한나 전하가 승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한나 전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정체불명……귀족들은 낯선 황녀의 부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최상위 귀족들의 인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풍문으로 전해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전하!” “응, 고마워. 베스트팔렌 변경백. 경의 외모에 대한 풍문은 아직 들은 적 없지만, 만약 풍문이 있었다면 나도 똑같은 말을 돌려줬을 거야.” “음? 하핫, 감사합니다.” 대체로 귀족들은 요한나 전하의 접대에 만족했다. 전하는 천성적으로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갓난아기부터 배운 예의범절이 몸짓에 스며들어 있었으나, 본인 자체는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묘한 밸런스가 있었다. “오십 평생에 황녀 전하께 외모를 칭찬받다니 오래 살고도 볼 일이군요.” “그거 안타깝네. 백작 나이가 지금보다 딱 절반이었다면 고백했을 텐데.” “흐하하핫!” 요한나 전하는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 너스레에 주변의 귀족들이 웃었다. 무엇보다도 요한나 전하에겐 재치가 있었다. 억지로 쥐어짜낸 재치가 아니라 척수반사적으로 그냥 튀어나가는 재치가. 여기 모인 절대다수의 귀족이 요한나 전하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빠른 속도로 어린 황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숨은 진주. 아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단어가 떠오르고 있겠지. “크흐. 황녀 전하께 고백받을 기회를 놓치다니, 이거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소리쳤다. “어이, 프리츠! 보았는가. 내가 이렇게 잘 나가는 양반이라 이거야!” “이 친구가 황녀 전하 앞에서 아주 원숭이가 되게 생겼군.” 다음 순번을 기다리던 노신사가 고개를 저었다. 듬직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남자가 황녀 전하 앞으로 와서 허리를 굽혔다. 공손한 인사였으나 그마저도 노인이 타고난 위압감을 가리지 못했다. “처음 존안을 뵙습니다, 전하.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입니다.” 내가 아, 하고 조용히 감탄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는 게임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에 속했다. 용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사를 적대하지도 않았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사명을 강조했다. 인류는 어디까지나 인류로서 싸워야지 용사라는 한 개인한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설령 마왕군에 승리할지라도 인류는 영웅주의라는 전염병에 걸려버린다……. 변경백들은 마지막까지 인류의 긍지를 보여주겠다며 출격했다. 용사가 아니어도 인류는 마왕군에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결국 변경백들의 군대는 패배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검은 산맥 너머로 진군했다. 요한나 전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환영해요, 긍지 높은 북방의 사자. 그대에 대해서는 나도 몇 번이나 들었어.” 긍지 높은 북방의 사자……. 전하가 말한 그대로였다. 프린츠 폰 로젠베르크를 표현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당사자인 변경백도 놀랐는지 눈이 약간 커졌다. 곧이어 얇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제 살아간다기보다 죽어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노인입니다. 소인에게 과분한 영광을 선물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변경백이? 푸하하, 그럴 리가. 변경백이 죽어가는 거라면 세상에 죽어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얼마 없을걸.” 요한나 전하가 키득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베스트팔렌 변경백과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흥미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지만 삶이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도리어 죽음으로써 증명되는 삶도 있겠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 내가 그대를 환영한다고 말한 건 공치사가 아니야.” “……황공하옵니다, 전하.”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전에 허리를 숙인 것과 분위기가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진심이 느껴졌다. “소신을 기억해주시는 분께서 이 황도에 계시다면, 저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것만으로 기쁜 마음을 갖고 북방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하여간 네놈은 너무 딱딱해.”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끼어들었다. “거 황녀 전하 앞에서 왜 이리 진지한가. 그러니까 나보다 인기가 없는걸세, 이 양반아.” “……후,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하지 못한다더니. 자네가 나한테 마리엔부르크에서 온 그 영애를 빼앗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 아니! 그 사건은 언급하지 않기로 약조했잖는가!”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허둥지둥거렸다. 그러자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미소를 지었다.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던전 어택>에서 변경백의 진중하고 차분한 모습만 구경한 나로서는 놀랐지만, 전혀 인상이 어색하지 않았다. “황녀 전하. 송구하옵니다만, 만에 하나 저희 두 사람의 나이가 절반이었더라도 전하께서는 결코 베스트팔렌 경에게 고백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헤에. 그건 흥미가 깊은걸. 왜 그렇지?” “바로 소신이 전하께 먼저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신이 베스트팔렌 경에게 약탈한 아가씨가 총 일곱 명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요한나 전하가 소리높여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전염병이 있어 근처의 귀족들도 다함께 웃어재꼈다. 졸지에 아가씨들을 빼앗긴 남자가 되어버린 베스트팔렌 변경백만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전하! 사실무근입니다.” “호오. 나의 친우여, 감히 황녀 전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셈인가. 뭣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일곱 처자의 이름을 자네에게 속삭여줄 수도 있네마는.” “이……일곱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이야!”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노호를 터트렸다.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산천초목이 떨었겠지. 아쉽게도 여긴 사냥터였다. 귀족들은 빵 터져서 더 크게 웃었다. 본래 적대적일 터인 변경백과 궁정귀족 사이에 온화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흡족했다. 지금까지 데뷔는 더없이 성공적이었다. 자아,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갈까……. 군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황녀가 걸어왔다. 머리카락은, 요한나 전하와 똑같은 은빛. 다만 요한나 전하와 다르게 엘리자베트 황녀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절도 있는 걸음에 맞추어서 은발이 찰랑거렸다. 변경백들의 차례가 끝난 다음이 엘리자베트 제3황녀였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에바트리에 백작의 작위를 갖고 있었다. 황궁의 무도회나 행사의 주최자가 아닌 이상, 순번상 백작 취급을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언니.” “응, 엘리자베트! 오랜만이야. 거의 이 년만인가?” “그쯤 되었군요. 자매끼리도 얼굴을 보기 어려웠으니, 새삼스레 시절이 다망함을 느낍니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도저히 열세 살이라곤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절제된 미소였다. 하긴 요한나 전하도 이따금씩 나이에 맞지 않는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어찌 되어먹은 핏줄인지……. “맏언니의 장례식이었지요. 그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지금 언니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많이 기뻐하셨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요한나 전하의 표정이 멈칫했다. 주변이 싸늘해졌다. 말 자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나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일찍이 제 나름대로 후계경쟁을 물리치고 당주직에 올라섰다. 황녀의 저의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어수룩한 자는 없었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 두 명의 황자가 연달아 죽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 저마다 병으로, 사고로 인해 죽었다고 전해지나……일각에선 엘리자베트 황녀가 암살을 획책한 거 아니냐고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 엘리자베트가 예전에 의문사 당한 제1황녀를 언급했다. 그녀는 요한나 전하에게 경고한 것이다. 왜 나대고 있는가. 당신도 맏언니처럼 죽고 싶은가. 엘리자베트 황녀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정말로 여동생이 친언니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아직 우리 가족에 오라버니들과 언니가 남아서 다행입니다. 물론, 아바마마께서도 건재하시지요. 작은 가족이나마 화목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 요한나 전하의 숫제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내 눈에는 보였다. 어깨까지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아주 살짝 요한나 전하와 엘리자베트 황녀 사이에 끼어들어, 미리 준비한 포도주잔을 요한나 전하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요한나 전하가 내쪽을 쳐다보았다. 짧게 시선이 오고갔다. 그걸로 충분했다. 요한나 전하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받아들었다. 어깨가 떨리는 것도 멈추었다. 나는 말없이 제자리로 물러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인이 평범하게 음료수를 올려바친 것에 불과했다. “맞아, 엘리자베트. 우리 가족에는 불행한 일이 너무 많았어. 로베르트의 죽음은 특히 충격이었지……여신께서 우리 가족의 영혼을 굽어 살피시기를.” 나는 또 한 잔의 포도주를 준비해서 이번엔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올렸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차분하게 와인잔을 넘겨받았다. 이로써 요한나 전하에게 포도주를 바쳤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겠지. “…….” 순간, 황녀의 푸른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싸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핥고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언니. 여신께서 우리 가족을 굽어 살피시기를.” 쨍그랑, 하고 두 자매가 와인잔을 부딪쳤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DaysofDoom// 예압, 첫코. 수천천사//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오해입니다. 정말이에요. 할레데임// 본작으로 키우면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게 되어 제가 죽어버립니다. NineBreaker// 더블연재=죽음, 이라고 제 머릿속 사전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ㅅㅅㅅㅅㅅㅅㅅㅅ// 죄송합니다. 딴길로 샜는데 생각보다 재밌네요.(...) 다음편에 얼른 끝내고 본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곰상아들// 예압, 세이프. fewfqew// 놀랍게도 이곳에서 주인공은 꽤 성실합니다! 시크리트으// 장담컨대 아마도 시크리트으 님은 모든 독자 여러분을 통틀어서 가장 열렬히 베드엔딩을 바라는 분일 겁니다.(...) 어둠을헤매는자// 내일 끝낼 예정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은 두 편 연참했으니 용서해주시길... katrias// 말씀이 너무나 난해하여 저로서는 알아듣기 어렵군요! 쓰다보니 재밌어서 다음편에 끝날 예정이 되었습니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193편에서 대사냥회가 끝나고 외전도 끝날 계획이었습니다만... 요한나가 생각보다 귀엽네요.(...)   00195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                        * * * 사냥회는 순조롭게 시작했다. 귀족들은 자유롭게 이합집산하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열띄게 사냥감을 쌓아올렸다. 점심이 되어 한 차례 휴식시간을 가질 때가 되자, 수십 명의 하인이 저마다 사냥감을 들쳐매고 돌아왔다.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고귀하신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전하께 진상합니다.” “리히트호펜 남작이 고귀하신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전하께 바칩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고귀하신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전하께 진상하나이다.” 이번 사냥회에서 황실의 레이디는 두 사람, 요한나 전하와 엘리자베트 전하였다. 귀족들은 제각기 자신이 원하는 레이디에게 사냥감을 바쳤다. 두 전하 앞에는 사슴이며 멧돼지며 멋들어진 사냥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헤에.” “호오.” 두 전하가 흥미롭다는 듯 구경했다. 황태자파에 속하는 귀족들과 변경백들은, 재미있게도 요한나 전하한테 사냥감을 진상했다. 반면에 황녀파에 속하는 귀족들은 엘리자베트 황녀한테 진상했다. 요한나 전하가 씨익 웃었다. “이거 어떡하지, 엘리자베트? 오늘 최고의 마드모아젤은 나인 것 같네.” 엘리자베트 황녀의 협박에 떨어대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장난스럽고 순수한 악동이 거기 있었다. 물론, 엘리자베트 황녀는 고단수였다. 한시도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직은 그렇군요. 하지만 사냥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언니.” “흐응. 그래, 아직도 행사는 많이 남았지.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도 지루하지 않아?” “지루하시다면?” 요한나 전하나 이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나는 신호를 알아듣고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마음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번 사냥회의 '백미'를 선보일 차례였다. ‘자아.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루돌프 황태자 전하. 엘리자베트 황녀 전하.’ 두 사람은 우리 요한나 전하에게 선전포고했다. 한 사람은 직접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간접적으로. 둘 다 건방지고 콧대 높은 황위계승자였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황제 폐하께서 지정하신 주최자, 요한나 전하한테 감히 무례하게 나왔다. 그들이 이런 태도로 나오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벌써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끄응, 끙.” 임시로 내 휘하에 배속된 하인들을 시켜서 큰 상자를 들고오라 명령했다. 하인들은 끙끙거리며 상자를 가져왔다. 쿠웅, 소리를 내며 상자가 바닥에 놓였다. 가볍게 점심을 챙겨먹던 귀족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다. “친애하는 전사들이여! 수고했어.” 요한나 전하가 일어서서 손뼉을 쳤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손녀뻘인 나에게 이토록 열렬히 구애하다니 경들의 취미가 심히 의심스러운걸. 합스부르크 제국의 미래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야.” “하하하.” 귀족들이 뿔잔을 치켜들며 “황녀 전하를 위하여!”라고 소리쳤다. 여기저기서 무질서하게 건배가 이어졌다. 엉망진창인 건배 선창이 오히려 묘하게 화음을 이루어, 연회장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오직 루돌프 황태자만이 뚱한 얼굴이었다. “고마워, 친애하는 전사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위해서 한 가지 선물을 준비했어.” “호. 그것이 무엇입니까, 전하?”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물었다. 그는 성량이 유독 거대했다. 단순히 질문했을 뿐인데도 목소리가 모두한테 들렸다. “바로 사냥감이지. 그대들이 나를 위해 이리도 많은 맹수를 잡아 진상하는데, 주최자인 나라고 그럴듯한 짐승 하나 잡지 않아서야 쓰겠어?” “음? 황녀 전하께서 사냥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응, 아주 거대한 사냥감이야.” 요한나 전하가 대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대들이 나에게 선물해준 사냥감보다 아무래도 격이 한 단계 높다고 고백해야겠어.” “허허, 그거 기대되는군요.” 귀족들이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이미 요한나 전하가 허언을 일삼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전하가 이렇게 말했으면 정말로 대단한 사냥감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재치 있는 농담거리일 거라고 기대하겠지. “로리타.” “예, 전하.” 내가 관짝처럼 커다란 상자의 문을 열었다. 상자가 열리고 그곳에서 소위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내자,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묘령의 여인이 있었으니까. “그 아가씨가 전하의 사냥감이옵니까?” 베스트팔렌 변경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덩치가 고릴라처럼 거대했는데, 그렇게 위여운 동작을 보여주니 꽤나 어색했다. 요한나 전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그녀는 반역자야.” “……예? 송구합니다, 전하. 소신이 잘못 들었나이다.” “그녀가 반역자라고 말했어. 베스트팔렌 변경백.” 반역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서로를 바라보거나 여인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빠르게 루돌프 황태자와 엘리자베트 황녀의 안색을 살폈다. 황태자는 가만히 인상을 찡그렸고, 황녀는 평탄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통해서 나는 깨달았다. ‘엘리자베트 황녀, 당신이었군.’ 내가 몰래 오른손을 꽈악 쥐었다. * * * 수주일 전부터, 세바스찬과 나는 계획을 짰다. 우리는 황제 폐하께서 대사냥회를 맡긴 이래 요한나 전하가 황위계승권자들의 타겟이 되리라 예상했다. 제1황녀, 제3황자, 제4황자, 자그마치 세 분의 전하가 의문사 당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들의 죽음에 무언가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우리는 “요한나 전하에게도 암살 위험이 밀어닥칠 것”이고, 그것도 “아주 빠르게” 다가오리라 생각했다. “에이.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우리들의 생각을 전해듣고 요한나 전하가 반신반의했다. “이제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루돌프 오빠랑 엘리자베트가 그렇게 빨리 움직일까?” “인생은 화살처럼 빠르지만 죽음은 더더욱 빠릅니다, 전하. 부디 고려해주시길.” “하지만 어떻게 나를 죽여?” 요한나 전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황궁에 있어. 여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구. 암살자가 침입할 방법이 없는걸.” “전하, 황궁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암살자가 널려 있습니다.” “하아? 누구?” “시녀들과 시종들. 그들이 꾀임에 넘어가지 않으리나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에 요한나 전하가 화나서 껑충 뛰었다. “그럴 리 없어, 바보들아!” 요한나 전하는 어릴 적부터 황궁에서만 지냈다. 덕택에 시녀들이나 시종들과 친밀했다. 실제로 궁내부의 사람들은 모두 이 귀여운 두 번째 황녀 전하를 사랑했다. 하지만 음모는 바로 상대방이 “그럴 리 없다”라고 믿는 곳에서 시작한다……. 세바스찬과 내가 합심하여 겨우 전하를 설득했다. 황녀 전하가 씩씩거리면서 소리쳤다. “좋아! 어디 너희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만약 암살 음모 따위가 없었다고 밝혀지면, 너희 둘 다 엉덩이 발개벗고 나한테 볼기를 맞을 줄 알아!” 황녀 전하가 엉덩이를 때리겠다 말한다면 그건 정말 때리는 것이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명심하겠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만약 누군가가 요한나 전하의 암살을 노린다면, 틀림없이 하인들을 통해서 이루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요한나 전하에게 직속 시종이라곤 고작 우리 두 명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세바스찬에게 말했다. “아마도 암살자는 세바스찬 님을 이용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그건 왜 그런가?” “세바스찬 님이 지나치게 노련한 궁내인(宮內人)이기 때문이지요. 요한나 전하에 대한 충심도 확실하고, 더군다나 수십 년 동안 궁전에서 지내온지라 쉽사리 암살에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흠.” 세바스찬이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았네. 필경 자네를 통해서 암살을 모의하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루돌프 전하나 엘리자베트 전하, 두 분은 심복들을 총동원해서 저를 감시하고 있겠지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 증거로, 벌써 저에게 은밀한 하룻밤을 주문한 시녀가 스물세 명이나 됩니다.” “허허허.” 세바스찬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제국 역사상 가장 인기많은 하인이 되었군. 축하하네, 로리타. 자네가 부럽구만.”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는 곤란합니다. 뭐, 그중에는 순수하게 저와 즐길 마음으로 접근한 여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전부 거절했습니다.” 세바스찬이 음? 하고 눈썹을 쨍그렸다. “어째서인가? 그들을 낚아올려야지 미리 암살에 대비할 수 있을 터인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중에 정말로 저와 한번 자려고 접근한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암살자라는 확신이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고 내가 제안했다. “황녀 전하의 군것질거리를 제가 모두 책임진다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실제로도 이미 그러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소문'입니다, 세바스찬 님.” 내가 그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세바스찬 님의 인맥을 경유해서 다과를 얻었습니다. 이제부턴 다릅니다. 저 홀로 주방을 오가면서 과자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그렇게 되면 자네가 볼품없이 주방의 하인들에게 구걸해야 할 것인데.” “바로 그게 목표입니다.” 세바스찬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제가 전하의 입에 직접 들어갈 과자를 구하느라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런 소문이 퍼진다고 해보지요. 암살을 노리는 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세바스찬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치켜들었다. “그런가, 자네의 궁색한 처지를 이용하려 들겠군!” “예. 저에게 과자장인이나 과자가게를 소개시켜 주려는 사람이 나오겠지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만약 주방의 하인들과 화해시켜주겠다고 말하면 암살자일 가능성이 적습니다. 하지만, 황궁의 주방이 아니라 예컨대 궁 바깥의 장인이나 가게를 소개한다면……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암살자입니다.” 우리는 차분하게 낚싯바늘을 드리웠다. 아니나 다를까. 사냥회가 시작하기 며칠 전, 한 명의 시녀가 내게 접근했다. 에리엘. 쇠퇴한 궁정귀족의 사녀이자 첩의 딸인 그녀는 사실상 가문에서 내쳐진 여자였다. 암살자로 써먹기에 이보다 적절한 시녀는 없겠지. 요한나 전하에겐 충격이었다. 시녀들 중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있었다. 가족의 우애 따위는 눈꼽만치도 느껴보지 못한 황녀 전하에게, 진짜 가족은 다름 아니라 하인들이었다……그런 이가 배신했다. 더더구나, 그 암살을 획책한 배후는 루돌프 황태자이거나 엘리자베트 제3황녀. 친오라비와 친여동생이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요한나 전하가 침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궁정이 이런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슬프구나. 결국 나에게 가족이란 없는 거였어…….” “전하.” “로리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조언해줘.” 요한나 전하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나는 그것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 * * “그녀는 이미 자신이 암살자임을 고백했어. 하지만, 충성스럽게도 그녀를 고용한 주인이 누구인지는 끝끝내 밝히지 않더라구.” 요한나 전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귀족들이 아연질색하여 전하를 바라봤다. 며칠 전, 나는 에리엘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척 유인했다. 에리엘은 기쁜 듯이 따라왔다. 그녀를 기다리는 운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여성으로선 도저히 버티지 못할 칼질이 이어졌다. 그녀는 겨우 두 시간을 채 버티지 못하고 토로했다. 다만, 모종의 마법이 걸린 것일까. 누가 그녀를 사주했는지만큼은 말하지 못했다. 요한나 전하가 검을 집어서 에리엘의 발밑에 내던졌다. “자아, 검을 들어. 암살자.” “…….” 에리엘이 벌벌 떨면서 발밑을 쳐다보았다. 옷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신체는 이미 고문으로 인해 엉망진창이었다. 고문은 요한나 전하가 직접 관람하는 앞에서 치루어졌다. 에리엘은 명백히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요한나 전하가 미소를 지었다. 잔인한 미소였다. “왜 그래?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제국의 핏줄을. 두 번째 황녀인 나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 기회를 주려는 거야.” “어, 으…….” “경고하는데, 너가 검을 들든 들지 않든 결투는 시작해.” 에리엘이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롱소드를 들었다. 시녀의 가녀린 팔목, 게다가 고문을 겪은 몸으로는 검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했다. 그걸 보고 요한나 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또한 세검을 빼들었다. 결투가 시작한 것이었다. “으, 으아아아악!” 에리엘이 괴성을 지르면서 전하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보아도 보법이 엉망이었다. 허나 황녀의 옥체에 검끝이 다가간다는 사실만으로 주변의 귀족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뛰어들려고 했다. “전하, 위험합니다!” 그 직전, 요한나 전하가 한 발자국 먼저 움직였다. 전하는 사뿐하게 몸을 돌려서 가뿐하게 에리엘의 검을 피했다. 그대로 세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정확히 에리엘의 목을 쓸어넘겼다. 에리엘은, 자기가 달려온 기세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털썩 넘어졌다. 이 시녀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후에 영원히 일어서지 못했다. “…….” 좌중이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말문이 막혀서 전하를 바라보았다. 전하만이 도도하게 허리를 바로 세우고 서 있었다. 전하가 휙, 하고 검을 내리쳤다. 핏물이 땅바닥에 튀었다.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이여. 이 사냥의 주빈인, 위대한 변경백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의 황실에 불미스러운 풍문과 어두운 소식이 연달아 터지고 있음을 알 거야.” 황녀와 황자들의 의문사를 일컫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해둬. 합스부르크는 아직 명예를 잊지 않았어. 제아무리 불법적인 수단이 황가를 위협하더라도, 불순한 무리가 황실의 이름을 더럽히더라도, 나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전사의 명예를 죽는 그 순간까지 지킬 것임을 그대들에게 보여주겠어.” “…….” “그러니 그대들은 황실을 걱정하지 마. 그대들의 영지로 돌아가. 그대들의 전선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영지를 보살피고, 국경을 사수해. 그대들이 합스부르크의 성벽을 지킬 동안 나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는 황궁에 충실히 봉사할 테니.” 요한나 전하가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내가 그대들에게 바치는 사냥감이야.” * * * 대사냥회가 파했다. 점심이 끝나고도 사냥은 계속되었지만, 사냥에 신경을 열중하는 귀족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은거하던 제2황녀가 공식적으로 후계경쟁에 뛰어들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결투'라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방식을 통하여. 세련된 취향의 귀족은 이것이 야만스럽다 여겼으나, 대다수의 귀족, 기사도에 대한 낭만에 공감하는 귀족들은 요한나 전하에게서 깊은 인상을 느꼈다. 특히나 골수부터 군인인 변경백들은 사냥회가 끝나고도 개인적으로 요한나 전하를 알현함으로써 무언의 지지를 보내왔다. 그날 하루가 끝나고 밤이 깊어졌다. 요한나 전하는 좀처럼 침상에 들지 못했다. 끊임없이 포도주를 마셨다. 나는 그녀의 옆에 서서 조용히 전하가 원할 때마다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로리타. 나는 내가 단 한 번도 루돌프나 엘리자베트와 경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전하가 중얼거렸다. 나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창밖 너머의 무언가에게 말을 건네는 느낌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즐겁게 살아가다 죽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싶었어. 하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하인들조차 간단하게 나를 암살하려고 들어. 아마도 나는 언젠가 소리 소문 없이 암살되었겠지…….” “…….” 아니다. 당신에겐 조금 더 처참한 죽음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루돌프 오라버니는, 엘리자베트는……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을 해온 거야? 어째서……황위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전하의 어깨가 조금씩 떨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우는 모습은, 일개 하인이 봐도 좋을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고개를 돌리더라도 살며시 이 어린 공주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앞으로도 우리는 몇 번이나,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이런 일을 겪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다름 아니라 대륙의 패자가 될 여인이니까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절대로 전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결코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게 지지하겠습니다. 당신이 제 목숨을 구했듯이, 제가 당신의 목숨을 지키겠습니다. 설령 죽더라도 제가 함께 죽어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한낱 시종에 불과한 저라도 할 수 있겠지요……. 밤이 깊어졌다. 이 밤이 얼마나 더 깊어질지 모른 채, 우리는 조용히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IF 루트 <프린세스 디펜스> END. 이후로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 황녀와 로리타, 세바스찬은 서로 의지해가며 난국을 헤쳐나가겠지요. 그들이 미래의 패왕에게 맞서서 어떻게 생존해나갈지. 그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고자 합니다. 00196 순례의 길 =========================================================================                        * * *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이곳 세계의 신화는 그렇게 말한다. 혼돈 도가니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혼돈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신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허나, 수많은 신을 모시는 여기 세계에서도 혼돈이라는 이름의 신만큼은 없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그냥 낳아졌다. 세계도 똑같지 않은가. 세계 자신도 결코 태어나기를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마치 예정에 없는 아이를 배어버린 섹스 파트너가 「어라, 생겨나버렸어. 헤헤」라고 남자친구에게 고백하듯이, 어쩌다보니 생겨났다. 차이점이라면 인간과 다르게 세계엔 피임약 따위가 없었다는 것이겠지. 만약 이 사생아가 세상에 온갖 저주를, 고통, 질병, 전쟁, 죽음을 뿌려댈 것임을 누가 미리 알았기라도 한다면――세계에게도 산부인과 의사가 있어 「지워버립시다, 정말로, 진지하고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하고 말해줄 수만 있었다면. 그리하여 산부인과 의사가 사생아로서의 세계에게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말해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겠는가. 그러나 여기 신화에는 의사가 없는 것이다. 세계가 탄생해도 좋을지 나쁠지 말해줄, 산파로서의 조물주가 전혀 없다. 태초에는 혼돈만이 있었다……세계는 지멋대로 태어나버렸다. 따라서, 세계가 탄생해서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영원히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지극히 전투적인 신화가 아니고 뭔가. 신들이 건강하고 영웅들이 일어선다면 그때 세계는 「좋다」. 마왕들이 들끓으며 몬스터들이 대지를 휩쓴다면 그때 세계는 「나쁘다」. 세계가 태어나서 좋았는지 나빴는지, 사람들은 처음부터 결정할 수 없다. 영웅들과 마왕들은 항상 싸워가며 결정해야만 한다. 지금의 시대가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그렇다면 백성들이여, 묻노라니.” 내가 말에 올라탄 채로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장에 프랑크가 악(惡)에 물들었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전염병이 창궐하며 길거리마다 사신이 음산하게 웃어대는구나. 프랑크의 백성들이여, 정말로 들리지 않았는가? 그대들의 귀에 사신들은 가장 창백하게 속삭이지 않았던가.――이제 죽을 시간이다, 필멸자여. 이제는 고통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나의 연기는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도시광장에 모인 육백 명의 사람들, 순진무구한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여자가 짧게 비명을 지르면서 혼절했다. 나는 지금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사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아, 이 시대 사람들은 정말이지 연설해주는 보람이 넘쳐났다. “식량은 떨어져가고 가족들은 죽어간다. 일초일초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서쪽에서는 브르타뉴 군대가 그나마 남은 식량을 약탈하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백성들이여. 프랑크는 전례없는 악에 물들어 있다. 내 재차 묻노라니, 그대들은 어찌해야 마땅한가?” “브르타뉴 놈들을 깨부숩시다!” 광장 한가운데서 남자 한 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수백 명이 벌떡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쳐죽여라! 놈들이 우리를 약탈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없다! 호밀 한 톨도 바칠 수 없다!” “세금을 거둘 것이면 흑색 허브부터 풀어라――!”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 가리지 않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과격하게 주먹을 흔들었다. 거친 농사로 인하여 단단해진 팔뚝이 구릿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렇다! 그대들은 프랑크를 악으로부터 구원할 의무가 있다!”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호와 같은 고함을 뚫고, 마법의 도움을 받아 목소리는 광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태초에 최초의 남자가 밭을 갈고 최초의 여자가 길쌈할 때, 누가 귀족이었던가! 태초부터 모든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니, 그대들 역시 악을 물리치고 프랑크를 구원할 힘이 있노라! 프랑크의 위대한 신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나는 두 손을 불끈 쥐어잡았다. “행군하라! 돌격하라! 이제, 드디어 우리에게 신들께서 정하신 때가 도래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비로소 그대들은 억압의 굴레를 벗고 자유를 되찾아, 오롯이 스스로 이 프랑크의 대지에 신성한 국가를 세울 수 있으리라!” 수백의 시민이 짐승처럼 포효했다. 미리 계획한 대로 광장 한켠에서 드워프 용병들이 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단창, 장창, 검,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쥐어잡았다. 열광을 뛰어넘어 광기가 도시에 불타올랐다. 손에 무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거대한 차이를 낳았다. 칼끝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으므로. “영주관으로 향하자! 흑색 허브를 되찾자!” “무기고로 쳐들어간다! 친구들이여, 프랑크를 위해 봉기하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일어서라!” 선동가들이 소리치자 오백 명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은 도시의 골목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동료와 가족을 불러모았고, 오백은 순식간에 천으로 불어나 도시 저편의 영주관으로 진격했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난쟁이 용병들과 합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용병단장인 자크리가 처억, 하고 군례를 올렸다. “아아. 무기는 정확히 이백을 나누어주었는가?” “예. 창과 도끼, 검을 위주로 배분했나이다.” “시민들이 무기고를 열어재끼면 여유분을 다시 보충하도록.” 프랑크 전역에 무법지대를 만드는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마왕 레라지에가 영지를 침입한다. 영주는 겁에 질려 우리 용병단을 고용한다. 그 다음에는 일방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 영주군의 작전과 배치를 레라지에한테 전부 알려주어, 간단하게 영주군을 괴멸시킨다. 그렇게 전멸한 영주군을 구원하는 입장이 바로 용병단이다. 우리 양날도끼 용병단은 '치열하게' 마왕군과 격돌하여 '간신히' 적을 몰아낸다. 자그마치 영주가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던 싸움이다. 백성들 입장에선 이제 영락없이 몬스터한테 잡아먹히겠구나, 하고 두려워하는데 용병단이 구해준 것이다. 물론,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비단 백성뿐만이 아니다. “와아! 사제님, 사제님! 정말 대단해요!” 루크가 달려와서 나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꼬마 남자애는 완전히 영웅이라도 보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루크. 오늘도 열심히 공부했니?” 오는 미소가 고운데 가는 미소가 곱지 않을 리 없었다. 나 또한 상냥하게 웃으면서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크는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도 새벽부터 점심까지 검술을 익혔습니다!” “루크는 정말로 성실하구나. 여신께서는 성실함을 사랑하신단다. 하지만, 루크.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구나.” 내가 엄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검술은 검술이고 글쓰기 연습은 글쓰기 연습이지. 오늘 하루의 공부를 분명히 채웠겠지?” “아……그게. 아직. 헤헤헤.” “으이구, 요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 같으니라고.” 루크의 앞머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겼다. 아프지도 않을 것인데 루크는 엄살을 피우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참고로 루크의 교육은 용병단장 자크리가 무술을, 암살대장 제레미가 교양을 맡고 있었다. “사제님! 남자로 태어났으면 글이야 자기 이름 쓸 줄만 알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도 얼른 한 사람 몫의 군인이 되어서 아르테미스 여신님과 프랑크를 위해 싸우고 싶어요!” “어휴. 어디서 들은 것은 많아서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내가 녀석의 뺨을 잡아서 쭈욱 늘렸다. 루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으브, 어, 바흐으.” “듣거라. 공부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기 마련이다. 너가 당장이야 여신을 위해 봉사한다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여신을 위해 봉사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 어찌 알겠느냐?” “…….” 뺨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루크는 자기 볼을 매만지면서 눈썹을 쨍그렸다. “여신님께선 언제나 항상 옳으시지 않나요?” “그렇다면 왜 여신은 언제나 항상 옳으냐?” “그야……여신님이니까? 어라? ……으응?” 루크가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허. 그러니 루크 너는 여신이 왜 옳은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여신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거로구나.” “뭐, 뭔가 이상해요, 사제님!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상해요!”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거다. 요 천방지축아.” 녀석에게 꿀밤을 한 방 더 먹였다. 이번에는 조금 강하게. “으으으!” 루크가 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꼭 똥 마려운 강아지가 주인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뭐, 너무 분해하지 마라. 이래 봬도 내가 말빨 하나로 여기까지 먹고 살아온 놈이란다. 세상물정 모르는 화전민 꼬마한테 당해서야 진즉에 혀 깨물고 자살해야지 않겠냐. “자아, 해가 넘어가고 있다. 얼른 제레미 선생님한테 가서 배우거라.” “아, 그러니까 그게……하아아. 알겠어요. 배우면 되잖아요, 배우면…….” 루크가 미역처럼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고 걸어갔다. 딱히 공부를 싫어해서 저러는 것은 아니다. 당장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영웅적인 연설이 오가며, 봉기가 일어난다. 소년에게는 매순간이 역사적으로 느껴지리라. 그런 흐름에 끼어들지 못하고 고대제국어나 고대공화국어 따위를 배우니 몸이 따분하고 간지러워 견딜 수 없겠지. 뭐,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제레미가 얌전히 공부만 시키지 않는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해서 종류가 퍽 다른 '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루크가 멀리 여관집으로 향했다. 용병들도 차례차례 여관에 들어갔다. 나는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정말 순수하고 착한 아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 데이지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 화전촌에서 나를 상대로 따박따박 맞서던 여자아이의 눈초리는 많이 죽어 있었다. 최근 들어 눈이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루크가 오빠여서 자랑스럽겠군. 물론, 루크도 네가 여동생이어서 자랑스럽겠지. 매일 저녁마다 정분을 나누는 사이인데 아무렴. 남매도 보통 남매 사이가 아니야.” 내가 키득거렸다. 그제야 데이지의 눈빛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버님은 루크를 속이고 있어요. 광장에서 연설한 것도 전부 거짓말입니다.” 데이지는 구태여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했다.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이대로 굳어버리면 나에게 일말의 방심이라도 생겨나리라 노리는 것이었다. “흐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버님이 거짓말을 할 때는 거짓말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님은 당신의 진심을 말씀하실 때 결코 연설조가 되지 않습니다. 방금 광장에서, 아버님은 틀림없이 거짓만을 말했습니다.” “직감이라! 그거 대단한 재능이로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데이지가 어깨를 들썩였다. “……읏.” 오늘도 시작했다. 슬라임 오나홀을 이용한 고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목적은 데이지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것.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여관방에선 제레미가 루크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겠지. ‘너희 남매는 우리로부터 떨어질 수 없어져야 한다.’ 루크는 정신적으로는 나에게 종속되고, 육체적으로는 제레미한테 묶인다. 그렇게 나는 차근차근 미래의 용사를 옭아매고 있었다. 데이지가 양팔로 몸을 감싸며 간신히 쾌락을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순전히 나의 악취미로, 내가 지켜볼 경우 데이지가 더더욱 수치스러워한다는 이유 때문이다――프랑크 전역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슬슬 폭발할 기점이 되었어.’ 멀리 영주관이 있는 방향에선 성난 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들이 격렬하게 반항하겠지. 시민들에게는 무기가 있다. 찌르는 것은 무척 간단하다. 서부는 브르타뉴군에 엉망으로 되어갔으며, 북부는 마왕 레라지에와 나로 인하여 무법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폭발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00197 순례의 길 =========================================================================                        다음날, 자크리가 소식을 가져왔다. “브르타뉴 군대가 황도(皇都)에 입성했습니다.” “음. 국경을 넘은 지 정확하게 20일인가…….”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탁자에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군.”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입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난쟁이 자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내가 사자성어를 쓰면 뜻이 전달되지 않고 그냥 낱말째로 번역되어 나갔다. 도대체 메커니즘이 어떻게 생겨먹은지 모르겠다. 참, 프랑크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발음이 무척 고급스럽다고 한다. 어느 날 자크리가 맥주를 마시면서 지적해주었다. ‘꼭 궁정귀족이 쓰는 프랑크어 같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따로 외국어를 교습받으셨습니까?’ ‘아, 뭐. 그렇다네.’ ‘합스부르크어에도 능숙하시다 들었습니다. 혹시 그외에도 능통하신 언어가?’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언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겠지. 이 세계에선 사람들, 특히 마법 아티팩트를 구입할 정도로 재산이 넉넉한 사람은 좀체 외국어를 배우려 들지 않는다. 번역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 인간계의 언어라면 웬만큼은 전부.’ ‘정말입니까. 대단하시군요!’ 자크리가 놀라워했다. ‘보통 마왕 전하들은 공부를 게을러하기 마련인데……아니, 물론 단탈리안 전하께선 보통 마왕이 아니지요. 대단하십니다.’ ‘흠. 흠.’ 그날 이후로 자크리는 나를 더더욱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싹 다물었다. 양심이 찔렸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나의 양심은 찔린 걸로 따지자면 벌써 난도질을 골백 번은 당했는걸. 아무튼 지금은 내 우아한 발음보다 프랑크의 전황이 문제였다. 외적이 침입하고 단 20일 만에 수도에 입성했다.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전투 하나 없이 행군했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정말로 전투 한 번 없었다면 모르겠으나……. “프랑크 제국이 힘을 못 써도 너무 못 쓰고 있네. 이거야 원.” “브르타뉴 왕국이 예상보다 강력합니다. 여왕의 명성도 심상치 않고요.” 전황은 이러했다. 외적이 갑작스럽게 침입하자 프랑크 귀족들은 처음에 우왕좌왕했다. 아직도 월맹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왕의 세력과 인류의 세력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이때, 설마 똑같은 인간측에서 공격해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특히, 프랑크의 귀족들은 월맹군 원정에 병력을 많이 차출했습니다. 국경지대에 대한 감시가 평소보다 소홀했을 겁니다.” 자크리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프랑크 귀족들은 어떻게 월맹군 전쟁 도중에 인류가 인류를 공격할 수 있느냐고, 브르타뉴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짓이지.” 벌써 여기서부터 브르타뉴와 프랑크의 실력차가 엿보였다. “브르타뉴의 앙리에타 여왕은 월맹군 원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간파헀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절대로 월맹군의 공격을 못 버티지. 그런데도 월맹군은 공격하지 않는다……어째서냐, 그렇게 자문했겠지.” 그리고 눈치 챘다. 마왕군이 또 분열했다는 것을. 역대 월맹군 원정에서 마왕들이 얼마나 거창하게 삽질했는가는 유명했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내가 왜 마왕 따위로 전생했는가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앙리에타 여왕은 내심 마왕들을 비웃었으리라. 인류를 멸망시킬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도, 자기네 파벌 싸움에 정신이 팔려 천재일우의 찬스를 놓쳐버렸다. 한심한 이야기였다……. “첩보에 따르면, 앙리에타 여왕은 미리 군대를 소집시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인류가 합스부르크에서 완전히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고, 추가적인 군대를 준비한 듯합니다.” 그 군대는 고스란히 프랑크 침략에 이용되었다. 프랑크에도 멍청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작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방군이 구성되었다. 백전노장 후작들이 군대를 통솔하여 맞서 싸우려 했으나――황도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브르타뉴는 짐의 적이 아니오. 프랑크의 친구이노라. 사령관들에게 명령하는바, 브르타뉴가 원하는 대로 길을 내주고, 브르타뉴가 원하는 대로 물자를 지원하라.’ 무엇을 숨기겠는가. 바로 프랑크의 황제였다. 프랑크의 지방사령관들이 대혼란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어느 나라의 황제가 외적에 길을 내주고 물자를 제공하라 명령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다. 외적에 저항해야 하는가. 아니면 황명에 복종해야 하는가. 사령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사상초유의 사태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서 브르타뉴는 여유롭게 행군했다. 행여나 제국군이 길목을 막아서면, ‘여기 프랑크의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서가 있다.’ ‘우리는 이곳을 지키는 수비대로…….’ ‘닥쳐라! 네놈들, 감히 폐하의 명령에 반항할 생각인가!’ 하고 앙리에타 여왕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는 정말로 황명이 적힌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그딴 위조 명령서를 들이미냐고 비웃었겠지. 하지만 제국군은 떨떠름하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려 세 군데의 요새가 눈뜬장님처럼 왕국군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요새주둔군은 무장까지 해제됐다는군요.” 마왕들 못지않게 희대의 병신짓을 터트려주는 황제였다. 브르타뉴군은 국경지대와 요새지대를 아무 피해 없이 통과했다. 이때 가서야 몇몇 프랑크 귀족들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공화주의자 귀족들이 충격을 먹었다. 비유하건대 조선 국왕이 신하들 때려잡겠다며 왜군을 불러들인 격이었다. ‘우리를 없애려고 폐하가 불구대천의 원수 브르타뉴까지 끌어들였다!’ 참다못해 일부 귀족이 들고 일어섰다. 프랑크 육군 총사령관 몽모렌시 원수, 기즈 공작, 생-앙드레 원수 등, 황태후파와 중립파의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둘러 병력을 소집했다. 아쉬우나마 15,000명 가량의 병력이 준비되었다. 질풍노도의 기세로 브르타뉴가 몰려오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죄다 모은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브르타뉴군은 약 9,000명. 병력 면에서 프랑크가 압도했다. 과연 제국을 칭하는 나라답다고 칭찬해야 할까. 제국군과 왕국군은 군사요충지에서 격돌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프랑크군은 분명히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뭐, 어쩌면 브르타뉴를 아예 몰아낼 수도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거의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 * * 브르타뉴 왕국군은 작전회의로 시끄러웠다. “프랑크의 황제가 원군을 파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정말로 황제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해온 대로 프랑크 놈들에게 말합시다. 황명이라고 둘러대면 놈들도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겁니다!” “글쎄, 적군의 사령관은 몽모렌시 원수요외다. 웬만한 협박에는 콧방귀나 뀔 것이오.” 귀족들은 대체로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이었다. 구천의 병력으로 일만오천의 병력에 대항하는 것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경향이라 보아도 좋겠지. 앙리에타 여왕은 상석에 앉아 회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수들이 어느 정도 의견을 조율했을 무렵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조용히 툭, 하고 말했다. “내일 새벽에 총공격한다.” 귀족들이 침묵했다. 그러자 노장(老將) 콜레녜 후작이 대표로 발언했다. “전하. 프랑크의 황제가 원군을 약속했나이다. 구태여 병력이 열세에 처한 지금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눈앞의 제국군은 허울만 좋은 허수아비야. 속은 텅텅 비었어.”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왕이 당차게 말했다. “일견 병졸의 숫자가 많아 대단해보여도 기병이 적다. 일만오천 중에 겨우 삼천은 될까. 반면에 우리는 구천 명에 불과할지언정 오천 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다. 제군들. 그대들은 착각하고 있어.” 앙리에타 여왕이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적군이 우리보다 많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적군보다 '네 배 넘게' 많다.” “……예? 전하, 네 배라니요?” “프랑크의 귀족들은 아직도 황명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다. 지금 눈앞에 모인 병력은 대다수가 징집병. 즉, 귀족들의 기사단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적은 기병 중에 기사의 비율은 더더욱 적을 터. 기껏해야 백 명이겠지.”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우리는 기사단의 수효가 구백 명에 이른다. 질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이다. 이것이 우리 브르타뉴가 적에 비해서 '두 배' 앞서는 까닭이다.” 여왕은 자아, 하고 손가락 두 개를 접었다. “적군은 비록 모여있다 한들 여전히 황명에 반항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다. 우리가 전투를 꺼리는 만큼이나 저들도 전투를 꺼리고 있다. 지금쯤 적군의 수뇌부는 공세를 퍼부어야 한다는 입장과 그저 시간을 끌어보자는 입장으로 나뉘었을 터.――적은 현재 두 쪽으로 나뉘어 있다. 고로.” 앙리에타 여왕이 나머지 두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저들은 전력이 두 쪽으로 나뉜 상황에서 두 배나 강력한 우리와 맞서야 한다. 우리가 제국군보다 네 배 유리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제군들! 우리는 하나로 단결되었으며 저들은 분열되어 있다.” 귀족들이 말없이 여왕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왕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빨려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에 반하는 세력들이 점차 뭉칠 터. 황명에 거스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귀족들이 대다수인 지금이야말로 기회이다!” 여왕이 탁자를 쿵, 하고 내려쳤다. “때마침 적군에 몽모렌시, 기즈, 생-드레가 끼지 않았는가! 황태후파의 수령들이다. 그놈들만 없애버리면 황태후파의 중심이 크게 약해진다. 제군들,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만찬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웃었다. “기사들에게 전하라. 내일 새벽, 신들께서 우리 브르타뉴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준비하셨노라고. 적들은 비명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돼지처럼 죽는다.” * * * 제국군은 참패했다. 본래 전술의 기본은 이러하다. 중앙에 보병을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한다. 보병이 견실하게 중앙을 압도하는 가운데, 양익의 기병이 적을 둘러싼다. 그런데 앙리에타 여왕은 절대다수의 기병을 '중앙'에 배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수백의 기사와 수천의 기병이 쇄도했다. 프랑크군은 깜짝 놀랐다. 서둘러 병사를 준비하여 우선 이천 명의 기병을 출격시켰다. 이천 명이면 기병을 거의 총동원한 것이었다. 약간이라도 시간을 벌어주리라 기대했으리라. 기병대와 기병대의 대결은 고작 한 번의 격돌로 끝났다.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기병은 문자 그대로 프랑크군을 갈아버렸다. 프랑크군은 혼비백산해서 패주. 기병들이 도망치면서 뒤에 있는 아군까지 말발굽에 치어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총사령관 몽모렌시 후작은 어떻게든 대열을 유지시키기 위해, 일흔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전방에서 분투했다. 그러나 전열이 복구되기 이전에 브르타뉴 기사의 칼날에 몽모렌시 원수의 가슴이 꿰뚫렸다.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총사령관이 전사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병의 패퇴에 사기가 낮아진 프랑크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이런 기회를 놓칠 앙리에타 여왕이 아니었다. 브르타뉴군은 그대로 적의 중앙을 양단해버렸다. 프랑크군은 속수무책으로 갈라져버렸고, 좌익과 우익이 각개격파 당하기에 이르렀다……. 전투 결과. “프랑크군은 오천 명의 사상자에 육천 명의 포로……반면에 브르타뉴군은 겨우 사백 명 남짓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결과로군.”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과연 던전 어택에서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이끌고 대륙통일을 넘본 군주다웠다. 틀림없이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거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의 데뷔전이 되었던 <검은 산맥> 전역. 전투가 끝나고 치하하러 온 바르바토스가 선봉장 제파르를 놀리는 장면이 있지요. '멋모르고 기사단에 닥돌해서 병력을 말아먹은 꼬맹이'라고. 이때 마왕 제파르의 병력을 순삭해버린 기사단이 바로 브르타뉴의 기사단이었다, 라고 언급되었습니다. 브르타뉴 왕국은 튜튼 왕국과 함께 작중 최강의 기사단들을 자랑합니다. 00198 백합 전쟁 =========================================================================                        앙리에타 여왕에 대응하는 나의 전략은 간단했다. “앙리에타가 평범한 '마드모아젤'이 아니라 암사자, 그중에서도 숫사자를 집어삼키는 암사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무도회에서 파트너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무서운 아가씨이지…….” 내가 자크리에게 말했다. “퇴짜맞을 것이 뻔한데 아가씨한테 춤을 신청할 이유가 전무하다. 자크리. 이제부터 우리는 앙리에타를 '벽에 핀 꽃'으로 만든다.” “브르타뉴의 여왕과 전면전을 피하실 생각입니까?” 자뭇 궁금하다는 눈초리로 자크리가 바라보았다. “아아. 사교계에 불쑥 신성(新星)이 출현한 것이지. 아름다운 미모에 절대적인 카리스마……무도회의 남자들이 모두 그녀에게 반했다. 그런 아가씨를 꺼꾸러트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혹시 알고 있는가?” 내가 웃었다. 가슴 부근, 심장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내장들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꽤 오래 기다렸다. 훌륭하게 인내했다. 바로 지금부터 펼쳐질 지옥도를 위해서 나의 내장들은 스트레스를 기꺼이 견뎌주었다. 새파랗게 굶주린 그것들은 이제 생피가 뚝뚝 흐르는 만찬을 대가로써 원하고 있었다. “다른 아가씨들을 전부 한편으로 만들어 하나의 일치단결한 동맹을 창설하는 것이야. 제아무리 화려하게 데뷔했을지라도, 다른 아가씨들을 적으로 돌려서야 사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마찬가지이다.” 앙리에타, 너는 조금 지나치리 만치 화려하게 승리했다. 가공스러운 군단은 적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만큼 적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게 만든다. 평소에 툭탁거리던 이웃들도 오크가 나타나면 주저없이 함께 민병대가 되어 저항하듯이.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해보자. 앙리에타 여왕이 간과한 것, 아니.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세력이 있었다. 나는 마법수정구를 통하여 그곳에 당장 연락을 취했다. ─ 단탈리안. 바타비아 공화국의 군대는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사와요. 바로 마왕 파이몬이 수백 년 동안 대륙 곳곳에 심어놓은 비밀결사 <해방동맹>이었다. 수정구에서 파이몬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동안 파이몬에게 직접 대화를 건 적이 없었으나, 당연하게도 해방동맹원인 자크리는 우리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수장 파이몬한테 보고하고 있었다. ─ 그대가 자크리에게 말한 대로 브르타뉴가 침공했군요. 여전히 놀라운 혜안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예언의 능력이 없음에도 어찌 앞날을 정확하게 예측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한낱 시답잖은 재주일 뿐입니다, 파이몬 님.” ─ 시답지 않다라. 그래요, 단탈리안이 자평하면 소녀야 할 말이 없지요. 그 시답지 않은 재주에 대륙이 진동했으며 이제 또 한번 진동하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겠사와요. 파이몬은 그리 말했어도, 정말 나는 겸손을 떤 게 아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프랑크를 공격한다. 이것은 게임에서 이루어진 사실이었고, 나는 이미 아는 정보를 통해 마치 나의 지식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뿐이었다. 정말로 대륙을 진동시킨 장본인은 바로 눈앞의 파이몬이겠지. 그녀야말로 순전히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세력을 일구었다. 정략과 모략을 제외하면, 나 따위는 도저히 파이몬에게 미치지 못한다……. ─ 출병의 시기는 언제로 잡을까요? 이미 국경지대에 배치해두었어요. “아직입니다. 바타비아의 원군은 압도적인 명분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먼저 손을 벌렸을 때 출격을 명하십시오, 파이몬 님. 그러면 우리는 모든 프랑크 백성의 지지를 쉽게 얻을 것입니다.” ─ 확실히 그렇네요. 파이몬이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가 벌써 국경지대에 배치됐다는 말에 속으로 놀랐다. 내가 자크리한테 '브르타뉴가 공격해올 것'이라 말하고, 그 정보가 자크리를 경유하여 파이몬에게 보고된 바로 그 순간부터, 파이몬은 군대를 준비했다는 얘기였다. ‘이거 원.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이군…….’ 쓴웃음이 나왔다. 파이몬은 이쪽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라 말이 실감되었다. 몇 번이고 파이몬을 궁지에 몰아세운 나이기에, 도리어 파이몬은 그만큼 나의 실력을 믿었다. 이쪽도 똑같았다. <던전 어택>에서 용사를 끝까지 물고 넘어진 자가 파이몬이었음을 깨달았다. 신뢰할 가치가 충분했다. ─ 어쩔 생각이지요? 프랑크에게도 자존심이 있사와요. 그들이 먼저 구원을 요청하기가 아주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특사가 되어 귀족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바로 이 설득을 위하여 지금껏 백성들을 선동했다. 우리 용병단은 가르시벨, 라로웨, 라시아렐, 트로인, 총 네 군데의 영지를 '해방'시켰다. 마왕 레라지에를 이끌어들여 영지전을 벌이고, 난전 속에서 영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반대로 용병단은 영지를 지킨 수호자가 되어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영주의 속박에서 풀려나 무장한 백성의 숫자가 합쳐서 약 1,500명. 무장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봉기에 참여한 백성까지 고려하면 훨씬 더 늘어났다. 중앙정부가 황제와 황태후의 싸움 탓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지금, 이들을 다독일 자는 없었다. 신전의 사제들이 있긴 있었지만……. ‘내가 바로 그 사제이지!’ 쟝 볼레, 사제로서의 나는 오히려 민중을 자극시켰다. 악마 같은 브르타뉴에 맞서 싸우자는 외침은 순식간에 프랑크 북부 일대에 퍼졌다. 백성이 직접 창칼을 꼬나쥐고 일어서자, 일대의 영주들은 갈팡질팡했다. 나는 이들 영주를 찾아가서 설득했다. 이미 쟝 볼레는 양날도끼 용병단의 후원자이자 인기를 몰고 있는 설교자로 유명해져 있었다. 영주와 접견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자작 각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예로부터 백성의 뜻은 하늘의 뜻이며, 여신들은 은밀히 자신의 의중을 백성들에게 퍼트린다고 했습니다. 지금 외적 브르타뉴에 맞서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인민과 천하를 위한 길입니다.” “하지만……쟝 볼레 사제.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령이오.” 공화주의자 귀족들도 과연 황명에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충성심에서 발로한 머뭇거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프랑크 황제와 브르타뉴 여왕이 이끄는 군대에 대항하는 것을. 육군 총사령관인 몽모렌시 원수조차 패사(敗死)했다. 무서울 법했다. 허나 외세가 두려워서 망설이는 자에게는 다시 외세가 해결책이 되는 법. 나는 은밀하게 말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원조를 약조했다면 어떻습니까?” “공화국이! 그것이 정말이외까!” 귀족이 놀랐다. “소인은 바타비아의 신전에도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서 알아본 결과, 공화국 지도층은 프랑크 내부의 공화주의자들이 불법적으로 억압을 받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자작 각하. 각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귀족들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수백 년 동안 독립전쟁을 벌이며 기어코 공화국을 수립해낸 바타비아 공화국. 그 나라의 군대가 도와준다면 승산이 없지 않았다. 프랑크 북부 영주귀족 열한 명이 나한테 교섭의 전권을 부여했다. 정말로 원군을 내줄 수 있는가, 내준다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얼마나 빠르게 내어줄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용병단에 돌아와서 곧바로 파이몬에게 연락했다. 파이몬이 웃었다. 그녀는 네 개의 단어를 짧게 끊어서 말했다. ─ 보병 일만오천. 기병 칠천. 내일. 용병비 없이. 바타비아 공화국의 참전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프랑크 북부는 바타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안 그래도 공화주의자가 많았다. 북부의 영주들은 일단 원군이 충분하다는 것을 파악했고, 심지어 상대측에서 용병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알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성명문을 발표했다. “현재 프랑크 궁정에선 간신배가 충신인양 행세하며, 도적이 근위대인양 으스대고, 외적이 자국의 군대인양 돌아다니고 있다. 이에 우리, 프랑크의 안위와 백성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들이 고한다…….” 꽤나 긴 성명문이었으나 요약하자면 브르타뉴군을 깨부수겠다는 말이었다. 북부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오직 간신배를 처단하기 위해 봉기했지, 결코 황제 폐하에 대적하는 게 아니라고 선언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다. 글쎄, 저기 멍청한 황제라면 믿을지도 모르겠군. 전국은 순식간에 혼돈으로 돌입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정말 약조한 대로 성명서가 발표한 바로 그 다음날 출진했다. 공화국은 북부 귀족들을 가리켜서, “그들은 진정한 명예와 충심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의 친구를 전력으로 도와줄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원조이다. 공화국은 향후 일체의 영토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현재 대륙은 마왕군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다. 브르타뉴는 대륙 전체의 안위를 무시하고 오직 자국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 행동했다.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브르타뉴 왕국은 지금 당장 프랑크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행위를 중단하라!” 그렇게 선언했다. 뭐라고 할까. 질이 너무도 나빠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자기네가 원군을 파병하는 것은 '친구'인 프랑크의 귀족들이 요구해서 이루어졌다. 자기들은 대륙 전체를 위해 행동하는 반면, 브르타뉴는 치사하게 행동하고 있다……. 아니, 정말로 바타비아 공화국이 그리 생각했다면 모르지만. 저 선언을 한 공화국의 배후에는 파이몬이 숨어 있다. 마왕이 대륙 전체의 평화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말한 셈이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하여간 파이몬도 특이한 양반이야. 프랑크는 물론이고 대륙 전체가 요동쳤다. 브르타뉴가 출병한 게 내정간섭이냐 아니냐, 프랑크 황제의 행동은 정당하냐 불법적이냐, 바타비아 공화국의 행동은 올바르냐 그릇되냐……. 황제파와 황태후파의 내전에서 끝났을지 모를 사건은, 브르타뉴 왕국과 바타비아 공화국까지 끌어들임으로써 완전히 국제전이 되어버렸다. 황태후의 출생국인 사르데냐 왕국에선 브르타뉴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더 많은 국가가 끼어들 판국. 대체 어디까지 사태가 커져버릴지 짐작도 안 되었다. 지금쯤 프랑크 황제와 브르타뉴 여왕은 야연실색하고 있겠지. 황제는 몰라도 앙리에타 여왕은 유능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개입할 가능성은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응이 너무나도 재빨랐다. 그게 문제였다. “자아. 여기서 앙리에타 여왕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느냐?” “…….” 지도를 펼쳐놓고 데이지에게 물었다. 데이지는 낮에 제레미한테 각종 교양을 교육받았고, 저녁과 밤이 되면 나의 시중을 들었다. 나는 이따금 데이지한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일종의 유희였다. 나와 쏙 빼닮은 성격을 타고난 이 여자아이에게 질문한 다음에 대답을 듣는 것은, 꼭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은 역겨웠지만. “앙리에타 여왕은……바타비아 공화국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데이지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얘기했다. “아직 월맹군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국가들은 섣불리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두렵겠지요. 바타비아 공화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아마도 앙리에타 여왕은 그렇게 여겼을 겁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지도를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타비아 공화국은 마왕군과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습니다. 튜튼 왕국이 보호해주고 있지요. 즉, 다른 국가와 달리 내전에 참전할 만한 여유가 있습니다. 아닌가요?” 나는 씨익 웃고 말았다. “나쁜 대답은 아니지만 아깝게도 틀렸다.” 정답은, 월맹군에서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의 사령관을 맡은 마왕 파이몬이 동시에 공화국의 수령이라는 것이었다. 즉, 바타비아 공화국은 애시당초 마왕군과 싸울 일이 없다……그러니 마음 놓고 프랑크 내전에 참여할 수가 있다. 이건 시작부터 앙리에타 여왕으로 하여금 오판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데이지는 물론이고 앙리에타조차 당연히 몰랐다. 마왕 파이몬이 인간계의 공화국을 막후에서 조종한다는 것 따위, 알 턱이 없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결코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자아, 게임의 역사에서는 프랑크를 점령하고 제국을 건설한 여왕이여. 그대는 훌륭하게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나와 해방동맹 역시 매우 오래동안 계획을 준비해왔다. 그대가 다음에 둘 수는 무엇인가? 아직 황녀에 불과했던 엘리자베트는 이미 패권에서 멀어졌다. 그 다음 차례가 너다. 부디 멋지게 왈츠를 추어주기를. 나는 일일여삼추와 같은 심정으로, 마치 애인을 몹시 애태우며 그리워하듯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00199 백합 전쟁 =========================================================================                        * * * “배후가 있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막사에 앉은 장군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배후……라니요, 전하?” “배후는 말 그대로 배후이다. 상쾌할 정도로 빌어먹어서 웃을 수밖에 없군.” 붉은 머리카락의 젊은 여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싸늘했다. “과인이 속는 것까지는 괜찮다. 인생에서 한두 번 속은 것도 아니거늘. 그거 횟수에 작대기 하나 늘려보았자 뭐 크게 서럽겠나? 예상치 못한 적군이 가세하는 것도 뭐, 괜찮다. 어차피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하지만 말이다, 제군들. 하지만…….” 앙리에타 여왕이 주먹으로 각탁을 내리쳤다. 쿵, 하고 소리가 막사에 울렸다.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건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빌어먹을 사태란 말이다!” 장군들이 침묵했다. 군주가 분노했을 때 말문을 여는 것은, 말하자면 성난 멧돼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앙리에타가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군들은 곤란해진 낯빛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크게 분노하시는가 싶었더니 이제는 웃으신다. 어찌된 영문인가. “제군들, 보아라. 공화국 놈들이 비정상적으로 빠르지 않나.” 여왕이 각탁에 놓인 지도를 손수 가리켰다. “바타비아 입장에서 마왕군은 동쪽에 있고, 프랑크는 서쪽에 있다. 월맹군 전쟁이 아직 한창인 이상에야 바타비아는 당연히 동쪽에 군사를 집결시켜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우리가 전쟁을 벌인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공화국놈들이 국경을 넘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해나갔다. 물론 한 달의 시간이면 공화국이 병력을 동부에서 서부로 옮길 수가 있다. 프랑크 공화주의자 귀족들과 밀약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전제가 잘못되었다……. “전제라니요, 전하?” “바로 우리의 작전목표를 공화국이 한 달 전부터 눈치 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앙리에타 여왕은 눈빛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푸른 불꽃이 타오를 때의 고요였다. “우리 브르타뉴가 프랑크를 공격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단순히 프랑크를 침공한 것일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실로 많다. 한 달 전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어. ……어떻게 바타비아의 창녀들은 우리가 '공화주의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침공했다'라는 사실을 콕 집어서 알았느냐!” “……! 배신자입니까!” 장군들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했다. 설령 공화국이 브르타뉴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작전목표까지 알기란 어려웠다. 심지어 프랑크 황제가 자국의 귀족들을 토벌해달라고 실제로 명령했다는 것까지, 그 진위를 어떻게 그리 빨리 알아냈겠는가. 누군가가 정보를 유포했다. 즉,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좌중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당연하지만 작전목표는 수뇌부들 사이에서만 공유되었다. 지금 막사에 앉은 누군가가 배신했다……. 앙리에타가 넉살좋게 웃었다. “제군들, 뭘 그리 긴장하나? 브르타뉴의 용자들이 언제 꼬맹이처럼 담력이 작아졌는지 모르겠군.” “허나, 전하. 배신자가 있다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배신자가 구태여 그대들 중에 있을 까닭은 없지.” 앙리에타의 선문답 같은 말에 장군들이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앙리에타가 또 다시 코웃음을 쳤다. “프랑크 황제 쪽에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 장군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 머저리 애송이 황제가!” “우리를 끌어다 놓고 공화파 돼지들까지 불렀는가, 가증스러운 놈!”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파리시오룸을 불바다로 만들겠나이다.” 장군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분노했다. 장군들은 자기네가 속았다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순백함을 여왕 앞에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큰소리로 노호를 터트렸다. 앙리에타가 빙그레 웃었다. “거 제군들,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야단법석 떨지 마. 내가 언제 자네들의 충성심을 한 번이라도 의심해보았나? 속이 빤히 보여서 곤란하지 않나. 마드모아젤을 곤란하게 하다니, 장수이기 전에 신사로서 낙제점이야.” “…….” 여왕의 대응에 분위기가 머쓱해졌다. 장군들이 험, 험,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여하간 여왕 전하께서는 우리를 멋쩍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장군들이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주군이 충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없었다. 방금 전, 앙리에타 여왕은 충분히 반역을 의심할 만했다. 귀족들의 기를 죽여놓을 수 있었다. 여왕의 지휘권은 더더욱 강해졌으리라. 그런데도 여왕은 자네들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휘하 귀족들은 되레 여왕에게 기꺼이 복종했다. 군사적인 재능과 사교적인 능수능란함, 두 능력이 앙리에타 여왕을 지탱하고 있었다. “제군들. 분노하기 이전에 차분하게 생각해봐라. 이건 기회가 아닌가.” “기회라니요, 전하?” “우리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다. 자네들이 말한 대로 폐하께서는 천하의 멍텅구리에다 애송이 머저리 새끼니까.” 장군들이 피식 웃었다. 브르타뉴군에서는 일반 잡졸까지 황제를 병신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럼 누가 정보를 흘렸겠어?” “황태후, 아니면 황제의 측근일까요.” “아아. 그리고 공화주의자이겠지.”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제군들. 실제로 누가 흘렸는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공화주의자가 황제 폐하께 배신을 저질렀다'라는 정황적인 증거이다. 우리 프랑크의 황제 폐하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여왕의 말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장군들이 고민에 잠겼을 때, 자클린 롱그위, 군대에 종사하는 성녀가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전하께서는, 숙청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맞혔다.” 앙리에타가 미소를 지었다. “제군들. 황제에게 공화주의자들이 정보를 흘렸다고 전해라. 공화주의자에서 공 자만 들어도 길길이 날뛰는 폐하께서 과연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하지 않는가. 파리시오룸에서 살아 숨쉬는 공화주의자들을 모조리 싸잡아 죽일 기회이다.” 그날, 황제가 대노하는 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졌다. 오래 전부터 왕당파와 공화파는 서로를 증오했다. 그중에서도 극렬분자, 철저하게 왕당파를 옹호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황제는 그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 '배신자'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왕당파 귀족들은 지금이야말로 황도에서 바퀴벌레들을 박멸할 기회임을 깨달았다. 사흘 뒤. 한밤에 학살이 시작되었다. 왕당파 귀족들은 파리시오룸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담당자를 배정했다. 그들은 “배신자를 죽여라! 프랑크를 욕보인 자를 죽여라!” 하고 소리높여 외치며 습격했다. 철저하게 계획된 학살이었다. 대다수의 파리시오룸 시민들은 왕당파였기에 쉽게 선동에 물들었다. 학살이란 시작하기 어려울지라도 일단 움직이면 폭주하기 마련이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이자 그 다음부터는 열 명이 되었고 스무 명이 되었다. 군중은 광기에 물들어서 가장 좁은 골목부터 가장 넓은 대로까지 뛰어다녔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처단하라!” “프랑크를 위하여 일어서라, 시민들이여! 망설이지 마라! 여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 “싸그리 죽여라. 가리지 말고 죽여라. 저승의 신께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해주실 것이다!” 왕당파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까지 피냄새에 물들었다. 선동구호에는 당파적인 이해관계, 사사로운 복수와 증오, 단지 학살의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혈향에 취한 폭주, 마지막으로 공화파 귀족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수작이 섞여들어 폭발했다.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하루나 이틀 전, 무언가 불길한 낌새를 알아챘다. “이상하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서둘러 짐을 싸거라. 질문하지 마라! 경화(硬貨)만 챙기고 마차에 올라타!” 그들은 자산을 챙겨 황도에서 탈출했다. 대체로 공화주의에 인생을 헌신한 자들이었는데, 설령 황제 폐하에게 맞서더라도 이념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공화주의자 귀족들, 특히 상인과 같이 부유한 평민들은 황도에 남았다. “음, 폐하께서 왕당파를 총애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는가? 큰일이래봤자 잠깐이겠지.” “이곳이 내 고향인데 어디로 떠날꼬.” 설마 황제가 자신들을 직접 해치겠는가? 그들은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하며 낙관하고 있었다. 낙관의 대가는 참혹했다. 부유한 상인들의 재산은 폭도를 더욱 흥분시켰다. 밤이 깊어질수록 학살은 움츠러 들기는커녕 산불처럼 거세게 번졌다. 공화주의자가 아닌 상인들까지 습격당했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아이, 모두 폭도의 창끝에 가슴이 꿰뚫렸다. 어느새 소문은 와전되어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이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 했다, 폐하께서는 분노와 두려움에 차서 브르타뉴한테까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우리 스스로 황제 폐하와 프랑크를 수호하자…….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밤 중에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지엄한 황태후는 미처 의복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궁정을 쏘다니며 울부짖었다. “오오! 신들이시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나이까! 왜 시내에서 고함과 비명이 들려오는가! 근위병! 근위병들은 어디 있는가!” 황태후는 역시 잠옷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시녀들을 대동하고 황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애타게 부르며 당장 학살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폐하! 당신께선 프랑크의 황제이십니다! 저들은 당신의 아들딸이요, 다름 아니라 당신께서 굽어 살펴야만 하는 백성입니다!” 황제 앙리 3세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짐은 아비에게 창끝을 들이대는 자식을 키운 적이 없습니다, 어마마마.” “폐하, 제국이 저주에 휩싸일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식이 아비를 증오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나이다! 폐하, 제발……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부디 가여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황태후가 황제 앞에 쓰러지며 애원했다. 오십 세의 어머니가 잠옷차림으로, 이제 늙어버린 살결을 드러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근위병들도 마음이 울적해져 황태후를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단호했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는 있을 수 없다!” 앙리 3세가 자리를 박차고 포효했다. “나를 낳은 어머니여, 실로 가증스럽구나! 황권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분열을 방치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어마마마, 당신입니다. 감히 의회가 황제보다 위에 있다 주장하는 자들을 어찌 제국의 일원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앙리……나의 앙리야. 제발, 부디 자비심을…….” “저의 자비심은 바로 어머니가 앗아갔습니다.” 황태후가 꿇어앉은 채 오른손을 벌려왔다. 그러자 황제는 어미의 손을 걷어쳤다. “오늘밤 이후로 프랑크에는 오로지 단 한 하나의 주권(主權)만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시여!” 황태후가 얼굴을 붉히여 일어섰다. 그녀는 분노에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 조롱거리를 기르느니 차라리 독사 한 뭉치를 몽땅 낳고 말 것을! 내 뱃속에 죄악의 씨앗을 배버린, 덧없는 쾌락의 그 밤이 저주스럽구나! 신들이시여! 아아, 신들이시여!” “태후를 모시거라.” 황제가 근위병들에게 손짓했다. 병사들은 머뭇거리면서 황태후에게 다가갔다. 황태후는 온갖 악독한 저주를 내뱉으며 황궁에서 끌려나갔다. 황제가 그 모습을 비웃으며 말했다. “시녀들은 따로 감금하라. 그들 중에도 역적의 딸이 있을 터. 섣부른 관용은 후환만을 남겨둘 뿐일지니. 신들께서는 오늘밤이 다만 완벽해지기를 허락하셨노라.”   00200 백합 전쟁 =========================================================================                        * * * 이날, 나는 여느 때처럼 데이지와 한방에서 자고 있었다. 데이지를 거둔 이후로 항상 그녀와 숙식을 함께했다. 주위에 양녀라고 말했으니까 부자연스러울 게 없었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막사나 여관에 돌아오면, 데이지가 의자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제레미가 내준 숙제로써 대개 고대제국어를 학습하는 공부였다. “……윽, 흐윽.” 때때로 데이지는 방안에서 소리죽여 신음하곤 했다. 뻔했다. 루크가 자기 방에서 슬라임 오나홀로 자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 감각이 데이지에게 전해졌다. 사춘기 남자애의 성욕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데이지는 하루에 두세 번, 심하면 다섯 번이나 구석에 틀어박혀 신음을 억눌렀다. 방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행여라도 바깥에 있을 때 루크가 자위를 시작하면, 데이지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날도 루크는 혈기가 왕성했다.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에 눈을 깨어보니, 데이지가 침대 아래의 바닥에서 몸을 비틀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하아……읏, 하…….” 흑발의 소녀는 작게 경련하더니 이윽고 힘없이 숨을 내쉬었다. 내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자다 깨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흐리멍덩했다. “오늘은 여섯 번인가? 끌끌. 루크도 대단하네. 그 나이에 여섯 번이라니.” “……다섯 번입니다. 멋대로, 횟수를 추가하지 말아주세요. 불쾌합니다.” 데이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제법 사나웠지만,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서야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즐겁게 해줄 따름이었다. “다섯 번이든 여섯 번이든 놀랍기는 매한가지야. 내가 그 나이였을 때는 사흘에 한 번도 많았는데 말이지. 역시나 영웅이 될 재목은 떡잎부터 다르다고 할까. 영웅은 색을 마다하지 않는다더니, 장래가 참으로 기대되는군.” “최악입니다.” “최고의 악이라고? 칭찬 고맙다. 참, 첫경험이 사실은 여동생과 똑같은 슬라임이라는 것도 기가 막히군. 과연 영웅이다. 자라날 때부터 달라도 뭔가 다르지!” 내가 껄껄 웃었다. 데이지가 분했는지 베개를 집어들어서 이쪽으로 세게 던졌다. 푹, 하고 베개가 나의 얼굴에 명중했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내 웃음소리가 커지기만 했다. 데이지는 벌떡 일어서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베개를 도로 잡아서 내 몸을 팍팍 때렸다. 이 어린애 장난으로 보이는 짓거리가 사실상 데이지가 발악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무겁거나 뾰족한 물건으로는 아예 나한테 던질 수조차 없었다. 베개. 아니면 솜덩어리. 혹은 뭐, 물방울? 그 정도 물건이어야 데이지는 나를 타격할 수 있었다. 그걸 거창하게 타격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노예각인이란 참으로 편리해서 좋았다. 하하. “단탈리안 님, 큰일이에요!” 방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제레미가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석상처럼 굳었다. 나와 데이지도 깜짝 놀라서 굳어버렸다. 다 자란 어른이 침대 위에서 열 살짜리 꼬맹이와 나뒹굴고 있다. 잠옷차림으로. 그것이 제3자의 눈에 어떻게 비추었을지는, 제레미의 점차 썩어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아. 단탈리안 님은 그렇고 그런 취향이었군요.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변태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정말로 이 정도로 변태일 줄은 몰랐지만요.” “어이, 제레미.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매우 잘 알겠다만 그건 아니다.” 제레미가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데이지? 정말인가요?” “선생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데이지가 눈썹 한 꺼풀 까딱이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이 명령하시면 무력한 저로서는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왼쪽 어깨에서는 잠옷이 내려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옷을 단단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짧은 틈을 타서 천연덕스럽게도 옷을 풀어재낀 것이었다. 제레미가 재판관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짜게 식은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소아성애자 변태 마왕 전하. 무언가 하실 변명이라도?” “이, 이 상큼한 돼지 년들이…….”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 녀석들이 요새 선생과 제자가 되어 붙어다니더니 아주 궁합이 착착 맞는군. “말만 전하이니 예의는 어디에 갖다 팔아먹었냐!” 내가 베개를 제레미한테 전력으로 투구하면서 소리쳤다. 제레미는 너무나도 가볍게 베개를 피했는데,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여긴 나의 침실이다. 급한 일이든 뭐든 적어도 문을 두들기는 게 예의이다. 네 녀석의 모자걸이는 암살 빼고는 써먹을 데가 없나!” “아!” 제레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탈리안 님! 큰일입니다! 너무 변태스러운 광경에 그만 깜빡했어요!” “……너의 오해는 나중에 가서 풀도록 하고. 그래, 고귀하신 제레미 경이여. 얼마나 다급하신 일이길래 자그마치 마왕 전하의 침실에 칩입하셨는지?”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는데도 제레미는 진지한 낯빛으로 고했다. “파리시오룸에서 숙청이……아니, 학살이 벌어지고 있어요!” 잠시 뒤, 나는 잠옷차림에다 망토 하나만 걸쳐서 걷고 있었다. 우리가 잠자는 저택은 도시의 부자가 살던 집이었다. 평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부자의 목과 몸통을 정성스럽게 분리시킨 이후에는 용병단과 암살대가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이미 일행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로비에는 각탁과 군사지도까지 갖추어졌고, 마법수정구에서는 누군가가 쉬지 않고 보고했다. 자크리가 얘기를 전해들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두 수고가 많다. 아닌 밤중에 파자마 파티를 열게 생겼군.” 내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면서 말했다. 난쟁이들과 엘프들이 빠릿하게 경례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서 되었다, 하고 손짓했다. “먼저 상황을 보고해라. 원인에 대한 분석은 나중으로.” “예, 전하. 현재 시각에서 약 네 시간 전부터, 파리시오룸 시내가 소요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히 일부 구역이 아니고 도시 전체에 폭도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자크리가 우렁차게 말했다. “대부분의 무리는 귀족가의 하인들이 이끌고 있으며, 그들은 황제를 배신한 간신배를 처단하라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결과,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가택에 감금된 생-드레 원수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코르나통 남작, 텔레녜 자작, 로쉐푸코 자작이 참살되었다는 소리도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내가 이마를 짚었다. “전부 황태후파의 간부이거나 공화주의자 아닌가. 단순히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야. 계획된 거사이다. 혹시 어찌된 일인지 분석까지 끝났는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자크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랑크의 황제가 직접 명령을 하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당파 중에서 극렬분자들이 실행부대를 맡은 것 아닌가, 하고…….” “미쳤군.”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쓸었다. 미쳤다. 그 단어가 한동안 입안에 맴돌았다. 무언가, 무언가 마실거리가 필요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도록 자극이 필요했다. 그때 옆에서 데이지가 뿔잔을 올려바쳤다. 포도식초를 섞은 물이었다. 데이지도 나를 따라오느라 잠옷차림이었는데, 말없이 조용하게 군의(軍議)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뿔잔을 넘겨받아 단번에 들이켰다. 시디신 식초물이 뇌까지 강하게 흔들었다. 좋다. 딱 좋게 정신이 들었다. 단탈리안, 이게 도대체 무슨 사단인지 파악해보자. “먼저 이것이 황제의 독단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크리, 학살에 브르타뉴군이 개입하고 있는가? 아니면 왕당파들만 움직이고 있는가?” “예, 전하. 현재까지 브르타뉴의 군복을 입은 폭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브르타뉴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개입하지 않았다……. “앙리에타는? 여왕은 어디에 있는가.” “앙리에타를 비롯해서 브르타뉴군은 황도 근교의 요새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오늘밤에 여왕이 요새에 있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황도 파리시오룸에 입성한 직후, 브르타뉴군은 파리시오룸에 주둔하지 않고 근처의 요새로 이동했다. “최소한, 겉보기로는 완벽하게 황제와 왕당파의 소행이라는 얘기인가?” “그러합니다. 파리시오룸 시민들도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자크리. 너무나도 이상하다.” “예?” 내가 오른발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얘기했다. “안 그래도 황제의 권위는 침몰하고 있었다. 여기서 학살극까지 벌인다고? 우둔하다. 밑 빠진 배에다가 쇳덩이를 싣는 격이다.” 황제가 무력으로 공화주의자를 박멸하기 시작했다. 브르타뉴군의 실력을 빌리지 않고 직접 근위부대를 동원해서. 왕당파야 환호하겠지.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나머지 세력들은? “황태후파이거나 공화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 황제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야. 그중에는 중립도 많거니와, 황명에 최대한 순응하려는 무리도 많다. 지금처럼 대학살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똘똘 뭉친다. 당연하다. 제 마음대로 신민들을 몰살시키기 시작한 주군에게 공화주의자들은 무기를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학살은 도리어 반(反) 황제파를 결집시키게 되었다. 아무리 앙리 3세가 머저리여도……아니, 외세를 끌이들인 시점에서 이미 병신인가. 녀석은 그냥 무시하자. 문제는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이다. 그녀가 이 일을 방관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황제도 여왕과 손을 잡은 이상, 적어도 학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었을 터이다. 앙리에타라면 곧바로 학살의 반작용을 알아차렸겠지. 왜 황제를 말리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해할 수 없군. 으음,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혼잣말했다. 난쟁이들과 엘프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황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멍청이라서, 여왕과 상의조차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거사를 치렀을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섭습니다.” 자크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여왕이 황제 근처에 첩자 한 명 심어두지 않았을 리도 없다. 어떻게든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적들을 결집하게 만든다……공화국 군대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황태후파 귀족들이 합류하게……아아, 그런가. 그런가! “자크리. 회전이다. 브르타뉴 여왕은 일대 회전(會戰)을 노리고 있어.” “예, 전하? 회전이라니요?” 수뇌부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너무 비약했는가. 내가 초조한 마음으로 말해나갔다. “지금까지 황제에게 반항하려는 세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난다면 순식간에 반-황제군이 결집한다. 가볍게 3만 대군을 이루겠지.” 그중에는 대귀족들도 기라성처럼 포진되어 있겠지. 공화국 군대를 불러들인, 북부의 몇몇 영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할 거다. “충분히 강력해진 그들이 공화국군을 어떻게 대접하리라 생각하는가?” “…….” 자크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지휘권이 분산되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반황제군이 집결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이 지휘권을 장악할 것이다.” 본래 병력이 가장 많은 세력이 지휘권을 갖는다. 프랑크의 북부 영주귀족들에 비해서 바타비아 공화국의 군대가 훨씬 많다.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바타비아 공화국이 지휘권을 독점할 것이나……. “하지만, 프랑크 국내의 귀족들이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소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화국군이 2만 2천. 여기에다 귀족들이 약 3만의 병력을 모아오면……프랑크의 귀족들이 병력 면에서 우세해진다! 공화국군은 지휘권을 독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귀족군이 공화국군을 휘하에 넣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병력이 우세한 것도 아니다. 이럴 경우……. “프랑크군의 사령관과 공화국군의 사령관이 따로 생깁니다. 틀림없습니다!” “아아.” 자크리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랑크의 귀족들에는 공화주의자만 있지 않다. 일부이다. 대다수는 황태후파와 중립파이겠지. “귀족들은 바타비아에게 필요 이상의 군권이 넘어가는 것을 경계할 것이고,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력으로 움직일 것이다. 브르타뉴군은 고작 일만에 불과하다.” 황제 근위병과 용병이 추가로 섞이더라도 많아봤자 이만 명……. 그 정도면 딱히 공화국에 손을 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섬멸할 수 있다. 태후파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할 터. 이쪽의 지휘권을 분리시켜서 앙리에타 여왕이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머리가 쪼개진 군대만큼 탐스러운 먹잇감은 없다……즉, 회전.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다. 대담하게도 앙리에타 여왕은 기껏해야 이만에 불과한 병력으로 프랑크 북부 영주귀족-황태후파-바타비아 공화국의 약 오만 대군을 헤치우고자 하고 있다. 이 무슨 자신감인가.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병법의 기본은 아군을 집결시키고 적군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앙리에타 여왕은 적군을 집결시키고 있다. 몸뚱어리만 거대하지 머리는 두 개 달린 군대가 만들어지도록 부추긴다. 그녀는 확신하는 것이다. 이쪽의 군대 따위 사만이든 오만이든 얼마든지 쳐부술 수 있다고!   ============================ 작품 후기 ============================   던디가 어느새 200화를 달성했습니다.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00201 백합 전쟁 =========================================================================                        * * * 앙리에타의 의중을 간파했다고 해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내가 소란을 떨어봤자 다들 고개를 갸웃할 거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그야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이쪽은 군세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북부의 영주귀족들(주로 공화주의자이다), 황태후파 귀족들, 그들이 고용한 용병단……여기에 바타비아군까지 모여든다. 군세만 헤아려도 벌써 가볍게 삼만 병력을 헤아릴 것이다. “좋다, 앙리에타! 그렇다면 아예 화려하게 춤에 어울려주지.” 나는 밤새 고민하여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브르타뉴의 기병은 강력했다. 지난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일만의 브르타뉴군이 이쪽의 삼만을 섬멸할지도 몰랐다. 허나 삼만오천이라면 어떨까? 버거워지겠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만약 사만이라면 어떨까? 오만 대군이라면 어떻겠는가. “그때도 여전히 승리를 자신할 수 있을까, 오만방자한 여왕이여.” 작전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상대방은 전술적 승리를 맹렬하게 노리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전략적인 우위를 공고하게 다졌다. 상대편에서 날카로운 창으로 이쪽을 꿰뚫으려 한다면――이쪽은 태산이 되어 놈들을 찌부려트리겠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앙리에타를 물리친다! 일단 목표가 세워지자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먼저, 북부의 귀족들을 다시 설득하여 프랑크 방방곳곳에 격문을 돌렸다. “삼가 대의를 받들어 천하에 고한다. 외적(外敵) 브르타뉴와 간신배가 하늘을 속이고 대지를 이간질하며, 나라를 집어삼키고 황제 폐하를 농락하매, 황궁을 어지럽히고 이제 무고한 백성을 참살하기에 이르렀나니, 그 죄악에 떨어대지 않는 수풀이 없으며 그 악명에 격노하지 않는 하천이 없도다.” “여기, 황제 폐하의 밀조를 받들어 오로지 정의로서 의병을 일으킨다. 흉악무도한 외적을 물리치고 간신배를 처형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쉬지 않는 군마(軍馬)로서 종사하고자 하니, 천하에 뜻있는 자들이여! 늪기슭의 진창에 빠져버린 백성들을 구원하고 황제 폐하를 수호하기 위해, 지금 우리와 함께 일어날지어다!” 프로파간다를. 더 많은 프로파간다를!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설령 네가 황제와 함께 움직이고 있더라도 명분은 우리 손아귀에 있다. 왕당파가 제아무리 나라에서 가장 파벌이 큰 세력이라 해도 외적인 네 녀석한테 충성을 맹세할 사람은 적다. 암살대, 해방동맹의 비밀결사원, 귀족들의 하인,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란 인력은 총동원해서 대공세를 퍼부었다. 전국의 고을들에 방문을 붙였다. 황제파에서도 반란이니 역모이니 하는 상투어를 써서 대응해왔다. 정보가 얽히고설켜 도저히 무엇이 진실인지, 백성들 입장에서 판단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엉망진창의 상황이야말로 내가 활약하는 전장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다고? 딱 좋았다. 진실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오로지 힘, 수사학만이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북부와 동부를 끊임없이 순례하며 연설했다. “백성들이여! 대저 혼란에 빠진 지금, 우리는 어찌해야 옳은가. 여신들이시여, 우리가 어찌해야만 하는지 당신들께서 빛을 내려주소서.” 성량확대 마법을 빌어서 나의 목소리가 광장에 낭랑하게 퍼졌다. “여신들께서는 말씀하셨노라. 첫 번째,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을 정하지 말고, 마음이 가는 그곳으로 몸을 이끌어라! 두 번째, 이미 나 있는 길에서 뜻을 찾지 아니하고, 뜻이 향하는 그곳으로 길을 낼지어다! 세 번째, 그때 비로소 우리의 하늘은 넓고 또 넓어져 아무것도 잃지 않으니!” 내가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울부짖었다. “하늘의 그물은 선한 자를 돕고 약한 자를 놓치지 않을지어다! 브르타뉴로부터 우리의 대지를 지켜라! 백성들이여, 의인들이여――봉기하라!” 수천 군중, 수만 군중이 흥분에 도취되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요동쳤다. 도시 그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 프랑크 만세! 프랑크 만세!” “역적들 모가지를 따버려라! 브르타뉴의 계집애를 죽여라!” “쟝 볼레! 쟝 볼레! 쟝 볼레!” 월맹군 원정에서 시작하여 나의 선동 능력은 이쯤에서 정점을 찍었다. 백성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성한 군대를 자처하며 나를 호위했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사제 쟝 볼레. 내가 가는 길에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귀족과 민중이 들끓었다. 내가 나지막하게 연설하면 그들은 숨을 죽였고, 내가 사자후를 터트리며 분개하면 그들 역시 격노했다. 수만 명이 일제히 “여신을 위하여!” 하고 소리치는가 하면 또한 묵념의 시간에는 침묵했다. 여기에다 예전부터 준비해온 책자들을 뿌렸다. 왕당파든 공화파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뿌려댔다. 일단 삼천 권 정도가 흩어지자 다음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필사해서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이 허위를 깨트려 없애야 한다…….”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토지의 주인이 되어라!” “모든 인간은 토지에 대하여, 또한 토지가 인간에게 주는 갖가지 이익에 대해서 평등하게 권리를 갖고 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백성들이 나의 책자를 갖고서 가족과 친구에게 설파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들어 의용군을 이루었기에, 책자의 내용은 정말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졌다. 이들은 단순히 의용병이 아니었다. 바로 이념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념에 물든 자만큼 강력하고 끈질긴 군사는 없다……. 연설은 당장은 강력해도 그만큼 효력이 짧다. 반면에 책자는 장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내가 지나가고 떠난 자리에도 책자는 남아서, 사람들은 스스로 계속하여 의욕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물경 12,000명의 의병이 봉기했다. 귀족들이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정도로 백성이 호응해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들은 뜻밖의 강력한 원군에 사기가 충천했다. “틀림없소. 신들께서는 우리의 대의에 손을 들어주셨소.” “당장 브르타뉴의 여왕을 사로잡으러 진군합시다!” 모두가 좋아라 한 것은 아니었다. 앞날을 염려하는 귀족도 생겨났다. “황제 폐하와 나라를 위해 일어선 그들의 의기는 칭찬할 만하나…….” “공화주의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 아니오외까?” 황태후파든 황제파든 본질은 귀족. 그들은 백성들이 필요 이상으로 '전염병'에 물드는 것을 걱정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득해야만 했다. 적군의 귀족들을 역적죄로 숙청하면,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지가 그대로 손에 들어온다. 그럴려면 일단 브르타뉴군을 패배시켜야 한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백성들의 군대를 용납하자. 어차피 무지몽매한 백성이 아닌가? 당장은 목청을 높여서 떠들지라도 시간만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먹어버릴 것이다……. 귀족이란 언제나 영지가 늘어나기만을 염원하는 족속이다. 설득은 유효했다. 몇 번의 교섭이 오갔다. 귀족들은 백성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나, 쟝 볼레를 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북부 영주를 설득하는 등, 프랑크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발벗고 뛰어다닌 공로를 인정한다.” 표면상으로는 그러했다. 진실은 조금 더 단순했다. 백성들의 폭주를 막아내고 귀족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내가 제격이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댁이 책임을 져라. 그런 의미겠지. 상관없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바이다. 원래 세계에서 농민병이야 훈련도가 낮고 사기까지 낮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나, 여기서는 다르다. 몇 년에 한 번씩. 많으면 일 년에 수차례나 농민들은 고블린의 습격에 시달린다. 운이 안 좋으면 오크떼와 맞붙는 경우도 있다. 마을에선 모두 자경단을 운영한다. 그들의 훈련도는 결코 낮지 않다. 원래 세계의 농민징집병에 비교해서야 미안할 정도이다. 뭐, 농민병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원래 세계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게 문제이지만. 여하간 제법 잘 훈련된 일만이천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아마 마왕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에 속할 나한테는 군자금도 충분했다. 문제없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그 여왕에게 맞서싸우려고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래서야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겠는데요.” “……군무(軍務)에 대해서는 무지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행동을 모두 지켜본 제레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서 데이지도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 최고의 암살대장과 미래 용사 후보생이 보기에도 나는 그야말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프로파간다, 즉흥 연설, 이념서적 배포. 귀족들의 관계를 특사로서 조정하고, 그중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공작을 우두머리로 세우게끔 뒤에서 돕고, 프랑크의 귀족들과 바타비아의 군지휘관들 사이까지 중재하고, 마지막으로 용병단에게 의용병을 훈련시키게 명령하고……. “크흐으.” 나는 식초물을 단번에 마셨다. 입안이 알딸딸했다. 장담컨대, 지난 며칠 동안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이었다. 이 광경을 라피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천하의 라피스라도 이번만큼은 손뼉을 치며 “대단합니다, 단탈리안 님. 훌륭하십니다. 단탈리안 님은 실로 모든 마왕 중에서 제일 성실하고 착실합니다” 하고 경탄했으리라. 마침내 아군의 병력이 총집결했다. ──────────────────── <신성연맹군> 총사령관: 앙리 드 기즈 공작 부사령관: 안나 더 빗 최고위원회 의원 ■제1군: 황태후파 귀족군. 총사령관: 앙리 드 기즈 공작.      보병 24,000명(용병, 징집병). 기병 5,000명(기사 1,000명) ■제2군: 바타비아 공화국군. 사령관: 안나 더 빗 최고위원회 위원.      보병 15,000명(용병, 시민병). 기병 7,000명(기사 150명) ■제3군: 프랑크 의용군. 사령관: 쟝 볼레 아르테미스-사제.      보병 12,000명(농민병). □ 총병력: 보병 5,1000명. 기병 12,000명(기사 1,150명) ──────────────────── 어마어마한 대병력이었다. 혹시라도 병력이 다 집결하기 이전에 브르타뉴군이 각개격파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결과적으로 쓸모없는 노파심이 되었다. 브르타뉴는 이쪽을 노리는 대신 자국에서 병력을 충원했다. 그래본들 브르타뉴의 병력은 일만오천에 불과했다. 여기에 황제의 근위부대가 가세하여 이만오천 정도의 군세가 마련되겠지. 만만치 않은 숫자이나, 미안하게도 이쪽은 무려 육만 대군이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2.5배의 병력 열세를 극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군다나 이쪽의 사령관들이 무능한 것도 아니다! 앙리 드 기즈 공작은 용맹과감하면서도 귀족들을 통제하는 위엄이 있었다. 안나 더 빗은, 예전에 내가 해방동맹에 가입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 안나는 해방동맹에서 파이몬 다음으로 가는 실력자였다. 적어도 무능하지 않겠지. 그리고 쟝 볼레……나는 전술적으로 딱히 뛰어나진 않다. 하지만 내 곁에는 백전노장의 용병단장 자크리가 있다. 의용병들을 완벽하게 장악할 카리스마도 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나는 제파르 대장과 바르바토스의 군지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천근처럼 값진 경험이었다. 자크리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세심히 군대를 운용하면, 실책만은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가 한편생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면, 바로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승리하는 군대란 무엇보다도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전투에 나선다. 말 그대로이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그대가 바라는 대로 회전을 준비해주었다. 하지만 유감이로군……. 그쪽이 주특기를 발휘하기도 전에 나는 전략적인 압승을 거둔 것 같다. 그대의 패배다.   00202 백합 전쟁 =========================================================================                      작품설정란에 전투 지도가 나와 있습니다. ============================================= * * * 진군이 시작했다. ─ 라아아 리스티, 트리이이 프로이테……. ─ 그리스아 시스비이 므르 브레메데아……. 사제의 노랫소리가 병사들 머리 위에 울려 퍼졌다. 아군에는 군중사제도 꽤나 많이 참군했다. 성녀급의 인물은 없었지만 수많은 여사제와 남사제가 선율을 이루어가며 낭랑하게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 가락은 성량증폭 마법을 타고 상공까지 올라가, 마치 하늘에서 햇빛처럼 내려오는 듯했다. 화음과 함께 육만 대군이 행군했다. 제레미가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세우고 말했다. “단탈……아니, 사제님은 노래 한 곡절 뽑지 않으려나봐요?” “미안하지만 음악에는 완전 낙제생이거든.”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 사제직업이 군대에서 가장 요긴하게 써먹히는 대목이 여기였다. 성스러운 군가는 병졸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더욱이 병졸들이 함부로 폭주하지 않게 도와주었고, 약탈이나 방종과 같이 군대라면 으레 일어나기 마련인 사건사고도 크게 줄였다. 뭐, 햇볕을 쬐며 진군하는데 꼭대기에서 성가가 들리는 것이다. 병사들이 신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노라고 느낄 만하지. 아마 PTSD 같은 정신질환도 적지 않을까. “헤에.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거짓말이네요.” “응?” “데이지 말이에요. 노래를 엄청 잘 부르거든요. 꼭 정령이 부르는 것 같다니까요.” 어라. 원래 게임에서 용사가 노래도 잘 불렀던가? “……내가 있을 때는 한 번도 노래 같은 걸 부르지 않았다만.” “그야 당연하죠. 누구인들 사제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겠어요.” “이 상큼발랄한 화냥년이 혀 놀리는 솜씨 좀 보소?” “깔깔깔.” 제레미가 웃었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륙 최고의 오페라 가수가 열창하는 가운데에서 펠라짓이나 즐긴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정말이지, 예술에 관련해서 나는 빵점이었다. 제레미가 엄지손가락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것들은 어디에 써먹으려고 바리바리 싸오시는 거예요?” “아아. 목책?” 우리군은 짐수레를 백 개 가까이 끌고다녔다. 나귀가 끄는 수레에는 미리 조립해둔 목책이 수북하게 실려 있었다. 농민병에게 만들라고 명령해두었는데, 이건 말하자면 나의 비밀병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앙리에타가 쓸 수 있는 계책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으음. 계책이라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정말로 회전을 벌이는 것이지. 그때는 아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압살시키면 그만이야. 하지만……두 번째로, 황제가 친정했을 수가 있어.” “프랑크의 황제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명분을 다지려고 일부러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간신배들'을 목표로 삼았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무고한 피고자이고, 뭐 그런 거지. 이런 상황에서 황제가 떡 하니 적군에 있으면 어쩌겠어?” “아하. 사기에 영향이 가겠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우려하는 지점은 황제가 직접 연설전(演說戰)에 나서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대군이 맞붙을 때 각 진영에서 한 명이 대표로 나서서 연설하는 관례가 있다. 연설전은 딱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항복해라. 싫다. 그럼 죽어라. 아무래도 기사의 전력이 상상을 초월해서 강력하다보니, 전쟁에도 자연스럽게 기사도스러운 절차가 생긴 것 같다.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군의 사기를 후려치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고. 지금 시점에서 프랑크 황제가 연설전 대표로 나와버리면 우리 입장에서 상당히 곤란해지겠지……. “단, 군지휘권을 황제가 쥐게 되겠다만.” 여태껏 무능한 모습만을 보여준 황제 앙리 3세에게 군사적 재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즉 황제가 친정하는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연설전에서 우리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트릴 수 있으나, 본격적인 전투에선 무능한 지휘가 이루어지리라. “황제가 나오느나 나오지 않느냐. 그것만 보면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의도가 확실해질 거다. 만약 나온다면 앙리에타는 회전을 원하긴 원하되, 정치적인 승리를 바라는 것이야. 하지만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은 일절 동원하지 않은 채, 순전히 섬멸전만을 노린다는 얘기가 된다. 내가 목책을 저리 잔뜩 싸온 것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야.” 우리군은 파리시오룸 근교의 생드니(St. Denis) 평야에 도착했다. 그곳에 브르타뉴-황제 동맹군이 사령부를 차려놓고 있었다. 눈으로 어림짐작하건대 적군의 총병력이 삼만조차 안 되었다. 정찰전과 첩보전을 벌인 결과, 적군에는 황제가 왕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크 황제를 가리키는 군기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황제를 대리하는 장군의 깃발이 펄럭일 뿐이었다. “결국 섬멸전을 노리는 것이냐, 여왕이여.” 나는 평원 너머의 적진을 노려보았다. 적 진영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한테 협력하는 귀족이 몇 명 있었고, 덕택에 적군의 전력을 상당히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이처럼 상대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자가 아군에도 숨었으리라. ──────────────────── <황제군> 총사령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 부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대리장군 ■제1군: 브르타뉴 왕국군. 총사령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      보병 5,000명(용병, 징집병). 기병 8,000명(기사 1,000명). ■제2군: 프랑크 황제군. 총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대리장군.      보병 2,000명(징집병). 기병 8,500명(기사 600명). □총병력: 보병 7,000명. 기병 16,500명(기사 1,600명). ──────────────────── 우리는 모인 정보를 가지고 곧바로 군사회의를 열었다. 우리측 총사령관인 앙리 드 기즈 공작을 비롯해서 바타비아 공화국군 사령관인 안나 더 빗 공화국 13위원회 위원, 난쟁이 부족연맹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단의 단장들 등, 쟁쟁한 귀족과 장군이 야외에 모여들었다. “확실해졌군요. 브르타뉴의 여왕은 기병전을 노리고 있습니다.” 안나 더 빗 부사령관이 말했다. 그녀는 하프엘프였다. 이종족 혼혈아로서 공화국의 최고수뇌부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걸이었다. 나와 똑같이 <해방동맹>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기병 전력에서 아군은 열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기사의 전력이 위협적입니다. 적측이 기병전을 원하는 이상, 아군이 그게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나가 말했다. 그녀는 인간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도 초록색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다. 하프엘프답게 미모가 아름다워, 지금도 몇몇 귀족은 약간 멍한 눈초리로 그녀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본인도 동의하네. 브르타뉴의 기병에는 얼마 전에 쓴맛을 보았지.” 앙리 드 기즈 총사령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는 느긋하게 세월을 챙긴 사십 대의 공작이었는데, 멋들어지게 수북히 자란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브르타뉴군에 참패한 전적이 있었다. “폐하께서 계셨다면 곤혹스러울 뻔했지만 말일세. 쟝 볼레 사제가 지적한 대로, 브르타뉴의 여왕은 진심으로 우리를 전멸시키려고 하는 것 같군.” “예. 무모하다고 평가해야 할지. 자신감이 지나쳐 보입니다.” “허나, 그 자신감을 뒷받쳐주는 실력 또한 있네.” 기즈 공작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얘기를 전해듣기로, 프랑크군이 일패도지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패잔병을 추스려서 안전하게 퇴각했다던가. 천재는 아닐지언정 결코 무능하지도 않다. 총사령관으로서 견실한 인사라 보아도 괜찮겠지. “기병들은 보병의 뒤에 배치하여…….” “장창병들 사이에 틈이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장군들이 자유롭지만 절도를 잃지 않고 회의했다. 예상한 대로 공화국의 지휘권은 안나 위원, 귀족군의 지휘권은 기즈 공작이 나눠가졌다. 하지만 내 예상이 기분 좋게 엇나간 부분도 있었다. 바로 지휘관들 사이에 알력다툼이 의외로 적다는 것이었다. 기즈 공작은 앙리에타에 비하면 장군으로서 2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귀족으로서 틀림없이 1류였다. 회의 도중에 일부 호전적인 용병대장과 귀족이 큰소리로, “여러분,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오? 우리는 육만이고 적은 고작해야 이만에 불과하오. 세 배나 많은 병력을 이끌었으면서도 고작 계집애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니 차마 견딜 수가 없구려! 총사령관 각하! 소장에게 일군을 맡겨주십시오. 계집애를 붙잡아서 효수하겠습니다.” 하고 호언장담하면 기즈 공작은 냉철하게 말했다. “실로 용감하군! 하지만 기병의 운용은 계속해서 보류하겠네. 기병전만이 사내의 용기를 보여주는 방법은 아닐세. 여왕이 원하는 대로 전투를 이끌어줄 필요는 없네.” 기즈 공작은 지휘관들을 능수능란하게 중재하며 자기가 결코 카드게임으로 공작위를 따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군은 쟝 볼레 사제가 입안한 작전을 채용하겠네.” 기즈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안한 작전이란 의외로 간단하다. 며칠 동안 나귀를 굴려서 힘겹게 운반한 목책들을 전방에 장성처럼 꽂아둔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책에 의지하여 장창병을 배치하는 것이다. ‘제파르 대장의 아이디어를 빌렸지.’ 내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제파르 대장은 목책과 말뚝을 이용해서 기사단의 돌격을 훌륭하게 방어했다. 제파르 대장처럼 신묘한 지휘를 보여줄 수야 없겠지만――그런 묘기는 마왕이 몬스터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때나 가능했다――목책을 활용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전방에 대량으로 목책을 배치할 경우, 기병의 돌격은 자연스럽게 효과가 급감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바라는 기마돌격이 힘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속도를 잃은 기병들을 향해서 장창을 꽂아넣는다. 본래 소수의 병력이 다수의 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친다. 이번에는 정반대이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우리가 도리어 방어전을 고수한다. “여왕이 자랑하는 기병과 기사단은 우리군의 방패에 막혀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쳤을 때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갑니다.” “음.” 나의 작전설명에 기즈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우리 사이에서는 논의가 끝났지만 주변에 알리려고 일부러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극단적으로 기병에 맞서기 위해서만 고안된 전술……. 순전히 앙리에타 여왕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진형이다. 몇몇 장군은 겁쟁이 같은 작전이라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은 불과 얼마 전에 브르타뉴 기병의 무서움을 체험했다. 기즈 공작은 섣부르게 전투를 벌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안심했다. 아군의 지휘부는 무능하지 않았다. 패배할 요소는 사라졌다. 전장으로 삼은 생드니 평야조차 우리에게 유리했다. 평야의 왼편에는 강이 흘렀다. 오른편에는 숲이 빼곡했다. 강가는 땅바닥이 물러서 기병이 돌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숲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생드니 평야는 기마돌격으로 승부를 보기에는 상당히 불리하다. 브르타뉴에게 유리한 요소는 전혀 없다. 기즈 공작이 호기롭게 외쳤다. “우리군은 병력에서 우위를 선점했을뿐더러, 전장에서도, 전술에서도 우위를 확보했네. 제장들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분투해주길 바라네!” 다음날 새벽, 브르타뉴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드니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00203 백합 전쟁 =========================================================================                        새벽 무렵. 평원 저편에서 뿔나팔이 음산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하나의 가락으로 시작했던 뿔나빨은, 마치 한 마리의 참새가 날아오르자 곧이어 스무 마리가 뒤따라 퍼덕이듯이, 수십 소리의 합창을 이루었다. 사백 년 전 제6차 월맹군에서 오우거 부대가 일격에 궤멸당했을 때도 뿔나팔은 울렸다. 오백 년 전, 팔백 년 전, 역사서에 오로지 기마돌격만으로 승리를 일구었던 그 순간에 뿔나빨은 어김없이 울렸다. 그들은 감히 천지에 고하고 있었다. 오늘, 역사가 재현된다. ─ 끼아아악. ─ 그르푸으, 까아아……. 숲의 정령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천초목이 핏물로 물들 것임을 예감한 것일까. 나무와 나무 사이로 초록빛 정령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뿔나팔이 우렁차게 울리자 깜짝 놀라서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다. 바람도 불지 않았건만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요란하게 떨었다. “장창병 앞으로! 장창병 앞으로!” 난쟁이 용병들이 농민병을 독려했다. 난쟁이들은 몸집이 작았지만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우렁찼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고산지대에서 태어나 한평생, 많게는 백오십 년 동안 전장에서 뒹군 난쟁이들은 단연 최고의 정예병이었다. “알겠느냐. 목책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라! 앞의 사람이 쓰러지면 얼른 목책에 달려가 붙도록.” “기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목책을 뚫고 돌격할 수는 없다. 하나만 기억하라. 목책을 사수해라! 목책이 무너지면 우리도 죽을 것이요, 목책이 건재하면 적이 죽을 것이다.” 난쟁이들이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엉덩이를 뻥뻥 때렸다. 전투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쉰 명의 양날도끼 용병단은 전원 부사관이 되었고, 능숙하게 병졸들을 전장으로 이끌었다. 농민병은 고블린과 오크를 상대로 장창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몬스터를 뚫는 창끝은 당연히 인간도 꿰뚫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기를 다루는 훈련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짜는 일이다. 용병들이 그걸 유도해준다. “……브르타뉴 여왕은 연설전을 생략하려는 모양이군.”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부대의 뒤편에 서서 일만이천의 부대를 한눈에 지켜보고 있었다. 내 호위역으로 붙은 제레미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황제가 친정하지 않았다는 게 더 확실해졌네요.” “음. 우리에게 명분 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지.” 심지어 사제들이 전투에 앞서 성가를 부르는 절차까지 생략했다. 저쪽에는 성녀가 있는데도 말이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순수하게 전투에만 집중했다. ─ 쉬이이익! 사방에 새벽안개가 옅으나마 깔려 있었다. 뿌연 상공을 뚫고 불벼락이 대여섯 개 쏟아졌다. 적측의 마법사들이 공격해온 것이었다. 화염마법은 목책을 불사르는 데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처방법이었다. 적들은 역시 목책을 방해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군중(軍中) 마법사는 저들한테만 있지 않았다. ─ 프로테제! ─ 스쿠툼! 우리군에는 마법사가 스물여섯 명이나 참전했다. 대다수의 마탑이 중립을 선언했으나, 귀족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사를 끌어왔다. 마법사는 학문과 진리를 위해 갈고닦은 마법이 한낱 살상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귀족들의 수완이 만만치 않았다. 상공에 방어막이 널찍하게 펼쳐졌다. 화염구가 도중에 막혔다. 어떤 마법사는 수구(水球)를 발사해서 정확히 화염구에 맞추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으아아아!” “프랑크 만세!” 적들의 일제사격이 허망하게 실패해버리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난쟁이들이 함성을 주도하고 있었다.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지금처럼 사기를 올리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반면에 안개 너머의 적들은 조용했다. “더 이상 마법으로 공격해오지 않는군요.” “아아! 목책을 불태우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겠지.” 나는 오른주먹을 꽉 쥐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군은 마법전력에서도 적군보다 앞서거나, 최소한 동등했다! 전장을 생드니 평야로 선택한 것에는 수많은 이점이 있었다. 이곳은 오른편에 강줄기를, 왼편에 숲을 두고 있어서 좁았다. 좁다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군이 주력으로 삼은 장창병들은 밀집할수록 강해졌다. “이제 여왕에게는 기마돌격밖에 수가 남지 않았다……!” 반면에 기병은, 필연적으로, 퍼질수록 강력하다. 그들은 돌격할 때 3미터에서 8미터에 이르는 기병창(lance)을 쓴다. 특히 브르타뉴 기사단은 8미터짜리 랜스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러를 쓰지 못하는 일반 기마병은 4미터~5미터의 랜스을 들 수밖에 없지만……. 기병들이 일렬로 주욱 늘어서서 랜스를 앞세워서 돌격해온다.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공포이다. 하지만, 생드니 평야처럼 전장이 좁다면 어떨까? 기마돌격의 위력이 줄어든다. 더군다나 우리는 전방에 목책들을 배치하고 있다. 목책과 목책 사이로 난 자그마한 공간뿐이다. 브르타뉴의 기병들은 겨우 그 좁다란 틈새로 돌격할 수밖에 없다. 위력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급감하겠지. 마지막 어퍼컷은 장창병이다. 비록 5미터 남짓한 장창이지만, 목책과 함께한다면 기병은 물론이고 기사와 자웅을 겨룰 법하다. 단언하건대 이곳이야말로 기병의 무덤이다. ─ 다그닥, 두그닥, 다그닥……. 드디어 안개 너머에서 일단의 기마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책에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졌을까. 수백, 수천 명의 기병이 화려한 갑주를 뽐내며 말을 속보(trot)로 몰았다. 무수한 갑옷들이 은빛 파도를 이루며 해일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과연 장관은 장관이로군.” 나는 지휘봉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쯤 내가 맡은 좌익 말고 다른 진영에도 기마병이 돌격해오고 있으리라. 이제부터 승부였다. “제레미. 사격 명령을 하달하라!” “예!” 제레미가 손짓하자 병사의 갑옷을 차려입은 암살대원이 깃발을 펄럭였다. 그 신호를 전해받고 전방의 난쟁이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사격준비, 사격준비! 삼천 명의 궁수가 시간차를 두고 활을 올렸다. 우리군은 무식하게 장창병만 앞세우지 않았다. 장창병 뒤편에 궁병을 충분히 배치했다. 장창병이 목책과 더불어 기마돌격을 저지할 동안, 궁병이 적들을 쏘아맞힌다. 완벽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난쟁이들이 요란하게 소리를 질렀다. “사격개시! 사격개시!” 화살비가 하늘을 가르며 브르타뉴의 기병들을 향해 꽂혔다. 대략 스무 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굴러떨어졌다. 두텁게 갑주를 차려입은 중기병에게 화살은 위력적이지 않았으나, 운 나쁘게 말한테 화살이 적중해버린 경우였다. 내가 쾌재를 불렀다. “좋다! 계속해서 화살을 퍼부어라! 화살비는 전액 지원해주겠다!” “장창병! 장창병 앞으로오오!” 화살비를 피한 기병들이 이제 목책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스무 명이 낙마했다, 라고 하면 보잘 것 없게 느껴질지 몰라도 단 한번의 사격에 스무 명이나 무력화된 것이었다. 네다섯 번만 더 반복하면 금방 백 명을 채웠다. 목책을 뚫지 못하는 이상에야 저들은 출혈이 늘어날 뿐이었다. “아……!” 제레미가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내가 고개를 돌려보자, 제레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싶더니! 사령관 각하! 없습니다!” “없다니? 뭐가 없다는 것이냐?” “랜스요!” 제레미가 소리쳤다. “기병들이 랜스를 들고 있지 않아요!” “뭐?” 화들짝 놀라서 전방을 쳐다보았다. 빈틈없이 은빛으로 무장된 갑옷. 몬스터와 이종교배를 해서 낳은 군마. 중기병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그러나 랜스가 없었다! 언제나 보병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브르타뉴의 전매특허인 8미터짜리 기사용 랜스도, 일반 기병이 사용하는 5미터짜리 랜스도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중기병에게는 지극히 생소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활이라고……!?” 그 순간, 수천 개의 화살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브르타뉴의 기마전대는 궁기병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목책에 십 미터 앞까지 접근해서 화살을 겨냥한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군의 병사들이 경악했다. “화, 화살이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목책 앞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수십, 아니 얼핏 보아도 백 명에 가까운 장창병이 꺼꾸러졌다. 전신을 갑옷으로 도배한 중기병과 다르게 이쪽은 대다수가 농민병이었다. 화살에 대한 방어력 자체가 달랐다. 브르타뉴 기병들은 목책에서 얼마간 떨어진 채 끊임없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앞선 열이 화살을 쏜 후에 뒤로 빠졌고, 다음 열이 화살을 쏘아올렸다. 그렇게 무한반복이라도 할 것 같았다. 스웜(Swarm)! 스웜 전술이었다! 유목민들이나 운용할 법한 궁기병 전용 전술을, 대륙 최강의 훈련도를 자랑하는 브르타뉴의 기병들이 실현시키고 있었다. “으, 으아아악! 피해!” “멍청한 놈들! 방패를 들어라! 방패를 들어!” “끄아악, 팔, 내 팔이!” 군중이 순식간에 혼란으로 가득찼다. 장창병들은 자그마한 나무방패를 들어서 어떻게든 화살을 피해보려 애썼다. 농민들은 처음 겪어보는 화살비에 허겁지겁 머리를 방패로 가렸다. 자연스럽게 장창들은 땅바닥을 향해 조금씩 내려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몇 초 동안 말을 잃었다. 직후에 내가 내뱉은 것은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경악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을 노렸는가, 앙리에타……!” “사령관 각하! 어서 명령을!” 제레미가 옆에서 나의 정신을 일깨웠다. 제기랄! 분노에 잠길 틈조차 없었다. 난쟁이들 덕분에 대열이 유지되고 있지만 이대로는 피해가 속출할 게 뻔했다. 나는 이를 물고 소리쳤다. “화살에는 화살로 맞서라! 궁병을 앞으로 세워, 방패를 가진 이들은 궁병을 엄호해라!” “즉시 명령을 하달하도록!” 제레미가 스무 명의 암살대원에게 손짓했다. 미리 깃발로 정해놓은 범위에서 벗어난 명령이었으므로, 대원들이 일일이 명령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이들은 재빠르기로는 마계에서 일등 이등을 다투는 정예 암살자였다. 대원들은 전방에 수천의 장창병이 밀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뛰어들어, 난쟁이 하사관들한테 명령을 하달했다. 이 분도 채 걸리지 않아 난쟁이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궁병 앞으로! 궁병 앞으로오오!” “방패로 궁병을 사수해! 사내새끼들아, 겁먹지 마라! 궁기병과 궁병이 싸우면 이쪽이 백전백승이다!” “아군을 믿어라! 아군을 지켜라!” 병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궁수가 대열 사이로 뛰어갔다. 인파에 파묻혀 있던 궁수도 동료들이 손으로 밀어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난쟁이들이 사기를 북돋았다. “말을 노려라! 말을 향해서 쏴!” 삼천 명의 궁수는 대부분 사냥꾼이었다. 훈련된 궁병처럼 일제사격을 펼칠 순 없었어도 명중률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궁수들은 동료들의 엄호를 믿으며 필사적으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화를 못 이겨서 발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완전히 속아버렸다! 앙리에타 여왕은 우리가 지극히 방어적으로 나오리라는 사실을 전부 간파하고 있었다. 아군은 생드니 평야를 전장으로 삼았다며 좋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우리가 그러하기를 내심 갈망한 것이었다.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것과 똑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로젠베르크 변경백, 그들도 훈련도가 높은 기병을 활용해서 궁기병 전술을 펼쳤다. “아우스테를리츠의 재현인가……!” 비좁은 평야에 수만 명의 장창병이 밀집해 있다. 화살로 인한 피해를 극대화하기에 더없이 알맞겠지. 우리는 브르타뉴의 기마돌격을 너무도 겁냈고, 그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궁기병에 대비하지 못했다. “사령관 각하. 아직 우리가 유리합니다.” 제레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표정을 꾸미지 않았다. 제레미의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본성이 얼굴에 드러났다. “방패로 수비하며 궁수들을 계속해서 활용하면 결국 궁기병은 패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목책이 방벽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제레미 말이 맞았다. 나는 목책을 더럽게 튼튼하게 만들도록 명령해뒀고, 덕분에 훌륭한 화살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꽤 많은 궁수가 그곳에 달라붙어 공격을 피하면서, 목책과 목책 사이로 난 자그마한 틈새로 화살을 쏘았다. 장창병들은 화살이 닿지 않은 뒤편으로 조금씩 물러서고 있었다. “알고 있다. 다만, 앙리에타 여왕에게 속아넘은 자신이 한심하다!” “당장에 기습적인 효과를 얻었을지 몰라도 앙리에타 여왕이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 침착하게…….” 제레미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레미의 눈동자에서 나는 무언가 불운한 것을 직감했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궁기병들이 천천히 물러났다. 여기저기 화살에 맞아 죽은 군마가 널브러져 있었다. 우리측의 사격에 피해를 입을까봐 물러갔다, 일견 그렇게 보이기도 했으나. “제2열이……!” 제1열과 교대하듯이 제2열의 기마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의 궁기병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병들. 기사였다. 기사들은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검은 백합의 망토를 휘날리면서 이곳으로 군마를 몰았다. 전신갑주, 심지어 말까지 갑옷으로 철저하게 입었다. 제1열과 다르게 기마병으로서 완벽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완벽한 무장을! 그들은 8미터짜리 랜스를 꼬나쥐고 있었다! 아군 병사들의 다급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기사다! 기마돌격이다――!”   00204 백합 전쟁 =========================================================================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스웜 다음에는 기병창 돌격이라니! 적들은 제1열이 사격을 가한 다음에 곧바로 빠져서 제2열이 돌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화급하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장창병! 장창병을 앞으로 세워라!” 지휘 깃발이 요동쳤다. 명령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크리를 비롯하여 난쟁이 용병들은 “앞으로!”를 외쳤다. 농민병들은 전황이 연이어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몰아닥치자 얼이 빠졌지만, 하사관이 엉덩이를 걷어차자 서둘러 움직였다. “거차아아앙!” 보병들이 창을 꼬나쥐고 목책에 다가붙었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장창을 땅바닥에 떨어트리는 병사도 있었다. 꼴불견스러운 실수가 연출되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군의 대열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궁기병에게 쓴맛을 보여주려고 나섰던 사냥꾼 출신 궁수들은 허겁지겁 뒤로 빠졌다. 앞으로 나가려는 장창병과 뒤로 빠지려는 궁병이 부닥쳐서 곳곳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일 초가 아까운 순간이었다. 랜스 차지, 그것도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가 돌격해오면 궁수로는 조금도 버틸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진형을 변형해야만 했다. 지금도 브르타뉴의 기사들이 해일을 이루며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기사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최고 속도(gallop)로 군마를 몰았다. 군마가 광폭하게 질주했다. 기사들은 목책과 목책 사이에 난 길목으로 쏟아졌고, 전투의 함성을 내질렀다. “수선화 중대, 명예롭게 돌격하라!” “여왕 전하를 위하여!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를 위하여!” 기사단과 장창병이 충돌했다. 핏물이 튀었다. 오러를 실은 기병창이 서너 명의 보병을 찢어발겼다. 혼혈의 몬스터 군마가 날붙이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울부짖었다. 장창보다 압도적으로 긴 기사용 랜스가 농민병의 어깨죽지를, 목을, 가슴을 꿰뚫었다. 군마의 앞다리가 자신을 막는 방해물을 모조리 짓밟으며 달렸다. 순식간이었다. 수십 명의 장창병이 일거에 무너졌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내는 거다!” 말에 올라타서 즉시 달려나갔다. 뒤편에서 제레미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보나마나 위험하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겠지. 웃기는 소리가 아니고 뭔가. 위험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군 전체이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기만작전과 기습작전을 병행했다. 작전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 바로 지금, 전투의 초반부였다. 기사에게 겁먹어 보병들이 만에 하나 목책에서 멀어지기라도 한다면――끝장이었다. 모든 것이. “물러서지 마라!” 목책만은 반드시 사수해야만 했다. 나는 미리 목걸이에 걸어둔 성량증폭 마법을 발동하여 소리쳤다. 전장에 나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사, 사제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멍청이들이! 나는 말을 몰아서 장창병 방진의 가장 뒤쪽까지 다가갔다. “앞을 노려보아라, 프랑크의 사내들이여!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뒤를 돌아보았던 병사들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네 멋대로 전투를 끝내게 내버려둘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들으라! 기사단이 일견 대단해보일지라도 목책을 관통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대들이 목책에서 멀어지는 순간, 기사들은 주저없이 오러로 목책을 파괴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패배하고 만다. 병사들이여, 목책에 붙어라! 기사들이 더 이상 몰아닥치지 못하게 막아라!” 목책으로! 목책으로! 나에게 호응하여 난쟁이들이 소리 질렀다. 병사들은 나의 말을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전쟁터의 열기에 휩쓸려서 발을 앞으로 향했다. 우우우! 우아아! 병사들은 악을 써가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난쟁이 용병들이 어떻게든 대오를 유지하려고 발에 피가 날 지경으로 돌아다녔다.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느리지도 않게. 기사가 다섯 명의 보병을 물리치고 있었다.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다시 다섯 명으로, 열 명으로, 쉰 명으로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으아아아악! 뒈져라!” “말을 찔러! 브르타뉴 돼지 새끼들에게 창맛을 보여주라고!” “황제 폐하 만세! 대프랑크 제국 만세!” 돌격해온 기병이 모두 기사인 것은 아니었다. 기사는 가장 전방에만 있었으며, 뒤이어서 몰아닥친 기병들은 전원 일반병이었다. 그들의 5미터짜리 랜스도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으나 거기엔 오러가 없었다. 랜스는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무기였다. 한번 찔러넣은 다음에는 검을 빼들어야 했다. 브르타뉴의 기사와 기병은 랜스를 손에서 놓고 검을 빼들었다. 휘어진 대검이 장창과 날카롭게 부딪쳤다. 제아무리 브르타뉴군이 정예 중의 정예라 할지라도 고작 검으로 장창병 방진을 몰아붙이기란 불가능했다. 기병들은 돌격력을 잃고 눈에 띄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좋다, 속도를 잃은 기병은 장창의 밥에 불과하다! “자랑스러운 프랑크의 전사들이여, 보아라!” 나의 내장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용솟음쳤다. “브르타뉴 놈들은 죄다 고자새끼다! 저놈들의 좆은 길기만 길지 두 번만 박아대면 찍 싸버린다. 프랑크의 남아들이여! 고자새끼들에게 진정으로 사내다운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어라!” 병사들이 광소했다.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었다. 폐를 쥐어짜내 웃음을 토하게 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동료를 도륙했음에도 단 한 사람 도망친 병사가 없었다. 이것이 두텁게 밀집한 보병진의 위력이었다. 행여나 우리군 전열이 얇았다면 기마돌격에 속절없이 무너졌으리라. 하지만 한 명이 무너져도 그 뒤에 수십 명이, 더 나아가 수백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쓰러지면 나머지 병사는 동요한다. 백 명 중에 한 명이 죽으면 너끈히 버텨낸다. 자신의 앞과 옆에 동료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난공불락의 성벽과 함께하는 느낌을 준다. 하물며 우리에겐 목책까지 있다……. 브르타뉴의 궁기병과 기마돌격은 확실히 대단했다. 앙리에타 여왕 휘하에서 얼마나 훈련과 실전을 거듭했는지 알 만했다. 생드니 평야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면서도 전술을 연습하고 또 확인했겠지. 그러나 대단할 뿐이었다. 일만 명의 의용병은 아직까지 훌륭하게 견디고 있었다. “정말, 막무가내라니까요! 이 양반이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암살대원들이 내 곁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레미가 그중에 선두를 차지했다. 나는 잠시 성량증폭 마법을 끄고 말했다. “제레미, 대원을 이끌고 기사를 쓰러트려! 기사만 처리하면 무서울 게 없다. 군마의 다리를 베어넘긴 다음에 장창병들한테 먹잇감으로 던져라.” “아니, 저까지 가버리면 사령관 각하께선 어떻게 지시를 내리시려구요?” “걱정하지 마라. 그대의 사령관은 스스로 부관을 찾는다.” 내가 얼른 가라며 제레미를 독촉했다. “생드니의 일만 의용병 전원이 나의 부관이다!” “……아아,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야. 존명! 존명하면 될 거 아녜요!” 제레미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녀가 뒤를 향해 외쳤다. “붉은 흉터의 빌어먹을 년들, 돼지를 살육할 시간이에요! 놈들의 쓰잘데기 없는 좆탱이를 뿌리부터 잘라버리세요!” 제레미가 말을 끝내자마자 스무 명의 암살대가 전방을 향해 사라졌다. 제레미 역시 땅바닥에 침을 퉷, 하고 뱉은 다음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뛰쳐나갔다. 성난 목소리, 쇠와 쇠가 부딪쳐서 내는 소음, 패배한 자가 내지르는 비명, 승리한 자가 토해내는 쉰 함성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브르타뉴군은 우리를 밀어내려 발버둥쳤다. 아군은 브르타뉴군을 목책 바깥으로 몰아내려 안간힘을 다했다. 암살대가 투입되자 즉시 효과가 발휘되었다. 몇몇 브르타뉴 기사가 겨우 곡도 하나를 손에 쥐고 일기당천이 되어 아군을 휘젓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어느 순간 갑작스레 낙마했다. “기사가 떨어졌다! 찔러! 찔러넣어라!” “아아악! 모두 달려들어!” 기사들은 방진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만큼 사방에 적이 넘쳐났다. 일단 자그마한 틈이 생겨나자 장창병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창을 내리꽂았다. 땅에 넘어진 기사를 향해 수십 개의 창과 도끼가 내리쳤다. 기사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그런 광경이 점차 늘어났다. 암살대원은 장창병들 사이에 숨어서 잽싸게 군마의 다리만을 절삭했으며, 나머지 처리는 군병들이 알아서 해치웠다.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건만 난쟁이 하사관들은 이쪽의 요구에 정확히 맞춰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을까. “물러서라! 우선 물러서라!” 브르타뉴의 중대 하나가 말머리를 돌렸다. 일단 하나의 중대가 퇴각하기 시작하자 거의 동시에 모든 기병이 뒤로 내달렸다. 아군의 함성이, 방어선을 사수해냈다는 확신에 가득 찬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승리! 우리는 초전에 승리했다. 기사가 포함된 최정예 기병들을 농민병이 쫓아낸 것이었다. “으아아아! 프랑크 만세! 황제폐하 만세!” “브르타뉴 개좆 같은 새끼들아아악!” 목책들 사이의 길목으로 기병들이 도로 빠져나갔다. 절대로 곱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 일부 궁수들은 마지막까지 활시위를 당겼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병사들이 화살값에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프랑크의 남아들이여! 그대들에게 묻는다!” 내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은 제국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가!” 그러자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외쳐댔다. 이미 정련된 언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짐승들의 울음에 불과했다. “그렇다! 프랑크는 우리의 자랑이다. 조루 토끼 새끼들이 그것을 짓밟으려 하고 있다……감히 용서할 수 있겠는가!” ─ Non! Non! Non! 병사들이 연호했다. 아니오! “우리는 더러운 토끼 새끼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 ─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그렇다, 죽여라! 망설임 없이 죽여라! 학살하라!” 나는 아무런 대사도 준비하지 않은 채 소리치고 있었다. 아아, 이럴 때 예정된 연설문 같은 것은 꺼져버려도 좋았다. 일만의 인간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전장의 광기에 휩쓸려 있었다. 아니, 우리가 파도가 되어 전장에 광기를 때려넣고 있었다! “끝없는 학살을! 만족을 모르는 학살을! 외적의 핏물로 일 드 프랑크의 초목은 자라나리라! 제국을 약탈하는 야만인들에게 신들께서 어떠한 최후를 약속하셨는가 각인시켜줄지어다! 프랑크의 전사들이여, 유구한 역사 앞에서 우리가 제국의 성벽임을 보이거라!” 나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서 소리 질렀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승리한다!” 병사들이 열광적으로 울부짖었다. 비바 프랑크! 비바 프랑크! 좌익에서 울리기 시작한 함성은 곧이어 아군의 중앙으로, 새벽안개 너머의 우익까지 전염되었다. 좌익뿐만이 아니라 아군 전체가 기마돌격을 막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앙리에타 여왕의 회심에 찬 기습공격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평야 저편에서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흥분해서 날뛰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앞쪽을 노려보았다. 궁기병. 천 명이 훌쩍 뛰어넘는 궁기병들이 또 달려오고 있었다. “크으.” 나는 깨달았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어떤 전술을 채택했는지. 여왕은 제1열의 궁기병, 제2열의 창기병, 다시 제3열의 궁기병, 제4열의 창기병, 이렇게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공격해올 속셈이었다. 즉, 방금은 첫 번째 파도를 막은 것에 불과했다. 브르타뉴의 창인가. 아니면 프랑크의 방패인가. 태양은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궁병을 다시 앞으로 배치하라 명령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기나길고 지난한 하루가 되겠지…….   00205 백합 전쟁 =========================================================================                        좋지 않은 예감은 꼭 현실로 이루어졌다. 적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쉼없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마의 앞다리가 격렬하게 질주했으며, 기사들은 랜스를 이쪽에 때려박은 다음 돌아갔다. 제1열 궁기병, 제2열 마상돌격. 이렇게 한 단위의 공격이 일곱 번 넘게 되풀이했다. 징그러운 놈들이었다. 나는 한숨인지 비명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브르타뉴의 군마는 밥도 먹지 않는다더냐!” 전투가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넘었다. 그동안 브르타뉴의 어떤 중대는 어림잡아서 열두 번을 돌격했다. 갑주가 찌그러졌는데도 기병들은 개의치 않고 장창병들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그래도 조금씩 기세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레미가 단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저들의 인마(人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살아숨쉬는 생명체이니까요. 지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우리 병사들도 거의 탈진할 지경이라는 것이 문제이지. 제기랄.” 장창병들은 명백히 지쳐가고 있었다. 적군의 기병이 한 명 죽어나갈 때 아군은 세 명에서 다섯 명이 죽었다. 네 배에 가까운 교전비율이었다. 조금 전에 중앙과 우익에 전령을 보내봤는데, 상황이 이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군은 총 5,1000명에 이르는 보병을 말 그대로 처박았다. 덕분에 목책 방어선을 사수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만약에 적군과 아군의 병력차이가 세 배 이하였다면……상상하기 싫은 사태가 벌어지고도 남았다. ‘왜 제파르 대장이 인간의 기병 전력을 끔찍하게 여겼는지 알겠군.’ 비정상적으로 강력했다. 오러를 신체 바깥으로 뽑아낼 줄 아는 기사는 물론이고, 기사의 시종으로서 오러를 수련해온 기병들까지. 일단 랜스 길이부터 무지막지했다. 5미터에서 8미터라니! 오크들로 장창병 방진을 꾸리지 않는 이상에야 누가 이들을 야전에서 대적하겠는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라면 바르바토스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단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던 제파르 대장은 또라이 중에 상또라이였다. 저놈들은 인간종이 아니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 시발스러운 것이었다. “또 돌격해오는군요.” “빌어먹을. 개새끼보다 더 개 같은 개자식들.” 수천의 인마가 평야를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내 다시 기사단과 회전을 치른다면 맹세컨대 파르시의 좆을 빨겠노라!” “그건 또 누구예요? 어휴.” 제레미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전방으로 갔다. 만에 하나 기사가 난입해 들어올 경우에는 제레미의 암살단이 활약해줘야만 했다. 그 암살단원도 벌써 다섯 명이 죽었다. “콜록, 콜록……썅.” 다시 한번 성량증폭 마법으로 병사들을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내 목소리는 이미 깡마른 노인처럼 쉬었다. 그게 세 시간 전의 일이었다. 랜스에 꼬챙이가 된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군마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악바리가 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던 백성이 피와 눈물 범벅이 되어 울부짖었으며, 브르타뉴인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희생되었다. “사제님……이 친구를 살려줍쇼…….” 한 병사가 부상병을 부축하며 다가왔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또였다. “친구가 팔이 잘렸습니다. 사제님, 부디 자비를…….”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내 눈으로 봐도 일목요연했으니까. 부상병은 오른팔과 왼팔이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절단면이 무서울 정도로 깔끔했다. 운 나쁘게도, 하필 제3급 이상의 기사가 달려든 것이었다. 병사가 나의 발끝에 키스하며 몇 번이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저랑 동향인 놈들 중에서 이제 이놈밖에 안 남았습니다요. 얘까지 죽어버리면 제가 마을사람들을 뭔 낯빛으로 보겠습니까……사제님.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쇼……!” “이보게. 나의 동지여.” 내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목구멍이 묵직했다. 이건 정말 빌어먹을 짓이었다. “안타깝지만 여신의 사제도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네.” “예?” “그 친구는 이미 죽었네.” 병사가 부상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상병, 아니 전사자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더 봐야겠고 더 말해야겠다는 듯이. 병사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자신의 친구와 나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어? 어? 예? 아까 전까지, 아니, 바로 전까지 말을 했는데……예?” 내가 방금 한 말을 철회해달라고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병사가 맞겠지. 바로 전까지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텨라,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라, 곧 사제님께서 치유해줄 거다, 조금만 더……아군의 장창병 방진을 겨우겨우 빠져나왔다. 그러는 도중에 부상병은 죽었다. 동향의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건내지도 못하고. 그뿐이었다. 병사는 전사자의 뺨을 이리저리 때렸다. 눈을 뜨라고, 일어나라고 말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제서야 병사는 친구가 영원히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음을 터트렸다. 수염이 거칠게 난 중년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반쯤은 먼지에 잠긴 울음소리였다. “…….” 나는 병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위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위선이라도 필요하겠지. 어차피 전쟁터에 선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적군이 먼저 지쳐 쓰러지든지, 아군이 먼저 붕괴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버티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지휘관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충 비슷한 것일까. “공작 전하께서는 예비대를 투입하시고자 합니다.” 총사령부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내가 맡은 좌익 이외 다른 곳에서도 지휘관들은 '어떻게든 해야 한다'라고 결심한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만이천 명의 병사를 맡았다면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은 물경 육만삼천의 목숨을 등에 짊어진 셈이었다. 일만과 육만은 차원이 달랐다. 단지 수사학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차원이 달랐다. 심리적인 압박에서 비교조차 안 되리라. “예비군이라니? 우리군에 아직 예비대가 남았는가?” “아군의 기병 전력. 공작 전하께서는 그것을 이용하시려는 계획입니다.” 전령의 보충설명에 내가 아, 하고 깨달았다. 왜 여태까지 고려하지 못했을까! 그렇다. 적군에게 기병이 있듯이 우리한테도 기병이 있었다. 그것도 일천의 기사에다 일만의 기병이. 비록 브르타뉴의 강병보다야 질이 떨어질지 모르겠으나, 적군은 지금 지쳐 있었다. 반면에 아군의 기병은 쌩쌩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과연……본인의 휘하에는 기병대가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작 전하께서 최선의 수를 고안해내신 것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이 말했다. “우익의 사령관께서도 작전에 동의하셨다고 말씀을 전해도 되겠습니까?” “아아. 어차피 본인에겐 기병이 없으니 별반 쓸모있는 동의는 아니네만. 공작 전하께 무운을 빈다고 전해주게나.”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령은 훌쩍 떠났다. 사실 이쪽이 동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기병과 같은 고급전력은 중앙의 황태후파 귀족군, 우익의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끼리 합의한 다음에 나한테는 명령만 하달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동의를 구한다면서 전령을 보냈다. 기즈 공작이 얼마나 됨됨이가 철두철미한 인물인지 알 만했다. 사람을 끌어안는 인덕이 있었다. ‘만약 황제가 기즈 공작의 절반만 닮았더라도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프랑크에는 불운이었으며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죽어버린 부상병에게도 불행이었다……. 말에 올라타서 후방을 바라보았다. 일만의 기병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아군의 장창병 방진을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나는 미리 길목을 만들어둘 것을 명령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끝이 다가왔는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 * * “드디어 시작하는군.”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중갑을 차려입고 군마에 올라타 있었다. 여왕 주변에는 브르타뉴의 참모들이 나란히 말머리를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적군의 저주스러운 목책. 방책과 방책 사이에 난 길목에서 장창병들이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다. 여왕은 흥분을 삭히며 말했다. “궁기병들에게 어서 전달해. 당장 랜스를 챙겨들라고.” “예, 전하.” 참모가 전령들에게 명령을 전달했고, 전령들은 딱 부러지게 군례한 다음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오늘 싸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랜스만 해도 무수히 많았다. 프랑크 황실의 병기창고를 먼지까지 털어낸 것은 물론이었고, 파리시오룸에 있는 대장간을 요 수십 일 동안 가열차게 돌렸다. “롱그위 성녀. 저번에 나는 정보를 팔아넘긴 자가 황제의 측근이라 말했지.” “네? 아, 예. 기억합니다. 전하.” 아테나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가 대답했다. “그거, 거짓말이었다.” “……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씩 웃었다. “만약에 그 정보팔이범이 정말로 우리 브르타뉴군을 막고 싶었다면 말이다, 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외적'에게 원군을 요청했을 리가 없어. 누군가가 독단적으로 공화국을 끌어들인 거다. 둘 중에 하나겠지.” 그녀는 먼저 한 사람을 지적했다. 공화국의 힘을 빌려서 옹립되고자 하는 인물, 즉 현재 귀족군을 통솔하는 앙리 드 기즈 공작. “기즈 공작은 지난 번 전투에서 유일하게 안전히 철수했다. 반면에 정치적인 라이벌인 몽모렌시 원수는 전사했지. 기즈 공작이 모든 것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꽤나 크다.” “두 번째 가능성은 무엇인지요, 전하?” “롱그위. 발상의 전환이다.” 앙리에타가 시종에게서 랜스를 넘겨받았다. 전나무로 만들어진 브르타뉴군의 랜스는 속이 텅 비게끔 파여 있었다. 그만큼 무게가 가벼웠으나 내구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브르타뉴의 랜스는 부러지면서도 적병을 꿰뚫도록 설계되었다. 본인이 제2급 무사이기도 한 앙리에타는 능숙하게 랜스를 잡았다. “누군가가 공화국을 움직인 것이 아니야. 공화국 자체가 프랑크의 북부 귀족들을 조종한 것이다.” “……공화국이 말입니까?” “그래. 그러면 왜 프랑크의 위험을 굳이 외국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는지, 이게 말이 되거든. 음. 마상돌격은 꽤나 오랜만이군.” 여왕이 탄 군마가 가볍게 푸레질을 했다.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까만 몸통과 새까만 갈기를 지닌 군마. 이 명마에게 여왕은 '까마귀 깃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브르타뉴의 상징, 검은 백합을 드러내기에 더없이 멋지다며 애지중지하는 애마였다. “만일 기즈 공작이 범인이라면 깊숙한 곳까지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상냥하게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정적을 희생시킬 정도로 기민하고 약삭빠른 위인이야. 전장이 웬만큼 유리하지 않으면 아예 출전하지도 않았을걸. 흐음, 한없이 장기전으로 끌고 나갔을 거야. 명분에서 밀리는 만큼 장기전은 우리한테 불리했지. 바타비아도 정치적인 술수를 애용했을 것이야.” 앞뒤로 교대하며 공격을 가하던 기병들이 평야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일자 정렬. 기마돌격의 고전적인 진형이었다. 상대편의 기병들도 방책에서 빠져나오며 착실하게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기즈 공작과 바타비아군을 없애버릴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승리해서는 안 된다.” 앙리에타 여왕은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참모들도 위대한 여왕을 따라 함께 움직였다. “철저하게 녀석들을 깔아뭉개야 한다. 롱그위 성녀. 나와 우리 병사들에게 무운을 빌어주게. 한 번 더 힘을 내줘야 하니 말이야.” “예. 전하의 뜻에 운명이 함께하기를.” 여왕 일행은 돌격의 선두에 서기 위하여 기병들에 합류했다.   00206 백합 전쟁 =========================================================================                        롱그위 성녀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 힘은 오직 내가 증명할지어니. 여인의 목소리가 창공을 열어재꼈다. 전투 내내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국가에 오로지 한 명, 대륙에 열두 명만이 오를 수 있는 직위. 합스부르크의 성녀가 마왕군과 밀통한 죄로 사형당한 지금, 오직 열한 명밖에 없는 무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일찍이 정신은 신이었으나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었나니. 여신이여, 여기서 다시금 필멸자가 그대를 노래함을 축복하소서. 다시금 위대한 부족의 발로 춤을 추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금 울창해지는 것을 용납하소서. 기병들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섰다. 성녀의 노랫소리가 그들의 으깨지고 부러진 갑옷 틈새로, 투구와 몸통 갑옷 사이로, 먼지와 핏물에 지친 말갈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전투의 함성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났던 정령들마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앙리에타에게 남은 기병은 육천. 그들 전원에게 약간이나마 기력을 되찾아주는 일은, 제아무리 성녀일지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롱그위 성녀는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러나 성녀였다. 이마를 찡그리지도 않았다. 평온에 잠긴 것처럼 온화하고 묵묵하게 기도를 올렸다. ─ 실로 죽음은 우리의 나날에서 먼 곳에 있나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유를,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할 자유를 기꺼이 누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필멸자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불멸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아테나 여신이시여. 푸른색 빛무리가 잠시 병사들과 군마들에게 깃들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여섯 번 넘게 적진으로 돌격했던 기병들은 사막에서 한 모금의 냉수를 마신 여행자처럼 순간적으로 기력이 되돌아온다 느꼈다. 군마들은 여섯 시간 전에 그러했든 짐승의 울음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성녀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 오늘 이들이 죽음을 죽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 말을 끝으로 롱그위 성녀가 낙마했다. 혼절한 것이었다. 주변의 시종이 떨어지는 성녀의 몸을 안전하게 받았다. 단지 일 분 정도 기도문을 올린 것인데도 성녀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훌륭하다, 자클린 롱그위. 나의 친우여.” 앙리에타 여왕이 말발굽을 한 발자국 나아갔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수천의 기병이 맨앞에 있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 증기를 뿜는 시선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가볍게 웃었다. “친애하는 나의 제군. 군인은 언제 패배하는가?” 목걸이에 새겨진 성량 마법을 발동시키며, 여왕이 말했다. “전투에서 질 때 군인은 패배하는 것인가? 전쟁에서 질 때 군인은 패배하는 것인가? 사령관을 잃었을 때, 군기를 약탈당했을 때 군인은 패배하는가? 그렇지 않다.” 여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사들이여. 그대들의 싸움은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코를 툭툭 가리켰다. “바로 여기이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싸움터이다. 동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눈을 돌릴 것인지 말 것인지, 바로 거기에 그대들의 싸움터가 놓여 있다. 적군이 휘둘러오는 창칼에 눈을 감은 것인지 말 것인지, 바로 그곳에 그대들의 싸움터가 놓여 있다. 그대들이 참혹한 고통에 맞서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다만 그곳에 그대들의 전쟁터가 놓여 있음이라.” 앙리에타 여왕이 땅을 가리켰다. “여기 한 명의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가족과 정을 나누고, 그렇게 육십 년의 세월을 보내어 죽는다. 그리고.” 왼손을 번쩍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곳에도 한 명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달의 높이에서 뛰어내린다.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이 대지를 향하여 낙하한다. 그녀는 육십 년의 시간 동안 낙하해서――이윽고 떨어져 죽는다. 땅에서 육십 년을 살아서 죽은 인간, 하늘에서 육십 년을 떨어져서 죽은 인간. 두 죽음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여왕의 육천 병사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앙리에타의 어조는 단호하고 낭랑했으며, 단단한 나무뿌리 그리고 나뭇가지와 같은 것이 여차하면 나뭇잎처럼 흩날려버릴 말의 단편들을 단단하게 쥐어잡았다. “어쩌면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는가? 평범하게 육십 년을 지상에서 보낸 삶과 단지 추락하기만 할 뿐인 삶, 두 개에는 어쩌면 똑같지 않겠는가. 제군들. 이것이 우리 인류의 문제이며 영원한 문제요, 질문 중의 질문이다. 무엇이 다른가. 그대들 역시 몰락하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가 썩어가며 부폐하고 있지 않은가.” 여왕이 한 마디의 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그대들은 전쟁터에 서 있다. 그대들은 질문을 강요당한다. 전쟁터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질문을 제일 강렬하고 매몰차게 강요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통탄할지어다! 오늘은 질문을 피하고 싶어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니.” 앙리에타 여왕이 웃었다. “매순간. 매순간마다 질문은 태풍처럼 그대들에게 몰아치리라. 동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대는 눈을 돌릴 것인가? 적이 창을 찔러올 때 눈을 감을 것인가? 그대가 참혹한 부상을 입어 죽어나갈 때,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릴 것인가?” 군마 수천 마리가 앞발을 뒹굴기 시작했다. 옅은 먼지구름이 말발굽을 스쳤다. 기병들은 숨을 몰아쉬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것을 보며 앙리에타 여왕이 소리쳤다. “제군이여. 그대들은 지금까지 살았되 산 것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들은 과연 살아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죽어가고 있었는지 시험받는다. 이것이 그대들의 승리이고 패배이다. 전투이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이 질문 중의 질문에 견주어볼 때는 한낱 부차적인 찌꺼기에 불과하다!” 앙리에타의 흑색 군마가 앞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뛰어오른 눈높이에서 여왕은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천천히 몰락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한 발자국을, 다시 한 발자국을 나아갈 것인가! 전사들이여.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대륙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라! 발걸음을 내딛고 고난에 맞서라. 진정으로 거머쥘 가치가 있는 삶은 그 고난 너머에 존재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기병들이 포효했다. 군마들이 울부짖었다. 육천 개의 랜스가 허공을 찢어발기려는 듯 찔렀으며, 일만이천 개의 앞다리가 대지를 뭉개려는 듯 짓밟았다. “그리하여 오늘 죽고자 하는 인간은 살아갈 것이고, 살고자 하는 인간은 죽어갈 것이니!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군대가 패배했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영원불멸 그러할 것이다. 전사들이여! 팔라스 아테나의 아들딸들이여! 위대한 역설로서 승리할 이들이여!” 앙리에타 여왕이 말머리를 전방으로 돌렸다. 그 방향에는 일만이천 명의 프랑크 기병. 여왕의 군대보다 두 배가 많으며, 전투의 피로를 전혀 받지 않은 군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왕은 소리쳤다. “――돌격하라!” 여왕이 가장 먼저 말발굽을 딛었다. 기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말허리를 두들겼다. 군마들이 야생의 숨결을 내뱉으며 앞으로 걸었다. 그중에는 브르타뉴인도, 프랑크인도, 버니시아인도, 카스티야인도 있었다. 기사가 있었으며 용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들은 오로지 한 사람의 왕만을 섬겼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단 한 사람이 그들을 이끌었다. 그에 맞서서 일만이천의 프랑크 기병도 움직였다. 총사령관인 기즈 공작도 그곳에 있었다. 공작은 명예로운 기사이자 훌륭한 대귀족답게 자신의 기병대와 함께했다. 공작 역시 연설을 펼쳤으며, 프랑크의 기병들도 용기백배하여 말을 몰았다. 양군의 사이가 점차 좁혀졌다. “적은 일만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소리 질렀다. 그녀는 성량 마법을 축소시켜서 주변의 귀족들한테만 소리가 들리도록 조정했다. “두 배의 병력이다! 무서운가, 제군들!” “아닙니다!” “우리는 두 번을 돌파하여 적군을 네 조각으로 찢어발긴다. 이천오백이 되어버린 적군의 조각들을 차례대로 분질러버리는 것이다. 알겠는가. 적군이 두 배인 게 아니다. 우리가 두 배이다!” 앙리에타 여왕이 포효했다. “나는 두 배나 되는 병력으로 적을 섬멸시키지 못하는 제장을 둔 적이 없다!” “그렇습니다, 여왕 전하!” “모가지를 열 개조차 따지 못하는 장군이 생긴다면 오늘이 장삿날인 줄 알도록!” 여왕이 투구 덮개를 닫았다. 대귀족인 참모들도 뒤따라 투구를 닫았다. 무사가 아닌 일부 참모를 제외하고 최측근 귀족은 모두 여왕을 따라나섰다. 앙리에타가 끄는 군마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명마였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뒤를 여왕보다는 못하지만 명마를 탄 귀족 지휘관들이. 다시 그 뒤를 육천의 병력이 따랐다. 이들은 여왕을 선두로 삼아 삼각 쐐기가 되어 평야를 질주했다. 트롯. 적군과 이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기병들은 속보로 말을 몰았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캔터. 백 미터 떨어진 시점에서 기병들은 말고삐를 내리쳤다. 병사들의 함성보다 군마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랜스의 창끝이 앞으로 향했다. “여왕 전하 만세!”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만세!” 갤럽. 사십 미터 가량 접근하자, 군마들은 최고 속도로 땅바닥을 내딛었다. 창대에 매달린 깃발이 요란하게 아우성을 쳤다. 일초의 시간이 말발굽에 짓밟히고――양군이 격돌했다. ─ 콰지직! 콰작! 기병과 기병이 충돌했다. 먼저 8미터짜리 기사용 랜스가 오러를 소용돌이치며 적의 심장을 가슴째로 뚫어버렸다. 3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나머지 랜스들이 서로가 서로를 꿰뚫었다. 쇠창이 피에르라는 병사의 오른쪽 가슴에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창의 위력에 피에르는 군마에서 요란하게 떨어져 흙먼지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떤 창끝은 막시밀리안이라는 기사의 관자놀이 뒤쪽으로다 뚫고 나왔으며, 덩치 큰 막시밀리안은 땅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시체의 화려한 무구들이 한참이나 요란하게 울렸다. 데오레라는 병사는, 랜스는 피했으나 해일처럼 닥쳐오는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낙마했다. 데오레가 먼지 속에 벌렁 나자빠져서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데오레는 전우들을 찾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때 한 마리의 군마가 먼지구름을 휘몰아치며 데오레의 배꼽을 짓밟았다. 말발굽은 사정없이 배를 뭉개트렸으며, 속창자가 터져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데오레는 눈을 뒤집고 절명했다. “크하아아아아!” 앙리에타가 랜스를 집어던지고 곡도를 뽑아들었다. 곡도가 푸르게 빛날 때마다 적병의 가슴이 으깨어졌고 팔뚝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붉은 피가 낭자했다. 창이 갑옷을, 검이 검을 들이받아 깨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전사들이 노호를 내질렀다. 단 한 번의 격돌로 평야는 온통 핏물과 창자로 물들었다. 사방에서 살육의 비명이 엇갈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귀를 먹먹하게 마비시켰다. 여왕은 무아의 경지가 되어 곡도를 휘둘렀다. 애마가 적병의 말을 물어뜯고 밟고 내팽개쳤다. 여왕과 군마는 인마일체가 되어 전방을 막아서는 것들을 분쇄했다. 여왕이 지나가고 남은 곳에는 손목과 팔뚝, 머리통 따위가 핏빛 선을 그리며 잠시간 부유했다. 그리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전하! 전하!” 대귀족 한 명이 소리쳤다. 여왕은 퍼득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눈앞에는 적병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 멀리에 적군의 목책들과 장창병들이 보였다. 돌파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반전하라! 나를 따르라!” 여왕의 군사는 일만이천의 프랑크군을 가로질렀다. 한 자루의 대검처럼 겹겹이 쌓인 인의 장막을 일도양단했다. 이제는 두 조각이 되어버린 적군을 네 조각으로 찢을 차례였다. 그때 여왕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적군의 한 가운데. 하얀 장미가 새겨진 깃발. 앙리에타 여왕이 광소했다. “그곳에 있었는가, 앙리 드 기즈!” 군마가 거대한 탄환이 되어 튀어나갔다. 명령이 필요없었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저곳에 있다는 사실을 앙리에타의 흑색 까마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를 애비로 둔 군마가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뱉어대며 돌진했다.   00207 백합 전쟁 =========================================================================                        * * * 우리는 초조하게 평원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섯 시간에 걸친 싸움에서 여왕의 기병은 꽤나 많이 상했다. 갑옷이 두꺼운 탓인지 사망한 적군은 적었으나, 주로 군마들이 수두룩하게 죽어나갔다. 덕택에 아군은 적군에 비해 기병전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여엉차!” “얼른 끌지 않고 뭐해!” 목책 부근에는 원래 세계의 말보다 1.5배는 덩치가 크고 사나워보이는 말들이 쓰러져 꼴딱꼴딱 숨을 쉬고 있었다. 아군의 장창병들은 조심스럽게 놈들을 찔러 죽였다. 시체가 된 말들은 목책의 틈새로 끌려나와 또 다른 방벽으로 사용되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돌파에 성공했네요.” “……아아.” 어딘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하고 제레미에게 맞장구치며 생각했다. 먼지가 전장을 뒤덮었다. 앙리에타 여왕으로 보이는 인물은 검을 높이 세우며 또 다시 먼지구름으로 들어갔다. 대대적인 기병전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돌파를 허용했다는 것이 그닥 희소식은 아니리라. “우리군이 패배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요.” 내가 한숨을 쉬었다. 패배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저놈들은 괴물인가. 병력에서 우리가 앞섰다. 아니, 전장에서도. 궁기병을 제외하고는 모든 요소에서 우리가 분명히 유리했다. 전략이 고작 전술 따위에 패배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말이냐.” “…….” 제레미가 우물쭈물거렸다. 아마도 내가 화내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었다. 나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었다. 궁기병의 일격을 얻어맞았을 때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아우스테를리츠의 혈전에서 분명히 기병들이 궁기병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투에서 그에 대해 전혀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나의 실착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앙리에타 여왕군은 순전히 실력으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선 분노할 일조차 없었다. 그저 심란할 뿐이었다. “제레미, 자크리를 불러와라.” “예.” 나는 사령관이다. 언제까지고 한숨만 쉬어서야 꼴불견이겠지. 월맹군에 참전했을 때부터 이 세계의 병법서란 병법서는 무작정 탐독했다마는, 승리했을 때보다 패배했을 때 지휘관의 역량은 가장 극명하게 발휘된다고 한다. 이제부터 패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자크리가 다가왔다. 이 옹골찬 난쟁이 용병단장은 아예 핏물로 샤워를 하고 왔다. 궁수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떨어지는 우리 좌익에서 브르타뉴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전적으로 용병단 덕분이다. 나의 연설 같은 건 전쟁터에선 부차적일 따름이다. 용병단이 농민병의 방진과 사격을 통제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자크리. 솔직하고 가감없이 얘기해주게. 아군의 기병이 패할 것 같은가?” “……승패란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소인이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자크리가 덤덤하게 얘기했다. 백 년을 넘게 전쟁터에서 구른 난쟁이 용병에게 승패란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일지 몰랐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기병지휘관이겠지요. 대륙은 적어도 이십 년 동안 여왕의 무훈에 고개를 조아릴 것입니다. 아마도 별명은 피투성이(Blutbefleckt)의 앙리에타 정도가 되지 않을련지.” “피투성이 브르타뉴인가.” 나 역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별명이 아니고 뭔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누구보다 선두에 서는 여왕……그야말로 피투성이라는 멸칭에 어울린다. 그녀는 프랑크인과 브르타뉴인의 피를 빨아마시고 결국에는 대륙의 패자가 되고자 하겠지. 앙리에타 여왕을 조기에 퇴장시키고자 했다. 난세는 위기이나 동시에 영웅한테는 기회였다. 앙리에타 여왕이라면 <던전 어택>에서 그러했듯이 프랑크의 혼란을 기회로 일약 패자로 부상하리라. 그러므로 초장부터 짓밟야만 했다. 지금이라면, 명분과 전략 모두 나에게 유리한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리였는가……. 어쩌면 앙리에타 여왕 또한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것일까. 앙리 드 기즈 공작으로 대표되는 '유능한 귀족'을 조기에 진압해야겠다고 판단했을까. 그렇기에 일부러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판단하게 만든 다음에 이곳으로 집결하게끔 만들었는가……. “부럽군.” 앙리에타에겐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 책략이나 계략을 어지럽게 짤 필요없이 그저 이쪽을 뭉개뜨리기만 하면 될 만큼 강력한 군대가. 그것은 게임으로 따지자면 레벨과 같았다. 일종의 절대적인 수치였다.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약자이다. 민중을 선동하고 합종연횡을 획책해서 부족한 힘을 어떻게든 떼워야만 한다. 하지만, 강군(强軍) 앞에서는 아무래도 모잘랐던 모양이다. 서열 제71위 마왕의 한계이겠지. 내가 말했다. “자크리, 아군의 기병이 패퇴한다면 돌아올 곳은 뻔하다.” “예. 이쪽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좌측은 강물이, 우측은 숲이 가로막았다. 전방에는 브르타뉴군이 버티고 있다. 일패도지한 아군의 기병 전력이 도망칠 곳은 오로지 후방뿐……즉, 목책이다. 기병들이 살려달라면서 아군의 목책으로 뛰어들 것이다. 차라리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라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막아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아군이 들이닥친다. 죽일 수도 없다. 목책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고, 장창병 방진은 혼란에 휩싸인다. 아군이 도리어 아군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좋다. 앙리에타 여왕은 바로 그 순간을 노리고 돌격해올 게 분명하다. 내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보니 어이가 없군. 마치 여왕은 우리가 기병을 꺼내들기까지 기다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성녀라는 패를 여태까지 아껴둔 이유가 있었던 게야. 생드니 평야는 아군이 아군에 압살당하는 지옥도가 되겠지…….” “어쩌시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후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후퇴하면 자칫 패전의 책임을 우리가 뒤집어쓴다. 자크리. 우리 병력을 숲에 바싹 붙여라. 나무들을 또 다른 방벽으로 삼아 끝까지 응전한다. 앙리에타 여왕은 항복을 권고해올 거야.” “예, 사령관 각하.” 우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농민병을 숲에 배치시켰다. 숲은 기병들이 공격해오기에는 최악의 입지조건이며,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최고의 방어전선이다. 목책들도 떼어다가 숲 앞으로 옮겼다. 문제는 우리가 배치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아군의 기병이 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못해도 십 분 정도는 더 버텨주지 않을까 싶었다만, 기병들이 혼비백산해서 소리치는 말에 사정을 알아차렸다. “기, 기즈 전하께서 패사하셨다!” “후퇴하라! 후퇴해서 대열을 가다듬어라!” 총사령관인 앙리 드 기즈 공작이 전사한 것이었다. 보아하니 영광스럽게도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와 일검을 나누다가, 즉 챔피언끼리 일기토를 겨루다가 모가지가 날아간 듯했다. 아름다운 여왕이 일기토에서 적장을 물리쳤다라. 전 대륙의 호사가들이 일제히 발기하겠군. 나도 패장에 속하지만 않았다면 기꺼이 한발 뽑아줄 용의가 있었다. 빌어먹을. 아니나 다를까, 기병들은 후퇴하면서 아군의 진영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적군에는 용감하게 맞서싸우던 장창병의 진형이 아군에는 어쩔 도리 없이 무너졌다. 그 뒤로 곧바로 브르타뉴의 기병들이 바짝 추격해오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 것이지, 쯧.” 프랑크 귀족들의의 기병대는 달아나면서 아군의 보병 전열을 짓이겼다. 다만 그것은 중앙과 우익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농민병들에게 지시해서, 아군이든 적군이든 목책에 접근하는 기병은 모조리 쫓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기병들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우리는 아군이다! 적이 아니야!” 농민병들이 장창을 쑤셔대며 우우우,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옘병, 패배한 아군은 더 이상 아군이 아니다!” “겁쟁이는 꺼져라! 좆탱이는 달고 있냐, 새끼들아!” 애당초 그들은 나의 연설에 감복하여 종군했다. 기병과 같은 고급전력은 대부분 귀족이나 귀족의 하수꾼이 맡았고, 농민병은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기병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기랄! 어처구니가 없군!” “어서 다른 곳으로 가세!” 그들은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내가 사령관을 맡은 좌익은 피해가 최소화되었다. 우리는 아군을 내쫓으면서 차근차근 숲에다가 방벽을 마련했다. 그러나, 황태후파 귀족이나 바타비아 공화국이 맡은 곳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쪽에는 숲과 같은 자연적인 방해물이 없었다. 거기에다 기병대는 그들과 똑같은 소속의 군대였다. 세상에 어떤 지휘관이 자신의 군대를 내쫓을 수 있겠는가? 보병 진형이 망가졌다. 아군의 기병이 패퇴하면서 자기네를 짓밟았고, 곧이어서 브르타뉴군이 밀어닥쳐서 다시금 기마돌격을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병대에게 버티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였다. 장창병들은 목책 방어선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그중에는 패배를 직감하고 기병과 함께 도망치는 보병도 적지 않았다. 쇠약해진 댐이 무너지듯이 이곳저곳에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브르타뉴군이 랜스 차지를 부딪혀오자 모든 것이 끝났다. 댐이 무너졌다. 장창병과 궁병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 “…….” 농민병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연했다. 눈앞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방진이 시시각각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대열을 이루지 못한 장창병은 기병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몇몇 보병이 필사적으로 대오를 지키려 발버둥쳤으나, 기사들이 그동안 고생시켰던 대가를 돌려주겠다는 듯 오러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소수의 보병으로 기사들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죽을 수밖에. 이럴 때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총사령관 이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기즈 공작은 이미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패배가 확실해지자 저항을 멈추고 도주했다. “어리석기는…….” 내가 중얼거렸다. 도망친다는 것은 적군의 기병에게 등을 내보인다는 얘기였다. 두 발로 도망치는 보병, 그리고 군마를 타고 추격하는 기병. 여기서 어떤 결과가 이어질지는 자명했다. 차라리 시체가 된 것처럼 땅바닥에 누웠으면 조금이라도 생존 가능성이 올랐을 텐데. 그나마 맹렬하게 저항의지를 불태우는 일부 용병대가 있었다. 그들에게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하나의 진실이란, 의지가 오러를 막아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용병대는 예외없이 참혹하게 도륙당했다. 브르타뉴군은 신나게 적병을 약탈했다. 수레를 강탈하고 시체의 무구를 발가벗겼다. 그게 전부 돈벌이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자유로이 약탈해도 괜찮다고 명령한 것 같았다. 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브르타뉴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진지를 만들어서 사수하고 있는 군대. 우리 의용대였다. 꽤나 직책이 높아보이는 기사가 이곳으로 다가왔다. “흐음.” 기사는 목책을 쓰윽 살펴보더니, 다음으로는 숲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손쉽게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그가 소리쳤다. “지휘관을 넘겨라! 지휘관을 넘긴다면 일반 병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 나는 순간 철렁했다. 보나마나 저건 거짓말이었다. 지휘관을 넘겨받은 다음에 우리를 섬멸할 생각이었다. 기초적인 기만책이었으나, 농민병들이 거기에 속아버리면 끝장이었다.   00208 백합 전쟁 =========================================================================                        옆에서 제레미가 뭐라고 반박하려던 그때였다. “개소리 집어치워! 브르타뉴의 사냥개한테 굴복할까보냐!” 제레미보다 앞서서 어느 농민병,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중년이 소리 질렀다. 한 사람이 우렁차게 대꾸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농민병들은 그렇다! 하고 맞장구치면서 기사에게 욕을 바가지로 쏟아부었다.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들어 던져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기사가 돌멩이 예닐곱 개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쳐서 떨어트렸다. “멍청하군. 너희는 이미 패배했다.” 기사가 말했다. “여기 모인 그대들은 패잔병에 불과하다. 모처럼 행운처럼 찾아온 자비심을 제 발로 걷어찰 생각인가? 잘 생각해보아라. 지휘관만 넘겨라. 그대 전원에게 안전한 귀향을 약속…….” “글쎄, 그쪽의 여왕 전하를 넘겨주면 고려해볼까.” 농민병이 비아냥거렸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궁정에서 귀족들이랑 하루가 멀다 하고 질펀한 나날을 보낸다지.” “아예 하렘을 만들어서 이백 명의 미동(美童)과 놀아재낀다 하지 않나! 그런데 말이지, 자네들 알고 있나? 브르타뉴의 여왕은 꼭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의 미동과 씹짓을 한다는 것일세.” “호오, 그건 왜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이 해버려서 구멍이 도저히 거시기 하나로는 채워넣을 수가 없거든. 하나로 안 된다면 두 개로 할 수밖에!” 농민병들이 깔깔 웃었다. 휴우. 나는 한숨을 돌렸다. 반면에 기사의 분위기가 흉악해졌다. 반응으로 보아하건대 영지에서 구를 대로 굴러가며 자라난 기사가 아니고, 왕립 아카데미아에서 나라의 녹을 먹어가며 키워진 기사인 것 같았다. 요컨대 샌님이었다. 저급한 음담패설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놈들 감히…….” “잠깐만, 그래본들 미동은 두 명이잖아. 나머지 두 명은 어디로 갔어?” “거시기를 쑤셔서 집어넣을 곳이 딱히 한 군데는 아니잖나. 뭐, 흐흐흐. 브르타뉴의 자랑스러운 여왕 전하께서 씹짓을 할 때는 미동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꼭 거미가 자위질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농민병들이 빵 터졌다. “캬아, 거기에는 당할 수가 없겠는걸! 암거미 전하 만만세일세.” “걱정하지 마쇼, 기사 양반. 우리가 이래봬도 프랑크에서 씹짓 하면 알아줘. 네놈들의 물렁 자지로는 만족시킬 수 없더라도 우리라면 한번에 여왕 전하를 보내드릴 자신이 있거든. 사양하지 말고 얼른 데려오셔!” “…….” 기사가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말머리를 휙 돌려서 떠났다. 농민병들은 더 크게 웃어댔다. “물렁 자지 발기부전 새끼!” “소세지 가죽이나 벗기고 다시 와라, 애송아!”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서는 제레미도 벙쪄 있었다.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본인은 꽤나 과분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 정말로.” 한심하게 패퇴해버린 아군의 기병보다 급조해서 편성해놓은 의용군이 더 믿음직스럽다니, 농담이면 웃어버리고 말겠으나 현실이라면 헛웃음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다. 이들은 나에게 선동당해서 종군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작이 거짓말이어도 그들의 의지만큼은 진짜이다. 나 같은 어릿광대에 비해서 훨씬 더 제대로 된 인간들이다. 이런 민중이 살아가는 땅에서 황제는 내전을 일으키려 든 것인가? 제정신이라 보기 어렵다. 나는 결심했다. “부상자들을 따로 모아라.” “예?”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써서 후방의 도시로 옮기도록 하지. 적들이 항복을 받아주더라도 부상병에 대한 처우가 좋을 리 만무하다. 시름시름 앓다가 골로 갈 것 아닌가.” 후방의 도시에 이송시키면 조악하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오늘 전투에서 귀족군이 사실상 전멸해버린 이상, 앞으로는 농민병이 더욱 더 중요해진다. 도시 관료들은 브르타뉴에게 항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민병을 치유해줄 거다. 제레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사령관 각하. 순간이동 두루마리를 몇 개나 갖고 계시기에.” “적어도 이 몸 하나는 지킬 만큼 충분히 갖고 있다.” 내가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잘 알고 있겠지? 뭐, 확실히 수십 골드가 훌쩍 뛰어넘는 아티팩트이지만 벼락부자의 선심이라는 녀석이다. 멋진 모습을 보여준 병사들에게 마땅히 보상이 주어져야지.” “하아. 예, 뭐……그리 말씀하신다면.” 정말로 돈을 물 쓰시듯 쓰시네요, 하고 제레미가 투덜거렸다. 농민병을 먹여살리고 재운 자금이 전부 이쪽의 손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제레미는 알고 있었다. 부상병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자기는 아직 펄펄하다며 가만히 냅두라고 소리치는 아저씨도 있었지만, 뼈가 아작나버린 사람이 요란을 떨어봤자……. 제레미의 알밤 한방에 기절하고 얌전히 끌려나갔다. 그 광경을 보며 또 농민병들이 와락 웃었다. 사기는 충분. 여유도 넘쳤다. 전투에 들어서는 데 이보다 적합한 부대는 없겠지. 우리는 목책의 틈새를 산더미만한 군마로 채웠다. 마치 자그마한 산성이 지어진 것 같았다. 브르타뉴의 군세가 접근해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말이 따로 필요없었다. 적군은 오늘 새벽부터 지겨우리 만치 반복한 전술을 재현했다. 정말 질리지도 않는 놈들이었다. 궁기병이 이삼십 미터 앞까지 다가와서 일제사격을 펼친 다음, 기병이 창을 꼬나쥐고 돌격했다. 그렇지만 효과는 상당히 떨어졌다. 목책에 더불어서 숲의 나무들을 자연적인 방해물이 되어주었다. 필연적으로 화살공격도 기마공격도 지지부진했다. 더욱이 적들은 지쳤다. 성녀의 예찬가, 순간적인 버프도 이제 효력을 잃었다. 여섯일곱 시간 내내 돌격을 반복한 기병과 군마는 명백히 움직임이 둔해졌다. 평야에서 마주친다면 그래도 위력적이겠으나 이곳은 숲지대. 농민병들은 훌륭하게 적을 세 번이나 격퇴했다. “후퇴하라!” 네 번째 돌격에서도 적군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났다. 사냥꾼 출신 궁병들의 저격에 값비싼 군마들만 죽어나갔다. 그렇게 시체가 되어버린 군마는 새로운 방해물이 되어 적군의 돌격을 가로막았다. “흐하하! 사제님, 이놈들 별 거 아닙니다요!” “갑옷만 삐까번쩍하지 속알맹이는 비실비실합니다!” “아아. 훌륭하다.” 내가 쉰 목소리로 웃어주었다. 의용군이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러나 유리한 전황이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 적군에게도 보병대가 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체력과 기력이 만땅인 보병대가. 그들이 다가와서 육박전을 벌이면 우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결국엔 화광반조……마지막에 불타오르는 불빛에 불과하다. 최선의 결과는 브르타뉴군이 다시 한 번 항복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제법 관대한 조건으로 말이다. 어차피 브르타뉴군은 싸움에서 이겼다. 쓸데없이 보병대를 낭비하고 싶어할 리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사항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마돌격이 이루어지고 난 뒤, 적측에서 사자를 보내왔다. 붉은 망토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이었다. 젊은 귀족이 목책 부근에서 소리쳤다. “나는 브르타뉴의 준남작 가르종 드 데제이다. 귀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누구인가!” “우리를 통솔하는 지휘관은 아르테미스 여신이시요!” 한 농민병이 당당하게 외쳤다. “그리고 지휘관을 대리하시는 분은 쟝 볼레요외다!” “쟝 볼레……아아, <미치광이 사제 쟝 볼레>인가.” 귀족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음으로 쟝 볼레가 브르타뉴측에서 어떤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았다. 미치광이 사제라니! 최악의 네이밍 센스였다. 하긴 브르타뉴의 암퇘지들에게 센스를 기대하기란 어불성설인가……. “쟝 볼레 사제여. 귀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그대들과 우리는 이미 일곱 시간을 오손도손 대화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내가 장창병들 사이로 나아가며 대답했다. 귀족이 모자를 벗어서 깍뜻하게 인사했다. 나 역시 사제의 예법에 따라 마주 인사했다. 양군에 자연스럽게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졌다. 귀족은 깃털 달린 모자를 도로 썼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쟝 볼레 사제,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전사에게 있어 전쟁이란 영원한 투쟁이라 말씀하셨던 것 같소만? 내가 벌써 가는 귀가 먹어서 잘못 엿들은 모양이로군.”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거야 원, 전쟁터에 있으면 사람이 금방 늙어버리오. 안 그렇소? 가르종 드 데제 준남작.” “오, 셀레네의 고귀한 사제여. 귀하께서 연설가 중에서 명연설가임을 저에게 입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귀족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귀하의 명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여왕 전하께서는 친정하기 전에 철학적인 연설을 자주 즐기시지요. 귀족인 저에게 그 연설은 고귀하고 또한 적합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귀족이기 이전에 한 명의 군인으로 귀하 앞에 있습니다.” “좋소. 허면 군인으로서의 가르종이 전달할 말은 무엇이오?” 귀족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명예로운 항복인가! 아니면 추잡스러운 죽음인가!” “…….” 적나라한 요구였다. 투항할 것이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것이냐. 내가 침묵하자 목책 건너편의 젊은 귀족이 진중하게 말했다. “쟝 볼레 사제. 원숭이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격이나, 제가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신념과 집착의 차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신념이란 이성적인 것이고, 집착은 감성적인 것이오.” “모범적인 답안이군요.” 귀족이 미소를 지었다. “군인이 된 자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투에서 승리의 가능성을 믿으며 올곧게 나아가는 것이 신념이며, 단지 패배를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나는 귀족의 논조를 이해했다. “패배함으로써 얻는 것도 있소.” 하지만 지금은 한번 튕겨줄 필요가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얌전히 물러나서야 항복의 조건이 엄격해질 뿐이었다. 나는 짐짓 엄격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것이 한 나라의 자존심이라면, 결코 추잡스러운 죽음은 아니지. 본인으로서는 항복이 더 명예롭다 느껴질 이유가 없소.” “물론 역사서에서는 쟝 볼레와 그의 농민병을 칭송하겠지요. 하지만 대중의 칭송이란 대저 흙탕물로 몸을 씻는 격이지 않습니까? 나라의 자존심을 앞세우며 무고한 백성을 전쟁터에서 죽게 내버려둔 죄, 후대의 현자들은 절대로 잊지 않겠지요.” “…….” 나는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먹혔다고 생각한 것일까, 귀족이 추가타를 날렸다. “백성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쟝 볼레 사제. 내전의 책임을 엉뚱하게 백성들이 짊어질 이유는. 그것도 피와 살로 짊어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뒤편에서 농민병들이 아우성쳤다. “아니, 저놈들이 먼저 침략했음서 뭔 개소리야! 황제 폐하를 유폐시킨 게 네놈들 아니냐!” “사제님! 들을 것도 없구만유. 저 기생오라비 낯짝을 깔아뭉갭시다요!” “브르타뉴 애새끼들이 뒈지기 전에는 눈꺼풀 하나 감을 수 없다! 우우우!” 나는 서서히 오른손을 들었다. 병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가운데 내가 말했다. “……투항한 백성을 해치지 않겠다는 보장은?” “모든 여신께 맹세코. ……라고 말씀하셔도 불안감이 남겠지요.” 귀족이 멋쩍게 웃었다. “여왕 전하께서는 다른 곳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기즈 공작의 잔당과 공화국 군대,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귀하의 의용군은 잇몸에 낀 가시에 불과합니다.” “불편하지만 단지 불편할 뿐이라.” “바로 그렇습니다.” 귀족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맹세했다. “모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어차피 귀하의 군대에는 몸값을 받을 만한 병사도 없습니다. 자유로워진 손, 자유로워진 발로 동쪽으로 향하십시오. 가문과 주군의 명예에 맹세하건대, 제 소대가 여러분의 신원 보증인이 되어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호위하겠습니다.” “…….”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한낮의 태양이 눈꺼풀 너머에서 어둡게 비쳐왔다. 생드니 평야의 태양을 얼굴로, 온몸으로 곱씹었다. 햇살이 따갑게 살갗에 스며들었다. 이것이 나의 첫 패전(敗戰)임을 각인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투항하겠다.”   00209 D급 모험대 =========================================================================                        인근 도시로 무사히 옮겨지고, 의용군은 일단 해산했다. 파리시오룸 일대는 브르타뉴군이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하던 대다수의 황실친위대 병력도 전투를 기점으로 전부 복속. 황태후파는 대대적으로 몰락했다. 젊은 여왕이 만들어낸 업적에 프랑크는 경탄과 공포를 보냈다. 황제파……뭐, 브르타뉴까지 합쳐서 왕당파라고 불러둘까. 왕당파는 확고하게 세력을 굳혔다고 보아도 좋겠지. 파리시오룸에서 일어난 대학살은 주변 도시로 마치 돌림병이 전염되듯이 퍼져나갔다. 황제가 저지른 실책은 어느 사이엔가 '공화주의자 간신배들에 대한 폐하의 철퇴'로 포장되었다. 북부 일대를 제외하고 프랑크 전역에서 공화주의자들이 학살되었다. 시장(市長)을 비롯한 지방도시 관료들이 학살을 주도했다. 이른바 '저는 폐하의 편이니 살려주십시오!' 하는 제스처였다. 세상사란 요 지경 요 꼴이다. 지방 장관들은 여태까지 황제의 편을 들까 황태후의 편을 들까 조용히 관망했다만, 생드니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2만으로 6만을 압살해버린 여왕의 위엄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수수방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기 위해서 다들 필사적으로 학살에 뛰어들고 있었다. 일부 양심적인 시장이 학살권고에 불응했을 뿐이었다. 대세는 기울었다. 당분간 공화주의자들은 집안에서 자위를 할 때도 조심조심 손을 흔들어야 할 것이다……아직 죽지 않았다면 말이지. 패배란 이런 것이라고,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에서 퇴직 기사들이 대거 프랑크로 몰려왔다 하는군요.” “퇴직 기사들이 말입니까?” “예.” 파이몬이 녹차를 홀짝였다. 패전 직후에 파이몬한테 불렸다. 패배의 책임이라도 묻는 것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이몬이 보기에도 생드니 전투는 일개 사령관이 어찌할 수 없었다는 얘기이다. 바타비아 공화국 총독관저. 그 심처에 비밀스럽게 지어진 정원에서, 파이몬과 나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 정원에는 푸르고 붉은 꽃이 드문드문 개화했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에도 귀족의 잔당은 꽤나 남아 있으니까요. 그들 중에는 기사단 출신도 제법 많사와요.” “과연. 국내에 두어봤자 잠재적인 반란분자이자 반동분자……엘리자베트 통령은 그들을 앙리에타 여왕에게 보냄으로써 일거양득을 취한다. 그런 것입니까.” 파이몬이 빙그레 웃었다. 양갓집 규수 같았다. “안목이 녹슬지 않았군요, 단탈리안.” “형편없이 패배해버린 장수에 불과합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자베트 종신통령과 앙리에타 여왕 사이에 협조체제가 갖추어져 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귀족 출신의 기사단들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처리해서 좋고, 앙리에타 여왕은 막대한 전력을 얻어서 좋다. 원래 <던전 어택>에서는 두 사람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데 말이지. 어찌된 영문이지 이 세계에서는 둘이 절묘하게 손을 잡았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원. “승패란 병가지상사라지요. 단탈리안은 충분히 제 몫을 해주었어요.” “글쎄, 과연 그렇겠습니까…….” “적어도 프랑크 북부는 공화국의 영향권에 들어 왔습니다. 프랑크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공화파의 손에 들어온 거예요. 이걸 업적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하겠어요? 자신을 가지세요.” 파이몬이 조용히 찻잔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내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뭐라고 할까, 입장이 바뀐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파이몬의 성격이겠지. 그녀는 실패하는 데 누구보다 익숙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건국하려고 자그마치 수백 년을 헌신했다. 느긋하게. 누구보다 여유롭게. 그것이 파이몬의 신념이지 않았을까. 그녀 입장에서는 프랑크 북부 일대를 점거했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소득일지 몰랐다. “프랑크뿐만이 아니라 <해방동맹>은 대륙 전역에서 봉기했사와요. 현재 버니시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카스티야 왕국, 모스크바 왕국에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답니다. 폴리투니아와 칼마르에서도 곧 발생할 예정이에요.” “상당히 본격적이군요.” 내가 찻물로 입안을 적셨다. 뜨거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전신에 긴장이 녹아내렸다. “……승산은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지방도시 몇 개쯤이야 독립시킬 수 있겠지요.” 파이몬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얼핏 겸손해보이나 도시의 독립, 즉 자유도시를 양산하겠다는 발언이다. 그 도시들은 대부분 알짜배기 땅으로서 부유하기 그지없겠지. 나라의 세금이 줄어들게 된다. 군주들에게는 치명타이다. “요 몇 달 수고했어요, 단탈리안. 당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겠지요. 또 다시 일이 생기면 부르겠사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음. 오늘 예정이 없다면 소녀와 함께 보내도 괜찮은데요?”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는 암사자처럼 번들거렸다. “영광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파이몬 님.”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모두 따먹은 남자’라는 호칭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다. 파이몬 저거, 나랑 잤다면서 십중팔구 여자 마왕들한테 소문을 퍼트릴 거란 말이지. 순전히 바르바토스를 놀리기 위해서.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대낫을 들고 나한테 달려오겠지. 녀석은 방긋 웃으면서 ‘다시는 함부로 좆탱이를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돼지 새끼’ 하고 뿌리부터 댕겅 잘라버릴 거다. 농담이 아니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짓거리를 진짜로 해버린다. 파이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래 봬도 서큐버스의 여왕인데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소녀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파이몬 님은 극상의 미녀입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알면 저를 죽이겠죠. 뭐, 바르바토스한테 끝까지 비밀로 지키겠다 약속해주시면 얘기가 달라집니다만…….”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으이구, 그럴 줄 알았다. 작별인사를 고하고 정원에서 빠져나갔다. 두어 달 만에 마왕성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패전으로 인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다.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총독관저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그만 물건을 놓고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이 불안해졌을 때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는 나무공이 없어졌다. “아차, 파이몬 님. 제가 물건을…….” 다시 돌아가서 양해를 구하려는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봄꽃이 피어오르는 정원 한 가운데. 밝은 햇빛을 받으며 파이몬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어깨를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얼굴과 손수건의 틈새에서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종 한 명 없는 정원에 마왕이 우는 소리가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 무엇이 슬퍼서 우는 것일까. 짐작이 가는 구석은 썩어빠질 정도로 흔했다. 자유로운 공화국이 펼쳐지는 세계가 또 한 발자국 멀어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 민중의 목숨이 의미도 없이 희생되고 말았다는 데서 오는 슬픔. 내전을 단번에 끝내고 못하고, 결국 나라 전체를 혼란으로 빠트렸다는 데서 오는 슬픔. 그녀에게 패배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패배에 익숙해지는 사람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다만 익숙한 척하는 것에 능숙해졌을 뿐이다.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나는. 일개 고블린 상인, 그것도 자신을 배신한 자가 자살했을 때도 파이몬은 울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사상에 동조해준 백성이 수만 명 학살당한 것이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슬픔에 잠겼을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나를 원망하면 편할 텐데.’ 하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파이몬은 긍지 높은 마왕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총독관저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금이야 해방동맹에 협력하는 나이지만 언제든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배신할 수 있었다. 저런 광경을 보면 나중에 마음이 약해질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보지 못한 것으로 해두겠다. 우리처럼 이기적인 마왕에게 눈물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파이몬. * * * 나는 자크리에게 농민병을 통솔하는 전권을 맡기고 던전에 돌아갔다. 참고로 데이지나 루크는 물론이고, 제레미를 비롯해서 암살단원도 전부 따라왔다. 인원이 꽤나 되는 바람에 중급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어야 했다. 우선 데이지와 루크는 마을에 남겨두고――오랜만에 부모님과 만나라고 배려한 측면도 있었다――나는 헐레벌떡 마왕성으로 달렸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다, 마이 러블리 스위트 홈이여!” 마왕성이라 쓰고 동굴이라 부르는 입구에 다가가서 내가 소리쳤다. 그런데 동굴 외관이 확 바뀌었다. 무슨 신전 입구처럼 큼직한 기둥들이 멋지게 들어섰다. 고블린 일꾼들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세심하게 조각을 새겨넣고 있었다. “오오! 벌써 1층은 다 지어가는 거냐.” “어이쿠. 이거 단탈리안 전하 아니옵니까.” 일꾼들의 책임자로 보이는 고블린이 고개를 조아리며 달려왔다.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신지요? 별래무양하신지요? 옥체 만안하시온지요?” “허허. 그대의 인사만 들어도 벌써 여독(旅毒)이 싸악 풀리는 것 같군.” 내가 고블린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고블린은 자신의 아부가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더 열성적으로 손을 싹싹 비볐다. “소인이 맡은 입구 구역은 벌써 마무리에 들어갔사옵니다. 갖은 노력을 가했사오나, 저희들 실력이 부족한 탓에 감히 단탈리안 전하의 위명을 전부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무얼, 충분해보이는구만. 마왕의 거처가 또 너무 화려하면 인간스러워서 욕 먹어. 적당히 진중한 감이 있어야지. 아니 그러한가?” “실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헤헤.” 주변에서 일하던 고블린들도 입을 모아 ‘과연 단탈리안 전하이옵니다!’ 하고 소리쳤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아아――. 이 기분이다. 사람들이 모조리 나에게 굴복하여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무진장 발버둥치는 이 분위기. 프랑크에 있을 때는 이런 공기를 좀처럼 맛보지 못했다. 역시 마왕이란 마인들 가운데에 있을 때 비로소 반짝거리는 법이었다. “하하하. 기분일세! 오늘 거하게 회식하게나!” 나는 주머니를 꺼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뿌렸다. 고블린들이 경악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주변으로 달려들었다. “금화다! 금화야!” “케르르륵, 월급이 땅바닥에!” 고블린들이 개처럼 땅바닥을 기면서 허겁지겁 금화를 집어넣었다. 탐욕스럽기로는 마계 제일을 자부하는 종족이었다. 나에게 아부하던 책임자도 언제 체면을 차렸냐는 듯 무리에 끼어들어 케륵케륵 소리를 질러댔다. “흐하하! 아직 본인의 주머니는 빵빵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케륵! 단탈리안 전하 만세!” “대륙에서 제일 멋진 마왕 전하 만만세!” 나는 마음껏 황금비를 뿌렸고 그때마다 고블린들이 만세를 연호했다. 이래서 인간이든 마인이든 일단 돈이 있고 봐야 했다. 전투에서 패배하여 기분이 꿀꿀해졌어도 이처럼 쉽게 고조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동굴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길목마다 황금비를 내려주었다. 한창 마왕성 건축에 종사하던 난쟁이와 고블린은 때 아닌 행운에 만만세를 불렀다. 마왕이 귀환하는 길에 이 정도 축하는 필요했다. 삼십 분 정도 느긋하게 걸어가니 멀리서 라피스가 보였다. 라피스는 언제나처럼 검은색 정복을 차려입고 일꾼들을 선두지휘하고 있었다. 건축자 간부들로 보이는 난쟁이랑 고블린이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소리쳤다. “라피스으으으, 나다! 단탈리안이 돌아왔다!” “…….” 라피스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꿈에서도 그리웠던 푸른색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기대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라피스는 무표정이었다. “예. 그곳에는 예비공간을 확비해두십시오. 창고가 필요합니다. 아뇨, 그곳은 넓게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푸른 닭벼슬 사무소 여러분께서 소재 확보에 수고를…….” 그녀가 도로 고개를 돌리고 건축업자들에게 뭐라뭐라 복잡하게 지시했다. 일꾼들도 딱히 나에게 집중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멋쩍어져서 슬그머니 그녀한테 접근했다. “저기, 라피스? 단탈리안이에요? 두 달 동안이나 보지 못한 마왕이에요? 딱히 화려한 환영식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따뜻한 한 마디라도…….”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지금 일하는 중입니다. 안 보이십니까? 방해되니까 나중에 얘기해주시길.” “…….” 라피스는 언제 어디서나 라피스였다.   00210 D급 모험대 =========================================================================                        “그, 그래. 일하는 중인가. 알겠다. 일은 중요하지.” 내가 참! 하고 뻘줌하게 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격려금을 베풀겠다. 자아, 성실하게 노동한 일꾼들이여. 손에 집히는 대로 금화를 수확하거라!” 나는 호기롭게 웃으면서 한바탕 금화를 날렸다. 돈지랄만은 아니었다. 두 달이나 부재했으니 일꾼들도 나를 대하기가 적잖게 어색할 터. 일종의 작은 축제를 열어 분위기를 전환하고, 나에게 부담없이 다가오도록 만드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찰랑, 찰랑, 유쾌한 소리를 내며 금화가 동굴바닥에 쏟아졌다. 돈 소리가 들리자 고블린들과 난쟁이들이 목뼈가 꺾어질 기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한 발자국 들어올렸다가――. “……어라?” 제자리걸음을 했다. 일꾼들은 충혈된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무척 조심스럽게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무수한 시선의 끄트머리에는 다름 아니라 라피스 라줄리. 분홍빛 머리카락의 서큐버스가 서 있었다. “일층은 중앙을 높게 뚫어두어도 좋습니다. 강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라피스는 금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계속해서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먼 훗날을 고려할 때, 일층에는 모험자들을 상대로 해서 각종 상점이 들어설 것입니다. 중앙에 광장이 형성될 수도 있어요. 그것까지 생각해두어야만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총지배인 님.” 일꾼들이 굽실굽실거리며 라피스한테 허리를 숙였다. 곁눈질로 동굴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결코 한 발자국이라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들……전부 라피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건축업계 인사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들 대다수가 사무소장이거나 소장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낱 반인반마(半人半魔) 하급 서큐버스한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얼이 빠졌다. 도대체 지난 두 달 동안 무슨 짓을 했기에 무슨 신병들마냥 군기가 이리도 빡세다는 말인가? “그리고,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손에 들린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호명했다. 매우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흠칫했다. “어? 어.”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에 감사드립니다만, 지금은 아직 작업시간입니다. 퇴근은 앞으로 세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때 일괄적으로 상여금을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일일이 다시 주웠다. 마치 한창 막바지 작업이 이루어지느라 바쁜 현장에서 쓸데없이 등장하여 초만 치는 회장님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였다. “저기, 라우라는 어디 있냐?” “글쎄요. 마왕방에서 고귀한 철학책이라도 읽고 있겠지요.” 순간적으로 라피스가 썩은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가 되었다. 마치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모조리 맛본 오십대 중년의 회사원이 사회 초년생 애송이의 작태를 보는 것처럼. 겁나게 무서웠다. “이, 일단 마왕방에 가볼게. 수고해.” 나는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뜨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임을 직감했다. 라피스에게 오른손을 흔들면서 뒷걸음질 쳤다. 라피스가 도로 무표정이 된 얼굴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예. 수고하겠습니다. 이미 수고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라피스의 지시와 명령이 재시작했다. 동굴에는 내가 등장하기 전보다 온도가 한층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무언가 죄라도 지은 것 같아 나는 풀이 죽은 채 걸어나갔다. 그런데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놀라움과 경탄이 샘솟았다. 나의 던전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규칙하게 이리저리 굽어졌던 동굴이 싹 정리되어, 질서정연하고 널찍한 통로가 놓였다. “와아.” 통로 양측은 거대한 벽이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저 벽 너머에 몬스터 부락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오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몹시 신기하여, 놀이공원에 초대된 어린아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돌아다녔다. 깡! 깡! 까앙! 통로 어디에서나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다. 곡괭이가 쉼없이 움직이며 동굴을 깎아냈다. 미장이들이 바지런하게 손을 놀렸고, 마법사로 보이는 고블린이 연신 고개를 흔들면서 뭐라고 화내며 중얼거렸다. “에잉, 이래서야 강화 마법을 걸지도 못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아다만티움 재고가 얼마 남지 않아…….” “책임자! 여기 책임자를 불러와!” 대공사였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떠들었다. 나는 시공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하나의 사무소가 아니라 여러 사무소에게 일감을 맡겼다. 공사비야 적어졌으나 이것은 총지휘자 한 명에게 부담이 엄청나게 집중되는 방식이었다. 수십 개의 사무소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업무를 조정해주어야만 했다. “으아아아.” 과연, 라피스가 신경질을 부릴 만했다.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게 쌓였겠지. 정작 총책임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나 돌아왔어, 반갑지?' 하고 태연자약하게 어슬렁거렸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두 시간 정도 느긋하게 걸어서 마왕방에 도착했다. 마왕방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먼저 마왕방 앞에 절벽이 있었다. 절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되게 깊은 해자라고 해야 할지. 해자에는 좁다랗게 돌다리가 놓였다. 그 다리를 건너야만 마왕방의 정문으로 갈 수가 있었다. 정문은……예전에 리프가 손도끼로 가볍게 찍어내린 목조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조각상에 가까웠다. 대단히 험상궂은 인상의 조각상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입구멍이 바로 정문이었다. 그야말로 마왕이 머무르는 거처, 라는 느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엄청난 악취미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조각상의 눈동자 부분에서는 새빨갛게 불이 타오르기까지 했다. 나는 압도당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위쪽. 즉 조각상에서는 코와 입 사이의 인중에 해당하는 부분에 조각칼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제국어로 쓰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 희망일랑 죄다 놓아라, 피안에 와버린 자여. “으어어억.” 정말로 본격적이었다. 본격적으로 마왕스러웠다. 마치 RPG에서 보스몹 사냥터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라피스는 속으로 '마왕'이란 것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가. 이백 년 가까이 살아온 마족 주제에 너무 유치하잖아! 아니, 바르바토스도 자기 마왕성을 <모든 죽은 자들의 성전> 따위로 부르니까……. 의외로 마왕성의 디자인이란 이렇게 유치찬란한 것이 보편적일지 모르겠다. 하기사 마인 놈들은 미적 감각이 심히 괴랄했다. 분홍색으로 된 정장 따위를 무도회용 정복이랍시고 즐겨 입지 않는가. 나는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마왕방에 터덜터덜 들어갔다. 의외로 마왕방 안쪽은 썰렁했다. 아직 공사에 들어가지 않은 낌새였다. “라우라? 단탈리안이 왔습니다. 라우라가 사랑하는 단탈리안이 돌아왔습니다.” 내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그러자 맞은편 침대에서 무언가가 빼꼼 튀어나왔다. 금빛 머리카락. 라우라 데 파르네세였다. “주군……정말로 주군인가?” 라우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무척 피폐해져 있었다. 언제나 봄날의 햇살처럼 찬란하던 금발도 생기를 잃어 푸석푸석했다. “소녀를 꾀어내려고 고안해낸 환영마법이 아닌가? 정말인가?” “화, 환영마법이라니.” 나는 충격을 먹었다. 도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건들이 벌어진 것인가. 라우라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어린 고양이에게 다가가듯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 진짜입니다. 환영마법도 뭣도 아니고 진짜 단탈리안입니다.” “평소에는 무척 근엄한 척하지만 조금이라도 압박감에 시달리면 맛이 가버려서 웃었다가 풀이 죽었다가 다시 웃어버리는, 옆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주군이 맞는가?” “……예, 바로 그 단탈리안입니다.” 라우라가 침대에서 얼굴만 내민 채로 여전히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성실하네 착실하네 헛소리를 일삼으면서 틈만 나면 소녀의 육체를 탐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만 세상에서 제일 성실하고 착실한 색마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주군이 맞는가? 열일곱 살 이상으로는 여자로 보지도 않는 주군이 정말로 맞는가?” “……라우라가 평소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잘 알겠군요.” 내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는 색마도 아동성애자도 아니라 단탈리안입니다. 그저 어떠다가 평균연령이 살짝 낮은 여성과 관계를 맺게 되었을 뿐이지요.” “아아, 그 뻔뻔하기 그지없는 상판대기를 보아하니 틀림없이 소녀의 주군이로다!” 라우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온 주인을 마중하는 애완견처럼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주군! 주군! 보고 싶었다! 소녀는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하고 점프하여 나를 온몸으로 덥썩 안았다. 나는 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뭘까요. 분명히 감동적인 재회 장면인데, 마음 한 구석이 싸하게 슬픕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아아, 이 엉망진창의 소인배스러운 관상하며!” 라우라가 감격했다. 아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볼품없이 굽어진 등줄기에 좁은 어깨!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전혀 깎지 않아서 밀림처럼 제멋대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비열함이 응축되어 생생하게 배어버린 입가! 아, 진짜배기이다. 진짜배기 주군임에 분명하다!” “……아, 예. 그렇습니까.” “주군은 분명 세상에서 제일 싸구려 같은 마왕이지만, 그런 싸구려 주군이기에 소녀는 주군을 좋아한다!” 라우라가 두 손을 벌려 내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진하게 키스했다. 한 번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는지 라우라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마구잡이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좋아요. 환영인사로는 충분합니다.” 내가 라우라를 떼어내면서 말했다. “그런데 뭡니까, 그 꼬락서니는? 저보고 더럽다고 욕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십시오. 머리카락은 푸석하고 피부는 잔뜩 상했고……이게 전직 공작가 영애이자 열일곱 살 소녀의 행색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목욕이나 하고 살았습니까?” “그것이, 그것이……흐윽.” 라우라가 눈물을 훔쳤다. 솔직히 말하건대, 여태껏 봐온 라우라 중에서 제일 꼴불견이었다. 이건 결코 내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객관적인 견해였다. “라피스 님께서 소녀에게…….” “……라피스 '님'이요?” “아, 아니. 아니다. 라피스 언니가 소녀에게 너무 과분한 업무를 맡긴다!” 라우라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언어 사용이었지만, 나는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이므로 너그롭게 넘어가주었다. 대충 어떤 사정인지 예상이 가기도 했고. “소녀는 율법이라든지 마을의 관습법이라든지 도통 모르겠다. 그저 효율적인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런데 라피스 언니는……게다가, 그 파르시인가 뭔가 하는 남자까지 덩달아서 소녀를…….” “일단 콧물부터 닦으십시오.” 내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열일곱 살 소녀가 제아무리 찬란할지라도 콧물마저 찬란할 리는 만무했다. 결단코. 라우라가 코를 팽하게 풀었다. “소녀가 꼭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인 것처럼 깔보는 것 아닌가!” “……아아. 알겠습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에서 당대 최고의 전술가로 이름을 드높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 철혈재상께서는, 정치력이 영 꽝이라는 사실에 좌절한 모양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마왕성 및 영지의 경영이 매우 지난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00211 D급 모험대 =========================================================================                        * * * 나는 여장을 풀지도 않고 곧장 마을로 되돌아갔다. 파르시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우, 전하.” “여전히 나이에 비해 얼굴이 늙어빠졌구나.” “시끄럽수! 내가 노안인 걸 전하가 책임이라도 져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하쇼.” 파르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멧돼지처럼 생긴 남정네가 그러니 웃겼다. 그는 몇 달 보지 않은 사이 부쩍 늙었다. 파르시는 사실상 영주대리인이었으며, 나를 대신해서 데이지네 화전촌 주민을 다독이고 이끄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듣자하니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느라 심히 고생했다고 한다. 촌장집에 들어가서 우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화했다. “으음. 라우라 데 파르네세 님이 영 어수룩한 것은 아니외다.” 파르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째푸렸다. “하지만 말이요, 전하. 인간들의 생리를 도통 모른다오.” “생리를 모른다니?” “샌님처럼 너무 이상적인 얘기만 나열한다는 말이지.” 파르시가 크흥, 하고 코를 풀었다. 그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요. 파르네세 님은, 그 뭐라고 하더라? 촌장과 지주가 마을을 관리하고, 법률은 마왕 전하와 가신단이 직접 만들고, 또 그 법률을 집행하는 이들은 따로 뽑아야 한다고 하더이다.” 파르시가 손바닥에 묻은 콧물을 방바닥에 스윽 문질렀다. 더러운 자식! 파르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말이나 쉽지 어떻게 잘 이루어지겠소? 생각해보슈. 마을사람들 입장에선 그럼 촌장도 아니고 마왕 전하도 아닌, 영 딴판인 외지인한테 재판을 받는 셈이오. 어디 신뢰나 가겠냐는 말이외다.” “으음.” 라우라가 주장한 것은 이른바 권력분립(權力分立)이었다.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규칙을 추상적으로 정립하는 입법. 이렇게 정립된 법률을 갖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사법. 법칙과 규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영지민들을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행정. 통치자가 자칫 지나치게 막대한 권력을 얻지 못하도록, 아예 미리부터 구획을 정해놓아 하나의 권력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자는 아이디어……그렇지만, 파르시와 같은 보통 농민들에게는 ‘왜 그리 복잡한 과정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하고 볼멘소리가 나올 법했다. 특히나 사법권. 이게 문제였다. 이 시대에 법률적인 다툼은 일상다반사이다. 논밭을 개척할 때는 대부분 여러 세대가 달라붙는다. 이때 누가 농기구를 빌려주는가? 누가 직접 땅을 일구는가? 개척되어 완료된 논밭은 어느 쪽이 얼마만큼 소유하는가? 마을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곡물창고, 여기서 각자의 몫은 얼마인가. 마을에서 갑작스레 가장이 병사한 집안이 있을 경우 누가 원조해야 하는가…….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이런 사태에 직면해서 마을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촌장을 비롯하여 지주 등, 유력한 농민들끼리 모여서 자체적으로 심판한다! 내가 말했다. “농민들 중에 유력한 지주한테 재판관을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흥. 그럼 마을관리를 맡은 지주가 따로 있고 재판을 맡은 지주가 따로 있는 거요? 그네들끼리 전부 결혼하고 왕래하여 한 집안이나 다름없는데, 잘도 공정하게 판결이 나겠수다.” “끄응.”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연스러운 유착관계라. 그것이 문제인가.” “차라리 지주들한테 죄다 재판을 맡겨버리면 말이요, 응? 그네들끼리 짜고 쳤으면 티가 확 나버리오. 마을사람들 보는 눈이 무서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겉보기에만 공정한 것처럼 위장해버리면……쓰읍.” 파르시가 말끝을 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정하다. 하지만 실상은 결혼관계 등으로 돈독하게 맺어진 지주들. 실상이 어찌 굴러갈지 뻔하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에, 마을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을 제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지주끼리 유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찰관을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그 관찰관은 또 어디서 뽑구? 마을 안에서요? 마을 밖에서요?” 파르시가 훗, 하고 웃었다. “안에서 뽑으면 피차일반 인맥에 휘둘릴 것이고, 바깥에서 뽑으면 마을사정도 잘 몰라서 측근들 말에만 귀를 기울여 편파적으로 판정할 거외다. 지주한테 매수당하든지. 아니, 그냥 지주들이 '외지인한테 정보를 팔아넘기는 자는 마을의 공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만 흘려도 끝이외다.” “하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나에게는 두 가지 정책이 놓여 있다. 첫 번째, 마을에 권력을 완전히 떠넘기는 것. 두 번째, 라우라가 주장한 대로 권력분립을 철저하게 실행하는 것. 첫 번째를 살펴보자. 마을이 공정하게 돌아가려면 권력을 뭉뚱그려서 모든 지주들한테 맡겨야 한다. 이때 재판이 잘못되거나 얼토당토 않게 흘러가버리면, 책임은 '모든 지주'에게 떨어진다. 연대책임이다. 마을사람들은 지주를 성토하면 된다. 책임소재가 무척 뚜렷하다. 그러나 지주들도 멍청이가 아니다. 왜 굳이 피박에 광박을 뒤집어쓰겠는가? 재판에서 행여나 모험을 감행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기네가 피해를 본게 된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관습법'에 따른다. 왜 이런 재판을 내렸는가? 그것이 관습이니까. 왜 저 사람이 농토를 더 많이 가져가는가? 그것이 관습이니까. 왜 우물은 누구에게 돌아가고 누구에겐 허락되지 않은가. 그것이 관습. 오로지 관습이기 때문에……. “결국 관습이 신앙이자 법률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게 뭐 크게 나쁘오외까?” 파르시가 이마를 찡그렸다. 관습법을 추종하면 책임소재가 부웅 공중에 떠버린다. 일이 잘못되어도 나쁜 것은 지주들이 아니다. 그저 '운이 나쁘게' 상황이 잘 굴러가지 않았을 뿐이다. 요컨대 운명론……매우 통속적인 민간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잘 되면 운이 좋아서. 잘 안 되면 운이 나빠서. 관습법을 바꿀 필요도 없고, 지주들 이외에 다른 재판관을 임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번에는 운이 좋기를 마을 언저리에 모셔진 토속신에게 기도할 따름이다……. 마을공동체=공동재판 및 인민재판=책임소재의 증발=운명론=토속신앙. 얼핏 보기에는 각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사슬로 단단하게 묶여 있으며, 이중에서 한 가지라도 고치려면 제도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쳐야만 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 작업일지는 상상만 해도 충분하다. ――이리하여, 마을이라는 하나의 사회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게 된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미개해서, 머리가 안 좋아서 보수적인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미개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농촌의 보수성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보수성, 이라고 표현하면 제격이겠지. 농민들 나름대로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려고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영주인 나의 입장은 어찌되냐?” “……뭐, 솔직히 그렇소만.” 파르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러했다. 마을공동체가 알아서 통치하고 알아서 재판하면, 영주인 내가 할 일이 증발해버렸다. 자기네 관습대로 하겠다는데 왕이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으으음, 세금을 받고 계시니 그걸로 만족하시는 것이?” “이런 개자식을 보았나. 너희가 세금을 내든 안 내든 어차피 나한테는 코딱지보다 좀스러운 돈이거든? 애들 푼돈 뜯어봤자 만족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껄껄껄.” 파르시가 노인네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마왕 전하께선 우리 마을들 입장에선 아주 이상적인 영주님이라오. 괴수들이 마을에 약탈하러 오는 것도 막아주시지, 세금도 거의 안 받으시지, 딱히 우리 권리에 간섭하지도 않지. 단탈리안 전하 만만세요외다!” 파르시가 두 팔을 번쩍 들어서 만세를 삼창했다. 나는 홧김에 주먹으로 녀석의 배를 때렸다. 녀석은 “에고고, 파르시 죽네!” 하고 소리 지르면서 벌러덩 쓰러졌다. 엄살이 끝내줬다. 어차피 장난삼아 친 거라서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이건 어떠냐. 다른 마을의 장로들로 재판을 꾸리는 거다.” “음?” 투박하게 생겼지만 젊고 영리한 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마을의 장로들로? 무슨 뜻이오?” “파르시. 나의 영지에 지금 마을이 몇 개 있느냐.” “어……기다려보슈. 원래 마을이었던 곳 세 개랑.” 파르시가 손가락을 굽혔다. “차남이랑 삼남들이 빠져나가서 꾸린 마을 두 곳이랑. 저번에 전하가 무책임하게 떠맡긴 화전민까지 해서, 전부 여섯 곳이구만유.” “충분히 많군. 잘 봐라, 어느 한 마을에서 사건이 생겼다. 그러면 사건당사자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서 재판에 맡겨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 파르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계속 말했다. “어차피 다른 마을이니 보다 공정하게 사태를 바라볼 것이다. 같은 영지민에다 교류도 활발하니 외지인도 아니지. 아예 내부인도 아니면서 아예 외부인도 아니다. 어떠냐? 좋은 수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확실히. 크흥.” 파르시가 콧물을 풀었다. “확실히,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구랴.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마을들 사이에 원한이 생겨버릴지도 모르오. 전하의 영지가 내분을 일으키는 거외다?” “쯔쯧. 그러니까 더더욱 조심스럽게 재판에 임하겠지.” 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 양옆으로 흔들었다. “잘못하면 내전, 그러하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 공정하게 재판해야만 한다……마을 원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흠. 흠. 흐음.” 파르시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고민에 잠겼다. 콧물이 손바닥 사이에 끼어서 초록색 샌드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헌데도 재판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다시 한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때는 영주인 내가 직접 꾸린 가신단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하지.” “……재판 위에 또 재판이 있는 거외까?” “글쎄, 대법원이라고 적당히 이름 붙이면 되겠군.” 파르시의 이마에 파인 골이 점점 깊어졌다. 이 시대, '같은 계급에서 일어난 일은 그 계급 안에서 해결한다'라는 원칙이 불문율처럼 통용되고 있다. 영지민이 영주한테 쪼르륵 달려가서 무슨 문제 좀 해결해달라고 말해버리면 같은 계급의 사람들한테 완전히 왕따를 당한다. 불문율을 어기면서까지 1차 재판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한다……즉, 상당히 중요한 재판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적다. 재판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서 누구든지 제멋대로 항소하기란 어렵다. 1차 재판이 유명무실해질 일이 없다는 얘기이다. “쇤네가 일자무식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소만 제법 좋은 제도처럼 들리오.” “당연하지. 누구 머리에서 나온 해결책인데.” “……그거 아시오? 전하께선 가끔씩,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자주 재수없소.” 내가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파르시는 배 한복판에 정확히 주먹이 들어갔는데도 끄떡이 없었다. 제기랄, 이래서 근육질 투성이의 농민이란! “혹시 모르니, 한 마을의 지주 집안이 다른 마을의 지주 집안과 결혼하는 것도 법으로 금하겠다. 이렇게 해두면 유착관계 따위가 최대한 사라지겠지.” “허어. 철두철미하구려.” 파르시가 혀를 내둘렀다. 이로써 나의 측근 라우라가 추진하는 권력분립 정책, 영주대리인 파르시가 대변하는 마을공동체 정책이 서로 타협점을 찾았다. 사법권을 마을로부터 분리시키되 다만 마을'들'에게서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전하.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소. 마을사람들은 여태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잘만 살아왔수다. 이제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삽시다! 라고 선언해본들 사람들이 제깍제깍 따라주겠소? 소인은 그게 걱정이외다.”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에게 이득이 있다면, 주저없이 동의할 거다.” “이득? 새로운 방식에 뭐 대단한 이득은 없어보이오만.”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권력을 분산하면 최종적으로 공동체가 건강해진다……라고 말해봤자 아리송하겠지. 너무나 추상적이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으로는 결코 영지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 새로운 정책을 밀어붙이려면 당장의 당근이 필요하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간단하다. 이득이 없다면 만들어라.” 바로 다음날, 나는 제레미에게 시켜서 인근의 가장 큰 도시로 보냈다. 그리고 모험자 사무소에 거액의 현상금과 함께 어떤 의뢰를 넣었다. 의뢰는 간단했다. 『마왕 단탈리안을 잡아오는 자에게 4000골드를 지급합니다.』 『기한은 촉박. 이번 달 마지막 날까지.』 『생사불문(生死不問).』 도시의 용병들과 모험자들을 들끓어 오르게 하는 소식이었다.   00212 D급 모험대 =========================================================================                        * * * 모험자. 낭만으로 넘쳐나는 직업군처럼 보이나 그 실상은 낭만과 거리가 무척 멀다. 우선 그들은 도시의 시민도 아니고 마을의 농민도 아니다. 집이 없다. 그때그때 시민들이 의뢰해주는 것을 해결해주며 겨우 하루치 밥벌이를 해먹고 산다. 갑자기 생겨난 몬스터 부락을 토벌해달라, 특산품 생산에 필요한 희귀 재료를 가져와달라……말하자면 도시의 하청업자. 시민이 아니기에 세금을 내지도 않으며, 세금을 내지 않기에 그저 도시의 기생충으로 비출 뿐인 부랑자이다. 모험자는 대부분 실향민이나 고아로 이루어져 있다. 영주의 횡포에 견디지 못해 야간도주하여 모험자로 근근히 살아간다……라는 이야기는 희귀하지도 않다. 출신성분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모험자에게 의뢰를 맡기느니 고양이한테 청어를 맡기는 편이 낫다.” 이것이 대체로 모험자에 대한 인식이다. 영 꽝이라고 해도 좋겠지. 법률과 치안이 발달한 현대와 다르게 이 시대에는 '신뢰'라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중요하며, 출신성분이 애매모호한 모험자는 누구나 꺼려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가게 아르바이트를 시킨다고 해보자. 아르바이트생이 만약 가게의 돈을 먹고 도망쳐버린다면 어쩔 텐가? 치안망이 강력하고 개개인의 정보를 세심하게 파악해놓은 현대라면 간단하다. 경찰에 신고하여 잡아들이면 된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치안망이 허술할뿐더러 정보 베이스 따위는 매우 조잡한 형태로만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도시 바깥으로 도망치기라도 하면 체포하기란 요원하다. 그렇기에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쓰려 한다. 대표적으로 다른 시민의 아들딸. 이들은 시민권을 가질 예정이므로 도시에서 도망칠 염려가 적다.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때는 부모들한테 피해를 청구할 수 있다. 안전하다. 혹은 신전의 사제와 도시의 관료가 신원을 보증해준 사람. 이런 사람은 신뢰가 간다. 사제와 관료는 자신의 이름값을 위해서라도 철저히 엄선된 이를 추천한다. 그렇기에 일거리를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명망 높은 사제나 관료, 하다못해 상인한테서 신원보증서를 구해야 한다. 모험자에겐 그런 것이 전무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실적을 쌓으면 용병단에 입단이라도 할 수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제레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나는 지금 모험자 길드 청사에 들어와 있었다. 건축된 지 오래된 건물이었다. 나무바닥은 밟으면 삐꺽거리고, 술값은 더럽게 비싼 주제에 싸구려 맥주밖에 없었다. 나는 질 낮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넣으며 길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단탈리안 마왕성으로 향하는 모험대를 모집하오!” “노랑색 모험자에게 전체 지분 15%를! 초록색 모험자에게 10%를 약속한다!”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건물 안을 돌아다니느라 사방에서 나뭇바닥이 삐끄덕 삐끄덕 시끄럽게 울어댔다. 모험자는 소리높여 자신과 함께 모험대를 꾸릴 자 없느냐며 소리 질렀고, 조금이라도 질 높은 동료를 맞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곳이 모험자의 아지트. 길드 청사이다. 모험자들 개개인은 어쩔 수 없이 신뢰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하고 모험자들이 강구해낸 방법이 바로 길드이다. 웬만한 도시에는 이처럼 모험자 길드가 하나씩은 있다. 길드에서는 다름 아니라 모험자의 '신뢰도'를 관리한다. 시민들은 길드에 의뢰를 넣는다. 그리고 모험자는 길드에서 공개적으로 내걸어둔 의뢰란에서 자기가 맡을 의뢰를 선택한다. 만약 모험자가 성공적으로 의뢰를 완수하면, '이 사람이 어떤 의뢰를 성실히 달성했음'이라고 길드 장부에 적힌다. 당연하지만, 만약 의뢰를 포기하면 '이 사람은 태만하게 의뢰를 방치했음'이라고 적힌다. 어떤 모험자가 어느 정도로 신용할 수 있는지 데이터가 축적되는 것이다. 신뢰도가 지나치게 떨어지는 모험자는 쫓겨난다. 아무도 그 사람에게 의뢰를 맡기지 않는다. 잔인한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겠으나, 모험자라는 직업군 자체가 성립하려면 어쩔 수 없다. 어느 세계에서나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모험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험자는 자기 분수를 뛰어넘는 의뢰는 절대로 맡으려 들지 않는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다. 이 퀘스트가 내 능력에 적당한가? 행여나 실패할 가능성은 없는가?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예컨대 『마왕 바르바토스를 잡아오는 모험자에게 5만 골드를 준다!』라는 의뢰가 있다고 해보자. 아무리 포상금이 먹음직스럽더라도 이건 터무니없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의뢰를 낚아채지 않는다. 허나 너무 신중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어찌되었든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배짱 역시 갖추어야만 한다. 신중한 안목, 뚝심 있는 배짱. 두 가지를 갖춘 자만이 모험자로서 성공하겠지. 거기에다 약간의 행운이 따라주어야 끝까지 생존할 수 있다……. 내가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내 마왕성은 허섭쓰레기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게요. 도시에 있는 모험자란 모험자는 죄다 몰려든 것 같은걸요.” 나의 던전에는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다. 바르바토스처럼 『모든 사자(死者)의 궁전』이라든지. 파이몬처럼 『레테가 잠드는 수해(樹海)』라든지. 잘 나가는 마왕성이라면 으레 하나쯤 붙는, 멋지구리한 별명이 전혀 없다. 그냥 단탈리안 마왕성이다. 내가 얼마나 허접스러운 던전의 주인인지 새삼스레 느껴져서 마음이 아프다……. 뭐, 아무튼. 그런 허접한 던전에 자그마치 4000골드 상금이 붙었다. 그외에도 도시 시장이 개인적으로 내 목에 걸어놓은 1000골드 포상금도 있었다. 다 합쳐서 5000골드라는 거금이었다. 모험자들 입장에선 천운이란 거다. 열 명으로 모험대를 꾸려도 쉽게 계산하여 한 사람당 500골드가 떨어진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모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걸 노린 거지만 말이야.” “후후, 청사 구석탱이에 바로 그 마왕님이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요.” 제레미가 키득거렸다. 그렇다. 우리 두 사람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추론할 수 있겠지만, 저 의뢰는 전부 함정이다. 모험자들은 예전에 기록된 단탈리안 마왕성의 수준에 속고 있다. “최하급 수준의 모험자들이 잔뜩 몰렸는걸요. 어휴, 불쌍해라. 다 죽겠네.” 제레미가 말한 그대로이다. 바르바토스네 정도로 흉악하진 않아도 내 거처가 이제 아주 만만한 곳은 아니다. 아직 1층뿐이긴 해도 마계 최고의 건축업자들이 달라붙어 만들었다. 자금도 거의 무한정으로 쏟아부었다. 던전에는 갖가지 함정과 미로가 건설되었다. 어지간한 모험자는 한번 깊숙이 들어갔다가 탈출하지조차 못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전하. 실력자들이 오면 조금 위험하지 않겠어요?” “지금은 실력자들이 전부 백합전쟁에 용병으로 나가 있어.”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합전쟁이란 현재 프랑크에서 지속되고 있는 내전을 가리켰다. 검은 백합이 상징인 브르타뉴 왕국, 하얀 백합이 상징인 프랑크 제국. 그래서 백합전쟁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전쟁은 실력 있는 모험대에게 가장 훌륭한 비즈니스이다. 모험대는 간단하게 용병단으로 직업을 바꿔서 비용을 지불하는 측에 가담하여 싸운다. 합스부르크에서 소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월맹군 전쟁, 거기에다 프랑크에서 일어난 내전까지. 대륙의 인민들에게는 불행한 시대이지만 언제나 의뢰에 굶주린 모험자 무리한테는 '아, 살기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리라. 내가 말했다. “아직도 도시에 남은 모험자는 죄다 쭉정이뿐이다. 절대다수가 최하급. 용병으로 써먹지 못할 부류이지. 글쎄, 아무리 높게 잡아줘도 중급 이상의 모험자는 도시를 떠나고 없을걸.” 나는 일부러 의뢰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왕 단탈리안을 잡아오는 자에게 4000골드를 지급합니다.』 『기한은 촉박. 이번 달 마지막 날까지.』 『생사불문(生死不問).』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한이 촉박하다'라는 부분이야. 겨우 보름 남짓한 시간밖에 안 된다. 현재 전쟁터에 나가 있는 고급 모험대들이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참가하기란 불가능하지.” “하아, 그런 의미였군요.” 제레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역시 전하는 잔머리 하나는 잘 굴러간다니까요. 저 제레미는 매번 감탄합니다.” “……그거 칭찬이냐?” “물론입니다. 세상에서 잔머리가 제일 잘 굴러가지만 6만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2만의 적군을 이기지 못한 단탈리안 전하.” 내가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움직여서 제레미의 정강이뼈를 찼다. 제레미가 아야! 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사기인 거다……! 내 평생 다시는 기사단이 주력인 병력이랑 회전을 벌일까보냐!” “으으. 여인을 걷어차다니, 전하는 야만인이에요.” “아픈가? 매우 아픈가? 그거 쎔통이로군.”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부하들 중에는 이 몸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가신(家臣)이 한 명도 없다. 라피스는 내 머리 꼭대기에 서 있지. 라우라는 예전에는 귀엽게 쫄쫄 따라다니더만 요즘엔 이상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제레미는 그냥 나쁜 년이다. “에잉, 못난 것들.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올라온 나를 찬양하지는 못할망정…….”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저는 단탈리안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경애한답니다?” 제레미가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단탈리안 전하는 뭐랄까요, 가까이 있으면 편해져요.” “편해?” “예. 소인은 파이몬 전하도 존경하지만요, 그분께서는 빈틈이 없지요. 천명을 받고 태어난 영웅이란 저런 거구나. 그런 감상이 저절로 들어요. 그래서 그분 옆에 서면 엄숙해지고 진지해지죠.” 하지만, 하고 제레미가 말했다. “단탈리안 전하는 이상하게 머리에서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에요.” “…….” 나는 말없이 정강이뼈를 한번 더 걷어찼다. 이번에는 예상했다는 듯 제레미가 능숙하게 발을 피했다. 젠장. “전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에요. 파이몬 전하가 자신의 이상을 향해서 올곧게, 단 한 걸음도 생략하지 않고 낙타처럼 걸어가고 있다면……응. 단탈리안 전하는 그냥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여요.” “그건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 아니냐?” “아, 물론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하죠.” 제레미가 웃었다. “하지만 전하. 이상을 추구하는 삶이란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요. 그것은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과 같아서 주위에 모여든 자들을 달아오르게 하죠. 동시에 그들을 연소시켜, 한줌의 잿더미로 만들어요……. 단탈리안 전하는 불길과 같은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흐음.” 내가 심드렁하게 맥주를 들이마셨다.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튼 욕이 아니라니 넘어가주었다. “단탈리안 전하께 모여드는 인재들은 틀림없이 전하 특유의 허술함에서 안식처를 찾은 사람들이겠죠. 가시나무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러한 안식처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제법 소중할 거랍니다.” 그 이후로 대화가 중단되었다. 제레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고, 나는 어째서인지 그 시선이 불편해서 맥주를 홀짝였다. “어이. 동석해도 좋겠나?” 한 모험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고급스러운 가죽갑옷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척 봐도 견실한 모험자라는 인상이었다.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예, 저희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내가 영업용 스마일을 드러내면서 대꾸했다. 사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표정을 0.5초만에 전환할 수 있었다. “지금 모험대를 구하고 있는데 말이야.” 모험자 형씨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당신들 실력이 꽤나 있어보이는구만. 어때? 나와 함께 모험대를 짜보는 것은?”   00213 D급 모험대 =========================================================================                        “호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희의 어떤 점을 보고 그리 생각하셨는지요?” “여기 밑바닥에서 오 년이고 십 년이고 굴러댕기면 말이야.” 모험자가 자기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삼십 대 중년으로 보이는 이 남성은 대머리였다. 오른쪽 눈가에 길게 칼자국이 났고, 그 때문인지 가죽 안대를 썼다. 피부는 햇살에 잘 구워져 갈색빛이었다. 대머리에다 애꾸라니, 꽤나 깡패스러웠다. “촉이 오거든. 누가 빛살 좋은 개살구이고 누가 진주를 문 조개인지, 싸아아악, 하고 촉이 와. 저기 접수대 앞에서 목청 큰 거 자랑하는 놈들.” 대머리가 청사에서 바글바글대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쟤네들이 마왕성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나자빠질 애송이들이지. 동네에서 고블린 몇 마리 잡아봤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농삿일 때려치고 도망쳐나온 차남이랑 삼남이야. 안 봐도 뻔해.” “아주 자신만만하시군요.” “내가 저랬거든.” 대머리가 씨익 웃었다. 버릇 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인텔리한 남성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짓는, 무척 지적인 미소였다. 그러자 대머리의 인상이 확 달라졌다. 근육질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던 야성미, 애꾸눈에서 비롯하는 해적선장 혹은 무법자스러운 분위기. 이것을 젠틀함이 껴안았다. 이렇게 말하면 다소 우습겠지만 대머리는 신사적인 폭력배 같았다. “저런 초보자는 대부분 처녀 싸움에서 죽어버리지. 그래, 대략 3할은 죽는다고 해볼까. 그리고 3할은 첫경험에서 지레 겁을 먹어 포기해버리고.” 대머리가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4할. 형씨, 알겠어? 오직 초보자 중에서 4할만이 이 업계에 계속 남는 거야. 이 녀석들의 인생은 무척 단순해져. 둘 중 하나이지. 마왕성 동굴바닥에서 뒈지거나, 아님 창녀한테서 매독이 옮아 훅 가버리거나.” 내가 흥미롭다는 눈치를 보였다. “흐음, 살아남는 경우는 없습니까?”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지. 엄청나게 운이 좋으면 그래, 오십 살이 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지. 하지만 그래봤자 뭐하겠나? 우리 같은 하루살이들이 어디 저축을 해두었겠나, 노후를 대비했겠나.” 대머리가 테이블 근처를 지나가는 여종업원에게 말했다. “아가씨, 여기 보리맥주 세 잔 갖다주게.” “그냥 맥주 세 잔이요? 알겠어요.” 종업원이 귀찮다는 듯 틱틱거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대머리가 동화를 대여섯 개 건네줬다. ‘흐음.’ 내가 마음속으로 눈앞의 모험자를 높게 평가했다. 대머리는 능숙하게 제레미와 나한테 술을 사준 것이었다. 우리와 뭔가를 함께해보고 싶다. 그것을 말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대인배 아니면 사기꾼이다. 대인배라면 상관없으나 문제는 사기꾼일 경우이다. 신사적인 미소는 사기꾼이 흔히 써먹는 술책에 해당한다. 과연, 이 사람은 어디에 해당할까……. “자네들도 알겠지만, 모험자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어. 하루살이야. 당장 내일 머리통이 몸통에게 작별인사를 고할지도 몰라. 생각해보라구. 만약 내가 죽어버리면 길드 창고에다 저금해둔 돈들은 어떻게 되겠나?” 대머리가 두 손을 벌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거야. 그날 저녁 길드의 간부 나으리들께선 밀맥주로 건배를 외치겠지……. 늙어서도 잘 살아보자며 아끼고 또 아껴봤자 결국은 남 좋을 일. 그렇다면 차라리 게 사라 사라(che sarà sarà)를 외치는 편이 현명하지.” 대머리의 말이 옳았다. 안정적인 삶에서 천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모험자한테는 시집 올 여자가 없다. 가족도 없다. 그렇기에 모험자의 영원한 연인은 길가에 핀 민들레……즉 창녀뿐이다. 던전에서 한탕 번 다음 그 돈으로 호화롭게 며칠을 산다. 고급스러운 창관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값비싼 음식에 술을 즐긴다. 여기에다 도박까지 끼어들면 완벽하다. 창녀와 술, 도박. 세 가지가 겹쳐지면 돈주머니가 거덜나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럼 며칠 간의 사치가 마치 꿈이요 몽상이었다는 듯이 모험자는 고달픈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딱딱한 호밀빵 하나 얻지 못하여 배를 굶주린다. 시민들 눈치밥을 얻어먹으며 우물물로 배를 채운다. 다시 화려한 그날을 보내기만을 손꼽으며, 길드 청사의 의뢰란 앞에서 건달처럼 서성거린다. 성공, 사치, 굶주림, 다시 성공, 사치, 굶주림……. “그러다가 어느 날 죽는 거야. 우리 모험자란.” 어쩔 때는 단순히 운이 나빠서. 고블린이 날린 돌멩이가 하필 머리에 맞아 절명한다. 어쩔 때는 모험대가 실수해서. 정찰조 역할을 해주어야 할 사냥터지기(레인저)가 그만 오우거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대로 절망적인 혈투에 돌입한다. 인간은 약하다. 내가 방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쉽게 죽는다. 확률상으로야 죽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하지만 모험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다보면, 언제고 그 낮은 확률이 잭팟을 터트려버린다. 밑바닥의 쓰레기 인생. 모험자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표현은 없겠지. 게임 <던전 어택>에서 용사 캐릭터도 마찬가지이다. 퀘스트가 끝난 후에는 만날 창관에 들린다. 여기에 빌어먹을 시스템이 있는데, 주인공 캐릭터가 창녀와 섹스하면 0.01%의 확률로 매독에 걸린다. 데드 엔딩이 떠버리는 것이다! 더 악질적인 것은 게임상의 매독에 잠복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병한다. 설령 0.01% 확률에 걸려넘어져 매독에 전염되었다 해도……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한창 게임을 진행해버리고 나서, 즉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당연하지만, 1년 6개월 전의 게임 데이터를 저장해놓은 경우란 없다. 무조건 데드 엔딩이다. 여기에는 욕을 퍼부어줄 수밖에 없다. 개좆보다 더 좆 같은 개발자 새끼들. 시발스러운 쌍놈들. 내가 매독 때문에 베드엔딩을 띄워버린 경우가 두 번이나 된다. 차라리 마왕한테 뒤지면 뒤졌지, 니미럴. 그러면 세이브-로드 신공으로 극복할 수라도 있지 않은가. 1년 6개월 이전의 데이터를 어디서 구한다는 말이냐. 만에 하나 그런 데이터가 있다고 해본들 또 다시 게임상으로 1년 6개월 동안 플레이 해야 한다는 거 아니냐. 존나 양심을 정액에 묻혀서 싸버린 말똥에 박아버린 새끼들! 만약에 그 1년 6개월 동안 레벨업 노가다라도 왕창 해놨다면……끝장이다. 내가 그랬다. 솔직히 자살하고 싶었다. 이 해괴망측한 시스템은 엄청난 원성을 샀다. 플레이어들의 항의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러자 개발사에서 내놓은 대답이 가관이었다. 『매독에 걸릴 확률은 기본적으로 0.01%입니다만, 플레이어가 현재 수준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레벨이 높을 경우 확률이 올라갑니다. 소위 레벨업 노가다라 불리우는 플레이를 자제해주십시오.』 한 마디로 퀘스트를 깨면서 차근차근 레벨을 올리라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놈들! 당연히 플레이어들은 겁에 질렸다. 레벨업 노가다를 했더니 매독에 걸려서 데이터가 날아가버렸습니다, 하는 보고서가 종종 게시판에 올라왔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레벨업 노가다를 포기하고 게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던전 어택>의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지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정말 변태적인 게임이 아니고 뭔가. 아아, 생각나니까 열분이 올라온다! 틀림없이 저 개 같은 시스템은 비너스빤스가 넣었을 거다. 증거는 없지만 확신한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나쁜 것들은 죄다 그 녀석 잘못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내 모습에 대머리가 뭔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호, 형씨도 모험자의 처지에 공분을 느끼는가 보구만?” “……이런, 부끄럽습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군요.” “아닐세. 형씨처럼 젊을수록 분노가 들끓는 거지.” 이해한다는 식으로 대머리 애꾸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선이 나에게 한결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이쪽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뭐, 구태여 교정해줄 필요가 없으므로 나는 계속 착각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냥 맥주 세 잔이요. 파비안, 가끔은 밀맥주를 시키라구요.” 하고 여종업원이 신경질적으로 맥주잔을 서빙했다. 대머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이 사람의 버릇이었다. “단탈리안 마왕성을 털고 나서는 밀맥주 따위는 삼백 잔이라도 시켜주지.” “지금 너도 나도 그 소리만 하고 있는 거 알아요? 데르달루스는 어제 모험대를 꾸려서 떠났다구요. 파비안, 당신은 이미 지각생이 되어버렸어요.” “데르달루스는 운빨로 버텨온 종자야.” 대머리가 맥주잔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제 슬슬 땅바닥에 입맞춤할 때가 되었지. 나와 내기할까, 플뢰르? 그 녀석은 사흘 안으로 대지의 여신과 결혼식을 올릴 거야. 백골이 너무 하얘서 누가 신부복을 입었는지 모를걸.” 여종업원이 피식 웃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여러분들, 이 아저씨 말을 너무 믿지 마세요. 사기꾼은 아니어도 그보다 더 악독하니까. 멀쩡하게 보여도 완전히 미쳤어요. 작년에 이 남자가 하룻밤 만에 육십 골드를 날린 건 유명하죠. 신이시여, 글쎄 유곽의 고급 창녀들을 모조리 사들여서 놀아재꼈지 뭐예요!” “정확히 팔십이 골드였어.” 대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주는 밤이었지.” “미쳤어, 진짜.” 종업원이 깔깔 웃었다. “헛소리가 아니야, 플뢰르. 난 그날부터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거든. 그런데 이렇게 대박 의뢰가 들어오는 것 아니겠어? 여신들께서 날 굽어살피는 게 분명하지. 이번 기회에 손을 털고 무기상이나 차려볼까 해.” “꿈도 야무지셔. 밀맥주나 시키고 호언장담하세요, 애꾸눈 파비안 씨.” 종업원이 손짓으로 얄밉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총총걸음으로 떠났다. 주홍빛이 나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대머리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우리 쪽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죽여주는군. 어떤가, 자네들?” “무엇이 말입니까?” “플뢰르 말일세. 꽤 매력적이지 않나?” 대머리가 속삭였다. “길드 청사에 허구한 날 들락날락이는 건달패의 태반은 플뢰르한테 반해 있어. 붉은색급 모험자의 딸인데, 아비가 죽은 다음엔 저렇게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 모험자의 생태계에 빠삭할뿐더러 보다시피 예쁘장하게 생겼지. 그런데.” 대머리가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었다. “자존심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랑도 두 번 이상 자지 않네. 어쩌다 마음이 맞아서 한 번은 떡을 칠 수 있지만, 절대로 두 번은 침대에 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별종이지.” “호오, 파비안 씨도 저 여자와 자본 모양이군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끝내주는 밤이었지.” 대머리가 맥주잔을 들이밀었다. 우리도 잔을 들어서 건배했다. 맥주는 미지근하고 맛없었지만,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청사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내가 이번 어릿광대 행렬에 참가하려는 이유도 저거일세. 오육백 정도의 금화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 여기 치안대와 연줄이 있으니 자그마한 무기상을 차리는 게 가능하거든. 그러면 플뢰르를 신부로 맞이할 수도 있겠지.” 꿀꺽꿀꺽, 하고 파비안이 맥주를 원샷했다. “크으. 이번 의뢰에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거시기로서의 행복이 전부 달린 거야. 어디 어중이떠중이와 모험대를 꾸릴 수 있겠나? 급할 때일수록 차분하게 옥석을 가려내야 해. 실력 있는 모험자는 그걸 알고 있지…….” 파비안이 제레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보자, 웬 남녀 한쌍이 탁자에 조용히 앉아 있지 않겠나? 청사의 모험자들을 관찰하면서. 마치 '어느 녀석이 쓸만한지 판별하려는 듯' 말이야. 어이, 아가씨. 특히 자네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 제레미는 파비안이 착석한 이후 줄곧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파비안이 입끌을 히죽 들어올렸다. “피냄새가 진동해서 견딜 수가 없어. 아수라장을 몇 번이나 빠져나온 사람만이 내풍길 수 있는 공기가 아가씨 주위에서 풀풀 날려. 바로 깨달았지! 자네들은 나와 생각이 똑같다는 것을. 제대로 된 동료를 구하지 못한다면 아예 출발하지 않겠다……. 어때, 내 말이 틀렸는가?” 내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맞습니다, 파비안 씨.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누군가'를 찾고 있었지요.” 다만, 그 누군가란 동료가 아니라 탐스러운 먹잇감일 따름이었다. 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00214 D급 모험대 =========================================================================                        파비안이 슬쩍 내 쪽을 쳐다보았다. “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쓸만한 놈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겠지. 나는 이 도시에서 황색의 모험자 자격증을 부여받았네. 언제든지 장부에서 확인해볼 수 있어.” 너는 급수가 어느 정도이냐, 그런 눈짓이었다. 노랑색 모험자란 대충 게임상에 D급으로 표현된다. 색깔이 없는 최하급(F급), 초록색(E급), 노랑색(D급), 주황색(C급), 붉은색(B급), 검은색(A급), 하얀색(S급). 여기서 절대다수의 모험자가 F급에서 E급에 속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랑색이라면 베테랑을 자처할 정도가 되었다. 애당초 하얀색이나 검은색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몇 사람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기사단에 발탁되거나 최고급 용병단장으로 활약한다. 시궁창 인생인 모험자로 사느니 전직해버리는 것이다. 붉은색이면 그럴저럭 괜찮은 용병단의 단장이 된다. 당연하다. 암살자 같은 직업도 똑같다. 만약에 기사를 자유자재로 암살할 정도로 실력이 고강한 암살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정도 인재가 왜 계속 암살자 따위를 하겠는가? 당장 떼려치울걸. 어디 영주 밑에 들어가 기사가 되어 신세를 바꾸고 말 거다. 뭐, 제레미처럼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겼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험자가 모험자로서 찍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은……사실상 주황색. 즉, C급이다. 파비안은 D급이므로 최고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뛰어난 모험자였다. 내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저희들은 프랑크의 오를레앙에서 왔습니다. 그곳에서 황색 자격증을 얻었지요.” “허, 내가 인물을 제대로 보았군. 오를레앙이면 꽤나 큰 도시이지 않은가?” 파비안이 감탄했다. 똑같은 등급이어도 소도시보다 대도시에서 발급한 자격증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렇지만 파비안의 눈빛에는 감탄 이외에도 다른 기색, 우리의 말을 의심스러워하는 낌새가 들어 있었다. “이 먼 땅촌까지 오를레앙의 모험자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알고 싶군.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눌지도 모르니까. 양해해주게.” “물론 이해합니다. 파비안 씨, 프랑크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십니까?” “풍문으로 들었네.” 파비안이 턱끝을 끄덕였다. “브르타뉴가 파리 일대를 점령하면서 오를레앙도 떨어졌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진즉에 불길한 냄새를 맡고 얼른 도망쳤지요. 전쟁통에 모험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징집대상 제1호이지. 아아, 그렇게 된 거로군.” 파비안이 대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정한 정도 전투력이 보장되어 있는 모험자는 시장(市長) 입장에서 즉각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면 시민권을 주겠다느니 하는 사탕발림으로 강제징집을 해버리기 일쑤였다. “징집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구만. 끌끌.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검은 산맥이니, 도망치기엔 더없이 끝내주지.” “마침 저희가 튜튼어를 말할 줄도 알아서 겸사겸사 피난왔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저런 의뢰가 걸려 있지 뭡니까. 하하하.” 파비안의 눈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빛났다. “……프랑크 사람이라면 튜튼어가 아무래도 투박하게 들리겠구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얼. 겸손하지 않아도 좋아. 프랑크어에 비하면 튜튼어는 야만스럽지. 그래서 말인데, 한번 프랑크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한 소절 들려줄 수 있겠나? 내 프랑크인을 만나본 김에 귓속을 청소해보고 싶군.” 네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스럽다, 정말로 프랑크 출신이라면 어디 노래라도 불러보아라, 이 얘기였다. “이를 말씀입니까.” 내가 방긋 웃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브루노에서 생드니까지――   눈물과 핏물로 얼룩진 검의 언덕을,   나는 오로지 맨발로 지났구나.   진격하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타는 목마음으로 울부짖으라,   영광의 순간이 왔도다.   붉은 성에서 울름 평야까지   보외티아 그리고 미뉘아이여   언덕과 계곡에 울려 퍼지는,   적군의 지옥과 같은 함성을 들으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핏물 묻은 전쟁 깃발을 올려라!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다름 아니라 내가 작곡한 노래였으므로 쉽게 불러재낄 수 있었다. 가사까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아 대충 끼워맞추었지만, 원래 노래란 게 돌고 돌아서 바뀌는 것 아니겠는가. “이야아, 명창이로군!” 파비안이 박수를 쳤다. 솔직히 명창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아마도 나를 의심했던 걸 사죄하는 의미에서 저러는 것이리라. 대머리 애꾸눈의 모험자, 파비안은 더 이상 우리의 신원을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모험자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그날 저녁까지 파비안은 보리맥주를 열두 잔 쏘았고 우리는 감사하게 받아먹었다. 다만 술자리에서 내가 정령사라고 말하자, 파비안이 깜짝 놀랐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희귀한 인종이었다. “정말인가? 아니,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닐세. 하지만, 정말로 정령사인가?” “물론입니다. 잠깐만 보여드리지요…….” 내가 주위에 보이지 않게 품속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냈다. 최하급 정령이었다. 나는 직업을 위장하기 위하여 던전에서 실프 몇 마리를 데려왔다. 지금도 내가 입은 옷속에서 두 마리의 실프가 나무늘보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 꺄아? 실프가 내 손바닥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어디에요, 주인님?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디라고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므로 나는 그냥 녀석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었다. ─ 끼하, 꺄아아아~. 정령이 내 손바닥을 붙잡고 뺨을 부비적거렸다. 귀여워라! 마왕의 신체는 거의 대부분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나 농도가 짙은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정령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다. 우리 모습을 보며 파비안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저, 정말이로군……정말 정령이야.” 그는 턱이 아예 벌어져 있었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재빨리 실프를 품안에 집어 넣었다. 조금 더 놀아주고 싶었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우리 귀염둥이, 이번에 모험자들 싸그리 죽여버린 다음에 느긋하게 놀아줄게! 조금만 기다리렴. “어떻습니까? 제 말이 믿음직스러운지요.” “아, 아아. 당연하네. 이렇게 증거물을 보여주었는데 믿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신이시여, 내 평생 정령사를 보기는 또 처음이네.” 파비안이 멍하게 맥주잔에 입술을 갖다댔다. 빈 맥주잔이었다. 그제서야 자기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닫고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들과 같은 인재를 찾아내다니, 내 안목이 아주 썩어빠지지는 않은 모양이야. 이번 모험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드는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맥주를 새로 시켜서 가볍게 건배했다. 믿을 만한 동료를 고르라고 있는 안목이 마왕을 골랐다면 과연 그 안목은 대단한 것일지, 참혹스러운 것일지. 그것이 궁금했다. 아무튼 엄청난 안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겠지……. * * * 이튿날, 우리는 도시를 떠났다. 파비안은 그동안 정말로 준비를 많이 해왔는지 마왕성으로 향하는 지도까지 갖고 있었다. “길 잃을 걱정은 하지 말게, 친구들.” 우리집에 가는 길을 생뚱맞게 다른 사람한테 안내받는 격이었다. 우스웠지만 제레미와 나는 꽤나 먼 도시에서 여행온 모험자로 위장하고 있었다. 잠자코 파비안의 안내를 받았다. 중간에 마을 몇 군데를 들리며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섯 개의 언덕, 그 위에 세워진 여섯 개의 마을. 타지의 인간은 전혀 모르겠지만 이곳이야말로 내가 통치자로 군림하는 소왕국이었다. 세금은 전면적으로 무료. 토지를 배분 받은 가구에만 일시적으로 3할의 세율을 요구하며, 복종의 대가로써 몬스터들을 막아주는……농민들의 천국. 이곳은 때 아닌 모험자들의 격류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아이고, 나리! 그건 저희 집안의 씨암탉입니다!” “아 글쎄, 돈을 주고 사겠다는데 왜 난리야.” 모험자 무리가 푼돈을 얹어주며 가정의 재산을 약탈했다. 겨우 동화 한두 닢에 씨암탉을 빼앗기게 생긴 농민은 울상을 지었지만 차마 대들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만 지금 모험자가 서른 명 가까이 활개치고 있었다. “값이 너무 헐어? 아니면 댁네 따님을 하룻밤 빌려주든지.”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충분합니다.” 농민이 동전을 꾸욱 쥐면서 고개를 숙였다. 모험자들은 장난스럽게 농민의 어깨를 치고 떠나갔다. 오늘 그들의 저녁 메뉴는 닭고기 스프이겠지. 차남과 삼남이 독립하면서 각 마을은 인구가 크게 줄었다. 마흔 명밖에 살지 않는 개척마을도 있었고, 많아봤자 아흔 명을 넘기지 못했다. 영지민들은 숫자의 폭력에 굴복했다. 하물며 상대측은 비록 고블린뿐일지라도 평생 칼을 잡고 놀아난 건달패였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자경단원이 나서야 했다. 그리고 내 영지의 자경단은 지난 번의 리프 사건 때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 “쯧, 분위기가 영 좋지 않군. 다른 마을에 가보세.” 파비안이 혀를 찼다. 우리는 옆마을로 갔다. 하지만 그곳도 무법지대가 되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퀼리노, 카피톨리노, 아벤티노, 첼리오……어느 곳이나 모험자로 붐비었다. 여섯 마을 전부 외지인들의 등쌀에 신음하고 있었다. “젠장, 무슨 쌩건달밖에 안 모였군! 내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애송이들.” 졸지에 반나절 동안 나의 영지를 순례해버린 파비안은 어처구니가 없어져 소리쳤다. 그가 가래침을 카악 하고 땅바닥에 내뱉었다. “저런 새끼들 때문에 사람들이 모험자를 부랑자로 여기는 거야! 도리도 도의도 없는 것들, 지들이 이쪽 업계에 흙탕물을 쏟아붓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여관이 있는 마을도 없습니다. 노숙이라도 해야겠군요.”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날 제대로 쉬어두지 않는 건 어리석은 짓일세.” 파비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하는 수밖에.” “흠. 그래서야 다른 모험자 무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나를 뭘로 보는 것인가? 제대로 숙박비를 지불할 것이야. 내일 아침, 마을 입구에서 보세.” 파비안은 툴툴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에게는 미안하게도 제레미와 나는 숙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마을 어귀로 걸어갔다. 일찍이 사냥꾼의 집이었던 그곳은 지금은 촌장집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방문을 두들겼다. 문 너머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아아! 모험자라면 냉큼 꺼지고, 마을사람이라면 더 꺼져버리라구! 난 너희한테 집을 내줄 생각이 없을뿐더러 너희 집에서 모험자를 쫒아낼 생각은 더 없으니까!” 내가 키득 웃었다. “파르시, 나다. 그대의 자랑스러운 주인님이다.” “어이구야!” 건물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영지 최고의 노안을 가진 파르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느라 불알이 쪼그라들 뻔했수다, 전하!” “겨우 며칠 지났다고 성화인가.” “그 며칠 동안 마을들이 뒤집어져도 열 번은 뒤집어졌소. 얼른 들어오소.” 파르시에게 안내를 받아 들어가며 내가 물었다. “그래, 모험자 놈들의 행패에 영지민들이 불만을 좀 가지던가?” “조금? 지금 조금이라고 하셨소? 말도 하지 맙시다. 이대로 당하느니 차라리 죽더라도 저놈들 눈꾸녕에 불알을 쑤셔넣고 죽자, 하고 소리치는 판국이라오.” “요컨대.” 내가 자리에 앉으면서 웃었다. “일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로군.” 그러자 파르시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렇수다. 빌어먹을, 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흘러가고 있소외다.”   00215 D급 모험대 =========================================================================                        여섯 마을의 촌장 중에서 파르시만은 내 계획을 알고 있었다. 먼저 모험대들을 잔뜩 불러모은다. 외지에서 온 깡패들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난동을 부린다. 자경단원이 부족한 마을들로서는 불합리한 행패에도 견뎌야 한다. 자기들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주민들은 누가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는가 살펴본다. 그리고 영주, 마왕 단탈리안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촌장들이 자네한테 뭐라 말하던가?” “말도 하지 마쇼. 마왕 전하께 말씀드려보라, 안 된다고 대답하면 어디 부탁이라도 해봐라……으이구. 지겨워서 혼났소.” 파르시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눈가에서 피곤한 기색이 줄줄 묻어나왔다. 대외적으로 파르시는 내 측근이라 알려져 있었다. 장수를 쓰러트리려면 먼저 말을 쏘라고, 촌장들은 파르시에게 먼저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었다. 어디 촌장뿐이었겠는가. 각 마을에서 행사 깨나 하신다는 지주――물론 이들은 모험대에겐 최고의 봉으로 보이기 마련이었고, 가장 많이 약탈당하고 있었다――들이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멀다며 파르시의 집을 들락거렸고, 일반 주민들도 우리 마왕 전하께 제발 말씀 좀 전해달라고 상청했다. “아, 나도 별 도리가 없다 계속 말하는데도 귓구녕을 똥구녕으로 알아듣지 않겠소?” “그래.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쩌냐? 앞으로는 더 빡세게 고생할 것 같은걸. 내가 말이야, 네 녀석 고생하는 것 조금 덜어준답시고 프랑크에서 인재들을 카드 뽑듯이 화끈하게 발탁하려 했는데…… 앙리에타한테 처참히 발리는 바람에 걔네 근처에도 못 간단다. 하하. 인재등용이 막 게임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 그래도 내가 아예 못난이는 아니다. 키워먹을 녀석들은 데려왔다. “이번에 내가 데려온 데이지와 루크는 만나보았느냐?” “……꼬맹이 남매 말이우? 그야 직접 부모한테 데려다줬으니 알지.” “마을에서 공동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걔네를 대동해라.” 데이지는 물론이고 루트도 머리가 좋았다. 한 달 정도 제레미가 가정교사가 되어 가르쳤을 뿐인데 프랑크어 문자를 익혔고, 고대제국어에도 훌륭하게 입문했다. 조만간 합스부르크어에도 능통하겠지. 하지만 파르시는 미덥지 못한 눈치였다. “얼라를 데리고 뭘 하라는 얘기요?” “그 녀석들을 집사와 시종으로 키워볼 요량이다. 나를 대신해서 마을들과 접혹하게 되겠지.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마을의 생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흐음.” 뭐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하고 파르시가 말했다. “헌데 그 남매에서 여동생인 아해가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더이다. 내 참, 이런 얘기를 전하께 해도 되는지 모르겠소만소.” “음? 무슨 일이 있었냐.” “걔네를 우리집에서 하룻밤 재웠수다. 야밤에 똥이 마려운지 사내아이가 바깥에 나가는 것 아니겠소? 소인은 잠에서 깼수다. 원래 밤잠이 얕아서 누가 좀만 움직이면 바로 깨거든.” 파르시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데 묘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아니겠소? 처음에는 잠결에 귀신소리가 들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우. 귀 기울여서 자알 들어보니까 이게 여자애가 누운 쪽에서 들려오고 있거든. 글쎄, 깜짝 놀랐지 뭐요. 어린 년이 자위를 하고 있었소!” “…….” 나는 침묵했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흘렀다. “자, 잘못 들었겠지.” “내 귀가 제아무리 병신이어도 자위질하는 소리를 헷갈릴까봐? 어우, 하여간 아직 보지에 털도 안 났을 것이 시덥지않게 색기는 있어 가지고 숨결을 하아하아 내뱉는데……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어디 손님집에서 그딴 짓거리를 하는지, 원.” 파르시가 혀를 찼다. “전하께서 아해들을 키우신다니 말씀드리는 거요. 그거 때문에 소인이 선입견이 생겨버렸으니까. 언제 전하가 한번 단단하게 예의범절을 교육시켜주시면 감사하겠수다. 그런 변태짓을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소외까?” “……아아. 네 말이 맞다. 단단히 일러두마.” 녀석에게 변태짓을 교육시키고 강요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다, 파르시여. 그나저나 루크, 그놈이 문제로군! 야밤에 밖에 나가서 수음까지 하는 걸 보건대, 슬라임 오나홀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이 분명하다. 열한 살 소년은 슬라임의 촉감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오나홀에 새겨진 주름과 주름이 사실은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오빠의 왕성한 성욕 때문에 졸지에 변태로 오해받은 데이지한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그럼 촌장들에게 슬슬 회답을 돌려줄 때가 되었겠군.”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파르시는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정 걸린 숫말처럼 거시기가 탱탱 불어오른 격이니 전하께서 당장이라도 일로 모이라 하시면 모일 것이오.” “나의 입장은 명확하고 간결하다. 법령(法令)을 받아들이라.” 마을들과 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본질적으로 하나뿐이었다. 몬스터로부터 마을들을 지켜줄 테니 나를 통치자로 인정하라. 영주인 나는 고블린 등의 몬스터를 통제할 의무가 생긴다. 영주민인 마을사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의무, 개간을 신고할 의무 등이 생긴다. ――계약의 어느 부분에도 ‘인간들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겠다’라는 구절은 없다. 모험대가 방약무인하게 마을을 휘젓는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모험자는 몬스터가 아니다. 몬스터가 아닌 인간종이 마을을 약탈하든, 방화하든, 심지어 학살하든, 마왕 단탈리안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내가 말했다. “정확하게 전달하라. 이번 사태는 계약 이외의 사항이라고. 마왕이란 본디 마물을 다스리는 자, 마물이 아닌 인간종의 침입을 어찌 통제하겠는고. 인간의 일은 인간인 그대들이 알아서 해야 할 터.” 그렇지 않아도 마을들은 두 번이나 나를 배신했다. 첫 번째, 리프의 모험대가 들이닥쳤을 무렵. 이때 배신하지 않고 내 편에 붙은 마을만이 생존했다. 그들은 내가 배신자한테 어떻게 보복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행여라도 이번 사태에 직면하여 ‘차라리 모험대와 합심해서 마왕성의 재화를 나눠갖자!’라는 주장은 나오지 않으리라. 두 번째, 촌장들이 제멋대로 세금을 착복했을 무렵. 나는 이것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고 넘어갔다. 마을사람들도 그걸 이해하고 있었다. 염치가 있으면 차마 ‘공짜로 모험대를 쫓아내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못하겠지. 나와 영지민 사이에 남은 해결책은 딱 하나. 비즈니스 거래뿐이었다. “만약 그대들이 인간의 일 또한 본인에게 맡기겠다 한다면……본인 역시 왕이 된 자로서 왕의 방식으로 그대들을 통치해야 마땅하다. 율법에 충실하라. 법률을 어겼을 경우에는 다른 마을에 가서 원로들의 재판을 받으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완전무결한 보호를 보장해주는 대가이다.” 파르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로 전하겠소, 나으리.” 이곳 농민들은 보수적이므로 새로운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농민들이 새로운 정책을 '대가성이 있는 거래품목'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했다. 단지 재판을 다른 마을에서 받는다고 약속하면 어머나, 자그마치 마왕 전하께서 보호를 약속해주신다고 한다. 이런 대박 거래가 다 있나! 세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니다. 사병이 되어 충성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 다른 마을의 유력자한테 재판을 받으면 그만이다……. 공짜나 다름없는 거래라고 생각하겠지. 실상은 다르다. 마을주민은 자체적으로 사법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들이닥친 모험대의 횡포에 주민들이 사법권과 같은 정치학적 개념에 신경을 기울일 리 만무. 나는 보수성이라는 질병에다가 모험대라는 독을 극약처방한 것이었다. 병이 낫는 도중에 영지민들은 재산을 약탈당한다. 아마 모험자에게 딸이 강간당한 집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적군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영지민에게도 이 따위 극악무도한 수작을 부린다……. 암군을 뛰어넘어 폭군. 아니, 간군(奸君)이라 표현해야 알맞겠지.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군주가 되라고 말했거늘 나는 이런 방식의 통치법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파르시. 네놈도 꽤나 능글맞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연기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나는 파르시라는 인물을 좋아할 자신이 있었다. 전자라면 그 맹목적인 순진함에, 후자라면 맹수와 같은 야비함에. 둘 모두 내가 동경하는 면모였다. “모름지기 촌장이란 촌민의 재산과 법도를 지켜주어야 하는 자리 아니더냐. 그대는 본분을 망각하고 나에게 충성한 셈이다. 촌민에 대한 의무와 군주에 대한 충성, 그 사이에서 너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째서인가?” 내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촌민보다 내 쪽에 가치가 있다고 여겼느냐? 촌장이기 이전에 나의 총신이고자 했느냐?” “…….” “걱정하지 마라, 파르시. 나는 너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야. 너는 항상 나에게 충실했다. 단지 궁금하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의 본질이 무엇인지. 부디 솔직하게 말해다오.” 파르시의 낯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뭐, 솔직히 마왕 전하에게 충성심 같은 것은 없소. 소인은 리프의 모험대에 붙지도 않았고, 촌장들이 지랄할 때 앞장서서 걔네를 처치했지. 꿀리는 게 하나도 없다는 소리요외다. 다만…….” “다만?” “예전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말이오.” 나지막한 목소리. 청년인 것 같기도 하고, 장년인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인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억나시오? 소인은 그때 아비를 잃어서 막 촌장이 되어버린 참이었수. 다른 지주가 촌장을 대행할 수도 있었는데 리프 그 새끼가 무서워서 시뻘겋게 어린 소인한테 떠맡겼소.” “아아, 기억한다.” 파르시는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무례했다. 무례하지만 말에 조리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면서도 결코 상대방인 나의 입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치감각을 타고난 녀석이었다. “소인의 아비가 왜 죽었는지도 기억하시우?” “……리프가 자기 모험대에 협력하라고 말했는데 거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 기억하고 있다마는.” “정확하외다.” 파르시가 말했다. “사실은 좀 더 복잡하오. 내 아비는 아예 마을주민을 이끌고 리프 그놈을 습격하려고 했소. 음. 마을에 그놈이 들어오는 즉시 맞이하는 척하다 단번에 처치할 계획이었지.” “호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들만큼이나 호쾌한 양반이 아닌가. “예정대로 모험대는 마을 깊숙하게 들어왔소. 아비는 큰소리로 지시했지. 공격하라! 공격하라!” “훌륭하군. 어찌되었는가?” “아무 일도 없었소.” 파르시가 낄낄 웃었다. “마을 놈들이 막상 모험대를 두 눈으로 보니까 겁을 먹어서 말이외다. 아비가 명령을 내렸는데도 움직이지 않았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 아비 혼자서 스무 명의 모험자 앞에서 꽥꽥 소리친 꼴이었수다.” “…….” “리프 그놈이 눈치 하나는 귀신처럼 빠르더이다.” 상황을 파악한 리프는 곧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촌민들이 배신한 것에 격앙한 파르시의 아비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도끼날에 머리가 장작처럼 쪼개졌다. 파르시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파르시이기에. 촌장의 의무라는 것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있었겠지. “……그런가.” 파르시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랬소.”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었다. 거기에 불을 지펴 파르시에게 건네주었다. 파르시는 말없이 담뱃대를 받아서 한 모금 길게 내뿜었다. 조용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러갔다. 그는 다시 나에게 담뱃대를 넘겨주었고, 나 역시 한 모금을 빨아 공기에 올려보냈다. 그것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 공양하는 행위임을 파르시도 나도 알고 있었다. 세상에 상처 하나 없는 인간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가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파르시 또한 그랬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00216 D급 모험대 =========================================================================                        나는 담배연기를 올려다보았다. “행복한 인간들의 모습이란 대체로 비슷하나, 불행한 인간들은 제각기 천차만별이다……어느 현자가 그렇게 말했다지.”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저 머리에 떠올랐을 뿐이다. 수 년 전에 보고 여태껏 한번도 떠오른 적 없는 구절인데 말이지. 사람의 기억은 오묘한 물건이로군.” 언제였던가.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에서 들었던가. 고작 몇 년 전에 불과한데, 어째서인지 까마득하게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분명히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의 첫 부분에 써둔 구절이었다. 그때는 아무런 감명 없이 읽고 넘어갔던, 흰 종이에 까만 글씨에 불과했을 문장이었는데 왜 지금 떠올랐을까. 내 주변에 어디가 꼭 하나씩 부러진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마족과 인간의 혼혈인 라피스, 가문에서 노예로 팔아넘겨진 라우라, 어린 시절부터 암살자의 삶을 강요받은 제레미……아버지가 죽고 억지로 촌장이 되어버린 파르시까지. 나의 가신(家臣)이라 불릴 만한 애들은 전부 꼬락서니가 이러했다. 파르시는 촌장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 제레미는 물론이고, 라우라 역시 자발적으로 성노예가 되지 않았다. 라피스도 어디 혼혈로 태어나기를 원했겠는가. 그들은 모두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불행해지도록 강요받았다. 불합리하지 않은가. “…….” 파르시의 집에서 그날밤을 지새웠다. 나는 며칠이고 잠을 자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므로, 창가에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며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했기에 불행해진다. 이것은 괜찮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뉘우칠 수도 있고,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비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행복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불행해진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뉘우칠 것도 없고 용서를 구할 것도 없다. 잘못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세상이다. 즉, 그들에게는 세상에 복수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불합리하게 불행을 강요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불합리함을 강요할 차례이다. 우리는 근본부터 악의로 뭉친 작자이며, 다름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악의를 허락받았다. 나는 마왕이다. 왕은 신민의 염원을 대행하는 자. 마왕으로서 나는 가신들의 복수를 대행해준다. 무차별적인 복수를. ‘바르바토스, 그게 나의 왕도(王道)이다.’ 모든 마족의 염원을 이루어주겠다는 네 왕도에 비해서는 한없이 더럽겠지.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런 방법밖에 없다. 너라면 이해해줄까, 긍지 높은 소녀여. 밤이 조용하게 흘러갔다. * * * “여어, 형씨. 간밤에는 잘 잤는가?” 다음날 아침에 파비안과 합류했다. 마을 입구에는 파비안뿐만 아니라 스무 명의 모험자들이 시끌벅적하게 요란을 떨고 있었다. 그들 모두 단탈리안 마왕성에 쳐들어가려고 도시에서 온 모험대였다. “다행히 잘 곳을 구했습니다. 파비안 씨는 잘 주무셨습니까?” “젠장, 숙박비를 왕창 주었는데도 마굿간에서 잤네. 여기 마을사람들은 일단 모험자라면 이빨부터 갈고 있더구만.” 파비안이 대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새 짚단을 이불로 얻었지. 그럭저럭 괜찮았어. 구름을 이불로 삼아 잠드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그런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군요. 무슨 약속이라도 잡힌 겁니까?”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파비안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형씨는 규모가 큰 모험에 가담해본 적이 없는가?” “예. 주로 5인 모험대와 10인 모험대를 짜서 다녔습니다.” “아하, 그렇군. 그럼 첫경험인가.” 파비안이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일세. 백 명 이상의 모험자가 모였을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봐보게나.” 잠시 뒤, 누가 뭐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수십 명의 모험자가 움직였다. 한 모험대가 앞장서서 나가자 다른 이들이 천천히 뒤따랐다. 나는 제레미와 고대제국어로 잡담을 나누면서 걸어갔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우리가 머문 마을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왼쪽 오른쪽에 우리들처럼 수십 명 단위의 모험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리들이 모이자 모험자의 숫자는 스무 명에서 단숨에 쉰 명, 백 명으로 불어났다. “호오.” 이윽고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 모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얼핏 어림잡아도 백오십 명은 되지 않을까? 진풍경에 내가 놀라워하자 옆에서 파비안이 말했다. “이번처럼 모험대가 왕창 모이면 말이지, 일정한 시간대에 모여서 함께 들어간다네. 딱히 약속하고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지.” “왜 그렇습니까?” “혼자 들어갔을 때보다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거든.”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성에 무슨 마물이 살고 함정이 있는지 모르잖는가. 나 대신 다른 모험대가 함정에 걸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뭐, 솔직히 말해서 희생양일세.” 과연.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정예군처럼 통일된 움직임을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다른 인간이 미끼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다. 게임에는 주인공 일행 위주의 소규모 모험대밖에 등장하지 않아서 몰랐다. “먼저 들어갈수록 불리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나중에 들어가려고 할 것 같습니다만.” “껄껄. 맞는 말이지만, 나중에 들어가면 그만큼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돼.” 빨리 들어가면 위험부담이 크다. 대신에 보상도 있다. 그런 얘기인가. “마왕성에는 마나가 넘쳐흐르지. 그런 마나를 섭취하며 살아가는 마물……가죽은 질기고 탄탄하여 상인한테 팔아넘기고, 뼈는 마법길드에 팔아넘길 수 있어. 전부 돈일세.” “많이 벌고 싶다면 먼저 마왕성에 들어가되, 안전을 우선한다면 뒤늦게 들어가라…….” 파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 실력에 자신이 있는 무리가 제일 먼저 들어가기 마련이야. 자존심 싸움도 걸려 있다구? 어느 모험대가 다른 무리보다 빠르게 들어갔다, 혹은 다른 무리보다 뒤쳐졌다. 그런 소문은 곧바로 모험대의 평판으로 직결되네. 저것 봐.” 파비안이 던전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에 어중이떠중이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모험자들이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질 높은 가죽갑옷을 입었다. 가슴에 사슬갑옷까지 착용한 사람도 있었다. 최소한 D급 모험대이겠지. 그들은 서로 눈싸움을 벌이며 몸을 들썩거렸다. “돌풍의 데르달루스, 미친년 미리엘, 독사마귀 디트하르트……근방에 이름 깨나 날리는 양반은 죄다 모였군. 전쟁질하러 빠져나간 애들 제외하면 그나마 쓸 만한 녀석들이지. 흠, 저 놈들 사이에 앙금이 쌓여도 보통 쌓인 게 아닐 텐데.” 아직 칼부림이 나지 않은 게 신기한걸, 하고 파비안이 태평하게 말했다. “뭐, 곧 있으면 결판이 날 걸세.” 그가 말한 대로였다. 덩치가 산처럼 거대한 모험자가 발을 움직였다. 그를 뒤따라 일단의 모험대가 차례차례 마왕성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자 신경전을 벌이던 모험자가 고개를 홱 돌려서 소리쳤다. “우리도 출발한다!” “정신 바싹 차려!” 한 명이 첫타자를 끊자 다음은 우르르 몰려갔다. 전방의 탐색꾼을 맡은 모험자들――보통 숲지기나 산지기, 즉 사냥꾼 출신이 맡는다――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미리 협조를 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적당히 타협하여 마치 탐색부대처럼 함께 움직였다. 파비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코를 씰룩거렸다. “흥. 데르달루스 녀석, 몸이 아주 달아올랐군. 저놈이 제일 먼저 죽을 줄 알았다니까.” “꼭 죽으라는 보장은 없지요.” “아아.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지. 안 그런가?” 파비안이 껄껄 웃었다. 우리 역시 인파에 떠밀려서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햇빛과 다르게 던전 안쪽은 마나를 머금은 마광석(魔光石)들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나 던전이 어두울까봐 횃불을 챙겨온 모험자들은 머쓱하게 되었다. 파비안도 횃불을 챙기고 있었는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기대한 것보다 마나가 풍족한걸. 적어도 횃불이 부족해서 돌아가는 일은 없겠어.” “좋은 일입니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네. 장점은 물론 빌어먹을 횃불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야, 씨발 새끼야! 거리 확보 안 해!?” 파비안이 설명하다가 뒤쪽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뒤를 바싹 쫓아오던 모험자 무리가 맞받아쳤다. 파비안과 그들은 한동안 쌍욕을 주고받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리를 벌렸다. “으이구. 너무 몰려 있으면 칼 휘두를 공간도 없어서 떼죽음이야, 떼죽음. 하여간 애송이들이 마음만 조급해서는……음, 어디까지 말했더라?” “마왕성에 마나가 풍족할 경우 어떤 단점이 있는지.” “아, 그래. 단점. 그거야 간단하지.” 파비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나가 풍족하면 풍족할수록 마물들이 많이 살지. 당연하지만 말일세. 우리 입장에서야 돈이 되는 사냥감이 넘쳐단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달리 말하자면, 반대로 우리쪽이 사냥감으로 전락할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거야.” 파비안이 씩 웃었다. 그때 전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쇳소리와 고함이 동굴벽에 부딪혀서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고블린이다!” 하고 소리쳤다. 먼저 들어간 무리가 처음으로 마물과 조우한 것 같았다. 소동은 금세 멎었다. 모험자들이 가볍게 고블린을 퇴치한 모양이었다. “별로 대단한 마물은 아니로군. 도망치자고 소리치는 녀석이 없어. 뭐, 아직 초입이니 당연하지만. 느낌이 좋군.” 그런 느낌으로 십 분 정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험대 무리가 줄어들었다. 몬스터에게 당한 것이 아니었다. 던전에서 갈림길이 나온 것이었다. 통로가 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모험대들은 각자가 바라는 대로 왼쪽이나 오른쪽, 또는 중앙을 골라잡아 뿔뿔이 흩어졌다. “……흐음.” 파비안이 갈래길 앞에서 멈추었다. 고민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을까. 파비안은 비교적 많은 모험대가 선택한 오른쪽 길로 빠져나갔다. 잠시 뒤에 또 갈래길이 나왔다. 이번에는 갈래가 두 개였다. 다시 갈래길이 나오자 모험자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들은 몸집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했으나, 오십 명 이상의 사람이 몰려들어가기에는 통로가 좁아져 있었다. “…….” 모험자들이 또 한 번 나뉘었다. 우리는 오른길에 들어갔다. 비교적 뒤늦게 출발한 우리 모험대는 앞서가던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십 분쯤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모험자들이 완전히 멈춰섰다. 백오십 명에서 출발한 모험자들은 어느새 스무 명 가량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들은 한곳에 멈추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중얼거렸다. “……이건 조금 불안하군.” 그들 앞에는 다름 아니라 또 한번의 갈림길이 놓였다. 아까 전보다 조금 더 좁아진 통로로서. 여기서 두 쪽으로 갈라지면 스무 명이 열 명이 되어버린다. 평범한 소규모 모험대 수준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숫자로 인해서 자신감을 얻었던 모험자들이 그런 사태를 꺼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들 머뭇거리는 가운데 파비안이 모험자들에게 말했다. “이보게들. 여기서는 힘을 합치는 게 어떤가? 조금 무리해서라도 한쪽 통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네마는.” 모험자들도 불안했는지 파비안에게 동의했다. 사람들은 서로 간에 다소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오른쪽 통로에 들어갔다.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내 새로운 마왕성의 '베타 테스트'임을 전혀 모른 채로.   00217 D급 모험대 =========================================================================                        * * * 군신(軍神). 일찍이 그리 불리운 영웅들이 있었다. 진나라의 백기는 한평생 백오십만 명의 넘는 적병을 학살했다. 한신은 이만의 오합지졸로 십만 이상의 군대를 섬멸시켜 적국을 멸망시켰다. 군신이란, 그처럼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자였다. “고블린 척후병이 적을 발견했군.” 라우라가 몸을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군신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자는 바로 소녀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사르데냐 왕국의 공작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개 성노예로 전락하나, 약 십 년 동안 절치부심한 끝에 자신의 주인을 직접 참살한다. 이후에 안목이 탁월한 앙리에타 여왕한테 발탁. 여왕과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군의 수뇌부로 올라간다. 일견 낙하산 인사가 분명하기에 여왕의 신하들은 라우라를 무시한다. 그러나 첫 출진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이만의 병력으로 합스부르크군 육만을 격파. 항상 적군보다 열세인 병력을 갖고도 압도적으로 승리하기 시작한다. 용사만 없었더라면 라우라는 불패의 장군으로 남았겠지. 전략을 전술로 깨부수고, 결투로 전술을 깨부수는 용사. 악몽과 같은 인간병기만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대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아무도 모르지만, 바로 그 용사가 현재는 단탈리안의 보살핌 아래에 들어갔다. “지금부터 모험자 무리를 각개격파한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막아설 인물은 이제 없었다. 그녀는 잠옷처럼 얇은 천옷을 입고 있었다. 입었다기보다 걸쳤다, 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했다. 새하얀 천옷에 몸이 가려진 부분보다 훤하게 드러난 부분이 많았다. 열일곱 살에서 열여덟 살이 되어가는 소녀의 몸은 막 피어오르는 백화(白花)처럼 눈부셨다. 단탈리안이 부재하는 몇 달 동안에도 이따금 모험자가 쳐들어왔다. 그때마다 라우라는 던전에 이주하기 시작한 고블린들을 통솔하여 가볍게 칩입자를 물리쳤다. 동굴바닥의 시체가 되어버린 모험자가 약 마흔 명. 마흔 명의 두개골은 라우라가 따로 보관하여 마왕방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소녀가 지니기에는 적이 끔찍한 악취미였으나, 라우라는 한가할 때면 백골들을 걸레로 닦곤 했다. 모험자들은 두 가지 진실을 몰랐다. 첫 번째, 최하급 마왕성이라는 판정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였다. 두 번째, 그동안 간간히 침입했던 모험자는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싸늘하게 죽었으며 그렇기에 단탈리안 마왕성의 등급이 올라갔다고 보고할 수 없었다. 무지의 대가로써, 이제부터 라우라의 개인소장품에는 무려 두개골 백오십 개가 추가될 예정이었다. “블링아. 오늘도 잘 부탁한다.” ─ 케르륵. 마왕 단탈리안의 첫 번째 마물, 하급 고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블린은 라우라와 몬스터 병사들 사이에서 전달자 역할을 담당했다. 라우라가 말했다. “먼저 알파 31구역에 들어온 모험자부터 격퇴한다. 고블린 제3소대로 막아서라. 그후, 알파 11구역까지 후퇴하여 매복조와 함께 기습하도록.” ─ 케륵. 블링이가 척, 하고 군례를 올렸다. 블링이는 곧바로 마법수정구에 대고 명령을 하달했다. 탁자에는 마법수정구 열여덟 개가 줄지어서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수정구에선 끊임없이 상황보고가 이루어졌고, 라우라는 잠자코 앉아서 머릿속으로 대국을 그렸다. 이곳이 라우라의 사령부였다. 그녀는 마왕방 입구에 앉아서 던전 전체의 병력을 통제하고 있었다.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하는 단점. 인간과 몬스터의 언어 차이 때문에 즉각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단점. 두 가지의 크나큰 단점에도 불구하고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거침없이 명령했다. “알파 23구역의 모험자는 격퇴했을 것이다. 제2소대는 즉시 알파 12구역으로 이동하도록.” “감마 13구역에서 모험자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장기전을 노리는 모양이다만, 양쪽의 통로에서 기습하여 섬멸하라.” “베타 12구역에서 도망치는 모험자를 그대로 몰아세워라. 단, 전멸시키지 말고 추격만 하도록. 그들이 베타 24구역의 모험자와 조우하게 만드는 것이다. 혼란을 유발시킨다.” 명령이 하도 빠르게 이루어져서 블링이가 전달하는 데 애먹을 정도였다. 라우라 앞에 던전 지도가 놓여 있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전황이 명확하게 떠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 한켠에는 지도뿐만이 아니라 숫자도 적혀 있었다. 바로 생존한 모험자의 대략적인 숫자였다. 라우라가 거듭 명령할 때마다 숫자가 십 단위로 줄어들었다. 처음에 150으로 시작한 숫자는 140, 130, 110으로 천천히 감소했다. 라우라는 눈을 감은 채, 지극히 무신경하게 숫자를 뺐다. 무기물질적인 숫자에는 물론 모험자들의 비명과 핏물이 처절하게 묻어 있었다. 처음에 모험대는 자신만만했다. 일단 머릿수가 많았다. 기껏해야 최하급 판정을 받은 던전을 공략하는 데 충분하고 넘치는 병력이었다. 그들은 중간중간에 서너 마리씩 모여 있는 고블린을 처치하면서 “별 것 아니네!” 하고 웃었다. 좁다란 통로를 지나서 넓은 공터가 나왔을 때, 모험대는 “드디어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있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공터에 열댓 마리의 고블린이 모였다. 방심하지 않으면 아무런 피해없이 격퇴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작 오 분 정도 밀어붙였을 뿐인데도 고블린 무리가 줄행랑쳤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라!” “오늘이 바로 곗돈 타는 날이로구나!” 열 명으로 이루어진 모험대는 신나서 추격했다. 몬스터는 본능적으로 던전의 중심부로 도망친다. 저 녀석들을 쫓아가면 길 잃을 염려 없이 단번에 마왕방으로 갈 터였다. 몇 분의 추격전 끝에 모험대는 또 다른 공터에 들어섰다.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공터의 또 다른 통로에서 고블린이 쏟아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매복공격에 모험자들은 당황했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몇몇 인간이 창졸간에 당해 쓰러졌다. “도망치지 마! 그래봤자 고블린이다!” 모험대를 이끄는 자가 소리쳤다. 그들은 약간 어수룩하지만 방진을 꾸렸다. 인간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고블린으로서는 방벽을 뚫기에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고블린들 저편에서 화염구가 쏜살같이 달려들자, 모험자들은 크게 혼란에 빠졌다. “마, 마법?” “고블린이 마법을 쓴다!” 고블린들의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한 몬스터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왕 레벨 D급부터 고용할 수 있는 몬스터, <고블린 주술사>였다. 한 마리에 1000골드나 드는 병종이었으나 단탈리안은 아낌없이 거금을 쏟아부었다. “말도 안돼……최, 최하급 마왕성이라며!?” “탐색꾼들은 뭐한 거냐!” 투자의 효과는 확실했다. 몬스터에게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알자 모험자들의 사기가 대번에 내려갔다. 이 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존재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화염구밖에 쓸 수 없는 고블린 주술사였지만, 운이 좋지 않은 인간이 화염구에 직격당해 온몸에 불이 붙어버리자 모험자들은 전투의지가 꺾였다. 어차피 동료애 따위는 얼마 없는, 애송이 모험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주저없이 도망쳤다. “저 멍청이들이! 여기서 물러다면 다 죽어! 죽는다고!” 모험대장이 고레고레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고블린들을 추격하느라 체력이 소모되었다. 이 상태에서 도망쳐봤자 얼마나 더 뛰겠는가! 하물며 고블린은 몸집이 작은 대신에 지구력이 월등했다. 저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다가는 뒷덜미를 붙잡혀 학살당할 게 뻔했다! 차라리 죽기살기로 돌격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주술사를 처치해야만 했다. “――끄하아아악!” 모험대장은 그것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비명이었다. 화염구가 그를 덮쳤다. 모험대장은 곧바로 동굴바닥에 뒹굴었지만,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고 더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사, 살려줘! 죽기 싫어!” 대장이 동료들에게 손을 뻗었다. 손마저 불타고 있었다. 모험자들은 참혹한 광경에 안색이 새파래져서, 그마저 방진을 이루고 있던 자들까지 도망쳤다. 그들은 왔던 통로로 다시 달려나갔다. 대장이 끔찍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개――새끼들, 내가 너희한테! 얼마나――.” 이윽고 입과 목이 불타면서 비명은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었다. 잠시 뒤에 시체가 타는 소리만이 동굴에 울렸다. 케르륵! 케라륵! 고블린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패잔병을 뒤쫓았다. 공터에는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아 한동안 조용히 불타올랐다. 이와 같은 사태가 던전 곳곳에서 일어났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주의 깊게 모험자들을 던전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였고, 지형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기습했다. 매복에 당하고 연달아 고블린 주술사가 출현하자 모험대들은 형편없이 패주했다. 라우라는 매번 정확한 타이밍에 몬스터 부대들한테 명령했다. 총 열세 번의 기습공격에서 그녀는 한번도 타이밍을 착각하지 않았다. 고블린들은 마치 자기네가 손과 발이 되어 한 몸뚱어리의 지시를 받는 것처럼 느꼈고, 거의 아무 피해가 없이 모험자들을 참살했다. 보통 고블린 두세 마리가 죽을 때 모험자 한 명이 죽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전과였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오십 명인가.” 라우라의 머리에 떠오른 숫자는 어느새 50이 되어 있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백 명의 모험자를 주살한 것이었다. 반면, 고블린은 이백열 마리 중에 겨우 스무 마리쯤이 사상했다. 교전비율 1:5. 지극히 효율적으로 침입자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열여덟 살의 소녀는, 단지 기분 좋다는 듯이 기지개를 쭈욱 폈다. “흐으으응―.” 때마침 수정구에서 모험자들을 추가로 서른 명 도륙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제 주군께서 계시는 모험대만 남았군. 수고했다.” 라우라가 블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블링이는 라우라의 지시를 매번 전달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녀가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자 블링이는 피로를 잊고 갸르릉, 하고 고양이처럼 울었다. “하여간 주군도 이상하다. 소녀에게 전부 맡기면 될 것을, 뭐 굳이 직접 두 눈으로 봐야겠다면서 모험자 무리에 뛰어들었는지.” ─ 케르르, 르륵. “주군이 성실해서 그렇다고? 흠. 블링이 자네는 눈에 콩깎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군.” 라우라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블링이가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 ─ 카르르륵! “아, 알겠네. 알겠어. 주군은 성실한 분이다. 소녀가 잘못 말했다. 사과하지.” ─ 키르르르. 블링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라는 고블린의 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아직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할 정도는 아니었어도 상대방이 뭘 말하는지 대체로 알아들었다. 딱히 고블린어를 공부한 게 아니었다. 함께 지내다보니 저절로 터득한 것이었다. 그녀는 인류로서는 지극히 드물게도, 고블린어를 아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케르르, 케르라, 하고 고블린어로 몬스터를 지휘하게 되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알파 구역의 모든 소대는 알파 4구역으로 이동하라. 만약 도주에 성공한 모험자가 보일 경우 격살하도록. 베타의 전 부대는 베타 0구역으로 이동하고, 감마의 전 부대는 감마 11구역과 감마12구역에 매복하라.” 곧이어 열여덟 개의 수정구에서 일제히 케르륵! 하고 대답했다. 고블린 주술사들은 수정구를 통해 받은 명령대로 각자 소대를 통솔했다. 라우라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음, 법률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소녀에겐 이런 일이 어울린다. 라피스 언니가 소녀를 아무리 무시해본들 대저 신하란 제각기 쓰임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라피스 언니는 내정에. 소녀는 군정에. 훌륭한 역할부담이다.” 그녀가 혼잣말하며 턱끝을 끄덕거렸다. “소녀는 멍청하지 않다. 응, 소녀는 멍청하지 않아.” 장래에 군신, 또는 인류의 악몽이라 불릴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에게는 백오십 명의 험상궂은 모험자보다 단 한 명의 혼혈 서큐버스가 훨씬 더 무서웠다…….   ============================ 작품 후기 ============================   던전 어택의 플레이어 캐릭터에게는 '성욕'이라는 패러미터 수치가 있습니다. 이 수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올라가는데요, 적당히 풀어주지 않으면 전투에서 디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매혹'이나 '흥분'과 같은 상태이상에 걸릴 확률도 올라갑니다. 안 그래도 난이도 높은 게임인데 이런 디버프에 걸리면 꿈도 희망도 없으므로, 플레이어는 어떻게든 성욕도를 낮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게임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공략이 완료된 히로인이 없다는 것. 즉 플레이어는 '창관에 간다'라는 커멘드를 누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00218 D급 모험대 =========================================================================                        * * * 스무 명으로 불어난 모험대는 자연스럽게 파비안이 대장을 맡았다. 우리는 순조롭게 던전을 공략해갔다. 공략한다고 말하기에 약간 쑥스러운 구석도 있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해물은 기껏해야 고블린 서너 마리였다. 모험자들이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갈림길이 연속되어 당황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괜히 쫄았다”, “최하급 던전답다”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전부 어린 고블린이었어. 쯧쯧…….’ 인간은 몬스터의 나이를 잘 짐작해내지 못했다. 몬스터는 어릴 때부터 몸집이 금방 자라니까 더더욱 알아보기 힘든 것일지 몰랐다. 그렇지만 울음소리에서 미묘한 차이가 났다. 얼굴만 보아도 얘가 어른인지 어린애인지, 마왕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 대피명령을 듣지 못하고 미처 못 빠져나간 애들이겠지.’ 안타까웠다. 미궁의 벽 너머에는 몬스터가 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마왕성 일대에 거주하던 고블린이 죄다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평소에 던전 통로 너머의 빈 공간에서 살다가, 지금처럼 모험대가 침입했을 때 숨겨진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공짜로 마나가 풍부한 던전을 몬스터들에게 허락했다. 대신에 몬스터들에게 거주지역마다 한 곳씩, 모험대로부터 방어해야만 하는 거점이 주어졌다. 던전에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해당 거점을 사수해야 했다. 인류의 국가로 따지자면 이른바 지방군……약간 변형된 둔전제라고 할까. 몬스터 부락민들이 거점을 방어하며, 라우라가 이끄는 정예 몬스터 부대가 이들을 지원한다. 마왕인 내 입장에서는 그저 거주공간을 내주고 저절로 방어병력이 생기는 셈이었다. 손해 볼 부분이 전혀 없다. 아직 어린 몬스터에겐 전투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하고 말해두었는데……어디에나 말썽꾸러기는 있었다. 꼬맹이 고블린들이 미궁 통로에서 놀다가 그만 대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모험대의 사냥감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구만.” 파비안이 여유롭게 말했다. “통로가 더 좁아지면 큰일이겠다 싶었는데 다행이야. 함정도 없고.” “어떤 함정이 있었으면 위험했겠습니까?” “응? 그렇군.” 파비안이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거미둥지 같은 게 있었다면 곤혹을 치루었겠지. 어느 마왕성은 동굴 천지에 거미와 박쥐밖에 없었네. 물소만큼 커다란 거미를 본 적 있는가? 그놈들이 동굴벽을 타면서 쉴 새 없이 공격해오니까 미칠 지경이었지.” “과연, 거미둥지입니까.” 나는 모험자들에게 '뭐가 없어서 다행인가?', '뭐가 위험했겠는가?' 하고 묻고 다녔다. 잡담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 나중에 써먹기 위해서였다. 게임에서 몬스터 거미 따위는 잡몹에 불과했다. 칼질 한방에 우수수 죽어나가니까 별로 효율적인 몬스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모험자들에게는 달랐다. 만약 지금처럼 직접 모험자 무리에 끼어서 돌아다녀보지 않았으면 깨닫지 못했으리라. 모험자들은 자기 지식을 뽐내며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았다. “갈림길 말고는 딱히 함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 사실 몬스터보다 함정이 가장 무섭다는 사람. “고블린밖에 없어서야 식은 죽 먹기이지!” 몬스터의 종류가 고정되어 있으면 맞춤형으로 공략하기도 쉽다는 사람. “마광석이 워낙 밝아서 시야를 확보하는 게 쉽구먼.” 게임에선 전혀 표현되지 않은 지점을 꼬집는 사람. “그렇군요. 아하, 그런 것까지.” 내가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베타 테스트 작업이었다. 거금을 주고 데려온 베타 테스터들은 내 기대에 응하여 훌륭하게 문제점을 지적해주었다. 모험자들은 부랑자 주제에 자존심 하나는 무척 강했고――원래 깡패들일수록 자존심을 따지는 법이다――잘난 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단탈리안 마왕성은 여러모로 개선되게 생겼다. 음,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보고해주신 문제점은 오픈 서비스에서 모조리 반영될 것입니다. 모쪼록 오픈 서비스를 기대해주십시오.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슬슬 마왕방에 도착할 때가 되었군.” 파비안이 말했다. 던전에 들어온 지 대략 두 시간이 흘렀다. 어제와 그저께 탐색조가 던전을 돌아다녀본 결과, 어떤 경로를 이용하든 두 시간이면 마왕방에 도착한다며 보고했다고 한다. 그들은 실수 하나를 저질렀는데, 아직 고블린들이 미궁벽에서 뛰쳐나오지 않았을 때 던전을 탐색했다는 것이다. 하긴, 벽 너머에 몬스터의 부락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탐색조는 “딱 최하급 던전에 어울리는 곳”이라고 모험자들에게 보고해버렸다. 잘못된 정찰의 결과는 본대의 파멸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실을, 모험자들은 마지막 통로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깨달았다. 마왕방 앞마당. 너른 공터가 펼쳐진 그곳에서 모험자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광경을 목도했다. “……여자?” 그곳에는 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라우라였다. 던전에 웬 여자아이가 있는가, 모험자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더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여자애가 두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었다. 라우라는 인간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음? 아아. 드디어 왔는가.” 라우라가 이쪽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보란 듯이 하품했다. “나 참, 너무 지각하지 않았는가. 소녀는 기다리다 지쳐 그만 곯아떨어질 뻔했다. 그쪽 통로에는 아무런 부대도 지정해두지 않았건만 두 시간이 넘게 걸리다니! 대장이 누군지 몰라도 지독하게 조심스럽군.” “…….” 모험자들이 조용해졌다. 소녀의 목소리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평탄했다. 라우라 주변에는 수십 개의 머리통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단검을 익숙하게 놀려 머리통에서 피부를 벗겨내고 눈알 따위를 발라냈다. 이쪽을 향해 말하는 와중에도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툭, 하고 손질이 끝난 머리통을 라우라가 옆에 던졌다. 거기에는 이미 살점이 조금 달라붙은 두개골들이 야트막하게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까지 합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였던 물건’이 백 개가 넘어섰다. ‘아이고, 또 저 짓거리 하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우라는 내 던전에 오고나서 이상한 취향이 생겼다. 던전에 침입해온 자들을 전부 두개골로 만들어서 무슨 박물관처럼 전시하는 것이었다. 보기 흉측하니까 제발 하지 말라고 부탁했는데도 또 저런다. 으이구. 라우라가 오늘 날씨가 어떻다는 둥의 어조로 말했다. “심심하여서 그대들의 동료를 먼저 합장하고 있었다. 숙녀를 기다리게 하다니, 아무리 모험자가 부랑자 나부랭이로 불릴지라도 너무 예의가 없군.” “우, 우웨에엑!” 누군가가 토했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초보 모험자이겠지. 머리만 남은 시체가 뒹굴거렸다. 눈알, 혓바닥, 두피 가죽 등이 피범벅이 되어 흩어졌다. 전쟁터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속이 뒤집어지고도 남았다. 몇몇 베테랑 모험자만이 ‘저것’이 평범한 소녀가 아님을 깨닫고 창칼을 겨누었다. 그중에는 파비안도 섞여 있었다. “……네 년, 누구냐.” “흐음. 마드모아젤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것, 그것이 신사의 예법 아닌가?” 라우라가 눈쌀을 찌푸렸다. 파비안은 그녀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이 굳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라우라는 정말로 순전히 예의를 지키라고 말한 것이었다. 나와 다르게 라우라는 말솜씨로 상대방을 농락하는 취미가 없었다. “파비안, 모험자이다.” “소녀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라우라가 일어서서 인사했다. 마치 무도회에서 아가씨가 인사하듯이 치맛자락의 양끝을 잡아 공손하게 벌렸다. 옷 아래로 하얀 무릎이 드러났다. 파비안이 어리둥절해져 되물었다. “……귀족?” “파르마의 두 번째 공작영애다. 이미 멸망해버린 가문이니 신경 쓸 것은 없다.” “어째서 귀족영애께서 마왕성에 계신 것이오? 혹시 마왕한테 납치당한 거요?” “음? 납치?” 라우라가 작게 웃었다. 웃는 얼굴은 정말로 십 대 소녀처럼 환했다. “옛날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군. 마왕이 한낱 귀족영애를 납치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아니, 납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마는.” “납치당한 것이라면 우리가 보호해주겠소. 마왕이 시켜서 그딴 짓거리를 하는 것이라면 당장 그만두어도…….” “우둔하군. 그리 눈치가 없어서야 소녀에게 당할 수밖에.”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두개골을 발라내고 있었다. “소녀는 결코 타의로 인해 이곳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을 것을 스스로 결정했다. 오, 이번에는 깔끔하게 벗겨졌군. 역시 여성보다는 남성이 처리하기 더 쉽다.” “……시체에 그런 짓을 가하는 것도, 온전히 영애의 뜻이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되지 않는 취미이다.” “젠장. 이제보니 훼까닥 돌아버린 년이로군.” 파비안이 퉷,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애새끼야. 숙녀고 신사고 나발이고 고인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 갖다 팔았냐!” “이것이 소녀 나름대로 장례를 치루어주는 것이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두면 마물의 식사가 되거나 썩어서 문드러질 터. 두개골이라도 남기는 편이 고인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적어도 소녀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준다.” 라우라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파비안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졌다. “좆 까고 있네. 네 년은 시체를 모욕하고 있을 뿐이야.” “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고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마왕성에 침입한 것은 그대들 아닌가. 가만히 있는 이곳을 휘저어놓은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대들이다. 먼저 그쪽에서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쓰레기 인생’을 모욕한다고 해서 무에 큰 문제인지?” “으아아아악!” 한 모험자가 견디다 못해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갔다. 그는 도끼를 꼬나쥐고 힘껏 횡으로 내리쳤다. 소위 분노의 베기, 가장 강한 힘을 실어서 날리는 일격이었다. ─ 촤아아악! 그러나 모험자는 불과 몇 걸음을 남겨두고 목이 날아갔다. 라우라의 그림자에서 대검이 튀어나오더니 모험자를 사타구니에서 머리끝까지 정확히 두 쪽으로 갈랐다. 시체 조각이 힘없이 쓰러지자, 대검은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되돌아갔다. “흑기사여, 머리는 손상시키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라우라가 그림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러면 소장품에 추가할 수가 없다……! 대체로 자네들은 비효율적으로 인간을 살해한다. 이런 식으로 칼을 놀리면 날이 금방 상해버린다! 아아.” 그녀가 반쪽이 되어버린 시체를 안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시체의 상태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소녀를 보며, 모험자들은 공포에 스멀스멀 잠겼다. 방금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저 소녀는 무엇인가? “혹시나 물어보지. ……그 머리통들, 어디서 났나?” “물론 그대들과 함께 침입해서 들어온 자들이다. 솔직히 지나치게 약해서 김이 빠졌다. 백오십 명이나 된다기에 기대했거늘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더군.” 모험자들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라우라가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거기엔 호의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거 길가를 지나치다 어쩌다 마주치게 된 행인한테 미소를 건네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도망칠 수 있다만? 아, 스무 명은 조금 많은가. 그대들끼리 합의해서 다섯 명만 도주하도록 만들어라. 소녀는 나머지 열다섯 명만 잡겠다.” “……시체애호증의 여자애가 파수꾼을 맡은 마왕성이라니. 터무니없는 곳에 와버렸군. 전원, 나를 중심으로 방진을 짜라! 미친 년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모험자들이 파비안을 중심으로 대열을 이루었다. “구태여 벌주를 마시겠다니 어쩔 수 없군.” 라우라가 머리통을 아래에 내려두었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들었다. “마왕 단탈리안의 이름을 우습게 본 것을 후회하며 절명하라, 모험자들이여.” 내 눈앞에서 홀로그램이 번뜩거렸다. 『모험대 '파비안 모험대(임시)' 출현!』 『던전 제1층 보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적군을 요격합니다.』 『보스전에 돌입합니다!』   00219 D급 모험대 =========================================================================                        오, 보스전이 발생하니 따로 알림창이 떴다. 그뿐만이 아니라 『警告!』 하고 경고창이 새빨간 색깔로 떠오르면서 요란하게 껌뻑거렸다. 긴박감을 연출하려는 것인가. 어슴푸레한 동굴의 공동. 단탈리안이 머무르는 마왕방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서, 일찍이 공작가의 영애였던 소녀와 스무 명의 모험자가 서로 마주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불안해야 하는 쪽은 소녀이겠지. 하지만……. “으, 으으…….” 모험자들이 이빨을 악 물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시선에서 긴장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두개골을 수집하는 악취미, 방금 전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대검. 그것들이 모험자들의 사기를 낮추고 있었다. 반면에 소녀는 태연자약하고 여유로웠다. 여자아이 한 명에게 성인남성 스무 명이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파비안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설마 공작가의 영애 정도나 되는 아가씨가 마왕에게 가랑이를 벌리다니. 세상사도 요 지경이군.” “……?”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자 파비안이 낄낄 웃었다. “방금 거기 그림자에서 나온 마물 말이야. 아가씨 것이 아니지? 보나마나 단탈리안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내려준 포상이겠지. 대단하군, 아가씨. 얼마나 아양을 떨어댔지? 밤기술이 대단한가봐. 마왕을 녹일 정도이니.” “…….” “하긴 얼굴은 반반해. 대갈통에 든 정신은 썩어 문드러져 똥냄새가 나지만 말이야.” 라우라를 도발할 생각인가. 확실히 냉정한 병사만큼 두려운 적은 없다. 상대방의 머리를 뜨겁게 달구어서 오판하게 유도하는 것이 정석이다. “마왕의 좆탱이는 맛이 좋던가? 온 대륙이 마왕군과 싸우느라 축나는 와중에 네 년 혼자서 떡을 치니까 좋더냐? 네 년한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마왕을 암살하려 들었겠지. 적어도 혀를 깨물어 자살할 수 있었을 거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단순한 창녀 새끼라는 얘기다!” 파비안이 비웃었다. “우리가 쓰레기 인생이라면 네 년은 뭐냐? 인류의 배신자, 목숨만 살려주면 마왕이든 뭐든 아무한테나 씹을 팔아재끼는 년……그래, 쓰레기 이하의 쓰레기다. 적어도 우리는 마왕한테 후장을 대지는 않아.” “…….” 라우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났다는 걸 알았다. 라우라는 화나면 조용해지는 타입이었다. 도발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가?” “? 무슨 헛소리냐.” “자기 주제를 모르고 짖어대는 돼지이다.” 라우라가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다섯 명은 살려주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모험자들이 서둘러 방패를 들어올렸다. 무슨 공격이 온다, 그렇게 직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몇 초가 흘러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파비안이 히죽 웃었다. “어차피 네 년은 여기서 끝이다. 허장성세도 정도껏…….” 사방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십, 수백의 발걸음이 동굴바닥을 타고 울렸다. 몬스터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작게 메아리를 치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뭐, 뭐야!?” 모험자들이 정신없이 주위를 쳐다보았다. 고블린, 수없이 많은 고블린이 통로들에서 기어나오고 있었다. 눈치 빠른 모험자는 자기가 함정에 걸렸음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케르르륵. ─ 키륵, 키르르. 하지만 실패했다. 그들이 지나쳐온 통로에서도 고블린 무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모험자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어, 으?” 마치 콜로세움의 관중처럼 고블린들이 원형으로 모험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이윽고 대여섯 겹의 고블린 장벽이 생겨났다. 겨우 스무 명에 불과한 모험대로 돌파하기란 한없이 불가능하겠지. 고블린들은 이상하게도 얌전했다. 백오십 명의 모험자를 참살시킨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몬스터 전원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위엄에 굴복하고 있었다. 짐승의 본능에 취하여 제멋대로 달려드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었다. 지금, 소녀의 군권은 확실하게 성립되었다. “빌어먹을.” “시발, 뭐야……이게 뭐냐고.” 일찍이 마왕 이외에 몬스터들 위에 여기까지 군림한 인간은 없겠지. 모험자들은 욕지거리 이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욕도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아예 얼어붙어서 무기를 떨어트려버린 사람마저 있었다. “후.” 웃음소리가 들렸다. “후후, 쿠쿡…….” 몬스터로 이루어진 장성 너머에서 라우라가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상냥하고 따스한 웃음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오로지 상대를 모욕하고 능욕하기 위하여 전사들이 머금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삶이 여기서 끝이라고? 벌써 종막을 맞이한다고?” 라우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증발하고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라, 쓰레기! 소녀가, 마왕 단탈리안의 대리장군인 소녀가, 네놈들에게 사냥당할까보냐!” 그녀는 작은 몸집에 비해 놀랍도록 큰 목소리를 터트렸다. 사자후에 모험자들이 움찔거렸다. “네놈들이 사냥하는 것이 아니다. 아아, 다른 마왕성에서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여기는 바로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을 도륙하기 위해 지어진 사냥터. 소녀가 쓰레기 따위에게 사냥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우라가 칼날을 바로세웠다. “네놈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뼛속까지 각인시켜주마. 포상금에 눈이 멀어 감히 창끝을 들이댄 모험자들이여, 너희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여기서 살육된다.” 한 모험자가 무릎이 풀렸는지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일부러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우, 사, 살려주십쇼! 용서해주십시오!” “네 녀석!? 일어서, 당장 일어서라!” 파비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어차피 임시적으로 대장을 맡았을 뿐인 파비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력을 발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자 다른 모험자들도 속속들이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탐욕에……소인이, 탐욕에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무기를 놓아버렸다. 방패고 창이고 떨어지면서 요란하게 쇳소리를 냈다. 모험대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했다. 어느새 오직 세 명. 파비안과 제레미 그리고 나만이 동굴에서 무릎을 펴고 일어서 있었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는군.” 라우라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개새끼가 눈에 보인다만.” “…….” 파비안이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얼굴이 치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제레미와 나뿐이었다. 모험자들이 용서를 구하면서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시선으로 맹렬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얼른 꿇지 않고 뭐하는 거냐! 우리를 전부 죽여버릴 셈이냐! 하고. 혹여라도 나 때문에 라우라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라우라도 제법 하지 않는가. 재능은 있어도 이런 심리전에서는 아직 미숙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런. 역시 나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일천했다. 사자는 어려서도 사자였다. 그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 용사 앞에서도 꿋꿋하게 턱끝을 들어올린 여장부가 한낱 D급 모험대 따위를 압도하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정면. 라우라를 향해 일직선이었다. “저, 저런 미친놈!” “개자식, 뭐하는 짓거리야!” 등 뒤로 경악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마치 모세를 맞이한 홍해처럼 양옆으로 고블린들이 스르르 갈라지자, 경악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어? 어? 하고 모험자들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라우라 앞에 가서 멈추었다. 라우라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칭찬해주기를 바라는 애완견 같았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습니다, 라우라.” “음. 별 것 아니었다.” 라우라가 다소곳하게 말했다. 사실 말투만 다소곳했지 목소리에서 ‘나 잘했지! 나 잘했지!?’ 하는 진심이 술술 풍겨나오고 있었다. 라우라는 이런 면에서 영락없이 꼬맹이였다. 어쩌면 나를 주군이라기보다 일종의 아버지로 여기는 걸지도 모르겠다. “주군이야말로 고생했다. 모험자들에게 수준을 맞춰주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아, 이쪽이야말로 별 것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재밌었어요?” 옛날 인간이었을 무렵처럼 모험자 플레이어가 된 것 같아서 두근거렸다. 베타 테스트를 뛴 보람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라우라, 제가 없을 때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심리전도 능숙하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와도 맞먹을 것 같습니다.” “후후, 과찬이다. 소녀는 주군을 보고 배웠을 뿐이다.” 우리가 함께 키득거렸다. “저런.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할 소리를. 저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착실하여서 두개골을 수집하는 취미 따위 없습니다.” “애당초 주군은 조금 더 마왕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이건 실익을 겸비한 취미이다. 마왕방 앞에 두개골이 수천 개씩 쌓였다고 상상해봐라. 적군의 사기를 깎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사기를 저하시킨다라. 과연, 그런 의미도 있습니까…….”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광경을 뒤에서 모험자들은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참, 주군. 여성 모험자들은 별도로 포획해서 묶어놓았다.” “응? 그런 귀찮은 일을 왜 했습니까?” “성욕을 풀고 싶을 때 자유롭게 쓰라는 배려이다.” 에엑, 하고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성노예입니까? 라우라가 있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소녀가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다, 사시사철 발정기인 나의 주군이시여.” 라우라가 내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소녀는 라피스 언니가 조금은 담당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몇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지 않은가. 내일부터 주군이 어떻게 할지 눈에 선하다. 프랑크에서 여독이 쌓였으니 뭐니 하며 소녀를 질리도록 범할 생각이겠지?” “…….” 얘는 관심법을 쓰는 게 분명했다. 프랑크에서 도착하자마자 라우라의 권위와 마을의 전통, 두 개를 양립시려고 돌아다녔다. 솔직히 너무 열심히 일했다. 이번에 모험대만 격퇴하면 ‘저 덕분에 라우라의 체면이 살았습니다. 저는 보답을 바랍니다!’ 하고 라우라한테 앵겨붙을 생각이었는데……! 라우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자기 덕택에 마을 건이 무사히 넘어갔다면서, 이 은혜를 몸으로 갚으라는 식으로 말하겠지. 뻔하다.” “크윽……!” 전부 알아차리고 있었는가! 이래서 천재란 짜증난다! 큰일이었다. 여성 모험자가 예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험악하게 던전에서 뒹구느라 남자처럼 터프한 애들이었다. 라우라의 빛나는 미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는 서둘러 변명에 들어갔다. “라우라, 저는 그저 성욕에 고픈 짐승이 아닙니다. 제 상대가 라우라니까 흥분하는 거예요. 저에게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어요. 라우라가 아니면 안기 싫습니다.” “흐응? 주군이 그리 말씀해주니 기쁘군. 허나, 소녀한테 달콤하게 구애하는 것치고는 프랑크에서 꽤 화려하게 놀아난 것 같지 않은가.” 라우라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주군, 듣자하니 오페라에서 제법 재밌게 놀았다던데.” “제레미이이이!”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제레미를 향해 소리 질렀다. 도대체 언제 까발린 것인가! 제레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나. 저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네 년 아니면 여기서 누가 그걸 알고 있다고!” “글쎄요. 단탈리안 님의 양심이 몰래 속삭여준 것 아닐까요? 만약 단탈리안 님께 양심이란 게 남아 있다면 말이에요.” 제레미가 깔깔 웃었다. 제기랄, 세상에 믿을 신하 한 명 없었다. 라우라가 말했다. “결국 주군은 얼굴만 반반하면 아무나 붙잡고 박아댈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소녀도 보는 눈이 있다. 특별히 미모가 괜찮은 여자 모험자들만 살려두었으니, 주군의 하반신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저는……그게 아니라…….” “더 이상 변명할 필요없다. 소녀는 전부 이해한다.” 라우라가 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년의 아저씨나 지을 법한 미소였다. 이제 열여덟 살이 될 소녀한테 성생활을 위로받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뭐, 냐……!” 그때 모험자들이 무릎 꿇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웃기지 마! 도대체 뭐냔 말이다……!” 파비안이었다. 그는 방패와 검을 꾹 잡고 몸을 일으켰다. 파비안의 두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주군? 단탈리안? ……네 녀석이, 네가 마왕 단탈리안이었다는 거냐!” “오. 바로 그렇습니다, 파비안 씨.” 내가 히죽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제가 바로 전 마왕군 서열 제71위. 이면(異面)의 마왕. 월맹군 최고 참모이자 평원파의 간부. 혹은 소수의 마왕들이 별명으로 부르기를 '절름걸이', '능욕하는 자', '브루노의 학살자'. 마왕 단탈리안입니다.” 모험자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아. 여러분은 정말 잘해주셨어요. 물론 5,000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렇게 예상대로 움직여주시는지!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프랑크에서 당한 울분이 깔끔하게 씻겨졌습니다!”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 정말 진심으로 고마웠다. 앙리에타 여왕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한번에 해소되었다. 내 웃음소리에 감염되었는지 라우라와 제레미도 따라서 웃었다. 우리 세 명은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더 크게 웃어재꼈다. 모험자들은 다만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쳐다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크흐. 여러분께서 저희한테 이렇게 헌신해주셨으니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라우라, 여자 모험자들을 성노예로 삼는 데 동의하겠습니다. 그 대신 이들에 대한 처분을 저한테 맡겨주지 않겠습니까?” “흐으음.” 내가 아무리 주군이라도 이번 전투의 최대 공로자는 그녀였다. 당연히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라우라는 잠시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소녀와 주군을 모욕한 저들에게는 끔찍한 처벌이 주어져야 마땅하지만, 주군이 그리 말씀하니 받아들이겠다.” “오오, 고맙습니다.” 내가 모험자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아, 여러분. 살아남고 싶으시지요?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깡패짓을 하고 다니는 여러분이지만, 살고자 하는 욕망은 귀족이든 왕이든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욕망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분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기회?” “예. 이곳에서 살아서 도망칠 기회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직히 몇 시간이나마 같이 움직인 동료 아닙니까? 제가 또 인간의 정이란 것에 약해서.” 파비안이 묻는 말에 내가 대답했다. 모험자들의 눈빛에 초조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벌써부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무얼,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라. 이쪽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여러분은 서로 죽여주셔야겠습니다.” “뭐……?” “결투입니다. 검투사 모릅니까?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십시오. 마지막에 생존한 인간에 대해서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자, 시작하십시오.” 실로 나는 관대했다.   00220 D급 모험대 =========================================================================                        파비안이 눈을 부릅 떴다. 저런, 잘못하다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라우라가 좋아하겠군. 굳이 두개골로 만드는 데 눈을 손질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개새끼……!” “파비안 씨, 당신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사람이 저의 아버지가 견공이라고 추측해왔지요.” 내가 말했다. “실로 과감한 추측입니다. 단지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부디 파비안 씨가 그런 말을 하고도 죽지 않는, 최초의 생존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라우라도 제레미도 마찬가지였다. 폐에서 숨 대신에 웃음을 내보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우리 세 사람 모두 어딘가 중요한 부분, 아마도 사람에게 꽤나 중요한 부분이 망가져 있었다. “모험자 길드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그분……이름이 플뢰르라고 했던가요. 그분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럼 우선 여기서 살아남아야죠. 새신부가 시체랑 첫날밤을 보내서야 곤란합니다.” “씹어죽일 자식! 모든 신께 저주받아 뒈져라!” 오오, 기세가 죽지 않았다. 파비안은 단순히 모험자 나부랭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존심도 품고 있었다. 자존심이란 대체로 쓸모가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쓸모가 없지. “끄어억!?” 파비안이 분개하든 말든 배틀로얄은 시작했다. 한 모험자가 옆에 있는 동료를 단검으로 쑤셔박은 것이었다. 모험자들이 깜짝 놀라서 살인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짓이야!” “감히 동료를 배신하다니!” 하고 모험자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단검을 들고 살인자가 덜덜 떨었다. “원래 마왕성에 오고 싶지 않았어……일확천금할 기회라고, 당신들이 거짓말하지만 않았으면! 그, 그래. 너희가 잘못한 거야……나는 집에 밭이 있어……너희 같은 밑바닥 인생이랑, 차원이 달라!” “살인자 자식!” 다른 모험자가 달려들어 도끼로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쳤다. 살인자는 히이익,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단검을 치켜세웠지만 도끼를 막지 못했다. 도끼날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박살났다. 그것이 기점이 되었다. 모험자들은 방패와 창칼을 치켜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방패에 달린 징이 징을 후려치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파비안도 날 노려보는 것을 그만두고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혹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치고 싶다. 원초적인 욕망들이 칼날을 타고 이쪽 혹은 저쪽으로 맹렬하게 쏘아졌다. 내가 팔짱을 끼고 검투장을 관람하고 있자, 어디선가 요정들이 날아왔다. 요정 네 마리가 낑낑거리며 와인병을 들고 있었다. 다른 세 마리는 각각 포도주잔을 배달해왔다. 주인이 술이 고픈 것을 알아차리고 대령해온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우리 요정들이 세계에서 제일 착하다니까!” 와인병을 받아들고 요정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요정들이 꺄르르 웃었다. 우리는 포도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콜로세움을 구경했다. 싸움은 무척 격렬했다. 격렬한 만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에 그럭저럭 질이 괜찮은 포도주까지 곁들자 이만한 구경거리가 없었다. 그중에는 적극적으로 싸우는 모험자도 있었고, 동족을 살해하는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자도 있었다. “제기랄, 싸우지 마! 마왕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라고! 젠장. 빌어먹을!” 그리고 파비안처럼 싸움을 말리려는 인간도. 이미 살인의 광기에 휩쓸린 모험자들은 파비안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파비안은 계속해서 싸움을 멈추라고 종용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그 역시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험자를 막기 위하여 칼을 휘둘렀다. 내가 휘파람을 불었다. “인간이란 위기가 닥쳤을 때 맨얼굴이 드러나는군요.” “음.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는 법이다.” 십 분이 지나자 모험대는 스무 명에서 일곱 명으로 줄었다. 남은 일곱 명도 몸이 성하지 않았다. 단검에 쑤셔진 자, 칼날에 자상을 입은 자, 모두 상처투성이였다. 그들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생존자들을 매의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먼저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대치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래서야 게임이 길어져버리고 만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게임만큼 시시한 것도 없다. 나는 그들에게 적당히 모티베이션을 주었다. “자자. 여러분, 잠깐만 싸움을 멈춰주십시오. 이쪽을 보세요.” 손뼉을 쳐서 이목을 이끌었다. 살기와 피로, 공포에 물든 눈동자 일곱 쌍이 이쪽으로 향했다. 나는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어 흔들어보였다. “이거 보이십니까?” 짤랑짤랑, 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엔 금화가 잔뜩 들어 있습니다. 대충 오십 리브라쯤 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분에게, 특별히 오십 리브라를 선물하겠습니다. 자, 모쪼록 싸움을 재개하십시오.” “……!” 인간들의 눈동자에서 탐욕이 피어났다. 오십 골드는 모험자에게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혈투가 상금을 노리는 결투로 바뀌었다. 모험자들이 자세를 낮추었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크아아아아!” 그들이 포효하며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분노의 베기, 정수리 베기, 빗겨내기, 저마다 자신 있는 검술을 사용하면서 오로지 살인을 위한 짐승이 되었다. 쇳소리가 엉망진창의 교향곡처럼 울려 퍼졌다. 내가 웃으면서 그들을 응원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살기 위해서라면,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족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께서 말귀를 알아들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세시봉! 세시봉!” 라우라가 딴죽을 걸었다. “주군은 정말로 취미가 나쁘다.” “하, 두개골 수집이 취미인 아가씨한테 듣고 싶진 않군요.” “……제가 보기에는 두 분 다 오십보백보인데요.” 제레미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싸움은 금세 끝났다. 오 분이 지나자, 고블린 장벽 한가운데의 콜로세움에 남은 인간은 한 명뿐이었다. 열아홉 명의 시체를 주위에 둘러치고 남자가 서 있었다. “후욱, 훅……크으윽.” 파비안. 그는 폐에서 숨을 짜내고 있었다. 왼팔은 상대방의 일격을 허겁지겁 막아내느라 희생되었다. 도끼에 반쯤 잘라져서 망가진 장난감처럼 덜렁거리고 있었다. 허벅지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고, 핏물이 멈추지 않는 분수처럼 숨풍숨풍 솟아났다. “훌륭하군요. 파비안 씨. 당신이라면 해낼 줄 알았어요.” “크흑……후욱, 흐으윽.” “축하드립니다.” 나는 파비안에게 갈채를 보내었다. 라우라도, 제레미도 손뼉을 쳤다. 하는 김에 나는 고블린들에게도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수백 마리의 고블린이 일제히 손뼉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비록 노예이지만 용감하게 분투한 검투사한테 로마 시민들이 경의를 보내는 일에 비유할 법했다. 수백 개의 박수갈채 속에서 파비안은 실로 영웅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저 얼마나 사나이다운 기상인지!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파비안은 우리의 축하인사가 기쁘지 않은 모양새였다. 파비안은 얼굴이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했다. 어째서일까? 이렇게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는데. 고블린들에게 박수를 받은 인간은 파비안, 당신이 인류최초일 것이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 짤랑. 나는 돈주머니를 날렸다. 주머니는 정확하게 파비안의 발치에 착지했다. 파비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잠시간 돈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 이것이 무엇인가,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호기심을 가진 동물과 같은 시선이었다. 파비안은 이내 주머니에 관심을 잃었는지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속한 보상입니다. 승자에게는 마땅히 그에 걸맞는 상금이 주어져야지요. 사양하지 마십시오. 제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윽.” 파비안은 당장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처럼 눈동자가 시뻘갰다. 결투가 끝났는데도 눈에 살기가 흘렀다. 아아, 이해한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모조리 이해한다. 내가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비안 씨. 저를 죽이고 싶은 것이지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까 전에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간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노라고. “저를 죽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시도해보십시오. 당신에겐 저를 죽일 권리가 있습니다. 뭐, 썩 충분하지는 않지만 여러분 덕택에 좋은 구경거리를 즐겼으니까요. 있다고 인정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고 내가 덧붙여서 말했다. “당신에게는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딱 한 번만 저를 공격할 기회가.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인생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두 번의 기회란 우리 삶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요……안타깝게도 말입니다.” “…….” “만약 저를 공격하지 않고 이대로 돌아가시겠다면.” 내가 포션을 꺼내들었다. 유리병에는 붉은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이럴수가! 명절을 맞이하여 단탈리안 마왕성에서 추가적인 보상이! 레어 아이템, 고급 체력 포션이 무료로 주어집니다. 이거, 완전 대박입니다. 출혈과다로 죽기 일보직전인 파비안 씨도 이걸로 무사히 생존가능!” 포션을 손에 들고 요란하게 떠들었다. 내 광대짓에 라우라와 제레미가 피식 웃었다. 오직 파비안만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곧 죽일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지요? 저를 죽이기 위해서 한 번뿐인 기회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포션과 금화를 챙겨서 이대로 금의환향할 것인가.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머리 애꾸눈의 파비안 씨.” “…….” 파비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이미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에게는 걸어다닐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겠지. 달려와서 나한테 일격을 먹일 힘이 없었다. 그러니까 단검을 날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생존이 아니라 날 살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멋지군요.” 기분이 좋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도 중요했다. 그 사실이 나의 심장을 기분 좋게 착 가라앉혔다.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모험자 파비안이 단검을 들어올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 휘이익!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공격이 날아왔다. 놀랍게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을 갖고서도 파비안은 단검을 명중시키는 데 훌륭했다. 푸욱, 하고 살점이 꿰뚫리는 소리가 내 몸에서 났다. 단검은 나의 오른쪽 가슴팍에 들이박혔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안타깝습니다. 이걸로는 죽지 않아요, 마왕은.” 나는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이쪽. 가슴이 아니라 이쪽에 명중시켰어야죠.” “…….” 파비안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무릎에서 힘이 풀려 쓰러진 것이었다. 그가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렸다. 온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다른 모험자들의 핏물로 흥건해진 동굴바닥이었지만. 우리는 파비안이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켜보았다. 길어봤자 십 분일 테니 크게 지루할 일이 없었다. 가슴에 꽂힌 단검을 빼내자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격통이 일었으나 가죽갑옷을 입어 버틸 만했다. “플……뢰르……플뢰르…….” 파비안은 마지막까지 모험자 길드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십 분 정도가 흐르자 중얼거림이 멎었다.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확실히 숨이 끊겨 있었다. 결국 여자 이름이 유언이 되어버렸는가. 진부한 남자였다.   00221 D급 모험대 =========================================================================                        * * * 인근 도시에 수상쩍은 소문이 돌았다. 풍문이 전하기로 무려 백 명이 넘는 모험자가 야밤에 도주했다던가. 실제로 도시에는 부랑자의 숫자가 훌쩍 줄어들었다. 시민들은 소문을 주고받으며 수군거렸다. “소식 들었나? 이번에 모험자들이 마왕성에서 단단히 한몫 잡았다는군.” “도시에 세금을 내는 것이 두려워서 단체로 도주했지. 현지의 주민들이 증언했다네.” “거기 마왕성에 그렇게 금은보화가 넘쳐난다면서?” 모험자들은 마왕 단탈리안을 토벌하는 데 실패했다. 그 대신, 몬스터들을 잡아죽이며 엄청나게 큰 이득을 벌어들였다. 너무나 돈벌이가 짭짤했던 나머지 모험자들은 세금이 두려워 아예 다른 도시로 이주해버렸다……. “재화를 두고 모험자들끼리 싸웠다고 하는데.” “마왕성에서 죽은 사람보다 내분에 휘말려서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군!” “으이구. 모험자란 놈들이 그렇지 뭐.” 소문에 소문이 덧붙어져 불어났다. 며칠이 지나자, 산더미만한 금화를 둘러싸고 백오십 명의 모험자가 패싸움을 벌여 그만 하룻밤 만에 모조리 죽어버렸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시민들은 모험자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이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유언비어였다. 백쉰다섯 명의 모험자 중에서 생존자는 불과 두 명. 제레미와 나뿐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던전에서 뼈를 묻었다. 고블린들은 그날 성대하게 축제를 벌였다. 고블린들은 인육을 뜯어먹으며 마왕 전하 만세를 연호했다. 포상금을 노리고 달려든 모험자가 백오십 명만은 아니었다. 학살이 일어나고 며칠 뒤늦게 도착한 모험자도 있었다. 다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차마 마왕을 토벌할 용기가 없어 던전 입구에서 고블린이나 몇 마리 잡고 돌아갔다. 그들에게 소문을 흘렸다. 한 발자국 늦어버렸다. 대박을 놓쳐버렸다. 소수의 모험자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성난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허름한 술집에서 분노하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갔으면!” 하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았다. 정말이지 운이 좋은 놈들이 아니고 뭔가? 뭐, 이번 모험대는 어차피 부차적인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나의 영지에 사법권력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마을의 촌장과 지주를 몽땅 불러모았다. 스무 명 가량 되는 마을 유지. 이들이 영지를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이들이자 앞으로 나의 최측근이 될 가주(家主)들이었다. “본인은 그대들이 바라는 대로 극악무도한 모험자 무리를 물리쳐주었다.” 내가 장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백오십 명에 이르는 모험자를 반나절 만에 괴멸시키는 영주. 달리 말해, 언제든지 자신들도 파리 목숨처럼 쉬이 비틀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임을 유지들은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은 그대들에게 숨기는 바가 없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생긴다면, 처음에는 자그마한 틈에 불과할지라도 서서히 벌어져서 이윽고 영지 전체가 그 구멍에 잡아먹히고 만다. 마을의 장로들이여.”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유지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본인은 결코 이번에 모험자를 격퇴해준 것이, 본인의 완전한 선의(善義)와 자비에서 비롯한 행위라며 감언이설을 일삼지 않겠다. 그대들이 내게 충성하는 이상, 나 역시 그대들을 인정한다. 그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에 백쉰다섯 명의 모험자를 격살했노라고 본인은 솔직하게 밝힌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사법권을 나에게 넘길 것. 마을에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절대로 주민들끼리 몰래 처리하지 말고, 다른 마을에 가서 재판받을 것. 그리하여 법정이 바깥 세상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 만약 문제가 생겼을 경우,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불합리한지 만인이 판단할 수 있게끔 재판이 공개될 것. 그리하여 주민들 스스로 문제를 개선해나갈 여지가 생겨날 것. 유죄를 판결하고 무죄를 판결한 그 책임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될 것. 그리하여 잘못된 판결에는 불만이 성토되고, 훌륭한 재판에는 찬양이 뒤따를 것. 결과적으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판옵티콘의 영지가 들어설 것. “마을의 유지들이여. 이 재판제도를 인정하겠는가?” “물론이옵니다, 전하. 뜻대로 하소서.” 스무 명의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지금 이곳은 내 영지 한가운데에 솟아난 언덕이었다. 난쟁이 건축가들한테 시켜서 여기에 원형극장을 지었다. 과연 마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건축업자답게 사흘 만에 그럴듯한 원형극장이 완성되었다. 정중앙이 음푹 아래에 들어가고, 관객석들은 계단이 올라갈수록 높아진다. 나는 정중앙 부분에 서서 말하고 있었다. 반면에 유지들은 내 키보다 높은 관객석에 앉았다. 그들은 이러한 자리 배치가 “지나치게 불경하다”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뭐, 내가 강권하자 어쩔 수 없이 앉았지만 말이다. 굳이 이런 공간을 만든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대들은 앞으로 이곳에서만 법정을 열 수 있다. 재판에 참여하는 자는 모두 지금 본인이 서 있는 곳에 올라와야 한다. 또한 재판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관객석에 앉을 수 있다.” 법정을 공개하려는 의도였다. 마을주민들의 대소사가 환한 태양 아래에서 열리면 열릴수록, 그만큼 나는 그들의 사정을 잘 파악한다. 더 세심하게 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재판을 벌이는데 누가 지켜보는지 모른다. 내 끄나풀이 섞였을 수도 있다. 장로들은 재판에 임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 발언하면 마왕 전하의 귀에 흘러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겠지. 바로 그 ‘혹시’가 나에게 보이지 않는 권력을 쥐어줄 것이다. 내가 일일이 유지들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게 심어진 의심과 의혹,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감시자이다. 유지 중 한 사람이 극히 공손하게 질문했다. “삼가 말씀을 아뢰옵니다. 모든 재판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아아. 모든 재판이다. 그대들에게도 생업이 있을 터, 재판은 매달 두 차례씩만 이루어진다.” 사람들에게 의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재판이 밀실에서 이루어지면 안 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모든 것이 명백하게. 마치 노출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전부 광장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수법을 더 섞는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을의 유지들이여. 본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재판관으로서 임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다면, 본인도 이곳에 법정을 세울 것이다.” “전하까지……?” “그렇다. 일단 재판관이 되면 그 사람은 단지 한 사람의 공명정대한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마왕이든 노예이든 상관없다. 명심하라. 그는 단지 한 사람의 공명정대한 재판관이어야 한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이 원형의 법정에서 만인이 그대들의 재판을 바라볼 것이다. 설령 바라보는 눈이 적더라도 반드시 입소문을 타서 마을과 마을에 퍼질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마을의 모든 인간이 바라보는 앞에서, 여신들께서 굽어살피는 가운데에서 재판에 임한다고 생각하라.” 고로, 하고 내가 말했다. “그대들은 긍지를 품으라. 그대들이 내리는 재판 하나하나가 본보기가 되고 정의의 목록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올바른 해답이고 무엇이 현명한 해결책인지, 만인만신(萬人萬神) 앞에서 큰 목소리로 밝혀라.” 수법이란 다름 아니라 사람들에게 '긍지'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업무가 아니다. 여기엔 매우 중대한 가치가 걸려 있다. 정의와 법도, 도덕, 윤리,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네들의 어깨에 놓인다. 그 임무를 운반하는 자네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인간'이다. “영지의 주인은 과연 마왕인 본인이다. 하지만 정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세상에 윤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따로 정해져 있던가?” “…….” 유지들이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타의 영주가 말하는 것과 무언가가 다른 것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그들도 깨닫고 있었다. “물론 신들께서 정의를 관장하고 윤리를 다스리신다. 그러나 신께서 지상의 법관을 맡아주시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대들 한명한명이 스스로 정의의 주인이요 윤리의 주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이 사회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시점은 바로 자신의 하루하루가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이다. 학교를 다녀서 뭣 하는가? 지금 내가 고생해서 하는 것들이 결국은 시시한 업무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의 일에 중대한 사명이 걸렸다고 믿는다면. 자기 자신이 실제로 법률을 실행하고 정의를 집행한다고 느낀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맹목적으로 변한다. 자신의 일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한다. 긍지를 품으라, 필멸자들이여!” 나는 그처럼 의심하지 않는 일개미로 꾸려진 영지를 원한다. “그대들 스스로 법률의 대행자이자 책임자로 거듭나라. 신들의 하인이 되어 가장 낮은 곳에서 심판하라.” 절대로 마왕 단탈리안의 통치를 의심하지 마라. 재판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단탈리안의 잘못이 아니다. 재판관들이 잘못했다. 영지민인 인간들이 잘못했다. 왜 조금 더 현명하게 재판하지 못했는가? 어리석은 우리가 잘못한 것이다……. 마왕 단탈리안은 언제까지나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길이 보존된다. “오늘부로, 여기 언덕을 법률과 정의의 궁전이라는 의미에서 팔라티누스(Palatinus)라 명명할지어니. 신께서 현현하시지 않은 지상에도 영원불멸의 왕국이 생겨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오로지 그대들 손에 달렸노라.” “마왕 전하 만세!” 누군가가 흥분에 못 이겨 소리 질렀다. “위대한 단탈리안 만세!” “팔라티노 단탈리안 만세!” 목소리는 곧바로 전염되어 스무 명의 유지가 만세를 울부짖기 시작했다. 원형극장은 열기로 후덥지근해졌다. 그들은 눈동자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늘 나는 영주임에도 몸소 극장에서 가장 낮은 곳에 섰다. 최고 권력자가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유지들도 망설임 없이 이곳에 설 수 있겠지. 아니, 마왕과 똑같은 곳에 선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긍심을 느끼리라. 나는 제레미를 비롯하여 암살단원들을 치안대로 편성했다. 혹시 모험자가 마을에서 행패를 부릴 경우 이들 치안대가 단숨에 해결한다. 어지간한 모험자가 아니고서야 제레미의 암살단을 당해낼 수 없겠지. 더불어서 팔라티노 언덕에 성곽을 짓기로 했다. 대규모의 군대가 몰려오면 암살대만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주민들이 마을에서 대피하여 팔라티노 언덕에 모여든다. ‘마을들은 각자 떨어져 있으면서도 재판과 군정(軍政)에 있어서는 하나가 된다.’ 재판과 군정, 두 가지만 내 손아귀에 들어오면 게임은 끝난다.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마을 유지들의 절대적인 환호성을 받으면서 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후, 팔라티노 언덕의 법정에는 내가 손수 조각칼로 글귀를 새겨넣었다. 『그대들, 가장 긍지 높은 하인이 될지어다.』 물론 블랙유머였다. 사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인이지만 긍지를 품으라는 소리였다. 하인으로서의 긍지를. 과연 그걸 알아차릴 사람이 과연 영지에서 몇이나 태어날지 의문스러웠지만. 글쎄, 그런 인물을 기다리는 것 또한 인생의 낙이지 않을까? 마왕의 삶은 수천 년이다. 길고 또 길다. 마왕으로서 느긋하게, 천천히 기다려보자…….   00222 마녀의 예언 =========================================================================                        어느 날, 마왕방에 돌아오니 바르바토스가 있었다. “안녕? 여전히 낯짝이 재수없네. 참, 맛있어보여서 마시고 있었어.” “…….” 방금 내가 무슨 일을 체험했는지 그대로 말하겠다. 아니, 체험했다기에는 완벽하게 나의 이해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나는 마을에서 영주 업무를 끝마치고 기분 좋게 퇴근했다. 그런데 마왕방 문을 열자, 하얀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침대에 떡하니 누워 있었다. 내가 아껴둔, 비장의 최고급 포도주를 병나발로 마시면서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낯짝이 재수없네!’라는 말이 마치 인사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버렸다. 만약 그런 대사를 인사말로 쓰는 부족이나 나라가 있다면 세 시간 만에 내전으로 멸망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이 로리년. “으――에――어?” 나는 다가가서 바르바토스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혹시나 최면술이나 깜짝 분장이 아닐까 기대했다. 바르바토스가 눈빛으로 뭐하는 짓거리냐고 물어왔다. “딴죽을 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만, 이것부터 질문하자. 합스부르크에서 섭정 노릇이나 하고 있을 녀석이 왜 여기에 있냐?” “아가레스 년, 가미긴 년이랑 싸우는 것도 지쳤어. 썅.”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툭 쳐내고 한숨을 쉬었다. 과거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땅에서는 현재 절찬리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원파를 영도하는 마왕 바르바토스,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 이중에서 바르바토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아마 일이 썩 잘 풀리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영토 내놓으라고 지랄발광을 떨어대는데 버틸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영토를 내줬냐? 으이구, 병신.” “병신한테 병신 소리 듣기는 싫거든요, 상병신아.”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포도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침대에 털썩 앉고 한손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뭐, 바르바토스에겐 그녀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한 명의 마왕인 동시에 평원파라는 거대 집단의 수장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만 한다.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해서 마음대로 풀 수도 없다. 버티다 못해 반쯤 도피하는 심정, 반쯤 휴식하는 심정으로 내 던전에 왔겠지. 지친 사람을 왜 왔냐며 쫓아낼 정도로 나는 박정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참, 네 마왕성 보안 열라 허술하더라. 나 여기까지 오는 데 한번도 안 걸렸다? 금화를 수백만 개 쏟아붓는다고 해서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더니 존나 걸레처럼 아무한테나 가랑이를 벌리네. 앞으로 네 마왕성은 걸레 마왕성이라 부를게, 깔깔.” “…….” 역시 쫓아내고 싶었다. 나쁜 년.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날 알아채는 녀석이 한 명 있더라고?” 쓰윽, 하고 바르바토스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거 참 용한 녀석이라서 일단 잡아놨지.” 손가락을 따라서 내가 고개를 올려보자――천장에 데이지가 데롱데롱 매달려 있었다. 마치 거미줄에 붙잡힌 날벌레처럼.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 “…….” 너 거기서 뭐하냐? 저라고 알겠습니까. 보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무언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 둘 다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참고로 데이지는 자기 부모님과 상봉한 이후, 내 마왕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녀로 지내었다. 내가 마왕방을 비운 사이에 그만 봉변을 당해버린 것이었다. 이곳에서 오직 바르바토스만이 신나서 떠들었다. “투명마법에 은신마법까지 곁들었는데 그냥 날 간파하는 것 아니겠어? 보아하니 이제 갓난아기에서 벗어난 인간년 같은데, 본능이 무슨 제6감 수준이야, 제6감. 너무 신기해서 이리저리 시험해봤지.” 바르바토스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짜식. 하여간 보는 눈깔이 있어, 보는 눈깔이. 쟤 아주 난 년이더라고. 저런 인재는 또 어디에서 구해왔대? 그래서 말인데, 저 꼬맹이 나 주라. 잘 키워서 좀 써먹자.” “즐.” 내가 중지와 검지 사이를 벌여서 V자를 만들었다. 이 세계관에서는 대충 엿이나 처먹으라는 제스처였다. “내가 저 녀석 빼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건 모르지만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지.” 바르바토스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나는 그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바르바토스의 손안에서는 다름 아니라 투명색 슬라임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 꼬맹이 몸속에다 꽤나 재미난 걸 심어놓었더라?” “…….” “우리 단탈리안이 잠깐 못 본 사이에 아주 변태가 되셨어?” 내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나랑 놀아재낄 때는 이렇게 변태적인 짓거리는 절대로 못하겠다고, 응? 제발 정상적으로 성교하자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주제에 말이야. 정작 뒤에서는 몰래 이런 놀이를 즐겨? 어이, 단탈리안. 자칭 세상에서 제일 착실하고 성실한 마왕 씨. 음란하고 변태적인 나한테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보시지?” “자, 잠깐만. 바르바토스. 오해다. 그건 오해야.” 내가 서둘러 슬라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가볍게 내 손짓을 피했다. “여기엔 네가 상상도 못하는 사정이……무척 깊은 사정이 있어! 절대로 변태짓이 아니라고!” “오호라. 얼마나 깊은 사정이길래 열한 살짜리 여자애한테 고문 슬라임을 집어 넣어야만 했는지,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이 가는걸.” 바르바토스가 슬쩍 나에게로 몸을 기대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젠장! 이 녀석, 벌써부터 눈동자가 색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목이 막혔다. 나는 녀석이 걸어대는 색욕 마법에 걸리지 않도록 무진장 애를 쓰며 말했다. “그러니까, 쟤가 겁나게 위험한 놈이라서……나한테 반항하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어서……야! 만지지 마!” “어째서 여자 구멍에다 슬라임을 넣는 게 심리적인 안전장치가 돼? 이해가 안 되는걸.”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으면서 나의 가랑이를 슬슬 문질렀다. “아무튼 지금 여기에선 하고 싶지 않다고! 어린애가 보잖아!” “어린애를 슬라임으로 괴롭힌 남정네가 할 소리는 아닌데. 그리고,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녀가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 볼수록 흥분되기도 하거든.” 결국 하고 말았다. 데이지가 천장에 매달려서 빤히 내려다보는 가운데. 더군다나 이번에는 바르바토스가 주인 역할이었고 내가 노예 역할이었다. 나는 열한 살 소녀가 관람하는 와중에 그렇고 그런 플레이를 강요받았다. 이 무슨 빌어먹을 일인가. 제발 용서해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오히려 바르바토스는 “깔깔깔! 더, 더 울부짖어봐, 더러운 개자식아!” 하고 달아올랐다. 그렇다. 바르바토스는 원래 그런 녀석이었다. 옛날옛적부터 되바라질 녀석이었다. 나는 내가 울어봤자 상대방이 좋아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네 여자들 다 불러봐.” 플레이가 끝나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내 담뱃대를 강탈해서 멋들어지게 연초를 피웠다. 반면에 나는 침대 구석에 앉아 우울해하고 있었다. 남녀의 역할이 심히 뒤바뀐 것 같다만, 상대가 바르바토스이다. 뭘 어쩌겠는가. “내 여자들이라니?” “너가 아끼는 여자들 있잖아. 월맹군에 부관으로 데려왔던 년이랑, 네가 흑색 허브 팔아치울 때 도움줬다는 년. 걔네 말고도 너랑 떡치는 여자 있으면 불러오고.” 그건 또 왜? 반항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자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거 부르라고 하면 얌전히 부를 것인지 잔말이 많아요.” 약자여서 더럽게 서러웠다. 잠시 뒤, 내 마왕방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막 던전 지하 1층 공사에 들어간 라피스, 고블린들을 데리고 군사훈련에 매진하던 라우라, 팔라티노 언덕에서 농땡이를 피우던 제레미까지. 내 주변에서 친밀하다 싶은 여자는 몽땅 집합한 셈이었다. “미천한 자가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군단장 각하께 예를 올리나이다.” “영원불멸의 마왕 전하를 뵈옵니다.” 그녀들이 바르바토스에게 극진하게 예를 올렸다.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했다. 서열 제8위의 마왕이면 사실상 세계에서 제일 고귀한 군주나 다름없었다. 라피스나 제레미처럼 출신이 미천한 마인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겠지. 둘 모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나 지금 바르바토스는 알몸이었다. 나와 섹스한 다음 옷도 안 입었다. 정사의 흔적이 남은 그대로 애들을 맞이했다. 애들은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그래. 고개 좀 들어봐라.” 바르바토스가 한손으로 턱을 괴고 거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전용으로 제작된 옥좌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 있었다. “여기서 단탈리안이랑 가장 먼저 만난 여자? 손 들어.” “……소인입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손을 들었다. “넌 단탈리안 아래에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데?” “임시적이긴 하오나 재무상서를 맡고 있습니다.” 으음, 하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상서면 제일 높은 거지. 그럼 이중에서 단탈리안이랑 가장 떡을 많이 친 여자는?” 라우라가 오른손을 들었다. “황공하오나, 소녀입니다. 군단장 각하. 소녀는 군무상서를 맡고 있나이다.” “왠지 너일 것 같더라.” 바르바토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몇 번 쳤는지 기억하냐?”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백여든 번은 아니올까 하옵니다.” “음. 그 정도면 나보다 많이 했네.” 내 눈앞에서 여자들이 나랑 몇 번 잤는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논하고 있었다. 너무나 포스트모던적인 광경에 나는 졸도해버리고 싶었다. 이건 뭐냐. 새롭게 개발된 고문법이냐? “여기서 가장 변태적으로 단탈리안이랑 놀아본 사람은?” “……소녀가 야외에서 해본 적은 있습니다만.” 라우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르바토스가 혀를 찼다. “쯧쯧, 그걸로는 택도 없지. 변태의 가장자리에도 못 닿았어. 또 없냐?” “소인이 오페라 관객석에서 한 경험은 있습니다.” 제레미가 말했다. “오페라 배우들이 빤하게 정면으로 보이는 관객석이었습니다, 전하.” “그나마 좀 낫네. 하지만 아직 한참 부족한걸.” “…….” 라피스가 경악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하게 경악하고 있었다. 당장 잔소리를 퍼부어주고 싶지만 차마 바르바토스 앞이라 참고 있다, 그런 얼굴이었다. 아마 바르바토스가 떠나고 나서는 라피스한테 시달릴 것 같았다……. “꽁냥이들아. 너희가 보다시피 단탈리안 이 녀석은.” 바르바토스가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엔 아직 데이지가 매달려 있었다. “난봉꾼이다. 어디 나갔다 하면 꼭 여자를 홀리고 오지. 어쩌면 내가 모르고 너희도 모르는 애인을 두세 명쯤 숨겨뒀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연애자유주의자야. 하지만 세상만사에는 구획정리가 필요한 법이지. 안 그래?” “그러하옵니다, 전하.” 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바르바토스가 씩 웃었다. “여기서 확실히 밝혀두지. 본처(本妻)는 나다.” “…….” “너희는 전부 첩이야. 재무상서랑 군무상서, 그리고 너 엘프. 이렇게 세 명까지만 첩으로 인정하겠어. 이외에 단탈리안이 또 여자를 만들겠다면 반드시 정실인 나의 허락을 받아.”       00223 마녀의 예언 =========================================================================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폭언을 이어나갔다. “아, 그렇다고 내가 단탈리안의 아내라는 얘기는 아니야. 정확하게 말해서 단탈리안이 나의 첩이다. 나한테 단탈리안의 소유권이 있는 셈이지. 하지만 나는 자비로워. 내 귀여운 첩이 바람을 피워도 너그럽게 용서해줄 의향이 있어.” 바르바토스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단, 무분별하게 놀아대면 곤란해. 단탈리안. 너는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나 바르바토스의 첩이다. 제왕의 애인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냐?” “……내가 난봉꾼이라고 알려지면 네 체면까지 덩달아 손상된다는 거로군.” 왕의 애인이 함부로 몸을 놀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흉이 되어버린다. 애인만 욕을 먹는 게 아니다. 왜 그런 사람을 연인으로 두었는가. 정말 제대로 된 안목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왕까지 비난과 의심을 받는다. 그런데, 하고 내가 물었다. “넌 남자랑 안 잤을 뿐이지 여태껏 신나게 놀아재꼈잖아? 새삼스럽게 그쪽 방면으로 손상될 체면이란 게 있었냐?” “멍청아. 유일한 남자 애인이라는 게 중요하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야 너랑 나 사이에 연정(戀情)이니 뭐니 달콤한 감정이 없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미심장하다 이거야. 내가 남자랑 사귀는 게 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에요, 이 양반아.” 이해했다. 마인들의 세계에서 오입질은 결코 추문이 아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기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동네이다. 흉측하게 생겨먹은 몬스터와 섹스했다는 것을 자랑스레 떠들고 다니는 부류도 소수이긴 하나 있다. 그러나 '아내' 혹은 '남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바람을 피운 당사자야 상관없다만, 파트너가 바람을 피우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비웃음을 당한다. “고위 마왕이란 건 여러모로 귀찮거든.” 바르바토스는 무척 피곤하다는 표정이었다. “엉뚱한 뒷소문이라도 생겨봐. 곧장 온 마계에 다 퍼져버릴걸? 예를 들어 단탈리안이 사실은 엄청나게 추잡한 난봉꾼이고 바르바토스가 거기에 꾀여서 넘어갔다, 라고 소문이 돌면…….” “당장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좋아하겠지. 젠장.” 바르바토스는 명분 싸움에서 조금이나마 불리하게 되어버린다. 정치계에서 원래 라이벌의 이미지를 공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법이 없으니까. 그런가. 나는 이제 여자관계까지 정리해야 하는 위치에 올라섰는가……. 마음대로 행동하고 욕망대로 살아가면 남한테까지 피해를 입히는 인물이 되어버렸는가. 무척 귀찮았다. 내가 퉁명스럽게 꼬집었다. “그러게 왜 사람들 앞에서 우리 사이를 공언했어?” 그러자 바르바토스는 무언가 기분 나쁜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차피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야. 목 위에 달린 게 돼지방광이 아니라면 생각 좀 해봐, 밥팅아. 네가 내 막사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나오지 않는데 아무렴 소문이 안 퍼지겠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직접 밝혀서 못 박아두는 편이 낫지. 아무튼, 이제부터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래서 정치란 골치가 아팠다. 이대로 꼼짝없이 바르바토스한테 꽉 잡혀서 살아야 하는가 우울해지던 그때였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떠오른 해결책이 말이 되나 안 되나 천천히 복기해보았다. “……어, 바르바토스. 잠깐 우리 둘이서 얘기할 수 없을까?” “응?” 바르바토스가 내 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네.” “아아. 조금 외도스러운 방법이지만.” “네 두개골이 생각하는 게 전부 외도이지 뭘 새삼스럽게. 다들 나가봐.” 바르바토스가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라피스와 라우라, 제레미는 그렇게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축객령을 받아버렸다. 참고로 데이지는 제레미가 줄을 끊어서 데려갔다. “좋아. 말해봐.” “내가 너랑 잔 것 때문에 몸을 조심해야 한다. 그건 맞아.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떠냐.” 그녀가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정반대?” 내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예 희대의 오입쟁이가 되는 거다.” “……하아?” 얘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바르바토스는 그런 얼굴이었다. 내가 개의치 않고 말해나갔다. “바르바토스, 생각의 전환이야. 마왕 단탈리안이 바르바토스만의 애인이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다. 거의 모든 여자 마왕들이랑 잠자리를 같이 든다면 문제가 안 돼!” “……하아아?”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이건 또 웬 개소리야' 정도로 바뀌었다. 둔하기는.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상상해보라고. 만약 내가 파이몬, 가미긴, 시트리 그리고 너랑 전부 애인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되겠어? 바르바토스, 네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내가 대단한 새끼가 되어버리는 거지.” 그렇다. 어떤 남자가 여왕님과 은밀한 사이라면 과연 그는 조심조심 처신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 남자가 한 명의 여왕이 아니라 이 나라 저 나라의 여왕이랑 모두 관계를 가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정말로 대단한 수컷이 되는 거다. 어느 여자가 난봉꾼이랑 잔다. 그럼 욕을 먹는다. 허나 그 난봉꾼이 다름 아니라 카사노바라면?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단지 카사노바가 엄청날 뿐이다. “……잠깐만. 미안. 나, 지금 머리가 무척 혼란스럽거든?” 바르바토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너랑 내가 똑같은 언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단탈리안, 그러니까 네 얘기는……파이몬 그 개년뿐만이 아니라 시트리, 가미긴까지 따먹겠다 이 말이냐?” “바로 그거지.” 내가 손뼉을 쳤다. “이해력이 빨라서 좋군.” “――뒈져라, 개새끼.” 바르바토스가 전력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나는 이미 바르바토스가 공격해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피했다. 바르바토스가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속삭포로 말했다. “바보 아니야? 멍청이 아니야? 돌았어? 미쳤냐? 이거 완전히 또라이네!” “아니,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생각해봐. 이거 생각보다 말이 되는…….” “나는 너한테 처녀를 따였다고, 나쁜 새끼야!”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아무리 연애자유주의자라고 해도, 응? 네가 첫남자라고! 내가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없이 네 자식이랑 떡쳤을 거 같아? 세상에. 두개골이 시궁창이어도 어떻게 그런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어? 어떻게 파이몬 그 창녀를 먹겠다고 내 앞에서――.” “나한테도 너가 제일이야!” 내가 두 손을 들고 소리쳤다. “골빈 년아, 왜 하나는 생각하고 둘은 생각 못하냐! 내가 파이몬이랑 가미긴을 따먹었다고 쳐봐! 그런데도 단탈리안한테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가장 소중하다고 소문이 흘러봐! 빌어먹을, 그럼 바르바토스 네가 여마왕들 중에서 최고가 되는 거야!” “…….” 바르바토스가 뚝, 하고 동작이 멈추었다. “……파이몬이랑 가미긴보다 높은 게 된다고?” “그래! 존나 자존심이 천원을 돌파해도 될걸! 사람들이 나한테 물어볼 거 아니냐. 댁이 따먹은 마왕들 중에 누가 가장 소중하냐고. 그때 내가 시바알, 세상에 아름다운 마왕이란 마왕은 죄다 시식해보았지만 바르바토스만한 여자가 없더라, 하고 대사 한방 날려주면!” 내가 허공에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끝장인 거지! 그때야말로 네가 내 정실(正室)이 되는 거라고! 이해했냐? 파이몬이나 시트리나 가미긴은 그냥 하룻밤 즐기는 첩에 불과하고, 바르바토스, 너는 천하의 난봉꾼마저 휘어잡은 여장부로 숭배받는다!” “…….”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닥쳐. 젠장, 네 새끼가 말하니까 개소리도 개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리잖아…….” “그야 개소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개소리가 아닌 걸로 들리지!” “아가리 좀 닥쳐보라고, 쌍놈아.” 말투는 거칠었지만 촉이 왔다. 현재 그녀는 나한테 설득되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다. 단지 감정적인 문제 때문에 납득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이럴 때 밀어붙여야 한다. 이건 어마어마한 중대사였다. 앞으로 마왕으로 살아갈 나날이 수천 년이건만 벌써부터 바르바토스한테 코가 꿰일까보냐! 우리 사이에서 첩이 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쪽이다. “야. 바르바토스.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가리는 삐뚫어졌어도 말은 제대로 해……나 내비두고 딴 년들이랑 떡치겠다는 게 어떻게 날 위해서 하는 거야!?” “네가 '여자'로서 파이몬을 깔아뭉갤 절호의 기회라고.” 조용히, 바르바토스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내 모습을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주저없이 악마라고 욕했겠지. 무얼. 전혀 상관없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예전부터 악마가 되고 싶었다. “파이몬한테 이기고 싶지 않아? 단지 마왕으로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여성으로서도 그 녀석을 짓밟고 싶지 않아? 파이몬의 자존심과 체면을 모조리 나락으로 떨어트려서 큰소리로 웃어보고 싶지 않냐고.” “으……으으…….” 바르바토스가 으으, 하고 신음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나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난공불락의 산성을 함락시킬 장수가 된 기분으로 귓속말했다. “솔직히 아니꼬웠잖아. 파이몬이 만날 너한테 만년 꼬맹이라고 놀리고 그랬다며? 가슴으로 빨래하는 빨래판 마왕이라고 비웃었다며? 너 자존심도 안 상하냐? 이대로 파이몬을 내버려두면, 응? 맨날 마계 사람들이 파이몬이랑 너랑 비교하고 그럴 텐데.” “으으…….” “세상 사람들한테 보여주자 이거야.” 내가 상냥하게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은 크다고 좋은 게 아니야. 작은 여자이기에, 아니 작은 여자일수록 아름다운 매력이 있어. 무지몽매한 군중은 그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 바르바토스. 네가 파이몬을 처참하게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기회는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안 그래?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와 또 언제 떡을 치게 되겠어?” “하지만……내가 파이몬과 똑같은 남자를 돌려먹기는 싫어.” 목소리가 약해졌다. 이건 거의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러짖었다. 바르바토스에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쭉쭉빵빵한 미녀가 가득한 마왕군에서 자기 혼자 체구가 작았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보전진, 아니 백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야. 파이몬을 물리치는 전쟁이다. 약간의 손해 따위는 감당해야만 해. 당연하지 않냐.” “이, 멍청아……파이몬이……너랑 잘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시트리는? 가미긴은?” 바르바토스가 울상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빨을 꽉 물고 참는 것이 꽤 귀여웠다. “미안. 네가 마음 상할까봐 말하지 않았어.” 내가 눈빛을 진지하게 가다듬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파이몬이 나한테 두 번 정도 추파를 던진 적이 있어.” “뭐……?” “이미 시트리는 나를 좋아해. 가미긴은, 뭐. 저번에 보니까 조금만 꼬시면 바로 넘어올 것 같던데.” 바르바토스의 낯빛이 아연해졌다. “구, 구라 까지 마! 파이몬이 왜 너 따위를 좋아하냐!?” “진짜야.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려줄까? 너, 파이몬이랑 옛날에 사귀었다면서.” “…….” 바르바토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얘기했다며. 너와 파이몬이 만약에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어떤 남자일지 무척 궁금하다고. 설마 너랑 똑같은 남자를 마음에 두게 될지 정말 몰랐다면서, 파이몬 걔가 말하던데?” “으, 으……!?” 체크메이트다, 바르바토스.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르바토스. 나 한번 밀어줘봐. 내가 널 최고의 여마왕으로 올려줄게. 내가 누구야? 단탈리안이야. 검은 산맥을 뚫고 합스부르크 홀라당 태워먹은 양반이야. 나 믿지?”   00224 마녀의 예언 =========================================================================                        한참 동안 바르바토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미 할 말은 다 던졌고, 설득도 끝났다. 여기서 더 보채본들 과유불급이었다. 바르바토스가 감정을 정리하기를 기다리면 될 뿐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딴 마음이 있는 거 아니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파이몬을 먹지 않았겠냐. 서큐버스 여왕의 유혹을 견뎌낸 거야. 이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걸.” 사실 뒷수습이 두려워서 피한 것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진짜로 내가 제일이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딱히 평원파에 충성하는 건 아니야, 바르바토스. 제파르 대장을 존경하고 벨레드 형님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평원파의 이념에 몸을 불사를 생각은 없어.” 내가 바르바토스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달리 말해, 당파적인 이익과 상관없이 나는 너의 친구야. 평원파의 수장도 아니다. 고위 서열의 마왕도 아니다. 단지 바르바토스, 너 자체를 친우라고 여기고 있어.” “만에 하나…….” 바르바토스가 찌릿 노려보았다. “파이몬한테 넘어가면 너 죽는다.” “저에게는 당신이 제일이라니까 자꾸 그러네요, 여왕 전하.” 내가 웃으면서 바르바토스에게 키스했다. 입술에 키스한 게 아니었다. 옥좌에 앉은 바르바토스의 발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부터 입술에 다가갔으면 지금 바르바토스의 심정상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저자세로. 정성스럽게, 마치 하인이 주인을 애무하듯이 소녀의 육체를 어루만졌다. 정강이에, 무릎에, 허벅지에……바르바토스의 발가벗은 배와 가슴을 거쳐서,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하듯이 입술을 입술로 갖다댔다. “흐응……응.” 간단히 성문이 열렸다. 우리 둘 사이에는 과격하고 격렬한 섹스가 이루어지곤 했다. 행위가 격렬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지 몸을 겹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채찍질과 같은 고문, 주인과 노예가 되어 역할에 몰입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볼 때 '도를 넘은' 성교에 집착했다. 그 때문일까. 가끔씩 평범하게 연인이 연인을 대하듯이 다가가면 바르바토스는 오히려 좋아했다. 사람이 자극적인 콜라만 마시고 살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넌 진짜 개새끼야.” 키스가 끝나고, 바르바토스가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소리에서 각진 모서리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개 같은 새끼한테 박혀서 개처럼 헐떡이고 싶지 않아?” “…….” 그것은 바르바토스가 맨 처음에 나를 유혹할 때 써먹은 대사였다. 당사자인 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그녀가 뭐라 불평을 쏟아내려는 찰나, 한 발자국 앞서서 입술을 틀어막았다. 바르바토스의 말은 형태를 잃고 조악한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흐읍, 하아……흐응.” “바르바토스.” 입술을 때고 말했다. “조금 보지 못한 사이에 내가 변태가 되었다고 놀렸지? 그거 사실이야. 내가 꽤나 변태적인 놈이라는 사실을 요즘에 와서 깨닫고 있어. 야아, 정말이지 놀라운 발견이었다고.” “……넌 원래부터 변태 새끼였어.” “호오. 내가 변태라는 걸 알면서도 섹스 파트너가 된 거로군.” 바르바토스는 조금이라도 나에게 욕을 날리고 싶은지 한 마디도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그게 도리어 실착이 되었다, 불멸의 마왕이여. “바르바토스는 말이야, 의외로 조금 마조끼가 있지.” “하아?” “평소에는 주인처럼 굴지만 역할이 바뀌어도 엄청 기뻐하고.” 나는 눈짓으로 홀로그램 창을 띄워서 곧바로 몬스터를 구입했다. 고문용 슬라임. 데이지에게 써먹은, 투명한 슬라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눈쌀을 찌푸렸다.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걸……어쩌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 슬라임에는 감각을 공유하는 성질이 있잖아.”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바짝 붙여서 속삭였다. “네 몸속에 이걸 쑤셔넣을 거야.” “…….” “반쪽으로 갈라서, 나머지 하나는 내가 가지고 다닐 생각이란 말이지. 언제나 주머니속에 휴대하고 다니겠어. 그리고 나는 너랑 함께 돌아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주머니를 만지작, 만지작거리는 거지. 어때? 좋은 생각이지?”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떨렸다.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냐니……미친놈이, 감히 나를……서열 제8위의 마왕을…….” “그동안 합스부르크에서 고생하느라 힘들었지? 우리집에 도망쳐온 김에 니블헤임으로 놀러가자고. 카지노에도 가고, 최고급 유곽에서 돈을 펑펑 쓰고, 응? 내가 요즘에 돈이 아주 많거든. 꽤 즐거울 거야.” 슬라임을 찢어서 바르바토스의 안쪽에 흘려넣었다. 슬라임이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기어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한테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만지는 거지. 주머니에 있는 슬라임을. 격렬하게, 강하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수많은 마인이 보는 앞에서 서열 제8위의 마왕이 가버리는 거야.” “미쳤, 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바르바토스는――. “그런 거,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희열을 참지 못해 웃고 있었다.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앞으로 쏟아져내릴 쾌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입끝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폭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의 잔해만이 남아서 간신히 바르바토스를 버티게 해주었다. 내가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의 역할이 뒤바뀐다는 신호였다. “아가리가 삐뚫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들어주는 게 아니다, 천박한 암퇘지 년아. 내가 명령하는 것이다. 육노예라면 육노예다운 방식으로 말해야지. 응?” “……, …….”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이후 여섯 시간 동안 바르바토스는 사람의 언어를 허락받지 못했다. 돼지처럼 꿀꿀거릴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두겠다. 데이지가 보는 앞에서 날 노예로 부려먹은 대가이다. 나는 받은 은혜는 반드시 돌려주는, 무척 성실한 성격이거든. * * * “회합?”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바르바토스는 단순히 도피성으로 온 게 아니었다. 용무가 따로 있었다. 바로 마왕들 사이에서 회합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원래 목적은 그 소식을 전해주는 거였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후우……월맹군 전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니까. 논공행상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지.” 그녀가 담뱃대로 연초를 길게 피웠다. 지친 얼굴이었다. 몇 시간 동안 동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놀아재꼈으니 당연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돌아다니면서 옷에 구멍이 생길 정도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고블린 일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절정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가버렸지만. 그것도 쉰여섯 번. 갈 때마다 몇 번째 절정인지 말하라고 명령했으니 나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바르바토스는 거의 기절해버렸다. 그녀는 동굴바닥에 쓰러져서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로 ‘쉰여섯……쉰여섯 번이요……쉰여섯 번이요……’ 하고 중얼거렸다. 참고로 이상한 레벨까지 올라버렸다. 「조교 레벨(Lv.2)이 올랐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얼른 확인해보았다. 데이지를 노예로 삼으면서 나한테도 새로운 기능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조교 레벨이 높을수록 노예를 효과적으로 조교할 수 있습니다.’ 설명창에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언제 한가해지면 데이지한테 실험해봐야겠다. “논공행상이라니……바알이 무슨 우리들 군주도 아니고, 왜 그런 자리에 참석해야 돼?” “뭐, 네 말이 맞지. 근데 말이 논공행상이지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거든.”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내가 바알 아저씨한테 중재를 요청했어.” 그녀의 말은 이러했다. 현재 합스부르크에서는 마왕들 간의 삼파전……요컨대 바르바토스와 아가레스, 가미긴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중립파의 마왕 마르바스가 다툼을 조율해주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마르바스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아가레스는 서열 제2위의 마왕이며, 가미긴은 서열 제4위의 마왕이다. 서열 제5위인 마르바스에게 마냥 순순히 복종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는 마왕군에서 절대적인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바알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알 아저씨는 스스로 해결책을 제안해주지 않아. 절대로.” 마왕 바알은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자였다. 문제가 생기면 중재의 자리를 마련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해결은 당사자끼리 마무리 지어라, 그런 느낌이라고 한다. 바르바토스는 조금이라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네가 아가리 하나는 물에 빠져도 둥둥 떠서 조잘거리잖아. 좀 도와줘봐.” “……야, 야. 미쳤냐? 나보고 아가레스와 가미긴이랑 척을 지라고?” 내가 식겁해서 말했다. “걔네들이 나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어쩌고.” “가미긴이 너 마음에 들어한다며? 좆탱이로 꼬셔보시든지.” “놀고 있네.” 가미긴과 만난 것은 월맹군 전쟁에서 잠깐뿐이었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가미긴은 정적을 없앨 수 있으면 주저없이 암살 따위의 수단을 동원할 위인이었다. 이권이 걸린 문제에서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이쪽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가레스는 말할 것도 없다. 나랑 친분이 전무하다. “음. 내가 교섭자로 나서서 이득을 볼 구석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부탁해도 안 되냐?” 바르바토스가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주인-노예 놀이는 조금 전에 끝났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제법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교섭자로 나서봤자 이득을 볼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바르바토스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부탁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무엇을 주겠다. 너에게 뭔가를 해주겠다. 바르바토스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전혀 이득을 제시하지 않았다. 즉……바르바토스는 이번만큼은 이익이라든지 손해라든지 하는 관계에서 떠나 순전히 나에게 우정으로써 부탁하고 있었다. “…….” 내가 골똘하게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 바르바토스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부탁해온 적이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꽤나 건조했다. 그녀나 나나 우정이나 연정 따위의 말랑말랑한 단어를 싫어했다. 언제든지 몸을 섞는다.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결코 연정과 우정을 이용해먹지 않는다. 무척 드라이한 관계라고 표현해도 좋겠지. 나는 고민 끝에 납득했다. ‘과연.’ 이것 역시 거래였다. 바르바토스는 나에게 파이몬 등과 자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감정의 응어리가 사라질 리 없었다. ‘내가 너에게 그 정도 허락했으니까, 너도 나에게 이 정도는 양보해줘.’바르바토스는 그렇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걸 입으로 설명하지 않은 까닭은, 명확하게 말해버린 순간 우리 둘의 관계에 연정과 우정이 너무나 명확하게 들어서버리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이 끼어버리면 관계는 순식간에 질척해져버리고 만다……. “흐흐.”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태도가 귀엽게 느껴졌다. 정말 건방진 꼬맹이가 아닌가. “바르바토스. 너, 내 손가락 가지고 왔냐?” “응? 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하얀 수건을 꺼냈다. 수건 속에 내 손가락 두 개가 모셔져 있겠지. 라피스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자른 손가락이었다. 아마도 나한테 도로 붙여주려고 가져왔으리라. 내가 말했다. “그거 목걸이로 만들어서 네가 가지고 다녀.” 바르바토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 “약속했잖아. 파이몬이랑 자도 나한테는 네가 제일이라고. 증거물, 이라고 하기에는 그렇다마는 꽤나 적나라한 징표가 되겠지. 나중에 파이몬 만나면 손가락 목걸이를 보여줘. 내가 선물했다고.” 네가 단탈리안과 잠을 잤을지라도, 그는 나에게 신체의 일부까지 선물했다. 내가 그와 훨씬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만큼 효과적인 제스처가 있을까. 나는 바르바토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손가락 두 개를 헌상하고자 했다. “……응. 알겠어.” 바르바토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하얀 수건을 꾸욱 쥐었다. 무엇을 알겠다고 말한 것인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말없이 몸을 기대왔다. 나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둘 다 형편없는 어리광쟁이였다.   00225 마녀의 예언 =========================================================================                        * * * 마왕방에서 축객령을 받고 쫓겨난 여자들은 한곳에 모여들었다. 이곳은 라피스가 본부실로 이용하는 임시 거처였다. 던전 건축과 관련하여 서류뭉치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자들은 마치 전투에서 도망쳐온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라우라가 한탄조로 말했다. “상대가 바르바토스 각하여서야 승산이 없다. 어느 요소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우리와 달리 바르바토스 각하는 최고위 마왕이니 입장상에서 불리하고, 더군다나 주군께선 별 도리가 없는 아동성애자이니 몸매에서도 뒤진다……!” 라우라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내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풍성해지는 것인가. 실로 원통하다! 주군과 만난 그날처럼 영원토록 어린애 체형으로 남으면 좋을 텐데!” “…….” 그 얘기, 바르바토스 전하가 들으면 당신을 죽이려고 들 걸요. 제레미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꼭 어린애 취향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곤란한데요. 보세요, 저도 있고.” “아니. 확실하다. 제레미 경, 저 아해를 보아라.” 라우라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데이지가 조용히 앉아 철학책을 읽고 있었다. 『인간 자유의 본질과 그것에 연관된 대상들에 대한 철학적 탐구들』라는 글자가 멋들어진 필기체로 표지에 새겨져 있었다. 데이지는 벌써 고대제국어로 철학책을 독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척 봐도 바르바토스 각하만큼이나, 아니 각하보다 더 어린애스럽지 않은가!” “……어린애스럽다기보다는 그냥 어린애 그 자체인걸요.” “주군께는 특정한 취향이 있음에 분명하다!” 라우라는 사람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이지, 갑자기 양녀라면서 저 아해를 데려왔을 때는 까무라칠 뻔했다. 아아. 소녀는 분명히 주군의 밤상대를 해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열한 살은 아니지 않은가, 열한 살은! 지나치게 좁다!” “으응. 단탈리안 전하께서도, 딱히 밤상대를 시키려고 데이지 양을 거둔 것은……형식상이나마 양녀라구요, 저 아이?” “아무 상관없다. 주군이라면 부녀 관계라서 더더욱 흥분된다고 날뛸 것이다.” 라우라가 단언했다. 제레미는 이곳에 와서 단탈리안의 이미지가 얼마나 바닥을 찍고 있는지 나날이 체감하고 있었다. 신하들한테서 이렇게 변태 취급받는 마왕도 몇 명 없으리라. “……아뇨. 오히려 잘된 것일지 모릅니다.” 라피스가 중얼거렸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중심을 잡아주신다면 함부로 단탈리안 님에게 접근하는 여성도 적어지겠지요. 무분별하게 첩실을 늘리는 걸 막는 데에는 바르바토스 전하만한 방패막이가 없습니다.” “과연.”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전략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겠군. 흠. 다른 요소는 몰라도 지(地)의 차원에서는 우리가 유리하다. 바르바토스 각하와 다르게 우리는 항상 주군 곁에 있을 수 있으니.” “예.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라피스와 라우라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제레미가 생각했다. ‘얘네들도 조금 이상해요.’ 세상에 어느 하급 마족이 마왕을 가리켜서 한낱 방패막이라고 부르는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인간 소녀는 심지어 동족의 두개골을 수집하는 취미까지 갖고 있었다. 데이지가 얼마나 이상한지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지금 이 분들, 바르바토스 전하를 상대로 진지하게 사랑 싸움을 벌일 생각인가요? 정말? 진심으로?’ 상대는 서열 제8위의 마왕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편, 이 아수라장에서도 데이지는 조용하게 철학책을 넘겼다. 문득 제레미가 깨달았다. ‘설마, 혹시, 지금 여기서 가장 상식적인 사람이 저인가요?’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사람을 암살하고 암흑가에서 피를 묻혀온 제가……가장 상식적이라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단탈리안 마왕군, 통칭 단탈리안 파밀리아(Dantalian familia)에는 제정신이 아닌 인재들만 모여 있었다. 라피스도 라우라도 처음 봤을 때만 정상적으로 비추었을 따름이지 속을 파고들어보니 그들의 군주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선 은근히 마조라고 들었다. 그 성향을 이용해서…….” “예. 라우라, 언제 기회를 노려서 세 명이서 성교하시길. 그때 라우라가 가장 우위를 점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공식적으로야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정실이나, 실제 궁전 안에서는…….”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턱이 점점 더 벌어졌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요. 라피스 님. 라우라 님. 설마 바르바토스 전하를 '노예' 역할로……그리고 라우라 님이 주인 역할을 맡겠다는, 그런 이야기인가요?” “전술적으로, 상대방이 약한 지점을 공격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라우라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지금이야 주군과 사귀지만 본래 동성애자이시다. 부끄럽지만, 소녀는 미색으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한다. 이 육체를 이용하겠다.” “네에……?” 라우라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소녀는, 바르바토스 각하의 애인이 되어 그분을 소녀의 노예로 만들겠다!” “…….” “바르바토스 각하의 첩인 주군은 그럼 소녀의 첩의 첩이 된다. 입장상 소녀가 유리해지는 것이다!” 이 년은 미쳤다. 제레미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마에 땀을 흘렸다. 그러니까 인간 소녀는, 단탈리안의 정실이 되기 위하여 바르바토스를 SM 플레이 파트너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머리구조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길래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제레미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훌륭한 방법입니다.” 또 다른 미치광이가 라우라를 옹호하고 있었다. “라우라 양은 정책에 서투르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과연 칭찬할 수밖에 없군요.” “걱정하지 마라. 라피스 언니는 소녀의 영원한 언니이다. 소녀가 바르바토스 각하를 점령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뒤엎어지진 않는다.” 제레미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단탈리안 파밀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한 귀문(鬼門)이었다. 이곳에는 주군이고 신하고 가릴 것 없이 머리 한구석의 무언가가 망가진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극히 정상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마왕 단탈리안은 제8차 월맹군을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마왕군의 전멸을 막은 유망주. 라피스 라줄리는 쿤쿠스카 상회에서 성공일로를 달리는 차기 거상. 남들이 보면 훌륭하기 그지없는 인재진이라고 생각하겠지. 실상은 완벽하게 달랐다. 이들은 그저 평범한 척할 뿐인 도깨비들이었다! ‘나, 나가고 싶어요. 전력으로 도망치고 싶어요. 이분들이랑 평생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암살자로서 살아온 그녀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들과 엮이면 좋을 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심장에 노예각인이 새겨져 있는 이상, 의뢰주의 명령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복종해야만 했다……. 『이곳에 들어와버린 자, 희망일랑 죄다 버려야 할지어니.』 던전 입구에 새겨진 말이 옳았다. 여기엔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없다……. 이날. 군주인 단탈리안은 자신의 연애자유를 사수하기 위해 여마왕들을 모조리 따먹겠다고 공언했으며, 그의 신하들은 정실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마왕 바르바토스를 함락시키겠노라고 모의했다. 그것이 단탈리안 패밀리의 퀄리티였다. * * * 니블헤임 시장관저에 마왕들이 모여들었다. 벌써 여기에 오는 것도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청문회에서 파이몬한테 추궁당했다. 그때 나는 아무 지위도 없는 최하급 마왕이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월맹군 원정이 결의되었다. 그때, 나는 평원파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문……나는 평원파의 최고 핵심이자 월맹군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 참모 지위를 갖고 있다. 세월이 무상하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돌이켜보면 정신없이 달려온 3년 아니었던가? “단탈리안 전하, 어서오십시오. 히히.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회에 잠겨 궁전 정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노파가 나를 맞이했다. 얼굴이 낯익었다. 몇 년 전에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중나온 바로 그 마녀였다. “훔바바 아닌가? 오랜만이로군.” “호호? 소인이 전하께 미천한 이름을 말씀드렸는지요?” 노파가 쥐처럼 끽끽거리며 말했다. 예전에는 신경에 거슬리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편안했다. 마녀의 능력치를 훔쳐보면서 ‘얘 한 마리만 쳐들어와도 싸그리 멸망해버리겠다’ 하고 절망했었다. 이제는 달랐다. 나에게는 죽음의 기사들이 있었다. 내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마왕이라면 신민의 이름 정도야 저절로 알게 되는 법이지.” “과연 단탈리안 전하, 끼끼. 마계에 위명을 떨치시는 분답군요. 자아. 궁전으로 모시겠습니다.” 노파가 앞장섰다. 이것 역시 옛날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노파가 아니라 그녀의 사역마가 안내했다. 새삼스럽게 내가 출세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 지위까지 오르는 데 정말로 많이 고생했다. 정말로. 한두 마디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 전하 납시요오오!” 문지기가 큰 목소리로 무도회장에 고했다. 경비병들은 지극하게 예의바른 태도로 나에게 허리를 숙였고, 그 한가운데를 내가 검은색 망토를 펄럭이면서 걸어갔다. 나는 부츠에서 망토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검은 죽음(黑死)의 마왕. 혹자는 나를 향해 수군거렸다. 아직도 흑사병과 나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검은색이 흑사병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떳떳하게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이제 나에게 감히 흑사병 따위로 추궁을 걸어올 마왕은 없었으니까. 마왕들은 멀찍이서 나를 지켜보았다. 누구도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과연, 주위를 둘러보니 평원파 마왕들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산악파였다. 그들 입장에서 마왕 단탈리안은 자신들의 두목을 수장시킨 악몽에 불과했다. 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겠지. 산악파가 마왕군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은 끝났다. 대륙의 정세는 확연하게 평원파가 휘어잡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역전을 만들어낸 전범자라는 소리였다. 무언가 우스웠다. 산악파 마왕들과 나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그런 침묵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끼어드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오랜만이야, 단탈리안!” “……예, 오랜만입니다. 시트리.” 마왕군에서 유일하게 심성이 더럽혀지지 않은 자, 서열 제12위의 시트리였다. 시트리는 나를 보자마자 팔짱을 껴왔다. 주변에서 경악성이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이몬이 몰락한 지금, 현재 산악파를 이끄는 장본인은 시트리였다. 그런 마왕이 산악파의 원수한테 친밀하게 다가간 것이었다. “그동안 뭐하면서 지냈어? 한참이나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잖아!” “하하. 제가 명줄 하나는 끝내주게 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안 그래도 단탈리안 싫어하는 인간들 많으니까 조심해야지.” 시트리가 뺨을 부풀리면서 노려보았다. 이쪽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쓴웃음이 나왔다. 나 참, 이 아가씨는. 지금 자기가 한 행위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거대한 파장을 몰고올지 아는 것일까. 아마 전혀 모르겠지. 그렇기에 시트리였다. 반면, 세상에는 위장에 구렁이를 이백 마리쯤 키우는 양반도 있었다. “헤헤. 안녕, 단탈리안? 오랜만이야.”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 바르바토스와 영토 분쟁을 겪고 있으며, 오늘 내가 평원파의 대표로서 협상해야 할 상대기이고 했다. 풍성한 금발을 자랑하며 가미긴이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가미긴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얼핏 보면 시트리처럼 순수해보였다. 물론 그녀의 속내가 얼마나 냉혹한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가미긴 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응. 바르바토스 덕분에 지루할 날이 없었어!” 가미긴이 활짝 웃었다. “오늘은 잘 부탁해, 단탈리안. 나 너무 몰아세우면 삐질 거야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우리가 서로 악수하며 미소를 지었다.   00226 마녀의 예언 =========================================================================                        “와아. 이렇게 손을 잡으니까 참 좋다아.” 가미긴은 왼손에는 포도주잔을 들었고, 오른손으로는 내 손을 꾹꾹 만졌다. 내가 대답했다. “저 같은 것이 만지기에는 비단처럼 고운 손길이군요.” “시트리. 단탈리안이랑 말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잠깐만 괜찮을까~?” 가미긴이 앙증맞게 애교를 떨며 시트리한테 말했다. 서열 제4위가 서열 제12위에게 건네는 말투치고 매우 정중했다. 시트리는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것이 불만스러운지 햄스터처럼 뺨을 부풀렸지만, 산악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가미긴이 내게 말했다. “저번에 브루노에서 그렇게 추파를 던졌는데도 모른 척하고! 나, 여자로서 자신감이 사라질 뻔했어.” “저에게는 무척 무서운 아가씨가 마드모아젤로 있어서 말입니다.” “내가 바르바토스보다 못하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는 운명이 있어 누구를 먼저 만나고 누구를 나중에 만났는가, 그 단순한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리고는 하지요. 가미긴 님.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을 먼저 만나지 못해서 저 역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헤헤.” 내가 공손하게 신사적으로 대응하자, 가미긴이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사실 가미긴은 나에게 다가오기 전부터 시종일관 방긋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만약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웃고 다니기만 하는 자가 있으면 둘 중 하나였다. 아주 착한 사람이거나――. “그래서, 뭘 원해?” 아주 위험한 사람이거나. 그리고 만약에 그 사람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고 모든 마왕을 통틀어 서열 제4위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어느 쪽이 정답일지 크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가미긴이 홀로 학살한 인간의 숫자만 수만을 헤아리겠지. 내가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무엇을 원한다니. 물론 가미긴 님. 저는 언제나 당신의 호의를 바랍니다.” “응? 시치미 떼려구? 후후, 그럴 필요 없어.” 가미긴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단탈리안이 바르바토스의 심복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나도 잘 아는걸. 예전에, 파이몬 물 먹이려고 네가 편지를 보낸 거 기억해? 사실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왜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이 편지를 보낸 건지 아리까리했거든~.” 일찍이 파이몬은 엘리자베트 총통과 연합하여 바르바토스를 섬멸하려 했다. 나는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고위 마왕들에게 개인적으로 서신을 보내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가미긴은 지적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바르바토스 본인이 편지를 보내는 편이 훨씬 더 신뢰가 갈 텐데 말이야. 하지만 안 그랬어. 어쩌면,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 네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후후.” “음. 곤란하군요.” 내가 멋쩍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정말로 파이몬이 그렇게 움직일지 안 움직일지, 완벽한 확신은 없었습니다. 만약에 예상이 틀릴 경우, 제가 잘못을 뒤집어쓰기 위해서 일부러…….” “걸렸구나.” 그 순간, 가미긴의 실눈이 커졌다. 가미긴은 걸렸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나한테 성큼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걸렸어, 걸려버렸어~.” 새빨간 눈동자가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 불길하게 빛났다. “단탈리안. 나는 바르바토스가 '네 계획'을 전혀 모를 수도 있다고 말했어. 우리 마왕군의 군단장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파이몬을 물 먹이는 계획……역시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 네가 완전히 혼자서 짜낸 대본이었구나~?” “…….” “결국 지금 우리가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가지고 다투는 원인도 단탈리안이 제공한 거네. 아, 걱정하지 마. 지금 내가 방음(防音)마법을 쳐뒀으니까 주변에는 안 들려!” 빌어먹을. 내가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직이었다. 아직 변명할 거리가 남아 있었다. 내가 차분하게 입을 열려고 한 때였다. 가미긴이 왼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슬쩍 놓았다. 포도주잔은 낙하하여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동안 가미긴은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탈리안. 표정이 '멈춰' 있다구?” 가미긴이 가늘게 눈웃음을 쳤다. “가엽게도. 자기 스스로 배역을 만들어서 몰입하는 사람은 말이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그만 배역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마치 왕의 배역을 맡은 삼류배우가 갑작스럽게 무대에 난입해온 관객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왕처럼 행동하듯이 말이야~.” 가미긴이 유리파편을 슬쩍 짓밟았다.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불쾌하게 울렸다. “유리잔이 깨졌는데도 놀라기는커녕 얼굴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잖아. 표정이 멈췄어. 그러면 안 돼, 단탈리안. 그러면 안 돼~. 그 정도 연기로는 세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속아넘길지 몰라도, 나 같은 '일류배우'한테는 간파당하고 만다구.” “…….”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 “에이, 그렇다고 또 너무 정색한다아. 가벼운 여흥이야. 같이 즐겨야지.” “저를 떠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동질감을 느꼈어.” 가미긴이 말했다. “마냥 웃고만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빌어먹지? 그런 세상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으려면, 내가 세상 다 합친 것보다 더 빌어먹은 사람이 되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래서 난 항상 웃고 다녀. 단탈리안도 똑같을 거라고 믿어.” “……당신과 내가 같은 부류라고?” 가슴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들끓었다. “바르바토스나 파이몬 같은 아이들. 정말로 짜증나지~?” 가미긴이 활짝 웃었다. “쟤네들은 세상에 정의라는 게 있다고 믿으니까 말이야. 두 사람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실 서로 쏙 빼닮았어. 마계의 염원이라느니 평화라느니 너무 거창해서 같이 못 놀아주겠어. 정말, 몇 번이나 죽이고 또 죽이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았다니까아.” “당신이 틀렸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를 좋아해요.” “글쎄에. 그냥 동경하는 게 아니고?” 가미긴이 장난스럽게 내 이마에 꿀밤을 날렸다. “나는 서열 제4위야. 이천팔백 년 전에는 서열 제70위였지. 제4위, 여기까지가 내 최선이었어. 아무리 사람들을 속이고 능욕해도 서열 제3위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겠더라구. 거기부터는 진짜 괴물들만 살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바로 너의 최선이야아.” 까마득한 과거, 가미긴은 나보다 더 나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때 세계에는 마족이면서도 마왕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최고위 몬스터들이 날뒤었으며, 마왕군은 대륙에 신경 쓰기 이전에 용족과의 대전에 죽어나갔다. 가미긴은 서열 제70위로 시작하여 마침내 서열 제4위에 올랐노라고 내게 밝히고 있었다. 그녀 역시 생존하기 위해 갖가지 발버둥을 쳤겠지. 그리고 나처럼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표리부동(表裏不同). 예상대로 가미긴은 살갗으로 웃고 다니지만 속에 뱀을 키우는 인물이었다. “선배이자 동류로서 예언해줄게. 나 가미긴, 마녀 중의 마녀로서 말하느니, 사랑과 동경을 착각해버리는 자에게 크나큰 불행이 있을 거야! 멋쟁이 단탈리안. 이제 연기는 그만하고 나와 조금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자.” “건설적인 이야기라니요?” “아까 물었잖아. 뭘 원하냐고.” 가미긴이 말했다. “설마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가레스와 나에게 덤빈 건 아닐 거잖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너한테만 보이는 이득이 있겠지. 그러니까 솔직하게 물어봤을 뿐이야. 뭘 원해~?” 아아, 그런가. 과연 가미긴은 나와 닮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이득과 손해를 생각하며 움직였다. 이상, 이념, 의리와 같은 낱말은 가미긴에게 한낱 쇳소리보다 못한 잡음에 불과하겠지. 생존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가치였으며,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러므로 나는 단언했다. “가미긴.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도 발뺌하려는 거야? 차암. 그럴 필요없대두.” “아니요, 진심입니다. 당신과 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결정적이어서 도저히 우리 둘을 동류라고 부르지 못하게 강요하는 차이였다. “가미긴, 당신은 강자입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덜떨어지는 부류라고 내려다보지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당신에게 있어서 그저 헛소리를 일삼는 멍청이에 불과합니다. 생존이야말로 진리. 나머지는 거짓이며 환상……당신은 그리 확신하고 있겠지요. 올바른 시각입니다.” “응.” 가미긴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게 뭐?” “당신은 환상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나였더라면 나처럼 허술한 부분이 없었겠지. 결코 노예상인 잭 올란드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에 용사가 될지도 모를 데이지와 루크를 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치들. 마계의 염원. 평화. 그런 것들을 향해서 부질없이 날개짓하는 행위야말로 아름답습니다. 부질없기에 역겨운 것이 아닙니다. 부질없으니까 도리어 감동적인 것입니다.” “……뭐?” “저런. 가미긴 님, 제 취향을 이해해주지 못하시는군요.” 내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바르바토스가 바라는 대로 마인들의 이상사회가 이루어졌다고 합시다. 그래봤자 억천 년의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가미긴 님,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왕이라고 하여 영원불멸할 수는 없습니다.” 흥이 겨웠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단지 조금 음흉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가미긴도 훌륭하게 멋진 위인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도 좋아했다. “근본적으로 세상은 콜로세움이나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검투사들은 오늘 살아남기를 바라며 한 순간 한 순간 온몸을 내맡겨, 상대의 가죽을 꿰뚫고, 핏물을 흘리고, 승리의 포효를 터트리지요. 그래봤자 내일, 아니면 내일모레, 아니면 삼 년 후, 어느 날 패배자가 되어 싸늘하게 죽어버릴 텐데!” “…….” “아무런 쓸모가 없음에도 바퀴벌레처럼 발악하는 그 부질없는 몸짓이야말로 마왕된 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미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방음마법을 쳐두었다니 마음껏 소리쳤다. 아아, 어쩌면 내 취향을 이해해줄지 모를 동지를 만난 것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죽겠지요. 파이몬도 똑같습니다. 그토록 고귀한 이념을 품은 자들이……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꿈에도 꾸지 못할 의지력을 품고, 수백 년, 수천 년 동안이나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이……결국은 좌절한다! 결국은 최후를 맞이한다! 아무런 보람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것은 정말이지――. “정말로 기대되지 않습니까!” 죽여주게 황홀한 일이다. 가미긴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미소가 멈춰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더 바싹 붙였다. “과연 어떤 유언을 남길까요. 얼마나 아름답게 죽을까요. 아아, 상상만 해도 멋집니다. 가미긴 님. 그렇지 않습니까? 바르바토스가 최후에 어떤 유언을 남길지, 파이몬이 마지막에 어떤 삶을 보여주고 떠나갈지, 기대되고 또 기대되어 밤잠을 설칠 정도 아닌가요! 오. 인간들 중에도 간혹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드물게도 '멋진 의지'를 가진 존재이지요.” 파비안이 떠올랐다. 최근에 접한 사람 중에는 파비안이 가장 멋졌다. 나는 마음속의 신전에서 영원토록 그를 기릴 것이었다. 마치 불꽃놀이처럼 그에 대한 기억은 해마다 거듭하여 내게 감동을 주겠지. “그런 의지들이 피어나고 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마왕의 의무라고 저는, 저 단탈리안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작품 후기 ============================   가미긴: 후후, 이 구역의 미친 년은 나……. 단탈리안: 꺄하하하, 꺄르르르륽, 까ㅓㅁ이ㅓㅏㅁ랴! 가미긴: ……죄송합니다. 저 나가봐도 괜찮을까요? 00227 마녀의 예언 =========================================================================                        이때 알림창이 푸르게 떠올랐다. 「마왕 가미긴이 당신에게 '위압' 당했습니다!」 「마왕 가미긴이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어떤 기적적인 확률에 의해 6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차에도 불구하고 상태이상을 성공시켰습니다!」 요란하게 효과음이 울렸다. 「기적적인 미션을 클리어했습니다.」 「미션 보상으로 1개의 스킬이 강화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스킬 <연기>가 스킬 <면종복배(面從腹背)>로 강화되었습니다!」 꽤나 의외였다. 이것이 얼마 만에 보는 스킬 습득인가. 면종복배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도 게임에서 외교와 음모를 실행할 때 보너스가 붙는다. <연기>처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는 잡스킬과 다르게 꽤나 써먹을 만하다. 세상에, 플레이가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서야 그럭저럭 괜찮은 기술이 습득되다니. 지옥 같은 난이도에도 정도가 있다.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플레이어들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제작사에 돌격하겠지. “단탈리안…….” 가미긴이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자그마한 틈새로 한숨과 같은 무언가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단탈리안, 미쳤구나.” “오. 우선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준을 말씀해주십시오. 기준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 전부가 미친놈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선을 넘어가버렸어. 마왕 중에 가끔 너 같은 작자가 있지.” 가미긴이 내 오른손을 놓았다. “알고 있어? 그런 것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고 환희하는 마왕은 둘 중 하나야. 인생을 위험천만하게 사는 모험가이거나, 사시사철 자살하길 원하는 도박광이야. 어느 쪽이든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얼른 자기를 죽여주길 바라는 미치광이라고.” “그래서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제가 미쳤다고 가정해봅시다. 뭐가 대단합니까? 살아남는 일 빼고는 전부 무의미하다고 내치는 당신은 안 미쳤습니까? 오직 마인들을 위해서 수백수천만의 인류를 죄다 쳐죽이자는 바르바토스는 제정신입니까? 다 미쳤습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신경 쓰이는지 이쪽을 힐끔거리는 마왕이 몇 명 있었다. 대다수는 자기네 파벌과 친목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차단되어서 내 귀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한 장소에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분리된 느낌을 받으며 내가 말했다. “마왕은 미친 작자만 하는 것입니다. 미쳐서 하는 일이에요. 가미긴, 당신께선 제가 바르바토스를 도와줌으로써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리라 지적하셨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바르바토스를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 “아, 물론 가미긴 님. 당신도 좋아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토록 겉표정과 속마음이 완전무결하게 분리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언제 한번 진득하게 얘기를 나누어보죠.” 가미긴이 실눈 너머에서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기회가 된다면.” 가미긴은 끝까지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나에게 우호적인 마왕이 이곳에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혼자 남게 되었다. 시트리가 나를 어딘지 애달픈 눈동자로 바라보았지만, 산악파 마왕들이 주변을 둘러싼 탓에 다가오지 못했다. 아마도 나한테 친근하게 접근한 것에 대하여 동료들한테 잔소리를 잔뜩 듣는 것 같았다. ─ 나 좀 도와줘, 단탈리안! 시트리의 시선이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잔소리를 들어도 쌌다. 이제 파이몬이 아니라 네가 산악파의 대표주자이니까 어느 정도 자숙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 포기해. 그리고 넌 좀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있어. ─ 배신자! 거짓말쟁이! 평생 원망할 거야! 시트리가 절망적인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원래 아프면서 성장하는 거란다. 그외에도 몇몇 마왕이 이따금씩 내 쪽을 훔쳐보았지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현재 마왕 단탈리안이 가지는 위치는 상당히 미묘했다. 일단 월맹군에서 거둔 전적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했다. 친분을 나누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마왕도 제법 있으리라. 문제는 섣불리 친해지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평원파의 핵심 인사. 게다가 바르바토스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다. 단탈리안과 친해지면 그 자체로 평원파에 가까워지려는 행보 아니냐고 의심을 받는다. 마계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과격분자로 유명한 평원파이다. 썩 달갑지 않겠지. 더군다나 파이몬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뭐, 산악파 입장에선 눈에 가시라는 거다. 산악파와 척을 질 배짱이 없다면 나한테 다가서기 어렵다. ‘뭐. 홀로 즐기는 연회도 그 나름대로 편하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도회장 구석에 갔다. 거기엔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다과가 산더미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좀처럼 맛보기 힘든 사치품이었다. 훌륭하군. 시종에게 포도주잔을 하나 건네받은 다음 나의 능력치창을 확인했다. 과연 스킬 부분에 <연기>가 사라지고 <면종복배>가 들어서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스킬의 세세한 효과를 확인했다. ───────────────────────── <스킬> 1. 면종복배(面從腹背). A급 개인 약화계 엑티브 스킬. 상대방의 호감도가 20 미만일 경우: 플레이어의 정치력 +10%, 매력 +10%. 상대방의 호감도가 20 이상일 경우, 상대방을 공격했을 시: 상대방의 통솔력 -20%, 무력 -10%, 지력 -20%, 정치력 -20%. (※ <연기>가 강화된 스킬입니다. 발동 시에 <연기>의 효과가 유지됩니다.) ───────────────────────── “음. 괜찮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주를 머금었다. A급 스킬치고는 상당히 쓰레기스러운 효과였지만 이것이라도 어디인가. 연기 스킬에는 설명문이랍시고 적혀 있던 문장이 딱 하나, ‘상대방을 설득시킬 확률이 증가합니다’, 이것뿐이었다. 나의 능력치에 대하여 관대해지기로 마음 먹은 지 한참 오래되었다. 그저 정치력과 매력을 10%씩이나 올려주어서 세상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아, 무엇이든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했다. 사람이 겸손해야지. 홀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다크엘프들로 이루어진 악단이 멋들어지게 악기를 켰다. 참고로 다크엘프는 이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인 종족이었는데, 의외로 순혈 엘프는 대부분의 음악을 '저속한 예술'이라고 깔보아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야. 너 구석에서 찌질하게 뭐하냐?” 시간이 지나면서 마왕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중에는 물론 바르바토스도 있었다. 그녀는 무도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스윽 마왕들을 훑어보더니, 나를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내가 쿨하게 대답했다. “보다시피 연회를 만끽하고 있지.” “지랄이 풍년일세. 오늘 무대의 주연이라는 놈이 왕따처럼 궁상이나 떨고 있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양쪽 허리에 손을 얹혔다. “네가 청승맞게 굴면 내 체면까지 구겨진다고 바로 얼마 전에 얘기하지 않았냐?” “후후. 바르바토스여, 너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어. 나는 고독하되 그 고독은 결코 망망대해에서 바닷길을 잃어버린 선원의 고독이 아니야. 다만 홀로 뱃머리가 향할 곳을 결정해야만 하는 선장의 외로움…….” “혓바닥 뜯어버리기 전에 닥쳐.” 네, 닥치겠습니다. 바르바토스가 과자를 집었다. 입에서 와작와작 씹어먹는 소리가 장렬하게 들려왔다. 일단 너부터 체면을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뻔했지만, 혓바닥이 뜯기기는 싫었으므로 얌전히 닥쳤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바르바토스의 이미지 하면 무엇보다도 검은색과 붉은색. 전쟁터이든 무도회장이든 흑색과 적색의 옷만 입기로 유명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만큼은 눈처럼 하얀 옷을 입고왔다. 바르바토스의 백발이랑 무척 잘 어울렸다. 눈이 야트막하게 덮힌 백야(白野)를 보는 듯했다. 그녀가 내면에 간직한 순수함과도 맞아떨어져 개인적으로 만점을 주고 싶었다. “왜 평소에 안 입던 옷을 입어?” “너한테 맞춘 거잖아, 둔탱아.” 바르바토스가 내 손에서 포도주잔을 가로챈 다음에 꿀꺽했다. “크흐. 너 만날 우중충하게 검은색으로 된 누더기만 입잖아. 어차피 오늘도 그럴 것 같아서 그냥 내가 하얀색으로 맞춰줬다. 됐냐?” “이거,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설원의 요정님. 저에게 첫 번째 춤의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럴려고 온 거야, 둔탱이 신사님.” 바르바토스가 웃으면서 내 손바닥에 손을 올렸다. 나보다 한참 자그마한 손. 그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유리로 된 예술품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우리는 홀 가운데로 나아가며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춤 실력이 늘었는걸.” 바르바토스가 즐겁게 말했다. “어디서 다른 여자랑 연습이라도 했나봐?” “춤 하나 제대로 못 춘다고 엄청나게 까대는 아가씨가 내 곁에 있어서 말이야. 구두굽에 밟히지 않으려고 꽤나 열심히 연습했지.”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를 비꼬는 말이었다. “흥. 입만 살아가지고는.” “아까 전에 가미긴이 접근했어. 나한테 뭘 원하느냐고 협상을 제시하더군.” 바르바토스가 호오, 하고 눈을 빛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냐?” “저는 어린애 취향이라서 당신처럼 쓸데없이 지방이 잔뜩 붙은 아가씨는 별로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지.” “깔깔깔.” 바르바토스가 크게 웃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바르바토스보다 가미긴 같은 육체가 취향에 가까웠다. 기분 좋으라고 말해준 것이었다. “그거 알아? 너 정말 밥팅이야.” “새삼스럽기는.”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기분 좋게 춤을 추었다. * * * “어머나, 저거 보세요. 바르바토스 님이랑 단탈리안이에요.”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정말이었군요!” 여자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가미긴 주변에 모여든 그녀들은 무소속 파벌이었는데, 정치적인 대립관계 따위에는 관심을 끄고 마왕으로서의 삶을 즐기는 데 집중했다. 연애담만큼 그들을 흥분시키는 것도 없었다. “꼭 작은 요정과 엘프가 춤을 추는 것 같아요!” “글쎄, 바르바토스 님은 확실히 아름답지만 상대방이…….” “어머나. 저는 저런 쪽이 더 취향인걸요.” 가미긴은 조용히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두 마왕 사이에는 왠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공기, 저쪽과 이쪽을 구분하는 벽과 같은 것이 있었다. 신뢰라는 물건이겠지.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한없이 무가치해.’ 가미긴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달콤한 술이었다. 한 여마왕이 가미긴에게 말했다. “가미긴 님은 어떠신가요? 아까 단탈리안과 대화를 나누신 듯한데.” “으으음.” 가미긴이 평소처럼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반응하는 편이 좋을까? 단탈리안과 제법 깊은 사이라고 묘한 여운을 남겨줄까. 그래, 그쪽이 마음에 든다. 여마왕들은 말하자면 사교계의 중심이요 소문의 진원지였다. 가미긴과 단탈리안이 각별한 사이라고 하더라, 그런 풍문이라도 돌면 평원파에 어느 정도 혼란을 줄지 몰랐다. “응, 부끄럽지만 약간 관심이 있다고 할까~.” “어머어머. 정말인가요!?” “혹시, 호감이 있다는 말씀이신지?” 여마왕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가미긴은 능숙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해내면서 여마왕들한테 얘기했다. 부끄럽다는 듯 홍조를 띄우는 것을 잊지 않고. 멋쩍게 미소를 짓는 것 또한 잊지 않고. 그녀가 슬쩍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멀어보였다.   00228 마녀의 예언 =========================================================================                        춤이 끝나자 무도회장 곳곳에서 박수를 보내왔다. 어디에서 누가 박수를 보내었는가. 그것이 현재 마왕군의 세력구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열렬하게 손뼉을 친 파벌은 평원파였다. 그들은 반쯤은 바르바토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에서, 나머지 반쯤은 자기네 파벌이 배출해낸 최고의 책사에 대한 칭찬에서 손뼉을 쳤다. 단, 바르바토스의 파트너 자리를 빼앗긴 벨레드와 제파르는 표정이 썩고 있었다. “크윽! 아우가 없었을 때는 내가 군단장 각하를 에스코트했거늘.” “각하께서는 전사보다 모사꾼을 좋아하시는 것인가……!” 두 마왕은 수백 년 동안 매번 파트너 자리를 두고 경쟁했지만, 오늘만큼은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궁상맞게도. 그 다음은 중립파였다.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이 소수의 양식파는, 단탈리안을 내심 이해심 깊은 동지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기에 단탈리안은 무식한 전쟁광밖에 없는 평원파에서 기적적으로 피어난 장미꽃이었으며, 유일한 양심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선 파이몬을 용서했고…….” “월맹군에서도 산악파를 너그러이 대우해주었지. 말이 통하는 자일세.”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관용과 균형을 중시하는 중립파에게 단탈리안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도 결코 선을 넘지 않는' 정치꾼이었다. 그것은 이상적인 정치꾼이기도 했다. 파이몬처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만인의 이익 따위를 울부짖는 자는 위험했다. 이쪽에서 이득을 제시해도 대의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 때문에 좀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함부로 선을 넘어가서 폭주해버리는 타입 역시 위험했다. 반면에 단탈리안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고, 언제든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컨대 말이 통했다. 정신병자가 가득한 마왕군에서 말귀가 통하는 마왕이란 소중했다. 중립파로서는 단탈리안이 계속해서 평원파에 남아 전쟁광들에게 목줄을 채워주기를 기대했다. 마지막은 물론 산악파였다. 그들이 심기 불편한 낯빛으로 무도회장을 바라보았다. 박수가 터져나오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표정이었다. 산악파 마왕들이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의 멸칭을 입에 담으면서 수군거렸다. “미치광이와 절름발이인가. 과연, 어찌보면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닌가.” “한 명은 양지에서 피를 몰아치고 다른 한 명은 음지에서 피를 빨아들인다. 평원파는 대단한 수장과 참모를 얻었어.” 오로지 시트리만이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의 동료들과 단탈리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은 파이몬 언니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은인이잖아?’ 솔직히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산악파였다. 평원파가 아니었다. 산악파는 책임을 지고 산산이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히잉.’ 단탈리안이 관용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산악파는 파탄났을 거다. 시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서 동료들이 고마워야 할 대상을 되레 증오하고 경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수가 끝났다. 단탈리안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다음 어디론가 걸어갔다. 바로 중립파가 모여 있는 장소였다. 어째서 평원파인 단탈리안이 중립파로 향하는가, 하고 여러 마왕이 고개를 갸웃하던 때였다. “저에게 당신의 첫 번째 춤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단탈리안이 중립파 마왕에게 춤을 신청했다. 마왕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탈리안에게 신청을 받은 마왕은――중립파의 거두,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였다. 당연하게도 마왕 마르바스는 남성이었다. 단탈리안이 남성에게 춤을 신청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제정신인가?” “미쳤군…….” 이곳저곳에서 마왕들이 경악했다. 제아무리 마계가 동성애에 관대하다고는 하나 마왕의 무도회처럼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자-남자 파트너가 허용되지는 않았다. 아니, 설령 허용된다 하더라도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단탈리안이 저지를 금기는 아니었다! 마르바스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흐음.” 두 마왕 사이에 말없이 눈짓이 오갔다. 마르바스는 두어 번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옅게 웃었다. “물론이다.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아름다운 꽃에 본인이 선정되다니, 영광이네.” “하하. 바르바토스가 제 친우가 아니었더라면 당신께서 첫 번째 꽃이 되셨을 것입니다.” “더더욱 영광이라네.” 마르바스가 자신의 손을 단탈리안의 손바닥에 올렸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마왕들이 흥분했다. “세상에나! 저것 좀 보세요, 마르바스 님이 춤추는 거 처음 봐요!” “설마, 설마하는 말이지만, 마르바스 님까지 단탈리안의 애인일까요!?” “꺄악! 어쩜 좋아!” 자고로 남성의 동성애만큼 뭇 여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화제거리가 없었다. 그 남자가 마르바스처럼 댄디하고 인기가 많은 마왕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여마왕들이 눈에 불을 켜고 쉴 새 없이 ‘마르바스와 단탈리안, 둘 중 어느 누가 남성 역할인가’를 논쟁했다. 가장 신난 사람은 단연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배꼽을 부여잡은 채 깔깔 웃었다. 벨레드 역시 두 마왕을 손가락질하며 크게 웃어댔다. “휘이이익! 잘한다! 더 해라, 더 해!” “남자가 리드를 정말 못하는구만!” 이미 정숙한 무도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마왕들이 산악파며 평원파며 파벌을 가리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 자그마한 해프닝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으나, 표정이 썩은 자도 일부 있었다. 가미긴은 심기가 불편했다. 이래서야 자기가 기껏해서 만들어내는 풍문이 쓸모가 없어졌다. 가미긴이 단탈리안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보다 마르바스가 단탈리안과 모종의 관계에 놓였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흥미로웠다. 한동안 사교계에선 두 남자 마왕에 대해 신나게 떠들겠지. 자신이 조작한 풍문은 미처 퍼지기도 이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 * * 첫날 밤은 무도회만 열리고 끝났고, 두 번째 날부터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벌써부터 사교계에는 마르바스와 나의 얘기로 시끌벅적했다. “중립파가 단탈리안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중립파가 평원파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의도이다.” 게다가 근거 없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마르바스가 내 애인인 것이 아니라 그저 평원파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대범한 추측이었으나 사람들은 의외로 이걸 마음에 들어했다. 아귀가 들어맞는다면서. 애인 한 명 없이 청렴하게 살아온 마르바스가 뜬금없이 단탈리안과 사귄다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뭐, 그걸 의도한 것이었지만. 마르바스 영감은 나한테 빚을 진 것이 여러 개 있었다. 그걸 이번 기회에 갚으라고 강요했다. 우리 둘은 서로 아무런 합의를 미리 건네받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동조했다. 아마도 내가 뭘 생각했는지 곧바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간 정치력이 비상한 영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나한테 유리한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인 협상이 열렸다. 바알이 중재석에 앉아 있었지만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말한 대로 바알은 단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이상으로 뭔가 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저쪽 대표로 나온 가미긴, 이쪽 대표로 나온 내가 논쟁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바알이 주변에 앉기만 했는데도 공기가 묵직해졌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끔 압도하는 분위기가 바알에게 있었다. 연륜이라는 것일까. “합스부르크를 점령하는 데 공헌한 것은 평원파뿐만이 아니야.” 가미긴이 말했다. “많은 군단이 함께 움직임으로써 얻어낸 거라구. 그쪽에서 제멋대로 합스부르크의 섭정을 자처하면서 몽땅 꿀꺽해버리면 곤란해~.” “누가 전쟁에 더 공헌했는가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내가 차분하게 반론했다. “합스부르크의 주력을 상대한 장본인은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파이몬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분쇄한 것도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는 마땅히 평원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물론, 여타 군단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흐응~?” “합스부르크의 영토에서 거둬들이는 재화를 상당량 제공하겠습니다. 만족할 만한 대가가 주어지리라 약속드리지요.” 가미긴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장난질이야, 그거. 우리가 지금 금은보화가 부족해서 뗑강부리는 줄 알아? 대륙에 자신의 영토를 갖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한 거야아. 솔직하게 말할게. 평원파만 마계의 영웅이 되려는 심보가 고약하다구.” “그렇다면 그쪽의 요구사항은 무엇입니까?” “평원파가 5. 아가레스랑 내가 각각 2.5씩. 어때? 이 정도면 타당한 분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고개를 저었다. “평원파가 8.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이 각기 1씩 분배받는 것으로 합의하지요.” “흐으응.” 가미긴은 길게 콧소리를 냈다. 방청석에서 다른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가미긴이 예의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였다. “전쟁을 하고 싶은 거야, 평원파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누가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까? 아가레스 님과 가미긴 님이 군단을 이끌었다지만 인간군과 정면대결을 피했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요새도시 크렘스를 점령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빈드보나를 함락한 다음에 잔존한 합스부르크 군대를 추격한 것은 누구였습니까? 우리 평원파였습니다. 가미긴 님. 당신은 합스부르크의 패잔병을 눈앞에 두고도 간단히 퇴각해버렸습니다.” “전략적인 후퇴라는 거야.” 가미긴이 미소를 무너트리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당장 추격전에 나선 바르바토스만 해도 군대를 말아먹었잖아. 그런 무의미한 전투에 병력을 소모할 만큼 우둔하지 않다는 말이지.” “무의미한 전투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류를 물리치고 마인들을 위한 세상을 대륙에 마련한다. 그 지상명제에는 당연히 희생이 따릅니다. 무의미한 희생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희생이지요. 바로 그런 희생 덕분에 우리는 합스부르크 북부라도 얻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희생하길 거절한 사람이 희생한 사람의 영토를 탐낸다……정말로 훌륭한 태도로군요. 감탄했습니다.” “…….”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방청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당연하다. 지나치게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한 명의 마왕으로 자리한 게 아니다. 평원파 전체를 대변하는 자로서 나와 있다. 평원파 전체이다. 가미긴이라는 마왕 한 명에게 저자세로 나갈 수가 없다. “여러분이 착각하는 것은 지금 협상을 세력 다툼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을 지키려는 우리 평원파와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입니다.” “말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 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중립파를 보십시오. 중립파 역시 추격전을 앞두고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중립파는 합스부르크에 남아 영토를 탐내지 아니하고,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향해 진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신 있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나는 명백하게 비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그에 반해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이 보이는 태도는 솔직히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께서 담당하신 영역은 본래 합스부르크가 아니라 다른 지방입니다. 그곳으로 향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싸우기 싫다, 희생하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싸우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는 자가 영토까지 얻을 수 있다니……언제부터 마왕이란 게 이처럼 편안한 직업이 되었는지, 소인으로서는 알기 어렵군요.” 결국 그날 협상은 파탄났다. 가미긴과 나는 각자가 제시한 협상안에서 한 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다가 마왕들의 다수결로 결정이 나겠지. 그렇다면 유리한 것은 가미긴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협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이었다. 최종적으로 평원파가 7, 가미긴과 아가레스가 각각 1.5 정도씩 먹으면 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내 숙소에 들어온 바르바토스를 보고, 나는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가레스 년이 쳐들어왔어.” “뭐?”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빈집털이를 했다고, 그 쌍년이!”   00229 마녀의 예언 =========================================================================                        나는 곧바로 옷을 챙겨입었다. 침대에 어젯밤 불러들인 묘족(猫族) 창녀가 나뒹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누구인지 알아봤는지 비명을 질렀다. 이불로 알몸을 대충 가린 다음――감춰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은 것을 가렸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허겁지겁 방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도 나도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무 돈주머니나 꺼내서 창녀에게 던져주고,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사실 의복조차 제대로 차려입지 못하여 엉망진창이었다. “선전포고는? 선전포고가 있었어?” “있었지. 공격하기 오 분 전에 경고하는 버르장머리를 선전포고라고 부른다면.” 내가 이를 물었다.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하필 평원파 대다수가 마계에 모인 지금! 속임수, 함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왠지 가미긴이 쉽게 쉽게 나온다 했어. 처음부터 이걸 노렸군!” “일단 벨레드와 제파르를 급파했지만 현지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화를 죽이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이상했다. 어째서 가미긴 홀로 협상대표로 참석했는가? 단순히 가미긴의 교섭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오판이었다……아가레스와 가미긴은 서로 협조하여 교묘하게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단탈리안, 잘 들어. 나는 곧바로 합스부르크로 향할 거야. 아가레스 년이 직접 나선 이상 내가 아니면 조금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나에게 전권이 떨어지는 것이로군…….” “일단 바알 아저씨한테 말해서 자리를 마련했어.”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행운을 빌어주지. 가미긴 따위한테 당하지 마.” “아아. 바르바토스, 너에게도 무운을.” 내가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짧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바르바토스가 마법을 써서 곧장 사라졌다. 나는 니블헤임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에는 이미 열댓 명의 마왕이 모여 있었다. 어디선가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 앞으로 일어날 진풍경을 가장 가까이서 관람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그중에 평원파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나를 제외하고 전원 합스부르크로 재빨리 귀환한 것 같았다. “어머, 단탈리안. 조금 늦었네~?” 가미긴이 협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어제와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뻔뻔하기는……! 화가 날수록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이 내 장점이었다. 나는 상석에 앉은 바알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바알은 이번 협상의 자리를 마련해준 장본인.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협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린 이상, 바알은 이제 평원파의 손을 들어줄 것이었다. “간밤에 아주 멋진 소식을 들어서 그만 잠을 설쳤지 뭡니까. 가미긴 님,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군요.” 내가 협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공식적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교섭자의 영토를 침범하다니요? 소인이 고작 서열 제71위라서 생소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최고위 마왕 여러분의 예의범절입니까?” “이런. 화가 잔뜩 났네. 하지만 한 군데 잘못된 점이 있어.” 좋다, 가미긴. 어떤 방식으로 변명할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가미긴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설령 가미긴이 아니라 다른 누가 오더라도 결코 변명하지 못하리라. “잘못된 지점이라고요?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부디 최고위 마왕께서 최하위 마왕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응. 최고위 마왕 '여러분'이 아니야. 복수가 아니라 단수를 써야 돼.” “……?” “정보통이 느리구나. 아가레스는 평원파만 공격하지 않았어.” 다음에 이어진 말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점유하고 있는 영토도 공격받았다는 얘기야, 단탈리안.” * * * 당했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레스는 애초부터 가미긴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전권을 넘겨주는 척하며 실제로는 뒤에서 바르바토스와 가미긴,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사냥했다. 주인들이 사라진 영지는 서열 제2위의 마왕군 앞에서 손쉽게 점령되겠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화가 난다고 할까~. 이렇게 멋들어지게 뒤통수를 후려맞으면 오히려 상쾌하다고 해야 할까아.” “가미긴 님도, 이번 사태의 피해자라는 말씀입니까?” 가미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에.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 그렇다면 아가레스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말인가?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에 잠겼다. 이상했다. 서열 제2위의 마왕이라고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괜찮을까? 바알이었다. 자그마치 서열 제1위의 대마왕이 협상을 준비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아가레스는 평원파뿐만 아니라 교섭자로 찍은 가미긴까지 배신했다. 말하자면 모든 이를 적군으로 돌려버린 셈이었다. 제아무리 아가레스가 강력하다고 한들, 열 손가락으로 태풍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대체 어디에서 자신감을 얻은 것이냐. “이해할 수 없군요. 가미긴 님까지 저희와 함께한다면 아가레스 님에게 승산은…….” “응? 무슨 소리야?” 그때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계속 단탈리안 너랑 협상할 건데.” 무슨 말인가. 자기 영토를 침범당했고, 우군에게 배신당했다. 누가 봐도 이제는 서로 협력할 차례였다. 그런데 또 다시 협상이라니? 나는 등골에서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이 떨어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미긴 님. 실례합니다만, 지금은 협상을 거론할 때가 아닌 줄로 압니다. 어서 합스부르크로 귀환하여 마땅히 배신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걸.” 일순, 가미긴의 실눈 너머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반짝거린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아가레스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예?” “아니, 단탈리안. 아가레스가 내 영토를 공격한 건 맞아. 괘씸한 일이지! 하지만 말이야. 적대하고 있는 세력이 마찬가지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을 공격했을 뿐이야? 딱히 배신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이유는 없잖아.” 나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허나, 가미긴 님께서는 아가레스 님을 대신하여 특사로…….” “아아. 나도 그랬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아니었더라구.” 가미긴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딱밤을 가볍게 먹였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아가레스가 나한테 외교권을 맡긴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어!” “…….” 아아, 그런가.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나왔는가. “내가 니블헤임에 가려는데 아가레스가 뜬금없이 너 혼자 가라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아, 얘가 나한테 교섭권을 전적으로 맡기려는구나아, 하고 제멋대로 생각했지. 상식적으로 그런 말이잖아. 아하핫.” 가미긴이 혼자서 떠들었다. 나는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었다. “내가 실수해버렸지. 아가레스한테 '공식적'으로 확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만 마음대로 넘겨짚은 바람에 문서 한 장 없지 뭐야. 으응, 멍청하게 굴었어. 부끄러운걸. 전부 내 실수야. 책임을 지고 보상할게.” “……한 마디라도.” 입술이 부들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한 마디라도, 당신을 교섭자로 인정하겠노라는 말씀을 듣지 못하셨다고요?” “응. 단 한 마디도.” 가미긴이 웃었다. “전혀 듣지 못했어.” “장난치지 마십시오!” 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이건 최악으로 더러운 수법이었다. 아가레스와 가미긴은 고스톱을 짜고 치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너를 교섭자로 인정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미긴은 제멋대로 착각해서 자신이 교섭자임을 자처했다. 이것은 실수였다. 그렇지만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 한 명이며, 고로 전쟁의 책임은 아가레스한테 돌아갔다. 더 나아가서 아가레스는 가미긴의 영토까지 침범하는 수작을 부렸다. 전쟁에 한하여 가미긴은 어디까지나 피해자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아가레스는 어떠한가.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은 분명히 비난받아 마땅했다. 그렇지만 아가레스는 협상의 자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가레스가 협상에 참여했다고 가미긴을 비롯하여 우리 전원이 마음대로 '착각'한 셈이었다. 고로 아가레스는 전쟁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라도 교섭을 파탄냈다는 것에 대한 책임은 전무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현재 합스부르크에서 세력 다툼은 일상사였다. 바르바토스가 먼저 국지전을 벌인 적도 많았고, 아가레스가 먼저 공격해온 적도 많았다. 그저 전쟁을 벌일 것만으로 아가레스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즉……이번 교섭 자체가 장대한 기만작전이었다! “어린아이라도 알 것입니다! 책임 소재를 돌려막아서 아예 증발시키려는 계획임을!” “흐응.” “당신은 바알 전하의 권위를 모욕했으며, 평원파의 의지를 깔아뭉갰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미긴은 우리의 방심을 이끌어내 기습공격을 이끌어냈지만, 애당초 그녀 역시 공격받았으므로 무죄였다. 가미긴에게는 그저 멍청하게 실수했다는 책임소재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아가레스는 교섭을 파탄내고 전투를 일으켰지만, 애당초 교섭에 동의한 적이 없으므로 무죄였다. 아가레스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전투를 한 번 더 만들어냈다는 책임소재만이 주어지게 되었다. 두 명의 최고위 마왕이 암약하여 서로가 서로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평원파에게 물을 먹였다! 개 같은 년들이! “뭐어, 단탈리안. 네가 길길이 날뛰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말이야~.” 가미긴이 여유롭게 말했다. “나한테 그렇게 분노해서 평원파에 좋을 게 없을 텐데?” “이 상황에서 가미긴, 당신께 분노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분노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는 계속해서 교섭할 거라구.” 가미긴이 손에 깍지를 꼈다. “자아. 단탈리안. 현재 아가레스는 네 곳의 영지를 제외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전부 점령했어. 이건 '나의 정보통'이니까 신뢰해도 좋아. 제국의 수도 빈드보나까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서 알려줄게.” 얼굴에 철면피를 발라도 수천 겹을 바른 것이 틀림없었다. 나의 정보통은 곧 자신이 아가레스한테 직접 정보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고작 네 곳의 영지를 빼고 합스부르크 중북부 일대가 함락되었다는 것은 결코 희소식이 아니었다……. “응, 평원파 일생일대의 위기라는 녀석이야. 그러면 단탈리안, 네 눈앞에 앉아 있는 마왕은 어쩌면 그 위기에서 벗어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존재 아닐까아?” “……가미긴, 당신.” “나는 평원파를 도와줄 의향이 충분히 있어. 아가레스한테 당했으니 복수할 마음도 뜨겁구. 그러니까…….” 가미긴이 히죽 웃었다. “글쎄에, 합스부르크 중북부에서 5할 정도의 영토를 넘겨주면 원군을 고려해보겠는데.” 내가 이를 꽉 물었다. 이것이 가미긴의 진짜 의도였다. 아가레스와 손을 마주잡고 협박질을 동원하여, 평원파로 하여금 강제로 부당한 영토분할에 동의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되겠는가. 결과적으로, 가미긴이 실수했다는 것조차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가미긴이 눈웃음을 치며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협상을 시작해볼까, 단탈리안.”   00230 마왕결전(魔王決戰) =========================================================================                        “…….”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가미긴에게 분노하는 것은 잠깐 뒤로 미루어두자. 분노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렇다면 무엇에 호소하여 상황을 반전시킬까. 법도와 예의? 언제 그런 것에 신경을 썼는가. 마왕들은 재미난 사건이 일어났다며 좋아할 뿐이겠지. 지금도 방청석에서 열댓 명의 마왕이 두근거리는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재자의 체면……대마왕 바알에게 호소하여 가미긴을 공격해본다. 그런 수도 있다. ‘왠지 몰라도 바알은 나를 꽤 싫어하지.’ 문제는 바알이 어느 정도의 처벌을 약속해줄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명분이 있으나 가미긴에게도 변명거리가 있다. 내 주장을 들어주어 전쟁 자체의 책임을 가미긴에게 추궁할 것인가? 아니면 가미긴의 주장을 들어주어 단지 실수의 책임만을 추궁할 것인가. 변명거리가 있으면 정치꾼은 얼마든지 얼굴에 철면피를 깔 수 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가미긴에게 말했다. “무려 오 할이나 되는 영토를 받으시길 원하다니. 한 명의 마왕이 독식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땅이 아닌지요.” “때로는 과식할 필요가 있으니까.” “오 할의 영토를 받아챙긴 다음에 각각 절반씩 아가레스 님과 공유한다……혹시 그런 의도 아닙니까?” 가미긴이 웃었다. “무슨 증거로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네에.”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뻔뻔했다.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우리한테서 5할의 영지를 뜯어내서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사이좋게 나눠 가지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후로 한두 시간에 걸쳐서 서로의 신경줄을 건드려가며 조용히 싸웠다. 소득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적어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냈다. 벌써부터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아가레스를 물리치느냐 마느냐,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이제부터는 유동적으로 상대를 공략해야겠지. 힘겨운 외교전이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바르바토스는 나의 의견을 전달받자마자 개전을 결심했다. “우리가 아가레스 년을 흠씬 두들겨패주면 끝날 일이야.” 바르바토스 말이 옳았다. 평원파가 아가레스의 군세를 섬멸시킨다면 협상이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명분과 실리를 전부 거머쥔 채 아가레스와 가미긴을 압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가레스가 영토의 대부분을 잡아먹었다면서. 빈드보나는 이미 함락되었고, 브란덴부르크와 작센만 간신히 남아 있잖아. 괜찮겠어?” “아가레스가 비록 일신의 무력이 강대하다 해도 머리는 짱구야.” 마법수정구에서 비추는 바르바토스가 자신있게 말했다. “경계할 필요는 있어도 지레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지.” 바르바토스는 곧바로 열여덟 명의 평원파 마왕을 규합했다. 그 군세는 2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상대하는 아가레스 역시 2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있었는데, 정보에 따르면 일부 무속속 마왕들이 아가레스에게 협조했다. “속전속결로 깔아뭉개겠어.” “……그러다 기습받으면 어쩌려고?” “아가레스처럼 멍청한 년이 그런 꼼수를 부릴 리가 없지. 그 년 머릿속에는 정면대결이랑 회전, 두 가지 단어밖에 안 들어 있어. 단탈리안. 마왕이 살아온 세월이 이천 년을 넘으면 말이야, 결코 더 이상 사람이 변하지 않는 법이야.” 바르바토스의 전략적인 안목은 언제나 정확했다. 평원파는 가장 짧지만 동시에 가장 험준한 지형을 골라서 진격했다. 만약 아가레스가 그곳에 복병을 주둔시켰다면 평원파는 크게 곤혹을 치룰 것이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에 틀어박혀서 평원파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심지어 아가레스는 평원파가 느긋하게 영채를 세우는 것까지 내버려두었다. 평원파는 이제 막 힘겹게 강행군을 펼쳐왔다. 이때 공격했더라면 아가레스가 크게 유리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레스는 그저 자신 역시 느긋하게 성밖에다 군막을 세웠다. 성 바깥에다가. 나는 여기까지 전황을 보고받고 안심했다. 과연. 요컨대 아가레스는 벨레드 형님이나 시트리와 같은 스타일이었다. 전략적인 안목이 부재했으며, 자기 자신의 강력함을 무기로 삼아 전투했다. 이런 타입의 지휘관은 일군에서 돌격부대를 맡을 만했다. 그러나 군 전체를 통솔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내가 점점 안심하는 것과 정반대로, 바르바토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그녀한테 물었다. “이미 끝난 거 아니야?” “전혀.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바르바토스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는 바로 다음날 밝혀졌다. 이날 바르바토스군과 아가레스군이 처음으로 격돌했다. 바르바토스는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었는데, 제1군을 자신이 맡았고, 제2군을 벨레드 형님이 맡았으며, 제3군을 제파르 대장이 맡았다. 전형적인 평원파식 진형이었다. 제파르 대장이 중군을 맡아서 적군의 공세를 버텨준다. 그 사이, 바르바토스와 벨레드 형님이 양쪽으로 빠져나가서 적군을 포위한다. 이른바 포위섬멸을 노린 것이었다. 반면에 아가레스군의 진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은 나중에 전투가 끝난 다음에 퍼진 소문이다. 풍문에 따르자면, 아가레스는 다가오는 평원파의 2만 군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고 한다. 서열 제2위의 마왕이자 「가장 강대한 마왕」이라고 불리우는 아가레스는 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만의 병력을 너에게 주마. 저놈들의 공세를 막아내라.” “예? 그러면 아가레스 님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제2군을 이끌고 저 우둔한 놈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부장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송구하옵니다만, 가장 강대한 분이시여. 아군에는 이만 이외에 달리 병력이 없습니다. 어찌 제2군을 편성한다는 말씀입니까?” 아가레스가 붉은 늑대에 올라타며 말했다. “내가 곧 제2군이다!” 그러자 아가레스는 질풍이 되어 정말 '혼자서' 적군을 향해 돌격했다. 아가레스 휘하의 다른 마왕들은 기겁했으나, 명령이 지엄한지라 아가레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아가레스가 향한 곳은 평원파의 제2군. 벨레드 형님이 통솔하는 오천 명의 부대였다. 벨레드 형님은――여기서부터는 본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이다――적군의 총사령관이 홀로 늑대를 몰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저거, 아가레스 맞지?”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만.” 벨레드 형님의 부관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만했다. 세상에 어떤 총사령관이 실성해서 단독으로 공격을 펼치겠는가? 벨레드 형님은 잠시간 멍한 눈길로 저 먼 곳을 쳐다보았다. 아가레스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크하하! 아가레스 님은 실로 두려움이란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벨레드 형님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단기필마로 오천의 군대를 향해 주저없이 한몸 내던지니, 마치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로를 향해 낙화하는 꽃송이라! 마치 신화 속의 한 장면 같지 아니한가. 훌륭하다. 훌륭하다, 아가레스여!” 벨레드 형님이 거대한 도끼를 들쳐맸다. “그대의 의지, 나 벨레드가 기꺼이 받아주겠다! 전군! 돌격하라!” 벨레드를 필두로 하여 오천의 평원파 제2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 마왕 아가레스만을 노렸다. 그리하여 아가레스 한 명과 오천의 군대가 평원 한가운데에서 격돌했다. 제일 먼저 아가레스와 격돌한 사람은 벨레드 형님이었다. 마왕군에서 무투파를 대표하는 두 명의 마왕은 서로 할버드와 도끼를 휘두르며 20합을 겨루었다. 하지만 20합뿐이었다. 아가레스의 할버드가 번쩍이자 공중에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벨레드 형님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마왕 벨레드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갔다. 그것은 불의의 일격에 당한 게 아니었으며, 벨레드 형님이 말하기로, 단지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었다. 벨레드 형님은 오른팔을 희생하며 옆으로 뒹굴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애송아, 거기서 우물이나 퍼마시렴.” 아가레스는 땅바닥에 나뒹구는 벨레드 형님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녀는 거기서 관심이 식어버렸는지, 벨레드 형님을 뒤에 내버려두고 다음 목표를 향해 휘몰아쳤다. 다음 목표란 벨레드라는 사령관을 잃어버린 나머지 오천 명의 군병이었다. 아가레스가 남색 빛깔의 오러를 폭발시키며 포효했다. “그라라라라아아아――!” 짐승과 같은 울부짖음을 몸에 두르고 마왕 아가레스가 돌진했다. 그녀가 할버드를 횡으로 내리칠 때마다 수십의 병사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내장과 핏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제2군에 속한 마왕들은 오우거를 총동원하여 이 가공스러운 적수를 막아세우려 했다. 스무 마리의 오우거가 멧돼지처럼 나아갔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단지 한 번의 내리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오우거를 격살했다. 인간과 마인에게 공포를 선사하던 산군(山君) 오우거들은 고작 오 분도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코를 처박았다. 평원파에는 아직 수천 명의 병력이 남았지만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제대로 서 있을 리 없었다. 마왕 아가레스가 전장에 강림했다. 그녀는 마치 평원파를 비웃듯이, 바르바토스를 능욕하듯이 전쟁터를 휘저었다. 「전략」이라고? 「전술」이라고? 그런 것은 약자들의 수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강자에게는 전략적인 안목도, 전술적인 기교도 필요없다. 강자에게는 단지 한 자루의 창과 몸뚱어리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이것이야말로 마왕이 전쟁하는 방식이라고 보여주는 것처럼. 아가레스는 입가에서 끊임없이 광소를 터트렸으며, 웃음소리가 하늘을 찢을 때마다 평원파의 몬스터 군대가 공포에 떨었다. 바르바토스는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욕지거리를 흘렸다. “애미 뱃속에서 탯줄로 자위했을 년 같으니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정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리라. 바르바토스가 몸소 전투 대낫을 휘어잡고 소리쳤다. “싸움 좀 한다는 놈들은 죄다 날 따라와!” 바르바토스를 비롯하여 총 여덟 명의 평원파 마왕이 아가레스에게 달려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직접 아가레스와 일합을 주고받으며 일기토를 벌였다. 무력의 측면에서 아가레스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바르바토스는 적절하게 흑마법을 운용함으로써 버텨냈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인 흑기사들 또한 동원되었다. 사백 명이 넘는 죽음의 기사들이 순서를 번갈아가며 아가레스와 상대했다. 이렇게 되자 과연 균형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아가레스와 바르바토스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혼전을 자아냈다. 그것은 바르바토스의 패배를 의미했다. 평원파의 지휘관들이 아가레스를 막기 위해 대거 빠져나가자, 2만의 아가레스군이 전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평원파는 서서히 밀려나갔다. 더 이상 피해가 속출하면 곤란했다. 바르바토스는 이빨을 꽉 물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전투는 평원파의 패퇴로 끝났다. 보고를 받고 나는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존나 개 같은 난이도, 씨발.” 제아무리 아가레스라고 해도 <던전 어택>에서 저 정도 포스를 뿜어내지 않았다! 뭐냐. 무슨 마왕군의 최종병기냐? 단기필마로 군대를 상대하다니,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어떠한 소드마스터도 펼쳐낼 만한 묘기가 아니다. 용사인 주인공이 만렙이라도 찍으면 또 모를까! 나는 이런 보고를 받은 상태에서 가미긴과 제2차 협상에 들어가야만 했다. 빌어먹을 일이 아니고 뭐겠는가. 협상석에 앉은 가미긴은 여느 때처럼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미소의 의미만큼은 예전과 달랐다. 꼴 좋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좋은 말할 때 듣지 그랬나. 그런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가미긴이 나를 보자마자 헤프게 웃었다. “협상하는 대가로 합스부르크 영토의 6할을 분배해줘~.” “…….” “미리 말해두지만, 이거 대박 할인 가격이다아?” 죽여버리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전쟁 직전 합스부르크 중북부 일대의 영토 현황을 설정란에 올렸습니다. 00231 마왕결전(魔王決戰) =========================================================================                        전체 영지에서 육 할을 떼어달라니! 머리통에 나사가 빠져도 치즈구멍처럼 빠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평원파, 아가레스, 가미긴이 제각기 4:3:3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만한 협상안이 아니었다. 상대는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며 아주 우쭐해져 있었다! “…….” 내가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바르바토스에게 중지와 약지를 선물해버린 이후, 나는 손가락이 잘려나가 뭉퉁해진 부분을 꼼지락거리곤 했다. 마왕의 재생력을 사용해서 치유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방심하면 언제든지 훅 가버릴지 모른다. 상처는 그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마계에서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아 혼란과 공포에 잠겼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 사태에 비하자면, 지금 이곳에는 암살자도 없었고 칼날과 마법이 오가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가자. “……현재 아가레스 님의 군세를 이루는 것은 일부 무소속 마왕입니다. 월맹군을 계기로 해서 모여든 무소속 마왕들은 아무 구심점도 연고도 없이, 그저 아가레스 님 본연의 카리스마로 인해 묶여 있지요.” “으응?” 가미긴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무슨 얘기야?” “집단으로서 지극히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일개 부랑자 집단조차 잘 나갈 때는 괜찮다. 어느 집단이 견고한가 허술한가는 위험에 마주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반란군이 기세 좋게 봉기하여 나라를 뒤엎을 듯이 전진하다가, 한번 반격당하자 내부에서 배신자들이 속출하여 무너진 사례쯤은 무수히 많다. “아가레스 님의 무력은 가히 마왕 중 마왕이라 천지를 떨게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군세 자체가 일신의 무력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승리했으니 좋겠지요. 서로 나눠가질 보상품에 흥이 겨워 떠들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어찌될지요.” 이런 측면에서 평원파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비록 초전에서 패배했지만 바르바토스는 퇴각하여 즉각 부대를 재편했다. 열아홉 명의 평원파 마왕 중에서 적한테 항복하거나 이탈해버린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벨레드 형님은 내게 전황을 설명하면서 “다음엔 내가 아가레스의 오른팔을 분질러버리고 말겠다!” 하고 으르렁거렸다. 패배한 군대가 무사하게 새로이 편성했다는 것만도 놀라웠는데, 전의가 꺾이기는커녕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미긴 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군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미긴이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대답했다. “그야 짓밟고 또 짓밟아도 바퀴벌레처럼 반격하는 군대이지.” “실로 그렇습니다.” 사령관 정도의 위치에서 군대를 실제로 지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패배해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공격해오는 군대라고. 장담하건대 그보다 끔찍한 적군은 없다. 평원파는 그런 군대였다. 바르바토스는 이념적 지도자이자 군사적 지휘관, 즉 모든 유형의 지도자를 통틀어서 가장 흉악한 부류이다. 그 주변에는 광신도만이 모여 있다. 이들은 머리와 가슴을 이념으로 물들인 채 한 덩어리의 살육기계가 되어 움직인다. “평원파는 몇 번이나 패배해도 끈즐기게 다시 일어나겠지요. 평원파를 최종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문자 그대로 전멸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흐응. 아가레스한테 그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모릅니다.” 내가 두 손을 내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장담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소속 마왕들이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미긴이 대답하지 않고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다만 침묵하기 위한 미소였다. “평원파와 달리 무소속 마왕들은 고작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동요하겠지요. 바르바토스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마왕군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전술가이다. 상대방이 허약해진 지점을 늑대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가미긴 님, 본질적으로 이번 내전은 평원파가 아니라 아가레스 님에게 불리합니다.” “아가레스가 불리하다구?” “예. 아가레스 님은 한번의 패배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위험천만한 도박이지요.” 가미긴이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인처럼 흰색 천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천옷이 흘러내려 허벅지가 훤하게 노출되었다. “그래서? 판돈이 높을수록 위험부담이 큰 거야 당연해.” “가미긴 님에게는 지금이 가장 몸값이 비싼 때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여유를 가장하여 미소를 지었다. “평원파가 승리해버린 다음에는 지금처럼 값비싸게 협상해올 기회가 영영 사라질 겁니다. 가미긴 님, 내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중북부의 2할을 당신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저희 평원파와 힘을 합쳐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걸.” 가미긴이 소리 높여 웃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강하지 않아. 아가레스가 자신의 카리스마만으로 군세를 유지시키고 있다구? 좋아. 하지만 정반대로 말하면, 바로 그 한 사람에게 평원파는 패배한 거잖아~.” “…….” 가미긴에게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적당히 영토를 떼어주겠다고 하면 협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마는, 아마도 아가레스와 가미긴 사이에는 내 생각보다 단단한 협조가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마법을 사용해서 서로 배신할 수 없게 만들어놨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했다. “저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가미긴 님.” “나야말로 분명히 협상을 제시했어. 단탈리안.” 우리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번째 협상이 아무런 소득없이 끝났다. 나는 지금까지 아껴둔, 비장의 한수를 동원하기로 결심했다. * * * 협상 결렬! 아가레스는 즉각 군대를 움직였다. 내심 그녀는 협상 따위를 마뜩치 않게 여겼으므로, 가미긴이 소식을 전해주자 크게 기뻤다. 아가레스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평원파는 빛살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애당초 그녀는 마왕군에서 대표적인 전쟁꾼으로 바르바토스가 손꼽히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예전부터 아가레스가 생각하기에, 전술이란 인간종의 놀이에 불과했다. 마인에게 전쟁이란 압도적인 무력으로 쓸어버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이번에도 최대한 지형적인 이점을 살리고자 했다. 먼저 고지를 점령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돌격할 때 쉽게 지치도록 만들었다. 앞선 전투의 교훈을 받아들여 바르바토스는 아예 아가레스만 전담할 부대를 따로 짜두었다.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와 벨레드 등, 아홉 명의 마왕과 사백 명의 흑기사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전대륙을 통틀어서 이보다 더 호화로울 수 없는 정예부대였다. 제파르가 걱정스럽게 지적했다. “각하께서 아가레스를 전담하면 누가 전군을 지휘하겠습니까?” “네가 지휘하면 되잖아, 제파르.” 그리하여 양군의 총사령관이 지휘권을 내팽개치고 직접 맞부닥친다는, 전무후무한 전투가 일어났다. 지난 패배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음에도 평원파는 접전을 이루어냈다. 평원파가 이끄는 군대 자체가 수백 년 동안 쉬지 않고 실전을 거듭해온 부대들이었다. 질적인 측면에서 아가레스의 군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애송이들아! 오늘도 한판 놀아보자꾸나!” 그러나 마왕 아가레스에게는 군대의 질을 무마하고도 남는 강력함이 있었다. 아가레스가 붉은 늑대를 몰면서 쉴 새 없이 종횡무진했다. 바르바토스는 전력을 다해서 아가레스에게 맞섰으나, 서열 제2위라는 직함을 노름으로 따낸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이 아가레스는 아홉 명의 마왕과 사백 명의 흑기사를 상대해냈다. “저 무식한 년은……지치지도 않나!” 바르바토스가 숨을 헐떡이며 쏘아붙였다. 전투는 벌써 여섯 시간 지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가진 마력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었다. 체내에서 마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자 현기증과 구토가 유발되었으며, 이윽고 내장이 베베 꼬이는 통증에 시달렸다. 상태가 나쁜 것은 바르바토스뿐만이 아니었다. 벨레드는 지난 번 전투에서 팔 한쪽을 상납했건만 오늘도 왼팔을 두 번이나 잘렸다. 어마어마한 재생력으로 다친 부위를 회복했지만, 그만큼 피로가 가중되었다. 바르바토스와 벨레드가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자 아가레스는 더더욱 날뛰었다. “벌써 끝이냐! 마계의 염원이라느니 뭐라느니 잘난 척하며 떠들 때는 언제이고, 겨우 이 정도로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였냐! 한심하구나, 평원파 년놈들아!” 아가레스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웃었다. “삶이란 상대적이다! 강자 위에는 더한 강자가 있으며, 약자 아래에 더한 약자가 있지! 그런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조차 몰라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강자이다 싶으면 사람은 강자인 척 가장하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리하여 누구나 강자인양 가장할 수 있다! 강자처럼 말하고, 강자처럼 생각하며, 강자처럼 몸짓과 손짓을 꾸며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강자란 차원이 달라!” 광풍에 휩쓸려 죽음의 기사 세 기가 단숨에 절명했다. 바르바토스와 벨레드가 다루지 못해 생겨난 틈새를 죽음의 기사들이 막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전력이 소모되었다. 아가레스가 오러를 피어내며 파안대소했다. “나는 너희처럼 강자인 척 살아가는 벌래 새끼들을 조질 때 살아 있는 보람을 느끼지! 바르바토스! 네 년의 무력함을 절감해라.” “아랫입만큼 윗입도 아주 헐렁하게 뚫렸군, 시발 년.”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갈며 재차 전투 대낫을 바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놀리면서 힐끔 시선을 돌렸다. 일부러 빈틈을 보여서 유인해내려는 속셈인가, 하고 바르바토스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그런 '꼼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가레스의 얼굴이 점점 더 구겨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일단 안전거리를 확보해놓은 다음, 아가레스의 눈길이 향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저편에서 수백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최고위 마왕의 우월한 신체능력이 한없이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깃발 문양을 알아보게 해주었다. 아가레스의 깃발이 아니었다. 여느 무소속 마왕의 상징도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곧장 문양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아가레스처럼 표정을 와락 찡그렸다. “……시트리?”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그것은 서열 제12위. 파이몬이 몰락한 이후 현재 산악파를 통솔하는 장본인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 * * 시트리는 대여섯 명의 산악파 마왕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산양에 올라탄 채로 언덕 아래,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쓰윽 내려다보았다. 어느 쪽이 아군이고 어느 쪽이 적군인지 가늠하는 눈초리였다. “헤에. 아가레스가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고 있네.” 그녀는 일찍이 단탈리안에게 약속했다. 파이몬을 살려주는 대가로 자신이 어느 소원이든지 두 가지를 들어주겠노라고. 첫 번째 소원은 자금을 원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단탈리안은 자신에게 두 번재 소원을 비밀리에 말해주었다. 소원이란 바로 합스부르크의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바토스를 도와줄 것. 평생의 숙적이자 정적인 바르바토스를 도와주라는 얘기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민했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승락했다. 산악파 마왕들이 반발했는데도 시트리는 독단적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 마왕 시트리에게는 단지 그 정도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시트리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전군,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아가레스를 강간해주자.” 그녀는 단탈리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즐겁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뒷구멍을 범하는 건 내 특기거든.”   00232 마왕결전(魔王決戰) =========================================================================                        아가레스는 표정이 찌그러졌다. 검은색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오러를 머금고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부유했다. 우지끈, 하고 아가레스가 두 발을 내딛고 서 있는 대지가 한층 무너졌다. 가뭄에 매마른 논밭마냥 땅에 틈새들이 벌어지더니, 거미줄 모양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산악파, 이 원숭이 자식들.” 미모의 여마왕은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분노한 악귀였다. “감히 끼어들 곳과 끼어들지 말아야 할 곳을, 헷갈리다니.” 아가레스가 품어내는 오러에 주위를 포위한 마왕들마저 헛숨을 들이켰다. 몸이 저릿저릿하게 마비되었다. 모두 삼백 년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삶을 경작한 마왕이었다. 그들조차 숨이 막혔다. 지나치게 압도적이지 않은가. 눈앞의 여마왕이 자신들과 동족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웠다. 저것은 우리와 다른 종족, 무언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비추었다. 어째서 그녀가 오직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마왕이라고 오연하게 선언했는가 이해되었다. 바로 그런 압도적인 무력을 향해서 달려드는 자가 한 명 있었다. “――거신(巨神)이 바로 선 앞에서, 나 맹세하노라.”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 그녀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질주했다. 대낫이 검은색 마나를 흩뿌리며 아가레스의 미간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바로 이 센티미터 앞에서 대낫이 무언가에 강하게 걸려서 정지했다. 아가레스의 전신을 뒤덮은 오러에 가로막힌 것이었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순수한 오러로 공격을 막아내다니. 그 무지막지함에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마법을 영창했다. “하나의 충성을, 하나의 피를, 하나의 전쟁을 시리게 맹세하리니.” “버러지 파리 새끼!” 아가레스가 분노하며 할버드를 내리쳤다. 까앙, 하고 할버드가 막혔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에서 일곱 개의 대검이 솟구쳐서 할버드를 방어했다. 그중 여섯 개의 대검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대검이 기어코 공격을 막아냈다. 바르바토스의 작은 입에서 주문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유일무이한 왕국에 사냥개로서 봉사하리니. 뇌우를 벗삼아 비행하는 독수리로서 예언하며 비상할지니.” “바르바토스!” 아가레스는 폭풍처럼 쉬지 않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때마다 그림자에서 검은빛 대검들이 용솟음쳤다. 만약 어느 안식이 높은 자가 싸움을 목격했다면, 지극히 차원이 높은 결투에 감탄하고 또 경악했으리라. 한쪽은 압도적인 무력. 만물을 으깨어버릴 기세로 내리친다. 아무런 기교도 필요없이 단지 태풍이 되어 몰아치는 그것은 자연의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일인군단(一人軍團)이란 그녀를 위한 단어였다. 반면에 다른 한쪽은――순전한 기교. 일찍이 바르바토스는 전사였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전장을 누비었다. 그녀는 부하들을 되살리기 위해 흑마법에 입문했으며, 그렇기에 전사인 동시에 흑마법사라는, 세계에 단 하나뿐인 유형이 되었다. 전투 대낫을 치켜들고 상대와 몸소 맞부닥친다. 팔다리가 쉴 새 없이 무기를 놀린다. 그 와중에 입술의 틈새에는 끊임없이 마법주문이 영창된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고, 시각을 어지럽히고, 균형을 착각시키고,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런 흑마법사-전사를 호위하는 것은 수백의 사역마. 하나하나가 최고급 전력으로 취급받는 죽음의 기사였다. 흑기사들은 주군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격을 저지했다. 아가레스의 공격은 대지를 뒤엎었으나 흑기사들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이 되어 막아냈다. 그곳에는 전사와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이 사수하는, 한 명의 거대한 요새가 있었다. 일인군단과 일인요새의 결투는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강자에 적합한지 가려내기 위해 격화하였으며――. 두 명의 마왕은 결투를 전투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전쟁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 “날파리 년! 네 힘만으로 싸워라!” “이것이 ‘나’이다, 아가레스.” 바르바토스는 전신이 땀에 젖었다. 이마에 백발이 땀으로 눌러붙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마나를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마나가 타오르자 심장이,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바르바토스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새끼!’ 전투에 들어서기 직전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과 통신했다. 단탈리안은 수정구에 비추는 영상을 통해 ‘이번에 이길 수 있도록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단탈리안은 정직했다. 녀석은 거짓말을 할지언정 허언을 입에 담지 않았다. ‘작은 선물이 아니잖아, 개새끼야!’ 어떤 수법을 동원했는지 몰라도 산악파를 원군으로 끌어들였다. 더군다나 원군을 이끄는 장본인은 서열 제12위의 마왕 시트리, 산악파에서 제일 강력한 무장이었다. 시트리가 이끄는 군세는 틀림없이 아가레스의 군대를 협공으로 압살하겠지. 자신은 그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바르바토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마력을 아껴두었다. 절대로 절반 이상을 소모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내다보기에 이번 내전은 장기전으로 끌고가야만 승산이 있었다. 여섯 번, 일곱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아가레스군을 서서히 소모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시트리의 깃발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바르바토스는 모든 마력을 불사질렀다. 장기전 계획 따위는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지금이야말로 승부의 순간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임을 그녀는 직감했다. “날파리 같은 잡종년, 발악하는 방법마저 불쾌하구나!” 아가레스가 포효했다. “부하들에 둘러싸여 목숨과 안전을 보존하다니! 그것이 네 년의 왕도(王道)이냐! 그것이 만마(萬魔)의 주인 된 모습이냐!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수치스러운지도 모르고 칼을 휘두르는구나! 바르바토스, 네 년이 마왕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어!” 태풍과 같은 공격이 쏟아져내렸다. 일격만으로 검의 주인마저 사살시킬 공격이 연달아 수십수백 번 휘몰아쳤다. 그 태풍 한가운데로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내딛었다. “너의 착각을 수정해주지, 아가레스.” 대검들이 아가레스의 공격에 무참히 부서졌다. 쨍그랑, 쨍그랑, 쇳소리와 쇳소리가 폭풍우처럼 울려퍼졌다. 대검이 부서지며 튄 쇳조각에 바르바토스의 뺨이 찢어졌다. 핏물이 튀었다. 그렇지만 바르바토스가 입가에 띄운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대낫을 올려쳤다. 필사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전력으로 공격한 그것을, 아가레스는 너무도 손쉽게 막았다. 대낫이 오러에 튕겨졌다. 그럼에도 바르바토스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 한 발자국을 더 내딛었다. “부하들이 나를 ‘뒤따라오는 것’이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하, 애들을 돌본다는 말이냐! 기가 차는구나. 대저 마왕이란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함으로,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공포를 대지에서 수확하는 자이다! 마왕에게 부하 따윈 필요없어. 압도적인 강함이 필요할 뿐이다!” “아니.” 여섯 자루의 대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대검들은 할버드를 미처 다 막지 못했다. 그러나 여섯 개의 대검을 부서트리며 전진하는 바람에 위력이 줄어든 공격을, 바르바토스가 대낫으로 저지해냈다. 바르바토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불태웠다. 한 발자국. 그녀가 더 내딛었다. “왕이란 다만, 다른 이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자.” 그림자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죽음의 기사들은 모두 동료였다. 그들은 죽고 나서도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전쟁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바르바토스와 그들은 한몸이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가 내딛은 한 걸음은 단지 한 걸음에 불과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인들이 평화를 노래하며 살 수 있기를. 언젠가 아비가 아들을, 어미가 딸을 팔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나라가 도래하기를.――바르바토스라는 소녀에게 생명과 죽음 그 이후를 맡긴, 모든 이들이 내딛는 발걸음이었다. “길은 한낱 오솔길로 남지 않으며, 이윽고 만인이 나아가는 대로가 될지어니. 나는 유일하되 한 명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대낫을 올려쳤다. “그것이 왕이 나아가는 길이다, 아가레스!” 할버드가 그것을 막아세우려는 순간, 시종일관 방어에 임하던 그림자의 대검들이 처음으로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열여덟 개의 대검이 한꺼번에 아가레스를 향해 검끝을 찔러넣었다. 아가레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할버드를 풍차처럼 돌려 단숨에 열 개의 검격을 튕겨냈다. 팔꿈치로 한 대검의 옆구리를 쳐내서 막았으며, 두 개의 대검은 몸을 비틀어서 피했다. 나머지 다섯 개의 검격은 풍압에 밀려나서 방향이 꺾였다.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대검들은 주군을 위하여 길을 터주었을 뿐이다. 흑빛의 대낫이 공기를 가파르게 갈랐다. 대낫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아래에서 위쪽으로 내달렸다. 열여덟 개의 대검이 간신히 만들어준 단 하나의 통로를 질주했다. 쉬익, 하고. 핏물이 공중에 퍼졌다. 무언가가 몸체에서 잘라져 잠시간 허공을 부유하더니 힘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 아가레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아가레스의 왼쪽 귀가 빨갛게 피에 젖어 있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누구도 아가레스의 몸을 해치지 못했다. 검끝이 살갗을 스친 적조차 없었다.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입은 상처를 눈앞에 두고 아가레스는 낯설어서 견딜 수 없었다. 서서히. 이것이 상처를 입은 감각이라는 것을 떠올리면서, 아가레스의 표정히 천천히 일그러졌다. “너, 이 잡종 새끼가.” “이제야 얼굴이 조금 볼 만하군.” 바르바토스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씨익 웃었다. 그녀가 중지와 약지를 벌렸다. 엿이나 처먹으라는 제스처였다. “너한테는 패배한 개새끼의 얼굴이 어울린다고, 짝귀 년아.” “――――!” 아가레스가 소리를 질렀다. 어느 맹수도 따라하지 못할 포효였다. 그녀는 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한테 그러하듯이 맹렬하게 진노했다. 대지와 공기가 떨렸다. 어찌나 소리가 격렬했는지, 저 멀리서 한참 전투를 벌이던 몬스터들조차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오러가 화산마냥 터졌다. 오라가 폭발시키면서 펼쳐낸 풍압이 전쟁터를 가볍게 휩쓸었다. 고블린은 풍압에 발이 떠밀렸으며, 오크는 팔뚝을 들어 바람을 피해야만 했다. 아가레스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바르바토스에게 뛰어들었다. 그때 벨레드를 비롯하여 여덟 명의 평원파 마왕이 끼어들었다. 마왕들은 익숙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아가레스의 공격을 버텼다. 조금만 잘못해도 목이 날아갈 공격의 홍수 속에서, 벨레드가 겁없이 웃었다. “나와 놀아주셔야겠수다, 아가레스.” “크아아아악! 애송이는 비켜!” “그렇게는 안 되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빚진 것은 확실하게 갚는 성격이거든. 댁이 나한테서 팔뚝을 세 번이나 가져갔으니, 댁도 세 번은 팔뚝을 헌납하쇼!” 그날 평원파는 아가레스라는 일인군단을 마지막까지 저지했다. 아홉 명의 마왕이 달라붙어서야 간신히 저지된 아가레스는 과연 가공스러웠다. 하지만 아가레스가 발이 묶인 사이, 평원파의 마왕 제파르와 산악파의 마왕 시트리는 적군에 협공을 퍼부었다. 아가레스와 마왕들의 전쟁은 무승부로 결착이 지어졌으나, 군대와 군대 간의 전쟁은 아가레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아가레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했다. 반드시 바르바토스, 네 년의 목을 분질러버리겠노라고 울부짖으면서. 가장 강대한 마왕이라 불리는 이는 그렇게 패배했다.   00233 마왕결전(魔王決戰) =========================================================================                        * * * 나는 초조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발을 덜덜 떨면서 방바닥을 두들겼다. 꼴불견스러운 습관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평원파의 명운이 이번 일전에 달려 있었다. 밤새도록 구부정하게 앉아서 연락을 기다렸다. 탁자에 올려둔 수정구를 가만히 노려보면서. ‘벌써부터 바르바토스가 몰락해서는 안 된다.’ 합스부르크 중북부는 지리적으로 무척이나 중요하다. 마왕들은 절대다수가 이른바 마왕의 성역으로 불리우는 일대……검은 산맥에 둘러싸인 지형에 둥지를 틀었다. 나의 마왕성은 그중에서도 서쪽. 최서단(最南端) 파게기아이, 라는 곳에 위치했다. 이름은 중요치 않다. 문제는 이곳이 위험천만한 위치라는 사실이다. 서쪽으로는 튜튼 왕국이 자리 잡았으며, 남쪽으로는 합스부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인간종에게 노출되기 십상이겠지. 바로 이 지역을 바르바토스의 세력이 관장해주어야만 했다. 인간계 군주들에게 엄청나게 미움을 사버린 나로서는……예컨대 엘리자베트 총통이 빡 돌아서 군대라도 보내오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그들이 도저히 군대를 통과시킬 수 없게끔, 나한테 우호적인 세력이 방파제가 되어 버텨줄 필요가 있었다. 아가레스나 가미긴이 이곳 지역을 점거해버리면 곤란하다. 그들은 결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어이쿠, 적국이 병력을 보내는 것을 그만 놓쳐버렸네! 미안!’ 하고 내 던전으로 원정오는 군대를 눈 감아줄지 모른다. 기사들이 이끄는 병력이 오백 명쯤 들이닥친다고 상상해봐라. 끔찍하지 않은가. ‘비록 던전을 방비하고 있다 해도 군대를 막을 수는 없어.’ 적어도 7층. 아니, 5층. 그 정도 규모의 던전이 완성될 때까지 바르바토스가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 한다. ……시트리를 꺼내든 것은 비장의 패였다. 시트리는 벨레드 형님보다 한수 높은 무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녀가 원군을 이끌고 합류한다면 승산이 높아지겠지. 물론 패배할 가능성도 있었다. 승리인가, 아니면 패배인가. 경우에 따라서 당장이라도 가미긴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가락을 핥아야 할지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다. 미래에 생존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발가락 정도야 수십 번이고 청소해줄 수 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 단탈리안. 수정구에서 푸르게 빛이 새어나왔다. 제파르 대장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드디어 연락이 왔는가! ─ 단탈리안, 그곳에 있는가. “예, 제파르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파르 대장은 척 봐도 피로에 절어 있었다. 아직 갑주도 벗지 않았는데 이제 막 전투가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서둘러 수정구 가까이로 몸을 숙였다. 내심 초조했다. 어째서 바르바토스가 직접 연락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통신은 전부 바르바토스가 넣어주었다. 그녀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통신을 맡겼을 것 같지 않았다. 즉, 바르바토스 본인은 현재 통신 따위를 할 여력이 없다는 의미였다. 부상, 패배, 패퇴……절망적인 단어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투는.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아아. 승리했다. 승리! 바르바토스가 승리했다! 내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요 사흘 동안 날밤을 새우면서 온몸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승리했다! “아군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바르바토스 각하의 상태는요? 통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겠지요? 아가레스는 붙잡았습니까? 무소속 마왕들의 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 단탈리안, 자네 너무 서두르는군. 제파르 대장이 작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 그렇게 많은 질문을 동시에 대답해줄 수는 없네. 흥분하지 말게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요 며칠,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 아군은 승리했다. 이 사실은 이제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네. 지금 와서 다급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지. 이제 광란의 전투는 끝났으며, 차분한 이성이 되돌아올 때라네. 자네에게 주어진 역할은 흥분이라는 것과 거리가 멀어……안 그런가? “아니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번 내전에서 나는 장군이 아니고 외교관이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있어야 한다. 하물며 상대해야 할 적은 위장에 너구리를 이백 마리쯤 키우는 능구렁이, 마왕 가미긴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다. “제파르 형님. 아군과 적군이 입은 피해규모를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제파르 대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아군 일만팔천육백에서 피해는 사천. 부상자가 삼천이며, 사망자가 일천이다. 아직 정확한 수효를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적군……이만일천에서 사상자가 약 일만. 내 얼굴이 밝아졌다. 이만일천 중에서 사상자가 무려 일만.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압승! 사실상 전멸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압승을 거두었다. 가슴이 가빠졌다. 그것을 겨우 참아내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 각하께선 용태가 어떠신지요?” ─ 자네가 불안해 하는 것도 이해하네. 하지만 걱정을 접어두도록. 각하께서는 아가레스와 일전을 겨루느라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하셨을 뿐이다. 자칫 잘못하면 마나 역류가 일어날 판국이라 각하께서는 요양하고 계시네. “상처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 솔직히 고백하네마는, 아주 팔팔하시다네. 끝까지 아가레스를 추격하겠다고 고레고레 소리 지르시는 것을 벨레드와 내가 간신히 침대에 눕혔지.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꼭 내가 근심걱정이 많은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었다. 젠장, 한숨이 많아질수록 빨리 늙는다는데. ─ 안타깝게도 아가레스를 생포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긴, 아가레스를 생포하는 일 자체가 가능한지 의문스럽지만 말이야. 대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무소속 마왕 세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파르 대장이 설명한 바에 따르자면, 평원파가 적군을 붙잡아둔 사이에 시트리의 군대가 후방에서 급습. 그 결과 고전적인 망치-모루의 형태가 재현되어 적군이 괴멸했다. 제파르 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 산악파에게 도움을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단탈리안, 우리 평원파는 매우 놀라고 있네. 단탈리안이 또 어떤 마술을 부린 것이냐면서. 정작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 제1공훈자가 되는 수법은 여전하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럼 오늘 바로 협상에 들어가도 괜찮을지요?” ─ 아아. 군단장 각하께서 윤허하셨다. 사막여우를 철저하게 사냥하게나. 사막여우는 가미긴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아름다운 금색털을 가졌지만 한없이 교활한 여우. 이제는 그 여우를 마음껏 사냥할 때가 다가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단탈리안은 강자에게 한없이 나약하되 약자에게 한없이 강했다. 눈에서 물이 쏙 나올 때까지 괴롭혀주지, 가미긴. 기대해도 좋다. 지금까지 농락당한 것에 이자를 붙여주지……. * * * 가미긴은 니블헤임에 거대한 별장을 갖고 있었다. 이 시대에 최신식이라 불리는 건축양식이라고 할까. 땅 대부분을 정원으로 채워넣고, 한가운데에 물길이 흐르게 만든 다음에 별장은 맨 깊숙한 곳에 자그맣게 만들어두었다. 건물이 작지만 화려했다. 최고위 서열이라면 마계의 대도시에 별장 한 채씩은 있는 모양이지. 아름다운 분수를 지나치며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토록 화려한 별장에 틀어박혀서 가미긴은 우중충하게 인상이나 찡그리고 있겠지. 무척 기분이 좋았다. “부디 이쪽으로.” 시녀에게 안내받아 정원 한쪽으로 갔다. 수풀들이 세심하게 가지치기 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한평생 미소로써 타인을 속여온 가미긴과 같았다. 취향부터 썩어빠졌으니 인성까지 구린 것이었다. 하하. 정원의 흙길을 한동안 밟자, 수풀 사이, 마치 감추어진 것처럼 야트막하게 자리 난 잔디밭에 가미긴이 앉아 있었다. “어서와, 단탈리안.” 가미긴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했다. 아직도 미소를 지을 여력이 있었다. 훌륭하군. “남자가 내 정원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인걸.” “그 말씀을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에게 속삭였습니까?” “으응, 아마도 대충해서 이백 명~?”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상당히 여유로우시군요. 조금 더 초조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 봬도 마음속은 어어엄청 초조하고 있어.” 가미긴이 웃었다. 그녀에게 미소란 이미 살갗에 눌러붙어서 떨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득, 눈앞의 여인이 인상을 구기면 어떨까 궁금해졌다. 고통과 쾌락에 물들여서 표정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도저히 미소를 지을 틈도 없이. 아마도 극락과 같은 쾌감이 아닐까.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여기에는 저희 둘밖에 없습니다. 서로 겉치레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머. 설마 우리 둘이 특별한 관계라는 얘기야아?” “글쎄……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일부러 말끝에 여운을 남겼다. 흐응, 하고 가미긴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층 더 노출이 많은 천옷을 입었다. 잠옷인 것일까. 천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허벅지며 가슴골이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천옷은 얇아서 가미긴의 새하얀 살결이 언뜻언뜻 비추었다. 이제 노을이 저물어가니 잠옷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면서 저런 잠옷을 입다니 너무나 불성실했다. 저 잠옷차림은 명백한 도발……내지는 유혹. 그런 의미를 품고 있겠지. 가미긴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유혹일까. 미인계로 나를 끌어들이겠다는 것인가? 재미있군. 어디 얼마나 나를 능숙하게 유혹할지 지켜볼까. “단도직입해서 말하겠습니다. 우리 평원파에선 영토분배를 일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헤에, 엄청 강하게 나오네?” “지난 번 협상에서 말씀드렸지요. 분명히 경고했다고.” 내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그때가 사실상 가미긴 님, 당신께서 '좋은' 타협안을 제시하실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우리 평원파는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승리할 것입니다. 아가레스 님과 무소속 마왕들에게 더 이상 기회란 없습니다.” “왜? 승패란 병가지상사인걸.” 가미긴이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아가레스가 패배했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아가레스에겐 역전을 이루어낼 만한 힘이 있어.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입니다. 인정합니다. 아가레스 님은 가히 세계 최강의 무인. 당대에 그분한테 대적할 사람 따위는 마계와 대륙을 통틀어서 전무하겠지요.” 하지만,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제거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응?” “내일모레. 마르바스 님이 중립파를 이끌고 합스부르크의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 가미긴이 일순 멈칫했다. “그건 거짓말이야. 마르바스는 세력 다툼에 군사적으로 절대 개입하지 않아.” “맞습니다. 만약에 지금 내전이 '세력' 간의 다툼이었다면 말입니다. 이번 사태는 어디까지나 아가레스 님이 단독으로 벌인 사건. 그쪽 편에 엮인 마왕들은 전원 무소속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르바스 님 입장에선 아무런 세력에도 편입되지 않은 무리가 난동을 부린 것이지요. 천 년이 넘게 대립해온 평원파와 산악파가 간신히 공존하는 시대가 다가오려 하고 있습니다. 헌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공존의 시대에 훼방을 놓는 무리가 있다…….” 나는 가미긴의 손에서 유리잔을 가볍게 낚아챘다. 한모금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달콤하며 깊이가 있었다. 최고급 미주였다.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군. “아마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요. 세력들의 화합을 방해하는 원숭이 새끼들 따위 신경에 거슬릴 뿐입니다. 이참에 밟아버리자. 그렇게 생각해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분 탓일까. 가미긴의 붉은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00234 마왕결전(魔王決戰) =========================================================================                        중립파는 나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월맹군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초, 바르바토스는 자신을 함정으로 몰아넣은 파이몬을 용서하지 않고 깔아뭉개려 했다. 정식으로 청문회를 열어서. 그런데 중립파의 마르바스가 회합을 개최하여 화해하라고 종용한 것이었다. 그때 마르바스는 말했다. ‘날개를 한쪽 잃어버린 새는 결국 날지 못한다. 산악파가 평원파를 공격한 것은 잘못이다. 허나, 지금에 와서 평원파가 산악파를 모조리 없애려 한다면 그 또한 잘못이지 않은가?’ 하고 그가 분명히 덧붙였다. ‘우리 중립파는 적절한 타협안을 바라고 있다. 물론, 평원파가 관용을 베풀 경우, 중립파에서는 평원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이다.’ 마지막에 언급한 '적극적인 지원.' 평원파가 산악파를 너그러이 용서해준 대신, 중립파가 우리에게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나는 그 패를 꺼내들었다. 아가레스라는 최악의 무신(武神)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마르바스군은 한참 국경을 넘어오고 있었다. 병력은 팔천. 현재 중립파는 폴리투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폴리투니아와 국경을 마주한 합스부르크의 영지는 다름 아니라――. “가미긴 님. 당신께서 무단으로 점거하고 계신 영지입니다.” 중립파의 군대는 곧바로 가미긴의 영지를 급습하게 되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지금은 아가레스 님이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영지이겠지만요. 무엇보다 가미긴 님께서 주장하시는 바에 따르자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만…….” “…….”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군요. 마계가 들썩거리겠지요.” 바르바토스가 군단장으로서 선봉에 서고, 그 뒤를 중립파와 산악파가 받쳐준다. 이 진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한다. 제2차 월맹군 원정에서 이들은 국가를 두 개나 멸망시켰다. 제8차 월맹군에서 내가 그렇게 날고 뛰었는데도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 하나를 완전히 무너트리지 못했다. 그것에 비교하자면 평원파-산악파-중립파의 동맹군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제 과거, 파벌끼리 다툼을 일삼았던 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조화와 화합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마인들은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희생양으로 아가레스 님과 가미긴 님이 선택되는 것입니다. 충분히 화려하고 호화로운 축제이지요.” 가미긴,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하나였다. 당신은 산악파와 중립파가 바르바토스를 도우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 곁에는 내가 있었다. 나에게는 시트리와 마르바스를 움직일 패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당신은 그걸 몰랐다.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어.” 가미긴이 말했다. “그게 너의 전형적인 수법이야. 절대로 자기 자신이 나서는 법 없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서 문제를 해결해. 월맹군 때도 그랬어. 파이몬이 함정을 만들자 너는 온갖 군단들을 불러들였지. 이제는 아가레스와 나를 파멸시키려고 산악파와 중립파를 끌어들였고.” 그녀가 실눈으로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웃음 지은 눈가의 저편에서 빨간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기생충이 살아가는 방식과 닮았구나, 단탈리안. 나는 말이지. 여태까지 네가 왜 아직도 서열 제71위에 머무르는가 궁금했어. 바알이랑 바싸고가 진즉에 서열을 올려줘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어.” 가미긴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손에 들린 유리잔이 째앵, 하고 부서졌다. 유리조각이 흩어지면서 내 오른손에 가라앉았다. “단탈리안, 너에게는 서열 제71위가 제일 잘 어울려. 오히려 서열을 한 단계 낮추어야 할 판이야. 기나긴 마왕군의 역사상 너처럼 염치없이 남들에게 기생한 자는 없었어. 마르바스가 우리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마르바스의 이념에 비추어서, 우리가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미긴이 웃었다. 그녀가 평소에 짓던 웃음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태양빛처럼 부드러웠던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함만이 남았다. “불쾌해. 정말로 불쾌해. 너는 애시당초 마르바스의 이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단지 아름다울 뿐이라고 생각하지. 한낱 구경거리로 여긴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단탈리안? 그건 상대방의 이상을 '가장 불쾌하게 짓밟는 방식'이야.” “만약에 저를 개 같은 쓰레기라고 욕하실 참이라면.”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로 쓸모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 진부해진 사실이거든요.” “너는 우리 마왕들 전체를 모욕하고 있어. 바르바토스도, 마르바스도, 결코 너의 관상용 예술작품으로 전시되기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야. 적어도 그 사실만큼은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손에 묻은 유리조각을 털어냈다. 까끌까끌해서 조금 거슬렸다. “바알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안목을 갖고 있어. 너는 마왕 같은 것이 아니야. 가짜이지. 자기 자신의 신념 따위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기생충처럼 살아갈 뿐이야.” “그건 조금 참신한 비난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너는 영원히 최하위로 머물 거야. 바알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한.” 음. 왠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나를 욕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실로 억울하다. 항상 먼저 잘못하는 것은 너희이지 않는가? 너희가 먼저 공격해오고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 나는 성실하게 너희를 대접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보고 빌어먹을 쓰레기라느니 가짜라느니 욕한다. 물론 나는 빌어먹을 쓰레기이긴 하나 그건 예의범절이 아니다. 서글프다. 세상은 도대체 언제부터 타락했는가……. “뭐, 가미긴 님께서 분노하시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만. 저한테 그렇게 화풀이를 쏟아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요?” 가미긴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뚜렷하게 살기가 느껴졌다. 저런, 이것도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따름인데……그렇게 질색할 거라면 애당초 다른 사람한테 하지를 말던가. 윤리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도 지키지 못하다니 실망스럽다. 흐음. 이쯤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볼까. 너무 긴장을 조이기만 해도 협상에선 못 쓸 일이다. “물론 저는 제 분수를 알고 있습니다. 가미긴 님께서 지적하셨다시피 기껏해야 서열 제71위에나 어울릴 놈이지요. 제가 다소 유리해졌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가미긴 님을 겁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흐응. 그러면?” “협상을 시작하지요.” 내가 말했다. “아가레스 님을 배신하십시오. 아니, 배신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신다면, 좋습니다. 아가레스 님에게 보복해주십시오. 가미긴 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다가 뜬금없이 아가레스 님한테 기습을 받았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당신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자면 말이다. 나는 예의 바른 신사이다. 숙녀가 그렇다고 주장하는데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이 없다. 어디까지나 레이디의 의견을 존중해주겠다. “그래주신다면 가미긴 님께서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던 영지를 대체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조금은 떼어주셔야겠습니다만, 그 정도는 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할만 거둘 테니까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참고로 이거 대박 할인입니다. 가미긴 님께서 부당하게 빼앗긴 영토를 우리 평원파가 대신해서 수복해드리고, 거기에다 고작 4할만 의뢰비로 먹겠다는 것이니까요. 꽤나 양심적이지 않습니까?” “…….” 가미긴이 침묵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4할의 영토를 빼앗긴다. 커다란 손실이다. 지금 가진 영토가 비좁은 것이 불만스러워서 전쟁을 일으킨 가미긴으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제안이 아니다. 내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4할을 2할 정도로 줄여들이는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 가미긴이 의문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손가락을 훑었다. 노골적인 손짓이었다. 가미긴이 코웃음을 쳤다. “내 몸을 바치라고? 수준이 알 만하네. 너는 역시 삼류배우야.” “그게 당신의 진짜 얼굴이군요. 가미긴 님.” 세상을 쓰레기더미, 오물 덩어리로 바라보는 것처럼 모욕적으로 비틀어진 얼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가미긴의 표정에는 냉소와 조소밖에 남지 않았다. 마치 현명하지만 지나치게 세상에 튕겨져 나와 그대로 늙어버린 노인이 그러하듯이, 가미긴은 얼굴 표정 하나로 세상 전체를 모욕하고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가미긴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제가 삼류배우라면 가미긴 님, 당신은 무엇입니까? 삼류배우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내고 말았군요. 시골에서 자신만만하게 상경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여배우에 비유할 법하지 않은지?” “단순히 내 몸을 원하는 게 아니겠지. 너는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한번도 없어.” 사람의 시선에도 민감했는가. 어쩌면 가미긴은 모든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여, 이윽고 세상에는 저열한 욕정 따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일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가미긴을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예. 안타깝지만 제가 새삼스레 당신에게 매혹된 것은 아닙니다. 뭐, 앞으로 매혹될지는 또 모르겠지만요.” “사설은 집어치워. 원하는 게 뭐야?” “바르바토스와 한 가지 약속했습니다. 세간에 아름답다고 알려진 여마왕들과 전부 한 번씩 잔 다음에 말이지요, 그래도 바르바토스가 최고이더라, 하고 공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가미긴이 어이없는 눈초리로 날 쳐다보았다. “뭐어?” “우리 꼬마 마왕님께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섬세하신 분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제가 내거는 조건은 그겁니다. 저와 애인 관계가 되십시오. 그리고 애인 관계가 되었다고 소문을 퍼트려주십시오.” 가미긴의 표정이 한층 더 어이없게 변했다. “결국 이 말이잖아. 나를 따먹고 버리겠다는 거.” “우아하게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그걸로 내가 가진 영지를 보존해주시겠다? 과연 너그럽기도 하네.” 가미긴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 영지의 8할을 보존해주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어. 내가 점유한 영지 전체를 인정해.” “좋습니다.” 선뜻 대답했다. 바르바토스가 뭐라고 불평할 수 있겠지만 변명할 거리가 무한했다. 아가레스를 더욱 더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여하간 얼마든지. 내전에서 바르바토스한테 승리를 쥐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투자했는가? 시트리에게 남겨둔 소원을 다 써버렸고, 마르바스한테 꽂아넣은 빚까지 탕감해주었다.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었다. 내 안전한 성생활을 마련한다는 이득쯤은 챙겨도 좋겠지. “이제 이야기가 간단해졌군요.” 내가 느긋하게 앉은 채로 말했다. “벗으세요.” 가미긴이 물끄러미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가지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얀 천옷이 천천히 살결에서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풀썩, 하고 옷가지가 잔디밭에 떨어졌다. 저녁이었다. 샛노란 노을이 가미긴의 육체를 윤곽에 따라서 하얗게 비추었다. 가미긴이 언뜻 굴욕적인 눈빛으로, 그 굴욕을 숨기려고 애쓰느라 더더욱 굴욕적으로 비틀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짓기만 했다. 장담하건대, 세상의 그 어떤 명화(名畵)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작품 후기 ============================   마르바스가 약조했던 말은 113화에 등장합니다. 단탈리안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아서 단어는 약간 다릅니다. 00235 마왕결전(魔王決戰) =========================================================================                        * * * 다음날, 니블헤임 궁전에서 제3차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날에 마왕들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 소란스러웠다. 특히나 여마왕들이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고 떠들어댔는데――원래 마왕이란 종자에게 주변을 신경 쓸 머리 따위는 전무하기도 했다――바로 하나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예, 저도 들었어요. 어제 저녁 무렵에 단탈리안이 가미긴 님의 별장에…….” “한 분이 흥미가 동했는지 별장 정문에 사역마를 붙여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그마치 새벽이 되어서야 단탈리안이 빠져나왔다지 뭐예요. 소문이 사실이었죠!” “협상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진위를…….” 나는 가미긴의 별장에 들어갈 때 대놓고 정문을 이용했다. 당연했다. 처음부터 가미긴과 그렇고 저런 스캔들을 흩뿌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소문에 기름이 부어질수록 좋았다. 중립파가 참전했다는 소식이 한 발자국 늦게 알려지면서 사교계에 난리가 일어났다. 내가 무도회에서 마르바스와 춤을 추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의혹이 불거져 있었다. 일각에서는 정말로 마르바스가 나와 사귀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불어서 시트리까지. 처음 무도회가 열렸을 때 시트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에게 달려와서 팔짱을 끼었다. 마왕들이 그런 움직임을 놓칠 리 만무했다. 시트리가 산악파 일부를 이끌고 참전하자, 아무래도 나에게 의문스러운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즉.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님까지 수에 넣으면…….” “도대체 단탈리안은 몇 분이랑 사귀고 있는 것이죠?” 나에게 뒤따라다니는 소문은 현재 세 가지. 첫 번째, 가미긴과 열애를 하고 있다. 두 번째, 마르바스와 모종의 관계에 놓여 있다. 세 번째, 시트리와 무척 뜨거운 사이다. 무려 스캔들이 세 개씩이나 되었다. 단순히 허무맹랑한 풍문이 아니었다. 세 개 모두에 정황적인 증거가 확고하게 있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은 절찬리에 뜨거운 씹을거리로 승화하고 있었다. 내가 협상석에 앉았는데 여마왕들이 다소 큰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세상에! 바르바토스 님과 가미긴 님을 동시에 취했으니 소녀 취향과 숙녀 취향을 두루 갖춘데다, 마르바스 님까지 넘어트렸으니까 성별에도 개의치 않는 거잖아요.” “그뿐이겠어요. 시트리 님은 아시다시피 그렇잖아요. 달리 말해, 여성과 남성, 심지어 양성까지 전부 폭넓게 섭렵했다는…….” “그런 변태는 들어본 적도 봐본 적도 없어요!” “대단하네요!” 참고로 마계에서는 변태 취급이 일종의 훈장이었다. 여마왕들이 묘하게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뭐 그리 변태라고 그러는가. 애시당초 저 세 마왕 중에 나랑 실제로 침대에 들어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야외 잔디밭에서 치고 박았으니 침대에 들어가진 않았다만. 가미긴은 좋았지. 녀석은 섹스하는 내내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음을 하면 내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착각도 큰 착각이었다. 나는 파트너에게 신음을 내뱉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적인 테크닉에 만족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랬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신음을 참으려고 얼굴이 찡그려질 대로 찡그러진 모습이 훨씬 더 흥분되었다. 야아, 가미긴이 워낙에 잘 참다보니까 말이야! 그만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눈앞에 있으면 실력 좋은 전술가들은 내 평생을 쏟아붓는 한이 있더라도 저것을 함락시키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는가. 마찬가지였다. 섹스하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그때까지 예닐곱 번은 절정한 것이 분명했는데도, 가미긴은 결코 뜨거운 숨결을 내쉬지 않았다. 얼굴도 눈썹을 약간 찡그렸을 뿐이지 건재했다. 멋진 인내심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대단하군요. 한 자릿수 서열의 마왕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아니, 파이몬 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파이몬? 설마 파이몬이랑도 한 건 아니겠지?’ ‘했습니다.’ 거짓말이지만. ‘저야말로 질문하고 싶군요. 설마 시트리 님이 파이몬 님의 의향을 배신하면서까지 저를 도왔으리라고 생각합니까?’ ‘…….’ 가미긴이 입을 다물었다. 시트리가 파이몬의 충실한 사냥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산악파 마왕들도 일단 명목상으로만 파이몬을 수장 자리에서 끌어내린 다음, 파이몬의 심복인 시트리를 대신 옹립한 것이었다. 실제로 파이몬은 아직까지 산악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시트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번 내전에서 평원파를 도와준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파이몬이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가미긴이 나를 어마어마한 인물이라 착각하도록 유도했다. 그럴수록 미래의 나한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이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단탈리안은 공격한다는 것은 곧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 심지어 파이몬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여겨주면 고마웠다. ‘가미긴 님. 저와 소소하게 내기를 하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기?’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성적인 기술에 꽤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미긴 님께서는 도저히 쉽게 함락할 수 있는 성곽이 아니시군요. 승부욕이 생깁니다.’ 내가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앞으로 딱 한 시간. 한 시간 이내에……그래요. 이건 어떻습니까? 가미긴 님께서 제발 더 이상 그만하라고 울부짖으신다면, 제가 승리하는 것으로 칩시다.’ 가미긴의 표정이 묘해졌다. ‘물론 가미긴 님께서 한 시간을 버티신다면 제 패배입니다.’ ‘내기에 뭘 거는데?’ ‘글쎄. 지금 보유하신 영지를 전적으로 인정해드릴 뿐만이 아니라, 아가레스 님이 기존에 점거하고 있던 영지까지 추가로 얹혀드리면 어떨련지요?’ 그녀가 장고에 들어갔다. 가미긴은 슐레지엔 지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강탈한 모라비아 지방까지 가지게 된다면, 가미긴은 단숨에 영지가 두 배로 불어나게 된다.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제안이다. 말도 안 되게 달콤하므로, 가미긴은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내가 패배할 경우에는?’ ‘앞으로도 간간이 저와 놀아주십시오. 제가 가미긴 님과 몸을 섞고 싶다고 말했을 때 웬만하면 거절해주지 말아주십사 부탁드리고 싶군요.’ ‘…….’ 가미긴에게 판단 재료로 주어진 것은 요 한 시간 동안 내가 보여준 섹스 테크닉. 여기서 한 시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리라. 비록 여태껏 가미긴이 잘 버텼다고는 하나 한 시간 동안 성감대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졌다. 쉬운 게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승리의 보상이 너무나 달콤하다. 한 시간. 겨우 한 시간을 버티기만 해도 거대한 영지가 손에 굴러온다. 반면에 패배의 대가는 비교적 보잘 것 없다. 단탈리안이라는 인물이 증오스럽기는 하지만, 가끔씩 몸을 섞어주는 것쯤이야 별로 대단한 재앙이 아니잖는가? ‘좋아. 간단하네.’ 가미긴이 코웃음을 쳤다. ‘약속을 어길 생각하지 마, 애송이.’ ‘저라고 해서 서열 제4위인 분과 약속한 것을 어기지 않습니다.’ 다만 편법을 쓸 따름이지. 내가 품속에서 물병을 꺼내들며 상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쪼록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일찍이 데이지를 함락시킬 때 써먹었던 <제레미 제작 특효 미약>이었다. 혓바닥에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몸 전체가 클리토리스가 된 것처럼 달아올랐다.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삼십 분 후. ‘흐윽, 하아……끄읏, 끄흐읏…….’ 가미긴은 잔디밭에 망가진 장난감처럼 널브러져서 전신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육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는지 엉덩이며 어깨가 제멋대로 들썩였다. 꼭 뭍에 올라온 물고기 같네, 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가미긴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닿은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가미긴이 흐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신체는 더없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런. 혹시 방금 가버리셨습니까? 손을 댔을 뿐인데도 가버리다니, 가미긴 님께서는 터무니없는 마조히스트 변태셨군요. 저 단탈리안,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흐끄윽……흐읏, 흐으윽……!’ ‘자아. 아직 한 병 더 남았습니다. 입을 벌려주십시오.’ 가미긴이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손에는 미약이 담긴 물병이 들려 있었다. ‘한 병, 더 있다고……?’ ‘예에. 저에게는 무척 뛰어난 약사가 있어서요. 한 방울만 마셔도 보통 사람은 온몸이 민감해져서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만, 역시 가미긴 님께서는 다르시군요. 한 병을 통째로 마셨는데도 멀쩡하시다니!’ 내가 싱긋 웃었다. 용사 후보생인 데이지조차 고작 한 방울에 함락했다. 그런 물건을 가미긴은 병째로 들이킨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뇌속이 파열해버릴 것처럼 뜨겁지 않을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했다. 과연 최고위 마왕이었다. ‘이거, 이거. 어쩌면 제가 패배할지도 모르겠네요. 무척 초조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미긴 님. 부디 한 병 더 드셔주시길.’ ‘…….’ ‘아니면, 설마. 설마라고 생각합니다만.’ 내가 물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보라색 물약이 기분 좋게 찰랑거렸다. ‘제발 그만해달라고 말씀하실 생각인지요?’ ‘…….’ ‘저야 이견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그만해달라고 말씀해주시면 즉각 약물의 투입을 그만두겠습니다. 제가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아니고서야 가미긴 님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참고로 무진장 즐거웠다. ‘자아, 가미긴 님. 말씀해주십시오. 저에게 약물을 그만 먹이라고, 그만해달라고 말씀해주시지요.’ ‘……먹여.’ 가미긴이 표독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까짓 물건에 좌절할 정도로, 시시하게 살아오지 않았어.’ ‘오오! 훌륭합니다. 쎄시봉, 쎄시봉!‘ 내가 병마개를 땄다. ‘그러면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조속히 두 번째 약물을 헌상하지요.’ 가미긴의 입술 사이에 약물을 흘려넣었다. 제레미가 이거 하나를 제작하는 데 천금을 소모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서열 제4위의 마왕에게 아까워서 쓰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에게 쓰라는 말인가? ‘……!’ 잠시 뒤, 가미긴이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아, 으, 으, 하고 단락적인 신음이 입술의 틈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정원에 바람이 불자 신음이 한층 강해졌다. 바람결에도 반응할 만큼 민감해졌다는 얘기였다. ‘하아, 으으으……끄으으윽…….’ ‘정말로 대단합니다. 아직도 꿋꿋하게 버티시는군요. 이 얼마나 엄청난 의지, 이 얼마나 엄청난 인내심입니까? 자아. 가미긴 님, 입을 벌리십시오.’ ‘하, 읏으……?’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가미긴이 날 바라보았다. 어째서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내가 미소를 활짝 지었다. ‘저에게는 아직 물약이 여섯 병 남아 있습니다.’ 가미긴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아……?’ ‘가미긴 님께서 워낙에 엄청나신지라 이거, 아무래도 제가 가진 전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위험하겠는걸요. 당신과 같은 강적은 처음입니다.’ ‘잠……깐…….’ ‘오오.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이 정도는 끄떡도 없다는 것이지요? 과연 가미긴 님입니다. 자아, 제 경의를 다 받쳐서 진상하겠습니다.’ 가미긴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물약 한 병을 그녀의 입에 쑤셔넣었다.   ============================ 작품 후기 ============================   Q: 정말로 '이런' 녀석이 주인공입니까? A: 예. 정말로 '이런' 녀석이 주인공입니다. 00236 마왕결전(魔王決戰) =========================================================================                        물약이 벌컥벌컥 입안으로 쏟아졌다. ‘읍, 으으읏……하, 흐읍……!’ 가미긴은 고통으로 얼굴이 와락 비틀어졌다. 개의치 않고 약물을 계속 먹였다. 미약은 미처 목구멍에 다 들어가지 못해서 입가로 흘러내리기도 했다. 지나친 쾌락 탓에 이미 가미긴의 눈가는 눈물로 젖었다. 입가까지 약물과 침으로 흥건해지자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유리병을 입에서 때어내자 뽕, 하고 귀여운 소리가 울렸다. 가미긴이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 ‘잠깐, 이라고 말했잖아……잠깐이라고 말했는데!’ 시선에는 아직도 날카로운 기세가 서려 있었다. 뇌가 핑크색으로 칵테일이 되었을 텐데 적의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깐이라니요? 설마 그만두라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조금, 흐읏……조금 더 천천히……!’ ‘죄송합니다. 불가능합니다.’ 내가 정말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승부에 시간제한이 걸려 있어서요. 벌써 삼십오 분이 흘렀습니다. 정말로 송구스럽습니다만, 저에게는 가미긴 님의 사정을 봐드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가미긴의 음부에 육봉을 쑤시고 싶었다. 상대방은 간단히 쾌락에 미쳐서 항복해버리겠지. 허나 그래서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미학적으로 수준이 뒤떨어졌다. 어설펐다. 모처럼 풍성하게 자라난 꽃을 소잡는 칼로 가지치는 꼴이 아닌가. 가미긴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심으로 덤비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그만큼 가미긴 님, 당신께서는 강하십니다. 아름답군요.’ ‘윽! ……귀에, 속삭이지 마!’ 귓가에 가볍게 바람을 불어넣자 가미긴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속삭이는 것조차 거대한 자극으로 느껴질 정도가 되었는가. 두 번째로 먹인 미약이 슬슬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주 좋았다. 지금쯤 가미긴은 온 세상이 고문도구로 느껴지리라. 살갗을 찌르는 잔디 한가닥한가닥이 죄다 성기에 찔러오는 육봉처럼 느껴질 것이고, 정원에 간간이 스쳐부는 바람은 잔인한 애무처럼 느껴질 것이다. ‘흐읏, 끄윽……아, 흐아아……! 으읏……!’ 내가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아도 가미긴은 몇 번이나 절정했다. 애액이 매끈한 허벅지에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복숭아 향기와 비슷하게 농밀한 체취가 물씬 풍겼다. ‘이건 어떻습니까? 가미긴 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약간 천천히 미약을 사용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제한시간을 삼십 분 늘려주십시오.’ ‘아, 흐으, 아아…….’ 가미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는 말로 거절할 여유마저 없었다. 신음이 쉴 새 없이 터져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타깝군요.’ 사실 예의상 제안해봤다. 이러면 상대방이 희망을 가져주기 때문에. 가미긴은 이렇게 생각했겠지. 혹시 저 자가 시간에 쫓기는 것 아닐까? 어떻게든 제한시간을 늘리려고 저렇게 태연한 척 가장하며 제안하는 것 아닐까. 아아, 내가 지금 무척 힘들긴 해도 결코 불리하지 않다. 안달복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더 잘 버티게 된다. 내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진리이다. 상대방을 괴롭히고 싶은가?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되도록 많은 기회를 안겨주라. 어떠한 탈출구도 없이, 어떠한 선택지도 없이 상대방을 단지 구석으로 몰아넣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학적으로 수준이 뒤떨어진다. 기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방이 그 기회를 걷어차면 걷어찰수록, 나중에 떨어지는 과실은 달콤하고 또 달콤하다. ‘저런, 가미긴 님. 눈가가 엉망이군요. 제가 눈물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아, 잠깐, 안 돼――흐으윽, 그거, 안 돼!’ 가미긴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내 손가락이 살을 만지면 현재 상태에서 어떻게 될지 그녀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만둘까요?’ 가미긴이 멈칫했다. 그 순간을 틈타서, 내 손가락이 그녀의 눈물을 스윽 닦았다. ‘흐아아아아악!’ 교성이 저녁 하늘을 날카롭게 찢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손가락은, 눈앞에서 아름다운 숙녀가 울고 있는데도 가만히 내버려둘 정도로 예의가 없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흐아아앗, 흐끄으으으읏! 흐앙, 흑, 아아아악!’ 내가 눈물을 닦아줄 때마다 가미긴은 괴로워하며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새하얀 허리에서 유독 갈비뼈 부근이 도드라졌다. 온몸에서 땀이 흘러나와 살결이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럽게 반들거렸다. 이것이다. 얼마나 신사다운 손짓인가? 처음부터 가미긴을 육봉으로 쑤신다든지 그렇게 포악하게 굴면 안 된다. 신사는 항상 신사답게 행동해야 할지어니, 고생길을 자처해야 마땅하다.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라. 실패의 위험을 무릅써라. 희망을 선물하라. 그리고 어디에도 희망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라. 이것이야말로 진리 중의 진리, 일찍이 고대인들이 이른바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로 후손들한테 전해주고자 했던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바 판도라! 비바 가미긴! ‘그런데 이거. 눈물이 멈추지 않는군요. 제 손까지 눈물범벅이 되게 생겼습니다!’ ‘나, 하윽, 끄으으읏! 안돼, 이거, 흑, 안돼!’ 어디까지나 상냥하게 눈가를 닦아주었다. 내가 눈물을 닦아주자 정신 나간 쾌락에 가미긴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으며, 덕택에 나 역시 계속해서 눈물을 닦을 수가 있었다. 멋진 순환이었다! 단지 눈물을 닦아줄 뿐인데 쾌락의 무한한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위대한 자연법칙의 숭고함을 느꼈다. 비바 가미긴! 비바 앤트로피! 내가 손짓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 이십 분밖에 안 남았군요.’ ‘느하, 그으으읏……흐아앙…….’ ‘가미긴 님. 듣고 계십니까?’ 가미긴은 눈동자에서 초점이 망가졌다. 이제 눈가를 만지지 않았지만 쾌락의 후폭풍이 여전히 남았는지 몸이 경련하고 있었다. 어이쿠, 벌써부터 무너지면 난감했다. 바르바토스랑 나는 이것보다 세 배쯤 심한 짓거리도 심심치 않게 즐겼다고? 내가 목소리를 키웠다. ‘가미긴 님. 가미긴 님! 이제 이십 분만 남았습니다!’ 그제서야 가미긴이 흐리멍덩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십 분……으, 이십 분……?’ ‘예, 겨우 이십 분입니다. 당신께선 무려 사십 분이나 버티신 겁니다. 자랑하셔도 좋습니다!’ ‘이십 분……이십 분…….’ 가미긴이 나약하게 중얼거렸다. 뇌에 입력되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새겨넣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그녀의 눈빛에서 총기가 돌아왔다. 전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반쯤은 어딘가 쾌락의 바다에서 잃어버리고, 나머지 반만 간신히 난파선에 의지하여 되돌아왔다. 그걸로 충분했다. ‘저로서도 점점 초조해지는군요. 정말로 패배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아아, 두려워서 미칠 것 같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물병을 재차 꺼내들었다. ‘그러니 가미긴 님. 세 번째.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물병 속에서 약물이 기분 좋게 넘실거렸다. ‘……, …….’ 가미긴이 입을 뻥긋거렸다. 그녀가 평소 얼굴에 쓰고 다니던, 연극적인 가면은 부서진 지 오래였다. 맨얼굴에는 순전히 공포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두 병의 미약으로 이렇게 되었다. 여기서 한 병이 더 들어가면……? ‘전부……남은 물약, 전부 한꺼번에……넣어.’ ‘예? 뭐라고요?’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남은 물약을 전부 말입니까? 진심입니까?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어차피, 전부 마시게 할 속셈이잖아……!’ 가미긴이 떨면서 말했다. ‘네 저속한 생각, 모를 것 같아? 한 병씩, 흐으읏! 흑, 한 병씩 마시게 해서……고문을, 즐기려는 거잖아!’ 과연. 이대로 순차적으로 단계가 높아지느니 차라리 한꺼번에 벌충하겠다라. 감동적이었다. 이것은 마치 학생이 교사에게 매질을 당할 때 한꺼번에 연속으로 맞겠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고통이 지속될 바에야 당장 크게 아프고 말겠다면서. 그러나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매질을 지금 벌어지는 쾌락의 폭풍에 어찌 비교하겠는가?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멋지군요.’ 어지간한 의지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했다. 여기서 어지간하다는 것은 영웅 중의 영웅만이 가질 법한 의지력을 가리켰다. 말하지 않았는가. 데이지도 물약 한 병에 넉다운했다고. 그에 반하여 가미긴은 실로 서열 제4위라는 직함에 어울렸다. ‘알겠습니다. 가미긴 님의 의사를 십분 존중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박수갈채라도 보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섭섭합니다. 고문이라니요? 저는 가미긴 님께서 혹여나 갑작스러운 물약에 당황하실까봐 차례대로 천천히 드렸을 뿐입니다.’ ‘웃기지, 마…….’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슬픈 일이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남은 물병을 전부, 정말로 전부 한꺼번에 들이키실 생각입니까? 당신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가미긴 님, 제발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부탁드립니다.’ ‘하, 왜……? 계획대로 안 되니까, 쫄려……?’ 가미긴이 웃었다. 입끝이 제어가 되지 않아 형편없이 떨리는데도 웃었다. 원더풀. 내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뒤적거렸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가미긴 님께서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요.’ 옷안에 쟁겨둔 물병들을 풀밭에 차례대로 올려두었다. 하나, 둘, 셋, 넷. ‘가미긴 님. 먼저 당신께 사과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사실 제가 가진 물약의 전부는 여섯 병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모두 열세 개가 있었지요.’ 가미긴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어……?’ ‘이야아. 가미긴 님께서 너무 힘들어하실지 몰라서 일부러 여섯 개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이지요. 굳이 제가 가진 물약의 ‘전부’를 쏟아내라 명령하시니, 최하위 마왕인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네요.’ 아아, 어째서 사람이란 이토록 어리석은지. 어째서 하나를 생각하면 두 개는 생각하지 못하는지. 자아. 가미긴. ‘음. 열한 병의 미약이 남아 있네요.’ ‘아, 아……?’ ‘부탁하신 대로 전부 한꺼번에, 확실히 가겠습니다.’ 내가 가미긴의 가슴을 꽈악 움켜잡았다. ‘히끄으으으윽!’ 가미긴이 비명을 터트렸다. 게임이 시작하고 처음으로 성감대를 직접 만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쾌락은 애들 장난으로 보이겠지. 나는 그녀의 벌어진 입구멍에다 물병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먼저 한 병.’ 가미긴이 어떻게든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유두를 꼬집었다. 그럼 별 수가 없었다. 가미긴은 신체가 명령하는 대로 교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제로 벌어진 입구멍에, 다시 물약을. ‘두 병. 세 병. 네 병――.’ 다시 물약을. ‘일곱 병. 여덟 병. 아홉 병.’ ‘푸르흡, 꾸륵――하아, 푸크흐흡!’ 가미긴이 괴롭게 숨을 토했다. 물약이 꽤나 많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흘러내리는 것보다 들어가는 것이 월등하게 많았다. ‘열 병. 열한 병!’ 나는 마지막 남은 물약까지 싹싹 털어넣었다. 가미긴이 숨을 꺽꺽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찬 물약, 거기에다 가슴과 유두의 자극으로 뇌가 보통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아득하게 뛰어넘은 쾌감까지. 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었다. ‘축하드립니다, 가미긴 님. 이제 십 분밖에 안 남았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내가 오페라 관람객처럼 손뼉을 쳤다. ‘십 분만 지나면 당신의 승리입니다.’ 단. 그 십 분은 지옥보다 조금 더 처절하겠지만.   ============================ 작품 후기 ============================   [리리플] TheDaybreak// 감사합니다. NineBreaker// 저 세계에는 경찰이 없습니다. 안타깝네요... 프롤마룬// 가미긴이 잘못한 건 사실 별로 없는데 너무하죠. asd메이지// 그렇습니다. 단탈리안은 천하의 나쁜놈입니다. 매실농축액2// 제 뜰에 들어가보시면 몇몇 히로인의 그림이 있습니다! 너굴2i// 제 뜰에 라우라의 스케치 그림이 올라와 있습니다. 곰상아들// 단사노바...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반드시 사라주어야 할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리샤에//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 단탈리안입니다. 물고기인간// 그렇게 되면 정말로 끔찍한 세상이 되어버릴 겁니다... NeoGGM// 단탈리안: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237 마왕결전(魔王決戰) =========================================================================                        ‘…….’ 가미긴은 땅바닥에 몸을 옆으로 뉘이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곧이어, 딱 반 발자국 늦게 해일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입이 벌어졌다. 그 한가운데에서 혓바닥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가미긴은 차마 비명을 지르지도 못해 아, 아, 하고 단락적인 신음만 겨우 토해내고 있었다. 발작에 걸린 사람처럼 전신이 떨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몸안에서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무언가를 간신히 참는 사람 같았다. ‘흐그읍, 아……흐윽…….’ 땀. 엄청난 양의 땀이 흘렀다. 지금 비명을 마음대로 질러버리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처럼. 사정없이 경련하고 있는 몸이 더더욱 미쳐 날뛰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것처럼. 꼭 그렇게 가미긴은 전력을 다하여 쾌락의 해일을 막아내고 있었다. ‘참고 계신 것입니까, 가미긴 님?’ ‘아으읏, 흑! ……으으으, 흐읍.’ ‘놀랍군요. 아마 바르바토스도 열 병 이상은 절대로 버티지 못할 텐데요. 글쎄, 파이몬은 여덟 병 정도면 광란하지 않을까요. 그런 가미긴 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지금부터 일 분마다 세어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이제 구 분 남았습니다.’ 가미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신께 무척 좋은 소식을 말씀드리자면, 안심하시길. 저는 이번 내기가 끝나기 전까지 성교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여기서만 있기에는 오늘 저녁이 너무 아름답군요.’ 내가 가미긴을 조심스럽게 안아올렸다. ‘히그으으윽!’ 내 손길이 닿자마자 가미긴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이빨을 악 물었지만, 등이 활처럼 크게 휘면서 절정해버렸다. 한 번뿐이 아니었다. 가미긴은 내 품에 안겨서 계속해서 가버렸다. 그녀가 명백히 쾌락을 느끼는 얼굴로 신음소리를 냈다. ‘으으응……! 그흣, 흐아앙…….’ 여자는 연속으로 절정할 수 있어서 참 좋겠어. 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정원을 걸었다. ‘싫, 어……! 으읏, 크흡……끄흐으윽, 안 돼, 안 돼……!’ 단지 신체에 접촉한 것만으로도 그녀가 결사적으로 쌓아올린 방파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가미긴의 비부에서 애액이 쉬지 않고 흘러내려 그만 이쪽 허벅지까지 물걸레처럼 축축해졌다. 여마왕 특유의 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마왕들은 대체로 체취가 황홀하다. 딱히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 다만 입이 심심할까봐 최고급 술이나 과일을 주로 먹는다. 수백 년 동안 싱그러운 과일만 먹고 살다보면 땀과 애액마저 향기로워진다. 가미긴은 복숭아향……아니, 딸기향이 조금 더 강한가. 딸기가 주식인 모양이다. 딸기는 참 좋지. 나도 좋아한다. 바르바토스는 사과향이 나는데 말이지. 가슴을 빨 때마다 꼭 사과를 핥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문득 파이몬과 시트리는 어떤 과일향이 날지 궁금했다. 과일시장인가. 여마왕들이 진열되어 있는 과일 가판대라니, 지극히 호화롭군……나중에 진득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응, 으으읏! 흐앙……!’ 가미긴이 달콤하게 헐떡거렸다. 그녀는 녹아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흐윽, 큿……아, 안 돼……, 아아아!’ 가미긴이 땀투성이의 몸을 마구 몸부림쳤다. 새하얀 살결이 땀으로 빛났다. 한없이 약한 몸짓이었다. 내 품에 안긴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꾸욱 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매달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사실 내 품에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살이 스치기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가미긴은 꼭 어린애마냥 무의식적으로 매달려왔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가미긴 님. 팔 분 남았습니다. 팔 분이요.’ ‘흐아아앗! 으으, 읏……, 하아앙!’ ‘지금까지 몇 번 갔습니까? 가미긴 님,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열 번인가요? 스무 번인가요?’ ‘흐으응……! 그런 거, 몰라……!’ 가미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순히 부정을 표시하는 게 아니었다. 쾌감 때문에 고개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설마 백 번? 이백 번이 넘어갔습니까?’ ‘모르니까……하으으읏, 끄흐윽! 그런 거 모르니까아, 흐읏!’ 내가 경쾌하게 정원을 걸어갔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정도 갔습니다. 대단하군요.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이백 번이나 가버리다니. 혹시 전무후무한 업적 아닐까요?’ ‘싫어……흐아앙! 느하, 싫어어!’ 뭐가 싫다는 것일까. 그만 웃어버렸다. 나오는 말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마 자기가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지. ‘자아. 도착했습니다.’ 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가미긴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움 따위 증발해버리고 쾌감에 절어버린 얼굴로. 내 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지, 눈초리가 멍한 것이 아마 시선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보이시지 않습니까? 분수입니다. 분수요.’ ‘나후햐아아……?’ 가미긴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잘 보십시오. 가미긴 님! 몸이 너무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땀에다가 애액으로 범벅되었습니다. 아무리 가미긴 님과 제가 진지하게 승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고위 마왕이신 당신께서 이리 더럽다니. 후학이 된 자로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내가 분수에 성큼 다가갔다. 이 분수는 정원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로에 연결되어 있었다. 수로에 보내질 물이 쉼없이 솟아나왔고, 장맛비가 내린 다음날의 시냇물마냥 물이 힘차게 흘렀다. ‘제가 뭐 대단한 걸 해드릴 수는 없고……그저 정성스럽게 목욕이라도 시켜드릴까, 하고.’ ‘흐에……?’ ‘예. 목욕입니다. 흐르는 물에 기분 좋게 몸을 씻는 것입니다.’ 내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말끔하게 말이지요.’ 살갗이 닿기만 해도 정신없이 절정해버린다. 그런 상태에서 '흐르는 물'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걸 상상하자 너무나 감미로워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기분이 좋아지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가미긴 님?’ ‘아, 안 돼……히이잇, 안 돼애…….’ 가미긴이 입을 뻥긋거렸다. 모기처럼 나약해빠진 목소리였지만 그속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안 된다고요?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인지?’ ‘안 돼……흐윽, 제바알……제발, 안 돼…….’ ‘저런. 제가 원하는 종류의 대답은 아닌 것 같군요.’ 나는 분수에 들어갔다. 수위가 꽤 되었다. 내 허벅지가 완전히 잠길 정도였다. 분수 한가운데까지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직접 씻겨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숙녀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겠지요. 죄송합니다. 가미긴 님 스스로 목욕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대로 가미긴의 몸을 떨어트렸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가미긴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트렸다. ‘히끄야아아아아악――!’ 그녀가 전신을 떨며 절정에 달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정의 연속이었다. 물길이 흐르면서 그녀의 살결에 빈틈없이 달라붙었으며, 온몸이 성감대가 되어버린 가미긴은 단 일 초도 끊기지 않고 연거푸 절정했다. ‘하으아아악! 느흑, 하앗! 끄흐으으윽! 후아아앗!’ 가미긴이 분수에서 몸부림쳤다. 물이 정신없이 첨벙거렸다. 그녀가 발악할수록 물결이 거세졌고, 결국 더욱 더 강해진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더 강해진 자극을 버틸 수 없어서 가미긴은 다시 발악했다. ‘그, 아으읏! 힛! 흐으으으읏!’ 첨벙, 첨벙, 하고 물장구 소리가 거세게 났다. 공포와 고통, 무엇보다도 쾌락에 가득 찬 비명이 가미긴의 목구멍에서 연달아 터져나왔다. 황홀하군. 무심코 감탄해버렸다. ‘이제 오 분 남았습니다! 힘내십시오!’ ‘끄흐, 그만……아! 아! 흐윽, 그마아아안, 으앙! 아아앗!’ 온몸이 물에 젖은 여인이 공포와 쾌락에 물든 얼굴로 발악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물결에 절정하고 경련한다. 자신의 정원에서. 자신이 만들라고 지시했을 분수에 빠진 채로. 다만 물이라는, 매우 소소한 자연물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내 눈높이를 만족시킨다. 이보다 호화로운 풍경이 달리 없다. ‘그만이라고요? 가미긴 님. 이제 겨우 오 분 남았는데요!’ ‘흐아아아앙! 후앗, 안돼, 흐앙! 가는 게……흐으으읏! 싫어, 더는……흐아앗!’ 가미긴이 발작하며 절정했다. ‘으음. 조금 더 버티시면 안 될까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육 분 남았는데 당신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일 분이나 줄여서 말해주었다고. 이 얼마나 친절한 남자인가. 조금이라도 더 이쪽이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랐다. ‘생각해보세요. 슐레지안 지방에 모라비아 지방까지 얻을 기회입니다. 앞으로 오 분. 딱 오 분만 더 버티면 이 알짜배기 영지들이 공짜로 당신 손에!’ 내가 두 팔을 활짝 벌려서 말했다. ‘어떻습니까. 가미긴 님, 앞으로 오 분만 더.’ ‘우윽! 실허, 흐그으읏! 싫어엇……!’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삼 분은 어떻습니까? 삼 분. 겨우 삼 분. 대박할인,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 합스부르크 중부에 대륙의 중앙을 차지하여 교통의 요지. 전략적 거점. 지금 마련하세요, 모라비아 지방. 알겠어요. 일 분에 어떻습니까? 일 분. 육십 초. 어때요?’ ‘제, 발……흐으으윽, 아! 아읏! 제바알……으으으, 흐아앗! 끄으으읏!’ 여기까지인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즐기고 싶었건만 여기서 끝내야 할 듯싶었다. 상대방이 기권한 이상 게임은 끝내야만 했다. 이건 규칙이었다. 규칙을 무시한 유흥 따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내기는 제가 승리했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미긴 님은 내전 직전에 본인이 차지하고 있던 영지만을 인정받습니다. 모라비아 영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 단탈리안은, 앞으로도 당신과 몸을 섞을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가미긴 님께서는 이를 인정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흐윽……! 그딴 거, 읏! 아무래도 좋으니까, 으읏……아앙!’ ‘예. 내기는 끝났습니다.’ 내가 가미긴을 건져올려서 대충 분수 바깥에다 내려놓았다. 그녀가 숨을 거칠게 헐떡거렸다. 한편으로 나는 옷을 벗은 다음, 가미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비부에 육봉을 가만히 갖다댔다. ‘에? 잠깐……뭐야,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야아?’ 가미긴이 나를 올려다보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가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내 몸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었다. 가미긴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부탁할게……거기만은……제발, 거기만큼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내기에서 승리할 경우, 앞으로 종종 저와 몸을 섞어주셔야겠다고.’ 내가 빙그레 웃었다. ‘내기에 패배한 결과를 얌전히 받아들여주시길.’ ‘나중에……나중에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으응, 제발……부탁이야, 단탈리안……내가 잘못했어……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거기만큼은……흐아아아아앗!’ 문답무용으로, 단번에 그녀의 속살에 육봉을 박아넣었다. 그날 저녁부터 시작하여 새벽이 될 때까지 그대로 정원에서 섹스했다. 가미긴은 도중에 수십 번 기절해버렸다. 그러나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질구가 육봉에 쑤셔지자, 그녀는 제대로 기절하지도 못했다. 새벽이 되어 내가 일어서서 옷을 챙겨입었다. ‘멋진 밤이었습니다, 가미긴 님. 참. 오늘 제3차 협상이 예정되어 있는 거, 잊지 않으셨겠지요? 시장 관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가미긴의 갈라진 틈에서 정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흔두 번째로 혼절해버린 가미긴을 내버려두고, 별장에서 가볍게 걸어나왔다. 그것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협상석에 앉아서 여유롭게 기다렸다. 멀리 주변을 둘러싼 마왕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협상이 시작하기로 합의된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이런 자리에는 원래 삼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해주어야 한다는 걸 감안하면, 가미긴은 명백히 지각하고 있었다. “가미긴 님이 조금 늦으시는 것 아닌가?” “설마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서…….” “아니. 가미긴 님이 그럴 리는 만무하지. 약속시간 하나는 철저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글쎄다. 아까 전에도 말했다시피, 미약을 네 병 마신 다음에 바르바토스와 나는 이틀 동안 제대로 생활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가미긴은 열세 병을 들이켰다. 과연 협상장까지 올 수나 있을련지 어떨지. 나는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노블레스가 유료연재의 장이 되기 이전, 조아라 19금란은 야설의 파라다이스였습니다. 레드에이어 님, 리그너스 님……. 지금은 활동하지 않고 계시지만, 조아라 19금란을 이끌어가던 거두였지요. 그때 조아라 19금란은 떡신. 실로 떡신에 열과 성의, 피와 땀을 쏟아부었습니다. 바야흐로 유료연재 시장이 열리고, 조아라 노블레스에서 19금씬은 배척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지요?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진리는 이곳에서도 유효합니다. 노블레스는 다시금 19금이라는 지상명제에 대해 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노블레스가 노블레스답게 나아가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바 노블레스! 비바 H씬! 00238 마왕결전(魔王決戰) =========================================================================                        마침내 협상할 시간이 다 되었다. 내 맞은편에 마련된 의자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가미긴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마왕들이 쑥덕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왜 가미긴이 오지 않는 것이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흥미로워하는 사람도, 이때가 기회라며 가미긴을 비웃는 마왕도 있었다. 예상대로인가……숙녀 아가씨에게 어젯밤은 다소 과격했나보다. 하긴, 그녀는 한번 찌를 때마다 한번씩 가버렸다. 자그마치 한번에 한번씩이었다. 밤새도록 수천 번은 절정에 달했겠지. 안 그래도 성적인 쾌감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강렬했다. 수천 번이나 가버린 것이 어떤 느낌일지 꽤나 궁금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에 들리도록 말했다. “가미긴 님께서 저에게 불만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싫어하셔도 그렇지, 이런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시다니……저는 상당히 얕보이는 것 같습니다. 서열이 낮은 자는 서럽군요.” 이런 절호의 기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으면 바보였다. 가미긴은 내가 서열이 낮아서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 같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협상에서 실제로 도움되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곳의 분위기를 내 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그동안 중재석에 앉아 침묵하던 바알이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동의한다면 자리를 파하겠다.” “아니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제 개인적인 의사로 그만두고 말고 할 자리가 아니니 말입니다. 평원파에서는 평화적인 해결을 강력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가미긴이 무시한 것은 비단 나 개인뿐만이 아니라 평원파라는 집단 자체이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바알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요 아저씨는 속으로 뭘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지만……서열 제1위 대마왕 바알인가. 나는 바알에 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알의 던전은 한 번밖에 클리어하지 못했다. <던전 어택>에서 다른 마왕들은 몇 번씩, 심하면 백 번이 넘게 깨보았지만 바알만큼은 딱 한 번 물리쳤다. 평원파가 서열 제2위인 아가레스를 물리친 지금, 더 이상 평원파를 함부로 건드릴 세력은 없어졌다.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대마왕 바알이었다. 아가레스마저 가공스러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바알은 어떻겠는가? 이번 기회에 바알의 속내를 찔러볼 필요가 있다. 괜찮다. 지금 나는 평원파의 대표자. 제아무리 바알이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리라. 어디 보자, 바알의 성향은……음. 게임 속 대화를 고려하자면 자신만만하고 명예로운 전사를 좋아한다. 바르바토스를 귀여워하는 걸 보아도 그렇다. 대충 그런 이미지로 가볼까. “가미긴 님이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서야 심심하겠지요. 어떻습니까, 바알 님? 변변찮은 놈입니다만 저와 잠시 동안 어울려주시겠습니까.” “…….” 바알이 눈을 뜨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다른 마왕들도 쑥덕거리는 걸 멈추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열 제71위 따위가 서열 제1위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전무후무한 무례였다. 하지만 내가 올바르게 예상했다면, 바알은 그런 예의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바알 전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평범한 마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흡혈귀였다.” 바알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선뜻 대답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뜻했다. “단지 오늘을 기준으로 돌이켜보건대 썩 평범하지는 않았군.” “어째서입니까?” “그때 당시에 흡혈귀는 진조(眞祖)뿐이었노라. 이제는 열 명도 채 남지 않았다만.” 헤에, 진조였구나. 진조는 순혈 흡혈귀를 가리켰다. 다른 종족끼리 교배가 가능하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순혈 뱀파이어는 적어졌다. <던전 어택>에도 진조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밖에 등장하지 않았다. “제가 소문으로 듣던 것과 약간 다르군요. 바알 전하께서는 가장 밑바닥인 병졸에서 시작하여 현재 자리에 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조라면 마계에서도 귀족으로 대접받지 않습니까?” “상상력을 발휘해보아라. 그 옛날에 지고지순했던 종족이 어디 흡혈귀뿐이었겠는가.” “아아, 다른 종족도 똑같았겠군요. 과연…….” 주위에서 놀라운 시선으로 이곳을 쳐다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1위 마왕에게 ‘당신 옛날에는 별 볼 일 없는 일개 마인이었지?’ 하고 묻는 것은 미친 짓거리였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친구라도 된 것처럼 편안한 말투로 바알과 대화하고 있었다. 더 질러볼까. “실례합니다만, 바알 전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아가레스 님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거기에 대해 아가레스 님이 변명할 거리도 있지요. 하지만, 바알 전하께서 따로 생각하시는 바가 없으신지요?” 바알이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가 입끝을 올렸다. “세상천지가 연극 무대라서 재미있는가?” “예?”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라.” 바알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나는 당황해서 잠시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방금 상대가 뭐라고 말했는가? 자기 앞에서 연기하지 말라고? 그게 무슨 의도인가. 가미긴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생충이라고 매도했다. 설마 바알도 똑같은 생각을 품은 것인가? 속에서 서서히 열이 뻗쳐왔다. 나는 그러나 눈앞의 상대방이 마계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철저하게 분노를 숨겼다. “알겠습니다. 그럼 느긋하게 가미긴 님이 오기를 기다리지요.” 삼십 분이 흘러도 가미긴이 출석하지 않았다. 이제 마왕들은 대놓고 불평불만을 표시했다. 저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마왕 전하들이었다. 가미긴은 저들 모두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볼멘소리가 터지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했다. “지금 장난하는 것인가!” “최고위 마왕이라고 해서 이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언제부터 마왕군의 기강이 이렇게 해이해졌는지 끔찍하군요.” 몇몇 마왕이 화를 내며 바깥으로 떠나갔다. 가미긴이 도착한 것은 원래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녀가 차분한 걸음걸이로 회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모두를 기다리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할게.” 가미긴이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그녀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 헐렁헐렁한 천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녀치고 매우 두터운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직도 미친 듯이 땀이랑 애액이 흐르고 있구나! 바알 때문에 상한 기분이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그랬다. 가미긴은 마왕의 재생력으로도 몸안에 남은 약기운을 전부 몰아내지 못했다. 만약 가미긴이 평소대로 천옷을 입었다면, 땀 때문에 옷이 살에 들러붙어 안쪽이 적나라하게 비출 것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몸이 보이지 않도록 두껍게 입었다. 옷 안쪽에는 아마도 모종의 마법을 걸어두어 체액과 체취를 제거하고 있겠지. 마왕들이 매몰차게 비아냥거렸다. “가미긴 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으신 것 아닙니까!” “응,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진심으로 사죄할게.” “하. 사과에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가미긴은 기계적으로, 계속해서 무표정하게 대답하기만 했다. 당연히 성의라고는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왕들이 분노했으나 이곳에서 나만은 가미긴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현재 그녀는 말투와 표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애먹고 있었다. 자칫 방심하기라도 하면 즉각 표정이 무너지겠지. 색기에 쩌든 신음이 나올 것이다. 자기 몸이 쾌감에 미쳐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가미긴은 철두철미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내가 손뼉을 쳤다. “자자. 마왕 여러분께서 화내시는 것도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미긴 님께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관대하게 용서해주시지요.” 누구보다 분노해야 할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마왕들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가미긴은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너그러이 이해해줘서, 고마워.” “별 말씀을.” 내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때때로 몸이 나빠져서 약속에 늦고는 합니다. 삶에는 도저히 예상하지 못할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니까요. 뭐, 그런 예상치 못하는 일을 어디까지 제어해내느냐가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겠습니다만……누구인들 항상 완벽하겠습니까?” “…….” “저는 가미긴 님을 이해합니다.” 순간적으로, 가미긴이 이빨을 꽉 물었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탓에 적어도 나한테는 훤하게 보였다. 이런, 그렇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면 곤란했다. 아직 즐거운 일이 많이 남았다. “자아, 가미긴 님. 어서오십시오. 협상을 시작해야지요.” “…….” 가미긴이 무척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협상석에 앉았는데, 엉덩이가 의자에 앉는 순간, 아주 조금이지만 입끝이 부르르 떨렸다. 의자에 닿은 것만으로 살짝 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멋졌다. 나는 왜 가미긴이 한 시간이나 늦었는지 알았다. 저 상태로 회의장까지 걸어올 수는 없었겠지. 니블헤임 안에서는 개인적인 순간이동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즉, 가미긴에겐 마차를 타고 오는 방법만 남아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가미긴이 몇 번이나 절정에 달했을까? 마부에게 수차례, 수십차례 잠깐만 멈춰달라고 부탁해야만 했으리라. 그녀는 마차 안에서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로이 홀로 절정을 참아냈다……. “가미긴 님께서도 회의가 길어지기를 원하시진 않을 테지요. 단도직입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평원파에서는 이번 내전이 발발하는 데 가미긴 님께서 피해자 입장임을 인정합니다.” 마왕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뭐,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방금 전에 가미긴 님께서 숨겨두신 병력이 우리군에 합류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가미긴 님과 아가레스 님은 전적으로 무관하다……그렇게 판단해도 좋겠지요.” “응. 정말이야.” 가미긴이 어디까지나 기계적인 어투로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아가레스가 어떻게 행동할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었어.” “가미긴 님의 군사적인 협력에 평원파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이번 협력에 대한 자그마한 성의로써 가미긴 님께 모라비아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하는 바입니다.” “너그러운 제안에 고마워.” 내가 박수를 보냈다. “훌륭하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으나, 오해는 풀리었고, 이제 화합의 길만이 저편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마왕들이 어리둥절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몇 명은 오늘 새벽에 내가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먹이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아마 다음날쯤엔 가미긴과 단탈리안이 열애한다는 소문이 쫘악 퍼질 것이다. 그것 역시 내가 바라는 바이다. 가미긴이 나와 엮이면 엮일수록, 사람들이 가미긴과 내 사이를 착각하면 착각할수록, 그녀는 나를 배신하기 힘들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배신했다, 라는 평판을 얻기 싫다면 말이지. 과연 순진무구한 여인을 흉내 내는 가미긴이 그런 평판을 무릅쓸 수 있을까. 내가 일어나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아, 가미긴 님. 우리 서로 화합한다는 의미에서 포옹합시다!” “읏……잠깐…….” 가미긴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덥썩 가미긴을 포옹했다. 팔뚝으로 꾸욱 그녀의 몸을 안았다. 내 품에서 가미긴이 “흐윽……!” 하고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그녀의 몸이 자그마한 동물처럼 경련했다. 내가 말했다. “오늘밤, 가미긴 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평원파와 가미긴 님의 영원한 우호를 다짐하자는 의미에서요. 설마 거절하시지는 않겠지요? 우리 둘 사이에 말입니다.” “……, …….” 가미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하지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멀리서 지켜보며, 다른 마왕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는 뻔했다. 사교계 아가씨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들려왔다. 이리하여 모든 일이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00239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대륙력 1507년. 학자들은 하나같이 탄식했다. 인간계와 마계를 가리지 않고. 작년, 월맹군 전쟁이 시작하여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마자 인간종이며 마족이며 죄다 내전에 돌입했다. 함께 화합해야 하는 이 순간에 왜 인간이고 마인이고 내분을 일삼는가? ‘만약 어느 종족이든 제대로 돌아갔다면 대륙은 진즉에 통일됐을 것이다.’ 학자들이 냉소적으로 이죽거리곤 했다. 프랑크 제국에서는 황제파와 황태후파가 외세를 이끌어들여 혈전을 거듭하였고, 합스부르크에서는 평원파와 아가레스가 영토 분쟁을 겪었다. 화합과 통합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이들은 칼날을 아군에게 돌리고 있었다……. 물론 이런 비난에는 지나치게 부당한 면이 있었다. 어머니한테 권력을 모조리 빼앗겨서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프랑크 황제한테 어느 누가 '대륙 평화를 위하여 그대 자신을 희생하라' 하고 명령하겠는가? 바르바토스가 영토를 전부 차지하는 바람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아가레스한테, 어느 누가 '마계 전체를 위하여 얌전히 참으시오'라고 말하겠는가? 사정은 이러했다. 학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고수함으로써 대륙 평화를 노래하듯이, 꼭 그처럼 프랑크의 황제 앙리, 브르타뉴의 여왕 앙리에타, 마왕 바르바토스, 마왕 아가레스――그들 전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할 따름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극히 소수의 인물은 때때로 앞만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았으며, 그리하여 무언가를 깨닫기도 했다. “단탈리안이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그늘진 눈가로 책자를 읽고 있었다. 눈가에 피로가 가득 쌓였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했다. 이곳은 공화국 통령의 집무실이었다. 오로지 정부의 간부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탁자와 서류. 그리고 의자. 이외에 화려한 장식이 일체 절제되어서 싸늘한 느낌마저 풍겼다. 엘리자베트는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예?”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린 말을 듣고, 근처에 앉은 여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꽤나 낯선 이름을 들어버린 탓에 비서가 한발자국 늦게 반응했다. “송구합니다, 각하. 소신이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보아라.” 엘리자베트가 비서에게 책자를 던졌다. 통령답지 않게 무례한 몸짓이었다. 그것에 당황하며 여비서가 허겁지겁 책자를 받아들였다. 책은 상당히 얇았다. 이것이 뭐가 그리 통령 각하의 마음에 거슬렸을까? “책 제목이 없군요…….” “저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쟝 볼레입니까? 소신이 견식이 짧아 처음 듣습니다만.” 비서가 조심스럽게 책자를 펼쳤다. 그녀는 이십 분에 걸쳐서 책을 완독했다. 엘리자베트가 물었다. “유리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 개인적으로 훌륭한 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서가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공화주의를 퍼트리기에 상당히 적합한 선전 도구가 아닐련지요. 쟝 볼레, 아마도 익명의 저자이겠습니다만, 우리 공화국에서 주장하는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그런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인가.” 엘리자베트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여기에 비서는 다시 한번 놀랐다. 통령 각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극도로 절제했다. 아까 전에 책자를 집어던진 것도 그렇거니와, 지금 입가에 비웃음을 담은 것도 전혀 통령 각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비서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자베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마왕 단탈리안이 쓴 물건이다.” “각하. '브루노의 악몽'이 이걸 썼다는 말씀입니까?”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틀림없다.” 이것 또한, 엘리자베트치고 목소리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통령은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절도와 위엄이 넘쳐났는데. “송구하오나 각하, 그리 확신하시는 근거가 있는지요?” “그 연설전이 있고 나서 단 하룻밤도 잊은 적이 없다.” 엘리자베트가 고통을 씹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자의 말투, 몸짓, 말하는 방식……모든 것이 마치 방금 전에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매일밤마다 로베르트와 함께 단탈리안, 그 마왕이 나타난다…….” 비서에게 말한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에 가까웠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 책자는 앙리에타 여왕이 보내왔다. 앙리에타도 깨닫지 못했겠지. 아니, 누구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아아. 단탈리안. 세상의 만인을 속여넘길지라도 나만큼은……절대로 나를 속일 수는 없다. 프랑크 내전에 개입했던가. 그토록 인류를 증오하고, 인류를 파멸시킬 생각인가.” 이윽고 엘리자베트가 숫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단탈리안에게 사제직을 위조시킨 자가 있다. 신전측에……단탈리안이 신전과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군. 아니면 파이몬인가……연결고리를 중재했을 가능성도 있을까. 그렇군, 충분히 가능하다……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여백에서조차 그대가 느껴진다. 로베르트. 절대로, 나만큼은…….” “통령 각하.”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최근 들어 지나치게 업무에 시달려 각하께서 피곤해지신 것일지 몰랐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엔 처리해야 할 일감이 넘쳐났다. 비서의 시선을 깨닫고 엘리자베트가 퍼득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하다. 본인이 생각이 너무 깊어졌군.” “아닙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각하께선 혹여 피곤하신 것 아닐지요?” “피곤하다고? 본인이?”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해도 벌써 사흘째 밤을 새고 계시지 않습니까. 생활 주기가 파탄나셨어요. 이제 그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셔야 합니다.” “알겠다, 알겠다.” 엘리자베트가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명백히 귀찮아하고 있었다. “드디어 유모를 퇴직시켰더니 이제는 비서가 새로운 유모가 되어 나를 괴롭히는군. 유리아, 본인은 열두 살 때부터 밤잠을 설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제 와서 고치라고 닥달한들 어디 고쳐질 성싶은가?” “통령 각하께서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셨잖아요. 아직 여자로서 시작하지도 않은 거랍니다.” “여자? 본인에게 여자로서의 삶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니 놀랄 노 자로다.” 엘리자베트가 피식 웃었다. “혹시 본인을 누군가와 결혼시키겠다는 망상 따위를 품고 있다면 당장 포기하도록. 본인은 이미 국가와 결혼했니라.” “하아. 모처럼 대륙 제일의 미녀로 태어나셨으면서…….” 비서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업무에 미친 상사만큼 모시기 더러운 상사가 없다더니, 엘리자베트 통령이 딱 그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통령 각하께서는 그럼 어느 정도의 남성이 나타나야 결혼을 일말이라도 고려해주실 건가요?” “음. 본인을 잠자리에서 눕힐 남성이라면.” 엘리자베트가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적어도 모든 마왕의 수급을 배어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고? 그만한 용자라면 기꺼이 본인의 처녀성을 내줄 의향이 있다.” “그건 영원히 결혼하시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농담이다. 으으음.” 엘리자베트가 기지개를 쭈욱 폈다. “무얼, 언젠가 본녀도 정략적으로 결혼하겠지.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면 얼마든지 결혼할 생각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수를 벌써부터 소모하기엔 아깝군. 본인은 한 국가의 통수권자이다. 스무 살, 서른 살이 되어도 그 가치는 하락하지 않겠지.” “자신감이 엄청나시네요…….” 결혼적령기를 한참 넘겨버린 비서가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억울하면 그대가 통령이 되어보는 것은 어떠한가?” “황공하오나 소신은 반역죄로 교살당하기 싫습니다. 통령 각하.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오세요.” 알겠다 알겠어, 하고 엘리자베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비서의 등쌀에 떠밀려서 집무실 옆방에 마련된 침대에 들어갔다. 실로 사흘 만에 눈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침대에 누운 지 이십 분도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미처 억누르지 못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미안하다, 로베르트. 미안하다……누나가……누나가, 로베르트…….” 벌써 몇 개월째일까. 브루노 평원에서 단탈리안이 모욕한 그날 이후로, 엘리자베트는 단 하루도 두 시간 연속으로 취침해본 적이 없었다. 잠이 들면 무조건 악몽에 시달렸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최근엔 더더욱 심해졌다. 원래대로라면. 한 남자가 나타나서 엘리자베트를 구원해줄 것이었다. 그는 대륙에 있는 마왕들을 모두 배어넘기고, 오직 여왕만을 위하여 온몸을 바칠 것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남자에게 위로를 받아 악몽이 없는 밤을 되찾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이제 그녀는 황녀도 여왕도 아니라 공화국의 통령이었다. 엘리자베트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남자 역시 너무나도 다른 길에 들어서버렸다. “……단탈리안.” 손바닥 틈새로 그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나만큼은, 절대로……절대로…….” 엘리자베트가 의미 모를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제풀에 지쳐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삼십 분이 흐른 다음에 또 다시 벌떡 일어섰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심처에서, 똑같은 일이 두 시간 내내 반복되었다. * * *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는 마왕성에 돌아왔다. 이번 외교전에선 그럭저럭 성공했다. 평원파가 승리하도록 도왔으며, 가미긴에게 목줄을 채웠다. 완벽하지 않다마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평해도 좋겠지. 아니, 애당초 완벽한 승리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성공했다. 깨달은 점도 있었다. 대체로 나는 전면에 나설수록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반면에 뒷 그림자에 숨을수록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이고, 내가 무슨 전술가랍시고 영웅들이랑 툭탁거리겠냐. 그냥 골방 노인네처럼 쉬어야지.” 한 마디로 말해 분수를 알았다고 할까. 앙리에타 여왕이나 아가레스 마왕이나 전술적인 핵병기였다. 그런데 전자에게는 패배했고 후자에게 승리했다. 전쟁이란 전술적인 차원에 접어들면, 특히나 이곳엔 오러 같은 것이 존재하는 바람에,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확실히 깨달았다니까. 이제부터 전술에는 손 뗄 거야! 다시는 전쟁터에 나가서 지휘봉을 잡나봐라.” “현명한 판단입니다.” 라피스가 내 외투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단탈리안 님에게는 전쟁 이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무에 대해서는 라우라 양에게 맡겨두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앞으로는 되도록 마왕성에서 출타하시지 않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어디 세상 일이 마음대로 흘러가나.”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 뭐 문제는 없었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라피스가 아주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 “역시나 마을들이 문제로군요. 새로운 율법에 익숙해지기 어려운 듯싶습니다.” “아아. 왜? 재판제도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있냐?” “영지민들도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엔 언제나 난항이 함께한다는 것일까. 내가 기지개를 쭉 피었다. 으아, 일 다음에는 또 일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이지. 나한테 맡겨봐. 사흘 만에 해결해줄게.” “……이제 마계에서 돌아오신 참인데 의욕에 넘치고 계시군요.” 라피스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내가 헤실헤실 웃었다. “오늘 하루는 쉬고. 나 꽤나 노력했거든. 자고로 성현들께선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구태여 오늘의 나에게 떠넘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 라피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분위기였다. 왜 그래? 거 섭섭하게. 나 정말로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다니까?   00240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마왕방 구석에 짐을 내려놓았다. 각종 물약과 필기구가 담긴 배낭이 풀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안착했다. “오늘은 자체 휴일이다!” 나는 가방과 더불어 침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수영이라도 치는 것처럼 팔다리를 놀렸다. 침대가 온수처럼 따뜻하게 내 몸을 받아주었다. “예의에 어긋납니다, 단탈리안 님.” 라피스는 나 대신에 배낭을 정리해주었다. 물품이 어지럽게 섞인 배낭을 능수능란하게 정리했고, 마왕방 곳곳에 물건을 가져다 놓았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위치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침대에서 자유영을 선보이며 말했다. “라피스를 보면 꼭 누나 같단 말이지~.” “예. 단탈리안 님은 꼭 손이 많이 가는 동생 같습니다.” “요컨대 치명적인 매력덩어리이자 귀염둥이라는 얘기로군. 알고 있어.” 라피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괜시리 키득거렸다. 침대에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하아아.” 천장에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런 고급스러운 사치품이 없었다. 그러나 라피스가 어마어마한 자본금을 운용하면서, 내 재산은 마르지 않는 바닷물처럼 든든하게 되었다. 샹들리에에서 희미하게 품어져나오는 빛을 보면서 나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고. 불합리하게 사고로 죽어나가고, 이상한 세계에 떨어지고……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지만 어떻게든 발버둥쳤다. 나 나름대로 극복해서 여기까지 왔다. 솔직히 잘도 버텼다. “…….” 안락한 침대에 누워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기듯이 짧은 꿈이 의식에 찾아들었다. 꿈속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을 걱정하는 낯빛이었는데 왜인지 오늘은 웃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라피스, 라우라, 바르바토스, 파이몬에 엘리자베트까지 거실에 앉아서 화목하게 웃었다. 안개와 같이 희뿌연 햇살이 그 모습을 감싸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광경이었다. 어찌나 허무맹랑한지 그만 웃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두 명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명은 저편, 저 안개의 햇살에 잠긴 채로 다른 이들과 함께 떠들고 웃었다. 웃음이 성스러운 공기가 되어 그들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다른 한편은 이쪽. 안개와 완전히 분리되어, 모든 것이 명확하며 모든 것이 뚜렷한 세계였다.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였다. 이곳에서는 공기의 흐름마저 죽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병환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공간이겠지. 여기에도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한 명씩 무미건조한 나무의자에 앉았다. 잭, 리프, 호크……이들은 의자에 앉아서 단지 내 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그저 가만히 이곳을 쳐다보며 침묵했다. 벌써 수십 번은 더 꾼 꿈이었다. 패턴이 똑같았다. 처음에 나는 그들과 대화하려고 별에 별 방법을 다 썼지만, 그들은 시체마냥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결국 포기하고 똑같이 침묵했다. 그러다 잠이 깼다. “…….” 이마가 서늘했다. 젠장, 기분이 더러웠다.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서 서둘러 품속을 뒤졌다. 없었다. 마약이 없었다. 외투에 넣어 두었던가. 내가 한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라피스? 라피스. 미안한데 외투 좀 갖다줘.” “……아직 침상에 드신 지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라피스는 근처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조금 더 주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충분히 잤어. 알잖아. 마왕은 잠을 많이 잘 필요가 없어. 외투 좀 갖다주라.”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마약을 찾으시는 일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도 지나치게 자주 드시고 계십니다. 최근 들어서는 미약과 같은 약물까지 남용하시지 않습니까. 제레미 경에게 들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시도때도 없이 약물 제조를 의뢰하신다고.” “알았어, 알았어. 잘못했어.” 내가 초조하게 대꾸했다. 몸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무심코 화를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라피스에게 화를 내지르는 것만큼은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라피스는 현재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도와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난 아무것도 못했다. <던전 어택>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액스트라였지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다. 그녀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젠장할! 정말이었다. 라피스에게 화를 내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성난 목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상냥하게 다듬었다. “잔소리는 언제라도 들어줄게, 응? 라피스. 외투 좀 가져다줘.” “……단탈리안 님.” “알잖아. 잠자고 깨어난 직후만 이렇게 심한 거야……응? 한 모금만 피우면 나아질 테니까. 한 모금이면 전부 평소대로 돌아오니까……마약도 약이잖아. 적절하게 복용하면 괜찮다고. 그러니까.” 빌어먹을, 두개골이 빠개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예전에는 조울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계의 유수한 의원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래도 조울증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이건 조금 더 악질적인 정신병이었다. 의원들도 원인을 모르겠다며 백기를 들어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해결했다. 고급스러운 포도주를 자주 마셨다. 그 다음에는 섹스였다. 라우라와 진탕 몸을 섞을 때만큼은 머리가 아프지도, 기분이 급격하게 뒤바뀌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담배. 그 다음에는 담배에서 조금 더 독한 마약류……요즘에는 약물까지 이따금 사용했다. 괜히 미약을 열세 병이나 들고다닌 게 아니었다. 정말로 지랄맞은 일이 아니고 뭔가. “미안하지만, 라피스……얼른…….” 미약을 나눠 마시고 질펀하게 섹스를 겪으면 한동안 두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약물중독자라도 되어버리면 그날로 인생이 끝장나겠지. 게다가 라우라한테 약물같이 몹쓸 물건을 사용할 순 없었다……. 바르바토스처럼 갈 때까지 가본 녀석. 아니면 부담없는 창녀. 그러나 바르바토스도 창녀도 언제나 내 주위에 있어주지는 못했다. 그럴 때는 제레미와 몸을 섞었다……. “여기 있습니다.” 라피스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라피스가 두 손으로 담뱃대를 건네주고 있었다. 파이프에 말린 약초가 꾹꾹 눌러담겼다. 머리가 아픈 나를 대신해서 약초까지 대신 담아준 것이었다. “고마워.” 서둘러 담뱃대를 받았다. 라피스가 마법을 사용해서 불을 지펴주었다. 담뱃대 끄트머리를 한입 물고 후우, 하고 길게 마셔냈다.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서서히 두통이 사라졌다. 온몸을 조여오던 압박감과 초조함도 사그라들었다. “…….” “…….” 나는 말없이 담뱃대를 뻐끔거렸다. 지금처럼 특히나 잠에서 깨어난 직후가 문제였다. 나는 언제나 이상하게 생겨먹은 악몽을 꾸었고, 꿈 때문에 기분이 꽤나 더러워졌다. 이런 때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나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데이지의 암살실패건이 좋은 사례였다. 누구든 작은 단탈리안을 건드리면 아주 새되는 거예요. 음, 농담을 할 정도로 정신이 안정되었군.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라피스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야 라피스답게 없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쯤은 쉽게 느꼈다. 내가 밝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고생할 일은 거진 다 해결됐다고?” “하지만…….” “인간계든 마왕군이든 피해를 입었어. 적어도 십 년은 세력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거야. 내 마왕성을 공격할 만한 세력도 주변에서 일소되었지. 나는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까지 모든 파벌의 지지와 후원을 얻었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날개를 잃어버린 새가 되었으며, 용사 남매는 나에게 발이 묶였다. 최악의 변수들마저 없앤 것이었다. “이제 모든 위협이 사라졌어. 라피스. 네가 도와준 덕분에 이루어낸 쾌거야.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조금 맛이 가버리긴 했지만 세상만사, 아무런 대가 없이 굴러가는 일이 없지.” “……그렇군요.” 라피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님이 말씀하는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위험요소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렇지?” 내가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돈도 겁나게 쌓였겠다. 우리는 이제 십 년이고 백 년이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면 되는 거야.” 세월이 흐르면 두통이든 악몽이든 전부 흐려지겠지. 틀림없다.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마약을 피며 희뿌옇게 빛나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 * * 지난 번에 합의했듯이 내 영지에는 새로운 법률이 들어섰다. 문제는 이게 아직 영지민들에게 낯설다는 것. 여태껏 관습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는데, 모든 마을에 통용되는 법률을 공지하자니 사람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힘든 모양이었다. “혹시 새로운 법체계에 영지민이 반발하는 거 아니냐?” “아니요. 익숙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요외다, 마왕 나리.” 파르시가 말했다. 파르시는 본격적으로 영주대리인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지 정중앙에 해당하는 팔라티노 언덕에 어수룩하지만 돌벽으로 사무실을 건설했는데, 이게 대충 관청과 같았다. 아직 관리라고 해봤자 파르시밖에 없었지만. “평생 살아온 습관이 어디 쉽게 바뀌겠수?” “쯧. 아직 어리구나, 파르시. 그렇게 사는 방식을 바꾸지 못하다가 개혁이 유야무야 증발해버리는 거다. 바꿀 때는 과감하게 바꿔야지.”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찌하겠소, 그만 깜빡하고 새로운 법률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벌금이라도 매기면 좋겠수까?” “백성에게 새 법률을 강압하는 것은 하책이지. 제아무리 좋은 법률이라도 강압이 섞여들면 일단 반발하고 보는 것이 백성이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들어야 해.” 내가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얌전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데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더냐?” 데이지는 파르시를 따라다니며 마을의 대소사를 견학했다. 내 시녀로서 견식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영지 업무를 익히기엔 나이가 한참 어렸지만 데이지에 관해서 나는 너그러워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자새끼는 절벽에 밀어넣어야 제맛이라지. 데이지는 사자새끼는커녕 공룡새끼였다. 절벽에 밀어넣은 다음 바위까지 굴러 떨어트려야 마땅했다. 데이지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기다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다려? 무엇을?” “영지민 중에 누군가가 큰 실책을 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 명이 법률을 중대하게 여겼을 때, 그를 본보기로 삼아 처형합니다. 일벌백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모범답안지와 같은 대답이었다. 자고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파르시에게도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흐음, 하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기는. 배운 것이 책밖에 없어서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 것도 우둔하기 짝이 없구나. 뭐, 처형해? 며칠이나 파르시를 따라다녔으면서 뭘 배운 거냐. 네 눈에는 영지민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보이더냐.” 데이지가 멈칫했다. “자기 마을사람들 목숨을 제발 살려달라며 내 앞에 나서던 여자애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원. 지 마을사람이 아니면 죽든 살리든 상관없다는 얘기로군. 위선자 녀석아, 네 오래비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아버님께서는 무엇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선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크흐. 제멋대로 망상까지 전개하니 별 도리가 없군.” 내가 비웃었다. “나는 분명히 강압적인 수단을 쓰지 말라고 언급했다. 몸속에서 슬라임이 빠졌나 싶었더니 이제보니 귓속에다 옮겨 심었구나. 그래, 너에게는 일벌백계로 백성을 처형하는 것이 별로 강압적이지 않다고 느껴지는 모양이지.” “…….” “대단한 명군(名君)께서 나시지 않았는가! 이렇게 현명한 여아를 양녀로 두게 되어 참으로 황공무지하다.” 소녀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파르시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거 어린애한테 너무 박하시구랴. 아직 얼라 아니오까?” “파르시. 내 양녀를 양육하는 방법 정도는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쩌업. 뭐, 소인이 책임질 일이 아니긴 하외다만…….” 파르시가 뻘쭘한지 입맛을 다셨다. 그 이상으로 파르시는 간섭해오지 않았다. 저래 보여도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마왕 나리께는 어떤 기발한 책략이 있소?” “간단하다. 큼직한 돌덩어리 세 개만 준비해라.” “웬 돌덩어리요? 돌덩어리를 무에 쓰려고 그러시오?” 파르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가만히 구경하도록. 농삿일에서야 자네가 선배이지만 이쪽 분야는 내 전문이니까.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00241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 * * 다음날, 팔라티노 언덕 꼭대기에 어린아이만한 돌덩어리가 우뚝 섰다. 돌덩어리는 희안하게도 고급스러운 비단을 걸치고 있었다. 왜 이런 바위에 값비싼 비단이 있는가, 하고 행인들이 한번씩은 쳐다보았다. 몇 명은 이게 보통 돌덩어리가 아니라 신령스러운 물건인가 싶어서 유심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평범하게 생긴 돌이었다. 사람들이 의아스러워 다함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게 왜 대공회당(大公會堂) 앞에 놓였지?” “누가 장난 삼아서 옮겨놓은 것 아니겠나. 으이그, 요새 젊은 것들이란.” “어디 곳간이 남아돌아서 비단으로 장난질을 쳤으려구요. 괜히 주름살이 특권이라고 젊은이들 욕하지 마쇼, 아재.” 대공회당은 단탈리안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재판소를 가리켰다. 마왕 단탈리안은 이곳을 재판소라고 불렀지만, 마을들 사이에서 대소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이곳에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공회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원래 마을에서 공회당 구실을 하던 집과 구분 짓기 위해서 영지민들은 여기를 ‘큰 집’이라 불렀다. “비단에 포고령이 적혔는데?” 영지민 중 소수가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인간이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비단에 글자가 적힌 것을 알아보았다. “돌덩어리를 언덕 아래까지 옮기라는군.” “으응? 뭣하러 그걸 옮기라고 포고씩이나 붙고 그려.” “나도 그건 모르겠는걸…….”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비단을 마저 읽었다. “그런데 일단 옮겨놓으면 금화 일백을 수여한다는데.” “금화 일백?” 영지민들이 잠시 침묵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역시 장난이구만. 거보게, 내 뭐라 그랬는지.” “이거 걸려들었다가 된통 웃음바가지나 뒤집어쓰는 수법이네. 뻔하지.” “어서 들어가세.” 비단에 적힌 말을 곧이곧대로 받들어서 낑낑거리며 바위를 옮기면, 어떻게 그런 헛소리에 진지하게 반응하느냐고 놀릴 게 분명했다. 체력은 체력대로 소모하고 한동안 마을사람들의 술안주로 전락하겠지. 영지민들은 자그마한 해프닝을 무시하고 대공회당에 들어갔다. 집회가 끝난 후, 사람들이 다시 출입구로 나왔다. 여전히 돌덩어리가 치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 전하께서 만드신 장소인데 웬 염병할 놈이 입구부터 장난질이야!”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파르시 영감. 이거 진즉에 치울 것이지 왜 여태껏 내버려두었어?” “영감이라고 부르지 마쇼, 이 영감탱이야. 열일곱 청춘보고 누가 영감이래.” 파르시가 대공회당에서 뒤따라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낄낄 웃었다. “전하께 감투를 받았으면 나이랑 상관없이 영감님이지. 말이 열일곱이지 네 면상떼기가 어디 열일곱 먹은 상태이시냐. 너 벌써 인생 다 살았다, 애늙은아.” “꺼지시구랴. 내 기필코 올해엔 참한 색시 얻을 테요.” 사람들이 더 크게 웃었다. “얼씨구. 네놈처럼 곰탱이 아들처럼 생겨먹은 게 잘도 장가가겠다.” “아, 꺼지라니까!” 파르시가 으르렁거렸다. 수가 틀리면 자그마치 마을의 촌장을 도끼로 찍어버리는 파르시였지만, 평소에는 그저 놀리기 좋은 총각에 불과했다. 게다가 사람들 대부분은 파르시가 어느 아가씨를 사모했는지, 그리고 총각의 연정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고 있었다. 파르시는 바로 위대하신 마왕 전하의 아내,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좋아했다. 첫눈에 반한 것이었다. 외모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사랑이 이루어지기란 절대로 불가능했다. 금발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얼마 전 영지 전체에 새로운 법률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농부의 아내처럼 단순히 밭을 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영지민들에게도 명확했다. 영지민들이 웃음소리 뒤에 숨어서 속닥거렸다. “저거 저게 진짜 병신이래두. 그리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마음을 뺏겼는데 다른 처녀들이 눈에 들어오겠어?” “쯔쯧. 촌장에다 마왕 전하의 신임까지 받으니 눈만 좀 낮추면 다 골라서 잡아갈 수 있을 것인데. 지 복을 제 발로 차는 꼬락서니 보소…….”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숨을 쉬었다. 저놈은 틀려먹었다. “저번 날엔 우리 여편네가 글쎄, 마왕 전하와 그 금발 아가씨가 외딴 밀밭에서 떡치는 걸 보았다지 않는가! 궁합도 그런 찰떡궁합이 없다는데 글쎄, 아주 가망이 없지.” “소문으론 몇 번 들었는데 설마 참말이려구.” “아, 그거 진짜야. 나도 보았다네. 우리 전하께서는 퍽 남사스러우시지!” 영지민들이 키득거렸다. 그들은 과연 파르시가 5년 안에 장가갈지 7년 안에 장가갈지 내기를 걸었다. 파르시, 애늙은이 영주대리인에게 희망이란 요원했다……. “파르시. 아무튼 거 보기 흉한 바윗덩어리 좀 치우게. 대공회당 정문에 이게 뭔가? 뭣하면 지금 우리들이 한손 거들어줄 테니.” “아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장난질로 모셔둔 게 아니오. 마왕 나리께서 정식으로 놓은 물건이라오.” “에엥?” 영지민들이 한층 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나라고 마왕 나리께서 생각하시는 걸 죄다 꿰고 있겠수?” 파르시가 하소연하는 투로 말했다. “갖다 놓으라니까 시키는 대로 했지. 염병, 꼭두새벽부터 팔자에도 없는 돌덩어리 운반하느라 허리가 빠지는 줄 알았소.” “써먹지도 못한 허리인데 조심히 관리해야지. 끌끌.” “썅. 아재들, 나 놀려먹으면 재밌수?” “꿀맛도 그런 꿀맛이 없더라.” 사람들이 웃는 가운데 몇몇 사람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영지민인 그들이 바라보기에 마왕 단탈리안은 선군(善君)이 아닐지언정 현군(賢君)이었다. 가끔씩 밀밭에서 연인과 남사스러운 짓을 치르거나, 영주님이면서 손수 밭을 일구는 등, 여러모로 희안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영지 통치에 관련해서는 언제나 절도와 도의가 있었다. 절도란 영주가 한번 영지민 앞에서 입에 담은 말을 결코 번복하지 않음을 가리켰으며, 도의란 시기와 때를 간파할 줄 알아 통치에 융통성을 담아냄을 가리켰다. 예컨대 단탈리안은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수리세이니 특별세이니 하는 온갖 잡스러운 세금을 매겨도 '뭐, 다 그렇고 그런 거지' 하고 영지민들은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래 다른 영지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의 아들딸이었다. 폭정이란 그들에게 더없이 익숙했다. 폭정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폭정을 하느냐가 단지 문제인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단탈리안은 절도 있는 영주로서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각인되었다. 우리 영주님은 헛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영주님이 한다면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되고 있었다. ‘이거, 아마도 영주님께서…….’ ‘음. 무언가 생각을 담아두신 것 같은걸.’ 노련한 장로들이 소리없이 눈으로 대화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전하께서 뭔가를 의중에 두셨다. 그것만 알았으면 충분했다. 정확히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은 주제에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장로처럼 인생에서 두 발자국쯤 물러서는 이들과 다르게, 어떤 젊은이는 성큼 앞으로 나갔다. “전하께서 보증하시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젊은이는 야머라는 이름을 가졌다. 지주 집안의 차남이었다. 이 시대에 차남이 흔히 그러하듯이 야머도 부모에게 농토를 물려받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단탈리안이 3할의 세율을 매긴 소작지에 들어갔다. ‘다 전하 덕분이야.’ 젊은이는 자신과 같은 차남들에게 기회를 마련해준 단탈리안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평소부터 그런 마음을 가진 터에 마왕 전하께서 친히 명령하신 바라고 하니, 제아무리 장난질로밖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선 것이었다. “비키시오. 내가 하겠소.” “으응? 아니, 그래도 돌덩어리 하나 옮기는데 백금이 들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머 역시 정말로 백금이 하사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냥 단순하게, 마왕 전하께서 내붙인 포고이니 마땅히 따라야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렴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허언이겠나? 여기 바위에 둘러친 비단이라도 주시겠지. 나는 그것만 챙겨도 이득이거든.” “뭐, 하긴…….” “비단 정도라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심이 생긴 눈으로 바위를 바라보는 사람도 생겼다. 저 비단만 해도 값어치가 꽤 나갔기 때문에. 하지만 선수필승이라, 야머가 먼저 나선 탓에 사람들은 입맛만 다셨다. “흐으으읍. 읏차아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머가 돌덩어리를 힘차게 들어올렸다. 상당히 무거웠다. “크흐흡……! 파르시. 언덕 아래면 아무데나 괜찮은가?” “장소에 대해서는 딱히 말씀하신 바 없으니 마음대로 해.” “좋아! 천하장사 야머 님께서 가신다아아아!” 야머가 성큼성큼 언덕 아래를 내려갔다.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났다며 야머를 따라갔다. 어차피 공회가 끝나서 각자 마을로 돌아가야 했으며, 과연 마왕 전하께서 어떤 장난을 준비한 것인지 궁금했다. 야머는 중간중간에 팔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걸었다. “농사 짓는 놈이 힘이 그게 뭐냐!” “우우우!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천하장사는 개뿔에 천하장사야!” 영지민들이 신나서 비아냥을 쏟아냈다. 야머는 이마에 힘줄이 돋았지만, 돌덩어리의 무게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불평을 돌려줄 여유가 없었다. “크하아아! 아이고, 삭신이야!” 사 분 뒤에 야머가 언덕 아래에 도착했다. 그가 쿵, 하고 돌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야머는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누웠다. “그놈 한번 겁나게 무겁네!” “저거 저, 쬐매한 돌멩이 하나 들었다고 엎어지는 거 보소.” “저래 가지고 부인한테 제대로 힘이나 쓸련지 몰라.” 사람들이 큰소리로 웃던 그때였다. 언덕 위에 지어진 초소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치안대원. 즉, 제레미를 따라서 이곳까지 온 암살단원 두 명이 다가왔다. 마을사람들은 치안대원이 보통 무예가 출중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다소 긴장했다. 무슨 일인가? 엘프답게 귀가 뾰족한 치안대원이 겉보기에도 호화로운 상자를 꺼내들었다. “바위를 옮긴 사람이 누구지요?” “저, 저입니다만.” 야머가 화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안대원이 소리쳤다. “그대들은 들으라! 나 단탈리안의 이름으로 내걸린 포고에 충실히 따랐으니, 그대에게 약속한 바 그대로 이 자에게 금화 일백을 하사한다.” “어, 예……?” “마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포상입니다. 공손하게 받으시길.” 야머의 맹한 눈동자에 퍼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돌을 옮기느라 부어오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치안대원이 예의바르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가슴팍만한 상자였다. 이 상자만 팔아도 금화가 몇 개 떨어질 것임을, 이곳에 모인 영지민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그러니까.” 꿀꺽. 야머가 침을 삼켰다. 그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결연하게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서는 정말로 금화더미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허어어억!?” 야머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영지민들도 야머를 따라서 마치 합창대가 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온화하게 기다리던 장로들조차 나이를 잊어버린 채 높고 높은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금화였다. 촌구석 농사꾼들이 본 적도 없는 금화가 언덕마냥 쌓여 있었다!   00242 모름지기 정치란 꼼수이니 =========================================================================                        돌덩어리를 하나 옮겼더니 백금이 주어졌다. 소식이 금방 마을들에 퍼졌다. 사람들은 마왕 전하가 혹시 해괴망측하게 장난하신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사흘 뒤, 다시금 대공회당 정문에 포고령이 붙었다. 터무니없는 명령이 붙어 있었다. ─ 사흘 전에 야머가 옮긴 돌덩어리를 도로 이곳에 옮기는 자한테 금화 삼백을 하사한다. 이번에 영지민들은 군말을 꺼내지 않았다. 당장 언덕 아래로 질주했다. “노인네들은 비키쇼! 거 무리하다가 허리만 아작날라!” “꺼져라, 애송이들아! 내가 팔팔할 때는 바위 두세 개 거뜬하게 들었던 양반이야!” 사람들이 툭탁거리며 돌덩어리를 향해 질주했다. 한 청년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영지민들은 청년에게 양보하지 않고 득달같이 돌덩어리에 달라붙었다. “아니, 내가 맨 먼저 도착했는데 다들 왜 이럽니까! 이거 내 껍니다, 내 꺼!” “네것내것 좋아하네. 흐흐, 포고령에서 한 사람만 옮기라도 말한 적 없다.” “아이고, 세상에 이런 순 날강도들을 봤나!” 청년은 억울하여 분기탱천했다. 이제 예순 살이 넘은 장로마저 콧김을 드세게 몰아쉬며 바위에 찰싹 들러붙었다. “욘석아. 네놈이 겨울에 쫄쫄 굶어디질 판에 군식구 보살펴준 은혜를 잊었느냐?” “아, 아니. 그 이야기는 또 왜 지금 꺼내요?” “예끼! 지금 날 내쫓으면 그놈 참 후레자식이라며 여신들께서 진노하실 거다!” 청년이 주춤하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들었다. “야! 우리집 대장간인 거 알지? 너 새끼, 이거 혼자서 먹으려고 그러기만 해봐. 앞으로 농기구고 뭐고 절대로 안 빌려줄 테다.” “마을에서 왕따 당하고 싶으면 어디 혼자 드셔보시든지. 아님 고향 떠나서 지 혼자 잘 살아보든가!” 청년이 울상을 지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졸지에 열네 명이서 돌덩어리를 운반하게 되었다. 바위를 대공회당 정문에 다시 갖다두자, 아니나 다를까 치안대원이 달려와서 하사금을 선물했다. 상자에는 정말로 금화 삼백 개가 들어 있었다. 열네 명의 영지민은 환호성을 지르며 금화를 평등하게 나눠가졌다. 이렇게 되자 묘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이제나 저제나 대공회당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머릿수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백 명이 넘었다. 안타깝게도 돌덩어리를 옮기라는 포고령은 결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탄했다. “으으, 역시 마왕 전하의 심심풀이였나…….” “내가 그때 거기 있어야 했는데!” 그런데 얼마 후, 난쟁이들이 와서 돌덩어리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난쟁이가 조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위에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난쟁이들은 뚝딱 글자를 새겨넣은 다음에 떠났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제1조. 영지는 영원불멸의 주권자인 영주가 통치한다.」 「제2조. 영지민은 영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평등하게 위임받는다. 영주의 통치권이 침해받지 않는 이상, 영지민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지켜진다.」 「제3조. 단체나 개인은 위임된 권리에 따라서 반드시 영지민의 자유, 영지민의 재산, 영지민의 안전, 그리고 세계의 발전과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 세 개의 조항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지난 번에 새로이 만들어진 법률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왕 전하가 벌인 것이 해괴망측한 농짓거리가 아니며, 자신들한테 명명백백하게 포고문을 내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이해했다. 소위 새로운 법률에는 사실 조항이 더 많았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일단 가장 중요한 조항만을 영지민들 머릿속에 각인시키고자 했다. 돌덩어리는 <야머의 바위>라고 불렸다. 단탈리안이 직접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곧이어 열린 대공회(大公會)에서 영지민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이제부터 본인이 그대들에게 명령하거나 협조를 구할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야머의 바위 앞에 포고문을 붙일 것이다.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영지민을 위해서 본인은 대리인에게 명령하여 포고문을 낭독하도록 배려하겠다.” “그러나 어째서 야머의 바위인가?” “법률을 만들어낸 사람은 분명히 본인이다. 차라리 단탈리안의 바위라고 이름하지 않고 영지민의 이름을 이 상징적인 바위에 붙인 까닭은 무엇인가?” “영지민들이여. 왜냐하면 법률을 실행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그대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는 틀림없이 나 단탈리안으로부터 비롯한다. 허나 그대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명심하라.” “오로지 그대들만이 그대들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영주는 결코, 절대로 그대들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삶을 선물하셨으나 정작 삶을 경작해야 하는 장본인은 그대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영주는 여신과 그대를 중개해주는 사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저 바위를 야머의 것이라고 부르노라. 바로 그대들의 법률이라는 뜻이다. 영지민들이여, 이 점을 명심하고 살아갈지어다.” 여기에는 물론 속임수가 숨겨져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속임수는 주권자가 영지민 전원이 아니라 단 한 명, 마왕 단탈리안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영지민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간다. 단지 영주에게 '은혜롭게' 권리를 내려받은 한에서만. 이는 영지민들이 언제나 영주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으며, 당연하지만 단탈리안을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게끔 유도했다. ……우리가 잘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우리가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애당초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단탈리안 전하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살 권리를 하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되어도, 평화를 만끽해도, 자유를 누려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단탈리안 전하 덕분이다……. 이것은 기괴하고 위험한 논리였다. “단탈리안 전하 만세!” 그러나 영지민들은 환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영지민에게 주권과 같은 개념은 낯설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 즉 영주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었다. 영지에 귀족도 노예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얘기 아닌가! 귀족의 폭정에 시달린 사람들은 ‘앞으로 영지에는 어떠한 귀족도, 어떠한 노예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단탈리안을 열렬하게 지지할 따름이었다. * * * 내가 대공회당에서 연설을 끝내고 마왕방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내 뒤를 배웅하면서 한참 동안 만세를 연창하는 바람에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데이지는 시중을 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 곁에 있었다. 마왕방에 돌아오자――마왕방으로 통하는 순간이동 장치를 드디어 완성하여 빨리 돌아왔다――데이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흑발의 소녀는 냉랭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지?” “전부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 전부가 기만이고 허위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내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말했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이 살아갈 권리 또한 당연히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들이 살아갈 권리를 나눠준다는 말이죠?” 데이지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아버님은 자기 말을 스스로 위반하고 있어요. 모순입니다.” “호오.” “그저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을 주워모아서 사람들을 속였을 뿐이에요.” 내가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으으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 “우리 데이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화주의의 투사가 되었구나. 루크에게 전염되기라도 했느냐? 어차피 나의 영지이고 나의 소유물이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데 무슨 모순이 있다는 말인지, 원. 내 것을 빼앗아서 영지민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글쎄.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니라 영지민들이 알아서 일어나야 할 일 아니겠느냐?” 애초부터 민주주의적인 영지 따위 만들 생각이 없다. 뭣하러 그러겠는가. 그때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마법수정구가 번쩍거렸다. 수정구는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이몬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였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수정구를 활성화시켰다. ─ 잘 지내나요, 단탈리안? 적발의 아름다운 마왕이 허공에 투영되었다. “예. 덕분에 편안하게 쉬고 있습니다.” 파이몬은 때때로 이렇게 통신을 걸어왔다. 별 대단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신변잡기이며 최근에 혁명투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평범한 얘기를 나누었다. 곧잘 파이몬은 혁명이 성공하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때마다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파이몬을 위로했다. “파이몬 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본래 사람이란 인습에 젖어서 사실 자신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그런 망각의 힘을 이겨내고 모든 대륙에 진정한 이상사회를 펼치는 것……이것이 쉬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 물론 그렇사와요. 하지만, 아무래도 불평할 수밖에 없네요……. “파이몬 님께서 지금 인내하시는 고난은 말하자면 파이몬 님 개인을 위한 고뇌가 아니요, 인류와 마인 전체를 대신해서 떠맡는 고뇌입니다. 그 고뇌의 무게는 당연히 무겁습니다.” ─ ……. “파이몬 님, 힘내십시오. 다른 모든 사람이 파이몬 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도할지라도 저만큼은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공화주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대체로 통신은 이렇게 끝났다. 파이몬도 괴롭겠지. 해방동맹의 동지들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평등한 동지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파이몬이 그들의 대장이었다. 대장이 된 자로서 섣불리 부하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과 입장이 대등한 마왕들 중에서 공화주의를 이해해주는 자도 없었다. 오직 나만이 파이몬의 이야기를 들어줄 입장이 되었다. 뭐, 개인적으로 나는 일종의 카운셀링이라고 생각한다. 몇 분 잡담하는 것만으로 파이몬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다.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는 전혀 없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데이지가 어째서인지 맹한 눈초리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음?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버님께서 영지민들에게 자유권을 인정하실 생각이 없다는 것까지요.” “그래. 자기 권리를 얻고 싶다면 혁명이든 뭐든 일으키라고 그러려무나. 뭐 아쉬운 게 있어서 내가 그들에게 권리를 선뜻 넘겨주겠는가? 어차피 세상 일이란 그런 거다.” 데이지가 갑자기 한숨을 거하게 쉬었다. “응? 사람이 말을 하는데 한숨을 쉬는 건 어디서 배운 예절이냐.” “아뇨. 그냥, 아버님께 이런 말을 꺼낸 제가 멍청했다 싶어서요.” 데이지가 꼭 예순 살 먹은 노인처럼 자조했다. “아버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빤히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네가 멍청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예. 전부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로.” 헤에. 웬일로 데이지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본래 죽어도 자기가 못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센 녀석인데 말이야. 그 때문인지 얘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예뻐보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날밤은 데이지를 괴롭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진실해지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가?   ============================ 작품 후기 ============================   참고로 작중에는 묘사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단탈리안은 데이지를 매일 조교하고 있습니다.   00243 던전의 주인 =========================================================================                        평화로운 시기가 흘렀다. 정확하게 말해서, 오직 내 세력만이 평화로웠다. 대륙에서는 여전히 내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프랑크, 브르타뉴, 합스부르크, 폴리투니아……. 전화에서 안전한 곳이란 거의 없겠지. 수백수천의 피난민이 도망쳐왔다. ‘검은 산맥 아래 어딘가에 이상향이 있다더라.’ 그런 정체모를 소문에 매달려서 걸어올 정도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나의 영지는 피난민을 받아들일 만큼 풍요로웠다. “이곳은 마왕이 다스리는 땅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세금이 적다고 들었습니다. 징병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아예 마을째로 피난민을 이끌고 온 촌장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말했다. “심지어 마물들까지 막아주신다고.” “진실이다.” “오오, 여신이시여. 이분을 축복하소서.” 촌장은, 대륙에 전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인 내 앞에 엎드려서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영주님께서 마왕이신 게 무에 상관이겠습니까.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곳을 찾으러 오는 데만도 일곱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부디 저와 제 식솔,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받아들여주십시오!” 나는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농토는 무료로 평등하게 분배. 세율은 마찬가지로 3할. 일 년이 흐르자 텅 빈 농토가 가득 차버렸다. 개간되지 않은 지역에 1할의 세율을 붙어서 나누어줬더니 그것마저 반 년 만에 찼다. 영지민의 숫자는 어느새 백 단위를 아득하게 넘어서서 이천 명으로 불어났다. 본래 검은 산맥 인근은 농사가 잘 된다. 수많은 정령이 땅과 숲을 헤집고 다니기에 농토가 쇠할 일이 없고, 구름은 산맥을 넘어가면서 꽤나 자주 빗줄기를 쏟아낸다. 단지 정령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마나가 충만하다는 것이며……몬스터. 즉 마물이 넘쳐단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도 때도 없이 몬스터가 출몰하니까 목숨을 내던진 인간이 아니라면 감히 검은 산맥 근처에 똬리를 틀지 못했다. 여기서 내가 몬스터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준 것이었다. 게다가 세율이 말도 안 되게 낮았다. 풍차에서 밀을 빻는 데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시장을 열어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법률만 잘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백성들 입장에선 가히 극락정토로 비췄으리라. 이제 농토는 전부 나갔다. 더 이상 피난민이 와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년이 넘어선 시점에서, 던전이 지하 5층까지 완성되었다. “마왕성을 모험자들에게 개방한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모험 도시 만들기> 계획을 실행시켰다. 인간들이 검은 산맥에 자꾸 몰려든다는 것은, 반대로 말해, 몬스터들은 그만큼 나의 명령에 의해서 억지로 습격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얘기이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몬스터들이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몬스터들은 전부 내 던전에 수용시켰다. 마나가 쉬지 않고 솟아나오는 던전이다. 몬스터들은 군말하지 않고 넙쭉 던전으로 이사왔다. 처음에는 고블린뿐이었지만 점차 미노타우르스, 리저드맨, 난쟁이족…… 마물(魔物)이 아니라 마인(魔人)이라 부를 만한 지성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약한 종족은 던전 1층에, 강한 종족은 지하층에 위치시켰다. 물론 약한 종족일지라도 레벨이 높아진 개체는 지하로 옮겨주었다. 이리하여 단탈리안의 마왕성은 몬스터 백화점이 되었다. 신개념 던전이라고 해도 좋겠지. 원래 던전에서는 강한 개체든 약한 개체든 섞여서 살았다. 강력한 간부쯤이 되어야 마왕의 근처에서 머물렀지, 구태여 입구에 약한 몬스터만 배치시키는 마왕은 전혀 없었다. 당연했다. 뭣하러 모험대가 마왕성에 익숙해지도록 약한 몬스터를 놔두겠는가? 아직 던전이 생소할 때 강력한 몬스터를 투입하여 모험대를 전멸시킨다. 이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마왕들과 목표 자체가 달랐다. “이제 마왕과 모험대는 더 이상 서로 적대하는 사이가 아니다.” 모험대를 왜 격멸해야 하는가? 모험대는 값비싼 무구로 무장하고 있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데다 부랑자 인생이라서 전재산을 항상 품속에 넣고 다닌다. 걸어다니는 금화라 표현해도 좋겠지. “우리는 '사업 동료'이다.” 모험자들은 내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함으로써 마나가 담긴 고기나 뼈를 얻는다. 나는 그렇게 사냥하다 죽어버린 모험자들의 무구와 재산을 챙긴다. 봐라. 어느 쪽이든 윈-윈이지 않는가. 던전에는 마나가 지나치게 많아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몬스터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식해버린다. 이걸 모험자들이 처리해줌으로써 적절하게 인구가 조절된다. 더 나아가, 모험자들을 잡아먹어서 몬스터가 한층 더 강력해지는 경우도 많다. 이런 몬스터는 나의 친위부대로 발탁된다. 정말이지 모험자란 고마운 놈들이다. “더 이상 농삿일을 할 땅이 없다고? 그러면 곡괭이 대신에 창칼을 들어라. 모험자가 되어 마물을 사냥하라! 어차피 1층에는 약해빠진 고블린밖에 없다. 그대들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고블린 주술사처럼 고급스러운 병종은 진즉에 지하층으로 빼돌렸다. 1층에는 진짜로 가장 약한 고블린이나 슬라임 따위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농민들도 힘을 합치면 너끈히 상대할 수 있었다. 살고자 한다면 던전으로! 내 영지로 도망쳐온 피난민들은 하나둘씩 무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방심해서 죽어버린 사람도 꽤나 있었지만, 정말로 안정적으로 수익을 벌기 시작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너도 나도 던전에 뛰어드는 데엔 약간의 시간만이 필요했다. 도시 경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서서히 움직였다. 먼저, 소문을 듣고 대륙과 마계에서 마법사들이 찾아왔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이리 배알하는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나이다.” “겉치레 같은 예의는 되었다. 본인은 마법사란 인종이 예의범절에 경기를 일으키는 인종임을 알고 있노라.” 마법사가 덮수룩하게 자라난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거, 이거. 과연 위명이 자자하신 단탈리안 전하이옵니다. 그럼 단도직입해서 아뢰겠습니다. 저희 루사티아 마탑(魔塔)에선 전하의 영토에 지부를 세우고자 청원드립니다.” “후후.” 내가 포도주를 들이켰다. “목적은 본인의 마왕성에서 모험자들이 길어올리는 재료들인가?” “오오, 역시 단번에 꿰뚫어보셨군요. 감히 무엇을 숨기겠나이까? 맞습니다.” “마법의 연구를 위함인가.” 마법사가 어린애처럼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마력을 머금은 마물의 고기와 뼈는 연금술과 마법을 단련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재료입니다. 평범하게 초원에서 풀을 뜯고 살아가는 마물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그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은혜롭게도 인간들한테 마왕성에 발길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물의 재료를 다른 도시까지 실어나르는 데만도 돈이 크게 들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저희 마탑이 바로 즉석에서 매물을 구입하겠습니다.” “허락하노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탑들에 소문을 흘린 것도 나였다. 마법사들이 영지에 대거로 이주오면 나쁠 게 전혀 없었다. 글쎄, 인간종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바르바토스야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필멸자여. 이곳은 오로지 나 단탈리안만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곳이니라. 그대들 마법사는 결코 평민 이상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 귀족 취급을 받을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도록.” “이를 말씀입니까?” 마법사가 주저없이 허리를 숙였다.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마법을 연구하는 것뿐. 속세에서 말하는 계급과 특권은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나이다.” “하나만 질문하지. 나는 마왕이다. 그대는 인간종이지. 그런데도 마왕의 영토에 적을 둔다는 것이 껄끄럽지 않은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그것이야말로 속세의 사정입니다.” 마법사가 웃었다. “좋다. 그대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오기로 한 마탑이 많노라.” “그, 그랬습니까? 후우. 재료를 독점할 수는 없겠군요……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노인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내가 한 마디를 덧붙이자 별안간 표정이 환해졌다. “아아. 그중에는 마계에서 건너오는 마탑도 있다.” “마계……? 저, 정말입니까!? 마계라고요!?” 인간종 마법사보다 마족 마법사가 더욱 더 강력했다. 아무래도 마력을 다루는 일에서 마족이 능숙하기 마련이니까. 당연하지만 마법의 발전도를 따지면 마계가 대륙보다 한수 위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마계로부터 마인을 소환해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제발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지만 마법을 아는 마족이 소환될 확률이 극히 드물었을 뿐더러, 설령 소환해낸다 할지라도 마인이 인간에게 호의적으로 나오기란 어려웠다. 마법사들에게 마족 마법사는 그림의 떡이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그렇다면 반드시 입주하겠습니다! 제발 입주하게 해주십시오! 세금을 얼마든지 내도 상관없으니, 전하, 제발 자비로운 처사를!” 동경의 대상이 개인도 아니고 자그마치 마탑 단위로 건너온다고 한다. 인간 마법사의 눈이 뒤집어질 법하다. 내가 씩 미소를 지었다. “마물의 재료를 사고파는 데 3할의 세율. 여기에 더해, 마탑에서 생산해내는 각종 약물과 무구를 우선적으로 취급할 권리.” “좋습니다! 아니, 거저나 다름없군요!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늙은 마법사가 체통도 잊어버리고 콧김을 훅훅 불었다. 이렇게 모두 합쳐서 열두 개의 마탑이 영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간종-마족 공동 마법연구 지구가 탄생한 것이었다. 연금술에 특화된 마탑이 있는가 하면 금속 강화술에 특화된 마탑이 있었다. 마탑들은 저마다 독자적으로 개발해온 마법 체계를 조심스럽게 교환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아 아예 본부 자체를 옮겨와버린 마탑이 속출했다. “마력강화 주문에 약물을 섞어서 무기에 바르면 특수한 효과가 나타난다네!” “써클과 상관없이 강력한 마법을 발휘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재료를 아끼지 마라. 이럴 때 쓰라고 벌어둔 돈이다. 아낌없이 개발해!” 마법사들은 정력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연구 도중에 제작되는 무구와 약물은 나에게 매각했다. 그것들 전부를 사들일 재력이 나에게는 있었다. 물론 내 재력도 무한대가 아니라서 상당히 지출이 컸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나는 이렇게 산 마법도구를 대륙과 마계에 되풀었다. 중간에 쿤쿠스카 상회가 끼어들어 어마어마한 중개료를 챙겨 먹었지만,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수익이 내 손에 떨어졌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재료가 되는 몬스터. 생산자가 되는 모험자. 가공자가 되는 마법사. 그것을 팔아재끼는 상회. 네 박자가 갖춰짐으로써 나는 실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마법도구는 수효가 절대로 끊기지 않는 품목이기에 장래도 밝았다. 가령,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려주는 약물은 인간계의 거부들에게 엄청난 가격으로 팔렸다. 영지에서 비롯하는 이익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쿤쿠스카의 상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지난 번에 나한테 문전박대당하고 치욕적으로 쫓겨난 이바르였다. 치욕을 잊어버릴 정도로 내 영지에 걸린 이익이 막대하다는 얘기였다. “전하. 쿤쿠스카 상회가 마탑의 생산품을 독점중개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물론 이바르 로드브로크 상주와 나는 각별한 사이이니, 웬만한 부탁은 들어주고 싶다네. 로드브로크 상주는 오늘날의 내가 있게 해준 장본인이 아닌가?” 내가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이바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짜 인형의 몸으로 방문했군. 내가 일찍이 말했을 텐데. 진짜 몸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야.” “예……?” “흡혈귀인 그대의 몸으로 직접 찾아오게나. 안 그럼 계약은 절대로 불가하네.” 이바르의 표정이 썩었다.   00244 던전의 주인 =========================================================================                        “……전하, 그것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침묵했다. 그것은, 하고 다음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상대방이 얼마나 뿌리 깊게 마왕을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를 대표하는 마인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인류군에 들어갔다. 마왕이 선천적으로 발휘하는 지배력에서 마인이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 즉, 강력한 노예각인을 걸어서 마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지배력을 넘겨주는 것.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스스로 용사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는 아직 용사가 서열 제20위밖에 물리치지 못했을 때였다. 아가레스는 물론이고 바르바토스도 건재했다. 한낱 인간 검사 나부랭이가 고위 서열의 마왕들을 떼로 몰살시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인간 주제에 검을 제법 쓴다.” 그 정도 인식이었지. 하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수천 년 동안 마계에서 쌓아올린 커리어와 인맥을 버려가면서, 전재산을 처분하여 용사 일행에 합류했다. 도박을 건 것이었다. 아주 약간의 확률에 불과할지라도 마왕들을 모조리 죽일 수만 있다면.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렇게 생애를 불사지를 정도로 마왕이란 존재를 증오했다. 죽어도 본체를 보여주고 싶지 않겠지. 특히 나처럼 수상쩍은 구석이 넘쳐나는 마왕에게는 말이다. 내가 물었다. “쿤쿠스카의 주인이여. 어떻게 해도 안 되겠는가?”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착잡한 어투였다.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쌓인 것이 많다. 헌데도 본인은 그대를 따로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대가 알지 모르겠다만 본인의 인맥은 그리 얕지만도 않다. 원하기만 했다면 언제든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가미긴에게 말했을 터이다. 쿤쿠스카를 더 이상 믿지 말라고.”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얌전히 듣고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글쎄, 마음속은 어떨련지. 상인이란 신뢰로 먹고 산다. 마계의 상회에게 마왕이란 신뢰의 보증수표이다. 이 상회는 마왕 전하께 물품을 납입합니다, 라는 꼬리표는 상회의 자부심과 같다. 그런 마왕들에게 버림받는다. 아무리 쿤쿠스카 상회가 잘 나간다 하더라도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로서는 결단코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 “왜인 줄 아는가? 본인이 그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월맹군에서 파이몬을 몰아넣었던 것 역시, 그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겠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 내가 피곤한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겉치레로 감사하다는 말 따위를 듣고 싶어서 꺼낸 얘기가 아니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가. 나는 그대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고 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상대방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이전에 무엇을 받았는가 고려하면서 상대방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것이야말로 상대방을 나와 동등하게 여긴다는 증거이다.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본인은 예전부터 자네와 그렇게 관계를 이루어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자네에게 나는 그저 여느 마왕들과 다를 바 없는 자로만 비추는 모양이군…….” 연설전이 끝난 직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절규하듯이 한탄했다. 마왕에게 결국 마인이란 자기보다 덜떨어지는 애완동물 같은 것 아니냐고. 우리에겐 정녕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는 것이냐고……. “우리 중에서 정작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쪽은 그대이지 않는가? 자네는 제멋대로 나를 판단하고 있어. 나는 그것이 참을 수가 없군.” “전하.” “되었네. 쿤쿠스카 상회에 마법물품 일체의 중개권을 맡기지.” 내가 일어서서 등을 돌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부디 좋은 장사를 하길 바라네, 쿤쿠스카의 상주여.”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 뒤에서 곤혹스러운 감정,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도망치듯이 접견실에서 물러났다. 접견실. 마왕성이 화려해지면서 이런 방까지 생겼다. 마계와 대륙의 유명한 예술작품이 벽지처럼 흔하게 걸려 있었다. 벽면에는, 내가 사냥해본 적도 없는 오우거 대가리가 뚝 잘려진 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곳은 화려하지만 적막했다. * * * 단탈리안의 마왕성에 대한 풍문은 금세 대륙 각지에 퍼졌다. 피난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몰려갔지만, 정반대로 확실하게 적의를 갖고 마왕성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다. “단탈리안이라면 인류를 모욕하고 농락한 마왕이잖아. 어떻게 그런 마왕한테 살고자 손을 벌릴 수가 있는지, 하. 내가 마왕 단탈리안을 토벌하겠어!” 보통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인간, 나이가 어린 자였다. 그중에는 기사 지망생도 꽤 많았다. 대부분 열다섯 살에서 열여덟 살의 청년으로, 재능이 엿보여서 어린 시절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시간이 지남으로써 '불량품'으로 판명된 이들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육비용은 일개 평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영주의 밑에 가신으로 들어가서 수십 년에 걸쳐 갚아야만 했다. 문제는 이런 불량품은 영주 입장에서도 써먹기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평범한 병졸보다는 쓸 만했다. 몇 년 동안이나 기사로 교육받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자존심이 쓸데없이 너무 컸다. “자네들은 앞으로 우리 영주님, 우리 국왕 전하를 바로 옆에서 보필할 기사로 자라날 것이다. 기사라는 것에 긍지를 갖고 언제 어디서나 명예로운 전사로서 행동하도록.” 기사 지망생들은 머리에 피가 마르지 않았을 때부터 그런 말을 들어왔다. 분수에 맞지 않는 교육이 뼛속까지 각인되어버린 것이었다. 평범한 군대에 넣어봤자 저 혼자 콧대가 높아서 분란밖에 일으키지 않았다. 다행히 몇 명은 일찍부터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이 써먹을 구석이 있음을 교관에게 열심히 보여주었다. 그런 이들은 하사관이 되어 말단이나마 영주의 가신단에 소속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죽어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종자가 있는 법. 청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분기탱천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교관에게 실망하면서, 자기보다 정의심도 떨어지고 기사답지도 않은 동급생들이 성공한 것에 질투하면서. “두고 봐라. 내가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때 사정을 해도 기사가 되어주지 않을 테니까!” 물론 평민인 청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휘황찬란한 졸업장이 들렸을 뿐. 달리 표현하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갚아나갈 빚문서였다. 청년에게는 졸업장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했다. “나는 프리드리히 아카데미아를 졸업한 사람이라구.” 사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에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런 종이쪼가리에 무언가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런 부류의 청년이 선택할 길은 별로 많지 않았다. 물론 고개를 살짝 돌리기만 한다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선택지가 보이리라. 그러나 본인이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존심을 만족시키면서 더 나아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길……. “마왕을 토벌한다.” 그리하여 청년은 가볍게 행장을 챙기고 마왕성으로 향했다. 마왕 단탈리안의 서열이 최하위였다는 것도 중요했다. 청년은 우둔했지만 자기가 서열이 높은 마왕을 토벌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열 제71위의 마왕이라면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는 불가능해도 동료를 모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허황된 꿈을 안고 칼잡이들이 단탈리안 마왕성에 몰려들었다. “……깡촌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청년은 마왕성 부근에 제법 그럴듯한 도시가 들어선 것을 보고 놀랐다. 인간들에게 검은 산맥은 대충 몬스터가 돌멩이처럼 많은 곳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검은 산맥 아래에 이런 도시가 있어서 우선 놀랐다. 이제 청년은 정말로 무일푼이었다. 그나마 모아두었던 돈도 마왕성까지 여행오느라 전부 써버렸다. 청년은 급하게 도시의 모험자 길드로 들어갔다. 모험자 길드가 번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다 낡아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 아니었다. 제대로 벽돌로 지어서 길드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음.” 청년이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영웅적인 일대기가 시작될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청년이 꿈에 부풀어오른 채로 길드에 들어갔다. 길드 안쪽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고블린을 토벌하러 갈 사람 없습니까? 머리당 은화 두 푼만 받겠습니다.” “아니, 머리당 1골드라는 게 말이 돼!? 우리도 겨우 벌어먹고 살아!” “그러니까 거기 마탑보다는 헬레나 마탑이 값을 더 쳐주더라고. 지금까지 숫제 손해보고 살았다니까, 시발.”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험자들이 사람을 구하거나, 고용비를 두고 교섭하거나, 유용한 정보를 나누었다. 청년보다 적어도 네 살은 더 먹은 사람밖에 없었다. 청년은 약간 긴장했지만 그럴수록 자신만만하게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접수처에서 모험자 등록을 한 다음――등록비 1골드가 없어서 청년은 또 빚을 져야만 했다――, 청년은 건물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할 수 있다. 쉴러, 너는 할 수 있는 녀석이야.’ 청년이 숨을 한껏 들이켰다. ‘나는 이런 어중이떠중이와 달라. 어릴 때부터 검만 잡았다고. 마왕 따위 두려울까보냐.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고 말 테다. 자, 가자. 화끈하게 가는 거다.’ 청년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모험자들이여, 누구보다 전사의 삶에 가까운 자들이여!” 목소리가 컸다. 모험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던 것을 뚝 멈추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깡패처럼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쳐다보자 청년은 그만 위축될 뻔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모험자가 아닌가. 청년이 계속해서 외쳤다. “그대들도 일찍이 마왕을 토벌하고자 열정을 품었을 것이다. 지금 그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낱 고블린이나 잡으면서 하루벌이에 만족하고 있다. 그대들이 보기에 지금의 생활이 부끄럽지 않은가!” “…….” “그대들도 알다시피 마왕 단탈리안은 천인공노할 죄인, 인류인 우리가 그를 잡지 않는다면 여신들께서 용서하시지 않으리라!” 모험자들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조용하게 청년을 쳐다보았다. 청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모험자들이 귀를 기울여주고 있었다. 역시 모험자들도 인간이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마왕을 토벌하자는 열의를 간직해온 게 틀림없었다. 그가 기세 좋게 말했다. “나는 쉴러, 프리드리히 아카데미를 졸업한 기사이다. 마왕 단탈리안을 토벌하고자 여기까지 왔다. 나와 함께 인류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용자가 있다면, 자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앞으로 나와라. 우리 함께 마왕 단탈리안을 물리치자!”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청년은 그럭저럭 괜찮은 연설이었다고 자평했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허약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을 너무 깔보지도 치켜세우지도 않았다. 청년이 생각하기에 연설에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모험자들이 돌려준 것은 호응이 아니었다. ““푸하하하하하!”” 웃음소리. 거대한 웃음소리였다. 사십 명이 넘는 모험자가 입을 모아서 웃었다. 접수대의 사무원까지 낄낄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웃음소리가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모험자들은 정확히 딱 오 초 동안만 신나게 웃어재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쓱 돌렸다. 모험자들은 자기네가 하던 대화를 계속했다. “고블린을 머리당 은화 두 푼만 받습니다―.” “은화 다섯 푼으로 가자고. 이게 최저한이야. 안 그래? 댁도 양심이 있다면…….” “그래. 마인놈들이 운영하는 마탑이 의외로 더 믿음직스러워. 나도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익숙해지니까 별로, 뭐. 괜찮더라고.” 한때의 소나기가 지나가고 모험자 길드는 바로 조금 전과 똑같이 시끌벅적해졌다. “…….” 오로지 청년만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반응인가?   00245 던전의 주인 =========================================================================                        “어, 이봐. 나와 같이 마왕을……!” 청년이 당황하면서 말을 재차 꺼내려 들었다. 그때였다. 음식과 술을 서빙하는 여종업원이 청년의 발을 뒤에서 걸었다.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받아버린 청년은 어, 어, 하다가 꼴사납게 넘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앞을 보지 못하고.” 청년은 연달아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직면했다. 그럴 때는 정신머리가 없어져 상대방이 하는 대로 맞추어가기 마련이었다. 여종업원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왔고, 청년은 맹하게 그 손을 잡았다. 청년이 부축되어서 일어서려는 순간, 여종업원이 손을 놓았다. 청년이 속절없이 균형을 잃고 엉덩이부터 쓰러졌다. 쿵, 하고 청년이 넘어지자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모험자들이 키득거렸다. “에구. 이거 어쩌나. 제가 여자라서 힘이 많이 약하네요.” 종업원이 허리를 굽혀서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자칭 기사 지망생 씨. 저는 응원한답니다. 당신이 마왕을 토벌해야지 제가 자그마치 용사를 쓰러트린 여자가 되지 않겠어요?” 주변에서 모험자들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년도 눈치챌 수가 있었다. 청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리 무례할 수가……!” “먼저 무례를 범한 사람은 그쪽이에요, 애송이 양반. 잘 들어.” 여종업원 말했다. “여기는 잘나신 기사 나으리들한테 배워먹은 것을 써먹는 연습장이 아니야. 알겠어요? 여기는 우리 일터라고. 밥벌어서 먹는 장소. 알아들었어? 빌어먹을 세상이라지만 적어도 남 밥그릇을 대놓고 깨부수면 안 되지. 기본적인 예의야.” “마왕을, 밥벌이 도구로 생각하다니!”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물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훨씬 더 많아! 대륙을 비탄으로 몰아넣은 마왕을 토벌한다. 이것이 바로 그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애송이 씨. 당신이 어떤 윤리관을 갖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없어. 당장 당신이 죽어 나자빠져도 그런 시시한 얘기를 대신해서 들려줄 사람은 넘치거든.” 여종업원이 청년의 손가락을 꾸욱 잡았다. “마왕성 하나만 바라보면서 천의 모험자가 살아가고 있어. 이 도시에만 마왕성으로 밥 벌어먹는 인간이 수천 명이야. 당신이 그 대단하신 정의감으로 마왕을 토벌하고 나면 여기 모인 우리들 죄다 실업자 되는 거야.――수천 명의 인생, 책임질 수 있어?” “…….” 청년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기 한 몸도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수천 명을 등에 업겠다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주홍색 머리카락이 예쁜 종업원이 코웃음을 쳤다. “물렁자지 새끼야, 일하러 온 거 아니면 꺼져. 보다시피 여기가 항상 붐벼서 말이야. 댁 같은 사람이 멀뚱멀뚱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몸이 부딪히거든.” 청년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길드 청사에서 쫓겨났다. 청년이 허둥지둥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험자들이 다시 한번 웃었다. 그들에게 악의는 거의 전혀 없었다. 모험자들은 그저 끔찍하게 심심한 와중에 재미난 녀석이 와주었다고 여기고 말았다. 고단한 삶에 웃음꽃이 피게 해주어서 고맙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험자도 꽤 있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인생이란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손해보는 물건이었다. 어떻게 모험자와 같은 인생을 버텨내면서 또한 인생에 진지해질 수 있겠는가? “하여간 플뢰르 양은 너무 신입생한테 친절해.” 한 모험자가 테이블에서 보리맥주를 마시며 얘기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그럴 필요없다고. 내버려둬! 어차피 머구리들은 앞이 새까매서 누가 도와줘도 몰라. 의미가 없어, 의미가.” 맞다, 옳은 소리다, 하고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쳤다. 여종업원이 허리에 양팔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꼰대 나셨네요. 어디 제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세상만사 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요? 자기 성깔을 이기지 못해서 튀어나가는 거지. 이게 제 성질머리니까 관심 끄세요, 천치 양반아.” “우리 아가씨는 입도 험하다니까.” 모험자가 맥주를 들이켰다. “크흐. 난 예전부터 궁금했어. 플뢰르 양, 왜 신입생들한테 만날 친절하게 굴어? 성질머리다 뭐다 말하긴 하는데 솔직히 변명으로만 들리거든. 아무래도 플뢰르 양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참견이라 이 말이야.” “…….” 여종업원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되도록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저 마왕성에서는…….” 모험자들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이야기였다. 아마 마왕성에서 소중한 사람이 죽었겠지. 부모라든지, 연인이라든지, 오빠나 동생이라든지. 이쪽 세계에선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험자들은 더 이상 캐묻고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질문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질문하지 마라. 이 바닥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불문율처럼 지켜야 할 명제 중 하나였다. 모험자가 보리맥주를 마저 마시면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저 아가씨 애비가 유명한 모험자였지.’ 자그마치 붉은색 급의 모험자라고 했던가. 틀림없이 자랑스러운 아버지였으리라. 자식을 키워냈다는 것 자체가 모험자에게 있어서는 세계를 구한 것만큼이나 대단한 과업이었다. 아비의 연줄 덕분에 플뢰르는 이쪽 도시로 이사오기 이전에도 옆 도시의 길드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단탈리안 마왕성에서 붉은색 급 모험자가 죽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모험자는 의문이 생겨났지만 자연스럽게 생각하길 멈추었다. ‘뭐, 상관없나.’ 모험자는 올해로 모험자가 된 지 칠 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여기 동네에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얼, 하고 그가 생각했다. 모름지기 세상과 여자란 비밀이 많을수록 아름답다……. * * * 길드에서 쫓겨난 청년은 그날밤 길거리에서 노숙했다. 돈이 없었다. “……그나마 춥지 않아서 다행이군.” 청년이 건물과 건물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몸이 굳을까봐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도 약탈자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좁다란 통로에서 노숙하면 혹시라도 자신을 노리고 도둑들이 다가와도 대적할 수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혹시나 해서 숙박비를 알아보았다. 역시 무리였다. 여관비가 문제가 아니라, 가정집의 마굿간을 빌려서 하룻밤 묵을 돈조차 없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들어가면 염치가 없긴 하나 공짜로 잘 수도 있었겠지. 도시 인심이 야박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청년은 바로 그 염치가 마음에 걸렸다. 구걸하는 데 익숙하기에는 청년의 삶이 아직까지 평탄했다……. 이제 전재산이 겨우 은화 한푼이었다. 이걸로는 빵을 네 덩어리 사먹으면 끝이었다. 물론 며칠은 버틸 수 있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니,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지.” 청년이 마음을 다잡았다. “뭐하는 거냐, 프리드리히 쉴러! 결심은 나약하고 현실은 냉엄하구나. 냉엄한 현실이란 높은 산맥과 같아서 그곳을 정복하는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지 않는가!” 청년은 수업시간에 배운 시조를 인용하면서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카데미에서 꿈을 품으며 바라보았던 바로 그 밤하늘과 똑같았다. 청년은 이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즉,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든지, 귀족으로 태어났든 노예로 태어났든, 기사로 생활하든 모험자로 생활하든,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은 똑같았다. 그것이 정의였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와 상관없다. 분명히 지금의 나는 비루하다. 너무나 비루한 나머지 더러운 골목길에 기대어서 잠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음날. “나와 함께 마왕의 조무래기들을 물리칠 용자는 없는가!” 청년은 길드 청사에 들어가서 우렁차게 외쳤다. 하룻밤이 지나자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자신에게 자신감을 다시 불어넣어주신 것 같았다. 단지 마왕을 토벌하러 갈 용자, 라는 단어가 마왕의 조무래기를 토벌하러 갈 용자, 로 소소하게 바뀌었지만. “…….” 여종업원이 청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초리는 오히려 어제보다 싸늘해졌다. 그녀는 청년을 무시하고 모험자들에게 보리맥주를 날랐다. 모험자가 맥주잔을 넘겨받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정신을 못 차린대두.” “앞으로 한번만 더 내 앞에서 꼰대질하면 거시기를 아작낼 테니 그런 줄 알아요.” “흐이익!”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청년의 호기로운 외침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년은 이날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골목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 “나와 함께 사악한 마물을 물리칠 용자는 없는가!” 청년은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그러나 약간 얼굴이 핼쑥해진 채로 소리쳤다. 모험자들은 벌써 익숙해져서 청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저놈이 언제까지 저럴지 보자며 내기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도, 다음날의 다음날도……. 연속으로 사흘. 청년은 굶고 있었다. “…….” 배가 고팠다. 안 그래도 먼길을 여행오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다. 그 상태에서 며칠을 굶으니 제아무리 기사 지망생으로서 단련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버티기가 어려웠다. 천만다행으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사람들은 월요일마다 스프를 새롭게 끓였다. 그리하여 요일이 지날수록 스프가 물처럼 맹해졌다. 일요일은 스프가 가장 맹국인 날. 거지가 스프 한 모금만 적선해달라고 구걸해올 때, 월요일이라면 가차없이 내쫓지만 일요일이라면 선뜻 한 사발쯤은 내줄 수가 있었다. “국물 한 사발만 적선해주십시오…….” 청년은 여섯 언덕의 마을을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마을에서만 적선을 구하면 구걸스럽게 보일까봐 두려웠으므로.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스프를 대접했다. “아니. 사지가 멀쩡한 젊은이가……쯧쯧.” 본래 이런 맹국에도 임자가 있었다. 여느 마을에나 고아들이 살고 있었다. 고아원 같은 게 없는 이상에야 고아들은 가장 밑바닥 거지가 되어 생활했는데, 바로 이런 고아들에게 '일요일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고아도 아닌데다 몸까지 건실해보이는 청년이 스프를 나눠달라니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청년은 더 이상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동료를 구하지 못했지만 홀홀단신으로 마왕성에 들어갔다. 고블린 두 마리가 청년을 덮쳤다. 아카데미아에서 가장 약한 마물로 가르쳐준 짐승들. 그러나 청년은 고블린 두 마리를 해치우다가 그만 팔 한짝을 잃어버릴 뻔했다. “헉, 흐억……허억.” 수업과 현실은 달랐다. 고블린 두 마리도 이렇게 어렵거늘 만약 세 마리가 뭉쳐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왕성은 도저히 혼자서 다닐 곳이 못 되었다. 청년은 고블린의 시체를 들쳐매고 헐레벌떡 빠져나왔다. 몬스터를 도축하는 방법도 몰라서 무식하게 아예 시체 한 구를 매고 도망친 것이었다. 청년은 백정에게 도축을 맡기고 은화 한푼을 벌었다. 바가지를 쓴 것이지만 시세를 모르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은화 한푼으로 빵 한덩어리와 치즈 한덩어리, 그리고 스프를 구해다가 먹었다. 어찌나 맛있는지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청년은 모험자 길드 청사에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블린 머리당 은화 한푼 받습니다. 고블린 한 마리당, 은화 한푼 받습니다……!” 그 목소리는 약간 어색하지만 그럴저럭 건물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고블린 토벌하러 갈 사람 없습니까? 머리당 은화 두 푼이요. 도축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머리당 금화 하나는 말도 안 된다고!” “야. 내가 알아보니까 마족놈들 마탑이나 인간놈들 마탑이나 그게 그거야. 세상에 믿을 새끼 한 명 없어!” 사람들이 여느 때처럼 웅성거리며 일거리를 찾아나서고 있었다. 청년을 멀리서 지켜보며 여종업원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배웠네.”   ============================ 작품 후기 ============================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플뢰르는 '대머리 애꾸눈 모험자' 파비안이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00246 던전의 주인 =========================================================================                        * * * 며칠 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주 월요일. 니블헤임 쿤쿠스카 상회 본부에서 전하의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간략하게 한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 매우 정제된 필기체로. 다른 사람이 훔쳐보았다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드디어 자신의 진짜 신체를 보여주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글씨가 예쁘군.”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은지라 대륙이고 마계고 필기체가 상당히 중요했다. 당사자가 교양이 얼마나 뛰어난지 드러낼 뿐더러, 자기 자신이 어떤 인물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왕들은 절대다수 필기체가 구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지나치게 달필이지. 붓글씨가 너무 멋들어지면 되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똑같다. 예컨대 시트리는 글씨체가 아주 스케이트 피겨 선수가 얼음판을 쌩쌩 달리듯이 날아다닌다. 이게 글씨인지 예술작품인지 원. 언젠가 시트리한테 연애편지를 한통 받은 적이 있었다. ‘요새 잠들기 전마다 단탈리안을 생각해.’ ‘보름에 한 번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 더 자주 보면 안 될까?’ ‘물론 바쁘면 괜찮아. 미안해. 단탈리안은 항상 바쁘니까…….’ 정말 여중생이 쓴 것처럼 풋풋하지 않은가. 문제는 글씨를 해석하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이다. 어찌나 고생고생해서 읽었는지, 편지 내용이 가진 싱그러움이 죄다 증발해버렸다! 나에겐 지끈거리는 두통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고야……. 반면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인쇄기가 찍어낸 것마냥 글자가 똑바랐다. 이런 곳에서 상대방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우선 실용적인 사고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되도록 남한테 자기 성격을 숨기고자 했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걸 극단적으로 꺼려했다. 너무나 이바르 로드브로크다운 글씨체였다. “데이지. 다음주 월요일 부근에 내 예정이 어떻게 되어 있냐?” “아버님께서는 이번 주 금요일에 파이몬 전하와 만나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데이지가 내 옥좌 옆에 서서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토요일에는 니블헤임으로 가셔서 마계의 대공들과 무도회에 참석하시며, 일요일에는 그대로 니블헤임에서 가미긴 전하와 하루를 보내시기로 했습니다. 월요일에 돌아오셔서 영지를 비밀리에 순회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 내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데이지는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예정을 줄줄이 암송했다. 데이지는 이제 열세 살이 넘어 제법 시녀로서 관록이 붙었다. 언제나 내가 질문한 것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요일에는?” “만하임에 방문하시어 파이몬 전하와 시트리 전하를 뵙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아, 기억났다. 주말엔 바르바토스를 만나러 가야 하잖아…….” 무심코 약한 소리가 기어나왔다. 상큼하리 만치 끔찍한 스케줄이로군. “어쩌다 예정이 이리 꼬인 거지? 세상이 원망스럽구나.” “자업자득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님. 그러길래 제가 말했지요. 나중에 만나자, 나중에 만나자, 하고 차일피일 변명하다가는 결국 한꺼번에 몰아서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고.” 데이지가 비웃었다. “아버님께서는 시트리 전하와 한 약속을 21일 전에 한 번, 12일 전에 한 번, 벌써 두 번이나 미루셨습니다. 파이몬 전하와는 16일 전에 약속 날짜를 어기셨지요. 그러다보니 다음주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데이지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말투만 정중했다. 마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담원한테 상냥한 목소리로 '예, 고객님. 무슨 시발스러운 일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네 년,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구나.” “감사합니다.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밤마다 고문하는 분께서 곁에 계시기에.” 데이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빌어먹을 년. “하아. 예전에는 슬라임 하나로 부들부들 떨어내는, 귀여운 녀석이었는데……어쩌다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으로 자랐을꼬.”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글쎄요. 지금도 제 몸속에 슬라임을 두 개나 집어넣은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네요.” “끄응. 루크는 요새 자위를 통 안 하더냐?” “제 오라비는 드디어 자위 생활에서 탈출하고 여자들을 찾은 것 같습니다.” 데이지가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고 대꾸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애인을 바꾸고 있더군요. 여섯 마을의 처녀란 처녀는 전부 꼬셔보았다고 합니다. 슬라임과 장난칠 시간 따위는 없겠네요.” “제기랄……! 여동생이 최고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렸는가, 그 애송이 자식!” 내가 머리를 잡고 신음했다. 왠지 요즘 데이지를 조교하는데도 레벨이 잘 안 오른다 싶었다. 가슴이라든지 뒷구멍이라든지, 성감대의 감도를 전부 레벨 5까지 올렸는데도 수치각인이 안 뜨지 뭔가. 이제보니 루크가 트롤짓을 하고 있었다. 기껏 여동생이 여자의 맛을 알려주었더니, 배은망덕한 놈! 머리가 조금 굵어졌다고 여동생을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들을 후려치고 다니는 거냐! 이래서 인간종이 은혜를 모른다는 거다. 소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입 다물어라.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기에는 아직 백 년은 이르니까.” 내가 으르렁거렸다. 데이지에게 끝없는 수치심과 굴욕감을 심어줌으로써 심리적으로 나보다 약한 위치로 몰아넣겠다는 전략은 유효했다. 참고로 당연하지만 데이지는 아직 처녀였다. 나 때문인지 몰라도 남성혐오증에 걸려버렸다나 뭐라나. 최근 들어서 라우라한테 은근슬쩍 달라붙으며 추파를 던지는데 이게 꽤나 우스웠다. <던전 어택>에서 서로 원수였던 영웅과 재상이 만약 연인이 된다면 참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뭐, 개인적으로 나는 가신들에게 성적으로 무한하게 관대했다. 내 파트너들을 성적으로 구속하고 싶은 생각일랑 눈꼽만치도 없었다. 알아서들 하라지. 단, 라우라는 데이지보다 바르바토스――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라우라는 바르바토스의 애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마는. “다음주 월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순회를 취소한다. 월요일,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와 곧바로 니블헤임 본부로 향하도록 하지.” “알겠어요. 순회를 호위하시기로 한 제레미 경에게 말씀드릴게요.” * * * 대륙에는 여전히 내전이 한창이었으나, 마족이 황금으로 쌓아올린 도시, 니블헤임에서 전쟁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마계대공들은 전쟁의 불꽃이 행여라도 자신에게 튀지 않도록 로비를 거듭했다. 보름에 한 번씩 최고급 연회가 열렸다. 니블헤임에서 가장 값비싼 기녀와 미동이 동원되었다. 한 방울이 황금과 맞먹는 술들도 아낌없이 진상되었다. “하하. 가미긴 님께서는 가히 마왕군 제일미이십니다.”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은 물론 로비 목록에 들어 있었다. “다른 마인들은 바르바토스 님과 파이몬 님을 더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런 평가에는 약간 주관적인 숭배심이 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 전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인기가 많지 않습니까?” 한 대공이 공손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객관성이 떨어지지요. 저는 가미긴 님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습니다.” “헤에. 고마워.” 가미긴이 오른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나두 바르바토스나 파이몬한테는 조금 쑥스러운걸. 두 사람에겐 정말로 신비스러운 매력이 있는 것 같다고 할까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외모의 아름다움을 꼽자면…….” 대공들이 가미긴을 둘러싼 채 화기애애하게 얘기했다. 활짝 웃은 겉모습과 다르게 가미긴은 마음속으로 따분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바르바토스 앞에서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 앞에서는 파이몬이 제일 아름답다고 말할 거면서. 뻔한 입발림에도 정도가 있어.’ 가미긴이 능숙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포도주를 머금었다. 대공들 중에 몇 명이 슬쩍 곁눈질로 자신의 가슴골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노출이 심한 천옷을 즐겨 입었는데, 그것이 대공들의 음심을 자극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재밌었다. ‘감정을 제어해봤자 나 정도 마왕이 되면 전부 알아차린다구, 머저리들아.’ 가미긴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라도 그런 대공과 시선이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윙크를 보내서 대공들에게 의미심장한 제스처를 보내었다. 이럴 경우 대공들은 십중팔구 황공해하면서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최상위의 여자 마왕을 침대에서 쓰러트린다. 그것이 지옥대공들에게는 일종의 꿈이겠지. ‘그래, 더 구경해봐. 아예 대놓고 구경해도 좋아. 어서.’ 대공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가미긴은 은밀하게 매혹의 마법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녀가 능수능란하게 대공들을 휘어잡을 때였다. 연회장 정문에서 대기하는 시종이 큰 목소리로 알렸다.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 전하 납시오――!” 연회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가미긴의 가슴을 훔쳐보는 데 열중하던 대공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제법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가미긴이 고개를 돌려버렸으므로 질책할 수가 없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문 근처에서 멈추어섰다. 왼쪽과 오른쪽을 돌아보더니, 마치 샹들리에에서 내리쬐는 빛을 느껴보려는 듯 잠시간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남자가 연회장의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꺽다리에 몸집이 말랐다. 살집이 볼품없게 적었다.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련지 모르겠지만, 가미긴에는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결코 미남이라고 부를 인물상이 아니었다. “귀하신 분들께서 모여 계시군. 가미긴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지 목소리만은 특별했다. 톤이 높지 않은데도 뚜렷하게 들렸다.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알아서 찾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목소리만큼은 가미긴도 내심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응, 단탈리안. 오랜만이야.” “진즉에 찾아뵈려 했는데 제 몸이 형편없이 게으름을 피우는군요. 다 제 몸의 잘못이니, 부디 저를 질책하지 마시고 몸을 혼내주십시오.” “단탈리안이 게으른 건 이미 모든 마왕이 알고 있는걸. 너그럽게 이해해줄게.”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발칙한 새끼.’ 단탈리안은 방금 우회적으로 섹스 어필을 했다. 가미긴과 나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었다. 더없이 불쾌했지만 가미긴 입장에선 뭐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가미긴 전하와 친하시지요!” 아니나 다를까. 대공 중 한 명이 떡밥을 물었다. 단탈리안은 시종이 날라준 포도주잔을 집어들고 대답했다. “음. 본인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분일세.” “그리고, 혹시 실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묻는 말씀입니다만……바르바토스 전하, 파이몬 전하, 거기에 시트리 전하와도 사이가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단탈리안이 웃었다. “어디 실례될 것이 있겠는가? 그대가 옳게 말했네.” “허면……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여마왕들 중에 어느 분이 특히나 아름다우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공들이 흥미진진하게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가미긴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예의상이라도 가미긴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음을. 그것은 기본적인 예의이자 대화법이었다. 하지만 여자 마왕들과 두루 사귀는 단탈리안이기에 저절로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단탈리안이 주저없이 말했다. “아아. 그야 바르바토스 님께서 제일 아름다우시지.” “…….” 대공들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표정으로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정작 당사자인 단탈리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 포도주가 상당히 고급스럽군.” 정말로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였다. 공기가 더더욱 싸늘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공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똑같은 마족이라면 뭐라 불평이라도 해주겠지만 상대는 마왕. 단탈리안에게 뭐라 할 만큼 배짱이 좋은 대공은 아무도 없었다. 대공들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미긴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가미긴이 생각했다. ‘진짜, 개새끼.’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00247 던전의 주인 =========================================================================                        대공들은 처음에는 단탈리안과 가미긴을 함께 만났다는 것에 기뻐했다. 아무튼 간에 두 마왕은 거물이었다. 친목이 목적인 자리에서 이만큼 호화로운 캐스팅도 달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 초라도 빨리 누군가가 날 이곳에서 꺼내달라고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왜 그 타이밍에서 바르바토스를 언급하는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가미긴 전하를 칭찬할 차례이지!’ ‘우리에게 물이라도 먹일 속셈인가…….’ 대공들은 단탈리안을 질타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평화로운 광경을 떠올렸다. 가령 파란 해안가에 조용히 세워진 공동묘지처럼……. 어떻게든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마왕은 감정을 읽어낼 줄 알았다. 그렇기에 머리로는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할지라도 감정만큼은 애매모호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대공들은 이런 수법에 꽤나 익숙했다. 상대방이 서열 제4위의 마왕이라면 그마저도 쓸모가 없었지만. “하아아아~.” 가미긴은 마음속으로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목소리가 쾌활했다. 쾌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기 속에서 어느 누가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주겠는가? “단탈리안도 차암, 너무한다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꼭 다른 여자를 들먹여야겠어?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 진짜 화낼 거다아?”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입장이란 것이 그걸 강요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더없이 무례한 모욕을 뒤집어썼는데도 도리어 자기가 중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가미긴은 기분이 더럽고 또 더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죄송합니다. 가미긴 님께서 저를 미워하시게 되면 저는 정말이지 외롭게 됩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지요.” “그래, 그래. 조심하라구.” 전혀 분노하지 않은 척.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척. 목소리가 꺾어지고 들어가는 음색에 눈짓 하나까지, 가미긴은 세밀하게 조종했다. 조종한다는 생각조차 희미할 정도로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대공들이 속아넘을 만큼 연기는 능수능란했다. “하하. 단탈리안 전하도 참으로 취향이 특이합니다.” “그렇습니다. 전하의 생각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적이 동안이시지 않습니까?” 가미긴이 물꼬를 틀어주자 대공들이 얼른 흐름에 올라탔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만 감사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연회 자체가 폭발할지도 몰랐기에. “공들, 너무 나를 탓하지는 말게나.” 단탈리안이 멋쩍게 웃었다. “내가 여자아이를 좋아하기에 바르바토스 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세. 어쩌다 좋아하게 된 분이 하필이면 여자아이처럼 생겼을 따름이지.” “전하의 말씀을 듣다보면 진실로 그런 것 같아서 때때로 두렵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소인들은 무지몽매하니 되도록이면 봐주십시오. 정말로 착각해버립니다!” “거 사람이 능청을 떨기는.” 단탈리안과 대공들이 껄껄 웃었다. 그후로 연회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번 연회는 미식회를 명목으로 삼고 있었다. 마계에서 내로라 하는 요리사들이 일종의 경연대회를 치르는 식으로 차례차례 산해진미를 진상했다. 미식회의 장점은 대화거리가 결코 끊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화가 멎을 쯤이 되면 새로운 요리가 나온다. “호오. 이건 상당히 각별한 맛이…….” “가미긴 전하, 이 마무리 음식이 꽤 멋지군요.” “요리사. 자네는 어떤 생각에서 이걸 요리했는가?” 그리하여 다시 대화거리가 충전된다. 요리를 서빙하는 사람들은 물론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미동――일부 대공들은 '단탈리안 전하를 대접할 때는 앞으로 반드시 소녀 얼굴의 여자를 고용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있었다――으로 채워졌다. 대화란 술과 같았다. 사람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하면 마치 취한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여기에 진짜 술까지 들어가면 사람들은 가벼운 기분이 되어 상대방과 웃고 떠들고 즐겼다. 정신이 멍해짐으로써 말이 가볍게 튀어나가며, 말이 가볍게 튀어나감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친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효과를 위하여 대공들은 마왕들에게 이른바 술맛 좋은 대화거리를 대접하고 있었다. “헤에. 나는 역시 하얀 포도주가 입맛에 맞는걸.” “그렇습니까? 하긴 무언가 다른 맛이 숨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미긴 전하께서 미각이 예리하시군요. 이 포도주는 화탕지옥(火湯地獄)의 용암백이 올 여름에 특별히 공개한 품목으로…….” 사람들이 쉽게 웃었다. 모두가 말과 술에 만취했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몽롱했다. 마왕은 체질상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가미긴이든 단탈리안이든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웃음이 헤퍼졌다. “좋네. 아주 좋아.” 가미긴이 빈 와인잔을 장난스레 흔들었다. “여기 포도주 하나 더 줘어.” 그녀의 한 마디가 오늘 미식회를 잘 표현했다. 대공 중 한 사람이 발개진 얼굴로 말했다. “가미긴 전하.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해도 될련지요?” “응. 아무거나 해봐.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있는데 질문 하나 없어서야 말도 안 되지~.” “혹시 단탈리안 전하와 특별한 관계에 있으십니까?” 가미긴이 으응, 하고 살풋 웃었다. “글쎄에. 단탈리안? 우리한테 묻고 있는데. 자기랑 내가 특별한 관계냐고.” “물론이지. 우리는 예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다네.” 단탈리안이 붉은 포도주를 원샷했다. 대공들이 점잖게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소문은 몇 년 전부터 무성했습니다! 두 분 전하께서 깊은 관계라고 말입니다.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헌데 단탈리안 전하, 모두가 알다시피……전하께서는 바르바토스 전하와도 관계를 맺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고말고.” 여기 모인 대공들 중 몇몇은 단탈리안에게 협박당한 경험이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노예처럼 울며불며 알몸으로 단탈리안한테 들러붙은 광경은, 그들이 무덤까지 끌고 들어가야 할 비밀이었다. “거기에다 듣자하니 파이몬 전하, 시트리 전하까지 관계망에 포함되어 있다고…….” “아르테미스 여신에 맹세코 사실이라네.” “신이시여! 전하께서는 그러면 마왕군에서 미인으로 이름이 드높으신 분들과 전부 사귀시는 것입니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하고 대공들이 입을 모아 성토했다. “자네들이 더 너무하군.” 단탈리안이 키득거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리 탓하는가?” “미인을 독점하니 그게 잘못이 아니라면 뭐가 잘못이겠습니까. 어디 비법이라도 전수해주십시오. 어떻게 아름다운 전하들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중요한 건 마음일세. 자네들도 알겠지만 사람이란 다 어디 한구석이 병들어 있지. 그 부분을 상냥하게 감싸주면 되는 것일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대공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멋지군요. 가미긴 전하. 단탈리안 님이 저리 말씀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으응~.” 가미긴이 헤벌레 웃었다. “그냥 길 걸어가다 누가 뒤통수라도 쳐줬으면 싶은걸.” “크하하하!” “여마왕들께서는 생각이 다르신 모양입니다, 단탈리안 전하!” 단탈리안이 말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엉망이 되어갔다. 그중에는 여자 웨이터를 대놓고 희롱하는 대공도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흘러가도록 예정된 종류의 모임이었기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잠깐만 바람을 쐬고 오겠네. 오늘 너무 취하는군.” “아, 나도~. 바깥 공기 좀 내놓으라고 머리통이 아우성을 치고 있어.” 그렇기에 단탈리안과 가미긴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도 대공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잘 다녀오시라고 배웅할 뿐이었다. 아직 알코올이 덜 들어간 대공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히죽 짓기도 했다. 연회장 구석에는 소위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탁자 하나에 의자와 소파가 놓였다. 둥근 탁자에는 막 준비된 것처럼 와인병이 얼음통에 담겨 있었다. 큼직한 창문 너머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베란다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연인을 위한 장소였다. “저는 정말로 바람만 쐴 생각이었는데요.” 단탈리안이 방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는 언제 취했냐는 듯 표정과 말투가 차분해졌다. “여기까지 어울려주었으니 대공들도 만족하겠지요. 슬슬 가미긴 님의 별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흐으응~.”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얼음통에서 와인병을 꺼내어 유리잔에 콸콸 부었다. 힘조절이 어설퍼서 그만 포도주가 넘쳐흘렀다. 가미긴은 오른손이 포도주로 흥건하게 젖었는데, 개의치 않고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가미긴 님, 설마하니 질문해봅니다만. 혹시 취했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에.” “세상에.” 단탈리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가미긴 님씩이나 되는 마왕분이 이 정도 술에 취할 리가 없습니다. 일부러 재생능력을 꺼두었군요.” “으응. 헤에.”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지옥의 통치자들입니다. 방심한 순간에 늑대처럼 물어뜯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미긴이 포도주를 재차 따라서 원샷했다. 입가에 술이 흘러내렸다. 붉은 액체가 턱선을 따라 미끄러져 새하얀 쇄골에 뚝, 하고 떨어졌다. “나씩이나 되는 마왕이 뭐길래.” “예?” “어차피 바르바토스보다 못한 여자잖아. 안 그래? 아주 대단할 것도 없는걸.” “…….” 단탈리안은 시선이 웬 정신병자를 보는 눈초리로 바뀌었다. “……정말로 만취했군요. 뭐, 사람은 누구나 취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왜 하필 오늘과 같은 날이어야 하는지 약간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너는 말이지, 으응. 정말로 개 같은 놈이야, 단탈리안.”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주정뱅이와 상대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 모습에 가미긴은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이 가미긴으로 하여금 방 전체에 방음마법을 걸치도록 도와주었다. 어떠한 장치도 숨겨져 있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가미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이딴 연극에 어울려주지 못하겠어. 신물이 나. 진절머리가 난다고.” “…….” “꼭 다른 마인이 보는 앞에서 나를 모욕해야겠어? 알아. 바르바토스가 너한테 중요하다는 거. 하지만, 뭐든지 때와 장소라는 게 있잖아.” 단탈리안은 가만히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어 물었다. 곧이어 매캐한 약초 향기가 방안에 피어올랐다. “나에게도 마왕으로서 자존심이 있어. 너 같은 말종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가미긴 님. 방음마법은 걸었습니까?” “어어엄청 빨리도 지적하네, 우리의 현명하신 단탈리안 전하.” 가미긴이 코웃음을 쳤다. “왜, 연기가 들통나는 게 두려워? 넌 겁쟁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 자식이야. 상대방을 협박하고 능욕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술자리에서 취할 줄도 몰라. 내가 제정신이냐고? 웃기시네. 너는? 너는 얼마나 제정신인데?” “좋습니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십시오.” 단탈리안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혹시 잊으신 것은 없습니까? 애당초 가미긴 님께서 자초하셨습니다.” “네, 미안하네요. 아가레스랑 짜고 영지에 찝적거려서 정말로 미안하게 됐네요!” 가미긴이 대리석 바닥에 와인잔을 내던졌다. 유리가 요란하게 깨졌다. “아예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 그거 갖고 나를 속박해보시지 그래? 그거 알아? 나는 언제라도 다시 네 자식의 잘나신 연인을 공격할 수 있어. 세상에 바르바토스를 아니꼽게 여기는 마왕이 아가레스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00248 던전의 주인 =========================================================================                        “정말 제정신이 아니로군…….” 단탈리안이 연초를 뻐끔거렸다. 그는 표정이 점점 무뎌졌다. “지금 이 자리,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없다는 걸 천운으로 여기십시오. 여신께서 저로 하여금 때마침 놔두고 오도록 배려하셨으니까요. 당신의 정치적 생명은 방금 끝장날 뻔했습니다, 가미긴.” “……!” 가미긴이 담뱃대를 낚아채서 내던졌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담뱃대가 바닥에 떨어지며 머리 부분이 깨졌다. 단탈리안이 무심한 눈초리로 가미긴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작센에서 장인이 만든 담뱃대였습니다. 꽤 비쌉니다만.”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어.” 가미긴의 이빨 틈새로 분노에 찬 숨결이 흘러나왔다. “나를 모욕하지 마.” 붉은색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녀는 마왕인 동시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와 있었다. 온몸에서 마력이 피어오르면서 살기를 자아냈다. “……알겠습니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사죄하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나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하여.” “저는 일전에 가미긴 님께 모라비아 지방을 넘겨드렸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계산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만……뭐, 좋겠지요. 어차피 공식적으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단탈리안은 무표정했다. “그런데도 사죄를 바라십니까.” 가미긴은 대답하지 않고 상대방을 노려볼 뿐이었다. 단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미긴이 자리를 비켜주자, 단탈리안은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머리를 바닥에 대고 사죄하는 것이리라. 가미긴은 못 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사과에 성의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모욕받지 않았는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모욕. 그에 반해서 사죄는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도저히 형평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해주자. 가미긴이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생각했다. 단탈리안이 자신에게 양보해준 것도 틀림없이 많았다. 슐레지안 지방에 대한 통치권 인정. 더 나아가, 일찍이 아가레스가 점유한 모라비아 지방에 대한 인정. 내전이 끝난 지 이 년째가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가미긴은 확고하게 일국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써 가미긴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단탈리안에게 협조해왔다.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으나, 한 파벌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아무래도 거동에 제약이 따랐다. 단탈리안은 서열 제4위라는 이름값을 등에 업고 마음껏 활동했다. 각자가 실리와 명분을 만족스럽게 교환한 것이었다. 가미긴은 그것이 공평한 거래임을 머리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감정의 문제였다. ‘아무리 거래가 공평했다고 해도……조금은 이쪽의 체면을 생각해주어도 괜찮잖아!’ 벌써 일백 번에 가깝게 몸을 섞었다. 대부분 단탈리안이 강요해서 억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가미긴은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예전에 주고받은 내기. 단탈리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패배할 경우에는?’ ‘앞으로도 간간이 저와 놀아주십시오. 제가 가미긴 님과 몸을 섞고 싶다고 말했을 때 웬만하면 거절해주지 말아주십사 부탁드리고 싶군요.’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지극히 가벼운 조건이다. 가미긴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잠자리를 거절할 수 있었다. 오늘은 싫다, 피곤하다, 너와 자기 싫다……변명거리 따위는 수없이 많겠지. 그런데도 가미긴은 변명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여 내기를 존중했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은 계속해서 단탈리안을 존중해주는 데 반하여, 단탈리안은 언제든 그녀를 모욕하고 있었다. 불공평하지 않는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쪽이 존중하는 만큼만 배려해주었으면 한다. 굳이 이렇게 화내면서 말해야만 그걸 알아채는지. 가미긴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그때 단탈리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아?” 가미긴이 사태를 인지할 겨를도 없었다. 단탈리안은 칼날로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직후, 단검을 그대로 쭈욱 위로 올렸다. 칼날이 뱃가죽을 째고 있었다. 새빨간 핏물이 옷을 적시며 순식간에 번졌다. 크윽, 하고 단탈리안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무, 무슨 짓을!?” 그제서야 가미긴이 눈앞의 현실을 파악했다. 그녀가 경악하면서 단탈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단탈리안의 두 손을 단검에서 빼내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우악스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피가 옷을 뚫고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멍청이――얼른 놔!” “크아악!” 혼란스러웠지만 가미긴은 재빨리, 매우 현명하게 조치했다. 억지로 단탈리안의 손가락 하나를 잡아서 비틀어버린 것이었다. 단탈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단검에서 손을 놓았다. 가미긴이 상대방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확인했다. “읏……!” 좋지 않았다. 칼날이 깊은 곳까지 쑤셔버린 데다가 완전히 내장을 갈랐다. 마왕의 재생력이 있다 해도 단탈리안은 최하위, 본연의 실력은 정말로 보잘 것이 없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단탈리안이 신음했다. “사죄는……크흑, 이걸로…….” “멍청이! 개자식! 병신 새끼!” 가미긴이 욕을 있는 대로 쏟아내며 회복 마법을 걸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그러나 회복 마법은 일시적으로 체력을 오히려 빼앗아버렸다. 포션, 적어도 몸에 원기를 돋아주는 약이 절실했다. 하지만……포션을 가지고 다닌 것이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인가! 가미긴이 아직 약해빠진 마왕이었을 시절에나 그런 도구를 들고 다녔다. 대마법사가 된 이후로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품안에 안긴 채로, 단탈리안이 확연히 안색이 나빠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공들에게 부탁해서……아니, 무슨 일이냐고 의심받아버려. 시녀들도……제기랄, 어떻게 하면……!” 별장에는 포션이 썩어넘쳤다. 순간이동해서 가져오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립지대인 니블헤임에선 순간이동 마법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순간이동을 발동하는 순간, 바로 모든 마왕이 합심하여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지. 가미긴이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대공들에게 약점을 잡히는 것도 안 되었으며,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으, 아……!” 가미긴이 서둘러 단탈리안의 옷가리를 파헤쳤다. 그렇다. 단탈리안 정도로 신중한 녀석이 설마 평소에 포션 한병 챙겨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망토에는 갖가지 물약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에는 언제나 그녀를 괴롭히던 미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미긴의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여섯 개의 유리병 중에 약물이 유독 붉은색을 띄는 것이 있었다. 가미긴이 허겁지겁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아보았다. 연금술 길드들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회복 포션에는 반드시 로즈마리 향기를 가미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물병에서 로즈마리 향이 강렬하게 피어났다! 가미긴은 눈가가 핑 돌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단탈리안의 입구멍에 포션을 천천히 흘려넣었다. 일 분에 두 번씩 나누어서. 아주 오래 전, 자기가 상처 입었을 때도 그렇게 투약하는 편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이미 천 년이 지난 옛날 일이건만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음……으음…….” 단탈리안의 안색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효과가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이만 안심해도 좋겠지. 가미긴이 자기 손으로 아름다운 금발을 헤집었다. 마치 전쟁터에 다녀온 것처럼 지쳐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분노와 경악, 안심, 이런저런 것들이 엉망진창으로 섞여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게 바닥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가미긴이 일어서서 단탈리안을 부축했다. 그녀는 단탈리안을 끌고 연회장으로 나갔다. “오오. 가미긴 전하, 무얼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단탈리안 전하께서 약간 이상하시군요……?” 대공들이 가미긴을 반기면서도 의아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차피 밀실에서 몸을 섞고 있겠거니, 하고 대공들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부축하며 걸어오는 것 아닌가. “아휴. 진짜, 완전히 취해서 이 모양이야~.” 가미긴이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미 얼굴을 가면으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단지 가면을 쓰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려버렸다. 그래서 밀실에서 말없이 바닥을 멍하게 지켜본 것이었다. “내가 그만 좀 마시라고 그랬는데두 아예 정신이 없어가지고는!” “껄껄껄. 가미긴 전하께서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시군요.” 가미긴이 너스레를 떨자 대공들이 웃었다. 그녀가 가볍게 윙크했다. “평소에는 절대 취하지 않는데 오늘은 기분이 꽤 좋았나봐. 으응, 본인이 취했으니까 말해버려도 괜찮겠지? 의리가 있다느니, 배려가 깊다느니, 대공들 칭찬을 많이 하더라구.” “하하. 두 분 전하께서 즐겨주셨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공들은 기분이 좋았다. 가미긴은 둘째치고 단탈리안은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런 자가 분위기에 취해 만취해버렸으니 접대하는 입장에선 대만족이었다. “나도 오늘 유쾌했어. 그런데 얘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좀 가봐야겠는걸. 먼저 자리를 떠나서 미안해.” “허어! 미안하실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미 밤이 많이 깊었습니다.” 대공들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풀어진 옷을 여미고 깍뜻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늘, 전하를 모시게 되어 더없이 영광이었습니다.” “바깥에 마차와 종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길.” “고마워. 나중에 또 초대해주기를 기다릴게.” 가미긴이 해맑게 웃었다. 미인이 약간 붉어진 얼굴로 솔직하게 미소를 짓자, 대공들은 상대가 마왕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가 가미긴의 별장에 갔다. 별장에는 시녀가 부재했다. 가미긴은 홀로 끙끙거리며 단탈리안을 부축해야만 했다. 가미긴은 오늘 내일 시녀들에게 모조리 휴가를 내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탈리안과 오늘밤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해둔 터에, 남들한테 들려주기에는 적이 민망한 섹스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탈리안은 섹스에 들어가면 좀처럼 자제하질 않았다. 그런 것을 시녀들에게 보여주기가 절대로 싫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금 가미긴은 서열 제4위 마왕의 체면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부상자 따위를 부축하고 있었다……. “개새끼!” 침실에 도착하기까지 가미긴은 몇 번이고 큰소리로 욕했다. “빌어먹을 후레자식! 말도 안 따먹을 원숭이 새끼! 아가리에 흙을 쑤셔넣어도 시원찮을 개자식!”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평소의 가면을 내려두고 마음껏 욕지거리를 떠들 수가 있었다. “끄응……!”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여 단탈리안이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피로감이 가미긴의 전신을 뒤덮었다.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가미긴이 슬쩍 단탈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쪽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전혀 모른 채로, 상대방은 침대에 엉거주춤 누워서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가미긴은 또 다시 열불이 터졌다. 차라리 뒈져버렸으면. “……하아.” 가미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 작품 후기 ============================   질문자: 섹파(섹스 파트너)가 자꾸 애인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단탈리안: 식칼로 자해를 하면 OK. 00249 던전의 주인 =========================================================================                        * * * 아, 생각보다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옆에서 가미긴이 소리를 줄여가며 울고 있었다. 흐윽, 흑, 하고 차마 견디지 못하고 울음이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비유하건대 멋진 자장가였다. 이쪽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 사실 처음부터 정신 따위는 잃지 않았지만. 가미긴에게 부축되어서 오는 것이 참 편해서 기분이 좋았다. 야아, 최근 들어서 가미긴의 스트레스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공평하게 거래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최대한 존중 받기를, 적어도 타인 앞에서 깎아내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공평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을까……가미긴은 서열 제4위이다. 나 같은 놈과 공평하게 거래했다는 것이 도리어 불공평하다고, 부당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람이란 간단하게 자신이 약자였던 시절을 잊어버렸다. 가미긴도 한때 최하위 서열이었겠지. 그렇지만, 권력자가 되고 수백 년이 흐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무시당할 정도로 하찮지 않다, 나는 조금 더 대접받아 마땅하다…….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수백 년이 흘러본들 뭐가 달라지는가? 이백 년, 삼백 년이 지나면 내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스운 일이다. 삼백 년이 흐르든 말든 머리통이 뽑히면 나는 죽는다. 어차피 그 정도 목숨이라는 거다. 머리통이 뽑히는 것을 언제나 항상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마저, 어리석어지면 간단하게 망각한다. 간단하다. 자기가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리석어야 괴롭히는 재미조차 적어진다……. 가미긴은 자기 스스로 생존이야말로 유일무이한 가치이니 뭐니 떠들었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에 연연했다. 안이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겠지. 만약 내가 가미긴이었다면 철저하게 복종했을 것이다. 당신에게 전부 마음이 빼앗긴 척 연기하면서 언젠가 약점을 드러내기를 기다렸으리라. 서열 제4위에게 온갖 아첨을 듣는 것이다. 상대방이 제아무리 냉혈한이라 해도 해벌쭉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미긴은 어수룩하게 나왔다. 나에게 완전히 협력하지도, 완전히 대적하지도 않았다. 어중지간했다. ‘상태창.’ 내가 슬쩍 눈을 떠서 가미긴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이름: 가미긴 종족: 마왕   소속: 가미긴 마왕군 속성: 악(-55) 레벨: 396   악명: 5233100 직업: 대마법사(SSS), 마왕(SS), 던전운영자(S) 통솔: 295  무력: 320  지력: 353 정치: 371  매력: 449  기술: 446 호감도: 22 현재심리: ‘전부, 지긋지긋해……. 전부…….’ ━━━━━━━━━━━━━━━━━━━━ 가미긴의 호감도가 최초로 20을 넘긴 것이 딱 일 년 전이었다. 당시에 나는 가미긴과 상당히 잘 지내고 있었다. 안 좋게 시작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이른바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여기에 몸까지 빈번하게 섞다보면 약간이나마 정이 붙을 수밖에. 내 입장에서야 서열 제4위가 아군이 되어주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레 상냥하게 대접했고,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러다보니 호감도가 달마다 2씩, 3씩 올라서 겨우 일 년 만에 20을 넘어섰다. 느릿느릿해도 착실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사브나크와 어울리지 마.’ 격렬하게 섹스하고 침대에 누워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예?’ 사브나크는 서열 제43위의 여마왕이자 무소속 마왕이었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 아가레스한테 합류했던 터라 평원파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제발 좀 용서해주세요, 하고 은근슬쩍 제스처를 취해오는 것이 재밌어서 몇 번 어울려준 적이 있었다. ‘딱히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울릴 테면 어울려. 아가레스가 불리해지자 제일 먼저 이탈한 게 녀석이니까.’ ‘아하.’ 내가 피식 웃었다. ‘혹시 지금 걱정해주시는 것…….’ 잠깐, 하고 내가 생각했다. 가미긴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기에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가미긴의 새하얗고 날렵한 등을 바라보면서 정체모를 오한에 휩싸였다. 방금 가미긴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그녀는 일찍이 아군이었던 자의 정보를 나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단지 나의 아주 자그마한 호감을 얻기 위해서. 왜? 어째서?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했겠지.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았다. 가미긴은 나에게 빚을 만들어두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관계가 파탄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내가 상대방에게 뭘 더 해주었는데, 내가 상대방에게 이만큼이나 선의를 베풀었는데. 그런데도 보답을 받지 못했다. 당신은 나에게 보답해주어야만 한다……비즈니스적인 관계가 한번 깨지기 시작할 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버린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서로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절대로,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도에 넘는 배려를 베풀어지도 않고 입지도 않는다. 이것이 상대방한테 쓸데없는 원한――나는 이만큼이나 해주었는데! 너는 왜 이것밖에!――을 품지 않는 방법이기에.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기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녹이 슨다. 나는 가미긴이 언뜻 보여준 태도에서 숨길 수 없이 비릿한 철 냄새를 맡았다. ‘……걱정해주신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하고 요란한 효과음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급격하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가미긴 님.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읏……!’ ‘왜 그러십니까? 젠장, 바르바토스가 제일이라고 말해서 신경이 거슬린 겁니까? 애당초 그걸 용납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리 가……저리 가라고!’ 틀림없이 가미긴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나한테 등을 돌리고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마도 마왕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나는 그제서야 가미긴이라는 마왕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겼음을 통감했다. 생각해보면, 가미긴은 나와 만나기 전까지 한번도 가면이 깨지지 않았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면을 유지한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상태일지 추측하기 쉬웠다. 요컨대 가미긴은 연애에 있어서 쌩초보였다. 사람이야 많이 사귀어보고 많이 자보았을지 모르나, 서로 진심을 부딪히며 적절한 관계라는 것을 터득할 겨를이 없었겠지. 가면을 벗은 채로 사귀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런 여인이 '너는 언제나 두 번째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견딜 리 없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서열 제4위이니까, 바르바토스도 시트리도 파이몬도 전부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니까, 당연히 가미긴도 능숙할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조금만 더 숙고했으면 간단히 알아냈을 텐데! 그래서. 초강수를 두기로 결심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빚을 만들자는 생각을 할 수도 없게.’ ‘내가 먼저 상대방을 거대한 빚으로 억눌러버린다……!’ 대공들에게 연회를 주선하라고 눈치를 준 것은 나였다. 우선 마왕 중에서 초대장이 가미긴과 나한테만 온 것부터 노림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안 그래도 염문에 휩싸여 있는데다 각종 스캔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파트너처럼 연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대공들은 우리에게 아첨하고 싶어했고. 마침 눈앞에 엮기 좋은 커플 한쌍이 놓였다. 그들이 질문할 거리는 뻔하게 예정되어 있었다. ‘허면……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여마왕들 중에 어느 분이 특히나 아름다우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아. 그야 바르바토스 님께서 제일 아름다우시지.’ 일부러 모욕했다. ‘오. 포도주가 상당히 고급스럽군.’ 천연덕스럽게 와인 맛을 품평함으로써 가미긴의 분노를 더더욱 부채질했다. 가미긴은 그런 모욕을 견디지 못하리라. ‘잠깐만 바람을 쐬고 오겠네. 오늘 너무 취하는군.’ 적당히 시간이 되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예상한 대로 가미긴의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따라오겠지. ‘아, 나도~. 바깥 공기 좀 내놓으라고 머리통이 아우성을 치고 있어.’ 실제로 가미긴은 밀실까지 얌전히 따라왔다. 어찌나 계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방에 들어와서 나는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파이프에 구겨넣은 연초잎은 평범한 담배가 아니었다. 일종의 마취제였다. 처음부터 나는 배를 쨀 생각이었다. 미쳤다고 내가 배를 째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겠는가? 이래봬도 섬세한 남자이다. 특별히 몸체의 통각을 무뎌지게 해주는 향초였다. 부작용이라고 할지, 얼굴도 엄청나게 무표정하게 변해버리지만 상관없었다. 표정 연기가 따로 필요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어느 정도 둔해지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배에 꽂아 넣었다. 마취가 되어 있다 해도 과연 고통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고 할까. ‘무, 무슨 짓을!?’ 내 상태를 알 리가 없는 가미긴은 경악했다. 정신없이 달려와서 치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가미긴이 대마법사에다 치유마법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할복한 것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위험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 “으, 으으윽……윽.” “……단탈리안? 단탈리안, 정신이 들었어?” 가미긴이 내게로 다가왔다. 헐레벌떡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딴 것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매우 괴롭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여기는……?” “내 별장이야.” 가미긴이 우는 것인지 분노하는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사람은 보통 누군가에게 미안하지만 사과하고 싶지 않을 때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자주 그랬지. “도대체 어쩌자고 그딴 짓거리를! 내가 얼마나……!” “……사죄를.” 내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참고로 정말로 힘겨웠다. 힘든 척 생생하게 연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데. 가미긴의 붉은색 눈동자를 일직선으로 바라보면서 얘기했다. “가미긴에게, 사죄를 하려면……으윽, 이제 이 방법밖에…….” “……!” 가미긴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바로 그거였다. 죄책감, 부디 더 질척거리는 죄책감에 휩싸이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죄책감만큼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이 없다. 이제부터 가미긴은 내 앞에서 절대로 연인이기를 주장하지 않겠지. 이쪽을 상처입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다. “……저는, 입장상……바르바토스와 맹세를 했으니까…….” 여기서 추가타를 날려준다. “가미긴이라면……이해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 가미긴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때가 타이밍이었다. 나는 피로에 지친 것처럼 서서히 눈을 감았다. 상대방이 눈물을 흘릴 때 봐주면 안 된다. 피해자는 어디까지나 나 혼자여야만 한다. 눈물로 피해자인 척 시늉하는 것을 놔둘까보냐. “조금, 피곤하군요……미안해요……미안해요, 가미긴……미안해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고 가미긴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히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울음소리였다. 물론, 내가 가미긴의 외로움을 오롯하게 전부 받아주는 선택지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나아가는 길도 있겠지. 하지만 왜 구태여 그런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르바토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누구 한 명한테 붙잡힐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다. 가미긴이야 이대로 평생 죄책감에 빠져 살든 말든 아무쪼록 마음 편한 대로 살라고 그래라. 원래 자신의 멍에는 자기가 짊어가는 것이지. 그렇고 말고. “윽……으읏, 흐으윽……으으읏…….” 가미긴의 울음소리를 아름다운 자장가로 삼아 나는 이번에 정말로 잠들었다. 음,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께선 부디 나쁜 남자를 만나지 않으시기를. 00250 던전의 주인 =========================================================================                        가미긴을 솎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겸사겸사 처리한 일에 불과했다. 사실 별로 대단한 뭣도 아니었다. 연애 초짜에게 이른바 좋은 경험을 시켜주었을 따름이다. 가미긴에게는 내가 복부를 찌른 광경이 트라우마로 남았겠지. 붉은 핏물, 방바닥에 깨진 유리잔, 신음…….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사귈 때도 트라우마 때문에 절대로 파트너를 지배하려 들지 못할 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미긴과 사귀게 될 미래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정말이지, 착한 짓도 지나치면 폐가 된다는데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일어났어?” 내가 깨어나자 가미긴은 평소처럼 태연하게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과연 가미긴이라고 할까, 심리가 극도로 불안정할 텐데도 잘 숨기고 있었다. 표정 연기가 완벽했다. 나 역시 평소처럼 대해주었다. “윽……! 그렇지만 아침식사 때, 스프를 먹다가 갑자기 고통스러운 것처럼 복부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가미긴이 깜짝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은제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억지로 지은 듯이. “저는 괜찮습니다, 가미긴 님.” 끝이었다. 그날 하루 온종일, 가미긴은 결코 가면을 다시 쓰지 못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가면은 간단하게 부서졌다. 점심식사에는 놀랍게도 식용 나이프가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건 꽤나 재미난 부분이었다. 단칼 같은 물건 자체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나중에 혹시 전쟁터에라도 나가면 고생하겠네. 하하하. 나중에 이 일에 대해서 바르바토스한테 얘기해주었다. 바르바토스는 내 성격을 모조리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딱히 숨길 게 없었다. 바르바토스도 인간들이 귀찮게 굴어서 자식의 손으로 부모를 몰살시켰느니 뭐니 뒤숭숭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고는 했다. 피차일반이라고 할까. “쯧쯧.” 바르바토스가 마법수정구 너머에서 혀를 찼다. “설마 내 생애 가미긴을 가엽게 여기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렇지? 그 나이가 되도록 진심 어린 연애 한번 해보질 않았다니, 참 나.” “……뭐, 그래. 내가 동정심을 느끼는 부분은 그쪽이 아니지만.” 바르바토스가 장죽으로 길게 연초를 빨았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가미긴을 속인 거 찔리지 않냐?” “응? 왜? 속는 사람이 잘못이잖아.” “…….” 그때 바르바토스가 지은 표정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게 구렸다. 나는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다. 가미긴이 평생 동안 참살한 인간 숫자만 해도 만 명이 가볍게 뛰어넘을 텐데, 그런 악인한테 트라우마 조금 심어주었다는 것에 뭐 잘잘못을 따지겠는가. 속는 사람이 나쁜 거다. * * * 쿤쿠스카 상회 총본부. 마계에서 대륙에 이르기까지 취급하지 않는 상품이 없으며, 거래하지 않는 고객이 없다는 이곳에는 항상 손님이 넘쳐났다. 소상인들은 상회의 담당자들과 옥신각신 흥정을 벌이면서 소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입구는 고대공화국 양식에 따라 대리석 회랑이 지어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최근에 건축한 것인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이 높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계 최고를 자처할 만큼 충분히 화려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니블에임에 방문한 주요 목적.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만나고 그녀의 본모습과 대면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분 좋게 가미긴의 별장에서 나와 여기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만날 수 있는지 몰랐다. 녀석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수정구를 내가 깜빡하고 마왕성에다 두고 와버린 것이었다. “아, 이제 와서 마왕성에 다녀오기는 너무 귀찮은데…….” 난감했다. 어디 안내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내 눈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룬 상인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리 자체가 너무 생소했다. 그동안 쿤쿠스카 상회와 수백 번을 거래했는데 정작 그쪽의 본부가 낯설다니 우스웠다. 별 수 있겠는가. 지나가던 아무 상회원이나 붙잡고 물어보았다. “저기, 자네. 말 좀 물어보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예?” 상회원이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눈초리로 이쪽을 훑어보았다. “……하, 정신병자를 다 봤네.” 그가 콧방귀를 뀌면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몰랐겠지. 바르바토스나 파이몬과 다르게 나는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여마왕 전하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양반이 있다고 한다.' 기껏해야 그 정도 인식밖에 없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을 잡아서 질문했다. “자네. 내가 길을 잘 몰라서 묻는 거네만, 혹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출구는 저쪽입니다.” 상회원이 손가락으로 건물 바깥을 정중하게 가리켰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음. “이바르 로드브로크? 설마 우리 회장님을 말한 거요?”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끌끌.” “안 그래도 바쁜데 뭔 개소리야!” 똑같은 짓이 수십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상회원은 나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대놓고 무시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란 단순히 상회의 최고경영자가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상계에 군림한 신이었다. 어디 관광객이 바티칸 성당에 가서 '죄송한데, 교황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고 물어보았다고 생각해봐라. 사람들이 썩은 눈동자로 바라보겠지. 마찬가지였다. 다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상황이 진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통 한가운데 외딴 섬처럼 서 있었다. “……이걸 어쩐다냐.” 뒤통수에 달린 뿔이라도 보여줘서 내가 마왕이라는 걸 알려줘야 할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조금 마왕으로서 체면이란 것이……게다가 나는 마왕치고 뿔이 외뿔인데다 크기도 엄청나게 작았다. 뿔이란 마왕들 사이에선 마치 남자의 거시기 크기와 같았다. 크면 클수록 경외를 받았고 작으면 작을수록 알게모르게 무시당했다. 나는 뿔이 어찌나 작은지 머리카락에 덮혀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보여주기는 또 싫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운 좋게 친절한 사람이 걸리기를 빌면서, 상회원들을 붙잡아 계속해서 길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친절한 사람은커녕 성격이 더러운 놈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아예 미친놈을 쫓아내라며 경비원을 불러버린 것이었다. 오크 경비원 세 명이 우락부락하게 다가섰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중 직위가 높아보이는 오크가 생긴 것과 다르게 멋진 억양으로 으르렁거렸다. 떡대가 아름답게 벌어진 것이 척 봐도 건드리면 위험해보였다. “이보게들. 나는 정말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초대를 받았다니까? 나 마왕일세.” “이거, 말로 해서는 정신을 못 차릴 진상이로군. 바깥으로 안내해.” “어…….” 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지만, 자네 곧 있다가 후회할걸. 진짜야.” “흐흐.” 오크 경비원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댁 같은 진상손님을 몰아내지 않으면 후회하겠지. 무얼, 폭력은 좋아하지 않소. 서로가 악감정 쌓이지 않게 얌전히 갑시다.” “으음.” 마음만 먹으면 마왕의 강제력을 발휘해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소란을 일으키는 게 싫었다. 바르바토스가 툭하면 나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제발 체통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홀몸이 아니다. 웃긴 말이지만 진실이다. 나는 바르바토스, 시트리, 가미긴의 애인……내 평판이 떨어지면 그녀들의 평판까지 나빠진다. 시장바닥에서 마왕이 난데없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소문이 나봐라. 니블헤임의 시민들은 이성이 희박한 몬스터가 아니라 엄연히 사회를 이루는 마인이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전쟁터에서라면 또 모를까, 이런 곳에서 함부로 대해서야 마왕의 이름에 먹통을 칠해버린다. “알겠네. 내 두 발로 직접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다시는 오지 마시오.” 나는 상회 총본부 앞에 세워진 분수대에 대책없이 주저앉게 되었다. 멍하게 도시에 노을이 지는 광경을 구경했다. 바람이 도시에 가볍게 불었다. 건물 사이사이에 거미줄처럼 쳐진 빨랫줄이 들썩였다. 옷가지와 담요가 어디를 한참 날아다니다 우연히 여기 걸렸다는 듯이 나풀거렸다. 나뭇잎처럼 다리 한쪽을 공중에 두고 사는 것들은 모두 한쪽으로 날렸다. 공중에 발을 대보지 못하고 설령 대보더라도 단지 또 다른 땅을 밟기 위해 잠시간만 발바닥을 들어볼 뿐인 것들은, 서로 말하고 일하고 귀가했다.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과입니다! 막 딴 사과 사세요!” 또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아니 정말로 커다랬대도.” 도시의 위로 구름이 지나갔다. 건물의 첨탑, 너른 지붕, 길바닥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구름이 도시를 지나쳤다. 사람들은 시원한 그늘이 사라진 걸 아쉬워했다. 그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위를 끄는 것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분수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내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지나자, 별안간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남자가 허겁지겁 내렸다. “이거, 단탈리안 님 아니십니까!” 남자는 내 손을 덥썩 잡으면서 친밀감을 드러냈다. 서열 제68위의 마왕 벨리알. 자기 마왕성이 인간군의 침략에 함락될 뻔한 것을 바르바토스가 구해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바르바토스의 연인인 나에게 항상 저자세로 나왔다. “아, 벨리알 님. 오랜만입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참고로 옛날 내 던전에다 리프 모험대를 밀어넣은 배후의 인물이 이 녀석이 아닐까, 하고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어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지만. “이런 저잣거리에서 단탈리안 님을 뵈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어쩐 일로 시장바닥에 이리 차분하게 앉아 계시는 것입니까?” “하하. 사실 상회에서 쫓겨난 참입니다.” “네?” 벨리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쫓겨나다니요?” “쿤쿠스카의 회장과 약속이 있어 왔습니다만, 제가 마왕인 줄 몰라보고 저기 상회원들이 들여주지를 않는군요. 곤란한 일입니다. 저녁까지는 가겠노라고 말해놨는데…….” 벨리알이 에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니. 강제력을 쓰시면 될 것을.”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행여라도 소문이 나쁜 방향으로 흐를까 두렵군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허어.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결국 나는 벨리알의 도움을 빌어서 접수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소위 VIP 고객을 전용으로 모시는 곳이었다. 내가 있던 곳과 완전히 반대방향에 자리하고 있어서 찾지 못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벨리알 님.” “뭘 이런 것 갖고……하하.” 나를 데려다주고 벨리알이 떠났다. 안내원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호출해달라 말하니 금세 노인이 내려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분신이었다. 녀석은 마치 마피아 패거리처럼 양옆으로 하수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극진하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수고들이 많구나. 이만 예를 생략하는 것을 허하마.” “황공하옵니다. 헌데 전하. 조금 더 빨리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비록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정해둔 바가 없었지만 아무튼 오늘 만나기로 해두었다. 상대방은 하루종일 꼼짝없이 발이 묶인 채 기다리고 있었겠지. 확실히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쿤쿠스카의 최고경영자여서야. 내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사실 도착하기는 서너 시간 전에 도착했네만.” “예? 왜 올라오지 않으셨습니까?” “쫓겨났네.” 아까 전에 벨리알이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을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지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으로서는 대체 무슨 말씀이온지……?” “본인이 마왕인 걸 몰라보고 경비원들이 내쫓았다네.” “…….”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마왕이라고 밝혔더니 나보고 진상손님이라며 욕하더군.”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이 마치 세계의 종말을 본 것처럼 사색으로 변했다.   00251 던전의 주인 =========================================================================                        “저희 상회측의 경비원이, 전하를, 말입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웃었다. “아아. 아니, 그렇다고 너무 죄송스러워하지는…….”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몸을 엎드렸다. 방바닥에 말 그대로 오체를 투신했다. 그와 동시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둘러 싸고 있던 패거리들이 똑같이 절을 올렸다. 한꺼번에 열댓 명의 마인이 나를 향해서 엎드린 셈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원 교육이 어찌나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인지, 간부진이 엎드리자 이쪽에서 오간 대화를 듣지도 못했을 상회인들마저 줄줄이 오체투지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나를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에 서 있던 마인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어마어마한 장관이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상회인들이 갑작스레 절을 하자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이나 소상인이 어리둥절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바르 로드브로크. 정치에 이골이 난 영감탱이야! 경비원이 쫓아낼 때 나는 얌전히 물러가주었다. 당연했다. 나는 이제부터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칼날 없는 전쟁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한테 조금이라도 책임부담을 떠넘길 기회가 다가온 것이었다. 마법수정구를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 그렇지만 실수를 역으로 이용하여 상대편에게 잘못을 떠넘길 수가 있었다. 이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상황을 듣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행동했다. 니블헤임은 마계에서 유일무이한 중립도시였으며,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도시를 통치하는 거물 중 하나였다. 웬만한 마왕보다 격조가 높았다. 그런 작자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사죄했다. “……그대들이 잘못한 것이 무에 있겠는가?” 당연하지만, 사죄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그대들을 용서할 것도 없다. 과례를 접고 이만 일어서도록.”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상대편이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하긴, 이렇게 질 낮은 수작에 쉽게 걸려 넘어질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마는……. 그보다 도대체 직원들을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아무런 군말도 없이 오체를 투지하냐? 얘네도 정상이 아니로군. “아니옵니다, 전하. 무례란 용서받기 이전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여전히 이마를 바닥에 갖다댄 채로 고했다. “당장 불의천만한 죄를 범한 자들을 잡아들여 효수하겠사옵니다!”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아이고야. 아주 못까지 꽉꽉 밖으시겠다? 방금 전에 나는 '그대들을 용서할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매우 어중지간한 언사였다. 이번 일은 그냥 이대로 넘어가주겠으나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는 의미.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심리적인 부담을 실어주고자 했다. 상대방이 이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그냥 처벌하시죠! 아주 엄하게!'라고 받아쳤다. 즉, 우리 두 사람이 몇 초 동안 주고받은 대화는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었다. ‘네 꼬봉이 나한테 잘못했는데 어쩔까?’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용서는 못해주겠고, 일단 네 얼굴 봐서 넘어갈게.’ ‘용서해주지 못하실 거면 깔끔하게 처벌하고 여기서 끝내시죠?’ 곧 죽어도 나한테 마음의 빚은 못 지겠다는 소리였다. 영악한 새끼. 내가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오크 경비원을 족치겠는가. 이미지 나빠지게. 단탈리안 그 마왕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마냥 좁아 터졌더라, 하는 뒷소문만 창궐할 것이 뻔했다. 관대하게 용서해주어야 마땅하겠지. “들으라. 오래 전부터 현자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얌전하게 물러서줄 생각은 까마귀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없었다. “어느 나라가 대단히 풍요롭고 평화로운지라, 옆나라의 대신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하여 잠행(潛行)을 갔다. 과연 나라에서 군주를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라.” “……?” 갑작스레 고사를 들먹이니 의아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프랑크에서 연설하고 다녔던 시절에 써먹었던 말투를 사용하며 천천히 분위기를 이쪽으로 잡아당겼다. “대신이 궁금하여 길 가던 백성에게 질문했다. '이 나라의 군주께서는 얼마나 덕성이 깊으시기에 이리도 사랑을 많이 받습니까?' 그러자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리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본인은 군주가 뭘 하는지 모르노라고.” 내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신은 황당했노라.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군주를 백성들은 왜 열렬하게 칭송하는가? 아무래도 이 무지몽매한 농사꾼이 뭣도 모르는 것이리라. 대신은 그 백성을 마음속으로 욕하며 다른 사람을 찾아나섰다.” “…….” “그리하여 대신이 재차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질문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고? 새로이 질문을 받은 사람 역시 대답하기를, 본인은 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요순시대 어쩌고 하는 고사에서 들은 얘기를 즉석에서 각색해보았을 뿐이지만. 뭐, 저작권 같은 것도 없었다. 요긴하게 써먹어주겠다. “세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네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이윽고 일곱 번째로 물어본 사람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군주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대답했나니, 그제서야 대신은 크게 깨달았노라. 본디 백성에게 관심사란 일신의 안전일지언저! 세상이 풍요롭고 평화롭다면 통치자의 이름과 생김새 따위 알 바가 무엇이겠는가. 반면에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백성들은 통치자에게 관심을 품고, 통치자의 이름을 가지고 놀며, 통치자의 용모를 비웃으며 희롱하는 법이다.” 어디선가 자그맣게 탄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내가 만든 얘기는 아니지만 실로 잘 지어낸 고사였다. “본인이 상회에 거동했거늘 경비원들이 쫓아낸다. 그들은 내가 마왕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지금 시대에 마왕들이 폭군처럼 그대들을 탄압하고 억압했다면, 그대들이 마왕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곧바로 알아보았을 터인즉. 이 사람 많은 상회에서 아무도 본인을 알지 못했으나 오히려 기쁘구나. 슬퍼할 일이 어디 있으며 용서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도 나 단탈리안이 지금까지 그대들에게 크게 잘못한 일은 없음을 이 자리에서 확인했다. 쿤쿠스카의 일원들이여,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거라. 그대들이 나에게 사죄함이 도리어 무례가 될 것이니라.” 간부진을 비롯해서 상회 직원들이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잔뜩 감격한 얼굴로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에 따라서 줄줄이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가 상회 건물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또한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나에게 길을 안내했다. 단탈리안 전하 만세! 단탈리안 전하 만세! 하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서 떠들어댔다. 내가 은근하게 눈웃음을 주었다. ‘본인이 얌전하게 물러나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그러자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눈가에도 주름이 깊어졌다. “한낱 경비원을 구제하는 것에 심려가 닿으시니 어찌 전하의 덕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상회에서 일하는 자들이 모두 만족하고 평온해보였으니 본인이야말로 그대의 덕을 칭찬하고 싶네.” 결국은 경비원 하나 처벌하는 걸로 끝내기 싫어서 일장연설을 펼친 것 아니냐. 맞다. 상회 직원을 통솔하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어디서 꼬리를 자르려고 수작질이냐. 대충 이런 대화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공기를 연출하며 걸어갔다. “자아. 이쪽으로 모시겠나이다.” 상회 한쪽 구석에 텔레포트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최상층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비록 이동하는 쪽과 나오는 쪽이 미리 정해져 있는 장치였지만, 순간이동 마법을 허락받았다는 것 자체가 쿤쿠스카 상회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텔레포트 장치를 타고 이동한 사람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간부진은 두고 왔다. “…….” “…….” 상회 최고층 건물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전까지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별세계에 온 것처럼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서, 복도 맨끝에 자리 잡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 미노타우르스의 머리가 뚝 잘려서 벽면에 장식되어 있었다. 기괴한 귀신과 마물의 조각상이 사방에 들이찼다. 을씨년스러운 공기가 진득하게 흘렀다. 악취미라고 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한가운데, 흡혈귀의 관(棺)이 열 개나 놓여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을 열었다. “전하. 소인의 본체를 드러내는 것은……이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삼가 모든 여신께 고하여 맹세하건대, 나 단탈리안은 그대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걸어나갔다. 열 개의 관 중에 한 곳을 골라 들어가더니, 잠시 후, 다른 관짝이 열렸다. 그곳에서 소녀가 걸어나왔다. “소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재차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금발의 소녀가 공손하게 드레스 끝자락을 집어 올렸다. 나는 여자애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쿤쿠스카의 주인이여. 어디까지 나를 우롱할 생각인가.” “예?” 소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전하?” “그것은 그대의 본체가 아니다.” 금빛 머리카락에 작은 여자아이. 여기까지는 똑같았다. 그러나 게임 일러스트에서 묘사된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눈동자 색깔은……자수정처럼 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눈앞에 선 소녀는 검은색 눈동자.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가 아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본인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 소리없이. 거대 상회를 이끄는 괴물의 얼굴에 금이 갔다. “……어떻게, 그것을.” 여자아이가 입가를 부들거리며 말했다. “제 본체는……아무도, 정말 아무도 보지 못했을 텐데! 어찌하여 단탈리안 전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 그뿐이다.” 상대방이 울분을 꾹 참고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나왔던 관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다른 관이 열리면서 무엇인가가 일어섰다. 끼이익, 하고 관짝이 열리면서 안개와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소녀가 새하얀 나신으로 일어섰다. “…….”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보랏빛 눈동자였다. “단탈리안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 결심했기에 미처 의복을 차려입지 못한 점,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흡혈귀 진조(眞祖). 가장 위대한 인형술사. 천의 신체를 다스리는 자. 마왕군을 배신하고 용사 일행에 붙은 매국노 중 매국노이며, <던전 어택>에서는 특별히 자기 전용 루트까지 보유한 히로인. 소녀를 눈앞에 두고 나는 활짝 웃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제야 그대와 만나는구나.”   00252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나는 몸에 걸친 검은색 망토를 풀었다. “…….” 소녀가 눈을 꾹 감았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져도 체념하겠다. 그런 느낌이 풍겨오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겉옷을 벗으니까 아마도 뭔가를 크게 착각한 것 같았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면서 그녀한테 다가섰다. 한 발자국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새삼스럽게 소녀가 얼마나 눈부시게 예쁜가 느껴졌다. 글쎄. 어쩌면 여자아이란 겉모습만으로도 눈부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망토에서 담뱃대만 꺼내 바지 주머니에 따로 챙겨넣고. 나는 하얀 나신에 조심스럽게 망토를 걸쳐주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가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뜻밖의 행동을 당했다, 하고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숙녀가 감기라도 들면 곤란하지.” “……영락없이 소인을 탐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아? 본인이 어디 무뢰한도 아니고 그대를 왜 탐하겠나.”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송구하옵니다만, 전하께서는 소녀가 취향이시지 않았습니까? 바르바토스 전하도 그렇거니와 시녀로 두고 계신 여아를 고려하건대 틀림없이 그쪽 취향이라 판단했사옵니다.” “전혀 아니야.” 어째서 세상에는 중상모략과 가담항설이 이리도 난무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성숙한 여인을 좋아한다. 설령 그쪽이 취향이라 할지라도 쿤쿠스카의 주인을 희롱할 만큼 내 생각머리가 부족하진 않네. 당연하지 않은가.” “으음. 과연, 보고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곳에 수염이라도 달려 있는 것처럼. 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헛, 하고 손동작을 멈추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하며 망토로 쓰윽 나신을 가렸다. “흠. 본체로 생활한 지 하도 오래되어 그만 버릇이 튀어나왔사옵니다. 용서해주시길.” 몸짓뿐만이 아니라 말투 하나하나가 순 영감이나 진배없었다. 어린 여자애가 꼭 어거지로 어른 말투를 따라하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괜찮다. 따지고보면 그대를 이리 나오게 한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뭐, 그건 그렇고. 자네는 손님을 대접하는 게 영 엉망이로구만.” 내가 근처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직까지 포도주 한잔 내오지 않아서야! 이거 원, 자네와 친해질 수나 있겠는가.” “전하. 진심으로 저와 술을 대작하시기 위해서 행차하셨다는 말이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양손으로 망토를 붙잡은 채 멀뚱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럼, 뭐? 본인이 자네 약점을 잡으려고 본모습으로 만나자 그랬는 줄 알았나. 누누이 말했을 텐데. 나는 그대와 잘 지내보고 싶다고.” 내가 씨익 웃었다. “어디 쿤쿠스카의 주인이 손님을 대접할 때는 얼마나 고급스러운 술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부디 본인을 실망시키지 말아주게. 무척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야.” 자아. 게임을 시작하자. * * * 꽤나 놀라운 점이지만, 나는 <던전 어택>의 히로인과 마주본 적이 없었다! 물론 게임에서 등장한 여성 인물들은 엄청나게 많이 만나보았다. 그러나 정작 어느 누구도, 단 한 명도, 게임상 히로인은 아닌 것이었다. 원통스럽게도, 나와 인연이 맺어진 인물들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용사 주인공의 적대세력에 속해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대놓고 주인공과 적대적인 브르타뉴 왕국 소속.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시트리, 가미긴은 당연하게도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마왕. 나는 게임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을 전부 공략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녀들을 농락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하지만, 히로인이 아닌 여성들까지 공략하는 방법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포도주를 들이키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시트리도 하나같이 호감도가 50에 머무르고 있지.’ 던전 어택은 참으로 빌어먹을 게임이다. 모든 히로인에게 이른바 '호감도 락'이란 물건이 걸려 있다. 이것도 상당히 복잡한 시스템이지만, 간략하게 얘기해서 호감도 50과 호감도 99를 뛰어넘으려면 일종의 퀘스트가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이 퀘스트가 히로인마다 제각각 다르다. 거의 아무런 힌트도 없는지라, 플레이어는 히로인을 공략하고 싶다면 생노가다를 반복하여 조건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전부 알고 있다. 주요 히로인들은 더럽게 퀘스트 알아내기가 힘들어서 팬사이트에도 공략 방법이 극소수만 올라와 있으며, 하루에도 제발 H씬 좀 구경하고 싶다며 징징거리는 게시글이 수십 개씩 올라올 정도였지만. 나는 전부 알고 있다. 게임에 주연과 조연을 다 합쳐서 등장하는 히로인만 세어봐도 72명이고, 그중에서도 엘리자베트 황녀의 진엔딩 같은 경우에는 히든보스인 바알을 깨트려야 한다는 최악의 제한조건이 붙었을 정도로, 모든 히로인의 공략법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그러나 전부 알고 있다! 바로 그 엘리자베트 진엔딩 하나 보겠다고 노가다에 노가다를 거듭한 게임폐인이 나다. “하하, 술맛이 각별하게 좋군. 과연 쿤쿠스카일세.”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옵니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지금 내 눈앞에서 최고급 포도주를 숨펑숨펑 퍼마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는……당연하게도, 내가 호감도 락을 모조리 외우고 있는 히로인 중 한 명이다! 오오. 여신이시여――.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거두어주신 한 명의 사제로서 겸허하게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축복과 행운에 대하여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지금과 같은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정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세계에 들어왔는데도 정작 히로인과는 한번도 떡을 쳐보지 못했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기냐는 말이다! “크흐. 이거 오랜만에 취하는군. 자자, 자네도 한잔 더 받게!” “물론이옵니다, 전하.” 밤이 으슥해지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와 나, 둘 모두 술기운이 짙어졌다. 마왕이나 흡혈귀나 술에 엄청나게 강한 족속이었다. 몸의 재생력이 술에 취하는 것을 방지해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묘한 경쟁심이 생겨서, 우리는 마치 생수를 퍼마시듯이 끊임없이 술을 위장에 채워넣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순히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다고만 생각하겠지. 벌써 세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잡담만 떠들었다. 그녀는 언제 이쪽에서 진심을 드러낼 것인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바르.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 내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흡혈귀 인형술사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공략하는 첫 번째 관문. 여기에는 총 네 가지 조건이 방해물로써 단단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제1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단 둘이서' 술을 마실 것. 제2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대작하기 시작한 지 게임 기준으로 최소 '세 시간'을 넘겼을 것. 제3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처음 만나고서 게임 기준으로 최소 '일 년'이 흘렀을 것. 제4조건.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특정한 이야기'를 들을 것. 원래 히로인과 단 둘이서 술을 마시려면 호감도가 꽤 높아야만 한다. 호감도 없는 남정네와 여자가 밤 늦게까지 대작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를 올리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내가 이쪽 세계에서 그녀와 함께 일한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호감도가 20이 채 안 된 것을 봐라. 얼마나 난이도가 극악인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호감도와 상관없이 대작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지.’ 꼼수라고 할까. 게임에서는 시스템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진 것을 여기서는 간단하게 지름길을 가로질러서 달성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히로인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술자리에 어울려주느냐 역시 호감도와 관련되지만, 이 조건도 나는 간단하게 충족시켰다.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을 만족시켜볼까.’ 내가 술에 잔뜩 취한 척 연기하며 말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크크. 마왕이란 정말 빌어먹을 년놈들이야. 정말로 빌어먹을.” “전하?” “무얼. 자네도 알지 않는가? 보게. 제8차 월맹군이 일단락된 지도 벌써 한참이 지났어. 그런데도 제일 큰 공로를 세웠을 터인 내가 여전히 서열 제71위일세……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으며, 아직 내가 진짜로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웠겠지. 나는 더더욱 실감나게 술주정뱅이를 열연하며 소리쳤다. 실제로도 조금 취해 있었다. “바알이 공정하다고? 개 같은 소리도 그 정도면 훌륭하지. 뭣 때문인지 몰라도 내 서열을 올려주기가 싫은 거야. 제기랄. 바알이든 뭐든 결국 마왕 년놈들은 한꺼풀 벗겨보면 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야……!”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바르바토스나 시트리 같은 분도 계시지 않사옵니까?” “얼씨구. 자네, 내 말을 헛으로 듣는구만. 말하지 않았는가. 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고!” 내가 화난 척하며 왼손을 보여주었다. “보게나. 손가락 두 개가 없지? 이거, 바르바토스가 달라서 내어준 것일세.” “예?” “사랑의 증표를 얻고 싶다던가. 자기가 제일 소중하다는 확약을 간직하고 싶다던가. 그런 제멋대로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내 손가락을 잘라갔지. 그리고 목걸이로 만들어서 갖고 다닌다네.” 내가 와인병을 쥐고 병나발을 불었다. “크흐. 나인들 어쩌겠는가? 바르바토스는 내 주인이나 다름없어……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원한다면 눈알이든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할 수밖에……전부 이기적이야. 전부…….” “……전하. 말씀이 과하십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안색에 그늘이 졌다. 촉감이 왔다. 상대방이 서서히 떡밥을 물어오고 있었다. “과하기는, 전혀! 내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마왕 따위는 되지 않았을 것일세. 마왕이라니! 모든 마인의 이상을 대신해서 이루어주는 존재라니!” 내가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족속이지 않은가. 사람이란 자신의 이상을 스스로 이루어야만 해……이상이란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야. 마왕은 태생부터 잘못된 것, 말하자면 이 세계의 오류일세……그렇고말고.” “…….” “솔직히 마인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지. 마왕이 그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느냐 없느냐, 오직 그뿐이지 않은가……요컨대 마왕이란 족속만 없으면 인간이나 마인이나 다를 바가――.” “전하!”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소리를 질렀다. “그 이상 말씀하시면 도에 지나치게 되옵니다!” “……그런가? 내가 도를 지나쳤는가?” 내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진심일세. 나로서는 정말이지 마왕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네……그저 정치꾼이야. 다른 정치꾼과 마찬가지로 모략을 짜고, 남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연설로 대중을 선동하고……그럴 뿐인 존재야. 그래, 도에 지나친 것인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정말로 도가 지나친 것은 마왕이 아닌가? 마왕들이 지껄여대는 헛소리에 수없이 많은 마인과 마물이 희생되어왔다……이바르 로드브로크. 나는 둘 중 어느 쪽이 도에 지나치고 있는지, 술에 취한 지금도 명확하게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네……명확하게…….”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 둘 다 묵묵부답으로 술을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앉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옳지. 나는 마음속에서 만면에 웃음을 활짝 피었다.   00253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음……?” “여쭈었나이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진실로 그리 생각하시는지.” 내가 고개를 들어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화려하지만 어두컴컴한 방. 촛불 몇 개가 처연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인 공간에서, 흡혈귀의 보라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보석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꼭 그처럼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시선이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여기서 한 번, 사양해둔다. 마치 술이 깼다는 것처럼. 지금까지 술기운에 힘입어 말해버린 것을 급하게 돌리고 싶다는 것처럼. 나는 술자리가 시작되고나서 전혀 입술에 대지 않은 물컵을 잡았다. 그리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을 깨려고 물을 마신다. 상대방에게는 그렇게 비추고 있겠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가 무엇이든 다소 과장해서 말한다는 것 말일세. 하하.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곳은 술자리입니다. 고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내 술잔을 채워주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증발해버리지요. 전하께서 속에 품고 계신 이야기가 있다면, 불민한 소인이나마 들어드리는 것 정도는 해내겠나이다.” “흐흐. 쿤쿠스카의 주인이 내 술친구인가. 본인도 참으로 출세했군 그래.” 여기서 또 다시 말꼬리를 돌려버린다. “그래. 슬슬 본인의 마왕성에 판매점을 내는 것을 논해야겠어. 본인은 그대와 흥정을 할 생각이 크게 없네. 이렇게 본체까지 보여주었거늘 이쪽 나름대로 성의를 보여야지. 안 그런가?” “……물론, 그래주시면 소인이야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슬쩍 포도주를 마셨다. 방금 우리는 새로운 화제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상대방이 술을 마셨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술을 마실 때는 입구멍이 막히므로 당연하지만 대화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된다. ‘자아.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대체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 번째, 상대방이 나에게 말을 양보한 경우. 요컨대 '그래, 새로운 화제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라는 태도이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제스처이다. 제법 재밌는 일인데, 사람들은 상대방한테 동의를 표시하고 싶을 때 오히려 약간의 딴짓에 열중한다. 이바르처럼 술을 들이키거나, 시선을 상대방한테서 30도 정도 기울인다……. 이러한 제스처를 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렇게 딴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야기가 너무나 올바른 나머지,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하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일부러 상대방한테 딴짓을 보여준다. 자신은 그 딴짓에 열중하고 싶지만 당신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실패했다. 그만큼 나는 당신의 말에 진심으로 집중하고 있다……. 대충 이런 의미이다. 따지고보면 꽤나 전술적인 제스처이지. 사람에게 진심이란 거의 언제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없는 진심을 가장하려면 소위 저 같은 '연극 도구'를 스스로 지참하는 수밖에 없다. 단, 지금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취한 몸짓은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아까 전에 대화 타이밍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가 아니었다. 이쪽이 주제를 꺼냈으니 상대방이 받아쳐줄 순서였다. 그런데도 타이밍을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즉 두 번째 경우……나에게 의도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저에게는 현재 전하께서 입에 올리신 주제가 썩 흥미롭지 않습니다. 더불어서, 화제를 돌리는 것 자체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매우 공격적인 의사표현이다. 일상대화 속에서야 스리슬쩍 넘길 수 있으나, 지금처럼 정치꾼과 정치꾼이 대작하는 자리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복싱으로 따지자면 거의 라이트훅에 가깝다. 아마도, 이번 공격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할까 지켜보고 싶은 것이겠지. ‘좋아.’ 여기까지 판단하는 데 이 초. 나는 물컵을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으면서 질문했다. ‘한 번 더 알아듣지 못한 척 무시할까? 어떨까? 좋은 대처일까?’ 곧바로 머리 한 구석에서 비토(veto)를 발동했다. ‘아니. 지금 나는 술이 화급하게 깨어 있는 상태를 연기하고 있어. 잔뜩 예민해져 있는 거다. 상대방의 제스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아무리 표정을 관리해도 어딘지 억지스럽고 꾸며낸 듯한 구석이 생겨버린다.’ 좋다.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의 반응인가? 벌써 삼 초가 지나려 하고 있다. 테이블에 물컵을 거의 다 내려놓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놈이 머리를 굴릴 대목은 이런 것밖에 없다, 멍청아. 얼른 해답을 내놔봐라.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고 거기에 따라 아부하는 것이 네놈의 특기 아니냐! ‘침묵은?’ 최악이로군. 세상에서 제일 작위적인 연기가 침묵이지. 질 낮은 배우들만이 침묵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한다.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아가라.’ 그거다. 이제 좀 쓸만한 대안이 나오는구나. 나는 입가에 상냥하게 미소를 그리며 생각했다. 그렇다. 지금 이쪽은 막 술기운에서 정신을 차렸다. 자기가 진심을 너무 과다하게 내비쳤음을 깨달아서 절찬리에 후회하고 있다. 상당히 예민해진 것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예, 전하.” “먼저 본인이 말을 돌리려고 한 것에 사과하지. 그래, 분명히 본인은 우리 둘 사이에 신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네.” 그런 상황에서 상대편은 이쪽을 공격해왔다. 어찌해야 할까?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들개처럼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답이라 확신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망설여지는 것일세. 자네는 끝까지 본체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어. 자네와 거의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의 몸을 가짜로 구해다가 내세웠지.” “전하, 그것은…….” “자네를 책망하려는 게 아닐세.” 내가 가볍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무얼. 자네와 어울린 지 벌써 몇 년이 되어가네. 나도 자네의 방식에 슬슬 익숙해졌어. 자네는 그렇게 시험과 시험, 관문과 관문을 마련해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부류인 게야. 그래.” “…….” “하지만 자네도 이해해주길 바라네. 자네가 마지막까지 본인을 시험한 대가로 인하여 나 역시 마지막까지 쉬이 마음을 풀 수가 없게 되었어. 기껏해야 술의 힘을 빌려서 밀어붙이는 게 전부였지. 그래, 그게 전부일세.” 이제부터 초조해져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편이다. 사람이란 영악해서 자기가 생각하여 해답을 내린 것만을 정답이라고 여긴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일단 의심한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면 곧 정답에 가깝다고 판단해버린다. 현재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걸린 문제는 오로지 하나――이쪽이 진심이냐 아니냐. 그걸 판단하기 위해서 소녀한테 주어진 재료는, 여태까지 내가 은밀하게 보여준 제스처들. 그리고 내가 처음에는 말꼬리를 돌렸지만 두번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 “좋습니다.” 짧게 양갈래로 묶인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전하께서 술기운을 빌리셨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오면, 오늘밤은 그대로 디오니소스께 가호를 받으면 되지 않겠나이까.” “호오.” 내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말인즉슨, 자네가 나한테 코가 삐뚫어질 때까지 퍼마실 것을 정중하게 제안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는가?”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오른손을 들어 공중을 휙휙 저었다. 어느새 소녀의 손가락 끝에는 실들이 달려 있었는데, 촛불 빛에 반사되어 실들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러자 방 저편에서 약 수십 개의 술병이 낚아채졌다. 소녀가 술병들을 잡아당겼다. 휙, 하고 빠르게 다가오는 그것들을 소녀는 망토를 펄럭임으로써 부드럽게 받아냈다. 환상적인 기예였다. “대단하군!”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망토를 물건받이로 쓰느라 소녀의 하얀 알몸이 훤하게 드러났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망토에 감싸인 술병들을 하나하나씩 테이블에 올렸다. 쿠웅. 쿠웅. 쿠웅. 마치 성채처럼 우람하게 술병들이 차례대로 들어섰다. 그것이 서른 개가 넘어서자 과연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력이 있었다. “소인이 감히 판단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보통 말술이 아니십니다. 소인 또한 술자리에는 이골이 나 있지요.” “보통 술로는 진솔하게 마음을 털어놓기 힘들다?” “말씀 그대로. 지금 전하께 진상한 것들은 모두 화탕지옥에서 엄별된 독주 중의 독주이옵니다. 평범한 흡혈귀가 마신다면 한 병에 주정뱅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고 소녀가 당돌하게 말했다. “저의 진심과 전하의 진심. 어느 쪽이 더 가벼울지, 승부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크흐.” 내가 재차 박수를 쳤다. “이제야 멋지게 나오는군. 본인은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을 열망했다네, 쿤쿠스카의 당주여.” 눈앞의 소녀는 틀림없이 똑똑했다. 모든 대화를 기억하고 또한 판단하겠지. 바로 그 똑똑한 면모에 자신의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모른 채. “하옵시면.” “아아, 승부하겠느냐고? 당연히 받아들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진심이란 게 애초부터 없으니까. 이번 술자리에 털어놓을 진심이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래봬도 바르바토스, 벨레드와 대작해본 몸이다. 마왕군에서 제일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겠지. 미리 말해두자면, 자네는 나에게 승부를 건 것을 후회할 것이야.” “전하와 대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소인에게는 영광이거늘 후회가 어디 있겠나이까?” 우리는 지금 정확하게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입장에서, 나는 이미 거의 모든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가 따로 있었다는 것. 그녀가 아주 예전에 마왕 때문에 연인을 잃었다는 것. 요컨대 나한테 들킬 본심 따위는 이미 없었다……. 어차피 본심이 전부 들켜버린 바에야 이제는 이쪽의 진심만 캐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잃을 게 없는 싸움이라면서. ‘사실은 자네가 잃을 것밖에 없는 싸움이지만.’ 원래부터 없는 진심을 캐내겠다고 승부에 뛰어들었다.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예컨대, 이바르 로드브로크.’ 나는 담뱃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자네는 내가 미리 <숙취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는 약초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지.’ 담뱃대에 쑤셔넣은 연초에 약초가 절반 가량 섞여 있었다. 제레미를 달달 볶아서 마련해낸 비장의 수단이었다. 하나의 약초가 아니라 여러 개를 조합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물건이니 냄새로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후우.” 담배를 깊이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때문인지 모르겠어도 효과가 죽여주었다, 껄껄. “그럼. 어디 신나게 마셔볼까.” “예. 소인이 먼저 따라드리겠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공손하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미 승부가 결정난 게임이지만 말이다, 원래 세상이란 그런 거다. 인생은 게임이다. 누가 승리할 것인지 미리부터 정해져 있다는 의미에서. 대기업이 카지노를 짓는 까닭은 결국 자신이 승리자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이윽고 다섯 시간. 우리는 정말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술을 퍼마셨다. 서른 병은 동이 난 지 오래였고, 새롭게 서른 병, 다시 새롭게 서른 병이 추가되었다. 그리하여 눈앞의 소녀는. “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바르으 로드브록? 취했는가? 취했어? 크하하.” “아닙니다……전하야, 말로. 취하신 게 빤히 보입니다만.” “아닌데! 전혀 아닌데!” 내가 깔깔 웃었다. 정말 술주정뱅이처럼 보였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든 나든 아까부터 혀가 꼬여서 숫제 중얼거리는 어투가 되어버렸다. “자아, 이젠 자네 차례에. 자네가 마실 차례야!” “좋습니다……갑니다앗!” 알몸의 소녀가 술병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호쾌하게 병나발을 불었다. 꿀꺽, 꿀꺽, 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더니 금세 한병이 또 비었다. “크으! 이제에, 전하 차례입니다……!” 참고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언제부터인가 망토를 벗어재꼈다. 알몸인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 가슴까지 붉어졌다. 완전무결한 술주정뱅이 소녀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좋아! 잠깐만, 담배 좀 피우고 말이야아.”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으음. 실로 향기로워라.   00254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후우우.” 입술 사이로 감미로운 연기가 새어나갔다. 눈앞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술에 취하여 막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볼을 붉힌다. 오른손에는 미주(美酒). 왼손에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부하가 제작해준 연초. 이것이야말로 인생, 이것이야말로 남자. 잇츠 쏘 뷰디풀 라이프.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표현하자면 부득이하게 양놈의 입을 빌려야만 했다. 나는 약간의 감동에 젖어 허공에 처연히 사그라드는 담배 연기를 보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무언가를 착각했는지 능글맞게 웃었다. “전하아? 더 이상 안 되겠으면, 술을 치우겠습니다?” “끌끌. 혀가 다 풀린 사람이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서운걸.” “소인의 혀는 멀쩡합니다마안―?” “퍽이나 멀쩡하군.” 너, 입가가 아예 녹아내려서 표정 관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다. 내가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처음에 자신만만했던 소녀의 얼굴은, 병에 든 술이 줄어들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이윽고 술병이 텅 비어버리니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표정이 뚱해졌다. 슬슬 이쯤에서 찔러볼까. “푸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소녀의 목소리가 약간 밝아졌다. “혹시 힘드십니까아?” “끄으응. 아니. 더는……후우, 힘들구만.” 리얼리티를 살려주기 위해서 손에 든 술병을 떨어트렸다. 카페트가 깔려 있어 유리병이 부드럽게 착지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내가 취해도 단단히 취했다 생각했는지, 맞은편에서 벌떡 일어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소녀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하? 그만하시겠사옵니까? 그럼, 소인이 이긴 걸로 해도 될련지요?” 얼핏 들으면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목소리에서 기쁨이 마구 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니까 꽤나 귀여웠다. 넘어트려서 범할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현명한 자. 마왕인 나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으면 도리어 정치적으로 써먹을 게 생겼다며 좋아하겠지.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 나는 딱히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미색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던전 어택 마니아로서 정식 히로인을 공략해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내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그래……항복하겠네! 도저히 안 되겠군. 항복이야. 어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대로 물어봐. 내 뭐든지 대답해주겠어.” “허면……전하. 염치 불구하고 여쭙겠나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어찌하여 소인의 과거지사를……소인이 본체를 숨겼다는 것이나 소인이 옛 연인을 잃었다는 것이나, 그런 것을 알고 계시온지요?” “아하? 그거 말인가. 간단하지. 나에게는 과거를 보는 능력이 있다네.”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들려주었다. “과거를 보는 능력이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옛날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그런 게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뭐, 대단한 능력은 아닐세. 무조건 떠오르는 게 아니거든. 예컨대 마왕들의 과거는 전혀 떠오르지 않고. 아주 드물게 떠오르고 그래.” 소녀가 '예언 능력이 아니었는가……' 하고 중얼거렸다. “하옵시면. 부르노에서 합스부르크 황가의 여인을 공격했던 것도?” “아아. 그건 운이 좋았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보자마자 떠올랐거든. 그래, 아마도 상대방이 가장 괴롭게 느끼는 과거……그런 게 떠오르는 것 아닐까 싶네.” “과연.”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납득한 기색이었다. “전하께서는 마왕이……마왕의 존재의의가 의문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하옵니까?” “으음? 말하지 않았나. 마인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그런 걸 구분하는 것부터가 마왕들의 잔수작이라고.” 나는 머리가 아픈 것처럼 간간이 신음을 섞어주며 얘기했다. 마치 술주정뱅이가 장광설을 늘어놓듯이 길게 지껄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되 어디까지나 취중진담이라고 착각하게끔. “이성이 있다는 점에서……그래. 이성적인 존재자라는 점에서, 인간종과 마족은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어. 이성적인 존재자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존재일세.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도 마왕 떄문에. 오로지 마왕 때문에 마족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어…….” “…….” “마인이 마인으로 거듭나려면, 우선 마왕이 싸그리 없어져야 하네. 그래. 나의 목적은……나의 목적은 모든 마왕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야.” 소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마왕을……?”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 될 것일세. 아아, 그렇고말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마인은 정당하게……진실로 이성적인 존재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돼.” “하, 하오나.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월맹군을 성공으로 이끄시지 않았사옵니까?” “중요한 건 균형이다.” 내가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마왕들이 주장하는 것 중에서 딱 하나 올바른 게 있지……바로 지옥은 마인이 살아가기엔 너무 척박하다는 사실이다. 오크족을 봐라. 대륙으로 나간 오크족은 방방곡곡에서 융성하여 번식하고……지옥에선 어떠한가? 기껏해야 수천이다. 대륙과 지옥의 환경이 그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어 한입 머금었다. “크흐. 이런 상태에서 마왕들이 다 죽는다면 어찌될까? 유례없는 대혼란이 일어나겠지. 그리고, 인간종은 기회를 틈타 대륙에서 아예 마족을 싸그리 몰아낼 것이야. 마왕들을 없애기 전에 인간종의 세력을 줄여놔야 하네.” “균형…….”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균형이다.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서 인간종과 마왕군, 양측의 세력을 적절하게 깎아놔야 한다. 제8차 월맹군은 그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이었어. 다만 아주 약간 거하게 이겨버렸지. 계산착오였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전을 일으켰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전쟁은 아가레스 전하와 가미긴 전하가 독단적으로…….” “무르군. 가미긴은 전쟁을 획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징을 받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도리어 평원파의 땅을 떼어주었지. 그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설마, 단탈리안 전하께서 처음부터 전쟁을 계획하셨다는 말입니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가레스는 우둔하지만 아주 멍청하지는 않아. 가미긴 정도 되는 아군이 붙어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겠지. 가미긴을 설득하기 위해 모라비아 지방을 통째로 건내줘야 했지만, 무얼.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 소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덕분에 그럭저럭 마왕군의 세력을 줄여놨지. 이제 더 이상 마왕군은 월맹군 전쟁을 이어나갈 기력이 없다. 아니, 설령 기력이 있다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겠지. 왜인지 아는가?” “……소인으로서는, 전혀.” “흐흐, 술에 취했군. 평소였다면 쉬이 대답했을 텐데. 간단하다. 마왕군에 의심의 싹이 심어져버린 것이야. 아가레스가 이미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 다른 마왕이 아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실제로 중립파는 내전 이후에 월맹군 원정을 중단하였다. 언제든지 아군이 배신할지 모른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일이 제법 있었으며, 가장 최근에 아가레스가 배신했다. 제8차 월맹군은 이제 일단락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종이 한숨 돌릴 기회가 생겨난 것이다. 다행이지 뭔가.” “만약 인간종이 세력을 회복하면……전하께서는 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내가 단언했다. “다음 전쟁에서는 인간종도 마왕군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겠다. 설령 마왕들이 모조리 죽더라도 감히 인간종이 전쟁을 벌일 수 없도록. 그래, 버니시아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정도를 남겨두면 딱 알맞겠지……그러면 얼추 균형이 맞게 될 거다.” “외도(外道)입니다. 터무니없는 외도입니다!” 소녀가 격앙해서 소리쳤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나가리라 생각하십니까! 종족을 불문하고 수십만……어쩌면 백만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마인에게 자유를 돌려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도리어 마인들을 그리 죽음으로 몰아넣다니……언어도단입니다!” “호오. 그렇다면? 이대로 내버려두자는 말인가.”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어차피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동족에게 애정이 깊지 않았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월맹군 때문에 죽어나간 인간종과 마인이 이미 수백만이다.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죽어나갈 생명은 또 얼마인가? 그렇게 수천 년이 의미없이 반복되어도, 여전히 마왕들은 살아 있고 여전히 마족에 자유란 없을 터.” “…….” “어차피 수백만의 목숨이 사라질 것이라면 마왕이라도 죽어야 마땅하다! 외도이든 뭐든 상관없다. 이 방법이 더 올바르다!” 나는 소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여리고 자그마한 손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자네는 원망스럽지도 않은가. 나에게 말해보라. 과거에 그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얼마나 억울한 짓을 당했는지. 그대가 마왕에게 품고 있는 원한을 나에게 말해다오!” “소인은……소인은…….” 소녀의 입가가 떨렸다. “……약소한 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바싸고 전하가……소인의 일족에 약속했습니다. 전하를 도우면 후일 풍요와 번영을 주겠다고.” 드디어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입에서 내가 듣길 원하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싸고. 서열 제3위의 마왕. 아주 먼 옛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에게 충성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용족과 싸우던 도중에 위기에 처하자……바싸고는…….” “바싸고는?” 내가 강하게 되물었다. “바싸고가 무엇을 했지?” “소인의 일족을……버림패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물을 흘렸다. “강제력을 써서……우리가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어나가는 가운데, 바싸고만이 도주해서……아버지도, 어머니도, 제 연인도, 모두……저 혼자만. 시체 밑으로 숨어들어, 저 혼자만 구차하게…….” “…….” “마왕들이란 어차피 그런 족속……소인은 맹세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우리를 우롱하고, 능욕하고, 배신한 그들에게 똑같은 무게의 배신을 돌려주겠노라고……!” 그래서 일족을 모두 잃어버린 소녀는 홀홀단신 상계로 뛰어들었다. 마왕들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소녀는 마계 제일의 상회를 만들어 마왕들의 돈줄을 휘어잡고자 다짐했다. 흡혈귀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때로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어떻게든 노력해나갔다. <던전 어택>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배반하자 실로 후폭풍이 어마어마했다. 마계 제일의 상회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쿤쿠스카 상회에 기대고 있던 수많은 군소상회가 도산해버렸고, 니블헤임의 경제 자체가 파탄났으며, 당연하게도 마왕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렸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복수를 이루어내고 만 것이었다. “으흑……으읏…….” 소녀는 울고 있었다. 작은 어깨를 떨면서 이미 오래 전에 죽어버린 가족과 연인을 그렸다. 수천 년의 시간이란 복수심도, 가족에 대한 애정도 녹슬어버리기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날 맹세한 마음을 곱씹으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알고 있다.” 나는 그녀를 꾸욱 안았다. “그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마왕이 얼마나 참혹한 존재인지 전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그대와 함께하고자 했어. 그대만이 마왕에 대한 나의 증오를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전하.” “이바르 로드브로크. 우리는 동지이다. 나는 마왕이고 그대는 마인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의 마음을 품고 있다.” 내가 소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모든 마왕을 멸하자. 다시는 마인들이 마왕 때문에 눈물 흘릴 일이 없는 세계를 만들자. 그것이 우리 둘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라고 믿자. 설령 수백만의 피를 흩뿌리게 되더라도…….” 소녀가 내 가슴에 안겨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전부 거짓말이지만. ‘크흐.’ 소녀는 지금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마왕을 모두 없애버린다고? 그럼 나까지 없애자는 얘기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지. 자살은 내 취미가 아니다. 그냥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기분에 맞추어서 그녀가 간절히 듣기를 원하는 얘기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됐다, 됐어! 조건을 전부 클리어했어!’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 한계를 깨부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제1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단 둘이서' 술을 마실 것. 제2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대작하기 시작한 지 게임 기준으로 최소 '세 시간'을 넘겼을 것. 제3조건. 플레이어 캐릭터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처음 만나고서 게임 기준으로 최소 '일 년'이 흘렀을 것. 제4조건.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 것. 네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면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50 이상 올라갈 수 있다. 이후에는 호감도 99까지 순조롭게 올릴 수 있었다. 호감도가 100이 되려면 조건을 하나 더 완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대망의 호감도 99 한계선을 깨는 조건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를 보는 것이지!’ 그렇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용사에게 합류했을 때도 처음부터 본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까 전에 나한테 보여주었던 몸, 눈동자 색깔이 다른 몸을 사용했다. 실로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 이걸 어쩌나? 나는 이미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본체를 보고 있는데. ‘즉……호감도 락이 두 개 동시에 깨졌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내가 그동안 제발 본체를 보여달라, 제발 본체를 보여달라, 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본체를 들고 나와 만났을 때부터 사실상 승부는 끝났다. 말하지 않았는가? 게임이란 시작할 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깊은 우정! 상대방이 당신을 진심 어린 동료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우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완전무결한 신뢰! 상대방은 당신을 생애의 반려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우정과 신뢰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호감도 한계가 깨질 때 나타나는 안내문이 눈앞에 번쩍거렸다. 아직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20이 채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감도 한계가 깨졌다는 이유 때문에 효과가 발휘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꼼수 중의 꼼수. 이제부터 호감도가 막히는 일 없이 쭉쭉 올라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 호칭 효과 때문에 호감도가 쑥쑥 오를 터. 공략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가 되겠지. “흑……흐윽, 읏…….” 내 품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나는 상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약간 거짓말을 해버렸지만 이제 와서 거짓말에 캥기는 양심 따위는 일절 없었다. 정식 히로인을 공략했다는 달성감이 가슴에 벅차올랐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공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00255 세상에서 제일 빠른 남자 =========================================================================                        “괜찮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 나는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쓰다듬으며 소녀의 얼굴을 내 얼굴에 꾹 눌렀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아직은 거짓말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느릿느릿하지만, 단 한발자국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렇게 기나긴 밤을 지새다보면 멀리서 천천히 새벽이 온다.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일세.” 나는 한껏 상냥하게 속삭여주었다. 마치 주술사가 소녀에게 최면을 걸듯이. 내가 당신을 오롯하게 받아주겠다는 듯이. “모든 것, 정말로 모든 것이. 이바르 로드브로크. 긍지 높은 진조여.” “…….” 문득, 소녀가 젖은 눈망울로 이쪽을 흐릿하게 올려다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촛불이 어둠을 더 어둡게 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오롯하게 나만을 비추고 있었다. 소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전하.”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모를 만큼 난 둔탱이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한 남녀. 앞으로 함께 걸어가기로 맹세한 두 사람. 어두컴컴한 방, 촛불 그리고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끈덕지근한 술향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나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감았다. 연한 분홍빛의 입술이 매끄러워 보였다. 나는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그저 자그마한 이마에 스치듯이 키스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째서…….” “나는 그대처럼 소중한 아가씨를 술기운에 품을 정도로 무례하지 않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미소를 화사하게 지었다. 안 그래도 빨간 소녀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띠링, 하는 효과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흡혈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4 오릅니다!」 정말 처음으로 그녀의 호감도가 올라갔다. 상급마족 중에서 상급마족인 히로인의 호감도가 한꺼번에 14씩이나 오르다니. 분명히 호감도 한계선이 깨진 것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시선을 피하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저기……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황송하옵니다만 단지, 그것이…….” “자네, 이제보니 제법 귀엽군.” “……!” 소녀는 얼굴이 다시 한번 화악 붉어졌다. 인간이 어디까지 빨간색에 접근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호감도가 2 올랐다는 홀로그램 알림창이 추가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호감도 대박 잔치였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나한테서 벗어나려 팔을 마구 움직였다. 별반 소용은 없었다. 술에 취해서 손짓이 엉망진창으로 흐느적거렸고, 내 몸을 밀어내지 못해 쉽게 미끄러졌다. “저, 전하. 밤이 지나치게 깊었나이다. 소인은, 그러니까. 소인은――흐읍!?” 그녀는 말을 다 끝마칠 수 없었다. 내가 도중에 막아버렸다. 다가올 때 상냥하게 밀어주고, 물러갈 때 과격하게 쫓아가준다. 그것이 내가 즐겨쓰는 전술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생각치도 못한 일격에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는 팔을 휘저었다. 저항이라기에는 적이 나약했다. “읍……흐읍, 하아. 잠깐……으읍.” 입술이 겹치고 혀가 얽혀들었다. 순간적으로 틈새가 벌어질 때마다 그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입속은 밤새도록 마셨던 미주처럼 감미로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밀어내는 소녀의 팔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걸 확인하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내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어떤가. 이제 술이 조금 깨었는가.”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부끄러움에 목소리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자가 몸을 허락할 경우 정말로 진심으로 허락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분위기를 타서 허락해버렸는지, 두 경우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여자와 하룻밤 즐기고 말 생각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기나긴 시간을 쌓아올릴 생각이라면 쌍방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시작해야만 한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보통 매우 어렵다. 서로 술에 취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흡혈귀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4 오릅니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이상한 방법으로 진심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라든지. “으응…….” 나는 소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재차 키스했다. 이번에는 이쪽을 밀어내려는 반항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력에 이끌려 소파에 누웠다. 그날밤, 수천 년 동안 남자를 잊어버린 채 살아온 소녀는 쾌락이 무엇이었는가 철저하게 기억해냈다. * * * 소파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나신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으응, 응……흐으읏…….” 쾌감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는지 잠결에 간간이 신음했다.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 허벅지, 머리카락, 가랑이에 흘러내렸다. 촛불에 드문드문 비치는 새하얀 몸이 오히려 눈부셨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우.” 연초를 빨았다. “……이제 막 여자로 돌아온 녀석한테 좀 심했나.” 약간 과하게 굴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평소에 라우라를 상대하다보니까 기준치가 너무 높아져버렸다. 이제 성노예 레벨이 놀랍게도 S를 찍어버린 라우라는, 하루종일 몸을 섞어도 두어 번 기절할지언정 끝까지 날 상대해주었다. 라우라와 나 사이에는 기본이 여섯 시간이었다. 거기에 익숙해져버린 내가 그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폭주했다. 아이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의 몸으로 돌아온 걸 고려했어야 하는데! 결과는 자명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아예 혼절해버렸다. “으으. 첫경험에 너무 과격한 기억을 심어주게 되었네.” 바보 멍청이 머저리 녀석. 물론 엄밀히 말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처녀는 아니었다. 애당초 마왕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한 이유가 과거의 연인 때문이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이미 수천 년이 흘러버렸다. 말하자면 처녀에도 유효기간이란 게 있어서, 수천 년 정도 여자로서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냥 도로 처녀로 취급해야 마땅했다. 마치 천년동정 벨레드 형님이 여전히 동정이듯이. 그만큼 배려를 해줘야 했는데, 씁. 게임의 정식 히로인이 내 품안에서 쌩으로 헐떡이는 광경을 보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브레이크가 박살나버렸다. 뭔가가 폭발했다. 소파에 힘없이 쓰러진 소녀를 보며, 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적어도 씻겨라도 줘야.” 나는 손수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적당한 통을 구해다가 물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벽난로에 달구어진 돌을 물통에 빠트렸다. 수증기가 일어나면서 물이 데워졌다. 뜨거운 물 완성! 망토자락을 찢어서 임시로 수건을 만들었다. 이 수건을 뜨거운 물로 적셔서 조심스럽게, 잠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몸을 닦아주었다. “흐흐흥, 으흥.”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딱히 괴로운 노동이 아니었다. 도리어 즐거웠다.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일을 마다할 남자는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걸. “으응……흣…….” 중간중간에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신음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얇은 팔뚝과 매끄러운 종아리, 야트막하게 부풀어오른 가슴까지, 따뜻한 수건으로 씻겨주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예의였다. 만약 여자가 격렬하게 한판 뛰고 정신을 잃었다고 해보자. 힘겹게 깨어났더니, 이게 웬걸. 자기 몸이 끈적끈적하고 미끌미끌한 액체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별안간 인생 최악의 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으으으.” 신이시여, 상상만 해도 정말로 끔찍하군……. 부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어젯밤에 폭주하여 배려하지 못한 나로서는 적어도 그녀에게 '괜찮은 아침'을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뭐, 본편 내용이 과격했을지라도 정작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으면 사람이란 '어젯밤은 멋졌어!' 하고 믿어버리거든. 요컨대 이게 다 상대방이 나한테 좋은 이미지를 가지도록 사전 작업해두는 거다. “청소 완료!” 잠시 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깨끗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도로 새하얗고 미끄러워졌다. 그녀를 소파에 눕힌 다음, 절을 올리듯이 손바닥을 합장했다. 나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흐응……끙…….” “정말 맛있었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올림포스의 여신들께 삼가 감사를 아뢰오니. 어제는 가미긴, 오늘은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일은 또 파이몬과 시트리가 예정되어 있사오니 이야말로 여신들의 축복이요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아프로디테 여신님의 미천한 종으로서 다만 여신께서 세상에 명하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경작할 따름이오니, 만약 저에게 미진한 점이 있다면 아량을 베푸시고, 만약 저에게 칭찬할 점이 있다면 더더욱 큰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아멘.” 나는 사제 시절에 배운 손놀림으로 성호 비스무리한 것을 그었다. 사실 난 아프로디테의 사제가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사제이고, 아르테미스 여신께는 아멘이라는 구호 따위가 전무하며, 심지어 여신께서는 다름 아니라 처녀와 순결의 수호신이시지만――나는 여신님의 뜻을 개혁교리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세상에 모든 처녀와 순결을 보다듬어 수확하거라.' 원래 모든 종교에는 개혁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음, 끝났다. 완벽하군.”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내 망토를 이불마냥 살짝 덮어주었다. 그리고 가뿐해진 몸으로 상회 건물을 나갔다. “흐으흥~. 진격하자 조국의 아들딸이여~.” 여신님의 자비로우신 뜻에 오늘도 충실하게 따른 여파일까. 상회를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으며 더없이 상쾌했다. 나는 기분좋게 팔자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담배를 피웠다. 시원한 아침공기와 향긋한 연초내음이 섞여들어 최고의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창칼을 잡으라, 시민동지들이여~. 으라라, 그대 부대의 앞장을 서라~.” 햇빛이 내 몸에 환하게 부딪쳐왔다. 이럴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세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세상은 이처럼 아름답지 않은가? * * *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숨을 들이키며 화들짝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녀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고 어젯밤 일을 기억해내려고 하자,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두통이 덮쳤다. “……으윽.” 숙취였다. 비로소 방바닥에 널린 술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른 병, 쉰 병, 일흔 병……상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대로 물건의 숫자를 세었지만, 두통이 방해했다. 그녀는 일흔두 병까지 세고 포기했다.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은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단탈리안 전하를 뵙고…….” 소녀가 사고가 아니라 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내뱉어진 것의 힘을 빌어서 차근차근 어젯밤 있던 일을 추적해나갔다. “내기를 해서……술을 마시다가……그리고…….” 그리고 떠올랐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소리없이 절규했다.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현재 마왕군에서 가장 위험한 분자와 몸을 섞다니 제정신인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리 어리석게 행동할 수 있는가, 로드브로크! 멍청한 녀석! “……아니, 아니다. 손해만 있는 '거래'는 아니다.” 소녀가 허겁지겁 혼잣말했다. “그래. 단탈리안 전하와 보다 깊은 관계를 맺으면 다른 측면에서 마왕군에 개입할 수가 있다. 바로 그런 점을 이제부터 활용해야 한다……좋다. 사랑에 빠진 숫처녀를 연기하여 전하를 속인 다음…….” 너무 발버둥을 친 탓일까. 무언가가 털썩, 하고 몸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엔 상당히 고급스러운 망토가 떨어져 있었다. “…….” 소녀가 망토를 집어서 끌어올렸다. 이것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단탈리안 전하의 망토였다. 그녀는 양손으로 망토를 펼쳐잡아서 한동안 그걸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슬그머니 망토에 코를 가져다댔다. 말없이 망토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 다행히 그녀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0256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단탈리안은 성격이 너무 악독하와요.” 파이몬이 홍차를 홀짝였다. 얼굴이 태평하여 말이랑 표정이 달랐다. 우리는 나룻배에 올라타 있었다. 하얀색으로 깔끔하고 단정하게 채색된 나룻배. 한없이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면서 강을 타고 흘렀다. 물의 정령이 배밑을 잡고 이끌어주는 덕분에 편안했다. 평화로운 한나절. 정령을 뱃사공으로 삼아 나룻배 유람을 즐긴다. 마왕이 아니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사치이겠지. “조금 더 여성을 배려할 수 없겠어요?” “여성을 배려하라니. 저만큼 여자를 배려하는 남자가 따로 없습니다.” “아휴.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라도 않을 텐데요. 시트리, 어떻게 생각하세요?” “응?” 홍차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과자만 먹던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파이몬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곤란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아, 그. 파이몬 언니의 말이 맞지만. 단탈리안은 정말 상냥하다고 할까……배려를 잘 해주는 편이라고 할까……으으. 미안해, 언니.” “이래서 여자의 우정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와요.” 파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는 언니, 언니 하고 귀엽게 쫓아오던 시트리가 남자한테 푹 빠져버려서는. 천 년 동안 자매로 지내오던 저보다 남자가 더 소중하다는 얘기이죠? 정말 실망이에요, 시트리.” “아, 아앗!” 시트리가 과자를 내던지면서 허둥지둥거렸다. 퐁당, 하고 케이크가 강물에 빠졌다. “아니야! 단탈리안은 여자를 배려하지 못하는데다 나쁜 녀석이야! 언니 말대로 어찌나 악독한지 머리카락 냄새만 나도 여자들이 죄다 줄행랑쳐버릴 지경인 거야! 여신들도 지상에 단탈리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지상을 살피지 않은 지 오래되었대.” 시트리가 제 딴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그 순간, 파이몬과 내가 눈짓을 나누었다.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확실하게 의사를 교환했다. “응, 단탈리안은 나빠. 언니 말이 옳아.” “……너무하는군요, 시트리.”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트리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저 상처 받았습니다.” “아? 어라?” “세상 만인이 저를 손가락질하며 욕할지라도 시트리만큼은. 그래요, 시트리만큼은 저를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트리도 저를 천하의 나쁜 놈이고 상종하지 못할 녀석으로 여기고 있었군요…….” 시트리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단탈리안, 그러니까 이건 언니 때문에!” “파이몬 때문이라고요? 파이몬 때문에 진심에도 없는 걸 지어서 말했다는 겁니까?” “으……으응.” 내가 날카롭게 시트리를 노려보았다. “시트리는 만약 누군가가 시키면 진심에도 없는 말로 저를 험담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시트리에게 있어 저 단탈리안의 존재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군요. 여신이시여, 저는 그동안 시트리를 진정한 친우라고 생각했거늘……!” “으아아? 으아에?” 시트리가 안절부절하지 못해서 내 손을 덥썩 붙잡았다. “미, 미안해. 단탈리안. 난 너가 상처받을 줄 모르고……언니가 화날까봐 무서워서, 그냥 무심코……미안해. 진짜루 진심이 아니었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잠깐만요. 시트리. 그게 무슨 말이와요?” 파이몬이 옆에서 불평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시트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시트리는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방금 저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어, 언니야? 그게 아니라.” “실망이와요. 정말로 실망이와요. 아아, 시트리가 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참고로 이 세계에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다만, 귀족 부인들이 부채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장담하건대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부채로 입을 가린 다음에 대놓고 한숨을 쉬면 엄청나게 재수없었다. 상대방을 빡치게 하는 데 이만한 제스처가 없었다. “더 이상은 시트리를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우정에도 녹이 스는 법인걸요.” “으……으으!” 결국 시트리가 폭발했다. “언니도, 단탈리안도, 전부 미안해요! 사죄하는 의미에서 제가 배를 몰 테니까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나룻배가 휘청거렸다. 우리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트리는 그대로 강물을 향하여 다이빙했다. “꺄아.” 물방울이 거하게 튀어오르자 파이몬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저건 연기였다. 시트리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는 파이몬이 부채 너머로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짓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파이몬. 표정을 관리하셔야죠.” “그러는 단탈리안도 히죽거리고 있는걸요?” “어이쿠야.” 이런. 시트리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그만 방심해버렸다. 우리 두 사람은 쌍으로 방긋거리면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시트리는 헤엄치며 나룻배를 뒤쪽에서 밀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이끌어주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나룻배가 나아갔다. 시트리는 헤엄을 치는 와중에도 간간이 소리쳤다. “미안해요! 파이몬 언니, 미안해! 단탈리안, 미안해!” 그 광경을 보고 누구인들 웃지 않겠는가. 마침내 우리는 빵 터져버렸다.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퍼져올라 햇빛 속으로 찬란하게 흩어졌다. “음. 가끔은 이렇게 뱃놀이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홍차랑 과자가 전부 엎어졌지만요. 이렇게 세 명이서 즐기는 것도 오랜만이와요.” “여러모로 바빴으니 말입니다.” 파이몬이 다소곳하게 미소를 지었다. “덕택에, 총 서른세 곳의 자유도시가 들어섰어요.” 해방동맹은 프랑크 내전에서 크게 패배했다. 그러나 앙리에타라는 희대의 영웅이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폴리투니아 왕국, 튜튼 왕국, 사르데냐 왕국……각 지방에서 민중이 성공적으로 봉기하였다. 순짜 농민이 혁명을 성공시킨 곳도 있었다. 길드 마스터나 신진 귀족이 주도하여 혁명한 곳도 꽤나 많았다. 그리하여 현재 대륙에는 자유도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파이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국,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는 건 실패했지만요…….” “무엇이든 처음부터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파이몬. 이것이 비록 우리에게 있어 자그마한 발걸음으로 여겨질지언정, 역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 될 것입니다.” “…….” 파이몬이 멍하게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끔씩 단탈리안은 깜짝 놀랄 만큼 멋들어진 말을 하네요. 예술적인 재능이 전무한데도. 신기해요.” “모르셨습니까? 상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자 하면 무사 여신들께서 저절로 은혜를 내려주시는 법입니다.” 내가 손을 뻗어서 파이몬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파이몬은 어머나, 하고 부채로 입을 가렸다. 별로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또 어제 누구를 홀렸나요?” “제 솜씨가 미진한 탓인지 어제는 영 운수가 나쁘더군요. 밤자리가 외로워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놓치지 않을 작정입니다.” “어머나.” 파이몬이 기쁜 듯이 꺄르르 웃었다. 나는 내친김에 손을 슬쩍 위쪽으로, 더 위쪽으로 옮겼다. 손목을 잡았다가 팔을 스르륵 쓰다듬었다. 파이몬은 마치 고양이가 몸을 가져대듯이 기꺼이 나의 손길을 허락했다. 이윽고 파이몬의 붉은색 머릿결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예에. 소녀도 나룻배에서 한 적은 없으니 기대되지만요.” “아무래도 목적지에 벌써 도착해버린 것 같군요.” 우리가 눈길을 돌려 강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도시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른다는 표현은 약간 과격할까. 시꺼먼 연기가 대여섯 줄기 피어올랐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창칼을 쥐어잡고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드디어 일 년 만에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하는군요.” “대륙 중부에서 제일가는 요새도시였으니까요. 고작 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사와요.” 하이델베르크는 접경 지대의 요새였다. 네카어 강을 끼고 완성된 이곳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엘리자베트 통령의 국가가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관리하는 도시였다. 마왕군이 더 이상 대륙을 침범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하며 쌓아올렸지. 솔직히 말해, 하이델베르크는 난공불락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성벽 자체가 두텁고 높았다. 사방을 해자로 둘러싼 데다 성탑이 뺴곡하게 들이찼다. 여기에다 규모까지 컸다. 요새 안에서 거주하는 시민만 해도 일만이 넘었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세상에 어느 요새에 시민이 일만이나 산다는 말인가? 그 시민들이 전부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이골이 난 병사. 여기에다 기사단이 자그마치 구백 명. 월맹군 전체가 휘몰아친다면 또 모를까, 현재 월맹군은 끝장나 있었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이곳을 산악파의 군세만으로 점령해야만 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산악파는 지난 전쟁에서 최선봉에 서느라 전력 소모가 극심했다. 게다가 이 년 전에 일어난 내전에서 또 한번 전력을 소모했다. 저런 괴물 같은 요새를 거꾸러트릴 힘이 없었다. “요새를 포위하면 될 것 아닌가.” 이때 라우라가 계책을 내놓았다. 요새가 너무 난공불락이라 곤란하다며 파이몬이 내게 상담했고, 나는 곧바로 라우라한테 상담했다.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네카어 강을 옆에 끼우고 있습니다. 설령 도시를 포위하더라도 적군은 강줄기를 통하여 계속해서 보급품을 전달받겠지요.” “그러니까, 주군. 바로 그 강줄기를 봉쇄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흐음?” 네카어 강은 강폭도 오육백 미터에 이르렀다. 그걸 무슨 수로 완벽하게 틀어막는가. “뭐, 감시선을 배치하면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합스부르크 공화국 군대는 유능합니다. 야간처럼 감시가 어려운 시간대를 활용해서 보급하겠지요. 그런 것까지 완벽하게 막아내기란 불가능하죠.” “나 참. 주군은 정말 전술에는 둔하군.” 라우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감시선을 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아버린다. 허면 애시당초 보급선이 오갈 수도 없을 것 아닌가.” “네?” 다리를 만들어서 강줄기를 봉쇄해? “……강폭이 그리 넓은 곳에 다리를 놓으려면 어마어마한 인력과 자원이.” “굳이 제대로 된 다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교각을 확보해두고 전함들로 다리를 이어붙인다. 봐라, 주군. 훌륭한 다리가 완성된다.” “…….” 내가 고심에 잠겼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써먹었던 것처럼 전함들을 서로 이어붙인다는 것이다. 나룻배로 임시적인 다리를 만드는 일이야 흔했지만 거대한 전함으로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지나치게 엽기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가능하겠군요. 아니, 반드시 성공합니다. 바타비아 공화국은 우리의 편. 몰래 그쪽 강줄기를 거슬러서 전함을 끌어오면.” “아아. 포위망이 완성된다.” 라우라가 빙그레 웃었다. “하이델베르크가 제아무리 대륙 중부 최강의 요새라 한들 완벽하게 이루어진 포위망에서 몇 년이나 버티겠는가? 기껏해야 일 년이다.” “요새를 함락하느라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느긋하게 일 년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곧바로 라우라의 계책을 파이몬에게 타전했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처음 내 얘기를 듣고 어디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얘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두 마왕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으응, 너무 기발한 계책이라서 불안한 면이 있지만.” “확실히 그럴듯하네요. 좋아요, 단탈리안. 그 계책을 전격적으로 수용하겠사와요.” 역사상 유례가 없던 방식의 요새포위전이 시작되었다.   00257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우선 전함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였다. 바타비아 공화국……그러니까 사실상 파이몬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국가는, 최강의 해군을 자랑한다. 순전히 정부에 소속된 대형 갤리선만 헤아려도 무려 육십 척이 넘는다. 괴물 같은 해양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파이몬이 간단하게 말했다. “우리 마왕군이 몰래 약탈한 걸로 위장하죠.” 평화로운 시기에 대형 전함은 곧잘 무역용으로 활용되었다. 내륙까지 들어와서 장사하는 함선을 산악파의 수중 몬스터가 급습. 일곱 척을 여유롭게 강탈해왔다. 일반 상인들이 몬스터의 앞니에 처참히 물려 죽은 것은 물론이었다. 내가 어쩐지 우스워서 말했다. “바타비아가 소유한 함선 아닙니까? 따지고보면 파이몬의 물건을 파이몬이 훔친 꼴이군요.” “어머나. 저는 공화국을 제 사유물이라고 여기지 않는답니다? 국가의 사유화는 참주정으로 가는 지름길인걸요.” 파이몬이 싱긋 웃었다. 참주정이란 독재국가 비스무리한 물건이다. “시민 여러분의 물건을 잠시. 아주 잠시 빌릴 뿐이에요.” “잠시 동안 빌리는 와중에 함선에 타고 있던 상인들이 떼로 몰살당했습니다만…….” “그 사람들, 번번이 독점을 유도해서 시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상회 출신이거든요. 언제고 기회를 봐서 몰살시키고 싶었어요.” 파이몬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벌한 얘기를 꺼내었다. “정부 차원에서 싼값에 대형선을 빌려준다고 하니까 덥썩 미끼를 물던걸요. 이번에도 소도시들에 독점을 유발할 계획이었던 모양인데……후후. 쓰레기는 청소되기 마련이지요. 안 그런가요?” “하하하…….” 이럴 때 파이몬이 마왕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파이몬은 이상주의자인데다 공화주의자인 주제에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쓰레기는 청소되어야 한다며 수백 명의 인간을 주저없이 강물에 빠트려 익사시켰다. 이런 인물이 배후에서 감독했기에 공화국은 타락하지 않았겠지. 땅덩어리가 콩알만큼 작으면서도 열국과 대등한 국력을 자랑했다. 모르긴 몰라도 파이몬이 '청소'한 인간의 숫자가 천 명은 가뿐히 뛰어넘으리라. 그중에는 분명히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가. 전함들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일렬로 주르르 배치시켰다. 양쪽 강변에 튼튼하게 교각을 만든 다음, 중간에 전함들을 세워놓으니 과연 다리가 뚝딱 완성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이 ‘어? 어?’ 하는 사이에 포위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요새주둔군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다리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물줄기가 막히면 보급선이 끊겨버리며, 보급선이 끊겨버린 상태에서 포위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이 공격해오리라는 사실을 빤히 예상하고 있었다. * * * “적군도 마왕군과 야전(野戰)에서 붙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알고 있을 터입니다.” 이제 최고 참모로 발탁된 라우라가 우리 마왕들 앞에서 말했다. 그녀가 바르바토스의 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꽤나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파이몬이나 시트리도 꽤나 정중하게 라우라를 대접했다. “틀림없이 기사단을 주력으로 삼아 소수정예를 활용하겠지요. 제일 강력한 부대를 구성하여 일점돌파한다. 그것이 요새주둔군의 계획입니다.” “곤란하네요…….” 파이몬이 부채를 천천히 펄럭였다. “기사단은 위력적이에요. 아군이 패배하진 않겠지만 피해가 막심할 텐데.” “예. 허나 피해없이 기사단을 궤멸시킬 방법이 있습니다.” “헤에.” 시트리가 팔짱을 끼고 재밌다는 듯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도 어디 가서 쫄릴 만한 마왕은 아니지만 기사단은 싫은걸. 아가레스가 아니고서야 피해없이 기사단을 전멸시키기란 불가능해. 천하의 바르바토스도 그건 어려워.” “외람된 말씀이오나.”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아군은 현재 적군이 어느 곳을 공격해올지, 어떤 부대로 공격해올지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군이 절반은 이긴 상태라 판단해도 좋습니다.” “좋았어, 단탈리안의 군사 양. 한번 작전을 말해보라구.” “존명.” 라우라가 군사지도를 가리켰다. “마법사 전대를 동원하여 네카어 강 주변 일대를 모두 뻘밭으로 만듭니다. 기사단은 십중팔구 기습의 효과를 살리기 위하여 야간에 기습해올 터. 그러나 전마(戰馬)가 제아무리 무시무시할지라도 다리가 뻘밭에 빠져버리면 무용지물입니다.” “…….” “전장이 강변인 만큼 마법사들도 마음껏 수마법을 쓰겠지요.” 라우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카어 강은 기사단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그녀의 예측은 무서우리 만치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하이델베르크에 주둔하던 기사단은 야밤을 노려서 다리를 노려왔다. 나중에 헤아려보니 육백 명 가까이 기사단을 이끌고 왔는데, 요새주둔군의 기사단 전력 중에 2/3이나 동원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근처의 다른 도시들이 원군을 보냈다. 전부 합쳐서 물경 천오백 명의 기사단이 야습했다. 기사단이라 해도 대다수는 견습기사 혹은 아카데미아 견습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들마저 최고급 기병임에는 분명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쳐들어와서 다리만 불사지르고 빠질 계획이었다. “돌격하라! 통령 각하의 명예를 위하여!” “공화국 만세! 통령 각하 만세!” 그러나 라우라가 의도한 대로 전장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모해 있었다. 힘차게 달리던 전마가 갑작스레 뻘밭에 가로막혀 속도가 죽어버리자 기사단은 당황했다. 그러나 눈앞의 목표물인 다리를 향해서 용감하게 전진했다. 즉, 그들은 전쟁에서 용기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증명하게 된 것이었다. “말을 위주로 공격하십시오.” 라우라가 다리 위에 자리한 사령부에서 차분하게 명령했다. 아군은 적들이 뻘밭에 진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 세례와 투창 세례를 퍼부어주었다. 오크가 온힘을 실어 날려버리는 투창에 전마들이 통째로 꼬챙이가 되어 절명했다. 우리가 미리 설치해둔 말뚝, 목책, 여기에 진흙탕까지. 기사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진했으나 우리쪽에서 쏘아대는 화살과 투창에 전마가 속속들이 쓰러졌다. 어쩌겠는가? 말에서 내려 돌격해야지. 기사단은 무거운 중갑을 걸친 채로 뻘밭을 헤엄치게 생겼다. 시트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파안대소했다. “이거 걸작인데! 단탈리안, 저것 봐! 꼭 애벌래들 같잖아!” 음.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광경을 가리켜 낄낄거리는 걸 보면, 시트리도 마왕스러운 감성의 보유자였다. 마왕군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역시 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기사는 뻘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러를 활용하여 마치 메뚜기처럼 돌격해왔다. 문제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전열을 이루어서 돌격해오지 않는 이상 소수의 기사는 딱히 전쟁 차원에서 무서울 게 없었으며, 시트리가 이끄는 몬스터 부대에 의해 사냥당했다. 검의 주인이 떼거지로 달려들지 않는 이상에야 별 도리가 없겠지. 이날 밤, 기사단은 열여섯 번이나 돌격을 감행했다. 브르타뉴 왕국군만큼은 아니어도 합스부르크의 기사단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브르타뉴의 경우와 다르게 그들에겐 전술적인 이점이 전무했다. 우리가 쏟아붓는 화살 세례에 천천히 죽어나갔다. “으응. 사백 마리 정도 도망친 것 같은데, 쫓을까?”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적군의 핏물을 시뻘겋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예. 중갑을 껴입은 채로 도망쳐봤자 속도가 느릴 것입니다.” “확실하게 사살해두라는 얘기지? 헤헤, 너 인간인데도 참 마음에 든다. 단탈리안이랑 바르바토스가 왜 아끼는지 알겠어.” 시트리가 라우라의 등을 빵빵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시트리의 무력은 장난이 아닌 수준이었고, 라우라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거의 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시트리가 싱글벙글 웃었다.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 “화, 황송합니다……시트리 님.” “에이 참. 언니라고 부르라니까!” 라우라가 약간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시트리 언니.” “그래, 그래. 헤헤.” 시트리가 신나게 환호하며 늑대에 올라탔다. “이제 난 바르바토스 애인의 언니야! 바르바토스 애인의 언니라구! 아싸라비야!” 그녀는 늑대기병을 이끌고 순식간에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 “…….” 사령부에 남겨진 파이몬과 나, 라우라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파이몬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저기, 데 파르네세 양? 시트리한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와요. 정말로 단순히 바르바토스의 애인과 자매가 되어보고 싶었을 뿐일 거예요. 저 아이, 바르바토스한테 마음의 빚을 느끼고 있어서요.” 라우라가 애매하게 웃었다. “시트리 님께서 진심이라는 것을 소녀도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소녀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길래 마왕 전하들의 애인이 되고 의동생이 되는 것인지…….” 라우라가 동태 눈깔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요? 제가 뭘? “인간으로서는 최초 아닙니까? 훌륭하군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라우라.” “……하아.” 왠지 모르게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가끔 이 아가씨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단 말이지. 여자란 그런 것일까? 세상이란 참 신기해. * * * 전투는 합스부르크군의 완벽한 참패로 끝났다. 천오백의 기사단 중에서 살아돌아간 병력은 고작 이백 명이 안 되었다. 전멸이라는 낱말로 표현하기에도 지나치게 처참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완벽하게 자신의 재능을 입증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은 이번 전투로 인해 기사단의 가용 전력을 모조리 소모했다. 남은 기사단은 요새를 지키기에 급급하겠지. 우리의 포위망이 단숨에 견고해졌다. 이제 요새가 기대할 만한 원군은 중앙에서 직접 파견해주는 군사뿐이지만……미안하게도,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에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부족하다. 현재 엘리자베트 통령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은 산악파뿐만이 아니다. 바르바토스의 평원파, 마르바스의 중립파, 가미긴, 세 세력이 전부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것이다. 정국이 이러하기에 엘리자베트 통령은 거점마다 요새를 확보해두었다. 요새들을 방어하는 방법을 택하여 전비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뒤집어 말해, 요새를 방어하는 것 이상의 전략을 쓰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겠지. “그렇지만 적군이 아예 요새를 방관할 리 없습니다.”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며칠 뒤, 라우라가 다시 회의에서 발언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군부는 지극히 유능합니다. 전비가 들지 않으면서도 도시를 구원할 계책을 마련할 게 분명합니다.” “응? 그런 게 가능해?” 시트리가 케이크를 집어 먹으면서 질문했다. 참고로 시트리는 케이크를 정말로 좋아했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몰라도 회의에서건 전장에서건 만날 과자를 먹으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예. 적군에 현명한 책사가 있다면 그는 이번 포위전의 핵심이 어디까지나 다리를 파괴하느냐 마느냐,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것입니다. 다리만 파괴할 수 있다면 굳이 기사단이나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없지요.” “으으응……잘 모르겠는데.” 시트리는 여전히 얼굴 표정에 물음표를 띠고 있었다. 막사 안의 공기가 포근해졌다. 여하간 시트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체불명의 따뜻한 마음을 불어넣는 재주가 있었다. “제가 적군의 참모라면 대규모의 선단을 준비하겠습니다. 함선마다 기름을 잔뜩 먹인 짚단을 가득 실어 놓습니다. 이 선단을 전진시켜 다리에 충돌시킨 다음, 선단과 다리를 통째로 불태웁니다. 우리에겐 별다른 함선 전력이 없으므로 이들을 막아내기가 무척 어렵겠지요…….” 라우라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만약 우리가 적의 의도를 파악해두지 못했다면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푸른 수국은 파르네세 가문의 문양입니다. 지난 날 파르네세 가문은 사르데냐 왕국에서 내전을 일으켰지만 패배하여 몰락했습니다. 이렇게 몰락하는 가운데 라우라는 성노예로 팔려갔지요. 그리고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던전 디펜스에 등장하는 모든 전투는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전투를 오마쥬하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에 등장하는 전쟁은 두 전투, 아니 세 전투를 섞어놓았습니다.   00258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누구인지 몰라도, 라우라를 상대하게 된 적군에게 동정심이 느껴졌다. 기사단으로 야습을 건다. 말로 표현하면 쉬워보인다. 실상은 요새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병력을 한꺼번에 올인한 것이다. 그것도 포위망이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평범한 지휘관은 일단 대기하고 관망하겠지. 당장 요새가 포위될지라도 최소한 반년은 아무런 문제없이 버틸 수가 있다. 안전한 요새에서 빠져나가 몬스터 대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휘관은 시간이 길어져봤자 허송세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중앙 정부는 현재 원군을 파견할 여력이 부족했다. 차라리 기습하려면 포위망이 완성된 직후. '설마 벌써부터 기습을 걸어올까' 하고 방심하는 찰나를 노려야만 한다……. 그래서 지휘관은 주변 도시의 기사단까지 규합하여 공격했다. 대담성, 판단력, 교섭력, 어느 하나 부족한 바가 없었다. 이것을 라우라는 단 한 마디로 간파했다. 합스부르크의 군부는 '유능'하다. 유능하니까 반드시 기습해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화공을 걸어올 거라고 예측했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배가 오는 족족 없애버리면 된다는 거지?” 시트리가 입가에 묻은 슈크림을 닦아냈다. “리저드맨이랑 물의 정령을 동원해서 노를 죄다 박살내면 되겠네.” “죄송하지만 불가합니다, 시트리 언니. 적군은 필히 바람이 잘 부는 날을 고르겠지요. 노가 전부 파괴되어도 돛의 힘으로 전진할 수 있는 그런 날씨를. 이런 종류의 기습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상대편의 생각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라우라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번 실패하면 이쪽의 경계가 더욱 더 심해져버린다……. 기회는 오로지 한 번뿐. 적군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입니다.” 적은 유능하다. 반드시 기습이 최고로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을 노린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적이 어떻게 판단할지 예상된다고 라우라는 단언했다. “네카어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는 하일브론입니다만, 항구가 지나치게 작습니다. 화공선을 숨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지요. 즉, 화공선단이 대기할 곳은 아마도 슈투트가르트.” 그녀가 지도에 그려진 강줄기를 짚었다. “적군은 기동력을 살려 3단 갤리선을 활용하겠지요. 슈투트가르트에서 3단 갤리선을 타고 오면 어림잡아 여덟 시간. 하일브론에서 잠깐 정박하여 쉬는 것까지 포함하면 아홉 시간쯤 걸립니다.” 우리는 멍하게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는 우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군사지도를 내려다보며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그녀의 입이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정확히 어느 시각에 출발하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적군은 다시 한번 우리의 정찰을 피하기 위하여 야간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밤 열한 시에서 새벽 네 시 정도의 무렵에 이곳에 도착하기를 원하겠지요. 그렇다면 역으로 계산하여, 슈투트가르트에서 화공선단이 출발하는 시각은 낮 한 시에서 저녁 여섯 시입니다.” “…….” “그러나 낮 한 시는 지나치게 밝습니다. 적군은 하일브론에서 잠깐 정박할 때도 최대한 어둡기를 바라겠지요. 즉, 저녁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출발할 것입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동풍이 거센 날, 저녁 다섯 시에서 여섯 시가 곧 적들이 작전을 결행하는 시간입니다.” “…….” “만약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3단 갤리선이 목격된다면 십중팔구 화공선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파이몬은 표정이 굳었다. 시트리는 아예 입이 떡 벌어졌다. “어? 어? ……으응? 어라?” “아마 적군도 수중 마물이 공격해오는 걸 대비할 것입니다. 마법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승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가 전부 파괴되더라도 마법사들이 어떻게든 돛만은 사수함으로써 화공선단을 다리에 충돌시킨다…… 그것이 적의 노림수이지요.” 라우라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구태여 우리가 적군의 장단에 놀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화공선단이 하일브론에 정박한 순간을 노려서 급습합니다. 하일브론은 성곽조차 없는 소규모 어촌입니다. 소관은 마을째로 선단을 불태우는 것을 추천합니다.” 시트리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저기, 마을을 공격하라구?” “예. 동풍이 거센 날, 밤 열 시에서 열한 시 경. 시트리 언니께서 별동대를 이끌고 하일브론을 기습해주십시오.” 라우라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자신이 뭘 얘기했는지 우리가 하나도 남김없이 이해했으며,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정박지에서 공격해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지요. 어린애 목을 비트는 것보다 아주 약간 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참 쉽죠, 하는 환청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파이몬과 시트리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라우라가 내놓은 계책에 따라 다리를 완공했으며, 포위망을 완성했고, 야습까지 막아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정확한 예측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파이몬이 내게 몰래 말했다. “단탈리안. 소녀가 비록 전술에 있어서 독보적이진 않지만, 이런저런 아수라장을 거쳐오면서 깨달은 점이 있사와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발한 상상력이나 계산이 아니에요. 견실한 판단력과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기발한 착상으로 작전을 펼쳐본들 용감하고 강력한 연대에 미치지 못한다. 견실한 판단력. 곧 어느 순간에 이 연대를 투입할 것이며, 어느 시점에 앞선 연대를 뒤로 뺄 것인가. 어디에 막사를 건설할 것인가. 이런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전투는 거의 대부분 머리싸움이 아니다. 이것이 많은 책사가 착각하는 부분이다. 책사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다. 음악을 실제로 연주하는 것은 연주자이지, 결코 지휘자가 아니다.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제대로 한곡을 뽑아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줄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실제로 싸우는 사람은 병사이지 책사가 아니며, 책사는 병사 한명한명이 가장 용감하고 가장 질서 있게 분투할 수 있도록 전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다. 참고로 내가 그래서 앙리에타 여왕한테 참패했다. 갑자기 슬퍼지는군……. 파이몬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데 파르네세 양은 분명히 재능이 넘쳐요. 하지만 열여덟 살의 인간 아가씨가 꿰뚫어볼 정도로 전장의 깊이가 얇지는 않을 거예요. 머리만으로 전쟁이 굴러가지 않는다……그 사실을 데 파르네세 양께 가르쳐주었으면 해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파이몬은 지극히 상식적으로 충고해주었다. 상식적이면서도 소중한 경고였다. 만약 라우라가 대륙의 역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군사(軍師)임을 내가 몰랐다면, 여기서 얌전히 물러섰겠지. 철혈재상 라우라 데 파르네세. 결코 좋은 별명이 아니다. 사실 브르타뉴의 적대국에서 만들어낸 별칭이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진 재상 주제에, 만날 전쟁터를 싸돌아다니며 피바람을 몰아친다.' 대충 그런 뜻이다. “하지만 파이몬, 저는 그녀의 후견인입니다. 저로서는 그녀의 재능에 판돈을 걸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저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요? 농담이겠죠, 단탈리안.” “예에, 농담입니다. 단지 만약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후견인이란 그런 만약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을지언정 나만큼은 그녀를 믿어주고 싶습니다.” “정말, 사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헷갈린다니까요.” 파이몬이 기가 막혀 했다. “단탈리안. 저는 사령관의 한 사람으로서 도에 지나친 전술은 수용할 수 없사와요.” “자아, 자. 파이몬. 여기서는 제 체면을 봐주십시오. 간단하게 생각해보세요. 기껏해야 별동대를 한번 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흐음. 그렇지만요.” 파이몬은 여전히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하여간 이런 지점에서 사람 성격이 드러났다. 공화국 하나 건국하는 데 수백 년씩이나 신중하게 행동한 마왕다웠다. 내가 은근슬쩍 말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만에 하나 라우라가 성공한다면 파이몬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 라우라가 실패할 경우에는 제가 파이몬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이.” “……소원이요?” 파이몬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상대방이 들어줄 수 있는 한도에서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숙고했다. “가령, 제가 단탈리안의 손가락으로 된 목걸이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들어줄 건가요?” “예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아가씨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파이몬이 부채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저 예를 들어서 한 말이와요. 손가락을 내놓을 정도의 각오를 갖추고 소녀에게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 것인지 궁금해서요.” “아니, 뭐. 물론 가능합니다. 제 손가락에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어차피 다시 자라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변태적인데.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그렇게 만들어준 목걸이가 하나 있긴 있다. 설마 바르바토스가 여마왕들한테 그걸 자랑하고 다니니까 막 유행처럼 번진 걸까?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 대박 유행, 이라는 느낌으로. ……그런 물건이 유행할 리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하기가 어렵군. 마왕들은 죄다 변태니까 말이다. 정말이지 무서운 동네다. 어머니께서 지금 내 모습을 보시면 방바닥을 두들기며 '어째서 내 착한 아들이 저런 변태들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하고 슬퍼하시겠지. 불효자가 되어버려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좋아요, 단탈리안. 기꺼이 내기를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지만 감사를 표했다. 이 계절에는 하얀 바다에서 서풍이 불어왔다. 동풍은 드물게 불었고, 이틀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나 요새가 포위된 지 두 달이 지날 즈음해서 동풍이 강하게 부는 날이 있었다. 라우라는 즉시 군사회의를 요청했다. “오늘이 결행일입니다. 시트리 언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응.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깨부수고 난장판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다녀올게, 하고 시트리가 씩씩하게 나섰다. 늑대를 탄 다크엘프 오백이 빠져나갔다. 파이몬이 여전히 의뭉스럽다는 얼굴이었다. 파이몬은 라우라의 계책에 동의했지만 그와 별개로 만약 화공선단이 접근했을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다리 근처에 물의 정령을 육십 마리나 배치시킨 것이었다. 반나절이 지나고 시트리가 돌아왔다. 시트리는 전신이 피로 덮혀 있었다. “우와! 정말로 마을에 갤리선이 잔뜩 있던걸! 안에 뭘 실었는지 불화살 몇 방 쏴주니까 활활 타오르더라구. 덕분에 칼도 몇 번 휘두르지 않았는데 지들끼리 불에 타서 난리였어. 헤헤, 혼자 보기에는 아까운 광경이더라.” 시트리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전과를 떠들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파이몬이 부채로 가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벌렸다. “참. 마법사도 아홉 명 있더라.” 하고 시트리가 왼손에 들고 있던 것을 막사 바닥에 내던졌다. 머리통 아홉 개가 줄줄이 묶여 있었다. “포로로 잡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반항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다 죽였어. 나 잘했어?” “예, 잘하셨습니다. 역시 시트리 언니군요. 완벽한 수행 능력입니다. 수급만 따로 취하신 것에서 시트리 언니의 미학적인 수준마저 엿보입니다.” 라우라가 화사하게 웃었다. “…….” 파이몬이 귀신이라도 목격한 표정으로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단어가 나오지 않는 듯이 몇 번 입을 뻥긋거리더니, 이윽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방긋 웃었다.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기. 기억하시죠? 나중에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파이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래서 부하는 잘 두고 봐야 한다.   00259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뭐, 파이몬의 안색이 핼쑥해지긴 했어도 아무렴 적군만할까.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도 전에 선단이 털려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입장에서는 졸지에 귀신한테 홀려버린 기분이겠지. 이쪽에 괴물과 같은 군략가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라리 기습이 아니라 전면전을 걸었어야 한다. 요새주둔군을 전부 이끌고, 기사단과 마법전대를 총동원해서 일대 회전을 펼쳤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라우라의 평가였다. 인근에서 기사단 전력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귀중하고 또 귀중한 마법사 전력까지 손상되었다. 고급스러운 병종이 죄다 반불구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반면에 이쪽은 오우거와 마법사가 건재했다. 그런데도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별동대를 조직하여 이쪽이 방심한 틈을 노렸다. 근처 도시들도 원군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그들이 빈틈이라 믿었던 것은 모조리 라우라가 의도한 실수였다. 도시들이 원군을 보내느라 병력을 소모하자, 오히려 우리쪽에서 근처 도시 다섯 개를 점령했다. 압도적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지. 적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수전(水戰)을 걸어왔다. 화공선을 포함하여 총 열다섯 척의 대형 갤리선이 진격했다. 적군도 바보가 아니였다. 열다섯 척 중에 어느 배가 화공선인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위장해두었다. 자칫 잘못하면 화공선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해버릴지 모를 상황. 이때도 라우라는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했다. “침착하게 대응하지요. 배가 얼마나 물에 잠겼느냐에 따라 화공선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습니다. 화공선이라면 안쪽을 병사 대신 억새풀로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응. 응.” 시트리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시트리는 그녀 나름대로 라우라에 대해 체념한 것이었다. 어차피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 만사 오케이라고. “도마뱀족과 정령을 그런 배에 집중시킵니다. 우선 화공선을 처리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잔당을 해치우지요.” “그러니까 얕게 가라앉은 배를 먼저 족치라는 거지? 알겠어.” 전쟁터에서 선택과 집중은 언제나 옳았다. 열다섯 척 중에서 강물에 얕게 가라앉은 배는 모두 네 척이었다. 백여 마리의 수중 몬스터가 네 척에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노잡이들이 순식간에 도륙되었고, 돛이 형편없이 쓰러졌다. 돛과 노를 잃어버린 화공선 네 척이 강물 정중앙에서 엉켰다. 이들은 거대한 방해물이 되어, 인간군의 다른 함선이 지나가는 것을 방해했다. “되었습니다. 전군, 일제히 불화살을 발사하도록 명령을.”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화공선에 쏟아졌다. 리저드맨이 직접 횃불을 들고 헤엄쳐서 직접 불사지른 배도 있었다. 기름 먹인 억새풀로 꽉꽉 채워진 화공선은 실로 기세 좋게 타올랐다. 거친 불길이 천천히 다른 함선들로 옮겨 붙었다. “불을 잡아라! 멍청한 새끼들――뛰어내리지 말고 불을 끄란 말이다!” “사, 살려줘!” “배를 버리고 퇴함하라! 퇴함하라!” 인세에 지옥이 펼쳐졌다. 갤리선들이 활활 타올랐다. 방해물에 가로막혀 이도저도 못한 채 적군의 함단은 그저 타오르기만 했다. 우리 몬스터 군단은 강줄기를 양변에서 포위하여, 헤엄쳐 올라오려는 인간군을 족족 사살했다. 화공선 중에는 화약을 실은 전함이 있었다. 그 배는 화려하게 폭발했다. 혼자서 익사하기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주변의 함선 세 척까지 끌어들였다. 멋들어진 동반자살이었다. 굳이 결과를 되짚을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완승을 거두었다. “포로로 사로잡은 기사들은 전원 성문 앞에서 효수하지요.” 중장갑을 걸친 기사들은 물에 빠져 허둥대다 대다수 포로로 잡혔다. 풀어주는 대가로 몸값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지만, 라우라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원을 처형했다. 내가 의심스러워서 물어보았다. “라우라. 설마 기사의 목을 수집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요?” “……주군은 소녀를 어떻게 보는 것인가. 소녀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다. 여기는 주군의 마왕성이 아니라 대륙의 전장이다. 소녀가 취미를 강요할 리 없지 않은가.” 말은 저래도 허둥지둥 옆머리를 빙빙 꼬는 것이, 십중팔구 머리통을 수집할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라우라. 혹시 변태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군한테 변태 소리를 듣게 되니 무척이나, 으응, 무척이나 화가 나는군. 설마 소녀가 주군으로 모시는 자를 후려치고 싶어질 날이 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군을 때리고 싶다. 때려도 좋은가?” 라우라가 입가를 부들부들 떨었다. “하. 설마 제가 변태라는 말입니까?” “설마가 아니라 정확히 그런 의미로 말했다. 소녀는 주군만큼 변태인 작자를 평생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중상모략이 따로 없군요.” 내가 길길이 날뛰었다. “라우라는 저와 아홉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떡을 치는 주제에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바르바토스까지 따먹지 않았습니까.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몸을 취했으니 그 취향의 변태스러움이 가히 천하를 뒤덮을 기세입니다.” “뭐라? 소녀가 언제 원해서 아홉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몸을 섞었는가. 전부 주군이 강요해서 이루어진 일 아닌가! 주군이야말로 변태 중의 상변태요, 아프로디테 여신마저 기겁하여 도망치게 만들 위인이다!” 라우라도 지지 않고 분기탱천했다. “말이야 말이지, 주군이 지금까지 따먹은 여자 숫자가 도대체 몇 명인가!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 후안무치한 바람쟁이!” “흥. 세상은 무엇이든 양보다 질입니다. 제가 설령 이백스물다섯 명의 여성과 합방했다 하더라도 오로지 이성과 잤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라우라는 어떻습니까? 동성인 바르바토스랑 떡치지 않았습니까! 질적으로 라우라가 훨씬 더 변태이죠!” 우리는 병사들까지 다 들리도록 큰소리로 난리를 부렸다. 마침 근처에 서 있던 파이몬이 싸움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우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주군의 논리를 듣고 웃을 것이다. 소녀가 바르바토스 각하와 잤다면 주군은 어떠한가? 시트리 언니와 자지 않았는가! 시트리 언니는 양성이니 동성과 잔 소녀보다 양성과 잔 주군이 훨씬 더 농밀하게 변태스럽다!” “웃기지 마십시오! 이 후배위 성애자가! 확 덮쳐서 개처럼 범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해볼 테면 해봐라, 주군이 변태라는 사실을 온 사방에 퍼트릴 수 있겠군!” 우리가 서로 이마를 부닥치며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변태 신하!” “답이 없는 스타킹 성애자!” “후장이랑 같이 쑤시면 좋아서 죽으면서!” “그러는 주군은 무릎이 성감대인 남자이지 않은가! 웃겨 자빠지겠군!” “이, 이, 이, 야외노출에 환장한 성노예가 건방지게――!?” “변태 주군이나 그러겠지!” 라우라와 나는 이미 갈 때까지 간 사이라서 일단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거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이대로는 영원히 결착이 지어지지 않을 게 분명해서, 우리는 동시에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파이몬!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라우라가 더 변태스럽지요?” “파이몬 전하!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주군이야말로 상변태이지 않습니까?” 파이몬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뇌했다. 로뎅의 조각상은 엉덩이로 가볍게 치워버릴 만큼 고뇌하는 얼굴에 실감이 넘쳐났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두 사람 모두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고, 좋지 않은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것 같사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심각해요.” 나와 라우라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누가 더 변태라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어느 쪽이 더 변태이온지요?”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방향성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두 사람 다 막상막하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여요. 그 방향성이라는 것도 아주 나쁜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여러분은 쌍방에 우열을 가릴 수가 없네요. 뭐, 어찌보면 천생연분인 것 같지 않은 것도 아니와요.”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나는 설령 변태일지라도 라우라만큼 변태는 아니라고 자부했다. 하루에 이백 번을 가뿐히 가버리는 여자와 나는 동급의 변태였다는 말인가? “제가 그 정도로 변태인 줄은 몰랐습니다…….” “주군이 왜 충격을 받는가? 소녀야말로 일생일대의 정체성 혼란에 직면했거늘. 여신이시여, 소녀가 주군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천박했나이까……?” 우리는 풀이 죽어서 침울해졌다. 삶에 의욕을 잃었다. 의도치 않게 일타쌍피를 달성한 파이몬은 당황해서 우리의 기운을 복돋아주려 노력했다. “저기. 저로서는 왜 두 사람이 우울해하는지, 이유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제가 잘못했나요? 설마 지금 제가 잘못한 부분인가요? 아니죠? 아니라고 믿고 싶네요.”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사령부는 패배감에 젖어들었다. 잠시 뒤에 시트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기사 이외의 일반 포로를 몽땅 강물에 수장시키고 오는 참이었다. 일반 포로 따위 살려봤자 밥값만 축내는지라 사령부는 만장일치로 몰살에 찬성했다. “어라? 분위기가 왜 이래?” 시트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라우라와 내가 우울증으로 향하여 초고속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파이몬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흐음.” 시트리가 설명을 전부 다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저기, 단탈리안. 라우라. 미노타우르스랑 성교한 적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당연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고블린 떼거지랑 집단 섹스한 경험은?” “……없습니다만.”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시트리가 마치 시대의 난제를 맞닥트린 수학자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도마뱀족이랑 수중 섹스는? 인큐버스한테 박히면서 서큐버스를 박은 경험은? 트롤의 성기에 식도가 터질 듯이 막혀본 경험은? 뱀족에게 뱃속까지 꾸욱꾸욱 하고 농락당한 경험은?” 우리가 모든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자, 시트리는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이 '변태'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 “헤헤. 전부 해본 내가 판결을 내려줄게. 두 사람 다 정말로 평범한 선남선녀야! 싸울 필요가 전혀 없어. 자, 화해하고 악수!” 시트리가 헤실방실 웃으면서 우리의 손을 잡아 연결시켰다. 라우라와 나는 완전히 경악하여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살짝 오해한 것일까. 시트리가 귀엽게 방긋거렸다. “참. 혹시 변태적인 거에 흥미가 생기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내가 친절하게 하나하나씩 가르쳐줄게! 난 단탈리안이랑 라우라가 정말 좋으니까. 헤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푸른 하늘 위에는 끝없는 우주가 펼쳐져 있다. 우주는 너무도 깊고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이 함부로 여행을 떠났다가는 단박에 죽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라우라와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고……. * * *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정확히 열한 개월 만에 항복했다. 저쪽에선 먼저 사절단을 보내왔다. 우리에게 제발 시민이라도 살려달라고 청원했다. 우리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공식적으로 시트리였지만 비공식적으로 파이몬이었으므로, 파이몬에게 결정권이 주어졌다. “항복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사와요.” 오늘이 바로 성문이 열리기로 약속된 날. 라우라가 지휘부를 지키고 있는 동안, 우리는 뱃놀이를 즐길 겸해서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것이었다.   00260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일단의 연대장들이 강가에서 도열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탄 나룻배가 미끄러지듯 강변에 닿았다. 곧바로 시종들이 나왔다. 시종들은 둘둘 말린 붉은 카펫을 화려하게 펼쳤다. 내가 먼저 나룻배에서 내려, 공손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담 파이몬.” “상냥도 하셔라.” 파이몬이 살풋 미소 짓고 내 손을 가벼이 잡았다. 연대장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령관 각하들께 경례!” “월맹에 영광을!” 처억, 하고 경례의 파도가 이어졌다. 강물에 햇볕이 반사되어 눈부셨다. 그 눈부심 속에서 깃발들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파이몬을 상징하는 사봉(四峰) 낙타. 시트리를 상징하는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각종 연대 깃발. 그리고, 이들이 격파하고 전멸시킨 기사단의 깃발들……. 우리는 군진 정중앙에 깔린 카펫을 밟으며 걸어갔다. “마치 결혼식이라도 올리는 것 같군요.” “어머나. 그런 얘기를 아무한테나 하고 다니면 큰일이 나버려요?” “아무한테나 하지 않습니다. 파이몬이니까 건네는 얘기이지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믿음이 하나도 가지 않는 거와요, 단탈리안.” 파이몬이 쿠쿡 웃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연애 짭밥이 수백 년이 넘으니 절대로 안 속았다. 파이몬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였다. “어서오십시오, 파이몬 전하. 단탈리안 전하. 그리고…….” 최고 참모로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라우라가 마중 나왔다. 라우라는 우리 뒤쪽을 보더니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찌부렸다. “시트리 언니께선 왜 물에 흠뻑 젖어 계신가요?” “흐허헝. 다 내가 못난이라서 그래. 미안해요, 파이몬 언니. 미안해, 단탈리안. 으아아앙!” 시트리는 물에 빠진 생쥐가 다름없었다. 그녀가 강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얼굴에 흘리며 훌쩍거렸다. “……항복 사절단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라우라는 인상을 한번 쓰더니 싸악 덤덤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신경 써봤자 좋을 일 없다는 사실을 단박에 간파한 모양이었다. 영리한 녀석 같으니라고. 항복 사절단은 라우라 말대로 성문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옷차림이 고급스러운 게 딱 봐도 다들 귀족 출신이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혁명을 일으켰노라고 자부했지만, 계급과 신분이 엄연히 남아 있었다. 공식상에서는 귀족과 시민이란 낱말 대신 제1급 시민, 제2급 시민, 이런 식으로 말한다던가. 요컨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훌륭한 수법이로군. 엘리자베트 통령에게는 정말로 배울 점이 많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위대한 존재를 뵙나이다.”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신사들이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비록 적군이라 해도 사절단한테 무례하게 대할 리가 없다――즉시 항복 문서를 검토했다.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마왕군에게 넘길 것. 전쟁배상금으로 사만 리브라를 지불할 것. 마왕군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자는 즉시 도시에서 떠날 것.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군요.” 무척 관대한 조건이었다. 책임자들의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지도 않았다. 사절단이 우리의 자비를 입술이 닳도록 칭송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심에 어찌 감복하지 않겠나이까?” “위대한 존재께 만신(萬神)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옵니다.” 파이몬이 이쪽 대표자로서 문서에 서명했다. 중년 남성이 큼직한 열쇠를 파이몬에게 바쳤다. 남성은 하이델베르크 시장이었고, 진상품은 바로 도시 정문의 열쇠였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파이몬이 활짝 웃으면서 시장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당신은 신민을 돌보는 시장으로서 임무를 다했고, 도시를 지키는 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어요. 저 파이몬은 당신에게 예우를 표합니다.” “소, 소신을 너그러이 봐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시장은 누가 봐도 잔뜩 쫄아 있었다. 턱수염이 복슬복슬하게 자란 주제에 겁쟁이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소신이라니? 그거 자신의 주군한테만 쓸 수 있는 용법이라고, 아저씨. 주변 인간들이 다 들었는데 댁은 살아서 돌아가도 반역죄로 처형당하겠구만. 엘리자베트가 패전의 희생물을 만들지 않을 리 없다. 쯔쯧. “그것이, 감히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사온데…….” “어머. 무엇이든 질문하세요.” “소신은 우둔하고 우매하여 병법을 논할 계제가 못 되옵니다.” 시장이 반쯤 대머리가 된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소신이므로 기사단의 야습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고…… 심지어 화공선단이 하일브론에서 전멸된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위대한 존재께서는 어느 이치에 닿으셨기에 천리가 꿰뚫렸는지 감히 여쭙나이다.” 어라, 이 후줄그레한 아저씨가 의외로 적군의 참모이기도 했나보다. 흐으음. 흐음? 으음……. 의심스럽군. 조금이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해둘까. 설마 그럴까 싶어도 뭐든지 유비무환이다. “글쎄요. 어느 이치에 닿았느냐라.” 파이몬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라우라는 나의 부하였다. 나에게 질문에 대답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다시 라우라를 쳐다봄으로써 당사자한테 권리를 양보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귀관의 계획을 사전에 방지한 것은 소관이다.” “에……?” 시장 아저씨가 당황해서 라우라의 외관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라우라가 불쾌해하며 눈썹을 찌부리자, 시장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치게 젊으신 듯하여서…… 소신이 마족 여러분의 나이를 헤아리는 데 미숙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소관은 마족이 아니다. 인간이지. 스무 살에 세 달을 살았을 뿐이니 귀관이 실례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시장은 얼굴 표정이 서서히 혼란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시장 말고 다른 사절들 또한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인간이시라고요……? 아니, 그보다 스무 살의 여식이 어떻게……?” “번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도록 하지.” 라우라가 딱 잘라서 말했다. “먼저 귀관은 어찌 천리를 꿰뚫어 보았느냐고 물었다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귀관이 패배한 까닭은 결코 천리나 운명 탓이 아니다. 천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도 있지. 허나 이번은 아니었다.” 라우라가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소관은 귀군이 극히 유능하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전무후무한 전술가이며, 통령을 지지하는 군부 역시 유능한 인사로 채워져 있지. 하이델베르크는 가장 중요한 거점 중에 하나이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무능한 군인을 책임자로 보냈을 가능성은 한없이 영에 수렴했다.” “그게 무슨…….” “귀관의 성격이 대략이나마 엿보였다는 뜻이다.” 그녀가 금빛 머리를 뒤로 스윽 쓸어넘겼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표시였다. “유능한 군인은 언제 과감해야 하고 언제 신중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그대에게 하이델베르크를 맡기면서 뭐라고 당부했는지, 대체로 상상이 간다. 반드시 요새를 지켜라.” “…….” “그러나 병력이 부족하다. 중앙의 원군을 기대하지 말 것이며, 최대한 적은 피해로 전쟁에 임하여라……. 대충 이러할까. 귀관은 극히 효율적으로 군사를 운용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시장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러건 말건 라우라가 자기 할 말을 밀고 나갔다. “요새가 포위되었다. 귀관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요새의 포위망을 아예 뚫어버리는 것? 절대로 아니다. 귀관은 유능하다. 그렇기에 '다리만 파괴하면 모든 전황이 해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했겠지. 아닌가?” “……마, 맞습니다.” “봐라. 문제가 간단해진다.”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일점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기습입니다.” “음. 정확하게 말하면 야습이지. 그러나 야습은 꽤나 훈련된 병력이 아니면 스스로 실패해버리기 마련이다. 귀관은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최정예 병력. 즉, 기사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마술의 비밀을 짜잔 하고 얘기해주는 것처럼 라우라는 친절했다. “귀관은 설령 우리가 야습을 대비하고 있을지라도 돌파할 수 있도록, 기사단에게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십 번이고 돌격하라고 주문해놓았겠지. 기뻐하게. 귀관이 지시한 대로 기사단은 열여섯 번이 넘게 돌격했다. 전멸할 때까지 말이지.” 시장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귀관이 어디를 노릴지, 무엇으로 노릴지, 어떻게 노릴지 모두 밝혀져 있었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시장이 고개를 숙여 잠시 침묵했다. 다른 사절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시장이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며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화공선단은……어떻게…….” “똑같다. 기사단이 일소된 이상, 귀관은 다시 한번 최소한의 피해로 다리를 돌파하고자 결심했다. 지상에서 공격할 수단이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수단은 무엇인가? 정답은 수상이다. 간단한 양자택일 문제이다.” “간단한…….” 시장이 얼굴을 들었다. 눈동자에 실핏줄이 번져 있었다. “하지만, 화공선단은 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궤멸되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음? 뻔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이해되지 않는 낯빛으로 되물었다. “귀관은 동풍이 거센 날에 선단이 다리에 도착하는 시간을 역계산했겠지? 그렇게 역계산된 것을 다시 역으로 계산하면 선단이 하일브론에 들릴 시각은 단번에 도출된다. 이것 역시 간단한 논리이다. 자아, 천리이니 천운이니 하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 침묵이 있었다. 시장이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네 년이……네 년이, 우리의 영토를 잘도!” 저런. 시장이 양손을 펼쳐서 짐승처럼 라우라한테 달려들었다. 주먹에서 희미하게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장은 기사 출신인 것이었다. 주변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절들이 경악으로 가득 차서 어,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파이몬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시트리가 서둘러 나아가기 위해 땅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들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흐어――크아아악!” 시장은 이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대검들에 온몸이 뚫렸다. 죽음의 기사들이었다. 진즉에 이상해서 내가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잠자코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거 원, 너무 수상하지 않은가. 이 아저씨는 시장인데다가 군사 지휘관, 게다가 작전참모였다. 요컨대 민정과 군정, 군작전까지 한꺼번에 맡은 위인이었다. 무지막지하게 유능했다. 그런 유능한 인물이 자기 말투랑 표정도 관리하지 못해서 소신을 자칭한다고? 의심스럽다. 억지로 약한 척을 해서 상대방이 방심하도록 유도하고 싶었겠지. 미안하지만 그렇게 허접쓰레기 같은 연기로는 갓난애기조차 속일 수 없다. “주군.” 라우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닥 놀라지도 않은 눈치였다. 무슨 스무 살 아가씨가 저리 강심장일까. 어딘지 재밌어서 내가 실실 쪼갰다. “선물입니다, 라우라. 저 돼지새끼의 목은 수집품으로 가져가도 좋아요.” 라우라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주군이 내린 하사품을 소녀가 마다할 수는 없지.” 라우라가 허리에 찬 롱소드를 뽑았다. 사지가 꿰뚫렸지만 아직 숨이 붙은 시장의 목을, 라우라는 단칼에 날려버렸다. 머리통은 아주 잠깐 허공을 떠돌다가 툭, 하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초대장이 잘못 도착한 것일까요. 아무래도 이분들은 사절단이 아니라 암살단인 모양입니다. 이거 원, 배달부가 관청과 암살자 길드까지 헷갈리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파이몬한테 느긋하게 말했다. 사절들이 새하얗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분위기를 보건대 시장은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 같았다. 단독범행, 다른 이들은 무죄. 인간종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산다. 그런 걸 의도했는가……. 좋다. 안이하게 생각한 대가를 보여주겠다. “잔치를 망치는 불청객은 이쪽에서 사양입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싸그리 죽여버리자는 말이었다.   00261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사절 열댓 명이 곧바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인간들의 입에서 진부한 변명과 사죄가 쏟아졌다. 저희는 전혀 몰랐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시장의 독단입니다……. 저질스러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마냥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불협화음이 울렸다. “목소리가 제일 큰 인간부터 죽이도록 할까요.” 울보를 달래는 것도 귀찮기에 대충 말했다. 소리가 싹 멈추었다. 만족스러웠다. 언제 입을 닥쳐야 하는가, 이것만 알아도 사람은 의외로 쉽게 성공한다. 가끔씩 착각하는 인간이 있지만 말이다. 입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곧 말할 권리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입이란 말하기보다 닥치기 위하여 달려 있다. 그 사실을 제대로 숙지했다는 점에서 사절단은 일단 합격이다. “사절단은 항복을 미끼로 삼아서 아군의 핵심 간부를 습격했습니다. 파이몬. 하늘을 기만하고 우리를 농락했으니 마땅히 사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아니, 과연 하이델베르크의 시민들이 항복에 합의했는지 의심스럽군요.” “단탈리안.” “번개가 내리쳤으니 천둥이 울릴 차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협정은 없습니다. 사절단을 교수형에 처하고, 요새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점령합니다.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하는 일만 시민은 몰살하여 여신의 제단에 바치겠습니다.” “……사절단을 포박해서 격리시키세요.” 파이몬은 한숨을 쉬면서 명령했다. 사신들이 줄에 묶여서 끌려나갔다. 시트리가 씩씩거리며 직접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가 내풍기는 살기가 어찌나 짙었는지 사절단은 감히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시트리는 진짜로 화가 나면 말수가 없어지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단탈리안.” 파이몬이 각탁에 털썩 앉았다. 시트리는 포로를 인솔하러 떠났고, 라우라에겐 내가 쉬라고 막사에 돌려보냈다. 지금 사령부에는 파이몬과 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요.” “합스부르크 통령의 밀명입니다. 볼 것도 없지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간이 마왕에게 항복한다. 단지 항복할 뿐만이라면 또 몰라도 시민들의 생명이 완전히 안전하게 보장된 채로 투항한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파악했겠지요.” 파이몬이 괜히 요새를 점령하려는 게 아니었다. 하이델베르크 점령전은 군사적이기 이전에 정치적인 노림수로 계획되었다. 첫 번째, 월맹군에서 추락해버린 파이몬의 지위를 회복한다. 현재 산악파는 임시로 시트리를 맹주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시트리 본인은 물론이고 산악파의 마왕들은 파이몬을 지지한다. 다시 파이몬이 맹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전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이델베르크이다. 대륙 중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요새도시를 아무런 피해없이 접수하는 것이다. 복귀식에 딱 어울린다. 두 번째, 마왕군의 이미지를 일신한다. “공화국 국민은 마왕군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있습니다만.” “예에. 우리가 평화로운 항복을 받아들이면 여론에 분열하기 시작하겠지요…… 하지만, 벌써 이쪽의 의도를 간파하다니.” 파이몬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지난 월맹군에서 평원파가 거하게 삽질한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벨레드 형님이 일으킨 일련의 학살극이다. 듣자하니 인간들 머리통으로 뗏목을 만들어 수십 척이나 강물에 띄었다나 뭐라나. 인간종이 마왕군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기껏해서 내가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에 쌓아둔 이미지가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그놈의 머리통이 항상 문제였다……. 엘리자베트는 이걸 기회로 승화시켰다. 「마왕군은 극악무도한 악마, 학살자, 사갈의 무리이다.」 「우리 공화국은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치고 있다. 이때 우리가 내분하여 서로를 모함하기에 이른다면 어찌되겠는가? 저 짐승들에게 잡아먹힐 뿐이다.」 자기 권력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공화정부를 비난하는 사람은 내란죄나 반란죄, 학살미수죄로 잡혀 들어갔다.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외부에 악의 집단을 설정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파이몬은 평화로운 항복협정을 원했다. 마왕군은 학살에 눈이 먼 미치광이 집단이 아니다, 얌전히 항복하면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내부에서 혼란시킬 의도였는데……. “자국의 분란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면 도시 하나쯤이야 희생시키겠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그런 속셈이겠지요.” 파이몬이 침음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인가요……. 패도, 아니 외도를 걷는 군주군요.”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장에게 암살 지령을 내린다. 무엇을 위함인가? 우리를 자극시키려는 것이다. 항복협정이 무산된다. 마왕군이 분노하여 도시를 통째로 불사지른다. 하이델베르크의 일만 시민은 마왕군에 맞서 최후까지 싸운 충열지사로 포장되겠지.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가장하며 ‘공화국의 만민이여! 우리, 이 원한을 결코 잊지 않을지어다!’ 하고 울부짖지 않을까. 인간들은 통령님 만세를 외치고 말이다. 공화국은 더더욱 똘똘 뭉치리라. 그야말로 외도의 극치이다. 정말 엘리자베트에겐 배울 점이 넘쳐난다. “합스부르크는 공화정의 탈을 쓴 참주정이와요. 이들을 분열시키고 하나하나씩 도시들을 독립시키고 싶었는데…… 만만치 않네요.” “저쪽의 통령은 평범한 위인이 아닙니다. 인류가 낳은 지도자 중에서도 틀림없이 가장 유능합니다. 만만치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파이몬.”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나머지 사절단을 고이 살려보내고 항복협정을 그대로 진행시킬 수도 있다. 파이몬이 의도한 바가 그대로 실현되겠지. 다만, 그래서야 이쪽의 자존심이 상한다. 피습까지 당할 뻔했는데 아무 반격도 넣어주지 못하면 짜증난다.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자니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파이몬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새삼 반하셨습니까?” “네? 그럴 리가요. 소녀가 단탈리안한테 반하더라도 얼굴 때문에 반하기란 불가능해요.” “…….” 세상을 저주할 테다. 파이몬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으응, 그냥요. 제 목적을 간파하고 주저없이 도시를 희생시키고자 한 통령도 대단하지만, 통령의 속내를 여기서 곧바로 파악한 단탈리안도 대단하구나, 싶어서.” “어라. 칭찬하려는 거였습니까?” 좋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허락하겠다. 나는 칭찬받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고보니 단탈리안은 통령과 인연이 꽤 깊네요. 브루노에선 두 사람이 연설전에서 대결했고요. 혹시 따로 예전에 만났다던가 그런 일이 있었나요?” “따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군요. 인연이 깊은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인연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히로인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해본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엘리자베트는 결코 외도를 자청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왕도를 동경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인간 자체에 끝없는 희망을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인간과 사회의 추악함에서 눈 돌리지도 않는다. 단지 지나치게 현명할 뿐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피해가 가장 줄어드는가.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가. 엘리자베트에겐 전부 보인다. 그녀는 절망하면서도 기꺼이 그곳이 길이라면 걸어가겠지……. 웬만하면 엘리자베트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왕이었다. 타협의 가능성은 애시당초 전무했다. 뭐, 보아하니 엘리자베트도 나도 지옥행 급행열차를 일착으로 끊어놓았다. 사후세계에서나 회한을 풀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는 사이 좋게 싸우도록 하자,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대책 말입니다만. 저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파이몬이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우선 하이델베르크의 항복은 받아들입니다. 단, 지난 일 년 동안 우리한테 반항한 것에 대하여 괴씸죄를 묻습니다. 항복은 받아들이겠으나 반항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지요. “책임이라고 한다면?” “요는 합스부르크를 어떤 방식으로든 내분시키면 그만입니다.” 파이몬은 평화로운 수단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전형적인 왕도였다. 나에게 그런 방법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포로를 다시 불러주십시오.” * * * 협상 결렬! 하이델베르크 시민은 사절단이 가져온 포고문에 크게 동요했다. 평화로이 항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서 한숨을 놓은 것이 고작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사절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끔찍했다. “시장이 암살을 시도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사절단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광장에서 성난 시민들이 소리쳤다. 일 년 동안 시민들은 용감하게 희생했다. 이런저런 군무를 도왔으며, 도시가 포위되어 생필품이 극도로 희귀해진 마당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항복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대표하는 시장이 무책임하게 암살 따위를 시도했다. 시민들은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서 격분했다. “누가 시장의 가족을 잡아오시오.” “가족을 교수형에 처해서 적군에게 보내면 조금이라도 자비를 구걸할 수 있겠지!”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선 사절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시민 동지 여러분. 시장의 가족은 이미 전부 죽었소. 살해당했지. 어제, 시장이 사절을 이끌고 나가기 직전 그 스스로 가족들을 참살했소. 집안에 아들과 딸, 아내, 친척까지 모두 시체로 쓰러져 있더이다.” “…….” 시민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기 손으로 가족을 직접 죽였다. 즉, 실패했을 경우 가족이 욕보이기 전에 스스로 살해한 것이었다. 소름 끼치는 단호함에 시민들이 잠시간 말을 잃어버리자, 사절이 재빠르게 공고했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사절단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 자체가 증거이지. 적군의 지휘관들은 여전히 항복협정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고 전했소. 모든 하이델베르크 시민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해주었소.” 단, 하고 사절이 덧붙였다. “지휘관들은 항복에 조건이 있다고 명시했소외다. 지금까지 반항한 것과 암살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라고.”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말에 환호하려던 시민들이 조건이란 단어를 듣고 긴장했다. 그렇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암살까지 시도한 도시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용서해줄 리 만무했다. 얼마나 혹독한 조건이 주어졌는가? “여섯 명.” “…….”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시민 여섯 명이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어야만 하오.” 광장에 침묵이 맴돌았다. 발언권이 있는 시민 중 한 사람이 거수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정확히 누가 책임자라는 겁니까? 관리입니까? 아니면 지휘관입니까?” “적들은 어느 누가 대표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소. 특정한 인물이나 직업을 꼬집지 않았소외다. 다시 말해서…….” 사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책임자들이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오.” 다시 한번 침묵. 광장에 모인 인파가 서서히 웅성거렸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다. 삽시간에 광장 전체가 떠들썩한 시장판처럼 시끄러워졌다. “아니, 무슨 권리로 희생자를 결정한다는 말입니까? 시장도 죽어버린 터에.” “겨우 여섯 명만 죽으면 모두 살 수 있으니 관대한 조건이긴 한데…….” “그러니까 누가 어떻게 정하냐고.” 이윽고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도대체 누가 죽으라는 말인가?”   00262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사람들은 쉬지 않고, 때로는 강하게 소리치고 때로는 약하게 수군거렸다. 다름 아니라 누구를 희생양으로 바칠 것이냐는 게 문제였다. 상층민은 하층민이 연합하여 자기네한테 덤터기를 씌우지 않을까 두려웠으며, 하층민은 상층민이 자기네를 모함하고 핍박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모든 시민이 이것이 지극히 난감한 문제임을 깨닫고 있었다. ‘누가 되었든지 간에 내가 나서면 안 된다.’ ‘이럴 땐 무조건 묻어가야 해!’ ‘함부로 나댔다가 괜히 몰매 맞을지도 모르는걸.’ 만약 앞장서서 어떤 사람을 희생양으로 몰아세운다 해보아라. 당장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일상이 돌아온다. 그때 동료들이 자신을 뭐라고 평가할까. 동료 시민을 배신하고 모함한 자,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죽인 살인자…… 그같은 꼬리표가 평생 동안 붙어 다니겠지. 결국 도시에서 살아갈 수조차 없게 된다. ‘아무나.’ ‘아무라도 좋으니 어서 나서라고!’ 선동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목청 큰 사람이 등장하여 외치기만 하면 된다. 예컨대 ……시민 여러분!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를 고생시킨 장본인이 누구였소. 노예였소? 일반 시민이었소? 아니면 이 도시를 소유하고 지키기를 원했던 상류층이었소? 상류층은 책임을 지시오. 아니면 ……시민 여러분! 이 비극적인 사태에서 우리는 가장 피해가 적은 수단을 고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사라져도 거의 아무런 피해가 없는 그런 사람들을 고릅시다. 그렇습니다, 저는 바로 거지 여섯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자기만 아니라면. “…….” 그때 한 노인이 일어섰다. 노인은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었다. 하인이 두 명이나 호위하고 있었는데, 노인은 하인들을 손짓으로 제지한 다음 홀로 걸어나갔다. 노인이 단상에 올라서자 사절들이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시민 여러분.” 아티팩트를 통해서 노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노인은 백작이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계급의 특권을 전부 잃어버렸다. 비공식적으로는 백작님이라 불렸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어 노인들의 사교계에나 얼굴을 비추는, 이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유물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백작. 시장이 죽어버린 지금 노인에게는 확실히 강한 발언력이 있었다. 어차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서 희생양을 정하는 것도 괜찮겠지. 이제부터 시작한다. 노인이 입을 열어 의견을 밝히는 순간, 시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벌떼처럼 일어서서 희생양을 호명하리라……. “제가 먼저 죽겠습니다.” * * * “여섯 명의 책임자를 뽑으라는 말씀이옵니까?” “그렇다.” 다시 불러모은 항복사절단에게 말했다. “그동안 그대들이 저항한 죄. 여기에 더불어 암살을 시도한 죄. 설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용서를 바라지는 않을 터. 허나, 암살은 시장이 단독으로 벌인 범행임을 본인은 믿고 있다.” “하, 하옵시면……?” “굳이 여섯 명을 죽일 생각은 없다는 얘기이다.” 내가 너그럽게 사절의 어깨를 두들겼다. “다만 우리에게도 체면이란 게 있다. 이만한 소동이 일어났는데 어떠한 처벌도 뒤따르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부하들에게서 위엄을 유지하겠는가.” 고로, 하고 내가 말했다. “희생양을 뽑되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신청한 자만을 선별하라. 마지막 사형의 순간에 우리가 희생양을 용서하도록 할 것이다. 무얼, 짜고 치는 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황공하옵니다!” 살았다는 생각에 사절단이 넙죽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희생양은 오로지 귀족이어야만 한다.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와서야 아쪽 체면이 죽어버리니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가.” “예, 예!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사절단은 자기끼리 다 알아서 준비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돌아갔다. * * *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방금 노백작이 뭐라고 말했는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가진 자가 무슨 말을 입에 담은 것인가. “자랑스러운 하이델베르크의 시민 여러분. 우리는 일 년 동안 절망적인 싸움을 이어왔습니다.” 세월이 스며들어 굳은 노인의 이맛살은 온화했다. “공포스러운 창칼을 마주보며 우리는 하나로 단합하였고, 한 조각의 빵이 절실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나보다 더 굶주렸다면 기꺼이 내 몫을 단념하였지요.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할지어니.” 노인이 유명한 경구를 읊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살아남을 길이 보였습니다. 죽음에 맞서 그토록 끈끈하게 단합했던 우리가 오히려 삶을 눈앞에 두고 분열된다면 이보다 우스운 일이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시민이여! 적군은 우리가 자기 목숨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합니까?” 노인이 상냥한 주름살과 달리 굳건한 눈빛으로 광장을 둘러보았다. “진실로 우리는――우리 인간은, 다른 이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없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정체모를 열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노인이 소리쳤다. “정의는 의연하게 피어나는 꽃일지어니! 의인(義人)들이여! 하이델베르크를 위해 일어서시오!” 그러자.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일어섰다. “사악한 마물 무리의 계략에 넘어질 수는 없지. 인간의 자존심을 보여줍시다.” “하잘 것 없는 인생을 마감하기에 훌륭한 무대라오.” 항복사절단 중 한 명이었던 남작. 도시상업을 지배하는 거상인 자작. 그들이 단상에 올라서서 말없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세 사람이 추가로 일어섰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시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사교계를 주름잡는 마담, 도시 법원의 판사장, 신전 사제장……. 죽음을 자처한 여섯 명 전원이 고위 귀족이었다. 광장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귀족들이 희생하겠다고 나섰는가. 저들은 누구보다 이기적이지 않았던가. 놀라움과 의문이 뒤섞인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노백작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고귀한 자는 마땅히 다른 이보다 더 무거운 책무를 짊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귀족들이 보여준 태도에 일만 시민은 경탄했다. 그들은 각자 신들에게 기도하여 여섯 의인한테 축복이 내려지기를 빌었다. 다음날 새벽, 여섯 명은 사형수처럼 속옷 차림으로 성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와 여섯 명을 배웅해주었으며, 그들이 가는 길에 끊임없이 기도를 외웠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유지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파이몬에게 계책을 설명하며 말했다. “첫 번째는 아까 논의했듯이 마왕군에 대한 적의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번째 이유, 바로 귀족에 대한 적의입니다.” “외부의 적, 그리고 내부의 적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트는 독재자로서 전형적이지만 효율적인 수법을 실행하고 있다. 외부의 적만 설정해버리면 국민이 지나치게 단합해버린다. 그렇게 하나가 된 국민이 독재자보다 더 강력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훌륭한 독재자라면 마땅히 내부에도 적을 설정해야만 한다. 국론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보다 여럿으로 나뉘는 편이 독재자 입장에서 국가를 통치하기 수월하다. 그로써 국가는 적절하게 통합하면서도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기교의 목적은 명확하다.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재자 자신의 지지세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는 고위 귀족을 공공연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도시 자체를 희생시킴으로써 마왕군이라는 외부의 적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받아쳐줄 차례입니다. 희생의 범위를 도시 자체가 아니라 고위 귀족만으로 줄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될까? 하이델베르크를 구한 것은 시장(市長)이 아니다. 군사도 아니다. 공화국 정부에게 천대받는 고위 귀족, 그들이 죽음을 자처함으로써 도시를 구해냈다……. 귀족들이 보여준 고귀한 희생정신에 모든 백성이 감동하겠지. 희생만큼 사람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드는 것은 드물다. 공화국에서 귀족의 이미지는 일변할 것이다. “정부에서 발탁한 시장은 암살 따위를 저질러서 도시를 위험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합스부르크 통령이 자랑하는 군대도 '무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이 희생한 것입니다.” 관리와 군인은 체면이 구겨지는 반면에 귀족은 발언권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 엘리자베트의 하수인이 약해지고 대적자가 강해진다. “……통령은 아무것도 못하겠네요. 어찌되었든 귀족들은 도시를 구한 영웅. 칭찬하는 수밖에 없사와요.” 파이몬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략에 있어서는 귀신 같네요. 단탈리안이 제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섯 명은 처형할 생각인가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인상만 나빠집니다. 당연히 살려줘야죠. 스스로 죽음을 자청한 의인들. 여기에 마왕조차 감격하여 그들을 용서해준다……. 보십시오. 무척 좋은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정의로운 귀족에 자비로운 마왕까지. 음, 멋진 주인공에 멋진 엔딩이다. 이야깃거리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올해 음유시인들은 어디 가도 굶어죽을 걱정이 없겠군. 모르긴 몰라도 내 덕을 보는 음유시인이 상당히 많을 거다. “게다가 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영웅이 훨씬 더 거추장스럽습니다. 여섯 명은 계속 살아주어서 합스부르크 통령의 골칫거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 있는 영웅이 골칫거리라…… 정말 단탈리안다운 말이네요.” 파이몬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소녀가 혹시 말한 적 있나요? 단탈리안은 성격이 너무 악독하다고.” “글쎄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만.”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파이몬이 빵 터졌다. 그녀는 부채를 접고 한참이나 웃었다. 다음날 아침,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처형식이 이루어졌다. 여섯 명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기 직전 파이몬이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이들은 저 도시에서 가장 의로운 이들이 아닌가요? 만약 우리가 이들을 죽인다면 세상에 얼마 없는 정의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니, 감히 어떻게 처형을 거행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파이몬 님.” 내가 짐짓 분노한 척하며 소리쳤다. “하이델베르크에는 대죄가 있습니다. 죄는 처벌되어야만 합니다!” “소녀는 의인을 죽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묻고 싶사와요. 비록 우리가 마인과 인간으로 나뉘어 반목하고 있으나, 어찌 정의를 논하는 데 있어서 마인의 정의가 따로 있고 인간의 정의가 따로 있을까요?” 파이몬이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소녀는 이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의인들이여! 그대들은 작게는 하나의 도시를 구했으며, 크게는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였으니, 저 파이몬, 종족을 뛰어넘어 경의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대들은 고귀한 책무(noblesse oblige)를 다한 자로서 역사에 길이 남겨질 것이에요.” 여섯 명의 의인은 풀려났다. 저들은 어차피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희생을 자처한 것이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선수였으므로 황공하옵니다, 파이몬 님이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군이십니다, 하는 말이 한참이나 오갔다. 이날 파이몬이 만들어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크게 유행을 타서 음유시인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역사란 이런 것이겠지. 아쉽게 됐구나, 엘리자베트. 내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당신 뜻대로 됐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세상에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좋은 경험을 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사람이란 모쪼록 겸손해야 하거든.   00263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기사인 중년의 남성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 기사단. 그들은 초라하게 도시에서 쫓겨났다. 한때 구백 명에 이르렀지만 야습이 거하게 실패하는 바람에 단원 숫자가 이백까지 급감했다. 남은 이백마저 절대다수가 견습단원으로, 고참 기사는 물론이고 기사단장마저 싹 전사했다. “저주받을 브루노의 악몽! 지옥에나 떨어져라!” 현재 이백 명의 인원을 선도하여 이끌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바로 부기사단장. 그는 벌써 몇 시간째 단탈리안을 욕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신 탓이었다. 부기사단장을 뒤따라가며 견습기사들이 수군거렸다. “어휴. 어젯밤부터 왜 저리 욕만 하신다냐.” “적군에서 야습을 예견한 사람이 그 마왕놈의 부하라잖아. 뭐, 속이 타들어가실 만하지.” 부기사단장에게는 출세를 향하여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천 명에 가까운 기사단에서 넘버 투를 차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 기사단은 너무나 참혹하게 패배해버렸다. 이대로 수도에 돌아가봤자 기다리는 것은 기사단 해산뿐. 그나마 평기사나 견습기사는 사정이 괜찮았다. 다른 곳에 배속될 수 있었다. 부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인사에겐 어림도 없었다. 패전의 책임을 껴안고 영원히 군부에서 퇴출되겠지. “그 새끼만 없었더라면……제길!” 만약 재능이 출중한 인사라면 백의종군이라도 시킬 것이다. 하지만 부기사단장은 적당한 실력에 적당한 인맥, 적당한 처세술을 활용하여 고위직에 올랐다. 참패라는 멍에를 벗어재낄 만한 실력도 재력도 인맥도 없었다……. 기사로서 자신의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 “뒈져라……개처럼 뒈져라……!” “아휴.” 부기사단장이 술에 취하여 욕지거리를 일삼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나머지 기사단원은 꼴사나운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도, 한편으로 부기사단장을 이해함으로써 묵묵히 계속 걸어갔다. 기사단이 흙길을 밟으며 행군하던 그때였다. 길 한가운데. 몸집이 초라한 남자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품새는 별 볼일이 없었으나 몸에 걸친 흑색 망토가 척 봐도 고급스러웠으며, 특히나 이상한 점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흙길에 웬 새하얀 대리석 의자를 두고 앉은 것이었다. 희한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또 뭐하는 잡놈이야.” 부기사단장이 취기에 잔뜩 험해진 말투로 뇌까렸다. “마법사가 아닐까요?” 시종이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설명했다. 부기사단장은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마법사?” “예. 원체 마법사란 놈들이 괴짜이지 않습니까. 가끔씩 저렇게 길 한복판을 막아두고 지나다니는 사람한테 수수께끼를 낸다고 들었습니다.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통과시켜주고, 풀지 못한 사람은 두꺼비로 만든다나 뭐라나요.” “흥. 별 쓰레기 병신이 다 있군.” 부기사단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만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 것이 혹시라도 마법사가 말소리를 들을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마법사는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과 경탄을 일으키는 부류였으므로. “얼른 썩 꺼지라고 말해.” “예!” 시종이 명령을 듣고 냅다 달려나갔다. 시종은 공손한 태도로 마법사와 대화를 나누더니, 곧 안색이 곤란해져서 주인에게 돌아왔다. “주인님. 저 마법사, 우리가 하이델베르크 기사단이냐고 물었습니다.” “으잉?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있다는 말이냐?” 부기사단장이 딸꾹질했다. “아니, 알아봤으면 냉큼 길에서 비킬 것이지 뭐하는 짓거리야.” “그게 그러니까……무슨 일이 있어도 비켜주지 못하겠다고 말하더랍니다.” “뭐? 하. 이제 보니 진짜로 병신이었군!” 부기사단장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비키지 못하겠는지 어디 잘나신 마법사 양반께 물어봐주마.” 그는 인장에 걸어둔 양손대검을 뽑아들었다. 인간의 머리통 따위는 손쉽게 따내는 병장기였다. 부기사단장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오러를 풀풀 풍기며, 의자에 앉은 남자에게 다가섰다. “나는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다.” 곰처럼 커다란 부기사단장의 체구가 땅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아무리 마법사가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하나 기사단의 행차를 가로막다니, 무례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당장 꺼져라!” “흐음.” 남자가 여유롭게 손에 깍지를 끼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대들이 정확히 이곳에 와준 것이다만. 아니, 표현하는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하아?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남자가 싱긋 웃었다. 눈앞에 오러를 무지막지하게 피워대는 기사가 있으며 그 뒤로는 수백 명의 기사단이 버티고 있는데도, 남자에겐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부기사단장이 불안해졌다. 설마 이 녀석, 터무니없는 고위 마법사인 것일까? 무엇보다도 하대가 지극히 익숙했다. 웬만한 실력자나 귀족이 아니고서는 부기사단장에게 이리도 자연스럽게 하대하기란 어려웠다. “……무슨 일로 우리 기사단을 기다렸다는 말이오?” 부기사단장이 한결 둥글어진 어조로 질문했다. 지금의 직책까지 그를 출세시켜준 처세술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순간적으로 남자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온화하고 느긋하게 미소를 짓던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남자한테서 짙붉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선이 서슬 퍼랬는지, 어디 가서 담력으로 밀려본 적 없는 부기사단장이 멈칫할 정도였다. “네 같은 돼지자식을 무슨 일로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뭐, 뭐라고?” “각하께서 내리신 명령을 제대로 완수하지도 못한 주제에 낯짝 좋게도 태양 아래서 쏘다니는구나.” 부기사단장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자신에게 '각하의 명령'을 운운할 부류는 하나밖에 없었다. 위대한 공화국의 지도자인 통령 각하께서 보내신 밀사임에 틀림없었다! 부기사단장은 즉시 오러를 거두었다. “소……소인이 미처 귀인을 알아뵙지 못하고.” “술냄새까지 풍기니 가관이로구나. 수도에서 교수대가 네놈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아는 모양이로군. 이승에서 작별주를 마시고 있으니 말이야.” “허억!”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부기사단장이 기사로서 자존심을 버려가며 양손대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용서해주십시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을까. 뒤편에서 부하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부기사단장은 주저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자존심은 중요했다. 그러나 자존심은 나중에 가서라도 챙길 수 있는 반면, 목숨은 결코 다시 무를 수 없었다. “용서? 무엇을 용서하라는 말이냐.” 남자가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위대하신 각하와 공화국에 네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좋다. 어디 술에 취한 입구멍으로 한번 네놈의 죄상이라도 읊어보시지.” “마왕군의 간부를 암살하는 데 실패하여…….” “그걸 아는 새끼가 무슨 낯짝으로 수도에 돌아온다는 말인가!” 사자후가 터졌다. 드넓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착각될 만큼 소름끼치는 일갈이었다. 부기사단장이 깜짝 놀라서 그만 고개를 숙였으며, 뒤편의 기사단원들은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다. 성량을 확대하는 마법을 쓴 게 분명했다. “돼지 같은 자식! 어디 한번 변명해보거라!” “소, 소인은 어떻게든 사절단에 참여하려 했습니다……하지만, 저 간교한 사갈의 무리가 기사단은 사절단에 포함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아서……어쩔 수 없이 시장이 홀로…….” “흐응.” 남자는 목소리가 약간이지만 풀렸다. “통령 각하께선 그대들 기사단에 밀명을 하사하셨다. 틀림없는가?” “예, 예. 물론입니다.” “요컨대 암살 사건에 대하여 그대들 역시 책임자라는 말이로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남자의 질문이 다소 이상하게 들렸으나, 부기사단장은 무조건 고개를 조아렸다. 잘못하다가 이 자리에서 즉결사형에 처해질지도 몰랐다. 일단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대가 잘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무엇인지 아느냐?”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전부 내팽개친 보람이 있었을까. 남자의 목소리가 훨씬 더 상냥해졌다. 부기사단장이 속으로 반색하면서 겸허하게 대답했다. “소, 소인은 우매하여 지은 죄만을 간신히 헤아릴 따름입니다.” “바로 내가 질문하는 바에 기밀사항을 술술 내뱉었다는 것이다.” “……?” 부기사단장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상쾌하게 웃고 있었다. ‘잠깐만.’ 부기사단장은 표정이 굳었다. ‘그러고보니, 저놈은 아직 소속을 밝히지――.’ 부기사단장은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뒤집히더니 곧이어 모든 것이 새까매졌다. 적막함만이 세상을 뒤덮었다. “아무렴 엘리자베트가 한 사람한테만 밀명을 내렸을까 싶었지. 친절하게 대답해주어서 고맙네, 프리드리히 부기사단장.” 툭, 하고 부기사단장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또르르 굴렀다. 남자의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대검은 그렇게 수급을 취하고 도로 가라앉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기사단원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경악할 시간마저 얼마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들의 그림자에서도 속속들이 대검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 마법이다! 저놈이 마법을 쓰고 있어!” “부기사단장께서 전사하셨다!” 기사단이 혼란에 빠졌다. 남자는 부기사단장의 수급을 챙기고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두 손으로 아티팩트를 찢자 순간이동 마법이 발동하였고, 의자와 더불어 남자를 바로 근처에 있는 숲으로 이동시켜주었다. 남자는 수풀에 몸을 숨기고 멀리서 기사단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림자에서 종행무진하는 대검에 기사단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만약 경험이 많은 기사가 있었다면 이것은 마법이 아니라 죽음의 기사라는 마물이며, 근방에 숙주가 있을 터이니 먼저 숙주를 찾아야 한다고 말해주었겠지만, 이미 반불구나 마찬가지인 기사단에 그런 고참은 없었다. 결국 이백 명 중에서 백 명 가량이 참살당했고, 나머지는 병장기도 챙기지 못한 채 도망쳤다. “…….” 남자가 얼굴에 뒤집어쓴 면피구를 뜯어냈다. 그곳에 단탈리안의 얼굴이 나타났다. 단탈리안이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중얼거렸다. “……이번 전쟁은 프랑크 내전에서 죽을 쑨 내가 파이몬한테 빚을 갚는 거다.” 승리의 영광도, 전쟁의 목적도, 모두 파이몬에게 되돌아가야 마땅했다. 단탈리안이 암살 사건에 흥분하여 소리 높여 복수를 울부짖었다면, 파이몬으로서는 그 주장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이델베르크를 함락하는 데 단탈리안과 라우라는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이었다. 단탈리안은 참았다. 파이몬이 프랑크 내전에서 아무런 문책 없이 자신을 용서했듯이, 단탈리안 역시 아무런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고 그저 정치적인 이익만을 고려해주었다. 설령 자신의 부하가 암살될 뻔했다고 해도 절대로 공공연하게 복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네놈들은 내 부하를 건드렸다.” 단탈리안이 땅에 내려놓은 부기사단장의 머리통을 덤덤하게 내려다봤다. 라우라가 복수를 주장할 아이가 아님을 단탈리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군을 위해 봉사하면 만족했으며, 주군이 파이몬을 도우고자 했다면 기꺼이 복수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일찍이 약속하지 않았던가. 부하들이 받은 모욕을 자신이 대신 복수하겠노라고. 결코 가벼운 약속이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단탈리안은 이틀 밤낮을 새가며 기사단을 추적했고, 마침내 기습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를 선택하여 복수했다. 단탈리안은 던전에서 라우라가 머무르는 방에 몰래 부기사단장의 수급을 올려두었다. 라우라는 갑자기 새롭게 늘어난 수집품에 의아해했으나, 머리통을 감싼 보자기가 하이델베르크 요새주둔군 기사단의 깃발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도 바로 알아차렸다. “주군이 더 변태다!” “아니, 라우라가 더 변태라니까요!” 하지만 라우라는 단탈리안에게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단탈리안 역시 라우라한테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았다. 두 주종은 평소처럼 서로를 험담하고 웃으며 하루를 보내었다. 그것이 두 주종이 마음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 작품 후기 ============================   ─ 챕터 '푸른 수국(水菊)의 파르네세' END.   00264 그래서 갑은 누구인가? =========================================================================                        잠시 단탈리안 마왕군의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내 던전이 건축 공사에 돌입한 지 삼 년이 넘어간다. 1층, 지하1층, 지하2층, 지하3층까지 던전이 완벽하게 건설되었다. 나머지도 차근차근 지어지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고블린과 난쟁이가 연장을 챙겨들고 쉴 새 없이 던전을 돌아댕긴다. 그중 유독 지하 10층만은 미리 깔끔하게 지어놓았는데, 바로 여기에 나를 비롯하여 단탈리안 마왕군의 핵심 인물들이 거주한다. 말하자면 지하 10층에 세를 들여놓은 사람이 곧 우리 마왕군의 간부라는 얘기. 단탈리안 마왕군에서 서열 제1위를 차지하는 자는 물론 나 단탈리안이다. “아버님. 홍차를 끓여왔습니다.” 지하 10층에 마련된 집무실. 그곳에 앉아서 느긋하게 서류를 읽고 있자니, 데이지가 다가왔다. 소녀가 홍차를 내려놓았다. 홍차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맙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독을 탔냐?” “이백 년에 걸쳐서 꾸준히 복용하면 뼈가 녹는 독을 섞었습니다.” 데이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레미 스승님께 배운대로 무색, 무취, 무미의 조건을 만족시켰습니다. 자신작입니다.” “수고했다. 다시 타와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홍차를 도로 가져갔다. 데이지는 저번 달로 열네 살이 되었다. 열 살 시절 이미 꼬맹이 주제에 장난 아니게 묘한 색기를 풍기던 아이였다. 열네 살이 되자 어리면서도 매혹적인 분위기, 그러니까 배덕적인 매력을 잔뜩 품은 독사과 같은 소녀로 자라났다. “처벌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내 맞은편에서 함께 서류를 보던 라피스가 말했다. “단탈리안 님을 독살하려 한 것입니다. 태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아서라, 저 꼬맹이가 나한테 독살을 시도한 것만 벌써 일흔네 번이야.” 심장에 새겨진 노예각인 때문에 자그마치 이백 년 동안 꾸준히 먹이지 않으면 쓸모가 없는 독약이나 사용하고 앉았다. 사실 독살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했다. 불쌍한 녀석. “쟤는 평생 저러고 살 팔자니까 그냥 무시해.” “알겠습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시 서류작업에 돌입하였다. 여느 때처럼 정장을 입었는데, 양갈래로 묶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정장 앞가슴을 살포시 덮었다. 라피스 라줄리가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2위에 해당했다. 그녀는 내무부 상서를 맡고 있다. 우리 마왕군에서 내무부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권력이 막강한데, 마왕성과 영지의 치안을 감독하며, 감옥을 책임지며, 영지 전반의 행정까지 관리한다. 행정부와 경찰, 정보기관이 합체한 괴물이다. 그런 부서에서 톱을 차지한 라피스 라줄리는……음, 대충 국무총리에다 경찰청장을 겸임하고 거기에 덤으로 국정원장까지 맡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어마어마한 직위로군. 참, 라피스는 호부와 공부. 그러니까 재정부와 건설부에서도 상서를 맡고 있다. 저 찬란한 직위들에 재정부 장관 및 국토건설부 장관만 더 추가하면 되겠다. 얘가 반란을 일으키는 날이 곧 단탈리안 마왕군 멸망의 날이라는 소리이지. 하하. “단탈리안 님. 서류에 결재를 부탁드립니다.” “응, 알겠어. 그런데 아무리 서류가 밀렸다고 해도 우리가 꼭 탁자를 같이 쓰면서까지 일할 필요가 있을까?” “있습니다.” 라피스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단탈리안 님께서 라우라 양과 함께 놀러다니느라 서류가 잔뜩 쌓였습니다. 얼른 처리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하지만 아직 주말도 남아 있고…….” “주말에는 바르바토스 전하와 만나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분 탓인지 라피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때 가면 어차피 단탈리안 님께서는 바르바토스 전하가 놀러오는 바람에 일을 못하겠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라고 변명하시겠지요. 뻔합니다.” “나의 완벽한 계획이 간파되었다……!?” 전율이 일었다. 사정할 때처럼 서릿서릿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말도 안 되었다. 계략만 따지면 전 대륙을 통틀어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나를, 겨우 일개 하급 서큐버스가 꿰뚫어보았다는 말인가. “단탈리안 님과 함께한 지 몇 년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도망치실 수 없습니다. 단념해주시길.” “하이델베르크 함락하고 아직 사흘밖에 안 지났는데……흑, 막 놀고 싶은데…….” 내가 눈물을 머금으며 서류를 읽었다. 뭐, 라피스는 개국공신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기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다. 흑색 허브로 대박을 터트리고 미네르바 작전을 성공하는 것도 라피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라우라가 까불 때는 이틀 밤낮으로 범해주면 그만이고, 데이지가 까불 때는 밤새도록 진득하게 조교해주면 그만이지만, 라피스가 화내면 그냥 게임 오버이다. 무조건 엎드려서 앞으로 잘할 테니까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한다. “후우.” 책상 밑쪽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이제 벌써 네 번째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각탁 아래에 쭈그려 앉아서 내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사정할 때처럼 전율이 일어난 까닭은 정말로 사정했기 때문이다. 라우라는 내가 싼 정액을 전부 삼키고 나서 조그맣게 한숨을 쉰 것이었다. “소녀는 슬슬 방으로 돌아가서 새로 입수한 앙투완 아르노의 철학책을 읽고 싶다만…….” “안 됩니다. 라우라가 가버리면 제가 꼼짝없이 서류작업에만 매달리게 되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서류를 전부 끝낼 때까지 애무하세요.” “……라피스 언니. 주군의 서류가 전부 끝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는가?” 글쎄요, 하고 라피스가 대답했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더 필요하겠군요.” “지금 소녀보고 다섯 시간 내내 펠라티오를 하라는 말인가!” 라우라가 울상을 지었다. “주군은 모르겠지만, 이거, 턱이 꽤나 힘들다! 주군은 쓸데없이 여기만 커다래서 입으로 감싸기 힘들단 말이다.” “아, 아. 잠깐만요. 손가락으로 때리지 마세요. 사정한 직후라서 예민하다고요.”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3위, 라우라 데 파르네세. 그녀는 병부를 책임지고 있다. 국방부 장관이라고 표현하면 편하겠지만 실상은 조금 더 권한이 강력하다. 군정, 군령, 군작전을 모조리 총괄하기 때문이다. 던전에 사는 모든 마물은 라우라가 내리는 지휘를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따르지 않을 경우, 내 의사와 상관없이 라우라는 즉석에서 병졸을 처벌할 권리를 갖고 있다. 실제로 라우라는 평소엔 맹하지만 일단 군사업무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다. 한달에 꼭 몬스터 두세 마리는 군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죄로 처형당한다. 아마 내 던전에서 사는 몬스터는 나보다 라우라를 훨씬 더 무서워할 거다. “하이델베르크를 함락시킨 건 주군이 아니라 소녀이지 않는가! 소녀야말로 휴가를 받아 마땅하거늘, 어째서 주군한테 다섯 시간이나 봉사해야 한다는 말인가……불합리하다!” “이제 알았습니까? 세상은 원래 불합리합니다. 싫으면 라우라가 마왕하세요.” “으으……!” 라우라가 눈물을 머금고 재차 내 성기를 입에 물었다. 음, 딱 기분 좋은 포근함이 하반신을 감쌌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류를 읽어나갔다. 여기까지가 단탈리안 마왕군의 최고 간부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파르시가 서열 제4위. 마왕성 이외에 영지의 업무를 맡고 있다. 영지의 행정권과 조세권을 담당한다. 몬스터에게는 제일 두려운 인물이 라우라이고, 인간에겐 제일 두려운 인물이 파르시이다. 그 다음으로는 제레미가 서열 제5위. 내무부 휘하의 자경단장이다. 라피스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치안과 감옥을 관리한다. 여기서 감옥을 관리한다는 것은, 제레미에게 죄수를 불로 지져버리거나 배를 째버리는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데이지가 서열 제6위. 나의 개인적인 비서이자 시녀장이다. 마왕성에는 내 귀여운 정령이들을 비롯해서 꽤나 많은 마물이 시종으로 근무한다. 이들 모두를 데이지가 감독하고 있다. 아울러 마왕인 나의 의사를 영지에 전달하는 사람도 데이지이다. 측근 중에 측근이라 할 수 있다. “홍차를 다시 우려왔습니다.” “오냐. 이번에는 또 무슨 독을 탔니?” “삼백 년 동안 꾸준히 복용하면 내장이 썩어버리는 독을.” “다시 타와.” “예, 아버님.” 최측근이 틈만 나면 나를 암살하려 든다는 게 넌센스이지만. 나머지 서열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가 없다. 각 마을의 촌장, 던전 각층의 보스방에 머무르는 상급 몬스터 정도가 서열 제7위에 해당하겠지. 한두 명이 아니다. 참고로 데이지의 오라비인 루크는 자경단의 부단장. 제레미 휘하에서 열심히 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서열 제15위쯤일 거다.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한테 출세 경쟁에서 뒤진 기분은 어떨까.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단탈리안 > 라피스 > 라우라 >>> 파르시 > 제레미> 데이지 >>> 각 마을의 촌장, 상급 몬스터. 이것이 공식적인 서열이겠다. 그런데 조금 더 내밀하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단탈리안!”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뻥 차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바르바토스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최고위 마왕의 등장에 라피스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부복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여기가 네 안방이냐? 올려면 온다고 시종이라도 미리 보낼 것이지 뭐하는 거야.” “개새끼. 오늘 아침 빈드보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면서 뭐, 시종? 네 녀석 목에 달린 물건이 바가지냐 대가리냐!” “어라.” 내가 깜짝 놀랐다. “약속한 날이 오늘이야? 내일 아니었어?” “개 같은 자식!”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아득 물었다. 숨이 거친 것을 보아하니 아마 단단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언제 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 저녁이 될 때까지 감히 나를 바람맞혀?” “자, 잠깐만. 난 정말로 내일인 줄 알았어! 내 시녀가 분명히 너와 약속한 날은 내일이라고!” 내가 사색이 되어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수첩에 적어놓았을 따름입니다.” 데이지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녀석의 입끝이 아주 조금, 약 3mm 정도 슬쩍 올라간 것을. 데이지의 눈동자는 계획을 성공한 책사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 이 자식!?” “파이몬이랑 놀아나는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아앙? 바람을 맞혀? 단탈리안 개새끼, 아주 간땡이가 배밖으로 튀어나가도 삼천리는 튀어나갔구나.” 바르바토스의 오른손이 검은 마나로 빛났다. 채찍이 나타났다. 바르바토스는 채찍을 쥐어잡고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공포에 몸이 떨렸다. 여기에 서글픈 진리가 있었다.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이 이러니 저러니 허구한 날 논해봤자……바르바토스는 그 모든 것에 우선했다. 세력만 살펴봐도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이니 어쩌겠는가. 나는 필사적으로 주변의 신하를 쳐다보았다. 나 좀 도와줘! “…….” “…….” 아무도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럴수가. 세상에 충신이란 충신은 죄다 죽어버렸다는 말인가. 군주가 죽을 판국인데 몸 하나 바치는 충의지사 한 명 없단 말인가. “흠. 바르바토스 언니가 왔군요.” 그때 각탁 밑에서 라우라가 기어나왔다. 바르바토스는 라우라를 보고 멈칫했다. “……라우라? 왜 그런 곳에 있었어?” “주군이 펠라티오를 시키는 바람에 잠깐 수고했습니다. 그나저나 바르바토스 언니. 지난 번에 다음날에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어째서 아침에 사라졌습니까?” “어. 그, 그게.” 바르바토스가 말을 더듬었다. 기세등등한 모습은 어디로 증발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갑자기 빈드보나에 일이 생겨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서.” “언니가 나와 한 약속은 그 정도 가치밖에 없었던 겁니까. 소녀, 언니와 아침을 같이 보낼 생각에 두근거렸는데……언니는 별로 기쁘지 않았나봅니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얼른 채찍을 역소환시키고 라우라한테 달려들었다. 그렇다. 놀랍게도,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이라는 서열이 확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우라 > 바르바토스'라는 서열이 또한 존재하는 것이었다.   00265 그래서 갑은 누구인가? =========================================================================                        “라우라, 군마(軍馬) 좋아하지? 내가 빈드보나에서 끝내주는 명마 하나 봐둔 게 있거든. 얘가 보통 말이 아니에요. 생긴 것도 깔쌈하게 생겨먹은 게 달리기도 잘 달려.” 바르바토스가 쩔쩔매면서 라우라의 손을 잡았다. 기생한테 잡혀버린 졸부마냥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그리고 장검도. 이야, 대장장이 시켜서 만든 장검인데 아다만티움 함량이 자그마치 칠 할이야. 씨발 내가 한번 들어봤더니 이건 뭐 검이 아니라 회초리예요. 존나 가벼운데 뭐 사람 뼈다구가 무 썰리듯이 확확 베는 맛이 있더라니까. 라우라가 다 가져.” “우와아…….” 그 꼬라지를 옆에서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바르바토스가 대단해서 경탄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이 정도로 추락할 수 있구나, 하는 의미에서 입을 벌린 것이었다. 바르바토스, 너 겁나게 추해……. 라우라가 여전히 세침데기 각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언니. 제가 지금 선물 받겠다고 언니한테 이러는 것 같습니까?” “아니지. 암. 아닌 거 알고 있지.” 바르바토스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가 미안해서……응? 아무것도 안 해주면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내 마음 알잖아, 라우라.”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점입가경이로군. 내 얼굴이 시궁창으로 썩어들었다. 참고로 저편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라피스도, 내 옆에서 다소곳하게 서 있는 데이지도, 다들 얼굴이 시베리아 평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애정 싸움이란 옆에서 지켜보면 추악함 그 자체였다. 바르바토스와 라우라가 사귀기 시작한 게 대략 일 년쯤이 되어간다. 바르바토스야 원래 동성애자였다. 게다가 지독한 여성우월주의자이기도 했는데, 남성이란 본디 음식물찌꺼기와 같은 생물이며 오직 여성과 여성만이 순수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유일한 예외는 나였다. 하지만 나와 사귀는 이유 역시 내가 성별을 뛰어넘어 매혹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물찌꺼기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하여 쓰레기 중 쓰레기이기 때문이었다.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었지만 아무튼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라우라의 스팩을 살펴보자. 첫 번째, 일단 아름답다. 소녀 시절을 지나쳐서 이제 막 성인 여성의 계절에 접어든 라우라는 그야말로 한껏 물이 오른 국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라우라만큼 예쁜 여성은 글쎄, 기껏해야 한두 명밖에 없겠지. 두 번째, 똑똑하다. 열여섯 살 때 이미 각종 철학을 통달했고 여섯 가지 언어에 능통했다. 사람이 똑똑하더라도 얼마든지 천박해질 수 있는데 라우라는 경우가 달랐다. 내가 무슨 책을 독파했다느니 언어를 몇 개나 할 수 있다느니, 그런 식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밤기술이 끝내주었다. 라우라는 성노예 직업 레벨 S를 찍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경국지색에 팔방미인인데다 팜므파탈. 가히 나라 하나는 껌값으로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대륙을 뒤흔들 여걸다웠다. 이런 여아가 대쉬하는데 아무렴 바르바토스라고 함락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얼굴 반반한 애가 꼬시니까 얼씨구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르바토스는 라우라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떡을 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밀당에서 바르바토스가 점점 더 불리해지더니 몇 달 전부터 아예 라우라가 주도권을 휘어잡았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아마도 둘이서 섹스할 때 라우라가 더 힘든 입장을 맡아주는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 입장에선 대륙에서 제일 잘난 여자애가 이걸 원하면 이걸 들어주고, 저걸 원하면 저걸 들어주는 셈이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겠지. 그러니까 전형적인 낮져밤이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언니와 저는 종족과 신분을 뛰어넘어서 마음으로 강하게 이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약간만 큰 일이 생겨도 침대에 내버려두고 떠나버리는 그뿐만인 관계…….” 라우라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저는 인간입니다. 노예였습니다. 언니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이미 사치겠지요. 어차피 저는 주군이 성기를 빨라면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하염없이 쭈그려 앉아서 빨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 “다, 단탈리안! 너 그런 짓을 우리 라우라한테 시켰단 말이야!?” 왜 또 나한테 화살촉이 돌아오는가. 더군다나 '우리 라우라'라니. 언제부터 라우라가 네 녀석의 재산이 되었냐. 황당무계하고 어이가 없었다. 잘못하면 아주 간이고 쓸개고 죄다 쓸어바칠 기세구만. “아니. 거 부하한테 거시기 좀 빨아달라고 시킬 수도 있지, 내가 뭐?” “라우라가 어딜 봐서 그냥 부하야! 내 애인이기도 하거든! 성깔 더러운 새끼, 어떻게 내 애인을 성노마냥 함부로 다뤄!” “너한테 성깔 더럽다는 얘기 들으니까 진짜 기분 더럽다…….” 마왕군에서 너만큼 성깔 더러운 여편네가 없어요, 바르바토스 씨. “애당초 라우라는 네 애인이기 한참 전부터 내 애인이었어. 애인끼리 물고 빨고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괜히 쫄리니까 나한테 화 쏟아내기는, 쯔쯧.” “아, 좀!” 바르바토스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라우라가 옛날에 얼마나 지독한 꼴을 당했는지 알면서도, 앙? 주군이란 놈이 방바닥에 앉혀서 펠라나 시키고 말이야!” 이 녀석, 나한테 화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절절함이 묻어나왔다. 제발 장단 좀 맞춰달라며 시선이 말없이 소리쳤다. 입이랑 눈이 따로 놀았다. 자기 혼자서 라우라가 삐진 걸 풀어줄 자신이 없으니 나한테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 라우라 예쁜 엉덩이가 얼마나 차가웠겠어. 그런 것쯤은 다 고려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하여간 단탈리안 네놈은 배려가 부족해, 배려가. 예전부터 태도가 글러먹었어!” “…….” “자. 어서 라우라한테 사과해! 얼른! 잘못했다고 빌어!” 내가 볼을 긁었다. 뭐, 오늘이 약속날인 걸 몰랐던 건 내 잘못이다. 바르바토스가 라우라한테 저렇게 매달리는 광경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면도 있다. 한수 접어주자. 내가 라우라한테 말했다. “……바르바토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제가 잘못한 걸 알겠습니다. 라우라, 미안했습니다. 조금 더 라우라를 배려했어야 하는데. 바르바토스 말이 맞아요. 제가 심했습니다.” “흐음. 이제부터 소녀에게 한 시간 이상의 펠라티오를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뭐시라?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우라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인가. 의도적으로 표적을 나한테로 돌려서, 사죄를 받아내고, 더 나아가 이런 약속까지 따내겠다고……? 무시무시했다. 너무나도 무시무시했다. 데이지도 그렇고 라우라도 그렇고, 우리 마왕성 여자들은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속이 이토록 새까맣단 말인가! “그, 그건 곤란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이라니요. 오늘처럼 서류로 작업하거나 심심할 때는 아무리 못해도 세 시간은 빨아주어야 제가 심심하지…….” “단탈리아아안!” 바르바토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지금 라우라가 용서해주겠으니까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잖아! 너는 사내 새끼가 되어가지고, 앙? 여자한테 제대로 사과하는 방법조차 모르냐?” “…….” 내가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입과 다르게 무척이나 쌍불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소리없이 외치고 있었다. 제발,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제발 여기선 항복해달라고. 한숨이 나왔다.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한 시간 이상 펠라티오를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라우라 > 바르바토스'가 성립함으로써, 우리 마왕군의 서열 순위는 '라우라 > 바르바토스 ≥ 단탈리안 > 그 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배갯머리 송사가 정말 무섭다. “음. 감사한다, 주군.” 라우라가 만족스러워하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바르바토스는 또 좋아 죽겠다는 듯이 표정이 헤벌레 풀어졌다. 완전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으이구. 저거 빠져도 단단히 빠진 거야. 라우라가 두 손으로 바르바토스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언니의 마음을 착각해서 미안해요. 언니는 절 위해서 이렇게나 애써주시는데…….” “아, 아니야. 나야말로 그날 말하지 않고 떠나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언니.” “라우라!” 두 아름다운 여인이 서로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어찌나 공기가 화사한지, 당장 주변에서 배경화면으로 하얀 백합이 피어줘야 할 것 같았다. 사람에 따라 감동적인 광경으로 비출지도 모르겠지. 참고로 라피스와 데이지 그리고 내 경우를 거론하자면, 우리는 나란히 썩은 동태눈깔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라. 우린 위층에 시찰 좀 다녀올 테니.” 두 여인은 이미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겠지만 일단 예의상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함께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집무실에서 나가기 직전, 라피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우라. 내일 군사훈련이 예정되어 있는 것, 잊지 마시길.” “아, 응. 알겠다, 언니.” 내 작별인사에는 반응하지도 않았던 라우라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아마 정말로 내일 예정을 까먹어버린 모양이었다. 라피스한테 지적당하고 퍼득 떠올린 것이겠지. 그래서 저절로 기합을 주어 대답했을 테고. 쿵, 하고 집무실 문이 닫혔다. 우리 세 명은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대충 지하 10층 던전을 거닐었다. 왜인지 마음이 씁쓸해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말이야. 서로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니까.” “그렇습니까?”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맞장구쳤다. “아아. 두 사람 사이에 딱 경계를 그어놓고 침범하지 않아야 담백한 관계가 유지되거든. 저거 바르바토스 좀 봐라.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라우라한테 전부 요구해버리니까, 역으로 라우라한테 잡혀 살잖아.” 적당히 요구했어야지. “저렇게 잡혀 사니까 얼마나 보기 흉해? 서열 제8위에다 평원파의 수장이어도 연애에서 한번 삐딱하면 끝장인 거야. 음, 라우라가 바르바토스한테 들이댄 것 자체가 의아스럽긴 하지만.” 나는 사실 라우라한테 동성연애 기질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둘이서 사귄다고 들었을 때도 내 입에서는 에엥? 하는 소리가 튀어나갔다. 동성연애든 뭐든 신하의 청춘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만, 라우라는 나한테 그런 낌새를 하나도 보이지 않았거든. “혹시 월맹군에서 라우라가 참모할 때 바르바토스랑 몰래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다.” “흐음, 세상엔 신기한 일도 다 있어.” 따지고보면 라우라와 나는 바르바토스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어버린 건데, 딱히 라우라가 나한테 심술을 부리는 것도 전혀 없고. 여러모로 신기하다. “단탈리안 님. 그보다 중요한 서류가 남아 있습니다.” “어? 서류는 집무실에 두고 나왔잖아.”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아서 미리 챙겨두었습니다.” 라피스가 옆구리에 낀 가방을 보여주었다. “많이 챙기지는 못했습니다만 두 시간 어치는 됩니다.” “으으으, 조금 놀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단탈리안 님의 집무실이 점령되었으니, 제 집무실에서 마저 작업하도록 하지요.” 라피스가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걸어나갔다. 나는 시무룩하게 그녀한테 연행될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서 데이지가 따라오면서 ‘사실 진실로 군림하는 쪽은……’ 하고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우리 마왕성은 그렇게 대체로 평화로웠다.   00266 반역하는 자 =========================================================================                        “흐음…….” 라우라가 책장을 넘겼다. 그녀는 독서할 때마다 저렇게 으음, 하고 소리를 내고는 했다. 이상한 버릇이라고 생각하여 언젠가 한번 지적했더니 라우라는 ‘내가 책을 이해했다고 나 자신에게 암시를 거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천재인 그녀조차 책을 한 번만 읽어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던가. 일종의 기법이겠지. “주군. 자유도시들을 거점으로 계속해서 공화주의 사상서적이 나오고 있다.” “그렇습니까? 뭐, 그동안 지식인들도 꽤나 억압받고 있었겠지요.” 이 세계에 공화주의는 낯설지 않다. 단지 발흥할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계속해서 사상가들이 공화주의를 지지해주는 논거를 내뱉어주면 좋겠네요. 그래야 대륙이 혼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딱 부러지게 하나의 공화주의라고 부르기에는 곤란해보인다.” 라우라가 옆머리를 꼬았다. “애시당초 공화주의가 무엇이냐 자체가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흐음?” “봐라. 이 저자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라우라가 책을 내 쪽으로 펼쳤다.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공화적 헌정체제를 민주적 헌정체제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 주의가 필요하다.」 「첫 번째로, 국가 혹은 도시국가는 어떤 종류의 인격체가 국가권력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즉, 단 한 사람만이 소유하거나, 몇몇 사람이 연합하여 소유하거나, 아니면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소유한다.――우리는 이를 순서대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로, 국가 혹은 도시국가는 통수권자가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통치의 방식이 어떤가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통치의 방식에 따라서 우리는 국가가 공화주의적인지 전제주의적인지 구분한다.――공화주의는 입법권력과 집행권력(정부)을 분리하는 방식을 뜻한다. 반면에, 전제주의에선 집행권력이 스스로 입법을 행한다.」 「그렇기에 민주정의 형식은 필연적으로 전제주의이다.」 “……에엥?” 입에서 쉰소리가 기어나왔다. 이것이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가. 내가 라우라한테 책을 넘겨받아 다음 장을 펼쳤다. 읽기 더럽기로 소문난 합스부르크어로 쓰인 문장들이 계속해서 꾸물꾸물 이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정책과 법률 등에 있어 어느 한 사람이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그 한 사람을 무시하고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따라서 모두가 아닌 모두가 결정하게 되며, 이것이 곧 집행권력(정부)을 정당화시킨다.」 「그리하여 공화주의적이고자 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민주정이 아니라 반드시 대의적인 정치체계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하지 않을 경우,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집행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고, 국가권력은 일개 사적인 소유물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민주정은 위와 같은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다.」 「아니, 민주정은 오히려 대의적인 정치체계를 아예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인이 국가의 주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군주정과 귀족정은 엘리자베트 합스부르크 통령이 “나는 한낱 국가에서 가장 높은 하인일 뿐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대의적인 정치체계의 정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적어도 가능하다.」 「우리는 주장한다.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즉 달리말해, 국가권력의 대의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도리어 국가는 공화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화주의 국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군주정보다 귀족정에서 훨씬 더 어려우며, 더더욱 민주정에선 오직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네에에?” 다시 한 번 입에서 쉰소리가.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두려웠다. 뭐냐 이거. 겁나게 무섭잖아. 심지어 깨알처럼 엘리자베트 통령이 했다는 말까지 삽입했다. 대놓고 책 뒤에 모종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평범한 인민에겐 국가가 군주정이냐 민주정이냐 따위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통치방식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만약 그 국가가 대의적이지 않고 전제적이라면, 인민은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민주정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국가가 대의적이라면, 즉 국가가 인민의 뜻을 충실하게 대신하고 있다면, 인민은 국가형식이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듯이 공화정은 결코 민주정과 똑같은 의미가 아니며, 심지어 두 개는 서로 양립하는 것조차 요원하다. 공화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대의적이어야 하며, 대의적인 통치방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군주정이 가장 적합하다.」 「단지 '전제주의적인 군주정'에서 군주를 왕 혹은 황제라고 부르는 반면, 우리는 '공화주의적인 군주정'에서 군주를 통령 혹은 대통령이라고 부름으로써, 둘 사이에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를 둔다.」 “와우…….” 원더풀한 개소리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가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어떤가, 주군?” “감탄했습니다. 인간이란 이토록 논리적으로 권력의 개가 될 수 있군요. 훌륭합니다. 단, 자기가 내뱉는 소리가 기껏해야 개가 헉헉거리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불쌍할 따름입니다.” 사기꾼과 선동꾼의 차이점을 무엇일까. 사기꾼은 자기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동꾼은 다른 사람을 선동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선동하고 있다. 나는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결코 사기를 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떳떳하다, 나는 옳다……. 그렇게 자기 자신까지 속여버리는 순간, 그놈은 단순히 선동꾼이 되어버린다. 이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악당으로 따져도 하수에 불과하겠지. 만약 이 세상에 뭔가 옳은 것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부분에 관련해서는 거짓말을 칠 수가 없게 된다. 사기꾼이 사기를 칠 수 없는 지점, 즉 약점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결과는 단순. 그 부분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다른 사기꾼에게 언젠가 이용당하고 먹혀버린다……. 사기꾼은 언제나 사기를 치는 사람으로 남아야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이 대상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당해서야 어쩌자는 것인가? 논리적인 화법이든 감정적인 화법이든 여하간 볼썽사납다.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국가의 권력이 사유화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습군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것을 찾아 해매기 마련입니다. 그건 그저 본성이지요.” 내가 연초를 꺼내서 물었다. 지독한 향이 폐를 게워내는 것이 느껴졌다. “책망할 것도 비탄에 빠질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어떻게 인생이 우리의 것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무언가에 의해 낳음을 당했을 뿐입니다.” 후우, 하고 연기를 뱉었다. “그러니 모두 무엇이 자신의 것인지 찾아 나서는 겁니다. 누군가는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누구는 연인을, 누구는 예술작품을, 누구는 재물을, 누구는 아름다운 이상을…….” 머릿속에 잭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녀석은 꿈속에서 마주치는 걸로 이미 충분했다.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먼지 새끼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두 팔로 아득바득 잡동사니를 긁어모았다가 잠시 후에 사라져버립니다. 잡동사니 중의 잡동사니가 바로 권력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잡동사니지요.” 자신이 하는 말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 자신이 정책을 결정하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이 달라붙어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낸다. “알겠습니까, 라우라? 처음부터 시각이 글러먹었습니다. 권력이 사유화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이미 사유화되고, 사유화되어야만 하는 물건입니다. 그놈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아귀처럼 달라붙는 먼지들이 바로 정치꾼이죠.” 고로, 공화주의는, 어떻게 하면 권력을 더더욱 대의적으로 만들 것인가에 초점이 달려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권력을 무용지물한 물건으로 만들 것인가에 달린 것이다. “예컨대 감사기관들을 두는 게 한 가지 방법이 되겠죠. 기관들이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겁니다. 권력이 독점되지 않게 되도록이면 분산시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공화정에는 그나마 민주정이 어울립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이다.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주인이 되려고 나선다. 결과, 실제로는 아무도 주인이 없는 정치체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각 기관장에 임기를 정해두어야겠죠. 한번 기관장에 임명되면 평생 봉사한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야 권력을 자기 걸로 만들지 않는 사람이 도리어 비정상적입니다. 10년도 깁니다. 5년도 너무 길어요.” “하지만, 주군.” 라우라가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그중 어느 한 기관이 점점 더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 않겠는가?” “맞습니다. 임시방편에 불과하죠.”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니까 권력 자체가 없어지면 됩니다.” “…….” “전부 죽여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지요. 뭐, 라우라. 우리가 '새삼스럽게' 공화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한 건 만약 공화주의자가 된다면 그럴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사유화된 권력을 아주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표현해도 좋다. 권력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나를 대신해서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 지금도 위층 던전에서는 몬스터들이 모험대에 맞서 죽어나간다. 권력이 있으면 부하들이 바라는 바를 대신 들어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우리보다 강력하고, 우리를 적대하는 권력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간단해서 좋군.” 라우라가 웃었다. “주군의 말이 맞다. 어떻게 권력을 평화롭고 영원한 형태로 만들 것인가. 이걸 고민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겠지.”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슬쩍 나한테로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내 목을 감싸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가볍게 키스했다. “허나 주군, 그래서야 너무도 희망이 없지 않는가?” “희망은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요.” “프랑크에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이 제국을 건설한다고 들었다.” 내가 라우라의 머리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부드러운 감촉. 기분이 좋았다. “삼 년 전의 복수를 할 때로군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군은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는지. 다시 싸워봤자 또 깨질 거다.” “음, 맞습니다. 저 혼자서 나댄다면 생드니 평야를 재현할 뿐이겠지요.” 내가 라우라의 하얀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자칭 타칭 천재 군사 아가씨가 있지요.” “호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치켜들었다. “소녀한테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의 군주, 그리고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왕을 동시에 상대하라는 명령인가?” “솔직히 그년들 살아 숨쉬는 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마침 파이몬한테 빚을 만들어뒀습니다. 용이하게 써먹도록 하지요.” 라우라가 작게 키득거렸다. “알겠다, 주군. 소녀는 주군의 검이다. 어떤 왕이 적일지라도 그 목을 베어 주군에게 바치겠다.” 그해 5월. 니블헤임에서 회합이 개최되었다. 나,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단탈리안이 전체 회합을 소집한 것이었다.   00267 반역하는 자 =========================================================================                        * * * 이번 소집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았다. 먼저 회합을 주최한 장본인이 문제였다. 여태까지 회합은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 혹은 그 이상의 서열을 가진 마왕이 열었다. 아무리 평원파의 실세로 급부상했다고 하나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 마왕군을 통틀어서 가장 미천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가 감히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니.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거늘 어찌 이리 무례하게 만행을 일삼는가.” 초대장을 받아든 마왕들 중 몇몇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단탈리안은 비유하건대 졸부와 같았다. 못해도 수백 년을 살아온 마왕한테 요 몇 년 사이 갑작스레 잘 나가기 시작한 단탈리안은 그다지 경탄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겨우 사오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무엇을 걱정하나? 상위 마왕들이 어련히 잘 처리하려구.” “콧대 높은 애송이에게 무서운 꼴을 보여주겠지.” 그들은 회합 소집이 자연스럽게 무산되리라 생각했다. 상위 마왕들이 초대를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몇몇 이는 단탈리안이 자기 스스로 정치적인 입지를 떨어트리게 생겼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돌아갔다. 먼저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참석을 밝혔다. 여기까지는 어찌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일이었다.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똑같이 평원파에 속해 있으므로. 더군다나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쯔쯧. 바르바토스가 어쩌다 남자한테 꼬리가 물려가지고…….” “사랑에 눈이 멀면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망가지는 것이지.” 단탈리안한테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평원파의 수장이 절차와 도리를 망각했다. 몇몇 마왕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다음으로,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이 참석 의사를 밝혔다. “가미긴도 단탈리안과 그렇고그런 사이라고 하지 않나.” “참 나! 여마왕들은 죄다 머리통이 비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흠, 단탈리안 그놈의 거시기가 물건은 물건인 모양이지.” 마왕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세태가 왜 이리 돌아가느냐고 한탄했다. 서열 제71위가 내건 소집에 응답하다니, 사랑이고 뭐고 운운하기 이전에 자존심이 걸린 사안이었다. 연애 감정에 자존심마저 버린 창녀들…… 그런 뒷담화까지 오갔다. 그리고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참석하겠다고 공언했다. “…….” “…….” 이때 가서는 비교적 정치에 무관심했던 마왕들조차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바르바토스가 참석했으니 평원파도 전원 나올 테고.” “가미긴을 따르는 무소속 여마왕이 대충 네 명은 되지 않던가?” “중립파까지 가세한다는 말인데, 이러면…….” 이러면 벌써 과반수 이상의 마왕이 회합에 참석하게 된다. 아니, 그보다 마르바스가 참석에 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마르바스는 중립파의 수장으로서 지금까지 발푸르기스의 밤을 주관해온 자. 그가 단탈리안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열 제9위의 파이몬과 서열 제12위의 시트리가 참석을 밝혔다. 중립파도 아니고 평원파의 실세가 연 회합에 산악파가 참가했다. 누구보다 크게 반발해서 회합에 반대해야 할 세력이 말이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우발적인 회합이 아니다!” “평원파, 중립파, 산악파, 게다가 가미긴까지 미리 상의하고 들어간 것이다!” 평원파, 바르바토스를 포함하여 열일곱 명. 무소속, 가미긴을 포함하여 다섯 명. 중립파, 마르바스를 포함하여 열 명. 산악파, 파이몬을 포함하여 열여섯 명. ──회합에 참여하기로 예정된 마왕의 숫자가 벌써 마흔여덟. 월맹군 전쟁으로 인하여 현재 마왕은 일시적으로 예순네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회합에 참석하는 인원이 전체 마왕에서 2/3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이들만으로 '새로운 월맹군 원정'을 결의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참석해야 하네.” “빌어먹을, 어째서 서열 제71위짜리에게 우리가 휘둘리는 건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마왕이 회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서열 제1위의 마왕인 바알도 섞여 있었다. * * * 상위 마왕들이 회합에 참여하면, 보통 그들을 위해 자리를 따로 마련해둔다. 각 파벌의 수장이야 부하들끼리 똘똘 뭉쳐 있으니 제외한다. 서열 제2위인 아가레스는 요새 들어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역시 제외. 그러니까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10위 중에서 여섯 명쯤은 따로 상석을 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번 회합에서는 상석 자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그 때문일까. 회합이 열리기 직전까지 니블헤임의 무도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원파도, 중립파도, 산악파도, 수십 명이나 되는 마왕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마왕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불안하게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는 그들도 몰랐다. 다만,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회장 가운데에는 삐적 마른 남자가 한 명. 모두가 침묵하면서도 남자를 힐끔거렸다. 시선이 집중된 걸 모르는 것일까. 남자, 단탈리안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단탈리안 주변만 마치 또 다른 공기가 감도는 것처럼 차분했다. 문지기가 소리쳤다. “서열 제3위, 공정의 마왕, 바싸고 님 드십니다!” 회장이 적막한 탓에 문지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곧이어 대문 사이로 젊은 귀공자가 걸어나왔다.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 바싸고는 회장의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간파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이윽고 원래라면 준비되어 있어야 할 상석이 어디에도 없음을 발견했다. 대마왕 바알마저 회장 저편에서 의자 없이 서 있었다. 바싸고는 주변의 마왕들을 둘러본 다음, 차가운 표정으로 단탈리안을 노려보았다. 그가 단탈리안에게 다가섰다. “예의가 아니로군. 서열 70위 정도 되면 무엇이 기본적인 예법인지 일일이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단탈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옅게 그렸다. “바싸고 전하 아니십니까.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지요?” “문제? 문제라고?” 바싸고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모든 것이 문제이다. 네놈이 분수도 모르게 회합을 주최한 것이 문제요, 애송이 놈의 장단에 마왕이란 녀석들이 죄다 놀아난 것이 문제요, 천연덕스럽게 내 질책에 반문한 것이 문제이다. 바르바토스!” 바싸고는 상대할 가치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바르바토스가 서 있었다. 그녀는 제파르가 따라주는 와인을 덥썩 받아 마시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껌뻑였다. “응? 난 왜 불러, 애늙은이 영감.” “수하를 대체 어떻게 관리했길래 이런 꼬락서니가 벌어지게 방관했는가. 이번 사태를 가만히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바르바토스가 포도주를 홀짝였다. “꼭 내가 뒤에서 조종했다는 말투다? 난 그냥 회합이 열린다니까 참석했을 뿐이야. 착각하지 마.” “웃기지도 않는군. 세상에는 법도가 있고 절차가 있다. 마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비웃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수하를 제멋대로 놔둔 네 녀석이 책임을 피할 것이라…….”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왕들이 시선을 돌렸다. 단탈리안이 숨을 죽여가며 웃고 있었다. 이 무례한 행동에 바싸고는 얼굴 표정이 굳었다. “……네놈.” “죄송합니다. 바싸고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투가 하도 재밌어서 말입니다.” “재미있다고?” 바싸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나풀거렸다. 당장이라도 회장을 송두리째로 무너트릴 만큼 마력이 짙었지만, 단탈리안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예. 어찌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수하라니요? 전쟁에서 부대의 상관으로 모시는 경우라면 또 모를까, 제가 어떻게 바르바토스의 부하이겠습니까.” “뭐?” “우리는 말 그대로 마왕입니다. 한명한명이 각자 마인을 대표하는 군주이지요. 바르바토스든 누구든 우리는 결코 우리 위에 황제를 모시지 않습니다. 바싸고 전하, 혹여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바싸고가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뭐 어떻냐는 얼굴로 씨익 웃기만 했다. 바싸고는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싸고 전하. 세상에 법도가 있고 절차가 있다면 오로지 마왕은 그 스스로 존립한다는 것뿐입니다. 서열을 정해두고 자신보다 높은 서열을 황제로 모시는 게 법도라고요? 쓰레기 구정물 냄새가 풍기는군요.” 바싸고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구나.” “모처럼 입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지껄여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단탈리안이 웃었다. “전하께선 착각하고 계십니다. 마인들이 우리를 비웃는다면 서열 제71위가 회합을 개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회합을 개최하는 데 있어 서열이 어떻느니 파벌이 어떻느니, 책임 소재부터 찾는 작태에 신물이 나겠지요.” “…….” “솔직히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태초부터 어디 마왕에게 서열이 있었습니까? 한낱 인위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인양 떠받들고 있으니 소꿉놀이가 따로 없군요. 마족들이 우리한테 질려버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바싸고의 어깨가 분노로 떨렸다. 마왕군의 서열은 바알과 바싸고, 두 사람이 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곧 바싸고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녕 이 자리에서 피를 보아야 닥칠 속셈이냐!” “죄송합니다, 바싸고 전하. 제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마인들이 이번 회합을 비웃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만, 글쎄요. 과연 정말로 그럴지 의문이군요.” 단탈리안이 가볍게 손뼉을 두들겼다. 대문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다. 인랑족, 묘족, 호족, 요정족 등, 니블헤임을 대표하는 열여섯 명의 상인이었다. 그 선두에는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었다. “무슨…….” “니블헤임을 대표하는 시민 여러분입니다. 이번에 발푸르기스 밤을 주최하는 데 여러모로 협력해주었지요. 아무렴 제가 마왕이라고 해서 이 자리를 마음대로 열었겠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비롯하여 상인들이 마왕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발푸르기스 밤은 우리 마왕군의 행보가 결정될지도 모를 중요한 자리. 마왕군의 행보는 곧 마족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마족 여러분에게도 발푸르기스 밤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권리가 있지요.” “…….” 바싸고가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여태껏 인식되지 않은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의 왼편. 서열 제13위의 벨레드가 언제든지 튀어나올 자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회장의 오른편. 서열 제12위의 시트리가 손을 허리춤에 찬 칼잡이에 올려놓았다. 바로 뒤쪽에는, 서열 제4위의 가미긴이 아까 전부터 마력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크으.’ 바싸고가 이빨을 갈았다. 벨레드와 시트리는 각 파벌을 대표하는 무투파였다. 거기에다 가미긴은 대마법사. 즉, 가미긴이 마법을 발통하여 자신의 발을 묶는 틈을 노려서 두 무투파가 공격해올 형국이었다. 심지어 니블헤임을 주름잡는 대상들까지. ――어디 한번 허튼 짓을 해보라. 세 명의 마왕이 동시에 공격하는 걸 막을 자신이 있다면. 더 나아가, 당신이 저지를 추태가 온 마계사회에 퍼져도 상관없다면. 단탈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바싸고 머릿속에 아가레스가 떠올랐다. 여기에 아가레스가 자리했다면 무투파 마왕을 전부 무시하고 한바탕 난동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가레스는 다름 아니라 눈앞의 단탈리안, 그리고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연합군에 격파되어 쫓겨난 것이었다. 만약 3년 전, 아가레스를 쫓아낸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서로 싸우기 바빴던 파벌들이 연합하였다는 말인가. “네놈. 도대체 언제부터……!” “그만하면 되었다, 바싸고.” 그때 뒤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이었다. 바알이 웃음기가 담긴 어조로 말했다. “단순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거늘 꽤나 재미난 농단을 부리는구나. 좋다, 단탈리안이여. 그대가 회합을 열어 달성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고.” 바알의 목소리는 마치 무게를 가진 것처럼 바닥에 낮게 깔렸다. 고요함에도 불구하고 회장에서 가장 구석진 곳까지 흘러드는 힘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그 목소리를 정면에서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 “제가 이번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한 까닭은, 바알 전하. 바로 당신의 죄를 문책하기 위해서입니다.”   00268 반역하는 자 =========================================================================                        침묵이 감돌았다. “…….” “…….” 단탈리안과 바알은 단지 서로를 지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몇몇 마왕은 그렇게 자문해야만 했다. 단탈리안이 말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머리가 거부했다. 서열 제1위인 지고지상의 마왕에게 서열 제71위인 최하의 마왕이 정면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있을 수 없었다. 있어서도 안 되었다. ‘―――!’ 바싸고가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충격에 빠진 것과 별도로, 수천 년의 업을 쌓아온 본능이 바싸고로 하여금 주위를 살피도록 강요했다. 혼란에 빠지기만 해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본능만으로도 바싸고는 자신이 서열 제3위에 어울림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황하는 놈들이 적다.’ 지나치게 적막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여 동요하는 마왕은 기껏해야 열댓 명 남짓. 회장이 온통 술렁거려야 마땅할 대참사인데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냉정을 유지했다. 긴장감만이 가득하여 숨통을 죽이고 있었다. 동요와 긴장감. 둘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던가. 마치 이런 사태를 미리 예고받았다는 것처럼, 마왕들 대부분은 긴장하되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싸고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반역이다!’ 소수의 무투파 마왕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곳에 참석한 모든 파벌의 마왕들이 명백히 공격 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순히 서열 제71위가 서열 제1위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 아니었다. ‘마흔 명과 동시에 상대하라니……바알은 당연하고, 아가레스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싸고가 꼼짝없이 경직되었다. 그때였다. “포위하였군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한 명의 마왕이 말했다. 온 머리가 노인처럼 하얗게 새어버린 여자였다. 그녀는 눈가에 붕대를 칭칭 묶고 있었다. 두 눈이 멀었으나 <천리안> 능력을 가진 마왕, 서열 제7위의 아몬이었다. “병사들이 매복되어 있어요. 감쪽같이 속았네요.” 아몬이 어딘지 정신이 나간 여자처럼 멍하게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해도 먼 세상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 그녀 특유의 어조였다. 바싸고가 얼굴에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물었다. “매복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아몬.” “사방의 그림자에서 희미하게 마력의 잔재가 느껴져요. 죽음과 긍지의 냄새. 죽음의 기사들이겠네요.” 아몬이 한 박자 느릿하게 덧붙였다. “숫자는 사백 이상.” “……!” 바싸고가 고개를 휙 돌렸다. 무도회장 한켠에서 바르바토스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두 마왕이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바르바토스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히죽 휘었다. “바르바토스, 역시 네 녀석이!” “그리고 상공에 와이번 부대가 강습을 준비하고 있어요.” 맹인의 마왕 아몬이 말했다. “숫자는 오백쉰여섯. 외곽에서 마법사 대부대가 반(反) 마법을 발동하고 있네요. 색깔로 보아서 순간이동 마법과 소환 계열을 차단한 것일까요.” “…….” “흑마법과 백마법, 정령마법. 모두 대마법사의 솜씨로 혼합되어 있어요. 꼭 무지개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워요. 예. 무척이나 아름다워요.” 아몬은 무언가에 감동했는지 멍하게 감탄했다. 이제 모든 것이 파악된 바싸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금발이 아름다운 여마왕은 여느 때처럼 친근하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으응. 바싸고, 무슨 일이야~?” 오직 가미긴밖에 없었다. 와이번 부대를 오백 단위로 활용하는 마왕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바싸고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독단적으로 이런 대규모 매복을 준비했을 리 만무했다. 니블헤임이라는 도시 자체가 협력하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했다. 여태껏 어떤 마왕이 추파를 던져도 꿋꿋하게 절대적 중립을 지켜온 니블헤임이…… 단탈리안에게 협력했다.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니블헤임의 거대 상단들은 결코 마왕에게 굴복하지 않는 위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웬만한 마왕보다 오래 산 괴물이기도 했다. 그런 니블헤임의 지도부를 언제부터 장악한 것인가. 모든 시선이 한 사람한테 쏠렸다. “이런.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군요.” 단탈리안이 태평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사실 별로 놀라신 것 같지도 않고요. 저는 이래 봬도 바알 전하를 깜짝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잔치를 주최한 사람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충분히 놀라고 있다. 그대와 같은 잔챙이에게 이만한 담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마왕 바알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우선 본인이 어떠한 죄를 지었다는 것인지 들어보겠노라. 화려한 잔치상은 모름지기 전채요리부터 즐겨야 마땅할지어니.” “분부하신 대로.” 단탈리안이 오른손을 정중하게 가슴팍에 올렸다. 주인을 모시는 집사처럼 예의바른 태도였다. 하지만 그 입술에서는 지극히 무례한 문책만이 흘러나왔다. “하늘을 우러러 감히 책망하건대 바알 전하께서는 세 가지 대죄를 범하셨습니다.” “대죄가 세 개나 된다라? 흥미롭도다. 어디 첫 번째 놈부터 고해보거라.” “예. 첫 번째 대죄는 지난 월맹군 원정에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는 것.” 단탈리안이 손뼉을 두들겼다. 그러자 공중에서 반투명한 지도가 큼지막하게 펼쳐졌다. 지도에는 대륙이 그려져 있었고, 화살표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횡단하고 있었다. 화살표는 마왕군의 각 군단을 상징했다. “지난 원정에서 모든 군단이 브루노 평원에 집결했습니다. 인간종의 군대가 먼저 평원에 집결했기 때문이지요. 당초에 예정되었던 계획과 어긋났으나, 무엇보다 핵심 전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작전 목표에 비추어볼 때 아군은 타당하게 행동했습니다.”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 승리하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에 교두보를 건설하였습니다. 허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군단이 있었지요.” “…….” “바알 전하. 당신께서 이끄신 제7군단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바알에게 문책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무모했으므로. “설마 잊어버리지 않으셨을 겁니다. 제8차 월맹군 원정을 선포한 장본인이 누구였는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바알 전하께서는 월맹군 원정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전쟁을 결의한 당사자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단탈리안이 뒷짐을 지고 회장을 거닐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후방 지원을 맡은 가미긴 전하의 제5군단조차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오로지 바알 전하만이 전쟁과 상관없다는 듯이 홀로 주둔했습니다. 아무래도 바알 전하께서는 솔직한 감상을 선호하시는 듯 하니, 제 진심을 말씀드리지요.” 단탈리안이 바알의 시선을 넘겨 받았다. “책임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비겁하고 더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지나친 폭언에 좌중이 싸늘해졌다. “십만에 이르는 마인이 자기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바알 전하, 바로 당신이 선포한 전쟁으로 인하여 그들은 죽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본인은 마왕성에 눌러앉아 평화롭게 시간을 때웠다…….” 단탈리안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당신이 마왕군에서 가장 강대한 전사라고요? 실례합니다만, 뭔가 잘못된 것 아닌지요? 저는 비겁하고 더러운 자가 전사라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저런, 원숭이 같은 벌거숭이가!” 바싸고가 흥분하여 나서려 하자, 단탈리안이 차분하게 말했다. “부외자는 잠자코 계십시오. 저는 지금 피 흘리며 죽어나간 십만의 마인을 대신하여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한몸 건사하겠다고 흡혈귀 일족을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 따위 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뭐…….” 바싸고가 멈칫했다. 귀공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네놈, 무슨 소리를……?” “가장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마왕, 서열 제3위의 바싸고. 그것이 당신의 이명이지요.” 단탈리안이 작게 키득거렸다. “희극도 이만한 희극이 없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약속을 내팽개치고 도주하며, 자신보다 강력한 마왕이 나타나면 냉큼 서열을 넘겨주는 겁쟁이 주제에 현명하다니요. 글쎄. 다른 의미에서 현명하긴 현명하군요. 모쪼록 본받고 싶습니다.” 단탈리안은 어디까지나 성격 좋은 호인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싸고 전하. 푸른 달의 일족에게 당신이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지 폭로되기 싫다면 가만히 닥치고 계십시오. 이대로 평판이 떨어져도 상관없다면 얼마든지 떠드셔도 괜찮습니다만.” “…….” 바싸고가 침묵했다. 주먹이 떨렸지만 그뿐이었다. “음.” 단탈리안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습니다, 바알 전하. 아까부터 왱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잠시 쫓아내고 왔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련지요?” “좋다. 용서해주마.” 바알이 재밌다는 듯 받아쳤다. “본인의 두 번째 대죄란 무엇인고.” “두 번째 대죄는 당신께서 마왕군의 내분을 좌시했다는 것입니다. 삼 년 전, 아가레스 전하는 명백히 내란을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하나로 통합된 월맹군의 기치를 완벽하게 망가트리는 이적 행위였습니다.” 단탈리안이 천천히 회장을 걸으며 말했다. “그때 바알 전하께서는 내란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무엇이 완전무결한 책임 방조인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 “이상으로 결론은 간단합니다. 바알 전하. 당신은 월맹군이 성공하는 것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심지어 월맹군이 내분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런 분께서 월맹군의 수장을 맡으시다니 농담도 뭣도 아닙니다.” 바알이 입가를 들어올렸다. “네놈의 말이 진실이라면 어찌할 셈이냐? 본인을 처벌하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당연히 처벌은 뒤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약과이지요. 전하의 진정한 죄상은 따로 있습니다.” “호오, 진정한 죄상이라.” 단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냐하면 전하께선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방관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마왕의 세력이 소모되는 동안 자기 세력만 보존한다,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조금 더 질 나쁜 이유가 숨어 있지요.”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바알 전하. 전하께서는 일부러 마왕들이 당신에게 반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마왕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반역하기를 기다리다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다른 모든 이는 모르겠지만 저만은 알 수 있습니다. 파이몬 전하의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둔 것도, 아가레스 전하의 행동을 좌시한 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지요. 전하께서는 계속해서 마왕들을 자극한 것입니다.” 더 이상 참지 말고 폭발하라. 이 불합리한 폭거에 들고 일어서라. “본래라면 과반수 이상이 찬성해야만 결의되는 월맹군 원정을 혼자서 천명했다. 본래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돌격해야만 하는 총사령관이 주저앉았다. 본래라면 엄정한 심판자가 되어 처벌을 내려야만 하는 장본인이 침묵했다…… 끊임없이 마왕들을 건드렸지요.” 마치 불만이 터져서 타오르기를 열망하듯이. “왜냐하면, 바알. 당신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 “따분했겠지요? 하급 마족으로 태어나 지존의 자리까지 올라간 당신이 어떤 삶을 겪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고난이요 전쟁이었을 터. 당신은 결코 그 가열찬 투쟁의 나날을 잊지 못했을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쟁광이니까.” 바알이 덤덤하게 듣는 와중에, 단탈리안이 한발자국씩 바알에게 다가섰다. “누군가가 결투를 벌여오고, 생사를 두고 싸우던 흥분을 망각하지 못했겠지요. 막상 서열 제1위에 오르니 대마왕이라느니 앙골모아의 재림이라느니, 당신을 떠받드는 소리에 진절머리가 났을 겁니다.” 단탈리안이 바알 앞에 섰다. “이제 밝혀보지요. 당신의 세 번째 죄과는, 바알. 당신이 천팔백 년 전 제2차 월맹군 원정에서 보급선을 끊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천팔백 년 전, 바르바토스-마르바스-파이몬으로 이루어진 제1군단은 대륙의 국가들을 종횡무진하며 전진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보급선이 끊어지는 바람에 괴멸당했다. 범인은 인간계의 기사단들로 밝혀져 있었다. 하나로 뭉쳐 있던 마왕군이 평원파, 중립파, 산악파로 산산조각나게 된 원인――. 다름 아니라 서열 제1위 바알이 범인이라고, 단탈리안은 말하고 있었다. “그대로 대륙을 정벌해봤자 왕좌에 오르는 사람은 당신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나의 마왕 아래 만인이 복종하여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겠지요. 당신은 그게 싫었던 겁니다.” “…….” “영원히 투쟁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습니까? 강한 마왕만이 살아남아, 말도 안 되는 폭거를 휘두르는 당신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는, 그런 광경을 바라지 않았습니까?” 단탈리안이 두 손을 벌렸다.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바알, 당신이 여기서 '그렇다'라고 대답하면――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풍경이 펼쳐집니다. 바르바토스가 당신을 증오할 것입니다. 파이몬이 당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마르바스가 당신을 경멸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가장 강력한 마왕들이 모두 당신의 심장이라는 목표 하나를 향해서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제 드디어 한 발자국만 남았습니다. 겨우 한 발자국입니다.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바로 제가, 최하이자 최약의 마왕인 저 단탈리안이 오롯이 당신을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자아, 바알. 부디 대답해주십시오.”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당신이 자신의 알량하고 이기적인 투쟁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월맹군을 파탄시킨, 그 더러운 개새끼가 맞습니까?” 그리고 바알은. “……크흐.” 서열 제1위의 위대한 마왕은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00269 반역하는 자 =========================================================================                        웃음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흐하, 크흐으, 흐하하하하――크하하하하!” 기나긴 시간 동안 묵혀오고 또 묵혀온 것, 뱃속에 웅크리기만 했던 그것이 구렁이 같은 식도를 역류하여 단숨에 터져나오고 있었다. “본인에게 그리 말한 자가 대체 얼마만인가! 좋구나! 호사로다!” 그것은 광기였다. 불길한 웃음소리가 두개골의 깊숙한 곳을 세차게, 몇 번씩이나 때렸다. 마왕들이 얼이 빠진 얼굴로 바알을 쳐다보았다. 웃음소리는 아무런 예고 없이 멈추었다. “오호라, 실로 오래된 기다림이었나니.” 바알이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얼마간 허공에 걸어두었다. 근엄한 표정만 지을 줄 알던 얼굴에 봄바람과 같은 자애심이 스쳐 깃들었다. 단탈리안 역시 목소리가 상냥했다. “당신의 예상보다 길게 이어진 모양이군요.” “그날로부터 이천 년을 기다려야 했음을 본인이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필멸자는 어리석음으로 시간을 수놓아야 하나니. 신들께서는 자만을 용서하지 않는다.” 바알이 상대방을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의외의 인물이며, 의외의 결말이다. 희극적인 무대를 끝내고 새로이 막을 올리는 자가 네놈 같은 작자였을 줄이야. 이것 또한 신들께서 본인에게 되돌려주는 응보일진저.” “저 같은 소인배가 전하의 유희를 끝내어 송구스럽습니다.” 단탈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여전히 전하가 예상하지도 짐작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 아니겠습니까? 실례하오나,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옳다. 본인은 한없는 기쁨을 맛보고 있노라.” 두 사람은 온화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다른 마왕들에게 거의 불가사의하게 비추는 풍경이었다. 마치 오랜 친우가 잡담하는 모습이지 않는가. “어느 마왕이 전하의 권태를 종결내리라 예상하셨습니까?” “파이몬이라면 능히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다 점쳤노라. 허나 실낱 같은 희망이었다.”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는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에 대응하는 데 따를 자가 없으나, 사건의 원인을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글렀다. 마르바스는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하는 데 제일이나, 문제의 원인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으므로 적절치 않았다. 나머지는 논외였지.” 바알이 무도회장 저편에 서 있는 바싸고를 실눈으로 노려보았다. “본인은 마왕들을 분노시킬 목적으로 서열이라는 체계를 공식으로 만들었다. 어째서 내가 서열이 낮은가. 어째서 다른 이의 서열이 나보다 낮은가. 그렇게 투쟁심을 불러일으킬 셈이었다만…….” “오히려 마왕들의 순위를 고정시켜버리는 효과가 나타났군요.” “아아.” 바알이 길게 탄식했다. “하위의 마왕이 상위의 마왕을 존중하는 관습이 당연하다는 듯 굳었도다. 저 바싸고처럼 아예 순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다지는 부류도 생겨났지. 쓰레기 같은 작자이다.” 바싸고가 움찔거렸다. 단탈리안이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아예 처음부터 전하가 저질렀음을 밝혔더라면…….” “우문이구나. 그래서야 본인이 저질러서 본인 스스로 끝내는 연극이 되어버리지 않는고.” 바알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싱거운 결말을 바래서 자행한 것이 아니다. 본인은 본인보다 강하고, 현명하며, 고귀한 이와 싸우다 죽기를 열망한다. 스스로 알아내지도 못해서야 곤란할 따름이라!” “음. 전사는 자신을 죽인 자의 가치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 또한 결정된다…….” “바로 그것이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기지 마.” 반쯤 어둠에 잠긴 회장의 구석에서,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웃기지 마, 아저씨……댁이 그 빌어먹을 보급선을 끊었다고……?” “그렇다.”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은 한숨을 쉬고 바알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그러자 바알이 웃으면서 계속하여 말했다. “책임자로 보급을 담당하던 세 명의 마왕을 격살한 것 역시 본인이었니라. 기사단이 습격한 것처럼 위장하느라 적이 고생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구나.” “팔만의 병사가 칼질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굶어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울부짖었다. “네 개자식 때문에 팔만의 병사가……!” “실로 슬프구나. 비극적인 일이다.” 바알이 말했다. “헌데, 바르바토스여. 순수한 전사여. 자뭇 궁금하여 질문하는 것이다만……그렇게 슬프고 분하다면, 왜 지금 당장이라도 본인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인고?” “……!” 그 순간, 바르바토스가 화살처럼 질주했다. 그림자에서 검은 액체가 용솟음치더니 바르바토스의 주변으로 넓게 폭발했다. 사방으로 펼쳐진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대검들이 튀어나왔다. 대검들은 거대한 양날개가 되어 오직 바알을 향하여 쏟아졌다. 단 일 초의 공방이었다. 바알이 망토를 펄럭이며 한 바퀴를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양손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반원을 그리며 자신에게 쇄도하는 대검들을 베었다. 대검들은 마치 유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서 흩날렸다. 바알의 검날은 그대로 바르바토스의 오른팔을 절단했다. “크아아아악――!” 바르바토스가 절규하며 그녀에게 남은 왼팔로 전투대낫을 휘둘렀다. 그러나 기세를 잃어버린 일격은, 바알이 가볍게 대낫의 옆구리를 쳐내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바르바토스여, 본인이 누누이 충고하지만.” 균형을 잃어버린 바르바토스의 몸을 향하여 바알이 주먹을 깊숙히 찔러넣었다. 주먹은 여린 소녀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으며, 신체를 꿰뚫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샛붉은 심장이 주먹에 쥐어져 있었다. 컥, 하고 바르바토스가 헛숨을 내뱉었다. “끄윽, 흐끄으윽……흐윽!” 바르바토스가 형편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왼손으로 가슴에 뚫린 구멍을 막으며 신음했다.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고통에 바르바토스의 몸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녀 주변으로 피웅덩이가 점점 넓게 퍼졌다. “자네는 부하와 관련해서 너무 감정적이게 나오는 것이 문제이다. 진정으로 부하를 생각하면 도리어 상시 냉정해야 할지어다. 왜냐한고 묻는다면…….” 바알이 손에 든 심장을 가볍게 짓뭉갰다. 푸덕, 하고 김 빠진 소리가 나며 소녀의 심장은 검붉은 덩어리와 핏물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대장이 자칫 상처를 입을 경우 부하들마저 폭주하기 때문이요.” 벨레드와 제파르가 동시에 자리를 박찼다. 벨레드는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내리꽂았고, 제파르는 소리없이 창을 휘둘렀다. 바알이 바닥에 널브러진 바르바토스를 발로 걷어찼다. 바르바토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 떠오르자, 일순 벨레드와 제파르의 시선이 멈칫했다. “적잖게 유용한 인질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알이 벨레드에게 달려들었다. 벨레드가 상대의 의도를 깨닫고 서둘러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바알은 정확히 양손대검을 상대방의 어깨에 찔러넣고 있었다. 벨레드는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갔다. 그에 반해 제파르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바알이 벨레드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자마자 몸을 피한 것이었다. 제파르는 바르바토스가 떨어지려는 것을 받아들고 재빨리 후퇴했다. 바알이 벨레드의 남은 왼팔을 베어내며 호오, 하고 감탄했다. “그쪽은 처음부터 바르바토스를 구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는가. 훌륭하구나. 본인이 등에 허점을 내보였음에도 당초의 목적을 변경하지 않다니.” “…….” 제파르가 시린 눈으로 바알을 노려보았다. 제파르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조심스럽게 바르바토스를 덮었다. 붉은 망토에 덮여 바르바토스는 괴롭게 숨을 헐떡였다. “흐음.” 바알이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가 단탈리안한테 말했다. “실례했노라, 단탈리안이여. 왱왱거리는 소리가 아득하여 잠시 정리하고 왔다. 본인의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물론입니다.” 단탈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력하시리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상상 이상이군요. 그 검, 혹여 파마(破魔)의 대검이 아닌지.” “호오? 이 무구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가.”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붉은 용이 열한 개의 용족 부족에 전해지는 고유마법을 전부 때려박은 무구. 소환수를 강제로 역소환시키는 백용(白龍)의 고유마법이 포함되어 있지요. 바르바토스에게는 상극이라 할 만한 무기입니다.” “네놈은 실로 박학하구나. 고대에 망각된 무구는 또 어찌 알았을꼬.” 단탈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회장을 포위한 병력 중에 제일 위협적인 것은 단연 바르바토스의 소환수……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를 먼저 도발하여 유인했고, 더불어 소환수들까지 무력화한 것입니까.” “본인은 아가레스처럼 난투를 벌일 자신이 없으니 말이다.” 바알이 친근하게 웃었다.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나머지 마왕들은 바알을 중심으로 포위진을 이루고 있었다. 평원파, 중립파, 무소속, 거의 모든 마왕이 함께 대열을 맞추어 긴장 어린 낯빛으로 빈틈없이 바알을 노려보았다. 바알이 파이몬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이몬이여. 그대가 들은 그대로이다.” “…….” “본인은 그대가 인간계까지 포섭한 강국을 이룩하기를 바랐노라. 그렇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이라.” “……인간과 마인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파이몬은 차게 식은 눈초리로 바알을 노려보았다. “소녀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신 분이 다름 아니라 전하였사와요. 전부 거짓말이었나요?” “거짓말이라니 적이 섭섭하구나. 본인은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었지.” 바알은 안타깝다는 얼굴이었다. “지난 월맹군에서 드디어 대성하나 싶더니 마력마저 잃고 추락했다…… 실망했도다. 결국에 그 정도 그릇에 불과했다는 얘기이리라.” “바알. 자네는 나에게 각 파벌의 중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하고 마르바스가 무표정하게 질문했다. “하나가 된 마왕군. 하나가 되어 전진하는 군세. 그것을 위한 부탁이 아니었는가.” “오래된 친우여, 미안하지만 아닐세. 만약 그러했다면 내 그대 중립파에게 힘을 더욱 더 실어주어야 마땅했겠지.” “……파벌이 존재하되, 다툼이 격화되어 지나치게 약화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함으로써 바알 자네에게 대적할 만한 힘을 적당하게 비축하도록.” 바알이 턱끝을 끄덕였다. “과연 자네는 현명하네. 하지만 현명한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충실한 나머지 바깥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지. 그것이 자네의 오점이었다, 마르바스.” “……충고, 고맙게 새겨듣지.” 바알이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금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가히 멋진 선물이로다. 단탈리안이여. 네놈을 본인의 대적자로 인정하노라. 허나, 과연 이 자리에서 본인을 격살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마는.”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각보다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걸치고 계신 망토도 살짝 의심스럽군요. 강력한 반(反) 마법이 걸린 특제 망토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정확한 추측이다. 한때 네놈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낭설이 떠돌았거늘, 단순히 낭설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로다.” “최악의 상황이군요.” 단탈리안이 바알한테서 멀어지며 말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전하를 배웅할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눈앞에 놓인 사냥감을 괜히 놓쳐서 나중에 뒤통수를 후려맞는 것입니다.” 그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전하.”   00270 반역하는 자 =========================================================================                        * * * 어디까지가 전투인가. 어디서부터 전쟁인가. 그 경계선은 생각보다 뚜렷하다. 하지만 만약 전투에 뛰어든 병사 하나하나가 일개 전력에 지나지 않고, 국가 하나에 버금가는 제왕으로만 이루어진다면――얘기는 전혀 달라지겠지. 칼날의 부딪힘 한번은 하나의 쟁쟁한 전투로 승화되며, 결투는 전쟁의 영역으로 펼쳐진다. “좋다. 왕들이여.”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에 선 마왕들은 한낱 사람이되 또한 왕국 그 자체였다. “본인은 선전포고를 기쁘게 받아들이나니.” 이에 대응하여 두 발로 굳게 선 자 역시 한 명의 마왕. 오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무너진 적 없는 제국이었다. 마왕 바알은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어 던졌다. 풀썩, 하고 검은색 장갑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무려 마흔일곱 명의 마왕들. 그리고 한 명의 마왕. “친애하는 동지들이여――전쟁을 시작하자.” 첫 번째 라운드가 시작했다. 먼저 다섯 명의 무투파 마왕이 달려들었다. 마왕들은 미리 정해둔 포지션에 따라 다섯 갈래의 방향에서 다섯 갈래의 돌풍이 되어 질주했다. 대장은 서열 제12위의 시트리. 오직 단신의 무력만으로 서열 10위권에 올라선 괴물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투입되면 공조가 번잡해지며, 지나치게 적은 인원이 투입되어도 바알을 상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엄선된 다섯 명의 마왕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검의 주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알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울부짖어라, 월천(月天).” 대검에 새겨진 열하나의 고유마법 중 하나가 발동되었다. 단순하고 우직하며, 오로지 동물적인 감각으로 하늘과 땅을 요동시킨 붉은 용족의 고유마법. 효과는 극히 간결했다. '무기'라는 개념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도양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절대적인 효과였다. 시트리가 채찍처럼 휘두른 사복검(蛇腹劍)은 마치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장검과 장창, 언월도가 간단하게 파괴되었다. 마왕들은 얼굴에 경악이 번져올랐다. 아다만티움으로 제작된 최상급의 무구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트리는 씨익 웃으면서 맨주먹으로 달려들었다. 시트리가 괴성을 지르며 정권을 날리자, 바알이 아슬아슬하게 한손으로 상대방의 주먹을 쳐냈다. 찰나의 빈틈이 생겨났다. 나머지 네 명의 무투파 마왕도 예정대로 공격했다. 사방에서 맨주먹이 파상공세를 쏟아부었다. “훌륭하다. 격투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싸움일지어니.” 바알이 대검을 휘두르며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대들의 몸뚱어리 역시 일개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왕들의 허리가 일격에 절단되었다. 핏물이 대량으로 튀었다. 허리가 절단된 마왕들은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로지 시트리만이 짐승과 같은 후각으로 반발자국 앞서 위험을 감지했으며, 덕택에 겨우 왼팔 하나만을 희생하여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다릴 틈도 없이,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 콰르르릉! 무도회장의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미리 천장에서 매복하고 있던 인형들이 뛰어내린 것이었다. 인형의 숫자는 첫 번째 라운드보다 열 배가 많은 오십 체에 이르렀다. 단지 전투를 목적으로 제작된 인형들. 흡혈귀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삼천 년에 걸쳐서 손수 만들어낸 살육기계였다. 마왕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만들어진 병기들은, 자아가 전무하기에 마왕의 지배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왕에게 배신당한 소녀가 필사적으로 고안해낸 대(對)마왕전용 살인병기. 인형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저마다 날카로운 무기를 꼬나쥔 채 낙하하였다. “과연. 인형술사가 개입했는고.” 무너져내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알이 감탄했다. 자그마치 오십 체의 인형을 제작했다는 것도 대단했으나, 그것들을 한꺼번에 조종한다는 것은 가히 기예라 칭송할 만했다. 인형술은 마법보다 익히기 어려웠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분야였다. 이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가 서린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무엇보다 공격 순서가 재미있지 아니한가. 첫 번째는 순수히 무투파 마왕들이 공격했다. 여기에 바알은 적룡의 고유마법을 발동했다. 그 다음, 상대편은 인형들을 투입하였다. 설령 바알이 인형들을 일도양단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인형들은 팔다리가 잘리든 몸이 부서지든 상관없이 거머리처럼 달라붙겠지. 모처럼 강력한 고유마법이 쓸모없게 된다. 철저하게 공격 순서가 계산되어 있었다. 마치 이쪽이 가진 무기의 효과를 간파하고 있는 것처럼. ――단탈리안. 그 이외에 이런 전술을 짤 인물이 없다. 바알은 깊숙한 내장에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했다. 이것은 단순히 마흔일곱 명의 마왕과 한 명의 마왕이 벌이는 전쟁에 불과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과격한 결투 너머에서 바알과 단탈리안, 두 총사령관이 체스를 두듯이 서로의 수를 가늠하고 있었다. 장기말로 올라선 것은 다름 아니라 지고지순한 마왕들. 도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체스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 거룩하고 호사스러운 체스판에 어울려주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반(反)마법 해제.” 바알은 자신의 망토에 걸린 반마법을 해제했다. 거의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켜줄 정도로 강력한 장비였지만, 그 대가로 바알이 마법을 쓰는 것 또한 봉쇄하고 있었다. 이제 봉인구가 풀린 바알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며 영창했다. “사람이란 본디 하나의 목숨만을 짊어질 따름이라.” 폭발적인 마력이 바알을 중심으로 터져나갔다. 그것은 순수한 마력이었다. 바알은 비록 마법사로서 경지가 낮았으나, 그저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만으로 대마법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오십 체의 인형이 풍압에 휘말렸다. 살인병기들은 천장과 함께 송두리째 산산조각나며 날아갔다. 세 번째 라운드. “정령이여. 시원적이며 무법적인 자연이여.” 천장이 소멸되는 것과 동시에, 서열 제4위, 가미긴이 영창을 읊었다. 아름다운 금빛 아우라가 가미긴의 몸을 환하게 밝혔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사 계열의 마왕 스물한 명이 합창대처럼 한 목소리로 마법 발동구를 노래했다. 이들은 전투가 벌어진 직후부터 대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둠을 어둠으로――.” “고유한 의지를 고유한 의지로. 질료를 질료로.” “재를 재로 돌려보내소서.” 수백의 마법이 바알을 향해 쇄도했다. “크하하하하!” 자신에게 태풍처럼 몰아닥치는 갖가지 마법을 쳐다보며 바알이 파안대소했다. 뇌우와 같은 괴음이 울리고, 니블헤임의 궁전이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바알은 참을 수 없어 어린애처럼 웃었다. 역시나 훌륭했다. 반마법을 풀어재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이 쏟아지지 않는가. 단탈리안은 실로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짜놓고 있었다. 당신에게 진상하는 선물이라고 단탈리안은 말했다. 이런 선물이라면 몇 번을 받아도 질리지 않았다. 바알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찢어발겨라, 화락천(化樂天).” 또 하나의 고유마법이 발동되었다. 사악하고 교활하여, 어느 부족보다 간교한 마법사에 어울리는 푸른 용족의 고유마법이었다. 붉은 용족의 고유마법이 '무기'를 일도양단한다면, 푸른 용족의 고유마법은 모든 '마력'을 베어버리는 것. 바알은 사방에서 빠르게 조여오는 마법들을 향해 한 번, 두 번, 총 세 번의 칼질을 휘둘렀다. 첫 일격이 칼바람을 날리며 절반의 마법을 무효화했다. 다음 일격에서 나머지 절반의 마법이 증발했으며, 마지막 일격은 마법사 계열의 마왕들에게 쏟아졌다.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직격탄을 맞은 일곱 명의 마왕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고유마법에 일시적으로 마력이 모조리 절단난 것이었다. 마력이 폭주를 일으키며 마왕들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압도적이었다. 단탈리안과 바알은 벌써 세 번의 격전을 주고받았으나, 저쪽의 전력은 빠르게 소모되어가는 반면에 바알은 끄떡없었다. 만약 바알이 약간이라도 당황했거나 흥분했으면 단탈리안이 준비한 수에 휘말렸겠지. 하지만 바알은 단지 기쁘고 평온한 마음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제 바르바토스가 매복해놓은 소환수도, 무투파의 일제공격도, 인형의 인해전술도, 마법 계열의 집중사격도 좌절되었다. 더 이상 어떤 수가 남았다는 말인가. 그리고, 네 번째 라운드. “음……!” 바알이 위쪽을 쳐다보았다. 천장이 사라져 저녁하늘이 펼쳐진 그곳에서 거대한 물체 수백 개가 유성우가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백 마리로 이루어진 와이번 부대였다. 거대한 용족이 오직 중력에 몸을 실고 바알을 향하여 활공했다. “육탄공격인가!” 이른바 자살부대였다. 바알이 고유마법을 담아 칼날바람을 쏘아 올려보았으나, 와이번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했다. 미리 반마법을 걸어둔 것이었다. 바알은 상대의 용의주도함에 경탄했다. 여기서는 견디자. 바알이 최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물경 오백에 이르는 와이번들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노예각인을 맺어둔 와이번들인지 자신의 지배력에 통제되지도 않았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이지 않다. 와이번에게 직격당하더라도 바알은 너끈히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울부짖어라, 월천.” 고유마법을 붉은 용족의 것으로 변경해두었다. 와이번들이 자신에게 떨어지기 직전, 녀석들의 몸뚱어리를 양단할 속셈이었다. 충격이 아예 사라지진 않겠지만 격감해버릴 게 확실했다. 아마도 단탈리안은 자신이 이전의 공격들에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리라 예상했으리라. 무투파 마왕에게 약간이나마 상처를 입고, 인형들에게 피해를 입으며, 마법에 어느 정도 기력이 소모될 것이다. 바로 그때 마무리 공격으로 와이번 자살부대를 동원한다…… 그 정도 계산이었을까. 더없이 훌륭하게 계산된 전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허나 본인의 대적자가 되기에는 적이 충분하노라.’ 와이번이 쇄도해오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바알이 미소를 지었다. 태생이 불쾌하고 천박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지만, 불쾌하고 천박한 인물일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바알은 기뻐했다. 따라서 바알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승리를 거두어도 단탈리안을 처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가미긴 정도는 처단해두어야 좋겠지. 단탈리안의 애인들이라 들었다. 사랑하는 애인들이 죽었을 때 단탈리안은 끝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오직 복수만을 위한 삶을 결심할 게 틀림없었다. 녀석의 가열찬 복수와 한바탕 놀아나는 것은 필히 즐거우리라. 계획이 완성되었다. 아울러 와이번이 코앞까지 몰아닥쳤다. 바알이 대검을 휘둘렀고, 와이번들은 속절없이 양갈래로 나뉘어 속내장을 빗물마냥 쏟아내렸다. 바알이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확신한 그때, 와이번이 흘린 핏물과 함께, 무언가 작은 것이 자신을 향하여 내리꽂혔다. 그것은 흑발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인간의 아이?’ 바알이 허를 찔려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강대한 마왕이라도 인간의 심리는 읽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바알은 미처 인간이 와이번에 타고 있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마지막으로 숨겨둔 비수였을까. “흐음!” 바알이 서둘러 소녀의 일격을 대검으로 막았다. 어린 인간, 게다가 소녀임에도 놀랍게도 공격이 묵직했다. 과연 단탈리안이 최후에 숨길 만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바알은 허를 찔렸다고 해서 순순히 당해줄 만큼 약한 자가 아니었으며, 소녀가 내리친 장검은 간발의 차로 막혔다. 바알이 인자하게 물었다. “인간의 아이야, 무모하구나. 어찌 가장 강대한 이들의 전장에 소녀가 나섰느냐.” “…….” 소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바알이 소녀를 몸째로 날려보내려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장갑이 깨지고, 살이 찢어지며, 뼈가 아스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 바알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자루의 흑색 대검이 자신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칼날에 시커먼 핏물이 묻어 흘러내렸다. 바알은 마치 다른 이의 몸을 살펴보듯이 검들을 따라 아래로, 더욱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대검들은 바알의 그림자에서 솟아나 있었다. 바로 가장 처음에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한 죽음의 기사들이었다. “……으음. 어째서.” 의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결코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림자에서 또 다시 수십 개의 칼날이 솟구쳤다. 오른팔과 왼팔이, 허벅지가, 복부가, 심장에,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부위에 대검이 파고들었다. 와이번이 추락하여 피어낸 먼지구름으로 발걸음이 들려왔다. 뚜벅, 하고 발걸음은 바알의 바로 앞에 멈추어섰다. 이윽고 손뼉을 치는 소리까지 울렸다. “가공할 만한 무위였습니다, 바알 전하. 감탄스럽군요.” 단탈리안이 마치 전투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00271 반역하는 자 =========================================================================                        “……그러했는고.” 바알이 쓰게 웃었다. 소환수 계열의 마물에게는 숙주가 필요했다. 숙주가 마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이상 소환수는 움직이지 못했다. 소환수들과 싸울 때는 숙주를 먼저 제거하는 편이 현명했다. '지금 무도회장에 죽음의 기사 오백 기가 있다'라고 아몬이 말했다. 죽음의 기사는 모든 소환수를 통틀어서도 극히 강력한 마물. 그렇기에 바알은 초반부터 바르바토스를 도발하여 유인했다. 마력의 근원인 심장을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일부러 패배하는 척 연기했군.” 정황상 바르바토스가 격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2차 월맹군에 대해서 가장 후회와 증오를 안고 있는 마왕이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였으므로. 그렇지만, 단순히 분노를 위장한 것이었는가……. 바알은 속속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제파르가 바알을 공격하지 않고 무조건 바르바토스를 구출하려고 한 까닭은, 그 자가 냉정해서가 아니라 작전상 구출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구출한 이후에 제파르는 망토로 바르바토스를 가렸다. 바르바토스가 회복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바알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 “상기해보니 이상했도다. 바르바토스가 공격해오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네놈, 본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더냐.” 감정이 북받쳐서 일어난 공격이 아니었다. 우발적인 기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만을 위하여 초장에 깔아둔 복선이었다. “결국 본인을 죽이는 자는 바르바토스인고……호사로다.” “음, 아닙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단탈리안이 손가락을 뺨을 긁적거렸다. “의도적으로 패배를 연출한 것은 맞습니다. 심장이 노려질 것이 분명하니 미리미리 회복약을 빨아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전하를 죽인 것은 아닙니다.” “회복약?” “포도주에 섞어두었지요.” 회합이 열리기 전부터 무도회장에서 바르바토스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이 회복약이었는가. 거의 집착에 가까운 철두철미함에 바알은 쓴웃음이 짙어졌다. “더더욱 아리송하구나. 헌데 어찌하여 바르바토스가 본인을 꿰뚫은 장본인이 아닌가?” “바알 전하께서는 어떨지 모릅니다만, 심장이란 게 그리 간단하게 재생되는 부위가 아닙니다. 고위 마왕이라도 심장이 파괴되면 꽤나 많이 아픕니다.” 단탈리안이 우습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에서 대검들이 추가로 솟아났다. 살점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바알의 몸에 대검들이 꽂혔다. 반면에 아까 전에 공격했던 대검들은 도로 그림자에 가라앉았다. 번갈아가면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으음, 하고 바알이 신음했다. 잡담을 떠들며 최대한 체력을 회복해볼까 싶었는데 빈틈이 전혀 없었다. “데이지. 자르세요.” “예, 아버님.” 인간 소녀가 칼을 내리쳤다. 싹둑, 하고 바알의 오른손 팔목이 잘렸다. 마왕이 쥐고 있던 파마의 대검이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기까지 빼놓은 것이었다. 바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버님이라고?” “양녀입니다. 전하와는 전생에 인연이 적지 않은 아이니까 귀여워해주시길. 물론, 귀여워하신다고 해봤자 얼마 시간이 남지도 않았지만요.” 단탈리안이 파마의 대검을 걷어찼다. “이야기로 되돌아갈까요. 바르바토스가 제법 멀쩡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소환수를 자유자재로 부릴 정도로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죽음의 기사들이 기습할 수 있었느냐…….” 단탈리안은 재차 손뼉을 쳤고, 대검들이 다시금 바알의 육체를 난도질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초부터 저에게 지배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 “무도회장에 잠복한 죽음의 기사 사백예순일곱 기 중, 바르바토스에게 기생한 마물은 겨우 예순일곱 기.”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나머지 사백 기는 전원 저한테 복속되어 있었지요.” 바알이 아아, 하고 야트막하게 탄성을 흘려보냈다. “본인을 속였군.” “예에. 무얼, 자책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죽음의 기사라면 모두 바르바토스의 친위대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혓바닥 놀리는 것만큼은 일품이로다.” 바알이 웃었다. “무투파 마왕들이 본인을 공격할 때, 인형들이 급습할 때, 마법이 퍼부어질 때……만일 그때 죽음의 기사들이 협공함으로써 본인을 계속해서 괴롭혔더라면 본인이 패배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손쉽게 승리하지 못했을지언저.” 그 가능성을 전부 무시했다. 끝까지 죽음의 기사가 무력화된 것처럼 가장했다. 오로지 하나의 완벽한 순간만을 노렸다.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어쩌면 패배했을지 모른다는 건 어쩌면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얘기 아닙니까. 전하께선 서열 제1위이십니다. 만전에 대비해야 마땅하지요.” 와이번들이 위에서 강습해옴으로써 시선을 위쪽으로 고정시켰다. 인간의 소녀가 공격하여, 바알의 대검을 한 순간이나마 붙들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틈에 죽음의 기사들은 침묵을 깨트리고 기습했다. 단탈리안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서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비밀입니다만, 사실 마왕들이 좀 죽어나갈 필요도 있었습니다. 저보다 강한 마왕은 되도록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크흐흐.” 결국 바알 본인조차 이용되었다는 얘기였다. 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자도 단탈리안이고, 서열 제1위인 자신을 바알을 죽일 자도 단탈리안이다. 앞으로 마왕군은 틀림없이 눈앞의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겠지. 그가 지배하는 난세에는 인의도 전사의 신념도 없을 것이다……. “그대 같은 자에게 죽는 것이 나 바알의 운명이었던가. 허나, 단탈리안이여. 이것은 네놈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위업이 아니도다. 본인을 죽이기 위해서는 모든 마왕들을 동원해야만 했음이라.” 바알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나 바알의 오천 년 생애는 그처럼 무거웠다. 필멸자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일찍이 이만한 최후를 맞이한 자가 있었는가. 없다. 없을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회색의 하늘이. 배고픔에 굶주려 하염없이 올려다본 하늘이 펼쳐졌다. 마계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지였다. 단지 생존하려고 발버둥쳤다. 강한 자가 한끼 식사를 더 먹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모든 마인은 강자가 되고자 했으며, 바알 역시 그러한 마인이었다. 죽여나가고 또 죽여나가는 가운데 바알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의미없이 죽어버리면, 지금까지 나에게 수없이 죽어나간 생명들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게 되는가? 빵 한조각을 먹기 위해서 어미와 어린 딸아이를 죽인 적도 있었다.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가족을 냉혹하게 학살했다. 더 이상 아비규환과 같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자던 설교자를 죽인 적도 있었다. 자신의 검에 죽은 전사들은 하나같이 위대했으며 또한 고귀했다. 그런 자들을 먹어치우고 자신은 살아 있었다. ――의미없는 죽음은, 결코 용서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바알은 자신의 죽음을 찾아 해맸다. 바르바토스는 모든 마인이 행복하게 사는 세계를 부르짖었다. 그 정도 무게의 이상을 짊어진 자라면 자신을 죽일 가치가 있었다. 파이몬은 종족을 뛰어넘어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역시 자신을 죽일 가치가 있었다. 비록 단탈리안의 계략이 주된 역할을 맡았다 해도,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은 모든 마왕들인 셈이었다. 바알은 이 죽음을 기껍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만족하신 듯하군요.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바알?” 그러나 기다려도 상대방은 자신의 목을 베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제가 전하를 죽이면 곤란합니다. 졸지에 바알을 죽여버린 마왕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피곤하지요.” “……무슨 소리이냐?” “그만한 위험부담을 무릅쓸 만큼 당신의 목이 매력적이지는 않습니다.” 바알이 눈을 뜨자, 그곳에는 비릿하게 미소를 짓는 단탈리안이 서 있었다. “저는 '새로운 황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조차 이렇게 죽은 것입니다. 제가 무소불위의 위치에 올라서더라도 어찌 그 권좌가 천 년을 가겠습니까? 저는 그저 가늘고 길게 살면 족합니다.” “…….” 바알은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녀석은 바알의 죽음에 별다른 가치가 없노라고 단언한 것이었다. “네놈…….”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당신이라는 절대적인 강자가 없어진 이상, 마왕군은 본격적으로 내부다툼에 돌입할 것입니다. 아가레스도 반쯤 불구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훗날을 경계할 필요가 격감해버렸지요.” 단탈리안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무척 안타깝게 되었군요, 바알. 당신이 그리도 열망하던 투쟁과 전쟁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고 절 원망해도 곤란합니다. 어차피 그대로 있어봤자 인간 따위한테나 죽었을 텐데, 오히려 저한테 죽어서 천만다행이지요. 음. 감사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단탈리안이 귓속말을 건넸다. “개새끼한테는 개 같은 죽음이 어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단탈리안은 마왕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동지 여러분! 제2차 월맹군을 파탄내고 그 이후의 월맹군까지 실패하도록 유도한 장본인, 마왕 바알은 패배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모든 마계인의 염원을 깔아뭉개던 반역자 중의 반역자가 이제 처단될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고 단탈리안이 말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바알을 처단한다면 그 사람 홀로 바알을 처치한 영웅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어느 한 사람의 반역자가 아니라 말했다시피 모든 마족의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단탈리안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므로 바알은 반드시 우리 모두의 손에 처단당해야 마땅합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는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 된 마계 그 자체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마인들을 대표한다고 자부하신다면, 여러분께서 진정한 의미로 만마의 왕이라 여기신다면――부디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단탈리안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그는 주저없이 단검을 바알의 어깨에 쑤셔넣었다. “투쟁과 경쟁, 피, 학살로 점철된 구시대가 아니라, 단지 화합과 평화, 공존, 무엇보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시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들의 두 손으로 열어재끼는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마왕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처음에는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여전히 힘겨운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으나, 전투대낫을 소환하여 바알의 허벅지를 찍었다. 파이몬은 반쯤 슬픔으로, 반쯤 회한에 잠겨 바알의 오른쪽 귀를 베었다. 가미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싱글거리며 바알의 가슴을 도려냈다. 사냥개들한테 살점이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뜯어먹히듯이. ‘아아…….’ 푸욱, 푹, 하고 육체를 찢어대는 감촉을 느끼며 바알이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선 이는 서열 제3위의 마왕 바싸고였다. 바싸고는 평소부터 바알을 추종하던 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그렇기에 바알의 측근이라는 누명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라도 이 살인극에 참여해야만 했다. 더 정확하게는 단탈리안이 바싸고를 그리 부추겼다. 바싸고는 얼굴이 공포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귀공자라 불리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바싸고가 장검을 치켜들어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두르는 광경이, 바알의 두 눈에 느릿느릿하게 비추었다. ‘이것이 나의 죽음인가.’ 그리고 모든 것은 어두워졌다.   00272 만우절 특집 특별루트 =========================================================================                                                     1. 루트 no.07: 천하통일까지 일직선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는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최근 들어 궁전에서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에 관련해서 황녀는 골머리가 썩어들었다. 다름 아니라 황궁 안쪽의 호수에 웬 평민이 떨어진 것이었다. 철두철미한 보안을 자랑하던 황궁이 일개 평민에게 뚫렸다는 사실은 모든 궁정인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더 나아가, 황실근위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엘리자베트 황녀에게 이번 사건은 정치적인 충격으로 다가올지 몰랐다. 어쩌면 좋을까. 엘리자베트가 고민하는 가운데, 미리 매수해두었던 감옥 관리인이 그녀에게 고했다. 호수에 떨어진 평민이 제발 자신을 만나달라고 울구불며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인간을 이용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기대하고, 엘리자베트 황녀는 비밀리에 감옥에 행차했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청년이 엘리자베트를 보자마자 따발총처럼 떠들어댔다. “안녕하십니까, 합스부르크의 영광이시여.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소인은 전하께서 제국을 재생시킬 열망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충성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먼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저택의 2층 지하에 귀족 출신의 성노예들을 가두고 있는데, 이걸 밝혀내서 폭로하면 간단히 황위계승전에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폰 합스부르크 황자와 계약하고 있는 레벨로 상단은 사실 브르타뉴 왕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반제국 집단입니다. 상단 건물을 쥐 잡듯이 수색하면 반역죄로 몰고갈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현재 수도방위군을 담당하는 데카브리트 백작 말입니다만, 그의 부관 두 명이 언제든지 상관의 등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데카브리트 백작한테 부인이 먹혔기 때문이지요. 난감하다는 표정이시군요. 물론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소인은 황녀 전하께서 열 살 무렵에 동생인 로베르트 황자를 별궁 뒤쪽의 숲속, 벚나무 아래에서 처리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셨는데요. 아무튼 지금이 제1황녀와 제2황녀가 살아있는 시점인지 모르겠지만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르데냐의 파르세네 가문에 라우라라는 영애가 있는데 그 아이는 반드시 영입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그림자'들을 동원해서 하루라도 빨리…… 잠깐만요. 전하. 제발 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전하와 제가 힘을 합치면 대륙통일은 거저 먹는 거나 다름없――.” 2. 루트 no.12: 너의 패턴은 '강약약강강강약강중약'이다. 대마왕 바알은 경악했다. 눈앞의 인간은 정확하게 자신의 마왕성에 돌입한 지 11시간 만에 모든 마인 부대를 전멸시켰으며, 단 하나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고, 심지어 바알 본인을 '단신'으로 쓰러트렸다. 게다가 놀랍게도 인간은 '소녀'였으며, 더 나아가, 아무리 봐도 열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바알은 심장이 성검에 뚫린 채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어찌 인간의 몸으로 그런 강함을 손에 넣은 것이냐.” “대마왕 바알. 서열 제1위. 물리공격을 받을 경우 적룡의 고유마법을 발동하고, 마법공격을 받을 경우 청룡의 고유마법을 발동. 하지만, 대규모의 사역마로 동시에 공격하면 반마법이 걸린 망토를 벗는 패턴이 있으며, 이를 고려할 경우 마검사로 전직하여 공격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 “네, 네놈, 무슨 헛소리를……?” 소녀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척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님한테 배드엔딩 뜬 횟수만 여든아홉 번이에요, 개껌아.” 3. 루트 no.28: 켠 김에 세계멸망까지 비너스빤스는 키보드 배틀에서 지자 분노가 치밀었다. 일단 뇌가 달아오르면 아무도 그녀를 제지할 수 없었으므로, 비너스빤스는 환생 제2호 트럭차를 몰고 그 빌어먹게 재수없는 녀석을 치어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상대방이 어떤 서열의 마왕으로 빙의되느냐 결정하는 데 있어 '72'라고 적어야만 했는데, 그만 '2'를 한 번 더 눌러서 '722'라고 입력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비너스빤스가 회고하며 “어제 저녁에 소주를 마셔서……” 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세상에 서열 722위의 마왕은 없으므로 시스템은 오작동을 일으켰으며, 정해진 서열이 없어지자 임의로 랜덤을 돌렸고, 세상에 가득 찬 악의와 기회주의적인 전개 및 노블레스적인 클리셰에 따라 상대방은 하필이면 서열 제1위의 바알에게 빙의되었다. 그렇게 마왕 중에서도 최강의 마왕이 크아아아아 울부짖었다. 빙의된 바알은 졸라짱쎄서 마왕 중에 최강이었다. 신이나 마족도 이겼다. 다 덤벼도 이겼다. 빙의된 바알은 세상에서 하나였다. 어쨌든 걔가 울부짖었다. 세상은 멸망했다. 4. 루트 no.29: 나의 한국이 쥬신제국일 리 없어! 여기서 비너스빤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서열 722위의 마왕은 없으므로 시스템은 오작동을 일으켰으며, 세상에 가득 찬 악의와 민족주의적인 전개 및 노블레적인 클리셰에 따라 상대방은 하필이면 16세기 조선 반도에 환생해버렸다. 환생하게 된 몸의 본래 주인은 하성군 이균. 훗날 선조가 될 소년이었다. 5. 루트 no.50: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노블레스적 클리세에 따라 단탈리안은 매우 잘 생긴 미남이 되었다. 허우대 같은 체형은 사라지고 근육질이 적절하게 박힌 미형이 되었다. 그 잘생김력은 대략 로맨스물에 환생하면 황태자가 반할 지경이요, 삼국지 TS물에 환생하면 조조와 유비가 그를 사이에 두고 개싸움을 벌일 지경이었으며, 레이드물에 환생하더라도 능히 십만 미녀를 발바닥으로 후려치고 다닐 기세였다. 단탈리안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이고 청문회에 서자, 당초 단탈리안을 책문하려던 파이몬은 입을 뻥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 너무 잘생겼사와요!’ 신의 대리석 조각이 그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포도주를 홀짝이던 바르바토스는 그만 와인잔을 떨어트려버렸고, 가미긴은 수백 년 동안 고이 간직해온 표정 연기가 깨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여마왕들은 심장이 심각하게 바운스하였다. 문제는 청문회에 참여한 게 비단 여마왕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남자 마왕들 전원이 단탈리안에게 반하고 말았다. 단탈리안을 사이에 두고 마왕군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으나, 단탈리안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일시적인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브루노 평원, 십만의 인간과 십만의 마인이 지켜보는 한가운데에서 단탈리안이 소리쳤다. 그는 역사적인 명연설을 남기고 있었으나 인간과 마인의 귀에는 그딴 연설 따위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 잘 생겼다!’ ‘꼭 아름다움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아!’ ‘너무 잘 생겨서 머리가 어지러워!’ 이리하여 단탈리안 쟁탈전에는 엘리자베트 황녀와 앙리에타 여왕 및 각 나라의 군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단탈리안이 필사적으로 전쟁을 막으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남녀노소 불구하고 모든 마계의 군주와 모든 인간계의 군주가 뛰어들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세계대전이 이루어졌다. 단탈리안이 바라던 대로 난세가 펼쳐진 것이었다. 놀랍게도 최후의 승자는 시트리였다. 6. 루트 no.99: 마왕의 체질이 약간만 달랐다면……. “그럼 청문회를 시작하겠다.” 마르바스가 침통하게 말했다. 마르바스는 언제나 분쟁의 조절을 맡아왔고 그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오늘 청문회에서 사회를 맡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르바스 이외에는 누구도 중재자 역할을 맡을 수 없다며 마왕들이 칭얼거렸고, 더 솔직하게 말해서,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마르바스가 나왔다. “피고 단탈리안.” “예.” 단탈리안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는 현재 우리 월맹군이 대륙으로 진출해야 할 시점임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즉, 현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마왕이 이탈하면 아군에 있어 치명적인 손해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그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마르바스가 쿵, 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그런데 왜 마왕들을 단체로 임신시켰는가!” 증인석에는 바르바토스, 아가레스, 파이몬, 가미긴, 시트리, 이외에 여마왕 일곱 명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배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는데, 모두 배가 언덕처럼 불렀다. “중상모략입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의도적으로 임신을 유도하지 않았습니다.” 단탈리안이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르바스가 이를 박박 갈면서 서류를 넘겼다. “증언을 따르면 자네는 불과 한 달 동안 바르바토스와 열한 번, 가미긴과 일곱 번, 파이몬과 일곱 번, 시트리와 세 번, 나머지 여마왕들과도 최소 두 번의 성관계를 가졌네. 다 계산해보면 자네는 30일 동안 67번의 성교를 했어!” 참고로 이것은 여마왕에만 한정시킬 경우였다. 평범한 마인, 인간까지 합치면 숫자는 단숨에 세 배로 건너뛰었다. 이런 사실관계가 적힌 서류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마르바스는 끔찍했다. “심지어 한 달 동안만 이런 게 아니라 자그마치 여섯 달 내내 그랬지. 이러고도 자네가 의도적으로 임신을 안 시켰다고 발뺌할 생각인가. 어디 변명해보시게, 최고참모 양반.” 단탈리안은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임신의 가능성은 아시다피시 꽤나 낮은 확률이며, 집단으로 임신하는 것은 더더욱 이상할 정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허구한 날 떡을 치고 다니니까 임신이 될 수밖에!” 마르바스가 괴성을 질렀다. 끔찍하게도 여마왕들은 단체로 '임신 휴가'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월맹군의 전력은 영락없이 반쪽으로 거덜나게 생겼다. 만약 이후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역사가들은 월맹군의 패배 원인을 '임신'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하겠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발정난 개 같으니라고, 전쟁 도중에 잠깐이라도 참으면 될 것을 그걸 못 견뎠는가!” “혹시 성욕을 참으라는 말씁입니까? 실례합니다만, 마르바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어떻게 성욕이란 걸 참을 수 있겠습니까?” “바르바토스는 겨우 '열두 살'짜리 몸을 갖고 있다네! 빌어먹을! 출산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머니가 항상 젊음을 유지할 테니 아이도 기분이 좋겠군요.” 단탈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태평하게 대꾸했다. 마르바스가 깨달았다. 이 녀석은 글렀다. 쾅! 전령이 문을 박차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마르바스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느 장소라고 함부로 소음을 내는가!” “죄, 죄송합니다, 군단장 각하. 하지만 시급하게 보고해야만 하는 중대사가 일어나서…… 바알 전하께서 임신하셨습니다!” 뭐라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알 전하께서 임신하셨으며, 이에 대해 임신휴가를 선언하셨습니다.” 뭐라고오오오? “무, 무슨 소리인가. 바알은 남자…….” “지금까지 성별을 숨겨왔지만 사실 여자였습니다. 외모 변형 마법을 쓰고 계셨더군요. 각하, 현재 제7군단은 완벽하게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소식이 전파되면서 나머지 군단들도 공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바알 전하께서 밝히신 바에 따르면 아이의 아버지는 단탈리안 전하라고 합니다…….” “…….”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모든 마왕이 입을 떠억 벌렸다. 충격과 공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단탈리안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겨우 '한 번'밖에 안 했는데…….”   ============================ 작품 후기 ============================   해리포터 팬픽 중에 <해리포터와 합리적 사고의 구사법>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명작이지요. 그중 <오마케>라고 해서 외전으로 적힌 편이 있는데, 그걸 보고 너무 재밌어서 저도 한번 그런 식으로 외전을 적어봤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군요. 바알은 정말로 여자였는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본편에서 이미 바알은 죽었으므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이 문제는 '슈뢰딩거의 바알'로서 전세계 학계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입니다…….   00273 대연정 =========================================================================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나는 바알의 시체에 올라섰다. 시체는 엉망진창이었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의 부위가 이리저리 뜯겨나가 도저히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만인지적의 서초(西楚) 패왕 항우를 떠올리게 하는 최후였다. 딱히 불쌍하지는 않았다. 설마 고귀한 죽음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분수에 넘치는 일 아닌가. 이 정도 최후가 바알에게는 딱 어울린다. 후우, 후우욱……. 마왕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전투의 열기,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살아남았다는 데서 오는 흥분이 뜨겁고 불쾌한 증기처럼 피어올랐다.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실제로 죽은 마왕도 대여섯 명쯤 되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악은 처단되었습니다.” 제왕이 압도적인 무위를 뽐내며 군림하던 시대. 신화의 시대가 이곳에서 저물고 있었다. “월맹군이 실패한 것은 결코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비겁하게 동족을 배신하고 남몰래 내분을 일으킨 반역자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태생부터 바퀴벌레와 같은 이 족속들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위장 능력에 힘입어 여태까지 마치 자기가 고귀한 인물인양 시늉해온 것입니다.” 현재 내 모습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메모리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바알이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 모습도 물론 저장되었다. 영상은 약간의 편집을 걸쳐서 마계사회 전역에서 무료로 틀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짓은 반드시 몰락합니다.” 나는 확고부동한 시선을 담아 정면을 노려보았다. “마왕이 한 명의 마인을 속이기란 간단합니다. 열 명, 백 명을 선동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천 명이 되면. 천 명을 뛰어넘어 만 명이, 만 명을 뛰어넘어 십만 명이, 십만 명을 뛰어넘어 백 만명이 된다면 그곳에서 더 이상 거짓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거짓말이지만. 한 명의 거짓이 열 명의 거짓으로, 백 명의 거짓으로, 천 명의 거짓으로 나아가면 그건 더 이상 거짓이 아니게 된다. <던전 어택>에서 바알의 죄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사람들이 으레 착각하지만 진실의 힘은 절대로 진실이라는 것 자체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 진실을 믿어주는 사람의 숫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하여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디에서나 선동자가 필수불가결하다. 순전히 힘의 싸움이다. 바알이 패배한 것은 거짓이 몰락하기 때문이 아니요, 나라는 선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역죄인 바알은 무려 이천 년 동안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 전체를 우롱했습니다. 어쩌면 지난 이천 년의 시간 속에서 바알의 진짜 얼굴을 깨달은 자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있었겠지요. 그들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퍼트리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바알의 칼 아래 싸늘하게 죽어나갔습니다…….” 이천 년 동안. 역사서에 이름 한 줄 남기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나는 묵념하는 사제처럼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과거의 역사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망각된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절, 정의는 단지 미약했으며, 진실은 그저 공허했으며, 용기는 다만 무의미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는 시체의 역사. 일억의 원통한 영혼이 일억의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없는 무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과장하지 않고 뚜렷하게 말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악은 처단되었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확성마법을 빌어 폐허가 되어버린 궁전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역사는 더 이상 무덤이기를 그칠 것입니다. 오늘 오후 5시 45분, 시간은 틀림없이 일시적으로 정지했습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오늘을 '위대한 정지'라고 부를것입니다. 바로 이제부터 전혀 다른 의미에서 역사가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모략의 시대로. 투쟁의 시대가 끝나고 대립의 시대로. “오늘부터 우리는 정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대책없는 낙관론을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정의는 승리할 것이며, 그보다 더 자주, 또한 더욱 처참하게 패배할 것입니다.――그러나 결코 정의가 망각되는 일만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느 쪽이 정의인지 내가 정해주겠다. “오늘부터 어느 쪽이 정의이고 어느 쪽이 악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누가 용감하고 누가 비겁한지, 모든 것이 적나라하고 명백하게 기록될 것입니다. 이제 폭군의 억압 아래에서 이름 모를 의인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죽은 영웅은 마땅히 선전에 써주어야 마땅하므로. “거짓은 반드시 몰락합니다. 그것은 거짓이 스스로 무력해져서 멸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봉대가 되어 거짓과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 거짓을 속삭일 때 우리는 열 명의 힘과 열 명의 목소리로 진실을 울부짖을 것입니다. 열 명이 거짓을 퍼트릴 때 우리는 백 명이 되어 투쟁할 것입니다. 백 명, 천 명, 만 명이 거짓을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시기가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전대를 이루어 용맹정진하게 정의를, 오로지 굳건하게 정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반항한다면 우리는 그대들보다 열 배는 많은 병력으로 철두철미하게 섬멸전에 돌입하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쳐야 말해야 합니다. 거짓은 반드시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마왕군과 마계사회 전체가, 반드시 거짓을 몰락시키는 것이라고!” 내가 손을 치켜들었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그대들이 연합할수록 우리는 강대해진다. “대역죄인 바알이 심어놓은 악은 아직도 뿌리가 깊습니다. 수만 명의 잔당이 마왕성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가장 강력한 군단입니다. 심지어 삼 년 전, 동족을 공격함으로써 마계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던진 일급범죄자 아가레스조차 건재합니다.” 이들이 처리되어야 나는 안심하고 발을 펴고 잔다. 다른 마왕들도 마찬가지이다. 단신으로 파벌의 힘을 능가하는 아가레스는 반드시 격멸해야만 한다. 평원파와 산악파는 파벌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없어기지를 바란다. 중립파는 파벌 간 질서를 망가트리는 트러블 메이커를 없애고자 한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항복, 혹은 완전무결한 연합이 그것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의지에 따라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노예가 되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더 나아가 우리의 후손 전원을 노예문서에 기입함으로써, 다시금 어둡고 음침한 이천 년의 시간에 접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하여. “마왕군의 지도부는 천명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정의가 우리에게 희생을, 필요하다면 모든 희생을 요구할 때, 우리는 마계사회의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보다 더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부터 감수하지 않을 고난이 마계사회의 시민 여러분에게 놓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지도부를 비방하거나 비판하지 마라.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마인 여러분 전체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계를 위하여 행진하는 '첫 번째 부대'일 뿐입니다. 가장 신성하고 소중한 제복을 다시 입을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미리 준비해온 천을 품속에서 꺼내들었다.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 월맹군의 깃발이었다. “정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이 제복을 벗지 않을 것이며, 승리하지 못한다면 살아서는 패배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부로, 마왕이자 마계를 위한 군인인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투쟁에 돌입합니다. 그 투쟁에는 오직 하나의 구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나는 월맹기를 꾹 쥐고 소리쳤다. “마인들이여! 연합하십시오!” 월맹기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나의 피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들 자랑스러운 마족에게 노예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신에게 후손들마저 노예로 떠넘길 자유가 있다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역자와 상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원칙, '너 스스로 고귀한 자가 되어라' 하는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계엄령이 내려졌다. 우리에게 협력하는 자에겐 정의의 꼬리표가 붙을 것이요, 우리에게 반항하는 자에겐 반역자라는 멍에가 씌워질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달리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삶이 비겁해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이여, 전사임을 소명받은 마족이여! 우리 자신이 살고 죽는 문제는 대단히 사소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마족의 긍지가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저열한 인간종과는 다르다. 마족에게 뿌리 깊게 박힌 인종차별적인 심리를 건드린다. “우리가 하나의 군단을 이루어, 어떠한 고난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결코 항복하여 노예로 전락하지 않겠노라고 소리친다면, 그 소리가 열 개의 메아리가 되어 다시금 열 명의 소리가 되고, 그리하여 다시 백 개의 메아리, 천 개의 메아리, 십만의 메아리가 되어 온 세계를 요동시킨다면, 우리는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것입니다!” 자아. “마족들이여! 일어서십시오! 하나의 정의를 위한 십만의 발걸음이 되어 일어서십시오! 오늘부터 새로이 열릴 시대를 위한 노래가 되어 일어서십시오! 오늘 5시 45분, 시간은 일시적으로 정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거짓과 기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여러분들의 두 손과 두 발로 직접 역사를 움직여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시작하자. “여신들께 우러러 요청하나니. 전사들이여, 연합할지어다!” * * * 우리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알의 잔당을 섬멸하기 위하여 연합군이 조직되었다. 바알의 대마왕성은 마왕의 성역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고, 덕택에 우리는 보급선을 신경 쓸 필요없이 곧바로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병력은 총 오만 대군. 우리에 맞서는 바알 휘하의 군단은 이만이천이었다. 겨우 한 마왕이 이끄는 군단이 이만이천. 바알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척이나 느긋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성에서 마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그만이야.”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렇다. 마왕성에 주둔하는 마인들은 마력을 먹고 산다. 하지만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어도, 마왕이 죽으면 마왕성에서 점차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버린다. 자그마치 이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을지라도 마력이 사라지면 보급이 끊기는 셈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이만이라는 병력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겠지. 그들이 잡아먹는 마력이 장난이 아닌 수준일 테니까. 우리는 마왕성을 포위한 채 스무 날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성문으로 뛰쳐나오는 적군이 속출했다. 우리는 포위망을 굳건하게 다져서 녀석들을 손쉽게 요리했다. “꼭 칠면조를 사냥하는 것 같은데.” 시트리의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사냥이었다. 바알이 사라진 이상 적군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반면에 이쪽은 마왕이 마인들에게 직접 심리를 통하여 명령 내리고 있었다. 마왕이 통솔하는 마족 부대와 그러하지 못한 마족 부대의 차이는 확연하다 못해 어마어마하여, 바알이 자랑하던 대군단은 불과 두 달 만에 녹아내렸다. 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제일 유효한 수단은 바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시시각각 폭로되는 바알의 죄목. 나의 연설. 여기에 군사적인 승리까지. 마계사회는 새로운 월맹군 지도부에 점차 열렬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266화에 참고한 서적을 알아낸 분이 나타나셨더군요. 맞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쓴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입니다! 영구평화론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사실 군주를 대통령이라 바꿔 읽으면 대의민주주의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00274 대연정 =========================================================================                        우리는 바알의 잔당을 무너트린 이후, 대대적으로 니블헤임에서 개선식을 올렸다. 이번 행사를 위해서 이미 두 달 전부터 개선문을 만들어두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당초 계획보다 개선문의 크기가 약간 작아졌지만, 난쟁이 장인들이 들러붙어 만들어내자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불멸의 바르바토스 전하 만세!” “순결의 파이몬 전하 만세! 고귀의 마르바스 전하 만세!” 니블헤임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꽃송이를 무수하게 흩뿌렸다. 오만의 군대는 보무가 당당하게 걸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대낮임에도 형형색깔의 연기를 뿜어내며 폭죽이 하늘로,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군마에 올라타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대군을 맨 선두에서 이끄는 면면을 살펴보면 꽤나 의미심장했다. 먼저 이번 사건으로 명실상부 마왕군의 톱으로 올라선 세 사람. 평원파의 바르바토스와 산악파의 파이몬, 중립파의 마르바스가 제일 앞에서 행진했다. 당초부터 각 파벌은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러나 바알과 아가레스, 두 사람에게는 파벌을 뛰어넘어 단신으로 전쟁터를 평정할 무위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파벌의 수장들은 언제나 마왕군에서 '두 번째'로 취급받았다. 바알이 사라진 이상 파벌들의 독주를 막을 세력은 전무했다. 정말 시대가 바뀐 것이었다. 그동안 무소속으로 남아 있던 마왕들도 불안에 잠겼다. 그들 중 몇몇은 중립파에 가입했고, 몇몇은 자신들을 비호해줄 유력자를 찾아 나섰다. 중립파에 가입한 자들은 아마 정치적으로 중립파가 제일 무난하리라 판단해서 그런 것 같았다. 세 명의 수장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 이런 풍경 자체가 마인들에게는 감격적이겠지. 월맹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제2차 월맹군에서도 저 세 사람이 선두에 섰다. 점차 인간에게 밀려서 언젠가 멸망하지 않을까, 하고 비관론이 대두하던 오늘날 세 명의 수장이 다시금 단합했다. 저런 풍경을 만들어내려고 고생한 사람은 정작 나이지만……. “바싸고 전하 만세!” “꺄아악, 가미긴 전하! 여기 봐주세요!” 다음으로 행렬을 이끄는 마왕은 바싸고와 가미긴. 재미난 순서였다. 서열이 우선시되었다면 당연히 서열 제3위인 바싸고와 서열 제4위인 가미긴이 앞장서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두 번째 순서에 배치된 것이었다. 바싸고와 가미긴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로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었지만, 글쎄.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이면의 단탈리안 전하 만세!” 그리고 나 단탈리안. 이상 여섯 명의 마왕을 상징하는 깃발이 도시 곳곳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참고로 나를 뜻하는 깃발은 일곱 개의 가면이 그려진 얼굴이었다. 때마침 영지도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럭저럭 적절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도 한참 말세가 되었군.” 내 왼쪽에서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는데 목소리에서는 불쾌함이 너울거렸다.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구만. “기껏해야 말단에 불과한 마왕이 우리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다니. 예전과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더 이상 예전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이겠지요.” 바싸고가 콧방귀를 뀌었다. “착각하지 마라, 무례한 놈. 바르바토스의 위세를 빌린 기생충 주제에 어디서 나대느냐.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기습을 당했을 뿐이지 나에게는 네 명의 정령왕이…….” “불의 정령왕, 물의 정령왕, 대지의 정령왕, 바람의 정령왕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사실은 어둠의 정령왕과도 계약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싸고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저런, 얼른 웃어라. 수많은 시민 여러분이 지켜보고 있다. 조금 더 활짝 웃지 않으면 정치적인 어필이 줄어들 거라고? 바싸고는 정령사이다. 본신의 무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으나 정령왕을 무려 다섯이나 거느리는 바람에 지극히 상대하기 까다롭다. 플레이어 캐릭터를 마법사나 마검사 계열로 키웠으면 거의 깨기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정령사에게는 '마음이 깨끗하다'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 정령사의 톱을 차지하는 바싸고가 실은 속이 새까만 능구렁쟁이다. 세상이란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이다. “어떻게, 어디에서도 소환한 적이 없거늘…….” “이런. 제가 연설에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거짓은 반드시 몰락하기 마련이라고.” 내가 작게 웃었다. 멀리서 보면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우스운 일이다. “바싸고 전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 따위는 없다는 것을 슬슬 깨달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기에는 교훈이 조금 부족했을까요?” “…….” “오늘 승전 연설에서 바르바토스가 선언할 겁니다. 마왕군의 서열 제도는 전격적으로 폐지됩니다.” 바싸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침내 웃는 얼굴조차 아니게 되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인데,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3위까지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는 미숙하다. 그들이 아니라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된 것 자체가 증거이다. 자신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정치적으로 덜 성숙하게 되는 것인가. “폐지한다니. 그게 무슨…….” “말 그대로 폐지입니다. 서열은 대역죄인 바알이 주관하던 것. 원래 서로 평등한 마왕들에 순위를 매겨서 마왕군 전체의 화합을 방해하는 제도이지요. 악습은 하루빨리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바싸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열 제도에는 바알뿐만이 아니라 바싸고 본인이 깊숙하게 개입해 있었다. 그런 제도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바싸고까지 숙청의 대상에 들어간다는 걸 뜻했다. 내가 이제 알아차렸다는 듯 참, 하고 소리를 높였다. “바싸고 전하께서 공정의 마왕이라 불리는 까닭이……그러고보니 서열을 공정하게 매긴다는 명성에서 비롯했군요. 곤란한 일입니다. 저희로서는 서열 자체를 부정할 계획이었습니다만…….”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바싸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알을 처치하는 일에 동참하면 모든 걸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했을 터이다. 맨 마지막에 바알의 목을 벤 사람도 나였어. 어째서 연좌제가 적용되냐는 말이다.” “예, 맞습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동지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더군요. 고작 바알에게 칼끝을 한번 쑤셔넣은 것으로 바싸고 전하의 진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그것이 중론입니다.” “그, 그럴수가…….” “동지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바싸고 전하가 바알을 찌른 것은, 솔직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전하가 바알을 배신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미 한번 배신해본 자가 다시 한번 우리를 배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것이죠.” 내가 멋쩍게 웃었다.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서 저도 변호에 실패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 “너무 질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가 끝까지 열렬하게 변호한 끝에 다른 동지 여러분도 바싸고 전하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기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제부터 역적 아가레스를 토벌하러 갑니다. 제 개인적인 정보망에 따르면 아가레스가 프랑크 제국과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적이 되겠지요.” 말이 프랑크 제국이지 실상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이 조종하는 국가이다. 앙리에타 여왕과 아가레스가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꽤 높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상정해두는 편이 좋다. 인간계 최강의 군주에 마계 최강의 군주가 비밀동맹을 맺은 것이다. 끔찍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아가레스는 반드시 처단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마왕군, 평화와 화합을 수호하는 마왕군에 있어서 아가레스는 분탕을 일으키는 종자에 불과하니까요. 이 역사적인 전쟁에서 바싸고 전하가 선두에 나서주셔야겠습니다.” “…….” 바싸고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가레스를 상대하는 전쟁에서……내가 선두에 서라……?” “예. 그렇게 해주신다면 다른 동지들도 바싸고 전하의 진심을 결코 의심하지 않겠지요. 제 이름을 걸고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로군……웃기지 마라! 아가레스이다. 그 아가레스야!” 바싸고가 이빨을 물고 소리질렀다. “그 멧돼지 같은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바알조차 대군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네놈의 잘난 파벌도 중립파와 산악파한테 손을 벌려서 겨우 퇴치하지 않았더냐. 아니, 퇴치도 아니지. 아가레스는 멀쩡히 살아서 도망쳤으니까! 이건 논외이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바싸고 전하.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최종권고이지요.” “뭐?” “아가레스가 강력하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습니다. 삼 년 전에 그녀를 상대한 저희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렇기에 아가레스 다음으로 강하다 알려진 바싸고 전하를 앞장세우려는 것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화살받이로 쓰겠다는 말이다. 이쪽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바싸고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네놈들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들어?” “여전히 이해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이건 최종권고입니다. 바싸고 전하께서 거부하시면, 안타깝지만, 저로서는 더 이상 전하를 옹호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동지들을 막을 수가 없어요.” “능글맞은 구렁이 새끼가……!”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붙잡으려는 듯 바싸고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의 왼편에서 함께 행진하고 있는 가미긴이 슬쩍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바싸고를 쳐다본 것이었다. 바싸고는 수차례 인상을 구기더니 간신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바싸고 전하. 물론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전하께는 그만한 자유가 허락되어 있을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전하의 마왕성에 돌아가서 농성하십시오.” 내가 한껏 상냥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얼마나 버티실지 모르겠군요. 바알도 저희 동지들에게 주살당했습니다. 마계의 여론은 이미 저희에게 기울었지요. 당장 오늘 예정되어 있는 연설에서 바르바토스가 바싸고 전하를 공적으로 선언할지도 모릅니다…….” “…….” 뭣하면 아가레스한테 도망쳐서 합류해도 좋다. 하지만 바알의 대군단도 고작 두 달 만에 녹아내렸다. 그 광경을 바라본 네놈한테 우리에게 등질 자신이 있을까? 마왕군 전체와 마계사회를 적으로 돌릴 배짱이 있을까. 나는 바싸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렴 우리가 멍청하게 바싸고 전하를 토사구팽하겠습니까? 아가레스는 강력한 적입니다. 바싸고 전하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잠시간의 침묵이 있고서 바싸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바르바토스한테 전령을 보냈다. 딱히 의미는 없지만 바싸고가 안심할 수 있도록 제스처를 보낸 것이었다. 이런 제스처는 되도록 후딱후딱 보여줘야지 후환이 없었다. 제스처를 보면서 상대방이 '그래,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이게 최선이야.' 하고 생각하게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바르바토스한테 기생한다고 말씀했습니다만, 그러는 바싸고 전하께서도 바알한테 지금껏 기생하시지 않았습니까? 전하나 저나 훌륭한 기생충 동지입니다. 이제부터는 저희 둘 다 똑같은 세력에 기생하는 것이고요.” “…….” “모쪼록 친하게 지내보지요. 사실 말이지, 저는 바싸고 전하를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바싸고는 행사가 끝나기까지 말없이 어깨를 떨었다. 그날, 마왕군에서 공식적으로 서열 제도가 폐지되었다. <화합과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00275 대연정 =========================================================================                        * * * 엘리자베트는 선잠에서 눈이 깼다. 하얀 침대. 일국의 군주가 사용하기에는 적이 검소했다. 엘리자베트가 부스스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지독한 피로감이 썩은 치즈처럼 두개골에 들러붙어 있었다. 단 일 분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끄응…….” 방 저편에 놓인 마법수정구들 중 하나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수면이 극단적으로 적은데, 저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이런 시각에 누가. 아니, 이런 시간이기에 더욱 시급하겠군.” 엘리자베트가 유령처럼 걸어갔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새하얀 나신을 어렴풋하게 비추었다. 옛날부터 속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자는 것이 습관이었다. “음. 앙리에타인가.” 엘리자베트의 눈동자에서 잠기운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다름 아니라 앙리에타 전용으로 만들어둔 마법수정구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소중한 잠을 얼마든지 방해해도 좋았다. 엘리자베트는 당장 마법수정구를 가동했다. 마법수정구에서 빛무리가 흘러나오며 인물의 형상을 투영했다. “안녕, 엘리제.” 화염처렁 정열적인 머리칼을 지닌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대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하나 물어볼게. 혹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 하나 있어?”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이군.”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신 친구와 같은 태도이지 않는가. 아무도 그녀가 제국과 왕국을 호령하는 군주라고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 거리낌 없는 어조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으음, 하고 엘리자베트가 턱을 괴었다. “비밀인가. 곤란하군. 소녀의 비밀을 알아내서 어디 나쁜 곳에 써먹을 생각인가?” “소녀는 무슨. 애인 하나 없이 이십 년 넘게 처녀로 산 여자 보고 누가 소녀라고 부르겠나.” “……마음만큼은 소녀다. 마음만큼은.” 엘리자베트가 항변했지만 자신이 느끼기에도 애처로웠다. “설마, 그 반응을 보건대 정말로 처녀야?” “본녀는 국가와 결혼했다. 좋다, 앙리에타. 이걸 그대에게 알려주는 비밀로 하지.” “쯧쯧.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러나.” 앙리에타가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트는 약간이지만 울컥했다. “마음만 먹으면 본녀도 누구든지 잡아서 즐길 수 있다. 단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거 얼굴은 예쁘장한데 남자 못 사귀는 애들이 항상 변명으로 써먹는 말인걸.” “됐다, 됐어. 이 얘기는 그만하지.”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브르타뉴의 여왕은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아마도 브르타뉴인과 합스부르크인이 가진 민족적인 차이겠지, 하고 엘리자베트는 넘어갔다. “나 원. 중신들이 이 대화를 엿들었으면 반란이 일어나도 벌써 두 번은 일어났을 거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사사로운 비밀을 들려달라 한 것인가.” 앙리에타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이 움직였다, 엘리제.” “…….” 공기가 달라졌다. 엘리자베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한 명밖에 없는 친구를 대하는 엘리자베트가 아니라 다만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냉혹하게 통치하는 독재자가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긴장감을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움직였다고 함은?” “당연히 군대를 일으켰다는 뜻이지. 월맹군이야, 엘리제.” 앙리에타는 마치 타인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긋했다. “차이점이라면 지난 번엔 합스부르크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프랑크로 오고 있다는 걸까. 네 입장에선 꽤나 다행이겠네.” “으음.” 물론 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월맹군을 자국에서 맞이하라니 끔찍한 악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목적지가 프랑크라는 것은 눈앞의 친구, 앙리에타가 월맹군에 맞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의심하는 어투가 되어 미안하다만, 그 마왕은 정보전과 심리전의 귀재이다.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섣부르게 판단한 순간 이미 상대방의 함정에 빠지게 되겠지.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정보부에서도 마왕군은 감시대상 제1순위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아직 특별한 동향을 보고받지 못했다. “이게 비밀을 알려달라고 한 이유인데, 나한테도 비밀이 하나 있거든. 사실 나는 지금 마왕 중 한 사람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어. 그 사람이 출처야.” “마왕이라니.”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째푸렸다. 앙리에타가 마왕과 협력한다는 사실은 제법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 지점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앙리에타 스스로 비밀을 알려온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현안에 집중했다. “정보가 역조작 되었을 가능성이 너무 크지 않은가. 위험하다, 앙리에타.” “그 마왕이 아가레스거든. 삼 년 전에 섭정국에서 일어난 내전, 기억하지?” “……서열 제2위. 내전에서 패배한 마왕이로군.”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앙리에타가 말했다. “현재 마왕군에서는 대대적으로 숙청이 이루어지고 있어. 제법 규모가 거대한 모양이야. 서열 제1위인 바알이 죽었을 정도라네. 그런 과정에서 단탈리안이 한 연설의 영상을 입수했어. 나중에 궁정마법사 시켜서 전송시켜줄게.” “부탁하지. 그렇다면 숙청은 단탈리안이 주도한 것인가?”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 “흐음.” “엘리제. 마왕과 협력하면서 지난 월맹군의 내막을 들을 수 있었어. 브루노 평원은 전적으로 단탈리안이 연출해낸 무대였지.” “……그게 무슨 뜻인가.” 단탈리안은 연설전에서 인류에 독을 뿌린 장본인이었다. 그것 이상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말인가? 앙리에타는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들려주었다. 단탈리안은 산악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 당시 마왕군의 군단장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썼다. 당연히 아가레스 역시 편지를 받았다. 아가레스는 단탈리안이 산악파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꿰뚫어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받음으로써 앙리에타는 제8차 월맹군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렇게 된 거야. 각본과 연출 모두 녀석이 꾸몄어.” “…….” 엘리자베트는 묵묵부답으로 술잔을 쥐고 있었다. 도중에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듣지 못하겠어서 술을 꺼내왔다. 최고급 미주일 텐데 입맛은 쓰기만 했다. “브루노 평원에 집결한 시점에 우리는 이미 함정에 걸린 거야, 엘리제.” “그게 무슨……고작 단 한 사람에게 인류는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말인가.” 엘리자베트가 몸서리를 쳤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어.”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지. 미안하지만 너와 나는 군주야. 우리에겐 현실을 외면할 권리가 없어.” 이런 것이 현실이라면 지나치게 끔찍했다.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대륙을 뒤덮고 있었다. “십만이 죽었다. 앙리에타, 합스부르크에서만 십만이 죽었다.” 엘리자베트가 괴롭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짓이라고? 어떻게 시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아무리 마왕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랑스러운 병사들을 자멸시켜야 했지.” 시종일관 느긋하게 얘기해온 앙리에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병사들이 내지른 비명을 잊어본 적 없어. 너도 그렇겠지.” “…….” “복수의 때가 다가온 거야, 엘리제.” 두 사람 사이에는 명백히 온도의 차이가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극도로 단탈리안을 경계했고 심지어 두려움까지 가졌다. 반면에 앙리에타에게 단탈리안이란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공포스러운 인물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는 몇 년 전, 엘리자베트가 미치광이 사제 쟝 볼레의 정체가 단탈리안임을 알아본 데서 비롯했다. 엘리자베트는 이 정보를 곧장 앙리에타에게 통보했다. 그리하여 앙리에타는 자신이 꺠부순 적이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앙리에타는 이미 한번 단탈리안을 철저하게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그것이 앙리에타에게 근거 있는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정보가 역조작된 것일지라도 우리가 주의를 가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설마 그 정도 자신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믿어, 엘리제.” “……옳은 말이다. 본녀가 약간 조급했군. 미안하다.” “뭐, 이해해. 단탈리안이 관련되면 너는 신경질적이게 되니까.” 앙리에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상대는 정보전과 심리전의 귀재야. 하지만 전쟁터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지. 그 점을 이용해서 한방 싸움을 노리면 돼.” “…….” 엘리자베트가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어떻게 얘기를 전달할까 잠시 머뭇거리고 눈앞의 친우에게 말했다. “전술에 관련해서다만. 앙리에타, 아마도 단탈리안은 강력한 부하를 얻은 것 같다.” “어?” “하이델베르크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군에도 꽤나 하는 녀석이 있다며 떠들었잖아.” “그 전술가의 정체 말이다만……십중팔구 단탈리안의 참모이다.” 앙리에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친구의 표정에 왠지 모를 아픔을 느끼면서 엘리자베트가 마저 얘기했다. “항복사절단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증언하건대, 단탈리안을 주군으로 모시는 소녀라고 하더군. 분명히 단탈리안은 전투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약점을 그대로 내버려둘 만큼 우둔한 인물이 아닌 게야.” 하이델베르크에서 귀족들이 고귀한 태도를 보여주는 바람에 시민들은 귀족층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공화국 정부 내에서도 귀족의 목소리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여태까지 억눌러온 만큼 일단 계기가 생기자 강하게 터져나왔다. 단탈리안은 한 번의 승리를 단지 전투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쪽의 정치까지 뒤흔들었다……. 승리를 활용할 줄 아는 적수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단탈리안은 지극히 두려운 존재였다. 앙리에타가 한탄했다. “모략과 정략. 거기에다 군략까지 갖춘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적수가 되어버렸네.” 두 명의 군주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압감을 이겨내려는 듯 엘리자베트가 말을 꺼냈다. “월맹군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떨까. 숙청을 획책한 것은 단탈리안이지만 그 정보에 비추어보건대 병력은 얼마 없다. 병력을 가진 마왕들을 분열시키고, 단탈리안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리면…….” “아마도 어려울 거야.”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레스의 말에 따르면 그 녀석, 아예 군단장들과 연인 사이라고 해. 거기에다 단탈리안은 월맹군을 성공시키고 내전을 무마한 장본인이야. 군단장들은 단탈리안을 한없이 신뢰하고 있겠지.” “신뢰는 굳건하다, 라고…….” “아아.” 서열 제1위 마왕에 대해서 숙청 작업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이 기획을 입안한 단탈리안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신뢰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내분의 여지는 한없이 적었다. 엘리자베트가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그 자는 무엇이 목적인가? 이해하기 어렵군. 단순히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이라면 숙청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을 터이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하지.” 앙리에타가 싸늘하게 말했다. “녀석은 가장 위험한 부류의 인물이고, 인류의 적이며, 우리의 원수야.” “…….” “반대로 생각해서 녀석만 사라지면 마왕군은 중심축을 잃겠지. 엘리제, 계엄령을 준비해. 이번이야말로 인류의 존망을 걸고 전쟁에 나서야 할 때야.” 엘리자베트는 술을 들이마시고 주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악몽은 스스로 끝내는 수밖에 없다…….   00276 대연정 =========================================================================                        * * * 엘리자베트와 앙리에타는 반드시 연합하겠지. 내기해도 좋다. 두 군주 사이에는 강한 협력체제가 완성되어 있다. 그걸 확신하게 된 시점은 지난 프랑크 내전이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는 기사이지만 귀족 출신이라서 반강제로 퇴직당한 자가 많았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그들을 앙리에타한테 보냈다. 엘리자베트는 잠재적인 반란분자를 국내에서 쫓아낸다. 앙리에타 여왕은 훌륭한 기사 전력을 얻는다. 간결하면서도 멋진 협조이다. ‘엘리자베트와 앙리에타라.’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일찍이 패권을 두고 다투어야 할 제왕들이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최강에 최강이 덧붙여진 셈이다. 에이스 투페어로군. 글쎄, <던전 어택> 팬들이 보면 환호할 만한 광경일지 모르겠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내가 대적자라는 점에서 웃지 못할 일이다. 본래 능력으로 따지자면 나 따위는 그녀들에 비해 구더기 오줌에 불과하다.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는 것일까요.” 작전회의에서 파이몬이 부채를 천천히 부치며 말했다. “합스부르크 통령은 공화국을 천명하고 있사와요. 반면에 브르타뉴의 여왕은 전형적인 군왕이지요. 두 사람이 떳떳하게 군사 행동을 함께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걸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컨대 의용병을 보낸다든지. 비록 정치체제는 다를지언정 우리는 국가의 일원이기 이전에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이며, 설령 증오스러운 왕정주의자일지라도 마왕군에 맞서서는 과감하게 단결해야 한다……. 대충 그렇게 선동하겠지. 엘리자베트는 선동하는 솜씨도 발군이다. “다만 방법을 현실에 가능하게 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실현시킨다면 그 자는 유능한 것이고,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무능한 것이지요.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통령은 지극히 유능합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기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 불쾌했는지 흥, 하고 각자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런 점까지 박자가 맞아서 더 귀엽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작전회의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해서 그만 아빠 미소가 나왔다. “마법도 못 쓰는 퇴물은 그냥 뒷방에서 자위질이나 하고 있지 그래?” “어머나. 할 줄 아는 거라곤 돌격밖에 없는 미친개는 얌전히 작전이 세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떤가요. 모쪼록 막사 근처에다 오줌을 싸갈기지는 말아주세요.” ……전언을 철회하겠다. 귀엽다고 칭하기에는 좀 많이 무섭다. 작전회의에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가미긴, 마르바스, 바싸고, 벨레드 형님, 제파르 대장, 시트리, 총 여덟 명이 참석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서로한테 틱틱거리고 벨레드 형님과 시트리가 서로한테 틱틱거렸다. 그런 구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장소 불문하고 똥오줌을 싸지르는 건 그쪽의 특기이겠지, 파이몬.”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네 머리카락에선 똥냄새가 아주 진득하게 풍기거든. 너희 파벌 꼬붕들이 말하지 않아줬나봐? 참, 미안. 파벌이라고 해봤자 얼마 있지도 않았지! 내가 착각했지 뭐야.” “머릿수가 많다고 잘난 척하는 건 하등생물의 특징이지요. 바르바토스는 아직 뇌가 덜 자란 모양인걸요. 불쌍해라. 하도 박혀대서 쭈글쭈글한 그쪽 아랫입처럼 뇌에도 주름을 늘려보심은 어떤지요? 뇌가 아니라 하반신으로 사고하는 하등생물에게는 조금 무리한 주문이겠지만요.” 너희 정말로 전생에 원수라도 지냈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이 표정 하나 까딱거리지 않고 쌍욕을 주고 받으니 그만큼 으스스한 장면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는 다들 귀여운 양반들께서 왜 이러실까. 바알을 토벌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거였다. 형식적이든 뭐든 아무튼 간에 평원파와 산악파를 합류시키는 것. 다행히 바르바토스는 산악파에게 빚이 하나 있었다. 내전에서 원군을 받은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저래 봬도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지라, 일단 은혜를 받았으니 돌려준다는 식으로 협력했다. 입에서 쌍욕을 쏟아붓기는 했어도. 문제는 파이몬이었다. 죽어도 바르바토스와 손 잡기 싫다는 의지가 풀풀 풍겼다. 하이델베르크 함락 작전에 협력한 까닭이 여기에도 있었다. 나는 평원파였다. 평원파가 산악파의 작전수행을 크게 도와준다고 알려지면 어느 정도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어서 라우라의 작전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로 내기를 걸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파이몬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바르바토스와 협력했다. “얼씨구, 서큐버스 년이 입에 걸레를 처물었나. 내 껀 네 년에 비교하면 매끈한 민둥산이거든요? 입구멍에서 오징어 냄새나 지우고 지껄이세요, 늙은아.” “어머, 꼬맹이 같은 얼굴로 발랑까져서 정말 좋겠사와요. 뭣하면 제가 엄마가 되어드려서 모유라도 드릴 수 있는데요. 우리 바르바토스 어린이, 모유 마시고 싶어서 많이 힘들죠?” 월맹군의 실패가 바알에서 비롯했다고 믿는 지금 시점에서도 양측 모두에게 감정적인 문제는 남아 있고…… 뭐, 하루가 멀다 하고 절찬리에 말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럴 때는 신경 쓰는 사람이 지는 거다. 어찌 들으면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느긋하게 감상하자고. “……싸우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으니 제발 조신하게 처신해주면 안 되겠는가.” 하지만 세상에는 나처럼 신경줄 굵은 사람만 있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최근 들어 마르바스는 십 년은 더 늙어보였다. “각 군단이 함께 움직이는 것은 제3차 월맹군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마계인들이 얼마나 이번 원정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터. 부디 제군들도 분발하여 원정을 성공시켰으면 한다.” “포기하십시오, 마르바스 님.”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번 개선식에서 두 사람이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더 이상 뭔가를 기대해봤자 우리만 피곤해집니다. 무시하고 회의하지요.” “자네마저 중재를 포기하면 이제 기댈 구석이 없다마는.”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좋다. 통령과 여왕이 협력한다는 것은 알겠다. 우리군은 어떻게 움직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어차피 적군이 협력한다면 그 전에 기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바싸고가 다소 신경질적인 얼굴로 말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말싸움을 벌일 때마다 바싸고는 표정이 나빠진다. 너무 바보 같아서 놀아주지 못하겠다는 심정이겠지. 조금 더 인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놈들은 우리의 계획을 아직 모르고 있다. 최대한 빠르게 행군하여 프랑크 제국과 아가레스를 먼저 처리한다. 합스부르크의 통령이 대단하다고 한들 혼자서 무엇을 하겠는가.” “으음.”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각개격파는 가능하다면 언제나 최상의 시나리오니까. 하지만 이번에 한정해서는 약간 안이한 낙관론이라 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상대는 비단 통령과 여왕뿐만이 아니다. 아가레스도 포함되어 있다. 마인들 중에는 틀림없이 아가레스를 지지하는 자도 있을 거다. 우리에 대한 정보가 아가레스한테 흘러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의 행보는 이미 어느 정도 노출되었다고 가정해야 올바르겠지. “단탈리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요. 나쁘지 않군요.” 바싸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쪽이 거들먹거린다고 생각했을까. 무얼, 나는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다. 잠자코 들어봐라. “여왕에게는 아가레스가 협조하고 있습니다. 마계인들 중에는 아가레스한테 정보를 흘리는 자도 분명히 있겠지요.우리가 아가레스를 토벌하려 한다, 이 정보는 이미 알려졌다고 상정해야 합니다.”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싸고가 기분 나쁜 듯이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알고 있는가? 댁은 대체로 표정이 너무 바깥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존경을 받지 못하는 거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설령 각개격파가 성공하더라도 별로 우리한테 유리할 게 없다는 점입니다. 아니, 오히려 적들에게 유리해지겠지요.” 마르바스가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가?” “간단합니다. 우리의 주력이 프랑크 방면에 모조리 집중되면,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맞대고 있는 국경이 텅 비어버립니다. 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요.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명목 아래 곧바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쉽개 말해서 양면 전쟁이 되어버린다. 합스부르크 방면에서 바르바토스는 섭정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그쪽에 사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마왕이 폭정을 펼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다고 알려지면 단번에 흥분하겠지. “섭정국 곳곳에서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지난 월맹군에서 겨우 얻어낸, 소중한 대륙의 교두보가 엉망진창으로 파괴되겠지요. 프랑크에서 승리할지라도 합스부르크를 잃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르바스가 침음을 삼켰다. “그래서는 '우리'가 곤란하군…….” 과연 마르바스였다. 나의 얘기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합스부르크 섭정국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하나일지 몰라도, 이쪽 입장에선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평원파가 차지하는 영토, 산악파가 차지하는 영토, 가미긴이 차지하는 영토, 그외에 소수의 무소속 마왕이 차지하는 영토. 만약 이곳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해봐라. 자기가 차지한 영지를 지키겠답시고 마왕들이 원정군에서 대거로 이탈해버린다. 대부분의 마왕에겐 아가레스를 물리치는 것보다 자기 영지가 무사한 게 중요하다. 월맹군은 일견 강력하게 단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으면 무너진다. 마르바스는 내 의도를 이해해서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합스부르크에 수비 병력을 남겨두어야 하겠는가.” “아니요. 그래서야 도리어 우리가 잘게 나뉘는 꼴이 됩니다.” 프랑크에는 앙리에타와 아가레스. 합스부르크에는 엘리자베트가 버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쪽 전력을 나누어서 각자 상대하라고? 더없이 미친 짓거리이다.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으로 전락해서 각개격파 당할 뿐이다. “이상한 논리로군.” 바싸고가 기분 나쁜 어조로 말했다. “전력을 집중하여 기습하는 것도 안 된다, 전력을 나누어서 측면을 방어하는 것도 안 된다. 그러면 대체 어쩌자는 말이냐?” “우리가 전력을 합쳐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싸고 전하의 지적은 옳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달려들지 마라, 바싸고. 꼭 애완동물 같아서 귀여워보이지 않는가. 그렇게 귀여움을 어필해서야 나만 곤란해진다. “단지 굳이 기습을 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천천히, 최대한 우리의 움직임을 광고하면서 행군합니다.” “하, 논외로다.” 바싸고가 비웃었다. “세상에 어느 군대가 요란하게 행군을 광고하느냐. 이쪽의 움직임이 읽혀서 위험을 자초할 따름이야.” “그 군대가 마왕군이 아니라 똑같은 인간종의 군대라면 어떻습니까.” “뭐?”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바르바토스 님의 꼭두각시 인형입니다만. 그 자를 명목상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합니다.” “……!” 마왕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월맹군으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황제의 군대에 참여합니다. 아가레스라는 마왕과 협력하는, 극악무도한 폭군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를 인류의 군대가 토벌하는 것이지요.” 이로써 전쟁의 모습은 완전히 역전된다. 우리가 마왕군으로서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우리가 인류에게 협조하는 군대로서 마왕을 공격한다. “이럴 경우, 통령이 여왕에게 협력한다면 마왕군에 협력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명분이 크게 떨어지겠지요.” “…….”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마왕군에 대한 대항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정작 통령 본인이 마왕군에 협력해서야 국가의 기반이 흔들립니다. 통령의 움직임은 극히 제한됩니다.” 마왕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숙고에 들어갔다.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 아니, 반드시 이루어진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이용해서 실제로 인간군까지 어느 정도 섞어주면 그럴듯한 인류의 군대가 완성되니까. 알고 있는가, 엘리자베트. 전쟁은 전투가 시작하기 이전부터, 한참 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인류를 우선시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국가를 우선시할 것인가. 너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절망적이겠지……. 너에게 다시 한번 괴로운 입장을 강요해주겠다. 서로 멋진 왈츠를 즐겨보자.   00277 대연정 =========================================================================                        * * * 우리는 곧바로 외교문서를 전달했다. 「우리는 프랑크 서부에 웅거한 마왕 아가레스를 치러갈 따름이다.」 「프랑크를 침범할 의사는 없으니 다만 길을 빌려달라. ……합스부르크의 섭정 바르바토스.」 정명가도(征明假道)라고 할까. 말이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지 이 시대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약탈과 파괴로 얼룩졌다. 자국의 영지와 백성이 침해받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군주는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주군. 프랑크의 앙리 황제 같은 군주도 있지 않은가.” “어, 음……. 걔는 지 어머니 물리치겠다고 외세를 빌리는 미친 놈이잖아요. 논외입니다.” 가끔씩 예외도 나오는 거다, 가끔씩. 라우라와 나는 막사에서 홍차를 마셨다. 내 계책이 받아들여지고 마왕군에서는 한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간 병사와 마족 병사의 차이를 최대로 줄이기 위해서 새하얀 군복을 만든다는 등, 사소하지만 무척 중요한 업무가 산재했다. 나는 외교업무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마구 땡땡이를 쳤다. 모두가 바쁜 가운데 나와 라우라는 지금처럼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겼다. “참고로 이건 마지막 타협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앙리에타는 정말로 간단하게 길만 내어줄 수도 있어요. 구태여 아가레스를 끌어안고 우리랑 싸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 경우, 영지들이 약간 파괴되겠지만 전쟁이 확대되지는 않겠지. 앙리에타가 아무리 호전적인 성향의 군주일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였다. “다만 문제는 정치적인 부담감이겠지요.” “정치적인 부담감?” “현재 프랑크 제국은 앙리에타 여왕이 주무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이러한 만행을 참고 버티는 까닭은, 그저 앙리에타 여왕의 군대가 너무도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프랑크에서는 매년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귀족이 일으키기도 했고, 공화주의에 전염된 소수의 민중이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앙리에타는 철저하게 반란군을 학살했다. “만일 앙리에타가 우리의 요청에 응하면 틀림없이 프랑크인들은 분노하겠지요. 같은 인간간을 때려잡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주제에, 정작 마족이 몰려오니까 간단하게 싸움을 회피했다.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내가 홍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액체가 위장을 편안하게 어루만졌다. 무슨 맛으로 홍차를 마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따쓰한 구석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차가운 도시의 남자, 홍차 정도는 따뜻해도 좋겠지.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앙리에타로서는 아무래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어요.” “주군도 참 뻔뻔하군.” 라우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겠지. 주군이 개입해서 억지로라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주군의 취향에는 더 어울릴 터.” “어라, 들켰습니까.” 내가 작게 웃었다. “맞습니다. 사실 앙리에타가 뭘 선택해도 저는 좋습니다. 시간이 적게 걸리느냐 조금 많이 걸리느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앙리에타는 이 기회에 반드시 짓뭉개고 싶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앙리에타는 프랑크 제국을 완전히 손에 넣겠지. 브르타뉴 왕국-프랑크 제국이 하나의 강력한 군주 아래 통합되는 것이다. 초강대국이 출현해서 나한테 좋을 게 없다. 라우라가 혀를 찼다. “성격 나쁘기는. 주군은 조금만 덜 뻔뻔하면 매력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앙리에타는 전쟁을 선택하겠지요.” 무시하고 말했다. 내 신조는 나한테 불리한 얘기는 귓등으로 흘려보내자는 것이다. “그녀에겐 자신감이 있습니다. 동시에 절호의 기회로도 보일 겁니다. 만약 마왕군을 물리치면 앙리에타의 정치적 입지는 단숨에 극적으로 상승합니다.” 프랑크를 집어삼킨 외적에서 프랑크를 수호한 영웅이 된다. 이처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앙리에타가 물러설 리 없다. 전쟁은 일어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음?” “이걸 보십시오.” 내가 탁자에서 문서를 하나 꺼내왔다. 길을 빌려달라고 적어놓은 그 외교문서의 필사본이었다. 라우라가 쓰윽 서류를 읽어보았다. “이것이 함정이라고? 소녀에겐 전형적인 명분 싸움의 외교문서로 보인다.” 내가 쿡쿡 웃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보십시오.” “…….” 라우라가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문서를 읽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모르겠다. 완전히 항복이다. 소녀가 모략에 약하다는 걸 주군도 알지 않는가.” “아래에 발신인을 살펴보십시오. '합스부르크의 섭정 바르바토스'라고 적혀 있지요.” 외교문서는 모두 바르바토스의 이름을 빌려서 전달되었다. 바르바토스는 인간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왕군의 의사를 대표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겠지. “앙리에타는 마왕군의 요청을 거절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섭정이 요청한 바를 거절한 것입니다.” “……! 꼭두각시 황제가 참전하는 명분을 제공하는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편견이다. 설마 마왕군이 인간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워서 진격할 줄은 상상하지 못하겠지. 바르바토스의 제안을 거절할 때도 단순히 마왕의 말을 거부했다고만 생각할 게 분명하다. “앙리에타가 외교적인 제안을 거부하는 즉시, 우리는 루돌프로 하여금 성명을 발표하게 합니다. 프랑크는 마왕을 정벌하자는 인류의 제안을 거부했다. 어찌하여 인류가 마왕을 지키려 드는가…….” 여기까지가 제1라운드이다. 기만책을 활용해서 상대방에게 기습을 날린다. “프랑크의 태도에 깊은 유감을 느낀다. 아무튼 마왕은 토벌해야만 한다. 프랑크가 허락하든 말든, 나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인류를 위해 친정에 나선다. 알겠습니까, 라우라?” “아니.” 라우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숨이 나왔다. 왜 라우라는 저렇게 똑똑한데 이런 종류의 계략에 관련해서는 완전히 어린애가 되어버릴까? 사람이란 참 신기했다.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앙리에타 측에서는 틀림없이 당황하여서 사절단을 파견하겠지요. 그것이 합스부르크 황제의 뜻인 줄은 몰랐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군대에 한해서는 통과를 허락할 수 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 할 겁니다.” 그런 꼼수에 어울려줄 의리는 전혀 없다. 앙리에타는 억울하겠지만 아무튼 실수를 저질렀다. 그 실수를 무마시킬 틈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무조건 막무가내로 나아가야 한다. 사절단이 뭐라고 말하든 이쪽에선 '그래서 아가레스를 함께 토벌하겠다는 것인가 아닌가!' 하고 윽박을 질러주자.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선동전입니다. 우리가 막무가내로 나오면 앙리에타도 맞수로 대응하겠지요.” 제2라운드의 시작이다. “좋다. 올 테면 와봐라. 어차피 너는 마왕군의 하수꾼에 불과하지 않느냐. 너희 쪽에서 주장하는 명분은 전부 거짓에 불과하다. 뭐, 그렇게 나올 겁니다. 진흙탕 싸움이지요.” 이럴 때는 목소리가 큰 놈이 이기게 된다. 앙리에타가 아가레스의 망명을 반쯤 눈 감아준 것도 사실이고, 루돌프가 마왕군의 하수인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쪽이 더 잘못했는가? 더 크고 더 그럴듯하게 떠들어대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 양쪽 모두에게 과실이 있고 명분이 있는 경우, 진실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누가 더 사람들을 잘 선동하는가. 오직 그것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쪽'은 나의 전문분야였다. 내가 홍차를 마시면서 얘기했다. “앙리에타가 맞대응을 해오는 순간,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우리한테 협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합니다.” “…….” “표면상으로는 마왕을 토벌하겠다는 것이 명분이지요.” 브르타뉴는 왕권신수설을 떠받든다. 반면에 바타비아는 공화주의의 우두머리. 두 국가는 지난 프랑크 내전에서도 맞붙었으며, 명실공히 서로가 서로한테 적성국이었다.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겠지. 마왕군을 상대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루돌프 황제가 친정을 발표하고, 바타비아 공화국까지 가세해버린다. 전쟁의 양상 자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바타비아 공화국 하나만으로는 불안하지 않은가?” “여기에 최근 독립한 자유도시들까지 부추깁니다.” 내가 즉답했다. “전력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도시들이 차례차례 우리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정치적인 파급력이 생기겠지요.” “그렇군. 자유도시들이 있었는가…….” 라우라가 고심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기만책이다, 속임수다, 라고 앙리에타는 줄기차게 항의하겠지. 어떻게든 자유도시들을 이탈시키려고 뛰어다닐 것이다. 앙리에타는 자유도시들 배후에 파이몬의 해방동맹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로써 선동전에서 '목소리가 큰 쪽'을 우리가 점유한다. “아버님. 심부름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막사에 데이지가 들어왔다. 하녀옷을 입은 데이지는 품에 기다란 상자를 안고 있었다. 내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드디어 왔군. 라우라, 당신에게 주는 제 선물입니다.” “선물?” “진즉에 드리려고 했는데 이제야 준비되었어요. 자아. 어서 열어보십시오.” 라우라가 눈쌀을 째푸리며 데이지한테 다가갔다. “주군. 혹시 또 팬티 부분이 뚫린 야한 옷은 아니겠지?” “어허. 어디 속고만 살았습니까. 제 양심에 걸고 그런 종류의 선물이 아니라고 장담합니다.” “주군의 양심만큼 믿지 못할 것도 세상에 몇 개 없다만.” 라우라가 반신반의하며 나무상자를 넘겨받았다. 그녀가 상자를 땅에 내려놓은 다음에 열었다. 상자 안에는 막대가 있었는데 기다랗고 두터운 천이 둘둘 말려져 있었다. 라우라가 그 물건을 들어서 펼쳐보았다. “이건……?” 라우라의 녹색 눈동자가 커졌다. 선물은 깃발이었다. 푸른 산수국이 그려진 깃발. “라우라. 당신의 깃발입니다.” 파르네세 공작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이번 원정군에서 총사령관은 루돌프 황제가 맡습니다. 부사령관은 누가 맡으리라 생각합니까?” “그거야, 바르바토스 군단장 각하나 마르바스 군단장 각하가.” “아닙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가 부사령관을 맡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소녀가……부사령관을?”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번에 월맹군이 아니라 루돌프 황제의 군대로 움직입니다. 부사령관을 마왕이 맡아서야 정말로 인류의 군대냐고 의심받을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인 당신이 맡아주어야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라우라가 얼떨떨하게 깃발을 쳐다보았다. “물론 이렇게 처치해도 사람들은 의심하겠지요. 어차피 명목상 내세운 허수아비 부사령관이 아니냐. 실력도 없고 실적도 없는 젊은 여자이다. 특히 브르타뉴군은 당신을 무시할 게 틀림없습니다.” 나는 라우라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방심이야말로 제가 노리는 것입니다. 루돌프 총사령관은 이미 죽은 시체입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은 당신이죠.” 금발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라우라. 제가 준비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외교전도 선동전도 제가 모두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부분, 전쟁에 있어서는 당신의 힘이 절실합니다.” “군단장 각하들이……소녀의 지휘를 따를 리가.” “바르바토스는 전혀 불만이 없을걸요.” 내가 피식 웃었다. “파이몬도 지난 요새함락전에서 당신의 재능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실력주의자에요. 인간이라는 이유로 당신의 지휘를 듣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거나 꽉 막힌 위인이 아닙니다. 마르바스는 제가 설득하지요.” “…….” 라우라의 뺨에 가느다란 눈물이 흘렀다. “소녀는……소녀는, 가문에서 쫓겨난 성노인데. 깃발을 사용할 자격 따위 어디에도 없는데…….” “제가 당신에게 그 자격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라우라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쳐주었다. 나의 작은 군사. 나의 소중한 첫 번째 애인. 가문에서 없는 자식으로 취급받고 끝내 성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한 소녀에게 있어, 가문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그 가문을 대표한다. 그것은 자신을 무시한 가문에 대한 복수가 되는 동시에…… 더없는 성취가 되겠지. 당신은 스스로 우뚝 설 자격이 충분하다. “파르네세 가문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라우라, 이제 당신이 파르네세 그 자체입니다. 대륙에 보여주십시오. 그대들이 어떤 인물을 버렸는지. 당신을 버린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 그 순간 귓가에 효과음이 들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1 오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상대방은 당신을 완전한 연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호감도 락이 풀린 것일까. 딱 99에서 멈춰 있던 호감도가 드디어 100을 채웠다. 기념할 만한 첫 번째 완전공략이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시선은 라우라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우라가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나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라우라는 포기하고 그저 품안에 깃발을 꾸욱 안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주군.”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본 어떤 미소보다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00278 대연정 =========================================================================                        * * * 궁정 회의실에는 긴장감이 조여오고 있었다. 장군들이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침묵했다. 모두가 침울해하는 가운데, 앙리에타 여왕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군. 당했어.” 엘리자베트 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녀도 상대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이니…….” 회의실에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각탁이 절반으로 나뉘어져, 한쪽에는 브르타뉴의 중신들이 앉았다. 아무도 앉지 않은 반대편에는 마법수정구 스무 개가 동시에 영상을 투영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중신들이 마치 정말로 자리에 앉은 것처럼 보였다. 앙리에타가 속에서 북받쳐오는 무언가를 씹으며 뇌까렸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인가. 엘리자베트, 그 남자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일까?” “……솔직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옛부터 흑마법에 정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시체를 조종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 앙리에타가 비웃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시체에게 한방 먹은 셈이네. 필요하다면 시체까지 계략에 이용한다라. 정말 그 마왕다운 수법이야.” 회의실에 침묵이 더 무거워졌다. 모두 더하여 열일곱 명의 인간이 앉아 있었다. 두 국가는 철저하게 실력주의를 추구했으며, 고로 여기 모인 열일곱 명은 인류에서 가장 유능한 축에 속했다. 그런 인간들이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에 얼룩졌다. “흥.” 앙리에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양손에 깍지를 끼고 의자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가 마왕군에 붙었어. 녀석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마왕군과 싸우는 것 자체를 귀족의 기만책이라고 여긴다.” 엘리자베트가 신중하게 얘기했다. “귀족이 자신의 신분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며, 그것이 대(對)마왕군 전쟁의 본질이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야. 신분과 종족을 뛰어넘어 하나의 목적 아래 협력하는 일이야말로 공화주의적이라고 믿고 있겠지.” “브루노의 악몽이네.” “아아.”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노 평원에서 단탈리안은 성전이 그저 지배계급의 논리에 불과하다고 울부짖었다. 그 영향력이 아직도 살아숨쉬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냉소했다. “흥, 신분과 종족을 뛰어넘는다니. 그게 오히려 정치적인 선동 문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차별이 없어지면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종족을 구분지어서라도 싸우는 게 인간이야. 어리석은 것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우리가 위기에 놓인 것도 사실이다.” 엘리자베트는 친구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넘어갔다. “자국에서 현재 귀족들을 중심으로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루돌프 황제이지만 마왕을 토벌한다는 명분 자체는 옳은 것 아니냐고. 속뜻은 공화국이 아니라 다시 제국의 질서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싸그리 숙청해버리지 뭐하고 있어?” “본녀도 그러하고 싶다만…….” 엘리자베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보면 최근 들어서 한숨을 쉬는 날이 잦아졌다. 예전에는 한숨 따위를 모르고 살았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얼굴은 확신과 희망으로 빛났다.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째서인지 까마득한 과거, 거의 기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머나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어째서일까. 그때 자신은 봄이었다. 제국이 개혁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은 멸망했으며, 기나긴 가뭄이 이어졌다. 비 한 방울 내리는 일 없이 음울한 태양이 대지를 메마르게 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이 지배하는 가뭄과 먼지의 여름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귀족들이 보여준 태도에 대다수의 시민이 우호적이다. 아직 실질적인 힘은 없지만 여론을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은 있어. 자칫하다 여론이 더욱 악화될 위험이 너무나 크다.” 그렇다. 이것마저 단탈리안 때문이다. 도시를 구하기 위해 죽음으로 뛰어든 이야기는 '하이델베르크의 여섯 시민'이라 회자되며 한창 인기를 몰고 있다. 전국의 음유시인들이 애창한다고 봐도 좋았다. 약간씩 변형이 있지만, 대체로 하이델베르크 시장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군인으로 등장하며, 여섯 명의 귀족은 고귀한 위인으로 등장한다. 지난 몇 년 내내 귀족은 숨을 죽이고 살았다. 페르디난트 제2황자조차 피도 눈물도 없이 처형되었다. 일반 귀족은 말할 것도 없겠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낌새가 보이면 무조건 숙청당했다. 달리 말해, 지금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귀족들이 광범위한 호의를 얻는 시기였다. 이 희귀하고 드문 시기에 하필이면 단탈리안이 대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단탈리안의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할까.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잘 맞아떨어지고…… 겨우 한 사람이 의도했다기에는 지나치게 장대하다. 어느 쪽이라도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만약 단탈리안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의도했는가. 하이델베르크의 요새에서 귀족들을 띄어주었을 때부터? 바타비아 공화국과는 언제 접선한 것인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아니면 한참 전, 프랑크 내전에서 쟝 볼레라는 가명으로 뛰어들었을 때부터? 자유도시들은 어째서 단탈리안의 계획에 동조하는가. 지난 삼사 년에 걸쳐서 대륙에는 자유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엘리자베트를 비롯하여 합스부르크의 간부층은, 자신들이 혁명에 성공하자 그 영향을 받고 자유도시들이 생겨난 거라고 기뻐했다. 공화주의가 점차 강대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만에 하나의 얘기이지만, 우리가 혁명에 성공한 게 원인이 아니라면? 도시들이 독립했던 배후에 단탈리안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면? 애당초 우리가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이유도 따지고보면 단탈리안 때문이지 않은가. 그때 이미 단탈리안은 장대한 기만책을 수립하고 있었을까?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들을 끌어들이고, 프랑크 제국을 무너트린다는 계획을. ‘말도 안 된다.’ 그렇다. 설령 단탈리안일지라도 개인이 그만한 역사를 움직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가 단탈리안의 의도인지 고민해보면 그때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엘리자베트가 피곤한 나머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더욱이, 바타비아 공화국과 자유도시들이 저쪽에 합류한 이상, 우리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할 명분이 대폭 줄어든다. 우리가 그대들과 공공연히 동맹하면 공화주의 국가들을 적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과연. 공화주의자들은 자기네를 같은 편이라 믿으니 말이지. 그런 면도 있겠구나.” 앙리에타는 이제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엘리자베트. 이건 꼭 내가 아니라 주로 너를 겨냥한 계책처럼 느껴지는데?” “…….” “아무래도 브루노의 악몽 씨께서는 나보다 통령이 더 무서운 모양이네. 뭐, 좋아.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명분에 얽매이는 건 어차피 내 방식이 아니야.” 앙리에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쿵, 하고 탁자에 내리쳤다. 화려한 반지였다. 그것은 오로지 프랑크의 황제만이 낄 수 있는 반지로서 제국의 통수권과 정통성을 상징했다. 그런 물건이 황제가 아니라 앙리에타 여왕에게 쥐어져 있다는 사실은, 현 프랑크 제국을 실제로 지배하는 장본인이 누구인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앙리에타. 어째서 그대에게……?” “어젯밤. 프랑크의 황제 앙리는 갑작스럽게 병이 들어 별궁에 드러누웠어.” 앙리에타가 미소를 지었다. “원인을 알지 못할 중병인지라 황제 폐하가 다시 국정에 참여하려면 시일이 걸리겠지.” “…….” 왜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프랑크의 통수권자가 병에 걸렸는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앙리에타가 내보이는 미소에 합스부르크의 제장은 모골이 섬찟해졌다. “만약 명분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지체했다면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올 날도 없었어. 위대한 브르타뉴가 반도에서 벗어나 내륙까지 발을 뻗을 기회조차 없었을 거다. 엘리자베트. 명분은 힘으로 이기지 못하는 자가 내세우는 임시방편이야.” 앙리에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브르타뉴의 제장이 동시에 기립했다. 한 장군이 다가와서 앙리에타에게 붉은 망토를 걸쳐주었고, 다른 신하는 담뱃대를 꺼내어 앙리에타에게 공손히 바쳤다. 앙리에타는 담뱃대를 한번 빨고 후우, 하고 숨을 뱉었다. “힘. 그것이 절대적이다. 브루노의 악몽이 제아무리 두개골을 굴려서 명분이니 뭐니 대신전을 쌓아올린들, 이쪽이 승리하기만 하면 곧바로 모래성이 되어 허물어질 뿐이야. 전쟁을 원한다고? 기꺼이 그 춤에 어울려주겠어.” 그 말만 남겨두고 앙리에타는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브르타뉴의 장군들이 줄줄이 여왕의 뒤를 따라나섰다. 한동안 묵직한 발걸음이 회의실의 공기를 불안하게 울렸다. 마법수정구가 꺼졌다. 합스부르크의 신하들 중에 쿠르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통령 각하. 비록 우리가 참전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브르타뉴군은 대륙 제일의 강군입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저쪽에는 아가레스라는 마왕도 있다지 않습니까?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들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기사란 괴물과 같은 병종이나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한층 더 괴물 같았다. 일단 군에서 기마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앙리에타도 모르고 있어. 방금 전, 앙리에타는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전쟁은 이미 예전부터, 한참 오래 전부터 시작한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번 전쟁은 브르타뉴와 우리가 연합해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것이 아군의 전력이었다. 적군의 전력은 어떠했는가? 마왕군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이제 와서 봐보거라. 아군에서는 우리가 빠지게 되었는가 하면 적군에는 공화국과 자유도시가 합류했다. 눈치 채고 보니 이 지경이다.” 적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쪽의 전력을 이탈시켰으며 동시에 자신의 전력을 보강했다. 병법에 상중하가 있다면 틀림없이 극상(極上)이라 불릴 만한 책략이었다. “앙리에타에게 전쟁이란 전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외교전과 명분전은 전투를 위한 초석에 불과하지. 하지만 적군은 시각이 아예 다르다. 전투는 어디까지나 전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단순히 전쟁의 결론에 지나지 않아. ……이것이 단탈리안, 그 남자의 방식이다.” 엘리자베트는 입맛이 썼다. 자신의 친우이자 아름다운 여왕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원해서 전쟁에 뛰어든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아니었다. 시각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그녀는 깨닫고 있을까……. “그런 자가 자신의 승패를 운에 맡겨둘 리 없다. 처음부터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머릿속에 그리고 나왔을 게다.” “…….” “나의 친애하는 신하들이여, 본녀는 두렵구나.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나, 두 번 일어난 일은 반드시 다시 일어난다. 단탈리안은 이미 합스부르크 제국을 꺼꾸러트렸다. 만일 그가 다시금 프랑크 제국을 멸망시킨다면, 이제 단탈리안에게 멸망시키지 못할 인류의 국가란 게 과연 있겠는가?” 정답은 분명했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엘리자베트는 움직여야만 했다. 굳이 본대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별동대들을 수없이 조직하여 마왕군의 후방을 괴롭혀줄 수는 있었다. 의용병으로 위장하면 국민들에게 들킬 일도 없으리라. “별동대를 조직하겠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변경을 경유하여 마왕군의 배후에 침입한다.” “예!” 제장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보급을 끊고 작전을 방해한다. 여차하면 브르타뉴군을 측면에서 옹호한다. 그것만으로도 마왕군은 꽤나 곤란해지겠지. 사냥개처럼 끈질기게 적군을 물고 늘어질 자신이 엘리자베트에겐 있었다. 나머지는 앙리에타에게 달렸다. 그녀가 승리해주기를 엘리자베트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엘리자베트: 귀족들이 단체로 여론을 이끌고 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그건 나다. 엘리자베트: 바타비아 공화국이 루돌프에게 동조하고 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아, 그건 나다. 엘리자베트: 자유도시들이 루돌프의 군대에 찬동했다. 누가 흑막인가? 단탈리안: 그것도 나다. 엘리자베트: ………….   00279 대연정 =========================================================================                        * * * “내가 왜 네놈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바싸고 전하를 꽤나 좋아한다고요.” 바싸고가 음식물 쓰레기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질색했다. 이런, 아무리 내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다고 해도 저렇게 반응해서야 상처를 입는다. 조금 더 취급에 주의해주길 바랐다. 대륙력 1511년 여름.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대군을 일으켰다. 총병력이 물경 오만에 이르렀다. 그것도 인간과 마족이 어우러진 다종족 연합군이었다. 절대다수가 마족이긴 하나,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전부 인간종이라는 사실은 제법 파란을 일으켰다. 라우라는 부사령관에 오르자마자 선포했다. “군법을 위반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하겠노라.” 콧대 높기로 유명한 상급 마족들은 새로운 사령관을 우습게 여겼다. 인간의 명령, 게다가 어린 여자의 명령 따위 들을까보냐. 그런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퍼졌다. 하지만 불과 열흘 만에 일곱 명의 사관이 처형당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세계에서는 나밖에 모르지만 라우라는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여걸이다. 농담 삼아 말하자면, 게임에서는 적군과 싸우다가 죽은 병사보다 라우라의 손에 처형당한 병사가 더 많다. “전쟁터에서 병사가 종족과 나이를 신경 쓰다니 훌륭한 배짱이다. 목이 잘리면 마족이든 인간이든, 어린애든 노인이든 떠들어재낄 수 없게 된다. 어디 모쪼록 그대들의 배짱만큼이나 목살이 튼튼하기를 기대하지.” 라우라가 손수 마족들의 목을 배면서 한 말이었다. 더불어서 라우라는 목이 베인 시체에서 살점을 발라내 두개골을 막사에 보관했다. 평소 습관대로 행동한 것이었는데, 몬스터 병사들은 퍽 다르게 받아들였다. ‘우리보다 더한 인간년이 있었다.’ ‘바르바토스 전하가 지지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한다.’ ‘그 잔인함에 나도 모르게 발기해버렸다. 헤헤.’ 심각하게 정신이 나간 반응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오크들에게 윤간당하는 라우라라니, 결코 나도 발기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결코. 군단장들이 묵묵하게 지지를 보내는 와중에 사관과 병사가 저항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뭐가 어떻든 간에 마왕군은 마왕을 정점으로 하여 철두철미하게 상명하복이 이루어졌다. 자상하기로 유명한 파이몬조차 군기에 관련해서는 용서와 자비가 없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 군인은 평등과 자유를 수호하는 자들이지, 만끽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언젠가 파이몬이 펼친 지론이다. 대충 이쪽 군대 분위기가 어떤지 알 만하겠지. 몬스터에게는 인권 그딴 게 없다……. 덕분에 라우라의 군권은 확립되었다. 오만 대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가운데, 그중 사천의 병력이 선봉군으로 뽑혔다. 선봉에는 전(前) 서열 제3위인 마왕 바싸고와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진군하며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바싸고가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는 내 앞에서 좋아한다느니 뭐니 지껄이지 마라. 어릿광대 놈. 네 녀석만 보면 구역질이 치밀어오른다.”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흥, 네놈이 전투에 임하는 방법을 알기나 하느냐. 바르바토스의 등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계략이나 짜내며 소일거리하는 주제에.” “하하.” 내가 볼을 긁적였다. 사실 이쪽 입장에서 바싸고는 대하기 편했다. 뱃속에 능구렁이를 오십 마리즘 키우는 보통 마왕들에 비해 바싸고는 솔직하다 못해 단순했다. 시트리가 순수하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면, 바싸고는 소인배라는 의미에서 단순했다. “이래 봬도 검은 산맥을 돌파하고 브란덴부르크를 점유하는 데 제법 공헌했습니다.” “역시 착각하고 있군. 검은 산맥에선 제파르가 군을 지휘했고, 브란덴부르크에선 바르바토스가 군을 지휘하지 않았더냐.” 바싸고가 비웃었다. “어느 쪽이든 네놈은 등 뒤에서 모략을 짰을 뿐이다. 전쟁에 사령관으로서 임하는 것과 참모로서 임하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어릿광대.” “으음…….” “네놈 같은 부류가 겨우 참모로 활약하면 군대도 잘 통솔할 거라고 착각하지. 그렇게 덜컥 대군을 맡았다가 패망하기 일쑤이다. 네놈이 패망할 날이 기다려지는군.” 죄송합니다. 이미 거하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습니다. 내가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에는 바싸고 전하께서 군을 지휘하시니 필히 승리하겠지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선봉장은 나다. 내 지휘에 참견하지 말도록.” 바싸고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대체로 선봉군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본대보다 앞서 나아가서 지형과 수질을 확인한다. 말이 오만 병력이지 이들이 한꺼번에 잠자리를 펼쳐본다고 생각해봐라. 반드시 드넓은 평야가 필요하다. 적군이 기습해오더라도 사전에 일찍 파악할 수 있도록 시야가 넓어야 한다. 근처에 수질이 괜찮은 냇가나 호수도 필수적이다. 이렇게 여러 조건을 만족시키는 지형은 생각보다 드물다. 선봉대가 미리미리 정찰해서 본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닦아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두 번째, 적군의 준비태세를 시험한다. 이쪽이 선봉군을 보내면 당연히 저쪽에서도 선봉군을 출동시켜 대응한다. 이때 적군의 선봉대가 어느 정도 수준이느냐에 따라 대체로 국력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선봉대가 형편없으면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다는 소리다. 아마도 본국에서 서둘러 군사를 조직하는 동안, 시간벌기용으로 선봉대를 급조해서 보낸 것이겠지. 이럴 때는 본대에 소식을 알려서 최대한 속전속결을 꾀해야 마땅하다. 반면에 선봉대가 훌륭하다면……적국이 전쟁에 항시 대비하고 있다는 뜻. 선봉대끼리 어느 지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 준비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국경을 돌파하고 한참이 지난 뒤 마주친다면, 비록 전쟁에 대비하고 있긴 하되 지금 전쟁이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프랑크의 선봉대가 보이는군.” 국경을 넘은 지 고작 이틀째에 선봉대와 조우한다면, 아예 이쪽 움직임을 훤하게 읽고 있다는 얘기이다. 적국에 처들어가는 입장에서 이보다 최악의 경우는 없다. 바싸고가 휴대용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았다. “수효는 어림잡아 삼천인가. 호각이로군…….” “기사단을 상징하는 깃발이 두 개나 있습니다.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군으로 보입니다만, 꽤나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호각이라는 것이다. 무능한 놈.” 바싸고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때마침 대군이 머무르기에 적합한 평야에서 양군이 조우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지. 적군은 우리가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하여 전쟁터까지 골라버렸다. 솔직히 언제부터 우리의 움직임이 읽혔는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인간놈들은 너무 빨리 죽어버려서 귀찮다. 귀족 가문이란 것들이 수백 년만 흘러도 휙휙 바뀌어버리니 알아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바싸고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적군의 깃발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백 년 전에는 방패문양이 유행하는가 싶더니 요즘에는 꽃인가. 백합에 장미, 국화까지……. 누가 보면 전쟁터가 아니라 정원에 놀러온 줄 착각하겠군.” “그야 우리랑 비교하면 인간종은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죠.” 내가 쓰게 웃었다. 마왕은 누가 살해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았다. 당장 바알이 얼마 전 마왕으로서 기네스북을 찍고 죽었다. 인간종이 아니라 요정족을 갖다 세워놔도 손색이 있을 거다. “검은색 장미에 들개 문양은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군요. 프랑크인 장성 중에서 그나마 정신이 똑바로 박힌 맹장입니다. 황제의 대리장군을 맡은 적도 있습니다. 뭐, 프랑크의 대리장군이래봤자 실권은 얼마 없겠지요.” 참고로 생드니 전투에서 싸운 적장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위치했던 좌익이랑은 별 연관이 없었지만. 바싸고가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귀족들의 문양을 외우는 것이냐?” “미숙합니다만 약간은.” 프랑크에서 내전을 치를 때 주요 가문은 대체로 다 외웠다. 며칠 전 복습까지 해왔다. 지금 평원에 나온 가문들은 하나만 빼고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창이 교차된 문양은 베테르낭 남작. 장미를 문 암사자는 헤브르 백작. 이쪽이 기사단을 하나 이끌고 있겠군요. 하얀 국화는 샤스테 남작입니까. 죄다 맹장들로 이루어졌군요. 실속이 있습니다.” “…….” “아무래도 다소 두뇌파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음, 그래도 선동대로서는 괜찮습니다. 특히 드 타바느 원수가 나왔다는 게 불쾌한 지점일까요. 드 타바느 원수는 전직 대리장군입니다. 그만한 인물이 빠르게 대응했다……. 인간들은 진즉부터 전쟁을 준비한 것입니다.” 타바느 가문은 영지가 프랑크 남부에 위치했다. 우리군은 프랑크 동북부에 침입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틀 만에 요격해올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부 프랑크의 가문이에요. 브르타뉴군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일부러 프랑크인만 추려서 선봉대에 집어넣은 것이지요. 훌륭합니다.” 과연 앙리에타 여왕이었다. 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짐승과 같은 후각을 지녔다. 여기서는 솔직하게 감탄해도 좋으리라. “설령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할지라도 여왕 입장에선 그럭저럭 나쁠 게 없습니다. 어차피 브르타뉴 입장에서 프랑크의 대귀족은 잠재적인 반란분자. 이번 기회에 처리하거나 적어도 전쟁터로 쫓아내려는 심산입니다.” “…….” “그 사이에 자신은 프랑크 황제의 권한까지 차지해버린다. 멋진 솜씨입니다.” 바싸고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프랑크 황제의 권한을 차지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냐.” “음? 물론 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브르타뉴 여왕이 본격적으로 황제직을 찬탈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사단의 수효를 헤아려보았다. 육백쯤 되어보였다. 적군은 삼천 병력 중에 오분지일이 기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식하리 만치 공격력이 높은 부대 편성이었다. “여왕은 프랑크 황제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프랑크가 약세에 처해 있더라도 대놓고 황제직을 찬탈하면 순식간에 전국이 반란에 휩싸이겠지요. 마왕군이 침략한 지금이 기회입니다. 우리를 막아내면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겁니다.” “…….” “뭐, 아마 지금쯤 프랑크 황제는 어디 궁전 한 구석에 유폐되어 있지 않을까요. 병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변명하면 그만입니다.” 그 사이에 앙리에타는 프랑크의 군권을 꿀꺽 잡아삼켰다. 정말이지 전쟁을 잘 활용하는 여걸이었다. 세상에 유능한 인간이 넘쳐나서 괴롭구만. “……선봉대의 깃발만 보아도 그런 것이 짐작되는가?” “예? 아, 뭐. 약간입니다만.” 흥미롭다. 아마 앙리에타 여왕은 승전을 거두는 즉시 프랑크 황제와 결혼식을 올리겠지. 여왕과 황제 모두 과년한 처녀총각이다. 일종의 연합정부가 꾸려지는 거다. 물론 겉으로만 연합정부일 테고 실권은 앙리에타가 모조리 쥐고 있다. 그리고 '병'에 걸린 황제는 얼마 가지 못해 골골거리며 죽을 터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와 왕국의 주인은 명실공히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프랑크가 차지한다. 어디까지나 앙리에타가 승리했을 경우이지만 말이야. 정세가 어찌 돌아갈지 즐겁게 상상하고 있자니 옆에서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약간이 아니지 않은가…….” “네? 죄송합니다, 생각에 잠겨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천치.” 바싸고가 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아마 얘는 항상 위장이 아픈 모양이었다. 그때 적군에서 단기필마가 평원 한 가운데로 뛰어나왔다. 전투를 벌이기 전에 사신이라도 보낸 것일까. 하지만 사신이라 치기에는 무장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사악한 마물의 무리는 들으라!” 단기필마가 창대를 꼬나쥐고 소리쳤다. 목청에 마력을 담았는지 쩌렁쩌렁했다. “프랑크의 기사 에르간이 네놈들을 승부할 테니, 그곳에 겁쟁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면 당장 나와서 이몸과 일검을 나누도록!” 쉽게 말해 일기토를 나누자는 소리였다.   00280 대연정 =========================================================================                        “무엇들 하느냐! 사악한 마물은 당장 뛰쳐나와 본인의 검을 받으라!” 기사가 군마에 올라탄 채로 고레고레 소리 질렀다. 나이도 아주 젊어보였다. 겨우 열일곱 살은 되었을까. 일기토에 나서는 사람은 십중팔구 죽을뿐더러, 자그마치 사천의 적병을 눈앞에 두고 고함치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담력을 요구했다. 틀림없이 용감무쌍한 청년이겠지. “어리석군.” 바싸고가 비웃었다. “가문의 이름을 대지 않는 걸 보아하니 기껏해야 제2급 무사. 그런 실력으로 우리 마왕군에 맞서려는 것인가. 당장 정령왕을 소환하여 격의 차이를 보여주지.” “잠시만요. 바싸고 전하. 기다려주십시오.”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성격 급하게도 바싸고는 벌써 푸른 마력을 온몸에서 피어내고 있었다. “군은 내가 지휘한다고 미리 말했을 텐데.” “아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규모가 저만한 군대입니다. 검주(劍主)가 한 명쯤은 있겠지요. 그런데도 필승의 한수를 꺼내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 푸른 마력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의도라니. 인간들이 일부러 패배하기라도 바란다는 말이냐.” “바로 그겁니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패배하려는 것입니다.” “하?” 바싸고가 고상하게 미간을 좁히고 쉰소리를 냈다. 표정이 하나하나 귀족적이었다. “결투에서 패배해본들 병졸의 사기가 떨어질 뿐. 패배를 자초할 이유가 없다, 라고 전하께선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 “하지만 정반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손해를 감수할 만한 이익이 적군에 있습니다.” 바싸고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어릿광대 놈, 설명해봐라.” “간단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인류의 군대를 표방하고 있지요.” 민중은 소문에 민감했다. 바타비아와 자유도시들까지 대거 이쪽에 합류했다. 이러한 명분이 적군에게 설마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까? 저들 입장에선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인류의 군대일지 모른다. 불안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겠지.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결투에서 냉큼 마족을 내보낸다고 해보십시오. 적들이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 역시 인류군이 아니라 마왕군이었다. 쓰잘데기 없는 의심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합니다.” 내가 싱긋 웃었다. “바싸고 전하. 저 기사는 희생양입니다.” “…….” “우리가 강한 마족을 보내어 기사를 죽인다면, 적들의 지휘관은 곧바로 소리치겠지요. 보아라! 저들은 마왕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여 분열했다. 우리가 동료를 희생시킨 것이다. 자아, 일어서라. 동료의 복수를 거행하자…….”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꽤나 흔했다. 화랑 관창이 대표적이었다. 지금 평야에 나온 기사 또한 어렸다. 희생양으로 써먹기에는 젊은이만한 게 없지. “빤히 보이는 수단에 우리가 굳이 놀아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서. 마족을 내보내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바싸고가 침음을 삼키며 뇌까렸다. “이대로 결투를 피할까? 아군의 사기가 엉망진창으로 떨어지겠군.” “음. 우연찮게도 저에게 이럴 때를 대비한 패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손뼉을 가볍게 두들겼다. “데이지.” 데이지가 우리 앞으로 걸어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까만 머리칼의 소녀는 여느 때처럼 하녀복을 입었다. 시녀로서 나를 호종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장검과 단검이 들린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멋들어진 하녀였다. 내가 이죽거렸다. “네년은 뇌수가 구정물로 된 쓰레기이다. 도저히 구제할 도리가 없는 머저리에 병신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예, 아버님.” 데이지가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돼지들이 우리에서 쫓겨났으나 제 처지를 망각하고 평원에서 한껏 꿀꿀거리고 있습니다. 본디 따뜻한 우리를 되찾으면 만족하는 동물들. 명분만 던져주면 얌전해지겠지요.”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데이지는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맞혔다, 암퇘지 년아. 저기서 꿀꿀거리는 동족들에게는 네년이 적당하다. 어디 한번 해보겠느냐?” “성량을 확대해주는 마법 아티펙트가 필요합니다.” 나는 품속에서 목걸이 모양의 아티팩트를 꺼내어 던졌다. 풀썩, 하고 목걸이가 풀밭에 떨어졌다. 데이지가 공손하게 목걸이를 집어들려는 순간에 내가 말했다. “입으로 주워라.” “…….” 데이지는 멈칫했지만 곧 내 명령을 따라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녀가 이빨로 목걸이를 깨물었다. 바싸고와 마족 지휘관들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땅에 얼굴을 처박은 것이었다. 내가 만족스럽게 방긋 웃었다. “건방진 노예년. 네년한테 어울리는 위치는 그곳이다.” 방금 데이지는 구태여 돼지라는 비유를 써먹었다. 약간이지만 잘난 척을 한 것이었다. 어디서 노예년이 함부로 나대는가. 나는 그 점을 지적했고, 내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데이지는 잠자코 명령에 복종했다. “출진해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목걸이를 들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녀가 평야로 향하자 옆쪽에서 바싸고가 말했다. “……의외로군. 네놈이 감정적이게 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양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러모로 사정이 있습니다. 유능하지만 자칫 주인의 손을 잡아뜯을 아이지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제 마음속으로 쳐들어와서 곤란합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이란 간악해서 조금이라도 잘 대해주면 원한을 잊어버리지요. 관계를 투명하게 유지하려면 냉혹해져야 합니다.” “흥. 쓰레기다운 의견이다.” 대화가 끊겼다. 우리는 말없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하녀복을 입은 소녀가 평야에 출현하자,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이 크게 수군거렸다. 신성한 결투에 웬 어린애인가? 게다가 시녀복을 입고 있다니? “……!” 프랑크인 기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데이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아마 너와 같은 인간 꼬마와 대결할 생각이 없다, 그런 식이겠지. 반면에 데이지는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묵묵하게 걸어갔다. 마침내 기사에게 다가섰다. 일격이었다. 장검을 빼들어서 올려치더니, 어느새 군마의 묵직한 목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사가 균형을 잃고 낙마했다. 데이지는 날렵하게 공중에 뛰어오르더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떨어지는 기사의 겨드랑이에 정확히 칼끝을 쑤셔넣었다. “…….” “…….” 양군이 대치한 평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기사가 절명하기까지 삼 초가 걸렸다. 모가지가 잘린 말의 시체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빗물이라도 맞는 것마냥 태연하게 핏물을 뒤집어썼다. 관능마저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녀가 목걸이를 입가에 가져다대고 말했다. “저는 라엘리아 출신의 프랑크인입니다.” 소녀의 목소리가 평야에 깔렸다. 북부 프랑크어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서북부 출신으로 이루어진 저들 적군에게는 친숙하기 그지없는 발음이었다. “제 어미와 아비는 화전민이었습니다. 산속이 저희 마을의 집이었지요. 그러나 화전민에게 내려진 운명이 늘 그러하듯 고블린 무리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 “어머니가 내장을 흘리며 괴롭게 신음했을 때, 아무도 저희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품안에 안고 머리가 잘렸을 때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데이지가 인간군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력이 소녀한테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저는 어리석어서 무엇이 정의인지 감히 모릅니다. 하지만, 대륙 한가운데에 마왕이 또아리를 틀도록 허용한다면 저와 같은 일이 다시 한번, 아니 계속하여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마물은 번성하고 인간은 신음 속에서 죽어나가겠지요. 그런 걸 용납하는 것이 정의일 리 없습니다. 예. 결코.” “…….” “동향인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여러분께서 대륙에 비극이 경작되는 것을 손놓고 바라보실 생각이라면. 그것이 소위 정의라고 불리운다면. 저는 거리낌없이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데이지가 등을 돌려 장검을 내리찍었다. 핏물이 튀면서 기사의 목이 잘렸다. 데이지는 그 목을 집어들고 터벅터벅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평원에 선 전원, 적아를 가리지 않고 소녀에게 기세가 제압당하여 말문이 막혔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흐하하하! 저것 좀 보십시오, 바싸고 전하! 꼬맹이가 제법이지 않습니까! 최소한 저 정도는 되어야지 저의 양녀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당연하지만 그건 나였다. 내가 손뼉을 마구 치며 신나서 떠들었다.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가 일개 시녀한테 목이 잘리다니 치욕도 저만한 치욕이 없습니다. 당장 음유시인한테 의뢰해서 희극을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뭐하고 있습니까? 멋진 무대를 연출해준 우리의 인간 소녀한테 박수를 쳐주지 않고!” “아, 예!” 마족 지휘관들이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하나둘씩 갈채를 보냈다. 박수는 일반 병사들한테 급속도로 감염되어 이윽고 우리군의 사천 병력이 일제히 환호성까지 내질렀다. 이로써 적군은 사기가 말도 안 되게 떨어졌겠지. 한참 어린 소녀한테 결투에서 완패했다. 더군다나 그 소녀는 마족이 아니라 동족인 인간종이었다. 우리가 마왕군이 아니라 인류군임을 보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존심과 명분, 프랑크군은 죄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안 됐군, 프랑크의 장군이여. 그대들은 희생양을 바침으로써 전군을 단합시키려고 했겠지만 이쪽엔 용사 후보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간병기가 갖추어져 있다. 그런 잔꾀가 통하는 괴물이 아니다. “아버님.” 데이지가 내 앞에 걸어와 부복했다. 그녀는 기사의 수급을 양손에 들어서 올려바쳤다. “훌륭하다. 제법 멋지게 해내지 않았더냐.” 군마에서 내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이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내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과연 쓰레기 새끼로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 아비와 어미의 이름까지 팔아먹다니 대단하다. 내가 네년을 지금까지 너무 얕보았어.” “…….” “예전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면서 이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족을 팔아먹는 것인가. 멋지다고 말할 수밖에 없군. 멋진 쓰레기이다, 데이지. 영지에 있는 네년의 애인도 틀림없이 기뻐할 거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에 증오와 치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영지에 있는 애인이란 다름 아니라 오라비인 루크를 가리켰다. 그녀의 감정에 만족하면서 내가 작게 웃었다. “가족을 배신했고 인류까지 배신했다. 너에게 이제 돌아갈 곳이 있을까.” “…….” “수고했다. 막사에 가서 휴식하도록.” 데이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린 입술에서 피가 터져서 흘렀다.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가 이빨 틈새로 새어나왔다. “……예. 아버님.” 소녀는 뒤편의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마족 병사들이 그녀를 환호성으로 받아주었지만, 소녀는 무표정하게 제 길을 갈 따름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자아, 바싸고 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적군은 사기가 대폭 떨어졌으며 전투 그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저런 군대를 농락하지 못한다면 이쪽의 체면이 농담거리로 전락하겠지요.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어째서인지 바싸고는 째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싸고가 한숨을 쉬듯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매듭을 지었다는 분위기였다. “……그 애비에 그 딸이군. 하긴.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더러우니 알아서 피해야 할 따름이다.” “예?” “아무것도 아니다.” 바싸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군. 공격하라.” 우리 선봉군은 그날 프랑크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적군은 삼천 병력에서 육백 가량이 전사했다. 전사자가 의외로 많지 않았는데, 저들이 잘 싸운 게 아니라 거의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패주해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아군은 전사자가 겨우 일백쯤에 불과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완승이었다.   00281 대연정 =========================================================================                        그러나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정말로 바빴다. 우리군은 포로를 꽤나 많이 붙잡았다. 여기에 철저한 심문이 이루어져야 했다. 때로는 한번의 승리보다 하나의 정보가 더 중요하다. 앙리에타가 언제쯤 본대를 이끌고 출진하느냐만 알아도 우리는 전략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 포로에 대한 고문은 필수적이겠지. 인권? 인간에게 권리가 있다면 오로지 죽을 권리뿐이다. “크아아아악!” 일반병을 고문해봤자 아무런 정보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지휘관급 포로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대다수가 귀족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들고 방긋거렸다. “단지 프랑크의 황궁에서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만 알고 싶습니다. 황태후 폐하는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황제 폐하는 병세가 얼마나 위독하신지. 간단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끄으윽……아……악마 자식.” 귀족 포로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끝끝내 정보를 토해내지 않았다. 대단했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만약 내가 쇠꼬챙이에 고문을 당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정보를 지껄여댈 자신이 있었다. “좋습니다. 당신의 인내심에 경의를 보냅니다. 제 경의를 표현하자는 의미에서 색다른 선물을 선사하겠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날 밤. 풀코스 고문이 호화롭게 이루어졌다. 포로에게 미약을 한도치까지 먹인 후, 오크들을 불러다가 강간시켰다. 정보를 불지 않을 때마다 눈앞에 무고한 일반병을 데려와서 즉결처형했다. 지나친 고통에 정신을 잃으면 서큐버스를 동원하여 꿈속에서도 고문했다. 결과는 간단명료했다. “……황태후 폐하는 삼 년 동안……별궁에 유폐되어 한 발자국도…….” “황제 폐하께서는 며칠 전부터 위독하시어…….” “제, 제발. 뭐든지 말할 테니 용서해주시오!” 여섯 명의 귀족 포로가 전원 정보를 토해낼 때까지 두 시간밖에 안 걸렸다. 나는 각자의 정보를 교차로 검증했다. 여섯 명에게 똑같이 질문하고 그들이 내놓은 대답을 비교해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반드시 밟아야 할 절차였다. 그리고 모두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야아,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차피 정보를 뱉을 거면 왜 반항했을까? 처음부터 협조적으로 나왔으면 편했을 것을. 저쪽은 고문을 받지 않아서 좋고, 이쪽은 고문을 하느라 괜히 시간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어딜 봐도 윈-윈이다. 인간이란 참 이상해. “단탈리안 전하.” 한참 고문에 몰두하고 있자니 전령이 들어왔다. 엘프였다. 후각이 뛰어난 엘프는 고문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피 냄새와 약물 냄새, 오크의 분비물 냄새로 가득했으니까. 내가 꼬챙이를 내려두었다. “무슨 일인가?” “실례했습니다. 보초병이 수상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오늘 결투를 벌인 인간 소녀를 꼭 만나고 싶다며 제 발로 항복해왔습니다. 정중하게 포로로 대접해주길 바라더군요.”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데이지를 아는 사람이라니?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데이지는 평생 산골 화전촌에서 살았다. 헛소리라고 일축하려는 그때였다. 전령이 투항자의 이름을 밝히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을 베르시 준남작이라 소개했습니다.” * * * “준남작 님! 이게 대체 얼마만입니까!” 베르시 준남작은 사지가 결박된 채 막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자세는 비굴했지만 얼굴에는 당당함이 말없이 흘렀다. 온갖 풍파를 겪어내고 단단하게 땅에 자리박은 거목과 같은 인상이었다. 내가 막사에 들어오자 베르시 준남작이 놀랐다. “쟝 볼레? 혹시 쟝 볼레 사제인가?” “세상에 쟝 볼레가 두 명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 물론입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랬다. 나는 쟝 볼레 전용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베르시 준남작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만, 정말로 사제가 있을 줄은…….” “저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재회하다니요. 자아,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나는 단칼을 꺼내어 준남작의 신체를 묶은 밧줄을 조심스레 잘랐다. 곧이어 준남작은 사지가 자유로워졌다. “……고맙다. 허나 아무리 우리가 구면이라 해도 이리 쉽게 풀어주어도 되겠는가?” “저는 베르시 준남작을 믿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사 년 전에 뵌 준남작께선 틀림없이 어질고 현명하신 영주였습니다. 만약 준남작께서 사 년의 세월을 미처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시다면 제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베르시 준남작께서는 약자이신지요?” “쟝 볼레 사제에게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군.” 베르시 준남작이 쓰게 웃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우리는 두 팔을 벌려 서로를 포옹했다. 두텁고 우악스러운 손길이 등에서 느껴졌다. 더불어서 띠링, 하고 효과음이 들려왔다. 「베르시 남작의 호감도가 7 올랐습니다.」 준남작이 포옹을 풀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씁쓸해보였다. “쟝 볼레 사제. 궁금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다 마왕군……아니.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군대에 종사하고 있는가?” “저 역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베르시의 친절한 주민 여러분들은 평안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 한두 시간으로는 회포가 풀리지 않겠지요.” 우리는 탁자에 마주보고 앉았다. 나는 포도주를 꺼내와서 대접했다. 몇 번의 안부인사와 건배가 오간 다음,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화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비밀을 감추어봤자 쇼용없겠지요. 준남작 각하. 사실 저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과연. 역시 그랬는가.” 베르시 준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다. 하지만 사제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사제의 행보를 간간이 소문으로 들었다. 프랑크 북부의 귀족을 규합하고 브르타뉴에 대항하여 바타비아를 이끌어들인 것, 평범한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베르시 준남작이 와인잔을 매만졌다. “쟝 볼레 사제, 자네가 주역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네에게는 능히 북부 일대를 요동시킬 실력이 있다. 자네가 베르시를 떠나면서 나에게 한 말을 혹시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각하께서 신을 믿지 아니하신다면 계급 역시 믿지 않아야 하니,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신이 계급을 정해놓았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다. 자네는 아는지 모르겠군. 자네의 일행이 떠난 이후 프랑크의 정세를 살펴보면서 본인이 얼마나 고민에 빠졌는지…….” 빙고. 나는 마음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베르시 준남작은, 말하자면 내가 사 년 전 내전에서 씨앗을 뿌려둔 사람 중 하나였다. 씨앗의 이름은 공화주의. 세상이 혼탁해지면 혼탁해질수록 그 검푸른 안개를 비료로 삼아 자라났다. 베르시 준남작은 유능한 영주였다. 영지민을 수호하는 것을 일생의 긍지로 여겼겠지. 그런 인물이 프랑크의 황제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외세를 끌어들이고, 심지어 어머니를 유폐시키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그런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해도 괜찮겠는가. 황제라는 존재에게 이 나라의 운명을, 국민의 안위를 맡겨놓아도 좋겠는가……. 내가 심어둔 싹은 성공적으로 꽃을 피운 모양이다. 당장 기쁨에 겨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곧바로 치고 들어가면 너무 속이 드러났다. 잠깐만 주제를 바꿔볼까. “실례되지 않는다면,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소집령을 걸었다네. 프랑크 동부의 영주들은 모두 군대를 차출해야 했지. 참고로 본인은 삼 년 전에 남작으로 승작했네. 덕분에 꽤 많은 영지민을 전쟁터로 끌고올 수 있었지…….”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마도 그에게 승작은 별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지. 황제가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황태후는 유폐된 상태에서 승작이 이루어졌다. 즉, 브르타뉴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였다. “중립의 대가입니까……각하께서 상심하실 만하군요.” 지난 내전에서 북부 일대의 귀족들 대부분이 반란에 동참했다. 베르시 준남작은 동북부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이 끝날 때까지 굳건하게 중립을 지켰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그게 도리어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베르시 준남작이 자조했다. “동포들이 국가를 위해 쓰러져가는 와중에, 나는 영지민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꼼짝하지 않았다.” “영주로서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니, 어리석었다. 설마 브르타뉴의 여왕이 이 지경까지 커질 줄 몰랐지. 내가 보지 못한 미래를 동포들은 보았던 것이야……나는 어리석게도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뿐일세.” 우리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유리잔이 찌르르 울렸다. “데이지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결투에 나서는 걸 보고 놀랐지. 어쩌면 자네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네. 자네는 결코 양녀를 내버려둘 위인이 아니니까. 패잔병 행렬에서 적당히 빠져나왔네.” “…….” 내가 포도주를 머금고 베르시 준남작의 두 눈동자를 찬찬히 살폈다. “각하. 연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연기라니?” “각하께선 제가 양녀를 내버려둘 리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각하께선 영지민을 이끌고 참전하셨을 터. 만약 각하께서 탈영하신 게 알려지면 영지민들은 절대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대장이 탈영한 것이다. 영지민들은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게 된다. “저로서는 베르시 각하께서 영지민을 버리고 단지 저를 만나기 위해 탈영하셨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귀족의 의무를 무엇보다도 신성하게 받들어 모시는, 영지귀족의 귀감입니다.” “…….” “아마도 각하께선 다른 지휘관들을 설득하셨겠지요. 어쩌면 제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자신이라면 나와 교섭할 자신이 있다고 강변하셨을 겁니다. 그 강변에 지휘관들은 일시적인 탈영을 용납했겠지요.” 저들은 브르타뉴군이 아니라 프랑크군이다.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해서 싸우는 현재 상황이 납득하기 어려우리라. 만약 우리가 단순히 마왕군이라면, 비록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한 셈이 되긴 해도 '인류 전체를 위하여'라는 명목 아래 싸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어제 전투로 인하여 우리가 인류군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무게가 실렸다. 프랑크의 장수들은 고민했을 거다. 이대로 계속해서 싸우면 브르타뉴의 여왕을 위해서 동족과 싸우는 게 되어버린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상황에서 베르시 준남작이 특사를 자처했다. 베르시 준남작의 평소 행실로 미루어보건대 동료들한테도 신뢰가 두터웠겠지. 동료들은 그를 믿고 이곳에 보냈다……. “요컨대, 각하께서는 투항병이 아니라 프랑크군의 특별사절입니다. 틀립니까?” “……정말로 쟝 볼레 사제에게는 당하지 못하겠군.” 베르시 준남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와인잔을 내려놓고 불쑥 내 두 손을 잡았다. 베르시 준남작의 눈동자는 차갑지만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프랑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네. 이대로 가다가는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단지 그것뿐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프랑크의 등을 배웅해주겠네. 허나, 역사는 항상 백성의 피를 요구해.” “…….” “쟝 볼레 사제. 우리와 협력해주게. 브르타뉴의 미치광이 여왕을 몰아내고, 프랑크를 프랑크의 백성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그것은 내가 실로 간절히 바라던 제안이었다.   00282 대연정 =========================================================================                        “각하.” 나는 반색하며 베르시 준남작의 손을 꾸욱 잡았다. 프랑크 귀족들이 협력해준다면, 이 전쟁, 벌써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손을 마주잡으며 한동안 눈빛을 교환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가. 어디까지 걸어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서로가 서로에게 그것을 확인받았다. 단지 추상적인 마음의 교환이 아니었다. 나는 베르시 준남작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호감도가 20 이상인 준남작은 심리상태가 짤막하게 나와 있었다. 준남작은 틀림없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대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여야만 합니다.” “방계 혈족에 어린 사생아가 있다네. 그 아이를 왕으로 올린 다음, 정책은 의회를 꾸려서 해결해나갈 계획이야. 의회의 고문위원에 황태후 폐하를 모실 것일세.” 입헌군주제인가. 어리고 명분이 약한 왕을 옹립하여 의회가 주권을 잡는다. 왕당파에서는 왕정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공화파에서는 의회의 우위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타협한다. 전국민적으로 존경을 받는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중재자 역할을 맡는다. 제법 그럴듯한 시나리오다. “하루이틀 사이에 보장될 만한 계획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준비되었습니까?” “프랑크 내전에서 패배한 직후. 기즈 공작은 전사했지만 아우들은 건재했다.” “기즈 공작의 동생이라면……로렌의 대사제와 마옌느 공작이군요.”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즈 공작은 프랑크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반(反)브르타뉴 연합군, 통칭 신성연맹군에서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 기세가 대단하여 앙리에타가 매우 경계했다.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기즈 가문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탄압이 이루어졌다. 로렌의 대사제와 마옌느 공작, 두 명 모두 소리소문없이 암살당했다. 누가 암살했는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안 봐도 뻔하겠지. 그런데 베르시 준남작은 그들이 장대한 계획을 꾸몄다고 밝혔다. 어찌된 일인가? 베르시 준남작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기즈 가(家)의 형제들은 패배할 경우까지 생각해두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랑크의 귀족들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질 것이라 예상했지. 극소수의 대귀족들이 약속했지. 차라리 매국노로 위장해서 브르타뉴의 눈을 속이자고.” “매국노로……? 설마?” 내가 입을 벌렸다. 베르시 준남작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렌 대사제와 마옌느 공작을 밀고한 범인은 다름 아니라 우리 동료들일세.” “……놀랍군요.” 준남작이 밝힌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만일 프랑크 귀족들이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더라면, 앙리에타에 의해서 서서히 힘을 잃어 자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한번 군사를 일으키자니 앙리에타를 쓰러트릴 자신이 전혀 없었다. 남은 수단은 단 한 가지. 귀족들은 브르타뉴에게 빌붙는 '척'했다. 기즈 공작의 동생들을 앙리에타한테 밀고함으로써. 요컨대 가장 강력한 동료들을 배신한 것이었다. 앙리에타는 이 배신자들, 프랑크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매국노에 불과한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로렌 대사제와 마옌느 공작은 일부러 동료들을 위해 희생했다……. 덕분에 앙리에타 여왕은 의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남은 동지들은, 매국노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지금까지 기다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프랑크는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앙리에타의 군사적인 위엄에 머리를 조아렸으나 이처럼 뒷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만일 황제인 앙리 3세가 조금이라도 현명했다면 어땠을까. 유능한 귀족들이 황제를 받쳐주는 것이다. 브르타뉴에 속수무책으로 먹히지 않았겠지. 베르시 준남작이 포도주를 들이켰다. “후우. 브르타뉴의 여왕은 만만치 않았다. 일단 의심을 거두었지만 계속해서 경계했지. 이번에 우리 프랑크 귀족으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내보낸 까닭도 거기 있다네.” “여러분의 전력을 알려주십시오.” “열두 개의 도시가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다.” 열두 도시. 아주 적지도 않고, 아주 많지도 않다. 여기서 내가 협력하면 프랑크 북부의 자유도시 일곱 개가 더해진다. 다 합쳐서 열아홉 개의 도시가 우리편에 속해 있다. 열아홉인가. 애매하군. 단독으로 정세를 뒤집기에는 전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킹 메이커의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각하. 이번 작전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브르타뉴의 여왕은 강력합니다. 지난 번, 우리는 신성연맹군이 승리하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패배했지요.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도 전력이 약합니다.” 명분에서, 정략에서 유리해도 정작 전투에서 패배하면 말짱 도로묵이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여태까지 그래온 것처럼 인내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앙리에타 여왕을 패배시키겠습니다. 그 이후에 봉기하십시오!” 베르시 준남작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대들 홀로 여왕을 물리치겠다는 소리인가? 위험하네!” “각하. 승패는병가지상사라, 우리가 연합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언제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내가 진지하게 준남작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연합합니다. 다 좋습니다. 하지만 천명이 부족하여 패배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브르타뉴의 여왕은 더더욱 가열차게 프랑크 출신 귀족을 탄압하겠지요.” “…….”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날 겁니다. 그나마 싹을 틔운 반항의 씨앗이 뿌리까지 뽑힙니다. 그날이 바로 프랑크가 진정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각하! 우리는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해야만 합니다.” 베르시 준남작이 턱을 짚고 고민했다. 사실 이것은 그들에게 나쁜 제안이 아니다. 우리가 대신해서 전쟁을 치루어주겠다는데 오히려 무척 반가우리라. 이쪽에서 덤터기를 죄다 뒤집어쓰는 모양새이니 베르시 준남작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내 솔직히 말하지. 조건이 너무 좋네. 어째서 자네에게 불리한 제안을 건네주는 것인가?” “각하. 제가 사정에 따라 선봉대장을 맡고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본질은 프랑크인입니다. 프랑크에 손해가 가는 일만큼은 막고 싶습니다.” 내가 쓰게 웃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군대가 반드시 선량한 목적을 가지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브르타뉴의 여왕을 간신히 내몰았더니, 그 자리에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들어온다……그런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음.” 베르시 준남작이 여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내 면전에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 아마 본인도 그럴 가능성을 염려했을 거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만약이란 우리가 패배했을 경우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승리하더라도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배신하는 경우까지 걱정해야지요. 각하, 그 만약을 위해서라도 프랑크의 군대는 최대한 전력을 비축해야 합니다.” “그러니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 “예.” 베르시 준남작은 크게 감격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나를 껴안았다. 목석과 같은 사내의 목소리에는 놀랍게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자네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일세.” “……내전에서 패배하고, 어떻게든 세력을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나 역시 울음기가 녹아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마왕 바르바토스의 꼭두각시입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마왕 아가레스를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겨우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각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쟝 볼레 사제…….” 베르시 준남작이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곧 익숙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베르시 남작의 호감도가 11 올랐습니다.」 「호감도가 50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격렬하게 포옹했다. 사나이의 우정이란 포옹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날이 새도록 포도주를 마셨으며, 새벽 하늘이 밝아오자 베르시 준남작은 몰래 군중에서 빠져나갔다. “후우.”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었다. 베르시 준남작은 내가 순전히 애국심을 갖고서 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나에게 프랑크 제국에 대한 애국심 따위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없었다. 단지 정말로 마왕군이 프랑크를 탐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계획대로인가.” 합스부르크 중북부를 점령한 것만으로 이미 마왕군은 충분히 강력했다. 여기서 프랑크까지 점령해버리면 마족과 인간종 사이의 균형이 깨져버릴지 몰랐다. 마왕군은 인간의 저항이 있을 때 성립한다. 자칫 인간종이 궤멸해버리면 그때부터 마왕군은 전국시대에 돌입해버린다. 그런 꼬락서니를 두고볼까보냐. 평원파, 중립파, 산악파. 지금처럼 세 개의 파벌이 나란히 공존하는 상태가 제일 이상적이다. 난세이되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성립한 난세인 것이다. 파벌들끼리 가끔씩 경쟁하고 가끔씩 화합하며, 그때마다 바로 나, 마왕 단탈리안이 중재자로서 권위를 확립해야만 한다……. 베르시 준남작이 돌아가고 사흘 후. 우리 선봉군과 프랑크의 선봉군은 재차 맞붙었다. 사전에 긴밀하게 조작된 전투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아직도 프랑크 귀족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이 일부러 패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하여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가 희생했다. “프랑크를 위하여!” 예순 살이 넘은 이 노장은 평생 동안 오로지 프랑크를 위해 봉사했다. 왕년에 프랑크 근위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맡았으며, 황제의 대리장군이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귀족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삶을 보내온 장군이리라. 당연하지만 드 타바느 원수는 앙리에타가 경계하는 위험인물 제1호였다. 그만한 거물이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앙리에타의 의심도 상당히 옅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노렸다. 미리 약속한 대로,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드 타바느 원수가 돌격해왔다. 총사령관이 선두에 서서 돌격해오는 것은 미친 짓거리였다. 이쪽에서는 데이지가 달려나갔다. 드 타바느 원수와 데이지. 그렇게 가장 나이가 많은 노장과 가장 나이가 어린 용사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교차했다. 칼이 번쩍였다. 데이지는 단 일검으로 원수의 가슴을 꿰뚫었다. “후퇴하라!” “전군, 퇴각하라!” 허망하게 총사령관을 잃은 프랑크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재빠른 후퇴였다. 사실상 피해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계획은 어긋나지 않고 이루어졌다. “…….” 나는 노장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노인은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예순이 넘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체격이 건장했다.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대검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데이지가 내 곁에서 중얼거렸다. “저와 마주쳤을 때부터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예, 아버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데이지도 노장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 시체가 깔끔하게 남을 수 있도록 일격에 가슴을 찔렀다. 소녀는 상대방에게 예우를 갖춘 것이었다. 내가 차분하게 물었다. “유언은 없었나.” “고맙다, 라고 저에게 속삭였습니다.” 틀림없이 노인은 후회없는 삶을 살았겠지. 민중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마저 백성과 나라를 향해 바쳤다. 최고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한 것일까……. “데이지. 이 자의 최후를 잘 봐두어라.” 내가 노인의 눈을 덮어주면서 말했다. “우리 같은 부류는 절대로 맞이할 수 없는 죽음이다. 똑똑히 기억에 새겨두도록.” “……예, 아버님.” 데이지와 나는 오랫동안 노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하나의 삶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평온하고 고귀한 미소가 있었다. 언젠가 최후의 순간에서, 우리 두 명은 반드시 노인의 죽음을 시기하고 질투하겠지…….   00283 대연정 =========================================================================                        * * * “초전에서 패배했다고 하는군요.” “프랑크 놈들, 조금이나마 기개를 보여줄까 싶었거늘…….” 전령의 보고를 받아들고 브르타뉴군 간부들이 혀를 찼다. 보통 패배가 아니라 대패였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그나마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일까. 병력 자체는 6할 가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령관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가 패사(敗死)해버렸다. 말도 되지 않는다, 라는 불평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나왔다. “이래서야 전군의 사기만 떨어질 판국입니다.” “드 타바느 원수께선 조금 더 분발해주리라 믿었습니다만, 그만 연세를 잊어버리신 것 같군요. 기병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돌격이라니요?” 브르타뉴의 장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원수가 근위기사단에서 활약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프랑크의 호랑이는 옛날에 이빨이 빠졌어요. 그런데도 나이를 잊고 무책임하게 전군을 돌격시키다니…….” “글쎄. 뒤를 받쳐주지 못한 프랑크 기사단의 과오겠지요.” 다른 장수가 비웃었다. “아마도 원수께선 프랑크 기병대가 우리 브르타뉴군의 수준이라고 내심 착각하신 것 아닐련지. 기병이라고 다 같은 기병이 아닙니다. 요컨대 아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착각해서야 될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막사에 모인 제장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그들은 프랑크인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프랑크인, 특히 귀족은 고루한 명예와 관습에 얽매여 있었다. 고상한 척 턱끝을 올리는 일에는 능숙했으나 전쟁터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했다. 귀족적인 돌격, 명예, 충성. 전부 좋았다. 정작 힘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러나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실력이 없는 인간들이 부르짖는 명예만큼 위선적인 것도 없소. 그리고 위선에 희생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백성이지.” “백성이 미천하면 자기네가 희생되는 줄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지도 모르는 게 백성입니다.” 장수들이 반쯤은 비웃음을, 반쯤은 착잡함을 담아 두런두런 얘기했다. 브르타뉴의 귀족 가문에서는 장자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딸들이 후계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처절하리 만치 싸우는 것이 브르타뉴의 전통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전원, 어릴 적에 형제자매를 짓밟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러한 전통을 가리켜서 야만적이라고 깔보았다. 하지만 그 야만적인 나라가 고상한 프랑크를 점령했다. 덕분에 프랑크는 내전에 휩싸였고, 백성들이 고스란히 전화를 뒤집어썼다.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비웃었다. 어디에 명예가 있는가? 어느 쪽이 더 명예로운가. 명예란 어디 허공에 떠다니는 가치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승리하는 이에게만 주어졌다……. “다들 그만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스파르 드 타바느 경은 진정한 전사였어. 그는 충성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황제에게 충성할 것인가, 국가에 충성할 것인가, 백성에 충성할 것인가.” 여왕은 어딘지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약간은 졸음에 겨운 듯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전사란 무엇인가? 고뇌하는 자이다. 그가 어떤 해답에 이르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고뇌를 모욕할 권리 또한 우리에게는 없겠지. 전원, 경의를 표하자.” “…….” 앙리에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이 여왕을 뒤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막사가 조용해졌다. 그때 여왕 옆에 서 있던 사제가 입술을 열었다. 주홍빛 단발이 아름다운 롱그위 성녀였다. 아테네 여신의 성녀인 롱그위는 천천히 묵념의 노래를 불렀다. “많은 것을 죽였고, 많은 것을 살렸으며, 많은 것을 후회했고, 많은 것을 행했도다. 아아――가스파르 드 타바느. 이제 그곳에서 잠들라.” “아테네 여신이시여. 전사에게 위안을.” 귀족들이 일제히 아테네 여신을 부르며 묵념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는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 선봉전은 프랑크 귀족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어. 그들이 승리하고자 했다면 큰 피해를 입었겠지. 반대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했다면 내가 몸소 그들을 숙청할 계획이었다. 드 타바느 원수는 이것을 알아차렸겠지.” “……과연, 의도된 패배였습니까.” “아아. 패배하되 변명하지 않는다. 그런 절묘한 결과를 위해서 원수는 희생한 것이야.” 앙리에타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섰다. “친애하는 제장들! 아직 프랑크는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에게 굴복했지만 여전히 그네들 나름대로 명예를 지키고 있어.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다.” 장수들은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이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저희는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브르타뉴의 귀족들은 '방심은 금물'이라는 전형적인 격언에 만족하지 않았다. 천성이 실리를 추구하도록 타고났다.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이 방심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면――그건 단지 마음을 다잡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서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기약이 없는데도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은 없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아직까지 긍지를 버리지 않은 까닭은 어딘가에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무엇이 그들의 희망일까?” “으음. 설마 황제는 아니겠지요. 그놈이 전무후무한 병신새끼라는 사실은 돼지들도 알고 있습니다.” 장수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여보게,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 그 무슨 망발인가? 그래 봬도 우리 여왕 전하와 장래를 약속하신 사이일세.” “어이쿠. 이거 실례했습니다. 소신이 감히 여왕 전하의 기둥서방을 몰라 보고!” 장군들의 너스레에 앙리에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숙청을 당해야 할 게 한두 놈이 아니야. 물론 황제는 프랑크의 희망과 거리가 멀지. 그런데도 프랑크 귀족들이 여전히 희망을 품는다면 그 이유는 뭐겠어?” “……새로운 황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전하.”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막사의 공기가 싸늘했다. 브르타뉴가 지난 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비밀스러운 정책이 하나 있었다. <백합 뜯기>라고 명명된 정책은 바로 프랑크 황가의 핏줄을 뿌리부터 뽑아내는 데 전력했다. 황태후는 네 명의 왕자와 세 명의 공주를 낳았다. 다산이 덕목인 시대였다. 일찍이 한 나라의 황비였던 여인으로서 카트린은 훌륭하게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황태후는 불행했다. 네 명의 왕자 중에 한 명은 어려서 병으로 죽었다. 세 명의 왕자는 차례대로 황제에 즉위했으나, 두 명이 요절했고, 남은 한 명이 현재 황제로서 남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식이 없었다. 두 명의 딸은 각각 카스티야 왕국의 왕세자와 합스부르크의 제2황자에게 시집을 갔다. 합스부르크의 제2황자는 엘리자베트 통령에 의해 몰살당했다. 즉, 현재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식은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뿐이었으며…… 이는 '차기 황제'를 이을 직속 후계자가 전무하다는 것을 뜻했다. “이미 사생아 다섯 명을 주살했습니다. 아직도 혈족이 남았다는 말씀입니까?” 직속 혈족도, 방계 혈족도 싸그리 사라졌다면 남은 것은 사생아뿐. 브르타뉴는 사고를 위장하여서 다섯 명의 사생아를 죽였다. 프랑크 귀족들이 사생아를 황제로 옹립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들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아직 사생아가 딱 한 명 남아 있어. 전대 황제인 샤를 9세가 남긴 핏덩어리이지.” 제장들이 놀랐다. “허허. 어찌하여 지금까지 살려두셨습니까?” “혹시 프랑크 귀족들이 꽁꽁 숨겨둔 것입니까?” 질문을 받고 앙리에타 여왕이 씨익 웃었다. “일부러 살려두었어.” “예?” “생각해봐. 만일 프랑크 귀족들이 아직까지 저항의 의지를 몰래 불태우고 있다면 언제 그걸 폭발시킬까. 보나마나 우리 브르타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야. 그런 기회가 다가올 때까지 참고 또 참을 속셈이겠지.” 앙리에타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유쾌하게 말했다. “자아, 인류군으로 둔갑한 마왕군이 절찬리에 침략해오고 있다. 사방에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합스부르크 동쪽은 멀고 또 머니 애시당초 기대를 접어야 할 판이라. 그렇다면 바다 건너 버니시아 놈이나, 윗동네 바타비아 년이나, 아랫동네 카스티야 놈이나 저기 먼 이웃인 사르네냐 년한테 손을 빌려야 쓰겠는데…….” 앙리에타 여왕이 손가락을 네 개 들어올렸다. “바타비아 년은 태생부터 공화주의에 썩어빠진지라 안 되겠고. 버니시아 섬놈들은 우리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도 싫고, 공화주의도 딱히 싫지 않은지라, 역시나 안 되겠고. 사르데냐 촌년들은 우리가 황태후 감금한 것 때문에 외교부터 싹 끊어버렸고. 이제 어떡하나?” 순식간에 여왕은 손가락 세 개를 접었다. “남은 건 카스티야 그 머저리 놈들뿐이라. 그런데 얘네 왕비가 황태후의 둘째 딸이잖아. 여차하면 프랑크의 황위가 자기네 물건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할 거란 말이지. 이놈들한테 원병을 청했다가는 보나마나 황위 내놓으라고 교섭해올 텐데……그럼 우리가 피똥 싸면서 프랑크 먹으려고 한 게 전부 헛짓거리가 되어버리네? 결국.” 마지막 검지가 굽혀졌다. “우리한테 원군을 보내줄 나라가 하나도 없어. 프랑크 귀족들도 이걸 빤히 알거라고.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 아마도 아니야. 이런 기회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않아. 제군들, 프랑크 귀족들은 반드시 봉기하려 들 거다.” “…….” “아마 우리군이 출진한 틈을 노려서 반란을 일으키겠지.” 그렇기에 앙리에타 여왕은 프랑크군을 따로 묶어서 선봉대로 보내버렸다. 반란분자를 사전에 쫓아내는 의미가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지휘관들의 처자식을 수도에 감금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봐라.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얘네는 원수가 패사하긴 했어도 전력이 그리 많이 깎이지는 않았어. 수상한 냄새가 나지.” “……전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이라도 토벌하겠습니다.”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제군들, 프랑크 귀족들은 현재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 있어. 이들이 서로에게 양보해서 타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바로 희망이 있기 때문이야.” 왕정을 유지하는 대신, 명분이 약한 사생아 출신의 왕을 내세운다. 왕당파는 명분을 유지하고 공화파는 실리를 차지한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앙리에타 여왕은 간파하고 있었다. 앙리에타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우리가 출진하기 직전……예컨대 하루 전에 마지막 남은 사생아가 돌연 죽어버리면 어떨까? 그래도 녀석들이 계속해서 협력할 수 있을까.” “……!” 장군들이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프랑크 귀족들은 혼란에 빠지겠군요, 전하!” “아아. 우리를 무찌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찌른 다음 어떤 형태의 정부를 꾸리느냐도 만만치 않게 중요해. 황위 후보가 사라져버린 이상 기존의 타협안은 완전히 공중분해 되어버리지.” 장군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그들은 파악했다. 장군들이 앞다퉈서 말했다. 다들 목소리가 흥분에 달아올라 있었다. “십중팔구 프랑크 귀족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할 것입니다, 전하!” “회의에 참여하는 귀족들이 곧 우리 브르타뉴에 반항하는 세력이라 보아도 무방하군요.” “병력을 매복시켜두었다가 회의를 급습하면……프랑크에 마지막으로 남은 저항세력을 단 한방에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앙리에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군들, 절체절명의 시기가 바로 절호의 기회이다. 겁쟁이 같은 프랑크인들은 그걸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어. 놈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앙리에타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손가락으로 묘기를 부리더니, 단박에 내리쳤다. 타악, 하고 단검이 탁자에 허리까지 박혔다. “이제부터 프랑크의 긍지를 말살한다.”   00284 꼭두각시 전쟁 =========================================================================                        “꺄아아악!” 하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주인을 깨우려고 방문을 열었다. 새하얀 침대 위에 어린 남자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다만 영원한 잠이었다. 열한 살의 소년은 목이 잘라졌다. 검붉은 피가 이불에 눌러붙었다. 더럽혀진 침대에는 백합 꽃잎 몇 장이 마치 무언가를 조롱하듯이 떨구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황손, 암살. 프랑크의 일부 귀족들에게 즉시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여신들이시여. 어찌하여 비극에 비극을 더하시나이까.” “분명히 브르타뉴의 감시를 피해서 저택을 만들어두었거늘.” 막 거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협력하기 위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논쟁과 타협이 물밑에서 이루어졌던가.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자란 분이었다. 밀고자가 없는 이상에야 브르타뉴 놈들이 알아챌 리가 없다…….” “저택에서 일한 하인들을 모조리 감금하시오!” 왕당파든 공화파든 내부에도 여러 개의 계파가 있었다. 수십 개의 신념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헌군주제는, 거의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타협이었다. 창졸간에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자 귀족들은 허망하여 차마 입술을 떼기 힘들었다. “지금은 누가 참극을 저질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부터 논의해야 합니다.” “앞으로? 앞으로 무얼 하라는 말입니까. 프랑크의 황손은 이제 모두 죽었습니다. 위대한 제국은 끝장났습니다. 전부 끝난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프랑크는 존속해야만 합니다. 설령, 황제가 없다 하더라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설마 지금 제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자는 소리입니까?” “만약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면.” 곳곳에서 귀족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처음에 그들은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극소수끼리 모여서 의견을 교환할 뿐이었지만, 이렇게 소규모로 토론을 해서야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파벌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상대 파벌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정국이 오리무중에 빠져들자 귀족들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약속대로 거사가 진행되는 것이외까, 아니면 취소된 것이외까! 하다못해 그것이라도 확실히 합시다!” “계획이 틀어졌으니 앙리 폐하를 옹립하는 수밖에…….” “나라를 이 꼬라지로 만들어놓은 황제를 다시 모시라고? 하. 그렇게 해본들 백성이 우리를 지지해줄 거라고 생각하나? 차라리 혁명을 일으키면 일으키지, 절대로 불가하다.” 하루 빨리 시급하게 대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귀족들은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장소는 황도(皇都) 파리시오룸 근교의 외딴 저택.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들은 브르타뉴군이 도시에서 출진하여 빠져나간 다음에 모여들었다. 집회에 불참한 귀족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신중했다. 설령 정국이 불확실하더라도, 아니, 불확실하기에 더더욱 안전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어째서 황손이 암살당했는지 아직 원인조차 밝히지 못했소. 우리 중에 밀고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건만, 어찌 경거망동하여 한 자리에 모인다는 말이오?” “앙리에타 그 화냥년이 이런 기회를 놓칠 것 같은가! 믿기지가 않는군. 다들 자살하려고 환장한 게야.” 당장 일이 코앞에 들이닥쳐도 안전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아무런 방책도 세워놓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자는 얘기입니까? 그게 여러분이 말씀하는 안전입니까? 그건 안전이 아니라 단순히 나라와 백성에 대한 태만이요, 직무유기에 불과합니다.” “브르타뉴는 현재 누란의 위기요.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것 같소!” 위험하더라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맞서야 할 것인가. 프랑크 귀족들은 대체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미 사 년 동안 침묵했다. 무엇을 위해 인내하고 굴종했던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애국전선에 몸을 담은 가문들 중에서 삼분의 이 가량이 비밀회합에 출석했다. 그러나 이날 역사는 과감한 행동이 언제나 정답이 아님을 증명했다. “적습이다!” 밤새도록 격렬한 토론을 이어나가는 도중이었다. 경비병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당했군.” “빌어먹을 창녀 같으니라고.” 귀족들이 저마다 허리춤에 찬 칼을 빼어들었다. 무슨 소란이냐, 하고 멍청하게 소리치는 귀족은 없었다. 왕당파와 공화파를 막론하고 그들은 모두 브르타뉴의 감시를 피해서 여태껏 살아남았다.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지 정도는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침을 튀기며 이념으로 논쟁한 것을 벌써 잊어버렸는지, 저택 정문을 중심으로 빈틈없이 방진을 꾸렸다. 어릴 적부터 기사 수업을 받아온 귀족이었다. 오러를 뿜어내지 못할지라도 싸움하는 방법쯤이야 다들 터득하고 있었다. 저택 부근에서 경비를 돌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이윽고 대문으로 브르타뉴의 기사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뚜벅, 뚜벅, 하고 기사들의 발걸음이 유독 요란하게 울렸다. “이거. 고귀하신 분들께서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로 다 모여 계십니까.” 한 여기사가 비웃는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가슴에 은빛 흉갑을 껴입었고, 짙은 초록색 망토를 펄럭였다. 여기사를 보고 프랑크의 귀족들이 혀를 찼다. “쯧. 밀리안느 드 나제흐 경인가…….” “대단히 호화로운 불청객께서 행차하셨군 그래.” 브르타뉴의 건국과 함께 지금까지 내려온 녹색 장미 기사단. 일찍이 단 한번의 기마돌격으로 마왕군을 분쇄해버린 경력마저 있었다. 그 부단장이 직접 행차했다. 귀족들이 비록 믿음직스러운 호위를 데려오긴 했으나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여기사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평소부터 애국자로 소문나신 분들은 그렇다 쳐도, 조국을 배신했다고 알려진 분들까지 잔뜩 모여 있으니, 이거 원. 저로서는 도대체 무슨 일로 여러분께서 한 자리에 모였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뭐. 분명히 흥미진진한 얘기가 오갔겠지요.” “…….” “여왕 전하께서도 오늘밤 모임에 대해 크나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자세한 얘기는 전하의 앞에서 들어보도록 할까요.” 출진하는 척 위장하고 사실은 우리가 모이기를 기다렸는가. 귀족들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중에는 매국노처럼 행동하며 앙리에타 여왕에게 아첨한 무리도 있었다. 자존심을 접어가며 여기까지 왔건만 모두 쓸모없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 스르릉. 귀족들이 칼끝을 앞으로 겨누었다. 여기서 더 이상 발뺌해봤자 앙리에타 여왕이 자신들을 살려줄 리 만무했다. 고문과 치욕 끝에 오로지 더러운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어차피 그들도 프랑크의 자랑스러운 귀족. 얼마든지 최후를 각오하고 있겠지. “……만약 그대의 여왕에게 불리는 것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어쩌겠는가.” “세상에는 인간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지요.” 기사들 또한 일제히 검을 들어올렸다. “여러분께서는 전원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프랑크의 귀족들은 용감하게 저항했다. 이제 막 당주에 오른 소녀부터 후계자를 전부 잃어버린 일흔 살의 노인까지, 칼자루를 들 힘이 있는 자라면 온몸을 내던졌다. 그들이 울부짖은 구호는 오직 하나. “프랑크를 위하여!” 공화파가 왕당파를 위해 가슴으로 검을 받아냈다. 왕당파가 공화파를 살리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다. 오래 전부터 사상이 달라 서로 원수로 지내던 이들조차 최후의 순간에는 단지 동료에 불과했다. “여왕 전하를 위하여!” 그 희생을 비웃듯이 칼날이 귀족들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창이 배에 꽂혀 귀족 소년의 창자가 와락 바닥에 쏟아져내렸다. 소년은 쓰러져서 두 손으로 창자를 도로 담아내려 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절명했다. 비명과 신음이 곤죽이 되어 새빨갛게 저택을 적셨다. 어느 중년의 남자가 황급하게 두 손을 들었다. 그가 이번 회합을 브르타뉴에게 고한 배신자였다. “잠깐만! 드 나제흐 경! 나요! 날 죽이지 마시오!” 부단장이 그에게 다가가서 상쾌하게 웃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여왕 전하께서 오늘밤 일을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고, 고맙소. 전부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이외다.” 아직 살아남은 소수의 귀족들과 그 호위들이 핏물 묻은 얼굴로 격앙했다. “네 자식이었는가, 베튄!” “더러운 핏줄에 영원토록 저주가 있으리라!” 예전에 동료였던 이들이 분노에 차서 저주를 퍼부었다. 남자는 잠깐 찔끔했지만 곧이어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자네들은 얼마나 핏줄이 깨끗하길래 허구한 날 프랑크를 노래하는가.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야. 누가 황제인지도 중요하지 않다네. 단지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황제가 프랑크인이든 브르타뉴인이든, 아니 마족이든 하등 상관없어!” “입 닥쳐, 아가리에 말오줌이나 집어처넣을 새끼야!” 한 소녀 당주가 소리쳤다. “너를 키운 것은 브르타뉴가 아니라 프랑크야! 프랑크의 백성이 너에게 세금을 바쳤고, 프랑크의 부모가 너를 키웠으며, 프랑크의 산천초목이 너를 보호해줬어! 지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돼지자식이 어디서 감히 백성을 논해!” “토론할 가치조차 없군……역사는 바뀌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그때였다. 핏줄을 세운 남자의 목이 퍼석, 하고 갈라졌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통이 귀족들의 발 앞까지 굴러갔다. “무, 무슨……?” “…….” 귀족들은 분노마저 잊고 할 말을 잃었다. 그들 앞에서 부단장인 여기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칼날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프랑크의 배신자이자 브르타뉴의 아군인 남자를, 여기사가 스스로 처단한 것이었다. “여러분과 같은 프랑크인이 그래서 안 되는 겁니다. 얼마나 올바른지 상관없이 말에는 힘이 뒤따라야만 하지요.” “……어째서 배신자인 그를 죽였어?” “질문의 의도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부단장이 검을 들어올려 상단 자세를 취하였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전원' 이곳에서 죽어주셔야겠다고.” “…….” “어디 시체가 되어도 그 잘난 신념을 떠들 수 있을지 지켜보지요.”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귀족들은 살해당했다. 이들이 소속된 가문에도 피바람이 불었다. 황도를 빠져나갔던 브르타뉴군의 일부가 돌아와서 가문들을 급습했다. 아녀자와 노인, 어린애를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 현재 몇몇 귀족들이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 황제의 명에 따라, 이러한 소요 사태를 시급하게 진압한다. ─ 외적에 동조하여 내부를 뒤흔들려 한 죄가 악질적이므로 예외없이 사형에 처한다. 그리하여 단 이틀 만에 삼백 명에 이르는 인간이 처형되었다. 브르타뉴군은 후환이 없어지자 만족하여 지체하지 않고 진군했다. 프랑크군을 포함해서 수만의 병력이 마왕군에 맞서기 위해 출진했다. 속전속결의 모범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 신중하게 행동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귀족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시의 광장마다 동료들의 수급이 창대에 꽂혀서 외로이 바람에 쓸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린 소녀 당주도 눈을 감은 채 죽어 있었다. 귀족들은 광장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저택에 돌아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심처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브르타뉴!” 베르시 남작. 스스로 준남작이라 칭하는 그도 살아남은 이에 속했다. 이빨에 뜯어져 피가 떨어지는 입술로 그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절대로! 브르타뉴의 땅에 피가 마를 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지어다! 내 생을, 피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 원한을 반드시 갚으리라!”   00285 꼭두각시 전쟁 =========================================================================                        * * * 대륙력 1511년 6월 초순. 여름의 바람을 가로지르며 아군은 프랑크 동북부에 성공적으로 집결했다. 이 시기는 농작물을 수확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전쟁에 미친 영주도 요 무렵만큼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자칫 여름철 농사를 단번에 망쳐버릴지도 모르니까. 영지민이 소집령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것도 이때였다. 달리 말해――마왕군이 인간계를 침략하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인간과 다르게 마물은 농삿일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전쟁의 시기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강력하게 제약을 받는 반면, 마왕군은 거의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이 세계에 기사단이 고도로 발달된 까닭이 여기에도 있겠지. 농사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마물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비군을 많이 육성하면 농삿일에 쓰여야 할 인력이 줄어버린다. 즉, 정답은 소수정예의 상비군밖에 없다……. 신기한 일이다.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계는 여기까지 달라진다. 전국 곳곳에 기사 아카데미가 설립된 것은 필연적이다. 마왕군이 어느 방향에서 침략해도 재빠르게 출동시킬 수 있도록 반드시 기병 전력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뭐, 거점마다 강력한 요새들을 두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까. 기사단에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요새에 주력할 것인가……. 각각 장단점이 있으리라. 인간의 국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을 적절하게 뒤섞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반면, 브르타뉴 왕국은 극단적으로 기사단을 육성해왔다. 심지어 브르타뉴의 왕도(王都)에는 성벽이 없다. 오백 년 전쯤에 파괴되었는데, 마물에 의해 부서진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브르타뉴인들 스스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유가 가관이다. “성벽 따위는 겁쟁이나 써먹는 물건이다.” “시민들은 성벽에 기대어 농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할 것이고, 야전(野戰)에서도 필사적으로 싸우지 아니하고 여차하면 도망쳐버릴 것이다.” “고로 성벽은 인민 전체를 유약해빠진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지름길이다.” 경악스러울 만치 단순하고 무식한 논변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브르타뉴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이 직접 곡괭이를 들고 성벽을 두들겨 부숴버렸으며, 그렇게 대량으로 나온 석재는 아카데미를 하나 더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정도면 일종의 정신병이라 보아도 좋지 않을까?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전투종족 같으니라고. “이처럼 브르타뉴는 광적으로 야전을 선호합니다.” 라우라가 말했다. 그녀는 선봉대와 본대가 합류하자마자 작전회의를 열었다. 넓은 막사에는 호화롭게 군장을 차려입은 마왕들이 앉아 있었다. 라우라는 차분하게 마왕 한명한명과 시선을 마주치며 작전을 설명했다. “브르타뉴군은 정신적으로나 체질적으로나 오직 야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거쳐온 프랑크 동북부에는 거대한 요새가 세 개 있었지만, 브르타뉴군은 그곳들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예 방기했지요.” 아마 프랑크인으로 이루어진 선봉대에도 야전을 명령했겠지. 보통 인간군이 몬스터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얼핏 보면 무식하고 소모적으로 보입니다만……그 내실까지 따져보면 브르타뉴군은 기동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기동방어라고 할까요.” “……기동방어? 처음 듣는 용어인데.”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바르바토스는 참고로 여름에 무진장 약했다. 여름이라고 해도 아직 그리 덥지 않건만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가슴골이 젖어 있는 게 묘하게 에로해서 곤란했다. 음, 결정했다. 오늘밤은 바르바토스랑 하자. “…….” 꼭두각시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가 큼직한 부채를 들고 있었다. 바르바토스한테 공손히 바람을 부치는 것이었다. 총사령관이 일개 지휘관한테 부채를 흔들다니, 하여간 죽어서도 꼴불견인 녀석이었다. “기동전이면 기동전이고 방어전이면 방어전이지 기동방어가 뭐야?” “보통 방어전의 목적은 '적군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요새를 중심으로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 이러한 방어전에 해당합니다. 이 경우, 공성측과 농성측은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서서히 소모해가며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라우라가 담담하지만 어딘가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 비축해둔 식량. 적군과 아군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소모되느냐에 따라 승자가 결정되지요. 극단적으로 말해 방어전에선 전력이 소모될지언정, 병력적인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새 공략전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요새에는 일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죽어나간 병사는 겨우 수백 명. 그걸로 전투가 결정되었다. 나머지는 그저 적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에 불과했다. “반면에 기동전은 적군의 섬멸을 의도합니다. 정예병을 한곳에 집중시켜 대회전을 벌이고, 단번에 전쟁의 결판을 지으려 하지요. 브르타뉴군은 단 한번의 결전에 집착합니다.” 이건 생드니 평원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이겠지. 내가 패배를 장식한 전투였다. “그렇기에 브르타뉴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회전을 벌이는 것에 극도로 신경을 쏟아부을 것입니다.” “흐응.” “여기에 맞서 우리군의 전략이 수립됩니다.” 라우라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시다시피 파리시오룸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났습니다. 파리시오룸의 민심은 더없이 흉흉해졌겠지요. 앙리에타 여왕 입장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앙리에타 여왕은 군사를 멀리까지 끌고 나가지 않겠지요. 즉.” 파리시오룸 근교. 기사단이 충분히 활약할 수 있도록 적당하게 넓고 평평한 지대. “반드시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전장을 고를 것입니다. 브르타뉴군이 보기에 요새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전장입니다. 요새는 주로 언덕에, 좁은 길목에 건설되니 말입니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우리군은 철저히 브르타뉴의 전략을 이용해줍니다.” * * * “우리군은 마르네 강을 배후에 두고 진영을 차린다.”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마르네는 파리시오룸 바로 동쪽에 흐르는 강이었다. 장수들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여왕에게 반문했다. “전하. 마르네 강은 지나치게 파리시오룸에 가깝나이다. 적들이 내륙을 휘저을 터인데, 조금이라도 멀리 진출하여 응전하는 것이 옳지 않을련지요?” “안 돼. 우리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숙청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작자들이 꽤나 있을 거야.” 앙리에타 여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형한 탓에 파리시오룸의 인심이 좋지 않아. 이럴 때 쥐새끼들이 선동하면 십중팔구 반란이 일어나겠지. 우리가 파리시오룸에서 멀어질수록 반란의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지고.”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장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허나 강을 배후에 두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병법의 도리에 어긋나옵니다만…….” “적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야.” 앙리에타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적군이 보기에 우리는 퇴로가 막혀 있겠지.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를 구석에 몰아세웠다고 생각할 터. 공성전을 피하고 야전을 선호하는 마왕군의 특성을 생각할 때, 놈들은 틀림없이 전투를 개시할 거야.” 마왕군의 침략에 맞서 인류는 전통적으로 농성전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상식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우리가 파리시오룸에 틀어박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제군들. 우리는 단 한 번의 결전으로 마왕군을 끝장낸다.”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브르타뉴군에는 마왕 아가레스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 마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바르바토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신과 협력하겠노라고 수차례 언급했다. 어려운 전투가 되리라. 하지만 결과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해서 앙리에타는 전투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브르타뉴군의 자신감이었다. * * *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예상한 대로 브르타뉴군은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꽤나 자유롭게 프랑크의 내륙을 횡단했다.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마르네 강줄기까지 진출했는데,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평원 저 너머를 노려보았다. “야아, 새끼들 봐라? 배수진을 차리고 있네.” 강줄기를 배후에 두고 브르타뉴군은 기세등등하게 진영을 세워두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비롯하여 우리군 간부들은 군마에 올라탄 채로 적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병력은 대략 삼만에서 사만 명에 이를까. 우리군에 비해 병력은 한참 뒤떨어졌지만, 문제는 역시나 기사단이었다. 스무 개에 가까운 기사단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 나라에 있는 기사단이란 기사단은 몽땅 끌고온 것 같았다. 마왕군 입장에서 이보다 더 혐오스러운 광경이 없겠지. 1차 세계 대전에서 끝없이 참호가 펼쳐진 적진을 바라보는 보병과 같은 심정이라고 할까. 바르바토스가 낄낄 웃었다. “저거 저거, 여기서 죽자 살자 싸우겠다는 거 아니야. 앙리에타인지 뭔지 취향이 나랑 맞는데. 야, 제파르. 봐라. 녹색 장미 기사단이다. 반가울 텐데 손이라도 흔들어줘.” “……너무하십니다, 바르바토스 각하.” 제파르 대장이 보기 드물게도 앓는 소리를 냈다. 기사단 돌격에 맞서서 오우거 일제 돌격으로 응수한 희대의 전술가가 바로 제파르 대장이었고, 그때 오우거를 무참하게 발라버린 장본인이 녹색 장미 기사단이었다. 트라우마의 원흉과 마주친 탓인지 아까 전부터 제파르 대장은 안색이 싹 굳었다. 라우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후퇴할 곳을 없애두었으니 병사 전원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저곳에 쳐들어가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우선 시기를 가늠해보지요.” 우리는 적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군영을 차렸다. 이때 라우라는 우리가 마치 결전을 치룰 것처럼 보이게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했다.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돌격할 것처럼 오우거 부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마왕들의 깃발도 보란 듯이 화려하게 펄럭였다. 그러나 사흘, 일주일, 보름이 흘러도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저쪽에서 안달이 났는지 편지를 보내왔다. 앙리에타 여왕이 직접 쓴 편지였는데,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에 대한 조롱과 마왕들에 대한 비웃음이 적혀 있었다. 요는 이대로 전쟁을 끌어봤자 쌍방에 좋을 것이 없으니 한판에 승부를 보자는 것이었다. 라우라는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아군은 전쟁하는 방법을 귀하한테 가르침 받을 생각이 없다. 댁의 군사나 잘 챙겨라.” 지독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양군은 자기 진영에 목책을 정교하게 깔아두고 서로가 먼저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브르타뉴군은 때때로 궁기병을 이끌고 우리군에 쳐들어왔는데, 내가 똑같은 수법에 당할 리가 없었다. 이걸 위해서 투창용 창을 어마어마하게 가져왔다. 우리는 간단하게 오크의 투창으로 대응했다. 이쪽이 철저히 방비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브르타뉴군도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오지 않았다. 정찰과 다름없는 소규모 접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아니, 언제까지 꼼짝없이 대치만 할 거요, 부사령관 아가씨?” “라우라아. 딱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 돌격하게 허락해주라.” 답답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벨레드 형님이나 시트리는 계속해서 제발 좀 돌격하자고 응석을 부렸다. 호전적인 마왕들도 서서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라우라는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으며 즉답했다. “안 됩니다.” 벨레드 형님과 시트리는 울상을 지으며 제각기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쳐다보았지만……. “우리 라우라 말대로 해.” “미안하지만 부사령관의 지시에 따라주세요, 시트리.” 지휘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군단장들이 동조해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호전적인 마왕들은 불안을 마음속에 파묻고 속절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름이 흘러갔다.   00286 꼭두각시 전쟁 =========================================================================                        * * * “대치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엘리자베트가 눈쌀을 찌푸렸다. 널찍한 평원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한 지 보름째. 인류군과 마왕군――세간에서는 왕국군과 제국군이라 불렀지만, 엘리자베트는 한사코 그 용법을 거부했다――어느 쪽도 지극히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앙리에타가 마법 수정구 너머에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정말이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네.” 적군이 움직이지 않는 게 자기 탓은 아니다. 그런 느낌이었다. “박수도 손이 맞아야 울릴 거 아냐. 나오라고 편지도 보내보고 결투도 신청해보고 해볼 건 다해봤는데도 안 나와요. 거 참, 거하게 회전을 벌이려고 왔는데 꼭 공성전이라도 하는 기분이라니까.” “흐음. 이상한 일이로군. 시간을 끌어본들 마왕군에 득이 될 일은 없다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대체로 공격측이었다. 타국을 침범하여 내륙 깊숙하게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보급선이 길어졌다. 길고 얇게 이어진 보급선을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간단한 해결방식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미간을 좁히며 혹시나, 하고 물었다. “저들이 약탈을 시행하고 있는가?” 질문하면서도 내심 엘리자베트는 설마 그럴까 생각했다. 단탈리안은 누구보다 명분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이 시기, 밀을 수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무렵에 무분별하게 약탈을 자행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민심이 앙리에타 쪽으로 기울겠지. 앙리에타는 귀족과 공화파에는 잔혹했지만 대부분의 백성, 즉 여신들께서 황제를 점찍어주셨다고 소박하게 믿는 백성들에겐 인자했다. 과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그건 아니야. 대신에 안전세라고 할까. 약탈하지 않을 테니 그 대가로 올 여름 수확량의 일할을 거두고 있다는데.” “그렇군. 수확량의 일할인가.” 적당하다. 통상 민가에 비축된 식량의 삼할 가량이 약탈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단 일할만으로 마을과 도시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상당히 너그럽다. 말뿐인 약속이 아니겠지.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있을 거다. 역시나 단탈리안은 민심의 지지를 노리고 있었다. “……더더욱 이상해지는군. 앙리에타, 설마 저들이 얌전히 밀을 징수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겠지.” “당연하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앙리에타 여왕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기사로 분견대를 만들어서 보급로가 보이는 족족 뺏어주고 있어. 자기네 딴에는 뺏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경로를 복잡하게 만든 것 같지만, 그래봤자 외지인이지. 지리에 어두워.” 그렇다. 보급이 문제였다. 앙리에타 여왕은 단순히 병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배수진을 차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마왕군에서 부사령관을 맡은 인간 소녀가 하이델베르크 요새를 어떻게 함락했는지 알게 되었다. 강줄기를 점령하여 요새의 보급로를 괴사시킨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강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강을 배후에 두어주겠다. 이것이 앙리에타의 대응이었다. 배수진 때문에 전술적인 부담감은 늘어났다. 하지만 브르타뉴군은 보급이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조운선이 강줄기로 와서 식량을 날라주면 그만이었다. 반면에 마왕군은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약탈을 금했을뿐더러, 설상가상 지리에 어두운 바람에 그나마 안전세로 거둔 식량조차 브르타뉴군의 별동대한테 뺏겼다. “그래서 너한테 상담하는 거야, 엘리제. 네가 말했잖아. 저기 부사령관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면서. 도대체 왜 안 움직이는 거야?” “…….” 시간이 흐를수록 브르타뉴군이 조금씩 유리해진다. 마왕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우리를 의심암귀에 빠트려서 조급하게 공격하게끔 유도하고 있을 가능성은?” “아. 나도 그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앙리에타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기엔 단탈리안이 있잖아? 바르바토스도 있고. 으으음, 뭐라고 해야 되나.” “그들이 짜내기에는 지나치게 볼품없는 수작인가…….” “응. 아무래도 좀 아니다 싶지.” 두 군주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상대방의 의도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군. 상담에 어울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니야. 사실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알아차렸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이틀은 잠자리에 들지 못했을걸.” 앙리에타가 씨익 웃었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면모에서 엘리자베트는 앙리에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어쩌면 단탈리안은 프랑크의 귀족들이랑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을지 몰라. 마왕군이 침략해온 틈을 타서 귀족들은 파리시오룸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조한 것이라고.” “흐음…….” “바깥과 안쪽이 한꺼번에 협공해서 우리를 쓰러트릴 계획이었겠지. 하지만 내가 귀족들을 싸그리 숙청해버리니까 계획이 완전히 헝클어진 거야. 닭 쫓던 개가 된 거지. 지금 마왕군은 이도저도 못하고 새로운 계획이 세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 아닐까.” 충분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아니, 현재 마왕군의 비합리적인 자세를 설명하려면 이외에 다른 해답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 엘리자베트는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았다. 추측이 옳을 경우, 단탈리안은 순전히 프랑크 귀족들에게 작전의 성공 여부를 맡겼다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단탈리안이 정말로 그랬을까. 의심을 가슴에 묻어두고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아무튼 어서 그쪽에 합류하겠다.” 대외적으로 엘리자베트 통령은 민심을 살피러 시찰에 나섰다고 알려졌다. 실상은 전국에서 교묘하게 기사단을 조금씩 차출하여, 국민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군부대를 꾸렸다. 순전히 기병으로 이루어진 천오백 명의 별동대였다. 물경 수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맞붙는 전쟁에서 천오백의 기병대는 그다지 가치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있는 편이 나았으며, 엘리자베트는 조금이라도 앙리에타를 도와주기 위해 직접 별동대를 이끌기로 했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틈을 타서 엘리자베트는 적군의 배후를 급습할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적군은 크게 당황하겠지. 전투 도중 배후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것만큼 끔찍한 사태는 없었다. 장갑과 깃발을 브르타뉴군의 물건으로 위장하느라 여태 시간이 걸렸다. 오늘에서야 준비를 완료했다. 이번 전쟁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절대로 알려져선 안 되었다. “응, 그래. 당장 내일이라도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부탁해.” “아아. 지각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통신을 끊고 곧바로 기병대의 선두에 올랐다. * * * “오늘도 목책을 만들고만 있어?” “예. 적군은 근처 숲에서 목재를 보급해오고 있습니다.” 앙리에타가 전령의 보고에 한숨을 쉬었다. 친구에겐 당장 전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정작 앙리에타 본인은 부정적이었다. 마왕군은 아무래도 야전을 공성전으로 만들어버릴 속셈 같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망루들이 세워졌고 목책이 배치되었다. “심지어 토산까지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일년을 바라보고 장기전을 펼치겠다는 걸까요. 어느 순간부터 대군을 유지할 수 없게 될 텐데, 이상하네요.” 롱그위 성녀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성녀의 말에 동조하며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급이 여의치 않은 현 상황에서 적군이 계속해서 오만 대군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약탈이든 뭐든 어떻게든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대군을 잘게 쪼개야만 하겠지. 그때가 바로 브르타뉴군이 승전을 거둘 날이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은 점이 없건만, 적군은 마치 장기전을 바라보듯이 진영을 요새화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결과적으로, 앙리에타는 친우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 바로 그날 밤에 앙리에타는 장군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이 깬 것이었다. “전하! 적군이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잠기운이 덜 발생한 상태로 앙리에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눈가를 비비며 되물었다. “……도하라니? 무슨 소리야.” “정찰병의 급보입니다. 전하, 적군은 부교와 뗏목을 동원하여 마르네 강을 넘고 있습니다.” 앙리에타의 머리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찰나에 해결되었다. 앙리에타가 잠옷 차림으로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빌어먹을,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구나!” 그녀는 나삼에 망토만 걸치고 재빨리 뛰쳐나갔다. 시종들이 황망하여 제발 갑옷을 걸치라며 간청했지만, 앙리에타 여왕은 귀찮은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낮이라면 속이 훤하게 비추었겠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달빛도 없군. 노렸어.” 앙리에타가 작전막사에 들어갔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 장수들이 전원 모여 있었다. 장수들이 일어서서 경례를 하기 전에 앙리에타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절차는 생략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상석에 앉았다. “보고해.” “예. 야간 정찰을 맡은 정찰조 중 하나가 적군이 마르네 강을 도하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시야가 어두워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아무리 적어도 삼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눈속임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현재 정찰조를 다시 보냈습니다.” 막사 안에는 마광석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왕의 나신이 망토 틈새로 슬그머니 비추었다. 하지만 주군의 살결에 신경을 쓰는 장군은 전무했다. 전투가 코앞에 들이닥쳤음을 브르타뉴의 장수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대들의 왕이 명령하나니, 이제 회의는 필요없다. 당장 부대를 출진시켜. 적군이 도하를 완료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예!” 장군들이 일어서서 막사를 나섰다. 롱그위 성녀만이 여왕 곁에 남아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전하. 저들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망루를 세우거나 목책을 만든 건 전부 눈속임이었어. 부교와 뗏목을 만드는 걸 위장한 거지. 쯧, 설마 결전을 피할 줄이야.” 시종들이 허겁지겁 갑옷을 가져와서 앙리에타에게 입혔다. 앙리에타는 시종일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녀석들의 목적은 우리와 싸우는 게 아니야.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거다. 회전을 벌일 것처럼 화려하게 치장해둔 것은 기만책이었고.” “파리시오룸을…….” 롱그위 성녀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가?” “황태후를 풀어줘서 협력자로 만들 속셈이겠지. 파리시오룸에는 아직도 프랑크 애국전선의 잔당이 남아 있을 터. 그들이 협조해서 성문을 열어주기로 사전에 계획되었을 거야.” 그제야 롱그위 성녀는 깨달았다. “전쟁이 아니라 정략으로 우리군을 위협하겠다는 것이군요!” “아아. 전쟁은 수단에 불과했어. 애당초 전투를 벌일 마음이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앙리에타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역시 부사령관보다 단탈리안이 군대를 이끄는 모양이네. 딱 그 녀석이 떠올릴 법한 발상이야. 하지만, 우리의 정찰조를 너무 우습게 봤군.” 여왕은 시종한테서 검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도하가 완료되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놈들이 가장 허약한 순간이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적군부터 깨부숴주겠어. 롱그위, 출진이다. 따라와!”   00287 꼭두각시 전쟁 =========================================================================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장군들 앞에서 단호하게 말했으나 앙리에타는 내심 조급했다. 대군은 강물을 건널 때 가장 허약해진다. 아홉 살짜리 어린애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도 적군은 도하를 시작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 즉……. ‘충분히 방비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다.’ 앙리에타가 막사에서 걸어나가 애마에 올라탔다. 이미 군중에서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브르타뉴군은 부사관들의 지휘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이루었다. “밤을 겁내지 마라! 마법사들이 그대들의 앞길과 동료를 밝혀주리라! 동료에게 지나치게 접근하지 말 것이며, 지나치게 떨어지지도 말 지어다! 명령을 등불로 삼아 밤을 헤쳐나가라!” 앙리에타가 군진을 돌아다니며 직접 병사들을 복돋우었다. 병사들은 그때마다 투구를 벗어 흔들거나 횃불을 흔들며 자랑스러운 여왕 전하에게 호응했다. “앙리에타 전하 만세! 만세!” “여신이시여, 여왕을 수호하소서!” 야간에 전투가 임박했음에도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그들에게 영웅이었다. 수백 년의 숙적인 프랑크 제국을 정벌한 군주가 바로 저 분이지 않은가! 근위대장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가 씩씩하게 고했다. “제1진과 제2진의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전하. 당장이라도 출진할 수 있습니다.” “음.” 앙리에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들이 명령을 받고 곳곳에 흩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순식간에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여왕은 조급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부대의 선두로 갔다. “연설은 생략한다. 즉시 출격하도록.” “예, 전하. 나팔수는 출진을 알리라!” 근위대장이 나팔수를 향해서 소리쳤다. ─ 부우우우. 뿔나팔이 길고 음산하게 밤하늘에 울렸다. 처음에는 한 자락으로 이어지던 뿔나빨 소리는 양옆으로, 앞뒤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료의 소리에 잠이 깬 것처럼 뿔나팔 수십 개가 한밤의 공기를 흔들었다. 소수의 수비군만 남기고 전군이 출진했다. ‘도하하는 와중인데도 충분히 방비가 되어 있다면……역시 진심으로 강을 건너려는 것이겠지. 우리군을 피해서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게 목적이다.’ 앙리에타가 뒷머리를 한데로 묶으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근위대와 함께 전체 병력을 선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만에 하나 적군이 기만책을 쓴 경우야.’ 이때, 마왕군은 어디엔가 병력을 매복시켜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마도 아군이 도하하는 적군의 꼬리를 공격하는 순간을 노리겠지. 매복해 있던 병력이 튀어나와서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도하인가, 매복인가. 어느 쪽이든 충분히 가능하다……. 한 인영이 앙리에타 근처에 바짝 다가 붙었다. 이 인물은 군마가 아니라 붉은색 늑대에 올라타 있었다. “어휴. 아닌 밤중에 웬 난리래.” “……아가레스.” “꼬맹이는 밤에 자야 키가 쑥쑥 자라는데 하여간 생활습관부터 잘못되었어. 바르바토스 애송이가 밤톨이만한 거에 다 이유가 있어요.” 마왕 아가레스였다. 그녀가 크게 하품하면서 중얼거렸다. “공중도 조심해라. 가미긴이라는 마왕은 와이번을 엄청 끌고 다니거든.” “공중에서…… 그렇네. 하늘에서 공격해오는 방법도 있었구나.” 앙리에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밤이라 시야가 어두운데 공중에서 와이번이 급습까지 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실제 피해보다 병사들의 동요가 훨씬 더 큰 문제이리라.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에 빠지자 아가레스가 손쉽게 해답까지 건네주었다. “마법사들한테 행여나 와이번이 강습하면 마법으로 빛을 내서 그놈들 눈부터 멀게 만들라고 명령하고.” “과연.” 대응책은 즉시 마법사 전대에 하달되었다. 앙리에타가 질문했다. “아가레스, 저들이 복병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전투에 나설 때 단 한번도 적의 의도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 오만방자한 대답. 하지만 앙리에타는 수긍했다. 아가레스가 합스부르크에서 쫓겨와 망명을 요청했을 때, 앙리에타 여왕은 시험삼아 아가레스의 실력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몬스터 부락을 어린애 팔 비틀 듯 가볍게 전멸시키는 모습에서 앙리에타는 상대방의 무력을 인정했다. 이후 아가레스는 줄곧 객장(客將)으로 앙리에타 곁에 남았다. 앙리에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레스는 능히 단신으로 군을 상대할 수 있다.’ 적군이 매복을 준비해놨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지간한 복병쯤은 아가레스에게 맡겨도 괜찮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아가레스가 이곳에 있는데 적군이 매복책 따위를 썼을 가능성이 적다. 복병을 따로 숨겨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군을 두 쪽으로 나눈다는 걸 뜻한다. 아가레스의 눈앞에서 병력을 나눈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역시 도하가 목적일까……. “전하! 보고를 올리나이다!” 앞서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돌아왔다. “적군, 마르네 강을 도하 중입니다!” 앙리에타 여왕이 혀를 찼다.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재차 정찰조를 파견한 까닭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적군의 병력을 정확히 보고해!” “예. 사만 이상입니다, 전하!” 저 앞에 사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집결했다는 소리를 듣자 공기가 어딘지 적막해졌다. 브르타뉴군은 정예병 중 정예병이었지만 대군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 “부교가 완성되었고, 이미 뗏목들로 병력을 옮기고 있습니다. 약 오천은 저편의 강변에 옮겨져 있습니다.” “흐응. 그럼 이쪽 편에 남은 병력은 삼만오천 정도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전하!” 이걸로 확실해졌다. 적군의 목적은 도하였다. 벌써 오천 가량의 병력이 강을 건넜다. 복병을 따로 마련해둘 여유 따위는 없겠지. 설령 복병이 있을지라도 그 숫자는 일만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그럼 전혀 대단한 위협이 못 되었다. “전군, 속도를 높여라!” 아가레스라는 대비책이 있는 이상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도 좋겠지. 여왕은 그리 판단하고 명령했다. 병사들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횃불이 무수하게 진영을 밝히고 있었다. 정찰병의 보고대로 부교가 완성되었다. 다른 부교도 두 개나 건설되고 있었다. 키가 언덕처럼 큼직한 트롤들이 강에 들어가서 다리를 놓았다. “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양분되어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물어 뜯어라!” “예, 전하!” 지휘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아직 프랑크에 들어오지 못했을 친구를 떠올렸다. 통령이라는 직무마저 잠시 내려놓으며 자신을 도와주러 왔지만, 아무래도 친우는 헛고생을 하게 생겼다. 승패와 상관없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겠지. ─ 부우우우우. 재차 브르타뉴의 뿔나팔이 울렸다. 친우에게 단탈리안의 목을 선물하자, 하고 앙리에타가 생각했다. 포도주를 밤새도록 주고받는 것이다. 최고로 감미로운 술자리가 되리라. 그 순간을 위해서 오늘밤은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한다……. * * * 마왕군이 도하를 시작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소식을 전해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직후에 마법수정구에서 빛무리가 꺼졌다. “어라. 반(反)마법이네요.” 옆에서 함께 소식을 듣던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는 통령 제1비서이자 6서클 마법사인 유리아였다. 하프 엘프인 유리아는 마법에 정통했다. “여기까지 오는 마법까지 차단하려면 상당히 광범위하게 반마법을 걸어두었다는 건데……이상하네요. 마법사를 수백 명 동원하지 않는 이상에야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마왕군이 마법사를 수백 명이나 끌고 왔다는 얘기인가?” 엘리자베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급보를 듣고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악몽의 여파인지 머리가 사방에서 죄여오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설마 그런 무식한 방법을 썼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통신마법을 끊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아마도 공중에서 반마법을 펼쳤을 거예요. 그리폰이나 와이번에 올라탔을 것입니다.” “마법사들을 태워 공중에 보낸다라. 마족들이나 쓸 법한 수작이군…….” 엘리자베트가 쓰게 웃었다. 국가 차원에서 그리폰과 와이번을 기르는 데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군부대로 활용하기에는 아직 연구가 부족했으며, 결정적으로 마왕군과 싸우는 데는 써먹지 못했다. 마물들은 마왕에 복종하니까. “설마 정말로 당장 전투가 일어날 줄이야. 조금 더 빨리 출발할 것을 그랬어.” “귀족들의 눈을 속이고, 시민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수천의 군대를 모은 것이에요.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이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주진 않는다……그것이 안타깝군.” 엘리자베트가 이끄는 별동대는 현재 합스부르크-프랑크 국경 지대에 도착해 있었다. 밤이 깊어 막사를 세워두고 취침에 들어갔다. 엘리자베트 통령과 유리아 비서는 한밤중에 전해져온 소식에 눈을 뜬 것이었다. “각하. 마왕군은 왜 마르네 강을 도하했을까요?” “지도를 봐라.” 엘리자베트가 탁자에 놓인 군사지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파리시오룸 근방의 지리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르네 강을 도하해서 그대로 행군하면 바로 파리시오룸에 도착한다. 중간에 세쿠아나 강을 한 번 더 건너야 하지만, 이미 부교와 뗏목을 준비해두었다면 역시 쉽게 도하할 터이다. 반면에 앙리에타에겐 도하할 뗏목조차 없지…….” 엘리자베트가 강줄기를 짚어나갔다. 손가락 끄트머리는 이윽고 프랑크 제국의 황도, 파리시오룸에서 멈추었다. “앙리에타에겐 마왕군을 영격할 수단이 없다. 마왕군이 느긋하게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것을 강 건너편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이다. 파리시오룸에서 시가전을 벌이든가, 이대로 파리시오룸을 포기하든가.” “아아……그렇군요. 도시 안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것은 기사단에게 무척 불쾌하겠네요, 각하.” 기사단의 위력은 말에 올라탔을 때 발휘된다. 시가전은 기사단의 장점이 모조리 사장되어버리는 전쟁터이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시오룸의 남쪽은 북쪽에 비해 성벽이 튼튼하지도 않다. 공성전을 벌이기에도 적이 부담스럽지. 하지만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딱히 큰 문제가 없다. 황제와 황태후를 빼낼 여유 정도는 충분할 테고, 재차 회전을 강요하면…….” 그 순간,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엘리자베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와 함께 시선이 지도 위를 빠르게 훑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달라지자 유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통령을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의 입술 사이로 침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아니……하지만 어떻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엘리자베트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유리아. 브르타뉴군은 조운선으로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 안 그런가?” “예, 맞습니다.” “조운선은 어디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을까.” 유리아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것까지는 자신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정보를 공유한 적이 없습니다.” “앙리에타가 과연 잠재적인 반란분자들이 숨어 있는 파리시오룸에 식량을 비축했을까.” “……아니요.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여차하면 반란분자들이 불을 질러버릴 수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유리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식량창고는 파리시오룸이 아닌 어딘가, 틀림없이 강변에 건설되어 있을 것이다. 도하를 예상하지 못했으니 아마도 북쪽 강변이 아니라 남쪽 강변에 따라 설치했겠지.” 엘리자베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마왕군은 강을 건넜다. 만에 하나, 그 식량창고가 있는 요새가 남쪽 강변 어딘가에 위치한다면…….” 유리아는 입을 벌렸다. “군량이군요! 군량을 불태우는 것이 적의 목적입니다, 각하!”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렸습니다.   00288 꼭두각시 전쟁 =========================================================================                        “확실하지는 않다. 먼저, 정말로 군량고가 남쪽 강변에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또한 군량고의 위치는 극비로 취급되어 있을 터. 마왕군이 그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 역시 적다.” 엘리자베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마왕군이 정보를 얻었다면 위험하다. 마왕군은 틀림없이 파리시오룸으로 진격하는 척 위장하겠지. 앙리에타는 황태후와 황제를 놓치면 안 된다. 파리시오룸으로 달려가서 황태후와 황제의 신변부터 확보할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는 군량고가 만약 파리시오룸이 있는 곳과 똑같은 방향에 지어졌을 때이다. 마왕군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그 경로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굳이 최악의 경우를 입에 담지 않았다. “식량을 잃어버릴 경우 앙리에타는 계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약탈이 자행되겠지. 프랑크 제국에서 브르타뉴에 대한 증오심이 순식간에 커져버린다. 아니, 단탈리안이 노리는 것은 그런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각하. 군량고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앙리에타 전하가 알지 못할까요?” 유리아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아예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마왕군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왕군은 정말로 파리시오룸을 노리는 걸 수도 있다. 파리시오룸인가 군량고인가, 어느 쪽도 확실하지 않은 이상 앙리에타는 군을 한곳에 집중시킬 수 없다…….” 엘리자베트는 혹시나 모르므로 마법수정구를 복구해볼 것을 명령했다. 유리아는 진땀을 흘리며 반마법을 돌파하려 노력했다. 이십 분이 지나고 유리아가 기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송구하오나…….” “복구가 안 되는가.” “예.” 엘리자베트의 한숨이 깊어졌다. 전쟁터에서 적의 의도를 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때때로 치명타로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눈치 채면 승률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이쪽에서 알려주는 것이 불가능했다. “7서클, 아니 8서클의 마법사가 반마법을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본국의 마법전대를 동원하면 가능하겠는가?” “죄송합니다. 마법전대를 모두 동원해도 어려울 수준입니다. 고위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서른 명 이상의 마족이 보조하는 듯합니다.” 엘리자베트는 인간계와 마계의 마법전력 차이를 절감했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양육할 수단이 부족했다. 지나치게 재능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적은 마탑이 최근 몇 년 들어서는 어째서인지 합스부르크 북부로 넘어가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마법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길게 한탄했다. “우리가 아무리 서둘러도 파리시오룸까지 닷새가 넘게 걸린다. 그때는 이미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났을 터다. 유리아, 우리에게는 친우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겠구나…….” “최대한 행군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군마에 지속적으로 체력 회복 마법을 걸어주면 이틀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사흘에서 나흘이 걸리겠지. 엘리자베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공격해오는군요, 부사령관 각하.” “주군. 소녀를 놀리면 재밌는가?” 라우라가 뺨을 부풀렸다. 햄스터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당연하지요. 세상에서 라우라를 놀리는 게 가장 재밌습니다.” “정말이지, 주군은…….” 라우라가 투덜거렸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부사령관으로서 체통을 지키라고 충고했겠지만, 전투를 코앞에 두고 군단장들은 전부 자기 부대로 돌아갔다. 지금 이 막사에는 라우라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 고블린 전령들이 대기하고 있지만 무시해도 좋겠지. 원래라면 전령을 쓸 필요없이 마법수정구로 연락하지만 말이지. 현재 이 지역에는 광범위한 통신 방해 마법이 걸려 있다. 가미긴이 직접 와이번에 올라타 공중에서 절찬리에 반마법을 전개하는 중이다. 적군도 아군도 마법통신은 불가능하다. 통신을 방해하는 목적은 교란이다. 외부와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은 불안해한다. 하물며 그 인간이 삼만의 병력을 이끌고 일국의 운명을 책임진 군주라면 심리적으로 대단히 압박을 받겠지. 나는 전방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브르타뉴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횃불을 보아하니 전군을 끌고 온 모양이군요.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이럴 거면 매복군을 준비해둘 것을 그랬습니다.” “주군, 농담이겠지. 소수의 복병을 준비해봤자 마왕 아가레스에게 전멸할 뿐이다. 시간 벌기조차 안 된다.” “일만 이상으로 복병을 마련했다면 어떻습니까?” “그럼 우리는 일만이나 적은 병력으로 브르타뉴 기사단의 일제 돌격을 맞이해야겠군. 소녀가 기억하기로 저것보다 훨씬 적은 기사단에 주군은 초토화 당한 경험이 있다마는. 자신이 있는가?”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간 라우라에겐 당할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르바토스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군요.” “바르바토스 각하도 각하이지만, 베르시 준남작의 역할도 중요하다. 제때 시간에 맞추어주면 좋으련만.” 우리군은 보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브르타뉴군이 배수진을 친 것을 보고 라우라가 내뱉은 말이 있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는다.’ 배수진이란 무엇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쪽과 한판 붙겠다는 의지였다. 라우라는 상대방이 단기결전을 열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자 결심했다. 그녀는 먼저 브르타뉴군의 군량창고가 어디 있는지부터 탐색했다. 파리시오룸에는 군량고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인되었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정보를 전해준 덕분이었다. 파리시오룸에는 군량고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지는 제도 근방의 요새들……문제는, 파리시오룸 근처에 크고 작은 요새가 자그마치 열일곱 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많은 요새를 일일이 점령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라우라는 적진을 살펴보고 말했다. ‘조운선으로 군량을 운반하는군. 군량고는 강변에 위치해 있다. 주군, 강줄기에 맞닿은 요새가 몇 군데 있는가.’ ‘여섯 개군요. 음, 확실히 경우의 수가 줄었습니다.’ 내가 만족하며 미소를 짓자 라우라는 도리어 눈썹을 찌푸렸다. ‘여섯 개도 여전히 많다. 북쪽 강변이 아니라 남쪽 강변에 위치한 요새를 추려봐라.’ ‘그렇게 하면 네 군데로 줄어듭니다만……왜 하필 남쪽입니까?’ 라우라가 즉답했다. ‘우리군은 합스부르크 북부에서 공격해왔다. 경로상 파리시오룸의 북쪽으로 진군할 수밖에 없지. 주군이라면 적군이 다가오는 쪽에 군량고를 두겠는가, 아니면 반대 방향에 군량고를 두겠는가?’ 그 말대로였다. 후보가 열일곱 개에서 네 개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나는 바싸고에게 부탁해서 물의 정령을 풀었다. 조운선의 뒤를 쫓아서 군량고를 역추적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과연 앙리에타 여왕은 용의주도했다. 조운선들은 어느 한곳에만 정박하지 않았다. 상류에 있는 요새부터 시작해서 하류에 있는 요새까지, 조운선들은 차례대로 정박해서 물건을 날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건이 뭔지 알 수 없게 위장해놨다. 네 곳 중 하나만이 진짜로 식량을 운반하고 있겠지. 이제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싶어 내가 의견을 내밀었다. ‘정령들을 시켜서 습격해보지요.’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 소란이 일어나면 우리가 군량고를 찾고 있음이 적에게 알려진다. 저들은 우리의 의도를 끝까지 모르고 있어야만 한다. 흐음. 주군은 정말로 전투에는 재능이 없군.’ ‘……직접 확인해볼 수 없으면 무슨 수로 군량고를 알아냅니까? 그냥 찍을려고요?’ ‘상상력을 발휘하라, 주군.’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악동처럼 짖궂은 미소였다. ‘굳이 우리가 알아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 ‘브르타뉴군은 스스로 군량고가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의아해하며 질문하자, 라우라는 가만히 지켜보면 알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군은 브르타뉴군의 별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랑크 동북부에서는 '안전세'를 명목으로 군량미를 보냈는데,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번번이 중간에 적군한테 빼앗겼다. 별동대가 순짜 기사들로만 이루어져 소수의 호위대로는 감당하기 불가능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가져온 식량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라우라는 숲에서 목재를 공급해오라고 명령했고, 그걸로 진영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벨레드 형님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어이, 부사령관 아가씨.’ 회의시간. 벨레드 형님이 벌떡 일어섰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자, 벨레드 형님이 라우라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댁이 바르바토스 각하랑 단탈리안의 애인이래도 내 할 말은 해야겠수. 제정신이오?’ 라우라가 덤덤하게 시선을 넘겨 받으며 대꾸했다. ‘저는 언제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자부합니다. 벨레드 장군.’ ‘흐. 브르타뉴의 애새끼들이 우리네 보급로를 번번이 털어먹고 있소. 장기전을 펼치는 것까지 말리진 않겠지만, 댁은 몰라도 우리는 먹을 게 없으면 싸우지를 못하거든?’ 벨레드 형님이 으르렁거렸다. 형님은 애당초 인간이 사령관을 맡는다는 것에 가장 격렬히 반대한 마왕으로서, 바르바토스만 아니었으면 반란을 일으켜도 진즉에 일으켰을 것이다. ‘호위병력을 늘리든가 그게 안 된다면 식량이 동나기 전에 적군을 깨부숴야 할 거 아니오. 그런데 부사령관 아가씨는 태평하게 나무를 배어와서 목책이나 쌓으라니,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아가씨가 저놈들이랑 싸우기 무서워서 겁쟁이처럼 틀어박힌 걸로 보여.’ ‘……하아.’ 저편에 앉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벨레드 형님은 끄떡하지 않았다. ‘부사령관 아가씨. 어디 설명 좀 해보시오. 미리 경고하건대, 만약 그럴듯한 대답이 안 나오면 나는 그냥 내 부대라도 이끌고 공격할 거요. 쫄리면 당장이라도 보급로에 호위병력을 추가하든가.’ ‘불가합니다, 벨레드 장군.’ 라우라가 손에 깍지를 꼈다. ‘보급로는 계속해서 약탈당해야 합니다.’ ‘……아가씨는 분명히 아까 전에 자기가 제정신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혹시 내 귀가 비루먹어서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본관은 제정신입니다.’ 벨레드 형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식량이 떨어져가는데 장기전을 치루라고? 어이, 아가씨. 아무래도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병법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아가씨가 입을 닥쳐야 하는 쪽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지.’ ‘군량이란 상대적입니다.’ 라우라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게 일주일치 군량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일 적군에게 하루치 군량만 남았다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아군은 그저 적군보다 군량이 많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 아닌가! 저놈들은 강으로 계속해서 식량을 보급받는데 우리는 육로가 병신이 되었다!’ 벨레드 형님이 일갈했다. 상위 마왕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았을 텐데도 라우라는 얼굴에 표정이 털끝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브르타뉴군은 배수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로막힌 형태입니다. 달리 말해, 저들은 육로로 보급을 받지 못합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여기서 본관이 질문하겠습니다. 벨레드 장군, 브르타뉴군의 별동대는 우리의 식량을 약탈해갔습니다.’ 라우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들이 약탈한 식량을 어디로 운반하겠습니까?’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시선을 돌려보니 파이몬이었다. 파이몬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군량창고로 향할 거와요. 그곳에 모았다가 보급할 생각으로!’ ‘맞습니다, 파이몬 군단장. 별동대들은 약탈한 식량을 창고에 비축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관은 약탈을 허용하는 대신 별동대의 뒤를 추적했습니다.’ 라우라가 벨레드를 바라보았다. ‘이미 군량고가 위치한 요새를 파악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 요새를 불태우는 일입니다. 벨레드 장군. 보다시피 본관은 제정신입니다.’ ‘…….’ ‘본관은 용감한 병사를 무척 좋아합니다. 벨레드 장군께서는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몸이 불끈거리시는 것 같으니, 특별히 가장 화끈한 싸움을 맡겨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왕 아가레스를 상대해주십시오. 배신자 아가레스입니다. 더없이 즐거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벨레드 형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만 보면 순수한 천사나 다름없었다. 물론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사형선고였지만. ‘사양하지 않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장군님.’   00289 꼭두각시 전쟁 =========================================================================                        ‘자, 잠시만. 아가씨. 아무리 나라도 아가레스를 감당할 수는 없어!’ ‘이제 와서 겸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라우라가 싱글벙글거렸다. ‘장군께서는 일개 부사령관도 무시할 만큼 대단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아가레스는 일신의 무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브르타뉴의 객장. 벨레드 장군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아니면……혹시, 객장을 상대할 자신도 없으면서 본관의 지휘에 간섭하신 것입니까?’ 벨레드 형님이 땀을 뻘뻘 흘렸다. ─ 휙. 형님이 고개를 돌렸다. 제발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내 쪽을 쳐다본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이미 그 시선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참 전부터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아, 이 막사, 정말로 고급스러운 호피(虎皮)로 지어졌네……얼마나 비쌀까……. ─ 휘익. 벨레드 형님이 이번에는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르바토스가 어디 눈치밥으로 누구한테 뒤질 여자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형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르바토스랑 나는 알고 있거든. 라우라가 얼마나 쫌생이인지 말이다. 평소에는 대범하게 넘어가지만 그런 애일수록 자기가 정해놓은 일선이 침범당하면 얄짤없다. 봐라. 섹스하고 난 다음날 아침에 바르바토스가 사라졌다고 해서 엄청 구박하지 않았던가. 자고로 현자란 그런 여자가 화났을 때 가까이 다가서지 않는 법이다. 벨레드 형님은 표정이 절망에 물들었다. 아우에게도 주군에게도 버림받은 상황. 희망은 없어보였다. ‘저기, 라우라~.’ 만약 마왕군에 유일무이한 천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예, 시트리 언니. 말씀하십시오.’ ‘벨레드 저 아저씨가 재수없는 건 맞는데, 그래도 아가레스를 혼자서 상대하기란 불가능해. 아까운 전력 하나가 낭비될 뿐이거든. 조금 봐줘라.’ 하고 양손을 모아서 귀엽게 윙크하는 시트리. 여기서는 마왕들이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트리는 산악파의 강경파였고, 벨레드는 평원파의 강경파였다. 두 사람은 사사건건 대립해왔다. 이곳에서 벨레드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사람을 골라보라면 단연 시트리가 뽑히겠지. 그런데도 시트리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했다. 순전히 아군 전체를 생각해서 발언했다. ‘……시트리 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라우라가 한숨 쉬듯이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시트리가 저리 나와서야 라우라도 개인적인 감정을 고집할 수 없었다. ‘마왕 아가레스는 강적. 벨레드 장군님 역시 강하시나 단신으로 그녀와 맞붙는 것은 무리수입니다. 아가레스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추후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고, 고맙소. 부사령관.’ 벨레드 형님이 벌떡 일어서서 라우라한테 허리를 숙였다. 죽다 살아났다. 그런 느낌이 온몸에서 풀풀 풍겨났다. 라우라는 덤덤하게 사과를 받았다. ‘본관에게 고마울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하는지, 그 정도는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적의 동태에 유의해주십시오. 이상.’ 라우라가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각탁에 앉은 마왕들이 일어났다. 라우라가 망토를 펄럭이며 막사 바깥으로 걸어나가자 마왕들이 군례를 올림으로써 배웅했다. 지금 이 순간, 부사령관의 권위는 다시금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크흠, 크음. 저기. 시트리.’ 벨레드 형님이 시트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멀대 멧돼지?’ ‘……아까 전에 도와줘서 고맙다.’ 시트리가 미간을 좁혔다. ‘착각하지 마. 그거 너 도와주려고 한 말 아니거든? 누가 멍청하다고 욕하지 않을까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멍청하게 꿀꿀거리네.’ ‘뭐, 뭐라고?’ ‘어차피 너 혼자 나대봤자 아가레스가 할버드 한방 휘두르면 깨개갱 하고 개처럼 나가떨어질 거 아냐. 저어번에 호기롭게 아가레스한테 달려들었다가 너 오른팔 날렸다며. 멀대 멧돼지 수준이야 뻔하지.’ 시트리가 혓바닥을 내밀어서 메롱했다. 벨레드 형님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방이 아니다……스무 합은 견뎠다.’ ‘그래. 어차피 아가레스 상대할 마왕은 정해져 있어. 너랑 나, 그리고 몇 명 추가되는 정도겠지. 네가 스무 합 견뎌주면 결과적으로 내가 편하잖아. 그러니까 봐달라고 한 거지. 너 좋으라고 한 말 이니니까 꿈 깨렴, 고자 새끼야.’ 시트리가 깔깔깔 웃으면서 막사를 나섰다. 산악파의 마왕들도 숨 죽여 웃으면서 시트리를 쫓았다. 벨레드 형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얼른 다른 마왕들한테 묻혀서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벨레드 형님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언젠가 반드시 썰어줄 테다, 창녀 새끼!’ 이것이 보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이라고 할까. 라우라는 군량고를 알아내는 한편 내부를 정리했다. 달리 말해 아군의 작전목표를 명확하게 했고, 목적 달성에 필요한 내부의 힘을 한데로 뭉쳤다. 바깥과 안쪽. 둘 중 어느 하나만 무너져도 전쟁에선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라우라에게 지난 보름은 결코 의미없는 시간이 아니겠지. “벨레드 형님 말입니다. 약간 지나치게 심술궂지 않았습니까?”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사령부에 반항하는 멍청이는 이쪽에서 사양이다. 그게 아무리 강력한 병사라 할지라도.” 라우라가 냉정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각하와 파이몬 각하, 마르바스 각하가 소녀를 지지해주고 있지만 다른 마왕들은 아니다. 소녀의 지휘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인간에게 명령 따위를 들을까보냐. 내심 그런 심정도 있을 것이다.” “뭐. 부정할 수 없지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왕들은 모두 자존심 덩어리다. 파벌의 수장들이 찬성했다고 하나 쉽사리 인간 소녀의 명령에 수긍할 리 없다. 마족과 인간종은 수천 년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거듭해왔다. 종족 사이에 파인 갈등은 생각보다 깊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에 이해 따위는 필요없다.” 라우라가 푸른 눈동자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필요한 것은 실적. 더 많이 죽이고, 더 효율적으로 죽이고, 더 냉정하게 죽이는 것뿐이다. 살육행위를 방해하는 위험요소는 뿌리부터 미리 뽑아놔야 한다.” “그래서 반쯤 의도적으로 벨레드 형님을 폭발시켰습니까.” “아아.” 라우라는 일부러 장군들에게 작전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왜 보급로가 강탈당하는데도 잠자코 있는가, 왜 단기결전이 필요한 이때 장기전을 준비하는가, 왜 요새를 지으면서 동시에 땟목을 만드는가……. 장군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했겠지. 성격이 활화산 같은 벨레드 형님이 가장 먼저 폭발했다.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항명이 아니었다. 라우라가 일부러 일으킨 것이었다. “깔끔하군요, 라우라.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책략에도 통달했습니까?” “주군으로 모신 남자가 이쪽 방면의 전문가라서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저절로 익숙해지더군. 정말로 훌륭하게 악랄한 주군이다.” 이런, 말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가……씁쓸한 일이로군. 내가 가신을 이길 날은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겠지. 그날, 운명이 바뀐 밤. 나의 가벼운 도발에 넘어와서 혀를 깨물려고 한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사라지고 없다. 지금 내 옆에는 스무 살의 나이에 오만 대군을 휘어잡은 사령관만이 서 있다. 그때였다. 꾸욱, 하고 무언가가 내 오른손을 잡았다. 내려다보니 그것은 라우라의 왼손이었다. “소녀는 대단하지 않다.” 라우라는 여전히 전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공작가에서 태어나 십오 년을 골방에 갇혀 지냈다. 소녀에게 허락된 것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감옥뿐. 머릿속에서 철학과 역사를 논하며 그것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세계라며 위안했다.” 밤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브르타뉴의 마법사들이 광구(光球)를 쏘아올린 것이었다. 전장에 시야를 밝히기 위해서겠지. 아군을 향해 달려오는 브르타뉴의 군사가, 파도처럼 넓게 퍼진 기사단이 환하게 다 비추었다. “처음으로 저택에서 나갔을 때 소녀는 이미 성노예였다. 우스운 일이지 않는가. 귀족일 때는 저택에 유폐되어 살았다. 이제 드디어 저택에서 자유롭게 되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노예가 되었다. 어차피 소녀의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자유란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브르타뉴를 위하여! 여왕 전하 만세! 군사의 함성이 들려왔다. 말발굽 소리가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기사들이 비정상적으로 긴 랜스를 꼬나쥐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맞서 군단장들이 침착하게 명령했다. 오크들이 장창을 던졌다. “알고 있는가. 주군을 만난 그 순간부터 비로소 소녀의 세계는 개화했다.” 장창이 기사의 몸통을 꿰뚫는다. 종잇장처럼 인간의 몸이 구부러져서 형편없이 나가떨어진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몸뚱어리를 뒷선 군마의 말발굽이 무참하게 짓밟는다. 기사단은 동료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돌격해온다. “세상이 주군을 뭐라고 질타하든 상관없다. 악질적인 어릿광대, 모욕하는 자, 쓰레기, 어떤 식으로 불러도. 주군은 소녀에게 다만 영원토록 주군이다.” “…….” “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소녀의 명예는 오직 주군의 명예일 뿐이며, 소녀가 이루어낸 모든 것 또한 오로지 주군이 이루어낸 것에 지나지 않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왼손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았다. 내가 멀리 전장을 바라보았다. “라우라. 저는 승리를 원합니다.” “주군이 바란다면 백 번의 승리를 가져다주겠다.” 그녀가 즉답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검은 백합은 갈갈이 찢겨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절명할 것이다.” “아가레스가 죽기를 바랍니다.” “음, 두개골만은 소녀에게 선물해주기를 바란다.” “푸후.” 내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새삼스럽지만 내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신하를 얻어버렸는가 실감했다. 정말로 반칙 같은 여자가 아닌가. 양군이 격돌했다. 랜스와 장창이 엇갈렸다. 기사단의 돌격은 생각보다 효과가 뛰어나지 않았다. 우리군이 참호를 파놓고 그곳에서 방어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참호 바깥으로 장창들이 튀어나와 있자, 기사단은 그렇지 않아도 각도가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 판국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도하 지점에 참호를 판 것은 바싸고였다. 보름 동안 대치를 하는 와중에 바싸고는 정령왕을 동원해서 비밀리에 참호를 팠다. 어떻게 감히 전(前) 서열 제3위이자 정령왕을 부리는 마왕인 자신에게 한낱 땅파기를 시키느냐며 으르렁거렸지. 하지만 그 애늙은이, 뭘 시키면 의외로 잘 따라준단 말이지. 투덜거리면서 자기 할 일은 다한다. 자기 입장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이쁜가? 이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기사단이 세 차례쯤 돌격을 시도했다. 랜스만 낭비했을 뿐이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오크들의 투창에 꿰뚫려 낙마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참호와 투창의 조합은 거의 완벽하게 일제 돌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조급하겠지. 지금도 우리군은 뗏목과 부교를 사용해서 강을 넘고 있다. 이대로 도하가 완료되면 적군은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그런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을 거다. 그리고 앙리에타 여왕에게는 실로 비장의 수가 주어져 있었다. “오는군.” “저한테도 보입니다.” 한밤인데도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붉은색 오러. 거대한 늑대를 타고 할버드를 쥔, 만인지적(萬人之敵)의 군마일체――. 마왕 아가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00290 꼭두각시 전쟁 =========================================================================                        * * * “뭐가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거냐, 애송이……!” 바싸고가 무엇이든 씹어먹을 기세로 중얼거렸다. 이번 원정에서 가장 의욕 없는 마왕이 바싸고였다. 이 위인은 자기 한몸이 편안하면 만족했다. 단탈리안이 향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다면 전쟁에 참여할 일도 없었겠지. 그렇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아가레스다!” “아가레스가 온다아아!” 사방에서 마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족들은 서둘러 피하기 시작했다. 일개 병사들은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심지어 수천 명이 달라붙어도 지금 돌격해오는 자를 막지 못했다. 병졸들이 하사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참호에서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단 세 사람. 그중에 바싸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향후에 안전해지든 말든――지금 당장 위험에 처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은가!” 정말이지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아가레스를 상대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정에 불참했을 것이다. “어이. 댁은 별로 위험하지도 않을 거요. 실제로 맞붙는 건 나랑 저 창녀니까.” “바싸고는 뒤에서 제대로 엄호해주기만 하면 충분해. 헤헤.” 나머지 두 사람, 벨레드와 시트리가 말했다. 두 마왕은 각자 도끼와 사복검(蛇腹劍)을 쥐고 느긋하게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둔한 것들. 우리가 상대할 녀석이 누구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바싸고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아가레스다. 학살자 아가레스야. 너희 따위는 서른 합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게 뻔하다. 너희가 없어지고 나면 그 다음 차례가 바로 본인이거늘, 어찌 위험하지 않겠느냐!” “응. 맞아.” 시트리가 시원하게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위험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네, 바싸고!” “……빌어먹을 천치년.” 이래서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족속은 질색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식한 녀석들과 함께 싸우라니 농담도 뭣도 아니었다. 벨레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잡담을 떠드는 것은 좋은데 말이지.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외다.” “여신들이시여. 부디 단탈리안을 저주하소서!” 바싸고가 엄지를 깨물었다. 콰득, 하고 과육이 터지듯이 피가 튀었다. 하늘빛 마법진이 바싸고를 중심으로 크게 원형을 그리며 팽창했다. 사십 미터까지 확장한 마법진은, 한계에 부닥쳤는지 돌연 멈추어섰다. 그때부터였다. 마치 어미가 새끼를 치듯이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에서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서 다시금 새로이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력이 지나치게 강력하게 울렁거려 공기의 흐름이 왜곡되었다. 바람은 돌풍이 되어 마법진에 휘몰아쳤다. “휘우.” 벨레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질풍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었다. 지금 펼쳐지는 마법진은 세계에서 오로지 바싸고만이 할 수 있었다.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러하겠지. 아니, 네 개의 작은 마법진 중에서 하나라도 펼쳐낼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바싸고가 허공에 핏물을 흩뿌렸다. 하늘빛에 새파랗게 비추어진 미청년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전(前) 서열 제3위, 가장 현명한 마왕이라 불린 자가 소리쳤다. “――얼른 쳐나와라, 밥이나 축내는 종놈들.” 마법 영창이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게 천박했다. 그러나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동서남북의 마법진에서 마력이 찬란하게 폭발했다. 팔과 다리가 질풍을 꿰뚫고 나타났다. 그 인영(人影)의 숫자는 모두 더해서 넷. 붉은 머리의 여인, <불의 정령왕>. 푸른 머리의 여인, <물의 정령왕>. 녹색 머리의 여인, <대지의 정령왕>. 하얀 머리의 여인, <바람의 정령왕>. 단 하나만 소환되어도 인간계에 능히 격변을 일으킬 만한 존재가 넷이나 소환되었다. ─ 어머나, 다들 이게 얼마 만이야? ─ 웬일이래니. 쫌생이 구두쇠 양반이 우리를 한꺼번에 부르고 말이야. 내 기억력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245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데. ─ 불쌍하게도……언니는 벌써 노화가 왔나봐요. 2455년이 아니라 2454년이에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2454년 67일 7시간 48분이죠. 푸른 머리의 정령왕이 눈썹을 찡그렸다. ─ 너 기억력 좋아서 잘났다, 얘. 그런데 그거 알아? 너 정말 재수없어. ─ 젊음을 질시하는 것은 노인의 특권이지요. 그걸 권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예에, 물론 저는 그런 의미에서 권리가 언니한테 있다는 걸 인정해요. ─ 어머나. 너희 정말 기운이 넘치는구나. ─ ……. 정령왕들이 소환자를 무시하고 잡담을 떠들었다. 오직 하얀 머리의 정령왕만이 조용하게 침묵을 지켰다. ─ 그런데 너희 화장이 너무 안 되었다, 얘. 언제 어디서든 소환될 수 있게 미리 준비해둬야지 그렇게 떡질이 되어서 어떡하니? ─ 너처럼 뇌수까지 분을 칠하지는 않았으니까 참견하지 마. ─ 맞아요. 언니는 태생이 못 생겨서 화장빨로 무마해야 할지 모르지만 저는 자연미인이라 그런 거 하나도 필요없거든요. 정령왕들이 싱글거리는 낯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 어머나, 못생긴 년들이 말본새도 더러워라. ─ 남이사. 만년 노처녀 주제에. ─ 한번 붙어볼래요? ─ ……다들. 사이좋게. 바싸고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벌써부터 두통이 몰려왔다. 이래서 웬만하면 네 정령왕을 한꺼번에 소환하기 싫었다. 그 결심은 이천 년이 넘도록 꾸준히 지켜졌으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단탈리안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바싸고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역소환시키기 전에 내 곁으로 집합해라.” 정령왕들이 잡담을 뚝 그쳤다. 그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싸고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소환사를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 없으리 만치 딱딱한 시선이었다. ─ 에에. 딱히 역소환시켜도 상관없는데? ─ 우리 부른 거 보니까 딱 심각한 사태인 게 뻔하지 뭐. ─ 무척 불쾌하네요. 어디서 같잖게 협박질이에요. ─ ……주제 파악. 필요. “제기랄! 정말로 역소환하고 계약 끊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집합해!” 바싸고가 이빨을 악 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정령왕들이 투덜거리며 바싸고한테 느릿느릿하게 다가갔다. ─ 저 봐. 얘는 동료의식이란 게 없어. 툭하면 계약이 어쩌고 저쩌고. ─ 으휴, 정이 붙을래야 붙을 수가 없다니까. 옛날에는 정령사들이 안 이랬는데. ─ 어쩌겠어요? 소환자가 까라면 까야죠. ─ ……횡포. 혁명, 절실. 정령왕들이 나란히 대열을 이루었다. 다들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만연했다. 일하기 싫어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놀고 있는데 가족 행사에 불려온 방구석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보통 정령왕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삼만 광년쯤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시트리와 벨레드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떨떠름하게 수군거렸다. “……나. 바싸고가 왜 항상 전쟁에 나서기 싫어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아아. 지금까지 겁쟁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만, 그 나름대로 절실한 사정이 있었던 거로군.” 만약 마족들이 이 모습을 목격했다면 바싸고는 권위고 체면이고 땅바닥까지 내려갔겠지. 바싸고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냉큼 전투를 끝낼 속셈으로 명령했다. “적수는 마왕 아가레스다. 기억해야 할 점은 단 한 가지. 너희가 상대했던 그 어느 용족보다 강력하다. 유일한 위안점이라면 마법을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이며, 비극적인 사실은 마법을 쓰지 못함에도 어느 용족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이지. 요컨대 괴물이다.” 그제야 정령왕들은 표정이 다소 진지해졌다. “우리의 아군은 두 명이다. 저기 보이는 마왕이지. 너희의 임무는 저 두 명을 원호하고, 서로 협조하고 보조하여, 어떻게든 최대한 길게 시간을 버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아가레스를 처치하는 편이 좋겠으나 일단 불가능하다고 여겨라.” ─ 어머나.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면서 싸움에 나섰어? 쫌생이 양반이 어쩐 일이래. 누구한테 협박이라도 당했어? “이제부터 개인적인 잡담은 금지한다.” 정령왕들이 뺨을 부풀리면서 뾰로통하게 소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 일에 한해서만큼은 바싸고가 옳았다. 벨레드와 시트리는 이미 무기를 바로잡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살기는 점점 다가오더니 이윽고 주변의 대지를 짓누르기에 이르렀다. 근처에서 병졸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창칼이 요란하게 부딪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주변은 조용했다. 브르타뉴의 기사단도 이곳으로는 말발굽을 몰지 않았다. 마왕군의 장창병도 자리를 피한 지 오래였다. 공기마저 숨을 죽인 듯한 착각 속에, 불현듯, 늑대의 발걸음이 울렸다. “두 명은 예상한 얼굴이고. 한 명은 의외의 얼굴이군.” 거대한 늑대에 올라탄 채 마왕 아가레스는 그곳에 있었다. “바싸고. 너마저 '그쪽'에 붙을 줄은 몰랐다.” “…….” “뭐, 좋지. 대세에 따르는 걸 탓할 수야 없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화염이 쏟아졌다. 불의 정령왕이 내뿜은 불길은 순식간에 아가레스를 덮쳤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러나 겨우 삼 초가 흘렀을 때, 화염 한가운데에서 돌풍이 일어나며 불길을 두 쪽으로 갈랐다. 화염이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검붉은 오러가 피어났다. “하지만, 본디 대세를 따르는 것은 약자들일 따름이지.”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쥐고 씨익 웃었다. “바싸고. 너가 바알 대신에 새로이 발견한 강자가 바르바토스인지 파이몬인지, 아니면 마르바스인지 상관없어. 마지막으로 질문할 기회를 주겠어.――그 녀석들, 나보다 강해?” “…….” 지금 공격은 결코 탐색전 따위가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으로서 가장 강력하게 먹일 수 있는 한방이었다.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공격이었거늘, 아가레스는 마치 촛불을 꺼트리듯 간단하게 막아냈다. 그런 아가레스가 질문한 것이었다. 만약 그쪽이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나한테 붙어도 용서하겠다고. 바싸고가 입끝을 비틀었다. “……아가레스. 나 또한 한 가지 질문하마. 너는 바알보다 강한가?” “으음? 글쎄. 어떻게 되려나.” 아가레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경우와 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맨몸으로 붙는 게 아닌 이상에야 내가 바알한테 패배하겠지. 이길 확률은 사할쯤일까. 그게 왜?” 바싸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바알을 참살했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겠지.” “……흐음. 유감이야.” 아가레스가 할버드 끝을 마왕들에게 겨누었다. 더 이상은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벨레드와 시트리가 기합을 지르며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돌려서 두 마왕의 도끼와 검을 한번에 튕겨냈다. 협공을 막아낸 직후, 아가레스는 늑대에서 뛰어내려 시트리한테 뛰어갔다. 시트리의 사복검은 평범한 무구가 아니었다. 자유자재로 길이가 늘어나기도 했고, 멋대로 휘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공격해오기도 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따라서 벨레드보다 시트리를 먼저, 라는 생각으로 단숨에 기습한 것이었다. 시트리가 이를 물었다. 타이밍을 빼앗기고 말았다. 협공이 이토록 손쉽게 실패할 줄은 몰랐다. 시트리의 표정을 조소하며 아가레스는 할버드를 휘둘렀으나――. “――오호라.” 할버드는 종잇장만한 차이로 시트리의 얼굴이 아니라 허공을 갈랐다. 아가레스가 슬쩍 아래를 확인해보자, 땅바닥에서 나무뿌리가 솟아나 자신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조금 힘을 주자 나무뿌리는 힘없이 끊어졌다. 하지만 그 틈에 시트리는 이미 멀찍이 물러섰다. 어느새 벨레드와 보조를 이루어 빈틈없이 아가레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바싸고 곁에서 대지의 정령왕이 얄밉게 웃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벨레드와 시트리가 무기를 섞는 가운데 정령왕들이 방해한다. 상대측의 전술을 알아채고 아가레스가 웃었다. “방금 깨달은 것인데……나, 용족과 마족, 인간종과 아인종, 전부 가리지 않고 적어도 한 놈 정도는 죽여봤지만. 어째서인지 정령왕은 한 번도 배어본 적이 없군. 참 기이한 일이야.” 아가레스가 할버드를 고쳐잡았다. “정령왕도 죽을 때 비명을 지르는지 어디 확인해볼까.”   00291 꼭두각시 전쟁 =========================================================================                        * * * 합스부르크 제국군. 여기에 더하여 바타비아 공화국 및 자유도시 연맹. 연합군적인 성격이 강한 군세였으나, 주지하다시피 그 내실은 약 삼만에 이르는 마왕군에 있었다. 마왕군의 핵심 전력은 언제나 오크였다. 돼지족[猪族]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마족들은 강인한 팔뚝과 용력을 타고났으며, 인간에 비해 1미터 이상 긴 장창을 너끈히 쥐어들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사단의 일제 돌격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물러서지 마라! 발걸음을 움직이지 마라!” 마왕 제파르가 소리쳤다. “하나의 성벽이 되어 파도를 막는 것이다!” 전(前) 서열 제16위이자, 평원파는 물론이고 마왕군 전체를 통틀어도 방어전의 귀재. 일찍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기사단들의 무시무시한 돌격을 막아낸 지휘관은 다시금 눈부신 재능을 뽐냈다. ─ 크훌라, 크후릅! 오크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다. 우익에서는 마왕 아가레스와 세 명의 마왕이 신화적인 결투를 재현했다. 말 그대로 언덕이 깎여나가고 대지가 파이는 싸움이었다. 아군도 적군도 감히 우익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감히 지켜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폭발이 난무해서, 제파르조차 그쪽에는 신경을 껐다. “벨레드와 시트리. 그리고 바싸고인가……믿는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우익이 뚫린다면 작전은 완전히 실패해버린다. 부사령관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짜놓은 작전 계획은 도미노처럼 섬세했다.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익이 버텨줘야만 했다. ─ 두그르륵, 두그닥, 그르륵! 말발굽 소리가 저 멀리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또 다시 돌격하는 것이었다. 마족 부관이 말했다. “각하! 여섯 번째 돌격입니다!” “나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얼마나 지났다고…….” 제파르는 반쯤 어이가 없어서 신음했다.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정녕 괴물이란 말이냐.” 벌써 여섯 번째 돌격이 이루어졌다. 전투가 시작한 이제 겨우 한 시간. 비정상을 뛰어넘어 비상식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군사의 운용이 신속했다. 심지어 지금은 어두컴컴한 야밤이었다. 인간보다 마족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간대였다. 그런데도 브르타뉴의 기마병은 광구(光球)에 의지하여 일사분란하게 돌격, 재돌격을 이루어냈다. 이쪽도 질 수 없었다. 제파르가 마음을 다잡고 지휘봉을 휘둘렀다. “마법사 전대는 물을 뿌려라! 투창병, 투석병은 창과 돌을 아끼지 마라!” “존명!” 마법사들은 기사들이 격돌해오기 직전에 대지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마력을 아껴야 했기에 일대를 늪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땅이 다소 물렁해지는 것만으로도 말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결국, 여섯 번째 돌격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 케르르륵! 케륵! 기사단이 빠지자마자 고블린들이 참호 바깥으로 뛰어나가 말뚝을 박았다. 흐물해진 땅바닥에는 말뚝이 손쉽게 들어박혔다. 이제 인간군의 마법사들이 기사단을 위해 땅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만들어주면――역설적으로, 말뚝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게 되었다. 반대편에서 앙리에타 여왕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대단하네. 땅을 눅눅하게 내버려두자니 돌격이 영 힘을 못 쓰고, 그렇다고 마법을 쓰자니 도리어 말뚝을 박아주게 되고……흐응.” 앙리에타 여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진퇴양난. 그렇게 표현해야 옳겠지. 여왕의 탄식에 근처에 있던 장군이 반응했다. “전하, 아군은 충분히 분발하고 있나이다. 피해도 거의…….” “없지. 알고 있어. 하지만 피해가 거의 없는 건 적군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쌍방에 피해가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고. 그건 정확히 적군이 바라는 바이지.” 아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피투성이 넝마가죽이 되더라도 목적을 달성하면 그것이 곧 승리이다. 그리고 적군은 도하에 필요한 지연전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범용한 지휘관이라면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버리겠지. 그러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어느 의미에서든 결코 범용하지 않았다. “밀리안느.” “예, 전하. 분부를.” “녹색 장미 기사단의 저력을 믿어보겠어.” 앙리에타 여왕은 전투가 개시하고 한 시간 만에 최강의 패를 꺼내들었다. 자타공인 대륙 최강이라 인정받는 기사단을 출격시킨 것이었다. 검주(劍主)만 두 명이 포함되어 있는 기사단은 여왕의 명령에 곧바로 말발굽을 들어올렸다. “브르타뉴의 후예들이여! 돌격하라!” “우리의 여왕을 위하여!” 기사단이 마음껏 내달리도록 마법사들이 바람의 칼날을 쏘아보냈다. 칼날은 대지를 훑으며 땅에 박힌 말뚝들을 두 동강 내버렸다. 마력을 아끼지 않는 지원사격이었다. 그 마법을 목격한 마왕 제파르는 이빨을 씹었다. “녹장미 기사단인가……! 투창병!” 제파르와 길고 긴 악연으로 얽힌 기사단이었다. 바로 저 기사단에게 제파르는 휘하의 오우거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 복수를 지금에야 이루게 되었다. “마력을 아끼지 마라. 공격하라!” “하지만 각하, 벌써부터 그러면 결전을 위한 예비 마력이…….” “눈이 달렸다면 보도록!” 제파르가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일갈했다. “지금이 바로 결전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왕군은 돌격해오는 녹색 장미 기사단을 향하여 마법을 쏟아부었다. 대지를 축축하게 만들었으며, 화염구를 쏘아보내었다. 제파르가 말한 그대로였다. 지금이 결전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명확해졌는데, 인간군 역시 눈에는 눈이라는 듯이 아낌없이 마법을 난타했다. 마흔 개의 화염구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떨어졌다.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찰나, 투명한 방어막이 펼쳐지면서 화염구를 튕겨냈다. 마족의 지휘관들이 칼을 빼들고 고함을 질렀으며,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에게 죽음이 있으라!” 기사단의 고참 기사들이 랜스를 꼬나쥐며 소리쳤다. “돌파하라! 짓밟아라――죽음을!” 그곳에 거대한 충돌이 있었다. 창날과 칼날,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치자 공기가 요란하게 떨었다. 붉은 피가 사방에서 난자했다. 말발굽이 오크의 얼굴을 짓밟았다. 투구는 두개골째로 바스라졌다. 장창이 기병의 가슴을 꿰뚫어 등가죽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크아아악! 크흐아아악!” “크후르, 크후프릅!” 비명과 신음이 뒤섞여 폭발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언어도 없었으며, 마족의 언어도 없었다. 오로지 피범벅이 된 짐승의 포효만이 울려 퍼졌다. 군마는 사나운 이빨로 오크의 어깨살을 와락 뜯어물었고, 오크는 낙마해버린 기병의 내장을 송곳니로 찢어발겼다. “죽어! 크아아악, 죽으란 말이다!” “크프라하알라!” 살점을 뜯어물은 자가 인간이든 마족이든 무슨 상관인가. 무기들이 땅바닥에 우수수 내팽개쳐졌다. 쇠붙이들이 떨어져서 내는 쇳소리에 귓속까지 멍멍했다. 여왕의 명령에, 마왕의 명령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마땅할 것들이 주저없이 생명을 불태웠다.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곳에서――. “진형을 유지하라! 크윽, 대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쉬지 말고 달려라! 돌격이다! 브르타뉴에 영광을!” 기사단은 기어코 장창병진을 꿰뚫고 말았다. 그 선두에는 검주(劍主) 마리안느 드 나제흐가 있었다. 금발의 여기사는 월도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황색 오러가 밤공기를 가를 때마다 오크의 머리통이 튀어올랐다. “전군, 나를 따르라!” 검주가 뚫어놓은 길목으로 열댓 명의 기사가 잇따라 내달렸다. 간신히 한두 명이 지나갈 것 같았던 길목은 순식간에 넓어졌다. 열댓 명이 뒤따르자 수십 명이 그곳으로 쏟아졌으며, 그리하여 수백 명이 휘몰아쳤다. 방어선이 돌파당한 것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근위 기사단! 돌격을 이어나가!” “제기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복구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앙리에타와 제파르가 동시에 소리쳤다. 여왕과 마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거칠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맞부닥친 이 순간, 틀림없이 여신은 창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중앙 방어선이 양단되었다. 일순간이나마 한 부분에서 장창병들이 도륙당했다. 기사단의 군마들은 깊게 파인 참호를 손쉽게 껑충 뛰어넘었다. 홍수에 방죽이 무너진 것처럼 수백의 기마병이 쇄도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승리를 직감한 이때. “제2차 방어선. 제3차 방어선.”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돌파당하라.” 부사령관이 내린 명령은 즉시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되었다. 제파르가 맡은 제1차 방어선과 달리, 제2차 방어선과 제3차 방어선에는 참호가 파이지 않았다. 단지 장창병들이 일렬로 여러 겹을 이루고 있었다. 이 방어선을 맡은 두 명의 군단장이 일제히 지휘봉을 올려들었다. “전군, 양옆으로 갈라지세요.” “기사단에게 중앙을 터주어라.” 파이몬과 마르바스. 두 군단장은 특출나게 지휘에 능숙하지 않았다. 공격에 있어서는 벨레드나 시트리보다 못할 것이고, 수비에 있어서는 제파르보다 떨어지겠지. 그러나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대부분의 마왕이 갖지 못한 장점을, 그것도 절대적인 장점을 두 개씩이나 지니고 있었다. ─ 크후르릅! ─ 케르르, 케륵! 그들이 서열 제5위와 서열 제9위에 해당하는 최고위 마왕이라는 사실. 단탈리안은 기껏해야 수십 명의 마물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명의 마왕은 수천 명에 이르는 마족에게 자유자재로 명령을 내렸다. 단순한 말 한 마디에, 별다른 전령과 지휘조차 필요없이, 거대한 부대가 움직였다. 두 번째 장점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사병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단 한번도 아군을 버린 적 없었다. 보급선이 끊겨 전군이 배고픔에 시달렸을 때도, 적지에 고립되어 필사의 행군을 이어나가야 했을 때도, 두 군단장은 병사들과 함께 모든 고난을 함께 겪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특출난 군사 지휘자가 아닐지언정――전 마족의 지도자임에 분명하겠지. 병사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명령. 병졸들이 한점의 의심없이 명령을 따르게 만드는, 절대적인 신뢰.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함으로써 군단장들은 사령부가 내린 지시를 더없이 훌륭하게 이루어냈다. “……!” 홍해가 갈라지듯 제2차 방어선과 제3차 방어선의 병력이 둘로 나뉘었다. 이미 기세가 올라버린 기사단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장창병들에게 둘러싸여 협공당할 따름이었다. 녹색 장미 기사단은 적군의 사령부를 향해서 직진했다. “안돼! 함정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앙리에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장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 지켜보기에는 기사단의 돌격에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방어선이 저절로 붕괴된 형세였으므로. “전하. 돌파가 성공했나이다. 나머지 방어선들은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적군의 사령부를 참살하고 교두보를 공격하면…….” “저게 어딜 봐서 '도망치는' 적병의 움직임이야! 나제흐 경한테 당장 명령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철퇴하라고!”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리에타 여왕은 적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적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본능적으로 철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전하, 송구하오나…….”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서 승리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통신 마법이 반마법에 방해를 받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지금도 저렇게 마법들이 휘황찬란하게 오가는데.” “송구하옵니다. 통신 마법만 이 일대에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일대 전부에 간섭할 만큼 강력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는데……겨우 통신만 차단했다고?” “예. 송구하오나.” “누가, 그런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짓거리를.” 앙리에타가 입을 서서히 벌렸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려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앙리에타가 지휘봉을 꾸욱 쥐었다. 반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면 당연히 통신뿐만이 아니라 각종 마법을 차단해야 옳았다. 어차피 차단하는 것, 아예 이쪽의 마법전력을 묶어두면 훨씬 더 이롭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적군은 오직 통신만을 끊었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충분히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죽음의 기사들이여.” 정 반대편. 마왕군의 사령부에는 금발의 여인과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중 여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 불리는 인간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기사단의 돌격을 막아세워라.” 그 순간, 사백 개의 대검들이 대지에서 솟구쳤다.   00292 꼭두각시 전쟁 =========================================================================                        ─ 푸그르르! 수십 마리의 말이 구슬프게 비명을 질렀다. 땅에서 치솟은 대검들이 뱃가죽을 일직선으로 그어버린 것이었다. 군마의 질기고 튼튼한 가죽이 힘없이 갈라지며 희여멀건 창자를 와락 뱉어냈다. “카아아악!” 군마들이 자기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여 흙바닥에 처박혔다. 기마병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흔 명이 넘는 병사가 자신의 애마와 함께 땅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먼지가 피어오르며 육중한 장갑의 병사들이 나뒹굴었다. 이들은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단 일격에 정예병력 수십이 몰살당했다. 어쩌면 기사단을 칭찬해야 할지도 몰랐다. 불의의 습격을 사각에서 당했다. 그런데도 피해는 고작 수십 명.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로 대검을 피한 것이었다. 평범한 기병대였다면 지금 시점에서 이미 반토막이 나버렸겠지. 하지만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앙리에타 여왕은 칭찬을 입에 담지 못했다. “자아. 어디 진득하게 춤을 추어볼까요.” “화살 세례를 퍼부어라. 무얼, 화살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쿤쿠스카 상회에서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희소식을 전달하마.” “예하 군단장들에게 명령한다.――적군을 압살하라.” 파이몬이, 마르바스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처참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기습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기사단에게 공세가 쏟아졌다. 앞쪽과 양옆, 세 방향에서 화살과 돌무더기 그리고 마법이 쇄도했다. 기병들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하마(下馬)하라! 말의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 방어해!” “바보 같은 놈, 여기서 돌격을 멈추어봤자 화살받이가 될 뿐이다!” 부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돌진해!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녹장미 기사단이 뚫어놓은 길목을 통해서 계속하여 기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와서 기사단이 방향을 선회하여 후퇴한다면, 뒤쫓아오는 아군과 맞부닥치게 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지겠지. 삼면 포위가 완성된 상황인데 아군끼리 혼란에 빠지다니. 자살도 그만큼 멍청한 자살이 따로 없다. 죽든지 살든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차라리 낫다. “전군, 돌격!” “죽음을 두려워 마라!” 목적지는 적군의 심장인 사령부. 그곳에 타격을 집어넣으면 이쪽이 승리를 거머쥔다. 부기사단장이 직접 최선두로 달려나갔다. 기사단이 다시금 말발굽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월도(月刀)나 곡도(彎刀)를 휘저으며 돌격했다. “훌륭하군.” 라우라가 감탄했다.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지든 마법이 들이닥치든 사정없이 나아간다. 아마 저들에게는 죽음조차 공포를 안겨주지 못하리라.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런 죽음을 달갑게 맞이하는 기사단의 모습은 이미 초인적이었다. 허나, 죽음조차 뛰어넘은 성벽이 나타난다면 어떠할까. “제4방어선. 영격하라.” 라우라가 지휘봉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병사가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제4방어선을 맡은 지휘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라우라.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다고.” 제4방어선 지휘관. 불명의 마왕 바르바토스. “우리 아이들한테 줄 먹잇감이 아주 생생하게 잘 보이거든.” 자그마한 체구의 마왕 뒤에는――사천오백의 좀비와 구울이 떼거지로 서 있었다. 썩은 악취가 풍기며 살기로 번들거리는 시체들이 차가운 숨결을 토해냈다. 넓은 평원에서 오직 이곳만이 영하로 내려간 것처럼 스산했다. 가장 더럽고 가장 추악한 군대가 그곳에 있었다. 살점이 썩어 문드러질지라도, 차마 생명체라 불리지 못할 신세에 전락할지라도,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의 영원한 군주와 영원토록 싸움을 이어나갈 것. 그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가장 순수한 전사라 불리운다. 한 좀비가 으르렁거린다. ─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가 있나니. 해골의 병사들이 음산한 마나의 파동으로 화답한다. ─ 영원토록 행군하는 발퀴레일지어다. 사천오백의 언데드 몬스터가 군가를 불렀다. 그것은 차라리 장송곡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성대가 썩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울, 입에 구멍이 뚫려 소리가 새어나가는 좀비. 노랫소리는 쉬어빠진 저음이 되어 안개처럼 땅에 낮게 내려앉았다. “좋다, 제군들. 나 바르바토스는 그대들의 영원한 고용주로서 계약을 이행한다.”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앞서 걸어나갔다. 그러자 사천오백의 몬스터가 뚜벅, 하고 발을 내딛었다. “유일한 계약을. 무서운 계약을. 전사가 영혼으로 나눈 계약을.” 바르바토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으며, 그에 뒤따라 사천오백의 발걸음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그들의 앞에 오러와 신성력을 휘감으며 돌격해오는 기사단이 비추었다. “더 많은 전투를.” 어느새 사천오백의 마물은 뛰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파도와 같은 무언가가 앞서 나가고 있었다. 새까만 물결이었다. 검은 물결은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다음 순간, 흑기사들이 형태를 갖추었다. 흑기사들은 대검을 치켜들고 질주했다. ─ 캬아아아악! 가래침이 섞인 듯한 함성이 터져올랐다.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리는 말은 이미 고함과 노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르바토스는 말했다. 어차피 그녀와 전사들은 서로 말소리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는가. 하찮은 인간이여, 좋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의 이후를 보여주마.” 기사단과 불멸의 군대가 격돌했다. 기병들은 훌륭했다. 말에 올라탄 채로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다. 좀비들은 머리가 잘려 나갔고, 군마는 말발굽으로 구울의 가슴을 치어 박았다. 그러나 이것은 목이 잘리고 가슴이 뚫린다고 해서 끝나는 전투가 아니었다. 머리가 사라져도 상체가 남아 도끼를 찍어내렸다. 가슴이 꿰뚫려도 이빨로 군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젠장! 말에 뭐가 덕지덕지 붙잖아!” 녹장미 기사단은 출격하기 이전에 성녀의 축복을 받았다. 그렇기에 효과적으로 언데드 몬스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나, 시체 조각이 되어서도 달라붙어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돌격을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부단장!” 질풍과 같던 기사단의 돌격이 점점 느려졌다. 기사들은 악을 써가며 어떻게든 군마를 이끌었다. 하지만 좀비와 구울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군마들이 피를 흘려가며 한 마리씩, 빠른 속도로 쓰러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사단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전원. 하마해서 응전하라.” 부기사단장이 월도를 고쳐잡으며 명령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녹색 장미 기사단은 최선을 다하였다. 야밤에 장창병진을 돌파했다. 적진에서 돌격을 지속했다. 전방에 나타난 언데드 몬스터에게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하고 부기사단장이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몬스터들이 삼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어느새 기사단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바르바토스가 기사단의 돌격을 멈춰세우는 동안, 파이몬과 마르바스가 포위진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일만. 기껏해야 천 명에 지나지 않는 기병 전력, 그것도 돌격이 멈추어진 병사들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 적병을 주살하라.” “예!” 기사들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한편, 부단장은 생각했다. 여왕 전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겠지.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다. 이제 와서 구원군을 보내봤자 성공할지 말지도 미지수. 의미없는 소모전이 되어버린다……부단장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부단장은 여왕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걸로 미련은 사라졌다. 그녀는 월도를 휘두르며 주저없이 몬스터들에게 뛰어들었다. 녹장미 기사단은 사천에 가까운 마물을 참살한다. 부단장을 비롯하여 기사단 칠백 명 전원이 전사한다. 이 놀랍고 장대한 최후에 대하여, 병법(兵法)은 비정하리 만치 차가운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기사단은 돌파에 실패하여 전멸했다. 그것은 여왕 앙리에타의 단기결전이 좌절했음을 의미하며. “……전군, 전선에서 물러서.” 동시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도하에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마왕군은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 이후, 마왕군은 부교를 파괴하고 강줄기를 따라 진군했다. 군대를 도하시킬 방법이 없는 브르타뉴군은 마왕군이 행군하는 모습을 건너편에서 멀찍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쟁에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었다. 녹장미 기사단을 비롯해서 꽤나 많은 숫자의 기병을 잃어버렸지만, 병력이 손상된 것은 상대편도 똑같았다. 오히려 전력비로 따지자면 브르타뉴가 근소하게 유리하겠지. 다른 한편으로 마왕 아가레스는 비록 결판을 짓지 못했으나 대지의 정령왕을 죽임으로써, 역시 유리한 입장에서 결투를 끝냈다. 이제 문제는 황도(皇都) 파리시오룸이 함락되느냐 마느냐였다. 파리시오룸에는 프랑크의 황제와 황태후가 남아 있었다. 절대로 그들을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파리시오룸을 끝까지 방어하거나 적어도 황제랑 황태후를 탈출시켜야 하는데…….” 앙리에타가 전쟁의 피로에 감긴 채 중얼거렸다. 장군들이 침체된 분위기로 여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황제는 그렇다쳐도 황태후 그 깐깐한 할망구가 우리를 따라올 것 같지는 않아.” “파리시오룸에서 농성전을 벌일 필요가 있군요, 전하.” “무슨 소리야.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 기절시켜서 납치해야지. 농성전 따위 우리에게 유리할 거 하나 없어.” 앙리에타가 한숨을 쉬었다. “황제와 황태후를 납치한 다음 서쪽으로 퇴각하겠어. 적군은 보급로가 허술하니까 감히 추격해오지 못할 터. 그렇다고 약탈을 자행하면 명분이 사라지니, 꽤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거야.” “퇴각입니까.” 장군들이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결전을 피한다는 얘기이지 않는가.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퇴각은 수단일 뿐. 저놈들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를 처단하자는 것이다. 우리쪽에 아가레스가 건재한 이상 쟤들은 마음대로 철퇴할 수가 없지. 보급로가 불안한 상황에서 철수하지도 못한 채 파리시오룸에 머물 거야.” “과연. 식량이 없이 천천히 괴사하겠군요.” 장군들이 턱끝을 끄덕였다. “그래. 어느 시점이 되면 참지 못해서 파리시오룸을 뛰쳐나올 것이고……그때 가서 우리는 다시 한번 회전을 강요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파리시오룸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황제와 황태후를…….” 어느 정도 작전이 수립될 무렵이었다. 서서히 새벽의 유리색이 하늘에 번져갔다. 밤하늘이 옅어지자,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파리시오룸이 위치한 방향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목격되었다. 바로 새까만 연기 구름이었다. “전하! 파리시오룸에서 연기가 나고 있나이다!” 장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앙리에타 여왕이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프랑크의 귀족놈들, 감히.” 앙리에타는 적군이 유독 통신마법을 골라서 먹통으로 만들어버렸는지 이해했다. 단순히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유인책만이 아니었다. 파리시오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도록 간계를 부린 것이었다. 밤새도록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파리시오룸에서는 잔재 귀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일까. 목적은 황제나 황태후, 어느 한쪽이라도 탈출시키는 것……혹은 두 명 모두를 탈출시키는 것, 그쯤인가. “빌어먹을!” 앙리에타가 지휘봉을 두 쪽으로 부러트렸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나 황태후가 적군에 합류하면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 “당장 전군을 몰아서 파리시오룸으로 향한다!” 브르타뉴군은 야간 전투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전속력으로 행군했다.   00293 꼭두각시 전쟁 =========================================================================                        * * * 앙리에타 여왕은 기병대와 함께 먼저 내달렸다. 이날 밤 돌격에 돌격을 거듭한 기병대는, 가혹하게도 강행군이라는 또 다른 역할을 맡았다. 갑옷이 뭉텅하게 부숴져 있었다. 군마는 두 시간에 걸쳐서 체력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브르타뉴의 기병대는 다시 한 번 힘을 끌어올렸다. “반드시 적군보다 앞서 파리시오룸에 입성해야 한다!” 마르네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경주했다. 브르타뉴의 기병은 신속하기로 유명했다. 조건만 같다면 적군에 비해 늦게 도착할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이미 시간이 꽤나 늦어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브르타뉴군은 이제야 행군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마왕군은 도하를 완료한 부대들부터 미리 출발하고 있었다. 전투에 두 시간 가량이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마왕군은 이쪽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움직였다……. 두 번째, 방금 전투에는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일절 참가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 병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적군의 다수가 마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인간이 눈꼽만치도 안 보이다니 어찌된 일인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공화국군은 도하 부대에 속했어.’ 앙리에타 여왕이 거칠게 몰며 생각했다. 왜 하필 인간군을 먼저 도하시켰을까. 적군의 목적이 파리시오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답은 쉽게 도출되었다. ‘도시에 안전하게 입성하기 위해서야.’ 만약 마물로 이루어진 부대가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려 든다면 시민들은 크게 혼란에 휩싸이겠지. 설령 절대로 약탈하지 않겠노라고, 우리는 마왕군이 아니라 똑같은 인류의 군대라 강조한다 할지라도, 당장에 병사의 얼굴이 오크인 것이다. 시민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쪽이 되레 이상하다. 그렇기에 인간 부대를 먼저 도하시켰다. 시민들이 편안히 입성을 받아들이도록. “단탈리안……!” 처음부터 상대방은 완벽하게 역할을 갈라놓았다. 전투력이 높은 마족 부대는 전쟁터에 배치했다. 이들이 브르타뉴군을 상대하는 동안, 전투력은 낮되 정치적으로 유용한 인간 부대가 도시로 행군했다. 본래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상이라 회자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이날 밤에 펼쳐진 전투는 전부 눈가림에 불과했다. 진정한 목적은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것. 더 나아가, 황제와 황태후를 탈취하는 것. 적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전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기병대장의 말에 앙리에타 여왕이 생각의 바다에서 깨어났다. 브르타뉴 기병대는 파리시오룸 외곽에 다다랐다. 걸린 시간은 사십 분. 군마의 체력을 무시하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린 셈이었다. “성문을 열어라!” “브르타뉴의 주인께서 여기 계신다!” 기수들이 깃발을 높이 들었다.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흑색 백합이 펄럭였다. 파리시오룸의 동쪽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다급하게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도개교는 별 수 없이 느릿느릿하게 내려왔다. “천치 같은 놈들! 얼른 내리지 못할까!”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빨리 내리면 다리가 부서질 수가 있어서…….” 기병대장들이 경비병을 윽박질렀다. 브르타뉴의 병사는 명백히 조바심에 쫓기고 있었다. 당연했다. 군주의 마음은 부하들에게 전염된다. 앙리에타 여왕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자, 휘하 장수들과 병졸들에게도 그 영향이 뻗치는 것이었다. “……후우.” 앙리에타는 부하들이 경비병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자신이 지나치게 서둘렀음을 알아차렸다. 군주는 언제 어디서나 냉정하고 침착해야 했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앙리에타가 의식적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다듬었다. 그녀는 도개교가 아니라 성벽을 쓰윽 훑어보았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가 적다. 깃발이 바람에 접혔는데도 펴두지 않았어.’ 깃발이 제대로 펴져 있는가, 아니면 볼썽사납게 접혀 있는가. 그것만 보아도 부대의 군기(軍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현재 성벽 위에는 군데군데 엉망으로 구겨진 깃발이 있었다. 깃발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서서히 새벽이 밝았는데도 파수병이 지나치게 적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동쪽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달리 말해, 파리시오룸 어딘가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병사들이 그쪽으로 차출되었다는 걸 뜻했다. ‘공화국군이 파리시오룸 남쪽을 점령했거나 적어도 일부를 점거했겠지.’ 그리고 아마도, 황태후나 황제가 별궁을 탈출하여 그곳에 합류했다……. 공화국군이 시내 일부를 점령했다면 이쯤에서 전투를 각오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마왕군의 본대가 합류하지 못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 덜컹. 도개교가 마침내 내려왔다. 기병들이 말허리를 차려는 찰나였다. 앙리에타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제군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곳에 도착했어. 이 대륙에서 제군들보다 빠른 군대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도 우리가 늦었다면 하늘을 원망할 일이지, 제군들이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야.” “…….” 기병들이 여왕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피로에 젖었으나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조급함은 실수를 낳고, 실수는 전투에서 패착으로 이어진다. 정예병일수록 무엇보다 조급한 마음을 가장 위험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병사들이 조급해지느냐 마느냐는 지휘관에게 달렸다. 지휘관에게 필요한 것은 병사들의 믿음. 설령 전황이 불리해져도 '저분께서 우리를 지휘하시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느끼게 해주는, 다소 광신적인 유대감. 그 유대감을 복돋우기 위하여 앙리에타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조국은 좁아터진 반도다. 땅은 소금기에 찌들어서 농사 짓기도 힘들지. 우리의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대륙으로, 프랑크로 진출하기를 열망했어. 자그마치 칠백 년 동안 내려온 염원이야. 그 염원을 다름 아니라 제군들이 이루어냈어.” “…….” “달리 말해, 제군들은 브르타뉴 역사상 최강이다.” 앙리에타가 투구를 벗어서 높이 치켜들었다. “감히 어느 누가 자그마한 반도의 국가가 대륙을 호령하리라 상상했겠나! 하지만 우리는, 브르타뉴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브르타뉴는 꺾이지 않는다! 제군들, 그렇지 않은가!” 기병들이 투구를 벗어들고 소리 질렀다. “브르타뉴 만세!” “여왕 전하 만세!” 연거푸 함성이 터졌다. 장수와 하사관은 여왕의 의도를 파악하고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는 동안 병사들의 마음에서 조급함이 잦아들었다.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도개교를 건넜다. “브르타뉴의 영광을 뵈옵니다.” 도개교를 건너자, 수문장이 앙리에타를 맞이했다. 프랑크인이 아니라 브르타뉴인이었다. 앙리에타가 얼마나 파리시오룸을 뼛속까지 장악했는지 입증되고 있었다. “수고했어. 보고를.” “예. 파리시오룸의 동문은 현재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 앙리에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상이 없다니. 파수병은 다 어디로 사라졌어?” “아, 그것이.” 수문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내에 큰 불이 났습니다. 경비대에서 급히 원호를 요청해서 소관의 재량으로 병사를 보냈습니다. “…….” 문득, 정체 모를 불안감이 앙리에타의 가슴에서 번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문장이 계속해서 따박따박 보고했다. “그 때문에 파수에 잠시 소홀하게 되었습니다만, 현재 병사들이 무사히 귀환하여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비상시에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철저히 방비하고 있습니다.” “……불은? 무엇 때문에 불이 난 거야?” “부두에 정박한 상선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수문장은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전시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 경비대와 성문 경비대가 협력하여 신속하게 대처했다. 인명 피해도 없었다. 자칫 큰 혼란으로 이어질 사고를 훌륭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수문장은 위대한 여왕 전하에게 직접 칭찬을 들을 기회라고 여겼겠지. 그러나 수문장의 생각과 다르게 여왕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 말고는? 시내에 아무런 일이 없었어?” “예. 소관이 알기로는 화재 이외에 별다른 사고가 없었습니다.” “…….” 앙리에타가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수문장의 어조를 들어보건대, 공화국군은 아예 파리시오룸에 접근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만일 남쪽 성문이 돌파당했거나 최소한 포위를 당했다면 응당 보고가 이루어졌겠지. 또 다른 가능성은 화재의 혼란을 틈타서 황태후나 황제가 빠져나간 것이지만……이것도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별궁에는 앙리에타가 특별히 신경 써서 경비 병력을 배치해두었다. 황태후나 황제가 탈출하면 즉각 동서남북의 성문에 협조를 요청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둘 중에 하나였다. 별궁의 경비대가 협조도 요청할 틈이 없이 완벽하게 몰살당했고, 그리하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황태후와 황제가 어디론가 탈출했거나――. “……공화국 놈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애시당초 적군이 파리시오룸으로 오지 않았거나. 앙리에타가 친위대를 이끌고 시내에 진입했다. 꼭두새벽부터 기병들이 대로를 지나치자, 시민들이 호기심과 불안감에 찬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앙리에타는 시민들을 다독일 여유도 없이 별궁으로 향했다. 황제와 황태후가 무사하냐는 질문에 별궁의 수비대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철통같이 지키고 있사옵니다.” “…….” 혹시 몰라서 앙리에타는 황태후와 황제의 안위를 확인해보라고 명령했다. 잠시 뒤, 시녀들이 돌아와서 어떠한 문제도 없노라고 보고했다. 앙리에타가 중얼거렸다. “정말 화재가 일어났을 뿐이잖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왕군은 파리시오룸 남쪽 성문을 점거할 기회가 있었다. 최소한 포위라도 할 수 있었다. 프랑크의 귀족들과 내응하여 충분히 황태후나 황제를 빼돌릴 법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남쪽 성문이 포위되지도 않았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질문만이 남았다. 공화국군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앙리에타가 피로해진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멍멍했다. ‘기껏 위험천만하게 도하를 해놓고서 파리시오룸이라는 목적을 놓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설마 녹색 장미 기사단을 끌어들여서 전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을까. 그렇기에는 너무나 장대한 움직임이었는데……잠깐, 목적이라고?’ 앙리에타가 멈칫했다. ‘파리시오룸이 목적이 아니라면?’ 앙리에타의 시선이 강줄기를 좇았다. 그리고 지도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멈추었다. 침묵이 있었다. 앙리에타는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이제 완연하게 새벽이 되었다. 저 멀리서 어두운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종이 다가와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급하게 전령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전령이 전달해준 문서에는 엘리자베트 통령이 친필로 써재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단지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친필 문서였다. ─ 군량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바스락, 하고 소리가 났다. 앙리에타의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앙리에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입끝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미소를 지으려다 실패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 틈새에서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두 시간은 늦게 보냈어. 엘리제.” 같은 시각. 브르타뉴의 군량고가 위치한 요새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국기가 꽂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렸습니다.   00294 꼭두각시 전쟁 =========================================================================                        * * * 아군의 본대가 파리시오룸 남서쪽 방면에 합류했다. 이로써 우리군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브르타뉴는 소중한 식량창고가 위치한 요새를 우리에게 빼앗겼다. 요새의 이름이 무척 길었다. 현자-제르맹-앙-레 요새였다. 기억하기도 부르기도 귀찮았다. 우리측 간부들 사이에선 <군량고>라고 멋대로 줄여서 불렀다. 보병 칠백 명과 기병 이백 명이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꽤나 견실한 수비 병력이었다. 하지만 무려 일만 명의 공화국군이 몰아닥치자 요새는 두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이곳에 대군이 몰려들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겠지. 완벽한 기습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앙리에타가 원군을 보내는 것이었지만……안 되었군. 부대가 출발하는 시점 자체가 너무 달랐다. 우리는 바타비아 공화국군을 먼저 도하시키고 재빨리 출발시켰다. 그에 반해 브르타뉴군은 전투에 발이 묶여 있었다. 두 시간 정도가 낭비되었지. 전투를 일으킨 시점에서 이미 앙리에타는 실책을 범한 것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다.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앙리에타는 과감하게 승리를 거둔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테고, 정반대로 우리는 도하하는 와중에 각개격파 당한 머저리로 묘사됐을 거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평가해준다……. 파리시오룸의 화재는 베르시 준남작에게 의뢰하였다.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났다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덜컥했다. 다행히 베르시 준남작은 피바람을 살짝 비껴나갔다. 프랑크의 애국전선과 우리군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준남작이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었다. 실제로 준남작은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앙리에타는 지금쯤 처절하게 한탄하고 있겠지. 녹색 장미 기사단이라는 최고 전력을 잃었고 군량미마저 상실했다. 이걸로 브르타뉴군은 운신의 폭이 극단적으로 좁혀졌다. 앙리에타, 너는 회전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전쟁이란 결국 속고 속이는 일이다. 브르타뉴군은 배수진을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이 회전(會戰)에 있다고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반면에 우리는 끝까지 이쪽의 의도를 숨겼다. 장기전을 치루는 것처럼 요새를 만들었고, 파리시오룸을 노리는 것처럼 도하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군량미였다. 이중의 함정에 앙리에타는 걸려서 넘어졌다. 정오 무렵. 라우라와 나는 개인 막사에 함께 있었다. 아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손에 넣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진 않았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건재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 되겠지. 파리시오룸 남서부에 새로이 주둔지를 건설하자마자, 우리 두 사람은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이제 브르타뉴군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도시에서 농성전을 벌이든지, 아니면 전면적으로 후퇴하든지.”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운을 떼면 내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작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농성전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회전의 신봉자일뿐더러, 장기적인 농성전을 위한 군량미까지 탈취당했다. 하루라도 빨리 철퇴하고 싶겠지만…….” “어디로 철퇴할 것이냐가 문제지요.” 프랑크에는 내전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파리시오룸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과 남쪽은 왕당파가 강하다. 공화주의자란 공화주의자는 싸그리 말살시켰으니 당연하다. 반면에 프랑크의 북쪽은 명실상부 공화파의 성지가 되어 있다. 내전에서 독립을 선언해버린 자유도시들이 밀집한 지역도 북부이다. 즉,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서쪽이나 남쪽으로 도망치고 싶다. 황제와 황태후를 납치하여 데리고 다니면 명목상이나마 '황제의 명령'으로 정당하게 전쟁세를 거둘 수도 있다. 합법적으로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남쪽과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다. 브르타뉴군이 남쪽-서쪽으로 후퇴하기 위해서는 어젯밤 우리가 그러했듯 강을 건너야만 한다.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라우라와 나는 저들이 도하하는 것을 얌전히 지켜볼 생각이 전무하다. “와이번 부대에게 명령해서 파리시오룸의 동태를 감시해야 한다.” “이미 가미긴을 통해서 전달해두었습니다. 부대가 절반씩 세 시간마다 번갈아가며 파리시오룸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지요.” 내 대답에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역시 나의 주군이다. 완벽한 부관이란 바로 주군을 가리킨다.” “……뭔가 주군과 신하의 역할이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 같지만요.” 주군을 부관으로 부려먹는 신하는 아마 라우라가 유일하지 않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브르타뉴군이 움직이면 와이번 감시 부대를 통해서 즉각 보고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적군이 강줄기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움직일 예정이다. 물론, 앙리에타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와이번들이 자기네를 감시하는 것을 눈치 챌 거다. “브르타뉴 여왕은 억지로라도 도하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도하를 포기할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우리에게 유리하군요.”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이 도하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를 펼칠 수 있다. 만약 저들에게 도하의 위험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부대가 있다면 이야기가 어려워지나…….” “바로 그 부대를 없애기 위해 지난 밤에 노력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라우라?” 녹색 장미 기사단. 이들은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도하가 이루어질 때 군대가 약해지는 것은 상식이지만, 녹장미 기사단은 아군의 도하를 원호하면서 적군의 공격을 너끈히 막아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밤, 다소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녹장미 기사단을 전멸시켰다. 사실 제1차 방어선에서 제4차 방어선까지 병력을 분산시키는 대신, 아예 제1차 방어선에다 전군을 집중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방어선은 돌파당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돌파를 허용했다. 그 결과 브르타뉴군은 비장의 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최고 전력이 상실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부담없이 도하에 뛰어들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하긴, 앙리에타가 이 사실을 깨달으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겠지만……. “브르타뉴군은 이제 북쪽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영역으로 앙리에타 여왕은 스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부족한 식량은 북부의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면서 보충하겠지. 그건 라우라와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 * * 정오가 지나고 지휘관들이 막사에 집합했다. 대체로 마왕들은 얼굴 표정이 밝았다. 전략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표정이 어두우면 이상했다. 다만 파이몬, 바싸고, 제파르 대장, 이렇게 세 명만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파이몬은 예전부터 라우라의 전략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승리했기에 삼가한다, 그런 느낌이 강했다. 바싸고는 그냥 심통이 난 거다. 바싸고에게 어젯밤은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다시는 아가레스랑 싸우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풀풀 풍겨났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 바싸고는 이미 아가레스 전담 마크 선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제파르 대장은 명백하게 화를 참고 있었다. “부사령관. 나는 이번 작전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소. 해명을 요구하오.” 노장의 주름살은 당장이라도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우리는 제1차 방어선이 뚫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승전을 거두었지만, 정작 제1차 방어선을 담당한 제파르 대장한테는 사전에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제파르 대장은 자신이 뚫리면 전군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분투했다. 라우라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번 작전은 제1차 방어선이 필사적으로 싸워주어야만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덜 용맹하게 싸웠을 것이라는 얘기오?” “아군에 대비책이 있는가 없는가는 천지차이입니다. 적어도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제파르 장군.” 제파르 대장이 입술을 닫았다. 납득은 간다. 그러나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파르 대장의 표정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최고의 공훈을 세운 사람은 단연 제파르 장군입니다.” 라우라가 손뼉을 쳤다. 막사 바깥에서 호족 병사가 품에 군기를 안고 들어왔다. 마왕들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제파르 대장만이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저것은…….” “예. 녹색 장미 기사단의 군기입니다.” 라우라가 손짓하자, 병사 한 명이 다가가서 깃발을 주욱 폈다. “총사령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대리하여 본관이 선언하니, 전투의 최고 공로자인 제파르 장군에게 군기를 포상하겠습니다.” “…….” 제파르 대장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그마치 칠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군기였다. 유구한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약탈당한 적 없는 깃발이기도 했다. 평범한 군기는 200골드에서 500골드 가량의 값어치를 지닌다만……녹장미 기사단의 군기는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졌다. 자신의 마왕성에 저 군기가 내걸린다면 대단한 명예였다. 제파르 대장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오백 년 전에 당한 설욕을 지금에야 갚게 되었다.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고맙소. 부사령관.” 제파르 대장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은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경례했다. 바르바토스를 주군으로 모시는 대장에게 있어 사실상 최고의 예의나 다름없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투에는 마땅히 명예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건재합니다. 본격적인 논공행상은 확실한 승리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계속하겠습니다.”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뭘 감추랴, 이번에도 바싸고였다. 내가 일부러 바싸고와 시선을 맞추어서 활짝 웃어주니 그제서야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말 귀여운 양반이라니까.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언제까지나 순수한 당신으로 남아주었으면 한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라우라가 말했다. “우리는 내일부터 파리시오룸 근방을 철저하게 약탈할 것입니다.” “응? 이제 군량은 충분하잖아. 구태여 인상 나빠지게 약탈할 필요가 있어?” 바르바토스가 반문했다. 지당한 의문이었다. 이 시대에 약탈은 일상적이었으나, 하지 않아도 좋다면 당연히 안 하는 편이 나았다. 라우라가 시선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대해서는 단탈리안 장군이 설명해줄 것입니다. 그가 이번 작전의 입안자입니다. 단탈리안 장군.” “예.”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마왕 동지 여러분께는 생소하겠습니다만, 프랑크에선 왕당파와 공화파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브르타뉴군은 왕당파에 속하고, 우리와 함께하는 바타비아군은 공화파에 속하지요.” 대다수의 마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세계의 정치 따위 관심을 가져봐서 뭐 하겠는가, 그런 얼굴들이었다. 쯧. 댁들이 월맹군에서 왜 연전연패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 년 전, 브르타뉴군을 주축으로 하여 프랑크에선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못해도 십만 명이 넘는 공화주의자가 전국 곳곳에서 몰살되었지요. 즉, 프랑크의 공화파는 왕당파에 대해 어마어마한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오심을 이용합니다.” 여전히 마왕들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00295 꼭두각시 전쟁 =========================================================================                        “증오심을 이용하다니. 더 정확하게 설명해보아라.” 마르바스가 평소처럼 차분하게 물어왔다. 이중에서 정략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마왕을 뽑으라면 단연 전(前) 서열 제5위인 마르바스였다. 아마 내 이야기를 잘 이해해주겠지. 나는 기대감을 안고 말했다. “마르바스 님. 쉽게 말하자면 프랑크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습니다.” 우선 왕당파와 공화파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왕당파가 크게 두 개로 갈린다. 브르타뉴에 적대적인 왕당파와 호의적인 왕당파가 그것이다. 보통 전자가 애국자로 취급된다. 후자는 매국노라고 불리겠지. 공화파도 무수하게 지파가 갈리지만 일단 간단하게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말해두자. 이야기가 처음부터 복잡해지면 마왕들이 쫓아오질 못한다. “프랑크에선 상당히 많은 인민이 왕당파를 지지합니다. 전체 국민의 5할 정도일까요. 반면에 공화파입니다만, 겨우 3할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지자의 비율로 따지면 왕당파가 압승하지요……하지만, 그들의 비호 세력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비호 세력?” “먼저 공화파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프랑크 내에서 공화주의자는 몰살당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든 곳이 북부입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군대를 꾸릴 여력이 부족합니다.” 북부에는 자유도시들이 들어서 있다. 자유도시, 라고 표현하면 무언가 그럴듯하지만 어차피 거대한 국가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중소 세력이다. “하지만 돈만큼은 넘쳐나지요. 프랑크 북부는 무역의 요충지인데다 곡창 지대입니다. 그 썩어넘치는 돈으로 북부의 귀족들은 방어 수단을 고안했습니다.” “용병이로군.” 마르바스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용병, 그것도 바타비아 공화국의 군대가 대다수입니다. 다시 말해 공화파를 비호하는 세력은 바타비아 공화국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내가 소위 애국전선을 비웃는 까닭이 여기 있다. 황제가 브르타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부당하다. 확실히 비난할 만하다. 그렇지만 거기에 대항해서 바타비아 공화국을 끌어들이면 어쩌자는 것인가? 장군에 멍군이라도 외칠 셈인가. 졸지에 프랑크는 대리전쟁의 싸움터가 되어버렸다. 황제파와 황태후파의 싸움, 이라고 서술하면 간단해보이지만 실상은 왕당파의 신봉자인 브르타뉴와 공화파의 수장인 바타비아가 싸웠다. 외세에 시달렸을 뿐이다. “다음은 왕당파의 차례입니다만 이쪽도 심각합니다. 이들을 비호해줘야 하는 황제는 전혀 제대로 생겨먹지 못했습니다. 드 기즈 공작을 대표로 하는 대귀족들도 멸문했지요. 결국 왕당파들은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목구멍이 텁텁해졌다. 그때 뒤에서 시종 겸 경호원으로 있던 데이지가 물컵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나는 물컵을 받아들어 단숨에 비웠다.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단탈리안. 두 부류라고 함은, 혹시 브르타뉴의 여왕에게 기대는 세력과 그러하지 않는 세력을 가리키는가?” “정확합니다.” 역시 마르바스. 좋은 의미에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내 말에서 벌써 뉘앙스를 낚아챘다. “왕당파 중에는 브르타뉴를 군주로 모셔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가 군주가 되든 좋다, 제발 끔찍한 내전만 없어져라……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왕당파를 비호하는 세력이 바로 브르타뉴 왕국입니다.” 이들은 황제와 여왕이 결혼해서 국가를 운영하길 바란다. 공동 군주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르타뉴의 여왕에게 반항하는 왕당파가 있습니다. 의기는 가상하지만 약간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지요. 이들을 비호하는 세력은 전무합니다.” “공화파든 왕당파든 외세를 뒤에 두고 있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로군, 단탈리안.” “예.”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사태를 그 지경까지 몰고간 것은 프랑크의 귀족들이다. 황제가 멍청하다고? 간단한 문제다. 황제를 버리고 황태후를 선택하면 된다.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어버리면 외국에 원군을 요청할 통로까지 막아버릴 수 있겠지. 앙리에타가 명분을 얻어서 활개칠 일도 사라진다. 하지만 귀족들은 황제와 황태후를 눈앞에 두고 천천히 간을 봤다.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게끔 유도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랬는가? 뻔하다. 황실의 권력이 강해지면 귀족의 세력이 약해진다. 반대로, 황실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귀족들은 강해진다……. 황태후든 황제든 귀족들에게 손을 벌렸다.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귀족들은 한껏 코가 높아졌겠지. 뻣뻣하게 굴면서 자기네 몸값을 불렸을 거다. 두 모자가 궁정을 개판으로 만드는 동안에 대부분의 귀족은 그저 사태를 관망했다. 화려한 저택에 들어앉아 포도주나 마셨겠지. 입으로는 고상하게 “황제 폐하는 뭘 하시는 것인가,” “황태후 폐하께서도 조금 더 자제하시는 편이” 하고 떠들면서. 단적으로 말하자. 그들에게 애국심은 없다. 만약 애국심이 있다면 그때 국가란 단지 그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국가를 말할 따름이다. 귀족들이 제딴에 진지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근엄한 어투와 고급스러운 어휘로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의 국가를 논하고 있을 때, 정작 내전에 휩쓸려서 피해를 본 쪽은 백성이다. 현자 바르톨로뮤 학살이 좋은 사례이다. 많게는 십만 명이 죽었다. 그중에는 당연하지만 열 살짜리 어린애들도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나간 어린애 앞에서 과연 귀족들이 입을 놀릴 수 있을까?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 살았다고? 농담거리도 안 된다. 결국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살았을 뿐이다. 귀족뿐만이 아니다. 앙리에타 여왕조차 그러하다. 그녀는 브르타뉴의 여왕이며, 고로 어디까지나 브르타뉴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 이쪽에서 보기엔 애국전선이나 여왕이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은 거짓말을 일삼는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속여버린다. 이것이 애국이며 올바른 행위라고……. 프랑크의 황제 앙리 3세도 그것을 느꼈겠지. 저 녀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지만, 충분히 정신줄을 놓을 만하다. 생각해봐라. 사방에서 신하들이 “소신은 국민을 위하여,” “황제 폐하를 위하여”라고 조잘거린다. 사실은 자기들 안위를 도모할 따름이면서. 진절머리가 나겠지. 이건 내 견해이지만, 황제가 앙리에타를 끌어들인 건 반쯤은 귀족들 보고 엿이나 먹으라는 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세력이든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모두를 위한다고 거짓말한다. 심지어 당사자들에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다. 그리고 위선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생뚱맞은 백성에게 돌아간다. 학살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이래서야 엉망진창이다. 뭐, 세상이 빌어처먹었다는 얘기는 식상하다. 술안주로 삼지도 못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학살 당한 사람들의 원한은 어디로 증발하는가? 틀림없이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 귀족들도, 앙리에타도, 황제도, 사실 백성들 스스로도 거짓말을 일삼았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은 귀족만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백성들도 자신과 같은 시민을, 마을 주민을 죽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속이고 있기에, 자기들이 학살을 일으켰다는 자각 자체가 없다. 왕당파 때문에 일어났다, 공화파 때문에 일어났다, 하고 싸우기만 한다. 학살에 책임을 질 의사가 아예 없는 것이다. 모두가 외면하는 사이에 희생당한 이들의 원한은 서서히 잊혀지겠지. 세대가 두 번쯤 바뀌면 '그때는 그런 비극이 있었다'라고 회상하며 남의 이야기처럼 회자되리라. 누구도 그들의 복수를 정당하게 이루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원한, 내가 대행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역사에서 망각될 원한이다. 어차피 아무도 책임지지 못할 원한이다. 어차피 버려지고 잊혀질 물건이라면, 단지 길을 지나가다 물건을 발견한 사람이 주워도 상관없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브르타뉴군은 현재 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군량미를 잃었으니 농성전을 펼치거나 후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브르타뉴군의 행동 범위를 제약하는 데 있습니다.” “행동 범위를 제약한다라.” 마르바스가 여전히 수염을 쓸면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냉철한 두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의 의도를 가늠하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간단합니다. 마르바스 각하. 우리가 왕당파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것입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지루하게 하품하던 벨레드 형님, 시트리 등의 마왕은 휙 하고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특히 벨레드 형님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뭐야? 무슨 얘기냐?’ 하고 눈짓으로 물었다. 정치적인 대화를 반쯤 졸면서 듣다가 학살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갑자기 흥미가 동했겠지. 너무나 일관적이라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학살이라니요. 단탈리안,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사와요.” 내 웃음을 불길하게 받아들인 것일까. 파이몬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살은 말 그대로 학살입니다. 주변 마을과 도시부터 시작해서 남김없이 해치웁니다. 사 년 전의 학살을 정반대로 재현하도록 하지요.” “그러니까, 왜 학살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설명이…….” “흑백 논리입니다. 파이몬 각하.” 파이몬. 너가 인간종에게 비교적 우호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너에게도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군이 왕당파를 학살한다. 왕당파에 속한 귀족과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격렬하게 반항하고자 하겠지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한테 대항할 무력은 전무합니다.” “…….” “그들에게 남은 수는 한 가지입니다. 브르타뉴의 여왕에게 도와달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지요. 브르타뉴는 왕당파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여왕은 왕당파의 요청을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합니다.” 앙리에타에게 그들은 자기를 지지하는 기반이다. 지지 기반을 외면하는 정치 세력에게 미래는 없다. “참고로 파리시오룸은 왕당파의 성지입니다. 학살이 가장 철저하게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부터 본론입니다만……과연 브르타뉴의 여왕이 파리시오룸을 간단히 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 마르바스가 주먹을 꾹 쥐었다. “도시에서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런 얘기인가!” 다른 마왕들도 눈빛이 진지해졌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졌다. “그렇습니다. 만약 파리시오룸을 방폐하고 떠나버린다면 여왕은 지지 세력을 스스로 배신하게 되는 셈입니다. 설령 도망치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왕은 자신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난받겠지요.” 비단 프랑크인만이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번엔 브르타뉴인도 여왕을 비난한다. 비유하자면 기독교도 군대가 도시를 학살할 게 뻔한데도 이슬람교도 군대의 지휘부가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무엇을 위한 군대인가, 왕당파를 수호하기 위한 군대이지 않았는가……여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겠지. “그리고 만약 적군이 빠져나가지 않을 경우입니다만, 이것도 좋습니다. 적들은 하염없이 농성전에 돌입하겠지요. 군량미를 전부 잃어버렸는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전쟁이 됩니다.” “과연…….” 마르바스가 감탄했다. 내 작전을 음미하듯 턱끝을 천천히 끄덕였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저들에게 미래는 극히 불투명합니다.” 이걸로 외통수다, 앙리에타. 군대를 살리고 싶다면 지지 세력을 버려라. 지지 세력을 얻고 싶다면 군대를 버려라. 너에게는 왕당파와 브르타뉴군 양쪽이 모두 소중한 모양이다만, 세상사란 원래 전부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간단한 진리이다. 그러나 너는 욕심쟁이지. 전부 가지려고 한다. 이번 기회에 직접 양자택일의 의미를 가르쳐주겠다. 무얼, 부담 갖지 마라. 과외비는 따로 받지 않는다. 이래 봬도 나는 제법 상냥하니까 말이지…….   00296 꼭두각시 전쟁 =========================================================================                        회의가 끝나고 각자 개인막사로 돌아가는 길. 파이몬이 나를 붙들고 구석으로 끌고갔다. 군진의 외곽에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파이몬이 손짓으로 내쫓았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파이몬은 이쪽을 노려보았다. “인정할 수 없어요!” 파이몬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저런, 너무 열렬하게 날 바라봐도 곤란한데. 나는 느긋하게 그녀의 시선을 넘겨받았다. “무엇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단탈리안, 그건 학살이에요. 무분별하고 잔인한 짓거리에요.” “무분별하고 잔인하다라…….” 내가 문장을 입에서 되풀이했다. 낱말 하나하나가 혓바닥에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파이몬은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유리병에 담긴 보라색 액체가 스스로 마법진을 그렸다. 아마도 내부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겠지. 마법 서클을 전부 잃어버린 파이몬이지만 마법약 정도는 제조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밀실이 성립되었다. 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잔인한 행위를 꺼리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왔습니다.” “소녀는 무분별하고 잔인하다고 말했사와요. 의도적으로 생략하지 말아요. 만일 대의가 있다면 학살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번 작전에 어떤 대의가 있지요?” 파이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단순히 브르타뉴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인 학살. 단순히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학살이에요!” “공화주의의 승리입니다, 파이몬.” “…….” 그녀와 내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수많은 대화가 소리없이 교차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대화가 순식간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 차악! 호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 “…….” 어느새 목이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내가 입술을 열려고 하자, 다시, 파이몬의 손바닥이 움직였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내 목이 또 한 번 힘없이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파이몬은 반복해서 손바닥을 날렸다. 그것이 여섯 번쯤 반복했을까. “위악자(僞惡者)……!” 파이몬은 이를 악 물고 있었다. “일부러 가장 최악의 방법을 고안해내다니! 소녀가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큰 착각이에요! 단탈리안, 당신은 위악자예요.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 변명할 것도 없이 악한 행위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변명을 하고 있다……정의를 위해서, 신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고.” “…….” “그러니까 당신은 변명할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짓은 틀림없이 악이다, 여기에 변명이 개입할 틈은 전혀 없다……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역사에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단지 당신의 개 같은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서!” 내가 뺨을 쓰다듬었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본 적이 얼마만일까. 아니, 이런 식으로 맞아본 경험은 없었다. 적어도 당장에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나는 다만 얼얼한 뺨을 만지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내 입에서는 저절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요? 제가 잘못되었습니까? 파이몬.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월맹군을 일으켰어요. 수십만 명이 죽어나갔습니다. 알겠습니까? 수십만입니다.” 어린애, 마족, 인간종, 아인종, 거기에 마왕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렇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미안하다. 나에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었다. 당신들은 어쩔 수 없이 죽어주어야만 했다.' 제가 그렇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파이몬, 대답하십시오. 그들이 저의 변명을 들어주어야만 합니까?” “…….” “나의 사정 때문에 당신들, 수십만의 생명이 죽어야 했다는 말이 애당초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하! 그거 참 대단한 사정이로군요.” 입가가 이죽거렸다. 의도적으로 이죽거리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가, 어조가, 표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움직였다. 좋다. 어디 마음대로 움직여봐라. 뺨을 맞고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이겠지. “어디 십만의 생명 앞에 가서 말해보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당신들은 희생되었으며, 따라서 당신들의 죽음은 필수불가결했다고. 국가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정의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공화주의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하십시오……개소리입니다! 전부 개소리입니다! 당사자들이 납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손이 파이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수십만의 죽음이 필수불가결한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절대로! 어디 피해자들 앞에서 그딴 식으로 입을 놀려보십시오……제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맹세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자를 제가 전부 죽여버릴 것입니다!” “…….” “내일부터 파리시오룸의 부속 도시들은 모조리 불타오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겠다. 선한 자와 악한 자도 가려지지 않는다. 오로지 앙리에타와 아가레스를 없애기 위한 작전이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다. “내 행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이해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파이몬, 알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십만을 죽였고, 이것이 유일무이한 진실이며――절대적으로 확고해야만 하는 진실입니다!” “…….” “이건 당신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죽인 십만의 생명과 나 사이의 문제입니다. 멋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나는 파이몬의 손목을 내리끌었다. 그녀는 내 힘에 떠밀려 땅바닥에 넘어지듯이 주저앉았다. 무력으로 따지면 그녀가 압도적으로 우월한데도. 온몸에서 당장 약을 피워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망토를 뒤적거려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파이프 구멍에 연초를 꾹 눌러 담으려고 했지만 그만 놓쳐버렸다. 담뱃대가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다시 주워들었지만 또 놓치고 말았다. “제기랄.”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금단증상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빌어먹을 기분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담뱃대를 다섯 차례 정도 들었다가 떨구었다. 병신 같았다. 아니, 정말로 병신인가……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나는 파이프를 짓밟았다. 작센에서 도기 장인이 특별히 제작한 사치품이었다. 간단하게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땅바닥에 쑤욱 박혔을 뿐이다. 짜증이 풀리기는커녕 화가 더 쌓였다. “후우.” 미쳐서는 안 된다. 미치는 것 또한 변명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분노를 참아라. 눈을 감고 호흡해라. 간단하게 생각하라. 손이 떨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수십만의 생명을 도륙한 학살자는 알고보니 미치광이였습니다, 라는 결말 따위 용납할까보냐. 미치는 것도 권리이다. 나한테 그런 권리 따위는 없다……. 조금은 침착해졌다. 나는 파이몬한테 등을 돌리고 걸어나갔다. 무언가가 망토를 잡았다. 아마도 파이몬의 손끝이겠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듯 망토를 잡아당기던 것은 이윽고 멀어졌다.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가 이미 개인 막사에 들어와 있었다. 막사에서는 데이지가 책을 읽고 있었다. 녀석은 내 모습을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쓰지 않고 모포에 털썩 누웠다. “칠칠맞게 약이라도 잃어버렸나요, 아버님?” 데이지가 말했다. 나는 데이지한테 등을 지고 몸을 구부리고 있었으므로 목소리는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제 약은 안 한다.” “제 기억력이 맞다면 아버님이 약을 끊겠다고 다짐하는 게 정확히 마흔여섯 번째입니다. 개도 세 번이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는데, 작심삼일에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 “너 잘난 거 알고 있으니 닥쳐라.” 조용해졌다. 데이지가 책장을 부드럽게 넘기는 소리가 막사에 간간히 퍼졌다. 모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잠이 별로 필요없는 마왕의 체질이 원망스러웠다. 잠이라도 퍼질러 자면 기분이 환기될 텐데 말이다. 가슴만 답답했다. 내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술을.” “하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지가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의 책략은 확실히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구태여 공화파와 왕당파의 구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마족들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그것만으로도 브르타뉴의 군주는 도시를 책임져야 하는 압박에 시달릴 것입니다.” “……멍청하기는. 그래서야 외국이 개입해버리지 않느냐.” 브르타뉴군을 압박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앙리에타 여왕을 고립시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공화주의자들이 왕정주의자에게 복수한다. 그런 명분이 있어야 주변국들이 개입해올 가능성이 적어진다. 단순히 마족에 의한 학살이 되어서야 반(反) 월맹군이 또 다시 결성될 뿐이야…….” “과연. 하지만 버니시아나 사르데냐는 그렇다 쳐도 카스티야 왕국은요?” “상관없어. 카스티야가 개입하면 이번 전쟁은 본격적으로 국제전이 되겠지. 사르데냐와 버니시아에게 원호를 요청하고, 프랑크 자체를 난장판으로 몰고 간다……나쁘지 않아…….” 물론 최선의 경우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어버린다. 카스티야 왕국, 버니시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전부 나와는 인연이 일절 없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참전한 지금 정도가 딱 좋다……. “그걸 위해서 황태후나 황제를 손에 넣는 편이 좋겠지……명분을 확실하게 가져가는 거다…….” “그렇다면 아버님, 둘 중 어느 쪽이…….” 데이지가 자꾸 뭔가를 질문했다. 나는 꼬박꼬박 대답해주었지만 점점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미 눈을 감고 있는데도 또 다른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귀로 무언가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 * * 작전이 결정되고 바로 다음날. 약탈을 빙자한 학살이 실행되었다. 이 시대에 약탈이란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군은 정도가 심했다. 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여자와 어린애도 죽였다.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우리의 대답은 확고했다. “사 년 전에 너희가 죽인 이들도 그렇게 빌었을 터이다.” 문답무용. 파리시오룸 근방의 마을과 도시에서 인간들이 묶인 채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무에 묶여서 파리시오룸의 남쪽 성문 앞에 놓였다. 성벽 위에서는 브르타뉴의 군사들이 명백히 당황한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사 년 전, 무고한 인민을 단지 공화주의자라는 명목으로 학살한 전쟁범죄자들이다. 그 범죄를 조장한 자가 브르타뉴의 여왕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내가 성량 확대 마법도구를 통해 소리 높여 말했다. “브르타뉴의 군주여! 만일 그대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들을 대신해서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만일 다섯 시간이 지나도 대답이 없다면 이들에게 학살의 죄를 묻겠다.” 예상대로라고 할까. 다섯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분주하게 오갔지만 앙리에타 여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인가, 여왕이여.” 나무통에 매달린 오십 명의 인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절망에 찬 자, 눈을 감고 끊임없이 기도문을 올리는 자, 악을 쓰다가 지쳐 고개를 떨군 자, 수십 가지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들 곁에 대기하고 있는 아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처형을 집행하라.”   00297 꼭두각시 전쟁 =========================================================================                        비명과 울음이 터졌다. 인간들이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 “살려주세요!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목숨만, 제발 살려주세요!” 오십 명이 제각기 색다르게 울부짖었다. 마치 연습을 하나도 맞추지 않은 오케스트라가 불협화음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이 엉망진창의 교향곡에 내가 새삼 감동할 리 없었다. 내 명령은 번복되지 않았다. ─ 화르륵. 아군 병사들이 장작에 불을 지폈다. 횃불에서 옮겨탄 불길은 점점 더 커졌다. 비명 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화형은 꽤나 번거롭다. 마른 장작도 잔뜩 모아야 하고, 무엇보다 처형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앞으로도 수백 명을 죽여야 하는 일정을 고려하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내가 화형을 선택한 까닭은 단순하다. 잔인하니까. “시발, 풀어! 당장 풀어――!” “자애롭게 굽어 살피시는 페르세포네여, 부디 제 혼과 백을 안내해주시옵고…….” “흐아악! 흐아아악! 크흐아아악!” 마을의 촌장. 지주. 세금관리인의 수하. 자경단장. 작은 사회에서는 귀족으로 군림했을 인간들이 서서히 하반신부터 태워졌다. 불길에 시야가 꾸불꾸불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연기에 숨이 막혀 컥컥거리다가, 누군가는 정신을 잃었고, 누군가는 끝까지 울었다. 그러나 최후는 똑같았다. 모두 바싹 태워진 해골이 되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 성벽에 선 브르타뉴군이 침묵했다. 화형에는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눈에 잘 띄었다. 장작이 불타오르면서 피워내는 연기는 능히 멀리서도 관찰할 수가 있었다. 파리시오룸 시민들한테도 똑똑히 보이겠지. 성벽 저 너머에서 인간들이 실시간으로 죽어나가고 있다……그렇게 실감을 느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나의 목적은 파리시오룸 시민들에게 압박을 주고, 그러함으로써 앙리에타에게 압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여섯 시간마다.” 내 경고가 새까매진 상공에 높이 울려 퍼졌다. “남쪽 성문에서 화형을 거행하겠다. 브르타뉴의 군주가 자신의 죄에서 도피하면 도피할수록 희생자는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자비란 없다.” “…….” “잘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브르타뉴의 인간들이여. 얼마나 거대한 죄악의 씨를 그대들이 뿌렸는지. 어떤 형태로 그것들이 수확되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희생을 외면할 수 있을지…….” 그날부터 하루에 네 번씩 화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도 구분하지 않았다. 낮에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으며, 밤에는 새빨간 불길이 멀찍이서 보였다. 파리시오룸 남쪽에는 매캐한 불내음이 잦아들 틈이 없었다. 내 예상대로 브르타뉴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고 표현해야 올바르겠지. “파리시오룸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어.” 가미긴이 말했다. 그녀는 와이번 부대를 이끌고 하늘에서 도시를 감시했다. 화형식이 시작되고 이틀째부터 시위가 일어났다. “좋군요.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던걸. 처음엔 서른 명쯤 되나 싶었는데 지금은 사백 명.” 시위대가 빠른 속도로 커졌다. 시민들이 불안에 떤다는 증거였다. 가미긴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의 요구는 간결했다. 지금 도시 바깥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당장이라도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은데 발목이 붙잡혔다. 사흘, 나흘, 닷새.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전투가 한 차례 일어났다. 파리시오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생뚱맞게도 파리시오룸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것도 바다에서 해전이 벌여졌다. 지상이 틀어막히자 브르타뉴군은 강을 통해서 보급선을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하구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성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면, 브르타뉴군은 틀림없이 강을 통해서 보급하려고 시도할 터.” 라우라가 지적했다. “세쿠아나 강 입구에 함단을 매복시켜두면 큰 소득이 있을 것이다.” 브르타뉴는 육지에선 둘도 없는 강군일지 몰라도 해군은 특출나지 않았다. 반면에 바타비아 공화국은 사르네야 왕국과 더불어 최강의 해군을 보유했다. 쉰 척이 넘는 대형 갤리선이 보급선단을 기습하자, 브르타뉴 해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라앉은 전함이 크고 작은 배까지 합쳐서 스무 척. 나포된 보급선만 서른 척. 라우라의 예측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식량을 가득 실은 보급선이 도리어 우리의 것이 되어 오고 있다는 보고에 지휘관들이 크게 웃었다. 그중에는 경악과 존경이 담긴 시선으로 라우라를 바라보는 마왕도 적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냥 예언자나 다름없구만.” 벨레드 형님이 투덜거렸다. 이제 라우라는 단순히 군명에 의지해서 권위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부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주변에 납득시켰다. 하지만 라우라는 주변의 열광에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표정에도 변함이 없었다. 당연하게 일어날 일을 당연하게 예상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본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이로써 브르타뉴군은 자체적으로 보급 받을 수단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리시오룸에 남아 있는 식량을 죄다 긁어모았겠지만, 글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도망치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도망쳐야 한다.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는 건 최악의 수다. 누구보다 앙리에타가 잘 알고 있겠지. * * * “아군의 함대가 바타비아 해군에 패배했어.” 앙리에타 여왕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장수들은 소리를 죽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군량고가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여왕은 본국의 해군에 연락했다. 더없이 신속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그것이 좌절되었다……. “전하, 하오면 보급은…….” “바타비아 해군을 돌파한 함선은 전무해. 제군들. 우리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순간, 브르타뉴 왕국군의 운명은 정해졌다. 앙리에타가 씁쓸하게 말했다. “통신 방해가 왜 쉽게 풀렸나 했지. 황궁의 마법진을 이용해서 뚫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적들이 일부러 반마법을 해제한 거야. 우리가 해군에 원군을 요청하도록…….” “전하. 설마 적군이 그것까지 예상했겠습니까?” 한 장군이 반문했다. “어느 정도 우연이 섞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나, 제군들. 이 전쟁에는 우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요새를 만들고 도하해서 군량고를 공격하기까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장단에 놀아났지……. 빌어먹을 이야기야.”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장기전이라고 생각했더니 황제를 노린 단기결전이었다. 단기결전이라고 생각했더니, 이쪽의 군량미를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장기전을 우리한테 강요하고 있어…….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군.” “…….” 세간에선 이 전쟁을 꼭두각시 전쟁이라 불렀다. 브르타뉴의 괴뢰가 된 프랑크 황제, 마왕군의 괴뢰가 된 합스부르크 황제, 두 꼭두각시가 전쟁을 벌인다는 풍자였다. 앙리에타는 다른 의미에서 이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각본을 썼다. 마왕군이든 브르타뉴군이든 모두 그 각본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언제까지 인형극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악몽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여왕의 질문에 장수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앙리에타가 예상하기로 이제 스무 일을 버틸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 아끼고 또 아끼면 한 달 반일까. 농성전에서 한 달치 식량은 비축한 물량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장수들이 현재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지, 앙리에타는 반쯤 시험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적게는 보름. 아무리 많아도 두 달을 버티기에 모자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군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에타는 제장의 판단이 자신과 비슷함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장군들이 우수하다는 것은 더없이 기뻤다. 우수한 장군들을 이끌고도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없이 절망적이었다. 그렇기에 앙리에타에겐 쓴웃음을 짓는 것 이외엔 별 도리가 없었다. 한 장군이 망설이며 고했다. “이대로 농성전에 돌입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 적도가 포위망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남쪽 성문이 봉쇄되었을 뿐이지만, 언제 나머지 성문까지 틀어막힐지 모릅니다.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결단하셔야 합니다.” “아니. 정반대일 수도 있어.” 앙리에타가 말했다. “저들은 일부러 남쪽 성문만 막아둔 거야. 도망치려면 도망쳐보라는 뜻이지. 제장들. 우리가 브르타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향해야 한다. 중간에 세쿠아나 강을 건너야만 하지. 그리고 세쿠아나 강 저편에는 저들이 버티고 있어.” “……우리가 도하할 때를 노려 공격해온다, 라고.” 장군들이 신음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얄미운 점은 이제 와서 바타비아의 해군이 등장했다는 것이지. 우리가 도시를 비웠을 때 저들은 함단을 이끌고 파리시오룸을 기습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구태여 파리시오룸을 함락할 필요가 없다. 적도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군요, 전하.”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들의 목적은 파리시오룸이 아니야. 전쟁의 승리조차 아니다. 그저 우리, 브르타뉴를 파멸시키는 것만 노리고 있어.” “…….” “농성을 하면 우리는 말라죽는다. 군대가 사라진 브르타뉴는 강대국도 뭣도 아니야. 단숨에 대륙에서 가장 약한 국가로 전락해버리겠지. 하지만, 농성을 하지 않고 탈출해도 브르타뉴는 이념을 잃어버린다. 신민들은 우리를 의심하게 되겠지. 그것 역시 국가의 죽음이다…….” 앙리에타가 중얼거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파멸이 기다리고 있어. 눈치 채보니 막다른 골목이다……. 끈질기고 끔찍한 적이야.” 끈질기고 끔찍하다. 그 표현에 장군들은 무심코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대로 된 회전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녹장미 기사단이 전멸했으나 인원으로 따지자면 천 명이 안 되는 피해였다. 하지만, 눈치 채보니 어느새 전쟁이 끝나 있었다. 이런 전쟁이 가능하리라고는 브르타뉴의 장수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군을 둘로 나눈다. 파리시오룸에 남아서 농성을 벌일 부대와 이곳을 탈출할 부대를.” “전하.” “적어도 도시를 버렸다는 소문이 돌지 않을 정도는 병사를 남겨야겠지.” 장군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장군들 역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병사를 희생양으로 남겨두고 떠난다는 걸 의미했다. “어차피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노병과 신병을 중심으로 남겨.” “전하, 하오나 그것은…….” “그렇다면 제가 남겠습니다.” 그때 롱그위 성녀가 말했다. 여왕과 장군들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도시에 남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 “우리가 전부 떠나서야 병사들이 버림 받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래서야 하루조차 농성전을 이어나갈 수 없겠지요. 버림패에 의미가 없어져요.” 롱그위 성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함께 남으면 병사들도 버림받지 않았다고 느낄 겁니다. 전하. 윤허해주십시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내가 직접 남을 것이다. 나는 이미 브루노에서 병사를 버렸어.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아.” “전하께서는 브르타뉴를 위해 남아주셔야 합니다. 죄책감은 군주에게 있어 훌륭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휘말려서 대사를 그르쳐서야 본말전도입니다. 브르타뉴를 대륙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전하의 의무이자 사명이지요. 벌써 잊으셨나요?” “…….” 여왕이 침묵했다. 모두가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가운데, 롱그위 성녀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저 역시 목숨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버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병사들과 함께 탈출하겠습니다. 여신께서도 그 정도의 자비는 저희에게 허락해주시겠지요.”                     00298 꼭두각시 전쟁 =========================================================================                        * * * 브르타뉴군이 탈출을 감행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움직이는가' 싶었다. 포위가 이루어지고 아흐레가 흘렀다. 퇴각하기로 결심했다면 이틀째가 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학살에 대한 공포가 파리시오룸을 뒤덮기 이전에 도망치는 게 옳았다. 앙리에타 여왕에게도 변명거리가 생겼을 거다. “그럴 줄 몰랐다.” “설마 거기까지 잔인하게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변명할 수 있다. 부주의하다는 비난이야 쏟아지겠지만, 적어도 학살을 방조했다는 혐의에선 꽤나 자유롭겠지. 정치적인 위험도 떨어진다.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치세는 유지된다……. 하지만 앙리에타는 밍기적거렸다. 그것도 열흘에 가깝게. 어중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황도 파리시오룸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지나치게 아까웠는가, 아니면 해군이 보급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계산 착오였다. 과연 당사자는 알고 있을까. 너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앙리에타. “서둘러 추격조를 편성해야겠군요. 바타비아군을 황도에 남깁시다. 그 정도면 충분히 황도의 민심을 통제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군사들이 도시를 방어하고 있는데?” 가미긴의 지적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네? 무슨 말씀입니까. 브르타뉴의 여왕이 도시를 탈출했다면서요.” “군사가 전부 여왕을 뒤쫓은 건 아니야. 빠져나간 군사는 대충 이만오천. 아직 사천 정도가 파리시오룸을 지키고 있어.” “설마……군대를 둘로 나눈 것입니까?” 이럴수가. 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앙리에타의 노림수였다. 사천의 군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자신은 파리시오룸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주장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별 쓸모없는 군사를 중심으로 남겼으리라. 생색을 내기 위해서 지휘관만큼은 높은 직위의 인물이 남았을 테고. 여왕 자신은 정예 병력을 고스란히 빼내서 퇴각……우리가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사이를 틈타서 냉큼 후퇴해버린다. 만약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내버려두고 추격한다면, 그대로 반전하여 파리시오룸에 남은 군대와 함께 우리를 협공한다. 쫓아오지 않으면 퇴각해서 좋고, 쫓아오면 유리한 입장에서 회전을 전개하니 좋다. 그런 계획이겠지. 이 얼마나. “얼마나 어리석은 수작입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뱃속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걸작이었다. 아아, 이건 걸작이었다! 병력도 살리고 명분도 살리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앙리에타는 내 수업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설마 나를 깔보고 있는 것일까? 프랑크 내전에서 당했다고 하여 이쪽을 괄시하는 것인가. 최악의 수를 골랐구나, 여왕이여. “부대를 둘로 나눈 게 뭐 어때서? 수가 적긴 해도 쟤네가 농성전에 들어가면 적어도 사흘은 걸릴 텐데.” “가미긴. 우리가 공성전에 돌입하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뭣하러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함락합니까. 여왕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없습니다.” 가미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럼 황도를 뒤에 내버려두고 추격하려고? 후방이 불안해.” “제 말을 곡해했군요. 가미긴. 저는 굳이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함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와이번을 통해서 인쇄물을 뿌리십시오. 거기에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여왕은 그대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파리시오룸 시민들이여, 만약 그대들 또한 학살당하기 싫다면 이제 와서라도 스스로 브르타뉴군의 압제에 대항하라. 용감하게 일어선 이들에 한하여 우리는 무조건적인 관용을 선물하겠다…….” 나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파리시오룸을 바라보았다. “허나 끝까지 브르타뉴의 학살자들을 옹호한다면 결코 용서란 없을지어니. 이것은 마지막 경고요. 마지막 자비로다.” 우리군은 즉시 선전 공작을 가동했다. 인쇄물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대신 성량 확대 마법을 십분 활용했다. 성벽 바깥에서, 와이번을 올라타고 하늘에서, 쉴 새 없이 항복하라는 목소리를 쏟아부었다. 열흘 가깝게 대규모 화형식이 집행된 데다가 믿었던 브르타뉴의 여왕까지 도망쳤다. 심지어 퇴각하면서 시내에 남은 식량 대부분을 긁어모아서 가져갔겠지. 학살에 대한 공포, 신뢰에 대한 배반,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 파리시오룸 시민들에게 선택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도시의 안쪽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쇳소리와 고함이 멀리까지 들려왔다. 파리시오룸에는 팔만 명의 시민이 살았다. 그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사천 명의 비숙련병으로 막을 만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우리군은 남쪽 성문에 장사진을 차려두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눈앞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데 가만히 있기 좀이 쑤셨는지 벨레드 형님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봐, 아우. 지금 성문을 두들기면 바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사령관 아가씨……아니, 부사령관 각하께 한번 말씀드려보게나.” “형님께서 직접 제안하시지 그러십니까?” 벨레드 형님이 손사레를 마구 쳤다. 단단히 라우라한테 혼난 모양새였다. 내가 작게 키득거렸다. “저게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에 혼란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 우리가 얼씨구 좋구나 하고 입성하는 순간,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습격한다……. 가능성은 적지만 무시할 수도 없지요. 부사령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으음.” 벨레드 형님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우라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지만. 라우라는 도시에 소란이 일어나자 바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반대했다. <던전 어택>에서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그러니까 엘리자베트가 여황이 되어 프랑크를 침공한 시나리오가 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주축으로 한 프랑크-브르타뉴 제국은 잘 버틴다. 하지만 끝내 용사 때문에 수도 파리시오룸까지 밀려난다. 그때 파리시오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용사는 신나게 도시 안으로 진격하지만 알고보니 속임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하여 정신없이 패주한다. 여기서 북쪽 성문으로 도망치느냐 동쪽 성문으로 도망치느냐에 따라 히로인 루트가 갈리는데……음. 아무튼 의심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내가 맞았다. 한밤에 일어난 방화는 브르타뉴군이 의도적으로 저질렀다. 문제는 시민들이 정말로 봉기가 일어났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불길이 치솟자 그동안 참아왔던 공포와 불안이 폭발하여 시민들은 한밤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만 명의 폭도는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무기고가 약탈되었다. 브르타뉴군이 경계를 선 성탑과 망루, 망대, 아성이 모조리 점령당했으며, 항복하든 저항하든 상관없이 학살이 자행되었다. 만일 우리가 초장부터 조심성 없이 성안에 진입했다면, 건물 사이에 매복된 적군들에 의해 몰매를 맞았겠지. 그러나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브르타뉴군은 매복을 위하여 이곳저곳에 분산해서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시민들에게 좋은 사냥감이 되어버렸다. 브르타뉴군은 집결하지 못하여 각개격파 당했고, 끔찍하게 몰살되었다. 새벽 여섯 시. 도시의 성문이 스스로 열렸다. 시민군들이 브르타뉴의 포로들을 끌고 나왔다. 숫자는 약 이백 명. 달리 말하자면, 이백 명을 제외하고 도시에 남은 사천 명의 브르타뉴군 전원이 죽었다. “…….” 놀랍게도 포로에는 낯익은 인물이 섞여 있었다. 새하얀 사제복. 주황색의 곱슬머리. 아테네 대신전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였다. 그녀는 독기에 찬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여왕이 성녀를 희생양으로 남겨두었을 줄이야……. 시민군 대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합스부르크의 유일한 주권자이자 점령자이시여.” 일반 시민들은 성벽 위에 올라서 있었다. 성벽에 올라간 시민만 어림잡아 일만 명이 훌쩍 넘어보였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약조해주셨기에 저희 파리시오룸은 역도를 토벌하여 이리 바치오니, 부디 약속된 관용을 이행해주시길 청원하나이다.” “그대들은 과거에 죄를 범했다.” 루돌프가 말했다. 참고로 우리는 명목상 인류의 군대였으므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항복사절단을 맞이했다. 마왕들은 황제 뒤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속죄를 허락하셨으니, 그대들 역시 신들의 뜻에 따르는 것.” 루돌프의 입에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녀석에게 의식은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조종하는 대로 읊조릴 뿐이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에게 대사를 적어서 건넨 사람은 나. 루돌프는 그야말로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자비를 내린다면 그것은 짐의 자비가 아니라 다만 신들의 자비로다. 파리시오룸의 시민들이여. 일어서라.” 루돌프가 몸소 대표 중 한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서 일으켰다. “브르타뉴에 의해 통치되는 프랑크, 브르타뉴에 의해 신음하던 파리시오룸은 지금 이 순간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짐은 프랑크와 파리시오룸의 영원한 동맹자이자 친우로서 맹세하나니. 짐의 군대가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오오, 존귀하신 황제 폐하…….” 대표들이 감격한 얼굴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루돌프가 대표의 어깨를 상냥하게 쓰다듬고――세상에, 바르바토스 녀석의 조종술은 단언컨대 세계 제일이었다!――고개를 돌렸다. “위대한 파리시오룸의 주민들이여! 짐은 침략자도 아니요, 그대들의 군주는 더더욱 아니로다. 그대들은 성문의 열쇠를 건내지 않아도 좋다.” 꼭두각시 황제가 파리시오룸의 성벽을 향해서 소리쳤다. 물론 성량 마법이 걸린 채로. “짐의 군대가 그대들의 안락한 저택을 들쑤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거리를 군인이 활개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며, 아녀자와 노인이 두려움에 떨 일도 없을 것이다. 신들께 맹세하나니! 파리시오룸은 완벽하게 독립권과 자치권을 부여받았노라!” 그 순간, 성벽에서 시민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당연히 우리가 도시를 점령하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잠깐이라도 도시에 주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민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관용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프랑크 제국 만세! 합스부르크 제국 만세!” “바타비아 공화국 만세!” 인간들이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정말로 전쟁의 업화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사 년 동안이나 브르타뉴에 의해 통치되던 도시 파리시오룸은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물론 '지나치게' 자유로워졌지만……지금 시점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오직 이백 명의 포로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군에게 포로의 처우까지 맡겼다. “브르타뉴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은 파리시오룸의 시민이다. 고로, 피해에 대해 복수할 권리도 온전히 파리시오룸에 있다.” 루돌프의 말이었다. 이 이해심 깊은 발언에 시민들은 다시 한번 열광했다. 즉석에서 시민들의 손에 의해 포로 수백 명이 처형되었다. 시민군은 황제의 자애로운 제안에 감사하며 최고급 지휘관들의 처우만은 우리에게 도로 양도하였다. 성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도가 적어도 사흘은 버텨줄 거라고 기대했는가, 앙리에타? 미안하군. 파리시오룸은 단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그것도 내분에 의해서……. 나는 분명히 양자일택을 권고했다. 하지만 너는 군대도 명분도 모두 챙기려고 했다. 그것이 네 패착이다. 이런 부분에서 너는 엘리자베트보다 한 발자국 떨어진다. 엘리자베트는 멸망의 위험이 들이닥치자 주저없이 제도(帝都) 빈드보나를 버렸다. 덕분에 월맹군이 분열되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군주의 자질을 결정하겠지. 엘리자베트는 해냈으며 그렇기에 합스부르크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앙리에타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던전 어택>에서 엘리자베트가 대륙을 재패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자신의 어수룩함을 원망해라, 앙리에타.   00299 제국 살해자 =========================================================================                        나는 황제의 일장연설이 끝나자마자 발안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전군, 추격전에 가담합니다.” 하룻밤 만에 황도(皇都)가 함락되었다. 적군에게 있어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였다. 이러한 기습 효과를 최대한 활용해야 마땅했다. “브르타뉴군은 파리시오룸에서 식량을 있는 대로 긁어갔습니다. 보급 마차가 제법 되겠지요. 마차와 함께 움직이는 이상 천하의 브르타뉴군도 멀리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가미긴의 와이번 부대는 한 번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수백 마리의 와이번은 모두 정찰병으로, 말하자면 비정규전에 활용되었다. 그들은 브르타뉴군의 퇴각로를 놓치지 않았다. “정찰부대에 따르면 적군은 아직 황도에서 겨우 백 리밖에 떨어지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추격하여 마왕 아가레스를 처단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전쟁을 끝냅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흥분에 달아오른 마왕들이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내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 * * 한 시간 정도일까. 행군이 이루어지기 전에 부대의 대형을 정리했다. 군사 숫자가 이만오천에 이르면 행군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공성전을 펼치는 진형에서 강행군을 위한 진형으로 바꾸었다. 지휘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대를 정리하는 가운데, 나에겐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베르시 준남작을 만나는 것이었다. 베르시 준남작은 항복사절단에 섞여 있었다. 어젯밤에 시민군 대표 중 일원으로 뛰어다닌 것 같았다. 나는 막사에서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데이지도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준남작 각하.” “……쟝 볼레 사제.” 베르시 준남작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피로에 물들어 있었다. 밤새서 도시에 남은 브르타뉴군과 싸우느라 지쳤기 때문일까. 그가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이오?” “지난 밤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행여나 외적의 칼에 다치시지 않은 듯하여 다행입니다.” 베르시 준남작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다행이라. 지금 내 몸에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준남작 각하. 각하뿐만이 아니라 프랑크의 애국전선이 무사했기를 기원합니다.” 그때였다. 베르시 준남작이 별안간 내 멱살을 잡아올렸다. 한평생 외진 마을의 영주로서 거칠게 살아온 준남작은 손길이 억셌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준남작을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베르시 준남작의 얼굴이 악귀와 같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고한 인명을 도륙시킨 학살자가 감히 위선을 부리는가……!” “…….” “신실한 사제라 믿었다. 아니, 그 이전에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협력했어……변명해보아라, 쟝 볼레! 왜 아무 죄도 없는 인간들을 참살했나!” 베르시 준남작은 지금 당장이라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단지 어젯밤에 쌓인 피로 때문에 초췌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째서냐! 단지 황제를 잘못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굶주리고 괴로워한 민중들이……어째서 하필 그들을 죽였는가!” 베르시 준남작이 핏기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전쟁에 괴로워하는 국민. 앙리에타에 의해 숙청당한 동료들. 여기에 더하여 성벽 바깥에서 이루어진 대학살. 한 명의 인간이 짊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운 재앙들이 너무 연달아서 일어났다. “대답하지 못한다면 네놈의 목숨――내가 직접 거두겠다!” 지금 베르시 준남작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겠지. 오직 악바리와 오기로 버티는 것이 느껴졌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감,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죄책감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에 대한 배신감까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사람에게 죽어도 괜찮을까? 베르시 준남작은 나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내 생명과 안위를 위협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 위협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준남작의 신뢰를 이용했다. 이 남자한테는 나에게 분노할 권리가 틀림없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가. 시험해볼까……. “프랑크를 위해서였습니다. 각하.” “프랑크를 위해서라고……?” “예. 프랑크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인민의 긍지를 위하여.” 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멱살을 잡은 주먹에 힘이 더욱 강해졌다. 숨이 약간 막혀왔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궤변을 놀리지 마라. 네놈이 말한 바로 그 인민들이 죽었다! 설마 학살은 군의 상층부가 결정했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는 않겠지……네 녀석은 단독으로 우리와 교섭할 정도의 위치에 서 있었다. 방관자의 변명은 용납되지 않아!” “물론입니다.”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에게 방관자를 자처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학살을 제안한 장본인이 바로 저 쟝 볼레이니까요.” “……!” 베르시 준남작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정통으로 내 뺨을 때렸다. 그 순간, 고개가 돌려지면서 데이지와 눈빛이 마주쳤다. 데이지는 이미 품에서 단검을 반쯤 꺼내고 있었다. 데이지에겐 나한테 위협을 가하는 대상을 배제하도록 노예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때문이겠지. 움직이지 마라. 내가 시선으로 말했다. 데이지는 손이 멈칫했다. 단검을 빼어들려다가 말고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로 괜찮습니까, 하고 녀석이 말없이 묻고 있었다. 아아. 괜찮고 말고. 시선이 오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다시 준남작을 바라봤다. “때려서 속이 시원하십니까? 다행이군요. 폭력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제 취향에도 맞습니다.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모쪼록 때려주십시오.” “네놈…….” “하지만 실망이군요, 각하. 정말로 제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습니까?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입니까.” 베르시 준남작의 눈동자가 아주 약간이지만 흔들렸다. 과연……. 어느 정도는 짐작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혹은 믿고 싶지 않다. 그런 상태인가. “만일 학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파리시오룸 시민들이 필요 이상으로 공포에 휩싸이는 일도 없었습니다. 묵묵히 농성전을 받아들였겠지요.” 그러다 언젠가 함락되었을 것이다. “그때 도시를 함락한 당사자는 저희 합스부르크 제국와 바타비아 공화국이 됩니다. 파리시오룸의 시민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주체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배격됩니다.” “…….” “파리시오룸은 다시 한번 외국군에 의해 점령되겠지요. 브르타뉴군이 합스부르크군, 바타비아군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외세는 지속됩니다. 프랑크인의 자치와 독립 따위는 단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르시 준남작이 침묵했다. 분노가 일어나지만 납득은 하고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좋다. 정신적으로 내몰린 처지에서도 현재 상황을 인식할 여유가 남아 있다. 그게 중요하다. 내 기준에서 베르시 준남작은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다. “프랑크인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외세의 괴뢰정부. 그뿐입니다.” “그것은…….” “더 얘기하게 해주십시오. 제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베르시 준남작을 엄하게 노려보았다. 이미 눈앞의 남자에게서 아까 전과 같은 기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 말을 부정할 수 없겠지. “괴뢰정부로 전락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쪽의 군대는 합스부르크와 바타비아가 합동으로 이룬 연합군입니다. 두 국가는 완전히 서로 다른 이념을 갖고 있지요……아시겠습니까? 합스부르크는 왕당파를, 바타비아는 공화파를 각기 괴뢰로 내세울 것입니다.” 바타비아 공화국군은 군량고를 탈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무시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제국, 그러니까 우리 마왕군은 공화국의 공로를 인정해야만 한다.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 년 전에는 황제파와 황태후파로 나뉜 프랑크가 다시 두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겠군요. 제국과 공화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동족끼리 피를 흘린다……브르타뉴라는 외세에서 독립하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분열입니까. 희극이 따로 없군요.” 베르시 준남작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멱살을 잡은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흐를까요.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준남작 각하. 그런 상황에서 프랑크인들 스스로가 긍지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모처럼 기회를 잡았는데 제국과 공화국에 휘둘려서 내분하는 것이다. 동족끼리 죽이고 또 죽이다보면 반드시 도탄에 빠질 날이 다가온다. 무엇을 위한 프랑크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국가에 생명을 바치는가? 프랑크에 대한 애국심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어지겠지. 이념들이 불타올라 서로 격렬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그 뒤에 남는 것은 잿빛 투성이의 권태뿐이다. 싫증과 실망, 긍지를 잃어버린 개가 되어버린다. “긍지를 잃은 개는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모두 몰락하고, 인민들은 오로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독재자만을 바라게 되겠지요. 베르시 준남작. 참주정의 개막입니다.” “아니다. 그럴리가…….” “정말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내 시선이 엄해졌다. 헛소리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도 먼 과거 공화국이라 불리우는 고대국가가 있었다. 그 최후는 독재자, 참주(僭主)가 출현하여 국가의 이념 자체가 파탄나는 것이었다. 귀족인 베르시 준남작도 역사를 배워서 알고 있겠지. 그는 부정하지 못했다. 내가 차라리 경쾌하게 말했다. “각하가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나는 인간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파리시오룸은 긍지를 지켰지요.” “…….” “외세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도시를 회복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도 도시를 점령하지 않았어요.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와 일어나지 않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미래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르시 준남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제가 저지른 학살을 단죄하실 것입니까?” “…….” 준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당신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인가……. 내가 준남작의 손을 툭 쳤다. 손에 힘이 없었다. 멱살에서 저절로 미끄러 떨어졌다. 나는 가볍게 옷깃을 다듬었다. 생각보다 크게 구겨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준남작. 저희는 이제부터 브르타뉴군을 추적합니다. 각하도 사병을 이끌고 합류하세요.” “어째서…….” “프랑크의 황제를 죽입니다.” 베르시 준남작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불과 몇 분 전에 비해서 얼굴이 이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황제 폐하를……?” “내전을 일으킨데다 타국의 군주에 좋을 대로 휘둘리고. 결국 수도를 방치하고 도망쳤습니다. 누구도 더 이상 앙리 3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밖에 일으키지 않는 황제 따위, 하루라도 빨리 없어지는 편이 프랑크에 이득입니다.” 불경하다고 생각했을까. 베르시 준남작이 부들부들 떨었다. “혹시 불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를 단죄하지 못하는 바에야 당신도 공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상냥하게 속삭여주었다. “준남작 각하. 당신에게 타바느 원수와 같은 최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생 프랑크의 인민을 위해 괴로워하십시오.” 삼십 분 후에 사병과 함께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베르시 준남작은 나를 붙잡지도 제지하지도 못했다. 파리시오룸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친애하는 제장이여.” 라우라가 포도주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광기와 살육의 한밤이 흐르고 때는 햇살이 서늘한 아침. 새벽의 유리빛에 와인잔이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라우라를 따라서 서른 명의 마왕이 와인잔을 높이 들었다. “승리를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모든 이가 단숨에 포도주를 비웠다. 그리고 빈 유리잔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쨍그랑, 하고 수십 개의 유리잔이 찬란하게 깨졌다. 바타비아 공화국군 일만은 후방에 남아 군량고를 지키기로 했다. 여기에는 파리시오룸 일대를 공화파가 순조롭게 접수할 수 있게끔 정치적인 노림수가 들어 있었다. 당장은 거추장스러울 뿐인 포로들도 일단 요새에 가두었다. 나머지, 마왕군 이만오천은 즉각 추격전에 돌입. 제1군단장 전 서열 제5위 마르바스. 제2군단장 전 서열 제3위 바싸고. 제3군단장 전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제4군단장 전 서열 제9위 파이몬. 부사령관 라우라 데 파르네세. 참모장 전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대륙을 호령하는 권력자가, 만마(萬魔)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군웅이, 일찍이 결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적 없는 영웅들이――모두 강력한 아군이 되어 진군한다. 전쟁의 결말이 다가왔다.   00300 제국 살해자 =========================================================================                        * * * 브르타뉴군은 한 발자국 늦게 함락 소식을 전해들었다. 와이번 정찰부대의 보고에 따르자면, 두 시간 전부터 갑작스레 적군의 행군 속도가 빨라졌다. 과감한 강행이었다. 추격전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당연하게도 라우라는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와이번 부대, 정찰 임무를 종료한다. 적들의 꼬리를 물고 집요하게 늘어지도록.” 라우라의 명령에 와이번 삼백 마리는 즉각 추격대로 변하였다. 와이번들은 상공에서 급속하게 하강하여 공격, 다시 하늘로 날아드는 전법을 구사했다. 상대하기 지극히 까다로웠다. 적군이 요새에 틀어박혀 있다면 별다른 효과를 누리지 못했겠지. 그러나 저들은 정신없이 행군하고 있었다. 궁병대를 제대로 배치해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적군의 진군 속도는 확연하게 느려졌다. 아침에 시작한 추격전은 그날 밤이 되어도, 다음날 새벽이 되어도 계속되었다. 제아무리 몬스터가 인간종에 비해 체력이 월등하다 해도 이틀에 걸친 강행군에는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서서히 탈락하는 병사가 나왔다. 하지만 라우라는 변함없이 강행군을 명령했다. “아군이 이렇게 힘들다면 적군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전력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아군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적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면 이쪽의 승리다.” 일부 마왕들이 휴식을 요구하자 라우라가 일언지하에 딱 잘라 말했다. 정말 최소한의 휴식을 제외하고 마왕군은 급하게 움직였다. 탈락자가 속출했으나 무시했다. 사흘째. 이 시점에서 아군은 브르타뉴군을 뒤쫓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우리가 세쿠아나(Sequana) 강줄기의 이남에 위치하고, 적군은 이북에 위치한 것이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대군이 나란히 달렸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을까. 브르타뉴군은 퐁 드 라르셰라는 곳에서 도하를 시도했다. 그러나 다리는 지나치게 좁았으며, 다리 입구에는 아군이 빈틈없이 대열을 짜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기사단을 앞세워서 어떻게든 이쪽 대열을 돌파하려고 했다. 접전이 펼쳐졌다. 만약 녹색 장미 기사단이 돌격했다면 포위망이 깨졌을지 몰랐다. 우리군은 사흘 동안 강행하느라 적잖게 지쳐 있었다. 하지만 겨우 기사단 하나로 이만오천 명의 대열을 깨부수는 것은 녹장미 기사단과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이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했다. 도하는 실패했다. 브르타뉴군은 아까운 기사단만 하나 더 잃어버리고 후퇴했다. 엿새째, 서북부에 위치한 요새도시 루앙에서 다시 한 번 접전이 이루어졌다. 프랑크 북부가 대부분 지난 내전을 통하여 공화파에 의해 접수되었다. 하지만 루앙은 북부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했다. 파리시오룸에 비교적 가까운 탓도 있어서 루앙은 브르타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이곳에서 식량을 보급받고 사기가 충만하여 도하를 시도했지만――실패. 양군을 통틀어서 삼천 명 가량의 손실이 생겼다. 아군과 적군의 사망자는 비슷했다. 압도적으로 저들에게 불리한 도하 작전에서 피해율이 엇비슷하다는 것은, 과연 브르타뉴군의 실력을 입증하는 셈이었지만……실패는 실패였다. 11일째, 또 다시 루앙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브르타뉴군이 이번에는 아예 작정했다. 다리는 물론이고 뗏목을 대량으로 운용하여서 강을 건너왔다. 그러나 적군의 선발대는 강을 반쯤 건너오지도 못하고 모조리 수몰되었다. 바싸고가 거느린 물의 정령왕이 한바탕 물난리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번에도 도하는 좌절했다. 브르타뉴군에서 일천 명의 사상자가 났을 따름이다. 연전연패. 한때 '패배를 모르는 군대'라 불리던 브르타뉴군의 사기는 밑바닥을 쳤다. 파리시오룸을 버리고 도망친 데다가 정신적 지주인 성녀마저 잃어버렸다. 여기에 연패가 겹치니 브르타뉴군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반면에 우리군을 말하자면, 이제 마왕들 사이에서 라우라가 거의 아이돌 수준의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라우라가 곰팡이로 치즈를 만들겠다 선언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기세였다. “저번에 대지의 정령왕이 죽었고 이번에는 바람의 정령왕이 죽었다. 네놈, 정령왕 수준의 정령을 키우는 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마왕 아가레스를 상대하느라 죽도록 고생한 바싸고를 제외하고. 내가 살갑게 바싸고를 달랬다. “자아, 자. 저번에는 바싸고 님을 포함해서 세 분이 아가레스를 상대했지만, 지금은 바르바토스 각하도 함께하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입은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는 말이다, 우둔한 놈.” 바싸고가 길길이 날뛰었다. 아끼던 정령왕을 둘이나 잃어버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거 참, 딱딱하게 굴기는. 전쟁이 끝나면 큼직한 영지 하나를 선물하겠다고 약조하니까 그제야 바싸고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꼭 사탕을 먹고 싶어서 날뛰는 어린애 같구만. 뭐, 사소한 해프닝을 빼고 마왕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적군은 연패했다. 루앙에서 식량을 얻어 한숨 돌렸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해군은 여전히 강줄기를 틀어막고 있었고, 이는 루앙의 보급선도 끊겼다는 얘기였다. 근본적으로 보급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보름째. 결국 브르타뉴군이 루앙을 포기하고 빠져나갔다.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브르타뉴군은 지나가는 길목마다 약탈을 자행했다. 북부는 브르타뉴에게 특히나 적대적인 지역이었다. 주민들은 저들에게 약탈을 당하느니 차라리 숲속으로 들어가 게릴라를 펼쳤으며, 이는 브르타뉴군의 처지를 더더욱 괴롭혔다. 몰릴 대로 몰렸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지. 브르타뉴군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점은 르 아브르라는 항구 도시였다. 바다에 접한 항구 도시……당연하지만, 브르타뉴군에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적에게 공성전을 강요한다.” 이번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라우라는 말했다. 자신은 절대로 브르타뉴와 회전을 펼치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은 예언처럼 이루어져서 이제 한 달째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회전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규모 접전만이 이어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느새 브르타뉴군은 외통수에 몰려 있었다.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도 못한 채로. 이제 브르타뉴군은 자신 없는 농성전을 강요받고 있다. 해상에서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대함대가 포위했고, 육지에서는 우리 마왕군이 포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레라지에 전하가 합류했습니다.” “북부 도시 동맹군, 용병 오천을 이끌고 합류!” 전쟁의 승패가 명확해지자 그동안 가만히 관망하고 있던 군세가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프랑크 북부에 마왕성을 가진 전(前) 서열 제14위의 마왕 레라지에, 전 서열 제27위의 마왕 로노베, 북부 자유도시들의 병력까지. 우리군은 삼만오천까지 불어났다. 보급로가 끊길 위험도 전무했다. 바다로는 해군이 보급을 해주었고, 육지로는 북부 자유도시들이 보급을 맡았다. 가로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득책일진저. 만에 하나라도 앙리에타와 아가레스가 궁지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다……. 나는 파리시오룸에서 행했던 학살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주변의 주민을 잡아와서 잔인하게 화형에 처했다. 이번엔 규모가 거대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에 이십 명 정도면 충분했다. 도시의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게 목적이니까. 추격전이 시작된 지 35일째. 르 아브르의 성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불길이 치솟고 전투의 함성이 들려왔다. “주군. 주민들이 봉기한 것일까?” “아니요. 아마도 아가레스가 소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아가레스가?” 내가 미소를 머금었다. “브르타뉴군은 드디어 항복하려는 것입니다. 전면적인 항복이 아니라 아마도 명예로운 항복. 즉, 순순히 브르타뉴에 귀국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항복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명예로운 항복이 이루어질 수는 없지요.” 나는 앙리에타 여왕을 굳이 죽여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다시는 대륙의 패자가 되지 못하도록 짓밟아두면 그만이었다. 프랑크에서 쫒아버리고, 강력한 기사단을 전멸시키고, 아울러 지지세력이 등을 돌리도록 만든다……. “우리군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마왕 아가레스를 처치하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아가레스의 수급을 우리에게 바친다면 명예로운 항복을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앙리에타 여왕은 아가레스를 기습했겠지요.” “그리고 아가레스가 눈치를 챈 것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기습 자체는 성공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가레스입니다. 기습을 허용했다고 해서 쉽사리 목까지 내주지 않습니다. 지금쯤 도시에선 한창 아가레스와 기사들 사이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겠지요.”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허면, 주군. 지금이야말로 공격할 순간이겠군.” “바로 맞혔습니다.” 우리 둘이 서로를 마주보고 웃었다. 우리에게 항복을 받아들일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이대로 공격해서 브르타뉴군을 초주검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공성전은 방어측보다 공격측에 불리하지만, 저쪽은 절찬리에 내분을 겪고 있다. 절호의 기회라 해도 좋겠지. “여왕이 명예롭게 항복하고 싶다면 받아줍시다. 하지만 여왕의 군대까지 고이 보내줄 이유는 전무합니다……크흐. 여왕이 홀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돌아가면 브르타뉴에서 어찌 생각할지 흥미롭군요.” “역시 주군은 성격이 글러먹었다.” “그건 라우라도 마찬가지겠지요?” 라우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고 명령했다. “전군, 공격하라.” 라우라의 한 마디에 삼만오천의 대군이 움직였다. 투석기가 바위를 쏘아올리고 공성병기가 성문을 두들겼다. 오우거가 통나무를 들고 직접 성문을 깨부수는가 하면, 와이번이 성벽 위의 수비군을 급습하여 도륙했다. 브르타뉴군은 용맹히 맞서 싸웠다. 연패를 겪은 군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기사들이 죄다 아가레스와 싸우러 떠난 모양인지 아무래도 기세가 부족했다. 성벽의 한 귀퉁이가 함락되는 데 불과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령들이 낭보를 전달했다. “남쪽 성문을 파괴했습니다!” “오우거 부대, 돌입! 벨레드 전하와 시트리 전하가 선봉에 나섰습니다!” 모퉁이 하나가 점령되지 도미노가 쓰러지듯이 나머지 방벽도 차근차근 떨어졌다. 브르타뉴군이 회전의 명수라면 마왕들은 대다수가 공성전의 명수였다. 이천 년이 넘게 인류와 치고박으면서 늘어난 것은 요새를 함락하는 솜씨밖에 없었다. 마족들은 쓰나미처럼 르 아브르의 외성(外城)을 넘어섰다. “바타비아 해군이 부두를 점령했습니다.” “아군과 협력하여 적을 협공하는 중입니다. 시가전에 돌입합니다!” 이쪽에는 해전의 명수인 바타비아 공화국군까지 있었다. 적군은 육로와 해로에서 협공을 받았다. 거기에다 내부에서는 아가레스가 날뛰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앙리에타가 아니라 엘리자베트일지라도 버티지 못하겠지. 시가지는 점점 우리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가레스 발견! 서쪽 시내에서 아가레스가 발견되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적도 아가레스는 상처가 중대! 온몸에 중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이번 전쟁의 목표인 마왕 아가레스를 찾아냈다. 아무래도 아가레스는 기습을 이겨냈을뿐더러 기사들의 맹공까지 버텨낸 모양이었다. 달리 말해, 우리 입장에서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아가레스는 상처를 입은 호랑이가 되었으며 브르타뉴의 기사는 수없이 많이 죽었겠지. “데이지.” 나는 내 옆에 선 소녀를 나지막하게 호명했다. “예, 아버님.” “아가레스의 목을 따와라.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지 말도록.” 바알이 가진 검. 세계에서 가장 사기적인 무구 중 하나일 텐데, 지금은 데이지가 지니고 있었다. 비록 데이지가 용사로서 완벽하게 각성하지 않았으나 아가레스는 중상에 빠졌다. 다른 마왕들과 능숙하게 협공하면 능히 이겨낼 수 있겠지. 흑발의 소녀는 고개를 까닥 끄덕였다. “그것이 아버님의 명령이라면.”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그나저나 벌써 300화... 세월은 빠르네요...   00301 제국 살해자 =========================================================================                        데이지가 전령과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에 마왕 아가레스가 버티고 있겠지. 바싸고, 가미긴, 바르바토스, 벨레드 형님, 시트리한테도 통신수정구로 연락했다. 마왕군 굴지의 실력자들이 사냥에 참여했다. 아가레스에게 미래는 없다. “주군. 적병이 내성(內城)으로 도망치고 있다만.” “적당히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요.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참. 항복하는 포로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해주세요.” 앙리에타 여왕이 이쪽에 항복할 의사가 명확하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포로는 되는 대로 죽여두는 편이 좋다. 그래야 항복이 이루어져도 브르타뉴에 멀쩡히 돌아갈 장병의 숫자가 줄어든다. “그러다가 적군이 도리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 “오히려 환영입니다. 전멸하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싸워달라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브르타뉴군은 내성으로 퇴각했다. 시내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사라졌다. 이제 소탕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군에 의해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이 벌어졌다. 나는 어린애와 노인,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요컨대 남자 주민들은 모조리 학살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공성전에 돌입하고 다섯 시간. 도시에서 검은 연기가 을씨년하게 피워올랐다. 우리는 소탕이 어느 정도 완료했다고 판단, 예비대를 이끌고 함께 성문에 입성했다. 마치 불도저가 밀고 지나간 것처럼 도시 곳곳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건물이 무너져 너른 벌판이 되어버린 그곳에 병사들이 도열헀다. 라우라와 내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자, 우리를 알아본 병졸들이 두 팔을 벌려 환호했다. “파르네세 장군 만세!” 거의 무제한적인 약탈을 허용해준 덕분에 병사들은 사기가 무척 높았다. 마물들은 배부르게 인육을 먹었으며, 조금이라도 값비싼 재화는 모두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일반 병사들에게 가장 위험 부담이 큰 회전은 일절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전쟁은 학살과 약탈로 얼룩졌다. 다시 말해, 위험이 적고 수입은 짤짤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병사들에게 군신(軍神)과 같았다. “멋진 함성이군요.” 오늘은 틀림없이 역사에 라우라의 이름이 새겨지는 날이었다. 스무 살의 여인이 역사상 최초로 인류-마족 연합군을 이끌고,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기 일보직전이던 브르타뉴를 꺾었다……. 무엇보다도 라우라는 약탈물에 완전히 관심이 없었다. 원래 병사는 하사관에게, 하사관은 상급 지휘관에게, 지휘관은 장군에게, 최종적으로 장군은 사령관에게 약탈물을 상납하는 게 관례였다. 라우라는 그렇게 올라온 재물을 받긴 받되 전부 아랫사람들에게 도로 나눠주었다. ‘전투에서 직접 두 발로 뛰고, 두 손으로 창을 들어, 하나의 심장과 하나의 머리에 기대어 창칼을 찔러넣는 주인공은 장병이다. 그들에게 모든 승리의 공로가 있다.’ 겸손한데다 부하들을 챙겨준다. 군사들 사이에서 라우라는 '여신들께 축복받은 장군님'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감회가 새로울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음. 군에서 사령관은 우상화되면 우상화될수록 좋다.” 라우라는 그야말로 내 신하라고 칭하기에 한점 부끄러움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패배가 확실해보이는 상황에서도 병사는 사령관을 믿으며 버틸 것이고, 승리가 확실해지면 그 또한 병사들은 사령관 덕택에 이겼다고 믿을 것이다. 마침 소녀는 그럭저럭 예쁘게 생겼다.” 라우라가 장난스럽게 입끝을 들어올렸다. “우상으로 떠받들기에 딱 적절하지 않은가?” “그걸 본인 입으로 떠벌립니까.” 내가 한숨을 쉬었다. “첫 번째 가신이 공주병 환자일 줄이야. 저는 아마 전생에 꽤나 큰 업보를 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대륙을 구한 용사이지 않았을지. 이만한 미인과 함께하다니 말이다. 왕국 한두 개를 구원하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아아, 정말이다. 적어도 대륙을 구한 용사였다. 시내 한복판에 펼쳐진 광장에 이르렀다. 군단장들이 망토를 늘어트리며 모여 있었다. 바르바토스처럼 피를 뒤집어쓴 마왕도 있었고, 파이몬처럼 전투가 시작하든 끝나든 상관없이 말끔하게 차려입은 마왕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 한 마왕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설마 아가레스를 죽이지 않고 생포할 줄은 몰랐기에 다소 놀랐다. “대단하군요. 천하의 아가레스가 이렇게 잡히다니.” “덕택에 내 오른팔은 또 날라갔지만.” 벨레드 형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 그대로 외팔이었다. 그외에 시트리도 팔을 한쪽 잃었고, 바르바토스는 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부위가 없었다. 안심과 신뢰의 바싸고는 어둠의 정령까지 꺼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의 정령왕을 잃어버렸다. 후방에서 원호를 맡은 가미긴만 멀쩡하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여서 망정이지. 브르타뉴 애새끼들이 아주 지독하게 달라붙은 모양이던데. 뭐, 결정타는 네 딸년이 날렸지만.” “호오. 그렇습니까?” 내가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데이지는 얼굴에 새빨간 핏물이 튀어 있었다. “아아. 우리가 아가레스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꼬맹이가 뒤를 기습했어. 아가레스는 그것도 눈치 채고 막아냈지만, 꼬맹이가 바알의 검을 들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을걸. 덕분에.” 바르바토스가 싹둑, 하고 장난스레 의성어를 내뱉었다. “아가레스의 할버드랑 손목을 통째로 잘라버렸지. 그게 결정타였어. 전원이 달려들어서 흠씬 패버리는데 지가 아무리 미친년이라고 해봤자 어쩔 거야? 깔깔.” 아가레스를 잡아서 바르바토스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녀석은 저번 내전에서 아가레스한테 워낙 당한 게 많았다. 모욕을 갚았다고 생각하겠지. 사실 처음에 잘못을 저지른 쪽은 바르바토스였지만 나는 그냥 싱긋 웃었다. “잘했다, 데이지. 훌륭하구나.” “…….” 손수건을 꺼내어 데이지의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데이지의 흑요석과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알과 아가레스를 참하는 데 일조했으니 너도 이제 당당히 한몫을 맡은 인간이다. 너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 될 것이고, 너의 과가 곧 내 과가 될 것이니. 언제 어디서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해두는 걸 잊지 마라.” 나는 피로 더러워진 손수건을 품속에 넣었다. 데이지가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가 닫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피로가 쌓인 탓일까. 데이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아가레스를 상대한 것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마왕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그리 맥빠지게 대답하느냐고 혼을 내도 되었지만, 뭐. 오늘 세운 공로를 고려해서 관두었다. 나는 고개를 라우라한테 돌렸다. “부사령관. 적도의 수괴 아가레스가 여기 있습니다. 군단장들이 각하의 처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찌 처우할 것인지요?” “반역자 아가레스는.” 라우라가 주변에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군이 하나로 통합해야 할 때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여 아군을 배신했다. 그후에도 뉘우침이 없이 사병을 이끌고 인간계로 도주하니, 실로 마계와 인간계를 가리지 않고 분열과 배신을 조장하는 악의 축임에 확실하다.” “…….” 아가레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피부가 찢겨져서 너덜거렸다. 한때 아름답게 빛나던 머리카락이 핏물에 굳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오로지 눈동자, 두 개의 눈동자만이 여전히 오싹하게 빛났다. “판결에는 사형 이외에 불가하다. 여기에 재고의 여지는 없다.” 라우라는 아가레스의 시선에서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했는지 어조가 느긋했다. “허나 아가레스는 명색에 전(前) 서열 제2위의 마왕.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족을 위해 노력한 점이 수십 개에 이르며, 그 명망도 결코 적지만은 않다. 마왕 아가레스. 본관은 연합군 총사령관이신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하문하나니.” “…….” “그대,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후회하고 반성하며 아군에 백의종군할 의사가 있는가. 만일 뉘우침에 뜻이 있다면 마왕의 증거인 뿔을 자름으로써 모든 죄를 사하겠다.” 마왕에게 뿔이란 긍지의 상징. 자신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만인에게 드러내는 증거물이자, 경우에 따라 마력이 집중되어 응축되는 장소. 그것을 포기함은 마왕으로서 온갖 명예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자라나겠지만. 잠시 침묵이 자리했다. 마왕들이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가운데서 아가레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녀는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크흐흐……흐하, 흐흐흐…….” 아가레스는 우스워서 견딜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의도적으로 비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웃음이 새어나와 단지 내뱉을 뿐인, 그런 얼굴이었다. “이것이냐?” 아가레스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물었다. “언젠가 긍지를 울부짖던 노예들아. 고작 이것이 월맹군의 최후인가?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가면을 쓰고 뒤에 숨는다. 제국의 섭정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직책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인다……심지어, 군대의 지휘권까지 인간종에 맡겨버린다.” 아가레스의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기가 걸렸다. “썩은내가 진동하는구나. 마왕은 한때 신이었다. 그러나 평민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노예가 되어버렸어. 최후라기에는 지나치게 꼴불견이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걸…….” “당신이 입에 담을 말씀은 아니군요, 아가레스.” 내가 대꾸했다. 깨끗한 척을 떠는 게 제법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빈드보나에서 끝까지 적군을 추격하자고 제안했을 때 당신은 거절했습니다. 내전이 끝나고는 아예 브르타뉴의 군주한테 망명해버렸지요. 어디에 마왕으로서 긍지가 있습니까?” “…….” 아가레스한테 있는 것이라곤 자기 변명과 추악한 배신뿐. 모두가 그걸 느끼고 있었다. 만약 아가레스가 정말로 마왕 중 마왕이었다면 바르바토스에게 패배한 순간 깨끗하게 물러서야 마땅했다. 거기서 승부가 끝났으면 적어도 변호의 여지라도 있었을 터. 하지만 아가레스는 승부의 결말에 납득하지 못하고 망명했다……. “결국 당신은 브르타뉴의 군주한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배신자의 최후는 배신이로군요. 훌륭한 결말이지 않습니까.” “……나는 배신을 당하지 않았어.” 아가레스가 이빨을 아득 물었다. 피부가 찢어진 바람에 이빨이 훤하게 드러났다. “인간의 군주를 이용해서 네놈들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승리를 거둔 다음에는 내 쪽에서 먼저 앙리에타를 죽일 계획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앙리에타는 너희에게 항복하려고 했어. 용납할 수 없었지. 그래서 내가 먼저 공격했다…….” 과연. 내분을 일으킨 주동자는 앙리에타가 아니라 아가레스였는가……. 아마도 앙리에타는 아가레스에게도 같이 항복하자고 권유했으리라. 그걸 아가레스는 참을 수 없었다. 아가레스가 기습했고, 거기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앙리에타가 난항을 겪었다. 그래서 도시가 혼란에 휩싸였다……. 내가 입꼬리를 이죽거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멍청이다, 아가레스.” “뭐?” “앙리에타는 동료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냉혹하고 잔인한 군주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국민과 동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앙리에타는 원한다면 당신을 암살해서 쉽고 편하게 항복할 수도 있었어.” “…….” 하지만 앙리에타는 너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도망치거나 함께 항복할 기회를. “그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며 내분을 일으킨 순간, 이미 당신은 전사의 긍지고 뭐고 전부 내다버린 쓰레기로 전락했다. 당신은 전사가 아니야. 그저 승부에 집착하는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하지.” “…….” “경애하는 동지들.” 나는 몸을 돌려서 마왕들을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배신자 아가레스에게 반성의 기미는 전무합니다. 이곳에는 현재 마왕의 과반수 이상이 참석해 있습니다. 저 단탈리안은 아가레스를 사형하는 데 있어서 투표를 시행하자고 제안합니다.” 즉석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 아가레스의 사형에 찬성하는 마왕은 서른두 명. 사형에 반대하는 마왕은 없었다. 만장일치로 사형이 가결되었다. 나는 데이지한테 바알의 검을 받아서 라우라한테 넘겼다. 라우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접 아가레스한테 다가섰다. 아가레스는 각오를 정했는지 두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아가레스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무엇인가?” “…….”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것이 대답이 되겠지. 라우라는 주저없이 파마의 검을 휘둘렀다.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가 울렸고, 연이어서 큼직한 물건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흙먼지가 그것을 덮었다. 일신의 무력으로 천하를 진동시킨 마왕 아가레스는 그렇게 사라졌다.   00302 제국 살해자 =========================================================================                        * * * 아가레스의 처형이 일단락되고, 우리군은 내성을 포위했다. 외성과 시가지를 함락했으니 나머지는 쉽게쉽게 풀려나갈 것이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르 아브르의 내성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성벽이 높았고 성탑이 일곱 개나 세워졌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라 보아도 무방했다. “보고에 따르면 어림잡아 일만삼천 정도가 무사히 퇴각한 듯하다.” “생각보다 많군요. 많아본들 육칠천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만…….” 아가레스에 의해 내분이 일어나는데도 절반 이상의 병력을 무사히 후퇴시켰다. 더구나 육지와 해상 양쪽에서 협공해오는 와중에.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앙리에타 여왕은 내분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갈 줄 예상했겠지. 미리 퇴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앙리에타 여왕은 불의의 습격을 당해 경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 병사들에게 농성에 나서는 한편 시기를 봐서 내성으로 퇴각하라 명령한 것이다. 놀라운 지휘력이다. “전부 예상하고 있었는가. 제법이다.” “예……확실히 제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령에게 물었다. “혹시 시내에서 군량고가 발견되었는가?” “아닙니다. 시내에선 군량이 저장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과연. 외성이 함락되기 전에 군량을 모두 내성으로 옮겼군.” 이로써 공성전이 길게 이어지지 않은 이유도 짐작되었다. 나는 주위에 앉아 있는 마왕들을 향해서 말했다. “브르타뉴군의 목적은 외성을 사수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시내에 비축해놓은 식량을 내성에 모두 운송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겠지요. 요컨대 시간을 버는 용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생각보다 요새의 방비가 철저하다는 얘기잖아.” “아마도 틀림없이.” 바르바토스의 질문에 내가 긍정했다. “내성은 외성보다 작습니다. 그만큼 방어하기 용이하지요. 해상에서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으니 도리어 상황은 적군에게 유리해졌습니다. 회광반조라고 할까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멋진 발악을 보여주는군요.” 마왕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모처럼 전투가 싱겁게 끝났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거늘, 난데없이 본격적인 공성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소식을 들어버린 것이었다. 불쾌할 만했다. 바르바토스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지. 나한테 맡겨.” “바르바토스 군단장. 좋은 계책이 있는가?” “으응. 뭐,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이 아니지만…….” 바르바토스가 라우라의 하문에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무슨 방도가 있다는 것일까. 마왕들도 고개를 갸웃하며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다만 파이몬이 자그맣게 한숨을 쉬는 걸 보아하니 그녀는 계책의 정체를 아는 듯싶었다.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전염병이야. 전염병. 내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 “아.” 내가 손뼉을 쳤다. “명안이다! 사방에 널린 게 시체이니 얼마든지 흑마법을 활용할 수 있겠어.” “그래. 시체들에다 전염병을 심어 넣은 다음에 투석기로 시원하게 날려버리면 그만이지. 좁아터진 요새에 병사가 일만이나 넘게 들어찼으니까, 효과가 직빵으로 날 거야.” 이른바 생화학전이다. 적군에도 사제가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숫자가 몇 백명에 이르진 않을 터. 일만 가량의 병사가 단체로 앓아누우면 사제들이라고 해도 손 쓸 도리가 없다. 요새가 널럴하다면 따로 격리할 장소를 만들 수 있겠지만, 브르타뉴군은 후퇴하면서 식량을 대량으로 가져갔다. 요새 안쪽의 빈 공간에는 죄다 식량이 채워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공간이 더더욱 좁아졌으리라. 돌림병에 대처하기에는 가히 최악의 상황이다. “깔끔하고 멋지군.” 무심코 감탄했다. 정작 칭찬을 받은 바르바토스는 영 표정이 뚱했다. 그걸 이상하게 여겨 내가 물어보았다. “뭐야, 바르바토스. 왜 진즉부터 흑마법을 쓰지 않았어? 월맹군에서 그 방법을 썼다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끌어나갔을 텐데.” “…….”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딘지 권태로운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의 의미를 깨닫고 아, 하고 헛숨을 흘렸다. 바보처럼 말해버렸다. 바르바토스는 무엇보다도 전사로서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전염병으로 적군을 학살하는 것은 그녀의 신념에 어긋나겠지. “전사의 도리에 어울리지 않는가…….” “나는 나와 함께한 부하들을 되살리기 위해서 흑마법을 익혔어. 거기에 대해서 부끄러움일랑 전혀 없어. 창과 검을 들고 적병에게 뛰어드는 거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무기를 주고받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작자는 그 공포를 몰라.” 바르바토스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달관한 느낌이었다. 바르바토스답지 않게 눈빛에 슬픈 기색이 담겨 있어서, 나를 비롯하여 주변의 마왕들은 저절로 귀를 기울였다. “전사란 항상 자신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나는 거기에 긍지를 갖고 있어. 그렇기에 일찍이 전사였던 부하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에도 긍지를 느껴. 하지만 흑마법 따위 단순한 사술(邪術)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지.” 부정할 수 없다. 생전에 아무리 고귀한 전사였다 한들, 흑마법에 의해 소생되면 그저 좀비나 구울에 불과하다. 살갗이 썩어문드러지고 온몸에서 악취가 풍긴다. 죽음의 기사도 육중한 갑옷 안에는 시체나 해골이 있다. 그것을 과연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생명에 대한 모욕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좀비와 구울은 단순한 마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 비난해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죽음을 맞이하고서도, 사후에서도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나의 부하들을 매도하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못해.” 바르바토스가 시선을 내려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일 내가 흑마법을 다르게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흑마법을 모욕하고, 더 나아가 내 부하들까지 모욕하겠지. 단탈리안.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흑마법의 마에스트로로서, 나는 흑마법 자체에 책임을 지닌 거야.” “……이해했다. 섣불리 말해서 미안해.”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던전 어택>에서도 바르바토스는 죽는 순간까지 생화학전을 펼치지 않는다. 부하들의 명예를 모욕하느니 차라리 용사의 손에 처단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만한 신념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했다.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뭐, 하지만 우리는 연합군이야. 내 개인적인 명예욕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지. 이번에 한해서 큰 마음 먹고 써줄게.” “아니. 괜찮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한 신념을 일개 '개인적인 명예욕'이라 단언하는 바르바토스는 과연 거물이었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이 모든 마인을 위한다는 대의 그리고 전사로서의 명예,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지금이 연합군이라는 집단을 위해 희생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겠지. 간단하게 자신의 굳은 신념을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바르바토스가 어떤 의미에서든 희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엉? 하지만…….” “저 요새가 전염병이 퍼지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굳이 흑마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 그저 매일 시체를 투석기로 쏘아올리기만 해도 충분히 전염병이 나돌 거야.” 바르바토스가 뭐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마왕들을 둘러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역적 바알을 참하고 우리가 새로이 마왕군을 창설한 지 벌써 이 개월이 넘게 흘렀습니다. 이 새로운 마왕군의 창설에 부족하나마 한손 보탠 자로서 발언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는 어느 마왕에게도 개인적인 희생 따위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마왕들 한명한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바알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만이 넘는 군대를 간단하게 내버렸습니다. 또한 아가레스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을 이루기 위해서 동족을 배신했습니다. 그들 모두 이기적인 욕망으로 다른 마왕을 희생시킨 장본인이요, 우리는 그들에 의한 피해자나 다름없습니다.” “…….” “만일 신(新) 마왕군이 다시금 전체의 욕망을 위해서 어느 특정한 마왕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면, 저로서는 도대체 바알과 우리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그중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꽤나 많았다. “우리에게 전체의 이익이란 개인들을 위한 것이야만 합니다. 바싸고 전하를 위한 이익이 아닙니다. 가미긴 전하를 위한 이익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전원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그리고 전체의 이익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마땅합니다.” 내가 한 템포를 쉬고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바르바토스는 왠지 모르게 멍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우리는 강하다.” “…….”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그뿐만 아니라 무소속인 전하들까지 이곳에 함께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두지. 우리는 강하다. 설마 우리가 네 개인의 희생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응…….”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가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아군을 믿어라.” 바르바토스가 떡끝을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녀석이 입술을 움직였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 귀까지 들리지 않았다. 대충 고맙다거나 그런 얘기일 거다. 쟤는 발랑 까진 주제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에는 상당히 어수룩하니까. “부사령관. 바르바토스 군단장의 제안을 저도 지지합니다. 브르타뉴 병사의 시체를 모아서 투석기로 날려보내도록 하지요. 십중팔구 돌림병이 발생할 것이고, 설령 발병하지 않는다 해도 적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것입니다.” “……본관이 어떻게 끼어들 틈이 없군.”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좋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과 단탈리안 참모장의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시내에 널린 브르타뉴군의 시체를 수집하고 투석기에 실어 날린다.” 그날 이후로 우리군은 매일마다 시체를 내성으로 던졌다. 자군의 시체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멀리서 보기에도 확실히 질려 했다. 투석기가 동원되고 보름이 흐르자, 마침내 내성에서 전염병이 나돌았다. 브르타뉴군은 나날이 기색이 나빠졌다. 우리는 일부러 야간을 틈타서 공성전을 펼쳤다. 말이 공성전이지 사실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는데, 이는 적군에게 무시무시한 스트레스를 강요했다. 한 달이 지나자 브르타뉴군은 슬슬 한계에 직면했다. 짐작하건대 이미 군사의 상당수가 장티푸스 따위에 걸려 앓아누웠다. 사제들이 분발하고 있겠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겠지. 때때로 성벽에서 브르타뉴군이 시체를 떨어트렸다.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왕 전하께서 협상을 원하시나이다.” 결국 성문이 열리고 사절단이 찾아왔다. 우리는 느긋하게 사절을 맞이했다. 인간과 달리 마족은 각종 병균에 강했다. 이쪽에도 전염병이 돌긴 했지만 곧바로 격리시켰기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여유로움의 측면에서 적군과 아군은 차원이 달랐다. 라우라가 턱끝을 세우고 물었다. “협상이라니? 무엇에 대한 협상인가.” “여왕 전하께서는 명예로운 항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위에 앉은 마왕들이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명예로운 항복은 적군이 함락시키기 까다로운 요새에 있을 경우, 우리의 손해를 최대한 적게 하려고 제안되며 수락되었다. 지금 상황은 우리에게 지극히 유리했다. “무인에게 명예란 오직 죽음에만 덧붙이는 수식어 아니던가?” “항복을 하려면 진즉에 파리시오룸에서 했어야지. 이제 와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들다니 가당치 않군.” “너희의 여왕에게 직접 성문을 열고 나오라 하라! 무얼, 예쁘게 옷을 차려입었다면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마왕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외교적인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황이 불리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쌍욕이 튀어나왔을 거다. “자아, 자. 동지 여러분. 브르타뉴의 군주가 멋진 분전을 보여준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적당히 틈을 노려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애써 노력한 적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베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관대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여왕이 우리의 구미에 맞는 제안을 해올지도 모릅니다.” “흠. 단탈리안, 정확히 어떤 식으로 협상하자는 말인가?”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글쎄요. 여왕의 얘기를 직접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직접 성에 들어가서 여왕과 협상해보겠습니다. 모쪼록 저에게 전권을 맡겨주십시오.”   00303 제국 살해자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여왕을 만나러 들어가?” 언제 어느 때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인 것이 바르바토스의 특징이었는데, 지금만큼은 평소에 비해서 기운이 없었다. 아니. 기운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지, 꼭 의도적으로 목소리에서 높낮이를 없앤 느낌이었다. “우리군은 아가레스를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야. 방금 목적이 완수되었고. 이런 명분을 내세운 덕분에 버니시아 왕국과 같은 타국의 개입을 봉쇄할 수 있었지. 만약 우리가 여왕에게 일말의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정세가 귀찮아질 거야.” 승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을 짓밟아서야 주변 국가의 경계심을 필요 이상으로 키워버린다. 이번 전쟁에서는 군단장들이 거의 모든 전비(戰費)를 부담했다. 벌써 전역이 일어난 지 삼 개월이 흘렀다. 서서히 전비가 걱정되는 무렵이었으며, 약탈이나 징수로 비용을 메꾸자는 생각이 샘솟는 시점이기도 했다. 지금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 딱 적절하다. 마족 병사들은 별달리 위험하지 않았던 전쟁에서 급료를 제대로 받아서 좋고, 마물들은 인육을 잔뜩 먹어서 좋고, 마왕들은 그럭저럭 적은 지출로 최고의 결말을 연출해서 좋다. 어딜 봐도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얼굴 표정이 영 못 마땅했다. 녀석이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그게 아니라. 왜 하필 네가 가야 하냐고.” “어?” “협상할 뿐만이라면 딱히 다른 사람이 사신으로 가도 상관없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내가 말을 잘하니까?” “나도 말은 잘 하는데에~.” 가미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미소가 유독 무서워보였다. “단탈리안은 전쟁에서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쓸데없이 원한을 많이 사지 않았을까? 거추장스러운 원한이 없는 내가 오히려 사신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아니, 죄송하지만 가미긴 전하께선 인간계의 역학관계에 완전 꽝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가미긴이 협상가로서 일류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마왕군 내부에서 협상이 이루어질 때 적용되는 얘기였다. “버니시아 왕국이랑 카스티야 왕국이 현재 브르타뉴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꿰고 있습니까? 거기서 프랑크 제국, 황제, 황태후가 각각 어떤 역할을 의미하는지는요? 황태후가 사르데냐 왕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의문입니다.” 가미긴이 입술을 닫았다. 그런데도 웃음은 여전히 활짝 피어 있었다. 이상했다. 가미긴이라고 자기보다 내가 사자에 더 적합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바르바토스도 그렇고 당최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뭐, 이곳이 인간계가 아니었다면 가미긴 전하께 부탁드렸을 겁니다. 다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자에는 제가 적합…….” “인간계의 국제적인 정세라면 소녀에게도 견식이 있사와요.” “…….” 이번에는 파이몬이 끼어들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포섭한 것도 소녀였지요. 산악파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고 외교로 이득을 취하려는 걸 목적으로 삼아 결성된 집단. 산악파의 수장을 맡고 있는 소녀가 사신으로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댁은 대신에 협상 능력이 잼병이잖아! 무심코 소리를 질러버릴 뻔했다. 아니, 정말로 뭐냐. 왜 갑자기 이 아가씨들이 삐딱한 자세로 나오는 거냐. 설마 나를 협상자로 보내면 불안하다는 소리인가? 약간 충격이다. 내가 다른 부분에서는 전부 밑바닥을 깔아줄지언정 말빨에 한해서만큼은 제법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후후.” 라우라가 숨을 죽여 웃었다. 주군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나는 분해져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라우라는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얼, 참모장. 그렇게 무시무시한 눈으로 본관을 노려보지 마라. 군단장들은 지금 참모장을 적진 한 가운데에 홀로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하아?” 라우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참모장은 심모가 날카롭다 한들 일신의 무위는 보잘 것 없다. 행여나 브르타뉴군이 좋지 않은 마음이라도 품으면 잠시라도 저항할 수 없겠지. 군단장들은 참모장의 안위가 걱정되고 또 걱정되어서, 차라리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 내가 고개를 돌려서 바르바토스, 가미긴, 파이몬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천하에서 제일 이기적인 년을 뽑으라면 나란히 공동 1위를 차지할 얘네가 걱정이란 걸 한다고? 그것도 나를? 농담이겠지. “흠흠. 꼭 걱정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너무 한 사람한테만 역할이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아, 싶어서.” “소녀는 그저 또 다른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했을 뿐이와요.” 그녀들은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분위기가 묘해졌다. 마르바스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시트리는 안절부절 못해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편 바싸고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완벽하게 썩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구더기 새끼' 하고 바싸고의 눈동자가 매도하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농담도 적당히 해주십시오, 부사령관.” “호오, 농담이라? 본관은 언제나 진실만을 입에 담는다.” “그러면 더욱 더 질이 나쁩니다. 설마 군단장들이 개인적인 심정 때문에 아군 전체의 향방이 걸린 대사에 관여할 리 없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군단장 각하들에 대한 모욕이 되어버립니다.” “흐응. 그러한가?” 라우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관이 경우에도 없이 장군들의 명예를 욕보인 셈이 되었는가? 본인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군.” 바르바토스, 가미긴, 파이몬 세 사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당연히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라우라를 대놓고 비판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사적으로 라우라의 군주에 해당하는 내가 대신해서 총대를 메준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세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우라가 쿡쿡 웃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 물론, 이 경우에는 어느 질문에 긍정했는지 분명하지 않다만.” “……부사령관.” “후후. 알겠다. 본관이 성급하게 말했다.”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장들, 부디 본관의 실수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너그러이 넘어가주면 감사하겠다.” 몸짓은 귀족 영애답게 무척 공손했는데 정작 목소리에서 반성의 기미가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불만스러웠다. 아무리 라우라가 원작에서도 공손한 구석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해도, 이럴 때는 화끈하게 제대로 사과해야 옳았다. 씁, 역시 천재라서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오만한 구석이 있는 건가. “아, 아니. 괜찮아, 라우라.” “……오히려 내가 경중이 없었는걸.” “실례했사와요.” 다행히 군단장들이 사과를 받아주었다. 세 마왕 모두 사회적인 활동에 있어서 라우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으니 앙금이 남았으리라. 나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다시 사과해야겠다. 아무튼 분위기가 다시 묘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자. “동지 여러분. 저에게 협상을 맡겨주십시오. 여러분이 전쟁에서 얼마나 위대한 공적을 세웠는가 저는 매번 감탄하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께서 기울이신 노력이 유종의 미까지 거두도록, 저 단탈리안, 분골쇄신이 되더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마왕들은 내가 사신이 되는 것에 찬성했다. 하긴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마왕 따위는 없었다. 바르바토스와 가미긴, 파이몬도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세 사람은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앙리에타가 천하의 멍텅구리가 아닌 이상에야 공식적인 사신으로 온 사람을 죽일 리 없다. 그래서야 안 그래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브르타뉴가 더더욱 궁지에 몰릴 따름이다. 아니, 궁지에 몰리기 전에 일단 앙리에타 본인이 죽겠지. 우리군의 복수에 의해서. 만약의 가능성이 있긴 하다. 정말로 상대방이 빡 돌아서 너 죽고 나 죽기 전법을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앙리에타가 절대로 그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던전 어택>을 통해 알고 있다…….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사과하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 * *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사절의 안내를 받아 요새에 입장했다. 요새에서 농성 중인 브르타뉴군은 상태가 제법 나빠보였다. 일단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가 드물게 보였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체력을 보존하겠다는 뜻이겠지. 달리 말해, 갑옷을 입은 채로는 체력이 유지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호위를 받으면서 성내를 거닐자, 병사들이 이쪽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들은 괴질이 도는 마당에 농성을 펼치고 있었다. 적군의 사신에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법했다. 내가 약간 목소리를 키워서 질문했다. “전염병이 퍼졌다고 들었다. 격리는 제대로 되어 있는가?” “죄송합니다. 소신은 군사와 관련된 일에 대해 말씀드릴 권한이 없어서…….” 사절이 난감한 어조로 말끝을 늘였다. 뭐, 권한이 있더라도 말해주지 않겠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사절에게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곁눈질로 주위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도저히 호의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험상궂은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만약 격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코웃음이라도 치거나 비웃음을 흘렸을 거다. 원래 여유가 없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척 가장하여 적을 압박하려 든다. 그런 가장조차 하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정말로 사태가 심각할 경우…….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병사들을 여기에 배치한 것이로군.’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앙리에타 여왕은 꽤나 힘든 입장에 처한 것 같았다. 협상자로서 이보다 기쁜 소식이 달리 없었다. “이곳입니다.” 몇 겹의 엄중한 경비 병력을 지나쳐서 요새 최중심부에 도착했다. 나무로 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송구합니다만. 혹, 인간계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으신지요?” “아아, 괜찮다. 본인은 아군을 대표하는 자로서 방문했다.” 사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앞에 선 기사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기사가 큰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신이 당도했사옵니다!” 문 건너편에서 쿵,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이 창대를 바닥에 찧는 소리였다. 그러자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화려한 치장이나 장식과 거리가 먼 장소였다. 붉은 카펫에 각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곱 명의 인간이 각탁을 중심에 두고 서로 두런두런 얘기하고 있었다. 그중에, 마치 피안화가 활짝 핀 것처럼, 붉은 머리가 찬란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장군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문득 한 번이라도 더 여인을 보고 싶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특별하게 생기가 넘치는 무언가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의 연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네가 단탈리안이군.” 그제야 나는 시선의 주박에서 풀려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나이다, 브르타뉴의 존귀한 여왕이시여. 말씀하신 대로 저는 단탈리안. 마왕군에서 서열 제71위라는 말석을 차지하며, 궁중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자입니다.” 그녀야말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난세의 영웅이다.   00304 제국 살해자 =========================================================================                        앙리에타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대를 어떤 식으로 환영해야 하는 것이지? 마왕인가. 아니면 일개 궁중백인가.” “송구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떤 자를 사신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십니까?” 내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앙리에타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떤 자를 사신으로 받아들이려 하다니?” “전하의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합스부르크 황제 폐하의 군대입니다. 전하께서 군사에 관련해서 논하시고 싶다면 저는 궁중백으로서 접견할 것입니다.” 우리군은 항상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표방했다. 사신으로 온 나 역시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며, 따라서 어디까지나 궁정백작으로서 행동해야 알맞다. “허나 만일 전하께서 양군이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대륙의 미래를 논하고자 하신다면.” 내가 양손을 보이면서 말했다. “저는 기꺼이 마왕으로서 전하와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흐응. 만약 내가 궁중백인 그대도, 마왕인 그대도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면?” “으음…….” 나는 고민하는 척 턱끝을 쓰다듬었다. “글쎄요. 그때는 단지 한 사람의 남자로서 전하께 접근하고 싶군요.” “뭐?”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십니다, 전하. 만일 오늘밤에 무도회가 준비되어 있다면 모쪼록 기대해보겠습니다.” 앙리에타가 피식 웃었다. “살다보니 마왕에게 춤을 권유받는 일도 다 있군.” “이미 전하께서는 프랑크를 무대로 삼아 멋지게 춤을 추셨습니다. 오늘은 말하자면 무도회가 끝난 막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예, 남녀가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대와 내밀한 시간을 즐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은걸.” 앙리에타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다들 나가 있어.” 장수들이 군례를 취하고 썰물처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방안에는 여왕과 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앙리에타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단도직입해서 말하지. 명예롭게 항복하고자 한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조건이 필요합니다.” “제시해봐.” 우리는 선수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겠다고 애꿎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검지를 올리면서 말했다. “첫 번째. 카트린 드 메디시스 황태후의 신변을 저희 측에 양도해주십시오.” “받아들일게. 단, 자클린 롱그위 성녀의 신변을 우리에게 양도해.”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으며, 나 또한 끄덕였다.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중지를 들어올렸다. “두 번째. 그동안 브르타뉴가 점유하고 있던 프랑크의 도시와 요새를 모두 포기해주십시오. 더불어서 프랑크와 불가침조약을 맺어주셔야겠습니다.” “……조약에 시기를 명시해. 시기는 십 년을 넘지 않아야 하고. 또한 우리가 요새에 비축해둔 무기와 군량은 도로 브르타뉴에 가져가겠어.” 십 년의 불가침조약. 이로써 단기간에 대륙을 재패하려던 앙리에타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들었다. “세 번째. 프랑크의 황제 앙리 3세를 죽이고 병사(病死)로 위장해주십시오.” “…….” 앙리에타가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한테 황제를 독살한 혐의를 뒤집어 씌울 셈이야?” “앙리 3세가 죽으면 프랑크 황실의 핏줄은 명실공히 단절됩니다.” 직계는 물론이고 방계까지 황족이란 황족은 싸그리 죽어버렸다. 앙리에타가 바퀴벌레 잡듯이 몇 년 동안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황태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겠습니다만. 황제가 있는 상황에서 섭정으로 군림하면 또 모를까, 태후가 단독으로 국정을 휘어잡기란 어렵지요. 프랑크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리라 생각하십니까?” “……다시 내전이 일어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크에서 웬만한 대귀족은 일소되었다. 남은 것은 다 고만고만한 난쟁이들. 그중 누군가가 패권을 잡으려 해봤자 전도다난할 게 확실하다. 즉, 내전의 재발이다. “지금까지 프랑크의 왕당파와 공화파는 일치단결했습니다. 전하, 바로 당신이라는 적이 있기에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면 당파들은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이제 안으로 돌리겠지요. 각 당파가 이해관계를 놓고 충돌할 것이 분명합니다.” “…….” 앙리에타가 침묵했다. 아까 전에는 눈빛에서 분노가 넘쳤다. 반면에 지금은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앙리에타가 뜸을 들이며 입술을 열었다. “그대들의 목적은 자군을 프랑크에서 축출하려는 것 아니야?” “맞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걸. 왜 프랑크에 해를 입히려고 하지?” “전하. 프랑크가 강대해지면 곤란한 국가는 비단 브르타뉴만이 아닙니다.” 내 대답에 앙리에타가 길게 탄식했다. “……그대들은 프랑크를 구원하려는 게 아니었어. 단순히 브르타뉴와 합쳐진 프랑크가 지나치게 강력해질까 두려웠을 뿐. 우리의 군사력을 깎아두고, 프랑크에는 내전의 씨앗을 뿌려둔다. 그리하여 중간에서 이득을 보려는 거야.” 내가 싱긋 웃었다. 부정도 하지 않았고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불가침조약을 십 년보다 길게 설정하는 편이 전하께도 이로우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프랑크인들은 마음을 놓겠지요.” “……그렇군. 조약문에 명시된 기간이 길면 길수록 프랑크인들은 안심하고 내전에 집중할 테니까.” 앙리에타가 어딘지 허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무서운 자로구나, 단탈리안.” “…….” “사람들은 전쟁이 무사히 끝나고 평화가 도래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대가 제시한 조건들은 하나씩 살펴보면 이상한 구석이 없다. 허나, 실상은 평화를 가장한 모략……이제 프랑크인들은 자발적으로 내전을 일으키겠지.” 앙리에타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습니까?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과연 마왕처럼 악랄하고 흉악하네……하지만.” 앙리에타가 일어섰다. “브르타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지. 협상을 받아들이겠어.” 우리는 서로의 오른손을 마주잡았다. 향후 10년, 프랑크의 운명은 바야흐로 지금 이곳에서 결정되었다. 우리는 그날 바로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외부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회담이 오갔다. 공식적으로는 브르타뉴군과 우리군이 의견 차이가 심각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고만 알려졌다. 며칠 뒤, 앙리 3세가 급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사망에 브르타뉴군은 '심각하게 동요'했고,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연합군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군은 그동안 브르타뉴군이 보여준 놀라운 분전을 인정했으며, 군기와 무기를 모두 들고 귀국하는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했다. 관대한 제안에 힘입어서 공표된 조약문은 아래와 같았다. 1.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향후 14년 동안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2. 브르타뉴 여왕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한 번의 선물을 증정한다. 3. 그 외에 브르타뉴는 합스부르크에 일절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으며, 합스부르크 또한 브르타뉴에 별도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르 아브르(Le Havre) 조약이라 이름 붙은 문서였다. 일국의 여왕을 완벽한 패배까지 몰아넣은 군대가 제안했다기에는 너무나 자비로웠다. 조약문을 조인하는 장소에는 프랑크에 머물던 각국의 대사가 참가했는데, 그 자리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는 선언했다. “아군의 목적은 마왕 아가레스를 토벌하는 것이요, 목적이 달성된 이상 과인은 브르타뉴의 군주를 핍박할 의사가 없다.” 일찍이 연합군이 내걸었던 명분이 겉치장이 아니었음을 만방에 알린 것이다. 만일 불평등한 조약문이 체결되었다면 지금까지 관망하던 국가들이 제동을 걸었겠지. 브르타뉴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이 불안한 만큼 합스부르크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 역시 불안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는 이번 전쟁에서 어떠한 영토도 차지하지 않았다. 대륙의 제국(諸國)은 황제가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친정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의의가 조약에 숨어 있었다. 바로 마왕군이 조약의 당사자로 끼었다는 사실이다. 여태까지 인류와 마왕군은 어떠한 조약도 공식적으로 맺어보지 않았다. 이번 조약은 비록 겉보기에는 브르타뉴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마왕군이 실질적인 한축으로 끼어 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달리 말해, 마왕군과 인류가 서로를 '여차하면'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 있는 상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걸로 제 목적은 완수되었습니다.” 내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흥얼거렸다. “앙리에타는 14년이면 국력을 회복하리라 자신하는 것 같지만, 기사단이 저리 전멸해서야 어림도 없지요. 게다가 앙리에타는 더 이상 왕당파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손안에서 대륙은 떠났어요.” 어깨를 주물러주는 라우라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는 즐겁게 웃었다. “서열 제1위의 마왕도, 서열 제2위의 마왕도……대륙에서 가장 패자에 가까웠던 군주도 탈락했습니다. 이제 파벌 정치밖에 안 남았지요. 라우라.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아아. 수고했다, 주군.” 참고로 브르타뉴군의 수중에서 해방된 황태후는 베르시 준남작이 모셨다. 베르시 준남작은 사병을 동원하여 황태후를 호위했고, 파리시오룸에 입성했다. 이 공로로 인해서 준남작은 단번에 백작의 칭호를 거머쥐었다. 황태후의 측근이자 공화파의 거두로서 베르시 백작이 파리시오룸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아. 이제 마왕군에 독재자는 사라졌다. 평원파든 중립파든 산악파든,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마왕군 전체를 움직이기란 불가능해졌다. 세 개의 파벌은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한다. 인간계에서도 월등한 세력이 말소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일개 공화국의 참주로 전락했고, 앙리에타는 아슬아슬하게 왕권만 유지하는 신세로 떨어졌다. 바알과 아가레스를 잃어버린 마왕군, 앙리에타를 잃어버린 인간계……사실상 이번 전역에선 마왕군과 인간계 양쪽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나라고 자신해도 좋겠지. 마왕군에서는 각 파벌의 조율자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합스부르크의 궁중백작으로 일국의 군주와 협상 테이블에 오름으로써, 앞으로는 인간계에서도 활동할 실적과 명분을 만들어두었다. 나는 기분 좋게 전쟁을 끝내고 귀환했다. 진심으로 유쾌했다. 이상한 소식을 전해듣기 전까지는. * * * “……우리군이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을 시행했다고?” “예. 그것도 상당히 대규모로 자행된 듯합니다.” 연합군이 각기 바타비아 공화국군, 합스부르크 제국군으로 갈라져서 귀국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전령에게 묘한 정보를 전해들었다. 제국군이 프랑크의 남부 영지를 싸그리 약탈하면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뜬소문이냐. 우리는 프랑크 남부에는 아예 진군한 적조차 없거늘.” “하지만 실제로 남부 도시들에서 아군에 대한 원망이 자자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쑥대밭이 되어버린 곳도 있다고…….” 전령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리는 표정이 구겨졌다. 말인즉슨, 무려 천 명이 넘는 제국군이 수십 개의 마을을 잔혹하게 약탈했다. 말이 약탈이지 학살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며, 파리시오룸을 공략할 적에 그러했듯이 대규모 화형까지 거행된 모양이었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피해는 더 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간신히 회복된 파리시오룸의 궁정으로 탄원서가 빗발치고 있었다. 새로이 뽑힌 프랑크 각료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진상을 조사하는 중이라던가. 바르바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야. 솔직히 불어. 어떤 년놈이야?” “…….” “누가 분견대를 풀어서 쓸데없는 짓을 벌였어? 앙?” 마왕들은 서로가 서로를 슬쩍 쳐다보았다. 공중에서 무수한 시선이 엇갈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00305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 나는 조용히 마왕들의 상태창을 띄웠다. 차례대로 심리상태를 읽어보았다. 전원이 결백했다. 바싸고든 마르바스든 모두 곤란해 하고 있었다. 적어도 군단장들은 뒤에서 호박씨를 까지 않았다……. “바르바토스, 진정해라. 범인이 이중에 있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 출진하지 않은 마왕 중에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몬, 발레포르……확실히. 우리에게 배신자가 있다는 것보다는 그들을 의심하는 편이 합당하겠사와요.” 마르바스와 파이몬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걸 다잡았다. 설령 배신자가 있다 해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의심이 퍼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적절하게 의심을 끊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단탈리안.” 마르바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모처럼 공기가 가라앉으려 하는데 왜 불씨를 되살리는가, 하고 마르바스의 눈이 질책했다. 마르바스. 그래서야 당장 사태를 무마할 수는 있을지라도 의심의 싹은 계속해서 남는다. 겨우 새로이 체계를 만들어낸 마왕군이다. 의심을 보다 확실하게 뿌리부터 없애버릴 필요가 있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번 출정에 동조하지 않은 마왕 중 누군가가 분견대를 풀었다고 해보지요.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우리군을 음해하려는 목적이지 않은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마족 병사를 동원했을 것입니다. 마왕군이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마을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연합군 따위 거짓말이고 허위이다……이렇게 흘러가야 방해 공작이 성공하겠지요.” 나는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령. 보고에 따르자면 마을들을 초토화시킨 것은 제국군이다. 틀림없는가?” “예, 전하. 틀림없습니다.” “보십시오. 마족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닙니다.” “…….” 마르바스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우리 중에 정말로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분견대로 마족을 출동시켰다면 더 효과적으로 아군의 평판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인간군의 복장을 구해다가 병사들한테 입혔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범인이 제국군으로 알려져봤자 마왕한테 이득이 될 게 없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마왕의 소행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는 마왕도 있었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확실히 조금 전보다 나아졌다.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에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럼 누가…….” “브르타뉴군이다. 우리와 협상하는 틈을 이용한 거야.” “제국의 군복을 입었다 하지 않는가?” 마왕들이 삼삼오오 마주보고 수군거렸다. 대체로 앙리에타가 의심스럽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범인은 마왕이 아니다. 자네는 인간이 약탈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단탈리안.” “예. 아마도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먼저 범인은 자유자재로 천 명의 군사를 통솔할 정도의 권력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출신의 병사를 구할 여건까지 된다. 그만한 여유를 가진 인간은 많지 않다. 다음으로, 아군이 '절대로' 프랑크 남부에 진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우리군의 전략적인 목표를 정확히 꿰뚫었다는 얘기가 된다. 상당한 수준의 전략가이다. 혹은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지녔다고 봐야겠지. 내가 입술을 열었다. “동지 여러분. 제가 감히 판단하기에 범인은…….” * * * “파리시오룸을 구원하는 것은 포기한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파리시오룸 근방을 직접 정찰하고 돌아왔다. 정찰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지휘관을 불러모아 단언했다. “브르타뉴군에게는 이미 가망이 없다. 포위가 이루어진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도 앙리에타 여왕은 황도를 버리지 않고 시간을 낭비했어. 전쟁은 끝났다.” “각하. 이제 겨우 이틀째입니다. 전쟁의 결말을 예견하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통령 제1비서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군. 겨우 이틀째인가…….”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군의 수괴는 단탈리안이다. 그는 전쟁을 모략의 연장선으로 취급한다. 유리아, 모략이란 눈치채고 난 뒤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겨우가 아니야. 벌써 이틀씩이나 지나버렸다.” 엘리자베트가 투구를 벗었다. 하얀 머리수건에 땀이 흠뻑했다. “어제부터 마왕군이 인간들을 화형에 처하고 있다. 죄목은 사 년 전의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를 단죄한다는 것이지. 제군.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유리아를 비롯해서 지휘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트는 시종이 건네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후우. 파리시오룸은 왕당파의 성지이다. 만일 브르타뉴군이 황도를 버리고 떠나버리면 학살의 불길은 그대로 파리시오룸까지 옮겨 붙을 터. 시민들이 여왕을 향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 “시민들이 몰살당할 것을 알면서도 도망쳐버린 군주. 백성보다 자기 한 목숨이 소중한 폭군. 그런 식으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본국의 왕당파마저 앙리에타를 매도하겠지.” 엘리자베트는 지쳤는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면 좋았다. 학살이 일어난 지 하루째라면 아슬아슬하지만 역시 괜찮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버렸어. 앙리에타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그럴수가…….” 유리아가 충격에 목소리가 메였다. 대륙의 패자에 가장 가깝다고 칭해지던 앙리에타 여왕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간단하게 몰락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겨우 이틀인데…….” “단탈리안이라면 가능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치명적이고 깔끔하지. 앙리에타는 가장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부류를 적으로 맞이하고 말았다.” “…….” 유리아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모략꾼이 단 이틀 만에 일국의 군주를 끝장내는 계책을 손쉽게 짜낸다는 말인가? 더 나아가, 눈앞의 여인은 어떻게 그런 계책을 단 한번에 꿰뚫어 보았는가. ‘드넓은 대륙에서 오직 두 명만이 전쟁의 결말을 알고 있다.’ 유리아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일찍이 엘리자베트 통령은 단탈리안을 가리켜서 '대륙 제일의 책사'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그 책략을 알아차린 통령은 무엇인가? 동류만이 동류를 정확하게 평가한다. 단탈리안과 엘리자베트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부류의 인물이겠지.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유리아가 질문했다. “각하께서는 어찌하실 것인지요?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퇴각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방법은 있다.” 엘리자베트가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두 눈을 떴다. “우리는 적을 모방한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태동했습니다. 제국군의 군기와 갑옷을 마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요. 재미난 사실은.” 저절로 입가에서 미소가 만들어졌다.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이 벌어진 지 한 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천 명 분의 갑옷과 군기를 마련하는 데 적어도 열흘은 걸립니다.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전송한다 해도 열흘입니다…….” 우리군이 파리시오룸을 포위한 기간이 딱 열흘. 여기에 더해 르 아브르에서 항복사절단이 나오는 데 한 달이 조금 덜 걸렸다. “요컨대, 파리시오룸의 포위가 막 이루어진 바로 그때 통령은 이미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훌륭하군요. 그녀는 우리군의 목적을 일견에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제국군을 위장해서 프랑크 남부를 휘저었다. 합스부르크의 언어를 쓰는 병사가, 합스부르크군이 쓰는 군기와 군복을 사용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이 침략해온 이때 활동한다. 누가 봐도 제국군의 소행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가 파리시오룸에서 행했던 학살의 방식까지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철두철미하다고 할까요. 과연 합스부르크의 통령입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왜 그런 짓을 벌이겠나?” 마르바스가 조용히 물어왔다. “어차피 프랑크의 일이다. 그쪽과 크게 상관없지 않은가.” 내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상관이 있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통령은 대륙을 시야에 두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마왕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목적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군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 여태까지 우리는 약탈을 최소화하면서 진군했습니다. 민심을 이쪽으로 끌고 오기 위함이었지요.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프랑크 동북부에서도 일할의 안전세만 거두었다. 그런 노고가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둘째로, 프랑크 전국에 다시금 반(反)공화주의가 들끓을 것입니다.” 엘리자베트가 '사 년 전의 학살을 단죄한다'라는 명목으로 남부에 학살을 일으켰다. 이것에 남부의 도시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남부의 도시들은 우리에게 항의하겠지요. 황태후에게도 학살의 참화를 알리며 우리군을 비난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살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저지른 적이 없으니 사과하지 않는다. 남부의 시민들이 이런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답변에 만족할 리 없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변명으로 들릴 뿐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누명이다.” 마르바스가 불쾌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차라리 통령의 소행이라고 밝히면 어떠한가?” “안타깝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엘리자베트이다. 증거가 될 만한 흔적 따위 남기지 않았으리라. 아니,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뻔하다. “정치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은…….” “힘들겠지요. 우리가 적어도 파리시오룸 근방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만큼은 진실입니다. 이미 학살을 저질러본 우리와 전혀 생소한 타국.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의심하리라 보십니까?” “으음.” 마르바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답답한 심정이겠지. 학살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난감하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첫사랑에 걸린 애송이처럼 두근거렸다. 당사자인 앙리에타조차 깨닫지 못한 이쪽의 술수를 엘리자베트가 간파했다. 그리고 곧바로 학살을 실행에 옮겼다……. 행동력과 결단에서 앙리에타와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밀정을 보내보지요. 아마도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통령은 국경의 경비대를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경 경비대가 사라진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상대방의 유죄를 밝힐지도 모릅니다.” “음.” 말로 하면서도 그럴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했다. 아마 엘리자베트는 병사들의 신분을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이다. 공화국의 국민들조차 군대가 움직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이런 방면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엘리자베트의 솜씨를 신뢰한다. 마르바스가 손깍지를 끼었다. “단탈리안. 자네의 주장은 통령이 우리군의 목적을 속속들이 꿰뚫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한다. 그것이 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군.” “가능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라면.”   00306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학살 사건 자체는 무척 쉽게 해결되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쉽게 해결했다. 엘리자베트의 노림수는 요약해서 다음과 같았다. '학살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수단과 방법을 그다지 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엘리자베트는 간과했다. 원정에 참여한 인간군 중에서 적당한 중대장을 한 명 골라잡았다. 사령부에서 호출하니 지휘관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찾아왔다. 나는 대뜸 중대장에게 말했다. “우리군은 현재 제법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유를 알고 있는가?” “소, 송구합니다. 소관은 전혀.” 앞에 선 남자는 비교적 계급이 낮았다. 아직 학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겠지. “정체불명의 군대가 우리군을 표방하며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을 행했네. 이게 꽤나 악질적이어서 말이지, 남부의 장관들이 단단히 화가 났다고 하더군. 우리군에게 학살의 책임을 지라며 성화라네.” “하…….” 중대장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사람이 없다는 것일세. 정말로 우리가 저지른 학살이 아니니까. 그러나 만일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장관들은 더더욱 가열차게 우리를 비난하겠지. 이해하겠는가?” “예, 예에. 어떻게든.” “모처럼 프랑크에 우리한테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초장부터 사이가 냉냉해져서야 농담도 뭣도 아니야. 우리는 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중대장이 난감한 듯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손에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요는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는 중요치 않아. 파리시오룸의 정부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태도이다.” “…….” “자네. 슬하에 딸린 가족이 많더군.” 지휘관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부모와 자식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잘 보살펴주겠네.” 내가 눈짓하자 시트리가 검을 빼들었다. 중대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서서히 경악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중대장이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 각하. 저는 정말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네. 자네는 완벽하게 무죄일세.” 시트리가 성큼성큼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죄는 자네가 아니라 내가 저지르는 것이지.” 중대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그의 목을 단번에 잘랐다. 바닥에 핏물이 튀었다. 첫 번째 희생양이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지휘관이 이끌고 있던 중대가 풍비박산 났다. 기병대 중대 여든일곱 명이 문답무용으로 잡혀왔다. 나는 중대장에게 얘기한 것처럼 똑같이 중대원들에게 설명했다. 여든일곱 명의 인간 병사는 꼭 상관처럼 의아해하다, 나중에 가서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이미 충분히 벌었으니, 목숨만……!” “왜 저희가 죽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설득이 아니라 단순히 명령이었다. 내 지휘 아래 철저히 살육이 행해졌다. 이번에는 화형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여든일곱 개의 수급을 얻었다. 수급들에 소금을 뿌려 파리시오룸에 전달했다. 우리군은 프랑크 남부에서 불미스럽게 행해진 사태에 대하여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했으며, 철저한 조사 끝에 불법적인 약탈을 저지른 주범을 밝혀냈다. 이들은 분견대로서 사령부의 의사를 교묘하게 왜곡. 명령이 내려진 적도 없는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군은 비록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이에 대한 책임에서 회피하지 않겠다. 아직 색출하지 못한 죄인을 지속적으로 수사해서 밝히겠으며, 잡히는 대로 파리시오룸에 이송하겠다. 대충 그런 해명을 내놓았다. 브르타뉴군에게 빼앗은 재화를 남부의 장관들에게 원없이 뿌린 것은 덤이었다. 대대적인 매수가 들어가자 장관들은 천천히 입을 닫았다. 프랑크의 신생 정부와 우리군의 밀월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나는 격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피는 결코 물로 씻을 수 없다. 오로지 피만이 같은 피를 씻겨낼 수 있다, 라고……. 엘리자베트는 훌륭했다. 학살을 모방해서 이쪽의 정치적인 분열을 꾀하다니,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떠올릴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하물며 발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은 엘리자베트 정도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깨달았을 거다. 나는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쪽이 모략을 걸어온다면 나도 똑같이 모략으로 받아주겠다. 내가 학살을 일으켰기에 그대도 학살을 자행했는가? 그렇다면 좋다. 더 학살하자. 피로 피를 씻자. 그 피를 다시금 피로 씻는 연옥을 연출하도록 하자.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끝나지 않는 연옥이다. 나와 함께 춤을 추려면 연옥에서 왈츠를 추는 정도의 배짱은 보여야 한다, 엘리자베트. 내가 편식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달아라. * * * 통령 집무실은 오늘도 우중충했다. 공화국 외무상서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집무실에 들어서며 한숨을 쉬었다. 방 저편. 엘리자베트가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하. 서류입니다.” “…….” 대답이 없었다. 지난 달, 비밀스러운 행차에 다녀온 뒤로 통령 각하께서는 우울해졌다.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마냥 엘리자베트는 창문 너머만 바라보았다. 뚝, 뚝, 하고 빗소리가 방안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창문에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빗물을 그녀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덧없고 처연해서. 신기루처럼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 무슨 불길한 상상인가.’ 하델베르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델베르크는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통령 각하.” “……아아? 외무상서로군.” 그제서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요즘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어.” “후우. 벌써부터 노화의 기미가 보이는 것 아닌지 소신은 걱정입니다.” “과일처럼 싱그러운 처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엘리자베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델베르크가 보기에는 그 미소마저 흐릿했다. “각하. 공화국의 대소신료가 각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 “물론 각하께서 프랑크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시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합니다.” 하델베르크는 엘리자베트의 비밀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물이었다. 통령은 프랑크에서 대대적인 약탈을 일으켰다. 그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하델베르크는 판단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공화국의 통령이십니다. 일국의 얼굴이시지요. 소신이 감히 마음을 다잡으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일국의 얼굴인가.” 엘리자베트가 또다시 멍하게 중얼거렸다. 명백히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볼프람. 합스부르크 섭정국에서 일주일 전 밀서를 보내왔다.” “예?” “편지에는 단 한 글자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천하(天下)라고.” 천하. 하이델베르크가 눈썹을 쨍그렸다. 섭정국에서 밀서를 보내는 것 자체가 극히 생소했지만 편지 내용은 더더욱 이상했다. “무슨 암호라도 되는 것일까요, 각하?” “암호가 아니다. 저쪽은 프랑크 남부에서 학살을 행한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야.” “…….” 하이델베르크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학살 작전에는 공화국의 상층부가 총력을 기울였다. 겨우 천오백 명의 군사에 불과했으나 그만한 병력을 극비리에 운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만큼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공화국의 국민은 물론이고 각료들도 대부분 몰랐다. 어떻게 섭정국에서 진실을 알아냈는가? “아마도 단탈리안이겠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마족 병사를 고용했어야 했다. 그러면 단탈리안도 학살의 주범이 마왕인지 나인지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 “실수였다. 난쟁이 용병들을 고용한 다음 일이 끝나면 입막음을 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과연 마족을 신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그것이 실수였다…….” 엘리자베트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단탈리안은 나를 조롱한 것이다. '보라, 이것이 그대가 원하던 천하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며 가지고 노는 기분은 어떤가.' 그리 묻는 게야.” “…….” “우울하군.” 엘리자베트는 시선을 돌려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 나는 천하를 재패하는 것이야말로 지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 와중에 수없이 절망할지라도 천하 자체는 아름다운 꿈이라 여겼다. 이제서 깨달았다. 천하에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없어.” “……각하.” “대륙 만민을 속이고 우롱한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피바람을 일으킨다. 존재하는 것은 기만과 술수뿐이다.” 엘리자베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조하는 미소였다. “하긴, 로베르트를 죽였을 때부터 이미 깨달았어야 하거늘. 멍청한 것은 나인가……. 루돌프 오라버니는 권력을 위해 언니들을 간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 도대체 오라버니와 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보면서 살았나…….” 하델베르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각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때로 목적을 달성하려면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법이었다. 지도자의 의무는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거기에 잘못이 있다는 것일까? “각하. 그럴수록 우리는 좋은 국가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희생자들의 무덤에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입니다.” “……죽은 자에게 국가는 필요없네.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낸다 한들 희생자들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기 변명,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바라보는 천하로군. 음울한 회색의 세계이다. 낭만과 이념이 없으며, 오로지 조소와 복수만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단탈리안에게 대륙이란 거대한 무덤이요 위령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 하델베르크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지금 자신이 무슨 위안을 건네더라도 결코 통령의 마음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허나, 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기만이라 불러도 좋다. 나 하나가 기만자가 됨으로써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돌려 하델베르크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에 더는 예전과 같은 패기가 없었다. 하지만 어둡게 뭉쳐져서 단단하게 굳은 시선이 그곳에 자리했다. “하델베르크 외무상서.” “예, 각하.” “프랑크의 남부 도시들에 접촉을 꾀한다. 북부에 자유도시들이 들어섰다면 남부에도 들어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섭정국이 북부를 장악한다면, 우리 공화국은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델베르크가 자신의 존경스러운 주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연락망을 가동하겠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섭정국은 북부의 공화파를 돕고, 우리 공화국은 남부의 왕당파를 돕는가. 농담이라 치부하기에는 적이 재앙스럽군.” 엘리자베트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좋다. 천하이다. 하늘 아래 연옥밖에 없다 한들, 적어도 두 명이 함께 춤을 출 공간 정도는 있을 것이다. 마음껏 어울려주마…….” 빗소리가 울리는 집무실에 엘리자베트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00307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 * * 소위 꼭두각시 전쟁이라 불리는 전역은 3개월 만에 종료했다. 내가 생각해도 솜씨 좋게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마계는 이번 전쟁의 결과를 두고 열광했다. 월맹군이 또다시 위업을 이루어냈다, 하찮은 인간종에게 마족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고 흥분했다. 브르타뉴군과 맺은 조약은 어느새 마계의 시민들에게 「항복 문서」로 여겨졌다. ─ 지난 월맹군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호쾌한 승리. ─ 전략적으로 완벽할 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마족의 권위를 바로세우는 전쟁 그 이상의 전쟁을 보여주었다. 대체로 그런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평판이 나돌도록 뒤에서 돈을 잔뜩 뿌렸다. 군단장들이 니블헤임에 귀환하자, 시민들은 바알을 토벌했을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기뻐하며 환호로 맞이했다. 개선식을 지켜보고자 무려 십만의 시민이 집결했다. 당연했다. 저번 개선식에서는 단지 반역자를 처치했다는 명목만 있었다. 이번에는 반역자는 물론이고 인간의 군대까지 압살해버렸다. 어느 쪽에 시민들이 더 환희할지 일목요연했다. 참고로 마계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와 바타비아 공화국이 '월맹군에 복종하여 얌전히 협조했다'라고 알고 있다. 거짓이지만 거기엔 어느 정도 진실이 섞여 있다. 그렇다면 세간의 인식을 왜곡하는 것쯤이야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아군이 입은 피해와 적군의 병력을 왜곡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우리는 자그마치 칠만의 대병력을 이천 명 정도의 피해만으로 물리친 군대가 되어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라고 한다. 음, 여론이란 무척 편리하구만. 이번 전쟁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라우라였다. 일각에선 왜 인간이 '위대한 마족'의 군대를 통솔하느냐고 불평불만이 일기도 했다. 월맹군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까닭은 마족의 위대함 때문이지, 결코 나약하고 하찮은 인간 덕분이 아니라고……. 멍청이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간계든 마계이든. 마르바스는 개선식 대표 연설에서 그러한 추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인간이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긍지와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고귀한 마족들이여, 언제부터 우리가 실력이 아닌 출생으로 한 인물을 평가했던가? 마왕이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군림하는 시절도, 어느 종족이 그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세하는 시절은 이미 끝났다.” 마르바스가 특유의 침착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마족들이여, 우리는 전사이다. 설령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해도 속에 품은 긍지가 고귀하다면 그 역시 훌륭한 전사이다. 본인과 마왕군의 대표자들은 이 자리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한 명의 전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전사는 출생이 아니라 오로지 실력만으로 우뚝 선다. 그것이 마족의 긍지이다. 비록 마계의 이면에는 지독한 계급제도가 존재했으나, 마르바스는 이를 비판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이번 전쟁에는 전체의 승리를 도외시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다 적발된 일당이 있다. 그들은 제멋대로 부대에서 탈영하여 민간인 마을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우리는 이들 배후에 특정한 마왕이 개입했다고 보고 있다…….” 충격적인 발표에 시민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고작 한 개의 중대만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마물로 이루어진 중대를 살인멸구했다. 간단한 이유다. 인간 병사의 목만 보내서야 프랑크에서 의심할 여지가 있다. 혹시 희생양을 보낸 것 아니냐고. 하지만 마물까지 죽여서 보내면 의심이 대폭 줄어든다. '우리는 계속해서 학살의 주범을 열심히 찾고 있다'라고 제스처까지 보여줄 수 있다. “본인은 시민 여러분에게 상세한 사정을 알려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단순히 마왕군의 전쟁에 지나지 않고, 마계 전체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배신자는 마계 전체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 명령을 위반한 부대는 마계가 아니라 대륙 출신. 현지에서 고용된 오크 부락민이다. 이들은 보통 마족과 구별해서 마물(魔物)이라 불린다. 설령 똑같은 오크족일지라도 보통 마계 출신은 지능이 높은데 비해, 대륙 출신은 지능이 떨어지기에 그같은 멸칭이 붙는다. 사실 마족은 인간종보다 편견이 심한 종족이다. 마족이건 마물이건 아무튼 지능이 떨어질수록 마왕에게 반항하기 힘들다. 즉, 마왕으로 이루어진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기 위해서는……'또 다른 마왕'의 명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직 어느 마왕이 배신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마르바스가 침통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만 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마왕이 개입해 있다. 본인은 아군의 군단장들이 배신했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이번 전쟁에서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십만 명의 대중이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누가 감히 신성한 월맹군을 배신했는가. 마르바스는 광장에 가득 찬 시민들을 내려다보았다. “긍지 높은 마족들이여! 본인은 이 자리에서 묻고 싶다. 인간인데도 아군의 승리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자가 있다. 반면, 마왕임에도 아군을 배신하고 사익을 가로챙긴 자 또한 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전사인가. 어느 쪽이 우리의 동료인가. 부디 곰곰이 생각해주길 바란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구태여 프랑크 남부의 학살을 부인하지 않은 이유이다. 마족과 인간이 협력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한다. 라우라의 권위와 명성을 확립시킨다. 이것이 첫 번째 목적이며,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적은 다른 지점에 있다. 마르바스는 이번에 참군한 군단장들이 결백하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바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강력한 마왕'. 이들이 대거 용의선상에 올라간다. 마왕군은 바알을 참살함으로써 새로운 지도자 집단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은 마왕들이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서열 제6위인 발레포르, 서열 제7위인 아몬……. 이들은 서열이 최상급에 해당하는 만큼 매우 위협적이다. 마왕군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조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눈엣가시처럼 거슬린다. 우리에게 비협조적인 마왕이 두세 명쯤 있어도 괜찮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똘똘 뭉치는 경우이다. 이때, 틀림없이 우리한테 반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마왕이 중심이 되겠지. 발레포르와 아몬은 잠재적인 정적이다. 바퀴벌레는 한번 늘어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초장부터 짓밟아야 한다. 프랑크 남부의 학살은 매우 적절한 시기에 터져주었다. 엘리자베트와 국제적인 공세를 펼쳐보았자 쌍방이 증거부족으로 지쳐 떨어질 뿐이겠지. 이렇게 내부의 적을 말살하는 데 이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좋다. “현재 탈영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곧이어 배후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본인은 결과가 나오는 대로 즉시 널리 알릴 것임을 약속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내던지는 경고이다. 아직까지 밍기적거리며 우리한테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마왕들이여, 들으라. 우리는 미지근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협조하든지 아니면 반항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리고 만일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반역자 바알과 아가레스의 뒤를 쫓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마법사를 동원해서 몇몇 마물의 정신을 완벽하게 세뇌했다. 마물들은 자기가 발레포르와 아몬의 밀명을 받아 움직였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었다. 만일 발레포르와 아몬이 최후통첩을 무시한다면……음, 피바람이 다시 한 번 불겠지. 이미 바알과 아가레스라는 피폭풍이 일어났다. 한 번쯤 더 일어난다고 해봤자 나는 아무 상관없다. 다음날. 승전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니블헤임 궁정에서 열렸다. 바알이 무너트린 궁정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빠르게 수리되었다. 아직도 무너진 잔해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곳은 영구히 보존하기로 했다. '반역자의 최후'라는 작품명을 붙여서. 마계에서 내로라 하는 인사는 죄다 참석했다. 니블헤임의 시민 대표자들은 물론이고, 상회 회주들과 마계 대공들까지. 그들은 군단장들을 둘러싸고 화기애애하게 떠들었다. 참고로 라우라도 마계의 귀족들한테 포위되어 아이돌 싸인회를 절찬리에 열고 있었다. 물론, 친애하는 마왕 전하들도 참석했다. “단탈리안.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겠나.” 옷차림이 화려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피부가 검은 구릿빛에 대머리였다. 남자의 뒤편에는 머리가 온통 새하얀 여인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두 눈을 붕대로 감았다. 발레포르와 아몬. 그들도 무도회에 온 것이었다. 내가 활짝 웃었다. “예. 제가 어찌 두 분 전하의 권유를 무시하겠습니까?” “…….” “로드브로크 회주. 나는 잠시 전하들과 얘기를 나누고 오겠네.” 나와 얘기하고 있던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양해를 구했다. 노인의 몸을 쓰고 있는 이바르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무도회장 저편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무도회장 구석에 마련된 발코니에 들어갔다. “어제 마르바스가 한 연설은 대체 무엇인가.” 발코니 문이 닫히자마자 발레포르가 입을 열었다. 푸른 눈동자에 조급함이 실려 있었다. 이런, 연설의 소식을 전해듣고 꽤나 마음이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월맹군에서도 열과 성의를 다했어. 마왕성까지 이끌고 브루노 평원에 몸소 간 것을 벌써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내가 의자에 앉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전하. 프랑크 남부에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원정에 참여한 마왕 중에 누군가가 행한 일이겠지. 단탈리안, 이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야. 내가 그깟 푼돈을 챙기겠다고 자네들 몰래 분견대를 보냈겠는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의도가 무엇인지도 오리무중입니다.” “솔직하게 말해보게. 단탈리안, 애당초 학살이란 게 있기나 했는가? 설마 우리를 협박하려고 자작극을 펼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슬며시 발레포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월맹군의 공식적인 발표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발레포르가 입을 다물었다. 아몬은 뒤편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전하. 저는 월맹군에서 다른 마왕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저는 전우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전우가 아닐지라도 동지이자 동족이신 두 분 전하를 행여나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목적이 무엇이지요?” 아몬이 말했다. 마치 성녀처럼 자애롭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저는 이런 정치적인 술수에 능숙하지 않아요. 평생 그런 것에 몸을 담아본 적도 없어요. 단지 여러분이 저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 당신에게 협상의 의지가 있다는 것, 두 가지만 간신히 알 따름이에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몬 전하. 우리는 전하를 절대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종의 모함으로부터 전하를 지켜드리고자 합니다.” “……좋아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가는 무엇이지요?” 아몬이 질문했다. 대화가 빨라서 좋았다. “마왕군이 회의를 소집할 때 적극적으로 참석해주십시오. 비록 두 분 전하께서 이번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으셨지만, 앞으로는 안 그럴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들이 멋대로 만든 단체에 협력하라는 얘기군요.”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마왕군이 두 개나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일주일 뒤, 탈영자들에 대한 조사가 발표되었다. 안타깝게도 탈영자들은 철저한 고문 끝에도 배후를 실토하지 않았다. 매우 강력한 세뇌 마법이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는 마탑의 의견도 첨부되었다. 시민들은 정체모를 배신자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하여, 꼭두각시 전쟁이 완전히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으로 치장된 전쟁이.   00308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 * * 베르시 백작은 요즘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작위가 남작에서 백작으로 올랐다. 한발 더 나아가서 제국 법무상(法務相)에 임명되었다. 제국에서는 황제, 재상, 바로 그 다음 순서가 법무상이었다. 단번에 정부의 실세로 뛰어오른 것이었다. 하물며 현재 프랑크에는 황제도 재상도 부재했다. 황제 앙리 3세는 죽었다. 재상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임시로 대행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사라졌다. 황태후 폐하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얼굴 마담, 상징적인 면모가 강했다. 게다가 황태후는 이제 늙었다. 정부의 수장은 누가 봐도 베르시 백작이었다. 일개 준남작에서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 책임자로 급무상……가문의 영광이라 칭송해도 좋겠지. 하지만 베르시 백작은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제국이라는 말인가…….” 서류를 뒤집으면서 베르시 백작이 이마를 짚었다. 서류에는 프랑크 제국의 사정이 적혀 있었다. 단순히 상황이 안 좋다고 표현할 만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재무, 법무, 군무, 어느 한 분야를 따질 것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최악. 두 글자가 백작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안 되겠군.” 베르시 백작이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서류를 읽다가는 두개골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세 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며칠째 이어졌을까. 나흘, 닷새, 엿새……베르시 백작은 보름까지 세다가 관두었다.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백작이 자조했다. 아무래도 머리까지 이상해진 모양이다……. 베르시 백작은 등받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로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조금만 쉬자, 하고 그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집무실 바깥에서 시종이 말했다. “각하. 황태후 폐하께서 드시옵니다.” “음.” 베르시 백작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순간적으로 손수건을 꺼내들어 얼굴을 휙 닦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단추를 여미고 상의를 평평하게 폈다. 모든 동작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5초.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는 데 2초.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그야말로 완벽한 동작이었다. 문이 열리고 노년의 여인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베르시 백작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여인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예는 생략하지요, 백작.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황송하옵니다.” 베르시 백작이 의자를 꺼내기도 전에 황태후는 척척 걸어와서 앉았다. 왕실의 여인은 나이가 들수록 예법에 엄격해지기 마련인데 황태후만큼은 예외였다. 아마 천생이 여장부로 타고났으리라. “상황은 어떤가요?” 거두절미하고 본론인가. 베르시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무척 나쁩니다.” “하. 사양을 모르는 남자로군요, 그대는.” “송구합니다.” 황태후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집무실에서는 온화한 공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요 한 달, 백작은 황태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쓸데없는 격식을 경멸하고, 말이 험하지만 높은 긍지를 품은 여장부……그것이 세 명의 황제를 낳은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였다. “폐하.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말도 마세요.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아달라, 가문을 복권해달라……브르타뉴가 있을 때는 조용히 닥치고만 있던 돼지들이 파렴치하게도!” 베르시 백작이 또 무심코 웃어버렸다. 목소리의 어조는 완벽히 예법에 들어맞게 고급스러운데 정작 저잣거리 왈패처럼 말이 험했다. 생소한 말투인데도 황태후한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옛날에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황태후는 훨씬 더 대화하기 즐거운 여인이었다. 황태후가 미간을 좁혔다. “제 말이 거짓처럼 들리나요? 농담이 아니에요. 하루에 접견을 신청하는 어중이떠중이의 숫자가 일흔 명이 넘어요. 백작, 이건 노인 학대예요.” “브르타뉴의 압제 아래에 풍비박산 난 가문이 많다는 뜻입니다, 폐하.” “그건 나도 알아요.” 황태후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하지만 백작. 저는 그 치들을 얌전히 복권시켜줄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나라와 황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외면했지요.” “그 말씀은…….” “의무를 망각한 작자들한테 작위와 영지 따위는 과분하지요. 안 그래요?” 베르시 백작이 침을 삼켰다. 브르타뉴는 수많은 귀족들의 영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광대한 토지가 황실의 소속이 되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강력한 브르타뉴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파리시오룸에 신생 정부가 들어선 지금, 살아남은 귀족들이 예전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 성화였다. 황태후는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 “의외로 표정이 안 좋네요. 저는 백작이 공화주의자라 들었는데.” “……폐하. 참으로 송구하오나, 만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소신에게는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파리시오룸 일대의 경비조차 바타비아 공화국군에 일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1년 동안 무상으로 경비를 서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렴 반란을 진압하는 데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터.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프랑크의 만 백성이 평화를 염원하고 있나이다. 국가를 재건하는 데 있어 귀족들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사재를 털겠어요.” 황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화국군에 웃돈을 얹어주면 기꺼이 참전하겠지요.” “…….” 황태후의 의지는 굳건해보였다. “백작. 달리 생각하면 이건 기회예요.” “기회, 말입니까.” “현재 프랑크에는 공작이 한 명도 없어요. 브르타뉴의 여왕한테 모조리 주살당했지요. 백작과 남작도 이전에 비하면 소수이지요. 일찍이 귀족의 세력이 이토록 약해진 시대가 있었나요?” 아무래도 황태후에게는 그저 공화주의적인 사고방식 이외에도 다른 생각이 숨은 듯했다. 베르시 백작이 귀를 기울였다. “아닙니다, 폐하. 확실히 귀족의 세는 약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와서 귀족들을 다시 복권시켜주면 어떻게 되겠나요? 브르타뉴한테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고자 할 거예요. 그리고 재화를 쥐어짜낼 곳은 하나뿐이지요.” “……영지민을 혹독하게 수탈하겠군요.”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백작? 평화를 바라는 것은 옳아요. 하지만 귀족들에게 협조하면 도리어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젠 백성이 반란을 일으킬 거예요.”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느냐,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느냐……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까.” 베르시 백작이 신음했다. 확실히 옳은 판단이다. 귀족이든 백성이든 지난 몇 년 동안 지나치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 폭발하기 일보직전이겠지. 내란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일어날 반란이라면 프랑크의 미래를 염려하는 편이 낫지요.” “…….” “저는 의무도 모르는 돼지들에게 미래를 걸지 않겠어요.” 이제 예순 살이 된 노년의 여인은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황태후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국이 이렇게 몰락한 것은 제 잘못이에요.” “폐하?” “사르데냐 왕국에서 시집을 올 때는 자신만만했어요. 훌륭한 황제를 낳아서 누가 봐도 부러운 궁정과 나라를 가꾸겠다고……저는 실패한 어머니였지요.” 너무나 참담한 어조에 베르시 백작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들은 엄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명군이 될 거라고. 하지만 제 자식들은 하나같이 소심하게 자라났지요. 너무 엄격하게 키운 탓이에요……. 프랑크가 불운에 빠진 것은 궁극적으로 제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합니다.” “…….” “황실은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하지 못해요. 대다수의 귀족도 마찬가지예요. 제 남은 사명은 어리석은 황실도, 잘못된 귀족도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를 남겨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베르시 백작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눈앞의 여인이 괴로워해야 하는가. 백작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한 가정, 조금 더 훌륭한 신하를 곁에 두어도 마땅한 인간이었다.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 고귀한 여인이었다……. 이 순간, 백작은 다시 한 번 내전을 결의했다. 옛날에는 내전을 일으킨 황제와 브르타뉴 여왕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는 백작 스스로 내전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쟝 볼레 사제가 말한 그대로였다. 더 이상 방관자로 남기란 불가능했다. 프랑크의 미래, 민중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은 희생되어야만 했다. 역사에선 자신을 기껏 찾아온 평화에 다시 전쟁을 일으킨 자라 기록하겠지. 귀족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할 테고, 백성들도 독재자로 취급할 것이다. 명예도 무엇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끌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백작. 제 마지막 남은 의무에 동참해주겠어요?” “예, 폐하. 소신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 * “하아, 흐윽……하아.” 거친 숨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였다. 쿤크스카 상회의 본부에 마련된 침실. 그곳에서 이바르와 나는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다. 막 전반전을 끝낸 참이었다. 이바르는 흡혈귀 주제에 밤일에 무척 약했다. 서른 번 정도 절정했을 뿐인데 벌써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연분홍색 입술에는 옅은 침자국이 흘렀다. 오랜만에 자서 그런 것일까. 오늘은 특히나 감도가 좋았다. “전……하. 더 이상은, 흐윽. 더는.” “왜 그러나, 이바르. 벌써 항복인가? 밤의 일족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내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면서 귓볼을 물었다. “하윽!” 이바르의 자그마한 몸이 부르르 떨었다. 약하게 절정에 달했다. 그녀의 주름살이 바싹 내 성기를 조였다. 마치 주름 하나하나가 빨판이 되어 들러붙는 듯한 감촉이었다. 크으, 하고 나도 모르게 헛숨을 흘렸다. 명기였다. 이바르의 육체는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탐욕스럽게 색을 구걸했다. 나는 이바르를 품안에 안고 허리를 놀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바르를 정면에서 껴안은 자세였다. 이쪽에서 깊숙하게 찔러넣을 때마다 이바르의 작은 몸집은 힘없이 들썩거렸다. “전하……전하, 흐윽, 전하…….” 이바르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뭔가라도 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이바르의 양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꽤나 귀여웠다. 그렇게 달라붙을수록 오히려 내 물건이 깊은 곳을 두들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짖궂게 미소를 지었다. “로드브로크 상주. 갈 것 같은가?” “흐읏, 예……가요……으으읏, 벌써, 벌써 몇 번이나……!”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면 천천히 하겠네. 프랑크의 신생 정부가 귀족들과 한판 대결을 각오한 모양이야.” 이바르가 물기에 젖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뜨겁고 갸날픈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네, 흐으응……흐읏!” “가뜩이나 돈이 부족한 신생 정부야. 전비를 감당하기에는 이만저만 부담이 되겠지. 어떤가? 바타비아 공화국을 경유해서 프랑크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 하으……전하, 잠깐만, 흐으으읏! 또, 흐윽, 아까 전에 갔는데……!” 나는 속도를 높였다. 이바르가 신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뒤로 젖혀지면서 하얗고 여린 목이 드러났다. “아, 아, 아! 싫어, 흐아아앙! 왜, 계속……!” “제국에 빚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로드브로크.” “으으, 하응, 흐으으읏……아……!” 이바르가 경련했다. 마비가 온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시험 삼아서 팔뚝을 풀어주었다. 금발의 소녀는 마치 실이 끊어져버린 인형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 이바르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소녀의 몸은 압도적인 쾌감이 남기고 간 여진에 떨고 있었다.   00309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내가 미리 조사해보니 프랑크에서 이자율이 보통 1할 정도 되더군.” 담뱃대를 쥐어서 불을 지폈다.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에 감돌았다. “이제 막 들어선 정부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이자가 세지. 자네가 4푼 정도의 이율로 빌려주겠다고 하면 감사하다며 받을 것일세.” “으…….” 이바르가 몸을 꿈틀거렸다. 아마도 일어서려고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바닥을 짚은 손에서 힘이 빠져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이바르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살결이 땀으로 투명하게 반들거렸다. 흡혈귀는 마왕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바로 체액에서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니 기분 좋은 살내음이 풍겨왔다. “이바르. 자네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4푼은 너무 적습니다.” 이바르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7푼은 받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옵니다.” “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 돈계산은 철저하군. 좋다. 장사에 관해서 자네를 따를 자가 어디 있겠는가. 마음대로 해라.” 이바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검소하시군요.” “응, 검소? 내가?” 전혀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등장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를 통틀어서 제일 갑부였다. 그런 재벌이 보기에는 내 씀씀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일까. “이래 봬도 상당히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고 생각한다만.” “씀씀이와는 약간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주로 투자하신 것을 살펴보면 마왕성, 영지, 뇌물, 군보급입니다. 반면에 옷이나 장신구에는 무관심하십니다.” 아마도 이바르는 나에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담뱃대를 보여주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피는 연초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 상품이라네. 연금술사에게 의뢰해서 손수 만들어낸 향초이지. 자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마왕 단탈리안은 누구보다 사치를 즐기는 놈이야.” “실례하오나, 그것이 핵심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바르가 내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내 왼손에는 중지와 약지가 없었다. 결함품이 되어버린 왼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이바르는 좋아했다. 어떤 유아기적인 욕구가 투영됐는지도 몰랐다. “사치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마약이나…….” “연초.” “……연초나 술에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쓰시면서 정작 타인의 눈에 띄는 품목에는 이상하리 만치 인색하십니다. 당장 이 옷만 해도 그렇습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옷가지를 이바르가 집어서 펼쳤다. “하의와 똑같이 상의도 검은색 일색, 벌써 몇 년째 입었는지 군데군데 낡았고……옷차림에 대해 완벽하게 무관심한 사람만이 이런 누더기를 입을 것입니다.” “누, 누더기?”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어깨가 좁으시고 살집도 없어서 제대로 맞춘 옷을 입지 않으면 매우 볼품이 없게 되옵니다.” “…….” 왜 시트리도 그렇고 나랑 친한 여자들은 죄다 내 스타일을 씹어댈까. 서럽다. “전하의 품격을 심각하게 손해시키는 것이지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매와 같은 상인의 눈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라피스 라줄리는 반쯤 전하의 가신으로 들어갔으면서 왜 이런 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저희 상회의 이름을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그래서 삼가 아룁니다만, 전하. 마침 전역도 종료되고 무도회들도 대강 끝났으니 말이옵니다.” 드물게도 이바르는 우물쭈물거렸다. “전하께서도 시간이 다소 널럴하시다면……소인의 말은 만에 하나 전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음? 뭔지 몰라도 상당히 뜸을 들이는군.” 내가 연초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후우. 자네와 나 사이이지 않는가. 웬만한 부탁일랑 전부 들어줄 심산이야. 마침 자네도 프랑크와 관련해서 내 청탁에 응해주었으니, 자아. 부담 갖지 말고 말하게나.” “…….” 본디 거래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진심이었다. 그러자 이바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살짝 붉었다. 그녀는 각오를 정했는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호, 혹시 소인이 전하에게 맞는 옷을 골라드려도……괜찮으련지요!” “…….” 뭐시라. “저, 그러니까, 향후에도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저희 상회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시리라 생각하옵고, 단탈리안 전하를 이런저런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 또한 상회의 임무라고 해야 할까, 기본적인 후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연초를 피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게 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이바르는 그런 내 시선을 깨닫고 더더욱 허둥거렸다. 피부가 새하얘서 유독 붉어진 뺨이 도드라져 보였다. “소신의 의무임에 마땅하므로, 결단코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있는 게 아니오라, 다시 말해서, 가는 날이 장날이오니, 또 전하께서 모처럼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시고 계시니까, 이참에 눈에 밟히던 짐을 풀어볼 생각에…….” “귀, 귀여워.” “……네? 소인이 잘못 들었사옵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이바르를 꾸욱 껴안았다. “어떻게 이토록 순수할 수가!” “하, 하아?”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이걸 원했다!” 순수함! 연인끼리 데이트 한번 나가자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워 하는――압도적인 순수함! 바르바토스 년은 데이트하자고 콧노래 부르면서 나가면 무슨 생뚱맞은 레즈비언 전용 창관이나 데려가고, 라우라는 하도 발랑 까져서 뭘해도 심드렁하고, 파이몬은 만날 우후후 여유로운 어른의 미소나 짓는데다, 가미긴은 뭘 조금만 해줘도 자기가 본처인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풍겨댄다. 유일하게 시트리가 부끄러움을 타긴 한데, 조금 이상하다. 잔뜩 부끄러움을 타는 주제에 정작 나를 데려가는 곳은 SM 클럽이다. 여고생처럼 순수하면서 놀아재끼는 수준은 음흉한 아저씨의 볼기짝을 6비트로 후려갈긴다. 말이 안 된다. 허나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보아라. 데이트의 목적이 단지 연인한테 멋진 옷을 사주는 것이다! “얼마나 건전한가. 얼마나 순수한가…….” 나는 이 비눗방울처럼 부드러운 존재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왜 지금 옥루(玉淚)를 흘리시고 계시옵니까. 소인은 당황스럽나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실로 자네는 보석과도 같이 아름답다.” “네, 네에?” 이바르는 숫제 귀까지 빨개졌다. “바야흐로 어둠이 군림하는 시대. 한때 빛이 가득했을 대지에 지금은 음흉한 계략과 위선만이 횡행하니, 나 단탈리안, 순수함을 찾아 해매는 한 명의 음유시인으로서 통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노라.” “…….” 왠지 모르게 이바르가 '그건 전적으로 전하 때문이 아니온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무시했다. “이 자리에서 그토록 찾아 해맨 보물을 발견하니 너무나 기뻐 내 두개골이 승천해버릴 지경이구나. 옷이라고? 아아, 얼마든지 사주겠다. 이브닝 드레스, 파티 드레스, 아니, 반지에다 목걸이까지 아무거나 골라 잡도록.” “저, 전하. 제가 아니라 전하의 것을…….” 이바르가 뭐라 꾸물거렸지만 이번에도 무시했다. 나는 터프하게 선언했다. “오늘 니블헤임은 그대가 전세를 놓았다!” 내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쫌생이거든. 그러나, 일단 한번 열리면 카오스 워프가 개봉박두한다. 나는 이바르의 손목을 붙잡고 이제부터 남극을 정복하겠노라고 외치는 아문젠 탐험대장처럼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자아. 나가자, 이바르 로드브로크! 마계의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이라.” “자, 잠깐만요. 전하. 옷은 입고 나가야…….” 우리는 상회 건물을 뛰쳐나갔다. 두 사람 모두 잠옷 차림이지만 상관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이바르가 제발 옷 차려입을 시간만큼은 허락해달라 외쳤지만 한귀로 흘려보냈다. 나는 도시에서 제일 값비싼 마차를 불렀다. “이 도시에게 유명한 옷가게로.” 나는 마차에 올라타서 행선지를 밝혔다. 엘프 마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 정도로 유명한 가게로 안내해드리올까요, 전하?” “물론, 제일 비싼 곳이다.” “분부를 받드옵니다.” 마차가 미동조차 없이 미끄럽게 니블헤임의 거리를 쏘다녔다. 우리는 옷 디자이너의 가게부터 순례했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다운 손님은 처음이옵니다. 전하의 비밀 애인이신지요?” “아? 나, 나는…….” 디자이너의 질문에 이바르가 버벅거렸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본인이 이번에 새로 얻은 연인이다. 모쪼록 성의를 보여라.” “꺄아! 역시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어쩌엄, 나쁜 남자의 표본이라니까!” 이미 유명인사가 된 내 얼굴을 모르는 마족은 없었다. 옷가게 주인인 서큐버스가 호들갑을 떨면서 이바르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의 표본을 들고왔다. “어여쁜 아가씨. 전부 최상급 소재로 짠 옷들이에요. 어때요? 최신 유행을 반영하면서도 고전적인 멋을 포기하지 않은 게 장점이죠.” “하, 하아.” “너무 얌전한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뒤를 돌려보면, 어머나! 등이 훤하게 파여서 섹시한 멋까지 잡았답니다. 아가씨처럼 어리면서도 묘하게 성숙한 매력을 뽐내는 여자한테 딱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좋군.” 이바르가 주인의 기세에 밀려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내가 쿨하게 말했다. “구입하지.” “단탈리안 전하, 멋져!” 주인의 눈동자가 금화처럼 번쩍거렸다. “그럼 여기 야외용 드레스는 어떤가요. 아니면 이 무도회 전용 드레스라던가. 잠자리에 특화된 이 드레스도 역시 놓칠 수가!” “후우.” 나는 진득하게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게 진열장을 쓰윽 훑었다. “저쪽에서 이쪽까지 전부.” “꺄아아아!” 인생 대박이 터져 실신해버린 옷가게 주인을 뒤로 하고, 마차는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목걸이 가게의 고블린 주인이 굽신거리면서 입구부터 마중을 나왔다. “위명은 익히 들었사옵니다, 전하. 오늘 전하를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어 전에 없는 영광입니다.” “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추천하게.” “오호.” 고블린이 외알 안경을 들어올렸다. 장인의 눈초리가 빛났다. “살결이 하얀데다 목선이 예쁩니다. 쇄골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이분에게 입혀진다면 필시 목걸이도 기뻐하겠지요. 전하, 어떤 종류의 보석을 선호하시옵니까?” “주문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로군.”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린다면 어떤 목걸이든 추천하라고 말했네.” “어, 어떤 목걸이든지 말입니까, 전하?” “아아. 어떤 목걸이든지.” 고블린 주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장인의 신중함이 사라지고 상인의 탐욕이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미처 전하의 의중을 깨닫지 못했군요. 바로 대령하겠나이다.” 고블린이 조수와 함께 헐레벌떡 어딘가를 다녀왔다. “여기 있습니다. 올발라 지옥에서 캐낸 최상급 원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들로서, 전부 마계에서 이름난 장인들이 수 년에 걸쳐 만들어낸 최상등품입니다. 자아. 아가씨께서는 이것부터 착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열 개쯤 되는 목걸이를 이바르가 하나씩 입어보았다. “어떤 게 마음에 드십니까, 마드모아젤?” “나는……딱히 아무거나.” 이바르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니블헤임은 자기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본연의 신체로 돌아다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여성 전용의 옷가게나 장신구점을 들리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겠지. 연인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대신해주는 것이 파트너의 역할. 나는 입에서 파이프를 때고 말했다. “여기 있는 물건들 전부로 하지.” 그날, 니블헤임에서 총 아홉 명의 상점주인이 기절했다.   00310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니블헤임에 저녁이 찾아오고. “이, 이제 됐습니다. 전하! 정말로 이제 충분하옵니다!” 이바르가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소녀는 상회 건물에서 나올 때랑 비교해서 이미 천양지차로 변신했다. 문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 하지만 아직 제일 중요한 구두가 남았는데.” “아까 전에도 가장 중요한 팔찌가 남았다고, 그 전에도 가장 중요한 귀걸이가 남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이바르가 고개를 휙 돌리면서 나를 비스듬하게 노려보았다. 귀여워라―. 사주고 싶어, 마구마구 사주고 싶어―. 일찍이 이토록 내 지갑을 쉽게 열어재끼는 여자는 없었다. 여신 강림. 그렇게 표현해도 한점 모자람이 없겠지. 이것이 바로 <던전 어택>에 정식으로 등장하는 히로인의 위력……이 단탈리안, 세파에 쩌들어 더는 구제할 도리가 없는 아저씨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바르가 곁에 있으니 무심코 치유되어버릴 것만 같다. 불가능하지만. “애당초 소인은 전하보다 부자입니다.” 이바르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삐죽 내밀었다. “희귀한 보석이란 보석은 소인의 금고에 죄다 잠들어 있습니다. 용족 장인이 만든 장신구까지 있지요. 만약 소인이 물량공세에 넘어갈 사람으로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으음? 뭘 착각하는 것인지.” 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마계 제일의 갑부이자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인 자한테 선물을 사준 게 아니라네. 단지 한 명의 여자로서의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선물한 것이지.” “네?” 이바르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네는 수천 년 동안 만년설 아래 잠들어 있었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자네가 그동안 아무리 재산을 모으고 사치를 부렸다 한들, 그것은 결코 자네를 위해서 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추는 자신'한테 투자한 것이지.” 쿤쿠스카 회주(會主)로서의 자신을 가장시키기 위하여. 이바르 로드브로크라는 자그마한 흡혈귀 소녀는, 보다 사회에서 쉽게 성공하려고, 타인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본래 모습을 감추고 지금껏 질주했다. 나는 물끄러미 니블헤임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샛붉은 석양에 점차 잠식해간다. “자네가 오늘 나에게 말했지. 사치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의미가 있다고. 그렇다면 자네는 어떠한가? 사람들이 자네를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것은 가장된 모습의 인형뿐이지.” “…….” “아무도 자네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니블헤임은 이바르 로드브로크라는 소녀의 염원이 담긴 도시이다. 오로지 상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곳. 여기에는 마왕의 통치도 미치지 못한다. 출신과 종족, 계급을 가리지 않고, 고블린에서 엘프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족이 모여들어 북적거린다. 하지만 이 무슨 역설인가. 소녀가 가장 절실하게 바란 소원이 이루어진 이 장소에서, 정작 그녀 자신은 본래 모습으로 있을 수 없었다. 마왕의 지배력을 벗어재끼고 모두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오로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만이 소외되어 있었다. 인형의 탈을 쓴 채로 끝없이 연극했다. “이바르. 바알은 죽었다. 아가레스도 죽었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혼자만의 힘으로 마계를 정벌할 세력은 사라졌다. 앞으로 마왕들은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명분을 중요시 하겠지. 얼마나 마계 사회한테 잘 보이느냐에 따라 명분이 정해진다. 함부로 마족을 통제하는 일은 극단적으로 적어질 것이야.” “…….” “이제 인형처럼 살아가지 않아도 돼.” 소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오늘은 처음으로 자네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보낸 하루야.” “내가 나로서 보낸 하루…….” 그녀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삼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지.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고 뭐겠나.” 내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가, 이바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본 자신의 도시는?” “…….” 이바르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아. 물론 자네에게 미안한 일도 있어. 원래 바싸고도 함께 처리할 계획이었네만 처세가 너무도 훌륭해서 차마 죽일 수가 없더군. 대신에 정령왕을 셋이나 황천길로 보냈으니 향후 수백 년은 힘을 쓰지 못할 거야.” 내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면목 없지만 그걸로 봐주지 않겠는가?” 이바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고 나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정말 치사합니다……이런 순간에, 이런 하루를 보내놓고,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합니까. 저로서는 용서해드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소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마왕이란 전부 거짓말쟁이뿐이라서……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정말로 바알도, 아가레스도 사라지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져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그렇게 말해버리면……그런 식으로…….”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섞여들었다. 단지 마왕에 대한 증오로 기나긴 삶을 경작해온 소녀였다. “이제 마왕을 증오하지 않아도 된다면……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타인이 대신 고민해줄 수도 없고 제멋대로 피해버릴 수도 없어. 달리 말해 그건 자네만의 문제이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한 번쯤 주어지는 문제이고,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하는 문제이지.” 다만, 하고 덧붙였다. “그런 문제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계속해서 인형의 탈을 쓰고 있으면 인형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어. 자네는 소녀다. 이렇게 가장 단순한 사실까지 잊어버리면 안 된다.” “……여자로 살아갈 마음 따위, 진작에 버렸습니다.” “그런가.” 내가 이바르의 턱끝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저항은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버린 것을 다시 주워야 하는 이유가 생겼을 텐데.” “……저, 전하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바르가 소리쳤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았고, 단어가 울음기에 파묻혔다. “달콤한 밀어로 소인을 속이려 들고……저 따위는 하룻밤 상대에 불과하면서, 지금처럼……어차피 소인을 사,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음.” “전부 알고 있사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보고서를 누가 받아본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래는 항상 공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소인이 전하께 앞으로의 인생을 바친다 해도, 전하께서 저한테 삶을 내어주실 리 없으니, 차라리……!” 이런 상황에 마주했을 때. 남자들마다 다르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정말로 착한 남자라면 여기서 상대의 말을 긍정한다. 당신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다. 부디 용서해달라. 지금 당장은 상대방이 깊게 상처를 입을지 몰라도 장래적으로 보면 차라리 낫다. 제법 나쁜 남자라면 여기서 교묘하게 부정한다.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왜 내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드디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첫사랑에 눈을 떴다. 너를 한 명의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고 싶다……. 그리고 정말로 나쁜 남자는. “……!” 키스를 한다. 이바르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받힌다. 왼손으로는 그녀의 턱끝을 살짝 들어올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기습적으로 입을 맞춘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꼭 물기에 젖은 자수정 같았다. 이바르는 처음에는 내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점점 더 팔에서 힘이 빠지더니, 이윽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얇고 긴 줄기를 그리면서 흘렀다. 니블헤임의 저녁노을이 우리를 조용히 비추었다. 한없이 고요한 공기를 깨트리는 소리가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9 오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상대방은 당신을 완전한 연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놓치지 않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에서 가장 부유할뿐더러 거대 상회를 이끌고 있다. 본연의 무력도 상당하다. 하물며, 게임에 등장한 이바르는 한번 연정을 바친 상대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지킨다. 재력, 권력, 무력, 충성심까지.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인재를 간단히 풀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바르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이바르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가느다란 손을 뻗어서 내 등을 껴안았다. 그녀의 손길이 등줄기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도시에 저녁이 지고 있었다. * * * 니블헤임에서 볼 일을 전부 마치고 드디어 마왕성에 돌아왔다. 일부러 한밤에 순간이동 마법서를 사용했다. 적어도 오늘밤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 침실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 아마도 틀림없이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 이바르에게는 밝은 미래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연극용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차근차근 소녀의 몸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세계를 바라보게 되겠지. 설령 비극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건 온전히 자신의 비극이다. 나는 아니다. 이미 나는 가면을 벗어재낄 수 없는 처지까지 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연기했다'라는 변명이 통하는 수준은 애저녁에 지나쳤다. 이바르와 나는 정확히 정반대의 방향을 걷게 되겠지. 저쪽은 점차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로, 이쪽은 점점 더 거짓과 위악밖에 없는 길로……. 나는 이바르한테 질투 혹은 동경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자신은 절대로 가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에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약간 우울할 따름이다……. ─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도착한 것을 알아챈 것일까? 어떻게? “단탈리안 님.” 라피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맥이 빠져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라피스에게는 마왕성에서 혹여나 마법이 발생하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는 도구가 주어져 있었다. 유사시에 나를 대리해서 마왕성을 맡는 재상이므로, 내가 예전에 선물했다. 하지만 의외로군. 일부러 몰래 귀환했다. 그 의미를 눈치 빠른 라피스가 모를 리 없었다. 당분간 혼자 있게 해달라, 그런 의미였다. 왜 라피스는 굳이 방문한 것인지……. “술이 고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단정한 옷차림의 라피스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여독을 풀 겸 발할라 230년 포도주는 어떤지.” “단탈리안 전하께서 흡족해하신다!” 역시 라피스야. 내가 포도주를 그대로 병나발로 마셨다. 그러자 라피스가 미리 준비한 듯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제레미 대장이 얼마 전에 새로 개발한 향초입니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해독할 겸 시음해보는 것은 어떤지요.” “음. 단탈리안 전하께서 기뻐하신다.” 나는 바로 담뱃대에 향초를 쑤셔넣어 피웠다. 끝내주었다. 다짜고짜 뇌물로 시작한 라피스의 방문은 어쩌다보니 내 신세 한탄으로 이어졌다. 약빨에 머리가 쩌든 주제에 술까지 마신 주정뱅이였다. 당연히 말이 엉망진창으로 튀어나왔지만, 라피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전부 불태워버렸지! 하하!”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나는 파리시오룸 근방의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대목에 이르러 파안대소했다. 여기서도 라피스는 덤덤했다. 그녀는 내 얘기를 끝까지 듣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한 마디를 꺼냈다. “단탈리안 님은 의도적으로 화형을 택했군요.” “아아. 그러는 편이 효율적이니까! 나는 역시 대단해!” “저는 효율성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라피스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화형은 화려합니다. 그러나 잔혹해 보이는 반면에 실속은 의외로 빈약합니다. 인간을 죽이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 중 하나가 화형이기 때문입니다.” “……어?” “일부러 '비효율적인' 학살 수단을 고르셨군요,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동시에 정작 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납득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조리듯이. “무척이나 단탈리안 님답습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어버린 술잔에 라피스가 포도주를 따랐다.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다시 라피스가 포도주를 따랐다. “……라피스.” “예, 단탈리안 님.” “나는 그런 말을 싫어해.”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말했어?” “술주정을 받아주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해두겠습니다.” “…….” 나는 한숨을 쉬면서 술을 받아 마셨다. 그후로 한참이나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세상에는 이런 녀석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탈리안 님.” “응?” “니블헤임에서 엄청난 양의 청구서가 날아왔습니다. 수천 리브라 수준이 아니더군요. 단탈리안 님의 재상이자 재무상서로서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어? 어, 그건. 그러니까.” “단탈리안 님이 바깥에 전쟁하러 돌아다닐 때 저는 마왕성에서 홀로 동분서주하며 어떻게든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씁니다만, 정작 나가는 곳은 따로 있군요. 제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부디 말해주시길.” “…….” “…….” “죄, 죄송합니다.” “놀랍군요. 단탈리안 님은 제가 단탈리안 님에게 사과를 듣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재상이자 재무상서인 제가, 재정의 출처보다 단탈리안 님의 사과 한 마디를 더 중요하게 여기리라 생각하시는지요?” “…….” “저는 그저 순수히 의문을 표명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 청구서들은 대체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라피스의 잔소리는 평균적으로 다섯 시간에 달한다는 말만 덧붙이겠다. 내 돈을 내가 썼을 뿐인데. 세상은 놀랍도록 부조리하다.   ============================ 작품 후기 ============================   - 챕터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END.   00311 소녀의 수난시대 =========================================================================                        “안녕하세요. 새로이 전하의 거처에 신세를 지게 된 이바르라고 합니다.” 금발의 흡혈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 역할은 니블헤임의 의회를 대표하여 단탈리안 전하와 의회 사이를 중개하는 것입니다. 제가 맡은 소임에 자부심을 갖고 전하를 위해 봉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편하게 이바르, 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짝짝짝. 의례적인 박수 소리가 울렸다. 마왕성 지하 10층. 오직 간부들만 출입하는 이곳에 모처럼 인원이 모였다. 재상 라피스, 군무상서 라우라, 자경단장 제레미, 시녀장 데이지. 이들은 새로 맞이하게 된 손님을 어딘지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럴 때 내가 나서주어야겠지. “자아. 본인이 소개했다시피 이바르는 마계의 연락책이다.” 나는 이바르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정상 가문의 이름은 밝힐 수 없다. 제법 유력한 혈족의 후계이지만 말이지. 걱정하지 마라. 그녀의 충심은 내가 보증하겠다. 우리 파밀리아(familia)의 일원으로 환영해주도록.” 짝짝짝! 아까 전보다 약간 갈채가 커졌다. 그렇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우리 마왕성에 이사를 왔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바르는 나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이후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정체 모를 의지로 불태웠다. ‘제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단탈리안 전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저에게 채, 책임을 져주셔야 마땅합니다.’ ‘콜.’ 나는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격이 아니고 뭔가. 이바르는 별다른 이명을 쓰지 않았다. 이바르 자체가 흔하고 흔한 이름이었다. 설마 금발의 여자아이를 보고 쿤쿠스카 상회의 늙은 여우를 떠올릴 미치광이는 없으리라. 라피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전하. 이바르 님은 우리 마왕군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습니까?” “흐으음. 지위라.” 내가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조직에서 서열을 확실히 정해두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절차였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이바르가 마계에서 얼마나 위세를 떨치는 가문의 자제인가 상관없이 이곳은 단탈리안 마왕군. 본래대로라면 시녀장인 데이지의 조수쯤에다 집어넣어야 옳겠지. 그런데. ‘조금 애매하단 말이지.’ 우리 마왕군의 실세는 단연 라피스이다. 하지만 라피스는 동시에 쿤쿠스카 상회에 속한다. 즉, 이바르는 마왕군 입장에서 보면 최하위 서열인데 바깥 세계를 기준으로 두면 라피스의 상사이다. 그것도 까마득한 회장님. 서열이 꼬여도 한참 꼬이는군……. 내가 고민하고 있자니 이바르가 스스로 나섰다. “라줄리 재상님이라고 하셨지요. 모쪼록 가장 직분이 낮은 시녀로 취급해주시길 바랍니다.” “음.” 내가 살짝 놀라서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이바르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기 부하보다 한참 낮은 직위로 들어가도 정말 괜찮다는 것일까? ─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쿤쿠스카 회주로서의 이바르가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여자로서의 이바르라고. 이바르가 몰래 전음(傳音)을 보내왔다. 그녀는 마법에도 꽤나 소양이 깊었다. ─ 신입인 주제에 갑작스럽게 위계 질서를 흐트리면 오히려 제가 고립됩니다.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동료들한테 시기와 질투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허락해주시옵소서. 아니, 뭐. 당사자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바르가 한발 더 나아갔다. “저는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는 가신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하고자 합니다. 다른 분들께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겠습니다.” “올바른 자세입니다.” 라피스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데이지 시녀장.” “예, 재상 각하.” “이바르 양의 교육을 맡기겠습니다. 사흘에 한 번씩, 오후 1시 15분에 보고를 올리세요. 시녀장이 처음으로 맡아보는 교육인 만큼, 이것은 여러분 두 사람을 동시에 평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데이지가 흠 잡을 데 없이 공손하게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었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파밀리아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 * * 이바르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도리어 익숙했다. 한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가족과 일족을 죄다 잃어버리고, 지옥도라 불리우는 마족사회의 상계에 혈혈단신 뛰어들었다. 거기서 거대 상회를 키워낸 실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금권으로 마계를 장악하는 데 천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니블헤임에 똬리를 튼 백여우, 라는 별명에 걸맞는 미소였다. ‘단탈리안 전하의 위세가 대단하나 그래본들 최근에 들어서야 급격하게 성장했다. 전하를 제외한다면 대단할 것도 없겠지.’ 이바르는 단탈리안 마왕성 전용의 하녀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하녀복은 묘하게 치마가 짧았다. ‘즉, 호랑이의 머리를 가진 개의 몸체라는 녀석이다. 겉보기에 화려할지언정 내실은 허약할 터. 오 년.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이름을 걸고, 단 오 년 만에 이곳을 석권하겠다.’ 아까 전에 만난 간부들도 영 시원치 않았다. 라우라라고 했던가. 군무상서 아가씨는 회의실에서 대놓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격식이나 인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쟁터에서는 천재일지 몰라도 이곳은 정치판.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자경단장인 제레미는 시종일관 단탈리안 전하한테 음담패설을 던졌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준다고 할까. 어느 조직에서나 약방의 감초와 같은 부류였지만, 태도와 말투가 너무 가벼워서 도저히 관록이란 게 없었다. ‘그리고 내 교육을 맡게 된 아해는 이제 열네 살이 될까 말까한 꼬마.’ 이바르가 확신했다. ‘낙승이로군.’ 인생 경험에서 자신과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바르는 데이지를 구워삶을 방법을 서른여섯 개쯤 떠올리며 탈의실에서 나갔다. “다 갈아 입었나요, 이바르 양.” 탈의실 바깥에서는 데이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가지런히 배에 올려두고 서 있었다. 소녀는 피안화 한 떨기처럼 청초했다. “예, 선배님.” 이바르가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아름답기는 아름다웠다. 왜 단탈리안 전하께서 눈앞의 여자애를 거둬들였는지 알 만했다. 아마도 시녀장일 뿐만이 아니라 첩실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어린애다.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없다. “좋아요. 오늘은 첫날이니 가사 솜씨부터 확인해보려 합니다. 혹시 질문이 있습니까?” “아. 네, 선배님. 왜 시녀옷은 전부 이렇게 치마가 짧은지요? 약간 생소합니다.” 데이지가 살며시 입끝을 올렸다. “위선적이지만 상냥한 대답을 원합니까, 솔직하지만 잔혹한 대답을 원합니까?” “……네?” 너무나도 예상 외의 대꾸에 이바르는 그만 약간 느리게 반응했다. 데이지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반문은 허락한 적 없습니다. 이바르 양, 질문에 질문으로 응답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기억해두세요. 두 번째 실수부터는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명시하겠습니다.” 한방 먹어버렸다. 눈앞의 소녀는 아무래도 평범한 열네 살이 아닌 듯했다. 초장부터 신입의 기를 죽이려고 단단히 다짐한 것이 분명했다. 의도적으로 이쪽이 당황할 법한 태도를 보여주고, 이를 빌미로 삼아 상대방을 압박한다……. ‘과연. 전하께서 괜히 양녀로 삼으신 게 아니군.’ 조금 지나치게 방심했다. 이바르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바르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성격이 아니라 자부했다. 이제부터 넋 놓고 당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럼, 선배님. 솔직하지만 잔혹한 대답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까요, 이바르 양.” “예. 저는 진심으로 단탈리안 전하를 섬기기를 갈망합니다. 전하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솔직하고 진실된 것을 원합니다.” 이바르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어째서인지 데이지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솔직하고 진실된 아버님의 모습이라. 부디 그걸 찾으면 좋겠네요. 이바르 양이 선택한 대답을 들려주자면, 바로 저 때문입니다. 우리 마왕성에서 시녀옷이 짧은 것은.” “선배님 때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데이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저의 아랫배에는 아버님의 명에 따라 항상 투명한 슬라임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무방비하게 걸어다녀서 치맛자락이 올라가면 저한테 들러붙은 슬라임이 적나라하게 보이지요. 그런 제가 조마조마해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아버님께서는 일부러 시녀옷의 치마를 짧게 제정하셨습니다. 제 설명을 이해했습니까?” ……. 장대한 침묵이 있었다. 이바르는 상대방을 농락하려고 고안해낸 서른여섯 가지의 계책을 몽땅 새하얗게 잊어버렸으며,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간신히, 겨우 입을 벌려서 한 마디 내뱉었다. “……네?” 그 순간이었다. 짜악, 하고 살벌한 소리가 마왕성 복도에 울렸다. 데이지가 이바르의 오른뺨을 날린 것이었다. “빠르게도 두 번째 실수를 저질렀군요.” “어……?” “질문에 질문으로 응대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데이지는 여전히 표정에 흐트러짐 없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뺨을 후려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저는 이바르 양의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제가 경고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바르 양의 자유의지를 억누를 권리까지 얻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이바르 양이 아무리 굳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해도 제 체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 “이바르 양. 저는 우리 마왕성 공식 시녀옷의 치마가 왜 짧은지 설명했습니다. 혹시 업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또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이바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요.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의 업무에 들어가지요.” 데이지가 가볍게 등을 돌려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직감했다. ――미친 년이다. 단순한 또라이가 아니었다. 저 꼬맹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다. 슬라임이니 뭐니 말도 안 되게 추잡한 거짓말을 떠벌릴 때도, 일말의 주저없이 뺨을 후려갈길 때도, 단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바르는 오랜 인생 경험에 따라 항상 웃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부류, 즉 천성이 상냥한 사람이거나 천성이 또라이인 사람, 두 가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저 꼬맹이는 볼 것도 없이 후자에 속했다. ‘제기랄. 하필 직속 선배로 배정된 여자애가 또라이일 줄이야.’ 이바르는 자신의 불운을 원망했다. 어쩌면 오 년으로 잡은 계획을 육 년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복도를 한참 거닐다가 데이지가 멈추었다. “저희의 첫 번째 업무는 지하 10층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입니다. 이바르 양의 가사 솜씨부터 확인해보지요.” “예, 선배님.” 다행히도 이바르는 각종 가사에 능숙했다. 빗자루질, 걸레닦이, 옷빨래, 양탄자 빨래 등등, 이바르는 선배가 지시한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물론 미친 여자한테 혹시나 따귀를 얻어맞을까봐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노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쓰윽. 데이지가 복도 구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손가락에 먼지가 끼지 않는 것을 보고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재상 각하께 좋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바르가 욕지거리를 참았다. 저 미친 꼬맹이한테 청소란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복도의 구석탱이까지 먼지 한 톨 없도록 닦아내는 걸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아침을 먹고 두 번째 업무에 들어가도록 할까요.” “두 번째 업무는 무엇인가요, 선배님.” 데이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고문입니다.” “…….” 하마터면 이번에도 네? 하고 반문해버릴 뻔했다. 이바르는 필사의 의지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반문을 도로 집어넣었다. 새파란 꼬맹이한테 얻어맞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저희 시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마왕성에 침입한 모험자를 상대로 고문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 “참고로 이것 역시 제가 고문의 쾌락에 빠지도록 아버님께서 유도하시는 바입니다. 아버님의 진실된 모습을 벌써 하나 더 알게 되었군요. 축하합니다. 부디 이바르 양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이쯤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될 장소에 와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 작품 후기 ============================   들어올_때는_마음대로지만_나갈_때는_아니란다.avi   00312 소녀의 수난시대 =========================================================================                        무사히 점심 식사가 끝났다. 시녀들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는 열 명의 죄수가 갇혀 있었다. 죄수들은 초췌한 안색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는데, 데이지가 감옥에 들어오자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미친 하녀다! 미친 하녀가 또 왔어!” “오, 여신이시여! 제발 오늘을 무사히 넘기게…….” 죄수들이 저마다 독방의 구석으로 도망쳐서 오들오들 떨어댔다. 그들 눈에는 열네 살짜리 시녀가 사신으로 비추는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난장판에도 데이지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버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모험자에게 관대합니다. 하지만 모험자를 가장한 군인에게는 잔혹하시지요. 이들은 모두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소속된 분대입니다.” “하아. 그렇군요.” 이바르가 양손에 든 음식 바구니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선배님, 저희가 가져온 식사는 세 명 몫밖에 없는데요.” “괜찮습니다. 딱 맞춰서 들고왔습니다.” 데이지가 천사처럼 미소를 지었다. “금방 세 명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니까요.” “…….” “이바르 양은 오늘 제가 하는 작업을 뒤에서 견학하세요.” 데이지는 어느새 선반에서 꼬챙이를 꺼내들었다. 꼬챙이 끄트머리에 피딱지가 눅진눅진하게 달라붙었다. 이바르는 확신했다. 이 선배라는 작자는 틀림없이 의도적으로 점심을 먹인 다음에 고문실로 데려왔다. ‘잔인한 광경을 보여줘서 내가 토하게끔 유도하는 것이군.’ 너무나 뻔하고 유치한 수작질에 이바르가 조소했다. 흡혈귀만큼 피와 고문에 익숙한 종족은 없었다. 열네 살짜리 계집아이는 나이에 비해 매우 영리하고 교활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종족의 벽을 넘지 못하리라. “시작하겠습니다.” 데이지가 독방 하나를 골라잡아 쇠창살을 열었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기만 하면 뭐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다……저는 상부에서 무슨 명령이 내려왔는지 모릅니다…….” “어머니……흐끄윽, 어머니이…….” 두 시간 후. 감옥의 어두운 바닥이 온통 핏물과 내장으로 범벅이 되었다. 정확하게 죄수 일곱 명을 죽인 다음에야 데이지는 고문을 멈추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광경을 지켜본 이바르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다 못해 아예 안색이 종잇장처럼 희여멀겋게 변해버렸다. “제법 흥미롭지요. 인간은 머리에 못을 박으면 생선처럼 경련이 일어납니다.” 데이지가 볼에 튀긴 핏물을 닦아냈다. 두 시간 내내 고문을 했는데 별로 지쳐보이지도 않았다. “분명히 죽었는데도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내장도 유심히 관찰하면 각기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지요. 인체의 신비입니다.” “……그거 정말, 신기하군요.” “예. 이바르 양. 이제 남은 세 명한테 식사를 전달하세요.” 데이지가 양손에 피 묻은 고문도구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어떻습니까. 딱 맞춰서 갖고왔지요?” “…….” 그날, 이바르는 기어이 저녁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첫째날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이 악마적인 계집애는 정말로 둘째날부터 자신에게 고문을 맡겨버렸다. 어제 충분히 견학했으니 괜찮겠지요, 하고 고문도구를 건네준 것이었다. 이바르가 별로 자신이 없다고 대답하자 데이지가 괜찮다며 말했다.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못하면 더 좋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요, 선배님?” “이건 고문이니까요. 그렇군요. 연습한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고문해보세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이바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연습, 입니까.” “예. 연습입니다. 딱히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두 시녀의 대화를 코앞에서 지켜보며 죄수가 사지를 비틀며 발악했다. “읍!? 으읍! 흐으으읍! 읍!” 이바르는 이 죄없는 인간이 안쓰러웠다. 물론 그에게도 어느 정도 죄가 있으리라. 하지만 대역죄인이 아닌 이상, 어느 인간이 이런 계집애한테 걸려도 좋을 만큼 죄값이 막중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일개 인간 계집한테 밀려나서야 흡혈귀 일족의 명예가 울 것이었다. 이바르는 최선을 다하여 죄수의 배를 쨌고 내장을 갈랐다. “폐는 과감하게 절단하십시오. 괜찮습니다. 포션은 넘쳐나도록 많습니다. 음. 나쁘지 않지만 약간 과감함이 부족하군요.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으흡, 으으으으읍!?” “반면에 심장을 다룰 때는 가장 작은 칼을 사용하여서.” 그렇게 둘째날이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바르는 첫째날이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음을 절감했다. 계집애의 기상천외한 면모는 고작 한두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벗기고 벗겨도 계속 속알맹이가 나오는 양파처럼 계집애 또한 그러했다. 기행 그 첫 번째. 계집애는 이따금 복도를 걸어가다가 발길을 멈추곤 했다. 그럴 때면 계집애는 어깨가 조금씩 떨리면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선배님. 왜 그러시죠?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제발 좀 아프라는 속내를 감추면서 이바르가 짐짓 걱정스러운 말투를 꾸몄다. 데이지는 뺨이 붉어졌을 뿐이지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별 일 아닙니다. 오라비가 자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네에?” “제 아랫배에 슬라임이 부착되어 있다고 예전에 말했지요. 그것입니다. 이 슬라임은 다른 슬라임과 감각을 공유합니다만, 바로 다른 슬라임을 저의 친오라비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라비는 슬라임으로 허구한 날 자위를 해대는 사춘기 소년이지요,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오라비의 자위는 평균적으로 4분 30초입니다. 앞으로 3분만 더 기다리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정확히 삼 분 정도가 흐른 뒤에 데이지가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4분 11초밖에 걸리지 않았군요. 부디 이대로 조루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 “자아, 이바르 양. 복도를 청소할까요.” 이런 기행이 적게는 하루에 한 번, 많게는 하루에 세 번이나 이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잦다 싶어서 이바르는 언젠가 불평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데이지는 '최근에 오라비가 애인과 헤어져서요,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간결하게 응답했다. 이바르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만 했다. 계집애는 단순히 미친 것이 아니었다. 변태적인 미치광이이며 과대망상증 환자인데다 정신병자였다. 청소하는 와중에 혹은 고문하는 와중에 갑자기 사 분씩 가만히 눈을 감아버리는 데이지를 볼 때마다 이바르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기행 그 두 번째. 데이지는 은근히 이바르를 추행했다. 말 그대로 추행이었다. 한참 빗자루로 복도를 쓸고 있자면 어느새 데이지가 곁에 와서 은근슬쩍 몸을 부딪힌다. 처음에 이바르는 그저 서로 조심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몸이 부딪히는 것을 뛰어넘어 데이지의 손등이 엉덩이를 스치거나 허벅지를 스치자 이바르는 천천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육체적으로 희롱하는 것이었다! “데이지 선배님.” 이바르가 조용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경고했다. “저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령 부조리한 업무일지라도 그것이 단탈리안 전하께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업무와 상관없이 저를 계속 희롱하실 생각이라면 다른 분께 고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경고가 먹힌 것일까. 피도 눈물도 뇌수도 없어 보이는 계집애가 드디어 사과했다. 이바르가 안심했다. 다행히도 상대방에게는 일말의 이성이 두개골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곧이어 이어진 말에 이바르는 다시 한 번 머릿속이 멍해지는 경험을 겪어야만 했다. “이바르 양이 매력적이라서 무심코 손이 나갔습니다.” “……예?” 잠시 침묵이 있었다. 이바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서, 선배님. 저는……여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눈이 달렸습니다.” 데이지가 말했다. “참고로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그날 이후, 이바르는 데이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적어졌다. 요컨대 데이지라는 소녀는 피가 낭자하는 고문에 미쳐 있으며, 사시사철 하루종일 아랫배에 슬라임을 집어넣고 다니고, 그 슬라임이 꿈틀대는 원인이 다름 아니라 자신의 친오빠가 자위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동성애자이다. 이바르는 삼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으나 이런 미치광이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결국 시녀가 된 지 한 달째. “재상 각하. 송구하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습니다!” 이바르가 재상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어쩌면 한 달이나 버텼다는 점에서 이바르는 이미 초인적인 인내심을 지녔다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 웬만한 영웅도 둘째날에 이미 백기를 들어올렸을 것이다. “시녀장은 미쳤습니다! 이걸 단순히 상급자에 대한 불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시녀장의 변태적인 행각을 마흔일곱 개나 외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바르 씨.”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여기에는 조직의 질서가 걸려 있습니다. 지금 와서 이바르 씨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다면 시녀장의 권위 자체가 흔들립니다.” “하지만, 재상 각하……!” 이바르가 눈물까지 흘릴 기세로 절절히 외쳤다. “시녀장은 오늘만 제 허벅지를 다섯 번 만졌습니다! 이런 대우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고작 허벅지를 만졌을 뿐이지 않습니까.”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던전에서 산책하는 라우라 군무상서를 붙잡아서 다섯 시간 동안 성교하는 것이 취미이십니다. 전하와 비교하면 시녀장은 무척 건전합니다.” “…….” 도대체 이 마왕성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이바르는 머리가 띵했다. “하, 하지만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마왕성의 군주이시니까요. 예외입니다. 시녀장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녀장은 개인적으로 전하의 양녀이기도 합니다. 지난 전역에 전하께 봉사하여 큰 공을 두 개나 세웠습니다. 다소의 특권은 충분히 용납될 수 있습니다.” “으윽…….” 이 고지식한 하프 서큐버스가! 이바르는 열불이 터졌다. 조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라피스의 주장은 분명히 옳았다. 그렇지만 이바르는 조직을 이끄는 회장이었지 결코 조직을 위해 희생되는 졸병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특단의 조치를 꺼냈다. “제1급 사무마, 라피스 라줄리. 나다. 그대의 고용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이다.” “……?” 라피스가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이바르 양에게 허언증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만.” “믿기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하지만 정말이다. 그대가 지금까지 접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내가 조종하는 인형이었다.” 당연하게도 라피스는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이바르는 필사적인 설득 끝에 겨우겨우 '증명의 기회'를 얻었다. 순간이동 마법서를 사용하여 이바르는 라피스와 함께 쿤쿠스카 상회 본부로 이동했으며, 밀실에서 자신의 인형 조종술을 선보였다. 라피스가 놀라운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진실로 이바르 양께서는 로드브로크셨군요.” “믿어주는 것인가, 라피스 라줄리.” “예. 회주님.” 이바르는 감동에 휩싸였다. 마침내 미치광이 변태 인간 계집한테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럼 이제 본인의 부탁을 들어다오. 여신께 맹세하건대, 그 시녀장은 보통 미치광이가 아니다. 한시라도 녀석의 아래에서 도망치고 싶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라피스가 자신의 외투를 뒤적거리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녀는 종이를 이바르한테 공손하게 바쳤다. 이바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뭔가?” “사직서입니다.” 무엇이라? “예전부터 본격적으로 단탈리안 전하의 가신으로 들어가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회주께 사직서를 드릴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잘 됐군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이바르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만 노인의 몸으로 소녀처럼 반문했다. “그, 그럼 내 근무처는?” “변함없이 시녀장의 조수입니다.” 지옥의 판결문을 읊는 염라대왕마냥 라피스가 단언했다. 그녀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제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양'.” “…….” 이바르는 세상을 저주했다.   00313 겨울왕(Rex Hyemis) =========================================================================                        지하 연못에서 온천을 즐기는 한때였다. “야, 혹시 파이몬이랑 싸웠냐?” 바르바토스가 불쑥 질문했다. 녀석은 우리 마왕성에 놀러와 있었다. 내가 목욕하고 있는데 어느새 옷을 홀라당 벗어재끼고 내 옆에 들어와 앉았다. 캬아, 시원하다, 하고 연신 감탄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저씨 그 자체였다. 어째서 이런 녀석이랑 애인이 된 것일까. 새삼스럽게 인생에 대해 회의감을 품으며 나는 연초를 뻐끔거렸다. “왜. 설마 소문이 났어?” “소문은 무슨. 파이몬 년이 쓸데없이 우울해 보이니까 함 찍어본 거지.” 바르바토스가 온천물로 얼굴을 어푸어푸 씻었다. “그년 신경줄이 오크 좆탱이마냥 두꺼워서 말이지, 웬만한 일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거든.” “뭐……. 조금 시덥잖게 말다툼을 했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싸웠는지 내가 맞춰볼까. 인간놈들 바베큐한 것 때문이지? 그치?” “어이구. 섭정직 때려치고 돗자리 까셔도 되겠어요.” “그럴 줄 알았어.” 바르바토스가 깔깔 웃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꼬맹이 마왕은 다른 사람이 꿀꿀해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디스트였다. 요새 제일 잘 나가는 마왕 전하가 이 녀석이라니, 세상 참 말세야. “거 봐. 너가 파이몬이랑 꽁냥거릴 때부터 불안했어. 파이몬은 '우리'랑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고. 제4차 월맹군인가 그때도 인간 포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문제로 존나게 싸웠다니까.” 바르바토스는 예전부터 내가 파이몬과 썸 타는 것을 싫어했다. 기본적으로 바르바토스는 연애자유주의자이다.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놀아나도 절대로 터치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파이몬만큼은 신경 쓰이는 라이벌이다. 예전에 바르바토스가 히스테릭을 부린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갑자기 자기가 정실이네 본처이네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꺼내든 사건의 배후에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사이에 오래도록 쌓인 라이벌 심리가 숨어 있다. '파이몬보다 내가 더 우위에 서 있다.' 그걸 나한테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뭐, 손가락 목걸이 선물해주고 퉁 쳤지만. 지금도 바르바토스는 알몸으로 목욕하고 있는데 손가락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래서 여자들의 질투 심리는 귀찮다니까. “바르바토스. 옛날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넌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그야 하루라도 빨리 지상에서 청소해버려야 할 쓰레기지.” 쓰레기라고 단언하는 겁니까. 정말 무섭네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인간도 이성을 가진 종족이잖아. 딱히 죽이지 않고 노예로 써도 괜찮지 않냐.” “밥팅아. 두개골에 이성이 눌러붙은 종족이니까 더더욱 싹 쓸어버려야 하는 거야.” 바르바토스가 온천 연못에 몸을 한층 깊숙하게 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이성이란 게 뭐 별 거냐. 하나도 쓸모없어. 마족이든 인간종이든 그냥 내버려두면 늑대처럼 교활해져서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 뿐이야. 어디 그 대단하신 이성적인 분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왜 똑같은 생명인데 동물이나 식물을 잡수냐고.”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하거든. 나는 이성적인 종족이고 동물이랑 식물은 존나 멍청한 새끼들이니까 먹어도 된다고. 이게 무슨 뼈다구가 똥 싸는 소리냐 이거야. 알겠어? 이건 간단한 문제야. 그놈이 동물이랑 식물보다 강하니까 잡아먹는 거지.”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쓰윽 들어올렸다. 수면 위로 새하얀 발이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나는 이성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귀를 잡아뜯어서 상대방의 입구녕에 처넣고 싶어. 파이몬과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여기야. 그놈은 설사를 황금처럼 받들어 모시고, 나는 설사를 단지 설사로 취급하지.” 과연. 온천물에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그럼 마족이든 인간종이든 가리지 않고 청소하면 될 일이잖아. 왜 인간종만 쓸어버려?” “응. 천만다행으로 마족은 내가 통제할 수 있거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단탈리안. 나는 이걸 일종의 축복이라고 생각해. 마족에게는 마왕이 있어.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겨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지.” “…….” “제어할 수 있는 쓰레기인가. 고삐가 풀린 쓰레기인가. 그 차이야. 만일 세상에 마왕이 없었다면 나는 진지하게 모든 종족을 멸망시키려고 노력했겠지…….” 내가 무표정하게 그런가,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아아. 그러니까 우리의 동지들을 제외하고 쓰잘데기 없는 마왕은 모조리 청소할 거야.” 제법 공교로웠다. 파이몬과 바르바토스, 두 사람은 모두 마왕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걸 저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은 그걸 축복으로 여긴다. 파이몬은 마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라고 파악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마왕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했다. 마족과 인간종이라는 구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회가 도래하려면……. 정반대로, 바르바토스는 인간종을 이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절대적으로 공정한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 인간종이 싸그리 사라져야 마땅하다면서. 그런데도 두 사람은 똑같은 해답에 이르렀다. '마왕을 대거 없애야 한다'라는 해답에.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나는 애초에 정의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먼 족속이야. 파이몬이 옳은지 너가 옳은지, 나로서는 판단할 자격조차 없어.” “…….”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어.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왕들이 얕보는 만큼 인류는 약하지 않다. 근래에 마왕군이 인간군보다 우위를 차지한 것은 철두철미하게 명분을 활용한 덕분이다. 결코 마족이 인간보다 태생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적의 분열을 이용했다. 브루노 평원에서는 귀족과 평민을 분열시켰어. 꼭두각시 전쟁에서는 프랑크와 브르타뉴를 분열시켰지. 그렇기에 승리를 낚아챈 거다.” 아군은 단합하고 적군은 갈라놓는다.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계율이며, 신성하게 받드는 원칙이다. 여태까지 내가 걸어온 모든 행보는 다만 저 유일한 원칙을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 “너가 산악파를 짓밟는 건 상관없어. 마족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도 좋다. 단, 지금은 아군과 싸울 때가 아니야. 나는 마왕군의 참모장으로서 군단장인 너에게 권고하겠어. 참아.”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합스부르크도 망했고, 프랑크도 망했고, 브르타뉴도 망했잖아. 여기서 뭘 더 참아?” “글쎄. 아직 건재한 나라가 버니시아, 칼마르, 바타비아, 튜튼, 폴리투니아, 모스크바, 카스티야, 사르데냐, 아나톨리아까지, 아홉 개나 되는군.” 열두 국가 중에 겨우 세 개만 무너졌다. 단순히 계산해서 인류의 3/4이나 아직 남은 것이다. 나는 인류가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마왕군이 요 몇 년 사이에 약화되었지. 전쟁통에 몇 놈이 죽었고, 바알과 아가레스가 죽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강력해보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우리는 뭉쳐 있고 쟤들은 흩어져 있으니까. 그런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가 화를 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데!” “발정난 고양이처럼 보채지 마. 그래, 적어도 합스부르크의 통령과 브르타뉴의 여왕이 죽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기다려라.” 그쯤이면 원래 게임에서 활약했던 인간측 인물들도 다 늙어서 죽겠지. 특히나 합스부르크 공화국. 이건 전적으로 엘리자베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엘리자베트가 죽으면 곧바로 무너질 것이 뻔하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옆구리를 장난스레 만졌다. “뭐, 길어봤자 육십 년이잖아.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리 대단치도 않아. 안 그래?” “젠장……너 진짜 싫어!”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걷어 쳤다. “야! 산악파랑 평원파랑 싸우면 너 누구 편 들 거야!?” “세상에. 어린애도 하지 않을 유치한 질문을…….” “썅, 넘어가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바르바토스가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무슨 소리야. 나는 산악파의 편도 아니고, 평원파의 편도 아니야.” 나는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단지 너의 편이지.” “……어?” “인간이 쓰레기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너의 이상이 고귀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 바르바토스, 나는 그저 순수하게 너의 아군이 되는 거야.” 나는 천천히 바르바토스의 입술에 다가갔다. 그런데 입술에 살짝 닿으려는 찰나였다. 휙,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키스를 피했다. 내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우와아, 너 겁나게 깬다.” 어라. 뭔가 기대했던 반응과 전혀 다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얼굴을 붉히거나 쑥스러워 하는 반응을 원했는데. 라우라나 이바르는 이렇게 해주면 좋아서 죽을 지경에 빠지건만, 바르바토스는 음식물 쓰레기를 쳐다보는 것처럼 눈길이 차가웠다. “방금 그게 날 꼬시겠답시고 말한 거야? 저능아야.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혀발림에 넘어가냐? 존나 느끼하네. 어제 먹은 푸아그라가 도로 올라올 뻔했어.” “…….” 순식간에 이바르와 라우라를 저능아로 만들어버리는 바르바토스였다. 나는 입끝이 덜덜 떨렸다. “네, 네년이 순수하지 않은 거지!” “순수는 무슨 오우거가 짝사랑하는 소리 지껄이고 앉았네. 내가 무슨 평생 연애도 안 해본 처녀도 아니고.”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어른인 내가 충고해주지. 너 절대로 누구 앞에서 그런 대사 치지 마라. 진짜 느끼해. 그나마 가슴에 있던 애정도 도망쳐버릴 지경이야.” “뭐가 어쩌고 저째……?” “솔직히 죽빵 날리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 애인만 아니었으면 벌써 너 혓바닥 잘렸다. 깔깔.” 바르바토스가 거하게 웃어댔다. 오랜만에 들어본 모욕에 나는 전신이 부들거렸다. 고작 라우라한테 쩔쩔매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내 연애법을 깔보는가. 다른 건 몰라도 연애사업에 관련해서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벌렸다. “놀고 있네. 너는 인간 꼬맹이한테 쪽도 못 쓰는――.” 그때였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이미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부드럽게, 한없이 자연스럽게 내 입술을 훔쳤다.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바르바토스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안에 들어왔다. 격렬한 키스가 아니라, 꼭 쓰다듬는 것처럼 살며시 나의 혀에 얽혔다. 나는 입을 다물 타이밍도 놓치고 바르바토스한테 농락당했다. 잠시 뒤, 키스가 끝나고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얼굴을 내뺐다. 녀석은 못된 장난을 친 악동처럼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꼬맹아. 사람을 꼬시는 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 “…….” “거 주둥이만 물 위에 둥둥 떠서 헛소리를 남발해봤자 아무것도 못해요. 알겠냐?” 바르바토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섰다. 지하 연못을 빠져나가는 바르바토스를 향해 내가 서둘러 소리쳤다. “너, 너 지금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들고 도망치는 거냐!?” 제기랄.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렸다. 방금 그것 때문에 내 몸은 격렬하게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다니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저 음흉한 바르바토스는 내 상태를 빤히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가 알 바 아닌데? 혼자서 딸딸이라도 잡든가.” “요즘 라우라랑 사귄다고 아주 서방님한테 못 되게 구는구만!?” “서방은 누가 서방이야. 싫으면 파이몬이나 불러서 떡을 치셔.” 그녀가 큰소리로 깔깔거렸다. 역시 사디스트이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바르바토스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00314 겨울왕(Rex Hyemis) =========================================================================                        * * *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바르바토스는 내 말을 납득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마왕이 나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싸우느라 사이가 서먹해진 마왕이라면 특히나 그러했다. “공화주의 대표회의?” 초겨울, 어느 공문을 전해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용은 간단했다. 대륙의 공화파를 대표하는 정치인과 학자, 예술가를 모조리 불러들여서 바타비아 공화국의 수도에서 대규모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회의는 전례가 없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니블헤임의 시민 대표들에게도 똑같은 초대장이 보내졌사옵니다.” 이바르가 옆에서 첨언했다. 지금 집무실에는 이바르와 데이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밖에 없었다. 다른 간부들이 각자 업무를 보러 나간 사이에 이바르가 공문을 가져왔다. “소인이 개인적으로 알아봤습니다만 마계의 대공들에게도 전송된 것 같습니다.” “대공들까지…….” 그렇다면 자유도시들에게 모두 동일한 서류가 발송되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대륙과 마계를 가리지 않고. 터무니없는 규모의 회의였다. 초대측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13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공화국을 지배하는 실세로 알려졌지만, 내실을 들여다 보면 파이몬의 꼭두각시였다. 확실했다. 이건 파이몬이 꾸몄다. 내가 한손으로 초대장을 구겼다. “제기랄……아직 일러도 너무 이르다!” 파이몬의 의도는 불 보듯 뻔했다. 현재 대륙은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휩쓸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탄생했고, 프랑크 제국도 공화파의 주도 아래 새로이 재편되었다. 태생적으로 공화주의에 가까운 자유도시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게다가 왕당파의 대표주자인 브르타뉴가 패배했다……단순히 생각하면 공화주의가 태양처럼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겠지. 이 기회를 살려서 한층 기세를 올리겠다. 파이몬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안 된다. 아직은 초국가적인 연맹을 겉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야…….” 내가 중얼거리자 이바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그저 회의를 열 뿐이라면 크게 염려하실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마족과 인간종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마계의 인사들과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인간종이 생각하기에 마족의 지도자란 곧 마왕이었다. 아주 틀린 인식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마계사회를 다스리는 지도층은 마왕이 아니라 대공 혹은 시민 대표였다. 그들이 실질적인 지배층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한숨을 쉬었다. “마계의 지도층이 처음으로 대륙에서 정치적인 데뷔식을 치루는 것이다. 그것도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이름이 붙은 모임에서……이것을 인간계의 군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과연. 자칫하면 마계 전체를 공화파로 오인하겠군요.” 이바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났다. 이바르는 우리 마왕군을 통틀어서 정치-외교적인 식견이 가장 뛰어났다. 라피스나 제레미도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바르는 이런 방면에서 나를 충실히 보좌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군주들은 브르타뉴의 패망을 고소해하면서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사옵니다. 경쟁자가 몰락한 것은 기쁘지만 왕당파가 패배한 것은 석연치 않을 것입니다.” “아아. 그런 상황에서 공화주의 대표회의란 게 열린다……쓸데없이 자극을 받겠지.” 이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왕군은 대륙에 공화주의를 퍼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군주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옵니다.” 문제는 이게 근거가 없는 의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루노 평원에서 공화주의식 연설을 펼친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나, 마왕 단탈리안이다. 대륙 정중앙에는 엘프-드워프의 부족 연합이 있다. 부족제가 흔히 그러하듯 이것도 공화정에 가깝다. 더욱이 마왕군은 하필 바타비아 공화국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 어떻게 살펴봐도 마왕군은 명백히 친(親) 공화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 번 의심하면 끝이 없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왕당파가 대대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할 거다……. 젠장할. 이바르, 데이지. 채비를 하고 따라와라. 파이몬의 마왕성으로 향한다.” “예, 전하.” 인류가 단합하는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 파이몬. 하루라도 빨리 대륙에 공화주의를 펼치고 싶은 네 욕망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걸 납득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 * * 마왕성 <공중정원>. 말 그대로 중력을 거슬러서 공중에 부유하는 마왕성이다. 풍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기로 유명하여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마왕성은 그 자체로 천연요새이다. 게임에서는 용사 일행이 이 난공불락의 마왕성에 침입하기 위해 그리핀 부대를 동원한다. 파이몬은 용사에게 심장이 꿰뚫린 채로 무너져 내린다……그녀의 마왕성도, 위대한 이상도 함께. 나는 본래 파이몬을 싫어했다. 진실을 알아낸 지금은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위선자라 해도 괜찮았다. 만일 위선마저 없다면 무엇이 삶을 눈부시게 만들어주겠는가. 나는 파이몬을 동경하며, 그녀가 게임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녀복을 입은 정령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한참을 걸으니 자그마한 호수가 나왔다. 호수 근처에 앉아 파이몬은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바르, 데이지. 이곳에서 기다려라.” 두 사람을 대기시키고 나는 파이몬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이몬.” 내가 곁에 다가섰는데도 파이몬은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 주변에만 또다른 공기가 고요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마음을 높으면 나까지 그 공기에 휩쓸릴 것 같았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이몬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하얀 살결이었다.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얘기했다. “제가 왜 방문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파이몬. 시기상조입니다.” “…….”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니요. 게다가 인간계와 마계의 인사를 모두 부르다니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이쪽이 똘똘 뭉치면 그만큼 적들도 경계하여 한곳으로 뭉치게 됩니다. 인류의 저력은 아직도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내가 무릎까지 꿇고 저자세로 나갔다. 이럴 때 파이몬은 철면피처럼 계속 침묵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전히 연못을 바라보면서 연한 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요?” 목소리에 생기가 적었지만 의외로 호의적인 질문이었다. 좋았다. 파이몬에게는 나와 대화할 의사가 있었다. 내심 다행으로 여기며 내가 차분히 대답했다. “육십 년. 아니, 오십 년만 기다려도 충분합니다. 연이은 전염병과 전쟁에 민중은 점점 더 불만에 차오르고 있습니다. 향후 오십 년 동안, 인간계의 군주들은 민중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겁니다.” “…….” “오십 년이 지나면 프랑크의 신생 정부도 어느 정도 안정되겠지요. 우리는 프랑크라는 거대한 동맹군을 얻게 됩니다. 파이몬, 오십 년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별로 대단한 세월도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잠시간 대화가 없는 몇 분이 흘러갔다. 찬란한 초겨울의 햇빛을 받으며 매 한 마리가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낙하했다. 물결이 첨벙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마력이 넘쳐나는 마왕성이기 때문일까. 초겨울인데도 이곳에는 수풀이 푸르게 우거져 있었다. 파이몬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어두우면서도 초점이 명확했다. 불안감이 내 전신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저건 대화의 여지가 남은 사람이 내보이는 시선이 아니었다. “단탈리안. 한 가지만 질문하겠사와요. ……그 오십 년 후에, 바르바토스의 평원파는 어떻게 행동하지요?” “……그것은.” 말문이 막혔다. 바르바토스는 당연하지만 대륙 정벌에 나선다. 마왕군을 필두로 하여 대륙과 마계를 하나의 절대적인 국가로 성립시킬 것이다. 비단 평원파만의 목적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제시하는 미래는, 현 시점에서 마계사회에서 가장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오십 년 동안 힘을 모으는 세력은 저희뿐만이 아니에요. 평원파도 똑같지요. 단탈리안. 그대의 말대로 오십 년 후에 인간계는 매우 약화되어 있겠지요. 그렇게 허약해진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과연 마족들이 참을 수 있을까요?” “…….” 무리다. 인간종과 마족을 아우르는 공화정이 성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종족 간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족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인간종은 기껏해야 2급 시민으로 취급받겠지. 공공연하게 신분을 차별할 것이다. 파이몬은 그런 차별을 증오하는 것이다. “바알과 아가레스가 사라지고 난 직후인 지금이 기회예요. 마왕군도 타격을 입었고, 인류도 타격을 입었어요.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서 대륙을 통합해야 합니다.”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큽니다. 마왕군의 참모장으로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파이몬은 평원파를 경쟁상대로 보고 있다. 위험하다. 인류는 적이고 마왕군은 아군이다. 그 사실을 혼동해버리면 곧바로 내분이 일어난다. “파이몬,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부디 차분히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내분을 겪었을 때는 언제나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단결했을 때는 어김없이 승리가 뒤따랐습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사와요.” 파이몬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몸짓이었다. “단탈리안. 꼭두각시 전쟁에서 패배한 쪽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물론 브르타뉴의 여왕이고 대륙의 왕당파입니다.” “아니에요.” 파이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미치광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틈새에 끼여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나간 백성이에요. 단탈리안. 그들이야말로 궁극적인 패배자입니다.” “…….”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저희 역시 승자의 편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오십 년을 기다리라고 말씀했나요? 군주들이 오십 년 동안 백성을 탄압하느라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라고요?”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갈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저는 그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 “단탈리안. 저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에 일종의 윤리가 깃들어 있음을, 소녀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하고 파이몬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저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여자예요.” “……파이몬.” 처참했다.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지난 번, 파이몬이 위악자라고 질책했을 때 나는 내가 철저하게 악의 축으로 남으려면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반박했다. 동일한 논리가 이번에 반대로 적용된다. 파이몬은 끝까지 선한 자로 남고자 결심했다. 따라서 결코 민중의 개죽음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여기서 파이몬에게 '승리를 위해 희생을 내버려두라' 하고 조언하면 파이몬에게 위선자가 되라고 권고하는 셈이다. 나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파이몬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단탈리안. 제가 바르바토스와 싸우는 날이 온다면 저를 선택해주실 수 있겠어요?”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걸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결정적으로 끝났다. 파이몬은 이후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뭐라고 말할 것이 없었다. 나는 등을 돌리고 호수에서 멀어졌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전하. 괜찮으신지요?” 이쪽의 표정을 보고 이바르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바로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으로 가자. 할 일이 많다.” 이대로 가다가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맞부닥친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인간계의 군주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겠지. 그런 결말을 용납할까보냐.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두 사람을 모두 구한다. 그것이 나의 결심이다. 하지만 정말로 가능할까.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란 게 과연 있을까.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다……. 나는 초겨울의 창백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러모로 바빠질 것이다. 이번 겨울은 유독 길겠군…….”   00315 겨울왕(Rex Hyemis) =========================================================================                        * * * 겨울철에는 군사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겨울잠은 필요없다지만 군대에 한정해서 얘기가 달라진다. 군대는 대체로 11월에 겨울나기 숙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빠르게는 3월, 느리게는 4월에 다시 느릿하게 기지개를 편다. 다만 몬스터 병사들은 2월부터 전역에 뛰어들 수 있다. 몬스터는 인간보다 추위에 강하다. 단순히 계산해서 마왕군은 인류군보다 자그마치 한 달에서 두 달 가량이나 '일찍' 행동할 수 있다. 마왕군이 군대를 움직이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2월쯤의 늦겨울. 인간들이 겨울 내내 보호해낸 작물을 수확하느라 바쁜 4월. 그리고 여름 내내 키워낸 작물을 거둬들이드라 바쁜 가을철이다. 인간들이 끔찍하게 바쁘거나 싫어하는 시기만 쏙쏙 골라서 움직이는 거다. 이런 일이 무려 삼천 년 반복되었다. 이래서야 인류가 마족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만한 증오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를 만들겠노라고 파이몬은 결심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미치광이에 불과하겠지. 미치광이에게 실제로 힘이 주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치광이를 그만두고 괴물로 변한다. 역사의 괴물로……. 나는 먼저 '승전 기념 행사'를 재빠르게 개최했다. 브르타뉴한테 거둔 승리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에 각국의 대사를 초대했다. 목적은 단순했다. 마족들이 공화주의자로 오해받기 전에 먼저 왕당파들과 모임을 가진다! 초청장에는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초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실상 마왕군이 외교적으로 건네는 '우호의 제스처'라는 사실을 예감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인간의 왕들은 기다렸다는 듯 외교 사절을 파견했다. 파티는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합스부르크의 위명이 천하에 진동하오니, 폐하의 위대한 승리에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나이다.” 전 국가에서 사절들이 방문하여 루돌프 황제 앞에서 침에 발린 칭송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그중에는 재미있게도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신도 끼어 있었다. 이 남자는 때때로 쓴웃음을 지었는데, '합스부르크의 위명'라는 부분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르바토스와 함께 황제의 양옆에 서 있었다. “하으아아암.” 바르바토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길게 하품했다. 바르바토스는 허례허식을 세상에서 제일 따분하게 여기는 족속이었다. 비록 내 제안에 의해서 파티를 열었지만,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겠지. “…….” “…….” 바르바토스로서는 그저 지루해서 하품한 것이겠지만, 효과는 상당했다. 사절들의 얼굴이 굳었다. 공기가 싸해졌다. 만인지상의 황제 폐하가 사절을 접견하고 있는데 감히 일개 신하가 여보라는 듯이 하품했다. 설령 바르바토스가 제국의 대법관이자 섭정이요, 실질적인 제국의 찬탈자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예의에 어긋났다.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법관.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앞에서 그 무슨 채신머리없는 행동거리입니까?” “아, 응. 송구합니다, 폐하.” 바르바토스가 얌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소신이 제국의 업무에 시달려 잠시 실례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하노라. 대법관이 제국을 보살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과인이 알고 있음이라.” 루돌프 황제가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절들의 눈빛이 조용히 이채를 띄었다. 그들에게는 꽤나 인상적으로 비추었겠지. 완전히 꼭두각시라고 여기던 황제가 최소한이나마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천하에 대적할 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마왕들이다. 그들이 인간을 가리켜서 공손하게 폐하, 라고 경칭한다. 사절은 십중팔구 '마왕들이 우리 인간과 진심으로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오라' 하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당연하지만 외교란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번 접견식은 시작이 좋다. 사절들도 아까 전에 비해 목소리에서 활기가 돌았다. 아첨하는 말이 길어졌고 단어도 다양해졌다. 드디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폐하.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 각하를 대신하여 제국의 경이로운 업적을 칭송하나이다. 폐하께서 거두신 승리는 단지 폐하와 제국의 경사일 뿐만이 아니옵고, 한 나라에 있어 진정한 주권자를 바로 세우셨다는 점에서 가히 대의의 승리이옵니다. 저희 통령 각하께서는 제국의 참된 주권자이신 폐하를 언제나 동경하고 있나이다.” 타국의 사신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미묘한 찬사였다. 먼저 다른 사절들은 '합스부르크'라는 용어를 썼는데 반해서 이 자는 '제국'이라고 말했다. 합스부르크의 진정한 후계자는 제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다, 라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한 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주권자'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린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제국에서는 바르바토스가 섭정이 되어 황제의 주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대 황제를 가리켜서 '진정한 주권자'라니? 자칫 잘못 해석하면 섭정인 바르바토스를 교묘하게 비난하고, 땅에 떨어진 황권을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린다. 아마 실제로도 그걸 의도했겠지. 건방지게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노림수가 너무 얄팍했다. “오오. 과인의 친누이가 축하를 보냈구나!” 루돌프 황제가 반색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절을 대하던 것과는 어조가 뚜렷하게 달랐다. “형제국에서 사절이 왔으니 한 오라비의 경사가 두 남매의 경사로 불어남이로다. 어떠한가. 과인의 누이는 평안하고 건강하게 신들께서 허락해주신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예, 폐하.” 공화국의 사신이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약간의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모두 폐하께서 친애의 정으로 걱정해주신 덕분이옵니다.” “허허. 과인이 뭘 했다고 누이에게 도움이 됐겠는고?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혼자서 잘 해냈다.” 루돌프는 숫제 황제의 가면을 어느 정도 벗어던지고 인간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주인인 황제가 부드럽게 얘기하자 주변의 공기도 한결 따스해졌다. “지금 돌이켜보건마는 엘리제와 더불어 궁전을 뛰어 돌아다닐 때가 과인에게 가장 찬란했던 한때가 아니었나 싶구나. 신들께서는 특별히 우리의 유년에 상냥하고도 부드러운 음악을 선사해주셨나니, 우리 남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원시나 매한가지였다.” 루돌프가 아련한 눈초리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진실로 아름답다기보다 유년시절에 마땅히 따라붙는 얼마간의 무지. 그리고 얼마간의 어리석음으로 치장된 아름다움일 터. 하지만 과인이 그대들에게 고백하거늘, 이제는 그 무지와 어리석음마저 그립고 정겹구나…….” “…….” 공화국 사신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저건 순짜 구라였다. 루돌프와 엘리자베트 남매 사이에 아름다운 추억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루돌프, 지금 시체가 되어 바르바토스한테 실시간으로 조종당하고 있는 이 양반은, 생전에 자기 누이들을 강간할 계획이나 진지하게 궁리하던 개자식이다. 하지만 타국의 사절들은 그런 내막을 모른다. “폐하께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계심에도 친애를 잊지 않으시니 실로 제국의 앞날이 밝사옵니다!” “어린시절을 잊어버리는 자에게는 위선이, 기억하는 자에게는 현명함과 자애가 깃들기 마련이라고 일찍이 현자들이 말했나이다. 폐하께서 씁쓸해하심은 한 명의 주권자로서는 피할 수 없는 상실이옵니다만, 제국 전체에 있어서는 어찌 크나큰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사신들이 입을 모아 루돌프의 인간적인 면모를 칭송했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한 기세였다. 과연 각국에서 고르고 골라 사절로 보내온 인간다웠다. 하나같이 청산유수였다. “그렇사옵니다.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유일하게 공화국의 사신만이 어딘지 심심하게 반응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명백히 목소리에 색채가 희미했다. 루돌프가 어떤 개자식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미안하지만 아직 이쪽의 차례는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짐을 위로해주니 고맙구나.” 루돌프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허나,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노라. 엘리제도 과인도 무엇이든 전부 스스로 해내려고 했다. 서로가 서로한테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음이라. 우리 남매는 너무도 어렸다…….” “…….”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되었을 텐데 그것이 안 되었지. 그 결과, 영광스러운 합스부르크는 둘로 나뉘어서 분가(分家)를 하고 있다. 어린 남매의 다툼이 국가의 절단을 낳았다. 과인이 어찌 후회하지 않겠는고.” “……!” 공화국의 사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교묘한 외교적 술수였다. 지금 루돌프 황제는 합스부르크가 둘로 나뉜 원인을 '단순한 남매 싸움'으로 규정해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자신들이야말로 정당한 합스부르크이며, 신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건국했다. 여기에 남매 싸움 같은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루돌프 황제는 이러한 사정을 걷어치웠다. 공화국은 대의명분 때문에 세워진 게 아니라 한낱 남매의 황권 다툼에서 비롯했노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사신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경악할 법했다. 말의 배치도 교활했다. 얼핏 오라비와 여동생, 두 사람이 모두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인상은 전혀 다르다.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혼자서 잘 해냈다'라고 아무 의미없는 말을 먼저 배치했다. 그 다음에 '서로가 서로한테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하고 덧붙였다. 이래서야 마치 엘리자베트의 독선적인 성격이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오오, 폐하. 부디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옵니다.” “언젠가 합스부르크는 다시금 영광스러운 깃발 아래 집결할 것이나이다.” 사신들이 루돌프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공화국 사신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적인 외교 무대에서 한낱 '분가'로 취급받게 생겼다. 설령 황제에게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그런 사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폐하, 하오나…….” “폐하.” 사신이 입을 연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황제가 나를 쳐다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좌중의 주목이 내게로 모였다. “환영식이 준비되었나이다. 오늘은 열국의 군주들에게 축하를 받아들이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겠사옵니까. 이런 날에 어울리도록 다 함께 근심과 걱정을 잊어보심은 어떻습니까?” “오, 단탈리안 궁중백. 그대의 말이 옳다.” 루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궁중백(宮中伯)은 최근에 내가 새로이 하사받은 작위였다. 제국에서는 공작과 변경백 다음으로 직위가 높았다. 바르바토스가 아우스테를리츠 공작이자 로젠베르크 변경백이니, 평원파의 최고참모인 나에게 궁중백은 꽤나 적절했다. “과인이 좋은 날에 지나치게 우울한 주제를 꺼내들었군. 이 실례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사신들에게는 즐거운 향연을 제공해야 마땅하리라. 자아, 궁중백. 사신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해주게나.” “분부를 받드옵니다.” 내가 허리를 숙이면서 힐끗 공화국 사신을 쳐다보았다. 사신은 시체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진짜 시체인 루돌프는 웃고 정작 산 인간은 울상을 짓는다. 재미있는 농담이다. 뭐, 내가 뻔히 황제를 지원하고 있는데 겁없이 잔재주를 부린 대가이다. 나는 이미 바르바토스한테 대본을 넘겨서 외우도록 만들어두고 있었다. 준비 자체가 달랐다. 버릇없이 건방지게 짖어대는 엘리자베트의 애완견에게는 좋은 교육이 되었을 거다.   00316 겨울왕(Rex Hyemis) =========================================================================                        공화국 사신의 자잘한 공격은 요컨대 장난스러운 서막에 불과했다. 나는 파이몬보다 한발 앞서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국제 무대에 올려버릴 심산이었다. 제국이 국제 정치에 등장한다. 그것은 여태까지 '합스부르크의 정당한 후계자'를 자처한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정면으로 충돌함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이번 겨울을 장식할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 * 먼저 프랑크 제국. “황태후 폐하께서는 귀국에 무한한 협력을 지시하셨습니다.” 프랑크는 어느 국가보다 확실하게 우리를 지지했다. 나는 프랑크 남부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역도당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베르시 백작에게 밀서를 보내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농간이라 알려준 바가 있었다. 프랑크의 궁정은 '괘씸죄' 때문에라도 공화국한테 한방 먹여주기를 원했다. 다음으로, 약간 의외일 수 있겠지만 브르타뉴 왕국. “여왕 전하께서는 이미 합스부르크의 황제 폐하를 정당한 주권자로 인정하셨나이다.” 이런 협력에는 지난 전쟁에서 맺은 르 아브르 조약이 걸려 있었다. 브르타뉴에서 우리를 주권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조약도 파기된다. 곧바로 전쟁이다. 주력군이 소멸해버린 브르타뉴 왕국은 더 이상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설령 앙리에타 여왕이 엘리자베트 통령과 개인적인 협력을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국가의 명운이 달린 문제에 직면해서는 어쩔 수 없으리라. 우리의 아군은 이렇게 프랑크 제국과 브르타뉴 왕국이었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귀국에 전쟁 의지가 없다는 것을 쉬이 믿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마왕군이 우리의 국토 일부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영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희는 결코 무조건적인 선의를 선물해드릴 수 없습니다.” 사르데냐 왕국과 폴리투니아 왕국이다. 사르데냐는 공화국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그네들 입장에서 공화국은 무시무시한 마왕군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파제. 공화국에 협력할 만하다. 폴리투니아 왕국은 중립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마왕 마르바스가 통솔하는 중립파는 월맹군 전쟁 때부터 이미 단독으로 폴리투니아에 침략했다. 일부 영토를 함락하여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 덕분인지 폴리투니아는 우리한테 절찬리에 적대심을 불태웠다. 나머지 국가들은 전부 중립이다. 버니시아, 튜튼, 칼마르, 아나톨리아, 카스티야, 모스크바. 심지어 바타비아까지. 일곱 개의 나라가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하며 누구 편을 들어줄까 고민했다. 필시 즐거운 고민이겠지. 우리와 공화국, 둘 중에 누가 더 달콤한 제안을 내미느냐에 따라 일곱 국가는 언제든지 협력의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현재 스코어 2:2. 합스부르크 제국과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한판 벌이는 형제 싸움. 그러나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나 단탈리안과 엘리자베트 통령이 벌이는 외교전이다. 만약 진짜 전투라면 나는 주저없이 후퇴할 거다. 엘리자베트는 군사의 천재이다. 나 따위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철과 철이 맞부닥치는 전쟁이 아니다. 쇠붙이 없는 전쟁, 혓바닥의 전쟁이다……. 더군다나 엘리자베트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본인이 직접 외교전에 뛰어들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일국의 군주인 만큼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이 따라붙는다. 반면에 나는 마음껏 자유롭게 움직인다. 영지 관리는 라피스와 파르시에게 몽땅 맡겨버리고 온전히 외교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 차이점이 승패를 가르겠지. * * * “모조리 돈으로 매수해버려라.” 나는 무엇보다 먼저 뇌물 공세에 착수했다. 뇌물은 고전적인 전술이다. 그만큼 효과가 입증되어 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공략한 지금, 나는 마계와 대륙을 합쳐서 명실상부 가장 막강한 자금 동원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바르가 보유한 자산은 무려 리브라 금화 5천만에 이른다. 황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니고 뭔가. 이게 어느 정도 재산이냐 하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궁정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이 150만 리브라 금화이다. 이바르는 혼자서 제국의 궁정을 자그마치 33년 동안 굴릴 수 있다! 혼자서! 그것도 33년 동안 일하지 않고 재산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는 가정 아래.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금발 소녀가 나에게 물었다. “금액이 어느 정도 필요하옵니까?” “각국의 사절단을 전부 매수하는 것이다. 금화 십오만 어치는 되어야 충분하겠지.” 아직 시장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다. 금화 십오만은 막대한 자금이었다. 쿤쿠스카의 영원불멸하는 진조(眞祖)는 약하게 코웃음을 쳤다. “가볍군요.” 그녀는 무이자 무담보로 즉석에서 삼십만 리브라를 융통했다. 몽땅 현금으로, 그러니까 경화(硬貨)와 보석으로 빌려준 것이었다. 덕택에 자금이 본래 십오만에서 두 배나 붙어버렸다. 어마어마한 뇌물 공세가 쏟아졌다. 이바르와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선수였다. 돈이란 반짝거리는 그대로 선물해서야 약빨이 떨어졌다. 인간이란 기계장치와 같아서 약간의 기름칠이 언제나 필요했다. “마계에서 최고급 기생을 불러들이지. 창관 길드에 의뢰하라.” “서큐버스와 엘프를 깔아뭉개는 것이 인간의 평생 소원이라 하지요? 그 환상을 듬뿍 만끽시키겠습니다.” 마계에서 내로라 하는 창녀와 창남이 직접 공수되었다. 하룻밤을 사는 데 입이 떡 벌어지는 돈이 드는 이들이었다. “악단과 배우, 연금술사도 고용하지.” “창관 길드에 연락하여 함께 고용하면 될 것이옵니다.” 성적인 문화에서 마족은 인간종보다 한참 발달했다. 마족의 삶은 심심찮게 수백 년에 이르고, 기나긴 삶을 달래기 위하여 기상천외한 향락이 고안되었다. 예컨대 무대에서 배우들이 문란한 공연을 펼치며, 악단이 간지러운 음악을 켜고, 연금술사가 흥분제 효과를 가진 약초를 피워내어――그 한가운데에서 농밀한 성교를 즐긴다든지. 가히 섹스의 종합예술이라고 부를 법했다. 외교관들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황홀경에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것은…….” “서큐버스가 아름답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사신들은 마계의 우월한 문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살면서 이렇게 감미로운 술은 처음이오!” “궁중백, 대체 어느 장인이 이 미주를 빚었습니까.” 술도 전부 마계의 물건으로 채웠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새로이 맛보는 명주란 그 자체로 훌륭한 대화거리가 되었다. 일주일. 나는 일주일 내내 외교관들을 구워 삶았다. 사신들은 아예 쾌락에 쩌든 절임이 되었다. 성교와 술이 오가는 와중에 그들의 돈주머니가 두둑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당연하지만, 뇌물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말했다시피 뇌물은 기름칠에 불과하다. 사신들은 어디까지나 주군에게 명령을 받아서 외교적인 사항을 결정할 따름이다. 그러나 군주들은 이곳에 참석하지 않았다. 군주는 사신의 보고를 받아 거기에 입각해서 판단을 내린다. 말하자면 사신은 각 나라 군주의 눈이다. 사신들은 마법 수정구를 이용해서 주기적으로 군주에게 경황을 보고한다. 자아, 그럼 이제 외교관들이 자국의 상관에게 어떻게 보고하겠는가? ─ 합스부르크 제국에 적어도 전쟁을 다시 일으킬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 마왕들은 명확하게 황제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섭정은 다소 방약무인하오나 의외로 궁정의 실세는 궁중백이 장악하고 있으며, 궁중백이 섭정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있습니다. 황궁의 정세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궁정백은 확실히 제국과 인간의 전통을 이해합니다. 궁중백에게는 제국의 황실 그리고 자국의 왕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일체의 편견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인이 판단하기로, 그는 진심으로 자국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습니다. 가는 물건이 있으면 오는 물건이 있는 법이다. 외교관들은 자신들이 받은 축하와 향응에 대하여 '자그마한 호의'를 돌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여기에는 내가 접대하는 동안 쉼없이 사신들을 설득한 영향도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단은 무시무시한 뇌물 공세에 경악했다. 공화국은 허겁지겁 외교 라인을 가동했지만, 미안하게도 실력은 둘째치고 자금의 수준에서 상대가 안 되었다. 신생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결코 돈이 넘쳐나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축에 속하겠지. 공화국에서도 뇌물을 건넸지만 우리쪽과 대조해서야 절망적으로 빈약했다. 이미 최고급 서큐버스를 한 명씩 하녀로 챙긴 사신들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단은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반쯤 공공연하게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언사를 내비추었습니다. 모두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되었으며, 이에 소신은 무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제국 궁정이 보여준 태도는 실로 칭찬할 만했습니다. 황제는 배후에 모욕이 숨은 발언을 들을 때마다 개인적인 분노를 터트리지 아니하고, 그 대신 소신들의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적절하게 대응했습니다. ─ 황제는 개인적으로 공화국의 통령에게 호감을 품고 있으며 이를 공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공화국의 사절단은 무례하기 그지없으며, 아국의 사신을 대접하는 데 있어서도 품격이 떨어집니다. 결국 초전은 완벽하게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사절단의 보고에 군주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사절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와 교섭했다. 지금까지 속 빈 강정 같은 입발림과 아부가 오갔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거래의 시간이었다. 첫 타자는 튜튼 왕국이었다. “궁중백. 우리는 서로 간에 충분히 친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대사.” “솔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본국은 제국에 제일 가까이 위치합니다. 제국이 행여라도 본국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을 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튜튼 왕국은 동쪽은 마왕의 성역, 서쪽은 바타비아 공화국, 남쪽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둘러싸였다. 사면초가라는 단어를 실감하고 있겠지. 그만큼 안보에 민감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대사. 저는 궁중백이지만 동시에 마족의 왕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작게나마 영지를 갖고 있지요. 천만다행으로, 그 영지는 튜튼 왕국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예.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영지라고 들었습니다.”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이렇게 다른 왕국들도 그 나름대로 정보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 영지는 기묘한 곳에 있지요. 경우에 따라 합스부르크에 붙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튜튼에 붙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 화전촌이었던 곳인지라 공식적인 소속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궁중백. 설마.” 튜튼 왕국의 대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 대왕께 주청을 올려 부디 제 영지를 튜튼의 백작령으로 봉해주십시오. 그리되면 저는 합스부르크의 궁중백인 동시에 튜튼의 백작이 됩니다.” “이를 말입니까!” 대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대사는 내 두 손을 잡으며 기뻐했다. “궁중백이 본국에 협력해준다면 실로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하, 과찬입니다. 제가 대사의 우정에 기대를 걸어도 되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궁중백. 소인의 이름을 걸고 이번 일은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바로 다음날, 튜튼 왕국의 답안이 비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내 영지를 튜튼 왕국에 귀속시키는 조건 아래, 합스부르크 제국을 주권국으로 인정하며 바르바토스를 정당한 섭정으로 인정하겠다는 문서였다. ――스코어, 3:2.   00317 겨울왕(Rex Hyemis) =========================================================================                        튜튼 왕국 다음에는 칼마르 연맹국 차례였다. 칼마르 연맹국은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고로 이름하기를, 북방의 사자. 혹독한 추위와 겨울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포효를 내지르는 전사의 나라이다. 과거에 이들은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대륙 각지를 약탈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이 잔혹무비한 전사들은 자신의 전투성을 보다 고상한 거죽데기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칼이 사라지는 대신에 장사와 무역이 들어선 것이었다. 전사이면서 동시에 상인. 칼마르인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뭐, 칼이든 무역이든 모두 약탈 행위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칼마르 연맹의 대사가 말했다. “궁중백. 공화국에서는 우리에게 관세의 인하를 제시했습니다.” 이미 공화국에서 떡밥을 던지고 간 모양새였다. “관세의 인하라…….” “상당히 좋은 조건입니다. 제가 궁중백에게 사실을 전해드리는 것은, 그동안 궁중백께서 저희에게 보여주신 우정에 보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겠지. 솔직하며 과감하다. 칼마르 연맹의 스타일이 느껴졌다. 나는 브랜디가 담긴 술잔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말씀을 들어보니 칼마르에서는 꽤 구체적인 협상안을 고려해두는 것 같군요.” “예, 저희는 단지 풍부한 시장을 원할 뿐입니다.” 대사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공화국이 제시한 관세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공화국이 그리 큰 시장은 아니지요. 저희에게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더욱 달가운 시장입니다……만약 몇 가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조건이라 함은 당연히 관세 인하를 가리켰다. 대륙에서 상인으로 이름난 국가를 열거하자면 칼마르 연맹국, 바타비아 공화국, 사르데냐 왕국. 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칼마르는 관세 혜택을 받음으로써 확실하게 선두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조건에는 물론 바타비아나 사르데냐에게는 관세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붙겠군요.” “궁중백께서는 역시 이야기가 빠르군요.” “흐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썩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 실례이지만, 무슨 말씀인지.” 칼마르 대사가 미간을 좁혔다. 지나치게 애매모호한 발언이라 생각했을까. “협상안으로서 그럭저럭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상책이라고 보기는 힘들군요.” “……저로서는 궁중백의 의중을 가늠할 수 없군요.” “대사. 저 역시 짧은 기간이지만 대사와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기대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협상안은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버립니다.” 대사는 명백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생뚱 맞은 타국의 정치인이 '귀국이 제안한 협상안은 별로 우아하지 못하군요'라고 지적해왔다. 제법 불쾌하겠지. 조금만 기다려봐라. 당신도 분명히 납득해줄 거다. “귀국의 협상안은 너무나 노림수가 명백합니다. 사르데냐와 바타비아를 공공연하게 경쟁국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희 제국은 귀국을 협력자로 얻는 대신에 두 국가를 도발하게 됩니다.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제국의 협력자가 되기에 본국에 모자람이 있다는 뜻입니까?” 대사가 화가 섞인 목소리로 추궁했다.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노림수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군요. 정략으로 평가하자면 우아함이 떨어진다, 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 “애시당초, 이런 협상안이 이루어지면 사르데냐와 바타비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귀국의 상인에 대하여 꽤나 본격적인 공세를 퍼붓겠지요. 십중팔구 관세 전쟁이 펼쳐집니다. 그건 귀국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사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가 술잔을 비우고 탁자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우리 전사들은 결코 대결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투이든 무역이든. 바타비아의 샌님이나 사르데냐의 쭉정이는 수천수만이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좋은 자신감이다. 그러나 자신감은 이성에 기반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울부짖는 자신감 따위가 국가 정책에 개입하는 순간, 또한 그것이 공식적으로 용인되어버리는 순간, 국가는 순식간에 실패자 집단으로 전락한다. 정책이 실패해도 실패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진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석하려 들기 때문이다. 왜 라이벌 국가에게 패배했는가? 전사로서의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니면 상대국이 지나치게 비열한 종자라서……. 이래서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계속 용기라느니 충성심이라느니 엉뚱한 것만 강조하게 된다. 감정은 백성을 선동할 때 전술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정책에 관련하여 관료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대사. 피를 흘리지 않고도 승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궁중백이 병법가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디 기발한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데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가 마물이라고 들었습니다.” “음? 예, 그런 면도 적잖게 있긴 있습니다만…….” 대사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수중에는 수많은 마물이 서식한다. 이들은 상인들에게 큰 위험이다. 그렇지만 마왕을 눈앞에 두고 ‘예, 장사하러 바다 돌아다니는 데 그 마물들이 제일 죽여버리고 싶은 방해물입니다’라고 솔직히 반응하기도 곤란하리라. “익히 아시다시피 우리는 마물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분명히, '특정 국가의 상선'만 골라서 공격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 대사의 몸짓이 일시정지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대사가 입을 열었다. “구, 궁중백. 그 말씀은.” “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열국과 교류하기를 열망합니다. 그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바다의 무법자로 설치고 있는 일부 마물을 통제하고자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마물을 통제하기란 어렵지요.” 내가 상대방의 빈 잔에 천천히 브랜디를 따랐다. “제국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물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판매할 것입니다. 마물들만 맡을 수 있는 향료를 뱃전에 바른다든지. 뭐, 방법은 여러 개 있습니다.” “…….” “이러한 정책을 시도해보는 일환으로서 먼저 특정한 국가에만 표식을 판매할 생각입니다.” 대사가 술잔을 들어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는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즉, 저희 연맹에 가입된 상선이 우선적으로 표식을 사용하도록……배려해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군요. 제국에서 배려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위험천만한 시범에 귀국이 기꺼이 동참해주는 것이지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대사. 이 시범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대륙에는 수많은 자유도시가 있습니다. 대체로 상업과 해운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고 있지요. 만약 이들이 '칼마르 연맹에 가입하면 항해 도중 기습받을 염려가 없다'라고 깨달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대사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다. 이건 단지 칼마르 연맹국의 상선들이 보호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유도시들이 바타비아나 사르데냐 대신에 칼마르를 주요 파트너로 삼는 데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무역 시장에서 다른 나라들은 가지지 못하는, 칼마르만의 빼어난 장점이 생기는 것이다. “바타비아나 사르데냐가 귀국을 공식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귀국은 단지 제국의 시범적인 정책에 어울려줄 따름입니다. 그들은 귀국의 성공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겠지요.” 대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표식의 가격은 어느 정도로?” “비싸면 비쌀수록 좋습니다. 이것은 귀국을 위해서입니다, 대사.” 대사의 미간이 또 좁아졌다. “……송구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왜 비쌀수록 저희에게 좋습니까?” “값이 싼 경우에는 제국과 귀국이 밀약을 맺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습니다. 반면에 값이 약간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비싸다면 이런 평가가 뒤따르겠지요. 칼마르가 증명조차 되지 않은 표식을 믿고 쓸데없이 거금을 쏟아부었다. 모험을 감행했다…….” 칼마르는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사르데냐와 바타비아가 더더욱 칼마르를 비난하기 어려워진다. 공식적인 비난도 다툼도 없다. 오로지 이득만을 챙긴다. 칼마르는 싸우지 않고 그저 승리를 챙기면 그만이다. “대사. 아무리 비싸봤자 자유도시들을 거저 얻는 것에 비하면 무척 저렴합니다. 그리고 귀국에서는 저희에게 구입한 표식을 다시 되팔 수도 있겠지요. 매우 적절한 가격에 말입니다.” “되, 되팔기까지 허락해주시는 것입니까?” 대사가 결국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표정과 목소리가 잔뜩 달아올랐다.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아도 비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것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지요.” “이, 이건 소인이 결정할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시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너무 여유를 부리지는 말아주십시오, 대사.”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저희는 바타비아나 사르데냐에게도 똑같은 협상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칼마르 연맹국에서는 바로 다음날 오전에 답신을 보내왔다. 연맹국에서는 모종의 표식을 독점할 권리를 얻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전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앞으로 칼마르에게는 11년 동안 독점적인 구입권이 인정될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매우 고가의 물품을 팔아주는 대가로 또 한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 이 협상의 내막을 듣고 이바르가 감탄했다. “훌륭하옵니다. 물품을 사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 유리한 가격에 팔아주는 것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상대방이 애원하고 있습니다. 전하께 상재까지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좋은 스승을 두었거든.” 분홍빛 머리카락을 지닌 서큐버스라든가. 우리는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조용히 건배했다. ――스코어, 4:2. * * * 튜튼 왕국과 칼마르 연맹국이 제국을 지지한다. 비록 구체적인 조건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지가 선언되자 그 자체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불과 보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제국은 두 국가를 삶아서 먹어버렸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외교력이었다. 열국의 사절단은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의문에 빠졌다. ─ 도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밀었길래 이토록 빠른 지지가 이루어지는가? 제국에서 어떤 협상안을 제시할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공화국한테 불리하게 진행되던 외교전이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사절단들은 공화국과 진행하고 있던 물밑 협상을 한꺼번에 전부 정지했다. 제국에서 협상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공화국과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화국 사절단은 타국의 외교관을 만나러 뛰어다니면서 온갖 조건을 제시했지만, 대체로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상업으로 유명한 국가들은 제국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칼마르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맺는다!” “아나톨리아를 확실하게 짓누를 수 있게…….” “어떻게든 제국에게서 좋은 제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겨울에 때 아닌 외교전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칼소리 없는 전쟁에 불을 지핀 장본인은 단연 제국의 궁중백 단탈리안이었다. 외교전이 가열차게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점차 이 '마왕'에게 또 다른 별명을 붙여주었다. 겨울왕(Rex Hyemis) 단탈리안.   00318 겨울왕(Rex Hyemis) =========================================================================                        * * * 외교전에 돌입하고 보름째. 드디어 엘리자베트가 움직였다. “성녀들이 우리를 비난한다고?” “예, 단탈리안 전하. 바로 어제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바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포세이돈의 대신전과 아레스의 대신전. 양측에서 성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식적으로 비난했사옵니다. 제국은 인류의 본분을 망각한 채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라고.” “과연. 종교를 이용하는 것인가.” 나는 감탄했다. 엘리자베트가 대리로 파견한 외교관이 어째서인지 싱겁다 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부터 외교전으로 승부할 생각이 없었겠지. 종교라는 이름의 완전히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어 판 자체를 뒤엎었다. “…….” 눈치 채보니, 이바르가 요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음? 아. 수고했다. 하루 만에 정보를 채오다니 훌륭하다. 수고했다, 이바르.” “그게 아니오라……아니, 물론 그것도 있사옵니다만.” 내가 이바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이바르는 뺨이 살짝 붉어진 채로 우물쭈물거렸다. 귀여워라.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이바르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앗, 하고 이바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내 쪽으로 넘어졌다. 이바르를 품안에 안아서 마치 빗질하듯이 이바르의 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 틈새로 만져주었다. “저, 전하. 아직 대낮이온데…….”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겠지. 나에게 궁금한 것이라도 있느냐?” 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이바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아, 분명히 라우라한테도 이렇게 순진한 시절이 있었는데. 설마 시간이 흐르면 이바르도 라우라처럼 덤덤녀가 되는 것일까. “그것이……소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전하께서 화나시지 않아서……오히려 기뻐하시는 것 같아 의아스럽다고 생각했나이다.” “아아.” 맞았다. 이바르가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도리어 즐거웠다. 마치 상대방이 돌을 두자 마음이 놓이는 바둑 기사처럼. “엘리자베트 통령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다. 그렇게 여긴 까닭이다.” “……전하께서는 전부터 공화국 통령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그녀는 천재이다.” 원래대로 역사가 흘러갔다면 지금쯤 합스부르크의 차기 황제로서 입지를 굳혔을까. 그렇지만 이제 제국은 무너졌으며 엘리자베트는 공화국 통령이라는, 엉뚱한 직위에 올라 있다. 삶이란 공교하군. “…….” 이바르가 또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불안? 초조함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이바르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저에게는 전하께서 훨씬 대단하십니다.” 하고 이바르는 고개를 쓰윽 돌려서 딴 곳을 쳐다보았다. 방금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전력으로 도망치겠다는 듯이.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귀여워! 대체 이 귀여운 생물은 무엇인가. 마왕을 암살하기 위해 엘리자베트가 비밀리에 건조한 암살 전용 병기인가. 나는 진짜 히로인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경악했다. 거의 범죄에 가까운 귀여움이 이곳에 있었다. ‘크윽.’ 당장 이바르를 덮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덮쳤더니 나중에 라우라처럼 되었습니다, 라는 결말이 나와서야 절망밖에 없었다. 라우라와 사귈 때는 내가 너무 무심했다. 소녀의 꿈이라는 것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았다. 조금 더 연애하듯이 말랑말랑하고 포근포근하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아침에도 섹스, 점심 먹고도 섹스, 자기 전에도 섹스, 오로지 섹스였다. 이러니 라우라가 ‘남자는 죄다 짐승이고 그중에서도 주군은 답없이 발정난 수컷’이라며 매도했지. 꿈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바르의 하얀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에게도 이바르가 가장 아름답게 비춘다.” “……!” 이바르는 얼굴이 불에 달군 주전자마냥 빨갛게 변했다. 귀여워라. 먹고 싶어라. 하지만 참아야지. 카레를 먹을 때 고기를 마지막에 남겨두는 심정으로 오늘도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남겨두노라. “각국의 반응은 어떠한가.” “가, 갑작스러운 발표에 당황한 듯합니다. 사절단들은 본국에서 지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속셈입니다. 아직 성명이 발표된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절도 많습니다.” “우리쪽에서 알려주어야겠군.” 정보 하나를 알려주는 만큼 저쪽은 우리에게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빚을 만들어두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 불리한 정보입니다. 되도록 늦게 알리는 편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불리한 정보이기에 오히려 말해주어야 옳다. 불리한 정보인데도 솔직하게 공유하면 상대방은 우리를 더욱 신뢰하겠지.” 어차피 내일쯤이면 전부 알려질 사실. 차라리 화끈하게 고백함으로써 신뢰를 쌓는 편이 나았다. 상인인 이바르와 정치가인 나의 시각이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었다. “자, 그럼 열국의 대사들을 만나볼까. 성녀의 개입은 저들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일 터. 우리와 상담하고 싶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어라. 이바르가 또 묘한 시선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상태창을 불러오면 심리상태가 적나라하게 보이겠지만, 최근 들어 나는 이 심리상태에 기대는 것을 점점 줄이고 있었다. 상태창은 편리했다. 하지만 너무 편리한 나머지, 자칫 상대방을 관찰하는 데 게을러질 위험이 있었다. 정말로 중요한 대목이 아닌 이상에야 웬만하면 내 눈과 내 촉감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감지하고 싶었다. 이는 나의 정치적인 감에 녹이 슬지 않도록 의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바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선배가 거짓말하는 것이었군요.” “선배?” 전혀 짐작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데이지 선배 말입니다. 본디 전하께 상급자의 흉을 보는 것은 주제에 넘는 일이옵니다만, 이번만큼은 소인의 무례를 허락해주소서. 선배가 참람하게도 주장하기를, 전하께서 선배의 몸에 투명 슬라임을 삽입했다는 것이옵니다!” “…….” 데이지 이 앙큼한 년이? “게다가 그 슬라임의 신경이 친오라비가 사용하는 자위기구에 연결되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친오라비와 유사 근친 성교에 빠트리는 것이 전하께서 의도하시는 바라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소인에게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모함이로구나.” “실로 그렇사옵니다. 세상에 어느 변태가 그런 짓을 추구하겠나이까? 틀림없이 선배의 질 떨어지는 두뇌가 스스로 꾸며낸 망상이겠지요.” 이바르가 콧방귀를 뀌며 조소했다. “전하. 예전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 왜 선배 같은 인간을 양녀로 들이셨습니까? 태생이 천박하고 변태스러운 아해입니다.” “……전화에 휩싸여 마을을 잃은 데이지가 불쌍해서 말이다. 무심코.” 참고로 그 마을은 내가 손수 불태웠다. “전하께서는 선배에게 다소 무른 경향이 있습니다. 양녀라고 해서 방약무인한 성격을 언제까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어린 만큼 성에 대한 관념부터 제대로 교육하셔야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옳은 간언이다. 성교육은 중요하지.” 그 성교육을 제가 강요했습니다. 겁나게 양심이 찔린다……. 항상 이바르의 처녀스러움에 감동을 받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빛이 너무도 눈부셔서 차마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바르. 잠시 바깥에서 데이지를 불러오거라. 바로 교육에 들어가겠다.” “분부를 받드옵니다.” “아,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사절들에게 다녀올 수 있겠느냐? 너는 나의 시녀로 알려져 있으니 충분히 전령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바르가 맡겨달라고 대답하며 방에서 나갔다. 그날, 데이지의 고통 어린 신음이 내 방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 * * 사태는 악화되었다. 다음날이 되자 헤스티아의 성녀도 성명에 동참했다. 그들은 명확하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마왕군의 하수꾼으로 규정했으며, 제국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곧 대륙을 마족에게 넘기는 것이라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지금까지 성명에 뛰어든 성녀는 세 명. 포세이돈, 아레스, 헤스티아의 성녀이다. 포세이돈은 사르데냐 왕국의 국교이고 아레스는 폴리투니아 왕국의 국교이다. 헤스티아는 모스크바 왕국의 국교. 사르데냐 왕국과 폴리투니아 왕국은 처음부터 엘리자베트를 지지했다. 즉, 모스크바의 헤스티아가 새롭게 합류함으로써 엘리자베트는 한 명의 아군을 더 얻었다. 그리하여 스코어는 4:3.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외교전이고 엘리자베트는 종교전인가.” 칼날이 오가지 않을 뿐이지 살벌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대륙에는 정교분리가 꽤 확실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성녀는 민중의 아이콘이다. 성녀가 앞장서서 뭔가를 비난하면 백성들도 거기에 따라서 목소리를 낸다. 신앙심 깊은 관료들도 거기에 끼어든다. 순식간에 정치적인 파급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내가 찾아간 곳은 약간 의외의 장소였다. “우리나라의 성녀와 만나고 싶으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브르타뉴 왕국의 대사. 이번 외교전이 가장 재미없을 국가의 사신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개인적으로 공화국 편을 들고 싶었지만, 국가의 안위가 걸렸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지지했다. 아마도 성녀들이 들고 일어선 것을 내심 기뻐하고 있겠지.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군요. 여왕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부디 서둘러주십시오.” 대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여왕과 나를 연결해주었다. 나는 밀실에 들어가서 브르타뉴의 마법수정구를 이용했다. 뿌연 장막이 펼쳐지면서 앙리에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한참 직무를 보고 있었는지 탁자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올려져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안녕하게 지내셨습니까, 전하.” “하루하루 그대를 저주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지.” 앙리에타가 입끝을 비틀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눈가에는 기미가 쌓여 있었다. “호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마왕이 나의 사랑스러운 왕국에 분열을 뿌려서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들이 말썽을 부리고 있지. 덕분에 아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어.” “그거 참 불경한 작자입니다.” 내가 웃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자세를 이쪽으로 돌리며 다리를 꼬았다. 군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은 앙리에타는 처음 보았다. 자주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화려함 대신에 간결함과 편안함에 중점을 두었는지 시원시원했다. 앙리에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궁중백으로 승작되었다고 했던가. 축하하네. 뭐, 자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감사합니다. 모두 전하 덕분입니다.” “……겉치레로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열받는걸. 그대가 지옥에 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앙리에타를 패배시킨 덕분에 승작했다. 그런 숨은 뜻을 알아채고 앙리에타가 말한 것이었다. 나는 또 웃었다. 재미있는 여왕 전하가 아니고 뭔가. “용건이 무엇이냐. 설마 본인을 놀리려고 아국의 대사를 협박한 것은 아니겠지.” “합스부르크의 통령이 성녀들을 추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낯빛을 진지하게 고쳤다. “정략과 정략의 싸움이라면 소인은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종교에 관련되어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인은 종교계와 인연이 적으니까요.” “쟝 볼레 사제께서 경천동지할 발언을 입에 담으시는군.” 앙리에타가 비웃었다. “그래서?” “귀국의 롱그위 성녀와 면담하고 싶습니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 아테네 여신의 성녀이자 브르타뉴 왕국의 수호자. 지난 전쟁에서 파리시오룸에 끝까지 남아서 저항하다가 우리군에 붙잡혔으며, 정전 협정의 대가로 브르타뉴에 돌려주었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단탈리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간의 배려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00319 겨울왕(Rex Hyemis) =========================================================================                        * * * ‘차분하군.’ 엘리자베트가 눈을 감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에는 어두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새까만 공간에서 오직 엘리자베트만이 의자에 앉았다. 그 앞에는, 상상 속의 체스판이 놓였다. 엘리자베트의 심상에서 체스판은 대륙을 의미했다.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금전을 상징했고, 때로는 성녀를 상징했으며, 때로는 열국의 군주를 상징했다. 검은색 체스말의 왕은 엘리자베트 본인을 가리켰다. 한편, 하얀색 체스말의 왕은……당연하게도 단탈리안을 의미했다. 엘리자베트는 때때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이런 상상의 작업에 몰두하고는 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어졌다. ‘마음이 이렇게 편안한 것은 오랜만이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 그 시절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륙을 체스판으로 삼아 종횡무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시간에 한여름의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비록 무덥고 혹독한 증기가 삶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그것은 태양을 품에 안은 자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운명에 불과했다. ‘정말로 오랜만이야.’ 그때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패기 넘치는 흥분이 사라지고 오로지 차분한 고요만이 배경처럼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일까. ‘악몽도 없다.’ 엘리자베트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심상의 풍경에서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덮혀 있었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저편에도 의자가 놓였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사람은 주위보다 더 짙은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간신히 몸의 윤곽만이 잡혔다. “───.” 시작했다. 어두워서 흐릿한 저편에서 오른팔만이 뚜렷하게 솟아났다. 손이 앙상하게 말라 살집이 적었다. 그 손이 말을 집었다. 툭, 하고 말이 전진하여 체스판에 놓였다. ‘돈으로 사절단을 매수하는가.’ 엘리자베트가 무감정한 눈동자로 탁자를 노려보았다. ‘……대응하기가 껄끄럽다.’ 공화국에는 예산이 부족했다. 외교전에 써먹을 뇌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에게 응수하여 체스말을 움직였지만, 벌써 흑색의 군대가 백색의 군대에 밀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예전부터 그러했다. 단탈리안은 철저하게 적의 약점을 공격한다.’ 엘리자베트는 상대의 행적을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하여 분석했다. 검은 산맥 전투, 성전, 프랑크 내전, 백합 전쟁. 그렇기에 엘리자베트에게는 단탈리안의 어렴풋한 윤곽이나마 보였다. ‘반대로 말해서, 상대방의 약점이 무엇인지 모호하면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어두운 저편에서 또 다시 팔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말을 움직이자 이쪽의 병사가 잡혔다. 엘리자베트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빠르다.’ 외교전이 시작하고 보름도 안 되어 튜튼과 칼마르를 떨어트렸다. 지나치게 빨랐다. ‘검은 산맥의 산성을 함락하는 데 3일.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는 데 7일. 파리시오룸을 함락하는 데엔 불과 1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단탈리안이 선두에 설 때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가속했다. 단탈리안의 수하로 추정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여장군과 대조하면 이 특징은 더욱 확실해졌다.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11개월에 걸쳐서 함락되었다. 속전속결을 강력하게 선호하는 단탈리안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요새가 떨어지기 한참 전부터, 엘리자베트는 저것이 단탈리안의 작전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대는 마치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어.’ 엘리자베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어째서?’ 시간에 시달리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전쟁에서 강자는 안전을 중시하며 천천히 상대편을 압박한다. 전황이 유리하니 구태여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현재 상황에서 단탈리안은 명백히 강자에 속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급한지 정신없이 외교전을 펼쳤다. ‘어서 해결하지 않으면 곤란한 거로군. 제국. 혹은 마왕군에 잠재적인 위협이 있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번 겨울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폭발하고 말 잠재적 위협.’ 엘리자베트가 체스말을 쥐었다. ‘내 생각이 틀렸는가――마왕이여.’ 쿵, 하고 육중한 체스말이 판에 내려앉았다. 대륙의 성녀를 동원한다. 그것이 이번 한 수의 뜻이었다. 단탈리안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다면 이쪽이라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왕군에는 성녀에 대적할 만한 종교적 상징물이 전무했다. 회심의 일격이라 해도 좋겠지. “…….” 의외의 기습에 마비된 것일까. 흑색으로 뒤덮인 그림자는 말없이 체스판을 주시했다. 잠시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림자의 팔이 서서히 움직였다. 상대방이 내놓은 수에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브르타뉴의 롱그위 성녀.’ 상대는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역시나 예상하지 못한 반격으로 돌려주었다. 롱그위는 오히려 다른 성녀들을 비판했다. 신들께서는 인간과 마족을 가리지 않으시고, 항구적인 평화를 바란다면 신분과 성별, 종족을 초월하여 모두가 동등하게 신들의 봉사자라 주장했다. ‘훌륭하다.’ 성녀에는 성녀로 맞선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성녀들끼리 의견이 분열되는 것만으로 대륙의 백성은 동요하겠지. 어느 성녀가 옳은가.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보고 의심해볼 것이다. 이제 적어도 무조건 제국을 비난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용케도 앙리에타를 설득했군.’ 앙리에타는 귀족들 사이에서 점점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그것을 이용했으리라. ‘앙리에타의 지지도가 사라지는 만큼 그 대신에 롱그위 성녀가 민중의 지지를 받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인기를 얻은 롱그위 성녀가 다시금 앙리에타를 지지한다면, 결과적으로 앙리에타는 잃어버린 민심을 꽤나 회복한다…….’ 엘리자베트가 재빠르게 체스판을 훑었다. 어디인가. 어떤 방법으로 성녀에게 인기를 쥐어줄 계획인가. 어떻게 앙리에타를 설득한 것인가. ‘프랑크의 중앙정부와 남부 도시들.’ 엘리자베트의 시선이 체스판 한곳에 고정되었다. ‘두 세력 사이에 전화가 감돌고 있다. 이들을 중재할 협상자가 필요하다. 본래라면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중재를 시도할 터……. 그 역할을 롱그위 성녀에게 양보했군. 과연, 멋진 한수이다.’ 엘리자베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의 남부는 북부와 비교해서 왕당파적인 색채가 강하다. 브르타뉴에도 큰 적대감이 없지. 앙리에타가 직접 중재자로 나선다면 반항하겠지만, 성녀가 움직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성녀는 국가적인 증오심을 뛰어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면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판단을 완료했다. ‘지금 롱그위 성녀가 나선 것은 그런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만일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롱그위 성녀는 매우 그럴듯한 명성을 얻게 된다. 첫 번째, 롱그위 성녀는 인간과 마족 등 종족의 차별을 초월하여 평화를 주장했다. 두 번째, 롱그위 성녀는 브르타뉴와 프랑크라는 국경을 초월하여 평화를 이끌었다. 세 번째, 심지어 롱그위 성녀는 마왕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적이 있으며 또한 브르타뉴의 성녀이다. 그런데도 마왕군과 프랑크에 유리한 평화 정책을 두둔했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롱그위 성녀가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것처럼 비춘다. ‘진정한 성녀의 탄생인가.’ 그리고 성녀는 추락하기 일보 직전까지 떨어진 앙리에타를 곁에서 보좌한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를 설득하는 데 써먹은 각본이었다. ‘마왕이 성녀를 만들다니. 더욱이 그것이 진정한 성녀라 칭송받을 예정이라니! 단탈리안, 그것이 너의 수단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인류를 농락하고 조소할 속셈이냐!’ 엘리자베트가 저 너머에 앉은 검은색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단탈리안은 그야말로 인류를 모독하기 위하여 태어난 자였다. 월맹군에 맞서는 인류의 신성한 동맹을 부정했다. 위대한 왕권을 모욕했다. 이제 이 가증스러운 마왕은 인류의 신앙심마저 더럽히려고 했다. 엘리자베트가 체스말을 꾸욱 쥐었다. ‘이번에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롱그위 성녀를 추동한다. 그것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한수임을 엘리자베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생각했다. ‘약점을 보이고 말았구나, 마왕이여……!’ 단탈리안에게 쟝 볼레라는 가짜 이름과 가짜 사제직을 마련해준 곳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아르테미스 대신전이었다. 이 마왕은 바타비아와 모종의 밀월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도 바타비아가 함께했다. 즉, 바타비아와 그대는 보통 친밀한 게 아니다. 이번에도 브르타뉴를 움직이는 것보다 바타비아를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쉬웠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단탈리안은 구태여 브르타뉴를 이번 외교전의 파트너로 삼았다. 어째서인가.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단탈리안. 그대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이로써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이 외교전에서 왜 이토록 서두르는지 알아냈다. 제국 혹은 마왕군에 잠재적으로 다가오는 위협,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타비아 공화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외교전에서 바타비아는 제일 먼저 그대를 지지해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바타비아는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엘리자베트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얼마 전 공식적으로 서신을 보내왔다. 공화주의를 토론하는 회의를 개최할 테니 부디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엘리자베트는 이를 마왕군의 음흉한 계략이라 여겼다. 공화주의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인류의 왕당파와 공화파를 이간질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단탈리안이 대응한 한수가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이끌었다. ‘공화주의 회의는 인류를 분열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마왕군을 분열시킨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단탈리안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즉. ‘마왕군 내부에서 공화파와 반(反) 공화파가 세력 다툼을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엘리자베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정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대에게는 마왕군의 공화주의자들을 통제할 힘이 없다. 그대한테 대항하는 세력이 마왕군에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 어떠한가, 겨울의 왕이여.――이것이 그대의 약점인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저 새까맣게 어둡기만 하던 인영이 점점 밝아졌다. 손끝이 보이고, 살집이 없는 손목이 보이고, 팔뚝이 드러나더니, 이윽고 몸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거두어지고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 나타났다. 마왕 단탈리안. 엘리자베트의 날카로운 직감은 자신이 정답을 도출했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단탈리안을 추월하는 데 성공했다! ‘잡았다……!’ 상대방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알아낸 이상, 엘리자베트에겐 더 이상 망설임일랑 없어졌다. 외교전 따위는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적당히 상대해주겠다. 그리고 늦겨울에 열릴 공화주의 대표회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거기서 단탈리안을 무너트릴 실마리를 찾는다. 그렇게 엘리자베트가 기뻐하려는 찰나였다. “……?” 여전히 상대방한테서 새카만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얼굴이었다. 얼굴 부분만큼은 여전히 칠흑으로 뒤덮여서 상대방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어떤 눈초리로 체스판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만.’ 엘리자베트는 깨달았다. ‘단순히 대륙의 왕당파에게 우호적인 손길을 건네고 싶을 뿐이라면, 구태여 외교전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둘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제국에 사절단들을 초대한다. 그들을 융성하게 대접한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할 터. 단탈리안이 이렇게까지 완벽한 승리를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상황에 쫓기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당신은 분명히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을 텐데. ‘……!’ 문득, 엘리자베트는 등줄기에 전류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에 모든 상상의 작업이 무너졌다. 체스판이 사라졌다. 그림자도 증발했다. 엘리자베트가 허겁지겁 두 눈을 떴다. 이미 어두운 공간은 없어졌으며, 대신에 익숙한 집무실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용한 집무실. 그 한가운데서 엘리자베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을 약자로 여기고 있어?”   00320 겨울왕(Rex Hyemis) =========================================================================                        * * * “어제는 수고했습니다. 롱그위 성녀.” “친근하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주홍색 곱슬머리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는 매몰차게 대꾸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성녀는 어제부로 브르타뉴에서 이곳 황도에 파견되었다. 도시 광장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고상하게 대륙의 평화를 울부짖는 내용이었다. 호응이 제법 좋았다. 그럼에도 롱그위의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건너편 의자에 앉은 단탈리안 때문이었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반응이 열렬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백성이 평화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만큼 대륙의 상황이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의지를 대신해서 연설한 셈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대륙을 참혹하게 만든 범인인 주제에, 잘도…….” 무심코 비난을 쏟으려 하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눈앞에서 단탈리안이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대방을 비난하면 비난할수록 그런 인물과 협력하는 자신의 가치까지 떨어졌다. 이른바 누워서 침 뱉기라는 것이었다. 단탈리안이 웃는 이유도 거기 있겠지. 롱그위는 꼭 팔뚝에 거머리가 기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하아.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류와 마족의 미래를 상담한다, 그런 명목으로 단탈리안의 저택에 들렸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일 초라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요, 롱그위 성녀. 벌써 나가면 곤란합니다.” “저한테는 이곳을 나갈 권리조차 없나요?” “그게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저와 상담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알려져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제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십 분 만에 나간다고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습니까?” “…….” “상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렇게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자리가 불편하더라도 최소한 두 시간은 견뎌주시길.” 정말인가? 롱그위 성녀가 유심하게 단탈리안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는 불만스러웠지만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단탈리안으로부터 시선을 삐딱하게 돌렸다. “홍차라도 마시겠습니까? 포도주도 있습니다.” “…….” “곤란하군요.” 단탈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를 싫어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우리는 앞으로 보조를 맞춰나가야 하는 협력자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의지 자체가 없으면 협력도 뭣도 불가능합니다.” 단탈리안이 파이프 담배를 꺼내들며 말했다. 어린애를 다루는 사람마냥 이쪽을 깔보는 낌새가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롱그위 성녀가 발끈해서 반론했다. “저한테 친근한 척 말 걸지 말아달라는 말씀이에요. 사업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당신과 제가 친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지극히 비효율적입니다.” 후우, 하고 단탈리안이 연초를 깊이 피웠다. “가벼운 안부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관계에서 사업이 이루어진들 얼마나 잘 이루어질지 의문이군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되레 깜짝 놀랄 일입니다. 혹시 이것이 브르타뉴인이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까?” “…….” “자클린 롱그위 성녀. 저는 지금 합스부르크 제국을 대표하는 궁중백으로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개밥그릇에나 처넣으십시오.” 롱그위 성녀가 단탈리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제가 이끄는 병사들을 모조리 사형시켰어요. 항복한 병사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지요!” “그래서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저라는 말씀입니까. 재미있군요.” 단탈리안이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롱그위 성녀, 제가 그대의 병사들을 죽게 내버려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공범자입니다.” 롱그위 성녀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지만 단탈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파리시오룸을 수비하는 병력은 명백히 노병(老兵)과 비숙련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대로 농성전에 임했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했겠지요. 브르타뉴군은 왜 파리시오룸에 형편없이 질이 떨어지는 병력만 남겼습니까?” “그것은…….” “누가 봐도 버림패였습니다.” 대답할 틈을 허락하지 않고 단탈리안이 단언했다. “여왕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는 데 소모되는 고기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설마 몰랐다고 발뺌하지 마십시오, 자클린 롱그위. 병사들은 여왕의 명령에 의해 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명령에 동의했지요…….” “…….” “당신과 여왕은 브르타뉴군 사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문서에 공동으로 서명한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롱그위가 대답하지 못했다. 저택의 응접실에 조소하는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내려앉았다.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렸으면서 정작 책임은 다른 사람한테 지운다라. 신경줄도 굵군요. 부러운 팔자입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성녀라니요. 무언가 서류가 잘못된 것이 아닐련지.” “다, 당신이란 마왕은……!” 성녀는 어깨가 분노로 떨렸다. 단탈리안의 입끝이 올라갔다. “저희 제국이었다면 절대로 성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은 신전은커녕 창녀촌에나 어울릴 법한 여자입니다.” 찰싹, 하고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성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단탈리안의 오른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성녀는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쯤은, 제가 쓰레기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저를 비웃을 자격이 없어요――당신만큼은!” “…….” “절대로, 세상에 살아가는 그 누구도 당신에게 비웃음 따위를 당할 정도로 악하지 않아!” 단탈리안이 조용히 성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단탈리안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옳은 지적이군요.” 지나치게 깔끔한 인정이었다. 한치의 주저도 없는 긍정에 당황한 쪽은 도리어 성녀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단지 눈썹을 찡그리는 성녀에게, 단탈리안이 지긋하게,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순전히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저를 무시하고 비웃을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 “뭐. 하긴 인간은 복잡한 생물입니다. 감정이란 혼란스럽고 오묘하여 이성으로 미처 다스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겠지요.”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업 얘기로 화제를 바꿀까요. 한 달 뒤, 바타비아에서 행사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당신과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아무렇지도 않나요?” 롱그위 성녀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는 짓이 모두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리 태평할 수가…….” “자클린 롱그위 성녀.”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십시오. 그건 당신이 발을 들여도 될 영역이 아닙니다.” * * * 겨울의 외교전은 철저하게 제국의 승리로 종식하였다. 성녀들이 분열되어 서로가 소리높여 자기 주장을 하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서 열국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대륙의 열두 국가 중에서 여덟 나라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네 나라가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지지했다. 압승이라 해도 무방했다. 짧지만 강력했던 외교전이 한 달 만에 끝나자, 거의 곧바로 바타비아에서 공화주의 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바타비아의 수도 암스텔로 향했다. 공화국 총독관저. 이곳에는 인간들에게 숨겨진 정원이 있었다.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파이몬이 하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겠지. 파이몬은 그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파이몬.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파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열국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설령 이제 와서 공화주의를 울부짖어도, 열국은 마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고 제국과 협조하려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봉기해본들 평원파의 제국은 고립되지 않습니다.” “…….”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가. 이미 결심이 굳어졌는가……. 나는 잠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는 제국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합니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싸우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습니다. 미리 경고하겠습니다. 파이몬, 당신의 뜻대로 일이 흘러갈 거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걸로 끝이겠지. 내가 등을 돌려 심처의 정원에서 나가려는 순간, 파이몬이 말했다. “단탈리안. 회의에는 합스부르크 공화국도 참여합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습니까. 공화국의 애송이 사신들이 저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당신이 옛날부터 천재라고 평가하던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내 발길이 멈추었다. “설마……?”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그녀는 이번 회의에 공화국 대표로서 참여하겠노라고 통보했사와요. 비록 이틀뿐이지만.” 몸이 경직되었다. “말도 안 됩니다. 어째서 일국의 군주가……파이몬. 이번 대표회의의 의미를 통령에게 알려준 것입니까!”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제외하고요.” 나는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서 파이몬의 심리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엘리자베트 스스로 대표회의의 내막을 알아낸 것인가. 말도 안 된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평원파도 이번 회의를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열려면 열든가, 하는 분위기이다. 엘리자베트에게 비밀을 누설할 자 따위는 없다……. 이쪽에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있음을 간파했다? 설마. 내분 따위는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발생한 적조차 없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허울 좋은 울타리 아래 모두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런가. 합스부르크 제국이 아니라 바타비아 공화국이 문제였는가. 바타비아 공화국은 최종적으로 제국을 지지했으나 아주 약간 타이밍이 늦었다. 그 직전에 나는 바타비아의 성녀가 아니라 브르타뉴의 성녀를 이용했다. 그것을 분열의 조짐으로 알아챘는가……. 온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단지 한 발자국 엇박자가 있었을 뿐이다. 정말로 별 것 아닌, 세상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엇박자였다. 그 한 순간의 틈을 엘리자베트는 간파하고 말았다. 아니, 그녀이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저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두렵고 무서운 인물이지만 방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건강하기를.” 나는 파이몬에게 인사를 건네고 총독관저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이 도시는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겠지. 일국의 군주가 참석하는 이상,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할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제 발로 찾아온 만큼 기회를 노려 암살하고 싶다마는, 안타깝게도 지금 바타비아는 내게 별로 협조적이지 않다. 암살은 일단 어렵다고 판단해야 옳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와 나는 대면하게 되겠지. 브루노 평원에서 벌인 연설전과는 다르다. 그때 이쪽은 엘리자베트를 알고 있었으나, 엘리자베트는 나를 몰랐다. 지금은 우리 모두 서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00321 겨울왕(Rex Hyemis) =========================================================================                        * * * 각국에서 내로라 하는 위인이 속속들이 도시에 도착했다. 지난 사 년, 대륙에서는 부유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공화주의 봉기가 일어났다. 그 결과 스무 개에 가까운 자유도시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새로이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유도시들, 또한 기존에 공화주의 노선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도시들, 혹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 사상에 호감을 품고 있는 영주의 영지――모두 다하여 일흔 곳에서 대사를 파견했다. 대사가 달랑 한 명만 오는 경우는 없었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장하기 위해서 호화로운 사절단을 꾸려서 보냈다. 여기서 쓴웃음을 짓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소수이겠지. “이바르. 저들을 보아라.” 나는 임시로 빌린 저택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도시 정중앙에 세워진 저택이라 대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지금 길에서는 <북 프랑크 자유도시 동맹>의 사절단이 요란하게 음악을 울리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인민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겠다며 봉기한 자들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말하는 인민이란 부자밖에 없는 모양이구나.” “송구하오나, 전하. 군사력이 없는 자는 자치권을 얻을 수 없나이다.” 이바르는 시녀 차림으로 내 옆에 서 있었다. “도시의 군사력은 용병을 사들이고 유지할 자금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됩니다. 돈이 없는 도시의 자치권이란 어불성설이옵니다. 부자가 도시의 주축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가…….” 내가 파이프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결국 봉기에 성공한 곳은 부유한 도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바르. 정말로 자유가 필요한 이들은 빈민이 아니겠느냐?” “소인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나에게 충성을 바치지만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흡혈귀 소녀가 말했다. “아무 재산이 없는 빈민은 자신의 나라에 영구적이고 고정적인 이해 관계가 없나이다. 그런 자들에게 나라의 통치에 대한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실로 그대다운 의견이다.” 내가 작게 웃었다. 아마도 이바르의 주장은 현재 대다수의 공화주의자가 지닌 의견일 거다. 시민에게 투표권을 준다. 도시 의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도시에 공헌한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부자는 빈민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낸다. 그 세금으로 도시는 용병을 고용한다. 군대 덕택에 도시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다. 부자가 도시를 지키는 데 더욱 공헌하므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논리이다. 가난한 농민에게 투표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도시에 세금을 한푼도 납부하지 않는 노예임에야 논의할 건덕지조차 없다. “이바르. 어디선가 역겨운 썩은내가 풍긴다. 모순의 냄새이다. 나 혼자만 저 행렬에서 구취와 악취를 맡는 것이더냐?” 내가 조소를 머금었다. “한끼의 식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굶주린 자이다. 이미 배부른 자에게 음식은 필요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가 절실한 사람은 노예이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소위 인민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작 노예에겐 자유를 줄 필요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구나.” “…….” 이바르가 턱끝을 숙이고 잠시 고민했다. “하오나 전하. 도시에 아무것도 공헌하지도 않은 자. 아니, 공헌하는 바가 현저하게 적은 자에게 똑같이 자유가 주어진다면 도리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공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에게 1000의 재산이 있고 빈민에게 10의 재산이 있다고 해보자. 도시에 위험이 들이닥쳤을 때 부자는 기꺼이 10의 특별 세금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빈민은 설령 나라가 멸망할 위험에 놓였을지라도 10의 세금을 내놓지는 못한다. 겨우 1의 세금을 원조할 따름이다. “……그러나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천으로 불리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내 비유를 듣고 이바르가 반박했다. “반면에 빈민은 더 노력할 수 있었음에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사지가 멀쩡하지 않거나 노력하고 싶어도 노력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구호소에서 도와주어야 마땅하겠지요.” 어릴 적에 일가친척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혼자만의 힘으로 마계 최대의 상단을 만들어냈다. 그런 이바르 로드브로크이기에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이외에 빈민의 빈곤함은 거의 전적으로 나태함에서 비롯합니다.” 아아. 여기다. 이 부분에서 이바르는 결정적으로 라우라와 다르다. 그렇기에 라우라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와 이바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약간 씁쓸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바르. 만일 그대의 인생이 고작 오십 년으로 끝날 운명이었다면 결코 쿤쿠스카 상회를 만들지 못했겠지. 안 그런가?” “예.” “그대는 흡혈귀로 태어났기에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구나. 그대는 스스로 원해서 흡혈귀로 태어났는가?” 이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닙니다.” “다시 묻건대, 부자는 스스로 원해서 부자로 태어났으며, 노예는 스스로 원해서 노예로 태어났느냐?” “……역시 아니옵니다.” 내가 후우, 하고 연초를 공중으로 흘려보냈다. 셀로판지처럼 창백한 겨울 하늘에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흩날렸다. “이바르. 혹시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내가 어디 원해서 단탈리안이 되었겠느냐. 누구는 스스로 원해서 나태한 사람이 되었으며, 누구는 스스로 원해서 성실한 성격이 되었는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세계에 떨어지고 마왕이 되었다. 그런 나이기에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의 삶이란 시작부터 세상에 내팽개쳐졌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거나 게으르게 태어나거나,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소인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의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이바르, 너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너의 자유로운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내가 조종했다. 내가 속였다. 나에 대한 네 연심에서 '자유'라고 불릴 만한 것은 전무하다. 자유롭다는 착각뿐이지. 그것을 나는 밝힐 생각이 없다. 아마도 영원히. “뭐,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치꾼이다. 조금 더 실질적인 문제를 논해볼까. 그대는 빈민이나 노예가 도시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다만, 사실 모든 시민한테 투표권을 정당하게 내리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바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간단하다. 전쟁이다.” 내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이 일어나서 하층민이 민병대로 활동한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목숨의 값어치는 가히 천금에 비할 만하지. 그러니, 전쟁을 마구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시민들은 평등해진다.” “마구 일으키다니…….” 이바르가 아연해졌는지 숨을 들이켰다. “진정한 공화주의가 대륙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야말로 대전쟁이 필요하겠지. 월맹군 전쟁으로도 한참 부족하다. 천 명 단위가 아니라 만 명, 십만 명이 간단하게 죽어나가는 전쟁이 필요하다.” “그건……재앙입니다. 아무도 그런 재앙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은 파이몬에게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파이몬은 기본적으로 월맹군 전쟁을 증오해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대전쟁을 일으키라니, 위선에도 정도가 있다며 분개하리라. 이바르가 경악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전하. 그것 때문에 월맹군 전쟁과 꼭두각시 전쟁을……?” “하하.” 내가 웃었다. “한번 말해보았을 뿐이다. 누군가가 평등을 울부짖는다면 다만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 자기 모순이니 말이다.” “…….” “아무도 그런 짓은 벌이지 않겠지.”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이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아, 길거리에는 사절단 행렬을 지켜보려고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어리석구나. 저리 화려하게 행렬을 꾸미는 것은 역효과이다. 도시의 위세를 과시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감명을 전해줄 수는 없다. 만약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 중에 진정으로 뛰어난 자가 있다면 도리어 조촐한 행렬을 보여줄 것이다.” 그걸로 우리 둘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각 세력의 대표단은 보름에 걸쳐서 차례대로 도시에 입성했다. 대표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 여태까지 들어온 사절단과 다르게 무척이나 빈곤한 행렬을 이룬 세력이 하나 있었다. 보통 사절단은 작게는 오십 명, 많게는 이백 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세력은 겨우 열 명 남짓한 인원밖에 동원하지 않았다. 행색에도 사치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 약간 형편이 좋은 농부가 잘 차려입은 정도, 딱 그 수준에 불과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붉은색 바탕에 하얀 독수리.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국기였다. 그 맨앞에는 은발의 여인이 군복을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얼마나 빈곤하면 저런 행렬을 가지느냐고 비웃었다. 큰 목소리로 조롱하는 시민도 있었다. 그러나 행렬을 선도하는 여인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길거리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공화국 만세!”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그것이 봇물을 터트렸다. 시민들은 환호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엘리자베트가 총독관저에 들어갈 때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방금 벌어진 행렬에 대해 논했다. “…….” 나는 테라스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화국 만세라는 표현은 기묘하게 적절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고, 바타비아 공화국을 뜻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시민들도 편하게 호응했겠지. 즉, 엘리자베트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바람잡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여자다.”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대표회의는 첫날에 평탄하게 흘러갔다. 서로 인사하는 자리라고 할까. 대륙의 실력자들이 무도회장에 모여서 웃고 떠들었다. 나는 롱그위 성녀를 파트너로 삼아서 함께 출석했다. 롱그위 성녀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신과 무도회에 나가다니…….” “브르타뉴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참아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롱그위가 이빨을 갈았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아, 팔라스 아테나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자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절망적인 어조로 여신한테 기도했다. 며칠 동안 저택에 함께 머물면서 깨달은 것인데, 얘도 딱히 사고방식이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우리가 무도회장에 등장하자 꽤나 반응이 격렬했다. 마왕과 성녀가 파트너로 나온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조합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자기 눈을 의심해볼 만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어찌된 일이냐고 넌지시 간접적으로 묻는 말에, 롱그위는 성녀답게 완벽한 미소를 연기하며 대답했다. “이번 행사는 인류와 마족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종족 간의 평화를 위해서 제가 단탈리안 궁중백께 함께해달라 부탁드렸어요. 궁중백께서 흔쾌히 받아주신 덕분에 과하게도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녀의 축복 받은 신심에 찬사를 쏟아부은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성녀와 함께 사람들을 상대하며 적당히 눈을 돌렸다. 당연하지만 엘리자베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무도회장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나를 끌어당기듯이 맞부닥친 눈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은발의 여인이 한손으로 유리잔을 들고 서 있었다.   00322 겨울왕(Rex Hyemis)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성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길을 옮겼다. 내가 발을 들어올린 순간, 단순히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은발의 귀공녀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발자국을 내딛고는 곧바로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 집중되었다. 보통 그럴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질 텐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능숙한 배우가 관객의 시선을 인식하면서 또한 동시에 자신의 배역에 확신을 갖고 몰두하여, 정확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순간, 나는 생에 더없는 확신을 가슴으로 느꼈다. 과장이 아니었다. 일찍이 나의 발걸음이 이토록 명확한 방향을 가진 적이 있던가. 길거리에 오가는 무수한 걸음걸이, 그것들이 가지는 얼핏 확실해보이지만 실상 흐릿하기 그지없고 단지 혼란스럽기만 할 뿐인 방향성――그런 애매모호함이 나에게는 완전하게 부재했다. 자아, 스스로 물어보자. 도대체 지금의 내가 바로 저곳에 가지 않고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을 저주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마치 이 하나하나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하여, 그저 그걸 위하여 세계에 내팽개쳐졌다고 해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끝을 들어 저 인도의 성벽을 가리켰을 때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처럼, 나의 발걸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필연이었다. 나 역시 어떤 필연성이 나를 이끌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에게 이 세계의 사람이라는 거주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샛푸른 눈동자를 보았을 때, 나는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보 없이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 마주섰다. 아마도 나는 최고의 미소를 짓고 있겠지. “단탈리안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다.” 서로가 그 이상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이미 암묵적인 동의가 체결되어 있었다. 마왕, 궁중백, 통령, 최후의 황족. 우리를 수식하는 어떠한 단어도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의 협정이었다. 당신은 엘리자베트이고 나는 단탈리안이다. 내가 당신이 엘리자베트임을 보증하며, 당신이 내가 단탈리안임을 보증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번의 확신으로 보증서를 믿기에는 너무나도 영악했다. 우리는 마치 맹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조심히 더듬는 것처럼 하나씩 질문을 주고받았다. “얼마 전에 편지로나마 뵈었습니다만. 제 연심이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얻으면 얻을수록 바라지 않게 된다.”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미녀와 천하의 공통점이겠지, 단탈리안.” “실로 옳으신 말씀.” 내가 웃었다. 역시 엘리자베트는 천하(天下)라 적어놓은 편지의 의미를 꿰뚫었다.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자, 세계 끝까지 뒤집어본들 엘리자베트 말고 없으리라. “그럼에도 그대와 나는 천하를 딛고 서 있다.” 이번에는 엘리자베트의 차례였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계속하여 이 땅에 서 있도록 강요하는가?” “하하.” 조금 우스웠다. 롱그위 성녀가 내 실체를 어렴풋하게 깨달았을 때 내던진 질문이 ‘왜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가’였다. 반면에 보아라. 엘리자베트는 ‘무엇이 그대가 삶을 유지하도록 강요하는가’라고 질문했다. 내용이 같으면서도 완전히 뉘앙스가 달랐다. “글쎄요. 여기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썩 적절하지 않군요…….” “음.” 엘리자베트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면서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엘리자베트와 나는 브루노 평원의 악연으로 유명했다. 불과 몇 주일 전에는 치열하게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 사이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엿듣고 싶겠지. “어떻습니까? 잠시 정원에서 바람이라도 쐬는 것은.”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무도회장 바깥에 조성되어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한동안 사교계가 시끄러울지 몰랐다. 연회장 근처의 정원은 종종 저속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파트너가 야외에서 성교한다든지. 물론 그 정도로 대담한 연인은 드물었고, 대부분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다가 가볍게 키스하는 수준이었다. 엘리자베트와 내가 스캔들에 휘말린다라. 정치적으로 어떻게 써먹을 건지와 상관없이 순전히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 않은가.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 “좋습니다.” 발길을 멈추고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걸이에 준비된 반(反)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행여나 도청이 이루어질 일은 없었다. “보다 명확한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엘리자베트.” “명확한 세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가 걸어온 길에 변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륙에서 스러져간 십만의 목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망령인가.” 엘리자베트가 한탄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군. 그대와 내가 학살자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학살자이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죽여온 생명의 값어치만큼이나 이상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도 당신과 저는 출발점이 다른 것이겠지요.” “출발점이 다르다?” “당신은 남동생을 죽일 때 명확한 대의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즉, 대의가 살인보다 앞섰다. “당신은 정적을 죽여나가면 죽여나갈수록 자신의 대의를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여태까지 죽여온 생명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천명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의 목숨과 안녕을 위하여 죽이고 또 죽였을 뿐입니다. 제가 대의를 주장해봤자 위선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명확한 세계를 위해서다. 살인을 저지른 자가 갑자기 세계평화를 주장한다고 해보자. 심지어 실제로 세계평화를 이루어낸다고 해보자. 이제 살인 당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사실은 살인자도 착한 사람이었다, 라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살인자에게 복수해도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살인자에게 변명거리가 생겨버린다…….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살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을 들고 있지만 다만 휘두르기 위해서일 뿐이지요. 저는 그 칼들에 확고부동한 방향성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대가 악행을 그만둘 일은 영원히 없겠군.” “물론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영원히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엘리자베트.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의 문제이지요.”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엘리자베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명의 장난이다. 무엇이 먼저 벌어지고 무엇이 나중에 벌어지는가. 단순한 순번의 문제이지만, 그것이 모든 걸 결정해버리는구나…….” 그녀가 고개를 내려서 날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확실하게 알았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무하다.”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그대를 죽인다. 그대가 등에 짊어진 십만의 목숨, 그대의 목숨과 더불어서――본인이 대신 짊어지도록 하지.” 엘리자베트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훌륭하다. 우직하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그녀에게 죽는다면 나는 아무런 후회를 남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가 입끝을 들어올려 소리없이 환희했다. 엘리자베트는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가리켰다. “그 첫 번째로, 먼저 이번 대표회의를 성사시키겠다.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인류와 마족을 가리지 않고 공화파가 집결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마왕군에 공화파가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을 터.” “멋진 추리입니다.” 나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이쪽이 결집하면 정반대로 마왕군이 분열한다. 단탈리안, 스스로 약하다고 믿는 자네에게 있어 분열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겠지.” “그 또한 맞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군요.” “흑사병은 그대에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였을지 모르겠으나, 전염병이 진정된 지금은 도리어 우리에게 최고의 기회이다. 농민의 숫자가 급감했다. 그만큼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지하는 토지의 크기는 늘어났지.” 그렇다. 예전에는 열 사람이서 경작하던 토지를 지금은 여섯 명이서 경작해야 한다. “농민들은 과거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몸값이 뛰고 있다. 용병의 몸값도, 기술자의 몸값도 서서히 오르고 있지. 그것은 농민이 기존의 권력계층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공화주의가 꽃 피우기에 더없이 적절한 시대. “제국과 왕국은 농민보다 귀족의 편을 들 것이다. 대대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자유도시들이 생겨난 것은 충돌의 서곡에 불과하다. 단탈리안, 공화주의는 역사적인 흐름이다.” “만에 하나 농민들이 봉기에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폭발을 최대한 늦출 것입니다.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이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50년은 걸리겠군요.” “본인은 2년 안에 폭발시킬 것이다.” 50년과 2년인가. 너무나 간극이 커다란 시간에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쾌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한 적의만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이미 늦었습니다.” “……?”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무도회장 쪽에서 들려왔다. 정원의 수풀이 일제히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란 폭음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반사적으로 무도회장 방향을 쳐다본 다음, 곧바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단탈리안!” “이번 암살은 인류와 마족이 통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극렬분자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아넘기면서 내가 차분하게 얘기했다. “이제 이 사건은 공화주의 대표회의로 기억되지 않겠지요. 이기적인 종족감에 휩싸여서 대륙의 평화를 깨부순 비극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마족과 인류의 평화를 더욱 강조할 것입니다…….” “본인과 진심을 교류하기 위해 정원에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는가!” 엘리자베트가 소리쳤다. “그대와 한 순간이나마 통했다고 확신했거늘……!” “저는 물론 당신과 진심을 나누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내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세상에 진심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저의 진심이든, 당신의 진심이든.” “……!” 엘리자베트의 눈초리가 한층 격렬해졌다. 나는 왜인지 더 즐거워졌다.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망령이라고 말했습니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 저는 망령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는 한 명의 마왕입니다.” 무도회장 쪽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몇 명이 죽었을까. 한 명도 죽지 않는 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였지만, 대여섯 명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파이몬의 실력을 믿어볼까……. “명심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죽어드릴 생각이 딱히 없습니다.”   00323 겨울왕(Rex Hyemis) =========================================================================                        “크읏!” 엘리자베트가 나를 추월해서 뛰어갔다. 부상자를 도우려는 속셈이겠지. 테러가 일어난 상황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고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점이 과연 대단했다. 은발이 멀어지는 광경을 나는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어서 정원으로 향하라, 하고 그녀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러를 사용하여 성량을 확대한 것이리라.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 * * 엘리자베트가 서둘러 무도회장에 뛰어들었다. 폭발의 여파 때문일까, 건물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먼지가 잔뜩 피워올라 시야가 어두웠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어서 정원으로 빠져나가라!” 엘리자베트가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재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2차 피해였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출입구가 막혀버리거나 추가적인 테러가 일어나거나. 무엇보다도 시야가 어둡다는 것이 좋지 않았다. 인간은 시각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동물이었다. 지금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시야마저 좁다면 사람은 간단하게 집단 패닉에 빠졌다. 그걸 막아야 했다. “곁에 중상자가 있다면 경비병을 불러라! 경비병, 구조 요청에 호응하여 움직여라!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하도록.” 경비병들이 아직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멍하게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트는 의도적으로 분노에 찬 표정을 연출하며 버럭 소리 질렀다. “형편없는 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군인인가!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아, 알겠습니다!” 엘리자베트가 제일 근처에 있던 경비병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그녀는 여린 외견과 달리 제2급 무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우락부락한 경비병이 간단하게 바닥에 넘어졌다. “천치놈들, 대답만 하면 뭐하는가! 움직여라! 도움을 요청하는 부상자들을 정원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 먼지 구름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간신히 일어섰다. 충격에 비해 피해는 생각보다 적은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대표회의 따위 무산되었겠지……. “상처가 없는 분은 경비병을 도와주시오!” 엘리자베트가 내심 안도하며 구조 작업을 지휘했다. 혼란이 사라지고 엘리자베트를 꼭대기로 한 임시적인 조직이 생겨났다. 그녀가 대륙의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는 사실이 통솔에 한몫 거들었다. 은발의 통령은 바타비아어와 프랑크어, 고대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장악했다. 시야가 어두워도 사람들의 두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언어가 이해되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사상자는?” “예.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중상이 세 명. 경상이 열한 명입니다.” 무도회장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가 대답했다. 기사는 얼굴이 확연하게 창백했다. 이토록 중요한 자리의 경비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출세 경쟁에서 완벽하게 실패했거니와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그거 불행 중 다행이로군.” 건물 잔해에 깔려서 사망자가 발견되지 않은 것일지 몰랐다. 그렇지만 일단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희망을 주었다. 어쩌면 사망자는 기껏해야 한두 명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경비대장, 어쩌다 테러가 발생했는지 파악하고 있는가? 범인은?”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송구하오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사가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려는 것이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크 만세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프랑크 만세라니…….” 프랑크를 위하는 자가 이곳에서 테러를 일으킬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엘리자베트는 이것이 단탈리안이 짜낸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곧바로 하나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롱그위 성녀는. 브르타뉴의 성녀는 어디에 있는가.” “예?”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는 답답했다. “프랑크를 위한다는 범행자가 가장 증오할 만한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브르타뉴의 상징이자 여왕의 충실한 조언자인 성녀이다. 이번 범행은 성녀를 노리고 일어났다.” 그제야 기사는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정원에 달려가서 성녀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큰소리로 물어라. 한시가 급하다.”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엘리자베트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당했다. 단탈리안은 성녀를 희생시킬 작정이었다. 성녀는 인류와 마족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하려고 이곳에 참석했다. 그런 와중에 암살에 직면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이름이 붙은 자리에서……. 두 종족의 합종연횡은 무산으로 돌아가겠지. 성녀의 죽음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격렬하게 싸울 것이 분명했다. 범인이 프랑크인이라는 부분이 특히나 악질적이었다. 프랑크 제국의 압도적인 우세로 종결된 조약이 대체 어떻게 변해버릴지. “각하.” 기사가 허겁지겁 다녀왔다.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 기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송구하오나…….” “성녀를 찾지 못했는가.” “예. 다수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성녀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켰다고……남자의 정체는 피에르 드 라비에르 남작. 프랑크인이 맞습니다.” 엘리자베트가 기억을 재빠르게 되짚었다. 라비에르 남작령. 틀림없이 프랑크 중부에 위치한 소영지였다. 제법 명망이 높은 궁중 마법사였지만, 앙리에타 여왕이 권력을 잡고난 이후 이런저런 죄목이 붙어 강제적으로 영지가 박탈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아는 사실은 거기까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불길함을 느꼈다. 라비에 르 남작은 성녀에게, 브르타뉴 왕국에 복수할 이유가 넘쳐났다. 단탈리안이 남작을 어떻게 유혹했을지, 엘리자베트는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경비대장. 우리는 이제부터 성녀를 찾아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프랑크의 정부에서 보내온 대표자가 있을 것이다. 그 자를 찾아서 우리한테 안내하라고, 자네의 부하에게 명령하도록.” 적어도 프랑크의 대표자가 자신보다 라비에르 남작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을 것이다. 범인의 동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겠지. 그렇게 기대하면서 엘리자베트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대에는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마법사들로 하여금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서 먼지 구름을 걷어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구(光球)를 대량으로 띄워서 더 뚜렷한 시야를 확보했다. “본인이 명령하지 않으면 주문조차 외우지 않을 작정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치료 마법사는 중상자를 담당! 경상자에게는 포션을 써라!” 엘리자베트가 성녀를 수색했다. 마침 부상자 중에 한 명이 성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녀는 무도회장 천장이 무너진 바로 그 아래에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무심코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본인을 도와라!” 그녀가 양손에 오러를 두르고 손수 건물 잔해를 치웠다. 경비대도 달려들었다. 마법사들은 덩치가 큰 잔해를 들어올려 조심스레 옮겼으며, 병사들은 잔해끼리 이루고 있는 균형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섬세하게 작업했다. 중간중간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머리가 부서졌거나 복부가 짓눌려 터졌다. 시체들은 한결같이 손바닥과 팔이 새까맣게 바싹 불태워져 있었다. 마력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막은 흔적이었다. 이곳이 폭발의 중심지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성녀님입니다!” 한 경비병이 소리쳤다. “성녀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정말인가!” 절망으로 물들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환해졌다. 그녀는 당장 달려갔다. 경비병 말이 옳았다. 대리석 돌덩이의 틈새로 주홍빛 머리를 지닌 여인이 보였다. “……윽……흐윽…….” 여인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는데, 괴로운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상이 심각했지만 틀림없이 아직 살아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병사들과 함께 서둘러 그녀를 잔해 속에서 구출했다. 몰골이 끔찍했다. 온몸이 먼지로 뒤덮였다. 폭발의 영향으로 성녀복이 불타버렸는지 행색이 엉망진창이었다. 복부와 허벅지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다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을까. “마법사!” 치료 마법사 세 명이 재빨리 성녀를 돌보았다. “시베르툼을.” “죄송합니다. 아까 전에 전부 썼습니다.” “어쩔 수 없지. 게르마세네이아로 대신한다.” 마법사들은 저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써가며 다급하게 치료를 행했다. 엘리자베트는 전투마법은 몰라도 치료마법에 관해서는 별다른 교양이 없었다. 그저 초조하게 지켜볼 따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간이 넘게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일 분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수석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여신들이시여!” 엘리자베트는 종교를 싫어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대륙에서 제일 열렬한 신도였다. “상처 자체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성녀복이 대부분의 피해를 막아준 듯합니다. 무도회인데도 성녀복을 입고 오신 것이 목숨을 살렸습니다. 마력 폭발은 거의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복부와 허벅지에 자상이 크게 나 있습니다.” “자상?” “아마도 범인은 먼저 단검을 찔렀을 겁니다. 암살용 마법이 걸린 단검이었겠지요. 복부에 한 번, 허벅지에 한 번 찌른 다음에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켰습니다. 악마적으로 능숙한 솜씨입니다.” 범인의 악랄한 수법이 경멸스러웠는지 마법사가 혀를 찼다. “단칼에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겠죠. 처음부터 과다출혈을 노렸습니다. 건물을 무너트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고……소인의 예상입니다만 칼날에는 독약도 발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성녀가 회복되면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금화 일백을 하사하마.” 마법사의 눈이 빛났다. “소인의 명예와 마력을 걸고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성녀는 들 것에 실려서 정원으로 옮겨졌다. 무도회장의 천장이 언제 또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는 경비대와 함께 마지막 부상자를 찾을 때까지 무도회장 안에 남았다. 그 사이에 천장 일부분이 무너져내려 크게 다칠 뻔했다. 경비대장이 먼저 탈출하라고 말했으나 엘리자베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민을 돕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이다. 눈앞에 벌어진 참사를 외면한다면 그 자는 지도자라 할 수 없다.” 바타비아의 병사들은 통령에게 크게 감격하여 구조 활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 시체 한 구를 수습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구조가 끝났다. 예순 명에 가까운 참석자 중에서 경상자가 스물일곱 명, 중상자가 열네 명, 사망자가 네 명이었다. 중상자의 태반은 신속한 조치 덕분에 생존했다. 성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맨 나중에 무도회장을 빠져나오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위대한 군주를 향해서 기립박수를 보내었다. 엘리자베트는 예기치 못한 테러에 직면해서도 그녀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것은 열국의 대표단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었고, 또한 성녀를 살림으로써 단탈리안의 계획을 적어도 반쯤은 무너트린 것이었다. “중상자와 사망자의 신원을 보고하라.” “예. 먼저 중상자부터 보고하겠습니다. 튜튼 왕국에서 온 하이젠부르크 남작, 카스티야 왕국에서 온 호델 자작…….” 기사가 어느새 썼는지 종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열세 명의 부상자가 불러지고 마지막 이름이 언급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온 단탈리안 궁중백.” 엘리자베트는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 중상자는 총 열네 명입니다.”   00324 겨울왕(Rex Hyemis) =========================================================================                        단탈리안이 중상을 입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자베트는 재빨리 좌중을 둘러보았다. 뒤늦게 도착한 신전 사제들이 부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행하고 있었으며, 상처가 가볍거나 없는 사람들은 일어서서 여전히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 나무에 기대어 앉은 남자가 한 명. 한눈에 봐도 상태가 심각했다. 복부에 핏물이 흥건했다. 평범한 사제의 치료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마왕이기에, 사제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단지 소수의 치료 마법사에게 일을 넘겼다. 남자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눈동자와 엘리자베트는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 단탈리안은 처음부터 이쪽을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박수 소리마저 한없이 느릿해졌다. 엘리자베트는 온몸의 신경이 정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가.’ ‘말씀하신 그대로.’ 그녀는 단탈리안의 대답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레짐작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나 검은색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빛났다. 그것이 말보다 더 확실한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당신과 내가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꽤 많습니다.’ ‘그중에서 본녀만이 사고 현장에 돌아왔고, 그대는 난데없이 중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누구라도 의심해볼 만한 대본이 완성되었군요.’ 사람들이 손뼉을 두들겼다. 짜악, 짜악, 하고 박수가 종소리처럼 둔중하게 울렸다. 단탈리안과 그녀를 제외하고 무엇이든 느려져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필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사고가 터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혹시라도 범인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아아. 조금이라도 빨리 현장에 합류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설령 의심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라도, 구조를 진두지휘한 본인을 대놓고 비난하기는 힘들다.’ ‘실로 당신은 훌륭하게 구조를 이끌었을 테지요.’ 그렇기에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보다 서둘러 현장에 도착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뒤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의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누구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황급히 달려와서 사람들을 도왔는데, 왜 당신은 늦장을 부리며 이제야 도착했는가. 혹시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성녀가 생존함으로써 단탈리안의 의도가 좌절되었다. 단탈리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구조에 참여함으로써 명분까지 얻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종료되었을 터였다. ‘나는 당신이 성공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단탈리안이 부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되지만 않았더라면. ‘성녀를 목표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나까지 당했습니다. 단순한 일개 암살범이 꾸밀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테러범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에게 의심이 집중된다.’ 단탈리안과 함께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그 자체로 이미 용의선상에 올랐다. 게다가 엘리자베트는 조금 지나치게 구조를 능숙하게 해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는데 오직 엘리자베트만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했다. 사람들은 자문하겠지. 그렇게까지 냉정한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에게는 범행 동기가 충분히 많습니다. 브루노 평원에서 개인적으로 진 원한이 있지요. 무엇보다, 바로 얼마 전에 당신은 성녀와 저한테 외교전에서 참패했습니다.’ ‘외교전의 보복으로 두 사람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인가.’ 엘리자베트가 이빨을 갈았다. ‘동기가 지나치게 뻔하다. 본인이 범인이라기에는 수법이 어수룩하다.’ ‘하지만 의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엘리자베트가 흑막이라고 하기에는 일이 너무 어설프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의 의심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외교 무대에서 당신의 평판은 썩 좋지 않습니다. 아니, 합스부르크 황가 자체가 별로 신용을 얻지 못하는 혈통입니다. 여러 악질적인 소문이랑 얽혀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당신은 둘째 오라비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인격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외교적 평판이다. ‘친오라비를 죽인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의심은 두고두고 남아서 당신을 압박할 것입니다.’ ‘…….’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엘리자베트에게 웃으면서 박수를 보냈고,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인파에 가려서 단탈리안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머리가 진정되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엘리자베트한테 의심이 향할 것이다. 그때 가서 엘리자베트에게 쏟아지는 것은 칭송과 호의가 아니라 의심과 경멸이리라. ‘그렇지만.’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엘리자베트가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장이 흘러나올 지경까지 자신의 배를 찌르다니.’ 엘리자베트가 떠나고 나서 단탈리안은 홀로 정원에 남겨졌다. 그곳에서 단탈리안은 칼을 빼어들어 스스로 자해했다. 한두 번 찔러서 생겨난 상처가 아니었다. 다섯 번이 넘도록, 열 번이 넘도록 저 남자는 자신의 배를 칼끝으로 쑤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는 가운데. 고통과 신음을 참으면서 묵묵하게 칼날을 찍었다. 그 광경을 상상하니 엘리자베트는 온몸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자해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런 짓이 가능한가. ‘아아. 정반대인가.’ 엘리자베트는 재차 깨달았다. ‘그런 짓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자인가.’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공화주의 대표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 * * 엘리자베트의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나친 고통에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왜인지 엘리자베트는 비교적 선명하게 비추었다. 신기한 일이로군. 아까웠구나, 엘리자베트. 너는 내 수법과 성격을 간파한 것 같다마는 아쉽게도 딱 한 발자국이 모잘랐다. 나는 너에게 정면승부를 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정면에서 앙리에타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너는 앙리에타보다 세 배는 무섭다. 도망치는 것이 득책이다. 그러니까 아예 판 자체를 뒤엎었다. 성녀가 죽을 뻔한 것이다. 회의는 이대로 무산된다. 행여나 일부 인간종과 마족이 공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집결하는 일은 없어졌다. 적어도 나중으로 미루어졌다……. 여기까지는 엘리자베트, 너도 알아차렸겠지. 그러나 내가 자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알겠는가? 약자란 단순히 도망치는 자가 아니다. 도망칠 곳이 남아 있다면 아직 지옥까지 떨어져본 사람이 아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낭떠러지 끄트머리라고 생각하는 자. 낭떠러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그것이 약자이다……. 아무런 희생 없이 너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팔 한짝이나 다리 한짝쯤은 가볍게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배때기 몇 번 쑤시는 것으로 때울 수 있다면야 오히려 횡재에 가깝다. 이걸로 자해하는 것은 두번째인가. 가미긴을 위협할 때는 마취용 연초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도처에 깔렸다. 마취제를 쓰면 그들이 알아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째서 습격을 받은 자가 마취되어 있는지 의심을 받겠지. 아무런 마취 없이 내 배를 스스로 찔러야만 했다……. 처음에는 이바르의 인형을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엘리자베트를 상대하는 동안 인형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폭발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엘리자베트 혼자 무도회장을 떠난 셈이 된다. 혐의가 보다 짙어진다. 문제는 무도회장의 경비가 생각보다 엄하다는 것이었다. 파이몬은 이번 회의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이중삼중으로 기사와 마법사가 대기하는 바람에 도저히 인형을 몰래 침투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자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옥과 같은 짓거리였다. 내게 마왕의 재생력이 없었다면 진즉에 죽었겠지. 솔직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조금 더 사람이 모여야 한다……제기랄, 눈이 점점 침침해졌다. 더 이상 엘리자베트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극심하니 도리어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군. “궁중백 각하! 괜찮으십니까!” 드디어 왔는가.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아득하게나마 느껴졌다. 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권자 중에 한 명이었다. 응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난리를 부려야 마땅했다. “마법사, 각하의 용태는 어떠한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상처에 독이 배었습니다. 각하께서는 재생력이 높으십니다만, 독이 그걸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침중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아연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독이라니.” “악랄한 수법을.” 건물이 무너질 정도의 파괴에 연이어서 암살까지 곁들었다. 원투 펀치라도 맞은 기분이리라. “철저하게 재생력을 방해하는 독입니다. 인간에게는 별다른 쓸모가 없겠지요. 암살자는 처음부터 궁중백 각하를 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큰일입니다. 성녀께서도 상태가 위중하시다 들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 소란을 피우는군. 걱정하지 마라. 딱 죽기 직전까지만 가도록 독을 조절했다. 내가 아니라 제레미가 수고한 것이지만……아마도 안 죽을 거다. “두 분은 인류와 마족을 잇는 가교나 마찬가지이다. 두 종족이 모두 폭주해버릴 수도 있어……마법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마법사도 안 되었다. 하필이면 내 치료를 전담하게 되었으니까. 인간과 마족은 치료법이 상당히 달랐다. 마법사는 지금 익숙하지도 않은 마왕의 치료를 맡게 되어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내가 죽으면 실제로 사형될 것이다, 이 노인네. 적당히 사람이 모였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연기할 순간이다. “끄으……으…….”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각하!” 크게 소리치지 마라! 머리가 울리지 않는가! 환자를 상대할 때는 조용히 하라는 것도 배우지 못했는가. 세상에는 멍청이가 너무 많다. 그 멍청이를 지금은 써먹어야 할 때라는 것이 문제로군. 내가 입을 열었다. “……님은.” 고통이 아득하게 느껴질 따름이지 상태가 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입술과 혓바닥에 집중했다. 마치 지금까지 자동으로 움직이던 신체를 수동으로 일일히 작동시키는 느낌이었다. “성녀……성녀님은……?” “……! 성녀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상처를 입으셨지만 문제 없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다급하게 대답해주었다. 조금 덜떨어지는 발언이었다. 문제가 없다니. 성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문제였다.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과장해서 말하려다 실수한 것이겠지. 바보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가……다행이군…….” 여기까지다. 나는 온힘을 다해 유지하던 정신을 그만 놓아주었다. 의식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허세를 부리면서 고통을 참아보았지만 그것도 힘들어졌다. 그걸 주변에서는 달리 착각했는지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다. “가, 각하!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누가 범인입니까! 범인을 말씀해주십시오!” “단탈리안 전하!” 멍청이들.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얌전히 내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성녀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증언하면 된다……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내 무죄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행여라도 잊지 마라……. 그리고 나는 의식이 어두워졌다. 정말이지, 마왕도 못해먹을 직업이다.   00325 겨울왕(Rex Hyemis) =========================================================================                        * * * 잠에서 깨어났다가 도로 잠드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내 의식은 바다에 떠다니는 코르크 와인 병마개 같았다. 파도에 뒤덮이면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고 또 뜬금없이 떠올랐다. 파도와 파도 사이, 약간이지만 평온한 의식의 수면이 펼쳐졌을 때, 갈매기 울음소리처럼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의 용태는…….” “마법사와 사제가 한 말에 따르면……필요…….” 이건 라우라와 이바르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마법을 써서 암스텔까지 왔겠지. 라우라에게는 계획을 미리 말해두었다. 구태여 올 필요가 없을 텐데도 이렇게 방문한 까닭은, 내가 정말 위급하다고 주변에 광고하려는 것이었다. 측근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병을 간호한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줄 필요가 있었다. 라우라는 저번 전역에서 일약 전설로 떠올랐다. 지금이 한창 이목이 집중될 시기였다. 광고 효과를 누리기에 때마침 적절했다. 라우라는 내 지시대로 잘 와주었다. “제레미 경이 보장했다마는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인가.” 라우라가 초조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다. 내가 안전할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치고 어투가 조금 지나치게 생생했다. “주군의 안색이 어둡지 않은가.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가장 위험한 대목은 넘어갔습니다. 군무상서, 진정해주시…….” “웃기지 마라! 지금 주군을 보고 소녀가 진정하겠는가!” 귀가 지잉 울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표정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꼭 얼굴가죽 자체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곤란하군. 나한테서 얼굴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말이지. 대륙과 마계의 아가씨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거 참, 나도 업보가 깊은 남자이다. ……멍청한 농담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상태가 최악은 아닌 듯했다. 뭐, 마취제를 과도하게 쓴 부작용이라던가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의식이 선명한 동시에 어렴풋했다. “소녀는 애초부터 이 웃기지도 않은 작전에 반대했다! 이바르. 분명히 자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했을 터!” “그렇습니다. 군무상서, 소인이 제레미 경에게 전달한 재료는 확실하게 안전을…….” “하. 주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이다. 일개 시녀에게는 이 상황조차 '문제'에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군.” 라우라가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맹세하지.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주군께 자그마한 불행이라도 닥친다면――소녀가 직접 두 손으로 자네와 자경단장, 시녀장을 죽음의 기사들에게 던져버릴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지옥을 보여주겠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에서 나는 조금이지만 놀랐다. 저런 라우라의 목소리는 웬만해서 듣기 어려웠다. 예전에……꽤 예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 있는데 언제였더라……. 안 되겠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이 두뇌가 아니라 두개골 껍질에서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라우라. 아무리 이바르가 직분상 하급자라고 해도 너무 막 대한다. 이바르가 저래봬도 심성이 여린데 배려를 해줘라. 라우라는 라피스를 제외하고 딱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우리군에 없어서 걱정된다. 바르바토스의 애인이라 그런지 다들 조금 꺼리는 분위기가 있지……. “거기까지 해두세요, 라우라.” “라피스 언니. 허나……!” “이바르 시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라피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들리는데 의미가 바로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지각과 인식 사이에 약간의 버벅거림이 끼어 있었다. “라우라도 동의했고, 저도 동의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 직접 추진하신 일입니다. 라우라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아니면 제레미 경의 실력과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이상했다. 라피스는 라우라와 사정이 다르다. 라우라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솔직히 방구석폐인이나 마찬가지이다. 할 일이 없으니까. 마왕성을 비우고 이곳에 병문안을 와도 괜찮다. 하지만 라피스는 매일마다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라우라에 비해 명성이 전무하므로 여기 와봤자 딱히 광고라고 할 만한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괜히 방문해서……. “아니다. 제레미 경을 의심하지는 않는다……하지만, 제레미 경이 직접 독약을 전달하지 않았다. 중간에 시녀장이 끼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시녀장은 틈만 나면 주군을 독살하려는 종자이다!” “라우라. 데이지 시녀장은 노예각인 때문에 결코 반항하지…….” “무슨 농단을 부렸을지 누가 아는가!” 라우라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다 좋은데, 여기가 환자실이라는 사실을 슬슬 유념해줬으면 한다. “주군은 괜찮다고 웃어 넘기지만 예전부터 불안했다……이런 사고가 터질 줄 알았다. 그 아해가 약초를 잘못 전달한 것이다. 틀림없다. 소녀가 시녀장을 죽여버리겠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드물게도 라피스가 언성을 높였다.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뚜렷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지만 라우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정하지 마라! 언니도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터이다. 아니라면 왜 성녀의 시중을 시녀장한테 맡기고 정작 주군의 병간호를 신입 시녀한테 맡겼는가.” “…….” “시녀장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아해이다. 그리 생각해서 라피스 언니도 직무를 거꾸로 배분한 것이다! 소녀가 틀렸다면 어디 반론해보아라!” 무서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라우라가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이 방안을 메웠다. 모두가 불안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어서 타박을 주고 싶었다. 멍청한 라우라, 군무상서 주제에 우리 마왕군의 탑인 라피스한테 대들어서야 본보기가 서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십시오. 아니, 무릎을 꿇고 라피스의 발가락을 핥으십시오. “시녀장을 이곳에 불러라.” “……라우라. 정말로.”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 라우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소녀는 지금 주군 전하의 한낱 애첩으로서가 아니라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3위, 군무상서로서 간하고 있다.” “…….” “제레미 자경단장이 약속한 기한은 사흘이었다. 그리고 현재, 사흘히 한참 넘어 일주일이 되었지만 주군 전하께서는 용태에 차도가 없다. 물론, 전하께서 내일이라도 아무 문제없이 깨어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정이 틀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책의 소지가 되어야 한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면 많이 실망하실 것입니다.” “상관없다. 주군의 이해자는 라피스 언니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라우라가 말했다. 목소리에 어두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소녀는 주군의 검이다. 만에 하나라도 주군 전하께 위협이 될 요소가 있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베어버리겠다.” “……주인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기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소녀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병기가 되라 명령하셨으며, 실로 모든 것이 주군께서 명하신 바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피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라우라. 당신은 위험할 정도로 단탈리안 님에게 광신적입니다. 전하 앞에서 항상 태연하고 나태함을 가장하는 당신이 실상 가장 악독한 광신도라니. 전하 본인께서도 모르시겠지요.” “소녀는 단지 주군의 곁에 있을 뿐.” 라우라가 즉답했다. “진정한 광신도는 오히려 언니 쪽이다. 소녀는 알고 있다. 언니가 왜 주군과 더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지.” “…….” “서큐버스는 첫사랑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향을 지녔다고 들었다. 독점욕이 지나쳐서 자칫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했던가.” 라우라가 비웃듯이 말했다. “언니는 두려운 거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봐.” “……지레짐작입니다.” “주군께서는 스스로 오롯하게 서는 존재자를 사랑하신다. 자기 감정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휘둘린다면 주군께 경멸을 받게 되겠지. 언니는 그게 무서운 것이다. 비겁자!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이야말로 주군이 증오하는 짓거리임을 모르다니!” 짜악, 하고 살결이 부닥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전보다 한층 더 짙은 침묵이 자리했다. 그 속에서 라우라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진실로 단탈리안 전하를 믿는다면 이렇게 난동을 피울 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설마 실수로 시녀장한테 약품의 배달을 맡겼다고 생각합니까. 단탈리안 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 “자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당신입니다, 라우라. 전하에게 만약의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심하군요.” 아, 라피스였다. 저게 라피스였다. 나는 눈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가 예의 싸늘한 무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전하께서 부재하신 지금, 라우라는 감정에 잡아먹힌 괴물 덩어리가 되어 사방에 분노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이래서야 당신을 군무상서로 임명한 단탈리안 님의 안목이 의심될 지경입니다.” “무슨…….” “그리고 두 번째.” 라피스는 상대에게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닙니다.” “…….” “저는 제 감정을 똑바로 직면하고, 숙고하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미리 내다보며, 그리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론이 설령 제 감정을 멈춰 세우는 것일지라도 그건 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이 저입니다.” 라피스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 자연스러운가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 질문은 순번이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결정한 올바름이고, 이것이 제가 받아들인 자연스러움입니다. ……문제는 단 한 가지. 저의 올바름과 자연스러움을 용납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뿐입니다.”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지만, 라피스는 내가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말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는 인물이다. 라우라한테는 다소 버겁다. “라우라. 당신은 지쳐 있습니다. 벌써 닷새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라피스 언니……소녀는……나는.” “전하를 간호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세요. 오늘밤은 제가 간호를 맡겠습니다.” 짧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군무상서를 객실로 안내하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이바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정오까지 수면을 취하십시오.” 라우라와 이바르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것 같았지만 라피스는 끄떡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병들어 주무시는 환자실에서 떠들고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상태로 환자를 돌보겠다니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명령입니다. 더 이상 추태를 부린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결국, 잠시 뒤에 문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병실을 나선 것이리라. 마침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내 의식은 안심하고 수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벌써 얘네가 떠든 내용이 기억에서 잘 떠오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뭐. 무슨 상관이겠는가. 정말로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저절로 기억에 남겠지. 나는 내 기억력을 신뢰했다. 감각이 끊기려는 찰나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끼치지 말아주세요.” 그 목소리는 잔소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만약 온몸이 마취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군주가 없어지면 단탈리안 패밀리는 곧바로 저렇게 되어버립니다. 화기애애해서 좋군요!   00326 겨울왕(Rex Hyemis) =========================================================================                        부상을 당하고 열흘째.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했다. 입술이 움직이고 눈짓을 건넬 수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이겠지. 하루에 스무 시간은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게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하루에 여섯 시간은 제정신을 차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라피스였다. 라피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마치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는 듯이 치료 사제를 불렀다. “놀랍군요.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사제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궁중백께서 인간이셨다면 분명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마왕의 신체에 대해 소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과연…….” “전하께서는 쾌차하신 것입니까?” 사제의 얘기가 길어지려고 하자 라피스가 칼같이 끊었다. 사제는 자신이 느낀 감상을 아름답고 장황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지 입맛을 다셨다. “예. 다만 너무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계셨지요. 체력을 회복하시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앞으로는 회복하실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두 손을 바르게 모아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물론이고 노사제도 깜짝 놀랐다. 라피스는 더 이상 일개 마족 상인이 아니었다. 마왕군에서 실세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의 측근이었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간단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 허리를 들어주십시오. 소인은 평민 태생입니다.” “목숨이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만인에게 하나뿐입니다. 목숨을 구해주고 치료해주는 분에게 신분은 무의미합니다.” 라피스가 허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저 라피스 라줄리. 단탈리안 전하의 국무상서로서 약속드립니다. 그대가 도움을 청한다면 무엇이든 전력으로 돞겠습니다.” “허허.” 사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쯤은 기쁜 기색으로 웃었다. “소인은 그저 정부에 잠시 고용된 의사에 불과합니다. 소인에게 감사를 표하기보다는 바타비아의 정부에 감사를 표할 일이요, 그러나 정부에는 무도회장의 경비를 게을리 한 책임이 있으니, 결국 누구에게도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습니다. 허리를 들어주십시오.” “제 의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라피스의 강요 아닌 강요에 사제가 백기를 들었다. 노인은 방을 나서면서 허탈하게 말했다. “신하를 보면 군주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오늘 라줄리 님을 뵈오니 마왕이신 궁중백께서 어찌하여 브르타뉴의 성녀와 함께하실 수 있는지 능히 짐작됩니다. 부디, 아르테미스의 미소가 끊이지 않기를.” 참고로 이제까지 대화는 고대제국어로 이루어졌다. 마법사야 고대어가 기본 소양이니 그렇다 쳐도, 하층민 출신에다 상인으로 살아온 라피스가 모국어마냥 고대어를 써재끼는 것은 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라피스 너무 유능하다. 두 사람만 남자 라피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 “…….” 라피스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기도 뻘쭘한지라 손가락으로 라피스의 눈가를 가리켰다. 거기엔 다크서클이 짙게 져 있었다. 손짓으로 대화해야 했기에 의미가 단락적으로 이어졌다. ‘너 지금, 눈 밑, 기미가 장난이 아님.’ 그러자 라피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했다. 나 나름대로 여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해준 말이었다. 약간 상처를 입었지만 문득, 저것이 열흘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깨어나자마자 처음으로 표현한 의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나란 놈도 하여간 물건은 물건이야. * * * “야. 네 재상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년이냐.” 바르바토스가 병문안을 와서 다짜고짜 투덜거렸다. “왜, 라피스가 어때서?” 내가 쓰러진 지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체력이 많이 회복되어 나는 목소리만 높이지 않는다면 꽤나 평범하게 대화할 수가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쟤가 아주 애들을 꽉 잡고 있었거든.” 바르바토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고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너 새끼가 쓰러졌다는 말 듣고 내가 튀어왔겠냐, 안 튀어왔겠냐? 와보니까 문앞에서 파이몬 그년이 서성이고 있는 거 아니겠어. 안으로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네 재상이 떠억 가로막고 절대로 안 비키는 거야.” “와우.” 가볍게 감탄했다. 그러니까 마족 중에서 기생으로 취급받는 서큐버스, 그중에서도 하프 서큐버스라 더더욱 천대받는 라피스가 무려 서열 제9위의 마왕인 파이몬을 막아섰다는 것 아닌가. “뭐. 우리 라피스가 배짱이 좀 있지.” “거기에 나까지 끼어들어서 보내달라고 했거든? 그래도 안 된대. 짜증나서 지배력을 쓰려고 했지. 그러니까 걔가 하는 말이 가관이야.” 단탈리안 전하께서 쓰러지신 지금, 단탈리안 마왕군의 책임자는 저입니다. 제 의사를 무시하는 것은 곧 단탈리안 마왕군의 총의를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다면, 부디 이곳을 지나가십시오. “어이가 없더라니까.”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무시했냐?” “흥. 제깟놈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디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이거야.”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옷가슴에 손을 집어넣더니 목걸이를 꺼냈다. 내 왼손 손가락 두 개가 매달린 목걸이였다. “내가 이거 보여주면서 말했지. 개 같은 분홍녀야, 난 지금 마왕이 아니라 저기 문 너머에서 곯아떨어진 새끼랑 수백수천 번 떡친 여자로서 찾아온 거다. 네 년이 재상이든 뭐든 시발 떡정을 막을 권리는 없다고.” “푸하.”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바르바토스다웠다. “시발, 그랬더니 들여보내주더라. 하다하다 하급 마족한테 허락을 받고 살아야 하냐, 내가? 으이구. 진즉에 뒈져버렸어야 하는데 뭔 광명을 보겠답시고 여태 꾸역꾸역 살았는지 몰라.” 나는 실실 웃었다. “라피스 미워하지 마. 내가 좋아하는 녀석이야.” “네가 하는 거 보고.” 바르바토스가 눈빛을 바꾸었다. “그래서, 이게 본론이다만. 누가 범인이야?” “…….” “잠깐 애들 풀어서 조사해봤더니 통령 그 쌍년이 범인이라고 수군거리던데.”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사건의 내막을 몰랐다. 순전히 부외자 시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즉, 바르바토스의 생각이 곧 제3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의견이라 봐도 무방했다. 현재 정치계와 사교계는 이번 암습 때문에 한창 시끄러웠다. 겨울의 외교전으로 인하여 내가 인기인이 된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이름값이 정점을 찍었을 때 암살 미수가 터졌다. 내가 죽을 것인가 안 죽을 것인가, 범인은 누구인가, 사건의 여파가 어디까지 퍼질 것인가……화제거리는 수없이 많았다. 각국의 대표단은 바타비아 공화국을 거세게 비난했다. 유명인사들이 모인 자리에 폭발범과 암살범이 끼어들었다. 심지어 암살범은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다. 아무도 공화국의 실력을 신뢰할 수 없겠지. 그냥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대표단도 꽤 많았다. 이로써 공화주의 대표회의가 열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적어도 바타비아 공화국이 주최하게 될 일은 없다. 파이몬은 실패했다. 바타비아가 안 된다면 이제 대륙에 남은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이지만, 이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엘리자베트 통령 자체가 암살범 내지는 암살범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다. 게다가 공화주의자들 중에는 엘리자베트를 독재자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마지막 한 개의 퍼즐만이 필요했다. “바르바토스.” “응?” “이번 사건, 이대로 덮자.” 그러자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일단 물어볼게. 왜?” “우리가 저번에 말했지. 우리 마왕군이 대륙 정벌에 나서기에는 아직 오십 년이 이르다고. 이번 사건을 키우면 전쟁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그년이 한 짓이 맞구나.” 바르바토스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평범한 놈이 범인이라면 전쟁까지 갈 이유가 없지. 전쟁을 벌이지 않고는 복수할 수 없는 인간이 범인인 거야. 그렇지? 응?” “아니야.” “그럼 어떤 개새끼가 널 찌른 건데!” 순간, 방안이 건물째로 진동했다. 바르바토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살기로 충혈되었다. 마왕인 나조차 경직해버릴 정도로 숨 막히는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검게 피워올랐다. 방안의 공기는 바르바토스에게 공포로 떨었다. 아아, 이래서 바르바토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봐라. 만약 내가 스스로 배를 찔렀다고 말한다고 해보자. 바르바토스는 틀림없이 왜 그랬냐고 묻는다. 나는 파이몬을 막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파이몬을 증오하는 바르바토스한테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고작 손가락 하나 잃어버렸을 때도 빡 돌아버린 바르바토스이다. 이번엔 얄짤없이 내전이 터져버린다. 그렇다고 바르바토스한테 거짓말을 하기는 싫으니까 나로서는 대답을 회피하는 게 최선이다. “바르바토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내가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부탁……?” “그래. 부탁이야. 잘 봐. 너는 이제부터 약간 연기를 해줘야 돼.” 계획은 이러하다. 내 방을 나서고 바르바토스는 분기탱천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돌아간다. 그 다음, 바르바토스는 당장 어느 국가로 쳐들어갈 것처럼 군대를 소집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공식적으로 범인을 밝히겠노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로 범인이 엘리자베트 통령이었구나 싶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며 두려움에 떨 것이다. 전 대륙이 긴장에 휩싸이리라. 그때, 성녀가 나를 방문한다. 성녀와 나의 만남은 밀담으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이 남을 뿐이지 정작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발표되지 않는다. 단지 반나절이 넘도록 밀담은 길게 이어질 필요가 있다. 직후에 내가 다시금 발표한다. ――대륙의 평화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성녀에게 감명을 받아, 지난 암살의 범인은 밝히지 않겠다고. 전쟁 직전까지 긴장이 고조되었다가 극적으로 해소된다. 대륙 만민이 브르타뉴의 성녀를 칭송하겠지. 여기에 편승해서 나도 '대륙 평화'라는 웃기지도 않은 표어를 진심으로 주장하는 척 위장할 수 있게 된다. 암살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평화를 울부짖은 롱그위 성녀. 역시 암살을 받았음에도 성녀에게 감화되어 전쟁을 무마시킨 마왕. 우리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세탁된다. “바르바토스. 저번에 우리가 대화했지. 앞으로 오십 년 동안은 전쟁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게 되면 충분히 오십 년을 뻐팅길 수 있어.” “…….” “너는 주전파인 척 연기해. 그리고 내가 반전파인 척 연기할게. 대륙에서 무슨 사건이 날 때마다 너와 내가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결국에는 너를 억누르는 연극을 보여주는 거야.” 사람이란 간사하다. 상대방이 아무런 이유없이 평화를 주장하면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방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전쟁을 일삼은 마왕의 족속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심을 없애려면 연극이 필요하다. 성녀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워서, 실제로는 있지도 않았던 암살의 범인을 조작하여, '평화를 주장하는 마왕'이라는 허울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내가 엘리자베트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증거 싸움으로 번진다. 이쪽엔 당연히 증거가 없다. 진실을 말하게 되는 마법이라도 검증에 들어가면 필패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만약 내가 엘리자베트를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다면――역설적으로 의심이 계속해서 남게 된다. 범인은 엘리자베트. 그러나 평화를 사랑한 성녀와 마왕의 자비에 의해서 그저 조용히 넘어갔다. 그런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단탈리안. 설마 나와 평원파를 위해서 일부러 범인을 말하지 않는 건 아니지?” “물론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침묵할 뿐이다. 그걸로 납득했는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번에는 연극에 어울려주겠어……하지만, 나중에는 꼭 똑바로 말하라고.” 내가 빙그레 웃었다. 너랑 파이몬이 사이가 좋아지면 말해주마. 아마도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   00327 겨울왕(Rex Hyemis) =========================================================================                        바르바토스는 의외로 선선하게 떠났다. “섭정인 내가 놀고 있어서야 안 되니까”라고 본인은 주장했다.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사실은 달랐다. 환자인 나를 배려해서 일찍 일어선 것이었다. 다만 바르바토스는 그런 걸 입밖으로 표현하는 위인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녀의 그런 성격을 사랑했다. 만일 결혼한다면 바르바토스 같은 녀석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결혼 생활을 그려보았다. 꽤나 손쉽게 상상이 이루어졌다. 자식을 낳아도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자기 손으로 키우지 않겠지. 귀찮다면서 남한테 양육을 떠넘겨버릴 거다.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아이를 키우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막아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탈리안 님한테 아이의 교육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반대할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내가 키우겠다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럼 누가 우리 아이를 키울까. 글쎄. 아마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양육하는 형태가 되겠지. 주로 할 일이 없어 백수짓을 하고 있는 라우라가 아이와 놀아준다. 여기에 간간히 일을 끝내고 돌아온 라피스나 데이지, 이바르가 끼어든다. 그러다가 애가 조금 커서 머리가 굵어지면 제레미를 따라다니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장난꾸러기가 되어서 우리 마왕군과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놓겠지. 이바르가 도련님, 도련님! 하고 말려보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 바르바토스는 자기 자식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낄낄 웃으면서 칭찬하겠지. 나는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쉰다. 아름다운 꿈이로군. 마왕은 자식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어째서일까. 사람은 커가면서 자신에게 무엇이 불가능한지 깨닫게 된다. 나는 용사가 될 수 없다. 혁명가도 될 수 없다. 예술가도 될 수 없다. 나에게 남은 길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진다. 예컨대 나는 사람들을 이끄는 제왕이 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을 선동하고 농락하고 모욕하는 자가 될 수는 있다. 단탈리안은 선동하고 농락하며 모욕하는 자이다. 원하든 말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너무 슬퍼할 이유도 없다. 애시당초 딱히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삶이 내가 원하지 않는 형태로 굳어져 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이상한 생각으로 빠지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나'에서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눈길을 다른 곳으로 향한다. 마치 저 너머에 더 넓고 더 광활한 지평선이 존재한다는 듯이. 그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사람들은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인류. 국가. 세계. 나는 타인을 농락하고 모욕할 수 있다. 얼마든지 그래도 좋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그리하여도 좋은가. 그것이 정말로 좋은 세계의 모습인가. 타인을 속이고, 살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강간하며 살아간다――그것이 정말 이 세계의 올바른 모습인가. 그것을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이 소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선언한다. '아니다'라고. 나는 비천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나는 이기적인 자여도 괜찮다. 그러나 인류가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 현재의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이냐와 상관없이, 미래에 다가와야 하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인류 전체의 모습은 정반대여야만 한다. 이들은 자신의 비천함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정신병자의 무리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아니하고 '인류는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눈앞에서 학살이 벌어질 때, '나는 도망쳐야 한다'라고 대답하면서 동시에 '인류는 이를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며, 여기서 후자의 문장을 자기 자신의 대답으로 삼아버린다. 정신병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류 전체, 세계 전체 따위를 호명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더 나아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정신병자의 망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병적인 아름다움이 있을지어니. 말하자면 그것은 세계의 질병으로서 사람들은 유사 이래 이 전염병을 앓고 있다……. “단탈리안.” 내가 두 개의 눈을 뜨자, 그곳에는 새하얀 공간이 끝도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것일까. 나는 이곳이 꿈속임을 알았다. 예전에 한번 초대된 적이 있었다. “……파이몬.” 붉은 머리의 여인이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피곤한데 소녀가 방해한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괜찮습니다. 요 열흘 동안 평생 잘 잠을 전부 자버린 기분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머지 잠은 훗날 무덤에 들어가서 영원히 보충하도록 하지요.” “…….” 어라. 가볍게 농담하는 느낌으로 말을 꺼내들었는데 파이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무언가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궁지에 몰렸어요. 프랑크의 신생 정부에는 대륙을 결집시킬 만한 힘이 부족하지요. 공화주의자들을 이끌 세력은 이제 어디에도 없어요. ……단탈리안, 당신이 바라던 대로.” “…….” “어째서인가요.” 파이몬의 눈동자가 물기로 흐려졌다. “단지 평화를 바랄 뿐인데, 그 식상한 단어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을 뿐인데……누구보다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왜, 어째서.” 엉망진창인 목소리에 엉망진창인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어조와 표정보다 직설적이었고, 나는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은 감정의 공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을 헤치다니, 정말로 그런 방법밖에……저는, 당신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이몬.” 내가 조용히 그녀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신이 상처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바르바토스가 서로를 죽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내 발끝이 멈칫했다. “당신은 치사하고 제멋대로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전부 알고 있고……수십 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왜 저 같은 여자의 죽음은 넘어가지 않나요! 소녀가 마음대로 죽도록……어리석게 자멸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잠시 동안 울음소리만이 적막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내가 자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이몬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파이몬은 고결하지만 마음이 여리다. 괴로웠겠지.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보다 내가 자해했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파이몬이 괴로워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고 있으므로 복부에 단검을 쑤셔넣었다. 그녀로 하여금 죄책감에 휩싸이도록. 그래서 마왕군에 분열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스스로 단념하게끔. 이것이 나이다. 상대방의 신념을 우롱하고 모욕하는 자이다. “…….”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저번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꿈속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옷차림으로 내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언제나 단검 한 자루쯤은 품에 지니고 다녔다. “……단탈리안?” 내 몸짓에서 수상함을 느꼈을까. 파이몬이 울음 섞인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정확히 내 목덜미를 향해서 칼끝을 세웠다. 파이몬의 눈동자에 경악이 번져갔다. 그녀가 나한테로 손을 뻗었다. “안돼!” 파이몬의 손끝이 내게 닿기 전에 나는 칼날을 목 정중앙에 힘차게 박았다. 의외로 고통은 얼마 없었다. 혀가 위로 밀려오고 눈동자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새하얀 공간이 사라졌다. 이곳은 내 진짜 몸이 누워 있는 방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괜히 목을 쓰다듬으며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열흘이 넘도록 주구장창 누워만 있었다. 당연히 몸이 내 명령을 제대로 따라줄 리 없었다. 나는 거의 방바닥에 굴러서 떨어지면서 침대를 벗어났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 라고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서지 못했다. 다행히 근처에 적당한 막대기가 있었다. 커튼을 걷을 때 써먹는 은제 막대기였다. “끄윽…….” 나는 그것을 막대기로 삼아 반쯤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래.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것보다 상태가 심했을 때도 있었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방문으로 향했다. 서큐버스는 가까이 있는 상대방에게만 꿈을 보여줄 수 있었다. 파이몬이 꿈속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녀가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침대에서 방문까지 가는 데만 다섯 번은 넘어졌다. 차라리 기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 방바닥에 누워버리면 정말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유지하며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 그곳에 파이몬이 주저앉아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해서.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로, 나를 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그만 웃음이 나왔다. 힘이 없어서 미약하게 입끝이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서 간신히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은……겁쟁이입니다, 파이몬.” “…….” “저를 직접 만나는 게 무서웠겠지요.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까, 어떤 얼굴로 만나면 좋을까……그걸 모르겠으니까 꿈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겁쟁이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본질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상주의자였다면 다른 사람한테 자기 신념을 마음껏 강요했겠지. 브루노 평원에서 당신은 자신의 마력을 잃어가면서까지 나를 구했다. 어째서인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행했는가. “당신은 아무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그게 마족이든, 저이든……그러니까 차라리 자기 자신을, 마왕이라는 종족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결심했습니다.” “…….”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왕이란 이질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그렇다면 나를 희생해버리자고 생각했겠지요.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서큐버스라는 계급에서 비롯한 강박관념인지, 아니면 파이몬의 천성에서 비롯한 성향인지는 알 수 없다. “오십 년 후에는 평원파가 강대해질 테니 그 전에 분란을 일으켜야 한다……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딱히 승리할 자신도 없을 겁니다. 당신을 제외하고 모든 마왕이 결집할 게 분명합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저, 저는…….”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패배하면 자신이 혼자 몰락하면 그만이다. 당신은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월맹군 전쟁에서도 그러했다. 만일 내가 파이몬의 입장에 있었다면 절대로 바르바토스한테 유예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트와 연합해서 거의 곧바로 협공에 들어갔을 것이다. 명분은 얼마든지 조작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며칠이나 바르바토스에게 항복을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예전에는 파이몬이 승리의 확신에 도취해서 자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이상을 남들한테 밀어붙일 배짱이 없을 뿐이다……학살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학살을 저지를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가 옳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니까. 원래 게임의 시나리오에서도 똑같았겠지. 용사를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놓쳤다. 왜인가. 용사가 고결한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족을 위해서는 용사를 죽여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신했다. 파이몬. 너는 대륙을 피로 물들이기에는 너무나 자상하다.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십시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세하건대 저는 당신의 행보를 앞으로도 가로막을 것입니다. 저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방해물이자 걸림돌입니다……저를 죽여서라도 당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자신이 있는지, 어디 증명해보십시오……!”   00328 겨울왕(Rex Hyemis) =========================================================================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단지 하나의 개인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의 가교를 끊는 것이다. 마족과 인간종의 중재인을 없애는 것이다. 가미긴의 연인을 죽임으로써 무소속 파벌의 마왕을 제어할 수단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 지위들을 얻기 위해서 희생된 목숨. 아우스테를리츠에서 쓰려져간 오만의 생명과 부르노에서 허물어진 오만의 생명이 있다. 검은 산맥에서 비명횡사한 이천의 각오가 있다. 아가레스의 삶과 바알의 생애 또한 틀림없이 있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죽어나간 수만의 무게가 주어져 있음은 물론이었다. 나는 명확한 의사와 판단을 가지고 모든 학살을 저질렀다. 나는 이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긍정한다.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곳은 변명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산꼭대기이며, 고로 변명을 씨앗으로 삼아 수확되는 곡물일랑 애당초 나지 않을 토지이다. 죽은 자만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망령의 묘지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불임인 채로 얼어버린 설원이다. 이곳을 부정하려는 자에게는 위대한 변명이 필요할지어니. 엘리자베트처럼 인류와 국가를 주장해도 좋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각오가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한점의 위선이 없느냐, 그뿐이다. 파이몬은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제가 죽일 수 있을 리가……없잖아요…….” 파이몬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폐부를 쥐어짰다. “저를 이해해주고……받아주고, 용서해주고.” 껍질이 깨진다. 가슴에 파묻어두고 살아가는 알맹이가 표정에 드러난다. 얼굴이 감정의 표면이 아니라 감정의 바닥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나와 다르게 바닥이란 것이 있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을……! 파이몬은 울부짖었다. “그런 사람을, 제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말했구나. 파이몬.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좋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오로지 극소수의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이, 백합의 꽃잎이 덧없이 낙화해버리듯이, 꼭 그처럼 소리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파이몬은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묵묵하게 수백 년을 희생한 여인. 그 값어치는 대륙에 돌아다니는 금화를 전부 모아본들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싶지 않다, 죽일 수 없다, 그런 지극히 현실적이고 강렬한 감정 아래 이상이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계약하자. 나는 파이몬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저에게 당신의 신념을 맡기십시오.” 영원히 깨지지 않는 계약을. 피의 맹약을. “파이몬, 당신은 결국 나 한 명을 죽이지 못합니다. 공화주의를 위해서 십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떨어지면 당신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겠지요. 그것이 당신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단탈리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파이몬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했다. 어딘지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파이몬이 멍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무릎을 꿇어 그녀와 시선의 높낮이를 맞추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공화주의를 위해서 십만 명이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수만의 목숨을 학살할 권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그래도 좋을 신념은 전무하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善)인 이상, 사람을 학살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수많은 이상주의자는 그것을 모른다. 알아도 외면한다. 외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파이몬은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아름다움에 창백한 표백제를 입혀서, 내 마음속의 박물관에 영원토록 전시해두고자 한다. “그러나 악한 자에게 십만이 학살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단탈리안……지금, 무슨 소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소망을 제가 대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되도록이면 상냥하게. 무심코 기대고 싶어지도록. “당신이 죽이지 못하는 것을 제가 죽이겠습니다. 당신이 용납하지 못하는 희생을 제가 강요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애초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짊어져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말도 안 되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저,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원한 적도 없어요……!” “거짓말입니다. 적어도 한 번쯤은, 아니, 수만 번은 소망했습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파이몬의 보석같이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곳은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어서 마족과 인간종의 구분도 없다……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히 절규하는 심정으로 바랐을 것입니다. 틀립니까?” “아, 아…….” 그녀의 입이 열리고 닫히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입술의 틈새에서 그저 언어가 되지 못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이건 계약입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모든 이상을 버리십시오. 저 하나 따위도 죽이지 못해서야 당신에게는 그런 이상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파이몬. 단순한 한 명의 여인으로 전락하세요.” 무언가가 옳기 때문에 생애를 바쳐서 원한다. 그 무언가를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면, 더 이상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이상가라면 누구나 처해버리는 역설이 여기 있다. 그러나 애시당초 악한 자가 살육을 일으키면 어떠한가. 학살이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것을 일으킨 범인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어느새 눈치를 채보니, 대륙에는 '결과적으로' 공화주의가 퍼져 있다. 이렇게 되면 살육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수 있다. 동시에 공화주의도 달성된다. 범인은 결코 공화주의를 위해서 살육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공화주의는 죄악과 무관한 채로,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는다. 그 세계에 영웅은 없으나 희생자 또한 없다. 악한 자만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사람들은 어떠한 의심도 의혹도 없이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십만 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에 파이몬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봤자 별로 차이도 없습니다.”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사지가 삐꺽거렸다. 그래도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선은 무능하고 악은 유능하다. 어찌된 일인지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다.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웃어야 마땅하다. “저를 염려해주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솔직히 주제를 아십시오. 설마 저를 구원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다면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으세요.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당신한테 짐을 맡기는 짓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모르겠는가. 나는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동의를 구하면 상대방과 공범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력자에게 공범 따위는 필요없다.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고 말해버린 순간 모든 것이 이미 끝났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 한 마디의 거짓말이다. 그것만 더해지면 눈앞에서 정신없이 울고 있는 여인의 영혼을 빼앗아올 수 있다. 그걸 지금부터 보여주겠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파이몬.” “아……?” 파이몬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반걸음 앞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파이몬의 눈동자가 커졌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내 몸을 밀쳐내려고 그녀가 발버둥쳤다. 나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십분 이용했다. 파이몬이 움직이자 마치 몸이 아픈 것처럼 가볍게 눈썹을 찡그린 것이었다. 파이몬이 아, 하고 화들짝 놀라면서 저항을 멈추었다. 내가 중상자라는 걸 상기했겠지. 그 틈을 이용했다. 파이몬이 물러섰으므로 나는 더 거칠게 키스를 강요했다. 그녀는 나를 밀쳐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내 몸을 어루만졌지만, 그런 장난스러운 반항은 오히려 우리의 두 몸을 얽히게 만들었다. 몸짓의 강도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결국 남은 것은,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안은 자세뿐이었다. “……, …, …….” 파이몬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그녀의 볼에 미끄러졌다. 그것과 동시에 이제는 음울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효과음이 울렸다. 「깊은 애정! 상대방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애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호감도 50. 첫 번째 호감도락이 파괴되었다. 파이몬을 공략하는 첫 조건은 다름아니라 파이몬의 이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야말로 악질적인 농담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납득하는 내가 있었다. 호감도 50이란 아마도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의미가 있다. 바로 히로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연인을 사랑하는 수치이다. 절묘한 균형을 나타낸다. 호감도가 50보다 적으면 자신의 신념과 연인이 눈앞에 주어졌을 때 신념을 선택하겠지. 호감도가 50보다 높으면 연인을 우선해버린다. 50은 정확하게 이것도 저것도 택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공략은 결코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만나기 전에 파이몬은 그녀 한 사람으로서 완성되어 있었다. 달리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만나버리고 그녀에게는 신념과 동등한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생겨버렸다. 신념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략은, 상대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짓거리이다. 라우라는 그녀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고 내 곁에 머물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가미긴은 사랑에 집착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바르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천 년 동안 쌓아올린 정체성을 잃고 내 시녀로 몰락했다. 그렇다. 몰락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것을 몰락이라 부른다. “아, 읍……흐읏.” 한층 더 부드럽게, 파이몬에게 키스한다. 이제 그녀에게 저항의 의지는 파편조차 남지 않았다.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파이몬은 몰락해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안타까운 점은 지금 내가 정말로 몸이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몸만 성했다면 당장 파이몬을 침대로 끌고가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줬을 텐데. 키스만으로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긴,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사랑한다고 말한 여인과 입술을 맞추면서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놈이었다. 별로 새삼스러운 진실은 아닌가……. 앞으로 파이몬은 내 의사에 따라 움직이겠지. 아직 이상의 잔재가 남아 제멋대로 행동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내가 강력하게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 그것이 공략이 진행된 히로인의 말로이다. 바야흐로 마왕군은 전적으로 나의 통제 아래 놓였다. 바르바토스는 내 조언에 따라 움직이고, 파이몬과 가미긴은 나에게 함락되었으며, 마르바스는 스스로 눈에 띄게 움직일 의사가 없다. 훌륭한 결말이다. 이런 얘기를 라피스한테 들려주면 틀림없이 혼나겠지만, 글쎄. 적어도 키스하는 동안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건 아무리 나라도 예의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알고 보면 나는 매너로 이루어진 남자다. 매너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파이몬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집중했다. 조용해져버린 밤을 느끼면서.   ============================ 작품 후기 ============================   어제 덧글란에서 긴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덧글란에 전혀 간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1) 다른 작품이나 다른 작가를 욕하는 덧글, (2) 다른 독자를 욕하는 덧글은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이외의 모든 덧글은 허용됩니다. 욕이란 단어가 애매하다면 예시를 들겠습니다. '오, 당신께서는 참으로 멍청하셔서 제가 다소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자연이 우연하게 만들어낸 기적을 목격하고 우리가 때때로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멍청함은 저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안겨주는군요.' → 허용 '씨○ ○나게 ○○하네, 두개골에 그딴 ○같은 뇌수를 집어넣은 채로 어떻게 숨은 쉬고 있냐? ○발 자연의 기적을 목도하는 것 같아서 ○나 지려버림.' → 불허 요컨대 최소한의 포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포장은 의례적인 존댓말이어도 좋고, 재치있는 유머여도 좋습니다. 참고로, 글쓴이 본인에 대한 욕설은 예외적으로 허용됩니다. 부디 안심해주시길. 저는 안전한 마조히스트입니다. 소설의 본문이 글쓴이의 공간이듯이 소설의 덧글란은 독자의 공간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해주세요!   00329 겨울왕(Rex Hyemis) =========================================================================                        * * * 나는 또다시 드러누웠다. 이번에는 몸살까지 얻었다. 몸이 완치하지 않았는데 무리하고 말았다. 담당 사제는 혹시나 이상이 생긴 것 아닌지 당황했다. 여자에게 키스 세례를 퍼붓느라 몸살에 걸렸습니다, 라고 곧이 곧대로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입을 싸악 닫았지만. ……바보는 약으로도 고치지 못한다던가. 딱 내 꼬락서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파이몬을 공략하는 대가로 겨우 몸살을 지불한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싸게 먹힌 셈이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당신이란 마왕이 어떤 작자인지 아주 잘 알았어요.” 롱그위 성녀가 질려했다. 병문안을 와서 하는 말이 저거였다. “자칫하면 저도 당신도 죽을 뻔했어요. 말도 안 돼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 살아있지 않습니까?” 내가 싱글거리며 두 손을 보여주었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롱그위 성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서 사람의 몸이 터졌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진귀한 경험을 시켜드린 것 같아서 기쁩니다.” “여신이시여. 부디 이 악마를 저주하소서……!” 롱그위 성녀가 이빨을 바득 갈았다. 그녀에게는 누가 테러범인지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의 연기력이 얼마나 괜찮을지 몰랐다. 알면서 암습을 당하는 것보다 모르면서 암습을 당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비밀로 해두었다. “닷새 안에 정신을 차리는 게 원래 계획이었잖아요. 그런데 오늘로 벌써 보름이에요. 알겠어요? 보름이라구요.” “음. 제 체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저질이더군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롱그위 성녀가 버럭 성질냈다. 영문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타인이 알아먹게끔 문장으로 말해라. 고릴라처럼 쿠왕쿠왕 소리를 질러서는 고블린도 고개만 갸웃거리겠지. 이런 양반이 신학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니, 학력 위조가 심각하게 의심되었다. 아니면 호감도를 20까지 올리고 와라. 내가 알아서 심리상태를 읽어주겠다. 그럼 고릴라도 편하고 나도 편해진다. 해피 엔딩이로군. “……당신, 또 이상한 걸 생각하고 있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를 뚝 뗐다. 내 철면피는 대륙 최강을 자랑했다. 걱정일랑 전혀 없었다. 성녀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죽기 일보직전이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마왕 단탈리안. 저와 브르타뉴 왕국은 당신에게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만……. 만일 당신의 계획이 항상 이번처럼 불안정한 요소를 안고 있다면, 우리로서는 협력을 재고할 수밖에 없어요.” “과연. 불안정한 요소라.” 그건 확실히 염려할 만했다. 브르타뉴 여왕과 롱그위 성녀는 사활을 걸고 이쪽에 협조하고 있다. 우리의 자작극으로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느 쪽이든 파멸해버린다. 정치적 파트너가 자기 목숨조차 챙기지 못해서야 불안할 거다. 조금 섭섭하군. “롱그위 성녀. 당신이 대화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예?” “저는 단탈리안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당신의 여왕에게 절망을 선물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랑을 늘여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토록 위세가 좋았던 브르타뉴의 기사단이 모두 제 군화 아래 싸늘하게 시체로 변했습니다. 혹시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아무한테나 당할 정도로 약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브르타뉴의 군대는 강했습니다. 그 강력함을 신뢰한 만큼 똑같이 저를 신뢰하십시오.” 성녀가 침묵했다. 납득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박할 거리가 없겠지.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저는 당신의 설득에 의해서 이번 범행의 배후를 밝히지 않습니다. 적어도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식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당신을 제외한 성녀들입니다.” “……다른 성녀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우리의 대본에 따르면 당신이 지나치게 '착한 성녀'가 되어버립니다.” 전쟁과 전염병에 지친 민중들에게 있어,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지긋지긋한 종족 전쟁의 재발을 막아세운 위인이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를 칭송하는 소리가 커질 것이다. “다른 성녀들이 보기에는 별로 재미있는 사태가 아닙니다.” “설마, 성녀들이 저를 질투라도 할까봐요?” 롱그위 성녀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 같은 악인은 모르겠지만 성녀는 엄격한 심사에 의해서 선발됩니다. 인성과 신심,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뛰어나야만 성녀의 직위를 얻고 유지할 수 있어요. 질투라니.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오, 성녀님. 세상에 쓸데없는 걱정이란 별로 없습니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엄격한 심사를 거치시고 아테네의 성녀가 된 자클린 롱그위 성녀이시여. 그대는 얼마나 대단한 인격자이길래 지금 마왕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까?” “……저는 브르타뉴를 위해서!” “똑같습니다. 다른 성녀들도 저마다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내겠지요. 자기에게 알맞은 옷을 골라입듯이 사람이란 매일 변명을 갈아입는 존재입니다.” 기침이 나왔다. 이건 진짜 기침이었다. “구태여 성녀들이 수고스럽게 제 손으로 옷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롱그위 성녀. 당신이 범대륙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 아테네 신전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집니다. 다른 신전의 사제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 “설령 성녀가 침묵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방해하려고 나설 겁니다.” 특히 몇몇 성녀는 엘리자베트와 협력했다. 이게 문제였다. 엘리자베트가 테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현재, 대놓고 그녀에게 협조하진 않겠지만 암암리에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틀림없다. 엘리자베트라면 '이미 한배에 탔다'라는 식으로 신전들을 협박한다.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좋은 방법이 있나요?” “간단합니다. 전부 들러리로 세워주면 됩니다.” 나는 약하게 기침하면서 말했다. “알다시피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국교가 없습니다. 성녀도 월맹군 전쟁에서 사형되었지요. 국교가 없다는 점을 역으로 이용합니다. 모든 신전을 국교로 예우하는 것입니다.” “예?” 성녀가 무심코 눈을 깜빡거렸다. 꽤 귀여운 동작이라서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그려졌다. “인류와 마족이 화합하는 상징. 앞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종족차별이 없는 대지에 종교적인 차별이 있으면 이상합니다.” 롱그위 성녀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신전들에서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냅니다. 모든 신전에게 남작령에 해당하는 영지를 무상으로 하사하겠습니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습니까?” 성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좋습니다. 이 제안을 가지고 각국의 대신전을 설득해주십시오.”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종교계에 인맥이 전무했다. 롱그위 성녀가 수고해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대신전부터 시작하세요. 헤스티아 대신전과 헤파이스토스 대신전은 반드시 마지막에 가서 교섭하고요. 우리한테 협력하길 주저할 겁니다. 그럼 당신들만 고립될 것이라고 협박해서…….” 그때 기침이 연이어서 크게 튀어나왔다. 바싹 매마른 기침이었다. 젠장, 이러니까 환자 같아서 불쾌했다. 실제로도 환자였지만 말이다. 롱그위 성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로 몸이 괜찮은 것 맞아요?” “몸은 대체로 전부 나았습니다. 심리적인 문제이겠지요.” 마왕의 신체는 어째서인지 심리적인 요인에 따라 쉽게 몸이 아팠다. 가령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을 때, 상처 자체는 금방 치유했음에도 한두 달 동안이나 오른발을 절뚝거렸다. “아무튼, 이건 브르타뉴에도 나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제국에서는 당신에게 명예 공작의 직위를 내릴 것입니다.” “하아. 마왕이 내려주는 작위 따위는 받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롱그위 성녀는 단칼에 거부했다. 명예직이라곤 하나 공작씩이나 되는 작위였는데. “섣부르게 선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브르타뉴 왕국에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고.” 성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낙재생을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된 기분으로 말했다. “제국의 작위를 받으면 롱그위 성녀, 당신은 더 이상 브르타뉴의 성녀일 뿐만이 아닙니다. 제국의 귀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브르타뉴 왕국은 우리와 맺은 조약에 따라 군사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공작인 자클린 롱그위는 경우에 따라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겠지요.” “……!” 성녀가 눈을 크게 떴다. “구, 군사적인 행동을 허용해준다는 말인가요!” “경우에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예를 들어, 그렇군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익에 상반되지 않으면서 브르타뉴의 이익에도 걸맞는 경우라면 예외적으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 롱그위 성녀가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브르타뉴 왕국은 향후 14년 동안 프랑크 제국의 영토를 침범할 수 없다. 그런데 프랑크 제국을 제외하고, 브르타뉴에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육로는 전무하다. 지난 전쟁에서 브르타뉴의 해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즉, 브르타뉴는 14년 동안 꼼짝없이 군사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브르타뉴가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새로이 생겨난다. 여차하면 무력을 동원해서 대륙에 간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성녀에게는 악마적으로 달콤한 제안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합스부르크 제국의 승낙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군요.” “정확합니다.” “제국의 외교는 단탈리안, 당신에게 달려 있지요.” 롱그위 성녀의 눈빛이 음울하지만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는 당신에게 종속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군사를 움직일 때마다 당신에게 알려주고, 당신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결국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내가 미소를 짓고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거부하시겠습니까?” 롱그위 성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불온한 침묵이 흘렀다. 성녀가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네요. 상대방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게 제안을 건네지만, 사실은 당신에게 얽히고 또 얽히게 되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어요.” “저는 겁쟁이라서 말입니다.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가 서로한테 얽히면 배신하기도 힘들어집니다. 어떻습니까, 저절로 신뢰가 생겨나지 않는지?” “……그런 걸 신뢰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이미 당신은 사람으로서 끝장났어요.”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성녀는 앙리에타 여왕과 상의하고 다시 방문하겠다면서 떠났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돌아온 대답은 '예스'였다. 앙리에타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어마어마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설령 우리의 통제를 받더라도 상관없다 여길 정도로. 이로써 유사시에 써먹을 수 있는 군사적 카드가 하나 주어졌다. 우리는 미리 계획한 바에 따라 차근차근 연극을 진행했다. 바르바토스가 군사소집령을 내렸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긴장감이 대륙을 뒤덮었으며, 이에 성녀가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설득했고, 나는 성녀에게 감화되어 테러의 범인을 영원히 비밀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롱그위 성녀를 비롯하여 모든 성녀는 '위대한 결정'이라고 입을 모아서 칭송했다. 이것과 더불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모든 대신전의 평등'을 선언.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실로 완벽하게 평화로운 결말이 이루어졌다. 테러가 일어난 지 한 달째. 나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자신에 대한 암살조차 넘어가는 선구자>라는 호칭을 가진 채 나의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단탈리안이 평화의 아이콘이 된 것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00330 ending no.03 =========================================================================                        이번 편은 if 외전입니다. 베드엔딩을 혐오하는 분은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 《엔딩 조건》 1. 마왕 파이몬의 호감도가 50 미만일 것. 2. 라피스 라줄리의 마법계열 직업 중에서 A레벨 이상이 전무할 것. 2. 단탈리안의 악명이 100000 이상일 것. · · · 사람은 하기 싫어도 뭔가를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라피스 라줄리는 현재 그 사실을 절감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황궁에 서 있었다. 제국의 섭정인 바르바토스에게 급히 전해야만 하는 소식이 있었다. 잠시 뒤, 바르바토스는 업무를 일단락 짓고 접견실에 들어왔다. “어라. 단탈리안네 재상이잖아.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의외의 인물이 접견을 청했다고 생각했을까. 바르바토스가 신기한 눈초리로 라피스를 쳐다보았다. “전하.” 라피스는 웬만한 일에도 감정이 동하지 않을 만큼 강심장이었지만, 입술을 떼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마치 목소리를 내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나마나 단탈리안이 보냈을 테고. 뭐야, 그 새끼가 또 말썽이라도 저질렀냐? 하여간 병상에 드러누웠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쯔쯧.” “전하.” “그래. 긴장하지 말고 말하려무나.” 바르바토스가 키득거렸다. 이쪽을 배려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바르바토스의 예법이었다. 라피스는 그것을 종종 옆에서 지켜보았고, 그렇기에 참담한 심정을 느꼈다. 몇 번이나 입속에서 중얼거리고 마침내 라피스가 소리내어 말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승하하셨습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 그대로 정지했다.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풀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뭐?” 바보 같은 되물음에 라피스는 더욱 괴로워졌다. 저건 본능적인 거부 반응이었다. 정말로 잘 듣지 못해서 반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문장을 거부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치는 도리질. “오늘 새벽, 오전 네 시 경에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라피스는 마음의 가장자리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어디까지나 사무적으로 얘기했다. 그것이 라피스의 최선이었다. “사인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암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소인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점차 허물어졌다. “야. 그게 무슨 농담이야. 거짓말이지?” “…….” “단탈리안이 죽을 리가 없잖아. 죽이려고 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 같은 바퀴벌레 새끼인데…….” 그 붕괴를 막으려는 듯, 바르바토스의 입끝이 올라갔다. 미소를 지으려는 것일까. 필사적인 복구작업은 그러나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서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 하고 바르바토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 또 단탈리안 녀석이 농간을 부리는 거야. 나한테 그런 말을 전해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속셈이지? 으이구, 한심한 놈. 세상에 구라를 쳐도 될 일이 있고 구라를 치면 안 되는 일이…….” “바르바토스 전하께.”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라피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과 같은 하급마족이 마왕에게 저질러서는 안 될 무례였으나, 바르바토스의 얼굴을 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 가장 먼저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께서……단탈리안 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신 분이기에.” 바르바토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흐르고. “아…….”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표정이었다. 라피스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탄식했다. 주군의 죽음을 전달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런 표정을 지었다. 라우라도, 이바르도 모두 똑같이 반응했다. 그녀들은 지금 단탈리안의 침대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소식을 전달할 만큼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은 라피스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녀가 바르바토스에게 왔다. “아, 아……아…….”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가락은 미처 흐르는 눈물을 다 가리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는 양의 눈물이 손가락 틈새로 계속해서 흘렀다. 사실 바르바토스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마왕은 마족의 심리를 느낄 수 있었다. 접견실에서 라피스와 마주한 순간부터, 이미 모종의 불길함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도리어 쾌활하게 행동했다. 그렇다. 알고 있었다. 꼭두새벽에 단탈리안의 재상이 급히 찾아올 만한 일이 무엇인지. 왜 라피스가 자신을 보며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가 죽어버렸다. “으, 아……아아…….” 조금씩, 절규가 토해졌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수확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결코 죽음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누구보다 죽음을 원망했고 두려워했기에, 역설적으로 흑마법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왕이니까, 언제까지나 곁에 함께해줄 것이라 믿었다. 가장 죽음에서 멀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유언……유언은……?” “마지막 전언을 남기실 틈도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라피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그녀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두루마리를 바르바토스한테 바쳤다. “하지만 단탈리안 님께서는 항시 유언장을 품에 이고 다니셨습니다.” “그런 거 들은 적 없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엔 바르바토스 전하께 전해드리라고……소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다물었다. 단탈리안은 자신의 죽음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그녀를 선택한 것이었다. 건네받은 두루마리의 무게에 바르바토스는 손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즉, 이것은 자신의 남자가 최후의 최후에 가서 남긴 것. 바르바토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닦아봤자 별 쓸모가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닦아냈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눈으로 단탈리안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 싶지 않았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약간 엉망인 필체로 유언이 적혀 있었다. 「이 유언장이 공개된다는 것은 본인이 예기치 못하게 죽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삶에 대해서는 변명할 거리가 없다. 다만 애처롭게도 삶이란 혼자서 펼치는 일인연극이 아닌지라, 내 초라한 무대에 때로는 우연하게, 때로는 우연치 않게 초대된 손님들이 있다.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작별인사를 대신한다.」 이후로 이름들이 언급되었다. 라피스 라줄리, 라우라 데 파르네세, 데이지, 제레미, 가미긴, 파이몬, 시트리…….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나의 가장 충실한 친우이다. 내 삶에 허락된 모든 애정과 우정을 그녀에게 바친다. 바르바토스. 너는 어딘지 여린 구석이 있어서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분명히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주제에 속으로 별 염병을 떨 것이다. 이 염병의 구체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의 처방전을 따라주길 바란다. 첫 번째. 나에게 혹시나 못해준 것이 있었는가 걱정하지 말도록. 너는 나에게 항상 필요 이상의 애정과 이해를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보증한다. 두 번째. 어쩌면 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걱정하지 말도록. 너의 삶이 온전히 너의 것이듯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내 소유물을 존중하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너라면 알아줄 것이다. 세 번째. 정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인 것 같지만, 행여나 순결 같은 관념을 지키겠답시고 갑자기 색욕을 끊어버리지 말도록. 이미 죽어버린 나에게 부당한 책임을 짊어지우는 일이다. 결단코 말리고 싶다. 사자(死者)를 존중해라.」 그걸로 끝이었다. 사랑한다든지, 힘내라든지, 그런 사소한 말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욕설을 퍼부었다. 바르바토스는 어째서 단탈리안이 그렇게 유언을 남겼는지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나쁜 새끼……개 같은 새끼…….” 눈물을 닦은 것이 무색하게, 다시 울음이 나왔다. 그녀가 두루마리를 꾸욱 접으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한테도, 슬퍼할 권리가 있다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라피스는 끔찍한 나날을 감내했다. 바르바토스가 장례식을 지휘했지만, 사무적인 일처리의 대부분은 라피스에게 맡겨졌다. 라피스 본인이 강력하게 소망했다. 주군의 죽음을 다른 사람한테 완전히 떠맡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장례식은……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라피스는 단지 단편적인 기억만을 갖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황궁에서 황제의 예우로 치루어진 장례식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 징그럽게 많은 숫자의 사람이 기억을 방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나 최악의 순간은 마왕 가미긴이 관에 들러붙었을 때였다. “아아아악! 아아, 아, 흐아아아――!” 가미긴은 처절하게 절규하며 단탈리안의 관을 부둥켜 안았다. 마력에 담긴 목소리는 황궁을 뛰어넘어 온 도시에 울려퍼졌다. “죽여버리겠어! 다 죽여버리겠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무엇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마왕씩이나 되는 인물을 말릴 수는 없었다. 가미긴은 한 시간이 넘도록 울다가 지쳐 제풀에 떨어졌다. 지옥처럼 끔찍한 비명이었다……. 그날부터 모든 것이 망가졌다. 라우라, 가미긴, 이바르, 세 사람이 광기를 주도했다. 라우라는 장례식이 열린 그날밤에 바로 데이지를 처형했다. 주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차마 라피스가 말릴 틈도 없었다. 라우라의 칼이 데이지의 목을 베었다. “주군이 없는 곳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라우라.” “당연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피 묻은 칼을 닦아내며 섬뜩하게 미소를 지었다. “주군이 계신 곳으로. 허나 맨손으로 가서야 주군도 섭섭하겠지.” 라우라는 마왕성에 남겨진 모든 몬스터를 이끌고 떠났다. “…….” 라피스에게는 그녀를 말릴 힘도, 의지도 부족했다. 직후에 라우라는 가미긴에게 투신했다. 두 사람이 사전에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이 대륙에서 단탈리안의 복수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인물들이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가미긴은 곧바로 '세 번의 암살을 방조한 바타비아 공화국'에 선전포고했다. 중립파의 마르바스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가미긴은 단독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 배후에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있었다. 상회의 재력을 모두 투입할 기세로 이바르는 가미긴을 지원했다. 마족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최상급 용병들이 모여들었으며, 군세는 오만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라피스는 단탈리안의 영지에 홀로 남아 업무를 처리했다. 누군가는 주군의 유지를 이어나가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죽자 마왕성에서 마력이 사라졌고, 마력이 사라지자 마탑들이 미련없이 떠났다. 마탑이 사라지자 상회들이 철수했다. 영지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그럼에도 라피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땅에는 주군과 함께한 기억이 있었다. 추억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주군이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국무상서!” 집무실 문이 열리고 파르시가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정신없이 뛰어온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파르시는 여전히 자신을 국무상서라 불렀다. 이미 단탈리안 마왕군 따위는 공중분해해버렸는데도. 곰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의리가 있는 인간이다, 하고 생각하며 라피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 그게……파르네세 님이 이끄는 군이 패배했다고 하외다.” 라피스의 깃펜이 뚝, 하고 멈추었다. “자세한 정황은 소인도 모르오만……거 통령인가 뭐가 하는 군대에 매복을 당해서…….” “군무상서는 무사합니까?” “……소식이 없수다.” 사령관인 라우라의 소식이 없다. 달리 말해, 거의 확실하게 죽었다고 봐야겠지. “……알겠습니다. 조금 더 확실하게 알아보지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라피스는 직감했다. 자신이 단탈리안 님의 곁에 돌아갈 날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 Ending no.03(Dead Ending): <파멸>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엄-청나게 오랜만에 찾아온 베드 엔딩입니다. 베드 엔딩을 싫어하는 독자분이 많으시지만, 죄송합니다. 단탈리안을 죽이기에는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여신께서 저에게 '죽여! 그 녀석을 지금 죽여!' 하고 속삭이셨습니다. 신의 계시치고는 약간 과격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이런 시간입니다. 아마 신께서도 과다한 야근업무에 스트레스가 쌓이신 것이겠지요. HAHAHA.   00331 아네모네 향기 =========================================================================                        마왕 단탈리안 겸 합스부르크 제국 궁중백. 나에게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주어진 호칭은 이와 같았다. 여기에 작위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는데, 바로 튜튼 왕국의 공작이었다. 지난 외교전에서 영지를 튜튼 왕국에 바친 대가였다. 내가 마왕성에 도착하자마자 칙서가 도착했다. 갈색 수염이 멋들어지게 뻗은 사신이 칙서를 낭랑하게 읊었다. “단탈리안은 종족 간의 평화와 대륙의 안녕을 위해 그간 동분서주한 바, 튜튼 왕국의 주권자인 나 게오르그 빌헬름 알베르트 알렉산더는 그의 영지를 공작령으로 봉하며, 그 이름을 <대륙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커스토스(Custos)라 부를 것이다.” 공작령이라는 점에서 나는 살짝 놀랐다. 기껏해야 백작령에나 봉해주면 충분하고 넘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튜튼 왕실은 조금 다르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왕국의 백작으로 봉해본들 제국의 궁중백에 비해서 격이 떨어졌다. 외교에서도 왕국 백작보다는 제국 백작의 이름을 앞세울 터. 그렇지만 공작은 달랐다. 명예직에 불과할지라도 그 명예가 밥을 먹여주는 것이 지금 세상. 괜히 바르바토스가 아우스테를리츠 공작이라는 간지 철철 넘치는 칭호를 가져간 게 아니었다. 어차피 왕국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기로 비밀리에 약조해뒀으니, 튜튼에선 이왕 작위를 내려줄 거 때깔이나 화려하게 내려주자고 생각한 듯싶었다. “커스토스 공작 단탈리안에게 세 가지 특전을 하사하노라. 첫 번째, 과인을 알현할 때 이름을 고하지 않아도 되며, 두 번째, 의회에 입실할 때 왕가의 깃발에 경례하지 않아도 되며, 세 번째, 왕궁에 입조할 때 일체의 무구를 해검(解劍)하지 않는 것을 허한다.” 휘이, 하고 제레미가 휘파람을 불었다. 외교적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결례였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사신조차 덤덤했다. 여기 모인 사람 전원이 이것이 단지 허례허식임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석에서 내려왔다. 사신 앞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단탈리안 커스토스. 삼가 명을 받아 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이, 위로는 여신을 모시고 아래로는 신민을 보살피겠나니. 다만 이 명예는 오직 제 주인되시는 전하에게서 비롯함이라. 여신의 축복과 신민의 칭송이 전하에게 영원할진저!” 사신이 칙서를 건네주었다. 원래 이때쯤에 구경꾼들이 두 손을 치켜들어 만세를 삼창해야 했다. 하지만 라피스를 비롯한 간부진만이 성의없게 손뼉을 쳤다. 내가 영지민들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안 그래도 늦겨울이 한창이다. 추위 때문에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데 영주님의 행사가 있으니 모두 소집하라고? 그만큼 귀찮은 짓거리가 또 없다. 그냥 따스한 집안에서 부부끼리 꽁냥거리도록 내버려둬라. 정 축하하고 싶으면 마음속에서 기도를 올리든지. 나는 영지민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운 군주이다. “놀구 있네. 그럼 왜 소인은 불러재꼈소?” ……라고 자화자찬하니 곰탱이 파르시가 투덜거렸다. 봉공식이 끝나고 우리는 영지의 대공회당(大公會堂)에서 축제를 열었다. 돼지와 닭을 잔뜩 잡아다가 굽고 끓여대니,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마을주민과 고아, 가난한 모험자가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네가 단순한 영지민이느냐? 내 쫄따구지.” “아이고, 소인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여신께서 이리 박하게 대접하시나.” “사냥꾼이 영주대리로 출세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고.” 참고로 파르시는 점점 더 얼굴에 위엄이 붙었다. 스무 살에 불과한데도 실질적으로 영지를 관리했다.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파르시가 갑자기 눈빛을 부라렸다. 꼭 반달곰이 벌꿀이라도 발견한 기세였다. “마침 얘기가 잘 나왔수! 마왕 나리!” “일단 수염에 묻은 닭국물부터 닦고 말하려무나.” 너 정말 인간적으로 더럽다. “영주대리인지 뭔지 잘난 감투를 준 것은 그렇다 치겠소. 헌데 왜 소인에게 매파 한 명이 오지 않는 거외까!” “설마……너 아직도 약혼 안 했냐?” “약혼은커녕 추파를 던지는 처녀도 없수다!” 야생의 반달곰이 포효했다. “소인이 이래봬도 근력이 장사이고, 응? 숲에 나가면 사슴이든 토끼든 꼭 한 마리씩은 잡아오는 사냥꾼에다 한 마을의 촌장이고, 이젠 영주대리이기도 하지 않소. 그런데도 여자가 한 명 없다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약간 의외이긴 했다. 얘가 생긴 건 조금 거시기해도 제법 유능한 남자인데. 스무 살 주제에 면상이 무슨 사오십 대 아저씨처럼 생기긴 해도. 온몸에 털이 북실북실해서 인간이 아니라 어디 산골에 굴러다니는 오크처럼 보이긴 해도. 예법이라곤 쥐뿔도 몰라서 치킨 스프를 떠마시는데 아주 턱수염이 국물에서 자유영을 즐기는 수준이긴 해도. ……어라. 왠지 결혼하지 못하는 요소밖에 안 보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파르시, 너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신랑감이다만.” “이게 전부 루크 꼬맹이 때문이오.” 루크? 여기서 왜 루크 얘기가 나오는가. “그놈이 과년한 처자들은 죄다 후리고 다니는 것 아니겠소! 마을에 처녀란 처녀는 죄다 그놈이랑 거사를 치뤘거나 치룰 예정이라고 하니 도대체 여신들께서 그놈을 홀라당 불태워버리지 않고 뭐하시는 것인지!” “아.” 루크가 희대의 바람둥이가 되었다는 소문은 여러 번 들었다. 이제 열네 살 열다섯 살인 주제에 색욕의 화신이 되어 여자들을 사냥한다지, 아마. 슬쩍 고개를 돌려서 공회당 저편을 바라보니, 루크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루크는 원래 게임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당연하게도, 화전촌 출신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미모가 빼어났다. 그리스 조각상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곱슬머리, 매끄러운 이마, 오똑한 콧날. 쾌활하면서도 언제든 진지해지는 혁명가의 눈동자. 입가에는 당신에게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는 듯 특별한 기운이 희미하게 감돌았고, 변성기를 지나쳐온 목소리는 기분 좋은 중저음을 만들어냈다. 몇 년 동안 제레미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 밤일까지 능숙했다. 심지어 마왕인 나의 총애를 받아 영지 자경단에서 부단장을 맡았다. 열다섯 살 주제에. 음. 그림으로 그려낸 먼치킨이로군. 우리 영지의 처녀들은 어릴 적부터 저런 루크를 보고 자란 것이었다. 평범한 남자로는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앞을 쳐다보았다. 반면에, 소위 루크의 대항마라 할 수 있는 파르시는……. “뭐요? 왜 이상한 눈으로 소인을 쳐다보오?” 온몸에 털이 복실하다 못해 적이 부담스러운 곰탱이가 한 마리. ……이 마왕님이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는구나. “나리. 이대로 총각으로 살다 죽게 생겼수.” 파르시가 절박하게 애원했다. “소인이 뒈질 때 뒈지더라도 토끼 같은 딸내미는 품에 안아보고 황천길에 들고 싶소! 제발 어디 먼 곳에서 소인의 단짝 좀 알아주십쇼!” “파르시. 너의 영주가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서 충고해주마.” 나는 파르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포기하면 편하다. 그 왜, 비미날레 언덕에 창관이 으리으리하게 들어서지 않았냐. 거기서 애인이나 두어 명 사귀어서…….” “으아아아아!” 파르시가 결국 광분을 토해냈다. 동정의 분노였다. 그렇다. 동정이었다. 파르시는 저렇게 생겼으면서 의외로 정조관념이 투철해서, 첫경험은 부인이 될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고집했다……불쌍한 녀석. 고생을 사서 하는군. 그때, 옆에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민에게 공공연히 유곽을 권고하는 군주라니. 도덕이 땅에 떨어졌군요.” 자클린 롱그위 성녀였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 떠들썩하게 대화하는 도중에 방해받은 기분이라,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잔치는 잘 즐기고 있습니까.” “예. 주인의 됨됨이에 비해서 영지민이 무척 유쾌하고 신심이 깊은 곳이라 놀랐습니다.” 이 아가씨는 파르시가 보는 앞에서 왜 이러는가. 대외적으로 성녀와 나는 굳건한 혈맹으로 맺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파르시가 가신이라 해도 사이 나쁜 모습을 보여서야 위험했다. 내가 맹렬하게 눈짓을 보냈다. 롱그위 성녀는 딴청을 피우며 파르시한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르시 님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아테나 여신님을 모시는 자클린 롱그위라고 합니다. 파르시 님은 젊으신데도 불구하고 영지 전체의 대소사를 중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소부터 그 위명을 익히 들어 흠모했어요.” “흐, 흐, 흠모라니요?” 파르시가 화들짝 놀랐다.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정 녀석. 예쁘장한 미인이 칭찬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고 아주 천둥벌거숭이가 되는구만. “당치도 않습니다! 소인은 그저 단탈리안 나리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낮추십쇼, 성녀님.” “후후. 본의 아니게 전하와 나눈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성녀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걸 파르시가 머엉하게 지켜보았다. 아이고. 저거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 “소녀 또한 결혼 이전에는 마땅히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파르시 님께서는 인세의 책무를 훌륭하게 이행하실 뿐만이 아니라 신들께서 우리에게 내려준 의무에도 충실하시니, 저도 모르게 감탄했어요.” “저기. 소인은, 그러니까…….” 파르시는 볼이 빨개지다 못해 얼굴 자체가 사과가 되어버렸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 하고 말했다. “초, 촌장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파르시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맙소사. 파르시, 정말로 그게 최선의 핑계거리였냐. 네 두뇌는 그보다 조금 더 괜찮은 변명을 생산하지 못한 거냐. 주군으로서 매우 부끄럽구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순수한 청년을 괴롭히니 즐겁습니까?” “당신 같은 마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즐겁네요.” “쯧. 파르시는 건들지 마십시오.” 롱그위 성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른 척하는 것인가. “행여나 파르시를 브르타뉴의 앞잡이로 키울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파르시가 순둥이로 보여도 나 단탈리안이 영주대리로 임명한 남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고.” 내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파르시가 정말로 결혼을 못해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르시가 마을의 유력자 가문과 혼인해버리면 해당 마을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순결을 지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하소연하던 건…….” “외부에서 짝을 찾아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아무런 연이 없는 곳에서 아내감을 찾아달라. 파르시는 장난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그건 원래 녀석의 성격이었다. 유력자 집안과 결혼하기는 싫다. 평범한 마을주민과 결혼하고 싶은데, 그런 집안의 처녀는 죄다 루크한테 홀려 있다. 억울하다. 자기가 못난 게 뭐냐……얘기의 맥락은 그러했다. “'어디 먼 곳'에서 단짝을 물색해달라고 말했지요. 우연히 튀어나온 단어가 아닙니다.”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롱그위 성녀는 나를 따라서 영지에 왔는데, 여기엔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나에게 멋대로 휘둘리느니 차라리 옆에 바짝 붙어서 날 감시하겠다는 의도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지시했겠지. 대외적으로는 우리 영지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짓고 거기에 성녀가 부임하는 식이 되었다. 나야 성녀씩이나 되는 종교적-정치적 상징물이 제 발로 찾아온다니까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까 전에 파르시한테 은근슬쩍 추파를 던진 것도 그렇고, 내 영지에서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건드리고 싶겠지. 얕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아무나 가신으로 삼지 않는다. “뭐, 우리는 성녀를 환영합니다. 오늘만큼은 모략을 잊고 즐기십시오. 그리고 영지민을 축복해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역할입니다.” “……좋아요.” 내가 술잔을 내밀었다. 거기에 쨍, 하고 성녀가 조심스레 유리잔을 부딪혔다. “여신의 광명을 위하여.” “신민의 안위를 위하여.” 나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회당을 둘러보았다. 문득 간부진 중에서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크를 본 덕분에 알아챈 것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데이지가 안 보이는군.   00332 아네모네 향기 =========================================================================                        데이지는 성녀의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들었다. 성녀가 쾌차했으니 진즉 본래의 업무에 복귀해야 마땅했는데,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재수없는 꼬맹이는 병문안을 온 적도 없었다. 나는 자뭇 불쾌함을 느끼면서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님에게 시종 한 명이 대동하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되는군요.” 딱히 데이지한테 문안 인사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병상에 쓰러진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데이지를 보지 못한 게 처음이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워낙에 속이 시커면 녀석이라서. 어디서 뭘 꾸미고 있는지, 원.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과 얘기하려고 일부러 떨어트리고 온 거니까요.” “제가 보낸 시녀는 항시 데리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밀담을 엿들어도 좋은 아이입니다.” 그러자 성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라니요? 누구를 가리키는 거죠?” “……일전에 흑발의 여자애를 병시중으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제 양녀입니다.” 성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흑발의 여자애라면……아아. 그 아이 말인가요. 잠깐 며칠 정도 제 수발을 들다가 다른 하녀로 교체되었는걸요. 그때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얘기를 나눠볼 틈도 없었고요.” “……듣지 못한 이야기군요.” “그거야 당신은 아예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요. 시녀장에게 물어봄은 어떤가요.” 그 아이가 시녀장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다 목구멍으로 삼켰다. 성녀는 든든한 협력자이기도 했지만 잠재적으로는 브르타뉴의 세작이었다. 이쪽에서 제 발로 정보를 풀어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성녀와 적당히 헤어지고 루크한테 다가갔다. 내가 모습을 비추자 루크를 둘러싸고 있던 일단의 마을 소녀들이 황송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루크는 자경단원이었으므로, 가슴팍에 오른주먹을 갖다올려 군례만 올렸다. 내가 한껏 자상한 대부를 흉내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루크가 인기가 많군. 곁에 있는 아가씨들이 모두 꽃처럼 아름다우니.” 허리를 숙인 채로 소녀들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대륙에서는 모욕하는 자라느니 겨울왕이라느니 하나같이 흉흉한 별명으로 불리는 나였지만, 영지민들에게는 함께 밀밭을 일구는 농사꾼 영주였다. 루크도 이제 애송이 티를 많이 벗은지라 공손하게 대답했다. “전하의 주변에야말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니, 감히 소인이 대적할 길이 없습니다.” “축제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는 법이야. 주군이 아니라 대부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 네, 아버지!” 소년이 활짝 웃었다. 열다섯 살, 루크는 한창 심장이 정의로 두근거리는 나이였다. 소년의 이성은 파괴적이지만 애매한 안개에 끼어 있었다.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 또한 무엇이 위선인지 깨달을 정도는 되었으나,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의 정체를 꿰뚫어볼 수준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 눈앞을 보지 못하면서 먼 미래만을 내다보는 자. 이런 사람에게는 초점이 없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믿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믿으며, 사실은 눈앞의 사건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지도자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광신도 돌격대장으로 삼기에는 제격이다. 제 누이보다 한참 못한 것. 비웃음이 밀려왔지만 차가운 비아냥이 아니었다. 가슴이 따스해졌다. 귀여운 병정인형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루크. 혹시 데이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느냐?” “어…….” 루크의 안색이 곤란해졌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는 전혀…….” “아니. 괜찮다. 요새 통 보이지 않길래 너희 부모님 댁에 갔나 싶었다.” 라피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넘어가려는데 루크의 몸짓이 눈에 밟혔다. 조금 과도하게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이럴 때 윽박지르면 상대방은 오히려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아름다운 프로이라인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아도니스를 잠시 나에게 빌려주지 않겠나.” 마을 처녀들이 꺄르르 웃으며 뒷걸음질하여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루크와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해도 기꺼이 경청하겠다, 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저어, 하고 루크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사실 데이지가 저희 집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됐어요.” “오래되다니. 얼마나?” “이 년……아니, 거의 삼 년 정도요.” 나는 놀랐다. 이 년에서 삼 년이면 거의 영지에 정착했을 때부터 발길이 뜸하다는 소리였다. “이상하구나. 데이지는 항상 휴가를 꼬박꼬박 받아갔다. 그때마다 집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었느냐?” “처음에는 그랬지만요. 으, 이거 데이지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루크가 곱슬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년쯤 됐어요. 데이지가 저희 가족이 다 모인 곳에서 갑자기 절연을 선언했어요. 자기는 이제 부모님의 딸도 아니고, 제 여동생도 아니라고…….” “허어.” 흥미가 들었다. 데이지의 심리가 손바닥 눈금 들여보듯 훤했다. 직접 살결을 맞닿은 것이 아닐지라도 간접적이나마 데이지는 친오라비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 더 이상 어떤 얼굴로 부모님과 오빠를 봐야 하는지 몰랐겠지. 그렇기에 절연을 선언했으리라. 이렇게 재미난 사건을 그간 숨겨왔다는 것인가. 데이지 녀석, 양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눈꼽만치도 없군. 내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를 꾸며냈다. “대체 어찌된 일이더냐.”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당연히 부모님들은 노발대발해서 무슨 말이냐고 혼냈지만……아시잖아요. 걔가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못 당하는 거요.” 루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머니가 울면서 제발 이유라도 말해달라 애원했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더라구요. 결국 아버지 쪽에서 너 같은 딸내미는 필요없다고 먼저 쫓아냈어요. 어휴, 정말 무슨 생각인지.” 바로 너 때문이란다, 루크. 나는 마음속으로 히죽 웃었다. 데이지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 작업은 내 눈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던 모양이었다. 데이지는 지킬 것이 있으면 놀랍도록 악독해지는 소녀였다. 마을사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작 10살 무렵 내 앞에 나섰다. 자존심을 지키고 복수하기 위해서 나를 암살하려 들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웬만해서 제어할 수 없었다. 유일한 해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지옥까지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 쓰레기이며, 무언가를 지킬 자격도 없고, 무언가에 의해 지켜질 자격도 없다……그렇게 질척한 자괴감이 필요했다. 마음이 썩어서 문드러지게끔. 오라비와 간접적으로 성교를 시키고 포로들의 고문을 일임했다. 악독한 짓거리 중에서도 가장 질나쁜 업무만을 맡겼다. 장차 영웅이 될 소녀가 어둠에 잠식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불쌍한 마음은 일절 들지 않았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려면 상대보다 내가 강하거나 적어도 동급이어야 한다. 나는 데이지를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내가 열 살 때 얼마나 어리버리한 꼬마였는지 떠올려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마왕이며, 데이지는 용사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소녀이다. 방심하면 이쪽이 물린다. “알겠다. 이미 늦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찬찬히 얘기해보마.”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루크가 애절한 얼굴로 말했다. “데이지는 제 소중한 가족이에요. 부모님에게는 당연히 둘도 없는 딸이고요.” “나에게도 데이지는 하나뿐인 양녀란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두렴.” 루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헤헤, 하고 루크가 방실거렸다. 투명한 사육장에서 길러지는 햄스터처럼 귀여웠다. “라피스. 이리로.” 나는 루크를 보내고 라피스를 불러들였다. 촌장들과 무언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는데, 내 부름을 받자 촌장들한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걸어왔다. 라피스는 모든 간부진의 일정을 꿰고 있으니 쉽게 의문을 해소해줄 터였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데이지를 골려줄까. 슬라임 오나홀을 슬슬 두 개로 들리는 방안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배덕감도 두 배, 자괴감도 두 배. 합쳐서 네 배의 효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엄청나군. 난 천재였다. 라피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단탈리안 님.” “응. 내가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니겠지?” “시덥잖은 잡담밖에 나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촌장들을 까내렸다. 라피스다운 언사였다. 내가 장난기를 섞어 투덜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요즘 데이지가 보이지 않는걸. 성녀한테 시종으로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라 하고, 제 부모님이랑 같이 있는가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네. 어디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거야?” “…….” 라피스가 별안간 침묵했다. 얼굴에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다년간 라피스를 관찰해온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피스는 지금 무표정하게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라피스 전문 감별사인 내가 보증하는 것이니 틀림없었다. “라피스?” “……단탈리안 님께서 병상에 누워계신 시간이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신단 내에서 동요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라피스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서 속삭였다. 다소 불길했다. 내 질문에 라피스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에둘러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문직답이 라피스가 내세우는 화법이었는데, 이는 그녀의 원칙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나는 곧바로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의 마법을 발동했다. 반경 3미터 가량에 장막을 둘러쳐 소리를 엉망으로 굴절시키는 마법이었다. 이로써 행여나 목소리가 새어나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눈초리를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계속 말해. 한점의 누락 없이.” “단탈리안 님께서 반드시 쾌차하리라 믿는 가신도 많았습니다만, 만약의 사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떠는 가신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겁쟁이로군.” 싸늘하게 비웃었다. “나를 믿지 못하고 걱정함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걱정함이다. 나를 잃어버리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지, 어떻게 몰락할지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니 내 가신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군무상서가 특히나 심각했습니다.” 내가 멈칫했다. 뭐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는 의미로 기이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라우라는 우리 중에서도 발군의 정신력을 자랑한다. 나보다 윗줄이야. 뭘 잘못 파악한 것 아니야?”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각오를 정한 눈빛으로 나를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보고드리고 싶은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고함을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가신들이 단탈리안 님께 내비추는 모습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단탈리안 님께 쓸데없는 심려를 끼쳐드리기 싫었습니다. 내궁(內宮)은 제가 통제할 수 있고, 또한 통제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판단이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입이 벌어졌다. 라피스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었다. 자책하고 있었다. 그 뚜렷하면서도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이 나한테 뚜렷하게 전달되었다. 나는 경악과 더불어서 분노에 휩싸였다. 무엇이 라피스를 절망하게 만드는가. “……데이지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어. 데이지는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라피스가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숙였다. 차마 면목이 없다는 듯이. 라피스가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단언컨대 한번도 없었다. 내 위장에서 순식간에 노기가 격화되어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나의 군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00333 아네모네 향기 =========================================================================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분노가 얼굴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얼마나 버틸지 몰랐다.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저기 승냥이 같은 성녀가 냄새를 맡겠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데이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예.” 라피스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화를 내장에 도로 집어넣고 어깨를 두들기자, 그제서야 라피스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대공회당에서 빠져나와 마왕성으로 향했다. 몇몇 간부가 우리를 눈치채고 따라오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마왕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간부진의 숙소가 마련된 지하 10층이 아니라 생뚱맞게 지하 9층으로 이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여기는 데이지의 방이 없어.” “…….” 그렇군.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자기 숙소에서 격리까지 당했다 이거지. 나는 그만한 조치를 당한 데이지에 관해서 단 한 장의 보고서도 받지 못했고. 점입가경이로군. 정점은 라피스의 발길이 멈춘 순간이었다. “이곳입니다, 단탈리안 님.” 내가 말없이 눈앞을 바라보았다. 라피스가 멈춰선 곳에는 철창으로 된 문이 하나 있었다. 건축업자들이 대충 작업해놓은 것이 빤히 보일 정도로 벽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동굴이나 다름없었다. 지하감옥. “이……이……!” 나도 모르게 이빨을 갈았다. 목에서 핏대가 뻗쳤다. 라피스가 자물쇠를 여는 것과 동시였다. 쾅, 하고 나는 철창을 걷어치웠다. 감옥에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동굴벽에 쉼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감옥 안은 불길한 습기로 먹먹했다. 그곳에 데이지가 걸려 있었다. 구역질 나리 만치 짙은 혈향을 풍기면서. “…….” 너무 분노한 나머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데이지는 십자가 형에 처한 사람처럼 벽에 사지가 묶였다.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몸을 가려주는 천조각 하나 없었다. 새하얀 살결에 흉측한 상처들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상처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끊임없이 채찍을 내리친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어느 상처는 핏덩어리와 함께 검붉은 딱지가 징그럽게 굳어졌다. 어느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아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인간이라기보다 차라리 넝마에 가까웠다. “……설명해라, 라피스.” 라피스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녀장이 암살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간부진 일부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고하라!” 내 목소리가 지하감옥을 강하게 때렸다. 마왕의 마력이 담긴 사자후였다. 동굴벽이 가볍게 진동했다. 라피스가 고개를 더더욱 낮게 숙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와 이바르 로드브로크 시녀입니다. 특히 군무상서는 시녀장이 독약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여, 전하께서 의식이 없는 동안 시녀장에게 개인적인 처벌을…….” “감히!” 내가 고함을 터트렸다. “감히 군부의 수장이 내궁부의 일원을 사적으로 처벌하다니!” “성녀의 병시중을 들던 데이지를 비밀리에 불러들여 암스텔의 모처에 감금하였으며.” 라피스의 말이 빨라졌다. 내가 완전히 폭발해버리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주려는 것이었다. “이후로는 마왕성으로 이송하여 지하감옥에 투옥, 채찍질과 담금질을 비롯하여 각종 고문을 가하였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으니 비밀로 부쳐둘 것을 각 간부에게 청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라우라!” 나는 분노로 포효했다. 시녀장이자 양녀인 아이가 반시체가 되어 걸레처럼 벽에 널렸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신은 차가운 동굴바닥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청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던 장군이, 언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던 충신이 나를 기만했다. 내 머리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장, 가신단을 여기로 불러모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루크를 제외하고! 이번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새끼도! 한 명도 남김없이, 당장!” 라피스가 감옥에서 나갔다. 나는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들어 데이지의 상처에 바르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상처가 치유된 모습을 가신들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참담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일까. 데이지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아, 버님……?”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단지 허덕임에 불과했다. 나는 이빨을 바득 갈았다. “멍청한 년, 평소에 가신들한테 얼마나 밉보였으면 네 년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느냐. 국무상서마저 침묵했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온몸이 피멍으로 범벅이 된 와중에도 강한 척인가. 어이가 없었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작은 몸짓 하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머리와 목이 떨렸다. 초췌하고 또한 처참했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초점이 흐릿했으며 입술은 핏물로 터졌다. “제기랄. 젠장……!” 육두문자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데이지를 숭고한 피해자 따위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데이지를 향한 악의는 오로지 나한테서 비롯해야 했다. 이 여자아이는 나의 작품이었다. 내가, 다만 나의 손길에서 태어나는 악의 꽃이었다! 데이지가 세계에 대해 지니는 악의는 오직 나에 대한 악의여야 한다! 그녀에게 허락된 세계는 나밖에 없다……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이 아이는 나의 것이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증오하고, 나를 통해서 복수가 무엇이고 관계가 무엇인지 배우며, 그리하여 이 아이를 통해서만 나는 온전히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 이 아이는 나의 산 증인, 유일한 변호사, 유일한 판사이고, 마지막에 가서는 나를 대리할 인간이다! 나의 작품을――. 내 숭고한 심판자를, 제멋대로 다루다니! “…….” 소리없이 끓고 있는 나를 데이지가 힘겹게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왜 웃느냐는 식으로 노려보자, 데이지는 마치 땅바닥에 내던져진 물고기가 아가미로 호흡하는 것처럼 띄엄띄엄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님……뭘 생각하는지, 너무 빤해서…….” “…….” “그런 생각을……말로 주고받지 않아도……알아들어……우스워…….” 나는 데이지의 입을 조용히 손바닥으로 가렸다. “복수를 행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아.”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숨소리를 남기고 데이지의 고개가 떨어졌다. 혹시나 싶어서 맥을 짚어보았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괜찮았다. 데이지는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술도 겪었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간부들이 속속 감옥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데이지의 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키는 간부도 있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기만 하는 간부도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인물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전원.” 와야 하는 사람이 모두 오자 내가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어라.” 명령과 동시에 가신들이 동굴바닥에 부복했다. 라피스, 라우라, 파르시, 제레미, 이바르, 총 다섯 명이었다. 저 멀리서는 블링이와 요정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라피스.” “예, 전하.” “고개를 들어라.” 라피스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차악,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라피스가 바닥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라피스 본인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단지 주변에서 경악에 잠기는 숨소리가 들렸다. 라피스가 나의 총애를 거의 독차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라피스를 때린 것이었다. 다른 가신들은 차마 입도 뻥긋거리지 못하고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일어서라.” 라피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곧바로 뺨을 때렸다. 라피스의 몸이 비틀거렸다. 냉혹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일어서라.” 반복. 라피스는 한 번도 신음을 뱉지 않았고, 나 역시 건조한 명령 이외에는 어떠한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끔찍한 폭행의 소리만이 지하감옥을 을씨년하게 울렸다. 정확하게 서른 번을 때리고서 손을 거두었다. 봐준 것은 없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라피스의 뺨을 쳤다. 그건 라피스의 어깨가 소리없이 떨리는 것만 보아도 명확했다. “국무상서는 내궁을 철저히 감독하여 각 부서끼리 월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방치, 군무상서의 독단을 제지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무겁다. 국무상서의 녹봉을 이 년 감한다.” “너그러운……처벌에, 감사드립니다…….” 라피스가 떨리는 몸으로 허리를 숙였다. 두 다리가 그녀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침묵과 공포가 감옥을 짓눌렀다. 나는 어느 때보다 차가운 혓바닥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예, 주군.” “마지막으로 변호하라.” 라우라가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천녀는 대역죄를 범하였나이다.” “좋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레미. 죄인을 천장의 사슬에 매달아라.”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레미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일절 없었다. 표정과 말투, 몸짓, 모두 감정이 거세된 암살자의 것이었다. 제레미는 즉각 일어나서 라우라의 두 손을 사슬에 묶었다.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라우라는 천장에 매달렸다. “군무상서는 과인이 묻지도 않은 죄를 감히 독단으로 판단하여 시녀장을 문책하였다.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율법을 어겼으며, 과인의 의중을 멋대로 짚었으니 군신의 도리를 어겼고, 타 부서의 장을 처벌함으로써 국본을 어지럽혔다.” 나는 감옥 한켠에 준비된 채찍을 쥐어들었다. “이에, 라우라 데 파르네제를 군무상서에서 파하고 백의종군을 명하는 바. 편형(鞭刑) 삼십 대에 처한다.” “저, 전하!” 파르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중에서 선처를 요구해도 괜찮을 정도로 연관이 없는 사람은 파르시 한 명뿐. 다른 간부진과 다소 동떨어져 영지를 감독하는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막역한 친구마냥 대화하던 파르시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예법에 따라 고했다. “아녀자의 몸으로 편형 서른 대는 감당하기 어려운 처벌이옵니다! 차라리 소신들 전원을 균등하게 벌하여주시옵소서!” “그대들 전원을 반 년의 감봉에 처한다. 허나 죄인에게 감형은 불가하다.” “전하!” 파르시가 고개를 들었다. “……!” 시선을 마주친 순간, 파르시는 동작이 멈추었다. 우악스러운 얼굴이 무언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듯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파르시는 내 눈가를 잠시간 멍하게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채찍을 단단하게 쥐었다. “죄인의 등을 드러내라.” “예.” 제레미가 라우라의 상의를 벗겼다. 새하얀 목덜미와 등이 드러났다.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눈 여자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 채찍이 바람을 날카롭게 갈랐고, 살갗이 파이는 소리가 터졌다. 라우라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채찍을 가했다. 두 대째에 이미 피부가 완전히 터졌다.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새빨간 핏물이 튀었다. 그 핏물을 내 얼굴로 받으면서 나는 팔을 휘둘렀다. 아홉 대를 때렸을 때 라우라가 혼절했다. 나는 제레미에게 눈짓했다. “깨워라.” 제레미가 라우라에게 찬 물을 쏟아부었다. 물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라우라가 강제로 의식을 차렸다. 나는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라우라는 일곱 번 정신을 잃었다. 등 근육이 모조리 넝마짝이 되었다. 피가 피를 씻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숨이 헐거웠다. 라피스와 라우라를 연속으로 처벌한 내 체력은 바닥을 찍었다. 그만큼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음이라. 내가 숨을 헐떡이며 얘기했다. “신하가 잘못을 저지름에 있어 그 책임은 군주에게 있다. 나 단탈리안은 직무에 어울리지 않는 인재를 군무상서라는 요직에 올렸으며, 국무상서가 죄를 저지름에도 알아채지 못했고, 시녀장이 고문을 당함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제레미에게 채찍을 건네주었다. “과인이 과인에게 형벌을 정함이니. 자경단장은 지금 즉시 과인에게 편형 예순 대를 집행하도록.”   00334 아네모네 향기 =========================================================================                        지하의 감옥에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제레미조차 표정에 금이 갔다. 제레미는 나에게 건네받은 채찍을 받아든 채로 석상마냥 꼼짝을 못했다. 미약하게 감정이 느껴져 전해왔다. 하기 싫다, 거부하고 싶다……. 상관의 명령이라면 자살마저 행하는 암살자에게 있어 그것은 사실상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나는 엄하게 제레미를 노려보았다. “자경단장은 즉시 명을 집행하라.” “옥체를 상하게 할 수는…….” “천치 같으니. 과인이 정녕 마물에게 명령을 내려야겠는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제레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지져진 제레미였지만, 지금만큼은 감정의 동요가 그대로 표면에 드러나고 있었다. “병상에서 쾌차하신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경단장이 아니라 전하의 어의로서 간청드립니다. 편형 예순 대는 너무나 과한 형벌입니다. 이것은 충심에서 간언하는 것이 아니오라 순전히 약사이자 의사로서 내리는 판단입니다. 전하, 부디 자비를…….” 내가 냉소했다. “한 번만 더 대꾸하면 그때는 마물을 동원하겠다.” “…….” “정신을 잃으면 찬물로 깨울 것이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방금 전 죄인에게 가한 것과 한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과인에게도 행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나는 제레미뿐만이 아니라 가신들 한명한명에게 엄포를 놓았다. “형벌이 도중에 중단되거나 방해받을 때마다 열 대의 편형을 더한다. 예순 대가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과인과 제레미를 방해하지 못한다.” 제레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나는 망토를 풀어서 바닥에 허물었다. 튜튼의 사신을 맞이하느라 쓸데없이 격식이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다. 가미긴이 직접 선물한 붉은색 현장(懸章)을 훌러덩 벗었다. 꼭 허물을 한 겹씩 벗는 것처럼. 마침내 윗옷을 전부 풀어헤치자 상반신이 드러났다. 조용히 동굴바닥에 정좌했다. 등 뒤로 제레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시행해도 좋겠습니까.” “아아. 그대의 임무를 한시도 잊지 마라.” 입안에 고무를 물었다. 식도로 침이 흘러내렸다. 곧 엄습할 고통을 예감했는지 살갗이 불안하게 따끔거렸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사사로이 율법을 어겼으니 라우라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사형을 대신하는 처벌이나 다름없었다. 제레미는 자비를 요구했으나 한참 모르는 소리. 이미 편형으로 사형을 대신하는 것 자체가 자비였다. 가신단을 대표하는 라피스를 먼저 처벌하고, 라우라에게 편형을 가하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다. 라우라보다 직분이 높은 재상과 왕이 나란히 죄과를 나누는 셈이다. 아슬아슬하게 사형을 면할 수준이 된다. 물론, 나의 신체가 편형을 버틸지는 의문이다. 평소에도 저질 체력이거늘 지금은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형에 버금가는 처벌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당연한 것은 당연히 실행해야 한다. 그뿐이다. 그리고. ――격통이 척추를 내달렸다. “크으으으읍……!” 눈이 번쩍 뜨였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등줄기에 쇄도했다. 짜악, 하는 채찍질 소리에는 살뭉텅이가 찢어지는 감촉까지 더해졌다. 나는 이빨을 악 물었다. 미리 입안에 고무를 물지 않았더라면 고작 다섯 대쯤에서 이빨들이 뭉텅 상했으리라. 두 대째. “흐크으으읍! 끄윽……!” 미친 듯이 아팠다. 화살에 허벅지가 맞았을 때보다,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을 때보다, 겨우 두 번의 채찍질이 압도적으로 고통스러웠다. 등짝에서 무언가 기포 같은 것이 부글거렸다. 아마도 핏물이겠지. 세 대째. 네 대째. 다섯 대――. 눈알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식도가 조여들어 무언가가 역류했다. 숨이 막혔다. 채찍질과 채찍질 사이에 필사적으로 숨을 헐떡였다. 이빨이 혀끝을 스쳤는지 입안에서도 피냄새가 맡아졌다. 비릿했다. “……주……군?” 채찍 소리에 의식이 든 것일까. 천장의 사슬에 양팔이 매달린 라우라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저편에서 라우라가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미 시야의 초점이라는 게 불분명했다. 단지 라우라를 비롯해서 희끄무레한 풍경이 비출 따름이었다. 라우라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틈에 나의 형벌이 결정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라우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데엔 단 십 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짜아아악! 내 몸이 들썩였다. 간신히 정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팔이 정신없이 후들거렸다. 이번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헛구역질 비슷한 무언가가 흐읍, 하고 목구멍에서 기어올랐다. “아, 아……? 으……?” 라우라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그것과 상관없이, 일곱 번째의 채찍질이 내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내장이 비명을 질러댔다. 살이 아프다는 느낌 따위가 아니었다. 근육이, 뼈 자체가 고통으로 파열되었다. 희생 없는 대가는 없어야 한다. 얼치기 처벌이 허용되면 국정은 소리 소문 없이 녹슬어버린다. 사람이 희생하지 않는 대신에 국본 자체가 희생된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가신들도 조금만 머리가 식혀지면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절차임을 쉽게 깨닫겠지. “아, 아아! 아아아아!” 라우라의 녹색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야 사태를 이해했을까. 그녀는 입을 벌렸다. 지나친 충격에 미처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단지 짐승처럼 폐부를 쥐어짜냈다. 그리고, 여덟 대째. “아아아아악! 무슨 짓을――주군에게 무슨 짓을!” 라우라가 온몸을 흔들었다. 천장에 묶인 사슬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서른 대의 편형을 맞아 반시체가 된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라우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발버둥쳤다. “그만해! 당장 그만둬! 제레미 경! 그만, 제발 그만……!” 아홉 대째. “아아악! 감히 주군에게! 나의 주군에게, 무슨 짓을!? 죽여버리겠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자경단장!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아, 아, 아아아아!” 열 대째. 열한 대째. 열두 대째. 잠시, 격통에 정신을 잃었다. 의식이 강제로 정전되는 느낌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것일까. 등짝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다시 의식이 강제로 밝혀졌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찬물이 등줄기에 난 상처에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정좌를 유지한 채로 기절해버린 듯했다. 무언가가 바닥에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입가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와서 침물인가 싶었더니 흐릿한 시야에 비춘 것은 새빨간 액체였다. 제레미가 지금이 몇 대인지 고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덕분에 열세 대째라는 사실을 알았다. 열세 대면 예순 대까지 얼마나 남은 것인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지독하게 많이 남았다. 그것만은 알았다. 턱선을 타고 핏방울이 동굴바닥에 떨어졌다. 어째서인지 이빨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웠다. “제발, 주군……더 노력할 테니까……그만…….” 라우라는 울고 있었다. 열네 번째의 채찍질이 가해지자, 울음은 곧바로 비명으로 바뀌었다. 뭐라고 끔찍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피냄새과 구역질이 뒤섞여서 이도저도 아닌 것이 두개골을 사방에서 압박했다. 숨이 막혀왔다. “으흑, 흐아아아……아아…….” 라우라에게는 미안한 짓을 저질렀다. 그녀가 왜 데이지를 고문했는지 알고 있다. 이해한다. 미치도록 걱정된 것이겠지.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의 격류를 견디다 못해, 애정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누군가에게 쏟아부어야 했겠지. “싫다, 주군, 이런 건 싫다……그만……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러니까…….” 내 책임이다. 라우라는 본래 감정에 휘둘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마지막 순간마저 고고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오만한 눈빛으로 용사를 내려다보는, 그런 인간이 될 터였다. 나라는 자에게 잡혀버린 탓에. 저토록 아름다운 아이를. 라우라를 내가 망쳐버렸다. “아, 흐아아, 아아……하지 마……안 돼……안 된다……주군, 주군…….” ……. 그후로, 숫자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서른 대쯤에 이르렀을 때 문득 지나치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상반신만 간신히 일으키고 뒤쪽을 쳐다보았다. 제레미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입안에 핏물이 가득했다.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입술을 살짝 벌려 그냥 바깥으로 쏟아 흘렸다. 혀를 움직일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몇 대째냐.” “서른……두 대입니다, 전하.” 내가 조용히 제레미를 노려보았다. 어서 나머지를 해치우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그런 의미가 담긴 질책이었다. 제레미가 우물쭈물거렸다. “더 이상은 전하께서 버티지 못하십니다…….” 굳이 대답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묵묵히 제레미를 노려보았다. 제레미는 이를 물고 천천히 채찍을 들어올렸다. 그래. 바로 그거다. 너의 역할은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잘했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상반신을 눕혔다. 정좌로 앉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기력이 없었다. 서른세 번째의 채찍질을 맞으면서 내가 비명을 질렀다. 기절한 사이 입에서 고무가 빠진 모양이었다. 이빨에 들어갈 힘조차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이제 와서 다시 끼어본들 쓸모가 없으리라. “……, …….” 라우라는 울부짖다가 기어이 체력이 나갔는지 입을 뻥긋거리고만 있었다. 안 그래도 형벌을 받느라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있는 힘껏 발버둥까지 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눈가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채찍질 세 번에 한 번 꼴로 혼절했다. 어쩔 수 없이 형벌은 긴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중간에 보다 못한 이바르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파르시가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간단하게 나의 형벌에 열 대를 추가했다. 그러자 이바르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물러났다. 제레미는 열 대를 추가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했지만 나는 한 번 내린 명령을 물리지 않았다. 결국 예순에 열을 추가하여 꼬박 일흔 대의 매질을 감당했다. “……일흔.” 제레미가 숨을 토해내듯이 말했다. 내 명령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채찍에서 힘을 놓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제레미는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면 말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이로써 내 마왕군의 기강은 확립되었다. 이런 사건이 반복할 일도 없겠지.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죽지 않았다. 그것이면 되었다. 누가 봐도, 훌륭한 결말이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중얼거렸다. “집……행을……완료…….” 그리고 말을 끝맞추지 못한 채 정신을 아예 놓았다. 마흔 대 무렵부터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모를 정신머리로 있었으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다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없이 눈을 감았다는 것이었다. 눈을 계속 감아도 괜찮다. 이것이 이토록 거대한 축복일 줄이야. 주변에서 전하! 하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데도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편안한 어둠에 감싸여 끝까지.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추락하였다. 이대로 영원히 잠겨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00335 아네모네 향기 =========================================================================                        * * * “다시는 저런 거 시키지 말아주세요! 진심입니다!” 제레미가 말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들은 잔소리였다. 며칠 동안 정신을 잃었느냐고 물어보니 사흘이 지났다고 했다. 지난 번과 비교하면 별 거 아니군, 하고 너스레를 떨어보았다. 그러자 제레미가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제자년이랑 군무상서, 전하, 세 사람씩이나 진료하다가 눈이 빠질 뻔했습니다.” 제레미가 끔찍하다는 듯 이마로 얼굴을 가렸다. “어휴. 게다가 세 명 전부 무슨 반시체가 되어가지고……진짜 말이나 말지.” “그래, 그래. 수고했다. 다른 두 사람은 무사하고?” “전하가 가장 심각했어요. 정말 송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빨이 전부 나가지 않나, 근육이 엉망이지 않나. 순전히 마왕이라서 명줄 붙은 걸로 아세요.” 제레미가 말하기를, 우리 세 사람 치료하는 데 그동안 보물처럼 아껴온 희귀 약초들을 죄다 써버렸다고 한다. 상처를 돌보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몸에 흉터가 남지 않도록 치료하는 것이었다. 상처투성이인 몸에서 흉터를 없애려고 하니 거의 수술이나 다름없는 작업이 필요했다. 파상풍이 들지 않도록 향초를 피우고, 수술도구와 각종 포션을 동원해서 세심하게 살갗을 재생시켰다. 행여나 상처가 아물어버리면 수술이 훨씬 더 복잡해지므로 우리의 몸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서둘러 살을 재구성했다. 그녀는 꼬박 사흘 동안 밤을 샜다. 장장 마흔 시간이 넘도록 혼자서 수술을 집도한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만했다. 어쩌겠는가. 나는 환자답게 조용히 제레미의 불평불만을 들어주었다. “수컷한테 흉터는 훈장이라죠? 그러니까 맨 마지막에 전하를 치료했습니다.” “아니, 그래도 내가 마왕인데…….” “제발 왕이면 왕답게 행동해주세요.” 피로에 절어 퀭해진 얼굴로 제레미가 쏘아붙였다. “일부러 흉터 두 줄은 남겨뒀으니 그런 줄 아시고요.” “끄응.” 아마도 제레미는 나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나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고 생각한다마는. 별로였냐?” “글쎄요. 군주로서는 최고의 대처였지만, 사람으로서는 최악의 대처였죠.” 제레미가 담뱃대를 꺼내들고 뭔지 모를 연초를 피웠다. “아, 그거 나도.” “상처 낫기 전에 연초 피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나쁜 년. “국무상서가 지금 식음을 전폐한 것 아십니까? 사흘 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그건 차라리 낫지, 군무상서는 아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고요. 제자랍시고 있는 꼬맹이는……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하지만, 뭐. 걔는 애당초 정상이 아니니까.” 한 마디로 마왕성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나는 덤덤하게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제레미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많이 수고했다. 이만 가서 쉬어도 좋아.”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신가요?” “……암살자에게 그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걸.” 내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렵지. 하지만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 또한 있었다.” “정말 못 말려요.” 제레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가 수술도구와 향초를 챙기고 마왕방을 나갔다. 나는 라피스를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잠시 후에 라피스가 방에 들어왔다. 뭐라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라피스는 즉시 오체를 투지했다. “라피스. 이쪽으로 와.” 라피스가 고개를 숙인 채로 일어섰다. 몇 발자국 다가오는가 싶더니 또 다시 방바닥에 엎드렸다. 절대로 나와 얼굴을 마주보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 가까이.” 시시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내가 가까이 오라고 말할 때마다 라피스는 움직였지만, 겨우 몇 발자국만 옮기고서 도로 엎어졌다. 그러기를 수 차례 반복하자, 마침내 라피스가 내 앞에 당도했다. “더 가까이.” “…….” 라피스는 바로 침대 옆에 서게 되었다. 얼굴을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손에 잡혔다.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진즉에 라우라를 말리지 못했는가. 왜 데이지를 구해주지 않았을까. 조금 더 빠르고 확실하게 대처했다면 주군이 상처 입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고. 그렇지만 사과할 수가 없다. 죄송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주군인 내가 어떤 각오로 형벌을 짊어졌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번 사건에 대해 다시 추궁하지 마라. 이것은 나의 책임이다. 나는 그런 의도로 처벌을 분배했다. 여기서 라피스가 사과해버리면 그 책임을 나에게서 빼앗는 게 된다. 내 각오와 상처를 부정해버리는 셈이 되어버린다. 라피스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없이 미안함에 괴로워하면서도 결코 사죄의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나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앙상 마른 손등이 느껴졌다.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했다던가. “미안해, 라피스.” “…….” “미안해.” 나는 누구한테도 사과하지 않는다. 사과란 쌍방향적인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달라.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달리 말해, '앞으로'의 나날을 당신과 계속해서 보내고 싶다……. 사과와 용서의 역학관계는 그러므로 상대방이 죽어버렸을 때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나와 함께 앞으로의 시간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과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사죄해봤자 일방적인 의사 표현밖에 안 된다. 아무도 나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해서 용서할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 유일한 예외는 라피스. 나에게 성공할 기회를 주고, 나를 도와주고, 함께 대륙을 절망으로 빠트릴 계략을 기획하고, 그 이후에도 별다른 말없이 내 곁에 있어준 그녀만큼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라피스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약간 초췌했지만 그래도 라피스가 그곳에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언제나 상대방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푸른색의 눈동자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눈이 있었다. “……앞으로는 결단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응. 나도 다시는 이런 방법을 쓰지 않을게.” “약속입니다. 단탈리안 님.” 기꺼이 약속을 받아들였다. * * * 비교적 빠르게 상처를 떨쳐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성녀가 의심한다. 성녀뿐만이 아니다. 나는 대륙에서 공히 주목을 받고 있다. 발각되지 않았을 뿐이지 나의 영지에는 수많은 간자가 숨어 지내고 있다. 내가 두문불출하면 이상한 소문이 만들어진다. 축제 도중에 나가버린 것이 특히나 안 좋다. 모두가 보는 와중에 자리를 비운 것이니까. 각종 유언비어가 양산될 위험마저 있다. 아프다고 해서 마냥 누워 있을 수 없다. 인기인의 숙명이란 그런 거다. 제레미가 끈질기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정말로 괜찮으세요? 정말입니까?” “아, 진짜로 다 나았어. 아무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네.” “…….” 즉답이었다. 신하에게 절망적인 신뢰도를 얻고 있는 군주가 이곳에 있었다. “뭐 이상이 생기면 바로 말해줄 테니 그냥 보내줘라. 응?” 나는 겨우 제레미를 설득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등쪽에 좀처럼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그곳만 신경이 죽어버린 것처럼 거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험삼아 뾰족한 바늘로 등을 찔러봤는데, 그냥 뭉텅한 손톱으로 찍은 정도의 촉감만 전해졌다. 몸 자체는 나았으니 정신적인 문제겠지. 이른바 정신적 불구라는 물건이다. 후유증인지 뭔지 모르겠어도, 잠을 자고 일어나면 마치 채찍질을 당한 그 순간처럼 뼈저리게 온몸이 고통스럽다. 가끔은 악몽과 고통이 뒤섞이기도 한다. 끔찍하다.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자는 잠은 더더욱 줄어들어서 이젠 이틀에 네다섯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충분하다. 나는 나에 대해서 한번도 감사해본 적이 없지만, 나의 신체에 대해서는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마을의 대공회당에 나가서 영지민들한테 내가 건재함을 과시해준 다음, 나는 데이지를 찾아갔다. 물론 데이지는 빌어먹을 지하감옥이 아니라 자기 침실에 누워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이지가 슬쩍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서 책을 읽지 않는가. 주인이 찾아왔는데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변함없이 건방진 노예였다. “아직도 누워 있느냐? 게으른 녀석.” “아버님과 달리 저는 평범한 인간이라서 말입니다.”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데이지가 대꾸했다. “아직 온몸이 욱씬거려 도저히 아버님을 맞이해드릴 수 없겠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평범한 꼬맹이가 이런 책을 읽을 리 없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데이지의 손에서 책을 뺏어들었다. 고대제국어로 표지에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Regula ad directionem ingeni)>라고 적혀 있었다. 졸지에 책을 빼앗겨버리자 데이지가 찌릿,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돌려주십시오. 한창 재밌는 부분을 보고 있었습니다.” “착각하지 마라. 너를 위해서 형벌을 짊어진 게 아니다.” 맥락이 없는 말. 하지만 데이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군무상서의 고문을 용납하면 너가 단순히 가련한 희생자가 되어버린다. 희생자란 곧 선이지. 나는 네 녀석이 선한 역할을 맡는 것이 싫었을 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데이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아버님의 의도를 설마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책을 보았느냐? 내 눈을 속이려 들지 마라. 다른 사람이 없을 때 독서함은 단지 독서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이 방문하였는데도 독서하는 것은 도피이다.” 내가 히죽거렸다. “나를 정면에서 마주보는 것이 마음 어딘가에 걸린 게다. 그래서 기피했지. 네 녀석, 나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구나. 내 말이 틀렸다면 어디 반박해보거라.” “인간에게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심장도 있습니다.” 데이지가 썩은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 한들 어찌 인간의 마음이 사라지겠습니까?” “너무 하잘 것 없어 웃기지도 않는 논리구나.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한참 모자란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걸 타인에게 드러내지 마라!” 나는 책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윽박 질렀다.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노출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너 자신의 힘을 타인에게 과시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다. 함부로 힘을 과시하는 자, 쓸데없는 적군을 만들 것이며, 쓸데없이 동정을 구하는 자, 이윽고 자기 자신마저 동정해버리고 말리니. 어느 쪽이든 미숙한 어릿광대나 벌일 짓거리다! 너는 어릿광대가 될 셈이냐.” “…….” 데이지가 이를 물었다. 반박이 튀어나오지 않는 걸 보아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고 들었다. 조금은 가엽구나. 그걸 나에게 말하지 않고 2년 동안이나 숨긴 솜씨만큼은 칭찬해주마.” “…….” 데이지를 만나고 나서 두 번째로 건넨 칭찬이었지만 녀석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없는 꼬마였다. 나는 장난스레 데이지의 앞머리를 툭툭 만져주고 등을 돌렸다. “오늘 군무상서가 너에게 사죄하러 올 것이다. 그때 군무상서를 용서하지 마라.” 등 너머로 데이지가 의뭉스러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입니까.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첩실이지 않습니까?” “나에게 첩실 따위는 없다. 라우라가 나 때문에 잠깐 약해졌다 해도 본디 누구에게 사죄해야만 삶을 허락받을 위인이 아니다. 라우라는 강하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발길을 옮겼다. “또, 강해져야만 하고.” 쿵, 하고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라우라의 침실을 찾아갈 차례였다.   00336 아네모네 향기 =========================================================================                        똑똑, 하고 라우라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여기서 내 이름을 밝히면 라우라가 도리어 발작 증세를 일으킬지 몰랐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좀먹는 것은 자괴감과 죄책감이었다. 하물며 라우라는 지금 두 감정을 한꺼번에 껴안았다. 단탈리안, 이라는 이름은 그 감정이 응어리진 덩어리 그 자체였다……. 침실의 정문을 말없이 열어젖히고 나는 빠르게도 경악에 휩싸였다. “……, …….” 라우라는 방문이 열린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초점이 없이 어두운 눈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작은 속삭임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극히 자폐적인 징후였으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우라!” 내가 달려가서 라우라의 손목을 강제로 낚아챘다. 손목에서 피가 흘렀다. 라우라는 자기 손톱으로 혈맥이 자리한 손목을 잡아뜯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포션을 꺼내 손목에 들이부었다. “주군……?” 라우라의 눈동자에 초점이 생겼다. 하지만 시선이 뚜렷하다고 말하기엔 한참 부족했다. 여전히 눈은 탁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잡아챈 손목 또한 꺾인 나뭇가지처럼 힘이 없었다. 그래도 생기가 돌아오는가 싶었으나 착각이었다. 라우라가 별안간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을 내 옷자락에 꾸욱 눌러댔다. “미안해요……미안해요, 미안해요, 주군……미안해요…….” 그제야 알아차렸다. 침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라우라가 중얼거리고 있던 말의 정체를. 그녀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사과하고 있었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라우라! 라우라 데 파르네세!”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효과가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폐증에 자학증이 겹쳤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나는 적어도 그녀가 대화를 나눌 상태는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라우라는 누구보다 강하고 빛났다. 그래서 낙관했다……. 나는 이를 까득 물었다. 마음을 엄하게 먹고 그녀의 뺨을 적당한 세기로 때렸다. 서너 번 때리니까 라우라의 시선이 허공에서 내 쪽으로 옮겨왔다.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검은 산맥에서 저한테 마왕의 길을,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라고 당당하게 권고했던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왜 지금 당장 자살하지 않냐는 말에 혀를 깨물려고 했던 자는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입니까!” 라우라가 어깨를 떨며 움츠러들었다. 그 몸짓이 나에게 슬픔과 분노를 이끌어냈다. 우리의 관계는 사랑이라 부르기 이전에 우정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았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된 빌어먹을 사랑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되어, 그러면서도 똑같은 곳을 향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답하십시오, 라우라. 단순히 한낱 어린시절의 치기에 불과했습니까. 맹약의 무게를 짊어질 수도 없을 만큼 우리의 허리는 정녕 굽어지고 말았습니까! “아, 아아…….” 라우라는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약하게 도리질을 쳤다. 마치 나약한 아기새가 자신의 날개를 펼쳐 날아오를 생각은 못하고, 도리어 제 몸을 가리기 위하여 웅크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라우라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노예로 살아갈 운명에서 구원해주었다. 자그마한 귀족의 세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군사(軍師)라는 정체성을 안겨주었다. 그때 라우라는 고작 열여섯 살. 가장 민감하고 불안정한 시기에 나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그런가. 본래 게임에서 라우라는 그녀 스스로 군사의 길을 걸었다. 자기 자신이 쟁취해낸 정체성이었다.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점은 다름아니라 정체성을 강요받느냐 아니면 스스로 부여하느냐에 달렸다. 라우라도 마찬가지였다. 성노예로서의 자신, 더 나아가 귀족으로서의 자신을 떨쳐내는 것. 그것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철저한 군사재상을 고집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내가 그녀에게 모든 정체성을 찾아주었다. 라우라에게 있어 나는 그야말로 주인이 되는 존재이겠지. 어차피 군사가 될 인재이니 그저 간단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벌어질 일을 조금 앞당길 뿐이라고 여겼다. 얼마나 멍청한 착각이었는가……. 나는 라우라를 성노예가 될 처지에서 구출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노예의 각인을 새겨버렸다. 이전에 라우라는 비록 몸이 노예일지라도 정신만큼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정신을 손에 쥐었다……. 아마도 결정적인 계기는, 호감도가 99를 돌파한 순간이리라. 라우라는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걸 내가 파르네세 가문의 깃발을 선물함으로써 되찾아줬다. 사생아라서 억압받던 과거의 한마저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라우라가 한때 가졌거나 앞으로 가질 역할이 전부 나한테서 비롯하게 되었다. 라우라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내가 없는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내가 상처 입은 세계는 멸망되어야 할 따름이다. 눈치 챘어야 했다. 가미긴이 나에게 집착증을 보였을 때, 이바르가 자기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호감도라는 것이 결코 좋은 기능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내가 그녀를 망쳤다. 책임의 소재는, 명확. 그렇다면――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역시 명확하다. “라우라.” 나는 라우라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몸이 품안에 들어왔다. 여태까지 그녀를 다그친 어조와 전혀 다르게 한없이 상냥한 어조로 속삭였다. 당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겠다는 듯이. “주군……?”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까. 라우라가 불안에 떠는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꼭 여린 동물이 어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괜찮다. 두려워할 건 어디에도 없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때문에……소녀 때문에 주군이 채찍질을…….” “아니요.” 라우라를 더 가까이 안아들었다. “당신이 얼마나 힘들어 할지 알면서도 제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라우라, 당신은 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상처 입히지 않을 것입니다.” 일찍이 이바르에게 그런 것처럼. 파이몬에게 그런 것처럼. 나는 라우라에게도 상냥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요. 라우라도 알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저에게는 사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라우라가 공공연하게 율법을 어겼다면 어쩔 수 없이 처벌해야 했습니다.” 주문을 걸듯이. 저주를 걸듯이. 악마의 달콤한 언어를 풀어놓았다. “문제는 라우라가 지나치게 고문을 가한 부분이었습니다. 죄과를 덮으려면 라우라를 처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했지요. 라우라는 저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처형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여, 역시 소녀 때문에 편형을 받은 것이지 않는가!” “아닙니다. 라우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에 말을 심는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열망하고 바라는 한 마디의 말을. “라우라를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마음이 단지 한 마디 말을 키우는 데 쏟아지도록. 씨앗은 감정을 먹고 자라나 이윽고 만개해버리고, 본래의 마음과 신념을 희생양으로 삼아 검은 꽃잎을 활짝 피운다. “당신이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치듯이, 제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일심동체이니까요.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그렇지요?” “아…….” 나약해진 소녀의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무척이나 간단해서. 내가 건넨 언어의 동아줄을 라우라는 필사적으로 잡았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 허리를 꾸욱 안았다. 강하게. 무척이나 강하게. “소녀는 오로지 주군을 위해서……주군만 무사하다면 다른 것은 어찌되어도 좋다!” “맞아요, 라우라. 우리는 세간에 널린 잡다한 사람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인연으로 묶여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곧 제 삶입니다. 제 삶이 곧 당신의 삶입니다.” “응, 주군……응……!” 라우라의 머리를 빗질하듯 살며시 쓰다듬었다. 만일, 라우라. 당신이 감정에 잡아먹힌 이유가 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그 사랑을 준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저는 기꺼이 당신의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신념. 의지.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소녀를 구성하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앞으로 당신이 저지를 일에 대해서 아무한테도 사과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책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책임을 질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므로. 죄도, 사죄도, 잘못도, 전부 내가 대신합니다. “그렇다면 계약합시다, 라우라. 저에게 당신의 신념을 맡기겠다고 맹세해주세요.” 나는 라우라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계약……?” “이제부터 당신은 모든 의미를 저한테서 찾아야 합니다. 당신은 제 검입니다. 제가 명령한다면 복종하고, 제가 학살을 지시하면 그대로 시행하고, 제 적을 토벌해주십시오. 저를 위해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스윽 닦았다. 우는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벌써 며칠 동안 씻지 못했을 테지만 라우라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한뼘도 손상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저는 당신에게 사랑을 드리겠습니다.” “주군…….” “영원한 사랑을. 어떠한 의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사랑을.” 라우라가 몽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응, 주군……맹세한다! 내 삶은 오직 주군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을 맹세한다! 주군이 바라지 않으면 소녀도 바라지 않고, 주군이 명령하지 않으면 소녀 또한 스스로에게 명하지 않겠다!” “기쁩니다.” 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가식이라든지 거짓이라든지 그런 말장난은 지극히 가볍다. 무엇을 했고, 따라서 무엇을 책임진다. 이 절대적인 의무 앞에서 모든 것은 무게가 가벼워질 것을 명령받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질 각오가 없다면 애당초 시작하지 않았어야 옳다. 이미 시작해버렸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묵묵히 걸어간다. “역시 저에겐 라우라밖에 없습니다. 라우라가 없었다면 전 벌써 죽었을 겁니다. 엘리자베트도, 앙리에타도, 아무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라우라.” 라우라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내가 장난스레 웃으면서 라우라의 머리에 약한 꿀밤을 먹였다. “하지만 라우라는 군재 이외에는 무능하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간절히 필요합니다. 가령 라피스는 당신에게 없는 재능을 갖고 있어요. 알겠지요?” “응……주군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소녀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라우라의 호흡은 눈에 띄게 안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흘리던 눈물은 내 옷자락이 모조리 흡수해버린 듯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당부를. “그러니까 함부로 다른 사람을 벌하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질투해도 안 됩니다. 그런 건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언제나 저에겐 라우라가 제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쉽게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다, 주군. 명심하겠다.” 라우라가 웃었다. 그것은 만개하는 벚꽃처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아아. 사랑합니다, 라우라.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00337 아네모네 향기 =========================================================================                        라우라와 함께 누웠다. 침대가 부드럽게 우리 둘을 받아주었다. 나는 라우라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노래에 영 소질이 없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자장가쯤은 그럴듯하게 흥얼거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주던 노래였다. “바다가 불러주는……자장 노래에.” 라우라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껍질을 부수고 나온 새가 이미 깨진 껍질을 찾아 그곳에 파고드는 것처럼. 꼭 딸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그걸 거부하지 않고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라우라가 잠기운에 막 사로잡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군. 흡혈귀가 되면 영원히 산다고 들었다.” “예. 저도 그리 들었습니다.” “흡혈귀에게 부탁해서 소녀도 흡혈귀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주군과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내 머릿속에 얼핏 한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오로지 죽음만큼은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의 것을 미련없이 포기했다. 포근한 기억이었다. 삶에서 얼마 마주치지 못할 유쾌함과 놀라움이 있었다. 나는 이제 기억에 정중히 장례식을 치루어주고자 했다. 마음속의 유리관에 기억을 살며시 내려두었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가 오면 부탁해보도록 하지요.” “응, 주군. 영원히 함께다…….” 그 말을 길게 늘어트리며 라우라는 잠에 빠졌다. 손으로 내 옷자락을 꾸욱 잡은 채. 삼십 분쯤 흘렀을까. 내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라우라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새근거렸다. 며칠 내내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였겠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숙면이었다. 나는 라우라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마왕성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영지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탈출용으로 만들어둔 통로를 따라 마왕성 뒤편의 들판으로 빠져나갔다. 갈대숲이 자라난 강가였다. 기병의 추격이 어렵도록 땅이 축축한 지점에 통로를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강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가 내 가슴에 닿아 얇게 철썩거렸다. 안락한 우울이 몸을 적셨다. 나는 마음에 한 줄기의 강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을 전환했다. 사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기력이 남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흑사병이 거의 완전히 대륙에서 진압되었다. 지역에 따라 심하게는 인구의 절반이 전염병에 죽어버렸다. 하지만 대체로 전체적인 피해는 총 인구의 2할~3할에 머물렀다. 본래 흑사병이 대륙 인구의 5할 이상을 앗아갈 예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인류는 상당히 선방한 셈이었다. 이제부터 농민의 권리가 급격하게 늘어나겠지.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을 경작할 인원이 부족하다. 소출량이 턱없이 줄어들게 생겼으니 지주들은 막대한 돈을 써서라도 인력을 구할 것이다. 지주들 간에 경쟁이 붙는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지주에게 농민은 품을 판다……. 전염병에 죽은 것은 농민뿐만이 아니다. 각종 계층에 평등하게 죽음이 내렸다. 대장장이든 곡물상이든 하다못해 신발공이든, 크게 줄어든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출신과 신분을 묻지 않고 사람을 고용한다. 군대를 기피하는 현상은 유례없이 확대된다. 구태여 용병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있다.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전쟁질 말고 다른 수단으로 밥을 벌어먹고 싶겠지. 용병단이 사라질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최소한 몸값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그 결과, 전쟁의 규모 자체가 줄어든다. 군주와 영주가 전쟁을 벌이고 싶어도 전쟁 자금이 지나치게 막대하다. 웬만하면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도 굳이 전쟁을 고집할 인간 군상이 틀림없이 생긴다. 어리석은 녀석들이다. 놈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세금을 쥐어짜내리라. 그렇지만 더 이상 농민들은 힘없는 피착취자가 아니다. 높은 임금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힘, 여기에 농촌 사회 특유의 단결력이 함께한다. 농민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전혀 없는 전쟁 따위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영주에게 과감히 반대의사를 표명하리라.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귀족은 이것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영주의 탄압, 농민의 저항……대대적인 농민 반란은 거의 필연적이다……대륙은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싸인다. 이런 혼란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여기에 향후 마왕군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공화주의를 일으킬 수 있다. 왕당파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할 수도 있다. 아니면 두 가지 전부……. “단탈리안 궁중백?”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롱그위 성녀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강물에 몸을 씻었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그보다 당신……?” 롱그위 성녀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생명체를 본 것처럼 경악에 잠겼다. 성녀가 몇 번이고 입술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그리고 눈썹을 찡그리더니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여신 앞에서 참회하고 싶은 후회가 있다면, 제가 대신 들어드리지 못할 것도 없어요. 이래 봬도 성녀라는 자리에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 삶은 어차피 후회가 가득할 것이라는 비아냥인가 싶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지요. 반성할지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이 제 격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명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인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성녀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쓰잘데기 없는 내용이겠지. 이 성녀의 정치적 감각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끝났다. 파르시보다 못했다. 딱히 얘기를 나눌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욕재계를 막 끝낸 성녀님, 이라는 풍경은 확실히 진귀합니다만 아쉽게도 더 지켜보다간 여신께 천벌을 받을 듯싶군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잠깐만요.” 성녀를 지나쳐서 걸어가려는 데 상대방이 제지했다. 조금 귀찮았다.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성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하아. 진짜 웬 오지랖이람.” 롱그위 성녀가 주홍색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먹었는지, 그녀가 눈가에 힘을 팍 넣었다. “궁중백. 저에게 아주 귀한 술이 몇 병 있습니다. 오늘 술을 마시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궁색한 영지에는 저와 잔을 나눌 사람이 없군요. 궁중백이 함께 처리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무나 골라잡으면 될 것을.” “사람들은 성녀라는 여자가 술을 입에 대는 것 자체를 경원시해요.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대작도 할 수 없죠. 그리고 전 이제 막 당신의 영지에 와서 친분이 전혀 없고요.” “그야 그렇겠습니다만.” 나는 제정신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저랑 마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본의가 아니지만 당신밖에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하겠어요.” 성녀는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혼자 마시면 될 것을 왜 날 초대하는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의 여왕 전하가 귀띰한 것이라도 있는지?” “네, 뭐. 그런 걸로 해두죠.” 상당히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딱히 술자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림으로써 별로 달갑지 않은 승낙을 표시했다. 그러자 성녀가 다짜고짜 땅바닥에 양털 수건을 넓게 깔고 앉는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 설마 여기서 술판을 벌일 생각입니까? 제 눈이 고장나지 않았다면 여기엔 술은커녕 유리잔 하나…….” “클라우스트롬.” 성녀가 마법영창을 읇자 그녀의 손목에 새하얀 아우라가 펼쳐졌다. 꼭 허공에 보이지 않는 주머니가 있는 듯, 성녀가 팔을 빛무리에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었다. 잠시 뒤에 그녀는 빛무리에서 술병 일곱 개와 유리잔 두 개를 꺼내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어디에서 꺼내왔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신전 창고요. 제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창고 물품을 가져올 수 있죠.” 요컨대 방금 롱그위 성녀는 아테나 대신전에 사람들이 바쳐다 놓은 술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나는 양털 타올에 앉으면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성녀가 사사로이 신전의 물품을 빼돌리다니. 당장 여신께서 천벌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군요.” “어차피 여신께선 드시지도 못할 술인걸요. 도리어 여신을 대신해서 제가 마시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시겠죠.” 롱그위 성녀가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과연. 단순히 성깔이 있는 성녀일 뿐만이 아니라 인격에 하자가 있는 여인이었는가. 하긴, 미치지 않고서 성녀라는 말도 안 되는 직책을 감당할 리도 없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옆에 두고 포도주를 주고받았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나 기다렸지만 성녀는 이상하게 하찮은 질문만 입에 담았다. 어쩌다 이곳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는지, 마왕군의 참모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상한 여자였다.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대충 대답해줬다. “꺄악!” 해가 빨갛게 질 무렵이었다. 늑대 한 마리가 술자리에 다가왔다. 나는 성녀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늑대에게 손짓했다. 늑대가 얌전하게 다가와서 내 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녀석의 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늑대가 기분 좋다는 듯 갸르릉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성녀가 아연해졌다. “구, 궁중백. 그건 대체…….” “제가 지닌 마력에 홀려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마왕들처럼 마력이 무시무시하게 많다면 되레 겁을 먹고 도망치겠지만, 저는 딱 적당하게 있어서요. 어째서인지 동물들이 좋아하더군요.” “하아…….” 롱그위 성녀가 얼빠진 얼굴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에 전시된 장난감을 바라보는 꼬맹이의 시선이나 진배없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 “성녀도 만져보시겠습니까?” “네? 저기. 그래도 안전한가요?” “당신이 절 죽이지 않는 이상 안전할 겁니다.” 성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늑대의 털을 만졌다. 늑대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성녀를 쳐다보았다. 성녀는 멈칫했지만, 곧이어 늑대가 기분 좋게 울었다. 성녀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본격적으로 늑대를 쓰다듬었다. 늑대는 아예 배까지 벌렁 드러내며 여인의 손길을 만끽했다. “헤에. 마왕의 마력이란 뭔가 신기하네요.” “마계의 학자들은 이것이 보통 동물과 마물 사이의 관계를 밝혀주는 단서일지 모른다고 추측하더군요. 뭐, 어려운 이야기라 저에겐 생소합니다.” 술자리가 길어졌다. 해가 떨어지고 밤하늘이 되어도 성녀가 꺼내오는 술병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사슴과 토끼, 여우, 열댓 마리의 동물이 내 마력에 꼬여서 다가왔다. 녀석들은 성녀와 내 주변을 빙그레 둘러쳐서 얌전히 앉았다. 성녀는 그 광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내 앞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를 한바구니 흘렸다. 결국 새벽이 넘을 때까지 성녀가 암시한 '중요한 얘기'는 코빼기도 등장하지 않았다. 성녀가 먼저 술에 취해서 땅바닥에 엎어진 것이었다. “음냐, 더는 못 마셔요…….” 눈앞에서 드르렁 코를 걸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음을 뛰어넘어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뭐였을까. 뭐, 이런 날도 있는 것인가. 내가 성녀를 들어올렸다. 그녀를 늑대에게 태워서 마왕성까지 갔다. 손님용 침실에 그녀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다음, 나는 내 침실로 돌아왔다. 술기운 덕분인지 마음에 우울한 기색이 없어져 있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00338 Brave New World =========================================================================                        모처럼 마왕들이 대륙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엔 제법 각별한 뜻이 있었다. 정치적 회합이든 단순한 연회든, 마왕들은 항상 마계의 중립도시에서 만났다. 모임을 주도하는 마왕도 언제나 중립파의 수장이었다. 높은 서열의 마왕이나 낮은 서열의 마왕이나 중립지대에서 서로 동등한 군주로서 만난다……그런 의미가 강력하게 담겨 있었다. 바알조차 암묵적인 약속을 깨부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대마왕이 죽어버린 작금에 이르러서 이 오래된 관례가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 “언제까지 '그 자'의 폐단을 용납할 속셈이오?” 대머리에 피부가 까만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서열 제6위, 아니, 전(前) 서열 제6위의 마왕 발레포르였다. 그는 생각보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기분이 불쾌했다. 기실 불쾌한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바알이 죽든 아가레스가 죽든 상관하지 않소. 그러나 우리의 권리는? 회합의 전통은 어디로 사라진 거요?” “글쎄에. 바알과 아가레스가 사라진 그 순간부터 과거의 권리는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지.” 가미긴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물이 사라지면 바다에서 물고기가 날뛰기 마련이야. 인위적인 권리가 사라진 자리엔 다시 자연적인 권리가 제 모습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기 마련이구.” “……가미긴이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무슨 뜻이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점해. 그것이 우리 마족의 자연권 아니겠어?” 발레포르의 검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허우대가 승자라니! 세 치 혀가 기발한 것은 인정하겠소만, 단순히 바르바토스의 위세를 빌려서 난동을 피우는 무뢰한에 불과하오.” “맞아, 맞아. 진짜 재수없는 녀석이야~.” 가미긴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 가여웠다. 아직도. 대부분의 마왕이 아직도 단탈리안이 어떤 작자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세간에서 단탈리안에 대한 평가는 기껏해야 바르바토스의 훌륭한 동업자 정도. 평원파의 떨거지 부하, 라는 평판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사람들은 단탈리안이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를 대신하여 앞장서서 발표하고 선동하는 일종의 대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선전부장이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소. 바르바토스는 그렇다 칩시다. 파이몬도, 그래, 빚진 것이 있을 테니 이해하겠소. 하지만 왜 마르바스와 같은 인물이 단탈리안을 밀어주는 것이오?” “난들 그쪽 사정을 알고 있겠어?” “제기랄.” 전제가 틀려먹었다. 단탈리안은 단지 신생 마왕군의 얼굴 마담이 아니었다. 새로운 마왕군 자체가 단탈리안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기구였다. 그렇다고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지도자인가, 하고 묻는다면 가미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단탈리안이 지도자라면 지난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자도 단탈리안이어야 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아무런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영지를 더 획득하지도 않았고, 약탈금을 얻지도 않았다. 단순히 정치적인 명성이 올라갈 뿐이었다. 실제로 이득을 독차지한 측은 평원파나 산악파 등의 마왕들이었다. 설마 단탈리안은 성자와 같아서 어떠한 욕심도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가미긴은 자기가 생각해놓고도 우스웠다. 아무튼 이상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단탈리안을 우습게 여겼다. 그는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고 실질적으로 마왕군을 움직이는 사람은 최고위 마왕들이라고……. 당장의 대화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선 뭘 논의한다는 거요? 난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소.” “미안하지만 나도 전혀 모르겠는거얼.” “허. 당신에게도 알리지 않다니, 벌거숭이 녀석……!” 가미긴이 속으로 비웃었다. ‘나는 딱히 너희들 편이 아닌데 말이야.’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연기하며 슬쩍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재빠르게, 가는 길 위에 우연히 마을이 있다는 듯이. 마차는 기병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길변으로 우르르 도망쳤다. 아이들은 말발굽이 당장 자기네 눈앞까지 튀어오를까 두려워하면서도, 기병의 늠름한 행군을 끈질기게 지켜보았다. 어떤 아이는 깃발을 향해 경례했다. 기병이 답례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깃발 자체에 대한 경례였다. 깃발은 지금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또 그곳에로 너희 역시 데려가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처럼 펄럭였다. 여느 약속과 마찬가지로 깃발은 순식간에 마을을 지나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옅은 먼지구름이었다. 아이들은 먼지구름을 헤집으며 마저 뛰어다녔다. ‘하지만 결국은.’ 가미긴이 무감정한 눈동자로 먼지구름 속에서 펼쳐지는 그림자 연극을 바라보았다. ‘단탈리안은 누구의 편도 아니겠지.’ * * * “가미긴 전하, 발레포르 전하 드시오!” 호족(虎族) 시종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발레포르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두 마왕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궁에 발을 들였다. 무소속 마왕인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사실 굴욕적인 처사였다. 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마왕들은 중립파와 산악파, 그중에서도 평원파에 속했다. 대다수의 무소속 마왕은 제국과 연관이 없었다. 황궁이란 장소는 엄격한 중립지대에서 거리가 멀었다. 헌데도 단탈리안은 일방적으로 회합 장소를 황궁으로 결정했다. 무례한 결정의 배후에는 명확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 신생 마왕군에 복종하든지 반항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도발적인 양자택일의 권고였다. 물론 마왕들은 이미 전원 새로운 마왕군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이 복종을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실로 박아두려는 것이었다. 마왕들에게 허락된 호위병은 고작 열다섯 명. 사실상 모든 무장이 해제되고 발가벗은 채로 제국의 황도에 초대받았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도에서 암살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무소속 마왕들은 이빨을 바득 갈았다. “당장 허리를 굽혔다고 해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파벌 놀이 따위에 놀아나는 놈들 주제에……!” “우리도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본래 정치를 혐오하여 아무런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쳐오는 위협에 대해서는 싫어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집결의 중심지가 된 마왕이 바로 가미긴이었다. “오오. 가미긴 님, 오셨습니까.” “가미긴 님의 미모는 하루가 다르게 만개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전에 미리 도착한 몇몇 마왕이 친근한 척 가미긴에게 접근했다. 가미긴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단탈리안은 의도적으로 마왕들의 착각을 이끌었다. 예컨대 무도회에 참석해서 가미긴이 아니라 바르바토스를 대놓고 칭찬한다든지. 꼭두각시 전쟁에서 유독 가미긴에게만 별동대를 맡겨 독립적인 작전권을 보장한다든지……. 겉으로 보기에 단탈리안과 가미긴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관계란 의외로 아슬아슬해서 언제든 무너질 것처럼 불안했다. 어째서 단탈리안은 가미긴과 불화를 일으키는 양 연기하는가? ‘나보고 소속이 없는 마왕을 제어하고 조종하라는 의미겠지.’ 가미긴이 웃으면서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는 단탈리안이 단순히 자신을 바르바토스보다 못한 여자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마음속 깊이 분노했다. 그렇지만 무소속 마왕들이 점점 자신을 중심으로 집결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노렸구나. 마왕군에는 발레포르처럼 단탈리안에게 불만을 가진 무소속 마왕이 제법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미긴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 숫자는 예닐곱에 이르렀다. 인원이 적었지만 결코 무시할 만한 집단도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집단이 아니라, 마왕 개개인의 돌발 행위야.’ 집단에 소속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을 구속한다. 개인끼리 맺은 약속은 쉽게 깨진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이 체결한 조약을 아무렇게나 깨트리기란 어렵다. 단탈리안은 무소속 마왕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두기를 원했으며, 그 대표자가 가미긴이 되도록 유도했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제정신이 아니지.’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을 일부러 집결시킨다. 도저히 평범한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 획책할 만한 노림수가 아니었다. 오로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벌였다. 너희가 아무리 모여들어서 집단적으로 대항해도, 나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무소속 마왕들 중에서 극소수만이 이것을 눈치챘다. 그중 한 명이 전 서열 제3위의 마왕 바싸고였다. 그는 가장 강력한 무소속 마왕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에 가입하길 진즉부터 거절했다. 그는 어리석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다른 마왕들을 비웃었다. “자발적으로 인형놀이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바싸고가 동료들한테 유일하게 건넨 조언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전 서열 제7위 아몬. 그녀는 철저하게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며 동료들과 멀어졌다. 무소속 마왕들은 두 사람의 태도를 이기적이며 무책임하다고 비난했지만,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처세한 것이었다. 지금도 바싸고는 어전 저편에 외로이 혼자 서 있었다. 가미긴이 그와 눈빛을 마주치자, 바싸고는 가만히 입끝을 들어올렸다. 가미긴은 자뭇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이시자 유일무이한 주권자이신 황제 폐하 드시오!” 마왕들이 전부 모이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소리쳤다. 화려하게 금빛 옷을 입은 루돌프 황제가 걸어들어와 옥좌에 앉았다. 그 좌우에는 자연스럽게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이 기립했다. 일부 마왕들이 조용하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꼭두각시 황제이거늘 뭐 의례를 지킨다고…….” “애당초 왜 우리의 회합에 인간 황제가 끼어드는지 이해할 수 없구려.”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 불쾌한 구도였다. 옥좌는 살짝 높은 곳에 위치했고, 당연하게도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다른 이들을 내려보게 되었다. 마왕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해오던 전통에 어긋났다. 마왕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단탈리안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논공행상을 다시 철저하게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논공행상이라니?”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니블헤임에서 이미 전부 정당하게 몫을 분배하지 않았더냐.” “그것은 마계에서, 마왕으로서 몫을 분배한 것입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몫은 여전히 미정인 채로 남아 있지요.” “……본인은 딱히 제국의 일원이 된 기억이 없다마는?” 바싸고가 뭔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탈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 이 자리에서, 공로와 허물을 철저히 되물어 여러분들 사이에 제국 내 서열을 확고하게 정해두고자 합니다.” “…….” 바싸고가 할 말을 잃었다. 서열을 다시 정립한다. 여느 파벌과 다르게 아무런 공로가 없는 무소속 마왕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00339 Brave New World =========================================================================                        * * * 일부 마왕들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장난치지 마라! 서열을 없앤 장본인은 네놈이지 않는가! 하고 대놓고 삿대질을 하는 마왕도 있었다. 어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은 시끄러운 깡통들이 아니었다. “…….” 바싸고. 이 영악한 만년생리증 환자는, 별안간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주도적으로 질문하던 양반이 말이다. 나는 재밌어서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과연, 눈치가 빨랐다. 대리석 기둥이 화려하게 알박은 어전. 갑작스러운 폭발 선언이 떨어졌건만 부산스럽게 항의를 쏟아내는 마왕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니, 확실하게 적었다. 파벌에 속한 마왕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오직 소속이 없는 예닐곱 명만이 바쁘게 입방아를 찧어댔다. 나는 목격했다. 바싸고는 내 선언이 이루어지자마자 순간적으로 어전 전체를 쑥 훑었다. 거기서 알아챘겠지.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마르바스도, 모두 덤덤하게 무표정을 짓고 있음을. 이것이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일이라는 사실을 바싸고는 안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삿대질을 치켜드는 것은, 달리 말해 마왕군 내부의 모든 파벌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 바싸고는 곧바로 한 발자국 뒤로 내뺐다. 치고 빠지는 솜씨가 가히 예술적이었다. 눈치만으로 능히 바퀴벌레 싸다구를 연속으로 후갈길 법했다. “단탈리안. 자네는 틀림없이 새로운 마왕군에는 서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네. 헌데 이제 와서 서열을 부활시키겠다니, 자네의 머리에 정신이란 게 박혀는 있는가?” 모든 마왕이 바싸고처럼 처세술에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전 서열 제6위, 마왕 발레포르가 시꺼먼 뺨을 씰룩거리며 다그쳤다.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며 만마(萬魔)의 위에 군림하는 마왕은 도리어 처세라는 단어와 거리가 매우 멀었다. 명령만 내리면 어떤 마족이든 복종한다. 그런 처지에서는 정치술을 익히고 다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특히나 무소속 마왕들은 정치에 환멸 내지 경멸을 느껴서 스스로 은둔한 이들. 천 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파벌 싸움을 벌여온 평원파나 산악파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나한테 속수무책으로 말린 것이다만, 저들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입니다. 모든 마왕은 동등한 자격을 지니고 마왕군에 참석합니다.” “자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고나 있는가?” 발레포르가 비웃으면서 주변 마왕들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그에 동조해서 몇 명이 악의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없앤다고 공언한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니. 모순이 어떤 의미인지 내 굳이 설명해야겠는가.” “모순도 무엇도 없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마왕이지만 동시에 제국의 궁중백입니다. 예를 들어, 마왕이라는 측면에서 저는 바르바토스와 동등합니다. 그러나 제국의 일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공작이자 섭정인 바르바토스에게 뒤쳐집니다. 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발레포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모처럼 선심을 써서 자상하게 알려주자.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의외로 좋아한다. 상냥하니까 말이야. “마계의 일은 마계에, 대륙의 일은 대륙에, 라는 것입니다. 발레포르.” “무슨 소리를…….” “이제부터 자기 멋대로 대륙을 휘젓는 만용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마왕은 무조건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어야 합니다. 마왕군이 대륙에 간섭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제국의 의회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발레포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의회……? 편입……? 단탈리안, 제정신인가.” “저는 언제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마왕의 긍지를 인간종이 세운 제국에 갖다 팔아먹을 생각이냐!”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여러 마왕이 떠들었다. 배신이라느니 반역이라느니, 듣기 안 좋은 단어란 단어는 죄다 쏟아냈다. 비난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폭풍은 저절로 잦아들었다. 얼굴을 붉히고 목청을 돋우던 마왕들은 잠시 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레포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한가운데 나만이 변함없이 미소를 지었다. “마왕의 긍지는 안중에 없습니다. 제국에 갖다 팔아먹을 생각이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어차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긍지입니다.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겠지요.” “말도 안 되는 폭언을……자네 미쳤는가!” 발레포르가 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다르게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제야 직감한 것일까.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다. 수레바퀴는 돌아갔으며, 시대는 바뀌었다. 서열 제6위라는 간판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절감하도록. “바알도 마왕의 긍지를 논했습니다. 아가레스도 마왕의 긍지를 울부짖으며 죽었습니다. 도대체 그 긍지란 것이 무엇입니까? 월맹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전멸시키는 것, 쓸데없이 내전을 일으키는 것, 이런 것들이 긍지입니까?” 내가 웃었다. 발레포르는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동족을 죽인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긍지를 논합니다. 정말 대단한 긍지로군요. 실례합니다만 그 따위 긍지, 공짜로 준다고 해도 이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네놈…….” “착각하지 마십시오. 마왕에게 허락된 긍지는 단 하나. 만마를 위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한다, 그것뿐입니다.” 나는 발레포르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헤라클레스의 용맹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은 옛날옛적에 끝났습니다. 동족과 아군도 알아보지 못한 채 폭주하는 행동 따위를 긍지이니 뭐니 치장하는 시대는 끝장났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단호한 단결력입니다.” 나는 단상에서 몇 발자국 아래로 내려갔다. “제2차 월맹군에서 우리는 대륙의 삼분지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까? 마족이 인간종보다 열등하기 때문입니까?” 천천히 어전의 정중앙을 거닐면서 주위의 마왕들에게 또박또박 소리높여 말했다. 이것은 이미 발레포르 한 사람을 상대하는 논쟁이 아니었다. 모두를 확실하게 설득해내는 연설이었다. “결코 아닙니다. 아군의 성공을 방해하는 자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람하게도 배신 행위에 불과한 짓거리를 마왕의 긍지라고 치장했습니다……웃기지도 않는 농담입니다.” “하, 제국에 편입되는 것이 진정한 마왕의 긍지라는 말인가!” 발레포르가 소리쳤다. 성난 황소마냥 흥분해 있었다. “그럼 어디 합스부르크 제국의 깃발을 꺼꾸러트리십시오.” 내가 차갑게 발레포르를 바라보았다. “모든 인간종을 적대하겠노라고 선포해보십시오. 당장에 인간종들이 단합해서 이곳으로 처들어오겠지요. 연이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우리 마왕군이 간단히 이겨낼 것 같습니까?” “전쟁을 앞에 두고 사사로이 패배를 운운하다니, 그야말로 겁쟁이의 사고방식이다! 마왕군은 언제나 승리한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해하고 계시는 겁니까? 우리가 공식적으로 인간종을 적이라 선언해버리면 그때는 월맹군의 재래입니다. 적당한 승리도, 적당한 패배도 없습니다. 마족이나 인간종 어느 한쪽이 전멸하는 그 순간까지 전면전을 펼쳐야만 합니다.” 인류가 지금 마왕군의 대륙 점유를 인정하는 까닭은 겉으로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면을 쓰고 있는 덕분이다. 아직도 그걸 모르는 녀석들이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도 부족한 판국에 아무런 보장도 없이 승리를 호언장담한다. 패전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겁쟁이라고 매도한다…….” 내가 입끝을 비틀었다. “왜 월맹군이 여태껏 실패했는지 알 만합니다. 당신과 같은 마왕이 지휘관으로 있어서야 승리할 전투에서도 전멸하기 십상이겠지요.” “뭐, 뭐라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신생 마왕군에 필요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나친 모욕에 발레포르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시선을 좌중으로 돌렸다. “무엇이 마족을 위한 지상낙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의견이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는 평원파처럼 마족의, 마족에 의한, 마족을 위한 국가야말로 정답이라 믿는 분도 계십니다.” 나는 한차례 평원파를 바라보고 천천히 눈길을 옮겼다. “여러분 중에는 인간종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인간종과 적당히 타협해서 마족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인 해답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 “혹은, 현재까지 우리가 차지한 영역이라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는 분도 틀림없이 계십니다.” 차례대로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의 중론을 언급한 것이었다. “저는 어느 한 쪽이 진정한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지성을 크게 뛰어넘는 판단입니다. 다만, 어느 쪽을 지지할지라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면을 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어느 파벌이든 제국의 이름을 필요로 한다. “평원파는 인간종을 정벌하는 데 있어 적절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순전히 마왕군의 이름을 걸고 출진하면 인간종이 지나치게 단단히 단합해버립니다. 반대로, 이쪽이 제국의 이름을 내걸 경우엔 잘만 하면 인간종의 분열을 획책할 수 있습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이 필수적입니다.” 이에 평원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산악파는 인간종과 타협하는 데 있어 명분이 필요합니다. 마왕군을 정면에 내세우는 것보다 제국을 정면에 내세우는 편이, 단연코 인간종과 협상하는 걸 수월하게 만들어줍니다. 외교적인 관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은 절실합니다.” 이에 산악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이리하여 양파벌이 같은 제국의 일원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대립할 뿐만이 아니라 때때로 협력하는 관계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립파의 입장에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어줍니다.” 이에 중립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그처럼 지난한 설득을 바탕으로,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서로 마음에 품은 열망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타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헛된 마왕의 긍지가 끼어들 틈새는 전무합니다. 오로지 냉철하고 뚜렷한 현실적 사고만이 허용됩니다. 알겠습니까, 발레포르?” 내가 고개를 돌려 발레포르를 쳐다보았다. “우리들 전원이 어떻게든 마족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왕의 긍지입니다. 그것이 왕의 의무입니다. 쓸데없이 추상적인 단어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버리세요.” “…….” 유일하게 방해되는 세력은 마족의 이상사회라는 꿈에 얽매여 있지 않은, 무소속 마왕뿐. 나는 싸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지를 찾는다면, 좋습니다. 얼마든지 찾으십시오. 다만 그럴 경우 모든 파벌을 적으로 돌릴 각오 정도는 해주시길. 몽상가를 위한 자리는 더 이상 마왕군에 없습니다.” “…….” 발레포르는 이빨을 바득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바알과 아가레스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돌프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서열을 발표하십시오.”   00340 Brave New World =========================================================================                        황금 옥좌에 앉은 황제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제국을 재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경들이 얼마나 지극한 충성을 보였는지 십분 이해하오. 그중에서도 특히 공로가 큰 분이 있으니, 그분들에게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한 칭호를 내리고자 하오.” 진짜 인간처럼 몸동작이 자연스러웠지만 잘 보면 표정이 단순하여 변화가 적었다. 이는 그러나 황제라면 마땅히 표정에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상식에 어울려서 쉽사리 무시되었다. 불쌍한 인간이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내장과 살이 썩어문드러지지 않기 위해 연금술사들은 매일마다 각종 시약을 황제의 온몸에 발랐다. 행여나 물약의 냄새가 풍길까봐 강한 향수를 뿌렸다. 흔히 사람들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고 불평하지만, 루돌프는 어떨까.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을 모욕당하는 것보다 죽음을 모욕당하는 것이 훨씬 더 참혹하다. 나는 몰래 숨을 죽여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희극적이지 않겠는가. 친족을 살해하고 강간하면서까지 그토록 황제의 자리에 오르길 바랐으니 어찌보면 소망을 이룬 것이리라. “바르바토스.” “예, 폐하.” “존귀한 그대에게 보헤미아의 왕관을 하사하오.” 몇몇 마왕이 헛숨을 들이켰다.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에는 왕작이 네 개 있었다. 하지만 개중 두 개는 황제에게 장식품처럼 딸려 있었고, 실질적으로 제국에 복속한 왕국은 보헤미아 왕국과 판노니아 왕국 두 개뿐이었다. 이는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보헤미아 왕이 가장 서열이 높음을 의미했다. 바르바토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울러 아우스테를리츠의 대공이자 제국의 영원한 대리 장군으로 임명하오. 보헤미아의 왕은 짐을 대신하여 제국의 국정을 도맡아 보살필지어니, 그대는 명예롭게도 카이사르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신민들은 앞으로 그대를 카이사르-바르바토스라 부르게 될 것이오.” “황공합니다.” 바르바토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왕관과 검을 수여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르바토스는 등을 돌려서 어전을 훑어보았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씨익 끌어당겼다. 그 순간에는 어리버리한 무소속 마왕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론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들이 복종하게 될 대상은 저 꼭두각시 황제가 아니라――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마족의 왕이자 인간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소녀임을.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옆에 기립했다. 다음 차례를 황제가 호명했다. “마르바스.” “부르셨습니까, 폐하.” 머리칼에 드문드문 흰색이 섞인 마르바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에 존경심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몸짓이 어찌나 우아한지, 자칫 마르바스가 진심으로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비출 정도였다. “존귀한 그대에게 판노니아의 왕관을 하사하오.” “과분한 영광에 부끄럽지 않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왕작이 내려지자 어전의 공기가 확실히 부산해졌다. 그런 분위가와 동떨어진 듯 마르바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한층 더 낮게 숙였다. “짐은 판노니아의 왕을 언제 어디서나 의부(義父)로 받들겠소. 사사롭게는 짐에게 아부(亞父)라 불릴 것이요, 공적으로는 황실의 인척에서 문중 어른으로 떠받들 것이니, 아부는 명예롭게도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이곳에 만일 인간계의 관직에 정통한 마왕이 있다면 지금쯤 전율을 느끼겠지.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대장군이 됨으로써 실권을 가져갔고, 마르바스는 황제의 아버지로 받들여짐으로써 가장 명예로운 호칭을 제수받았다. 제국의 서열에서 카이사르는 세바스토크라토르보다 격이 한 단계 낮았다. 평원파와 중립파가 사이좋게 이권을 나눠가진 것이었다. “제국의 신민은 앞으로 그대를 세바스토크라토르-마르바스라 칭송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마르바스가 예를 다하고 일어섰다.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오른편에 섰고, 마르바스는 황제의 왼편에 기립했다. 이 다음으로 누가 불릴지는 여기 모인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파이몬.” “신 파이몬, 부름을 받사와요.” 파이몬이 어전의 정중앙을 걸어나갔다. 그녀는 화려하리 만치 붉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다소곳하게 들어올렸다. 이전에 부름을 받은 두 마왕과 다르게 파이몬은 어조에서나 예법에서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다만 황제에게 불린 것이 아니라 꼭 가면무도회에 초대받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고귀한 그대에게 룩셈부르크 공국을 하사하며, 여기에 더해 룩셈부르크 공국을 대공국으로 승격하오. 아울러 팔츠 선제후령을 룩셈부르크 대공국에 편입시키는 바요.” “황공하옵니다. 위로는 폐하를 돕고 아래로는 신민을 보살펴 제국을 수호하겠습니다.” “음. 파이몬 대공에게 황궁에 대한 관리를 일임하는바, 그대는 명예롭게도 프로 파라코이모메노스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차례대로 관직이 정해졌다. 관직은 철저하게 파벌의 논리에 따라 분배되었으며, 이는 서열이 가장 높은 자들을 열거해보면 곧바로 명확하게 파악되었다. 보헤미아의 왕, 황제의 대리장군, 평원파 바르바토스. 판노니아의 왕, 황제의 의부, 중립파 마르바스. 룩셈부르크의 대공, 제국의 대시종장, 산악파 파이몬. 모라비아의 공작, 제국의 해군사령관, 무소속 가미긴. 작센의 선제후, 평원파 제파르. 마인츠의 선제후, 산악파 시트리. 쾰른의 선제후, 무소속 바싸고. 모두 다해서 일곱 명. 황제가 꼭두각시인 이상, 이들은 명실상부 제국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되었다. 이들 일곱 제후에게는 황제를 선거로 선출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졌다. 이른바 선제후(選帝侯)라고 불리는 직위였다. 누가 황제가 되는지는 이제 일곱 명의 선제후한테 달렸다. 파벌의 구도를 살펴보자면 평원파 2표, 산악파 2표, 중립파 1표, 무소속 2표가 된다. 얼핏 꽤나 공정하게 작위가 분배된 것처럼 보이지만……실상은 다르다. 바싸고는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독야청청하는 애늙은이인지라 이름표가 무소속일 따름이지, 어느 특정한 집단의 마왕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시류에 따라 이편에도 붙고 저편에도 붙는다. 달리 말해, 현재 거의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소속 마왕들은 바싸고 입장에서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평원파나 중립파와 함께하려 들겠지. 바싸고는 무소속 마왕들에게 도리어 적대적인 것이다. 즉……파벌로 뭉친 마왕들이 7표 중에서 자그마치 6표를 독점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겠지. 시대가 바뀌었다. 무소속인 바알, 마찬가지로 무소속인 아가레스가 마왕군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은 종결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정점은 누가 뭐라 해도 바르바토스-마르바스-파이몬으로 이어지는 파벌의 수장들이다. 그런데도 어전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공평하다’라는 것이 무소속 마왕들의 분위기였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평등함에 무소속 마왕들은 안도하고 있었다. 가미긴에게 1표가 떨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한없이 우둔했다……. “하겐티를 크니프하우젠 남작에 봉하오.” “……감사합니다.” “알로켄을 마르티니츠 남작에 봉하오.” “황공합니다.” 한 사람씩 황제에게 호명되어 부복했다. 이들도 알고 있겠지. 사실상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단상에 올라서 있는 세 명의 마왕, 바르바토스-마르바스-파이몬한테 복종하는 것이다. 잘 보면 재미난 점이 있다. 평원파에 속한 마왕은 은근슬쩍 바르바토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산악파에 속한 마왕은 슬그머니 파이몬을 향해서 고개를 숙인다. 반면에 무소속 마왕은 이도저도 아니고 떨떠름하게 부복한다. “…….” “…….” 마왕들이 차례대로 불리고 돌아올 때마다 이상한 침묵이 어전을 휘감았다. 그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몰래 내 쪽을 쳐다보고는 했다. 하나같이 눈동자에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선을 무시하며 느긋하게 작위식을 구경했다. 그렇다.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제파르 형님이 선제후로 임명되는 순간, 수십 명의 마왕이 일제히 나를 훔쳐보았다. 분명히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의 오른팔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근 평원파에서 압도적으로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반박의 여지가 없이 나 단탈리안이었다. 대륙의 열국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제국을 인정받게 만든 사람도 나였다. 선제후에 오를 만한 인물로 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겠지. 그런데도 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마왕들이 호명되면 호명될수록, 남은 마왕의 숫자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알게 모르게 나한테 집중되는 시선이 늘어났다. 아무도 소리를 내어 이 이상한 현상을 지적하지 못했다. 마침내. 모든 마왕이 작위를 수여받고 오직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중에 제국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마족과 인간종의 평화를 위하여 동분서주한 분이 있소. 과인은 상찬과 큰 상을 내리고자 했으나, 그분은 겸양의 말로 한사코 은상을 거부했소. ……단탈리안.” “예.” 나는 허리를 피고 걸어나갔다.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흐뭇해하는 눈길, 칭찬하는 눈길, 의심하는 눈길, 증오하고 질투하는 눈길. 그 모든 것이 마치 망토처럼 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 망토가 벗겨질 날은 앞으로 영원히 없겠지. “과인은 그대에게 제국의 법무상(法務相)을 제수하오.” “제국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을 위해 제 혼과 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나치게 담백한 대화에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등을 돌려서 천천히 어전을 둘러보았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파이몬, 가미긴, 제파르 형님, 시트리, 바싸고. 그들과 한번씩 눈을 마주친 다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나의 우군이다. 호감도로 따지면 50. 즉, 바르바토스가 가진 1표 중에서 절반은 내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0.5표. 마르바스는 나에 대한 호감도가 거의 50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치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 그가 지닌 1표 중에서 절반은 역시 내 것이다. 1표. 가미긴 또한 50의 호감도를 갖고 있으며, 그녀의 불길과 같은 소유욕 때문인지 호감도 이상으로 나한테 집착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가진 1표 중에서 절반은 나의 것이다. 1.5표.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에게 복종한다. 실제로는 하수꾼이다. 바르바토스와 똑같이 형님의 권리 중 절반은 내 의사에 따라 움직인다. 2표. 시트리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3표. 파이몬은 나에 대한 호감도가 50을 넘었고, 사실상 내 의도대로 그녀의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가진 1표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녀의 오른팔인 시트리의 권리와 하나로 묶인 채. 4표. ――7표 중에서 4표. 정확하게 과반수 이상이 나의 수중에 떨어져 있다. 이것이 오늘 열린 작위식의 배후에 진정으로 감추어진 본질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 시대는 비단 세 명의 마왕과 세 개의 파벌에 의해 통치되고 조율되는 시대를 뜻할 뿐만이 아니라, 일찍이 제71위라는 서열에 머물렀던 한 명의 마왕에 의해 조종되는 시대가 펼쳐졌음을 의미한다. 나 단탈리안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이 시대를 집행한다. 제국은 마족과 인간종의 연합체라는 명분을 유지할 것이고, 이는 제국이 언제든 마족의 이름으로, 혹은 인간종의 이름으로 대륙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걸 가리킨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틀림없이 향후 대륙의 역사를 지배한다. 그 제국을 지배하는 자는 나다. 다만 전면이 아니라 뒤편에서. 양지가 아니라 음지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커스토스의 공작이자 제국의 궁중백이요, 한때 서열 제71위였던 자에게 어울리는 차례는 맨앞도, 중간도 아닌, 마지막 중에서도 마지막일 수밖에 없으니. 나는 언제나 최후의 인물이었고 언제까지나 최후의 인물로 남을 것이다. 마왕들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짝, 하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바르바토스가 손뼉을 친 것이겠지. 그러자 뒤이어 대부분의 마왕이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곧 제국이다.   ============================ 작품 후기 ============================   비잔틴-로마의 관직과 칭호를 참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를 참조하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비잔틴-로마의 관직 같은 경우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혼재되어 있어서 작중에선 때때로 라틴어가 쓰이는가 하면 때때로 그리스어가 쓰였습니다. 이것 역시 조사가 미흡한 탓이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특히 여성명사를 따로 취급해줘야 했는데 제가 라틴어에 완벽하게 무지한 탓에 몇몇은 그대로 남성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각종 명칭은 추후에 수정하겠습니다.   00341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트란실바니아 방면에 적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왕실의 근위기사단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군단장.” “적군의 숫자는 확실치 않으나 최소한 일만칠천이 넘을 것입니다.” 군막사. 네 명의 마왕과 열댓 명의 마족 지휘관이 각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이가 중얼거렸다. “양익기사단……붉은색과 하얀색의 사도(使徒)인가.” 마왕 마르바스. 신중하고도 노련한 시선이 지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마르바스의 옆에서 중립파 마왕 한 명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륙 최강을 자처하는 기사단 중 하나이지요. 브르타뉴의 장미가 지난 번에 떨어졌으니 확실히 최강이라 인정할 만합니다.” “음.” 회백색 눈동자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으나 항상 무언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중립파에 소속된 마왕들은 마르바스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마치 고요한 숲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감정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뚜렷하다. 때때로 차분함이 격정보다 더욱 강렬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마왕들은 마르바스라는 거목을 통해서 몇 번이고 실감했다. 그래서겠지. 중립파에 적게나마 계속해서 마왕이 모여드는 까닭은. 단순히 중립파의 이념에 공감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남자, 누천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이 시대들을 거쳐온 마르바스의 인격에 반한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마르바스의 시선이 자신한테 향하고 있었다. “푸르손. 본인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아.” 아차, 하고 중립파 마왕이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너무 뚫어지라 마르바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마왕은 어떻게 변명할까 머리를 재빨리 굴리다가 그냥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군단장께서 지나치게 차분하셔서 말입니다. 무심코 탄복했습니다.”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브르타뉴의 장미를 꺾은 적도 있지 않은가.” “그때는 마왕군 전체가 움직였습니다. 반면에 지금은 우리 중립파만이 전선에 나와 있지요. 상황이 다릅니다.” 현재, 합스부르크 제국은 폴리투니아 왕국과 국경분쟁에 놓였다. 원인은 제8차 월맹군에 있었다. 월맹군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함락시키고 난 뒤로도, 중립파는 방향을 비틀어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침공했다. 아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다섯 개의 백작령을 함락했다. 마르바스는 지극히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왕국을 침략했다. 먼저 평원파에게만 '멋진 역할'을 넘겨줄 순 없다는 이유가 한몫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자면 제8차 월맹군은 평원파의 독무대였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는 단탈리안이 기획해서 단탈리안이 연출하고 단탈리안이 연극한 한 편의 전쟁극이었다. 향후 마계인들 사이에서 평원파가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 위험이 있었다. 마계인들은 비난하겠지. 평원파가 홀로 노력하고 피를 흘릴 때 나머지 파벌은 무엇을 했느냐. 말이 중립파일 뿐이지 실상은 개인의 안전과 보신만 노리는 기회주의자 집단이다, 하고.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르바스는 왕국을 침공했다. 결과적으로 마르바스의 판단은 탁월했다. 무리하게 추격전을 펼치던 평원파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매복에 걸려 패퇴했다. 반면에 폴리투니아로 방향을 돌린 중립파는 소소하게 이득을 얻었다. 마족들 중 명분론에 흥분하는 이들은 평원파를 칭송했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지닌 자들은 마르바스의 신중함을 상찬했다. ─ 평원파의 이상은 올바르며 마인이라면 무릇 지지해야 마땅하다. ─ 그러나 대저 이상을 논함에 있어 우리의 두 발은 단단히 땅을 내딛고 서 있어야 한다. 중립파는 이상과 현실의 중도가 무엇인지 극히 모범적인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마계 지식인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중에는 평원파가 중립파를 도와서 함께 왕국에 침공했다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하고 오히려 평원파를 비판하는 시민도 꽤 있었다. 비록 폴리투니아와 국경을 분쟁하게 되었으나, 중립파 입장에선 매우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장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내었다. 마르바스가 짧게 다듬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여차하면 적군에게 패배해도 좋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예?” 마왕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나머지 중립파 마왕들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씀입니까, 군단장. 몇 년에 걸쳐서 겨우 얻어낸 영토를 포기하다니요?” “자네들이 아까워하는 것은 십분 이해한다. 허나 벌써 잊었는가.” 마르바스가 마왕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우리가 전쟁을 통해 얻으려고 한 것은 명분이었다. 결코 조그마한 땅덩어리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기존에 수립한 작전 목표를 달성했네.” “하지만……명분이란 것도 성과에서 비롯하기 마련입니다. 이제 와서 영토를 도로 잃어버린다면 마계 사회에서 우리를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주위의 마왕들이 반박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르바스는 조용히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정반대다. 마계는 우리가 아니라 평원파와 산악파를 비난할 것이다.”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이 빠졌지만 마왕은 또 다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군단장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자네가 아까 전에 지적하지 않았는가. 예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일세.”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조리는 것처럼 안경을 닦으며 자연스럽게 얘기해나갔다. “예전에 우리는 독립적인 군단이었다. 고로 영토를 함락시킨 것 또한 온전히 우리 중립파만의 공로였으며, 월맹군 전체의 공로로 취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떠한가? 우리는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다.” “아……!” 마왕들이 마르바스의 저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이번에 우리가 영토를 잃어버려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고 수수방관한 제국 중심부의 책임이 되어버립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평원파와 산악파의 책임이 된다.” 마르바스가 외눈 안경을 고쳐 썼다. “우리 중립파가 힘들게 벌어놓은 성과를 시기한 나머지 단 한 명의 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파벌 싸움에 정신이 팔려 대의를 망각했다. 그렇게 여론이 조성되겠지.” “과연……패배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까…….” 마왕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말을 듣고나니 탁자에 올려진 전쟁 지도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비추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점점 집결하고 있는 왕국의 군대를 막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고민을 품고 끙끙거리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즉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여력이 부족하여 후퇴한 것'처럼 사람들 눈에 비출지 고민하게 되었다. 작전 목표 자체가 변경된 것이었다. “……전면적인 농성전 대신에 소규모 분대를 파견해서 끊임없이 왕국군을 괴롭혀야겠군요.” “음. 또한 영토 안에 거주하는 마인들을 서둘러 피난시켜야 한다.” “옳습니다, 옳습니다……그래야 우리들이 끝까지 시민들을 위해 싸웠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줄 수 있습니다!” 마왕들 사이에 기묘한 열기가 번졌다. 승리할 가망이 적은 전쟁을 감내한다는 생각에서 전술적 패배, 전략적 승리의 전쟁을 치룬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자에 비한다면 후자는 명백히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고 의미도 넘쳐났다. “어차피 별로 비옥하지도 않은 땅이다. 우리가 얻을 정치적 이득에 비해서는 한없이 가치가 낮다.” “놀랍습니다, 군단장. 어째서 이제야 저희에게 고견을 들려주신 것입니까?” 마왕들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마르바스를 쳐다보았다. “진즉에 말씀해주셨다면 저희도 그에 맞추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둘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처럼 마르바스는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마르바스에 대한 존경심이 높은 중립파 마왕들에겐 아무래도 서운한 처사였다. 회의에서 처음으로 마르바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왜냐하면 이 작전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일세.” “……예?” 마르바스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기색이 섞여 있어서 마왕들은 어리둥절했다.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되레 웃어버리다니 어찌된 영문인가. “작전이 성공하면 중립파는 마계의 여론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계기를 얻게 된다. 평원파와 산악파의 인기는 추락하지. 우리가 제국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네.” “예,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저들 중에 누구도 이쪽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그러하지.” 마르바스가 한쪽 눈을 가볍게 찡긋했다. 마르바스의 근엄한 얼굴에 그런 장난스러운 눈짓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우리 제국에는 각별한 후각을 가진 이가 있다. 이런 '냄새'를 그자가 맡지 못할 리 없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를 승리하게끔 뒤에서 획책할 것이야.” “……군단장.” 마왕이 다소 어이없는 어투로 말했다. “바로 전선에 서 있는 저희조차 군단장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군단장께서 애당초 의중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실상 우리는 어떠한 행동도 옮기지 않은 셈입니다. 실현된 적도 기획된 적도 없는 의중을 그 누가 간파한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는 거의 본능적인 후각의 소유자가 있는 것이다, 푸르손.” 마르바스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이었다. “전쟁을 승패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철저하게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야. 본인부터 그러하지 않은가.” “하오나…….” 그때 막사에 전령이 들어왔다. 마왕들의 시선이 전령에게 쏠렸다. 전령은 몇 번이나 받아도 익숙치 않은 시선의 집중을 감당하면서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각하. 보고를 올립니다.” “허락한다.” “황도에서 사신이 파견되었습니다. 현재 사신은 군중에서 각하의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들라하라.” “……알겠습니다.” 전령이 약간 주저하며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누가 사신으로 왔는지, 어떠한 행색이며 목적은 무엇인지 물어보기 마련이었다. 질문에 대비해서 전령은 수십 번 대답을 연습하고 준비했다. 그런데 흔쾌히 출입을 허락하니 다소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전령이 떠나가자 마르바스가 피식 웃었다. “양반은 아니로군. 얘기를 꺼내자마자 오는 걸 보니.” “설마 황실에서 군단장의 계획을 알아채고 사신을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마르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마왕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주변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마르바스는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렸다. 잠시 뒤, 막사의 휘장을 걷어내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유독 등이 구부정한 남자는 순식간에 막사 안을 훑어보더니 그 다음에야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주위의 상황을 먼저 파악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변치 않는 습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마르바스가 환영의 인사를 건네었다. “이런 외딴 변경에 무슨 일이신가, 법무상.” “변경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검은 남자, 단탈리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저는 지금 제국의 중심에 방문하고 있습니다.”   00342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제국의 중심인가.” 마르바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수사학일까, 아니면 이쪽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암시일까. 만약에 간파했다면 어느 정도까지 알아챘는가……. 마르바스는 단탈리안의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적이 대군을 끌어모았네. 폴리투니아의 국왕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있지. 중앙에서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야.” “아무리 군세를 모아본들 어찌 마르바스 전하 한 사람에게 당하겠습니까?”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웃음기로 반짝거렸다. 저 눈동자 때문이었다. 무해하고 힘없는 초식동물마냥 단탈리안의 눈에는 반쯤 유약한 구석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으면 바로 항복해버릴 것 같았다. 저것 때문에 단탈리안을 상대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깔본다. 그러나 안심해서 공격하면 터무니없는 반격이 돌아온다. 이쪽이 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사방에서 포위한다. 눈치채보면 이미 사지가 묶여 있다. 마치 거미와 같은 인물이다. 사냥꾼의 눈을 현혹하는 독거미……. 단탈리안은 둘 중 하나이겠지. 천성적인 위장술을 지녔거나, 혹은 눈빛마저 자유자재로 조종할 만큼 능숙한 희대의 배우였다. 어느 쪽이든 지극히 위험한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수만의 대군에 필적할 수는 없다.”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황부(皇父)야말로 마왕군 제일의 병법가라 믿고 있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는가…….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고쳐 썼다. 단탈리안은 폴리투니아의 대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이쪽의 속내를 훤히 뚫어보았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나가주게. 단탈리안과 긴히 나눌 말이 생겼네.” 마르바스가 다른 마왕들과 지휘관들을 바깥으로 보냈다. 중립파 마왕들은 대체로 단탈리안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에, 존경하는 군단장과 단 둘이 내버려두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막사가 적막해졌다. 주변의 시선이 사라지자 마르바스는 단도직입해서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 챘는가?” “폴리투니아의 왕이 군대를 모집하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군을 즉시 청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실 의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단탈리안이 즉답했다.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바라고 계신다……그렇다면 패배해서 얻을 이익은 무엇인가. 거기서 생각을 역추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쉬워보이는군.” 마르바스는 졸지에 어린애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단탈리안이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가 당신의 생각을 알아내리라 짐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수수방관하신 것 아닙니까? 서로가 서로의 덜미를 잡았으니 무승부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승부라…….” 달리 말해 호적수인가. 당신과 내 수준이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찌보면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건만, 마르바스는 어째서인지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전하와 정략을 주고받는 것이 내심 즐겁습니다.” 어느새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동지들은 자극적인 즐길거리를 별로 선물해주지 않지요. 더러 따분할 때가 있습니다.” “허. 자네는 제국을 다스리는 일을 한낱 놀이로 취급하는 것인가.” “세상에는 진지함과 지루함을 혼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은밀하게 귓속말로 중얼거리는 것 같은 어조였다. 마르바스가 웃고 말았다. “맞는 말이다. 마왕이라면 응당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황송합니다.” “허나, 단탈리안. 본인으로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군. 본인의 계획을 막고 싶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군이 필수적이다. 자네는 그러나 단독으로 이곳에 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는 의문을 담아 마르바스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를 말씀입니까, 고귀하신 마왕이여. 원군은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호오. 자네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인가.” 오만하기까지 한 발언에 마르바스는 즐거워졌다. “소신에게 맡겨주십시오. 폴리투니아의 삼만 대군은 단 하나의 요새도 함락하지 못한 채 쓸쓸이 회군할 것입니다.” 황궁에서 마왕들의 서열이 재정립된 지 두 달이 흘렀다. 짦은 시간 동안 눈앞의 마왕은 확실하게 권력을 휘어잡았다. 그 솜씨를 바로 옆에서 일견하는 것도 즐겁겠지, 하고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엇이 필요한가?” 단탈리안이 연극하듯이 두 팔을 벌렸다. 그가 허리를 낮추고 말했다. “중립파의 모든 병력.” 이틀 뒤, 일만오천의 마족으로 이루어진 중립파 군세가 진군했다. 이 진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폴리투니아의 왕은 이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두 군세는 약속한 것처럼 널찍한 평원에서 맞닥트렸다. 양군을 합쳐서 사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부닥치는 전투. 이제야 평화가 찾아오는가, 하고 안심하고 있었던 대륙인들은 다시금 불안에 잠겼다. 그들은 각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휘스트 평원에 주목하였다. * * * 널찍한 평원에 양군이 마주보고 있었다. 수만 명의 병력이 드넓게 진용을 펼치는 광경은 언제 봐도 웅장했다.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불안감, 초조함, 흥분, 두려움……그 모든 감정이 짙은 안개가 되어 대지에 내려앉았다. 대부분의 지휘관은 그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한다. 겁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 수많은 장병들을 절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냄새를 맡고 흥분해버린 오크는 제멋대로 날뛰고, 인육을 눈앞에 둔 고블린은 마음껏 돌격해버린다.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마왕은 덩달아서 흥분하고 만다. 웬만한 연륜이 없는 이상, 마왕의 군대는 한 덩어리의 카오스가 되어 폭주한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흥분감. 그 때문에 마왕들은 이성을 잃고 돌격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립파는 견고하게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부대를 배치하고 한참이 지났는데 어느 마왕도 마르바스한테 공격을 보채지 않았다. 일선의 부대들은 엄중한 절도를 지키고 있었다. 소수의 젊은 마왕이 혈기를 참지 못하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중립파 마왕들은 한없이 침착한 시선으로 평원 너머의 적군을 지켜보았다.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던짐으로써 서로가 적당히 긴장을 풀어주었다. 정예병을 이끄는 숙장(宿將)들이라고 할까. 평원파처럼 명장과 맹장이 즐비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이쪽이 군대로서 올바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군대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겠지. 다만 평범을 뛰어넘은 규격 외의 군대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게임에서 마르바스는 군대를 이끌고 엘리자베트와 맞서 싸우다가, 전투 도중 결사대로 돌격한 용사에 의해 목이 날아간다……. “배치가 끝났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단탈리안?” 마르바스는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너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흰색 깃발을 준비해주십시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협상부터 할 생각인가?” “폴리투니아의 국왕과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나는 세 명의 기병만 대동하고 평원 한가운데로 말을 몰았다. 한 명의 기병은 사신을 뜻하는 흰색 깃발을 들고 있었다. 다른 기병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가를 뜻하는 붉은 독수리 깃발을 들었다. 마지막 한 명은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을 휘날렸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평원의 정중앙. 잠시 뒤, 폴리투니아군 쪽에서 일단의 기병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폴리투니아 왕국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흰색의 깃발. 폴리투니아 왕가를 의미하는 하얀 독수리와 성기사. 기병들은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추어섰다. 그리고 무리 중에서 한 명만이 말머리를 앞세운 채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 역시 거기에 호응하여 말을 이끌었다. 사만 명의 병력이 바라보는 가운데 나와 상대방이 조우했다. “항복을 전하러 왔는가, 마왕이여.” 스테판 바토리. 동방의 거인. 폴리투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덩치가 웅장한 남자는 검은 턱수염을 실룩거렸다. 황금색 망토를 어깨에 걸친 대왕은, 꼭 자신이 올라탄 말과 한몸이 되어 허리를 우뚝 피고 있었다. 근엄한 목소리는 내 귀에 작은 말발굽을 울리는 듯했다. 나보다 키가 곱절은 크겠군, 하고 생각하며 내가 미소를 지었다. “대왕이시여. 항복은 없습니다.” “항복이 없다면 전쟁이 있을 뿐. 그 이외에 예법은 전쟁터에 불필요하다.” “왕이라면 무릇 중도를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토리 대왕이 흐, 하고 낮게 웃었다. “중도란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결과를 두고 치장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짐은 이곳에 오만의 정병을 끌고 왔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겠는가.” “실례합니다만, 저는 대왕께서 승리를 바라시고 이곳에 왔다 생각치 않습니다.” 대왕은 불쾌한 듯 눈썹을 와락 구겼다. “마왕이 변설을 일삼는다고는 듣지 못하였다만.” “대왕께서는 이번에 출병하는 데 있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전포고는 폴리투니아 왕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대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요.” 군대를 움직이는 데엔 항상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고 그 자금은 세금에서 충당되어야 한다. 문제는 귀족들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쉽사리 세금을 지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리투니아의 귀족들은 국왕을 위하여 전쟁 특별세를 내는 데엔 동의했다. 단, 최소한 자신들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루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전쟁이 벌어져도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 국왕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전쟁의 필요성엔 수긍하면서도 백성들의 원망을 듣긴 싫다는 얘기이지. 뭐, 마왕들이야 '국왕이 선전포고한 것이나 국가가 선전포고한 것이나 똑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인간계의 정치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위대한 바토리여. 당신께 작금의 상황은 별로 달갑지 않을 터입니다.” 대왕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마왕.”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협력할 때만 하더라도 대왕께선 설마 제국이 국제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셨겠지요. 그렇기에 통령에게 협력하여 반(反) 월맹군 전선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 현재 대륙에서 제국에 적대적인 국가는 사르데냐 왕국과 폴리투니아 왕국, 합스부르크 공화국, 단 세 곳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 점점 고립되는 상황에 바토리 대왕은 심란할 게 분명하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적당히 전쟁하여 적당히 협약을 맺는 것……우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짐의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는가?” “대왕께서 다른 국가에 원병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바토리 대왕이 진심으로 우리 마왕군과 한판 결전을 벌이고 싶었다면 이 전쟁을 '사악한 마왕군에 대적하는 인류'라고 광고해댔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바스가 제국의 중앙에 아무런 원병을 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토리 대왕 또한 주변국에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폴리투니아 국왕의 이름으로 병사를 이끌었다. 국제적인 논란으로 야기시키기 싫다는 의미이며, 현재 대륙의 외교적 판국을 어지럽힐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바토리 대왕은 명백히 승리가 아니라 협약을 노리고 있다. 우리와 적당한 화해를 원하는 이유는 간단. “당신께서는 공화국과 서서히 거리를 벌리고자 원하시고 있습니다.” 썩은 동앗줄을 버리고 새로운 줄로 갈아타려는 것. 바토리 대왕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의 말대로 짐이 휴전을 바란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더더욱 전투를 치러야지 않겠는가? 아무런 명목도 없이 휴전을 맺기란 불가하다. 짐에게도 최소한의 체면이 필요하니 말이다.” 일국의 대왕답게 말귀가 빨랐다. 말인즉슨, 휴전을 원하지만 영토를 빼앗긴 채로 순순히 협정에 들어가면 주변에서 유약한 군주라고 깔볼 것이니 조금이라도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체면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런 얘기였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우리가 친구가 되는 방법이 있나이다, 대왕이여.”   00343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달콤하여 되레 버겁구나.” “대왕.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인 법입니다.” 본래 찰리 채플린이 한 명언이나 이 세계에는 당연하게도 위대한 독재자가 없었다. 저작권은 나에게 있었다. 바토리 대왕이 잠시 멈칫하고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내가 던진 말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한 줄기의 현명함이 담겨 있구나. 무엇이든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느냐.”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쯤을 포기할 수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옳다.” 바토리 대왕의 입꼬리가 슬그머리 올라갔다. “삶의 진지함을 포기하는 자는 진지함을 비웃을 수 있다. 투쟁을 포기하는 자에게 타인의 피 흘리는 투쟁이란 단지 쓸데없이 웃긴 발악에 불과하다. 제국의 번견이여! 그러나 버리는 자는 버림으로써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는 것이다!” 거인은 말꼬리를 쥐어잡고 일갈했다. “왕이란 무거운 자다. 또한 마땅히 무거워야만 한다. 짐의 어깨에 신민 천만의 생명과 왕국 육백 년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노라. 그 무게를 경계하라.” “위대한 바토리여. 저만큼 무게에 정통한 자도 없습니다.” 내가 작게 웃었다. “대왕과 저 사이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쌍방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는 양끝에서 출발함으로써 길의 중간에서 만나겠지요. 결국, 두 사람 모두 반절의 길밖에 걷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추고 말 것입니다.” “짐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가?” 바토리 대왕이 불곰처럼 으르렁거렸다. “짐은 그대들을 죽이고 영토를 탈환할 것이다. 패배는 그대의 몫이다.” “전면전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폴리투니아의 평원에 살아가는 모든 목축과 나무는 싸그리 불타 죽을 것입니다. 대왕이 자랑스러워하는 신민은 아기와 말에게 먹일 하루 끼니도 찾지 못하고 굶주림에 쓰러질 것입니다. 흑마법사는 역병을 흩뿌릴 것이요, 해골과 시체가 초원을 배회할지어니!” 바토리 대왕이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었다. 기세에서 밀려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되었다. 나는 싸늘한 비웃음을 적나라하게 내비추었다. “혐오스러운 묘지에서 매일밤마다 식인의 환호성이 울리고, 마족은 장난 삼아 수만 명의 인간을 장님으로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끔 한바탕 축제를 펼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류의 도덕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스테판 바토리.” “…….” “나는 단탈리안. 산 자를 모욕하고 역병을 퍼트리는 자입니다. 인간의 군주여! 마왕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검은 수염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잔뜩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을 진정시켰다. 좋다. 가장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쌍방이 함께 길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영토를 동시에 포기한다고?” 바토리 대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영토의 절반은 아레스의 대신전에 봉납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아테나의 대신전에 바칩니다. 이 땅은 앞으로 귀국과 저희가 평화로운 맹약을 맺은 증거로 남을 것입니다.” “…….” 대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레스는 폴리투니아 왕국을 대표했고, 아테나는 브르타뉴 왕국을 대표했다. 다만 아테나 신전은 최근 들어 명백하게 친(親) 합스부르크 제국을 표방하고 있었다. 요컨대 폴리투니아 왕국과 우리가 반반씩 영토를 나눠갖는 것. 눈가림용 속임수였다. 검은 돈을 이리저리 세탁하듯이, 영토의 출처를 신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세탁한다고 할까. “배부른 사제들에게 공으로 땅을 선물하라는 말이냐.” “신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 체면입니다. 양국의 평화, 더 나아가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나선 셈이 됩니다. 잔뜩 콧대가 높아지겠지요. 어느 사제를 파견할 것인지는 대왕께 결정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대왕이 혀를 찼다. “나쁘지 않은 계책이나 달갑지 않다. 신전에, 그것도 두 개의 신전에 빚을 만들어두는 꼴이지 않는가. 짐은 그들에게 채무를 느끼고 싶지 않노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정반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아레스의 대신전은 포세이돈 대신전, 헤스티아 대신전과 함께 제국을 비난했지요. 열두 곳의 대신전 중에서 오직 세 곳만 그러했습니다. 지금쯤 그들이 고립감을 느끼고 있지 않겠습니까?” “……!” 바토리 대왕이 침음을 흘렸다. “과연. 신전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오히려 우리가 배려해주는 모양새가 되는가…….” “더군다나 명목상으로, 우리는 신전들에 영지를 봉납합니다.” 신전들 입장에서는 세 가지 이득이 있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 서로 서먹해진 관계를 자연스럽게 회복, 명목상으로 늘어나는 신전의 토지까지. 이게 웬 떡이냐면서 우리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겠지. “대왕께서 이참에 사제들한테 크나큰 빚을 지워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바토리 대왕이 장고에 들어갔다. “후우.” 문득, 그가 하늘을 높이 올려다보더니 장탄식을 흘려보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위로 딸려갔다. 얄밉도록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대는 무서운 자로고.” 여태까지 바토리 대왕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위압감이 불현듯 어딘가로 가라앉았다. 왕자(王者)의 카리스마가 증발하고 나자,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대륙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군주가 아니었다. 한 명의 중년이 안장에 올라탔을 뿐이다. 다만 검은색 눈동자가 유독 깊었다. 천성적인 직감과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한 깊이였다. 얼굴 주름에는 세월의 풍파가 거칠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대가 모시는 황제의 여동생에게 들었다. 제국의 심처에는 한 마리의 독거미가 산다고…….” “…….” “눈치 채보면 이미 거미줄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으며, 움직이자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던가. 그녀가 실로 올바르게 말했구나.” 이미 엘리자베트는 바토리 대왕과 인연을 만들어두고 있었는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나라를 재건하면서 동시에 주변국과 몰래 협조했다. 엘리자베트이기에 가능한 묘기이겠지. 그리고 주변국과 협조를 꾀한 이유는 아마도 단 하나, 나를 사방에서 포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가 독거미라면 그녀는 교룡입니다. 때를 만나지 못해 승천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능히 대륙 전체를 오시할 재능이 있습니다.” “알고 있노라.” 바토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바토리는 어딘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짐도 젊을 적에는 대륙을 아우르고자 했다. 청년의 혈기였지.” “…….” “허나 천운이 부족하고 재능이 부족했다. 짐에게 주어진 왕국 하나를 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기에 보고 싶었다. 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대륙을 정벌하는 광경을. 그 눈부신 재능을…….” 그랬는가. <던전 어택>에서 폴리투니아 왕국은 퀘스트 하나를 깨면 간단하게 용사를 지지했다. 본래부터 제국과 우방국인가 싶었지만, 스테판 바토리의 개인적인 열망이 숨겨진 모양이었다. “어리석은 소망이라 해도 좋다. 마왕이여, 이해하겠는가. 짐은 단지 증명되기를 바란 것이다. 짐이 어릴 적에 꿈꾼 광경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불가능하지 않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삶이겠지. 나는 당신의 삶을 기꺼이 긍정한다. “그런데 저에게 협력해도 좋겠습니까?” 내가 반쯤 장난스레 입끝을 들어올렸다. “저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미래를 가로막을 자입니다. 지금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녀가 구상한 계획은 망가질 것이요, 대왕의 꿈을 이어받을 자가 좌절할 것입니다.” “으음.” 바토리 대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턱끝을 돌렸다. “대륙의 제왕이 되겠다는 여걸이 겨우 짐 때문에 좌절해서야 쓰겠는가? 만일 좌절한다면 결국 그 정도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다.”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저 단탈리안, 대왕의 드넓은 도량에 실로 감복했나이다. 과연 천만의 생명과 육백 년의 역사를 짊어질 만한 뻔뻔함입니다.” “짐이 그런 칭찬을 자주 듣는다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토리 대왕이 대답했다. 이거 걸물이었다. 바토리 대왕에게 호감이 생겼다. 게임에서도 위대한 군주라 자주 묘사되길래 그냥 그런가 싶었건만, 실제로 보니 재밌는 아저씨가 아니고 뭔가. 이 남자의 오만함과 뻔뻔함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는 뻔뻔함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오직 뻔뻔한 자만이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만끽하는 모습이란 언제나 흥겨웠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고 배신하며 모욕하는 가치가 있었다. 우리의 삶을 한결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부류였다. 좋다. 당신에게 깜짝 선물을 건네주도록 하자. 내가 흥에 겨워 마치 노래하듯이 말했다. “위대한 바토리여. 대왕에게는 여동생이 한 분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아. 짐이 소년일 때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노라.” 바토리 대왕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양반은 소년 시절 여동생과 사랑을 나누었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엄격한 궁정 생활, 그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겠지. 아름다운 왕녀는 한창 꽃다운 열다섯 살에 죽었다. 적어도 세간에 그리 알려졌다. “왕녀가 살아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 공기가 바뀌었다. 넉살 좋은 남자가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맹수가 나타났다. 눈동자에서 약간의 호감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이쪽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눈빛이 맹폭했다. “네놈. 어떻게.” “왕녀는 어릴 때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운이었지요. 왕녀가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폴리투니아 왕가의 명성에 큰 해가 됩니다. 대왕께서는 사랑하시는 동생을 죽음으로 위장하고, 멀리 외딴 별장에 숨겨두었습니다.” “…….” 이게 폴리투니아 왕국을 용사편으로 끌어들이는 한 개의 퀘스트였다. “왕실에서 엄선한 치료 마법사 덕에 여태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만, 실로 괴롭고 저주스러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제 호의입니다. 마계의 의사를 대왕께 보내도록 하지요.” “설마…….”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 바토리 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백방에 처방을 구해도 무용지물이었거늘!” “인간계는 아무래도 흑마법에 미숙하지요. 허나 마계는 다릅니다.” “흑마법이라니.” 바토리 대왕은 아연해진 얼굴이었다. “동생께서 걸리신 병은 단순한 문둥병이 아닙니다. 교묘하고 음습한 흑마법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뭐, 너무 마법사와 사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인간계에서 흑마법이 실전된 지 이미 천 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어찌하여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단탈리안입니다. 마왕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그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협박에 상대방이 침묵했다. 나는 오른손을 건네었다. “대왕. 제가 귀국의 영원한 우정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 느긋하게 기다렸다. 바토리 대왕은 오른손으로 내 손을 마주잡았다. 손에서 미약하지만 떨림이 있었다. 매우 기분이 즐거웠다. 인간은 마왕에게 딱 이 정도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 좋았다. 엘리자베트의 우군이 한 명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00344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이제 우리는 친구입니다.” 나는 오른손에 힘을 꾸욱 주었다. 장담컨대 바토리 대왕이 나보다 두 배는 손이 큼직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내 손바닥이 그의 손을 구렁이처럼 휘감았다. 바토리 대왕은 미지에 대한 공포가 서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친구이지요.” 왼손으로 그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두들겼다. 저절로 악수가 풀렸다. 여전히 시선이 흔들리고 있는 대왕을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숙였다기보다 비틀었다고 말해야 올바를 정도로 아주 살짝. “여신께서 그대와 그대의 동생을 보우하시길.”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바르바토스가 선물해준 명마는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발굽을 몰았다. 흑색 갈기가 아름다운 말은 우연찮게도 이름이 아미쿠스(Amicus). 즉, 친구였다. 내가 말을 타고 나아가자 뒤편에서 대기하던 세 명의 기병이 따라붙었다. 나는 그중 하얀색 깃발을 꼬나쥔 병사에게 명령했다. “깃발을 높이 들어라!”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기병은 깃발을 드높이 쳐들었다. 협상이 무사히 이루어지면 흰색 깃발을 휘날리고, 안타깝게도 결렬되면 깃대째로 땅바닥에 버린다. 마르바스에게 미리 그렇게 말해두었다. 일만오천 명의 아군 병사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장창들이 하늘을 찔렀고, 방패들이 땅바닥을 두들겼다. 이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았다. 아무리 마족이 호전적이라 해도 패배가 정해진 전투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 단탈리안! ─ 단탈리안! 단탈리안! 단탈리안! 나는 병사들의 함성을 한몸에 받으며 대열의 정중앙으로 향했다. 이때 마르바스는 꽤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뿔피리를 불어서 전 병력을 뒤로 돌리게 한 것이었다. 오크 종족이, 고블린 종족이, 켄타우로스와 묘족이, 각자 자신들의 부족에 대대손손 전해져 내려오는 뿔피리를 불었다. ─ 부우으으으. 폴리투니아 평원에 마흔아홉 부족의 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기묘하고 둔탁하게. 이천 년의 월맹군 역사에서 어김없이 전쟁을 몰고온 그 음산한 피리 소리들은, 그러나 오늘은 검은 피가 떨어지지 않은 승리를 축복했다. 양익의 기병대가 말허리를 돌려 후방으로 달렸다. 중앙의 보병들이 그대로 뒤를 돌아 대오를 맞추어 걸어나갔다. 전군이 전면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진형을 바꿀 경우 자칫 적군에게 돌격을 허용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패배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르바스가 적군에게 등을 내보이는 이유로는 두 가지쯤을 뽑을 수 있었다. 하나는 적군에 대한 예우. 당신이 비겁하게 협상자의 등을 공격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 표시였다. 다른 하나는, 나에게 거의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 협상자인 내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당신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당신이 평화로운 교섭을 성공했다고 보고했으니 그에 따르겠다……. 장대하고도 우아한 제스처가 아닐 수 없었다. 마르바스답다고 할까. 전쟁터의 신사란 저런 느낌이겠지. “협상이 성공한 모양이로군.” 내가 지휘부에 도달했다. 마르바스는 이미 다른 마왕들과 함께 후방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시원한 미소를 그리면서 말했다. “단 한 차례의 대화로 종결되다니. 본인이 굳이 군대를 끌고올 필요가 있었는가?” “스테판 바토리는 곰처럼 교활하고 잔인한 자입니다. 언제든지 약자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지요.” 나는 아미쿠스를 마르바스의 회백색 말에 바짝 붙였다. “폴리투니아는 왕정과 공화정이 기묘하게 결합된 국가입니다. 국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귀족의회의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폴리투니아 국왕은 세습되지 않았다. 귀족의회가 선거를 통해서 왕을 뽑는 방식이었다. 국왕의 자리를 좌지우지할 정도이니, 조세와 관세를 부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군사를 동원하는 것조차 귀족의회에 동의를 얻어야 했다. 대체로 폴리투니아에서 국왕이란 꼭두각시 자리에 불과했다. “폴리투니아가 그간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우호적이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겠지요.” “호오. 그렇다면 더더욱 저 스테판 바토리라는 작자도 운신에 폭이 좁아지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대체로, 라는 것은 예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폴리투니아에서 국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도 대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카리스마로 성질이 불길과 같은 폴리투니아 귀족들을 휘어잡았습니다.” 이 시대에는 뛰어난 군주가 기라성처럼 즐비했다. 엘리자베트는 논외로 치더라도, 많은 나라가 역사상 세 번쯤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영도되었다. 던전 어택에서 마왕군이 멸망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대체 뭔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인류는 올스타 맴버라도 출현시킬 셈인가. 나에게 있어서는 프랑크의 앙리 황제와 우리 제국의 루돌프 황제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원한다면 키스라도 해줄 수 있다. 둘 다 죽었지만. “제도의 한계를 단신의 능력으로 극복한 사례이지요. 저런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는 때때로 놀라운 힘을 보여줍니다. 스테판 바토리와 대적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스테판 바토리가 죽으면 그 힘도 사라지겠군. 아니 그러한가?” 내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는 국왕의 죽음과 함께 단결력 또한 잃어버린다. 후계자가 평범해도 안 된다. 심지어 후계자가 약간 뛰어날지라도 안 된다. 이미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맛본 귀족들은 항상 국왕을 전대의 지도자와 비교한다. ‘선대 전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국왕에게 몰렸던 권력이 다시금 급속하게 귀족 세력으로 빠진다. 국왕은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귀족들은 거기에 반발한다. 왕권과 신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두 세력이 싸우고 다투는 동안 국가의 힘은 알게 모르게 탕진된다……. “왕권이란. 아니, 국가 권력이란 결국 제도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합니다. 한 명의 뛰어난 카리스마에 의해 유지될 만큼 국가는 만만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기다린다. 엘리자베트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스테판 바토리가 썩어빠진 백골이 될 때까지. 원래 이 시대를 주름잡아야 할 인간종의 위인들이 모두 무덤에 파묻힐 때까지. “반면에 우리 마왕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긴 안목으로 장기전을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인가.” 마르바스가 웃었다. “단탈리안, 자네는 참으로 교활하군. 상대방을 잔뜩 칭찬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결론적으로 승자는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지 않나. 저들이 듣기에는 오히려 칭찬을 받지 않는 것만 못하다.” “고귀하신 분이여.”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대편을 크게 칭찬할수록 그들에게 승리한 우리의 가치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저를 믿어주십시오. 포도주가 오래 숙성할수록 달콤해지듯이, 꼭 그처럼 우리의 승리도 더더욱 각별해질 것입니다.” 마르바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나의 몸이 살짝 앞으로 굽어졌다. 나는 몸을 굽힌 적이 없었기에 잠깐 멈칫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르바스가 날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왜 몸이 굽어졌는지 이해했다. 마르바스가 호의를 표시하려고 내 등짝을 가볍게 후려친 것이었다. 라우라를 처벌한 사건 이후, 등쪽에 거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몸을 조금 다쳐서 말입니다. 등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르바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등에서? 혹여 심각한 문제는 아닌가?” “하하. 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마 심리적인 문제일 겁니다.” “본인에게 뛰어난 명의가 몇 있으니 보내줄 수도 있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서 의사가 가장 필요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마왕들이지 않습니까. 별다른 문제가 아닐 겁니다.” “흐음…….” 마르바스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늙은이의 노파심이라 생각해도 좋다. 단탈리안, 자네는 자신의 몸을 무척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야. 자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소중하게.” “예?” 단순한 걱정이나 기우가 아니었다. 마르바스는 진중한 얼굴이었다. “자네는 스테판 바토리가 제도의 한계를 개인의 능력으로 무마했다고 평했지. 본인이 보기에 그 평가는 그대로 우리 마왕군에 적용된다. 요 사이에 우리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가?” “…….” “제도가 아닐세. 우리에겐 아무런 제도도 없어.” 그렇다. 마왕군은 조금 평가절하해서 표현하자면……거의 부족연맹체에 가까웠다. 마왕마다 마왕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 마족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듯, 마왕들은 이상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첨예하게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본인이 발푸르기스의 밤을 만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제도라고 불릴 만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왕군에 마련해두고 싶었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발푸르기스의 밤이라고 해봤자 단순한 회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네.” 심지어 그 회합에 참여하는 마왕도 간신히 절반을 넘을까 말까 했다. “우리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개개인의 능력 덕택이야. 단탈리안, 틀림없이 자네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과분한 칭찬입니다.” “겸양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네.” 마르바스의 외알 안경이 반들거렸다. “자네가 죽는다면 신생 마왕군도, 합스부르크 제국도 끝장일세. 마왕이 영원토록 산다고 하지만 바알의 최후를 기억하게나. 운명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야. 주의하고, 또 주의하게.”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약간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칭찬을 듣는 것은 아무래도 내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비틀어지고, 왜곡되고, 나쁜 방향으로 꼬아진 칭찬을 좋아했다. 여기서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해야겠지. “감사합니다, 마르바스. 명심하겠습니다.” “음.” 마르바스가 만족스럽게 턱끝을 끄덕였다. 마르바스를 가리키는 단어는 꽤 많았다. 가장 고귀한 마왕, 제국의 황부, 세바스토크라토르. 이번에 나는 단지 마르바스라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방금의 약속을 온전히 당신 한 사람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네만.” 어라, 대화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시지요.” “흠…….” 마르바스가 헛기침을 했다. 대화를 질질 끄는 것은 마르바스에게 어울리는 화범이 아니었기에 나는 다소 의아했다. 마르바스는 몇 번이나 말머리를 삼켰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단탈리안.” “예, 마르바스.” “……자네, 본인의 아들이 될 생각은 없는가?” 나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마르바스도 따라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멍청하게도, 정말 멍청하게도 멍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네? 잘못 들었습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는 것처럼 마르바스가 과감하게 말했다. “양아들 말일세. 자네를 양아들로 삼고 싶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00345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어색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회군하는 병사들이 주변을 지나치고 꾸역꾸역 걸어갔다. 마르바스와 나만이 시냇물에 박힌 바윗돌마냥 말발굽을 멈춘 채 그 자리에 박혔다. “흐음. 흠.” 마르바스는 어째서인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다소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그 각도와 눈빛은 틀림없이 이쪽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 기세에 떠밀려 말해놓고 상대방이 어찌 나올까 조심히 관망하는 태도였다. 내 시선과 마르바스의 시선이 몇 번 교차하고 미끄러졌다. 그러자 어색한 공기에는 새로운 색채가 더해졌다. 마치 부드럽고……그러면서도 간질간질하고 무언가 야리꾸리한…….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라. 이건 뭐냐. 지금 내 온몸의 신경세포를 분홍색으로 휘감으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촉수의 점액질과 같은 분위기는 대체 뭐냐! 마르바스, 당신은 왜 자꾸 내 눈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겁니까. 절 보십시오. 아니, 눈길을 피하지 말고……군단장 각하? 저기요? 능구렁이 영감탱이 씨? 세바스토크라토르……? 문득 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마르바스는 현재 호감도가 50을 찍고 있었다. 그러니까……호감도가 50이라서……나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무언가 이상하게. 이 시대에는 어린 동성 애인을 양자로 들이는 풍습이 있기도……. ‘그럴 리가 없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절규했다. 나는 그러나 원망스럽게도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었다. 주인이 절찬리에 카오스의 폭풍에 휘말리는 도중에도 이성적인 자아들이 남았다. 자아의 파편들이 냉정하게 현황을 논의했다. ‘설마 양자 이벤트가 호감도 락을 해체하는 조건이었다니.’ ‘맹점이었던 거야.’ ‘마르바스까지 함락하면 바르바토스, 파이몬이랑 합쳐셔 삼관왕 플레이 오케이?’ ‘제국의 궁전에서 시녀는 목격했다. 충격보도 360일.’ 내 이성은 죄다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들이었다. 이런 새끼들을 데리고 천하를 논하느니 차라리 시트리한테 제국 섭정을 맡기는 편이 훨씬 유익하리라. “…….” “…….” 일초가 흐를수록 우리 주위의 공기가 기묘해졌다. 정체도 모르거니와 밑도 끝도 없는 부끄러움과 머뭇거림이 칵테일되고 있었다.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난 이런 공기가 쥐약이었다! 정말로 싫었다. 증오한다고 표현해도 부족했다. 여기서 허둥지둥거려도 볼썽사나울 뿐이었다. 그러했다. 3cm 철갑을 가뿐히 씹어먹을 정도로 견고한 내 철면피를 사용하자.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마, 마르바스 님. 양자란, 무슨 뜻인지요?” ――침착하게 대응하기는커녕 말을 씹어버렸다.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팝콘을 튀긴 것처럼 들떴다. 틀렸다. 글러먹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미팅에 나가서 여자 고등학교 학생이랑 얘기할 때와 비스무리한 공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끔찍한 재앙이었다. “말 그대로. 자네가 내 양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외람되오나, 저, 저는 누구의 아들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본인은 상관없네.” 마르바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단탈리안. 자네라는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 “…….” 그렇게 열렬하게 고백해와도 이쪽은 곤란할 뿐이다! 나는 졸지에 붕어가 된 기분으로 입을 뻥긋거렸다. 머리가 너무 과열된 나머지 어떻게 무슨 식으로 말을 내뱉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혓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란 조금 더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알고 나서 논해야지 옳다고 할까요. 전하와 저 사이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섭섭하군.” 마르바스는 적잖게 실망한 어조였다. “본인은 출생과 나이를 뛰어넘어 그대와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조금 더 단단한 인연으로 묶이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아……그것이 말입니다……네, 그렇지요…….” 긍정하지 마라, 멍청아! 웬 숫처녀처럼 우물쭈물거리는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갔다. 세상에. 정말로 내가 낸 목소리가 맞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다. 뭇 여마왕들의 마음을 농락했고 심지어 시트리까지 사로잡았건만 겨우 동성에게……까마득하게 나이가 많은 남자한테……그것도 스무 살 서른 살 수준이 아니라 수천 년이나 연상인 사람한테……! “단탈리안.” 마르바스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딸꾹질이 나올 만큼 깜짝 놀랐다. “네, 네.” “본인은 타인을 속일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거짓말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바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일세. 마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본인은 진심으로 제안하고 있다네. 알겠는가?” 마르바스의 나지막하고 그윽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회백색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이것이 마계의 여성들에게 천 년이 넘도록 부동의 인기를 자랑하는 미중년인가. 아가씨와 아줌마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고 들었는데,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게 나이가 들었다……. 눈썹과 턱수염은 매일마다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이 분명하겠지. 적당한 길이에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주름은 자연스럽게 접혔다. 나이에 의해서 접혔다기보다 수많은 감정이 누적되고 누적되어 그 무게에 의해 저절로 파인 느낌이었다. 그래. 깊이가 있었다. 향수조차 기분 좋게 은은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필사적으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깊이는 무슨 얼어 죽을 깊이인가! 나는 여자가 좋았다. 백 번 양보해서, 진짜 백 발자국 양보해서 시트리까지는 허용하더라도, 진짜 남자를 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 마르바스 전하.” “본인은 자네를 믿고 있네. 아아. 믿고말고――.” 마르바스가 그윽하게 눈빛을 보내왔다. 지금 마르바스를 거절하면 호감도가 확 줄어들지도 몰랐다. 중립파에 대한 영향력도 덩달아 감소하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인간으로서, 아니 마왕으로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지켜야만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탈리안. 용감하고 과감하게. 미래에 행여나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죄, 죄송하지만 소인은!” “――자네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 경직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예? 황제라니요?” “자네도 알다시피 본인은 황부(皇父)가 되었다. 황실의 일원으로 공인된 것이지. 공화국의 통령은 합스부르크라는 성씨를 버렸으니, 사실상 루돌프를 제외하고 본인이 유일한 황족인 셈이다.” 처음에는 마르바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진중한 목소리는 꼭 노크하는 것처럼 내 두개골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뜨거운 수증기에 감싸였던 정신머리가 서서히 돌아왔다. “본인이 자네를 양자로 맞이하면, 단탈리안. 자네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거듭난다네.” “아, 아. 그래서 소인한테…….” 요컨대 마르바스는 꼼수를 고안해낸 것이었다. 제국에는 현재 공식적인 후계자가 전무했다. 황족이란 황족이 싸그리 죽어버렸으니 당연했다. 내가 마르바스의 양아들로 들어가면 최소한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땅바닥이 꺼지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휴. 저는 그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또.” “음? 무슨 소리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착각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안고 살자. 나는 상황을 이리저리 정리해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얼굴 표정을 제대로 가다듬었다. “전하. 확실히 흥미로운 계획입니다. 허나 마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인간종은 가만히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황제로 즉위하면 그만일세.” 마르바스가 즉답했다. “적당한 인간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게. 아내를 여황제로 추대하고 자네는 부군이 되는 형식이다. 자네의 부인은 명목상의 여황제로 남는다.” “……!” 과연. 여황제의 부군이라는 방법이 있었는가. 아무 왕국에서나 그럭저럭 지위가 높은 왕녀를 데려온다. 현재 제국과 친교를 맺고 싶어하는 나라는 수두룩했다. 그렇게 수입해온 왕녀를 바르바토스의 흑마법으로 세뇌시킨 다음, 철두철미한 꼭두각시 여황제로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 분의 시간이 흐르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가능……하군요.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마왕군에 존재하는 세 개의 파벌 전부에서 인망을 얻고 있네. 자네가 황제에 오르면 약간의 잡음이 있을지언정 큰 반발은 없겠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시체로 조종할 수는 없다. 나는 엘리자베트 통령과 바토리 대왕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우리 제국에도 적용된다. 루돌프 황제가 늙어죽지 않으면 우리를 의심하는 인간들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루돌프 다음으로 누가 황위를 이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였다. 바르바토스가 즉위해도, 파이몬이 즉위해도, 마르바스가 즉위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마왕군이 내전에 휩싸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바싸고나 가미긴은 아예 논외에 해당한다. 그들에겐 마왕군 전체를 다독일 균형 감각이 없다……. “단탈리안. 자네가 아니라면 황제에 즉위할 인물이 없다.” 그렇기에 마르바스는 나를 대안으로 선택했으리라. 세 파벌 모두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각 파벌 수장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제국을 안정적으로 조율할 위치에 서 있다. 흥미로웠다. 이건 내가 그려놓은 구상과 180도 다른 미래도였다. 나는 제국의 음지에 숨어서 파벌들을 조종해나갈 계획이었다. 반면에 마르바스는 내가 정면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역설하고 있었다. 궁극의 약자택일이라 해도 좋겠지. 막후의 지배자인가, 아니면 만인지상의 황제인가. 음지인가, 양지인가……. “자네도 아까 전에 말했지. 제도가 뒷받쳐주지 않는 집단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단탈리안, 제국이라는 집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제도는 바로 후계자에게 있네. 후계자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제국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 올바른 지적이었다. 루돌프 황제의 치세가 끝나면 어찌할 것인가. 나로서는 아직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마르바스 전하. 소인은.” “알고 있네. 갑작스러운 제안이겠지.”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자 한다. 일 년 동안 고민해도 좋고, 십 년 동안 고민해도 좋다. 아직 우리에게는 제법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마르바스가 말고삐를 당겼다. 군마가 가볍게 투레질을 하며 발굽을 들어올렸다. 나도 그를 따라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기억하게, 단탈리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결코 영원이 아니다. 앞서 준비하는 자만이 시대를 지배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 앞서 준비할 수 있는 자는 자네밖에 없네.” “…….”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황제의 부군이 된다. 굳이 타국의 왕족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성녀를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 성녀는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지만 간단히 성녀의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부부의 예를 올릴 수가 있었다. 성녀와 마왕의 결합에 전 대륙은 환호하겠지.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보장받는다. 음지에 머무르는 편이 유리할까, 양지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이 유리할까. 나는 말을 몰면서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00346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 * * “단탈리안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가미긴이 황궁에 들이닥쳐서 소리 질렀다. 고대제국 풍으로 걸쳐입은 토가의 끝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질질 끌렸다. 갑작스러운 마왕의 출현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깜짝 놀랐다. 가미긴의 뒤편에서는 엘프족 경비병들이 헐레벌떡 쫓아오고 있었다. “고, 공작 전하! 이러시면 곤란하옵니다!” “궁중백께서는 변경에 급한 업무가 있으셔서 현재 자리를…….” 가미긴이 고개를 휙 돌아보았다. “나를 부를 때는 마왕 전하라고 말하려무나. 아가들아.” “……!” 경비병을 비롯해서 열 명에 이르는 마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자의가 아니었다. 뇌수가 흔들릴 정도로 지배력이 강력하게 행사되고 있었다. 마족들은 몇 배로 건너뛴 중력에 짓눌리듯이 어깨를 떨었다. “단탈리안도 궁중백이 아니라 마왕이야.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요즘 아이들은 잊어버린 걸까?” “소, 송구하옵니다……위대한 존재이시여.” 가미긴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단탈리안이 어제 돌아온 거 전부 알고 있어. 당장 불러들여.” 묘족(猫族) 시녀장이 이빨을 딱딱 부딪혔다. 가미긴이 말했다시피 궁중백은 어제 황궁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이 사실을 당분간 비밀로 해두라고 엄명이 내려진 것이었다. 궁중백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서열이 높은 분의 명령으로. 지금 가미긴에게 굴복하면 자신은 죽는다. “전하……외람되오나…….” “언제부터.” 가미긴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일개 하인이 마왕의 언명에 꼬투리를 달게 되었지?” “아, 아, 아아…….” “사죄하렴.” 시녀장이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았다. 컥, 하고 시녀장이 헛숨을 토했다. 그녀가 발버둥을 쳤다. 어떻게든 손을 풀려고 해보았지만 도저히 자기 의지대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묘족의 악력이 가느다란 목을 우악스럽게 졸랐다. 잠시 뒤에 숨이 멎었고, 그녀는 싸늘한 대리석 바닥 위로 쓰러졌다. “후우.” 가미긴이 후련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지나치게 표정이 부드러운 나머지 방금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갔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음 타켓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족들을 휘감고 있던 압박감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마족들은 오래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나온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믿을 수 없군요. 이렇게 야만적일 수가……!” 복도에서 한 명의 마왕이 걸어나왔다. “가미긴!” 붉은 머리칼의 파이몬이었다. 마침 황궁 별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일까. 허겁지겁 뛰어나왔는지 옷차림이 헐거웠다. 아니, 헐거운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녀는 알몸에 얇은 이불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어라. 내가 잠자는 사람을 깨워버린 모양이야?” 가미긴이 만면에 싱글벙글 미소를 띄웠다.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나요!” “글쎄에. 무례한 아해한테 자기 분수를 알게 해줬다고 할까.” 파이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당신은 아무런 죄도 없는 관리인을 살해했어요!” “마왕을 감히 인간종의 직책으로 부른 죄. 마족이면서 마왕의 명령을 거스른 죄. 당장 대역죄가 두 개나 걸리는걸.” “이 철부지 살인마가……!” 마침 잘 됐다, 하고 가미긴이 생각했다. 그녀는 예전부터 눈앞의 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왕이 시민에 대한 종사자에 불과하느니 마느니 이상한 얘기를 최초로 퍼트린 장본인이 바로 파이몬이었다. 입 발린 말에 수없이 많은 마족들이 환호하고 파이몬을 지지했다. 천박한 서큐버스 출신의 계집애다웠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시민들한테 아낌없이 가랑이를 벌려댔다. 가미긴은 일신의 노력과 모략만으로 서열 제4위까지 올라갔으며, 그렇기에 파이몬을 단지 운이 좋아 출세한 창녀로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이 창녀도 단탈리안의 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단탈리안을 죽이려고 든 주제에.’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얼른 몸을 들이댔으리라. 뻔했다. 가미긴은 심장이 분노로 검게 물들었다. 자신의 애정을 빼앗아간 남자가 자신 하나로 족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들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가미긴 입장에서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한없이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한번쯤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미긴이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서? 나를 벌하려는 거야?” “제국의 법률에 따라서 당신을 고발하겠어요!” “와아, 무서워라. 제국의 법률이라니. 이래서야 나처럼 연약한 마왕은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네.” 가미긴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황금색 마법진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야, 정의심에 불타오르는 파이몬 씨.” 그녀가 손을 튕겼다. 경비병의 머리가 터졌다. 아까 전에 가미긴을 공작 전하라고 부른 남자였다. “꺄아아악!”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 핏물이 튀어올랐다. 머리를 잃어버린 시체는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족들은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일부는 곧바로 등을 돌려 뛰었다. 뛰어난 생존본능이 발동한 것이겠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서 운이 나빴다. 복도 너머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그들은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머리통이 산산조각났다. “…….” 파이몬이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충격이 분노로 바뀌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무슨 짓을……!” “으응? 제국 법률에 따라서 행동한 거야.” 가미긴이 손가락으로 볼을 짚었다.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최소 준귀족에 달하는 증인이 세 명 필요하잖아. 한 명은 파이몬 너가 채운다고 해도, 나머지 두 명은 어떻게 구할까? 응?” 파이몬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순식간에 네 명이 죽어버린 탓에 지금 복도에는 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황궁에서 종사하는 시녀이고 경비병이니 어떻게 우기면 준귀족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미긴이 구태여 법률을 들먹인 까닭은……. “여섯 명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네.” 어디 한번 자신을 막아보라고 파이몬을 도발한 것. 가미긴이 손을 튕기자, 자리에 주저앉은 시녀 중 한 명의 머리가 날아갔다. 가미긴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다섯 명이었나? 헤헤.” “…….” 파이몬이 이빨을 바득 갈았다. 급하게 뛰어나오는 바람에 마법약품을 챙기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설마 상대방이 이렇게 과감하게 반응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마족들 앞에 서서 그들과 가미긴 사이를 막아섰다. 그것 이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잘나신 마법 서클도 죄다 부셔진 마당에 말이야.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를 가르치려고 한 거야, 응? 파이몬.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 “나 한 사람 혼내주려고 해도 법률 따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그거, 조금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아?” 가미긴이 손가락을 튕겼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시녀를 향해서 날아갔다. 시녀의 머리가 여덟 조각으로 갈리기 직전이었다. 파이몬이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바람의 칼날이 그대로 파이몬의 팔뚝에 달려들었다. “하아?” 가미긴이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새빨간 피가 공중에 튀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팔은 비록 잘리지 않았지만, 칼에 배인 것처럼 깊게 상처가 파였다. 파이몬은 입을 질끈 다물고 있었다. 끔찍한 격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너……그냥 몸으로 때우려고?” “…….” 파이몬이 묵묵부답으로 가미긴을 노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 의중을 읽어내고 가미긴은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하, 하하핫! 걸작이네! 이거 걸작이야!” “…….” “천하의 파이몬이! 한때 마왕군을 쥐락펴락하던 마왕이! 이제는 고작 하녀 몇 명을 구하지 못해서 자기 몸으로 마법에 들이박다니! 아하하핫!” 가미긴이 한참이나 배를 붙잡고 웃었다. 심장을 사로잡은 분노는 말끔하게 씻겨 사라졌다. 유쾌한 만족이 차올랐다. 이만한 승리감을 맛본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가미긴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온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갔다. 너무 크게 웃었는지 가미긴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해버렸다. “이런. 무언가 재미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단탈리안이 복도 저편에서 걸어온 것이었다. 단탈리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복도를 둘러보았다. 다섯 명의 목 없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파이몬의 오른팔이 넝마짝처럼 엉망으로 되어 있었다. 단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숙녀들께서 드잡이를 벌이기에는 장소가 적절치 않습니다만.” “아하, 하핫……이게 전부 너가 늦게 나와서야, 단탈리안.” 가미긴이 허리를 들어 단탈리안을 바라보았다. “진즉에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저는 잠시라도 혼자 있을 수가 없군요. 변방에서 폴리투니아의 군대를 간신히 회군시키고 돌아왔더니 당장 어젯밤부터 사람들이 찾아오고. 이거야 원.”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미긴은 그의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젯밤부터?” “예. 바르바토스고 파이몬이고 연달아 들이닥치지 뭡니까. 곤란합니다.” 가미긴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파이몬을 쳐다보았다. 파이몬은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아까 전에는 그저 아침잠을 자다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파이몬이 어젯밤을 단탈리안과 함께한 것이라면? 그래서 이불 한 장을 껴입고 달려온 것이라면. “…….” 잠자코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바르바토스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평원파에서 성장하고 평원파 덕택에 성공한 단탈리안이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 하겠지. 그러나 파이몬은 용납하지 못한다. 저 창녀보다 뒤쳐지는 신세가 되는 것은――결단코 용서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왔다는 말도 안 했으면서.” 가미긴이 중얼거렸다. “……음.” 그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단탈리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나한테는 어제 왔다고 알려주지도 않고. 그런데 바르바토스랑 저 년은 알고 있었어? 어떻게? 왜?” “가미긴. 진정하십시오. 단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처리해야 할 일에 저 년이랑 자는 것도 포함된 모양이지?” 가미긴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단탈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가미긴, 보세요. 우리 유치하게 나오지 맙시다. 당신은 너무 머리가 쉽게 달아오르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저 제가 조금 바빴을 따름이에요. 가미긴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를 무시했잖아!” 가미긴이 파이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년은 알고 있었고, 나는 몰랐어! 황궁에다 눈을 심어두지 않았으면 지금도 멍청이처럼 모른 채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이런 단순한 사실이 있는데 어떻게 발뺌을 하려고――.” “그래요.” 파이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녀는 단탈리안한테 미리 말을 들었어요.” “잠깐, 파이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단탈리안이 당황해서 그녀를 제지했다. 하지만 파이몬은 단탈리안이 다가오자 오히려 그의 팔뚝에 몸을 기대었다. 파이몬이 의도적으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가미긴을 비웃으려는 듯이. “그리고 어제 밤새도록 심도 깊게 대화를 나눴사와요. 제가 아침에 어디서 눈을 떴는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너……!” “저는 당신과 달라요, 가미긴. 당신처럼 매달릴 필요가 없지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날아간 지 오래였다. 가미긴은 바람의 칼날을 퍼부었다. 파이몬의 머리를 향해서 곧바로.   00347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가미긴은 실수했다. 머리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파이몬을 노리지 않았겠지.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시녀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시녀를 막기 위해서 파이몬은 크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파이몬은 그대로 공격에 노출되었으리라. 반면에 파이몬은 거기까지 판단해두었다. 단탈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을 도발한 것은, 가미긴의 시선에서 시녀들을 완전히 빼내려는 수작이었다. 문제는 너무 도발이 잘 먹혀들었다는 것일까.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가까이 붙으면 차마 상대방이 공격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연인이 위험해질 것을 감수하고 주저없이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하고 방심했다. “아……!” 누가 목소리를 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가미긴이 마법을 쏟아부은 직후 낸 목소리였는지, 정말로 공격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파이몬이 낸 목소리였는지――아니면, 파이몬을 감싸면서 손을 내민 단탈리안의 목소리였는지.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단탈리안의 그림자에서 새카만 대검들이 튀어올랐다. 대검들은 바람의 칼날을 대신 받아 안전하게 상쇄시켰다. 그러나 한 줄기. 미처 막아세우지 못한 한 줄기 바람이 대검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촤락, 하고 단탈리안의 팔뚝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단탈리안! 괜찮아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단탈리안은 약간 신음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할까요. 제 악운도 질기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피가 계속 흐르잖아요!” “이런 건 상처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단탈리안이 망토를 뒤적여서 포션을 꺼냈다. 그는 이빨로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빼낸 다음, 상처가 난 왼판에 아무렇게나 액체를 쏟아부었다. 그걸 보고 파이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한테 주세요!” 파이몬이 포션을 뺏었다. 자신이 걸치고 있던 이불을 지이익 찢어서 충분히 포션을 먹였다. 붕대 대용으로 이불조각을 쓰려는 것이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의 왼팔을 천조각으로 칭칭 둘렀다. “세상에, 당신이라는 남자는 정말이지…….” “뭘 허둥지둥댑니까. 정말 별 것 아닌 상처라니까요?”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세요!” 파이몬과 단탈리안이 툭탁거렸다. “…….” 그동안 가미긴은 제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단탈리안의 팔뚝에서 핏물이 튀기는 광경을 보자마자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윽고 붕대가 완성되자, 파이몬이 고개를 돌려 무시무시한 눈으로 가미긴을 노려보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나는……그러려던 게…….” “제멋대로 관리인들을 죽이고! 게다가 단탈리안까지!” “정말이야……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파이몬이 가미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가 가미긴의 뺨을 후려쳤다. “죽음의 기사들이 없었으면 단탈리안은 죽었을지도 몰라요.” “무, 무영창 마법이었는걸. 그 정도로 강하지는…….” “당신이 죽일 뻔했다고요!” 가미긴이 움찔했다. “거기까지 해두세요.” 뒤쪽에서 단탈리안이 다가와 두 여인의 사이를 벌렸다. 파이몬은 오른팔로, 가미긴은 왼팔로. 붕대에 감긴 팔이 자신을 슬쩍 밀어내자 가미긴은 더 몸이 얼었다. “……단탈리안, 하지만.” “저는 거기까지 하라고 말했습니다.” 파이몬이 입술을 다물었다. “이번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 * 폴리투니아에서 한건 해결하고 돌아오니 이 난리였다. 그것도 바로 다음날 아침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파이몬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화났어요, 하고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 가미긴을 처벌하고 싶겠지. 미안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파이몬. 당신은 시녀들을 추슬러주세요.” “고소는…….”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소는 없습니다. 증인으로서 격이 떨어집니다.” 작위식이 열린 지 이제 겨우 두세 달이 지났다. 그런 시점에서 막 공작에 오른 가미긴이 구설수에 올라버린다? 농담이 아니다. 제국 전체가 망신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이몬은 산악파를 대표하고 가미긴은 무소속을 대표한다. 두 사람이 제국 법정에서 맞부닥치면 그건 이미 일대일 싸움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어느 한쪽의 파벌이 끝장날 때까지 폭주하겠지. “가미긴의 명예는 비단 가미긴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제국의 명예이지요.” “허울밖에 없는 명예 따위는 없어지는 편이 차라리 나아요.” 파이몬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국가의 저력을 나타내지요.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을 더 해롭게 만들 거예요.” “저런. 혹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파이몬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번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다고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아.” 파이몬이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따로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 시녀들을 다독여서 일으켜 세운 다음, 파이몬은 황궁을 빠져나갔다. 내가 쓰게 웃었다. 이거야 원.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난리인지. 마법을 날아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가미긴이 폭주하는 모습이야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놀라움보다는 솔직히 '또냐' 하는 심정이 앞섰다. 이럴 때 가미긴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되었다. 죽음의 기사들에게는 일부러 바람 한 줄기를 놓치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가미긴은 내가 무도회장에서 칼로 복부를 찌른 것이 트라우마로 단단하게 박힌 모양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면 거의 본능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 지금도 가미긴은 멍하게 내 왼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참, 파이몬은 쓸데없는 배려를 해주었다. 붕대로 숨겨두지 않고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가미긴이 심리적으로 더 불안해할 테니까. 정말 괜한 참견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다. 약간 연기해볼까. “으으윽…….” 나는 갑자기 상처가 아파온 것처럼 팔뚝을 붙잡았다. 허리를 살짝 굽히는 디테일도 까먹지 않았다. 그러자 가미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탈리안!” 가미긴이 급하게 내 몸을 부축했다. 뭐라고 할까. 너무 의도한 대로 반응해서 재밌었다. 그녀는 나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미안해……내가 실수해서……하지만 고의가 아니었어……!”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픔을 참아내는 듯이 힘겨운 미소였다. “당신이 고의로 저를 공격했을 리가 없지요.” “맞아. 그 창녀 때문이야. 걔가 쓸데없이 피해서…….” “하지만 실망했습니다.” 가미긴이 뚝, 하고 멈추었다. “어?” 꼭 실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내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파이몬 옆에는 바로 제가 있었습니다. 자칫 조준이 엇나갔다면 제가 맞았을 것입니다. 가미긴, 당신은 제가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고 마법을 썼습니다.” “나는 정확히 파이몬을 노렸어…….” “만에 하나. 백분의 일이라도 빗나갈 확률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가미긴의 황금색 눈동자를 냉정하게 노려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사귀어본 결과,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가미긴은 내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의 견디지 못했다. 지금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생각조차 할 수 없으리라. 단순히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만, 나는 그녀의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활용했다. “역시 그렇군요. 제가 다칠지 모르는데도 당신은 공격한 겁니다…….” 가미긴이 두 손으로 내 옷자락을 꾸욱 잡았다. 무릎에서 힘이 풀렸는지, 그녀는 서서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아……니야. 단탈리안. 날 믿어줘……정말로 아니야…….” “저는 당신에게 사죄하기 위해 자해까지 했는데.” 가미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결국 제 안전보다 자기 자신의 분노를 푸는 것이 소중합니다. 저보다 당신의 감정이 우선이지요. 가미긴.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려면 제가 얼마나 더 상처 입어야 합니까?” “아니야, 단탈리안. 정말 아니야…….” 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기껏 저한테 한다는 변명이 아니라는 말밖에 없습니까. 예전에 현명했던 당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군요.” “너가 파이몬을 우선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가 났을 뿐이야!” 가미긴이 허둥지둥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전에 시녀들이 날 모욕해서! 그러니까, 파이몬이 제멋대로 끼어들어서……나는 너가 돌아왔는지 몰랐는데 파이몬은 알았다고 하니까…….” 애인이 명백하게 잘못한 상황. 여기서 상대방을 더 궁지에 몰아세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변명을 꼼꼼이 들어주는 척하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점만 끄집어내는 것이다. 단, 계속해서 똑같은 잘못을 지적하면 안 된다. 상대방에게 이성을 되찾을 여유를 안겨주고 만다. 원투 펀치를 먹이듯이 게속해서 새로운 잘못을 들춰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변명밖에 못한다. 예컨대. “가미긴. 어떻게 제가 돌아온 걸 알았습니까?” “어……?” “황궁에 첩자를 심어둔 것입니까?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요?” 가미긴의 얼굴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빙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정말로 절 감시하는 사람을 심어두었습니까? 저를 믿지 못해서요?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숨긴다면 전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까?”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단탈리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혹시 몰라서…….” “혹시라도 저를 의심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나는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데 굳이 감정이 진짜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감정은 진짜다. 단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진짜인가 거짓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나 정도가 되면 5초 만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아…….” 눈물이 흐르자 가미긴은 완전히 사고가 정지했다. 남자의 눈물이란 원래 비장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어야 하는 법. 여태까지 나는 가미긴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달리 말해, 가미긴은 지금 처음으로 내 눈물을 목격한 것이었다. “아, 아…….” “어떻게 저를 의심할 수 있습니까. 가미긴, 제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저는 당신에게 제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모라비아의 땅을, 슐레지엔의 땅을……공작위를,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그 모든 것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애인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밝힐 때는 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 땅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라비아의 땅이라고 말한다. 작위라고 말하지 않고 공작위라고 말한다. 추상적일수록 적게 상처를 입고, 구체적일수록 날카롭게 상처를 입는다. 기본 철칙이다. 단, 자그마한 선물은 제외하고 가장 커다란 선물만 깔끔하게 언급한다. “그런데도 당신은 단 하루조차 저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아니야, 단탈리안……제발…….” “저는 당신에게 모든 헌신과 노력을 바쳤건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의심과 첩보원입이로군요. 그것이 당신의 사랑입니다. 하루조차 허락해주지 않고 상처를 입히는 사랑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가미긴의 얼굴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잔뜩 흘리는 눈물이 그대로 가미긴의 뺨으로 옮겼다. “가미긴, 대답해주세요……가미긴.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당신을 믿고 싶은데 너무 아픕니다……너무 아파요, 가미긴…….” 그리고.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단탈리안, 내가 잘못했어……미안해…….” 가미긴이 눈물을 터트렸다. “의심해서 미안해……내가 생각이 짧았어……미안…….” 서로의 눈물로 그녀와 내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지금 가미긴은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감성만으로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믿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를 망각하고, 그녀에게 애당초 조바심과 의심을 심어둔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순전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가미긴은 연애경험이 전무했다. 상대방한테 입은 상처 그리고 상대방에게 준 선물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전략적인 안목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정말입니까? 제가 당신을 한 번 더 믿어도 괜찮은 걸까요……?” “정말이야……미안해, 미안해…….” 이쪽이야말로 미안하다, 가미긴. 원래 첫사랑은 처참하기 마련이다. 다만 누구한테 걸리느냐에 따라 참혹함의 정도가 달라진다. 멍청한 남자한테 걸리면 그럭저럭 나빠지고, 무책임한 남자한테 걸리면 꽤나 많이 나빠진다. 모든 남자는 멍청하거나 무책임하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첫사랑이 처참해지지 않을 확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제 작은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러면 당신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악은 연인을 이용하는 남자한테 걸리는 것이다. 모쪼록 하늘을 원망해라.   00348 중립국 =========================================================================                        나는 담뱃대에 불을 지폈다. 아침부터 가미긴과 엉망진창으로 섹스했다. 그녀는 지금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섹스하는 내내 어린애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감정의 교감이 부재하는 자리를 육체적인 쾌락으로 채우려는 것처럼. 창문 너머에서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 마왕들은 모두 자의식 덩어리에 자폐증 환자이다. 정신에 병이 들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나의 감정인지 아니면 타인의 감정인지 분명하지 않다. 경계선이 흐릿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둘러쳐져 있는 방호막이 마왕에겐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왕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어쩌면 단지 상대방의 감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나를 좋아해주는 상대의 애정을 내 애정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으레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마왕들은 그러나 '무엇이 나인가'라고,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문한다. 그렇다. 마왕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란 처음부터 확고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혹은 만들어낸다.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쌓아올린다. 대륙정벌이라는 목표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바르바토스. 모든 종족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진지하게 추구한 파이몬. 파벌 사이의 중재를 천직으로 여기는 마르바스까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종 전체가 멸망해도 상관없다. 동족을 전부 죽여버려도 괜찮다. 자신의 정체성만 유지할 수 있다면, 수백수천만을 희생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균형 감각이 망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 정신병 환자. 망상증 환자나 다름없다. 너무나 병적이다. 그러나, 또한 병적이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다. “단탈리안…….” 가미긴이 새근거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질하듯이 쓸어주자,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한 차례 몸을 뒤척였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고 여기는 물건에 대한 광적인 집착. 이 집념은 물건이 아니라 애인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했다. 나는 가미긴의 사랑을 그렇게 이해했다. 어떤 사람은 그걸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 말하겠지. 무슨 상관인가. 가미긴은 섹스하기에 즐거운 파트너이며, 이용해먹을 구석이 무궁무진한 여자이다. 우리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감정이 사랑이든 집착이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가미긴.” 기분 탓인지 몰라도 가미긴이 조금 움찔한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창가에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 * * 황궁에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직접 사건을 겪은 시녀들에게 입막음을 시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여자들이란 소문을 퍼트리는 데 천성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시녀들은 특별히 뛰어났다. 사건이 일어나고 다음날, 황궁은 물론이고 제도(帝都)에 머무르는 모든 마왕이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전해들은 소문은 이러했다. 가미긴이 단탈리안 궁중백에게 무언가를 항의하러 입궐했다가 파이몬의 방해를 받았다. 결국 가미긴은 홧김에 궁중백한테 공격 마법을 쏟아부었다……. “올 것이 왔다.” 마왕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현재 제국은 누가 보더라도 무소속 파벌의 마왕들을 홀대하고 있었다. 거의 반(反) 무소속주의라 표현해도 좋았다. 제국 각부처에 마족들이 대거 관료로 임명되어 배치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소속 마왕들과 인연이 없는 인재들만 뽑혔다. 낮게는 황궁의 경비병에서 높게는 법무부 서기까지. 전원이 평원파의 추종자이거나 산악파의 추종자, 중립파의 추종자로 채워졌다. 너무나 정치색이 명확한 나머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파벌들 가운데서도 “조금 더 당파성이 옅은 인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최소한 법관들이라도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선출해야 한다” 하고 불안감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에 대해서 단탈리안은 명확하게 반론했다. 미리 준비했다는 듯, 그는 <중립에 대해서>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스무 쪽 가량으로 이루어진 책자가 마왕들에게 뿌려졌다. ─ 정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중립이 있다. 소극적인 중립과 적극적인 중립이다. 소극적인 중립이란 말 그대로 당파에 무관한 인물을 요직에 앉혀두는 것으로서, 정치에 완연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 그러나 이는 결국 개개인의 청렴함과 정직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제도가 한낱 개인의 미덕에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이 경우, 우리는 중립성이 훼손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개인들에게 미덕을 권고하고 강조할 수밖에 없다. ─ 궁극적으로, 소극적 중립성은 제도라는 거대한 차원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 내면의 도덕적인 문제로 소급시킨다. ─ 이에 반대해서 본인은 적극적인 중립성을 지지한다. ─ 적극적인 중립이란 철두철미하게 당파성에 입각하여 모든 요직을 배분하는 것이다. 가령 국가에 세 개의 파벌이 있다면 정확하게 1:1:1의 비율로 관직을 나눈다. 이는 제도의 문제를 제도로써 해결하는 데 의의가 있다. ─ 중립성이 훼손될 경우, 우리는 간단하게 힘이 부족한 당파에게는 조금 더 많은 요직을 나누어주고, 힘이 과한 당파에게서는 요직을 거둬들이면 된다. 개개인의 미덕은 중요하지 않다. 정치적 균등함만이 관건이다……. ─ 나는 마족이 마왕의 명령에 거슬러서 끝까지 순수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중립'이란 허상이고 망상에 불과하다. ─ 가장 명료하게,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파벌의 세력비를 노출시키는 것만이 우리가 앞으로 제국을 경영해나가는 데 있어 최선의 방책이리라……. 소책자는 즉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적인 시각을 보여준다고 칭찬하는 마왕도 있었고, 파벌 논리에 파묻힌 선동문이라고 비난하는 마왕도 있었다. 이에 덩달아 마족들이 양편으로 갈라져서 싸웠다. 사태에 정점을 찍은 것은 중립파의 지지선언이었다. “이 소책자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앞으로 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고 있다.” 마왕 마르바스는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단탈리안을 지지했다. “우리 중립파가 지난 천 년 동안 이루고자 했던 중립이 바로 적극적 중립이다. 본인은 단탈리안 궁중백의 시각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뿐만이 아니라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중립파의 거두가 내뱉은 말은 무게가 남달랐다. 혹자는 폴리투니아에서 단탈리안이 마르바스를 도와줬음을 지적하며, 두 마왕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고갔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는 음모론에 불과했다. 여론은 단탈리안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무소속 마왕들이 분개했다. “우리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마르바스의 뒤를 따라서 도미노가 쓰러지듯 평원파와 산악파가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전형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무소속 마왕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들은 단탈리안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의 개이며, 파벌의 꼭두각시이다!” “저들이 말하는 중립이란 오직 권력의 독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끝끝내 무소속 마왕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작위식이 열리고 지난 두 달 동안 일어난 사태가 이러했다. 무소속 마왕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미긴이 난동을 부렸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도 않았고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가미긴은 무소속의 대표자로 취급받고 있었으므로. 늦은밤. 무소속 마왕들이 가미긴의 저택에 모여들었다.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의 만행을 토로하는 모임으로, 벌써 다섯 번이 넘게 열렸다. “그자의 의도는 명백하오. 우리에게는 좁쌀만한 영지를 건네주고 자기가 제국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것 아니외까!” “아무런 작위를 받지 않았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합니다. 법무상이니 뭐니 직책을 받았을 때 이미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어야 합니다. 저주받을 여우놈…….” 여섯 명의 마왕이 포도주를 들이마시며 몇 시간이고 시끌벅적 불만을 토해냈다. 그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세가 퍽 처량했다. 만마의 위에서 군림하던 자신들이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 정치적인 순수성을 지키는 자신들이 도리어 배격되고 있으니 말세가 따로없었다. 전 서열 제6위였던 발레포르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참고 있어야 하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상대는 서열 제71위였소. 여기서 그자보다 약한 분이 계시오?” 마왕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발레포르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결국 단탈리안 그자는 파벌들의 얼굴 마담에 불과하오. 개인의 무력은 하찮고 또 하찮소외다. 저쪽에서 우리를 끝까지 무시할 속셈이라면, 우리도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소.” “……발레포르. 허나 그자를 암살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마왕들이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이미 단탈리안을 암살하자는 얘기는 수십 번도 더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왕들은 어렵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단탈리안은 죽음의 기사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을뿐더러 최근 들어서는 언제나 황궁에만 머물렀다. 발레포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본인이 운을 때었음에도 말문을 닫았다. 단지 안색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가미긴이 입술을 연 것은 그때였다. “가능할지도 몰라.” “가미긴 님? 정말입니까?” “으응.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가미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포도주를 홀짝였다. “단탈리안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여자야. 난봉꾼으로 유명하잖아. 살짝 고백하자면, 예전에 아가레스랑 내전을 일으켰을 때 단탈리안이 나를 봐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야.” “…….” 몸을 바쳐서 구명을 얻었다는 암시였다. 마왕들은 멋쩍어 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단탈리안의 애인인 척 돌아다녀야 했지.” “허면, 미인계를 써서 암살하자는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너무 적어보입니다만…….” “그러니까 말했잖아. 방법이 있다구.” 가미긴이 혓바닥으로 입술에 묻은 포도주 방울을 훔쳤다. “내가 황궁에서 단탈리안을 상처 입혔으니까 말이야. 그거에 대해서 사과하러 가야 하거든. 그런데 단탈리안이 사과를 받아주는 대신 나한테 개인적으로 뭘 요구할지 너무 뻔해~.” 가미긴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톡톡 건드렸다.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단탈리안은 변태거든. 놀아도 보통으로 놀지 않아.” “보통으로 놀지 않는다는 말씀은……?” “변태처럼 논다는 얘기지. 마치 강간하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해서 즐겨. 뭐, 그 이상으로 굳이 내가 말로 표현해줘야겠어?” 마왕들이 헛기침을 했다. 마계가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다지만 마왕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강간이란 단어를 자유자재로 쓰기란 조금 꺼려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가미긴 님, 그걸 어떻게 이용하자는 말씀인지요?” “어휴. 나는 이래 봬도 제국의 공작이잖아.” 가미긴이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만일 일개 궁중백이 공작을 개인적으로 협박해서 강간했다고 해봐. 그 광경만 메모리아 마법으로 찍을 수 있으면 단탈리안의 정치적인 생명은 끝장나지 않겠어?” “……!” 무소속 마왕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00349 중립국 =========================================================================                        “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그 교활한 작자가 메모리아 마법도 방지하지 않겠습니까?” “쯔쯧. 그러니까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주변의 마왕들이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도, 가미긴은 느긋하게 탁자 위의 포도를 집어서 혓바닥으로 감싸 삼켰다.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몸짓에 마왕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단탈리안이 반마법을 펼칠 겨를도 없이 내가 유혹해내면 이기는 거고. 아무리 노력해도 단탈리안의 방심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지는 거고. 세상에 반드시 성공하는 계략이란 게 어디 있어? 다 상황과 운에 따르는 거지.” “…….” 마왕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발레포르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그래서야 가미긴께서 홀로 희생하시는 것 아니오?” “아니. 여기서부터 제안하고 싶은 계획이 있어.” 가미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내가 황궁에 입궐해서 단탈리안한테 사죄를 해. 단탈리안 성격을 미루어볼 때, 이쪽에서 사과한다고 얘기하면 아마 다짜고짜 옷부터 벗어보라고 그럴 거야. 정말로 사과하는 것인지 진심을 보이라면서.” “…….” “너희들은 황궁 바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만약 메모리아를 성공시켰다면 마법으로 신호를 보낼게.” 가미긴은 입안을 한 모금의 포도주로 적시고 얘기해나갔다. “응. 신호가 오면 그대로 황궁으로 돌입해서 단탈리안을 해치워버리는 거야.”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그자를 죽입니까?” “우리들만 제국의 경영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단체로 항의하러 왔다가, 우연찮게 단탈리안이 나를 강간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하면 돼.” “…….” 마왕들이 또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찮을까, 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이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이미 불합리한 처사를 받고 있는 마왕들이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봐버린 까닭에 흥분해서 살해를 저질렀다. 뭐어,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메모리아 영상만 확보해뒀으면 문제없어. 제국의 공작을 강간했는데 어쩔 거야~?” 가미긴이 작게 키득거렸다. 마왕들이 성공 가능성을 짐작하고 있는 동안, 발레포르가 물었다. “메모리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오?” “간단하지. 나는 너희한테 신호를 보내지 않고, 너희는 황궁에 들어오지 않으면 돼.” 가미긴이 즉답했다. “아무런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나갈 뿐이야. 언제나와 같은 어제가 되겠고, 언제나와 같은 내일이 되겠지.” “허나 그러면 당신이 쓸데없이 모욕을 보는 것인데…….” “모욕 따위는 애저녁에 봤어.” 가미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대신 차가워진 시선으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단탈리안에게 복수를 하고 싶고, 가능성이 있는 계획을 너희한테 제안했어. 성공할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바꿔 말하자면 실패하더라도 위험부담이 적어. 그런 모험을 하는 대가로 다섯 시간 정도의 모욕만 참으면 된다면, 응? 아주 비싸지는 않지?” “…….” 언뜻 귀기가 서린 가미긴의 눈빛에 마왕들이 동요했다. 발레포르는 고민에 잠겼다.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은 함정, 실패하면 단지 황궁 입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면 그만이다……위험부담은 실제로 전무하다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마왕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었다. 무소속 마왕들 사이에는 끈끈한 의리나 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 같이 불쌍한 처지에 놓인 자들끼리 모여들었을 뿐이다. 이 계획을 단탈리안이나 바르바토스한테 고발하여 자신의 이득만 챙길 가능성이 충분했다. 즉, 얼마나 보안을 철저히 지키느냐가 관건이겠지. 마법적인 맹세가 필수불가결했다……. “문제는 오히려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야.” 마왕들이 각자 나름대로 고심에 빠져 있을 때 가미긴이 말했다. 발레포르가 자신의 생각에서 깨어나 반문했다. “성공했을 때가 오히려 문제라니? 무슨 뜻이오?” “잘 봐. 바르바토스가 그렇게 아끼는 애완동물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당장 우리들을 죽이려고 들걸.” 가미긴이 다시 장난스러워진 어조로 흥얼거렸다. “단탈리안을 죽이는 데 성공하면 여기 있는 전원이 공범이야. 메모리아 영상을 증거로 사방에 퍼트린 다음, 우리는 한 목소리를 이루어서 바르바토스한테 대항해야 돼.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 “…….” “그러니까 제대로 각오가 된 사람만 계획에 동의해주면 좋겠어. 정말로 단탈리안을 죽여서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사람. 계획의 후폭풍이 불러일으킬 위험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사람만.” 마치 너희에게 그만한 각오가 있을까, 하고 말하는 듯한 눈초리로 가미긴이 마왕들을 바라보았다. 발레포르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가미긴에 대한 의심은 상당히 적어졌다. 계략을 꾸미는 사람은 실패할 확률을 낮게 감추고 성공할 확률을 부풀려서 말한다. 반면에 가미긴은 시종일관 실패할 확률을, 더 나아가 성공했을 때조차 짊어져야 할 리스크를 강조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대로 단탈리안에게 정치적인 힘을 거세당한 채 배부른 돼지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위험할지언정 마왕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 “본인은 참가하겠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미긴은 자신의 육체를 희생했다. 여기서 자신이 마왕의 긍지를 희생할 수는 없었다. 마왕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발레포르…….” “단, 본인은 여기에 모인 분들 전원이 찬성했을 경우에만 동참하겠소. 이 계획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보안을 요구하오. 모두가 함께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양자택일밖에 없소외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발레포르가 가미긴에게 눈짓했다. 가미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응. 발레포르 말이 맞아. 우리는 일심동체가 될 필요가 있어.” “바싸고 전하를 모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한 마왕이 말했다. “그분께서도 단탈리안에게 적의를 품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싸고 전하의 힘을 빌릴 수만 있으면 거사를 치르는 일이 수월해질 것입니다.” “으응. 그건 곤란해.” 가미긴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바싸고는 기본적으로 강한 사람의 편이야. 시류에 맞추어서 행동한다고 할까. 만약 우리가 계획을 공유하려 들면 곧바로 단탈리안이나 바르바토스한테 알려줄걸. 우리는 사이 좋게 법정으로 출두되고.” “본인도 그건 반대하오.” 발레포르가 한몫 거들었다. 본래 발레포르는 이 모임에 바싸고를 초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싸고는 쓸데없는 짓이라 일축하며 거절했다. 바싸고는 무소속 마왕들의 처지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것이 발레포르가 내린 판단이었다. 결국 바싸고는 강자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였다. 발레포르는 그에게 깊이 실망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안이 생명이오. 무턱대고 함께할 사람을 늘려대면 그만큼 우리가 위험해질 공산도 또한 높아지오.” 그리고, 하고 발레포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합시다. 단탈리안을 죽이는 데 우리 일곱 명이면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소? 여기서 더 인원을 추가해봤자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 꼴이오.” “발레포르 전하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서열 제71위 마왕을 잡는 데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응, 바싸고를 설득하는 건 단탈리안을 죽인 다음이야. 그때 가면 일단 우리에게 강력한 증거와 명분이 있으니까 훨씬 더 쉽게 바싸고를 끌어들일 수 있어. 바싸고뿐만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단탈리안을 싫어하는 마왕들도 동조해줄 테고.” “과연. 모든 것은 성공한 다음의 문제인가…….” “쉽지 않겠지. 나쁘게 말하면 도박이야.” 가미긴이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도 아니야. 안 그래?” 음, 하고 발레포르가 턱끝을 끄덕였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의심을 지웠다. 가미긴은 계략 자체에 신경을 쏟고 있지 않았다. 계략을 성공한 이후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이 계획을 마주보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만약 가미긴이 이번 계획을 성공하기만 한다면 사태가 좋아질 것이라 말했다면, 마치 마법처럼 하나의 계획이 모든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 치장했다면, 발레포르는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미긴은 설령 성공하더라도 자신들 앞에 가시밭길이 놓여 있음을 강조했다. 즉,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계략의 성공 자체가 아니었다. 자신과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동지였다. ‘설령 계획이 허무하게 실패하더라도.’ 발레포르의 눈동자가 진중하게 빛났다. ‘여기 있는 일곱 명은 서로에게 각오를 맡긴 동료로 거듭난다. 인원은 적지만 내실이 단단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 집단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목적일지 모른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외부의 적이 내부를 단합시킨다. 고금의 진리는 단탈리안이라는 외적을 맞이한 무소속 마왕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리라. “저는 동참하겠습니다.”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저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으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도박에 뛰어들겠습니다.” 허무맹랑한 호언장담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입안에 끌린 것일까. 단탈리안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은 두루뭉실한 형태를 벗어재끼고, 단탈리안을 암살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증거와 명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온갖 구체적인 고려를 낳았다. 그리고 마왕들은 '가능하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들은 숙고 끝에 한 명씩 가미긴의 계획에 동의하겠노라고 의사를 밝혔다. 물론, 거기에는 전 서열 제4위와 제6위가 함께한다는 사실에 기대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마침내 일곱 명의 마왕 전원이 거사에 동참했다. 가미긴은 흐뭇하고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가 희생하는 보람이 충분해.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반드시 성공하도록 노력해볼 속셈이야. 단탈리안에게 마왕이란 억압을 참지 않는 존재임을 알려주자.” 마왕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긴이 마법진을 펼쳤다. 맹약을 강제하는 마법이었다. “단탈리안을 암살하는 계획을 영원히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누설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해?” “맹세합니다.” “맹세하오.” 마왕들은 저마다 자신의 심장과 마력을 걸고,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가미긴은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마법의 강제력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맹세를 어길 경우, 이들은 심장이 터지고 마력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그렇게 음모가 태동했다. 마왕들은 밤을 새가며 암살 계획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부하한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머리를 쥐어짜내야만 했다. 대부분 가미긴과 발레포르가 계획을 짰다. 거사를 시행하는 것은 사흘 뒤로 정해졌다. 속전속결. 가미긴이 황궁에서 부린 난동이 아직 뜨거운 화제로 남아 있을 때, 모든 것을 끝내버리기로 결정했다. 황궁의 경비대가 순회하는 스케쥴을 입수하여 몇몇 경비병을 매수했다. 일부 시녀도 매수되었다. 그들은 계획이 성공할 경우에는 조용히 도시의 골목에서 처리될 것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가미긴이 방금 입궐했소.” 발레포르가 마왕들을 굳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왕들 역시 각오로 단단해진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다 함께 황궁으로 갑시다.” 단탈리안 암살 계획이 시작되었다.   00350 중립국 =========================================================================                        * * * 대륙력 1512년 3월 15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3월은 겨울 추위가 물러서는 시기였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대는 차가운 겨울 내내 숙영지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다가 3월이 되어야 서서히 움직였다. 사람들에게 3월이란 전쟁이 다시 움트는 시기였으며, 그렇기에 전신(戰神) 아레스에게 공양된 달이었다. 이날은 궁전에서 대회의가 예고되어 있었다. 봄철이 다가옴에 따라 새해를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왕은 물론이고 마계의 대공, 자유도시의 시민대표가 초대되었다. 대공과 시민대표 중에는 흡혈귀가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대회의는 땅거미가 지는 저녁에 열렸다. 보통 오전에 회의를 여는 인간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본디 마족의 예법이란 그러했다. 무소속 마왕들은 주의 깊게 이날을 암살 결행일로 선택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여러 개 있었다. 첫 번째. 손님을 대거 맞이할 준비로 인해 황궁이 무척 부산하다. 두 번째. 황궁에 입궐해도 정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비추지 않는다. 세 번째. 마왕과 대공이 모인 자리에서 가미긴이 강간당하는 영상을 공개하면, 더더욱 효과적으로 단탈리안의 죽음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다……. 아무리 바르바토스이나 몇몇 마왕이 단탈리안을 총애할지라도, 대공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강간 영상 따위가 공개되어버리면 별 도리가 없다. 단탈리안의 죄를 옹호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진다……. 무소속 마왕들은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좋겠지. 단탈리안을 처단하고 단숨에 세간의 지지를 얻는다. 3월 15일은 말 그대로 최적이었다. “…….” “…….” 가미긴이 황궁에 입궐하고 무소속 마왕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누군가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져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반응이 시원하지 않았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만약 암살이 이루어지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도록 혼란스러워진다. 결국에 소수파에 불과한 자신들이 혼란을 책임지고 짊어져야만 한다……. 발레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러니했다. 파벌 싸움에 휘말리는 것이 싫어서 수백 년 동안 마왕군의 정치판에 거리를 두었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정치의 최전선에 설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군.” “예?” “본인은 정치가 싫어서 한적한 바닷가에 은둔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생각하니 아무래도 우습구려…….” 무소속 마왕이 아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쩌다 마왕이 되었을 뿐이지, 대륙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저야 조각상이나 모으면서 시간을 때울 수만 있다면야 정치든 뭐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호오. 조각상을 모으는 취미도 갖고 계셨소?” “단탈리안이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집을 금지시키기 전까지는.” 마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다른 마왕들까지 웃었다. “그 작자는 끼어들지 않는 곳이 없군.” “정말입니다. 나 참.”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누구나 솔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발레포르는 이 순간에 이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동지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제는 제국에 세금까지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왕이 제국에 세금을 낸다니, 지나가던 개도 웃어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발레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소. 바로 권리는 가만히 있다고 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오.” “아아. 편안하고 게을렀던 나날은 이제 영원히 안녕이로군요.” 마왕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러분께만 몰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솔직히 가미긴님께서 실패하시는 것을 내심 바라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상상하면 목덜미가 서늘합니다…….” “이해하오. 이포스, 본인에게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소.” 바알조차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의 신생 마왕군이다. 그것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파벌들을 이끌어나가거나 숙청할 수 있을까. 여기 모인 마왕들 중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허나 마왕군은 잘못된 행보를 걷고 있소. 아무리 실리를 위해서라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인간종의 제국과 동침하다니. 무언가 잘못되었소.” 마왕들이 찬동했다.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당장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과 불만이 생겨날 것이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평을 토로하는 마족들이 수두룩할 것이외다. 우리는 바로 그 잠재적인 불만을 십분 이용해야만 하오…….” 그럴듯한 이야기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사실 정말로 그런 불평분자가 있는지, 만약 있다고 해도 얼마나 될지, 그건 발레포르도 알지 못했다. 있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그 정도 수준의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한 마왕이 말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생쥐처럼 생긴 마물을 들고 있었다. “가미긴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성공했다고.” “……!” 단숨에 긴장감이 공기를 쫙 폈다. 발레포르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 초조, 흥분. 수십 가지의 감정이 눈동자들에 담겼다. 이것이 이제부터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시선이다, 하고 실감이 되었다. 피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겠지. 정적(政敵)이 용서하지 않고, 역사가 용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주사위는 던져졌소. 갑시다.” “예.” 마왕들은 저택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은 당당하게 대로를 걸어 황궁으로 향했다. 찔리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주변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일단의 마왕들이 들이닥치자 황궁 경비대장이 허겁지겁 마중을 나왔다. 자그마치 서열 제6위에 해당하는 마왕이 행차한 것이었다. 서열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마족들의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바다와 태풍의 지배자를 뵈옵니다! 발레포르 전하.” “음. 오늘 회의에 참석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왔네.” 경비대장이 공손한 낯빛으로 발레포르의 뒤편을 살펴보았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모든 마왕과 대공의 신상을 외우느라 진을 뺐고, 덕분에 다섯 명의 마왕 전원을 알아보았다. “황송합니다. 회의가 시작하기에는 약간 이르오니, 별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단탈리안이 머무르는 곳에 안내하도록.” “아……궁중백 각하에게 말입니까?” 경비대장은 약간의 무례를 무릅쓰고 반문했다. 황궁의 경비대장인 그는 단탈리안이 얼마나 권력을 쥐어잡고 있는지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함부로 안내했다가는 다음날 아침 경비대에서 쫓겨날 것이 뻔했다. 발레포르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들이 이른 시각에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회의가 열리기 전 궁중백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하기 위해서이다.” “알겠나이다. 당장 시녀장을 호출하겠습니다.” 발레포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경비대장은 자기가 관여해봤자 좋을 일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가 되어 끼어들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리하여 경비대장은 이 심상치 않으면서 불길한 주제를 다른 사람한테 간단히 넘겨버렸다. 약간의 절차를 거치고 마왕들이 황궁에 들어섰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궁전 건물의 코앞까지 도착하자, 저편에서 열댓 명의 시녀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그들은 정확히 일렬로 멈춰서서 마왕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궁 안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보다 먼저 말할 수가 없었으므로, 하인들은 정숙하게 허리를 굽힌 채 가만히 기다렸다. “음. 그대들이 수고가 많도다.” “황송하나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엘프족 시녀장이 극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에게 봉사를 명령하시면 무슨 일이든 진력을 다하겠나이다.” “우리를 단탈리안 궁중백에게 안내하라.” “…….” 시녀장이 일순 멈칫했다. “송구하오나, 궁중백은 회의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본인도 오늘 회의에 참석하건만 그걸 모르겠는가? 바로 그 회의에서 논할 안건 때문에 잠시 궁중백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문을 능숙하게 잇지 못하는 시녀장을 보며 발레포르는 확신을 얻었다. 단탈리안은 미리 시녀장에게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언질을 준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로 주저하느냐. 설마 본인에게 궁중백을 만날 권리조차 없다는 것인가.” “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다만 지금 궁중백이 가미긴 전하를 접견하고 있는지라…….” “오호라. 마침 잘 됐구나.” 발레포르가 짐짓 기쁘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단탈리안에게 파벌이 없는 마왕들의 처지를 제고하라고 항의하기 위해 왔노라. 가미긴께서도 우리와 사정이 같으시니 오히려 호사로다. 그대는 어서 본인들을 안내하라.” “저, 전하…….” 발레포르가 엄하게 시녀장을 쏘아보았다. “네놈! 마왕의 언명이 우습게 들리느냐!” 마력이 담긴 사자후가 궁전 안뜰에 쩌렁쩌렁 울렸다. 시녀들이 기겁하여 그대로 바닥에 온몸을 부복했다. “궁전이 있고 마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왕이 있고 그 다음에야 궁전이 있는 법이다! 감히 마왕들 사이의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어디 하찮은 직분을 남용하려 드는가! 당장 궁중백에게 안내하지 않으면 네놈의 두 귀를 찢어버릴 것이다!” 시녀장은 아무런 말도 반박하지 못하고 복종했다. 그녀는 일찍이 단탈리안에게 뇌물을 바친 마계 대공의 첫 번째 딸로서, 마족 사회에서는 최정상에 군림하는 일족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권위도 마왕의 분노 앞에서는 무색해질 따름이었다. 시녀장이 몸을 떨며 마왕들을 안내했다. 한참이나 궁전 안쪽으로 들어가서야 단탈리안이 머무른다는 방이 나왔다. 시녀장이 문을 두들기려고 가까이 다가서자, 다짜고짜 발레포르가 앞질러 걸어나갔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우리는 한가하게 차나 마시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다. 단탈리안!” 발레포르가 두 팔을 벌려 방문을 열어재꼈다. 그리고 마왕들과 시녀들이 얼어붙었다. 방안에는 금발의 아름다운 가미긴이 벽에 꽁꽁 묶여 있었다. 단탈리안은 채찍을 들고 때마침 가미긴을 내려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리자 단탈리안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네노오오옴!” 이 순간 발레포르는 분노했다. 그것은 연기인 동시에 진심이었다. 가미긴이 가장 좋은 메모리아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찍이 부드럽고 대리석처럼 하얬던 그녀의 살결이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을 듯 말 듯 고개를 픽 숙이고 있었다. “감히 지엄한 황궁에서! 네놈보다 격이 높은 마왕에게 무슨 짓을!” 그러나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레포르는 단 일 초도 낭비하지 않고 뛰었다. 최고위 마왕인 그는 단 몇 발자국 만에 단탈리안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단탈리안이 당황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자, 잠깐――.” “불충은 죽음으로 사죄하라!” 발레포르는 그 손을 쥐어잡고 그대로 비틀어서 꺾었다. 뼈가 아스러지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그 비명이 기점이었다. “감히 단탈리안이 가미긴 전하를 고문하고 있다!” “저 후안무치한 역적을 쳐라!” 뒤쪽에서 무소속 마왕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의 팔은 어느새 마력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00351 중립국 =========================================================================                        단탈리안은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들이 나오려는 듯 그림자가 일렁거렸지만, 고작 한 사람의 마왕이 여섯 명의 마왕이 발휘하는 지배력에 앞설 수는 없었음일까. 흑기사들은 그림자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크으……흐아아!” 단탈리안이 품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붙잡은 발레포르를 향해 찍어내렸다. 의외로 기세가 대단했다. 발레포르가 당황하여 순간 손을 놓아버렸고, 단탈리안은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도망쳤다. 아차, 하고 발레포르가 소리를 질렀다. “잡으시오! 여기서 저놈을 놓치면 전부 끝장이오!” 마왕들이 서둘러 단탈리안의 뒤를 쫓았다. 몇 명은 재빨리 주문을 외어 마법을 쏘았다. 그러나 단탈리안이 걸친 옷에 상당한 수준의 반(反)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마법들은 제 힘을 쓰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반마법이다!” “찔러서 죽입시다!” 방안이 널찍했지만 단탈리안은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렸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 싶을 때였다. 단탈리안이 테라스로 빠져나갔다. 무려 높이가 3층에 이르렀다. 땅바닥에는 충격을 어느 정도 무마시켜줄 수풀이 없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단탈리안은 곧바로 테라스 밑으로 몸을 던졌다. “쓸데없이 끈질기기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마왕들이 혀를 차며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백주 대낮. 황궁의 안뜰에서 난데없이 도주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란에 사람들의 시선이 끌렸다. 수많은 관리와 하인이 궁전을 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럽나, 하고 사람들이 안뜰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대리석으로 도배된 광장이었다. 단탈리안이 마왕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제대로 낙법을 펼치지 못한 탓인지 그는 심하게 발을 절뚝거렸다. 결국, 몇 걸음 도망치지도 못하고 추격자들한테 따라잡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광경에는 어딘지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이제 막 몰려든 봄철의 햇살이 화사하게 대리석 광장을 비추었다. 빛무리가 새하얗게 반사되는 한복판에서, 한 마왕이 단탈리안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단탈리안이 그를 뿌리치려고 팔을 내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곧바로 두 번째로 도착한 마왕이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단탈리안의 목덜미를 스쳤다. 붉은 핏방울이 햇빛을 내리받으며 허공에 흩날렸다. 그제야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을까. “꺄아아아악!” “세상에, 여신이시여!” 사람들이 경악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모두 숙련된 전사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마왕들이 단체로 한 명의 마왕을 살해하다니――그건 만약의 사태라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버거웠다. 그때부터 사냥이 시작되었다. “독재자를 처단하라!” “마족을 배신하고 인간종에 빌어먹는 놈!” 무소속 마왕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단탈리안이 고레고래 비명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여섯 명의 마왕이 단탈리안을 둘러싸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공격했다. 푸욱, 하고 칼끝이 단탈리안의 등에 내리꽂혔다. 단탈리안이 발악하며 뒤를 돌아섰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서 있던 마왕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깊숙하게 단탈리안의 허리살을 꿰뚫었다. “끄흐억……흐어어억……!” 단탈리안이 서서히 쓰러졌다. 그는 끝까지 왼손에서 단검을 놓지 않으려 했으나, 발레포르가 능숙하게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단탈리안의 손등을 발로 짓밟았다. 이제 단탈리안은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여섯 명의 마왕이 수십 번이 넘도록 칼을 쑤셔박았다. 마치 시체를 파먹는 미친개들처럼. 온 사방이 햇빛으로 가득했으나 오직 단탈리안의 몸만 그늘에. 마왕들이 빙 둘러싸서 드리운 그림자에 어둡게 가려졌다. 어느 여인의 속살처럼 하얀 대리석 광장에 새빨간 핏물이 흘렀다. 핏물은 마왕들의 발과 발 사이를 빠져나가 점점 굵게 흘러넘쳤다. “후우, 후우…….” “…….” 암살자들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마왕의 재생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이건 치명상이었다. 공범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성공했다. 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건만, 기어코 궁중백 단탈리안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현실감이 희박했다. 암살자들은 황궁에 있는 누구보다 꿈결에 비몽사몽했다. 아마도 불가능할거라고 여겼던 일을 해내고 만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이, 여섯 명의 마왕들도 지나친 흥분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발레포르였다. “어서 가미긴을 모셔오시오. 우리는 이 광장을 거대한 법정으로 삼아서 단탈리안이 어째서 사형당해야 했는지 증거를 보여주어야만 하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전 서열 제22위의 이포스가 대답했다. 젊은 얼굴임에도 머리가 백발로 새어버린 이 남자는 첫 번째로 단탈리안의 목덜미를 붙잡은 자이기도 했다. 아가레스가 내전을 일으켰을 때 열성적으로 참군했고, 아가레스의 패배로 인하여 본래 자기에게 주어져야 할 영지를 잃어버렸다. 암살에 참여한 무소속 마왕들은 대체로 이런 사정을 갖고 있었다. 발레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겠소.” 이포스를 떠나보내고 발레포르는 시체의 목을 내리쳤다. 마력으로 강화된 단검은 칼질 두 번만에 몸통과 머리통을 분리해냈다. 발레포르가 단탈리안의 머리카락을 붙잡아서 높이 치켜들었다. “저, 저런…….” “대체 무슨 짓을……!”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충격에 잠긴 눈동자로 하염없이 광장을 쳐다보았다. 차마 가까이 다가서는 이조차 없었다. 그쯤 황궁의 경비대가 광장에 도착했다. 경비대장은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바로 방금 전에 자신이 통과시켜준 사람이 황궁의 실질적인 주인을 살해했다. 경비대장은 죽음을 예감했다. 충격과 경악이 지배하는 가운데. 발레포르가 마력을 담아 당당하게 소리쳤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잠시 본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오. 여기 이 남자, 소위 단탈리안이라고 불리던 죄인은 오늘 죽었소!” 발레포르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광장을 둘러싼 궁전 건물들을 차례대로 일견했다. “본인은 이전에는 서열 제6위의 마왕으로 불렸으며 지금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마계에 봉사하는 한 명의 시민이오. 본인의 인격과 명예를 존중한다면, 지혜로운 이들이여! 부디 내 말을 의심하지 마시오!” 발레포르가 마왕의 지배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발산시켰다. 서열 제6위라는 자리는 결코 카드게임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었다. 속세에 관심이 적었을 따름이지, 발레포르 역시 서열 제8위였던 바르바토스나 서열 제9위였던 파이몬과 마찬가지로, 능히 하나의 군단을 통솔할 정도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중에는 일찍이 단탈리안을 좋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본인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소. 개인에 대한 사랑이 과연 마족 전체, 마계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앞설 수 있는지 말이오.” 발레포르는 마음속으로 마족들에게 진정하라 명령했으며, 이 명령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일단 마족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단탈리안은 마족의 명예를 인간종이 만들어낸 제국 따위에 귀속시켰소. 우리가 명예롭게 전쟁터에서 싸워도 그것은 더 이상 마족의 명예가 아니라 제국의 명예요. 우리가 합심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낼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마족의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제국의 역사요. 그리하여 우리의 아들딸, 우리의 후손은 우리를 명예로운 전사이자 현명한 시민인 마족이 아니라, 단지 제국의 일원이자 신민(臣民)이라고 배우게 될 것이오!” 발레포르가 주먹을 움켜잡았다. 피부가 온통 구릿빛인 발레포르는 새하얀 대리석 광장에서 유독 눈에 띄었고, 그는 훌륭하게 좌중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단탈리안이 살아 있다면 마족은 죽으며, 마족이 살기 위해서는 단탈리안이 죽어야만 하오! 친애하는 인민이여! 부디 진솔하게 대답해주시구려! 그대들은 단탈리안을 살리고 스스로 인간종의 비천한 노예가 되기를 바라오? 아니면 단탈리안이 죽고 그대들 모두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살기를 원하오?”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만일 여러분 중에 기꺼이 비천한 노예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소. 인정하겠소. 나 발레포르가 죄를 지었소.” 발레포르가 기세를 타서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모두가 자유를 갈망한다면. 자신의 명예가 한낱 인간종의 명예로 둔갑되지 않기를 원한다면――감히 선언하거니와, 본인이 단탈리안에게 했던 행동은, 바로 여러분을 대표해서 이 발레포르가 감행한 것이나 다름없소!” 발레포르는 단탈리안의 목을 효수하듯 더욱 높이 들었다. “마인들이여! 제국을 사랑하지 말고 마족의 긍지를 사랑하시오! 인민들이여! 단탈리안을 죽이고 스스로를 살리시오!” 그때, 정문에서 평원파 마왕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열댓 명에 이르는 평원파 마왕들은 순식간에 광장을 포위했다. 이미 황궁의 예법은 깨어졌는지 그들 모두가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단검을 제외하고 아무런 무장이 없는 여섯 명의 무소속 마왕쯤은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지 몰랐다. “내 아우에게 무시무시한 짓거리를 저질러주었군, 발레포르.” 마왕 벨레드가 한 발자국 성큼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으며, 또한 비웃음으로도 감추지 못한 분노로 입술이 들썩거렸다. “어디 최후의 변론은 생각해두었겠지.” “궁중백 단탈리안은 대역죄인이다!” “글쎄. 마지막 유언으로 삼기에는 너무 멋이 없구만.” 평원파 마왕들과 무소속 마왕들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패배자 새끼들! 각오는 되어 있느냐!” “흥, 단탈리안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놈들이 기세만은 좋구나!” “오늘이야말로 밥버러지 애새끼들을 청소해주마!” 여섯 명의 마왕은 서로에게 등을 기댄 채 단검을 치켜들었고, 평원파 마왕들은 그것을 노려보며 사냥개처럼 위협적으로 울부짖었다. 발레포르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단탈리안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든 마왕과 대공이 모였을 때 발표할 것이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벨레드가 도끼를 허공에 휙휙 휘두르며 위협했다. “내가 지금 형씨의 대가리를 두 쪽으로 갈라버리지 않은 것은 형씨들이 치켜든 이쑤시개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우리 군단장 각하에게 네놈의 목을 양보하기 위해서이지. 바르바토스 님께서 오시면 네놈은 죽은 목숨이다, 껌둥이 새끼야!” “하. 고작 한 명의 마왕한테 파벌 전체가 흔들리는 모습이 가당치 않군. 바르바토스도 총기를 잃은 것이겠지. 벌건 대낮의 황궁에서 여인을 강간하는 남자한테 반하다니 말이야!” 벨레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강간이라고?” “그렇다. 단탈리안은 감히 가미긴을 협박하여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벨레드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증거가 없는 중상모략 따위로 작금의 상황을 무마하려는 거냐.” “우리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노라.” 발레포르가 똑똑히 들으라는 식으로 일갈했다. “단탈리안이 죄악을 저지르는 모습을 메모리아에 담아두었으며, 지금 본인의 동지가 증거물과 증인을 찾아서 데려오는 중이다. 가미긴뿐만이 아니라 이 황궁의 시녀장 또한 증인이다. 단탈리안의 죄를 감쌀 방도는 천하에 없다, 벨레드!” “크으. 혀만 지껄이는 것이라면 동네 꼬맹이들도 할 수 있지.” 두 마왕이 맹렬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곧이어 이포스가 가미긴을 부축하며 광장으로 돌아왔다. 발레포르는 충분히 사람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줄 것을 부탁했다. 벨레드는 코웃음으로 일관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파벌의 대치는 저녁까지 이루어졌다. 바르바토스가 그때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대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마왕들과 대공들이 전원 황궁의 광장에 모여들었다. 일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광장을 점령했다. 마왕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공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피바람이 한바탕 몰아칠 것을 예감했으리라. “자아.”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바르바토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어디 네 새끼가 주장하는 그 증거란 물건을 보여주실까.”   00352 중립국 =========================================================================                        “아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발레포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미리 약속을 받아두겠다, 바르바토스. 우리가 보여줄 메모리아는 여기 있는 가미긴의 명예를 상당히 훼손할 염려가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가미긴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기를 바란다…….” “거창하게 나오는걸.”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수치도 모르는 개새끼와는 아무런 약조도 내걸지 않아.” “수치를 모르는 것은 단탈리안이다, 바르바토스. 그는 무소속 마왕들을 겁박했으며 오늘도 가미긴을 모욕했다!” 발레포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한 평원파 마왕이 삿대질을 했다. “중립지역으로 선포된 황궁에서 암살 따위를 저지르다니. 네놈들이야말로 지엄한 율법을 모욕하지 않았는가!” “하, 중립지역을 먼저 침범한 자가 바로 단탈리안이다!” 기세에서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되었다. 그 사실을 발레포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며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사방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마왕들을, 대공들을,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오 년 전을 기억해보라.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마왕이었던 안드로말리우스가 어디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수백 년 동안이나 중립지역으로 엄숙하게 지켜진 니블헤임에서, 그것도 모든 시민이 바라보는 광장 한 가운데에서,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누가 율법의 파괴자인가. 누가 후안무치한 살인자인가!” 무소속 마왕들이 팔을 높이 치켜들며 호응했다. 그렇다, 단탈리안은 범법자다, 하고 소리가 터져나왔다. “중립지역은 모든 마왕들을 위해 존재하지, 결코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단탈리안은 자기 편할 대로 중립지역을 써먹으며 그 스스로는 어떠한 중립도 존중하지 않는, 이 시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파렴치한이다!” “암살자의 변명이다!” “저놈의 혀를 잘라버려라!” 파벌에 속한 마왕들이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우우, 하고 야유를 쏟아부었다. 무소속 마왕들 역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밀리지만 명분과 증거는 여기에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당장이라도 난투극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바르바토스가 빈정거렸다. “단탈리안이 가미긴을 강간했고, 때마침 가미긴은 그 광경을 담아두는 메모리아 아티펙트를 갖고 있었고, 또 때마침 너희는 그 순간을 노려서 들이닥쳤다라. 우연이라면 그거 참 대단한 우연이네.” “이상한 건 어디에도 없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아티펙트를 상비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오히려 단탈리안의 잘못이지 않겠는가?” 발레포르가 비웃었다. “아티펙트가 없이는 단 둘이서 만나는 것도 위험한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모두가 염려하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가미긴.” 발레포르가 고개를 돌려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가미긴은 몇 시간 동안 안정을 취해서 다행히 채찍질로 난 상처가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래.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어.” “그녀는 증인으로 부적합하다!” 중립파 마왕 중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가미긴은 단탈리안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내밀한 일이 이루어졌다 한들 어찌 그것이 강간이겠는가.” “단탈리안은 가미긴을 연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단지 내전의 승리를 빌미로 가미긴을 겁박하고 협박했을 뿐이다!” 발레포르가 가미긴을 대신해서 반박했다. “단 한번이라도 단탈리안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미긴을 연인으로서 존중한 적이 있는가! 허구한 날 바르바토스와 비교하며 그녀를 깎아내리지 않았는가. 단탈리안은 순전히 그녀를 모욕하고 비웃음거리로 만들 목적으로 즐겼다. 그녀는 피해자다!” 다시 마왕들 사이에서 노성이 오갔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오른손을 들자 평원파들이 입을 다물었다. 천성이 전사이며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이들은 흥분과 적의로 숨을 씩씩거렸다. 다만 평원파라고 해서 모두가 단탈리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자들은 침묵했다. “더 이상 말은 무용.” 바르바토스가 차갑게 일축했다. “가미긴. 증거를 보여라.” “안 그래도 보여주려고 했어.” 가미긴이 자신의 목에 걸린 흑요석 목걸이를 벗었다. 과연, 하고 발레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에 메모리아 마법을 걸어두었는가. 단탈리안은 우둔한 자였다. 어떤 미래가 도사리는지도 모른 채 그녀를 방안으로 들였다……. 이제 단탈리안이 그녀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천하에 드러나겠지. 방안에서 보았던 광경에 의하면 변태적인 고문까지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감히 마왕을 창녀처럼 마구 대한 것이었다. 관용은 불가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도 단탈리안을 옹호한다면 평원파의 명예까지 땅바닥에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지금 이곳에는 마계의 대공들까지 참석하고 있다. 감정이 어떻든 간에 공식적으로는 단탈리안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계획은 완벽하다……. 목걸이에서 불투명한 막이 새어나왔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한 증거를.” 허공에 총천연색의 광경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발레포르에게 익숙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언제까지 우리가 참고 있어야 하오? 처음에 발레포르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 상대는 서열 제71위였소. 여기서 그자보다 약한 분이 계시오? ─ 결국 단탈리안, 그자는 파벌들의 얼굴 마담에 불과하오. 개인의 무력은 하찮고 또 하찮소외다. 저쪽에서 우리를 끝까지 무시할 속셈이라면……우리도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소. ─ 발레포르. 허나 그자를 암살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발레포르 자신이, 동료 마왕들이 불투명한 막에 투영되었다. 이게 무엇인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발레포르는 알 수 없었다. 등줄기에서 형거할 수 없는 오한이 일어났다. 그는 기계처럼 고개를 돌려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가미긴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 본인은 참가하겠소. ─ 발레포르……. ─ 단, 본인은 여기에 모인 전원이 찬성했을 경우에만 동참하겠소. 이 계획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보안을 요구하오. 모두가 함께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양자택일밖에 없소외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이었다. 가미긴이 한 말은 모조리 삭제되었고, 무소속 마왕들이 찬동하는 부분만이 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영상을 앞에 두고 무소속 마왕 전원이 석상처럼 굳었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황궁 전체에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저건……암살을 모의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기보다 혼잣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타인의 심정을 대변해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혼잣말이 아니었다. 불온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요동쳤다. “암살이다! 계획된 암살이다!” “저놈들이 궁중백을 암살했다!” 광장이 고함소리로 진동했다. 무소속 마왕들이 얼어붙었다. 벨레드가 우렁차게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은 모든 것을 폭발시켰다. “암살자들을 쳐죽여라!” 벨레드가 가장 근처에 있는 무소속 마왕을 향하여 도끼를 날렸다. 메모리아에 의해 충격으로 굳어 있던 마왕이 당황하며 본능적으로 두 손바닥을 내밀었으나, 도끼날은 정확하게 마왕의 이마에 찍혔다. 두개골이 사정없이 부서지며 마왕은 뒤로 꺼꾸러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이 달려들었다. “가미긴……가미긴, 네년이! 크헉!” 이포스가 분노하며 단검을 휘둘렀다. 곧 시트리의 사복검(蛇腹劍)이 뱀처럼 날아들어 그의 오른팔을 어깨째로 갈기갈기 찢었다. 이포스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단검을 놓쳐버리자 다섯 명의 산악파 마왕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었다. 이포스는 공포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른 무소속 마왕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은 마왕을 향해서 창날이 쏟아졌다. 이자는 가슴과 허벅지, 오른쪽 팔뚝, 목이 꿰뚫리며 그대로 절명했다. “죽이지 마세요! 잡아서 심문해야 합니다!” 파이몬이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무소속 마왕이 죽어버린 뒤였다. 발레포르를 포함하여 오직 세 명만 남았다. 그들은 저항할 의지조차 사라져 있었고, 온몸이 꽁꽁 묶여 바르바토스 앞에 던져졌다. 발레포르가 중얼거렸다. “모함……그래, 모함이다……저건 조작된 영상이야……!”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변명으로 삼기에는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데. 조금 더 머리를 굴릴 수는 없을까, 암살자 양반?” “어째서…….” 어째서 배신하였는가. 가미긴도 틀림없이 맹약을 행했다. 자신들을 배신했다면 모든 마법 서클을 잃어버린 채 반신불수로 전락할 터……. 그러나 가미긴은 멀쩡해보였다. 설마 맹약의 마법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마법은 확실했다. 몇 번이나 점검했다……. 어느새 바르바토스 옆에 다가선 가미긴이 싱긋 웃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 발레포르. 어째서가 아니야. 어떻게인지를 물어야지.” “무슨 소리를…….” “나는 너희랑 약속한 대로 아티펙트를 가동했어.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티펙트가 바뀌기라도 한 것 아닐까?” 발레포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미긴의 눈동자에 상대방을 가련하게 여기는 기색이 떠올랐다. “너는 스스로 제법 똑똑하다 믿겠지만 결국은 전쟁에도 정치에도 무관심한 채 수백 년 동안 허송세월한 범인에 불과해. 사람을 의심할지라도 제대로 의심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람을 죽이더라도 제대로 죽이는 방법조차 모르지…….”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그때 뒤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발레포르는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등이 벨레드에게 밟혀 있는 탓에 머리를 돌리지 못했다. 잠시 뒤, 발레포르의 머리 위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당신이 구제할 도리가 없는 머저리라는 소리입니다. 발레포르.” “뭐…….” “발을 치워주십시오, 벨레드 형님. 암살자란 본디 왕과 동격입니다. 그는 저를 볼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러자 등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사라졌다. 발레포르는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곳에는 단탈리안이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수가……말도 안 된다…….” “안타깝게도 말이 될뿐더러 이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동지를 보게 되었으니 잘 됐군요. 부디 환영해주셨으면 합니다.” 단탈리안이 발레포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주변에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저를 증오하신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나약한 소인에 불과해서 말입니다. 암살에 대비해서 항상 대용 인형을 준비해두고 있지요. 여러분께서 죽이신 것은 불쌍한 인형입니다.” “인형이라니…….” 그 순간 발레포르는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인물이 반마법 옷을 입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마력이 유독 약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반마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납득했다. 애초부터 마력이 대단찮은 단탈리안이기에 무시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마왕이 아니었다면. 단탈리안이 등을 피고 말했다. “포로들을 가두십시오. 그들은 단독범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들을 심문해서 배후에 숨은 공범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공범이라니? 발레포르는 아까 전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공범이 있다는 말인가. 단탈리안을 죽이자고 맹세한 사람은 일곱 명, 아니 여섯 명밖에 없었다. 발레포르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단탈리안이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심문이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한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인가. 저 남자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00353 중립국 =========================================================================                        * * * 살아남은 마왕 세 명은 밤낮으로 고문을 맛보아야 했다. 이들을 경애하는 의미에서 다소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다. 보통은 죄인에게 너의 잘못은 무엇무엇이며 이것을 인정하라, 하고 윽박지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비효율적이었다. 어차피 너의 죄를 인정하라고 협박해봤자 순순히 그렇습니다, 라고 인정할 리가 없지 않는가. 정말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고문하는 사람이나 고문당하는 사람이나 괴로울 뿐이겠지. 쌍방을 위해서 쓸데없는 짓은 생략하자. 그것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굳게 믿고 있다. “크으……빌어먹을 간신배 같으니!” 고문실에 들어서니 발레포르가 눈알을 부라렸다. “네놈이 뭘 꾸미는지 몰라도 내가 순순히 무릎을 꿇으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싱긋 웃었다. 기운이 넘쳐보여서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나는 기운이 넘치는 사람을 좋아했다. 상대가 활기발랄한 모습을 보노라면 내 우중충한 인생도 약간이지만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없이 발레포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고문기술자한테 명령했다. “시작해라.” “예.” 이번 심문에는 최고의 고문기술자 두 명이 고용되었다. 바로 제레미와 데이지였다. 지난 삼 년 동안, 두 사람은 내 명령에 의하여 삼백 명이 넘는 사람을 고문해서 죽여보았다. 얘들은 이미 고문업계의 베토벤이나 다름없었다. “뭐? 무슨 짓을……크아아악!” 곧바로 능지형이 거행되었다. 제레미는 심장에 각인이 새겨져 마왕에게 저항할 수 있었고, 데이지는 인간이니 마왕의 지배력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고의 인선이겠지. “흐끄으읍! 끄아아악!” 죄인의 살을 산 채로 회뜬다. 그것이 능지형, 달리 불러서 능지처참이었다. 뼈에서 천천히 살을 발라내서 족발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웠다. 능지형은 죄인에게 너무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본래 마취약을 먹여두고 시작한다. 그러나 여신들께서 축복하사, 마왕은 특유의 재생력 덕분에 아무리 살을 발라내도 금방 회복해버린다. 덕분에 거의 무한하게 살을 발라낼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적적인 육체인가. 마취약도 포션도 필요없다. 지속-가능한-고문이라는 개념에 이보다 충실한 육체는 없으리라. 참고로 지속-가능한 고문은 제레미가 제창한 개념으로서, 이것이야말로 고문의 미학에 어울리는 슬로건이라나 뭐라나.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고문은 “최대한 길고, 최대한 지속되고, 최대한 육체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 언젠가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고문인데 왜 육체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냐?’ ‘에이, 마왕님도 참. 뭐 당연한 걸 물으세요. 저는 사람을 고문하고 싶은 거지 고깃덩어리를 고문하고 싶은 게 아니라구요.’ 지극히 평범한 어투로 제레미가 대답했다. ‘팔다리 찢어지고 얼굴도 뭉개진 사람을 고문해봤자 무슨 재미예요? 저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 사람이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얘도 조금 머리에 맛탱가리가 갔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제레미의 미학은 수제자인 데이지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두 사람은 각종 마취약과 포션을 동원해서 인간 모험자를 자그마치 '사만 번'의 칼질 끝에 죽였다. 사만 번이나 칼질을 당할 때까지 그 모험자는 살아 있었다고 한다. 맙소사. “단탈리안 전하. 오늘은 감이 좋은걸요.” 제레미가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어쩌면 이번이야말로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르겠어요. 육만 번, 아니 잘하면 육만오천 번까지. 심지어 포션을 쓰지도 않고요. 마왕은 최고에요!” “으이구. 또라이 같으니라고.” 내가 혀를 쯧쯧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이 이성적으로 미쳐버리면 답이 없었다. 자고로 사람이 저렇게 되면 못 쓰거늘. 제레미의 말에 발레포르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피부가 까만데도 희멀겋게 질릴 수 있다니 재밌었다. “크흑, 다짜고짜 고문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다못해 문초라도 이루어져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발레포르 님. 제가 죄를 인정하라고 말하면 순순히 인정할 것입니까?” “본인은 아무런 죄도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인정할 것도 없다!” “거 보십시오.” 저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어차피 제가 양해를 구해도 응답해주지 않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 뭣하러 정성을 들여 하문합니까. 그냥 진이 빠질 때까지 고문이나 하고 말지요.” “뭐, 뭣…….” “이래 봬도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제레미에게 눈짓했다. 얼른 시작하지 않고 뭐하는가. “부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 잠깐……흐아아아악!” 쇠사슬로 벽면에 묶인 발레포르가 발버둥을 쳤다. 워낙 꼼꼼하게 묶어둔 탓에 그래봤자 목 위로 얼굴만 조금 들썩거렸다. 나는 두 시간마다 고문실을 돌아가며 마왕들을 따로 고문했다. 그렇게 순전히 고문으로만 이루어진 첫째 날이 지나갔다. 둘째 날부터는 방식이 약간 달라졌다. “발레포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뭡니까?” 고문 중간중간에 의미없는 질문을 넣었다. 당연히 고문 때문에 분노가 쌓인 상대방은 악바리를 써가며 대답하지 않았다. “헛소리는……집어치워라!”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상대가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고문을 이어나갔다. 여기서부터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살아남은 마왕은 세 명이고, 그들은 각각 두 시간씩 돌아가며 차례대로 고문을 받는다. 즉 일단 고문을 받았으면 앞으로 네 시간은 편하게 쉴 수 있다. 네 시간의 휴식. 이것이 핵심이다. 이 시간 동안 마왕들은 상처를 회복하고 정신적으로 위안을 되찾는다. 모진 고문에 의해 거의 굴복할 뻔했던 마음을 다시 추스른다. ‘아무리 괴로워도 두 시간만 참으면.’ 그런 일념 하나로 버틸 수가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비록 고문실을 따로 쓰고 있지만 세 명의 마왕이 전원 똑같이 고문을 감내한다는 것.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료들도 똑같이 고문을 견뎌내고 있다. 이런 심리가 작용한다. 즉, 고문에 일정한 휴식시간을 보장받는 것과 집단심리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했다. 덕분에 마왕들은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고문을 받고 있음에도 반항심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것들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 내가 고문실에 들어서자 발레포르가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그럴 만했다. 내가 발레포르를 심문하고 떠난 지 아직 네 시간이 채워지지 않았으니까. 글쎄, 겨우 세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직 시간이 안 되었을 텐데?” “예정이 조금 앞당겨졌습니다.” 내 뒤를 따라 데이지가 고문기구를 챙겨 발레포르에게 바싹 다가섰다. 데이지는 어제는 조수로 활동했지만 오늘은 어엿한 주 고문기술자로 나섰다. “지금부터 다시 발레포르 님을 심문하겠습니다.” “흐, 본인을 집중해서 고문해봤자다. 우리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럴까요.”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모종의 불길함을 느낀 것일까. 발레포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냐.” “발레포르 님의 고문 예정이 앞당겨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 질문에 다른 분이 기꺼이 대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설마……말도 안 된다.” 발레포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뭐가 그렇게 놀랍습니까? 딱히 대단한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첫사랑은 무슨 종족이었는지. 그 정도는 어린애라도 대답할 수 있겠지요.” “…….” “다만 저는 이성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분을 좋아해서 말입니다. 특별히 그분의 고문을 중단하고 다음 차례로 건너뛰었습니다.” 그럼 또 시작해볼까요, 하고 고문을 지시했다. 어제와 똑같이 고문이 이루어졌지만 딱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마왕들은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발레포르. 가장 좋아하는 술 종류가 무엇입니까?” “…….” 질문에 대답하면 고문이 짧아진다는 사실을. 따라서 고민한다. 어제는 바보 같은 질문 따위 집어치우라고 일갈했으나 지금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질문 그리고 단순한 대답. 단 한 마디의 말로 고문을 단축할 수 있다……. “……헛소리나 들으려고 본인에게 왔는가? 장소를 잘못 찾았군.”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단, 거절하는 말에서 명백히 색채가 부족해졌다. 머뭇거림과 주저함이 무채색과 같은 침묵을 낳았다. 발레포르는 두 시간을 꼬박 버텼다. 그러나 고문이 끝나고 고작 두 시간 만에 내가 되돌아오자, 발레포르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할 말을 잃고 날 바라보는 발레포르에게 멋진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야아. 다른 분들은 대화가 통해서 즐겁군요. 덕분에 저도 수고를 줄였습니다.” “그, 그럴수가.” “세상 사람이 모두 당신처럼 꽉 막히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또 시작해볼까요.” 고문이 재개하고 한 시간쯤 지났다. 나는 평소처럼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발레포르의 의지가 강할지라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겠지. 그가 떨리는 입술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포도주를……사르데냐의 포도주를 즐겨 마신다.” 대전제가 무너진 것이었다. 두 시간만 버티면 네 시간을 쉴 수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동료들도 똑같은 무게의 고문을 받고 있다……그 전제들이 붕괴되었다. 내가 활짝 웃었다. “아하. 포도주입니까. 저도 포도주는 좋아합니다. 하지만 인간계의 포도주는 아무래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발열지옥에서 제조하는 포도주가 극상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저열하게 고급품만 찾는 것이 네놈 수준에 딱 들어맞는군.” “혹시 따로 추천하는 지방이라도 있습니까?” 시덥지 않은 잡담. 일상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대화가 지금은 막중한 의미를 가졌다. 잡담을 나누는 동안은 고문을 받지 않을 수가 있었다. 1분짜리 대화보다 3분짜리 대화가, 3분짜리 대화보다 10분짜리 대화가 당연히 큰 의미를 지녔다. “좋습니다. 절 상대해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특별히 다음 차례로 건너뛰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나면 일어서서 떠났다. 발레포르는 물론이고 다른 마왕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간단한 질문의 반복. 약간의 대화. “무슨 색깔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켄타우로스가 첫사랑이었다고요? 흥미롭군요. 자세히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마왕성을 경영하는 데 뭐가 제일 골치가 아픕니까?” 마왕들은 처음엔 한 시간 정도 고문을 참다가 그 이후에야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점점 더 고문을 견디는 시간이 짧아졌다. 한 시간, 삼십 분, 십오 분……이날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내가 찾아오자마자 질문에 대답했다. 마왕들을 차례대로 순례하는 시간도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그렇게 고문 이틀째 날이 끝났다. 세 번째 날도 똑같았다. 다만 질문의 내용이 바뀌었다. “마계의 대공들 중 일부가 이번 암살을 후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뭐라……?” 발레포르가 얼토당토 않다는 표정이었다. “암살에 성공하면 대공들이 마계에서 소란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난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여러분들이 단숨에 정국을 장악합니다. 이런 계획이 있지 않았습니까?” “개소리.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어섰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침에는 세 마왕 모두 두 시간을 버텼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한 마왕의 시간을 건너뛰고, 곧바로 발레포르한테 재방문했다. 내가 고문실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발레포르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거짓말……말도 안 돼, 그런 질문에 동의했을 리가 없다!” “상상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발레포르.” 내가 싱긋 웃었다. “고문을 시작하지요.” 네 시간의 휴식이 세 시간으로, 두 시간으로, 이윽고 삼십 분까지 줄어들자 발레포르는 버티지 못했다. 회복력이 상처를 따라가지 못할 수준에 이르자 발레포르는 넝마짝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 “대공들이 여러분을 후원했습니까?” 사흘째. 나는 열한 명의 대공이 암살에 연루되어 있다는 '증언'을 메모리아로 확보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틀째에 나의 질문에 순순하게 대답한 마왕은 아무도 없었다. 사흘째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을 고의적으로 건너뛰었을 뿐이다. 그 사람한테는 나 대신 제레미를 보내서 고문시켰다. 신뢰의 가장 큰 적은 의심이다. 그 단순한 진리는 고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나는 감옥탑에서 나오자마자 파벌들에 동의를 얻고 명령했다. “마계대공들을 붙잡아라.” 자아. 숙청이 이루어질 시간이었다.   00354 중립국 =========================================================================                        군병이란 자고로 일단 움직이면 벼락처럼 신속할지어니.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근처에 주둔하는 마왕군 부대가 들이닥쳤다. 제도(帝道)는 단숨에 장악되었다. 스물여섯 명의 마계대공 전원이 끌려오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실로 깔끔한 솜씨였다. “대체 무슨 난리이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마계 대공들은 며칠째 제도에 머물고 있었다. 본래 열리기로 예정된 대회의가 한없이 연기되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힌 것이었다. 당연했다. 애당초 대회의는 구실에 불과했다. “이번 암살사건에 그대 대공들이 연루되었다는 증언이 확보되었다.” “……!” 대공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이번 암살 사건에서 내가 노린 세력은 무소속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마왕이 없는 동안 마계에서 제멋대로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공들은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다. 이 녀석들을 바깥으로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명목은 뭐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아주 재미있는 증언을 들었다. 월맹군 원정이 계속 실패하도록 그대들 중 일부가 음모를 획책했다지 않는가. 그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모, 모함이옵니다……그런 간신배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건 자네들이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마계대공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 하오면 누가 판단하오리까?” “글쎄.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군.” 내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는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날 밤부터,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마계대공들은 드디어 이번에 자신들을 모이게 한 이유를 깨달았겠지. ――피의 숙청. 나는 마왕군이 언제나 내부의 분열로 인해 실패함을 알았다. 이제 내가 배후에서 권력을 잡은 이상, 그런 웃기지도 않은 실패를 되풀이할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도대체 마계대공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족을 지배하는 부류는 마왕 하나로 충분. 나머지 군벌 세력은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편이 월등하게 좋았다. 물론 마계대공들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렇기에,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마왕의 증언이라면 아득하게 높은 가치를 지녔다. 무소속 마왕은 말하자면 마계대공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였다……. 마왕들을 고문할 때 써먹었던 방법을 이번에도 그대로 써먹었다. “그대 대공들은 의도적으로 월맹군 원정을 방해했다. 내 말이 맞는가?” “일찍이 반역자 바알과 몰래 내통하여 제2차 월맹군의 보급로를 끊은 것이 그대들의 책략이라 밝혀졌다. 승인하라.” 대공들은 나흘을 버티지 못하고 범행을 인정했다. 스물여섯 명의 대공 중에서 열한 명이 유죄로 판명되었다. 마왕에게 특히나 적대적인 녀석들이었다. 나머지 열다섯 명은 무죄로 판결이 났다. 그중 절반은 옛날에 나한테 천만 골드에 해당하는 뇌물을 바친 대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으로도 무사히 살아남고 싶으면 이쪽에 협조하라.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법 많은 대공들을 순순히 풀어주자 의문이 생긴 것일까. 나와 공범인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불평했다. “왜, 이참에 전부 죽여버리지 않고?” “원래 숙청이라고 해서 전부 죽여버리면 안 돼.” 내가 포도주를 마시며 말했다. “몽땅 다 죽이면 그건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라 폭군이야.” “흐응. 둘의 차이점이 뭔데? 어차피 우리는 이미 폭군이 되어버린 거 같은데.”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기준을 제시해주는 거.” 정치는 전쟁터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그중 가장 비슷한 지점을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어떠한 승리도 완벽하지 않다'를 들겠다. 설령 한 명의 적군도 살려두지 않고 몰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건 결코 완벽한 승리일 수 없다. 누군가는 당신의 업적을 질투한 나머지 모함을 해버릴지 모른다. 적국의 백성들은 당신을 학살자로 취급해서 대대손손 원망하고 증오할 것이다. 그 원망과 증오가 나중에 당신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줄 수도 있다……. “유죄로 판결낸 애들은 우리한테 비협조적이었어. 무죄가 난 애들은 비교적 우리한테 호의적이었고. 우리는 아무나 죽이지 않는다.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만 죽인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준 거야.” 이른바 생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었다. 나는 포도주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쪽에 협조하는 대공까지 굳이 죽일 필요는 없어. 한번 공포심을 맛본 만큼, 놈들은 훌륭한 사냥개가 되어 우리한테 충성하겠지……가끔씩 적당히 먹이라도 던져주라고. 신나서 꼬리까지 흔들걸.” “대공을 한낱 개새끼로 취급하다니.” 바르바토스가 꺄르륵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고 있자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바르바토스가 내게 입술을 맞추었다. 가벼운 애정표현이 아니었다. 딥키스였다. 하긴 바르바토스의 애정표현은 언제나 무거웠지만……. “으……하아, 으읍…….” 참고로 우리 두 사람은 지금 루돌프 황제의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죄인들을 심문한 결과를 황제 폐하께 먼저 개인적으로 보고드린다. 그런 명목이었다. 물론 루돌프 황제가 살아서 움직일 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구석에 인형처럼 틀어박혀서 우리 두 사람이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키스가 길어지자 나도 바르바토스도 자연스럽게 숨결이 거칠어졌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고 내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섭정 전하. 전하께서 사시사철 발정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몰래 운우지정을 나누기에는 장소가 심히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앞입니다.” “그거 알아? 너 며칠 전부터 온몸에서 피냄새가 나.”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난 왠지 네가 개새끼 같을 때가 좋더라.” “변태라서 그래, 변태라서.” “깔깔.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바르바토스가 내 허벅지에 올라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 두 사람은 의자에 기대어 서로 마주본 형태가 되었다. 다시 한번 키스했다. “응, 으응……흐으응…….” 일국의 섭정이 입어야 하는지라 바르바토스의 옷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 옷을 한겹씩, 한겹씩, 천천히 벗겨나갔다. 조급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로는 내 손가락이 그녀의 상의를 벗겼고, 때로는 그녀 스스로 속옷을 미끄러 내려트렸다. 눈이 내리듯이 의자 아래에는 옷가지가 겹겹이 쌓여갔다. 이윽고 흠집 하나 없이 새하얀 바르바토스의 맨살이 드러났다. 황제의 침실. 제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후우, 하아……. 야, 단탈리안.” “응.” “너가 가미긴이랑 놀아나는 거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바르바토스는 내가 여러 명의 여자와 즐기는 걸 용납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바르바토스가 여러 명의 여자와 노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마 외부의 눈에서 보자면 우리는 제법 또라이 같은 연인으로 비출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 공주님.” 내가 키득거렸다. “가미긴도 죽여버릴까?” “흥. 놀아나는 것 자체는 상관없어. 그런데 걔는 마치 네가 자기 물건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니잖아. 불쾌한 년이야……흐읏.” 가볍게 바르바토스의 가슴을 핥았다. 바르바토스는 가슴이 자그마한 주제에 쓸데없이 감도가 민감했다. 적당히 달아올랐다 싶었을 때는 아주 살짝 깨물어주었다. 깨문다기보다 이빨에 조금 스친다는 느낌으로. “하으, 잠깐만. 짜식아. 발정난 개처럼 굴지 말고 잠깐만……으읏!” “뭐야. 한참 즐기려고 하는데.” 나는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눈썹을 찡그렸다. 자기가 먼저 유혹해놓고 분위기를 깨다니, 제멋대로인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이거 봐라.”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루돌프 황제가 쓰고 있던 황금관이 무언가에 끌려오듯이 바르바토스의 손에 날아들었다. 바르바토스는 그걸 자신의 머리에 쓴 다음 짜잔~, 하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어때? 어울리지?” “……대역죄인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바르바토스의 태도는 무례함을 뛰어넘어 귀엽기까지 했다. “지금 나는 황제의 관을 쓰고 있어.” “아아. 역사상 마왕이 처음으로 황금관을 쓴 순간이겠지.” 그녀는 내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고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가깝게. “한 번쯤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을 범하고 싶지 않아?” “…….” 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가 오직 머리에만 황금관을 쓴 모습은, 틀림없이 배덕적이었다.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신 한 번만 더 약속해.” “아아.” 뭘 약속하라는 것인지 마저 듣지 않아도 뻔했다. 가미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행여나 딴 눈 팔지 말라는 암시였다. “나한테는 언제나 너가 최고야. 바르바토스.”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 가지고는.” 더 이상은 말이 필요없겠지. 나는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날, 황제의 침실에서 바르바토스는 두 번 기절할 때까지 엉망진창이 되었다. * * * 암살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열한 명의 마계대공들에게는 굵직한 죄목이 세 개나 걸렸다. 첫 번째, 월맹군 원정이 실패하도록 수차례에 걸쳐 대역죄인 바알과 함께 계략을 획책한 것. 두 번째, 지난 꼭두각시 전쟁 후반기에서 제멋대로 별동대를 보내 프랑크 남부를 약탈한 것.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마왕군의 신의를 크게 손상시킨 것. 세 번쨰, 신생 마왕군에 반항해서 궁중백인 나를 암살할 계획을 모의한 것. 요컨대 그동안 미해결로 남아 있던 죄목을 모조리 덮어씌웠다. 세 개 모두 무소속 마왕들과 다른 마계대공들의 증언을 토대로 입증되었다. 제멋대로 조작된 증거였으나 그런 진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열한 명의 대공과 세 명의 마왕은 즉시 처형되었다. 처형은 공개된 광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마왕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마족과 인간이 구경하러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겠지. “저주한다! 단탈리안 개자식! 네놈을 저주한다――!” 그들은 대부분 나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죽어갔다. 처형자로는 특별히 벨레드 형님이 자처했는데, 과연 형님답게 단 한 번의 도끼질로 마왕과 대공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시켰다. 훌륭한 솜씨였다. 마지막 차례는 발레포르였다. “죄인 발레포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 발레포르가 내 쪽을 쳐다보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바알이 죽었을 때는 이 또한 시간의 흐름이라 생각했다. 아가레스가 죽었을 때도 역시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이제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본인을 옹호해줄 자가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구나.” 발레포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 않은 죽음을 당연한 것처럼 보고 넘어갔다. 허니, 본인의 죽음이 시간에 파묻혀서 그대로 흘러가버리는 것 또한 정당한 보복이겠지. 다만 본인이 미련했다는 것만이 회한과 후회로 남을 뿐……. 그저 이대로 내버려두어라.” 벨레드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도끼가 번쩍 빛났고,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의 처형에 군중들이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대적할 내부 세력은 이리하여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마왕의 피에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믿는 일부 사람들은 어린애들을 보내서 빵조각에다 핏물을 묻혀오게 시켰다. 아이들이 어른들 틈새를 비집고 쪼르르 달려나왔다. “저지할까요?” 경비대장이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저 내버려두라고.”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빵에 새빨간 핏물을 묻히고는 다시 뛰어나갔다. 부모님이 내린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기쁨으로 아이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열네 명의 마왕과 대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풍경이었다.   00355 중립국 =========================================================================                        * * * 조속하게 내부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마계사회는 말 그대로 들끓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암살미수와 숙청이 일어났다. 처음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했지만, 이쪽이 정식으로 발표하자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 암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동족을 죽이려고 한 비겁자. ─ 여태까지 마왕의 칭호로 불렸다는 것조차 마족의 수치. ─ 월맹군을 실패시키고, 최근에 일어난 원정까지 초를 칠 뻔했다. 수치심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는 들개이다. 마계의 도시 곳곳에서 여섯 마왕을 상징하던 깃발이 불탔다. 그중 이포스는 마왕이면서 동시에 매우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는데 그가 조각한 작품들은 공공연히 파괴되었다. 마계대공이 열한 명이나 싸그리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옅었다. 아마 대공들 자체가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는 '대변자'라기보다 '지배자'에 가깝기 때문이겠지. 대변자는 오히려 마왕에 가까웠다. 옛날 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나는 민중의 대변자다'라고 주장한 모양인데 그것과 비슷했다. 어째서 민중은 카스트의 정점에 오른 지배자를 오히려 대변자로 여기는 것일까? 알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글쎄, 멋대로 착각해주면 나야 고마웠다. 여하간 대세는 이쪽에 있음이라.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무소속 마왕의 사병들이 속속들이 항복했다. “부디 자비를” 하고 용서를 구해와서 쿨하게 용서해주었다. 다만 천 명 정도는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했다. “의미가 없는 반항이었어.” 토벌 대장을 맡은 벨레드 형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형님이 말한 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저항이었다. 마왕이 죽은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마왕성과 함께 자멸하는 것뿐이었다. 발레포르의 마왕성인 기동요새 <라비린토스>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마왕성은 평소 바다 한가운데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게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서서히 외벽이 깎여나갔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물보라와 해일을 일으키면서 성채째로 수몰되었다. “그건 제법 장관이었지.” 벨레드 형님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탄했다. 우리는 제도의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거나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호오. 직접 보지 못해서 안타깝군요.” “뭐, 네놈은 방구석에만 박혀 있으니까 자업자득이다.”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내 목덜미를 벨레드 형님이 잡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손에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뭐, 괜찮다. 살다가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벨레드 형님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곳에는 저항의지를 불사른 근위병 삼백 명이 남아 있었다. 탈출하려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았군요.” “아아. 의미없는 죽음이었지. 허나, 일말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름다움인가. 하지만 그것도 멀리서 지켜보았기에 아름다운 것이겠지. 나는 입안에 맥주를 털어넣으며 말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폭포와 같은 삶을 살다 죽었군요.” “흐흐, 세상에 어느 누가 폭포의 삶을 살겠느냐.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나 그랬을까.” 벨레드 형님이 웃었다. “이보게, 아우! 기껏해야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려고 아득바득 발꿈치를 드는 거야. 한 순간만이라도 쏟아지는 힘을 비껴나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지.” “으음.” 벨레드 형님은 거기까지 말했다. 형님의 눈동자에는 어딘지 상냥하고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나 역시 형님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으므로 더 이상 대화를 걸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고,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이제 슬슬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집어삼킬 차례인가? 그 왜. 아우가 정말로 싫어하는 여자가 거기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정말로 싫어하는 여자입니까.”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희대의 천재, 합스부르크의 구원자, 독재자. 엘리자베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많고 많았지만 벨레드 형님처럼 부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아니요. 저는 얌전히 기다릴 생각입니다.” “왜? 헬베티카도 우리에게 복속했다. 공화국을 삼면에서 포위한 셈이지 않나. 이 정도면 그 여자가 제아무리 쌈박질을 잘하더라도 별 수가 없을 터인데?” 헬베티카는 엘프-난쟁이의 부족 연맹국을 가리킨다. 월맹군이 자그마치 이천 년 동안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자 거기에 환멸을 느껴서 중립국을 선포해버렸다. 내가 어마어마한 숙청을 일으키자 제 발이 저렸는지, 과거의 일탈을 용서해달라며 우리한테 복속했다. 덕분에 현재 엘리자베트는 서쪽 북쪽 동쪽 삼면에서 우리에게 포위되었다. 이 자발적인 복속에 마계가 또 한번 크게 열광한 것은 물론이었다. 사실 헬베티카 연방 대표를 내가 거하게 협박한 것도 있었다. 뭐, 이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형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지금 전쟁을 걸면 십중팔구 우리가 이깁니다. 공화국도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최악의 사태가 기다리겠지요.” “최악의 사태? 그게 뭔가.” 벨레드 형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자베트는 자기 나라를 버릴 겁니다.” “……!” 내가 맥주를 들이키고 씁쓸하게 말했다. “형님.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짓밟히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그거야 절망하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사람은 절망에 패배하겠지요.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철의 의지를 관철하는 자가 가끔씩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오로지 복수만을 갈망합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는 어딘가 외국으로 망명할 것이다. 멸망한 국가의 군주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써먹기 좋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핏줄을 지니고 있는 엘리자베트라면, 적당히 어느 왕자랑 결혼시켜 씨받이로 만들겠지.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씨받이로서 값어치가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엘리자베트가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의 국민, 이념, 대의. 그런 것들이 족쇄가 되어 엘리자베트를 묶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사라지면.” “그런가. 복수를 위한 귀신이 태어나는 것인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트에게 군재가 있다는 건 모든 나라가 알고 있습니다. 객장(客將)으로 써먹겠지요.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병력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정말이지 난감한 아가씨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쪽이 당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패배시키면 복수의 귀신이 되어 달려든다. 발레포르 같은 잔챙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가시다. 내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수세를 지키는 것. 이게 최선입니다.” “으으음.” 벨레드 형님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방법에 불만이 있는 듯 신음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게 최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천만다행으로 지금 엘리자베트에게는 용사가 없다. 데이지는 나에게 맹약으로 묶여 있고, 루크는 혁명사상에 전염되어 엘리자베트를 독재자로 여기고 있다. 용사라는 패가 사라진 만큼 엘리자베트는 아마도 암살자를 고용하겠지. 어떻게든 마왕만 죽일 수 있다면 사태가 호전된다. 아무리 수많은 병력이 있다 한들 마왕이 죽으면 끝.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던전 어택>에서는 마왕에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마왕성에 틀어박혀 무한정 농성하거나, 아니면 병력을 통째로 이끌고 바깥으로 진출하든가. 마왕성에 틀어박히면 생명을 잃을 위험이야 줄어들겠지만 반대로 행동 반경이 극도로 줄어든다. 전략적으로 수세에 몰린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전략적인 우위를 넘겨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마왕성에서 뛰어나와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야전의 명수이다. 바르바토스조차 엘리자베트와 정면으로 맞붙다가 패사(敗死)한다. 결국 두 가지 결말밖에 없다. 자기 본진에 있다가 말라비틀어져 괴사하든지, 야전에서 처참하게 전멸당하든지. 꽤나 괴로운 양자택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엘리자베트에게는 단독으로 마왕을 죽여버릴 만한 최종병기가 없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암살자로 마왕들을 죽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고로, 엘리자베트는 이쪽의 배신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엘리자베트는 발레포르와 결탁했을 것이다. 누가 단탈리안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그런 마왕들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겠지.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현재도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라면 대략적인 계획을 그려내는 데 이 년쯤 걸릴까. 아니, 일 년 안에 해내겠지. 나는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 서둘러서라도 이쪽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일찌감치 짓밟았다……. “엘리자베트에게 남은 수단은 이쪽의 내부를 뒤흔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도저히 공격할 수 없다면 내부를 공략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지요.” “음. 아우는 그걸 미연에 방지한 것이고.” 그렇다. 편집증적인 강박관념이라 해도 좋다. 천하의 엘리자베트라고 해도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은, 엘리자베트가 모든 마왕을 죽일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 아우. 폴리투니아에서 침공을 준비했을 때 굳이 자네가 직접 간 것도…….” “예. 폴리투니아는 엘리자베트의 동맹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지요.” “…….” 벨레드 형님이 맥주를 원샷했다. 형님은 맥주잔을 쿵, 하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묘하게 탄성을 흘렸다. “꽤 재미있군. 대륙을 장기판으로 놓고 자네와 그 여자, 두 사람이서 놀아재끼는 것 아니냐. 그 여자 때문에 왕국이 움직였고 마왕과 대공이 죽었다. 이걸 그 여자가 알면 얼마나 좋아할지! 크흐흐. 마치 대륙을 혼수물로 삼아 구애하는 꼴이다.” 나는 형님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벨레드 형님은 그것마저 원샷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보여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형님,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아니. 나는 또 자네가 바르바토스 님이랑 정말로 사귀고 있는 것 아닌지 걱정했지 뭔가. 크하하.” 벨레드 형님이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찔끔했다. 참고로 벨레드 형님은 아직도 나와 바르바토스의 사이를 SM 파트너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내가 두드려맞는 관계로. “그,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바르바토스에게 저는 그저 단순한 육노예. 자기가 편할 대로 써먹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어제만 해도 잔뜩 채찍질을 당했다구요.” “암, 그렇고말고. 이제보니 자네가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었구만!” 벨레드 형님이 내 술잔에 맥주를 콸콸 쏟아부었다. 저기, 형님. 술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자네가 그 여자랑 결혼해서 공화국을 이어받으면 순조롭게 대륙이 정벌되는 것 아닌가! 크하하하! 아우, 자네의 사랑을 내 진심으로 응원하겠어!” “아니,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자아! 건배하자고!” 일단 공화국은 핏줄로 이어받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해드릴까 했지만 관두었다. 벨레드 형님은 특정한 분야 이외에는 완전히 멍청이였으니까. 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사버린 것 같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지. 나한테도 불쌍한 벨레드 형님한테도. “건배.” 결국 나는 활짝 웃으면서 벨레드 형님에게 건배했다. 힘내십시오, 형님. 저는 형님이 천년 동정을 탈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00356 외교전의 걸작 =========================================================================                        “제국에서 추가적인 숙청은 일어나지 않았는가?” “예, 통령 각하. 방위사령부는 이미 제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결국 일주일의 혼란에 불과했는가.” 엘리자베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탈리안이 암살되었다는 정보에 엘리자베트 통령은 지난 일주일 동안 극도로 긴장했다. 며칠 밤을 새가며 단탈리안에 대한 정보만 수집할 정도였다. 의도된 자작극인가. 아니면 미처 예방하지 못한 습격인가……. 그것에 따라 향후 방침이 달라진다고 엘리자베트 통령은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방금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쿠르츠, 이건 철저히 계획된 자작극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동의합니다. 진짜 범행이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하죠.” “아아.”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르츠도 따라서 턱끝을 숙였다. 지나치게 깔끔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만약 암살이 단탈리안으로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범인을 색출하는 데 너무나 촉박했다. “공식적으로는 위장 대역을 세워둔 덕택에 살았다고 발표했지만 그것도 거짓이겠지.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치고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건만, 헛된 기대였나…….” “어라. 기대가 엇나간 것치고는 안색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십니다, 각하?” 쿠르츠가 너스레를 떨었다. 분위기가 필요 이상으로 무거워지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애당초 이번 사건은 엘리자베트와 쿠르츠 두 사람 모두 ‘이건 자작극일 확률이 9할’이라고 예상한 상태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단지 1할의 예외를 염려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낙담할 필요는 없겠지. 엘리자베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암살되지 않은 걸 기뻐해야겠지.” “네엡?” 질색하며 부정하리라고 쿠르츠가 생각한 것과 퍽 다른 반응이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단탈리안에게 보통이 아닌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쿠르츠도 잘 알았다. 그는 반쯤 장난기를 담아 혹시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각하. 설마 정말로 그 조그마한 가슴에 연심을…….” “그런 게 아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엘리자베트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공화국은 제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다. 그런데도 제국이 우리를 침공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단탈리안이 마왕들의 고삐를 단단하게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아, 단탈리안이 죽으면 마왕들이 미친소처럼 날뛴다는 얘기입니까?” 뭐야, 그런 이야기였나. 쿠르츠는 약간 김이 빠졌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진지했다. 그녀가 손에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올렸다. “이번에 숙청된 마왕들은 아마도 미처 재갈을 물려두지 못한 자들이겠지. 훗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해치운 것이다. 쿠르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뭐, 그 남자가 제국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뜻이지요.” 고작 일주일.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상대는 자신한테 적대적인 세력을 모조리 숙청했다. 사실상 현재 제국은 단탈리안의 수중에 떨어진 장난감이나 다름없다고, 쿠르츠는 판단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정답이지만 해답은 아니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숙청을 벌였는지가 관건이다.” “……으음.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는걸요.” “만일 본녀가 단탈리안이었다면.” 엘리자베트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통령이 이럴 때는 저절로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 같았다. 쿠르츠는 등줄기가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통령의 시선에 집중했다. “조금 더 좋은 시기를 골라잡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자는 본녀가 제국의 내부를 뒤흔들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을 터.” “……?” “그런 내 조바심을 충분히 역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편이 그자의 수법에 어울린다. 이렇게 깔끔하게 해치워버리는 것은 단탈리안의 성미에 맞지 않아.” “저기, 각하.” 잠자코 이야기를 듣자고 생각한 쿠르츠였지만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마치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엇이냐?” “죄송합니다. 아까 전부터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하가 제국의 내부를 뒤흔든다는 것은 뭐고, 또 그걸 단탈리안이 알고 있다는 건 뭡니까? 제가 명색에 각하의 그림자입니다만 처음 듣는 정보인뎁쇼.”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비밀 정보기관의 이인자였다. 엘리자베트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는 쿠르츠의 눈과 귀를 거친다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 엘리자베트가 하는 말들은 쿠르츠도 전혀 몰랐다. “그대야말로 무슨 소리인가.” 웬 뚱딴지처럼 구냐는 식으로 엘리자베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으로 제국을 압도하기가 불가능하고, 외교로 제국을 압박하기도 글러먹었다. 그러면 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국의 내부에 아군을 만드는 것밖에 없지 않느냐.” “……뭐,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걸 단탈리안이 알고 있어서 이번에 숙청을 일으키는 데 고려했다고요?” 엘리자베트가 즉답했다. “당연하다. 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단탈리안이 모를 리 없다.” “…….” 어라. 무언가 이상했다. 쿠르츠는 무척이나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느낌의 정체를 캐묻기 전에 엘리자베트가 얘기를 이어나갔다. 쿠르츠는 일단 감정을 가슴 한켠에 치워버렸다. “어찌되었든 단탈리안은 최대한 빨리 내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쿠르츠. 권력을 쥐어잡은 자가 급하게 내부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어디로 멀리 떠나 있어야 할 때이지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 미리 청소해두고 떠난다. 그런 상황을 떠올리며 쿠르츠가 대답했다. 엘리자베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섭정인 바르바토스가 제국을 지킨다. 바르바토스가 건재한 이상 제국의 안쪽이 흔들릴 일은 없겠지. 그런데도 단탈리안은 급하게 숙청에 들어갔다…….” “…….” “즉, 바르바토스도 단탈리안과 함께 제국을 비운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탈리안이 바르바토스와 함께 움직인 경우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그는 엘리자베트의 말뜻을 파악한 것이었다. “설마, 전쟁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번 숙청은 전쟁에 나서기 전에 미리 화근을 뽑아두는 사전작업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쿠르츠는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꼭두각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제국에 전비를 감당할 여력이 있을지.” “이번에 숙청된 인물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마왕, 거기에 말로만 듣던 마계의 대공들이다. 어느 쪽이든 마족의 정점에 군림하니 쌓아둔 재화가 상당하겠지.” 쿠르츠가 무심코 침음을 삼켰다. “숙청은 군자금을 확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말씀입니까…….” “문제는 단탈리안이 어디를 노리냐는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시선은 이미 쿠르츠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두워진 눈동자가 조용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일단 프랑크는 아니다. 튜튼도 단탈리안에게 작위를 내렸으니 아니다. 남은 선택지는 폴리투니아, 아니면 우리 공화국…….” “각하. 우리를 노리는 것일까요?” “아니. 폴리투니아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제국과 폴리투니아는 영토 분쟁에 놓여 있다. 전면전으로 확대될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하고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바토리 대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단탈리안과 바르바토스가 나선다고 해도 쉽사리 꺾이지 않을 것이야. 전쟁은 길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제국도 허점을 보이게 되겠지. 반드시 빈틈을 쑤실 기회가 생긴다.” “…….”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단탈리안이 굳이 본녀한테 허점을 보일 전쟁을 치를지가 의문이다. 단탈리안은 그럴 자가 아닐 터……아무래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구나.” 엘리자베트의 의문은 의외로 빠르게 풀렸다. 찜찜한 대화가 있고 난 바로 일주일 뒤, 합스부르크 제국과 폴리투니아 왕국 사이에 공식적인 화해가 발표되었다. 양국은 국경이 접한 지대를 중립지역으로 선포하고 그곳을 신전들에 나누어줬다. 신전들은 양국의 결단에 대하여 ‘대륙 평화를 위해 진심 어린 결단을 내렸다’라고 극찬했다. 화해 선언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자마자 쿠르츠는 허겁지겁 통령 집무실로 달려갔다. 단탈리안이 노리는 곳은 폴리투니아가 아니었다. 그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폴리투니아가 선택지에서 제외된 이상 제국과 국경을 맞댄 적국은 이제 공화국밖에 남지 않았다! 쿠르츠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근위대장인 쿠르츠에게는 언제든지 집무실을 방문할 자격이 있었다. 엘리자베트도 기다렸다는 듯이 쿠르츠를 바라보았다. “각하!” “사르데냐 왕국이다, 쿠르츠! 사르데냐였다!” 그녀가 난데없이 소리쳤다. 쿠르츠는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멈칫했다. “사르데냐 왕국이라니요?” “헬베티카 연방이 제국에 복속하지 않았더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단탈리안은 알프스 산맥을 건너서 사르데냐로 진격할 속셈이다.” “……!” 쿠르츠가 아차, 하고 입을 벌렸다. “사르데냐까지 굴복하면 우리 공화국은 사방이 틀어막힙니다!” “아아.” 엘리자베트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사르데냐는 우리의 유일한 우방이기도 하다. 사르데냐에서 보내오는 지원이 끊기면 아국의 경제는 파탄나겠지. 단탈리안은 사르데냐를 겁박해서 굴복시킨 다음, 우리를 천천히 말라죽이려는 것이다…….” 북쪽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서쪽은 프랑크 제국에, 동쪽은 폴리투니아 왕국에 가로막혔다. 유일하게 남은 통로가 남쪽의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거기까지 단탈리안의 손길이 닿게 되면 공화국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쿠르츠는 그 미래를 떠올리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흥분되었다. 만일 정말로 단탈리안이 사르데냐를 노리고 있다면, 지금 자신들은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그 남자의 속셈을 알아차린 자들이었다! 군대를 움직이기는커녕 소집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의중을 꿰뚫어보았다. “대단하십니다, 각하. 각하가 아니라면 누가 그 자의 계획을 알아냈겠습니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 자에게 당해버렸을 겁니다.” 마치 미래를 예측해낸 것처럼 쿠르츠의 안색이 달아올랐다. 그는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여인은 역시 걸작이었다. 이 사람에게 인생을 내건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사르데냐 왕국에 연락해야 한다. 사르데냐는 지금껏 국경을 방비하는 데 소홀했다. 우리를 지원하는 것으로 국방을 대신했지. 분명히 군사력이 형편없는 수준일 것이다……하루라도 빨리 대책에 들어가야 해!” “알겠습니다. 외무상서를 부르겠습니다.” 쿠르츠는 집무실을 뛰어나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 자신이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엘리자베트는 지금까지 대륙을 논하면서 단탈리안을 다루었다. 어디까지나 대륙이 먼저였고 단탈리안은 부차적인 것, 말하자면 이상을 이루는 데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둘 사이의 중요도가 역전된 것이었다. 아니, 초점이 달라졌다고 해야겠지. 대륙을 바라보며 단탈리안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을 바라보면서 대륙을 다루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쿠르츠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뭐가 나쁠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쿠르츠가 고개를 저었다. 단탈리안이 그만큼 공화국의 주적이라는 얘기였다. 대륙을 논하려면 먼저 단탈리안을 밟고 넘어야 한다. 그 정도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사르데냐를 어떻게 설득하냐는 것이었다. 콧대 높은 귀족들로 가득한 그 왕국을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쿠르츠는 외무상서에게 전해줄 말을 떠올리며 급하게 통령 관저를 뛰어갔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 아 님 치트 자제요. 엘리자베트: …………. 현재 합스부르크 제국 주변부의 상황을 설정란에 지도로 올립니다.   00357 외교전의 걸작 =========================================================================                        * * *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크고 아름답다…….” 눈앞에는 문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 여섯 명의 마왕과 열한 명의 마계대공이 수백 년이 넘도록 축적한 재물이 한자리에 모였다. 반역자들에게 수금한 재화는 황궁의 창고 일곱 곳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으하하하, 단탈리안! 이거 봐라! 금이 쓰레기 같아!” 바르바토스는 한창 신나서 금화에 파묻혀서 꺄르르 웃었다. 얘가 금화더미를 보자마자 정신줄을 놓더니 옷을 홀라당 벗고 뛰어들었다. 내가 식겁해서 말리려고 하니까 옛날부터 꼭 한 번쯤 이런 짓거리를 해보고 싶었다며 막무가내였다. 아니, 그 심정은 이해한다마는……섭정 전하. 체면을 좀 차리시죠. 하긴 바르바토스에게 체면 따위 무리인가. 차라리 개한테 교양을 바라는 편이 낫겠지. 내 옆에서는 이바르가 냉정하게 서류를 읽어나갔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경화(硬貨)와 보석만 구천만 골드에 육박합니다.” “구, 구천만 골드…….” 머릿속이 띵했다. 나의 재산이 대략 리브라 금화로 환산해서 삼백만 골드가 남았다. 참고로 명실상부 마계 최대 재벌, 지금은 어째서인지 외눈 안경을 쓴 채 서류를 읽고 있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 아이 전재산이 현물자산까지 통틀어서 오천만 골드였다. “대부분이 대공들의 재산입니다. 무소속 마왕들은 의외로 가난하더군요.” “저기. 가난하다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왠지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갔다. 아마도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 영혼까지 각인된 거지근성 때문이겠지. 이바르가 외알 안경을 쓰윽 고쳐 썼다. “기껏해야 여섯 명 전부 합쳐 천만 골드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흐음,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것일까요. 개인의 인격과 실력은 별개라더니 이번 경우에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처, 청빈……천만 골드가 청빈…….” 이것이 부르주아 중에서도 부르주아로 군림하는 자의 금전 감각. 설마 이바르가 보기에 나 정도 되는 자산가도 시골에 짱박혀 청빈낙도하는 선비 수준으로 비추는 것일까.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소녀인가……. 태생이 프롤레타리아인 내가 옆에서 덜덜 떨고 있자니, 이바르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마왕보다 오히려 대공들이 월등하게 많은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결국 세상에 마왕이 없었다 해도 절대다수의 마족들은 지배자에게 착취당하기 마련이었겠지요. 마왕인가 아닌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 그리 달라지는 점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장본인이 이바르여서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계대공 열한 명을 족쳐서 뜯어낸 금액이 구천만 골드라서 상당히 아득하긴 한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바르가 지닌 전재산의 두 배가 안 되었다. 마왕 여섯 명과 마계대공 열한 명 = 이바르 두 명, 이라는 등식이 간단하게 성립했다. 요컨대 재벌이 벼락부자를 비웃는 셈이었다. 새삼스레 이바르의 무시무시함이 느껴졌다. 내 여자라서 참 다행이지. 나는 허리를 굽혀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이중에서 오백만 골드는 대공들한테 선물로 뿌릴 거야. 따로 분류해둬.” “대공들한테……그렇군요. 위로금으로 하사하실 생각입니까?” “반역자 혐의에 심장이 덜컹했을 것 아니냐.” 내가 작게 웃었다. 이번 숙청에 마계대공들은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마계에 돌아가자마자 자기들끼리 몰래 모여서 향후 대책을 마련하자며 회합을 열겠지. 그 회합에서 엉뚱한 짓을 벌이지 않도록 약간의 기름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자상한 마왕이니까 말이야. 모쪼록 몸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배려심을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삼천만 골드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따로 모아둬.” 이바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거금은 어디에 쓰실 계획인지 소인이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삶을 살아가면서 삼천만 개의 금화를 쓸 일이 몇 개나 있겠나.” 허리를 폈다. 한 웅큼 쥐어든 금화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금속과 금속이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금화들이 굴렀다. “군자금이다, 이바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전쟁을 벌이도록 하지.” * * * 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을 내걸고 사절단을 보냈다. 목적지는 사르데냐 왕국. 아직도 대세를 거스르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국가였다. 엘리자베트에게 행여라도 전쟁을 일으킬 힘을 허락하지 않으려면 사르데냐의 지원을 끊어야만 했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무슨 명분으로 사르데냐 왕국을 협박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매우 인간적인 주제를 카드로 꺼내들었다. 사절단이 나의 서신을 전달하자 저쪽은 난리가 벌어졌다. 사르데냐 왕실에서 고르고 고른 사신이 곧장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합스부르크 황궁으로 찾아왔다. 사신은 맹렬하게 항의했다. “궁중백. 이건 말도 안 되오. 명백한 내정간섭이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아국은 귀국에 정당한 요구를 할 뿐입니다. 이것은 국경을 뛰어넘어 보편타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정당함에 불과하지요.” “진즉에 배신자로 낙인 찍혀 멸문한 가문을 어찌 복권시킨다는 말이외까……!” 사신은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파르네세 가문은 결코 배신자의 무리가 아닙니다. 파르네세는 한번 잃어버린 명예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제국의 총의입니다, 후작.” 그렇다. 라우라의 가문인 파르네세는 이른바 국화전쟁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의해 몰락했다. 이 내전은 왕국이 절반으로 나뉘어 치고박고 싸웠다기보다, 귀족들이 절반으로 갈라져 자기네의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복잡하게 얘기하자면 왕족의 직계 혈통을 국왕으로 내세울 것인가, 방계 혈통을 국왕으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사정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귀족사회의 지난한 왕권 다툼은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 중요한 것은 파르네세 가문이 직계 혈통을 옹호했으며 이로 인해 패망했다는 것. 파르네세 공작가는 상대 파벌을 반역자라 비난하며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다. 당연히 상대편에서 보자면 파르네세 가문이 반역도당이었다. 파르네세 가문을 싸그리 멸문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제2계승권자였던 라우라를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만 봐도, 이 내전이 얼마나 서로 간에 깊은 원한을 안겨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귀족이 같은 귀족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경우는 정말 희귀했다. “궁중백. 우리 솔직하게 말합시다.” 사신으로 파견온 로디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후작은 제국에서 변경백에 해당하니 나보다 위상이 높았지만,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힘 깨나 쓴다는 남작이라면 너도 나도 후작을 자칭했다. 국화전쟁에서 귀족의 절반이 비명횡사하자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격식을 덜 차리고 있었다. “제 귀는 언제나 현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후작.” “파르네세 가문은 아국의 국왕 전하께 정당한 계승권이 있음을 부정했소. 파르네세를 복권시킴은 자칫 국왕 전하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소. 아니, 명백한 위협이오……!” 내가 눈빛을 차갑게 했다. “귀국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도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후작.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황제 폐하의 대리장군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총지휘권이 그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 “지금 귀국에서는 아국의 대장군을 감히 반역자의 후손이라 매도할 생각입니까?” 후작이 이마를 비단 손수건으로 닦았다. 머리가 반쯤 뒤로 벗겨진 후작은 척 보기에도 몸에 열이 많았다. “그럴 리가 있겠소! 궁중백! 황제 폐하의 명예가 달린 문제라는 것은 알겠으나 이쪽도 국왕 전하의 명예, 더 나아가 왕실 전체의 안위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주셔야만 하오.” “후작.” 내가 후작을 향해서 허리를 굽혔다.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지척에 놓였다. “이건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문제입니다. 아국의 명예인가. 귀국의 명예인가.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양보를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후작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이미 사생결단의 각오를 끝마친 눈빛이 침침하지만 뚜렷하게 서려 있었다. “이 사람은 어리석어 사람의 귀를 사로잡을 연금술사의 언어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소. 그러니 궁중백이 말씀해주시오. 우리가 '최종적인 권고'를 회피하려면 어떤 배려가 필요하오?” “약간의 배려가 필요하지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후작. 공식적인 타협이 불가능하다면 비공식적인 타협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 점을 염려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대화는 여신들께서도 엿듣지 못하실 거요.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귀가 빠른 양반은 언제나 환영할 만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끊으십시오.” “…….” “공화국은 아국의 황제 폐하께 정당한 계승권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국은 잘못되었고, 새로이 건국된 공화국이야말로 진정한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이어받는다……제국과 공화국은 태생부터 서로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결심으로 다져진 후작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 비공식적인 제안이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 것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했겠지. 시시각각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르데냐 왕실의 정당성이 문제라면 아국 왕실의 정당성 또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 후작도 충분히 이해해주었으리라 믿습니다.” 후작이 반박할 수단은 전무했다. 파르네세 가문의 복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논리가 바로 왕실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끊지 않겠다고 대답해버리면, 자기네들 정당성은 소중한 주제에 이쪽 황실의 정당성은 알 바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파르네세 공작가를 복권시키든지, 아니면 원조를 끊어라. 이것이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협상임을 후작도 깨달았으리라. 목소리가 잠겼다. “……우리가 공화국을 원조하는 까닭은 귀국에 적대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국방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귀국 내부의 문제가 있지요.” 내가 슬며시 입꼬리를 들었다. “국화전쟁으로 귀족 가문이 절반 이상 멸절해버린 만큼, 행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부유한 평민을 대거 관료로 발탁했겠지요. 그들은 아무래도 공화주의라는 사상에 조금 더 친근합니다. 물론, 애당초 귀국은 공화주의에 친밀했습니다만.” “…….” “새로운 관료 세력이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후작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왕실을 설득하는 것보다 관료들을 설득하는 것이지요.”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보다 아국의 사정을 꿰뚫고 있구려. 옳소. 공화국에 대한 원조는 비단 외교적인 문제에 지나는 게 아니오. 우리 젊은이들 중에는 이전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을 흠모하는 자가 많았소.” “이해합니다. 통령은 이런저런 책을 많이 저술했으니 말입니다.” “넓은 이해에 감사드리오.” 사르데냐 왕국은 꽤나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우리 부탁대로 원조금을 끊자니 부르주아 출신의 관료 세력이 반발하게 생겼다. 이들은 정부의 실력자들이고 왕국을 관리하는 데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 부탁을 거절하면, 이제 공식적인 타협도 비공식적인 타협도 끝나버린다. 즉. “하지만 쌍방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배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이해는 완전히 무력하여 오히려 하지 않는 것만 못한다는 실망감을 안겨주지요.” “……실로 현명한 말씀이오, 궁중백.” 더 이상 타협은 없다. 전쟁이다. “후작. 우리의 삶에 대해서 제가 다시 한번 실망할 때가 찾아왔습니까?” “…….” 후작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00358 외교전의 걸작 =========================================================================                        “……이 사람이 데 파르네세 장군을 내 직접 만나보겠소.” “호오.” 개인적으로 만나서 설득하려는 것일까.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는 후작의 노력이 가상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가련하다고 표현해야 적절하겠지. “미리 말씀드리지요. 장군을 직접 설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되오. 한참 예전에 멸문한 가문 하나 때문에 양국이 전화에 휩싸일 수는 없소. 신민들이 견뎌야 할 고초를 조금이라도 염려한다면 장군도 마음이 기울 터요.” 내가 작게 웃었다. “라우라 장군은 제 연인입니다. 후작.”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말이외까…….” 후작이 신음했다. 그는 그래도 라우라를 한번 만나보겠다고 고집했다. 굳이 값비싼 순간이동 마법서를 써가면서 내 영지까지 찾아가겠다는데 말리지 않았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후작은 쓸쓸한 발걸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나는 공식적으로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황제 폐하의 대리장군에게 명예를 되찾아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를 위해 사르데냐 왕국측에서 협조해줄 것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파르네제 가문을 복권시켜준다면 이에 대해 충분히 사례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발표를 전해들은 각국의 대사들 중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예전에 파르네제 가문이 다스렸던 영지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저 배신자로 낙인 찍었던 것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을 뿐. 사례금으로 십만 골드라는 거금까지 내걸었다. 간단하게 해결될 사안으로 보였겠지. ─ 반역도당의 복권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르데냐 왕국에서 거부의 의사를 밝히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정보원을 최대한 돌렸겠지. 각국에서는 이것이 합스부르크 황실과 사르데냐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임을 파악했다. 뭐, 국화전쟁은 워낙에 유명한 내전이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곧바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최대한 쇼를 연출했다. ─ 황제 폐하께서는 대리장군을 각별히 아끼고 계신다. ─ 파르네세 공작가를 복권해준다면 사례금 십오만 리브라를 어떠한 유예도 없이 즉각 보답하겠다. 마치 제국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사례금은 필요없으니 내정간섭이나 중단하라고 일축했다. 우리는 처음에 십만 골드로 시작한 사례금을 십오만, 십칠만, 이십만 골드까지 가파르게 올렸다. 타국에서 보기에는 제국이 갈등을 피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걸로 비추었다. 하지만 사르데냐 왕국은 한사코 거절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불만이 한 마디씩 흘러나왔다. 제국의 황제가 몸소 부탁한다고 얘기하는데 지나치게 단호한 것 아닌가, 하고. 딱히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문제가 자칫 본격적인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까봐 염려된다,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 아국은 폴리투니아 왕국과 분쟁을 종식하고 서로 영원히 협력할 것을 다짐한다. ─ 양국의 국경지대를 영구중립지대로 선포하는바,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만신(萬神)들께 이 지역을 봉헌하노라. 폴리투니아 왕국과 전격적인 화해를 선언한 것. 대륙의 열국은 이 결정을 환영했다. 안 그래도 바토리 대왕이 군대소집령을 걸어버린 탓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던 판국이었다. 신전들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영지를 얻게 생겼으니 열렬하게 기립박수를 보내왔다. 제국에서는 평화를 바란다. 그 제스처가 강력하게 먹힌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바토리 대왕도 '쇼'에 참여했다. ─ 누구나 입으로 평화를 부르짖기란 쉽다. 그러나 평화의 진정한 실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반걸음씩 양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 반걸음을 양보하지 못하기에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은 달랐다. ─ 제국이 진심으로 평화를 바란다는 것에 본인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은 단지 평화로운 해결책을 바랐을 뿐이지만, 제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구한 평화를 이룩하자고 제안했다. ─ 제국은 본인에게, 그리고 열국에 진정으로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쯤 바토리 대왕의 여동생은 우리쪽에서 파견한 흑마법사 덕분에 서서히 저주가 풀리고 있었다. 대왕은 동생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 보답한 것이었다. 뭐, 완전히 보답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 넓게 보자면 바토리 대왕은 자신의 혈육을 구해준 빚을 말 한 마디로 갚아버린 셈이니까. 곰처럼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사르데냐 왕국 입장에서는 얼떨떨하겠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 대륙이 화기애애하게 러브 앤 피쓰를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관대하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 파르네세 공작가의 복권에 대하여 이십삼만 리브라를 사례금으로 보상하겠다. 그리고 단호한 거절.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가자 드디어 열국의 대사들이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외교적 수식어가 잔뜩 붙었지만, 잔가지를 전부 털어내고 핵심만 뽑으면 간단했다. ─ 거 좋은 분위기에 눈치 없이 산통 깨지 마시오! ─ ……. 사르데냐 왕국은 억울하기 그지없겠지. 대륙에 말랑말랑한 공기가 감돌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이쪽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거쳐서 겨우겨우 누가 정당한 지배자인지 가려냈다. 이제 와서 반역자의 가문을 복권시켜주면 그때 흘린 피는 뭐가 되는가.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내정 간섭이었다. 사르데냐는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까지 똘똘 뭉쳐서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응했다. 파르네세 가문은 그들 모두에게 원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 사르데냐 왕국은 전혀 내 상대가 안 되었다. 나는 분위기가 이렇게 될 때까지 카드를 아끼고 또 아꼈다. 일단 게임이 이쪽에 유리해진 이상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나는 그동안 숨겨왔던 포문을 열어재꼈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인류와 마족이 하나로 화합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자 상징이다! 제국의 총사령관은 인간이며, 바로 그녀의 지휘 아래 모든 종족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어떻게 이 상징적 위인을 일개 반역자로 치부하는가! ─ 사르데냐는 전 종족의 평화와 화합이라는 기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어찌 이들의 근시안에 통탄하지 않겠는가? ─ 사르데냐에게도 사르데냐 나름대로 사정이 있음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정도 인류와 마족의 항구적인 평화라는 대의명분보다 앞서지 못한다. 그야말로 외교적인 융단폭격. 여태까지 얌전히 타협안을 제시한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맹렬한 비난을 쏟아부었다. 한 가문을 복권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폴리투니아 왕국과 화해한 것을 기점으로 이 문제는 대륙의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느냐 깨트리느냐 하는 문제로 커졌으며, 이제는 심지어 인간종과 마족이 협력한다는 상징물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건 사실 가장 기본적인 수사학 기술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은 최대한 확대해서 해석하고, 내 주장은 한껏 최소화시킨다. 요컨대 당신들이 가문의 복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저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불과하지 아니하고 '모든 나라가 순조롭게 화해 모드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없이 초치는 짓거리'이자 '모처럼 마족과 인간종이 화합하려는 걸 망치려는 행위'이다. 그에 반해서 우리는 '고작' 한 가문의 복권을 바랄 따름이다. 이 확대 해석의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물론이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교전에서도 완벽하게 유효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게임에서 내게 완패했다. 나는 황궁의 테라스에 앉아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들린 와인잔이 샛노란 햇빛으로 그윽하게 반짝거렸다. “이것이 수사학의 요체이다, 데이지.” 내 가슴은 깊은 만족에 잠겼다. 대륙을 장기판으로 삼아 일국을 고립시켰다. 이만큼이나 만족감을 안겨주는 일이 따로 없었다.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데이지가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대답했다. 내가 피식 웃었다. “역시 너는 우둔하다. 항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 “잘 기억해둬라. 수사학에서 승리는 부차적이다.” 나는 입안을 와인으로 적시고 말했다. “자신이 논쟁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하나 있지. 바로 논쟁을 나와 상대방의 일대일 싸움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당연하다. 나는 사르데냐 왕국과 상대하고 있을 때 그들과만 싸운 것이 아니다. 폴리투니아가 보고 있고, 프랑크가 보고 있고, 튜튼이 보고 있으며, 바타비아가 보고 있지.” 수사학이란 단지 말싸움을 화려하게 치장해주는 기술을 뛰어넘는다. 한 명의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중과 관객을 설득하는 것. 그것이 수사학이다. “만일 말싸움에서 이겨본들 목소리가 시끄러웠으며 몸동작에 절도가 없었고, 주장에 대의와 명분이 실종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관중들의 호감을 잃어버릴 것이요,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되 전쟁에서 패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고로 수사학은 본질적으로 기사의 결투가 아니라 검투사의 대결이다. 검투사는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 이상으로 '멋지게' 상대를 압도하는 게 중요하다.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인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땅바닥에 꺼꾸러진 상대방을 향하여 관객들이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를 연호하게 된다면, 비로소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이 정의로운 것처럼 위장하라. 이쪽에 정의가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만들어라. 그 이후에나 전쟁을 논하는 법이다.” “……하지만 아버님. 아직 전쟁에 돌입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해보입니다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확실히 마지막 불꽃놀이가 부족하지.” 나는 와인잔 너머로 석양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노을빛이 부드럽게 굴곡되었다. “그럴 때는 단지 불꽃을 선물해주면 그만이다.” 사흘 뒤, 국제사회의 비난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시기. 사르데냐 왕국의 파비아 백작이라는 자가 폭탄을 터트렸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일찍이 성노예로 팔린 천민이다. ─ 그녀는 노예경매소를 탈출하여 합스부르크로 도망쳤으며, 자기 마족에게 팔아 목숨을 부지했다. 반역자 집안을 복권하는 것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거늘 하물며 성노예를 공작으로 추대하라니 말이 되겠는가! 참고로 파비아는 라우라의 노예경매가 이루어졌던 도시이다. 이 폭탄 발언은 외교판을 강하게 흔들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합스부르크 황제의 대리장군을 성노예라고 비하하는 것은 적나라한 모욕이었으므로. 파비아 백작은 제 딴에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라고 여겼겠지. 라우라가 성노예였다는 증거를 마음껏 뿌려버렸다. 대부분은 이쪽에서 몰래 보내준 자료였다. 뭐, 백작 본인이야 스스로 찾아낸 증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폭로는 효과가 확실했다. 계급 관념이 투철한 귀족들은 사르데냐를 조심스레 지지했다. 이대로 외교전이 지속될 경우 어쩌면 이쪽이 불리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작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외교전으로 이번 사태를 끝마칠 생각이 처음부터 전무했다는 것이다. “군대를 소집하라.” ――명분은 충분. 감히 제국의 대장군을 모독한 자에게 철퇴를 내리치도록 하자.   00359 외교전의 걸작 =========================================================================                        철저한 계급사회인 이 시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성노예의 낙인이 찍혔다는 것은 결코 씻지 못할 불명예였다.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성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물며 라우라는 사생아가 아니냐는 의혹이 옛날부터 있었다. 제국은 졸지에 사생아에다가 성노예이기까지 한 젊은 여자한테 공작 작위를 내달라고 주장한 셈이 되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사르데냐 왕국은 훌륭하게 대응했다. 말싸움에서는 너희가 승리했다. 그러나 어리석다. 너희는 논쟁에서 승패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제국은 최대한 노력했다. 대륙의 평화. 종족의 화해를 지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사르데냐 왕국은 치졸한 인신공격을 감행하면서까지 이쪽의 모든 배려를 무시했다……. 사람들은 사르데냐의 주장을 이해할 것이다. 아무렴 성노예한테 공작위를 줄 수는 없다. 그건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열국과 종족의 화합이라는 대국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고. 겨우 한 명의 노예에 불과하다. 대의를 위하여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지 않은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차치하고 일단 사르데냐가 무척이나 치졸해보인다. 속이 좁다. 시야가 짧다. 부정적인 인상을 아무래도 지우기가 힘들다……. 말 그대로 육참골단, 살을 내주되 뼈를 취할지언저. 제국은 말싸움에서 졌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 작업뿐. 나는 황제의 입을 빌려서 언론 플레이에 들어갔다. 루돌프 황제는 장문의 선언문을 적어 각국 대사에게 보냈다. 선언문은 관리들에 의해 도시 광장에서 큰소리로 읊어졌다. ─ 짐은 만방에 선포한다. 들으라, 대륙에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범법자들이여. 지엄한 언약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합스부르크 제국은 지금 이 시간부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하여 노예가 된 신민에게 전적인 자유를 선언한다. 노예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소유문서에 도장을 찍었을 경우, 모든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상실한다. ─ 사르데냐는 들으라. 그대들은 지난 내전에서 패배한 가문들을 필요 이상으로 능멸했다. 노인에서 갓난아기까지 3대를 처형한 것은 넘어간다 할지라도, 도대체 어떤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들의 가슴에 움크렸기에 멀쩡한 공녀를 성노예로 팔아재낀 것인가! ─ 대저 귀족의 명예는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도리이다. 설령 반역자라 해도 귀족은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귀족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마땅하다. ─ 그러나 므네모쉬네 여신이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귀족에 대한 예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존중조차 망각해버렸노라! 국화전쟁에서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했을 적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겨우 열네 살에 불과했다. ─ 열네 살의 소녀, 전쟁에 어떠한 책임도 없는 이 아이를 저 참람한 인간들이 성노예로 전락시켰다. 고작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서! ─ 이제 와서 그대들은 무고한 피해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하는 보상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고, 정중한 사과 대신에 도리어 분노를 퍼붓고 있다. 이 후안무치함에 짐은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 짐은 분노에 마주해서는 분노로 되돌려주는 방법밖에 모른다. 그리고 여신들 앞에서 맹세하건대, 짐은 이 무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노라. ─ 들으라, 가증스럽게도 권력의 이름으로 무고한 소녀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여. 제국의 주인이 지금 그대들에게 경고를 내리고 있다. ─ 사르데냐 왕국은 공식적으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사과하고 즉각 공작위를 반납하라. 아울러 본래 파르네세 가문이 다스리던 파르마 일대의 영지를 반환하라. 마지막으로, 감히 제국의 대리장군을 능멸한 파비아 백작은 짐의 앞에서 직접 사죄하라. ─ 이것은 최후통첩이며 번복의 여지는 전무하다. ─ 기억하라. 제국의 권고를 무시한 이들이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는지. 만일 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역사가 그대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선언문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굵직굵직한 주제가 몇 개나 있었다. 향후 제국이 불법적인 노예매매를 철저하게 단속할 것이라는 점, 제국의 황제가 직접 사르데냐 왕실을 적나라하게 비난했다는 점, 양국이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였다는 점……. 역시나 본질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데 있었다. 성노예한테 공작위를 내리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생각해서, 공작가의 여식을 성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두 쪽으로 나뉘었다. 그래도 성노예에게 공작은 안 된다고 반응하는 측, 애당초 성노예로 만든 쪽이 잘못한 거라고 비판하는 측으로. 철두철미한 계급의식이 오히려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어느 쪽도 사르데냐 왕국에는 호감을 품지 않았다. 사태를 정리해볼까. 첫 번째, 성노예가 공작이 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사르데냐의 주장은 옳다. 두 번째, 그러나 애시당초 공작가의 여식을 노예로 전락시킨 것은 사르데냐의 책임이다. 세 번째, 이처럼 책임이 명백한 사안에 있어서 사르데냐는 대륙의 평화와 종족의 화합을 무시하면서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각국 귀족들은 빠른 속도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두 번째 지점에서 분개했다. 그들도 귀족인 이상, 아무리 반역자의 딸이라 해도 노예의 인장을 찍어버리는 처사에는 공분했다. 처음에는 제국이 말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호감, 귀족들의 심정적인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자아. 체크메이트다. 사르데냐 왕국 입장에서는 제국의 최후통첩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일부러 황제의 선언문을 매우 무례한 어조로 작성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설령 제안을 받고 싶더라도 말투가 저토록 오만방자해서야 도저히 타협할 수가 없겠지. 황제의 호통에 사르데냐 왕실이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왕실의 체면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말 그대로 최후통첩.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다. 결국 수순은 예정되어 있었다.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르데냐의 국왕은 강경하게 나왔다. 제국은 늙고 병들어 분별을 잃어버렸으며, 노망이 난 노인네처럼 주변에 불쾌감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 우리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사과하기 이전에 제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무례를 사과해야 할 것이다. ─ 파르네세 가문은 공작위가 아니라 두 단계 격하하여 백작위로 복권시키겠다. ─ 파비아 백작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발표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할 수 있을지라도 왕국 차원에서 사죄하는 일은 결단코 불가하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꺼지라는 소리였다. 나는 사르데냐에서 보내온 문서를 읽고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읽어봐도 선전포고로 보이는군요, 후작.” 내게 손수 외교문서를 전달해준 사람은 지난 번에 특사로 파견된 로디 후작이었다. 후작은 이쪽의 안색을 살피면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나마 파르네세 가문을 백작위로 복권시켜주겠다는 지점에서 성의가 보였다. 아마 왕실의 체면을 살리면서 동시에 이쪽의 제안을 만족시킬, 일종의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했겠지. 문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는 것일까. 아직도 사르데냐 왕실은 자기네의 체면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 믿음이 과대망상증에서 비롯하는 헛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겠다. “궁중백. 합스부르크의 황제 폐하께서는 지나치게 아국의 명예를 무시하셨습니다…….” “명예? 지금 명예라고 말했습니까, 후작?”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무엇이 명예인지 말씀드리지요. 불의를 보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명예입니다. 이미 넘어가버린 불의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죄하는 것이 명예입니다. 귀국의 왕실은 명예라고는 길가에 나돌아다니는 개만도 모르는 무뢰한으로 가득합니다.” “말이 지나치오!” 나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후작에게 던졌다. 후작은 당황해서 가슴팍에 부닥친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받았다. “궁중백, 이것은?” “우리 사이에 이제 지나침 따위는 없습니다. 후작. 그건 선전포고문이요.” 후작이 눈을 감고 절망했다. “여신이시여…….”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진솔하게 사과해오지 않을 것을 이미 점치고 계셨습니다. 한 소녀의 명예조차 챙기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국가의 명예를 챙기겠는가. 그것이 폐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탁자에서 작그마한 종을 집어서 흔들었다.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데이지가 종소리를 듣고 접견실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후작께서 귀국길에 오르신다고 한다. 황궁 정문까지 정중히 배웅해드려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후작은 고작 몇 분 사이에 이십 년은 늙어버렸다. 완전히 힘이 빠져버려 마치 곱추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방향성 없는 발걸음으로 접견실을 나갔다. 나는 창가에 서서 후작이 궁전을 나서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후작은 몸을 돌려서 궁전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그곳에 서 있다가 힘없이 발길을 옳겼다. “롱그위 성녀.” 나는 후작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탁자 위의 통신수정구를 가동했다. 곧이어 수정구에서 뿌옇고 푸른 막이 새어나왔다. 거기에 자클린 롱그위 성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방금 막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습니다. 준비하십시오.” ─ 기어코 전쟁이 일어나는군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일이 풀려서 기분이 좋나요? 롱그위 성녀가 예의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올려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전달하는데 거의 도가 텄다. 성인군자라도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늘어질 만큼 파괴력이 막강했으나, 예전에 함께 밤새도록 술을 마신 이후로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도리어 상쾌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예, 무척 기분이 좋군요. 덕분에 롱그위 성녀에게 선물을 줄 수 있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모쪼록 제 선물에 기뻐해주시길 바랍니다.” ─ ……쯧. 롱그위 성녀가 대놓고 혀를 찼다. 정말로 이런 여자가 성녀로 뽑혀도 괜찮았을까? 아테나 대신전에는 마조히스트밖에 없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 알겠어요. 여왕 전하께 연락을 전달하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불법적인 노예매매를 반대했습니다. 대신전들은 오래 전부터 노예매매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을 터.” ─ ……대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을 지지하도록 발표하라는 말씀인가요? “굳이 대신전의 공식발표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전도 대놓고 노예매매를 반대하기에는 가려운 구석이 있겠지요. 하지만 성녀가 '개인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것쯤이야 상관없을 것입니다.” 롱그위 성녀가 눈썹을 째푸렸다. 미인은 눈썹을 찌푸리는 것도 그림이 되었다. ─ 성녀의 발언은 이미 그 자체로 대신전과 연관돼요. 성녀에게 순전히 개인적인 발언이란 있을 수 없어요. 이렇게 단순한 것도 모르나요? “괜찮습니다. 공식적이지 않되 공식적인 발언이 되도록 하면 그만입니다.” ─ 공식적이지 않되 공식적인 발언?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폴리투니아와 협상해서 얻어낸 땅을 대신전에게 공짜로 뿌렸지 않습니까. 명목에 불과하더라도 아무튼 신전의 명의로 된 영지가 추가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한테 보답해줘야지 않겠습니까?” ─ ……과연. 대신전의 공식발표가 아니라 성녀 개인의 지지발언으로 빚을 퉁칠 수 있다면, 대신전 입장에서도 싸게 먹히는 것이라고……. “바로 그렇습니다.”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 지독하네요. 정말로 지독해요. 당신이 하루 빨리 길거리에서 객사하도록 진심으로 여신께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신들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아마 그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을 겁니다.” 롱그위 성녀의 코웃음과 함께 통신은 거기서 끊겼다. 다음날, 합스부르크 제국은 정식으로 사르데냐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그와 함께 노예매매에 관하여 제국을 지지하노라고 롱그위 성녀가 발표했다. 아테나의 성녀가 나서자 자기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나머지 성녀들도 지지선언을 내놓았다. 이러한 지지선언은 불가피하게 마치 제국의 선전포고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추었다. 사르데냐 왕국에게는 미리 애도의 말을 전하자. 단념해라. 그저 상대가 조금 악질적이었을 뿐이다. 뭣하면 길을 걸어가다가 운이 나빠서 개똥이라도 밟았다고 생각해라. 물론, 개똥에 미끄러져서 머리통이 깨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00360 제2차 국화전쟁 =========================================================================                        제국은 원정군으로 삼만 대군을 편성했다. 편성했다고 표현해야 할지, 정확하게 말해서 고용했다. 마왕군은 이번에 단 한 명도 출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순수히 용병으로만 전쟁을 치를 생각이다. 용병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국민병보다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있다. 실상은 정반대다. 지금 시대에 국민이란 태반이 농사꾼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일년 내내 밭일에 신경 쓰는 농사꾼보다야 전투를 생업으로 삼는 용병이 당연히 더 뛰어나다. 다만……용병은 비싸다. 엄청나게 비싸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알보병이 일년치 봉급으로 자그마치 500골드를 받는다. 50골드가 아니다. 500골드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므로 두 번 강조해둔다. 즉, 순짜 보병으로 이루어진 용병대를 천 명만 굴린다고 가정해보면……일 년에 무려 50만 골드가 고용비로 빠져나가는 거다! 만 명을 고용하면 500만 골드가 흘러나간다. 이쯤 되면 병력으로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 돈으로 전쟁을 한다고 봐야겠지. 참고로 기병은 보병보다 훨씬 비싸다. 간단하게 두 배 더 비싸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자아, 어디 계산해보자. 나는 이번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병 이만과 기병 칠천을 고용하고 싶다. 보병 한 명당 500골드, 기병 한 명당 1000골드. 따라서 20000×500골드, 여기에 7000×1000골드. 결론적으로, 해마다 1700만 골드를 용병대에 지불해야 한다. “지나치게 비쌉니다.” 라피스가 단답형으로 말했다. 나는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라피스에게 상담했다. 전문경제가인 이바르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대공들한테 거둬들인 재화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마 상담해달라고 부탁하기 미안해서 라피스를 불렀다. “일단 대공들 족쳐서 나온 금액이 구천만이니까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긴 한데…….” “그건 앞으로 단탈리안 님께서 제국을 운영하는 데 써야 할 금액입니다. 아낄 수 있다면 최대한 아끼는 것이 상책입니다.” 라피스가 냉정하게 주판을 튕겼다. “제가 계산하기에 보병 기준으로 300골드까지 절감할 수 있습니다.” “엉? 어떻게?” “헬베티카 용병들을 대거 고용하십시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병 중에서 가장 비싼 게 헬베티카 놈들인데?” 헬베티카는 아인종(亞人種) 연방국이다. 인간들의 박해를 피해서 엘프와 난쟁이가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이 산맥에 터를 잡고 전문적으로 용병대를 수출하여 먹고살기 시작했는데,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용병 기업처럼 되어버렸다. 난쟁이는 힘이 타고난 장사이고 엘프는 천성적인 사냥꾼이다. 헬베티카 용병은 월등한 전투력, 드높은 사기, 무엇보다 고용주에 대한 의리 덕분에 최고의 용병으로 불린다. 라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 님은 정말로 금전과 관련해서는 무지하군요. 뇌 구조가 일반인과 다른 것일까요. 특정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시면서 왜 가장 경제에 있어서는 수준 이하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아마도 나보고 멍청하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서 라피스밖에 없을 거다……. 내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 나 멍청하다. 아무튼 무슨 마술을 부리면 300골드로 퉁칠 수가 있어?” “이번에 대공들을 본보기로 숙청한 것 때문에 헬베티카 연방이 스스로 제국에 복속해오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행여나 단탈리안 님이 자신들까지 숙청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 하고 내가 손뼉을 쳤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너희가 진심으로 제국에 복속한 건지 어디 한번 충성심을 증명해보라고 하면 되겠군!” “물론 급료를 아예 지급하지 않는다고 하면 반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당히 싼 가격에 고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300골드…….”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합스부르크와 튜튼에서는 약 500골드에 보병이 고용됩니다만,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450골드에서 475골드, 바타비아에서는 300골드로 고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어라?” 바타비아에서 유독 용병이 쌌다. 시선에 의문을 담아 보내니까 라피스가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급료를 지급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타비아에서는 열흘마다 한 번씩 급료를 현금으로 지불합니다. 반면에 다른 국가들은 3개월, 심지어 반년이 넘도록 외상으로 체불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과연. 신뢰의 문제인가…….” 이해했다. 바타비아는 부유한 국가인 만큼 제때제때 급료를 내어준다. '일을 하면 확실하게 보답해준다.' 그런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국가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더라도 급료를 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 당연히 용병들은 바타비아에 고용되는 걸 선호하겠지. 그러니까 훨씬 싼 가격에 용병을 모집할 수 있다. “즉, 300골드는 예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저임금입니다.” 라피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빛났다. “비록 단탈리안 님에게는 바타비아 공화국이 지금껏 쌓아올린 신뢰가 없습니다만, 대신 충성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헬베티카에서도 충분히 납득하겠지요.” “좋아!” 내가 기분 좋게 소리쳤다. “라피스, 헬베티카 연방의 지도자들과 단판을 짓고 와라! 황제의 인장을 내줄 테니 네 마음대로 휘저어도 상관없다.” “분부를 받듭니다.” 라피스는 바로 다음날에 합스부르크 황제의 전권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헬베티카 연방으로 파견되어서 고작 일주일 만에 모든 계약을 성사시켰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겠다. 여하간 라피스는 정말로 보병을 300골드에, 기병을 600골드에 고용해냈다! 여기까지만 해도 브라보를 외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라피스 얘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협박한 것인지, 연방의 지도자들은 완전히 쫄아버린 나머지 기병 이천 명에 대한 급료를 자기네들이 알아서 지급하겠노라고 약조했다! 나는 이제 칠천 명의 기병 중에서 오천 명에게만 봉급을 주면 되었다. 고로, 라피스는 1700만 골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전비(戰費)를 900만 골드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예산의 절반을 절약해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겸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피스에 비교하자면 나 따위는 달빛 아래의 반딧불이요, 보들레르 앞에서 시를 외워대는 꼬맹이요, 바르바토스 앞에서 흑마법을 시연하는 견습마법사였다. 라피스의 눈에 나는 800만 골드를 허공에 날려버릴 뻔한 멍청이로 비추겠지. 라피스 라줄리, 청금석의 서큐버스를 찬양하라! “라피스! 너가 최고다!” 나는 라피스가 헬베티카에서 돌아오자마자 맨발로 뛰어나가 그녀를 껴안았다. 여기서 맨발이란 관용어가 아니라 정말 낱말 그대로 맨발을 뜻했다. 마침 가미긴이랑 섹스하는 도중이어서 신발을 안 신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재상 하나는 잘 뒀지! 다른 거 다 필요없어. 라피스가 최고야!” 나에게 껴안긴 채로 라피스가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단탈리안 님. 이곳은 예법이 지엄한 황궁입니다만.” “내가 곧 제국인데 그까짓 예법은 좀 무시하면 어떠냐!” “시녀들이 쳐다보지 않습니까. 부끄럽습니다.”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무덤덤한 말투였다. 나는 내친김에 그녀를 등에 업어서 황궁을 한 바퀴 돌려고 했지만, 라피스가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쳐다보듯이 썩은 눈동자로 바라보았기에 관두었다. 그 눈빛을 보니까 왜 헬베티카의 지도자들이 겁을 먹었는지 깨달았다. 라피스는 무서운 아이다……. “헬베티카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응? 시원한 포도주 마실래?” “어차피 순간이동 마법으로 다녀오는 것입니다. 여독도 없습니다.” “그럼……그렇지! 어깨라도 두드려줄까? 내가 이래 봬도 바르바토스한테 마왕하지 말고 안마사나 하는 게 어떠냐고 찬사까지 받은 사람이야.”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건 찬사가 아니라 비아냥입니다, 단탈리안 님.” 800만 골드를 꽁으로 절약시킨 라피스가 너무 대견하여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어째서인지 데이지가 게슴츠레한 두 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목격했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내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뭘 보고 있느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니요.” 데이지가 한숨을 참는 얼굴로 말했다. “창고에서 포도주를 가져올까요, 아버님.” “그 정도 눈치라도 네 뇌수에 담겨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만 너에게 달린 것이 두개골인지 두레박인지 헷갈릴 뻔했구나. 뭐하냐? 어서 다녀오지 않고.”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서 라피스에게 살갑게 굴었다. “참, 그러고보니 라피스한테 내가 휴가를 깜빡하고 안 줬네. 어때? 5년 넘게 쉬지 못한 거 이참에 길게 휴가라도 끊어볼래? 니블헤임에 저택 하나 지었는데 그거 별장으로 빌려줄게.” “……하아.” 등 뒤에서 데이지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은 매사에 어두침침한 꼬맹이니까 말이지. 아마 새삼스럽게 인생의 부조리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부조리에 절망하든 말든 상관없으므로 신경을 껐다. 라피스의 활약으로 예산을 대폭 절감하게 된 나는 경쾌하게 출진을 명령했다. 총 병력 2만 7천. 총사령관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최강의 장수가 통솔하는 최강의 용병이었다. * * * “통령 각하, 제국군이 출정했습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집무실에 들어와 보고했다. 엘리자베트는 식초를 탄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물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병력은?” “대략 이만에서 사만 사이로 추정됩니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오차 범위가 너무 넓다. 이만과 사만은 천지차이다, 슐라이어마허 장군.” “이거 면목이 없습니다. 간자를 최대한 많이 풀어놓았으니 조금 더 정확한 숫자를 밝혀낼 겁니다……그리고 병력을 추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이유?”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맹군이 출진하지 않았습니다. 바르바토스는 물론이고 그녀의 휘하 병력도 꼼짝하지 않고 있습니다. 각하, 제국은 이번에 용병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음…….”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용병들이 써먹기 좋다 해도 마족의 군세에 비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지요.” 쿠르츠의 말이 끝나자 엘리자베트가 길게 침묵했다. 그녀는 식초물을 전부 비우고, 그러고도 비어버린 유리잔을 한동안 입술로 물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타국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다. 쿠르츠. 단탈리안은 외교적인 평판을 신경 쓰고 있다.” “외교적인 평판이요?” 엘리자베트가 은발을 귓등으로 쓸어넘겼다. “전쟁에 자국민을 동원하지 않고 순전히 용병만 투입한다. 이건 합스부르크 제국과 사르데냐 왕국 사이의 전면전이 아니다. 단지 귀족과 귀족이 서로의 명예와 재산을 걸고 결투에 나설 뿐이다……그런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지.” 쿠르츠가 음, 하고 자신의 턱끝을 쓰다듬었다. “그럼 단탈리안은 단지 타인에 비출 인상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자금을 용병에 투입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과연 그만한 실효가 있을까요?” “생각해보라. 이번 전쟁의 명분이 무엇인지.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귀족적인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황제가 개인적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에 나선다면, 바로 그 명예를 지키되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는 모양새가 만들어진다. 어디까지나 명예로운 결투가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명분이 명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에 의해서 뒷받침이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명분은 더더욱 강력해지겠지. 거기에 더해, 국제외교의 비난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까지 있다.” “국제외교의 비난, 입니까.”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왕군을 동원했다면 이번 전쟁을 마왕군에 의한 침공으로 윤색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르데냐 왕국에게도 명분이 생겼겠지.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막아버린 거다…….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군.” “하지만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각하.” “아아.” 엘리자베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쪽이 움직일 차례다, 쿠르츠. 국경에 병력을 대기시켜라. 아마도 기다리는 날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야.” “예. 명을 받듭니다, 통령 각하.”   00361 제2차 국화전쟁 =========================================================================                        * * * 대륙력 1512년 5월 15일. 제국군은 이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을 건너기 시작했다. 아직 삼만 명의 용병이 전부 모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용병대장들은 한 달 정도를 더 기다리고 난 뒤에 진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라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고향이 어디인가.” “물론 헬베티카입니다, 장군님.” “그렇다. 우리는 지금 헬베티카로 가고 있다. 자네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도 길잡이가 필요한가?” 라우라가 투구를 집어서 머리에 썼다. 그녀는 일개 병사처럼 허름하고 낡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제멋대로 데이지를 고문한 것을 벌하기 위해 라우라에게 백의종군이 내려졌는데 아직도 그 처벌은 유효했다. “아직 집결하지 못한 병사들에게 전하라! 루가노에서 보자고.” 루가노는 알프스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들어선 도시였다. 헬베티카에서 사르데냐로 향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용병대장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가운데, 라우라가 그들을 향해서 씨익 웃었다. “본관은 그대들이 샌님이라고 욕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출신이다. 그런 본관보다 산맥을 늦게 통과한다면, 사실 헬베티카인이라고 자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겠지.” 그 말을 남기고 라우라는 막사에서 나갔다. 정말로 병력을 출발시키려는 모양새였다. 용병대장들이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난쟁이와 엘프도 지금만큼은 똑같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풍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소집을 이렇게 멋대로 해도 문제가 없으련지……” 대장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참고로 나는 이번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권대사로서 원정군에 참여했다. 라우라가 군사를 이끌고 적군을 궤멸시키고 내가 뒤치닥거리를 한다. 그렇게 역할이 분담되었다. 물론 궁중 서열은 내가 라우라보다 높았다. 용병대장들은 난쟁이와 엘프로 이루어졌으므로, 인간인 라우라보다 마왕인 나를 알게 모르게 더 섬기었다. 사령관은 라우라이지만 막후의 지배자는 나라는 느낌이었다. 대장들이 라우라를 말려달라는 눈빛으로 애원했다. “괜찮겠습니까, 전하?” “이 군대의 총사령관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다. 본인은 제국에서 파견된 궁중백. 한낱 외부자에 불과하지. 얌전히 명령을 받들게.” 내가 능실능실 웃었다.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공작보다 늦게 도착할까봐 두려운 것인가? 헬베티카 사람들이 산타기에 자신이 없는 줄은 미처 몰랐군.” 대장들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지역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유치하긴 해도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사실 유치한 만큼 효과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용병대장들은 마왕인 내 앞에서도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않으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사령관께서는 우리보다 이주일은 늦게 도착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날 회의에서 오간 대화는 모든 용병대에 전달되었다. 용병대장들은 간단한 도발에 분기탱천했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용병대는 행여라도 총사령관보다 늦으면 안 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높은 산맥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노라고 자신하는 헬베티카 용병들 입장에서, '사르데냐 촌놈' 출신의 총사령관보다 느리다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5월 30일. 헬베티카 용병들은 전 병력 27,542명 중에서 26,910명이 루가노에 집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라우라가 알프스 산맥에 발을 들인 지 딱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이주일 만에 헬베티카 용병들은, 군대가 지극히 모여들기 어려운 산맥 지형에서 사실상 소집을 완료해버렸다. 전례가 없는 속도였다. 어느 용병대는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여기까지 왔다! 무게가 나가는 갑옷과 무구를 전부 순간이동 마법으로 옮겨버린 다음, 마을에서 나귀를 구해다가 밤낮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마법서랑 나귀들을 구입하는 데 못해도 수천 골드는 들었을 테니 그야말로 불굴의 집념이었다. 라우라는 용병들을 치하했다. “과연 헬베티카의 군인은 다르군. 보급관, 이걸 받게.” 라우라가 보급장교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장교가 제국어로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사령관?” “아군의 물자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허가증이다. 보급관. 지금 당장 연대를 이끌고 루가노의 민가란 민가는 모조리 돌아서 질 좋은 맥주와 포도주를 구입하라.”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누가 봐도 반해버릴 것 같은 미소였다. “병사들에게 전하게. 본관은 오늘 헬베티카 사나이들에게 반해버렸노라고. 소녀의 연심을 담아 선물을 보내니, 코가 삐뚫어지도록 즐기는 것을 허락한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용병대장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힘겹게 강행군을 펼쳐온 병사들에게 음식과 술이 수레째로 배달되었다. 병사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어리둥절하다가, 소식을 전해듣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파르네세 공작 전하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평야를 가득 매웠다. 용병들은 비싼 급료를 받아가며 일하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식비로 제외된다. 갑옷과 무기도 자기 돈으로 구입하고 관리해야 하므로, 용병이 벌어들이는 돈은 목숨을 건 것치고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평소 술이라고 마시는 물건은 식초물이나 다름없는 포도주, 말오줌에나 비유할 법한 맥주. 그것도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에야 사령관이 생색을 내며 하사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술통이 내려왔다. 저절로 만세 소리가 나오겠지. 병사들이 술안주로 선택한 화제도 당연히 미모의 총사령관 각하였다. 라우라는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렀는데, 이때 병졸이 입는 옷을 똑같이 입었고, 병졸이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었으며, 병졸이 자는 곳에서 똑같이 잠들었다. 라우라와 함께 보름을 보낸 병사들은 신나서 이 이야기를 떠들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떠드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군에 퍼졌다. 용병들은 안 그래도 거나하게 술판을 벌려주어 호감이 가던 판이었다. 저런 이야기까지 접하자 단숨에 라우라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라우라는 억세고 반항스러운 용병들의 마음을 확고하게 쥐어잡았다. 정점은 다음날에 있었다. 소집일에 늦어버린 오백 명의 병사가 루가노에 도착했다. 용병들은 이 지각쟁이들을 향해 야유를 쏟아부었다. 약속 날짜를 지키지 못했으니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시킨다면 참수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삼만의 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우라가 책임자를 불러들였다. 난쟁이족 연대장이 걸어나왔다. 오른눈에 안대를 낀 난쟁이였다. “군법은 지엄하다. 자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지.” “예, 공작 전하.” 난쟁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미 각오를 마친 얼굴이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대의 연대와 그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겠다. 무엇 때문에 늦었는가?” “부상자를 부축하고 오느라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벗어라.” 생뚱맞은 명령이었지만 난쟁이는 아무런 의문을 표현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가죽이 겹겹으로 된 신발을 벗자, 그곳에는 볼품없는 난쟁이족의 발이 있었다. 물집이 엉망진창으로 터져서 흉측했다. 그때 용병대장들이 라우라의 행태를 보고 기겁했다. “아니!” “공작 전하!” 라우라는 땅바닥에 몸을 웅크리더니,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난쟁의 발등에 입술을 맞춘 것이었다. 대륙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라우라였다. 그녀가 못 생기기로 유명한 난쟁이족, 그것도 신체에서 가장 더러운 발에 키스를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장교와 병사도 깜짝 놀랐는데 졸지에 공작 전하께 발등 키스를 받아버린 장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녀를 말리지도 못한 채 온몸이 굳었다. 라우라가 일어나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는 소집일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탈영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 군법으로 처벌될 것임을 알면서도 본관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다. 대저 보상을 바라면서 싸우는 병사는 오합지졸이고, 기꺼이 처벌을 받아들이는 병사를 정예라고 했다.” 라우라가 난쟁이 연대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부상병을 탈주병으로 처리하고 급히 서둘렀다면 이 자는 처벌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동료와 부하를 버리지 않고 동시에 군법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헬베티카의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만큼 동료를 사랑하고 군법에 충실한 전사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 호응했다. 소리는 금세 전염되어 이윽고 삼만 명의 병사 전체가 함성을 내질렀다. 난쟁이 연대장은 감격하여 두 무릎을 꿇고 라우라에게 부복했다. 이 순간, 라우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병사들과 일체가 되었다. 본래 용병의 단점은 연대마다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보병이래도 장창을 애용하는 부대가 있고, 방패와 중검의 조합을 애용하는 부대가 있다. 개개의 전투력이 강력하지만 개성이 천차만별인 용병대를 조화롭게 운용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 난점을 라우라는 총사령관에 대한 신뢰로 해결했다. 장교와 병사의 마음을 얻었다. 여기서 마음이란 좋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가장 기초적인 욕구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긍지를 이해받고 싶다는 가장 드높은 욕구까지 통틀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치 않은 싸움터라도 라우라가 명령한다면 기꺼이 몸을 던지겠지. 동료에 대한 의리를, 용병으로서의 긍지를 이해해준 상관에게 끝까지 충성할 것이다. 라우라가 그들을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틀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서 라우라가 명령을 내렸다. “산사람들의 실력을 평원놈들에게 보여주어라!” 라우라 본인도 이른바 평원 촌놈에 해당했지만 장교들 중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원정군은 재빠르게 진격했다. 어느 강줄기에 도달하자, 이미 이쪽의 진군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사르데냐의 기병들이 군영을 차리고 있었다. “수가 많지 않습니다. 척후병입니다, 공작 전하.” “즉시 공격한다.” “예?” 라우라가 다짜고짜 공격 명령을 내리니 대장들이 놀랐다. 라우라의 표정은 무덤덤한 그대로였다. “만약 우리가 이곳으로 진군해올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저 강줄기 너머에는 척후병의 진지가 아니라 본진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본진이 이곳에 없다는 것은 아군의 대략적인 경로만 파악했다는 뜻이다!” 용병대장들에게 설명하면서 라우라는 직접 곡도를 빼들었다. “적군은 아직 우리가 여기 도착했음을 모르고 있다. 이대로 척후병을 전멸시키고 깊숙하게 전진하여, 적군의 본진을 기습한다! 돌격하라!” 그리고 대장들이 각 연대에 명령을 하달하기도 전에 라우라는 홀로 말발굽을 내달려 뛰어나갔다. 용병대장들은 화들짝 놀라서 라우라의 뒤를 쫓았다. “뿌, 뿔나팔을 불어라! 돌격하라!” “공작 전하를 뒤쫓아! 제기랄, 절대로 전하를 혼자 내버려두지 마라!” “돌격하라! 전군, 돌격하라!” 나팔수들이 허겁지겁 뿔나팔을 불었다. “와아아아! 공작 전하께서 먼저 나아가셨다!” “전하께 뒤쳐지지 마라, 애송이들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강을 도하했다. 강폭이 좁았지만 그래도 깊은 곳은 강물이 난쟁이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곳을 이천 명의 선봉대가 막무가내로 돌격했다. 진형도 없었다. 라우라와 용병대장들을 선두로 하여 역삼각형 모양으로 전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나갔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전군 돌격이었다. 이것이 제2차 국화전쟁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 작품 후기 ============================   그리고 제2차 국화전쟁은 전설로 승화됩니다.   00362 제2차 국화전쟁 =========================================================================                        적군의 진지에서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줄기를 넘어버릴 줄은 몰랐겠지. 다소 느긋하게 이쪽을 관망하면서 우리군의 상태를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우라를 필두로 열두 명의 용병대장이, 그 뒤를 삼백 명의 기병이 단숨에 달려나갔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어디, 쫓아가볼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군마가 으르렁거리며 발굽을 내딛었다. 바르바토스에게 선물 받은 녀석으로 흑색 갈기가 멋들어진 명마였다. 내 승마술은 솔직히 볼품이 없었지만, 녀석은 이렇게 얇은 강물 따위는 흙바닥이나 마찬가지라는 듯 거침이 없었다. 수백 명의 기병이 일제히 강물을 가로질렀다. 장관이었다. 사방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 사방에 희뿌연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 위로 태양빛이 새하얀 알프스 산맥을 비껴서 내리 쏟아졌다. 마치 저녁놀이 얇은 커튼에 비추어 찬란하게 빛나듯이, 꼭 그처럼 물보라가 햇빛의 커튼이 되어 환하게 퍼졌다. “공작 전하,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난쟁이 용병대장이 라우라를 따라잡았다. “나는 군사들의 뒤에 숨어서 비겁하게 지휘할 생각이 없다!” “사령관에게 일개 병사의 용맹은 필부의 무모함에 불과합니다! 전하, 부디 재고를!” “그렇다면 그대들이 나보다 앞서가라.” 라우라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는데, 물소리 떄문에 대화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얘기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본인이 그대들보다 앞서고, 그대들이 나보다 앞선다. 허면 아무런 문제가 없군!” 용병대장들이 할 말을 잃었다. 거기에 대고 라우라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새로운 군명이다. 본인보다 적진에 늦게 도착하는 자는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 지각하는 사람은 헬베티카의 신사를 자칭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겠다!” 라우라가 금발을 휘날리며 오히려 말에 속도를 더했다. 용병대장들은 어이가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렴 총사령관을 선봉대장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명을 받듭니다!” “내 살면서 이런 분을 대리 군주(軍主)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걸!” 대장들이 라우라를 지나쳐서 돌격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저질러보자는 심정이겠지. 대장들이 단기필마로 앞장서자 병사들도 용기백배해서 뒤따랐다. 수백 명의 기병이 순식간에 강을 건넜다. 아직도 적군은 대열을 짜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산발적으로 화살을 날려댈 뿐이었다. 수백에 이르는 아군, 그것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병에게 화살 몇 개를 쏘아봤자 잘 맞지도 않았다. 기병들이 목책에 수비 병력이 없는 쪽으로 간단히 뛰어넘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적군은 기병의 난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적군은 어떻게든 서로 모여들어서 방진을 만들려고 했다. 실제로 스무 명 정도가 모이는 데 성공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만들어진 방진은 지극히 수동적이었다. “방진을 공격하지 마라!” 라우라가 소리쳤다. 그녀는 용병대장들보다 한 발자국 늦게 적진에 돌입했다. “적이 모여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라! 사냥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곧바로 라우라의 말을 이해했다. 아군은 방진을 이룬 보병은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동료와 합류하지 못한 알보병부터 처리했다. 이쪽이 말의 속도에 더해서 곡도를 휘두르자, 적은 미처 대적하지도 못하고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미처 대열을 짜지 못한 채 기병의 난입을 허용한 것이었다. 결과는 자명하겠지. “으하아아악!” “후, 후퇴하라! 후퇴하라!” 한 순간에 결착이 지어졌다. 대충 이백 명쯤 되어보이는 적군은 손도 쓰지 못하고 패퇴했다. 우리가 강을 건널 무렵부터 진즉에 도망쳐버린 몇 명을 제외하고――실로 세상 살아가는 법을 통달한 현자들이다――모조리 사냥당했다. 방진을 이룬 적군은 느긋하게 화살을 쏘고 창을 던져서 처리했다. 동료가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고 단단히 겁에 질렸으리라. 대여섯 명이 화살에 맞아서 부상을 입자 저들은 냉큼 항복해버렸다. 오십 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다. 그들은 험악하게 생긴 난쟁이, 그리고 종족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껌 좀 씹을 것처럼 생긴 엘프에게 둘러싸였다.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포로들을 향해서 라우라가 질문했다. “그대들의 사령관은 누구인가.” 라우라와 시선이 마주친 병사가 우물쭈물거렸다. 아군의 정보를 누설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자 라우라가 단박에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포로의 목 정중앙을 꿰뚫었다. “커, 커헉…….” 가래침이 들끓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포로는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숨결이라고 하기에는 적이 비참한 비명을 흘리고 풀밭에 힘없이 거꾸러졌다. “흠.” 라우라가 롱소드를 가볍게 내리쳐서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다음 포로를 바라보았다. 포로가 히익, 하고 공포에 질렸다. “사령관은 누구인가.” “스포르차 공작 전하입니다!” 포로가 넙죽 엎드렸다.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 대도시 밀라노를 다스리는 영주였다. 국화전쟁에서는 파르네세 가문과 대립하여 현재의 왕실을 지지했다. 밀라노는 사르데냐의 북방 전선을 다스리는 맹주. 이번 전쟁에서 총사령관을 맡기에 더없이 적절했다. “스포르차, 밀라노의 공작인가. 타당한 인선이로군.”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아 백작은 밀라노 공작의 휘하에 있는가?” “죄,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잘…….” 병졸이 사령부의 인선을 정확하게 알기란 어려웠다. 다행히 모든 병졸이 그런 것은 아니라서, 라우라는 파비아 백작이 적군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적군의 본진이 노바라라는 도시에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라우라가 포로를 심문하고 지도를 살펴보는 동안, 아군의 나머지 군사가 느긋하게 강을 도하했다. 큰 전투는 아니었어도 초전에서 기분 좋게 승리했다는 사실에 병사들은 낯빛이 여유로웠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공작?” 내가 라우라에게 물었다. 참고로 나는 라우라와 엇비슷하게 전장에 난입했지만 직접 싸우지 않았다. 그저 등에 걸쳐맨 석궁을 꺼내잡아 화살만 몇 발 날렸다. 나는 평화주의자이니까 말이지. 무서운 싸움은 무서운 아가씨한테 맡겨두자는 것이 내 신조이다. “음. 적군은 전방에 본진을 차리는 대신 도시를 거점으로 만들었다.” 라우라가 지도를 손으로 짚었다. 용병대장들도 주위에 모여서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저들이 도시를 놔두고 진군하지 않은 까닭은 한 가지다. 아직 군세가 충분히 모이지 않은 것이다.” 제국은 처음부터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사르데냐는 외교전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당연히 전쟁에 대처하는 속도에서 사르데냐가 반 발자국 느렸다. 그 반 발자국을 한 발자국으로 늘려버린 요인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우리 제국에서 헬베티카 용병을 독점해버린 것이었다. 사르데냐 입장에서도 헬베티카는 가장 빠르고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용병 시장이었다. 그곳을 우리가 선점했다……. 사르데냐가 제아무리 허겁지겁 군대를 소집해봐도 다소 늦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적보다 일보(一步) 앞서 있다. “지금쯤 사르데냐의 중부에서는 한창 용병을 소집하고 있겠지. 병력이 전부 모이기 전까지는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방어한다. 그것이 적군의 의도이다.” “전하. 허면 도시를 지키는 수비 병력도 대단치 않겠군요.” 한 엘프족 용병대장이 말했다. “적은 우리가 진군해온 것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단숨에 진격하면 쉽게 밀라노를 포위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책이다.”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용병이 없을지언정 시민병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고향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시민병도 필사적으로 농성할 터. 더욱이 밀라노는 대도시다. 간단하게 떨어트릴 수 없다.” 그렇군. 사르데냐가 방어 전략을 취한 것은 시민병의 애향심을 염두에 둔 것인가. 시민병은 용병보다 약하다. 그러나 고향을 지키는 전투에 한정해서는 때때로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 도시가 함락되면 자신의 가정이, 부모가, 자식이 약탈당한다. 침략자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적의 본진인 노바라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보아라.” 라우라가 지도를 가리켰다. “밀라노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전하.” “그렇다. 우리가 밀라노를 공격하면 곧바로 원군을 보내올 수 있는 장소이다. 즉, 적군은 시민병을 밀라노에 배치하고 그외 나머지 소수의 용병은 전부 이곳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확실히…….” 대장들이 진지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라우라가 확신에 차서 단언했다. “제장은 잘 듣도록. 적군의 기본적인 전략은 시민병과 용병의 보조에 있다. 시민병이 밀라노를 방어하며, 용병은 소수의 유격대로서 우리를 방해할 속셈이다. 이러한 작전의 목적은 후방에서 병력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다.” 대장들은 잘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부에는 나 또한 포함되었다. 나는 군략에 있어서 아마추어다. 하지만 라우라가 어떤 점에서 대단한지 정도는 알고 있다. 상대방의 의중을 언제나 읽어버리는 것, 그것이 라우라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파편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정보를 조합해서 적군의 작전 계획을 간파한다. 말로 표현하면 쉬워보이지만, 실제로 라우라가 포로들한테 얻어낸 정보라고는 두 개밖에 없다. 적군의 사령관이 밀라노 공작이라는 것. 그리고 본진이 노바라에 있다는 것. 고작 두 개의 정보를 가지고서 순식간에 전체 전략을 조합해냈다. 나 같은 범재가 흉내를 낼 만한 묘기가 아니었다. 용병대장들도 자신들의 총사령관이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 알아차렸겠지. 아직 반신반의하는 대장이 다수 있었지만. 라우라가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밀라노를 공격하면 적의 의도대로 놀아주게 된다. 밀라노 공략은 불허한다.” “전하. 밀라노 주변을 마음껏 약탈하는 것은 어떻나이까?” 난쟁이족 용병대장이 제안했다. 라우라에게 키스 세례를 받은 대장이었다. “도시 주변이 대대적으로 약탈되면 밀라노 공작도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 “대신에 우리 제국군은 악명을 떨치겠지.” 라우라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귀족들 사이의 명예 다툼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을 다치게 했다고 말이야. 불허한다.” “전쟁에서 약탈은 악덕이 아니옵니다, 전하.” “왜냐하면 전쟁 자체가 악덕이기 떄문이다. 우리 스스로 백성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대장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시선에 의문이 생겨났다. “공성전도 약탈도 아니된다 하시면 어찌해야 좋을지, 소관은 모르겠나이다.” “내 말을 잘못 이해했군. 본인은 밀라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명령했을 따름이다.” 라우라가 지도에서 특정 부분을 손끝으로 짚었다. “밀라노가 아닌 지역. 그중에서도 우리 제국이 정당하게 약탈할 권리를 지닌 곳이라면 상관없다.” 파비아. 라우라가 가리킨 곳에는 그런 글자가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우리는 밀라노를 공격하지 않고, 노바라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두 도시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서 파비아로 향한다. 본관을 노예로 팔아먹은 지역이다. 하물며 파비아 백작은 감히 황제 폐하를 모욕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우리에게 약탈을 당한들 변명할 수 없겠지. 제군. 파비아에 지옥도를 펼쳐주자.”   ============================ 작품 후기 ============================   작품설정란에 사르데냐 북부 지방의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63 제2차 국화전쟁 =========================================================================                        이제 작전을 설명할 단계는 끝났다는 듯, 라우라가 거침없이 명령을 내려나갔다. 그녀는 군사 작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했다. 더 큰 장점은 판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드 블랑 남작! 그대는 본관과 함께 육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파비아로 향한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빠르게 진군할 것이다. 각오하도록.”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엘프족 용병대장이 군례를 취했다. 이제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만큼 어려보였지만 저래 봬도 엘프. 아흔 살이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이름은 줄리아나 드 블랑으로, 헬베티카에 있는 남작가 태생이었다. 라우라가 다음 명령을 내렸다. “뒤낭 대장! 그대에게 보병 전체를 통솔할 권리를 내리겠다. 그대는 일천의 기병과 이만의 보병을 통솔하여 밀라노로 행군하라.” “밀라노 말입니까, 전하?” 한 난쟁이족 용병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 밀라노를 절대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바로 라우라 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라니 어리둥절하겠지. 라우라는 상대방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고, 다시금 똑같은 명령을 뚜렷하게 내렸다. “아아. 단, 무슨 일이 있어도 민가를 약탈하지 마라. 그리고 밀라노를 공격할 필요는 없다. 포위할 필요도 없다. 단지 밀라노 근방까지 진군하여 도시를 지켜보면 충분하다.” “어렵지 않은 명령입니다.” 난쟁이 용병대장도 굳이 상관이 설명하지 않은 것을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알고자 했다. “적군이 교전을 걸어왔을 경우에는 소관이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제군의 판단을 신뢰한다.” 라우라가 즉답했다. “제군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 년이 넘도록 대륙을 전쟁터로 삼아 뒹굴었다. 반면에 사르데냐 촌놈들은 기껏해야 내전밖에 치뤄보지 않았다. 그대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경험과 본능은 월등하게 사르데냐를 앞선다.” “화, 황송합니다.” 아랫사람이 아부를 떨면 허허 웃고 넘어가고 말겠지만, 윗사람이 마치 당연한 진실을 읊는 것처럼 대놓고 칭찬을 쏟아내면 아무래도 계면쩍기 마련이었다. 그 윗사람이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볼까 말까한 절세미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흠, 크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겠지요. 으흠.” 용병대장들이 영 엉뚱한 곳을, 예컨대 땅바닥이나 허공을 쳐다보았다. 딴 게 아니라 자기네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험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반들이 웬 산골짜기 숫처녀마냥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가히 내 안구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도 남았다. 그들을 향해서 라우라가 빙그레 웃었다. 여름비에 갓 피어난 산수화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뭐, 밀라노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을 게다. 그대들은 보급 기지를 만드는 데 착수하라. 본관이 기지에 쌓아둘 식량을 넉넉하게 챙겨올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도록.” 용병대장들이 입을 반쯤 헤벌레 벌리고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라우라의 미소에 피격당한 순간 저들은 심장이 쿵, 하고 심각하게 울렸겠지. 이해한다. 나도 그래서 가끔 라우라가 웃으면 참지 못하고 던전이든 마을 대로든 가리지 않고 덮친다. “음? 본관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가?” 라우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몸짓이 또 살인적으로 사랑스러웠다. 실로 심장에 해로운 여자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평소처럼 아름다우십니다!” 대장들이 다급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이미 얼굴이 붉어진 양반들이 여기 있었다. 하여간, 수컷이란 어찌할 도리가 없이 불쌍한 종족이다. ……아니, 잘 보니까 블랑 대장도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그쪽 취향인 것일까. 라우라는 이성과 동성을 불문하고 피격해버리는 저격수인 것인가……. 괜찮다. 나는 대장들을 이해한다. 나야 라우라와 제법 오랜 시간 살을 나누었으니 일종의 면역력이 생겼다. 저들에게 없는 것은 면역력이다. 익숙해져라. 익숙해지면 편하다. “……궁중백은 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라우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쪽을 쳐다봤다. 이 주군이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시선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단지 전쟁에 피폐해질 백성들을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슬퍼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하아.”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회의의 마지막을 고했다. 제국군은 즉각 21,000명의 본대와 6,000명의 분견대로 나뉘었다. 본래 총사령관이 본대를 맡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라우라는 정반대로 분견대를 지휘했다. 제국군 본대는 그대로 밀라노를 향해서 진군했다. 이들은 밀라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천천히 압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전군, 최대 속력으로 진군한다.” 라우라가 이끄는 6,000명의 기병은 처음부터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밀라노와 노바라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다. 적군은 나중에야 우리 분견대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것도 도중에 적군의 정찰병과 우연히 마주쳤기 때문이다. 정찰병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멀리 도망쳤다. “추격해서 족칠까요, 전하?”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말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릴 기세였다. 누가 용병으로 평생을 구른 아가씨 아니랄까봐, 적군만 보이면 저절로 어조가 거칠게 튀어나가는 듯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버려두어라.” 아군 분견대는 정찰병조차 무시한 채 계속해서 강행군을 유지했다. 분명히 왕국군은 당황했겠지. 대도시 밀라노와 군사기지 노바라가 쌍둥이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두 곳을 전부 무시해버리고 그냥 지나칠 줄은 몰랐으리라. 아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정확히 하루 만에 밀라노-노바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돌파했다. 상식을 뛰어넘은 기동에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혹시라도 적들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해오지 않을까요!” 한창 말을 달리고 있는 와중에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물었다. “아군의 본대가 밀라노를 포위한 것도 아닙니다. 밀라노에서 원병을 보내오고, 노바라에서 호응하여 또 원병을 보내버리면, 우리는 양쪽 방향에서 배후가 잡혀버립니다!” “정반대다, 드 블랑 남작.” 라우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화답했다. “배후가 잡혀버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밀라노이다.” “예?” “어제 회의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사르데냐의 기본적인 작전 목표는 거점을 방어하는 것이다. 저들은 애시당초 우리를 단기결전으로 섬멸시킬 생각이 없으며, 그럴 만한 저력도 없다.” 라우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드 블랑 남작을 바라보았다. 마주 불어닥치는 바람에 라우라의 금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흩날렸다. “작전 목표뿐만이 아니다. 병사 자체도 문제가 된다.” “병사가 문제…….” 드 블랑 남작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병은 확실히 고향 도시를 지키는 데 필사적이다. 허나, 달리 말하면 농성전 말고 시민병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란 드물다. 도시 바깥에서 나와서 우리를 요격한다……말로 표현하면 간단하다만, 민병대 입장에서는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겠지.” 적군은 작전 목표상, 방어 거점인 밀라노에서 벗어나는 것이 곤란하다. 또한 적군은 대다수가 민병대로 편성되어 있는 이상, 도시 바깥으로 진출해서 요격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적군에게 꼼짝없이 가만히 있도록 만드는 소극적 이유. “게다가 아군의 본대가 밀라노로 뻔히 진군하고 있다. 남작. 이런 상황에서 민병대를 거느린 채 도시를 방어해야 하는 밀라노 공작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도시를……지키라고 명령할 것 같습니다, 전하.” 마지막으로 적군이 제자리에 있도록 적극적으로 강요하는 이유. 그것이 라우라가 밀라노로 진군시킨 2,1000명의 본대의 접근이었다. “밀라노 공작은 행여라도 원군을 보내느라 병력이 줄어든 사이에 이쪽의 본대가 공성전을 걸어오지 않을까 염려할 터. 고로.” 고로, 설령 파비아가 약탈당하더라도 수비를 고집한다.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본관이 지어낸 논리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알겠는가, 남작?” “예? 아. 죄, 죄송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드 블랑 남작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라우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중백. 궁중백은 알겠는가, 우리 계획에 나 있는 구멍을.” “파비아 백작을 고려하지 않았군요.” 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라우라는 본래 나를 주군이라 부르지만, 황제의 대리장군으로 임명되어 있는 만큼 남들의 이목이 있는 장소에서는 내가 존대하기로 결정했다. 만일 라우라가 나를 주군이라 부르면서 떠받들면 용병대장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라우라보다 나를 존중하는 용병대장이 틀림없이 나타난다. 사람이란 그렇다. 누가 더 권력자인지 파악하고 나면, 주저없이 권력자에게 따른다……. 군중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원정군은 라우라의 지휘 아래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밀라노를 지키는 민병대, 라고 말했지만 거기에 순전히 밀라노 시민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에서도 병력을 끌어왔겠지요. ……그중에는 파비아의 민병대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 여기서 질문이다.”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가 아니라 전쟁을 조종하는 책략가의 미소였다. “파비아 백작은 누구보다 본관을 두려워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본관을 노예로 팔아재낀 장본인이니. 자칫 보복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겠지.” “과연.” “그런 백작이다.” 라우라가 한 템포를 쉬고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이 자신의 영지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백작에게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제국군은 파비아를 본보기로 삼아 쑥대밭으로 만들 속셈이다, 라고 생각하겠군요.” “백작은 졸지에 영지와 영지민을 싸그리 잃어버리고 패가망신하겠지.” “당연히, 사령관인 밀라노 공작에게 제발 원군을 보내달라 애걸복걸할 테고요.” 라우라와 나. 우리 두 주종은 서로를 마주보며 히죽거렸다. 제3자가 옆에서 지켜보면 아연해질 모습이었다. “…….” 실제로 드 블랑 남작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했다. 이런 대화에 면역력이 없는 것이겠지. 익숙해져라. 익숙해지면 편하다. “밀라노 공작이 그걸 허락하겠는가?” “백작에게 파비아가 소중하듯이 공작에겐 밀라노가 소중합니다. 들어줄 턱이 없습니다.” “허면, 백작은 공작에게 자기 영지밖에 챙기지 않는 비겁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겠군.” “공작은 분노에 차서 자기 영지는 자기가 알아서 챙기라고 백작한테 화낼 것입니다.” 백작은 공작에게 겁쟁이에 비겁자라고 매도하고, 공작은 백작에게 군사 작전을 무시한 채 자기밖에 모르는 소인배라고 비난한다. 최고 지휘부 차원에서 분쟁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결과는 단 한 가지. “파비아 백작은 단독으로 출진한다.” “겁쟁이는 도시에 틀어박혀 있어라. 내가 직접 그 성노예를 단죄한다. 뭐,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는 주민을 피신시키는 게 목적일 테죠.” 우리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아. 즐거웠다.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농락하고, 상대편을 분열시키는 것은 다른 어떤 쾌감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런 것에 즐거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부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라우라도, 나도, 이미 바닥까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군상이었다. 내가 웃음을 참지 않으면서 물었다. “안전한 도시를 박차고 뛰어나온 백작을. 그것도 단독으로 나와버린 백작을 어떻게 요리할 생각입니까, 라우라 장군?” “이를 말인가.” 라우라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물론 성대하게 손님을 맞이해야지.” 육천 명의 기병이 잔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목표는 파비아. 아니. 파비아와 밀라노 사이에 위치한 숲이었다.   00364 제2차 국화전쟁 =========================================================================                        “드 블랑 남작.” “예, 예엣!” 갑자기 라우라한테 이름이 불려서 놀란 것일까. 줄리아나 드 블랑 용병대장이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시선에는 왠지 모르게 라우라를 삼가는 기색이 새로 생겨났다. 존경심같이 건전한 감정이 아니었다. 조금 더 불온했다. 이를 테면 일종의 두려움이라든지. “귀관에게 이백오십 명의 군사를 따로 맡기겠다.” “저기……척후병을 정리하면 되는 것인지요?” “아니. 귀관은 군사를 이끌고 서둘러 파비아 쪽으로 향하라. 파비아 인근에 숲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성대하게 불을 지르도록.”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파비아 인근에 있는 숲이라면 나도 가본 적 있었다. 다름 아니라 노예상인인 잭 올란드가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찍어 자살한 장소였다……. “불, 입니까.” 드 블랑 남작은 잘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파비아 방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파비아 백작은 다급해지겠지.” 라우라가 간단하게 남작의 의문을 해결해주자 남작이 아, 하고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 입장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를 것이다. 첫 번째, 우리가 이미 영지에 난입하여 무질서하게 약탈하고 있다. 두 번째, 한참 격렬하게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백작은 우리의 배후를 기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할 게다. 한층 더 서두르게 된다.” “그렇군요…….” 남작은 살짝 기가 질렸다. 그걸 알았는지 라우라가 엄하게 명령했다. “남작! 귀관이 이번 전투에서 이끄는 병력은 적을지 몰라도 두 어깨에 짊어진 임무는 막중하다. 귀관이 실패하면 본인은 백작을 기습하는 데 실패할 것이요, 우리의 원정 자체가 지난해질 것인즉!” “……알겠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의 무게를 깨닫고 남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라우라 역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를 열한 명 붙여주겠다. 파비아 전역에 반(反)통신마법을 걸도록. 숲에 화재를 일으키는 데도 활용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남작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강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듯이 우리군은 나뉘었다. 남작은 두 개의 기병중대를 이끌고 샛길로 빠져나갔다. 이로써 라우라 휘하에는 마법전력이 전무하게 되었다. 우리군은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늘이 노을에 붉어지고 이윽고 어둑해졌을 무렵. 그제야 라우라는 전군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할 길목이었는데, 대로에서 꽤 떨어진 지점에 숲이 나 있었다. “이곳에서 매복한다.” 그리고 라우라는 전방에 정찰병을 몰래 배치했다. 기병들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벌써 한나절을 내리 달려왔다. 휴식이 절실했다. 병사들은 숲속의 나무에 기대어 쉬거나, 전투를 대비하여 간식을 꺼내 먹었다. 군마들은 여름 햇살을 받아오며 달리느라 뜨거워진 몸뚱어리를 밤공기에 식혔다. 머리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니, 달빛이 나뭇가지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런데 나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엘프야, 엘프야……. ─ 난쟁이도 잔뜩 있어. 무슨 일일까? ─ 무슨 일일까? 무서운 사람들이야. 무서운 일일 거야……. 숲의 정령들이 나뭇가지에 숨어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침입자들 때문에 겁을 집어먹었겠지.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정령들이 불안하게 종알거렸고, 나뭇잎은 서로 스치며 쏴아아 울어댔다. 내가 녀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구나. 잠시 너희의 집을 빌리마.” 조그마한 정령들이 나뭇가지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빼들었다. ─ 말도 안 돼. 위대한 주인께서 오셨어! ─ 위대한 주인님이라기에는 바람이 너무 작은걸……. ─ 바보야, 멍청아, 언제부터 태풍과 바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니? 그러자 어두운 숲속에서 빛무리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수백 개의 빛무리는 모두 정령이었다. 하늘에서 달빛을 나눠받은 것마냥 희미하고 뿌옇게 빛났다. 하얀색보다 하늘색에 가까운 빛이었다. “맙소사…….” “아르테미스이시여.” 병사들이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았다. 아인종인 그들에게 정령은 익숙한 존재였다. 그러나 정령은 기본적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 이토록 많은 정령이 깜깜한 숲속을 환하게 밝히자, 용병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반겨줘서 기쁘긴 한데, 빛은 꺼주지 않겠느냐? 우리는 지금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라서 말이다. 술래한테 들키면 큰일이 난단다. 조용히 해주면 고맙겠구나. 내 던전에서 뛰어놀고 있을 정령들이 생각나서, 목소리가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정령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 술래잡기래! 모두 조용히 해야 돼! 주인님을 방해하면 혼나. ─ 멍청아, 너가 제일 시끄럽잖아. ─ 쉿. ─ 쉬잇. 천천히 빛무리가 어두워졌다. 아예 어두워진 것은 아니고 환하기가 반딧불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음. 괜찮았다. 이 정도라면 적들에게 이목을 끌지 않을 거다. 정령들이 내 주변으로 꼬물꼬물 모여들었다. 녀석들 나름대로 조용히 한다고 조심하는 것일까. 거의 귓속말하듯이 나에게 물었다. ─ 주인님, 주인님. 누구랑 술래잡기하는 건가요? ─ 못 생긴 오크인가요? 발정난 켄타우로스인가요? 무시무시한 바실리스크인가요? ─ 모두 오래 전에 죽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요……. ─ 인간들이 죽였어요. 숲도 많이 불태웠어요……. 정령들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구, 귀여워라. 가장 근처에 있는 아이를 들어올렸다. 정령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봉인해둔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겨드랑이를 문질문질 간지럽힌 것이었다. ─ 꺄앗. 정령이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급하게 자기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당장 웃겨 죽을 것처럼 발버둥치는 와중에도 끝끝내 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기특하기도 해라! 내가 아빠 미소를 짓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들이랑 술래잡기를 하고 있단다.” ─ 꺄핫, 인간이요? ─ 인간은 같이 놀기엔 신용이 없는 거예요. ─ 걔네는 맨날 숲을 불태워요. 주인님, 인간을 믿으면 안 돼요. 신용이라니 어려운 단어를 쓰는군. 내가 작게 웃었다. 마왕으로서의 내 수준이 올라간 뒤로, 예전에는 꺄아- 꺄아- 하는 소리로만 들리던 정령의 목소리를 지금처럼 언어로 이해하게 되었다. “과연. 아주 나쁜 놈들이구나, 인간은.” ─ 맞아요. 인간은 되게 나빠요! ─ 나뭇가지에 내장을 매달아도 시원치 않은 거예요! 정령들이 분분하게 불평을 쏟아냈다. 숲을 태워서 개간해야만 하는 인간종과 숲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요정족은 태생부터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내 부탁 좀 들어주겠느냐. 조금 뒤에 인간들이 저 앞을 지나칠 것이란다. 만약 인간들이 오는 것 같으면 몰래 나한테 알려주려무나. 나쁜 인간들을 내가 혼내줄 테니.” 정령들이 얼마든지 맡겨달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라우라가 전방에 정찰병을 배치하고 돌아왔다. “갑자기 숲이 빛나서 놀라지 않았는가.” 라우라는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주군……아니, 궁중백.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평소대로 주군이라 부르려다 화급히 호칭을 고친 그녀에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정찰병들을 고용한 참이었습니다.” “……?” 라우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숲에 도착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저길 봐라.” 라우라가 저편의 지평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작이 화재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군.” 정말이었다. 그곳만 유독 빛나고 있었다. 라우라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좋은 시점에 불을 질러주었다. 왕국군이 우리의 경로를 알아내고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하는 데 한나절, 원군을 편성한 다음 이곳까지 달려오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최소한 하루가 걸린다.” “시간이 아슬아슬하지 않습니까?” “아슬아슬했다. 그렇기에 소녀는 본대를 밀라노로 진군시켰다…….” 소녀라니. 일군의 총사령관이 자칭하기에 부적절했다. 주의를 줄까 싶었지만 주변 가까이에 병사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관두었다. “이번 작전의 성패는 얼마나 적의 원군을 늦추느냐에 달렸지. 딱히 많은 시간이 지연될 필요는 없었다. 파비아 백작과 밀라노 공작이 격렬하게 다투는 한 시간 내지는 두 시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정령이 수풀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 주인님, 인간들이 잔뜩 오고 있어요! 나는 허리를 굽혀서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령이 꺄아, 하고 방실거렸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의 지연인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고 딱 그쯤에 적의 원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예측한 그대로였다. “라우라.” “주군이 말한 정찰병이 그거였군.” 라우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주군. 멀리서 소녀를 지켜봐달라. 주군이 있으면 소녀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이를 말입니까, 데 파르네세 공작.” 라우라는 중대장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하달했다.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조용히 군마에 올라탔다. 가끔 군마들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수풀이 덮어주었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다가왔다. 나는 정령이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서 적군의 규모와 진용을 파악했다. 저들은 급히 강행을 하고 있는데도 선발대를 따로 꾸려서 앞장세웠다. 파비아 백작이 군재에 얼마나 통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경계심은 갖춘 듯싶었다. “적의 본대는 대략 오천입니다.” “호오, 기병이란 기병은 전부 끌고온 모양이로군.” 라우라가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파비아 백작의 발언권이 의외로 높았는가. 아니면 밀라노 공작이 백성을 내버려두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든 고마울 따름이다.” 보통 적군의 규모가 크다고 하면 겁을 먹거나 적어도 긴장하겠지. 라우라는 정반대였다. 마치 한겨울 산속에서 곰과 마주치고 '이번 겨울은 배부르게 보내겠군' 하고 웃는 전사처럼, 사냥감의 거대한 덩치에 라우라는 도리어 기뻐했다. 라우라가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전군이 한 발자국 나아갔다. 처음에는 마보(馬步)로 시작했다. 가볍게 걷는 느낌으로 군마들이 달렸다. 제1열과 제2열이 숲을 완전히 빠져나갔을 즈음해서, 속도가 트롯으로 올라갔다. 제1열이 돌격 속도를 선보이면 그것을 제2열이, 제3열이, 제4열이 따라하는 방식이었다. 속도를 높이라는 하사관의 고함도, 전투를 앞두고 흥분에 찬 함성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기마 돌격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 앞에서 사르데냐의 기병이 길게 열을 이루어서 행군하고 있었다. 적군은 우리에게 완벽히 무방비하게 측면을 드러냈다. 다만 아무리 조용히 움직여도 말발굽 소리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저들도 우리를 알아챘다. “기, 기습이다!” “말머리를 돌려라!” 적군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습이다, 매복이다, 하고 고레고리 소리를 질러댔다. 적군은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 최고 속력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형을 바꾸기란 극히 어려웠다. 이미 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시점에서, 아군의 기병들은 최고 속력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소리를 죽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목걸이에 걸린 성량 마법을 발동해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헬베티카의 전사들이여! 돌격하라!” 그것이 기점이었다. 지금껏 숨마저 죽인 채 접근해가던 용병들이 전투함성을 토해냈다. “사르데냐 촌놈들을 쳐죽여라!” “거창! 거차아아앙!” “싸그리 쓸어버려!” 군마가 날뛰면서 앞으로 돌격했다. 적들도 그 나름대로 정예였는지, 어떻게든 대열을 이루어 아군의 돌격에 똑같이 돌격으로 맞받아쳤다. 문제는 거리였다. 말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서 필요한 거리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이미 사백 미터를 돌파하며 속도를 붙인 아군에 비하여, 적군에게는 고작 백 미터 남짓한 거리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결과는 명료. 이쪽의 제1열과 적군의 제1열이 요란한 쇳소리를 울리며 충돌했다. 아군의 군마에 치여서 말째로 내팽개쳐지는 적병마저 있었다. 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적군의 제1열이 부숴졌다.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왕국군의 제1열은 아무런 시간도 벌지 못했다. 저들은 이제야 제2열을 만들고 있었으며, 명백히 미완성된 대열이 아군의 돌격에 노출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겠지. 삽시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 평원에 나의 확성된 명령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군, 학살하라!” 일방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00365 제2차 국화전쟁 =========================================================================                        아군은 적군의 예기를 인정사정없이 꺾어트렸다. 군마의 말발굽이 밟고 지나간 곳에는 피먼지와 비명만이 남았다. “크아아악!” “무, 물러서지 마라!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완벽하게 기습을 얻어맞았는데도 분발했다. 그러나 지옥도는 이제야 막 펼쳐지고 있었다. 앞선 동료들이 명예롭게 제1열 돌격을 성공시키자, 제2열과 제3열 그리고 제4열의 아군은 거세게 들끓었다. ─ 부우우우우. 곳곳에서 뿔나팔이 울려퍼졌다. 제1열이 지나쳐간 바로 그곳을 다시금 후속 기병들이 들이받았다. 언제부터 적이 도주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제2열 돌격까지는 견뎠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3열이 들이닥칠 쯤에 적군은 서로 뭉쳐서 대항하지조차 못했다. 제4열 돌격에 이르러서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이미 승패는 결정났다. “도망치지 마라, 겁쟁이들아!” 그때 적진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우리의 가족과 이웃은 누가 지킨다는 말이냐! 파비아를 지켜라! 시민을 지켜라! 그리고 그대들의 긍지를, 아군을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 따위가 아님을 증명하라!” 중년 남성일까. 분노에 차서 호통을 쳤다. 오직 지휘관만이 전장에서 확성 마법을 썼다. 마법 아티팩트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지휘관 말고 감히 구입할 엄두가 안 나는 까닭도 있었지만, 너도 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리면 명령 체계가 망가져버렸다. 즉, 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파비아 백작. 혹은 백작의 부관이라는 소리였다. “용감하군요.” “하지만 무모하다.” 내 칭찬에 라우라가 비웃음을 지었다. “야밤에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바르바토스 언니께서 오신다 해도 손쓸 도리가 없겠지. 한낱 필부의 용맹으로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지휘관이 어디 있는지를 빤히 알려주다니.” 라우라가 나에게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명령했다. “제5열, 적도의 지휘관을 향해서 돌격하라!” 이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제5열의 기병대가 말을 몰았다. 경기병을 제외하면 사실상 우리군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력이었다. 라우라는 제1열과 제5열에 정예 연대를 배치해두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파비아 백작도 이쪽의 명령을 들었겠지. “맞서 싸워라! 살아서 비겁해지느니 죽어서 명예로워지라!” 그가 난폭한 맹수처럼 포효했다. “이날 밤을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기억해주시리라! 여신께 피를!” “여신께 피를!” 파비아 백작의 근처에는 적군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파비아나 밀라노의 기사단이겠지. 마흔 명도 안 되어보이는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백장이 구령하고 기사들이 호응하였다. “동포에게 영광을! 우리의 적에게는 죽음을!” “으아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기사들이 일제히 국왕 전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이곳으로 질주해왔다. 실로 장렬한 돌격이었다. 저들은 그러나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쪽은 제5열이 천 명의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장이 빈약한 경기병이 아니었다. 수십 년이 넘게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최정예 중기병이었다. 천 명의 중기병과 서른 명의 기사가 충돌했다. “국왕 전하 만세!” “사르데냐의 평야를 위하여!” 과연 기사단은 막강했다. 아군에 비해 돌격 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백 명을, 이백 명을 도륙했다. 일당백이라는 관용어는 기사에게 허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저들이 백 명을 죽일 때 우리는 열 명을 죽였고, 저들이 이백 명을 죽일 때 우리는 또 다시 열 명을 죽였다. 어느새 백작 주변에는 열댓 명 남짓하는 기사밖에 남지 않았다. 기사단의 군기(軍旗)마저 땅바닥에 떨어졌다. “훌륭하군요. 멋집니다……!” 나는 깊은 만족감을 표현했다. 나에겐 후천적인 질병이 하나 있다. 바로 기사-혐오증이다. 생드니 평원에서 앙리에타에게 발려버린 이후, 나는 기사들이 처절하게 죽어나갈 때마다 엄청난 오르가즘을 느낀다. 거짓말이 아니다. 솔직히 섹스해서 사정하는 쾌감보다 훨씬 더 좋다. 기사 따위 세상에서 모조리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아니, 진심으로. “흐하하. 거금을 들여 고용한 보람이 있습니다. 더 죽이십시오! 저 쓸데없이 비싸보이는 투구를 깨부수십시오. 장갑은 뭉개트려서 개밥으로 사용합시다.” “……저 돌격을 보고 느껴지는 감상이 고작 그것인가?” 라우라가 질겁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쳐다보는 눈초리였다. “오오, 물론 고귀하고 용감한 돌격이었습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기에 더욱 더 더럽혀야 마땅합니다! 새하얀 종이를 보면 응당 새까만 물감으로 칠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헬베티카의 전사들이여, 쳐죽여라! 기사 따위 겉만 번지르르한 병종임을 증명하라!” “어째서 소녀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라우라가 팍팍 한숨을 쉬었다. 최고지휘관인 우리 두 명이 꽁트를 펼치는 사이, 기사단은 전멸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기사들은 투창 세례에 군마가 쓰러졌다. 그래도 반항하는 기사들에겐 선물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전하, 적도의 지휘관을 생포했나이다! 대승입니다!” 중대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우리가 숫적으로 유리했다고 하나 오천 명의 기병을, 그것도 기사단이 포함된 적군을 박살냈다. 반면에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말 그대로 대승, 완승이겠지. “승리를 경하드립니다, 공작 전하!” “전하의 지략과 용맹은 아테나 여신께 비견되옵니다!” 라우라가 위엄 있게 턱끝을 까닥였다. “실로 분투했다. 적장을 사로잡은 병사는 누구인가.” “제 중대에 소속한 기젤라 중사입니다.” “기젤라 중사는 앞으로 나오도록.” 한 난쟁이가 걸어나왔다. 풍체가 당당했지만 총사령관의 면전이라 그런지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그게 아니라면, 주변을 둘러싼 중대장들한테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르지. “기젤라 중사!” “예, 전하!” “그대는 헬베티카 전사의 용맹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이 대지에 흐르는 강줄기의 이름을 본따, 오늘밤은 티키누스 전투라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티키누스 전투의 주인공은 기젤라 중사, 그대이다! 그대의 이름은 영원토록 역사에 전해질 것이다!” 난쟁이 중사는 감읍한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본관은 그대에게 자그마한 은상으로써 오천 리브라를 하사한다.” “화, 화, 황공하옵니다!” 중사가 눈알이 빠질 기세로 말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무작정 황공하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았다. 주변에서도 헉소리가 튀어나왔다. 오천 골드라니! 평범한 용병이라면 십 년 내내 뒹굴어야 얻는 금액이다. 그런데 용병은 봉급에서 절반을 식비로 쓰고, 다시 절반의 절반을 무기와 장갑 가꾸는 데 써먹는다. 삼십 년 동안 진짜 아무런 사치도 부리지 않고 목숨을 내걸어야만 5천 골드를 벌까 말까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를 용병이 저금은 무슨 놈의 저금인가! 질 좋은 맥주에 그럴저럭 예쁜 창녀를 안는 데 봉급을 죄다 쏟아붓기 일쑤이다. 5천 골드는 평생 절대로 만져볼 일이 없다. 미친 듯이 배포가 큰 공작 전하에게 중사 본인은 물론이고 중대장들도 할 말을 잃었다. “기젤라 중사가 소속한 중대의 책임자는 그대인가.” “예, 예. 전하. 소인은 파르민 대위라고 하옵니다.” 역시 난쟁이인 중대장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아까 전에 중사를 소개한 자였다. “음. 파르민 대위에게도 금화 오천을 하사한다.” “…….” 대위가 딸꾹질을 했다. 중대장들이 소리없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라우라가 크게 소리쳤다. “들으라! 여기 파르민 대위는 부하의 공로를 가로채서 보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파르민 대위는 무엇이 전사의 명예인지, 무엇이 상관의 덕목인지 몸소 실현했도다. 훌륭하다!” 돌처럼 굳어버린 파르민 대위의 어깨를 라우라가 토닥거렸다. “세간에서는 그대들이 돈을 쫓는 망령이라고 매도한다. 금화를 받고 타인을 죽이는 악귀이자 살인마라고…….” “…….” “실로 우리는 사람을 죽인다. 아아, 기꺼이 죽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긍지가 있다. 부하의 공로를 빼앗지 않는다.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전투를 앞두고 도망치지 않는다……그것이 우리의 긍지이다. 그렇기에 그대들은 헬베티카인이다!” 병사들이 팔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헬베티카는 이종족이 세운 국가. 언제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용병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살아왔다지만, 어찌 살면서 받은 경멸을 잊었겠는가. 라우라는 그걸 정면에서 깨부수고 있었다. “고로, 오늘밤의 승리는 본관의 승리가 아니다! 제국의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바로 그대들, 헬베티카의 승리이다! 오늘밤,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노라! 대륙은 헬베티카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대륙은 헬베티카를 영원히 두려워할 것이라고!” 함성이 울려퍼졌다. “공작 전하 만세!” “헬베티카 만세!” 하고 병사들이 끊임없이 환호했다. 다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깔끔했다. 헬베티카인이 가진 피해의식. 거기에 용병이라는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교묘하게 찔렀다. 어느 순간부터 라우라는 '우리'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을 용병의 무리에 끼워넣은 것이었다. 사람의 심리는 대부분이 피해의식, 자부심, 공동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라우라는 바로 핵심적인 심리만 건드린 것이다. 연설은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고 부추기는 기술. 그런 점에서 라우라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았다. 누구에게 본받았는지 몰라도 깔끔한 솜씨였다. 틀림없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난 스승님을 두었겠지……. 병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라우라가 척척 걸어갔다. 그 앞에는 밧줄에 파비아 백작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팔뚝과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격렬하게 반항한 흔적이었다. “창녀 주제에 감히 시답잖은 속임수를……!” 파비아 백작이 피 끓는 얼굴로 분노했다. 그는 중년의 남자였다. 주름살마다 엄격한 가풍이 녹아들어 있었다. 비록 몸은 포로로 사로잡혔으나 정신만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파비아 백작이 당당하게 일갈했다. “과연 잠자리로 황제를 농락한 창녀로다! 하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마족에게 가랑이를 벌린 화냥년이 무슨 짓을 못할꼬! 더러운 배신자년, 인간의 손을 인간의 피로 더럽힌 네 년에게 천벌이 있으라! 네 년의 애비도 무덤에서――.” 그러나 백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라우라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들더니 단 일격으로 백작의 목을 베었다. 칼날이 정확하게 턱 아래를 스쳤다. 백작은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컥, 컥, 하고 동물처럼 피 끓는 소리를 내뱉었다. 라우라가 백작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인간이기에 인간을 증오할 수 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대장이 도끼를 꺼냈다. 그가 백작의 목을 내리쳤다. 두 번, 세 번 내리친 끝에 백작은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었다. 라우라는 백작의 머리카락을 쥐어잡아 높이 치켜들었다. “사르데냐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려라!” 병사들은 그날밤 가장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대륙력 1512년 6월 5일. 제2차 국화전쟁의 첫 전투, 티키누스 전투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이끄는 기병 육천은 사르데냐의 기병 오천을 격파. 지휘관인 파비아 백작의 수급을 취했다. 전쟁은 제국군의 완승으로 막을 올렸다.   00366 제2차 국화전쟁 =========================================================================                        * * * 제국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기습으로 완승을 거두고 라우라는 즉시 파비아로 군세를 몰았다. 파비아는 꽤나 괜찮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문제는 수비에 임하는 병력이 적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서 사백 명은 될까 싶었다. 반면에 아군은 육천 명에 이르렀고, 마법사까지 열한 명을 거느렸다. 단적으로 말하자. 적군에 승산은 전무했다. 게다가 사령관인 라우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성전 분야의 달인이었다. 순전히 요새도시로 지어진 하이델베르크도, 프랑크 최대의 도시 파리시오룸도, 라우라의 발 아래 굴복하였다. 파비아는 간식거리에 불과하겠지. 라우라가 명령했다. “백작의 목을 내걸어서 저들에게 전시하도록.” 용병들이 방금 전투에서 죽인 적군의 수급들을 창에 꽂았다. 새벽이 밝아오자, 성벽에서 농성하던 수비군은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수천 개가 넘는 머리통이 창끝에 꿰뚫려서 대롱거렸다. 개중에는 파비아 백작의 머리도 있었다. 영주가 잔인하게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수비군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라우라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열한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성문으로 마법을 쏘아댔다. 성문은 금세 박살났고, 기병들이 뿔나빨을 울리며 신나게 돌진했다. 사기가 떨어진데다 성문까지 돌파당하자 수비군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채 각자 제 살 길을 찾아 도망쳤다. 덕분에 육천 명의 기병은 마치 초원을 달리듯이 도시를 휘저었다. 그들에게 라우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을 대지 마라.” 달리 말하자면, 모든 남자 주민과 여자 주민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설상가상으로 라우라는 자유로운 약탈까지 허가했다. 병사가 무언가를 약탈해도 지휘부가 결코 제지하지 않겠다며. 파비아에 지옥이 펼쳐졌다. 용병들은 승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듬뿍 향유했다. 그들은 부잣집과 귀족 저택의 정문을 깨부수고 난입했다. 앞을 가로막는 하인이나 남자는 머리통이 도끼에 찍혀 절명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만 주십쇼!”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살해당하고 강간당했다. 재미로 인간을 죽이거나 민가에 불을 지르는 무리도 심심찮게 있었다. 파비아의 시민은 평생 동안, 아니 대를 이어서 쌓은 재산을 깡그리 빼앗겼다. 재산만 빼앗기면 그나마 양반이겠지. “살아남은 주민은 모두 노예로 취급한다.” 라우라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본관을 노예로 취급했던 이들에게 관용은 불필요하다. 사르데냐와 파비아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파비아 시민 일만오천 명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제국군은 파비아에 군사 기지로 삼아 주둔했다. 민가는 강제로 징발당해서 아군의 숙소로 쓰였고, 주민은 노예가 되어 용병의 수발을 들었다. 재물도 식량도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파비아 함락. 소식은 사르데냐 왕국을 강타했다. 파비아 백작이 전사했다는 것, 오천의 기병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증발했다는 것에 왕국군은 충격을 받았다. 기병 전력이 일소되어버린 밀라노 공작은 야전을 포기하고 더욱 더 성안에 틀어박혔다. 라우라가 보고를 받고 중얼거렸다. “흠, 아예 틀어박히면 곤란한데. 밀라노 공작은 확실히 파비아 백작보다 군재에 밝은 듯하군.” “기병이 싹 전멸했는데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겠지요.” “으음…….” 라우라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아서 돌렸다. “주군. 어디 좋은 생각이 없겠는가.”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을 끌어내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작의 전략을 점점 곤란하게 만들 방법은 있지요.” “그게 무엇인가?” 내가 빙그레 웃었다. “밀라노 공작에게 선포하십시오. 파비아의 노예를 돌려받고자 한다면 몸값을 지불하라고.” “……아아, 과연. 몸값을 비싸게 매겨서 공작이 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라우라는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감탄했다. “공작은 시민을 풀어줄 수 있는데도 외면하는 것이다. 비난이 쏟아지겠군.” “아뇨, 정반대입니다. 값을 아주 싸게 매깁니다.” “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내 수제자나 다름없었지만 딱 한 발자국 모자란 면이 있었다. 모략의 수준이 조금 지나치게 빤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두당 삼십 리브라 정도로 가격을 매기십시오. 평민이고 귀족이고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삼십 리브라입니다.” “하아? 무슨 소리인가.” 라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지 않은가. 그래서야 밀라노 공작이 노예를 구입하게…….” “단, 자그마한 조건을 내걸어둡니다. 일괄 구매만 인정하겠다고 말이지요. 약삭빠르게 귀족만 따로 골라서 구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으음……?” “구입하려면 일만오천 명의 시민을 한꺼번에. 그 이외의 방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우라는 여전히 아리까리한 것 같았다. 내가 웃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적으로 귀족까지 단돈 삼십 리브라에 풀어주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쪽은 삼십 리브라에 팔아재끼려고 한다…….” “…….” “밀라노 공작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일괄 구매라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원정군에 당장 거금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라우라가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그렇군! 우리에게 돈이 얼마 없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인가!” “밀라노 공작은 우리의 경제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파비아를 서둘러 약탈한 것도 재정적인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겠지요.” 밀라노 공작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전쟁을 길게 끌면 끌수록 자신한테 유리해진다. 어쩌면 이쪽이 고용비를 체불하여 용병들이 알아서 해산해버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얼마 전에 꼭두각시 전쟁을 치루지 않았던가!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으리라. 지금 제국에는 연달아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여유가 부족하다. 아니, 없다. 그러니까 당장 포로의 몸값을 받아챙기려는 것이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인간에게는 못된 버릇이 있지요. 일단 판단을 내리면 거기에 맞추어서 좋을 대로 상황을 해석해버립니다. 밀라노 공작은 자기 생각이 옳은지 한번 튕겨볼 겁니다. 그때 우리가 가격을 4/5 정도로 낮추어서 다시 제시합니다.” “하하하!” 라우라가 자기 팔뚝을 잡고 웃었다. “역시 주군은 최고다! 대륙에서, 세계에서 가장 흉악하고 썩어빠진 남자다!” 하고 라우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덥썩 안겼다. 그리고 내가 불평을 남길 틈도 없이 키스를 해왔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왜 나와 사귀는 여자들은 전부 내가 흉악해서 좋다는 것일까. 설마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그런 식의 얘기인가……. 정말로 모르겠다.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 우리는 곧바로 밀라노 공작에게 술책을 걸었다. “파비아의 노예들을 돌려받고자 한다면 몸값을 지불하라.” 가격은 두당 30골드. 자유민의 몸값이라 하기에도 상당히 헐었고, 귀족의 몸값이라고 하면 거의 공짜였다. 바겐세일이라고 표현해도 좋았다. 단, 반드시 한꺼번에 사들여야만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노예로 붙잡힌 시민이 일만오천에 이르므로 45만 골드를 지불해야 한다. 상당한 거금이지만, 일만오천 명의 인력에 빚을 메달아두는 셈이니 사실상 거저나 다름없었다. 밀라노 공작이 사신을 보내와서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교섭인을 파견하여 '그럼 가격을 할인해서 35만 리브라는 어때? 이거 거진 떨이야, 떨이!' 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밀라노 공작은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거절해왔다. 제국군에 돈이 부족함을 확신했겠지. 단순히 거절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탈 행위를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자유민을 노예로 취급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 어쩌고 저쩌고……. 정확히 기억해줄 의리는 없었다. 아무 윤리학 책이나 펼쳐도 쓰여 있을 법한 문구였다. 우리 두 사람은 '점잖은 쌍욕'으로 도배된 서신을 나란히 읽었다. 그리고 키득거렸다. “주군. 이제 되었는가?” “예. 이제 충분합니다.” 제국군은 파비아에 삼천 명의 수비병만 남겨두고 북상했다. 도중, 밀라노에 진군시킨 이만 명을 불러들여서 합류. 총합 이만오천 명 가량의 병력으로 군사기지 노바라를 공격했다. 노바라는 잘 정비된 군사거점으로 함락시키기 만만치 않았다. 사르데냐 왕국에서 헐레벌떡 고용한 용병 오천 명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을 따름이지, 병력상 5배가 뛰어넘는 아군에 맞서서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었다. 우리군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노바라 - 아군 - 밀라노, 이렇게 되어서 적군의 거점 사이에 끼어든 모양새였다. 만약 이때 밀라노에서 과감하게 출진하여 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노바라를 함락시키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겠지. 그리고 사르데냐 왕국의 남부에서 모집된 군대가 치고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밀라노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라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마법통신을 쉴 새 없이 보내도, 성벽 한쪽이 무너져내려 처절한 농성을 이어가도, 공작은 마치 용병들을 내다버린 것처럼 밀라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라의 용병은 절망했겠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군의 후방을 견제해달라. 단지 그뿐이었다. 이 간단한 요청조차 밀라노 공작은 무시했다. 덕택에 우리는 후방을 염려하지 않고 노바라를 공격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밀라노 공작은 우리가 유인책을 거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바라를 멀리서 지켜보며 말했다. 적군의 용병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미 성벽이 두 군데 무너졌는데, 어떻게든 병력을 집중하여 난입을 막아냈다. “재정이 부족하니까 자기를 도시에서 끌어내어 단기결전을 펼치려는 거다. 뭐,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오판이지.”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밀라노 공작은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본인은 그리 생각할 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천 명의 기병과 오천 명의 용병을 전부 잃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제 밀라노에 남은 것은 시민병뿐.” 그렇다. 우리는 사르데냐 왕국군의 대전략을 역으로 이용했다. 대도시를 지키고 싶다면 얼마든지 지키게 내버려둔다. 단, 적군이 보유한 정예병은 모조리 녹여버린다. 파비아를 약탈함으로써 재화와 식량도 충분히 비축한다. 밀라노 공작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기병, 정예병, 군사기지, 거기에 평판과 명성까지……. 시민을 풀어줄 수 있었음에도 방치해버렸으며, 더 나아가 군사기지가 함락되는 걸 코앞에서 수수방관했다. 밀라노 공작에 대해서, 그리고 사르데냐의 전략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지겠지. 군사거점 노바라는 아흐레 만에 아군의 손안에 떨어졌다. 성문이 돌파될 때까지 적군의 용병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원군이 올 가능성 자체가 없어졌음이 분명해지자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라우라는 관대하게 항복을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들의 분투를 칭찬하며 재고용했다. 재고용에 응하지 않은 연대장을 처형시킨 다음, 우리군은 새롭게 이천 명의 병력을 얻었다. 어찌되었든 사르데냐 왕국군은 용병들의 신뢰를 무참히 배반했다. 이 시점에서 왕국은 이미 정예병 10,000명을 잃었다. 그러고는 이른바 전략적 승리를 거뒀노라고 위안하고 있겠지. 좋다. 얼마든지 위안해라. 어차피 그게 승리가 아님을 깨닫기까지, 딱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00367 제2차 국화전쟁 =========================================================================                        * * * “도대체 왜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공작!” 청년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적도가 파비아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보름 내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집 안방을 돌아다니듯이 사르데냐를 농락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청년은 검은 곱슬머리가 단정하고 짧게 깎여져 있었다. 하얀 이마가 아름다웠다. 다만 청년의 아름다움은 곱상한 이마에 있지 않았다. 이마에, 미간에, 심지어 눈썹 끄트머리에서, 생기가 난폭하게 꿈틀거렸다. 그런데 눈동자가――깊은 눈동자가 모든 혈기를 간신히 억눌렀다. 바로 거기에 이 청년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었다. 당장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생기가 가득 넘쳤으나 청년은 놀라운 자제력으로 그걸 다잡았다. 청년은 난폭한 말을 다스리는 기수와 같았다. 말이 사납고 거칠수록 그걸 제어해내는 기수가 훌륭해지듯이, 꼭 그처럼 청년은 타고난 혈기를 억누름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대공. 제국군에는 물자가 부족하외다.” “시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시민들이! 공작은 지금 귀족으로서 의무를 방기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갓 스물여섯 살이 된 청년. 그 이름은 코시모 데 메디치, 사르데냐 왕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지체가 높은 메디치 가문의 주인이자, 대도시 피렌체를 다스리는 대공(大公)이었다. “제국군은 강력하고 이쪽의 수비병력은 나약하오. 이 노인이 무얼 할 수 있겠소?”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이 국왕 전하께서 공작에게 내린 임무입니다!” “전하께서는 나에게 밀라노를 사수하라 명하셨소.” 밀라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법수정구에 희뿌옇게 투영되었다. 육십 세가 넘은 밀라노 공작과 스물여섯 살의 피렌체 대공, 두 대귀족은 현재 작전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파비아의 비극은 안타까우나 소탐대실을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오.” “소탐? 지금 소탐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피렌체 대공이 입술을 실룩였다. “제가 무엇이 소탐인지 감히 말씀드리지요.” “이 노구가 경청하겠소.” “형제 도시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병력이 아까워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것.” 대공의 검은색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포로를 풀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낱 돈이 아까워 재산을 풀지 않는 것, 군사기지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전이 헝클어질까 두려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 이것들이 소탐입니다!” 피렌체 대공은 탁자를 쿵, 하고 쳤다. “수치심을 기억하십시오, 공작! 지금 왕도(王都)에서 공작을 뭐라고 욕하는 줄 아십니까. 파르네세의 창녀보다 밀라노의 공작이 안방주인에 어울린다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 밀라노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노구의 말을 주의하여 들어보시구려. 제국군에는 물자가 부족하오. 용병들에게 내어줄 급료도 부족한 상황이오.” “……계속해서 말씀하시지요.” 청년이 화를 짓누르며 일단 경청했다. 그는 눈앞의 노인보다 귀족 서열이 높았다. 허나 밀라노의 주인이나 피렌체의 주인이나 위세로 따지자면 비등비등했다. 명목상은 우위이나 실제로는 동격. 그런 상대방을 대할 때 거들먹거릴 만큼 청년은 멍청하지 않았다. 사르데냐 왕국은 겨우 몇 년 전에 내전을 겪었다. 귀족가의 절반 가량이 내전에서 쓰러졌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은 한결같이 유능했다.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은 비록 노인과 청년으로서 한참 나이가 차이났지만, 지난 내전에서 파르네세 공작가를 궤멸시키는 데 혁혁한 군공을 세웠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났다. ――뛰어나기에,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경계했다. “우리가 이대로 방비를 단단히 하여 농성한다면 제국군은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오.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만큼 상대하기 쉬운 적도 없소외다.” “…….” “저들은 곧 반란을 일으키거나 떠나버릴 것이오. 밀이 자라는 데 더러운 비료가 필요하듯, 영광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항상 얼마간의 모욕이 필요하오. 우리는 버텨야 하오!” 피렌체 대공이 손가락으로 탁자 끝을 툭툭 건드렸다. “무슨 근거로 적도에게 물자가 부족함을 자신합니까?” “제국군이 협상을 서두르고 있소.” 밀라노 공작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헐값에라도 파비아의 시민을 넘기려고 아둥바둥거린다오. 저들에게 당장 급전이 필요하다는 뜻이외다.”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공작.” 피렌체 대공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포로들이 먹어 헤치우는 식량이 아까워서 공작한테 떠넘기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만 명의 포로를 받아들이면 밀라노는 틀림없이 식량난에 시달립니다.” “내 도시의 식량고는 앞으로 삼 년을 버틸 수 있소.” “……적군이 그 사실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들이 무얼 노리는지 우리로서는 섣불리 단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피렌체 대공은 차분히 반박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시민 전체를 삼 년이나 먹이고 재울 군량이 있다니. 밀라노 공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쟁을 대비해온 것이 분명했다. 성벽도 아주 튼튼하게 보수되어 있겠지. ‘쯧,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이유가 있었나.’ 적군이 아무리 강력해도 자기 도시 하나만큼은 지킬 자신이 있다. 반면에 야전에서 승리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형제 도시가 약탈되든 파괴되든 나 몰라라 하염없이 틀어박힌 것이다……. ‘가증스럽군.’ 젊은 대공은 심장이 역정으로 물들었다. ‘시민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찌 귀족이라 불리는가. 무능한 악보다 역겨운 것이 유능한 악이다. 야망이 있다면 시민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야망을 동시에 성취해라! 그것이 대귀족의 기본 자세이지 않은가!’ 피렌체 대공은 점점 마음이 굳었다. 공작의 전략은 이해했다. 그러나 근거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허술한 지레짐작에 기대어서 군대를 운용할 수는 없었다. 사르데냐 왕국에 침범한 저 창녀의 군대를 하루 빨리 내쫓아야만 했다. 대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의 전략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데 메디치 대공!” “이곳은 사르데냐이고, 우리는 사르데냐인이며, 저들은 침략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민의 재산이 빼앗기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는 게 아닙니다. 공작. 나에게 보조를 맞추어 적군을 요격하십시오.” 밀라노 공작의 얼굴이 주름살로 깊게 일그러졌다. “제국군과 야전에서 맞붙는 건 하책이오! 브르타뉴의 기사단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벌써 잊었소외까.” “기사단을 물리친 것은 마왕의 군대이지 창녀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군이 원하는 바요. 자기네를 깔보고 야전에서 맞붙는 것 말이오!” 대공이 노공작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해볼까요. 적군이 밀라노를 포위해서 공격하든지 말든지 내 휘하의 군대는 일절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공작이 혼자서 제국군을 상대해보십시오!” “무슨…….” 노귀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피렌체 대공은 더욱 분노에 차올라 일갈했다. “자신이 당하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타인에게는 부당한 짓을 강요합니까!” “…….” “파비아 백작은 우리들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파르네세 가문에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둘째 공녀를 노예로 전락시키자고 제안한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우리입니다. 바로 우리가 동의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파비아 백작이 대행해주었거늘!” 대공이 탁자에 놓인 유리잔을 손등으로 걷어쳤다. 유리잔은 바닥에 부닥쳐서 요란하게 깨졌다. “일찍이 은혜를 베푼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백작의 신민이 잔혹하게 학살을 당하는데 이 와중에도 겁쟁이처럼 안방에 박혀 있다니!” “대공! 말씀이 심하오!” “명예를 아십시오!” 두 귀족이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국왕 전하의 대리장군으로서 명합니다. 내 휘하에 합류하시오!” “대공에게는 나의 시민병을 마음대로 지휘할 권리가 없소! 사르데냐 북방군 총사령관은 바로 나,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이외다!” 둘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대가 아니라 설령 국왕 전하께서 오신다 하여도 내 시민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이오!” “어리석고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는 노인이여……! 파비아가 그대를 영원히 저주하리라!” 대공은 그 자리에서 마법수정구를 잡아다가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수정구가 산산조각났다. 값비싼 아티팩트였지만 대공은 당장이라도 뻔뻔한 노인네의 얼굴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후회 따위는 없었다. 피렌체 대공은 군화로 수정구 조각을 짓밟았다. “창녀라고 욕하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닌가!” 시민을 지킨다. 형제를 돕는다. 침략자를 물리친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한 의무였다. 문제가 있다면 이 의무가 적이 '무겁다'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 하루하루가 노동으로 고되고 힘겨운 인간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귀족이 있었다. 대저 귀족이란, 당연히 짊어져야만 하는 짐을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메는 자.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면 귀족이 뭐가 고귀하여 세금을 거두는가. 그런 귀족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귀족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피렌체 대공은 만전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밀라노 공작이 전해준 정보를 마냥 무시하지 않았다. 밀라노 공작의 추측이 맞다면 분하지만 공작이 말한 대로 농성전을 펼쳐야 옳았다. 그러므로 피렌체 대공은 한 가지 계책을 고안했다. 대공은 제국군에 사신을 보냈다. 자신이 공작을 대신해서 파비아의 포로들을 사들이겠노라고 제안한 것이었다. ‘만일 제국군이 급전이 필요하다면 내 제의에 응할 것이요.’ 대공이 판단했다. ‘급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밀라노에 식량난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면, 내 제의를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제국군은 대공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신이 실패하고 돌아왔다. 대공은 사신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하게 상을 내렸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물자 부족 따위를 겪고 있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기결전이 아니라 장기전. 밀라노에 농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제장을 소집하라!” 피렌체 대공이 휘하의 연대장을 소집했다. 젊고 아름다운 대공의 카리스마에 이미 연대장들은 매혹되어 있었다. 프랑크인, 합스부르크인, 사르데냐인, 폴리투니아인 등등, 용병대장들은 저마다 출신이 천차만별이었다. 피렌체 대공은 일곱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그들을 사로잡았다. “진군의 나팔을 울리도록. 이제부터 우리는 황제의 군대를 처단한다!” 피렌체 대공 코시모 데 메디치 휘하, 사르데냐 왕국군 35,000명. 북상(北上). * * * “걸렸습니다.” 사신을 떠나보내고 내가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도 나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밀라노 공작을 대신해서 피렌체 대공이 몸값을 지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파비아가 함락되도록 내버려둔 사람은 대공이 아니라 공작. 그런데도 대공이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은…….” “왜 우리가 헐값에 포로를 넘기려 하는가. 그 이유를 판단하기 위함이지요.” 우리가 작게 키득거렸다. “적군의 지휘부는 보기 좋게 분열된 모양이다, 주군. 이 기회를 놓친다면 말도 안 되는 멍청이다.” “실로 옳습니다. 한번 장대하게 연기해보지요…….” 유능한 지휘관의 적은 무능한 아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능함이다. 나는 그걸 앙리에타 여왕한테서 배웠다. 어디 이 좋은 교훈을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전파해볼까.   00368 제2차 국화전쟁 =========================================================================                        “밀라노 공작에게는 승리하되 피렌체 대공에겐 패배한다.” 그것이 라우라가 내세운 전략이었다. 우리는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한테 정반대로 대처했다. 두 대귀족은 내분을 겪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적군을 놔두고 완전히 분열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지. 처음부터 적군의 무능함을 기대해서야 못 쓴다. 두 사람이 더 깊이 분열하도록 신중하게 계략을 짜내야 한다. 먼저 밀라노 공작. 이 노귀족은 찔끔찔끔 성밖으로 분견대를 보내오고 있었다. 피렌체 대공이 북상하는 것에 발맞춰서 이쪽을 견제하려는 의도겠지. 우리는 이 분견대를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었다. 백이십오 명, 삼백 명 단위로 분견대가 뛰쳐나올 때마다 사정없이 짓밟았다. 우리는 적군의 분견대를 쥐 잡듯이 후려쳤다. 이런 불상사가 다섯 번쯤 계속되자 밀라노 공작은 단단히 질려버렸다. 아예 성문을 걸어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그나마 살아돌아간 기병들이 죄 죽겠다 싶었을 거다. 안 되었군, 공작. 초반에 기병대를 잃어버린 게 뼈아팠다. 당신은 파비아 백작한테 원군으로 기병을 붙여주면 안 되었다. 시민병을 오천 명쯤 쥐어주는 편이 나았을 테지. 물론 시민병은 전멸했을 것이다. 괜찮다. 애시당초 버리는 패로 사용하면 그만이다. 민병 오천 명이 궤멸해도 상관없다. 대신에 정예병이 버젓하게 남아 있다. 도시를 지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상황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진다. 기사단이 섞인 오천 명의 기병을 분견대로 삼는다면, 지금처럼 우리한테 벌레처럼 짓밟힐 일이 없겠지.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하면서 얼마든지 우리를 괴롭힐 수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밀라노 공작은 이웃 도시를 구원하려고 시민병까지 내어준 셈이 된다. 공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비교적 적어질 수박에 없다. 오히려, 섣불리 출진하는 바람에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파비아 백작한테 비난의 화살이 향할 터.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유리해진다. 꽤나 상황이 편해진다……. 결과적으로 우리 제국군은 난감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민병 대신 정예기병을 보내주고 말았다. 실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설마 오천 명이나 되는 기병대가 단 한번의 기습으로 패퇴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겠지. 달리 말해, 라우라가 얼마나 뛰어난 장군인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브르타뉴를 꺾은 것은 요행이라고 생각했는가. 어차피 단순한 스물한 살의 계집애. 그렇게 깔보았는가……. 어리석군. 십 대의 나이에 놀라운 군공을 세운 인간도 역사상 드물지만 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틀림없이 역사에 예외라는 이름의 경고 비석을 세울 인물이다. 앞으로 대륙은 그걸 알아채는 자와 알아채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 밀라노 공작, 너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한다.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라는 이름은 경고의 본보기로써 후세에 전해지겠지. 이제 공작에게는 이쪽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 기동력에서 싸움조차 안 된다. 노바라-밀라노-파비아 일대를 제어하는 것은 왕국군이 아니다. 우리 제국군이다. 이 시대, 기동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정보전에서 유리해진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거미줄을 펼치듯이 사방에 정찰부대를 퍼트렸다. 정찰병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정보를 수집했다. 덕분에 피렌체 대공의 군대가 언제,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피렌체 대공은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 단순히 속도가 빠른 것에 불과하지 않았는데, 대공은 항구를 보급기지로 확보해두고 그 다음에야 움직였다. 민병을 징집하며 해군으로 활용. 보급선단을 이끌게 만들었다. 전투 부문은 용병에게 맡기고 보급 부문은 바닷물에 익숙한 민병에게 전담시켰다. 조속하고 깔끔한 솜씨에 라우라가 감탄했다. “신속하지만 서두르지 아니하며, 운용 역시 이치에 맞다. 피렌체 대공은 메디치 가문에서 방계에 속한다고 들었거늘.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가주(家主)에 오른 이유가 있었군…….” 군더더기가 없다. 피렌체 대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러했다. 더군다나 대공은 보급과 진군에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쪽이 정찰병을 퍼트렸듯이 대공도 전초부대를 화끈하게 보내왔다. 곧, 이쪽과 저쪽의 정찰병력끼리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성가시게 되었다. 이런 성격은 우직하면서도 신중하다. 스물여섯 살의 대공이라길래 조금 더 조급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이 나와버렸다.” “이런. 사르데냐에는 유능한 귀족이 많군요.” 내가 라우라에게 눈짓했다. 라우라도 사르데냐 출신이니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내 말뜻을 알아듣고 라우라가 쓰게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삼십 년 가깝게 내전을 치뤘으니 말이다. 유능한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과연. 대륙에 흑사병이 휘몰아쳤을 때도 유독 사르데냐 지방은 피해가 적었다. 심지어 사르데냐에서 흑사병이 처음으로 발생했는데도 말이다. 지배계층의 유능함이란 그런 지점에서 증명되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파르네세 가문은 저들보다 무능했다는 소리다. 딸아이의 재능도 알아보지 못하고, 내전에서 패배하여 몰락할 대로 몰락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라우라는 무표정하게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척 발랄하게 말했다. “어쩔까요? 이건 신경전입니다. 쓸데없이 기병전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로서는 지금이라도 정찰부대들을 불러모으는 걸 추천합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다, 주군은.” 라우라가 어느덧 무표정을 잊고 키득 웃었다. 나는 그것이 기뻐서 일부러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물론 연극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극임을 상대방도 아는 상태에서 진행된다면 그건 단지 연극이 아니다. “전 상당히 상식적인 권고를 건넸다고 생각합니다만.” “후후, 삐지지 마라. 주군이 어쩌면 귀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착각해버리지 않는가.” “전 귀여운 사람 맞습니다.” 하고 나는 라우라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귓볼을 깨물었다. 라우라가 꺄아, 하고 어딘지 즐거운 목소리로 질색했다. 사람은 즐겁게 질색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여긴 군중이다! 하여간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기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남자라고 인정해주면 발정기가 끝날 것 같은데요.” “무슨, 흡혈귀가 어이없어 눈깔에 마늘을 바를 헛소리를……꺄아!? 알겠다, 알겠다, 주군! 주군은 천하에서 제일 상큼하고 귀여운 남자다! 그러니까 제발 침은 묻히지 마라!” “덧붙여서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라고도.” “이 주군은 일말의 양심마저 없는 건가……!?”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꺄아꺄아 거리며 놀았다.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작전회의가 재개되었다. 참, 우리는 작전을 회의하고 있었다. 한 시간 중에서 삼십 분은 항상 아까 전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작전회의였다. 나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만하게 말했다. “자아, 라우라. 세상에서 제일 잘난 저한테 설명하는 영광을 라우라한테 드리겠습니다. 어디 그 짧은 지혜로 열심히 설명해보십시오.” “……그냥 이대로 전쟁에서 패배해버릴까 싶은 욕구가 맹렬하게 치솟고 있다마는, 내가 주군보다 어른스러우니 참아주겠다.” “하하. 별 말씀을.” “칭찬이 아니다, 바보 주군!” 라우라는 이마에 힘줄을 띄울 기세였다. “어휴. 아무튼 기병전력을 불러들이면 안 된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병을 아낀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최대한 병력을 아껴서 결전을 벌이려 한다고 해석하겠지. 그럼 피렌체 대공은 무리해서라도 밀라노 공작과 협력하려 들 거다.” 병력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 그런 말인가. 하지만 난감했다. 우리는 실제로 결전을, 거대한 회전을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쪽보다 저쪽이 병력에서 우세하다. 우리에겐 병사 한명한명이 소중하다. 이미 적군의 군세와 지리를 파악해둔 이상, 정찰전에서 쓸데없이 전력을 소모하면 앞으로가 힘들어진다. “착각하면 곤란하다, 주군.”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라우라가 단칼같이 쳐냈다. “설령 아군의 기병을 오백 명, 천 명 잃어버린다 해도 피렌체 대공과 밀라노 공작을 철저히 분리시킬 수만 있다면 거저나 다름없다. 반대로, 두 명이 합류해버리면 오백 명의 기병은 이득도 뭣도 아니다.” “……옳습니다. 오백 명은 문제가 안 되지요.” 나는 수긍했다. “그럼 어찌하는 편이 좋습니까?” “정찰부대를 계속해서 파견한다. 지금보다 더욱 많이.” 라우라가 간단한 해답을 내놓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정찰이 아니다. 피렌체 대공이 진군해오는 것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목적이라고 해야 할까.” “흐음.” 내가 턱을 괴었다. “진군을 방해하려면 적어도 천 명 단위의 기병대가 필요하겠습니다.” “말하지 않았는가. 정말로 진군을 방해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러는 시늉만 하면 충분하다.”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백 명 단위로 정찰부대들을 지속적으로 보낸다.” “그래서야 적군의 전초부대에 쉽게 패배……아아. 그렇군요. 그런 겁니까.” 나는 말하는 와중에 깨달았다. 라우라가 무슨 생각인지 알았다. 하지만, 하고 내가 걱정이 들어 지적했다. “피렌체 대공한테 승리를 안겨줘서 자만시킨다는 대전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고작 정찰부대를 패퇴시키는 걸로 대공이 자만하겠습니까? 라우라도 말했다시피 대공은 신중하고 우직한 자입니다.” “괜찮다.”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나에게 계책이 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녀를 말릴 필요가 없었다. 라우라의 작전안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밀라노 공작이 자기 도시에 더더욱 수세적으로 틀어박히는 가운데, 피렌체 대공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파르마에서 아군의 정찰대가 패주했습니다!” “크레모나를 감시하던 중대가 후퇴!” “전하, 왕국군이 피아센차를 점령했습니다!” 우세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사방에 펼쳐놓았던 정찰대가 속속들이 패퇴했다. 대륙력 1512년 6월 25일. 피렌체 대공은 마침내 코앞까지 당도했다. 어림잡아 삼만 명이 넘었다. 병력을 소집하느라 제법 허송세월한다 싶었더니 대군을 끌고왔다. 삼만 명의 왕국군은 언덕에 진을 차렸는데, 피아센차라고 불리는 언덕으로서, 인간들은 정말 세상 어디에나 이름을 붙이는구나, 하는 감상을 남겨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지명이었다. 내 두개골의 소중한 용량을 소모해서까지 기억해줄 의리는 없겠지. 아무튼 피아센차이다. 여기가 또 위치가 절묘하다. 서쪽으로는 아군의 거점이 된 파비아를 노릴 수가 있고, 북쪽으로는 밀라노와 연계할 수가 있다. 이쪽을 견제하면서도 자기네 아군과 연합한다. 만일 우리가 밀라노를 공격하면 피렌체 대공한테 배후를 드러내게 되고, 만약 우리가 피아센차를 공격하면 밀라노 공작한테 배후를 드러내게 된다. 남정네 두 명이서 여자 한 명을 호시탐탐 노리는 형국이라고 할까. 과연 사르데냐인은 변태였다.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문제는 남정네 중 한 명이 늙어빠진 물렁자지라는 사실이었다. 밀라노 공작, 이 영감탱이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여자가 알아서 기어주리라 착각하고 있었다. 돈 많은 골방노인이 자기 망상에 빠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불쌍한 노릇이다. 시간은 당신의 편이 아니다. 그 진실을 언제 깨닫게 될지 개인적으로 기대된다. 이 시점에서 라우라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파비아를 잿더미로 만들어라!” 여태까지 제법 온전하게 남아 있던 파비아 시내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시민들이 울고불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엎드렸다. 자신들의 부모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군 도시였다. 하지만 라우라는 강철과 같은 의지로 명령을 고집했다. 그러자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시민들 일부가 탈출했다. 철통과 같은 경계 속에서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도망쳤다. 실제로 이백 명의 시민이 죽었다. 그러나, 열 명쯤은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탈주자들은 동쪽에 있는 피아센차 방향으로 도망쳤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서문, 남문, 북문, 모두 사전에 철저히 틀어막았다. 동문에만 일부러 경비병을 적게 배치했다. 탈주를 시도한 포로 중에서 동쪽으로 향한 자들만 성공한 것은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 “기병대를 보내서 추적하지요. 따로 명령할 게 있습니까, 대장군?” 라우라가 웃었다. 딱 세 단어로 이루어진 명령은 실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문이었다. “적당히, 설렁설렁, 대충.”   00369 제2차 국화전쟁 =========================================================================                        명령에 충실하게도 기병대가 적당히, 설렁설렁, 대충 탈주자를 추적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나 설렁설렁이었다. 포로들은 맨발로 뛰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겐 천천히 말발굽을 모는 기병조차 공포 그 자체였다. 기병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포로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전하. 포로들이 피아센차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보고했다.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이다 와서 그런지 얼굴이 헬쓱했다. “정말로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녀석들한테 화살비를 날렸습니다. 운이 안 좋은 녀석이 맞고 쓰러지더군요. 피아센차의 경비병들도 그걸 빤히 봤습니다. 아마 포로들이 간자로 의심받을 가능성은 적을 겁니다.” “수고했다, 남작. 푹 쉬도록.” 감사합니다, 하고 남작이 집무실에서 나갔다. 남작이 나가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다. “라우라. 왜 일부러 포로를 대공한테 넘겨준 겁니까? 포로들은 우리군의 실상을 꿰뚫고 있습니다. 대공에게 공짜로 정보를 건네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피렌체 대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대공을 끌어들여?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지금껏 우리군의 전략을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 * * “……종잡을 수가 없군.” 피렌체 대공이 하얀 미간을 찌푸렸다. 찡그린 얼굴에도 귀티가 흘렀다. 주변에 모여든 연대장들은 그런 사령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적들은 계속해서 정찰부대들을 보내오는 것이지? 고작해야 백 명 단위다. 이래서야 마치 우리에게 간식거리를 끝없이 던져주는 꼴이지 않는가…….” “으음.” 연대장들도 곤란한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현재 왕국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승전에 순수히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적군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었다. 적게는 오십 명, 많아봤자 이백 명. 그것도 싸움이 일어나면 얼마 창칼을 섞다가 냉큼 도주해버렸다. 전투보다 차라리 조우라 표현하는 편이 알맞았다. 이래서는 승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어 방심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술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예. 그렇습니다.” 연대장들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상대에게 자그마한 승리를 계속 던져준다. 결과, 상대는 적이 허약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상대는 방심하기에 이르며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해온다. 너무나 전형적인 술책이었다. 이런 책략이 실제로 먹히려면 '자그마한 승리'의 규모가 어느 정도 거대해야만 했다. 적군의 정찰부대 백 명을 무찔렀다고 해서 방심할 멍청이는 없었다. 적어도 코시모 데 메디치 대공은 그런 멍청이가 아니었다. 연대장 한 명이 말했다. “적은 우리가 밀라노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굳이 합류해야 할 만큼 적은 강하지 않다, 그런 인상을 우리한테 심어주고 싶겠지요.” “제군. 그러면 저들은 우리를 바보로 취급한다는 얘기가 되는군.” “…….” 바로 그 점이 석연치 않았다. 피렌체 대공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휘하는 달랐다. 헬베티카의 기라성과 같은 용병부대가 줄줄이 서 있었다. 어떤 연대는 역사가 이백 년이 넘었다. 전설적인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한테 진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허술한 속임수로 상대를 농락할 수는 없다고.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국군의 총사령관은 훨씬 더 멍청하여, 부하의 진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사라는 것인가…….” “하하.” 연대장들이 작게 웃었다. 만약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멍청이라면 브르타뉴군을 물리치지도 못했겠지. 즉, 적들에게 뭔지 모를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봐야 했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도 한번 농담을 던져본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국군은 우리가 조급해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장단에 놀아줄 필요는 없지. 이곳 피아센차에 목책을 두르고 단단히 방비하라.” “예, 대공 전하!” 이틀이 지났다. 병사들에게 충분히 휴식을 안겨주었다. 피렌체 대공은 슬슬 파비아로 공격해들어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대공의 종사가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왔다. “영원한 영광에 충성을. 보고드립니다.” “음.” 대공이 탁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온 것도 예의에 어긋났다. 하지만 대공은 군중에서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모조리 금지했다. “파비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전하.” “반란?” 대공이 깃펜을 멈추었다. 그는 왕실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지금 막 들은 소식이 매주마다 바쳐야 하는 장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상세히 보고하라.” “포로로 잡힌 파비아의 시민들이 대규모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오 분 전, 시민 일곱 명이 우리 군진에 도착했습니다.” “나머지는 가면서 듣도록 하지. 안내하라.” 피렌체 대공이 벌떡 일어섰다. 그가 직접 망토를 둘러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망토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색이었다. “시민이 확실한가? 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제국군의 경기병이 코앞까지 추격해왔습니다.” “음. 추격 자체가 위장일 가능성은?” “제국군이 화살을 쏘았습니다. 본래 아홉 명의 시민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만, 두 명이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비대가 급히 병사를 내보내서 추격군을 쫓았습니다.” 대공이 음, 하고 턱끝을 끄덕였다. 복도를 걸어다니던 군인과 시종이 대공을 보고 공손하게 길을 비켰다.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붉은색 망토가 펄럭거리며 복도바닥을 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망토 끝자락이 볼품없이 상해 있었다. “데 두라초 경을 불러라. 진실의 마법으로 검증하도록.” “현자는 소식을 듣고 이미 가 있습니다.” “좋다.” 두 사람이 관저의 앞마당에 걸어나왔다. 그곳에는 처참한 몰골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인이 가져온 의자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군인들은 주위에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전원 일어섰다. 그중 군청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영원한 영광에 충성을.” “자네가 새벽부터 수고하는군. 검사를 끝마쳤는가?” “예에, 대공 전하. 파비아의 시민이 확실합니다.” 늙은 마법사가 고개를 가까이 해서 속삭였다. “탈주를 시도한 시민이 대략 삼백 명이라고 하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시민은 겨우 일곱 명이지 않는가.” “……그만큼 추격이 치열했겠지요. 전하.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해주시옵소서. 파비아는 지옥이 되었고, 용병들은 악귀처럼 잔인합니다. 저들은 모두 아내와 딸을 잃었습니다.” 대공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심문은 오늘밤에 하도록 하지. 내 손님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허락해주게나.” “자애로우신 메디치여.” 마법사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소인이 미약하나마 기력을 돋구는 물약을 대접했나이다. 감히 아뢰옵니다. 저들은 적도의 군세와 무장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바, 즉시 정보를 받아내어 대책을 세우는 것이 옳다 여겨집니다.” 그러자 대공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파비아에서 여기까지 도망쳐온 사람들을 당장 심문하라는 말인가.” “저들에게 얻어낸 정보로 적도를 물리칠 수 있다면, 대공 전하.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위로이자 복수가 되겠지요.” “…….” 대공이 천천히 턱끝을 끄덕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듯한 고개짓이었다. 젊은 대공이 지켜보는 앞에서 심문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포로가 아니라 자국의 시민한테 양해를 구하고 이루어지는 심문이었다. 종사가 정중히 질문하면 시민들이 울면서 대답했다. “저희 집에는 병사가 세 명 머물렀습니다. 첫날 밤부터 놈들은 제 딸을 욕보였습니다……그걸 막으려고 저와 아들이 덤볐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그놈들은 심지어 옆집에 머무는 병사들과 모여서……이웃집의 딸까지 함께…….” “개자식들!” 어느새 한두 명씩 모여든 지휘관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쏟았다. 제국군이 그저 '재미'로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가 시민들 입밖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대공을 비롯해서 사르데냐의 군인들은 점점 할 말을 잃어갔다. 파비아는 문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살인, 강간, 방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 “어제부터 놈들이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놈들은 미쳤습니다! 민가든 성벽이든 가리지 않고…….” “잠시만.” 피렌체 대공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적도가 성벽을 파괴했다고?” “예, 예.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부셨사옵니다.” “…….” 대공이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 뒤 그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것이었는가.” “전하?” “이들을 정중히 관저의 객실로 안내하라.” 그리고 대공은 모든 연대장을 집합시켰다. 지휘관들이 모두 모이자 대공이 명령했다. “제군. 우리는 즉시 파비아로 진군한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연대장들이 깜짝 놀랐다. “전하, 바로 얼마 전에 방비를 단단히 하도록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게 된 연유를 소인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소서.” “적들이 왜 소규모의 정찰부대를 끊임없이 파견했는지 알아냈다.” 대공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가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은 지금 포위망에서 도망치려는 것이다!” * * * “왜 기껏 힘들게 얻어놓은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가. 대공은 틀림없이 의문에 휩싸일 게다.” 라우라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파비아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농성하면 삼만 대군이든 오만 대군이든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왜 파괴하는가…….”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때, 대공에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르겠지.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정찰부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왜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소부대를 지치지도 않고 보내왔나.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성벽을 파괴하나. 그 해답은…….” * * * “전하. 포위망이라니요?”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했다. 반대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라.” 피렌체 대공이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군은 현재 밀라노의 군대와 합류하지 않고 있다. 밀라노 공작과 과인이 다투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공작과 과인이 불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제국군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 “적군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현재 밀라노와 피아센차, 양방향에서 저들을 압박하고 있다.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서로 협력해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병력도 이쪽이 압도한다. 적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 군을 뒤로 물리려고 하겠군요, 전하!”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확신과 분노로 형형했다. “정반대였다. 제국군은 우리의 합류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저들 입장에서 우리는 이미 연합하고 있다. 즉, 합류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저들에겐 최선이다.” “과연. 그래서 소규모의 병력으로 진군을 방해한 것입니까.” 연대장들이 납득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군을 뒤로 물리자고 결심한 이상, 우리한테 파비아를 온전하게 넘겨주기엔 아깝겠지. 철저하게 파괴하고 방기하여 우리가 써먹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전하. 하오면 지금 적군은…….” “그렇다. 전략적인 후퇴를 준비하고 있다.” 대공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일만오천 명의 포로를 데리고 후퇴하거나, 아니면 포로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후퇴하는 것이다.” “학살이라니…….” “어차피 거추장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저 악귀 같은 놈들이라면 가능하겠지.” 연대장들이 침음을 흘렸다. “전하,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둘러 파비아로 향해야 하옵니다.” “아아. 저들이 포로와 함께 후퇴하고 있다면 뒷덜미를 물어뜯는다. 만약 포로들을 학살하고 있다면……일만오천 명의 인간을 전부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은 걸리겠지. 죽음을 직면한 시민들은 있는 힘껏 반항할 것이다.” 대공이 탁자를 쿵, 하고 내리쳤다. “어느 쪽이든 적군은 군기가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이다! 전군에 명령을 하달하라! 우리는 파비아로 향한다!” * * * “파비아를 버리고 군을 뒤로 물린다. 그것이 대공의 해답이다. 대공의 판단은 세 가지로 나뉘겠지.” 라우라가 흥얼거리 듯이 즐거운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가 포로를 이끌고 퇴각할 경우, 일만오천 명의 포로 때문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공격한다. 우리가 포로를 처단하고 퇴각하려는 경우, 그러기 이전에 공격해 들어간다. 우리가 포로를 내버려두고 퇴각할 경우, 대공은 일만오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해방시켜주는 영웅이 된다. 어느 쪽이든 대공에겐 이득밖에 없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지도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그렇게 추격해오는 대공을 우리는 전력을 다해 요격한다! 두 번의 전투는 없다! 피렌체 대공이 이끄는 왕국군은 내일 안에 소멸된다!” 내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는 파비아를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파비아뿐만이 아니다. 사르데냐 왕국 전체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사르데냐인에게 마왕보다 더 증오스러운 이름이 되겠지. 나는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너는나의것// 옙, 첫코입니다. 한뫼사람// 웰-컴. Omicron// 이분, 덧글 상태가...? 프롤마룬// 엘리자베트의 존재 의의는 멘붕에 있지 않습니다.(...) NineBreaker// 그러면 정말로 죽어버려요! 검의마술사// 작중에 안 나왔을 뿐이지 살도 자주 섞고 있습니다. 군중인데 말이죠! 물고기인간// 단탈리안은 버스를 탄 기분이라서 사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사르데냐를 밟아주라고 명령하니까 저절로 밟아주는 신하가 아래에 있어요! 아침새// 달리 말하자면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했다기보다 카르타고 로마에 패배했다고 말해야 한니발이 그나마 억울해하지 않을 것입니다.ㅠㅠ Selendis// 감사합니다! xgesty1// 헉,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나요? 제 눈에는 여전히 낯이 익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370 제2차 국화전쟁 =========================================================================                        * * * 대륙력 1512년 6월 28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오늘, 곧이어 푸르게 될 하늘은 지상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도록 또 한 번 강요된다. 그것은 여름비로 습해진 땅바닥에 다시 엎어지는 핏물이다. 방패에 박힌 징이 또 다른 방패에 박힌 징을 내리치는 쇳소리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살육이라 부르며, 전쟁이라 부르고, 비극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단어를 써봤자 오늘 지켜보게 될 광경을 담아낼 수는 없다. 이날 삼만 명이 죽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로 살해당할 것이요, 또한 기꺼이 살해할 것이다. 여기에 책임 따위는 없다. 사람은 얼마든지 무책임하게 타인의 목덜미에 칼날을 쑤셔박을 수가 있다. 사가(史家)는 이에 대해 뭐라 논평하겠는가. 화려한 언어와 문체를 총동원하여 무엇을 역사서에 남길 것인가. 기껏해야 사람의 추악한 본능이겠지.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며 음울한 어조로 비극을 노래하고, 결국 몇 사람의 용기, 몇 사람의 지략, 몇 사람의 행운만이 마치 유일하게 특별한 것인양 기록되리라. 거기에는 피가 없다. 청동과 청동이 맹렬하게 부딪치며 내는 징소리도, 살인자가 코앞의 살인자에게 터트리는 노호마저 없다. 그러므로, 기억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나는 영원을 살아가는 마왕으로서 이날 평원에 흩뿌려질 피 한 방울까지 기억한다. 미적지근하게 사람의 본성 따위를 책망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책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영원토록 이곳에 남을 것이다. “대장군.” “아아.” 라우라가 천천히 뒷머리를 한데로 묶었다. 우리군은 현재 피아센차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피아센차를 공략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전력에서 열세인데 공성전을 걸 리 만무했다. 목적지는 우리군과 왕국군 사이에 흐르는 강줄기였다. 파비아에서 피아센차로 향하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저 강줄기를 거치는 남쪽길. 그리고 밀라노 방향으로 우회하는 북쪽길이다. “만일 북로를 택하면 밀라노와 피아센차 사이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된다. 피렌체 대공은 의심하겠지. 우리가 내분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터인데, 어찌하여 자처해서 더욱 더 위태로운 포위망으로 끼어드는가…….” 자칫 이쪽의 의도를 의심해버릴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남쪽길이다. “공작. 저는 드 블랑 남작이 잘 숨어줬는지 걱정입니다.” “남작은 지난 번에 별동대를 맡아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적임자다.” 드 블랑 남작은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였다. 그녀는 막사에서 세 시간만 자고 또 다시 텔레포트 마법서를 사용해서 어디론가 떠났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지난 밤, 라우라는 포로를 설렁설렁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포로를 뒤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드 블랑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는 지금 강줄기 근처의 숲에 매복했다. 한밤에 탈주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기병대가 출동했다. 우리군에 섞여 있을 스파이(당연히 스파이는 어디에나 있다)가 설령 기병대가 나가는 것을 목격했을지라도, 적군에는 ‘포로를 뒤쫓기 위해서 기병대가 출동했다’라고 보고되겠지. 매복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덧붙여서, 간밤의 수색전에는 기병 일천과 보병 일천이백이 동원되었다. 보병 이백은 눈속임용으로 다시 우리 진영으로 복귀했다. 나머지 이천은 지금쯤 드 블랑 남작과 함께 숨을 죽이고 숲에 숨었겠지. 이 세계에 와서 제법 전쟁짓하러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아군의 병력은 무조건 부풀려서 광고하라는 것이다. 아군이 일만 명이면 이만 명으로 속이고, 이만 명이면 오만 명으로 부풀린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그래야 본진에서 별동대가 일이천 빠져나가도 적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군도 적군도 안다. 오만 명이 뻥튀기한 숫자라는 사실을. 요는 이쪽에 정확히 어느 정도 병력이 갖추어져 있는지 감을 못잡게 만들면 그만이다. 아군의 병력을 잔뜩 줄여서 발표하거나 아니면 잔뜩 늘려서 발표해야 하는데……아무래도 과장하는 편이 낫다. 본국이나 동맹국에 원조를 요청할 때도 ‘지금 삼만 명이 굶고 있습니다!’보다 ‘지금 오만 명이 굶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떡고물이 더 떨어진다. 아무튼 적군은 이쪽의 병력을 정확히 몰랐다. 복병 이천의 누락은 허용 범위였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냉정하고 늠름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아이는 언제나 일타쌍피를 취했다. 일부러 포로를 풀어줌으로써 적군이 서둘러 출진하도록 유인했다. 그와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서 복병을 숨겨두었다……. 매복이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높겠지. 감탄스러운 솜씨였다. 복병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만큼 평범한 발상이다. 문제는 그걸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서 삼류와 이류가 갈린다. 발상을 실제로 실현하면서 일거양득까지 취해버린다면, 틀림없이 일류에 속하겠지. “정찰부대의 첩보입니다, 전하.” 부관 한 명이 말을 몰아 황급히 다가왔다. “피아센차에 있는 적군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출진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나. 피렌체 대공은 결단이 빠르군.”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푸른 산양 기병연대에 명령을 하달한다.” “예, 전하!” “지금 즉시 선봉대로서 달려나가 피아센차의 적 진영에 한바탕 화살비 세례를 퍼붓고 와라. 접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사르데냐놈들의 엉덩이에 화살맛을 조금만 보여주는 걸로 충분하다.” 난쟁이족 연대장이 군례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놈들을 십분 끌어오겠습니다.” 궁기병 일천 명이 긴 행군대열에서 빠져나가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마법전을 대비해서 마법사도 열 명이 함께 따라나섰다. 궁기병대가 적군을 깔짝깔짝 괴롭히는 동안, 우리는 본래 목적지인 강줄기에 도착했다. 라우라는 이 강줄기를 눈앞에 두고 진영을 꾸리도록 명령했다. 강줄기의 이름은 트레비아. 사실 강이라기보다 조금 넓은 개천에 가까웠다. 강폭은 넓지만 깊이가 얇았다. 본래 사르데냐에서는 여름에 비가 드물었고 겨울에 비가 잦았다. 건기라고 표현할 만큼 비가 드문 것은 또 아니라서, 그럭저럭 강줄기의 구색이나마 갖추었다. 다만 강 주변으로 드문드문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만일 대군이 트레비아를 도하한다고 하면, 일단 느릿느릿한 유속과 얄팍한 수심에 안심할 거다. 그러나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늪 웅덩이가 있어서 발자국을 내딛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시 말해, 소수의 병력이 건너기엔 안성맞춤이지만 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는 썩 길이 좋지 않다. 라우라는 보름이 넘도록 사방팔방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인근 지리를 꿰뚫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피아센차 부근에서 전투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특히나 이 주변은 정찰부대에게 일일이 확인해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라우라는 트레비아 강을 전쟁터로 낙점했다. “겉보기에는 만만하되 실상은 난해하다. 이 작고 볼품없는 강줄기는 매복 작전에 써먹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잠시 뒤, 궁기병대가 강 저편에서 복귀해왔다. 연대는 적군의 기병에 쫓기고 있었다. 연대가 주저없이 강물에 뛰어들어 우리 진영으로 달아나자 적들이 주춤했다. 기병 단독으로 깊숙한 곳까지 추격하기는 부담스러웠겠지. 이만큼 내쫓았으면 됐다, 하며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궁기병대가 강을 건너다 말고 다시 공격했다. 적군을 약 올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의 기병연대도 활을 빼들어서 응수했다. 제법 진귀한 장면이었다. 궁기병과 궁기병이 강가 근처를 맴돌며 사격을 주고받았다. 참고로 궁기병 간의 대결은 가장 손실이 적은 싸움이었다. 멀리 있는 적병을 화살로 맞히기도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움직이는 말에 앉아서 움직이는 적을 맞히기란 오죽할까. 거의 촌극에 가까웠다. 솔직히 화살값이 아까웠다. 오후가 되자 사르데냐 본군이 움직였다. 적은 이미 완벽하게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궁병들이 앞서고 뒷배를 장창병들이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행여나 궁기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군은 기병까지 충원했다. 라우라가 멀리서 펼쳐지는 조우전을 관찰했다. “적군은 기병이 적군.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삼천 정도이다.” “삼천이 안 됩니다. 이천사백, 이천육백 정도일까요.” 옆에서 엘프 연대장이 말을 거들었다. 엘프족은 인간보다 눈이 좋았다. “다만 피렌체의 검독수리 기사단이 까다롭군요. 육백 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입니다만, 사르데냐 왕국 최강의 기사단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에서 최강인가.” 라우라가 슬쩍 웃었다. “요즘은 아무데서나 최강을 자칭하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군. 그래서, 저들이 무서운가?” “설마요. 사르데냐의 기사단 따위를 두려워해서야 용병짓도 못해먹습니다, 전하.” 용병대장들이 실실 웃었다. 사기는 충분했다. “작전을 변경한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툭툭 쳤다. “본래는 적군이 도하할 때를 노려서 공격하려 했다마는, 그럴 필요가 없어보이는군. 적군이 강을 완전히 건널 때까지 기다려준다.” “쉽게 갈 수 있는 싸움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전하?” “아아. 적군에 기병이 이천오백뿐이라면 구태여 조심할 필요가 없다.” 용병대장들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은 눈앞의 젊은 총사령관 전하에게 제법 튼실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궁기병대가 적군의 기병에 쫓겨서 강줄기를 건너왔다. 이번에는 적군도 과감했다. 궁기병대를 바짝 쫓아서 트레비아 강을 넘었다. 적들이 트레비아를 다 건너자마자, 라우라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모든 기병연대는 돌격하라!” 미리 대열을 짜두고 있었던 기병연대들이 뿔나팔을 불었다. 인근의 숲에서 매복하고 있는 드 블랑 남작의 휘하를 제외하고, 아군의 모든 기병이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려나갔다. 경기병대까지 포함해서 그 숫자는 사천오백을 헤아렸다. 적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전력이었다. 양익에서 치열한 기병전이 이어졌다. 그 사이, 적군의 보병들이 트레비아를 넘어왔다. 적들은 지체하지 않고 우리 본대를 향해서 접근해왔다. 물경 삼만 대군의 보병이었다. 대군이 항오를 맞추어 다가오는 모습은 베테랑 용병에게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궁병 앞으로!” “궁병 앞으로!” 라우라의 명령을 내가 이어받아 확성마법으로 소리쳤다. 오천 명에 이르는 궁병이 장창병들 앞으로 일렬을 이루어 나아갔다. 곧이어 동일한 명령이 저편에서도 울려 퍼졌다. “사격 개시!” “쏘아라!” 지휘관들의 명령에 맞추어서 궁병들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때때로 상대편의 깊은 곳까지 떨어져 누군가의 허벅지를, 혹은 팔뚝을 맞추었다. 그러나 우리군이든 왕국군이든 피해는 심각하지 않았다. 화살 세례가 몇 번 오갔다. 그동안 양군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한 걸음, 부정할 수 없는 한 걸음이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눈 좋은 인간이라면 적병의 얼굴 표정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서로 가까워졌다. “궁병을 양익으로 물려라.” 라우라가 명령했다. 이제 신사적으로 화살만 주고 받는 시간은 끝났다. 아군의 궁병은 양익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적군의 궁병도 장창병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허공을 가로짓는 화살의 숫자가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이제 저들이든 우리든 발걸음을 뒤로 물릴 수 없다. 등을 돌린다면 오직 패배해서 처참하게 도망칠 때뿐. “황제 폐하를 위하여!” “국왕 전하에게 영광을!” 전투 함성과 함께 아군의 제1열과 적군의 제1열이 맞부닥쳤다. 트레비아 전투의 개시였다.   ============================ 작품 후기 ============================   전쟁 지도를 설정란에 올려둡니다. 상세한 전투 지도는 아마 다음화에 올릴 것 같습니다.   00371 제2차 국화전쟁 =========================================================================                        * * * “밀어붙여!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밥버러지들아!” “최대한 버텨라! 방패로 눈을 가리지 마라!” 보병들 사이에 피 튀기는 접전이 일어났다. 창날이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고, 칼이 쇄골을 내리쳐서 어깨와 목의 틈새를 찢어갈겼다. 방패가 방패를 거칠게 밀어재끼는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사관들은 목을 길게 내뻗어서 이따금 멍청하게 대열을 어지럽히는 병사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십오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흐르자, 일방적으로 밀리는 군세가 있었다. 제국군이었다. 사르데냐 보병이 제국군을 조금씩이지만 밀어내고 있었다. “전하, 아군이 우세하옵니다!” “좋다!” 피렌체 대공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군은 아군에 비해 보병이 압도적으로 적다. 밀어붙여라!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총사령관이 흥분하자 열기가 다른 부관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애시당초 강줄기를 도하해서 공격하는 것을 사르데냐의 지휘관들은 꺼려했다. 제국군이 일부러 파비아에서 나와서 이곳까지 진출한 이유가 의심스러웠다. 이쪽이 도하하는 와중에 공격하려는 것 아닌가. 아니면 상류에 댐을 쌓아 터트리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총사령관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다르게 생각했다. “지금 즉시 도하를 준비하도록.” “전하!” 지휘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반박했다. “비록 수심이 얇사오나 안심은 금물인 줄 아룁니다. 소신은 저들이 아군의 반도(半途)에 편승할까 염려됩니다.” “내 전해듣기로 제국군은 삼만 명에 이른다고 들었다.” 대공이 말했다. 목소리가 유독 싸늘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들은 이만을 조금 넘은 것 같구나. 나머지 군사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 “파비아에 포로로 붙잡힌 시민만 일만이 넘는다. 그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천의 병사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 대공 전하, 설마!”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 창녀는 기어코 파비아의 시민들을 처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적군이 이곳까지 진출한 이유는 시민들을 정리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우리가 도하를 두려워해서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파비아에선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지휘관들이 길게 탄식했다. “여신이시여…….” “빌어먹을 제국놈들! 명예도 모르는가!” 적군의 잔인한 처사에 분노하는 이도, 지금쯤 파비아에서 벌어지고 있을 참극에 표정을 찡그리는 이도 있었다. 피렌체 대공은 당장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알겠는가. 저들은 우리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다. 후방이 정리될 때까지, 조금 더 가볍게 후퇴할 수 있도록 우리한테서 시간을 벌어보려는 심산이다…….” 대공이 날카롭게 전방을 쳐다보았다. 제국군의 궁기병대가 이쪽을 약 올리며 깔짝깔짝 화살을 쏘아댔다. 어지간히도 이쪽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은 것이리라. 누가 봐도 아군을 유인하는 몸짓이었다. 정말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에는 너무나 빤한 술책이었다. 피렌체 대공이 가늘게 눈을 떴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술책에는 속임수가 들어 있기 마련. 어디 확인해볼까.’ 대공은 우선 궁기병대에 똑같이 궁기병대를 출진시켰다. 병력은 일천. 의도적으로 적군과 숫자를 엇비슷하게 맞추었다. 대공의 계산은 간단했다. 만약 적군이 정말로 우리를 끌어내고 싶어 한다면, 궁기병대를 더욱 더 충원해서 이쪽을 공격해올 것이다. 적군이 군사를 투입하면 이쪽도 똑같이 투입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저 유인하는 척 시늉하는 것이라면.’ 대공이 판단했다. ‘제국군은 계속해서 일천 명 남짓하는 궁기병대로만 이쪽의 신경을 툭툭 건드릴 것이다. 그 경우, 저들의 목적은 우리에게 의심암귀를 불어넣는 것. 섣불리 강을 도하하지 못하게끔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대공이 냉정하게 전장을 바라보았다. 제국군 궁기병대가 왕국군 궁기병대에 쫓겨서 강을 넘었다. 충분히 추격했다 싶어서 왕국군이 돌아오려는 순간, 제국군이 돌연 반전하여 또 다시 공격해왔다. 그 광경을 보고 대공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역시 허장성세였는가.” 적 궁기병대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대공은 세 가지 판단을 동시에 내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제국군은 정말로 우리를 유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지연책. 유인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저들이 무슨 함정을 준비했을까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두 번째. 저들은 전면전을 바라고 있지 않다. 아마도 적군은 파비아 시내가 파괴되었다는 정보가 우리한테 입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적군은 몰래 후퇴하고 싶어하는데, 정보가 새어나가면 이쪽에서 급히 추적하리란 사실이 명백하므로. 즉, 세 번째. 적군에게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싸우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전군에 전진 명령을 하달하라!” 이제 피렌체 대공은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강물을 도하해서 공격하는 것은 틀림없이 위험하다. 그러나 트레비아는 수심이 얕다. 실제로 제국군 궁기병대는 제 집 안방마냥 강줄기를 건너고 되돌아오고 하지 않는가. 여전히 도하 도중에 공격받을까 염려되는 지휘관들을 향해 대공이 말했다. “안심하라. 제국군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저 강으로 군대를 진전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제 꾀에 자기가 넘어진다는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대공이 씨익 웃었다.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확실히 적 궁기병대는 이쪽을 대신해서 트레비아가 안전한 강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보병이 강에 들어가도 기껏해봐야 허리까지 물이 차오를 뿐이겠지. “예, 전하! 각 연대에 즉각 명을 전달하겠습니다.” 평원에 뿔나팔이 길게 울려 퍼졌다. 기사단을 필두로 왕국군 삼만 명이 전진했다. 곧이어 양익의 기병대가 먼저 강을 건넜다. 그러자 적군도 기병대로 대응했다. 강 너머에서 기병대끼리 접전을 펼치는 와중에, 보병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견뎌내며 힘차게 나아갔다. “…….” “…….” 지휘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때가 제일 위험한 고비였다. 기사단과 기병대를 먼저 내보낸 것은 무사히 도하를 완료하기 위함이었다. 행여나 적군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기사단과 기병대가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제국군에 기병이 생각보다 많았다. 척 봐도 아군보다 두 배가 넘었다. 무장이 빈약한 경기병이 아니라 기사나 다름없이 갑옷과 마갑을 갖춰입은 중기병이었다. 언제까지 아군이 버텨줄지 미지수였다……. ‘신들이시여! 부디 학살자에게 자애를 베풀지 말아주소서!’ 대공이 기도했다. 그는 덤덤하게 말에 올라타서 지휘부와 함께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만큼은 누구보다 초조했다.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를 용서하지 마시옵고, 무엇보다도 무고하게 죽어나간 시민들의 복수를 제가 이루어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보병들은 빠르게 트레비아 강을 건넜다. 말발굽이 물결을 헤쳐나와 무른 땅을 밟은 순간, 피렌체 대공은 승리를 예감했다.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아군의 기병은 두 배가 뛰어넘는 적 기병을 상대로 훌륭하게 버텨주었다! “제군들! 보아라!” 대공이 기쁨에 차서 소리 질렀다. 얼굴에 기쁜 감정이 드러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대공은 위엄이 넘치는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했다. 총사령관은 안색이 약간 변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막대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대공은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우리가 곧바로 진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도하를 성공했다. 우리는 적의 허를 찌른 것이다!” “대공 전하의 혜안이 실로 옳습니다!” 부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제군들이 분발할 차례다. 압도적인 보병 전력을 허투로 낭비하지 않고 적도를 쓸어버리도록!” “예, 전하. 전군 앞으로!” 무사히 트레비아를 넘은 왕국군이 자신만만하게 진군했다. 대공이 흐뭇해하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연대가 강을 전부 건넜다. 그런데 강가의 군데군데 늪이 엶게 퍼져 있었다. 운 나쁘게 그곳으로 빠져나오게 된 병사들은, 허벅지에 질척질척한 진흙을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저런.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피렌체 대공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운이다. 도하가 반쯤 이루어진 시점에서 공격을 허용했다면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만약 제국군이 전면전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면, 또 지리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십중팔구 저곳 늪지대로 왕국군을 몰아세웠을 터. 왕국군은 끔찍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흐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를 하나 넘겼다는 생각에 대공이 안도했다. 또한, 대공은 더욱 더 강하게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제국군은 정말로 회전을 치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이 근방의 지리에 미숙한 것도 분명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제국군을 지금 공격한 건 극히 올바른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병과 보병이 맞부닥치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결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하, 아군이 우세하옵니다!” 부관이 흥분한 어조로 보고했다. 십 미터. 접전이 발생한 이후에 왕국군의 대열이 제국군의 대열을 십 미터 뒤로 밀어냈다. 삼십 분 만에 전열이 십 미터나 밀린 것이었다. 제국군은 명백히 열세에 처했다. 피렌체 대공도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다! 적군은 아군에 비해 보병이 압도적으로 적다. 밀어붙여라!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희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행운과 불운이 차례로 교대하듯이, 다른 부관은 안 좋은 소식을 보고했다. “아군의 우익 기병대가 패주하고 있습니다!” “무슨……베르티모 남작은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대공이 반응하기 전에 주변의 연대장이 버럭 일갈했다.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받아먹던 작자가 정작 전투에서는 가장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치다니! 전하! 남작을 군법으로 처벌해야 마땅한 줄 아룁니다.” “음. 전투가 끝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바로잡겠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우익 기병대를 탓하지 않았다. 두 배가 넘는 적병을 상대로 이만하면 충분히 잘 버텨주었다. 하지만 아군의 패주를 관대하게 용서하면 다른 병사들까지 쉽게쉽게 도주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에 루아노 기사단장은 명불허전이군요. 한치도 밀리지 않고 있사옵니다.” “비록 우익이 무너졌으나 좌익이 굳건하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사려됩니다.” 현재 전황은 왕국군에 우세했다. 일단 중앙의 보병에서 숫자 차이가 극심했다. 제국군이 약 일만오천에 지나지 않는데 반하여, 왕국군은 약 삼만 명의 보병으로 밀어붙였다. 기병전에선 제국군이 유리했다. 하지만 전황을 뒤바꿀 정도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우익의 기병대가 패배하여 도망쳤지만, 좌익에선 피렌체의 기사단장이 용감무쌍하게 적군에 맞섰다. 아직까진 왕국군이 근소하게 압도한다 표현해도 좋겠지. 그러나 중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상, 어느 순간부터 제국군은 급속하게 전력이 줄어들 게 분명했다. 장기전이다, 하고 대공이 생각했다. 앞으로 길게는 여섯 시간. 짧게는 두 시간까지 전투가 이어지겠지……. 헬베티카 용병은 다른 용병보다 질이 뛰어난 만큼 넉넉잡아 다섯 시간까지는 각오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군의 승리였다. ‘문제는 적군을 추격할 기병전력이 전무하다는 게로군.’ 대공은 입맛이 썼다. ‘전투에선 승리하겠지만 적군은 적어도 전력의 7할을 보존할 것이다. 완승이지만 대승은 아니다. 단기결전으로 이번 전쟁을 끝내는 것은 무리인가……아니. 지금은 파비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 밀라노 공작이 못한 것을 내가 해냈다! 그걸로 충분하다…….’ 대공이 우익에 전력을 보강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였다. “저, 전하. 루아노 기사단장으로부터 보고가!” 생각에 빠져 있던 피렌체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수정구를 든 마법사의 얼굴이 헬쓱했다. “무엇인가. 서둘러 보고하라.” “아군 좌익에, 적이 급습! 게트아네 부기사단장이 전사!” “……!” 대공을 비롯해서 지휘부 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습입니다! 제국군의 복병이 기사단의 측면을 기습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된다. 어디에서 복병 따위가…….” “좌익의 기병대는 이미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단도 3할……아니, 4할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사단장은 급히 명령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작품 후기 ============================   작품설정란에 전투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72 제2차 국화전쟁 =========================================================================                        “대, 대공 전하…….” 부관들이 불안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대공이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당황해버리면 만사휴의였다. “데 두라초 경! 마법전대를 이끌고 지금 즉시 좌익으로 가라!” “전하. 하오나 이 노구가 자리를 비우면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적군의 마법사들이 이곳 중앙을 노리고 말 것이옵니다.” 늙은 마법사가 걱정했다. 대공은 마법사의 견해가 옳다 느꼈지만, 여기서 말을 번복해버릴 수는 없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은 천금보다 무거워야만 했다. “이제 와서 보병을 보내봤자 좌익이 무너지기 전까지 도착하지 못한다. 좌익이 붕괴하면 다음 차례는 이곳이다! 경의 임무는 어떻게든 기사단장을 도와서 적군의 기병대를 내쫓는 것이다. 알겠는가.” “지엄한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열다섯 명의 마법사가 순간이동을 사용하여 좌익으로 급히 향했다. 이제 중앙에는 마법사가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각 전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는 마법사. 그리고 피렌체 대공 개인을 호위하는 마법사들뿐이었다. 이걸로는 도저히 적군이 발사하는 전투마법을 상쇄시키기 힘들었다. “제장들은 분전하라!” 피렌체 대공이 소리쳤다. 눈앞에서 대공과 궁정마법사가 재빠르게 명령을 주고받자, 부관들도 적당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부관들의 눈빛에선 어느 정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걷어졌다. “중앙에서 오천의 병력을 빼서 우익에 배치하라. 예비대를 사용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좌익에도 이천을 보낸다. 기사단장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른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도록!” 순식간에 예비대가 칠천 명이나 줄어들었다. “…….” 대공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부관들이 서둘러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지만, 대공의 마음속에선 좀처럼 초조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바야흐로, 이 시점에서 양군의 중앙은 비등비등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제국군은 보병 만오천 명, 왕국군은 보병 만팔천 명. 대공은 적아의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눈어림으로 그 차이가 일천보다는 많고 오천보다 적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대략 사천 명. 사천 명의 차이인가……부족하다.’ 상대편은 이름 높은 헬베티카 용병. 사천 정도는 아예 차이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더군다나 왕국군은 제국군에 비해 마법전력이 뒤떨어졌다. 이쪽은 견습을 제외하고 마법사가 열일곱 명이었다. 반면에 제국군은 스무 명이 넘는 마법전대를 꾸리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지금까지는 적군이 쏘아대는 마법을 방어하기만 했다. 숫자에서 밀릴지라도 방어에 전념하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마법전에서는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수월하다. 가령 적 마법사가 불덩어리를 발사하면 이쪽은 수(水)속성 마법으로 방어막을 펼친다. 그렇기에 제국군이 스무 명이 넘는 마법사를 끌고왔을지라도, 피렌체 대공의 마법사들은 여태껏 문제없이 공격을 잘 막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보장할 순 없었다. 잠시 뒤. “……역시 알아차렸나.” 전방에서 적군의 마법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불덩어리가 작렬했다. 왕국군 마법사도 분전했지만 명백하게 역부족이었다. 이쪽은 마법사 두 명이서 진땀을 빼며 마력고갈까지 각오한 채 싸웠다. 반면에 제국군은, 어림잡아 열 명의 마법사를 중앙에 투입하고 있었다……. 적군은 마법전력이 스무 명에 이르렀다. 지금 중앙에 열 명이 있었으니, 나머지 열 명은 또 다른 곳으로 향했을 터. 그곳이 어디일지 대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대공 전하. 데 두라초 경께서 보고를 올리셨습니다.” “제국도 마법사로 대응해왔는가.” “……예. 현재 좌익에 제국이 열한 명의 마법대를 투입했다는 보고입니다.”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병 이천을 정면에서 빼낸다. 좌익에 배치하라.”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죽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하오나……그리하시면 아군에 예비대가 전무하게 되옵니다.” “상관없다. 지금이 바로 예비대를 쏟아부을 순간이다.” 대공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직감하고 있었다. 좌익은 얼마 가지 못해서 붕괴한다. 부기사단장이 즉사해버릴 정도로 기습에 허를 찔렸다. 운 좋게 기사단장이 살아남아 병사를 지휘하고 있다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마법사로 구원하는 방법도 적이 똑같이 응수해오는 바람에 저지당했다. 제국군은 퇴각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철두철미하게 포위섬멸전을 노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복병을……설마, 어제 파비아 시민들을 추격하면서?’ 대공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우리를 끌어내려고 파비아를 파괴했는가. 시민을 풀어준 것도, 피아센차로 진군한 것도, 전부 미리 계획된 속임수였는가!’ 대공이 전방을 쳐다보았다. 인의 장막 너머. 푸른 산수화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일찍이 팔 년 전에 멸망했을 가문이, 다시금 자신의 상징으로써 펄럭거리고 있었다. 팔 년 전에 이루어진 일을 이번에는 정반대로 반복해보자는 것처럼. 대공이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시뻘건 핏물과 함께 신음이 새어나왔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 * * “우익에서 적군이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렌체의 검독수리 기사단, 패주. 드 블랑 남작이 기사단장을 격살했습니다!” “좌익의 아군 기병대. 돌격을 개시합니다!” 각 부대에서 끊임없이 보고가 올라왔다. 대부분이 승전보였다. 지휘부의 사람들은 표정이 밝았다. 이따금씩 웃음소리가 터지기도 했다.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겠지. 현재 제국군은 교과서적인 포위섬멸전을 재현하고 있었다. 매복은 대성공했다. 적 기사단은 완전히 측면을 노출한 채 이쪽의 돌격에 얻어맞았다. 안 그래도 기사단은 전력이 두 배 차이나는 상황에서 분전하고 있었다. 그럴 때 기습에 돌격까지 닥친 것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오 분 만에 기사단의 절반 가까이가 죽거나 낙마했다. 이런 위기에서는 엘리자베트가 아니라 엘리자베트 할애비가 와도 별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의 할아버지는 별로 유능한 황제도 아니었다고 하지만……. “드 블랑 남작이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군요. 기사단장의 수급을 취했으니 제1공로자입니다.” “흠. 훌륭하다.” 내 말에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투가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전방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드 블랑 남작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우익을 정리한 다음에는 곧바로 적 본대의 후방을 몰아쳐라. 단, 적병이 늪지대로 도망치도록 한쪽 구멍은 비워둔다.” “예, 전하!” 부관이 씩씩하게 군례를 올렸다. 주변에선 라우라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패배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듯했다. 상대방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전세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은 놀라움 반, 두려움 반을 섞어서 수군거렸다. ‘총사령관 전하께서는 아테나 여신의 환생이시다.’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얘기였다. 하지만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라우라는 여신만큼 아름다우니까 숭배하고 싶어질 만했다. 용병대장들은 더더욱 공손해져서 이제 라우라의 명령이라면 당장 포도로 맥주를 만들어내라고 해도 알겠습니다, 전하! 하고 대답해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쯤에서 마법사들에게 전력을 다하라 명령하심이 어떻습니까, 공작. 저들에겐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겠지요.” “좋다. 마력을 비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마법사들에게 즉시 명령이 내려졌다. 곧이어 전방에서 수많은 폭발이 작렬했다. 우리군에는 전투마법사가 스물일곱 명 있다. 헬베티카에서 고용한 마법사가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계약한 자들이다. 내 영지에는 마탑이 넘쳐났으며, 적당한 조건만 내밀어주면 마법사를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었다. 적당한 조건에 '포로한테 비인간적인 해부 및 실험을 허가해줄 것'이 포함되지만……. 뭐, 어젯밤 반란을 주동한 파비아의 시민 백 명을 마법사에게 선물했다. 그들에게 남은 미래란 해부용 거치대에 눕혀져서 자기 내장이 무슨 색깔인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뿐이다. 나머지 시민들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헬베티카 연방에서 이들을 노예로 구입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헬베티카의 거친 산맥에는 광산이 널려 있었다. 노예들은 위험천만한 갱도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전하, 우익이 정리되었습니다. 드 블랑 남작은 다음 단계로 이행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남작이 이끄는 이천 명이 그대로 적의 배후로 돌아갔다. 사면포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배후를 완전히 틀어막을 필요는 없었다. 배후에서 적을 압박한다, 그 사실 자체로 충분했다. 적은 이제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필연적으로 전면의 대열이 얇아졌다. 그렇게 얇아진 대열에 이쪽 마법사들이 사정없이 불덩어리를 꽂아넣었다. 폭발음에 대지가 부르르 진동했다. 사면포위에 무차별적인 마법의 포화. 사르데냐 왕국군은 지옥을 맛보고 있다. 삼십 분 뒤, 적 중앙의 모서리가 허물어졌다. “적군의 일부가 도주하고 있습니다!” “왕국군 전열이 차례대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전하! 전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휘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끝이로군. 전열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그걸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예비대다. 무너질 위험이 있는 대열에 재빨리 예비대를 보충해주어야 한다. 사르데냐 왕국군에는 예비대가 다 떨어졌다. 즉, 여기서 끝이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오늘 몰락한다……. “푸른 산양 연대에서 추격전을 요청!” “드 블랑 남작도 추격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급하기는. 각 연대에서 줄줄이 추격을 허락해달라 요구해왔다. 반항하는 적병을 공격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적병을 사냥하는 것이 당연히 편했다. 전과를 확대하기도 쉬웠다. 다만 조금 지나치게 빨랐다. 아직 피렌체 대공이 저항하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더 대공을 몰아세워야 할 때였다. 추격이야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추격을 허가한다.” “……공작?” 라우라 입에서 뜻밖의 명령이 나왔다.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아직 왕국군의 일부가 격렬하게 맞서고 있습니다만.” “본관도 알고 있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추격을 허락하면 적군에게 '도망치면 사냥당한다'라고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적군의 반항이 더 심해집니다.” 라우라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숙지하고 있다.” “허면 어째서…….” “궁중백.” 전투가 벌어지고 처음으로 라우라가 시선을 돌렸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가 내 얼굴을 직시했다. “과거에 스승이 본관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지. 완벽한 승리는 완벽한 패배만큼이나 해롭다는 것이다.” “…….” 내가 라우라한테 해준 말이었다. “하지만, 피렌체 대공을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은 대공을 격살할 때가 아니다. 궁중백. 본관을 신뢰하라.” 나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바로 허리를 숙였다. 총사령관의 명령은 지엄해야 마땅했다. 아군의 기병이 적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기병에게 등을 보인 병사의 말로란 비참했다. 그들은 강줄기에 닿기도 전에 기병도에 맞아 절멸했다. 그걸 보고 적군의 남은 전열이 똘똘 뭉쳤다.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적군은 필사적으로 아군의 중앙을 돌파하려고 분투했다. 피해가 심각해질 지경에 이르자, 라우라는 또 다시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적군이 중앙을 돌파하도록 내버려두어라.” 일부러 맞서싸우지 말고 접전을 피하라는 얘기였다. 이 명령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휘관이 의아해했지만, 이미 완전무결한 승리를 보여준 총사령관이기에 다들 군말없이 따랐다. 피렌체 대공은 이쪽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대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무분별한 후퇴가 아니라 엄중하게 항오를 갖추어서 물러서는 것이었다. 섣불리 추격하면 당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일만 명 정도가 대공과 함께 전쟁터를 빠져나갔다. 기껏 완벽하게 포위를 해놓고 다시 풀어준 꼴이 되었지만, 대승은 대승이었다. “승리를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전하께선 실로 아테나 여신의 이름을 대신하신 자격이 있습니다!” 연대장들이 달려와서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적군 삼만 중에서 이만 명 가까이가 쓰러진 것이었다. 일만 명의 보병을 제외하고, 사르데냐 왕국군은 문자 그대로 녹아내렸다. 대륙력 1512년 6월 28일의 태양은 그렇게 졌다. 또 한 번의 대승. 이제 사르데냐인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00373 양웅(兩雄)의 조우 =========================================================================                        사르데냐 왕실에서 급히 사신을 보냈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겠지.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이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사르데냐 왕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헬파이어 수준으로 떨어졌다. 과장법이 아니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삼천 명, 노바라 공성전에서 오천 명, 트레비아 전투에서 이만 명이 쓰러지거나 도망쳐버린 것이다. 전부 도합해서 무려 삼만 명에 이른다. 더군다나, 전원이 정예병……. 우리가 알프스 산맥을 5월 30일에 건넜고, 티키누스 전투를 6월 28일에 끝냈으니, 정확하게 한 달이 걸렸다. 고작 한 달. 사르데냐의 북방군-중앙군 주력은 겨우 한 달 만에 증발해버렸다. 사르데냐 국왕은, 소문에 따르자면, 전투 보고를 받고 아예 기절했다고 한다. “삼만 명! 과인의 삼만 명을 돌려다오!”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던가. 국왕 입장에선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은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왕도(王都) 테베레 시민들은 당장이라도 제국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파르네세 가문의 악귀, 복수를 위해 마왕에게 영혼을 판 마녀……불과 며칠 사이 라우라에겐 수십 가지의 별명이 붙었다.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티키누스 전투가 일어나고 바로 다음날에 두 곳의 영지가 항복했다. 피아센차와 파르마였다. 특이하게도 이곳 영지민들은 제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영지는 예전에 파르네세 가문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반역향으로 낙인 찍힌 지방이 다 그러하듯이, 지난 내전에서 패배해버린 피아센차-파르마의 영지민들은 극심하게 차별을 받았다. 공작령에서 두 개의 남작령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이곳 출신의 인사는 왕실에 등용되지 못했다. 멍청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사르데냐의 정치가였다면 피아센차-파르마를 저딴 식으로 억압하지 않았을 거다. 피아센차는 백작령으로 격하시키고, 파르마는 남작령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파르마에 한해서만 차별 정책을 펼친다. 이러면 파르마 시민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피아센차의 시민에게 향한다. “모두가 잘못했는데 어째서 너희만!” 하고 분개한다. 두 영지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겠지. 명심해야 한다. 억압은 하나의 집단을 두 개로 분리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걸 알지 못하면 그저 잠재적인 반란분자를 키워주는 꼬락서니밖에 되지 않는다. 하긴, 이제 와서 충고해봤자 사르데냐 국왕이 들을 리도 없는가. 어쩔 수 없지. 모쪼록 다음부터 주의하시길. 하하. 아무튼, 왕실에서 전권대사를 파견해온 시기가 바로 이처럼 공포와 반란이 정점을 찍은 시기였다. 사신은 이번에도 로디 후작이었다. “오랜만에 뵈오, 궁중백.” “그간 안녕했습니까. 후작.” 대머리에 수염이 덮수룩한 이 중년의 신사는 놀랍게도 이번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귀족 세계에서 드물게도 두개골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후작처럼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 좋았다. 사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쾌했다. 딱히 대머리가 시원해보여서가 아니다. 정말이다. “국왕 전하께서는 진심 어린 사과를 황제 폐하와 파르네세 영애에게 건네실 준비가 되어 계시오.” 약간 잡담을 나눈 뒤에 우리는 본론에 들어갔다. “귀국에서 전하의 사과를 받아들여준다면 전쟁은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소.” “후작. 저는 아직까지도 파르네세 공작이 파르네세 '영애'라고 불리는 점에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나는 느긋했다. 지금 급한 사람은 이쪽이 아니었다. “영애라니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르마-피아센차를 다스리는 공작가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주인입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직도 거대한 인식차가 도사리는 것 같군요.” 말투는 온순했지만 내용이 반쯤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영애를 파르네세 공작으로 인정한다고 가정해보시오.” 로디 후작이 신중하게 말했다. “파르네세의 영지는 사방팔방이 아국에 포위된 형태가 되고, 결국 '육지의 섬'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교류도 끊기고 상인도 발을 돌릴 터. 그런 영지에 무슨 가치가 있겠소?” “흐음. 확실히 그건 문제로군요.” 내가 유리잔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고심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까. 로디 후작의 안색이 약간이지만 밝아졌다. “알아주어서 감사하오. 이제 보다 현실적인 타협안을…….” “그러면 밀라노 공작령까지 우리한테 넘겨주시면 되겠습니다.”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밀라노라니…….” “보십시오. 밀라노까지 파르네세 가문에 포함되면 영지가 헬베티카 연방에 딱 맞닿습니다. 연방은 우리 제국으로 길이 통하니까, 결과적으로 파르네세 가문이 '육지의 섬'이 될 일은 사라집니다.” 내가 짜잔, 하고 멋진 마술이라도 보여준 것처럼 활짝 웃었다. “완벽한 해결책이군요. 어떻습니까.” “지금 소인을 우롱하는 것이외까!” 후작이 흥분해서 탁자를 내려쳤다. “밀라노는 아국에서 두 번째로 광활한 공작령이오! 함부로 타국이 가져가니 마니 할 만한 영토가 아니란 말이오!” “파르마 공작령도 그만큼 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공중분해되었지요. 이미 한 번 일어난 사건은 두 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로디 후작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렸다. 파르마 영지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말을 꺼냈는데 졸지에 두 배, 아니 세 배에 가까운 영토를 내놓으라고 하니 꼭지가 돌아버릴 법했다. “우리의 요청은 단순하고 명료하며, 따라서 확고합니다. 후작.”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건 우리라고. 그쪽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할 처지가 안 된다. “우리는 귀국의 국왕 전하가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파르네세 공작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울러, 지난 내전 및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밀라노 공작령, 과거의 파르마 공작령, 두 영지를 파르네세 가문에 내주십시오.” “그처럼 무례한 조건은 결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내 목소리는 한없이 단호했다. “이상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이상 타협은 없습니다.” “…….” 로디 후작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었다. “궁중백은……처음부터 전쟁을 원하신 것이구려…….” “저런. 중상모략은 곤란합니다, 후작.” 내가 웃었다. “저는 한 달 전에도, 두 달 전에도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걸 보기 좋게 걷어찬 장본인이 귀국의 국왕 전하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이고, 제국은 마녀 한 명에게 놀아나는 바보집단이다……. 멋진 도발입니다.” 로디 후작은 목까지 붉어졌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래서 전쟁을 치르기 전에 명분을 확보해놓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을 때, 상대방에게 거의 무제한적인 요구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이 명분의 위력이었다. “파비아 백작이 왜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멍청한 작자가 이번 전쟁에 도화선을 불지폈기 때문입니다. 감히 제국의 대장군을 성노예라 모욕하다니 대단한 배짱이었지요.” 내가 작은 종을 손으로 흔들었다. 부관이 상자를 세 개 갖고 왔다. 상자는 고급스러운 청색 비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국왕 전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한번 열어보시지요.” “…….” 아마 무슨 물건인지 직감했겠지. 후작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파비아 백작의 머리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페르세포네 여신이시여.” 로디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파비아 백작의 얼굴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대로 표정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마법으로 처리하여 보존해둔 덕택이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보기에 역겨울까봐 딸기향을 첨부했습니다. 포도향과 딸기향, 둘 중에 무엇을 더 국왕 전하가 좋아할지 고심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입을 열면.” 내가 상자에 손을 넣어서 파비아 백작의 입을 열어재꼈다. 푸르뎅뎅한 혓바닥에 앙증맞게도 산딸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산딸기를 집어들었다. “어떻습니까? 무척이나 우아하지요. 산딸기가 사람의 머리통에 몉 개나 들어갈 수 있는가 시험해보았습니다. 맹세컨대, 후작. 정확히 사십아홉 개가 들어가더군요! 딱 하나가 아까웠습니다.” “…….” “나머지 상자에는 검독수리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담았습니다. 부디 만족스러운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빨로 산딸기를 한입 깨물었다. 로디 후작이 그걸 보고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오…….” “그리고 백작은 살아 있는 자를 모욕했지요. 귀국의 국왕에 제가 한 말을 빠짐없이 전달하십시오.” 타협의 여지가 전무하다는 걸 느꼈을까. 로디 후작이 힘없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마도 후작은 밀라노 공작령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종전을 이룩하고 싶을 거다. 그러나 후작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사르데냐의 국왕이, 밀라노의 공작이 납득할 리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부관에게 손짓했다. “연대장들을 집합시키게. 삼십 분 안에 모두 모이도록.” “예, 각하.” 연대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여들었다. “제장들. 이제부터 사르데냐 왕국에서 자네들을 뇌물로 유혹하려 들 것이다.” “뇌물 말입니까?” “전쟁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한테 이길 자신은 없다. 그런 겁쟁이 돼지들이 선택할 방법은 뇌물밖에 없지.” 연대장들이 실실 웃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헬베티카의 명예를 걸고 뇌물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뇌물을 접수해라.” “예?” “모처럼 선물을 주겠다는 것이다. 괜히 받지 않아서 아쉬워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연대장들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쪽이 거짓으로 충성심을 떠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안심해라. 나는 금전과 관련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 곁에 무시무시한 아가씨가 한 명 있어서 말이지, 돈으로 거짓말을 하면 엄청나게 혼내거든. “선물을 받는다고 해서 사르데냐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것이다.” “……각하. 설마.” “아아, 받아먹기만 하고 입을 싹 닦도록.” 지나치게 적나라한 말에 연대장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괘,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도리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전쟁터에서 적군한테 도리는 무슨 도리인가. 제군의 지갑이나 배부르게 채워라. 제군이 풍요로워야 병졸들한테 고기 한 점이라도 떨어진다. 여차하면 부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 적군에게 뇌물을 받으라고 권장하는 상관은 또 처음이겠지. 연대장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이건 총사령관의 명령이기도 하다.” “공작 전하께서…….” “아울러서 공작은 이렇게 명령했다. 각 연대장 별로 왕국에게 얼마나 많이 뇌물을 뜯어냈느냐에 따라서 공적을 평가하겠노라고.” 내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연대장들은 화들짝 놀랐다. “이건 놀이가 아니다! 전쟁의 일환이다! 사르데냐 왕국에 돈이 적어질수록 장차 제군이 맞이할 적군의 숫자도 그만큼 적어진다! 그대들은 만에 하나라도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뇌물을 받아내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며, 명을 받듭니다!” 연대장들이 군례를 올렸다. “알겠으면 냉큼 나갈 것이지 뭣들 하는가! 행여라도 쥐꼬리만한 뇌물밖에 받지 못한 연대장은 총사령관이 아니라 내 손에 경을 칠 게야!” “예, 옙!” 용병대장들은 헐레벌떡 막사에서 뛰어나갔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디 후작에겐 미안하게 되었다. 아마 나를 설득시킬 수 없겠으니 휘하 연대장들을 꼬시려고 시도해보겠지. 노력이 가상하다마는,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포기해라. 포기하면 편하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이 대체 어느 정도의 영토를 요구한 것인지, 그에 대해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74 양웅(兩雄)의 조우 =========================================================================                        아니나 다를까. 후작은 뇌물 공세를 퍼부었다. 금화 삼천 장이나 오천 장은 우스웠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연대장들이 뻘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저어, 궁중백 각하. 이게 오늘 결산입니다.” 하고 보고하러 들어왔다. 나는 그날마다 가장 금화를 많이 벌어온 대장에게는 칭찬을, 가장 소득이 적은 대장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둔하기는! 준다고 해서 그냥 덥썩 받아먹으니 밀당이 없지 않느냐!” “애인은 수두룩하게 꼬셔본 주제에 정작 늙은 후작 한 명을 제대로 구워삶지 못하는고. 얼간이 같으니라고! 내일도 이것밖에 못해오면 그날로 지옥을 맛볼 줄 알거라.” “지금 본인이랑 장난하는가! 도대체 금화 일천 장으로 뭘 어떻게 해먹으라는 게냐! 애새끼 용돈도 이것보다는 많을 것이다!” 나흘이 지나자 용병대장들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상관의 허락 아래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지극히 기묘하고 이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용병대장들은 야차처럼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눈알이 시뻘개져서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오늘은 오천을 벌었습니다, 저는 삼천입니다, 하고 내게 보고해왔다. “음.” 나는 무척이나 흡족했다. “좋다. 이제 자네들에게 본인의 비법을 전수해도 될 듯싶다.” “비법……입니까?” “본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단탈리안이다. 일찍이 서열 제71위에서 출세한 마왕이 바로 나다. 트레비아의 강물로 귓구멍을 잘 씻어내고 경청하도록.” 그리고 단탈리안표 특별강좌가 막사에서 비밀리에 열렸다. “자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자네는 진짜 정보를 흘려라. 모두가 협조적으로 나오면 후작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겠는고. 후작 본인이 '음, 저 자는 설득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꽤 확실하게 포섭했다'라고 착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 정보를 유포함으로써 도리어 상대방에게 신뢰를 얻는 방법. “정보는 항상 반쯤만 확실해야 한다. 보급선이 이날 이때 지나가고 있습니다, 라고 알려준다고 해서 정말 그 보급선이 그날 그때 지나가면 안 된다. 한 시간 정도 일찍. 혹은 한 시간 정도 늦게 말해주어야지.” “어……각하.”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녀는 공책을 들고 아예 깃펜으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받아적고 있었다. “저기. 그러면 후작이 저희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정반대다. 후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차피 의심은 끝까지 가지고 간다. 이럴 때는 오히려 실수를 해주어야 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음, 만약 이 사람이 나를 정말로 속이고 싶었더라면 완벽하게 연극을 펼쳤을 터인데, 살짝 어수룩한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날 속이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고 안심하게 만드는 게다.” 의도적으로 실수를 섞어넣음으로써 도리어 상대방에게 안심을 주는 방법. “상대방이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쪽이 적당히 실수하면 실수할수록 후작은 기고만장하게 나오겠지. 돈을 그만큼이나 줬는데도 이것밖에 못하겠느냐고 말이야.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렇게 단단히 착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착각함으로써 결국 의심을 불식시키는 방법. “알아들었는가, 제군들.” “예. 각하.” 세 시간에 걸쳐 특별강좌가 끝났다. 용병대장들은 어째서인지 어마어마하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라우라를 바라볼 때 내보이는 존경심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졌다. 라우라를 향한 시선이 ‘우리 총사령관 전하께선 정말로 대단해!’였다면, 나를 향한 시선은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뭐라고 할까. 그래. 정말로 대단한 분이었네……’ 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상관인가. 어느 쪽이든 존경심은 존경심이었다.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제군은 이제부터 나의 제자다. 나는 아무나 제자로 삼지 않는다.” “…….” “나의 기준은 엄격하며,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네들은 사르데냐 왕실의 골수까지 빨아먹고 십이지장은 회 쳐 먹어야 할 것이다.” 용병대장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심으로 제군의 건투를 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각하!” 그들은 필사의 각오를 온몸에 둘렀다. 수능을 앞둔 재수생의 얼굴이 이럴까 싶었다. 연대장들이 후작을 상대로 세기의 사기극을 벌이는 동안, 우리 제국군은 병참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병참선은 노바라-파비아-피아센차-파르마로 이어졌다. 네 개의 기지는 전부 강으로 이어져 있었다. 강물을 젖줄로 삼아 제국군은 튼튼하고 원활한 병참로를 완성했다. 도시 하나에 인근 마을들을 깔끔하게 털어먹은지라,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부족하다 싶은 물자는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돈을 내고 구입했다. 물론 현지인들은 침략군인 우리와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약탈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얌전히 물건을 팔 것이냐, 하고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건네주니까 전원이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사실 돈으로 물자를 구입하는 우리 제국군은 무척 신사적이었다. 다른 한편, 제국 본토에서는 끊임없이 외교전을 이어나갔다. ─ 아국은 사르데냐군에 압승을 거두었으나 마땅히 승자로서 관용을 베풀고자 한다. ─ 사르데냐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에게 본래 물려졌어야 할 영지, 즉 피아센차-파르마 공작령을 돌려달라. 더불어서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밀라노 공작령을 파르네세 가문에 포함시키도록 한다. ─ 이상의 조건만 만족되면 아국은 어떠한 위해도 사르데냐 왕실에게, 또한 사르데냐에서 살아가는 신민에게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조한다. 아국은 전쟁의 주범인 파비아를 제외하고 어떠한 영지에서도 약탈을 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진심이다. 외교전을 주도하는 사람은 가미긴과 라피스 그리고 이바르였다. 라피스와 이바르는 내 의사를 충실하게 전해주었고, 그걸 바탕으로 가미긴이 외교단을 전두에서 지휘했다. 내가 각본과 대본을 짜고 그녀들이 실행에 옮겼다. 멋들어진 팀워크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르데냐의 귀족들이 주춤했다. 가만히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니, 굳이 전쟁에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안 그래도 밀라노 공작은 거세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 파비아 백작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군사요충지인 노바라가 함락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으며, 심지어 피렌체 대공이 코앞에서 패퇴하는데도 수수방관했다. 사정을 모르는 귀족들이 보기에는 뭐 이런 천하의 상놈이 다 있나 싶겠지. 그런데 마침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원하는 것도 밀라노 공작령 하나뿐이다. 다른 영지는 침범할 계획도 없고 약탈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또 실제로도 그러고 있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냥 밀라노 공작만 치워버리면……?' 하고 마음이 솔깃해질 법했다. 파비아 백작이 죽은 것도, 노바라가 넘어간 것도, 피렌체 대공이 패배한 것도 전부 밀라노 공작의 책임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져야지 않겠는가. 그런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당연히 밀라노 공작은 길길이 날뛰겠지. 밀라노를 지배하는 스포르차 가문은 유서가 깊었다. 도마뱀 꼬리 잘라내듯이 깔끔하게 치워버릴 수 있는 버림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밀라노 공작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공작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차가워졌다.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하다못해 나가서 싸워라도 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공작은 ‘조금만 더 버티면 용병들이 알아서 해산할 것이다!’라고 반박하겠지. 그렇다. 내가 노리는 지점이 여기다. 바로 여기서 사르데냐 왕국은 분열한다. “단탈리안 궁중백……!” 병참기지를 요새화시킨 지 한 달 가까이 흐른 무렵. 로디 후작이 콧구멍에서 씩씩 김을 불어대며 내 막사에 들이닥쳤다. 후작은 목덜미는 물론이고 훤히 벗겨진 이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단단히 분노한 게 확실했다. “어서 오시지요, 후작.” “나를 속였구려! 용병단을 갖고서 나를 우롱했어!” 내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대머리 후작께서는 드디어 한 달 만에 자신이 인형극에서 멋지게 춤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용병단이라니요? 후작, 설마 개인적으로 우리 용병대장들과 접촉하셨습니까?” “시치미떼지 마시오!” 시치미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맞습니다, 라고 선선하게 인정해버리면 어쩌겠는가. 이쪽이 불리해질 만한 증언을 알아서 나불거려줄 의리는 없었다. “이제 궁중백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았소. 아주 잘!” 로디 후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후작의 주름살이,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하나하나 전부 셀 수 있었다. “궁중백은 뼛속 깊이 거짓밖에 모르는 자요. 타인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소! 그러면서 입으로는 대륙의 평화라느니 양국의 우호라느니, 좋을 대로 무엇이든 지껄이지……당신을 경멸하오, 단탈리안 궁중백!” 나는 다리를 꼬고 그 위에 깍짓손을 올렸다. “농락하는 자, 배신하는 자, 우롱하는 자입니까. 귀가 가렵지도 않군요.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떠들어주십시오.” “뭐…….” “당신은 사르데냐의 전권대사입니다. 사르데냐 천만 신민의 운명이 당신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제국을 대표합니다. 제가 경멸받든 말든 제국이 안녕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로디 후작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기세로 밀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르바토스도, 아가레스도, 심지어 바알마저 나한테 기세를 빼앗지는 못했다. 그들이 못한 것을 당신에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후작. “당신이 용병단에 무슨 장난을 벌였는지 저는 관심없습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은 말입니다, 후작.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쟁이 계속되리라는 것뿐입니다.” “…….”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날도 후작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갔다. 제법 많은 양의 금화를 허공에 날려버리게 되어서 그런지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사르데냐 왕실이 우리 용병단에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널리 발표했다. 제국군이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제하는 등 지극히 '신사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데, 왕국군이 뇌물과 같이 '기사도적이지 못한' 방법을 동원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현했다. 사르데냐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폭탄이 터졌다. 밀라노 공작이 여태까지 농성전을 고집한 까닭이 무엇인가. 제국의 용병단에 급료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사르데냐 왕실에서 로디 후작한테 명령해서 바로 그 부족하다던 금화를 뿌렸다. 밀라노 공작은 왕실이 대사를 그르쳤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자신이 내세운 대전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밀라노 공작이 도리어 소리를 높였다. 왕실도 어이가 없겠지. 파비아 백작의 죽음과 피렌체 대공의 패배를 수수방관했다며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작을 책했다. 당장 출진해서 불명예를 회복하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귀족들은 즉각 세 개의 당파로 갈라졌다. 밀라노 공작을 위시하여, 비난의 화살을 왕실로 돌리는 파벌. 왕실을 중심으로, 밀라노 공작한테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파벌. 마지막으로 쓰잘데기 없는 싸움은 그만두고 전쟁이나 준비하자는 파벌. 여기에는 피렌체 대공이 속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제국군은 한 달 동안 병참기지를 완성시키고, 외교전을 지속하고, 더불어서 적군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용병대장들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챙긴 것은 덤이었다. “자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사르데냐의 강물이 유구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붉은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며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다리느라 슬슬 지치고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엘리자베트.” 유일하게 나의 제국에 대적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부르며.   00375 양웅(兩雄)의 조우 =========================================================================                        과연 여신께서는 천한 종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다음날,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외교 성명서를 발표했다. 외교문서에는 무미건조한 단어가 나열되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이다 못해 지루해빠진 문장이 나불나불 기어다녔다. 쓸데없는 기름기를 싹 걷어내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내용만 골라내면, 대체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천하의 개상놈이다”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었다. 세상사란 의외로 간결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온갖 언어와 장식물을 총동원해서 핵심을 베베 꼴까. 아마 의도적으로 타인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드려는 것이겠지. 근성이 썩어빠졌다. 자연미인보다 화장미인이 더 취급받는 세상에 가볍게 회한과 슬픔을 느꼈지만, 아무래도 이 사태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성명서는 별다른 비난 없이 타국에 수용되었다. 라우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의외로군. 공화국은 주변국들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만.” “우리가 너무 압도적으로 승리해버린 탓입니다. 주변국에서는 결코 우리가 압승하기를 원하지 않겠지요.” 나는 라우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였다. 우리는 서로 알몸인 채로 침대를 뒹굴고 있었다. 거의 매일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취침했다. 라우라와 내가 연인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해도 곤란하다. 뭐, 주변국들 생각은 뻔하지요.” “그렇군. 공화국은 텀터기를 쓴 것인가.” 라우라가 내 머리를 빗질하듯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좋게 말하면 분위기를 읽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스스로 광대짓을 자처하는 겁니다. 주변국들에서 차마 대놓고 하지 못할 말을 공화국에서 대신 말해준다. 나머지 나라들은 이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적당히 동조 의사를 암시한다……음.” 라우라가 내 입안에 산딸기를 넣어주었다. 파비아 백작과 기사단장, 부단장의 머리에 집어넣으려고 채집한 산딸기였다. 너무 많이 따버려서 상당히 많은 양이 남아버렸다. “뭐. 대충 그런 거죠.” “결국 제국을 멈춰 세우자고 암묵적으로 외교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주군은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쟁을 멈춰봤자 공화국에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사르데냐 왕실한테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청할 것이고, 이걸 거부할 만큼 사르데냐는 입장이 좋지 않지요…….” “호오. 공화국은 들러리 역할만 잔뜩 하고 버림패가 되겠군.” 내가 긍정의 의미로 라우라의 갈비뼈를 문질거렸다. 라우라가 꺄륵 웃었다. 참고로 라우라는 간지럽히기에 겁나게 약했다. 성감대랑 간지럼타는 거랑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공화국 입장에서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갑니까, 라우라.” “으응.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애쓰겠지.” “전쟁 중에 이루어지는 협상에서 유리해지려면요?” 라우라가 턱끝을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승리로군……. 공화국은 전투에서 적어도 한 번쯤 승리하길 원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에 첩자를 심어두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베네치아의 원조를 받으면서 용병을 몰래 소집하고 있더군요. 세 달 전부터 말입니다.” “세 달 전이라고……? 그때는 우리가 아직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라우라는 놀란 목소리였다. “하다못해 외교전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다. 공화국이 무슨 수로 이쪽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말인가.” “헬베티카 연방이 우리에게 복속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폴리투니아와 휴전하고, 튜튼과 협상하고, 프랑크는 이미 해치웠고, 바타비아는 아닙니다. 남은 선택지는 사르데냐뿐. 간단한 논리입니다.” 어쩐지 우스워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간단한 논리를 간파할 정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흐, 정말 기대를 배반시키지 않는군요. 언제나 저를 즐겁게 해줍니다.” “…….” 라우라가 내 얼굴을 어딘지 흐릿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저기……주군.” “음? 뭡니까?” “그러니까…….” 라우라가 말끝을 늘어트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공화국이 함부로 참전하기는 어려울 터인데. 엘리자베트 통령이 전쟁에 끼어들면, 아국의 마왕군은 당장 공화국으로 침공할 것이다. 양면전쟁이 되어버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왕군은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마족을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엘리자베트 통령이 바라는 바다. 그러면 이번 전쟁이 마족과 인간종의 전면전으로 변질되어버린다. 여태까지 잠자코 방관하고 있는 주변국들도 당장 들고 일어서겠지. “제2차 국화전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귀족들이 벌이는 정치전이어야 합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쳐들어올 테면 쳐들어와봐라. 우리는 멸망하겠지만, 그 대가로 제국도 곤욕을 치를 것이다…….”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정말로 간덩어리가 배밖으로 튀어나온 여인이 아니고 뭡니까. 공화국은 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피와 땀을 흘려서 만들어낸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그토록 소중한 나라를 마치 체스판 위의 장기말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훌륭하군요.” “…….” 라우라가 또 다시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 걱정이 아닌가. 우려? 착잡함? ……어느 쪽이든 사람의 감정은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서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대신에 라우라의 살에 코를 파묻었다. 나는 자신이 있다. 준비도 해두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틀림없이 올해 안에, 길어도 내년 안에 몰락한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였다. 정확하게 얘기해서 참전은 아니었다. 베네치아를 비롯해서 몇몇 도시들이 공화국에 “부디 우리 도시를 보호해주시오” 하고 요청했다. 공화국은 단지 요청을 받아들여 베네치아에 진주했다. 그 숫자는 15,000명. 아나톨리아와 폴리투니아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시 몇 개를 지키는 데 필요한 용병치고는 지나치게 많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이럴 때 쓰라고 발명된 격언이겠지. 아나톨리아 제국의 용병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프랑크 제국이 공중되어버린 지금, 온 대륙을 통을어서 제국을 자처하는 국가는 두 개밖에 안 남았다.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과 바다 건너의 아나톨리아 제국……. 이 이상으로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강대해지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가. 아니면 엘리자베트가 뒤에서 부추겼는가. 아마도 후자이겠지. 역시 엘리자베트는 재밌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법을 항상 하나쯤은 들고왔다. “타국이 전쟁에 간섭하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후작!” 물론 내 개인적으로 공화국이 참전할 걸 예측했다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분노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당장 로디 후작을 소환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참전이 아니오. 단지 베네치아 의회가 만약의 사태를 우려해서…….” “참전이 아니라고요? 하. 그럼 피아센차-파르마의 의회가 우리 제국군에 주둔을 요청해도 전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겠습니다?” “그, 그것은…….” “어디서 다섯 살짜리 애송이도 웃어버릴 변명을 들고 오는 겁니까!” 로디 후작이 땀을 뻘뻘 흘렸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후작과 면담하면서 단 한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모욕을 당했을 때도 차분하게,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도 냉정하게 대화했다. 언젠가 공화국이 참전할 순간을 위해서, 하나의 카드로 아껴두었다. “귀국에서는 우리에게 기다려달라 부탁했습니다! 협상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 후작, 당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수작을 뒤에서 꾸미고 있었습니까? 이것이 귀국에 대한 우리의 존중을 보답하는 방식입니까?”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 궁중백.” 로디 후작은 처음 목격하는 내 분노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새였다. 이 아저씨도 참 불쌍했다. 사르데냐 왕실에서는 어떻게든 타협을 끌어내라고 닥달하지, 밀라노 공작은 뭐 쓸데없이 나서서 대국을 망쳤냐고 욕하지, 피렌체 대공은 괜히 외교전으로 어떻게 해보려 들지 말고 전투나 대비하라고 일갈하지……. 그리고 나한테 불려와서는 왜 이딴 식으로 사냐고 절찬리에 비난을 받고 있다. 가엽게도. 아마 로디 후작은 지금 너무 억울한 나머지 혀 깨물고 자살하고 싶을 거다. 외교대사만큼 등골이 휘어지는 역할이 없다. 깽판은 다른 애들이 놓는데 책임은 자기가 몽땅 짊어져야 하거든. 참고로 나는 안 그래도 불쌍한 사람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것이 취미다. “파르네세 가문과 귀국 사이의 결투였습니다. 알겠습니까? 제3자가 끼어들어서 더럽혀도 되는 난투장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궁중백의 말이 옳소이다…….” “결투에서 패배를 했으면 적당히 승복해야 할 것이지, 이제 자신들이 못하겠으니 타국을 끌어들이겠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귀국은 뻔뻔하고, 수치심을 모르며, 국가 간의 기본적인 존중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꽝, 하고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탁상이 넘어지면서 그 위에 놓여 있던 포도주병이 산산이 깨졌다. 후작이 움찔했다. 무척이나 값비싼 포도주였지만 상관없었다. 일부러 깨트리려고 올려둔 물건이었다. “후작. 이걸 보십시오. 눈 똑바로 뜨고 어디 봐보십시오!”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내 그림자에서 거무튀튀한 가스와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곧장 형태를 이루었다. 죽음의 기사 여섯 마리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나와 후작을 둘러쌌다. “구, 궁중백. 이건…….” “예에. 죽음의 기사입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제국 제2급 무사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백 명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후작의 안색이 헬쓱해졌다. 사실은 백 명이 채 안 되지만. “이백 명으로 구성된 최상급 기사단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고요하게 적진에 침투하여 적 지휘관의 수급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전력인지 알겠습니까.” “…….” “이 대단한 전력을, 저는 귀국을 상대하면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는 바로 후작 옆을 스쳐서 내팽개쳐졌다. “왜, 제가 언제라도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전력조차 사용하지 못한 멍청이라서 그랬습니까? 이들이 전쟁터에서 얼마나 유용한지 몰라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 “왜냐하면 이들은 마족이며, 저는 귀국과 오로지 신사 대 신사의 결투만을 벌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귀국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후작, 당신을 인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마왕인 내가 마족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후작은 점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땅바닥에 코끝이 닿을 기세였다. “그걸 당신은, 귀국은, 제 존중과 신뢰를 이다지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정말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 “공허한 사과는 집어치우십시오!” 내가 후작에게 바싹 다가갔다. 눈을 치켜세우고 후작을 노려보았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만장일치로 올해의 남우주연상을 갖다 바치리라. “만약에 공화국 군대가 베네치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일 경우!” “…….” “우리 제국군은 더 이상 어떠한 신사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후작, 당신이 그토록 소중하다고 노래부른 민중이 어디까지 처참해질 수 있는지 구경해보시지요!” 후작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궁중백, 제발……이 소인의 부탁이오. 제발 백성들만큼은…….”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으면 공화국 군대를 붙들어두십시오!” 내가 후작의 몸을 손으로 거칠게 밀었다. 축객령이었다. “썩 꺼지십시오!” 후작은 오늘도 기력이 빠진 모습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회사에서 핍박받은 아버지의 형상과 같았다. 나는 후작이 나간 걸 확인하고 서랍에서 새 포도주를 꺼냈다. 비밀이지만, 저기 탁자에서 굴러떨어져 깨진 유리병에는 싸구려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미리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다. 사람이 마실 것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래 봬도 나는 기본적인 예의에 충실한 남자다. “음.” 포도주를 유리잔에 따랐다. 아름다운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제 엘리자베트는 깨나 고생할 거다. 공화국을 내버려두고 사르데냐까지 왔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원래 집 나가면 고생이다. 안 그런가, 엘리제?   00376 양웅(兩雄)의 조우 =========================================================================                        * * * “통령 각하. 로디 후작이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음. 들어오시라 전하도록.” 엘리자베트가 통령이 탁자에 놓인 서류를 치웠다. 군사지도, 보고서, 정책현황 등, 온갖 잡다한 물건이 탁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비서격으로 따라온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피식 웃었다.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청소가 아니라 보안상의 안전이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엔 기밀서류도 많아.”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군?” “저는 제 경험을 신뢰할 뿐입니다, 각하.” 쿠르츠는 엘리자베트만큼 완벽한 인간을 보지 못했지만, 딱 두 가지 분야에 있어서 통령은 완벽하게 무능했다. 청소와 요리였다. 엘리자베트가 하루라도 머물다 지나간 곳은 태풍이 휩쓸고 간 지역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으며, 엘리자베트가 손끝이라도 간섭한 요리는 단맛이 쓴맛이 되고 매운맛이 신맛이 되는 가히 창조주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됐다. 얼른 후작을 모시기나 해라.” 엘리자베트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청소를 포기했는지 손을 털었다. 사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고도로 훈련된 첩자조차 통령의 책상에서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골라내기란 불가능했다. 저건 그냥 혼돈의 카오스였으니까. 잠시 뒤, 로디 후작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합스부르크에 정의와 명예가 함께하기를.” “여신께서 사르데냐를 영원토록 축복하시기를. 반갑소, 후작.” 엘리자베트가 일어서서 후작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각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후작과 만나는 일이라면 새벽 세 시에도 반갑게 환영하겠소. 본인은 후작의 어깨에 많은 생명이 실려 있음을 알고 있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지.” 엘리자베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트는 슬쩍 후작의 이마를 훔쳐보았다. 후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머리가 점점 더 후퇴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후작의 대머리는 눈에 띄게 확산되었는데,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바로 그 생명 때문에 급히 찾아왔습니다. ……통령 각하.” “음.” 로디 후작이 조심스럽게 쿠르츠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쿠르츠는 문가에서 경호원처럼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슐라이어마허 대장. 잠시 후작과 단 둘이서 얘기하고 싶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맥주나 마시고 있게나.” 쿠르츠가 상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부를 받들지요.” 쿠르츠는 집무실을 나갔다. 쿵, 하고 방문이 닫혔다. “안심하시오. 후작. 이 방에는 메모리아 마법이 설치되어 있지 않소.” 엘리자베트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나에게 신앙 고백을 하여도 좋소.” “각하께서 특정한 신을 섬기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을 한분 섬기오. 바로 국가라는 이름의 신이지. 강력하고, 눈으로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웬만한 인간의 소원은 들어줄 수 있다오.” 엘리자베트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깍지손을 책상에 올렸다. “귀국에 지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종류의 신이기도 하지.” “……각하.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엘리자베트가 가만히 후작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사르데냐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이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각하. 제 개인적인 부탁에 불과합니다.” 로디 후작이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꼴불견사납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충분히 인지하는 모양이었다. 특이하군. 엘리자베트는 흥미가 생겼다. 후작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약간 둔한 면모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외교판에서 파트너로 써먹기에 이상적이라는 소리였으므로. 그런 후작이 개인적인 부탁 따위를 운운했다…….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흥미롭구려. 본인은 지금까지 후작한테 '개인'은 별로 중요한 가치관이 아니라고 생각했소.” “물론 소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백성입니다.” “까딱하면 반역죄가 될 수도 있소, 후작.” 엘리자베트가 싱긋 웃었다. 후작은 이것이 왕국의 공식적인 제안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부탁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현재 왕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백성들을 위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실언했습니다. 소인은 단지 국왕 전하를 위해 견마지로할 따름입니다.” “이해하오.” 너무 쉽다, 하고 엘리자베트가 생각했다. 단 한 번 함정을 설치했을 뿐인데 후작은 간단하게 걸려들었다. 예전부터 이러했다. 엘리자베트는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상대방을 이용하고 농락할 수 있었다……. “제국의 단탈리안 궁중백입니다.” “흐음.” 그 이름을 듣자 엘리자베트는 눈꼬리가 약간, 아주 약간 올라갔다. “궁중백이 소인에게 경고했습니다. 통령 각하의 군대가 여기 베네치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무차별적으로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육하겠노라고…….” “신이시여. 그게 정말이오?” 엘리자베트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움직여야겠군. “각하. 궁중백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니, 제정신이지만 미쳐 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그런 자에게 무고한 백성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으음. 일이 곤란하게 진행되고 있구려.” 아니었다. 궁중백은 제정신이지만 미친 것이 아니라, 미쳤지만 제정신인 것이었다. 그 두 개는 아주 달랐다.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미천한 자가 부탁드립니다. 각하, 제발 민중을 생각하여…….” “후작. 그대의 마음을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아도 좋소.” 엘리자베트가 오른손을 슬쩍 들어 제지했다. “인민은 곧 국가. 이미 본인은 후작에게 동의하고 있소.” “하, 하오면…….” “문제는 언제나 정치라오.” 엘리자베트가 깍지손에 턱을 올렸다.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 공화국은 귀국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여기까지 온 것이오. 이제 와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귀국과 한 약속을 어기게 되오. 귀국은 아국의 유일무이한 우방이자 동맹. 후작, 본인은 친구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소.” “……소인이 국왕 전하를 설득하겠습니다.” 후작이 결연하게 말했다. 죽음을 각오한 눈동자였다. “애당초 국왕 전하께서도 전쟁을 달갑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진심을 다해 설득하면 분명히 알아주실 것입니다. 무엇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인지…….” “흐음.” “제국군의 가증스러운 술책으로 인하여 아국은 현재 세 개의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힘을 합쳐도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어찌 분열된 채로 이기겠나이까. 지금은 한 발자국 양도해서 평화를 이룩해야 할 때입니다. 소인은 그리 확신합니다.” 엘리자베트가 찬찬히 후작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심이 느껴졌다. “허나, 여기서 물러서면 밀라노 공작령을 내주어야 할 터요. 공작이 동의하겠소?” “……꼬리를 잘라내야만 살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희생은 필요한 법입니다.” 엘리자베트는 다소 감탄했다. 후작은 정확하게 전세를 판단하고 있었다. 직감인지 본능인지 몰라도, 이대로 제국군과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피렌체 대공이나 밀라노 공작에 비교하면 훨씬 더 판단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밀라노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을 꼬리라고 단언했다. 배짱까지 두둑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 공작을 숙청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오.” “공작은 안 그래도 강하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후작이 성공하기를 기원하겠소.” 엘리자베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후작은 깊이 감명하여 안색이 밝아졌다. “각하……!” “착각하면 안 되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소. 길어봤자 사흘. 그 안에 그대의 군주를 설득해야 할 것이오. 사흘 뒤에도 소식이 없다면, 본인은 주저하지 않고 군을 움직일 거요.” “충분합니다.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두 사람이 단단하게 손을 마주잡았다. 후작이 한결 가벼워진 기색으로, 그러면서도 비장의 각오를 두르고 집무실을 나갔다. 후작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엘리자베트가 그를 불렀다. “후작. 공화국 군대가 소모하는 식량과 전비가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보고하시오.” “통령 각하……?” “외국의 군대를 유지하느라 거금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군주는 없소. 조금이라도 그대의 국왕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라도 갚겠습니다.” 후작은 엘리자베트를 향해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후작이 집무실을 나가고 얼마 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교대하듯이 들어왔다. 쿠르츠가 건달처럼 싱글벙글거렸다. “밀담은 즐거우셨습니까, 각하. 대머리가 취향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메모리아를 사르데냐 왕실에 보내라.” 쿠르츠의 입가가 히죽 휘어졌다. “괜찮겠습니까? 후작은 십중팔구 사형당할 겁니다.” “그리고 사르데냐는 다시금 하나가 되겠지.” 쿠르츠에게 축객령을 내릴 때,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말했다. '맥주나 마시고 오게나.' 둘 사이에서 맥주는 메모리아 마법을 뜻하는 은어였다. 통령과 후작이 나눈 대화는 집무실에 몰래 설치된 메모리아 아티팩트에 의해 남김없이 기록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손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왕실에서 허락하지도 않은 회담을 독단적으로 진행. 자국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은연중에 비난했고, 밀라노 공작을 숙청하자고까지 얘기했다. 단순한 사형이 아니라 극형에 처해지겠지.” “사르데냐 왕실에 대한 선물입니까?” “아니.”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르데냐에 필요한 것은 희생양이다. 패전을 책임지는 사람이, 실패의 원흉이라 지목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로디 후작이라는 말씀이군요.” “아아. 후작은 일부러 제국군의 용병대에 뇌물을 바침으로써 밀라노 공작의 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왕실을 배신하고 제국군을 지지했으며, 우리 공화국군이 움직이지 않도록 공작까지 펼쳤다. 이보다 희생양에 제격인 사내가 없겠지.” 엘리자베트가 일어나서 창가에 섰다. 그녀는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작은 반역자이자 배신자로 전락한다. 이로써 왕실은 밀라노 공작에게 화해를 청할 수 있고, 밀라노 공작도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된다. 피렌체 대공의 위신도 세워지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왕국이 약해서가 아니다. 로디 후작이 내통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후작이 건물을 걸어나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국왕을 만나서 설득하려는 듯 걸음걸이가 바빴다. “게다가 후작은 국왕과 만나서 우리 공화국군을 잔뜩 흉볼 거다. 전비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다느니, 식량이 거덜난다느니.” “국왕은 우리가 보낸 메모리아를 이미 감상한 상태겠군요. 각하.” “그렇다. 국왕의 눈에 후작은 단순히 공화국을 중상모략하는 배신자로 비추겠지.” 쿠르츠가 크게 웃었다. “완벽합니다, 각하. 당장 메모리아를 전송하겠습니다.” “수고하도록.” 쿠르츠가 집무실에서 나간 이후로도, 엘리자베트는 한동안 조용히 창가에 섰다. 그녀는 창문 너머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꾸욱 쥐었다. “간단히 져주지 않겠다. 단탈리안…….” 다음날. 국왕을 접견하러 왕궁에 등청한 로디 후작은 근위병들에 의해서 체포. 왕궁의 복도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포박당했다. 후작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런가. 그랬는가.” 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고위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반역죄가 적용되어, 이례적으로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그날 처형되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 없냐는 질문에 후작은 단지 침묵했다. 대륙력 1512년 8월. 엘리자베트가 통솔하는 공화국군 일만삼천――진군.   00377 양웅(兩雄)의 조우 =========================================================================                        * * * 후작이 죽었다. 급편으로 소식이 전달되었다. 국가반역죄, 왕실능욕죄, 신성모독죄……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덤터기씌울 수 있는 죄목 중에서 악질적인 것은 죄다 붙었다. 충신의 최후가 이런 것인가. 끔찍한 농담이로군. 더불어서 사르데냐 왕실은 평범한 사형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극형을 집행했다. 제레미나 데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이 세계는 극형과 고문이 변태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후작은 살갗이 벗겨진 다음 온 핏줄과 근육이 난도질당했고, 뼈는 잘게 부숴버린 다음 개먹이로 던져졌다. 발표에 따르면 후작은 우리 제국과 내통했다고 한다.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의 작전을 몰래 입수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것도 후작, 왕실을 속여서 우리에게 금화를 뿌린 장본인도 후작, 이라고 하던가.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잘 만들어진 희생양이었다. 나는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었다. 후작은 사지(死地)로 걸어들어가기 직전, 나에게 급히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궁중백에게 내 신실함을 담아 보내오. 궁중백이 나에게 요구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오. 아시다시피 우리가 건너야 할 산맥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으며, 베네치아에 펼쳐진 첫 번째 산맥을 생각보다 힘들이지 않고 건넜소. 이제 나는 마지막 산을 등정하려고 하오.’ ‘편지를 보내는 까닭은 부디 내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오. 나는 궁중백이 약속에 엄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지만 때때로 엄격함과 잔혹함 사이의 경계는 애매하오. 그 경계를 가로짓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나누는 약속으로 인하여 타인이 희생되는가 희생되지 않는가, 그뿐이오…….’ ‘이 편지에 내 반지를 붙여두오. 나의 가문과 직위를 상징하는 반지요.’ ‘국왕 전하께서 손수 내려주신 가보라오. 내 긍지와 피가 이 작은 물건에 집약되어 있소. 물론 궁중백은 그런 추상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을 터이니, 이 반지가 있어야만 우리 가문의 금고를 열 수 있음을 알려두겠소. 사실상 전재산이지. 이제 신뢰가 조금 생기지 않겠소? 농담이외다.’ ‘궁중백. 사흘만 기다려주시오. 딱 사흘이외다. 우리의 약속에 의해 타인이, 하물며 무고한 약자가 희생되면 안 되오. 나는 두 번째 산맥을 등정한 다음 궁중백에게 반지를 되돌려받으러 방문하겠소……. 아스카니오 주노 데 로디.’ 편지에는 확실히 금반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볼품없고 낡은 반지였다. 이게 당최 황금으로 만들었는지 놋쇠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색깔이 누리끼리했다. 아마 후작 가문의 창고에는 값비싼 물건이 하나도 없을 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틀렸습니다, 후작. 저는 추상적인 걸 아주 좋아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내가 범인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베네치아에 틀어박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공화국군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용병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후작은 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후작이 엘리자베트에게 갈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트가 후작의 이용가치를 알아보리라는 것도……. 다시 말해, 후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엘리자베트가 아니었다. 나였다. “주군. 베네치아에서 공화국군이 움직였다는 정보다.” 막사에 라우라가 들어왔다. 가볍게 검술이라도 연습했는지 몸이 땀으로 젖었다. “병력은 일만이천에서 일만오천 사이라고 한다. 피렌체 대공이 다시 용병을 소집해서 일만오천까지 키웠으니, 다 합치면 삼만 대군에 이른다. 둘이 합류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시간에 여유가 얼마나 있습니까?” “음.” 라우라가 망토와 흉갑을 벗어던졌다. 하녀들이 라우라에게 달라붙었다. 미리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와서 하녀 세 명이 라우라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저 하녀들은 모두 벙어리에다 귀머거리였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일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군. 빠듯하게 나흘까지는 여유가 잡힌다.” “이틀만 더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 라우라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명령조가 아닌 걸 보니 개인적인 이유로군.”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일이지요.” “좋다. 우리는 이틀 뒤에 움직인다.” 라우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틀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부탁했는지 이유는 묻지 않았다. 가만히 주둔하는 이틀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공화국의 개입을 비난했다. 주변국들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입을 다물고만 있기 어려워졌다. 주변국은 여태까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은 타국의 전쟁에, 그것도 '공작 가문 복권'이라는 지극히 사사로운 명분의 전쟁에 마음대로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도가 지나쳤다. 주변국에서 비난이 쇄도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위시로 하여 프랑크, 튜튼, 폴리투니아, 칼마르가 차례대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외국에 대한 간섭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루돌프 황제는 최종 권고를 내렸다. ─ 사르데냐 왕국과 공화국을 자칭하는 반역도당에게 최후로 경고하는 바이다. 짐은 그대들에게 칼 대신 악수를 취할 기회를 몇 번이나 주었다. 이제 짐은 더 이상 물러서지도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통보할 따름이다. ─ 밀라노 공작령, 피아센차-파르마 공작령을 파르네세 가문의 영지에 포함시킨다. 아울러 사르데냐 왕국과 반역도당은 즉시 모든 인적·물적 교류를 중지한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대들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도 오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이런저런 외교적 공방이 오가자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으므로 라우라는 군대를 움직였다. 피아센차-파르마에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겨두고, 우리 제국군은 사르데냐 중부를 향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피렌체 대공이 다스리는 대도시 피렌체였다. “사흘. 확실히 기다렸습니다.” 이만오천 명에 이르는 군사가 길게 행렬을 이루어 진군했다. 그 광경을 언덕에서 지켜보았다. 내 왼손에는 후작이 남긴 금반지가 끼어 있었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휴전은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침묵한 전쟁이 재개되었다. * * * 사르데냐 왕국군은 현재 총사령관이 세 명 있었다. 피렌체 대공, 밀라노 공작, 엘리자베트 통령이 이에 해당했다. 명목상으로는 국왕의 대리장군인 피렌체 대공이 군권을 잡아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밀라노 공작은 순순히 대공을 따르지 않았으며, 엘리자베트 통령에 이르러서는 아예 한 국가의 통수권자였다. 어느 쪽이든 얌전히 명령을 따를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 대공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최근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나머지 대공은 거의 매일마다 위염에 시달렸다. 군대 하나에 총사령관급이 세 명이라니? 농담이라면 웃을 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정색하지도 못했다. 세 사람은 지금 수정구를 통해서 회의하고 있었다. 사실 회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안녕하시오.” “반갑소.” “명성은 일찍이 들었소.” 회의가 시작하고 딱 세 마디밖에 발언되지 않았다. 대공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부관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대공 전하. 제국이 움직였습니다.” “드디어…….” 무심코 대공이 한숨 비슷한 한탄을 흘려보냈다. 공작과 통령도 관심이 갔는지 슬쩍 부관을 쳐다보았다. “목적지는 어디인가.” “타루스 강을 따라서 남하하고 있습니다. 전하.” “타루스……. 그렇군. 제노바로 오는 것인가.”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파르마에서 출발하여 제노바로 오기 위해서는 타루스 강을 따라 진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제노바에는 대공이 머무르고 있었다. 제국군의 다음 목표는 대공 자신이었다……. “라스페치아일 가능성도 있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밀라노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수염이 덩달아서 들썩거렸다. “타루스 강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향하면 제노바. 하지만 동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라스페치아가 나오지. 반드시 제노바로 향하리라는 보장은 없소.” “라스페치아? 그곳에 가서 제국이 얻을 이익이 무엇입니까?” 대공은 공작이 자신의 의견을 반박해서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말문을 열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번 회의에서 대공이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로디 후작……실례했소. 반역자 아스카니오의 영지가 라스페치아이지 않았소외까.” “……그렇군요. 아스카니오는 선정을 베풀기로 유명했던 자. 분명이 영지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민들은 지금쯤 아스카니오가 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에 분노했을 겁니다.” “옳소. 제국군이 진군하면 영지민들이 그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대하오. 아니, 어쩌면 이미 제국과 라스페치아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지도 모르오.” “무혈입성인가…….” 이번에는 밀라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경계하고 싫어하지만 쌍방의 실력은 인정한다.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라스페치아 방면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노구는 그리 생각하오. 허나 대공이 제노바를 비운다면, 제국군이 마음을 바꿔서 언제든지 제노바로 진군할 수도 있소. 도박성이 강한 걸 부정하지 않겠소.” “으음.” 제노바인가. 아니면 라스페치아인가. 저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전에 야전으로 맞붙는 것도 방법이었다. 문제는 피렌체 대공 휘하에 병력이 13,000명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제국군은 약 삼만. 트레비아 전투에서는 제국보다 병력이 많은 상태에서도 참패했다. 지금은 병력이 많기는커녕 적군에 비해 1/2 수준이었다. 야전으로 덤벼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밀라노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아스카니오를 섣불리 죽이는 것이 아니었소.” “공작!” 피렌체 대공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후작은 공식적으로 대역죄인이 되었다. 후작을 두든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반역죄가 적용되었다. 위험했다. “대공. 내 입을 막지 마시오. 현명한 노인은 죽음 앞에서 대담해지는 법이오.” “…….” “나는 정치적인 타협을 원했지, 후작이 모든 걸 짊어지고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소. 후작은 이 나라와 왕실에 헌신적인 인물이었소. 대공도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피렌체 대공은 말을 아꼈다. 대공도 공작도 알고 있었다. 로디 후작은 반역을 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가 살벌한 정치판인 이상, 세 명의 대귀족은 이따금 서로 반목하고 화해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사르데냐에 헌신하고 있었다. 공작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아스카니오는 처형당하기 전날 나에게 통신을 해왔다오.” “공작에게?” “밀라노 공작령을 포기해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더라이다. 본인의 영지를 나에게 대신 건네줄 테니, 사르데냐의 평화를 위해서 공작령을 놔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대공이 설마,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승락하셨습니까?” “당연히 거절했소. 밀라노는 내 개인 소유물이 아니오. 우리 가문의 역사가 담겨 있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구라고 생각했고, 냉큼 꺼져버리라고 소리쳤소. 그랬더니 다음날에 아스카니오가 반역죄로 잡혀가더군…….”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구려.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그건 대공도 자신할 수 없었다. 밀라노 공작과 불화를 일으켰을 때부터인가. 제국에 속아넘어 트레비아 강으로 진군했을 때부터인가. 어쩌면, 파르네세 가문을 멸망시키고 한 소녀를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겼을 때부터인가……. 마치 과거의 망령이 진득하게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질척하고, 한번 발을 디디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이 있는 것 같았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00378 양웅(兩雄)의 조우 =========================================================================                        “두 분이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이해하오. 그러니 본인이 나쁜 역할을 자처하겠소.” 엘리자베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후작은 이미 죽었소. 우리가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살아있는 적을 처리해야 하오. 제노바인가, 라스페치아인가. 어느 쪽으로 제국군이 몰려올지 정확하게 예상할 필요가 있지.” “으음.” 애도는 애도였고 회의는 회의였다. 마냥 슬픔에 잠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엘리자베트는 '후작'이라고 생전의 작위를 불러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통령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저들은 언제든지 제노바로 올 것인지 라스페치아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제국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전략을 수립해본들 어차피 무용지물입니다.” “…….” “우리가 어디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 그에 따라서 우선 전략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올바른 발언이었다. 옆에서 밀라노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미소를 지었다. 조소였다. 이쪽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웃는 느낌에 가까웠다. 대공은 방금 그들이 나눈 대화에서 어느 부분이 스스로에게 조소를 일으킬 법했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비웃음은 한 순간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나갔다. “좋은 지적이오. 대공은 어느 곳이 중요하다 생각하시오?” “제노바야말로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략적 거점입니다. 대도시이고, 아국의 해군기지이며, 무엇보다도 부유합니다. 라스페치아와는 비교할 수 없지요.” 대공이 확신을 담아서 강하게 말했다. “설령 라스페치아가 함락될지라도 대세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노바는 다릅니다. 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입니다. 파르마에 이어서 제노바까지 넘어간다면, 왕국 신민들은 두려움에 떨겠지요.” “이 노구는 다르게 생각하오.” 밀라노 공작이 반론했다. “제노바는 훌륭하고 단단한 성벽을 보유하고 있소. 적군이 몰아닥쳐도 능히 1년 넘게 버틸 수가 있소. 허나 라스페치아는 다르오.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대하다는 말이외다. 충분한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도시째로 제국에게 선물하게 될 것이오.” “공작. 바로 그 충분한 병력이 문제입니다.” 대공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휘하의 병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두 도시를 동시에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으으음.” 두 귀족은 낯빛이 곤란해졌다. 확실히 안전하게 대도시 하나를 지킬 것인가, 다소 위험하지만 도시 두 개를 지킬 것인가……. 지난 번과 대조해서 두 귀족은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이제 대공은 안전한 노선을 주장했으며, 공작은 위험한 노선을 지향했다. 이건 피렌체 대공이 제국군에 참패했기 때문이다. 대공은 적군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 철저하게 깨달았다. 위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수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대공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간단한 문제 아니겠소.” “좋은 해법이 떠오르셨습니까, 통령?”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당도하기 전에 우리의 손으로 직접 라스페치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되오.” “뭐…….” 쑥대밭이라니? 방금 이 여자가 뭐라고 말한 것인가? 피렌체 대공이 그렇게 의문을 가진 순간, 엘리자베트가 재차 확실하게 말했다. “라스페치아로 병력을 급파하여 성벽을 부수고 주민을 소거시키는 거요. 반항하는 시민은 본보기로 숙청하시오. 제국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무슨……지금 제정신입니까!” 대공이 경악하며 엘리자베트를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공은 가슴속에서 단숨에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우리에겐 라스페치아를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영주인 로디 후작이 반역자로 지정되었다. 반역향을 소거시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절차이지 않는가?” “사르데냐인이 아니라고 해서 무척 쉽게 말씀하시는구려, 통령.” 밀라노 공작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하나가 되어 제국에 맞서자고 결의한 마당에 또 다시 희생자를 늘린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없소.” “전략적으로 필요한 조치일 따름이오.” 엘리자베트가 차분히 대응했다. “제노바와 라스페치아를 동시에 지킬 수 없다. 라스페치아를 온전히 넘겨주면 적군을 살찌우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오. 라스페치아를 파괴시키는 것이지.” “…….” 대공의 입가가 떨렸다. 대공은 필사적으로 분노를 참아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축복받았군요. 당신 같은 분이 통수권자로 있으니 말입니다.” “…….” “여기 골방에 틀어박혀 수만 명의 목숨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느니 필요없다느니 멋대로 재단하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통령 각하. 권력은 달콤하신지요.” 대공이 오른손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결국 대공은 화를 전부 억누르지 못했다. “사르데냐 왕국의 대장군으로서 명령하겠습니다! 더 이상 아국의 신민을 고의적으로 살상하거나 위험에 방치하는 행위는, 어떠한 미명 아래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통령께선 특히나 주의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통령의 인민이 아니라고 해서 가벼이 여긴다면――내 가문과 명예를 걸고 경고하겠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대지입니다.” 불온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과연. 아름답군.”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반응이었다. 대공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의미입니까, 통령.” “말 그대로의 의미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미처 몰랐소. 그렇군. 이런 기분이었는가…….” “……?” 질문에 대답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아리송해졌다. 대공이 공작을 쳐다보자, 공작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이쪽을 깔보거나 우습게 여기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더 의아스러웠다. 엘리자베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예상은 이러하다. 제국군은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제국군은 파르마에서 움직이는 게 이틀 느렸다. 그 이틀 동안 이미 라스페치아의 시민들과 연락하여 반란을 준비했겠지.” “이틀?” “본인이 베네치아에서 움직인 것이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도 제국군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느라 시간이 늦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피렌체 대공이 미간을 좁혔다. “행군을 채비하느라 늦은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군. 제국은 우리가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진군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겠지.” “…….” 대공이 다시 공작을 쳐다보았다. 두 명의 대귀족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무엇을 근거로 엘리자베트 통령이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확신하는 것인가? 그들 눈에 통령은 지나치게 성급하게 비추었다. “문제는 라스페치아가 함락당한 이후이다. 제국군은 제노바로 향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로 향한다는 말씀입니까?” “피렌체. 바로 그대의 영지이다, 대공.” “……!” 대공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럴 리가. 적군이 피렌체로 남하하면 저에게 후방을 노출하게 됩니다. 그런 위험을 구태여 감수할 까닭이…….” “피렌체는 그대의 본거지다. 어찌되었든 그대는 제노바에서 나와 제국군을 추격할 수밖에 없다.” “…….” “안전한 성안에서 위험천만한 평야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이 제국의 노림수다.” 엘리자베트가 싱긋 웃었다. 대공과 공작은 무심코 그녀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어릴 적부터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통령이었다. 두 대귀족은 행군 도중에 기습을 당한 병사처럼 한 순간이나마 멍했다. “재미있지 않은가. 대공. 제국은 그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양자택일, 말입니까?” “아아. 라스페치아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그대 피렌체의 영지민을 지킬 것이냐. 그대는 틀림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거기서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도 드러나겠지……후후. 가히 악질적인 취미가 아닌가.”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티끌 한점 없이 맑은 미소였으나 대공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아까 전에 통령이 지었던 비웃음도, 지금 내보이는 미소도, 전부 이곳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있지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로군요. 양자택일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각하가 말씀하신 그대로 제국군이 움직여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적군의 향방을 재단하시는 것입니까.” “대공. 본인은 제국을 잘 알고 있다.” 엘리자베트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건 제국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상대방의 신념을 미끼로 삼아서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들이민다.” “……추상적입니다. 도무지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에 기반해서 군을 운용하다니 언어도단입니다.” “호오, 그런가. 추상적인가.” 엘리자베트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는 명백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대공의 말대로 본인은 한낱 외국에서 온 용병에 불과하다. 내가 고용한 용병들도 급료는 전부 사르데냐의 왕실에서 제공하고 있지. 대리장군으로 임명된 그대가 명령한다면, 나는 잠자코 따르는 수밖에 없다.” “…….” 엘리자베트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대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어떤가. 그대와 내가 내기를 하는 것이다.” “내기라니요?” “그대가 판단한 대로 제노바에 주둔하라. 다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피렌체로 남진하겠다. 만약 제국이 제노바를 공격하면 본인은 즉시 방향을 돌리겠다. 그리고 다시는 그대의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대공이 엘리자베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만일,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국이 남진한다면?” “본인의 승리다. 대공은 향후 작전을 펼치는 데 있어 본인의 의견을 심각하게 고려해주도록.” “달리 요구하실 것은 없습니까?” “그뿐이다.” 대공과 통령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내기를 받아들이지요.” “대공!” 밀라노 공작이 나지막하게 질책했다. “대국을 결정하는 데 있어 사사로운 내기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오!” “괜찮습니다, 공작. 이 내기는 누가 승리하더라도 왕국에 이득을 안겨줍니다.” 피렌체 대공은 엘리자베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제가 승리할 경우, 통령의 군대가 남쪽에서 북진함으로써 제국군을 쌍방향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패배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에서 동시에 제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령.”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밀라노 공작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경고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이 있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여차하면 선단을 동원해서 해로를 이용하겠습니다.” “허. 대공의 뜻이 정 확고하다면야, 말리지 않겠소만…….” 엘리자베트가 주먹으로 탁상을 가볍게 두 번 두들겼다. “결정되었군. 본인은 조금이라도 빨리 남하해야 하니 이만 나가보겠다.” “……살펴가십시오.” 수정구가 비추는 막에서 엘리자베트가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밀라노 공작의 모습도 곧이어 사그라들었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피렌체 대공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양자택일은 전형적인 정치꾼들의 논리였다. 어쩔 수 없었다느니,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느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는 수사학에 불과했다. 피렌체 대공은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양자택일 따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증명해주겠다…….   ============================ 작품 후기 ============================   참고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79 양웅(兩雄)의 조우 =========================================================================                        제국군이 근처 일대에 도착하기까지 6일이 걸렸다. 그동안 제국군은 빠르게 진군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느긋하게 움직였다. 정찰부대의 보고를 들어보니, 꽤나 많은 숫자의 척후병을 동원하면서 느릿느릿 전진하는 것 같았다. “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군.” “매복을 두려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곳으로 오는 길은 좁은 계곡과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음. 매복을 조심하는 것인가.” 용병대장의 말을 들으면서 대공은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여겼다. “또한, 도중에 마주치는 마을이란 마을은 싸그리 약탈하고 있다 하옵니다. 마을 창고에 있는 곡식을 전부 가져가고 농사에 쓸 소는 전부 도축한다고…….” “쯧쯧.” 대장들이 저마다 혀를 찼다. 제국군은 확실히 협상이 결렬된 이후,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이후, 여태까지 언제 약탈을 자제했냐는 듯이 무자비하게 나왔다. “대공 전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협곡 지대에 복병을 대거 배치해서 적군을 요격해야 합니다. 저들이 가도로 뛰쳐나오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상하겠습니까?” “……불허한다.” 대공이 뭣 씹은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보고를 들었지 않는가. 제국은 만전의 대비를 하며 다가오고 있다. 이쪽은 일만이고 저쪽은 이만이다. 병력상 정면에서 맞붙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필패, 참패이겠지……. 지금은 진출할 수 없다.” “하오나 전하, 민가의 피해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피렌체 대공이 분을 참으면서 명령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이 대공 본인이었다. 용병대장들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사실 사르데냐 출신을 제외하고 대장들은 안전한 성안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혹시 몰라서 가장 매목하기 좋은 지점에 이백 명을 숨겨두긴 했다. 그리고 이백 명의 복병은, 알프스 산자락에서 나고 자란 헬베티카 용병을 상대로 산악 지대에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증명했다. 역으로 기습을 당해 전멸당한 것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섣불리 제국군과 맞서는 것은 금물이다. 참아라. 참으면 기회가 올 것이다.” 대공 휘하의 병력 일만삼천은 바싹 움츠러들었다. 정찰부대를 늘리는 것 이외에 군사적 활동은 거의 없었다. 성벽을 보수하고, 농성장비를 점검하고, 제노바 시장을 닥달해서 더 많은 보급물자를 지원받고……. 잡무를 도맡으면서 피렌체 대공은 신중하게, 다만 신중하게 제국군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의했다. 이곳 제노바인가? 로디 후작의 영지였던 라스페치아인가. 이윽고 대공이 바라던 정보를 전령이 가져왔다. “대공 전하, 정찰대의 보고입니다. 제국군이 베르세토에서 기수를 틀었습니다.” “……! 동쪽인가, 서쪽인가.” “동쪽입니다. 전하. 제국군은 남동쪽으로 남하하고 있습니다.” 동쪽! 피렌체 대공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라스페치아였다. 제국군이 노리는 곳은 제노바가 아니라 라스페치아였다. 달리 말해, 이미 경고한 바대로 라스페치아의 영지민들은 제국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 “대공 전하.” 용병대장들이 불안한 눈길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다들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언어보다 명확한 의사가 회의실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대공이 침을 삼켰다. ‘불태워야만 하는 것인가. 라스페치아를.’ 그는 손바닥을 통해 자신의 이마에서 혈관이 작게 약동하는 것을 느꼈다. ‘제국에 넘어가기 전에, 내 두 손으로 직접 불태워야 한다는 말인가.’ 후작이 선정을 베푼 덕분에 라스페치아는 부유했다. 흑사병이 전 대륙에 휘몰아칠 때도, 라스페치아는 영주의 발빠른 대처로 피해가 최소화된 모범사례 중 하나였다. 만일 이곳을 제국군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차지한다면……끔찍했다. 제국군은 원없이 보급을 받겠지. 식량도 무기도 충분한 상태에서 전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 여파는 단지 라스페치아 주변에 한정되지 않는다. 제노바로, 피렌체로, 테베레로, 왕국 전역으로 전염병처럼 퍼칠 것이다. “전하.” 용병대장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대공의 뇌리에는 며칠 전 엘리자베트 통령이 재밌다는 듯 건넨 말이 스치고 있었다. ‘라스페치아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그대 피렌체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그대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거기서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도 드러나겠지…….’ 대공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럴수록 용병대장들도 불안에 잠겼다. 침묵이 길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내려질 명령이 그만큼 숙고를 거쳤다는 것이요, 쉽사리 번복되지 않을 만큼 단호하다는 것이었다. “……라스페치아를……내버려둔다.” “전하!” 피렌체 대공은 무표정했다. 단지 목소리에서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괴로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라스페치아가 적도에게 넘어가면 전국은 극히 난해해집니다! 전하, 부디 결단을!” “전하께서는 지켜보고만 계셔도 좋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로이 행동해도 좋다고 허락만 해주십시오. 소인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나이다!” 용병대장들이 이구동성으로 결단을 촉구했다. 군주(軍主)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대장들 얼굴에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대공은 그들의 목소리를 떨쳐내려는 듯 강하게 명령했다. “다시 명령한다. 라스페치아를 내버려둔다! 이는 결정사항이다.” “하, 하오면 라스페치아의 무기고를 징발하는 것만이라도 허가해주십시오. 반역의 위험이 있다는 명목을 내세우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라스페치아가 왕국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대장들이 입을 다물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저 정황상 강하게 의심이 들 뿐이었다. “아직 배신하지도 않았고, 배신하리라는 증거도 없는 도시에 무슨 권리로 무기고를 징발하느냐. 이쪽에서 무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 오히려 역심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명령한다. 라스페치아는 내버려둔다…….” 대공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로디 후작이 반역자일 리 없다고 믿었다. 후작을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해도 이미 평생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또 다시 후작의 영지민을 반역도로 몰아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대공의 군대는 그대로 제노바에 주둔했다. 며칠 뒤, 삼만에 이르는 제국군이 라스페치아에 밀어닥쳤다는 정보가 들렸다. 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라스페치아의 수비병력이 가망이 없는 농성전을 펼친다는 소식과 함께. ─ 피해가 심각합니다! 적의 마법전력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합니다! ─ 동쪽 성벽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원군은, 원군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라스페치아는 다급하게 원군을 요청했다.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일반 시민까지 참전해서 어떻게든 농성을 이어나갔지만 상황은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흐르고. 사흘이 지나갔다. 회의실에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대공은 얼굴이 부쩍 야위었다. “라스페치아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가.” “예. 오늘 새벽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제국군이 간밤에 급습하여 성벽을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리 대기시켜둔 예비대 덕택에 간신히 퇴치했다고…….” 대공과 용병대장들은 답답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라스페치아가 제국과 내통한 것이 맞습니까?”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이곳에서 꾀어내려는 술책일 수도 있어요.” “섣부르니 뭐니 자시고, 당장 외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라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원군을 보내서 도와줘야 합니다.” 지휘관들은 크게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라스페치아가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의견과 이것이 전부 유인책이라는 의견이었다. 양측 모두 심증이 있을 뿐이라서 논쟁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렸다. “…….” 대공 역시 판단할 수 없었다. 만약 제국군이 진심으로 라스페치아에 공세를 펼치는 것이라면 왜 통신마법을 차단시키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다. 덕분에 다급하게 원군을 요청하는 통신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혹시 우리를 안전한 제노바에서 끌어내기 위해 기만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대공은 제국군이 얼마나 간교한지 알고 있었다. 이쪽이 어떻게 생각할지 빤히 읽어내고, 되레 역으로 연락책을 풀어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적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쪽의 생각을 읽고 있는가……. 대공은 답이 없는 고민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느 사르데냐인 용병대장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 라스페치아가 적도의 손에 넘어가면, 파비아를 내버려둔 밀라노 공작과 이쪽이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군을 구원하지도 못하는 군사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피렌체 대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뭘 고민한 것인가?’ 저 용병대장이 한 말이 옳았다. 만일 여기서 라스페치아를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빤히 파비아가 파괴되고 능욕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방치해버린 밀라노 공작과 뭐가 다른가.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공은 치욕스러웠다. 누구보다 밀라노 공작의 선택에 분노하고 반발했던 사람이 바로 대공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겁을 집어먹어서 한때 자신이 비난했던 행위를 그대로 반복하려고 했다……. 대공은 재차 자문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전하! 급보이옵니다!” 그때 전령이 회의실에 헐레벌떡 들어왔다. 전령은 황급히 군례를 올렸다. “라스페치아, 외성 함락! 기사단은 전멸했습니다!” “……!” “현재 영주대리가 내성으로 후퇴하여 마지막 저항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라스페치아에서는 원군이 오고 있는지, 오고 있다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용병대장들이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루, 길어봤자 사흘 안에 라스페치아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든 결정된다. 선택은 대공에게 넘어갔다. 피렌체의 대공이자 메디치 가문의 주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입을 열었다. “라스페치아를 구원한다.” 마침내 떨어진 대공의 결정에 지휘관들 사이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전하!” “단,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통해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제국에는 해군이 전무하다. 우리가 이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을 터.” 대공이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투로 확고하게 명령했다. “제노바 시장에게 당장 본인의 명령을 전달하라. 제노바에 있는 함선을 모두 징발한다. 이는 국왕 전하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작전이요, 조금이라도 거부의 의사를 내비추는 자는 항명죄로 즉결처단하겠노라!” “예, 전하!” 부관이 딱 부러지게 군례를 올린 다음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마법사 부대를 먼저 라스페치아로 파견한다.” “전하, 송구하지만……순간전이 마법에 대해서는 적군이 반마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통신만 풀어둔 것인가.” 전령의 첨언에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제국군은 진심으로 라스페치아를 공략하고 있었다. 전이 마법을 막아둔 것이 증거였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 적이 이쪽 생각을 읽고 있을지……. “기사단이 전멸한 이상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전군, 서둘러 준비하도록. 최대한 빨리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예, 전하!”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공은 그러나 주사위가 어디로 굴러갈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00380 양웅(兩雄)의 조우 =========================================================================                        * * * 제노바에서 즉시 선단이 꾸려져 출항했다. ‘제국군을 바다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대공은 선상에 서서 고민했다가 실없는 생각이었다며 자조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육지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해상의 제왕이었다. 그러나 제국에는 해군이 전무했다. 바다에서 싸우고 싶어도 적국에 아예 군함조차 없어서야,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제노바에서 라스페치아까지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였다. 왕국군은 아무런 걱정 없이 항해했다. 그러나 도중, 일찌감치 멀찍이 앞서가던 갤리선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대공이 부관을 불러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마물의 습격입니다, 전하.” “음. 각 함선은 협력해서 격퇴하도록.” 해상에서 마물이 습격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일상다반사라고 해도 좋았다. 사르데냐 왕국의 주력선인 5단 갤리선에는 한 척마다 전투병력이 백 명이 넘게 탑승했다. 웬만한 대형 마물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금방 가라앉으리라 생각한 소란은 그러나 점점 다른 함선으로 번져갔다. 선장이 당혹에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전하! 포세이돈의 분노입니다!” “무슨……아직 8월이지 않는가!” 포세이돈의 분노는 사르데냐인이 마물의 대규모 해상 습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다에 사는 마물들은 겨울을 기점으로 대거 이동했는데, 이 무렵에 항해하는 것은 극히 위험했다. 그렇지만 아직 8월이었다. 겨울이 오기에는 한참 멀었다. ─ 땡땡땡, 땡땡땡땡. 바다 위에 사방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특별히 마물들이 싫어하는 음색을 내는 종이었다. 선원이 필사적으로 종을 울렸지만 마물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인어가, 도마뱀족이 선상으로 기어올랐다. “밀어내라!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밀어넣어!” “어서 돛을 접어라!” “젠장할, 왜 이런 시기에!” 병사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창을 꺼내들었다. 그들은 난간으로 몰려가서 어떻게든 마물들을 떨어트리려고 창끝을 아래로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선단이 혼란에 돌입하였다. “허를 찔렸는가……!” 이 대규모 습격은 틀림없이 제국군이 꾸며낸 짓이었다. 우연이라 간과하기에는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하지 않은가. 대공은 상대편의 계략을 곧바로 눈치 챘다. 마왕군을 동원했다며 비난해도 제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선단을 습격하고 있는 마물들은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않고 맨몸으로 공격해오고 있었다……즉, 어떻게 봐도 야생 마물이었다. '제국은 이들과 일절 관련이 없으며 왕국군이 맞부닥친 것은 어디까지나 야생 마물에 불과하다.' 제국군은 그렇게 주장하겠지. 대공이 신음했다. “라스페치아는 미끼였다.” “미끼라니요, 전하?”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제국은 일부러 라스페치아를 함락시키지 않고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해로를 통해서 올 것임을 간파하고 미리 마물들을 준비시킨 것이다…….” 해상 백병전에서는 대단한 전술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전함과 전함이 대결한다면 또 모를까, 그저 바다에서 꾸역꾸역 몰려오는 마물을 상대로는 각 함선마다 분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방에서 갤리선 한 척이 당했다. 선원과 조타수를 잃은 함선은 무력하게 파도에 휩쓸리다가 옆을 항해하던 동료 함선에 들이박았다. 그렇다고 다른 함선이 좌초되지는 않았으나, 운이 나쁘면 노들이 손상되어 기동력이 잔뜩 떨어졌다. 부관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해상전이 익숙치 않은 용병들이 많아서……전하. 마법사를 동원하는 걸 허가해주십시오.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된다. 만일 이것이 제국군의 술책이라면 분명히 아직 남은 수가…….” “크라켄이다!” 공포에 찬 비명이 대기를 갈랐다. 빨판으로 가득 덮인 문어 다리가 파도를 거세게 일으키며 해면에서 솟아나왔다. 보통의 문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빨판마다 날카로운 이빨이 돋았다는 것, 그리고 다리가 고목처럼 거대하다는 것이었다. “퇴함! 퇴하아아암!” “으아아악!” 크라켄의 다리들이 갤리선을 감싸더니 마치 과자를 부서트리는 것처럼 간단하게 짓이겼다. 5단 갤리선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살아남은 선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마물로 가득한 바다에서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대공 전하!” “지금이다. 마법사들은 전력을 쏟아부어 대형 마물을 퇴치하라!” 스무 명에 이르는 마법사들이 동시에 크라켄을 향해서 마법을 쏘아날렸다. 몇 개는 빗나갔지만, 대부분이 크라켄의 다리에 명중했다. 살점이 터져나가면서 괴물의 다리가 끊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왕국군이 함성을 질렀다. 크라켄은 뱃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폭군이었지만, 두려움을 간단하게 격퇴했을 때 사기는 크게 오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단 후방에서 다리들이 튀어나왔다. 한 개체가 아니었다. 마치 사방에서 포위하려는 듯이 동시다발적으로 크라켄이 출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갤리선 다섯 척이 하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다섯, 아니 여섯 마리인가!” “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크라켄이 한꺼번에 여섯 마리라니…….” “당황하지 마라! 마법사들은 차근차근 한 놈씩 처리해서――.” 그때 굉음이 함단 전체를 뒤엎었다. 피렌체 대공은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가 척추를 타고 한순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을 비롯해서 왕국군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많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비늘로 뒤덮인 무언가가, 마치 거대한 뱀과 같은 몸통이 파도와 파도 사이를 스치고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산산조각이 나버린 함선뿐이었다. “……보았는가.” “오, 포세이돈이시여…….” 바다 어디에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바이올린 소리와 같은 흐느낌이 노잡이들의 귓가에 불길하게 메아리쳤다. 병사들은 눈앞의 마물을 상대하면서도 등골에 치미는 공포 때문에 팔이 덜덜 떨렸다. “맙소사. 마지막으로 보고된 것이 반백 년이 넘었거늘…….” 파도가 다시금 높이 치솟았다. 이번에는 대공이 확실하게 보았다. 그것은 뱀의 몸뚱어리를 가진 괴물이었다. 아가리에는 오우거가 우습게 보일 정도로 큼직한 이빨들이 달려 있었다. 괴물은 갤리선을 살짝 쓸듯이 건드리고 또 다시 순식간에 바다로 파고들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갤리선은 힘없이 뒤집혔다. 중장갑을 입은 병사들은 헤엄도 제대로 못 치고 소용돌이 속으로 빠졌으며, 선원들은 득달같이 달려든 마물들에게 목이 물려 뜯어졌다. 가히 찰나에 백 명의 전사를 태운 갤리선이 침몰하였다. “레비아탄!” “신이시여――레비아탄이다!” 선단 전체가 삽시간에 충격에 잡아먹혔다. 일 년에 두어 번 보고되기도 힘든 크라켄이 동시에 여섯 마리가 나왔다는 것만 해도 이미 경악스러웠건만, 백 년에 한 번 등장한다던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마물조차 아니었다. 레비아탄은 한때 신으로 숭배받던 괴물이었다! “흐, 흩어져! 흩어져야 산다!” 일부 선장들이 재빨리 조타수에게 명령했다. 이들은 레비아탄을 만난 것이 처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함선끼리 조밀하게 달라 붙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몇몇 갤리선이 대형을 포기하고 일탈하기 시작했다. 대공이 헛, 하고 정신을 차렸다. “우둔한 놈들, 대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흩어지면 죽는다!” 만약 생존하는 게 목표였다면 여기서 각개도주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왕국군의 목적은 생존이 아니었다. 라스페치아를 구원해야 했다. 일단 함선 하나가 도주해버리면 나머지 함선들 또한 공포에 잠식되어 순식간에 선단이 와해되고 말 것이었다. 부관이 수정구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곧 부관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대공에게 보고했다. “일부 함장들이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빌어먹을……마법사들은 두 조를 짜서 대처하라! 한 조는 크라켄을 요격하고, 다른 한 조는 레비아탄이 나타났을 때를 노려서 공격하라! 냉정을 잃지 마라! 이 바다는 마물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르데냐의 것이다!” 피렌체 대공은 어떻게든 자신의 카리스마로 선단을 유지했다. 마물들이 도망치는 함선을 우선적으로 골라서 침몰시킨 탓도 있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흩어지면 죽는다는 대공의 말에 강한 믿음을 실어주었다. 바다 위에서 처절한 사투가 이어졌다. 마법사들은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싸웠으며, 실제로 몇 명은 순간전이를 쓸 마력조차 남지 않아서 함선과 함께 가라앉았다. 많은 용병들이 해상 백병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사력을 다하여 응전했다. 제노바의 시민병으로 이루어진 노잡이들까지 창을 들고 맞서 싸웠다. 세 시간 후. 왕국군은, 기적적으로 마물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함장에서 노잡이에 이르기까지 탈력해서 갑판에 나앉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크라켄은 여섯 마리 중에 네 마리가 죽었다. 레비아탄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큰 상처를 입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사르데냐 왕국 만세!” 마지막 크라켄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왕국군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함성을 질렀다. 제노바에서 위풍당당하게 출항한 백삼십여 척의 선단은 육십 척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절반이 넘게 바다의 망자가 되었다. 사실상 전멸이라 해도 좋았다……. “후우우.” 대공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기진맥진했다. 세 시간이면 육지 위에서 싸워도 체력이 소진되었다. 그만한 시간을 바다 위에서 견뎌야 했으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승리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전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대공의 우울한 낯빛과 대조적으로 부관은 감격하고 있었다. “일찍히 레비아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해군……아니, 살아남은 해군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기적을 이루어내셨습니다.” “……부관. 라스페치아에 연락하라. 원군은 없다.” 대공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함정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제국이 여태껏 라스페치아를 함락시키지 않은 것 또한 기만책에 불과하겠지. 지금 라스페치아로 향하는 것은 사지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다. 우리는 제노바로 회항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부관이 각 함선에 명령을 전달했다. 선원들은 지친 몸을 재촉해서 돛을 펼쳤다. 전투 도중에 대다수의 함선이 노가 상했다. 바람의 힘을 믿고 항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 각 함선이 돛을 움직이려고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는 때였다. 한 선원이 바다 저편을 보고 가만히 눈을 찡그렸다. 선원이 팔꿈치로 동료를 툭툭 쳤다. “뭐야.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구만 괜히 시비 털지 마라.” “네가 힘들어 죽겠으면 난 이미 관짝에 처박혔다. 어이, 저거 보이냐?” “어?” 선원이 가리킨 방향을 동료가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마물은 아닌데.” “그야 하얀색 마물은 없으니까. 저거 배 아니야?” 이와 비슷한 대화가 여러 함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보는 빠르게 선원에서 지휘관으로, 지휘관에서 함장으로, 함장에서 피렌체 대공으로 전달되었다. 대공은 망원경을 꺼내들어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 대공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부관이 의아해서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옵니까?” “……왕국 국기를 달고 있다. 라스페치아의 함단이다.” 뜻밖의 희소식에 부관이 반색했다. “잘 되었군요. 라스페치아에 가망이 없으니 해군이라도 도주한 모양입니다. 저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조금 더 수월하게 제노바까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전원, 전투를 준비하라.” “예?” 대공이 망원경을 접었다. “……라스페치아의 외성이 함락되었다고 보고가 올라온 게 이미 한참 전이다. 외성이 뚫렸는데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멀쩡할 리가 없다. 즉, 저들은 지금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었거나, 아직까지 외성이 뚫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기만한 것이지.” 대공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즉시 명령을 하달하라, 부관. 지금부터 라스페치아는 우리의 적이다…….”   00381 양웅(兩雄)의 조우 =========================================================================                        * * * 라스페치아 앞바다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상대편은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사르데냐 왕국 해군. 이쪽은 이제 막 전투에 돌입해서 갓 잡아올린 청어처럼 싱싱한 라스페치아-제국 연합 함대였다. 라스페치아가 배신 의사를 알려온 것은 로디 후작이 죽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후작의 가신단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배신했다. 유일하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지킨 사람이 라스페치아 기사단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기사단장은 동료들의 손에 죽었다. 후작은 분명히 좋은 영주였겠지. 후작의 죽음에 가신단, 시민 의회, 농부를 가리지 않고 분노했다. 살짝 등을 떠밀어주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협력해주었다. “우웨에엑, 우에엑!” 그리고 현재, 나는 절찬리에 배멀미를 겪고 있었다. “……궁중백의 위엄이 죄다 갑판에 쏟아지는군. 그렇게 힘든가?” “으으으. 생각해보니 저, 바다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우으읍!” “파도도 괜찮은데다 이건 5단 갤리선이다. 궁중백처럼 야단법석인 사람은 드물 텐데.” 라우라가 한심한 녀석 쳐다보는 느낌으로 쯧쯧 혀를 찼다. 나도 오늘 와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지만,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바닷배에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컨대 내 신체는 일찍이 바다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위장이랑 내장이 뒤집혀서 잡탕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뭣하면 마법사한테 부탁해서 속을 진정시키는 마법을…….” “안 됩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마력을 소모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아군의 전력은 마법전력이 전부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헬베티카 용병은 지상에서 날아다니는 베테랑이었지만, 해상전에 대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배멀미를 치르는 병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배의 숫자 자체도 적군에 비해 적었다. 저쪽은 한 차례 전투를 끝냈음에도 육십 척 가량이 잔존했다. 반면, 이쪽은 처음부터 서른다섯 척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라스페치아에 비해서 제노바가 훨씬 더 거대한 해상기지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군은 대부분이 2단 갤리선 혹은 3단 갤리선……5단 갤리선이 주력인 적군에 대비해서 아무래도 불안했다. 만약 지금이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런 전력으로 맞부닥치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변수가 되는 지점은 두 곳. 첫 번째, 적군이 탈진했다는 것. 왕국군은 해상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혈투를 벌였다. 제대로 칼을 휘두를 힘조차 남지 않았을 거다. 두 번째, 적군의 마법전력이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것. 크라켄이나 레비아탄과 같은 대형 마물을 움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왕국군에게 마음껏 마법을 쏟아붓도록 유도했다. 왕국군이 더 이상 마법을 운용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발레포르의 잔당들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로써 반역자의 부하였던 그들은 내 보증 아래 무죄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 시시한 마법을 쓸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왕국군에 공격을……우웨에엑!” “승리에 대한 주군의 집념은 정말 보기만 해도 질리는군.” 라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고 있는 동안, 양군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왕국 해군은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배가 노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저들은 돛을 제외하고 방향과 속도를 조종할 수단을 잃어버렸다. “마법대에 명령한다.” 라우라가 가볍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가라앉혀라.” 서른여섯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영창주문을 외웠다. 불꽃 덩어리가 바다바람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묘하게 느릿느릿하게 비추는 광경이었다. 도중에 푸르른 막이 펼쳐져서 불꽃을 튕겨보냈다. 그러나 방어막은 기껏해봤자 열 개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스물다섯여 개의 불꽃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적 함선의 측면을 후려갈겼다. 결과는 명확했다. 퇴함! 퇴함! 하고 정신없이 울부짖는 함장. 배가 정확히 양단되어서 원치 않아도 저절로 퇴함을 강요받는 선원들. 운 나쁘게 마법에 적중되어서 몸째로 불에 그슬린 병사. 라스페치아 앞바다에선 불지옥이 그려졌다. “일방적이군.” 라우라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녀 말대로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는 그래도 방어막이 열 개 정도 생겨났지만, 세 번째 이후로는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두 개의 방어막만이 펼쳐졌다. 그것조차 여섯 번째 사격부터는 실종되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우리의 마법에 얻어맞기만 했다. “항복한다! 항복하겠다!” 포화를 버티지 못한 것일까. 함선들에서 흰색 천을 펄럭거렸다. 라우라가 시선을 슬쩍 돌려서 날 쳐다보았다. “어쩌겠는가, 주군.” “이번에 마물들이 많이 수고해주었습니다. 배가 고플 텐데 식비라도 우리가 대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전투에 마물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왕국이 알아차리면 난감했다. 정보 자체가 새어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을지 몰라도, 증인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두고 싶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란 없다.” 라우라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사격을 재개했다. 항복하든 항복하지 않든 무차별적으로 마법이 날아갔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 항복했는데 어째서 공격하는 거야!” “으아악! 개새끼들아! 항복한다! 항복한다고!” 아군의 반응은 덤덤했다. 잔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용병들이야 이미 총사령관 공작 전하의 무자비함에 익숙해졌다. 노잡이를 맡은 라스페치아 시민들을 거론하자면, 아예 꼴 좋다는 듯이 대소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왕실은 실수를 했다. 후작을 너무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살가죽을 전부 벗겨버린 이후 핏줄과 근육을 잘게 썰어버리고, 거기에 뼈까지 빻아서 개먹이로 던져주었다던가. 영주 귀족이자 전권대사였던 사람에게 가하기엔 지나치게 잔혹했다. 라스페치아의 시민들이 격노한 것도 당연하겠지. 항복조차 먹혀들지 않자 왕국 해군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돌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저쪽은 돛밖에 활용하지 못했고, 이쪽은 노잡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충각술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살돌격을 감행하든, 절망에 사로잡혀 가만히 나앉든, 도망을 치든, 사르데냐 왕국군 갤리선 60척의 운명은 한결같이 결정되어 있었다. 바로 침몰이었다. “음. 비명 소리를 들으니까 속이 좀 진정되는군요.” “궁중백은 대체 위장이 어떻게 생겨먹은 겐가?” 라우라가 짜게 식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인데 어쩌겠는가. 한 시간 뒤, 바다에 떠 있는 왕국 해군은 단 한 척밖에 남지 않았다. 피렌체 대공이 지휘하는 기함이었다. 유독 화려하게 장식된 5단 갤리선.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검독수리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궁중백. 저건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포로로 잡으면 오히려 귀찮으니까 평등하게 침몰시키죠……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메디치 가문의 군기(軍旗)라니, 너무 탐나는 보물이군요.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이대로 포세이돈께 헌상하기엔 조금 아까운걸요.” “음. 본인도 동의한다마는, 그렇다고 백병전을 벌이는 건 득책이 아니다. 저 기함에는 틀림없이 일당백의 전사들이 탑승하고 있겠지.”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저건 천 명의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파르네세 공작. 현 프랑크의 황후가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요?” “물론이다. 방계 출신이라고 들었다만.” “글쎄요. 직계가 죽어버리면 방계가 직계가 되는 법이지요.” 라우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곧,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피렌체 공작령을 프랑크의 괴뢰로 만들어버릴 속셈인가.” “우리 제국이 피렌체 공작령까지 집어삼키면 여러모로 주변국의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그렇다고 눈앞에 떨어진 요리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기도 아깝습니다. 아마 좋은 협상거리가 되겠지요.” “궁중백은 역시 악마다.” 라우라가 쿡쿡 웃었다. “반드시 저 군기를 탈취해야겠군.” “웬만하면 가지고 싶다는 게 저의 솔직한 욕망입니다.” “본관의 임무는 궁중백의 욕망을 충실히 만족시켜주는 것이지. 허나 구태여 백병전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 전군, 화살의 사정거리가 닿는 곳까지 전진하라.” 이런. 나보고 악마라고 말했지만 진짜 악마는 여기 따로 있었다. 서른다섯 척의 아군 선단이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적 기함을 향해서 화살을 발사했다. 천 개에 이르는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끄아아악! 흐아악!” “사, 살려줘! 제발 목숨만은!” 적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한 명씩 쓰러졌다.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중에는 일부, 일찌감치 승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바다에 뛰어든 현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열댓 명쯤은 엄청나게 운이 좋아서 해안까지 헤엄치는 데 성공할지 몰랐다. ――바닷물 속에서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는 마물들만 없었더라면. 미리 말했다시피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적군이 생기면 꽤 성가시게 된다. 한 명도 남김 없이 헤치우는 것이 중요하다. 피렌체 대공 본인을 포함해서 만오천 명 가량의 왕국군은 오늘 이곳에서 수장된다. 잠시 뒤, 적 기함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배를 몰아서 적 기함에 접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기함으로 넘어갔다. 내가 군기를 가리키면서 명령했다. “가장 중요한 노획품이다. 소중하게 다루도록.” “예, 각하.” 병사들이 재빠르게 다가가서 군기를 내렸다. 혹시라도 값나가는 물건이 있을까 해서 수색을 명령했다. 그래도 기함이니까 금화상자 정도는 있겠지. 적어도 병사들에게 화살값을 물어줄 만한 돈은 가지고 싶었다. “각하. 데 메디치 대공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부관이 낭보를 가져왔다. “좋습니다. 어디 가서 표정이라도 구경할까요!” “……궁중백은 정말로 배멀미를 겪은 것이 맞기는 한가?” 뭘 모르는 소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죽기 직전의 인간 표정을 구경하는 것이요,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죽은 직후의 인간 표정을 관람하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것이 담겨 있거든. “…….” 대공은 돛대에 허리를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화살이 목과 가슴, 허리, 허벅지에 박혔다.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지휘봉을 꾸욱 쥐고 놓지 않았다. 얼굴 표정은……후회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그러면서도 후회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별로 재미있는 얼굴은 아니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머리를 배서 잘 보관해두십시오. 써먹을 데가 있을 겁니다.” “예.” 부관이 도끼를 꺼내들어서 대공의 시체에 다가갔다. 흡, 하고 기합을 넣어 부관이 도끼를 휘둘렀다. 두 번의 도끼질만에 대공은 머리가 떨어졌다. * * * “대공 전하, 피하십시오!” “빌어먹을 놈들……항복조차 받아들이지 않다니!” 아비규환이었다. 근위병들이 어떻게든 대공만은 살리기 위해서 대신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분당 수천 개씩 떨어지는 화살을 막아낼 만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빠른 속도로 갑판에 쓰러졌다. ‘이건 어떤가. 그대와 내가 내기를 하는 것이다.’ 이때 대공은 어느 여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대가 판단한 대로 제노바에 주둔하라. 다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피렌체로 남진하겠다. 만약 제국이 제노바를 공격하면 본인은 즉시 방향을 돌리겠다. 그리고 다시는 그대의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화살이 근위병들의 틈을 뚫고 들어와 대공의 어깨에 박혔다. 대공은 눈썹을 찡그렸을 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만일,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국이 남진한다면?’ ‘본인의 승리다.’ ‘달리 요구하실 것은 없습니까?’ ‘그뿐이다.’ 아아. 대공은 마음속 깊이 탄식했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던가. ‘괜찮습니다. 이 내기는 누가 승리하더라도 왕국에 이득을 안겨줍니다.’ ‘제가 승리할 경우, 통령의 군대가 남쪽에서 북진함으로써 제국군을 쌍방향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패배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에서 동시에 제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령.’ 대공은 왜 자신의 말에 엘리자베트 통령이 굳이 대답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달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왜냐하면, 대공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차피 대공이 죽어버리면, 사르데냐 왕국군의 모든 지휘권이 통령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이건 왕국과 제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국과 엘리자베트 통령의 싸움이었어.’ 화살이 연이어서 대공의 허벅지를 날카롭게 쑤셨다. 대공은 점점 더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제는 부하들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공허했으며,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명멸했다. ‘미안하오, 후작. 부디 내 죽음으로 용서…….’ 푹, 하고 마지막 화살이 대공의 목을 꿰뚫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대공의 가슴을 여태까지 환하게 비추었던 불꽃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대공이 의문으로 품어왔던 것, 싫어했던 것, 좋아했던 것,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밝혔다. 그러나 잠깐뿐이었다. 불꽃은 순식간에 커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그 속에 대공은 다시금 홀로 남았다. 불꽃이 사라지자 어둠이 덮쳐왔다. 대공은 어스름이 자신의 살갗을 점점 더 덮어오는 것을 느꼈고――어느새 몸 전체가 그림자에 덮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했다.   00382 양웅(兩雄)의 조우 =========================================================================                        * * * 아군, 라스페치아-합스부르크 연합함대는 곧장 제노바로 진격. 라스페치아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사르데냐 왕국기와 메디치 가문기를 내건 함대가 출현하자, 제노바는 미처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재빠르게 항구 안으로 진입했다. 수정구에서는 끊임없이 의문에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벌써 회항하는가? 아군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 “어서 수문을 열어라. 공작 전하의 명령이시다. 아군은 도중에 포세이돈의 분노에 휩쓸렸다. 제노바 시장에게 전달하도록. 라스페치아 공략 작전, 실패!” ─ 그럴수가……아니, 알겠다. 수문을 열려면 공작 전하의 직접적인 요청이 필요하다. 미안하지만 대공 전하께……. “본인을 불렀는가.” 내가 나섰다. 미리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내 외모에 환영마법을 걸어두었다. 목소리까지 위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대공의 목을 파헤쳐서 성대 구조를 파악했다. 괜찮았다. 어차피 목이 잘린 마당에 조금 더 엉망이 된다고 해서 별 차이점도 없겠지. “부관이 보고한 그대로다. 수문장. 당장 피로에 지친 아군에게 문을 열어라.” ─ 알겠습니다, 전하. 절차에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디치에 영원한 영광을! 영원한 영광. 그것이 메디치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아아. 메디치에 영원한 영광을.” 제노바 항구를 보호하는 수문이 열렸다. 이 시대, 항구는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부둣가 전체가 목책으로 둘러싸였다. 제노바의 경우에는 입구와 출구가 각각 다섯 개씩 있었다. 우리군은 노를 동원해서 손쉽게 5열을 맞추었다. 30척에 이르는 선단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부드럽게 수문을 통과했다. ─ 제노바에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하! 제노바의 신민은 언제라도 전하께 봉사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지금 시장이 전하를 영접하기 위해 오고 있습니다. “본인이 조금 천천히 내리는 편이 시장에게 도움이 되겠군.” ─ 황공하옵니다. 시장은 대공 전하께서 베푸신 친절과 배려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문장이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제법 훈련을 잘 받은 개였다. 제노바 시장도 유능한 인물이라는 뜻이겠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덜떨어지는 귀족들에 비해 확실히 사르데냐의 인물들은 뛰어났다. “사르데냐의 귀족은 유능하군.” 라우라가 옆에서 속닥거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귀족은 유능하고, 평민은 점점 관료층에 진출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공화주의에 우호적인 국가인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라가 아니고 뭔가. 사르데냐. 너희가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면 바로 한 소녀를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가장 희생시켜서는 안 될 종류의 인간을 희생양으로 공양했다. 그럴 줄 몰랐다고, 실수에 불과했다고 변명하고 싶겠지. 그렇다면 실수의 결과물을 받아들여라. ─ 전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장이 지금 항구에 나와 있습니다. “본인의 눈에도 보이는군. 그런데 자네는 어디에서 관제를 맡고 있는 것인가?” ─ 전하의 기함에서 우측에 보이는 탑 꼭대기층에 있나이다. 대공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셨다고 생각한 것일까. 목소리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내가 상냥하게 웃었다. “수고했네. 본인은 자네의 친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네. 이에 자그마한 선물을 하사할 것인즉.” ─ 오오. 영원한 영광이시여.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자네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네.” 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부관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발사!” 아군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법을 발사했다. 일부는 제노바의 시장이 가신을 이끌고 나온 선창으로, 일부는 항구에 나란히 정박해 있는 상선들로, 일부는 수문장이 머무르는 탑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저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시장과 가신단은 통째로 불에 타올랐다. 화마가 상선들을 덮치면서 항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탑이 무너지면서 마지막으로 이 사태를 통제할 본부가 증발해버렸다. 라우라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소거하라.” 제노바에 거주하는 7만 시민의 운명은 이 한 마디로 결정되었다. 우리 용병대는 이미 학살과 약탈에 도가 텄다. 이들은 무분별하게 민가를 먼저 덮치지 않았다. 우선 제노바의 성탑과 무기고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소수의 수비병력을 참살한 것이었다. 공포에 직면한 인간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하나는 절망에 사로잡혀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필사의 의지를 불태워서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놀라운 의지를 불어넣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평소에 잘 조직된 수비대, 저항군이 도망쳐서 한동안 반항할 수 있는 성벽 및 성탑, 자신의 두 손에 묵직하게 들린 무기. 부잣집을 털어재끼느라 정신이 팔리면 반항군은 이상 세 가지 항목에 의거해서 어떻게든 결전의 각오를 불태웠으며, 이는 용병들에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정말로 잘 훈련된 용병은 '맛있는 잔치'를 약간 뒤로 미룰 줄 알았다. 라우라의 지휘 아래 놓인 헬베티카 용병은 명백하게 후자에 속했다. 불과 40분. 제노바 시의 모든 성탑 및 무기고가 접수되었다. 시장과 가신단이 초장에 죽어버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우두머리를 잃어버린 경비대장들은 대부분 무력하게 항복했다. “성문을 걸어 잠가라!” 이로써 시민들이 도망칠 수단은 사라졌다. 현재 아군의 숫자는 약 3,200 명. 제노바의 시민 전체를 상대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라우라와 나는 강수를 두었다. 바로 마법사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명령한 것이었다. 일반인에게 마법은 경외와 공포의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폭력이었다. 민가들이 파괴되고 불타올랐다.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법이 닿지 않는 곳으로, 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다. 마치 몰이사냥과 같았다. 우리군은 시민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근차근 몰아갔다. 호신용 검과 버클러로 무장한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장창으로 무장한 아군의 용병대를 당해내기란 불가능했다. 용병대는 피해가 문자 그대로 전무했다. 마법이 살짝 빗나가는 바람에 오른쪽 팔에 화상을 입은 병사가 한 명 있었는데, 이것이 유일한 피해였다. 마침내 시민들이 제노바의 서쪽 성문에 밀려들었다. “비, 비켜! 비키라고!” “씨발, 성문을 열어! 왜 성문을 안 여는 거야!?” 자그마치 7만 명이 한곳에 몰렸다. 바깥 사람은 조금이라도 성문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앞 사람을 밀쳤고, 몸싸움에 밀려 넘어져버린 시민은 그대로 수백 명의 발굽에 짓밟혀서 압사했다. 인세에 아비규환이 재현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까. 시민들이 방향을 바꾸어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뒤쪽은 장창이 고슴도치 털처럼 조밀하게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시민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떻습니까, 공작. 슬슬 항복을 권고해볼까요?” “척 봐도 오만 명이 넘어보이지 않는가. 너무 많다.”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현재 우리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다.” “흐음.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학살하면 외교적으로 곤란해집니다. 너무 심하게 굴었다면서 비난을 들어버린다구요? 파비아는 예외 중 예외였습니다.” 우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실로 느긋한 대화였다. 우리 두 사람만 떼어놓고 보면 도저히 칠만 명의 목숨을 저울질하고 있다고는 느끼지 못하리라. “이건 어떤가. 우리에게 완전히 복종하겠다고 맹세한 시민들만 포로로 잡는 것이다.” “혀로만 복종하고 마음속에는 비수를 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마음이 독기로 가득할지라도 정작 몸이 맨몸이어서야 아무것도 못하겠지.” 라우라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시민들은 전원 속옷을 제외하고 일체의 옷을 벗는다.”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항복하고자 하는 자는 탈의하라. 처음 시민들은 명령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물론 의미없는 발악이었다. 가볍게 불꽃 덩어리를 한두 개 선물해주니 입들이 저절로 닫혔다. 누군가가 주저하며 옷을 벗었다. 그러자 기하급수적으로 탈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귀족들은 옷을 벗기지 마십시오.” “그런 배려를 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배려가 아닙니다. 한 집단을 궁지에 몰아세울 때는 모쪼록 두 개로 분열시켜야 합니다. 왜 귀족만 특별하게 취급받느냐, 하고 불만을 심어주는 것이 득책입니다.” 그리하여 소수의 귀족과 사제를 제외하고 모두가 옷을 벗었다. 속옷 차림의 남녀 수만 명이 일렬을 이루어 걸어 나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술 없이는 구경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라우라와 나는 포도주를 주고 받으며 이 역사적인 명화를 관람했다. “이제 제노바를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 궁중백.” “글쎄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호오. 다소 시기가 이르지 않은가?” 나는 포도주에 젖은 입술을 쓰윽 핥았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했습니다. 저쪽이 먼저 국제적인 예의를 어겼는데 이쪽이라고 지켜줄 의리는 없습니다. 과연 엘리자베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 이야아,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 라우라에게 대답이 없었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왠지 모르게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작?” “응? 아. 그렇군. 본관도 기대된다.” 라우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궁중백. 요즘 들어서……그게 뜸해지지 않았나 싶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우라가 흠칫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걸로 겨우 말뜻을 알아차렸다. 섹스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얘기였다. “그저께도 했잖습니까?” “으응. 그러니까, 본관의 말은……어제 하지 않았으니…….” “…….” 아마도 지금 내 눈은 변태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되었을 거다. “언제는 맨날 발정난 개처럼 해댄다고 욕했으면서 이제는 하루 걸렀다고 불만입니까? 세상에. 여성이 나이가 들수록 성욕이 커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공작이 벌써부터 그럴 나이인 줄은 몰랐는데요.” “으으으, 그게 아니라……됐다! 싫으면 관둬라!” 라우라가 삐졌는지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실수를 가장하여 라우라의 군복에 포도주를 엎질렀다. “무, 무슨 짓인가!?” “어이쿠.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제가 실수로 전하의 의복에 그만 실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나는 주위에 있는 용병대장들한테 다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말했다. “일군의 총사령관이신 분께서 이렇게 계셔야 되겠습니까. 자아. 어서 갈아입으러 가시지요. 제가 잘못한 것인 만큼 직접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이걸 거절하시면 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오늘밤에 잠도 못 잡니다. 드 블랑 남작.” “앗, 예! 각하!” 정신줄 놓고 우리의 만담을 보고 있던 드 블랑 남작이 바짝 긴장해서 군례를 올렸다. 참고로 드 블랑 남작은 이제 라우라와 나의 최고 심복이 되었다. “본인은 총사령관 전하를 잠시 안내하고 오겠다. 그동안 철통처럼 포로들을 감시하도록. 알겠는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아!” “음.” 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라는 당황한 눈치였지만 내가 반쯤 억지로 끌고 갔다. 시민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시내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적막했다. 나는 근위병들에게 잠깐 대기하라고 명령한 다음, 라우라와 단 둘이서 광장으로 걸어갔다. 널찍하게 트인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없는 광장에 분수만이 졸졸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군? 왜 이런 곳에…….” “그거 압니까, 라우라. 저는 아주 예전부터 말입니다.” 나는 라우라를 데리고 천천히 분수가로 다가섰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라우라를 범해보고 싶었습니다.” “무, 무, 무슨 소리를……?” “마침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가 나와주었군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라우라가 발버둥쳤다. 하지만 나는 라우라의 어깨를 꾸욱 잡아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공작 전하. 빨리 끝내지 않으면 병사들이 봐버릴지도 모릅니다?” “주군은 역시 변태다! 어떻게 수만 명을 죽이고서 바로 그날, 그것도 점령지 한가운데에서……!” 옛날에는 너무 많이 해서 싫다, 조금 전에는 너무 적게 해서 싫다, 그래서 이제 해주려니까 또 다시 싫다고 말한다. 제아무리 내가 관대하고 상냥한 남자라 할지라도 이건 조금 화가 났다. “……!” 화가 나니까 문답무용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 이후로는 간단했다. 우리 두 사람은 사르데냐 왕국군 13,000명을 몰살시키고, 시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쓸어버린 다음, 아무도 없는 광장에 나앉아서 엉망진창으로 몸을 섞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는 기 막히게 궁합이 좋은 커플이었다. 안 그런가.   00383 양웅(兩雄)의 조우 =========================================================================                        * * *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대규모 파병이 결정된 것은 겨우 며칠 뒤였다. 정확하게 말해서 파병은 아니었다. 엘리자베트라는 군주(軍主) 아래 용병이 대거 고용되었을 따름이다. 문제는 용병의 규모였다. 일만오천 명의 용병이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배를 타고 현재 사르데냐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조차 제1차 파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경우에 따라 제2차, 제3차 파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언급이 아나톨리아 외무대신의 발언에서 암시되었다. “…….” 나는 집무실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난 적어도 엘리자베트가 사르데냐를 도와주기 위해서 참전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외세에 기대어버리다니? 이래서야 설령 사르데냐 왕국이 승리를 거둘지라도 아나톨리아 제국에 직간접적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도시 하나를 넘겨주든가, 적어도 정치적으로 상당히 속박되는 상황에 놓이겠지. 지금 사르데냐 왕국은 국제외교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것까지는 동맹국이니 어찌저찌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제3자를 개입시킨 것. 국제사회의 여론은 명백하게 사르데냐에 등을 돌렸다. ……엘리자베트다. 역시 엘리자베트가 설득했겠지. 피렌체 대공의 죽음에 사르데냐 왕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하고 우리한테 패배해버릴 것이라고 절망하는 가운데, 엘리자베트가 왕실을 유혹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이면 확실히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다고……. 이미 사르데냐와 아나톨리아는 거래를 끝마쳤다. 아나톨리아가 제공하는 것은 병력. 사르데냐가 대신 건네주는 것은, 피아센차-파르마-밀라노 일대보다는 값어치가 덜 나가는 무언가……. 즉, '우리한테 패배하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생각되는 무언가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 부분을 파악하지 못하면 엘리자베트의 의도도, 아나톨리아의 목적도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불분명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 거래의 중개를 맡은 것이 다름 아니라 엘리자베트였지. 달리 말해, 이 거래가 엘리자베트에게 있어 꽤나 이득이 된다는 얘기다. 안 그러면 굳이 번거롭게 아나톨리아를 끌어들이고 사르데냐를 설득할 이유가 없다. 무엇이 엘리자베트의 이득인가. 그게 핵심이리라. 한참이 지나고 내가 중얼거렸다. “……그렇군. 베네치아를 할양하는 것인가.” 사르데냐는 아나톨리아에 베네치아를 임대, 혹은 할양해준다. 그것이 계약조건이다. 틀림없다. 첫 번째, 사르데냐 입장에서는 베네치아를 하나 넘겨주는 것이 밀라노-피아센차-파르마를 통째로 빼앗기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아나톨리아 입장에선 대도시이자 무역거점을 얻게 되는 셈이니 이득이다. 세 번째, 엘리자베트는……베네치아가 아나톨리아의 영토가 되면, 공화국은 고립에서 벗어난다. 베네치아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다. 자국에 우호적인 항구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왜 하필 1만 5천 명의 용병인가? 확실하게 전쟁을 이기고 싶다면 5만 대군 정도를 파병해야 옳다. 5만 명을 빌려주는 대가로 베네치아를 얻을 수 있다면 결코 불리한 거래가 아니다. 1만 5천 명은 너무 어중지간하다. 우리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병력이라는 말이다. 혹시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가진 일만오천에 아나톨리아의 일만오천을 합쳐서, 총합 3만 명이면 여유롭게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설마. 엘리자베트는 희대의 용병가다. 그녀가 라우라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라우라를 전쟁에서 압도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이 없군. 엘리자베트.”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기대 이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외라고 표현해야 할까. 좋다, 엘리자베트. 네 의도에 한번 맞춰보겠다.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는지 봐볼까. 나는 책상에 올려진 수정구를 가동했다. 잠시 뒤, 투명한 막이 새어나오면서 한 인물을 비추었다. 롱그위 성녀였다. “오랜만입니다. 병력은 잘 모집되고 있습니까? 우리 양녀가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만.” ─ 예, 오랜만이에요. 데이지 양은 충분히 유능해요. 덕분에 쉽게 용병을 모집할 수 있었어요. 당신의 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아이더군요. 내가 무심코 실소했다. 심성이 곱다고? 누가? 데이지가? 농담이겠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데이지처럼 악독한 인간을 달리 본 적이 없었다. ─ 딱히 용건이 없으면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렇습니까? 저는 용건이 없어도 성녀님이랑 대화하는 게 각별히 즐겁습니다만. 저녁은 드셨습니까? 사르데냐는 하늘이 맑아서 좋더군요.” ─ 끊겠습니다. 끊어버리겠습니다. 정말로 끊을 기세로 말했기에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롱그위 성녀.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 ……괜찮겠어요? 원래 계획보다 한 달은 빠른걸요? 주홍색 머리카락의 성녀는 표정이 진지해졌다.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덕분에 우리의 예정도 앞당겨졌지요. 이제 우리가 움직여도 비난할 주변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하지만 아직 여왕 전하께 연락을……. “오. 제가 장담하건대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국내에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태세라고 곤란하다지요?” ─ ……. “야심차게 준비했던 프랑크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어서 아예 대륙으로 진출할 길까지 막혀버렸으니 귀족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후우. 안타깝군요.” ─ 말씀하고 싶은 게 뭔가요? “귀족들의 인기를 끌어모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물을 던져줘야지요. 롱그위 성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여왕 전하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어서 연락하세요.” 성녀가 침묵했다. 이제 와서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성녀에게도 각오가 필요했다. 이건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하는 산사태와 같았다. 1분 정도가 흐르고, 성녀는 새삼 각오를 다시 정했는지 이쪽을 뚜렷하게 노려보았다. ─ 아뇨. 여왕 전하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보고를 드리지요. “호오. 자신이 책임을 전부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 예.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넘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니까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제가 이걸 시작하겠습니다. 성녀가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 오늘부로, 우리 브르타뉴 왕국은 귀국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 * * “통령 각하! 큰일입니다!” 피렌체에 마련된 집무실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뛰어들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두 발을 아예 탁자에 올려두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들갑은. 자네에게 큰일이 아닌 것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아니,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제국이 제노바를 타국에 양도했습니다!” “…….” 엘리자베트가 다리를 내리고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건 확실히 '큰일'이로군. 보고하라.” “브르타뉴입니다! 제기랄. 각하, 브르타뉴였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짓을!” 쿠르츠가 전속력으로 뛰어오느라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이빨을 바득 갈았다. 엘리자베트는 다소 의외였다. 쿠르츠가 이렇게까지 분해하는 모습은 드물었다. “브르타뉴가 직접 참전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할 터이다. 어찌된 일이냐?” “……정확하게 말하면 브르타뉴가 아닙니다. 롱그위 자클린 성녀. 아테나 대신전의 공식 제1좌 성녀입니다. 제국은 성녀에게 제노바를 인도적인 차원에서 할양했습니다.” 쿠르츠가 간신히 목소리를 진정시키고 보고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포로에 가차없지 않습니까. 파비아 때처럼 이번에도 제노바의 시민들을 죄다 노예로 팔아버릴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프랑크의 남부도시들에서 구입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도중에 성녀가 끼어들었군.” 엘리자베트는 즉각 상황 전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거 노예로 팔리게 생긴 시민들. 그걸 사겠다고 나선 프랑크측 도시들. 절체절명의 순간, 평화주의자이자 화합의 상징인 자클린 롱그위 성녀가 '안 됩니다!'라고 나선다……. 훌륭한 시나리오였다. “안 그런가, 쿠르츠.” “맞습니다. 프랑크의 남부도시들은 성녀한테 빚이 있지요. 얌전히 물러났습니다. 제국은 왜 국가 간의 전쟁에 성녀가 함부로 끼어드냐고 격렬하게 항의했고…….” “그리고 아테나 대신전에서 노예값을 대신 지불했겠지.”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쿠르츠가 한숨을 쉬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훌륭한 짜고 치기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단탈리안이 써먹을 법한 술책이야. 어느 한쪽을 끌어들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브르타뉴였군. 그래서 제노바는 어떻게 됐는가?” “뭐. 뻔하지요.” 쿠르츠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성녀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다,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전원 노예로 팔릴 뻔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봐주기 힘든 눈물의 무대를 연출하더니……. 제국에선 아테네 대신전에 그럴 거면 도시를 통째로 구입하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대신전에서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노바는 도시의 주인이 왕국에서 대신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시민들의 모든 권리와 재산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업적을 이루어낸 롱그위 성녀의 명성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라고,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최근 롱그위 성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대륙의 평화, 종족의 평화를 울부짖으며 성녀는 실제로 몇 번의 협상을 타결시켰다. 지난 공화주의 대표회의에서는 자살 폭탄에 휘말리기도 했다. 몸을 가리지 않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성녀……그것이 사람들이 가진 인상이었다. 그 실상은 브르타뉴 왕국의 앞잡이. 종교계를 이용하고자 했던 단탈리안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해낸, 왜곡의 이미지였다. 성녀는 기꺼이 단탈리안에게 이용당했다. 그 대신에 브르타뉴 왕국에 일정한 이익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는 대신전과 성녀에게 병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통령 각하. 롱그위 성녀가 누구한테 지원군을 요청했는지 아십니까?” 쿠르츠의 질문에 엘리자베트는 무척 간단하게 정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앙리에타이겠지.” 브르타뉴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아테네 여신을 국교로 지정하고 있으며 성녀와 개인적인 친분 또한 깊다고 알려진 군주. 롱그위 성녀가 진심으로 충성심을 바치고 있는, 유일무이한 여걸. “단탈리안은 이걸 노렸군.” 엘리자베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새어나왔다. “그가 전쟁을 벌이리라는 사실을 내가 알았듯이, 내가 참전하리라는 사실을 단탈리안 역시 알았다. 우리 공화국이 전쟁에 참여한 이상, 제국 역시 또 다른 제3국을 끌어들일 명분이 생겨버리지.” “빌어먹을 일이지만 통령 각하의 예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쿠르츠가 쿵, 하고 탁자에 서류를 올렸다. “롱그위 성녀가 개인적으로 끌어모은 병력의 목록입니다.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겨우 어제인데, 어찌된 일인지 성녀는 벌써 사천 명 이상의 용병을 모집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기병으로요.”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하군.” “공식적인 발표에서는 폴리투니아 방면에 치안유지군으로 보낼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개소리입니다. 통령 각하. 제국은 처음부터 브르타뉴를 끌어들일 생각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르데냐에는 전 대륙에서 군세가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합스부르크 제국군, 사르데냐 왕국군, 아나톨리아 제국군, 브르타뉴 왕국군……. 엘리자베트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좋다. 단탈리안. 끝까지 쫓아가주지.’ ――앙리에타와 자신이 각자 반대진영에 서게 되었다. 이런 대본을 만들어낸 어느 남자를 향해서, 엘리자베트는 깊은 감명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2차 국화전쟁은, 어느 국가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가속했다.   00384 양웅(兩雄)의 조우 =========================================================================                        * * * “제노바 시의 열쇠를 성녀께 전달합니다.” “도시의 열쇠,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대륙력 1512년 9월.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제노바에 행차하여 할양식을 주관하였다. 제노바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아테나 대신전에 넘어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노바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만세를 외쳤다. “만세! 성녀님 만세!” “아테나 여신께 영광을!” 성녀 덕분에 노예가 될 뻔한 신세를 벗어났다. 아마 저들은 롱그위 성녀가 탁자를 갈아서 멜론 주스를 만들겠다고 말해도 '성녀님이라면 가능합니다!'라고 소리치겠지. 성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주변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만세 소리가 더더욱 격렬해졌다. 정치를 아는구만. 할양식이 끝나고 우리는 관저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성녀 그리고 데이지, 딱 세 명만이 방안에 들어갔다. “저 우습지도 않은 행사는 또 뭐에요? 저런 걸 준비했으면 준비했다고 말해야죠.”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녀는 아까까지 지었던 미소가 거짓말이라는 듯이 표정이 180도로 변했다. 멜론 주스는커녕 바퀴벌레라도 씹어먹은 얼굴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성녀에겐 예외적으로 유죄 판결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 여자는 마녀입니다. “그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계약서를 만들어서 도장 찍고 끝내버립니까? 이건 애시당초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뭐,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치고는 잘했습니다.” “보름 내내 달려와서 겨우 도착했나 싶었는데, 냉큼 연설문을 쥐어주지 않나! 궁중백, 당신은 사람을 다루는 게 엉망진창이에요!”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 연설문도 내가 몸소 써주었지 않은가. 감동적인 연설 덕택에 제노바 시민들의 심장은 그대로 성녀의 손아귀에 들어가 두근두근거리게 되었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듣고 싶을 정도였다. “예에, 예에.” “사람이랑 얘기할 때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세요! 어깨 으쓱거리지 마세요! 비웃지도 마세요! 당신, 얼마나 몸짓으로 상대방을 화내게 하는지 아세요!?” “저도 성녀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건사합니다. 특별취급입니다. 기뻐하셔도 괜찮습니다만.” “당장 죽어버렸으면……!” 이빨을 바득바득 갈면서 이쪽을 노려보는, 자칭 타칭 대륙과 종족의 평화를 위해 세상 누구보다도 열심히 발품을 팔고 계신 자클린 롱그위 성녀 28세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시녀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데이지.” “예, 아버님.” “성녀님한테 들었다. 용병을 모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그래도 한 사람 몫은 해낼 정도로 머리가 자란 모양이구나.” 나는 데이지의 앞머리에 손을 올려서 가볍게 토닥거렸다. “수고했다.” “…….” “당분간은 이대로 성녀님의 시중을 들도록. 나는 지금 군무상서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네가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겠지.” “예. 알겠습니다……아버님.” 라우라와 데이지는 견원지간이었다. 의외로 피해자인 데이지는 라우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라우라는 데이지를 볼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되도록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되돌렸다. “자아.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해볼까요.” “……어? 아. 네에.” 어째서인지 성녀가 약간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멍청한 표정은 뭐냐는 눈짓이었다. 그러자 성녀가 미간을 좁히면서 말했다. “의외로……딸아이한테 상냥하시네요?” “푸웁!” 예상치 못한 발언에 내 입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튀어나갔다. “상냥? 제가 데이지한테? 농담이 지나치군요, 롱그위 성녀.” “조금 전에는 어딜 봐도 약간 무뚝뚝한 아버지에 착실한 딸이었는걸요.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뭘 단단하게 착각했는지 눈앞의 성녀께선 우쭐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꼭 새끼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다 알고 있다, 하는 그 표정 말이다. 새끼고양이가 그러하듯이 안타깝게도 롱그위 성녀 또한 지능이 상당히 떨어졌다. “데이지 양이 어리면서 왜 그리 열심히 일하나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데이지 양. 단탈리안 궁중백은 상냥한 아버지인가요?” 성녀가 싱글벙글거리며 허리를 굽혀 데이지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었다. 알다시피 데이지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 꼬맹이로 취급받는 일이었다. “예. 아버님께선 언제나 무척 상냥하십니다.” “어머어머. 어쩜. 설마 궁중백이 세상에는 이래도 악마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테냐, 하는 기세로 온갖 질병과 저주를 흩뿌리고 다니는 주제에 가정에서는 부드럽게…….” “제가 잘못할 때마다 밤새도록 고문을 가하지만, 충분히 상냥하십니다.” 롱그위 성녀가 웃는 모습 그대로 표정이 멈추었다. “네?” “가장 최근에 고문받은 건 벌써 사 개월 전이군요. 커스토스 영지의 마을들 사이에서 분쟁을 조율하는 데 그만 한 마을의 이권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서류를 잘못 작성했지요. 그날은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삼각목마에 앉아서 촛물로 온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 이러면 나도 데이지를 말리지 못했다. 사실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성녀는 데이지를 모욕했다.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어라……? 네……?” 성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정말? 아니면 농담? 하고 성녀의 눈동자가 당황한 채로 질문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데이지가 글자를 세 개 잘못 적는 바람에 칠백오십 명의 마을주민이 피해를 볼 뻔했습니다. 무수한 인명을 책임지게 될 사람한테 실수 따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합당한 처벌일뿐더러, 사실 조금 가벼운 처벌이기도 하지요.” “…….” 성녀의 어안이 벙벙해진 와중에 데이지가 말을 이어나갔다. “반 년 전, 3월 16일에는 그만 용의자를 고문하는 데 실수했습니다. 간을 도려내야 했는데 폐를 도려내고 말았습니다. 폐가 재생되기까지 용의자는 숫기 빠진 소리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심문 작업에 차질이 생길 뻔했습니다.” “고, 고문?” “예. 그날 아버님께서는 감각이 수백 배 증폭되는 약물을 투입하신 다음, 저를 인적이 드문 성벽에 매달아두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었지요.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방금 데이지가 한 말에는 중대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오류를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멍청하기는. 그건 3월 17일이다.” “아니요. 16일이 확실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발레포르를 고문한 날 아니더냐? 3월 17일이 맞다.” “아버님께서 피습을 당하신 게 3월 15일이고 바로 그날부터 고문을 시작했으니 15일, 16일, 그러니까 16일입니다. 15일은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고, 17일에서는 전부 밝혔습니다. 그 정도는 기억하실 수 있겠지요?”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으음. 16일이 맞는 것 같군.” “보십시오. 아버님은 기억력이 지나치게 나쁩니다.” 훗, 하는 느낌으로 데이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끔씩 노인성 치매가 의심됩니다. 정말로 제가 화장실까지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시끄럽다. 네가 비정상적으로 기억력이 좋은 것이다. 나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롱그위 성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두 사람은……양부와 양녀,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롱그위 성녀.” 성녀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서로를 아끼는 건가요……아니면 싫어하는 건가요……?” “증오합니다.” “증오하는데요.” “……? ……?” 성녀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마주한 18세기 수학자처럼 난해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서로를 아끼거나 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아니요.” “그건 조금 다르군요.” 데이지를 함부로 건드리는 녀석이 있으면 아가리를 찢어버린 다음에 항문에 쑤셔 박아버리고 남대문에 네 조각으로 갈라서 전시해버릴 것이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지난 번에는 건드린 사람이 라우라였으니까 채찍질로 끝났을 뿐이다. “혹시 롱그위 성녀. 사람이 상대방을 아끼려면 반드시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나요……?”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옆에서는 데이지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른 채로 신전에서만 자라난 아가씨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의 관계와 심리라는 것이 딱 잘라서 호오로 갈리는 줄 아십니까? 세상에. '미지근한 우정보다 차라리 적나라한 적의가 낫다'라는 명언도 있습니다만, 아마 롱그위 성녀는 평생이 걸려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왜 굳이 무겁게 목에다가 머리를 달고 살아가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정말입니다. 얼굴은 예쁘면서 30살이 다 되도록 뭘 배우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나와 데이지의 연타 펀치에 롱그위 성녀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성녀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무척이나 단호하게 각오한 기색이 느껴졌다. “죄송한데요, 궁중백.” “말씀하시지요.” “제 전담 시녀를 당장 바꿔주세요.” 그날 밤. 나는 라우라와 데이지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짜느라 무진 애를 썼다. * * * 피렌체 대공이 처참하게 죽어버린 이후, 사르데냐 왕국은 극히 수동적으로 나왔다. 왕국군은 절대로 우리와 회전에서 맞붙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가 약점을 보이면 언제든지 물어뜯을 수 있도록 아군의 보급로를 철저하게 노렸다. 전형적인 지구전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이런 지구전은 엘리자베트 통령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라고 들었다. '현재 제국군과 정면에서 부닥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했다던가. 안 그래도 지구전을 주장하던 밀라노 공작과 더불어서, 사르데냐 왕국군은 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었다. 덕분에 우리군은 마음대로 왕국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깡그리 불태우십시오.” 민병들이 요새에 틀어박혀서 우주 방어를 펼치든 말든, 그들의 집과 재산까지 요새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돈이 나갈 만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뺏어갔다.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것은 불태워버렸다. 요새가 마련되지 않은 지역, 가령 딱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고 개발도 덜 된 지역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다.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엘리자베트 전략'은 알토란과 같은 도시들을 제외하고 남은 모든 지방에 희생을 강요했다. 엘리자베트의 전략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무서운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희생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농민들, 거기에 농민들의 대표자들은 거세게 왕국군을 비난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엘리자베트는 2만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우리를 견제했다. 공격이 아니라 견제였다. 우리가 마음대로 약탈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찔끔찔끔 위협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군의 분견대가 운 나쁘게 엘리자베트의 포위에 걸려들고 말았다. 엘리자베트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겠지. 그러나. “피해자는 전무합니다, 공작 전하!” 어찌된 일인지 엘리자베트는 우리 분견대가 그대로 탈출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엘리자베트 본인은 '실수'로 놓쳐버렸다고 말했다던가. 이 한심한 작태에 사르데냐인들은 격분했다.   00385 양웅(兩雄)의 조우 =========================================================================                        “적군을 제대로 포위하지도 못하다니!” “언제까지 외국인 용병에게 왕국의 안위를 맡길 셈인가!” 엘리자베트 전략에 피해를 입은 신민을 중심으로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새화된 도시들도 공식적으로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약탈과 방화에 살 곳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대거 도시에 피난을 왔고, 이들을 껴안느라 도시의 치안과 환경이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왜 비(非) 시민을 부양하는 데 도시의 자금이 소모되어야 하는가. 실향민이 부랑자가 되어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는데 왕국 중앙은 언제까지 지구전을 고집할 속셈인가. 애당초, 외국인에게 통솔권이 넘어가 있는 현재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저런 불만이 폭발해서 엘리자베트의 입지를 공격했다. 사르데냐 왕실은 입장이 곤란해졌다. 딱히 왕실이 좋아서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파비아 함락, 피아센차-파르마 항복, 라스페치아 항복, 제노바 함락, 연달아서 불행이 일어나는 가운데, 왕실은 또 다시 회전을 벌일 능력이 부족했다. 외국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지구전은 최악의 상황을 넘어가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거점들을 제외하고 아국의 영토를 일시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구전을 입안하는 자는 누가 되었든지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여기서 엘리자베트가 나섰겠지. ‘본인은 어차피 외국인. 비난을 짊어져도 잃을 정치적 지위도 없다. 백성의 불평은 본인이 동맹국을 대신해서 짊어지겠다…….’ 다만, 불평의 수준이 너무도 심각했다. 대륙력 1512년 9월 17일. 엘리자베트를 총사령관 지위에서 끌어내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사르데냐 전체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때, 제노바에는 일단의 병력이 상륙했다. “사르데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왕 전하.” “그대에게 받는 환영 인사만큼 불안한 것도 없는걸.” 브르타뉴 왕국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이끄는 병력이 닻을 내렸다. 그 숫자는 오천. 대국을 결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싶은 규모이겠으나, 나는 진심으로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왜냐하면 오천이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브르타뉴 왕국의 기병이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전력인지는 내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브르타뉴의 기병은 보병이 지원해주지 않아도 단독으로 적군을 깨부수는 것이 가능했으며, 무척 고상한 단어로는 '깡패'라고 불렸다. “전하께서 왕림하시니 이미 전쟁이 끝난 기분이 듭니다. 야아,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니까 이토록 든든하군요.” “낯짝이 두껍기는 여전하네. 다른 의미로 안심이야.” 앙리에타 여왕이 어이가 없는 듯 피식거렸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에 생기가 조금 부족했다. 의외로 화기애애한 우리 두 사람과 다르게, 여왕 뒤쪽에 서 있는 장수들은 날 악마라도 보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모두 브르타뉴 왕국군의 지휘관이었다. 저들에게 나는 자국을 쇠퇴시킨 장본인이요, 당장 처죽이고 싶은 인물 제1순위에 해당하겠지. “허허. 다들 뭐 그렇게 얼굴이 심각하십니까. 앞으로 같은 동료로서 무수한 난관을 거쳐갈 사이인데 서로 웃고 삽시다. 자아, 미소. 활짝 미소.” “…….” 내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휘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지휘관들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항해한 나머지 오줌이 심하게 마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불쌍하군. 참고로 나는 이렇게 패배한 개들이 쳐다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사랑한다고 해도 좋았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을 가지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내 뒤쪽에서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궁중백의 말이 옳아요. 아군끼리 분열해봤자 좋아할 사람은 적뿐입니다. 여기서는 잠깐이라도 과거의 원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왕국에 이익이 된다고, 이 천녀는 생각합니다.” “성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과연 아테나 여신의 독실한 신자들이라고 할까. 성녀가 한 마디 거드니까 마지못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나는 여왕이나 성녀처럼 사령관급의 인물이랑 소통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없었다. 하루 동안 여독을 풀고 난 다음, 앙리에타 여왕은 나와 독대했다. “전황은 보고받았어. 엘리제가 꽤 난감한 상황에 놓인 모양이던데.” “간교하고 또 악랄한 수법이지요.” “음?” 앙리에타가 포도주잔을 들고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야?” “엘리자베트 통령은 일부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일부러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킨다니…….” 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탈리안이여.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구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자베트가 정말로 사르데냐를 구원할 생각이라면 아나톨리아 제국을 노골적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향후, 사르데냐는 설령 전쟁에 승리할지라도 아나톨리아의 그림자에서 살게 됩니다.” 유일한 동맹국이 괴뢰로 전락해버린다. 엘리자베트는 어째서 그런 악수를 두었는가. “엘리자베트는 외교 파트너를 갈아치운 것입니다, 여왕 전하.” “사르데냐에서 아나톨리아로……과연, 그런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톨리아가 맨입으로 엘리자베트를 도와줄 리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조건은 베네치아를 할양받는 것, 최대한의 조건은……아마도 사르데냐의 분열 및 패망. 그리하여 사르데냐 전체가 아나톨리아 제국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 앙리에타가 낮게 신음했다. “악마의 수법이다. 동맹국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락으로 이끌다니.” “대신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훨씬 더 든든한 맹방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아나톨리아라는 대국을. 최고의 한수 아닙니까?” “…….” 앙리에타는 점점 더 안색이 어두워졌다. 얼마나 더러운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다. 지금 이 땅에는 동맹에 대한 의리도, 타국에 대한 예의도, 민중에 대한 배려도 없다. 기만과 거짓이 횡행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도 나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여왕. 당신도 다르지 않습니다. 브르타뉴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지요? 사르데냐의 시체를 양분으로 삼아 브르타뉴에 공급하는 것입니다.” “…….” “아니, 정확하게는 브르타뉴도 아니죠. 당신의 왕권입니다. 이번 원정에서 성공함으로써 아직 전하의 군사적 역량이 건재함을 알리고, 브르타뉴 국내의 불만을 잠재운다.” 내가 웃었다. “훌륭한 외도입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는 군주의 표본이군요. 아, 비웃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친구와 친구는 서로 닮은 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대의 말이 맞아.” 앙리에타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말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국가일 뿐.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국가는 필요없어. 브르타뉴는 나의 것이고, 그렇기에 브르타뉴의 영광은 나의 영광이지.” “솔직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거지?” 앙리에타가 내 눈을 노려보았다. “합스부르크는 제국과 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중앙과 지방으로 분열되었어. 이제 그대는 사르데냐를 산산조각내려 하고 있지. 단탈리안. 그대는 발을 밟는 곳마다 분열을 흩뿌리고 다닌다. ……무엇을 어디까지 노리는 것이냐.” 내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 모든 인류의 분열이다. 프랑크가 브르타뉴를 증오한다. 브르타뉴가 바타비아를 증오한다. 사르데냐는 브르타뉴를 증오한다. 각자의 사정이 뒤엉키고 충돌하여,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서로를 격렬하게 증오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때. 우리 마왕군은 대륙을 점령할 것이다. 더 이상 예전의 마왕군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미명 아래 내가 배후에서 지배하는 마왕군이다. 그리고……. “제가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 “음?” “당초 목적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사르데냐 왕국의 지원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엘리자베트를 말려 죽이고 싶어서 말입니다. 사르데냐의 지원은 정말 눈엣가시였지요.” 나는 작은 원을 그리면서 포도주잔을 흔들었다. “엘리자베트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아나톨리아부터 끌어들인 것을 보십시오. 저런 외교적인 합의가 하루이틀 만에 되겠습니까? 전쟁이 시작하기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겁니다.” 저절로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트는 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자신임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협상할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알겠지요. 엘리자베트는 지금 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 “예. '어차피 그대가 사르데냐를 짓밟아도 나에겐 아나톨리아가 있다. 쓸데없이 나와 싸우는 대신, 서로 사르데냐를 사이좋게 갈라먹는 것은 어떤가?' 하고.” 비유하자면 무도회의 장대한 프러포즈. 사르데냐를 무대로 삼아 엘리자베트와 내가 춤을 춘다. 누가 더 외세를 많이 끌어모을 수 있을까, 이것이 솜씨를 겨루는 기준이다. 나는 헬베티카 연방과 브르타뉴 왕국을 회유했다. 엘리자베트는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였다.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사르데냐 왕국은 사분오열되어 주변국을 배부르게 만족시켜주겠지. 피가 철철 흐르는 레어 스테이크를 테이블에 둘러앉아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디 후작이 버림받았고, 피렌체 대공은 죽었다. 충신도 능신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이 없어지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외국에서 온 여우 한 마리다. 사르데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한 명을 달래겠다고 왕국 하나를 선물한 것이지 않습니까? 뭐, 약간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만 성의를 봐서라도 용서해야지요. 저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 “이번에 엘리자베트가 실각하면 다음 총사령관은 싫어도 회전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글쎄, 그 마지막 총사령관까지 죽어버리면 사르데냐 왕실도 엘리자베트를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때가 기대됩니다…….” 내가 웃는 모습을 앙리에타가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의는 그쯤에서 끝났다. 엘리자베트가 이끄는 부대와는 싸우지 않고, 다른 장수가 지휘하는 부대와만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것이 작전이었다. 당연하지만, 제노바라는 대도시가 아테나 대신전에 통째로 넘어가는 사태를 사르데냐 왕실은 인정하지 못했다. 왕실은 아테나 대신전과 더불어서 브르타뉴 왕국을 비난했다. 타국의 전쟁에 제3자가 함부로 개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국들에선 이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 먼저 공화국을 개입시킨 쪽은 사르데냐가 아닌가. ─ 게다가 아나톨리아 제국까지. 눈 가리고 아웅에도 정도가 있다. 오히려 싸늘한 반응으로 사르데냐를 고립시킬 따름이었다. 내가 그토록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아둥바둥 뛰어다닌 것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왕실은 대내외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엘리자베트 통령이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엘리자베트는 깔끔하게 퇴진했다. 왕실의 돈으로 고용한 용병대까지 순순하게 내놓아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단, 아나톨리아의 용병만큼은 계속해서 지휘권을 자신이 가졌는데, 이걸 두고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물러서자 전권을 휘어잡은 사람은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 속칭 밀라노 공작이었다.   00386 죽은 귀족의 국가 =========================================================================                        밀라노 공작도 이런 시점에서 총사령관이 되기 싫었겠지. 본의가 아니게 떠맡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피렌체 대공이 패사하고 엘리자베트 통령이 퇴진한 지금, 사르데냐의 모든 도시가 기꺼이 복종할 만한 가문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실력이 있지만 격이 낮은 가문. 격은 높지만 실력이 낮은 가문. 어느 쪽도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높았다. 당연했다. 총사령관이란 “전쟁터를 향해 몸을 던져라” 하고 명령을 내리는 지위다. 전쟁터는 언제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병사이거나 장군이라고 해보자. 고작 무능력한 총사령관 때문에 자신이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과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납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격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역사도 짧고 명성도 없는 가문 출신의 총사령관 때문에 나 자신의 인생이 종결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실력주의라든지 혈연주의라든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고 싶지 않고,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스포르차 가문. 그렇기에 밀라노 공작이다. 한 인간이 50년, 아니 20년이라도 명망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유혹에 기꺼이 넘어갈 수도 있다. 상대방의 모략에 걸려 좌절할 수도 있다. 그걸 스포르차 가문은 300년이 넘도록 견뎌냈다. 명예. 오로지 극소수의 가문만이 이 두 글자를 가문기(旗)에 새겨넣을 수 있었고,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더불어서 그러한 극소수에 해당했다. 귀족들은 기꺼이 그들의 위엄에 복종했다. 그들이 전쟁터에서 죽으라고 명령하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가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을 지키는 두 마리의 수호신, 검독수리와 레비아탄. 그중 검독수리는 라프페치아의 앞바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레비아탄이 똬리를 풀고 포효해야만 했다……. 밀라노 공작은 비록 단기결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또한 '그까짓 개인적인 이유'로 자신의 책임감에서 눈을 돌릴 인물이 아니었다. ─ 왕국 전토에 총동원령을 내린다! ─ 모든 도시 의회는 즉각 시민병에 대한 지휘권을 본인에게 양도하라. ─ 사르데냐인이여. 집결하라! 비상령이 왕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밀라노 공작은 더 이상 빠른 시일 안에 용병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는 각 도시를 수비하는 시민병을 끌어모았다. 비록 시민병이 용병에 비해서 사기가 낮고 실력도 뒤떨어진다지만, 질은 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의 진퇴를 두고 갑론을박한 것이 언제였냐는 듯, 사르데냐 왕국은 밀라노 공작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시민병들도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우리 제국군이 무자비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할 뿐, 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아마 밀라노 공작이 뒤에서 획책했겠지. 제국은 갓난아기의 내장을 즐겨 먹는다든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횡행했다. 하지만 효과적이었다. 약탈로 인해 주전파의 목청이 한껏 커진 상황. 귀족이고 시민이고 가리지 않고 어서 전쟁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사정. 여기에 밀라노 공작의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술책이 더해졌다. 총동원령에 의해 모집된 병력은 자그마치 4만 명. 여기에 다국적 용병으로 구성된 정예병 1만을 더하여, 밀라노 공작은 이례적인 속도로 5만 대군을 조직해냈다. 허겁지겁 숫자만 불린 오합잡졸이 아니었다. 제대로 지휘관과 지역에 따라 편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군대였다. 사르데냐 전역에서 영주귀족들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 하는 각오였다. 그동안 우리 제국군은 뭘 했느냐면――. “공작 전하. 산마리노는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게 어디 있나. 불태워버려라.” 열심히 약탈했다. 아아, 말 그대로 꾸준하고도 집요하게 약탈했다. 사냥도 그렇거니와 약탈은 부대들 간에 협동을 길러준다. 우리 제국군에는 이번에 브르타뉴 왕국군이 새로이 들어왔다.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부터 브르타뉴군과 박자를 맞춰야 했다. 브르타뉴군뿐만이 아니다. 라우라는 적군이 무서운 기세로 민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보험을 들어두어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즉시 피아센차-파르마-라스페치아 일대에서 시민병을 뽑았다. 그중에는 약탈과 살인이 두려워서 우리에게 투항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이리하여 3,900여 명의 시민병을 마련했다. “제국이 패배하면 왕국이 배신자인 그대들을 얌전히 놔둘 리 없다”, “로디 후작의 최후를 보아라. 배신자의 말로란 저런 것이다”, “얌전히 기다려서 죽든지 싸워서 살아남든지 선택하도록”, 등등. 시민병들에게 동기를 불어넣은 몫은 나에게 떨어졌다. 이래 봬도 나는 시민병 전문 지휘관이었다. 프랑크의 백합 전쟁에서 유일하게 패퇴하지 않은 부대가 바로 내 지휘 아래 분투한 농민병이지 않았는가. 내 선동과 통솔에 시민병은 금세 단련되었다. 우리군은 사르데냐 왕국을 불사르고 돌아다녔다. 밀라노 공작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제아무리 우리가 심각하게 약탈을 행하여도 절대 응전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다만 우리군이 노리려 하는 도시마다 마법대만 급파했다. 우리에게는 공성장비가 전무했고, 마법전력에서 압도하지 못하는 이상 공성전을 치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었다. 밀라노 공작의 기민한 대응 때문에 우리군은 도시 일대를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릴 수 있었어도, 도시 자체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3주일이 지났다. 마침내 밀라노 공작이 움직였다. 공작은 해군을 이용해서 5만 대군을 성공리에 집결시켰다. 5만 명 이상의 대군이 평원에 집결한 광경을 한번이라도 구경했다면 알 것이다. 그건 세상에서 제일 겁쟁이인 인간도 일당백의 용사가 되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왕국군이 용기백배해서 진군했다. 이에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회전은 우리야말로 바라는 바다. 지옥을 보여주겠다.” 라우라의 명령에 아군 3만이 일제히 전진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몇 번이나 거두어온 라우라는 헬베티카 용병들에게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앙리에타 여왕과 브르타뉴 왕국군도 얌전히 명령에 따랐다. 이들은 천성이 전사에 가까웠고, 전사는 자신을 패배시킨 적수를 누구보다도 존중했다. 대륙력 10월 10일. 현자-말레딕투스 평원에서 양군이 마주했다. 평원에는 파두스 강이 흘렀다. 나는 지명을 일일이 기억함으로써 내 뇌수를 스트레스에 휩싸이도록 만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단지 '큰 강'이라고 개인적으로 명명했다. '큰 강'은 여러모로 훌륭한 이름이었다. 일단 외우기 쉬웠다. 거기에 우리군이 전투를 치른 티키누스 강과 트레비아 강, 그러니까 파비아 백작이 야습에 사망해버린 곳과 피렌체 대공이 군대를 말아버린 곳, 두 강줄기가 모두 이 '큰 강'의 지류에 속했다.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앞으로 수천 년 동안 '큰 강'은 파두스 강 따위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저주받은 강줄기, 피로 물든 강, 절망과 한탄의 강, 그런 이름으로 회자되리라. 사르데냐 왕국의 멸망이 이 강물과 함께하리니. 적군이 두 배에 가까운 현재 상황에서도 나는 확신했다.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라우라가 최종회의를 열었다. “…….” “…….” 막사에 헬베티카 용병대장들과 브르타뉴측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일국의 여왕인 앙리에타가 자리하자 다들 조금씩 삼가는 분위기였다. 놀랍게도 라우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앙리에타를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제일 늦게 들어오는 것이 관례라고 해도 '감히 여왕 전하를……' 하는 공기가 브르타뉴측에서 감돌았다. 뭐, 정작 앙리에타 본인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데 파르네세 공작께서 드십니다!” 경비병이 우렁차게 말했다. 자리에서 전원이 기립했다. 라우라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한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몇몇 지휘관들은 얼굴이 묘해졌다. 스물두 살의 여공작. 아직 애송이 티가 벗겨지지 않을 나이. 하지만 전 대륙에 군사적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다. 40대, 50대의 지휘관이 보기에는 어떤 느낌일까……. “모두 자리에 앉도록. 아군은 다음과 같이 진형을 짠다.” 라우라가 군례를 올리자마자 본론에 들어갔다. 용병대장들이 익숙하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브르타뉴의 지휘관들도 약간 당황했지만 군말 없이 착석했다. 우두머리인 앙리에타 여왕이 한결같이 차분한 덕택이었다. “보통 일렬로 보병을 배치하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라우라가 탁상의 지도에서 점토를 옮겼다. 잠시 뒤, 아군의 보병을 가리키는 점토들이 고르게 배열되었다. 일렬이 아니었다. 마치 반달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아니, 세모꼴 ▷ 모양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전투에 한해서 다소 변칙적인 진용을 꾸린다.” “…….” 장수들이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총사령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입술을 열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인가?” “그렇습니다. 적군의 보병은 아군에 비하여 두 배 이상 많습니다. 단기전이 되면 적군이 유리합니다.” “조금 도박성이 짙군…….” 앙리에타가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진영을 배치하면, 잠시나마 가장 앞에 선 제1열이 적군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야 된다. 자칫 잘못해서 제1전열이 녹아버리면 삽시간에 중앙이 뚫려버려지. 상당한 정예병을 배치해야 할 것이다.” “아니요.”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제1전열은 시민병이 담당합니다.” “하아? 징집병이?” 앙리에타 여왕이 미간을 좁혔다. “순식간에 패퇴할 터인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간단합니다. 적군의 주력 또한 시민병입니다. 동족인 사르데냐인과 싸우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격하되,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들지 않겠지요.” “……과연. 동족상잔을 일으키는 것인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군에는 사르데냐인 민병뿐만이 아니라 외국 출신의 용병도 있다. 그들이 적군의 제1전열로 나오면, 작전은 통용되지 않아.” “밀라노 공작은 용병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하지?” 그때 라우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거다. 라우라가 전쟁터에서 무척 안 좋은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항상 저런 미소가 튀어나왔다. 아마도 나를 보고 배운 습관인 것 같았는데, 개인적으로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라우라를 잘못 교육했다니까. “왜냐하면, 여왕 전하. 밀라노 공작이 '똑똑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앙리에타를 비롯해서 지휘관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무릇 현명한 인간은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는 법입니다. 밀라노 공작은 어째서 왕국군이 연전연패했는가 철저하게 분석하겠지요. 그건 공작이 전쟁터로 이곳, 현자-말레딕투스 평원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이미 엿보입니다.” 라우라가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지도를 쓰윽 훑었다. “보십시오. 여기 근처에는 산자락이나 둔턱, 하다못해 어느 정도 큰 숲도 없습니다. 사방이 훤하게 뚫린 평야입니다. 적군은 티키누스, 트레비아, 양 전투에서 모두 우리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패배했습니다.” “…….” “밀라노 공작은 이렇게 판단했겠지요. 제국의 특기, 아니 파르네세 공작의 특기는 복병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매복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 “음.”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 공작이 의도적으로 현자-말레딕투스 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했다. 그 추측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강점을 봉인한다. 확실히 병법의 기본입니다만…….” 라우라가 재차 짙게 웃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기본이라는 것이지요. 밀라노 공작은 제 발로 사지(死地)에 걸어 나왔습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리리플] NineBreaker// 예, 전쟁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단탈리안한테 좋지요. 단탈리안이 세계에 출현한 이후, 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국가전은 단탈리안이 조장했습니다.(...) 클리너63// 엄청 많이 보내시잖아요. 제가 늦게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asd메이지// 옙, 엘리자베트와 단탈리안의 무도를 장식해줄 거대 케이크 맞습니다. 프롤마룬// 엘리자베트는 괴롭혀지기 위한 인물이 아닙니다...! 물고기인간// 글쎄요. 단탈리안의 목 정도 아닐까요. ^o^ TheDaybreak// 감사합니다. 아침새// 적군을 이기기 힘들다면 함께 갈라 먹으면 된다, 라는 매우 심플한 결론입니다. T검은 날개T// 캬캬. 메이사이// 아뇨, 간당간당하게 세이프이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387 죽은 귀족의 국가 =========================================================================                        “자기 발로 사지에 걸어왔다?”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한 것이지요. 사방이 막힌 데 없이 훤히 뚫린 평야라는 것은, 그만큼 기병을 운용하기에 제격이라는 얘기입니다.” 보병만 보자면 사르데냐 왕국군은 우리에 비해 두 배 많았다. 그러나 기병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우리군이 왕국군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밀라노 공작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평야를 전장으로 골랐다지만 실상은 약점을 강화해버린 꼴이었다. “밀라노 공작도 기병이 취약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공작이 내세울 작전의 주요 골자는 어떻게든 최대한 우리의 기병을 버텨내는 것. 그리고 만약에 대비해서 기병이 돌격해와도 방어할 수 있도록 배후에 정예 보병을 배치하는 것…….” 반면에 우리 제국군은 최대한 적군의 보병을 버텨내는 것이 목표였다. 왕국군이 제국군의 기병에 붕괴되는 것이 먼저인가. 제국군이 왕국군의 보병에 압살당하는 것이 먼저인가. 그 결말에 따라서 회전 전체가 결정되었다. “허면.” 앙리에타 여왕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과인의 기병에 승패가 달린 게로군.” “그렇습니다, 여왕이시여.” “이렇게 말하는 것도 뭣하다마는, 명운을 과인에게 내맡겨도 괜찮겠는가. 결국은 타국의 군대에 불과하다. 만약 과인이 그대를 배신한다면 손 쓸 도리가 없이 패퇴할 터.” 여왕의 말에 오히려 주변 지휘관들이 더 당황했다. 전하! 하고 소리 내서 제지하는 장수도 있었다. 라우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라우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여왕께서는 배신하시지 않습니다.” “호오. 어째서?” “여왕께서 배신하신다고, 단탈리안 궁중백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아?”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기대하던 앙리에타의 눈빛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러건 말건 라우라가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본관은 정치에 무지합니다. 하지만 궁중백은 아닙니다. 만약 여왕께서 배신하실 마음이 있었다면 궁중백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궁중백은 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고, 따라서 저는 여왕님을 완전하게 신뢰합니다.” “뭐…….” “배신할 리 없다는 사실이 분명한 이상, 브르타뉴의 기병은 저에게 있어 단지 매우 믿음직스러운 전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투의 명운을 가장 강력한 전력에 맡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라우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 시선이었다. 총사령관의 발언에 막사 안에서는 누구나 말문이 틀어막혀 있었다. 라우라는 몇 가지를 더 설명하고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다” 하고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단탈리안.” 앙리에타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참고로 앙리에타는 나를 궁중백이라고 부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왕에게 패배한 것이지, 제국의 궁중백 따위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무어라 해야 할까. 정말이지 죄가 깊은 남자로군.”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입니까, 전하?”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소리다.” 라우라. 큰일났습니다. 방금 발언으로 여왕이 배신할 확률이 1% 늘었어요. * * * 다음날 아침, 왕국군 진영에서 아침부터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이길 자신이 강할수록 전투를 빨리 시작했다. 빨리 해치우고 빨리 집에 가자, 라는 마인드는 아니었다. 단지 승리하고 난 이후에 적군을 보다 쉽게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전투가 밤늦게 가서야 끝난다면 추격전 역시 밤새도록 이어지게 되었다. 밤은 추격하기 썩 좋은 시간대가 아니었으며, 패잔병이 야음을 틈타서 도망치기에도 편했다. 밀라노 공작은 우리보다 먼저 나팔을 불었다. 승리할 자신이 충만하다는 소리였다. 아침 여덟 시. 가을 공기가 선선하게 내려앉은 가운데, 양군은 군사를 정렬시켰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제일 위험한 장소에 말을 타고 있었다. 바로 제국군의 제1전열이었다. 아군의 목표가 적군 보병을 막아내는 것인 이상, 그 보병을 제일 처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이곳은 최대 격전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저한테는 너무 무거운 짐입니다, 라우라.” 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간이 망원경으로 평원 저편을 내다보았다. 인간, 인간, 그리고 또 다시 많은 인간. 어디를 어떻게 봐도 인간이 득실거렸다. 월맹군 전쟁 이후로 이렇게 많은 적군을 대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전투 직전에는 가슴이 뒤숭숭했다. 나는 언제나 전투를 앞두었을 때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쟁은 정치와 달랐다. 변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글쎄, 라우라는 정반대로 말하려나……. ─ 사르데냐여, 외국의 압제에 대항하여 일어서라! 대규모 전투라서 그런지 연설전이 이루어졌다. 멋들어지게 늙었다 싶은 신사가 대형으로 투영되어서 연설을 펼쳤다. 투영마법에 번역마법이 동반되는 연설전은 마법사가 일정 이상 확보되어야만 부릴 수 있는 사치였다. 밀라노 공작은 목소리가 중저음에다 기본 바탕에 힘이 있었다. 좋은 정치인이 될 인상이었다. 내 말은, 거짓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순둥이처럼 '아, 저 사람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거짓말했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공작은 꽤나 멋진 말을 아주 멋진 말로 꾸며낼 줄 알았다. 격조가 있었고, 적절한 울림이 있었으며, 애국심과 애향심을 교묘하게 부추겼다. “오오오.” 모처럼 멋진 연설을 들었다. 다 끝나고 났을 때는 내가 손뼉을 쳤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병사들이 ‘각하……? 진짜로……? 지금 진짜 진심으로 박수 치고 계신 건가요?’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차마 지휘관이라서 병신이라 욕하지는 못하겠다 싶은 얼굴들이었다. 왜. 자고로 예술작품에는 적아가 없는 법이거늘. ─ 제군들. 우리측 연설자로는 내가 아니라 앙리에타 여왕이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총사령관을 라우라가 가져간 만큼, 얼굴 마담 정도는 여왕한테 양보해줄 필요가 있었다. 앙리에타도 브르타뉴로 돌아가서 대외적으로 자랑할 거리가 있어야지 않겠는가. 앙리에타도 목소리가 제법 고왔다. 엘리자베트에 비하면 약간 거칠지만 충분히 멋진 연설을 해내리라. 나는 느긋하게 앙리에타 여왕의 연설을 기다렸다. ─ 지금 저기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문둥병 환자에 창녀가 뒷간에서 낳은 자식, 뼈마디란 뼈마디는 죄다 쉬어빠진 시금치마냥 구부러진 노친네보다 역겨운 놈은 없다. “푸우웁!” 그리고 첫 마디를 듣자마자 성대하게 침을 뿜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나도 모르게 뒤쪽을 바라보았다. 큼직하게 투영된 앙리에타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는가. ─ 저 노친네는 치매에 걸린 나머지 자기가 어디에 왔는지도 모르고 푸짐하게 똥을 싸갈기고 있다. 잘못 듣지 않았다! 정말로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똥이니 뭐니 말하고 있었다! ─ 아마도 우리가 친히 이곳이 노인을 위해 지어진 화장실이 아니라 전쟁터임을 알려줘야만 정신머리를 차릴 텐데, 안타깝게도 그때 가서는 또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대며 오줌을 질질 흘리고 말 것이므로, 저 노인은 기어코 이곳 말레딕투스 평원을 자기 전용 화장실로 만들어버릴 운명이다. 오, 여신들이시여! 벌써부터 똥냄새가 내 콧구멍까지 퍼져오는구나. 병사들이 깔깔 웃었다. 특히나 브르타뉴 군사의 웃음소리가 컸다. 그들에게는 여왕의 저런 말투가 익숙한 듯싶었다. 다른 병사들도 서서히 웃음에 전염되었는데, 대체로 투박하게 살아온 그들에게는 오히려 여왕의 연설이 성격에 맞았는지 “우오오오오!”라고 환호성을 질러 화답했다. ─ 적군은 아침에 발기도 제대로 안 될 것이 분명한 노친네를 우두머리 대표랍시고 내보냈다. 말인즉슨 저기 옹기종기 모여든 놈들은 죄다 발기부전에 걸린 머저리 병신 집단이라는 이야기다. 제군들, 솔직히 과인은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수컷을 만나보았지만 저것들처럼 불알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개들은 만나본 적이 없음을 고백하노라.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놓고 휘파람을 부는 병사도 있었고, 여왕에 호응하여 적군을 향해서 온갖 음담패설과 쌍욕을 내뱉는 병사도 있었다.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 저들은 밤기술이 너무 형편없는 나머지 부인들한테 두들겨 맞아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 분명하다. 제군들! 적어도 우리는 자기 아내한테 처맞고 사는 병신들에게 패배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 우아아아, 하고 군사들이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 확실히 저들은 우리보다 머릿수가 많다! 그보다 확실한 것은 저들 하나하나가 제군의 불알 한짝보다 덜 떨어지는 머저리라는 사실이다! 앙리에타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내들어 정면으로 겨누었다. ─ 반면에 제군들은 진정한 사나이며, 저쪽에 바글거리는 내시 새끼들과 다르게 훌륭한 불알을 두 개씩 가지고 있다! 가서 놈들에게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라! 전군! 전진하라! 함성이 절정에 달했다. 각 부대들이 전통적으로 내려가진 뿔나팔을 무질서하게 불어댔다. 북소리가 무박자의 박자로 신나게 울렸고, 악기가 없는 병사들은 발을 굴러서 온 신체를 대신 악기로 만들었다. “……아니. 뭐. 일국의 여왕이.” 나는 반쯤 헛웃음을 지었다. 밀라노 공작이 기껏 신사적이고 낭만적으로 깔아두었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엘리자베트가 브루노 평원에서 보여준 명연설에 비하면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불꽃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 전하인가. 왜 군사들에게 인기가 그리 많은지 이해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초반 기선 제압을 이쪽이 가져간 상황에서, 양군이 서로 점점 가까워졌다. 먼저 좌익에서 기병들끼리 맞붙었다. 어제 라우라가 설명한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적군은 좌익에 가장 정예인 기병들을 배치할 것이다.’ ‘좌익은 강줄기에 접해 있다. 그만큼 전장이 제한되어 있고, 지반이 비교적 물렁하지.’ ‘밀라노 공작의 목적은 기병전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우익과 좌익, 어느 한 쪽이라도 오랫동안 버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터.’ 그렇기에 왕국군은 기병전에 불리한 지형에다 오히려 정예병을 배치시킨다. 라우라는 그렇게 예측했다. ‘고로, 아군 역시 좌익에 최정예 기병을 투입한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단 한방에 싹 쓸어버려라.’ 좌익의 기병대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롱그위 성녀가 축복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다. 현재 아군의 좌익을 담당한 기병대는 다름 아니라 브르타뉴군. 여왕 앙리에타가 직접 이끄는 기병 오천 명이었다. 이에 대항해서 요격하러 나온 왕국군의 기병대는, 군기를 보아 짐작하건대 소수의 기사단과 대다수의 다국적 용병. 시민병이 주력인 왕국군에 있어 틀림없이 가장 듬직한 전력이겠지. 브르타뉴군과 왕국군이 강가에서 충돌했다. 나는 망원경으로 슬쩍 기병전을 구경해보았다. 창과 창이 엇갈리면서 병사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렸고, 휘어진 칼에 몸이 찢긴 병사가 말에서 떨어져 사정없이 굴렀다. “흐음.”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었다. 더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안 되는군.” 브르타뉴군의 압승이었다. 왕국군은 단 한 차례의 충돌에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이제 와서 평범하신 척하셔도...(어깨 으쓱) asd메이지// 스포르차 가문의 상징이 레비아탄입니다. 불쌍하게도... 벌레// 비너스 안 나옵니다. 진히로인 아닙니다.(...) 프롤마룬// 착각입니다! 그거 착각입니다! 수천천사// 얍얍. xusaku// 헉헉. TheDaybreak// 감사합니다. 물고기인간// 사람머리, 라고 하니까 말씀드리자면 라우라는 요새 수집품이 많아져서 좋아하고 있습니다. kodks// 감사합니다. 누구셧더람// 야호?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388 죽은 귀족의 국가 =========================================================================                        브르타뉴가 제1라운드를 뺏어가는 가운데. 우익에서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가 적군의 기병대와 충돌. 평야의 양 가장자리가 말발굽 소리로 치장되었다. 이 굉음을 귓가로 넘겨들으며 수만 명의 보병은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나아갔다. 전투는 막힘없이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군가를 부르도록.” 내 명령을 부관들이 복창했다. 그러자 시민병 사천 명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사르데냐에서 태어나서 사르데냐에서 살아온 민병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은, 당연하게도 사르데냐인의 노래. 적군은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당황했다. 그들은 외국인 침략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도시를 박차고 위험천만한 전쟁터로 나온 것이었지, 동족을 살해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적군의 전열이 주춤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배신자는 밀라노 공작이다!” “형제들이여, 같은 핏줄을 서로 죽이지 마라!” “라스페치아는 버림받았다!” 아군의 민병들이 하사관을 중심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건 아군과 적군의 전투의지를 동시에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아군 역시 진심으로 형제와 싸우기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양측이 사기가 떨어진 와중에, 내가 이끄는 제1전열과 왕국군의 제1전열이 부딪쳤다. “헛소리다! 놈들은 전부 배신자다!” “동족을 배신한 놈들에게 응징하자!” 왕국군의 독전관들이 고함을 질렀다. 창칼이 요란하게 난무했다. 우리군이 진심으로 싸움을 회피하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서자, '저건 거짓말이다!'라고 목청을 키운 독전관의 주장에도 설득력이 사라졌다.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살인하는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장창을 쥔 병사들의 손아귀에는 명백하게 힘이 부족했다. 이래서야 우리 제국군이든 왕국군이든, 최소한 이곳 제1전열의 접전지에서는 시간만 끌 뿐이었다. 상대편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은 한없이 연기되겠지. 그리고 라우라가 나에게 명령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지연전이었다. “너무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지 마라! 천천히. 동료들과 확실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하사관의 구호에 따라서 물러서는 것이다!” 나는 직접 대열 사이를 오가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연전을 벌인다면서 한 걸음씩 물러서는 병사들이 사기를 잃어버릴 경우, 뒷걸음은 순식간에 걸음아 나 살려라 식의 후퇴로 바뀌어버렸다. '지휘관인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다'라는 사실을 강조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따금 나는 석궁을 들어서 적병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말뿐만이 아니다. 행동으로도 그대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그렇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내 화살이 적병에 명중할 때마다 주위의 병사들이 “와아아아!” 하고 소리쳐서 호응했다. “쏴라!” 내 모습을 발견했겠지. 왕국군 궁수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집중적으로 화살을 쐈다. 근위병들이 방패를 들고 내 몸을 가렸다. “각하, 위험합니다! 잠시 뒤로 물러서주십시오!” “제까짓 놈들이 날리는 것이 이쑤시개밖에 더 되겠는가. 내버려두어라.”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여 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했다. 물론 내가 대단히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전쟁을 대비해서 투구와 갑옷에 거금을 투자하였다. 마법으로 도배된 갑주인지라 허구한 날 화살을 쏴봤자 뚫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기랄. 나는 역시 전쟁터에서는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하필이면 갑옷이 미처 보호하지 못한 왼발 허벅지 틈새로 화살이 날아들어 박혔다. 장창의 숲을 빠져나가고, 근위병의 방패를 지나서, 갑옷의 틈을 파고들어, 내 허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크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굽혔다. 근위병들이 경악했다. “각하! 젠장, 각하를 모셔라!” “필요 없다!”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눈앞이 시뻘개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빌어먹을 화살이 허벅지를 꿰뚫은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해라’였다. 여기서 지휘관인 내가 쓰러지면 시민병으로 구성된 제1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터. “크읍, 크프흐흡!” 나는 화살을 잡아서 반바퀴 돌려 단숨에 빼냈다. 근육이 헤집어지는 감각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눈알이 빠질 뻔했다.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스스로 배를 두세 번 째본 놈이 아니었다면, 마왕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어도 두 번은 죽었다. 빌어먹을 화살! 나는 세상에서 화살이 제일 싫다! “크아아아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방법으로 화살을 빼낸 다음 치켜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높이 빼들어 포효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장군님 만세!” “사르데냐 만세! 사르데냐 만만세!” 나는 네놈들의 장군님으로 불리기도 싫었거니와, 사르데냐 만세는 내게 어울리는 구호도 아니었다! 여하간 민병들은 자기네가 좋을 대로 함성을 쏟아냈다. 그대로 바닥에 수직낙하했을 뻔한 사기는 반등하여 하늘을 찔렀다. 내가 잠시 음성확대 마법을 꺼트리고 근위병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머저리 병신들, 아주 내가 시체가 될 때까지 넋 놓고 치켜볼 속셈이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정말 개처럼 아프군. 빌어먹을!” 나는 품안에서 포션을 꺼내어 허벅지에 흘려보냈다. 화살촉이 살 안에 틀어박히는 사태를 막으려고 일부러 깊숙하게 반바퀴 돌려서 빼내는 짓거리까지 감행한 상태였다. 포션이 흘러갈 구멍은 충분히 넓었다. “쓰읍. 푸흐으으……끄으읍!” 포션이 상처에 스며들어서 제2차 고통을 유발하는 가운데, 나는 허벅지에 화살이 스치거나 틀어박힌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자그마치 세 번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프의 모험대한테 한 번.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궁기병한테 한 번. 이번이 세 번째였다! 평생 살면서 화살촉이 내 신체에 접촉한 것이 세 번인데 세 번 모두 허벅지와 딥키스를 나누었다. 전생에 화살촉과 허벅지 사이에 도저히 상상도 못할 로맨스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덕택에 고통은 내가 옴팡지게 독박을 쓰고 있으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죽일 것들. 내가 엘프 근위병들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너희는……되었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보겠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근위병들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군중에서 나를 전하가 아니라 각하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나를 떠받들어줌으로써 어떻게든 내가 내릴 처벌을 가볍게 만들려고 했던가. 나도 알고 있었다. 근위병들한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방금 화살은 지독한 우연을 뚫고 내 허벅지를 강간한 것이었다. 단지 고통에 눈이 뒤집히면 아무한테나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후우.” 내가 가볍게 숨을 쉬고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내가 위치한 제1전열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보병대가 접전에 돌입했다. 우리를 제외한 아군 보병대는 당연하지만 시민병이 아니었다. 고로 동족의식에 의해 주저하고 있는 이쪽과 달리, 매우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나갔다. 다음으로 나는 좌익과 우익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좌익. 그러니까 앙리에타 여왕이 담당한 구역은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좌익에서 맞붙은 양군의 기병대 숫자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 기병대는 적군을 일격에 분쇄해버렸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좌익에 시체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적군은 이미 저 후방 너머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브르타뉴 기병대가 뒤를 바짝 쫓았다. 행여라도 적들이 재집결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짓밟으려는 심산이겠지. “쯧, 화살 맞은 보람은 있구만.” 내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망원경을 정반대편으로 돌렸다. 우익.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담당한 구역에서는 아직 기병전이 한창이었다. 다만 척 보기에도 아군의 병력이 적에 비해 두 배는 많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정리될 듯싶었다. 이제부터 이변이 없는 이상, 기병전은 우리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저, 전하!” “공작 전하!” 내가 전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다시 지휘에 나서려고 했을 때, 뒤쪽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다. 등을 돌아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총사령관으로서 중군에 있어야 할 라우라가 부관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 아닌가. “라우라!”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총사령관이 왜 여기 있습니까!” “…….” 라우라는 말에서 내리더니 다짜고짜 나에게 안겨왔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라우라가 중얼거렸다. “주, 주군……주군…….”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어조였다. 그날 밤, 라우라가 모든 것을 내게 떠맡겼을 때의 목소리와 울림이 똑같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근위병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당장 우리 두 사람을 가려라, 하고 마왕의 능력을 사용해서 명령했다. 근위병들은 그래도 눈치가 있었는지 얼른 망토를 펼쳤다. 그리고 라우라와 나를 넓게 둘러싸서 바깥의 시선을 차단했다. “주군……흐윽, 무사해서 다행이다…….” “라우라. 진정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내가 라우라의 등을 쓸어주면서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우리 두 사람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서 서로를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라우라는 내 흉갑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군이 화살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나, 머리가 새하얘져서……그래서…….” “괜찮습니다. 자아, 보세요. 저는 마왕이지 않습니까.” 내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사실 아직도 허벅지가 격렬하게 욱씬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치 라우라의 울음소리에 사고가 화악 각성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의 생각과 허벅지의 고통이 분리되었고, 나는 얼마든지 평소처럼 목소리를 꾸며낼 수가 있었다. “웬만한 상처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습니다. 라우라. 당신의 주군은 생명이 질긴 남자입니다. 이 정도로 죽을 것 같았다면 이미 진즉에 세 번은 죽었습니다.” “다행이다……주군이 마왕이라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손으로 라우라의 눈물을 닦았다. 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라우라는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않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간신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그렇지요?” “……으응.” “저를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정말로 절 위한다면 전투에서 이겨야 합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세요. 부관들이 많이 불안해 하고 있을 겁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입술을 맞추었다. 바로 옆에서 쇠가 쇠를 긁는 소리, 방패가 방패를 밀어내는 소리, 핏물에 잠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입술을 떼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믿고 있습니다. 라우라.” 그제야 라우라는 푸른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응. 주군.” 라우라가 다시 중군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 순간 나에게 정말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 점은, 전쟁의 함성이 너무도 가까이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화가 났다. 모든 것이 시끄러웠다. 창, 방패, 말발굽, 병사,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의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시끄러웠다……. “…….” 어째서인지 근위병들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들의 눈치가 목숨을 살릴 줄 알거라.” 어디 가서 너희가 본 광경을 발설하기라도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릴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적어도 내 진의를 알아들을 머리는 가지고 있었는지, 근위병들이 큰소리로 “예, 전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시선을 전장으로 돌렸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89 죽은 귀족의 국가 =========================================================================                        기병대가 패퇴해버리니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까. 사르데냐 왕국군이 본격적으로 거칠게 나왔다. 밀라노 공작이 스스로 전열에 나와서 군을 독려했다. 장담하건대 “동족이든 뭐든 깡그리 죽이도록 해!”라고 소리쳤다. 영감탱이가 목소리는 갓 태어난 사내놈보다 우렁찼다. “밀어붙여라!” “으아아아!” 왕국군은 이제 우리의 보병을 꿰뚫지 못하면 패배하게 생겼다. 지금이야 우리 기병대가 왕국군의 기병대를 마저 섬멸하기 위해서 저 멀리까지 소풍하러 떠났다지만, 그 다음에는 더 탐스러운 먹잇감을 노리고 말머리를 돌릴 것이 분명했다. 뒷구멍이 범해지기 전에 사태를 끝내고 싶겠지. 왕국군은 더더욱 치열하게 전진, 오로지 전진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내가 맡은 부대는 뒤로 물러섰고――자연스럽게 적군을 깊이 끌어들였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일어났다. 슬슬 시민병으로 이루어진 내 부대에는 한계가 들이닥쳤다. 이대로 무작정 버티기만 해서는 적군에게 수박이 깨지듯이 산산조각 나버릴 지경이었다. “적군이 중앙을 돌파하도록 내버려두고, 부대를 양편으로 나눈다.” “예, 각하!” 부관이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부대 뒤쪽에는 예비대가 쌩쌩하게 4개 연대씩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바통을 넘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 나의 부대가 좋게 말해서는 전술적으로 해산하고, 나쁘게 말해서는 전열이 붕괴되어 다른 부대로 도망치고 있을 무렵, 무언가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곧이어 나는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깨달았다. 이거, 피렌체 대공을 궤멸시켰을 때랑 똑같았다. 그때도 우리군은 지금처럼 사르데냐 왕국군을 포위해갔다. 완벽하게 포위가 완성되었을 찰나에 라우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렸다. ‘적군이 중앙을 돌파하도록 내버려두어라’ 하고. 궁지에 몰렸던 피렌체 대공은 덕분에 구사일생했다. 우리군의 정면을 뚫고 도망쳤다. 나는 대공을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아까워했다. 라우라가 나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완벽한 승리는 완벽한 패배만큼이나 해롭다.’ 그리고 어제 군사회의에서 라우라는 이렇게 말했다. ‘밀라노 공작은 똑똑한 인물이다.’ ‘모름지기 현명한 인간은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려고 한다.’ ‘밀라노 공작은 왜 왕국군이 그간 연전연패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겠지.’ 나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았다. 만약에 라우라가 말했던 대로 밀라노 공작이 현명한 인물이고, 과거의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새로이 적용하고자 했다면. 막바지에 이르러 피렌체 대공에게 돌파를 허용하고 만 과거의 전투를――라우라가 일부러 적군을 놓쳐주었다고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제국군의 중앙 보병이 허약해서 돌파를 허용한 사례'로 파악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한다.’ ‘밀라노 공작은 스스로 사지(死地)에 걸어왔다.’ 그때 라우라는 일부러 피렌체 대공을 놓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으로 하여금 우리군의 약점이 중앙 보병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라우라는 피렌체 대공을 이미 적수로 취급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사전작업에 불과했다. 언젠가 다시 벌어질 전투,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전투를 대비하여. 하지만 어떻게? 라우라는 어떻게 적군이 과거의 실패에서 학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는가. 피렌체 대공이 물러난 다음에 누가 차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쩌면 실패에서 배울 줄도 모르는 머저리가 총사령관이 되었을지 어찌 아는가. “아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아, 내가 라우라한테 말했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언젠가 엘리자베트 통령과 전면대결을 펼칠 것이라고, 틀림없이 말했다! 라우라는 내가 얼마나 엘리자베트를 높이 평가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라우라는 나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즉, 라우라는……주군이 높게 평가하는 적 지휘관이 과거의 실패를 되돌이켜볼 줄도 모르는 멍청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트레비아 전투에 피렌체 대공을 방치한 것은 훗날 엘리자베트와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하여 마련해둔 함정, 위장, 거짓이었다. 도대체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차기 총사령관을 확실하게 잡아내기 위해서, 눈앞에 포위로 몰아넣은 현직 총사령관을 순순하게 놓쳐주었다고! 그런 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또 다른 군사적 천재라 불리는 앙리에타 여왕조차 불신할 게 분명했다. 헬베티카의 용병대장들도, 브르타뉴의 지휘관들도,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전략이라고 비난하겠지. ――따라서, 적군도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밀라노 공작은 물론이고 사르데냐 왕국 전역에서 꾸역꾸역 모여든 귀족들과 장군들도 알아차릴 수 없다. 상대방이 어리석지 않을수록, 현명하면 현명할수록, 라우라가 파둔 거미줄에 스스로 뛰어들게 된다. ‘사르데냐의 귀족은 유능하군.’ 언젠가 라우라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어쩌면 라우라는 거기에 이어서 ‘유능한 적군만큼 써먹기 쉬운 상대는 없지’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나는 이번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공언했다. 우리가 엘리자베트 통령과 싸울 일이 사라졌노라고. 그렇기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고안해낸 필사의 전략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가 아니라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에게로 향했다……. “…….”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에 북받쳤다. 기쁨과 회한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이것이 나의 연인이었다. 내가 타락시키고 영원히 함께하기로 맹세한 여자였다. 이 얼마나 눈부시는 재능인가. 얼마나 눈부신 인간을 나는 무책임하고 섣부르게 망가트렸는가……그러나 이것이 나의 연인이었다……. “부관. 나머지 지휘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각하?” “이미 우리 부대는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인이 지휘하나 자네가 지휘하나 별반 다를 것도 없겠지. 수고하도록.” 부관이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들리지 않았다. 망토를 휘날리며 뒤쪽으로 헐레벌떡 뛰어갔기 때문이다. 왼쪽 허벅지가 끔찍하게 아파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왕에게 고통이란 어차피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푸른 산수화. 내가 라우라한테 선물했던 군기가 저쪽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는 절름발이처럼 우스꽝스럽게 절뚝거리며 달려갔다. 아직 한참이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라우라는 정확하게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도 나한테로 달려왔다. 부관들도 그녀를 따라서 황망하게 따라붙었다. “주군, 무슨 일인가! 혹시 상처라도 덧났는가!” 내가 무심코 웃어버렸다. 아직도 주군이라 부르고 있었다. 대화가 주변에 다 들리는 장소에서 저렇게나 조심성이 없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 내가 옆에서 평생 뒤치닥거리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곤란한 아가씨였다. “주군? 괜찮은가?” 걱정스러운 얼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식으로 우울하게 표정을 짓고 있는 라우라를 향해서, 내가 숨에 차오른 채 말했다. “당신은 천재입니다, 라우라!” 나는 라우라의 어깨를 꾸욱 껴안았다. “주, 주군?”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천재에요!” 설명도 뭣도 없이 되는 대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그 이상의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걱정에 휩싸였던 라우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희로 물들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았겠지. “응, 주군이라면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아닙니까. 이런 건 아무도 알지 못해요.” 부관들이 먼발치에 멈춰서서 우리를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제1전열의 지휘관이 다가오나 싶더니, 갑자기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총사령관과 나누고, 갑자기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어리둥절한 것이 당연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번 전투가 '실제로' 무엇이었는가는,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히 단 두 사람만이 알 것이었다. 라우라는 사실상 엘리자베트를 죽였다! 원래 이 평야에서 쓰러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엘리자베트였다! 라우라는 지금 한 순간이나마 대륙 최강의 전술가이자 전략가가 되었다. 그것이 이번 전투의 진짜 의미였다. 나는 이 사실을 오직 나 혼자만이 깨달았다는 것에서 분노와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라우라, 지금은 당신이 최고입니다. 당신은 엘리자베트 통령을 죽였어요……저는 그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아…….” 내 말을 듣자, 라우라의 얼굴에서 완벽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저, 정말인가? 주군에게는, 소녀가 최고인 건가……?” “당연합니다. 뭘 새삼스럽게 묻는 겁니까. 저한테는 언제나 라우라가 최고였습니다.” “…….” 라우라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째서인지 라우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음이 섞여든 목소리로 라우라가 다소 두서없이 속삭였다. “으응, 나, 항상 주군에게 최고가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내가 노력했을 때 주군은 지금처럼 반드시 알아준다. 응. 소녀에게는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전쟁터의 고함과 비명을 자장가로 삼는 것처럼 서로를 부드럽게 안았다. 나의 라우라, 나의 죄……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는 증거. 내가 결코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는, 나의 증거였다. 총사령관이 갑작스레 지휘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아군은 사르데냐 왕국군을 완벽하게 3면에서 포위했다. 적들은 어떻게든 중앙을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새로이 투입된 예비대는 완강하게 벼텨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마침내 아군의 기병대가 돌아왔다. 밀라노 공작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전황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파악했다. 밀라노 공작이 후방에 정예병인 용병대를 배치시킨 까닭이 여기 있었다. 용병대들은 능숙하게 대(對) 기병전용 장창방진을 짰다. 밀라노 공작은 조금 부주의했을 뿐이다. 브르타뉴의 기병대, 그것도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기병대는 단지 '부정적인' 전력이 아니었다. 악몽이었다. 생드니 평야에서 프랑크군은 브르타뉴군보다 세 배나 병력이 많았다. 목책으로 철저하게 방어진지까지 구축했다. 그런데도 브르타뉴군의 돌격을 이기지 못하고 전멸해버렸다. 고작 기껏해봐야 5,000명에 불과할 용병대로 앙리에타를 막겠다고? 글쎄. 나라면 별로 현명하지 못한 대처라고 조언해주고 싶었다. 앙리에타의 브르타뉴 기병대는 아군과 협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적 기병대를 박살내고 돌아온 다음, 쉬지 않고 곧바로 돌격을 감행했다. 아마 롱그위 성녀의 축복 덕분에 군마도 사람도 생생했겠지. 단 한번의 날카로운 공격이 있었고, 그대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왕국군에서 최고 정예병으로 취급되던 용병대는 앙리에타의 일격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장창방진은 형편없이 무너져내렸고, 적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그들의 도주로를 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똑같은 왕국군이었다. 적군은 맞서싸우지도,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우리 제국군은 삼면에서 적을 에워쌌으며, 나머지 한면에서는 브르타뉴 왕국군이 끊임없이 돌격을 감행했다. 내가 지독하리 만치 당한 일제 사격-이후 돌격으로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아군과 적군에 둘러싸여 서서히 압사당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00390 죽은 귀족의 국가 =========================================================================                        “물러서지 마라! 뒤로 도망치지 마라!” 왕국군의 하사관들이 할버드를 치켜세우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나 병사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는 맞서 싸울지라도, 자신과 왼쪽에 있는 동료, 오른쪽에 있는 동료까지 목숨이 위험해진 상황에 처한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법이었다. 브르타뉴 기병에 용병대가 패주했다. 용병대가 아군인 왕국군을 향해서 도망쳤다. 안 그래도 왕국군은 사방이 포위되어 있었다. 패잔병이 정신없이 섞여들자,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자그마치 4만 명이 한곳에 몰리고 있었다. 우리 제국군이 휘두르는 창칼을 피해서 왕국군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으며, 눈치 채보니 어느새 뒷발을 치지도 못할 정도로 4만 명이 뭉쳐버렸다.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적병은 제대로 팔을 뻗어서 창을 내지르지도 못했다. 그에 반해서 우리 제국군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무기를 휘둘렀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로군요. 라우라, 어쩌겠습니까?” “자비는 없다.” 이제 울음을 그친 라우라가 평소처럼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어떤 지휘관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저들에게 평등한 죽음을 하사하라. 전투가 끝나고 나면 용병들에게 시체를 약탈하는 권리를 약속한다.” 우리군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적들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사방에서 “항복한다!”, “자비를, 제발 자비를!” 하고 애걸복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어재끼는 광경도 심심찮게 나왔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처참하게 그들의 목을 베었다. 샛붉은 핏물이 낭자했다. 창자와 간이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뇌수가 튀겼으며, 새빨개진 창날이 피로 쇠를 씻었다. 말레딕투스의 평야에는 비명밖에 울리지 않았다. 적군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마법사들이 모여서 일제히 불덩어리를 쏟아부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숫자가 비슷한 상황에서 공격이란 무의미했다. 우리는 손쉽게 마법을 방어하기만 했다. 적들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참, 반(反) 순간전이 마법을 펼쳐두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서 사르데냐의 수호 가문은 죽는다. 아주 운이 좋게도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병사가 열댓 명씩 생기기도 했다. 그런 행운아들은 줄리아나 드 블랑의 기병대에 의해 칠면조처럼 사냥되는 경험을 맛보았다. 매우 색다른 체험이었을 게 분명했다. 저항해도 죽었고, 항복해도 죽었고, 도망쳐도 죽었다. 아예 자포자기해서 바닥에 주저앉는 적병도 많았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죽이기 편해져서 좋다'라는 반응밖에 돌려줄 것이 없었다. 대략 1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성공적으로 섬멸을 이루었다. 사르데냐 왕국군 4만 명을 모조리 참살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망원경으로 계속 살펴본 결과, 우리는 왕국군 병사가 도망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밀라노 공작조차 무명소졸의 창날에 목이 꿰뚫렸다. 공작, 후작, 백작까지, 무려 열한 명의 고위귀족이 목이 잘렸다. 서른 명의 마법사가 죽었다. 아흔 명의 남작이 효수되었다. 이들을 전부 포로로 팔았다면 국가예산을 세 개는 마련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라우라는 자비가 없음을 명확하게 선언했고, 나는 막지 않았다. 감히 외교적인 예의를 잊어버리고 제국에 반항할 경우,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 강줄기의 이름을 따서 파두스 전투라고 명명한 이 싸움은 다음과 같이 종결되었다. 제국군. 보병 19,400명과 기병 9,800명 참전. 사상자는 보병 4,900명에 기병 600명. 이중에서 사상자 3,000명은 내가 지휘한 민병대에서 발생했다. 왕국군. 보병 약 41,000명과 기병 약 7,000명 참전. 사망자는 보병 약 40,000명에 기병 약 3,500명. 전투에 참여한 48,000명의 왕국군 중 살아서 도망친 병사는 겨우 4,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은 바야흐로 사르데냐 왕국의 악몽으로 군림했다. * * * 이제 대세는 명백하게 기울어졌다. 회전이 일어날 때마다 삼만 명 이상의 병력이 죽어나갔다. 반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사르데냐 왕국군은 정병 10만 명을 잃었다. 왕실은 더 이상 결전 따위를 바랄래야 바랄 수 없는 처지까지 전락했다. “파르마 공작 전하. 위대한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공작 전하의 위명이 이미 대륙을 호명하고 있나이다.” 며칠 뒤, 각국에서 축하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감하고 부랴부랴 사신들을 파견한 것이었다. 아나톨리아 제국과 사르데냐 왕국,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서 사절이 왔다. 자그마한 해프닝도 있었다. 사신들은 소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는데, 금은보화로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 어렵겠다 싶었는지 특별한 물건을 준비했다. 그런데 아홉 개국의 사신 전원이 똑같은 종류의 선물, 즉 보검을 마련했다. ‘공작 = 장군 = 군인 =검’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생겨버린 참사였다. 졸지에 똑같은 선물을 아홉 번이나 헌상하게 된 사신들은 멋쩍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라우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가운데, 내가 손뼉을 쳤다. “일찍이 열국의 국왕 전하들에게 모두 검을 하사받은 장수는 없었습니다. 공작 전하. 폴리투니아의 국왕 전하께서 선물하신 보검은 '폴리투니아의 검'이라 명명하고, 프랑크의 황후 폐하께서 선물하신 보검은 '프랑크의 검'이라 명명함으로써, 아홉 자루의 검을 하나의 진귀한 상징으로 만드심이 어떤지요?” 내 재치있는 제안에 사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실로 멋진 생각이옵니다!” “공작 전하, 소인도 궁중백의 의견을 지지하겠나이다.” 라우라 역시 웃으면서 제안을 승락했다. 자칫 민망스러운 외교적 해프닝이 될 뻔한 사건은 그리하여 <열국(列國)의 검>이라는 미문으로 탈바꿈했다. 소문이 퍼지자 엘리자베트 통령과 아나톨리아의 황제도 보검을 한 자루씩 선물해왔다. 이로써 라우라는 전무후무하게 열두 개국의 군주에게 명검을 하사받은 장군이 되었다. 뭐, 프로파간다란 이런 것이겠지. 우리 제국군은 그대로 기수를 돌려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는 파두스 전투에서 시민병을 대다수 잃어버렸다. 밀라노 공작이 모범을 보이겠다며 자도시의 민병을 대거 이끌고 출병했기 때문이다. 덕택에 밀라노의 전력은 농성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급하게 노인까지 징병해서 성벽 위로 내세우는 모습이 제법 안쓰러웠다. 라우라가 성벽 코앞까지 말을 타고 가서 쓰윽 한 바퀴 둘러보았다. 라우라는 가볍게 코웃음을 한번 쳐주었다. “저들에게 소중한 가족을 돌려주어야겠군.” 제노바에서 약탈한 투석기 다섯 기가 나아갔다. 아군은 투석구에 묵직한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라우라가 발사를 명령했다. 다섯 개의 투사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도시에 쇄도했다. 잠시 뒤, 밀라노의 성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가 던진 것은 돌덩어리가 아니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의 머리통 수십 개였다. 그중에는 일찍이 밀라노 시민이었던 인간의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차마 인간이 저질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짓이었다. 밀라노의 급조된 수비병은 공포에 떨었다. “무엇들 하는가. 계속해서 가족들을 보내주지 않고.” “예, 전하!” 우리군은 장장 두 시간에 걸쳐서 머리통 세례를 쏟아 부었다. 성벽의 병사들은 완전히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개중에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덜덜 떨면서 쪼그라 앉은 병사까지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라우라는 확성마법을 통해서 간결하게 통첩했다. “싸그리 죽고 싶지 않다면 오 분 안에 성문을 열어라, 천치들.”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최후통첩이었고, 그렇기에 효과적인 최후통첩이었다.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더니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성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군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느긋하게 밀라노에 입성하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내 옆에서 말을 몰면서 중얼거렸다. “별로 기분이 안 좋은걸. 남의 일 같지가 않아.” “…….” 아아. 생각해보니 앙리에타 여왕도 르 아브르 요새에서 농성할 때 투석기로 시체 세례를 받았다. 전염병을 노린 수작이었는데 바로 내가 제안한 공격이기도 했다. 왠지 앙리에타 여왕의 얼굴이 살벌했다. 그거 사실 제가 제안했지 말입니다, 하고 고백하면 당장 한 대 맞을 분위기였다. “밥을 먹고 있는데 머리 위로 시체가 떨어지면 어떤 기분인지 아는가?” “그, 글쎄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단탈리안도 꼭 한번 당해보기를 바라네. 정말 개 같은 기분이거든. 어떤 마왕이 그딴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어도 과인에게 걸리면 그날로 죽은 목숨이야.” “하하, 하하하.”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사르데냐 북부에서 제일 강력한 성벽을 자랑하는 대도시,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인 밀라노는 너무도 간단하게 함락되었다. 밀라노가 떨어졌다는 것은 사르데냐가 북부를 통제할 힘을 상실해버렸음을 의미했다. 사르데냐 왕실은 허겁지겁 엘리자베트를 다시 총사령관으로 올렸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프랑크 황실에 몰래 의뢰하여, 황태후로 하여금 메디치 가문의 승계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피렌체 대공에게도 아들이 있었으므로 진짜 승계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한참 어린 아들이 자라날 때까지 황태후가 '후견인'으로서 뒤를 돌봐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당연하지만, 말이 후견인이지 실상은 섭정이나 진배없었다. 게다가 황태후는 이미 한번 섭정이라는 명목으로 프랑크 제국을 쥐락펴락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사르데냐 왕실과 피렌체의 메디치 본가에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프랑크 제국이 참전했다. 프랑크의 남부 귀족들이 연합해서 사르데냐로 침공했다. 명분이 가관이었다. “시대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사르데냐인이 자꾸만 우리들 영지에 무단으로 침범해온다. 부랑자, 피난민, 패잔병을 근절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겠다.” 이것을 하나의 근사한 개소리로 취급해도 좋으리라. 참고로 내가 직접 써준 명목이었다. 하하. 나는 너그럽게 프랑크의 진출을 허용해주는 대신, 프랑크 귀족들로부터 상당량의 보급물자를 약속받았다. 우리 제국군에 식량과 무기가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이 막대한 보급품을 얻어내기 위해서 프랑크 귀족들이 사르데냐의 영토를 무자비하게 약탈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 다음에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카스티야 왕국, 칼마르 연맹국이었다. 나는 이번 전쟁 때문에 대륙의 무역이 중단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이에 대한 '대가'로 제국군이 점령한 항구를 세금 없이 이용해도 좋다고 공언했다. 이들 국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바타비아, 카스티야, 칼마르는 자국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수의 함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 제국군이 필요할 때마다 함선을 빌려주었다. 세 개국은 어디까지나 자국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이며 전쟁에 끼어들 의사는 전혀 없다고 밝혔는데, 이 또한 매우 고급스러운 개소리에 속했다. 우리 제국군이 포로로 잡은 노예들이 그들에게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모든 나라가 이리떼로 돌변해서 사르데냐라는 이름의 탐스러운 양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사르데냐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 작품 후기 ============================   현재 전황을 지도로 올려둡니다.   00391 죽은 귀족의 국가 =========================================================================                        장기말이 전부 갖추어지자, 엘리자베트와 나는 땅따먹기에 들어갔다. 이건 무척이나 간단한 게임이었다. 제국군이 군대를 이끌고 출현하면 엘리자베트는 도망쳤다. 이 도주에는 '청야전술' 혹은 '지구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혹여라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누군가가 이걸 비난하면, 엘리자베트는 또 다시 단기결전으로 맞붙어서 패배하고 싶냐며 단박에 일축시켰다. 반대로, 프랑크 귀족군이나 이곳저곳에서 여우떼처럼 모여든 군대가 나타나면 엘리자베트는 곧바로 태세를 돌변해서 달려들었다. 엘리자베트는 피 흘리는 물고기를 물어뜯는 상어처럼 처참하고 확실하게 상대편을 죽였다. 우리 제국군도 똑같았다. 엘리자베트가 다가오면 교묘하게 경로를 바꾸어 비켜나가는 한편, 사르데냐의 귀족군이 결성되어 우리를 요격하러 나오면 언제 조심하게 움직였냐는 듯 재빨리 달려들었다. 마치 우리 두 사람은 잘 차려진 만찬에서 식탁 정반대 방향에 앉아, 조금씩 손을 뻗어서 요리를 먹어헤치우는 손님들 같았다. 굳이 우리가 서로를 잡아먹지 않아도 먹을거리는 넘쳐났다. 사르데냐의 도시는 함락되었고, 농지는 불타올랐으며, 창고는 약탈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엘리자베트와 내가 이동안 단 한번도 의사를 교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수정구를 이용해서 통신하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 우리 둘은 철저하게 앙숙이자 원수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는 능숙한 춤꾼들이 비록 무도회장에서 처음 만났을지라도 어찌저찌 훌륭하게 박자를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편이 군사를 움직이면 나는 저쪽으로, 내가 이쪽으로 움직임으로써 상대편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고, 결코 서로의 의중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사르데냐 왕실이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빠르게 닥쳐왔다. 엘리자베트가 다행히도 각지에서 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제국군만큼은 어찌 처리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 본인도 공공연하게 “야전에서 제국과 맞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자살행위”라고 말하고 다녔다. 설령 엘리자베트에게 싸울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병사들에겐 없었다. 이제 적군들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었다. 명령하면 전쟁터에 나서긴 나서겠지만, 조금이라도 패전의 그늘이 뒤덮으면 ‘또 진다!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학살당한다!’ 하고 줄행랑을 쳐버릴 분위기였다. 휴전협정. 이 음울한 네 글자 이외에는 어떠한 정답도 없었다. 그리고 사르데냐에게 휴전이란 항복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구, 궁중백 각하……이건 너무나도 가혹한 조건입니다…….” 사르데냐의 외무대신이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외무대신의 손에는 우리 측에서 제시한 휴전협정안이 담겨 있었다. “우리 사르데냐 왕국에게 북부는 주요 항구도시와 산업지대가 집중된 곳입니다……이, 이곳을 이렇게 포기해버리면 왕국의 미래란…….” “왕국의 미래라.” 내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외무대신이 입을 뚝 다물었다. “공작. 과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에, 궁중백 각하.”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제일 처음에 제시하신 협상안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외무대신이 침묵했다. 협상안을 몰라서 침묵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파르네세 공작가의 명예를 복권시켜달라. '고작' 그것뿐이었습니다.” “…….” “맨입으로 해달라는 얘기도 아니었습니다. 충분하고 넘치는 사례금까지 명시했습니다. 그런데도 귀국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반역도당의 무리를 복권시키는 건 가당치 않다고 말했을뿐더러, 심지어 파비아 백작을 앞장세워 데 파르네세 공작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외무대신이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내가 오른손을 세워서 제지했다. “이 모욕을 당하고 아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공작, 제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과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는지요?” “…….” 유구무언인가. 미안하지만 내 쪽에는 조금 더 공격할 거리가 있었다. “제2차 협상안은 어떠했습니까. 그저 파르네세 공작에게 유산으로 넘겨져야 마땅했던 파르마-피아센차 공작령, 여기에 전쟁배상금의 일환으로 밀라노 공작령을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도 귀국에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끌어들임으로써 화답했지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공작. 귀국은 무례하고 뻔뻔하며 외교적인 존중이란 눈꼽만치도 없는 파렴치한입니다.” “구, 궁중백…….” “아국에게서 일말의 자비조차 기대하지 마십시오. 귀국에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협상안을 받아들이십시오. 아니면 거절하십시오.” 내가 몸을 일으켜서 외무대신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언젠가 제4차 협상안을 체결해야 될 때가 온다면, 오, 제가 장담해드리겠습니다. 그때는 겨우 사르데냐의 북부만 가지고 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세해도 좋습니다. 솔직히 저는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군요.” “…….” “가서 공작의 멍청하고 쓰잘데기라곤 하나도 없는 국왕에게, 자국의 백성이 약탈당하도록 내버려두고 외국의 군주한테 국방을 떠맡기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국왕 전하에게 전하십시오. 제국의 권고를 무시하는 자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기대하라고.” 그대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역사가 그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전쟁 직전에 합스부르크 황제가 한 말은 워낙 인상 깊었던 탓인지, 요즘 와서는 거의 합스부르크 황실의 가언(家言)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내 단호한 통첩에 외무대신은 차마 더 말을 붙여보지도 못하고 퇴장했다. 그해 11월 겨울, 사르데냐 왕실은 전면적인 휴전협정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륙의 열세 국가에서 파견한 외무관료가 피렌체에 모여들었다. 나는 합스부르크 황제를 대신하여 조약에 날인하였다. 피렌체 조약이라 명명된 휴전협정안은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1. 파르네세 공작은 과거 파르네세 공작가의 상징인 푸른 산수화를 자신의 문장에 새겨넣을 권리를 획득한다. 향후 이것은 더 이상 전쟁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2. 파르네세 공작은 밀라노, 베르가모, 파비아, 피아센차, 라스페치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파르네세 공작은 사르데냐 왕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는다. 3. 브르타뉴 왕은 제노바, 니케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4. 아나톨리아 황제는 베네치아, 파도바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5. 피렌체 대공이 적법한 나이까지 성장할 때까지 피렌체 대공령은 프랑크의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서 대리통치한다. 단,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피렌체 대공령에 대한 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한다. 6. 피에몬테 일대에 대한 통치권을 프랑크의 여덟 귀족에게 나누어서 분배하며,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한다. 이들은 사르데냐 왕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는다. 7. 이외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전쟁 중에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반환한다. 8. 바타비아 공화국, 카스티야 왕국, 칼마르 연맹국,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상인은 피에몬테 일대 및 베네치아에서 무관세 무역이 허용된다. 나는 조약문에 기분 좋게 도장을 찍은 다음 사르데냐의 외무대신을 쳐다보았다. 외무대신은 도장을 쥔 채 손을 떨고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무엇을 하십니까, 공작. 혹시 도장이 너무 무거워서 힘드신지요?” “…….” 외무대신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 조약문은 사르데냐에게 일방적인 출혈을, 아니 일방적일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사르데냐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다섯 개 뽑으라면 그 안에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가 반드시 포함되었다. 이 세 개의 도시를 한꺼번에 타국에 할양하게 되었다. 10년이라든지 20년 단위로 잠깐 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영구히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대도시인 피렌체마저 일시적이지만 외국의 황태후에게 넘어갔다. 북서부 지방은 아예 프랑크 남부의 귀족들에 의해서 갈갈이 찢어졌다. 반면에 우리 제국이 사르데냐 왕국에게 건네주는 보상은 딱 하나――전쟁을 그만두는 것밖에 없었다. 이처럼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귀족에게 있어 대대손손 불명예로 남았다. 외무대신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나는 외무대신을 부축해주는 척하면서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희는 얼마든지 전쟁을 계속해도 좋습니다, 공작.” “…….” 외무대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노귀족은 나를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분노일까, 공포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외무대신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로디 후작보다 담력이나 인격이나 한참 뒤떨어지는 귀족이었다. 결국 외무대신이 꾸욱, 하고 도장을 찍었다. 내가 외무대신의 오른손을 잡고 신나게 흔들었다. “이토록 기쁜 날이 또 있을까요. 양국에 절망과 피해만 안겨주었던 전쟁이 드디어 종막을 선언했습니다. 저 단탈리안 궁중백은 아국의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귀국에, 아울러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열국의 대표단 여러분께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신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중 사르데냐 왕국을 배려하거나 존중해주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 물론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대표는 가만히 있었지만 쟤네가 제일 악질이니까 셈하지 않겠다. 이날 밤에 종전을 기념하는 무도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라우라는 군중에 남아서 잡무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나는 롱그위 성녀를 파트너로 삼아서 무도회에 참석했다. 물론 롱그위 성녀는 처음에 길길이 날뛰었다. “왜 또 저인가요! 당신은 도대체가 무도회장에 데려갈 여자 한 명을 제대로 사귀지 못하나요!” “제가 이런 자리에서 데려갈 만한 영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녀. 좀 봐주십시오. 제가 브르타뉴 왕국에 재기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까, 지키지 않았습니까? 네? 제 신실함에 대한 선물로 무도회 정도는 같이 가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거고――이건 이거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이어, 롱그위 성녀도 마땅히 파트너로 삼을 남자가 전무하다는 사실이 발각. 이미 앙리에타 여왕이 “난 무도회는 질색이라네”라고 불참을 알려왔는데 여기서 롱그위 성녀까지 자리를 빼면 그야말로 외교적인 결례가 되어버리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춤을 추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거에요”, “앙리에타는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등등, 무도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이 아가씨가 얼굴은 예쁘장한테 왜 애인 하나 없는지 알 만했다. 무도회장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하게 화려한 무도회였다. 다만 엘리자베트도 참석해 있었다. 아예 파트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혼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롱그위 성녀와 첫춤을 춘 다음, 엘리자베트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마드모아젤.”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또' 춤을 출 이유가 있겠는가?” “없지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또 추지 말라는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엘리자베트가 쿡쿡 웃으면서 내 오른손에 손을 가볍게 걸쳤다. 제2차 국화전쟁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 작품 후기 ============================   최종협상에 의해서 사르데냐 왕국 영토가 어찌되었는지,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00392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마왕 마르바스. 전직 서열 제5위이자 현직 판노니아의 국왕,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세바스토크라토르의 호칭을 허락받았으며, 황제를 제외하면 유일무이하게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마왕군에서 중립파를 이끄는, 초로의 신사. 감히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어 보이는 이 마왕은――놀랍게도 현재, 절찬리에 한숨을 쉬어대고 있었다. 원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음에 있었다. 마르바스의 바로 옆에서 여마왕 세 명이 살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러니까 대가리에 골 빈 년들아. 내가 첫타로 예약해뒀으니까 더럽게 군침 흘리지 마시고요. 좋게 좋게 말할 때 그냥 얌전히 꺼져.” “어머나. 순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순번이 중요하와요. 하긴 뇌 없는 시체들이랑만 놀고 있서야 두 개의 차이점도 모르겠지만요.” “너희 두 년 다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뱃살 늘리는 것밖에 없잖아. 헤헤.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보상이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차례대로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이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세 마왕 모두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면, 어쩌면 굳이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전원이 눈웃음만 지었을 뿐이지 입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마왕들의 입가가 떨릴수록 마치 그 진동이 주변에 퍼지듯이, 황궁 앞마당의 공기도 불온하게 떨어댔다. 여기에 바로 역사적으로 중대한 쾌거가 있었다.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각 파벌은 수천 년 전부터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파벌들은 하나의 거대한 조약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다.――저 여마왕들로부터 반경 20미터까지 접근하지 말 것. 그리하여 마르바스 정도 되는 마왕을 빼고, 모든 마왕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파별의 구분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들은 사상적이고도 이념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적인 의견, 즉 ‘정말로, 진심으로 말려들고 싶지 않다……’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아아앙? 뇌 없는 시체? 그건 내가 아니라 네 이야기겠지, 두개골에다 화단을 마련한 년아. 네가 단탈리안한테 해준 일이라고는 위장에다 염증 생기게 한 것밖에 더 있어? 아주 걔가 권력을 쥐니까 이제서야 꼬리 살살 흔들리는 꼬락서니가 아주 고귀하십니다?”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고 비웃음을 날린 다음, 파이몬을 정확히 32˚각도로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단탈리안이 “무덤에 묻힌 성녀가 관짝을 차고 나와서 쌍욕을 퍼부어댈 만한 파괴력을 가졌으니 결코 상대방한테 쓰지 마라” 하고 경고한 제스처였다. “참, 여우가 아니라 서큐버스년이었지! 창녀가 권력자한테 가랭이 벌리는 거야 직업윤리에 충실한 행위였는데 내가 잘못 말했네. 미안, 창녀야. 네가 창녀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창녀짓하는 것을 욕헀어, 창녀야. 부디 네가 창녀라고 욕한 나의 잘못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바랄게, 창녀야.” 파이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장담하건대, 마르바스는 이때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확신했다. 틀림없이 혈관이 터지는 소리였으리라. 그와 동시에 마르바스는 자신의 위장도 터지는 것을 느꼈다. 속이 쓰렸다. “어머나, 그저께도 황궁에 기녀들을 잔뜩 불러모아서 단체 성교를 벌인 여자한테 창녀라는 소리를 듣다니 정말 의외네요. 듣자 하니 대단한 무도회였다면서요. 그렇게 허구한 날 몸을 버려서야 어디 구멍이 남아나기는 하련지 모르겠사와요. 몸집은 꼬맹이처럼 작은 주제에 구멍만 헐렁해진 것 아니에요?” 파이몬이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아, 단탈리안이 불쌍해서 어쩜 좋을까요. 안 그래도 가슴이라고는 발페르 해협마냥 쑥 들어간 꼬맹이랑 잠자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구멍에 넣어도 이게 넣어진 것인지 아니면 공기를 범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에요. 옛날에 잠깐 사귀었다고 해서 만날 자기가 첫 번째라느니 뭐라느니……어휴, 귀찮게 달라붙는 여자만큼 꼴불견인 것도 없다지요.” 또 다시 어디에선가 혈관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이제 거의 서로 코를 맞댄 채 중얼거렸다. “걸레년이 누구 보고 헐렁하대, 썅?” “제가 막 물에 씻은 걸레라면 당신은 바닥을 닦고 탁상을 닦고 더해서 화장실 바닥까지 닦은 다음에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3달 동안 숙성시킨 걸레죠.” “호오. 요컨대 네 년 모가지를 잘라서 제발 3달 동안 숙성시켜주시라는 요청이지?” “소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겠으니 이제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말인가요? 누가 야만적이고 천박하다고 말하지 않을까봐 참 단순하게 나오시네요. 뇌에 주름이 조금 부족한 건 아닌지? 원하신다면 소녀가 직접 주름을 새겨드릴 수도 있는걸요.” 마르바스는 점점 더 위가 쓰려왔다. 황궁 앞마당은 마력이 너무 진하게 내려앉은 나머지 거의 마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찍이 대마왕 바알을 토벌하기 위해 마흔 명의 마왕이 집결했을 때도 이보다는 숨 쉬기가 편했다. 진실이었다. ‘나조차 이리 속이 쓰린데 대체 이 아해는 무엇인고.’ 마르바스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반인반마의 서큐버스가 허리를 쭉 피고 서 있었다. 단탈리안의 개인 비서이자 단탈리안이 부재할 경우 그를 대신해서 국정을 보좌하는 아이였다. 라피스 라줄리. 그녀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옆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라줄리. 누가 가장 먼저 순서가 돌아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신경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가미긴이 슬그머니 라피스에게 달라붙었다. 마왕이 한낱 마인에게 대하는 태도치고는 다소 저자세였다. 라피스가 마계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는 인간-혼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이었다. 이런 태도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군요. 반 년 전의 상황을 이어서 계산해보면, 바르바토스 님께서 4회. 파이몬 님께서 2회. 가미긴 님께서 3회이십니다. 형평성을 따져서 파이몬 님께 다음 차례가 돌아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바로 단탈리안의 잠자리를 관리하는 장본인이 이 서큐버스 혼혈이었다. 라우라나 제레미처럼 직위가 비교적 낮은 연인은 물론이고, 여마왕들도 라피스 라줄리의 스케줄 관리에 의해서 잠자리가 결정되었다. 지난 번에 가미긴과 파이몬이 치정극을 벌이면서 대판 싸우고 난 뒤, 단탈리안은 완전히 질색하여 “라피스한테 전부 관리를 맡기겠습니다!”라고 선언해버렸다. 그 결과. “그거 보세요! 소녀가 제일 먼저잖아요!” “야, 야, 야. 재상 아가씨. 우리 너무 고지식하게 나오지 말자고. 응? 제국에서 서열로 따지면 내가 제일 위잖아. 저거 파이몬 저 년은 나보다 서열이 두 개나 낮아요.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데 내가 당연히 먼저지.” “하하, 마왕의 대소사를 제국 서열 따위로 정하다니 지나가던 슬라임이 허파로 웃어댈 논리네. 나는 좋아. 첫 번째가 아닌 건 아쉽지만 두 번째라면 뭐어, 납득할 수준인걸.” 천하를 호령하는 세 명의 여마왕은 때때로 서큐버스 혼혈의 한 마디에 희비가 교차하는 비극이, 아니, 희극이 연출되었다. 평범한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탈리안은 사시사철 발정난 개처럼 껄떡거렸으며, 여마왕들은 딱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연인 행세를 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지금 단탈리안이 황궁을 떠난 지 6개월이 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 '리셋'된 상황에서는 누가 제일 먼저 단탈리안의 시간을 빼앗느냐, 즉 누가 단탈리안을 가장 압도적으로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여마왕들의 자존심이 세워졌다. 만일 여기서 상대방보다 뒤쳐진다면……그러니까 가령 바르바토스가 파이몬보다 하루 늦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나는 파이몬보다 나중에 만나도 되는 여자'가 되었다. 여마왕들은 그런 사태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애인들을 사귀는 것은 좋았다.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파이몬은 시트리와 사귀었고, 바르바토스는 무수히 많은 애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들 자유연애주의자였다. ――하지만 자기가 다른 여마왕보다 뒤쳐지는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했다! “재상 아가씨. 우리 이렇게 하자고. 내가 이번 달에는 딱 2회만 채울게. 응? 겨우 2회야. 대신에 날 앞으로 밀어줘. 빡빡한 세상에 그 정도 융통성은 있어도 괜찮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푸후. 그럼 난 1회로도 충분하거든? 우리 시체녀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아?” “그럼 시발 나보고 네 년들 차례 전부 돌아간 다음에 자라고!? 내 눈알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그 꼴은 못 본다, 이 쌍것들아!” “잘 됐네요. 소녀가 직접 당신의 눈구멍에 흙을 채워 넣어드리겠어요!” “아앙!?” “하아!?” 마르바스가 기침을 했다. 마르바스는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기침에 피까지 섞여버린 것이었다. 마르바스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기도했다. 단탈리안이여, 제발 빨리 와주게. 이 이상 본인을 기다리게 만들면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경전을 구경하던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트리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떨어졌다. “응? 그러면 세 명이서 다 함께 자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럼 순번도 다 공평하게 1등이잖아. 헤헤. 단탈리안도 괜히 이런 거에 신경 쓰는 것보다 마음 편하게 해결하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침묵.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내가――.” “이렇게 천박한 여자들이랑.” “같이 잔다고?” 시트리가 응, 하고 활짝 웃었다. 해바라기가 꽃피는 것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완벽한 해법이잖아.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야! 참, 기왕이면 거기에 나도 끼어들면 더 좋구. 히히.”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라피스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경우에는 일정도 한결 편하게 관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하온지요? 전하들께서 동의만 하신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님한테 말을 전해드릴…….” “절대로 안 돼!” 세 여마왕이 이구동성으로 맹렬하게 소리쳤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허면 시트리 님께서 제1순위가 되시겠습니다.” “예? 왜 시트리죠? 제가 먼저 아니었나요?” “송구하옵니다만, 파이몬 전하께서도 엄밀히 말하여 첫 번째가 아닙니다.” 라피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만 지금 세 분 중에서 첫 번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체를 통틀어서 계산하면 시트리 전하가 우선입니다.” “…….”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타이밍 좋게도 황궁 정문에 순간전이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색 마력이 사방으로 안개처럼 퍼지더니 그 속에서 단탈리안이 걸어나왔다. 시트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단탈리안에게 와락 안겼다. 마치 애완견이 오랜만에 돌아온 집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어서 와, 단탈리안――!” “시, 시트리. 하하. 무겁습니다.” 단탈리안이 깜짝 놀라면서도 시트리를 가슴으로 받아주었다. 단탈리안은 시트리를 안은 채로 황궁 앞마당에 모인 마왕들을 둘러보았다. “아니. 고작 저 하나 온다고 해서 뭐 이리 다들 모이셨습니까? 제가 도리어 부끄러워질 지경입니다.” “자네는 승전을 올리고 귀환하는 것 아닌가.” 마르바스가 말했다. 사실은 조금 달랐다.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 세 명이 단탈리안을 환영해야 한다면서 자기네 파벌을 긁어모아 집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침묵해야만 하는 진실이 있음을, 마르바스는 경험상 터득하고 있었다. “황도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우리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란 이런 것뿐일세. 사양하지 말게, 궁중백.”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단탈리안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와준 마왕들 약 서른 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단탈리안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마왕조차 상대방이 극진하게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하자 차마 안 좋은 표정을 짓기 힘들었다. 참고로 단탈리안이 악수하러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시트리는 거머리처럼 그의 허리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에이, 단탈리안. 시시껄렁한 의식은 집어치우고 빨리 들어가자.” “……정말로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시트리를 대신해서 제가 여러분께 마음 깊이 사과드립니다.” “빨리!”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며 황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영식이 얼떨결에 빨리 끝나자, 대체로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마왕들도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광장을 떠난 사람은 물론 마르바스였다. “…….” “…….” “…….” 오직 세 명의 여마왕만이 얼떨결에 남아버렸다. 세 명은 슬쩍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실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00393 방울져 떨어지는 밤 =========================================================================                         * * * 다음날 밤, 황궁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 무도회가 열렸다. 인간들은 이번 전쟁을 해석할 때 라우라 데 파르네세한테 초점을 맞추었다. 황제의 대리장군이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 이것이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반면에 마족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의외로, 마족들이 주목한 부분은 바로 헬베티카 연방이었다. 여태까지 마왕군은 연이어서 실패만을 반복했다. 이백 년 전, 마왕군이 대륙을 토벌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엘프와 난쟁이 같은 아인종들은 과감하게 마왕군을 버렸다. 더 이상 자신들은 월맹군에 참전하지 않겠다며 영구중립을 선언함으로써……. 헬베티카 연방은 그런 아인종들이 모여든 국가였다. 즉, 여타 마족들 입장에서 헬베티카 연방은 비겁하고 저열한 배신자 집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헬베티카 연방은 다시금 마왕군에 복종하겠노라고 서약했다. 연방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에서 '마왕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이제 헬베티카 연방은 충성심을 증명했다. 한때 사분오열되었던 마족이 다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마족들은 이렇게 이번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년 봄.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이 척살되었다. 작년 가을.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처형당했다. 올해 봄. 세 명의 마왕과 열한 명의 마계대공이 숙청되었다. 올해 가을. 신생 마왕군에 헬베티카 연방이 복종했다. 고작 2년 만에 거대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틀림없이 어떤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격류였고, 철저하게 계획되어 진행된 연극이었으며, 피하거나 숨지 않는 이상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화살이었다. 신생 마왕군은 명백하게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그 배후에 누가 숨었는지 대부분의 마족은 몰랐다. 마족들은 그저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원불멸하는 군대의 바르바토스에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파이몬에게, 공정한 마르바스에게 열광하였다……. 하지만 극소수의 마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계의 대공은 이 극소수에 들어갔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인이 미처 전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였나이다.” “괜찮다. 과인은 그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노라.” “하오면, 미천한 소인에게 다시 한 번만 말씀을 들려주시오면…….” 마계에서 울발라지옥(嗢鉢羅地獄)을 다스리는 대공이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대공의 눈앞에는 마왕 단탈리안이 앉아 있었다. 단탈리안은 포도주를 홀짝이고 느긋하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과인은 빠른 시일 안에 귀공의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말했다.” “저, 전하…….” 울발라 대공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쉴 새 없이 닦았다. 체격이 뚱뚱한 대공은 안 그래도 땀이 많았다. 그러나 대공은 평생 지금처럼 땀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만일 소인이 전하께 불충했던 점이 있었다면 부디 말씀해주시옵소서. 곧바로 시정하겠습니다……소인은 언제나 전하께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과인이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일세. 노예제를 폐지하게.” 노예제를 폐지하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저히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대공은 자신을 숙청하기 위해서 마왕 단탈리안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표정이 진지했다. “과인은 지금 그대에게 수작질을 거는 것이 아니다. 마계에서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자네와 같은 대공은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노예를 수천 명이나 부린다. 반면에 가진 물건이라곤 자기 몸뚱어리밖에 없는 마족이 수두룩하지.” “…….” “단적으로 말해주겠네, 대공. 과인은 마왕을 제외하고 어떠한 권력층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의 발밑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너무나 솔직한 발언에 대공은 할 말이 사라졌다. 단탈리안은 대놓고 '네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건 마치 이제부터 상대방을 두들겨팰 거라고 예고한 다음에 실제로도 두들겨패는 사람과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뭐라고 이성적으로 반박할 수 있겠는가? “노예제는 저희 선조의 선조가 살아가던 시절부터 이미 존중되던 전통입니다. 전하께서 서열 제도를 폐지하신 것에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오나, 과거의 유산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과거의 유산이라.” 단탈리안이 작게 웃었다. “과인이 옛것 중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직접 말해주마. 새로운 마왕군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복종한 15명의 마계대공은 좋은 옛것이다. 그러나 마왕군에 대항하고, 반란을 획책하고, 감히 암살을 계획한 11명의 마계대공은 나쁜 옛것이다.” “…….” “선과 악은 자네가 결정하지 않는다, 울발라 대공.” 단탈리안이 대공에게 상반신을 쓰윽 숙였다. 더없이 가까워진 거리에서 단탈리안이 말했다. “우리 마왕들이 선악을 결정하지.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선악은 기준이 무척이나 명확하다. 복종이 선이며 저항은 악이다. 자네는 편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야.” “바,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울발라 대공이 악을 썼다. “마계에서 노예를 소유한 것은 대공뿐만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귀족들이 노예를 축적하고 있나이다. 수백 년이 넘도록 쌓아올린 재산을 하루 아침에 포기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면, 그들은 참지 못하고 폭발할 것입니다!” 단탈리안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폭발하게.” “예?” “자네는 의외로 순진하군. 설마 반란 한번 일어나지 않고 노예제가 조용히 폐지되겠는가? 과인이 그런 기적을 기대할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였는가. 울발라 대공. 당연히 반란이 일어나겠지.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어쩌면 백 년에 걸쳐서 일어날지도 모르네.” “하, 하온데 어째서.” 단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과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편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 “우리는 그대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부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따름이다. 물론 그대들은 노예가 아니므로 자유의지에 따라 반항할 수 있다. 단, 그 경우에는 가슴에 자유를 품은 채 무덤까지 걸어가야 하겠지.” 침묵이 찾아들었다. 멀리서 무도회의 열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무도회장에서 다소 떨어진 장소였다. 밀담을 나눌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대공은 마왕 단탈리안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를 때 '어떠한 얘기를 들어도 겁먹지 않을 각오'를 끝마쳤으나,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오였다……. 대공이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전하. 모든 마족이 마왕 전하들께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일부 대공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할 것입니다.” “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다는 말인가?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긴 암살자들이라도 이용하려는 것이냐.” 단탈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마음껏 동원해보거라. 그런 암살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이백 명? 이천 명? 오오, 마왕의 억제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암살자 군대라! 너무 무서워서 그만 오줌이라도 지려버리겠구나.” “…….” “예전에 알찰타 대공이 암살자를 고용해서 과인을 습격한 적이 있지. 알고 있는가?” 울발라 대공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알찰타 대공은 어리석게도 단탈리안을 암살하려 들었고, 그 대가로 죽음의 기사들에 의해 참살당했다……. 알찰타 대공이 머무르던 궁성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이백 명의 귀족이 전원 참수되어서 꼬챙이에 뚫렸다. 마왕 단탈리안은, 모든 머리통에 일일히 하나의 문구를 칼로 새겨넣었다. 네 자신을 알라. “그대 자신을 알게, 대공. 우리에게는 십만 명의 군대가 있다.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과인은 언제든지 자네를 짓밟을 수 있다. 하지만 자네는 아니지.” “만약 노예제를 폐지한다면…….” 대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에게는 어떤 보상이 주어지옵니까?” “목숨.” 단탈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또한 자네의 헌신적인 충성심에 대한 선물로써, 다시는 이렇게 강압적으로 정책이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 그것뿐이옵니까? 수천 명이 넘는 노예를 순순히 포기하는데도, 오직 저희가 얻는 것은 안전밖에 없나이까?” “대공.” 단탈리안이 물끄러미 울발라 대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등줄기에 한기가 들었다. 방안의 온도가 한순간에 수십 도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목숨은 말일세, 무척――그야말로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일세.” “…….” “권력자들은 목숨이 얼마나 무거운지 쉽게 잊어버리지. 그리고 과인은 목숨의 무게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을 존중하기가 어렵더군.” 이날 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무도회에 참석한 15명의 마계대공은 단탈리안에게 똑같은 통보를 전해들었다. 접견이 모두 끝나자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단탈리안은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휴식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파이몬이 안으로 들어왔다. 단탈리안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대공들에게 전했습니다. 늦어도 보름 안에 반응이 오겠지요.” “……단탈리안.”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도 동의했어요. 일주일 뒤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해서 정식 안건으로 올릴 겁니다.” 단탈리안이 오른손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유리잔은 텅 비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어서 인간들을 멸망시키자고 호들갑을 떨어대고, 파이몬 당신은 어서 공화주의를 퍼트리자고 난리입니다. 바르바토스를 달래려고 사르데냐 왕국을 짓밟았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달래려고 돌아오자마자 대공들을 협박하고 있지요…….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단탈리안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파이몬은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단탈리안, 소녀는 다만…….” “아아. 그냥 조금 푸념해본 겁니다. 누가 옛날에 연인이 아니었다고 할까봐 두 사람이 서두르는 성격까지 비슷해서요.” 단탈리안이 고개를 돌려서 파이몬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의 얼굴에는 약간 생기가 없지만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여간 저의 연인들 중에서 저한테 뭔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시트리밖에 없군요. 바르바토스는 만날 인간을 죽여라, 당신은 만날 인간을 살려라, 가미긴은……음. 뭐. 제 사지를 절단해서 자기 전용의 창고에 보관해두지 않으면 성깔이 안 풀리는 모양이고.” “후후.” 파이몬이 키득거렸다. 그녀는 안심했다. 평소와 똑같은 단탈리안이 눈앞에 있었다. 빈정거리고, 비웃고, 그렇지만 '어쩔 수 없군요'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단탈리안이. 파이몬은 바로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다들 욕심쟁이인걸요. 그런 욕심쟁이들을 독차지하려는 단탈리안이야말로 욕심이 과한 것 아닐까요?” “어이쿠, 결국은 전부 제 잘못입니까. 도대체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다음 생애에서는 시트리 같은 연인들만 사귀기를.” 파이몬이 옷자락을 벗었다. 무도회 드레스가 슬그머니 방바닥에 떨어졌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감쌌다. “다음 생애에서도 연인을 여러 명 사귀려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저는 욕심쟁이니까 말입니다.” 단탈리안이 파이몬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한동안 방안에는 두 사람의 더운 숨소리가 흘렀다.   00394 방울져 떨어지는 밤 =========================================================================                        * * * 합스부르크의 황궁. 이제는 거진 마왕들의 전용 회의장이 된 장소였다. 제일 상석에 황제 폐하. 우리의 친애하는 루돌프 폐하께서 근엄하고도 엄숙하게 앉아 계셨다. 좌우 제1석에는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제국에서 서열이 높은 순서대로 이어졌다. 참고로 나는 법무상(法務相)으로서 황제의 바로 왼편에 섰다. 황제를 대신해서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내가 유독 눈에 띄어서 싫어하는 마왕도 있지만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이란 본래 이런 행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드러났다. 나에게 권력이 제일 많은데 어쩌겠는가? “노예를 해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왕 아미가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회의에서는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일수록 송사리 바람잡이였다. 아미로 말하자면 옛날에 검은 산맥을 돌파할 적에 나와 함께 활동한 마왕이었는데, 내가 제국의 권력자가 되는 동안 저 녀석은 쓸데없이 허송세월이나 했다.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제도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제일 거대한 분야에는 노예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내가 다른 마왕들을 대신해서 질문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미가 움찔거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미는 나를 두려워했다. 아마 내가 언젠가 자신을 숙청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피해망상증 환자 같으니, 쯔쯧.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욕망은 언제나 가장 저열하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자리에서 더러운 얘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처럼 선천적으로 고결한 마왕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매일마다 배변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배변물을 치워야 합니다!” 아미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 문명 사회에는 언제나 배변물이 넘쳐 납니다. 노예는 바로 이 필수불가결한 작업에 동원되는 필수불가결한 인력입니다! 노예제에 대한 공격은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헤에. 자기 똥은 자기가 치워야지, 무슨 헛소리야.” 가미긴이 웃었다. “다른 사람한테 밑구멍을 닦아달라고 부탁하는 놈은 두 종류밖에 없는걸. 불행한 장애인이거나, 아니면 무진장 게으른 부자뿐이야. 네가 말하는 문명이란 것이 누구를 위한 문명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 아미가 입을 다물었다. 서열이 한참 낮은 아미로서는 감히 가미긴에게 반박할 배짱이 없었겠지. 그러니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네가 애송이로 남는 것이다. 아미는 평원파였으며, 모든 평원파의 뒤를 바르바토스가 봐주고 있었다. 대체 뭐가 두려운지, 원. “아아. 괜히 우리 애들 가지고 놀지 말고.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보자고.” 바르바토스가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거 봐라. 바르바토스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자기 파벌의 부하는 철저하게 챙겨주었다. “억울하게 노예가 된 애들을 풀어주자. 이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결투에 의해서 노예가 된 경우라든지, 전쟁에서 패배해서 노예로 전락한 경우라든지, 이런 거에는 예외를 둬야 할 거 아냐? 전부 다 풀어주면 뭐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무슨 자선가도 아니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평등해요.” 바르바토스가 나서자 이번에는 파이몬이 치고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만인이 태어날 때 이미 똑같은 권리를 부여받지요. 그건 바로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하지만 노예는…….” “시발, 빌어먹을. 진짜 네 년의 입구멍에서 먹물 냄새가 풍기지 않는 날이 도래하는 것만이 내 평생 소원이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당하면 안 된다고? 여기가 무슨 도덕 수업을 가르치는 신전이야, 뭐야? 그 소중하다던 목숨을 전쟁터에서 수십만은 죽여버린 게 네 년이고 우리야.” “전쟁과 노예는…….” “똑같아.” 바르바토스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왜 전쟁터에서 적군을 쳐죽이는데?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우리가 죽이지 않으면 빌어먹을 적병이 우리를 죽이니까. 그거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사람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딴 놈들 목숨을 취해버릴 수 있다고.”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오직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만 전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 자체가 전쟁이고, 매일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타인의 목숨을 거둬들인다. 만일 노예가 우리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우리는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무척 인상적인 철학이다, 바르바토스.” 바싸고가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말투가 잔뜩 배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은 단 한 번도 철학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 바르바토스. 문제는 노예제를 사용해서 마계대공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놈들은 노예를 수천 명씩 부리면서 자기네가 마왕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멋을 부리고 있어. 본인은 마계대공들을 압박하는 전술적 용도로써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다.” “중립파도 이에 동의한다.” 마르바스가 이어서 발언했다. “마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리 마왕들에게 있어서 마족들은 원래부터 노예인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마계에서는 노예가 다시 노예를 부리는, 매우 기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 우리가 '마족의 주인'으로서 마왕 이외에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하겠는가?”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이 다수 있었다. 파이몬처럼 권리에 기반해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할 때는 대다수가 코웃음을 흘렸지만, 바싸고와 마르바스가 실리를 따지자 서서히 설득되는 분위기였다. 파이몬이 분한 듯이 입술을 꾸욱 물었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파이몬의 심정이야 이해된다마는 이건 당연한 광경이었다. “좋아. 너희 말이 맞다고 하지.”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마족들 사이에서는 노예제를 철폐한다고 해보자고. 그래. 하지만 인간종의 경우에는 어때. 인간종까지 노예로 삼으면 안 되는 건가?”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인간종은 얘기가 다르다”, “어차피 마계에도 인간 노예는 별로 없으니 예외로 남겨도 괜찮지 않은가” 등등, 대체로 바르바토스의 말에 수긍했다. 마왕들은 대개 인간종에 적대적이었으므로 이 역시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등한 인간종한테 자유를 건네줄 필요까지는 없겠지.” “중립파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다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겠지.” 마르바스가 한 걸음 물러서서 유보를 표시했다. 아마 대륙의 외교적인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 그 와중에 파이몬만이 자신의 무릎을 꾹 쥐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의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죽거렸다. “동지 여러분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이야. 인간종은 어디까지나 예외이지. 하지만 우리 중에는 꼭 첩자가 한 명 숨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지. 구태여 마족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성적 존재자'처럼 겉멋이 든 용어를 쓰는 여자가 있거든.” “…….” “어이, 파이몬. 내가 질문하지. 인간종에 대해서도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냐?” 좌중의 시선이 파이몬에게 쏠렸다. 파이몬은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바르바토스를 쏘아봤다. “예. 소녀는 인간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배신자다!” 평원파 마왕 중 엘리고스가 일어서서 삿대질을 했다. 그걸 기점으로 평원파 마왕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월맹군의 이상을 져버린 창녀!” “인간놈들에게 가랭이를 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러자 산악파 마왕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궁은 순식간에 노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저 개 같은 새끼, 파이몬 언니한테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네 모가지가 따여도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지 시험해주겠어!” “너희 평원파야말로 저기 황제인지 뭐니 웃기지도 않은 병신한테 가랑이를 벌린 주제에 어디서 까불고 있는가! 매일 밤마다 황제한테 따먹히는 년은 바로 바르바토스이지 않는가!” “이놈들이 아주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아가리를 벌려대는군.” 하아. 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째 회의를 열 때마다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내가 지긋지긋하다는 눈초리로 마르바스를 쳐다보자, 마르바스도 똑같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마르바스 님. 저 발정난 개들을 말려주시지요.’ ‘본인이 무슨 보모도 아니고 만날 저 녀석들 말리는 데 시간을 낭비해야겠는가?’ ‘마르바스 님 말고 누가 천치들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하게. 본인은 솔직히 자네 애인들 때문에 위장이 남아도는 날이 없네.’ ……대충 이와 같은 대화가 암묵적으로 지나갔다. 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제국에 없는 동안 국정을 도맡다시피 돌본 사람이 마르바스였다. 빚을 졌다고 표현하면 우습겠으나, 어찌되었든 일처리를 넘겨버린 셈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나설 수밖에……. 내가 입술을 열었다.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나의 한 마디에 가장 먼저 시트리가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는 바싸고가, 가미긴이, 파이몬이, 바르바토스가 입을 닫았다. 제파르 형님과 벨레드 형님이 자리에 앉았다. 서열이 높은 마왕과 과격한 무투파 마왕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잔챙이 마왕들도 서서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언성이 잦아들자, 몇몇 마왕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곧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30초 만에 궁전이 조용해졌다. “여러분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동안 마계대공들은 대마왕 바알에게 협력하여서 월맹군이 의도적으로 실패하도록 도왔습니다. 아직 우리가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대공들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내가 마왕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마주쳤다. “대공은 우리의 적입니다.” 마왕들은 파벌을 불문하고 자존심이 하나같이 강했다. “저는 대공과 같은 존재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은 하나뿐입니다. 우리 마왕을 제외하고 다른 마족들이 권력과 부를 충족시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째로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념도, 이익도 아니라 자존심을 활용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우리들에게 덤빈 대공들한테 본때를 보여줍시다.” “…….” “물론 여전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노예를 전부 해방하라 명령해도 불응하겠지요. 하다못해 인간종 노예라도 인정해달라고 징징거리는 놈들도 틀림없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고블린을 예외로 둔다면 대공들은 즉시 사방에서 고블린을 긁어모을 것이요, 만일 인간종을 예외로 둔다면 인간종을 긁어모을 것입니다.”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적들에게는 어떠한 예외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복종을. 처절한 응징을. “오로지 우리 마왕만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직후, 노예제 전면 폐지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모든 의제가 투표에 의해서 정해졌다. 다만 모두가 투표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선제후로 선발된 일곱 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즉, 궁중백인 나는 투표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만장일치가 이루어져야만 정책이 통과했다. 내가 황제를 대신해서 일곱 명의 선제후 마왕에게 표를 받았다. 비밀투표나 무기명투표 따위는 없었다. 각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채로 투표했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마르바스, 폐지 찬성.”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에게 뜻 깊은 눈길을 보내왔다. “가미긴, 폐지 찬성. 시트리, 폐지 찬성.” 마왕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번에도 만장일치로 통과할 모양이라고 얘기가 오갔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논의될 만한 의제는 사실 회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오갔다. 이번에도 그랬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얼굴을 굳혔다. “……바싸고. 폐지 반대.” 좌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바싸고가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로 계속해서 투표 결과를 읊어나갔다. “제파르, 폐지 반대. 파이몬, 폐지 찬성.” 나는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폐지 반대.” 황궁이 더더욱 어수선해졌다. 내가 찬성을 표시한 안건에 대해서 바르바토스와 제파르 형님이 반대표를 던졌다. 우리 세 명은 언제나 의견이 일치했다. 바싸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성 4표, 반대 3표로 노예제 전면 폐지에 대한 안건이 부결되었음을 알립니다.” 처음으로. 우리의 의견이 갈려진 채로 의제가 종료되었다.   00395 방울져 떨어지는 밤 =========================================================================                        “그럼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무덤덤하게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똥 씹은 표정이라든지 불쾌한 낯빛을 보여주면 절대로 안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재빨리 넘겨야만 했다. 내가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마왕들은 이쪽의 지도부가 분열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분열하는 집단의 지도부만큼 무능하게 보이는 지도부는 없다. 지도부는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얼굴에 가면을 써야 한다. “…….” 안타깝게도 파이몬은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파이몬이 눈동자에서 아주 용암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채찍으로 쳐죽일 기세로 바르바토스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왜, 꼽냐?’ 하고 파이몬을 쳐다보았다. “……오늘 발푸르기스의 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동지 여러분, 모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결국 그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공기가 어수선했다. 마왕들이 일어서서 삼삼오오 모여 퇴궐하기 시작했다. 말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들이 무슨 주제로 속닥거리는지 정도는 훤하게 보였다. 제기랄. 나는 바싸고에게 눈짓을 주고 대전(大殿)에서 나갔다. 먼저 복도에 나가서 분을 삭이고 있자, 바싸고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바싸고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저의가 무엇입니까?” “바르바토스가 어젯밤 나를 찾아와서 반대표를 던지라고 언질했다.” 바싸고가 복도벽에 기대어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양반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나를 따라서 담배에 취미를 붙였다. 후우, 하고 바싸고가 연기를 흘려보냈다. “나는 네놈이 바르바토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했는 줄 알았지. 하지만 이렇게 나를 따로 불러내는 것을 보아하니, 네놈은 완전히 모르는 일이었군. 어떤가, 우리의 위대하신 단탈리안 전하? 신뢰하던 애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바싸고가 비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일부러 바르바토스에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까.” 회의 초반에 바싸고는 바르바토스에게 대적했다. 덕택에 두 마왕은 서로 같은 편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변에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싸고가 반대표를 던진 까닭은 단지 노예제의 '전면' 폐지에 반대하기 때문. 즉, 마족뿐만이 아니라 인간종 노예까지 해방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겠지. 바싸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가 나한테 각본을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라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인간종 노예에 대한 화두를 던지겠다면서?” “아아.” 우리는 벽에 기댄 채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 둘 다 상대방이 아니라 단지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구태여 몸짓이나 눈짓을 동원해서 서로를 협박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바싸고. 당신은 지금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게 된 모양이로군.” “저는 항상 당신에게 직접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당당하게. 면전에서. 아무리 바르바토스가 저의 애인이라 할지라도, 제가 바르바토스를 '시켜서' 당신한테 말을 전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를 갈았다. “바르바토스는 제 전령이 아니고, 당신도 제 부하가 아닙니다. 제가 애인한테 의사를 대신 전달시킬 만큼 게으른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제가 그 정도로 당신을 존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까?” “내 잘못을 인정한다.” 바싸고가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목소리에 약간 분노가 실려 있었다. “알다시피 네놈은 빌어처먹을 정도로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애송이 아니냐. 바르바토스를 전령으로 삼아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가벼이 넘겼다.” “그렇다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저한테 얘기를――.” “하지만 네놈도 잘못한 것이야, 단탈리안.” 내가 고개를 돌려서 바싸고를 바라보았다. 바싸고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네놈이 바르바토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네놈은 공공연하게 바르바토스와의 관계를 과시하고 다녔어.” “…….” “행여나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꼴 보기 싫게 여기저기서 시시덕거리면서 온 세상을 지들 안방인 마냥 활보하던 꼬락서니 하고는. 흥, 이래서 사랑 따위에 생명을 거는 놈들은 언제고 큰코다치는 것이지.” 내가 묵묵하게 시선을 되돌려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지적에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바르바토스가 저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이럴 줄은.” 적막.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었다. 그때, 바싸고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담뱃대에서 저절로 피시식 불꽃이 미약하게 일어났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담뱃대를 뻐끔거렸다. “내가 네놈을 위로해줄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네놈은 상종하지 못할 개자식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녀석이 약해지면 내가 곤란하다. 빌어먹을 놈, 나는 내 정치적 생명을 네놈한테 모조리 내걸었다는 말이다. 아가레스를 토벌하느라 정령왕을 세 개체나 잃었다. 수천 년이 넘도록 공을 들인 정령왕을 세 개체씩이나 상실했다는 말이다.” 바싸고가 퉷,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애송이.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 보이지 마라.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세상에 위안이 필요할지언정 네놈만큼은 절대로 위안의 수혜자가 아니다. 정말 기분이 더럽군…….”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바싸고는 더더욱 화내겠지. 나는 침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를 알지 못했다. 화제를 바꾸는 수밖에. “하지만 이상합니다. 바르바토스는 왜 당신을 끌어들인 것일까요.” “흠?” “어차피 저한테 바로 들킬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당신을 끌어들였지요. 분명히 다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허공을 보았다. “만약에 바르바토스가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해보지요. 이 경우에는 평원파가 단독으로 반기를 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싸고, 당신까지 반대표에 섞이면…….” “각자가 자기 신념에 따라 투표한 것처럼 비추겠지. 과연. 그것을 노렸는가.” 바싸고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턱을 주억거렸다. “예. 바르바토스는 저에게 반대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저와 아주 척을 진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습니다. 당신을 끌어들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습니다.” “졸지에 나도 모르게 부부싸움에 이용된 꼴이로군. 빌어먹을 것들.” 이제 의문은 하나가 남았다. 바르바토스는 왜 나에게 반대표를 던졌는가. 이에 대한 의견을 바싸고가 내놓았다. “허면 네놈한테 불만을 표시한 것 아니겠느냐? 네놈이 하도 마음대로 제국을 쥐락펴락하니 바르바토스 입장에서야 셈이 날 만하지.” “……바르바토스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시할 리 없지 않습니까. 불만 따위야 저한테 직접 말해도 됩니다.” “흥, 녀석은 어린애가 맞다.” 바싸고가 벽에서 등을 떼었다. “외견도 속마음도 풋풋하지. 자기 부하들을 살리겠답시고 검을 버리고 흑마법사가 된 놈이다. 그런 녀석이 어린애가 아니라면 뭐겠느냐. 어디 애송이와 어린애끼리 열심히 부부싸움을 벌여봐라. 나는 시시해서 도저히 같이 놀아주지 못하겠으니.” 바싸고는 그 말만 남기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 나는 복도에 남아서 담배를 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바토스가 머무르는 침실로. * * * 바르바토스의 침실이 위치한 복도에는 경비병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들이 투명한 영체가 되어서 이곳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기 때문이었다. 내가 복도를 걸어오자 죽음의 기사들이 차갑게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로리타 콤플렉스 놈들. 흑기사들이 노려보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노크도 생략하고 바르바토스의 침실문을 열어젖혔다. 어떤 죽음의 기사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방안은 어두웠다.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어둑어둑한 그곳에서, 바르바토스는 창가에 걸터 앉아서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흥얼거렸다. “의외로 늦게 왔네.” “충격이 컸거든. 나 혼자서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지.” 나는 방안에 있는 아무 의자에나 앉았다. “바르바토스. 너는 나를 배신했어.” “알아.” “배신이라니. 우리 둘 사이에 배신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바르바토스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단탈리안. 네가 멍청한 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머리가 병신인 줄은 몰랐는데.” “나는, 너한테, 직접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내가 나지막하게 끊어서 말했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에 노기가 넘쳐 흘렀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한테 자신의 생각을 숨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군.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비겁하게 굴지 마, 바르바토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네가 직접 그 빌어먹을 말을 입에 담아! 네가 책임을 져라!” “비겁한 건 네 자식이야.”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이번 법안, 파이몬 년을 위해서 내놓은 거지?” “…….”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것 같았어? 마계대공은 핑계거리에 불과하고 사실은 파이몬 년 때문에 벌이는 짓거리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마왕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느니……대공들한테 응징이 뭔지 보여주어야 한다느니……전부 핑곗거리야. 네가 거짓말로 진열해놓은 말재변에 내가 속아서 옳다구나 동의할 줄 알았으면, 단탈리안. 정말 나를 우스운 년으로 본 거야.” “바르바토스.” 내가 괴롭게 중얼거렸다. “대공들한테 응징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다.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하. 그럼 왜 인간종까지 노예로 두면 안 된다고 주장한 건데? 그것도 네가 지껄인 대로 필수불가결한 조치여서?” “…….” 바르바토스가 창가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나한테로 다가오더니 나의 멱살을 꾸욱 잡았다. “처음부터 이번 안건에 대해 듣고 눈치 깠어. 네가 파이몬 년을 위해서 움직이려 하고 있다는 걸. 만약 처음부터 나한테 솔직하게 사실을 밝혔으면 그래, 한번쯤 눈 감고 넘어가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사실을 숨겼어. 그리고 그럴듯한 헛소리로 넘어가려고 했지……!”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누가 먼저 우리 관계를 배신했는데? 응? 누가 먼저 서로한테 자기 생각을 숨겼는데? 내가 제일이라고, 행여라도 파이몬을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일은 없을 거라고 수십 번이나 말했으면서!” 개 같은 자식, 하고 바르바토스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 들어. 나는 더 이상 네가 파이몬이랑 놀아나는 걸 지켜보지 못하겠어. 애당초 나랑 파이몬을 동시에 따먹으려고 든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선택해. 나를 고르든지, 파이몬 그년을 고르든지. 여기서 당장 말해……!” 바르바토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입술을 열지 못했다.   00396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바르바토스.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했어. 앞으로도 너를 선택할 거야.” “파이몬 그년을 죽여. 네 손으로 직접.” 바르바토스가 늑대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진지하게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럴 때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무척 흥분했고,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여기서는 일단 순순히 따라주는 제스처를 표시해줄 필요가 있었다……. “너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파이몬을 죽일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바라는 게 그거니까.” “왜 하필 지금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너가 나를 설득해야 돼.” 바르바토스가 눈가를 찡그렸다. “설득? 지금 나한테 설득하라고 말한 거야?” “파이몬은 산악파의 수장이야. 약간 지지도가 떨어진 면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인망이 있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일 수는 없다, 바르바토스. 마왕군이 분열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상에야.” 이번에는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우리 두 사람은 조금만 더 움직이면 서로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이르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보였다. 바르바토스는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술을 마신 것이었다. 코끝으로 허브 향기의 술냄새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내 귀에는 그래서 못 죽이겠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말했잖아. 왜 하필이면 지금 당장 죽여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봐. 마왕군이 하나로 통합된 지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났다. 우리가 충분히 힘을 비축할 때까지 써먹기 위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외양까지 세웠다. 그걸 다시 흙바닥에 던져서 짓밟자고?” 내가 입 끝을 말아올렸다. “그게 너의 소원이야? 정말 고상한 취향이로군.” “입 조심해.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나는――나의 모든 피와 땀을 바쳐서 이 제국을 만들었어!” 이쪽의 멱살을 쥔 바르바토스의 손을 이번에는 내가 오른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바르바토스, 누군가를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너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옛날부터 대등한 관계였다. “이천 년 동안 병력을 땅바닥에 내던진 월맹군 원정을 누가 처음으로 성공시켰냐. 나다! 삼천 년 동안 마왕군을 기만한 바알을 처단하는 데 누가 앞장섰냐. 바로 나다! 우리의 성공을 일시적인 기적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영구적인 역사로 남기도록 누가 제국이라는 체계를 성립시켰냐. 나다, 바르바토스! 대지에 흩뿌려진 핏물 중에 내 손에서 비롯하지 않은 핏물이 없고, 하늘을 메운 비명 중에 내 칼날에서 비롯하지 않은 비명이 없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손을 멱살에서 떼어냈다. “너가 파이몬과 둘이서 시답잖은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평원파와 산악파가 지금 공존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빌어먹을 네 년들이랑 내가 동시에 사귀고 있으니까!” 찰싹,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고개가 돌아갔지만 즉시 곧바로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때릴 테면 얼마든지 때리라고 해봐라. 차라리 검이라도 꺼내들어서 내 심장을 찌르라지. 그래도 내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아아, 그래. 내가 너희 둘이랑 떡을 치고 있어서 제국은 유지되고 있는 거다. 이게 진실이야. 왜, 언제부터 진실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워지기라도 했냐, 바르바토스? 반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아주 겁쟁이가 되셨군.” “개 같은 새끼……!” “그리고 넌 그 개새끼를 개새끼라는 이유로 좋아한 녀석이지.” 바르바토스가 또 다시 내 뺨을 때렸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입안에서 어딘가가 터졌는지 혓바닥에서 비린 피맛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침 잘 됐다. 내 입구멍에서 피냄새가 흘러나오면 바르바토스도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겠지. “내가 괜히 벨레드 형님을 의형으로 모신 줄 알아? 내가 할 일 없어서 시트리를 애인으로 삼은 줄 알고 있냐? 평원파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남자랑 산악파에서 제일 다혈질인 여자가 정말로 '우연하게'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바르바토스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었다. 삼세 번이라는 말도 있다마는, 난 똑같은 짓을 세 번이나 당하는 호구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얌전히 맞아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나는 왼손으로 바르바토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제 바르바토스는 내게 양손이 붙잡힌 셈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발버둥을 치자, 우리 둘은 균형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바르바토스의 양쪽 팔목을 쥐어잡은 채로, 그녀를 방바닥에 넘어트렸다. “나는 내 온몸과 마음을 버려가면서 파벌들을 조율하고 있다!” 바르바토스에게 올라타서 소리쳤다. “나의 우정을, 나의 헌신을, 나의 애정을, 진심이란 진심은 모두 쏟아부었어! 아아, 덕분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저열한 남창이 되었지! 기분이 끝내주더군. 하지만 무슨 상관이냐. 나의 사소한 감정 따위는 포도주 한잔으로 때우면 될 만큼 시시한 일이다!” 파이몬도 그렇고, 바르바토스 너도 그렇고, 전부 지나치게 감정에 휘둘린다. 알고 있다. 감정은 때때로 강렬해진다. 그 강렬함 덕분에 감정은 진심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진심과 진실은 전혀 다르다! 네가 진심으로 지껄인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어주진 않는다! 네가 파이몬을 없애버리라고 아무리 소리쳐봤자, 그것이 파이몬을 없애도 된다는 걸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 이런 가장 단순한 사실조차 너희는 외면하는 것이냐. 사람의 감정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질투라느니 원한이라느니, 그까짓 감정으로 제국을 무너트려도 괜찮은 것이냐! 겨우 하나가 된 마왕군을 다시 갈갈이 찢어놓으라니――정말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냐, 바르바토스! “그런데 이제 와서 너는 내 손으로 직접 제국을 무너트리라고 말하고 있지. 좋아, 바르바토스. 나는 너한테 언제나 영원히 너를 우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네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나는 기쁘게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를 꽉 물었다. “적어도, 너가 나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이미 목소리보다 신음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목소리를 씹고 또 씹어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제국을 너가 기어코 짓밟겠다면, 좋아. 내가 흘린 피와 땀을 전부 쓸모없는 것으로 되돌리겠다면, 그것도 좋아. 하지만 최소한 나를 설득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냐, 바르바토스……?” 그때 바르바토스의 눈언저리에서 무언가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괴로워, 단탈리안.” “…….” “나, 알고 있어. 바타비아에서 너가 암살까지 당해가면서 공화주의 회의니 뭐니 성공시키려고 한 것도 다 파이몬 때문이잖아. 결국 파이몬 때문에 죽을 뻔한 거잖아.” 바르바토스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월맹군 시절 파이몬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뛰쳐나간 그날, 장대비가 하염없이 내린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네 목숨을 위협한 것도 파이몬이야. 월맹군에서 널 나락으로 끌고간 장본인도 파이몬이야. 그리고 저번 겨울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어…….” “바르바토스.” “내가 파이몬한테 죽는 건 괜찮아. 응, 그것까진 용납할 수 있어. 하지만 너가……단탈리안, 너가 만약에 파이몬 때문에 죽는다면……난 정말로 모든 걸 저주할 거야.” “…….”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안 된다고, 나쁜 새끼야…….”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흐려졌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만약 너가 죽는다면 틀림없이 파이몬 때문이야. 난 더 이상 그년 얼굴도 보기 싫어……제발 파이몬을 죽여줘.” “나는 죽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바르바토스가 소리 질렀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었어도 넌 그때 죽었어! 거짓말 따위로 날 안심시키려고 하지 마!” 사면초가. 바르바토스는 그때의 암살이 자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비밀로 해두었으니까. 만약 내가 여기서 그게 자작극이었다고 밝힐지라도, 바르바토스는 결국에 납득하지 못하겠지. 왜 그런 자작극을 벌였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럼 나는 파이몬을 위해서 암살을 연출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에게 거짓말을 하면 간단히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르바토스한테 거짓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파이몬에게 연기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이바르도 거짓으로 속여도 괜찮았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와 라피스만큼은. 두 사람한테는……. 도대체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해낼 수나 있었겠는가. 두 사람을 속이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그저 단순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이몬이 너를 파멸시킬 거야, 단탈리안! 나는 알 수 있어. 알고 있다고……네가 파이몬을 죽이지 않겠다면 내가 그년을 죽이겠어!” “안 돼, 바르바토스. 제국을……우리의 새로운 마왕군을 생각해라.” 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나 참지 못한 여분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의 미래를……바알도 죽었고, 아가레스도 죽었어. 산악파가 협력해주지 않으면 대륙 정벌은 불가능해. 냉철하게……냉정하게 생각하는 거다.” “그 미래에 네가 없으면 무슨 의미인데?”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는 너가 대륙 전체만큼이나 소중해, 단탈리안. 빌어먹을 얘기지만 그렇게 되어버렸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나는……나한테 아무리 패업이 중요해도, 그만큼 너도 중요해……어느 한 쪽만 선택할 수가 없어…….” “…….” “백 년 뒤에 대륙을 정벌하지 못해도 좋아. 이백 년 뒤에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도 좋아. 천 년이 걸리더라도, 이천 년이 걸리더라도, 삼천 년이 걸리더라도……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내 옆에 있어줘……나를 더 이상 혼자로 내버려두지 마…….”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들어 나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바르바토스의 눈 밑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내 눈가에서 넘쳐서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바르바토스의 새하얀 볼을 따라서 마저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만약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이미 잘못된 것을 어디서부터 숨기려 들었을까, 라고 고쳐서 물어야 하겠지. 누가 먼저 입술을 뗐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뒤로 물러섰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바르바토스가 그만두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다. 우리 둘 모두 얼굴이 망가져 있었다. 내 표정이 통제력에서 벗어났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방안에는 합스부르크의 궁중백도, 제국의 섭정도 없었다. 물기에 젖어버린 사람이 두 명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 내가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만 참을 수 없어져서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시간이 늦어질 대로 늦어져서 황궁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복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반박자 느리게 나의 그림자를 따라왔다. 내가 머무르는 침실의 문앞에는 데이지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이쪽의 발걸음이 다가가는 것을 들었는지 데이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어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바라보자 데이지는 말을 끊었다. 아니, 말이 끊어졌다고 표현해야 더 적절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세심하게 바라볼 이유도 하나 없었다. 데이지를 무시하고 침실문을 열어재낀 뒤, 무작정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방에 놓인 물병을 집어들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걸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00397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나는 닥치는 대로 몸부림을 쳤다. 의자를 들어서 다섯 번, 열 번, 수십 번을 내리쳤다. 방향성 따위는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내동댕이치는 것에 불과한 동작을 반복했다. 의자는 좋았다.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져 단단했다. 수백 번을 때려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의자는 스무 번도 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어떤 것이든 간단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내가 손을 내뻗었다. 벽에는 롱소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칼날을 빼어들어서 마구잡이로, 사방에다 휘둘렀다. 생명이 있는 것은 쉽게 죽어버렸다. 생명이 없는 것은 쉽게 망가져버렸다. 침대가 찢어지고 깃털이 새하얗게 흩날렸다. 공중에서 깃털이, 너무 많은 깃털이 쏟아져 내렸다. 땡그랑,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어느새 내 오른손에서 칼자루가 빠졌다. 그와 동시에 내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슴과 볼, 손바닥에 깃털이 스쳤다. “…….” 희뿌옇게 깃털에 가려진 시야 저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내가 난동부리기를 멈추자 깃털들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곳에는 검은색 옷차림에 검은색 머리카락,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데이지가 서 있었다.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단 한 마디도 하지 마라.” 데이지가 나에게 서서히 걸어왔다. 나는 바닥에 떨군 검을 다시 꾸욱 잡았다. 헛소리라도 놀리면 데이지의 심장을 찔러버릴 생각이었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었지만, 나는 지금 비이성적이었다. 데이지는 이미 용사의 경지에 거의 다다랐지만 나에게 반항할 순 없었다. 어디 아무런 잡담이라도 떠들어봐라. 단칼에 죽여버릴――. 퐁, 하고 우스운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품안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포도주병에서 코르크 마개가 따였다. 데이지가 술병을 내 머리 위에 갖다 대더니 거꾸로 쥐어잡았다. 당연하게도, 와인색의 술이 나의 머리에 줄줄 쏟아졌다. 내 머리카락과 턱선을 따라서 포도주가 흘러내렸다. 붉은색의 액체가 나의 얼굴을, 옷을, 방바닥을 적셨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하얀 깃털에도 포도주가 스며들었다. 그동안, 데이지는 한없이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술병 하나가 동났다. 데이지는 방 한켠에 마련된 술 저장용 서랍을 열어서 포도주를 한 병 더 가져왔다. 퐁, 하고 코르크 마개가 개봉되는 소리가 울렸고, 또 다시 내 머리로 술이 흘러내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윽고 열 몇 병이나 되는 술을 전부 비워버린 다음에야 데이지가 멈추었다. 방바닥이 붉은색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머리가 조금 식었는지요, 아버님.” “…….” “제가 심장각인 수술을 받으면서 흘린 피가 대략 이 정도 양일 것입니다.” 내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웃음이 아니라 그저 허파에서 새어나온 공기였을지도 몰랐다. “이것보다 삼분의 일에 불과했다.” “아버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열 개로 불리시는 것이 취미인데, 제가 고작 세 배쯤 부풀려서 말했다고 한들 거짓말이 되지는 않겠지요.” 내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마저 술에 푹 절어 있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하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서 얼굴을 닦으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더 죽여야겠다. 더 많이 죽여야겠어.” 머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명확하게 떠올랐다.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보통 때라면 내 계획에 허점이 없는지 라피스와 상담하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상담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명백했다. 이건 내가 온전히 판단하겠다. “데이지. 파이몬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한점의 의문을 내비추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나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침대에 앉아서 파이몬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십 분 정도가 지나고, 파이몬이 내 방에 들어왔다. 마침 잠을 자다가 나왔는지 잠옷 차림이었다. “세상에. 단탈리안?”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파이몬이 기겁했다. 가구란 가구는 죄다 부서져 있었고, 바닥에는 도자기 파편과 깃털들, 게다가 술까지 쏟아져 있었다. 놀랄 만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대체 무슨 일이…….” “바르바토스가 저를 배신했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토스가, 저를 배신했어요.” “…….” 파이몬의 눈에는 내가 어떤 표정으로 비추었을까. 파이몬은 입을 다물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다음, 파이몬이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단탈리안. 바르바토스는 단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하필이면 우리와 완전히 정반대의 신념을……그 아이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신념을. 예, 바르바토스는 그런 마왕이에요.” “파이몬…….” “후후. 어쩌면 우리가 한 발자국 물러서야 할지도 몰라요.” 파이몬이 밝게 말했다. 아마도 애써 밝은 척하는 것이리라. 노예제 폐지 안건이 통과되지 못해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파이몬 본인이었다. 솔직히 나는 노예제가 폐지되든 말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파이몬의 신념을 내가 대신 짊어지기로 결심했기에 묵묵히 추진했을 따름이다. “인간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도 괜찮아요. 약간 조건을 완화시켜서 마인 노예만 해방시키자고 다시 의제를 제출하면,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도 분명히 통과될 것이와요.” “하지만, 파이몬.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파이몬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마계대공들은 인간 노예를 집중적으로 사서 모을 겁니다. 마인들이 해방될지라도 그만큼 인간들은 나락으로 빠져들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아요. 괜찮을 리 없잖아요.” 파이몬이 무언가를 꾹 참는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가 멀쩡히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 “소녀는 세상이 절대로 한번에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와요. 단숨에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배후를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개혁과 수없이 많은 희생이 숨어 있어요.” 파이몬이 내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우리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쳤다. 파이몬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처연한 미소였다. “단탈리안, 우리는 역사를 느긋하게 관찰하는 학자가 아니라 역사를 짊어진 장본인들이잖아요. 한 발자국에 불과할지라도 그 한 발자국은 우리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대공들을 설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내가 파이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야 인간 노예를 허용할지라도 비공식적으로는 금지시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파이몬. 저는 이제부터 대공들과 단판 승부를 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마인 노예가 금지되면 대공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면 됩니다.” 파이몬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어떤 대가를 말하는 거죠?” “저번 숙청에서 거두어들인 여섯 마왕의 영지. 그것을 대공들에게 분배합니다.” “……!” 파이몬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난 숙청에서 제거된 인물은 마왕이 여섯 명, 대공이 열한 명이었다. 본래 여섯 명의 마왕은 당연하지만 대륙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그들의 영지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환된 상태였다. “하, 하지만, 단탈리안. 그걸 건네주면 대공들이 입는 타격은 상당히 낮아져요. 애당초 대공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예제 폐지라는 안건을 꺼내들었는데, 본말전도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사와요.” “어차피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었지, 대공들을 약화시킨다는 건 평원파와 중립파를 설득시키는 데 필요한 명분이었지요.” “예. 그러니까 이제 와서 대공들한테 영지를 나눠준다고 하면 다른 마왕들이 반발할 거예요.” “비밀로 해두는 겁니다.” “…….” 파이몬이 입술을 닫았다. “다른 마왕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주고받는 제안입니다. 만약 대공들이 우리의 제안에 따라 인간 노예까지 포기해준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영지의 감독을 맡겨줍니다. 영주로 임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주의 대리인으로 삼으면 그만이지요.” “즉……다른 마왕들을 속이자는 얘기군요.” 파이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눈꺼풀 너머로 진지한 기색이 머물렀다. “위험한 거래예요, 단탈리안. 마왕들이 이걸 알고 나면 크게 비난할 게 분명해요.”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소녀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앞으로 잠시 동안만 당신의 '신뢰'를 빌리겠습니다, 파이몬.” 우리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노예제 폐지의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대공들은 어리둥절했겠지. 나에게 이미 협박을 단단히 받았는지라 틀림없이 안건이 통과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건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을 터. 그런 상황에서 바르바토스와 내가 거세게 대립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렀다. ‘최근 들어서 마왕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권력을 거의 독점했다. 바르바토스는 이러한 단탈리안의 행보에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두 사람이 부닥치기에 이르렀다…….’ 대충 그런 소문이었다. 대체로 틀린 소문이었지만 핵심만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실제로 냉전을 연출했다. 그날 밤에 싸운 이후로 한번도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어쩌다 황궁에서 서로 마주쳐도,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서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소문에는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바르바토스가 대놓고 내게 반대표를 던진 것도 맞았고, 우리 둘이 예전과 다르게 냉랭하게 지낸다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마계대공들 입장에서는 덜컥 소문을 믿기 어렵겠지. 대공들은 나 단탈리안을 지극히 경계했다. 어떤 소문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믿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불과 반년 전에 대공들이 열 명이 넘게 숙청되지 않았던가? “대공들에게 화해의 서신을 보내라.” 나는 마계대공들을 황궁으로 초대했다. 용건은 단순했다. 지난번에 내가 개인적으로 대공들을 협박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15명밖에 남지 않은 마계대공들이 나한테 답장을 보내왔다. 온갖 수식어를 걷어내고 내용만 뽑아내자면 다음과 같았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으나, 황궁에 가지는 못하겠다.’ 대공들은 의심하고 있었다. 이쪽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아닌가. 저번 신년회처럼 자기네를 불러모은 다음 한꺼번에 없애버리려는 속셈은 아닌가, 하고. 다른 마왕은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단탈리안만큼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대공들의 의견이겠지. 그때 독사지옥(毒蛇地獄)의 마계대공이 한 가지 제안을 보내왔다. ‘만일 합스부르크의 황궁이 아니라 소신의 궁전에서 회합을 개최하신다면, 기꺼이 응하겠나이다.’ 이 제안에 다른 마계대공들도 동의했다. 요컨대 자기들이 대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보고 자기네 안마당인 마계로 건너오라는 얘기였다.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주어야지 않겠느냐'라는 의중이 담겨 있었다. 몇몇 대공들은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흔쾌하게 허락의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사과하는 입장에 처한 만큼 당연히 이쪽에서 수고해야 마땅하며, 마계에 방문하는 것은 마왕이 된 자로서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면서. 단, 조건이 붙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파이몬과 함께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00398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대공들은 파이몬이 참석한다는 말에 오히려 반색했다. 내가 혼자서 아무리 절절하게 사과해봤자, 대공들 입장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겠지. 반면에 파이몬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마인들에게 인기가 드높은 파이몬이 몸소 고개를 숙인다면, 대공들은 체면이 살아났다. 이른바 정치라는 영역이었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바르가 파이몬의 시중을 들기로 했고, 데이지가 내 시중을 들기로 했다. 이바르와 데이지는 겉모습이야 미숙한 여자아이에 불과했지만 전투력으로 따지면 상당했다. 한쪽은 무려 오십 개의 전투인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인형술사. 다른 한쪽은 바알의 대검으로 무장한 용사였다. 최고의 패라고 해도 좋겠지. 내 신변을 보호하는 데 이들보다 믿음직스러운 경호원이 없었다. “단탈리안 님. 저는 아무래도 걱정입니다.” 다만, 나의 성실한 국무상서만은 염려를 거두지 않았다. “작금에 마계는 결코 단탈리안 님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설마 대공들이 나를 암살하려 들까봐?” “이미 단탈리안 님께서는 한 번 암살될 위험에 처하신 적이 있습니다.” 라피스가 나에게 망토를 여며주었다. “이바르 양과 데이지 양이 유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가…….” “만약의 사태란 없어.” 내가 라피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계에서 내가 암살당할 뻔했을 때, 나를 대신해서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라피스였다. 그녀가 감싸준 덕분에 나는 멀쩡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피스 없이 마계에 가게 되었다……. “그때를 제외하고 내가 암살될 위험에 처한 건, 모두 내가 계획해서 스스로 연출한 무대였어. 라피스. 언젠가 내가 죽을지 몰라도 이번만큼은 아니야. 대공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멍청하지.” “……요즘.” 라피스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매사에 정확하고 깔끔한 라피스가 할 말을 도중에 끊는 것은 무척 드물었다. 나는 너그럽게 라피스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라피스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 모친은 몸을 파는 서큐버스였습니다.” “…….” “서큐버스 창녀와 어느 이름 모를 인간. 저는 그 둘의 혼혈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보름 만에 모친은 저를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쳤고, 저는 마을의 마굿간을 전전하며 자라났습니다.” 라피스는 단 한번도 나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나 또한 과거의 일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라피스가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족은 저를 일종의 저주이자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안 그래도 천대 받는 창녀. 거기에 가장 저열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핏줄을 타고난 것입니다. 불가촉천민이란 저를 말하는 것이었지요. 음식물 찌꺼기로 끼니를 떼우지 않은 날이 없었고, 넝마조각으로 몸을 가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창부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인간의 혼혈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라피스가 적이 쉽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 않았다. 라피스가 스스로 얘기하면 얘기하도록 내버려둘지언정, 절대로 내가 먼저 질문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에서 내 호기심 따위는 지극히 사소했다.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날린 돌에 머리가 맞아서 기절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저는 쓰러진 채로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목이 무척 말랐습니다.” 라피스가 머리끈을 풀었다. 양갈래로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어졌다. 라피스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동안 머리칼에 가려져 있었던 뒷골을 손가락으로 드러냈다. 그곳에는 명백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웠습니다. 목덜미 전체에 무엇인가가 들러붙어서 끈적했습니다. 간신히 시냇가까지 기어가서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습니다. 문득, 수면에 제 얼굴이 비추었고, 그제야 저의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저는 그날 처음으로 권력을 열망했습니다.”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계에서 유일하게 신분을 불문하고 실력만으로 평가하는 집단이 쿤쿠스카 상회였습니다. 물론 상회에서도 암묵적인 차별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상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는 것이 저의 목표였으므로.” 단탈리안 님,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제가 단탈리안 님을 담당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단탈리안 님을 거진 떨거지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직급이 높은 상인들이 거절하고, 거절하고, 또 거절해서 마침내 밑바닥인 저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마왕한테 서큐버스와 인간의 혼혈인 소녀를 전담으로 붙여주는 것 자체가 대단히 큰 무례였다. 보통 마왕들은 호족(虎族)이나 묘족(猫族)처럼 마계에서 귀족으로 분류되는 종족을 전담원으로 두었다. 한쪽은 서열 제71위의 떨거지 마왕. 다른 한쪽은 마계의 불가촉천민인, 서큐버스 창부와 인간의 혼혈.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한짝이었다. “저는 곧바로 전담원 자리를 승락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훗날 권력을 잡으시면 저 역시 옆에서 호가호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계산적인 접근이었고, 제 출세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나에게 조력자가 라피스 한 명밖에 없었듯이. 라피스에게도 출세할 기회는 내가 유일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다. 그 사실을 우리 모두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우리는 군신(君臣)이 아니라 파트너였다. 내가 유독 라피스에게만 모든 것을 양보하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미네르바 작전을 고안하여 모든 인간군과 모든 마왕군을 파멸로 몰아넣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혼란의 틈새에서 단탈리안 님께서 권력을 잡으신다면 저 또한 권력에 한층 다가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단탈리안 님께서 인간의 마을과 도시를 짓밟기로 결정하셨을 때, 학살과 더 많은 학살을 결의하셨을 때, 심지어 자해를 결심하셨을 때, 저는 매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으로 향하는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단탈리안 님의 공범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한 공범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얼굴 모르는 어미와 이름 모르는 아비를 부모로 둔 라피스 라줄리는, 오직 저의 얼굴과 저의 이름으로 제 삶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피스는 한점의 거짓 없이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미약하게 전달되는 그녀의 감정은 오로지 순수하게 진심뿐이었다. “라우라 양에게 채찍질을 가하신 이후로, 매일밤 술로 지새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대 밑에 포도주를 숨기셔도 소용없습니다. 침실의 남서쪽에 바닥을 떼어내고 그 속에 자그마한 술창고를 마련하신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철거했습니다.” “하하.” 나는 유쾌해져서 웃었다. “마약을 끊으신 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이제 술도 끊어주세요.” “알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혼자서 책임지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아아.” “저도, 힘껏 버티겠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죽지 않을게.” 라피스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부디 다녀오세요, 단탈리안 님.” * * * 초로의 노인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제 초라한 거처에 왕림해주셔서 지극한 영광이옵니다, 전하.” 마계를 다스리는 대공 중에 독사지옥을 다스리는 남자였다. 나와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대공이기도 했다. 허리를 낮게 숙인 대공을 향해서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일세, 대공. 도대체 몇 년 만에 방문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허허. 세월이 유수와 같아 어느새 오 년이 흘렀습니다.” 독사대공이 황공하다는 듯 양손으로 공손하게 악수해왔다. 일전, 나는 바르바토스 몰래 SM 영상을 찍어서 대공들을 협박하는 데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메모리아 영상을 목격한 대공의 숫자가 총 일곱 명이었다. 이 일곱 명은 전원 지난번의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마계대공이 26명. 저번에 깡그리 숙청된 대공이 11명. 이제 15명의 마계대공만이 남았으며, 이중에서 7명은 나와 '무덤에까지 들고가야 할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독사대공은 물론 7명에 속했다. “오오, 파이몬 전하!” 독사대공이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더더욱 과장스럽게 환대했다. 내 팔짱을 끼고 있는 파이몬에게 독사대공은 거의 바닥에 키스할 지경까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미천한 종자가 만마의 영광이시요, 약자의 대변인이시자, 모든 명예와 약속의 증인이신 주인 중의 주인을 뵈옵니다.” 독사대공이 능숙하게 윙크했다. “물론, 소신에게 감히 전하의 위명에 하나를 덧붙일 기회를 하사해주시오면, 소신은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을 뵈어서 영광이라고 말하겠나이다.” “후후. 성실한 환대에 감사드려요, 대공.” 파이몬이 살풋 웃었다. 이럴 때 파이몬이 보여주는 눈웃음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결국 대륙은 외지(外地). 비록 황폐할지라도 우리의 고향은 이곳 마계예요. 우리 마왕들이 고향을 떠나서 전전할 동안, 대공은 언제고 마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집을 지켜주었사와요. 대공이 보여준 헌신에 저 파이몬이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황공, 또 황공하신 말씀이옵니다.” 파이몬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대공이 무릎을 꿇어 파이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에서 나와 파이몬 그리고 독사대공 사이에 오간 정치적인 제스처를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독사대공은 파이몬이 아니라 내게 먼저 인사했다. 이것은 독사대공이 반쯤 공개적으로 '소신에게는 파이몬 전하보다 단탈리안 전하가 우선이십니다'라고 표시한 것이었다. 두 번째, 그러나 독사대공은 나에게 짧은 인삿말을 건넨 반면에 파이몬한테 긴 인삿말을 건넸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인사하고 파이몬에겐 더 화려하게 인사함으로써, 약간이나마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었다. 세 번째, 파이몬은 솜씨 좋게도 긴 인삿말에 똑같이 긴 화답을 돌려주었다. 게다가 손등을 내밀어서 키스를 유도했다. 비록 내가 처음으로 인사를 취했으나 극례를 받은 쪽은 파이몬이 되었다. 결국 제3자 입장에서 보자면, 독사대공은 우리 두 명의 마왕을 정확히 동등하게 환영한 것처럼 비추었다. “단탈리안 전하. 파이몬 전하.”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한없이 많은 것들이 배후에서 교환되고, 속닥거리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실력을 인정함으로써 우글거린다. 마왕들이 소수를 제외하고 정치판에 미숙한 것과 달리, 대공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에 잔뼈가 굵은 자들. “소신의 궁전에 어서 오십시오. 다른 대공들이 있는 자리로 안내하겠나이다.” 이곳이 마계였다.   00399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대공의 안내에 따라서 궁전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독사대공을 제외하고 14명의 마계대공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에 절반 가량이 흡혈귀나 엘프였고, 나머지 절반은 호족과 묘족, 그리고 켄타우로스, 오크, 고블린으로 이루어졌다. 마계에서 종족으로 인한 계급의 상하가 얼마나 뚜렷한지 엿보였다. 대공들 전원이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파이몬과 나는 대공들에게 일일이 악수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두 분께서 함께 다니시니 소인들의 눈이 다 부실 지경이옵니다.” 의례적인 인삿말이 몇 차례 오가고, 우리는 상석에 앉았다. 데이지와 이바르가 우리를 호위하듯이 양옆에 섰다. “모두들 앉아주시오.” “예, 전하.” “본론부터 간결하게 말하겠소.” 내가 대공들을 둘러보았다. “본인이 지난 무도회에서 그대들을 강압적으로 다룬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하오. 그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낸 업적과 지위를 무시한 처사였소.” “망극하신 말씀이옵니다.” 독사대공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만마의 주인께서 어찌 시종에 불과한 저희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그저 저희의 자그마한 노력을 인정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그대들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재차 감사하는 바요. 만마를 위하여.” 내가 포도주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대공들도 술잔을 집어서 화답했다. 만마를 위해, 하고 나의 선창에 따라서 대공들이 포도주를 마셨다. 시종들이 테이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빈 잔에 새로 술을 따랐다. 자아, 여기서부터 본론이었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안건이 다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다시 제청될 예정이라오.” “…….” “저번에 의제가 부결된 까닭은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오. 인간종까지 노예 해방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쟁점이었지. 그리고.” 내가 슬쩍 얼굴이 돌려서 파이몬에 눈짓했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산악파에서는 평원파에 한 발자국 양보하기로 결정했어요. ” “전하, 하오면 다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예. 인간종을 제외하고 모든 노예에 대한 해방이 선언될 거랍니다.” 대공들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음…….” “크흠.” 대공들은 다른 마족을 노예로 부리면서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쟁취했다. 코앞에서 당신네의 기득권이 사라질 거라고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한 차례의 휴지(休止)를 두고 독사대공이 발언했다. “전하. 부디 소신들의 충심을 의심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모든 마족이 마왕 아래 평등해야 한다는 대의에, 저희만큼 공감하는 이들이 달리 없습니다.” “십분 이해하오.” “소신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너그러운 자비심뿐입니다.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필요악이란 게 있습니다.” 독사대공이 상인처럼 두 손을 모아서 작게 흔들었다. “소수의 노예에게 고된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유민들은 생계의 부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월맹군이 일어날 때마다 저희 마계에서 막대한 의용군을 지원했습니다만, 만일 노예가 후방에서 산업을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만한 의용군이 결성되기란 아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전하. 저희들의 헌신은 상당 부분이 노예로부터 나옵니다. 이 점을 이해해주셔야만 합니다.” 노예가 해방되면 자신들의 권력과 부가 줄어든다. 이 경우 자신들이 마왕군에 원조하는 금액과 병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즉, 대공들은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면 그걸 구실로 더 이상 마왕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물론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할 생각은 없소.” “오오. 그 말씀은?” “그대들에게 대륙의 영지를 배분하겠소외다.” 대공들이 웅성거렸다. “실례하오나, 전하. 어느 정도의 영지를, 어떻게 소신들한테 나눠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지도를.” 이바르가 품속에서 큼직한 두루마리를 꺼내어서 펼쳤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그려진 지도에는 대공들에게 분배될 영지가 따로 까맣게 색칠되어 있었다. “본래 역적 발레포르를 비롯하여 여섯 명의 마왕이 소유한 토지였소. 보다시피 상당하지.” “……실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 토지를 최대한 공평하게 그대들한테 분배할 생각이오. 만일 원한다면 그대들이 스스로 분배해서 가질 몫을 정하여도 좋소. 전적인 자유를 보장하겠소.” “으음.” 대공들이 옆에 앉은 사람들과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아마도 애당초 친분이 있는 대공들끼리 가깝게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자신의 주인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어느 정도 의견이 정리되었을까. 독사대공이 시종에게 귓속말을 전해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로운 제안에 모두를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오나 전하. 과연 저희 대공들에게 대륙을 나눠준다는 의제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통과할 수 있겠사옵니까? 예컨대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저희가 대륙에 진출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실 것입니다.” “이 제안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오.” 대공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독사대공만은 평탄한 표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황송하옵니다만, 비공식적이라는 단어가 소신의 귀에는 결코 호의적으로 들리지 않사옵니다.” “백작이나 남작과 같은 직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해줄 수는 없소. 그러면 그대들이 마왕과 동급이 되어버리니 말이오.” “하오시면?” “그대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관료로 임명될 것이오.” 기본적인 눈속임이었다. 우선 여섯 명의 역적에게 거둬들인 영토를 계속해서 황제의 토지로 묶어둔다. 다만, 마계대공들이 '황제를 대신해서 영토를 돌보는 관리인'으로서 각지에 파견된다. 실질적으로 땅을 다스리는 주인은 대공이 되는 것이다. “황제에게는 개인적으로 관리인을 임명할 권리가 있지. 구태여 발푸르기스의 밤에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좋소. 설령 일부 마왕들이 반대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거요.” 대공들이 다시 한번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었다. 수군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가라앉은 가운데, 한 명의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뚱뚱한 체격에 머리가 벗겨진 호족의 대공은 울발라지옥을 다스리고 있었다. 참고로 저 대공은 지난번 무도회에서 나한테 협박을 들었을 때 특히나 불쾌해한 인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투가 공손한 것에 비해서 말의 내용은 제법 공격적이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저희에게 제안해주신 약속에는 담보가 필요해 보입니다.” “담보라? 어디 말해보시오.” “황제가 독단적으로 영지의 관리를 맡길 수 있다는 얘기는, 뒤집어서 말해, 언제든지 또 다시 독단적으로 관리인을 해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울발라대공의 지적에 다른 자들이 음, 하고 턱을 주억거렸다. “전하의 약속은 매력적이나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 “약속을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영구한 계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하께서 소신들에게 어떠한 보증을 맡겨주셔야 하옵니다.”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울발라대공이 고개를 반쯤 숙였다. “결혼동맹입니다, 전하.” 결혼. 갑작스럽게 나온 단어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발라대공이 말을 당당하게 이어나갔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부인을 맞이하시거나 첩을 들이신 적이 없는 걸로 아옵니다. 전하. 소신들에게는 마침 장성한 딸아이들이 있습니다. 소신들의 여식을 첩으로 받아주시옵소서.” “무슨……!” 파이몬이 흥분해서 자리를 박차려고 했다. 파이몬의 호감도는 이제 80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 생뚱맞게 첩을 들이라고 말하면 당연히 분노가 치밀겠지. 내가 재빨리 파이몬의 손을 잡아서 제지했다. 파이몬이 이쪽을 쳐다보고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파이몬이 흥분을 억누르고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한편, 대공들은 한두 명씩 울발라대공에게 합세하고 있었다. “피보다 더 진한 동맹을 성사함으로써 전하께서 저희를, 저희가 전하를, 영원하고도 굳건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전하. 울발라대공의 제안이 실로 적절하다 사려되옵니다.” “부디 윤허해주시옵소서, 전하!” 곧이어 대공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건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대공들은 마치 결혼동맹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빛을 꾸미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아무런 의논 없이 좋다고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미리 대공들 사이에 밀담이 오고 갔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내가 물끄러미 독사대공을 쳐다보았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읍례했다. “소신 또한 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전하, 윤허해주시옵소서.” “…….” 나에게 첩이 생기면 대공들은 제국의 심장부에 첩자를 심어두는 꼴이었다. 마계대공의 친딸인 이상, 아무리 내가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녀들을 멋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어엿한 첩으로 대접해줘야 했다. 그러면 그녀들은 '궁중백의 첩'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이런저런 음모를 꾸밀 수가 있었다. 사자의 심장에 벌레. 저기서 가장 목소리를 크게 높이고 있는 대공들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겠지. 반면에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희생. 필요에 의한 희생. 내가 입을 열었다. “좋다.” “그럴수가…….” 파이몬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파이몬에게 눈짓으로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라고 신호를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파이몬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단, 그대들의 여식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가히 부담스럽소. 열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만을 첩으로 받아들이지. 더불어서 이것은 흥정이 아니라 최후의 조건이오.” 대공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리고 미리 약속한 것처럼 하인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들고 연회장에 입장했다. 테이블에 빠르게 요리들이 진상되었다. 대공들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만마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선창하자 대공들이 “단탈리안 전하 만세! 파이몬 전하 만세!” 하고 외쳐먼서 술잔을 기울였다. 단숨에 연회장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유일하게 그 공기에서 소외된 사람은 파이몬이었다. 건배가 오가는데도 파이몬은 오른손에 유리잔을 든 채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빛이 어둡고 깊게 가라앉았다. 대공들이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셨다. 파이몬은 그저 조용하게 술잔을 들고 있기만 했다. “……실례하겠어요.” 파이몬이 탁자에 유리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녀는 드레스 양끝을 쥐어잡고 빠른 발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나갔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파이몬은 일어설 때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주연이 퇴장하자 잠시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대공들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함으로써 다시 공기를 북돋았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본인도 잠시 실례하겠네.”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전하.” 독사대공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파이몬을 뒤쫓아서 무도회장에서 나갔다.   00400 방울져 떨어지는 밤 =========================================================================                        어디로 사라졌는가. 복도에 멈추어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허리를 낮추면서 공손하게 오른팔을 들었다. 오른팔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맙다.” 하고 나는 하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다른 하녀가 한 명 더 서 있었다. 그녀 역시 허리를 숙이면서 어느 방향을 팔로 가리켰다. 그렇게 열다섯 명쯤에 이르는 하녀들이 차례차례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는 기분으로 하녀들의 말없는 안내에 따라서 뛰었다. 복잡하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돌아서 걸어가자 그곳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었다. 조명조차 없어서 어둡기만 한 공간이었다. 창문에서 달빛이 희미하게 비출 따름이었다. “…….” 그곳에서 파이몬은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조용히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파이몬.” “……거짓말쟁이…….” 파이몬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녀에게 신뢰를 빌려달라고 말했으면서……그래서, 신뢰를 빌려준 대가가 이것인가요? 대공들의 딸들을 첩으로 삼고, 소녀는 첩보다 못한 애인 신세로 내버려두고…….” “파이몬. 저는 그녀들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파이몬에게 다가서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어차피 정치적인 결혼동맹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파이몬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슬픔, 어떤 애원과도 같은 감정이 눈동자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소녀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오로지 단탈리안, 당신을 위해서였어요! 당신이 저 한 사람에게 묶여버리면 정치적으로 힘들어지니까! 바르바토스, 시트리, 가미긴과 멀어지게 되면 당신이 곤란해지니까! 그런데, 소녀의 마음을……이런 식으로……!” 알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도 자기가 본처라고 으스대지만 정말로 결혼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라우라도, 시트리도, 가미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안 돼요, 단탈리안. 이건 안 돼요. 저는…….” “노예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필요에 따른 희생이에요.” 나는 염원을 담아서 말했다. 진심 어린 염원을. “파이몬, 당신도 이 세상에서 노예제가 사라지기를 누구보다 바라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는 당신이 가장 소중해요!” 파이몬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가며 오열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저 자신보다, 당신을,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 “안 돼요, 단탈리안. 이건 너무 고통스러워요……너무 고통스러워요…….” 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에 낀 장갑을 벗어서 복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파이몬을 꾸욱 껴안았다. 파이몬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옷이 금세 그녀의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한없이 어두운 복도에 울음소리만이 작게 메아리를 쳤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바르바토스가 당신을 죽이겠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결국에는 제 목숨을 위협할 거라고. 저를 위해서라도 당신을 죽이겠다고.” 나는 파이몬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병을 다루듯이, 섬세하게. “바르바토스가 반대표를 던진 건 인간종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바르바토스는 당신을 없애버리기로 단단히 결심했겠지요.” “…….” “하지만 제가 어떻게 당신을 버리겠습니까. 파이몬. 저는 당신을 오롯하게 짊어지기로 결심한 남자입니다. 당신이 죽이지 못하는 것을 제가 대신해서 죽이고, 당신이 용납하지 못하는 희생을 제가 대신해서 강요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나는 오른손을 움직여서 이번에는 파이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붉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내 손을 포근하게 받아주었다. 정말로 따뜻한 감각이었다. 이대로 계속 쓰다듬고 있고 싶을 만큼. “저는 당신의 신념을 대행합니다.” “단탈리안…….” 파이몬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검은색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파이몬.” 정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파이몬은 이해하지 못했는지 표정이 서서히 망가졌다. “아……?” “이런 자리에서 고백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진심입니다. 비록 일곱 명을 첩으로 맞이하게 되겠지만 저와 진정으로 함께 나아갈 동반자는 당신이기를 바랍니다.” “아, 아아……아아아…….” 파이몬의 눈가에서 눈물이 넘쳐 흘렀다. “다, 단탈리안. 단탈리안……단탈리안…….” “숨기지 않겠습니다. 저는 바르바토스도 사랑합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맹세했고, 저는 더 이상 두 사람을 함께 좋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저희에게는 마계대공들의 협력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바르바토스는 틀림없이 당신과 제 결혼에 분노하겠지요. 하지만 파이몬, 당신이 이끄는 산악파. 저에게 호의적인 중립파. 여기에 대공들의 전면적인 협력까지 끌어들인다면.” “네, 단탈리안……네…….” 파이몬이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파이몬은 울고 있는데도 입가만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마저 힘이 없어서 떨렸지만, 분명히 파이몬은 기뻐하고 있었다. “소녀의 모든 걸 바쳐서. 소녀의 모든 걸 희생하더라도. 단탈리안,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서 살겠어요. 영원토록 당신만을 사랑하겠어요…….” 그리고. 「파이몬의 호감도가 16 오릅니다.」 「파이몬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상대방은 당신을 완전한 연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우리 두 사람은 길게 키스를 나누었다. 파이몬은 그후로도 한참이나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었다. 허리에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체감상 이십 분 정도가 흐른 다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자아, 파이몬.” 내가 장갑을 다시 쓰면서 말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습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대공들이 불안해할 겁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대공들을 확실하게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알고 있지요?” “예, 단탈리안.” 파이몬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활짝 웃었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미소는 더욱 아름다웠다. * * * 우리가 연회장으로 나란히 들어오자 대공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여자가 홀로 뛰쳐나갔는데도 돌아올 때는 사이좋게 함께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리라. “두 분께서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독사대공이 눈치 빠르게 굽실거렸다. 파이몬이 부끄러운 듯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연회 도중에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요, 대공.”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자아, 소신이 두 분의 영광을 염원하며 감히 한 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대공들이 차례대로 포도주병을 들고 와서 우리에게 술을 따랐다. 우리는 상석에 앉아서 한 잔씩 대공들과 주고 받았다. 참고로 파이몬과 나에게는 오른손 검지에 독극물을 자동으로 검사하는 아티팩트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독살의 위험은 전무했다. “전하.” 마지막으로 울발라대공이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약소하오나 두 분 전하께 소신이 선물을 준비했사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선물을 공개할까 하옵니다.” “후후. 깜찍한 계획이네요.” 파이몬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다른 대공들도 기대하는 눈초리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예에, 우리야말로 기쁘게 받아들이겠어요.” “황공하옵니다.” 울발라대공이 등을 돌려서 손뼉을 쳤다. ─ 짜악. 연회장 입구에서 두 명의 하인이 큼직한 수레를 끌고 왔다. 평범한 수레가 아니었다. 숫제 황금으로 제작한 수레였다. 더욱이 수레에는 미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다발이 실려 있었다. “오늘처럼 기쁜 날에 꽃이 없어서야 음유시인들이 슬퍼하지 않겠나이까.” 울발라대공이 웃으면서 자신의 팔로 수레를 가리켰다. “이 자리를 기념하자는 의미에서 수레와 꽃을 두 분 전하께 진상하옵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 “…….” 파이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레에 당장이라도 범람할 것처럼 가득 실린, 붉고 또 붉은 꽃. 피안화(彼岸花). 죽은 자를 위한 꽃. 지옥꽃이라 불리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사인화(死人花)라 불리기도 했다. 샛붉은 꽃잎이 핏물을 연상시키는 탓이었다. 똑같이 빨강색인 장미와는 정반대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농담으로라도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꽃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파이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울발라대공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소신에게 대신 전달하라 명령하셨습니다.” “……!” 파이몬이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입구에서 칼을 든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오십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파이몬과 나를 반원 형태로 둘러쌌다.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도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데이지와 이바르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반면에 마계대공들은 천천히 병사들 뒤로 걸어갔다. 열다섯 명의 대공 전원이. 그중에는 독사대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디서, 감히, 같잖은 짓거리를!” 파이몬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녀가 병사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장 저 반역자들을 처치하세요!” “죄송합니다. 이들은 모두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겨넣은 암살자입니다. 망극하게도 전하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다.” 울발라대공이 여유롭게 말했다. “물론 저희 대공들은 각인이 없으니 전하의 명령에 어느 정도 복종하겠지요. 하지만 만일 전하께서 저희에게 어떠한 강압적인 한 마디라도 하신다면, 이 암살자들은 곧바로 두 분 전하를 공격할 것이옵니다. 미리 명령해두었습니다.” 병사들이 한 발자국 처억, 하고 우리에게 접근했다. 데이지가 등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바알의 대검이었다. 데이지는 흉흉한 살기를 사방으로 피워내며 암살자들을 노려보았다. “아버님.” “기다려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대공들은 겁먹은 시선, 경계하는 시선, 분노에 찬 시선, 무표정한 시선 등, 각양각색의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중에 한 명을 바라보았다. “울발라대공.” 뚱뚱한 남자가 움찔거렸다. 울발라대공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나에 대한 두려움을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정말로 바르바토스가 그대에게 밀명을 전달했는가?” “……그렇사옵니다. 저희의 임무는 단탈리안 전하와 파이몬 전하를 감금하는 것. 이제 한두 시간 뒤에 바르바토스 전하께서 긴급하게 발푸르기스의 밤을 소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예제를 영구히 폐지 불가능한 제도로 선언할 테지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바르바토스가 찬성표를 던질지라도 다른 마왕들은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 “아니옵니다. 만일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는다면 저희는 단탈리안 전하의 손가락을 잘라서 합스부르크 황궁에 배달할 생각이옵니다.” “그러면 바르바토스의 분노를 살 뿐이다. 바르바토스가 본인의 연인임을 모르는가?” “바로 그 연인께서 우리의 계획을 정해주셨나이다.” 내 옆에서 파이몬이 이빨을 바득 갈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했겠지. 울발라대공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마저 말했다. “두 분 전하가 인질로 잡혀 있다. 인질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일단 안건을 통과시켜야 한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그렇게 다른 마왕 전하들을 설득할 것이옵니다.” “멍청하군.” 내가 작게 웃었다. “그대는 사실상 마왕군 전체에 반기를 든 셈이다. 마르바스와 가미긴이 그대를 가만히 내버려두리라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가 인질을 풀어준다면, 예에. 물론 소신은 곧바로 사형에 처하겠지요. 그러므로 저희는 파이몬 전하를 석방하되, 단탈리안 전하만큼은 끝까지 인질로 붙잡아둘 계획입니다.” “…….” 데이지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만일 내가 기다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이미 뛰쳐나가서 암살자들을 도륙하고도 남았으리라. 내가 천천히 연회장을 살펴보았다. 병사들과 하녀들이 무표정하게 병장기를 세우고 있었다. 대공들은 그들 뒤에 숨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엎어지는 바람에 요리가 어지럽게 바닥에 쏟아졌다. 유리잔이 깨졌고, 포도주가 엎어졌다.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울발라대공. 자네는 요컨대 바르바토스와 나, 둘 중에 바르바토스를 선택했군.” “그러하옵니다, 전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하는가.” 울발라대공이 웃었다. “당연하고 말고요. 단탈리안 전하. 전하의 권력은 애시당초 바르바토스 전하의 호의 아래에서 비롯했습니다. 평원파가 더 이상 전하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전하는 이미 날개를 잃어버린 새가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희가 어찌 바르바토스 전하 이외에 다른 분을 선택할 수 있었겠나이까?” 대공들이 그에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울발라대공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다른 대공들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대공들은 더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연회장의 공기를 가득 메웠고. 나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병사들이 칼을 휘둘렀다. “――아아아악!” “아악! 끄하아아아아!” 웃음소리는 사라졌고 오로지 비명만이 울려 퍼졌다. 병사가 병사를, 하녀가 하녀를 죽였다. 칼날이 목을 그었다. 스무 명의 목에서 동시에 공중을 향해서 핏물을 토해냈다. 동료들에게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암살자들은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무도회장 바닥에 붉은 늪이 펼쳐졌다. “무, 무슨……이게 무슨…….” 몇몇 대공들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가진 기계처럼 망연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충격을 오래동안 견딜 필요가 없었다. 일곱 명의 대공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자신들의 앞이나 옆, 뒤에 있던 다른 대공의 목덜미에 칼날을 쑤셔박았다. “크프읍!” “끄허어어억!” 일곱 명이 한 명씩. 열다섯 명의 대공 중에서 단숨에 일곱 명이 목덜미가 뚫려서 피를 쏟았다. 이들은 억, 억, 하며 손으로 상대방을 붙잡았다. 마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일곱 명의 대공은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확실히 사살하기 위해서. 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대로 목에, 가슴에, 배에, 눈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단검에 찔린 대공들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 단검을 빼어든 일곱 명을 제외하면, 오로지 울발라대공만이 살아남았다. 울발라대공은 말조차 나오지 않는지 다만 덜덜 떨었다. 무릎이 떨렸고, 어깨가 떨렸으며, 턱이 떨렸다. 나는 식탁에서 술잔을 집어들었다. “울발라대공. 내 다시 한번 묻도록 하지.” “으, 어하, 으으으아아…….” “본인이 아니라 바르바토스를 고른 것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보는가.” 울발라대공이 바닥에 온몸을 투지했다. “사, 살려주십쇼, 전하! 소신이, 소신이 어리석었나이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소, 소신의 모든 걸 드리겠나이다. 재산도, 노예도, 무엇이든,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자비를, 관용을 베풀어주시옵소서!” 내가 독사대공에게 눈짓했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검에 무게를 실어서 그대로 울발라대공의 등에 내리찍었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공들이 마치 늑대처럼 달려들어서 울발라대공의 몸을 찔렀다. 단검이 살을 뚫고 헤집을 때마다 울발라대공은 찢어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급격하게 비명의 강도가 낮아졌고, 30초가 흐를 때쯤에는 소리 자체가 어디론가 내려앉았다. 침묵. 파이몬이 나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어딘지 한심하다는 기색으로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대공들이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술잔을 내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모든 마족을 위하여.” 하녀를 위장한 암살자들이 대공들한테 술잔을 쥐어주었다. 일곱 대공이 나를 따라서 유리잔을 높이 들었다. “단탈리안을 위하여.”   ============================ 작품 후기 ============================   참고로 저 일곱 대공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전에 한번 등장한 공통점이요 >_<);;   00401 방울져 떨어지는 밤 =========================================================================                        우리는 포도주를 비우고 유리잔을 바닥에 내리쳤다. 월맹군에서 오래도록 내려오는 이 전통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의미했다. 깨진 유리조각을 이어붙여서 다시 술잔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선택을 번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밟고 나아가리라. 그것이 전진을 의미하든지 후진을 의미하든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공들에게 명령하겠다.”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전하.” 내가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짓밟았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신발 밑창 너머로 느껴졌다. “궁성에는 아직도 반역도당의 무리가 잠복하고 있다. 그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처형하라.” 오늘 연회에는 마왕과 대공만 참여했지만, 본래 내일 대공의 가족이나 휘하 귀족도 접견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현재 이곳 궁전에 머물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비란 없다. 종족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죽이도록.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노인에서 시작하여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한 태아까지, 반역도당의 피가 섞인 인물들은 모조리 사살하라.” 이것은 숙청을 빙자한 전쟁이었다. 일곱 명의 마계대공이 나를 따라온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뽑으라면 바로 막대한 이익에 있었다. 오늘부로 거주지를 명계로 옮기게 될 여타 대공들. 그들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땅들이 모조리 일곱 명의 대공에게 돌아갔다. 마계는 더 이상 스물여섯 명의 대공이 다스리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오직 일곱 명의 대공이 마계를 통치할 것이다. “존명.” 대공들이 오른주먹을 가슴팍에 올렸다. 군례였다. 대공들은 암살자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미 내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학살이 예정되었는지, 복도 저 너머에서 아득하게 피투성이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바르. 여기에 적힌 대로 임무를 실행하고 와라.” “예, 주인님.” 나는 이바르한테 옷소매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서 주었다. 이바르는 쪽지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바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가 '정말인가요?' 하고 묻고 있었다. “현재 이 궁전에는 광범위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공으로 높이 날아야 할 것이야.” “……분부를 받듭니다.” 이바르가 고개를 숙인 다음, 연회장에 길다랗게 나 있는 창문을 깨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나와 파이몬 그리고 데이지뿐이었다. 물론 시체 수십 구를 제외한다면. 조용해진 연회장. 파이몬이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얌전히 포개었다. “정말로 놀랐어요, 단탈리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데이지를 슬쩍 쳐다보았다. 파이몬과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 알아서 적당히 나가라, 하고 눈짓한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저는 아버님의 호위입니다. 이바르 양이 사라진 이상, 저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연회장 입구에 가서 망을 보아라.” “의외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장소는 언제나 항상 아버님의 바로 옆자리 아니었나요?” 나를 증인으로 삼은 장본인은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달라. 데이지가 그렇게 암묵적으로 시위하고 있었다. “…….” 좋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에게는 참관할 권리가 있었다. 파이몬과 단 둘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내 과한 욕심일지도 몰랐다. “저는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대공들을 만나러 간다는 정보도, 당신과 함께 방문한다는 정보도 대놓고 사방에 흘렸습니다. 바르바토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배신으로 여겨질 법했지요.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하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파이몬이 진지하게 내 얘기에 집중했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군요, 단탈리안.” “예.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특별히 신뢰할 만한 마계대공이 일곱 명 있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미처 움직이기 전에, 제가 먼저 그들에게 연락했습니다.” 곧 바르바토스가 그대 마계대공들에게 어떠한 음모를 전달할 것이다. 그 음모는 속임수이다. 우리의 진정한 계략은 15명의 대공에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8명을 축출하는 것. 그리고 그대들에게 나머지 마계의 통치를 위임하는 것이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연락을 하고서 겨우 이틀 뒤에,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일곱 대공들 입장에서는 제 말에 신뢰가 갈 수밖에 없겠지요.” 독사대공을 포함하여 나에게 섭외된 일곱 명의 대공. 이들은 과거, 바르바토스와 내가 성교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 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고로, 일곱 대공은 '바르바토스가 마왕 단탈리안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는 시나리오보다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이 또 다시 짜고 치는 극본을 마련하고 있다'라는 시나리오를 신뢰했다. “지금도 대공들은 오늘밤 일이 바르바토스와 내가 짜놓은 숙청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습니다.” “단탈리안……대단해요.” 파이몬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에게 깊이 안겨왔다. 파이몬의 부드러운 몸이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파이몬은 나의 어깨에, 나는 파이몬의 어깨에 턱을 올려두는 자세가 되었다. 포근했다. 지금까지 나를 안아준 여인은 꽤나 많았다. 바르바토스, 라우라, 시트리, 이바르. 하지만 파이몬에게 안겼을 때가 가장 따뜻했다. 파이몬은 햇살과 같은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촉을 좋아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대공들이 사실을 눈치 채버릴 텐데. 그게 유일한 걱정거리네요.” 파이몬이 바로 내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마치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고요한 음악과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울렁거리는 무반주 첼로곡처럼. “그때 가서도 과연 대공들이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선택해줄지, 소녀로서는 약간 자신이 없어요……아. 물론 단탈리안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전부 알아서 잘 하겠지요,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파이몬.” 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쥐었다. “전부 진실이니까요.” “예?” 파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칼자루를 잡아 파이몬의 목덜미에 힘껏 찔러넣었다. 붉은 피가 공중에 흩날렸다. 순간, 파이몬이 비명을 토해냈다. 그것과 동시에 내 몸을 껴안은 파이몬의 손길에도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하나. 열 개의 손가락 전부가 등줄기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파이몬이 미약하게 신음했다. “단, 탈리안……?” 나는 단검을 휘둘러서 파이몬의 등에 꽂았다. 칼날이 파이몬의 몸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하윽, 하고 파이몬이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속에서 분출된 핏물이 내 손장갑을 축축하게 적셨다.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맹독이 묻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파이몬의 뒷목에 칼날을 쑤셔넣었다. 그러자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서 있었던 파이몬이 힘을 잃고 허물어졌다. 그녀의 무너지는 몸을 내가 왼팔로 지탱했다. 파이몬은 아주 서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내 왼팔에 안긴 채 망연자실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으……흐크읍, 프흑…….” 파이몬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말은 목에서 쉴 새 없이 뿜어지는 핏물에 가로막혀서 미처 발언되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피거품을 토해낼 따름이었다. “노예제는 전면적으로 폐지될 것입니다. 마족도, 인간종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바르바토스가 노예제 폐지에 동의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의 목숨입니다.” “흑, 하프흐읍……커흑…….” “만인의 해방보다 저 한 명을 더 소중히 여긴 시점에서, 파이몬.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내가 파이몬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에 당신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회였어요, 파이몬.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제는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단탈, 리안……흐끄으윽……단, 탈리안…….” “그러니 제가 당신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날밤에 약속한 것처럼. 영원히.” 파이몬이 천천히 오른팔을 들었다. 그녀는 내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피가 묻은 파이몬의 손바닥은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그녀의 손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사랑, 해요…….” “…….” “사랑해요……울지, 마세요……단탈리안…….” 그리고 파이몬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내 뺨에 길게 피의 붉은 궤적을 그리면서, 한없이 낙하했다.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내 품안에서 느껴지던 무게도, 고동도, 감촉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더 이상 파이몬이 아니라 그녀가 남긴 일종의 여진과도 같은 떨림이었다. 상태창, 하고 내가 자그맣게 중얼거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나는 파이몬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피비린내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키스를 이어갔다. 붉고 따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하.” 이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바르는 어느새 창가에서 넘어와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이바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움찔거렸다. 발걸음이 멈추었다.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보고하라.” “……마왕 바르바토스에게 전달했습니다. 사건은 종결. 바르바토스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서 반역자 대공들의 영토를 유린하겠다고 대답을 돌려주었습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전해준 쪽지에는 바르바토스한테 연락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이바르가 깜짝 놀란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이바르는 내가 바르바토스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단탈리안과 파이몬을 붙잡으라' 하고 거짓 명령을 내린 것도. 내가 일곱 대공한테는 전혀 다른 밀명을 내린 것도. 전부, 바르바토스와 내가 계획하여서 주도한 대본이었다. “수고했다. 데이지.” “……예, 아버님.” “복도에 돌아다니는 아무 암살자나 잡아서 데려오도록.” 데이지는 연회장을 나서더니 고작 3분도 지나지 않아서 하녀 옷차림의 암살자를 대동하고 돌아왔다. 내가 휙, 하고 턱짓하자 데이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암살자를 일도양단했다. 암살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는 암살자의 손에 내 단검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손에 쓰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불태웠다. “데이지. 너는 나의 명령으로 근처에 암살자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암살자가 침입하여 나를 공격했다. 파이몬은 그런 나를 감싸고 대신해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해했느냐.” “……예.” “파이몬을 죽인 것은 암살자이고, 결국 암살자를 고용한 여타 대공들이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될 내용이었다. 산악파 마왕들은 분개하겠지. 배신한 대공들에게 격노할 것이 분명했다. 일부 마왕은 혹시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냐고 의심하겠지만, 문제는 누가 산악파의 의견을 주도하느냐였다. 파이몬이 사라진 이상 앞으로 산악파를 지도할 인물은 시트리밖에 없었다. 시트리는 누구보다 나를 신뢰했다. 나에 대한 의심을 단번에 일축해버릴 것이다. 설령 약간의 의심을 품을지라도 그때는 내가 시트리를 속이면 그만이었다. 배신자 대공들이 전부 죽어버리고, 그 친지까지 오늘밤 안에 모두 죽을 것이므로, 진실을 아는 제3자들은 모조리 땅에 묻혀버리고 마리라. 나의 권력은 유지된다. 바르바토스의 지지, 시트리의 지지, 마르바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계속해서 유지된다. 파이몬이 죽었다는 사실을 빼면 파벌들의 균형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가자.” 나는 양팔로 파이몬을 안아 들었다. “제국의 황궁으로.”                 00402 방울져 떨어지는 밤 =========================================================================                        * * * 내가 순간전이를 통해서 합스부르크의 황궁에 도착했을 때. 마왕들은 궁전의 광장까지 몰려나와 무척 어수선한 공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밤에는 달빛이 어느 때보다 밝았다. 구름의 역할이란 그저 때때로 연한 보랏빛의 달무리를 뿌리는 것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속옷만 입은 마왕까지 있었다. 파이몬과 내가 피습을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서 앞뒤 가리지 못하고 헐레벌떡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러했다. 바로 시트리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시트리는 불길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불길함이 야트막한 안개처럼 광장 전체에 깔렸다. 산악파, 평원파, 중립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내가 걸음을 내딛었다. 발목쯤에 무거운 안개가 걸려서 걸음걸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내 종아리는 안개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더욱 아래로 빠져들었다. 나는 황금으로 가장자리가 마감된 정문을 지나쳐서, 광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우스운 일이었다. 가끔씩 내가 걷는 박자에 맞추어서 밤하늘의 조명이 번갈아 뒤바뀌었다. 달빛은 나의 발끝을 내리쬐었다가 다시금 구름에 어둡게 가려졌다. “하…….” 누군가가 신음을 내쉬었다. 어쩌면 비명이었을지 몰랐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왕들은, 내가 단지 홀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며, 품안에 누군가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카락이 장미보다 붉은 여인을. 마왕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럴수가…….” “신들이시여.”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밤구름이 물러나고 달빛이 비추었다. 덕분에 마왕들은 더 자세하게 이쪽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파이몬은 피투성이였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추악하게 더럽혀졌다. 내 입술과 입가에도, 왼쪽 뺨에도 그녀의 핏물이 칠해져 있었다. 나는 파이몬을 조심스럽게 광장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돼……아니야, 거짓말이야…….” 시트리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주변에 있던 산악파 마왕들이 시트리를 부축했다. 시트리는 그들에게 양팔이 걸린 채 “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라는 말만을 고장난 오르골처럼 반복했다. 그래, 시트리. 나다. 내가 이 여자를 죽였다. 이 여자에게 착각을 심어주었고, 신념을 이용했고, 농락했으며, 왜곡했고, 가장 큰 행복을 약속한 다음 곧바로 그 행복을 이 두 손으로 강탈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이 여자의 이름은 파이몬이었다. “방금, 겨우 삼십 분 전에, 우리의 가장 사랑스럽고 명예로운 연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제 품안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을 아주 뚜렷하게 기억했다. 내 입은 마왕들을 향해서 말을 내뱉었으나, 내 머리는 파이몬을 떠올리고 있었다. ─ 회의와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을 추궁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한답니다. ─ 단탈리안은 주저없이 안드로말리우스를 격살했습니다. 소녀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답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마왕의 일원일까? 만일 마왕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쉽게 다른 마왕을 살해할까? ─ 소녀에겐 아직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 남았어요! 우리의 만남은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배신자는……여덟 명의 마계대공이었습니다. 주범은 울발라대공으로, 이 반역자는 파이몬과 저를 감금시키고 여러분에게 발푸르기스의 밤을 강요할 예정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을 인질로 삼고, 노예제를 영구히 폐지 불가능한 제도로 확립시킨다. 그것이 울발라대공이 밝힌 범행 동기였습니다……그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내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분개했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흘렀다. 나는 이 정도 연기를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스킬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 손수건 갖고 계신가요? ─ 앞으로는 부디 손수건을 상비하세요. 신사의 소양이랍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내가 겪어온 시련에는 어김없이 당신이 개입했다.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감옥에 갇힐 뻔한 것도, 월맹군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것도 당신 때문이었다. “……대공들 중에서 일곱 명이 우리의 편을 들었고, 결국 대공들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유리했습니다. 반역자들을 내쫓는 데 성공했지요. 하지만 반역자의 잔당은 건재했고, 아군은 그들을 마저 소탕하기 위해 추격했습니다. 그리고……대부분의 아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는 말문이 막혀서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울음기 때문에 말투가 헝클어지고 무뎌졌다. 모두 의도된 연기였다. 나는 내가 완벽하게 연기를 펼치고 있음을 자각했다. 나의 표정은 분노와 슬픔을, 충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내가 오로지 나 자신만 위해서 연기했다면, 파이몬, 당신은 전혀 달랐다. ─ 우리 마왕은, 얼마나 우둔했었나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정작 죽어나간 것은 마왕이 아니었어요. ─ 위선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어도 위선과 기만은 끊기지 않겠지요. 더더욱 화려하게 불타올라, 인간계, 마계, 이윽고 세계 전체를 태워버릴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동족을 버리고 인간만 사랑하는 위선자도 아니었고, 마왕이라는 한계에 얽매여서 무엇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외면하는 독선가도 아니었으며, 자기가 생각한 것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겁쟁이도 아니었다. ─ 그거 아세요? 바르바토스와 소녀가 아직 친구일 무렵에 있었던 일이에요. ─ 우리가 농담 삼아서 얘기했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말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 ……눈을 감아주세요, 단탈리안. 당신은 나에게 선(善) 그 자체였다. 고로, 당신을 살해한 나는 변명할 여지도 없이 악인이겠지. “파이몬은……파이몬은, 저를 감싸다가 죽었습니다!” 내가 울부짖었다. “암살자가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그때 파이몬이 저를 껴안고, 암살자가 파이몬의 등에 몇 번이고……몇 번이고…….”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구겼다. 내가 파이몬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가슴속에서 진실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추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추억을 이용해먹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칼날이 그녀의 등을 헤집는 것이, 저에게도 진동으로, 느껴졌습니다! 암살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파이몬이 조금씩 무너져내렸습니다! 저는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느낄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보다 완벽한 거짓을 위해. “파이몬은 끝까지 제 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끝까지 양팔로 저를 감싸안고……저를 가려주고……그녀가 피를 내뱉었고, 그 피가 제 얼굴을 뒤덮었는데도……그런데도 파이몬은 마지막까지…….” 내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절규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감정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토해냈다. 밤공기가 떨렸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손톱으로 살을 긁었으며, 목에서 핏기를 내뱉었다. 마왕들은 나의 분노에 압도되었다. 여기서 하나의 진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복수를……!” 절규와 절규 사이로 나는 띄엄띄엄 단어를 토했다. “용서 없는, 복수를! 전부……모조리……!” 파이몬이 어떤 존재였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세계에서 나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거짓으로 물들인다면, 그걸 수정하고 고쳐주는 사람이 한 명 없이, 그대로 사실로 남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파이몬이라는 한 명의 여인에 대해 무제한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파괴하고, 또 파괴해서!” 어떠한 변명도 불가능하도록. 파이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도록. 어떠한 책임도 파이몬이 짊어질 필요가 없도록. 바로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범했으며, 마지막까지 소유했다. 그렇기에. 나는 단 한점의 흐릿함 없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뭇거림도, 후회도, 의심도, 반성도 없이. “그녀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내가 파이몬을 죽였다, 하고. “가장 끔찍하고,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배신자들을 싸그리 죽여주십시오!” 파이몬을 죽인 장본인은 바로 나 단탈리안이다,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진실로써 세계에 못 박아둘 수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쿵, 하고 머리를 돌바닥에 부딪쳤다. “부탁드립니다……제발……동지 여러분, 제가 잘못한 것도 부족한 것도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를……제 모든 것을 바쳐도 좋으니 그녀의 복수만은……부디 제발…….” 쿵, 쿵, 몇 번이고 이마를 바닥에 때려박았다. 새카매진 세상에 내가 머리를 박는 소리만이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나는 마치 땅바닥에 나의 데스 마스크를 뜨려는 사람처럼 두개골을 내리쳤다. 꼭 망치를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내 양쪽 귀를 감쌌다. “괜찮아.” 내가 무겁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린 탓에 오른쪽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왼쪽 눈으로 희미하게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시트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처럼 떨렸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미소였다. “괜찮아, 단탈리안. 네 잘못이 아니야.” “…….” “응. 네 잘못이 아니니까……다 괜찮아질 거야. 전부.” 시트리가 그녀의 뺨을 나의 이마에 꾸욱 눌러붙였다. 내 얼굴에 피가 아닌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시트리의 눈물이었다. 시트리한테서 흐르는 눈물이 나의 얼굴을 타고, 핏물을 씻어내며, 천천히 턱선을 따라서 흘렀다. 내 피와 파이몬의 피, 시트리의 눈물이 섞인 액체가 땅바닥에 조용히 떨어졌다. “괜찮아질 거야……으응, 정말로 괜찮아질 거야…….”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슬퍼해야 할 시트리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내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트리는 깨닫지 못했겠지만, 파이몬이 사라진 이때 시트리의 행동은 산악파를 대표한다고 보아도 좋았다. 즉. 나의 연기는 또 다시 성공하고 말았다. “제 잘못입니다……제가 없었더라면……저만 없었다면, 파이몬은…….” “으응. 괜찮아.” “파이몬은…….” 내가 시트리에게 안겨서 울음을 쏟아냈다. 나는 여태 마왕들 앞에서 지금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게, 때로는 상대방을 조소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런 내가 어린아이처럼 엉망으로 울어재꼈다. 그 의외성이 보다 연기에 신뢰성을 불어넣겠지.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깨고 보니, 침실에 누워 있었다. 데이지가 침대 옆에서 앉은 채로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창문은 환하게 밝았다. 최소한 하룻밤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데이지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정신을 잃은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어제, 월맹군이 결성되어 마계로 출군했습니다. 총사령관은 마왕 시트리입니다.” “…….” 내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속이는 것은 이토록 쉬웠다. 이토록.   00403 방울져 떨어지는 밤 =========================================================================                        “이틀 동안 병문안을 온 사람이 많습니다. 가미긴, 바싸고, 제파르…….” “내가 그걸 일일이 기억하리라 생각하느냐? 멍청한 것. 종이에 써서 주거라.” “국무상서와 군무상서도 바로 옆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떴다. 창문이 열린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나의 볼에 잠시 묻었다가 흘러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만졌다. 손바닥을 살펴보았지만, 핏물이 묻어 있지 않았다. “파이몬의 시체는?” “영구보존 마법으로 엄중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장례식 절차에 대해서는 아직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우선 마왕 시트리가 원정을 다녀온 이후에 결정하자는 식으로 논의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래…….” “아버님이 깨어난 이후에 결정하자는 얘기도 함께 있었습니다.” 대부분 마왕에게는 가족도 친지도 없었다. 마왕이 죽었을 때는 보통 그 사람과 가장 친밀했던 자가 상주(喪主)를 맡았다. 이번 경우, 파이몬의 애인인 시트리와 내가 상주 후보로 거론되었겠지. 그렇지만 시트리는 파이몬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데다 나는 기절한 채로 깨어나지 않았다. 마왕들도 꽤나 곤란했으리라. “데이지.” “예, 아버님.” “노래를 불러다오.” 데이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데이지는 음색이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과거 프랑크를 순례했을 때는 천사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용병들에게 찬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마왕성에서도 데이지는 때때로 혼자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는 했는데, 아마 책읽기와 더불어서 녀석의 몇 안 되는 취미일 거다. 난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데이지가 놀란 것이겠지. “……울게 내버려두소서.” 잠시 뒤에 데이지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녀석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 * * 많은 사람이 내 침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가장 먼저 들이닥친 사람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라우라와 라피스였다. 라우라는 나를 보자마자 엉엉 울면서 나의 침대에 달려들었다. “주군은 정말 바보다!”라느니 “멍청이!”라느니, 대체로 유치한 욕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라피스는 라우라보다 대처하기가 훨씬 더 난감했다. 그저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일종의 침묵시위였다. 왜 미리 말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실행했느냐, 하고. 라피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내가 전부 가져가고 싶었다. 거의 모든 마왕이 병문안을 왔다. 덕분에 별로 아프지도 않는데 며칠씩이나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참고로 제일 웃긴 병문안 손님은 바싸고였다. “쯧.” 바싸고는 침실에 들어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등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정말로 곧바로였다. 그러니까 바싸고가 와서 남긴 말은 '쯧' 하고 혀를 찬 소리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하러 방문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벨레드 형님은 마계에 대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울발라지옥에서 살아가는 마인이란 마인은 종족과 계급을 불문하고 학살당하고 있네.” “……시트리가 학살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시트리가 민간인을 싸그리 죽여댄다는 것이었다. “반역자들의 영지는 이미 일찌감치 항복했지. 이미 대공들이 죽은 판국에 우두머리도 없이 뭐 반항이야 할 수 있겠나.” “설마 항복을 했는데도 죽이는 것입니까.” “아아. 말려도 소용이 없더구만.” 벨레드 형님이 어깨를 으쓱였다. 벨레드 형님은 딱히 인도주의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살을 선호하는 부류였다. 그런 벨레드 형님이 말려야 했을 정도라니, 얼마나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행각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기가 막힌 방법을 쓰더라니까 그래. 우선 일자로 구덩이를 파놓는 거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마인들을 열에 맞추어서 대기시켜둬.” “생매장입니까?” “매장은 매장이지만 말이야.” 벨레드 형님이 피식 웃었다. “뒷열의 사람한테 무기를 들려줘서 앞열의 사람을 찌르라고 명령한다.” “예?” “그렇게 첫 번째 열의 마인이 모조리 죽어서 구덩이에 떨어지면, 다음 차례는 두 번째 열이지. 무기가 뒷사람에게 넘어가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야.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등을 찔러버리라고.” 요컨대 민간인이 민간인을 찌르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죽일 수 없다면서 울어재끼는 마인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런 놈들은 시트리가 직접 사지를 찢어버리더군. 얌전히 죽을 것인지 사지가 찢겨서 죽을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는 거야. 흐이구.” “…….” “나중에 가서는 마인이 울며불며 앞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죽이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어차피 바로 자기도 죽을 테니 용서해달라면서 칼을 찌르지 뭔가. 앞사람은 뒷사람한테 괜찮다고 또 울면서 말하고……하여간 끔찍했어.” 매당되어버린 민간인의 숫자가 무려 십만. 울발라대공이 머무르던 도시는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고, 땅에는 다시 생명이 자라지 못하도록 대량의 소금이 뿌려졌다. 그동안. 수만 명의 마인이 단지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 시트리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 근육이란 것이 사라진 사람처럼. 마치 표정이란 것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대다수가 정신병을 갖고 있는 마왕들이 바라보기에도 적이 광적일 정도로, 시트리는 단지 학살에 학살을 더하였다. “결국 시트리한테 다들 질려버려서 말이지. 대부분이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그냥 여기로 돌아와버린 걸세. 뭐, 사실상 전쟁은 첫 날부터 끝나버렸지.” 벨레드 형님이 내 침대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과일 중 사과를 집어들고 아삭 깨물었다. “시트리가 지금 마계에서 하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한 살인이야. 아우도 알겠지만 나는 미친 전쟁꾼이지 냉정한 살인자가 아니거든. 아무런 미학도 의미도 없는 학살에 동참할 이유는 없으니, 깔끔하게 접고 돌아왔네.” 아마도 시트리는 역사상 마인을 가장 많이 살해한 마왕으로 남게 될 거라고, 벨레드 형님이 사과를 씹으면서 말했다. “더 재밌는 건 시트리 그 녀석이 정확하게 십만 명을 채우고 끝내겠다고 말한 거야. 글쎄, 뭐라더라. 내가 어제 떠날 때는 아직 9만 5천 몇 명밖에 안 죽여서 조금 부족하다던가.” 벨레드 형님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 미친놈이 정신이 나갈수록 숫자처럼 미세한 것에 집착하게 되거든. 자기가 벌이는 미친 짓에 전부 하나하나 이유를 붙여두려는 거지. 이해하겠나, 아우? 집착증이라구. 쯔쯧, 그 여자는 이제 끝일세. 너무 멀리 가버렸어.” “…….” 시트리가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것은 이틀 뒤였다. 처음으로 대륙이 아니라 마계에 창끝을 돌린 월맹군은, 전쟁이 시작하고 열흘도 지나지 않아서 종료되었다. 마인이 마왕에게 반역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겨우 며칠 만에 시트리는 잔혹하고 잔인한 마왕의 대표주자로 바뀌었다. 시트리가 귀환하고 첫 번째로 찾은 사람이 나였다. “다녀왔어, 단탈리안.” 시트리가 환하게 웃었다. 벨레드 형님이 전해준 것처럼 무표정한 학살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순진무구한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많이 죽였어. 아주 많이 죽였어. 응, 파이몬 언니는 싫어하겠지만……언니는 바보처럼 착하니까 싫어하겠지만, 그냥, 용서할 수가 없었어.” “…….” “단탈리안. 나 잘한 걸까?” 내가 말없이 시트리를 안아주었다. 시트리는 아주 잘해주었다. 그동안 산악파를 이끌어온 파이몬이 사라졌다. 산악파는 자칫 분열될 위험에 처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것은, 과감하고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분노하면 이렇게 공포스럽다. 우리를 얕보지 마라. 우리의 힘에 굴복하라……. 이런 식으로 집단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시트리는 파이몬의 다음을 이을 후계자로서 더없이 훌륭하게 행동했다. 딱 10만 명을 맞추어서 학살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마왕 한 명이 죽었으므로 배신자 십만 명을 차단했다, 하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학살이지만 동시에 '계산적인' 보복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시트리. 앞으로 당신이 산악파를 이끌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분명히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응. 나, 노력할게…….” 시트리가 내 어깨에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시트리는 표정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나와 단 둘이서 있을 때만 예전처럼 웃고 방실거리고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해버렸다. 아니, 정말로 변해버린 것이겠지. 시트리에게 파이몬은 그만큼 의미가 큰 존재였다. 단지 시트리는 나를 똑같은 처지로 생각했다. 파이몬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단탈리안도 포함된다고. 일종의 동지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오직 내 앞에서만 옛날처럼 웃을 수 있었다……. * * * “그럼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겠습니다.” 바로 다음날. 모든 마왕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전후처리를 겸해서 이번 회의는 매우 중요한 안건을 세 개나 다루고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모든 사단이 일어나게 된 원인인 노예제였다. 평소라면 안건에 대해서 여러 마왕이 시끄럽게 토론했겠지만, 이번 회의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모든 노예를 폐지하자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노예제는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실제로 노예가 사라지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괜찮았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대륙이 노예제를 폐지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기로 이미 맹세했으며, 단언하건대 나의 맹세를 방해할 세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자는 없애버리면 될 뿐. 이제까지 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죽어나간 인명이 사십만에 이르렀다. 사십만을 사백만으로 바꾼다고 해서 내가 무너질 일은 결코 없었다. “다음. 이번에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 앞장선 공신들. 독사대공을 비롯해서 일곱 명의 대공에게 일찍이 반역도당이 점거했던 영토를 나누어준다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마계에서 대공을 칭할 자격이 있는 자는 일곱 명으로 영구히 제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마계를 다스리는 대공들 전원이 나와 굳건한 동맹관계에 놓였다. 이제 나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마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안건. “선제후 투표에서 공석이 되어버린 룩셈부르크 대공직을 마인츠의 선제후, 시트리로 하여금 겸임하도록 하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마인츠의 선제후 시트리는 룩셈부르크 대공이자 제국의 대시종장을 겸하며, 앞으로 모든 투표에 있어서 예외적으로 두 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파이몬이 가지고 있었던 선제후 지위를 시트리에게 양도했다. 이는 산악파에게 특별한 예외를 안겨주는 동시에 산악파의 권력이 시트리 이외에 다른 마왕에게 흘러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했다. 내가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파이몬이 앉았던 의자였다. 시트리의 의자는 시종이 다가와 들어서 어디론가 치웠다. “오늘 발푸르기스의 밤은 여기서 폐회합니다. 동지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 …………. 회의가 끝나고. 나는 황궁의 뒷정원에 앉아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원없이 잠을 잤다. 오늘 하루쯤은 잠들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다. 황궁 뒷정원에는 수영장처럼 직사각형으로 생긴 인공 연못이 나 있었는데, 나는 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내 발밑에는 빈 유리병이 일곱 개 뒹굴었다. 마왕의 신체는 편리했다. 아무리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았다. 라피스는 나에게 술도 끊으라고 권고했지만, 이런 몸을 가지고 주도를 즐기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일이었다. 터억, 하고.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의자를 내려놓았다. 바르바토스였다. 바르바토스는 의자에 앉아서 말없이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 역시 말없이 바르바토스한테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 “…….” 우리는 수면에 비춘 달빛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술을 마셨다. 어떠한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나와 친분이 있는 마왕 중에서 병문안을 오지 않은 사람은 바르바토스가 유일했다. 당연하게도, 바르바토스는 자신에게 병문안 따위를 핑계삼아서 내 침실에 들어올 자격이 없음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대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술자리가 이어진 지 세 시간쯤 흘렀을까. 그때 처음으로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열었다. “단탈리안. 아직도 나를 좋아해?” 서투르기 그지없는 한 마디였다. 내가 유리잔에서 입을 떼었다. “사랑하고 있어.” 천천히 한 잔의 포도주를 천천히 마셨다. 붉은 액체가 위장에 똬리를 트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잔이 금세 비워졌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 작품 후기 ============================   ─ 챕터 <방울져 떨어지는 밤> END.   00404 거미와 독사 =========================================================================                        절벽이 병풍처럼 줄지어 선 해안가. 이미 오래 전에 바닷바람에 삭아서 허물어진 신전이 절벽에 걸쳐 있었다. 바다에는 거대한 잔해가 파묻혔다. 마왕성 <공중정원>. 한때 허공을 부유하던 섬은 이제 주인을 잃었다. 마력이 사라지고서 공중정원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우연의 일치였다. 파이몬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공중정원도 함께 이곳 앞바다에 큰 파도를 일으키며 침몰했다……. 이제 사시사철 아름답게 꽃피던 정원은 없었다. 계절을 무시하고 우거지던 수풀도. 모든 것이 바닷물에 뒤덮혀서 천천히 어디론가 가라앉았다. 그것들이 다시 공중에 떠오를 일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친애하는 동지들.” 내가 뒤를 돌아섰다. “우리 해방동맹의 수장, 마왕 파이몬이 죽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열두 명 모여 있었다. 머리가 로브에 덮힌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로 그럭저럭 면식이 있었다. 이들은 파이몬이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낸 조직 해방동맹의 간부였다. “바로 내 품안에서 죽었지.” “그분의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여인이 말했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안나 더 빗 총지부장. 해방동맹에서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담당했다. 파이몬에 이어서 조직의 이인자로 취급되었는데, 바타비아에서 내로라 하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백합전쟁에선 나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녀처럼 고귀하고 명예로운 유언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파이몬은 대륙의 평화를, 모든 종족의 평등한 공존을 염려했다. 파이몬은 나에게 후사를 부탁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간부들이 멈칫했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안나 더 빗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건 고귀한 죽음도 아니었고, 명예로운 죽음도 아니었다. 파이몬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바로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내가 로브를 쓴 간부들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유언을 남길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파이몬은 오직 나를 감싸는 데 최후의 순간을 소모했다. 암살자가 그녀의 목등을 찌르고, 등을 찢어발기고, 미친 늑대처럼 물어뜯을 때마다, 파이몬은 내 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신음과 비명조차 참았다.” “…….” “마지막으로 쓰러지면서 파이몬이 조용히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라고. 그것이 유언이라면 유언이겠지.” 간부들이 침묵했다. 나를 마음껏 저주해라, 파이몬. 나는 필요하다면 너의 유언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 여기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숨이 멎어가는 순간까지 파이몬은 눈앞에 비춘 사람을 걱정했다. 그것이 파이몬이었다. 나의 연인이었고, 그대들의 지도자였다.” “…….”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공화주의를 부르짖는 것인가. 대단히 드높은 이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가 특별히 고결한 지식인이기에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인가?” 나는 밤공기가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부산스럽지 않았다. 내가 정확한 기교를 발휘해서 말할 때면 마치 나 자신이 주변에 녹아든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그러했다.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고통을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할 뿐이다. 길거리의 노파가 힘겹게 숨을 들이마실 때 우리 역시 숨이 막힌다. 저잣거리에서 노예가 채찍질을 당할 때 우리 역시 분노를 느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시작하는 것이다…….” “…….” “나는, 내 눈앞에서 가장 고결한 여인이 가장 비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품속에서 천조각을 꺼내들었다. 파이몬의 핏물이 묻은 옷자락을 잘라내어 손수건처럼 만든 물건이었다. 보존마법을 걸어두어서 반영구적으로 피가 변색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해방동맹의 간부들은 이미 이것이 무엇인지 분위기상으로 짐작한 눈치였다. “동지들이여. 나 단탈리안이 그대들에게 맹세한다. 나는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파이몬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리라. 추모의 방법은 혁명이다. 올바른 것에는 정의를 되찾아주고, 슬픈 것에는 만인의 동정을 안겨줄 것이며, 분노해야 마땅한 것에는 철퇴를 내릴 것이다.”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와 함께 죽어줄 것인가.” 간부들이 로브 너머로 묵묵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때 체구가 땅딸막한 인물이 로브를 벗었다. 난쟁이였다. 자크 보놈, 내가 편안하게 자크리라고 부르는 간부로서 백합전쟁에서 나를 전력으로 보좌해준 용병대장이었다. “나는 단탈리안 전하를 우리의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하는 것에 찬성하오.” 간부들이 웅성거렸다. 자크리는 해방동맹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요컨대 선봉대장과 같았다. 파이몬을 열렬히 숭배했으며 공화주의를 종교처럼 받들었다. 그런 열성분자가 나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자 파장이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이중에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단탈리안 전하와 보냈다고 생각하오. 만일 동지들이 내 안목을 조금이라도 신뢰한다면, 내가 지금 하는 말에도 약간의 신뢰를 보태주시오. 단탈리안 전하는 대륙에 공화주의를 꽃피울 분이오.”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어요.” 안나 더 빗이 반박했다. “전하의 진심을 제가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맹을 이끌기에는 경험이 부족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것을 이루셨소.” 자크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프랑크 제국을 무너트리고 공화주의자들을 정부 수반에 앉혀놓았소? 단탈리안 전하요. 누가 사르데냐 왕실을 좌절시키고 자유도시들을 해방시켰소? 단탈리안 전하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종족을 불문하고 일체의 노예제를 철폐하겠다고 선언하셨지.” 자크리가 오른팔로 나를 가리켰다. “전하께서는 감히 수천수만이 모여도 이루어내기 어려운 업적들을 홀로, 그것도 5년도 안 되어서 이루어내셨소외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반론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소. 감히 확신을 담아서 장담하건대, 단탈리안 전하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대의를 실현시키는 데 앞장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간부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간혹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대체로 권위보다 실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나만큼 실적이 찬란한 인물이 없었다. 사실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발푸르기스 밤에서 통과시켰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는 독보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튜튼 지부에서 찬성하오.” “모스크바 지부에서 찬성표를 던지겠습니다.” “사르데냐 지부 또한 찬성하겠소.” 내가 해방동맹의 수장이 되는 것에 지부장들이 찬성을 표하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하고 열두 명의 지부장 중에서 찬성이 9표, 기권이 2표 나왔다. 이미 과반수가 한참 넘었으므로 내가 옹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관건은 모두가 동의하느냐 마느냐였다. 반대표가 하나라도 나온다면 동맹은 잠재적으로 분열할 위기에 처했다. “…….” 마지막으로 총지부장인 안나 더 빗이 의사를 표시해야 할 때가 왔다. “살아 생전, 파이몬 전하께서는 언제나 기쁜 얼굴로 단탈리안 전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제가 지겨워하는 것은 상관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계속 수다를 떠셨지요.” 안나 더 빗이 머리에서 로브를 벗었다. 금발의 엘프는 뺨에 자상(刺傷)이 새겨져 있었다. 백합전쟁, 생드니 전투에서 앙리에타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했을 때, 거의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다가 얻은 흉터였다. “저는 저의 안목도, 자크리의 안목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이몬 전하의 안목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파이몬 전하께서 단탈리안 전하를 믿으셨으니, 저 또한 단탈리안 전하를 믿습니다.” 마지막 찬성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기권이 두 표 나오긴 했지만, 이건 찬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인해서 나에게 과도한 권위가 부여될까 염려되어서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이겠지. 실제로는 전원이 찬동한 셈이었다. 내가 간부들을 향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혁명을 위하여.” 간부들이 조용히 해방동맹의 구호를 읊었다. 포도주가 오가는 등의 화려한 의식은 전혀 없었다. 파이몬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는 것은, 간부들에게 있어 절대로 기쁘거나 축하해야 할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파이몬이 거느리고 있던 세력은 모두 유산이 되어서 내게 상속되었다. 산악파의 지도자인 시트리는, 군사적으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나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내 의견이 곧 산악파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제는 해방동맹까지 내가 이끌게 되었다……. 폐허가 된 신전을 뒤로 하면서 내가 생각했다. 나는 평원파에도 산악파에도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마계 전체를 믿음직스러운 아군으로 두었고, 마인들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상단을 내 전용 금고마냥 사용했고, 대륙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진 비밀조직마저 내 손에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그림에 그린 듯한 마왕이었다. 이바르는 나를 볼 때 종종 '앙골모아'라고 중얼거렸다. 마족들에게 내려져 전해오는 전설이었다. 언젠가 앙골모아라는 대마왕이 나타나서 모든 대륙을 마족들에게 열어줄 것이라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바르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처럼 의외로 사실을 적중했을지 몰랐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 * * 나는 프랑크의 정부 수반과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현재 프랑크 정부를 이끄는 인물은 물론 베르시 백작이었다. 내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법무상이었고 베르시 백작이 프랑크 제국의 법무상이었으니, 우연찮게도 지위가 똑같았다. 제국인 주제에 황제가 유명무실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소, 궁중백. 그동안 평안하셨소?” 베르시 백작은 역력하게 피로한 기색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조국을 어떻게든 꾸려나가느라 잠도 아껴가면서 일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수척해졌군요.”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 미처 몰랐소. 그러는 그대도 썩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구려.” “백작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경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베르시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처음에 쟝 볼레 사제를 연기하면서 베르시 백작과 만났지만, 약 1년 전에 이바르를 통해서 프랑크 제국에 막대한 금액을 차관으로 빌려주면서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백작은 상당히 놀랐지만 꺼려하거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베르시 백작은 공화주의자였다. 내가 브루노 평원에서 어떤 종류의 연설을 했는지 알고 있기에, 오히려 확실한 사상적 동지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리 비밀스럽게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오? 부디 내 잔주름을 하나 더 늘려주지 않는 일이기를 바라오만.” “미안하지만 잔주름이 늘어날 이야기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빌린 돈을 슬슬 갚아주셔야겠습니다, 백작.” “…….” “7푼의 이자로 빌려드린 차관 말입니다. 적어도 이자 정도는 돌려주십시오.” 베르시 백작의 얼굴이 악마를 만난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00405 거미와 독사 =========================================================================                        “궁중백.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정부에는 이자를 지불할 여력이 없네.” “연간 칠푼밖에 되지 않는 이자입니다.” 내가 과일주를 마셨다. 술이 더럽게 달았다. 어린아이도 이렇게 단 것은 차마 혀에 제공하지 못하겠다며 바닥에 내다버릴 정도였다. 요즘 일부러 비정상적으로 달콤한 과일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라피스가 드디어 내 집무실과 침실 및 마왕성의 모든 술 저장고를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었다. 크고 작은 비밀창고 13곳이 전부 소각되었다. 도대체 마왕성의 연못 바닥에 몰래 저장고를 파두었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을까? 혹시 라피스한테 나의 사생활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일까? 결국 나에게 허락된 주류는 이게 설탕물인지 술인지 모를 물건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라도 마시고 싶으시다면, 부디’ 하고 라피스가 건네주었다. 이를테면 금연 담배와 비슷했다……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제일 부유한 내가 술도 제대로 못 마시다니, 삶이란 이처럼 부조리했다……. 본래 마왕 중에서 가장 갑부인 사람은 파이몬이었다. 파이몬의 재산은 모두 제국 국고로 들어갔다. 덕분에 제국은 향후 20년 어치의 예산을 얻었다. 합스부르크는 '나의' 제국이었으니, 사실상 내 주머니가 배불러진 것이었다. 파이몬의 유산은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내 것이 되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본래라면 1할이 넘는 이율로 빌려드리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시 백작님의 얼굴을 봐서 7푼으로 낮췄지요. 거의 헐값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자를 갚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씀인지요?” “……제대로 세금이 거둬지는 도시 자체가 희박한 지경일세.” 베르시 백작은 얼굴이 굴욕과 슬픔으로 뒤틀렸다. 일국의 재상이 빚쟁이처럼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이만한 치욕이 없으리라. “남부의 도시들은 아예 공공연하게 세금을 지급하고 있지 않네. 일부 귀족은 현재 황제가 없다는 점을 들먹여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고 있어.” “허어. 그럼 군대를 동원해서 철퇴를 내려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알면서도 나를 놀리는 것인가! 수도의 치안과 방비조차 바타비아군에게 맡기고 있다네. 남부의 귀족들을 처벌할 여력 따위는 어디에도 없어!” 프랑크의 제도(帝都) 파리시오룸은 현재 바타비아군이 무상으로 지켜주고 있었다. 문제는 이 봉사의 기한이 1년이라는 점이었다. 이미 약속한 1년이 지났다. 언제 바타비아군이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베르시 백작은 노심초사하고 있겠지. 참고로 이 바타비아군을 맡은 담당자가 안나 더 빗. 해방동맹의 총지부장이었다. 즉, 프랑크 제국의 재정과 국방은 말 그대로 나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허면 남부를 포기하십시오. 남부의 귀족들은 이미 반쯤 대놓고 독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요청을 들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군요.” “……!” 베르시 백작이 일어서서 내 멱살을 쥐어잡았다. 정확하게 등급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베르시 백작은 실력이 상당한 검사였다.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지쳐 쓰러지지 않은 까닭은 예전부터 쌓아온 체력 덕분이겠지. 그걸 증명하듯이, 괴물 같은 악력으로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쟝 볼레.” “…….” “자네는 내 얼굴을 봐서 이율을 싸게 쳐주었다고 말했지. 아주 좋은 말일세. 그러나 나 또한 자네의 얼굴을 보아서 넘어간 것이 제법 많았어.” 베르시 백작은 당장이라도 내 얼굴을 물어뜯으려는 것처럼 위협했다. “자네는 프랑크에 전쟁과 학살밖에 뿌리지 않았네. 그때마다 자네는 프랑크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허언을 일삼았지. 쟝 볼레라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희극배우를 앞장세워서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분노하지 않은 이유는 자네가 비겁하게도 막대한 차관을 값싼 이율로 빌려주겠다며 제안했기 때문이다!” 프랑크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급전이 필요했다. 개인의 감정으로 국가대사를 그르치는 실수 따위, 베르시 백작에겐 용납할 수 없었겠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싼값에 차관을 대출해드린 겁니다.” “뭐라고……?” “예. 저는 당신의 품위와 긍지를 이용했습니다. 당신이 분노하지 못할 시점에,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미끼로 던졌습니다. 그래서 나쁩니까?” 내가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결과적으로 프랑크는 재정난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개인의 감정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걸 대가로 한 국가를 살려주었으니, 도리어 저에게 감사하셔도 모자릅니다.” “……!” 베르시 백작이 오른 주먹을 치켜들었다. 내 얼굴을 후려갈기려는 것이었다. 주먹이 내 뺨에 닿기 직전이었다. 베르시 백작의 팔이 뚝 멈추었다. “무……슨…….” 베르시 백작이 악을 쓰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겨우 힘겹게 숨을 토해낼 수만 있었다. 팔뚝은 물론이었고 온몸이 갑작스레 석상이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이면, 암살 시도로 판단하고 죽이겠습니다.” 내 호위인 데이지가 백작을 뒤에서 붙잡고 있었다. 데이지는 자신보다 체구가 두 배는 거대한 베르시 백작의 몸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단지 겨드랑이와 목, 허리를 봉쇄했을 뿐이었는데도 백작은 숨을 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움직이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만.” “이 남자는 과거에도 한 번 아버님을 건드린 적이 있습니다.” 데이지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똑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자비를 베풀어주어서는 안 된다. 아버님께서 제게 한 말입니다. 혹시 아버님께서는 본인도 지키지 않을 사항을 양녀에게 가르치셨습니까.” “멍청한 것. 그때 백작이 때린 사람은 쟝 볼레 사제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왕 단탈리안이다. 백작에게는 별개의 인물로 인식되지 않겠느냐.” “…….” 데이지가 잠깐 말이 없었다. 내 주장이 사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 데이지가 백작의 몸을 풀어주었다. “일리가 있습니다. 이 남자에게는 아버님을 팰 권리가 있습니다.” “하여간 네 녀석은 언제나 하나만 알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 것이 단점이다.” 나는 혀를 쯧쯧 찼다. “언제가 되어야 자기 단점을 고칠꼬. 하긴 애당초 태어나기를 멍청하게 태어났으니 그것도 네놈의 팔자다.” “제 팔자가 수상하다지만 아버님의 팔자만큼 더럽겠습니까?” “이래서 우둔한 것이 입만 잘 놀리면 답이 없는 것이라.”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베르시 백작을 쳐다보았다. “제 양녀가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법무상. 대신에 저를 두 번 패셔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두 번이나 때린 사람은 전무하오니 제법 가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직 앳된 꼬맹이가 자신을 제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일까. 베르시 백작이 자못 망연하게 데이지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베르시 백작은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바보 같군. 멋대로 속아서, 멋대로 화를 낸다. 그야말로 광대 노릇이야.” 백작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두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백작이 중얼거렸다. “이자는 반드시 이번 달 안에 준비하겠다. 약속한다. 하지만 남부의 독립은 논외다……. 나는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지, 국가를 분열시키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야. 내정간섭은 용납하지 않겠네.” “백작은 국가를 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민초를 위하고 있습니까?” 베르시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고작 몇 분 만에 초췌해진 안색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국가와 인민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닙니다. 국가권력이 민초들을 억압하고 쥐어짜낸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백작에게는 마치 국가와 인민이 동일선상에 놓인 것 같군요…….” 베르시 백작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다시 질문하지. 무슨 소리인가.” “브르타뉴의 압제에 시달릴 적, 프랑크 북부는 용감하고 과감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수시로 저항군을 일으켰지요. 반면에 남부의 여러 도시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과연 북부의 인민과 남부의 인민, 어느 쪽이 더 행복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 베르시 백작이 나를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불만이 넘쳐났지만 정작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일단 내 얘기를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도시가 내는 세금은 결국 민초의 혈세에서 비롯합니다. 도시가 정부에 세금을 전달하지 않는 만큼, 민초가 짊어지는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저로서는 남부의 도시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국가가 굳건하지 않다면 결국 인민이 피해를 입게 된다.” “지금 프랑크 제국이 제대로 된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습니까? 수도의 경비조차 외국군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에?” 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베르시 백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백작. 당신도 인정하고 있을 겁니다. 남부 귀족들은 딱히 악독해서 당신에게 불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네야말로 신민을 위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남부에 자치권을 인정해주십시오. 남부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도시에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해주어야겠습니다. 단, 자치권을 보장받는 것은 영지귀족이 아니라 각 도시의 의회입니다.” 베르시 백작이 눈썹을 찌푸렸다. “목적이 무엇인가.” “제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뿐입니다. 모든 인민을 위하는 것이지요.” 거짓말이지만. 베르시 백작의 뒤쪽에서 데이지가 오직 입근육만 움직여서 비웃고 있었다. 나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지금은 백작이 황후 폐하와 함께 힘겹게 국정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 변고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정부를 대표합니까? 반드시 혼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인민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강력하고 현명한 독재자입니다.” “…….” “저는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혼란을 헤쳐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백작.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구성하세요. 프랑크는 진정한 의미에서 권위를 가진 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라니?” “어디까지나 도시들이,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가를 말합니다.” 그리하여 프랑크는 잘게 쪼개진 일종의 연방이 된다. 대륙에서 강력한 제국은 내가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제국 하나뿐으로 족했다. 프랑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든든한 우방으로 남되, 잠재적으로 위험한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딱 적당한 국력을 보유해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 프랑크에는. 아니, 정부에는 스스로 권위를 되찾을 만한 실적이 부족하다.” “지난번 전쟁에서 사르데냐의 영토를 꽤나 많이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국화전쟁은 그대들의 전쟁이었지. 우리는 막바지에 발을 담근 것에 불과하다.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에는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떻습니까.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에 잡혀 있는, 프랑크 출신의 노예를 모조리 해방해드리겠습니다.” “……뭐라고?” “그쪽에서는 정부가 직접 교섭하여 노예를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하십시오. 합스부르크와 프랑크, 양국의 우호는 더없이 단단해질 겁니다. 그리고 자국민을 구원하는 데 성공한 정부의 외교력에 만민이 찬사를 보내겠지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먼저 남부 도시들에 독립을 인정한다고 공표하십시오. 남부의 귀족들은 들떠서 날뛸 겁니다. 바로 그때 마계에 붙잡혀간 자국민을 구출했노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이미 독립해버린 남부의 도시들은 프랑크에 소속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노예해방의 혜택을 누리지 못합니다.” “…….” “만일 노예를 해방시키고 싶다면 남부 도시들에게 말하십시오. 프랑크의 산하에 소속되는 것을 인정하라고.” 베르시 백작이 한껏 조용해진 목소리로 반박했다. “허나, 그렇게 쉬이 독립을 포기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남부 도시의 민초들을 불만을 토로할 겁니다. 어차피 민초들은 자기 자신을 프랑크인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노예를 해방받을 수 있다는데 귀족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독립을 고집하는 것이 탐탁치 않을 겁니다.” 그리고, 하고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번에 남부 귀족들이 사르데냐 서북부 지방을 차지했지요.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다. 그걸 모를 리가 있는가.” “그들이 새롭게 차지한 영토도 당연히 '프랑크에 소속되지 않은 영토'가 되겠군요?” “……!” 베르시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난 전쟁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많은 수의 노예를 포획했습니다. 거의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대부분의 노예가 헬베티카 연방이나 마계에 팔려갔습니다.” 당연히 그들도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단, '프랑크 국민'이라는 딱지가 붙는 경우에 한해서. “안 그래도 사르데냐 북부의 백성들은 외국인에게 점령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프랑크의 귀족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부린 탓에 자신들의 가족이, 친척이, 이웃이 노예에서 풀려날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대대적인 반란인가……!” 내가 싱긋 웃었다. “예. 반란입니다. 그들은 결코 공짜로 새 영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물건이지요.” “…….” 베르시 백작이 이쪽을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아니, 대체 언제부터……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남부 귀족들에게 사르데냐를 차지할 기회를 준 것인가?”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얘기를 이어나갔다. “한껏 반란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두십시오. 힘이 다 떨어질 때 즈음해서 남부 도시들을 선동하는 겁니다. 프랑크의 중앙 정부에 고개를 숙이기만 한다면 모든 난리를 잠재울 수 있다고.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요.” “…….” “백작.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국가를 구성하게 만드십시오.” 물론 겉보기에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무슨 상관인가. 베르시 백작, 당신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발적으로 프랑크의 재상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실상은 내가 남몰래 계획하고 획책했기에 재상직을 맡은 것이다. 프랑크의 인민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자발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진실이 드러날 필요는 전혀 없다……부디 자랑스러운 국가가 만들어지기를 기원하지.   ============================ 작품 후기 ============================   제가 이번에 동인 단편집을 내는 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꽤나 상업적인 색채가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동인 모임입니다. 자기가 쓰고 싶은 단편을 써서 그걸 모음집으로 만들어서 내놓자, 해서 결성되었습니다. 저 이외에도 여러 작가 분께서 참여하시는데요, 대표적으로 <디자이어>와 <테이커>, <나비꽃> 등을 연재하신 살혼 님도 참가하십니다. 흥미가 있으시다면 모쪼록 단편집을 내는 데 후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후기란에서 홍보를 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길... 헤헤. https://tumblbug.com/wotr_kr_vengeance 텀블벅에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406 거미와 독사 =========================================================================                        * * * “최근 잠자리가 줄어들었군요.” 베르시 백작을 내보내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더럽게 단 과일주를 홀짝였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것이었다. 요새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굳이 잠을 오래 잘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의 잠자리가 아닙니다. 아버님. 그 여자가 죽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갖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부터 네가 내 아랫도리 사정까지 훤하게 꿰뚫었는지 궁금하군.” 내가 비웃었다. “이제 머리가 좀 굵었다고 네놈도 그런 방면으로 관심이 생겼느냐? 아서라. 너처럼 젖비린내가 아는 꼬맹이를 상대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말꼬리를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다. 아버님처럼 사시사철 발정기에 시달리는 분께서 한 달이나 금욕한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겨우 한 달이다. 나도 쉬고 싶은 시기가 있는 것이지.” “저는 아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데이지는 입가를 비틀고 있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그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 “아버님의 방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기억합니다. 제가 감히 말씀을 올리자면, 무척이나 꼴불견입니다. 진상에도 정도가 있지요.” 내가 과일주를 머금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라우라와 이바르가 네놈한테 칭얼거린 모양이군.” “놀랍게도 마왕 가미긴까지 저를 만나서 정보를 요구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민폐입니다. 적당히 아무 여자나 잡아서 떡 치시지요. 어차피 아버님의 신체에서 쓸모있는 부분이라곤 입구멍과 아랫도리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절반으로 떨어트리실 셈입니까?” 어찌된 일인지 뻔했다. 내가 갑자기 잠자리를 멈추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다들 전담시녀인 데이지한테 물어본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여자들이었다. 15살짜리 꼬맹이한테 질문해도 될 것이 있고 질문하면 안 될 것이 있지, 쯔쯧……. “괜히 참견하지 말거라. 남의 연애에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 보기 힘들다. 그러는 네 연애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고?”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와 사귄 적이 없습니다만.” “네 잘난 오라비가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이쪽에서 비웃어줄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지의 얼굴이 시궁창처럼 썩어 들어갔다. “……저는 루크와 사귀지 않습니다.” “왜? 네가 동성애자라서 말이냐? 크흐, 거 좋은 변명이로구나. 네 오라비한테 연심이 있는 것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연기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볼 만하다. 이바르의 엉덩이를 만지니까, 그래.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지더냐?” “…….” 내가 이죽거렸다. “갑자기 말이 없어졌구나. 어디 잘난 듯이 떠들어보거라. '저는 아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어이쿠, 그래도 말이 없구나. 하긴 만약을 대비해서 친부모랑 절연까지 했으니 입구멍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겠지. 우리 딸의 연정이 참으로 대단해서 이 아버지는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노라.” “죽여버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협박이로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퍼컷을 날려주려고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문득, 열 살에 데려온 꼬마아이가 얼마나 자라났는지 갑작스레 실감이 났다. 농담 삼아 말했지만 데이지는 정말로 거의 다 컸다. “흐음.” 내가 데이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윽 만졌다. 아름다운 흑발이 손안에 들어왔다. 마치 백자 도자기처럼 새하얀 살결도 눈에 띄었다. 가슴은 크게 나오지 않았지만, 암살자에게는 그편이 오히려 좋았다. 그런가. 벌써 5년이 넘었는가……. 내가 함부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데도 데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본이 무표정인 얼굴에는 어릴 적부터 계획적으로 단련시킨 지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언어만 따져도 이 아이는 10개 국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결혼하고 싶느냐?” “…….” 데이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뒤, 데이지가 길거리에 누군가가 구토해놓은 토사물을 본 행인처럼 우거지상을 지었다. “미쳤습니까?” “평범하게 결혼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면 내 특별히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너도 열다섯 살이니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해볼 법한 나이다. 솔직하게 말해봐라. 결혼하고 싶느냐.” 내가 의외로 진지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지. 데이지가 한층 싸늘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르네, 알베르, 브누아, 쟝, 토비, 아벨, 브뤼노, 티보, 루씨앙. 모두 아홉 명.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니.” “아버님께서 죽이신 저희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데이지의 눈동자에 독기가 번들거렸다. “르네 아저씨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서 매일 새벽마다 마을의 목책을 점검했습니다. 알베르 아저씨는 자기 가족한테 먹일 식량도 부족하면서 겨울에 굶어죽을 가족이 생기면 항상 도왔지요. 브누아 촌장 할아버니는 언제나 저희를 현명하게 이끌었습니다. 전부 아버님께서 파리 목숨을 없애듯이 죽이셨습니다.” “…….” “이제 와서 선인인 척 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은 구제할 도리가 없이 근성부터 썩어빠진 악인입니다. 제가 때때로 아버님을 위로해드리는 까닭은, 순전히 제가 아버님을 이 두 손으로 죽이기 전에 아버님이 망가지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데이지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깟 여자 한 명 죽였다고 망연자실하게 있다니, 너무 우스워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이미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자식이었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습니다. 하. 이제 와서 죽음을 애도하실 여력이 생겼습니까? 어차피 창녀였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촤악, 하고 데이지의 얼굴에 과일주를 내던졌다. 주홍빛 액체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졌다. 데이지는 그러나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파이몬은……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어.”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지요. 생명의 무게는 똑같은데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생명에만 유독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마왕 시트리도 순진한 얼굴을 해놓고는, 숭배하는 연인이 한 명 죽었다고 해서 아무런 죄가 없는 시민을 십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놀라운 계산법이네요.” 데이지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서 얼굴을 닦았다. “맹세합니다만 결혼 따위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인생의 의미는 그날, 아버님께서 저희 마을을 불사지르고 능욕한 날에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을 죽입니다.” “…….” “단지 아버님의 목숨을 거두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숨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저는 아버님의 모든 죄악을 추궁하고, 끄집어내서, 그에 걸맞는 최후를 선물해드릴 것입니다.” 데이지가 얼굴을 전부 닦은 다음 희미하게 웃었다. “우연치 않게도 마침 아버님께서 바라는 최후와 똑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효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저 또한 진심으로, 마음 속 깊이 간절하게 소원하고 있으니까요.” 그거 대단한 효녀로군. 열녀문이라도 세워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제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아버님.” “……뭐?”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데이지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저와 잠자리를 가져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미쳤어도 아버님께 처녀를 바칠 만큼 실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침대 아래에 숨어서 주무세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일단 말투부터 교정할 필요가 있었다. “네 주인은 나다. 그런데 꼭 네가 내 주인이라도 된 것마냥 말하는구나.” “결혼을 시켜달라는 부탁보다는 가볍지 않습니까? 제 아버님이 되어서 베풀어주신 것이 고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런 부탁 정도는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까지 나를 닮았다. 정말로 교육을 잘못 시켰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침대 아래에서 자라니. 대체 저의가 무엇이냐.” “오늘밤에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데이지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왕성에 위치한 데이지의 침실에서 자게 되었다. 방바닥이 차갑고 딱딱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예전, 라우라를 처벌하면서 나 자신한테도 편형을 내린 이후, 나는 등쪽에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 덕분에 어느 길바닥에 잠들어도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는 체질이 되었다. 멋진 이득이었다. 그렇게 침대 밑에 누워서 뭘 하고 있느냐면. “……이 녀석은 당최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데이지의 침실은 살풍경했지만 가구 자체는 최고급품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침대 역시 쬐끄마한 데이지가 독차지하기에는 상당히 거대해서, 내 몸 전체를 완전히 가려주고도 남았다. 그런데 데이지, 이 요망한 것은 마왕성의 주인이자 제국의 흑막을 감히 침대 아래 깔아뭉갠 것도 모잘라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핀잔을 주니까 ‘오늘밤은 그곳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라고 도리어 협박을 돌려주었다. 결국 나는 새카맣게 어두운 침대 아래에 누워서 역시 새카만 침대 밑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초라도 피우거나 술이라도 마시면 좀 나으련만, 이 빌어먹은 장소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아.” 얼마나 엉뚱한 짓거리를 저지르려고 날 이런 곳에 몰아넣었는지, 원. 솔직히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나를 놀려먹으려는 것일지 몰랐다. 아니, 데이지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 끼이익. 침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돌아왔는가, 하고 내가 마음을 놓은 순간이었다.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침대 너머에서 울렸다. “헤에. 여기가 데이지의 방이구나. 처음 봤어!” ……루크?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역시 데이지는 대부님의 총애를 받는구나. 부럽다. 나는 성에 개인 침실 따위는 가지지 못했는데.” “아버님에게 총애를 받는 게 부러워?” 이번에는 데이지의 목소리였다. 데이지가 반말을 쓰는 걸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신선했다. 다만 어미가 반말로 바뀌었을 뿐이지, 어조 자체는 똑같았다. 무뚝뚝하고, 어딘지 서늘한 음색이었다. “물론이지! 대부님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신 분인걸. 나도 들었어. 얼마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법률을 통과시키셨다면서.” “세상 전부는 아니야.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에만 해당하지.” “어차피 곧 전 세상이 될 텐데, 뭐! 그게 그거지.” 루크는 확연하게 들떠 있었다. 생각해보니, 데이지는 이미 3년인가 4년 전에 루크와 일절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친부모와 절연한 뒤에 루크와도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루크 입장에서는 3년 만에 누이동생과 대화를 나누게 된 셈이었다. 기뻐할 만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에 부른 거야? 아니, 싫다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버님께서 오늘 나한테 말했어. 오빠랑 너무 소홀하게 지내는 것 아니냐고.” “대부가…….” 루크는 살짝 감격한 듯했다. “그렇구나……미안해, 데이지. 내가 예전에 아버님한테 너에 대해서 얘기했어.” “괜찮아. 나도 일이 바쁜 걸 핑계로 오빠한테 소홀한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해야 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지금 부르는 수밖에 없었어.” 루크가 납득했는지 응, 그렇구나, 하고 말했다. 내 시점에선 루크의 발목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광경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오빠. 이건 재회를 기념하자는 의미야.” 용사 남매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무슨 종류인지 모르겠지만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 훈련, 업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잡담이나 떠들고 헤어지려고 루크를 불렀을 리 만무했다. 데이지는 지금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   00407 거미와 독사 =========================================================================                        “오빠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어. 주로 여자 관련으로.” “으응? 하, 하하. 그게 그렇게 소문이 퍼졌나…….” “두 달에 한 번 꼴로 여자를 갈아치우고 있다면서. 대단해.” 데이지가 빈정거렸다. 그걸 루크는 호의가 섞인 놀림으로 받아들였는지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했더니, 루크는 정말 도시에 처녀가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찬란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왕이자 영주인 내 양자라는 간판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대단한 것까지야. 그냥 대부님한테 배운 걸 실천할 뿐인데.” “아버님이 뭐라고 했길래?” “응. 가족이란 제도는 사람이 사유재산을 후대에 물려줘서 결국 부를 대물림하는 거라고.” 루크는 마치 신의 진리를 입에 담는 성직자처럼 확신에 차서 떠들었다. “진정으로 평등이 이룩되려면 결혼과 가족에 대한 관념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씀했어. 그러니까 마음에 들거나 사랑스러운 감정이 들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제일이야!” ……어라?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아, 아아! 기억이 났다. 언젠가 루크가 제레미와 성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나한테 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루크는 제레미가 내 첩실인 줄 알았다. 양아버지의 애인과 몰래 사랑을 나누는 걸 죄악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때 저런 말을 들려주었다. 제레미든 누구든 연애는 개개인의 자유라고. 너희 두 명이서 좋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아무렇게나, 대충 떠오른 대로 말했다. 그때 나는 프랑크에서 앙리에타를 어떻게 상대할까 고심하느라 꼬맹이의 상담에 진지하게 응해줄 여유 따위가 없었다. ‘그, 그럼 제가 제레미 누나랑 그걸……해도 되는 건가요?’ ‘당연하고 말고.’ 머릿속으로는 앙리에타에게 얼마나 큰 엿을 먹여야 거 참 잘 먹였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면서, 나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아이한테 무책임하게 말했다. ‘오히려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단다.’ ‘네, 네에?’ ‘생각해보려무나. 루크. 네가 자유로운 연애를 상대방한테 알려주면 그만큼 널리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퍼지는 것 아니겠니? 평생을 걸쳐도 네가 연애할 수 있는 여자는, 아무리 많아봤자 만 명이 넘지 못하겠지. 그래도 만 명이란다. 대단한 숫자야. 만 명의 몫만큼 루크 너는 올바른 일을 한 거란다. 그것이 아프로디테 여신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들에게 내려주신 임무이기도 하지.’ ‘그, 그렇군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장래 용사 후보께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알겠어요! 저, 사제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세상에 자유로운 사랑을 전파하겠어요!’ ‘좋은 결심이다, 루크. 그대로 정진하렴.’ ……이제 완전히 떠올랐다! 솔직히 루크는 데이지에 비해 너무 멍청해서 만날 대충대충 대응했다. 어차피 제레미가 루크를 농락한 것 자체가 나의 지시에서 비롯한 것이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무심코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루크의 연애 철학이 형성되어버렸다! 즉, 지금껏 루크에게 처녀를 빼앗긴 마을 주민과 도시 시민 수백 명은……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처녀를 상실한 셈이었다. 이 무슨 상상하지도 못한 결과인가. 영웅이 호색인 것이 아니라 내가 희대의 호색한을, 괴물 카사노바를 만들었는가……나란 녀석은 얼마나 죄업이 깊은 것인가……. “흐응.” 데이지가 서늘하게 코웃음을 흘렸다. 단언하건대 방금 방에서 온도가 2도 정도 떨어졌다. 데이지는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을 쿵, 하고 짓밟았다. 당연하지만 녀석의 발은 침대 아래에 숨어 있는 나에게도 아주 잘 보였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개미가 한 마리 보여서 밟았어.” 양녀한테 졸지에 개미 취급을 받아버렸다. 데이지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단 한 명뿐인 남매야.” “어? 물론이지.” “웬만해서는 서로한테 비밀 같은 걸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루크가 응, 하고 몇 번이나 수긍했다. 그저 3년 만에 사랑하는 동생과 길게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확연하게 들뜬 루크와 다르게 데이지는 어딘지 모르게 냉랭한 기색이 있었다. “오빠가 연애에 열심이라는 건 알겠어. 나는 거기에 아무런 생각도 없어. 오히려 응원하고 싶을 정도야. 진심으로.” “하하. 고마워, 데이지. 너도 얼른 좋은 남자 만나서…….” “단지 궁금한 점이 있어. 오빠는 거의 항상 연인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잖아.” 데이지가 말했다. “그런데 왜 매일 발정난 개처럼 자위를 해대는 거야?” “…….”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녀석이 크게 당황했다는 것쯤은 공기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야 데이지의 의중이 짐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 소리없이 경악했다. “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의 의미야.” 데이지의 목소리가 서서히 협박조로 바뀌었다. “시치미 잡아떼도 소용없어. 제레미 스승이 오빠한테 건네준 물건이 있을 거야.” “……아, 제레미 누나가 말한 거구나. 하하. 난 또 뭐라고. 하여간 제레미 누나는 사람 놀리는 걸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너도 제레미 누나한테 성격이 옮았구나.” 루크는 어떻게 해서든 농담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애썼다. 그만큼 소년에게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소재라는 얘기였다. 데이지는 그러나 단호하게 분위기의 흐름을 잘라 끊었다. “지금부터 내가 질문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오빠와 영원히 절연하겠어.” “데이지……?” “부끄럽다는 거 알아. 말하기 싫은 것도 알아. 하지만 내가 굳이 이런 밤에, 삼 년 반이 넘도록 피해온 오빠를 아무도 없는 방으로 불러들여서, 이걸 물어보는 데엔 전부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대답해.” 데이지가 루크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갔다. “애인이 널렸으면서, 왜 그딴 슬라임을 계속 사용하는 건지.” “…….” 잠시 뒤, 루크가 입을 열었다. “왜 질문하는 건지 이유를 알려줄 거야?” “오빠가 성실하게 대답해준다면.” “정말로 중요한 질문인 거, 맞지?” “약속할게.” 루크가 한숨을 쉬었다. “으으, 알았어. 뭐. 생각해보면 별로 부끄러운 것도 아니려나. 내 나이에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내 질문에 대답해줘.” “……일단 그건 제레미 누나한테 선물받은 거야. 글쎄. 벌써 오 년 정도 됐나. 너도 알겠지만 제레미 누나는 여러가지로 짓굳은 면이 많아서……아마 그때도 완전히 어린애였던 나를 놀려먹으려고 했던 것 같아.” 루크가 종종 말끝을 늘어트리며 설명했다. 목소리에서 부끄러움이 넘쳐났다. 동생한테 자신의 치부를 밝히는 것이 어지간히 화끈거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자세한 것까지 다 말해야 돼?” “아니. 중요한 것만 대답해줘도 상관없어.” “어휴, 다행이다. 아무튼 제레미 누나는 그 물건으로 나를 엄청 자주 괴롭혀서.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거기에 익숙해져서…….” 루크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작아졌다. “지금도 난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으니까. 제레미 누나같이 다 큰 사람이 놀려대면 그냥 어쩔 수가 없어. 아니, 제레미 누나가 나쁜 건 아니고. 어쨌든 그렇게 됐어. 응.” “나중에 가서는 오빠한테 애인들이 많이 생겼잖아. 그런데도 물건에 의지할 필요가 있었어?” “아니……필요가 있었다고 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데이지가 차갑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기분이 좋았구나?” “어, 응. 뭐. 그런 거지.” “다른 애인이랑 자도 만족할 수가 없었어?” “……내가 특이한 거지. 어쩌면 일종의 첫경험이었어서 이상한 후유증이 남은 걸 수도 있고. 후우, 데이지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그,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궁합 같은 게 있거든.” 루크는 아직도 부끄러워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자유롭게 말했다. 아마 마음속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한 듯했다.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한테 오빠인 자신이 성교육을 시켜준다. 그런 식으로 이해했을지 몰랐다. “저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웃지 마.” “안 웃어. 전혀 웃기지 않은 내용이니까.” “……아무래도 난 그 물건이랑, 궁합이 제일 맞는 것 같아. 으. 진짜 내가 좋아한 여자애들도 몇 명 있었어. 그런데도 사랑을 나눌 때나 나눈 다음에나, 이상하지만 그 물건보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하아. 사실 이게 정말 나랑 사귀어준 여자애들한테 미안한 말인데.”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 루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응, 미안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 “됐어. 이제 아무것도 얘기 안 해줄 거야.” 루크는 단단히 삐진 어투였다. “원래 실제랑 물건이랑 느낌이 다른 법이라구. 애당초, 아버님은 데이지 너한테 너무 물러. 완전 그쪽 방면에 무지한 채로 교육하시다니! 알고 나서 상관하지 않는 거랑 알지도 못한 채로 상관하지 않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어. 내일이라도 당장 대부님한테 말씀드려서 숫기가 없게…….” “나야. 오빠.” 데이지가 말했다. 아무런 색채가 없는 목소리로. “그거, 내 거야.”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드디어 사람 좋은 루크도 서서히 역정을 냈다. 데이지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은 방 저편에 놓인 서랍으로 다가가더니, 뭔가를 꺼내는 듯 부스럭거렸다. 내 각도에서는 데이지가 무엇을 꺼내는지 안 보였다. 그러나 빤히 예상되었다. “이거랑 똑같잖아. 오빠가 쓰는 슬라임.” “…….” “오빠는 모르겠지만, 그 투명 슬라임은 반쪽이야. 나머지 반쪽과 감각이 공명해. 예를 들어서 오빠의 슬라임이 구부러지면 이 슬라임도 똑같이 구부러져.” “아까부터 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진짜 하나도…….” “오 년 전, 프랑크의 숲속이었지.” 루크가 입을 다물었다. 데이지가 조곤조곤 말해나갔다. “너무 울창해서 햇빛마저 드문 숲이었어. 낮이지만 조금 쌀쌀했지. 며칠 전, 제레미 스승이 내 몸안에 투명한 슬라임을 삽입했지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 나는 그날 제레미 스승이 오빠를 숲속으로 데리고 가는 걸 보고, 몰래 따라갔어.” “어, 아……?” “수풀에 숨어서 두 사람을 훔쳐봤어. 오빠는 바위에 앉아 있었고. 제레미 스승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빠를 애무하고 있었어. 충격적이었지만 바로 다음에 내가 보게 된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압도적인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서. 데이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서, 루크의 폐부를 찔렀다. “제레미 스승이 무언가를 꺼내들었어.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게 며칠 전 나한테 강제로 선물한 물건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어. 그때만큼 내 좋은 시력을 원망한 적도 없었지만.” “거짓말……데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루크는 목소리가 떨렸다.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제, 제레미 누나야? 제레미 누나가 시킨 거야……? 안 되겠어. 제레미 누나 침실이 어디지? 이 층에 있는 거지? 당장 가서 한 마디를 해야…….” “도망치지 마.” 루크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주춤거린 순간,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데이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침대 위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데이지가 점점 더 루크에게 몸을 가깝게 기울이는 것만은, 두 사람의 발목 위치가 바뀌는 걸 통해 알았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봐. 끝까지 들어.” “으, 아으…….” “그 물건이 오빠의 몸을 덮었어. 동시에, 내 몸안의 물건도 똑같이 진동했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어. 땅바닥에 쓰러져서 지옥 같은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간절히 원했어.” “거짓말……거짓말이야…….” “어제 두 번.” 루크가 흐느끼는 것이 뚝 멈추었다. “한 번은 정오 무렵. 나머지 한 번은 새벽. 어제 잠이라도 설쳤어, 오빠? 덕분에 나도 어제는 꼭두새벽부터 깨어나서 업무에 지장이 많았어. 그저께는 다행히 한 번이었네. 지난 오 년 동안 내가 가장 절실하게 바랐던 게 뭔지 알아?” “아, 아…….” “오늘은 한 번만. 제발 오늘은 한 번만이었어. 오빠가 그 궁합이 좋다는 슬라임으로 장난칠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단지 제자리에 서서 견뎌야 했으니까.” 루크의 발이 떨렸다. 온몸을 떨어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언젠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견디자. 그러면 언젠가 끝나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어.” “아, 으, 아……아아…….” “오빠가 애인들을 사귄다고 들었을 때 조용히 눈물을 흘렸지. 드디어 끝났다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 년이 지나도, 이 년이 지나도……시간이 계속 흘러도 지옥 같은 순간은 끝나지 않았어.” 데이지가 희미하게 자조했다. “결국 더 이상은 오빠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졌어. 부모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절연했지. 자기 아들딸이 사실상 매일마다 교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랑 어머니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다시 삼 년이 지났지만 오빠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어. 내가 왜 오빠를 피하기 시작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나만, 오직 나만 고통받고 있었어.” “…….” “그래서 오늘 진실을 말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루크. 내 오빠.” 데이지가 루크에게 몸을 밀착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오빠는 친동생을 오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수없이 강간한 개자식이야.” ――순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루크의 정신이 뚝, 하고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00408 거미와 독사 =========================================================================                        “시작은 제레미 스승의 사소한 장난이었을지 몰라.” 데이지가 말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덮고 넘어갔을 거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부 오빠가 저질렀어.” “정말로……몰랐어…….” “그거 다행이네.” 상대방이 도망칠 수 없도록 데이지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혔다. “오빠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나만 알고, 나만 당하고, 나만 상처 입어서 다행이야. 오빠가 그렇게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테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루크라는 소년이 정신적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이 붕괴하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소년이 믿어왔던 것,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천천히 마음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덧없이 시간이 흘렀다. “……내가.” 루크가 중얼거렸다. 폐허와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더 이상 좋아질 것도 없어.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지. 단지 죄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을 뿐이야.” 데이지가 여유롭게 말했다. 이미 사냥감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독니를 찔러넣었다고 확신하는 뱀처럼, 어느 부위부터 물어뜯을까 즐겁지만 신중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서서히 루크를 옥죄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 “부디 영원히 속죄하도록 해, 오빠.” 직후, 데이지와 루크 사이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졌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나는 데이지가 루크한테 입맞춤을 했다고 확신했다. 증거는 없었다. 다만 만약 내가 데이지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오늘밤의 대화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끔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해서. “나가.” 데이지가 축객령을 내렸다. 루크가 유령같이 맥없이 침실을 나갔다. “…….” 루크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좀처럼 침대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나가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데이지 역시 말 한 마디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데이지였다. “이제 도망칠 수 없어요, 아버님.” “……무슨 소리냐.” “아버님과 제가 맨 처음에 무슨 내기를 했는지 기억하시겠지요. ” 당연히 기억했다. 루크가 나에게 자발적으로 진심 어린 충성을 맹세하는 것. 그 경우, 나는 어떠한 일이 생겨도 루크와 데이지를, 그리고 두 아이의 친부모와 마을사람을 죽이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반면에 루크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죽여도 괜찮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프랑크의 화전민 마을에서 나와 데이지가 건 내기였다. “저는 왜 아버님이 루크를 전쟁터로 데려가지 않는지 쭉 의문이었습니다. 루크는 저만큼 쓸모가 있습니다. 아니, 암살자로 키워진 저보다 처음부터 전사로 키워진 루크가 백병전에서는 더 활약하겠지요. 그런데도 아버님은 루크를 영지에 내버려두기만 했습니다.” “…….” “아버님은 의도적으로 루크를 쓰지 않았어요. 거의 만나지도 않았지요. 저는 아버님이 '루크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낼 생각이 거의 없다'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루크를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두었다. “의문은 더 깊어졌지요. 루크만큼 써먹기 좋은 패를 썩히다니, 아버님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내가 침대에서 기어나갔다. 이 대화는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나누어야만 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3시간 가까이 꼼짝하지 않고 있느라 굳어버린 몸을 풀었다. 데이지는 침대에 걸터앉아 연초를 피고 있었다. 향기를 맡아보건대 상당히 강력한 물건이었다. 스승인 제레미, 주인인 나, 두 사람 모두 뼛속까지 썩은 골초였는지라 데이지가 연초에 손에 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데이지는 내 앞에서는 일절 연초를 피지 않았다.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이 이유이겠지. 지금도 내가 침대에서 기어나오자, 데이지는 엽궐련을 방바닥에 찍어서 끄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허락하마.” 나는 방구석에서 의자를 가져다가 데이지 바로 맞은편에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앉았다. 데이지가 우물처럼 검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답에 대한 단서는 세 가지였습니다. 베르시 백작, 마왕 파이몬, 엘리자베트 통령.” “호오.” “먼저 베르시 백작입니다. 꼭두각시 전쟁에서 아버님께서는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셨지요. 그때 베르시 백작이 분기충천하여 아버님께 따지러 들이닥쳤습니다. 저는 거기서 무척이나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나는 품안에서 담뱃잎을 꺼내어서 천천히 말았다. 연초를 끊은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어차피 마약이란 끊는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하는 것에 불과했다. “바로 아버님께서 곧바로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담뱃잎을 말고 있는 동안, 데이지가 덤덤하게 말했다. “왜? 어째서?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께는 범행을 자백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마왕이 계획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속이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시원할 정도로 가볍게 범행을 인정했습니다.” 데이지가 조용히 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버님께선 베르시 백작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어째서인지 베르시 백작의 무언가를 가늠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일부러 진실을 말해주고, 그 다음 백작이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리고 있었지요.” 데이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두 번째 단서는 마왕 파이몬이었습니다. 작년 겨울이었지요. 마왕 파이몬이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개최하자, 아버님께서는 그걸 무마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셨습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각 파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변명하셨습니다만…….” 데이지의 연초 끄트머리가 벌겋게 빛났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국을 지키고 싶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아버님께는 마왕 파이몬이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입니다. 도저히 잃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한 연인을 죽였을까요. 단순히 제국이 붕괴될까봐 두려워서? 파벌의 다툼이 심해질 것 같아서? 아닙니다. 그런 건 전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데이지가 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버님. 파이몬이 더 이상 당신을 죽이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작년 겨울에 아버님께서 그 여자를 지키려고 그토록 노력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버님께 있어서 파이몬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후보자' 중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으므로.” 데이지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그때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십중팔구 마왕 파이몬은 평원파와 중립파에 의해서 짓밟혔겠지요. 아버님께서는 자신을 죽여줄지도 모를 후보자가 그토록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해하면서까지 마왕 파이몬을 지켰습니다…….” 엽궐련을 말던 내 손이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각이 마치 촉감처럼 느껴졌다. 데이지의 시선은 내 시선을, 내 시선은 데이지의 시선을 붙잡았으며, 늘어졌고, 끌어당겼다. “그제야 저는 베르시 백작에게 왜 아버님이 진실 따위를 고백했는지도 알아챘습니다. 베르시 백작도 아버님께서 세상 모르게 뽑아놓은 '후보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백작이 아버님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시험해본 것이지요.” “…….” “틀림없이, 아버님께서는 마왕 파이몬에게도 자신을 죽일 기회를 선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몬은 그 기회를 걷어찼습니다……아버님을 죽이는 대신에 오히려 아버님께 종속되는 것을 선택했지요.” 즉, 마왕 파이몬은 당신의 후보자에서 탈락했다. 데이지가 그렇게 고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엘리자베트 통령입니다.” 데이지는 추측이 아니라 확고한 진실을 말하는 어투였다. “아버님께서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의중을 간파한 다음, 신기하게도 그녀에게 맞추어서 전쟁을 수행하셨습니다. 얼마든지 통령을 속이고 농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마치 아버님께선 통령과 혈맹을 맺은 것처럼 박자를 맞추셨습니다. 통령의 목숨을 철저하게 끝장대는 대신, 도리어 질긴 목숨을 살려두었지요.” “…….” “이제 저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 또한 아버님의 후보자에 속합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목록에 올려넣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께서는 후보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물러터지신 구석이 있습니다.” 데이지의 비웃음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일까. 의도치 않았는데도 나의 입 끝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렇다면 맨 처음의 의문, 왜 제 오라비를 활용하시지 않는지 또한 저절로 해소됩니다. 마찬가지로 제 오라비가 후보자 목록에 올라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버님.” “옳다.” “루크를 전쟁이나 이런저런 일에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는 명료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루크가 진실로 순수하고, 정의로우며, 올바른 인간으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님과 같은 악인을 처단해도 될 정도로 '순수히 올바른 인간'이 되기를.” 악인이 악인을 죽이는 것은 단순한 살인이다. 반면에, 선인이 악인을 없애는 것은, 매우 올바른 집행이자 처단이다. 나는 엽궐련을 다 말고 입에 물었다. 그리고 얼굴을 쓰윽 내밀었다. 데이지가 연초 끄트머리를 내 연초의 끝자락에 살짝 갖다붙였다. 잠시 뒤, 나의 연초로 불씨가 옮겨 붙었다. 나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마도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제 오라비가 진실을 깨닫도록 유도했겠지요. 그리고 당신을 죽이도록, 진정한 전사가 되도록 도와주었을 겁니다. 제 오라비가 모르는 사이에.” “…….” “어설펐습니다, 아버님.” 데이지가 말했다. “저는 물론 어리석은 아이입니다. 그렇지만 단서를 세 개씩이나 보여주시다니요. 제가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해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베르시 백작, 엘리자베트 통령, 루크……설마 그들이 아버님을 죽여도 된다고 판단하셨는지요?” 데이지는 미소를 지었다. “백작 따위에게, 통령 따위에게, 오라비 따위에게 제 권리를 양도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이 아버님의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애당초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님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한참 엇나간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초를 핀 탓인지, 마음이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 오라비는 이제 스스로를 죄인이자 악인으로 여깁니다. 한점의 의심없이 악인을 처단할 만한 인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부디 후보자 목록에서 제 오라비의 이름을 지워주세요.” “…….” “제가 감히 판단하건대 베르시 백작도 인물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을 아버님 스스로 죽이셨으니, 이제 마왕 바르바토스와 엘리자베트 통령 정도가 유력하겠군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아버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절대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 한가운데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제가 그들로부터 아버님을 지킵니다.” 데이지가 올곧은 시선으로 내게 선언했다. “이 세계에서 아버님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00409 거미와 독사 =========================================================================                        데이지가 이제 절반이 남은 엽궐련을 내 몸에 갖다댔다. 앞가슴. 정확히 나의 심장이 위치한 흉부에다가 데이지는 연초 끄트머리를 비볐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천천히 다섯 번 연초를 돌렸다. 그렇게 불씨가 꺼지는 동안, 나는 가슴에서 온기를 느꼈다. “바로 여기에 칼날을 쑤셔 넣겠습니다.” 데이지가 말했다. “최대한 고통스러운 살인 방식을 택하고 싶습니다만, 아버님께서는 마왕입니다. 어중간하게 찔러서야 재생력으로 회복하시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일격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확실히 나같이 허약해빠진 마왕은 심장이 없어지면 회복할 도리가 없지.” 회복마법이나 포션도 만능에서 거리가 멀었다. 심장을 파괴할 정도의 일격은 역시 무마시키기 어려웠다. 글쎄, 바르바토스 같은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바알한테 심장이 터졌는데도 바르바토스는 멀쩡하게 회복했다. 조무래기가 따라해도 될 묘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감이 지나치구나, 내 딸아. 너는 노예각인이 새겨진 일개 암살자에 불과하다. 바알을 참살하고 아가레스를 잡았다고 하여 자만하는 것 아니더냐.” 내가 미소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엘리자베트는 일국의 군주이다. 너 같은 쓰레기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지. 헌데 네 년이 무슨 도리로 그들을 제치고 나의 목을 딸 수 있을까.” “서열 제71위의 마왕이 바알을 잡는 것 또한 터무니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버님께서 이미 해내신 일입니다. 제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방진 것.” 내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데이지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건방진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싶었다. 내 아래에 깔아뭉개서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욕망에 휩쓸려서 세상에서 제일 달콤해질 포도주를 서둘러 개봉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네가 계획을 줄줄이 밝혔으니 나 또한 계획을 말해주마. 무얼, 사양하지 말거라. 딸아이가 모처럼 자신만만하게 장래희망을 발표한 것이다. 아비로서 뿌듯하기 그지없구나.” 엘리자베트도 데이지도 한 가지 착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나는 최고의 죽음을 원했다. 그러나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죽고 싶어서 최고의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웬만하면 죽어줄 수 없으니까, 만약 죽어야만 한다면, 오로지 '최고'의 죽음만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희생함으로써 십만 명의 인간을, 자기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기꺼이 죽고자 하리라. 그것이 좋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죽음을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최고의 죽음이 선사되지 않는다면 얌전히 죽어줄 생각이 일절 없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최고의 죽음이란 상당히 휘황찬란하다. “네가 나를 죽이는 데 실패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너를 깔아뭉개서 범할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서 루크와 친부모가 불에 타서 죽는 광경을 보여주지.” “…….” “아니, 내가 직접 범하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구나. 이건 어떠냐. 루크를 죽인 다음에 바르바토스에게 부탁하여 시체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 인형에게 명령해서 너를 범하도록 한다.” 내가 데이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애정을 듬뿍 섞어서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루크도 안 되었지. 그토록 오매불망 찾아해매던 일생의 연인이 여동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극적이건만, 죽은 다음에야 동생과 이어지게 되다니 말이다……흐음. 시체 인형도 정자를 생산할 수 있던가. 그건 바르바토스에게 물어봐야 알겠군.” 용사와 용사가 낳은 자식이다. 틀림없이 최상의 자질을 보여줄 것이다. 무척이나 기대된다. “흐. 양아들과 양녀가 나의 손자를 낳아주리라 상상하니 벌써부터 흥분되는구나.” “……아버님이나 떠올릴 법한 쓰레기 같은 미래도입니다.” “저런. 겨우 이 정도로 매도해서야 내가 섭섭하다.” 아직 예고편에 불과하다. 정말로 재미있는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 나는 마르바스의 양자로 들어간다. 마르바스는 형식상 제국의 황족이다. 나 역시 황족에 포함되는 게지. 그리하여 제국의 계승권을 받게 되면, 데이지, 너도 졸지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녀가 되는 것이다!” “…….” “세계 전체를 통틀어도 나만한 아비가 없음이라. 화전민촌에서 백정만도 못한 계급을 타고 태어난 딸아이에게 제일 고귀한 계급을 부여해주니 어찌 천하의 부친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상이 아니겠느냐.” 내 손길이 데이지의 턱선을 타고 내려가서 목으로 흘렀다.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살결이 적당히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합스부르크의 제1황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영원불멸하는 제국에 아름다운 영광이 되소서.” 내가 키득거렸다. “지금 황제가 죽으면 나에게 황위가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황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속셈이다. 당연하지 않은고. 마왕이 황제에 등극해버리면 곧바로 다른 국가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터. 그러니 아깝지만 다른 사람에게 황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지. 내가 누구한테 양보할 지 이제 감이 오느냐.” 내가 데이지의 턱을 잡아 슬쩍 치켜들었다. “바로 너다, 데이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녀석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너를 흡혈귀로 만들어서 반영구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마. 황제가 되어서 이백 년, 삼백 년이 넘도록 홀로 제국을 다스리거라. 이 아비가 만든 제국을. 물론 너는 누구보다 제국을 부서트리고 싶겠지. 그러니 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 될 것이야…….” 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 희미한 감촉이 느껴졌다. “…….” “…….” 마치 조용히 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가벼운 키스. 데이지의 입술은 물기가 없었지만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키스를 하는 동안 데이지는 눈을 깜빡거리지 않았다. 다만 뚜렷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그러니, 사랑스러운 딸아. 부디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하려무나. 너의 아비는 가혹하고 잔인하여, 실패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는 위인이 아니다.” 나는 데이지의 오른 손목을 쥐어잡았다. 그리고 내 심장으로 데이지의 손바닥을 가져갔다. “확실한 순간에. 확실한 상황에. 확실한 일격으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번에 뚫어야 할 것이야.” “명심하도록 하지요……아버님.” 데이지는 시선에 한점의 미혹조차 없었다. 좋았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데이지를 밀었다. 데이지가 균형을 잃고 침대에 넘어졌다. 나는 데이지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침실에서 나왔다. 우울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엘리자베트도, 데이지도, 최근 들어서 나를 즐겁게 해주기로 아예 작정한 모양이었다. 내 걸음걸이는 저절로 춤이 되어서 아무도 없는 마왕성 복도를 가뿐하게 밟으며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내 마왕성도 지하 7층까지 완공되었다. 지하 8층도 거의 완성되었다. 지하 10층은 이미 나와 간부들 전용의 거주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지하 9층만 마무리지으면 애시당초 목표했던 마왕성의 위용이 달성되었다. 지하 10층짜리의 거대한 마왕성이다. 웬만한 군대를 이끌고 와도 쉽게 함락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내 마왕성을 점령하려면 우선 바깥에 있는 영지부터 휩쓸어야 했다. 마탑들이 줄지어 있는 내 도시를 함락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언젠가, 데이지에게 제국을 맡겨버린 다음에는 이곳에 틀어박혀서 영원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죽인 자들을 끝없이 기억하면서. 괜찮았다.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죽음마저 사치이지 않겠는가. * * * “대부. 혹시……약간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날, 내 집무실에 루크가 찾아왔다. 나는 라피스와 함께 제법 밀린 서류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국의 국정을 처리하느라 급급했기에 영지는 딴전으로 밀어두었다. 다행히 파르시가 나를 대신해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두었지만, 진짜 영주만이 처리할 수 있는 사안도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말해보렴.” 나는 루크가 찾아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여유로웠다. 당연했다. 지금 루크는 16년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자기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적인 위기를. 그럴 때 어린아이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상담하겠는가. 친부모? 아마 루크가 지금 제일 피하고 싶고 마주치기 싫은 인간이 친부모이리라. 나밖에 없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대부인 나뿐이다. “그런데……저기…….” 루크가 라피스를 조심스럽게 힐끔거렸다. 루크는 무척이나 어두운 안색이었다. 라피스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루크에게 말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좋습니까?” “아, 네……감사합니다, 상서님.” “별말씀을.” 라피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라피스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자아, 이리 가까이 와서 앉거라.” 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면서 루크한테 자리를 권했다. 루크가 머뭇거리면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우리 루크가 나에게 보통 상담이란 걸 한 적이 없는데, 이제야 대부에게 조금 의지해주는 것 같아서 솔직히 기쁘구나.” “대부…….” 루크는 감격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숨길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루크가 먼저 밝히기 전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였다. 루크는 몇 번이고 입술을 뻥긋거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내가 인내심을 갖고 너그럽게 기다려주었다. 오 분쯤이 지나자 마침내 루크가 말을 뱉었다. “제가……제가 너무 큰 죄를 범했어요…….” “……아무래도 정말로 심각한 일인 모양이구나.” 내가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나는 더없이 진지하게 루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어조와 목소리가 나에게 대단히 심각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하고 포즈를 취했다. 이걸 위해서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밝히지 않아도 괜찮단다. 그저 추상적인 얘기만 해도 좋아. 다만 진실을 말해주렴. 진실을 말해준다면, 어쩌면 루크 너에게 필요한 대답을 내가 들려줄지도 모른다.” “네, 대부……고마워요…….” 루크가 물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너무 큰 죄예요. 제가 어떻게 해도 지울 수가 없을 정도로……상대방은 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하지만, 제가 자살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대요.” 루크는 이미 눈가가 퀭퀭했고 눈동자엔 붉은 실핏줄이 퍼졌다. 아마 어제부터 밤새도록 울었겠지. 이 순수한 소년이 지난 밤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을 맛보았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저,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용서를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음으로 사죄하지도 못한다면……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대부, 이럴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내가 신중하게 루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처럼, 한없이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장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루크의 양손을 잡은 채로 오 분 정도 침묵했다. “그럴 때는, 오직 한 가지의 방법밖에 없단다.” “한 가지……?” 어젯밤, 데이지는 '루크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워달라' 하고 요구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었다. “너의 생명도, 인권도, 신념도, 모두 포기해서 상대방에게 바치는 수밖에 없어.” 루크는 이제부터 내 노예가 될 것이다.   00410 거미와 독사 =========================================================================                        소년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상대방에게 생명을……?” “그래, 루크.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타인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희생이지.” 데이지가 제 오라비를 휘감아서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었다면, 나는 루크가 천천히 거미줄에 걸려들기를 유도했다. 어디까지나 거미줄에 날아든 것은 루크 본인이었다. 내가 전면에 드러나서 해치지 않았다. “제레미에게 배웠으니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세상에는 노예각인이란 것이 있어.” 제레미, 라는 이름을 듣자 루크가 움찔거렸다. 얼굴 표정에 잠깐이지만 혼란과 분노, 후회가 뒤섞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뿐이었다. 루크는 자기 감정을 통제할 정도로 원숙하지 못했지만, 그 감정을 계속해서 방치해둘 정도로 미숙하지도 않았다. 원숙함과 미숙함 정중앙에 놓여 진자운동을 반복했다. 아마도 루크가 그리는 반원의 곡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하겠지. 즉, 루크는 소년이었다. “노예각인이 새겨지면 상대방에게 거의 완벽하게 종속된다. 주인이 명령하기 전에는 자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 삶에서 결단을 내릴 수는 있어도 미처 결단의 파장까지는 모르는 소년. “그뿐만이 아니다. 주인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하면 노예는 그대로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설령 노예가 사람을 살해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생명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길지라도, 주인이 명령한다면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전부 뒷전으로 몰아둔 채 실행해야만 한다.” 타인을 배신하는 것은 익숙해도 타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서투른 소년. “상상해보렴, 루크. 인간이 그런 상태를 견딜 수가 있을까?” “……아니요.” “맞아. 보통 견디지 못해. 어쩌면 1년은 버틸지 모르지. 5년이 넘도록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10년, 20년, 그렇게 일생을 산다고 해보자…….” 내가 양손을 벌려서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럼 자기 자신이란 것이 삭아서 사라진단다. 어느 시점에선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어버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생명은 애당초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믿어왔던 것과 생각했던 것이 바뀌고, 뒤틀리고,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되고, 결국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 “진정한 의미에서 죽어버리는 거다. 자신을 죽여버리는 행위야. 목숨만이 아니라 너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나는 속삭였다. 거미가 사냥감을 실로 말아서 천천히 죽이듯이. “루크. 너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 상대방을 위해서 살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을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겠느냐.” “…….” 루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 루크가 얼굴을 들었다. 그곳에는 결연한 결심이 시리게 서려 있었다. 나는 루크가 침묵할 때 이미 이 아이가 어떻게 대답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 “대부, 저는 그렇게 하겠어요.” 걸렸다. 이제부터 되돌이킬 수 없다, 루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마. 너는 아직 열여섯 살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 살아갈 삶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너는 지금 저지른 죄 때문에 남은 인생 전부를 희생시켜도 괜찮겠느냐.” “네.” 루크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좋다. 나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데이지는 나의 노예였다. 루크가 데이지의 노예가 된다면, 징검다리를 하나 건너뛰어서 내 노예로 종속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용사가 되었을 남매 두 명 모두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노예각인을 심장에 새기는 수술은 무척 고통스럽다. 우리 영지에서 노예각인 수술을 맡길 만큼 실력이 좋은 사람은 두 명이지. 네가 마음에 든 사람에게 시술을 받거라.” “누구죠?” “제레미와 데이지다. 다행히도 모두 너에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구나.” 루크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하필이면 각인을 새겨줄 사람이 제레미와 데이지밖에 없다니! 루크는 자신이 죄를 저지르도록 반쯤 유도한 장본인에게 수술을 맡기거나, 아니면 자신이 죄를 저지른 피해자에게 수술을 맡기거나, 양자택일해야만 했다. 이만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저기, 대부. 혹시 다른 사람은 없나요?” “음? 일단 우리 영지에는 없구나.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수술이라서 말이지. 솜씨가 어설픈 사람한테 맡겨버렸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노예각인 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살갗을 파내서 심장에 직접 각인을 새긴다는 얘기에는 루크도 약간이지만 질색했다. 다른 곳에 각인을 새기면 쉽게 파기될 수 있으니 심장에 새기는 것이 관례라고 말하자, 루크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걱정하지 마라. 제레미도 데이지도 최고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두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다. 솔직히 다른 곳에서 시술자를 찾아봐도 두 사람보다 뛰어날 것 같지가 않구나.” 자아, 루크.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테냐. 가해자인 제레미냐. 피해자인 데이지냐.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너의 성향이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이건 너의 인생을 결정지을 대사건이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드러낼지 선택해야 한다. 제레미에 대한 분노가 더 거대하다면 제레미를 선택할 터. 데이지에 대한 죄책감이 더 거대하다면 데이지를 선택하리라. 제레미에 대한 복수심을 심장에 새겨넣을 것인가, 아니면 데이지에 대한 죄의식을 심장에 각인시킬 것인가……어느 쪽이라도 나는 즐거웠다. 너가 수술받는 광경을 기쁘게 지켜보겠다. 아아――그래도 데이지를 선택하면 더 좋을 텐데. 나는 개인적으로 데이지를 고르는 편을 선호했다. 제레미야 최종적으로 제3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달랐다. 남매였다. 가족이었다. 여동생이 친오빠를 영원토록 노예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이쪽이 조금 더 역설적이어서 좋았다. 게다가 데이지의 입장. 데이지는 이미 나에 의해서 노예각인 수술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데이지는 결정적으로 나에게 증오심을 품었다. 복수를 맹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당한 짓거리를 이번에는 스스로 오빠한테 저지르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술하고 난 다음에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볼까. 자신이 증오하던 인간과 똑같은 행위를 범해버렸을 때,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되어버렸을 때, 데이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안 되겠다. 참을 수가 없군. 잘못하다가 데이지한테 다시 한번 키스해버릴지도 모른다. 루크, 데이지다. 데이지가 올바른 선택지이다. 너의 죄의식에 복수심 따위가 섞여들게 방치하지 마라. 아무리 원인을 제레미가 제공했다고 해도, 결국 이후에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은 바로 너다. 설마 제레미한테 책임을 돌리지 않겠지. 강해져라! 단호해져라! 무지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지옥을 더 순수하게 만들어라. 인간의 강함은 무엇에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명색에 용사가 되었을지 모를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변명의 출구를 허락하지 마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저는…….”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저는, 데이지한테 맡기고 싶어요.” “알겠다. 데이지에게 내가 말을 전달해두마.” 잘했다! 바로 그거다, 루크! 나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설령 대자(代子)일지라도 너는 어엿하게 나의 아들을 자칭할 자격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동족으로 인정하겠다. 도대체 근친상간이, 실제로는 저지르지도 않은 근친상간이, 얼마나 큰 죄악이라는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무런 죄악도 잘못도 아니다. 그런데도 루크, 너는 저울추에 가장 거대한 무게를 올려놓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저울추에 올려진 무게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루크의 무게였다. 루크가 스스로 판단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 루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고 스스로 형벌이 되었다……. “누구의 노예가 되는 것인지는 묻지 않으마.” “고마워요, 대부…….” “무얼.” 내가 루크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악질적인 걸로 따져서 네가 저지른 죄악에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대부는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희생한 거잖아요. 저 같은 것과는 전혀 달라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단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가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기로 결심해서 기쁘구나. 힘들 때도 있을 거다. 괴로울 때도 있을 거다. 너에게는 다른 인간들처럼 휴식할 권리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건 너가 비천한 노예이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루크를 양팔로 안았다. “단지 너에게는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명백할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목표란 것이 저 멀리 위치해 있다면 너에게 목표란 길 그 자체, 너가 내딛는 발걸음 자체다. 다른 사람이 휴식을 취하는 것은 보다 멀리 나아가기 위함이지만, 너가 휴식을 취하면 그 순간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것이 된다.” 꾸욱, 하고 루크의 머리를 내 가슴에 품었다.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할 이유도 무엇도 없다. 조급하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네, 대부…….” 루크가 내 상의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나는 루크의 뒷머리를 천천히 빗질하면서 히죽 웃었다. * * * 수술은 바로 이틀 뒤에 이루어졌다. 내 마왕성 지하 9층에는 죄수들의 감옥 및 고문실이 위치했다. 그곳에서 루크는 노예각인이 새겨졌다. 처음에는 제레미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려 했지만,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간단하게 포기했다. “어머나.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했는데 드디어 루크가 알았군요.” “앞으로 밤길 조심하거라. 루크가 언제 너에게 복수할지 모르니.” “꼬맹이한테 밤에 당할 정도로 소인은 약하지 않답니다.” 제레미가 쿡쿡 웃었다. “아아, 하지만 아깝네요. 데이지가 루크를 수술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꼭 보고 싶은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두 사람은 현재 수술실 출입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벽에 나란히 기대어서 쭈구려 앉았는데, 폼이 영 별로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면 상당히 불쌍한 노숙자처럼 보일 것이었다. 우리가 수술실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데이지 때문이었다. 이 맹랑한 꼬맹이가 절대로 우리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침입하면 루크의 수술을 포기해버릴 거라고 선언한 탓에, 우리는 꼼짝없이 부외자가 되어버렸다. “정말 은혜도 모르는 꼬맹이에요. 제가 그 애한테 가르쳐준 게 얼마나 되는데, 겨우 수술하는 모습 하나 안 보여주고……어휴. 이래서 제자 키워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까요.” “후후.”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네모난 물체를 꺼내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전하, 설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단탈리안. 사상 최악의 극악무도한 마왕이다.” 훗, 하고 웃음을 흘려보냈다. “이럴 줄 알고 어제 미리 메모리아 마법을 수술실에 설치해두었지.” “꺄아아악! 전하 멋져요! 사랑해요!” 제레미가 호들갑을 떨며 내 뺨에 입맞춤 세례를 퍼부었다. “그것도 하나만 설치한 게 아니다. 사방에서 세밀하게 지켜볼 수 있도록, 자그마치 전 각도로 서른여섯 개나 설치했다……! 이걸 마련하는 데 든 금화만 헤아려도 자그마치 수천 장!” “역시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고 계시다니까요!” “후후후. 데이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예. 분명히, 틀림없이, 감미롭고도 각별한 표정을 보여주겠지요!” 우리는 서로 꺅꺅거리면서 난리를 피웠다. 그 나물에 그 밥, 이라는 문장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이것이 내 마왕성의 평범한 일상인 것을 어쩌겠는가. 애당초 데이지가 지금 사용하고 있을 수술도구 자체가 내 돈주머니에서 나왔다. 데이지에게는 내 물건을 사용하는 이용료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디 데이지가 멋진 장면을 연출해주기를, 나는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00411 거미와 독사 =========================================================================                        “…….” 체감상 사십 분쯤 흘렀을까. 데이지가 철문을 열고 나왔다. 데이지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얼굴이 썩었다. 당연했다. 과년한 남정네와 여인네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두근두근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꼴에 아버님과 스승님이라는 작자……충분히 인생에 회의가 느껴질 만했다. “두 분께서 뭐하시는 겁니까?” 데이지는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피비린내에 로즈마리 향기가 살짝 풍겼는데, 수술 도중에 포션을 어지간히도 많이 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하아아아…….” 제레미와 내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우리 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랑하는 오라비의 심장을 쨌는데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다니…….” “이 선생님은 무척이나 실망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맛이 없을까.” “조금은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오늘 하루를 살아갈 기력을 얻지라도 않겠느냐.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이게 다 전하 때문이에요. 전하가 애를 워낙 굴리는 바람에 이제 내성이 붙은 거잖아요. 하여간 교육에는 영 자질이 없으셔.” 우리가 대화를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데이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음식물 쓰레기를 바라보는 시선, 아니 음식물 쓰레기에 꼬여버린 구더기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안 되었구나, 데이지. 미안하지만 제레미든 나든 구더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부류였다. 멘탈에 아무런 타격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너도 구더기 동료이지 않느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되었다. 내가 너처럼 멍청한 녀석에게 뭘 기대하겠는고.” 내가 일어서서 데이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데이지는 의외로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꼭 사람이 아니라 수수깡처럼 가벼웠다. 수술을 집도하느라 체력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겠지. “흐음?” 수술실 정중앙에 루크가 기절해 있었다. 루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마치 수술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온몸이 깨끗했다. 내가 쿡쿡 웃었다. “자기 몸은 피투성이로 내버려둔 주제에 오라비는 끔찍하게 아끼는군.” “…….” “뭐, 좋다. 나를 따라서 말하거라.” 첫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다. 두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이 친애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지 못하며, 단탈리안과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 세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의 명령에 복종한다. 네 번째.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단탈리안의 생명을 우선한다. 내가 일찍이 데이지에게 내렸던 명령이었다. 나는 여기에다 '데이지의 명령과 내 명령, 둘 중에서 내 명령을 더 우선할 것'을 추가했다. 데이지가 덤덤하게 내 말을 따라서 읊었다. 이제 루크는 데이지와 나의 공동노예가 되었다. ‘상태창.’ 내가 루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 빌어먹을 효과음이 울리면서 푸른 빛깔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 이름: 루크 종족: 인간   주인: 데이지 속성: 선(55) 레벨: 21    명성: 1788 직업: 모험자(C), 검사(A+) 통솔: 43/100  무력: 107/140  지력: 27/125 정치: 29/95  매력: 84/100  기술: 19/81 호감도: 5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C), 검술(A), 작전술(C), 설득(E), 기마술(A), 원소마법(-)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기절 중] ━━━━━━━━━━━━━━━━━━━━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능력치였다. 레벨이 고작 20대로 표시되고 있는데도 무력 능력치가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칭호의 효과 덕분이었다. <전설의 모험자>와 <전설의 용병>, 두 칭호가 함께 발동하면 레벨이 하나 올라갈 때마다 무력은 자그마치 12씩이나 올랐다. 비교적 <전설의 모험자> 칭호가 나중에 활성되어서 그나마 이 모양이지, 일찍 각성시켰다면 애저녁에 무력이 한계치인 140까지 찍혔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드러나는 방식은――압도적인 재능. 누군가가 검술을 시연하면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데도 따라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보름이 지나면 완전히 터득해버리며, 한 달이 흐르면 마치 어릴 적부터 반복해온 동작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응용한다. 천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익히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지금까지 루크와 데이지를 가르쳐본 사람 전원이 남매를 가리켜서 희대의 재능이라고 극찬했다. 예컨대, 루크는 무력 능력치가 높았지만 지력 능력치가 떨어졌다. 반면에 데이지는 지력 능력치가 월등하게 뛰어났다. 아직 열다섯 살인데도 불구하고 언어를 열한 개나 익혔으며, 기하학 서적과 철학 서적을 고대제국어로 읽어가며 마음껏 탐닉했다. ……좋겠지. 녀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잔뜩 있었다. 하지만 되었다. 다만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괜히 데이지를 양녀로, 루크를 대자로 들인 것은 아니었다. 정작 본인들은 그 이유를 영원히 모르겠지만. “데이지. 너에게도 명령한다. 너는 나 혹은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결코 루크에게 명할 수가 없다. 오로지 내 허락이 확실하게 있는 경우에만 특별히 가능하다.”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되었습니다.” “음? 뭐가 되었다는 것이냐.” “아버님과 제가 처음으로 맺은 약속.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문득, 내 뇌리에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너.” “루크가 아버님에게 진정한 복종을 맹세하게 된다면, 아버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루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루크는 아버님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제 내기는 끝났습니다.” 아. 아아? 내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내가 데이지에게 내걸었던 내기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루크가 몸과 영혼을 전부 바치는 마법적 노예계약으로 맺어질 경우, 나는 데이지의 승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데이지의 말대로 지금 루크는 노예계약을 맺었다. 데이지의 승리였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설령 데이지가 내기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나한테 불이익이 돌아올 일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나도 이걸 감안하고 노예계약을 시전한 것이었다. 문제는 데이지의 목적이었다. “네 년……설마 루크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나는 여태까지 데이지가 그저 루크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우기 위해서 노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데이지는 지금 내기에서 자신이 승리했음을 강조했다. 즉, 거짓말. 나의 후보자 목록에서 루크를 삭제하라고 겁박한 것은 거짓. 당신을 죽일 사람은 오직 자기 하나뿐이라고 휘황찬란하게 꾸며댄 말도 거짓. 오로지 목적은, 자신의 소중한 오라비를 내 마수에서 지켜내는 것. 데이지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루크를 후보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철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는 아버님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입니다. 만일 아버님께서 계획대로 루크를 육성하셨다면, 십중팔구 루크는 아버님 손에 죽었겠지요.” “…….” “위험을 원천봉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금씩 내 몸에 분노가 차올랐다. 내가 당장이라도 데이지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를 죽이겠노라고 맹세한 것이 전부 거짓이었더냐.” “아니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 또한 진심입니다. 하지만…….” 데이지가 입꼬리를 들었다. “제가 아버님을 위해서 그런 걸 맹세할 이유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데이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데이지가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녀석은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채로 데이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이지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제가 아버님보다 루크를 우선해서 분노하셨는지요. 우스운 일입니다.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는 분이 아버님입니다. 기껏해야 저 하나의 마음을 독차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화내시다니 꼴불견…….” 나는 녀석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복부에 힘껏 발차기를 날렸다. 그제야 데이지가 약간의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성이 풀리지 않아서 몇 번이고 녀석을 짓밟았다. 한참 뒤에야 내가 숨을 가다듬었다. 분노로 달아오른 숨이 폐를 지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나를 데이지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대여섯 번 흘렸을 뿐이지, 딱히 괴로운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승리감. 데이지의 눈동자에는 승부에서 이겼다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걸 읽을 수 있었다. 데이지가 헛기침을 토해내고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저를 완전하게 취하고 싶으십니까?” “…….” “제가 오직 아버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면, 아버님 또한 저만을 바라보십시오. 저는 순전히 아버님만을 눈동자에 담는데 정작 아버님께선 이곳저곳으로 눈을 돌린다……도무지 공평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데이지가 웃었다. 내장이 상했는지 웃는 도중에 핏기가 섞인 기침을 했다. “아무도 아버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마왕 파이몬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감히 뚫린 입이라고……!” 나는 데이지의 복부에 발끝을 꽂아넣었다. 그런데도 데이지의 입가에서는 웃음기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더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마왕 파이몬이 오직 아버님만을 우선하는 인형이 되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요. 아버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마왕 파이몬만을 우선하게 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결국 아버님께서는……흐윽!” 나는 데이지의 가슴을 아예 신발 바닥으로 마구 짓이겼다. 이번에는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데이지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삼십 초쯤 흐르자 통증에 익숙해졌는지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결국, 아버님께서는……상대방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아…….” “…….” “그런데도 저에게는, 오직 아버님만을 바라보고, 아버님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길 원하다니……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착한 아이로 보였습니까……?” 데이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를 온전하게 취하시고 싶다면, 먼저 저만을 바라봐주시길. 그게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엘리자베트 통령도 바라보고, 마왕 바르바토스도 바라보고 계시면서 이제는 제 시선까지 독차지하려 하다니……언어도단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이 주제에.” 내가 이빨을 바득 갈았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녀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한테 인생을 바치라고. 그래야 자신도 인생을 바쳐줄 수 있다면서. “어디 해볼 테면 해보거라. 하지만 명심해라. 너까짓 것에게 내 모든 걸 갖다바칠 정도로 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너에게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사십만의 생명에 비기지는 못해!” “그럼 아버님께서는 저를 독차지하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나는 데이지에게 마지막으로 발차기를 날려준 다음, 성큼성큼 수술실을 나갔다.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데이지의 웃음소리가 끝까지 귀에 거슬렸다.   00412 대륙을 조정하는 자 =========================================================================                        1513년의 새해가 밝았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어느덧 8년째가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의외로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워낙에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일까……. “대부님. 홍차입니다.” “아. 고맙구나, 루크.” 루크가 탁자에 홍차를 내려놓았다. 데이지보다 약간 어수룩했지만 꽤나 각이 잡혔다. 루크는 자경단의 부단장직에서 사퇴했다. 자경단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제레미인 이상, 루크가 뛰쳐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자경단 대신에 루크에게 새로이 주어진 업무는 집사장이었다. “집사 업무에는 조금 익숙해졌느냐?” “아직 미숙하지만 시녀장 덕분에 어떻게든.” 루크가 멋쩍게 웃었다. 검은색의 집사복을 차려입은 루크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엔 활기차고 순수한 천연 미소년이었지만, 지금은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회한이 배어들었다. 몸 한구석이 언제나 우수에 잠겼다. 영지의 처녀들은 변모한 루크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상큼발랄한 루크도 좋지만 숙성된 포도주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는 루크도 좋다나 뭐라나. 그러나 우리 영지민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문란하고 난잡한 연애생활을 뚝 끊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집사장이 시녀장보다 높은 직위인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데이지가 집사 업무도 겸임했으니, 여러 방면에서 너보다 선배이고 상사이다. 열심히 배우거라. 너희 남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예, 대부님.” 루크가 어딘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일부러 루크 앞에서 데이지 얘기를 많이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루크는 슬퍼했는데 제 딴에는 나한테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게 더 애처로워서 즐거웠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아버님.” 데이지가 집무실에 들어와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데이지는 루크를 곁눈질로 보고 나서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 무뚝뚝한 눈길에 루크가 움찔거렸다. 이야아, 참으로 멋진 광경이로다. 최근에는 이 남매 덕택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필요 이상으로 루크한테 차갑게 구는 데이지, 그런 여동생을 보면서 절망하지만 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루크. 정말이지 지켜보는 보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금단의 사랑을 키우면 더 멋질 텐데. “무슨 일이냐, 사랑스러운 딸아.” 나는 데이지한테 실로 상쾌하게 미소를 웃어 보였다. 데이지의 표정이 일순 썩어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가서 내게 편지를 전달했다. “……프랑크 남부에서 온 서신입니다.” “흐음. 마살리아 공작인가.” 내가 봉인을 뜯어서 편지를 읽었다. 서신은 가지런한 필기체에 무척 정중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첫 문장부터 ‘위대하신 제국의 기둥, 가장 강력한 제국의 궁중백이시자, 인간종과 마족의 유일하고도 굳건하신 가교, 커스토스 공작 전하께 삼가 아룁니다’라고 시작했다. 너무 심하게 아첨하는 나머지 잘못하면 내 항문이 다 헐어빠질 지경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는 모양이군.” 내가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는 계획대로 혼란에 돌입했다. 법무상 베르시 백작이 국내의 모든 도시들에게 ‘자발적인 국가 구성’을 요구했다. 일종의 사회계약론에 기반을 둔 정책으로서, 도시들이 프랑크라는 국가에 소속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어디까지나 스스로 의지에 따라 결정했다. 이건 꽤나 의미가 깊었다. “흐음.” 내가 편지를 접고 남매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솜씨를 시험해볼까. 보나마나 데이지가 압도적으로 우월하겠지만 약간의 여흥이었다. “루크. 프랑크에서 베르시 법무상이 도시들에 자발적인 충성을 요구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대부님.” 루크가 잔뜩 긴장한 것이 엿보였다. “왜 이제 와서 베르시 법무상이 충성을 요구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게……프랑크에서는, 현재 세금을 내지 않는 도시가 많습니다. 그런 도시들을 질책하기 위해서 형식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루크가 띄엄띄엄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거의 어린애 수준의 답변이었다. 자경단의 부단장이라면 모를까 내 집사장은 정치에 안목이 있어야 했다. 이 정도 시험에도 통과하지 못하면 집사 실격이었다. “데이지. 너의 생각은 어떠냐.” “공화국의 탄생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입니다.” 데이지가 즉답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을까. 루크가 눈을 크게 떠서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호오. 어째서 그러한지 이유를 말해보거라.” “먼저, 기존에 귀족들이나 도시들은 프랑크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세금이나 군대를 국가에 빌려줄 때는 '정부'에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의 '황제'에게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데이지가 한 차례도 막히지 않고 술술 말해나갔다. “지금처럼 황제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이는 ‘프랑크에는 더 이상 황제가 필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즉, 공화국의 발족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짚었다, 데이지. 네 말대로 이건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다.” “…….” 내가 데이지를 칭찬하자 루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집사장이 된 이후, 루크는 여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마왕성의 모든 잡무를 처리할 뿐만이 아니라 종종 영지의 업무에도 참여했다. 자경단에서 검술 연습이나 하던 루크와는 비교하기도 미안했다. “대다수의 도시에서는 기꺼이 베르시 백작의 정책을 수용했다. 이미 프랑크는 세 명이나 연달아서 무능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 자체에 질려버렸지.” 현실적으로 황제직을 수행할 만한 귀족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어찌나 꼼꼼하게 황가를 멸살했는지, 사생아는커녕 방계의 사생아조차 단 한 명도 남아나지 않았다. 황가와 핏줄이 이어진 대귀족 가문조차 깡그리 몰살당했다. 이래서야 황위를 주장할 가문 자체가 전무했다. 물론 모계까지 따져서 이리저리 족보를 추적하면 꽤나 여러 가문이 걸리긴 하는데……세력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당연했다. 이들이 생존한 까닭은 앙리에타가 ‘설마 얘네까지 짓밟을 필요는 없겠지’ 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곱 세대 전의 황제 첩실의 네 번째 아들의 사생아의 딸아이의 사위……같은 식이었다. 그게 뭔가.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막대한 권위를 가지는 사람은 황태후다.” 황태후는 유일하게 남은 황가의 일원이자 내전 내내 품위와 긍지를 지켰다. 황제가 학살을 명령했을 때, 황태후는 잠옷차림으로 궁전을 달려가서 제발 백성을 지켜달라고 울고불며 애원했다. 그런 황태후에게 신민은 경애를 품었다. “그리고 황태후는 베르시 백작의 정책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지. 법무상은 이길 확률이 높은 도박에 뛰어든 것이다. 뭐, 결국 남부 도시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만…….” 자아, 여기서부터 두 번째 시험이다. 특히 데이지. 모쪼록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너는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정도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해서야 나를 죽이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엘리자베트보다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보여줘야겠지. 그게 너 따위한테 가능하다면 말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프랑크 남부의 대귀족들은 베르시 법무상에게 반항하고 있다. 신생 정부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지. 덕분에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문제는 자치권을 대가로 노예 해방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에 붙잡혀 있던 노예들이 대거 풀려났다. 이들은 어떠한 조건도 없이 조국으로 귀향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프랑크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남부에선 이와 같은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결과, 저번 전쟁에서 남부 대귀족들이 차지한 사르데냐의 영토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사르데냐인들은 전쟁에서 가족과 이웃이 대거 노예로 잡혀들었다. 당연히 가족과 이웃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그런 분위기에 남부 대귀족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가족을 돌려달라. 마을사람이 돌아오도록 해달라. 사르데냐인은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대귀족들에게 시위했다. 하지만 시위 도중, 사르데냐인의 대표자 중 세 명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르데냐인들은 볼 것도 없이 프랑크 대귀족들이 저지른 짓거리라며 분개했다. 안 그래도 외국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르데냐인들은 순식간에 반란을 일으켰다……. 정말 공교롭다는 말이지. 왜 하필 그런 시기에 사르데냐의 대표자가 세 명이나 암살되었을까. 그때 우연찮게도 제레미를 비롯해서 내 휘하의 암살단이 잠시 사라졌다마는――아마도 진실이 밝혀질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서신이다.” 내가 편지를 들어서 내보였다. “남부 대귀족들은 자력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프랑크 정부에 반항했는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원조를 요청할 수도 없지. 결국 파르네세 공작령의 실질적인 주인인 나에게 군사원조를 부탁해왔다.” 내가 먼저 루크를 쳐다보았다. “루크. 우리가 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느냐.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반란을 진압할까? 아니면 가만히 방관할까.” “당연히 사르데냐인의 편을 들어줘야 합니다.” 이번에는 루크가 즉답했다. “사르데냐인들은 지금 불합리하게 외국인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당한 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독립하여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아낌없이 원조해주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루크는 멍청했다. 답이 없었다. “데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반란을 방관해야 합니다.” “데이지……!” 루크가 깜짝 놀라서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러나 데이지는 루크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여기서 아버님께서 군대를 움직이시면 지나치게 경계를 사게 됩니다. 이미 아버님께서는 지난 전쟁에서 충분하고 넘치도록 전공을 쌓으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헌데 또 출전하신다면, 다른 왕후장상들이 아버님의 진의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방관하는 편이 좋다?” “어차피 사르데냐인이 어찌되든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루크는 데이지의 단정적인 대답에 충격을 먹은 눈치였다. 말도 안돼,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짓고 루크한테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잠시 데이지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구나. 루크, 자리를 비켜주겠느냐?” “……예, 대부님.” 루크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상의를 벗고 뒤를 돌아라.” “…….” 데이지가 묵묵하게 옷을 벗고 나에게 등을 내보였다. 나는 집무실 서랍에서 채찍을 꺼내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말채찍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데이지의 등짝에 채찍을 휘둘렀다. “읏……!” 데이지가 신음을 참으며 상체를 약간 구부렸다. “우둔한 것. 그렇게 방관했다가 사르데냐인이 정말로 반란에 성공해버리면 어찌하느냐. 기껏 피를 흘려서 성공한 전쟁이 무용지물로 돌아가버리지 않느냐. 그게 네 머리에서 쥐어짜낸 해답이라니!” 차악, 하고 말채찍이 데이지의 살을 붉게 파냈다. “우리가 군을 움직일 수 없다면 브르타뉴의 군대를 움직이면 된다! 브르타뉴군은 이제 와서 나빠질 인상도 없다. 고작 이런 것도 생각해내지 못하겠느냐.” “하지만……국가적 원수인 브르타뉴군이 난리를 부리면, 이번에는 프랑크 남부의 백성들이 불만을…….” “그러니 더더욱 브르타뉴군을 활용해야지!” 내가 가차없이 세 번째로 채찍을 가했다. 데이지는 이번엔 신음을 견뎌내지 못했다. “사르데냐인은 사르데냐인 나름대로, 프랑크인은 프랑크인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게 된다! 결국 남부 대귀족들은 권위를 잃게 된다. 반면에 베르시 법무상의 권위는 더욱 강해지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팔을 휘두른 다음, 채찍을 방바닥에 내던져서 버렸다. 데이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말만 휘황찬란하지 실제 식견은 한참 모자르지 내 어찌 너에게 기대를 걸겠는고. 한심한 녀석. 썩 꺼지거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떨리는 손길로 상의를 챙겨입었다. 그리고 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들어 불씨를 지피고 한 모금 빨아들었다. 저래서야 죽이기는 누굴 죽이겠는가. 데이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00413 대륙을 조정하는 자 =========================================================================                        * * * “평화란 참으로 좋군.” 엘리자베트는 요 근래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 평화란 물건이 하루에 17시간 가량의 업무시간, 4시간 가량의 수면시간을 강요하므로 평범한 인간에게는 결코 평화스럽지 않고 오히려 극악무도하게 느껴지겠지만, 엘리자베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습니까요.” 근무차 통령실에 들린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통령의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보고 평화를 운운하다니, 확실히 통령은 변태였다. “아아. 단탈리안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꼭 중년 아저씨가 온천에 들어가서 표정이 헤벌레 풀어지는 것 같은걸, 하고 쿠르츠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단탈리안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예? 잘못 들었습니다?” “생각해봐라, 슐라이어마허. 대륙에서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죄다 단탈리안이 만들어낸다. 그건 달리 말해서, 단탈리안만 조심하면 대륙은 평안하고 무탈하다는 뜻 아닌가.”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발상에 스스로 감탄했는지 우쭐거렸다. “대륙 어디에 반란이 일어났다. 그럼 단탈리안을 살펴봐라. 대륙 어디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도 단탈리안을 살펴봐라. 세상만사가 실로 간단해지나니. 단탈리안인가, 단탈리안이 아닌가, 모든 문제가 그리 집약되는 것이다.” “하아, 예에…….” “인생이란 하나의 창문으로 내다보면 실제보다 훨씬 근사해지는 법. 단탈리안이야말로 본인의 창문일지도 모른다.” 이거 맛이 갔군.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마음속 깊이 통령을 동정했다. 그러니까 일 좀 줄이고 휴식을 취하라고 수백수천 번이나 권고했거늘, 자기에게는 일하는 게 쉬는 거라면서 살인적인 업무량을 짊어지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본인은 지금 삶에 무척 관대하다. 아무리 단탈리안이라고 해도 아나톨리아 제국을 하루아침에 거꾸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무사태평한 것이지. 후후. 본인이 선취점을 따낸 것이야.” 쿠르츠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2차 국화전쟁의 끄트머리에서 통령은 종전기념 무도회에 참석했다. 통령은 놀랍게도 단탈리안 궁중백과 춤을 추었다. 그날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은 ‘제법 춤을 잘 추더군’이라든지, ‘후후’라든지, 틈만 나면 단탈리안 얘기를 꺼내면서 키득거렸다. “단탈리안도 그걸 알았겠지. 하지만 낭만성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본인과 함께 무언가를 꾸민다는, 그 매력적인 낭만에 스스로 허리를 굽혀주었어.” “그렇습니까―?” “즉, 이건 달리 말해 단탈리안이 본인에게 상당히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맛이 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뇌수가 쉬어버렸다. 어째서일까. 쿠르츠는 심각하게 자문했다.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뇌수가 썩어버리기에는 적당한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엘리자베트 통령은 실시간으로 썩어가고 있었다……무엇이 문제일까. 역시 과로인가……. “단탈리안이 본인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를 상대해줄 수 있는 사람이 대륙에서 본인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지.” 쿠르츠가 썩은 동태눈깔이 되어서 통령을 쳐다보았다. “그냥 차라리 궁중백과 결혼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하아?” 엘리자베트 통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멍청한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본인이 왜 단탈리안과 결혼하는가? 뇌수가 쉬어버렸는가, 슐라이어마허. 여름도 아니고 겨울인데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군.” “……아니. 허구한 날 궁중백 타령을 해대니 소인이 그러는 것 아닙니까요. 어차피 한쪽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장이겠다, 다른 한쪽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세이겠다, 이참에 다시 하나의 합스부르크로 합쳐버리면 되겠군요.” 엘리자베트 통령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아국은 공화제를 표방하고 있다. 저쪽에서 왕정제를 포기하면 모를까, 애시당초 제국과 공화국은 너무나 다르다.” “루돌프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루돌프가 죽으면 공화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따뜻한 눈길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미워할 수 없는 낙제생을 바라보는 선생과 같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세는 인간이 아니라 마왕들이다. 그런데도 제국이 대륙의 국제외교에서 인정받는 까닭은, 최소한 외견상이라도 인간인 황제에게 마왕들이 복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아.” “단탈리안이 괜히 제국의 대장군으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임명했는 줄 아는가? 파르네세 공작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황제와 대장군, 제국의 얼굴을 모두 인간으로 내세운 것이야.” 그러므로 제국이 왕정제를 버리고 공화제를 택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불가능하다.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단언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단탈리안은 공화제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번에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무산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얼마 전에는 마왕 파이몬이 숙청되지 않았더냐?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그만한 사건에 단탈리안이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과연. 단탈리안이 행여라도 공화제를 주장할 일은 없습니까…….” 엘리자베트가 턱을 끄덕거렸다. “단탈리안은 단지 공화주의가 선동에 유용하기에 써먹을 따름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어. 단탈리안에게 이념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지.” 글쎄, 하고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이쪽에서 공화제를 포기하면 이야기가 성립할지도 모른다만.” “예?” “우리 공화국이 제국에 항복하는 대신, 본인이 단탈리안과 더불어서 공동황제에 즉위한다. 그런 가능성은 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눈이 둥그레져서 통령을 바라보았다. 통령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해나갔다. “다만 섣불리 항복해서야 국민들이 납득해주지 않겠지.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제국이 아국에 비해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질 것. 전면전이 벌어지면 우리한테 도저히 승산이 없음이 명백할 것. 그렇다면 본인이 '선처'를 부탁하며 항복할 수 있게 된다.” “하아…….” “물론 한여름밤의 꿈과 같은 얘기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멋쩍었는지, 엘리자베트가 씨익 웃었다. “우선 단탈리안이 제아무리 제국의 실세라 해도 황위까지 넘볼 권리는 없다. 실력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또한 공화제에 관심이 없는 인물한테 아국을 갖다바칠 만큼, 본인은 이기적이지 않다…….” 다만, 만약 일이 그렇게 풀리면 확실히 인명피해만큼은 적어진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마왕과 인간이 결합하는 것이다. 종족 간의 화해라는 명분이 생긴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합작이라는 형태까지 취할 수 있다. 입헌군주제가 적당하겠지. 의회의 수장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맡긴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공왕(公王)이었다. 실력도 증명되었다. 의회를 대표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인재가 없었다. 가장 큰 장점은 단탈리안의 심복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입헌군주제가 성립할지라도 단탈리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다. 얼추 그림이 맞았다. “……뭐, 역시 불가능하겠다마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그런 구상을 납득할 리 없었다. 마왕 파이몬이 숙청된 것을 보아하니 단탈리안은 확실하게 바르바토스의 편에 기울었다. 바르바토스는 마왕에 의한 정복을 바라고 있었다. 입헌군주제 따위 사도(邪道)였다. “결국 망상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 엘리자베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쿠르츠를 쏘아보았다. “괜히 본인의 시간을 빼앗을 여유가 있다면 본인을 도와서 서류를 처리하게나.” “소, 소인은 사르데냐의 프랑크 점령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 멍청한 프랑크 귀족들이 브르타뉴에 원군을 요청했다지. 어차피 대귀족들이 권위를 잃고 베르시 법무상에 의한 통치로 종결될 것이다. 공화제에 가까운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 우리로서 나쁠 일이 없다.” 자아, 하고 엘리자베트가 일어나서 손수 서류뭉치를 쿠르츠에게 건네주었다. 어림잡아도 삼백 장이 넘었다. 쿠르츠가 울상을 지었다. “각하. 제가 서류에 쥐약이라는 걸 아시면서도…….” “자네가 게으름을 피우면 백 명의 인민이 불행해진다. 자네가 도망치면 천 명의 인민이 고달파진다. 민중을 책임지는 지도자에게 나태 따위는 허락되지 않아.” 결국 그날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장난삼아 결혼 얘기를 꺼낸 대가로 온종일 통령에게 붙잡혔다. ――이 시점에서, 프랑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가 단탈리안이 계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당사자들 이외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 * *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혁명이라느니 변혁이라느니, 겉으로는 갑작스럽게 폭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득하게 긴 시간 동안 변화할 준비를 해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금 억지로, 의도적으로, 단시간에 끝마치고자 했다. 시간은 단축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언제나 피다. 피가 많이 흐를수록 그만큼 역사는 가속된다. ─ 당신이 지시한 대로 따라주었어요. 반란은 점점 커지고 있구요. 수정구에서 투영된 롱그위 성녀가 말했다. 프랑크 남부의 대귀족들은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을 직접 도와주는 대신 브르타뉴군에 연결을 시켜주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대귀족들은 브르타뉴에 막대한 용병비를 치르면서 원군을 끌어다 썼다. 하지만 이때 내가 꼼수를 사용했다. ‘대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르데냐인의 반란을 진압하되,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말 것.’ 이런 식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적극적으로 반란을 뭉개트리려고 날뛰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롱그위 성녀는, 타국의 백성을 함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사건건 여왕을 타박했다. 결과적으로 브르타뉴군은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 두 사람의 의견충돌 때문에 거동이 어려워졌다. 반란이란 본디 초전에 박살을 내지 않고 내버려두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마련이었다. 브르타뉴군이 기껏 진출했으면서 진압에 밍기적거리자, 사르데냐인은 이때가 외국인의 통치에 맞서 봉기할 때라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 하지만, 궁중백.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이익이 무엇이죠? “사르데냐인의 민심을 당신에게 모으는 것입니다. 롱그위 성녀. 당신은 저번에도 제노바의 시민들을 구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지역의 백성까지 구하게 된 셈입니다.” 내가 말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사르데냐인들은 반란을 성공하고 나서 당신에게 자발적으로 영토를 갖다바칠 것입니다. 전부 브르타뉴를 위해서입니다, 롱그위 성녀.” ─ 그러니까, 저는 우리의 이익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제가 얻을 이익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궁중백이 무슨 이익을 얻을지 전혀 감이 안 오네요. 당신은 이익도 없는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저에게는 이득입니다.” 성녀의 지적이 옳았다. 나는 이득이 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프랑크 제국와 브르타뉴 왕국, 거기에 사르데냐 왕국까지,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정리해버릴 속셈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줄 의리는 없겠지. 브르타뉴는 조금 더 배가 불러질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과식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테지만,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   00414 대륙을 조정하는 자 =========================================================================                        * * * 프랑크에 대한 작업은 단탈리안의 계획대로 무탈하게 흘러갔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기껏 의뢰를 받은 주제에 설렁설렁 반란을 진압했고, 덕택에 프랑크의 남부 대귀족들은 스트레스만 왕창 쌓였다. 무엇보다도 대귀족들은 사방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 명색이 프랑크인이면서 반란을 무마하는 데 구적(仇敵) 브르타뉴의 손을 빌리는가! ─ 이제 와서 프랑크의 품을 떠나 자치와 독립을 얻으려 하다니 괘씸하다. ─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버린 신민을 해방시킬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 일부 귀족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세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저버렸다. 이것이 평범한 프랑크 사람들의 비판. 즉, 대다수의 프랑크 귀족과 민중이 가진 의견이었다. 그러나 남부 대귀족들은 꿋꿋하게 버텼다. 대귀족들에게는 자신이 있었겠지. 프랑크의 남부 지방은 내전으로 피폐해지지도 않았고, 국화전쟁에서 새로운 영토까지 얻었다. 요컨대 ‘약한 놈들이 백날 떠들어본들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겠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때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게릴라전을 펼치던 사르데냐인 반란군 이백여 명이 브르타뉴군에 항복했다. 정확히 왜 항복했는지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 역시 사전에 미리 기획된 것으로, 이백 명의 반군을 이끄는 자는 단탈리안의 해방동맹에 소속된 일원이었다. 이렇게 포로로 잡힌 사르데냐인은 공식적으로 대귀족들의 신민이었다. 당연하지만 브르타뉴군에게는 포로를 대귀족들에게 인도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사르데냐인 포로를 한 명도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롱그위 성녀가 나섰다. 주홍빛의 곱슬머리가 아름다운 여자, 이제 소녀티를 완전히 벗어재껴서 원숙한 여인이 된 자클린 롱그위, 현재 대륙에서 가장 명망이 높고 가장 많은 칭송을 받는 성녀는, 갑작스럽게도 포로의 인도를 거부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왜 포로를 건네주지 않겠다는 거요?” “그대들은 너무나 야만스럽게 민초를 다룹니다. 저번에 인도한 포로들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해버리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의 폭거는, 아테나 여신님을 대신하여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귀족들 입장에서는 황당무계했다. “반란을 다스림에 있어 다소 과격한 처벌은 도리어 권장받아야 마땅하오. 성녀께서는 지금 자비심에 눈이 멀어 대사를 그르치고 있소.” 반란을 일으킨 민초는 신민이 아니었다. 탄압하고 소거해야 할 전염병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롱그위 성녀는 막무가내로 나왔다. “애당초 그대들은 정당한 통치자가 아니라 외국에서 끼어든 압제자에 불과합니다. 사르데의 민중이 여러분께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뭐, 무슨 소리를……!” “천녀는 한낱 개인에 불과하므로 여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을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롱그위 성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와드릴지라도 무구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브르타뉴군은 브르타뉴의 법도를 따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용병비를 들여서 고용한 브르타뉴군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열불이 터졌거늘, 롱그위 성녀의 발언은 불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롱그위 성녀가 진압을 사사건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반란 자체가 초전에 종결되었을 터다. 요컨대 롱그위 성녀는 쓸데없이 바른 말만 나불거리는 방해꾼이었다. 이만큼 얄미운 사람도 없으리라. 대귀족들이 즉각 롱그위 성녀의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며 이성적인 숙고가 현저하게 부족한 반항’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 도대체 브르타뉴는 용병을 끌고 온 것인가, 아니면 자선가를 끌고 온 것인가. ─ 우리가 지불한 사례금을 즉각 반환하고 철군하든지, 무분별하게 국가대사에 끼어든 성녀한테 마땅한 처벌을 내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양측은 단숨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롱그위 성녀의 명성은 가볍게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브르타뉴의 상징과 같았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놀랍게도 성녀가 아니라 대귀족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인간성에 국경은 없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의 인간성을 소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인간성 이외에도 제2의 인간성, 즉 사회성을 각자의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동의 아래 체결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임시로 마련된 법정에서 말했다. 롱그위 성녀는 공손하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었으므로 땅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 사회적인 인간성에 있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가 성립한다. 피에몬테 지방의 사르데냐인은, 의문의 여지없이, 마살리아 공작을 비롯하여 여덟 대귀족에게 그 사회적 인격성이 종속되어 있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비록 영원불멸하진 않을지언정 존중받아 마땅한 계약을 준수하지 않았음이라. 이에 실형을 선고한다.” 실형을 선고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이번 반란에서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격렬하게 맞부닥치고 있다고는 하나, 두 사람은 약간의 마찰 때문에 손상될 정도로 우정이 얕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과로 끝나겠지, 하고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헌데 실형이라니. “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경우 감형해줄 수 있노라.” 앙리에타 여왕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사람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공갈이었다. 실형을 내리겠다는 선고로 대귀족들의 체면을 살려주고, 동시에 사과를 유도함으로써 실질적인 처벌도 피해간다. 능숙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꼿꼿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천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예상과 어긋난 발언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끝내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피에몬테의 사르네냐인은 결코 자발적으로 여덟 대귀족을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프랑크는, 아니 일찍이 프랑크에 적을 두고 있던 대귀족들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이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재판을 참관하고 있던 대귀족들이 일어서서 삿대질을 했다. “우리의 통치권은 피렌체 조약에 근거해서 인정되었다!” “열국이 모인 가운데 성사된 권리를 어디서 감히 무시하는가!” 분위기가 점점 과격해졌다. 형식상 간단하게 사과만 받고 물러나려던 대귀족들도 마음이 바뀌었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롱그위 성녀에게 처벌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정말로 사과를 할 마음이 없는가.” “제 결심은 굳건합니다.” 성녀는 어디까지나 뻔뻔하게 나왔다. “도리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부당하게 사르데냐인을 탄압했음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늘 아래를 활보하고 다니니, 여신들께서 저주할 것입니다.” “저, 저런 망측한 일을 보았나!” 대귀족들은 시끄럽게 고함을 토해냈다. 이 와중에 여왕은 삼십 분에 걸쳐서 몇 번이나 사과를 종용했다. 그러나 성녀는 타협의 여지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결국 앙리에타 여왕은 재판이 시작할 때와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그러니까 한없이 음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판결을 내린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계속해서 군무에 임하도록.” “여왕 전하!” 대귀족들이 얼굴을 붉혔다. 자클린 롱그위는 브르타뉴군에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전권을 휘둘렀으므로 허수아비 부사령관에 불과했으나, 어찌되었든 부사령관은 부사령관이었다. 그런 직책에 계속 남겨두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처벌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대귀족들이 격앙하여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그러나 처벌이 없을 수는 없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 그대는 무단으로 이백여 명의 포로를 취했다. 이백 명에서 열 명씩 한 대로 계산하여, 그대에게 스무 대의 편형(鞭刑)을 선고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녀는 반쯤 신성불가침했다. 그런 성녀에게 채찍질을 가하다니 전례에 없었다. 대귀족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먼저 브르타뉴군의 장수들이 선수를 쳤다. 장군들이 일제히 롱그위 성녀 앞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넙죽 이마를 댔다. “전하! 성녀는 그간 아국에 공헌한 바가 무수히 많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편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앙리에타 여왕은 명백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쓰디쓴 독주를 들이킨 사람처럼 이빨을 꾹 물었다. “부사령관직에서 파면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편형으로 그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관대한 처벌이다. 제장은 행여라도 불만을 품지 마라.” “전하! 성녀는 꼭두각시 전쟁에서 전하를 대신하여 파리시오룸에 남았습니다!” “여기 숨 쉬고 있는 모두가 성녀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전하께서 지엄하게 법도를 집행하는 것은 옳사옵니다만, 소장들이 어찌 이와 같은 사태를 외면하겠나이까!” “시끄럽다!” 재판이 이상해졌다. 틀림없이 재판은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대립하는 형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어느새 앙리에타 여왕이 '괴롭지만 법도를 위해서 희생하는 역할'처럼 비추고 있었다. 대귀족들은 졸지에 방관자가 되어버려 멍하게 재판을 지켜보았다……. “항의를 제기하는 장수들에게도 모조리 편형 다섯 대를 선고한다!” “전하!” “그리고!” 앙리에타 여왕이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부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과인에게 책임이 있는 바. 과인에게도 자클린 롱그위 성녀와 동일하게 편형 스무 대를 선고한다!” “전하아아!” 어라. 대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게 무엇인가. 왜 갑자기 장수들이 나서서 롱그위 성녀를 일제히 두둔하는가. 왜 장수들까지 편형 다섯 대를 선고받는가. 아니, 여기까지는 여차저차 말이 된다고 해도――어째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까지 편형을 스무 대씩이나 받겠다고 나서는 것인가? 이래서야. “고금에 옥체를 스스로 상하게 하는 판결은 없었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에이잇! 시끄럽노라, 머저리들아! 신하의 잘못은 곧 군주의 잘못이다!” 이래서야 마치. “네놈들은 과인이 자신의 잘못을 신하들에게 떠넘기는 우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냐! 이제부터 판결에 왈가불가 토를 다는 녀석이 한 사람 생길 때마다 과인의 처벌에 편형을 다섯 대씩 추가하겠다!” 마치, 이쪽 대귀족들이 철두철미하게 악인이 되어버린 것 같지 않은가. “전하……흐윽, 전하…….” “소신들이 불민하여 이런 망측함을…….” 30대는 물론이고 40대, 50대도 종종 섞인 장군들이 눈물을 흘렸다. 롱그위 성녀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도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브르타뉴의 장교들과 병사들도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 ‘전하!’를 연호했다. 대귀족들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당최 연유를 몰랐다. 다만 여기서 여왕에게 편형이 이루어지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지금껏 귀족으로서 살아온 깜냥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만 보면 대귀족들이 형벌을 요구하는 바람에 일국의 여왕까지 편형을 받아버리는 꼴이 되지 않는가! 대귀족들이 마음속으로 일제히 절규했다. ‘이, 이건 막아야 한다!’   00415 대륙을 조정하는 자 =========================================================================                        대귀족들이 조심스럽게 여왕한테 다가갔다. “전하. 옥체에 편형을 내리실 필요까지야 어디 있겠습니까.” “손수 일벌백계를 보여주시려는 의기에, 소인들, 감탄했습니다. 하오나 이미 육신을 여신께 바친 성녀입니다. 편형을 내렸다가 혹여 신들의 마음이 편치 않을까 걱정되옵니다.” “…….” 대귀족들에게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미 여왕과 장군들, 병사들이 자신들만의 삼각지대를 완벽하게 형성했다. 대귀족들은 한낱 부외자에 불과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단호하게 도리질을 쳤다. “왕의 재판은 지엄하며 번복을 용납하지 않는다.” “저, 전하. 여기서는 저희의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판결을 집행하겠다! 채찍을 대령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벌떡 일어나서 성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 광경이 구경할 만했다. 여왕이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연대장, 기병대장, 기사단장, 궁중마법사장, 온갖 고위간부가 달려들어서 여왕의 발을 붙잡았다. 이들이 하나같이 곡소리를 냈다. 마침내 앙리에타 여왕이 성녀에게 당도했다. “자클린 롱그위, 상의를 벗어라! 설마 이제 와서 용서를 빌지는 않을 터!” “……예, 저의 여왕이시여.” 성녀가 새하얀 상의를 벗어서 여왕에게 등을 내보였다.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시종에게 채찍을 건네받아 치켜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이들이 제지한 보람도 없이, 채찍은 가혹하게 성녀의 등에 내리쳤다. 롱그위 성녀가 기우뚱했다. 자칫 땅바닥에 몸이 처박힐 뻔했다. 그러나 성녀는 철의 의지로 고통을 견뎌내고 신음조차 뱉지 않았다. ‘여, 연기 따위가 아니다! 저건 진짜야!’ ‘성녀에게 채찍질을 가하다니 브르타뉴의 암캐가 드디어 실성했는가!’ 대귀족들이 경악했다. 그들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 일부는, 설마 전하께서 성녀님을 진짜 심하게 때리려구, 하고 어딘지 모르게 낙천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채찍 소리가 장내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병사들은 기겁했다. “한 대!” 여왕이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미처 사람들이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두 번째 채찍질이 성녀의 등을 파고들며 기다란 핏자국을 사선으로 남겼다. 성녀는 한층 더 땅을 향해서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채찍질. “아아아악!” 여태까지 신음을 꾹 참아낸 성녀도 이번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대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장군들과 병사들이 모두 엎드려서, 성녀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그녀에게 동조하여 크게 울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기어코 채찍질을 스무 대 채웠다. “…….” 성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열 대가 넘어진 시점에서 성녀는 이미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서 힘없이 널브러졌다. 그저 채찍이 내리치면 몸을 들썩거리며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성녀의 등가죽은 검붉은 색과 보라색으로 변색하여 끔찍하게 너덜너덜해졌다. “자클린 롱그위 부사령관을 침실로 옮겨서 치료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그녀도 얼굴이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다음은 과인 차례이다.” 여왕이 편형을 받을 때는 아까 전보다 더욱 큰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연대장에서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브르타뉴의 군인은 출신과 계급을 불문하고 울어재꼈다. 그들에게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흐읍……!”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편형 스무 대를 감당했다. 앙리에타는 놀랍게도 채찍을 맞는 내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정좌를 한 자세 그대로 채찍질을 고스란히 견뎠다. 본신의 실력이 검주(劍主)에 버금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왕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다음은……제장들 차례다.” 열댓 명에 이르는 장수들이 눈물을 흩뿌리며 상의를 벗었다. 편형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존경하는 여왕 전하께서 참담한 일을 겪게 되신 것 자체에 슬픔을 느낀 것이었다. 앙리에타는 열한 명에 이르는 장수들에게 일일이 채찍을 때렸다. 장수들 전원이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처벌을 인내했다. 그들의 결심은 단단했다. 여왕 전하께서 자그마치 스무 대를 비명 없이 버티셨다. 반면에 우리는 겨우 다섯 대. 고작 다섯 대였다. 감히 어떻게 신음이라도 흘리겠는가……. 아니, 실제로 채찍은 아프지도 않았다. 여왕이 휘두르는 채찍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했다. 방금 전에 생으로 편형을 당한 사람이 어찌 힘차게 팔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에타 여왕은 “한 대……두 대……” 하고 형벌을 집행했다. 아프지 않았다. 그 사실이 장수들에게는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여왕은 부하들을 처벌한 다음에 자신을 처벌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을 두 번째 차례에 놓았다. 어째서인가. 장수들은 여왕의 의중을 잘 알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편형을 스무 대 맞고 나서는 제아무리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일지라도 진이 빠져버리기 마련. 그 상태에서는 형벌을 집행해본들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사실상 고통을 받는 것은 여왕과 성녀뿐……장수들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처벌을 받았다. 여왕은 의도적으로 오늘 재판에서 장수들을 배제시켰다. 죄가 없는 장수들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는 없다면서. “전하……흐윽, 전하…….” 시간이 지날수록 채찍을 휘어잡은 앙리에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장수들은 등줄기에 내리치는 채찍의 강도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았다. 장수들이 흘리는 눈물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많아졌다. 결국 앙리에타는 마지막 연대장을 처벌하고서 픽 쓰러졌다. 혼절한 것이었다. 여왕은 들것에 실려서 막사로 옮겨졌다. 시종들 중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브르타뉴군 전체가 초상집이 되어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설 법정 한쪽 구석에는 이번 재판의 또 다른 주인공들, 즉 사르데냐 반란군 이백여 명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를 위해서 처벌을 받은 성녀에게, 또 그런 성녀를 감싸느라 스스로 옥체를 돌보지 않은 여왕에게 감사함과 송구스러움,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니 실로 모든 인간이 격정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프랑크의 남부 대귀족들을 제외하고. “…….” 병사들이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대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벌써 대귀족들을 싸그리 참살하고도 남을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미 브르타뉴군에게 대귀족들은 감히 ‘세상에서 제일 마음씨 고우신 성녀님과 여왕 전하를 넝마짝으로 만들어버린,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자식들’로 인식되었다. “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이다.” “어서 이곳을 피합시다.” 대귀족들은 도망치듯이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병사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끝까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재판 사건의 소식은 단숨에 사르데냐인의 반란 지역으로 퍼졌다. 하늘 아래 제일 고귀한 인간이라는 성녀가 이백 명의 미천한 평민, 그것도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당장 사형당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포로들을 위해서 희생했다. 이 이야기는 사르데냐인은 물론이고 프랑크인에게도 큰 감명을 안겨주었다. 반면에 남부의 대귀족 여덟 명은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 대귀족들은 비겁한 방식으로 지난 국화전쟁에서 이득을 취하였다. 거의 끝나버린 전쟁의 막판에 발끝만 살짝 담근 주제에 영토까지 취했다. 기사도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어려운 작태였다. 두 번째, 대귀족들은 조국 프랑크를 등지고 자치 및 독립을 선포했다. 그 때문에 대귀족들의 영지가 고향인 노예들이 풀려나지 못했다. 도저히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충실한 모습이라 보기 힘들었다. 세 번째, 고작 포로 이백 명을 돌려받겠다며 일국의 여왕과 성녀가 편형을 짊어지도록 방관했다. 포로들에 대한 관용도, 자기보다 직분이 높은 인물들에 대한 존중도 없었다. 귀족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미숙한 모습이었다. 전쟁에서 법도를 무시한 비겁함. 조국에 대한 충성과 전통을 저버린 이기적임. 무엇보다도 재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인간성. 세 가지의 이유로 인하여 프랑크 남부 대귀족들은 완전하게 인망을 잃어버렸다. 사르데냐인들은 더더욱 가열차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껏 신중하게 태세를 살펴보던 상류층과 귀족들마저 반기를 들었다. 대귀족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퍼부었다. 대귀족들은 비록 염치가 없었지만 브르타뉴군에 반란군을 토벌할 것을 주문했다. 반란군은 무기와 물자가 현저하게 떨어졌으므로 과연 정면대결에서 브르타뉴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황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반란군이 속속들이 브르타뉴군에 투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가 백마를 몰고 전장에 나오기라도 하면 반란군이 즉각 태세를 돌변하여 흰색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르데냐의 민중은 '악랄한 프랑크의 독재자들'에게 창칼을 향할지라도 '상냥하시고 고귀하신 성녀님'에겐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물론 이러한 항복에는 계산적인 타협이 숨어 있었다. 사르데냐 본국에서 반란군을 지원해줄 희망이 전무한 이상, 반란군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브르타뉴군은 이에 적합했다. 일단 브르타뉴는 본국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곳 피에몬테 지방을 직접 통치할 여력이 안 되었다. 상당히 높은 자치권이 보장될 확률이 높았다. 더욱이 브르타뉴는 군사강국. 주변국의 압박에서 안전했다……. 감정적인 호감과 계산적인 판단, 양쪽 기준에서 브르타뉴 왕국은 합격이었다. 한 번 파도가 밀어닥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반란군은 급속하게 브르타뉴에 항복했다. 심지어 반란군이 자체적으로 탈환한 도시와 마을이 제 발로 달려가서 투항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이, 이럴 수는 없소! 브르타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용병으로 온 것! 고용인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창을 거꾸로 잡다니, 세상에 이런 법도가 어디 있소!” 대귀족들이 분개해서 여왕에게 항의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항의 서신을 받아들고 간단하게 한 줄만 적어서 답장했다. “천명이 브르타뉴로 하여금 피에몬테를 돌보라 하는데 어찌 거부하겠소?” 그제야 대귀족들은 자신들이 용병이 아니라 한 마리의 늑대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앙리에타 여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피에몬테 지방을 홀라당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대귀족들은 화급하게 프랑크 본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자신들만으로 브르타뉴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했다. 하지만 대귀족들이 받아든 답서에는 앙리에타 여왕의 편지보다 훨씬 더 짧은 두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불가(不可).”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데 동참하지 않은 대귀족들에게 원군을 내어줄 정도로 베르시 백작은 우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시 백작은 그거 잘 됐다면서 모처럼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피에몬테 반란을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점입가경이라고 했던가. 브르타뉴군은 피에몬테 지방을 손에 넣자마자 기세를 몰아서 프랑크 본국에 침입해 들어갔다. 대귀족들의 본래 영지까지 위험해진 것이었다. “르 아브르 조약의 위반입니다!” 대귀족들이 사신을 보내서 격렬하게 반항했다. 꼭두각시 전쟁에서 브르타뉴는 프랑크에 패배함으로써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향후 14년 동안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라고 약조했다. 여왕이 자신들의 영지를 침탈한 것은 명백히 국제조약을 어긴 것이라며 사신이 성토했다. 하지만. “그대들은 더 이상 프랑크 제국에 복속하지 않고 있다. 허니 조약문을 위반할 것도 없지 않은가?” “무슨……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과인이 이미 프랑크에 의견을 물어보았네. 이것이 조약을 위반한 행위인지 아닌지 미리 양해를 구했지.” 툭, 하고 앙리에타 여왕이 사신에게 두루마리를 던졌다. 사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곳에는 여덟 대귀족의 영지는 전적으로 자치권이 보장된 독립국이며 프랑크는 이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노라고, 법무상 베르시 백작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방긋 웃었다. “보아하니 그대들의 영주는 과인에게 항복하든지 프랑크에 다시 칭신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모양이로군. 참. 과인에게 항복하면 내 잘 대해주겠어. 이래 봬도 우리는 한때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묶인 사이 아닌가?” 사신은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브르타뉴가 이번 반란에서 새로이 얻게 된 영토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00416 대륙을 조정하는 자 =========================================================================                        * * * “이야아, 두 분께서 참으로 잘해주셨습니다. 저도 감탄했습니다.” 내가 수정구를 향해서 말했다. 나는 엎드려 누워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 ……. 수정구에서 비추는 인물은 롱그위 성녀. 성녀님을 알현하기에는 내 자세가 적이 불경스러웠으나, 공식적인 접견이 아니었을뿐더러 나 말고 상대쪽도 포즈가 똑같았다. 성녀도 엎드려서 등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어라. 왠지 얼굴이 안 좋군요. 경사스럽게도 브르타뉴의 영토가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기뻐하셔도 괜찮을 텐데요.” ─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롱그위 성녀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성량이 어찌나 높은지 그만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죽을 뻔하다니?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롱그위 성녀가 발정난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 그 표정!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그 표정이 열받아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성녀의 명성은 다시 한번 치솟았고, 인민이 제 발로 영토를 갖다 바쳤습니다. 브르타뉴군은 피에몬테 지방에 무혈입성. 어딜 봐도 좋은 일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소인은 감사를 받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 제가 편형을 받았다구요! 얼마나 아팠는지 아세요!? 아아. 그 얘기였는가. 내가 드디어 감이 왔다는 표정을 짓자, 롱그위 성녀가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따져왔다. ─ 저는 채찍을 맞는 동안 아예 혼절해버렸어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같은 아녀자한테 편형을 맞으라고……믿을 수 없어요! 시끄럽다. 고작 스무 대 갖고 뭘 칭얼거리는가. 나는 무려 일흔 대나 맞아본 적도 있었다. 채찍질 몇 대 맞아서 영토를 늘렸으니 오히려 대단한 이득이었다. 어차피 포션을 왕창 써서 등에 흉터도 안 남았겠지.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아니냐.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에, 예에. 고결하시고 신성불가침하신 올빼미 성녀님의 피부를 상하게 해서 무척 송구스럽게 되었습니다. 저 단탈리안, 마음속 깊이 유감을 표명합니다.” ─ 당신,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리겠어요! “와아. 그거 참 무섭군요. 제가 어디 성녀님 때문에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 이이이익! 요즘 들어서 나를 죽이겠다는 양반이 부쩍 늘었군. 죄다 여자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하긴 나도 웬만하면 미녀의 손에 죽고 싶지, 꾀죄죄한 남정네한테 살해당하긴 싫었다. 예쁜 여자에게 죽으면 왠지 그것만으로도 천국에 갈 확률이 두 배는 높아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농담은 여기까지였다. 내가 어조를 바꾸었다. “슬슬 남부 귀족들도 기세가 꺾일 때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남부는 내전에 휩쓸리지 않았지요. 덕분에 시민들이 풍요롭습니다만, 그 반동으로 전쟁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이른바 일장일단이라는 물건이군요.” ─ ……실성하지 않는 이상 우리 브르타뉴군에 맞서지 않는다. 그런 뜻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선가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해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다. 용병이 모집되는 동안 브르타뉴군이 신나게 영지를 약탈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약해빠진 민병으로 천하의 브르타뉴군을 요격하기란 불가능했다. 남부 귀족들은 단단히 외통수에 몰렸다. “남부 귀족들은 십중팔구 프랑크의 신생 정부에 백기를 들 겁니다. 독립권을 포기하고 프랑크에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전쟁이 끝나니까요.” 조약에 의거해서 브르타뉴는 프랑크를 침범할 수 없었다. 남부 귀족들이 다시금 프랑크에 종속되면 그 순간부터 브르타뉴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남부 귀족들은 프랑크의 중앙에 빚을 지게 됩니다. 이게 중요하지요. 끄응.” 내가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데이지가 마사지를 멈추고 옆으로 물러섰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자, 데이지는 말없이 담뱃대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음. 마사지를 받고 난 다음에 빨아재끼는 이 한 모금이 참을 수 없이 맛있다는 말이지. ─ 아. “알겠습니까? 역할이 바뀌는 것입니다. 만약 남부 귀족들이 처음부터 중앙에 고개를 숙였다면, 빚을 지게 되는 쪽은 도리어 베르시 백작입니다. 충분히 독립을 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협조해준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사정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 ……그, 저기. “베르시 법무상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겠지요. 대귀족들의 힘이 약해지고, 중앙관료들에게 명망이 모여듭니다. 프랑크는 꽤나 괜찮은 나라가 될 겁니다.” ─ 자, 잠시만요. 궁중백. 수정구에서 비춘 롱그위 성녀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발갛게 물들었다. 시선을 애써 돌리면서 흠칫흠칫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 옷 좀 입으세요. 외간 여자한테 남사스럽게 그게 무슨 꼴인가요. 나는 마사지를 받는 도중이었으므로 당연히 상의와 하의를 입지 않았다. 헐렁한 천조각을 수건처럼 허리에 둘렀을 뿐이다. 아무래도 곱게 자라난 성녀께서는 남자의 맨살을 보는 것이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아?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썩을 대로 썩은 사람끼리 뭘 부끄러워 하십니까.” ─ 당신은 썩었을지 몰라도 저는 썩지 않았거든요. 롱그위 성녀가 내 눈길을 피했다.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날카로움이 부족했다. 나는 그 반응에서 본능적으로 어떤 진실을 잡아챘다. 마치 번개가 스치듯이 뇌리가 번쩍거렸다. 내가 입을 벌렸다. “설마…….” 나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꼈을까. 롱그위 성녀가 머뭇거렸다. ─ 뭐, 뭔가요. “설마, 성녀님. 그 나이가 되도록 처녀입니까.” ─ 지금 여자한테 뭘 물어보는 거예요!? 롱그위 성녀가 또 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틀림없었다. 초점이 흔들리는 눈동자, 창피함에 달아오른 뺨, 차마 치욕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까지, 모든 정황적 증거가 롱그위 성녀의 처녀성을 맹렬하게 증명했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수가. 정말 삼십 살이 될 때까지 남자 한 명 못 사귀어봤습니까? 진짜요? 인격에 심각한 결함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미모를 가졌으면서 대체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군요…….” ─ 설령, 만에 하나, 제가 평생 처녀를 지켰다고 해도 그게 제 인격을 손상시키지는 않아요! 롱그위 성녀가 암사자처럼 포효했다. ─ 당신처럼 제멋대로 하반신을 놀려대는 불한당은 모르겠지만, 본래 순결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에요! 당신보다 제가 저열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지 마세요! 당신이야말로 불결하니까! “불쌍하게도……그런 시대착오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자그마치 삼십 년 동안 삶의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는 말입니까……이제 늙는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나날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 그러니까 그렇게 안쓰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지 말라고요! 아테나이시여! 도대체 제가 왜 당신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그 따위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아니, 미안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동정하고 있었다. 이거 순 천연기념물이 아니고 뭔가. 생각해보니 내가 처녀를 만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데이지도 처녀이긴 했지만 아직 열다섯 살밖에 안 됐으니 성녀와는 비교가 불가했다. 나는 왠지 미안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성녀님이 그리 생각한다면야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불편한 주제를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사과하니까 꼭 제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잖아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제가 사과한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제가 배려심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군요. 처녀라니……세상에 그런 단어가 아직까지도 현존하는지 미처 까먹고 살았습니다.” ─ 정말로 죽여버리겠어! 롱그위 성녀가 울부짖었다. 나에게는 몹시 처량하고 슬픈 곡소리로 들리기만 했다. 이후, 나는 앙리에타 여왕과 이번 반란에 대해서 상의하며 넌지시 “성녀님한테 실한 남자 좀 소개시켜주십쇼” 하고 청탁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떨떠름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과인이 수십 번은 만남을 주선했어. 하지만 전부 퇴짜를 놓지 뭔가. “세상에. 얼마나 눈이 높길래 그런 답니까?” ─ 본인이 열두살 때부터 주장하기로는 백마 탄 왕자님 아니면 꽁냥거릴 의향이 없다더군. 순수하고 착한데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왕자님이어야 한다던가. “…….” ─ ……. “피에몬테 지방은 프랑크 중앙정부에 삼분지일을 넘겨주는 것으로 처리하지요. 아마 베르시 법무상이 직접 그쪽으로 협의하러 갈 테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그래. 과인도 동의하겠어.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다만 우리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동정심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이때부터 롱그위 성녀가 쓸데없이 화를 부려와도 무척이나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주어게 되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는 불치병이니 너그러워질 수밖에. * * * 1513년 1월 하순, 남부 대귀족들은 프랑크의 중앙 정부에 고개를 숙였다. 대귀족들은 베르시 법무상이 약조한 대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으나, 그들이 원래 만끽하고자 했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중앙 정부의 허가 없이는 군사를 동원하지 못했고, 타국과 외교적인 협약을 맺지 못했다. 이것과 동시에 브르타뉴군이 철수했다. 어디까지나 '프랑크와 브르타뉴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라는 르 아브르 조약을 준수한 것이었다. 더불어, 브르타뉴에 항복한 피에몬테 지방의 일부가 프랑크 중앙정부에 양도되었다. 기껏 반란을 성공시킨 사르데냐인들이 반발했지만, 여기서는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한몫 거들었다. 프랑크에 한 발자국 양보해준 대가로 아무런 유보 없이 피에몬테 출신의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켜주었다. 이로써 반란에 참여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사르데냐인은 자기네가 고분고분한 백성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브르타뉴는 거진 공짜나 다름없이 상당량의 영토를 얻었다. 베르시 법무상은 가만히 앉아서 남부 대귀족들을 휘어잡았다. 유일하게 대귀족들이 피해를 옴팡 뒤집어썼지만, 본디 세상이란 소수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법이었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그러게 애당초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 잘못이었다. 이번 반란을 계기로 프랑크는 공식적으로 '프랑크 섭정제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가의 권력을 인도받아서 섭정이 황제를 대신하여 국가행정을 통솔했는데, 이 섭정은 프랑크의 모든 도시의회 및 모든 영주귀족이 한 표씩 투표를 행사하여 선출하였다. 요컨대 도시민의 참여가 보장된 귀족공화정이었다. 공작, 백작, 남작, 계급을 가리지 않고 한 표씩. 영주귀족들은 평등을 약속받았다. 비록 일반 민중이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도시의회는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다.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공화정은 공화정이었다. 섭정은 종신직. 섭정이 죽었을 경우에만 새로운 섭정을 뽑았다. 베르시 법무상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프랑크를 통치하겠지. “…….” 나는 오랜만에 합스부르크 황궁에 들렸다. 황궁의 심처에는 파이몬이 안치되어 있었다. 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서 파이몬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되어 시체가 썩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한 나절을 보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00417 황금의 몰락 =========================================================================                        요새 나는 황궁의 안치소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파이몬을 위해서 지어진 이곳은 항상 조용했다. 매일 새벽마다 황궁 시녀가 꽃을 갈아주러 오는 것을 제외하면 들리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와서 깊은 생각에 빠지기에 딱 좋았다. 뭐, 대신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었지만……그건 무시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파이몬을 애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안치소에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제스처였다. 파이몬은 마계에서 가장 지지도가 높았던 마왕 중 한 사람이었고, 아직도 산악파에선 파이몬을 그리워했다. 파이몬의 죽음을 잊지 않고, 나 단탈리안이, 황궁에 올 때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안치소에서 보낸다. 그들이 보기에는 썩 기특한 행동거지가 아니겠는가. “역시 여기 있었네.” 누군가가 입구에서 걸어왔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자, 시트리가 그곳에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집무실에 들렸는데 없더라구. 딱 여기 있겠다 싶어서 왔어, 헤헤.” “여기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응, 맞아. 나도 그래. 자아.” 시트리는 오른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걸 건네받아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깜찍하게도 샌드위치 비슷한 간식이 예쁘장하게 담겨 있었다. 찐감자까지 앙증맞게 두 개가 들었다. “이거 진수성찬이군요!” “도, 도시락을 만들어봤어. 어차피 단탈리안도 점심 안 먹었을 테니까.” “시트리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요.” 내가 다소 과장스럽게 감탄했다. 시트리를 보면 한없이 마음이 울적해졌는데, 그걸 감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부산하게 떠들었다. 내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시트리가 헤벌레 웃었다. “요새 신부수업을 하고 있거든!” “신부수업이라니요?” “그동안 내가 너무 왈가닥처럼 다닌 것 같아서. 시녀들이나 선생들한테 막 배우고 있어. 헤헤.” “……그렇군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트리는 신부수업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지도자 교육이었다. 파이몬이 서거해버린 이상, 좋든 싫든 산악파를 이끄는 사람은 시트리가 되어주어야만 했다. 산악파에는 시트리보다 인망이 높은 마왕이 없었다. 본인이야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자칫 파이몬의 사후 공중분해 되어버릴 뻔한 산악파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도 시트리였다. 마계에 철두철미한 복수극을 펼침으로써 산악파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신부수업에서 뭐가 가장 어렵습니까?” “으응. 식사 예절이려나. 난 여태까지 편한 대로 음식을 먹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구. 칼 종류만 수십 개가 된다니까.” 시트리가 수업을 듣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처럼 툴툴거렸다. 보다시피, 시트리는 일반 교양이 상당히 뒤떨어졌다. 파이몬이 있었을 때는 시트리에게 교양도 뭣도 필요치 않았다. 시트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산악파가 자랑하는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산악파의 수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마계에서 유력자들이 접견을 청해올 때 맞이하는 것도, 평원파나 중립파와 정치적인 싸움을 벌이는 것도, 전부 시트리가 짊어져야 했다. 평생을 다만 전쟁터에서 한 자루의 검에 의지해서 살아온 그녀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군말없이 제왕학 교육을 받아들였다. 아니,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먼저 요청했다. “훌륭합니다, 시트리. 정말로 대단해요.” 내가 시트리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트리는 애완 강아지처럼 손길에 몸을 맡기고 더욱 더 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신기해. 단탈리안이 칭찬해줄 때마다 막 힘이 나.” “……만약 너무 힘들면 포기해도 좋습니다.” “으응, 단탈리안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걸.” 시트리는 파이몬의 죽음에서 도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바라보고 수용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산악파가 붕괴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파이몬이 남긴 유산을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이 있으니까 괜찮아.” “…….” “자아. 아앙.” 시트리가 샌드위치를 집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음.” 베이컨에다 토마토, 양상추가 들어갔다. 베이컨의 풍미에 아삭한 양상추가 씹혀서 딱 좋았다. 토마토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음식을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엿보였다. 어째서인지 인간들은 토마토를 '흡혈과(果)'라고 부르면서 식용으로 쓰지 않았다. 토마토가 붉은 이유가 사실은 땅속에서 시체의 피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라던가. 아직 미신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맛있어?” “예. 무척이나 맛있습니다.” “그, 그럼 이건 어때?” 시트리가 두 번째 샌드위치를 들었다. 바구니에 담긴 다른 샌드위치와 달리 그것만 모양이 어설펐다. 토마토는 삐죽 튀어나왔고 척 보기에도 베이컨이 지나치게 많았다. 오호라. 이래 봬도 나는 요 8년 동안 눈치밥 하나로 생존했다. 곧바로 진실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도시락을 만들어온 여자, 딱 하나만 모양이 엉망인 샌드위치. 그리고 시트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그랬는가. 생각해보니 제왕학 수업에서 테이블 매너는 또 모를까,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리가 없었다. 나는 마치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느긋하게 두 번째 샌드위치를 먹었다. “흐음.” 일부러 간을 보듯이 천천히 씹어먹었다. 일 초가 흐를수록 시트리의 표정이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나는 확신을 얻었다. “어, 어때……?” “맛있군요. 아니, 아까 전 것보다 훨씬 더 맛있습니다.” “정말!?” 시트리 얼굴이 활짝 만개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정성이 담겨 있다……예. 정성이 느껴집니다. 꼭 맛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가 뻔했다. 아마도 시트리는 오늘 처음으로 요리를 해보았겠지. 샌드위치 비슷한 간식을 만들어보는 것도 처음. 당연히 잘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시트리는 자신의 실력에 절망해서 황궁 요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손수 만든 요리를 내게 맛보여주겠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해서, 몰래 딱 하나, 자기가 만든 샌드위치를 숨겨두었다. 그게 유난히 못생긴 샌드위치였다. “아까 간식은 조금 기계적이고 지나치게 전문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약간 모양이 어설플 뿐이지 한결 편안합니다.” “헤, 헤헤……그래? 잘 됐다.”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면서 웃는 시트리. 후후. 이 정도 진실은 내 눈앞에서 손쉽게 밝혀지는 것이다. 우리는 잔뜩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간식을 먹었다. 찐감자를 입김으로 호호 불어서 식힌 다음에 반쪽으로 나누어서 내게 건네주는 시트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명화에 옮겨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금방 식사를 끝마치고 나는 시트리의 무릎에 누웠다. 시트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머리를 빗질해주었다. “시트리 님!” 그때 안치소 입구로 집사 차림의 호족(虎族)이 뛰어들었다. 집사가 다가오자, 포근하고 따뜻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시트리의 얼굴에서 상냥한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드러난 것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시트리는 살기가 담긴 눈동자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망자가 휴식하는 곳이야. 소리를 낮춰.” “죄, 죄송합니다……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집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기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집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마왕 벨리알을 포획했습니다. 지금 시트리 님의 집무실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좋아. 산악파의 동지들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집사와 대화하는 시트리의 목소리는 아까 전과 전혀 달랐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의 목소리가 그곳에 있었다. 시트리가 집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내 귀에 속삭였다. “단탈리안.”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내가 몸을 일으켰다. 시트리가 산악파를 재정비했다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더 이상 산악파에 희망이 없다면서 다른 파벌로 도망치려고 획책한 마왕도 있었다. 그것이 전(前) 서열 제68위의 마왕 벨리알이었다. 마왕 벨리알은 일전, 제8차 월맹군 초기에 바르바토스한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다. 마왕성이 인간군에 함락될 뻔한 것을 바르바토스가 구해주었다. 그 때문이겠지. 산악파가 조금 불안하다 싶으니 얼른 밧줄을 옮겨탔다. 그러나 어수룩했다. 시트리는 나의 조언에 따라서 산악파 마왕에 일일이 감시역을 붙여두었다. 하녀와 정원사, 마부, 하다못해 하인의 자식들을 매수하여 거미줄처럼 감시망을 펼쳤다. 마왕 벨리알이 제파르 형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정황이 곧바로 포착되었다.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이인자나 다름없었다. 이런 시기,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배신자로 치부되기에 딱 좋은 상황에서 상대 파벌의 이인자를 비밀리에 만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저는 시트리의 우군입니다.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어요.”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안치소를 빠져나와 시트리의 집무실로 향했다. 본래 시트리에겐 따로 집무실이 없었지만, 파이몬이 사용하던 집무실을 이제는 시트리가 쓰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방안에 산악파 마왕들이 전원 집결해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산악파 마왕들은 지금부터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는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시트리가 입장하자 마왕들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시트리 전하를 뵈옵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잘 모여주었어.” 시트리가 오른손을 들어서 예를 생략했다. 산악파 마왕들은 내가 따라온 것을 보고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딱히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파이몬이 죽었을 때 내가 보여준 눈물, 그리고 이후에 주기적으로 안치소에 들려서 묵념하는 것 등으로 인하여, 산악파 마왕들은 내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시, 시트리 님.” 집무실 한 가운데에는 마왕 벨리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팔이 뒤쪽으로 꽁꽁 묶였다. 벨리알은 시트리를 보자마자 애절하게 구걸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오해입니다. 저는 정말로 결백합니다. 제가 산악파를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 시트리는 곁눈질로 벨리알을 훑어보았을 따름이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눈길을 돌린 것은 벨리알이 아니라 다른 산악파 마왕들이었다. 시트리가 입술을 열었다. “우리는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어. 파이몬 언니는 죽었고, 평원파는 건재하지.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파이몬 언니한테 맡겨두었기에 이런 사태를 앞두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해. 솔직히,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우리가 당황해서 분열할수록 좋아할 사람은 따로 있어.” 시트리가 정확하게 누구라고 꼬집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평원파를 가리킨다는 걸 모르는 산악파 마왕은 없었다. “파이몬 언니의 장례식을 떠올려봐. 그놈들 중 아무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어. 단지 관 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리고, 그걸로 모든 예를 다했다는 것처럼 등을 돌려서 걸어나갔지. 한 명을 제외하고.” 시트리가 나에게 잠깐 시선을 돌렸다. 산악파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묻고 싶어.” “시트리 전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죽음 앞에서 예를 표하지도 못하는 녀석들에게 당해줄 수는 없습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열 명의 산악파 마왕이 차례를 돌아가면서 모두 찬동했다. 그럴수록 벨리알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럼, 우리 모두가 동의한 거네.” “전하! 제발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이,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결단코 아무런 짓도 한 적이――.” 벨리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트리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어들어 번개처럼 빠르게 휘둘렀다. 허공에 새빨간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화려한 황금색 카펫에 벨리알의 머리가 퉁, 하고 가볍게 떨어졌다. 곧이어 피가 카펫을 물들였다. 산악파 마왕들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트리가 검을 한 번 더 휘둘러서 칼날에서 핏물을 털어냈다. “배신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어.” “…….” “우리가, 우리 전원이, 파이몬 언니의 유산을 지키는 거야.”   00418 황금의 몰락 =========================================================================                        “…….” 좌중이 조용해졌다. 파이몬은 언제나 파벌을 너그러운 인망으로 이끌었다. 산악파 특유의 분위기, 느슨할지라도 넓은 연합이 형성되었다. 지금 시트리가 펼치는 정치는 정반대였다. 공포정치 내지는 협박에 의한 정치라고 봐야겠지……. 공포정치가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 자신만은 철퇴에서 안전하다는 확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더라도 나는 안전하다. 그와 같은 믿음이 부하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즉, '어떻게 하면 처벌을 받지 않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줌으로써 부하들이 잘 처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두 번째, 지금은 공포정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공감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므로 공포정치 따위는 차선……아니, 차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포정치가 통용되려면 상황이 그만큼 최악에 가깝다는 인식이 필요했다. 무자비하게 통치하지 않는 이상 멸망해버리고 만다, 하고. 그렇기에 배신자의 처단이었다. 배신자를 처형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명확한 기준을 주변에 제공했다. 배신하면 죽지만, 배신하지 않으면 안전하다. 이보다 깔끔한 기준이 달리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배신자가 나왔으니 산악파 마왕들은 현재 사태에 심각한 경각심을 지니겠지. ‘좋은 타이밍이었다.’ 말 그대로, 마왕 벨리알은 실로 적당한 타이밍에 배신해주었다.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정말로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 증거가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요는 정치적으로 필요했느냐. 이것만이 중요했다. 시트리의 지도력은 적어도 당분간 필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여러분. 저는 평원파에 발을 걸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공포정치의 핵심은 현재 상황을 최악에 가깝다라고 인식시키는 것. 어디까지나 최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말로 최악으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했다. 자제력을 잃고 폭주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어쩌면 평원파가 이번 기회에 우리를 말살하려 들지도 모른다.' 이 정도 인식이 딱 좋았다. '평원파가 우리를 말살하고 있다!'라는 인식이 되어버리면 난감했다. 산악파 마왕들은 멸망하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보자며 폭주하겠지. 누군가가 인식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유지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벨리알은 저희 평원파의 마왕 제파르를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평원파 내부에서 산악파를 분열시키려는 생각을 가진 마왕들이 일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탈리안. 안타깝지만 당신도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않소.” 흰 수염이 덮수룩하게 자란 노신사가 말했다. 전 서열 제21위, 말발굽의 마왕이라 불리는 모락스였다. 마르바스가 타고난 미모를 유지하며 지긋하게 늙었다면, 모락스는 얼굴 이곳저곳에 검버섯이 난 채 노인이 되었다. “당신 역시 평원파요. 단순히 그쪽 파벌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토스가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남성이지. 만약 평원파에 정말로 우리 산악파의 내분을 획책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면 간부 중의 간부인 당신이 몰랐을 리 만무하오.” 노신사의 지적에 산악파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질책하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 한번 해명해보라는 분위기였다. 꽤나 정중했다.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평원파 내부에서 제 발언력은 생각보다 보잘것없습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구려. 그대가 평원파의 실세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소.” “저에 대해서 무척 잘 아시는군요.” “파이몬 전하께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면전에서 파이몬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였다. 길게 침묵할 것까진 없었다. 5초에서 6초. 그 정도만 침묵해도 충분히 주변에 제스처를 전달할 수 있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시간을 잰 다음 입을 열었다. “모락스 님. 제 권력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노구가 아는 대로 대답해보자면, 바르바토스의 총애에서 비롯한다오.” “정확하게는 세 사람의 총애에서 비롯했습니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그리고 파이몬.” 내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내비치는 몸짓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파이몬한테 심각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생각했으며, 나는 그런 착각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싶었다. “저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생합니다. 그건 바로 파벌들 사이의 균형입니다. 산악파든 중립파든 평원파든, 서로가 서로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순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제 역할이 빛을 발합니다. 달리 말해, 파벌들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저 따위는 필요가 없어집니다…….” “겸손이 지나친 것 아니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뿐입니다.” 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건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현 시대가 황금의 균형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 붕괴되는 것은 저에게 있어 최악의 사태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평원파에서 균형을 파괴하고자 획책하는 무리가 있다면, 여러분. 그들이야말로 저의 적입니다.” 노인이 가늘게 눈을 떠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살이 거무튀튀하게 주름져 있었다. “무슨 방도를 가지고 계시오?” “저는 제파르 형님과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그분에게 벨리알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방법이 아닌지.” “저는 제 방법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믿음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께서 알아주셔야 할 점은, 저에게 영원한 믿음을 건네주실 필요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해가 일치할 때만 저를 조건부로 신뢰해주십시오.” “…….”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마왕들의 시선이 시트리에게 모여들었다. 우두머리가 결정하는 바에 따르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시트리는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았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둘게. 나는 단탈리안을 사랑해.” “…….” “하지만 내 사적인 관계와 우리 파벌의 일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산악파 마왕들의 표정이 변했다.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집무실 안의 공기가 약간 술렁거렸지만, 시트리는 변함없이 차가운 어조로 말해나갔다. “나는 사적인 관계를 앞세워서 우리 파벌의 대소사를 결정하지 않을 거야. 당연하잖아. 산악파는 내 것이 아니야. 파이몬 언니가 피땀을 흘려서 일궈낸, 우리의 장소야. 나는 언니의 기억과 흔적이 남은 이곳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시트리 전하…….” “그러니까 모두가 결정하자. 비록 파이몬 언니는 지금 여기에 없지만……언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면서.” 일편단심만큼 사람을 쉽게 감동시키는 것은 없었다. 시트리가 얼마나 파이몬을 사랑했는지는 마계의 꼬맹이조차 알았다. 정치판에서 상대방을 의심하는 게 기본이라지만 시트리의 연심은 믿어도 좋았다. 그 순수성이 마왕들의 마음을 움직였겠지. “저는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단탈리안은 확실히 교섭역에 어울립니다. 우리가 손해를 볼 일도 전혀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줄줄이 찬동을 밝혔다. 마지막에 가서 모락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반대하고 싶을지라도 여기서 시트리에게 반항하는 건 하책.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느니 일단 시트리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올바른 판단이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집사처럼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부여받은 역할을 다시 확인하고자 합니다. 저는 평원파에 정말로 이쪽을 분열시키려는 무리가 있는지 알아내고, 황금의 균형이 붕괴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합니다. 이것이 제 역할이 맞습니까?” “그렇소.” 마왕들이 동의했다. 나는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끝까지 한번도 시트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제파르 형님에게 배정된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 * * 황궁은 크게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었다. 이중에서 동관은 평원파에, 서관은 산악파에 배정되었다. 중앙에 가까운 구역은 중립파와 무소속 마왕이 차지했다. 알기 쉬운 배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궁은 본래 볼품이 없었다. 전 황제, 그러니까 엘리자베트와 루돌프의 아비가 역사상 낭비벽이 가장 심한 군주였다. 틈만 나면 궁전을 개축하려 들었지만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게다가 엘리자베트가 월맹군 전쟁 때 수도를 불태우고 파천하면서 황궁의 상당 부분을 해체해서――그렇다, 값나가는 장식이나 조각상은 죄다 떼서 옮겨버렸다! 알고 보면 엘리자베트 통령도 엄청난 구두쇠다――가져간 탓에 몰골까지 꾀죄죄했다. 지금은 규모가 달라졌다. 기본 골자를 토대로 마계에서 불러들인 고블린과 난쟁이 장인들이 대대적으로 공사를 벌였다. 크기가 몇 배나 뻥튀기되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소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덕분에 나는 산악파가 위치한 서관에서 평원파가 위치한 동관까지 꼬박 수십 분을 걸어가야 했다. “어서 오게나.” 제파르 형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얼굴은 여느 때처럼 근엄했지만 목소리에 다정함이 살짝 서려 있었다. 제파르 형님은 작업 중인 서류를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요새 아우를 자주 봐서 나쁘지 않군.” “영지를 돌보시는 것이 힘든 모양입니다.” “솔직히 브르타뉴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주 약간 쉬운 정도라네.” 우리가 작게 웃었다. 약간 잡담을 나눈 뒤에 제파르 형님이 집무실에서 하인들을 물렸다. 내가 표정을 진지하게 고쳐서 말했다. “형님. 지금부터 형님에게 드릴 말씀은 당분간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주셔야 합니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이 곧바로 심각해졌다. 그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진지해질 수 있는 남자였다. “심각한 일이 발생했군. 안 그런가.” “예. 마왕 벨리알이 조금 전에 숙청당했습니다.” “…….” 제파르 형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커진 상태에 머물다가 천천히 눈꺼풀에 감겼다. 제파르 형님이 집게손가락으로 콧대를 짚었다. “……숙청이라는 것은?” “아마도 시트리가 벨리알의 목을 직접 베었습니다. 산악파 마왕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원 시트리의 집무실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파르 형님이 눈을 감은 채로 한숨을 쉬었다. “일이 요란하게 번져버렸군.” “아니, 생각보다 심각한 사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트리가 저에게 교섭을 요청했습니다.” “교섭?” “산악파에서는 마왕 벨리알이 자기네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형님과 비밀리에 접견을 가졌다고…….” 제파르 형님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군. 지금 상황에서, 이런 시기에, 벨리알과 같은 애송이를 받아들여봤자 좋을 것이 어디 있는가. 괜한 분쟁을 일으킬 뿐이겠지.” “산악파들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제파르 형님의 생각대로 그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걱정하는 것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이건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 “무슨 소리인가?” “형님은 원래 벨리알과 만나는 걸 주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형님께 벨리알을 만나라고 조언한 것이 바로 저입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저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마왕 벨리알은 '실로 적당한 타이밍'에 배신해주었다.   00419 황금의 몰락 =========================================================================                        “아니. 말 그대로 아우는 단지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네.” 나는 시선을 들어서 제파르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조언자에게 책임을 떠넘길 인물로 비추는가. 결정을 한 사람은 나다.” 물론 그럴 인물이 아니므로 제파르 형님을 이용했다. 벨레드 형님이라면 ‘음, 조언을 한 당사자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지’ 하고 나 몰라라 룰루랄라 도망쳐버릴 것이 뻔했다. 오히려 내 실패를 껄껄거리며 비웃겠지. 그래서야 곤란했다. 이번에는 다소 고지식하게 귀족적인 제파르 형님의 성격이 필요했다.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 “자아. 책임을 운운하기 전에 대책부터 세워보도록 하세. 자네가 좋은 대책을 세워서 사태를 무마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지는 자세일 터.” 제파르 형님이 내 말을 끊었다. 회색 턱수염에 단호함마저 서린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한층 깊숙하게 숙임으로써 예를 표했다. 내 머리 위로 제파르 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는 단탈리안이라는 사람은 한두 개의 해결책도 장비하지 않은 채 사과를 구하러오는 남자가 아니다. 아우. 혹시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을 잘못 관리했는가.” “……이번 사태에서 입증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일단 입을 연 다음에는 또박또박,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현재 산악파는 신경이 지극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산악파 측에서는 마왕 벨리알이 배신했다는 증거도 증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형님과 접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벨리알을 주살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산악파는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겠지요.” “으음.” 제파르 형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산악파 전체가 예민해진 것인가, 아니면 시트리가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인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트리를 중심으로 남은 산악파 마왕들이 빈틈없이 뭉친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마 이번에 벨리알을 공동으로 처리한 것도…….” “파벌 전체에서 경각심을 공유하기 위해서인가…….” “예. 그런 의도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제파르 형님이 낮게 신음했다. “얕보았군. 시트리에게 이 정도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을 줄이야.” “정치감각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깝겠지요. 위험을 느끼니 과도하게 이빨을 드러내서 주변을 위협합니다. 그 본성은 상처를 입어버린 짐승입니다. 하지만 시의적절하게, 지금의 산악파에는 시트리처럼 앞에 나서주는 우두머리가 필요했을 테지요.” “상처 입은 짐승이라……. 성가시기 그지없군.” 제파르 형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시트리가 벨리알을 처단한 것은 내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제파르 형님에게 진실을 알려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만일 정치감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타협할 여지가 넓어진다. 그렇지만 본능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면 곤란하다. 시선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밖에 보지 못하지…….” “시트리가 저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입니다. 본래라면 벨리알을 죽이자마자 우리 평원파에 최후통첩을 날렸겠지요. 제가 적어도 다리의 역할을 해낼 수는 있을 겁니다.” “아아.” 제파르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정확히 산악파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저들은 일부 평원파가 산악파에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착각하고 있습니다. 당장 일부의 주동자를 찾아내서 공개적으로 사과시켜라. 그것이 산악파의 요구입니다.” 제파르 형님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 일부가 설마 나를 가리키는가?” “정확하게는 바르바토스 전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뭐라?” 내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파르 형님이 바르바토스 전하의 수족이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알고 있습니다. 제파르 형님이 움직였다는 것은 틀림없이 배후에 바르바토스 전하가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터무니없는 오해를!” 드디어 제파르 형님의 어조에서 열기가 발생했다. 매사에 침착하고 냉정한 제파르 형님이었지만, 유일하게 바르바토스가 관련되면 마음이 들떠지는 면모가 있었다. 한점의 흐릿함이 없는 충성심이라고 할까. 충성심 덕분에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공동이인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장점이란 으레 시점만 바꾸면 간단하게 단점이 되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단탈리안. 설마 저들이 구태여 일부를 강조한 이유는.” “예. 바르바토스 전하의 직접적인 사과를 얻어내기란 힘들다고 판단했겠지요. 우리 평원파에 바르바토스 전하는 정신적 지주입니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부'라고 조건을 붙인 것입니다.”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마 바르바토스의 사과까지는 요구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알아서 희생양을 만들어라. 산악파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우리 체면을 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바보 같은…….” “형님. 산악파는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제 제파르 형님도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를 대신해서 사과할 인물이라면 벨레드 형님이나 제파르 형님뿐이었다. 이번 사건에 벨레드 형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즉, 입장상 제파르 형님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아니면……. “왜 제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드렸는지 알아주십시오.” 평원파의 최고참모이자 바르바토스의 애인인 나 단탈리안밖에 없었다. “형님께선 이번 사건에 아무런 책임도, 단 한 부분의 잘못이라도 차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형님께 조언했습니다. 제가 원인입니다. 그러니 제가 산악파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겠습니다.” “잠깐. 자네의 정치적인 입장은 어떡하고?” 제파르 형님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 “형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대로 바르바토스 전하께 가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단지 형님에게 먼저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기에 여기 왔을 뿐입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방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나는 나의 연기에 완벽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면서 걸음걸이를 셌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거기 멈추게.” 내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 제파르 형님이 양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일어서 있었다. 제파르 형님은 약간 허리가 굽어진 자세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거운 아우라가 형님을 둘러쌌다. 마치 중력이 형님의 몸만 주위보다 강하게 짓누르는 것처럼. “나는 자네에게 해결책을 요구했지, 책임을 지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아우는 우리 평원파와 산악파를 유일하게 이어주는 가교일세. 아니, 마왕군 전체를 한 장소에 모이게 해주는 통로이지. 자네가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주변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면 누가 통로 역할을 대신해주는가?” 내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마르바스가 충분히 대신해줄 것입니다.” “마르바스는 훌륭한 중재자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이미 한 파벌의 수장이다. 양지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음지에서 각 파벌의 의견을 몰래 조정하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어디 부정해볼 테면 부정해보게.” “…….” “단탈리안.” 제파르 형님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보았다. “마왕군에는 자네가 필요하다.” “…….” “시트리는 이성을 잃은 상태일 텐데도 자네에게 의지했다네. 벌써 이것 자체만으로도 아우는 누구보다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시트리뿐만이 아니야.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도, 가미긴도, 마르바스도, 중요한 위기 상황에서는 자네에게 교섭을 맡기겠지. 그건 나에게는 없는 재능이다.” 제파르 형님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확신을 얻었는지 턱을 한 차례 끄덕였다. “산악파에 공식으로 사과하는 역할은 내가 맡겠다.” “안 됩니다, 형님!” “나를 우습게 보지 말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야.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내가 나서는 것이 가장 피해가 적어.” 제파르 형님이 입꼬리를 슬쩍 들었다. “나는 평생을 전장에서 지내온 군인에 불과하다. 솔직히, 나에게 맡겨진 영지를 통치하는 것조차 골치가 아프다. 이제 와서 정치적인 입지가 줄어든다고 해봤자 아무런 타격이 없다.” “하! 정치적인 입지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제파르 형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마도 내 얼굴은 명백하게 분노로 일그러져 있으리라. “누가 실수를 저질렀고 누가 책임을 지느냐의 문제입니다! 방금 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제 눈에 형님이 조언자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인물로 비추느냐고요.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형님한테 저의 책임을 떠넘길 만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나는 자네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네.” 내가 코앞까지 다가와서 눈을 부라렸건만 제파르 형님은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아우는 언제 어디서나 냉정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해내지. 하지만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용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네는, 파이몬이 죽은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어.” “무슨……파이몬은 지금 얘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자네는 파이몬의 죽음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번에 산악파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 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있다. 파이몬에게 속죄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에게 벌을 내리려는 것이지.” 나는 한 순간이지만 숨을 멈추었다. 그 틈새에 제파르 형님은 오른손을 들어서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단탈리안. 자네는 아무것도 속죄하지 않아도 좋다.” “넘겨짚지 마십시오……근거 없는 추리입니다. 잘못을 범한 자가 책임을 지는 것뿐입니다. 속죄고 뭐고 거창한 이야기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는 내 안목이 어설프다는 얘기이다.” “각하!” 제파르 형님이 입가를 움직여서 작게 웃었다. “자네에게 각하라고 불린 것도 오랜만이군.” 그때, 형님이 오른손을 들어서 내 목을 가격했다. 분명히 오러가 담긴 일격이었다. 나는 컥, 하고 볼품없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이 꺾어졌다. 마치 뇌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눈앞이 순식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서 입을 열었다. “어리, 석은…….” 그러나 간신히 한 마디가 나왔을 따름이다. 더 이상 문장을 잇지 못했다. 빠져나가는 정신을 붙드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저 멀리서 제파르 형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르바토스 각하의 유일무이한 남자 연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라니. 대체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아우는 나를 불귀의 객으로 만들고 싶어서 작정했는가. 자네는 조금 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제파르 형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곧이어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졌다. 발소리가 멀어졌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걸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사라졌다. 나는 계획을 충실하게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 마음을 놓고 기절했다…….   00420 황금의 몰락 =========================================================================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에 어둑했다. “…….” 나는 제파르 형님의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창문이 슬그머니 열린 틈새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멍하게 새들이 밤하늘에 울려보내는 소리를 들었다. 꼭 청각이 의식의 전부를 차지한 것 같았다. “끄으응.” 점차 시각과 촉각이 청각을 밀어냈다. 우선 뺨이 꺼끌꺼끌했다. 카펫에다 얼굴을 처박고 기절해버린 탓인지 빰에 자국이 잔뜩 눌렸다. 나는 오른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이쯤에 와서야 처음으로 머릿속에 생각이라 할 만한 것이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 시나리오였다. 그 단어를 떠올리자, 마치 하나의 낚싯줄에 물고기가 여러 마리 매달려서 튀어오르는 것처럼 곧바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산악파. 시트리. 평원파. 바르바토스. 내분과 선동――. 희생양. 제파르 형님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리겠다는 계획. 그것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서둘러 확인해야만 했다. 나는 품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눈가가 쾡쾡했다. 머리가 엉망이었다. 이런 몰골로는 시골 처녀조차 꼬시지 못하겠지. 하지만 엉망인 정도가 딱 좋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엉망일 필요가 있었다. 나의 각본은 간단하면서 효율적이었다. 먼저, 산악파가 똘똘 뭉치도록 배신자 벨리알을 처단한다. 이건 자칫 파이몬의 죽음으로 인해 산악파가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다음으로, 평원파에서는 제파르 형님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제파르 형님은 평원파의 한쪽 날개다. 형님이 무너지는 것은 그 자체로 평원파의 정치세력이 약화되는 걸 의미한다. 산악파의 힘은 강화한다. 평원파의 입지는 좁힌다. 그리하여 다시금 마왕군에 새로운 균형을 마련한다……. 다만 제파르 형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산악파는 파이몬을 잃어버렸다. 꼬리나 양팔 따위가 아니라 머리통 자체가 잘린 셈이었다. 제파르 형님에게서 정치적인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균형이 맞지 않았다. “좋아.” 나는 손거울을 집어 넣었다. 산악파가 머리를 잃었다면, 마찬가지로 평원파 역시 머리를 잃어야 했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게임을 시작하자……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는 그녀가 경계선을 넘어버린 것에 대해 스스로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었다. * * * 바르바토스는 본인의 침실이 아니라 황궁 뒷정원에 있었다. 그녀는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초점이 불분명한 눈길로 정원의 연못을 바라보았다. 내가 발소리를 내면서 다가서자, 바르바토스는 슬쩍 이쪽을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요즘 얼굴 보기 어려운 분께서 오셨군.” 바르바토스가 재미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구한 날 안치소에서 다른 여자랑 데이트를 즐기는 신사께서 말이야, 오늘은 허파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옛 애인을 찾아오셨는지 모르겠네. 드디어 시체와는 떡을 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으려나.” “나는 바르바토스. 너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치고 술잔을 약하게 흔들었다. “헤에, 그거 신기하네. 지금까지 나는 내 이름이 바르바토스인 줄 알고 살았거든. 이천 년이 넘도록.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던 거라면 부디 수정해주기를 바라겠어.” “평원파의 수장이자 제국의 섭정을 보러 온 거다.” “…….” 바르바토스가 나를 노려보았다. 황금색 눈동자는 명백히 피로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움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전부야? 꼬박 한 달 만에 겨우 찾아와서 하는 소리가 그거야?” “바르바토스. 나는 딱히 너를 피한 게 아니야. 가미긴도 만나지 않았어.” “하. 감히 그 정신병자 젖탱이랑 나를 비교하지 마.” 바르바토스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애당초 네가 가미긴한테 애정을 갖고 있기나 해?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따먹은 거잖아, 개자식아. 진심으로 그런 년을 나와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거야?” “…….”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이몬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항상 만날 때마다 싸웠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해서 결국에는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다보니, 이제는 눈짓 하나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거진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네가 제일이라는 걸 다시 증명해주기를 바라는 거냐.” 내가 입술을 열었다. “파이몬으로는 아직 부족해? 가미긴도 죽여야 성이 풀리겠나. 이참에 시트리도 죽여서 아예 너만 바라보고 사는 남자가 되어줄까? 그게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것이냐.” “나한테, 그딴 식으로 지껄이지 마.” “오오. 당연히 공손하게 말씀을 올려야지요, 바르바토스 각하. 각하께서는 평원파의 위대하신 우두머리이시고 저는 각하가 아니었다면 밑바닥 시궁창에서 해매었을 놈이니까요.”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존댓말을 써드릴까요? 그러는 편이 각하의 마음에 드십니까? 죄송합니다. 각하의 귓구멍이 이토록 상처에 약하실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깨물었다. 이건 그래도 양반이었다. 서로 손찌검이 오가고 고함을 질러대는 날도 심심찮게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품위는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다.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정치적인 이야기만 나누자.” “……좋아. 어디 한번 말해봐, 궁중백.” “제파르 대장에게 사과를 시키면 안 돼.”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를 찾아가서 이번 사태에 대해 설명했겠지. 자신이 부주의하게 실수를 범한 탓에 쓸데없이 산악파를 자극했다고, 그러니 책임을 지고 산악파에 사과하겠노라고 말했으리라. 하지만 벨리알을 만나라고 조언한 사람이 나라든지, 내 조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든지, 나와 관련된 사항은 죄다 빼버리고 설명했을 거다. 형님은 이번 일을 자기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니 바르바토스 입장에서는 내가 이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수상쩍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엔 제파르 형님이 '전부 제가 멋대로 몰래 진행해서 생겨난 사고입니다'라고 보고했을 터인데, 지금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제파르 대장한테 벨리알을 접견하라고 부추긴 사람이 나야.” “뭐?”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바르바토스. 여태껏 제파르 대장이 너한테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파벌의 중대사를 결정한 적이 있었는지. 대장은 언제나 네 명령에 따라 움직여. 단, 예외가 있다면…….” “네가 조언한 경우이지. 개자식.”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어. 속셈이 뭐야.” “산악파에 경각심을 불어넣으려고 했지.” “경각심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각심?” 내가 한숨을 쉬었다. “시트리가 마계에서 벌인 학살극을 봐라. 시트리는 지금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흥분하고 있어. 만약 이런 상황에서 산악파가 급속하게 붕괴되면 시트리는 다시 한번 충동적으로 반응하겠지. 최악의 경우, 내전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 “일종의 충격요법이 필요했어. 이대로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파벌을 갈아타는 배신자가 나오겠구나, 하고. 벨리알은 산악파 중에서도 가장 허약한 송사리니까 딱 적당히 경각심만 심어주기에 제격이다……그렇게 판단했다.” 여기서 내 목소리가 한층 어두워졌다. “실상은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뭐가 문제였는데?” “시트리다. 시트리가 예민해진 정도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시트리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벨리알이 제파르 형님을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만날 쯤에 가서야 반응해야 옳았다. 그런데 시트리는 고작 딱 한 번 형님을 만났다는 이유로 벨리알을 죽여버렸지. 도저히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야…….” 바르바토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 “흥, 어차피 파이몬이 아니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파벌이 산악파야. 조무래기 녀석들이 오들방절을 떨어대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서?” “그렇기에 더더욱 제파르 대장이 사과를 하면 안 된다.” 내가 똑바로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제파르 대장이 아무리 혼자서 일을 진행시켰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 대장이 네 심복 중의 심복이라는 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니까. 대장의 배후에 사실 네가 있었다고 모두가 생각할 거다. 심지어 우리와 같은 평원파조차.” “…….” “그렇게 되면, 바르바토스. 너는 네 자신의 잘못을 자기 부하한테 덮어씌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산악파에게는 비웃음을, 중립파에게는 경멸을, 우리 평원파에겐 실망감을 안겨주게 돼.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되니까 안 된다고?”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사과는 누가 하고? 나쁜 건 벨리알이었고 우리 평원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라고 그냥 생까버려? 시트리 그 미친년이 납득해줄 것 같지가 않은데.” “제파르 대장이 사과해서도 안 되고, 네가 사과해서도 안 되고, 사과를 아예 안 해서도 안 돼.”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산악파에게는 내가 사죄한다.” “……하?” “나는 제파르 대장과 달라. 굳이 너의 명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혼자서 움직일 만한 사람이라는 걸, 거의 모든 마왕이 알고 있어. 내가 사과하더라도 바르바토스 너한테까지 혐의가 옮겨갈 가능성은 적다.” 바르바토스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지만 나는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나는 대외적으로 평원파의 이인자로 통용되고 있어. 내가 고개를 숙이면 산악파도 수긍할 수밖에 없어. 어느 쪽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맞이할 거다.” “야, 잠깐만. 시발, 잠깐 기다려봐.” 바르바토스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겁나게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면……내 얼굴에 먹칠하느니 차라리 네가 된통 뒤집어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착각하지 마, 바르바토스. 너를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내가 차갑게 단언했다. “애당초 내가 제파르 대장에게 잘못된 조언을 올린 것이 사건의 원인이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해. 제파르 대장은 자기가 희생하면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틀려도 크게 틀린 판단이지.” “아니…….” “내가 고개를 숙여봤자 피해를 보는 건 나 하나다. 반면에 네가 고개를 숙이면 평원파 전체가 피해를 본다. 우리 둘 중에 누가 사과의 자리에 올라야 할지는 불 보듯 뻔해.” 바르바토스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보라고……이 멍청아. 그야 네가 단독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는 마왕도 있겠지만, 보통은 우리 파벌이랑 관련된 일이니까 나와 상의한 다음에 진행했다고 생각할 거 아냐. 앙?” 바르바토스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럼, 시발. 나는 내가 책임을 지는 대신에……애인한테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천하의 개쌍년이 되어버리는데? 제파르한테 떠넘기는 거나 너한테 떠넘기는 거나 차이점이 대체 뭐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다.” 내 입에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연루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변에 심어줄 테니. 너는 이번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얌전히 빠져.” “얌전히 빠지라고……?” 바르바토스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는 시선에 응수해주지 않았다. 대신에 등을 돌려서 정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꾸욱, 하고. 작은 손바닥이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지랄하지 마, 단탈리안. 기다려.”   00421 황금의 몰락 =========================================================================                        바르바토스의 손바닥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단탈리안 너,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는 거지.” 내가 상체만 비스듬하게 돌려서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내 몸을 놔줄 생각이 없는 것일까. 바르바토스는 계속 손목을 쥐어잡은 채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키 차이 때문에 그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모른 체라니. 무엇을?” “그냥 이참에 산악파를 흡수해버려도 되잖아.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지. 제파르가 고개를 숙일 필요도, 네 자식이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 파이몬 년이 남긴 유산을 이번 기회에 모조리 지워버리면 만사형통이야.” 사자와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산악파 녀석들이 지금 죄다 여기 황궁에 모여 있다고? 잘 됐어. 좋은 기회야. 한번에 싸그리 청소해버릴 수 있겠네.” “……제정신이냐, 바르바토스.” 나는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상대쪽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사과 한 마디다. 네가 직접 사과할 필요도 없어. 그저 내가 고개를 숙이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도 안전하게 끝난다. 그런데 기어코, 머리 하나 숙이는 게 어려워서,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냐?”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제파르도 잘못하지 않았고, 너도 잘못하지 않았고, 그리고 시발 나도 잘못한 게 없어. 단탈리안. 저 개 같은 불씹장이한테 왜 사과를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바르바토스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게 정치란 거다.” “정치는 최소한 대등해 보이는 사람들끼리 성립하는 수단이지. 나는 가장 강력한 마왕이야.” 내 손목을 휘어잡은 바르바토스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우리에게 정치는 필요하지 않아.” “…….” “내가 여태까지 산악파를 짓밟지 못하고 내버려둔 이유는 하나뿐이야. 파이몬 년이 마족들에게 인기가 많았거든. 원래 창녀처럼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여자에게 사람들은 홀리기 마련이지. 하지만 이제 파이몬은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시트리는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지 증명했지. 자그마치 십만 명의 마족을, 아무런 죄도 없는 백성을 학살했다고. 자기네 파벌의 생명줄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스스로 마족을 죽여댔어. 어리석은 년…….” “덕택에 산악파는 하나로 단결되었다.” “허약해빠진 것들이 하나로 뭉쳐봤자 지나가던 똥개도 두려워하지 않아.” 실제로 바르바토스는 정확한 지점을 타격하고 있었다. 시트리가 공포로 군림해준 덕에 산악파는 지금처럼 위급한 시기에도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의 지지였다. 현재 마족들은 파이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감히 파이몬 전하를 암살한 마계 대공들은 사지를 갈갈이 찢어도 시원치 않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트리가 자행한 학살극, 대공과 같은 지배자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까지 쓸어버린 대규모 범죄에 대해서는……당연하게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피투성이 시트리. 그것이 시트리에게 새롭게 붙은 별명이었다. 다만 아무도 소리 높여 비난하지 못했다. 비난하고 싶어도 비난하지 못했다.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들이 간단하게 죽어버렸다. 십만 명의 백성이 열흘 남짓하는 기간에 매장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트리에게 욕설을 날릴 만큼 대담한 마족은,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지하에 파묻혔으니까.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시트리는 제 손으로 무덤을 파고 있어.” 마족이 아니라 마왕이라면. 유일하게 마왕에게 대항할 수 있는 동족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시트리를 비난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고한 마인을 십만 명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허용한계를 뛰어넘었어. 그런데 이제는 자기 파벌인 벨리알까지 숙청했지. 단탈리안, 이 멍청아. 이런 때 우리가 고개를 숙이면 안 돼. 이건 기회야.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바르바토스의 말이 옳았다. 만일 산악파를 없애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선사한 기회였다. 우두머리인 파이몬이 암살되었으며, 새롭게 수장으로 등극한 시트리는 인망을 잃어버렸고, 반면에 평원파는 굳건하게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평원파에게는 산악파를 추락시킬 명분과 실력이 갖추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걸 지적하지 않은 까닭은……. “파이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마, 단탈리안.” “…….” “네가 이제 와서 산악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고 해봤자 꼬락서니가 우스워질 뿐이야. 왜? 시트리가 미쳐버리니까 불쌍해지기라도 했어? 갑자기 이게 전부 너의 잘못인 것 같아서 자괴심이라도 들었냐?” 바르바토스가 비웃었다. “웃기지 마. 동정심이나 자책감 같은 싸구려 감정은 개돼지한테나 어울리는 사료야. 영혼에 군살을 늘리는 것 이외에 쓰잘데기라곤 어디에도 없지. 네가 이렇게 물렁하게 나올 거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파이몬을 죽이지 말고――.” 바르바토스는 내 손을 잡아 끌어서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나를 죽였어야지. 날 선택하는 대신에 파이몬 그년을 선택해야 됐어. 하지만, 단탈리안 멍청아. 너는 나를 골랐어. 영원히 선택의 몫을 짊어져야 한다고!” 바르바토스가 내 뺨을 쳤다. 강하게 친 것이 아니었다. 고개가 약간 돌아갈 정도로 강도가 낮았다. 육체보다는 정신을 때리는 듯한, 그런 손짓이었다. “어설프게 나오지 마. 끝까지 독해져. 이건 네가 말한 대로 단순한 정치야. 그리고 정치의 본질은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는 거야! 파이몬이 사라진 산악파에는 아무런 명분도 쓸모도 없어! 도대체, 명분도 쓸모도 없는 약자를 우리가 왜 살려둬야 하는데!”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내 손목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의 시선만큼은 시종일관 내 몸을 옭매었다. 그것이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결정했어. 제파르가 보고할 때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지만, 네가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준 덕택에 마음이 바로 섰어. 아아, 그래. 이참에 마왕군을 갉아먹는 구더기들을 갈아버릴 거야.” “무모해. 산악파에 무투파가 거의 없다 하더라도 시트리가 있어.” “하, 입은 삐뚫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 시트리 년을 빼면 아무도 없는 거지. 그년이 벨레드랑 제파르 그리고 나를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십 분이라도 버티면 대단한 기적이겠는걸.”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잠시 휴지(休止)를 두고 말했다. “……평원파가 독주하는 걸 다른 마왕들이 방관할 리 없어. 당장에 마르바스를 봐라. 누구보다도 상식적인 교양인이 이번 학살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도, 지금 산악파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트리가 벨리알을 죽였다는 정보를 넘겨주겠어.” 바르바토스가 즉답했다.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얘기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미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홀로 정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숙고했겠지. 그렇게 바르바토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마르바스 영감탱이가 두려워하는 건 파벌의 붕괴 그 자체가 아니야.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지. 만약 시트리 년이 제어 불가능한 수준으로 날뛰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영감탱이는 다소의 출혈을 각오해서라도 시트리를 배제시킬 거야.” 그것 역시 사실이었다. 시트리가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지어 공포정치를 지속하기 위해 같은 파벌의 마왕까지 망설임 없이 죽였다고 하면, 마르바스 역시 심각하게 산악파의 해산을 노릴 것이었다. “산악파 마왕을 죄다 죽여버릴 필요도 없어. 어차피 지들을 이끌어주는 우두머리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찌질이들이야. 시트리만 없애버리면 알아서 기어다니겠지. 뭣하면 그놈들 전부 중립파에 들어가도 상관없어.” “…….” “그리고, 단탈리안. 십만 명의 마인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어.” 바르바토스가 음울하게 말했다. “마왕이란 마인을 책임지는 자. 그 책무를 잊어버리고 사사로운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날뛰어댄 시트리에게는 이미 마왕을 자칭할 자격조차 없어. 나는 마인들을 위해서라도 시트리를 처단하지 않으면 안 돼.” 바르바토스에게는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이겠지. 단지 결정적인 호기를 잡아채지 못해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입장에서 시트리가 벨리알을 숙청한 것은 도리어 간절하게 바라던 바였다. 실로 오래된 숙원, 산악파를 없애고 평원파야말로 마족의 의지를 대신한다는 구상. 그걸 이룰 수 있는 기회였다……. “단탈리안. 내가 브루노에서 말했지. 이제 너는 더 이상 애송이가 아니어야 한다고. 만마(萬魔)의 총의를 등에 짊어진 마왕이 되어야 한다고. 만일 우리에게 왕이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면――그건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말하는 거다.” “…….” “자신의 백성을 십만이나 몰살시킨 미치광이를 처단해. 거기에 죄책감같이 사적인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바르바토스가 주먹으로 툭, 하고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마르바스 영감은 내가 설득하겠어. 너는 바싸고와 가미긴을 설득해줘. 두 사람 다 네 부탁이라면 사막 한가운데서라도 발가벗고 춤을 출 테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영감만 설득해내면 모든 것이 끝나.”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나를 지나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구름이 달을 가려서 어둑해진 뒷정원의 돌길을, 하얀 장발의 마왕이 천천히 밟았다. “만약 도저히 시트리를 죽이지 못하겠다면……나한테 와서 직접 말해. 거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너의 감정을 존중해줄게. 하지만 너에게 많이 실망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더니 이윽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정원에 혼자 남겨졌다. 바르바토스는 언제나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파이몬인가, 나인가. 시트리인가, 나인가. 흐릿하고 불분명한 상태를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선택의 책임을 껴안는 것은 나였다. 나는 거기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를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 내가 원인이었다. 평원파도, 산악파도, 중립파도, 무소속 마왕들도, 모두 내가 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숙한 자신감이라고 평가해야겠지. 당연하게도, 누천 년 동안 대립해온 파벌들과 개인들이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오래된 앙금을 털어버릴 리가 없었다. 이런 형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나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둘 중 하나를 잘라냈어야 하리라. 단지 나는 그것이 적어도 십 년 후에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파이몬과 바르바토스는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파이몬은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초강수를 두었고, 바르바토스는 마계대공들을 활용해서 파이몬을 암살했다. 어차피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면 자기가 먼저 선수를 치겠다고, 선수를 치지 않으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두 사람 모두 생각했다. “…….” 역시나 어설펐던 것은 내 쪽인가. 어디에선가 실수를 저질렀는가. 바르바토스는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매우 올바르게 지적했다. 나는 영원히 책임을 껴안고 가야만 했다. 파이몬의 뜨거운 피가 내 손바닥을 적셨을 때 나는 이미 그것을 확고하게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 방향에는 가미긴이 머무르는 침실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가미긴을 설득한다. 다음에는 바싸고다.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르바토스도, 나도, 시트리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00422 황금의 몰락 =========================================================================                        * * * 그날은 모든 마왕이 모였다. 모든 마왕, 이라고 거창하게 말해보았다마는 실제로 머릿수는 많지 않았다. 서른한 명. 고작 서른 한 명이었다. 한때 일흔두 명의 성세를 자랑하던 마왕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 반절도 안 되는 인원만이 남았다. 그때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몰락했다고 표현해도 부족하겠지. 머릿수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강대하고 강력한 마왕이라 불리우던 바알도, 아가레스도 죽었다. 마왕군의 질 자체가 압도적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왕군은 삼천 년 역사가 시작한 이래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생 마왕군에 대한 마족들의 지지는 최고조였다. 대륙의 인간들은 마왕군의 위엄에 암묵적으로 복종하였다. 과거, 검은 산맥 일대에만 통치력을 발휘하던 마왕군은 이제 대륙 중부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서쪽으로는 브르타뉴 왕국까지, 남쪽으로는 사르데냐 왕국까지, 동쪽으로는 폴리투니아 왕국까지 손길을 뻗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약화된 마왕군은. 역설적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를 펼쳐냈다. “……마르바스 님은 아직인가…….” “가미긴 전하께서는 곧 도착하신다고…….”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돔형의 지붕에 속닥거림이 나지막하게 울렸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 밤공기와 함께 한 자락의 달빛이 떨어졌다. 서늘하게 푸른 달빛을 제외하고는 조명다운 조명이 없었다. “오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안타깝게도 그럴듯한 정보가…….” 마왕들은 몸의 절반 가량을 어둠에 파묻어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왕들은 태생적으로 밤눈이 밝았으며,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떠들기를 좋아했다. 달빛이 떨어지는 건물 정중앙에는 유리관이.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마치 잠든 듯이 누워 있었다. 이곳은 파이몬의 안치소였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황궁에 새로이 만들어진 장소. 그곳에서 마왕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는둥 마는둥 하며 잡담을 나누었다. 어두침침한 허공 속에서 모든 윤곽이 애매했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입술들만이 간신히 뚜렷하게 비추었다. “…….” 그때 무언가가 내 오른손을 감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꾸욱 잡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개 돌리지 마, 밥팅아. 다른 애들이 알아채잖아.” “내가 그만 눈치 없게 행동해버렸군.” 나 역시 조그맣게 중얼거려서 대답해준 다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로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에는 시트리를 비롯해서 열한 명의 산악파 마왕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귓속말을 나누면서 때때로 고개를 끄덕였고, 때때로 이쪽을 곁눈질했다.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단탈리안. 네가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겠어.” “거 든든한 호언장담이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바싸고와 가미긴, 두 사람 모두 나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설득되었다. 바싸고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서 결단을 내렸다. 반면에 가미긴은 오히려 기뻐서 날뛰며 ‘당연하지, 당연히 할게’라고 열렬히 좋아했다. 현재 두 사람은 건물 한쪽 구석에 뿔뿔이 흩어져서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 문득 바싸고와 눈길이 마주쳤다. 바싸고는 내가 바르바토스와 손을 잡은 모습을 흘겨보고, 차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쿡.” 바싸고의 심리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아서 작게 웃었다. 나는 내가 점점 더 완벽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원래부터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생뚱맞은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진 극한상황이 내 무언가를 각성시켰는지, 정확히 어느 쪽인가는 모르겠어도 정치와 관련해서 나의 머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으며, 날이 갈수록 무뎌지키는커녕 막 핏물이 맺힌 식칼처럼 생생하게 날카로워졌다. 상대방이 취하는 눈빛과 표정 따위가 나에게 직접 말을 건넸다.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어떻게 해야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끄는가, 감히 장담하건대 나는 모조리 알았다. 다만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내가 머릿속에 저장한, 혹은 저장되어버린, 사람들의 눈짓과 몸짓이 이따금씩 눈앞에서 저절로 재생되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라우라도 몰랐다. 나와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라피스조차 몰랐다. 제딴에는 나에 대한 것을 죄다 간파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데이지도, 당연하지만 이것만큼은 몰랐다. ─ 개 같은 놈. 허공에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환청이었다. 여기 안치소처럼 어두운 장소가 특히나 위험했다. 밝은 장소에서는 비교적 환청이나 환각 따위가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시야가 멀어졌을 때, 즉 먼 곳의 풍경이 보이는 경우에는 꽤나 잘 나타났다. ─ 옥체에 어디 편찮은 구석은 없어? 응? ─ 자네가 마지막일세. ─ 거짓말……어째서……. 여하간에 이런 장소는 나에게 쥐약. 맥락도 없이, 대충 이십 초에서 삼십 초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나는 환청이 들릴 때 늘 그러했듯이, 품속에서 연초를 꺼내어서 입에 물었다. “후우.” 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환청보다 훨씬 더 흐릿한 수준의 광경이 보였다. 뭐라고 할까. 내가 '본다'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보인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나의 뇌수가 맛이 가서 제멋대로 보여주는 연극을 나는 찬찬히 구경했다. 그건 아주 웃기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이 안치소의 유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두운 구석에 모여들어서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웃고 떠들었다. 웃음소리가 반짝거리는 먼지들과 함께 공기에 녹아들었다. 공기는 반은 지붕에서 새어나오는 달빛에, 또 나머지 반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리프의 얼굴, 호크의 얼굴, 잭의 얼굴 등등을 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오늘도 지랄발광을 하는군. 실로 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번 미친 척하고 '저것'에 말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아도 저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맥락 따위가 전혀 없었다. 가끔은 잭의 얼굴을 한 그림자가 엘리자베트의 목소리로 대화할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생지랄이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물도 아니고, 실체도 없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푸욱 파인 발자국들과 같은 것으로서――길을 걸을 때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막상 뒤를 돌아보면 그동안 남긴 발자국들이 쭈욱 한꺼번에 보이듯, 꼭 그처럼 저 그림자들도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질 따름이다. 가끔씩 보면 꼭 쟤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삶은 저들만의 특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마는. 그야말로 착각이겠지. 나는 살아 있었다. “……단탈리안?” 봐라. 지금도 내 오른손에는 바르바토스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불안해서 그래.” “흐응? 웬일로 네가 약한 소리를 다하네.” “이런 날에는 나도 약한 흉내 정도는 내고 싶어지거든.” 바르바토스가 한결 더 강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웬만하면 자주 약한 흉내를 내봐. 그러면 네 징그러운 면상이 약간은 귀엽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야. 혹시 몰라? 내가 침대에서 조금 더 봉사해줄지.” “크흠. 흠흠…….” 뒤편에서 제파르 형님이 헛기침을 했다. 제발 체통 좀 지켜주십시오. 대충 그런 의미였다. 바르바토스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무심코 작게 웃었다. 일단의 중립파 마왕들이 안치소에 입장한 것은 그쯤이었다. 마르바스가 앞장서서 다섯 명의 중립파 마왕들을 거느리고 걸어들어 왔다. 마르바스는 먼저 바르바토스와 눈을 마주치고, 나와 마주친 다음, 안치소의 입구에 똬리를 틀었다. 산악파 열한 명. 평원파 아홉 명. 중립파 여섯 명. 무소속 다섯 명. 이로써, 총 서른한 명의 마왕 전원이 집합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한 장소로군.”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고인의 눈앞에서 난동이 일어나는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일세. 황궁에는 이미 반(反)마법이 펼쳐져 있네마는 이곳은 본인이 특별히 신경을 기울여서 마법에 금제를 걸었다. 오늘 모여준 동지들께서 부디 평소보다 더욱 더 언동에 신경 써주기를, 진심으로 당부한다.” 마왕들이 소리를 내어 대답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허면, 오늘 이 자리, 발푸르기스의 밤이 개최됨을 의장으로서 선언한다. 본래 의장은 단탈리안 궁중백이 맡는 것이 관례이나…….” 마르바스가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쟁점이 될 의제가 매우 민감한 관계로 오늘밤만큼은 본인이 의장을 대리하겠다. 이는 사전에 투표권을 가진 여섯 명의 마왕이 전원 찬성한 바, 본인에게는 회의를 진행할 권리, 발언을 허락할 권리 및 발언을 중단시킬 권리, 의제를 투표에 부칠 권리, 회의를 연기하고 파기할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된다. 다섯 선제후(選帝侯)는 본인에게 일체의 권리를 맡길 것을 동의하는가?” “동의해.” “동의하겠어.” 순서대로 바르바토스, 시트리, 가미긴, 제파르, 바싸고가 대답했다. 마르바스가 턱 끝을 끄덕거렸다. “좋다. 허면, 발푸르기스의 밤을 열 것을 제청한 시트리부터 발언하도록.” “내 요구.” 시트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아니, 우리 산악파의 요구는 간단해.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그저께 우리는 마왕 벨리알을 처단했어.” “마왕이 마왕을 사사로이 벌하는 것은 강력하게 금지되어 있다.” 마르바스가 엄하게 질책했다. “만일 어느 마왕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마땅히 발푸르기스의 밤에 의제를 올려, 그 마왕을 처벌할 것인지, 만일 처벌한다면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세세하게 의논해야만 한다. 시트리여. 적법한 과정을 건너뛰고 벨리알을 주살한 까닭은 무엇인가.” “응. 내가 잘못한 건 맞아.” 시트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발푸르기스의 밤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어떨까.” “무슨 뜻인가?” “벨리알이 우리 파벌을 배신하도록 의도적으로 책동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야.”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마르바스가 눈썹을 치켜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왕들이 입술을 닫았다. 마르바스는 시선을 시트리에게 되돌렸다. “그게 누구인가, 시트리. 미리 말해둔다만 심증만으로 상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설마 증거도 없이 벨리알 살해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는 아니리라 믿는다.” “물론, 우리에게는 심증뿐만이 아니라 증거도 증인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 시트리가 덤덤히 대꾸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범인을 찾아내어서 필요 이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게 아니야.” “허면?” “우리는 '진심 어린' 사과를 바라고 있어.” 시트리가 이쪽을. 평원파 마왕들이 서 있는 이곳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지적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나와서 고개를 숙여주기를 원해. 우리에게. 그리고 여기 잠들어 있는 파이몬 언니에게.” 그래서 하필 파이몬의 안치소에서 회의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벨리알로 하여금 파벌을 배신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보를 몰래 넘기게 만든 사람이, 솔선해서 사과하는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건 그뿐이야. 아주 온화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섣불리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르바스 역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려는 듯 조용했다. 그렇게 일 분 정도가 흘렀을까. “아아. 알겠어, 시트리.”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그 사과. 내가 하겠어.”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마왕. 평원파를 지배하는 자――바르바토스가 유리관을 향해서 한 걸음 내딛었다.   00423 황금의 몰락 =========================================================================                        “……바르바토스. 네가 사과를 하겠다고?” 시트리는 의외라는 어투였다. 애당초 그녀가 목적했던 것은 제파르 형님 선에서 사태가 정리되는 정도였다. 설마 라이벌 파벌의 대표가 나설 줄은 몰랐겠지. “나는 평원파를 대표하는 마왕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생각도, 비겁하게 숨을 생각도 일절 없어. 만약 사과가 이루어진다면 내 입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지.” “시트리가 제기한 혐의를 인정하는가?” 마르바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대가 산악파의 내분을 획책했으며 벨리알을 회유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인정하지 않아.” “무슨…….” 바르바토스의 단언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시트리를 포함해서 산악파 마왕들의 마왕이 구겨졌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분위기도 얼마간 있었다. 이번만큼은 마르바스도 소동을 잠재울 생각이 없었는지 그대로 기세를 타서 되물었다. “사과를 하겠다는데 혐의를 부인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바르바토스.” “이런 얘기지. 내가 산악파에 몹쓸 짓을 저지른 건 맞아. 얼마든지 인정해주겠어. 하지만 저쪽에서 시트리가 제기한 혐의대로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어.” 바르바토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몸짓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것이 산악파 마왕들을 자극했다. 시트리가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나는 사과를 요구했지, 네 개소리를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진정하라고, 시트리. 네가 사랑하는 언니께서 보시고 계시잖아. 이런 곳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응?”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의 유리관을 왼손으로 쓰다듬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산악파 마왕들과 평원파 마왕들이 무기를 꺼내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록 그들이 안치소에 출입할 때 무기를 모두 반납했다고는 하나, 마왕에게는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도 자신의 병장기를 소환하는 능력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트리의 손에 사복검(蛇腹劍)이, 벨레드 형님의 손에 도끼가 들렸다. “당장――거기서 더러운 손을 치워.” 시트리에게서 진득하게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여전히 장난스러운 느낌으로 워워, 하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사람이 얘기하면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 도리이지. 그리 성급하게 날붙이부터 꺼내면 어디 쓰나. 그럼, 뭐야? 나에게는 관을 만질 자격조차 없다는 거야? 정말로 여기서 피를 보고 싶다면 보고 싶다고 말해.” “…….” “마르바스 영감, 봐봐. 산악파의 새로운 지도자께서는 아무래도 머리에 피가 너무 쉽게 오르는 것 같은걸. 적어도 파이몬은 이런 도발에 무기를 꺼내지는 않았어.” 안치소에서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거기서 한 마디만 더 내뱉어봐라, 하는 공기였다. 어느새 각 파벌의 마왕들이 서로가 서로를 빈틈없이 겨누고 있었다. 바싸고와 가미긴, 아몬 등, 무소속인 마왕 다섯 명만이 개판 일보 직전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본인의 위장이 썩어빠지도록 각자가 다들 최악을 보여주고 있군. 마치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한숨이었지만, 내 귀에는 거의 하늘이 무너지는 수준의 한숨으로 들렸다. 슬슬 마계의 연금술사들이 마르바스를 위해서 위장약을 발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대들이 난장판을 벌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마음대로 싸우도록. 그러나 먼저 상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파벌은 각오를 단단히 해두게. 우리 중립파는 선공을 범한 파벌을 공격할 것이니.” 마르바스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중립파 마왕들이 무구를 소환하였다. 산악파와 평원파가 맞붙는다면 십중팔구 평원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중립파가 산악파에 가세한다면 승부의 향방은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어느 한쪽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성립했다. 마르바스는 세상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결국 폭력적인 위협이 없어지면 마왕들은 언제든지 상대 파벌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들었다. 세상사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타협하면 그만이겠지만, 정치적인 타협을 제일로 여기는 마르바스에게는 위장이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뭐, 우리는 애시당초 유혈사태를 일으킬 생각 자체가 없었지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얘기야. 나는 물론이고 우리 평원파의 어느 누구도, 산악파에 계획적으로 내분을 일으킬 계획을 짜거나 행동을 실행한 적이 없어. 하지만 제 발로 오자고 하는 사람을 막을 생각까지야 없지.” “……순전히 벨리알이 단독으로 벌인 행각이라는 말이야?” “응, 그게 진실이야.”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우리는 너희를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어. 벨리알은 다만 자진해서 소속을 바꾸겠다고 했을 뿐이야.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그쪽에 사과를 해야 할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지만 말이야……그래도, 뭐.” 바르바토스가 목을 삐닥하게 기울여서 뒤쪽에 서 있는 평원파 마왕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진지한 태도는 아니었다. 평원파 마왕들이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조용히 웃어댔다. “내가 약간 부주의했던 것 같기도 해. 이야아, 겨우 하위 마왕 한 명이 이탈하려고 했을 뿐이잖아. 설마 그거 가지고 발정난 원숭이처럼 길길이 날뛸 줄은 몰랐지. 그 정도로 산악파의 분위기가 나빴을 줄 미처 몰랐어. 미안, 미안.” “…….” “내가 조금 배려심이 부족한 면모가 있거든. 약소 파벌의 사정까지 헤아려서 행동거지를 잘 다스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니, 정말로 미안해. 파이몬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나?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 시체인데, 뭐. 고개쯤이야 얼마든지 숙여줄게.” 바르바토스가 연극 무대에 선 극단주마냥 양팔을 활짝 벌리고 유리관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진심으로 사죄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안치소의 공기가 끊임없이 싸늘해지는 가운데,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어서 씨익 웃었다. “그런데 시트리. 내가 진짜로 궁금해서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건데.” “…….” “그깟 조무래기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쓰레기 조직은, 그냥 차라리 멸망해버리는 편이 세상을 위해서나 고인을 위해서나 올바른 일 아닐까?” 시트리가 사복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져서 바르바토스의 목덜미에 꽂히려는 순간, 벨레드 형님이 어느새 검격을 가로막는 위치에 서 있었다. 벨레드 형님은 장작을 패듯이 사복검의 허리를 내리찍었다. 쿵, 하고 안치소 바닥이 흔들렸다. 찰나에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찰나에 공격이 차단당했다. “―――.” 벨레드 형님이 시트리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벨레드 형님의 갈색빛 근육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시트리는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했구나.”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그녀는 벨레드 형님에게 몸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 나를, 먼저 공격해버렸어.”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검은색 마나가 소용돌이를 치며 그녀의 손에서 퍼져나갔다. 곧이어, 바르바토스의 상징이자 반신(半身)인 대낫이 소환되었다. 신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절단해버리는 사신의 대낫이. “마르바스 영감. 이제 어쩔 거야? 저쪽이 먼저 나를 공격해버렸는데.” “…….” “아직도 정치적 타협이니 뭐니 물렁한 얘기를 꺼낸다면, 나 영감한테 조금 실망해버릴지도 몰라.” 마르바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었다. 마르바스는 얼굴 표정을 가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원. 평원파에 합세해주게나.” 중립파 마왕들이 일거에 칼끝을 돌렸다. 이로써 평원파 9명, 중립파 6명, 총 15명의 마왕이 산악파를 에워싸는 형국이 완성되었다. 비록 산악파가 총 11명으로서 숫자상 아주 불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수가 아니라 질이었다. 평원파에는 바르바토스, 벨레드, 제파르가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은 다들 하나같이 전쟁에 숙달된 장수였다. 주로 온건한 마왕들이 속한 산악파에게 지금 상황은 너무도 버거웠다. “크윽…….” “무례한 짐승 새끼들이……!” 산악파 마왕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이라도 공간을 좁힘으로써 적은 아군으로 많은 적군을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본능적으로 안치소 출입구를 흘겨보았다. 여차하면 도망칠 구석을 확보하고 싶겠지. “헤에. 다들 싸울 생각 만만이네~.” 애석하게도 출입구 방향은 세 마왕, 바싸고와 가미긴 그리고 아몬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으나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형국에서, 하필 입구를 차단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만큼 멍청한 사람은 여기 없었다. 그걸 증명하듯이 가미긴이 흥미진진한 눈동자로 안치소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 “…….” 평원파 마왕들이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에 응답해서 산악파 마왕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침묵이 요동치고 있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사냥감을 사방에서 둘러싸는 암사자 무리처럼 천천히 상대편을 옥죄었다. 기껏해야 일 분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만,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안치소에서는 하나의 걸음이 결정적이었다. 오 분이 흐르자, 산악파 마왕들은 평원파 마왕들에 의해서 완벽하게 포위당했다. 그 뒤에서는 중립파 마왕들이. 더 뒤쪽에는 무소속 마왕들이 버티고 있었다. 물 샐 틈조차 없다는 건 이런 형세를 가리키겠지. “진부하게 항복을 권고하지는 않겠어.”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짓고 말했다. “하지만, 시트리. 네 년만큼은 아니야.” “…….” “파이몬이 죽어서 슬펐어? 산악파가 공중분해되면 파이몬이 세상에 남긴 증거까지 사라질 것 같아서 불안했냐? 그래서 무고한 마계의 인민을 십만 명이나 도륙했냐. 그렇게 하면 파이몬의 원혼이 얌전해져서 편히 눈을 감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일순 차가워졌다. 여태껏 장난스럽게 풍기던 웃음기가 일체 증발했다. “웃기지 마, 쌍년아.” “…….”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네가 학살극 따위를 저질러서 가장 절망했을 마왕을 한 명 뽑으라면, 그게 바로 네가 사랑하고 또 사랑한 파이몬이다. 너는 마왕으로서 책무를 저버렸을 뿐만이 아니라, 네가 온몸을 바쳤다고 울부짖는 년의 마음까지 배신한 거야.”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마르바스! 이 자리에서 안건을 제출한다! 십만의 무고한 백성을 학살한 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마왕 벨리알을 사사로이 주살한 죄! 두 가지 죄를 물어서, 죄인 시트리를 마왕군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안건으로 받아들인다. 죄인으로 지목된 마왕 시트리와 죄인을 지적한 바르바토스, 아울러 의장인 본인은 일시적으로 선제후의 자격을 박탈. 남은 세 명의 선제후가 투표를 행사한다.” 마르바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으니까 동의할게~.” “물론, 동의하오.” “……흥. 본인도 동의한다.” 가미긴, 제파르 형님, 바싸고가 찬동했다.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투표권을 가진 세 명이 전원 동의했으므로 마왕 시트리에 대한 처단을 만장일치로 가결한다.” “터무니없는 결정이다!” “네놈들, 제정신인가!” 마르바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악파 마왕들이 고함을 질렀다. 단지 코앞에서 평원파와 서로 칼날을 겨누고 있는 상태인지라 시선을 딴곳으로 돌리지는 못했다. 바르바토스가 히죽거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쪽 양반들. 아직은 명예롭게 소속을 바꿀 수 있어.” “…….” “나는 관대해. 학살자 시트리를 처단하는 데 함께할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앞으로 딱 삼십 초만 기다려주겠어.” 산악파 마왕들이 치켜든 검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00424 황금의 몰락 =========================================================================                        삼십 초. 일생의 대부분을 산악파에 바친 마왕들이 파벌을 배신할지 말지 결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그러나 이럴 때는 시간을 넉넉하게 주지 않은 편이 효과적임을 바르바토스도 알고 있었으리라. 산악파 마왕들은 명백하게 동요했다. “…….” 십 초쯤이 흘렀을까. 한 노인이 무기를 내리고 터벅터벅 평원파로 걸어갔다. 산악파 마왕들이 경악에 빠져서 소리쳤다. “모락스!” “파벌을 배신할 속셈인가!” 전(前) 서열 제21위의 마왕 모락스였다. 검버선이 피어난 얼굴로 모락스가 자신의 동료들, 아니 일찍이 동료였던 자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파벌을 배신하지 않았소. 산악파를 배반한 것은 오히려 시트리 님이오. 파이몬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마계 신민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셨으며, 무엇보다 마족의 미래를 앞서 생각하셨지. 그런 파이몬 전하의 이상을 시트리 님이 배반했소. 이제 지긋지긋하구려.” 모락스가 한숨을 쉬었다. 노신사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위대한 이상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파벌 논리에 따른 정치적인 싸움뿐……그래서 시트리 님을 위시로 하여 우리가 새로이 산악파를 재건한다 한들,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소? 마인들을 위한다는 이상? 십만의 마족을 학살해버린 우리가 무슨 권리로 마왕을 자칭하겠소까?” 모락스가 시트리를 지긋하게 쳐다보았다. 굵은 주름살에 감추어진 노인의 눈동자는 적의로 빛나고 있었다. “벨리알에게 파벌을 바꾸라고 처음 권고한 것은 다름 아니라 본인이오.” “뭣이……!” “이탈자가 나올 경우에 시트리 님이 어찌 대처할지 살펴볼 요량이었지.” 산악파 마왕들이 충격에 술렁거리는 가운데, 장본인인 모락스와 시트리만은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모락스가 두터운 입술을 열었다. “노부 나름대로 시험을 해본 것이라 해도 좋소. 어찌되었든 시트리 님은 이미 민간인을 수없이 학살한 범죄자였소. 그때 시점에서 파벌을 이탈해도 괜찮았소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었소. 과연 파이몬 전하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 “결과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대로요. 시트리 님은 벨리알에게 공개적인 항변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소. 그 즉결처형은 더없이 불법적이었고 또한 야만적이었소. 노부는 깨달았지. 마왕 시트리는 모든 문제를 피로 해결할 줄밖에 모르는 작자라고……!” 모락스가 폐부를 쥐어짜낸 듯 절절하게 말했다. 시트리는 그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안치소에 들어서고 단 한 차례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단지 올곧게 맑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 일말의 애잔함을 느꼈다. 아아. 이곳에서 나만이. 시트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오직 나만이 이해하고 있었다. ─ 만약 그렇게 파이몬 언니가 소중했다면, 어째서, 언니를 예전부터 구해주지 않았던 거야. 시트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나는 시트리의 시선에서 천 가지 단어와 백 가지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니었다. 시트리는 시선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나밖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따름이었다. ─ 파이몬 언니가 월맹군 전쟁에서 죽을 뻔했을 때. 마나가 망가져서 빈사상태에 이르고, 언니의 목숨을 처결할 권리가 단탈리안에게 넘어갔을 때――왜 아무도 단탈리안에게 달려가서 제발 언니를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던 거야? ─ 왜? ─ 어째서 나만이, 모든 파벌을 통틀어서 인원이 가장 많다는 산악파 중에서 고작 나 한 명만, 단탈리안의 막사에 처들어가서 애걸복걸했던 건데? ─ 위선자들. 시트리의 검 끝이 아주 조금이지만 기우뚱거렸다. 그녀가 묵묵부답하는 동안 산악파 마왕들은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모락스가 일단 도망치니 부담감이 적어졌는지, 한두 명씩 서서히 대열을 이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트리는 똑바로, 한없이 똑바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 너희는 전부 위선자야. ─ 자기가 유리할 때는 파벌에 복종하지. 언니의 자세를 칭송하고 이상이니 뭐니 온갖 화려한 단어를 써가면서 치장해. 하지만 조금이라도 태세가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해버려. ─ 너희는 파이몬 언니가 처분당할 것 같았을 때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어. 자칫 파이몬 언니의 측근이라는 인상을 주위에 심어주었다가는, 다음 차례에 자신이 당할 거라고 걱정했으니까. ─ 언니는. ─ 내 언니는, 너희 같은 것들보다 훨씬 더……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 ─ 차라리 너희가 전부 죽어버리고 언니가 살아야 했는데. ─ 그게 세상의 올바른 형태였는데……! 오 분이 넘게 지났다. 미리 약속한 삼십 초가 한참 전에 흘렀으나 바르바토스는 짐짓 모른 체하며 유예기간을 연장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산악파 마왕들이 시트리의 곁을 떠난 것은 물론이었다. 시트리는 그들에게 입을 열지도 않았고,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시트리의 곁에 남은 마왕은――두 명. 불과 두 명뿐이었다. 열 명 중에서 무려 여덟 명이 이탈했다. 8할. 압도적인 비율.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율로, 산악파 마왕들은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 동안 신세를 진 자신의 파벌을 배반했다. “카핫.” 바르바토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해서 참을 수 없다는 웃음이었다. “봐라, 제군들. 이것이 본질이다. 파이몬 년이 잘난 듯이 떠들어댄 이상과 신념의 본질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참여하는 파벌의 진짜 모습이란 이토록 초라한 것이야!”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미소로 일그러졌다. 만면이 귀기(鬼氣)로 비틀려서 흉악했다. “더 이상 산악파에는 예전과 같은 이상이 없다는 명분! 이제 배신해도 괜찮다고, 아니, 배신해도 사실은 배신한 게 아니라고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는 명분……! 거기에다 실질적인 위협! 여기서 배신하지 않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니, 이제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하얗게 드러내며 진심으로 웃어댔다. “두 가지가 합해지면, 아아, 돼지들은 그 두 가지만 갖추어지면, 수천 년의 맹세조차 간단하게 깨버릴 수 있다! 이것이 산악파다! 파이몬 년이 마계의 미래라며 자랑하던 파벌의 실제 모습, 더럽고 천박한 돼지 우리다!” “무슨…….” 분위기가 일변했다. 바르바토스가 내뱉은 폭언에 소속을 바꾼 여덟 명의 마왕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들이 뭐라고 반박하기 직전, 바르바토스가 파안대소하며 일갈했다. “제군들――주제도 모르고 울부짖는 돼지 새끼들의 모가지를 따버려라!” 그리고, 사방에서 피가 난자했다. 벨레드 형님이, 제파르 형님이, 평원파의 모든 마왕이 일제히 병장기를 휘둘렀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채고 주변을 경계했던 여덟 명의 배신자도. 아울러서 시트리를 비롯한 세 명의 마지막 산악파 마왕도 무기를 내뻗었다. 안치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크아아악! 다리가! 내 다리가!” “이,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소! 바르바토스 전하! 이탈을 유도하면 향후 지위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조하기 않았소외까!” 모락스가 비명을 질렀다. 과연. 신중해 보이는 노신사가 어쩐 일로 가장 먼저 배신하는 초강수를 두었는가 궁금했는데, 바르바토스가 사전에 음모를 꾸며둔 것이었는가……. 여전히 빈틈이 없는 녀석이었다. 나는 싸움 따위에 재능이 없었으므로 진즉에 한 발자국 물러나서 중립파 마왕들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과 무소속 마왕들은 여차하면 끼어들 태세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산악파와 평원파의 결투였다……. “흐응? 무슨 잠꼬대인지 모르겠는걸.” “크으으읍……!” 초반에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는지 모락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알기로 모락스는 마법사였다.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된 이곳에서 본 실력을 발휘하기란 극히 어렵겠지.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흑마법사였지만 예전 직업이 전사였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락스가 팔뚝에 철철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소리 질렀다. “이, 이제 와서 모르쇠로 나오다니! 약조가! 약조가 다르오, 바르바토스 전하!” “그러니까 왜 잠꼬대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바르바토스가 히죽 웃으면서 대낫을 크게 휘둘렀다. “나는 네깟 새끼의 '전하'가 아니야. 병신 머저리야.” 대낫이 정확하게 모락스의 목 정중앙을 절단했다. 모락스는 오른팔을 내뻗어서 저항해보려 했지만, 치켜든 팔까지 통째로 잘렸다. 무서우리 만치 신속한 참수였다. “……, …….” 모락스의 목은 한동안 몸뚱어리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일 초, 이 초가 흐르자 머리통이 기우뚱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노인의 얼굴은 굴욕과 고통으로 뒤틀려 있었다. “참혹하군.” 내 옆에 선 마르바스가 중얼거렸다. “참혹하기 그지없어.” “의외의 말씀이군요, 세바스토크라토르. 이보다 더 끔찍한 광경을 수도 없이 지켜보시지 않았습니까?” “겉보기로 끔찍한 정도를 따지자면 그러하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누군가를 살해하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마왕군이 몰락하고 있다…….” 그런 의미였는가. 나는 묵묵히 유혈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마르바스에게는 그렇게 비출 수밖에 없겠지. 혈투는 이십 분 만에 종료되었다. 승자는 당연하게도 평원파였다. 안 그래도 평원파가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산악파는 변절자와 충신으로 갈라지기까지 했다. 오히려 이십 분이나 버틴 것에 대해 칭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로 시트리가 격렬하게 반항한 덕분이겠지.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이 협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트리는 두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시트리는 광전사와 같은 기세로 전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안타까웠다. 두 형님이 시트리의 발을 묶어둔 사이, 바르바토스가 평원파 마왕들을 이끌고 나머지 잔당을 깔끔하게 청소했다. 평원파 마왕들도 소소하게 부상을 입었지만 그뿐. 바르바토스는 잔당을 해치운 다음 형님들한테 가세했고, 가볍게 시트리를 제압했다. 바르바토스는 전술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꽤나 애를 먹이잖아. 불씹장이 년.” 바르바토스가 퉷, 하고 침을 뱉었다. 바닥에 쓰러진 시트리의 얼굴에 붉은색 침이 떨어졌다. 시트리는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잘린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제파르. 형편없는 녀석. 겨우 이 년 하나 잡는 데 그리 엉망진창으로 당해?” “송구합니다, 각하.” 제파르 형님은 오른팔이 한짝 잘렸으므로 비교적 양호했다. 적어도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바라보기에 그 정도는 중상 축에도 끼지 못하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제파르를 매도했다. “피해상황. 보고.” “여덟 명의 적을 사살하고 세 명의 적을 생포했습니다. 아군은 한 명이 사망했고, 세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앙? 중상자가 세 명이나 된다고? 제파르 자식아. 설마 너를 중상자로 분류한 것 아니겠지. 벨레드처럼 다리가 나가버렸으면 또 모를까, 어디서 팔 한 개 갖고 유세를 떨어?” “……죄송합니다. 중상자는 두 명입니다.”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제파르 형님의 보고에는 역설적인 구석이 있었다. 8명의 적이 죽었고, 3명의 적이 생포되었다. 여기서 8명은 산악파를 배신한 마왕들을 가리켰다. 바르바토스가 사전에 귀띔하지도 않았건만 평원파 마왕들은 배신자에게 가차없이 철퇴를 내리친 반면, 끝까지 의리를 지킨 자들은 어떻게든 사로잡았다. 사실 이것 때문에 평원파의 피해가 생각보다 커진 것이었다. 미쳐 날뛰는 시트리를 죽이는 것만도 어려운데 거기에 더해서 생포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지를 잃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기는 무투파들이나, 그러니까 평원파 마왕들이나 벌일 행각이었다. “자아. 위대하시고 고결하신 산악파의 새로운 우두머리 대령이오.” 바르바토스가 시트리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시트리는 꿈틀거리지도 못한 채 이쪽으로 질질 끌려왔다. 오늘밤을 주관하는 의장은 마르바스였다. 바르바토스는 마르바스의 발 아래 시트리를 내팽개쳤다. 시트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 시체가 호흡하는 것에 불과했다. “후우.”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고요가 찾아왔다. 바르바토스는 한건 끝냈다는 기분으로 기지개를 쭈욱 폈다. 평원파 마왕들은 무기에 기대어서 바닥에 나앉았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흥분된 피를 식히느라 숨을 깊이 내쉬고 있었다. 그때 희미한 중얼거림이 안치소 바닥에 퍼졌다. “……사……해.” 마왕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시트리가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험상궂게 인상을 구겼다. “아앙? 뭐라고?” “……사……과해…….” 무언가가 바닥에 흘렀다. 핏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투명하고, 더 흐릿한 액체였다. ――이날 처음으로, 시트리가 차가운 무표정을 깨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려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몸이었다.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핏물에 잠긴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시트리는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몸속에 쌓인 무언가를 조금씩 토해냈다. 핏덩어리보다 붉은 것을 필사적으로 게워냈다. “파이몬, 언니……한테…….” “…….” “언니한테……사과……해…….” 시트리는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00425 황금의 몰락 =========================================================================                        “아앙? 아직도 개소리를 입에 달고 있네, 천치가.”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들어서 시트리의 복부를 걷어찼다. 흐윽, 하고 시트리가 신음을 뱉었다. 단지 소리뿐만이 아니라 시꺼멓게 뭉친 핏덩어리까지 토해냈다. 바르바토스는 개의치 않고 다시 발길질을 날렸다. “죄송해? 내가 파이몬한테? 왜?” “……언니한테……사과…….” “어이가 없어요. 네가 학살한 십만 명의 무고한 인민은 생명이 아니고 파이몬 년만 생명이야? 아주 지만 비극의 주인공인 것 같지? 들개 같은 년.” 바르바토스가 싸늘하게 시트리를 내려다보았다. “왕으로 태어나서, 왕으로 대접받고, 왕으로 살아간 것 자체가 이미 비견할 데 없는 호사이고 사치다. 단 하루라도 배를 굶어본 적도 없고, 단 한 시간이라도 땅을 파본 적이 없는 년들이 허구한 날 비극을 떠들어대지.” 바르바토스는 복부를 때리는 일에 신물이 났는지 목표를 바꾸었다. 시트리의 오른팔이 잘려나간 절단면을 발바닥으로 꾸욱 짓눌렀다. 핏물이 튀면서 바르바토스의 발가락을 붉게 물들였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시트리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바르바토스는 무표정하게, 거의 기계적으로 시트리에게 고문을 가했다. “나는 말이지. 네년처럼 세상을 저주하는 부류를 볼 때마다 위장에서 벌래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끔찍하거든. 네 주제를 아세요, 주제를. 천 년이 넘게 권력자로 살았으면서 네가 마계의 신민에게 해준 게 뭐 있냐? 앙? 그냥 허리에 달린 좆이나 신나게 싸갈겼지, 네가 제대로 한 일이 뭐 있냐고.” “언니……언니…….” “싱거운 쓰레기 새끼.”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거두었다. 고문이 끝났다. 시트리는 망가진 녹음기처럼 끊임없이 사과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휴, 기분만 잡치네. 마왕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디 우팔라 지옥에서 창녀나 되었을 녀석이. 이런 애들 때문에 괜히 애꿎은 마족들이나 줄초상을 치르지.” 바르바토스는 대낫을 어깨에 들쳐매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안치소에 눌러앉아 휴식을 취하는 평원파 마왕들을 쭈욱 둘러보고, 바르바토스가 버럭 소리쳤다. “떨거지들 몇 명 죽였다고 뭐 지쳤다면서 쓰러져 있냐! 일어서, 짜식들아!” 벨레드 형님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렸다. “존경하는 각하. 저는 다리가 병신이 되어버렸는데 어쩌면 좋습니까요?” “몰라. 평생 여기서 헤엄이나 치시든지.” 평원파 마왕들이 작게 낄낄거렸다. 그리고 영감처럼 신음하며 한두 명씩 일어섰다. 벨레드 형님은 허벅지 아래가 통째로 잘린 탓에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워낙에 덩치가 커서 두 명이 달라붙어야 그나마 지탱이 되었다. “가서 부축하는 것을 도와주도록.” 마르바스가 명령했다. 그러자 중립파 마왕들이 예, 하고 우르르 흩어졌다.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녀석은 타인에게 친절을 받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이었다. “굳이 도와줄 필요까지야 없는데. 자기 몸은 자기가 건사해야지.” “중상자가 세 명이라지만 경상을 입은 동지가 많지 않은가. 호의는 받아두어라.” “뭐, 굳이 수고하겠다면야……이런 걸 빚으로 생각하진 않을 거니까. 자아, 뒈진 놈들한테는 보존마법 걸어두고 숨 붙은 놈들은 감옥에다 넣자고.”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르바스, 바르바토스, 내가 고개를 돌려서 소리가 퍼진 곳을 쳐다보았다. 정반대편에서 가미긴이 양손으로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저 병신이 또 고질병 도졌나.” 바르바토스가 혀를 찼다. 그녀는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평원파 마왕 중 한 명이 사망한 터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시트리를 고문한 것에는 분풀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미긴이 웃어대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했는데, 그건 마르바스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왜 또 웃고 있는가, 가미긴.” “아니――미안해. 마르바스. 아하하, 미안. 그런데 너무 웃긴 광경이잖아.” 가미긴이 손등으로 금발을 쓸어넘기고 안치소 정중앙을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황궁 정문에 오순도순 모여서 누가 먼저 단탈리안이랑 잘지 툭탁거렸는데에. 한 애는 저기 자빠져 있고.” 가미긴이 다음으로 피웅덩이에 널브러진 시트리를 가리켰다. “한 애는 저기서 팔이랑 다리 하나씩 잃은 다음에 헤엄치고 있고.” 가미긴이 바르바토스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하핫. 아니, 그냥. 이건 이제 웃을 수밖에 없는 농담이 아닐까.” “하아……? 야, 두개골에 철사 때려 박은 년아. 나한테 시비를 걸고 싶으면 제발 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떠들어라. 네가 입을 열 때마다 덜떨어지는 지능이 풀풀 새어나오잖아.” “응, 미안해. 미안해, 바르바토스. 오늘 너무 유쾌한 장면들을 보게 되어서.” “가미긴.” 그때까지 쭉 입을 다물고 있었던 바싸고가 한 마디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라.” “아아. 미안, 진짜 미안해. 내가 너무 눈치가 없이 좋아했지? 후후. 그냥 파이몬의 안치소가 공동묘지가 되니까 신기해서.” “조용히 닥치라고 했다.” 그제야 가미긴은 잡담을 멈추었다. 하지만 만면에 활짝 핀 웃음기는 여전했다. “…….” 바르바토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마침 바싸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라, 한 템포 느리게 바르바토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뚫어지라 나를 바라보았다. “…….” “…….” 주위에서는 평원파 마왕들이 중립파 마왕들의 도움을 받아서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기에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을지 몰랐다. “도와줘서 고맙네. 나중에 한 턱 쏘지.” “내 참, 늙은이가 의외로 힘이 쎄서 고생했다니까.” 주변에서 부상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멀리 안치소의 벽에 부닥쳐서 다소 둔중하게 메아리쳤다. “…….” 바르바토스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그녀는 마르바스를 쳐다보았다. 마르바스는 진즉에 시선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그녀의 눈동자와 직면했다. 내 경우와 달리 바르바토스는 마르바스와 길게 눈길을 교환하지 않았다. 다만, 자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 바르바토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황금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세상의 공기가 전부 멈추어버리고 오로지 우리 두 명만이 동떨어져서 말없이 대화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피해!” 그녀가 고함을 지른 것보다 한 발자국 앞서. 혹은 그것과 동시에. 중립파 마왕들은 무기를 꺼내들어서 평원파 마왕들의 신체를 거칠게 찔렀다. 칼날들이 복부를, 허리를, 목등을, 허벅지를 거침없이 쑤셔 박았다. 상대방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평원파 마왕들이 비명을 질렀다. “크하아아아악!” 사방에서 핏물과 비명이 허공에 튀었다. 중립파 마왕들은 일격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재차, 몇 번이고 평원파 마왕들의 신체에 칼끝을 찔러넣어 비틀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잠시간 난도질을 견디는 듯이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지만, 직후, 무릎이 꺾이면서 쓰러졌다. “이―――!” 바르바토스는 그 광경을 눈에 담자마자 입술을 깨물고 대낫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턱 바로 아래에 겨누어져 있었다. 마왕 마르바스의 검이었다. “진부한 말로 항복을 권고하지는 않겠네, 바르바토스. 다만, 그대의 부하가 현재 시점에서는 아무도 우리에 의해 죽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말하마. 그대처럼 현명한 자라면 본인의 권고를 이해할 터다.” 네가 움직이면 그 즉시 평원파의 부하 마왕들을 죽이겠다. 그런 의미가 담긴 협박이었다. 대낫을 쥔 바르바토스의 두 손이 자그맣게 떨렸다. 안치소는 살육의 향기로 물들었다. “크허억……크흡……!” 순식간에 평원파 마왕의 절대다수가 허물어졌다. 제파르 형님도, 벨레드 형님도 참화를 피하지 못하고 끔찍하게 난자당했다. 이미 부상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기습까지 당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멀쩡하기란 불가능했다. 산악파 마왕들의 시체가 널린 그곳에. 다시 한 번, 평원파 마왕들이 포개어지듯이 쓰러졌다. “네놈들, 감히……!” 중립파 마왕들이 달라붙지 않아서 기습을 피한 평원파 마왕 세 명은, 이미 바르바토스의 목에 검이 들이대진 시점에 꼼짝없이 동작을 멈추었다. 현명한 처사였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반항했다면 이번에는 무소속 마왕들이 나섰을 것이다. 무서운 침묵이 안치소를 지배했다. “바르……바토스……님…….” “각하…….” 평원파 마왕들은 피를 쏟아내는 가운데에도 바르바토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내뻗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할 기력이 그들에게는 남지 않았다. 설령 기력이 남았더라도 저항하기는 어렵겠지.. 중립파 마왕들은 현명하게도 평원파 마왕들의 양손 손가락을 전부 잘라버렸는데, 혹시라도 무기를 잡지 못하도록 조처한 것이었다. 평원파 마왕들이 간간히 흘리는 신음만이 공기를 부르르 진동시켰다. 그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도. 무소속 마왕들도. 유리관에 안치된 파이몬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트리도,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해서. “……어째서.”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지만 결국 흘러나온 단어는 어째서, 그것밖에 없었다. 마르바스는 슬픔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파이몬의 죽음을 용납하면 안 되었다, 바르바토스. 시트리의 죽음을 꾀해서도 안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행보였어.” “…….” “파이몬과 시트리가 사라진 이상, 산악파가 자립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그리 되면 파벌 간의 균형은 무너지고 그대가 권력을 독점하겠지. 본인이 그대를 견제하겠지만 역부족일 터.” 마르바스가 쓸쓸하게 말해나갔다. “본인은 그대와 파이몬이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 불안하고 또 불길했네. 두 사람은 우리 마왕군의 양쪽 날개다. 혹여 그대들이 서로를 증오하느라 가장 단순한 진실, 즉 아무리 위대한 새일지라도 반쪽짜리 날개만으로는 결코 비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바르바토스가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마르바스는 칼날을 더더욱 바르바토스의 목에 가까이 붙였다. 살결이 배여서 샛붉은 피가 한 줄기 흘렀다. 바르바토스는 몸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다. 세상사란 정말이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바르바토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마르바스를 노려보았다. “감히……!” “죄목을 밝히겠다. 바르바토스. 그대가 파이몬의 죽음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확보되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에서 초점이 흔들렸다. “거짓말이야…….” “마계대공들 전원이 바르바토스, 그대에게 협박 내지는 권고를 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는 본인이 직접 그들에게 청취한 사실이다. 본인은 그대가 파이몬을 간접적으로 암살했음을 확신하고 있다.” 침묵이 흘렀다. 바르바토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녀는 말없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 바르바토스.” 나는 말했다. “마르바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00426 황금의 몰락 =========================================================================                        “그대가 만에 하나 진솔하게 사과했다면.” 마르바스가 말을 이어받았다.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이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바토스. 그대가 만약 파이몬이 누운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더라면. 우리 중립파가 나설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그대의 도발이 없었다면 평원파와 산악파가 충돌하지도 않았겠지.” “…….” “깨닫지 못했는가. 아니, 깨닫는 것을 시도할 수조차 없었음인가…….” 마르바스가 탄식했다. “우리는 마계대공들을 직접 불러들여서 진위를 검증했다. 대공들은 그대가 암살에 깊이 관여했음을 증언하였으며,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 알겠는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소집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시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시트리는 그대를 고발하는 대신에 단지 사과를 요구했다. 그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당장이라도 그대의 가슴에 칼을 꽂아넣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단 한 번의 기회를 그대와 평원파에게 허락한 것이다.” 마르바스가 애절하게 말했으나 그 언어는 전달되고 있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망울로 나를 직시하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무엇이든 좋다. 무엇이든 좋으니까――. 제발, 네가 나를 배신했다는 것만은 부정해줘.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마르바스 전하. 잠시간 의장의 역할을 대신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버거우나마 제가 다시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오늘 밤을 주재할 권리를 돌려주십시오.” “……인정한다. 그대에게는 회의를 진행할 권리. 발언을 허하고 금할 권리. 의제를 투표에 부칠 권리. 회의를 연기하고 파기할 권리. 일체의 권한이 정당하게 인정되노라.”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다음. 내가 어떤 한 마디를 내뱉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바르바토스는 현명한 여자였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녀는 이미 전부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렇기에 오히려, 나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현재 상황을 부정할 기회를 떠넘기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이 순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무례한 새끼. 숙녀의 집에 방문할 거라면 오기 전에 연통은 미리 줘야 할 거 아냐.’ ‘사내자식이 말린 정어리처럼 어리버리하긴. 내가 네 나이 때는, 밥팅아, 사흘 밤낮으로 질펀하게 놀아대도 끄떡이 없었어.’ 우정이. ‘좋아, 협력해주지. 전쟁? 바라던 바야. 희생? 그딴 것에 연연할 성격이었으면 벌써 진즉에 포기했어. 단 한 순간의 명예로운 전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당하지. 나는 마왕이니까.’ ‘어이구. 우리의 꾀주머니, 족제비 마왕, 반쪽짜리의 단탈리안. 이번에는 또 얼마나 질나쁜 수작을 꾸며왔길래 그리 자신만만하게 손을 드실까?’ 신뢰가. ‘동지들. 보다시피 내가 이 녀석을 찜했거든. 미리 침 발라뒀으니까 혹시라도 얘 뺏고 싶으면 내가 친절하고 자상하게 두들겨 패줄게. 나랑 일대일로 깔 자신 있는 새끼만 등판하도록.’ ‘……진짜로, 내가 제일이지?’ ‘제발 내 옆에 있어줘. 나를 더 이상 혼자 내버려두지 마…….’ 결속이. 시간조차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무게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지금 순간에 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혀끝을 움직인 순간, 마치 한 줄의 현(絃)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잡아뜯기듯이――우리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던 무언가가 소리 없이 끊어졌다. “룩셈부르크의 고귀한 대공, 제국의 대시종장, 마왕 파이몬에 대한 암살을 획책하고 실행한 죄목을 물어, 바르바토스. 그대를 보헤미아의 왕좌에서 폐위한다.” “…….” “이는 이미 네 명의 선제후가 만장일치로 동의한 바. 항변의 여지는 없다. 죄인이 파벌의 수장인 점을 고려하여 죄인뿐만이 아니라 파벌에 소속한 마왕 전원을 투옥한다. 이에 따라 그들이 지닌 일체의 지위 또한 금일 이 시간부로 인정되지 않음을 선언한다.” 한 줄기. 바르바토스의 눈가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믿고, 있었는데…….” “…….” “내가 제일이라고……말했으면서…….”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서 바르바토스의 목에 갖다 댔다. 내 손이 당장이라도 새하얀 목을 조를 것처럼 가까워졌지만, 바르바토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마르바스의 검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지. ─ 차락! 내가 단숨에 그녀의 목에 걸린 장신구를 잡아 뜯었다. 바르바토스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 다름 아니라 나의 손가락들이 꿰매어진 목걸이였다. 바르바토스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건네준 목걸이의 실줄이, 가볍게, 끊어졌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실이 사라지자 두 개의 손가락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명령했다. “전원. 포로들의 뿔을 자르십시오.” 중립파 마왕들은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마왕에게 뿔이란 심장과 더불어서 생명력과 마력의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뿔이 왜소하면 왜소할수록 볼품없는 마왕으로 취급받았다. 내가 예전에 반쪽짜리 마왕이라 불린 까닭은,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마왕답지 않게 외뿔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끄으……네놈들……!” “이러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느냐, 단탈리안! 저주한다! 내 피에 맹세코 네놈을 영원토록 저주하겠다!” 평원파 마왕들이 몸부림을 치며 발악했다. 뿔은 마왕의 긍지.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동료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가장 참혹스러운 형벌을 당했다. 평원파 마왕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이미 반죽음이나 다름없이 부상을 당한 처지였다. 그들은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가 처박혔다. 중립파 마왕들이 그들을 제압하여 손쉽게 뿔을 도려냈다. 쿵, 하고 거대한 뿔이 떨어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어째서……단탈리안, 어째서 배신 따위를 했느냐……!” 제파르 형님이 바닥에 엎드려져 제압당한 채, 간신히 고개만 비틀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은 충격과 굴욕으로 뭉개져 있었다. “누구보다 평원파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는가!” 온몸이 난도질당하고 오른팔을 잃었건만 제파르 형님의 노호는 무섭게 요동쳤다. “군단장 각하를, 바르바토스 전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더냐! 대답해라, 단탈리안! 대답해라……!” “아닙니다. 제파르 대장. 전혀 아닙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제파르 형님을 쳐다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저는 결코 평원파를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바르바토스를 사랑한 적도 없지요. 대장께서는 생기신 것과 다르게 낭만주의자로군요. 사랑이라니요. 그런 것에 얽매일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치지 않았는지요?”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의도치 않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적절했다. 내가 여태껏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연기 실력은, 이미 내 의도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솔직히 짜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만 열면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 여러분은 스스로 숙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 라고…….” “머리에 든 고민이라고는 어떻게 해야 전쟁을 일으킬까, 그것밖에 없겠지요. 마왕군의 미래를 바르바토스의 미래와 동일시한 시점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완전히 질려버렸습니다.” 내가 오른손으로 바르바토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흐르고 지나간 자국이 내 손바닥에도 희미하게 자국을 남겼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토록 숭배하던 바르바토스입니다. 전사의 명예라느니 긍지라느니 잘난 듯이 떠들었습니다만, 결국 숙적인 파이몬을 죽일 때 사용한 방법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암살……. 자신이 내건 신념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문득, 내 손등을 적시는 것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바르바토스가 더한 눈물임을 알았다. ――괜찮았다. 얼마든지,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명예를 운운합니까? 대단하군요. 살인자가 자신의 죄악을 미학으로 치장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옵니다.” “불경한 손을 치워라! 각하께서 암살 따위를 하셨을 리가 없다!” “저런, 모함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란하군요. 하기사 모함이라고 믿는 편이 여러분에게는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겠지요.” “네놈, 언제까지 우리를 조롱할 테냐……!” “알겠습니다. 모쪼록 모함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제가 거짓말로 바르바토스를 모욕했으며, 여기 계신 마르바스 전하를 비롯해서 중립파 전원이 거짓말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고, 그리 믿어주십시오.” 제파르 형님의 표정이 정지했다. 그렇다. 배신자인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파르 형님도 알고 있겠지. 마르바스는 결코 거짓 모함 따위에 거사를 일으키는 위인이 아니란 것을…….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공정하며 고결한 자, 절대적인 법정을 관장하는 자, 고귀한 마왕 마르바스. 그는 지난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거짓된 중상모략에 편 들어준 적이 없었다. 마르바스가 내 고발을 지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발언에 압도적인 신뢰성을 부여했다……. 제파르 형님이 이를 물고 고함쳤다. “말도 안 된다……그럴 리가 없다!” 공기가 술렁거렸다. 의심의 독이 퍼지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암살 같은 짓거리를 저질렀을 리 없다는 믿음.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세월 동안 마르바스가 보여주고 입증해낸 신뢰. 두 개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파르 대장. 저 역시 바르바토스를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제 품에 안겨서 파이몬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그 순간조차, 저는 바르바토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진실을 알고 난 이후, 저는 바르바토스에게 말했습니다. 시트리에게 사과하라고. 공식적으로 사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사과하라고.”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거짓임이 입증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건 정치적으로 이미 진실이었다. “우회적인 방법이라니……설마…….” “예. 오늘 이 소집이 바로 우회적인 사과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제파르 대장께서는 본인이 사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요. 어디까지나 바르바토스가 직접 사과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제파르 형님의 얼굴에 재차 충격이 내려앉았다. 지금 형님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며칠 간 이루어진 사건과 대화가 전혀 다르게 재구성되고 있으리라. “눈치도 없게 잘 끼어들어 주셨군요, 대장. 난감했습니다.” “…….” “물론, 대장께서 나섰다고 해서 바르바토스가 사과할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보셨겠지요. 바르바토스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사과를 건네기는커녕 산악파를 말살하려 들었습니다.” 내가 건조하게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둥그런 돔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 오래 전에 번개는 내리쳤다. 이제 뇌성이 울릴 차례만이 남았다. “용서받을 죄가 아닙니다. 용서받아서는 안 될 죄이지요. ……바르바토스를 비롯해서 여러분 전원, 마계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참수될 것입니다.” 평원파 마왕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00427 황금의 몰락 =========================================================================                        공개적으로 처형식을 거행한다. 평원파 마왕들에게 이보다 굴욕적인 죽음은 없었다. 저들은 일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 숙적으로 인정한 적에게 검을 받아 죽는 것이야말로 이상으로 그리던 최후일 터. 하물며 광장에서 참수당하다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치욕으로 온몸을 떨어대는 평원파 마왕들을 향해 내가 말했다. “물론, 바르바토스에 비해서 다른 평원파 여러분에게는 큰 죄질이 걸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원을 처형하는 것이 어쩌면 지나친 처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건을 내걸겠습니다.” “조건……?” “예. 뭣하면 사법거래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이래 봬도 저는 한때 여러분과 함께 바르바토스를 섬긴 일원입니다. 그야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여러분을 구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사람이 조금 지나치게 좋군요. 마음의 군살입니다.” 사법거래라는 말에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제파르 형님은 그러나 변함없이 분노로 가득차서 소리쳤다. “뻔한 헛수작을……웃기지 마라! 각하에게 불리한 증언을 지껄이라는 것 아니더냐!” “섭섭하군요. 제가 그렇게 악마적인 자식으로 보였습니까.” 평원파 마왕들이 만에 하나라도 바르바토스를 배신하고 증언을 위조하는 데 동참할 가능성은 없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해서 그들은 진정한 충성심을 품었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조금 더 단순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여러분이 죄인 바르바토스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십시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계의 온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은 파이몬의 암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며, 단 한 지점에서라도 관련하지 않았다고. 어떻습니까? 정말로 간단한 요구사항입니다.” 평원파 마왕들의 얼굴에 혼란이 찾아들었다. 당혹스러울 만했다. 내가 내건 조건은 단순히 간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진실이기도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순순히 인정해도 아무런 손해가 없는 그런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의심의 꽃이 더더욱 피어났다. “더불어서, 마르바스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선제후가 제 거래를 보증합니다. 바르바토스가 저지른 범죄 행각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만 인정해주시면 여러분께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 “…….” 왜 이렇게 단순한 요구사항을 제시하는가, 하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모함에 불과했다. 그 모함의 진정한 목적은 평원파를 작살내는 것……그렇게 판단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가 방금 말한 요구조건은 평원파 마왕들이 믿는 시나리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만약 암살건이 모함이라면, '평원파 마왕들도 암살에 관련되어 있다'라고 어떻게든 엮어버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반대로 '평원파 마왕들은 관련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째서. 왜? “제파르 대장.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말씀이 없어졌습니까.” “…….” “아주 단순한 요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바르바토스가 암살을 획책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저 '존재하지 않았던 암살 사건'에 본인들이 연루하지 않았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지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완벽하게 호인(好人)이 지을 법한 미소였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호인의 웃음이란 도리어 기괴하고 뒤틀린 인상을 주었다. 지금쯤 평원파 마왕들의 눈에 나는 한없이 역겨운 배신자로 비추고 있겠지. “만약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여러분은 암살과 전혀 상관없으니 역시 진실을 고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어느 경우에서든 여러분께선 진실을 얘기합니다.” “…….” “제파르 대장. 여전히 저를 불경하다고 매도하실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을 위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사법거래까지 마련해왔습니다.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면 완전무결하게 무죄를 인정받는다니.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습니다…….” 어서 피어나라. 화려하게 개화해라. 열심히 머리를 굴려라. 이 정도 추리는 너희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 싸움질밖에 할 줄 모르는 평원파일지라도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었다면 능히 정답을 생각해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라. 자신의 믿음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라. 대단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올바른 사고방식이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게 쉬운 만큼,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평원파여. 너희의 문제점은 너무나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마왕에게는 별다른 통치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만히 옥좌에 앉아만 있어도 마족들이 저절로 충성하고 복종하는 존재. 그것이 마왕이었다. 아무리 개판으로 다스려도, 백성을 돌보지 않아도, 마왕의 권력은 절대적……. 권력이 영원하므로 정치술은 태어나지 않았다. 통치가 사라진 왕좌에는 무엇이 남는가? 전쟁이다. 오로지 전쟁만이 남는다. 서열 제도 자체가 그것을 증명했다. 서열 제1위에서 제72위까지 평가하는 기준은 순전히 '얼마나 전쟁을 잘 수행하느냐'였다. 마왕의 세계란, 오직 전쟁에서 발휘하는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곳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고 뭔가. 저들은 왕이었다. 그런데도 타인을 잘 다스리는 실력이 아니라 타인을 잘 꺼꾸러트리는 실력에 따라서, 서열과 명예가 전부 결정되었다……. 이래서야 마왕들이 수천 년 동안이나 서로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분열을 일삼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런 마왕의 세계에서 평원파였다. 천부적으로 싸움과 전쟁에 관하여 재능을 타고난 자들.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며, 기마병을 이끌고 적군을 유린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전투병기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마왕으로 태어난 것을 천명이라 여겼으리라. 당연했다. 자신들이야말로 마왕다운 마왕이라고 한치의 의심 없이 자부했겠지. 그리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전사인 바르바토스를 숭배하는 데 어떠한 주저도 없었다……. 자신들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자체가 평원파 마왕들에게는 생소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걸어가는 길이 올바르다고, 정말로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 명예로운 전사를 그리는 모습은 틀림없이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맹목이었다. 이제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날 때다. 딱히 꿈을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지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 나에게 당신들의 의심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의 신념을 완전하게 부수지는 않겠다. 말하자면 너희는 지금 꽃봉오리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의심이 더해지면 바야흐로 꽃이 만개하는 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이 분야에 관해서만큼은 내가 전문가다……. “……그래서.” 마침내 제파르 형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자네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자네들은 어떤 이익을 얻느냐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익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모른 척 반문했다. 노골적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면 되레 어색할 테니 단지 정중하게 당신의 질문을 다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암살자가 술에 독약을 타듯이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행동했다. “시치미 떼지 마라. 우리가 그런 발언을 해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지 않은가……!” 아니다, 제파르. 그게 아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는 경우는 오직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모함을 당했을 때에 한정된다. 정말로 바르바토스가 암살건을 저질렀다면――당연하게도 당신들의 선언은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마르바스와 중립파의 목적은 순전히 바르바토스를 단죄하는 것이니까. 정치적인 모함이 아니다. 증언을 거짓으로 조작해내서 평원파를 파멸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마르바스는, 중립파는, 그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파이몬을 암살해버린 바르바토스를 처벌하려는 것이다. 그뿐. 바르바토스 이외의 평원파를 처벌할 이유는 없으므로. 오히려 무죄를 선언해주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그대들에게 양심고백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재차 반문하도록 하지요.” 알겠는가. 너희는 지금 전제를 잘못 세워두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바르바토스를 중상모략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제파르 대장.” 그대들의 자랑스러운 주군은, 명예로운 군단장은, 진실로 파이몬을 암살했다. 바로 이 전제 아래에서만 너희의 고백은 의미를 갖는다. 이 전제가 올바르기에 우리는 너희에게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해답이다. 정답에서 고개를 돌리지 마라, 평원파. “…….” 내가 반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파르 대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질문에 대해 반문하는 것도 때때로 훌륭한 대답이 되었다. 지금 경우가 그러했다. 내 반문 자체가 제파르 대장의 머리에서 하나의 가설을 강화했다. 강화해버렸다. 제파르 대장이 예상하고 기대했을 '사악한 이익'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마르바스와 중립파에게는 없었다. 중립파는 순전히 바르바토스의 폭주와 독주를 막으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제파르 형님이 이빨을 꽉 물었다. “만약에……만약에, 네놈들이 바르바토스 각하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 성공하면……그리고 우리가 그 말도 안 되는 모함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 들었다. 제파르 형님은 '누명'이라든지 '그 말도 안 되는 모함'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렇게 위장 연막을 뿌려봤자 질문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방금 제파르 대장이 입에 담은 질문을 진정한 문장으로 복구시키면 다음과 같았다. ――만약에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암살을 지시했다면 어떻게 되느냐, 라고. 명백한 의혹. 의심암귀(疑心暗鬼). 어쩌면 바르바토스 각하께서 파이몬의 암살을 획책했을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 여태까지 맹목적인 충성심과 믿음에 의해서 가려져 있었던 가능성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새벽 어스름에 슬그머니 꿈틀거리는 나팔의 꽃처럼. “우선 한 가지 사항을 짚고 넘어가지요.” 이제 멈출 수 없었다. 한번 피기 시작한 꽃이 다시 봉오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아. 이곳이 나의 영역이었다. “암살건은 결코 누명이 아닙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도 증거를 보여드릴 날이 오겠지요. 아니, 당장 내일 보여드릴 계획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지속될 시간은 겨우 열다섯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감히 선언하나니. 지금부터 평원파와 바르바토스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된다. 마르바스가 지배를 관장하듯이. 바르바토스가 전사의 영혼을 관장하듯이. 각각의 마왕에게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대가 있었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해드리자면, 당연히 바르바토스는 처형되고 여러분은 무죄로 풀려납니다. 우리가 임의로 거두어들인 지위도 모두 돌려드리겠습니다.” “…….” “당연한 것을 왜 굳이 물어보시는지요, 제파르 대장?” 나,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이 관장하는 것은 모략과 복수, 연기술. 하나의 단어로 통틀어서 가리키자면 속임술. 의심이라는 청동으로 배신이라는 동상을 주조해내는 조각술이요, 거짓된 납덩어리를 황금으로 바꾸는 연금술 중의 연금술이다. 마르바스도, 가미긴도, 바싸고도, 오늘 밤에 협력해준 어떤 마왕도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만마를 거느리고 천의 군세를 휘두르는 마왕들이여. 턱을 숙이고 눈을 아래로 두어라. 주름진 이마를 조아리고 내 언어에 복종하라. 여기서부터가 나 단탈리안의 영토이다.   00428 황금의 몰락 =========================================================================                        * * * 이날 밤, 평원파 마왕들은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질렀다. 사실 악바리를 쓴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우리는 바르바토스 전하와 함께 죽기를 맹세했다! 그곳이 전쟁터이든 광장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네놈에게 무슨 사악한 계획이 있을지라도 우리들의 맹세를 깨부술 수는 없다!” 그야말로 핏기가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외침이었다. 동료의 의기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혹은 잠시라도 바르바토스에 대해 의심한 것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것인지, 평원파 마왕들은 앞다퉈서 내게 욕을 쏟아부었다. “그렇다! 헛수작 부리지 마라, 저열한 배신자야!” “네 녀석이 원하는 것이라곤 우리의 목숨 이외에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리라!” 그들은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아우성을 쳤다. 나와 더불러서 중립파 마왕들이 그들을 호송했다.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충동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서는 파이몬의 죽음에 어떠한 연관도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만이 처벌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암살 따위를 행하지 않으셨다!” 한 마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께서 결백하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입니까?” 그러나 내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다는 듯, 대다수의 평원파 마왕들은 그저 악바리를 쓰기만 했다. 여덟 명의 마왕은 각기 멀찍이 떨어져서 독방에 투옥되었는데, 한동안 감옥에 갇혀서도 바르바토스와 같이 죽겠노라고 소리 높여 맹세했다. 단지 두 사람, 제파르 형님과 벨레드 형님만은 각기 다른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제파르 형님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묵묵하게 입을 다물었고, 벨레드 형님은 당장이라도 파안대소할 것처럼 입가에 웃음기를 띄웠다. 바르바토스는……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원파 마왕들이 모두 뿔뿔이 투옥된 직후. 나는 호위로 데이지를 대동한 채, 먼저 제파르 형님이 갇힌 독방에 찾아갔다. 모든 독방은 철저하게 반(反)마법으로 뒤덮여 있었고, 수감자는 벽면에 사지가 꽁꽁 묶였다. 제파르 형님 역시 온몸이 포박되어 있었다. 내가 철문을 열고 들어오자, 제파르 형님이 빤히 나를 노려다보았다. 무엇을 하려고 여기 왔느냐. 시선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겠습니다, 형님.” “형님……?” 제파르 형님이 메마르게 웃었다. 사막의 공기가 떠오를 만큼 메마른 웃음이었다. “네놈이 여전히 나를 그리 부를 이유가 어디 하나라도 있다는 말이냐?” “뭐라고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우선 이걸 알아두십시오. 이대로 내일이 지나면, 바르바토스는 틀림없이 죽습니다.” “…….” “바르바토스는 정말로 파이몬을 암살했습니다.” 쿵, 하고 제파르 형님이 몸을 비틀었다. 특별히 마력이 서린 강철 쇠사슬로 빈틈없이 신체를 묶어두었음에도, 게다가 제파르 형님 본인부터 팔이 잘린데다 독 묻은 칼날에 몇 번이고 찔렸음에도, 순간적으로 독방이 진동했다. “그 요망한 혓바닥을 당장 멈추지 못할까……!” “형님. 제 말을 신뢰하든 신뢰하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다. 그 정도로 생각해주셔도 좋습니다.” 내가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만약의 이야기입니다. 바르바토스가 진실로 파이몬을 암살했으며, 그에 대해 확고부동한 증거들이 있다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르바스는 일부러 우리 평원파가 산악파를 공격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일부러……?”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어서 물었다. 자연스럽게, 데이지가 옆에서 불을 지펴주었다. “마르바스는 말했습니다. 파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르바토스를 처단한다고. 그렇지만 단순히 바르바토스를 처벌하고자 했다면, 구태여 산악파가 전멸에 이를 때까지 수수방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차라리 산악파와 연합해서 평원파를 공격하는 편이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후우, 하고 연기를 공중에 흘려보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산악파가 거의 전부 죽는 것을 용인했습니다. 그 다음에 평원파를 숙청하고자 움직였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형님?” 제파르 형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을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에게 대답한다는 행위 자체가 증오스러워서 입을 다물었을 따름이다.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마르바스는 중립파에 의한 독재를 꿈꾸고 있습니다.” “…….” “아니, 독재라고 하면 어감이 과할까요. 학살을 저지른 산악파도, 암살을 범한 평원파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느낌에 가깝지요. 마르바스는 중립파 이외에는 마족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본래 마르바스와 시트리 사이에는 평원파를 협공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르바스는 중립파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려고 한 발자국 늦게 평원파를 공격했다. 어차피 평원파를 전부 숙청해버리기로 결정한 이상, 산악파 역시 숫자가 줄어들 필요가 있다 판단했겠지. 결국 시트리는 어느 쪽에서든 이용당한 셈이 되었다. 나에게도, 마르바스에게도, 산악파의 배신자들에게도. ……여긴 순수한 마왕이 아무런 탈 없이 살아갈 정도로 밝은 곳이 아니었다. 판데모니움. 말 그대로 만마가 모여드는 장소였다. 지금쯤 시트리는 마법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시트리가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생각하는 동시에――'잘 되었다'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었다. 시트리가 중립파에 적대심을 품으면 품을수록 결국 나에게 이득이 되었다. 시트리가 기댈 곳이 더더욱 나 한 명으로 고정되니까. 마르바스에게 환멸감을 품어주는 것이, 배신감을 느껴주는 것이 내게는 좋았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다. 나란 녀석은 그런 놈이었다. “형님. 이대로 평원파 동지들이 자신의 무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극본이 완성될 것 같습니까? 아니. 제가 말해보지요.” “…….” “평원파는 전원이 처형당합니다.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평원파 모두가 파이몬의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의혹이 굳어진 채로. 산악파는 몰락하고, 평원파는 궤멸합니다. 마르바스의 승리입니다.” 제파르 형님이 눈을 감았다. 얼핏 보기에도 괴로운 기색이었다. “마르바스는 평원파들이 무죄를 고백하는 것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제발 무죄를 고백해주십시오.” 내가 애절하게 부탁했다. “그것만이 평원파가 살아남을 길입니다.”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제파르 형님이 툭, 하고 중얼거렸다. “우리가 무죄를 고백해본들 어차피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죽음을 면치 못하시겠지. 각하께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나. 거기에도 여전히 평원파가 남을 것 같은가?” 제파르 형님이 작게 비웃었다. “……형님. 이건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정말로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세, 단탈리안.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무지하군. 이건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야. 각하의 죽음이 곧 평원파의 죽음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영원히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제파르 형님이 눈을 떴다. 주름진 눈꺼풀 너머에서 회색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동자는 명백히 고통으로 지쳤다. 하지만 그속에도 형형하게 도사리는 빛이 있었다. “삶의 문제란 결국에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로 결정된다.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해서 죽는 방식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해서는 삶이 결정된다. 우리는 바르바토스 각하와 함께 죽겠노라고. 반드시 같이 죽겠노라고 결정했다.” “…….” “어쩌면 자네에게는 괴로운 입장을 강요했을지 모르겠군.” 제파르 형님이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자네는 바르바토스 각하의 애인이었지만 파이몬의 애인이기도 했어. 아아, 그랬지. 자네가 두 파벌을 조율한 덕분에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다. 얄궂은 이야기야. 결국 자네 한 사람에게 마왕군 전체가 평화와 전쟁을 떠넘긴 셈이니……. 제파르 형님이 씁쓸하게 한탄했다. “자네를 사이에 두고 바르바토스 각하와 파이몬이 말로 다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어쩌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찰나의 꿈이었군. 결국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못하게 되었어. 자네에게 요 몇 달은 영원토록 최악의 실수이자 악몽으로 남겠지…….” ”…….” “아마도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정말로 파이몬을 암살하셨겠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죄를 인정해주십시오!” “아니다. 단탈리안, 정반대다. 자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라.” 제파르 형님이 슬쩍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수염도 입가도 핏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곧 죽으셔도 암살 따위는 행하지 않을 분이다. 상대가 파이몬이더라도 마찬가지야. 아니, 숙적인 파이몬이기에 오히려 절대로 암살을 택하지 않겠지. 그건 마왕의 자존심이 걸린 지점이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절반은 연기였고, 절반은 진심이었다. 제파르 형님은 내 의도대로 속아주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결심했는지, 나는 눈금 들여다보듯 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파르 형님이 지금 내뱉는 말들은 내 계획상에 없었다. 큰 물줄기가 흘러가지만 어딘가 한가운데에서 빙글 돌아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 만일 암살을 범하셨다면 그건 마왕으로서 행한 일이 아니다.” “…….” “단탈리안. 각하께서는 자네를 사랑하는 한 명의 소녀로서 그러신 게야.” 아마도. 지금 내 얼굴은 굳어 있겠지. “어떤 고난이 들이닥쳐도 긍지와 신념을 꺽지 않는 분이시다.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위해서 죽는 그날까지 신념을 지키시겠지. 하, 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그렇기에. 오히려 그렇기에, 하고 제파르가 말했다. “만일 그분께서 긍지를 접는다면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다.” 거기까지 말해라. “자네를 위해서다.” 그딴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만큼. 꼭 그만큼 자네 역시 사랑하고 있는 것이야.” 이미 파이몬을 죽이는 그 순간부터. 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에 비롯했다는 사실 따위는,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걸 구태여 내 면전에서 되새기게 하지 마라. “우리 평원파가 숭배하는 마왕 바르바토스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단지 그분에게는 자신의 신념만큼이나 거대한 무언가가 생겨버렸을 뿐이지. 만약 그것이 사랑이라면, 단탈리안. 나는 기쁘게 바르바토스 각하의 이율배반을 인정할 것이다.” 바르바토스가 내 배신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 까닭. 아무런 항변도 변명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이유. 그건 그녀가 정치적 동반자인 나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단지 사랑하는 여자로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반당했기에,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 각하께서 홀로 떠나시게 내버려둘 수야 없지. 나 제파르, 태어난 의미를 깨달은 그 순간부터 각하를 모셨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각하를 옆자리에서 지키겠다. ……단탈리안. 안타깝지만 자네의 제안에 응해줄 수는 없다.” 그걸로 제파르 형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축객령이었다. 나는 말없이 독방에서 걸어나왔다. 걸어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눅눅하고 축축한 복도를 걷고, 나는 몸이 기울어지면서 벽에 부딪쳤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두근거렸다. 숨이 가빠왔다. 내가 벽면에 미끄러지면서 쓰러지자,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내 몸을 받아냈다. “하아, 흐윽……하아…….” 이건 연초 때문이었다. 그렇다. 연초에 중독된 탓에 갑작스레 심장이 날뛰는 것이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가끔씩 이런 발작이 일어났다. 데이지가 물끄러미 검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히죽 웃었다. 입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찌되었든 미소를 만들어냈다.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악덕이었다. “뭘 우습다고 보고 있느냐.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거늘.” “…….” “일으켜라, 우둔한 것.” 데이지가 조용히 나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잠시 뒤에 어지럼증이 사라졌다. 심장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평소대로의 나. 언제나와 같은 내가 완성되었다. 좋았다. 제파르 형님의 마음속에 심어둔 의심의 꽃이 만개했다. 시나리오는 완벽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바르바토스가 남았다.   00429 존재의 긍지 =========================================================================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까지라도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소녀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코 끝에 매캐한 연기 냄새가 감돌았다. 희미하게 피냄새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또 전쟁터에서 잠들어버린 모양이라고, 소녀가 스스로 납득하였다. 뺨에서 무언가가 끈적거리길래 손바닥을 대보니까, 이게 웬걸. 검붉은 피딱지가 묻어 있었다. “어이.” 두텁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과 동시에, 축축한 물수건이 소녀의 얼굴에 부닥쳤다. 소녀는 수건을 쥐고 상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주 쥐 죽은 듯이 자더군. 간덩이가 큰 건지 머리가 빈 건지 모르겠군. 그러다가 패잔병한테 목이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냐.” “안 죽었잖아.” 소녀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얼마나 많은 핏물을 얼굴로 받아낸 것일까. 회색 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그중에서 어느 정도의 피가 자기 몸에서 나왔을지 소녀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된 거 아니야?” “너무 아슬아슬해서 가만히 두고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지랖이 넓네. 마왕답지 않아.” 소녀가 무미건조하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니까 이제 조금 시야가 보였다. 한없이 광대한 평원이었다. 수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한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마법사들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소녀가 문득 떠올렸다. 마력이 급속도로 낭비되면 이런 불모지가 형성된다고 했다. 눈에 띈 것은 붉은 모래로 뒤덮인 대지뿐만이 아니었다. 시체. 수많은 시체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젯밤에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이었다. “아직 마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말이다.” “몇 살인데?” “글쎄. 나이를 세다 말아서……대충 아흔 살을 넘었나.” “완전히 꼬맹이네.” 소녀가 실실 웃었다. 딱히 상대방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상대방이 너무 노안이었다. 회색 머리카락. 지긋하게 주름진 얼굴. 만약 얼굴로만 따지면 마왕들 전체를 통틀어서 제일 늙은이로 취급받을 기세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막내 중에서도 막내였다. “…….” “미안해. 무섭게 노려보지 마. 내가 너보다 이백 살이나 많다는 게 우스워서 그래. 뭐어,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소녀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사람 이름을 도통 못 외워서.” “어제도 그리 말했고, 그저께도 그리 말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느냐. 자기소개를 수십 번 해야 하는 나의 입장도 조금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미안하다니까.” 읏차, 하고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오래된 경첩처럼 관절의 마디마디가 삐꺽거렸다. 소녀는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면서 몸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내가 나쁜 게 아니야. 모처럼 이름을 기억해봤자 전부 죽어버린다고. 특히 너 같은 신입 마왕은 말이지, 간단하게 모가지가 쓱싹 잘리거든. 어제 마왕이 몇 명 죽었지?” “내가 알기로 세 명이 전사했다.” “거 봐. 이번 주에 나자빠진 마왕만 스무 명이 넘는데, 걔네를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마왕과 용족.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지배자들의 혈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왕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마족의 군주임을 천명했다. 반면, 마왕의 지배력에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는 드래곤들은 이에 반발했다. 두 세력이 피로 피를 씻는 대전을 일으키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평범한 전쟁이 아니었다. 마왕과 용족은 각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벌이는 싸움. 말 그대로 절멸전쟁이었다. 물러설 수 없는 전쟁에서, 물러설 수 없는 자들이 무기를 쥐어들었다.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서 하나씩 접었다. “어디 보자. 맘몬 아저씨는 사지가 찢겨서 죽었고, 베엘제붑 아줌마도 통째로 바싹 구워져서 죽었고, 벨페고르도 피부가 싹 다 벗겨져서 죽었고. 바알 아저씨는 반죽음 시체로 후방에서 죽을 준비나 하고 있고. 봐, 가장 잘났다는 놈들이 싸그리 다 당했잖아. 내가 네 이름 기억해봤자 어디 보름은 더 가겠어?” “나는 죽지 않는다.” 노안의 마왕이 불쾌한 듯 말했다. “적어도 너처럼 죽으려고 환장한 것보다는 나중에 죽겠지. 맹세해도 좋다. 설령 내가 죽을지라도 너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거 웃긴 놈일세.” 소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알았어. 이번엔 정말로 기억해줄게. 이름이 뭐야?” “제파르.” 남자가 소녀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제파르다. 영원히 까먹지 마라, 꼬맹이.” “누가 누구 보고 꼬맹이래. 백 년도 살아보지 못한 애송이가.” 소녀가 수건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나중에 빨아서 돌려줄 속셈이었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소녀가 기절하듯이 곯아떨어지자, 행여라도 변을 당하지 않도록 남자가 주변에서 번을 봐주었다는 것. 일부러 물에 젖은 수건을 준비해서 소녀에게 건네주었다는 것. 아마도 남자는 죽겠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마왕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용족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마왕군의 피해가 너무도 심각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적수, 가장 강력한 용군주(龍君主)를 토벌하기 위해 진군해야만 했다. 거기서 십중팔구. 아니, 반드시 남자는 죽으리라.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죽는 것이 당연한 전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해봤자 나중에 괴로워질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신세를 졌는데 통성명조차 거부하기란 어려웠다……소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바르바토스야. 오늘도 죽지 않도록 노력해보자고.” “바르바토스.” 남자가 그 이름을 되새기려는 듯이 천천히 읊었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다.” “응? 뭐.” “수십만 명에 이르는 마족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죽어나가고 있다. 마계 전체의 피해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수준이다. 이런 피해를 짊어지면서까지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는가?” 소녀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좀 과묵하다 싶었더니 쓸데없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철학자였나.” “나는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 어차피 그대도 원해서 마왕이 된 것이 아닐 터. 언젠가 눈을 떠보니, 태어나보니 우연하게 마왕이었을 뿐이지 않는가. 그런 우리에게, 수십만 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권리 따위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남자가 뚫어지라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비교적 젊은 마왕에 속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누구보다 압도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녀가 양손검을 휘두르며 나아가면, 병사들은 용기백배해서 산더미만한 덩치의 용족을 향해서 돌격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컨대, 소녀에게는 목숨을 던져서라도 뒤따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는 거기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소녀는 의문에 대답해줄지 모른다. 병사들이 기꺼이 죽음을 바치는 소녀라면 그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해줄지도 모른다……. “간단한 문제야.” 소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왕이 다스리는 세상과 용족이 다스리는 세상. 어느 쪽이 마인들에게 더 행복할지 생각해보면, 정답은 저절로 나오잖아.” “행복……?” “그래. 우리 마왕들은 마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어.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볼 정도는 돼. 우리가 재판관이 된다면 최소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처벌당할 사람도, 죄를 저질렀는데도 처벌당하지 않는 사람도 사라지겠지.”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알겠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사라지는 거야.” “…….” “겨우 그것뿐이지만. 겨우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지금 세상이잖아.” 소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움켜 잡으려는 듯이 꾸욱 주먹을 쥐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억울하게 죽는 생명이 단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나는 그때까지 싸워 나가겠어.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세상을.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희생되지 않는 세상을 나는 원해.” 그건 오직 우리만이 이룰 수 있는 이상이야, 하고 소녀가 말했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데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그 생명들에 내가 책임을 질 방법은 사실상 없어. 그러니까――적어도 내가 가장 앞장서기로 맹세했어.” 그렇기에 전쟁터에서 소녀는 누구보다 앞서 달려나갔다. 마왕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최전선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마인들은 그런 소녀의 모습에 매혹되어서, 소녀의 진심 어린 행동에 감화되어서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 그곳에서도 소녀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양 날개를 가진 용족을 눈앞에 두고, 마왕들 전원이 굳어버렸을 때. 용족이 울부짖은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켜 십만 명의 병사가 모두 공포로 사지를 떨었을 때. 바로 그때, 아무런 주저도 없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자국을 내딛은 자가 그곳에 있었다. 소녀는 백발을 휘날리며 자신보다 두 배는 거대한 양손검을, 자신보다 천 배는 거대한 용족을 향하여 휘둘렀다. 그 일격은 틀림없이 강철보다 단단한 용족의 비늘을 찢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소녀는 피를 흘렸고.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을 떄, 어느새 수만 명의 함성이 소녀를 뒤쫓아서 쇄도했다. 전투는 사흘 밤낮으로 이어졌다. 모두가 지쳐서 쓰러져도 소녀만큼은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패배할 수밖에 없노라고 절망하여 멍하게 눈앞을 쳐다보면, 바로 그곳에서 소녀는 쉴 새 없이 검격을 날리며 거용(巨龍)의 눈을 잡아두었다. 아마도 어느 한 순간은 소녀 혼자서 용에게 맞서 싸웠다. 주변에 누군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소녀는 계속하여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만약 신화가 실존한다면, 그때야말로 신화가 펼쳐진 순간이겠지. 자그마한 소녀가 자신의 검에 의지해서 홀로 용을 토벌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용이 내뿜은 불길에 타올라서 사라질 것 같았지만, 소녀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불길을 피했다. 당장이라도 용의 발바닥에 짓눌려서 터질 것 같았지만, 소녀는 단 한 치의 거리를 두고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검격을 이어나갔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불멸. ――불멸의 바르바토스. 결국, 마지막 용군주의 콧등에 칼날을 내리찍은 사람도 또한 소녀였다. 십만의 군세 중에서 팔만의 병사가 목숨을 잃어버리고 마흔 명의 마왕이 전사해버린 전쟁은, 소녀의 발걸음에서 시작하여 소녀의 검으로 끝났다. “…….” 용에게 결정타를 날리자마자, 소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남자가 황급하게 달려가서 소녀를 부축했다. 남자는 이때 진심으로 소녀가 죽은 줄 알았다. 지난 사흘 동안, 소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혈투를 벌여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남자의 품안에 안긴 소녀는 작게 웃었다. “서로가 엉망진창이네.” “……아아.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다.” 남자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진짜로 이번엔 죽는 줄 알았어. 어때? 나 조금 멋있지?” “부정할 수 없는 게 슬프군.” 그 순간, 남자는 자신의 의문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소녀를 지킨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사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마왕으로 태어난 의미임을 남자는 깨달았다. “너무 멋있어서 반했다. 나와 결혼해다오.” “뭐래, 애늙은이가.” 소녀가 두 눈을 감으면서 희미하게 속삭였다. “수염이나 멋있게 길러봐. 그럼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어.” 그렇게 대전은 종결되었다. 오래된 기억. 한 명의 남자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 날이었다.   00430 존재의 긍지 =========================================================================                        * * * “…….”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바르바토스는 약간 졸리운 듯 반쯤 눈을 감았다. 천장에서 매달린 채로 잠들면 피로가 거의 풀리지 않았다. 여러 의미에서 피곤하고 지쳤겠지. 바르바토스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슴푸레했다. “그리운 꿈을 꿨어.” “꿈인가.” “응. 그랬네. 제파르 녀석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게 그쯤이었구나……예전부터 바보처럼 진지한 놈이었어.” 바르바토스는 무엇이 재밌는지 쿡쿡 웃었다. 나는 연초를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흘려보내는 웃음소리와 내가 피어내는 연기 사이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방이 잿빛으로 틀어막힌 독방이었다. 항시 빗물에 젖은 응달마냥 서늘하고 음울했다. 우리 둘이 이런 곳에서 대화를 나누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바토스도 똑같은 감상을 품었겠지. 손목에 걸린 쇠사슬을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아, 아―. 결국 차여버렸네, 나. 이래서 남자 따위는 사랑하는 게 아니었는네. 나도 참 바보 멍청이라니까.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세 겹은 씌었어.” 뿔이 잘리고 사지가 결박된 마왕이라기에는 한없이 태연자약했다. 그렇지만, 이게 바르바토스였다. 가슴에 긍지를 품은 암사자. “나를 사랑한 걸 후회하나?” “후회하지. 엄청 후회해. 나는 말이야, 애인을 차는 건 좋아해도 애인한테 차이는 건 정말로 싫어하거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장 네 자식의 불알부터 박살낼 거야.” 내가 웃었다. 잠시 말없이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음악이 멈추었을 때처럼 내 심장 부근에서만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그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다가 이윽고 활시위 끊어지듯 뚝, 하고 튕겼다. “내가 파이몬을 죽였다. 바르바토스.” “어? 알고 있어.” “아니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손으로. 직접 파이몬의 몸에 칼날을 쑤셔 박았다.” “…….” “파이몬이 흘리는 핏물을 내가 모두 내리받았어. 목덜미에 한 번. 등에 한 번. 뒷목에 한 번. 모두 세 번, 날카롭게 벼린 단검을 꽂아 넣었다.” 나는 맨주먹으로 나의 목덜미와 등을 가볍게 두들기면서 시연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찌를 때마다 파르르, 하고 말이야. 파르르, 하고 몸을 떨어대더군. 끝까지 버티려다가 안 됐는지 나한테 체중을 실었어. 정확하게 급소들만 노려서 공격했으니 숨이 넘어가는 것도 금방이었지.” 그런 내 모습을 바르바토스가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대공들이 파이몬을 죽였다고 알았다. 내가 그녀를 직접 살해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약간이지만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바르바토스가 멍한 표정을 지으면 난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지. 내가 일부러 목만 두 번 찔렀다는 거야. 피가 목구멍을 역류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거든.” “하아……?” “유언이다. 죽을 것 같으면 유언을 남길 거 아니냐, 바르바토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는 파이몬을 죽이기 전에 그녀한테 결혼반지를 선물했어. 행복은 방심을 의미하니까. 파이몬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이지. 그래서 결혼반지를 준 다음에.” 내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들었다. 일찍이 직접 파이몬의 약지에 꽂아준 바로 그 반지였다. 나는 반지를 집게손가락으로 잡아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찔렀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찔렀어. 어때? 조금 지나치게 참혹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파이몬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너무 참혹하다고. 그러니까, 만일 파이몬이 유언을 남긴다면 틀림없이 나에 대해 온갖 저주를 토해낼 거란 말이지. 어떤 저주일지 도대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깊고, 무시무시한 유언을…….” 그걸 잠자코 들을 자신이 없었다. 파이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주는 반드시 나의 뇌리에 쑤셔 박혀서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파이몬의 저주는 환영과 환청으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원망하겠지. 나는 나 자신의 정신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이미 상태가 꽤 위태로웠다. 환청까지는 어찌저찌 괜찮다고 넘어갈지라도 환영은 심각했다. 거기에 파이몬의 저주를 끼얹으면, 정말로 내 정신이 붕괴할지도 몰랐다. 신속하게. 유언을 남길 틈조차 없이. 그렇게 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마력을 모조리 잃었다 한들 마왕은 역시 마왕이야. 딱 한 마디. 최후의 한 마디 정도를 남길 여력이 남아 있었지. 물론 너무 길게 얘기할 수는 없었어. 복잡한 어휘를 사용할 수도 없었고. 입에서 계속 피가 역류했으니까, 짧고 단순하게 말해야만 했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기에 아무래도 한 마디의 말은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파이몬에게는 그같이 부조리한 유예만이 남아 있었다. 생각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눈앞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 약혼자이기도 하며, 살인자이기도 한 남자에게 서둘러 유언을 남겨야 했다. 파이몬은 마지막 힘을 끌어내서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라고 말하더군.” “…….” “그 여자. 자기 손바닥을 내 뺨에 갖다대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에 죽어버렸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 바르바토스? 단순한 고백이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내가 담뱃대를 입에서 빼어들고 히죽 웃었다. “그 여자는, 파이몬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서조차……제일 효과적이고 제일 잔인한 저주의 한 마디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만 거다. 완벽하게 천재적이지.” “…….” “파이몬은 알고 있었지. 나라는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 굳이 수없이 많은 저주를 퍼부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악랄한 여자가 아니고 뭐냐. 본능적인 교활함이야.”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슬퍼하는 것도 아니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탈리안. 너……언제부터 환영에 시달린 거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환영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마. 난 전쟁에 집어 삼켜진 병사들을 수천수만 명이나 봤어.” 바르바토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자기가 살해하는 사람이 유언을 남길까봐 두려워서 빨리 죽인다니. 그거, 전형적으로 환영에 사로잡힌 살육자들이 보이는 태도야. 나한테 변명할 생각하지 마. 전쟁에 관련해서 나만한 전문가는 없으니까.” 바르바토스가 내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악몽으로 나타났지? 그 다음에는 환청. 마지막 단계가 환영이야. 거기까지 증상이 악화되면 손쓸 방법이 없어. 언제부터였어? 얼른 대답해.” 나는 가만히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받아냈다. 더없이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르바토스가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말도 안 돼……아니, 너……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착각하지 마. 나는 아주 멀쩡해.” “그러니까 마약이랑 술에 빠진 게……잠깐만, 그건 월맹군 때부터……아니, 단탈리안. 나를 바라봐. 내 눈동자를 봐, 개자식아!” 정말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바르바토스는. 아까 전부터 계속 너만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아……! 아아!”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정리되었다. 혹은 더욱 비틀어졌다고 표현해야 올바를지도 모르겠다. 바르바토스는 순전히 경악에 물든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이걸……이렇게 단순한 걸 눈치 채지 못하다니……!” “내 착각이 아니라면 우리 둘 사이에서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바르바토스.” “단탈리안, 너, 사람이랑 대화할 때 상대방의 얼굴이랑 눈만 바라보잖아!” 대화가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지. 그게 예의 아니냐.”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왜 그것도……너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 시선을 둘 곳이 상대방의 얼굴 정도밖에 없었던 걸, 그걸…….”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군.”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몇 명이야!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아까 전부터 말하고 있잖냐.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방안에서 죽은 놈들 면상이 몇 명이나 보이는 거냐고!” 그러니까. 이 방안에는 바르바토스와 나,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 바르바토스는 이상한 주장을 고집하는 것일까. “사법거래다. 제파르가 너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 쓰겠다고 말했다. 네가 공개석상에서 파이몬의 암살을 오직 너 혼자 기획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평원파 전원이 사형당할 거다.” “고개를 돌려!” “너는 부하들을 사랑하고 있겠지. 평원파가 이대로 궤멸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 순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 빌어먹을 개새끼야! 내가 시키는 대로 시선을 어디 다른 방향으로 돌리라고!” 바르바토스가 소리를 내질렀다. 아무래도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협상에 응하지 않을 속셈인 것 같았다. 내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독방의 한 구석이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아. 됐냐. 네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돌려주었다. 이제 소원이 풀렸으면 나와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거기서 뭐가 보여?” 바르바토스가 끈질기게 물어왔다. 정말이지 거머리보다 악독스러운 여자였다. “그쪽 구석에 뭐가 보이는지 대답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안 보여. 그냥 축축하게 젖은 돌벽이 있을 뿐이다.” “…….” “자아, 쓸데없는 망상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말자고.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지 않냐.” 내가 한숨을 참으면서 다시 바르바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리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지금껏 내가 목격한 그 어떤 표정보다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왜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한 거야……. 내가 언제나 네 옆에 있었는데……한 마디 말만 해줬으면, 나한테 조금만 의지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 “바보 단탈리안……그쪽 구석에는 고문도구들이 놓여 있어…….” 더 많은 눈물이. 보다 많은 눈물이 궤적을 그리면서 흘러내렸다. “도대체 뭐가 네 시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그곳에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시체들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 방안에만 수십 명이 나를, 바르바토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창에 꽂혀서 매달린 시체들이, 참수당해서 머리밖에 남지 않은 시체들이, 핏물로 뒤집혀서 우리 두 사람을 포위했다. 대체로 그들은 앉아 있거나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저들끼리 속삭이기도 했는데, 대체로 내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리였다. 머리통만 남은 시체가 얘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들은 모조리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환상에 불과했다. “파이몬도 있구나.” 바르바토스가 눈물에 흐려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파이몬까지 보이는 거야. 그렇지, 단탈리안? 솔직하게 대답해줘……지금 네 눈에 파이몬이 어디서 비추고 있어……?” 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엔 아무도 없어, 바르바토스.”   00431 존재의 긍지 =========================================================================                        “…….” “불쌍한 놈 쳐다보듯이 할 필요가 없어. 여기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무언가가 내 발목에 들러붙었다. 축축하고 눅눅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만일 내가 발목을 내려다보면 촉감이 즉시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함정에 걸리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이걸 개인적으로 간지럼증이라고 불렀다. 발목이 간지러워서 발목을 긁으면 이상하게도 허리가 가려워졌다. 허리를 긁으면 이번에는 또 어깨가 가려워졌다. 꼭 그처럼, 일단 저 그림자들에 시선을 줘버리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발목을 보고, 허리를 보고, 어깨를 보아서, 그렇게 그림자들을 쫓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퇴로에 막히게 되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감촉만이 남아서 내 손목을, 발목을, 등을 쥐어잡아서 끌어당겼다. 벌레들이 온몸을 갉아먹는 것처럼.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만 말해두겠다. “파이몬이 죽고 나서 넌 아무와도 자지 않았어…….” 바르바토스가 흐느끼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흐느낌이었다. “난, 그게 네가 나한테 싫증이 난 탓이라고 멍청이처럼 생각했어…….” “아아. 여자들에게 질렸거든. 사람에게 질렸지.” 내가 연초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성욕이란 것도 정말로 사람한테 질려버리면 사라지는 물건이더군. 성욕에서 벗어난다는 게 이토록 기쁜 일인지 미처 몰랐지 뭐야. 흉악한 포주한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창녀가 된 기분이라고 할까.” “파이몬의 환영이 계속 비추기 때문이잖아……!” 나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냈다. 실수로 붉은 손수건을 꺼냈는데, 그걸 도로 집어넣고 새하얀 손수건을 쥐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에게 다가가서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년이, 결국 그년이 너를 망쳤어……아아! 이럴 줄 알았는데! 이미 옛날에 알아차렸는데, 내가 바보같이 주저하는 바람에……! 진즉에, 너한테 말하지 않고 내가 죽여버렸어야 했어!” “그만 울어.” “어디야, 그년은 어디 있는 거야……나한테 달라붙어 있어? 네가 보는 여자마다 파이몬이 겹쳐서 보이는 거야? 아아, 단탈리안, 이 바보야……멍청한 개자식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네 얼굴은 아주 잘 보여.”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르바토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은 그리 최악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보는 여자마다 파이몬이 악령처럼 달라붙어 있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여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했겠지. 정반대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업적인 얘기를 나눠보자.” 파이몬은 내 등 뒤에 있었다. 오른팔로 나의 가슴을. 왼팔로는 나의 허리를 껴안은 채. 그녀는 턱을 내 오른쪽 어깨에 올려두었다. 덕분에 그녀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흘러들었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의 말을 되풀이하고,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간헐적으로. 마치 숨결을 내쉬듯이. 어깨와 가슴에서는 축축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핏물을 의미하겠지. 비유하자면 조금 강도가 센 간지럼증이었다. “나를 죽이지 마, 단탈리안…….” “…….” “나를 죽이면 안 돼. 제발. 차라리 동토(冬土)의 감옥에 영구히 가둬. 내가 죽은 모습으로 너한테 비추면 정말로 끝장이야……그런 걸 네가 견딜 리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네 자신이 잘 알고 있잖아…….” 바보 같은 소리를. 바르바토스처럼 거물인 마왕을 동토에 가두어놓은들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마계에는 바르바토스를 숭배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설령 파이몬을 암살했다는 죄목이 낱낱이 밝혀질지라도, 소수의 마족은 끝까지 바르바토스를 구하려 들겠지.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짊어져도 괜찮을 부담이 아니었다. 내 무표정한 얼굴에서 절망적인 대답을 느낀 것일까. 바르바토스가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다. “차라리, 나랑 도망쳐……!” 손수건을 쥔 내 손이 멈칫했다. “나랑 같이 도망치자, 응? 네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할 필요가 대체 어디 있는데. 마계 어디론가……사람의 발길도 마물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수백 년을, 천 년을 지내다보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바르바토스와 단 둘이서 지내는 것인가. 평범한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한적한 산골에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아간다. 마왕에게는 많은 식량이 필요하지 않다. 살림에 쫓겨서 바빠질 일도 없겠지.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것도 괜찮겠지. 이래 봬도 나는 농사에 재능이 상당했다. 아마도 바르바토스는 '뭐 이렇게 심심한 일에 열중하냐' 하고 비웃을 것이다. 열심히 농기구를 휘두르는 나를 옆에서 보며 깔깔거리겠지. 천하의 단탈리안이 결국 취한 직업이 농사꾼이냐고. 그러면서도 내가 일과를 끝마치면 '수고했어'라고 빙그레 웃어줄 거다. 영원과도 같은 평화가 흐르리라. 나는 매일 밤마다 악몽과 환영에 시달린다. 그런 나를 바르바토스가 부드럽게 안아준다. 낮에 비웃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한없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쓰담는다. 괜찮다고. 네 옆에는 내가 있다고. 언제든, 언제까지나, 언제라도, 내가 당신의 옆에 있어줄 테니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비극을 겪었지만 두 사람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도 무너지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다면, 설령 백 년이 걸릴지라도, 천 년이 소요될지라도, 우리는 틀림없이 견뎌낼 수 있겠지.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애원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비웃는 것처럼 내 입끝이 일그러졌다. 이내 비웃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가 양손으로 바르바토스의 뺨을 잡았다. 행여라도 금이 갈까봐 두려워서 부드럽게 그녀의 살결에 손바닥을 올려두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나의 얼굴을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나는 입을 비틀어서 히죽 웃었다. “그 따위 미래가 가능할 리 없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내가, 이 단탈리안이 용납하지 않는다! 도망이라니! 도주라니! 꼴사납게 몰락하고 말았구나,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의 눈동자에 악귀와 같은 웃음이 비추었다. “내가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것을 잊어버릴 사람으로 비추었다면 큰 오산이다! 왜, 사랑하는 이의 불행에 마음이라도 울적해졌느냐! 내가 온 세상의 불행을 짊어진 아틀라스로 보이기라도 한 거냐! 어설프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턱을 잡아올렸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파르르 떨고 있는 눈썹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다.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리니까 그 모양이 된 거다――이치는 간단하다! 지금 이 자리에, 예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치는 단 하나뿐이다!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지! 그것조차 해내지도 못하는 자가 어찌 왕을 자칭하겠나!” “단, 탈리안…….” 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웃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분노하고 저주함으로써 사물을 죽인다. 그러나 나는 웃음으로써 죽인다. 살아 숨쉬는 사십만 명조차 나를 막아서지 못했다. 사십만 명이 죽어서라도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환지통(幻指痛)이었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괴로움은 아무리 뚜렷할지라도 결국 나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까짓 환영이 나를 침범하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나에게 왕이 되라고 충고했지, 바르바토스!” 나는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바로 코앞에서 노려보았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는 단지 지금 살아 있는 백성들에게만 책임을 지는 왕 따위는 되지 않겠다. 내가 죽인 생명들, 내가 학살한 목숨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영토의 정당한 신민임을 이곳에서 선언한다!” “아아, 아아아…….” “행복과 평안 따위는 개먹이로나 던져주라지.” 내가 바르바토스의 턱에서 손을 거두었다. “내일 모레. 니블헤임의 광장에서 처형식이 거행된다. 그것이 너의 처형식이 될지, 아니면 평원파 전원의 처형식이 될지는 순전히 네 증언에 달려 있다. 네가 저지른 암살 때문에 벨레드와 제파르까지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너에게는……그렇게 해서 너한테는 뭐가 남는데……?” 이런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정말로 어쩔 도리가 없는 여자였다. 누구보다 잔인하게 행동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가 마음을 준 사람에겐 지나치게 부드러워졌다. 그것이 너의 단점이었다. 왕이라면 마땅히 평등해야 했다. 애인은 물론이고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평등하게 재판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는 결국 폭군에 지나지 않으며, 바르바토스, 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폭군이었다. “모든 것이 남는다.” 나는 오히려 환영들에 감사하고 있었다. 행여라도 내가 미치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잖은가. 내 정신이 돌아버려서 이제껏 내가 무엇을 했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게 되는 것을, 그런 우습지도 않은 정신병자 노인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저 환영들이 철저하게 막아주었으니까. 잭이 저주하고 호크가 울부짖고 파이몬이 속삭일 때마다, 그럴수록 도리어, 내 정신은 뚜렷해졌으며 나의 이성은 날카로워졌다. 내가 다른 것에 한눈 파는 외도를. 예컨대 방금 바르바토스가 건넨 유혹에 넘어가는 짓 따위를 원천봉쇄했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서 나는 미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의 광기를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미쳤느냐 미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거기에 패배하느냐 마느냐였다. “걱정하지 마, 바르바토스. 내일 모레 처형식에서 칼을 잡는 사람은 나다. 너를 죽이는 역할을 설마 내가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리가 없잖아. 확실하게. 변명할 여지가 없이 사형을 집행하겠어.” “…….” “우리 모두, 최후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자.” 나는 그리고 등을 돌렸다. 내 시선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시체들의 시선도 움직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문으로 걸아갔다. 뒤에서 바르바토스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탈리안, 안 돼……가지 마……제발, 단탈리안…….” 그건 아마도 울음에 묻힌 절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리를 끊어내듯이 철문을 강하게 닫았다. 쇳소리가 감옥의 복도에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외길로 단 복도에서는 데이지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데이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녀석도 바르바토스와 비슷한 감정을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데이지의 왼뺨을 후려쳤다. 얄밉게도 데이지 녀석은 고개가 살짝 돌아가기만 했다. “이제부터 나머지 평원파 마왕들을 일일이 만나봐야 한다. 갈 길이 멀거늘 뭘 맥빠진 눈길로 나를 보고 있느냐. 앞장서라, 머저리 같은 녀석.” “한 가지만.”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아버님.”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아버님께서 살해하신, 제 마을의 사람들도……비추는 건가요?” “오냐. 아주 잘 비친다. 눈알이 파먹히고 입구멍이 창칼로 꿰뚫린 채 나를 저주하고 있구나. 어떠하냐. 이제 만족했느냐?”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나에게 동정심이 생기느냐? 용서해주고 싶다는 마음이라도 생겼느냐? 허면, 결국 네 의지는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겠지. 그들의 죽음을 용서할 권리가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망토를 끌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내 발소리와 또 다른 중얼거림이 뒤섞이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그림자들을 잠깐이라도 인정해버린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녀석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있었다.   00432 존재의 긍지 =========================================================================                        * * * 예정대로 니블헤임에서 공개재판이 열렸다. 도시의 중앙광장에는 마인이 수만 명 집결했다. 이들이 보는 앞에서 바르바토스를 비롯하여 평원파 마왕 전원을 재판하는 것이었다. 보통 재판에서 판결이 이루어지더라도 약간의 유예를 두고 처벌을 집행했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판결이 내려지고 곧바로 처형을 시행한다. 그것이 이번 재판에서 판관으로 임명된 선제후들. 마르바스, 시트리, 가미긴, 바싸고, 네 사람끼리 합의한 사안이었다. 나는 일종의 고발인이자 검사로서 재판을 진행했다. 요컨대 짜고 치는 도박. 변호사는 없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순전히 자신들만의 힘으로 스스로 변호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증인을 불러들일 권한조차 없었다. 군사재판이나 종교재판보다 더 악독한 재판이,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숫자의 마왕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전하께서 암살을 저지르셨을 리가…….” “불경한 말을 입에 담지 말게. 저곳에는 마르바스와 바싸고 전하께서…….” 시민이 오만 명쯤 모였을까. 마왕들의 앞인지라 마족들은 시끄럽게 떠들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았으나, 옆사람과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는 소리조차 오만 명이 동시에 내면 이미 거대한 진동이나 다름없었다. “단탈리안.” 재판장을 맡은 마르바스가 나를 불렀다.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마르바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에게 온전히 이번 일을 맡겼네만, 잘 진행되고 있는가.” “걱정하지 마시길. 평원파의 우정은 단단한 성채와도 같습니다.”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번 재판에서 평원파는 반드시 몰락해야 했다. 나는 물론이고 마르바스 역시 지금 정치적인 생명을 걸고 있었다. “저를 신뢰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마르바스. 평원파를 신뢰하십시오.” “본인은 언제나 자네를 신뢰한다네.” 우리가 바르바토스를 밀실에서 처형하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 바르바토스 본인이 가진 인망 때문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바르바토스의 유죄를 낱낱이 밝혀내지 않는 이상, 마계의 시민들은 결코 바르바토스가 암살을 범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리라. 중립파와 산악파가 자작극을 연출해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틀림없이 제기된다. 설령 우리들 앞에서 당당하게 의혹을 폭로하진 못할지라도 의심은 찌꺼기처럼 끈덕지게 남는다. 장래에 위험이 될 만한 요소를 조금이라도 남겨둘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신뢰하지.” 마르바스가 회색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우리에게는 진실이 함께하고 있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을 암살했으며, 바르바토스가 처단되어야 하는 이상 평원파를 모조리 처분해야 한다. 안 그런가.” “예, 세바스토크라토르. 우리 모두가 동의한 사항입니다.” “으음.” 마르바스가 두 눈을 감았다. “결국에는 이런 날이 오고 말았는가. 제2차 월맹군으로부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래. 이미 그때부터 정해진 결말일지도 모르겠군.” 마르바스는 감상이 남다르리라. 일찍이 함께 군단을 이끌었던 동료한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남자의 견고함이 엿보였다……. 친애를 느낀다. 존경도 표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된다면 말끔하게 선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마르바스라는 마왕이었다. 바로 그런 냉철함 때문에 마르바스와 나는 파트너가 되었다. “단탈리안. 회한을 남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회한에 지지 않을 자신만은.” “……그걸로 좋겠지.” 마르바스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흑색보다 짙은 회색의 눈동자를 빛내면서 마르바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것은 오늘을 장식할 무대의 막이 오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청하라! 마족들이여!” 마르바스의 목소리가 확성마법을 타고 널리 울려 퍼졌다. 마치 오르간처럼 음색은 공기를 내리찍고 짓눌렀다. 물경 오만 명의 시민이 한 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를 안고 구경하러 온 오크도, 분개하며 동료들과 떠들던 마녀들도, 가장 앞자리에서 서로 수군거리던 마계대공들도, 모두 마르바스의 지배력에 숨을 죽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중대하고도 엄중한 진실이 밝혀질지어다!” 마르바스가 광장을 오시했다. 누구도 마르바스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단지 마르바스의 양옆으로 앉은 선제후 판관들만이 평소와 똑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왕을 살해했다는 것은 거대한 죄악. 거기에 더하여 암살이라는 흉계를 동원했다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이다! 오늘 모인 인물들 중에 누군가가 바로 그 악을 범했노라!” 가미긴이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바싸고가 만사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허공을 흘겨보고 있었다. 아직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시트리는, 목발을 품에 거느린 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였다. 내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였다. 샛푸른 하늘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광장의 경비를 보는 와이번들이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삼아서 천천히 날개짓했다.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호위하고 있는 데이지에게 바알의 검을 건네받아서 바르바토스 및 평원파 마왕들의 목을 친다. 바알의 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면 바르바토스를 일격에 참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 마르바스가 고귀한 이름으로 선언하나니, 이곳에서 진실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요, 악행은 의문의 여지없이 곧바로 처단당할 것이다! 그대들은 이 앞에서 엄숙하게 침묵하라!” 자아. “마왕 바르바토스에 대한 재판을 개정한다!” 공개처형식의 시작이다. 마르바스가 자리에 앉아 손짓했다. “먼저 죄인 제파르를 심문한다. 끌고 오도록!” 위병 역할을 맡은 중립파 마왕들에게 이끌려서 제파르 형님이 연단에 올라왔다. 제파르 형님은 얇은 천옷을 걸치고 있었다. 거의 새하얀 속옷이라 봐도 무방했다. 마왕의 위엄이나 체면이라고는 철두철미하게 무시한 복장이었다. 시민들은 제파르 형님의 옷차림에,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한쪽 팔에 충격을 받아 수군거렸다. “보호구를 풀어라.”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 형님의 머리에서 투구 비슷한 것을 벗겼다. 시각과 청각을 차단하는 투구로써 현재 모든 평원파 마왕들에게 강제적으로 씌워져 있었다. 투구가 벗겨지자, 사흘 내내 감옥에 투옥되어 초라해진 제파르 형님의 얼굴이 드러났다. “단탈리안. 시작하도록.” “예, 전하.” 내가 제파르 형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은 말하자면 결투장. 콜로세움이었다. “…….” “…….” 수만 명의 관중이 구경하고, 네 명의 재판관이 심판하는 가운데, 연단에 올라선 제파르 형님과 내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목적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바르바토스의 유죄를 폭로하는 것. 그리고 바르바토스가 무죄임을 입증하는 것. 나는 이미 사흘 전에 거미줄을 쳐놓았다. ‘본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제발 무죄를 고백해주십시오. 그것만이 평원파가 살아남을 길입니다.’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거기에 걸려들지 않을지. 그것이 도박이었다. 오늘 재판에서는 내가 도박을 건 부분이 두 군데 있었다. 그 첫 번째 내기판이 제파르 형님과 여타 평원파 마왕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두 번째 내기판의 상대는 바르바토스……. 즉, 나는 두 개의 난관을 넘어서야만 완전무결한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 바르바토스를 밀실에서 처리해버리는 대신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한 이상, 당연하게도, 내가 패배할 가능성 또한 생겨났다. 따라서 대결이었다.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리 판단하고 있었지만, 평원파가 승리를 거둘 확률 역시 틀림없이 있었다. 그저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승부가 아니었다. 마음껏 덤비도록 해라, 제파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칼날을 서로에게 겨누고 있다. 형님 대접을 받을 생각 따위는 집어쳐라. 나는 전력으로 당신을 사냥하겠다. “저 단탈리안은 마왕 파이몬을 암살한 범인으로서 마왕 바르바토스를 고발합니다.” 내 목소리 역시 확성마법을 통해서 광장에 퍼졌다. 이미 재판 내용이 어느 정도 공개되어 있었지만 시민들이 경악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게다가 바르바토스의 첫 번째 남자로 유명한 내가 그녀를 고발한다니 충격이 배가 되겠지. “먼저 증인들을 부르겠습니다. 오늘 증인으로 출두한 일곱 명의 마계대공. 그들 전원에게 증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허가한다. 증인은 본인이 호명하는 순서대로 출두하여 증언석에 서도록.” 첫 타자는 독사대공이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흡혈귀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증인석에 올라왔다. 하인 두 명이 큼직하게 양산을 펼쳐서 주인을 보호했는데, 흡혈귀가 대낮의 태양빛에 노출되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존경하는 재판관 여러분께 소인이 오로지 진실만을 증언할 것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아폴론과 하데스의 이름에 맹세하나니, 제 증언에 터럭이라도 거짓이 섞인다면 재판관 여러분께서 만신(萬神)을 대신하여 소인을 처벌해주실 것이며, 오늘 광장에 자리한 신민이 만마의 의지로써 소인을 저주할 것입니다.” 독사대공이 공손하게 재판관으로 나온 마왕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독사대공은 네 명의 마왕에게 절도 있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각각 한 번씩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등을 돌려서 광장을 향해 특히나 깊이 허리를 기울였다. 의례가 정리되자 내가 대공에게 질문했다. “독사대공. 그대는 올해 12월, 마왕 바르바토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맞는가?” “예, 전하. 소인은 분명히 바르바토스 전하께 비밀리에 연락을 받았나이다.” “그 연락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대공이 슬쩍 광장을 훑어보았다. 한 박자 느릿하게 대답을 함으로써 이목을 끌려는 것이었다. 대공이 아주 약간 머뭇거렸을 뿐인데도 광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소인은 감히 참람하여 말씀드리기가 두렵습니다.” “그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진실만을 말하기로 약속했다. 침묵은 결코 진실을 대신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침묵이란 거짓에 유예를 주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엄하게 독사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써, 지금 독사대공이 난처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는 것도 극본에 짜여진 그대로였다. “물론 소인은 감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주권자이신 여러분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거나 유예할 생각일랑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하오나, 진실은 때때로 그것을 입에 담은 자를 해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소인의 안전을 약조해주시옵소서.” 독사대공이 말을 끝내자마자 광장이 들끓었다.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안전을 요구하는 행위는 재판관들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무례하다든지, 주제를 모른다든지, 일부 과격한 시민들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조용히.” 마르바스가 말했다. 그러자 광장의 소란도 잠잠해졌다. 마르바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독사대공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우리의 증인이요, 이곳은 우리의 법정이다. 이미 그대에게 안전을 보장했건만 또 다시 보증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송구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전하. 하오나 소인은 재판의 결과가 어찌되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기 원합니다.” “그대는 우리들의 약속을 받았노라.” 마르바스가 반쯤 몸을 일으켜서 하문했다. “지난 해 12월. 그대는 바르바토스로부터 무슨 언질을 받았느냐.” “이미 승하하신 파이몬 전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전하.”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르바토스께서는.” 독사대공이 잠시간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바르바토스께서는 파이몬을 암살할 것을 소인에게 명하셨나이다.” ――광장에서 폭발음과 같은 아우성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00433 존재의 긍지 =========================================================================                        “거짓말이다! 저 역겨운 배신자를――.” “파이몬 전하의 복수를!” “당장 죽여――.” 대공을 매도하는 소리와 바르바토스를 모욕하는 소리가 뒤섞여서 요란하게 진동했다. 마침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소음이 되어 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과열되고 흥분되었다. 사람들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굵은 팔뚝들이 피스톤처럼 쉴 새 없이 요동쳤다. 그리하여 아우성들은 단지 아아, 하고 의미없이 메아리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전락했다. 분노. 시기. 단순한 재미. 의심. 스프를 덜 끓인 가마솥에서 재료들이 둥둥 수영하는 것마냥 감정들이 날것 그대로 허공을 떠돌았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에 놓일 때 괴로웠다. 지금은 달랐다. 감정이 복잡하다면 이성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면 된다. 나는 그걸 배웠다. “조용히.” 마르바스가 정숙을 명령했다. 확연하게 광장이 조용해졌다. “바르바토스가 자네에게 파이몬을 암살하라 지령을 내렸다. 자네는 그리 증언했다. 틀림이 없는가.” “소인이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전하들께서 잘 아시리라 생각하옵니다.” 네 명의 재판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르바토스께서는 소인 이외에도 모든 마계대공에게 지령을 내리셨습니다. 저희는 함께 모여서 어떻게 해야 파이몬 전하를 암살할 수 있을지 모의했나이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사대공은 이번만큼은 계속해서 말해나갔다. 지금이 몰아붙여야 할 타이밍임을 대공은 알고 있었다. “파이몬은 수천 년이 넘도록 유구하게 전해져 내려온 노예제를 폐기하려는 악당 중의 악당이요, 마계의 모든 도시와 촌락을 파멸로 이끄는 악몽. 바르바토스께선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단호히 파이몬 전하를 처단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연이어 터지는 폭로에 시민들은 경악을 멈출 틈이 없었다. 독사대공이 꿋꿋하게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다만, 저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대공은 아무래도 수긍할 수가 없었나이다. 파이몬 전하께서는 마족을 위하여 누구보다 분투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암살하라니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과연. 그래서 반기를 들었는가.” “예, 전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제파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독사대공이 진실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제파르도 체감했으리라. 나는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입을 열었다. “판관을 맡아주신 동지 여러분. 지금 들으셨다시피 바르바토스는 마왕 파이몬을 암살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르바토스에게 가장 엄격한 처벌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과연 이 끔찍한 암살에 오직 바르바토스만이 가담했을지 의문입니다.” 내가 제파르를 노려보았다. “마왕 파이몬은 단순히 한 명의 마왕이 아니라 산악파의 거두였습니다. 즉,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한 것이 아니라 평원파가 계획적으로 산악파를 말살하러 들었다……이쪽이 더 합당한 극본입니다.” “증거는 있는가?” “우선 강력한 심증이 있습니다.” 나는 수만 명의 마인을 둘러보았다. 어떤 공기가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었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하며 수많은 대중을 제어한다는 확신. 사람들을 선동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이런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왕 파이몬이 암살을 당한 직후, 바로 사흘 전, 평원파는 산악파 전체를 말살하고자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악파에 소속한 마왕 여덟 명이 사망했습니다. 한 파벌의 수장을 암살한 다음에는 나머지 잔당을 청소한다……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적잖게 절묘하군요.”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 여덟 명 중에 한 명인 마왕 모락스는 수상한 언동을 보여주었다. 모락스는 마치 바르바토스한테 사전에 어떤 약조를 언질받은 것처럼 얘기했지.”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바르바토스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첫 번째, 마왕 파이몬을 암살하여 산악파를 뒤흔든다. 이것은 대공들의 증언에 의해서 진실임이 드러났습니다. 두 번째, 산악파가 흔들리는 틈을 타서 배신자들을 섭외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강력한 심증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속임수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한 이유가 '산악파를 없애기 위해서'로 고정되었다. 만일 이곳에 뛰어난 변호사가 있었다면 곧바로 허점을 노리고 파고들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평원파를 위한 변호사 따위는 없었다. 마르바스와 나의 암묵적인 연극 아래 진실이 하나씩 은폐되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배신자들까지 포함시켜서 산악파를 전원 말살한다. 이것이 사흘 전, 마왕 파이몬이 안치된 건물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바르바토스는 간악하게도 배신자들마저 숙청함으로써 행여라도 자신의 계획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내가 슬프게 분노한 표정을 지어 내보였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서로 대립한다는 사실은 어린애조차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상대 파벌을 짓누르고자 열망할지라도, 바르바토스의 수단은 지나치게 참혹합니다. 그녀는 파이몬을 암살했습니다. 그녀는 상대 파벌의 동료들로 하여금 서로가 서로를 죽이도록 조장했습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 여덟 명의 마왕을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나는 광장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저는 고합니다. 만일 세상에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한 명 있다면 그것은 바르바토스입니다. 여기에 재판관으로 나와주신 시트리 전하를 언급하자면…….” 내가 오른팔로 시트리를 가리켰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바르바토스에게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파이몬을 죽인 것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사과해줄 것. 그것이 다만 시트리 전하의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그때 바르바토스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단지 한 마디의 사과를 바랄 뿐인 시트리 전하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내가 입술을 꾹 다문 다음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숨결을 토해내듯이 말했다. “천박한 돼지 새끼라고 모욕했습니다.” 나의 호흡을 따라하듯이 광장의 인민들이 숨을 죽였다. 기묘하리 만치 적막해진 광장에 내 조용한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시트리의 팔다리를 잘랐습니다. 그때조차 시트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과하라고, 파이몬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하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한때 전사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비열한 정치가로 전락해버린 이 암살자는, 시트리의 손등을 짓밟고, 시트리의 머리채를 잡아뜯으며, 그녀에게 침을 뱉고, 그녀를 고문했습니다.” 분노는 조용할수록 위력적이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바르바토스의 죄목을 고발했다. 이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바르바토스와 내가 수없이 나눈 웃음소리였다. 그 가벼운 웃음소리를 한켠으로 밀어내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광경을, 저는 바로 이 눈앞에서 지켜보았습니다.” “…….” “동지 여러분. 그대들도 함께 보았을 터입니다. 누군가가 이 죄악을 처단해야만 합니다. 저는 이번 암살과 숙청에 관여한 모든 평원파 마왕들에게 참수형을 요청합니다.” 전원 참수형. 광장이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아까 전과 같이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불길함과 음산함, 폭로된 진실의 무게에 시민들은 헛숨을 삼켰다. 마르바스 역시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다음으로, 독사대공 이외의 마계대공들이 차례차례 증인석에 올랐다. 그들은 입을 모아서 바르바토스의 지령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했다. 이로써 바르바토스의 죄는 명백해졌다. “제파르.” “…….” “당신은 평원파의 핵심 간부이자 바르바토스의 측근입니다. 바르바토스가 계획적으로 산악파를 말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당신이 몰랐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당신에게 질문하겠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암살하는 계획을 당신은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습니까?” 여기서 제파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 즉, 암살 계획은 들어본 적도 없으며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제파르는 증거가 부족하는 이유 아래 풀려나리라. 다른 한 가지는. “아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걸렸다. 제파르는 내가 쳐놓은 거미줄에 정통으로 걸려들고 말았다.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달리 말해 범행에 참여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본인은 마왕 파이몬을 암살하는 데 누구보다 깊이 참여했으며, 사실상 그 계획을 주도한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광장이 술렁거렸다. 정말로 단순한 함정이었다. 제파르는 바르바토스가 이런 자리에서 죽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의 죽음을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살아남기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파르와 같은 충신이 선택할 길은 단 하나뿐. “하지만 대공들의 증언에는 잘못된 곳이 있다.” “잘못된 곳? 그게 무엇입니까.” “마계대공들에게 지령을 내린 사람은 바르바토스 전하가 아니다. 바로 나, 제파르가 그들에게 지령을 내렸다.” 바르바토스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자신이 끌어안는다. 제파르는 당연하다듯이, 자신이 희생하는 길을 선택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납득하기 어렵군요. 대공들은 분명히 바르바토스에게 직접 지령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폴리모프 마법을 동원했다. 간단한 일이었지.” 제파르가 덤덤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전하가 잠시 황궁을 비운 사이, 내가 전하의 접견실을 이용해서 그들을 불러들였다. 대공들은 멍청하게도 본인이 바르바토스 전하라고 철썩같이 믿더군. 그들을 속이는 것은 쉬웠다.” “……당신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물은?” “없다.” 제파르가 씩 웃었다. “파이몬을 암살하는 일이다.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지. 증거 따위 남겨두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물 역시 없을 터. 아니 그러한가.” “…….” 내가 잠깐 침묵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왜 굳이 바르바토스를 가장해서 당신이 지령을 전달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바르바토스 본인이 밀명을 내리든, 당신이 밀명을 내리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아니.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파이몬을 암살할 것을 떠올리고 계획한 자가 바로 본인이기 때문이다!” 제파르가 광장을 쳐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바르바토스 전하는 이 계획에 참여한 적도 없다. 모든 것은 나 제파르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음이라.” “무슨 소리를…….” 제파르의 도발적인 선언에 시민들이 수군거렸다. 나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파르는 끊임없이 말해나갔다. “본인은 예전부터 파이몬,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창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왕인 주제에 쓸데없이 인명을 아끼고 선정을 베푼다면서 노예제를 폐지하려 들었다. 천박하고 멍청한 년이었지!” 제파르가 파안대소했다. “그 창녀가 마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직감했다. 아아, 그래서 마계대공들을 불러모았다. 바르바토스를 흉내 내서 암살을 명령했다. 훌륭한 계획이었지. 단탈리안, 네놈까지 거기서 죽어버렸다면 더없이 완벽했을 텐데 말이다!”   00434 존재의 긍지 =========================================================================                        잠시간 도화선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제파르가 던진 폭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직후, 광장에서는 전에 없이 거대한 노성이 터졌다. 나는 다른 곳이 아니라 시트리가 앉은 곳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시트리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본인이 유일하게 아쉽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뿐. 붉은 머리카락의 창녀가 죽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지고의 명화(名畵)와 같았을 테지. 그 더러운 년의 얼굴이 참혹하게 뭉개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다니, 안타깝고 또 안타깝구나!” 다만 손이. 시트리의 왼팔이 덜덜 떨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제파르를 노려보았다. “지금 발언, 한치의 거짓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고 뭐고 이것이 진실이다. 내가 암살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벨리알을 만나서 산악파 내부에 분열을 획책한 것도 본인이었지. 멍청한 녀석, 자기 행선지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해서 금방 탄로 나더군.” 제파르가 코웃음을 치면서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눈가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애당초 산악파란 그 정도 애송이들밖에 없는 집단……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어차피 언젠가 꼴사납게 거꾸러졌을 것이다. 도리어 본인은 감사받아 마땅하다. 적어도 그년에게 고귀한 희생자라는 감투를 씌워주지 않았는가. 어디 뒷골목에서 후레자식들에게 간살당해도 할 말이 없을 여자였거늘――.” 그때, 시트리가 괴성을 지르면서 제파르에게 달려들었다. 시트리는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아 팔이 재생되었지만, 아직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 탓에 시트리는 짐승처럼 땅바닥을 짚고서 제파르를 덮쳤다. 시트리가 주먹을 치켜들어 제파르의 얼굴을 집요하게 때렸다. “내 언니를! 파이몬 언니를 모욕하지 마!” 사지가 묶인 제파르는 속수무책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 피가 튀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시트리를 붙잡았다. 마왕들에게 제지당하는 와중에도 시트리는 울부짖었다. “왜――다들 왜 언니를――!” 시트리가 사냥꾼에게 잡힌 짐승처럼 연약하게 몸부림을 쳤다. 시트리에게는 확성마법이 걸린 아티펙트가 없었다. 광장의 시민한테는 그녀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겠지. 그러나 어떠한 웅변보다 처절한 몸짓으로 시트리는 절규했다. “내가 너희를 구해줬어! 너희 평원파 새끼들이 아가레스에게 전멸당할 뻔했던 것을 내가, 우리 산악파가 구원해줬어! 너희들 따위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가레스한테 죽도록 버려뒀어야 하는데!” 아가레스가 가미긴과 함께 평원파를 향해 반기를 들었을 무렵. 마왕군이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편성되는 것에 반대하고 무소속 마왕들이 대거 군사를 일으켰을 때, 평원파는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서열 제1위 바알 역시 암묵적으로 반란군을 편들어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알이 반란군의 배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평원파는 군사적으로는 아가레스에게, 정치적으로는 가미긴에게 당해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때 평원파를 구원한 마왕이 다름 아니라 시트리였다. 숙적임에도 불구하고 시트리는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 그 가볍고도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평원파를 도와주었다. 덕분에 평원파는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에 잠시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들!” 시트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고함을 쳤다. “최소한의 명예도, 약속의 의미도 모르는 돼지 새끼들! 전부 죽어버려! 전부……!” “제파르에 대한 심문은 이로써 끝마치겠습니다.” 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 끼어들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한테 다시 투구를 씌우고 단상에서 끌어내렸다. 투구에 의해 얼굴이 가려지기 직전, 제파르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무덤덤한 눈동자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시트리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파르 다음으로 차례차례 끌려온 평원파 마왕들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 내가 파이몬을 암살했다!” “천박한 몸뚱어리가 갈갈이 찢어지도록 칼날을 쑤셔박으라 명령했지!” “바르바토스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셨노라!” 전원. 다섯 명 전원이 바르바토스의 무죄와 자신의 유죄를 선언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파이몬을 처절하게 모독했다.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원망이 쏠리도록. 사흘 전, 나는 일일이 감옥을 돌아다니면서 평원파 마왕들에게 의심을 심었다.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암살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이대로 재판이 진행된다면 십중팔구 바르바토스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평원파 마왕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가 죽는 것을 방관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희생되고자 했다. 거기엔 어떠한 열외도 없었다. 제파르와 벨레드를 비롯하여 전원이 자신의 유죄를 소리높여 주장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순수했다. 그 순수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평원파 마왕들은 파이몬을 가리켜서 창녀라고, 더러운 년이라고, 죽어 마땅한 여자라고 소리쳤다. 그들에게는 파이몬 따위보다 바르바토스가 훨씬 더 소중하므로. “…….” 결국 시트리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렸다. 누구도 죽은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 죽은 자가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넘도록 오로지 마족을 위하여 헌신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기려주지 않았다. 시트리, 그녀만이 홀로 파이몬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몇 개의 마음이 교차하는 것일까. 평원파 마왕들은 단지 바르바토스를 구하고자 자신들이 저지른 적도 없는 죄를 고백했다. 시트리는 그저 파이몬의 원한을 갚아주고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실제로 파이몬을 죽이고 바르바토스를 죽이려 하는 범인은 바로 이곳에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훌륭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심문할 마왕을 호명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최후의 죄인을 이곳에 부르고자 합니다. 바르바토스를 소환해주십시오.” “승인한다.” 중립파 마왕들이 바르바토스를 끌고 나왔다. 바르바토스는 거의 헝겊에 가까운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더럽고 낡아빠졌으며, 누리끼리한 조각으로 간신히 몸을 가렸다. 두 손목과 두 발목은 쇠사슬에 단단히 묶였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쇠사슬이 삐꺽거리며 그녀의 팔다리를 옥죄었다. 이미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르바토스가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연단을 향해 올라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퍼억. 무언가가 바르바토스의 백발에 부딪쳤다. 썩은 과일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연단에 가까이 서 있었던 마족들이 온갖 더러운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르바토스의 근처는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바르바토스는 붉고 끈적한 액체에 뒤덮였다. “비겁한 암살자!” 시민들이 소리쳤다. 마계대공들의 증언에 의해서 바르바토스는 이미 유죄가 확정되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조금이라도 바르바토스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평원파 마왕 전원이 자신의 유죄를 주장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여섯 명이나 생겨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평원파 마왕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를 감싸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주군의 과오를 덮어버리기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쳐놓은 함정이었다. 만약 제파르 한 명이 자신의 유죄를 주장했더라면 역전의 기회가 있었겠지. 만약 평원파 마왕이 모두 순순히 무죄를 고백했더라면, 우리는 절대로 암살을 저지르지 않았노라고 주장했다면 역시 기사회생의 기회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무죄를 고하지 않았다. 평원파 마왕들은 그저 단순히 바르바토스를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다. 그녀를 외면하고, 암살을 실행했을지도 모르는 그녀를 매도하고, 알아서 자기가 살 길을 찾아나서는 편이 나았다. 그랬다면 모두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을 가능성 또한 작게나마 있었다. 나는 평원파 마왕들의 충성심을 신뢰했으며, 고로 충성심을 이용했다. 그 결과가 지금 바르바토스에게 쏟아지는 오물 세례였다. “…….” 썩은 과일과 날계란에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얼룩졌다. 안 그래도 더러운 헝겊 조각은 더없이 더러워져서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머리에, 가느다란 팔뚝에, 새하얀 종아리에 물건들이 부딪쳤다. 바르바토스는 한때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마족들에 의해서 능욕당하고 있었다. 성녀에서 마녀로 전락해버린 어느 여전사처럼. 그런데도 그녀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침내 바르바토스가 연단에 올라섰다. 내가 말했다. “바르바토스. 대공들이 그대의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그대의 유죄는 거의 확정되었습니다.” “…….” “다만 평원파 마왕들은 이 범행이 당신의 지시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암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라는군요. 바르바토스, 그대는 범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그리고 이것이 최후의 함정이었다. 바르바토스,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나의 유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이번 암살이 순전히 나와 너의 계획에서 비롯했고, 파이몬을 죽인 책임 또한 우리 두 사람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반박할 생각이 없다. 너와 깔끔하게 이 자리에서 죽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바르바토스. 너에게는 나를 죽일 권리가 있기에. 너와 동반자살하는 것은 나에게도 별로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파이몬을, 그 아름다운 여인을 죽인 죄값을 함께 짊어진 채로 낙화하자……. 다른 하나는 너가 홀로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는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평원파 마왕들이 유죄를 받아버린다. 그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 때문에 처형당한다. 바르바토스, 네가 자신의 유죄를 주장해야만 그들의 무죄가 인정될 가능성이 생겨난다. 선택해라. 나와 함께 죽을지, 아니면 평원파 마왕들을 살릴지. 바르바토스는 한동안 침묵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 애들이 파이몬을 암살했다니.”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들었다. 온갖 잡다한 오물에 얼룩져서 그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나 황금색 눈동자만큼은 빛바래는 일이 없이 오롯하게 정면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파이몬, 그년이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우리 애들처럼 둔한 애들한테 당할 만큼 머저리는 아니여서 말이야. 그년을 죽이려면 꽤나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단 말이야.” 마족들에게 배신당하고 연인인 나에게까지 배신당한 바르바토스는. “우리 애들이 암살을 저지른 게 아니야. 바로 나, 전 서열 제8위이자 평원파의 주인이요, 세상에서 파이몬을 가장 증오하고 그년의 죽음을 가장 열렬하게 갈망했던 내가,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죽였다.” 바르바토스는 활짝 웃고 있었다. 여느 때의 그녀와 같이 당당하고 아름답게.   00435 존재의 긍지 =========================================================================                        “…….” 웃음 때문에 침묵이 일어나는 경우란 희귀하겠지. 자신의 범행을 폭로하는 바르바토스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어서, 사람들은 한 순간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꼭 장난스러운 어린애처럼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솔직히 조금 실망했어. 아무리 파이몬을 죽였다고 해도 나 바르바토스한테 이렇게 못살게 굴어도 괜찮은 거야? 응? 마인 여러분께서는 어지간히도 의리가 없으시네. 이래서야 내 헌신과 노력이 너무 볼품없어 보이는걸.”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인민을 위한 노력이란 항상 허무하기 이를 데 없다지만 이건 실망 중에서도 대실망이야. 어휴, 진흙탕에 코를 박고 향기롭다는 듯이 음미하는 돼지 자식들아. 도대체 언제쯤이면 제대로 된 후각을 갖출 거냐?” 다시금 광장에서 오물거리가 날아왔다. 그것들은 대부분 형편없는 명중률을 자랑하여 바르바토스의 발치에 떨어지거나 한참을 빗나갔다. 바르바토스는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파이몬을 암살했다. 아아,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설령 내가 처벌을 당해야 할지라도 너희 같은 오물 덩어리들한테는 당하지 않겠다는 거지. 그럼. 왜냐하면 너희에게는 감히 나를 처단할 권리가 없거든. 없지. 전혀 없어!” 바르바토스가 턱을 치켜들어 광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오시했다. “오히려 나는 이 자리에서 너희 마족들, 내장의 썩은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오물 인생들을 고발한다. 첫 번째, 너희들은 게으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며 그것을 가리켜 현명하다 칭송한다. 비겁함과 교활함을 지혜로 치장하는 것은 태생부터 천박한 노예들의 습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게 어울리는 삶이란 영원토록 노예로 살아가며 자신의 더러운 핏줄을 원망하는 것밖에 없다.”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노예제가 폐지되어서 정말로 유감이구나! 이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들개의 핏줄을 타고난 새끼들을 가리켜서 노예라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너희는 신속하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서 스스로를 자칭해야만 할 거다! 글쎄, 음식물 쓰레기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뭐든지 반쯤 씹다가 버려졌다는 점에서 너희의 가련한 인생과 공통점이 있지. 보는 이에게 구토를 유발한다는 것까지 쏙 빼닮았어.” 광장의 아우성이 점점 격해졌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더더욱 기세가 올라서 즐겁게 흥얼거렸다. “아직 첫 번째 죄목밖에 말하지 않았어. 한참이나 남았다고. 자그마치 수천 년 동안 너희의 군상을 지켜본 내가 아무렴 이 정도로 끝날까. 두 번째로, 너희들은 멍청하다. 너희가 얼마나 어중지간한 지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지 나는 거의 경탄스러울 지경이야. 도대체가 무엇 하나라도 끝까지 숙고하고 생각하여 진상을 알아내는 법이 없지. 너희는 오두막집이 태풍에 무너져도 다시 똑같은 오두막집을 지을 병신들이요, 평생을 미지근한 온수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지적 태만을 도리어 자랑스러워 할 머저리들이다.” 시민들은 이제 목청을 돋구어서 시끄럽게 악바라를 썼다. 소리를 친다기보다 짐승 떼거지처럼 짖어대는 것에 가까웠다. 핏줄이 도드라졌고 팔뚝이 정신없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너희는 비겁하다! 게으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멍청하기에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매사에 도망치는 주제에 자신이 도망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지. 그렇기에 너희들의 인생은 비겁함 그 자체다. 단 한번도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것들! 너희는 순수한 백성임을 자랑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너희는 악마적인 백성이다!”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내 목을 잘라서 이 니블헤임의 광장에 걸어두거라! 그리고 지금 내가 내리는 선고를 영원토록 기억하라! 천박한 돼지들아. 나 바르바토스는 너희의 나태함과 우둔함 그리고 비겁함을 경멸하며 너희들에게 목 매달아 자살할 것을 선고한다!”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큰소리로 웃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달려들어서 바르바토스에게서 확성마법 아티팩트를 떼어냈다. 바르바토스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공중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도시의 종소리처럼 웃고 있었다. 심문이 끝났다. 여섯 명의 평원파 마왕은 모두가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를 구하기 위해서 죄를 인정했고, 바르바토스는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서 죄를 받아들였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 이 희생극은 그러나 애시당초 비극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쪽의 승리였다. 망설일 이유도 주저할 이유도 없겠지. 나는 연단에 우뚝 서서 논고를 시작하였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저는 더 이상 더러운 살인자들이 자신들의 범행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광경을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내가 주로 마르바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첫 번째, 평원파는 산악파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말살하려 들었습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바르바토스는 마왕 모락스의 배신을 유도했고, 제파르는 마왕 벨리알의 이반을 획책했습니다. 평원파의 간부가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움직였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두 번째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두 번째, 평원파는 마계대공들을 겁박하여 파이몬을 암살하라 지령을 내렸습니다. 정확하게 누가 대공들을 협박한 장본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평원파 마왕 전원이 사전에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점, 또한 전원이 자신이야말로 실행범이라고 자백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지난 암살 사건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서 계획되고 시행된 것이 아니라, 평원파 전체의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죽인 것은 평원파 그 자체입니다.” 나는 주먹을 쥐고 광장을 둘러보았다. 수만의 시선과 수만의 감정이 내게 쏠려 있었다. 그것을 마주보며 내가 나지막하게 선언했다. “이상의 죄과로――저는 평원파 전원에게 참수형을 선고할 것을 제안합니다.”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보내왔다. 바람잡이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사형을 울부짖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은 소수의 시민도 있겠으나, 그들은 거대한 목소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했다. 무엇보다도 평원파 마왕 중에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 대중에게는 결정적인 증거, 즉 실제로 그들이 파이몬의 암살을 주도했다는 것에 대한 입증으로 비추었다. 변호의 여지는 없었다. 마르바스가 함께 재판관을 맡은 마왕들을 호명했다. “시트리.” “……선고에 동의해.” “가미긴.” “당연히 동의하지. 화형이 아니라 참수형이라서 안타까울 정도인걸.” “바싸고.” “동의한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역시 선고를 받아들인다. 네 명의 판관이 만장일치로 선고에 동의하는바, 평원파 전원에 대해 유죄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들 모두를 참수형에 처한다. 보통 형벌이 집행될 때까지 유예를 두는 것이 관례이나.” 마르바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번 범행은 그 죄악이 심각하게 악질적이며 마왕군은 물론, 더 나아가 마계사회 전체에 크나큰 해악을 미쳤으므로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집행해야 마땅하다. 평원파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신의 형벌을 받을지어다.” 마르바스가 법봉을 들어서 망치처럼 휘둘렀다. 쿵, 하고 선고가 결정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서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를 끌고 단상에 올라왔다. 내가 데이지에게 바알의 검을 넘겨받았다. 살짝 무거웠지만 어떻게든 들 수는 있었다. 이 검은 사용자에게 맞게 적당히 크기가 변형되어서 괜찮았다. 나는 검을 거꾸로 잡은 채 확성마법을 꺼트렸다.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의 무릎을 거세게 꿇어 앉혔다. 그들이 투구를 벗기자, 제파르는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파르는 이내 상황을 전부 이해했다는 듯이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었는가…….” 제파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단탈리안, 최후로 한 가지만 묻고 싶다.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겠나.” “어떠한 질문에도 진실을 말씀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바르바토스 각하는 어찌 되셨는가?” 나는 무표정하게 제파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짙은 잿빛을 감상하며 내가 입을 열었다. “동토의 감옥에서 사백 년 동안 유폐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파르 형님과 벨레드 형님을 비롯하여 네 명의 평원파 마왕이 처형됩니다. 형님들께서 원하시는 대로 바르바토스는 살아남았군요.” “…….” “후회하시지 않습니까?” 제파르가 고개를 저었다. “후회밖에 없는 삶이었다. 구태여 말할 것도 없겠지.” 제파르는 나를 바라보았다. “바르바토스를 부탁하네, 단탈리안. 그녀는 누구보다 상냥한 여자야.” “……어느 여신에게 최후의 인도를 청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제파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본인은 무신론자일세.” 내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나는 검자루를 굳게 쥐고, 제파르의 목덜미를 향해 정확하게 칼날을 내리쳤다. 뼈가 갈라지는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툭, 하고 제파르의 머리가 몸뚱어리에서 분리되어 나뭇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시민들이 환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단탈리안, 하고. 그 홍수와 같은 부르짖음 속에서 푸른색 빛이 잠깐 번쩍였지만 나는 그걸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중립파 마왕들이 제파르의 시체를 끌고 사라졌다. 다음은 벨레드였다. 마왕들에게 이끌려서 벨레드는 정확히 제파르가 무릎 꿇었던 곳에 앉혀졌다. 그 역시 투구가 벗겨졌다. 벨레드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어떤 무례한 놈이 나보다 먼저 뒈진 거냐.” “제파르입니다.” 벨레드가 크흥, 하고 코를 울렸다. “결국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 나보다 빨리 꺼꾸러졌으니 내 승리로군. 바르바토스 각하는?” “동토의 감옥에서 사백 년 동안 유폐될 것입니다.” “흐흐. 이 벨레드, 주군보다 오래 사는 불충은 겪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군.” 그리고 벨레드는 길게 목을 빼들었다. 유언 따위는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벨레드는 여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마, 제파르와 마찬가지로 기도문구를 읊으면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 따위는 사절하고 싶겠지. 그렇기에, 나는 잔말을 떠드는 대신 검을 치켜들어 내리 베었다. 무겁고 둔중한 소리를 울리며 벨레드의 머리가 떨어졌다. 핏물이 대량으로 뒤기면서 내 옷자락을 흠뻑 적셨다. 나는 그것을 닦지 않고 가만히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도, 그 다음도. 평원파 마왕들은 바르바토스가 어찌되었느냐는 질문만을 입에 담고 순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때마다 바르바토스에게 유폐형이 선고되었노라고 대답했다. 당신들의 자작극이 성공하였노라고, 당신들이 죄를 위증한 탓에 바르바토스의 형량이 가벼워졌노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마왕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족스럽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은 끝까지 거짓만을 안은 채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의 죽음을 모욕하는 데 이보다 효율적인 속임수는 없겠지. “…….”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마지막으로 중립파 마왕들이 한 명의 소녀를 끌어올렸다. 당연하게도, 그 소녀의 이름은 바르바토스였다.   00436 존재의 긍지 =========================================================================                        나는 바르바토스의 유언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녀가 남기는 말이 무엇이든지 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으리라. 단순히 말의 외형만이 아니라 문장에 섞여든 뉘앙스와 숨결, 감정까지 계속해서 나와 함께갈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이제 나의 세계에서만 입을 열고 손짓을 하는 사람이 된다. 비록 그 입에서는 저주만이 흘러나오고 그 손짓은 목을 조를 뿐이겠지만, 괜찮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바르바토스를 계속 볼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해서 행운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되면 환영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인가……진퇴양난이로군. 바르바토스와 내가 눈길을 주고받았다. “…….” “…….” 진흙탕보다 더러운 내 시간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찬란했다. 마왕이란 땅바닥에 가볍게 내려앉은 먼지와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인격을 잃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나의 마음조차 내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안드로말리우스처럼 도박과 술에 빠져 지내는 것이 도리어 정상이겠지.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마왕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견고한 자아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어떤 승리에 대한 교향곡으로써 ‘나는 바르바토스다, 내가 바르바토스다’ 하고 끝없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거의 첫눈에 반해버렸다. 내가 너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바르바토스. 나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너는 바르바토스이고자 하면 할수록 너 자신에 대한 찬가가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퍼진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내가 나이고자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정해놓은 것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도리어 나라는 것이 사라지는가. 바르바토스, 나는 가장 깊은 눈물로 너에게 묻고 있다. 왜 너에게는 삶이 하나의 승리이고 하나의 축복인가.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종착역인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기보다 동경한다. 나는 다름 아니라 너와 같이 사는 것을 갈망했다. 나를 이해해달라――애당초 나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살도록 허락받은 자가 아니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최초로 저지른 일은 무엇이었던가――살인이었다! 그 다음에는 학살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 생애는 오직 최초의 학살들을 정당화하는 데 바쳐졌다. 말하자면 나는 악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길이 없었다. 바르바토스. 제발. 바르바토스. “…….” 그리고 그녀는 사뿐하게 두 무릎을 꿇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별난 몸짓이나 눈짓조차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단지 내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지극히 평범한 몸동작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나는 망연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유언 없이. 바르바토스는, 유언을 남기지 않고 죽을 작정이었다. 나에게 환영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자기가 뱉은 말은 무엇이든지 내게 주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바르바토스는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죽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충격에 온몸이 마비되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너는 지금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신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볼 수 있고, 마땅히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아니. 최소한 너의 부하들, 평원파 마왕들이 어찌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싶어서 미칠 것이다. 질문이 아니라 유언은. 유언은 어찌되는가. 바르바토스, 이건 너의 최후다. 수천 년 동안 살아온 네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천 마디 문장과 만 개의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원한과 감사가, 저주가 네 가슴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을 포기한다……? 고작 나 따위에게 저주를 남기지 않기 위해? 겨우, 그런 이유로, 네가 살아온 모든 것에 대해서 침묵하겠다고? “웃기지 마!” 내가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고함이었다. 그리고 또한 진심이었다. 내 몸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났다. 손이 멋대로 튀어나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고 말았다. 바르바토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에게 최후의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말을 남겨! 내 눈동자를 쳐다봐!” 나는 바르바토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광장의 시민들은 이것이 막간의 고문극이라고 생각했는지 격렬하게 환호를 보내왔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눈을 뜰 때까지 그녀의 발등을 짓밟고 뺨을 때렸다. 폭력이 이어질수록 광장의 열기는 더해졌다. 그러나 정반대로 내 주변만은, 마치 나와 그녀가 주변에서 격리되어버린 것처럼, 바깥의 열광도 손뼉소리도 옅어져서 거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카핫.”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기에는 천 년이 이르다고, 단탈리안.” “거짓말이라니……무슨 헛소리야.” “파이몬. 너, 그년이 유언을 길게 남길까봐 일부러 목덜미를 찔렀다고 말했지. 어설퍼. 그런 말도 안 되는 속임수로 이 몸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넌 정말 멍청한 거야. 야아, 너무 감쪽 같아서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지만.” 바르바토스 슬쩍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감옥에서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말이 안 되더라구. 정말 유언을 듣기 싫었다면 목을 잘라버렸어야지, 안 그래? 아니면 거기 네 호위 꼬맹이한테 명령해서 파이몬을 죽이던가. 그런데 너는 이렇게 말했지. 목덜미를 한 번, 등을 한 번, 다시 뒷목에 한 번, 단검을 쑤셔 넣었다고…….”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이게 무슨 뜻일까. 간단해. 단탈리안, 너는 파이몬을 껴안은 채로 죽였다는 얘기야. 자세가 그렇게 나오거든. 어라아. 이상하지 않아? 응? 뭔가 구린 냄새가 풍기는데 혹시 내 착각일까?” “…….” “환영에 시달리기 싫어서 재빨리 파이몬을 죽였다는 양반이, 정작 죽일 때는 파이몬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아서 죽여? 게다가 목을 그어버리지도 않고? 바보 단탈리안, 이거 모순이잖아. 말이 안 된다고.” 내 이빨이 떨렸다. 입안에서 피냄새가 느껴졌다. “정반대였어. 단탈리안. 너는 파이몬이 유언을 남기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찌른 게 아니야. 오히려 가장 농축된 유언을 듣고자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거지. 너는 파이몬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제일 모욕적인 방식으로 배신을 때리고, 제일 뼈아픈 저주를 들으려고 의도적으로 살해 방법을 선택한 거야.”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를 기만하지 마. 난 그렇게 우스운 여자가 아니야. 파이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죽어줄까보냐. 멍청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바르바토스가 내게 얼굴을 바싹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가 연하게 웃음기가 섞인 숨결로 속삭였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아.” “…….” “너를 신뢰한 것도 나야. 너를 좋아한 것도 나야. 너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주어서 배신당할 빌미를 준 것도 나고, 파이몬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도 나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맞이하는 죽음은 온전히 내 책임이지, 단탈리안, 결코 네깟 남자 때문이 아니야.” 내가 굳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자, 바르바토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녀석. 그렇게 중얼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 이 말만은 남겨줄게. 미안해. 단탈리안.” “…….”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으, 아…….” 어째서인지 눈앞이 흐릿해졌다. 사물이 뿌옇게 흔들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했다. 그녀를 죽이지 못하게 된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바르바토스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철두철미하게 악으로 남아야만 하는 자.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걸 변명으로 삼아 도피해서는 안 되는 자다.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학살해온 목숨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저 역시 사랑을 하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면죄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 바보가……뭐하는 거야.”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바르바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귓가를 쓰다듬듯이, 그렇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바르바토스의 목소리에도, 흐릿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얼른 죽여, 개 같은 자식아.” 내 등을 떠밀어주는 그 한 마디에.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바르바토스의 마지막 모습을 뚜렷하게 담을 수 없다는 것이 한이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라면 내가 그녀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살해한다 당장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은 검자루를 필사적으로 쥐어잡고. 당장이라도 무너져 쓰러질 것 같은 무릎을 필사적으로 세워서. 그녀의 목을 향해서, 망설임 없이, 일격에, 그녀를 죽인다. “…….” 바르바토스가 목을 숙였다. 그것과 동시에, 내 칼날이 아래로 쇄도했다. 나는 처음부터 너와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아니. 모험대가 쳐들어왔을 때 순순히 잡혀들어서 무명의 사형수에게 죽어버리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터다. 적어도 너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먼저 나를 죽여야만 했다. 차마 그것이 불가능했다. 사람들을 학살하면서까지 살고 싶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살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죽으면 안 되는 자가 되어버렸다. 개죽음이나 자살 따위는 허락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차라리 세상에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그때는 그곳에서, 반드시 너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할 테니까. 너에게 사과할 테니. 지금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나는, 검을 마저 내리찍었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오른손이 튕겨져 나갔다. 잠시 뒤, 바알의 대검이 허공을 풍차처럼 날아다니다가 땅바닥에 깊이 박혔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악귀처럼 얼굴을 구기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들린 그곳에는. “아버님.” 데이지가 발을 접은 자세로 나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녀석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상황을 파악했다. 바르바토스를 죽이려는 찰나, 데이지가 다리를 쳐올려서 내 손등을 튕겨버린 것이었다. 그 충격에 나는 대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감히……네 년, 감히 무슨 짓거리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데이지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오롯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많은 밤을, 차마 헤아리지 못할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살려둔 이유. 제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와 죽여야만 하는 이유. 어느 것이 올바르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지, 무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그녀가 바알의 대검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대검이 데이지의 마력에 이끌려서 그녀의 손아귀에 돌아왔다. 데이지는 나를 향해서 대검을 치켜세웠다. “저는 당신을 막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흑발을 흩날리며 선언했다.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저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마왕 단탈리안. 지금부터 당신을 가로막겠습니다.”   ============================ 작품 후기 ============================   ─ 챕터 <존재의 긍지> END.   00437 DAISY =========================================================================                        “이 천치 벌거숭이가…….” 내가 이빨을 깨물면서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당장 고함을 쳐서 저 녀석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분노는 언제라도 토해낼 수 있었다. 노예에 불과한 데이지가 어떻게 나의 행동을 방해했는지, 이변의 원인을 파악해내는 것이 먼저였다. 이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는 세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내 두뇌는 명백하게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당황하기보다는 도리어 환호하며 어느 때보다도 가열차게 돌아갔다. 첫 번째.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데이지에게 협력했다. 데이지는 시녀장으로서 이바르를 마음대로 다루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어도 데이지가 이바르를 통해서 인형을 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바르는 자기가 인형술사라는 사실을 감추었지만 데이지라면, 이 태생이 교활한 독사라면 그 정도 비밀을 알아내는 것쯤이야 쉬우리라. 망설임일랑 불필요. 곧바로 첫 번째 가능성을 점검해보았다. ‘상태창!’ 데이지의 상태창이 푸르게 떠올랐다. 십수 회차를 넘어선 용사답게 무지막지한 숫자가 주르르 표시되었다. ━━━━━━━━━━━━━━━━━━━━ 이름: 데이지 폰 커스토스 종족: 인간   주인: 단탈리안 속성: 중립(0) 레벨: 69    명성: 8133 직업: 모험자(A), 검사(AAA), 암살자(S) 통솔: 100/100 무력: 166/166  지력: 117/125 정치: 95/95  매력: 100/100  기술: 81/81 호감도: 0 종속도: 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A), 검술(AAA), 작전술(B), 설득(S), 기마술(S), 원소마법(A)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호감도와 종속도의 영향으로 인해 표시되지 않습니다. ━━━━━━━━━━━━━━━━━━━━ 내 눈동자가 재빠르게 상태창을 훑었다. ‘아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무력 및 매력 부문 이외에는 한참 능력이 떨어지는 루크에 비하여, 데이지는 통솔과 정치, 심지어 기술까지 정점을 찍었다. 제아무리 이바르라고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인형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하겠지. 지금 내 눈앞에서 대검을 치켜들고 있는 소녀는 데이지 본인. 틀림없었다. 나는 즉시 첫 번째 가능성을 폐기했다. 아울러서 두 번째. 데이지가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노예각인을 해제했다는 가설 또한 동시에 무너졌다. 상태창에는 나 단탈리안이 데이지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기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녀석이 무언가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노예각인을 지웠다고 추론했다만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천한 인간 주제에 난동을 부리다니!” 그때였다. 중립파 마왕들이 데이지를 둘러쌌다. “감히 신성한 법정을 어지럽히고도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는가!” 마왕들이 제각기 무구를 빼들었다. 그들에겐 갑작스러운 난입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데이지를 향해 달려들려고 뒷발에 힘을 준 순간,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 아이는 나의 딸이다!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시퍼렇게 날이 선 고함에 중립파 마왕들이 멈추었다. 생각에 잠긴 나머지 무심코 반말을 쓰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내가 그들보다 아득하게 상위의 권력을 쥐어잡은 마왕이라고 하나, 표면상으로라도 상대방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 일단 상황을 정리하자.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제 딸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 죄, 사건이 정리되고 마땅히 무게에 따라 처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물론이오, 단탈리안.” 중립파 마왕들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대를 불쾌하게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소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서서 재판석에 앉은 마왕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친애하는 선제후 전하들에게 아주 잠깐의 유예를 청하는 바입니다. 저 단탈리안,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르바스가 진중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감상하듯이 살펴보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답이 없었다. 유예를 허락하되 단지 암묵적으로 허락해줄 뿐이라는 얘기였다. 고로, 나 역시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답례를 대신하였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 “…….” 데이지와 나 사이에 대치가 이루어졌다. 데이지는 마치 바르바토스를 지키는 것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전까지 시야를 흐릿하게 산란시킨 노이즈가 이제는 사라졌다. 덕분에 바르바토스가 똑똑히 보였다. 백발의 소녀, 긍지높은 마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식도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당장 한바탕 구토를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데이지에 대한 분노, 나의 빈틈없는 계획과 여정을 중간에 끊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진노가 간신히 구역질을 가라앉혔다. 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내듯이 말했다. “네 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저는 자살을 희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데이지가 즉답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녀석은 이죽거리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작태가 내 분노에 분노를 더하였다. 고마운 노릇이 아니고 뭔가. 헛구역질이 완전히 날아갔으니 말이다. “지금 아버님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하나뿐이겠지요. 어떻게 당신의 의사를 거역할 수 있었는가. 정답을 아시겠습니까, 아버님.” “네 년에게 내려진 명령들.” 내가 목소리에 노여움을 흘려보냈다. “그것들 사이의 충돌을 이용했겠지.” 이것이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 데이지의 노예각인에 부여된 명령들은 다음과 같았다.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내 명령에 복종하라. 너 자신의 삶보다 나의 삶을 우선하라. 상기의 명령들을 언제나 절대적으로 준수하라. 여기서 간단하게 추론되는 사실은, '내 명령에 복종하라'라는 사항과 '나와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라는 사항이 지금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나의 명령과 의사를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르바토스는 명백하게 내가 가장 친애하는 인물이었다. 데이지 입장에서는 '주인의 명령을 따르라'와 '바르바토스를 지켜라',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과연 아버님입니다. 항상 그러하듯 이번에도 멋지게 착각하시는군요.”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눈가에는 상대를 모독하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십중팔구 허장성세였다. 건방진 녀석. 네 녀석이라고 해서 내가 봐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감히 이런 자리에서 나를, 바르바토스를, 모든 마왕을 모욕한 죄과를 받아주마. “새로이 명령한다!” 내가 확신을 담아 소리쳤다. “앞으로 모든 지시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예외로써 제외시킨다! 명령에 있어서 바르바토스를 나의 연인으로 취급하지 마라! 그러니 즉시 대검을 내놓아라, 천치 녀석!” 나는 손을 뻗었다. 데이지가 얌전히 바알의 대검을 되돌려주는 것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1초가 흘러도, 2초가 흘러도, 3초가 흘러도――데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에 반항하는 것에 극심한 격통이 몰려올 것인데도 눈썹조차 까딱대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 어째서.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왜 당연하다는 듯이 데이지가 내 명령을 위반하고 있는가. 데이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님께선 멋지게 착각하고 계시다고.” “네놈……대답해라. 어떻게 명령에 반항하는 것이냐.” “아쉽게도 '그 명령'은 저에게 유효하군요.” 데이지의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뉘앙스는 역시나 조소였다. 녀석은 나를 도발하고 있었다. 뻔한 도발이었지만, 동시에 확실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차분하게. 데이지는 쓸데없이 상대를 도발하는 녀석이 아니다. 나를 분노에 휩싸이게 해서, 내 판단을 마비시켜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이다. 녀석이 숨기고 있는 목적이 있다. 여기서 넘어가서는 데이지의 의도대로 춤을 춰주는 꼴이 된다. “처음에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라우라 데 파르네세.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규중 아가씨 말입니다.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봐라. 말 끝마다 나를 조롱하는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멍청한 것, 역효과였다. 그리 빤하게 도발해서야 내가 침착해지는 것을 도와줄 따름이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은 어디에 잊어버리고 저리 어수룩하게 나와는지 한심했다. 하지만, 라우라라니. 이것만은 의문이었다. 왜 라우라의 이름이 언급되었는가. 내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저는 아버님의 명령이 어디까지 유효한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오 년 전부터, 각종 독극물과 함정을 동원해보았지요. 다만 '아버님께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수단'은 어떻게 해서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익히 알고 있었다. 데이지는 틈만 나면 홍차에다 몸에 해로운 물질을 섞곤 했다. 문제는 차마 독극물이라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효력이 미약한 약물만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나는 마왕. 자체적으로 독을 해소하는 체질을 갖고 있었다. 데이지가 건네주는 약물 따위는 수천수만 번을 섭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버님이 아니라 아버님 주위의 인물을 뒤흔드는 것은 유효하지 않을까, 하고.” “뭐……?” “기본적인 발상입니다. 적군의 요새가 지나치게 강대하고 견고할 경우, 주변의 위성 요새들부터 공략한다. 친히 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 전략이 아닌지요.” 데이지가 여유롭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라줄리 국무상서는 파고들 틈이 없었습니다. 제레미 스승은 아버님께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지요. 반면에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아주 적절한 사냥감이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아버님을 험담했습니다.” “…….” “너무 노골적이어서는 곤란했습니다. 그저 아버님에 대한 화제가 입에 오를 때, 천천히, 착실하게, 제가 얼마나 아버님을 증오하는지 알렸지요. 아버님께 드리는 찻물에도 항시 장난질을 친다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데이지가 자그맣게 입가를 올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군무상서는 본디 저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저를 경계하고, 꺼리며,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혹시 군무상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님의 양녀인 저를 괴롭히리라고 생각하셨는지요.”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목뼈를 타고 뒷머리로 치솟았다. 간신히 내려앉은 분노가 다시금 역류하고 있었다. “네 년……설마…….” “예. 제가 유도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바타비아의 관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쓰러지셨을 무렵,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적나라하게 저를 의심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사흘이 넘도록 의식이 없으니 혹여라도 제가 중간에 장난을 친 것 아닌지 걱정한 것이지요.” 데이지의 입꼬리가 그리는 곡선이 짙어졌다. “얼마 뒤, 군무상서가 저를 불러들여서 물었습니다. 네가 약물에 엄한 짓을 저질렀냐고. 저는 제가 깔아놓은 거미줄에 이 가여운 군무상서가 걸렸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드렸지요. 비웃음을 흘리면서, 그녀한테 정면으로 말해두었습니다.” “…….” “제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있으십니까――하고.” 데이지가 마침내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단순한 숨결이었을지도 몰랐다. 녀석은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내 귀에는, 내 눈에는, 더없이 뚜렷한 비웃음으로 비추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 간단히 미쳐버리더군요.” “…….” “아버님께도 꼭 보여드리고 싶은 광경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내 주군을, 내 주군을, 하고 망가진 오르골마냥 쉴 새 없이 울부짖었지요. 그날부터 군무상서는 저를 고문했습니다만……솔직히 고문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실소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손이 분노로 떨렸다. “어떻습니까, 아버님. 참으로 아버님께 지극정성인 여자가 아닌지요.”   00438 DAISY =========================================================================                        “네가…….”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머리에 열기가 차올랐다. 눈이 뜨거워지면서 내 입에서마저 과열된 숨결이 새어나왔다.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언제나 환하게 웃는 라우라였다. 자신만만하고, 대체로 만사에 귀찮아서 꼴사나운 얼굴로 하품을 하고, 가끔씩 질색하며 나를 매도하지만 결코 내 요망이나 소망을 거부한 적이 없고, 영원히 내 동반자이기를 자처한……나의 작은 군사 아가씨. ─ 미안해요, 주군. 미안해요……. ─ 소녀 때문에, 소녀 때문에 주군이 채찍질을……. 라우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한 그날 밤의 기억이. 무언가가 망가진 것처럼 나한테 끊임없이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고 사과하던 라우라의 모습이. 그 모든 음울하게 빗물에 젖은 색채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네가, 나의 라우라를.” “군무상서는 제 의도를 충실히 따라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노예각인의 헛점을 하나 발견했으니까요. 아버님이나 아버님의 연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는 없을지라도, 간접적으로 의심암귀와 상해, 내분을 유발시키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데이지는 라우라를 망가트렸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겠지. 녀석의 심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라우라는 유일하게 내가 평대를 허락한 아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라우라와 나는 일반적인 군신 관계를 뛰어넘어서 친우로서, 연인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대했다. 데이지는 그 유일한 관계를 깨트리고 싶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나의 정신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기에. “마치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데이지가 덤덤하게 고백했다. “군무상서는 저를 지하감옥에 가두고 며칠을, 수십 일을 고문했습니다. 벽에 매달아두고 하루에 눈물만큼 작은 양의 물만을 주었습니다. 돼지들에게 주는 사료를 음식이라며 제게 먹였지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 제 머리만큼은 어느 때보다 희열을 느끼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데이지는 작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아버님과 제 내기판은 압도적으로 저에게 불리했습니다. 저는 아버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었고, 심지어 아버님의 연인들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했습니다. 패배하는 것이 정해진 노름판에서 하나의 탈출구, 한없이 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구인 것이 확실한 빛줄기가 내려왔습니다. 저의 기쁨을. 저의 환희를 이해해주시겠지요.” “…….” “어두운 지하감옥에서 돼지 사료를 먹으면서, 구역질에 토를 하고 살갗이 채찍에 벗겨지면서, 그 와중에도 저는 어떻게 하면 이 헛점을 이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아버님을 파멸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행복하다, 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데이지는 어조가 완만했다. 자그마한 즐거움이 녀석의 목소리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 마왕의 딸이 된 소녀는 나지막하게 자신의 악행을 밝혀나갔다. “사흘 정도 지났을 무렵일까요. 저에게 미친 듯이 매질을 내리치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를 보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거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번개가 제 온몸을 핥고 지나간 것처럼 저는 떨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부 알아버렸습니다.” 십할의 확률. 본래라면 지는 것이 확정된 게임에서 데이지는 기적적으로 승리패를 엿보았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는 것이 도리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제 눈앞에서 울부짖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마왕 바르바토스의 연인이지 않습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당혹스러운 침묵이 아니었다. 인식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침묵이었다. 데이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을 했고,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입술을 벌렸다. 내 시선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지, 데이지가 약간 재밌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바르바토스 말입니다. 아버님. 여기 있는 바르바토스요. 생각해보십시오.” 데이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바르바토스는 어느 날부터 아버님을 갑자기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인이 궁금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증오했다고 하더라도 암살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러자, 이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 무슨…….” “당신은 닥치십시오.” 바르바토스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데이지가 대검을 내리찍었다. 대검은 정확하게 바르바토스의 허벅지를 찔렀다. 바르바토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데이지를 포위하고 있던 중립파 마왕들까지 움찔거렸다.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바르바토스를 흘겨보았다. “저는 지금 아버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감히 제3자 따위가 끼어들 곳이 아닙니다.” “이, 개 같은, 년이…….” “당신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의 대답밖에 없습니다. 바르바토스. 누가 당신에게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말해주었습니까?” 데이지가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른 채 그대로 칼날을 거꾸로 돌렸다.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속살을 깊이 파고들어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바르바토스는 입술을 깨물어가며 비명을 참았지만, 끔찍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데이지가 자그맣게 혀를 찼다. “대답조차 제대로 못하는 건가요. 쓸모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여자로군요. 고작 이런 버러지한테 반해버렸다니, 아버님. 딸인 제가 다 민망할 지경입니다.” 내가 이빨을 으드득 씹었다. “당장 집어치워라……!” “방금 전에 아버님께서 하신 얘기를 또 뒤엎는군요. 앞으로 바르바토스를 모든 명령에서 제외시켜라. 바로 조금 전에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데이지가 희미하게 조소했다. “저로서는 당황스러워서 어느 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괜찮겠지요. 저는 효녀입니다. 아버님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불합리한 명령일지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푹, 하고 데이지가 대검을 거둬들였다. 바르바토스의 허벅지에서 검붉은 핏물이 샘솟았다. 데이지는 귀찮다는 듯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분위기가 안 좋았다. 데이지는 지금 명백하게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도 어느새 데이지의 목소리에 귀가 사로잡혀서 경계와 더불어 호기심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광장의 시민들은 술렁거리면서도 이 난입자의 대담한 짓거리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내 본능이 위험신호를 맹렬하게 보내왔다. 그러자 데이지의 흑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여기서 저를 막으실 생각입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미리 알리겠습니다. 만일 여기서 제 발언을 막는다면, 아버님께서는 영원토록 제가 어떻게 노예각인에 반항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좋다면, 예. 얼마든지 저를 막으십시오.” “나를 협박할 속셈이냐.” “협박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입니다.” 데이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는 바르바토스를 제 손으로 참수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연인이, 아버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견디실 수 없겠지요.” “…….” “이야기를 본론으로 되돌립니다.” 데이지가 바르바토스의 허벅지에 오른발을 올렸다. 하필이면 대검에 헤집어진 부위에. 바르바토스가 입술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을 참아냈다. “이 여자가 대답하지 못한 질문을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르바토스는 누군가에게 다급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십중팔구 파이몬이 아버님을 살해하고 말 것이라고. 바르바토스는 이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파이몬을 배제하고자 움직였습니다.” 아. “그 인물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 아아. 아, 아아아! “군무상서는 안 그래도 마왕 파이몬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워낙에 파이몬이 아버님과 대립한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하필 아버님에 대한 독살이 시도된 장소가 바타비아의 총독 관저였습니다. 마왕 파이몬이 암약하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관저 말입니다. 과연 군무상서가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했다고 보십니까?” 데이지가 고개를 저었다. “군무상서는 한시라도 급하게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파이몬이 아버님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해서 아무런 방책을 준비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님에 대한 군무상서의 사랑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군무상서는 어떻게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마왕 파이몬을 막아줄 안전책을 고안했습니다…….” 나는 머리가 뇌전에 당한 것처럼 마비되었다. 턱 끝이 떨렸다. “아버님.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시는 아버님.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누구에게 상담했을 것 같습니까?” “말도 안 돼……그럴 리가…….” “마왕 파이몬은 강대한 자입니다. 파이몬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만큼 강력한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경고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며, 파이몬만큼 강력하며, 또한 동시에 파이몬을 위험시하는 자.” 데이지가 오른발을 꾸욱 짓눌렀다. 바르바토스의 미약한 비명이 터졌다. “그렇습니다. 군무상서는 바르바토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파이몬이 아버님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 같으니 부디 주의해달라고.”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도중. 데이지는 라우라의 혹독한 심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단 한 마디, 라우라의 마음속에 의심을 꽃피울 말을 딱 한 마디만 속삭였다고 한다. ――바타비아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까. 그것은 데이지가 파이몬과 협력하고 있다는 심증을 강력하게 굳혔다. 적어도 라우라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라우라는 어느새 심증을 확신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가장 믿음직스러운 연인이자 아군인 바르바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을 예의주시했습니다. 라우라는 아버님의 최측근입니다. 그런 측근이 경고할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길 법하지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던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히 파이몬을 질투해서가 아니었는가. 라우라는 파이몬이 공화주의 해방동맹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라우라가 그 사실을 바르바토스에게 알려주었다면, 파이몬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위험한 인물인지 말했다면, 바르바토스의 경계심은 극도로 높아졌을 터. 바로 그 타이밍에 마왕군에서는 노예제 폐지 안건이 올라왔다. 바르바토스의 눈에는 그것이 공화주의자인 파이몬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비추지 않았을까. 그래서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파이몬을 없애려고 든 것인가. 달리 말해. 라우라가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망가진 것도. 바르바토스가 필요 이상으로 파이몬을 경계한 나머지 결국엔 암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저질러버린 것도. 내가 파이몬을 죽이게 되는 시점에 이르게 된 것도――. “물론, 그렇다고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암살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장대한 파벌 싸움에 돌입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매우 기쁜 계산착오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지요.” 전부 데이지가 자아낸 함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전개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게 예측하신 독자가 한 분 계십니다.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오늘 본문에는 그분의 닉네임을 알게 모르게 숨겨 놓았습니다. 문단의 첫 글자만 따로 읽어보시면 중간에 닉네임이 드러납니다. 제 작은 장난입니다! 헤헤 >_<)   00439 DAISY =========================================================================                        나는 목소리를 집어 삼켰다. 재차 입을 열어서 뻐끔거렸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어쩌면 십수 번을 그렇게 헛구역질과 같은 숨을 토해낸 다음에야 나는 간신히 하나의 문장을 주조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러나 말이라기보다 감정의 분출에 가까웠다. “그런 방식으로……나를 파멸시키려고 한 게냐…….” “당신은 인과(因果)의 괴물입니다, 아버님.” 내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음을 알았을까. 데이지는 대답하는 대신에 자신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은 근본적인 착각에, 하나의 거대한 윤리적인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런 표현을 더 선호하신다면, 당신께서는 그야말로 착각의 육화(肉化)이십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온 세상의 악마들은 찬송가를 불러대며 축제를 벌였겠지요.” 데이지가 입가를 뒤틀면서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는 동안에도 내 머리 한 구석에는 녀석을 관찰하는 시선이 남아 있어, 데이지의 눈짓과 몸짓에서 과장스러운 연극적 어조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신과 같습니다만 거꾸로 뒤집히고 비틀린 신입니다. 아버님과 같이 도덕의 왕국을 역설적으로 이룩해낸 사람은 일찍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출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범행, 고백, 선언은 전부 '나다! 내가 이 일을 저질렀다! 내가 여기에 있다! 나야말로 이 사건의 주인이다'라고 소리칩니다.” 데이지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인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시선의 각도를 비틀어서 이쪽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님의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제 무례를 용서하시길. 저는 아버님의 악마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낭만적인 희생극에 지쳤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한 것입니다.” “선물……?” “저는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데이지가 대검을 한층 더 똑바로 치켜세웠다. 데이지의 매끄러운 입술에서 광장 전체를 울릴 것만 같은 노호가 터져 나왔다. “당신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의 착각. 그 붕괴에 원인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 데이지 폰 커스토스이며, 고로 당신은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매섭게 분출했다. “파이몬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사람이 아버님 자신이라는 것 또한 웃긴 착각에 불과합니다. 진실한 범인은 저입니다. 당신의 고뇌, 당신의 슬픔, 당신의 상처――아버님의 모든 것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오롯하게 저에게서 비롯했습니다. 안 됐군요, 아버님.” 데이지의 두 눈동자가 희열로 번들거렸다. 승리자의 시선. 무엇보다도 정복한 자의 시선이었다. “당신께서는 더 이상 자신이 두 사람을 몰락시킨 주범이라고 자부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당신의 어깨로 짊어지겠다는 환상은 유리잔처럼 깨졌습니다! 방금, 당신을 파멸시키려고 했냐고 질문하셨습니까?” 데이지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 무슨 착각인지요. 정반대입니다. 저는 당신을 시시한 파멸에서 구해주려는 것뿐입니다. 이제 아버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예. 양자택일입니다.” 데이지가 반쯤 비스듬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첫 번째. 이 세상에 '나'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십시오. 당신의 위악이 아슬아슬한 곡예라는 걸 자인하시지요. 물론, 아버님에게 이런 선택은 불가능하겠지요……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피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가 도저히 안 되겠다면, 두 번째.” 데이지가 말했다. “제가 모든 일의 범인이라는 걸 인정하십시오.” “…….” “파이몬, 제파르, 벨레드, 당신에게 소중한 이들을 앗아간 것은 다름 아니라 저입니다. 당신은 한낱 가련한 꼭두각시 인형이자 피해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연극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면, 당신이 가련한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물론,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그것도 불가능하겠지만.” 데이지가 크게 웃었다.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웃음소리가 팽팽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웃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아버님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양자택일의 구조가 아닌지요.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역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버님은 상대방을 지배했지요. 그리고, 이제는 제가 아버님을 가질 차례입니다.” 마치 체스판이 요동치듯이. 여태까지 하수인에 불과했던 졸병이 마지막까지 내달려서 마침내 여왕으로 변하듯이. 데이지가 고했다. “이제부터 아버님의 고통은 모조리 제 것입니다. 아버님의 악몽도, 어쩌면 숨결까지도 온전히 제 것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삶 전체가 저당 잡혔습니다.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입니다.” 광장에 약한 바람이 불어 데이지의 흑발이 살며시 흩낱렸다.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서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저 데이지가 남긴 여진에 몸을 떨었다.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훑고 지나간 다음, 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다.” 나는 더없는 분노를 담아서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네 년을 죽인다. 그리 되면 나는 다시금 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인지 녀석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같이 분노로 인해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성취감으로, 승리에 대한 도취로 떨리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제부터 아버님의 삶은 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전부 결정된다는 얘기로군요.” “…….” “아버님이라면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드디어, 저는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 치욕과 고통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데이지는 대담하게도 두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온몸이 환호하는 것을 잠시 내버려두고 그대로 느끼는 것 같았다. “파이몬이 아닙니다. 엘리자베트 통령도 아닙니다. 바르바토스도 아닙니다. 오직 저만이. 제가 아버님을 살해할 권리와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아버님의 '무엇'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생명? 기껏해봐야 목숨입니까? 아아, 모자랍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버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데이지가 눈을 떴다. 그와 함께 데이지는 광소했다. 단지 큰웃음만이 광소는 아니라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단락적으로. 마치 일부러 발음을 끊어서 흘리듯이, 아핫, 하핫, 하고 데이지는 짧게 웃음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아버님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이로써 제 맹세는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 전체,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저 하나뿐! 그렇기에 아버님의 신념을, 고통 자체를, 인격 자체를 말살할 수 있는 사람도――오로지 저 하나뿐!” 데이지가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광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데이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곁눈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짙은 먼지구름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금발의 남자아이. 정갈하게 집사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데이지의 오라비이자 내 노예일 터인, 루크였다. 루크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대검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광장에 테러를 감행한 것이리라. 데이지뿐만 아니라 루크마저 노예각인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인가……! “데이지……!” “실례하겠습니다.” 바람이 가르는 소리와 함께, 데이지가 바알의 대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순식간에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데이지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중립파 마왕들의 무기를 절단냈다. 대검에 서린 오러는 마왕들의 가슴을 찢었다. 네 명의 마왕이 가슴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핏물이 사방에 튀어올랐다. 일격. 단 한 번의 호흡만으로 데이지는 중립파 마왕들 네 명을 무력화시켰다. 아무리 바알의 대검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가히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러고도 데이지는 가볍게 파리들을 치웠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얼 그리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거대한 비극이 일어나기라도 했습니까? 오히려 아버님께서 꿈에도 그리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서 저를 칭찬해주십시오.” 내가 이빨을 악 물었다. “나의 명령이다! 자결해라, 데이지!” “아하.”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죄송하지만 그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바로 제가, 가장 비천한 노예이자 화전민의 핏줄을 타고난 여자아이가 오롯이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자들이 모두 당신을 처단하기 위해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데이지가 대검을 가뿐하게 네 번 휘둘렀다. 그러자 데이지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칼날이 바르바토스의 사지를 잘라버린 것이었다. 그것과 더불어서 바르바토스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묶어두고 있던 마력봉인구도 절단되었다. 어째서 명령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데이지는 아직도 내 노예였다. 그런데 어째서, 데이지는 물론이고 루크까지 나를 방해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데이지가 공손하게 한쪽 치맛자락을 잡아들고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은 자신의 알량하고 이기적인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이제부터 대가를 치를 시간입니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이냐……!” “그걸 기대하면서 기다리시는 것 또한 아버님의 낭만적인 삶을 즐겁게 치장해줄 향신료가 아니련지요.” 데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옷덜미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바르바토스는 바닥에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미 뿔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당장 바르바토스가 감당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심각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를. 저는 최고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잠시간 아버님 곁을 떠나겠습니다. 술은 적당히 드시고 마약도 슬슬 끊으시지요. 술과 약에 취한 정신으로 마주해도 좋을 만큼 저는 가소롭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의 검이 데이지를 향해 쇄도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데이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방심한 것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검을 치켜들어서 공격을 막았다. 공격이 날아온 곳에는 시트리가 서 있었다. 시트리가 이를 씹으며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네 년이 우리 언니를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거지?” “예. 일조한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없었다면 파이몬이 개처럼 죽을 일도 없었겠지요.” 데이지가 시트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부외자는 꺼져주십시오. 감히 인형이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다니.” 가볍게, 데이지가 대검을 비틀었다. 데이지의 검을 뱀처럼 휘감도 있던 시트리의 사복검이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장력에 의해서 버티고 있던 시트리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아직 시트리는 지난 번에 입은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본래 공주님을 약탈하는 것은 마왕의 역할이라지만.” 데이지가 바르바토스를 허리에 안았다. “가끔씩은 역할이 뒤바뀌어도 상관없겠지요.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여인을 인질로 빌려가겠습니다. 외롭다고 너무 울지는 마시길, 아버님. 당신의 딸이 부끄러워지니까요.”   00440 DAISY =========================================================================                        * * * 고향이란 단어는. 나에게 언제나 배고픔과 치욕이라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네 살 무렵,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비천한 출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화전민은 어느 국가에도 도시에도 소속되지 못한 떠돌이였다. 숲을 바짝 태워가며 살아가야 하는 화전민의 삶에 어딘가에 정착하고 머무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세상의 낭떠러지. 나는 내 마을을 마음속으로 그렇게 불렀다. 끝없이 광대하게 펼쳐진 숲을 보고 있노라면 싫더라도 그런 감상이 들었다. 특히 겨울이 오면, 사방에 눈이 차곡차곡 쌓이면 마을은 한없이 고요해져서 때때로 모든 인간이 죽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겨울. 화전민의 겨울. 춥고 배고파서――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계절. “아주 잠깐이면 된단다.” “그래, 데이지. 이건 아무 일도 아니니까.” 마을의 어른들이 내게 기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지나치게 성숙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상하게도 나는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앞서는 구석이 있었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벌써 눈동자에 우수가 잠겼다. 아마도 그것이 어른들의 음심을 자극했겠지. 외부에서 격리된 마을. 그런 곳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태어난 소녀. 그 결말이 어찌될지는, 어느 정도 이미 정해져 있었겠지. 저항할 수는 있었다. 얼마든지. 하지만 내가 한 끼를 대신하면 그만큼 부모님이나 루크에게 돌아갈 몫이 많아졌다. 그런 사실을 간단하게 외면하기에는 내 머리는 계산과 이익이 밝았다. 나는 어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노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데이지는 정말로 예쁘구나.” “어쩌면 살결이 이리 하얗게 들었을까.” 부모님이 밭일을 나가고 루크가 동네 애송이들과 놀러 나가는 시간대면, 어김없이 마을 구석에서, 혹은 어느 오두막집 구석에서 예의 장난이 이루어졌다. 나는 내 몸을 정신없이 더듬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자기 그림자를 파먹는 들개 같아, 하고 생각했다. 특별히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단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오두막집 외벽을 두웅, 두웅, 하고 둔중하고 느릿하게 두들길 때마다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사람들은 죽지 않고 차라리 살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혓바닥이 내 살갗을 더듬거렸다. 마치 그것이 제일 맛있는 과일이라는 것처럼. 마을어른들이 하는 얘기에 따르자면 내 몸에서는 복숭아 향기가 난다고 했다. 설마 우리처럼 가난한 천민들이 복숭아를 먹어보았을 리는 없으니,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해본 말이겠지. 전부 거짓말쟁이니까. 예컨대, 어느 가족의 부인이 죽었다. 낮에는 약초를 따러 다니는 여자였다. 실종된 지 사흘 만에 산속에서 발견되었다. 늑대한테 온몸이 갈가리 찢겨진 채로. 남편은 절망에 빠져서 울부짖었고, 마을사람들은 참 안 된 일이라며 그를 위로했지만. 사실은 남자들에게 간살당한 것이었다. 패거리들이 내 몸을 가지고 놀면서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혼자 산길을 헤매고 있는 여자를 덮쳐서 죽을 때까지 범했다고. 그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도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눈앞에 명백하게 놓여 있었다. “어이, 너.”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패거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알베르. 이 마을에서 암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는 비밀 패거리 중에서 가장 난폭한 남자였다. 남자는 내 뺨을 후려쳤다. “뭘 잘났다고 쳐다보는 거냐. 우리 덕분에 겨우 겨울을 나는 창녀 주제에, 어디서 은인들을 깔봐.” “…….” “기분 나쁜 년 같으니.” 퉤, 하고 남자가 내 가슴에 침을 뱉었다. 어차피 어른들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별로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모욕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는지 도로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죄책감의 부재.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솜씨.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남 탓으로 돌리고,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실종된 인간들. 나는 인간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납득했다. 아마도 그들에게 뻔뻔한 처세술은 형편없이 짓눌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겠지. 침으로 얼룩진 내 허벅지에 다시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를 부비적거리는 남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안심했다. 그리고. 화전민촌이라는 이 기괴하게 비틀어진 세계는 가볍게 뭉개졌다. 습격. 학살. 생전 처음 보는 골렘들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나왔다.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온몸이 새카만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눈을 덮었고, 검은색 망토로 몸을 가렸다. 두 눈동자는 마치 우리를 시험한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주위를 흘겨보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있었다. “본인이 어째서 너희를 겁박하는가. 어째서 너희를 습격했는가. 그런 의문일랑 전부 내려놓아라. 지금부터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침입을 받아 마을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남자가 여덟 명이나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르네, 알베르, 쟝, 토비, 아벨, 브뤼노, 티보, 루씨앙…….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나를 장난감으로 삼던 남자들이었으니까.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촌장이 말했다. 나는 속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검은색의 남자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 하고 지시했다. 촌장은 지금 막 내려진 명령에 반항한 셈이었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부하가 단검을 던졌다. 촌장은 목 한가운데에 칼을 맞아 절명했다. 마을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자업자득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너희에게는 어떠한 질문도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본인이 질문하는 바에 대답할 의무만이 주어진다. 만일 본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경우 본보기로 한 사람씩 죽이겠다.” 남자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남자의 진심을 이해했는지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해력이 느린 인간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중에 루크라는 소년이 있는가?” 어째서인지 남자는 내 오빠를 찾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처음에는 저항했다. 모두가 침묵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들보다 훨씬 더 교활했으며, 간단하게 마을주민들의 계책을 깨부수었다. “감히 본인의 명령을 귓가로 흘리다니 멋진 배짱이다.” 남자가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까지 나는 어느 정도 무심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가 왜 루크를 찾는지 모르겠어도 확실한 사실은 단 하나, 우리에게 반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를 이기지 못했다. 쓸데없이 저항하느니 이대로 가만히 있는 편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다음 순간에 나는 입을 벌렸다. “숲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또한 루크라는 소년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알려주겠다.” 남자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주민들을 존중했다. 그대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대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또박또박, 천천히 말해주었다. “고로, 본인은 루크라는 소년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왕림했다. 그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이리라. 본인도 군말을 더하지 않겠다. 본인과 여타 마왕들, 더 나아가 마족의 미래를 위해 그대들은 여기서 죽어주어야겠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우리들을 죽여버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마치 우리처럼 비천한 인생에게도 '죽을 이유'가 정당하게 필요하다는 것처럼, 남자는 정직하게 고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화전민촌에서 살아가는 거렁뱅이조차 어린 여자애한테 폭력을 휘드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간단했다. 저 앞에 서 있는 남자 정도라면 간단하게 주민들을 학살할 수 있을 텐데, 쓰레기로 여길 수 있을 텐데――남자는 도리어 우리를 인간으로 대했다. 그 사실을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알아차렸다. 마을주민들은 여전히 공포에 덜덜 떨었다.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나는 놀라웠다. 어느 국가도 도시도 당신들을 사람이라 인정해주지 않았건만, 그것 때문에 당신들은 삶을 저주했건만, 정작 지금 눈앞에서 그 인정이 이루어지자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나는 일어섰다. 혹시 당신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것도 영원히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일까.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내가 소리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린아이가 말을 걸었는데도 나를 깔보거나 오시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남자는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막연하게나마 확신이 섰다. 그가 나를 거부할 수 없고, 내가 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단 한번의 마주침으로 인해 명백해졌다.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말을 꼬지 않게 주의하면서 얘기해나갔다. 장담하건대 그때만큼 내 혓바닥과 입술에 신경을 집중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남자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상대방 역시 나를 무서우리 만치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목소리로 남자를 두들겼고. 남자가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확신은 굳어졌다. “저는 왕의 관용에 기대어 아룁니다. 예언에서 얘기하는 소년이 루크 한 사람이라면 저희를 모두 죽이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디 루크 한 사람만을 참하소서.” 만일 당신이 내가 상상하던 대로. 내가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던 대로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 말에 반응한다. “단, 루크는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을 부디 허락해주시길 간청합니다.” 잠시간 침묵이 가라앉았다.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가지 질문하겠다.” “무엇이든지, 위대한 존재이시여.” “친족을 죽이는 것은 가장 크나큰 죄악이다.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어째서 죄악을 자처하는가. 그 질문이 핵심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동시에 시험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남자가 마을주민들을 개돼지로 취급했다면, 남자는 훨씬 더 손쉽게 우리를 학살할 수 있었다. 개돼지를 도축하는 데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할까. 그러나 남자는 구태여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했다. 개돼지를 도축하는 작업을 스스로 인간을 학살하는 악행으로 끌어올렸다. 둘 사이에는 아득한 간극이 놓여 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죄악을 자처하는가. 그것은 내가 남자에게 질문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위대한 존재이시여.”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어른들은 나를 창녀로 대했다.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열 살의 여자애를 범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라느니 '우리 덕분에 네가 살았다'라느니 변명해댔지만, 진실이란 그들이 소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자기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없는 인간이리라. 모든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는 일선을 긋는 자이리라. “……고개를.” 남자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라.”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로 눈을 마주쳤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엄습했다. 어느 겨울날, 나는 한 명의 마왕을 만났고――. 잿빛으로 얼룩진 삶에서 처음으로 나의 동족을 만났다.   00441 DAISY =========================================================================                        * * * 아무래도, 남자는 나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남자와 만난 지 이틀 만에 그걸 깨달았다. 싫어하는 척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남자는 나를 꺼려하며 피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마치 전염병이라도 옮을 것처럼.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자만하지는 않지만 난 꽤 귀여운 편이라고 생각했다. 열 살에 불과했지만 바로 그 열 살짜리의 외양에 넘어가서 마을 어른들이 집단으로 괴롭혔을 정도다. 이때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남자가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므로――그럴 수밖에 없었다――남자의 행위는 간단히 말해서 불가사의했다. 봐라. 남자가 또 나를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하아.” 하고 한숨을 더 깊이 내쉬었다. 가끔씩은 한숨을 내쉬는 대신에 “분명히 후회할 거야”라든지 “잭 올란드도 있었고”라든지 “나는 천하의 멍텅구리다……”라든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쩐지 화가 났다. 남자는 결국에 내 요청을 들어주어서 마을사람들을 살려주었다. 솔직히 나에게 마을사람들은 죽든지 말든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부모님이랑 루크는 소중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앞의 남자였다. 남자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자기가 악행을 저질렀으면 절대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도 않았고, 상대방을 필요 이상으로 무시하지도 않았다. 올곧게. 똑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남자였다. 나는 처음으로 동족을 만났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두근거렸는데, 남자는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날 구해준 것을 오히려 절실히 후회하는 것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후회할 거라면 구해주지 말고, 구해주었다면 후회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남자는 후회하면서도 구해주었다. 이상한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아가야.” “제 이름은 데이지입니다.” “그냥 순순하게 죽어주면 안 되겠느냐?” 정정하겠다. 남자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거렸다. “예?” “생각해보거라.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살아간다는 건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다. 루크와 너만 자살해주면 나머지 마을사람들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마. 네 부모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 어떠냐.” 남자는 나한테 자살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더없이 진지하게. 이때부터 남자의 인상은 '내 동족'에서 '조금 뇌수가 맛이 간 동족'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저리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것일까. “만약 제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우선 제 손으로 루크를 죽이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을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주십시오. 제 입장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바뀌지 않겠지.” 남자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물에 푹 젖은 강아지 같아서 귀여웠다. “하아. 왜 세상에 네 같은 별종이 존재해서 나를 또 괴롭히는고. 내 삶이란 참으로 저주받았구나. 이제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 요컨대 남자는 나와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동족과 조우했다는 생각에 두근거린 반면, 남자는 동족을 만나서 끔찍하다고 절망했다. 이런 태도에 나는 적잖게 실망했다.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여버린 느낌에 가까웠다. 결국 나도 퉁명스러운 태도를 계속해서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수술. 노예각인을 새기는 수술은 정말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마취제를 잔뜩 먹여서 고통이 완화되었다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아픔이 생살을 찢어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는――이제 겨우 열 살이 된 꼬마 여자애가 정말 자기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며 진심으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나는 한낱 초라한 화전민에 불과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허약한 몸뚱어리.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남자를 위협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남자는 나를 동급으로 취급했다. 단순히 동류일 뿐만 아니라 동급으로.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남자는 자기 자신을 쓰레기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나한테 무한한 재능이 숨겨져 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정반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쓰레기라고 생각했고, 남자는 자기야말로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내 쪽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엇갈려서 상대방과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달을 리는 없었고. 나는 노예각인 수술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남자에게 ‘죽여버리겠습니다’라든지 용서하지 않겠다든지, 아주 약간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솔직히 그 정도 불만은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생살로 찢어졌다가 붙었는데 당연하지 않을까. 불만스러운 눈길로 남자를 바라보자니, 남자가 말했다. “너는 일단 내 양녀로 되어 있다. 필요할 때는 아버님이라고 불러라. 기본적으로 도시나 마을에 갈 때, 주변에 낯선 인간이 있을 때 아버님이라 부르면 된다.” 그렇다. 아버님이었다. 나는 단탈리안이라는 남자를 그때부터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동류였지만 역설적으로 동류였기에, 상대방이 나 자신을 정반대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부녀가 되었다. * * * 언제 아버님이 나를 범할까 기다리던 나날이 이어졌다. 나를 이상하다고 여기면 곤란했다. 자그마치 여덟 살 때부터 남자들에게 노리개로 쓰였다. 설령 내가 세상의 모든 남자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할지라도 이쪽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내 몸에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는 첫 번째 남자였다. 혹시 고자인 것일까? “아흥, 앗, 하읏, 전하! 조금 더! 조금 더 거칠게 다뤄주세요!” “하하하. 역겨운 변태 돼지 같으니라고. 어디 돼지처럼 울어보거라!” “꾸울. 꿀, 꿀, 흐으윽!” 아니었다. 아버님이 제레미 스승과 미친 듯이 성교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이후, 아버님-고자설은 전격적으로 폐지되었다. 고자는커녕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어느 남자보다도 왕성한 성욕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어른인 여자에게만 흥분을 느끼는 체질일까? “으응, 단탈리안, 나, 더 이상 못하니까……하으읏! 이제, 몸이 버티지 못하는데……!” “제발 용서해주세요 주인님, 이라고 말하면 그만두지 못할 것도 없지. 자아. 어서 말해봐. 무릎을 꿇고 개처럼 빌어보라고.” “주인님……흐아앙, 주인님, 제발 천박한 노예를 용서해주세요…….” 아니었다. 아버님은 도리어 어린애 체격을 좋아하는 듯했다. 제레미 스승과 성교할 때보다 바르바토스와 교접할 때 훨씬 더 왕성하게, 훨씬 더 즐겁게 놀았다. 가끔씩 바르바토스가 마왕성에 놀러오면 이틀은 가뿐하게 그 짓을 하면서 소모했으니까. 나는 아버님-누님파설을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는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날, 나는 진지하게 거울을 바라보았다. 객관적으로 내 외모를 평가하기 위해서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나 바르바토스, 제레미 스승, 파이몬, 시트리 등등, 아버님의 온갖 기라성과 같은 애인들을 떠올리면서 찬찬히 비교해보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이쁘다. 자만심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 흑발은 밤하늘보다 아름다웠고, 새하얀 살결은 살짝 건드려도 미끄러질 것처럼 매끈했고, 두 눈동자는 흑요석보다 깊이 있게 매혹적이었다. 단언하건대 나는 나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 그런데 왜 범하지 않는 걸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허구한 날 마왕성을 돌아다니면서 “주군은 하여간 너무 많이 해댄다!”, “내 몸이 남아날 틈이 없다!” 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했지만, 솔직히 배부른 투정으로만 보였다. 전쟁질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금발녀 주제에. 나는 예전부터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싫었다. 이 여자는 조금 분수를 몰랐다. 신하들이나 영지민들이나 마치 군무상서가 아버님의 아내인 것처럼 대접했다. 군무상서도 그런 착각이 싫지는 않은 듯이 흐흥, 하고 콧대를 높이며 돌아다녔다. 나보다 머리도 나쁜 주제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고작해야 여섯 개 국어밖에 몰랐다. 반면에 나는 아버님의 양녀가 된 지 2년 만에 여덟 개 국어를 익혔다. 두뇌 수준에서 군무상서는 내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군무상서는 마치 자기가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인 것처럼 우쭐거렸다. 하긴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나는 너그러이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 여자의 두개골에 위생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무상서가 마왕성을 거닐다가 아버님에게 덮쳐져서 세 시간 정도 성교하면――매우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그 다음에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지하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님이 싸지른 정액을 마왕성 복도에 뚝뚝 떨어트리면서. 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광경일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한 마디로 수치심이란 걸 모르는 여자로서, 어떤 날에는 “어차피 주군이 찢어버릴 것인데 귀찮게 옷을 입고 다닐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고 아예 알몸으로 생활했다. 조금 제정신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어지럽힌 복도를 치우는 것은 언제나 시녀장인 내 몫이었다. 그녀가 걸어가고 나면 나는 재빠르게 청소도구를 손에 쥐어들고 정액을 청소했다. 이게 얼마나 정신 나간 작업인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공감할 수 없겠지.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흘린 정액을 싹 다 양동이에 모아서 언젠가 면상에 쏟아버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버님이 내게 내린 명령 때문에 불가능했다. 나는 아버님을 비롯해서 아버님의 연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명령만 아니었다면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정액으로 목욕을 해도 벌써 수백 번은 했을 거다. “시녀장. 오늘따라 손이 둔하군요.” 아버님의 집무실을 청소하고 있자니,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청소도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즉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와 격을 달리하는 인물이었다. 국무상서는 아버님의 신뢰를 듬뿍 독차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든 것은 두 가지, 즉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단 한 번도 잘난 척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버님의 총애를 받을 만큼 실제로도 유능하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그녀는 아버님과 성교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딱히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데이지 양은 단탈리안 님의 딸입니다. 고민이 있다면 저에게 털어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국무상서는 거의 항상 아버님을 '단탈리안 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호칭이 허락된 사람도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뿐이었다. 다른 신하들은 '주군', '전하', '마왕님'이라는 호칭을 주로 사용했다. 반면에 국무상서는 아버님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건 조금 분수를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 역시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로 했다. 국무상서는 그래도 군무상서에 비하면 성인군자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사실 특별하기는커녕 약간 불쌍한 면이 있는 호칭이니까. “예. 고민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왜 아버님은 저를 취하지 않는 것일까요?” “…….”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이 아이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일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실례였다.   00442 DAISY =========================================================================                        “아버님은 변태이지 않습니까. 외양에 상관없이 여자라면 누구나 취해버리는 변태입니다.” “단탈리안 님의 성욕이 다소 지나치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왜 저는 예외로 취급하시는 것인지요?”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데이지 양은 양녀이긴 하나 딸입니다. 아비가 딸을 취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국무상서는 아버님께서 그런 금기에 아랑곳하실 인물이라고 생각하나요?” “절대로 아니지요.” 즉답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적어도 아버님의 변태성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아직 데이지 양이 어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왕 바르바토스는 외관 연령이 저보다 적습니다만.” “그렇지요…….”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아버님의 명예를 지키려고 한 것 같았지만, 어떤 수단을 동원할지라도 아버님의 성욕을 부정하기란 마치 태양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한 모양이었다. 국무상서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단탈리안 님께서는 데이지 양을 책임지기 싫어하고 계실 것입니다.” “책임, 입니까?” “단탈리안 님께서는 일단 한번 몸을 섞은 여인은 어떤 의미로든 간에 책임을 짊어지려고 합니다. 바르바토스 님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두 분 모두 자유롭게 연애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보면 솔직히 소꿉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하지만 데이지 양. 단탈리안 님께서는 이미 수십만 명의 목숨을 등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겠지요?” “예.” “단탈리안 님의 어깨는 이미 충분히 무겁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주는 관계는 그분께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더더욱 무겁게 만드는 요소에 불과합니다. 그분께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정반대.”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쌍방이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자유롭고도 대등하게 서 있는 관계. 그뿐입니다. 오로지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 앞에서만 단탈리안 님께서는 본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으시겠지요.” “…….” 내가 멍하게 국무상서의 말을 들었다. 마치 번개가 내리친 기분이었다. 왜 여태까지 그처럼 간단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아버님은 수십 만 명을 학살한 악인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악인이라고 뚜렷하게 인식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악인에게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해봤자 괴로운 고문밖에 되지 않았다.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노라고. 나 따위를 사랑해봤자 민폐밖에 되지 않는다고 자책하겠지. 세간의 사랑이란 아버님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따름이었다. 도리어 아버님께 필요한 것은 '당신은 악합니다'라고 똑바로 인정해줄 사람. 당신은 증오를 받아 마땅하므로, 내가 대신해서 당신을 증오하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해줄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버님께 필요했다! 내가 깨달음에 가만히 전율하고 있는 사이,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데이지 양.” “제가……?” “단탈리안 님의 동반자가 되겠다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본래 저는 반인반마에다 비천한 상인으로서, 도저히 단탈리안 님께 어울릴 만한 종자가 아닙니다. 지금도 매일마다 필사적으로 그분의 곁에 있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무상서는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밤 늦게까지 업무를 돌보았다. 마왕성과 영지의 모든 서류가 국무상서에 의해 해결되었다. 나는 그런 국무상서가 유능하다며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무상서는 자기 자신을 유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무능한 상인 출신의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업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단탈리안 님의 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과분하게도 국상의 직책을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 “당신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단탈리안 님께 동급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제가 각고의 노력을 쏟아내서 겨우 얻어낸 자리를, 데이지 양.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했습니다.” 국무상서의 눈동자가 어둡게 윤기가 났다. 질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질책.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처럼 과분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느냐고, 조용히 질책하고 있었다. “단탈리안 님께 부끄러운 존재가 되지 마십시오.” “…….” “이건 제 경고입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당신을 예외적인 인간으로 여기고 계신다면 부디 그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단탈리안 님의 곁을 떠나세요.”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서 국무상서를 배웅했다. 그녀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만약 국무상서가 충고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천치 벌거숭이마냥 아버님을 오해했겠지. 그녀가 집무실에 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나는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날부터 내 인생의 목적은 정해졌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아버님께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맹목은 아버님의 목을 조를 뿐이었다. 그분께 진정으로 절실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증인이요 목격자였다. 오로지 그래야만 아버님의 삶을 모욕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진실로 쓰레기 같은 분이군요.” “딱 아버님이 떠올릴 법한 계략입니다. 썩은 내가 진동해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아버님께서 방금 학살한 파리시오룸 시민들에게 갑자기 미안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우습군요. 그 따위 죄책감으로 아버님의 죄악을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비웃는다. 조소한다. 아버님께 필요한 증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때마다 아버님은 분노에 폭발해서 내게 채찍을 때리거나 고문을 가했다. 그렇게 가슴속에 맺힌 진노가 풀리면 또 며칠 동안은 아버님의 정신이 안정되었다. 이것 역시 내가 나 자신에게 내려준 역할이었다. “잭……어머니……아아, 저는……저는…….” 아버님은 잠에 빠져드는 밤마다 집요하게 악몽에 시달렸다. 그때면 내가 아버님을 무릎에 뉘여서 조그맣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무엇이든 평범한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는데, 하다못해 노래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내가 천천히 노래를 속삭이면 아버님도 신음하다가 곧잘 숙면에 접어들었다. 내가 아버님에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형벌을 받습니다.” “…….” “아무도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제가 하겠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눈을 감으세요.” 나는 잠에 빠져든 아버님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아버님께서는 '마왕에게 숙면은 별로 필요없다'라며 자기가 잠을 즐기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악몽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 나흘에 한 번씩만 잠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랑 따위는 얼마든지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넘겨주겠다. 바르바토스든, 파이몬이든, 시트리든, 얼마든지 아버님을 사랑하도록 내버려두겠다. 당신들은 결국에는 아버님의 목을 조르리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마음껏 사랑에 도취해라. 그렇게 사이 좋게 파멸하면 좋다. 그러나 증오만큼은. 아버님을 증오하는 역할만큼은 내가 대신한다. 당신들은 아버님이 이십 만 명을 학살했음에도 '그래도 상관없다' 하고 아버님을 사랑한다. 바로 그 '그래도'가 얼마나 아버님을 상처 입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여자들. 오직 나만이 아버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망각은 도피. 위안은 변명. 도취는 죄악. 이 한없이 윤리적인 정식들이 아버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너희는 모른다.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님과 정신적으로 똑같은 핏줄을 타고난 내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아버님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문제는, 아버님이 연기의 달인이라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배역을 수행하다가는 간단히 간파당하고 말겠지. 그렇다면 아버님을 속이기 이전에 나 자신부터 완벽하게 속일 필요가 있었다. 매일 새벽,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아버님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쓰레기이다. 나는 그런 쓰레기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네 년이 안 된다는 거다, 머저리 같으니!” “멍청하기는. 배운 것이 책밖에 없어서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 것도 우둔하기 짝이 없구나.” “위선자 녀석아. 네 오래비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더냐!” 나는 연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내 눈앞에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배우가 표본으로서 있었다. 아버님을 보면서 연기에 대해 배우자, 나는 금세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버님이 내게 분노를 토해내면 토해낼수록, 고문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나는 내가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버님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연기를 했다. 반면에 나는 딱 두 사람. 아버님과 나 자신에 대해서만 연기하면 그만이었다. 아니――연기라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아버님을 증오한다. 연기가 아니다.――나는 이것이 연기임을 자각하면 안 되었다. “데이지. 이 자의 최후를 잘 봐두어라. 우리 같은 부류는 절대로 맞이할 수 없는 죽음이다. 똑똑히 기억에 새겨두도록.” 예, 아버님. 저는 세상에서 오로지 아버님 한 명을 위해 무대에 올라선 배우. 당신만을 위해서 연기하고, 당신만을 위해서 노래합니다. 이 세상은 당신에게 잔혹함만을 선물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선물을 거부하지 않았고, 이것은 자신의 죄업이라면서 스스로 멍에를 짊어졌습니다. 세계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니. 제가 아버님께 저 자신의 영혼을 드립니다. 비록 당신께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당신을 이해하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제가 간직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태어난 이유. 저의 생명. 저의 모든 것. 단탈리안. 저의 아버지. 단탈리안. 당신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 * * ――가장 처음으로 균열을 눈치 챈 것은, 아마도 나였다. “솔직하게 토로해라. 네놈이 저질렀는가.” 바타비아 총독 관저에서 아버님이 쓰러졌을 때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다짜고짜 나를 저택의 구석에 몰아세웠다. 군무상서는 얼굴이 악귀처럼 흉흉해져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무슨 소리인지요, 군무상서 각하.” “주군 말이다. 네놈이 주군에게 들어가는 약물에도 독을 탄 것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주군이 며칠이 지나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게야!” 이 멍청한 여자는 무슨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것일까. 나는 원천적으로 아버님께 해를 끼치지 못했다. 이게 주관적인 판단이라서 더욱 까다로웠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아, 이건 아버님께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 같다'라고 느끼면 곧바로 그 행위를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배개를 아버님한테 던지는 정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아버님께 해가 가지 않을 거다'라고 판단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행위가 허용되었다. 애당초, 내가 아버님에게 위해를 가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는 아버님의 시녀입니다. 또한 그에 앞서서 아버님께 종속된 노예이기도 합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무슨 수단으로 아버님에게 위해를 가하겠습니까?” “…….”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초록빛 눈동자가 차갑게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 말, 진심이겠지?” “저를 신뢰하지 못하시겠다면 아버님을 신뢰하십시오. 아버님의 계책은 언제나 완벽했습니다. 설마 저 같은 시녀에게 당할 정도로 아버님께서 무방비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모쪼록 당신의 머리통에 뇌가 있다면 생각이란 걸 해보기를 바랐다. 군무상서는 정말이지 외모가 그럭저럭 뛰어난 것과 군략에 재능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쓰잘데기가 하나도 없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중책을 맡기면 왕국 하나가 거덜날 것이 분명했다. 아버님도 무슨 생각이신 건지. “저는 아버님의 침대를 청소해야 하므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군무상서의 팔을 툭, 하고 거둬 쳤다. 그걸로 간단하게 군무상서의 포위를 풀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슬쩍 숙인 다음에 옆으로 빠져 걸어나갔다. 그녀가 끝까지 나를 노려보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그것이 모든 붕괴의 서곡이었다.   00443 DAISY =========================================================================                        * * * 아버님이 병상에 눕고 열흘쯤 흘렀을까. “흐악, 크아아아아악!” “조용히 하십시오. 핏물이 옷에 튀기지 않습니까.” 나는 암스텔에서 저택을 하나 빌려 포로들을 고문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각국의 첩자들이 몰려들어서 저택을 감시했다. 그중에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간자들이 특히나 악질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빼내려고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번에도 엘리자베트 통령이라는 여자가 보낸 것이겠지. 그 여자는 아버님께서 유독 신경 쓰시는 여인이었다. 소문으로 듣자니 상당히 미인이라고 했다. 이름부터 조금 재수 없는 여자였다. 이건 편견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엘리자베트라는 이름이 왠지 모르게 싫었다. “크하아아악!” “아.” 고문을 하는 와중에 그만 강도를 잘못 조절했다. 포로가 실신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꼬챙이에 힘을 줘서 생살을 과도하게 찢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간만 조금 때어내려고 했는데 실수로 심장 부근을 건드렸습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순서대로 고문하겠습니다.” “……프……흐픕…….” 포로는 말이 없이 개거품을 물었다. 이래서 고문 도중에는 딴 생각에 잠기면 위험했다. 효율적으로 느긋하게 가지고 가야 할 자극을 순식간에 몰아넣고 말았다. 만약 평범한 포로였다면 즉사했겠지. 신체가 튼튼한 기사라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합스부르크의 통령은 틈만 나면 암살자들을 파견하는 것일까요. 기사 씨. 혹시 그 여자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로 아버님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불가사의하군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일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 “혹시 그 여자는 자신에게 아버님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툭, 하고 손이 조금 미끄러졌다. 그러자 기절해 있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면서 목청이 찢어지라 비명을 질러댔다. “히끅, 하, 크하아아아악!” “아.” 또 실수했다. 남자는 회생불가능한 상처를 입어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손상되면 제아무리 기사라 해도 회복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는 내 부주의한 실수를 사과하는 의미로 이쯤에서 고문을 중단했다. 즉, 단검을 꺼내들어서 포로의 목에 쑤셔 박았다. 내가 고개를 재차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크릅, 크흐프륵……흑…….” 기사는 몇 번 피거품을 토해내더니 이윽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나는 물양동이에 손을 담가서 핏물을 씻어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경련이 멈추지 않았는데, 의외로 명줄이 길다 싶어서 목에 박힌 단검을 옆으로 비틀어주었다. 그제서야 남자는 완전히 사망했다. 나는 고문도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때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오른손으로 잡은 다음, 문을 노려보았다. “누구입니까.” “저입니다, 시녀장 님. 이바르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단검을 품안으로 갈무리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내 직속 부하로서 약간 일처리가 어수룩했지만 무슨 일에든 의욕이 넘치는 후배였다. 하지만 가끔씩 아버님과 침실을 같이 쓴다는 점이 무척이나 분수에 어긋났다. 그래서 이바르가 막 시녀로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짓궂게 장난을 쳐주었다. “저는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바르가 지은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건 조금 훌륭했다. 지금도 그 얼굴을 떠올리면 아무런 반찬 없이도 딱딱한 빵을 먹을 자신이 있었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예, 실례하겠습니다.” 이바르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흠칫 표정이 굳어졌다. 방안에는 기사의 십이지장이 구불구불하게 널려 있었다. 내장이 풍기는 냄새 탓에 이바르는 움츠러든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되었는데 정말 어수룩한 아이였다. “시녀장 님……그, 몸에 피가…….”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갈아 입으면 됩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왔습니까? 제 허가 없이는 고문실에 들리지 말 것을 요구했을 텐데요.” “주군 전하께서 상태가 위독해지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도 나는 어느 상황에서건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눈썹이 살짝 매서워진 것 이외에는 얼굴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다소 급해진 어조가 튀어나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위독하시다는 것은.” “소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마법사와 사제를 급히 불렀습니다. 시녀장께서도 도움을 더해주실까 싶어서 제가 이곳에 왔습니다.” “훌륭합니다.” 누가 판단했는지 몰라도 적절한 지시였다. 나는 의술에 문외한이었지만 각종 마취제와 환각제에 대해서 통달했다. 만일 아버님이 모종의 수술을 거쳐야만 할 경우, 나는 수술이 완벽히 편안하게 이루어질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가 방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군요. 먼저 옷을 갈아 입고 즉시 저택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이바르 양, 혹시 모르니 제 방에서 약품 가방을 갖고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마취제가…….”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나는 눈앞이 핑 돌면서 무릎이 꺾였다. 뒤통수가 욱씬거리는 것과 함께 급격하게 시야가 하얘졌다. 내가 이빨을 깨물고 허벅지에 숨겨둔 단검에 손을 가져간 순간, 다시 한 번 무언가가 내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아……?” 나는 본능적으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렇지만 손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무너졌다. 얼굴부터 방바닥에 쓰러지면서 눈앞이 완전히 아득해졌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조차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마지막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이 사실을 아버님한테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배신자. 누가 사주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버님의 왕성에 숨어둔 심장충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이바르를 경계해야만 했다. 아버님께서 신뢰하셨기에 나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이바르를 믿어버렸다. 만약 이바르가 아버님을 속일 만큼 교활한 첩자라면. 그녀를 마지막으로 의심할 수 있는 인물은 나밖에 없었는데도. “……아버, 님…….” 내 시야가 암전되었다. 이 다음에 내가 눈을 뜬 곳은 마왕성의 지하감옥이었다. 나는 벽면에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시험 삼아서 팔을 움직여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눈앞에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서 있었다. “이제야 일어났군.” 군무상서가 차갑게 뇌까렸다. 나는 한눈에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와 저주로 일그러진 것을 알아차렸다. 흉흉한 기색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여자를 뒤덮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배신자.” “군무상서……?” 내가 숨을 토했다. 입안이 비쩍 말라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퇴색해서 발음되었다. 어떤 딱딱한 것이 내 뒤통수를 덮고 있었는데, 냄새로 보아 피가 딱지로 굳은 모양이었다. 이바르뿐만이 아니라 군무상서까지 배신자라는 얘기일까. 하지만,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아버님의 애완용 육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버님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고고할 터. 어째서……. 내가 의문을 담아서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본녀는 지금부터 그대를 심문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대가 포로들을 매일마다 심문했듯이. 그대에게는 무척 익숙한 작업이겠지.” “심문…….”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멍하게 되풀이했다. 심문이라니? 나를? 무엇 때문에 날 잡아들여서 심문하는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의 앞에서는 그녀가 절대로 짓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여자는 아버님을 대할 때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태도가 천차만별로 바뀌었다. 그건 재수 없는 여자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하필 주군께서는 바타비아의 총독 관저에서 암살당하실 뻔했다. 여기까지는 주군의 계획대로 흘러갔지. 그러나 어째서 주군은 한참이 지나서 의식을 차린 것인가? 본래 극본대로라면 주군께선 닷새 만에 정신을 되찾으셔야 했다.” “…….” 입안이 갈증에 시달렸다. 대체 나는 며칠이나 기절한 것일까. 아버님께서 머무르시는 저택은 지금 며칠씩이나 무방비로 노출된 것일까. 여기 있어서는 안 되었다. 내가 경비를 서지 않으면 누군가가 침입할지도 몰랐다. 위험했다. 기사 나부랭이 따위는 감히 들어갈 수 없도록 철저히 함정들을 만들어두었지만, 마왕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돌파할 가능성이 있었다. 며칠이 지났는가. 심장이 촛불에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마왕 파이몬은 예전부터 주군을 적대해왔다. 그녀가 배후에서 통치하는 바타비아의 암스텔에서 사건이 일어났으며, 바로 그곳에서 주군께선 예정보다 훨씬 더 길게 가사 상태에 놓였다.” “무슨 소리를……당장 저를 풀어주십시오, 군무상서……저택의 경비에 차질이…….” “네놈이 파이몬과 작당을 쳤다면 모든 의문점이 해소된다.” 이 머저리 금발녀가. 고작 그딴 의문점을 풀겠답시고 이바르와 함께 작당을 치다니. 그러고보니 이바르도 금발이었다. 나는 이 시간부로 세상의 모든 금발 여자를 증오하기로 다짐했다. 그들의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는 까닭은 머리통에서 뇌수가 흘러나와 무지개처럼 빛나기 때문이었다. “헛소리는 작작 하십시오. 어서 저를 풀어주세요.” 내가 이빨을 으득 물었다. 잇몸이 뿌리부터 고통스러웠다. “저를 가둬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두개골에 정액밖에 들이차지 않은 대가리로는 유추할 수 없는 것입니까. 아버님은 현재 열국의 첩자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택의 경비는 완벽하다. 본녀가 모두 방비해두었으니.” “하.” 내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경비를 했으니 완벽하다고? 아무래도 군무상서는 자신이야말로 아버님의 가신들 중에서 가장 허약하고 나약한 아치의 윗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슬슬 당신이 전쟁터와 규방이 아닌 장소에서는 발톱에 낀 때만큼도 쓸모가 없음을 알아채면 좋으련만, 이 여자는 언제나 분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내가 아버님에게 배운 것이 연기술뿐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했다. 나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요컨대 아버님 다음으로 사람을 비아냥거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거 참 믿음직스럽군요. 어련히 아버님의 성노예께서 잘 처리하셨을까요. 하지만 군무상서. 저택의 경비를 단단히 하기 전에 먼저 군무상서의 아랫입부터 제대로 단속하는 것이 어떨까요? 군무상서께서 마왕성 복도에 흘리신 정액만으로도 벌써 능히 호수를 두 곳은 팔 수…….” 차악, 하고 군무상서가 내 뺨을 후려쳤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모기가 우연히 내 얼굴을 스친 것이었을까. 내가 고개를 꺾은 채, 눈만 슬쩍 돌려서 군무상서를 흘겨보았다. 이 각도가 상대방을 도발하는 데 제일 적절했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성기가 헐렁한 걸레짝이 되어버려서 슬프실 텐데, 소녀가 미처 배려하지 못하고 직언을 올렸습니다. 단지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군무상서를 취할 때마다 허공에 들이박는 느낌에 시달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어디 계속해서 떠들어보거라.” “허면 윗입으로 아버님을 만족시켜드릴 수밖에 없을 터이거늘, 얼마나 그쪽 실력이 출중하기에 아버님이 아직도 군무상서를 찾으시는 것인지요? 경탄스럽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하더니 군무상서께서는 걸레짝 성기를 실로 잇몸으로 대신하시는군요. 모쪼록 기회가 된다면 군무상서께 한수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군무상서가 채찍을 쥐어들었다. 제 딴에는 위협을 가하려는 모양새였다. 안타깝게도 군무상서는 평생 채찍이란 물건을 다루어본 적 없는 것이 분명했다. 채찍을 너무 짧게 잡았다. 저러다가는 십중팔구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겠지. “본녀가 요구하는 것은 엄정한 진실이다.” “아하. 무슨 진실입니까?” “네놈이 마왕 파이몬과 협력해서 주군의 약에다 독을 탔느냐.”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고해라.” “군무상서의 잇몸은 아직 건강하십니까?” 직후, 채찍이 내 살결을 가차 없이 찢었다.   00444 DAISY =========================================================================                        그날부터 고문이 이어졌다. 완전히 초보자라서 그런 것일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고문은 다른 의미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실토해라! 네놈이 주군께 위해를 가하고자 함을 내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더냐!” 때리고, 내려치고, 후려갈기고. 도대체가 강약을 조절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채찍질이 내 살갗을 찢어발길 때마다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지만, 사실은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게다가 고문의 기본은 상대방을 죽지 않을 정도로 살려두는 것이었는데, 군무상서는 아예 음식과 물조차 주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고블린 집사가 몰래 약간의 스프와 식수를 전달해주는 게 전부였다. 아마도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가 지령을 내린 것일까. 이해했다.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는 이번 기회에 궁내부(宮內府)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언젠가 아버님이 정신을 차리면 군무상서의 만행을 알게 된다. 그때까지 여왕처럼 방만하게 굴었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틀림없이 철퇴를 내려맞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고문을 담담하게 견디는 것 또한 아버님을 위한 일. 내가 아주 잠시만 희생하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권위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내궁의 권력은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에게 집중된다. 국무상서라면 믿음직스럽다. 그녀는 유일무이하게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아주 약간 덜하지만 아무튼 충분히 아버님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흐.” 무심코 실소가 흘러나왔다. 군무상서는 정말로 멍청한 여자다. 내가 그녀를 비웃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군무상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아, 당신에게는 딱 그 정도 표정이 어울렸다. 앞으로도 쭉 흉악한 악귀마냥 주름살을 구기고 다녀주기를 바랐다. “하. 네놈, 지금 본녀를 비웃은 것이냐?” “생각해보니……군무상서도 꽤 늙었군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군무상서를 쳐다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온몸에 기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구겨지는 군무상서의 얼굴 표정을 보자니, 애써 턱을 들어올린 보람이 있었다. “스물셋……아니, 벌써 스물네 살이 되었나요? 이제 몇 년만 더 있으면 여자로서의 인생도 막바지에 접어들겠군요. 그때 가서는 아버님께서도 당신을 찾지 않으시겠지요. 외로이 독수공방하며 밤마다 자기 손으로 헐렁한 성기를 위로하실 군무상서를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그만 동정심이…….” 채찍이 내 가슴을 후려쳤다. 이래서 늙은 아줌마는 곤란했다. 농담을 몰랐다. 아마도 농담이 진담처럼 들리기 때문이겠지. 이해한다.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군무상서의 고문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군무상서가 지하감옥에 들어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매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만일 아버님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군무상서가 이곳에 오지 못할 테니까. 군무상서가 한가하게 감옥에나 들락거린다는 얘기는, 달리 말해, 아버님이 무사하시다는 것을 뜻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군무상서가 감옥의 철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안도하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비웃음으로 착각하고 군무상서는 더욱 가열차게 매질을 가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약속된 결말이 찾아왔다. “감히, 감히 군부의 수장이 내궁부의 일원을 사적으로 처벌하다니!” 넝마짝이 되어버린 내 몸을 보고, 아버님은 일찍이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하게 진노했다. “당장 가신단을 여기로 불러모아!” 나는 도중에 기절해서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군무상서에게 손수 채찍질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무상서까지 처벌했다. 즉――아버님에게는 역시나 내가 제일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아니다. 라피스 라줄리도 아니다. 내가, 아버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설마 아버님 스스로 형벌을 짊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졌다. 나는 한동안 아버님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는데, 자칫하다 내 연기가 깨질까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설픈 탓이 아니리라. 아버님이 너무 고귀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 모습을 봐버리면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이 도리어 어렵지 않은가. 그래. 무심결에 일곱 번은……. 상스럽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권위는 대추락. 아버님께서 군무상서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게 명백해졌으므로, 우리 두 사람의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군무상서는 예전과 달리 마왕성 복도에서 나를 마주쳐도 아무런 말을 건네지 못했다. 꼭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가던 길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툭, 하고 말했다. “주름살이 하나 늘어나셨군요, 군무상서.” “…….” “아니. 백의종군을 하시는 도중이니 군무상서는 아닌지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 양.” 군무상서가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제까짓 것이 노려보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일까. 나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시선을 마주해주었다. “슬슬 본격적으로 피부 관리를 받으셔야 하지 않을지요. 제가 솜씨 좋은 안마사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쓸데없는, 배려입니다, 시녀장 님.”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말을 뚝뚝 끊어서 대답한 다음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백의종군하는 자기 신세를 알았는지 나한테 존댓말을 썼다. 훌륭했다. 앞으로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대화를 걸어줘야겠다. 내궁부의 신경전에서 이쪽이 완전무결하게 승리했다. 1승 0패. 나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이 흘렀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아버님이 제출한 안건이 부결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7표에서 자그마치 4표가 노예제 해방안을 거부함으로써, 아버님이 야심차게 준비한 극본은 엉뚱하게 좌초하고 말았다. 게다가 안건에 반대한 마왕들에는 바르바토스가 끼어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설마 마왕 바르바토스는 아버님과 대립한 속셈일까? 건방지게도. 분수를 모르는 짓거리를 저질러주었다. “…….” 나는 차분하게 아버님의 침실에서 대기했다. 아마도 아버님은 바르바토스와 독대를 나누는 중이겠지. 괜찮았다. 바르바토스가 무슨 변덕을 부렸는지 모르겠어도 아버님께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실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은 한 시간 만에 침실로 돌아왔다. 복도가 어두워서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걸음 소리가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버님은 왼발을 약간 저는 습관이 있어서 발걸음의 박자가 특이했다.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어서……?” 돌아오세요, 하고 말하려다가 내 말문이 막혔다. 나는 허리를 들어올리면서 아버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충격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아버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나는 이때 처음으로 아버님이 엉망진창으로 울부짖는 광경을 접했다. 아버님은 나를 지나쳐서 순식간에 침실로 들어가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물건을 깨부수었다. 나는 머리가 멍해져서 다만 아버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얼굴을 내비추지 않는 분이. 사방에 눈물을 흩뿌리면서 괴롭다는 듯이 절규하고 있었다. 어떤, 찢어죽여도 마땅찮을 년이. 감히, 나의 아버님한테 상처를. 머릿속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나는 분노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냉정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정황상 바르바토스가 아버님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분명했다. 단지 거부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버님의 소중한 무언가를 망가트린 게 틀림없었다. 일단 아버님을 진정시켰다. 아버님이 울부짖는 소리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했다. 역시나 바르바토스가 아버님을 배신했다. 자신을 선택할 것인지 파이몬을 선택할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며 아버님을 몰아세운 것이었다. 쯧. 내가 작게 혀를 찼다. 몸집이 작은 만큼 두뇌도 자그마한 그 꼬맹이가 언젠가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궁내에서 여왕처럼 행세하는 여자라면, 바르바토스는 궁 밖에서 아버님의 부인인 마냥 주제도 모르고 콧대를 세우는 여자였다. 더 가관스러운 것은 두 사람이 애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재수 없는 여자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마력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아버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부디 죽을 때도 동반자살을 해주었으면 한다. ……아니, 잠깐만. 바르바토스는 왜 이 시점에서 아버님을 배신했을까?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왜 파이몬과 자신 둘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하라고 강요했을까. 바르바토스는 시건방진 애송이였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보다 아버님을 중요하게 다루는 측면이 있었다. 단순히 아버님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난장판을 벌였을 가능성은 적었다. 이대로 파이몬과 밀월관계를 이어나가면 아버님이 위험해진다……그렇게 판단했기에 억지를 부렸을 거다. 다시 말해, 최근 들어서 파이몬이 아버님을 위협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다는 얘기다……. “최근…….”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장 최근에 파이몬이 아버님을 위협한 것이 무엇이지? 잘 모르겠다. 기껏해야 반 년도 더 전에 공화주의 대표회의에서 아버님을 거스르려고 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바르바토스는 그때 파이몬이 암약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파이몬에 대한 정보를 바르바토스한테 넘겨주었다면……. “……!” 그때 내 머리에 한 명의 이름이 스쳤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상당히 높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이몬이 독살 사건――사실은 그런 사건이 존재하지도 않았건만――에 관여했다고 믿었다. 아버님이 비록 내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진심으로 승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즉,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이몬이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애인인 바르바토스한테 '파이몬을 조심하라' 하고 경고했을 수 있다! 이야기가 성립한다. 이러면 말이 된다. 바르바토스가 필요 이상으로 파이몬을 경계하고, 이번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아버님을 배신하면서까지 반대표를 던진 이유. 전부 설명된다. 또, 쓸데없는 짓을……! 나는 곧바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향했다. 합스부르크 황궁에서는 순간이동이 불가능하므로 궁성 바깥까지 달려가야만 했다. 나는 신분표를 제시한 다음, 순간이동소에서 즉시 마왕성으로 이동했다. 목표는 마왕성 지하 10층.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침실. 나는 문손잡이를 비틀어서 문짝째로 날려버렸다. 쿵, 하고 소리가 울렸다. 마침 침대에 누워 있던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갑작스럽게 들린 소음에 일어났다. 나는 단숨에 도약해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옷가슴을 쥐어잡았다. “군무상서.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십시오.” “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코웃음을 쳤다. 담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여자였다. 하지만 내 손에 심장이 뚫려도 여전히 담력이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잡아서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신음했다. 본래 아버님의 애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설령 애인일지라도 아버님께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되면, 나는 언제든지 명령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상대를 배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명백하게 아버님께 위해를 끼칠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다음,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목을 약하게 졸랐다. 우리 둘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드디어, 네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마왕 바르바토스에게 무슨 말을 건넨 것입니까. 마왕 파이몬에 관련해서 당신이 무언가를 경고했을 터입니다. 지금 당장, 저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싸늘하게 질문했다. “당신이 파이몬에 대해서 바르바토스한테 경고한 바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제 와서 안달복달하는 걸 보아하니 과연 찔리기는 찔리는 모양이구나. 천박한 배신자여.” 퉤, 하고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내 얼굴이 침을 뱉었다. 침이 내 눈밑에 적중해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서 확신을 얻었다. ――이 여자다. 이 여자가 모든 것을 어지럽혔다.   00445 DAISY =========================================================================                        “당신이…….” 내가 이빨을 꾹 물었다. 아마도 지금 내 얼굴은 험악하게 비틀렸겠지. 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목을 오른손으로 졸랐다. 군무상서가 괴로운 듯이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아직이었다. 아직 한참 부족했다. 아버님이 겪은 고통에 비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당장이라도 부러트리고 싶었다. “당신이, 아버님을…….” 그 순간이었다. 심장에 격통이 엄습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갑작스러운 고통으로 인해 손아귀에서 힘이 저절로 빠져나갔다. 숨이 트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커억, 컥, 거리면서 급하게 호흡을 내쉬었다. 내가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아, 으읏…….” 여전히 심장이 고통의 여진에 떨었다. 나는 오른쪽 손바닥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아버님의 노예각인이 내 행동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 여자를 죽일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죽어버리면 아버님은 반드시 절망한다. 세상을 저주해버리게 된다. 그런 사실을 내가 지나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미래가 아버님께 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여자를 살해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또한, 아버님께 절대로 말씀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저주할 테니까. 군무상서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온전히 책임을 뒤집어 쓸 테니까. 아. 아아, 아. “…….” 내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나는 생기를 잃어버린 시체처럼 군무상서의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군무상서가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뭐라고 외쳤는지 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가만히 내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나 파이몬,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이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이 마왕군의 세력 균형은 무너져버린다. 평원파-중립파-산악파. 이렇게 세 파벌로 이루어진 신생 마왕군 체제가 곧장 붕괴한다. 아버님의 권력은 바로 저 균형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죽이든 파이몬을 죽이든, 어찌되었든 간에 권력을 잃고 만다! 진퇴양난. “…….” 혀 끝에서 혈향이 느껴졌다. 거울을 바라보니 어느새 내 입가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빨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고 있었다. 한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십중팔구, 아버님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을 둘 다 처리하겠지. 그게 유일한 해답이다. 한 사람만 죽으면 마왕군의 권력을 산악파나 평원파가 독점하게 된다. 아무도 죽이지 않든가, 전부 죽이든가.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을 맹렬하게 적대하기 시작한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전부 죽는다. 아버님이 사랑하는 연인 두 사람이 모두 죽어버린다. “그건 안 돼.”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버님을 잘 안다. 만일 아버님이 두 연인을 살해해야만 한다면, 아버님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녀들을 죽일 게 분명했다. 당연했다. 아버님은 자신이 얼마나 거대한 악행을 저질렀는지 그 영혼에 새겨넣기 위해 일부러 살인을 감행할 것이다.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아버님이라고 해도――그만한 죄책감을 짊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안 된다. 아버님은 견디지 못하고 파멸할 것이다. 자기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만으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런 자가 연인들의 죽음까지 감당할 리 만무하다. 설령, 어찌저찌 견디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아버님에게는 인간성 따위가 남지 않으리라. 사실 여태까지 아버님이 망가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 연인들을 살해한다면, 그곳에 남는 것은 단지 아버님의 살가죽을 뒤집어쓴 인형……단지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일 뿐인 기계에 불과하다……. 그런 결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아버님이. 누구보다 고결한 아버님이 결국에는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서 무너진다고? 그것이 아버님이 추구해온 길의 종막이며――필연이라고? 결국에는 그런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고? 웃기지 마라. 나는 아버님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이 세계 전체와 아버님. 둘 중에 승리해야 마땅한 쪽은 단연 아버님이다. 도대체 세계가 무엇을 해주었는가? 도대체 세계 따위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아버님에게 고통을 던져준 것으로도 모잘라서 이제는 패배까지 선물할 속셈인가. 그딴 결말,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떻게 해야 아버님의 권좌를 지키는 동시에 아버님의 영혼까지 지킬 수 있을까. 고민해라, 데이지. 틀림없이 방법이 있을 거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만일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서열 제72위의 마왕이 서열 제1위의 마왕을 물리치는 것 정도겠지. 아버님은 이런 짓을 실제로 해내었다.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탈출구는 그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고민해라. 스물일곱 개의 계책을 구상했지만 모두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다. 고민해라. 아홉 가지의 방책을 떠올렸지만 모조리 역부족으로 판단되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느 틈엔가 벌써, 하룻밤이 지나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꼬박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눈동자는 깜빡거리는 것마저 잊어버린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가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내가 희생하면 된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실수를 이대로 덮어둔다. 그 대신, 내가 군무상서를 몰래 추동한 것처럼 위장한다. 이로써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면책을 받는다. 아버님께서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도 사라진다. 설령 앞으로 아버님이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을 죽이더라도, 그 모든 원흉은 나. 아버님의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사악한 악행으로 고정된다. 아버님은 나를 뼈저리게 저주하겠지. 감히 자신의 연인을 망가트렸다면서, 심지어 죽게 만들었다면서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님 마음속에서 나는 절대 용서하지 못할 인간으로 기억되리라. 그리고 나, 데이지라는 이름은 아버님에게 영원토록 악마의 대명사로 남으리라. 하지만 상관없다. 아버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파멸적인 종막에서 아버님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나는 일찍이 아버님을 세계로부터 구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 아버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껏 증오를 쏘아댈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그 증오가 조금 더 거대해질 뿐이었다. '나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의자에 않은 채 찬찬히 계획을 자아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사고는 투명했으며 또한 뚜렷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계획의 헛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마치 웅장한 건축물이 지어지듯 모든 방침이 빈틈없이 수립되었다. 나는 포도주를 한 병 쥐어들고 마왕성을 빠져나왔다. 밤이 끝나고 새벽의 유리색 어스름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세찬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마도 이때, 내 심장마저 차가운 유리빛으로 물든 것이 분명하겠지. 좋다. 이제부터 나는 역사를 속인다. 평범한 사람은, 설령 계획을 짜더라도 완벽하게 실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천 가지 의도와 만 가지 목적을 어깨에 짊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거운 몸으로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반면에 나는 다르다. 내 목적은 오로지 아버님을 위해서.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세계와 역사를 속인다…….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시리도록 쓰린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것으로 밤새도록 입에 고인 피를 씻어냈다. 그리고 나는 땅바닥에 유리병을 던졌다. 유리가 찬란하게 깨졌다. 오직 단탈리안을 위해서. 아니, 나의 아버님을 위하여. 나는 모든 생명과 영혼을 바친다. * * * 먼저 제1단계에 착수했다. 나는 아버님께서 파이몬을 죽이시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산악파와 평원파는 모두 몰락할 필요가 있었다. 두 파벌을 모두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파이몬이 장차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님께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은 나에게도 명백했다. 언제까지나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균형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억측이 마냥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군무상서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금발녀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은 파이몬을 죽이려는 순간 나한테 '나가라' 하고 눈짓했다. 하지만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버님의 호위입니다. 이바르 양이 사라진 이상, 저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연회장 입구에 가서 망을 보아라.” “의외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장소는 언제나 항상 아버님의 바로 옆자리 아니었나요?” 아버님이 입을 다물었다. 암묵적으로 내가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아버님은 파이몬을 순수하게 혼자서 죽이고 싶겠지. 파이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아버님 홀로 오롯하게 짊어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버님이 저지르는 악행을 지켜볼 의무가 있다. 아버님은 그걸 인정해주었다……. 파이몬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말했다. “과연 대공들이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선택해줄지, 소녀로서는 약간 자신이 없어요……아. 물론 단탈리안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전부 알아서 잘 하겠지요,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파이몬. 전부 진실이니까요.” “예?” 핏물이 공중에 튀었다. 아버님은 파이몬을 살해한 다음, 그녀에게 길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파이몬의 옷자락을 조금 찢었다. 아버님은 옷자락을 피에 붉게 적셔서 마치 손수건을 보관하듯이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죽음을 영원히 가슴에 지고 살겠다는 뜻이었다. “…….” 확인했다. 이 순간, 나는 아버님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내게 각인시킨 명령은 모두 여섯 가지. 나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마라. 나와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마라. 내 명령에 복종하라. 너 자신의 삶보다 나의 삶을 우선하라. 상기의 명령들을 언제나 절대적으로 준수하라.' 방금, 아버님은 파이몬을 죽였다. '내가 친애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결코 외면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가 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깊은 의미를 가졌다. 아버님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친애하는 사람'을 죽일 경우에 내 노예각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달리 말해, 노예각인은 '아버님이 친애하는 사람'보다 '아버님'을 훨씬 더 중요하게 인지했다. 이것이 내가 제1단계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바. 첫 번째 고비는 다행히도 매우 순조롭게 넘어갔다. 아버님은 지금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방관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여기겠지. 시작이 좋았다. 다음, 제2단계. 나는 루크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실험에 착수했다. 일부러 아버님을 내 침대 밑에 숨겼다. 그리고 루크를 불러들였다. 아버님이 보기에는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짓거리로 보였으리라. 실상은 철저하게 계획된 범행이었다. 나는 오빠의 정신을 뿌리부터 파괴할 정도로 잔혹한 언행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오늘 진실을 말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루크. 내 오빠.” “아, 아아……아아아…….” “오빠는 친동생을 오 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수없이 강간한 개자식이야.” 마음이 여린 오빠는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내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두 가지 결론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루크는 '아버님이 친애하는 사람'였다. 나는 명령에 정면으로 대항해서 루크를 상처입혔다. 그런데도 노예각인이 반응하지 않았다. 즉, 우선순위가 아버님이기만 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아버님의 친지를 상처입히는 것이 가능했다. 두 번째. 내가 이런 일을 벌이는 광경을 아버님이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더라도, 역시 노예각인은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루크가 진실을 알고 타락하게 되는 것은 아버님의 계획, 루크를 장차 용사로 키운다는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님의 의사를 거슬러서 오빠를 망가트렸다. 설령 아버님이 싫어하더라도, 설령 아버님의 계획에 반대되더라도, 내가 일단 아버님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면……나는 노예각인을 뛰어넘어서 행동할 수 있었다. 요컨대, 노예각인은 아버님의 판단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나의 판단에 의해서 작동한다. 성공. 제1단계에 이어서 제2단계도 성공했다. 오빠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것은 중요했다. 오빠는 본인이 자각했든 자각하지 못했든 나를 간접적으로 범해왔다. 지금부터 그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제3단계. “미안해, 오빠.” 나는 얼마 뒤에 루크한테 진실을 털어놓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실수에 대해서. 파이몬에 대해서.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님이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진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루크는 내 이야기를 시종일관 차분하게 들었다. 내가 루크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탁했다. “아버님을 위해서,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줘.” “……그러면.” 루크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만 하면, 데이지. 나를 용서해줄 거야?” “나는 처음부터 오빠를 원망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용서할 것도 없어.” “…….” 루크가 두 눈을 감았다. 침묵이 한참이나 내려앉았다. 루크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의 턱이 자그맣게 움직였다. “나는 아버님과 너한테 삶을 허락받았어. 그렇다면, 내 검도 아버님과 너를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당연해. 데이지. 나는 너의 명령을 따를게.” 제3단계 역시, 성공했다. 우리 남매는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가 루크의 등을 쓰다듬었고, 루크는 내게 안겨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기에는 죄악이 있었다. 용서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을 위한, 강철과 같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이로써 계획의 절반을 달성시켰다. 나의 극본은 나머지 절반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였다.   00446 DAISY =========================================================================                        제4단계. 이대로 가다가는 아버님이 반드시 파멸하리라는 확신을 얻어야 했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왜 그것도……너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어. 시선을 둘 곳이 상대방의 얼굴 정도밖에 없었던 걸, 그걸…….”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군.” “대체 몇 명이야! 몇 명이나 있는 거야!?” 나는 본래 주관적으로 충분히 아버님의 파멸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강력한 증거가 필요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내가 사태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버님이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예컨대 아버님은 파이몬을 살해한 이후 단 한번도 애인들과 동침하지 않았다. 이러한 증상은 파멸의 전주곡과 같았다. 그렇기에 ‘아버님은 파이몬을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도발을 써가면서 증거를 얻으려 했지만,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왕 바르바토스는 아주 잘해주었다. “바보 단탈리안……그쪽 구석에는 고문도구들이 놓여 있어……. 도대체 뭐가 네 시선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아버님은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우 놀라웠다. 거의 하루 종일 아버님을 호위하는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아버님은 그토록 냉철하게 자신의 비밀을 감춘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난공불락과 같은 정신력에 반해 무심코 그 자리에서 황홀해질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일과 시간이었다. 내 연기는 아직 유효했다. 바르바토스와 대담을 끝마치고 나오는 아버님을 향해서, 내가 마지막으로 여쭈었다.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아버님. 제 마을에 살던 사람들도. 아버님께서 살해하신, 제 마을의 사람들도……비추는 건가요?” “오냐. 아주 잘 비친다. 눈알이 파먹히고 입구멍이 창칼로 꿰뚫린 채 나를 저주하고 있구나. 어떠하냐. 이제 만족했느냐?” 훌륭했다. 제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화전민. 그런 인간들마저 아버님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 바르바토스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죽이고서 아버님이 멀쩡히 제정신을 유지할 리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5단계. ――행동 개시. * * * 공개처형이 이루어지는 당일이었다. 나는 우선 평원파 마왕들이 모두 처형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평원파 마왕들은 자기네를 숙청해버린 아버님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 산악파가 괴멸해버린 이상, 평원파는 더 이상 남아봐야 쓸모는커녕 해악밖에 없었다. 모두 얌전히 죽어주는 편이 좋았다. 평원파 마왕들의 목이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잘 되었다. 아버님의 권좌는 다시금 단단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만이 남았다. 나는 아버님과 바르바토스가 울음기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발자국을 내딛기 전, 잠시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름다운 하늘. 바람이 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따금씩, 아버님은 아주 이따금씩 나를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연기가 깨질까봐 두려웠다. 인간을 부식시키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부드러운 편안함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후자를 경계했다. 우리의 무대는 두 사람이 철저하게 배역을 지켜야만 성립했다. 아버님은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든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사람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꼭 그처럼, 아버님과 나는 무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종자였다. 연기하기 위해서 숨을 쉬는 것이 아니고, 숨을 쉬기 위해서 연기한다.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대지를 무대로 삼고. 하늘을 장막으로 삼아서. 이 세계를 우리의 연기로 홀려버린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강철의 의지. 다만, 지금까지 연극은 아버님이 관객들을 속이는 게 전부였다. 제1막은 끝났다. 하늘의 구름은 걷혀지고 제2막이 오른다. 이곳에서는 주연인 아버님마저 무언가에 속는다. 비극의 외양에 다시금 또 다른 비극이 덧씌워진다. 연극의 제목은――단 한 사람만을 위한 교향곡. 아버님이 절대적으로 파멸하리라는 확신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아버님을 구원할 사람이 오로지 나 하나뿐이라는 확신도, 이곳에 있었다. 두 개의 믿음이 마치 아치 기둥처럼 나를 떠받들었다. 그리함으로써 나는 노예각인에 새겨진 명령, 나를 짓누르는 중력의 악령에서 해방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이제 아버님은 어떠한 명령으로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자아. 가자.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아버님의 칼날이 아래로 내리찍혔다. 묵직한 대검이 바르바토스의 목을 절단하려는 찰나, 내 발끝은 정확한 각도와 정확한 강도로 아버님의 손등을 후려쳤다. 대검이 튕겨서 멀어졌다. 아버님은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표정의 변화가 이상하게도 느리게 느껴졌다. 아마도 지금 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으로 아버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이겠지. 나는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감히……네 년, 감히 무슨 짓거리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아버님은 처절한 배신감을 맛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버님이 제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식으로 배신하지는 않으리라고, 아버님께서는 믿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최고의 순간을 거머쥐었다. “수많은 밤을. 차마 헤아리지 못할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과연 아버님을 이렇게 막아서도 되는 것일까. 설령 아버님이 죄책감이 찌부러져서 자멸할지라도 그것 역시 정당한 결말이지 않을까. 아버님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 맞이하는 최후가 아닐까. 그걸 내가 제멋대로 왜곡하고 비틀어도,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납득하지 못한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 또한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아버님이 자신의 업을 짊어지고 몰락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듯이, 나는 내가 아버님을 짊어지고 몰락하는 것을 이기적으로 갈망한다. 고로. “저는 당신을 막습니다.” 내가 대검을 손아귀로 소환했다. 일찍이 마왕 바알이 지녔던 검은 온전히 내 의지에 순응하였다. 어째서인지 이 물건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왜냐하면 나는 아버님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저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마왕 단탈리안. 지금부터 당신을 가로막겠습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대가 조용해졌다. 새로운 주연 배우의 등장에 관객들은 압도당했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으며, 사람들은 침묵이라는 몸짓으로 불길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아버님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버님은 우선 선제후 마왕들에게 몇 마디 양해를 구한 뒤, 거리낌 없이 나와 마주보았다. 우물의 땅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나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네 년. 이런 곳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저는 자살을 희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중요했다. 나는 아버님한테 착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아버님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켜서 판단의 착오를 유발한다. 그걸 위해서 나는 일부러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이 노여움을 담아서 소리쳤다. “새로이 명령한다! 앞으로 모든 지시에서 바르바토스만은 예외로써 제외시킨다! 명령에 있어서 바르바토스를 나의 연인으로 취급하지 마라! 그러니 즉시 대검을 내놓아라, 천치 녀석!” 심장이 고통으로 조여왔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고통은 아니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미리 준비해놓은 확신들이 아버님의 명령을 이겨낸 것이었다. '지금 내가 대검을 내려놓고 계획을 포기하면, 아버님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라는 판단이 고통을 무마시켰다. 좋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눈매에 조소를 담아서 아버님을 희롱했다. “처음에는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라우라 데 파르네세.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규중 아가씨 말입니다. 그새 잊어버리셨습니까?” 원래 있었던 일을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로 바꾸어버린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증거가 없다. 증인이 없다. 거짓말을 폭로해버릴 무언가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났던 진실, 지금 내가 자아내는 거짓, 두 개 모두 완벽하게 상반되는 방식으로 성립한다. 완벽한 극본. 이제 아버님이 내 말을 믿기만 하면, 내 거짓말은 이윽고 진실을 덮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버린다. 그러니까 아버님을 속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군무상서는 본디 저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저를 경계하고, 꺼리며,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혹시 군무상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님의 양녀인 저를 괴롭히리라고 생각하셨는지요.” 속인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는 것이 도리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제 눈앞에서 울부짖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마왕 바르바토스의 연인이지 않습니까.” 속인다. “바르바토스는 누군가에게 다급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마왕 파이몬을 조심하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십중팔구 파이몬이 아버님을 살해하고 말 것이라고. 바르바토스는 이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파이몬을 배제하고자 움직였습니다.” 속인다. “그렇습니다. 군무상서는 바르바토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파이몬이 아버님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 같으니 부디 주의해달라고.” 아버님을. 내가 가장 경애하는 당신을 속인다. 나는 대검을 똑바로 치켜들고, 세계를 향해 포효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당신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의 착각. 그 붕괴에 원인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저 데이지 폰 커스토스이며, 고로 당신은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아버님의 분노를, 원망을, 저주를, 모두 저에게 쏟아주세요.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 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로 남겠습니다. “…….” 그리고 나는 아버님의 눈동자에서 거대한 악의가 솟아난 것을 목격했다. 지금 이 순간, 틀림없이 아버님은 나를 어느 누구보다 증오하고 있었다. ――가슴이 옥죄였다. 노예각인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내 가슴을 가볍게 쥐었다. 그러나 고통 따위는 무시하고 나는 철두철미하게 무표정과 조소를 연기했다. “아직 마지막 선택이 남아 있다. 네 년을 죽인다.” “…….” “그리 되면 나는 다시금 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번,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내 얼굴 표정이 일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 되었다.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 입가를 비틀었다. 하지만 차마 마음을 전부 억누를 수가 없어, 입술이 자그맣게 떨렸다. “아버님이라면,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드디어 저는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 치욕과 고통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예정한 대로, 루크가 광장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중립파 마왕들이 한 순간이나마 시선을 광장에 빼앗겼다. 나는 그 틈을 노려서 중립파 마왕들을 일격에 무력화시켰다. 미리 예측한 혼란을 이용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버님이 악을 쓰면서 소리쳤다. “나의 명령이다! 자결해라, 데이지!” 심장이 격통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견뎌냈다. 무릎이 꺾일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참았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아버님께 진실을 고하면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마음의 군살을 잘랐다. 절대로. 나는 여기서 결코 굴복할 수 없었다. 나의 죽음을, 아버님의 파멸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연기하며 아버님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그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00447 DAISY =========================================================================                        아마도 나는, 아버님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 증거가 사정없이 구겨진 아버님의 얼굴이었다. 이제 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붕괴시킨 주범. 아울러 마왕 파이몬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었다. 아버님에게 완벽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아버님이 분노에 차서 말했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이냐.” “그걸 기대하면서 기다리시는 것 또한 아버님의 낭만적인 삶을 즐겁게 치장해줄 향신료가 아니련지요.”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서 아버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아버님을 보지 못하리라. 되도록 아버님의 모습을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넣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안녕히 계시기를. 나는 바르바토스를 인질로 잡아서 한 걸음 크게 도약했다. “오빠.” 광장 한복판에 가뿐하게 착지하였다. 광장에서는 이미 루크가 한바탕 난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혈극에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일대 혼란을 연출했다. 내가 오빠한테 바르바토스를 던져주었다. “여기서 1분 안에 빠져나가야 돼.” “응. 알았어.” 고통과 출혈로 인해 바르바토스는 기절해버린 상태. 사지가 잘려나간 그녀를 오빠가 단단히 등에 매었다. 공주님을 약탈하는 방법치고는 적이 야만스러웠지만, 원래 납치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잡아라! 저 반역자를 잡아라!”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마라!” 사방에서 마족 병사들이 뛰어왔다. 포위망은 완성된 지 오래였다. 다만 관중들이 도망치느라 병사들은 좀처럼 제대로 된 포진을 이루지 못했다. 바로 그곳에 허점이 있었다. 내가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우리 남매는 각자가 양손검을 꺼내쥔 채, 고요하게 정면을 노려보았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사그라들었다. 관중들의 비명도, 저편에서 아버님이나 마르바스가 외치는 명령도, 병사들이 늑대 떼거리처럼 악을 쓰는 소리도, 모두 그림자처럼 허물어졌다. 이쪽에 적의를 품고 달려드는 칼날과 창날의 동선. 그것만이 내 눈에 느릿하게 비추었다. 아군은 두 명. 적군은 약 이천 명. 전력비가 정확하게 1:1000. 달리 이르기를――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 내가 입을 열었다. “오른쪽과 위쪽은 내가 맡을게.” “아아. 왼쪽이랑 후방은 내가 처리하겠어.” 우리 남매의 작전회의는 그걸로 종료되었다. 우리는 따로 기합을 지를 필요도 없이, 조용히, 발자국을 내딛었다. 한 줄기의 질풍이 광장에 치달았다. 수십 미터 떨어져 있던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오자, 오크 병사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상대방의 주름살이 접혀지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가볍게 대검을 내리찍었다. 오크 병사는 표정이 구겨진 얼굴 그대로 절명했다. 조금 더 빠르게. 나는 반원을 그리며 대검을 넓게 휘둘렀다. 붉은 핏물이 공중에 낭자했다. 우리 남매는 따로 상의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똑같은 동작으로 양편의 병사들을 도륙했다. 다음 순간, 열세 명의 병사가 가슴이 뭉텅 잘린 채 쓰러졌다. 다시 발자국을 내딛었다. “이, 이쪽으로 온다!” “방진을 만들어서――.” 우리 남매가 달려드는 것을 보고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엘프가 입을 크게 열어서 뭐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그 이상으로 명령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은 병사들을 덮쳤다. 열댓 명으로 이루어진 소대를 학살하는 데에는 고작 한 호흡밖에 소모되지 않았다. 나는 오른편을, 오빠는 왼편을. 두 사람이 일격을 날리자, 방패든 창대는 무엇이 가로막든 상관없이 대검이 병사들의 몸뚱어리를 일도양단했다. 재차 핏물이 대량으로 튀어올랐다. 엘프 지휘관이 자신의 배를 부여잡았다. 그는 불과 2초 만에 부대원이 전멸한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괴물, 녀석…….” 엘프 지휘관은 배가 터지면서 내장을 와락 쏟아냈다. 거리가 가까웠던 탓인지 피 서너 방울이 내 옷에 묻었다. 아버님이 선물해준 시녀복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이건 아버님이 손수 도안을 짜서 장인에게 제작하도록 시킨 옷이었다. 아마도 객관적으로 가치를 매기자면 한 나라의 국보 정도가 되겠지. 그런 보물이 더럽혀져서 조금 기분이 나빴다. “…….” 내가 슬쩍 전방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마족 병사들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기세는 이미 명백하게 우리한테 넘어왔다. 제대로 진영을 짜서 맞붙는 것이라면 또 몰라도, 수많은 시민들이 어지러이 뛰어다니는 통에 광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부대 단위의 병사들이 움직이기에는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바깥에서 내부로 침입하는 경우는 대비해두었겠으나, 설마 안쪽에서 외부로 탈출하는 시나리오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남매는 그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돌파해나갔다. 광장을 벗어나는 데에는 미리 예고한 대로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니블헤임의 골목을 교묘하게 내달려서 마침내 도시 바깥까지 도망쳤다. ─ 끼하아아악! 도시의 미로를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공에서 와이번들이 강하했다. 마왕 가미긴이 수족으로 부리는 정예 와이번 부대이겠지.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 안쪽에서는 활약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품속에서 순간이동 마법서를 꺼내들었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 남매는 순식간에 빛무리에 감싸였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덮쳐오기 직전, 우리는 니블헤임에서 탈출했다. 풍경이 한 순간에 바뀌었다. 칙칙하고 메마른 마계의 대지에서 푸른 수풀이 끝없이 이어진 인간계의 땅으로. 조금 전까지 긴박하게 추격전이 이루어졌던 게 거짓말처럼, 눈앞의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단지 조금 때가 안 좋았을까. “어, 어어……어어어.” 농부 한 명이 우리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마침 밭일에 쓸 목재라도 구하러 이곳에 온 것일까. 일부러 인적이 드문 숲 근처를 순간이동 목적지로 삼았건만, 운 나쁘게도 목격자가 발생해버렸다. 농부는 무척이나 놀란 것이 분명했는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틀림없이 순간이동 마법 따위는 평생 처음 목격했으리라. 얼굴에서 순박하게 살아온 세월이 생생하게 묻어나왔다.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성함이 어찌 되는지요?” “저, 저 말입니까요?” “예. 여기에 다른 분은 없으니까요.” 농부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합스부르크어를 썼는데 서부 사투리 억양이 진했다. 반면에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황실 억양의 합스부르크어를 배웠다. 농부의 귀에 내 합스부르크어는 반쯤 외국어로 들릴지 모르겠다. “소인의 이름은 프로슈라고 합니다요, 마님.” “프로슈. 부인과 자식을 갖고 있습니까?” “예, 예이. 모자라지만 아들을 세 명 두고 있습죠.” 농부가 잔뜩 움츠러들어서 허리를 숙였다. 나를 귀족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실상 나는 아버님이 튜튼 왕국의 공작인데다 그 하나뿐인 후계자였으니 꽤나 귀한 공녀이긴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로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예?” “저희는 누군가에게 급히 쫓기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목격자를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죽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프로슈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 나의 대검은 이미 프로슈의 가슴팍을 양단하고 있었다. 이 순박한 농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뚱어리가 두 쪽으로 갈라져 힘없이 허물어졌다. 초록색 풀밭에 피가 흘러내렸다. 내 옆에서 루크가 중얼거렸다. “……꼭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 “우리는 이제부터 아버님을 상대해야 돼. 일말의 위험이라도 남겨두면 아버님은 반드시 냄새를 맡고 우리를 추격할 거야.” 내가 물끄러미 루크를 바라보았다. 루크는 낯빛이 우울했다. “오빠. 우리가 방심하더라도 아버님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아버님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해?” “……아니. 절대로 아니지.” “아버님은 방심하지 않고 우리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거야. 그렇다면 우리 역시 절대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오빠의 죄책감도, 망설임도, 전부 가슴의 밑바닥에 묻어버려. 우리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품에 불과하니까.” 그렇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버님을 적으로 돌렸다. 여태까지 아버님을 적수로 돌린 자는 수두룩하게 많았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졌다. 전원이 아버님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다가 목이 날아갔다. 나는 그런 선례를 반복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루크가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했다는 분위기가 전해졌다. 그거면 되었다. 우리는 순간이동 마법서를 수십 장 써가면서 이리저리 이동해나갔다. 혹시라도 마법사 부대가 추격해올 경우에 우리의 경로를 착각시키기 위해서였다. 합스부르크, 프랑크, 사르데냐, 헬베티카 등,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짧은 시간에 마력이 지나치게 많이 빠져나가서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 정도는 너끈히 버텼다. 이제 되었다, 싶었을 때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서 멈추었다. “…….” 시각은 이미 어두컴컴한 밤. 창백한 달빛 아래, 그럭저럭 거대한 성벽이 비추었다. 성벽 위에서 때때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순찰병들이 쥔 횃불이 타오르는 것이었다. 우리 남매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 * “각하. 야밤에 송구합니다.” 통령 집무실에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을 시간대였지만, 잠이 적은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때까지 업무를 돌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외알 안경을 벗으면서――그녀는 최근 들어 시력이 약간 나빠졌다――쿠르츠를 쳐다보았다. “이런 시간에 여자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현명한 작태가 아니로군. 슐라이어마허 장군.” “저도 웬만하면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이쿠. 그건 본인에 대한 모욕으로 취급해도 괜찮을까?” 엘리자베트 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통령은 하늘거리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업무를 보다가 잠기운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서 잠들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통령은 무릎에 푹신푹신한 베개까지 준비해두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엄이 넘치는 통령이 밤마다 베개를 끌어안고 책상에 엎어진다는 사실을 공화국 시민들이 알면 어떻게 반응할련지……아니, 어쩌면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소관이야 언제든지 질책을 받아도 좋습니다. 지금 경비대에 다소 문제가 생겼습니다. 외곽 성문에 잘 차려입은 시종 두 명이 찾아왔는데, 순식간에 경비대장을 인질로 삼아서 통령 각하를 뵙게 해달라고 협박하는군요.” “경비대장을 갈아치울 때가 되었는가?” “내일 새로운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겠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깃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이 인질로 잡혀서야 말이 안 된다. 무시하고 화살을 쏘게. 그런 작자는 대지에 비료가 되어주는 편이 그나마 공화국의 인민을 위한 길이겠지.” “소관도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쿠르츠가 다음에 내뱉은 말에 엘리자베트 통령의 깃펜이 뚝, 하고 멈추었다. “그 시종들. 마왕 단탈리안을 모시던 자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더군요. 인상 착의도 저희 정보부에서 가지고 있던 자료와 일치합니다. 제 생각에는 각하께서 직접 만나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작품 후기 ============================   - 챕터 END.   00448 DANTALIAN =========================================================================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두 명의 남매가 짓이기고 간 자국에 시민들과 병사들이 힘겹게 신음했다. 곳곳에 구덩이가 움푹 파였고, 대량의 핏물이 시체를 감싸돌면서 흘렀다. 불과 2분. 아니, 아마도 1분이 채 지나지 않았겠지. 그토록 짧은 시간에 사상자 수백 명이 발생했다……. “…….” 나는 무심코 오른쪽 손등을 매만졌다. 아직도 데이지에게 걷어차인 부위가 욱씬거렸다. 그러나 더더욱 쓰라린 곳은 손등 따위가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했다. 데이지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그날부터, 어딘지 모르게 지금과 같은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마왕으로 태어난 주제에 용사를 살해하지 않았다……즉, 나는 지금 순전히 인과응보를 받은 것에 불과했다. 데이지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라우라 역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내가 라우라를 거두었으며 데이지를 거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이지에 대한 분노로 머리가 뜨거웠지만, 나는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에에. 결국 도망쳤네~.” 가미긴이 뒤쪽에서 칭얼거렸다. 내가 등을 돌려서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주요 마왕들도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도망치다니. 추격에서 탈출한 것인가?” “응.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순간전이 마법을 써서 증발해버렸는걸. 와이번들이 덮치기 바로 직전에 도망쳤어.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봐.” 바싸고가 혀를 찼다. “쯧, 영악한 놈들이로군. 일단 마법사들을 위주로 추격대를 조직하지. 여차하면 뒤꽁무니를 쫓을 수 있을 게다.” “글쎄에. 저 정도로 머리가 굴러가는 아이들이라면 전이도 여러 번 해서 흔적을 분산시킬 것 같은데. 개고생이 될 것 같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별로 추천하지 않아.” “그렇다고 두 손 놓고 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바싸고가 끔찍하다는 듯 탄식했다. “우리는 바르바토스를 빼앗겼다. 게다가 장소가 좋지 않아. 니블헤임의 한복판이다. 마족의 안마당에서 인간종 애송이들한테 코를 베였다. 이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군.” “…….” “단탈리안. 본인은 네놈을 질책하고 있다.” 바싸고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마왕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혹은 이런 상황이기에 더더욱, 나는 바싸고의 행동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바싸고는 지금 일부러 총대를 매었다. 현재 나를 대놓고 비난할 수 있는 마왕은 극소수. 마르바스, 시트리, 가미긴, 바싸고, 이렇게 네 명밖에 없었다. 가미긴과 시트리는 노골적으로 내 편을 들고 있으니 나를 꾸짖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입장상 마르바스와 바싸고만이 남았다. 만일 마르바스가 나를 질책하면 어떻게 될까. 곧바로 정치적인 견제가 되어버린다. 자칫 잘못하다 중립파가 대세를 쥐어잡고 주도하는, 그런 그림이 나와버릴 수 있다. 그렇기에 바싸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중립파보다 한 발자국 앞서감으로써 나를 원호해주었다. 바싸고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반역도들은 네놈의 수양딸이고 수양아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과오이다. 설마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변명할 속셈은 아니겠지. 어디 네놈의 혓바닥이 여전히 제 실력을 과시한다면 마음껏 항변해보거라.”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여기서 확실하게 사죄를 해둔다. 수양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송구하다고. 누군가가 나중에 다시금 이번 사건에 대해 추궁하지 못하도록 아예 단단하게 사과를 한다. 정치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호기였다. 고맙다, 바싸고.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맹세한다. 앞으로 설령 당신이 나를 배신할지라도 단 한 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겠다. “저에게는 감히 변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차분하게 입술을 열었다. “바르바토스의 처형을 담당한 사람은 저입니다. 이 자리에서 수양딸에게 배신당해서 꼴불견을 연출한 사람도 저입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부덕입니다. 여기에 이견의 여지는 없습니다.” “호오. 네놈치고는 꽤나 순순하게 잘못을 인정했군.” 바싸고가 이죽거렸다. 그가 강하게 나와주는 덕택에 다른 마왕들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허면 이제 책임을 질 차례이다. 이 사단을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저에게 도끼를 하나 건네주십시오.” “흐음.”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호위병 한 명이 시선에 응답하여 앞으로 걸어나왔다. 병사는 날이 시퍼렇게 선 손도끼를 공손하게 바쳤다. 바싸고가 도끼를 건네받아서 나에게 넘겨주었다. “…….” 나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광장 저 멀리에서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이미 거의 모두 떠나갔다. 부상자와 부상자를 돕는 이들만이 남아서 소동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데이지에게 기습을 당한 중립파 마왕 네 명도 그럭저럭 회복되어서,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도끼를 치켜들어――단숨에 왼쪽 허벅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아?” 누군가가 헛숨을 토했다. 아마도 가미긴과 시트리겠지. 나는 무덤덤하게 도끼를 치켜들어서 다시 한 번 허벅지를 도려냈다. 시뻘건 핏물이 도끼날에 묻으면서 바닥에 흩뿌려졌다. 허벅지를 자르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계적으로 열한 번을 내리찍은 다음에야 마침내 절단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얼굴색이 바뀌지 않았다. 제법 고통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국화전쟁에서 왼쪽 허벅지에 화살이 맞은 이후, 나는 그 부근으로 통각이 지극히 옅어졌다. 등살과 마찬가지로 감각이 둔해진 부위 중 하나였다. 뭉텅한 무언가가 잘려나갔다, 기껏해야 그 정도 느낌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왕들 입장에서는 달리 보이겠지. “…….” 내가 고개를 들어서 마왕들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꽤나 생경한 시선들이 있었다. 마왕들은 하나같이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마치 끔찍한 괴물을 목격한 듯한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기사 누군가가 무표정하게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찍는 모습은 기괴스러운 구석이 있으리라. 조금 더 아픈 척을 했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마 내 판단이 옳았을 것이다. “소인 단탈리안. 모든 여신들 앞에서 맹세하나니, 이제부터 영원토록 한쪽 다리가 없는 절름발이로서 살아갈 것을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내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이마를 숙였다. “재생력을 이용해서 다리를 되찾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본디 죄의 무게를 생각하자면 다리 한쪽은커녕 목숨을 바쳐도 크게 모자람이 있습니다만, 나머지 죄과는 저의 실태를 무마하는 것에서 찾고자 합니다. 부디 소인에게 관용을.” 정적이 찾아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렸으므로 마왕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보지 못했다. 다만 잠시 뒤, 충격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시트리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그 인간년이 전부 잘못한 거잖아! 왜 단탈리안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 “반역자의 후견인은 단탈리안이었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바싸고가 어쩐지 힘이 빠진 어조로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단탈리안의 사죄는 지극히 올바르다. 본인은 이 정도로 용서하지. 다만, 단탈리안 본인이 말했듯이 이번 사태를 전적으로 책임져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헤에. 듣자하니 아주 네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하잖아.” 가미긴이 끼어들었다. 가미긴은 약간 열이 받은 느낌이 그대로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오늘 경비를 맡은 사람이 단탈리안이었어? 내 기억으로는 아닌데. 수양딸인지 뭔지 하는 잡년이 배신한 거야 단탈리안의 책임이 맞다 쳐도, 그 잡년을 겨울철 숭어마냥 허무하게 놓쳐버린 사람은 어느집 양반들이야? 마르바스. 당신이 오늘 경비를 총괄하지 않았던가?” 가미긴이 비웃음을 흘렸다. “마왕이 네 명이나 달라붙어 포위했으면서 인간종 꼬맹이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겨우 일격에 나가 떨어지다니.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는가 조금은 반성해주었으면 하는걸.” ――훌륭했다. 방금 가미긴은 바싸고를 매도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중립파에 책임 소재를 추궁했다. 바싸고의 의중을 깨닫고 거기에 몰래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다. 바싸고나 가미긴이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시늉했으나 실상 차례차례 중립파의 주도권을 약탈하고 공격했다. 두 사람의 중간에 시트리가 끼어든 것도 적절했다. 시트리는 정치적인 눈치 싸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순전히 분노했을 뿐이겠지만, 덕분에 바싸고와 가미긴의 연계가 눈에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새로이 구상한 마왕군의 균형. 한쪽에는 중립파가. 다른 한쪽에는 산악파 및 무소속 마왕들이. 그 중간에서,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균형을 조절한다. 이전에 중립파가 해온 역할은 바싸고가 대신한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과거 평원파와 산악파처럼 극심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안정적인 균형이기도 했다. 이념들이 배제되고 순전히 정치성만이 남은 구도이니까. 마르바스에게도, 바싸고에게도, 시트리에게도, 가미긴에게도. 어느 누구한테도 일찍이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이 정열적으로 몰두한 이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 남은 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정치적인 계산뿐. 결국 이것이 나의 종착역이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 단탈리안의 사죄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만큼이나 사태를 해결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 단탈리안만한 적임자는 없음이라. 단탈리안. 고개를 들게. 우리는 그대의 사죄를 받아들인다네.” “동지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선처.” 내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대는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가겠노라 맹세했다만, 시트리가 지적한 대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대는 한 명의 마왕이기 전에 제국의 얼굴이다. 어찌 불구로서 지내고자 하는가.” “재차 너그러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마르바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저는 여신들께 맹세했습니다. 신상필벌은 지엄한지라 감히 제 책임을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부디 제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이건 바싸고를 위한 연극이었다. 나에게 사죄를 요구한 것도 바싸고였으며, 사죄를 받아주겠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도 바싸고였다. 여기서 냉큼 마르바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바싸고의 체면이 깎였다. 앞으로 신생 마왕군에서는 바싸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중립파나 무소속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만한 사람은 바싸고 이외에 없었다. 그런 만큼 가능한 한 바싸고에게 발언력을 실어주어야만 했다. 바싸고에게는 단탈리안을 처벌할 권위가 있다. 그와 같은 외양이 중요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단탈리안, 그건……!” 시트리가 뭐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그보다 앞서,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자네가 그쪽이 편하다면 본인은 반대할 권리가 없네. 하지만 생각이 바뀌더라도 우리는 결코 자네를 책망하지 않을 것일세. 그것만은 알아주게나.” “예.” 내가 다시금 바닥에 엎드려서 예를 표했다. “이 불충. 반드시 갚겠습니다.”   00449 DANTALIAN =========================================================================                        “어찌되었든, 얘기는 일단락이 되었으니까. 어서 상처를 치료해야…….” 시트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다가왔다. 시트리는 품안에서 유리병을 꺼내들었는데, 손가락을 심하게 더듬거린 탓에 그만 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유리병이 바닥에 부닥치면서 와인색 액체가 엎질러졌다. 시트리가 어, 어, 하고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품속에서 포션병을 꺼냈지만 또 아래로 떨어졌다. “아. 어, 그러니까……그러니까…….” “옆으로 저리 비켜.” 가미긴이 한숨을 쉬며 시트리와 나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래서 여차할 때 너 같은 아이는 도움이 안 되는 거야. 그런 심장으로 어떻게 병사들은 이끌었는지 모르겠네.” 가미긴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다음, 자신의 드레스 치맛자락을 지이익 찢었다. 옷조각에 포션을 듬뿍 뿌리는 걸 보아하니 그걸 붕대로 삼으려는 것 같았다. 가미긴은 무심한 눈동자로 내 허벅지 절단면을 천조각으로 묶었다. “가만히 있어.” 기껏 예쁘게 차려입고 온 고급 드레스가 핏물에 더러워졌다. 가미긴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단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지긋지긋함과 권태로움만이 눈가에 넘쳐났다. 가미긴이 붕대를 꾸욱 단단하게 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음기가 연하게 배어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왜 내가 너보다 네 몸을 더 걱정해야 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가 네 몸을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걱정하냐는 얘기야……아니, 됐어. 어차피 말해봐야 귓등으로 흘릴 게 뻔하지. 그래. 평생 외다리로 살아버려. 너한테는 그게 딱인걸.” 가미긴이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피곤해졌어. 바르바토스 년이 얼마나 꼴사납게 죽을까 지켜보려고 왔는데 어디로 도망쳐버리지 않나, 열심히 변호해봤자 누구는 알아서 다리를 상납하지 않나. 인생 열심히 살아봤자 뭐하나 싶네. 잘들 알아서 해봐. 난 황궁에서 잠이나 잘 거니까.” 가미긴이 연단에서 걸어나갔다. 찢어진 치마가 살랑거리면서 허벅지가 하얗게 드러났다. 가미긴을 따라다니는 두 명의 무소속 여마왕도 그녀를 뒤따랐다. 이대로 법정이 파장하는 분위기였다. “확실히 우리가 지금 논의할 수 있는 안건은 극히 적어 보이는군.”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이만 해산할 것을 제안한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추격조는 이쪽에서 담당하겠다. 별다른 일이 생기면 곧바로 모여야 하니, 부디 그대들도 황궁에서 대기해주기를 부탁하네.” 그리고 우리는 해산했다. 나는 주변에 반마법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시트리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합스부르크 황궁으로 이동하였다. 재미난 점은 시트리나 나나 반신불수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거야. 너희는 전부 물러나.” 주변에서 시종들이 도와드리겠다며 달려들었으나 시트리가 한사코 자기가 부축할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며칠 전에 반죽음을 당한 부상자가 누구를 돕겠다는 것일까.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시트리는 오른팔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나는 왼발이 날아가버렸다. 시트리 입장에서는 나를 부축할래야 방향이 맞지 않아서 제대로 보조할 수가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데서나 지팡이를 구해다주세요.” “하, 하지만…….” “보세요. 벌써 피도 멎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내가 한참이나 다독거린 다음에야 시트리는 지팡이를 가져왔다. 목재에다 검은색으로 두껍게 옻칠한 지팡이였다. 아무리 봐도 대충 구해온 것치고는 고급스러운 물건이라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서 이런 걸 가져왔습니까?” “마침 누가 이걸 짚고 다니길래 양해를 구하고 가져왔어. 헤헤.” “…….” 그야 눈이 벌겋게 뒤집힌 마왕 시트리가 지팡이 좀 내놔, 라고 부탁하면 제아무리 담력이 강한 마족이라도 냉큼 상납할 수밖에 없겠지. 졸지에 소중한 사치품을 빼앗기게 된 익명의 마인한테 유감을 표한다. 지팡이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걸어갈 수 있었다. 몸의 균형이 상당히 낯설어서 살짝 심하게 절뚝거리긴 했다. 그때마다 시트리가 호들갑을 떨면서 내 몸을 받쳐주었는데, 얼굴 표정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심각했다. “하아……후우, 하아…….” 나는 도중에 한 번 숨이 차서 멈추었다. 다리 때문이라기보다 몸속에서 피가 한꺼번에 많이 빠져나가서 지친 것이었다. 두개골이 꽉 조여오는 것이 두통 기운마저 있었다. 한 걸음 내딛으면 복도 자체가 울렁거릴 것 같아서 도저히 더 걸어가기가 힘들었다. “잠시만……아주 조금만, 쉬어도 괜찮을까요.” “응, 단탈리안. 쉬자. 얼른 쉬자.” 시트리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나는 복도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트리가 팔뚝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단번에 엉덩이가 떨어졌으리라. “후욱, 하아……후으…….” 호흡이 가빴다. 마치 가슴 부근만 내 몸이 아니게 된 것마냥 제멋대로 날뛰었다. 목구멍도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째서인지 식도 자체가 헐어버린 느낌이었다. 가래를 뱉고 싶었지만 침이 없어서 기분 나쁘게 매마른 재채기만 나왔다. 눈앞이 약간 새하얬다. 꼭 전등이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 같았다. “다, 단탈리안. 괜찮아? 정말로 괜찮은 거야?” “아주 조금……머리가 어지럽군요. 괜찮습니다. 가벼운 현기증입니다.” 내가 가슴 주머니를 더듬어서 포션병을 꺼내들었다. 로즈마리 향기가 연하게 풍겼다. 허브 향기와 벌꿀이 들어간 최고급 포션으로 내 입안을 적셨다. 이 물건에는 알코올도 섞여 있었다. 조금씩 포션을 맛보았다. 혀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감미했다. 입안이 싱그러운 액체로 가득 차자, 그제야 두개골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포션을 꿀꺽 삼켰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어지럼증도 가라앉았다. “…….” 깨닫고 나니, 어느새 시트리가 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흐윽……으읏, 흐아아…….” 시트리의 어깨가 떨었다.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내렸다. 나는 아직 머릿속에 멍한 기운이 남아 있어서 한동안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천천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시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시트리. 저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탈리안까지 없어지면……읏, 단탈리안까지 없어져버리면, 나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부 괜찮아질 거에요.” 시트리는 제대로 된 문장을 지어내지 못하고 다만 울었다. 나는 시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내 가슴에 꾹 눌렀다. 그래서 내 옷자락도 그녀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어떻게 시트리한테 밝힐 수 있겠는가. 내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파이몬을 살해했으며――지금 이 순간에도 파이몬이 환영으로서 내 몸 한편에 환영으로 들러붙어, 시트리와 똑같이 손톱으로 옷자락을 잡아끌고 있다는 것을. 괜찮다는 말 이외에 시트리한테 해줄 말이 나에게는 없었다. 아마도 나는 시트리에게 영원히 진실을 말하지 못하리라. ……. 잠깐.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만약 데이지가 아까 전 처형식에서 파이몬 암살의 진실을 폭로했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시트리와 산악파 마왕들이 착란에 빠져서 혼란이 더더욱 커졌겠지. 그런데 왜 데이지는 나를 암살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는가. ……. 데이지가 단순히 내 파멸을 목표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만일 내가 암살범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고 해보자. 나는 처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그건 내가 바라는 방식의 죽음이기도 하다. 파이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트리의 분노를 받아, 누가 봐도 악인의 화신인 채로 사형당한다. 나는 이런 죽음에는 불만이 없다. 폭로자가 데이지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십중팔구, 데이지도 나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데이지는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철두철미한 패배를 나에게 안겨주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살 수도 없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당신의 패배다.' 이것이야말로 데이지가 선언하려는 바이리라. “…….” 그렇군. 데이지가 어디로 도망쳤을지 알겠다. 아마도 틀림없이 데이지는 엘리자베트 통령한테 망명했을 것이다. 나는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나를 살해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내게 걸맞는 죽음을 선물하기에 상당히 괜찮은 후보로 여기고 있다. 데이지는 엘리자베트의 부하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그녀를 암살할 거다. 왜냐하면 그래야 '아버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하나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찍이 데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 베르시 백작, 엘리자베트 통령, 루크. 설마 이들이 아버님을 죽여도 된다고 판단하셨는지요? ─ 그들이 아버님의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애시당초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님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한참 엇나간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데이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 후보들을 말살할 계획이었다. 내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좋다. 대충 밑그림이 그려졌다. 녀석이 왜 바르바토스를 납치했는지도 이해되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일종의 뇌물이겠지. 현재 합스부르크의 황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기실 바르바토스가 흑마법으로 소생시킨 시체라는 정보까지 떠넘기면 금상첨화였다. 데이지는 단번에 엘리자베트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렇게 엘리자베트가 방심한 순간을 노려서, 단칼에 그녀를 죽인다. 이것이 데이지의 극본이지 않을까. 어수룩한 꼬맹이 주제에 꽤나 웅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제법이었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네 마음대로 세상만사가 흘러갈까……. “단탈리안. 정말로 계속 이렇게 살아가진 않을 거지? 평생 절름발이로 지내겠다는 말, 그냥 상황이 심각한 걸 풀려고 했던 거지?” 문득, 시트리가 울먹거리는 소리가 내 의식을 깨웠다.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조금 나중에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하니까요. 이대로 바르바토스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응……그건 그렇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시트리의 말을 끊었다. 이미 내 머리에서는 데이지가 엘리자베트에게 망명했을 경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찬찬히 시나리오를 예상해보고 있었다. “제 침실에서 지금 이바르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이바르?” “시녀입니다. 자그마한 체격에 금발을 한 시녀요. 그녀를 여기로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엘리자베트는 쉽게 타인을 신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를 헌상하는 것만으로 신뢰를 얻기란 어려웠다. 데이지는 자기가 '충실한 배신자'임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고래로부터 배신자가 새로운 주군에게 신용을 얻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쪽의 군사 정보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내 마왕성의 비밀통로를 알고 있었다. 그걸 엘리자베트한테 말해주겠지. 엘리자베트는 데이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가름하기 위해, 비밀통로로 암살단을 파견해볼 것이다……. 엘리자베트와 데이지. 본래 역사대로라면 여황제와 용사로서 엮일 두 사람인가. 시간이 별로 없다. 마왕성에 방비를 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미리 예상한 티를 너무 내는 것도 품격이 떨어지는 짓이다. 어디 한번 적당히 장난을 쳐볼까…….   00450 DANTALIAN =========================================================================                        * * * 대륙력 1513년 4월 초순. 나는 다리를 한쪽 잃어버리고 바로 다음날 선제후 마왕들을 불러모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부터 대대적으로 전면전이 시작할 가능성이 높았다. 엘리자베트는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걸 이용해먹지 않을 리 없었다. 틀림없이 적당한 명분을 노려서 외교적인 공세를 퍼부을 거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단순해졌다. 한 발자국 앞서서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접견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마왕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양손으로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이 접견실은 대전(大殿)보다 훨씬 더 작은 방으로, 지금처럼 소수의 고위 마왕들끼리 회의를 나누는 데 제격이었다. 사실상 밀실회의나 마찬가지였다. 대전과 달리 의자도 열 개 정도밖에 놓이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리자, 가장 먼저 바싸고가 접견실에 들어왔다. 바싸고가 방안을 둘러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경비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아무도 없지 않나.” “오늘 이 자리에 경비병은 필요없습니다. 절대로 정보가 새어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시종도 한 명 없는 것은 조금 과한 것 아닌가? 회의 도중에 갈증이 나면 목이라도 축여야 할 것 아니냐.” 내가 탁자에 올려진 와인병을 가리켰다. 알아서 마시라는 얘기였다. 바싸고는 질렸다는 듯 혀를 차더니, 내가 앉은 자리에서 가장 정반대로 멀리 떨어진 의자에 가서 앉았다. 밀실회의가 열리기로 한 시간이 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착 가라앉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하도 많기 때문이었다. 의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상에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바싸고는 시간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성격이었다. 무슨 회의가 열릴 때마다 정확히 30분 일찍 도착했다. 나와 더불어서 모든 마왕들 중에 가장 일찍 회의장소에 오는 사람이었다. 참고로 회의에 가장 늦게 지각하는 마왕은 바르바토스였다……. “어제 처형당한 평원파 마왕들의 군대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꽤나 대처가 빠르군요.” 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반란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여파가 거세졌는가. 일전에 무소속 마왕들이 숙청되었을 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반란군들이 마왕성에 틀어박혀서 반쯤 자멸하다시피 붕괴했다. 하지만 평원파의 군대는 처형식이 이루어지고 단 하루 만에 봉기했다. 거의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빠른 반응이었다. 이전부터 준비했다고 봐야 옳겠지. 평원파 마왕들이 잡혀들어간 바로 그 시점부터, 반란군은 이미 모반을 각오하고 있었다……. 과연 전쟁에 익숙한 정예군단이었다. 평화에 찌들어 살았던 무소속 마왕들의 군대와 격이 달랐다.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로군.” 바싸고가 내 얼굴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자그마치 이만 명의 반란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조금쯤 놀라거나 조급해하는 표정을 지어보는 것이 어떠냐.” “이래 봬도 감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팡이를 의자 턱걸이에 비스듬하게 내려두고,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나는 담뱃대에 불을 지피면서 말했다. “무소속 마왕들이 숙청되었을 때 그들의 군대는 본거지에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실상 집단자살이나 다름없었지요. 저들이 구태여 마왕성에 스스로 고립된 까닭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반란을 일으켜봤자 마왕의 지배력에 대항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반란군이 1만 대군, 2만 대군을 끌어모아서 진군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들을 지휘해줄 마왕이 부재했다. 반면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이쪽에는 마왕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예컨대 마르바스와 가미긴, 두 사람이 ‘당장 공격을 멈춰라’ 하고 명령하기만 해도 반란군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도저히 싸움이 안 되겠지. 그렇기에 무소속 마왕들의 반란군은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하는 길을 골랐다. 현명한 짓인지 어리석은 짓인지 도통 감이 안 왔지만. 그만큼 군주를 잃어버린 마족들에게 있어 반란이란 지극히 어려운 선택지였다. “그런데도 평원파의 군단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면전을 벌일 수 없는데도 대규모 반란을 획책했다……즉, 전면전이 아니라 유격전을 노린다는 얘기입니다. 반란군은 제국의 사방에 소규모 분대를 보내서 오래동안 분탕을 칠 속셈이겠지요.” “…….” 바싸고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는 것 같은 얼굴, 어쩐지 질려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놈. 혹시 반란군이 봉기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였느냐?”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본인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떠올랐다고?” 내가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은 약하게 연초를 즐기고 싶었기에 깊이 들이마시지 않고 입안에서만 천천히 향내를 굴렸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풍미가 있어서 좋았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 “그보다 무려 이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유격대라니. 이건 제법 골치가 썩히겠군요. 제가 예상한 것보다 오늘 회의가 더 길어지겠습니다.” 바싸고는 다시 한 번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뭐라고 말하는 것인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불평이 가득 넘치는 어조인 것만은 확실했다. 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선제후 마왕들이 한두 명씩 도착했다. 차례대로 가미긴, 시트리, 마르바스가 접견실에 들어와서 각자 편할 대로 의자를 골라 앉았다. 시트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단탈리안. 조금 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마르바스가 손수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나는 그걸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일신의 불편함보다 제국이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빠르게 대처할수록 좋습니다.” “허나 바르바토스가 어디로 납치당했는지 아직 모르지 않는가. 행선지를 모르는 이상에야 논의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두 손으로 마르바스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르바스가 흠, 하고 무표정하게 술을 받았다. 나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최고위 마왕들은 가볍게 목을 축였다. “이미 들었을지 모르겠으나 평원파의 잔당이 군사를 일으켰다. 주군들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겠다며 명분을 내세웠더군. 일단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면서 바르바토스의 행방을 점쳐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마르바스의 말에 다른 선제후 마왕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바르바토스를 구할 것인지 혹은 내버려둘 것인지, 일단 어디로 납치되었는가 알지 못하는 이상 결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바스의 제안은 정석에 가까웠다. 언제나 견실한 전략과 전술을 선호하는 마르바스의 성향은 이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반발자국 늦어버린다. 당신들은 엘리자베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엘리자베트는 정석만으로 대처해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서서 뛰어가야 간신히 엘리자베트를 추월할 수 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바르바토스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있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부끄럽게도 제 양녀는 우리 제국의 정보를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로 망명해야 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 또한 파악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소보다 편한 분위기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여기 모인 다섯 명은 관계가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수장들이었으나, 바로 그렇기에 오히려 편해지는 구석도 있었다. 생각해봐라.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72명의 마왕이 16명으로 줄어들었다. 인구가 감소되는 속도에도 정도가 있었다. 이들은 치열하기 그지없는 살육의 경쟁에서 생존한 마왕들. 그중에서도 끝끝내 정점을 유지한 세력가들이었다. 겉으로야 어떻든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역량을 인정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심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음. 그런데 왜 하필 합스부르크 공화국인가?” “루돌프 황제 때문입니다. 바르바토스가 죽으면 주인을 잃은 루돌프 황제의 시체는 자연스럽게 괴사해버립니다. 그리고 황제가 죽을 경우에 제일 큰 이득을 볼 국가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입니다.” 마르바스가 미간을 좁히고 신음했다. “과연……. 그러고보니 공화국의 군주는 확실히 루돌프 황제의 여동생인가. 루돌프 다음으로 유일하게 제위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고 있군.” 역시 말귀가 빨라서 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화국의 통령은 상당히 유리한 패를 손에 넣는 것입니다. 바르바토스를 죽이기만 해도 황제가 사라지게 되니 이득을 보고, 운이 좋으면 우리 마왕군이 황제를 조종했다는 증거를 잡아내서 세상에 폭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제국은 순식간에 공공연한 적이 되어버립니다.” 바싸고가 코웃음을 쳤다. 나를 한껏 비아냥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주 대단한 인간종을 양녀로 두고 있었군, 단탈리안. 사자의 심장에 벌레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말 아니더냐. 매사에 철두철미한 네놈이 그깟 인간종의 여아에게 빈틈을 보이다니.” “……감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순순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것도 바싸고의 좋은 술책이었다. 나를 질책함으로써 바싸고는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에 모인 마왕들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얻었다. 마르바스가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데도 분위기가 마르바스에게 집중되지 못하도록 말이다. “어라. 반역자에 대한 책임은 이만 묻어두기로 어제 얘기 전부 끝난 것 아니었어~?” 그리고 약속한 것처럼 가미긴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는 자리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괜히 회의를 번거롭게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이니까 빨리 진행해주면 좋겠어.” “예. 이야기를 되돌리겠습니다.” 내가 와인으로 혓바닥을 적셨다. “만일 제 추측이 올바르다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는 조만간 사절단을 보내올 것입니다. 명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내겠지요. 교역을 늘리고 싶다느니, 친분을 강화하고 싶다느니, 되는 대로 떠들 겁니다.” 사절단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 터. “그리고 사절단은 루돌프 황제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게 분명합니다. 상대방이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소생술로 되살아난 시체인지 확인해보겠지요. 비밀리에 그런 검증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가져올 것입니다.”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컨대 공화국에서 사절단을 보내온다면 자네의 추측이 맞다는 걸 입증하는 셈이 되겠군.” “예, 확실합니다. 우리는 우선 황제의 대역을 준비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흐응. 그럼 인형을 쓰면 되겠네.” 가미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 인형으로 황제를 대신할 계획이었잖아. 그걸로 사절단을 속이면 되는 거 아니야?” “예. 인형을 대체해두면 사절단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바르바토스를 사형한 이후, 이바르의 인형으로 황제를 대신할 예정이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꼭두각시 인형은 실제 인간과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패를 곧바로 꺼내들기에는 아까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허리를 낮게 숙여서 속삭였다. “사절단에게 황제의 시체를 마음껏 검증하도록 일단 내버려둡니다.”   00451 DANTALIAN =========================================================================                        “…….” 마왕들이 입을 다물었다. 내 제안이 비상식적으로 들렸기 때문이겠지.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마왕은 단 한 사람. 가미긴뿐이었다. 그녀만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중에서 실질적으로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짜본 사람은 가미긴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마르바스, 바싸고, 시트리. 세 사람은 나와 언제나 내 시나리오에서 조연을 맡아왔다. 단 한 번도 나와 머리를 함께 맞대고 극본을 써나간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미리 만들어둔 시나리오에 따라 참여했을 따름이었다……. “단탈리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화국이 황제의 실상을 알아채도록 방관하자니?” 즉. 엄밀히 말해서 이번이 첫경험. 여태까지 바르바토스의 그늘에 반쯤 가려져서 은밀하게 행동했던 내가――마왕들에게 직접 나의 입으로, 나의 얼굴로, 나의 몸짓으로 온갖 음모와 계획을 설명하게 되었다. “동지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계획을 단계별로 경청해주십시오.” 달리 말하자면, 지금껏 무대에서 열연을 펼쳐온 배우들은 처음으로 장막 뒤쪽에서 무슨 모의가 오갔는지 깨닫는다. 단지 완성된 극본을 받아보는 것이 아니라, 극본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목격한다. “우리는 공화국 통령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통령의 입장에서?” “예. 통령은 결코 쉽사리 제 딸아이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반역자라지만 마왕의 양녀입니다. 혹시 이중간첩은 아닌가. 거짓으로 배신해서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 아닌가. 통령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자베트는 나를 인세의 악마로 취급했다. 내 영지에 풀린 공화국 첩자만 스무 명이 넘었다. 이것도 신원이 파악된 첩자들에 한정되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요원까지 합치면 그보다 두 배는 많겠지. 고작 하나의 도시에다 간자를 수십 명이나 풀어놓은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언제나 이쪽을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그런데 별안간 단탈리안의 양녀가 망명한다고? 의심하지 않을 리 없다. 아니, 단언해도 좋았다. ――엘리자베트는 절대로 데이지를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는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설마 나 정도 되는 인간이 '양녀의 반란' 따위를 허용할 만큼 허술하리라고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믿지 않는다. 데이지가 믿음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도리어 엘리자베트는 의심하겠지. 이건 나도 똑같았다. 갑자기 엘리자베트의 충복이 배신해서 나한테 와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배신자를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엘리자베트와 같은 괴물이 측근의 이탈을 용납한다――이건 그냥 단순히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어떤 의미로, 엘리자베트와 나는 누구보다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제 양녀는 필사적으로 통령의 믿음을 쌓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루돌프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라는 정보는 지나치게 거대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정보들부터 차근차근 흘리면서 자신의 신뢰도를 높이려 들겠지요.” 바로 이 작은 정보가 내 마왕성의 비밀통로였다. 나는 찬찬히 선제후 마왕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 모두들 표정이 영 시원치 않았다. 당연했다. 지금 나는 마치 엘리자베트와 데이지에 대해 전부 파악했다는 것처럼, 두 사람의 성격과 미래를 모조리 알았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는가. 무슨 보장으로 당신이 말하는 대로 미래가 흘러가리라 확신하는가.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마다 약간씩은 말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벌써 십 년에 가깝도록 그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으니까. 뭐, 엘리자베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해본들 아무도 수긍해주지 않을 거다. 마왕들 입장에서 엘리자베트는 그저 망국의 마지막 후계자. 경계할 필요는 있을지언정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딱 그 정도 인물에 불과했다. 엘리자베트가 사실상 마왕군 전체에 맞서서 지금까지 공화국을 유지시킨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과업인지, 마왕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내 잘못도 컸다. 엘리자베트가 마왕군에 조금이라도 수작을 걸려고 하면 내가 그걸 막았으니 말이다……. 솔직히 조금 억울하군. 왜 나 혼자만 엘리자베트를 신경 써야 하는가. 언제나 고생하는 역할은 내가 떠맡았다. 게다가 알아주는 사람도 적었다. 이래저래 손해보는 점밖에 없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체스판'에 엘리자베트와 나만이 참여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앞으로 이틀. 아무리 길어도 이틀 안에 공화국 첩자들이 제 마왕성의 비밀통로에 난입할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우리는 바르바토스가 어디로 납치되었는지, 통령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한꺼번에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 * * 침입조가 단탈리안의 마왕성에 돌입한 지 오 분이 흘렀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수정구를 통해서 침입조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이 통로, 만들어진 지 적어도 오 년이 지났습니다. ─ 급하게 지어진 통로는 아니로군. 이런 곳이 숨겨져 있었나……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웠어. 침입대원들이 두런두런 대화하는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비밀통로는 무척 어두워서, 수정구에서 투영하는 영상도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그걸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옆자리에서 말했다. “소녀가 말한 대로 확실히 비밀통로는 있었군요.” “흐음.” 엘리자베트가 뿔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거의 식초에 가까운 저질 포도주였다. 본래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부터 미주(美酒)를 사랑했지만, 통령이 된 이후 개인적으로 마시는 술은 모조리 하등품, 가난한 농민들이나 즐길 법한 물건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단탈리안이 어디까지 상황을 통제하고 있느냐이다. 우리가 비밀통로로 침입해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단탈리안도 예상하고 있겠지.” “예?” 쿠르츠가 입에서 유리잔을 때고 의아해했다. 자신의 군주이자 일국의 지도자인 엘리자베트가 저질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쿠르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최고급 술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제 진실의 마법을 동원해서 녀석을 검문해보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배신한 건 절대로 단탈리안의 의도가 아니라고 증언하는 데서 진실 판정이 나왔습니다만……. 어떻게 단탈리안이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겠습니까?” “본인은 진실의 마법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차갑게 일축했다. “어차피 심장의 박동과 관상학에 의거해서 작동하는 마법. 신뢰성은 잘해봐야 오 할에 불과하다. 본인은 데이지라는 아이가 심장이 뛰는 속도를 정교하게 조종할 수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게야.” “통령님. 어제 밤새도록 추궁해낸 질문만 칠백여든 개입니다?” 쿠르츠가 작게 웃었다. “그야 한두 번의 질문을 속이는 거야 훈련받은 첩보원에겐 식은 죽 먹기입죠. 하지만 쉰 개의 질문, 백 개의 질문, 오백 개의 질문을 모조리 회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난 밤, 공화국의 정보국은 그야말로 성대하게 '손님'을 대접했다. 첩보에 몸을 담은 지 수십 년이 넘어가는 베테랑들이 총동원되어서 열여섯 살짜리 소녀. 데이지 폰 커스토스를 집단적으로 추궁했다. 주먹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열몇 시간 내내 쉴 새 없이 이어진 추궁은 이미 신체적인 폭력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폭거였다. 칠백여든 개의 질문은 단순히 줄줄이 나열된 질문의 집합이 아니었다. 질문 하나하나가 마치 그물처럼 정교하고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비록 엘리자베트 통령 말마따마 진실의 마법이 만능은 아닐지라도, 물경 칠백여든 개의 질문. 이 정도라면 마법의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설마 이제 열여섯밖에 안 된 꼬맹이가 칠백 개의 질문을 전부 속였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통령 각하. 하하.” “…….” 엘리자베트가 침묵했다. 상대방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리자 졸지에 쿠르츠는 머쓱해졌다. 어떻게 다시 말을 붙여볼까 하던 차,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블린이다! 스무 마리는 되는걸! ─ 모두 침착하게 대응하도록. 진형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고블린쯤이야 간단하다. 쿠르츠의 눈매가 다소 가늘어졌다. 다행히도 화제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굴릴 필요는 사라졌다. “역시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네요. 뭐, 비밀통로라고 해도 최소한의 방비는 해두는 게 상식이죠. 하지만 고블린이라니. 조금 어설프지 않을까 합니다.” “끝났군.” “네?” 엘리자베트가 여전히 무심한 눈길로 말했다. “단탈리안이 비밀통로에 고블린 따위를 배치했을 리 없다. 저곳이 뚫리면 단번에 마왕성의 9층이 함락되는 것이다. 만약 경비병을 세워둔다면 당연히 강대한 마족을 배치하겠지. 저건 속임수다.” 엘리자베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 순간이었다. 수정구에서 다급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 크하아아악! ─ 무슨 일이야!? ─ 지옥거미다! 제기랄, 천장에 지옥거미들이 매복해 있었어! 전원, 전투대형을 방진으로 바꿔서 방어한다! 대원들이 어떻게든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으나, 비명은 끊이지 않고 점차 거세졌다. 대형 거미뿐만이 아니라 바위로 위장하고 있던 골렘들까지 나타나서 그들을 덮쳤다. 수정구에 비춘 비밀통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엘리자베트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고블린을 보여준 다음 복병들로 기습한다. 효과적인 전술이지만, 적군이 다가온다고 미리 예상하지 않았다면 실현시킬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우리가 첩보부대를 보내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음.”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원은 어느덧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수십 개체의 마물이 마지막 생존자를 둘러쌌다. 남자는 동굴바닥에 도끼를 떨어트렸다. ─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푸욱, 하고 육신이 난도질당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이후로는 마물이 시체를 물어뜯는 잡음만이 이어졌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끔찍하게 통령집무실에 흘렀다. 엘리자베트는 감흥이 없는 얼굴로 수정구의 영상을 꺼트렸다. “대단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지, 소인은 잘…….” “단탈리안 말이다.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방금 단탈리안은 침입자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엘리자베트가 쿠르츠를 슬쩍 쳐다보았다. “포로를 잡을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다. 어느 누가 비밀통로를 알아내서 침입자들을 파견했는지 심문해야 마땅할 텐데, 그 과정을 당연하다는 듯 생략해버렸다. 이미 우리 공화국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뜻이야.” “…….” 엘리자베트는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천천히 꼬았다. “본인은 이번에 전투력이 낮은 부대를 파견했다. 포로로 잡히기 쉽게 말이다. 하지만, 그런가. 역시나 벌써 알고 있었는가……일부러 사르데냐어를 쓸 줄 아는 대원들을 추려서 보냈건만 아무런 쓸모도 없었군. 뭐, 소득은 있었다. 단탈리안이 제대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춤을 신청하는 것치고는 꽤나 과격하지 않은가. 이래서야 거절하고 싶어도 오기가 들어버리기 마련이지. 쿠르츠, 사절단을 준비해라. 두 번째 무도회를 개막할 시간이다.” “예, 통령 각하.”   00452 DANTALIAN =========================================================================                        * * * “그렇게 야만적으로 취조를 해대다니, 공화국 놈들……!” 루크가 씩씩거리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지금 막, 루크와 나는 공화국 정보부에서 풀려난 참이었다. 루크는 정보부원들의 횡포에 상당히 마음이 상한 것 같았다. 내가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루크를 달랬다. “적어도 폭력은 쓰지 않았잖아. 그 나름대로 신사적인 대응이야.” “하지만 진실의 마법에다 약물까지 썼어! 이건 우리를 망명자로 대접하는 게 아니야. 대놓고 간첩으로 취급하는 거지!” 루크가 주먹으로 벽을 쿵, 하고 쳤다. 튼튼하게 지어진 돌벽이 움푹 파이면서 돌가루를 떨어트렸다. 루크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렸다. “나는 그렇다 쳐도 데이지, 너는 커스토스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공녀야. 단탈리안 대부께서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양자로 들어가시면 너는 제국 황위의 계승권자가 된다고! 정성스럽게 모시지는 못할망정 감히……!” “괜찮아.” 루크의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이번 취조에서 정보부원들은 나 한 명만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반쯤 의도적으로 루크를 마치 시종 다루듯이 대했는데, 이 때문에 정보부는 루크의 중요성을 나에 비해 한참 낮게 평가했다. 타당한 취급이라 봐도 좋았다. 우리 남매는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에 도착하자마자 감금당했다. 밤새도록 취조가 이어진데다 거기에 더해서 한나절이나 독방에 투옥되었다. 아마 한나절은 내 증언을 검토하는 데 걸린 시간이겠지. 우리가 풀려났다는 것은 달리 말해, 공화국에서 마왕성의 비밀통로를 직접 확인했다는 얘기이다. 과연 공화국이었다. 행동이 매우 빨랐다. 아니, 여기서는 통령이라는 여자를 높이 평가해야 할까…….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스스로 성씨를 버려서 단지 엘리자베트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이 권력자는, 초면부터 내 눈에 거슬렸다. 우리가 경비대장을 붙잡아서 인질극을 벌이자 그녀는 잠옷 차림에 망토만 달랑 두른 채 걸어나왔다. 보는 사람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핏줄을 증명하는 은빛 머리카락. 올곧게 등을 펴고 턱을 들어올린 채, 엘리자베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의 시종이라 했는가.’ 한겨울이 연상되는 목소리였다. 차갑지만 매혹적이었다. 나는 원래 그녀를 만나면 저자세로 공손하게 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실물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저 여자는 불경스럽게도 아버님을 '단탈리안'이라고 경칭을 생략한 채 불렀다. 내 아버님이 당신의 친구라도 된다는 말인가. 조금 불쾌했다. 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고귀하신 커스토스 공작 전하의 딸, 데이지 폰 커스토스입니다.’ ‘커스토스? 설마 단탈리안은 자신의 내궁에서 그리 불리더냐?’ ‘통령께서 공작 전하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통령께 들려드릴 얘기거리가 많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뭐, 상관없겠지. 그대가 불리기를 원하는 그대로 불러주겠다. 커스토스의 공녀여. 이 야심한 밤에 우리 공화국의 수도에 침입하여 행패를 부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조를 보건대 상대방도 첫눈에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몇 번의 시선과 몇 개의 문장을 나누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상대방이 얼마나 지독하게 집요한 성격인지 어느 정도 파악했다. 먼저 저 여자는 죽어도 나를 '단탈리안의 딸'이라든지 '단탈리안의 여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미 정보부를 통해서 내가 데이지 폰 커스토스와 인상착의가 똑같음을 확인했을 텐데도.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저 여자는 내가 아버님과 매우 친밀한 사이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망국의 황녀 주제도 모르고 아버님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님은 필요 이상으로 눈앞의 여인에게 집착했다. 정반대로 통령이 아버님에게 집착한다고 해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문제는 눈높이의 차이였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아버님을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조금 머리가 나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콧대를 눌러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경비대장을 풀어주었다. 내 칼날이 경비대장의 목에서 떨어지자, 경비대장은 허겁지겁 저쪽을 향해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트 통령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호오. 자발적으로 인질을 풀어주어도 괜찮겠느냐.’ ‘어차피 통령 각하를 뵙기 위해서 잡은 인질입니다. 저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오래 붙잡고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 엘리자베트 통령이 팔짱을 끼었다. ‘커스토스의 공녀여. 지금 일곱 명의 검주(劍主)가 그대를 몰래 포위하고 있다. 인질이 풀려난 이상 우리가 공격을 자제할 이유 또한 사라졌노라. 지나치게 오만한 것 아닌가?’ ‘일곱 명이 아니라 아홉 명이겠지요.’ ‘…….’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흉흉해졌다. 통령을 빈틈없이 호위하고 있는 무사들이 이쪽을 향해 반발자국 내딛었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일곱 명의 검주 이외에 철저하게 은신하고 있는 나머지 두 명까지 간파당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못해도 검주 이상의 실력자라는 사실을 저쪽도 알아차렸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대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다음에 고했다. ‘저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강대한 마왕 바알을 참하였고, 마왕 아가레스를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프랑크 제국의 대리장군인 가스파르 드 타바느 원수에게 명예로운 결투로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는 귀국에 망명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제대로 정치적 망명자로 대접하라는 얘기였다. 병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읊은 전공이 워낙에 압도적인 탓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건대, 아버님이 내게 마왕들을 참하도록 명령한 것은 먼 훗날을 위해 안배해둔 것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경우에 따라 나를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로 내세울 계획이었다. 마왕의 양녀인 내가 황제로 등극하면 주변국은 물론이고 인민들이 거세게 항의하겠지. 아무리 인간이라 해도 어떻게 마왕의 여식을 황제로 떠받드느냐,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하고. 그때 내 전공이 빛을 발한다. 서열 제1위의 마왕과 서열 제2위의 마왕을 잡은 인간. 이걸 대대적으로 과시하면 반발이 크게 적어진다. 오히려 마족과 인간, 양쪽에 공평한 황제라는 인상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아버님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거미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정말 정확한 비유였다. 사방에 거미줄을 뿌려놓음으로써 만전을 기한다.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준비해둔다……아버님 이외의 모든 인물은 단지 거미줄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아사해가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아버님에게 경의를 표해라. 나는 통령의 눈을 올곧게 쳐다보았다. 잠시 뒤, 통령이 입술을 열었다. ‘공화국은 출신을 묻지 않고 인민을 받아들인다. 진정으로 망명을 바란다면 아국은 기꺼이 그대를 환영한다. 허나 모종의 절차가 필요함은 그대 또한 알고 있을 터.’ ‘물론입니다.’ ‘제군. 모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성심성의껏 대접하도록.’ 엘리자베트 통령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한도 끝도 없는 취조였다. 정보부 요원들이 둘러싸서 수백 가지의 질문을 퍼부었다. 전원이 극도로 숙련된 전문가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정보망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하긴, 독재가 철저히 이루어질수록 정보부 같은 곳이 융성하기 마련이었다. 질문을 폭포처럼 쏟아부어서 내 정신을 흐트러트릴 의도였을까. 미안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님은 훈련을 빙자하여 내게 보름 내내 쉴 새 없이 고문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정신을 유지했다. ‘정말로 단탈리안을 배신했습니까?’ ‘이때 단탈리안은 서열 제71위인 마왕을 가리킵니다. 그를 배신한 것이 사실입니까?’ 정보부 요원들이 저들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어서 추궁해왔다. 아버님의 무시무시한 '수업'에 비교하자면 이런 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조금 심심해서 오히려 이쪽에서 질문들을 역으로 이용해주었다. 그 결과, 바르바토스는 정보부에서 감시하는 대신 어디까지나 내 관할 아래 놓였다. 지금쯤 통령의 개들은 자기네가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노라고 자화자찬하고 있겠지. 엘리자베트는 실로 나를 성심성의껏 대접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정성껏 그녀의 부하들을 요리해주었다. 나로서는 잘못한 게 하나 없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 통령은 나를 끝까지 의심할 테지만, 일단 정보부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목적은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루크와 다르게 정작 내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이래 놓고 어디 허름한 방구석에 감금해봐. 내가 난리를 칠 거니까.” 루크가 씩씩거리면서 복도 끝자락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정보부 건물의 지하에 마련된 곳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허락 없이 여기서 빠져나가면 안 되었다. 방은 꽤 넓었다. 정중앙에는 바르바토스가 반(反)마법 사슬에 온몸이 묶인 채로 매달려 있었는데, 매우 강력한 마취제가 투입된 탓인지 기절해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왕실처럼 호화스러운 방이었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네.” 루크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지못해서 봐준다는 느낌이었다. 아버님을 배신하고 타국의 정보부에 감금당하다시피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루크는 태평했다. 대담한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일까. 여동생인 내가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해봐도 루크는 후자에 가까웠다. 나는 침대를 향해서 걸어갔다. 등 뒤로 루크가 말했다. “어? 바로 잘려고?” “아마 몇 시간 안에 통령이 다시 호출할 거야. 그때까지 눈을 붙여두게.”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고슴도치처럼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보부에서 보낸 이틀이 알게 모르게 내 신체에 피로를 강요했을 터. 이렇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몸의 피로를 풀어주어야 했다. 천천히 잠이 몰려왔다. 나는 언제 어디서도 잠이 들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아버님의 수업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심심찮게 '보름 동안 자지 말고 버텨라'라든지, '10분 쪽잠 이외에 허락하지 않겠다'라든지, 극한의 고통을 버텨내야 하는 과제를 내렸다. 그 훈련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이곳에 있었다. 당장 아버님이 곁에 없을지라도, 아버님은 내 몸안에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내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아버님이 내게 입술을 맞춘 그날의 광경이었다. 아버님의 눈썹 숫자, 입술의 부드러움과 온도,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나는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 조금 곤란했다. 아버님의 입맞춤을 상상하니까 몸이 아주 약간 뜨거워졌다. 하지만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루크가 있을뿐더러 사방에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깔려 있었다. 여기서 손장난을 쳐버리면 곧장 엘리자베트 통령에게도 보고가 들어갈 것이었다. ……참자. 나는 의식적으로 아버님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잠이 들 때마다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위로하던 것이 이미 오랜 버릇이 되어버린 터라, 나는 나 자신의 습관에 대항하여 처절하게 맞서 싸워야만 했다. 결국 내가 잠이 든 것은 세 시간 뒤. 그동안 루크는 반대편 침대에서 벌써 잠이 들어버리고 신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 취조에서는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1인실을 요구해야겠다. 꼭 메모리아 아티팩트가 깔리지 않은 방으로.   00453 DANTALIAN =========================================================================                        * * * “볼프람 하델베르크라고 합니다. 미흡하게나마 공화국을 대표하여 공작 전하를 뵙게 되었습니다. 향후, 모쪼록 귀국과의 영구한 평화를 위해 진력하겠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중순.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예측이 맞아 떨어졌다고 자축해야 할까. 일단 저쪽에선 교역이다 관세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고 찾아왔지만, 전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목적은 어떻게든 황제를 만나서 진위를 확인해보는 것이겠지. 그 전에 법무상인 나를 먼저 감당해야겠지만. 내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상대방을 집무실에서 맞이했다. “하델베르크 상서로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륙의 언어는 물론이고 마족의 언어까지 통달하셨다고.” “공작 전하께서 소인을 알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환히 웃었다. 이제 삼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미청년에서 미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체력을 살짝 잘못 관리했는지 얼굴에 볼살이 붙었지만 덕분에 후덕한 인상이 풍겨서 오히려 좋았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일찍이 제국의 전통적인 명문가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였다. 이십 대 무렵, 엘리자베트가 이끌던 황녀파에 투신하여 공화국 건립에 일조하고, 지금까지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미 청년 시절에 한 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뿐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실세는 죄다 젊었다. 하긴 엘리자베트 통령부터가 아직 이십 대에 불과했다. 젊고 유능한 정부. 그것이 현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유능함이 곧 국력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게 난세의 비극이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당신이 제일 절절하게 통감하고 있겠지. 본래 공화국에는 든든한 우방들이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었다. 브르타뉴 왕국, 폴리투니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 이제 공화국을 편들어주는 나라는 없다. 아나톨리아 제국 하나뿐이다. 바로 내가 공화국의 팔다리를 교묘하게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에게 있어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으리라. ……나란 인간은 명문가 태생에 20대 개국공신인 수재를 좌절시킨 것인가. “공작 전하?”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잠깐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요새 눈앞에 상대를 두고도 종종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생겼다. “미안합니다. 천재로 유명한 하델베르크 상서에게 칭찬을 받으니 조금 어색해서 말입니다.” 내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재는커녕 둔재로 자평하고 있지요.” “공작 전하께서 둔재인 것입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이해했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이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면 인간은 당혹스럽고 화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되받아쳐줄 방법이 없으므로. 내가 조곤조곤 타이르듯이 말했다. “저의 처지를 이해해주십시오, 상서. 귀국에는 천재가 지나치게 많지 않습니까. 통령 각하는 물론이고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슐라이어마허 정보부장, 거기에다 경까지. 방심은 절대로 금물이지요. 여러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저를 의식적으로 과소평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잠깐이지만 숨을 멈추었다. 방금 나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정보부장으로 칭했다. 이건 외부인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될 극비사항이었다. 슐라이어마허의 공식 직함은 근위대 사령관이지 정보부장이 아니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겠지.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저희를 상대하다니 과한 말씀입니다. 어찌 소국에 불과한 저희 공화국이 존귀하신 공작 전하를, 더 나아가 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제국을 감히 상대할 수나 있겠습니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가 홍차를 홀짝거렸다. 진정제가 들어간 홍차였다. 지금은 의족으로 대체된 왼쪽 다리가 이따금씩 미친 듯이 가려웠는데, 그걸 가라앉히려고 제레미한테 진정제를 처방받았다. 향이 꽤 좋아서 개인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저는 온 세상을 통틀어서 오직 귀국만이 우리 제국의 앞날을 가로막을 자격이 있다고, 마음 속 깊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전하.”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벌떡 일어서더니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안쓰러울 정도로 처량한 얼굴로 고했다. “저희는 절대로 제국을 거스를 뜻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소인의 알량한 말을 믿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국이 강국을 상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국경이 접한 상태에서 적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어주십시오.” “국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단숨에 버리는군요. 그대와 같은 사람이 통령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상, 공화국은 계속해서 성세를 누리겠지요.” “…….”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국의 외무상서가 갑작스레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태연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공화국을 경계하겠다는 내 태도는 바윗돌처럼 확고부동했다. “어째서 저희를 그리 경계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는 삼면이 제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헬베티카 연방까지 고려하자면 사실상 사면이 포위된 셈입니다. 제국의 온정에 기대지 아니하면 생존할 수조차 없는 소국, 그것이 저희 공화국입니다.” “그렇지만 남쪽으로 사르데냐 왕국과 혈맹을 맺고 있었지요. 사르데냐가 흔들리자 곧바로 다음 동맹국으로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였습니다. 가히 절묘한 외교력입니다.”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 처절히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신기한 광경이 집무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공화국의 외무상서는 필사적으로 자국을 깎아내리는 반면, 적대국의 법무상인 내가 공화국을 추켜세웠다. “그 증거로 지난 국화전쟁에서, 저희 통령은 결코 제국군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만일 저희가 제국에 역심을 품고 있었다면 어찌 그러했겠습니까?” “어차피 사르데냐는 전 국토가 유린된 상황이었지요. 썩은 동앗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르데냐를 버리는 대신, 새로이 아나톨리아 제국을 선택한다……전략적으로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이지 않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었다. “통령은 그때 군단을 이끄느라 바빴지요. 하델베르크 상서. 경이 통령을 대신하여 아나톨리아 제국과 교섭했겠지요. 훌륭합니다. 결과적으로 공화국은 과거의 동맹국보다 훨씬 더 강대한 국가를 우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잃어버린 것 하나 없이.” 정말로 훌륭했다.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에게 건네준 것은 베네치아였다. 이 풍요로운 도시는 그러나 공화국의 영토가 아니라 사르데냐의 영토였다. 즉, 공화국은 자기네 땅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땅을 가지고 외교적인 거래를 이루어냈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뻔뻔하고 솜씨가 좋았다. 엘리자베트의 실력에는 언제나 놀랄 따름이었다. 꼭 본받고 싶었다. “저, 전하. 어찌해야 저희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입니까?” “진심이라니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귀국의 진심을 저만큼 잘 알아주는 사람이 대륙에 달리 없다고 자부합니다만.” 그렇군요, 하고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국경지대에 빼곡하게 건설해둔 요새들을 모조리 철거하십시오. 베네치아에 주둔하고 있는 아나톨리아의 용병 군단을 해체하십시오. 그리고 공화국의 정규군을 항상 5천 이하로 유지하십시오. 이 정도면 귀국을 조금은 믿을 수 있겠군요.” “그건……현실성이 없는 조건입니다! 부디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머리를 바닥에 세게 찍었다. 소리가 제법 크게 울릴 정도였다. 카펫이 깔려 있으니까 통증이야 없겠으나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 자체가 처절했다. 내가 물끄러미 하델베르크를 내려다보았다. “귀국은 크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귀국에 망명을 신청한 제 양녀.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녀를 다름 아니라 저의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생각합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역시 눈앞의 남자도 연기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내 마음속의 경계심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무슨 말씀인지 소인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제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여기십시오. 제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인간이 바로 귀국의 통령과 제 양녀입니다. 만약 귀국에서 진정으로 우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면, 제 양녀가 망명을 신청한 즉시 제국으로 되돌려 보냈어야 합니다.” “전하. 소인은 정말로…….” 내가 찻잔을 거꾸로 집어들었다. 붉은 홍찻물이 바닥에 주르륵 떨어졌다. 내 무례한 짓거리에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할 말을 잃었다. “그대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델베르크 상서. 그대는 우리 제국에 방문한 것 자체로 이미 모든 임무를 끝마쳤습니다.” 처음으로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얼굴에 진심으로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예?” “제가 양녀의 행방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귀국의 통령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가 시체 인형이라는 것도 이미 옛날부터 직감하고 있었을 겁니다. 통령에게는 새삼스러운 정보도 아니었겠지요.” 상대방의 눈이 흔들렸다. 이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도 구태여 통령은 그대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 “통령은 저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벌일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한층 미소를 짙게 머금었다. 가령, 하델베르크가 황제를 접견하도록 내버려둔다. 이때 이바르의 인형을 써서 상대방을 속인다. 공화국은 아무런 트집도 잡지 못하고 무력하게 물러난다. 평화로운 해결책이다. 단, 이 경우에 엘리자베트는 틀림없이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를 죽여버린다. 당연하다. 이쪽의 트집을 잡는 데 써먹을 수 없는 이상,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는 쓸데없이 위험한 폭탄물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엘리자베트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단탈리안이여. 그대도 알다시피, 본인에게는 바르바토스와 그대의 양녀가 있다. 황제가 시체 인형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겠는가? 공표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경우에 두 사람은 죽는다. 요컨대 협박. 볼프람 하델베르크 자체가, 통령과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쓰인 협박편지였다. 물론 하델베르크 본인은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알려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통령과 나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어서야 마냥 불쌍하지 않은가. “당신은 오늘 저녁에 황제 폐하를 접견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티팩트든 뭐든 마음껏 사용하세요. 그리고 황제가 시체 인형이라는 사실을 통령에게 전하십시오.” “…….” 전쟁을 벌여볼 테면 벌여봐라. 그런 답신이었다. 선제후 마왕들은 이미 내가 설득해두었다. 벌써 며칠 전부터 용병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참에 다시 한번 전쟁에 돌입해도 상관없었다. 명분도 충분했다.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용병을 모집한다고 둘러대면 주변국에서 의심할 일도 사라졌다. 엘리자베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이대로 바르바토스와 데이지를 얌전히 우리한테 돌려주든가. 아니면 황제가 시체 인형임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면서 전쟁에 돌입하든가. 후자의 경우, 우리쪽에서는 공화국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오히려 공화국이 바르바토스를 납치했음을 폭로함으로써 맞싸움에 들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진흙탕 싸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완전한 복종이냐. 혹은 완전한 대결이냐. 나는 어느 쪽이라도 환영했다. 엘리자베트가 바라는 대로 대응해주면 그만이었다. 바르바토스와 데이지가 반송되면? 공개처형식을 한번 더 열어재낀다. 별로 수고로운 일도 아니다. 폭로전 양상, 맞불 싸움이 되어버린다면――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버린다. 헬베티카 용병은 물론이고 온 대륙에서 병사들을 사들인다. 아나톨리아 제국이든 뭐든 마음대로 공화국을 후원해라. 합스부르크 제국도, 프랑크 제국도 나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아나톨리아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혹시나 몰라서 말씀드리자면 그쪽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제국은 귀국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입니다. 단순한 양자택일이지요.” “…….” “모쪼록 통령과 깊이 상의하고 답신을 보내주십시오.”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00454 DANTALIAN =========================================================================                        “소인이……이곳에서 뭐라고 대답해드릴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대에게는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릴 권한이 없겠지요. 숙소에서 편히 쉬다가 황제 폐하와 저녁 식사나 함께합시다.” 내가 고개를 숙여서 책상에 올려져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상당히 무례한 짓거리였지만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순순히 물러났다. 내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본래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는 성격인 것일까. 아마도 양쪽 전부이겠지. 나는 말없이 볼프람 하델베르크를 내보낸 직후, 손잡이 종을 울렸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들어왔다. 데이지가 사라진 이후로 내 시중은 이바르가 전담했다. 데이지에 비해 약간 어수룩한 면이 있었지만 업무에 지장이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선제후 마왕들은 이미 접견실에 모여 있느냐?” “예. 반시진 전부터 모여 있다고 얘기를 들었나이다.” “이런,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만들었군.” 내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의족이 달린 왼발에 지팡이까지 동원해서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었다. 이바르가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주려고 했는데, 고개를 흔들어서 거절했다. “아직 다른 사람한테 부축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정도로 몰락하지 않았다.” 이바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하…….” “되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은 것 아니더냐.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소모하느니 군자금을 관리하는 데 주력하도록. 헬베티카 연방에는 연락을 넣었겠지?” “……예.” 내가 조금 기우뚱거리면서 문을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 모양새가 우스웠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좋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헬베티카 연방의 용병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이번에도 라우라가 지휘를 맡을 것이라고 슬쩍 정보를 건네라. 그럼 용병들도 쉬이 우리를 따르겠지.” “그, 하온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음?” 이바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떻게 운을 때야 할지 모르겠다는 안색이었다. 내가 눈짓으로 차분하게 재촉하자, 이바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라줄리 국무상서가 지금 접견을 청하고 있나이다.”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태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상념들이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평원파 반란군에 대한 계략이며, 바르바토스를 외교적으로 활용하는 책략이며, 엘리자베트와 데이지에 대한 방책 등, 마치 알코올이 증발하듯이 싹 사라졌다. “지금? 여기에?” “공화국의 사신이 출입하자마자 거의 동시에 왔습니다. 전하께서 사신과 담화를 나누시는 동안, 국무상서가 문밖에서 전하를 쭉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눈을 부라렸다. “설마 내 왼발에 대해 라피스한테 말했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라줄리 국무상서는 전하께서 지난 국화전쟁 때 부재하시는 동안, 이곳 황궁의 관료들과 다방면에 걸쳐서 인맥을 쌓았습니다. 그쪽에서 정보가 샌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이바르도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내 왼발에 관하여 절대로 라피스나 라우라한테 알리지 말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다. 두 사람 모두 마왕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쪽에서 정보를 퍼트리지 않는다면, 마왕성의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이 진실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건만……. 어쩔 수 없는가. 이미 들켰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뒤돌아서서 벽 쪽으로 다가갔다. 등 너머로 이바르가 말을 걸었다. “단탈리안 님?” “왜 부르는고.” “그게……지금 뭐하시는 것이옵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내가 창문틀에 오른발을 올렸다. “라피스가 들이닥치기 전에 얼른 탈출해야 되겠다.” 그렇다. 이제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 여기는 3층이옵니다!?” 공손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던 이바르가 경악했다. “떨어지면 옥체가 손상되어버립니다!” “괜찮아. 아무런 문제도 없다. 기껏해야 다리 한쪽이 부러지고 말겠지. 나는 이미 왼발이 부러졌으니 땅바닥에 착지할 때 왼발을 사용하면 된다. 즉……나는 완전히 안전하다.” “완전히 논리가 글러먹었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무슨 헛소리를 남발하시는 겁니까!” 이바르가 달려와서 나의 허리를 붙잡았다. “놓아라! 당장 놓지 못하겠는가! 이바르는 아직 라피스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몰라서 이러는 것이야! 녀석한테 걸리면 잔소리가 다섯 시간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당장 선제후 마왕들이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는 말이냐!” 내가 바둥거렸다. 이바르는 팔뚝이 여리고 가느다란 주제에 쓸데없이 악력이 강해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아니되는 겁니다! 다리도 성하지 않은 분께서 3층 높이를 뛰어내리시려 하다니, 무모한 짓에도 정도가 있사옵니다! 게다가 국무상서가 무서운 여자라는 건 소녀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바르의 얼굴을 다급하게 쳐다보았다. “이바르. 네가 나를 안고 뛰어내리는 것이다. 우리 둘이서 함께 도망치자꾸나. 그럼 위험할 일도 없거니와 만사가 태평해지니 실로 완벽한 해결책이다.” “송구하오나 아니되옵니다.” 이바르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결사적인 각오가 빛났다. “그러면 제가 나중에 국무상서한테 혼나버리지 않습니까!” “이바르, 너마저!?” 이제 보니 내가 위험하다는 것 때문에 말린 게 아니라 이대로 나를 도망치게 내버려두면 자기가 혼날까봐 말린 것이었다. 이럴수가.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 소리 질렀다. “주군의 안전보다 네 일신의 보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냐!?” “애시당초 전하께서는 혼쭐이 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국무상서와 군무상서한테 사실을 숨기라고 명령하시다니,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옵소서!” 이바르가 겁나게 억센 손아귀로 나를 창문틀에서 끌어내렸다. 덕분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정말로 이게 호감도와 충성도가 극한까지 찍힌 연인이요 충신이 저지르는 행태란 말인가. “군무상서야 세상사에 귀가 어두우니 어찌저찌 속인다 치더라도 상식적으로 국무상서를 기만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잖습니까! 국무상서가 가지고 있는 인맥만 헤아려도 능히 대륙의 절반을 뒤덮습니다!” “어, 언제부터 라피스가 그리 된 것이냐?” “그야 전하를 모시고 난 이후부터지요!” 이바르가 이빨을 으득 갈았다. “전하에게 어떻게 조금 비벼보려고 하는 인사들은 죄다 국무상서의 마음부터 얻으려고 온갖 뇌물을 싸들고 찾았으니, 마계의 대공에서부터 각종 상단의 주인, 심지어 선제후 마왕들까지 국무상서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안 되기는요.” 이바르의 눈이 불타올랐다. “전하께서 외정만 돌보시고 내정은 모조리 국무상서한테 맡겼으니 일이 이렇게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있겠나이까! 전부 전하께서 자초하셨습니다. 얌전히 국무상서에게 잡혀주십시오.” 이바르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원한이 서려 있었다. 단순히 국무상서한테 혼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담긴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원한이, 묵히고 묵혀서 이내 썩어버린 무언가가 이바르의 가슴을 경유하여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죽하면 내가 어깨를 찔끔거릴 정도였다. “이바르……혹시 너, 라피스한테 당하고 살았느냐?” “무슨 소리인지요. 전혀 아니옵니다.” 이바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설마 과거의 부하한테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유로 마음이 상할 만큼 제가 속이 좁은 성격이겠습니까. 예에. 그럴 리가 없지요. 소녀를 일개 시종으로 전락시켜버린 단탈리안 전하께 유감을 품는다던가, 그럴 일은 일절 없나이다.” “완전히 마음이 꽁해 있거늘 뭐 아닌 척을 하는고!”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이바르는 라피스에게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심지어 라피스한테 당한 수모를 당사자가 아니라 나에게 풀려 하고 있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아, 전하! 정의의 심판을 받으십시오!” “이제는 아예 내숭을 떠는 수고조차 기울이지 않는구만!” “소녀한테 가식을 떨지 말라고 충고해준 게 어디 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그러나 어린애와 같은 진지함으로 필사적으로 툭탁거렸다. 농담이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이 일전에 달려 있었다. 그때였다. “집무실이 무척이나 소란스럽군요.” 뚝, 하고. 서로의 옷가지를 쥐어뜯으며 난동을 부리던 우리 두 사람의 몸동작이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멈추었다. 이바르와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는 라피스가 있었다. “개인의 집무실이란 언제나 그 주인의 품격을 상징합니다. 언제나 차분해야 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무겁지 않되 엄숙한 중도를 지켜야 하지요. 이바르 양.” “예, 국무상서.” 이바르가 언제 나와 드잡이질을 했냐는 듯이 곧바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태세를 전환하는 속도가 가히 고블린의 번식속도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내숭을 떨어본들 물이 엎어진 지 오래라. 라피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바르를 좌절시켰다. “오늘밤 업무가 끝나고 제게 찾아오시길. 이바르 양의 업무 태도에 관련해서 주의를 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구, 국무상서. 소인은 어디까지나 전하께서 다치실까 저어되어……!” “이의는 그때 듣도록 하겠습니다.” 라피스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라피스는 조용히 내 왼발을 먼저 살펴보았다. 문득, 라피스가 멈칫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의 왼발을 주욱 내려다보았다. “…….” “…….”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침묵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그 사이에 이바르는 눈치 빠르게도 혼자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녀석을 불러잡고 싶었지만, 라피스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버린 이상 말문을 열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났다. “단탈리안 님.” “……응.” 그리고 또 다시 침묵. 라피스는 입술을 자그맣게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천천히 닫았다. 나에게는 어떠한 질책보다도, 잠시 열렸다가 도로 닫힌 라피스의 입술이 훨씬 더 뼈아프게 가슴을 후려팠다. 나는 차마 잘못하다고 사과할 수조차 없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라피스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체되어, 꼭 철없는 어린애마냥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라피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 양에 대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그, 그래.” “본래 단탈리안 님께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버린 이상 제가 입을 다물 수는 없습니다.” 무슨 얘기일까.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라피스가 데이지를 언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다소 얼이 빠진 표정으로 얘기를 들었다. 일종의 항복이었다. 라피스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순순히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대체로 니블헤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는 알았습니다. 하지만, 단탈리안 님. 단탈리안 님께서는 데이지 양에 대해 한 가지 오해하고 계시는 지점이 있습니다.” “오해……?” “예.” 라피스가 어쩐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척 중요한 오해입니다.”   00455 DANTALIAN =========================================================================                        “중요한 오해라니. 내가 데이지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거의 없을 텐데.” “……데이지 양은 단탈리안 님의 영원한 증인.” 라피스가 말했다. “그것이 단탈리안 님께서 그리신 구상이겠지요. 데이지 양은 그 구상에 어울리고자 최대한 힘껏 노력했습니다. 온갖 언어를 익힌 것도, 학문과 무예에 힘쓴 것도, 어떻게 해서든 단탈리안 님과 대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 분투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뭐. 기특하기는 기특한 일이지. 나도 녀석을 인정하고 있어.” “하지만 데이지 양이 자력으로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어?” 라피스가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본래 데이지 양은 어찌하여 자신이 앙녀가 되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탈리안 님을 적대한다든지, 그런 생각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데이지 양은 단탈리안 님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함께 걸어가기를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일전에 데이지 양이 저한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왜 단탈리안 님께서 자신의 몸을 취하지 않는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다시 침묵. 드물게도 내 머리가 대화의 맥락을 쫓아가지 못했다. 라피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해석하기 위하여 두뇌의 모든 부분이 최대출력으로 엔진을 돌렸지만, 모터가 쓸데없이 허공에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한참이 지나서 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데이지 양은 아직 단탈리안 님의 의중을 정확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조언했습니다. 단탈리안 님께 필요한 것은 연인이 아니라 이해자라고.” “…….” “데이지 양에게는 그것이 기점이 되었겠지요.” 여전히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다만 라피스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 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데이지가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데 있어 라피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뭐 어디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겠는가. 데이지가 생각보다 조금 더 멍청했다. 그런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라피스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진 그늘이 조금 더 짙어졌다. 나는 마음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 라피스의 안색이 바뀔 때마다 나는 심장이 조여지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단탈리안 님.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닙니다. 데이지 양이 단탈리안 님께 호감 내지는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정?” “예. 데이지 양을 이끄는 원동력은 단탈리안 님에 대한 증오심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내가 오른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 작게 웃었다. 라피스가 하는 말을 도중에 끊어서 미안했지만 이건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었다. 확실하게 짚어두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건 절대로 아니야. 나한테 호감을 품어? 데이지가? 차라리 바싸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게 더 그럴듯하지.” “…….” “왜 이리 표정이 진지하다 싶었더니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라피스. 내가 이유는 말해줄 수 없어도 데이지는 내게 호감이 눈꼽만치도 없어.” 그렇다. 호감도 시스템은 절대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호감도를 확인하는 데 약간 주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건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모조정원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가 모조정원이라도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이게 현실이었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사람들이 숨을 쉰다. 생각을 한다. 움직인다. 괴로워하며 고뇌하고, 슬픔을 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천박함과 고귀함 사이에서 끝없이 오간다.――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그렇기에 나는 일찍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이전의 내가 아니라 단탈리안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 세계를 받아들였다.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나는 살인자이며 학살자이다. 여기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감도 시스템은 철벽. 예전에는 축복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저주에 불과한 속박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걸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잘도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 한 발자국 뒤늦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탈리안 님. 데이지 양이 어떻게 명령을 거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피스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노예각인에 속박된 사람은 결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데이지 양은 보란 듯이 대놓고 단탈리안 님의 지시에 거역했습니다. 원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명령들 사이의 모순을 사용했겠지.” 내가 즉답했다. 그건 나도 고민하고 또 고민한 사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이바르한테 명령해서 노예를 한 명 구해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서로 모순되는 명령을 노예한테 지시해보았다. 그러자 노예는 어쩌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노예각인은 순전히 주관적으로 명령을 받아들여. 자기가 생각하기에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때 노예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 데이지 녀석도 그 틈을 노린 거지.” “옳습니다.” 라피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단탈리안 님.” “…….” “노예는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이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령이 모순된 상황에서조차 노예가 주인에게 해악이 되는 행동을 취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 예컨대 노예각인에 두 가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해보자.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을 지켜라’라는 명령이 있고,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라’라는 명령이 있다. 이런 명령들이 입력된 상황에서 만약 주인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주인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주인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기 목숨을 버려서도 안 된다. 진퇴양난이다. 명령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럴 때 노예는 주인에게 이로운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노예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인을 구출하겠지. 라피스는 지금 그걸 지적하고 있었다. “데이지 양은 처형식을 제지하는 것이 단탈리안 님을 위한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증오로는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탈리안 님. 오로지 정반대의 감정만이 데이지 양을 이끌 수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술책을 부렸을 거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술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몰라.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로 교묘하고 복잡한 수단을 동원했겠지. 하지만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었다는 것만큼은 아니야.” 그렇다. 매우 단순한 선택의 문제였다. 첫 번째, 라피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에 나는 호감도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두 번째, 내 추측을 받아들인다. 이 경우에는 데이지가 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정교한 계책을 부렸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할까. 당연히 두 번째였다. 호감도 시스템이 무너졌음을 믿느니 데이지의 계략을 믿는 것이 훨씬 더 합당했다. 단지 라피스는 호감도 따위를 알지 못하므로 첫 번째 가능성을 진지하게 믿는 것이었다. 요컨대 정보의 차이 때문에 빚어진 오해였다. “라피스. 이번에 데이지가 저지른 일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내가 라피스의 오른손을 꾸욱 잡았다. 서늘하게 기분이 좋은 감촉. 나는 손이 뜨거운 편이라서 라피스를 만지는 것이 항상 즐거웠다. “네가 뭔가를 조언했다고 해서, 데이지의 증오심은 어디까지나 데이지 본인이 만들어낸 감정이야. 만약 거기에서 책임을 따진다면, 온전히 나의 책임이지 결코 네 책임이 아니야.” 내가 부드러운 눈길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라피스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정말이야.” 아마도 라피스는 지금 상황을 모조리 자기 책임으로 느끼고 있겠지. 데이지가 저런 사단을 벌인 것도, 그것 때문에 내가 왼발을 절단해버린 것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섣부른 조언 때문이었다고 자책했을 것이다. 라피스는 자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니까. 아무리 괴로워도 내색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 라피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나는 라피스를 껴안으려고 슬그머니 양팔을 벌렸다. 그런데 라피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라피스는 아까보다 더욱 굳센 의지를 시선에 담아서 나를 직시했다. 당황스러웠다. 이토록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일은 라피스에게 무척이나 드물었다. “라피스……?” “저를 믿어주세요.” 내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단탈리안 님……이번만큼은……저를 믿어주세요.” 라피스가 괴로운 듯이 말을 조금씩 토해냈다. 아니, 그녀는 정말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한없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라피스는 지금 틀림없이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 나는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추측을 수정한다. 라피스가 자신을 믿어달라고 부탁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부탁한 적이 없는 라피스가 고통에 둘러싸인 얼굴로, 제발 신뢰해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 따위는 얼마든지 뒤집어야 마땅했다. 제아무리 합당한 판단일지라도 라피스가 진심으로 재고를 부탁하면, 당연히 심각하게 의심해야만 했다. 라피스의 부탁에는 그만한 무게와 가치가 있었다. 내가 의자에 걸어가서 앉았다. 라피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집무실에서 나는 사고의 바다에 잠겼다. “…….” 어떻게? 라피스의 말대로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이는 상태창에 드러나는 호감도 표시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찌해야 호감도가 잘못 표시될 수 있는가. 그런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만에 하나라도, 천만분의 일이라도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인가. “라피스. 하나만 확인할게. 데이지가 나에게 품은 감정은 정말로 우정이나 연모와 같이 일종의 긍정적인 감정이야?” “예, 단탈리안 님.” “……안 되겠군. 정보가 부족해.” 내가 지팡이로 방바닥을 가볍게 툭툭 찍었다. 나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허공을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데이지 양은 언제나 단탈리안 님께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무언가 상당히 특이하다거나 이상한 지점은 없었어?” “도움이 되는 정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단탈리안 님께서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가. 빠짐없이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것도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스쳤다. 만약 데이지가 이바르처럼 인형을 사용했다면 어떨까? 데이지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과 쏙 닮은 인형을 제작했다. 데이지 본인은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지만, 인형은 본체와 다르게 호감을 품지 않았다……그런 시나리오가 가능하지 않을까? “음.” 상당히 빈틈이 많은 시나리오였지만 아예 검증할 가치가 없진 않으리라. 내가 손잡이 종을 집어들어서 흔들었다. 경쾌한 금속음이 울리고 잠시 뒤, 이바르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이바르는 아직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부르셨나이까, 전하.” “이바르. 급한 명령이다. 그대가 보유한 인형들 중에 아무거나 지금 즉시 가져올 수 있겠는가?” 이바르가 눈을 깜빡거렸다. “네, 물론입니다. 여기 황궁에 숨겨둔 인형도 열두 체나 있으니까요.” “의식을 인형으로 옮긴 다음 여기에 와주어도 괜찮겠는고? 잠깐 시급하게 검증해볼 일이 있다.” “이를 말씀이옵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길.” 이바르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집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살았다, 라는 감정이 전해졌다. 아마 라피스가 자기를 질책할 줄 알고 잔뜩 겁먹은 모양이었다. 삼 분 정도 흘렀을까. 집무실로 낯익은 얼굴의 청년이 들어왔다. 부프에. 내가 처음으로 이바르를 만났을 때 그녀가 사용하고 있던 인형이었다. 내가 쓰게 웃었다. “그 모습은 무척 오랜만이군.” “전하께 약간의 여흥이 될까 싶어서 이 몸을 골랐습니다.” 청년이 빙그레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상태창.’ 하고 내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눈앞에 푸른 빛깔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00456 DANTALIAN =========================================================================                        나는 상태창을 유심하게 훑어보았다. ━━━━━━━━━━━━━━━━━━━━ 이름: 부프에 라니에리카 종족: 흡혈귀(인형)  본체: 이바르 로드브로크 속성: 악(-20) 레벨: 34    명성: 4522 직업: 상인(A) 통솔: 30/30  무력: 42/42  지력: 71/71 정치: 59/59  매력: 76/76  기술: 10/10 호감도: 100 *칭호: 1. 쿤쿠스카의 간부후보 *능력: 거래A, 회계B, 산술B *스킬: - 현재심리: ‘라피스 라줄리의 기분이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군. 저 녀석,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예전에 알몸을 본 것 때문에 지금까지 꽁해 있는 것이겠지. 으으, 속 좁은 것…….’ ━━━━━━━━━━━━━━━━━━━━ 이름란에 틀림없이 부프에라고 적혀 있었다. 능력치 또한 이바르의 본체와 많이 달랐다. 다만 가장 중요한 부분――호감도만큼은 이바르와 마찬가지로 정확히 100이 표시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인형과 같은 술수를 동원해서 데이지가 나를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만약 라피스의 말마따마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면 상태창에도 여과 없이 나타났겠지. 하지만 데이지는 언제나 호감도 0을 자랑했다. 라피스의 가설은 간단히 부정되었다. “역시 그런가.” “예?” “아니다. 혼잣말이다. 수고했노라, 이바르.” 이바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애당초 '데이지 인형설'은 너무나도 허점이 많았다. 만약 데이지가 인형 내지는 그 비슷한 물건을 대역으로 세웠다고 해봐라.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했겠는가. 데이지는 인형술사가 아니었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가설이었다……. 다시 확신했다. 호감도 시스템은 철옹성. 온갖 기묘하고 약삭빠른 계략을 써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요새와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사실 데이지가 나를 좋아했고 지금껏 펼친 모든 것이 연기에 불과했다는 시나리오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하지만. “…….” 시선을 돌려서 라피스를 훔쳐 보았다. 아까부터 라피스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라피스는 분명히 더 이상 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그녀 기준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을 내게 부탁해버렸다고 여기겠지. 다시 생각하자. 또 다시 가능성을 검토해본다. 데이지는 용사다. 달리 말해,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내정된 아이다. 오로지 데이지만이 호감도 시스템에서 예외로 취급될 가능성은? ……안 된다. 그러면 왜 루크는 호감도가 제대로 표시되는가. 데이지에게 이상이 있으면 루크한테도 있어야 한다. 떠올려라. ‘본인은 모든 마족의 주인, 서열 제72위의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감히 그 관용에 기대어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데이지와 관련된 기억을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되살핀다. 어느 한 군데라도 이상한 지점이 있었는지, 라피스의 가설을 입증할 만한 증거, 아니, 정황이라도 있었는지 알아낸다. ‘제 자신이 오라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쓰레기 새끼임을,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데이지 녀석도 활기에 차 있었지. 목소리가 당당했고 얼굴에도 자신감이 쉽게 드러났다. 그렇지만 수술.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기는 수술을 기점으로 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더 무뚝뚝해지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일 데이지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면 수술 이전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녀석도 나를 눈에 띄게 증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살이 찢어지고 심장이 파이는 고통, 자신을 영원히 노예로 속박시켜버린 악행에 분노했다……. ‘역시, 안 되는군요.’ 그리고 암살 미수. 이쪽이 잠들어버린 틈을 타서 내 목에 단검을 꽂아넣으려고 한 사건. ‘네 년이 죽을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아니요. 당신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나를 죽여볼 수 있더냐? 유감이로군.’ 사실 그 사건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긴 있었다. 데이지의 행동에 다소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당장 불어라. 언제부터 정신을 차렸느냐?’ ‘오늘 햇빛이 났을 때부터.’ 바로 시간차였다. 내가 데이지의 살기를 느끼고 깨어난 시각은 한밤. 반면에 데이지는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기 이전까지, 데이지는 얼마든지 몰래 암살을 시도해본 다음에――모르는 척 관둘 수가 있었다. 구태여 이쪽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서, 자신이 암살을 시도해보았다는 사실을, 나한테 적나라하게 알려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데이지는 일부러 '역시 안 되는군요'라고 소리내어 말했다. 내가 잠에서 깨는 것을 유도했다. 흥분시키고 도발했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 위험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음을 광고하듯이. ‘잭은 누구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항상 악몽을 꾸십니까? 사람 이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계셨습니다. 반복되는 이름이 있더군요. 잭, 호크, 올란드, 리프…….’ 혹시나 정반대라면? ‘그리고 어머니.’ 내 암살을 시도해본 다음에 일어서려고 했지만, 모종의 이유 때문에 차마 일어서지 못한 것이라면.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데이지의 몸을 붙잡아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이유가 그때, 내가 아직 잠에 빠져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자각하지 못한 바로 그 순간, 일어나고 있었다면. 그건. 그런 것이. 그런 게, 있을 리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오른손이 작게 떨렸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아직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검증이다. 철저하게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양손으로 강하게 손깍지를 끼었다. 손이 떨리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바르. 한 가지만 더 부탁할 것이 있다. 괜찮겠느냐.” “전하의 명령이라면 천 번이라도 만 번이라도 기쁘게 수행하겠습니다.” “무소속 마왕들이 반역을 도모했을 때.” 마음이 동요할 때마다 항상 그러했듯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갑고 음산했다. 내가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뚝뚝함과 차가움은 나에게 있어 언제나 연기를 의미했다. “그때 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몇 체 만들지 않았더냐.” “예. 무소속 마왕들을 속이기 위하여 전하와 닮은 인형을 모두 3체 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파괴되었으니 아직 두 개는 남았겠구나.” 이바르가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암살을 대비하는 용도로 쓰임새가 있을까 하여 보관했습니다. 하나는 마왕성에 숨겨두었고, 다른 하나는 황궁에 숨겨두었나이다.” “그걸 지금 가져올 수 있겠느냐.” “물론이옵니다.” “……부탁한다. 그리고 이바르, 그대도 본체로 갈아타서 오도록.” 이바르가 집무실에서 나갔다. 억겁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 표현하는 쪽이 올바를지 모르겠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전하. 여기 대령했나이다.” 이바르가 뒤쪽에 인형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오 분, 십 분 만에 다녀왔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의식을 인형에게 옮기겠다. 도와주거라.” “네, 전하. 잠시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전에도 이바르의 도움을 받아서 인형을 조종한 적이 잠깐 있었다.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무소속 마왕들이 거사를 일으켰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인형으로서 살해당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자적하게 본체로 돌아왔다. “조금 헛구역질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바르가 내 이마에 슬쩍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역겨운 욕지기가 일어났다. 마치 내 손발이 끝없이 짧아져서 죄다 두개골의 범위에 들어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내 몸에서 손이 얼마나 길게 뻗어져 있는지 거리감 자체가 사라졌다. “다 되었습니다. 전하.” 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집무실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왼발에 의족을 찬 내 본체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인형에 의식을 옮기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 별로 유쾌한 체험은 아니었다. “…….” 가슴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어떤 실험에 들어간다. 만약 라피스의 가설이 옳다면 이것이 최후의 가능성. 이걸 제외하고 데이지가 나를 속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비록 내가 라피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지라도, 라피스에게 슬픔을 안겨주게 될지라도, 나는 냉정하게 그녀의 믿음을 부정할 것이었다. 나는 이바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단 한 마디의 말을, 토해냈다. ‘상태창.’ ……조용하기 그지없는 정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허공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기다렸다.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똑같은 말을 속삭여도, 몇 번이고 끈질기게 반복해도, 허공에는 결코 어떠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이바르가 부끄러운 듯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저기, 전하. 그리 빤히 바라보시면 소녀가 부끄럽습니다.” “…….” “전하?” 이제 나의 두 손은 통제를 벗어나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이번에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피스를 향해서 내가 자그맣게 소리 내어 말했다. “상태창.” 아무것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 그것은 무척이나 작은 신음이었지만 동시에 나약한 비명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불가능하다. 단편적이고 부정적인 상념이 머릿속을 새카맣게 메웠다. 인형으로는 상대방의 호감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상태창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호감도 시스템은 오로지 마왕인 '단탈리안'을 향해서만 작동했다. 내 의식이 인형으로 옮겨지면 마족의 감정을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지배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당연했다. 감정을 읽는 것이나 지배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전부 마왕만의 특권이었으니까. 설령 이바르와 라피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할지라도. 단탈리안의 몸에서 인형의 몸으로 옮겨온 나에게는 그 호감의 수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왕 단탈리안이므로.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가. ‘데이지 양은 언제나 단탈리안 님께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단탈리안 님께서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가. 빠짐없이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의 진실을 알아차렸다면. ‘당신 같은 존재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내가 사실은 단탈리안이 아니라. 어미도 아비도 없이 마력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태어난 마왕이 아니라, 한 명의 어머니를 가진, 원래는 마왕이 아닌 다른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무엇이 당신의 이름입니까? 처음 마을에서 뵈었을 때 당신께선 안드로말리우스라 자칭하셨습니다. 다음은 단탈리안. 그 다음은 쟝 볼레.’ 그리하여 단탈리안의 몸은 인형에 불과하고. 단탈리안의 이름은 한낱 가명에 불과하며. 내가 이 세계에서 단지 배우로서 연기하고 있음을. 가면 너머로 한때 또 다른 내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 누군가가 단탈리안이 아니라, 나에게, 호감을 품는다면―――. ‘저는 당신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겠습니까?’ 내 입에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깨달았다. 데이지가 공개처형장에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가 완전히 이해되었다. ‘아버님. 이 세상에 '나'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슬 인정하십시오.’ ‘당신의 위악이 아슬아슬한 곡예라는 걸 자인하시지요. 물론, 아버님에게 이런 선택은 불가능하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피했을 테니 말입니다.’ 데이지는. 본래 용사가 되었을 소녀는. 나의 단 한 명뿐인 후계자이자 양녀는. ‘아버님께서 세상의 악마가 되겠다면, 저는 오직 아버님만의 악마입니다.’ ―――내가 단탈리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과거를 집요하게 조사했다. 아마도 데이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발견했을 것이다. 수 년 전, 대륙력 1505년, 특정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서 갑작스레 마왕 단탈리안의 세력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머니를 언급하는 나의 잠꼬대를 증거로 삼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알아보았다. “아……아, 아…….” 데이지가 인형을 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인형을 써서 살아왔기에. 마왕 단탈리안을 향한 호감이 아니라 올곧게 나를 향한 호감은,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00457 DANTALIAN =========================================================================                        “…….” 내가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바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집무실을 걸어나갔다. 발걸음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칠수록, 몸이 발걸음을 재촉할수록, 내 얼굴은 차갑게 식었다. “전하? 전하, 갑자기 어디를……국무상서! 전하께서…….” 등 뒤로 이바르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황궁의 화려한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따각거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계속해서 한 걸음.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마냥 기계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시녀들이 도중에 나와 마주쳤다. 그녀들은 헐레벌떡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그중에는 제법 행동거지가 그럴듯한 시녀도 있어서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자신이 꽤 훌륭하게 인사했다는 사실을 시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자랑스러운 것일까?’ 시녀들이 연달아서 내게 인사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단지 몸동작뿐만이 아니었다.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라고 말할 때 시녀는 미세하고 미묘한 발음 하나하나에 자신의 자부심을 실었다. 이런 인사를 올리는 것 자체에 대단한 의미가 숨겨진 것처럼. 그러나 대체 무엇이 대단하기에? 정답은 명확했다. 시녀라는 역할. 거기에 그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위대하고 화려한 황궁. 호화롭기 그지없는 만마전을 위하여 봉사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아름답게 유지한다. 아무에게나 주어진 영광이 아니다. 오로지 시녀에게만, 전문적인 실력과 드높은 교양을 겸비한 사람한테만 허락된다. 그것이 시녀들의 자랑이었다. 그렇지만 시녀들의 자부심이 나의 두 눈에는 얼마나 가당찮게 비추는가. 제국은 위대하지도 않으며 영광스럽지도 않다. 이미 예전에 죽어버린 반시체 꼭두각시가 황제에 올라 있다는 것부터 대단한 넌센스다. 인간의 제국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주제에 실상은 마왕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 황제국인 주제에 사실은 온 대륙의 공화주의를 지원하고 있다……확실한 정체성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제국이나 제국이 아니다. 합스부르크이지만 합스부르크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시녀들은 도대체 무엇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일까. “위대한 존재를 뵈옵니다.” 나 역시 처지가 똑같지 않은가. 시녀들이 제국의 황궁에 봉사한다면, 나는, 단탈리안은 단지 이 세계를 위해 봉사했다. 그녀들이 시녀의 배역을 맡았듯이 꼭 그처럼 단탈리안이라는 배역이 이곳에 있었다. 나는 거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건 즐거운 자부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확고한 자부심이었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이 역할을 해냈겠는가? 감히 내가 아니라면 누가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까? 이곳은 모든 산맥 중에서 가장 드높은 산맥이고, 모든 밑바닥 중에서 가장 드넓은 밑바닥이다. 나는 단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아래로 추락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몰락한다! 그러나 지구를 반대로 뒤집어서 본다면 그것은 상승이다. 그렇다. 나는 몰락함으로써 위를 오른다. 모든 몰락하는 사람 중에 누가 이런 길을 선택했던가. 누가 세계를 위해 자신을 거꾸로 뒤집을 수 있었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자신을 위해서 세계를 뒤집어버리는 것밖에 모르지 않았던가. 이 헌신. 이 희생. 배역에 대한 몰입과 무대에 대한 존중. 이것이 나였다. 이것이 단탈리안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자부심은 또 얼마나 가당찮은가?’ 내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황궁은 전혀 대단하지 않다. 단지 시녀들이 황궁을 대단한 것처럼 꾸밀 뿐이다. 똑같지 않은가! 세계 따위는 전혀 대단하지 않다. 그저 내가 세계를 꾸미고 있을 뿐이다.’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피냄새가 혓바닥에 번졌다. ‘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이 차이점이었다. 이 황궁을 청소해주는 시녀는 많았다. 수백 명에 이르렀다. 제국이 유지되는 이상 황궁은 언제까지라도 수백 명의 정성과 수백 개의 손길로 가꾸어지겠지. 그러나 이 세계는? 누가 세계라는 이름의 궁전을 보살피고 있는가? 잭 올란드의 죽음이 부당하기 그지없었다는 사실을 누가 기억해주는가. 월맹군 전쟁으로 스러져간 이십만의 생명을 누가 정당히 평가해주는가. 파이몬이 얼마나 고귀한 여인이었는지 누가 알아주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소리 없이 잊혀 간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전부 내가 역사를 비틀고 마음대로 연출해낸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으므로. 내가 해내지 않으면―――. “응? 단탈리안?” 나는 접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선제후 마왕들이 모여 있을 터인 접견실에는 그러나 가미긴만이 홀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가미긴은 반쯤 옷을 헐벗고 포도주를 진탕 마셨다. “뭐야, 허겁지겁 들어오고. 설마 지금 회의하러 온 건 아니겠지? 네가 지각해서 이미 한참 전에 저녁 때 다시 열기로 했는걸. 네가 시간약속을 어긴 건 이번이 처음 아니야~?” “…….” “그래도 마침 잘 됐어. 너 요즘 나한테 소홀해도 너무 소홀하잖아. 파이몬이 죽은 게 아무리 충격적이었다 해도 그렇지, 남자가 그런 거 오래 질질 끄는 것도 보기 흉하거든. 자, 이 누나가 다 들어줄 테니까 술이나 같이 마시자.” 가미긴이 배시시 웃으면서 자기 소파 옆자리를 두들겼다. 이리 와서 함께 즐기자는 표시였다. 나는 가미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역시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서 접견실을 나갔다. 등 너머로 가미긴이 소리쳤다. “단탈리안? 야, 단탈리안. 단탈리안! 뭐야, 너 진짜 나한테 이러기야!? 내가 확 돌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이렇게 막 대해!? 당장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파이몬 안치소에다 확 불내버릴 거야! 단탈리안!” 쨍그랑, 하고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홧김에 유리잔이라도 던진 것이겠지. 나는 그러나 무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에 내가 찾은 곳은 시트리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시트리는 두 명의 산악파 마왕과 함께 무언가를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별안간 들이닥치자 다소 놀랐다. 시트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단탈리안…….” 시트리가 슬쩍 내 하반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왼발이 멀쩡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시트리는 다시 나의 눈동자를 유심히 노려보았는데, 이윽고 세기의 난제를 마주한 수학자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맞는데.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시트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상태창.’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트리가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걸어와서 나의 손을 잡았다. “뭐, 뭐야? 응? 진짜 무슨 일이야? 어디 말 좀 해봐.” 나는 천천히 시트리의 손을 내 손에서 밀어냈다. 계속해서 손이 떨리는 바람에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시트리가 다시 나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그 전에 나는 뒤돌아서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단탈리안……?” 한없이 나약한 목소리를 뒤에 남겨두고, 나는 정신없이 걸었다. 이제 목적지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에 무수히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끌려서 발걸음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중에서 유독 두개골을 크고 깊이 울리는 하나의 메아리가 있었다. 몸 전체가 마치 그 메아리가 울리는 데 사용되는 동굴인 것마냥, 한 문장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들켜버렸다. 데이지에게 들켜버렸다. 내 배역의 의미를, 내 무대의 의미를 데이지에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완벽하게 시작하여 완벽하게 끝날 예정이었던 연극이 망가졌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몰락하는 시나리오가 부숴졌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전부 책임지겠다면, 좋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버님은 누가 책임지는 것이지요?’ 데이지가 나에게 결코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지만. 내 머리에서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조소가 담긴 어조로. ‘아무도 아버님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님을 위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디까지나 단탈리안으로 남아야 할 터. 데이지에게 정체를 들켜버린 지금,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데이지는 나한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모든 것을 잘못했다.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황궁 뒤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언제나 바르바토스와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던 곳이었다. 내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연못에서 사는 몬스터가 물의 표면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뱀장어 같은 대가리가 이쪽을 향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바르바토스가 이따금 녀석한테 과자를 던져준 탓이겠지.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있자, 물고기는 이상하다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저거 봐. 나 생전 저렇게 못 생겨먹은 물고기는 처음 봤다니까. 단탈리안, 너 혹시 저게 환생한 거 아니냐? 외모 수준이 그럭저럭 삐까치는데.’ ‘놀고 있네. 내가 얼굴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남자거든?’ ‘좋아. 지금 정했어. 이제부터 쟤 이름은 단탈리안이다.’ 물고기는 허공에 몇 번이나 헛입을 달싹거리고 이내 물밑으로 쑥 들어갔다. 연못의 표면에 벚나무가 떨어트린 꽃잎만이 흐드러지게 떠다녔다. ‘야, 단탈리안. 옛다, 여기 네놈 먹으라고 꽁쳐온 과자다. 감사히 잡수라고.’ 만발한 벚나무 아래로 이 세상 것이 아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하고, 심장이 조여왔다.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안으로 숙였다. 내 몸뚱어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가장 작아졌다. 그리고 소리 없이 무언가를 토해냈다. “…….” 조금씩. “……, …….” 조금씩. 어느새 내 등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껴안고 있었다. 그 누군가도 몸이 떨렸다. 사실 내가 떨고 있는 것인지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녀가 나를 대신하여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단탈리안 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피스가 끝없이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 나는 입을 열어서 그녀한테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나한테 사실을 알려준 것은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라피스의 두 팔을 내 두 팔로 꾸욱 붙잡아주었다. 라피스의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아마 라피스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연극은 끝나지 못했다. 연극은 단지 실패했다. 팔 년 전부터 우리 둘이 계획하고 연출해온 하나의 거대한 연극은,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라피스와 나는 서로의 패배를 말없이 받아들였다…….   00458 악(惡)의 극본 =========================================================================                        볼프람 하델베르크 외무상서가 임무를 완수했다. 외무상서는 내가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한테 아티팩트를 발동했다. 아마도 흑마법을 감지해내는 기능이 있겠지.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 외무상서가 이쪽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눈에서 증오가 불타올랐다.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입장에서 나는 단순히 제국을 몰락시킨 장본인이 아니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살해한데다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시체 인형으로 만들어서 농락한 자. 희대의 악마였다. 나는 이 남자의 조국을 무너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았다. 충분히 증오를 받을 법했다. 내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황제 폐하께 문안을 올려야지요, 상서.” “저까짓 인간의 문안이 폐하께 무슨 소용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전하. 당신은 지금 전쟁을 바라고 있습니다. 설령 통령 각하께서 전쟁으로 화답하시지 않을지라도, 이런 만행을 보고도 소인이 가만히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본인의 호의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호의? 지금 호의라고 말했습니까……?” 볼프람 하델베르크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인의 가문은 합스부르크 황가를 섬겼습니다. 오래된 주인이 이리 몰락한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건만 당신은 그걸 호의라고 조롱하는 것입니까.” “저는 상서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영원히 비밀을 숨기고 내버려둘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걸 호의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세상에는 영원히 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좋은 진실도 있습니다!” 내가 지그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서.” “…….”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붉으락푸르락 구겨진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내게 더 이상 어떤 비난을 퍼부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내가 벌이는 체스 게임에서 자신이 한낱 장기짝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상기했으리라. “위대한 마왕 단탈리안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제가 이곳에 발걸음을 들이기 전까지는 막연하고 불안한 감정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르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예.” 볼프람 하델베르크가 차갑게 뇌까렸다. “전하께 작별인사를 올려야 하는 지금 저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우리 공화국은 아우스테를리츠의 참욕을 기억할 것입니다.”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황제를 향하여 허리를 숙였다. 젊음에서 노년으로 건너가는 중간다리에 걸린 이 외무상서는, 마지막으로 나를 씹어 죽일 기세로 노려본 다음 발걸음을 휙 돌렸다. 그날 밤에 곧바로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공화국에 돌아갔다. 이때부터, 물밑으로 외교전이 이루어졌다. 이번 사건에 연류된 모든 당사자가 전쟁을 원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그러니까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걸 최후의 기회로 여기고 있겠지. 공화국 대표회의가 무산되었으며 폴리투니아-사르데냐-공화국으로 이어지던 동맹도 붕괴했다. 만일 역전을 노린다면 바르바토스를 손에 넣은 지금이 기회였다……. 아나톨리아 제국도 마찬가지. 그들은 대륙의 판세가 현재 지나치게 우리한테로 넘어온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제2차 국화전쟁에 개입한 까닭은, 욱일승천하는 우리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꺾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국가들은 어떠한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지. 프랑크, 사르데냐, 폴리투니아……국경이 인접한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아나톨리아 제국,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두 나라가 전쟁을 펼치는 것이었다. 확실한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주변국들이 적극적으로 끼어들 가능성은 낮았다. 미리 교통정리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 귀국의 섭정이 정말로 납치되었다는 말인가? 폴리투니아의 국왕, 스테판 바토리가 굵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수정구를 통해서 서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끄럽게도 그리 되었습니다. 본래 제국 내부에서 깔끔하게 일을 끝내고자 했습니다만, 누군가가 개입하여 사태가 복잡하게 돌아가는군요.” ─ 큰일도 보통 큰일이지 않은가. 일국의 재상이 납치되었다면 이건 이미 국제적인 문제일세. 커스토스 공작. 내 바토리의 이름을 걸고 아낌 없이 협력할 것을 약속하겠네. 바토리 대왕이 진중하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의 말이 갖는 무게가 평범한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이 대왕의 위엄이라고 해야 할지, 수십 년 동안 집권하면서 쌓은 내공이라고 해야 할지. “감사합니다. ” 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토리 대왕도 당연히 마계에 간자들을 심어두었을 터. 공개처형식에서 어떤 사단이 벌어졌는지 진즉에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이미 납치범이 어디로 도주했는지는 대략적으로 알아냈습니다.” ─ 호오. 벌써 말인가? 바토리 대왕이 흥미 깊다는 듯 검은색 눈동자를 빛냈다. ─ 그래, 이번에는 어느 나라가 그대에게 무모한 도전을 신청했는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입니다.” ─ ……. 바토리 대왕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아마 지금쯤 바토리 대왕의 머릿속에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그려졌으리라. 합스부르크 공화국 뒤에는 아나톨리아 제국이 있다. 그건 다시 말해 최악의 사태를 의미했다. ─ ……참으로 일이 공교롭게 흘러가는군. 공화국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가. “안타깝지만 확실합니다. 오늘 공화국의 외무상서가 황궁에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갔습니다. 무역 관세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이 고작 이틀만 머무르고, 정작 관세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귀환했지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 협박인가. “그렇습니다. 알아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섭정 바르바토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는 얘기이겠지요.”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왕께서도 권력을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킨 적이 있으리라 감히 짐작합니다. 대왕. 바르바토스는 소인의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숙청하였으며, 제 두 손으로 직접 그녀의 목을 자르고자 했습니다. 소인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차릴 수 있는 예의였지요.” ─ ……. “엘리자베트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배후에서 사주를 했든 말든 저에겐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차분히 홍차를 홀짝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왜 이리 강경한 수단을 취하는 것인지, 대체 무슨 장난질을 준비해두었기에 전쟁도 불사할 각오를 끝마친 것인지, 저로서는 아직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고합니다. 엘리자베트는 마땅히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 그대는 이미 전쟁과 평화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한 모양이로군. “예. 저는 그저 대왕께 미리 양해를 구해두고 싶었나이다.” ─ 단탈리안. 내 직위에 구애받지 않고 솔직하게 질문함세. 과인은 소국의 주인이나 자네는 대국의 주인이야. 대국이 거사를 행하는 데 있어서 소국에 양해를 구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대왕이라면 저를 이해해주시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이해라니 무슨 소리인가? “대왕께서는 자그마치 수십 년 동안이나 동생을 세간의 이목으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스테판 바토리한테는 문둥병에 걸린 여동생이 있었다. 젊은 시절, 여동생을 사랑한 바토리 대왕은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동생을 비밀리에 은거시켰다. 지금 그녀는 내가 보낸 흑마법사에 의해서 완벽하게 치료가 되었다. “대왕께선 틀림없이 정치적인 괴물입니다. 일국의 지엄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특히 폴리투니아처럼 왕권이 약한 곳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괴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는 끝끝내 왕녀를 지키셨습니다.” ─ ……. “대왕. 저는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르바토스의 목숨을 거두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결코. 절대로.” 내가 시선을 웃음기로 위장한 채 대왕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대왕이라면 손쉽게 내 웃음 너머에 가려진 진짜 표정을 읽어내겠지. “우리에게는 각자 나름대로 풀어야 하는 문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문제에 타인이 개입하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지요.” ─ ……. 바토리 대왕이 제법 길게 침묵했다. 대왕은 다소 무심한 눈길로 지그시 이쪽과 마주보았다. 잠시 뒤에 그가 중얼거렸다. ─ 과인에게는 정병 5만이 준비되어 있다. 대국들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시기를 절묘하게 노린다면 축 하나를 무너트릴 만한 기세는 능히 선보일 수 있겠지……. 여신께서 귀국을 보살피기를 기원하네. 거기서 통신이 끊겼다. 스테판 바토리 대왕이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병 5만을 동원하여 우리 제국을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대왕의 여동생을 치료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써. 나는 통신이 끊긴 이후에도 한동안 수정구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다른 주변국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 귀국에 전면으로 협력할 수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아국에 미리 통보를 해주신 이 은혜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소. ─ 지난 전쟁에서 공작이 우리를 잊지 않고 챙겨준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바타비아는 영원토록 제국의 우방으로 남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 공화국은 이미 수 차례나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였지. 공작의 말마따마 잘못에는 응당 대가가 뒤따라야 하는 법이라오. 대놓고 협력하진 못할지언정 제국의 편을 들어주겠다. 그것이 열국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항상 명분을 챙긴 이유가 여기 있었다. 명분에 앞서야만 여차할 경우 주변국에 도움을 쉽게 얻었다. 더 나아가, 나는 프랑크 제국을 짓밟았을 때도, 브르타뉴 왕국을 몰락시켰을 때도, 사르데냐 왕국을 초토화시켰을 때도 결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개평을 나눠주듯이 언제나 주변국들에 무언가를 선물하였다. 만일 내가 프랑크를 합병시키거나 사르데냐를 지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주변국들이 우리를 편들어줄 일은 절대로 없었으리라. 국제무대에서 중도를 지켰으므로 오늘날의 호의가 가능했다……. 당연하지만 내가 선하기 때문에 중도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엘리자베트와 정면대결을 펼칠 날이 오리라 예상했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미리 체스판을 만들어둔 것이었다. 말하자면 최후의 결전. 7년 전의 월맹군 전쟁, 브루노 평원에서 엘리자베트와 처음으로 마주친 그날부터 예정된, 예정되어버린, 우리 두 사람의 결착. 본래 이 대륙의 주인이 되어야 했을 여제와 지금 대륙을 배후에서 지배하게 된 나 사이에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충돌.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나의 신념을 내버리지 않는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결투였다. 그리고 데이지. 이쪽의 가면을 간파하고 나를 알아봐준―――나의 단 한 명뿐인 딸. “와라.” 빛이 꺼진 수정구를 눈앞에 두고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들만의 결착을 지어야 할 때다.” 대륙력 1513년 5월 초순. 합스부르크 공화국과 아나톨리아 제국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꼭두각시 시체 인형임을 공동으로 선언했다.   00459 악(惡)의 극본 =========================================================================                        * * * 제국 각지에서 병력이 소집되었다. 나는 황제를 대동하고 제도(帝都) 바깥으로 나갔다. 문무대신이 우리의 뒤를 따랐다. 우리 모두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었고, 나는 붉은색 망토를 휘둘렀다. 수백 명의 대소신료가 빠른 잰걸음으로 우리를 쫓아 걸어왔다. “제국의 유일무이한 주권자이시자, 만신의 축복을 받으시고 만마의 충성을 거두어들이신, 위대한 합스부르크의 황제 폐하 납시오!” 도시 바깥의 드넓은 평원에는 연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시종이 우리를 보고 우렁차게 고했다. 마법으로 확성된 목소리는 평원 곳곳에 널리 울려 퍼졌으며, 이백 명 남짓하는 경비병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기서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나는 말을 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마에 올라타지도 않았다. 그저 의족과 지팡이에 의존하여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황제는 내 걸음걸이 속도에 맞추었고, 그리하여 우리를 뒤따라는 수백 명의 사람도 퍽 느릿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더없이 암묵적인 과시였다. 볼품없이 절름거리는 발걸음은 동시에 제국의 진정한 실세가 누구인지, 그 거대한 권력을 조용히 증명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황제와 함께 연단에 오르는 광경을 숙연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높은 연단에 올라서서 평원을 둘러보았다. 신하들, 병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국의 사신들. 사신들은 연병장 한켠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낯빛으로 이쪽을 훔쳐보았다. 내가 무표정하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 부우우우우. 그러자 뿔나팔들이 울렸다. 바르르 떠는 잡초 이파리가 음산한 공기를 알려주었다. 잠시 뒤, 나팔소리가 잦아든 바로 그곳에서 북소리와 비슷한 무언가가 나지막하게 시작되었다. 울림은 평원 저편에서 조금씩 다가왔다. 나지막하게 흙먼지를 망토처럼 휘두른 채 달려오는 그것은 일단의 기병이었다. 수백 마리의 군마가 거칠게 씩씩거리며 이쪽을 향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끄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마왕 마르바스였다. 마르바스는 옆구리에 투구를 끼운 채 한손으로 능숙하게 말을 이끌었다. 시종이 양피지를 들고 소리쳤다. “판노니아의 존귀한 대왕이요, 합스부르크 황실의 영원한 수호자이자, 제국의 가장 거대한 기둥인 세바스토크라토르 마르바스! 정병 오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마치 원을 그리듯이 병사들이 연병장 외곽을 돌면서 천천히 연단 앞을 지나쳤다. 마왕 마르바스를 상징하는 깃발, 천칭을 손에 쥔 사자의 문양이 나부꼈다. “…….” 마르바스가 이쪽을 향해 상반신을 돌렸다. 그는 오른쪽 가슴에 주먹을 턱 하니 올렸다. 군례였다. 일찍이 마왕군의 군례였으나 이제는 제국군의 군례가 된 손동작. 나는 마르바스와 멀리 눈을 마주치면서, 조용히 주먹을 가슴에 올렸다. 마르바스의 병력이 연단 앞을 지나쳐 평원에 가지런하게 열을 맞추어 섰다. 오천 병사가 뜨거워진 몸을 거친 들숨으로 식혔다. 그들이 말없이 열기를 토해내는 그때, 평원 저 너머에서 다시금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깃발의 문양은 뿔이 세 개 달린 염소. 시종이 재차 소리쳤다. “룩셈브르크의 고귀한 대공이요, 마인츠의 고귀한 선제후이자, 제국의 대시종장인 시트리! 정병 일만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시트리가 거대한 산양에 올라타고 일만 대군을 이끌었다. 자주빛 망토가 거센 바람에 펄럭거렸다. 시트리는 파이몬의 사병을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숙청되어버린 산악파 마왕들의 병력 역시 흡수하였다. 단독으로 제일 많은 병사를 휘하에 둔 마왕을 뽑으라면 단연 시트리가 압도적이겠지. “…….” 시트리가 연단을 스쳐가며 날 향해 군례를 올렸다. 내가 황제와 바로 나란히 서 있었기에 멀리서 보면 시트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위치에서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내 연인으로서의 시트리가 아니라 산악파 수장으로서의 시트리, 냉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시트리가 그곳에 있었다. 나 또한 차가운 얼굴로 답례를 올렸다. 일만 병력이 마르바스의 병력 옆에 줄지어 정렬했다. 열기는 점점 더해졌다. 숫사슴 뿔이 달린 일각수(一角獸)의 문양. “모라비아의 명예로운 공작이요, 제국의 모든 바다를 통솔하는 사령관이자, 불멸하는 황실의 후원자인 가미긴! 정병 사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면류관을 뒤집어쓴 악어의 문양. “쾰른의 고귀한 선제후요, 황실의 지혜로운 조언자인 바싸고! 정병 삼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눈에 검은색 천을 두른 아누비스의 문양. “자간의 백작인 아몬! 정병 삼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이빨로 독사를 물어뜯는 백곰의 문양. “바이로이트의 백작인 푸르손! 정병 이천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여태까지 살아남은 열다섯 명의 마왕들. 그들은 각기 서열의 순서대로 연병장을 돌아서 제 위치에 섰다. 누군가는 전쟁을 열망할 테고 또 누군가는 전쟁터에 끼어들고 싶지 않겠지. 그러나 모든 마왕이 연단을 지나치면서 나를 향하여 주먹의 손등을 보여주었으며, 내 답례를 받아야만 했다. 총 병력 42,000 대군. 열다섯 종류의 깃발이 찬란하게 펄럭거렸다. “…….” 사신들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제국의 군세를 쳐다보았다. 단순히 사만 대군이라 해도 경의로운 숫자였으나, 이건 마인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최소한 인간의 군세보다 두 배. 상황에 따라 어쩌면 세 배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인간군으로 따지자면 거의 십만에 이르는 정병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평원에 도열하지 않은 군세가 하나 있었다. 이곳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고 지배해야 하는 깃발이 하나 더 남았다. 먼 저편에서 흙구름이 피어올랐다. 대지를 진동시키면서 군단이 다가왔다. 수백 명이 내는 진동도, 수천 명이 내는 진동도 아니었다.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숫자의 말발굽이요 발걸음이었다. 먼지구름을 뚫고 내리쬔 태양빛에 수만 개의 창날이 번쩍거렸다. 푸른 수국의 깃발. “파르네세의 명예로운 공작이요!” 그 선두에서 대군을 이끄는 사람은 금발의 여인. 아미쿠스라고 이름지어진 흑마에 올라타, 샛파란 망토를 휘날리며 여인은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서 병사들은 엄숙하게 대열을 맞추었다. 아무런 구호도 오가지 않았지만 대열에는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황제 폐하의 유일무이한 대리장군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 정병 삼만을 이끌고 황제 폐하의 지엄한 소집령에 응답하라!” 그것은 나의 군대였다.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은 어디에도 없었고, 단지 파르네세 가문을 나타내는 깃발만이 나부꼈으나, 이곳에 모인 마왕들은 모두 주지하고 있었다. 헬베티카 용병과 다국적 용병으로 이루어진 저 대군이야말로 마왕 단탈리안의 군세임을. 평원파가 몰락해버린 이상, 헬베티카의 용병은 중립파와 더불어 최고 수준의 정예였다. 게다가 이들은 바로 얼마 전에 제2차 국화전쟁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아니, 그걸 성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모자르리라. 저들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의 전설을 이룩했다. 사령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언제나 약속한 보수 그 이상을 챙겨줌으로써 생겨난 충성심. 자신들이야말로 대륙의 역사를 새로 고쳐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긍심.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정점으로 한 이 군단은 여타의 병력과 일선을 달리했다. 라우라의 뒤를 곧바로 쫓고 있는 수십 명의 용병단장들이 자신만만하게 주변을 오시했다. 그중에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과 자크리 등, 내 눈에 익은 인물도 있었다. “…….” 라우라가 연단 앞에 멈추어섰다. 다른 사령관들은 연단을 스쳐 지나갔지만 라우라는 군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홀로 연단의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라우라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부복한 방향은 황제와 내 틈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라우라를 내려다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평원의 구석진 후미까지 나지막하게 울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 “예.” “제국은 다시 한 번 도전에 직면하였다. 우리의 명예를 무시하는 도전이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전이며, 우리의 미래를 방해하는 도전이다. 상승(常勝)의 파르네세여. 그대, 불손한 도전자들에게 철퇴를 내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우라가 고개를 숙인 채로 오른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름다우면서도 더없이 확고하고 뚜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인의 모든 생명과 신념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겠나이다.” “파르네세 공작에게 전쟁의 전권을 대리시키는 바이다.” 내가 황제에게 검을 건네받고 다시 라우라한테 하사했다. 라우라는 양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은 다음에 고개를 들었다. 라우라의 두 눈이 잔인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차갑게 고했다. “이제부터 제국을 가로막는 역도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하나. 공평한 죽음뿐입니다.” 라우라는 이번 사태의 진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 데이지란 은혜를 저버리고 반역을 일으킨 배신자였다. 그로 인해 내가 왼발을 스스로 잘라냈다는 얘기를 듣고 라우라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엘리자베트가 데이지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얘기에는 적의를 불태웠다. “단지 죽음이 아니라 잔혹무비한 죽음을. 처절한 고통을. 인세의 지옥이 무엇인지 역도들에게 깨닫게 하겠나이다.” 지금 라우라를 이끄는 것은 순수한 증오였다. 라우라와 내가 지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증오심에 마음의 언저리가 썩어 문드러질 때 더더욱 냉철해진다는 것이었다. 라우라는 단신으로 헬베티카 연방에 가서 그곳의 부족장과 용병단장을 설득시켰고, 사르데냐 북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용병단들을 단숨에 규합했다. 병사들을 고용하는 데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갔지만 괜찮았다. 이바르와 내가 보유한 자금은 삼만 대군을 유지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 내가 사신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중 한 사람, 롱그위 성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롱그위 성녀는 연단에 올라와서 황제의 옆에 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만약 황제가 흑마법으로 인해 소생한 시체 인형이었다면 성녀인 롱그위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다. 롱그위 성녀가 황제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 자체가 엘리자베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실제로, 황제는 이미 이바르의 인형으로 교체된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흑마법을 검사해본다 할지라도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하리라. “…….” 라우라가 일어서서 뒤로 돌아섰다. 칠만 대군을 내려다보며 라우라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하늘을 무너트릴 기세로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요동쳤다. 전쟁의 여신. 브르타뉴와 사르데냐를 거꾸러트린 대장군. 병사들은 창 끝으로 공중을 힘차게 찔러대며 피스톤처럼 끊힘없이 팔뚝을 움직였다. 대륙력 1513년 5월 하순. 합스부르크 제국의 칠만사천 대군. 황제의 대리장군 라우라 데 파르네세 및 열여섯 명의 마왕. 국내에 창궐하는 반란군 진압을 명목으로 내세워서―――남진.   00460 악(惡)의 극본 =========================================================================                        * * * “도대체 왼발은 왜 또 잃어버린 거예요?”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사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더군요.” 롱그위 성녀가 벌레를 보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진군하고 있었다. 중립파 마왕들이 선두에, 내가 중진에, 나머지 마왕들이 후진에 위치했다. 슬슬 각군으로 나뉘어서 진군할 때가 되었지만 아직은 함께 움직였다. “아, 네.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어차피 만날 일 저질러놓고 계획대로 흘러간다느니 예상헀던 그대로라느니 음흉하게 미소 짓는 게 댁의 취향이면서.” “이번엔 진짜입니다. 하나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란 정말 미지의 연속이로군요. 아직도 제가 즐길거리가 잔뜩 남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확 낙마시켜버릴까.” 롱그위 성녀가 짜게 식은 동태 눈깔로 말했다. 자클린 롱그위는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나 역시 성녀의 이런 면모를 싫어하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발도 한짝 없고. 조금만 밀어버리고 머리부터 떨어트리면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 농담이 맞을 거다, 아마도. 우리는 딱히 사이가 좋아서 말머리를 나란히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현재 외교 무대에서 합스부르크 공화국 및 아나톨리아 제국은 연일 우리를 비난했다. 사악한 흑마법의 무리라거나, 황제를 모욕한 죄라거나, 여하간 뻔한 수식어들이었다. 자클린 롱그위는 대륙에서 가장 인기 높은 성녀였다. 귀족들에게도 지지도가 높았고, 무엇보다 일반 백성들한테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롱그위 성녀가 나와 같이 움직여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외교적 제스처를 매우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흑마법 따위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이다. 성녀가 그걸 보증한다. 엘리자베트의 외교전은 별로 신통치 못하게 흘러가리라. “저기. 만약을 위해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죽으면 브르타뉴의 뒷배를 봐줄 사람이 제국에 없어져버립니다?” “농담인 게 당연하잖아요. 당신 바보예요?” 롱그위 성녀가 도리어 성을 냈다. 나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조용히 말발굽이 따각거렸다. 내가 머릿속으로 전략을 검토하고 있자니 롱그위 성녀가 먼저 대화를 걸어왔다. “궁중백.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소국이잖아요.” “예? 아, 뭐 그렇지요.” “구태여 이렇게 대군까지 동원하면서 총력전을 펼칠 이유가 있나요? 공화국 통령이 뛰어난 인물이긴 해도 궁중백이 극도로 경계할 만한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경계할 만한 이유가 없다라…….”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녀님은 모르겠지만 엘리자베트 통령과 제 악연은 매우 질깁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브루노 평원의 연설에서 시작해서…….” “아니요.” 내가 말을 끊었다. “성녀님은 모르고 있습니다.” “……뭐예요, 무례하게.” 롱그위 성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제가 뭘 모르고 있는지 한번 말해보세요.” “엘리자베트 통령과 제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지점은 프랑크입니다. 우리는 다름 아니라 귀국을 내기판에 올려놓고 승부했습니다.” 그렇다. 첫 번째 충돌은 백합 전쟁이었다. “브르타뉴가 프랑크를 집어삼키면 엘리자베트 통령은 강력한 동맹국을 옆에 두게 됩니다. 우리 제국을 삼면에서 포위하는 것이지요. 즉, 프랑크의 독립을 지켜내느냐 마느냐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예?” 롱그위 성녀의 얼굴에서 불쾌감이 사라지고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예요? 왜 백합 전쟁이 당신과 통령의 싸움인가요. 저희 브르타뉴의 싸움이었지.” “여러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귀국의 여왕 전하께서는 수시로 엘리자베트 통령과 밀담을 주고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쟁에는 틀림없이 통령의 의사가 개입해 있었습니다.” “…….” 백합 전쟁에서 나는 패배했다. 패전의 영향은 상당했다. 먼저, 내가 전쟁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마왕군의 정세가 거세게 요동쳤다. 아가레스와 가미긴이 연합하여 평원파에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평원파는 자칫 잘못하면 몰락할 뻔했다. 반대로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돌렸다. 동맹국인 브르타뉴가 든든하게 지반을 다지게 되었고, 적대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이 황금과 같이 절묘한 시기를 틈타서 엘리자베트는 공화국을 재편했다. 제1라운드는 엘리자베트의 승리. 내 완패였다. “생각해보십시오. 마왕 아가레스가 내전에서 패배하여 도망치자 귀국에선 망설임 없이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건……여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이에요. 훗날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 훗날이란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까?” 롱그위 성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모르고 있겠지. “마왕 아가레스는 양날의 검입니다. 우리 제국은 아가레스를 처단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크를 침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녀, 정반대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반대요?” “여러분이 마왕 아가레스를 앞세워서 도리어 우리 제국을 침공하는 것입니다. 아가레스는 억울하게 쫓겨났으며, 그 복수를 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돌아온다.” “……!” 자클린 롱그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롱그위 성녀의 정치적인 감각은 그리 날카로운 편이 아니었다. “간단합니다. 이쪽에서 쳐들아갈 때 유용한 도구는 저쪽에서 공격해올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습니다.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아가레스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훗날 제국을 침공하는 데 교두보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저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극비 중의 극비였을 겁니다. 공화국 통령과 여왕 전하 둘 사이에서만 계획이 오갔겠지요.”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공화국 통령은 궁지에 몰리면서까지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여왕 전하를 설득하여 마왕 아가레스의 망명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만일 제국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엿보였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쪽을 물어뜯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치에 집중했다. 평원파-중립파-산악파의 연계를 강화했다. 만에 하나라도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어지도록. 대마왕 바알의 숙청은 그 연속선상이었다. 바알은 위험분자였다. 언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마음대로 행동할지 몰랐다. 신속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 아가레스가 살아 있는 이상 위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마왕군 전체를 동원하여 아가레스를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는 김에 귀국의 기세를 꺾어두면 금상첨화였지요.” 제2라운드. 꼭두각시 전쟁. 서로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두고 프랑크를 전화로 물들였다. 그러나 엘리자베트가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나의 소중한 보물이자 대륙 제일의 전략가였다. 엘리자베트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라우라는 브르타뉴의 군세를 무너트렸다. 엘리자베트는 마지막에 가서 분견대를 파견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전세를 뒤집기란 불가능했다. 프랑크가 독립했고 브르타뉴는 몰락했다. 엘리자베트는 가장 든든한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제2라운드는 나의 완승. 엘리자베트의 참패였다. “…….” 롱그위 성녀가 침묵했다. 그녀는 얼굴이 분노와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당신의 얘기가 맞다면 꼭 우리 브르타뉴는……마치, 당신들 두 사람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용되었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누구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합니다.” 내가 차분하게 성녀를 다독거렸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공화국 통령이 바라는 대로 극본이 진행되었다면 브르타뉴 왕국은 지금쯤 전성기를 누렸겠지요. 브르타뉴에도 이득입니다. 그러니까 귀국의 여왕 전하께서도 통령한테 동의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 하지만 실패했다. 다름 아니라 나에 의해서. “뭐, 저는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브르타뉴를 끊고, 폴리투니아를 끊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공화국의 우방은 사르데냐밖에 없었습니다. 명줄을 끊어내기 위해 저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제3라운드. 국화 전쟁. 이번에 엘리자베트는 라우라의 존재를 인지했다. 서로가 무엇을 노리는지, 서로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도 모조리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제3라운드는 무승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저는 사르데냐를 붕괴시켰지만 그 대신 통령은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최후의 결전이 뒤로 미루어졌지요. 우리는 각자가 최후를 약속한 채 헤어졌습니다.” 그 최후가 지금 다가왔다. 엘리자베트는 무리를 해서라도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왕군은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무투파 마왕들의 집합소나 다름없었던 평원파가 전멸했다. 게다가 평원파의 잔당들이 이곳저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절호의 찬스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거꾸러트릴 수 없다. 여태까지 자기가 쌓아온 모든 것을 내걸어서 전쟁터에 뛰어들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롱그위 성녀.구태여 대군을 동원해서 총력전을 벌일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습니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저의 대답입니다. 확실히 공화국은 소국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통령은 다릅니다. 그녀는 소국을 이끌고 여기까지 저와 승부를 나누었습니다. 월맹군이 일어났을 때부터 계산하면 벌써 7년입니다. 길고 긴 악연이군요…….” 물론 아무도 몰랐다. 백합 전쟁도, 꼭두각시 전쟁도, 국화 전쟁도――전부 엘리자베트와 내가 둘이서 펼친 반상 위의 대결이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비록 성녀가 내 얘기를 들어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지만 세간에 퍼지는 일은 없으리라. 과연 역사서에서는 세 개의 전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합스부르크 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이었다고 서술할 것인가? 공화정과 군주정이 충돌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태였다고 기술할 것인가. 어느 쪽도 진실에서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재밌는 것이었다. 대륙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곳에서 엘리자베트와 나는 대륙 전체를 장기판에 올려둔 채 싸웠다. 다시 말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게임이었다. “롱그위 성녀는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난 번에 사르데냐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제가 무엇 때문에 브르타뉴한테 개평을 떼어주었다고 생각합니까.” “…….” 브르타뉴는 프랑크의 대귀족들을 물리치고 홀라당 점령지를 꿀꺽해버렸다. 이 계략의 배후에는 내가 숨어 있었다. 여왕과 성녀는 내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번 전쟁에서 롱그위 성녀가 나를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까닭은 그때 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궁중백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자신감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야지요.” 다만. 이 게임에는 엘리자베트도 나도 고려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바로 데이지였다. 녀석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국면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내가 데이지의 속내를 짐작했다 할지라도 녀석의 행동까지 전부 예측할 수는 없었다. 과연 어떻게 될련지……. 데이지.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떤 심정으로 내 앞에서 증오를 연기했느냐. 엘리자베트를 어떻게 할 속셈이고, 또 바르바토스를 어떻게 처리할 속셈이냐. 나는 당장이라도 너와 대화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남은 삶에서 얘기를 나눌 시간은 분명히 얼마 없겠지.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의 최후를 준비해두자……. 후회가 남지 않도록.   00461 악(惡)의 극본 =========================================================================                        * * * “잘 주무셨습니까. 카이사르 바르바토스.” 작은 여자아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약기운 때문일까. 황금색 눈동자가 초점이 없었다. 하긴 지금도 마약 효과가 있는 향을 피우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물건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물수건으로 여자아이의 맨몸을 닦았다. 적당히 뜨겁게 끓여온 양동이 물에 수건을 몇 차례 담그면서 세심하게 이곳저곳을 문질렀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관리를 전적으로 내가 맡았으므로 이런 잡일도 나의 업무였다. “너……으, 아…….” “입을 열면 머리가 고통스럽게 울릴 것입니다. 지빠귀나무 수액에 자주빛 마탑 공방의 마취제를 섞었습니다. 약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조금 효과가 강력합니다.” 바르바토스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온몸에 돌기가 솟은 것처럼 민감하겠지. 잔바람만 불어도 미친 듯한 통각에 시달릴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내가 물수건을 움직일 때마다 바르바토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마왕의 몸이란 신기하군요. 잡티 하나 없습니다. 도저히 전쟁터에서 수백수천 년을 구른 사람의 신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부럽습니다.” 하고 내가 바르바토스의 쇄골을 스윽 닦았다. 약간 강세를 주어서. “흐윽……!” 바르바토스의 허리가 튕겨올랐다. 일시적으로 전류가 흐른 것처럼 그녀의 몸이 저릿저릿하게 떨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개 같은, 년……누구 딸내미 아니랄까봐, 싸가지가 아주 가관이야…….”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으드득거리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고통으로 비틀려 있는데도 눈동자에 담긴 적의만큼은 뚜렷하게 빛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꼭 고슴도치가 필사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 과연, 이런 면모 때문에 아버님은 이 여자한테 마음을 한뺨 정도라도 허락한 것일까. 괴롭히는 보람이 느껴졌다. “바르바토스께서 건강하신 것 같아서 안심입니다. 카이사르께선 제국의 섭정이십니다. 무척이나 소중한 몸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손가락 끝으로 슬그머니 목을 건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흣, 으흑……!” “행여라도 상처를 입으시면 안 되지요.” 가슴을 지나고. “만일 카이사르가 다친 모습을 아버님께서 나중에 보시면 또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아읏……아, 으으, 흐으읏!” “그러고보니 카이사르는 아버님의 본처를 자칭했지요. 깨끗하게 몸을 단정해서 얌전히 남편을 기다리는 것을 본처의 의무로 보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카이사르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배를 지나쳤다. “……!” 바르바토스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짧고 높은 숨결을 토해내더니, 바르바토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허공에 쇠사슬로 매달린 채 축 늘어졌다. 그럭저럭 보기 괜찮았다. 자기 분수를 모르는 짐승에겐 이 정도 자세가 딱 적당했다.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우스운 일입니다. 카이사르는 아버님께 민폐만 끼쳤습니다. 그러고도 본처를 운운하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 건방지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라서면 다들 카이사르처럼 염치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권력이란 꽤 역겹군요.” “……어져, ……아.”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워낙에 목소리가 미약해서 들리지 않았다.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죄송합니다. 듣지 못했습니다. 부디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그때였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침이 정확하게 나의 눈 밑에 튀었다. 묽은 액체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지옥에 떨어져, 엿이나 처먹을 년아.” “…….” 내가 무심하게 손으로 침을 닦았다. 문득 절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제법 아꼈다. 공개 처형장에서 바르바토스를 참수하려고 했을 때 눈물을 흘렸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은 본래 매우 드물게 눈물을 흘렸는데, 언제나 아버님을 곁에서 모신 나조차도 여태껏 세 번밖에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가 카이사르를 취하면 아버님께서 어찌 반응하실까요?” 바르바토스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지나치게 자극적인 통각에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그녀가 반문했다. “……뭐?” “분노하실까요. 얼마나 분노하실까요. 제가 카이사르를 엉망진창으로, 넝마짝과 다름없이 손상시키면. 카이사르의 자존심을 짓밟고 내팽개치고 모욕하면, 과연 아버님께서는 어떤 감정을 느끼실까요.” 내가 희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아버님은 더욱 더 가열차게 나를 증오하게 되지 않을까. 아버님이 바르바토스를 아끼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바르바토스의 고결함에 있었다. 내가 온갖 약물과 고문을 동원하여 그 고결함을 약간이라도 손상시킨다면, 거기에 진흙을 묻혀버린다면, 아마 온갖 슬픔과 적의를 담아서 날 증오하지 않을까? 좋은 발상이었다. 아버님이 나를 증오하면 증오할수록, 아버님은 피해자로 전락하고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요컨대 아버님이 올바른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아. 이거 이제 보니까 완전 또라이 미친년이었네. 단탈리안 새끼는 무슨 정신머리로 네 같은 정신병자를 양녀로 삼은 거래. 부녀가 아주 쌍으로 염병을 떨어대는구만. 너희 설마 떡도 쳤냐?” “카이사르께서는 천박하시군요.” “단탈리안한테 엿 먹이려고 날 범하시겠다? 미친 년. 생각하는 꼬라지가 지 아빠 빼닮았네.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되바라질 것아.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다시 한번 바르바토스가 침을 뱉었다. 이번에도 맞아줄 의리는 없었으므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서 침을 피했다.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네 쓰래기 애비한테 먼저 강간당하고 와보시든가. 어디서 떡도 못 쳐본 처녀 새끼가 나를 넘보고 있어.” 처녀라. 나 역시 작게 웃었다. “그렇군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카이사르.” 이틀 내내 밤낮으로. 나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녀를 고문했다. 방안에는 비명과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한 시간에도 정신을 수십 번 잃었으며 맥없이 혼절했다. 나는 그녀가 정신을 잃으면 물을 뒤집어 엎거나 허벅지를 불에 달군 꼬챙이로 지졌다. 그러면 다시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르바토스가 일어났다. 바르바토스 본인이 자처한 일이었다. 당신이 쓸데없이 파이몬을 암살하려 들었기에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원흉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였지만 당신의 잘못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내가 배운 모든 약제조술과 고문기술을 동원하여 바르바토스를 문자 그대로 짓이겼다. “후우.” 내가 한숨을 쉬었다. 땡그랑, 하고 쇠꼬챙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방바닥에는 검붉은 액체가 자그마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피로 이루어진 오물이었다. 쇠꼬챙이가 반쯤 핏물에 잠겼다. 내가 손등으로 이마를 가볍게 닦았다. “……, …….” 눈앞에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육체 덩어리가 하나. 일찍이 아름다웠던 백발이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졌다. 새하얀 살결은 흉측하게 난도질을 당했다. 마왕의 재생력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아서 실시간으로 상처가 낫고 있었지만 속도가 매우 느렸다. 온몸에 마력을 봉쇄하는 아티팩트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저는 똑같은 걸로 두 번 경고하는 사람이 아니니 부디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쥐어잡아 끌어당겼다. 바르바토스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이쪽에서 잡아끄는 방향 그대로 고개가 들렸다. “제 아버님을 함부로 모욕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 이미 바르바토스에게는 의식이라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다. 40시간이 넘도록 연달아서 나의 고문을 받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의 탁한 눈동자에는 어떤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발레포르 같은 마왕과는 다르다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휙 놓았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 데이지…….” 방문 바로 바깥에서 루크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이틀 동안 방을 고문실로 사용했다. 그 바람에 잘 곳을 잃어버린 루크는 복도에서 모포 한 겹만 두르고서 버텨야 했다. 루크가 초췌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루크의 표정이 굳었다. “너, 그게……대체 무슨.” 아무래도 내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처참한가 싶어서 내가 옷자락을 집어서 코 끝으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기분 나쁜 냄새라곤 전혀 없었다. 마왕의 피와 내장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악취가 감돌지 않았다. 이건 상당히 좋은 점이었다. “왜? 뭐가 이상해?” “…….” “정보부 사람들한테 방청소를 부탁하고 올게. 미안하지만 아직 방에 들어가지 마. 아니, 들어가도 괜찮은데 오빠한테는 조금 버거운 광경일 수도 있어.” 나는 루크를 내버려두고 복도를 걸어갔다. 외길로 난 복도를 걷자 덩치가 좋은 사람들 다섯 명이 나타났다. 전원이 검주(劍主)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로서, 나를 감시하기 위해 엘리자베트 통령이 보낸 감시원들이었다. 그들이 나를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방이 조금 더러워졌습니다.” 내가 치마의 양끄트머리를 잡아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방에는 각종 감시도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고문하는 광경도 틀림없이 실시간으로 새어나갔겠지. 이 감시자들 또한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청소용구라도 있다면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봐도 방에 없더군요. 다소 번거러울지라도 방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미친 년 같으니.” 검주 중 한 사람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내 평생 살다가 마왕을 동정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저주받을 부르노의 악몽이 양녀를 품었다길래 어떤 인간인가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괴물 새끼였어.” “…….” “이쪽을 쳐다보지 마라. 불쾌해서 숨도 쉬기 싫어지니까. 통령 각하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벌써 진즉에 네 년의 목을 베어버리고도 남았다.” 검주가 복도바닥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네 명 모두 나를 쓰레기 바라보듯 흘겨보며 침을 뱉었다. 나는 이렇게 눈앞에서 침을 뱉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인간이란 얼마나 과장스러운 존재인가 감탄스러웠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걸레는 챙겨줄 테니 그걸로 네 년이 알아서 해.”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도 일곱 통 필요합니다.” “얼른 꺼져.”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등 뒤로 재차 가래침이 뱉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저들은 얼마나 폐가 썩었길래 몸안에 가래를 저수지처럼 저장하고 있을까. 조금 신기했다. 이로써 공화국 정보부에선 내 결백을 더 신뢰하겠지. 혐오스러울지언정 바르바토스를 적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의 배신은 신뢰할 만하다.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이틀의 고문은 그걸 노린 바이기도 했다. 그저께, 아버님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총사령관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라는 것도……. 지금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시 나를 증오하고 있을까.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교활하고 교태로운 얼굴로 아버님을 위로하고 있을까. ‘괜찮다, 주군. 주군의 곁에는 내가 영원히 함께 있다’하고. 두근. “…….” 그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조여왔다. 나는 품안을 더듬어서 담뱃대를 꺼냈다. 아주 조금 다급하게 연초에 불을 피우고, 깊이 입안에 빨아들였다. 천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 괜찮다. 나는 끝까지 해낼 수 있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아버님을 속일 수 있다. 그러니까 괜찮다. 부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후까지. 최후까지.   00462 악(惡)의 극본 =========================================================================                        * * *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이십만 대군, 삼십만 대군을 보내온다는 뜬소문이 파다했다. 아무리 그래도 삼십만은 지나치게 많겠지. 정말로 최대한 쥐어짜내도 이십만 명. 그것도 한꺼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파견할 것이었다. 뭐, 언제나 그러하듯 전쟁이란 직접 맞붙어봐야 알았다. 직접 봐도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우리군의 대전략은 항구들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위 지휘관들을 불러모아서 작전을 설명했다. “공화국은 숫자만으로 보면 대단한 적수가 아닙니다. 적군의 주요 전력은 아나톨리아 제국군. 그러나 아나톨리아군은 바다를 통해 건너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해안가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해버리면,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보내지 못할 터.”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다. “――틀림없이 공화국군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자신의 말을 뒤엎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우선 항구들을 내버려둡니다.” 개전(開戰). 머릿속에서 무심코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전쟁은 시작하였다. 엘리자베트나 나 정도의 사람에게 전쟁이란 꼭 '직접 가봐야 아는 싸움'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가 발생하기 한참 전부터 우리들 사이에는 치열하게 수싸움이 벌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내 입술이 열린 지금 개막한 것이었다. “항구들을 그냥 내버려둬? 왜?” “공화국과 아나톨리아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는 겁니다.” 어두침침한 막사. 하나하나가 역사의 산 증인이나 마찬가지인 마왕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다들 분위기가 여유로웠으나, 그 여유로움 때문에 도리어 막사의 공기는 숨 막힐 듯 팽팽했다. 허튼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 허락되는 장소가 아니었다. “적군에는 크나큰 약점이 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지나치게 병력이 많다는 겁니다.” “병력이 많아서 약점이라니. 군량 때문에 그러는 거야?” “군량도 군량입니다만 더 본질적이고 더 악질적인 약점입니다. 바로…….” * * * “아나톨리아에 비해서 우리군의 숫자가 너무 적다.”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작전회의실에는 공화국의 군부 수뇌가 전원 모여 있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통령근위대장, 샤를 리히트호펜 친위기사단장,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 막료총감……각자가 능히 전쟁터를 호령할 위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군세가 많이 상륙하면 상륙할수록, 역으로 우리 공화국 군대의 입지는 좁아진다. 아나톨리아에서는 작전권을 독점하려 들겠지. 결국 우리는 아나톨리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적어도 표면상으로 공화국은 아나톨리아에게 손을 벌리는 형태. 아나톨리아가 공화국을 버리면 전쟁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비록 동맹국이라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만약 적군이 항구 도시들에 집중해준다면 오히려 우리가 좋다. 아나톨리아군이 상륙에 난항을 겪는다면 그만큼 이미 전쟁에 뛰어든 우리군의 발언권이 높아진다. 하지만…….”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 그녀가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단탈리안은 우리가 아나톨리아와 알력 다툼에 휘말리도록 유도할 것이다. 해안가의 도시들을 일단 방치해둔 다음, 아나톨리아군이 충분히 많이 상륙하고 나서야 움직일 터. 여기까지 질문 있나?” “통령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저쪽에선 일부러 아나톨리아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도록 내버려둔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건 조금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사례 같은데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 “자그마치 이십만입니다. 그중에 절반만 건너와도 십만이에요. 십만은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겁니다. 아무리 적들이 우리의 분열을 노린다고 해도, 십만이나 되는 위험을 짊어질 가능성은 적지 않겠습니까요.” “물론, 저들이 전쟁의 승리를 목표한다면 그렇겠지.” 엘리자베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하지만 저들의 목적은 승전이 아니다.” “예?” “제군들. 단탈리안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통령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회의실에 울렸다. “가령 이번 전쟁에서 아나톨리아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서 겨우 승리했다고 가정해보라. 승리는 승리이지. 그렇지만 우리 공화국의 운명은 어찌 되겠는가? 기껏해야 아나톨리아의 위성국가로 전락할 뿐이다.” “과연……구태여 승전할 필요도 없이, 우리를 깔아뭉개기만 하면 되는 것이군요.”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단탈리안은 아나톨리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본인을, 공화국을 경계할 따름이다.” “…….” 오연하다 못해 오만한 발언. 그러나 엘리자베트의 목소리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로 그리 믿게 만드는 박력이 있었다. 실제 전적도 있었다. 지난 제2차 국화전쟁에서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 우리가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이느냐'이다. 단탈리안은 반드시 그런 전략을 노리고 들어오겠지.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해답이 도출된다…….” * * * “항구 도시를 포위한다?” “예. 전면적인 포위전이 정답입니다.” 내가 지팡이로 지도를 쓰윽 가리켰다. 외다리가 되고 난 이후 좋은 점이 있다면 따로 지팡이 비스무리한 물건을 지참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소소한 블랙조크였다. “우선 가장 거대한 항구 도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해안가를 전부 점령합니다. 어차피 십만 단위의 대군이 상륙할 거점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수상도시 베네치아인가.” 마르바스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군의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해안가를 정리해버리고, 재빠르게 베네치아를 포위합니다.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아나톨리아군이 베네치아에서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마르바스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내 의도가 잡히지 않은 듯했다. “아나톨리아군은 섣불리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싶지 않겠지요. 저들도 야전에서 마왕군과 맞붙는 건 거의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기 위해, 아나톨리아군은 공화국에 요청할 것입니다. 포위망의 후방을 공격하라고.” 그렇다. 아나톨리아가 전방을 맡고 공화국이 후방을 맡는다. 앞뒤로 동시에 후려치면 전투에서 십중팔구 승리할 것이라고, 아나톨리아군은 판단할 것이다. “즉, 공화국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발목이 붙잡힙니다.” “……그렇군. 공화국군이 어떻게 행동할지 그 노선을 전부 예상할 수 있게 되는가.” 마르바스가 천천히 턱을 주억거렸다. “게다가 공화국은 아나톨리아에게 작전권을 모조리 빼앗깁니다. 철저히 아나톨리아가 요구하는 사항에 맞추어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전국을 주도하고 싶은 엘리자베트 통령 입장에서는 고역이나 다름없겠지요.” 따라서, 하고 내가 말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베네치아를 구원하는 데 전력을 쏟아붓지 않을 것입니다. 전군을 이끌고 베네치아로 가버리면 아나톨리아게 지휘권이 먹혀버린다. 그렇다고 아예 응원군을 보내지 않으려니 아나톨리아의 눈치가 보인다……답은 하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 있으리라. 내가 마왕들의 눈동자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두운 막사에 나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양면전쟁입니다.” * * * “우리의 전병력을 둘로 나눈다.” 엘리자베트가 제장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우리가 보유한 사만오천 명의 군세에서 삼만을 차출. 베네치아로 향해서 원군을 보낸다. 단, 절대로 아나톨리아의 설득에 넘어가서 포위망을 공격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시늉만 내는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각탁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빈틈없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나머지 일만오천은 국토를 방위한다는 명목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기다린다.” “기다리다니요. 무엇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통령 각하?” “뻔하지 않은가. 단탈리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단언했다. “단탈리안은 군대를 둘로 나누고, 대부분의 병력을 베네치아 포위전에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본인은 따로 별동대를 추려서 이곳으로. 우리 공화국의 수도를 향해서 진군하겠지.”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심장이 위치한 부분이었다. “단탈리안 입장에선 본인만 잡으면 성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최고의 정예를 추려서 공격해올 게 분명하다. 우리도 정예병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비텐마이어 막료총감.” “예, 각하.” 머리가 회색으로 샌 청년이 자리에서 기립했다. 불면의 총감이라 불리우는 막시밀리안 비텐마이어였다. “그대에게 삼만으로 이루어진 제1군을 맡긴다. 아나톨리아와 적당히 협조하면서 마왕군의 본대를 포위하라. 적의 발목을 붙잡아두는 것이 귀관의 유일무이한 목표이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슐라이어마허 대장.”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빠릿하게 일어섰다. 그렇지만 어딘지 장난기가 사라지지 않은 몸동작으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군례를 올렸다. “예이, 통령 각하.” “그대와 리히트호펜 단장은 본인과 함께 일만오천의 제2군을 담당한다.” “이 한 목숨을 다 바쳐서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다.” 엘리자베트가 씨익 웃었다. “정말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야. 그것도 여러 번.” “……그거 참 기대되는군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등골이 저릿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웃었지만 눈빛에 진심이 담겼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전사하리라. 그런 직감이 쿠르츠의 뇌리를 스쳤다. 아직 결혼도 못한 노총각 신세로 죽게 되는가……쿠르츠는 씁쓸했지만 동시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었다. “제군들. 단탈리안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어라. 우리도 그와 목적이 똑같다. 마왕 단탈리안을 잡기만 하면 이번 전쟁, 우리의 승리이다. 서로가 최선의 준비를 갖춘 채 충돌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기나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지.” * * * “엘리자베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우리의 본대는 발이 묶이게 됩니다. 하지만 적군도 사정은 똑같습니다. 아나톨리아의 대군과 공화국의 본대는 속절없이 베네치아에 붙잡혀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 틈을 노려서, 저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 이끄는 별동대가 공화국의 수도를 불태워버립니다.” 즉,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눈다. 전쟁을 질질 길게 끌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단숨에 공화국의 수도로 진격한다. 바르바토스를 되찾고 데이지를 잡아버린다. 속전속결이다. “마르바스 전하. 외람되오나 제1군을 맡아주십시오. 아나톨리아와 공화국이 연합하면 그 병력은 물경 십오만에 이를 것입니다. 이중에서 그만한 대병력을 감당할 분은 마르바스 전하밖에 없습니다.” “기쁘게 내 역할을 받아들이겠다.” 내가 머리를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이번 전쟁은 단판승부가 될 것입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전사하느냐, 혹은 제가 전사하느냐.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단탈리안. 그대는 어느 쪽에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패배라는 단어를 제국에 허락한 기억이 없습니다.” 5월의 막바지에 이른 무렵. 나는 라우라와 함께 일만오천의 헬베티카 용병을 이끌고 진로를 틀었다. 이 군세는 제2군단이라고 불리었으나 사실 전쟁의 향방이 여기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마왕군 전원이 알고 있었다. 목적지는 무니헨.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였다.   00463 악(惡)의 극본 =========================================================================                        대륙력 1513년 5월 30일. 이날은 딱 국화전쟁의 1주년이었다. 작년 5월 30일, 라우라는 헬베티카 용병을 이끌고 사르데냐 왕국을 침공했다. 헬베티카 용병은 그리고 전설이 되었다. 단지 날짜의 숫자가 같았을 뿐이지만, 여기서 어떤 대단한 의미를 찾으려는 병졸이 많았다. “전쟁의 여신께서 우리 군주(軍主)-대리를 수호하신다.” “여름은 우리에게 축복받은 계절이다. 패배할 리가 없다.” 이른바 미신. 그러나 이런 미신이야말로 장병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깃발에 글자를 수놓도록 명령했다. 아테네 여신께 영광을. 이미 용병들에게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여신의 환생쯤으로 여겨졌다. 짧고 효과적인 문장이었다. “아테네 여신이시여!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오오, 여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라. 이 얼마나 신성한가.” ……아니, 조금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을까. 라우라가 검은색 군마를 타고 지나칠 때면 주변의 병사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은 다음, 마치 진짜 여신을 배알하듯이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거나 기도를 올렸다. 이게 꽤나 장관이었다. 라우라는 무덤덤하게 병사들의 환호성에 답례했다. “아테네 여신님, 이쪽을 봐주십시오!” “저에게 한번만 가호를 내려주세요!” 거의 광신에 가까운 인기였다. 문제는 저렇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죄다 전쟁터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용병이라는 점. 웬만한 동네 양아치가 질겁해서 도망칠 정도로 험상궂은 아저씨 아줌마가 ‘여신니이임!’을 울부짖으니 가히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에 대해서는 라우라도 폭발했다. 군중을 돌아다닐 때는 의연했지만 막사에 들어와서 단 둘이 되면 삿대질을 아끼지 않았다. “여신님이 뭔가, 여신님이! 나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다. 어차피 가라앉을 헛소리라 생각하여 방치해뒀더니만 아주 나날이 목청이 커지는군.”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특효약이지 않습니까.” “부끄럽지 않은가!” 라우라가 얼굴을 붉히면서 빽 소리 질렀다. 귀여워라. 내가 살면서 생각해봤는데, 라우라는 역시 괜한 일로 쑥스러워할 때 제일 귀여웠다. “아예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병사들이 보기에 우리 라우라는 진짜 여신처럼 예쁜 겁니다. 전쟁도 잘 해요, 군사도 잘 챙겨줘요, 게다가 예쁘기까지 해요. 이 정도면 완전 여신 아닙니까?” “…….” 그날 이후로 라우라는 여신 숭배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호성이 터질 때마다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기 외모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라우라도 귀여웠다. 이런저런 분위기를 보면 자명하겠으나, 우리군의 사기는 최고였다. 우리군이 주둔한 곳에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로 직행하기 위해선 방해물 하나를 넘어야만 했다. 바로 알프스 산맥이었다. 국화전쟁에서 산맥을 돌파했듯이, 이번에도 우리는 이곳을 질주해야 했다. 대군이 지나치는 것을 결코 쉬이 허락하지 않는 고령. 대륙에서 제일 험준한 산맥이자, 일찍이 만신이 거주하는 영산(靈山)으로 취급받은 곳……. 라우라가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며칠이 필요한가?” “일주일만 주십시오, 공작 전하.” 알프스 산맥이 일개 평지마냥 간단한 지형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나와 라우라가 마왕군 중에서 헬베티카 용병만 가려서 뽑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헬베티카인에게 알프스는 고향이었다. 고산 지대를 통과하는 데 있어 그들만한 숙련병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알프스의 가장 가파른 부분을 통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국화전쟁에서 돌파한 경로와 비교하자면 거의 완만하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물론, 이마저도 평범한 군대로서는 진군할 엄두도 나지 않겠지만. “일주일은 너무 길다. 엿새 안으로 끝내버린다.” “조금 과격한 소풍이 되겠군요!” 지휘관들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여하간 죽어도 자존심에서 밀리는 걸 싫어하는 족속이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계책을 더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헬베티카는 여러 부족이 연합해서 만든 연방이었는데, 그중에서 난쟁이 부족들과 엘프 부족들의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한집살림인 주제에 서로를 원수처럼 보았다. 일종의 라이벌 심리라고 불러야 할까. “엘프 부대와 난쟁이 부대를 구분해서 각기 따로 진군시킵니다.” 그 심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그저 부대를 나누는 김에 종족을 기준으로 구분했다, 라고 설명했다. 시치미를 뚝 잡아뗀 것이었다.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둬도 저들끼리 알아서 경쟁할 것이 분명했다. 산맥 초입에 들어섰을 때는 다들 얌전했다. 적당히 강행군을 이어나가면서 쉴 때는 쉬고, 발걸음을 놀릴 때는 놀리고, 전쟁의 프로답게 확실히 정도를 지켰다. 문제는 이따금 엘프 부대가 난쟁이 부대를 지나칠 때였다. “훗.” 자그마한 콧방귀. 너희 같은 느림보는 언제든지 따돌릴 수 있지만 그냥 예의상 보조를 맞춰둔다는 것처럼. 엘프들은 난쟁이들을 아주 약간 추월하면서 비웃음을 흘렸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코웃음이란 본래부터 적나라한 제스쳐였다. “아니, 저런 간나 새끼들이……?” “저 자식들 지금 우리 비웃은 거 맞지?” 아무렴 난쟁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진군이 시작한 지 겨우 한나절 만에 양쪽 종족의 자존심 대결이 시작했다. 어느 반나절은 난쟁이 부대가 살짝 앞서 나갔다. 당연하게도 난쟁이들은 엘프 부대를 스쳐서 지나칠 때 얼굴을 기하학적으로 구기면서, “후.” 하고 비아냥을 날렸다. 엘프들은 한동한 멍하게 난쟁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이 썩어들었다. 소위 말해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었다. “저, 저 사시사철 땅바닥에 눌러붙다 못해 구멍에 쳐박혀서 사는 콧수염 새끼들이!” “지금 우리랑 한판 해보자는 거야, 뭐야?” 그리하여 추월하고 추월당하는 접전이 불을 튀겼다. 휴식이고 뭐고 없었다. 지휘관이 부관을 닥달했고, 선임병이 후배를 갈구었다. 하급 병사들은 자기가 받은 고통을 선임이 아니라 적수들에게, 즉 엘프 부대에 투사했다. 전형적으로 아름다운 상하 관계가 그곳에 있었다. 애당초 헬베티카 용병은 동네별로 분대가 짜여졌다. 선임이나 후임이나 동향 출신이었다. 같은 마을의 큰형님이 까라고 하면 정말 명령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재수탱이 없는 종족에 한방 먹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희여멀건 허우대 새끼들!” “진흙에 코 박고 허우적거릴 땅딸보 놈들!” “위선자!” “변태 자식들!”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 제3자 입장에서 보니 유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유치한 싸움이 다 그러하듯이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만약 라우라와 내가 정상적인 사령관이었다면, 이런 쓸데없고 무의미한 경쟁은 제지해야 마땅하겠지. 하지만 라우라도 나도 정상인의 기준에서 조금 많이 떨어져 있었다. “성녀님. 부탁드립니다.” 롱그위 성녀의 축복에는 장병들에게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다. 꽤나 오래전, 나는 롱그위 성녀가 브르타뉴군에 축복을 내리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써먹을 차례였다. 롱그위 성녀가 시궁창 같은 얼굴 표정으로 병사들한테 축복을 내렸다. “……힘은 오직 내가 증명할지어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다시금 울창해지는 것을 용납하소서.” 이튿날에 한 번.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유를,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할 자유를 기꺼이 누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필멸자가 유일하게 향유하는 불멸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사흘째에 다시 한 번. 당장이라도 지쳐서 떨어질 것 같았던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재차 발을 움직였다. 안 그래도 라우라가 아테네 여신의 환생으로 오해받는 상황. 거기에다 우연찮게 아테네 여신의 성녀인 롱그위가 축복까지 걸어주자, 이제 병사들의 미신은 집단적 광신으로 발전했다. “여신께서 우리에게 저 재수없는 엘프놈들을 족치라고 명령하셨다!” “가자, 친우들이여! 나의 고향 동료들이여! 난쟁이 자식들의 코를 짓뭉개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내려진 과업이다!” 살짝 이상한 방향으로 신앙심이 폭발했지만. 나야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언제 라우라가 진짜 여신이라고 말한 적이라도 있는가. 저들이 알아서 오해하는데 구태여 오지랖 넓게 착각을 교정해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어째서인지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심각하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여신께서 소녀한테 내려주신 권능을 이런 식으로……신성한 전쟁터도 아니고 고작 자존심 싸움에……아아, 아테네 여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하고 불민한 종자를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성녀는 병사들에게 축복을 내릴 때마다 땅바닥에 엎어져서 통곡을 했다.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종교인이란 다 저러는 것일까. 새하얀 사제복이 흙에 더러워지는데도 무릎을 꿇은 채 절망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조금 동정심이 일었다. 나는 성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토닥거렸다. “괜찮습니다, 롱그위 성녀. 왜 슬퍼하는지 몰라도 저걸 보십시오.” 내가 손가락으로 부대를 가리켰다. 성녀가 내 손끝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막 축복을 받고 아테네 여신을 옹호하는 난쟁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의 눈동자는 엘프에 대한 적의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오늘에야말로 허우대들을 짓밟아버린다!” “아테네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곰발톱 부족의 명예를 걸고 깔아뭉개자!”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아테네 여신님에 대한 신앙이 쭉쭉 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성녀로서 참으로 보람찬 과업이 아닌지요.” “…….” “저들은 앞으로도 평생 아테네 여신님의 충실한 신도가 될 게 틀림없습니다. 롱그위. 당신은 여신의 사도에게 주어진 임무를 누구보다 훌륭하게 이루어낸 것입니다. 여신께서도 당신을 흐뭇하게 여기시겠지요. 자랑스러워 해도 좋습니다.” 그러자 롱그위 성녀는 아예 목을 놓아 울어버렸다. “당신이랑 엮이고 나서 제 인생이 제대로 돌아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신이시여! 아아, 여신이시여!” “뭐, 뭐가 불만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노력해서 고쳐보겠습니다.” “전부 불만이야!” 롱그위 성녀가 나한테 돌맹이를 마구 던졌다. 명중률이 형편없어서 한 개도 맞지 않았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도망쳐야만 했다. 참고로 나는 군단이 진군하는 내내 가미긴한테 빌린 와이번을 타고 다녔으므로, 일단 하늘 높이 도망쳐버리면 롱그위 성녀가 날 잡을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려와! 이 나쁜 새끼,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트리고 어딜 도망쳐! 책임져! 어떻게든 책임지란 말이야!” 롱그위 성녀는 계속해서 의미없이 돌맹이를 난사하였다. 그 모습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성녀가 아니라 광전사. 혼기를 놓쳐버리는 바람에 매일 히스테릭을 부리는 노처녀 환자였다. 불쌍하게도……인간이란 정신적으로 내몰리면 저기까지 몰락할 수 있었다. 롱그위 성녀의 광분과 상관없이 우리 군단은 말 그대로 질풍처럼 진군했다. 알프스 산맥에 들어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경이적인 속도로 산맥을 돌파하였다. 강행군을 펼쳤음에도 군사들은 괴로워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라우라의 통솔력과 나의 계략, 롱그위 성녀의 지원이 합쳐짐으로써 역사적인 강행군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우리들 눈앞에는 저 멀리 잘츠부르크라는 도시가 버티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남단을 수호하는 핵심 도시. 달리 말해, 저곳을 함락시키면 공화국의 수도가 바로 지척에 놓였다. 라우라가 지휘봉을 천천히 내렸다. “잘츠부르크를 지도에서 지워버려라.”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00464 악(惡)의 극본 =========================================================================                        용병들은 단숨에 도시를 유린했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탓일까. 잘츠부르크 수비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저, 적습이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의 첨탑에서 요란하게 울릴 즈음, 이미 우리의 선봉대는 야트막한 성벽을 넘어섰다. 용병이 휘두른 칼날에 붉은 핏물이 튀었다. 종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저녁 하늘을 갈랐다. 잘츠부르크는 아름답게 잘 정돈된 소도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외성(外城)이 허술했다.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우리 제국과 국경이 맞닿은 도시를 전부 요새화 했으나, 잘츠부르크는 공화국의 남단, 즉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대에 놓여 있었다. 멀쩡히 평지를 내버려두고 산맥을 횡단하여 공격해올 줄은 몰랐겠지. 내가 일부러 알프스 산맥을 타고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초전은 싱겁게 끝나겠군요.” 내가 한손 망원경으로 도시를 둘러봤다. “하긴 우리가 사흘 만에 알프스를 돌파하리란 걸 어찌 예상했겠습니까.” “주군의 술수 덕분이다. 본인도 기껏해야 닷새가 한계라고 생각했다. 공화국의 통령도 그리 판단했을 거다.” 라우라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인간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 여기서 놓치면 저들은 시민이 아니라 저항군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을 터. 철저하게 약탈하고 학살하여 후환을 남겨두지 않도록.” “예, 전하!” 기병대장들이 명령을 하달받고 도시 주변의 평원으로 널리 퍼졌다. 시민들이 허겁지겁 사방으로 도망쳤으나, 기병대는 마치 토끼를 사냥하듯이 시민들을 쫓아서 사살했다. 약 1만 명으로 이루어진 잘츠부르크는 이날 밤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우리군은 민가와 식량창고, 내성을 털어서 군량을 확보했다. 그다지 막대한 양의 식량은 아니었다. 보름에서 한 달쯤 넉넉하게 버틸 만했다. 창고에는 어째서인지 곡식보다 소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는데, 딱히 쓰잘데기가 없어서 챙길 만큼만 챙기고 죄다 강물에 버렸다. “저게 다 돈인데…….” 용병들이 소금가마를 강에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며 롱그위 성녀가 중얼거렸다. “성녀가 구두쇠인 줄 미처 몰랐군요. 제법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처럼 돈이 썩어나가는 갑부는 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죠. 꼭두각시 전쟁 이후로 우리 왕실이 얼마나 빚을 많이 지게 되었는지 알기나 하세요?”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래도 브르타뉴에게는 브르타뉴만의 고충이 있는 것 같았다. 롱그위 성녀는 무척이나 서글픈 눈동자로 강줄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말했다. “단탈리안 궁중백. 제가 축복을 한 번 내릴 때마다 금화 일천 장을 지불하세요!” “예?” “솔직히 저 덕분에 기습이 성공한 거잖아요. 애당초, 저는 당신한테 따라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축복까지 내려야 한다는 얘기는 사전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추가 노동……계약상에 없었던 일거리……즉, 별다른 대가가 필요해요!”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최고지휘관인 우리야 이렇게 잡담을 떠들었지만, 미리 말했다시피 잘츠부르크는 현재 온갖 방화와 학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만 명의 무고한 시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다. 요컨대 롱그위 '성녀'께서는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서 돈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저 같은 놈이 이런 말 꺼내는 것도 우습긴 합니다만……안 부끄럽습니까?” “제가 부끄러움을 참는 대신 왕실의 재정건전성에 헌신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괜찮아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만.” “계속 눈치없게 굴다가는 당신도 새빨갛게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전쟁의 여신을 섬기는 성녀님은 조금 화끈했다. * * * 나는 라우라와 함께 잘츠부르크 외곽 평야에 나왔다. 우리를 호위하는 인원은 열여섯 명의 기병에 불과했다. 롱그위 성녀도 여기엔 없었다. 성녀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술을 마시다가 곯아 떨어졌다. 글쎄, 성녀에게는 성녀 다름대로 고민거리가 있으리라. “라우라. 저는 지금까지 수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내가 어두컴컴하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중에 마물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꼭두각시 전쟁에만 마왕군을 투입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꼭두각시 전쟁만이 예외였습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서 별빛이 각양각색의 색깔로 윤을 내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밤하늘을 목격한 다음에야 별이 때로는 초록색으로, 보라색으로, 붉은색으로 빛난다는 걸 알았다. “당시 브르타뉴 왕국은 아가레스를 끌어들였습니다. 그것이 좋은 명분이 되었지요. 만일 명분이 없는데도 마왕군을 동원했다면, 그 즉시 대륙의 열국이 반발하여 반(反)마왕군을 조직했을 겁니다. 저는 오직 적합한 명분이 주어질 경우에만 마물을 일으킵니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공화국은 우리의 섭정인 바르바토스를 납치했습니다. 마왕군을 총동원할 명분으로서 충분하고 넘치는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화국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마디의 단어를 속삭였다. 그러자 눈앞에 푸른 빛이 투영되며 글자들이 떠올랐다. ━━━━━━━━━━━━━━━━━━━━━━━━━━━━ [몬스터명(B)]   [체력] [공격]  [방어]  [고용비] -오우거 보병    400   505   550   10000골드 -트롤 보병     610   300   620   11000골드 -살라만드라(상급)  220   400   190   15000골드 -운디네(상급)    260   310   250   15000골드 -노움(상급)     290   300   300   16000골드 -실프(상급)     200   240   200   11000골드 -은랑족(銀狼族)   390   560   450   17000골드 ━━━━━━━━━━━━━━━━━━━━━━━━━━━━ 현재 나의 전재산은 금화 이백사십만 장 가량. 성녀가 표현했다시피 돈이 썩어 넘치도록 많았지만, 나는 예전에 몇 번 활용한 것 이외에 몬스터를 시스템으로 고용한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나치게 비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굳이 거금을 들여서 마물을 장만할 필요성도 적었다. 마물을 동원해도 괜찮은 전쟁이라면 마왕군을 쓰고, 마물을 동원하는 게 곤란한 전쟁이라면 용병을 쓴다.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오우거, 이백 개체.” 그러나 이번 전쟁은 달랐다. 마물을 사용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오우거들을 정말로 고용하겠느냐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내가 주저하지 않고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소환.” 순식간에 내 전재산 수치에서 이백만이 삭제되었다. 나 역시 자린고비 근성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거금이 날아가버린 것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겠지. 하지만 엘리자베트를 상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도 않았다. 수많은 보랏빛 마법진이 대지를 가득 메웠다. 밤하늘의 별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 땅바닥의 마법진들에서 새어나왔다. 호위로 따라온 열여섯 명의 기병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 크라하아아……. 마법진에서 거대한 형체의 괴물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오우거들이 내쉬는 증기와 같은 숨결이 공중에 흘렀다. 잠시 뒤에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평야에는 이백 명의 오우거가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살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오, 오우거다.” “백오십……아니, 이백은 거뜬히…….” 호위병들이 본능적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나한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오우거 이백 명이라면 거진 웬만한 기사단을 쓸어버릴 전력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인의 충실한 수하들이다. 겁 먹지 않아도 된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호위병들이 멋쩍은 듯 사과했다.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라우라와 나는 태연자약한데 경호원인 자기네가 겁을 집어먹었으니 쑥스러울 법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 저들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전력이다만, 아예 전투 도중에 소환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상대방이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찌르는 효과가 있었을 거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저 오우거들을 평원파의 잔당이라 속일 것입니다.” 오우거의 가죽에다 바르바토스를 상징하는 문양을 대충 그려넣고, 손에는 바르바토스의 깃발을 건네준다. 중간중간에 제파르 형님의 깃발과 벨레드 형님의 깃발도 끼워넣는다. 즉석에서 평원파 반란군이 완성되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에 불과하겠으나 괜찮았다. 요는 저 오우거들이 ‘바르바토스를 되찾기 위해 공화국에 쳐들어왔다’라는 명분을 내세우게 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평원파의 반란군을 추격하느라 '의도치 않게' 공화국 영지까지 발길을 들인 겁니다. 라우라, 제 말을 이해했습니까.” “호오.” 라우라가 감을 잡았는지 즐겁게 흥얼거렸다. “잘츠부르크를 파괴하고 불태운 것은 우리 제국군이 아니라, 복수심에 눈이 멀어버린 평원파 반란군의 소행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반란군을 몰아내고 잘츠부르크를 구원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단, 안타깝게도 한 발자국 지각해버리는 바람에 잘츠부르크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요.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 아니고 뭡니까.” “주군은 여전히 성격이 나쁘다.” 라우라가 키득거렸다. “그래서, 사악하기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의 주군. 저 오우거들에게 내릴 명령은 무엇인가. 이미 소녀는 어느 정도 감이 잡히고 있다만 예의상 물어보겠다.” “잘츠부르크 주변의 마을들을 모조리 파괴할 것.” 내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오우거들이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이루었다. “오늘 밤에 수천 명의 농민들이 공포를 맛보겠지요. 우리 제국군은 공화국 국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사방팔방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가 다시 한 번 손을 털어내자, 오우거들이 육중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백 명의 오우거가 흩어지며 쿠웅, 쿠웅, 하고 음산하게 발소리를 울렸다. 오우거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어두운 밤공기 너머로 사라졌다. “물론, 우리가 약간 늦어버릴지도 모릅니다만……그건 사람들의 운에 달린 것 아닐련지.” 잘츠부르크 인근에 펼쳐져 있던 농토는 초토화되었다. 섬세한 약탈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 보이는 대로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농가를 짓뭉개버릴 뿐이었다. 기껏해야 마을 자경단 정도로 오우거를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우리 제국군은 기병대를 운용하여 각 마을을 도와주도록 했다.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제국군이 들이닥치면 오우거들이 슬그머니 마을에서 후퇴했다. 마을주민들 입장에서 제국군이 구원자로 비추는 것은 당연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제국군은 이렇게 조언했다. “무니헨으로 피난하시오! 여러분의 통령이 도와줄 것이오. 이곳은 우리가 막겠소.” 그리하여 피난민들은 수도를 향하여 힘겨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피난민들은 수도까지 걸어가면서 소문을 퍼트리겠지. 오우거 수십 마리가 난동을 부렸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자기네를 구해주었노라고. 풍문은 금세 널리 퍼져서 제국군에 대한 인상을 좋은 쪽으로 왜곡시킬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엘리자베트. 너는 자국의 피난민을 죽여서 그 입을 틀어막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차마 국민을 죽이지는 못하겠지. 너에게 국가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신념일 테니까. 마치 나에게 버릴 수 없는 신념이 있듯이 말이다. 전초전은 이쪽의 승리다…….   00465 악(惡)의 극본 =========================================================================                        * * * 대륙력 1513년 6월 7일.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일만오천의 병력을 몰아 공화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조급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적지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었지만, 병사들은 여유로운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공화국 통령은 오우거를 그냥 내버려두는군. 기사단을 소수로 운용하면 어느 정도 오우거를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기사단 전력을 최대한 아껴두려는 것이지요.” 라우라와 내가 말머리를 나란히 움직이며 두런거렸다. 내 말에는 특수한 안장이 설치되었는데, 덕택에 왼발이 의족으로 대체되어버린 나도 말을 탈 수 있었다. 딱히 주문하지도 않았건만 난쟁이들이 뚝딱 만들어왔다. 난쟁이들은 손기술이 정말 뛰어나구만. “병사들의 실력만 놓고 비교해봤을 때 우리군은 공화국을 압도합니다. 공화국군이 제아무리 엘리자베트 통령 아래에서 강병으로 훈련되었다 할지라도, 이쪽은 수십 년 동안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 용병……상대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자베트는 더더욱 기사단 전력을 보존하고 싶겠지. 이백 명의 오우거를 사냥하겠답시고 기사단을 파견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수가 있었다. 설령 마을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최후의 일전을 위해 기사단을 아껴둔다. 그것이 엘리자베트의 결정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위해 모든 것을 비축한다는 것인가? 결국 공화국 통령도 위선자로군. 오우거가 국민의 농토를 마음껏 짓밟고 다니는 것을 허용했다. 대단한 양반이 아니다.” “뭐, 이쪽의 속내를 읽은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아쉽군요.” 나는 실제로 적군의 기사단을 끌어내려고 오우거를 풀었다. 오우거처럼 막강한 마물을 상대하는 데엔 기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어쩌면 유인책에 걸려들까 싶어서 해보았지만 역시 안 되었다. 뭐, 이 정도로 뻔한 함정이었다. 엘리자베트가 걸려드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주변의 농가를 약탈하면서 천천히 전진했다. 농민들이 급하게 도망치느라 마을의 식량창고에 꽤 넉넉하게 식량이 남아 있었다. 덕택에 우리군은 진군하면 진군할수록 식량이 풍족해지는, 기이한 현상을 겪었다. 마침내 6월 12일.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다. 라우라는 항상 그랬듯이 직접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정찰했다. 전군의 총사령관이 정찰을 다녀오는 것은 상당히 무모했지만 그게 라우라의 방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우라는 정찰 도중에 적군의 분견대와 마주치고 말았다. 만일 분견대가 공격해 들어왔다면 자칫 목숨이 위험했을 상황. 하지만 라우라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명령했다. “공격하라!” 겨우 스무 명 남짓하는 기병으로 돌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러자 공화국의 분견대가 오히려 놀라서 황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아마 이쪽에 병사가 스무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도망쳤을 거다. “위험천만했군요. 어떻습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까?” “아니. 마침 잘 됐다. 한동안 이 근방을 돌아다니는 적군이 없을 테니 마음껏 정찰하지.” 그리하여 라우라는 네 시간 동안이나 느긋하게 주변 지역을 살펴보았다.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심장이 무슨 강철로 되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라우라의 뒤를 따라다녔다. “쯧. 제법 단단하게 대비해두었군.” 라우라가 저 멀리 평야를 내다보면서 혀를 찼다. 그곳에 공화국군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공화국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흰색의 깃발이 무수하게 펄럭거렸다. “척 살펴봐도 병력이 이만을 훌쩍 넘긴다. 이만삼천, 사천, 그 정도일까. 우리군에 비해서 숫자가 확실하게 많다.” “이상하군요. 그렇게 많이 남겨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공화국의 모든 병력이 사만오천. 그중에 베네치아 방면으로 보낸 병력이 삼만이었다. 이건 가미긴의 와이번 부대를 동원해서 확실하게 정찰해두었다. 현재 공화국에 남은 병력은 아무리 많아봤자 일만칠천 가량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그녀라면 뭐든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갑작스럽게 병력 오천을 만들어내기란 어려워 보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우라가 “흐음” 하고 말했다. “여기서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볼까.” “가보다니. 어디를 말입니까?” “뻔하지 않은가.” 라우라가 말고삐를 가볍게 휘둘렀다. “적진이다.” 그리고 라우라가 대뜸 군마를 몰아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나와 기병대가 깜짝 놀랐다. 내가 다급하게 라우라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라우라를 따라서 달렸다. 라우라는 평원 딱 정중앙에 가서야 멈추었다. 망원경을 사용하면 공화국 병사들의 얼굴까지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적진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적병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라우라, 대담한 것도 좋지만 너무 경거망동하는 거 아닙니까!” “아아. 미안하다, 주군.” 라우라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어투로 사과했다. 아예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라우라는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잠시 뒤에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그렇군. 적의 속임수를 알았다.” “정말입니까?” “주군도 직접 한번 살펴봐라.” 하고 라우라가 내게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나는 오른쪽 눈가에 망원경을 갖다 붙인 채 공화국의 진지를 둘러보았다. 마침 점심을 먹을 때라서 그런지 공화국 군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빵을 뜯었다. 열 명쯤 모여서 먹는 병사들도, 스무 명 서른 명쯤 모여서 먹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갑자기 평원에 출현한 우리의 모습을 요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무리도 많았다. “알아차렸는가?” “아니. 딱히 이상한 점이 안 보입니다만.” “주군은 정말 전쟁질에는 소양이 없다. 눈은 달아두었다가 어디에 써먹는 것인가?” 라우라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망원경을 접어들어서 라우라의 이마를 콩, 하고 약하게 때렸다. “전쟁질 이외에는 아무데도 소양이 없는 라우라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뭐가 이상하다는 얘기입니까.” “밥을 먹고 있는 병사의 숫자다. 일정한 수의 병사끼리 모여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숫자가 들쭉날쭉하지 않은가. 그게 속임수의 비결이다.” “하아.” 밥 먹는 숫자가 뭐 어때서.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라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군이 말한 바가 맞다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그동안 맹훈련을 받았다. 통령은 그중에서도 정예병력만을 뽑아서 이곳 수도에 배치했을 터.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숙식을 해결하는 데 병사들이 난잡하게 섞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한번 잘 봐라.” “흐음.” 내가 망원경을 재차 들어서 적진을 유심히 살폈다. 그제야 비로소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일정한 숫자를 이루어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대충 열 명일까. 십인대 단위로 모인 것 같았다. 반면에 중간중간 과도하게 많은 숫자의 병사, 예컨대 서른다섯 명쯤이 한꺼번에 모인 경우가 있었다. 다만 그런 경우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 “어휴, 아직도 모르겠다는 얼굴인가.”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재수 없었다. “공화국 통령은 아마도 전군을 십인대 단위로 조직했을 것이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중간중간에 십인이 아니라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분대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훈련을 거치지 않은 부대임을 의미한다.” “아.” “틀림없이 급조해서 뽑아낸 병력이겠지.” 라우라가 노래를 흥얼거리듯 평안하게 말했다. “왜 급조해낸 병력을 십인대로 편성하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알겠는가, 주군?” “제기랄.” 내가 기어코 욕설을 중얼거렸다.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설명해보십시오. 뭡니까? 저를 놀리는 게 재밌습니까?” “당연히 주군을 놀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미주(美酒)에 비견할 만큼 맛있다.” 라우라가 깔깔 웃었다. 젠장할. 나는 툭하면 라우라를 바보라고 놀렸다. 평소에 나한테 당한 짓거리를 복수하려는 게 분명했다. “우선 이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왜 공화국 통령은 신병들을 저리 엉망진창으로 내버려두었는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쪽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십인대로 만들지 않는 편이 효율적이라고요?” “그렇다. 괜히 신병들에게 익숙하지도 않은 체계를 강요하느니, 차라리 신병들이 익숙한 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라우라가 적진을 바라보았다. “저 신병들은 바로 도시나 마을에서 징집한 민병이다. 도시나 마을의 자경단은 그들 나름대로 익숙해져 있는 편성이 따로 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스물다섯 명, 서른 명 단위의 전투가 편안하다.” 아하. 과연 그럴듯했다. 막 뽑은 민병들에게 십인대-백인대 따위의 체계를 억지로 밀어붙인들 효과가 나올 리 없었다. 차라리 수 년 내내 함께 뒹군 고향의 동료들끼리 조를 짜주는 것이 훨씬 나았다. 다시 말해, 점심 식사에서 열 명 이상 모여 식사를 해결하고 있는 병사들은 엘리자베트의 정예병이 아니었다. 인근 도시와 마을에서 급히 끌어온 민병이었다. “통령은 전투가 목전에 다가왔음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터. 유사시에 우리가 기습하더라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분대별로 숙식을 지키도록 엄격하게 명령해두었겠지. 그러니까 소수의 분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들이 딱딱 열 명 단위로 모인 것이다.” “과연……요컨대 일만오천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민병이겠군요.” “그렇다.”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주군. 두 번째로 추측할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예이, 예이. 소인은 천하의 바보 멍텅구리이니 부디 공작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소서.” “후후.” 라우라가 작게 웃었다. “생각해봐라. 만일 공화국의 통령이 정예병과 민병을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민병을 십인대로 조직했을 거다. 편대가 들쭉날쭉인 군대를 갖고서 우리 제국군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하니까.” 웃음기를 품은 라우라의 푸른색 눈동자가 순간 암사자처럼 날카로워졌다. “민병은 민병대로 가장 효율적인 편대로 구성한다. 정예병은 정예병대로 가장 효율적인 편대로 준비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단 하나. 바로 민병과 정예병을 완전히 분리시켜서 운용하리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따로 포진시킬까? 민병을 별동대로 삼아버릴까? 그것도 불가능하겠지. 별동대로 활용하기에는 훈련도가 너무 떨어진다. 민병을 본대로 삼는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군의 진격에 곧바로 무너질 테니.” 라우라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졌다. 그건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짓이었다. “공화국에 별동대를 조직할 여력 따윈 없다. 정예병이든 민병이든 모두 본대로 삼을 수밖에 없다. 즉, 민병을 제1전열로 내세우고 정예병을 제2전열과 제3전열로 내세운다. 이것이 공화국 통령의 전술이다.”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이었다. 예전에 나는 왜 지혜와 전쟁이 함께 취급받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우라를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적진을 정찰하고 단 한번에 상대방의 전술을 읽어냈다. 이런 인간을 지혜이자 전쟁의 여신이라 부르지 않고 뭐라 칭하겠는가? “제1전열의 민병으로 우리 제국군의 공격을 일단 한번 막아낸다. 그리고 우리군이 민병을 상대하느라 약간 지쳤을 때, 정예병인 제2전열과 제3전열로 덮치려는 것이다. 흐응. 정석적이면서 교활한 방법이로군.” 라우라가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자, 주군. 적의 의중은 파악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해줄 차례다.”   00466 악(惡)의 극본 =========================================================================                        우리가 돌아가려고 하자, 공교롭게도 적진에서 일단의 기병이 출격했다. 아마도 우리를 내쫓으려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챙겨 먹느라 지각한 것일까. 반응이 느렸다. 이미 정찰로 확인할 건 전부 확인했다. 우리는 미련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공화국 기병대는 한참이나 쫓아왔으나, 우리의 말발굽이 피어낸 먼지구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뒤를 돌아보았다. 군마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더러운 먼지가 부유했다. 그 너머로 무수히 많은 깃발들이 신기루처럼 느릿하게 펄럭거렸다. 아마 어느 깃발 아래에는 데이지가 서 있으리라. 녀석은 틀림없이 나를 발견했겠지. “주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나 덜미가 잡힐까봐 추격병을 확인해봤습니다.” 내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원경으로 최대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거기엔 데이지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데이지의 희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이대로 내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넘어감으로써,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결말을 안겨주어야 할까. 아니라면……말해주어야 옳은 것일까. 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눈앞에서 폭로해야 마땅한가. 그것이 도리어 데이지를 어떤 의미로 존중하는 길일까. 어느 쪽이든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너무나 당연했다. 문제는 어느 선택이 실제로 데이지를 더 위하는가, 그뿐이었다. 단탈리안이라는 역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데이지를 위해서. “라우라. 이번 전투에 대해서 미리 말할 게 있습니다.” “주군의 요망은 웬만하면 다 들어주겠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님이었다. 스물네 기의 기병이 평원을 가로질러서 이쪽 진지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아버님이 그곳에 있음을 다 알았다. 검은색 군마에 검은색 망토, 온몸을 흑색으로 도배하는 의복 따위는 아버님밖에 입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건대 아버님은 옷 고르는 눈썰미가 형편없었다. 재미난 점은 여자들 옷을 사줄 때는 또 능숙하게 잘 고른다는 것이었다. “아버님이야.” “어? 정말?” 루크가 밀빵을 내리고 타조처럼 고개를 올렸다. 루크는 평야 저편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감았다. “너무 멀어서 안 보이는걸.” “확실해. 어딜 봐도 아버님이잖아. 오빠는 눈구멍을 뒀다가 어디에 쓰는 거야? 아버님도 알아보지 못해서야 정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네.” “…….” 정오 무렵. 햇살이 찬란한데도 유독 아버님만큼은 반쯤 그림자에 덮인 것 같았다. 그 옆에 머리가 나빠 보이는 금발머리의 여자도 눈에 띄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 내지는 나무 비슷한 생명체였다. 관심을 줄 필요가 전무했다. “우리가 있는 걸 알아보실까?” 루크가 불안하게 속닥거렸다. “많이 화나셨을 텐데. 솔직히 어떤 얼굴로 대부님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오빠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게 있기만 하면 돼. 유일하게 오빠가 멍청해 보이지 않는 표정은 그거 하나뿐이야.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네.” 우리는 공화국의 신뢰를 얻어내서 이번에 출전했다. 바르바토스를 극악하게 고문한 것이 유효했다. 우리 남매가 이중간첩일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겠지. 정말로 너희가 배신자라면 어디 단탈리안의 군대와 싸워봐라. 그런 의미도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루크가 어수룩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시나리오가 무너지면 안 되었다. “……?” 시야에 이상한 부분이 잡혔다. 바로 아버님의 왼발이었다. 거짓말, 설마? 마왕인 아버님이 신체를 절단된 채로 내버려둘 리 없었다. 다시 말해, 저 왼발은 일부러 아버님이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사죄의 의미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걸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최근에 아버님께서 누군가에게 사죄해야 할 만한 사건은 단 하나. 양녀인 내가 처형식에서 난리를 피운 것이다. 꾸욱.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 줄기의 피가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르바스, 가미긴, 시트리, 선제후 마왕들 전원이 아버님의 절대적인 우군이라 생각했다. 바싸고는 선제후이긴 하나 실권이 없으므로 안심했다. 아버님한테 과도한 책임을 지울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혹시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일까. “데, 데이지? 입에서 피가 나고 있어.” 마르바스나 바싸고, 그쯤에서 아버님에게 책임을 요구했을까. 분수를 모르는 작자들이 아니고 뭔가.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권좌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들이 간단히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들을 응징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죽을 계획이었다. 시나리오는 단순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중반에 가서, 나는 아버님을 향해 단독으로 돌격한다. 아버님은 내가 당신을 노리고 있음을 예상했을 터. 이쪽이 철부지처럼 적진에 뛰어들었을 때, 모종의 수단을 동원하여 날 없애려 들 것이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망가트린 것에 대한 원한. 마왕 파이몬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복수. 마지막으로, 마왕 바르바토스를 모욕한 것에 대한 단죄. 아버님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겠지. 순수하기 그지없는 증오로써 나를 처단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함으로써 아버님은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된다. 저 멀리서 아버님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구름 때문에 아버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되도록 길게 먼지구름을 쳐다보았다……. * * * 대륙력 1513년 6월 13일, 양군이 무니헨의 평야에 대치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훤히 트인 지형이었다. 어딘가에 복병을 숨겨둘 수도 없었다. 강줄기를 이용한 전술도 불가했다. 오로지 양쪽 지휘관의 순수한 전술 능력에 의해서 승패가 갈리겠지. 병력은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일만오천 명. 반면에 합스부르크 공화국군이 약 이만이천 명에 달했다. 병사의 숫자만 두고 보자면 제국군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이만이천 병력 중에서 칠천 가량은 민병이었다. 도저히 써먹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믿음직스러운 병력은 아니었다. 솔직히 인간 방패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다. “역시 민병을 제1전열로 내세웠는가.” 라우라가 적진을 둘러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의도가 너무 적나라해서 도리어 쑥스럽군.” “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무얼. 정석에는 정석으로 대응해줄 따름이다. 주군, 오우거들을 준비해주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우거 이백 마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쿠웅, 쿠웅, 하고 오우거의 욕중한 몸뚱어리가 움직일 때마다 땅바닥이 바르르 떨었다. 이윽고 오우거 이백 마리가 모두 최전방에 도열했다. 멀리 저편에서 공화국 군사들이 불안에 떠는 것이 눈에 잡혔다. 창날 끄트머리가 미묘하게 계속 움직인다는 게 증거였다. 이건 장창을 쥔 병사가 끊임없이 몸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뜻했다. 즉, 공포에 잠겨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민병에 대한 라우라의 대책. 정예병이라면 또 모를까, 평범하게 도시나 농촌에서 자경단으로 지낸 민병이 오우거의 공포를 이겨내기란 거진 불가능했다. 오우거가 코뿔소처럼 미친 듯이 돌격해봐라. 민병은 그 기세에 짓눌려서 잠시라도 버티지 못한다. ─ 크르하아아. ─ 그르르으……. 오우거들이 걸쭉하게 침을 흘렸다. 그들에겐 일부러 한 끼를 굶겼다. 배고플수록 흉폭해지는 오우거의 습성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체력이 떨어지겠으나 오우거는 한 끼 정도야 굶어도 상관없었다.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다시는 오우거의 모습에는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저것 보아라, 주군.” 라우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어투로 적진을 가리켰다. “기사단이 움직인다. 진형을 바꾸고 있어.” “예상대로 흘러가는군요.” 우리가 오우거를 전방으로 내보내자, 공화국군도 즉각 대처했다. 양익에 펼쳐져 있던 기사단이 대거 중앙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이대로 오우거가 돌격해버리면 민병의 제1전열이 형편없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공화국은 제1전열 중간중간에 기사 전력을 섞어줄 필요가 있었다. 오우거를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기사밖에 없으니까. 이것 역시 라우라가 의도한 바였다. 우리 제국군은 보병에서야 상대방을 압도했으나 기병에선 그러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 때문이었다. 초인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언제나 마왕군에게 위협적이었다. 물론 헬베티카의 용병도 다들 한 가락 하는 베테랑이었지만, 기사단이랑 정면에서 충돌할 경우 마냥 승패를 장담할 순 없었다. 요컨대 공화국의 기병 전력을 얼마나 약화시키느냐. 여기서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절반은 빠져나간 듯하군. 안 그런가?” 라우라가 기분 좋게 말했다. 라우라는 오우거를 전방에 배치함으로써 민병에 대한 대책과 기병에 대한 대책,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아냈다. 민병은 오우거를 두려워하며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요, 기사단은 오우거를 처치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일거양득이었다. “좋습니다. 뿔나팔을 부십시오.” “호오. 연설전을 주고받지 않아도 괜찮은가?” “마법사들의 체력을 아껴야지요. 어차피 엘리자베트와 저는 연설에서 엇비슷한 실력을 가졌습니다. 괜히 서로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관들을 쳐다보았다. “개전 신호를 알리도록.”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부관들이 깃발을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곧이어 평원에 수십 자락의 뿔나팔이 울리기 시작했다. ─ 부우우우우. 이쪽에서 뿔나팔을 불어대자 저편의 공화국도 소리를 울렸다. 야만적이고 음산한 마왕군의 뿔나팔과 깔끔하고 정갈한 인간군의 뿔나팔. 두 음색이 평원 정중앙에서 맞물려 얽혀들었다. 라우라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전군, 전진하라!” 부관들이 라우라의 명령을 그대로 큰소리로 복창했다. 전진하라! 전군, 전진하라! 순식간에 하나의 명령이 여러 갈래의 목소리로 군중을 메웠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따로 구보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맨 앞에서 오우거들이 발걸음을 뻗으니 대지가 일정한 박자로 흔들렸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낄낄 웃으면서 그 박자에 자신들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그러자 우리군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된 것처럼 정확한 박자로 오른발과 왼발을 내딛었다. 오우거 이백 명과 용병 일만오천 명이 한 순간에 땅을 짓밟자,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요동쳤다. 양군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라우라가 두 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마법사 부대, 발포하라.” “발포하라!” 서른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공중에 큼직한 불덩어리를 쏘아올렸다. 불덩어리는 길게 궤적을 그리면서 적군을 향하여 쇄도했다. 그러자 공화국에서도 수십 개의 불덩어리를 발포했다. 상대방의 포격을 막기 위해서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비록 불덩어리가 이곳에 떨어지기 직전, 아군의 마법사가 펼친 방어막에 상쇄되었지만 열기만큼은 막지 못했다. 전쟁터는 점점 더 뜨거운 공기로 달아올랐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00467 악(惡)의 극본 =========================================================================                        * * * 아직 새벽의 서늘한 수증기가 걷히지 않은 무렵. 오우거들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이곳,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령부까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오우거 발자국 소리에는 불길한 마력이 있었다. 그 공포스러운 진동에 병사들은 오히려 침묵하고 마는 것이었다. ─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단일 전투에서, 그것도 양군의 총병력이 4만을 넘어서지 않은 전투에서 오우거가 이백 마리나 동원되는 경우는 거의 전례가 없었다. 공화국 군진이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창을 높이 들어라!” “제대로 땅바닥에 고정시키고! 허리를 숙여!” “오늘 신나게 한번 놀아보자!” 어수선한 공기를 다잡으려는 것일까. 고참들이 병사들의 엉덩이를 차거나 등을 후려갈기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거기에 몇몇 병사가 호응하여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군중의 공기가 그나마 달구어졌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엘리자베트 옆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고참병들이 제대로 해주고 있군요. 하여간 짬밥을 많이 먹은 놈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공화국 국민들께서 잘 버텨주시려나 몰라.” “슐라이어마허.” 엘리자베트가 무심하게 말했다. “여긴 본인의 개인적인 집무실이 아니다. 입단속을 잘 하도록.” “하, 하하. 죄송합니다.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경례했다. 전투가 시작하고서, 아니 시작하기 한참 이전부터 엘리자베트는 냉랭하게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트 주변에만 보이지 않은 눈발이 조용히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오우거를 양익에 두지 않고 정면으로 가져왔다. 우리의 기병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지.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는가. 아니,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가…….”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노려보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쿠르츠는 얼마 전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이 혼잣말하는 습관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악몽에 시달리는 횟수야 전과 다름없이 많았지만, 왠지 혼잣말이 유별나게 잦아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통령이 자기한테 의견을 물어보는 줄 알고 열심히 대답해보았지만, 이내 통령에겐 말상대가 필요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군로도 잘 잡았죠. 강이나 숲이 있는 곳은 기막히게 피해갔으니.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진득하게 걸어왔습니다. 뭐, 저쪽에도 고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쿠르츠도 대충만 맞장구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통령이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도록 내버려두어서야 멋이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깊은 배려심에 살짝 감동했다. 왜 자기와 같은 남자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여서 목책을 세워뒀는데 오우거가 상대여서야 쓸모가 없겠습니다요.” “아니. 민병에게, 모든 병사에게 심리적인 위안이 되어준다. 눈앞에 튼튼한 목책이 있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적어도 민병들이 도망치지 않도록 발목을 잡아줄 것이다.” ――오우거들이 그 목책을 수수깡마냥 가볍게 날려버리기 전까지는. 엘리자베트도 쿠르츠도 다음에 이어질 말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화국 사령부에게 민병이란 고기 방패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순전히 주력 병력을 다치지 않고 보존시키기 위해 앞에 세워둔 몸뚱어리들……. “하지만 소인도 놀랐습니다. 각하께서 아무런 주저도 없이 시민병을 그런 용도로 쓰시다니요. 전쟁은 어디까지나 군인의 영역. 각하가 항상 말씀하고 다닌 바 아니었습니까?” “본인은 이 전쟁에서 모든 신념을 버렸다.” 엘리자베트가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자조하는 기색이었다. “어차피 단탈리안을 상대로 긍지를 지켜나가며 싸우기란 불가능하다. 자기 신념에 잡아먹히거나, 단탈리안에게 잡하먹히거나, 어떻게 해도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남자는 어째서인지 상대방의 신념을 모조리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전부 버렸다.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윤리도, 국가란 국민과 동일하다는 명제도, 엘리자베트라는 인간이 그동안의 인생에서 쌓아올린 모든 믿음을 뒷전에 내팽개쳤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평야를 노려보는 사람은 단지 전쟁에 재능을 타고난 한 명의 군인.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한 자루의 무기였다. “본인은 전쟁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물러설 계획이다.” “예?”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오우거의 발소리가 점점 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전투를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 제정신이냐며 반사적으로 물어볼 뻔했다. 쿠르츠가 그나마 평범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농담을 던져대는 습성 덕분이었다. “어, 어젯밤에 날밤을 새셨습니까요? 막 통령 각하의 입에서 헛소리가 흘러나오는데요.” “자네는 입을 단속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군. 그런 성질머리로 어떻게 근위대장까지 올라섰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야.” 엘리자베트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야 원래 그림자 출신이기도 했고, 각하께서 실력주의를 제창하셨으니……아니. 괜히 말을 딴 데로 돌리지 마십쇼! 정말입니까, 각하? 아니. 각하는 농담에 처절할 만큼 재능이 없으니 당연히 진심이겠지요.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제정신입니까, 각하?” “……일단 근위대장의 목을 자르기 전까지는 자리를 보존할 셈이니 안심하게.” “아니. 갑자기 왜 그런 결심을?” 엘리자베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갑자기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비밀로 감쳐두고 있었지만, 본인은 2년 전쯤부터 각종 환각 증세에 시달렸다.” “…….”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보았다. 지금 두 사람은 칼마르어(語)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륙의 모든 언어에 능통한 두 명이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부관들이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한 평생을 첩보조직의 간부로 살아온 쿠르츠였으므로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핀 것이었다.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목소리 어조가 달라졌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한없이 차값게 가라앉은 음색이었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습니까.” “설마 본인이 이런 일을 떠들고 다닐 위인으로 보이는가. 만일 누군가 알아차렸다 한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왜 통령 각하의 시녀들이 주기적으로 물갈이가 되나 싶었는데, 단순히 간자를 대비하는 차원의 작업이 아니었군요. 이해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시녀를 짧으면 3개월, 길어도 1년씩 갈아치웠다. 지나치게 외부의 개입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 아닌가 암암리에 생각했건만 이런 속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엘리자베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와주는 시녀들은 얼마 안 가서 통령의 비밀을 알았다. 그리고 퇴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디찬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한 나라의 통수권자가 환각증에 시달리는 정신병자 후보생이라니. 농담이라면 적이 불길하고, 농담이 아니라면 더욱 더 웃을 수 없다.” 엘리자베트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 아직 대륙에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악몽이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탈리안을 상대할 인간은 본인밖에 없다. 과신이라 해도 좋다. 자만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적어도 본인에게 이건 냉정한 현실이요 진실이다.” 마치 서로가 불 타는 짚을 품안에 안고 달려가는 경주와 같았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쓰러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달려나가다가는 자신조차 불길에 휩싸여서 파멸하겠지. 불에 타오를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단탈리안의 양녀가 망명했을 때 직감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단탈리안의 제국이 공고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본인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 결착을 내고 싶었다…….” 어쩌면 엘리자베트 개인의 욕심이 섞였을지 몰랐다. 엘리자베트는 나날이 짙어지는 환청을 유심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건 내 과업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나의 지능이 쇠퇴하고, 나의 판단력이 둔해질 경우, 누가 나서서 단탈리안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직 최고의 상태에 머무를 때 단탈리안과 승부를 보고 싶었다. 누군가가 과욕이라 욕해도 변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 통령은 각오를 굳혔다……. “고로, 우리의 목적은 제국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단탈리안. 그 남자의 목을 베어버리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다.” 엘리자베트가 주먹을 꾸욱 쥐었다. 한때 합스부르크의 에메랄드라고 불린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도 불타올랐다. 그때 오우거들이 거의 공화국 군진에 접근했다. 민병들이 벌벌 떠는 모습이 여기서도 훤히 보였다. 그들은 목책을 마음의 성벽으로 삼아 어떻게든 장창을 붙들고 있었다. “거창!” “거차아아앙!” 부관들이 목청이 터지라 소리 질렀다. 민병들이 이빨을 깨물며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창 밑바닥을 땅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오른손으로 장창을 쥐어잡은 채 왼손으로 오른손을 지탱했다. 본래 기병대가 돌격해올 때 취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눈앞에 밀어닥치는 것은 기병대보다 아득하게 공포스러운 마물이었다. “궁병대, 발사!” “쏴라!” 간격에 들어오자 궁병들이 굳은 얼굴로 활시위를 놓았다. 수백 개의 화살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표적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인지, 화살 자체는 상당히 괜찮은 명중률을 자랑하며 오우거의 살갗에 떨어졌다. ─ 크라하아아아아!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제아무리 날카롭게 벼린 화살촉이라 할지라도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을 꿰뚫기란 어려웠다. 대다수의 화살은 꽂히지도 않고 튕겨져 나갔다. 오우거들은 따끔한 장난질에 분노가 치밀어서 더더욱 가열차게 돌격했다. “으, 아아……아아아…….” “막을 수 있을 리가……이걸 어떻게…….” “주먹에 힘을 놓지 마라!” 민병들이 발뒤꿈치를 물리려는 순간, 부관들이 능숙하게 소리쳤다. “손에서 힘을 놓는 순간 너희는 전부 죽은 목숨이야! 창대를 꽉 쥐어! 오우거의 눈알이 꿰뚫리도록 단단히 잡으란 말이다!” 창에서 주먹을 놓지 마라. 간결하고도 직접적인 명령에 민병들이 본능적으로 복종했다. 마치 이 주먹에 자신의 생명이 달렸다는 것처럼 온힘을 집중했다. 그렇다. 전에 없이 단단한 목책도 놓여 있지 않은가. 괜찮을 거다. 틀림없이 괜찮을 거다. 민병들의 헛된 희망이 부숴지는 데엔 단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 콰아아아앙! 오우거들은 거대한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단 일격에 목책들이 산산조각 나서 하늘에 붕 떠올랐다. 나무 파편들이 흩날리는 장면을 민병들이 경악하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전부 떠지기도 전에, 오우거들은 한 발자국 내딛어서 두 번째 일격을 날렸다. “크아아악!” “사, 살려줘!” 육편이 튀었다. 검은색 핏물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땅바닥에 엎어졌다. 내장과 뼈도 함께였다. 오우거들은 마치 코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마냥 거침없이 질주했으며, 그들이 무릎을 처올릴 때마다 사방에 인육이 난자했다. “통령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엘리자베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기다려라.” 엘리자베트 통령은 민병이 학살당하는 광경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00468 악(惡)의 극본 =========================================================================                      화난 목소리가 군진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언제 돌입하는 겁니까, 부장님!”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기하라!” “이러다 우리 병사들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들은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었다. 오직 오우거를 막아내기 위해 긴급하게 중앙에 배치되었다. 기사도 한낱 인간인지라, 이백 마리의 오우거를 눈앞에 두고 불안에 떨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아군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오우거가 휘두른 몽둥이에 어느 민병의 몸뚱어리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허리 위아래가 양단된 신체는 두 조각이 제각기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기사가 소리쳤다. “부장님!” “아직이야!” 부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민병으로 이루어진 제1전열을 사수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 아니었던가. 이대로 오우거가 난동을 부리는 것을 내버려둘 경우, 민병들은 그만 전의를 잃어버리고 도주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엘리자베트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우거의 돌격력을 민병으로 상쇄시킨다.’ 엘리자베트가 냉정하게 전방의 추세를 지켜보았다. ‘오우거를 처리하는 것은 녀석들이 기세를 잃어버린 다음. 기사단의 피해를 최대한 줄인다.’ 민병은 처음부터 버림패에 불과했다. 기사단을 제1전열 군데군데 섞어준 까닭은, 어디까지나 오우거를 쉬이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민병을 지킨다'와 '오우거를 사살한다'. 이 두 목적 사이에는 제법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이백 명의 오우거가 순식간에 목책 방어선을 돌파했다. 천 명에 이르는 민병이 속수무책으로 꺼꾸러지는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본대, 헬베티카 용병들이 천천히 전진해오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오른팔을 치켜든 것은 그때였다. “지금이다!” 무엇이 지금인가. 굳이 설명해줄 필요도 없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가 합스부르크어로 크게 소리쳤다. “기사단에 출격 명령을 하달해!” “예, 장군!” 부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깃발을 흔들었다. 유독 한 옥타브가 높은 뿔나팔이 사령부에서 길게 울려 퍼졌다. 명령을 하달한다는 의미의 나팔 소리였다. 각 부대에는 귀가 밝은 병사가 두세 명씩 배치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서둘러 부대의 지휘관에게 뒤쪽을 가리켰다. “명령입니다, 부장님. 출격 명령입니다.” “거 빨리도 명령이 내려왔군, 그래.” 지휘관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공화국 기사단을 상징하는 보라색-흰색 깃발. 중앙을 의미하는 검은색 깃발. 그리고 공격을 의미하는 적색 깃발. 틀림없이 병사가 일러준 대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휘관이 마음의 짐을 떨쳐버리고 투구를 바로 썼다. “돌격하라! 더러운 괴물 새끼들을 도륙한다!” 먼저 하마(下馬)기사들이 장검을 쥔 채 뛰어나갔다. 그들이 가장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오우거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도, 전투에 앞선 초조함도, 일단 오른발을 들어서 땅바닥을 짓밟자 어디론가 가볍게 날아갔다.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위하여!” “통령 각하 만세! 공화국 만세!” 어린시절부터 오로지 전쟁터에 버려질 목적으로 길러진 살인병기들이 떼를 지어 돌격했다. 그들은 교관들에게 공화국의 이념을 주입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매일 먹고 자는 데 드는 비용이 국민의 세금에서 나왔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위대한 공화국에, 그리고 아름다운 통령 각하께 은혜를 보답할 차례 아니겠는가! ─ 크르하아아아! 오우거는 드디어 자기가 상대할 만한 적수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시시한 살육에 피가 식어버릴 참이었다. 오우거들 역시 전사였다. 전장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토끼의 두개골을 부숴트리는 것과 적병의 허리뼈를 날려버리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무엇을 위해 귀찮게 전쟁터까지 기어오겠는가. 오우거의 팔뚝에서 힘줄이 꽈악 도드라졌다. 살육! 파괴! 본능에 새겨진 두 단어에 따라 오우거들은 쇠몽둥이와 도끼를 휘둘렀다. “정면에서 맞서 싸우지 마!” “주의를 끌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고참 기사들이 침착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시선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적어도 한 명은 오우거를 상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 제1전열 곳곳에서 기사단과 오우거가 격돌하였다. 그중에 대다수는 운 좋게 오우거의 일격을 피했다. 운 나쁘게도 몇몇 기사는 정통으로 공격을 맞아버렸다. 오우거의 도끼가 방패를 통째로 분쇄하며 상대방의 몸을 찌부러트렸다. “지벨! 제기랄, 지벨이 당했습니다!” “멍청한 새끼, 죽은 놈에게 눈길을 주지 마. 우리 앞에 있는 게 그저 덩치만 큰 멧돼지로 보이냐.” “공격하라! 쉴 새 없이 공격하는 거다!” 그리하여 최전선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민병들에게는 천금과 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코앞에서 기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일단 재앙을 피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민병은 왜 이렇게 늦게 도우러 왔느냐며 분노를 터트렸다. “게으른 자식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전부 죽을 뻔했지.” “아이고, 인성부터 썩어빠진 친구야. 거 도와줬으면 됐지 뭘 또 투덜거려. 저기서 기사 나리들이 죽어가는 거 안 보이냐?” “쯧. 쟤들은 원래부터 죽으라고 여기 있는 거야.” 오우거의 돌격에 잔뜩 뒤로 물러섰던 민병들이 다시 얼기설기 대오를 맞추었다. 곧바로 등을 돌려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민병들은 칭찬을 들을 만했다. 여기서 도망치면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이 함락당할 것이라는 사실. 자신들의 조국을 짓밟은 마왕군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 이것들이 민병으로 하여금 앞으로, 재차 앞으로 걸어나갈 힘을 주었다. 민병들이 악바리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걸어가! 오우거는 무시하고 걸어가라!” 민병들이 오우거를 지나쳐서 다시금 전열을 정비했다. 멀리서, 그러나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적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헬베티카의 용병이었다. 용병들은 장창을 꼬나쥐고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군가(軍歌)를 부르고 있었다. 난쟁이와 엘프 특유의 창법이 평원에 음산하게 흘렀다. 고음과 저음이 동시에 진동하면서 노랫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머리 잘린 기간테스, 백 마리의 뱀이 울렁거리는구나. 태산에 깔려 하늘에 짓눌릴지라도 살육과 피에 대한 욕망은 화산을 터트릴지어니. 신들마저 도망치고 인간은 멸망하리라. 기가스들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한때 모든 신을 공포로 몰아넣어 세계를 끝장낼 뻔했다. 그러나 인간종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신들을 도와 기간테스를 무찔렀다. 인간종에게 쫓겨나서 알프스 산맥에 틀어박히게 된 헬베티카인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을 기간테스로 비유하곤 했다. “크르훕! 크후흡! 크훌라, 크르흡!” 용병들이 후렴을 넣어가며 발을 굴렀다. 어떤 엘프는 기묘한 창법을 구사하며 한없이 길게 아리아를 뽑아냈다.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노래가 그곳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 야만성에는 어떤 규칙적인 리듬이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간들의 귀에는 공포스럽게 들렸다.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노려보았다. “양익을 출전시킨다.” “양익에 명령을 하달하라! 출격!”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복창한 명령을 부관들이 반복했다. 기사단을 상징하는 보라색-흰색 깃발. 각각 우익과 좌익을 나타내는 푸른색 깃발, 초록색 깃발. 마지막으로 공격을 지시하는 적색 깃발이 힘차게 휘날렸다. 그와 동시에 뿔나팔 소리가 공기를 타고 널찍하게 울렸다. “장군.” “나도 귀 안 먹었다. 우리의 차례로군.” 금발의 친위기사단장, 샤를 리히트호펜이 콧노래를 불렀다. 샤를 리히트호펜은 우익의 기병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전군의 총사령관이 담당하는 위치였다. 다만 지금은 엘리자베트가 총사령관이었으므로, 샤를 리히트호펜은 얌전하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얌전하게 내숭을 떨 필요성이 방금 전 사라졌다. “헬베티카 촌놈들에게 환영인사를 던지러 가볼까.” “예, 장군. 나팔을 불어라!” 기병들이 술잔을 들어 마시듯이 뿔나팔을 치켜들었다. 그들은 지금 중앙에서 오우거와 분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가 불쌍했다. 모름지기 기사란 군마에 올라탔을 때 진가가 발휘되었다. 날카롭게 벼린 창을 허리에 차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면서, 진동하는 땅바닥의 울림에 짧지만 강렬하게 전율을 느껴가며, 이윽고 군마가 몰아쉬는 숨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를 일치시킴으로써 끝없이 앞으로 돌격한다―――. 그것은 전쟁이었지만 또한 전쟁의 미학이었다. 달리는 군마의 안장에서는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기꺼이 목숨을 버려도 될 정도로. “마보(馬步)!” “마보!” 샤를 리히트호펜이 소리쳤다. 그러자 우익에 배치된 일천 명의 기병이 나란히 속도를 높였다. 평원 저편에서도 일단의 기마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적군의 기마대였다. 마치 거울로 마주보는 것처럼, 이쪽에서 속도를 높이면 저쪽도 따라서 속도를 높였다. 샤를 리히트호펜은 마치 자기가 수천 명의 기병을 동시에 지휘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쪽이 멈추면 저쪽도 멈출까!’ 샤를 리히트호펜이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 반대편에서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기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라우라를 따라 제2차 국화전쟁에서 활약한 이 기병대장은, 이미 몇 차례나 상대편의 기병에 전멸을 선사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적군을 학살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속보!” “속보!”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쓸려 흩날렸다. 드 블랑 남작은 투구 따위를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시야를 방해할 따름이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을 뒤따르는 일천 명의 기병이 일제히 가속했다. ─ 두구르르, 두그닥! 지면에 엷게 먼지가 깔리기 시작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흙냄새를 맡았다. 이것이었다. 이 흙냄새를 느낄 때마다 남작은 온몸에서 피가 생생하게 폭주했다. 그녀는 땅 밑에서 맡는 흙냄새와 군마의 위에서 맡는 흙냄새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전쟁의 냄새였다. “거창!” “거창!” 샤를 리히트호펜과 줄리아나 드 블랑, 둘 중 누가 더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외쳤다. 이편에서 일천 명의 기병이 창을 들었으며, 저편에서도 일천 명의 기병이 창을 꼬나쥐었다. 두 부대는 이제 완전히 서로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한 순간. “돌격하라!” “헬베티카 만세! 아테네 여신께 영광을!” “돌격! 돌격! 합스부르크 공화국 만세!” 군마가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가열찬 입김이 군마의 마구로 튀어나왔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양군의 기마병이 거리를 좁혔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창을 찔렀고―――마침내 격돌했다. “크아아아아!” 비명과 비명, 고함과 고함이 뒤섞였다. 한 병사가 적군의 창에 정통으로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어느 병사는 날카로운 창날에 목이 꿰뚫렸다. 낙마한 병사들이 피어내는 먼지구름에 핏물이 왈칵 튀었다. “죽여! 모조리 죽여!” “통령 각하 만세!” 최선두에 이어서 두 번째 대열이, 세 번째 대열이, 네 번째 대열이 순식간에 충돌했다. 어느 쪽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기병들이 부닥치는 소리가 전장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니헨 전투는 이로써 두 번째 장(章)에 돌입하였다.   00469 악(惡)의 극본 =========================================================================                        * * * 자아, 하고 내가 일어섰다. 전황은 난전으로 치달았다. 아버님에게도 엘리자베트에게도 각자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나는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짐작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아버님의 말에 따르자면 엘리자베트 통령은 유일무이하게 아버님과 비견할 만한 심계의 소유자였다. 내가 어설프게 계략을 짜내도 간파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했다. 아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네놈. 어디를 가려는 거냐.” 남자가 말했다. 우리 남매를 감시하는 검주였다. “가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전투가 일단락될 때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이미 사전에 얘기해뒀을 텐데.” 자그마치 네 명의 검주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은발머리 통령이 의심암귀에 걸렸다는 증거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통령은 오히려 경계심이 높아졌겠지. 국가의 명운을 두고 겨루는 이 전투에서조차, 검주를 네 명씩이나 나한테 딸려 보냈다. 자기 재주에 제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얘기는 통령을 가리켰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막강한 전력을 쓸모없는 곳에 묶어두었다. 아버님도 그렇거니와 머리 좋은 사람의 약점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잡아먹혔다. 나는 검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가야만 할 곳이 생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데이지…….” 루크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정말로 가야 하는 거야?” “말했잖아. 이게 최선이야.” “하, 하지만.” 루크가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우스워서, 나는 루크의 턱을 잡아서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루크의 눈동자가 커졌다. 루크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다. 반년 전, 루크가 내 침실에 초대되었을 때 묘하게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루크의 마음에 응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매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루크까지 신경을 써도 될 정도로 내게 여유가 넘치지 않았다. 나는 루크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살짝 거두어들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 오빠.” “…….”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잘 부탁한다. 아버님을 잘 부탁한다. 루크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 정도는 알아들었겠지. 신뢰하고 있어, 루크. 내가 고개를 돌려 검주들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 저는 제 아버지를 처단할 것입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뭐…….” “통령에게 보고해도 좋습니다. 애당초 제가 망명할 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제 아버지를 처단하는 데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전장까지 마련해주었군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검주들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나는 바알의 대검을 쥐고 전선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검주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내가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우리는 네놈을 감시하는 것이 임무다. 섣부르게 행동할 경우, 군중을 어지럽히고 반역을 꾀한 것으로 판단하겠다.” “반역입니까.” 내가 희미하게 냉소했다. “합스부르크의 섭정이자 평원파의 거두인 바르바토스를 당신들에게 바쳤습니다. 정보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협조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혐의가 남아 있습니까? 제가 이제 와서 당신들을 배신하고 다시 제국에 돌아간다 한들 제 목숨이 안전할 것 같습니까. 조금쯤은 머리를 사용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대로 침투합니다.” 검주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내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저는 아버지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제가 전열의 한 곳을 뚫으면 아버님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저를 포획하려 들 것입니다. 그때 제국군은 균형이 무너지고 맙니다. 당신들이 믿는 만큼이나 통령이 진실로 유능하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요.” “하, 말 그대로 특공이지 않은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예. 그렇습니다만. 무언가 문제라도?” “…….” 검주들이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맞받아 쳐주었다. 나는 아버님을 속인 인간이었다. 당신들 수준의 안목으로 내 연기를 간파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네들 입장에서 마음이 동할 만한 몇 마디를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왕 단탈리안은 제 마을을 파괴했습니다.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를 인질로 사로잡고, 마을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저는 5년이 넘도록 매일 밤마다 온갖 고문에 시달렸지요. 그리고 드디어 원수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그뿐입니다.” 나는 검주들을 지나쳐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중 한 명이 내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등으로 가볍게 쳐서 피했다. 등 뒤로 목소리가 수군거렸다. 검주들이 책임자에게 급히 보고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발걸음을 천천하지만 묵직하게 놀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쪽이 서두르면 없던 의심도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전방에선 공화국군과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양익의 기병들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난전을 벌였고, 중앙에서는 보병들이 맞붙었다. 전황은 그럭저럭 호각일까. 오우거들이 날뛰는 바람에 공화국군의 민병대는 사기가 크게 약해졌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주할 것이다. “…….” 나는 바알의 검을 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제1전열과 제2전열의 사이. 길지만 좁게 트인 그 공백의 지대에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 날붙이끼리 요란하게 튕기는 소리, 말발굽이 시체를 짓이기는 소리, 온갖 잡다스러운 소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일류배우는 무대에 올라섰을 때 관객이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그것과 비슷하겠지. 이제부터 아버님을 만난다. 아버님은 나를 죽이기 전에 반드시 한두 마디의 말을 남기기 위해 직접 보러 올 것이다. 자신이 죽일 상대방에게서 유언을 들어두는 것. 그게 아버님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따라서 다시 한번 확실하게 나 자신을 세뇌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버님을 증오한다. 내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마왕 단탈리안에게 무고한 마을사람들이 학살당하여 복수의 뜻을 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연심을 이용하여 이간책을 뿌렸고, 결과적으로 마왕 파이몬의 죽음을 유도했다. 마침내 원수를 끝장내고자 적진에 뛰어든다……. 그것이 나의 배역.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을 위해 마련된 자리. “……좋아.”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구름이 없는 곳도 색깔은 매한가지로 회색 빛깔이었다. 어쩌면 정오쯤에 소나기가 내릴지 모르겠다. 지나치게 햇빛이 희박한 하늘은, 어딘지 모르게 나의 유년시절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죽기 좋은 날인걸.” 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아―――마지막 무대에 오르자. 나는 전열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오우거들과 기사들을 지나쳐서, 민병대와 용병대가 어우러진 격전지에 도달했다. 나는 가뿐하게 땅바닥을 밟아서 뛰어올랐다. 어느 민병의 투구에 착지하여 재차 뛰었다. 그렇게 투구를 징검다리 삼아서 네 번 건너뛰자, 곧바로 장창의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검주다! 검주가 나타났다!” 내 몸놀림을 보고 헬베티카 용병들이 급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절대로 난입하지 못하게 막아!” “찔러버려!” 용병들이 일제히 장창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곁눈질로 사방을 확인한 다음,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어 대검을 공중에 그었다. 장대들이 우스스 절단되는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었다. 다음 순간, 용병들이 내지른 수십 개의 장창은 모조리 허리가 잘린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용병들은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괴물 같으니……!” 누구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 것일까. 내가 얼굴에 미소를 품은 채 대검을 휘둘렀다. 난쟁이들의 험상궂은 머리통이 허공에 날아들었다. 그리하여 한 순간이지만 제국군의 전열에 빈틈이 생겼다. 나는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제기랄, 검주가 난입했다!” “막아! 어떻게든 막으란 말이야!” 용병들이 장창을 버리고 칼을 꺼내잡았다. 창을 찌를 공간조차 없기 떄문이리라. 그들은 난전에 익숙한 듯 비좁은 공간에서도 정확히 나를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나는 다시 곁눈질로 사방을 확인했다.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칼날의 숫자가 열한 개. 그 다음에 이어서 쇄도하는 칼날의 숫자가 열세 개. 최적의 경로를 그려봐도 전부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한 개. 운이 나쁘면 두 개가 내 몸에 닿는다. 그렇다면 막을 수 없는 검격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판단을 끝마쳤다. 한 호흡. “죽어라, 괴물!” 내가 허리를 잔뜩 낮추었다. 다섯 개의 칼날이 이로써 무의미하게 공중을 휘저었다. 나는 낮춘 자세 그대로 대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일곱 명의 난쟁이들이 무릎째로 잘려져 나갔다. 두 호흡. “크아아아악!” “멈추지 마! 저 년을 몰아세워!” 어떤 난쟁이가 대지에 쓰러지면서 칼을 놓쳤다. 데겐. 비교적 길이가 짧지만 유용한 검이었다. 허공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그 검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오른손에 대검. 왼손에 데겐. 오른쪽 칼날은 위로, 왼쪽 칼날은 수평으로 치켜든 채, 내가 무릎을 튕기며 한 바퀴 몸을 돌렸다. “크흡! 내 팔, 내 팔이! 흐아아악!” “멈추지 말라고 했잖아, 개새끼들아!” 세 호흡. 이때 미리 예측한 경로로 검격이 들어왔다. 이건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가볍게 내주었다. 용병이 뒤에서 휘두른 칼은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나의 등에 닿았다. 등줄기에서 화끈한 통각이 덮쳤다. “좋았어! 이대로 전부 한꺼번에 덮쳐―――.”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데겐을 역수로 쥐어잡아 내리찍었다. 푸삭, 하고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오른손의 대검으로 크게 반원을 그렸다. 대검은 자기가 지나치는 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절단했다. 네 호흡. “크흐흡……!” 전방에서 달려들던 세 명의 난쟁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목줄기에 선명한 검상이 그어졌다. 목구멍에서 터져나오는 핏물을 집어삼키며, 용병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데겐을 던졌다. 싸움 내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의 이마에 칼날이 부드럽게 꽂혔다. 마치 두개골이 검집이라도 된 것처럼 부드럽게. 난쟁이 지휘관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히 뒤로 꺼꾸러졌다. ─ 풀썩. 지휘관이 쓰러지면서 자그맣게 먼지가 피어났다. 나는 그리하여 다섯 번째 호흡을 내쉬었다. 내 주위에는 스물네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적막이 찾아들었다. 시끄러운 전장에서 오직 이곳에만 침묵이 가라앉았다. “으, 어어……으아아…….”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아무리 용감무쌍한 헬베티카 용병일지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소대 병력이 지워져서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 “제 이름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 내가 바알의 대검을 똑바로 세웠다. “용맹한 헬베티카 군인이여. 부디 저의 길을 막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00470 악(惡)의 극본 =========================================================================                        용병들이 주춤거렸다. 단언하건대 난쟁이들의 턱수염마저 떨어댔다. 여기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주면 편하고 좋으련만, 역시나 그건 과도한 기대였을까. 제법 계급이 되어 보이는 난쟁이 지휘관이 버럭 소리 질렀다. 목덜미에 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큰 목소리로. “고작 계집년 하나 못 잡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놈들, 당장 불알을 떼어버리든지 저 애송이를 죽여버리든지 알아서 해! 아니면 내가 손수……크흡!?” 내가 허벅지에 끼워둔 단검을 뽑아들어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난쟁이 지휘관의 목에 명중했다. 난쟁이는 두 손으로 목을 부어잡은 채 인파 너머로 쓰러졌는데, 부하들의 몸뚱어리에 가려진 것이었다. 조금 쓸데없이 시끄러워서 처리했다. 내가 슬쩍 주위를 눈으로 훑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남아 있는 분, 아직 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예병에게 충격이란 아주 잠깐만 유효한 법이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금세 또 정신을 차려서 창칼을 이쪽으로 향할 게 분명했다. 최전선에 있던 난쟁이 부대는 내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충격에 몸이 굳어버린 것은 최전선의 일부 부대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지 마라. 방패병 앞으로!” “정확하게 조준해서 사격하도록!” 밀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시금 파도가 들이닥치듯이, 내가 기껏 부대를 정리해도 끝없이 병사들이 충원되었다. 그들은 나에 대한 전술을 바꾸어서 아예 거리를 떨어트린 채 화살을 쏘았다. “…….” 나는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 화살 세례를 막아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프 궁병들이 이쪽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사각을 없애버리고 일제히 공격하려는 것이겠지. “쏴라!” 엘프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한꺼번에 쉰 발에 이르는 화살이 들이닥쳤다. 내가 시체를 내팽개치고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풍(劍風)으로 화살의 기세를 죽일 심산이었다. 이런 방식은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 화아악!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 화살의 속력을 꺾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화살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비틀어지면서 땅바닥에 소낙비처럼 꽂혔다. “읏……!” 내가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그때, 종아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치달았다. 한 대의 화살이 내 오른쪽 종아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칫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나는 고통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후우.” 어떻게든 호흡을 되찾았다. 방금 그건 우연히 이루어진 사격이 아니었다. 병사들에게는 일제히 쏠 것을 명령하고서, 지휘관만 일부러 한 박자 느리게 활시위를 튕겼다. 내가 화살비를 돌파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여 의도적으로 빈틈을 노렸다. 누군지 몰라도 제법 교활한 작자였다. 궁병대를 처리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병사들 틈새에 끼어들면, 아군을 빚맞히는 게 무서워서라도 화살을 쏘지 못할 터. 나는 궁병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제2전열에 돌입했다. “억지로 막아서지 말고 장창으로 처리하라!” “순차를 두어서 찌르는 거다. 옆에 있는 동료들과 보조를 맞춰!” 다시금 보병들이 나를 맞이했다. ─ 꾸우욱. 오른발로 땅을 밟을 때마다 격통이 몰려왔다. 아픔이 지나쳐서 발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화살촉에 독이 묻혀둔 모양이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종아리보다 무릎과 허벅지에 균형을 실었지만, 말 그대로 변통에 불과했다. 어서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아버님에게 가야 했다. “저놈은 오른발에 상처를 입었다!” 이쪽이 아주 약간 주춤거린 것을 깨닫고 용병들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나를 상대하는 방법이 점점 더 교묘하게 진화했다. 과연 헬베티카에서 엄선해서 파견한 병력이라고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이런 군대를 완벽하게 장악한 아버님을 우러러봐야 할까. ―――아버님. “제1조는 적의 오른발을 집중적으로 노려! 제2조는 후방에서, 제3조는 나와 같이 놈의 정면을 상대한다!” “사격 지원! 빌어먹을 멀대 새끼들. 제때제때 화살을 날리란 말이야!” 내 대검이 검기를 일으켰다. 다음 순간, 어느새 용병들의 몸이 양단되어 있었다. 피바람이 일었다. 열댓 명의 용병이 사방에 내장을 흩뿌리며 흙바닥에다 콧수염을 처박았다. 내가 입꼬리를 들었다. “저, 저걸 어떻게 막아!?” “뒤로 물러서라! 뒤로 물러서라! 엄호!” 아버님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단순한 애욕이 아니었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깊은 무언가를 원했다. 삶이란 일종의 건축물을 짓는 것이라고 비유할 때, 한 명의 사람이 쌓을 수 있는 건축물이란 기껏해봐야 탑밖에 없다. 탑은 높으며 또한 올곧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탑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집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음울한 비석. “너희 소대는 후퇴해! 창대 전부 부러져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대장님! 이거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화살이 나의 팔뚝을 스쳤다. 피가 와락 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당신의 기둥이 되어주고, 당신은 나의 기둥이 되어준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문이다. 설령 우리가 그 안에서 머무를 공간이 없다고 해도 좋다. 그때 비로소 나는 무언가를 맞이할 수 있다. 일종의 비밀스러운 동맹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허락하고 거절한다. 세상을 투과하여서 우리 두 사람만의 영역을 만든다. 당신의 신념이 올바르다고. 당신의 가치가 올바르다고, 바로 옆에서 승인해줄 수 있게 된다. 퇴폐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전열이 돌파당했다!” “추격해! 아니, 궁병대만 추격해라! 여기서 대열을 무너트리면 끝장이야!” 이번에는 화살이 조금 아픈 곳을 찔렀다. 푸욱, 하고 왼쪽 허벅지에 정통으로 날아들어서 깊숙하게 박히고 말았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버님과 나는, 분명히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단지 우리가 만난 시간이 어긋난 것일까. 약간만 더 일찍 서로를 만났다면, 아버님이 아직 살육을 저지르지 않았을 때 만났다면, 내가 바라던 관계가 이루어졌을까. 아버님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을까? 나는 조금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 문득 눈앞에 평야가 펼쳐졌다. 더 이상 내 주위에는 병사들이 없었다. “…….” 눈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자 시야가 멀리까지 보였다. 궁병들이 멀리서 원을 그리듯이 날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활시위를 당긴 손이 덜덜 떨렸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 아버님이 서 있었다. “하.” 내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 나름대로 비웃음을 연기할 속셈이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약한 신음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도달하느라 지나치게 많은 상처를 입어버렸다. 통한의 실수였다. 하지만, 괜찮겠지. 응. 괜찮다. 나는 제대로 마지막까지 분발할 수 있다. “완전히 넝마짝이 다 되었군. 그 볼썽사나운 몰골은 무엇이더냐.” 아버님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아버님이 말한 대로 조금 꼴불견이었다. 아버님에게 받은 시녀복이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인의 장벽을 뚫고 오느라 핏물까지 잔뜩 묻었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공작가의 여식이라고 소개할 수 없었다. 자아. 적당히 나 자신을 연기하자. 그러니까, 아버님이 생각하는 데이지 폰 커스토스라면―――이런 상황에서 이런 눈빛으로, 이런 말투로, 이런 뉘앙스로 말하지 않을까.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했습니다. 효녀라고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옷차림을 지적하다니요.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 평소 아버님의 지론이지 않았습니까?” “지금 네 마음이 외모보다 아름답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게냐?” “다만 사실을 말씀드릴 따름입니다.” 아버님이 피식 비웃었다. “올해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웃기는군. 네 녀석만큼 마음이 외양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을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겉보기라도 그럭저럭 괜찮게 태어나게 해준 것을 신들께 감사하도록.” “제 외모를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여태까지 신을 믿어본 적이 없는 저도 하마터면 열렬한 신도가 되어버릴 뻔했습니다.” 내가 살짝 눈을 돌려서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도, 자클린 롱그위 성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버님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갔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즉, 모종의 수단을 써서 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처했다고 추론하는 편이 합당했다. 아마 투명마법을 써서 기척을 지웠으리라.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내가 방심하는 틈을 노려서, 나한테 치명타를 날릴 계획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끼 역할은 다름 아니라 아버님인가…….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는 아버님의 버릇은 여전했다. 조금 불평하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만사휴의. 여기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능청을 떨어야 했다. “신들에게 기도해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님 아닌지요. 아버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제 앞에 나온 것은 실수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 대검이 아버님의 목을 그어버릴 가능성이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다. 큰 실수를 저질러버렸어…….” 아버님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뻔뻔한 연기였다. 아버님의 눈동자에서는 회한의 감정이,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감정이 강하게 드러났다. 너무나 뚜렷해서 도저히 가짜로 끌어올린 감정이라고 느끼기 어려웠다.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아버님을 위해 발명되었다. “아버님과 저입니다. 서로 간에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겠지요.” 내가 대검을 바로 세웠다. 순식간에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멀리서는 궁병들이 당장이라도 화살을 쏠 것처럼 시위를 끌었다. 유일하게 태연한 것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은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오는 눈동자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버님은 지금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건 곤란했다. 이 무대에서 가해자는 오롯하게 내가 담당했다. 아버님은 피해자로 남을 필요가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 묘한 동정심을 품는 것 역시, 아버님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하아. 이래서는 안심하고 죽을 수 없었다.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놓자. “참. 궁금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만, 바르바토스 섭정은 무탈합니다. 공화국의 돼지우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지가 잘리더니 엉금엉금 잘도 기어다니더군요. 특히 공화국의 병사들은 예쁜 애완동물이 생겼다며 좋아했습니다.” “…….” “바르바토스 섭정도 잔뜩 귀여움을 받았지요. 아버님, 혹시 돼지가 교접할 때 어떻게 신음하는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한 번쯤은 경청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과연 생살이 찢어질 때는 돼지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버님은 바르바토스를 사랑했다. 아버님 본인은 부정할지 몰라도 진실이 그러했다. 나는 내가 죽은 이후, 아버님을 위로하고 보다듬는 역할을 바르바토스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이미 극본도 완성되어 있었다. “…….” 아버님이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반응하지 않는다기보다. 도리어 눈동자에서 슬픔의 색이 진해졌다. 나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인가. 바르바토스를 욕보였으니 어느 정도 분노를 보여주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내 도발이 약했을까. 아니, 꽤 괜찮은 연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데이지.” 그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방금 아버님이 발음한 '데이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님은 결코 저런 방식으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마치.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로하는 것처럼―――. “이제 괜찮아.” “…….” 불길함은 더더욱 강렬해졌다.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버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고정되었다.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이제 더는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데이지.”   00471 악(惡)의 극본 =========================================================================                        ―――무슨 말을. 방금 아버님이 무슨 말을 한 것인가. 나는 얼굴이 굳었다.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아버님의 눈동자. 슬픔에 가득 찬 검은색 눈동자만이 나의 모든 시야를 차지했다. 1초가 흘렀다. 어쩌면 3초가. 아니, 어쩌면 1분이 침묵으로 흘렀다. 그제야 나는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이러면 안 되었다. 무슨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이래서는 안 되었다. 어찌되었든. 왜냐하면 나는 지금 연기하고 있으니까. 아버님을 속여야 하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므로. “연기라니. 잠꼬대가 심하시군요.”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님의 말씀은 원래부터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헛소리가 심했습니다만, 오늘따라 유독 헛소리의 농도가…….” 내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아버님의 시선. 저 눈동자 때문에 목소리가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작아지다 못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예 끊겼다. 뒤늦게 내 혀가 멈추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농도가 지독합니다. 의미불명이군요.” 나는 필사적으로 문장을 만들어서 내뱉었다. “이제 죽을 때가 되었으니 아무런 말이나 주절거리는 건지요. 솔직히 양녀로서 보기 부끄럽습니다. 슬슬 그만해주셨으면 합니다.” “…….” 아버님은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벌써 노망이 들어버리면 효녀인 제가 마음이 아파서 약해지지 않습니까. 만약 그게 아버님의 전술이라고 한다면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하긴 아버님의 말씀은 원래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잠깐만. 이건 아까 전에 한 말이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말았다. 실수였다. 이래서야 무대에 오른 배우로서 실격이지 않은가. 설령 똑같은 말일지라도 조금 더 다양하게 표현해야 했다. 괜찮았다. 문제없었다. 내 말솜씨를 따라올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옛날부터 그런 부분이…….”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걸까. “…….” 입이 닫혔다. 나는 이빨을 꽉 물었다. 대검을 양손으로 강하게 쥐어잡았다. 이건 거짓된 수작이었다. 아버님이 내 연기를 알아차릴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전무했다. 그런데도 연기를 운운하는 것은, 틀림없이 아버님의 계산된 책략에 불과했다. 직접 시험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나는 대검을 높이 치켜들어 아버님을 향해 내리찍었다. 바알의 대검이 광풍을 몰아치며 쇄도했다. 칼날이 달려드는 곳은 아버님의 얼굴. 누가 봐도 내 검격은 허초가 아니었으며 내 살기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분명히 나를 막아낼 방도를 세워뒀을 것이다. 즉, 아버님의 목이 잘리기 전에 무언가가 나를 제지하리라. 투명마법으로 몸을 감춘 암살자라든지. 미리 장치해둔 마법이라든지. 상세한 내막이야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가, 아버님의 계략에 어울릴 만한 무언가가 준비되었을 게 확실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내가 휘두른 대검이 점점 더 아버님의 몸에 가까워졌다. “…….” 아버님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요, 아버님. 제 검은 틀림없이 아버님의 목을 도륙낼 것입니다. 피하시지 않으면, 막으시지 않으면 바로 다음 순간에 죽어버리고 맙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연인들을 파멸로 몰고 간 원수에게 죽는 것입니다. 칼날이 더더욱 가까워졌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 검을 막으러 뛰쳐나오는 인물이 없었다. 내 몸을 제지하러 발동하는 마법도 없었다. 궁병들은 그저 멀리서 활시위만 붙들고 있었다. 뭐하는 것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아버님이 죽는다. 너희의 임무는 아버님을 지키는 것 아닌가! 어서 나를 막아라. 아버님을 사수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제 칼날이 아버님의 얼굴에 거의 다다랐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대검은 거침없이 아버님을 베어버릴 터. “읏……!?” 내가 필사적으로 검을 멈추었다. 양팔에 사력을 다하여 어떻게든 동작을 정지시켰다. 억지로 칼날을 거두어들인 탓일까. 안 그래도 화살에 날카롭게 베인 양쪽 팔뚝에서 핏줄이 터졌다. 아직 부족했다. 이대로는 칼날이 완전히 멈추기 전에 아버님의 목에 닿아버린다! ‘안 돼!’ 나는 온몸을 비틀었다. 여태까지 일부러 힘을 주지 않았던 허벅지와 종아리도 지금 순간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상처가 핏물을 왈칵 뱉었다. 고통을 뛰어넘어 격통이 전신을 찔렀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아버님만 무사하다면 내 몸 따위는 어찌되어도 괜찮았다. ‘제발……!’ 염원이 통한 것일까. 대검은 정확하게 아버님의 목에 닿기 직전, 멈추었다. 다만 완전히 기세를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주 살짝 칼날이 아버님의 살갗을 스치듯이 베었다. 붉은 핏방울이 살에서 흘러나와 내 대검을 따라 주르륵 흘렀다. “아…….” 나는 망연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대검이 자신의 목을 그어버릴 뻔했는데도 아버님은 피하지 않았다. 한없이 새카만 눈동자로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의 시선은 촘촘한 그물망이 되어 나를 사로잡았다. “어째서…….” 나는 손가락 하나조차 까닥거릴 수 없었다. 혀를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째서, 피하지 않는 겁니까.” “…….”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어째서…….” “데이지.” 그때였다. 아버님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대검을 거두었다. 자칫 잘못하다 대검이 아버님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버님은 더 걸어와서, 나를 양팔로 꾸욱 안았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버님의 품속. 듬직하다기보다 허술하고,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야윈 몸이 내 몸을 감쌌다. 아버님은 허리를 살짝 구부려서 나를 안았다. 그 딱딱하고, 부드럽고, 빗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며, 비좁지만 충분히 넓은 틈 속에서―――한 줄기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나왔다.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 “내가, 나란 녀석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너에게 증오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래야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아―――. 입술이 떨렸다. 몸의 모든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는 없노라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그건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재앙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 오른손에서 검이 힘없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걸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데이지. 나 때문에 너가 모든 짐을 짊어졌구나. 내가 절대로 짊어지지 못하는 것을 너가 대신해서 맡으려고 했어.” “아……아아아…….” “미안하다.” 무언가가 내 뺨에 흘러내렸다. 그건 나의 눈물이 아니었다. 아버님이 흘린 눈물이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나에게 강한 모습만을 보여준 아버님이, 나를 껴안은 채 숨 죽여 울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지.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 인간에게는 원래 그런 것 따위 존재하지 않았는데, 허상에 불과한 것에 눈이 사로잡혀서, 너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어. 전부. 전부 내 잘못이야…….” 아니다. 그게 아니다. 내가 당신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가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왜 사과하는 것인가. 아버님, 왜 또 무언가에 사과하고 있나요. 아버님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사과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쪽은 이 세계입니다! 당신에게 살인을 저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학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삶에 내팽개쳤습니다. 그런데 왜 아버님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가요. 왜 모든 것이 아버님의 잘못으로 귀결되는 것입니까. 그런 건 이상합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 같은 건,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 내가 다급하게 아버님의 가슴을 밀쳐냈다. “무슨 소리입니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 “아버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잘못된 것은 세상입니다.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똑바로 마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뚜렷한 사람이 없습니다. 시체가 썩은 냄새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아버님만이 모든 걸 짊어져야 하나요!” 절규했다. 어느새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에게 사과하지 말아주세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님에게 마지막으로 기억될 얼굴 정도는 아름답게 남기길 원했다. 그렇기에 용병들의 장막을 베어 넘기고 필사적으로 돌파하는 와중에도, 얼굴만큼은 상처가 나지 않게 힘껏 노력했다. “제발, 자책하지 말아주세요……!” 영혼이 찢어지는 통각. 아버님에게 내 연기가 간파당했다. 나의 극본이 실패했다. “……!” 그리고 나는 이 순간, 아버님이 무엇을 할지 깨달았다. 이제 아버님은 나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하겠는가. 아버님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까? 자기가 학살한 목숨들을 더 이상 책임지지 말자고 결심할까?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준 나와 함께 비록 비참하게나마 이 연옥을 견디려고 할까? 그럴 리 없었다. 아버님은 나를 죽일 것이다. 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을 다시금 가해자의 역할에 올려놓을 것이다. “안 돼요, 아버님……그것만큼은 안 돼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파이몬을 죽인 것만으로도 넝마짝이 되어버린 아버님이었다. 여기서 나까지 죽인다면? 더군다나 내가 죽고 나서는 바르바토스마저 살해하실 게 분명했다. 아버님은 한꺼번에 나라는 이해자와 바르바토스라는 동반자를 잃게 된다! 내가 재빠르게 바알의 대검을 땅바닥에서 쥐어들었다. 나는 아버님을 향해 칼 끝을 내밀었다. 이미 쓰레기처럼 힘이 빠져버린 내 오른팔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님은 그걸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다. 아버님은 결코 견딜 수 없다. 스스로 파멸해버릴 것이다. “그런 결말을 허락하느니, 차라리……!” 덜컥 목이 메였다. 나는 마저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목이 막혔다. 차라리, 내가 아버님을 죽인다. 아버님을 지옥으로 떠나보내는 대신 평안한 안식을 선사하겠다. 괜찮다. 문제없다. 어차피 아버님을 죽이고서 나도 곧바로 자살할 것이다. 아버님을 혼자 보내서야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저래 봬도 아버님은 길을 헤매는 것이 특기였다. 내가 옆에서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가시지도 못하겠지. “…….” “…….” 아버님과 나 사이에 기묘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검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다. 아버님에게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불리한 것은 이쪽이었다. 나는 자신의 불리함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더 살기를 피워냈다. 아버님은 나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서 죽이려 하고. 나는 아버님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서 죽여야만 했다. 아버님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내가 입술을 꾹 깨물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하다못해, 약속해주세요……바르바토스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세요. 그럼, 그러면 저는 괜찮습니다……얼마든지 죽어도 괜찮으니까……!” “…….” 그리고. 아버님은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거절이었다.   00472 악(惡)의 극본 =========================================================================                        결국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내 팔은 이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떨렸다. 나는 숨을 고르려고 노력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자꾸만 시야가 둔해졌다. 아마도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나는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한 발자국. 만일 아버님이 단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주저 없이 검을 휘두르겠다고. 아버님은 언제나 내게 강조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다. 만약 무언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걸 할 수 있다. 따라서 나 또한 아버님을 죽일 수 있다……. 그렇지요, 아버님. 아버님께서도 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내심 원하고 계실 테지요. 항상 당신의 무덤을 찾아 해매던 아버님입니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세계 전체를 황량한 묘지로 삼겠다고 맹세하던 아버님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망량처럼 배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제대로 미소를 지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입꼬리가 엉망으로 떨리는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아버님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겠습니다.” 우리 부녀는 서로 미소로 마주보았다. 우리가 비웃음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미소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겠지. 아버님이 최초이자 최후로 내게 지어보인 미소는, 내가 꿈에서 갈망하던 것과 무척 달랐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버님이 품속에 느릿하게 손을 집어 넣었다. 아버님의 손에 들린 것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 모양새가 낯이 익었다. 그건 제레미 스승님이 아버님을 위하여 물약을 제조할 때 전용하는 용기였다. “…….” 투명한 색깔의 물약이라니. 연금술, 특히 각종 물약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무엇보다도 색깔과 향기가 중요했다. 미리 색깔로 이런저런 약물을 구분해두지 않을 경우, 자칫 실수로 엉뚱한 액체를 사용해버릴 수 있었다. 예컨대 상처를 회복하는 물약은 반드시 붉은빛에 로즈마리 향기가 나도록 제조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반면에 저건 투명했다. 달리 말해, 다른 사람이 알아볼 필요가 없는 약물. 혹은 이게 어떤 물건인지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면 곤란한 약물이라는 의미였다. “아버님, 그건……?” 아버님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 내용문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아버님의 목이 울렁거리면서 액체를 삼키는 것이 보였다. 금세 한 병이 비어졌다. 아버님은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똑같이 생긴 유리병을 하나 더 꺼냈다. 나는 아버님이 두 번째 물약을 해치우는 것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무색무취의 약물. “……!” 독약이다. 저건 독약이다! 내가 깨달은 것과 동시에, 아버님이 묽은 기침을 쏟아냈다. 각혈이었다. 검붉은 피가 땅바닥에 쏟아졌다. 식도가 아니라 내장의 차원에서 밀려나온 피였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세 번째 물약을 입에 물었다. 내가 대검을 던지고 아버님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아버님이 휘청거리며 무릎이 꺾였다. 나는 다급히 아버님의 몸을 지탱했다.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웠다. 아버님이 원래 이렇게 야위었던가. 여기까지 망가진 몸으로 아버님은 마왕군을, 거대한 제국을 짊어진 것인가. 아버님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다. 그리고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안 돼……독약의 종류를,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 아버님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서둘러 땅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을 주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유리병에 아주 약간 남은 물약을 꿀꺽 마셨다. 순간, 강렬한 고통이 식도를 쑤셨다. 마치 식도가 녹아내리는 것처럼……아니, 타오르는 것처럼 아팠다. 겨우 몇 방울만 삼켰을 뿐인데. 이건, 단순히 평범한 독약이 아니었다. 내장을 녹이는 수준의 독극물이었다. 아무리 아버님이 마왕이라 하더라도 이런 극약을 견딜 수는 없었다! “아, 아아……안 돼…….” 내가 왼팔로 아버님의 몸을 지탱한 채, 오른손으로 허겁지겁 아버님의 품안을 더듬거렸다. 회복 약물. 아버님은 항상 회복 약물을 챙기고 다녔다. 이미 독약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시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만을 생각했다. 없다. 어디에도 없다. 손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회복 약물이 없었다. 어째서.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안 돼요, 아버님……안 돼…….” 눈가가 희뿌옇게 물들었다. 눈물이 흘렀다. 일생을 살아오며 흘린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아버님의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여전히 약물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손가락은 다만 아버님의 망토를 끝없이 허망하게 휘저었다. 결국 눈물 때문에 시야가 아예 안 보였다.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계속 닦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버님의 얼굴이. 아버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싫어……이런 건, 싫어요……아아…….” 나는 온힘을 다해서 아버님을 꾹 껴안았다. 무언가가 떨리고 있었다. 내 몸이 절규하는 소리였다. 체내에 남은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우직, 하고 대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땅바닥에 생겨난 틈새는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쳐나갔다. “……해! 당장……둬!” “안……지만, 끝날 때……수가……!” 멀리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경악하는 소리일까. 곧이어 모든 소음이 웅웅거리는 잡음으로, 희미하기 그지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했다. 갑작스럽게 마력이 폭발하여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잘기잘기 갈라진 대지는, 이윽고 작은 혜성이 떨어진 자리처럼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오직 아버님과 나만이. 우리 둘이 발을 디딘 이곳만이 폭풍의 핵처럼 고요했다. 나는 아버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아버님의 옷을 끊임없이 적셨다. 끝났다. 끝나버렸다. 아버님에게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언젠가 사라지고 말 온기가. 나는 추위에 떠는 새끼 짐승마냥 아버님의 몸안으로 더더욱 파고들었다. 문득, 따뜻한 손바닥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아버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자상한 눈길로. 그리고 나는 이것이 마지막 순간임을 직감했다. 내가 아버님에게 건넬 수 있는 말, 내가 아버님과 나눌 수 있는 시선, 전부가 찰나의 여유만을 남기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아버님이 내게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 눈앞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주위로 깊게 파인 대지의 구덩이도. 마력 때문에 사방으로 새하얗게 반사되는 빛도. 중력에 거슬러서 허공에 느릿하게 떠오른 흙더미와 바위도. 모두 정지했다. 어떤 영원감 같은 것이 흘렀다. 유일하게 나한테 느껴지는 감촉이란, 아버님의 입술. 그리고 아버님의 입에서 내 입으로 흘러 들어오는 독약. 아. 그렇구나. 아버님은 첫 번째 물약과 두 번째 물약을 삼켰다. 하지만 세 번째 물약은 입안에 간직해두었다. 아버님은 지금처럼 내가 다가와서 당신을 부둥켜 안았을 때 독약을 전달할 계획이었다. 독약이 식도를 지나쳐 내장에 떨어졌다. 몸속에서 천 개의 바늘이 내장을 꿰매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직 멀리서 지켜보는 것 같던 죽음이 나의 몸을 손아귀에 쥐었다. 그렇지만 나는 떨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아버님의 입술에 응석을 부리듯 달려붙었다. 조금이라도 길게 이 감촉을 느끼기 위해서. 독약의 고통 따위는 이 감촉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아버님이 흘려보내는 독약을 그대로 삼켰다. 왜냐하면 아버님의 생각을 전부 이해했으므로. 마침내, 독약이 전부 내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아버님의 입안에서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아버님과 나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누가 나중이라 할 것도 없이,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 “…….”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파요, 아버님.” “제레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니까.” “아팠어요……무척.” 아픔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이었다. 아버님을 만났다. 아버님과 죽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전히 엉망진창이겠지만, 아까 전과 달리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아버님도 똑같겠지.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아버님도 겪고 있었다. 온몸이 바스라지고 내장이 넝마짝이 되어버리는 통각을, 우리는 똑같이 나누었다. 비록 아버님과 나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마족으로, 인간종으로. 왕으로 태어난 자로, 천민으로 태어난 자로. 마왕이 되도록 강요된 자로, 마왕을 죽이도록 강요된 자로. 겨울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겨울을 다만 견뎌야 했던 사람으로. 정반대편에서 피어났지만―――우리는 제대로, 함께 떨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만족할 수 있었다. 나는 아버님에게 말했다. 아버님이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마치 어릴 적, 언제인지 모른 날, 숲속 저 너머의 겨울 하늘을 올려봤을 때처럼. 끝없이 아득하고. 한없이 고요한 곳처럼. 죄송해요, 아버님. 아무래도 제가 아주 조금 먼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조금만 더 먼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라우라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주군은 자신에게 병력을 통솔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당연히 자기가 맡은 역할이었으므로, 라우라는 흔쾌히 허락했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중앙 전열을 돌파했다 들었을 때는 불안했지만 라우라는 자신의 주군을 믿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는 제 일을. 라우라는 라우라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라우라는 약간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니라 주군의 명령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주군은 자기 스스로 장담한 바를 이루지 못한 적이 거의 없었다. 라우라는 누구보다 단탈리안을 신뢰했다. 그리고 지금, 그 신뢰가 빛을 발했다. “틈을 보였구나, 통령이여.” 라우라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전장에서는 헬베티카 용병이 점차 공화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패착을 저질렀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일시적으로 뚫어둔 틈새로 일부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새였다. 소탐대실이란 그대를 위해 만들어진 경고이겠지.” 라우라가 자신만만하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이대로 적의 중앙을 포위하라! 적을 양익으로 흘려보내지 마라! 뒤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예, 전하!” 부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공화국은 민병이 패퇴하여 본격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민병이 뒤로 후퇴하려 들자 공화국의 정예병이 가로 막아섰다. 그러자 민병은 양익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이걸 헬베티카 용병이 방해했다. 결국 민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절망에 빠졌다. 아군의 절망은 금세 동료들에게 전달되는 법. 라우라는 이 전투의 승리를 확신했다. “사령관, 단탈리안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오오. 주군께서는 뭐라 하시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라우라는 아까 전에 엄습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일부러 활기차게 물었다. 전령이 입을 열었다. “적장 데이지 폰 커스토스, 전사!”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시녀가 드디어 죽었다. 축배라도 들고 싶었지만 정작 라우라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걸 알았는지 전령도 서둘러 다음 사항을, 주군의 안부를 입에 담았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 작품 후기 ============================   이 자작곡은 <던전 디펜스> 공지사항 및 대문에 올려두었습니다. 아래 주소에서도 동일한 곡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https://soundcloud.com/musicship/requiemby-teiad   00473 무엇을 위하여 =========================================================================                        “좋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직접 달려가서 주군의 용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라우라는 지금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임을 알고 자제했다. 일단 무사하다는 걸 알았으니 인내할 수 있었다. “전하, 우익에서 아군의 기마대가 패퇴하고 있습니다!” “괜찮다. 예정된 수순이다.” 부관의 다급한 보고로 라우라는 단숨에 의식을 다시 집중했다. 이번 전투의 행방은 여기에 달려 있었다. 헬베티카 용병대가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공화국의 기병대가 양익을 차지하는 것이 먼저인가. “아직 좌익이 버텨주고 있다. 당황하지 마라. 기마대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예……!” “패퇴하는 아군에게는 최대한 멀리 도망치라고 전달하라. 조금은 시간을 더 빼앗을 수 있겠지.” 만일 이쪽에서 중앙을 돌파하기도 전에 공화국의 기병대가 양익을 점거하면, 제국군은 졸지에 3면에서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당하고 만다. 그렇기에 상대편은 민병을 희생양으로 삼아 중앙을 보강했다. 반면에 이쪽은 오우거를 운용하여 기사단의 일부가 중앙으로 배치되도록 강요했다. 일수일퇴.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뚫릴 듯 뚫리지 않을 듯,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묘기가 이어졌다. 드디어 중앙이 돌파되는가 하면 엘리자베트가 곧바로 분견대를 동원하여 틈새를 메꾸었다. “부대를 운용하는 능력은 호각인가……. 하지만, 나와 성향이 정반대로군.”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기본적으로 부대를 크게 다루었다. 연대 하나당 병력이 대략 이천오백에서 삼천 명. 아무리 적어도 이천 명을 집어 넣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아무리 많아봤자 일천오백 명을 연대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즉, 라우라는 보다 묵직하고 강렬한 한방을 선호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비록 힘이 조금 떨어질지라도 재빠르고 섬세하게 병력을 조종했다. 충격력인가. 아니면 기동력인가. 군사(軍師)들의 영원한 난제가 이곳 평원에서도 맹렬하게 맞붙었다……. 개전하고 한 시간이 지난 무렵, 전황이 움직였다. 데이지가 일시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엘리자베트가 병력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공화국의 검주들이 일제히 사나운 늑대떼처럼 달려들었다. 이 가열찬 쇄도에 라우라는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도박! 이대로 전투가 이어지면 공화국이 불리할 것이라 판단했겠지. 엘리자베트는 즉석에서 검주들을 파견하여 전쟁터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라우라 역시 곧바로 예비병력을 중앙에 쏟아부었다. “민병을 동원한 것이 네놈의 패착이다.” 승리의 여신은 라우라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검주들이 일거에 달려들자 과연 위력이 막강했다. 그들은 데이지가 만들어놓은 틈을 더더욱 넓게 벌려서, 결국 제국군의 제1전열을 뚫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라우라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우선 라우라는 제1전열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그대로 제2전열을 전진시켜서 검주들을 막았다. ‘작금의 돌격은 분명히 날카롭고 가공스럽다.’ 라우라가 끊임없이 명령을 내려가며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그렇지만 검주들의 뒤를 바쳐줄 병력이 허약하다! 민병으로는 우리 제국군의 전열을 붕괴시킬 수 없다. 비록 틈새가 생겨버렸다고는 하나, 그뿐! 이쪽이 뚫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진 않는다!’ 라우라의 판단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검주들은 제국군의 제2전열에 가로막혀 돌파력을 잃었다. 마법사와 궁병이 아군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검주들에게 화력을 퍼부었다. 이에 검주들로 이루어진 특공대가 주춤거렸다. “전군, 전진! 밀어내라!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라우라가 직접 군마를 몰고 돌아다니면서 깃발을 휘둘렀다. 부관들이 그녀를 허겁지겁 쫓아다니며 진땀을 뺐다. 일단 라우라가 이렇게 나오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라우라는 제1전열과 제2전열을 오가며 “전진! 전진하라!”를 소리쳤다. 그건 과감하다 못해 거의 비상식적인 명령이었다. 제아무리 돌파력이 죽었다고는 하나 검주에 의해 제1전열이 돌파당했다. 군사를 뒤로 물려서 재편하고 숨을 골라도 모자를 판국. 그런데 오히려 전진을 울부짖다니! “공작 전하의 명령을 따르라!” “애송이 새끼들아, 앞으로! 앞으로 밀쳐내!” 그러나 헬베티카 용병들은 주저없이 명에 복종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헬베티카 용병대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사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존경스러운 총사령관 전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수천 명의 병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전진했다. 공화국 민병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오우거들의 난동에도 굳건하게 버틴 민병들이었지만, 한바탕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전문적인 전쟁꾼들의 기세를 받아치기란 불가능했다. 전진, 전진, 끝없이 전진! “적 중앙의 전력을 양쪽으로 압박하라! 뒤를 염려하지 마라! 그대들의 총사령관이 함께하고 있다!” 라우라를 태운 군마가 드높이 앞발을 들었다. 푸른 수국의 깃발이 바람을 가르며 찬란하게 펄럭거렸다. 마법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그녀만이 오롯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극적인 절대성이 그곳에 있었다. “공작 전하 만세!” “여신께서 전하를 수호하신다!” 헬베티카 용병들이 더더욱 거세게 민병대를 압박했다. 민병대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이러자 공화국의 특공대는 적지 한복판에 고립된 꼴이 되어버렸다. 뒤에서 받쳐주는 병력이 없었다. 특공대의 놀라운 돌격은 전황을 바꾸는 데로 이어지지 못했고, 그저 조금씩 소모되기만 했다. 몇몇 검주는 순간전이 마법서를 꺼내들었지만 이미 마법사들이 반마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포화 공격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절망적인 미래가 결정되자, 검주들은 마지막 함성을 울부짖으며 돌격했다. “공화국을 위하여!” 그들은 전원 장렬하게 옥쇄했다. 이 시점에서, 엘리자베트 통령은 패배를 직감했다. “당했는가.” 그녀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너무나 덤덤해서 바로 옆에 있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어리둥절했을 정도였다. 엘리자베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마저 감돌았다. “이쪽의 공격이 일시적이나마 중앙을 양단했다. 그걸 오히려 포위의 기회로 삼아 이쪽으로 과감하게 돌격해오다니. 이제 민병대는 삼면에서 포위되는 형국에 처했다. 가망이 없다.” “아직 우리의 정예병은 건재합니다. 이제야 호각이라 할 수 있습지요.” “아니, 끝났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왜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민병을 삼면에서 포위하겠는가. 민병대로 하여금 유일한 탈출로, 즉 후방으로 후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후방에는 우리 공화국이 자랑하는 정예들이 버티고 서 있지.” “그렇다면…….” “그래. 민병들이 후퇴하는 것을 우리 군대가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엘리자베트가 끄응, 하고 기지개를 쭉 폈다. 한없이 태평한 몸동작이었다. 그 때문에 주위의 부관들은 설마 통령 각하께서 현재 아군의 패배를 예언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는 칼마르어로 말했다. “민병들은 어떻게든 후퇴하려고 발악할 터. 결국 우리 정예병들의 대열도 혼란에 빠지겠지. 후퇴하는 자와 후퇴를 막아서는 자끼리 충돌이 발생한다. 그 혼란을 틈타서 적군은 정예병까지 포위해버릴 게다.” “……그렇군요. 큰일이지 않습니까, 각하.” “아아. 큰일이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어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본인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다. 하나는 패퇴하는 민병대를 추슬러서 혼란을 최대한 막아보는 것이다. 뭐, 논외이지. 그리 간단하게 패주의 혼란을 잠재우기란 어려우니 말이다.” 쿠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첫 번째 선택은 논외였다. 그야말로 탁상공론. 이도저도 아니게 혼란만 가중할 게 분명했다. “두 번째는 민병대와 함께 아예 후퇴해버리는 것이다. 무니헨에 틀어박혀서 공성전이라도 벌이면 된다. 다만 이 경우, 어떻게 후퇴하면서 적군의 추격을 막아내느냐가 문제로군. 꽤 막대한 피해가 생겨나겠지.” “예. 기껏해야 차선의 선택밖에 되지 않습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이미 세 번째 대안이 무엇인지 예감하고 있었다. 쿠르츠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각하, 마지막 선택은 무엇입니까.” “민병들을 사살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간단하게 말했다. “후퇴하는 민병들에게 화살을 쏟아붓고 창날을 세운다. 민병은 당황하여 앞으로도 뒤로도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결국 절망에 빠진 민병대는 아군의 창칼에 죽느니 차라리 적군에게 죽겠다며 돌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혼란은 사라진다. 자포자기한 돌격이 무언가 커다란 성과를 얻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적군의 발목을 붙잡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패퇴로 인한 혼란이 없어질뿐더러 헬베티카 용병대의 체력까지 소모시킨다. “이게 최선책이다.” 일거양득의 계책. 자국의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함으로써 얻어내는, 계책. “……각하께서는 무엇을 고르실 것인지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조용히 물었다. 쿠르츠는 본래 권력자를 싫어했다. 그가 엘리자베트에게 충성을 바친 까닭은, 권력과 고결함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상반되는 요소를 과연 엘리자베트가 성취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고결한 지배자란 불가능하다. 모순이다. 하지만 그 모순의 결말이 지켜보고 싶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라는 인간이 어떤 종착지에 이를지 궁금하다. 그것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만약 그 결말이 여느 권력자로 전락하는 것이라면, 쿠르츠는 더 이상 엘리자베트의 곁에 머무르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 손으로 엘리자베트를 처단하는 것이 옳았다. 단탈리안, 그 작자를 만나고서부터 통령은 변질되었다. 본래 통령의 성격대로라면 이번 전투에 민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권력자라면, 국가를 지켜내는 것 또한 권력자여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병 이외의 시민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켰을 것이다……. ‘뭐, 이미 당신은 단탈리안을 상대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신념을 저버렸습니다. 설령 지금 내 칼에 죽더라도 변명할 도리는 없겠지요.’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각오를 다졌다. 승리에 눈이 먼 독재자 따위를 모시고 싶어서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통령을 암살하면 자기 역시 죽겠지만, 어차피 인간이란 전부 죽기 마련이지 않은가. 쿠르츠는 가벼운 남자였다. “물론 시민들을 희생한다.” 엘리자베트가 웃었다. “그렇게 결단하고 싶다마는, 쿠르츠. 아무래도 본인은 끝까지 이도저도 아닌 인간인 모양이다. 신념 따위는 들개한테나 줘버리자는 심정으로 전쟁터에 나섰거늘 막상 이런 순간이 닥치면 그 남자처럼 행동할 수가 없어.” “…….” “내가 민병에게 처음 희생을 부탁한 까닭은 우리가 승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본인의 오판으로 인해 궁지에 몰렸다. 거기에 대고 화살과 창칼을 겨누라고, 본인은 도저히 명령하기 어렵구나.” 엘리자베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니헨으로 후퇴한다. 적군은 절대로 우리를 쉽게 놓쳐주지 않겠지. 힘겨운 퇴각전이 될 것이야.” “…….” “슐라이어마허 장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결정에 따라주겠는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여간 사람 다루는 게 험악하시다니까요. 저처럼 피학에 쾌감을 느끼는 남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통령 각하를 보좌하겠습니까? 뭐, 봉급이나 제대로 올려주십시오. 무니헨의 술집 아가씨들이 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엘리자베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공화국 정부는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주게, 근위대장.” 엘리자베트와 쿠르츠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었다. 공화국의 본진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보라색 깃발과 검은색 깃발이 펄럭거렸다. 그건 전군의 후퇴를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00474 무엇을 위하여 =========================================================================                        * * * “장군! 후퇴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뭐, 후퇴라고!” 한창 제국군의 기병을 상대로 곡도를 휘두르던 샤를 리히트호펜 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공화국의 기병대는 근소하지만 적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샤를은 이대로 20분, 아니 10분이 더 주어지기만 해도 적을 내쫓을 자신이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통령 각하께서는 내게 우익을 정리하라 명하셨어.” “하, 하지만 정말로 후퇴기가 올라왔습니다.” 샤를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발굽이 낸 먼지 구름 탓에 시야가 썩 쾌적하지 못했다. 샤를은 왼손으로 품을 뒤져서 휴대용 망원경을 꺼내들은 다음, 거칠게 눈가에 가져갔다. 흑색 깃발. 틀림없이 전면적인 후퇴를 의미하는 깃발이었다……. “말도 안 돼. 각하께서 이렇게 간단히 물러날 리가…….” “장군님! 중앙의 아군 전열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우리가 포위되어버립니다!” “크으……후퇴하라!” 샤를이 이빨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헬베티카의 기병대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기병대를 쫓아낸 다음 적군의 중앙을 후방에서 덮친다. 그러면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승리를 거둔다. 통령 각하께서도 아시고 계실 텐데, 어째서. “각하께선 누구보다 승리를 바라시지 않았는가……!” “장군님!” 여전히 아쉽다는 듯 전방을 바라보는 샤를을 향해서 부관이 소리쳤다. 이미 퇴각을 의미하는 뿔나팔이 먼지 구름을 기이하게 흔들고 있었다. 아군 기병대는 다소 당황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 제기랄!” 샤를이 억지로 말머리를 돌렸다. 군마가 뒤를 돌아 내달렸다. 중앙, 좌익, 우익. 모든 방향에서 공화국이 대대적으로 물러섰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최전방에 나와 있었다. 덕택에 그녀는 전장의 바람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추격하라!” 적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거짓 후퇴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이제 와서 거짓으로 후퇴하여 얻을 이익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복군을 숨겨둘 숲지대 따위도 없었다. 공화국은 패전을 예감하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퇴각하는 것이었다. “전군, 대열을 갖출 필요도 없다! 추격하라! 추격하라! 거침없이 추격하라!” 라우라가 직접 군마를 몰아 달려나갔다. 부관들은 그녀를 호위하면서 뿔나팔을 치켜들었다. “돌격하라!” “적들을 물어뜯어라!”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라우라의 뒤를 쫓아 앞으로 나아갔다. 엄중한 항오를 자랑하는 헬베티카 용병이었지만, 일단 추격전에 나서자 대열도 보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용병들은 적병을 죽여서 탈취할 전리품에 눈이 시뻘개져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건 극단적인 변형이었다. 여태까지 성벽처럼 빈틈없이 버티던 용병대가 이리떼로 돌변하였다. 용병들은 가장 먼저 적군의 중앙을 물어뜯었다. 다음은 우익이었다. 중앙과 우익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공화국군은 본격적으로 후퇴를 감행했다. “기병의 전력이 부족한 게 한이로군.” 라우라가 말발굽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어 바로 옆의 땅바닥에 꽂혔다. 아주 약간이라도 방향이 달랐다면 라우라에게 정통으로 맞았을 뻔했다. 하지만 라우라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부관들을 향해 명령했다. “각 용병대장들에게 전하라. 전군, 약탈을 허용하되 무니헨까지 추격하지는 마라. 지금 상태에서 공성전으로 돌입하기란 불가하다. 그저 전과를 확대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예. 공작 전하께서는 달리 가실 곳이 있습니까?” “주군의 용태를 확인하러 가야겠다.” 라우라는 수자기를 땅에 내려꽂았다. 그리고 후방을 향해서 터벅터벅 말을 몰았다. 라우라가 지나치는 부대마다 두 팔을 벌려 크게 환호했다. 위대한 공작 전하께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머쥐셨다. 더군다나 너그럽게도 자신들에게 약탈을 허용해주셨다. 용병들이 만세를 부르짖었다. “데 파르네세 공작 전하 만세!” “아테네 여신께서 축복하시리라!” 라우라는 말 위에서 대충 근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병사들이 아무리 열광하더라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라우라에게 전쟁이란 일어나기 직전이 가장 흥미로웠고, 그 다음은 일어나는 도중이 재밌었으며, 전부 끝나버린 이후에는 아무런 흥미도 재미도 없었다. ‘주군은 무사할까.’ 라우라가 무심하게 병사들을 훑어보면서 생각했다. ‘자기만 믿고 맡겨달라고 호언장담했으니 별 탈이야 없겠다마는. 이번에도 또 몸으로 때워버리지 않았을지 걱정되는군. 하여간 주군은 자기 몸이 소중한 줄 모른다.’ 주군이 바타비아에서 가짜 암살을 당한 뒤 열흘이나 드러누웠을 때 얼마나 놀랐는가. 얼마 전에 왼발을 스스로 잘라버렸다고 들었을 때는 또 얼마나 경악했는가. 라우라는 치가 떨렸다. ‘전부 화전민 계집년 때문이다. 이제 그 애송이의 면상을 보지 않아도 된다니 유일한 위안거리로군. 애당초 주군이 프랑크에서 그 년을 주워오지만 않았더라면……아니, 주군의 잘못이 아니다. 배은망덕한 계집애의 잘못이지.’ 라우라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라우라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스물두 살이 넘은 작년부터 눈가에 피로가 들러붙었다.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로 운동을 해야 되겠다 싶었다. ‘이번 전쟁만 끝마치고 마왕성에 돌아가면 주군을 꼬셔서 같이 운동을 시작하자.’ 라우라가 굳게 다짐했다. 본래 라우라는 승마가 취미인데다 가볍게 검술도 즐기는 건강 소녀였건만, 단탈리안의 가신으로 들어간 이후로 주군에게 옮았는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침대’라는 사상에 깊이 심취했다. “전하.” 라우라가 군진 막사에 당도했다. 경비를 서던 엘프들이 군례를 올렸다. 그들은 라우라에게 달려와서 군마를 잡아주었다. 라우라가 등자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음. 수고가 많다. 주군은?” “안에 누워 계십니다. 지금은 마왕 전하의 시녀가 곁에 있습니다.” 라우라가 양팔을 벌리자 엘프 병사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흉갑을 벗겨주었다. 다른 병사는 헐레벌떡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서 라우라의 얼굴과 목덜미, 손등을 정성스레 닦았다.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시녀?” “예. 평소 전하의 시중을 드는 금발의 시녀 있지 않습니까. 왜, 눈동자가 자주빛인.” “아아. 이바르 양인가.” 라우라가 안심했다. 시녀라고 하기에 또 누구인가 싶었다. 라우라는 병사가 들고온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화장은 안 했지만 충분히 주군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라우라는 마왕성에서 게으르게 뒹굴거릴 때나 심지어 전쟁터에 나설 때조차 기본적으로 외모를 다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파르네세의 공작.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의 대리장군. 라우라는 어떤 것도 자신의 정체성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의 군사요 신하에 불과했다. 단탈리안의 라우라.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라우라가 머리카락을 단장하면서 생각했다. ‘그 계집애도 분수 넘치게 주군의 것이 되기를 원했지. 하지만 결코 주군의 것이 되지 못했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지만 계집애가 무엇을 증명했다는 말인가.’ 라우라가 거울을 다시 한 번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오로지 한 명의 남자를 위하여 오랜 시간 동안 닦아온 미모였다. ‘그럭저럭 싸움을 잘 한다는 것? 확실히 대단하다. 하지만 주군에게 녀석과 같은 싸움꾼이 필수불가결한가? 주군에게 있어 녀석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가?’ 라우라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녀석이 없어도 주군은 얼마든지 패업을 이룰 수 있다. 그렇지만 라피스 언니는 어떠한가? 라피스 언니가 없으면 주군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어떠한가? 내가 없어도 주군이 대륙을 재패하기란 불가능하다.’ 정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이 없는 곳에서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 주군이 없는 곳에서 라피스 언니가 마음껏 능력을 펼치기란 어렵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주군이 주군으로 있기 위하여――우리가 우리로서 있기 위하여.’ 반면에 데이지라는 소녀는 거기에 실패했다. 데이지가 있든 없든 주군은 주군의 길을 걸어갔다. 걸어갈 수 있었다. 마왕 단탈리안이 나아가고 나아가야 할 패도(霸道)에 데이지라는 요소는 불필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가까웠다. 데이지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으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력했다. 필사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검술을 익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라피스나 자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설 수 없었다……. 라우라는 데이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해내지 못한 사람은 과장된 행동을 통해서, 즉 ‘나도 얼마든지 당신을 위협할 수 있다’라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의 거짓된 가치를 만들어냈다. 주군의 약에 독극물을 탄 이유도 일맥상통했다. ‘나는 언제든 주군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인간이다. 나를 경시하지 마라.’ 그런 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라우라가 거울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천박한 년.’ 라우라는 그 같은 인간을 제일 경멸했다. ‘나는 단탈리안의 라우라이며, 주군은 라우라의 단탈리안이다. 이런 위치를, 이와 같은 관계를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나는 사십만의 생명을 도륙했다. 주군을 위해서!’ 라우라가 손을 저어서 병사들을 물렸다. 병사들은 흉갑과 수건 등을 껴안고 주변으로 물러났다. 라우라가 고개를 까닥거린 다음 막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라우라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금발의 시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바르였다. 이바르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녀가 일어서서 인사하려 들자, 라우라는 조용히 얼굴을 흔들었다. 주군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괜히 말소리를 크게 내서 깨울 필요가 없겠지. 라우라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군께서는 용태가 어떠한가.” “무탈하십니다. 다만 독약의 영향으로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으음.” 라우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어쩌다 주군이 독약을 들이켰는지 새삼스레 질문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집애를 죽이려고 어떤 계략을 꾸몄겠지. 어차피 자기가 불평해봐야 주군이 꿈쩍할 리 없었으니, 잔소리는 라피스 언니에게 모두 맡길 속셈이었다. “어휴. 하여간 주군은 항상 무리하는 게 문제다.”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가까이 다가섰다. 주군은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다만 숨소리가 무척 안정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라우라는 마음이 상당히 편해졌다. 다행이었다. 별로 아프지 않아 보여서……. 라우라가 부드럽게 단탈리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바르가 옆에서 수건으로 닦아준 것인지 단탈리안의 이마와 얼굴은 깨끗했다. 그 광경을 이바르가 괴롭게 바라보았다. “군무상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인가.” “잠깐 바깥으로 나와주셨으면 합니다.” 이 막사에는 이야기를 들을 귀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단탈리안이 있는 자리에서 꺼내기 싫은 주제라는 뜻이었다. 라우라가 이바르와 함께 막사 입구로 나왔다. “군무상서. 우선 이 사항은 극비임을 말씀드립니다.” “말해보게. 내 입은 주군이 상대만 아니라면 매우 무거우니.” “바로 그 주군께도 당분간 말씀드리면 안 됩니다.” 라우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것이 주군을 위한 길인가?” “예. 제 모든 생명을 걸고 맹세하여.” 라우라가 데이지를 처치하고자 결심했을 때, 이바르는 거기에 따라준 동료였다. 라우라는 이바르를 제법 신뢰했다. 주군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과 연정은 진심이었다. “좋다.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난 틈을 노려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특공대를 파견한 것 같습니다. 현재, 마왕성과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뭐라……!” 라우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바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마왕성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군무상서. 마왕 전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신 지금, 군무상서께서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라줄리 국무상서가 마왕성에 있음을 유의해주십시오.”   00475 무엇을 위하여 =========================================================================                        “…….” 라우라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잠시간 침묵에 잠겼다. “……마왕성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겠는가?” “마왕성 전체에 강력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습니다. 일단 커스토스 영지 부근으로 심부름꾼을 보냈습니다. 아마 반각이 지나기 전에 보고가 올라올 것입니다.” 당장에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마왕성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대단치 않은 기습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대대적인 습격에 시달리는 걸 수도 있었다. 라우라가 침음을 삼켰다. “어쩌면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예, 소인이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문제입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동의했다. 단탈리안 마왕군의 서열 제1위인 주군은 현재 의식을 잃었다. 서열 제2위인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는 때마침 습격을 당한 마왕성에 머물렀다. 서열 제3위인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라우라는. “……정찰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바르가 걱정스럽게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라줄리 국무상서께서 위험에 처하셨을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라도 국무상서가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왕성은 난공불락이다. 쉬이 함락될 리 없어.” 라우라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마도 이것은 공화국 통령의 계책이다. 지금 공화국은 전쟁터에서 패퇴하고 있다. 이 절묘한 순간, 만일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린다면 적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 “적군에 의해 계획된 습격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인가. 처음부터 이쪽의 전력을 분산시킬 속셈이었다면 오늘이 아니라 어제쯤에 난동을 부렸어야 옳았다. 그러나 공화국은 본대가 패주하는 때를 정확하게 노렸다. 라우라는 상대편의 의중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이럴 때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반대라니요?” “왜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렸는가, 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왜 지금과 같은 순간을 노릴 수밖에 없었는가. 이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라우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바르에게 설명한다기보다 단지 판단을 입으로 풀어재끼는 느낌이었다. “만약 적에게 마왕성을 끝장낼 정도로 막강한 특공대가 있었다면, 전투가 한창 일어나는 도중에 습격을 명령했을 것이다. 아군은 무시무시한 혼란에 휩싸였겠지. 특히 주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만약 적에게 마왕성을 적당히 위협할 정도의 특공대가 있었다면,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에 습격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즉, 하고 라우라가 말했다. “적군에게는 실질적으로 마왕성을 위협할 특공대가 없다. 그저 습격하는 척 가장할 수만 있을 뿐이야. 아마도 통신 마법을 절단하고, 순간전이 마법을 가로막는 수준의 방해밖에 하지 못하겠지.” “……과연.” “실제로는 습격도 무엇도 없다. 습격이 일어났다는 착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이 적군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후퇴하고자 하는 게야.” 이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납득했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마왕성에 대한 원군은 없다. 그리 결정하신 것이군요.” “아아. 본인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마는, 대군을 운용하는 데 있어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우선 자네가 파견한 정찰병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이바르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막사로 들어갔다. 라우라는 그녀를 따라가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전부터 기묘한 위화감이 라우라의 등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라우라는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그렇기에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혹시 본인이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는가?’ 라우라가 막사 입구에 서서 찬찬히 자신의 사고를 복기했다. ‘주군은 공화국 통령을 대륙에서 제일 뛰어난 군재(軍才)로 평가했다. 사람을 보는 안목에서 주군은 틀린 적이 없었다. 허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통령이 단순히 특공대를 버림패로 사용할까……버림패……그렇군.’ 라우라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통령이 이번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특공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구태여 우리를 견제할 필요가 사라지니까. 요컨대, 통령은 오로지 패배했을 경우에만 유효한 수단을 미리 준비했다는 얘기가 된다……그건 불합리하다!’ 라우라는 그제야 위화감이 약간이나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마왕성 전체에 반마법을 펼치려면 상당한 규모의 마법사 부대가 필요했다. 그만한 전력이 있었다면 차라리 방금 전 전투에서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했다. 어쩌면 그 마법 전력 덕분에 엘리자베트가 승리를 거두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패전을 감수하고서라도 마법사 부대를 마왕성에 보냈다? 더군다나, 쓸모라고는 오로지 자기네가 패전했을 경우에만 유효하도록? ‘허면 통령은 일부러 패전을 노렸다는 얘기가 된다. 패전으로 인해서 자기가 얻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불가하다!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저질렀을 리 없어.’ 라우라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시간이 초조하게 흘렀다. 라우라는 좀처럼 막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엘리자베트 통령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라우라는 의문을 남겨둔 채 전쟁터에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후퇴를 노렸다. 그런 것이 가능한가……?’ 라우라가 휙 하고 부관들을 쳐다보았다. 부관들은 계급이 아득하게 높은 상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군인만큼 상사의 기분에 민감한 직업이란 없었다. 더욱이 상사가 보통 상사도 아니고 총사령관이자 황제의 대리장군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제군. 시급히 확인해줄 것이 있다.” “무엇이든 명령해주십시오, 전하.” 부관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흠 잡을 구석이 없이 훌륭한 자세였다. “적군이 후방에 보급마차들을 대량으로 세워뒀는가 확인하도록.” “예, 전하! 곧바로 통신을 돌리겠습니다.” “으음.” 만에 하나라도 공화국 통령이 일부러 패전을 노렸다면―――비록 왜 패전을 해야만 하는지, 라우라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후방에 보급마차들을 배치했을 것이었다. 용병들에게 보급마차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약탈감이었다. 신나게 적군을 쫓아가다가도 도중에 보급마차를 발견하면, 일단 추격을 중지하고 마차를 털어먹어야 마땅했다. 당연했다. 그깟 잡졸들 대여섯 명 죽이느니 마차 하나를 터는 것만 못했다. ‘이곳은 무니헨에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급마차를 필요 이상으로 동원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 그런데도 보급마차가 대량으로 배치되었다면……오직 우리군의 추격을 가로막기 위해서 끌고 왔다는 뜻이다.’ 라우라가 부관의 보고를 기다렸다. 잠시 뒤, 부관들이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끝냈다. 그들이 라우라에게 말했다. “전하. 좌익의 기병대에서는 전방에 보급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익의 기병대는 아직 재정비를 끝내지 못해서 추격전에 돌입하지 못했습니다.” “중앙의 아군은 보급마차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대량의 보급마차는 우선 아군의 시야에 발각되지 않았다고 사료되옵니다.” “…….” 라우라가 작게 신음했다. 사고가 다시 미궁에 빠져들었다. 이바르가 막사에서 걸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바르는 품안에 통신용 수정구를 품고 있었는데, 발걸음이 조급하였고 안색이 심각하게 어두웠다. 라우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어.’ 라우라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이바르에게 다가섰다. “보고가 올라왔는가.” “예, 군무상서. 사태가 심각합니다. 마왕성에서 주기적으로 계속 진동과 소음이 들려온다고 합니다.” “진동과 소음?” “심부름꾼이 아직 멀리서 정찰했을 뿐이라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마왕성 내부에서 일종의 폭발이 터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라우라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폭발음이라면 십중팔구 전투의 흔적이었다. 적군의 특공대가 침입하여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풍경이 순식간에 라우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왕성의 비밀통로는 정예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모종의 계략에 의해 방어선이 뚫렸다면. ‘라피스 언니에겐 군사를 다루는 재능이 없다!’ 문제는 라피스 라줄리의 책임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중하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라피스 라줄리는 적도의 군화 아래 마왕성이 짓밟히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설령 적군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아닥쳐도, 설령 자신에게 그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다 하더라도, 라피스 라줄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곳은 단탈리안이 돌아올 집이므로. 절대로 제3자에 의해 침범되어서는 안 될 장소이므로. 라우라가 이빨을 물었다. ‘라피스 언니가 죽으면 안 된다……!’ 라우라는 유일하게 라피스 라줄리를 자신보다 상위의 여인으로 인정했다. 자신보다 라피스 라줄리가 주군에게는 더 큰 의미를 가졌다. 때때로 주군의 편애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는 라우라였지만, 지금 그런 감정은 중요치 않았다. “사정이 바뀌었다. 이바르. 본인은 곧바로 마왕성으로 향하겠다. 그대는 주군을 곁에서 지켜다오.” “알겠습니다, 군무상서. 부디 무운을.” “아아. 무운을.” 라우라는 급히 친위대를 소집했다. 난쟁이 자크리가 이끄는 단탈리안의 친위대는 베테랑 용병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오백 명의 친위대와 함께 단번에 마왕성 부근으로 전이했다. 여기에만 어마어마한 금액의 마법서가 소모되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마왕성을 향해 진군한다!” “예, 장군!” 친위대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라우라를 전하가 아니라 장군이라 불렀다. 이건 그들에게 암묵적으로 허락된 특권으로서, 오로지 마왕 단탈리안만을 전하라고 부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친위대는 전원이 기마술을 익히고 있었기에 빠르게 진군했다. 커스토스 영지 외곽을 빙 둘러서 친위대가 마왕성에 당도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건만, 거의 동시에 친위대들이 말발굽을 멈추었다. “이건, 대체…….” 라우라가 망연하게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장엄한 풍광을 자랑하던 마왕성이 통째로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자그마한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마왕성 내부에 살던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나왔다. 서둘러서 도망치는 바람에 수많은 마인들이 발을 헛디뎠으며 그대로 압사당했다. 아비규환이 그곳에 펼쳐졌다. 설마 마왕성의 각 층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훼손당한 것인가. 그야말로 마왕성의 내부 구조에 훤하지 않으면 훼손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내부에 상당한 솜씨의 첩자라도 있지 않는 이상. 라우라가 입술을 꾹 물어뜯었다. “……다른 입구로 향한다!” 저런 난리통에 수백 명의 친위대와 함께 돌입하기는 불가능했다. 라우라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비밀통로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곧이어 그들은 강변에 숨겨진 비밀통로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아직 비밀통로는 무사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라우라는 우물처럼 새카맣게 이어진 통로의 저편을 바라보며, 차마 견딜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장군님.” “…….” 친위대장 자크리가 조용히 라우라를 불렀다. 결단을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라우라가 각오를 끝마쳤다. 국무상서가 위험에 처한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라우라는 목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이대로 돌입한다!”   00476 무엇을 위하여 =========================================================================                        친위대는 신중하게 통로에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동굴 천장이 이따금 잔잔하게 흔들렸다. 천만다행으로 마왕성 입구에 비해 이곳은 진동하는 정도가 약했다. 비밀통로는 마왕성에서도 가장 튼튼한 강도를 자랑했다. 지극히 자명한 이유, 즉 비밀통로가 약간의 충격에도 무너져내려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 키히이이익. ― 케르흐르. 거대한 거미들이 통로 바닥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라우라를 알아보고 친위대를 습격하지 않았다. 라우라는 문득 자기에게 마물의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이 없는 것이 몹시 억울하게 느껴졌다. ‘라피스 언니가 피신했는지 안 했는지, 공화국의 특공대가 여기를 통해 침입했는지 안 했는지, 그것만 알 수 있어도 운신의 폭이 넓어질 텐데!’ 그렇지만 라우라의 귀에 거미들은 그저 음산하고 불쾌한 울음소리를 발산할 따름이었다. 새삼 마왕인 주군이 이곳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군이라면 훨씬 더 능숙하게 사태를 처리했겠지. “속도를 높인다.” “예, 전하.” 라우라는 통로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친위대가 명령에 복창하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언제 어디서 공화국의 특공대가 기습해올지 몰랐으므로 주변에 대한 경계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라우라는 여태껏 몇 번 비밀통로를 오갔다. 하지만 오늘만큼 여기가 낯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진동 소리도, 물에 젖은 토끼마냥 약하게 떨어대는 종유석도, 모조리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주군이 잠들었다. 라피스 언니가 없다. 그것만으로 이렇게 불안해지는가.’ 라우라는 점점 더 강하게 입술을 씹었다. 연하게 피냄새가 혓바닥을 타고 흘렀다. 라우라는 쓸데없이 불안감을 가라앉히느라 기력을 소모하는 대신,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장군.” 난쟁이 친위병이 난감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를 전부 지나칠 때까지 습격은 없었다. 마물이 아군을 공격하는 일도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통로의 천장과 기둥은 약간 불안하긴 해도 여전히 굳건했으며,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것 같았다. 문제는. “입구가 막혀 있습니다.” “…….” 통로에서 마왕성 9층으로 이어지는 출입구가 붕괴되어 있었다. 마치 이곳만 의도적으로 틀어막은 듯, 거대한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려 있었다. 병사들이 둘러붙어서 해결할 수준의 방해물이 아니었다. 라우라는 누군가가 완벽하게 의도적으로, 나머지 통로는 내버려두고 이곳 출입문만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방도가 없는가……!” 라우라가 분노로 뇌까렸다. “전하. 일대에 지나치게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통신과 전이가 차단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계통의 마법을 차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친위대의 마법사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계통의 마법이라니. 적군은 대체 얼마나 많은 마법사를 투입한 것인가!” “만일 우리가 얻은 정보대로 정말 마왕성 전체에 걸쳐서 반마법이 이루어졌다면……최고위 마법사들이 개입한 것 아닐지 감히 사료하나이다.” “제기랄.” 라우라는 그녀답지 않게 작전 도중에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도 라우라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하기는 친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단탈리안 전하의 본거지가 파괴되고 있거늘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두 가지 가능성.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다.’ 라우라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공화국의 특공대가 여기로 침입한 뒤, 아무도 탈출하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봉쇄했다. 이 경우에 특공대는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자신들이 도망칠 구멍까지 없애버린 꼴이다.’ 이 경우, 상황은 더더욱 절망적이었다. 마왕성 안에 있는 인원은 도망치지 않을뿐더러 도망치지도 못한다. 결사대와 사생결판을 나누겠지. 라피스 라줄리가 생존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라피스 언니가 출입문을 막아버린 것. 침입을 미리 눈치 채고 비밀통로로 탈출한 다음, 추격자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붕괴시킨 경우이다.’ 라우라가 간절히 후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아주 미약한 희망은 아니었다. 두 개의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 공화국의 특공대가 이곳으로 침입했다기에는 통로가 너무나 깔끔했다. 거미 무리는 다소 당황하긴 했어도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침입자가 들이닥쳤다면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을 거다. 적어도 거미의 시체가 몇 개쯤을 널려 있어야 자연스러웠다……. 두 번째, 마왕성에 거주하는 마인들이 지나치게 당황했다. 만일 특공대가 지하 9층에 난입했다면, 그 위쪽에서 살고 있는 마인들이 허둥거릴 필요는 비교적 적었다. ‘비밀통로가 아니라 입구에서 정면으로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다면 마인들이 혼란에 휩싸인 것도 이해되었다. 특공대는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워서 마왕성에 쳐들어왔다. 마왕성을 지키는 마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곧이어서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 이에 마왕성의 주민까지 공포에 휩싸여서 대대적인 혼란이 벌어졌다…….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라우라가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물러선다.” “장군!” “어차피 우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라우라가 차가운 눈초리로 단언했다. “판단의 책임은 모두 본인이 진다. 설령 국무상서에게 불화가 덮쳤을지라도 단탈리안 전하께 책망을 받을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다. 그대들은 내 명령에 복종하도록.” “……알겠습니다.” 친위대장인 자크리가 고개를 숙였다. 총사령관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 의지를 손상시킬 권리도 실력도 자크리에게는 없었다. * * * 라우라는 그대로 되돌아서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친위대를 둘로 나누었다. 자크리에게 이백오십의 병력을 맡겨서 커스토스 영지에 합류하도록 명령했고, 자신은 나머지 이백오십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돌아갔다. 라우라가 군막사에 다가서니 이바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바르는 라우라 못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군무상서. 보고는 들었습니다.” “아아. 면목이 없다…….” 라우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지 국무상서가 커스토스로 안전히 피신했기를 바랄 뿐이야…….” “국무상서도 국무상서지만 더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군무상서. 전하께서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주군께서!” 라우라가 활짝 얼굴을 폈다. 그러나 즉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주군이 바란 대로 그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건 분명히 자랑해도 좋을 쾌거였다. 하지만 국무상서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감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라우라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런 라우라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이바르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의식을 차리시긴 했어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국무상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가 자칫 용태가 더 나빠지실지 모릅니다. 최소한의 기운을 차리시기 전까지 비밀로 해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라우라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국무상서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접하면 주군이 어찌 반응할까. 틀림없이 직접 국무상서를 구하기 위해서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킬 것이었다. 온몸이 독약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주군이 그러는 것을 라우라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실상 현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라피스 국무상서가 사망했을 경우,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피스 국무상서가 살아서 피신했을 경우, 역시 그들이 할 일은 전무했다. 결국 운명은 이쪽이 아니라 저편에 달려 있었다……. “일단 주군을 만나 뵙겠다.” “전하께서는 아직 매우 약하십니다. 부디 주의해주십시오.” “알고 있네.” 두 신하가 막사에 들어갔다. 라우라는 침대를 보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주군의 몸뚱어리는 여전히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병자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라우라입니까? 라우라의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응, 주군. 주군의 라우라이다.” 라우라가 침대에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병자의 손을 꾸욱 쥐었다. 문득, 라우라는 주군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갯머리 방향에서 한없이 나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지금 눈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조금, 무리를 해버렸군요.” “아…….” 라우라는 눈가에 물이 차올랐다. 얼굴이 너무도 수척했다. 눈을 감았을 때는 뚜렷하지 않았던 주군의 인상이 지금은 완전히 수척해진 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장 기절할 것처럼 눈 밑은 새카맣게 변색되었고, 피부는 하얀 것을 뛰어넘어 창백했다. ‘말할 수 없다. 이런 주군에게는 라피스 언니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라우라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제아무리 병상에 누워 있다고는 하나, 라우라가 생각하기에 주군은 주군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무슨 일이냐며 질책할 게 뻔했다. 라우라는 단탈리안 앞에서 거짓말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었다. “주군은 바보다. 무엇이든 몸으로 무마하려 하니까 또 누워버린 것 아닌가. 바보는 죽어도 고쳐지질 않는다더니, 아무래도 주군은 앞으로 영원히 바보일 모양이다.” 그렇기에 라우라는 쾌활하게 말했다. 상대방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부디 주군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라우라의 간절한 소망이 닿았을까. 아니면 단지 그만큼 상태가 나쁘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그녀를 질책하거나 추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너무하는군요. 이래 봬도 최대한 노력한 결과입니다. 독약을 무려 세 병이나 마셨다구요……살아 돌아왔다는 점에서 전 이미 모든 의무를 다했습니다.” “주군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무도 지킨 적 없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기침 소리가 울렸다. 라우라는 혹시라도 주군이 각혈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초조하게 침대를 바라보았다. 기침은 몹시 메말랐지만 핏기는 섞여 있지 않았다. 라우라는 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군은 바보다. 정말로 바보다.” “이번 전쟁만 끝나면 안 그래도 얌전히 살 계획입니다. 전쟁도 없이. 정치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조용하고 한적하게……하지만, 아직은 정원 생활을 꿈꾸기에 조금 이르지요. 라우라. 전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군의 승리다. 주군. 공화국군은 패퇴하고 있다.” 라우라가 짐짓 밝은 어조로 떠들었다. 그녀는 주군에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주군의 기운을 차리게 해줄 몇 마디 희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현재 아군이 적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이다. 무니헨의 코앞까지 쫓아가라 명령해두었다. 공화국군은 결코 쉽사리 물러서지 못할 것이야.” “과연. 무니헨까지 추격하는 것입니까.” 침묵이 있었다. 잠시 뒤, 나약하게 떨리는 한 마디가 떨어졌다. 그곳에는 분명히 강철과 같은 의지가 숨어 있었다. “라우라. 곧바로 기세를 몰아 무니헨을 함락시키십시오. 지금이야말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뇌부를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입니다…….”   00477 무엇을 위하여 =========================================================================                        “절호의 기회라니.” 라우라가 당황하여 무심코 반문했다. “주군. 우리가 추격전에서 성과를 거두리라는 사실은 자명하나, 무니헨을 함락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공성장비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공성을 시도하면 아군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다.” “오우거를 이용하면 됩니다.” 단탈리안이 대답을 미리 마련해놓은 것처럼 바로 말했다. “기억나지 않습니까, 라우라. 우리가 제일 처음 벌인, 전쟁다운 전쟁이요. 우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검은 산맥을 건너야만 했지요…….” “…….”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제8차 월맹군. 아직 십 년이 채 흐르지 않았건만 라우라에게는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어수룩했다. 지금은 마왕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라우라도 그땐 일개 부관에 불과했다. 마인들은 인간인 라우라를 우습게 여겨서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라우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당연히 기억한다. 소녀가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저는 선봉대의 참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라우라는 기껏해야 마궁수(馬弓手)의 지위에 머무를 뿐이었지요. 이제는 흐뭇하기까지 하군요. 그래요, 제파르 대장이 우리를 이끌어주었습니다…….” “…….” “그때도 아군에게는 제대로 된 공성장비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준비가 부족했지요. 그런데도 제파르 대장은 보란 듯이 청색 산성의 성문을 깨부수었습니다.” 단탈리안 말이 옳았다. 제8차 월맹군. 평원파는 최대한 신속하게 검은 산맥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선봉대장을 맡은 서열 제16위의 마왕 제파르는, 거추장스러운 공성장비를 동원하는 것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에 제파르는 오우거들을 육탄 병기로 활용했다. 오우거에게 큼직한 공성추를 들쳐메도록 했다. 오우거들은 문자 그대로 몸통째로 성문에 박치기를 가했다. 천 년이 넘도록 인간계를 수호해온 청색 산성은 다섯 번째 오우거의 돌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하고 라우라가 주저했다. “아군에는 오우거가 없다. 전투 초반에 전부 소모해버리지 않았는가.” 흐으,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승리를 이끄는 것이 사령관의 임무라면, 패배를 대비하는 것 또한 사령관의 자세입니다. 라우라. 아군의 후방에는 일흔 마리의 오우거가 매복하고 있습니다.” “뭐……!” 라우라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오우거 칠십 마리를 따로 마련해두었다는 것인가, 주군!” “잘츠부르크를 함락한 날만이 아니라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소환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진군 속도를 늦춘 것도 있지요.” “소녀는 전혀…….” 라우라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감탄사가 나온다기보다 의문사가 입안에 맴돌았다. 어째서인가. 왜 주군은 패배할 경우에, 그리고 오직 패배했을 경우에만 유효한 기책을 준비해두었는가. 엘리자베트 통령도 똑같았다. 겨우 패배했을 때만 써먹을 수 있는 특공대를 미리 준비시켰다. 이번에도 주군은 저 가증스러운 공화국의 통령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라우라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외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라우라는 결국에 공화국 통령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단탈리안이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하고 라우라가 생각했다. 나는 주군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라우라의 심장을 적셨다. 주군에게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것은 나. 주군에게 가장 충실히 휘둘러지는 검 역시 나. 라우라는 그렇게 믿었다. 이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독 엘리자베트가 거론될 때만 라우라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 불안은 지금도 현실로 나타났다. “주군. 일흔 마리의 오우거가 더해졌다면 전투에서 보다 쉽게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리 패배를 대처해야 한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에서 그토록 여유를 부리는 것은 병법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고 피로와 고통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상대가 엘리자베트 아닙니까.” “…….” “저번 전쟁에서도, 이번 전쟁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수를 빤히 내다본 상태에서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도리어 전쟁이 단순해졌지요. 하지만 제가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꾸욱, 하고. 라우라의 가슴이 조였다. “하지만……주군에게는 소녀가 있다. 설령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소녀는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다.” 라우라가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다. 나를 최고라고 말해주지 않았는가, 하고 라우라가 마음속으로 애걸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라우라가 최고라고, 엘리자베트보다 라우라가 더 대단하다고, 단탈리안은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다. 넓은 품으로 라우라를 껴안으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라우라는 오직 단탈리안의 인정에 기대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왜 패배할 경우를 고려했는가. ‘소녀는 반드시 통령에게 승리한다. 주군도……주군도 그렇게 믿어준 것이 아닌가. 분명히 그리 믿는다고 소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는가.’ 라우라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소리에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라우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단탈리안의 손을 꾹 쥐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주군. 굳이 아군이 패배할 경우를 대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저는 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예컨대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를 도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쿨럭, 하고 기침 소리가 또 다시 불길하게 울렸다. “엘리자베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우거 일흔 마리는 그녀에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 이걸로 쐐기를 박습니다.” “…….” 그러니까. ‘주군께서는 내 승리를 믿는 것보다.’ 그것 이상으로. ‘공화국 통령의 유능함을 믿었는가.’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우라는 몇 번이나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입술이 열릴 때마다 약하게 눈가가 자극되었다. 이때 방심해버리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라우라는 병상에 앉은 주군한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들려줘서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라우라는 단탈리안 앞에서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는 데 익숙했다. 주군이 좋아할 수 있는 여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했으니까. “……응. 주군은 역시 대단하다.” 라우라는 밝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 뚜렷하게 밝힌 적은 없었지만, 단탈리안이 사실 현명한 여인에게 몹시 끌린다는 사실을 라우라는 알았다. 단탈리안이 사랑하는 라피스 라줄리가 그러했다. 이걸 눈치 챈 날부터 라우라는 매일 휴식시간이 생길 때마다 각종 학문서적을 읽었다. 단탈리안이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자기 스스로 올곧게 바로서는 인생을 동경하며 또한 그런 여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라우라는 알았다. 단탈리안이 사랑하는 바르바토스가 그러했다. 이걸 알아차린 날부터 라우라는 단탈리안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 애정을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것을 억눌렀다. 현명하고 대범한 여인. 단탈리안의 이상형에 어울리도록 언제나 자신을 깎아내고, 쳐내고, 잘랐다.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나에게 주군은 대단하다. 언제나…….”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더 머물러봤자 자꾸 안 좋은 일만 떠오를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된다, 하고 라우라가 생각했다. 주군은 음울한 여자를 싫어한다. 대놓고 애정을 요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참아야 했다. 주군에게 나는 어디까지나 최고로 남아야 하므로. “주군이 승리의 발판을 준비해주었다. 본인은 어서 군사를 통솔하여 무니헨을 함락시키겠다. 걱정하지 마라. 공화국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의 자랑스러운 수도를 잃어버릴 것이다.” “아아. 믿고 있습니다, 라우라.” 병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는 조금 피곤하군요. 잠깐만 눈을 붙이겠습니다…….” “응. 푹 쉬어라. 눈을 뜨면 이미 소녀가 주군의 명령을 완수하고 있을 것이다.” 라우라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라우라는 그러나 입술의 감촉을 즐길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까봐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불가능했다. 평소와 달리 입맞춤에서 애정을 느끼지 못한 채, 라우라는 서둘러 막사를 뛰쳐나왔다. “아…….” 막사의 출입구에서 나오자마자, 라우라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라우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틈새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아, 아, 하고 라우라가 어떻게든 신음을 죽이기 위해 목소리를 억눌렀다. 라우라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왜 자신은 라피스 언니처럼 태어나지 않았는가. 왜 자신은, 이토록 노력하는데 엘리자베트 통령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지 못하는가. 라우라에게는 단탈리안이 유일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에게는 라우라가 유일하지 않았다. 거기서 라우라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슬픔이 몰려왔다. 이런 마음을 없애려고 라우라는 의도적으로 바르바토스의 애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라우라의 외도에 오히려 기뻐했다. 질투나 독점욕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괴심에 시달리는 것은 다만 라우라뿐이었다. ‘주군은 잔인하다……주군은 너무도 잔인하다…….’ 라우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주군이 옳았고, 슬픔을 느끼는 자신이 틀렸다.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상대방을 지배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주군이 옳았고,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틀렸다. 항상 주군은 올바랐고 그녀, 라우라만이 잘못되었다. 열다섯 살의 소녀가 단탈리안에게 거두어진 그날부터 언제나 그러했다. 라우라는 단 한 번이라도 주군이 자신을 위해서 잘못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 “아……아아…….” 라우라가 손으로 가슴을 쥐어잡았다. 왜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몸이 이토록 아픈지, 라우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눈물로 흐릿해진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라피스 언니가 죽었다면.’ 신음과 신음의 틈새에서 어떤 생각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 생각은 한번에 연결되지 않았다. 몇 번의 울음과 몇 번의 억누름, 수십 번의 절규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생각은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공화국 통령도 죽는다면. 바르바토스도 죽는다면. 주군에게는 나밖에 없는 것인가. 주군에게 나는, 최고일 뿐만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라우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주군은 라피스 라줄리가 죽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파멸할 것이다. 그곳에 더 이상 라우라가 갈망하는 단탈리안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단탈리안의 외양을 갖춘 인형만이, 부스러기와 같은 잔해만이 흐트러지겠지. ‘하지만, 공화국 통령만큼은.’ 라우라가 이빨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적의가 감돌고 있었다. ‘그 망국의 황녀만큼은 죽여도 된다. 그녀를 죽이면 나는 주군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게 된다.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않겠다. 절대로, 아무한테도.’ 라우라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잠시 뒤, 합스부르크 제국군 전군에게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00478 무엇을 위하여 =========================================================================                        * * * “적들의 수급을 베어서 한데로 몰아넣어.” “시체 틈새에 생존자가 있을 것이다. 제대로 찔러서 확인해.” 트레비소 평야. 해상도시 베네치아의 후방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왕군의 부관과 병사들이 이리저리 적당히 뛰어다니며 명령을 수행했다. 사령관인 마르바스가 그들을 어딘지 아련한 눈길로 가늘게 쳐다보았다. 오른편에서 시트리가 다가왔다. “전부 처리했어.” “시트리인가. 수고했다.” “수고는 무슨. 우리 병사들이나 고생하지.” 시트리가 다소 힘이 없는 손길로 투구끈을 풀었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투구를 던지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능숙하게 받아냈다. 군중의 시종들이 다가와서 시트리에게 젖은 수건과 물잔을 대령했다. “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시종이 몸을 닦아주려고 하자 시트리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시종들이 송구하다는 듯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시트리는 단번에 물잔을 비우고, 얼굴을 수건으로 마구 문질렀다. “피해는 어찌 되는가.” “아나톨리아 촌동네 애송이들은 문제가 아니었어. 싸울 줄 모르는 신병이 대부분이던걸. 써는 맛도 없어서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었지. 하긴 이삽만이니 뭐니 떠들 때부터 알아봤어야지. 안 그래?” 시트리가 수건을 뒤로 던졌다. 전쟁터의 모래 먼지가 벗겨지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마르바스는 그녀가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다니던 옛날보다. 지금처럼 한 군데 망가져서 무표정해진 그녀가 더 아름답다고. “문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 애들이었어. 전쟁질하는 방법을 알더라. 브르타뉴에서 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면 결과가 나빴을지도 몰라. 결과적으로 내 병사가 삼천 명이나 상했어.” “적군의 상황은 어떠한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마르바스 아저씨.” 시트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전멸이라는 단어 말고 적한테 다른 걸 허락한 적이 있어?” 그때 군진의 천막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르바스와 시트리가 시선을 돌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한 남자가 병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혀 있었다. 제법 직급이 높은지 화려한 갑옷을 껴입었다. “아나톨리아의 장군인 모양이군.” “정확하게 말하면 총사령관이지.” 시트리가 빈 물잔을 옆으로 뻗었다. 시종이 얼른 다가와서 살얼음이 낀 물을 따라주었다. 시트리는 물잔을 기울이며 지그시 적군의 장군을 바라보았다. 멋들어지게 턱수염이 자라난 장군은 계속해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 “본인이 아나톨리아어는 미처 익히지 못해서 말이다. 뭐라고 떠드는 것인가?” “아저씨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 멍청한 년인 거 그새 잊었나.” “음. 안타깝게도 우리 둘 다 저 남자가 떠드는 말을 이해할 수 없군.” 부관이 도끼를 꺼내들었다. 병사들은 아나톨리아의 장군을 더더욱 강하게 잡았다. 장군이 경악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의 병사를, 그리고 천막 아래서 시원하게 얼음물을 들이키고 있는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그러게.” 시트리가 무심하게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휘익, 하고 도끼가 공기를 갈랐다. 땅바닥에 머리통이 떨어졌다. 아나톨리아 제국의 총사령관이자 재상인 남자는 최후까지 엉망진창으로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병사들이 다음으로 처형할 사람을 끌고 나왔다. 비명이 터지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울렸다. “적장들 죽이는 데 한 세월이 걸리겠네.” “명색이 십오만 대군이었으니 말이다.” 평원에는 수만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마르바스를 위시한 마왕군은 작전대로 베네치아를 포위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은 마왕군을 경계하며 일단 도시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후방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원군이 도착하자, 제국군은 과감하게 협공하기로 결정했다. 이걸 경솔하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물경 13만에 이르렀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공화국군 3만. 도합 16만 대군이 적을 양면에서 공격하게 된 것이었다. 반면에 마왕군은 약 6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베네치아를 둘러싸느라 얇고 기다란 포위망을 형성했다. 병력이 적을뿐더러 두께까지 얄팍했다. 당연하게도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전투 중반까지는 제국군이 유리했다. 마왕군이 제아무리 통상 세 배의 병력차까지 감당할 정도로 강력하다고 해도, 양방향에서 압박해오는 적을 상대하기란 어려웠다. 마왕군은 금세라도 붕괴될 것 같았다.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흑백합의 깃발이 평원 저편에서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칠천 명으로 이루어진 브르타뉴 기사단은 문자 그대로 제국군의 측면을 파쇄했다. 그러자 얌전히 수비 태세로 임전하던 마왕군이 거짓말처럼 공세를 퍼부었다. 전투는 삽시간에 난전으로 바뀌었다. 모든 군세의 진형이 허물어졌다. 전투가 처절한 개싸움이 될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마왕군이었다. 마왕들은 마인들에게 일일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므로.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서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마왕군과 달리 아나톨리아 제국군은 섬세하게 명령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모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시트리가 이끄는 일만 명의 군세가 잔혹했다. 이들은 시트리를 중심으로 뭉쳐 전장을 한바탕 피바다로 만들었다. 살려달라며 항복하는 인간도, 후퇴하려고 등을 보인 인간도, 시트리는 일절 용서하지 않고 사살했다. 거의 광란에 가까운 학살에 인간군은 전의를 잃어버렸다. 온 평원에 마왕군의 뿔나팔이 울려 퍼졌다. 군마의 말발굽과 늑대의 발톱이 십육만 대군의 내장을 짓이겼다. 그중에서 살아남아 베네치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인간은 겨우 오만 명에 불과했다. 단 한 차례의 싸움으로 십만이 죽어나갔다. “아아, 완전히 지쳐버렸어~.” 천막 아래로 가미긴이 걸어왔다. 그녀는 금발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전투 내내 와이번에 올라타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니느라,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굳고 말았다. 가미긴은 시종들이 달라붙어서 몸을 닦아주는 걸 흐뭇하게 즐겼다. “도망치는 놈들한테 전부 추격대 붙였으니까 행여라도 문제는 없을 거야. 뭐, 베네치아로 가버린 애들은 여기서 손쓸 수가 없지만.” “수고했다.” “그럼, 그럼. 엄청나게 수고했지. 어휴, 난 역시 전쟁 체질이 아니야. 그냥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는 게 삶의 낙이라니까.” 잠시 뒤에 바싸고가 들어옴으로써 사령관급 마왕 전원이 모였다. 전투 때문에 그들은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큰일을 끝낸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마왕들도 의자에 앉아서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인간군의 장군들이 계속해서 처형되고 있었다. 네 명의 마왕은 나란히 앉아서 그 풍경을 관람했다. “이제 몇 명 남았는가?” “으응. 대충 백 명만 더 베어버리면 끝났다는데.” “끔찍하군.”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처형수한테 얼른 죽여버리라고 전해라. 이러다 밤을 꼬박 새버리겠어.” “저것도 최대한 빨리 죽이는 거라네. 다섯 명이서 돌아가며 죽이고 있지 않은가.” “거 다섯 명이 한 명씩 잡아서 죽이면 안 되는가?” “자네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품위가 떨어지는군.” 마르바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바싸고에게 말했다. 바싸고가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품위는 무슨. 전쟁에서 예법 따지는 것만큼 우스운 소리지. 단탈리안 그놈은 어떻게 됐나?” “자네에게는 불행한 소식이겠네만, 그쪽도 승전을 거두었다네.” “빌어먹을.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군.” 바싸고가 땅바닥에 묽은 침을 뱉었다. 가미긴이 깔깔 웃었다. “아서라. 단탈리안이 죽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네가 먼저 목 매다는 편이 현명할걸. 이제 걔 누가 막을 건데? 응? 이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말해두지만 난 단탈리안 편이다아?” “이래서 연애를 늦게 하는 연놈이 더 무섭다는 거다.” 바싸고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흘렸다.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를 사귀더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지 않는가. 한심한 것. 옛날에 잠시라도 네가 현명한 여성이라고 생각한 내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다.” “헤에. 우리 현명한 바싸고 전하께서 날 그리 높이 평가했는 줄 미처 몰랐네. 바싸고 전하께서는 무진장 똑똑하시니까 틀림없이 단탈리안한테 꿀리지 않았겠지?” “…….” “하여간 단탈리안도 신기해. 브르타뉴 애들도 여기로 보내고, 우리도 전부 여기로 보냈는데, 어찌저찌 혼자서 또 이겨버리네.” “흥.” 바싸고가 썩은 얼굴로 포도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나른한 공기가 흘렀다. 기이한 풍경이었다. 사방에 수천수만 구의 시체가 대지를 뒤덮었으며, 눈앞에서도 처형식이 끊임없이 이어졌건만, 학살의 주범인 마왕들 주변에는 권태로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살아남을 사람만 살아남았군.” 바싸고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괜히 딴짓을 꾸밀 마왕은 없지 않느냐.” “으응. 아마도?” 가미긴이 하품을 했다. “확실히 명줄이 길다 싶은 사람들끼리만 남았어.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난 파이몬이나 바르바토스나 언젠가 제 명에 못 살겠다 싶었다니까.” “…….” 시트리가 가미긴을 슬쩍 노려보았다. 가미긴이 헤헤 웃으면서 양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미안, 미안.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나 파이몬은 색깔이 강하잖아. 짧고 굵게 살면 살았지, 나처럼 가늘고 길게 살 운명은 아니었다. 뭐, 그런 얘기야~.” “…….” 시트리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우리한테 싸움 걸어올 나라도 없으니 한동안 평화로울 거잖아. 여기까지 살아남은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내자구. 쓸데없이 계략이니 모략이니 뒤에서 콩을 까면 어디의 무서운 마왕님께서 화내실걸.” “걱정하지 마라. 이제는 싸울 기력도 없어.” 바싸고가 한숨을 쉬었다. “중립파는 어떠냐. 마왕군을 집권할 생각이 있는가?” “본인은 이대로 만족한다. 사실 본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남자라네.” “아무렴 그러시겠나.” 전쟁은 끝났다. 아직 정리해야 할 피라미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전쟁이라기보다 처리작업이라 표현해야 올바르리라. 제국의 정점에 위치한 네 마왕들은 처형식을 지켜보며, 이제부터 찾아올 평화를 예감하고 있었다. 평화. ‘결국 평화를 위해서 그 많은 피를 흘렸는가?’ 바싸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군. 도대체 마왕군에 뭐가 남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곧이어 바싸고는 생각을 중단했다.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바알도, 아가레스도,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없어져서 시시하게 되었지만 이런 마왕군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내 한 목숨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삶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야.’ 부관이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 후욱! 도끼가 공중에 핏물을 흩뿌리며 또 다시 한 명의 머리를 절단하였다. 잘린 머리는 데구르르 굴렀다. 멈출 듯 멈추지 않을 듯 굴러가던 머리통은 어설프게 땅바닥을 한 바퀴 돌더니, 이윽고 힘이 떨어졌는지 뚝 멈추었다. 거기에 차가운 정적이 감돌았다. 잘린 머리는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00479 무엇을 위하여 =========================================================================                        * * * “……끈질기게 추격해오는군.”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도 무니헨, 동쪽 성벽. 엘리자베트가 전방을 내다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이미 예상한 바였으나 적군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다. 조금쯤 멈추어서 시체를 약탈해도 괜찮을 텐데, 무엇에 쫓기듯이 정신없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르츠가 투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설마 이 참에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심보는 아니겠죠?” “글쎄. 적군에게는 공성장비가 없다. 이 이상 접근해봤자 소득이 없을 터이다만…….” 흐음, 하고 엘리자베트가 침음을 흘렸다. 대다수의 병사는 무사히 성안으로 도망쳤다. 현재 각 부대에서 중대장들이 병사들을 서둘러 다독이고 있었다. 정비가 완료된 부대들은 성벽으로 올라와서, 만에 하나 공성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대비하였다. “저거 보십시오, 각하. 저놈들도 아예 재편성을 하고 있는데요.” 쿠르츠가 전방의 평야를 가리켰다. 무니헨의 성벽 아래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다. 해자 바깥에는 견고한 목책이 대여섯 겹으로 세워졌다. 원래부터 드넓은 평야에 자리 잡았으므로 난공불락이라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었지만, 적어도 쉽사리 함락할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데 평야 저편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연대기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병사들을 유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열이 깔끔하게 늘어섰다. “아무리 봐도 숙영지를 세우려는 건 아닙니다.” “으음. 역시 바로 공격하려는 것인가.” “소인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의문이 깊어졌다. 무니헨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에 투석기도 없이 덤벼드는 것은 무모했다. 마법사 전력도 엇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걸어본들 적군의 피해만 심대해질 터. 엘리자베트는 상대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전군에 농성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라. 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숨겨둔 비책이 있겠지.” “예, 각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부관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각자 자군의 전열을 정비했다. 오늘 다시 한번 치열한 싸움이 예약되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두 군대는 평소보다 호화롭게 밥을 먹었다. 엘리자베트도 간부들과 함께 끼니를 떼우고 있었다. 이때 정보부의 요원이 다가와서 쿠르츠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쿠르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전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칼마르어로 말했다. “나쁜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정보부의 지하에 수감되어 있던 바르바토스가 탈주했다고 합니다.” “…….” 수프를 떠먹던 엘리자베트의 은수저가 뚝 멈추었다. “그, 데이지인가 하는 여자애가 데리고 다니던 시종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금발의 남자애 말인가.” “녀석이 의외로 검을 깨나 놀리는 놈이었습니다. 정보부를 지키던 검주 한 명이 죽었고, 한 명이 크게 부상을 당했답니다. 지금 정보부원들이 최선을 다해서 쫓고 있습니다만.” 엘리자베트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녀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보고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이 달리 없지. 슐라이어마허 정보부장. 바르바토스는 이미 아국의 손에서 벗어났다. 본인이 그리 판단해도 좋겠는가?”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쿠르츠가 한숨을 쉬었다. “본래 정보부에 붙어 있던 검주들도 거의 전부 전쟁터에 나섰습니다. 게다가 단탈리안의 양녀가 사라졌으니 더 이상 심각하게 주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죠. 설마 시종까지 검주 이상가는 실력자일 거라고는……소인의 실책입니다요.” “어디로 도망쳤는가?” “경비가 제일 적은 서문으로 도주했습니다.” 엘리자베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우리의 경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공성전을 벌일 것처럼 위장했나……감쪽같이 속아넘었군.” “그럼 저건 역시 허장성세일까요, 각하?” “아마도.”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이게 사전에 계획된 탈주극이라는 점이다. 단탈리안의 양녀가 사라져서 우리가 안심하자마자 바르바토스가 탈출했다. 허면, 애당초 바르바토스를 들고 우리한테 투항한 것 자체가 거짓일 공산이 높다.” “…….” “이번 전쟁은 엄밀히 말해서 바르바토스의 존재에 의해 촉발했어. 전쟁의 원인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니. 무척이나 피곤해지는군.” 쿠르츠는 그건 아닐 거라며 반박하고 싶었다. 데이지라는 소녀를 정보부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철저하게 심문했던가. 만약 소녀의 마음속에 다른 뜻이 있었다면 반드시 심문 과정에서 탄로났으리라. 그렇지만 엘리자베트 통령이 너무도 피곤해보여서, 또 쿠르츠 본인이 잘못한 것도 커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트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최악의 사태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악의 사태라니요? 바르바토스가 단탈리안에게 넘어가는 경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쿠르츠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 경우를 떠올리니 머리가 아파왔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이대로 무사히 제국에 돌아가서 ‘나는 그동안 공화국에 붙잡혀 있었다’라고 증언하기라도 하면 공화국의 처지가 매우 난감해졌다. 아마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공화국을 맹비난하겠지. 공화국 외교상서는 자신의 미래에 절망한 나머지 정말로 목을 매달아버릴지 몰랐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아니. 그 정반대다.” “예?” “바르바토스가 이대로 단탈리안 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 당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사태에 해당한다.” 쿠르츠가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잘되는 일 아닙니까요? 그럼 우리가 바르바토스를 납치했다는 증거도 함께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어 보입니다만.” “자네는 천생이 정보부 사람이라서 그런지 생각하는 각도가 고정되어 있군.”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제국에서는 바르바토스가 납치되었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 그런데 제국군이 승전을 거둔 직후, 갑자기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이 허물어지는 것일세. 열국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 쿠르츠가 숨을 죽였다. “제기랄. 우리가 바르바토스를 없애버렸다고 생각하겠군요!” “아아. 납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화국에서 교살한 것 아니냐……십중팔구 그런 의심이 생겨날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묽은 포도주를 들이마셨다. 식초에 가까운 포도주의 신맛이 입안을 강하게 자극했다.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머릿속이 조금 더 투명해졌다. “반대로 만약 바르바토스가 단탈리안에게 무사히 넘어간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해진다. 제국이 자작으로 납치극을 연출한 것 아닌가. 어떻게 납치당했다는 바르바토스가 멀쩡하게 다시 나타났는가. 열국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법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으리라. 엘리자베트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는 것은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는 점일까. 아니, 단탈리안이 소문대로 바르바토스를 사랑하고 있기를 바라야겠군. 정치적인 이득을 외면해서라도 바르바토스의 목숨을 살려두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엘리자베트는 다만 단탈리안이 정치적 이득과 애인의 생명, 둘 중 하나가 걸렸을 때 후자를 선택하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엘리자베트가 단탈리안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인간인 내가 마왕의 안녕을 빌게 될 줄이야.’ 엘리자베트가 짧게 자조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안에 전투가 재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천천히 식사하게.” “예, 각하.” * * * 루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후우, 후욱……흐아아.” 데이지가 전쟁터로 뛰쳐나간 직후, 루크는 몰래 정보부에 잠입하여 바르바토스를 탈취했다. 이때도 경계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아서 두 명의 검주가 정보부를 지키고 있긴 했다. 루크는 능숙하게 검주들을 처리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사지가 잘린 채 약물에 절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루크는 바르바토스를 단단히 등에 짊어지고 정보부를 빠져나갔다. 그 순간, 루크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심장 부근이 썰렁해지는 것을 느꼈다. ‘데이지가 죽었구나!’ 루크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데이지. 아아, 데이지!’ 루크는 본능적으로 노예각인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자신은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루크는 결코 자유가 기쁘지 않았다. 눈가에서 눈물이 차올라, 루크의 새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인을 잃었다. 혈육을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유일무이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루크가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멈추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데이지는 죽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데이지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크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움직여야 해.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어서.” 루크가 바르바토스의 몸뚱어리를 들쳐메고 걸어나갔다. ‘작전대로 데이지가 대부님한테 죽었어. 이제 대부님은 바르바토스를 순전히 데이지의 계략에 의해 피해자로 전락한 사람으로 볼 거야.’ 그는 경비병의 시야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철저히 건물의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뛰어 건너면서 이동했다. 성벽의 경비병은 루크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부님은 바르바토스를 죽이지 못해. 그래. 바르바토스와 대부님이 나란히 희생자로 전락해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결말이 완성돼. 그걸로 됐어.’ 경비병이 잠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루크가 재빨리 성벽을 타고 넘었다. 완전히 조용하게 성벽을 넘을 수는 없었는지 경비병이 침입자를 눈치 챘다. 경비병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빼들었지만, 이미 루크는 성벽을 다 넘고 땅바닥을 향해 풀쩍 뛰었다. ‘응. 데이지가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으니까……나도 만족해.’ 한 발자국 뒤늦게 경비병들이 루크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성벽 위에서 화살들이 날아갔다. 그것들은 루크가 지나간 자리에만 허무하게 박혔다. 루크가 후우, 후우, 하고 숨을 쉬며 뛰어갔다. ‘왜냐하면, 나는 데이지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으니까.’ 그것이 루크가 한 맹세였다. 자신이 무식하고 무지한 탓에 데이지가 5년 내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전혀 몰랐다. 루크는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그 죄값을 속죄하고자 했다. 설령 단탈리안이 자신을 보고 진노하여, 데이지를 죽였듯이 꼭 그처럼 자신을 죽일지라도, 루크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우리는 만족할 수 있어.’ 얼마나 뛰었을까. 루크는 무니헨에서 한참 멀리까지 뛰어온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반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났겠지 싶어서 루크가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루크가 순간전이 마법서에 마력을 흘러보냈다. 성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빛무리가 루크를 감쌌다. ‘그렇지, 데이지?’ 잠시 뒤. 루크는 무니헨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이되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이었다. 루크가 주위를 조심스레 살피며 숲을 걸어나오자, 저 너머,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깃발이 펄럭거리는 군진 막사들이 보였다. 저곳에 대부님께서 머무르고 계시리라. 루크가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00480 무엇을 위하여 =========================================================================                        후방에서 루크를 발견한 사람은 단탈리안의 친위대였다. 루크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정보부에서 탈주하면서 베어넘긴 검주와 요원들의 핏물이었다. 숲 속에서 걸어나오자 루크는 단박에 경비병의 눈에 띄었다. 경비병은 현명하게도 루크한테 “웬 놈이냐” 내지는 “멈춰라” 하고 겁박을 지르지 않았다. ─ 휘이이익! 경비병은 대신에 피리를 꺼내서 호각을 불었다. 한 청년이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나타났다. 그것도 제국의 총사령부가 가까이 위치한 후방으로. 웬 놈이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으며, 구태여 멈출 것을 부탁할 이유도 없었다. 동료의 호각을 들은 병사들이 재빨리 모여들었다. 서른 명의 난쟁이 병사들이 순식간에 집합했다. “…….” 루크가 눈을 찌뿌둥하게 찡그리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창대를 쥐어잡은 각도, 창칼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정도, 쓸데없이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과 얼굴 표정에 두려움이 없는 것. 루크는 한눈에 병사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정예병이네.’ 어떻게 할까, 하고 루크가 생각했다. ‘죽이려면 전부 죽이고 갈 수 있기는 한데.’ 루크는 되도록 자신이 직접 단탈리안을 만나고자 했다. 차마 단탈리안에게 ‘데이지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나요’ 하고 물어볼 염치는 없었다. 대부님이 친절하게 말해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만약 데이지의 유언을 전해들을 수 없다면, 그녀를 죽인 단탈리안의 얼굴 표정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 걸 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루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을 직접 보지도 않은 채 누군가에게 사로잡혀 문답무용으로 사형당하는 것만큼은 싫었다. 전력을 다해 거부할 생각이었다. “으으음. 저기.” 루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친위대가 더욱 매섭게 창을 들이밀었다. “아.” 루크는 조금 곤란했다. 자신에게는 말재주가 부족했다. 대부님이나 데이지는 달변가 중의 단별가였는데, 왜인지 자신은 거의 눌변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 데이지가 있었으면 교묘하고 화려하게 병사들을 설득하여 대부님이 있는 곳까지 편안하게 갈지 모르겠다고, 루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마법과 같은 일은 못할 거야.’ 루크가 울적하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제가 여러분이랑 그, 대화 같은 걸 할 수 있을까요?” “무슨 개수작이야.” “그러니까 제가 누구이고, 왜 여기 왔는지, 여러분한테 설명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면 고맙겠습니다만…….” 난쟁이 친위병들이 잠깐 서로를 쳐다보았다. 죄다 얼굴들이 석상처럼 무뚝뚝했다. 그들이 눈빛으로 얘기했다. 그 대화 내용은 눈앞의 인간종 청년이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의논하는 것이었으며,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고 중론이 모였다. “말해봐.” “감사합니다. 저기, 저는 합스부르크의 귀족 출신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공화국이 멸망할 것 같아서 제국에 망명하려고 왔습니다.” “귀족?” 난쟁이 병사가 미간을 좁혔다. 자고로 용병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귀족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네를 고용해주는 귀족 어르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탈탈 털어먹을 사냥감이었다. 병사들은 머릿속에서 눈앞의 청년을 총사령부로 끌고 가는 것이 이득일지, 아니면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이득일지 곰곰이 따졌다. “거 얼굴이 잘생긴 게 귀태가 있기는 있구만. 급수가 어떻게 됩디까?” “네?” “급수요, 급수.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나. 핏줄만 내려받고 흙 파먹는 양반도 귀족이고, 저기 궁전에서 으리으리하게 돌아다니는 양반도 귀족인데. 그쪽이 어느 정도 귀족이신 줄 알고 우리가 대접해드리겠소?” “아…….” 루크가 볼을 긁적거렸다. 마치 꼭 처음으로 세상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용병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눈초리나 그들의 어투, 모든 것이 낯설었다. 루크는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단탈리안의 그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살았는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일단, 공작가의 아들이긴 한데요.” “공작?” 난쟁이 병사의 얼굴이 조금 더 엄격해졌다. “그거 직급이 가장 높네요?” “아무래도 왕족을 제외하면 그렇겠죠?” “사생아라든지 삼남이나 사남이라든지……뭐 그런 건 아닙디까? 혹시나 해서.” 루크가 고민에 잠겼다. 커스토스 공작가의 가주는 단탈리안이었고 후계자는 명백하게 장녀인 데이지였다. 데이지가 죽은 게 확실한 지금, 커스토스 공작가의 후계라고 할 만한 사람은 반쯤 양아들로 취급받는 루크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요. 아마 제가 후계자일걸요.” “사령부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난쟁이 병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크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한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런데 여전히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루크를 향해 창날을 겨누고 있었다. 루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대표로 나선 한 명의 병사가 살갑게 웃었다. “그래도 도련님이 간자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무기는 내려줍시사 부탁드립니다.” “아, 예.” 루크가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검집에 집어넣어 병사한테 건네주었다. 병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몸안에 위험한 흉기나 뭐 그런 비스무리한 물건을 갖고 계십니까?” “네. 조금.” “그것도 곤란하니까 죄송하지만 상의랑 하의를 벗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체로 끌고 가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잠깐 벗으셨다가 다시 입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루크가 순순히 협조했다. 루크는 끈을 풀어 조심스럽게 바르바토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온통 핏자국으로 더럽혀진 집사복을, 마왕성에서 단탈리안의 집사로 일할 때 받은 제복을 벗었다. 루크의 몸은 겉모습과 다르게 섬세한 잔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야아.” 병사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탄사를 흘렸다. 베테랑 용병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만큼 제대로 만들어진 몸이었다. “도련님이 검기를 쓸 줄 아나보네.” “아. 그게 보여요?” “근육이 딱 검기 쓰는 무사용인걸. 부럽습니다. 우리 같은 애들은 몸을 불려야 싸움을 해도 제대로 하거든요. 직급도 높으시고, 얼굴도 훤칠하게 생기셨고, 게다가 몸까지 좋아. 여자들 겁나게 따먹으셨겠네.” “…….” 루크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병사 한 명이 동료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병사는 루크가 내려놓은 바르바토스를 손가락질했다. 바르바토스 역시 몸 전체에 핏물이 묻었지만, 적어도 사람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팔다리 잘린 사람 아냐?” “망명 귀족이 사지병신은 왜 들고 다녀.” 점차 많은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수군거림을 전해들은 대표 병사가 루크에게 말했다. “아. 그런데 도련님, 저어기 내려놓으신 물건이라고 할까. 사람이라고 할까. 저건 뭡니까?” “마왕 바르바토스입니다.” “예?” 루크가 상의를 전부 벗었다. “바르바토스요. 설마 모릅니까? 대부님의 애인인데.” 루크의 푸른색 눈동자가 병사를 바라보았다. 눈이 호의적으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는 루크의 눈동자 자체는 결코 웃지 않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거기에는 우물처럼 깊고 새카만 눈동자만이 있었다. “대부라니…….” 난쟁이 병사가 움찔했다. 그 눈동자를 정면에서 직시하니 문득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저건 위험했다. 위험한 놈의 눈초리였다. 가끔 전쟁터에서 자포자기한 살인마가 저런 눈빛을 품곤 했다. 난쟁이 병사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동료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병사가 발뒤꿈치를 움직이자마자, 루크가 병사에게 질문했다. “병사. 당신의 직급이 어떻게 됩니까.” “……친위대 하사입니다.” “마침 잘 됐군요.” 루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들을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트렸다. “저는 단탈리안 전하의 양아들. 커스토스 공작가의 이름을 빌릴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귀군의 군주(軍主)이신 단탈리안 전하께 루크가 찾아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당신의 연인인 바르바토스까지 함께 도착했다고.” 병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알겠습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동료 병사들에게 귓속말로 뭐라 속삭인 다음, 헐레벌떡 군진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뒤에 병사가 백 명 가량의 근위병과 함께 돌아왔다. 근위병들은 조용히 항오를 맞추어서 루크를 포위했다. 물 샐 틈도 없이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그동안 루크는 상의를 발가벗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병사가 다가왔다. “가시지요, 도련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르바토스를 등에 짊어지고 일어섰다. 루크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백 명의 근위병도 함께 움직였다. 병사들의 경계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삼엄해졌다. 백 명이 백오십 명으로, 백오십 명이 이벽 명으로 불어났다. 그렇지만 루크는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정말 대부님한테로 가고 있구나.’ 경계가 엄격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이 중요한 장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였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루크는 무사히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사령부 군진에 당도했다. 막사들이 끝없이 줄지어 펼쳐졌다. 제국을 뜻하는 검은 독수리의 깃발이 펄럭거렸다. 루크는 보병과 궁병, 심지어 기병들의 포위를 받으며 군진의 중앙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련님, 여기에 무릎을 꿇어주십시오.” 가장 화려한 막사가 루크에게 보였다. 루크는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단지 그 전에 바르바토스를 끈에서 풀어 자신의 옆에 부드럽게 눕혔다. 과다한 약물에 의해 바르바토스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루크가 이마를 땅바닥에 갖다 대었다. 그야말로 죄인의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루크의 머리 위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십시오, 집사장.” “……로드브로크 양.” 루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서 있었다. 시녀복을 입은 금발의 소녀는 여느 때처럼 표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에 불만스러운 것처럼, 혹은 슬픈 것처럼 입가가 굳었다. 붉은색 눈동자는 차갑게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전하께서는 지금 의식을 잃고 계십니다. 당신의 심문은 제가 담당합니다.” “의식……대, 대부님께서 변고를 당하신 건가요?” “시녀장을 처단하실 때 다소 무리를 하셨습니다.” 처단. 한 사람의 죽음을 의미하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한 울림에 루크가 전율했다. 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루크는 자기가 죄인임을,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눈물을 흘려도 될 처지가 아님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대부님께서는……지장이 없으신 거지요……?” “당신께 직접 전하의 용태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당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하겠습니다.” 루크가 쿵, 하고 이마를 아래에 내리박았다. “말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겠습니다. 어떤 처벌이 내려져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 하지만 마지막으로 대부님을 뵙게 해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로드브로크 양, 제발…….” “…….” 이바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바르의 시선은 냉철한 의지로 가라앉아 있었다. “좋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하문하지요. 루크,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 당신에게 마왕 바르바토스의 납치를 의뢰한 것이 맞습니까?”   00481 무엇을 위하여 =========================================================================                        “공화국의 의뢰…….” 루크가 멍하게 중얼거였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자신들한테 납치를 의뢰했다니. 그런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공화국에서 어떤 수작을 부렸더라도 데이지와 루크를 포섭하기란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에 대한 두 사람의 애착은 진심이었다. “로, 로드브로크 님. 데이지는…….” “제 질문에는 예, 아니오, 두 가지 종류로 대답해주십시오. 다시 하문하겠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 당신과 데이지 폰 커스토스에게 납치를 의뢰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루크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메모리아 마법이 발동되고 있으리라. 루크도 가까스로 사태를 파악했다. 자신의 거짓 증언을 수집함으로써 마왕군은 훗날 벌어질 명분 싸움에서 승리하려는 것이었다. 이바르의 단호한 눈빛과 마주보노라니, 정치적 식견이 한없이 부족한 루크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영원히 사실이 정해져버려.’ 루크가 고개를 숙였다. ‘대부님에 대한 데이지의 마음이. 헌신이. 전부 없었던 게 돼. 공식적으로,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천민을 양녀로 거둬준 아버지의 믿음을 간악무도하게도 배신한 자, 데이지. 그 배신을 증언한 자, 루크. 이 구도의 잔인성에 루크는 몸이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데이지에게 단탈리안은 모든 것이었다. 상대방은 지금 데이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다름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으며 또한 그녀의 혈육이었던 루크에게 요구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답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 루크는 목이 메여서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식도가 부어올라서 목구멍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 같았다. 호흡마저 가팔라졌다. 루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속죄란 이런 것이었는가.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 생각하는 것마저 스스로 배신해야 하는가. “맞습니다…….” 루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너무나 나약한 소리라서, 루크는 다시 한 번 뚜렷하게 발음해야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위협적인 침묵이 자신에게 그걸 말없이 요청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저와 데이지에게 의뢰했습니다……커스토스 영지에는 공화국의 첩자가 많았습니다. 제가 마을을 돌아다닐 때 몰래 접근해와서.” “공화국의 간자가 당신에게 접근해서.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마왕군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마왕을, 한 명 납치해달라고.” 주위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이 수군거림에는 명백히 적의가 넘실거렸다. 인간종과 내통하는 것은 마인에게 있어 크나큰 수치였다. 애당초 배신자란 시대와 직업을 막론하고 가장 경멸받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걸 받아들였습니까?” “예.”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당신들을 양녀와 대자로 거두어주셨습니다. 그 전에 당신들은 프랑크의 변방, 아무것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화전민에 불과했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막힘없이 루크를 질책했다. 마왕성에서 청소나 잡일을 담당하던 일개 시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일찍이 단신으로 마계 제일의 상단을 세우고, 한 도시의 지배자가 된 흡혈귀가 그곳에 서 있었다. “들개조차 자신에게 한끼 밥을 내려준 주인에게 은의를 느끼거늘, 하물며 당신들은 단탈리안 전하에 의해 천민에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일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왜 전하를 배신하고 통령에게 붙었습니까.” “왜냐하면…….” 루크가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루크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데이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인지 알아차렸다.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영웅이요?” “예. 마왕을 처단하고 인류를 구원해내는 영웅이……비록 비천한 화전민으로 태어났지만, 저도 제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님에게 실제로 처단당해야 마땅할 죄목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이바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공명심입니까.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고작 그런 욕구를 위해서 자신과 여동생의 삶을 구원해준 은인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입니까.” “처음에는……저도 처음에는 배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공상에 불과했어요. 가끔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르는 상상……누구라도 두세 개쯤은 마음속에 품고 다닐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거기에 공화국이 기회를 주었습니다.” 어리석은 배신자를 연기하자. 루크는 도저히 여동생처럼 현명해질 자신이 없었다. 하다못해 현명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를 연기할 수는 있었다. 자신만큼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 있는가. 루크가 알기로 그는 세상에서 제일 우둔했으며―――그렇기에 어리석음의 연기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화국이 기회를 주다니요?” “명분 따위는 자신들이 만들어주겠다. 당신들은 그저 계기를 마련해주면 된다고. 얼마든지 영웅으로 치장해줄 테니, 어느 마왕 하나만 납치해오라고.” “비열하고 사악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이빨을 으득 물어뜯었다. 도저히 연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표정이고 어조였다. 이에 호응하듯, 친위대 병사들이 분개하며 큰소리를 내질렀다. 공기가 들떴다. 사람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가운데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심문을 이어나갔다. “고작 그런 이유로 공화국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까?” “제 여동생은……데이지는 반대했습니다. 너무 위험하다고,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고. 하지만 여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저한테 약했어요. 제가 밀어붙이면 억지로라도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여동생의 그런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잠시. 서릿발과 같이 매섭게 기세를 몰아치던 이바르가 아주 잠시 멈칫했다.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아니라 당신이 주범이라는 말입니까.” “예. 애당초 제 여동생은 주로 마왕성에만 머무릅니다.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만 영지에 모습을 드러냈지요. 첩보원들이 접근하기에 여동생은 별로 좋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영지에 자주 돌아다녔으니 포섭하기 보다 수월했겠죠…….” 루크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루크의 얼굴에는 간절한 애원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신이 모든 오욕을 뒤집어쓰겠다. 여동생의 명예만큼은 지키게 해달라. 심문에서 무엇을 질문해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대답해드릴 테니 이 소원만은 지켜달라. 그것이 어리석은 오라비가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헌신이므로.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어금니에 입술이 찢어졌다. 비릿한 피냄새가 혓바닥으로 번졌다. 그녀는 혼자서 심문을 주관하고 있었다. 단탈리안에게 대본을 지시받았지만, 이제 와서 심문을 멈추고 단탈리안에게 달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신의 재량만으로 지금 루크가 고백한 발언을 처리해야 했다. ‘단탈리안 님.’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소녀, 이바르 로드브로크. 처음으로 단탈리안 님께 독단을 저지르겠습니다.’ 금발의 흡혈귀가 다시 차가운 눈초리를 지었다. “이기적인 공명심으로 일생의 은인을 배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혈육까지 말려들게 하다니. 악독한 배신자여. 당신에게 입이 있다면 어디 변명해보십시오.” “…….” 루크는 자신의 이마를 이바르가 서 있는 방향으로 내렸다. 루크가 몇 번이고 이마를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흙먼지가 얼굴 전체를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계속하여 이마로 밑바닥을 쳤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누, 눈이 멀었습니다. 영웅이라는 이름에.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보, 보십시오. 저는 바르바토스를 다시 데려왔습니다. 제 죄를 용서받기 위해……무, 물론 대죄입니다.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성하고 있습니다……모, 목숨. 예. 목숨만 살려주세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동생의 명예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더러움을 제가 오롯하게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크는 다만 그런 마음으로 이마를 내리쳤고, 이바르 역시 어떠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크가 내뱉는 말은 모두 그가 진실로 나타내는 마음과 반대되었다. 루크가 흘리는 눈물 역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이렇게 죽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팔을 자르겠습니다. 다, 다리도 자르겠습니다. 앞으로 평생 병신이 되어서 살겠습니다.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루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여동생은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무고한 혈육이 희생당했습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지요.”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그녀의 본심이 아닌 단어들을 내뱉었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죽어나간 무수한 병사들. 인민들. 그 모든 생명이 당신의 보잘것없는 공명심으로 인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입니까.” “죄송합니다……하, 하지만 여기 바르바토스가 있습니다.” 루크가 옆자리에 뉘인 바르바토스를 가리켰다. “제가 아니었다면 바르바토스는 죽었을 것입니다! 공화국의 통령은 무서운 여자입니다. 바르바토스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용서했을 리 없습니다. 아,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바르바토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으면 이번 전쟁의 원흉이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았을 것…….” “하.” 이바르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공화국은 패배했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당신 또한 처리되었겠지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예 사라지는 편이 좋으니 말입니다. 배신자여. 당신은 그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이 숙청당할 것 같았기에 도망쳤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후회해서 용서를 빌고자…….” “끝까지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하지 않는군요.” 이바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주군이신 단탈리안 전하를 대신하여 명령합니다. 루크. 제 발에 입을 맞추십시오.” “어, 얼마든지! 얼마든지 사죄하겠습니다!” 루크가 개처럼 달려들어 이바르의 신발에 입술을 맞추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루크의 모든 행동은 메모리아로 저장되고 있었다. “일어서십시오.” “예, 예에.” 루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바르가 단검을 휘둘렀다. 칼날은 정확히 루크의 목 정중앙을 일직선으로 갈랐다. 단검이 살을 파고 지나간 자리에서 검붉은 피분수가 솟구쳤다. 루크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지만, 피분수는 손바닥이 미처 가리지 못한 틈을 통해서 분출되었다. “……, …….” 루크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이미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했다. 핏물이 식도를 물들였다. 루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눈앞이 하얘졌다. 이바르가 그런 루크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선언했다. “화전민의 아들 루크. 그대는 사사로운 이기심에 사로잡혀 은인을 배신하였으며, 혈육을, 더 나아가 대륙의 무고한 인민을 쓸데없는 피바람에 몰아세웠습니다. 그 죄값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사형입니다.” “…….” “부디 영원히 잠들기를.”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루크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이윽고 쓰러졌다.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목이 너무도 아팠다. 피가 새어나가는 감각이, 생명이 사그라드는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루크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찾아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한 것일까. 나는 제대로 마지막까지 잘 해냈을까. ‘데이지.’ 의식이 까마득하게 작아졌다. 그 공간은 지나치게 작아 오로지 한 마디의 말을 남겨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자리에 무엇을 남겨두어야 하는지 자신이 결정해야 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따라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한 마디를. 루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데이지.’ 자그마한 소리. 그것이 루크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수천천사// 굳이 첫코가 아니어도 순위권에는 항상 드셨잖아요. HAHA. CurtisAxel// 얍얍. NineBreaker// 마지막 결론이 이상합니다!?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사실 자신의 애정이 머무를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그토록 많은 여자를 찾아 다닌 것이지만요. halem// 예, 루크가 갔습니다. 으악으아악// 네에에에...? 한뫼사람// ;ㅅ; TheDaybreak// 감사합니다. 『∑zero™』// 예, 저도 거의 다 왔다고 느낍니다. 물고기인간// 사실 지금 상황에서 별로 안 중요하니 말입니다.   00482 무엇을 위하여 =========================================================================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시체를 내려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이바르는 감정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자신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수없이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감상에 잠길 시간 따위는 불필요했다. “목을 잘라 군진에 효수하십시오. 보존마법을 거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제도(帝都)에 개선할 때 이 배신자의 머리가 제일 앞줄에 세워질 것입니다.” “예.” 하사관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바르의 심문은 친위대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심문은 요점만을 정확히 짚었으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이바르 스스로 배신자를 죽였다는 것 또한 가산점이었다. 모름지기 용병들은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경시했다. 이런 점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드브로크 님. 바르바토스 전하는…….” “무엄하군요. 전하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녀는 대역죄를 범했습니다.” 이바르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 서슬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호칭에 주의하십시오.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 전하께서 집행하신 법정의 판결입니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께서는 죄인을 안으로 들이라 하명하셨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귀관들은 혹시라도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이곳에 대기하십시오.” “예.” 이바르는 사지가 잘린 바르바토스의 몸뚱어리를 두 손으로 가지런하게 들었다. 친위대가 깍뜻하게 허리를 숙인 가운데,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갔다. 각종 보호마법이 둘러쳐진 막사에 들어서자 별안간 사방이 적막해졌다. “…….” 이바르가 바르바토스를 의자에 앉혔다. 이바르는 막사 한켠에 마련된 물양동이를 들고 와서 바르바토스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았는데, 그건 경애하는 주군의 애인에 대한 예의였다. 이바르는 주군이 실제로 바르바토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뭘 위해서?’ 수건이 바르바토스의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럴수록 하얀 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이바르가 수건을 물양동이에 적시자, 샛붉은 물감과 같은 것이 천천히 물에 퍼졌다. ‘이 세상에서 모든 마왕을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이제 나에게는 단탈리안 님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나를 버렸는데, 다시 내가 나에게 찾아와야 한다는 말인가.’ 이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문득 한없는 고독을 느꼈다. 본래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당분간 잊고 살았던 바로 그 고독감이었다. 망망대해에 자신만이 내던져 있었으며, 언젠가 육지에 도착하리라는 희망도, 하다못해 자신이 조타하고 있는 배가 침몰하리라는 희망조차 없었다. “……으응.” 바르바토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바르가 손을 멈추고 의자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잠시 뒤, 졸리운 듯 먹먹한 눈동자로 바르바토스가 앞을 바라보았다. 약기운 탓인지 눈매에 힘이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눈가를 찌푸리고 다시 피기를 반복했다. “썅…….”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욕지거리를 흘렸다. 머릿속이 어지럽다는 것 자체가 바르바토스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신음을 내뱉었는데, 자기가 흘린 욕지거리 때문에 두개골이 온통 진동한 것이었다. “이러다 완전 병신이 다 되겠네, 시발…….” 머리가 욱씬욱씬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뇌를 직접 주물럭거리는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극심한 두통을 참아내며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여기까지 해내는 데만 해도 십 분이 걸렸다. “바르바토스 전하를 뵈옵니다.” 이바르가 치맛자락을 양옆으로 붙잡고 허리를 숙였다. 바르바토스를 배려해서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더욱 더 구겨졌다. “넌 또 어디서 기어나온 년이야.” “소녀,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라 하옵니다. 존귀하신 바르바토스 전하를 영접하게 되어 일신의 영광입니다.” “아, 그 흡혈귀?”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두통이 또 격해졌다. 그녀는 대체 얼마나 많은 물약이 자기 몸안에 흘러다니는 것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마 지금 자기가 피를 흘려서 누군가에게 먹이면 그 사람은 하루종일 헤롱거릴 게 분명했다. “시부랄.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 넌 뭐냐. 너도 그거냐? 미친 년이야?”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공화국의 정보부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군진, 단탈리안 전하의 개인 막사입니다.” “…….” 이바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바르바토스는 거의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그 증거로, 고통에 가득 차 있던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그런가. 단탈리안이 이겼나.”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더없이 무심했지만 그렇기에 하나의 뉘앙스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는 그대로 흘렀다. 그녀는 말이란 게 결국은 어떤 암시밖에 주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고, 이럴 때 차라리 침묵하는 걸 선택했다. “……뭐. 인간종에 죽는 것보다야 나으려나. 단탈리안 녀석, 나 죽이면 그거 평생 환각에 시달릴 거잖아. 그럼 얌전히 죽어줘야지. 죽어도 녀석 괴롭히는 재미로 살게.” 어조는 장난스러웠지만 표정에도 목소리에도 아무런 색채가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무채색 그 자체였다. “자아. 난 언제 죽일 건데? 웬만하면 단탈리안 녀석 안 보고 뒈지고 싶은데.”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왕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내는 재주 따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눈앞의 소녀가 어떤 감정인지 손에 뚜렷하게 잡혔다. “단탈리안 님은……평소부터 몸에 유언장을 항상 갖고 계셨습니다.” “어?” “그분께선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셨습니다. 당신께 소중한 인연들에게 한 마디의 말을 남겨두셨지요. 그중에서도 바르바토스 전하를 가장 소중히 다루셨습니다.” 이바르가 품속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었다. “본래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만, 제 독단으로 바르바토스 전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편지를 펼쳤다. 편지에는 단탈리안이 여러 연인들에게 남기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쩐지 날림으로 쓰인 필기체에 바르바토스는 그리움을 느꼈다. 단탈리안의 글씨체였다. 한없이 어설프고 불친절한 글씨. 「바르바토스는 나의 가장 충실한 친우이다.」 「내 삶에 허락된 모든 애정과 우정을 그녀에게 바친다.」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바르바토스. 너는 어딘지 여린 구석이 있어서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분명히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주제에 속으로 별 염병을 떨 것이다. 이 염병의 구체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의 처방전을 따라주길 바란다.」 「첫 번째. 나에게 혹시나 못해준 것이 있었는가 걱정하지 말도록. 너는 나에게 항상 필요 이상의 애정과 이해를 보여주었다. 이는 내가 보증한다.」 「두 번째. 어쩌면 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걱정하지 말도록. 너의 삶이 온전히 너의 것이듯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내 소유물을 존중하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너라면 알아줄 것이다.」 「세 번째. 정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인 것 같지만, 행여나 순결 같은 관념을 지키겠답시고 갑자기 색욕을 끊어버리지 말도록. 이미 죽어버린 나에게 부당한 책임을 짊어지우는 일이다. 결단코 말리고 싶다. 사자(死者)를 존중해라.」 잠시간 바르바토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편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단번에 알았다. 애인에게 보내는 유언장. 보통은 사랑한다고, 당신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단탈리안의 편지에는 단 한 마디도 사랑을 암시하는 구절이 없었다. “……등신 머저리 새끼.” 바르바토스의 입꼬리가 힘없이 휘어졌다. 예전에는 편지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비밀을 알고 난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단탈리안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환영에 시달렸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에 의해 누군가가 고통을 겪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겠지. 나를 잊고 살아라. 나 따위로 인해서 슬픔을 느끼지 마라. 단탈리안의 유언장은 오직 그럴 목적으로 쓰여졌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영원토록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은 그 편지에, 바르바토스는 조용히 분노하고 또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 바르바토스는 다시 한 번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휩싸였다. 단탈리안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했다. 마왕이 아니어도 좋았다. 평원파가 전부 숙청당해버린 지금도, 바르바토스는 도저히 단탈리안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단탈리안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해져서,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를 구하고자 했다. 단지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이바르라고 했나. 마지막으로……마지막으로 단탈리안을 볼 수는 없을까……?” 바르바토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자신은 한 번 단탈리안에게 거절당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생각을 바르바토스는 떨쳐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처절하게 애원하면 부탁을 들어줄지 몰랐다. 자신의 자존심을 전부 버리고, 정말 개처럼 애걸한다면……그 연약한 녀석은 자신의 청원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 “무리한 부탁이란 건 알아. 그냥 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만 보고 싶다고 전해줘. 그러면, 그러면 녀석은 부탁을 들어줄 거야. 거절하지 않을 거야.” 바르바토스는 결심했다. 단탈리안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자고. 그 남자를 내버려두고 죽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이 감정을 안은 채로 평안하게 죽기란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도 후회를 남기고 떠나버릴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후회 어린 삶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은 변치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 전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을 때와 똑같았다.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을 터트린 바람에 도리어 표정이 사라졌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불가합니다.” “……부탁할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줘. 정말이야. 그 녀석, 이대로 놔두면 죽어버릴 거야. 너도 옆에서 지켜봤다면 알 거 아니야. 단탈리안을 내버려두면 안 돼…….” “불가합니다.” “제발…….” 바르바토스가 몸을 비틀어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사지가 없음에도 어떻게든 기어서 이바르의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바르는 바르바토스가 얼마나 긍지 높은 마왕인지 익히 알았으므로, 그녀의 행위에 더없는 고통을 느꼈다. “불가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이바르가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저에게, 아무리 저한테 부탁하셔도 안 됩니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셨습니까. 이미 당신은 단탈리안 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건 결정사항입니다!” “말 한 마디를 전달해줄 수는 있잖아……응? 한 마디만. 내가 보고 싶다는 말만이라도 전해주면…….” “그러니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해야 합니까! 단탈리안 님은―――.” 이바르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한 순간, 이바르는 목이 메였다. 소리가 입안에서 멤돌았다. 그녀는 이빨을 꾹 물고, 분노와 슬픔, 무엇보다도 고통을 담아내어, 절규하듯이 내뱉었다. “단탈리안 님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루크는 사실 피해자이죠.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단 한번도 맺어지지 못했습니다. Omicron// 예.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독단입니다. CurtisAxel// 성녀이니까 처녀로 죽는 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아닐까요.(...) ginrneves// 질주하고 있습니다. 앤떱// 저는 컴퓨터만 쓰기 때문에 앱에러는 눈치 챌 수 없었습니다. 컴터에서도 가끔 에러가 나지만요. 오룔리// 곧 정해집니다. 수천천사// 예, 어떤 의미에서든 일직선으로 가고 있습니다. 국제경제학// 아마 다음화에 나올 것 같습니다. 으악으아악// 사실 루크치고는 열심히 분발한 겁니다.(...)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유독 두통이 심해서 글을 적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ㅅ;   00483 무엇을 위하여 =========================================================================                        * * * 한 달하고도 보름 전. 달이 밝게 빛나는 한밤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단탈리안의 침실에 들어갔다. 단탈리안이 이바르를 침실에 부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어서, 그녀는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탈리안 님께서 다른 여인과 동침을 끊은 지 제법 오래되었다. 어쩌면 오늘 자신이 그 휴식기를 끊어트릴지 몰랐다……. ‘오늘 낮에는 조금 이상하셨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오늘 대낮 무렵에 벌어진 기행을 떠올렸다. 단탈리안은 갑자기 그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찾았다. 그리고 인형으로 자신의 의식을 옮기더니, 무슨 이유인지 황궁을 온통 돌아다녔다. ‘라피스 라줄리도 이상했다.’ 결국에 두 사람은 한참 뒤에야 집무실로 함께 돌아왔다. 둘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끊임없이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이 라피스 라줄리를 제외하고 모두, 절대로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 것을 명령했으므로.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이바르입니다.” “아아. 들어오도록 해라.” “예.” 이바르가 방문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소 놀랐다. 방안에는 단탈리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고, 바로 옆에서 라피스가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잠자리를 달래라고 불러주신 건 아니겠다.’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자신이 라피스 라줄리와 함께 세 명이서 놀아날 일은 없었다. 즉, 이번에 단탈리안이 그녀를 부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애써 억누르려고 했던 불안감이 싹텄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래, 이바르. 내가 사랑하는 소녀여.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 “…….” 뻔한 말임에도 이바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탈리안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단탈리안은 애정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몸으로 보여주었다. ‘라피스 라줄리도 있는데, 전하도 남사스러우시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작게 “예” 하고 대답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만약 라피스 라줄리가 없었다면 전하에게 애교라도 부려보았을 텐데, 보는 눈이 있어 차마 그러기 힘들었다. 이바르는 정숙한 시녀처럼 시종일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바르.” “네. ……제 정인(情人)이시여.” 이바르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일종의 과시였다. 자신과 단탈리안이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 라피스 라줄리한테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바르는 라피스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단탈리안이 작게 웃었다. “그래. 이바르. 내가 오늘 그대한테 다소 잔혹한 얘기를 들려줄지도 모르겠어. 아니, 틀림없이 잔혹한 얘기가 되겠지. 그대한테나. 나한테나.” 그제야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고개를 들었다. 단탈리안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바르는 심장이 서늘해졌다. 단탈리안의 그런 얼굴을, 이바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건 이바르에게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전하께서 파르네세 군무상서를 친히 벌하셨을 때…….’ 그때 이바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의 결백증 내지는 집착. 단탈리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거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바르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 남자에게 향했음을 깨달았다. 그 광기에 직면하고도 단탈리안에 대한 감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어째서. 왜 그런 표정을……?’ 이바르가 조심스럽게 라피스 라줄리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이바르는 상대방의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혹여, 소녀가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인지요?” “자네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어. 다만……그래. 우리 둘 다 잘못을 저질렀지.” “말씀해주시옵소서.” 이바르가 망설이지 않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소녀가 스스로를 벌하겠나이다. 이것만이 소녀의 소원입니다. 전하께서 그 손을 더럽히실 일 없이, 부디 소녀가 속죄할 기회를 허락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이 군무상서를 몸소 처벌할 때 얼마나 망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본질적으로 단탈리안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이바르는,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죄값을 짊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 단탈리안의 미소가 더 처연해졌다. “그대는 내가 앞으로 말할 잘못을 꼭 짊어질 필요가 없어. 내 얘기를 전부 들은 다음에 그대가 선택해도 괜찮아.” “만약 그것이 제 잘못이라면.” 이바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부디 소녀가 짊어지게 해주소서. 소녀는 강인합니다. 비록 시녀의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저는 삼천 년을 홀로 버텨온 로드브로크의 진조. 어떤 잘못이라도 반드시 감당해내겠습니다.” 설령 그 형벌이 죽음일지라도. 이바르는 구태여 소리내어 덧붙이지 않았지만, 단탈리안 역시 그녀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단탈리안은 더욱 슬퍼진 눈동자로 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이바르. 군무상서가 데이지를 납치했을 때 그대도 협력했다고 말했지.” “예, 전하. 군무상서께서 계획을 짜셨으나 실행에 옮긴 사람은 소녀였습니다. 시녀장을…….” 이바르가 멈칫하고 단어를 고쳤다. “그 배신자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에 감금했습니다.” “데이지는 군무상서를 파탄시켜 내 세력을 무너트리려고 했다. 그것이 진실이다. 이바르, 자네는 그리 생각하고 있는가?” “예, 전하.”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확신했다. 그녀에게 데이지 폰 커스토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인간을 고문하는 것에서 끝없는 쾌락을 느꼈다. 입을 열면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데이지가 공개처형식에서 날뛰었을 때, 이바르는 ‘저것이 저럴 줄 알았다’라고 한탄했다. ‘미치광이에게는 아무리 은혜를 입혀도 소용이 없다. 냉정하게 잘라내야 한다.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단탈리안 님이 걱정되어 차마 강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어.’ 이바르가 후회했다. 납치극이 탄로되었을 때, 이바르는 단탈리안이 너무도 단호하게 처벌을 집행하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만일 그때 자신이 조금 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나섰다면―――데이지 폰 커스토스는 태생이 더러운 종자이고, 언젠가 틀림없이 배신할 것이니 지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 몰랐다. 평원파와 산악파의 균형이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두 사람을 한꺼번에 포용할 비책이 생겼을 것이다. ‘그깟 인간종 한 명 때문에 전부 망가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엎어지고 말았다. 이바르는 거기에서 책임을 느꼈다. 납치로는 부족했다. 아예 단탈리안에게 사형을 선고받을 것을 각오하고, 자신이 직접 데이지 폰 커스토스를 사살했어야만 했다. 약간의 방심과 약간의 머뭇거림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왔다……. 단탈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이바르.” “예……?” “데이지는 단 한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어.”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바르는 모든 전말을 전해들었다. 어두운 침실. 방안을 비추는 것은 유리창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달빛밖에 없었으며, 그마저도 이따금 구름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희미한 달빛이 구름에서 벗어나올 때마다, 그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이바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 이바르가 어깨를 떨었다. “그럴 리……없습니다. 무언가 착각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전하…….” 적막만이 침실에 감돌았다. 단탈리안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확신이 없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확정해서 들려주는 사람은 더욱 더 아니었다. 이바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소녀가……그럼, 소녀가 전하를…….” 단탈리안을 나락으로 몰아세운 죄인은 데이지 폰 커스토스가 아니라. 다름 아니라 군무상서와 이바르 로드브로크 본인이라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이바르.” 단탈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마치 이바르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어버렸어.” “…….” 뚝, 하고. 이바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고요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이바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입술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저, 저는……저는 어떻게 해야…….” 내가 단탈리안 전하를 지옥에 떨어트렸다. 이바르의 머릿속에서는 그 생각만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죽는 것이야 간단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죄값을 치를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수천 년을 이어온 이 삶을 끊어도 좋았다. 그렇지만 죽음 따위가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파이몬이 죽었다. 산악파가 파멸했다. 평원파마저 모조리 숙청당했다. 한낱 자신의 목숨으로 속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부서지고 말았다. 공포와 슬픔이 이바르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단탈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우라가 망가진 것은 나의 책임이야. 그렇게 될 줄 몰랐지. 내가 안이한 탓에 라우라가 극단에 서버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던 내가 결국은 바로 코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던 셈이지. 우스운 일이다…….” “…….” “이미 늦었지만 나는 책임을 지고자 하네. 이바르. 만약 그대가 허락해준다면 둘이서 함께 책임을 지고 싶다.” 둘이서 함께 책임을 진다. 그 의미를 알지도 모른 채, 이바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단탈리안만이 해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저는 책임을……제가 책임을 지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가요……?” “그래. 이바르.” 단탈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바르와 단탈리안의 눈높이가 똑같아졌다. 단탈리안은 오른손으로 이바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나는 데이지와 함께 죽을 것이다.” “…….” “데이지에게는 잘못밖에 저지르지 않았어. 녀석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반면에, 그 녀석은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지. 이제 내가 데이지한테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할 차례야…….” 아. 이바르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무엇을 명령하려는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책임을 짊어질 것인지, 벌써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이바르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사라지시면……마왕군이, 제국이 무너집니다…….” “그래. 그렇게 되겠지.” 단탈리안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니까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형은 계속 있어주어야 한다.” “전하……제발……제발, 그것만큼은…….” “이바르.” 단탈리안이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나를 대신해서 단탈리안을 연기해주게.”   ============================ 작품 후기 ============================   [리리플] 수천천사// 데이지는 한 번 더 작중에 나올 것입니다. NineBreaker// 저에게 불리한 조건밖에 없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은하수조각// 엡, 3위입니다. Omicron// 안심해주세요. 계략이 아닙니다.(...) 김병멍군// 흐아앙. 으악으아악// 돌아왔습니다.(...) SShelter// 얍얍. 류파// 단탈리안 더 제서스인가요 ;ㅅ; 샤이휘른// 예, 단탈리안입니다. 붉은맹세// (도주) 오늘도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ㅅ;   00484 무엇을 위하여 =========================================================================                        왜 단탈리안이 그토록 슬픈 눈동자를 지었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해했다. 불과 수십 분 전에 자신은 지극히 어리석게 행동했다. 그때 이바르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 소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소녀가 스스로를 벌하겠습니다. ― 어떤 잘못이라도 반드시 감당해내겠습니다. 우둔의 극치.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너무도 쉽게 책임을 지겠노라고 맹세했다. 고작해야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제 그녀는 사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지금 그녀에게 들이닥친 것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으리 만치 장엄하고 악질적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영원히 연기한다. 단탈리안 전하는 죽어서 사라지고, 자신이 대신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은폐한다. 영원히. “아, 안 됩니다. 전하. 저는 못해요…….” “이바르.” “저는 못해요. 전하, 소녀를 지옥에 떨어트리지 말아주세요.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저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자존심을 버렸다. 금발의 아름다운 흡혈귀는 단탈리안을 껴안았다. 어쩌면 껴안는다기보다 쓰러졌다고 표현해야 올바르리라. 이바르가 가느다란 두 팔로 단탈리안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팔뚝이 바람에 시달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저는 할 수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대는 마계 제일의 상단을 지배했어. 그대처럼 오랜 세월 동안 마왕들을 상대해본 자가 없지. 마르바스의 정략도, 가미긴의 모략도 그대를 함부로 해칠 수는 없을 것이야. 이바르. 오직 자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거짓말!” 이바르가 고개를 들어 단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눈물에 뿌옇게 가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분노와 애원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강렬해졌다. 두 사람의 얼굴은 무척이나 가까워서 서로가 흘리는 숨결의 떨림을 미세한 강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더는 인형으로 살아갈 필요 없이, 한 명의 소녀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말했으면서!” “…….” “당신께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애, 애정 따위는 오래 전에 버렸는데. 다시는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갈 거라고 맹세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마왕에 대한 복수도, 전부 버리게 만들고……아아……!” “이바르.” “……!” 단탈리안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이바르는 단호하게 그 손길을 내쳤다. 그녀가 자신의 옷섶을 스스로 찢어발겼다. 시녀복에서 앞가슴을 가리던 부분이 찢어지며 속옷이 드러났다. 이바르는 속옷마저 제 손으로 뜯었다. 속옷의 천조각이 천천히 허공에 흩날렸다. “전하……보세요.” 그곳에는 소녀의 새하얀 나신이 있었다. 희뿌연 달빛이 살결에 물들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오른손을 잡아서 그녀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당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건 제 몸이 아니었어요. 영원토록 어린아이인 채로 살아가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흡혈귀……그런 건 제가 아닙니다. 저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위대한 쿤쿠스카의 지배자이자 마왕들의 복수자였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바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코, 절대로, 이런 보잘것없는 소녀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 “당신이 저를 몰락시켰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울부짖었다. “쿤쿠스카의 지배자도, 니블헤임의 군주도, 마왕들의 막후 조종자도……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제 모든 정체성을 당신이 앗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제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며, 당신께서 대신 짊어지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나요……저는, 이제 앞으로 단지 한 명의 소녀로 있으면 된다고…….” “…….”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거기서 이바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은 죽고 없어진 세상에서 자신만이 홀로 남는다. 그 상상이 한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이바르는 어떤 단어도 문장도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단순히 남는 것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죽지 않은 척 연기해야만 했다. 더 이상 단탈리안이 웃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 웃음을 지어야 했다. 더 이상 단탈리안이 말할 수 없는데도, 자신이 그 목소리와 그 표정과 그 뉘앙스를 모조리 흉내 내며,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속삭이고 살아가야 했다. 이바르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은요? 전하께서 죽으시면, 그 사실을 누가 또 아나요. 라우라? 군무상서는 알고 있나요. 가미긴은, 전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단탈리안이 침묵했다. “저뿐입니까.” 이바르가 메마르게 웃었다. 망가진 인형의 관절이 삐꺽거리는 것처럼.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전하가 죽은 줄도 모르고 달려드는 정인들한테……제가 전하를 대신해서 안아주고, 품어주고, 웃어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들까지 돌봐야 하는 것입니까.” “…….” “어찌 그리 잔인하실 수 있습니까.”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흐느꼈다. “이럴 거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소녀의 삶 따위 다시는 줍지 않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좋았어요. 전하……전하……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전하의 양녀가 무고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모두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바르가 양손으로 단탈리안의 가슴을 꾸욱 쥐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전신에 힘이 없었고 손도 마찬가지였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옷가슴을 쥐어 잡으려고 했지만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다시 한 번 단탈리안에게 손가락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미끄러져 내렸다. 결국 그녀는 단탈리안에게 온몸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이바르의 얼굴과 단탈리안의 가슴. 그 좁디좁은 틈새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도, 같이 죽게 해주세요…….” “…….” “이미 무너진 잔해에서 헤매게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전하, 제발…….” 그때. 단탈리안이 이바르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아.’ 이바르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를 밀쳐낼 힘이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힘은 더욱 더 없었다. 처음으로 단탈리안에게 입술을 빼앗긴 그날처럼 이바르는 그저 나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불가능해.’ 이바르가 두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자신의 무게를 주체하지 못하여 흘러내렸다. 눈물에게 중력이 그러하듯이,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거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심장을 옥죄고 있음을 직감했다. ‘결국, 무엇이든……나는 단탈리안 님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어…….’ 그녀는 저주스러웠다. 이미 단탈리안에게 처음 몸을 허락한 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렇게 되리라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그때도 눈물을 흘렸다. 그건 패배에 굴복하는 자의 눈물이었으며, 동시에 그 패배에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라는 것에 대한 저주였다. 모든 마왕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으로 살아왔다. 이제 자신이 한 명의 마왕으로서 살아야 했다. “…….” 죄. 책임. 단 두 개의 단어에 이바르는 심장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재앙과도 같은 입맞춤이 끝났다. 단탈리안이 이바르를 품에 안았다. 그는 이바르의 어깨에 머리를 숙이고 나지막하게 귓속말했다. “이바르. 거절해도 좋습니다.”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단탈리안이 전부 알아듣고 대답해주었으므로. “아무런 아픔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당장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대답은 기껏해야 절반밖에 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바르는 무엇보다도 나머지 절반을 두려워하며 말했다. “단탈리안 님은.” “괜찮습니다. 제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예상에 적중한 대답이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심장이 찢어지는 격통에 사로잡혔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다면, 자신의 잘못에서 도피할 것을 고른다면, 단탈리안은 그녀를 어떤 의미로든 인정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부드럽지만 차갑게 끊어내리라. 단탈리안의 곁에서 오롯하게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진즉에 그 사실을 알았으나, 이런 경우, 즉 책임을 받아들이고자 하면 영원히 단탈리안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 따위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 보세요.” 이바르가 웃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역시, 잔인하잖아요…….” 단탈리안은 그녀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는 아무 말도 돌려줄 것이 없어 그저 조금 더 강하게 이바르의 몸을 안았다. 거친 손바닥이 이바르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단탈리안이 머리를 빗질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언제나 그녀가 찾을 수 없었던 평안을,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이바르는 다시 한번 절대로 평안해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달빛이 구름에 숨어들었다. 흡혈귀인 그녀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어둠이 방안에 가라앉았다. 이바르가 조용히 속삭였다. “말씀하세요, 전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모든 계획을 단탈리안에게 전해 들었다. 단탈리안의 극본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한층 가혹했다. 이바르가 영원히 단탈리안을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 확정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단탈리안을 위하여. * * * 단탈리안이 데이지와 공멸한 직후. 이바르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데이지의 마력과 단탈리안의 마력이 서로 얽히면서 일대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땅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날리는 그곳으로 이바르는 뛰어갔다. “…….” 그곳에,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단탈리안과 데이지가 포개어져 있었다. 데이지는 단탈리안에게 꾹 얼굴을 파묻었고, 단탈리안은 그런 데이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 모두 한없이 평화로운 표정이었다. 만약 이곳이 어느 침대였거나 평야의 한복판이었다면, 이바르는 두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모포를 덮어주었을 것이다. “…….” 그렇지만 두 사람은 죽었다.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몸뚱어리를 짊어졌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이바르는 입술을 꾹 깨물고,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친위대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다만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빨리 막사에 모셔야 하니 길을 비켜주십시오.” “예.” “그리고……구덩이 안에 있는 소녀의 시체를 고이 보관하십시오.” 배신자의 시체는 오체를 분시하고 효수한다. 그러나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계획을 듣자마자 데이지를 위해 그녀와 똑같이 닮은 인형을 준비했다. 이 인형은 거의 완성되어서 마지막으로 시체와 어디 다른 점이 없는지 확인해보는 절차만이 남았다. 데이지의 몸은 아무도 모르게 정중히 보관될 것이었다. 그것이 이바르가 그녀에게 보내는, 유일한 속죄였다. ‘빨리.’ 누군가가 보기 전에 거사를 끝마쳐야 했다.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가서 단탈리안의 시체를 침대 아래에 숨겼다. 대신, 미리 침대 아래에 가져다놓은 단탈리안의 인형을 꺼내 마치 의식을 잃어 누운 것처럼 침대에 눕혔다. “…….”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시체를 침대 아래 숨기고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침대에 매달려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제 모든 재앙이 시작할 것이었다…….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바르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그곳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이바르가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봤다!’ 그녀가 일어나서 인사하려 하자, 라우라가 손짓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이 손짓으로 이바르는 상대방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인가. “주군께서는 용태가 어떠한가?” 라우라의 질문에 이바르가 입술을 열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예. 무탈하십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여명빛// 헉헉. NineBreaker// 단탈리안의 입장에서 쓰게 될 날을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xusaku// 이바르보다 라피스의 시점에서 먼저 쓸 줄 알았는데, 쓰다보니 예정이 바뀌었습니다. 다다음화에 나오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악으아악// 루크는 정치적인 목적 아래 죽었습니다. coffeelover// (도주) 오룔리// 설령 2회차가 가능하더라도 단탈리안이 그걸 받아들일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hwang3820// 어쩌면 한 번쯤 모습을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천천사// 헉 수천 님은 덧글을 실시간으로 수정하시는 모양이군요. 신기합니다! AillAireno// 이게 전부 단탈리안 때문이니 단탈리안을 손가락질 해주십시오! 루시아벨// 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끄윽, 연달아서 지각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ㅅ; 그레이트순대 님께서 두 번째 표지를 제작해주셨습니다. 멋진 표지를 그려주신 그순대 님께 감사드립니다.   00485 무엇을 위하여 =========================================================================                        “다만 독약의 영향으로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으음.” 라우라 군무상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무탈하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무리를 한 것에 화내야 할지, 잠깐 동안 고민하는 분위기였다. 이윽고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단탈리안에게―――단탈리안의 인형에 다가가서 한숨을 쉬었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가슴이 괴로웠다. 이바르는 한 달 전,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만 그날 밤, 단탈리안이 나지막하게 속삭인 말을 기억했다. ‘라우라를 시험대로 삼아.’ 차가운 목소리. 온갖 인정(人情)을 끊어버린 듯한 어조에 이바르는 바닥 없는 슬픔을 느꼈다. ‘시험대입니까.’ ‘그래, 이바르. 그대의 연기가 어디까지 통용될지 시험하는 것이다. 라우라는 틀림없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여자야. 그대와 마찬가지로.’ ‘…….’ 이바르는 단탈리안의 저의를 알아들었다. ‘제가 군무상서를 속이는 데 성공할 경우, 다른 사람들도 능히 손쉽게 속일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군무상서가 인형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할 정도라면 제 조종술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 ‘만약에 속이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바르가 질문했다. 다소 도발적인 말투였다. 당신의 계획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더 솔직하게 말해, 이바르는 마음속으로 이 대본이 실패하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실패해버려라. 영원히 고통에 잠기느니 차라리 파탄이 나버리는 편이 좋았다. 단탈리안이 즉답했다. ‘라우라를 죽여라.’ ‘…….’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라우라가 받아들일 리 없다. 라우라는 강인한 여자지만, 그 강인함은 그녀한테서 비롯하지 않는다. 내가 있다는 사실. 내 곁에서 함께한다는 사실. 거기서 비로소 라우라는 바로 설 수가 있어.’ 단탈리안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단탈리안의 시선은 창밖이 아니라 다만 달빛이 창백하게 스며들어 있는 유리창에 머물렀다. 바깥에서 나방이 툭, 툭, 조용하게 유리창에 머리를 부닥치고 있었다. 나방은 왜 이곳이 안쪽인데 들어갈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라우라는 끝이다. 복수에 미쳐서 날뛸 것이야. 무엇에 복수해야 하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고 그저 한없이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자살할 것이다.’ 단탈리안이 가만히 나방의 투신을 바라보았다. 나방은 자기가 안쪽을 들여다 볼 수는 있어도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른 날개를 파닥여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러자 단탈리안도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런 최후를 바라지 않는다. 편안하게. 라우라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죽여주게.’ ‘…….’ 이바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단탈리안이 예고한 시험의 순간이 다가왔다. 라우라는 침대에 다가가서 자신의 주군과 쏙 빼닮은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이바르는 품속에 갈무리해둔 단검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눈치 채라. 이바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간절히 열망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뒷모습이 비추었다. 하얀 목덜미가 무방비하게 이바르를 향해 노출되어 있었다. 단검으로 내리 찍으면,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같은 인간의 신체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쓰러지리라. 눈치 채라.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이지 않는가. 눈이 멀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는가. 인형과 헷갈려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 사랑이 약하지 않을 터. 제아무리 똑같이 생겨도, 제아무리 무표정하게 누워 있어도,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라. 그리고 이곳에서 끝내도록 하자. 이바르는 라우라를 살해한 다음 곧바로 자결할 생각이었다. 라우라를 속이지 못하는 연기력으로 다른 마왕들, 가미긴과 시트리를 속여내기란 불가능했다. 단탈리안의 계획은 실패하고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이 최선.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유일하게 남은, 최선의 결말이었다. 막사의 침대. 라우라가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아차렸을까.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까. 이바르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어휴.”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다정한 질책이었다. “하여간 주군은 항상 무리하는 게 문제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채 인형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운 애인을 어루만지듯 꼭 그처럼 라우라는 인형을 내려다보았고 또 속삭였다. “…….”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가슴에 올려둔 오른손을 제자리로 돌렸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음으로써, 자신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었다. 이바르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기뻐해야 할지, 실패했다고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이바르가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단탈리안이 승리했다. 그러나 자신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실패한 것이었다. 사실 언제나 그러하지 않았는가? 이바르는 자조 섞인 미소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괴로운 표정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군무상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무슨 일인가.”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다음 시험을 진행하였다. 단탈리안이 죽는 것과 동시에 마왕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왕성의 구조를 뒷받침하는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에 마왕성 전체의 강도가 달라지면서 대대적으로 무너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붕괴될 것이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단탈리안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죽자마자 라피스가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크게 일으킬 필요도 없겠지. 마왕성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구조물만 파괴하면 그만이니.’ ‘라줄리 국무상서가…….’ ‘전쟁 도중에 공화국이 특공대를 보냈다. 마왕성의 내부 구조를 알려준 사람은 데이지와 루크.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특공대가 정확히 마왕성을 타격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마왕성이 붕괴하는 데 그럴듯한 이유를 마련할 것. 단탈리안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다. 다행히도 마왕성은 매우 깊은 지하에 위치했다. 무너져 내린 마왕성에 지하가 파묻히면, 그곳에 마력이 머무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는 두 번째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파르네세 군무상서가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느꼈다면.’ 라우라가 사라진 직후. 이바르가 막사에 들어와서 생각했다. ‘마왕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의해 무언가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단탈리안 전하는 이상하고, 마왕성까지 붕괴되었다. 그렇다면 도출되는 정답은 단 하나뿐이다.’ 반대로 말해, 라우라가 마왕성의 붕괴를 목격하고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단탈리안이 사망했다'라는 사실을 감히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이바르의 인형이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바르는 라우라가 돌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라우라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이바르는 확신을 품을 수 있었다. 자기가 인형을 앞세워서 연기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 초조한 기다림이었다. 이바르는 몇 번이나 회중시계를 꺼내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 분, 십오 분, 삼십 분. 그녀는 반쯤 의도적으로 시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되도록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안 그러면 저 침대 아래 단탈리안이 죽은 채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게 분명하므로. “…….” 이바르는 견딜 수 없어서 막사를 나왔다. 잠시 뒤,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친위대를 이끌고 복귀하였다. 이바르는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자마자 대본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라우라는 틀림없이 초조해 하고 있었지만, 이쪽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거나 질책하는 기색일랑 전혀 없었다. ‘그래. 좋다.’ 이바르는 마음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단탈리안이 발견하고 키워준 소녀로서의 마음이. 이제 갓 개화하여 피려고 했던 꽃잎이 떨어지고, 수천 년 동안 이바르를 움직인 지배자로서의 면모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들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마왕을 추존하는 세상 전체를 경멸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떠올랐다. ‘어디 한번 본인의 연기를 꿰뚫어 보아라. 너희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내 조종술이 완벽하다면―――어차피 단탈리안 전하에 대한 그대들의 사랑도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얘기이다.’ 이바르가 입을 열었다. “군무상서. 전하께서 의식을 차리셨습니다.” “주군께서!” “의식을 차리시긴 했어도 많이 힘들어하고 계십니다.” 이바르는 자신이 자유자재로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에게 익숙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이바르는 대여섯 명의 인물을 한꺼번에 조종해왔다. 언젠가는 쿤쿠스카의 상주로서 지냈으며, 또 언젠가는 상회의 유망한 간부 후보로 지냈다. 여태까지 이바르의 가면을 간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탈리안을 제외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라우라를 막사 안쪽으로 안내하였다. 마치 라우라의 발자국 소리를 엿듣고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이바르는 인형을 조종하여 말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라우라입니까? 라우라의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응, 주군. 주군의 라우라이다.” 이바르의 인형술에 군무상서는 감쪽같이 속아넘었다. “주군은 바보다. 무엇이든 몸으로 무마하려 하니까 또 누워버린 것 아닌가. 바보는 죽어도 고쳐지질 않는다더니, 아무래도 주군은 앞으로 영원히 바보일 모양이다.” “너무하는군요. 이래 봬도 최대한 노력한 결과입니다. 독약을 무려 세 병이나 마셨다구요……살아 돌아왔다는 점에서 전 이미 모든 의무를 다했습니다.” “주군은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런 의무도 지킨 적 없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라우라가 눈물을 참아내며 인형에게 말을 걸면 걸수록. 또한 인형이 단탈리안을 연기하며 대답하면 대답할수록, 이바르의 마음은 더욱 더 차갑게 냉각되었다. 문득 눈앞의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것 같았다. 지독한 거리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뭘 보고 있는가?’ 이바르가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 것인가.’ 어쩌면 단탈리안이 대답해줄지 몰랐다. 그러나 이 질문을 내던지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더 이상 그녀는 대답을 바라며 단탈리안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저 소녀에게는 아직 단탈리안 전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바르가 이빨을 꾹 깨물었다.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탈리안을 몰락시킨 주범은 이바르 본인만이 아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저 인간종의 여인도 몰락에 참여했다. 아니, 오히려 라우라야말로 가장 거대한 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만이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왜 전하께서는 저 소녀에게 안락한 여생을 허락했는가. 내가 인형술을 익혔기에? 나는 연기가 가능하고 저 소녀에겐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합리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망가트렸다. 이바르는 교묘하게 단탈리안의 뉘앙스를 흉내 내어 라우라의 정신을 구석으로 몰아 세웠다. 간단한 일이었다. 단탈리안이 미묘하게 엘리자베트를 추켜세우는 발언을 계속해서 흘렸다. 라우라는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들었다. 라우라가 숨결을 토해내듯 말했다. “하지만……주군에게는 소녀가 있다. 설령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지라도 소녀는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다. 주군. 굳이 아군이 패배할 경우를 대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싸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저는 제가 틀렸을 가능성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예컨대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를 도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라우라의 표정이 무너졌다. 라우라는 어떻게든 얼굴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무리였다. 숨결의 떨림, 입술 끝이 부들거리는 것, 무엇보다도 창백해진 안색이 그녀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암시했다. 이바르는 그 짙은 절망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독백했다. ‘그대 역시 지옥을 맛보라.’   ============================ 작품 후기 ============================   [리리플] 수천천사// 으아아, 죄송합니다. 요새 하루에 글을 7시간 정도 쓰는 것 같습니다. 두 종류의 글을 동시에 쓰는 건 처음이라서 여차저차 시간이 늦어지네요. 죄송합니다 ;ㅅ; rrrt123// 그러게 말입니다. 요플레를먹을때는껍질부터// 만약 라우라가 사실을 안다면 십중팔구 붕괴하겠지요. Omicron// 1. 표지에 맞추어서 묘사를 했습니다. 2. 그렇지요-. 3.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dbwjdtn//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llOTL NineBreaker// 단탈리안의 시점도 머지 않아 등장할 것 같습니다. xusaku// 약간 스포일러 기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허용 범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설마 아직 데이지편을 보지 못하신 독자 분들께서 지금과 같은 전개를 예상하실 리 없으니까요.(...) 앤떱// 본디 던디의 표지는 더쿠했다고 합니다! 으악으아악// 으으으으 죄송합니다 ;ㅅ; 요새 두 종류의 글을 적고 있는데, 제가 빨리 빨리 써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흑흑... JM카시// 헉, 이런 진행을 원하셨군요. 편안한 주말 되세요^^   00486 무엇을 위하여 =========================================================================                        * * * 마왕성 지하 10층의 심처. 라피스 라줄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무상서한테 배정된 집무실에는 짧게는 이십 분, 길게는 한 시간마자 끊임없이 보고가 올라왔다. 오늘은 마왕성 건축을 담당한 이들이 집무실에 방문했다. “아직 완공식 준비가 남았습니다만 어찌저찌 완성했습니다요.”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뇨, 아뇨. 위대한 마왕 전하께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소인들의 기쁨입니다.” 난쟁이와 고블린 대여섯 명이 웃었다. 칠 년 가까이 끌어온 공사가 드디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사실 공사 자체는 이미 끝났다. 단지 이만한 대작업에는 마땅히 화룡점정이 필요한지라, 난쟁이와 고블린은 요 근래 가장 화려한 완공식을 열어볼 속셈이었다. “저기, 상서님. 완공식에는 어떤 분들이 참석하실 예정인지 혹시 여쭈어도…….” “단탈리안 전하와 친분이 있는 분들을 초대할 것입니다. 마르바스 전하와 시트리 전하, 가미긴 전하, 바싸고 전하는 모두 참석하겠지요. 기대해도 괜찮습니다.” 건축가들 안색이 환해졌다. 이들에게 완공식이란 일종의 장기자랑 무대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건축물을 만들어냈는지 알림으로써 몸값을 높일 수 있었다. 자고로 장기자랑은 직책이 높으신 양반들 앞에서 뽐내야 제맛이었다. 마르바스, 시트리, 가미긴, 바싸고가 있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서님!” “별말씀을.” 라피스 라줄리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 난쟁이한테 건네주었다. “아직 완공식이 남았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흥에 불과합니다. 오늘부로 여러분은 일단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영지로 올라가서 편안하게 쉬십시오.” “오오……!” 이른바 수고비였다. 주머니가 상당히 묵직했다. 건축가들은 라피스 라줄리와 칠 년 동안 함께 일했다. 평소에는 지독하게 자린고비에다 자신들의 능력을 쥐어짤 대로 쥐어짜는 여자였으나, 하사금을 내릴 때만큼은 화끈했다. 섭섭함 따위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오랜만에 코가 삐뚫어지도록 마실 수 있겠군요!” “상서님께서도 바쁘지 않으시다면 소인들과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가 그래도 한번은 대접을 해드려야 하는데……헤헤.” “괜찮습니다.” 라피스 라줄리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함께하면 여러분도 편히 쉬지 못하겠지요. 또한 저에게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야 아쉬울 따름입니다요.” 난쟁이와 고블린이 멋쩍게 굽실거렸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들에게 까마득한 상관이자 고객. 알아서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위인이었다. 그런 사람과 같이 해봐야 즐거울 것 하나 없었으나 일단 예의상 권유했다. 라피스 라줄리 역시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그럼 소인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예. 살펴가십시오.” 건축가들이 우르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사라지자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라피스 라줄리는 의자에 앉아서 그대로 서류를 처리했다. 단탈리안을 대신하여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으며, 국무상서의 인가를 의미하는 도장을 기계적으로 정확히 찍었다. “…….” 어느새 오늘 하루치 서류를 전부 처리해버렸다. 라피스 라줄리가 가만히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류더미를 쳐다보다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번쩍 나타나 새로운 서류뭉치를 전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마왕성이 완성되었다고 했지.’ 라피스 라줄리가 일어섰다. 그녀는 습관처럼 복장을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이제는 몸만큼이나 익숙하여 어쩌면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정복을 입은 채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태어날 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라피스 라줄리가 마왕성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등을 쭉 펴고, 어깨가 일절 흔들리지 않은 채, 라피스 라줄리는 정면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만일 눈앞에 단탈리안이 나타난다면 당장이라도 멈춰서 공손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어미가 나를 버린 것이 생후 11일째였나.’ 반인반마(半人半魔). 지금이야 단탈리안이 정책을 펼쳐 계급제도와 노예제도가 완화되었다지만, 라피스 라줄리가 태어났을 시기만 해도 마계에는 엄연히 부족마다 신분이 달랐다. 그중에서 반인반마는 어떠한 종족에도, 어떠한 부족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불가촉천민.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림받았다. 서큐버스 부족은 애써 라피스 라줄리가 마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허락만 했을 뿐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어릴 적부터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골목과 골목, 집과 집을 돌아다니며 구걸했다. ‘…….’ 어느 날, 라피스 라줄리는 길바닥에서 눈을 떴다. 왜 자신이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머리가 끈적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만져보니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는 누군가가 돌을 던지는 바람에 자기가 기절했음을 알았다. ‘살아야겠다.’ 그렇게 라피스 라줄리는 결심했다. 마을에서 떠나 무작정 도시에 들어갔다. 라피스 라줄리는 온갖 더러운 일과 잡일을 손에 묻혀가며 어떻게든 생존했다. 쿤쿠스카에서 계급을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했을 때, 라피스 라줄리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상회에 투신했다. ‘더러운 창녀. 왜 자살하지 않나 모르겠어.’ ‘서큐버스 년이 보나마나 뻔하지.’ ‘지 애미랑 애비한테도 버림을 당했다면서.’ 물론 그곳에도 차별과 멸시가 엄연히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가 상회 건물을 돌아다닐 때면, 동료 상인들이 대놓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중에는 불가촉천민 바로 위의 계급에 해당하는 하층민도 많았다. 하지만 라피스 라줄리는 꿈쩍하지 않고 업무에 임했다. 기회. 언젠가 기회가 찾아오리라. 자신을 멸시한 이들에게 복수한다―――한때는 그런 생각을 품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저 순수하게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을 증명해야 할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도 '증명되어야 할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기회. 그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탈리안 님. 쿤쿠스카 상회의 라피스 라줄리입니다.’ ‘워, 워어?’ ‘단탈리안 님과 쿤쿠스카 상회의 거래는 앞으로 제가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피스 라줄리가 복도 한가운데서 멈추어섰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복도벽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차가웠다. 서늘했다. 고급스러운 복도. 라피스 라줄리에게는 이것보다 볼품없는 동굴이 오히려 더 익숙했다. ‘죄송합니다, 단탈리안 님. 실례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볼품없는 던전은 제 짧은 마생(魔生)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팔 년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쿤쿠스카 상회의 밑바닥에서 전전하던 라피스 라줄리는 일국의 국무상서가 되었다. 유사시에는 단탈리안을 대신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업무까지 맡았다. 마계의 대공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고, 한때 아득한 상관이었던 이바르 로드브로크조차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라피스. 보여주자. 약자의 긍지를.’ 약자의 긍지. 단탈리안은 그녀에게 약속을 지켜주었다. 검은 산맥을 넘어 브란덴부르크를 평정했고, 합스부르크를 정벌하고 프랑크와 사르데냐를 토벌했다. 대륙과 마계에 존재하는 강자들은 모두 단탈리안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단탈리안의 옆에는 언제나 라피스 라줄리, 그녀가 말없이 서 있었다……. 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토사구팽하고 보다 유능한 인재를 재상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단탈리안은 단 한 번도. 결코 단 한 번도 라피스 라줄리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라피스 라줄리를 조금이라도 모욕한다면, 단탈리안은 곧바로 그 자를 참수하여 개먹이로 던졌다. “국무상서.”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라피스 라줄리가 뒤를 돌아보니, 제레미 자경단장이 곰방대를 물고 서 있었다. “이쪽은 준비를 다 끝냈어요. 슬슬 국무상서도 저와 함께 가시죠.” “수고하셨습니다, 자경단장.” 라피스 라줄리가 고개를 까닥 숙였다. “하지만 제가 있을 곳은 여기입니다.” “……준비가 다 끝났다니까요. 약속한 시간이 되면, 여기, 무너져버려요?” “자경단장.” 라피스 라줄리가 건조하게 말했다. “제가 있을 장소는 이곳입니다.” “…….” 제레미가 연초 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그녀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임으로써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현했다. 제레미는 평소와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래 아무런 표정이 없는 것이 그녀 본연의 얼굴. 제레미가 허리를 숙인 것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국무상서를 뵙고 적잖이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영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자경단장. 항상 파르시 영주대행과 함께하십시오.” “예. ……제 목숨을 바쳐서.” 그리고 제레미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라피스 라줄리가 반대편으로 향했다. 잠시 뒤, 넓직한 알현실이 나타났다. 알현실 양쪽에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이 수십 기나 걸려 있었다. 정중앙에는 붉은색 양탄자가 펼쳐졌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당연하게도, 단탈리안의 옥좌가 자리했다. “…….” 라피스 라줄리가 알현실의 정중앙을 걸어갔다.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적막했다. 심지어 그녀의 발소리조차 양탄자가 전부 받아냈다. 텅 빈 옥좌를 향해 나아가며, 라피스 라줄리는 한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라피스. 연극은 실패했어. 우리는 실패하고 말았어…….’ ‘책임을, 지실 생각이군요.’ ‘그래.’ 이윽고 옥좌에 도착했다. 라피스 라줄리가 바닥에 앉았다. 그녀는 옥좌에 다소곳하게 팔배개를 했다. 머리를 그곳에 기대고, 라피스 라줄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나는 네가 살아주기를 원해. 라피스. 나는 잊어버리고…….’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디선가 쿠웅, 하고 진동이 전해졌다. 마왕성 전체가 흔들렸다. 마지막 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마왕성 전역에 걸쳐서 반마법장을 형성하였고, 제레미가 이끄는 암살대는 핵심적인 구조물들을 파괴시켰다. 마왕성이 붕괴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저는 단탈리안 님을 잊고 살 수 없습니다.’ ‘라피스……라피스…….’ ‘죄송합니다.’ 부디 같이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 라피스 라줄리가 옥좌에 조금 더 머리를 파묻었다. 언뜻 향기가 났다. 몹시 그리운 향기. 언제 부터인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게 된 냄새였다. ‘단탈리안 님.’ 천장에서 돌먼지가 떨어졌다. 깃발들이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거대한 기둥들에 금이 갔으며, 사방에서 자그마한 돌덩이와 먼지구름이 피어났다. 마왕성 전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비명은 점점 더 강해졌다. 라피스 라줄리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단탈리안 님. 하지만 지하 십 층은 규모가 너무 거대합니다. 조금은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렇군요. 지하 팔 층이어도 충분합니다.’ 그리운 기억. 자신의 질문에 단탈리안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오직 라피스 라줄리에게만 보여주는 단탈리안의 맨얼굴이었다. ‘그러면 우리 둘만의 공간이 좁아지잖아.’ ‘예?’ ‘아니. 그러니까. 어, 내 마왕성은. 그렇다고.’ 단탈리안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단탈리안의 얼굴이 연하게 붉어진 것을, 라피스 라줄리는 틀림없이 보았다.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내보였을지,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 라피스 라줄리가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어두운 가운데,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또한 조용했다. 무척이나. 라피스 라줄리는 그 고요함을 사랑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이바르는 완전무결한 철인이 아니니까요. ;ㅅ; rrrt123// 단탈리안의 시점도 곧 나올 것 같습니다. 으악으아악// 라우라는 사실 이미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지만요... Omicron//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이바르의 연기력이 도마에 오를 것입니다. 수천천사// 사실 이바르를 지옥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또 라우라죠.(...) 흑꾼// 헙헙. 하늘위에있다// 사실 저도 수용하지 못합니다.(...) 오룔리// 강하게 뉴게임... 강하게 뉴게임은 없는가... Raha000// 향후 전개에 관련된 질문에는 죄송하지만 노 코멘트입니다 ;ㅅ; 깨앵// 단탈리안을 위하여. 글을 쓰면서 조금 울었습니다 ;ㅅ;   00487 무엇을 위하여 =========================================================================                        * * * “절대로 세 명이서는 안 돼요!” “정말? 정말로 안 됩니까.” 내가 귀엽게 윙크를 했다. 팔자에도 없이 귀여운 척을 떨어보았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파이몬은 진저리를 쳤다. 여기서 헷갈리는 지점은 과연 파이몬이 내 애교에 질색한 것인지, 아니면 내 제안에 질색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절망적이었다. “싫어요! 벌써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단탈리안!” “너무 비싸게 구는군요. 시트리랑은 몇 번이나 해보지 않았습니까.” “시트리는 특별한 예외구요. 원래 소녀랑 애인이기도 했고, 또 시트리는 여자 역할과 남자 역할을 전부 해낼 수 있으니 편안했잖아요. 이건 얘기가 전혀 달라요. 전혀!” 내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손이 닳도록 빌어도 안 될까요.” “차라리 소녀가 기둥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겠사와요.” “제가 단검으로 복장을 쑤셔도 안 될까요.” “그 전에 소녀가 단탈리안을 교살하겠어요.” “파이몬.” 내가 진지하게. 세상에서 제일 난해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드디어 풀어내겠다고 발표하는 철학자처럼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바르바토스랑 세 명이서 잠자리에 들면 안 될까요.” “싫어요―――!” 파이몬의 마왕성 공중정원에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선제후 마왕들을 임명한 이후, 나는 공중정원에서 한가로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공중정원은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가 흘러서 휴식하기에 딱 좋았다. 장미꽃이 만발한 풀밭에서, 나는 파이몬의 무릎베개를 만끽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참 좋다 싶어서 예전부터 생각해온 아이디어를 말해보았다. 바로 파이몬과 바르바토스 그리고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까놓고 말해서 3P였다. “거절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반응이 격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뭘 한숨을 쉬는 건가요. 꼭 소녀가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단탈리안이 잘못한 거잖아요!” 내 얘기를 듣자마자 파이몬은 분기탱천. 아직 내가 머리를 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릎을 빼버리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머리통이 땅바닥까지 떨어졌다. 조금 아팠다.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보고 말싸움을 시작했다. “아니,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십시오. 시트리는 괜찮고 바르바토스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입니까? 바르바토스 아래에 거포가 안 달려서 불만입니까?” “하, 알면서도 뭘 굳이 질문하는 건가요. 시트리는 원래부터 제 애인이었고, 저와 무척 친밀한 아이니까 괜찮을 뿐이와요. 바르바토스와 시트리 사이에는 고블린과 엘프 정도의 격차가 있답니다!” “옛날에는 바르바토스랑도 애인 관계였다면서요.” 파이몬이 움찔거렸다.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인지요. 이천 년도 더 된 일이에요. 게다가 대판 싸우고 헤어졌는걸요. 누가 먼저 차버렸는지 이제 와선 기억도 안 나요.” “한 번 애인이었는데 까짓거 두 번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파이몬. 화끈하게 달려봅시다.” “당신, 가끔 표현이 아주 싸구려가 된다는 거 아세요?” 파이몬이 나를 노려보았다. 경멸이 가득 흐르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할 말이 많았다. “지금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언젠가 평원파와 산악파는 충돌하고 맙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분상의 국가로 조직들을 끌어 모았지만, 어차피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 파벌의 우두머리부터 관계가 살벌한데 어쩌겠습니까.” “…….” “파이몬.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제 숨김 없는 진심을 전하건대, 바르바토스 또한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저는 두 사람이 대립하지 않기를, 설령 대립하더라도 그 결말이 파국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일단 육체적으로 우리 둘 사이를 봉합하겠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정신적으로 화해하기란 태양과 달이 진하게 입맞춤을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본심은요?” “과거의 원한이고 뭐고 떠올릴 겨를도 없이 마구 보내버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파이몬이 드물게도 욕설을 입에 담았다. 파이몬 정도 되는 여자한테는 쓰레기라는 단어가 어마어마한 욕이었다. “당신 성격에 소녀를 먼저 떠볼 것 같지 않아요. 바르바토스한테 말해보셨어요?” “뭐.”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저께 일단 의견을 타진해보았습니다.” “당황하면 말투가 정치적으로 변하는 게 당신의 못된 버릇이에요.” “무슨 말씀인지 저로서는 도저히…….” “됐어요. 결과나 말해보세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맞은 채찍자국이 아직 등짝에 남아 있습니다만. 한번 구경해보시렵니까?”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파이몬이 하얀 도자기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였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홍차를 마셨다. 여느 때처럼 설탕을 가득 넣어서. “우리 두 사람이 화해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그저 서로 비등한 세력을 갖춤으로써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최선인걸요.” “역시 아름다운 꿈에 불과했습니까…….” “글쎄요. 소녀는 꿈이라기보다 저열한 망상이라 부르고 싶네요.” “한 번쯤 해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사심이 듬뿍 담겨 있군요!” 무슨 소리. 사나이라면 마땅히 꿈꿔도 이상하지 않았다. 왼쪽에는 바르바토스. 앙증맞은 몸매가 사랑스러운 백발의 소녀. 오른쪽에는 파이몬. 굴곡이 아름답게 져서 고혹적인 여인. 평원파와 산악파를 나란히 두고 즐긴다. 잠깐만. 혹시 그렇게 따지면 중간에는 중립파인 마르바스가 위치해야 하는 걸까. “…….” 무시무시한 상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안 되었다. 비록 내가 시트리와 농밀한 정사를 나누긴 했어도 시트리는 본래 여성.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아직 아슬아슬하게나마 세이프였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내딛으면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지 몰랐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탈리안.” 파이몬이 슬그머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는 단탈리안에게 바르바토스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바르바토스도 똑같을 거라고 믿습니다. 소녀와 바르바토스는 비록 죽는 그날까지 서로를 증오하겠지만, 단탈리안을 위해서라면 조금은 참을 수 있어요.” “……그럴까요.” 내가 보이지 않는 물살에 끌려가듯이 파이몬의 무릎에 머리를 눕혔다. 부드러운 살결이 내 무거운 두개골을 받아주었다. “그런 야트막한 안전장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바르바토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려요. 만일 저를 없애는 것이 단탈리안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소녀를 죽이지 않을 거에요.” “파이몬도 그렇습니까?” “그럼요.” 파이몬이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우아하게 웃었다. “팔다리만 잘라버리는 걸로 용서할 수 있어요.” “으이구. 그게 무슨 용서입니까.” “적어도 목숨은 붙어 있잖아요?” 순수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주제에 머릿속은 은근히 살벌한 파이몬이었다.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분명히 뇌수가 썩어 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파이몬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만해도 좋으리라, 이제 끝나버렸으니. 어찌하여 그녀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직 나의 슬픔만을 갈망하는가. 왜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도록 부추길까. 나의 고통을 위한 약을 나는 찾을 수 없도다……. 잠결에 잠기면서 중얼거렸다. “파이몬.” “네, 단탈리안.” “의외로 노래는 별로 못 부르는군요…….” “귀를 찢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파이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화냈다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작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바람과 함께 귓가를 장난스럽게 스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만해도 좋으리라. 이제 끝나버렸으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 * “…….” 잠깐 선잠에 잠겼을까. 누군가가 헛기침하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자, 친위병들이 잔뜩 긴장한 채 도열해 있었다. 적군의 검주가 이곳을 향해 돌파해오고 있기 때문이겠지. 더군다나 적은 단신으로 몇 겹이나 되는 전열을 꿰뚫었다. 사상최강의 전사임이 분명했다. “군사를 뒤로 물려라.” “전하. 그건 경호상의 이유로 불가하옵니다.” 자크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충실한 용병은 언제나 내게 직업정신이 무엇인가 보여주었다. 그는 작은 세계밖에 몰랐지만 그렇기에 자크리의 세계는 단단했다. 그 강도는 마땅히 경탄스러웠다. “우리 둘의 인연도 제법 오래되었군, 자크 보놈.” “예. 전하께서 해방동맹의 일원이 되신 그날 밤으로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 파이몬이 나를 이끌어주었지.” 자크리가 입을 다물었다. 자크리에게 파이몬은 하나의 우상과 같았다. 이 작고 옹골찬 난쟁이는 파이몬에게 매혹되어 전 생애를 공화주의에 투신했고, 이제는 파이몬의 후계자,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밝혀져 있는 나를 따르고 있었다. “잠깐 파이몬의 꿈을 꾸었어. 여전히 아름답더군.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얼굴, 심지어 그녀의 감촉마저 나에게는 생생히 느껴지고 있다네.” “…….” “자크리. 프랑크는 느슨한 공화국의 연합체가 되어가고 있다. 사르데냐 또한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야. 일단 공화주의가 양팔을 널리 편다면, 다른 나라들이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시대의 조류에 잠식되겠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우회적이지만 확고하게 전달했다. 나는 오랜 친구를 대하는 말투에서 마왕의 말투로, 감히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어조를 바꾸었다. “본인은 수양딸과 긴밀히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다. 방해는 용서하지 않겠다. 자크 보놈. 귀관은 친위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물러나도록. 활시위를 당겨서 적을 위협하는 것은 허락하되, 일체의 공격 행위를 금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자크리가 고개를 숙이고 보병과 궁병을 이끌고 빠져나갔다. 이윽고 내 눈앞이 환하게 트였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났고, 병기와 병기가 부닥치는 쇳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나는 지팡이로 땅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그것이 풍경에 묘한 리듬을 입혔다. 그리고―――. 데이지가 저곳에서 느릿하게 걸어왔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시녀복은 이미 칼날과 화살촉에 찢겨져 넝마조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핏물인지, 데이지의 핏물인지 모를 새빨간 액체가 그녀한테서 흘렀다. 이제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 것일까. 대검을 쥔 데이지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 그렇게까지. 나에게 도착하기 위해 여기까지 노력했는가.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녀석의 손에서 검을 빼주고 싶었다. 양팔로 데이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일렀다.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참아야 했다. 데이지가 멈추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이지는 핏물이 눈가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하게 얼굴을 문질렀다. 아주 약간 피가 벗겨졌다. 그리고 데이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내 존재를 깨닫고, 데이지가 가볍게 웃었다. 예전이라면 비웃음이라고 착각했을 그 미소였다. 나는 잠시 데이지가 먼저 말할 수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데이지는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마치 시간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체내에서 피가 너무 빠져나간 탓이었다. 내가 입술 안쪽을 이빨로 깨물었다. 그렇게 겨우 입꼬리를 비웃는 모양새로 만들었다. “……완전히 넝마짝이 다 되었군. 그 볼썽사나운 몰골은 무엇이더냐.” 그제야 데이지는 시간을 느낀 것 같았다. 데이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의식적으로 연출해낸 미소.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 여태까지 가공하고 완성한 가면으로, 데이지가 입술을 열었다. “아버님을 뵙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했습니다.”   00488 무엇을 위하여 =========================================================================                        “…….” “효녀라고 칭찬해주지 못할망정 옷차림을 지적하다니요.” 데이지가 자꾸 무엇인가를 말해나갔다.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적당히 어울려주었다. 그러나 내 머리 한켠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것을 생각했다. 마치 얼굴 가죽이 머리와 분리되어서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제법 익숙한 감각이었다. “…….” 귓가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방금 전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와 똑같았다. 파이몬의 음색이었다. 나는 그것이 파이몬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데이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르바토스 섭정도 잔뜩 귀여움을 받았지요. 아버님. 혹시 돼지가 교접할 때 어떻게 신음하는지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한 번쯤은 경청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과연, 생살이 찢어질 때는 돼지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데이지가 비웃었다. 바르바토스에 대한 나의 애정을 이용해먹을 속셈이겠지. 과거에 나는 분노했다. 공개처형식이 열린 그날, 나는 데이지가 라우라와 파이몬을 무너트렸다는 생각에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데이지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자결하라고 명령했다. 나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데이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괴로웠겠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참아냈다. 심장에 새겨진 노예각인이 삐꺽거리는 것을 견디면서, 내 한마디 한마디에 의해 내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인내하고, 어떻게든 이곳까지 당도했다. 최후를 위해서.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구하기 위해서. “데이지.” 그렇지만 나는 구원과 같은 단어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데이지가 어떻게 생각해주더라도 그러했다. 바뀔 수 없는 사실이 이곳에 비석처럼 박혀 있었다. 나에게 안락한 위안 따위는 절대로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제 괜찮아.” 그걸 지금부터 밝힌다. “이제 더는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아, 데이지.” “…….” 강철과 같이 차가웠던 데이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저 아이는 현명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어느 누구보다도. 겨우 약간의 암시에 불과했지만, 데이지는 이 암시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으리라. 하지만 사람은 이해하고도 거절하고 싶은 것, 거절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연기라니……잠꼬대가 심하시군요.” 눈동자가 유독 검은 여자아이였다. 갓 백지에 찍어 누른 묵색의 붓글씨처럼, 데이지의 머리카락은 한없이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매끄럽게 윤이 났다. 그녀는 나를 만났을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 세계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확신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한 알았다. “아버님의 말씀은, 원래부터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서 두려웠다. 그녀는 이미 이곳이 무대이며 자신이 어떤 배역이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마을사람들이 죽어나가 시체로 널브러진 가운데, 이 아이는 이미 눈앞의 학살자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나섰다. 그것이 나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죽여야 한다. “헛소리가 심했습니다만, 오늘따라 유독 헛소리의 농도가……농도가 지독합니다. 의미, 불명이군요.” 언제든 죽일 수 있도록. 내가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당연히 데이지를 죽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나에게 죽는 것을 납득하느냐 마느냐. 오직 그뿐이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정을 품으면 어떻게 되는가. 혹시라도 나를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안 되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살인이라는 것은 변명할 도리가 없이 악한 짓거리였다. 살인을 저지른 자, 그것도 끝없이 학살을 자행한 자는 어디까지나 악인으로 남아야 했다. 악인이 아닌 사람에게 자신이 살해당한다……그런 구도를 나는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데이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데이지에게 언제나 악인으로 남고자 결심했고, 따라서 언제 어디서 데이지가 살해당하더라도 그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게 안배했다. 어떤 찬란한 대의가 있어서 네가 죽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를 살해하는 내가 악인이므로, 변명할 구석이 없는 지점까지 도착하고 그곳에 영토를 선포한 악인이므로, 너는 살해당한다. 무미건조한 방정식. 하지만 간결했다. “아버님은, 옛날부터 그런 부분이…….” 데이지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입술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데이지가 대검을 휘둘렀다. 어떤 심정에서 검을 움직였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연기가 간파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이쪽이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기를, 데이지는 내심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진심 어린 살기. 칼날이 허초가 아니라 정말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나는 미동하지 않았다. “읏……!” 데이지가 급격하게 대검을 멈추었다. 칼날이 내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데이지의 시험은 실패했다. 그녀는 표정이 허물어졌다. “어째서……어째서 피하지 않는 겁니까.” 가여운 데이지. 나의 딸.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어째서…….” 단 한번도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녀가 힘들어 할 때 부드러운 위안을 남겨주지 못했다. 그녀가 고독에 몸서리를 칠 때 결코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 내가 데이지에게 배역을 강요했다. 나를 증오하라고 요구했다. 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도 모른 채. 그렇지만 데이지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내게 따라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담아서. 데이지의 몸을 안아주었다. “아…….” 너무나도 작은 몸집. 내 가슴에 들어오고도 빈 공간이 한참 남았다. 이렇게나 작고 가냘픈 아이였다.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저질렀는가……. 이 아이에게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하고, 고문하게 만들고, 인간의 마음이 죽어버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를. 단순히 위험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안하다…….” 단탈리안은 누구에게도 사과해선 안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악인으로 남아야 하는 대명사였다. 따라서, 이것은 나 자신의 사죄. 온전히 나한테서 발언되는 사과의 말이었다. 데이지가 내 품안에서 떨고 있었다. “너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어. 전부. 전부 내 잘못이야…….” 처음에 데이지는 반항했다. 자신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파이몬이 사라지고, 바르바토스의 죽음마저 예정된 가운데, 자신마저 죽는다면 아버님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아니면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아버님을 죽이겠다며 절규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독약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단순한 독약이 아니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인간을 즉사시키는 맹독 중의 맹독. 제레미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독극물이었다. 마왕인 나에게는 한 병만으로 부족하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꽤 여러 병을 준비했으니까. “아버님, 그건……?” 병마개를 열어 무색무취의 독약을 마셨다. 식도가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내장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식도와 위장이 녹아내렸다. 나는 고통에 의식이 아득했지만, 필사적으로 두 번째 독약을 비우고, 세 번째 독약까지 입안에 한가득 머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물약의 정체를 알아채고 데이지가 달려들었다. “아버님!” 조금 더 가까이. “안 돼……독약의 종류를,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아, 아아! 안 돼……!” 더 가까이. “싫어……이런 건, 싫어요…….” 이윽고 데이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을 때. 나는 오른손으로 힘겹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곳으로, 나는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 데이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 내 입술에 얽혀들었다. 역시 영리한 아이였다. 조금 더 데이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조금 더 데이지의 곁에 머물러주고 싶었다. 머무를 수 있을 때는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머무르고 싶어진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시간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후회란 언제나 이런 형태로 다가왔다. 하지만, 적어도 최후를. 독약이 조금씩 내 입술을 통해서 데이지의 입술로 떨어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약물은 다 흐르고 사라졌다. 우리가 천천히, 무언가 아쉬운 듯이 입술을 떼었다. “……아파요, 아버님.” 데이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나 역시 똑같이 웃고 있겠지. 얼굴에 감각이 없었지만 확신이 있었다. “제레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니까.” “아팠어요……무척.” 데이지는 내게 응석을 부리며 꾸욱 안겨왔다. 이미 우리 두 사람의 마력이 폭주하고 있었다.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바위조각과 돌조각이 중력에 거슬러서 허공에 부유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풍경. 우리 두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종착역이었다. “이렇게, 아버님이랑 나눈 말도 기억도 사라지고……아무도 아버님을 기억해주지 못하고…….”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게다가, 하고 내가 말했다. “솔직히 다른 사람한테 기억되어도 좋을 만한 건 없으니까.” “아버님은 항상 너무 삐딱해요.”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조금 더 강하게 데이지를 안았다. 아까부터 데이지는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죽는 것이 무서운 걸까. 이대로 사라진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공포스러운 걸까. 생각해보면, 데이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두렵겠지. “끝까지 같이 있어줄 테니까.” “아버님.” “그래.” “……좋아해요.”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품안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지의 생명도. 내 생명도. 데이지가 내쉬는 숨결이 조금씩 약해졌다. 부드럽게. 나는 어딘지 모르게 데이지의 촛불이 아주 조금 더 먼저 꺼지리라는 사실을 느꼈다. 그것에 안도했다. 내가 죽은 것을 느낀 채로 데이지가 떠나길 바라지 않았다. “…….” 시간이 무척 오래 흐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데이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평생 그녀에게 고통밖에 안겨주지 않았지만, 최후에 미소를 안겨주는 것만큼은 해낸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이 죽어가는 감각. 머릿속이 정전되어가는 느낌. 이미 언젠가 한번 경험해본 감각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살아가는 건 싫어도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왜 죽는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정말이지. 전신에 휘몰아치던 마력이 사방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몸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코로 내쉴 숨결조차 없었다. 나는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더 데이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득해졌다. 사고가 정지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리고…………. “…….” 마침내, 나의 두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땅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잿빛 투성이의 하늘.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하늘 사이를 가린 나뭇잎들은, 이곳이 숲속 한가운데임을 알려주었다. “……성공인가.” 내가 중얼거렸다. 자조하려는 느낌으로 말해보았지만 뜻밖에도 물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데이지를 위한 눈물일까. 한동안 그 자리에서 소리를 죽이고 울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데이지를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하니까.   00489 지키는 자 =========================================================================                        어떤 최후를 맞이해야 올바른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로지 이 생각에만 골몰했다.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서 웃을 때도. 다른 마왕들과 심각하게 회의할 때도. 심지어 매우 끔찍한 일이지만, 연인들과 살을 섞을 때마저 나는 이따금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에게 찾아올 때마다 눅눅하고 차가운 습기처럼 두개골에 달라붙었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 문득 뒤를 쳐다보았다. 사방에 나무가 우거져 있었기에 시야는 극히 짧았다. 저 너머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불러일으킨 전쟁 때문에. 여태까지 학살한 사십만 명에서 더 얼마를 더해야 할까. 나는 이제부터 간단하게 오십만 명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십만 명. 오십만을 죽여버린 사람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파이몬을 내 손으로 직접 살해하기 이전까지는, 아주 명확한 계획이 있었다. 처형장에서 악인으로 사형을 당한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내가 저지른 짓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그만이었다. 제8차 월맹군. 백합 전쟁에서 꼭두각시 전쟁까지. 바타비아의 총독 관저에서 일으킨 암살 소동도 사실은 자작극이었다.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밝히기만 해도 내 죄값은 사형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처음에는 나를 두둔하려는 사람도 많겠지. 공화주의에 찬동하는 지식인. 월맹군의 성과에 눈이 멀어서 무조건 신생 마왕군한테 박수를 보내던 마족. 노예해방령에 의해 사유재산을 갖게 된 자들. 그러나 한 명씩 입을 다문다. 월맹군의 주범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많은 이들이 항변하리라. 어찌 되었든 월맹군은 승리했노라고. 애당초 먼저 음모를 꾸민 것은 파이몬이요, 이를 이용해서 마왕군에 승리를 안겨다준 단탈리안의 책략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수십만 명이 죽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이야 언제나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 명씩 입을 다문다. 백합 전쟁의 전말을 전해듣고도 많은 이가 항변하리라. 중립파 마왕들을 숙청한 것이 순전히 기만에 불과했으며, 단탈리안이 의도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 폭로되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하게 한 명씩 침묵해가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말한다. 마왕들과 대공들 대다수가 단탈리안에 의해 죽은 것 아닌가, 하고. 이제 목소리는 점차 거세진다. 과격해진다. 연이은 전쟁에서 죽어나간 병사들의 목숨이 거론된다. 마침내 마인들은 단탈리안이 자신들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놀았음을 깨닫고, 이 전무후무한 흑막에 끝없이 분노한다. 그때 광장에서는 어떤 함성이 울려 퍼질까. ‘죽여라!’ 십만 명이 하나의 어조와 하나의 열망으로 소리치리라. ‘단탈리안을 죽여라!’ 완벽한 무대. 신들조차 저주할 정도로 악마와 같은 본성을 타고난 마왕. 자신의 사욕과 가학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마인과 인간종을 조종하고 학살했으나, 마침내 범행이 탄로나서 인민의 심판을 받는다. ‘죄인. 마지막으로 남길 참회의 말이 있습니까.’ 사형집행을 맡은 자가 말한다. 마르바스일 수도 있고, 다른 마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점 찍어놓은 처형자는 다름 아니라 데이지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는 사람이 내 목을 자른다. 그것이야말로 흠집 하나 없는 결말이지 않은가. ‘참회?’ 십만의 성난 관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내가 미소를 짓는다. 생애 마지막 연기가 될 미소를. 나는 완전무결한 연기를 펼쳐내겠지. 한없이 환희에 가득차서 희생자들과 인민들을 모욕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참회한 적이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 쾌락이었고, 보다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이 내 과업이었다. 백만 명도 죽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후회라면 후회로구나. 왜 나는 더 죽이지 못했는가!’ 그 순간, 절대적인 악이 처벌되는 광경이 역사에 새겨진다. 정적이 가라앉는다. 내가 내뱉은 망언에 사람들이 경악한 것이다. 곧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민들이 분노하여 온갖 물건을 던진다. 처형장은 난리가 나고, 어서 단탈리안을 죽여버리라는 소리만이 가열차게 반복된다.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악으로 남은 채. 딸아이가 휘두르는 대검에 의해 단탈리안은 사라진다. 이것이 최선.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욱……!?”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분명히 제대로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헛딛었다. 아직 새로운 육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낙법을 펼치지 못해서 몸이 무척 쓰라렸다. 흙먼지가 얼굴을 덮었다. ‘쫓아오는 녀석은 없겠지.’ 뒤쪽을 바라보았다. 수풀이 무성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걸지도 몰랐지만, 일단 추격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게 중요했다. 이 계획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내가 발길을 재촉했다. 무릎에 심하게 상처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내 몸뚱어리는 웬만큼 자잘한 상처 따위는 너끈하게 버틸 수 있었다. 생각이 바뀐 시점은 파이몬이 죽고 난 이후. 나는 파이몬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항시 품에 안고 다녔다. 가끔 생각이 정지할 때마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하는 우울감이 몰려올 때마다, 나는 붉은 손수건을 꺼내서 가볍게 코를 파묻었다. 그러면 내 게으른 우울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과연 죽음만으로 충분한가. 일종의 강박증과 같았다. 파이몬이 잠든 황궁의 건물에 홀로 들어가서 나는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부족했다.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처형식에서 공개적으로 처단당하는 것이 정말로 최선의 결말일지, 어딘지 모르게 의문이 들었다. 어두운 안치소. 여태껏 내가 학살한 목숨들의 환영이 끈덕지게 손길을 내밀었다. 환영은 단순히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마저 홀렸다. 시커먼 손가락들이 내 팔뚝과 종아리, 허벅지, 목덜미를 할퀴었다. ‘죽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나는 환영들에게 물어보듯이 중얼거렸다. ‘이것들을 전부?’ 당연하게도 그림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생전에 내뱉었던 소리를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이들은 내 기억과 심리가 투영된 잔상이 분명했으며, 나 자신이 질문에 만족하는지 안 하는지 판별해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무얼 더 이상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 사고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했다. 하지만 데이지가 연기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불현듯, 뇌우가 내려치는 것처럼 해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해답의 형태로 주어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결정적인 질문의 형태로 먼저 내 두개골을 뒤흔들었다. ―――내가 죽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데이지에게 정체를 간파당하고 나서야 이 중대한 질문이 나에게서 피어났다. 틀림없이 질문 중의 질문이며, 가장 무거운 질문이었다. 나는 단탈리안에 너무나 심취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하나의 착각, 그것도 하나의 '의도된 착각' 아니던가. ‘전부 끝나버린다면……?’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죽든 말든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아갈지 몰랐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탈리안의 악행은 유구하게 전해져서 그 소임을 다할 것이었다. 허나 만일 내가 죽는 것과 함께 이 세계마저 끝나버리면 어찌 되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절규했다. 잭 올란드를 죽인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사십만 명의 생명이 죽어나간 것이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파이몬의 숭고한 이상도. 바르바토스의 아름다운 신념도. 전부 없었던 일로.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 내가 죽을 경우 이 세계 자체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보통 죽는다는 것은 어둠에 드는 것. 그림도 소리도 없으며,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나의 성격과 기억과 목소리와 뉘앙스가 모조리 사라진다. 그것까지는 괜찮다. 마땅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죄악이 소리없이 증발해버리는 것만은―――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세상은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작자였는지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에 의해서 얼마나 수없이 많은 생명이 바스라졌는지 철저하게 기억해야 한다. 거기에는 파이몬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라는 소녀가 있었다. 나의 딸. 데이지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으며. 그 책임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죽지 않아야 했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고민했다. 얼마나 사고에 침잠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안치소에 들어갔을 때는 하늘이 어두웠고, 나왔을 때는 새빨갰다. 나중에야 내가 이틀을 꼬박 그곳에 틀어박혔음을 알았다. 해답은 찾았다. 나머지는, 실행에 옮기는 것뿐. ‘단탈리안은 죽는다.’ 먼저 라피스. 언제나 내게 조력해준 동반자. ‘하지만, 단탈리안의 신체가 아니라 내 의식은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 말씀은……?’ ‘이바르의 인형을 사용하겠어.’ 라피스는 이미 모든 걸 알아들었다. ‘끝없이 책임을 지시려는 것이군요.’ ‘그래.’ 이바르의 인형에 의식이 옮겨 심어진 채로 나는 살아간다. 단탈리안으로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단탈리안이라는 오해를 만들어낸 장본인, 마땅히 죄악을 짊어져야 하는 의식으로서,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단순히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에 머무른다. ‘저는……다시는 전하를 뵙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이 누린 행복과 애정은 전부 버린다. 라피스도, 라우라도, 이바르도, 다른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설령 알아낸다 하더라도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 이것이 최선. 단탈리안은 처벌받는 동시에 영원히 이 세계를 지탱하도록 강요받는다.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판결이었다. ‘나는 네가 살아주기를 원해. 라피스. 나는 잊어버리고…….’ ‘그건 불가능합니다.’ 라피스는 거절했다. 나를 만날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마왕성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고자 했다. 그녀가 나를 설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를 설득할 수 없었다. 라피스 라줄리는, 그녀의 주군인 단탈리안과 함께 저물었다. 다음은 이바르. ‘아, 안 됩니다. 전하. 저는 못해요……저는 못해요, 전하.’ 단탈리안을 계속 연기하라는 요구. 그리고 앞으로 결코 나를 만날 수 없다는 통보에,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절망했다. 차라리 마왕 단탈리안과 함께 죽을 것을 요구했다. 나는 라피스에게는 그런 최후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바르는 예외였다. 단탈리안을 끝까지 연기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바르 이외에 그런 인재는 전무했다. ‘저뿐입니까.’ 이바르가 망가진 인형처럼 자조했다. 동정심이 들었지만, 이미 한낱 동정심 때문에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너무도 먼 곳까지 와버렸다. 게다가 이바르도 알고 있었다. 내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에 이바르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전하.’ 결국 이바르도 납득했다. ‘영원히 전하와 만날 수 없음을……그 사실을 알고도 부정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데이지는 이런 결말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단탈리안의 본체는 그녀와 함께 죽어주었다. 데이지는 죽는 순간까지 단탈리안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위안했으리라.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오히려 지금부터다. 의미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영원히.   00490 지키는 자 =========================================================================                        드디어 숲에서 빠져나왔다. 땅바닥에 넘어진데다 나뭇가지에 쓸려서 몸이 묘하게 피곤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준 인형인지라 삐끄덕거릴 위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하게 다루는 편이 좋겠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몸은 단순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한낱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허투로 내버려둔 채 모략을 진행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했다. “…….” 살아남는다, 인가.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생존만 염두에 둔 적이 있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그런 시절도 있었다. 아직 사람들을 충분히 죽이지 않은 무렵이었을까. 목숨만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는가……. 그 시절이 좋았다. 무엇이든지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훨씬 더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질렀다. 지금 나는 똑같이 살아남는 것만을 바랐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 도저히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겠지. 살기는 쉬워도 죽기는 어렵다. 내가 작게 웃었다. 뭐가 우스운 건지 몰라도 매마른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품안에서 순간전이 마법서를 꺼내 두 조각으로 찢었다. 마나가 하얗게 피어오르면서 온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나는 설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새하얗게 눈으로 덮인 벌판뿐. 단 한 군데, 당장 쓰러질 것처럼 낡아빠진 오두막이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그림으로나마 본 기억이 있는 풍경이었다. 이바르의 본체가 숨겨진 장소. 원래 이바르는 모스크바 왕국의 두메산골에다 본체를 놔두었다. 인적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도 여기에서 사나흘을 꼬박 걸어야 했다. 밤새서 걸을 경우에만 그러하고 실제로는 일주일이 훌쩍 넘을 터. 벽지 중의 벽지. 순간전이 마법서에 좌표를 입력해두지 않았다면 절대로 찾아올 수 없는 오지였다. “으으. 춥다, 추워…….” 내가 코를 훌쩍였다. 비교적 따스한 대륙의 중부지방에서 외딴 북방의 산골짜기로 떨어졌다. 살갗이 알아서 쪼그라들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신기했는지, 정령들이 눈밭에서 빼곰 고개를 들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 누구일까? 누가 우리 마을에 찾아왔을까? ─ 인간이 아니야. 은랑도 아니야. ─ 정체불명의 이방인. 인기인의 예감. ─ 질투해야 하는 거? 내가 빵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령의 언어가 들렸지만 신기하게도 정령들의 감정이 전해지지 않았다. 원래 이게 정상이긴 했지만, 요 수년 동안 마인의 감정을 자연스레 읽어온 나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 상냥한 사람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거야. ─ 안 돼. 미소가 예쁜 사람일수록 속이 음흉하다고 들었어. ─ 천진난만한 시절, 낭만 넘치는 약속, 그리고 예정에 없던 아이. 눈물 없이 관람할 수 없는 파탄과 배신의 36시간……. ─ 유비무환. ─ 일단 경계해보는 것으로. 정령들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자기들 딴에는 위협한답시고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귀여워라. 여름이 다가온 바람에 추위를 좋아하는 정령들은 죄다 북방에 몰려왔겠지. 수많은 정령들이 두더쥐 게임처럼 고개만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잠깐만 지나갈게.”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마왕성에 있을 정령들이 떠올라서 표정이 굳었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나와 함께해준 아이들. 그 아이들도 마왕성이 무너지면서 같이 소멸했겠지. 라피스도. “…….”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렇다. 나에게 무언가를 보고 흐뭇해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연인이고 부하고 모조리 희생시킨 희대의 악인이 나 아니던가. 이제 와서 인간적인 척 안면근육을 비틀어봤자, 스스로에게도 우습고 역겨울 따름이었다. 눈처럼 하얘질 것. 단지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어 살아갈 것. 이것만이 간신히 내게 허락할 만한 일이리라. 오두막에 들어서자, 온갖 잡다한 물품이 나를 반겼다. 저절로 온도를 조절해주는 망토며 물이 떨어지지 않는 수통, 이바르의 예비인형들과 수북하게 쌓인 금화까지. 모험자가 발견했다면 군침이 질질 흐를 만큼 호화스러운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격 하나 꼼꼼하군.” 내가 쓴웃음을 짓고 오두막 벽에 기대었다. 어깨에 망토를 덮자 몸이 딱 적당히 따스해졌다. 다만 얼굴에 스치는 공기가 몹시 서늘했다. 수백 년. 수천 년이나 정체된 공기가 오두막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검은색 관이 덩그러니. “…….” 잠깐 호기심이 들어서 관짝에 누워보았다. “의외로 편해…….” 흡혈귀가 사용하는 관은 달라도 뭔가가 달랐다. 쿠션이라고 해야 할까. 푹신푹신한 재질의 가죽이 안쪽에 덧씌워져 있었다. 잘 보니까 숨구멍 비스무리한 통로도 몇 개 뚫렸다. “하하.” 이러니까 정말로 죽은 거 같은걸. 시체가 된 단탈리안, 이곳에 등장. 아니. 더 이상 단탈리안이라고 자칭하면 안 되는가……. 단탈리안은 데이지와 함께 죽었다. 그것이 나를 알아준 데이지한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쟝 볼레? 프랑크에서 썼던 이름이지만 안 되었다. 조금 유명했으니까. 더 평범한 이름, 술에 술을 타고 물에 물을 탄 것처럼 평범한 이름이 좋았다. 글쎄, 뭐가 괜찮을까. “으으음.” 나는 관짝에 틀어박혀 고심했다. 제3자가 본다면 상당히 포스트모던한 광경이리라. 사흘 내내 제대로 똥을 싸지 못한 변비환자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고민하다보니, 문득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쟈코모. 쟈코모는 어떨까. 잭 올란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잭을 사르데냐어로 바꾸어서 읽으면 쟈코모가 되었다. 올란드라는 가문명까지 배끼면 곤란하므로, 나는 즉석에서 스크루타라는 성을 지었다. 대충 현재 내 처지에 빗대어 고대제국어에서 따왔다. 사르데냐가 전화에 휩싸이면서 꽤 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나는 사르데냐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 전쟁이 두려워 도망친 피난민. 그래서 쟈코모 스크루타.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닌 한 명의 남자가 곧바로 만들어졌다. 이런 가명이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인간종의 마을이나 도시에 나가서 써먹을 때가 있겠지. “……나 참.” 이런 처지가 되고도 여전히 미래를 염려하고 계획을 세우는 건가. 정말이지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이제 미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상당히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이바르한테 넘겨주었다. 웬만한 사고가 터져도 이바르가 알아서 잘 대응해줄 것이었다. 애당초 이번 전쟁만 끝나면 마왕 단탈리안은 일선에서 물러서기로 되어 있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공개처형식을 망친 장본인이 단탈리안의 양녀였다.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멀쩡히 제국의 흑막으로 활동한다면, 제국에 기강이 바로 설 리 만무했다. 단탈리안은 반쯤 은퇴하여 정치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다. 그렇다면 이바르도 충분히 본연의 정치력으로 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대륙을 조종하고 우롱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쯤은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륙이 완전히 안정되었다 싶으면, 그때는……이바르가 결정하겠지. 슬쩍 관뚜껑을 닫아보았다. 뚜껑이 관을 덮으니 마치 외부세계와 단절된 것처럼 적막했다. 완벽한 무음(無音). 완벽한 어둠이었다. 유사-죽음이라고 표현해도 좋았다. 너무 좁아서 그런지 하루 내내 나를 괴롭히는 환영마저 이곳에는 없었다. 나는 지나치게 좁은 곳에 있으면 환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나쁘지 않겠다. 환각이 보이지 않고 환청이 들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게 원래 내가 평범하게 느끼는 감각이었구나. 무언가 어색했다.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불안하다고 해야 할지. 당장이라도 파이몬이 귓가에서 사랑 아닌 사랑을 속삭여야 할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정신병자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정신병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이미 사람으로서 끝장난 것이었다. 서서히 잠이 쏟아졌다. 관짝에서 자본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안식에 아주 조금, 다가선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했다. “도대체 어디서 주무시는 것입니까.”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눈이 떴다. 관뚜껑이 열어져 있었다. 눈앞에 금발의 소녀, 이바르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뇌수가 잠기운에 절여져서 사고가 혼란스러웠다. “이바르?” “예, 이바르입니다. 나 참. 어디로 사라지셨나 싶었더니 소녀의 방에 놔둔 관짝에 숨으셨을 줄은……전하께서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시고. 이제 와서 술래잡기를 즐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지요.” 술래잡기라니? “회의에서 도망치시려 해도 안 됩니다. 켄타우로스의 대부족장들이 벌써 접견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십 분이 넘었습니다. 여기서 더 무슨 결례를 범하시려는 것입니까.” 아아. 그랬다. 회의가 있었다. 언제나 회의야 있었지만. 언제도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언제나 회의가 있었다. 내가 관을 박차고 이바르의 침실에서 헐레벌떡 나왔다. 문 바깥에서는 라피스가 서 있었다. 라피스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옷이 삐뚤어졌습니다, 단탈리안 님.” 미안하다. 내가 미소를 짓고 싹싹 빌자,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다가왔다. 서로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 그곳에서 라피스는 내 옷깃과 넥타이를 능숙하게 매주었다. “단탈리안 님은 대체로 외견에 신경을 너무 안 씁니다. 마왕으로서 체면을 지켜주십시오.” 외면을 안 꾸며도 내면이 아름다우니까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정신상담사가 필요하군요.” 죄송합니다. 조금 까불어봤습니다. “자아, 자아. 주군도 충분히 반성하는 것 같으니 넘어가게.” “라우라……당신이 항상 단탈리안 님의 어리광을 받아주니 문제입니다.” “라피스 언니도 만날 주군이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면서 무슨 소리인가.” 라우라가 웃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웃음소리였다. “어이구, 지각해도 한참을 지각했네. 우리 단탈리안이 많이 컸어?” “바르바토스. 부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체신머리 없게.” “체면은 너나 차려. 나는 회의에 참석해주는 걸로 의리를 다했으니까.” 바르바토스가 손을 휘휘 저으면서 술병을 치켜들었다. 회의실에서 당당하게 술을 꺼내 마시는 마왕은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바르바토스밖에 없겠지. 파이몬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단탈리안. 어떻게든 소녀가 끌고 왔는데 태도가 저래서…….” 파이몬이 바르바토스를 끌고 왔다고? 놀랄 노 자로군.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끌고온 것 자체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어 유구하게 전해져도 될 만큼 대단한 업적이니까요. “아, 바르바토스! 나도 한입만 줘! 그거 겁나게 비싼 술이잖아!” “한심하기는. 남이 입에 댄 술을 뭘 마시겠다고 졸라아.” “응? 나는 남이 따먹은 여자랑 남자도 잘만 따먹는데?” “그거 정말 대단한 자랑이네―.” 시트리와 가미긴.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으라면 어딘지 모르게 날이 빠진 것일까.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서로 투덜거리는 모양새가 묘하게 부드러워 보였다. 기분 나쁘게 언제 그렇게 친해진 겁니까. “아버님. 오늘 회의자료입니다.” 아, 그래. 고맙다. “별말씀을.” 데이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회의자료를 펼쳐보았다. 잘 모르겠다. 이미 전부 안 상태여서 그런지, 눈앞의 글자가 머릿속에 하나도 입력되지 않았다. 무얼. 괜찮겠지. 나는 서류가 없어도 회의를 성공시키는, 매우 유능한 좌장이었다. 편안했다.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라는 확신이 충만하게 다가왔다. 그래. 사실 나는 이런 풍경을, 이 사람들과 함께 일을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나는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내가 상석에 앉자,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음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이몬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시트리는……싱글벙글인가. 가미긴도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의미가 달랐다. 라피스와 이바르 그리고 데이지는,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뒤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아, 여러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   00491 지키는 자 =========================================================================                        “…….” 눈을 뜨자, 온통 어두컴컴했다. 한동안 멀뚱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앞을 바라본다는 자각도 없이. 몸을 움직이니까 판자에 부닥쳤다. 조금 더 팔다리를 움직였는데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다. 여기는 뭐냐. 내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관에 들어가서 누워 있었지. 왜 그런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 행위는 가끔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므로 딱히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관뚜껑을 밀어서 빠져나왔다. “으흡, 으아아아.” 뭔가 한참 자버린 느낌. 사흘에 한 번 잘까 말까 하는 생활이 이어진 지 어언 5년이 훌쩍 넘었다. 설령 잠이 든다고 해도 서너 시간 눈을 붙이면 많이 붙이는 꼴이었다. 이렇게 숙면을 취한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겨울잠을 자고 나온 곰탱이마냥 거하게 하품했다. 그런데 시야에 이상한 것들이 잡혔다. 새하얗고 몽실몽실한 솜사탕 같은 아이들이 관짝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눈의 정령들이었다. ─ 깨어난 거예요. ─ 이 날씨에 자고도 살아남다니 대단해애. ─ 요새 인간종은 무척이나 야생적인 것? ─ 근육남이 대세일 거 같은 예감. 정령들이 소곤거렸다. 이 녀석들 오두막까지 들어올 수 있었나……. “어흥!” 내가 두 팔을 크게 벌려 겁을 주었다. 정령들이 깜짝 놀랐다. 꺄아, 꺄아, 하고 허둥지둥 저들끼리 밟고 부딪치고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도망쳤다. 그런데 내가 한숨을 쉬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였다. ─ ……. 저놈들이 도망치긴 도망치되 오두막 바깥까지 뛰쳐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반경 6미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령들은 물끄러미 이쪽의 기색을 살폈다. 정령들이 작은 목소리로―――그렇지만 나에게는 다 들렸다―――속닥거렸다. ─ 역시 허장성세인 모양? ─ 허우대도 없는데 괜히 쫄은 것 같다는 중론. ─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외교적 타협이 필요한 거야. 벌써 하루만에 내 성향을 파악해낸 듯했다. 이래서 정령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순수한 건지 영리한 건지 잘 분간이 안 되었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블링이와 요정들을 피하기 시작한 것도, 녀석들의 영리한 순수성이 도저히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백색은 그 자체로 나 같은 인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가. 나 바쁜 남자야.”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여기서 바쁠 게 뭐 있는 걸까. ─ 우리는 그냥 신기해서 쳐다보는 건데 자의식과잉인 거야. ─ 허우대에다 정신머리까지 썩어 빠졌으면 이미 답이 없는 수준인 거? “…….” 눈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바람이나 숲에서 사는 애들보다 독설이 차갑구나. 이 아저씨, 까닥 잘못했으면 우울증이 또 도질 뻔했단다. 정령들을 무시하고 여행짐을 꾸렸다. 오두막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온갖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바르한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요긴하게 써먹기로 했다. 내가 행낭을 풀어서 짐을 구겨넣었다. 정령들이 또 슬그머니 다가왔다. ─ 이상해. 우리 말을 알아듣는 인간종은 마법사뿐인데. ─ 이 사람은 심장이 빙글빙글 안 돌아. 마법사가 아니야. 내가 묵묵히 짐을 쌌다. 이제 정령들은 대놓고 내 팔뚝에 매달리는가 하면 허벅지에 앉았다. 나를 새로운 놀이기구쯤으로 취급하자고 합의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반응해본들 물귀신처럼 더 들러붙겠지. 정령은 기본적으로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생명체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 정체가 뭘까? 저엉체가 뭘까? 얼씨구. 아예 한 놈은 내 머리통에 올라갔다. 거긴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니다, 꼬맹아. 정복할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 이유도 모른 채 이별통보를 받은 남자. 십오 년에 걸쳐서 군역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을의 그녀에게는 어째서인지 아비 없는 자식이. 돌아온 남자를 보고 표정이 굳는 여자.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신 연극. 이곳에 개봉박두. ─ 사건을 많이 내놓거라. 사건을. 일단 많은 사건이 벌어지면 관객들은 놀라서 입을 떡 벌릴 거야. 거기서 관객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으면 그만! 사건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실력도 감출 수 있어. ─ 희대의 비평가, 이곳에 강림. ─ 이로써 연극계는 평정되었도다? 이 정령들은 도대체 평소 어떤 문화생활을 즐긴 것일까. 나는 자꾸만 딴죽을 걸고 싶어서 입술이 근질거렸다. 그래도 한 시간이 넘도록 침묵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정령들이 내 머리카락으로 꽈배기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 분과를 창조했으며, 팔뚝은 그네가 되었고, 등짝은 미끄럼틀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침묵을 사수했다. “후우.” 내가 사각형으로 된 가죽가방을 쥐었다. 외양은 평범하지만 이래 봬도 공간마법에다 경량화마법이 중첩된 아티팩트였다. 신체가 손상되었을 경우 갈아치울 예비 인형 부품, 리브라 금화 오만 장에 해당하는 금품, 실생활에 도움이 될 물품까지. 전부 자그마한 가방에 들어갔다. 준비 완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몸에서 놀고 있던 정령들이 미끄러 떨어졌다. ─ 꺄아아아. ─ 삶의 하강곡선을 타고 내려간다아아. 나는 피식 웃고 오두막집을 나섰다. 그대로 정령들을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돌연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이바르의 맹세를 신뢰했으나 세상사에는 만약이란 게 있었다. 만일 이바르가 내 인형에 일종의 추적장치를 달아두었다면? 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서 언젠가 찾아오면 어떻게 될까. 정령을 이용하자. “얘들아. 내 부탁을 들어주면 당분간 놀아줄게.” ─ 어떤 부탁? ─ 우리는 백지수표에 넘어가지 않는 부류. ─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거야. “내가 흔적을 남기면 최대한 지워주렴. 사실 무서운 아저씨들한테 쫓기고 있거든. 막 인간도 잡아먹고 정령도 잡아먹는 아저씨들인데, 혹시라도 내 자취를 발견하고 달려올지도 몰라.” 정령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었다. 자기들 나름대로 원탁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 흔적이라면 마나의 자취나 발자국 등등? ─ 모처럼 쓸 만한 놀이기구가 왔는데 그 정도 수고는 괜찮을지도. 역시 나를 놀이기구로 취급하고 있었다. 정령들이 잠시간 회의를 진행한 끝에 내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오두막집을 나와서 야트막하게 눈이 쌓인 산길을 내려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인간 도시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정령들이 자기네만 믿고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이바르가 제작한 인형은 확실히 튼튼했다. 종일 걸어도 장딴지가 아프지 않았다. 체력과 근력이 본래 내 육체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마왕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이 몸 또한 수면을 취할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사흘 내내 밤을 새서 걸었다. 말인즉슨 사흘 동안 정령들의 말상대를 해주었다는 얘기. 정령들은 정말 일 초도 쉬지 않고 나불나불 떠들었다. ─ 쟈코모는 왜 아저씨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인간을 많이 죽였거든.” 내가 가볍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정령들이 발자국을 지워주었다. “너무 많이 죽이는 바람에 원한을 많이 샀지.” ─ 인간종이 싫어서 많이 죽인 거야? ─ 우리도 인간종은 싫어. 만날 너무 춥다고 툴툴거려. “싫지 않아.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지.” ─ 응? 좋아하는 걸 왜 망가트렸어? 내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 왜 망가트렸을까. 처음에는 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죽였는데 나중에 가서는 그것도 아니었지. 사실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 모르는 거야, 말하기 싫은 거야? “…….” ─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 묵묵하게 길을 걸었다. 정령들도 여기에 관해서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녀석들은 주변 사람의 감정에 민감했다. 내 감정에 동화되어서 정령들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아주 잠깐뿐이었다. 오 분 정도가 흐르자 정령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떠들었다. 지금은 그 떠들썩함이 고마웠다. 환영들이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정령들의 잡담에 묻혔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눈밭이 적어졌다. 땅바닥이 드문드문 드러나나 싶더니 사흘째부터는 갈색이 흰색보다 많았다. 갈색의 비중과 반비례해서 눈의 정령들은 점차 내 동행에서 탈락하였다. ─ 더워어. ─ 녹아내린다~. 한여름의 첫사랑처럼 녹아내린다~. ─ 나는 여기까지야. 너희만이라도, 너희만이라도 끝까지 가줘. 나는 그걸로 만족하니까. ─ 하사관께서는 훌륭한 군인이셨습니다. 마력이 약한 아이들은 흐물흐물한 아이스크림이 되어서 어디론가 떠났다. 아마 우리가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겠지.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때까지 철새처럼 그곳에서 머물 것이었다. 제법 마력이 강한 정령은 사흘째도 버텼다. 그렇지만 나흘째 저녁이 되자, 내 곁에는 오직 한 명의 정령밖에 없었다. 이 정령은 내 정수리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곳에다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 이쪽으로 쭉 걸어가면 무장무장 큰 도시가 나오는 거야. “혹시 도시 이름을 알고 있니?” ─ 노브고로드. 노브고로드. 분명히 모스크바 왕국의 산하에 있는 도시였다. 칼마르 연맹국이나 폴리투니아 왕국과 주로 교역하면서 성장한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 다만, 예전에 비해 성세가 퍽 줄어들어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쇠퇴해가는 북방의 도시라. 지금 내 처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호감이 느껴졌다. 일단 저곳에 둥지를 틀고 시세를 관망하는 편이 좋으리라. ─ 으으, 안타깝게도 나도 여기까지인 거야. 머리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정령을 집어들어서 손바닥에 올렸다. 정령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젠 더워서 안 되겠어?” ─ 태생의 한계를 절감하는 느낌. “여기까지 안내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길 한번 잃지 않고 왔어. 나한테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보려무나. 힘껏 노력해서 들어줄게.” ─ 세계제일의 부자로 만들어주세요. 생각보다 훨씬 더 영악한 정령이었다! 내가 입꼬리를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당히 들어주기 어려운 소원이네.” ─ 만능의 소원기가 아닌 거야? “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조금.” ─ 능력 없는 아저씨. 반박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 그럼 뽀뽀나 해주세요! “갑자기 소원의 난이도가 확 내려갔다…….” 세계제일의 부자가 되고 싶은 꿈 다음에는 나와 뽀뽀하는 것인가. 정령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정령의 하얀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었다. 차가운 감촉이 입술에 머물렀다. 정령은 꺄아, 하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내 손바닥에서 빠져나와 공중을 한 바퀴 비행했다. 내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또 만나자.” 그러자 정령이 활짝 웃었다. ─ 응. 또 만나요, 단탈리안 님! 하고 정령은 저 멀리 산자락을 향해 날아갔다. 녀석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제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어퍼컷을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설마 도중에 깨달은 거냐.” 어쩌면 처음부터 알아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바르에게 미리 부탁을 받아서 내 안내를 담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바르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놓은 오두막에 제멋대로 들락거리는 걸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토록 철두철미한 이바르가 오두막에 아무런 방비도 안 해뒀을 리 만무하거늘. “벌써부터 감이 많이 떨어졌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가방을 고쳐 매고 느릿느릿하게 도시로 향했다.   00492 지키는 자 =========================================================================                        노브고로드에는 간단하게 정착했다. 토지관리인에게 알선받아서 적당한 저택을 구입했다. 도시 외곽. 성벽 바깥에 위치한 2층짜리 집이었다. 본래 어느 소귀족이 사냥용 별장으로 쓰다가 형편이 안 좋아져서 매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손님. 그런데 이건 현찰로 팔아야만 하는 물건이라서…….” “이 정도면 되겠소?” 내가 즉석에서 금화 2백 장을 내놓자 관리인이 입을 싹 다물었다. “하루만 여관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저희가 깨끗하게 청소하고 단장시키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상업의 도시라서 그런 걸까. 손님이 이방인이든 뭐든 돈만 주면 깍뜻하게 대접했다. 나는 청사에서 역시 거금을 들여 시민권을 얻은 다음, 이제 마이 프리티 홈이 된 저택에 안착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생활. 새로운 나. 그런 신선함을 만끽하며, 일주일 동안이나 집안에 틀어박혀 방바닥을 헤엄쳤다. 인형의 신체는 밥을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없었다. 금세 나는 지루함이라는 녀석에게 시달렸다. “이러다 심심해서 죽어버리겠다…….” ─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어때? “닥쳐.” 누구인지 모를 환청에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이제는 환영들을 무시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환각에 시달리든 말든 어차피 간섭할 사람도 사라졌다. 지루함을 유일하게 덜어주는 요소도 이 그림자들이었는데, 툭하면 내 살갗을 찢어발기고 내장을 물어뜯으려 든다는 점만 제외하면 녀석들도 제법 괜찮은 친구였다. “눈깔에 달라붙지만 마라.” ─ 죽어버려. “아. 알았으니까 눈깔은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방바닥에 대 자로 누워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내 눈알을 손톱으로 쿡쿡 찍어누르던 환영이 다행히도 눈동자를 포기했다. 대신에 귓볼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법 실감나게 감촉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환상통에 불과했다. ─ 어째서. 왜……거짓말이야……. ─ 개자식, 배신했구나……. 내가 환영들에 대답하기 시작하자, 놈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그래도 반경 5미터까지 다가오는 놈이 정말로 적었는데 요즘은 기본이 반경 3미터였다. 친구도 없는 자식들. 말상대 해주니까 좋다고 들러붙는 꼬락서니가 아주 볼 만했다. 방구석 폐인 전략은 일주일도 못 넘겨서 좌절했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집에서 꼼짝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끝마쳤거늘, 도저히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있더라도 무언가 정신을 집중시킬 일이 필요했다.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전까지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취미였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떨까.” 모델은 말 그대로 지천에 널려 있었다. 잭 올란드는 전방 2미터 지점에서 머리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묻은 채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았으며, 호크 대장은 목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끊임없이 뭐라고 속삭였다. 파이몬은 지금도 절찬리에 내 등에 들러붙고 있는 중. “너희를 그림으로 그리면 되겠네.” 환영들이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해서 저주를 퍼부었다. 모름지기 대화란 쌍방의 의사소통으로 성립해야 하는데 이 녀석들은 아주 기본이 안 되었다. 시험 삼아서 주먹을 휘둘렀더니 꼭 이빨에 살결이 찢어지는 감촉이었다. “…….” 무서운 놈들. 까불지 말아야겠다. 나는 오랜만에 도시로 외출했다. 규모가 큰 도시라서 그런지 화방(畫房)이 꽤 많았다. 아무 화방이나 들어가서 연필과 종이, 물감과 캔버스를 사들였다. 화방을 운영하는 것은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인이었다. 노인은 내가 퍽 신기하게 보였는지 시종일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귀족 나리이십니까요?” “아니외다.” “가끔 귀족 나리들이 그림에 취미를 붙일 때가 있긴 한데…….” 노인은 이쪽의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분들이 또 금방 그림에 질려버리지요.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으면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어서. 스케치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요.” “질리면 질리는 대로 괜찮은 것 아니겠소, 노인장.” “그게 귀족의 사고방식이지요.” 노인이 딱딱한 호밀빵을 씹는 얼굴로 말했다. “그림도 장인이 하는 일입니다. 좋든 싫든 신들께서 내려주신 천업이지요. 단순히 질렸다고 하여 화폭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가볍게 왔다가 가볍게 떠나는 것이 귀족 나리들의 특권이겠습니다마는.” “걱정하지 마시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스스로를 화가라고 자부할 일은 없을 테니. 그저 그려야겠다 싶은 대상이 있어서 재료를 준비하는 것뿐이오.” “그려야 할 대상입니까?” 노인이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붓을 고르면서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나밖에 남기지 못하겠다 싶은 것들도 생기더군.” “…….” 노인이 왜인지 안색이 진지해졌다.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글쎄.” “화첩도 사가십시오. 그림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이날 기본적인 회화 도구를 구입하는 데만 금화 삼십 장이 들었다. 아마도 노인이 바가지를 씌웠으리라. 달리 돈을 쓸 구석도 마땅치 않아서 알면서도 당해주었다. 서비스인지 뭔지, 노인의 손녀가 수레를 끌고 직접 저택까지 물건들을 배달했다. “합스부르크 집안 싸움이 겨우 끝났다는구만.” 술집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치는데 잡담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사내들이 맥주를 주고받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떠들고 있었다. “무니헨이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남녀노소를 분간하지 않고 죄다 죽였다는 소문도…….” “과연 제국군은 자비가 없어.” 나는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멈추었다. “…….” 그렇구나. 승리했구나. 달리 말해, 이바르의 연기가 성공했다. 만일 라우라가 인형의 정체를 간파했다면 전쟁에 집중하지 못했겠지. 라우라가 지휘봉을 잡지 못하는 이상, 엘리자베트 통령을 이기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라우라는 이바르의 연기에 속아넘었다. 그리고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여 엘리자베트 통령을 패배시켰다. 무니헨 함락은 나에게 그런 걸 알려주었다. ‘잘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역시 당신이 제일이에요. 라우라.’ 라우라는 환하게 웃어주겠지. 그녀는 엘리자베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괴로워했다. 제2차 국화전쟁에서 풀지 못한 숙원을 이번에야말로 해결했다.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나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할까. 라우라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날인데도, 나는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라우라에게 회한 이외에 다른 걸 남기지 못했다.’ 회한. 가문에게 버림당하고.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라우라한테, 나는 또다시 한번 배신을 안겨주고 말았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저택에 돌아왔다. 여기까지 수레를 끌고와준 화방의 손녀에게 심부름값을 주었다. 여자애는 신나서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 방 한가운데서, 내가 무작정 그림을 그렸다. 그날부터 폐인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술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일과가 딱 두 종류로 나뉘었다. 환각들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든가, 아니면 술독에 빠져 지냈다. 때때로 두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대체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내 아틀리에가 금방 그림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화폭에는 파이몬이, 바르바토스가, 라우라가, 라피스가, 데이지가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별로 그리기 싫었지만 군것질거리를 먹는 기분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저택은 내 삶을 요약해둔 전시장처럼 되어버렸다. 가끔 초상화를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그림의 주인들이 저들끼리 떠들기도 했다. 대체로 내 두개골이 술에 절어서 흐물흐물해질 때 그러했다. ─ 언니. 제가 지금 선물 받겠다고 언니한테 이러는 것 같습니까? ─ 아니지. 암. 아닌 것 알고 있지. 그냥 내가 미안해서. 응? 라우라와 바르바토스. 얼마 전에야 접수한 정보이다만, 사실 라우라는 바르바토스를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바르바토스가 내 정실에 되어버릴 위험에 처하자 궁여지책으로 라우라가 미인계를 꺼내든 것이었다. 라피스가 전해준 사건의 전말을 듣고 얼마나 경악스러웠는지.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 그 중심에는 내가 서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말싸움에서 밀린 것일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획 돌려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 단탈리안! 너 그런 짓을 우리 라우라한테 시켰단 말이야!? 시키긴 뭘 시키냐. 멍청아. 너는 지금 라우라한테 속고 있다. 바보가, 수천 년을 살아온 마왕 주제에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인간종 여자한테 헤벌레 빠져서는. 애당초 너는 애정에 너무 약하다. 한 파벌을 이끄는 수장이면서 감정적으로 약점이 지나치게 많다. 그러니까 나 같은 놈한테 숙청당하는 거다. ─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환영이 사라지듯 꼭 그처럼 허물어졌다. 그녀가 없어지고 난 자리에는 차가운 공기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조용히 술병을 들이켰다. ─ 무엇이든지 중독은 해롭습니다. 이번에는 라피스가 잔소리를 해왔다. 사실 라피스가 내게 한 말의 절반은 잔소리밖에 없었다. ─ 연초도 술도 부디 적당히 즐겨주십시오. 단탈리안 님의 정신이 무너질까, 소인은 두렵습니다. 그래. 내가 정신줄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항상 라피스가 옆에서 보좌해준 덕택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도 나를 질책할 줄 알았다. 라피스의 침묵은 편안하면서도 또한 내게 경계심을 안겨주는 힘이 있었다. 이제 라피스는 없다. ─ ……. 라피스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숨결이 내 코앞을 살며시 스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널브러져서 잠이 들었다. 온몸이 물감으로 지저분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을 텐데. 내일은. 내일은 또 무엇을 해야 할까. 내일 모레는? 또, 그 다음날은.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내 삶이 영원히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텅 빈 하루. 과거의 잔상에 사로잡혀서 죽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 하지만 이게 좋다. 먼지처럼 쌓여갈 뿐인 시간이 나에게는 어울린다. 이따금 화방의 손녀가 찾아와서 물감과 종이를 제공해주는 것이 내 유일무이한 사회생활이었다. 손녀는 내 그림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늘고 있다면서, 이렇게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 입장에서는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뇌수를 알코올로 대체하고 깨어난 날이었다. 화실에 처음 보는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 “…….” 그녀는 내가 그린 그림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또 환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집어도 저런 여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내가 끄응, 하고 신음하며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아. 일어났군요.” “……무단으로 집에 침입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데.”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나는 여인이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족이 입는 것과는 느낌이 다른 복장. 양복에 가까운 옷차림이었다. “제가 이 세계에 당신을 안내한 장본인입니다.”   00493 지키는 자 =========================================================================                        머릿속에서 술기운이 단박에 증발했다. 다만 얼굴은 여전히 알코올에 취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눈을 끔뻑 감은 다음에 천천히 떴다. 정신을 차리려고 발악하는 술주정뱅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을 방문하려면, 조금쯤 예의를 차려서 와야 하지 않나.”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서요.” “긴급이라. 참 긴급하게 찾아오셨군.” 나는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팔을 헛디뎠다. 손바닥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기우뚱거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예 머리를 방바닥에 박았을지 몰랐다.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현재 나의 상태를 속일 수 있었다. 실제로 몸이 취해 있긴 했지만―――조금 취했다고 해서 뭐가 문제이겠는가. 나는 약물에 절여진 채로 계략을 짠 적도 수두룩했다. “어머. 괜찮으세요?” 여자가 이쪽으로 달려와서 나를 부축하려 들었다. 나는 여자의 손등을 내쳤다. “손대지 마라.” “……그게 바라시는 바라면.” 여자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목소리에서 옅은 비웃음이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리라. 여인은 기본적으로 나를 깔보고 있었다. 예의바른 말투 너머에서 녀석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 감각, 8년 동안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진 감각은 아주 사소한 뉘앙스라도 놓치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온 거냐.” “본래라면 제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뵐 일이 없었어요.” 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인은 이쪽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탁자 너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다짜고짜 집안에 들이닥친 것만 봐도 대충 상대방의 성향이 엿보였다. 안하무인. 오만방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에 존댓말을 썼다.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였다. 첫 번째, 상대방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일부러 존댓말을 쓰는 성격이다. 두 번째, 상대방이 내게 존댓말을 써야만 하는 사정이 숨어 있다. 확인해볼까. “저는 당신께서 모든 걸 끝낼 때까지 잠자코 관망하고 싶었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리긴 힘들지만, 제가 개입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거든요.” “배려심이 매우 깊으시군. 그깟 말싸움에서 졌다고 사람 하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작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걸.” “그것에 관련해서는 저도 사과를 드립니다.” 여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끄덕거림 한 번에 억만금이라도 달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 가치는 있었다. 방금 여인이 수긍해준 덕분에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첫 번째 가능성이 흐릿해졌다. 8년 전 그날, 여인은 시종일관 내게 반말을 사용했다. 지금은 무언가 강제에 의해서 경어를 쓰고 있다고 보는 편이 그럴듯하겠지. “단순히 사과만 해서는 성의가 없겠지요. 만족하실 만한 보상을 준비했습니다.” “보상?”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든. 아마도 대부분 이뤄드릴 수 있다고, 저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릿결이 아름다운 여자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큰 절망과 괴로움을 느끼셨을지, 계속 지켜본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한 번 무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하는 당신의 연인도. 사랑이 빗겨나간 참극도 모두 되돌릴 수 있습니다.” “…….” “그것이야말로 당신께서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이라고 저는 감히 단언합니다.” 내가 작게 웃었다. 웃음이란 상당히 강력한 제스처였다. 이쪽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 적합했다. 상대방은 지금 나를 치기에 사로잡혀 빈정거리는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최소한 술주정에 몸을 겨누지 못해서 감정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상태로 오인할 것이었다. 더 끌려와라. “다만 저희에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시나리오를 끝내주시지 않으면 공식적인 보상을 안겨드리기 힘듭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간결하게.” “계속해서 단탈리안으로 살아주십시오.” 여자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이미 최고 득점을 달성하셨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은 이 세계에서 가장 안 좋은 입지를 갖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서열 제72위인 안드로말리우스가 더 열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근처에 용사가 사는 화전촌이 있지.” “그렇습니다.”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예, 맞아요. 안드로말리우스는 틀림없이 최약체이지만 아주 강력한 이점. 극초반에 용사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안드로말리우스로 시작할지라도 용사를 제거하거나 수하로 두면 형편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최하위는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 안드로말리우스보다 딱히 나은 점이 없는 주제에 입지 조건마저 최악에 가까웠다. “당연히 바알이 되어서 대륙을 평정하는 것과 단탈리안이 되어 대륙을 평정하는 것 사이에는 아득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단탈리안으로, 그것도 최악의 난이도를 상정하고 들어간 상황에서 대륙을 재패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여인이 눈웃음을 짓고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로서는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길을 찾아내셨어요. 게다가 주요한 마왕들을 모두 숙청한 것도 상당히 좋은 한수였습니다. 제가 아직 전부 말씀드리지 못할 뿐이지…….” “용건만.” 여인이 탁자에 손깍지를 올렸다. 탁자에는 촛불, 그리고 술을 마시다 남은 것처럼 보이는 유리잔이 올려져 있었다. “이대로 외지에 틀어박혀만 계시면 아무런 보람이 없어집니다. 당장 자살하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주시면, 마땅히 당신께 돌아가야 할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자살을 권유하는 방법치고는 별로 우아하지 못한데.” “어차피 가상 속의 의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내가 입 끝을 올렸다. “가상이라.” “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당신께서 애정을 주신 인물들도 이 상태로는 어디까지나 허구에 머무릅니다. 그녀들에게 진정한 삶을 선물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비로소 속죄를 완수하는 것 아닐까요.” 더 끌려와라. “차라리 강제로 끝을 내버리지 왜 나를 설득하고 있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마무리를 짓는 것은 항상 당사자의 의사결정에 따릅니다. 본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무언가를 강제하는 것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흐음.” 아마도 시작을 하는 것조차 내 의지에 달려 있겠지. 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교묘하게 속였다. ‘정말로 지금 당장 시작할 것이냐.’ ‘당신의 시간을 모조리 빼앗을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의미를 알기 어려운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내 대답을 유도했다. 얕디얕은 수작. 거기에 나는 걸려들었다. 그래. 내가 손끝으로 탁자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겼다. 재료는 충분히 모였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가. 약한 불로 지질 것인가. 강한 불로 태워버릴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를 배려해줄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만 질문하겠다.” “예.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질문이라면 무엇이든지.” “여기를.” 내가 탁자를 그만 두들기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가상의 존재라고 단언했는데. 지금 그쪽도 여기에 있잖아. 당신도 그러면 허구에 떠다니고 있는 것인가.” “물론이지요.” 여인이 즉답했다. “저의 본체는 엄연히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의식만 잠깐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가상이라 이 말씀이지.”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른손이 내려가면서 탁자에 놓여 있던 촛불을 건드렸다. 촛불은 등잔째로 아래에 떨어졌다. 쨍, 하고 쇠그릇이 부닥치는 소리가 울리자 여인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여인의 손등을 찍어내렸다. 칼날이 살갗을 뚫고 책상까지 깊숙하게 꽂혔다.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여자의 오른손이 꼼짝없이 탁상에 들러붙었다. “……!?” 여자가 고통을 자각하는 데 약 1초.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으, 아아아아악!?” 여자가 발버둥을 쳤다. 어떻게든 손을 빼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심하게 움직이면 상처가 더욱 깊어질 것을 본능적으로 염려한 것일까. 오른팔만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다른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가상의 존재라고 자인해주니 내 마음이 제법 편해지는군.” “무슨, 짓을! 지금 무슨 짓을!” “아직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그럴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말게.” 나는 유리잔을 잡아서 그 내용물을 상대방의 얼굴에 뿌렸다. 안면에 액체가 쏟아지자 여인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똑같은 내용을 두 번 설명하는 걸 꽤나 좋아하거든.” 내가 품안에서 또다른 단검을 꺼내어 이번에는 여자의 왼손을 찍었다. 공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끊임없이 연달아서 여인이 고통에 잠긴 비명을 질렀다. “후우.” 나는 엽궐련을 꺼내서 오랜만에. 상당히 오랜만에 연초를 피웠다. 제레미가 내 전용으로 만들어준 연초는 이제 없었다. 고급스러운 담배맛에 길들어진 내 취향은 평범한 연초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담배맛이 잊힐 때까지, 그 향기가 그리워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흐아, 아아악……으, 으으…….” 내가 엽궐련을 절반쯤 태울 때까지 여인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봤자 단검이 더욱 파고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몸짓이 점점 약해졌다. 목소리도 금세 쉬어서 보잘것없이 변했다. 마침내 비명이 잦아들었다. 내가 무심한 눈동자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조금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죽여버릴 거야……감히 네 같은 새끼가 나를……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표정이랑 말투가 솔직해져서 좋군.”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담배 끄트머리를 여자의 손등에 문질렀다. 재차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그 비명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담배를 꾸욱, 꾹, 정성스럽게 돌렸다. “그쪽도 나를 관음했으니 알겠지만, 이 저택에는 강력한 반마법이 형성되어 있네. 자네가 의식을 옮겨탄 육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법으로 탈출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지.” “아, 크으읏……!” “자네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 실수를 범했어.” 여자는 눈물과 침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 얼굴이 무척이나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자고로 미인은 괴로워할 때 제일 아름다운 표정이 나왔다. “하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야. 생각해보게. 나는 여태까지 제정신으로 그 모든 걸 짊어지려고 별 난리를 친 사람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술독에 빠져서 지낸다? 정신이 녹아내린 폐인처럼 허구한 날 뇌수에 알코올을 쏟아붓는다?” 내가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전혀 아니지. 자네는 나를 너무 쉽게 봤어. 만약 내가 술에 져버릴 정도로 허약한 인간이었다면 애시당초 이곳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것이야.” “무슨 소리를……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하등한 것이…….” “자네는 내가 술에 떡이 된 순간을 일부러 노렸을 테지.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웬만하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교섭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가.” 여인의 얼굴이 굳었다. “의도, 적으로……?” 내가 빙그레 웃었다. “폐인짓은 소싯적에 많이 해봐서 그런지 연기하기가 쉽더군.”   00494 지키는 자 =========================================================================                        “……말도 안 돼. 그런 거, 가능할 리가 없어.” “신기하게도 나한테 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레퍼토리를 쓴다만. 혹시 자네들끼리 미리 대사를 약속해두거나 그런 것 아닌지 의심스럽네.” 내가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설산의 오두막에서 챙겨온 가방이. 가방 속을 뒤져서 쇠사슬을 꺼내었다. 마력의 운용 자체를 방해하는 쇠사슬이었다. 그걸 챙겨서 다시 여자에게 다가섰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면서 날카롭고 불길한 소리를 냈다. “염병할 개자식. 이딴 짓거리를 저질러놓고 무사할 것 같아……?” “글쎄. 세상 일이란 것이 본래 태반은 도박이니 말이다. 일단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아하니 내가 아주 패배한 것 같지는 않아. 뭐, 성공할 확률이 조금 더 높다고 점쳤다네.” “내 부하들이 전부 모니터링하고 있어……지금 당장 머리를 처박고 사죄해!” “오호라. 그거 참 무섭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잠이 들 때마다 데이지가 곧잘 불러준 노래였다. 데이지에 비하면 노래 실력이야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나는 음정과 박자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멜로디를 불렀다. “미리 경고하는데 얌전히 있어라.” 내가 쇠사슬을 들고 여인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양손은 단검으로 찍어 내렸으니 우선 발목부터 쇠사슬로 묶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쇠사슬에 달린 수갑으로 발목을 봉쇄하려 들자, 여인이 이쪽으로 발길질을 날리는 것 아닌가. “어이쿠야.” 까닥 잘못했으면 머리가 정면으로 차일 뻔했다. 여인은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았다. 고통 때문일까, 치욕 때문일까. 그녀는 이빨을 으드득 물었다. 목소리가 씹혀서 너덜너덜해진 채로 새어나왔다. “내 몸을, 건드리지 마.” “…….” 한숨을 쉬었다. 이런 경우에 나는 카리스마의 부재를 실감했다. 바알이나 아가레스, 바르바토스, 심지어 파이몬조차도 목소리에 일종의 언령(言靈) 같은 것이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날것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맥박치는 것. 위압감. 상대방으로 하여금 저절로 당신의 명령에 수긍하게 만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런 게 부족했다. 좋게 말하면 부드러운 남자였고, 나쁘게 말해서 쉬운 남자였다. 항상 상냥하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나의 이 마음을 왜 세상 사람들은 몰라주는 것일까. 성의의 문제인가. 역시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인가. 내가 벽면에 장식용으로 걸린 창을 빼왔다. “어?” 굵기가 상당히 얇은 창이었다. 천성이 부드러운 나조차도 손쉽게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대인무기라기보다 사냥에서 멧돼지를 잡을 용도로 쓰는 무기였다. “잠깐……잠깐만.” 따라서 나는 동물에게 창날을 내리찍는 기분으로 여인의 허벅지에 창을 꽂았다. 푸욱, 하고 근육이 헤집어지는 감각이 창대를 타고 손바닥에 전해졌다. 질긴 근육에 가로막혔는지, 아니면 뼈에 걸렸는지, 창날은 도중에 멈추었다. “아아아아악―――!” 내가 창날을 뽑았다. 검붉은 구멍에서 하수구가 역류한 것마냥 핏물이 흘러나왔다. 창이 빠질 때 다시 근육을 엉망진창으로 긁은지라, 여자의 비명은 더욱 더 격해졌다. 방바닥에 창을 던졌다. 창대가 두어 번 튕기더니 또르르 굴러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여인의 턱을 잡아서 이쪽으로 비틀었다.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여인의 입에서는 침물이 흐르고 있었다.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가.” “으, 아으……끄윽…….” “나는 자네를 죽이지 않을 것이야. 내가 죽어야만 이 세계가 마무리된다고 말했지. 자네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네. 이쪽 세계에서 죽여본들 멀쩡히 저쪽에서 살아나겠지. 그건 내가 바라는 구도와 조금 거리가 멀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구멍이 뚫린 바로 그 근처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눌렀다. 여인이 경기에 떨었다. 안면 근육이 통제되지 못해 제멋대로 경련했으며, 당장 정신이 나갈 것마냥 눈동자가 조금 뒤집혔다. 끄윽, 꺽, 하고 신음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딱 죽이지만 않고 고통을 안겨줄 계획이다. 하지만 나에게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고통의 정도가 덜해질 수는 있지. 가령, 지금처럼 상처 근처를 주물럭거리는 정도에서.” 검지를 상처 구멍에 푹 집어 넣었다. 다시 비명. 불쾌한 따뜻함이 손가락을 에워쌌다. “이것처럼 상처를 직접 헤집는 정도까지. 다양한 수준의 고통이 마련되어 있다. 태도와 반응의 문제라네. 아무리 삶이 괴롭다지만 적어도 괴로움을 경감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이 우리의 본분 아니겠는가.” “……, …….” 여인의 뺨이 덜덜 떨렸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이리라. 나는 어느새 눈물로 흥건해진 오른손을 여자의 얼굴에서 거두었다. 한켠에 내버려둔 쇠사슬을 도로 가져와서 상대의 발목에 채웠다. 이번에는 여인도 발길질을 치지 않았다. 아까보다 얌전해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양다리와 양팔을 의자에 묶었다. 참고로 손등에서 단검은 일단 빼주었다. 단, 곧바로 의자의 팔걸이에 도로 손등을 단검으로 고정시켰다. 자리만 바꾼 것이었다. 여인은 이제 비명을 내지를 기력도 없어 게거품과 함께 신음을 간간히 내뱉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대화로 풀었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새끼가……네가, 먼저…….” “미안하네. 나는 내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듣는 습관이 있어서.”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아직 형형하게 살기를 품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농담을 던졌을 뿐인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이래서 조크를 모르는 사람은 상대하기 곤란했다. 사회성이 조금 부족했다. 실수로라도 출혈과다 때문에 죽으면 안 되었으므로 상처에다 포션을 흘려주었다. 손등에 칼날이 찍힌 채 살갗이 재생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뼈가 하나 더 생기는 느낌일까.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으음.” 내가 찬장에서 특별히 고급스러운 위스키를 꺼내왔다. 여기서 위스키는 최근에야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이른바 유행 상품이었다. 포도주와 맥주만 취급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유리잔에 따라서 한 모금 머금자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이건 이거 나름대로 괜찮은걸.” “…….” 맞은편에 앉은 나를 여인이 노려보았다. 포션 덕분에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나한테서 뭘 얻으려는 거야.” “음?”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치미 떼지 마. 교섭을 하고 싶으니까 나를 잡은 거잖아. 시발, 너는 지금 헛짓거리를 하는 거야. 눈 감고 자살하기만 했으면 안 그래도 네놈이 바라는 걸 전부 들어주려고…….”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내가 혓바닥을 위스키로 적셨다. 확실히 포도주나 맥주보다 도수가 높았다. 앞으로는 이쪽을 애용해야겠다. “나는 그쪽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뭐?” “그저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쪽에서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대비해두었을 뿐이다.” 술이 맛있었다. 다만, 그렇다. 안주가 부족했다. 여기에 닭꼬치가 있었으면 정말로 어울렸을 텐데. 파까지 곁들면 더할 나위가 없는 안주가 완성될 것이었다. “다행히 예상이 적중했지. 이것저것 준비한 게 쓸모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는군. 기뻐해도 좋네. 자네는 대접하는 맛이 있는 손님이야.” “무슨 소리야……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혹시 나 혼자서 고급스러운 술을 홀짝여서 기분이 상한 것일까. 미안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술에 관해서는 라피스한테도 두세 번밖에 양보하지 않았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 거야? 1위라고. 수십만 명, 수백만 명, 온갖 세계에서 고르고 골라서 뽑은 대행자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1위의 기록을 세웠어! 너는 아무 소원이나, 거의 무한정에 가깝게 풀어낼 수 있어.” “내 자존심을 높여줘서 고맙네.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어떤 소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초면부터 알아차린 사실이다만, 이 여자는 단단히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약간 불쌍했다. 젊은 처자가 어째 저렇게 망가졌을꼬. “네가 사랑했던 인물들을 전부 현실에 불러들일 수 있어.” “흥미롭군.” “단순히 외형과 성격만 닮은 게 아니야. 네 자식이랑 나눈 기억도 전부 그대로 살려둔 채……그야말로 궁궐과 같은 저택에서, 보통 하등한 것들이 절대로 누리지 못할 행복과 쾌락을 만끽하면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어.” “꽤나 구미가 당기는구만.” 문제는 닭꼬치였다. 닭꼬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머저리. 위스키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예 안주도 없이 술병을 비워버릴 확률마저 있었다. 아니다. 그런가. 그런 수가 남아 있었는가. 한 병을 더 가져오면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여인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그, 그게 싫으면 이 세계를 네 마음대로 조작해도 돼. 과거에 돌아가고 싶어? 네가 했던 행동을 바꾸고 싶어? 전부 가능해. 상부에 보고하기만 하면 네 관리 아래로 떨어지는 건 정말로 시간문제야.” “참으로 고마운 제안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스키를 두 병 가져왔다. 그러했다. 사람에게는 놀랍게도 손이 두 개나 달려 있었고, 고로 술병을 동시에 두 개나 가져온다는 업적이 가능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참. 그런데 닭꼬치를 소환하거나 그런 재주는 불가능한가?” “…….” 어째서인지 여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역시 어려운 요구였나. 여인은 나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여인이 개입했을 경우에 그 사실이 자동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세한 내막이야 내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여인은 이 세계의 시스템을 속일 권한이 없었다. 일종의 초월적인 존재처럼 행세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나를 관찰하는 것만이 허락되었겠지. 혹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조작하는 것만이 가능했으리라. 지금처럼 내부에 속해버린 이상, 여인은 신과 같은 권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당초. 내가 술에 취해서 약해진 틈을 일부러 노리고 찾아올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여인은 자신이 가진 카드패의 절반을 이미 나에게 들켜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걸 말해줄 의리는 없었다. 세상이란 신기했다. 누군가는 가볍게 일견하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상황에 따라 순응했다. 여인도 절찬리에 잘난 척을 하고 있었지만 똑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얕보는 것일까. “그럼, 왜 나를 잡은 거야.” “진즉에 말하지 않았는가. 대화 상대가 필요했다고.” 내가 새로 개봉한 위스키를 술잔에 졸졸 따랐다. 갈빛이 감도는 황색 액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애주가였다. “나는 이 세계가 끝장날 때까지 조용히 틀어박힐 셈이다. 수천 년이 될지, 수만 년이 될지, 아니면 약간 상상하기 어려워도 억이나 조 단위의 이야기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단탈리안이었을 때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똑같았다. 마왕은 살아 있음으로써 마왕성을 지탱한다. 그게 아주 조금 더 규모가 거대해졌다고 보면 되겠지. 나는 살아 있음으로써 이 세계를, 나의 모든 흔적이 남은 이곳을 지킨다. 언젠가 이바르는 나를 가리켜서 앙골모아의 재림이라고 과장스럽게 칭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예언이란 물건이 실존할지도 모르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이바르의 비유 아닌 비유는 성립하였다. 하나의 성을 지키는 자를 만마의 왕(魔王)이라 부른다면. 하나의 세계를 지키는 자는―――마땅히 만마의 귀신(魔神)이라 불러도 좋겠지. 이미 나는 단탈리안이라는 자가 죽고 남긴 혼백과 다름없다는 점에서, 앙골모아의 비유는 더욱 절묘했다. “내가 아무리 강철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일세. 억만 년은 조금 생소하지 않겠는가. 자고로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말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드럽게 웃었다.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나의 대화상대가 되어주게.” “…….” “아. 가끔은 유열이 필요하니 고문이 들어갈 것이야. 그 정도는 너끈히 버텨주리라고, 나는 자네에게 기대를 품고 있다. 좋은 인생 경험이라고 생각하게나.”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여인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당신은……미쳤어.” 내가 두 번째 위스키를 비웠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한테 당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리 말하더군. 신기한 일이야.”   00495 지키는 자 =========================================================================                        시간은 유구하게 흘렀다. 사람이 집안에서만 지내면 시간 감각이 이상해졌다. 하루가 나흘처럼 느껴질 때도, 일주일이 반나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기르는구나 싶었다. “오늘은 치즈 샌드위치이다만.” “…….” 애완동물을 키우면 주기적으로 밥을 주고 물을 주어야 했다. 시간에 일정한 기준이 생겨났다. 책임감이 생겼다. 하루가 하루로 정해졌고, 사흘이 사흘로 정해졌다. 진기한 역학관계가 아닌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애완동물을 돌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애완동물이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안 먹느냐? 제법 맛있는데.” “퉷.” 오랜만에 만들어본 요리에 여인이 침을 뱉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여자는 식사에도 물에도 입을 대지 않음으로써 자살을 꾀하는 것 같았다. 현명하다고 해야 할까. 악바리 근성을 지녔다고 칭찬할까. 이대로 어이없이 자살해버리면 곤란했다. 그래서 노예각인을 박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싫어! 제발, 아, 그것만은……반항하지 않을 테니까!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탁자로 간이 수술대를 만들어서 여인을 고정시켰다. 혹시라도 쇼크로 죽어버릴까봐 값비싼 마법 아티팩트까지 동원했다. 반마법에서 치료 및 재생과 관련된 마법만 잠시 허용한 다음, 수술대에 강력한 회복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포션까지 왕창 준비했으니 만에 하나 여인이 수술 도중 죽어버릴 가능성은 낮았다. 이로써 초보자도 안심하고 심장에 각인을 새겨박을 수 있습니다―. 초강력 회복 마법진, 단돈 금화 삼백 장. 단돈 금화 삼백 장에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질병에 대해서는 효과가 거의 없으니 주의해주십시오―. 홈쇼핑 광고를 하는 느낌으로 흥얼거렸다. “바로 음식을 함부로 다루는 녀석은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 밀빵에는 말이다. 수 개월씩이나 공을 들여 밀을 수확한 농부의 마음씨가 담겨 있고, 밀가루를 곱게 빻아서 빵으로 만들어낸 정성이 스며들어 있다.” “죽여버리겠어! 정말로 죽여버릴 거다, 개새끼야!” “인성이 덜 되었군.” 내가 혀를 쯧쯧 찼다. “뭐, 걱정하지 말게. 이래 봬도 각인 수술은 완전히 초짜가 아니라서.” 제레미가 수술하는 모습을 몇 번 옆에서 관람했다. 그러니까 한 번. 한 번도 몇 번이긴 몇 번이니 어쩌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취급받을 수 있지 않을까? 뭐 어떤가. 내가 몇 번이라고 하면 몇 번이었다. 생각해보니 데이지가 루크를 수술하는 장면도 꽤 자주 돌려보았다. 사실상 나는 수술에 관련해서 프로나 다름없었다. 객관적으로 그러했다. 여인이 걱정해야 할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음. 여기를 째면 되려나?” 불에 달군 수술용 외과도(外科刀)로 여인의 살갗을 그었다. 꽤나 자연스럽게 살결이 갈라졌다. 역시 나는 재능이 있는 것일지 몰랐다. 너무 다재다능해도 세상이 시시해져서 난감했다. “……!” 이제는 익숙해진 여자의 비명. 수술대에 단단히 고정했는데도 여인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비명을 지르느라 목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정말로 아픈 것 같았다. “아.” 마취제를 쓰는 것을 깜빡했다. 프로로서 이런 실수를. 무언가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마취향과 마취제가 없었다. 마치 이름을 안 쓰고 시험지를 제출한 학생마냥 부끄러웠다. “미안하다. 마취하는 걸 잊어버렸다.” “윽, 흐윽……끄으으…….” “잠깐만 기다리도록.” 나는 여인을 내버려둔 채 집안을 뒤적거렸다. 등잔에 마취향을 피웠다. 곧이어 화실이 매캐한 향내로 가득 찼다. 마취제도 여인한테 적당히 투입했다. 내가 만족스럽게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완벽하군.” 나 자신의 철두철미한 준비성에 전율했다. 마취제 성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아서 고통이 막 안 느껴지고 그럴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뜨끔거리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직도 인간적인 배려심이 이만큼이나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이 아저씨, 감동스러워서 찔끔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는 흐뭇하게 여인의 생살을 찢었다. “크으……아아아아악!” 음. 분명히 마취제를 덕지덕지 발랐는데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했다. 혹시 그거인가. 선천적으로 마취제와 체질이 맞지 않는 것인가. 안타까웠다. 모처럼 따뜻하게 배려해주었는데 소용이 없어지다니. 물론 개인의 비극이 역사적인 변증법을 막아서기란 불가능했다. 세상이란 그렇게 생겨먹었다. 따라서 나는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투사와 같은 심정으로, 천천히, 최대한 공을 들여서 여인의 내부를 휘저었다. “……이건 심장처럼 보이지 않는데. 혹시 폐인가.” “으, 끄으읏…….” 아주 약간 실수도 저질렀지만. “이건 도대체 알아볼 수가 없는 내장 기관이로군……별로 중요하지 않을 테니 없어도 상관없겠지? 체중은 적당히 가벼운 편이 좋다는 속설도 있고 말이다.” “…….” 괜찮았다.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수술이 완료되었다. 첫 경험치고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노예각인은 확실하게 여인의 심장에 새겼다. 여자의 몸이 핏물과 포션으로 범벅이 되었다마는, 결과가 좋으므로 만사 오케이. 그날부터 굳이 여자를 쇠사슬로 묶어두지 않았다. 자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명령 체계를 만들었기에 염려할 까닭도 없었다. 진즉에 노예각인을 새겨두자는 내 선택은 과연 훌륭했다. 여인은 때때로 내게 강렬한 적의를 표시했지만, 허벅지와 종아리가 마흔네 번쯤 뚫리자 적의는 공포로 물들었다. 내 일과는 극히 단순했다. 일단 술을 마신다. 일어나서 그림을 그린다. 다음에 술을 마신다. 적당히 여인과 '대화'하며 사회성을 유지한다. 사회성이 곧 사람의 인격이다. 일정한 인격을 유지하는 데 대화는 거의 필수적이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수레에 위스키를 가득 실어서 사온 게 어제 같았거늘, 벌써 동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노브고로드 시내까지 수레를 몰고 갔다. 양조장을 다섯 군데 들리면서 고급스러운 술은 죄다 쓸어담았다. 도시의 거리를 지나치는 길. 여느 때마냥 남정네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마왕 바르바토스가 처형되었다지 뭔가.” “네놈이 말해준 덕분에 똑같은 걸 네 번이나 듣게 되었구나.” “불사신의 악신도 죽는 날이 오는군. 신기한 시대야.” “…….” 수레에서 위스키병을 한 개 꺼내 들었다. 나는 한손으로 병나발을 불고, 다른 한손으로 수레를 끌었다.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길이 울퉁불퉁해졌다. 당연히 한손에 의해 끌려가는 수레도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나는 병나발 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앞으로 바르바토스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그냥 반말 써, 애송이 새끼야. 지금 내가 네보다 나이 많다고 깔보는 거야? 경로우대 따위 엿이나 처먹으라지. 적어도. ─ 알겠어, 바르바토스. 나는 단탈리안이야. ─ 좋아. 내 이름은 바르바토스. 좋을 대로 부르라고, 애송이. 적어도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다. 수레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엎어졌다. 술통과 술병이 와르르 땅바닥에 쏟아졌다. 무려 절반 가량의 술병이 깨져버렸다. 흙길에 투명하거나 노란 액체가 흘러내렸다. 돈이 아까운 광경이었다. “…….” 내가 술병을 주우려고 무릎을 굽혔다. 나는 약간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들었다. 수레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만 도중에 병을 놓치고 말았다. 병이 떨어지면서 또 깨졌다. 나는 무표정하게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아까운 짓을. 술은 비쌌다. 병은 깨지면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웠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 “…….” 술병을 집었다. 또 떨어트렸다. 다시 술병을 집었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떨어졌다―――. “…….” 어느새 주변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뒤덮였다. 어째서일까. 왜 값비싼 물건은 쉽게 깨져버리는가. 소중한 것일수록 단단해야 정상일 텐데. 나에게는 오히려 정반대로, 소중할수록 간단히 망가졌다. “아…….” 심장이 꾹 조여왔다. 숨이 몹시 가쁘게 변했다. 호흡이 힘들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고 내뱉을 때마다, 마치 철사에 꿰인 것처럼 심장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쥐었다. 의식할 사이도 없이 등이 저절로 굽어졌다. “…….” 숨을 토한다. 나의 호흡이 내게 헛구역질을 일으켰다. “……바르바토스.” 무척이나 불안정한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새어나갔다. 그것은 토해내야만 하는 무언가였다.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발소리.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짓는 모습. 화내는 얼굴. 한없이 장난스럽고, 그렇기에 한없이 진지했던 그녀의 모든 숨결을. “……바르, 바토스…….” 토해내야만 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꼴사납게도 눈가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왔다. “바르바토스…….” 녀석이 보았다면 마음껏 비웃었겠지. 이제는 나를 비웃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 이윽고 온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았다. 한 번만이라도, 바르바토스의 웃음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웃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지금의 나는 너무나 무거웠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해버리는 배처럼. 나에게는 바르바토스가 필요했다. ─ 차라리, 나랑 도망쳐……! ─ 마계 어디론가……사람의 발길도 마물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수백 년을, 천 년을 지내다보면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어리석었다. 조금 더 어리석어서 바르바토스의 제안에 넘어가야만 했다. 내가 속아 넘어가도록, 나 자신을 내버려두어야 했다. 단지 그것이 불가능했다. 도저히 불가능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힘없이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가 컴컴했다. 인적 드문 흙길에서 혼자 주저앉다니. 자살을 희망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들짐승이 나타나서 물어뜯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이바르가 만들어준 몸이 간단히 당해줄 리 만무했지만. 나는 수레를 그대로 방치하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멀리서 나의 저택이 보였다. 어쩌면, 저 안에 바르바토스가 있었을지 모른다. 내 선택에 따라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틀림없이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한 채 집문을 열고 들어가면―――왜 자기는 빼놓고 혼자서 맛있는 거 마시면서 다녔느냐고, 잔뜩 화를 낼 그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저택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집문에 등을 기대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속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죽은 것일까. 놀라웠다. 아직도 죽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늦가을의 벌레들이 어디선가 고요하게 울어댔다. 나는 현관에서 잠이 들었다. “…….” 아침. 따가운 햇빛에 눈이 뜨였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떠올렸다. 곧바로 생각이 났다. 그러자 가슴이 또다시 차가워졌다. 나는 이걸 영원히 품고 가야겠지. 계속해서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인이 깜짝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의자에 앉았다. 문득 천장에서 술병을 꺼내올까 하다가 어제 자신이 저지른 일이 생각났다. “…….”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이 연주되다가 끊겼을 때의 공백과 같이. 천천히. 느리게.   00496 지키는 자 =========================================================================                        * * * 한동안 내 캔버스에는 한 명의 소녀만 등장했다. 하얀 백발. 이제 막 땅에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얀……. 그녀의 죽음을 인식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바르바토스도 환영이 되어 서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제나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진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무표정하기도,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설마 파이몬 때문일까. 파이몬이 내 등에 딱 달라 붙어 있어서 바르바토스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상상을 하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환각이 되어서도 사이가 나쁜 녀석들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불화가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갖고서도 농담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심장이 죄여오긴 했지만. 이건 내가 앞으로 계속 가져가야 할 자국이었다. “또라이 새끼. 너 지금 일주일 내내 그림만 그리고 있는 거 알아?”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화실 저편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작은 부피만 차지함으로써, 자기가 본래 이런 장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철저히 방관자가 되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래봤자 허구의 인물이라고. 아니, 그래. 좋아. 네 미친 주장에 동의해서 진짜라고 치자. 그러면 뇌수를 변기물로 채운 새끼야. 오히려 더욱 더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서라. 허벅지에 구멍 한번 더 뚫리겠다.” “……진짜로 의문이 들어서 그래. 그 아이들이 진짜처럼 소중하다면 되살리는 게 좋잖아.” 협박이 통했는지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감이 사라졌다. 내가 남아일언중천금의 격언을 반드시 지키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슬슬 알아준 듯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밑그림에 색채를 더했다.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다양해서 좋았다. 화난 얼굴, 무뚝뚝한 얼굴, 웃는 얼굴. 모두 바르바토스다웠다. 일주일은커녕 백 년이 넘도록 주구장창 바르바토스만 그려도 질리지 않으리라. 확신이 들었다. “되살려서 뭐 어쩌자고. 그런다고 내 잘못이 사라지나.” “어차피 너한테 쪽도 못 쓰는 것들 아니야? 네 곁에 머무르는 게 허락되기만 해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할 것 같은데. 야. 이러지 말고 내 말에 귀 좀 기울여줘. 정말 아무것도 복수하지 않을게. 나만 풀어주면…….” 붓을 멈추었다. 동시에 여인도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니, 그녀가 침을 삼켰다. 이쪽이 그림 그리는 걸 멈추고 사냥용 창을 가지러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좋은 현상이었다. 생명체가 경계심을 품고 자숙하는 것은 극히 올바랐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두지. 나는 딱히 그녀들한테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어.” “……그럼 왜.” “우리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꽤 심하군. 다른 사람한테 사과해야 하는 일을 구태여 왜 하는가?” 여인이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찡그렸다. 내 얘기를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봐라. 누군가가 고의로 살인을 범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유족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아이를 죽여서 죄송합니다……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가?” “마치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처럼 들리거든.” 내가 싱긋 웃었다. “죽여서 죄송합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절대로 살인 따위는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충 뉘앙스가 그렇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실수였다는 얘기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자네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죽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 “납득할 수 없겠지. 거기에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자기가 칼로 찌른다……대체 여기의 어디에 실수라는 게 있나? 고의밖에 없다. 나는 살인과 같이 중대한 행위에 대해 사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탁자에 놓인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참고로 수레를 엎은 바로 다음날에 양조장을 다시 순회했다. 알코올 없이 버티기에는 하루가 잔인하리 만치 길었다. 나는 그런 놈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나는 실수로 그녀들을 죽이지 않았어.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똑같은 의도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되풀이할 것이야.” 당연했다. 나는 결코 충동적으로 살인과 학살을 행하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고. 위험을 인지하고.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으로서 살인과 학살을 선택했다. 순수하게, 정말로 순수하게 의도된 행위였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라는 가정 따위는 불필요. 설마하니 내가 실수로 파이몬을 죽였겠는가. ‘파이몬이 실수로 살해당했다’라는 문장을 감히 내가 허락할 것 같은가. 절대로 용납하지 못했다. “자네는 내가 왜 파이몬을 손수 죽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당신, 계속 후회하고 있잖아.” “회한이야 남지. 사라지지 않을 것일다. 그러나 사죄는 없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선택이 나를 의미했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리거나 나의 선택을 번복하는 것은, 자기기만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참회하는 단탈리안'이라니. 이게 대체 무엇인가. 형용모순에도 이만한 말장난이 따로 없었다. “지금 와서 털어놓는 말이다만, 나는 자네를 별로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소시민으로 빌빌거리며 살다가 끝날 인생이었지. 이곳에 와서야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났다. 솔직히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그,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모니터링을 했다면서 여인은 허구라느니 가상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였다. 근성이 썩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 봬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윤리적인 남자였다. 여인과 같이 비윤리적인 인격 미달자를 볼 때마다 훈육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그래. 말하자면 나는 손수 수고를 들여가며 악동을 교육하는 교사. 이 시대의 참된 스승이었다……. “자네도 허벅지에 창을 쑤시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나. 그 아픔이 가짜라면 왜 비명을 지르고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는가?”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일세. 쑤시면 아파하고, 잃으면 슬퍼하고, 되돌이키면 후회하며, 바라보면 웃어주지. 나는 그런 것을 진실이라고 부른다네. 외부의 실재성 따위는 편견에 사로잡힌 구도야.” 내가 혀를 찼다. “그런데 가짜라고 매도하다니. 배려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지. 부디 인격 수양하러 외딴 곳에 왔다 생각하고 천천히 살아보게나.” “……후회할 거야. 내 부하들이 당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당신이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댈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단검이 방바닥에 챙, 하고 떨어지자 여인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내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직접 단검으로 손가락을 하나 자를 것인지, 아니면 나한테 창에 찔릴 것인지. 시간은 여유롭게 1분을 주도록 하지.” 여인이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헛소리를 그만하라는 둥의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언제나 성실하게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남자임을 여자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만 으, 아, 하고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30초 남았네.” “…….” 여인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아직 검을 들었을 뿐이지 차마 내리찍지는 못했다. “10초,” 10초를 부르고서 나는 친절하게 9초, 8초, 하고 카운트 다운을 알려주었다. 여자가 마침내 단검을 찍은 것은 4초가 남은 시점이었다. 살덩이가 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읍……!” 놀랍게도 여인은 비명을 참아냈다. 고통이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었는데, 저건 나에게 비명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일념 아래 극복한 것이었다. 내가 손뼉을 두들겼다. “멋지군. 나도 모르게 감탄했어.” “하, 흐아……흐윽…….” 여인의 뺨에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비명은 참았지만 격통에 의한 눈물은 억제하지 못했는가.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나는 박수를 멈추고 화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사냥용 창이 걸려 있는 벽면으로. “왜, 왜 그래……?” 여인이 왼손을 감싸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래. 나 잘랐어. 잘랐다구. 봐봐, 잘 보라니까……!” 여자가 왼손을 보여주며 울먹거렸다. 확실히 새끼 손가락이 절단되어 있었다. 검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인은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덜덜 떨면서 잘려나간 새끼 손가락까지 내밀었다. 내가 사냥용 창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1분이 지났다.” “어?” “미리 약속한 1분이 지나버렸다. 안타깝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야! 4초, 적어도 3초가 남았을 때 잘랐어! 분명히 잘랐어!” 내가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이었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 10초 느리게 시간을 세고 있었다. 내가 10초를 불렀을 때 벌써 1분이 전부 지났지. 약간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거짓, 말…….” “자네의 소중한 손가락이 달린 문제였는데 시간 정도는 자네가 스스로 세었어야지. 쯔쯧. 이런 일에서 타인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는가. 아직 인생을 헛살았구만, 헛살았어.” 나는 창을 날카롭게 세웠다. 여자가 바닥에 엉덩이를 끌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만……제발 그만…….” “안타까워. 딱 5초 정도만 일찍 결단했으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거늘.” “제발…….” 여자의 등이 건물벽에 걸리고 말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인이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었을 때, 창날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내 화실에는 오늘도 고음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흘쯤 흘렀을까. 누군가가 화실의 문을 노크했다. 화방의 노인이 손녀를 보냈나, 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생전 본 적이 없는 청년이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나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예 직각으로 허리를 숙인 채 미동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중한 인사는 마왕이었을 때 말고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누구요? 일단 허리를 드시구랴.” “그쪽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부하 직원이 되는 사람입니다.” 미청년이 난감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내가 말투를 바꾸었다. “아아. 왠지 그런 사람이 온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다.” “예, 약간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을 만큼 권한이 높지 않아서, 상부에 허락을 받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쪽도 골치 아픈 일들이 있는 모양이로군.” 청년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이 다 그렇지요. 실례합니다만, 제가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다. 어서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청년이 또다시 깍뜻하게 인사하고 화방에 발을 들였다. 여인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바닥에 누워 선잠을 자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인이 퍼뜩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희로 빛났다. “드디어……! 드디어!” 여인은 거의 방방 날뛸 기세였다. 그녀가 악의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끝장이야! 감히 관리자를 무단으로 납치하고 고문하다니! 소원은 무슨 소원, 염병맞을 또라이 새끼! 영원토록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보면서 살아가라!” “조용히 해라.” 나의 명령에 여인이 입술을 닫았다. 그녀는 노예각인에 저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득의양양해서, 네깟 놈이 명령을 내려봤자 어디 계속 내릴 수 있나 보자, 하고 깔보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게.” “예. 감사합니다.” 청년도 여인을 모르쇠하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우유나 술을 권했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청년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먼저 저희는 귀하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00497 지키는 자 =========================================================================                        “아니. 별로 사과받을 일도 없다네.” “본래 시나리오의 대행자를 고르는 것은 철저히 계약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계약자에게 모든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재차 동의를 구한 다음에야 일이 진행됩니다.” 이건 내 예상과 합치했다. 저들이 제멋대로 나를 끝장낼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시작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도리에 맞았다. 눈앞의 청년이 그걸 구태여 말로 꺼낸 까닭은 아마도……. 내가 슬쩍 여인의 표정을 확인했다. 여자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 중에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딱한 이야기였다. “나와는 이른바 불공정한 계약을 맺은 셈이로군.”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저기 계신 분. 개인적으로 제 상사가 됩니다만, 편법에 편법을 동원하여 억지로 계약을 밀어붙였지요. 그 사유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자존심 대결……저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야 여인도 불길한 낌새를 알아챘다. 표정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내린 명령 때문에 입술을 뻐끔거릴 따름이었다. “계속 말하게.” “저는 모든 전말을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단탈리안 님……아니, 실례했습니다. 쟈코모 스크루타 님께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분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속여넘긴 사람에게는 마땅히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상부에선 판단했습니다.” “너……!?” 여자가 헛숨을 들이키고 콜록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운명이 결정되었다. 거기에 굴욕을 느끼고 있으리라. “처우는 잠정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청년은 여인을 무시했다. “영원히 고립된 세계에 유배되어서 무미건조한 연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의 당사자이신 분께 결정권을 드리는 것이 도리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나에게 처우를 맡기겠다?” “다소 억지스러운 처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털썩, 하고 여인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낯빛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드디어 조직에서 자신을 구해주러 오는가 기뻐했더니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여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 아, 하고 떨었다. 유심히 살펴보면 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무얼. 나는 인간적인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인격을 조작할 수도 있고, 신체를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끝없는 고통과 절망도 간단히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소원이 아니라 단순한 처벌이라는 점에 유의해주십시오. 염려하실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 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거창한 처벌은 별로 바라지 않네. 그보다 의미가 있는 결과가 당기는군.” “의미 있는 결과라고 말씀하시면?” “저 여자의 본체를 없애주게.” 여인이 퍼득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망발을 지껄이느냐. 그런 표정이었다. “본체를 없애라는 얘기는……죽음을 선고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다. 단지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돌아갈 장소'가 없도록 만들어달라는 뜻이다. 본체가 사라지면 저 여자에게는 이곳의 삶이 전부가 되어버리겠지.” “……과연. 이해했습니다.” 청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청년이 얘기를 더 이어나가려다 잠시 멈추었다. 그는 두세 번 침을 삼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씀이군요.” “아. 이쪽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도 당장 중단해주면 고맙겠네. 나도 바르바토스나 시트리와 지내면서 성적인 취향이 상당히 관대해졌다마는, 노출 플레이만큼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더군.” “……데 파르네세 양과는 꽤나 즐기신 것처럼 보였는데요.” “저런. 파트너를 노출시키는 것과 나 자신이 노출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 그런가.” 내가 작게 웃었다. “여러모로 송구할 따름입니다.” 청년이 멋쩍게 웃었다. 이쪽의 사생활을 멋대로 훔쳐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었다. 서로 성격이 제법 잘 맞았다. 다른 형태로 만났다면 쉽게 친구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청년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혀 배웅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세계에 불청객들이 연이어 찾아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솔직히 말해 얼른 나가주었으면 싶었다. “제 말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금발의 청년이 나가기 전에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위안도 똑같이 무의미하니까.” “당신께서는 실로 놀라운 일을 해내셨습니다. 단지 외형적인 업적을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신 윤리의 방정식……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 끝까지 지키신 미학은, 저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청년이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최대한 경의를 표하려는 듯이. “일생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저택에서 나갔다. “으으음.” 골치 아픈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에 시원하게 기지개를 폈다. 문득 여인을 살피니, 망연자실하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차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말해도 된다.” 금구의 명령을 풀어주었다. 금기가 해제되었는데 여자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부터는 언제든지 자살을 해도 괜찮다.” “…….”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 절대로 자살을 하지 말라는 명령도 해제해주었다. 죽느냐 사느냐는 이제 온전히 여인의 선택에 달렸다. 삶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것, 이를 악 물고 여생을 이어나가는 것. 나는 어느 쪽도 즐겁게 지켜볼 자신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여인은 항상 문가에 있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한 눈길, 의식이 희미해진 눈동자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끔 내가 질문을 던져도 대답하지 않았다. 망가진 인형처럼 되어버린 여인은 그 나름대로 감상할 구석이 있었으므로, 나는 별달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원래 애완동물은 인간의 언어로 떠들지 못하는 법이지 않은가. 어느 날. 여인이 사라졌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여자가 가출했구나, 하고 납득했다. 나에게 위해를 끼치는 것을 제외하고 여인은 대부분의 행동에서 자유로웠다. 몇 년은 물론이고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바깥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무방했다. 도중에 생뚱맞은 인간에게 살해당해도 괜찮았다. 그것 역시 인생의 우연에 해당하리라. 그리고 내가 아침 공기를 마시기 위해 문을 열고 바깥에 나온 순간,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여인이 버드나무에 목을 매단 채 죽어 있었다. “…….” 내가 멈칫했다. 교살한 시체답게 여인의 외양은 적이 흉측했다. 밧줄이 단단하게 목을 옥죄었으며, 혓바닥이 길게 기어나왔다. 여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하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볼썽사나운 결말이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나왔는가…….” 내 마음은 놀라우리 만치 평안했다. 사실 이게 정상적인 해결책임을 알고 있었다. 나 또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백수천 번. 어쩌면 수만 번 머릿속으로 자살을 그렸다. 이 충동은 그대로 환각에 반영되어, 지금도 그림자들은 내 팔다리를 이빨로 자근자근 물어뜯고 있었다. 나는 충동을 받아들였고, 여인은 패배했다. 그뿐이었다. “교살보다는 그냥 화끈하게 목을 따는 편이 치우는 입장에서 편한데.” 내가 투덜거리며 나뭇가지에 걸린 밧줄을 잘랐다. 시체가 요란하게 떨어졌다. 수레를 가져와서 시체를 실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덤까지 만들어줄 이유가 없었기에 대충 야산에다 시신을 버렸다. “들짐승이나 마물한테 양분이 되려나―.” 제아무리 외모가 예쁘장하더라도 정신의 근본적인 부분이 허약하면 이렇게 되었다. 썩 안타까웠다. 나는 그렇게 장사를 지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 나중에 봄이 되었을 무렵 똑같은 장소를 한번 들려봤는데, 유난히 그 부근에만 산벚꽃이 풍성하게 개화해서 조금 흥미로웠다. 시간이 흘렀다. 말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나는 혼잣말을 주고받는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린 초상화들에서 점차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평범한 환영과 비슷했다. ─ 개 같은 놈. 중얼거림이 들렸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이었다. 내가 잠깐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초상화들이 기다렸다는 듯 욕설이나 잡담을 지껄였다. 이 착란증상에 나는 여느 때마냥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나는 정말 개새끼지.” ─ 얼굴에 철판을 깐 새끼. “그것도 올바른 지적이야. 그런데 자기혐오로 자위하기에는 우리 둘 다 너무 늙지 않았냐. 조금 새로운 레퍼토리를 들고 와주었으면 고맙겠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래봤자 잠시 얌전해지는 것에 불과했다. 캔버스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새 수많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때로는 목소리가 겹치고 또 겹쳐서 어마어마한 소음이 되어 이쪽을 괴롭혔다. 회화에 입문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이게 별로 유익한 취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정신건강에 결코 좋지 않았다. 여태까지 환영들이 뚜렷하긴 해도 얼마간 흐물거렸다면, 이제는 초상화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시끌벅적해서 좋았지만. 시끌벅적하기에 상처가 되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노브고로드 화방의 손녀딸이 본격적으로 내 그림들에 눈독을 들였다. 처음 봤을 떄는 분명히 한참 어렸는데 어느새 중학생 나이 정도가 되었다.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그 나이대의 데이지가 떠올라서 조금 껄끄러웠다. ‘그냥 창고에 박아둬서는 안 돼요!’라고 화방 손녀딸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반드시 역사에 남겨야 한다느니, 인류의 보물이라느니, 사춘기 소녀답게 휘황찬란한 어휘를 총동원했다. 녀석은 보름마다 한 번씩 찾아와서 지치지도 않고 열변을 토했다. 당연히 무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유별나게 환청이 시끄러웠다. 나는 그림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그러면 목소리가 잠시간 잦아들었으나, 또다시 기세를 살려서 내게 온갖 저주를 쏟아부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칼로 파이몬의 초상화를 부욱 찢었다. 그 순간, 귀청이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렸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명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목소리에 피가 맺힌 비명, 처절한 저주가 묻어나오는 비명이었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 아아.” 내가 파이몬의 초상화를 끌어안았다. 정중앙이 날카롭게 찢어발겨진 그림에서는 당장이라도 핏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라피스의 초상화가, 라우라의 초상화가, 바르바토스의 초상화가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나는 내가 잠든 시간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나는 영원히 잠이 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괜찮았다. 이 신체는 견딜 수 있었다. 나의 의식도, 아마 참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라쉬나르// 얍얍. 물고기인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남자입니다. NineBreaker// 예, 그렇습니다. 울반// 껄껄껄. 바람귀공자// 그런 무서운 단어를 쓰시다니... 저는 두렵습니다 ;ㅅ; heybro// 욥욥. no name// 결국 다시는 계약서를 작성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asd메이지// 속지 마십시오. 함정일지도 모릅... 수천천사// 단탈리안도 어떤 의미로든 최악이지요. 바람귀공자// 캐피탈리즘, 호-!   00498 지키는 자 =========================================================================                        “…….” 최근에, 깨어 있을 때와 잠들었을 때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뇌수가 휘발유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무언가가 조금 남으려는가 싶어도 금방 잊혀지고. 징검다리라고 불러야 할지, 그보다 더 엉망진창이라고 해야 할지. 꿈속을 거니는 감각. 꿈의 폭력에 노출되는 감각. 어느 학설에 따르면,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는 느낌은 결국 생존본능에서 비롯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위기에 처할 경우 기아하리 만큼 시간을 길게 체감했다. 트럭이 달려드는데 유난히 느릿느릿하게 다가온다든가. 건물이 무너지는데 벽돌 하나하나 떨어지는 속도가 저마다 다르게 느껴진다든가. 하나의 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위기에 접촉한 찰나, 뇌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하여 생존에 도움이 될 정보를 과거의 기억 속에서 탐색하는 것이었다. 반대라면 어떨까. 이 신체는 더 이상 죽을 가망이 없다. 그런 판단이 확고하게 세워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무런 영양분도 섭취하지 않는다. 내장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알코올뿐.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최저한의 활동도, 소화를 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운동도 멈춘다. 신체의 움직임이 극도로 약화되어 가사상태에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죽지 않는다. 거의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산다. 이때 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꿈과 비슷하게 여기지 않을까. 과거 수도승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극심한 단식에 들어갔다. 생체기능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동굴의 막다른 벽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벽이 양쪽으로 열렸으며, 끝없이 광대한 바다가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생시로 꿈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유독 극심한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까닭이 여기 있겠지. 나는 본래 인간이었다. 인간의 리듬과 감각을 지니고 살았다. 그렇지만 마왕이 되어버린 이후, 나는 점차 음식의 섭취와 수면을 줄여갔다.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식사와 수면이 끊어졌다. 반쯤은 꿈에 머무는 상태. 최소한의 사회생활조차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 내 의식은 이윽고 실물과 환영을 완전히 구분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상시적인 깨달음의 현상이라고 비유할까. 나는 환자로서 병을 앓으면서 바로 그 병을 갖고서 수행했다던 어느 승려를 떠올렸다. “아버님과 달리 저는 평범한 인간이라서 말입니다.” 그렇지. 데이지의 말이 옳았다. 데이지는 똑똑하니까. 너무 똑똑한 나머지 단탈리안의 헛점을 발견했다. 단탈리안의 잠꼬대를 엿듣고 진상을 밝혀냈다. 그렇지만, 단탈리안이란 단지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마왕으로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앓은 홍역과 같았다. 단탈리안은 어떤 질병의 이름이었다. 인간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 마왕이 되기에는 너무 먼 곳에서 걸어왔다. 그렇기에 질병. 숙주에 기생하여 조금씩 숙주를 갉아먹는, 악의적인 종양. 데이지가 자그맣게 코웃음을 치면서 눈길을 책으로 돌렸다. 시크한 몸짓이 귀여웠다. 차가운 도시의 여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누구를 닮았는지 완벽한 연기였다. 브라보. 셰시봉. 나는 무심코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멋진 딸아이에 대해서 제군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너한테 처녀를 따였다고, 나쁜 새끼야!” 바르바토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억울해하는 느낌. 거기에 부끄러움과 수치로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르바토스. 너는 남자와 떡을 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수천 년 전에 할 짓 못할 짓 죄다 섭렵한 변태계의 이인자 아니냐. 이제 와서 처녀성을 운운하는 것은 비겁하다못해 가히 후안무치한 망발이다. 남자와 여자가 뭐 크게 다르다고 처녀를 따로 따지는가. “그러면 왜 저를 마다하시는 거죠?” 시트리가 고개를 깜찍하게 갸웃거렸다. “하나만 있는 것보다 두 개가 전부 있는 게 당연히 더 좋은데…….” 오호라. 그렇게 나왔습니까―. 숫자에 기댄 논리는 언제나 강력했다. 남성 전용의 처녀가 하나. 여성 전용의 처녀가 하나. 합계가 둘. 고통도 두 배, 쾌감도 두 배. 당연하지만 둘은 하나보다 월등히 좋았다. 1+1 행사. 파격의 바겐세일이었다. 그렇지만 출혈도 두 배라는 것은 어떠한가. 흘리는 피가 중첩된다. 어떤 상처를 받아도 꼭 두 번에 걸쳐서, 이중의 장막이 뚫려져서 핏물을 흘려야만 한다. 그것까지 좋다고 할 수 있는가. 저는 현대사회에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서 두 배면 무조건 좋다를 외치는 세태에 대해 의문을 표합니다. 라우라가 머리를 저었다. “소녀는 주군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최후의 순간까지 바겐세일입니까! 폐점을 정리하느라 떨이로 팔아치우는 느낌입니까! 과연 라우라는 터프했다. 생각의 차원이 범인과 달랐다. 둘이서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고 제안한 여장부다웠다. 내가 눈여겨본 소녀. 상승의 대장군이라면 이래야 마땅했다. 생존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제품을 헐값에 파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참담할까? 틀림없이 참담하겠지. 그렇지만 제값을 고집하다가는 불량 재고를 끌어안고 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라우라. 저는 이미 가격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동반자살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적어도 살 수는 있지 않을까요. “애당초 소인은 전하보다 부자입니다.” 마계 제일의 부르주아인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는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이바르는 망설이는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 품에 안긴 여자애는 너무나도 어깨가 가녀려서, 당장이라도 가볍게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약하기에 가면을 썼다. 두렵기에 강철의 갑옷을 둘렀다. 가면과 갑옷이 벗겨진 소녀는 놀라울 정도로 연약했다. 그래서 물어뜯었다. 갸아아아. 독사가 갸아아아, 하고 울었다. 맹독이 뚫고 들어간 상처를 혓바닥이 핥았다. 피냄새. 쇠의 향기가 뇌수를 흔들었다. 포도주처럼 달콤한 냄새였다. 정복욕.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압도적인 쾌감. 그런 재미마저 없으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질책하는 듯한, 어딘지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건강하다. 갸아아아. 봐라. 이리도 팔팔하지 않은가. 독사가 독수리처럼―――독수리가 독사처럼? 아무튼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한 번, 두 번. 요즘 들어 숫자를 셋까지 세는 것이 귀찮아졌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맹수와 꿈틀거릴 때마다 거친 흙바닥에 쓸리는 날것은 절묘하게 랑데부를 이루었다. 하강, 상승. 하강. 그리고 상승. 군침을 흘릴 만한 명장면이었다. 일찍이 이토록 붉은색이 매력적인 키스씬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로맨스가 그러하듯이, 독수리와 독사의 사랑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독독. 이독제독. 毒이 두 배로. 맹독은 두 번 중첩될 수 있었다. “단탈리안.” 라피스가 여전히 나를 걱정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울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니, 라피스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라피스가 아니었다. 누구인가. 지금 나를 바라보는 여자는 누구―――. “앞으로는 부디 손수건을 상비하세요. 신사의 소양이랍니다.” 파이몬? 손수건? 문득 눈앞을 바라보자, 독사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색……? “아.” 시야가, 되돌아왔다. 급격한 일그러짐. 내 오른손은 날카로운 단검을 들었으며, 내 왼손은 어째서인지 수도 없이 난도질을 당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붉은색.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넝마짝이 그곳에 있었다―――내가 찔렀다. 누가 내 왼손을 이토록 찔렀는가. 질문과 대답이 역전되었다. 질문이 나오고 대답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이 도출된 다음에 질문이 튀어올랐다. “아아……아아아악!” 격통. 한 발자국 늦게 고통이 온몸을 찢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기어가고, 또 기어가서, 포션이 있는 천장에 닿았다. 오른손을 올리니 천장이 무너졌다. 몸무게가 조절되지 않았다. 의식이 명백하게 신체에 대한 제어권을 잃고 있었다. 가구가 떨어지면서 포션이 담긴 유리병들도 와장창 깨졌다. 수십 개가 동시에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형태가 온전히 남은 포션도 몇 개 있었다. 나는 물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포션을 쥐었다. “……!” 칼날에 엉망으로 헤집어진 육편의 틈새들로, 액체가 흘러들었다. 고통스러웠다. 내 상처가 어떤 형태인지 아픔이 섬세하게 알려주었다. 한 군데씩. 살점이 뜯겨나간 자국까지 편집증적으로. 그러나 덕분에―――의식이 돌아왔다. 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위험했다. 거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칼을 휘둘렀다. 손등을 끊임없이 찍어내렸다. 생생한 고통 때문일까. 환영과 환청이 일제히 멎었다. 시야의 주변부가 선명해졌다. “고작, 몇 년이, 지났다고.” 맨 처음에 입가에서 흘러나온 것은 분노였다. 숫자에 대한 감각이 흐릿해지긴 했어도 아직 천 년은커녕 오백 년도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백 년도 안 지났을지 몰랐다. 화방의 손녀딸은 소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노년의 부인이 되었고, 그녀의 아들이, 또다시 아들의 딸아이가 내 저택에 물품을 공급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아들의 아들의 딸아이일 수도 있었다. 한 세대, 두 세대쯤. 혹은 대충 그 정도의 세대를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충분히 오래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나약해빠진 놈.” 경멸을 돌려주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만약 보호본능 때문에 의식이 맛이 간다면, 똑같이 보호본능을 이용해줄 따름이었다. 정신을 놓을 때마다. 환영에 사로잡혀서 이끌려 들어갈 때마다, 나는 주저없이 단검으로 신체를 도려냈다. 손등을, 팔뚝을, 허벅지를, 종아리를, 발바닥을 찔렀다. 생체활동을 잊어버린 몸뚱어리에게 억지로 고통을 각인시켰다. 효과는 훌륭했다. 의식이 무엇을 강요하는가, 신체는 금방 알아들었다. 고통을 느끼자마자 일종의 각성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신체는 또한 지나치게 영리했다. 고통이 아무리 격렬해도 절대로 죽음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파악했다. 시간이 흘렀다. 손등을 한 번 찍어내리는 것으로는 부족해졌다. 나는 손등을 두 번 찔렀다. 시간이 흘렀다. 두 번으로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잦아졌다. 나는 칼날로 손등뿐만이 아니라 팔뚝을 찔러 이리저리 비틀었다. 더욱 시간이 흐르자, 온몸이 고통에 신음해야만 간신히 의식이 돌아왔다. 팔과 다리. 모든 관절. 복부에 가슴까지. 내 손에 의해서 난자되지 않은 구석이 드물었다. 종착역. 여기서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지점까지 내몰렸다. 몸은, 이미 너덜너덜. 아무런 힘이 없었다. “…….” 벽면에 기대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새하얬다. 겨울이었다. 언제 계절이 바뀌었는지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왠지 모르게 창문을 바라본 것이 무척 오래간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필사적으로. 다만 필사적으로. 나는 나를 견디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기울여서 아래를 쳐다보니, 핏물에 잠겨 있는 팔뚝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육체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의식적으로 웃었다. 웃기면 의식적으로 웃어야 하는 만큼, 내 신경은 일그러졌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보여주는 용도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웃어주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었다. “패배한 개의 꼬락서니인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십 년? 오 년? 일 년? 어쩌면 반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냈다. 게을러터진 나치고는 제법 분발했다. “나한테 지는 건 정말로 싫었는데 말이야…….” 다시 웃었다. 나는 전략가였다. 전략가란 자고로 승리는 물론이고 패배 또한 예측할 줄 알아야 했다. 사지를 잘라가며, 죽음에 이르기 일보 직전까지 감행하며, 어떻게든 저항해보았지만 이제 막바지가 보였다. 그렇다면 추악하게 최후까지 달려가겠다. 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말을 비웃어주자. 그 정도 권리쯤은 나에게도 있겠지. “…….” 언제 눈을 감았을까. 방문이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걸어둔 망토를 집었다. 지금도 가끔 화방의 주인이나 딸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상처를 숨기기 위해, 반드시 망토로 온몸을 가린 채 나갔다. 화방의 주인들은 자기네 나름대로 나라는 사람을 이해했는지, 내 처지나 사정에 대해 일절 캐묻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 조그마한 아이에게 화백님은 정말 엘프님이신가요, 라는 질문을 듣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수수께끼를 해결했는가 충분히 짐작했다. 엘프는 대부분 잘 생겼는데 말이다. 때때로 그들의 무지가 고마웠다. 똑똑, 하고 방문자가 재차 노크했다. 나는 거울로 모습을 확인했다. 아무런 틈새가 없었다. 얼굴을 제외하고 온통 새카만 망토를 휘둘렀다. 저택 안까지 들이지 않는 이상, 화실 한 구석이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들킬 염려도 없었다.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항상 향료를 피웠으니까. 또다시 노크. “지금 간다.” 내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상처가 심한 까닭에 여기서 방문까지 걸어가는 데도 한없이 멀었다. 상대방은 내가 곯아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기적인 간격으로 문을 두들겼다. 그것이 여섯 번, 일곱 번 반복할 때 즈음하여. 나는 마침내 문을 열었다. 반대편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문짝이 조금 무거웠다. 나는 힘껏, 손에 몸무게를 실어서, 문을 밀어냈다. 그러자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틈새로 환하게 밀어닥쳤다. “안녕.” 그리고 문앞에는.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인 벌판을 뒤로 놔둔 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뭐라고 인사를 건넬까 나 나름대로 고민했는데 말이지. 이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더라고. 음. 가장 간단한 게 가장 어렵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체감하는 중이야.” “――――――.” 입술이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간단하게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 여자아이. 끝없이 펼쳐진 설원만큼이나 백색인 소녀가 이쪽을 향해 활짝 웃었다. “여전히 빌어처먹을 정도로 재수 없는 낯짝이구나. 단탈리안.” 그곳에. 그곳에, 바르바토스가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그렇습니다. 저는 웃고 있었습니다. 마리오넷// 책임... 책임이란 무엇일까요? 잠깐 단탈리안한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앤떱// 피자는 제가 살아가는 이유에서 3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낄푸핫// 단언컨대 피자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물고기인간// (동공지진) no name// 단탈리안이니 말입니다. 겜마스터// 여기, 삭아 문드러진 기둥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설은제1의예술이다// 던전 디펜스의 장르는 사실 로맨스입니다. 수천천사// 아마도 외전은 없습니다. sprtmxj// 예, 10등입니다.   00499 지키는 자 =========================================================================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도 바르바토스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의 바르바토스가. 다시 문앞을 쳐다보자, 바르바토스가 눈썹을 찡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뒤를 쳐다봐? 혹시 떡치고 있었어? 그새를 못 참아서 또 애인 만들었냐. 발정난 개자식 같으니라고. 내가 나중에 다시 찾아와줄까?” 달랐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환영의 바르바토스는 머리에 뿔이 솟아나 있었다. 마왕의 증거. 강대한 마왕일수록 거대하여 긍지를 드높여주는 그 물건이, 문앞에 선 바르바토스에게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깔끔하게 잘라져 있었다. “……아. 이거?” 내 시선을 눈치채고 바르바토스가 뿔의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꿈에도 그리던 소리. 바르바토스의 웃음소리였다. “아니, 뭐. 웬만해 가지고서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아서.” “…….”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되었다. 짧은 한마디. 요약이라 할 수도 없는 하나의 문장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바르바토스가 사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포기해야만 했을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나는 양손으로 바르바토스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느껴졌다. 맨살의 부드러움이 손바닥을 통해 따스하게 전달되었다. 그 감촉이 가슴속의 무언가를 두들겼다. 연약하고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 반쯤 끊어지고 말았다. “바르바토스.” 내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바르바……토스…….” “…….” 바르바토스가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 가지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오르골처럼 망가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해도, 다른 의문을 제기하려고 해도, 그것들은 어떤 격류에 휩쓸려서 가라앉고 말았다. “바르바토스…….”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응.” “……바르바토스…….” “응,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녀는 내 오른손에 살짝 볼을 파묻었다. 자신의 살결이 어떤 감촉인지 내게 알려주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부드럽게, 도리질을 쳤다. “나 여기 있어.” “…….” 가슴속의 실이 완전히 끊어졌다. 나는 무릎이 무너졌다. 온몸을 뒤덮은 망토가 겨울바람에 휩쓸려 미끄러져 내렸다. 칼자국 투성이가 된 살갗에 바람이 불어오자 너무도 아팠다. 한없이 차가운 대기. 그러나 머리를 감싸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멍청이.” 바르바토스가 양팔로 내 머리를 그녀의 몸으로 꾸욱 눌렀다. “또 무슨 짓을 하다가 넝마짝이 되어버린 거야. 고생한 건 이쪽인데. 너 하나 찾으려고 대륙을 전부 뒤졌는데, 왜 나보다 네가 더 엉망이야……?” 착각이 아니라면, 바르바토스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숨기는 왜 또 그렇게 잘 숨었어. 덕분에 쓸데없이 고생했잖아. 내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알기나 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응. 아무리 헤매도 안 나와서. 정말로……정말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었다. “……정말로……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했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힘껏 견뎠구나, 단탈리안.” “…….” 그리고 나는,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 * * 단탈리안이 죽었다. 이바르의 폭언을 듣고, 바르바토스는 한동안 말을 잃어버렸다. 말만이 아니라 표정마저 잃었다. 이바르는 숨을 씩씩거리며, 어딘지 상쾌해진 얼굴로 바르바토스를 내려보았다. 당신도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마찬가지였다. 단탈리안 전하가 몰락하는 데에는 당신 역시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큼이나, 어쩌면 군무상서보다 더욱 크게 일조했다. 상처를 받아 마땅했다.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처형당할 운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는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고통받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바르 로드브로크 본인이 그녀에게 교묘한 언동을 속삭일 것이므로. 군무상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찬란한 업적을 거두어도,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결코 그녀를 온전히 칭찬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꼭 그처럼 마왕 바르바토스에게도 고통을 안겨주리라. ‘단탈리안 전하께서 죽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대에게 제일 격심한 아픔이 되겠지!’ 이바르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바르바토스의 얼굴은 까마득한 절망에 물들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십 분의 시간이. 이십 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바르는 고개 숙인 마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없어.” 바르바토스가 불쑥 중얼거렸다. 이바르가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단탈리안이 죽었을 리가 없어.” 이바르의 입가에 가학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현상을 부정하는 것인가.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았을 때 곧잘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결국 긍지 높은 마왕이라고 자부하던 바르바토스도, 연인의 죽음에 앞에서는 평범한 여자처럼 흐느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단탈리안 전하는 죽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당신과 같은 작자에 의해서.” 어차피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산 목숨이 아니었다. 단탈리안 전하는 앞으로 영원토록 고통에 빠져 살게 되리라. 탈출구도 없이, 희망 따위도 없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짐으로써 연옥의 한복판에서 머무르는 것. 그것이 전하의 의지였다. 이바르는 견딜 수 없었다. 단탈리안 전하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건 괴로웠다. 틀림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단탈리안의 계획에 찬동한 이래, 이바르는 또다른 사실에 의해서 더 큰 쓰라림을 맛보았다. 왜 단탈리안 전하만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불합리했다. 부조리했다. 불공평했다. 단탈리안 전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선언했다. 그렇지만 틀렸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은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이상했다. 그건 단지 의지의 표명, 하나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동원된 수사학이 아닌가. “마음껏 후회하십시오. 부디 절망해주십시오.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당신의 얄팍한 간계가 누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조금이라도 깨닫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저주를 내리는 심정으로 뇌까렸다.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모두에게 공평한 연옥을. 어떤 경과로 단탈리안이 죽었는가. 왜 단탈리안이 데이지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는가. 무엇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는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첫 번째 죄인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다. 그러나 두 번째 죄인은 바로 당신이다. 이바르는 이 점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 얼마든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무지로 인하여, 혹은 편견으로 인하여 하필이면 이 길을 선택해버린 자들 전원에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기꺼이 저주를 퍼부었다. “바르바토스. 당신은 추악한 존재입니다.” “…….” 침묵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더 이상 어깨가 떨리지 않았다. 이바르는 설마 상대방이 현실을 인지해서 떨림을 멈추었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긍정적인 해석이었다. 오히려 정반대. 현실을 수용하는 것을 완벽하게 거부했기에 움직임이 끊어졌으리라. “아니.”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오롯하게 이쪽을 직시하는 것을 보았다. “단탈리안이 죽었을 리 없어.” “…….” 무슨 소리인가.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을 거부하다못해 아예 정신을 놓아버렸을까. 그 정도까지 연약한 여자였는가. 이바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부정한들 전하께서는 이미 안 계십니다. 적당히 당신의 죄과를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사형되는 그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입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인형술사.” 바르바토스가 이바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양녀와 함께 자살해? 라우라를 내버려두고, 나를 내팽개치고, 녀석이 제멋대로 '먼저' 죽었다고? 하아. 거짓말을 치려면 제대로 쳐. 너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벌써 자기정당화에 들어갔습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인이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평생 자신을 속인 채 살아가십시오. 어쩌면 그쪽이야말로 당신에게 어울리는 최후이겠습니다.” 이바르가 막사에서 나가려고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단탈리안은 절대로 자살 따위는 하지 않아.” 이바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양녀를 오해해서 죽음으로 내세웠다. 슬프지. 녀석에게는 무지에서 기인한 오해만큼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게 없을 테니까. 쓸데없이 머리가 좋은 놈은, 착각 때문에 일어난 과오를 견디지 못하는 법이거든.”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건 단탈리안의 절반밖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야.” “…….” “양녀를 죽였어? 그럼 오히려 더 가열차게 자기 자신을 탓할 새끼가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의 개자식이야.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시녀여. 단탈리안은 절대로―――절대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아.” 이바르가 무표정하게 바르바토스를 오시했다. “무슨 근거로 당신의 망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까.”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냐하면 그 녀석, 자살하려면 이미 진즉에 자살하고도 남았으니까.” 바르바토스는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르바토스만이 단탈리안의 이상성을 알아차렸다. 단탈리안이 끝없는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바르바토스가 울면서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부탁했을 때 단탈리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런 건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며 단언했다. 평안 따위는 개먹이로 던져버려라. 단탈리안이 그때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를, 바르바토스는 똑똑히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렇기에 바르바토스 역시 단언할 수 있었다. “녀석한테는 죽음마저 평화로운 사치야. 게다가 사랑하는 양녀와 함께 죽는다니. 그만치 호화스러운 말로를 스스로 허락할 리 만무하지.” “당신의 허언에 어울려줄 틈은…….” “살아 있구나, 단탈리안.”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아직 살아 있어.” “…….” 바르바토스는 머리를 굽혀서 이바르의 발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간청을 드립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이바르의 발에 키스했다. 일생 동안 누구에게도, 심지어 바알에게조차 존댓말을 쓰지 않았던 바르바토스가 말을 높였다.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벌써 충분해요. 개가 되라면 개가 되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노예가 되겠습니다. 제 마왕의 뿔을 영원히 자라지 않도록 저주하셔도, 괜찮아요.” “…….” “제 심장을 파괴하시면, 열여섯 번 정도 파괴하시면, 마력도 보잘것없이 줄어들 것입니다. 마력의 근원을 파괴하셔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법사로서의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뭐든지 빼앗아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간절히 애원하며. “그러니까, 제발……제가 그 녀석을 찾을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예, 강림했습니다. Nstarcity// 저도 정말 500화까지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설마 1년이 넘게 쓸 줄 몰랐습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참으로 알 수 없군요... 외전은 아마도 안 쓸 것 같습니다. xusaku// 이렇게 되었습니다. mightnmagic// 얍얍. asd메이지// 단탈리안을 M의 세계로 이끌어들인 장본인은 바르바토스지만요. <- 오룔리// 그렇습니다. 수천천사// 비너스빤스: 나 덕분에 경국지색의 미인들과도 살을 섞어보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Omicron//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ㅅ; 호박호박// 예, 가끔은 바라셔도 괜찮습니다. 숮랑// 차기작은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아라가 아니라 다른 사이트에 연재하는지라, 여기서 언급하기에는 조금 죄송하네요. ;ㅅ;   00500 지키는 자 =========================================================================                        이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실수했다. 단탈리안 전하가 죽었다고 얘기하면 안 되었다. 설마 저토록 단호하게 단탈리안 전하의 의중을 간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대로 바르바토스를 처단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몰락했으나 명색이 평원파의 우두머리. 한때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를 호령하다시피 한 거물이었다. 여기서 독단으로 바르바토스를 처분해버리면, 다른 마왕들이 납득하지 못했다. ‘잠깐만.’ 이바르가 문득 사고를 전환했다. ‘이 넓디넓은 대륙에서 단탈리안 전하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차라리 모래사장에서 하나의 모래알을 찾는 것이 쉬웠다. 단탈리안 전하가 어디에 있는지, 도시에 머무르는 것인지 시골에 머무르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외딴 동굴에 틀어박혔는지, 바르바토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 불가능. 바르바토스가 부하를 조종한다면 또 모를까, 혼자서는 절대로 이루어낼 수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바르바토스에게서 마왕의 지배력을 앗아가는가. 아니, 지배력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긍지와 실력을 빼앗는가에 달렸다. 이바르의 입가에 악의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무엇이든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 예!” 바르바토스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설득이 먹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저는 당신의 의지를 믿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 하더라도 간단히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알고 있겠지요.” 이바르가 차갑게 바르바토스를 쏘아보았다.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의 혓바닥에 놀아나서 실질적으로 단탈리안 전하를 파멸시킨 장본인은 당신입니다. 당신은 이미 한 번 단탈리안 전하를 죽였습니다. 덕분에 저도, 라줄리 국무상서도……모두가 전하를 잃게 되었어요.” 이바르가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발바닥이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꾸욱 짓눌렀다.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아.” “……읏.” “당신의 경쟁심을. 독점욕을. 무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알고 있어? 단탈리안 전하께서 가장 사랑하신 여자는 당신이 아니야. 나도 아니지. 그분의 신뢰와 애정을 독차지한 사람은 언제나 라피스 라줄리였어.” 이바르가 오른발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바르바토스는 머리가 바닥에 박혔다. 마왕으로 태어난 이후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굴욕이었다. 같은 마왕도 아니고 한낱 마인에게, 그것도 시녀의 신분에 놓인 자에게 머리를 밟혔다. “라피스 라줄리는 자살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 아직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했어. 왜 그런 줄 알아? 그녀는 자신의 희망보다, 자신의 신념보다, 단탈리안 전하의 의지를 우선한 거야……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해달라 부탁했어. 다시는 우리와 만나지 못해. 만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바르바토스는 치욕스러운 처사에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바르의 발바닥이 그녀를 짓누르는 대로 노예처럼 수긍했다. 지금껏 지켜온 자긍심을 모조리 땅바닥에 버렸다. 그런 바르바토스를 쳐다보며 이바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라피스 라줄리는 전하의 요망에 전적으로 따라준 거야. 죽은 것으로 여겨주라고 부탁하셨으니까, 그 반인반마는 정말로 단탈리안 전하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전하와 우리는 그 정도의 각오를 짊어지고 이 연옥을 연출하고 있어.” 이바르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녀는 오른발을 들어서 바르바토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저항할 수단도 의지도 없이, 바르바토스가 괴롭게 신음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발길질이 끊임없이 바르바토스의 몸뚱어리를 쳤다.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전하를 만나겠다고?” 이바르가 이빨을 갈았다. “나도, 라줄리도, 국무상서도, 어느 누구도 허락받지 못한 사치를―――하필이면 너 같은 원흉에게 허락해달라고?” “죄송합니……으읏……죄송, 합니다…….” “주제를 알아라.” 바르바토스가 신음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구타에 의해 헛숨을 들이마시면서, 울음을 토해내면서, 어떻게든 사죄를 이어나갔다. 무자비한 학대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멎었다. “하, 아……으…….” 바르바토스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약물과 고문에 의해 신체가 상할 대로 상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덮쳐온 폭력에, 바르바토스의 몸은 맥없이 널브러졌다. 헛구역질이 몇 번이나 일어나서 위액을 토했다. 위액에 핏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혼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좋아. 허락해달라니 기꺼이 허락해주지.” 이바르가 바르바토스의 옆얼굴을 짓밟았다. “하지만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사후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신 또한 한번 죽어야만 해. 당연한 조건이야.” “…….” “첫 번째 시험을 내려주마. 바르바토스. 너의 마나를 폭주시켜라.” 마나의 역류. 마법사로서 일생을 바친 자에게 죽음과 같은 형벌이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서클을 억지로 망가트린다. 그동안 일정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체내에 마나를 공급하던 서클들이 폭주하고, 제멋대로 방향과 속도가 일그러지면서 서로 충돌한다. “지금 당장.” 일찍이 파이몬이 겪었던 고통이었다. 파이몬은 마나 역류로 인해 이천 년 간 쌓아올린 경지를 잃어버렸다. 바르바토스도 똑같은 처지로 전락하겠지. 심지어 그때 파이몬에게는 의료진이 달라붙었다. 반면에 바르바토스에게는 치료 따위 호화스러운 망상에 불과했으며,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십중팔구, 마나를 역류시키면 죽음에 이를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억지로 입가를 움직였다. 바르바토스에게는 이미 그 정도 힘밖에 남지 않았다. 단지 기회를 내려주었다는데 감사하며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잠시만……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금방 끝낼 테니……단숨에, 끝내버릴 테니까…….” 이바르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모쪼록.” 그녀는 바르바토스의 신체를 구속한 마력봉인구를 풀어주었다. 이로써 바르바토스는 마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바르바토스의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잘 알았다. 구속구를 풀자, 검은색의 마나가 바르바토스를 서서히 감쌌다. 짙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 사지가 잘려나간 부위에 모여들었다. 그것들이 팔과 다리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윽고 검정빛 마나가 벗겨져 흘러내렸다. 살결이 새하얀 사지가 드러났다. “하아……흐읍…….”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최소한의 마력을 돌렸을 뿐인데도 숨이 벅찼다. 당장이라도 뱃속에서 무언가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구역질로 인해 귀가 먹먹했다. 이바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뭐하고 있습니까, 바르바토스 전하. 아직 시작도 안 되었습니다.” “네, 잠시만……잠깐이면 끝나요…….” “전하에게는 잠깐이라는 단어가 다소 특이하게 정의되어 있는 모양이군요. 우리 둘 사이에 오해가 없도록 제가 시간을 계산해드리겠습니다. 1분. 앞으로 1분 안에 마력을 폭주시키십시오.” “…….”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심장 부근에 모인 마나에 집중했다. 몇 달이 넘도록 봉인구에 의해서 억눌러진 탓일까. 마나는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대마법사로서의 지식은, 이런 상태에서 마력을 역류시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다고 경고했다. ‘괜찮아.’ 바르바토스가 심장에 걸린 여덟 개의 고리에 속삭였다. ‘응. 괜찮을 거야.’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눈을 감은 채, 여덟 개의 고리에서 제일 바깥에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잘라냈다. “……!” 마력이 즉시 폭주했다. 바르바토스가 피를 토했다. 핏물에는 검붉은 덩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디의 내장인지, 바르바토스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장육부가 비틀어지고 뼈가 비명을 질렀다. “크, 흐으으……으으, 끄으읏……!” 바르바토스는 자신이 흘린 피웅덩이에 상반신이 고꾸라졌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몸을 떠받치던 팔뚝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고통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린 마나가 체내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며 쏘다녔다. 그녀의 머리 위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설마 그걸로 끝입니까?” “읍, 하아아……흐윽…….” “어쩔 수 없군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한숨을 쉬었다. 다분히 비아냥이 섞인 한숨이었다. “좋습니다. 자비를 베풀겠습니다. 고리를 하나 제거하는 데 1분씩. 모두 다 합쳐서 8분의 시간을 드리지요. 자그마치 제한시간을 여덟 배로 늘려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소녀의 배려에 조금은 의지가 생겨나는지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가시길.” 이바르가 이죽거렸다. “벌써 1분은 다 지났습니다.” “…….” 이런 고통을 앞으로 일곱 번이나 더 견뎌야 했다. 아니, 고리를 하나 풀어갈 때마다 고통은 중첩되었다. 두 배. 세 배, 네 배……. 바르바토스는 이빨을 물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팔이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두 번째 고리를 단숨에 끊어냈다. “아……!”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식도를 거슬러 터져나온 핏물에 모든 소리가 묻혔다. 바르바토스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내장들이 찌그러졌다. 마왕의 회복력이 어떻게든 장기를 복구하려 들었으나, 회복력도 마나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날뛰는 마나 때문에 회복 자체가 끔찍한 고통을 더했다. 찢어지고, 회복되고, 다시 찢어지고, 회복되려고 하면 완전히 찢어 발겨졌다. “……, …….” 입에서 쉴 새 없이 핏덩어리가 흘러나왔다. 이바르가 중얼거렸다. “1분이 지났습니다. 다음.” “…….” 세 번째 고리를 끊었다. 입뿐만이 아니라 귀에서 피가 흘렀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기에, 이바르는 말로 명령하는 대신 발바닥으로 바르바토스의 몸을 쳤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신호. 바르바토스는 지옥과 같은 고통 속에서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들었다. 네 번째 고리를 끊었다. 피눈물이 흘렀다. 살갗이 터지면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제 막 생성되어 안정되지 못한 사지에서 주로 그러했다. 바르바토스가 품은 내장 중에서 어떤 것도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했다. 형태마저 잃었다. 마지막까지 심장이 견디다가 허물어졌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마침내. 여덟 번째. “………….” 몇 번을 혼절했을까. 수십 번, 수백 번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이바르가 몸을 툭 건드리면 바르바토스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미 막사는 바르바토스가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자그마한 소녀의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 붉은색의 한가운데, 버려진 쓰레기처럼, 바르바토스가 파묻혀 있었다.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은 멈춘 지 오래. 단지 여전히 뱃속에서 날뛰는 고통의 감각으로, 아직 살아 있구나, 하고 간신히 깨달았다. “팔 분은커녕 두 시간이 걸렸습니까. 한심한 노릇이군요.”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걷어찼다. 발길질에 그대로 떠밀려 바르바토스는 피웅덩이에 재차 엎어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제한시간을 한참 어겨버린 만큼, 첫 번째 시험은 성공도 뭣도 아닙니다. 다음 시험에서는 부디 바르바토스 전하의 진심을 보여주시길.”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아까 전부터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감아버리면 정말로 끝나버릴 것 같아서. 영원히 잠들어버릴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휴식. 아주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 눈을 감자, 어째서인지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탈리안.’ 바르바토스는 그 사람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다. 간절하게.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생각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온몸이 피로 더럽혀진 채, 바르바토스는 까마득한 의식의 그림자로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바르바토스... ;ㅅ; 사실파괴// 사실파괴 님의 피는 무슨 색깔입니까. 한뫼사람// 이제 저는 변명을 포기했습니다... asd메이지// 무엇을 숨기랴. 저는 조아라 로맨스 판타지의 팬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궁정물을 애정합니다. 로○마리, 귀족○가씨 같은 작품이 취향에 적중하지요. HAHA. 사리면// 단탈리안 ts라니... 저는 무섭고 두려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인간// 개그가 되어버리는 거군요. 알고 있습니다. 페르르// 표지는 강력했습니다. no name//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고통이 부족하지 않을까요... 산초나베// 얍얍. NeoGGM// 욥욥. 500화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ㅅ;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독자 여러분 덕택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써보려고 합니다.   00501 지키는 자 =========================================================================                        * * * 바르바토스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바로 그날 밤. 아직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두 번째 시험이 내려졌다. “심장과 내장에 각인을 새기겠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밤새도록 바닥에 기절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탈리안을 위해 준비되었던 막사이기에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 있기는 했다. 그런데도 온몸이, 내장이, 뼈까지 차가웠다. “왜 대답이 없습니까.” 바르바토스의 상태를 빤히 알면서도 이바르가 구태여 물었다. “혹시 이제야 시험을 포기하실 생각이 드셨습니까? 잘 되었군요. 어차피 도중에 실패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자력으로 마나를 흐트린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평가해드리지요. 그럼,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괜찮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일어섰다.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짊어든 말의 다리처럼 바르바토스는 팔이 후들거렸다. 그녀가 얼굴을 들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병자의 눈. 눈밑에 기미가 지다 못해서 까맣게 파였다. 안색이 창백하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다음 시험, 할 수 있어요.” 눈동자의 깊은 저편에는 형형한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바르가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저는 당신의 진심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단탈리안 전하를 찾아가겠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입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당신은 야욕에 집어삼켜진 마왕에 불과합니다. 여건이 된다면 언제 참회했냐는 듯 다시 권력을 움켜쥐려고 할거하겠지요.” “아니에요. 맹세하건대…….”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선언하십시오.” 이바르가 품에서 마법서를 꺼내었다. 이바르는 마법서를 펼쳐서 상대에게 보였다. 비록 바르바토스가 마법사로서 폐품이 되어버렸으나 지식만은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단번에 마법진의 형태를 알아보았다. “금제(禁制)와 맹세의 마법…….” “예. 계약자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도구이지요.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로 반가운 마법이지 않습니까.” 역시 마왕 파이몬이 당했던 수법과 동일했다. 파이몬은 인간군의 성녀 그라시아와 밀약을 나누었다. 약속의 내용은 산악파와 인류군이 연합하여 단탈리안을 공격할 것. 파이몬은 막바지에 가서 약속을 어겼다. 그 대가로 죽음의 위기를 맞닥트렸다……. ‘파이몬 년이랑 똑같은 전철을 밟는 건가. 아니, 순서만 거꾸로 되었네.’ 바르바토스는 왠지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가장 닮기 싫어하는 여자였다. 어떻게 살더라도 그 여인처럼 살지는 말자. 그녀처럼 되지만 말자고 다짐하며 수천 년을 대립했다. 하지만 같은 남자를 좋아했다.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똑같이, 남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기이한 인연이라고 감탄해야 할까. 아니면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한 우연이라고 욕해야 할까. “저는 맹세로 당신의 야망을 속박시킬 계획입니다.” “네. 현명하고 올바른 조처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불멸의 바르바토스라고 자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일개 시녀한테 맞장구를 치며 아부하는 것인가요. 마왕이란 결국 그 정도 종자로군요. 혐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숙였다. 치욕을 겪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파이몬을 떠올리니 바르바토스의 의지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라피스 라줄리라는 반인반마도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단탈리안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저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마나의 고리가 붕괴되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당신은 위협스러운 인물입니다. 위험성을 뿌리부터 박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바르가 막사의 벽에 장식된 장검을 가져왔다. “금제의 마법을 걸기에 앞서 당신의 심장을 파괴하겠습니다.” “…….” “고리가 마법의 근원이라면 심장은 마력의 근원. 마력이 옅어질수록 마왕의 지배력은 약해지지요. 저는 당신의 지배력이 거의 없어지는 지점까지 심장을 없앨 것입니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제는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이 뭉개졌다. 오늘은 마왕으로서의 모든 것이 빼앗기게 되었다. 상대방의 말인즉슨, 바르바토스한테 더 이상 마력이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심장을 제거하겠다는 얘기였다. 신체가 파손되면 체내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복구작업에 들어간다. 그런 복구작업이 불가능해지도록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심장을 파괴한다……. 수십 번이 될지도 몰랐다. 수백 번이 될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작업’은 즉시 거행되었다.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바르는 장검을 들어서 바르바토스를 찔렀다. 바르바토스의 심장이 파괴되면 몸안에서 마력이 일어나 어떻게든 부위를 치료했다. 심장이 다 낫기까지 여유롭게 기다렸다가, 이바르는 다시 장검을 내리찍었다. 생살이 베이며 심장이 찢기는 고통에 바르바토스는 끝없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흐악, 아, 아아아아악!” 찌르고, 회복되고, 찌르고, 회복되고. 그것이 하루 동안 반복되었다. 마왕이 제아무리 불사의 몸을 갖고 있다지만 심장은 특별했다. 예전에 바알이 바르바토스의 심장을 부서트렸을 때 그녀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한 번 파괴되는 것까진 버틸 수 있었다. 두 번 연속으로 파괴되는 것도, 어쩌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은.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쉴 새 없이 열두 번이나 파괴되는 것은―――바르바토스의 마력을 송두리째 들어내는 짓거리였다. 처음에는 심장이 재생되는 데 15분이 걸렸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바르바토스의 몸치고는 매우 분발했다. 두 번째로 심장이 파괴되고 재생하는 데 또다시 15분이 걸렸다. 세 번째에도 15분. 그러나 네 번째부터는 급격하게 속도가 떨어져서 30분이 소요되었다. 다섯 번째에 60분. 여섯 번째에 90분. 일곱 번째에 다소 급락이 둔중해지고 110분. 여덟 번째에 120분. 다시 무시무시하게 속도가 떨어져 아홉 번째에는 240분이 걸렸다. 마지막 열두 번째에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었다. “……읏, 흐아……아…….” 바르바토스가 지나친 고통으로 인해 떨었다. 말 그대로 혹사. 몸에 남은 마력이 바닥까지 긁어졌다. 수십 번을 쥐어짜낸 걸레처럼 이제 바르바토스에겐 한 방울의 마력조차 머무르지 않았다. 마력으로 강화되던 근육마저 흐물해졌다. 마법도 마나도 모조리 잃어버린 바르바토스는, 한낱 평범한 여자아이 수준으로 근력이 몰락하였다. “어떻습니까. 천하를 호령하던 위치에서 순식간에 약자로 전락한 기분은.” 도합 스물세 시간이 작업에 소요됐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게 평범한 마인입니다. 모두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당신처럼 태어날 때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강자로 태어나 강자로 군림하는 것이 당연했을 터입니다.” 이바르가 바르바토스의 머리카락을 잡고 억지로 들었다. 바르바토스가 신음했다. “당신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탈리안 전하를 만나는 것은 절대로 허락받아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요. 이만큼이나 고통을 겪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머리를 바르바토스의 코앞까지 숙였다.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나 정도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통을 자처했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원래는 허락되지 않을 일도, 내가 이만큼씩이나 했으니까, 당연히 허락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바르가 속삭였다. “―――오만한 것.” 흡혈귀 소녀의 송곳니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단탈리안 전하를 다시 한 번 만날 수만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고통을 받아도 좋아. 백 년이 넘도록 심장이 파괴되고 재생될지라도, 단탈리안 전하를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을 거야. 유일한 예외로 취급받는 것이 당신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이바르가 비아냥거리면서 바르바토스의 뺨을 툭툭 때렸다. “단탈리안 전하가 아무와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당신은 여전히 계속해서 재회를 포기하지 않았어. 그게 당신의 죄야. 오만이지. 당신에게는 단탈리안 전하보다 자기 자신이 소중한 거야…….” 짜악, 하고 이바르의 손찌검이 멈추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당신을 놓아줄게.”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이유가 없어. 나는 단지 당신이 자신의 오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랄 뿐이거든. 어디 평범한 몸뚱어리로 세계에 버려져봐.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명령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봐.” “…….”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 이바르가 머리카락째로 바르바토스를 내팽개쳤다. 이후, 바르바토스에게는 갖가지 금제의 각인이 새겨졌다. 체내에 마력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도록 조처했다. 바르바토스가 자연적으로 마나를 회복하지 못하게끔. 마나가 거의 텅 빈 상태에 영원히 갇히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바르바토스임을 단탈리안 이외의 인물한테 폭로하거나 발각될 경우, 심장이 터졌다. 마나가 없어진 현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심장이 파괴된다는 것은 틀림없이 죽음을 의미했다. 철두철미한 감옥. 그녀에게는 풀리지 않을 족쇄가 채워졌다. ─ 풀썩. 아직 어둑한 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몰래 군중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숲속에서 포대를 풀어, 바르바토스를 아무렇게나 내다버렸다. “…….” 바르바토스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었다. 그저 살갗이 돌멩이에 걸려 찢어지는 걸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이었다면 금세 새살이 돋아났을 상처에서 짙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이틀에 걸쳐서 바르바토스의 외형을 완벽하게 메모리아 아티펙트로 저장했다. 공개처형식에는 바르바토스의 인형을 올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사형수한테 마력 봉인구가 덕지덕지 붙은 것이니, 마왕인지 인형인지 알아볼 수단은 없었다. “참.” 이바르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잔혹하기만 한 악마가 아닙니다. 당신의 의지에 감탄한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그걸 보아서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단서만 넘겨드리지요.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서쪽'에 계십니다.” “…….” “부디 모래밭에서 한 알의 모래를 발견해보시기를.” 그리고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떠났다. 단탈리안이 대륙의 서쪽에 머무른다는 정보는 물론 거짓. 이바르는 모스크바 왕국의 설원에 오두막을 지어두었다. 단탈리안 전하가 일단 그곳으로 이동했으니 한동안 북쪽에 기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서 대륙의 북동쪽에 가까웠다. 서쪽과는 정반대로 떨어져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지막까지 마왕 바르바토스를 농락한 것이었다. “…….” 한참이 지났다. 이바르가 떠나고서 한 시간이 넘게 흐른 다음에야 바르바토스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잘 안 되었다. 무릎이 꺾여서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거친 땅바닥에 살결이 쓸렸다. 바르바토스는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하지만 그보다 아득하게 고집스러운 몸짓으로, 재차 땅을 짚었다. 그때 바르바토스는 허리가 굽어지긴 했어도 두 발로 대지를 디뎠다. “……조금만, 기다려. 바보 자식아.”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무릎에서 힘이 풀려서 거꾸러졌다. 바르바토스가 일어나서,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바로……만나서. 응. 바로 만나서…….” 그렇게 그녀는 나아가고 있었다. 최후의 용군주를 토벌했을 때 그러했듯이. 월맹군을 이끌고 진군할 때 그러했듯이. 불멸의 이름이 삼천 년의 세월 동안 언제나 그러했듯. “정말로 한방, 세게 때려줄 테니까…….” 바르바토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00502 지키는 자 =========================================================================                        ‘서쪽에 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겠지.’ 바르바토스가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어갔다. 세 번을 연달아서 넘어진 이후 그녀는 별 수 없이 적당한 나뭇가지를 집었다. 그러나 서른 발자국쯤 걸어갔을 때, 바르바토스는 온몸이 넝마짝이 되어 더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아, 후우……후우우.” 바르바토스가 나무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숙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아가레스와 반나절이 넘도록 일기토를 벌였을 때보다 힘겨웠다. 잘 생각해보니 과장도 아니었다. 그때보다 최소한 서너 배는 힘이 없었다. ‘나를 그만큼 증오하는데도 제대로 된 위치를 가르쳐줬을 가능성은 일절 없어. 내가 조언을 무시하고 정반대 방향으로 찾으리라는 사실까지 계산하고 건넨 속임수겠지만. 서쪽이라는 낱말 자체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목적…….’ 바르바토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대륙의 지도를 그렸다. 자세하지 않고 각 나라만 대충 그린 그림이었으나, 의외로 도시의 위치 같은 것이 정확했다. ‘서쪽이라면 프랑크, 바타비아, 버니시아, 브르타뉴 그리고 카스티야인가. 썅. 오질나게도 넓은걸.’ 바르바토스는 열세 개의 국가 중 다섯 개국에 X를 그었다. 숨 고르기가 조금 편해졌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넓은 대륙에서 1/3 가까이를 지우게 되었으니. ‘합스부르크도 아니야. 단탈리안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싶어서 사라진 거니까. 합스부르크에는 추억이 너무 많지. 너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요소가 지나치게 득실거려. ……그렇지, 단탈리안?’ 합스부르크 제국과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X자가 그려졌다. 열세 개의 나라 중에서 이제 남은 곳은 여섯 곳. 바르바토스가 간이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격렬한 피로가 바르바토스를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 처형식에서 최후를 맞이할 운명에서 벗어나 단탈리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모든 피로를 압도했다. ‘확신하긴 어려워도……튜튼이나 사르데냐, 폴리투니아도 아닐 거야. 합스부르크랑 너무 가까워. 멀리.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이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던 곳. 분명히 그런 곳으로 갔을 거야.’ 바르바토스가 몇몇 국가를 지웠다. 그러자 지도에는 오직 세 곳만이 남았다. 칼마르 연맹국. 모스크바 왕국. 아나톨리아 제국. “…….” 바르바토스가 묵묵하게 지도를 바라보았다. 열세 나라에서 세 군데. 숫자만 중얼거려 본다면 확실히 적게 느껴졌다. 문제는 영토의 넓이였다. 아나톨리아 제국만 하더라도 대륙에서 삼분의 일을 홀로 차지하는 대국. 그중 많은 부분이 사막이지만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단탈리안은 분명히 사막이나 설원처럼 삭막한 곳에서 지내려 들 거야.’ 그게 단탈리안이었다.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품은 채 눈가를 문질렀다. 얼굴에 붙어서 딱지처럼 굳어버린 핏가루가 떨어졌다. ‘넌 지금까지 가져온 인연을 전부 자르고 은거했어. 사회성이란 거. 인간관계라는 거. 전부 버리고 들어간 셈이야. 거기서 다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소로 간다? 그리고 조금씩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바르바토스가 작게 웃었다. 식도와 폐, 입과 이빨이 동시에 아팠다. 작은 웃음조차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지만 바르바토스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절대로 불가능해.’ 왜냐하면, 단탈리안은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릴 만한 가치가 자신에게 있는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인연을 전부 버렸다. 잘랐다. 끊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면, 무엇보다도 자기가 버린 인연들을 모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불가능해.’ 단탈리안은 아예 시간이 멈추어지기를 원하겠지. 더 이상 생명이 자라나지 않는 사막. 발자국이 찍혀도 금세 눈발에 묻히고 마는 설원. 자기 자신한테 미래를 허락하지 않고 현재를 앚어버리게 만든 채, 단탈리안은 그저 과거를 끝없이 추억하며 살아가고자 할 것이다. ‘자살도 안 해. 녀석이 자살할 리가 없어. 숨만 쉬는 시체마냥 지낼걸.’ 다만 걱정되는 지점은 단탈리안의 증세였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면서 언제까지 정신이 버틸 수 있을까. 본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살을 열망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을까.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고독을 일 년도 감당하지 못한다.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이 괴물과 같은 이성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십 년. 백 년까지도 어찌어찌 버티리라. 하지만 이백 년은 어떠할까. 삼백 년. 과연 사백 년을 버틸까. ‘백 년 안에. 아무리 늦어도 이백 년 안에 찾아야 해.’ 이백 년을 초과해버리면 단탈리안의 정신이 망가져버린다. 설령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단탈리안이 아니라, 단지 단탈리안이었던 무언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단탈리안과 만나고 싶어.’ 똑똑한 주제에 멍청한 그 녀석을 보고 싶었다. 뻔뻔하면서도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는 그 남자가 그리웠다. 그렇기에 이백 년의 기한.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바르바토스에게 건 금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드시 혼자서 단탈리안을 찾을 것, 같은 금제도 걸려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오직 두 발과 두 손에 의지하여 그를 찾아야만 했다. “…….” 어느새 바르바토스는 일어서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알고 있었다. 지금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조금이라도 건강한 몸상태로 출발하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다독인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르바토스는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환한 대낮. 나뭇잎과 흙먼지가 바르바토스의 몸을 덮었다. 새가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에 바르바토스는 퍼득 일어났다.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하지만 몸에 붙은 나뭇잎의 숫자를 보고 바르바토스가 분노했다. “이, 병신 같은 몸뚱어리가……!”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었다. 아무리 적어도 사흘은 공으로 날려먹은 게 분명했다. 사흘이라니! 지금 까먹은 사흘 때문에 단탈리안은 부서질지도 몰랐다. 바르바토스는 이빨을 갈고 서둘러 일어섰다.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빨리, 단탈리안을. 1년째. 바르바토스는 얼굴과 하복부를 불길로 지졌다. 이미 잘려나간 뿔은 더욱 더 아래로 잘라, 머리카락에 가려지게끔 만들었다. 이제 누가 봐도 그녀를 바르바토스로 알아보지 못했다. 안면이 화상을 심각하게 입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약해빠진 여자아이가 혼자서 돌아다녀도 무사할 정도로 이 세상은 상냥하지 않았다. 절대로 범하고 싶은 욕망이 들지 않을 정도로 흉측하게. 사람들이 저절로 따돌릴 만큼 기괴하게. “문둥병 환자야…….” “아니, 틀림없이 마녀…….” 바르바토스의 외모를 본 인간들은 누구나 다 수군거렸다. 때로는 돌멩이가 날아왔다. 자신들의 마을과 거리에서 꺼지라고 욕하면서. 어느 날인가 바르바토스는 아나톨리아 제국의 안토키아 지방을 지나치면서, 머리에 돌을 강하게 맞아버렸다. 예전이었다면 코웃음을 치고 거뜬하게 넘겼을 타격.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돌을 맞자마자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하루 반나절. 바르바토스는 피를 흘리며 기절했다. “…….” 의식을 되찾았을 때 바르바토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짜증이 났다. 돌을 던진 누군가보다 거기에 반나절이나 기력을 못 찾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바르바토스는 머리카락에 젖은 핏물을 대충 털어냈다. “……이쪽은 바쁘단 말이다.”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2년째. 바르바토스는 긴 후드로 얼굴을 감추었다. 한여름이 몰아닥쳐도 결코 후드를 벗지 않았다. 어쩔 때는 무더위 탓에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평범한 신체'가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만큼은 좋았다. 식사와 수면은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었다.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만큼 단탈리안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시간이 늘어났다. 고마운 일이었다……. 3년째. 세상에는 별에 별 미친 놈이 다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현재 자신의 외모가 삼 년 동안 성욕을 참은 사춘기 남자애가 봐도 저절로 성기가 쪼그라들 정도로 흉악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자기를 덮친 남자가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오직 목소리만으로 발정하는 놈이었다. 으쓱한 뒷골목에서 덮쳐진 바르바토스는 얌전히 따르는 척하며 기회만을 노렸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렇게 남자가 안심하며 바리춤을 내린 순간, 바르바토스는 펠라티오를 해주려는 척하면서 성기를 물어뜯었다. “크아아아아악!” 골목에 남자의 비명이 울렸다. 이대로 원한을 남겨두면 골치 아프기에, 바르바토스는 호신용 단검으로 남자의 불알을 찍어버렸다. 비명이 거세졌다. 바르바토스는 코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목줄기를 그었다. “날 강간하려면 적어도 제국 하나는 정벌하고 와라. 쓰레기 새끼.” 기분 나쁜 피가 묻어버린 단검을 땅바닥에 버리고, 바르바토스는 유유히 골목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로 바르바토스는 성대까지 의도적으로 손상시켰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걸걸하고 불쾌한 음색으로 변했다. 5년째. 7년째. 15년째. 작은 마을에서 큰 마을을. 산골짜기에서 바닷가를. 인간이 사는 곳과 고블린이 사는 곳, 마물이 지내는 곳과 정령이 배회하는 곳.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오지에서 절벽의 귀퉁이까지. 바르바토스는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녀가 쓰러지는 경우는 오직 몸이 더 견디지 못해 무너질 때뿐이었다. 무모하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하나의 일념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단탈리안을. 62년째. “젠장. 여기도 아닌가.” 바르바토스가 양피지 지도에 연필로 X자를 그렸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나톨리아의 지역을 대부분 뒤졌다. 아직 탐색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으나, 바르바토스 나름대로 찾을 곳과 찾지 않을 곳을 구분하고 있었다. 예컨대 술을 구하기 어려운 지방은 탈락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이 술도 없이 맨정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놈은 뼛속부터 술에 중독되었다. 따라서 사막 한복판이나 산맥의 동굴과 같은 곳은 후보에서 지워졌다. “섬마을 같은 곳에 있을 확률도 높단 말이지…….” 으으, 하고 바르바토스가 머리를 긁었다. 마침 시내 한복판에서 연주자들이 음악을 하고 있었다. 축제일이 가까워짐에 따라 도시에 고용된 연주자였다. 바르바토스는 눈썹을 찡그린 채 연주자들을 바라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음악?’ 아, 하고 바르바토스가 입을 벌렸다. 단탈리안은 분명히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영원토록 버틸 속셈일 거다. 아마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책을 마련해두지 않았을까? 제일 좋은 방법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니 각하되었다. 허면, 사회생활을 제외하고도 자신의 정신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단은 무엇인가. ‘취미!’ 바르바토스는 머리에 뇌우가 스쳤다. ‘음악이라거나 공예, 그림, 아무거나 취미를 하나 잡아서 하고 있을 거야!’ 바르바토스가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기나긴 여행에 방향성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00503 지키는 자 =========================================================================                        시간이 흘렀다. 75년째. 바르바토스의 여행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도시에 들릴 때 그녀는 반드시 갖가지 공방에 들렸다. 화방. 조각실. 악기 제작소. 예술가들과 작업가들이 일하는 아틀리에에 들려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말수가 적고…….” “음침하고.” “재수없는데다, 눈빛이 쓸데없이 어두운데.” 그런 남자가 있었다. “자기가 세상에서 모든 불행이랑 고뇌를 짊어진 것처럼 보이는…….” “아니, 그렇다고 아예 우중충하기만 한 건 전혀 아니라서.” “그 녀석 나름대로 잘 웃기도 하고.” 분명히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도 자주 던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미인, 그야말로 못된 자식인데.” “……그게. 녀석만의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조금, 표현하기 어려웠다. 바르바토스는 공방 주인들에게 단탈리안에 대해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설명하려면 설명할수록, 자주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단탈리안을 지나치게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지나친 이해가 설명을 방해했다. 예컨대 한 명의 인간이 방문을 열고 단순히 지나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물리적인 조건과 해설이 필요한가. 그는 공기의 저항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1초에 30킬로미터의 속도로 태양 둘레를 도는 방바닥 위에 안전하게 착륙해야 했다. 일초의 단 몇분의 일이라도 일찍 혹은 늦게 내려섰다면, 방바닥은 순식간에 몇 킬로미터나 멀어져 버리게 될 것이었다. 심지어 방바닥은 단단하지조차 못했다. 그곳을 밟고 지나친다는 것은 차라리 파리떼 속에 발을 내디디는 것과 똑같았다. 그는 모험을 감행하여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러자 파리떼 가운데 한 마리가 그에게 부딪쳐 왔다. 다음 발자국에서는 또 다른 파리 한 마리가 그를 위로 올려쳤다. 그는 무수하게 넘어졌으며 그때마다 파리가 그를 되밀었다. 우연과 우연이 합쳐져 이루어진, 단지 이상한 조건들의 연속선상에서―――한 남자가 방문을 열고 걸어갔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좋은가. 어떻게 말해야 '단탈리안'이라는 남자를. 하나의 제스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남자요?” 공방 주인들은 대체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항상 그들은 어떤 남자를 찾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바르바토스는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울해도 웃어주는 남자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었다. “검은색이 어울리는 남자예요.”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 남자를 좋아했다. 이상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모르겠군.” 바르바토스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공방 주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본 적이 없다가 아니라 모르겠다. 이 대답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런 남자에 대해 모르겠다는 의미. 그리고 당신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의미. “알겠습니다.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숙였다.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 마디를 쏟아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걸 잘 알았다. 어차피 그런 것이었으므로, 바르바토스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음 도시로 향했다. 시간이 흘렀다. 89년째. ‘단탈리안은 음악에 전혀 재능이 없으니까.’ 이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지도를 바라보며 바르바토스가 생각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은 이제 다 돌았다. 혹시나 몰라서 섬마을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너무 동떨어진 벽지에서 취미 생활을 이어나가기란 어려웠다. 외딴 섬마을에 머무를 확률은 높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오직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바르바토스는 수백 개의 섬을 돌아다녔다. ‘음악에 몰두할 가능성은 적지. 노래도 마찬가지야. 그림이나 조각일 것 같은데……으응. 양쪽 전부에 심취했을 수도 있고.’ 바르바토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8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리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바르바토스는 어느 때보다 단탈리안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조금씩 이해할수록 바르바토스는 자신도 알아갔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잠수부가 심해를 바라보는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보았다. 꼭 그처럼 바르바토스는 단탈리안을 바라보았고 또 거기에 그녀가 비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바르바토스는 그에 대해 생각하면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 여기는 숨을 놓는 곳. 천천히 떨어지는 꽃잎에는 방향이 없었다. 떠밀려 오는 시간도, 떠밀려 가는 시간도 아니었지만, 지금 막 멈춘 첼로의 선율이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분의 시간을 길게 연장하듯이. 바르바토스는 시간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여 잦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 괜찮아.” 바르바토스가 눈을 떴다. 손바닥에 떨어져 있는 벚꽃 한 잎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반밖에 안 왔는걸.” 시간이 흘렀다. 120년째. 바르바토스는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모스크바 왕국으로 건너왔다. 남방에 사막이 펼쳐진 아나톨리아와 정반대로, 모스크바는 북방으로 올라갈수록 한없이 넓게 설원이 이어졌다. 어느 겨울날. 바르바토스는 지평선까지 새하얗게 뒤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자기가 헛되이 여정을 소비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막이나 설원. 단탈리안은 분명히 두 장소 중 하나를 애호할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가. “……바보 같았어.” 단탈리안은 틀림없이 설원에 기거한다. 사막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엔 오아시스가 있었다. 경쾌한 태양의 유목민들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뜨겁게 작렬하는 햇볕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오아시스 옆에서 춤추는 소녀들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이다. 바르바토스는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단탈리안이 있다. 다른 어디도 아니라 바로 이곳에. 바르바토스는 때때로 설원의 늑대떼에 습격당하여 온몸이 갈가리 찢겼다. 호신용 장검을 휘둘렀지만 들짐승 무리를 한꺼번에 감당하기란 어려웠다. 바르바토스의 샛붉은 피가 하얀 눈밭에 떨어졌다. 도적들에게 습격받는 날도 제법 많았다. 바르바토스가 어린 소녀인 걸 알아보고 도적들은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웃음에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두꺼운 털옷을 벗어서 자신의 맨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자.” 도적들은 얼굴이 구겨졌다. “범하려면 어디 범해보시던가.” 핏빛과 보랏빛의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신체. 살덩이가 뭉개져서 보기만 해도 혐오감이 치솟았다. 문둥병 환자도 이보다는 덜 기괴한 살결을 가지고 있으리라. 여자를 보지 못한 지 수개월이 지난 산적들조차 바르바토스의 몸을 보고는 침을 뱉었다. 도적들은 재수가 없다며 소지금마저 빼앗지 않았다. 전염병이나 저주가 걸려 있을까봐 꺼리는 것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도적들이 뒤꽁무니를 빼는 걸 보며 크게 웃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씻었다. “단탈리안, 이 병신아!” 설원 한가운데. 바르바토스는 나신으로 양팔을 벌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내가 면상에 주먹을 후려갈겨 줄 테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광활한 눈밭에 울렸다. 그러고도 바르바토스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괴성을 토해냈다. 아아아, 아아아아, 의미가 없고 형태가 없는 외침이 끝없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웃음소리였다.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창 이어지던 메아리가 서서히 끊겼다. 설원에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설원이 받아들여야 할 만큼 요란스러운 소리가 전무했다. “……윽…….” 단지 미처 눈에 가닿지도 못할 정도로 나약한 소리가 있었다. 소리를 대신하여, 뜨거운 물이 눈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르바토스는 팔이 떨렸다. 어깨가 떨렸다. 이빨을 꾹 물었는데도 입술이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백 년이 넘도록 억눌러온 둑이 무너져 내렸다. “으……으윽, 아으으…….” 단탈리안. “진짜. 뭐야, 싫게……으읏…….” 단탈리안. “……아, 으윽……나쁜 새끼…….” 눈물이 흘렀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양팔을 끌어안았다. 입술에서 새하얀 숨결이 불안정한 리듬으로 새어나갔다. 이곳은 너무 추웠다. 일년일년이 흘러갈수록, 이 형편없는 몸뚱어리가 망가져 갔다. 이백 년은 단탈리안에게 허락된 유예뿐만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 그녀에게도 기껏해야 이백 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체내에 남은 마력이 점점 더 고갈되는 것이 느껴졌다. 존재가 덧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바닥에 고인 물마저 떨어지기 전까지 바르바토스는 그와 만나고 싶었다. 단탈리안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단탈리안…….” 내 눈앞에 나타나줘. 나한테 목소리를 들려줘. 네가 벌써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더 이상 울리지 않도록. 그런 생각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도록. 바르바토스는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애원을 참아내며, 단탈리안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단탈리안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그걸 소리 내어서 말해버리면 정말로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살아 있을 거야. ―――그런데 왜 눈앞에 없는 것인가. 간단히 죽어버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단탈리안이 죽을 때까지 내가 찾지 못한다면. 만약, 내가 죽을 때까지 단탈리안을 찾지 못한다면. “…….” 바르바토스가 눈물이 맺힌 눈동자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설원에는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그 눈부심에도 불구하고 바르바토스는 똑바로 태양을 직시했다. 아직이다. 아직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바르바토스는 망토를 두르고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내딛은 자리에 발자국이 남았다. 다시 눈이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뚜렷하게 남을 발자국이. 바로 그 잠깐의 흔적을 믿으면서 바르바토스는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검은색이 어울리는 남자요?” “네. 혹시 보지 못했나 싶어서요.” 바르바토스는 노브고르드라는 이름의 도시에 도착했다. 여행 초반에는 도시에 있는 집을 하나하나 몰래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요령이 생겨 이렇게 도시에 위치한 공방부터 순례했다. 술집과 양조장을 돌아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탈리안이라면 반드시 주기적으로 양조장을 털어먹을 것이었다. 화방의 주인이라는 여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볼일이 있으신 건데요?” 그 순간. 바르바토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인이 방금 말한 뉘앙스. 목소리의 어조. 이쪽을 살피는 듯한 기색까지. 바르바토스의 예민한 감각이 모든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흥분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지금까지 64번이나 있었다. 64번 모두 꽝이었다. “예전에 빌린 물건이 있어요.” 바르바토스가 멋쩍은 미소를 연기했다. “제가 아니라 저의 선조님이 가져간 물건인데 집안 대대로 내려왔거든요. 아버님이 이걸 어떻게 해서라도 본래 주인한테 돌려달라고 유언을 남겨서, 지금 홀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 정도 변명이 적당하겠지. 바르바토스는 순수한 성격을 흉내 내며 냉철하게 여인의 태도를 살폈다. 여인은 고민하고 있었다. 머뭇거림은 1초. 혹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바르바토스에게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여인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희 가게에 그런 손님은 오신 적이 없네요.” 거짓말. “아, 역시 그런가요. 하아. 언제쯤 찾을 수 있을련지…….” “혹시 이 도시에 머무르실 생각인가요? 제가 다른 손님들한테도 여쭤보겠습니다.” “아니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내일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확신을 품고 화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곧바로 건너편의 골목에 숨어 들었다. 비좁고 차가운 골목으로 고양이들이나 쏘다닐 법한 곳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거적데기로 몸을 숨긴 채 골목에 잠복했다. 다음 날, 여인이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 바르바토스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인을 미행했다. 거리를 지나치고 성벽을 지나, 여인은 점차 으슥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이따금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괜찮았다. 평범한 아낙네한테 미행이 들킬 정도로, 바르바토스는 쇠락하지 않았다. 그 끝에 저택이 있었다. 여인이 문을 두들기자 잠시 뒤에 누군가가 나왔다. 바르바토스가 나무 뒤에 숨어 저 멀리 문의 틈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가린 바람에 상대방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조금씩 몸을 움직였고, 그때마다 상대방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윽고 여인이 허리를 깊이 숙였을 때. “―――――.” 바르바토스는 보았다. 검은색 망토로 온몸을 감춘 한 명의 사람을. 씁쓸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를. 기억 속의 누군가와 닮은 미소를. “아…….” 아주 잠깐뿐이었다. 여인은 떠났으며 문은 닫혔다. 거짓말과 같이 짧은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바르바토스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나왔는지는 바르바토스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안에는, 이토록 울음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찾았, 다…….” “찾았어…….” “……죽지 않았어…….” “다행이야……응, 다행이야…….” “죽지 않아서……정말 다행이야…….” 바르바토스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울음을 토해냈다. 여행이 시작된 지 179년째. 소녀는 한 명의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찾았다.   00504 지키는 자 =========================================================================                        바르바토스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물에 젖은 옷을 수십 겹이나 두른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르바토스는 발을 움직였다. 이미 밤이 지나버리고 새벽이 왔지만, 울음을 터트리느라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바르바토스는 걸어갔다. “읏.” 수풀에서 빠져나오면서 바르바토스가 눈밭에 뒹굴었다. 경사진 면을 따라서 그녀가 미끄러졌다. 바르바토스는 눈밭에 내팽개치자마자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일어났다. “단탈리안…….” 발이 절뚝거렸다. 눈더미에 발이 빠지면서 몸의 균형이 깨졌다. 바르바토스가 균형을 되찾을 생각도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았기에 세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넘어졌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곧바로 일어서서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조금만 더. 이제까지 수억수만 번의 '조금만 더'가 있어왔다. 하지만 지금의 '조금만 더'는 달랐다. 이제는 정말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단탈리안이 있었다. 저택이 보였다. 저택의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심지어 그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질 수 있었다. 손가락을 뻗으면 닿았다. 바로, 지금 이렇게―――. “…….” 저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 직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오른손이 문의 표면을 스칠 듯한 지점에서 멈췄다. 바르바토스는 한참을 우두커니 문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안 돼.’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자기가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떠올렸다. 웃으면서 단탈리안을 맞이할까, 울면서 단탈리안을 껴안을까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이었다. 현재 자신은 문둥병처럼 추악한 화상 자국을 품었노라고. ‘이런 모습으로 단탈리안이랑 만나기는 진짜 싫은데.’ 바르바토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래도 만나고 싶고. 당장 만나고 싶고……으으. 이건 싫지만.’ 한숨이 나왔다. 아까 전까지 마음이 요동쳤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약간 우스웠다. 단탈리안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적어도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은 보여주기 싫다. 자신한테 이렇게 평범한 감정이 숨어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화상이 회복될 때까지 잠깐만 기다렸다가. 아니, 그 사이에 저 멍청한 새끼가 무너지면 어쩌려고.’ 고민이 깊어졌다. 만나고 싶다. 하지만 당장 만나기는 싫다. 두 개의 상반되는 욕망이 피 터지게 다투었다. 바르바토스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잡고 으으, 으으으, 하고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문득 꽃송이 여러 개가 바르바토스의 눈에 띄었다. 겨울에 피어나는 노란색의 꽃, 설연화(雪蓮花)였다. 얼음새꽃이나 빙리화라고도 불렸다. 아직 만개하지 않아 봉오리가 슬쩍 벌어진 꽃무리를, 바르바토스가 쾡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운에 맡기자.” 결정적인 순간에 직감을 따르는 그녀다웠다. 바르바토스는 무릎을 굽혀서 자그맣게 쪼그려 앉았다. 얼음새꽃 한 송이를 뚝, 하고 꺾었다. 그리고 노란 꽃잎을 하나하나씩 뜯으면서 멍하게 중얼거렸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바르바토스의 하얀 손가락이 꽃잎을 가볍게 찢었다. 설연화는 꽃잎이 스무 장이 넘었으므로 꽃점을 치는 데 아주 제격이었다. 꽃잎이 줄어들수록 바르바토스는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한 잎. 바르바토스가 조심스럽게 꽃잎을 뜯었다. “……만나지 않는다…….” 운명의 여신은 아직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한 표를 행사했다. 바르바토스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시발.” 그녀는 한동안 꽃잎이 다 떨어진 설연화 줄기를 노려보았다. 계속 노려보면 줄기가 공포에 벌벌 떨어서 꽃잎을 새로 하나 더 피우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현명했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얼음새꽃을 협박하는 것 따위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을 곧바로 찾아냈다. “자고로 승부는 삼세판이지.” 정말로 간단한 정당화였다. 음음, 하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설연화를 한 송이 더 꺾었다. 2분에 걸쳐서 바르바토스는 염원과 소원을 담아내서 정성스레 꽃잎을 뜯었다. “……아아앙?” 만나지 않는다. 두 번째 꽃점에서도 실패했다. 바르바토스가 얼굴을 꽃줄기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며 눈알을 부라렸다.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일 꽃잎에 사람과 같은 감각기관이 달렸다면 틀림없이 땀을 뻘뻘 흘렸으리라. “나한테 뒈지고 싶냐?” 안타깝게도 설연화에는 입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꽃에는 입이 달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바르바토스는 이미 꽃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여기서 죽어본들 어떻게 또 죽는다는 말인가. 설연화 입장에서 억울하기 그지없는 협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미물과 눈싸움을 벌이다가 또다시 명안을 고안해냈다. ‘아니지. 삼세판은 세 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니까.’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세 번째 꽃송이를 꺾었다. 설마 세 번이나 연속으로 꽝이 당첨되지는 않겠지. 이래 봬도 바르바토스는 자기가 제법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고 자신했다. “만난다, 만나지 않는다, 만난다…….” 꽝이었다. “…….” 설마 하던 삼연속 실패. 세상은 그녀를 버렸다. 바르바토스가 저주의 욕설을 작게 내뱉었다. 언제부터 삶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다못해 꽃들까지 운명에 딴죽을 걸었다. “오냐, 염병에 전을 부쳐 지져먹을 것들아. 조금 있다가 만나주마. 젠장할.” 바르바토스가 툴툴거리며 도시로 돌아가 여관을 잡았다. 막상 발걸음을 움직이고 나니까 또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당장 단탈리안이 다른 곳으로 실종될 위험이 없는 이상, 아주 약간의 연기는 괜찮을 듯싶었다. 그날부터 바르바토스는 회복에 전념했다. 예전처럼 단박에 신체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조금씩.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최대한 정교하게 움직이면서 새로운 살갗을 복원했다. 그만큼 수명이 짧아졌으나 바르바토스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설령 하루를 살더라도 단탈리안의 기억에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채 살고 싶었다. 회복하는 틈틈이 바르바토스는 남몰래 저택 가까이에 걸어갔다. 멀리 숨어서 저택을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저기에 단탈리안이 있었다. 그같이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르바토스는 약간 분했다. “아.” 방금 단탈리안의 모습이 창가에 비추었다. 바르바토스는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뺐다. 아쉽게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얆은 커튼에 단탈리안의 그림자만 언뜻거렸다. 그래도 아쉬움은 잠시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보면 더 아까우니까.’ 바르바토스가 실실 웃으면서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기가 너무 대책 없이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매우 기괴하고 오묘한 표정이 완성되었다. 눈썹은 찡그리고 눈동자도 심각했거늘 오직 입가만 헤벌레 늘어졌다. 시간이 온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 뒤. “…….” 바르바토스가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심코 속삭였다. “나, 이런 얼굴을 갖고 있었구나.” 이백 년 가까이 흉측한 몰골로 살았더니 그만 자신의 외모조차 까먹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깔끔하게 다듬어진, 새하얀 머릿결. 살결은 막 내려앉은 눈처럼 부드러웠다. 오똑하게 돋아난 콧등에는 바르바토스의 자존심이 감도는 것 같았다. “……이히.” 바르바토스가 활짝 웃어보았다. 이빨이 드러나며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이후로도 이런저런 표정을 시험했다. 단탈리안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가장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바르바토스는 가장 자신답게. 단탈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바르바토스답게 웃기로 결심했다. 바르바토스가 여관방에서 내려왔다. “잘 지내셨수, 손……님?” 여관 주인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바르바토스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우울하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그 손님이 아니었다. 맹세하건대 여관 주인은 한 명의 요정이 내려오는 줄 알았다.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관 주인은 심장이 벅차게 뛰었다. 바르바토스가 돈주머니를 탁상에 던졌다. “편하게 잘 머물렀어. 장사 잘해.” 게다가 목소리. 사람의 신경을 의도적으로 긁는 탁음이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대신에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위엄과 자신감이 들이찬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뼈대가 흐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관 주인이 돈주머니를 헤아려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바르바토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르바토스가 도시를 빠져나갔다. ─ 뽀드득. 신발이 눈을 가볍게 눌렀다. 바르바토스는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걸어가던 발걸음은 어느새 속도가 붙어, 거의 반쯤 뛰어가다시피 되었다. ‘단탈리안.’ 바르바토스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나 정말로 많이 힘들었어.’ 발바닥이 닳아 없어질 만큼. 닳아도 다시 새살이 돋고 수천 번 돋을 만큼 헤맸다. 오로지 당신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떠돌았다. ‘단탈리안.’ 너무 서두른 탓에 바르바토스는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가뿐하게 다리를 비틀어서 땅바닥을 되쳤다. 그녀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욱 더 빠르게 달렸다. 더운 숨결이 바르바토스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단탈리안!’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남자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 그녀는 단숨에 저택까지 뛰어왔다. 숨이 가빴다. 무릎에 손바닥을 대고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관방에서 나와 여기까지 올 때까지 바르바토스는 한 순간이라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뻗었고. ―――조금 주저했으며. 다시 움직여서, 똑똑, 하고 문을 두들겼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그저 조용히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저 너머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바토스는 어쩐지 참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문을 두들겼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 그 남자의 발소리였다. 바르바토스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여기서 울어서야 생때를 부리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나는 당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179년의 시간을 건너 이곳에 왔다. 그러니까, 위로받는 것은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바르바토스의 가슴속에 무수한 말과 문장이 교차했다. 이윽고 경첩이 삐걱거리며―――비록 삐걱거렸다고 한들, 문이 열렸다. 문의 틈새로 단탈리안이 보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바르바토스가 생각해오고 고민해온 모든 인삿말이,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안녕.” 사라지고 남은 곳에 서 있는 것 역시 바르바토스였으므로. 이 남자 앞에서 그녀는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서 웃을 수 있었으니까. “뭐라고 인사를 건넬까 나 나름대로 고민했는데 말이지. 이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더라고. 음. 가장 간단한 게 가장 어렵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체감하는 중이야.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간단하게 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 “아, 아아…….” 상대방이 눈물을 흘렸다. 벌써부터 울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바르바토스는 핀잔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에 활짝 웃어주었다. “여전히 빌어처먹을 정도로 재수 없는 낯짝이구나.” 그녀가 생각했다. 마왕으로 태어나서. 전사로 살고자 했고. 누구보다 앞서서 걸어가려고 했던. “단탈리안.” 나는. 역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xusaku// 얍얍. NineBreaker// 사드 의혹을 받게 되어 곤혹스럽습니다... 레이어즈// 욥욥. 문피아가더좋아// 이백 년은 최대한 길게 잡은 경우입니다. 말랑말랑조랑말// 예, 차기작은 다른 사이트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던디만큼 애정이 가지 않는군요. 사실 던디에 제가 이렇게 애정을 갖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ㅅ; bae2014// 의, 의미가 있을까요? 앤떱// 피자는 신의 식품입니다. 수천천사// 판사님, 저는 억울합니다... 전진돌격정복// 빠름- 빠름- 빠름-. 호박호박// 그러게 말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505 Acta est Fabula =========================================================================                        무척 오래된 꿈을 꾸었다. 어떤 꿈인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었기에. 잠이 들었는데 악몽이 찾아오지 않은 것은 더욱 더 오랜만이었기에. 나는 꿈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겪어보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떠오른 풍경은 새하얀 백색. 끝없이 백색으로 펼쳐진 한복판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색의 공간에는 바람이 없었다. 어쩌면 공기도. 빛은 있었을지 몰라도 결코 햇빛은 아니었으며, 차라리 수은등의 창백한 빛깔에 가까웠다. 알고 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나의 이미지다.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기다림이라는 행위만이 덩그러니 주어져 있었다. 이것이 대답. 나만의 대답이었다. ―――. ―――――? ――, ―――――. 내가 입을 열어서 무언가를 말했다. 꿈속의 내가 무엇을 얘기했는지,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사실 알아들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곳에 아무런 소리가 발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대로 사라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나는 단지 백색에 파묻혀서 앉아만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깊이 안심하면서. 안심하면서? 무엇에 안심하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무엇이 안심하고 있는 것일까. “슬슬 일어나시지 그래.” 눈이 뜨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또 눈을 뜨다니. 눈 앞이 하얬다. 가장자리가 몹시 뿌옇게 물들었다. 겨울철 창문에 입김이 서린 것처럼 내 두개골에도 차가운 수증기가 묻어 있었다. 눈꺼풀을 몇번 깜빡였다. 좀처럼 희뿌연 서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청각마저 다소 멍했다. 둔해진 감각 너머로 한줄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목소리라기보다는 한숨이었다. “으휴. 병신.” 병신이라니. 말이 조금 심했다. 개인적으로는 병신(病身)보다 병신(病神)을 선호했다. 악질적인 전염병의 신. 얼마나 멋진가. 뜻을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도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졌다. 질병의 악령. 혹은 질병이라는 이름의 유령. 내 취향이었다. 그때. 촤악! “……!?” 내가 기겁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겁나게 차가운 물이 안면을 정면으로 덮쳤다. 냉수가 내 콧구멍과 입구멍을 강간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연속으로 두 번 찬물이 기습을 걸어왔다. “차거어어어!?” 난데없이 얼음물 세례를 받은 나는 얼굴을 문지르면서 절규.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온몸이 고통으로 비틀리는 와중에, 웃겨 죽겠다는 웃음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배꼽을 부여잡고 나한테 삿대질을 했다. 어찌나 웃어대는지 손이 덜덜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불로 콧물을 닦아내고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짓거리야, 만년 빈유 자식아!” “등신이 꼴깝 떠는 거 보고 웃고 있는 중이시다. 왜. 꼽냐.” “너와는 육체적으로 결판을 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마왕 중에서 제일 허약한 초파리 꼽추 새끼가 뭐래. 깔깔깔.” 내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지독하게 년이 아니고 뭔가. 수백 년 만에 재회했는데 벌써 1분도 안 되어서 병신, 등신, 꼽추 새끼까지, 연달아서 욕설을 세 개나 내뱉었다. 이렇게 악랄한 여자를 나는 달리 본 적이 없었다. 어제는 부드러웠지만. “…….”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제 일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어도 나는 바르바토스한테 매달려서 어린애마냥 울었다. 그야말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부짖었다. 바르바토스는 다만 미소를 지어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치 엉망진창으로 울어본 것은 평생 처음이었거니와, 하물며 바르바토스에게 어리광을 부린 것은 일생의 오점이었다. “어라아?” 내가 침묵하는 걸 보고 바르바토스가 히죽거렸다. “단탈리안? 언제 어디서건 냉철하신 단탈리안 님? 왜 갑자기 입을 다무셨어요? 어라라. 얼굴이 새색시처럼 붉어진 게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당황하고 계실까?” “시끄러.” “우쭈주, 우쮸쮸. 우리 단탈리안 어린이 화났쪄요? 막막 화가 나고 그래요? 바르바토스 누나가 찌찌 줄까, 찌찌? 우리 아가 제일 좋아하는 우유가 너무너무 고파?” 내가 홧김에 베개를 집어던졌다. 면베개가 푹신하게 바르바토스의 복부에 명중했다. 피해가 전무했다. 도리어 웃음만 키워주어서 바르바토스는 한참이나 깔깔거리며 얼레리 꼴레리니 뭐니 유치찬란한 도발을 시전했다. 문제는 이런 도발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년은 전생에 나와 원수를 져도 단단히 진 것이 틀림없었다. 우라질 것. 되바라질 것. 궁뎅이를 8비트로 후려갈겨도 모자랄 것. 웃음에도 그러나 한도가 있었다. 과열된 공기가 서서히 식어버리자,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없어졌다. 불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불온함은 전적으로 나한테서 흘러나왔다. “…….” 바르바토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바르바토스는 분명히 처형당했다고 들었다.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녀가 이곳까지 도착했는지. 왜 도착하는 데 2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려야만 했는지. 상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었으나 대체로 흐릿한 윤곽을 잡아볼 수 있었다. 볼품없이 잘려나간 마왕의 뿔이 추측을 뒷받침했다. 그런 추측. 그와 같은 가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나는 그녀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 왜 왔어.” 질문이 아니었다. 하나의 공격이었다. 어떻게 왔느냐도 아니라 왜 왔느냐. 이 질문에는 오지 말라는 뉘앙스,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도 분명히 그걸 알아들었을 텐데,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내 마음이지.” “……이바르가 실수를 저질렀군. 잘하고 있다고 여겨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터무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어. 하필이면 너한테 비밀을 폭로하다니. 게다가 너를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주기까지 하다니.” 나는 이바르를 비난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 바르바토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떠나줘. 웬만하면 멀리 도망치는 편이 좋을 거다. 네가 나가자마자 연락수단을 동원해서 이바르에게 통보할 테니까. 당장…….” “나 곧 있으면 죽어.” 내가 입을 다물었다. 바르바토스가 평안한 어조로 말했다. “이바르인지 뭔지 네 부하 진짜로 지독하더라. 이제 마법도 못 부려. 아니, 마법은커녕 몸 안에 마력이 얼마 안 남아서 말이지. 거의 찌꺼기에 가깝다고 표현할까. 자연적으로 마나가 돌면 좋은데 그것도 각인으로 새겨버려서.” “…….” “길어봤자 십 년?”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단탈리안. 어차피 네가 아무 지랄을 안 떨어도 곧 자빠질 여자가 한 명 있는데……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면, 안 될까?” 대답할 수 없었다. 단 몇 마디의 암시로 사태가 파악되었다. 이바르는 바르바토스를 질식사 시키려고 했겠지. 마법과 마력을 앗아가버리고,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조차 봉인해버려서, 단지 비천한 몸뚱어리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정보만 주었을 뿐이지, 어디에 있으리라는 조언 따위는 일절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몸뚱어리 하나. 바르바토스는 거기에 의지해서 걸어왔다. 이백 년 동안 어떠한 정보도 없이 이 대륙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걸 허락해서는 안 되었다. 단탈리안은 죽었다. 이곳에 남은 사람은 비유하건대 한낱 망령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바르바토스와 여분의 시간을 보낸다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너도 곧 죽을 거 같아서 걱정되는 거지, 단탈리안?” “…….” 그렇다. 결코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정신적인 한계에 직면했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벽면에 기댄 채 영원히 잠들었을지 모른다. 바르바토스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정말로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 감각은 약간 멀어졌으나 지금도 등 저편에서 이쪽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길어봤자 10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리 길어본들 수년을 버티지 못하겠지. 정신을 잃었을 때, 잠이 들었을 때, 언젠가 무의식적으로 목을 찌르고 말 것이었다. 혹은 의식이 더 이상 가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작정 수면에 돌입할지도 몰랐다. 나는 이미 빠듯하게 한계선에 몰려 있었다……. 죽을 때는 혼자 죽는다. 다른 사람에게 최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떤 의미로 상대방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짓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본 사람은 그 죽음을 기억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는 그런 무게를 타인에게 강요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앞으로 딱 일 년만 있을게.” 바르바토스가 이쪽의 속내를 다 짐작한다는 어투로 제안했다. “일 년?” “그래. 솔직히 겁나게 지쳤거든. 네가 어디 한번 이백 년 내내 대륙을 싸돌아다녀 보세요. 몸이 축나나 축나지 않나. 제발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응?” “…….” 일 년이라면 버틸 수 있을까. 바르바토스는 오로지 나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백 년을 고통받았다. 거기에 일 년의 유예를 내려주는 것. 잠시 내 곁에 머무르다가 떠나가도록 용인해주는 것. 그것은 납득할 만한 허락이지 않을까. 내가 대답을 결정하지 못해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어디론가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향한 곳을 보고 내가 아차, 하고 깨달았다. “저기, 단탈리안. 이거 뭐야?” “어. 어어. 그건 그러니까…….” “흐응?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꼭 나처럼 생겼는데.” 바르바토스가 가리킨 곳에는 한 사람의 초상화와 인물화가 무수히 걸려 있었다. 웃는 얼굴, 슬퍼하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수천의 군대를 이끄는 모습과 홀로 평원에 서 있는 모습. 무엇을 숨기겠는가. 전부 바르바토스를 그려낸 그림이었다. 그녀 이외에도 수많은 인물화가 저택에 널려 있었지만 바르바토스의 초상화는 유독 많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바르바토스가 제일 표정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정말이다! 다른 이유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다. “흐응. 호오오. 흐으으음?” 그런데 저 여편네는 뭘 착각하는 것인지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인물화를 살펴보았다. 뭐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꼴사납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바르바토스가 음흉하게 웃었다. “와아. 정말 나를 쏘옥 빼닮았다. 그림에서 다 애정이 느껴지는걸. 응, 응. 이걸 그린 화가는 어지간히도 초상화의 주인공이 많이 보고 싶었나봐?” “……착각은 자유라지.” “그래? 나는 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허를 찔렸다. 바르바토스는 졸렬한 주제에 가끔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졌다. 나는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다. 그런 나를 향해서 바르바토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싱글벙글거리는 면상이 심상치 않았기에 나는 무심코 뒷발을 내디뎠다. 쿵, 하고 내 등짝이 벽면에 부닥쳤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바짝 다가와서 내 가슴팍을 쥐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코에 감돌았다. 바르바토스의 향기였다.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히죽 미소를 지었다. 사냥감을 호시탐탐 노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맹수. “내숭도 적당히 떨어, 멍청아.” “나, 나는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바르바토스가 옷가슴을 잡아당겼다. 거부할 틈도 없이 내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그녀의 혓바닥이 과격하게 이쪽을 침범했다. “읍……으읍, 으으으!” 용서가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의 농락이 이어졌다. 나는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천천히 방바닥에 무너졌다. 바르바토스가 내 몸에 올라탔다. 눈동자가 짐승의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프하아.”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뗐다. 잘 먹었다. 그런 기운이 얼굴에 넘실거렸다.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엉덩이가 깔린 채 바둥거렸다. “자, 잠깐만. 잠깐만, 바르바토스. 나 벌써 이백 년째 그 짓을 안 했거든? 아마도 안 설 거야. 절대로 안 서. 괜히 나 민망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 오손도손하게 홍차나 마시면서 여태 풀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를……!” “닥쳐, 돼지 새끼야. 홍차는 쥐뿔.” 바르바토스가 흐흐 웃었다. “이야기고 뭐고 일단 먹고 보자.” “강간이다! 이건 강간이야!” “억울하면 잘난 근위대를 불러보시든가. 크으, 이백 년만의 몸보신인가. 참느라 뒈지는 줄 알았지.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잡아 먹혔습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아무런 일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오룔리// 2회차라니 여러모로 끔찍하군요. 노를// 이분 위험한 사상을 갖고 계십니다... ginrneves// 바르바르 ;ㅅ; coffeelover// 맞습니다. 원인이 얽히고설켰죠. Omicron// 일단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MardiGras// 얍얍. 물ing// 아뇨, 안 늦으셨습니다. 구타성불전문// 욥욥. 샤프한팬더// 이 무슨 치트. 즐거운 하루 되세요^^   00506 Acta est Fabula =========================================================================                        * * * 그날부터 바르바토스와 나. 두 사람의 기묘한 생활이 이어졌다. 바르바토스가 내 마왕성에 놀러와서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틀어박힌 적은 꽤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오랫동안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립적으로 표현해서 동거였고……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자아, 단탈리안. 오늘은 닭수프를 끓여봤어.” “…….” 신혼생활. 거의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봐도 엄청나게 맛있거든. 거의 예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먹다가 죽어도 시체 처리는 안 해줄 거니까 천천히 먹으라고.” 바르바토스가 없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우쭐거렸다. 가끔 보면 이 녀석은 자기가 빈약한 가슴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누구든지 육덕진 몸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가 요리도 할 줄 알았냐?” “글쎄. 옛날에 전속 요리사가 그랬는데 요리는 감성이랬어. 마음을 담아 차근차근 만들면 어떤 요리든 맛있게 완성된다던데. 내가 마음을 듬뿍 담아서 만들었으니까 당연히 맛도 훌륭하겠지.” 내가 접시에 담긴 치킨수프를 내려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색깔이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부글부글, 하고 국물의 표면에서 물거품이 터졌다. 도대체 향신료를 얼마나 집어 넣었는지 모를 정도로 기괴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솔직히 쫄았다. 사람도 아니고 요리에 쫄아버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음이 아니라 살기를 담아낸 것 같다만…….” “아아앙? 지금 네 혓바닥이 존나게 고급스러워서 내가 손수 만든 요리 따위는 처드시지 못하겠다, 그런 얘기야?” 유감스럽게도 치킨수프보다 훨씬 더 무서운 여자가 내 코앞에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제 방실방실 웃었냐는 듯 표정이 급변했다. 전문 암살자조차 지금 바르바토스를 보면 똥오줌을 실례하고 말겠지. “당연히 차려줬으니 기쁘게 먹어야지. 딱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 이거 간은 봤냐.” “뭔 소리야? 마음으로 요리했다니까.” 간도 안 보고 자신의 첫 요리를 선보이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은수저를 쥐었다. 수저가 수프를 떴다. 물컹거리는 감촉이 실감나게 전달되었다. 소름이 돋았다. 수프라기보다 푸딩, 그것도 끈적거리는 푸딩에 가까웠다. 바르바토스는 정말로 이것을 사람이 섭취 가능한 식품으로 인식하는 것인가. 각막이 손상되어도 단단히 손상된 게 분명했다. 아니면 뇌가 망가졌거나. 아무래도 후자에 가능성이 더 실리는군. “재수 없게 재지 말고 얼른 먹어.” “으읍!?” 바르바토스가 이쪽의 수저를 억지로 움직였다. 나는 반항해볼 생각도 못 떠올리고 바르바토스한테 떠밀려 보라색 수프를 먹고 말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혓바닥으로 수프를 맛보았다. 잠시 동안 끔찍하게 몰캉거리는 감촉이 혓바닥을 적셨다. “……의외로 맛있네?” “그치? 마음을 정성스럽게 담았다니까 그러네.” “감촉은 더럽게 참혹한데 진짜 맛만큼은 괜찮다…….” 세계의 불가사의한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바르바토스는 매일 한 차례 식사를 차렸다. 본인도 귀찮았는지 가끔은 밀빵에 치즈 덩어리만 달랑 올려두었다. 어차피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기에 나는 무시하려고 했으나, 지금 자기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이냐며 노발대발 날뛰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접시에 치즈를 올려두는 것도 정성이라면 정성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바르바토스의 목적을 깨달았다. “오늘은 특별히 양고기 꼬치다. 만드느라 힘들었으니 감사히 먹도록.” “무슨 마법을 부리면 양꼬치가 녹색이 되는 건지, 원.” 하루에 한 번이나마 식사를 함으로써 내 일과에 어떤 규칙성이 생겼다. 예전에는 하루이틀은 기본으로 정신을 잃었다. 수면을 취할 필요도, 무언가를 먹을 필요도 없었으니 그저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기본적으로 청소는 하고 살자, 이 화상아. 드러운 놈. 저택을 아주 먼지가 점령하고 있네. 콧구멍이 코딱지로 질식하지 않은 게 기특할 수준이야.” “설마 청소는 나보고 하라는 얘기입니까.” “그럼 내가 요리를 도맡고 있는데 청소까지 하랴. 조금만 더 있으면 나보고 엄마 거리면서 모유도 달라고 조르겠다, 야?” 바르바토스가 찾아온 날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설령 정신을 잃더라도 꼭 한 번은 일어나야만 했다. 여기에 설거지와 청소, 빨래까지 더해졌다. 일과가 성립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멋대로 흘러가던 시간에서, 하루가 하루로서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르바토스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도. “단탈리안. 오늘도 나 안 그려?” “……짜샤. 그림 그릴 때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허구한 날 다른 년들 초상화나 그리고 앉았으니까 말하는 거지. 이번에는 네 국무상서. 저번에는 라우라. 저저번에는 쌍년. 나는 대체 언제 그릴 예정인데.” “죄송합니다. 당점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손님.” “악랄한 시체성애자 새끼.” 바르바토스가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일까. 그녀가 입가를 올렸다. 바르바토스는 캔버스에서 약간 왼쪽으로 비낀 자리에 서더니, 원피스의 어깨끈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올렸다. 어깨는 부드럽고 가냘파 보여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건 어때.” 원피스가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바르바토스는 단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속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 창가에서 햇빛이 들어와서 그녀의 몸을 절반 가량 비추었다. 나머지 절반에는 조명이 없는 저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늘의 군청색 속에서, 바르바토스는 환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그림자와 빛의 압도적인 대비에 한순간 숨이 멎었다. 심장이 뛰는 박동이 느껴졌다. 바르바토스의 장난질에 핀잔을 주려고 했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하게도, 그녀는 내 시선을 완벽하게 잡아 끌었다. 농락당했다고 표현해도 좋으리라. 바르바토스가 얄밉게 미소를 지었다. “바보야. 이래도 나 말고 다른 애 그릴 거야?” 정말이지. 이런 수법에는 두손두발 전부 들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는 거부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의 일과를 조정하였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이미 아침에서 새벽까지 일정한 리듬이 짜여 있었다. 우리는 똑같이 이른 아침에 기상했고, 같은 탁자에 앉아서 식사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바르바토스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연주했다. 그리고 잡다한 집안일이 끝나면, 똑같은 침대에 누웠다. 바르바토스는 조금 억지를 써서라도 내가 수면을 취하게 만들었다. “단탈리안!” 물론 수면은 나에게 적대적이었다. 정신이 흐릿해지면 나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스스로를 자해했다. 주변에 날카로운 물건이 있으면 단검이든 연필이든 잡아서 손등을 찍었다. 날카로운 물건이 없어도 손톱으로 생살을 찢었다. 그럴 때마다 바르바토스가 내 몸을 강하게 껴안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니까. 응.” “…….” “단탈리안. 전부 괜찮아질 거야…….” 발작은 몸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보다 잠이 드는 것이 훨씬 더 괴로웠다. 나 자신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 끝장났다는 사실. 이미 쇠락할 대로 쇠락했다는 사실만큼 쓰라린 일은 없었다. 의문의 여지 없이 나는 망가져 있었다. 바르바토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복 따위는 불가능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백 년의 고통스러운 여행은 그녀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바르바토스는 가만히 있는데도 식은땀이 곧잘 흘렀다. 가끔 의식을 잃고 발광하기까지 했다. 내가 자해하는 방식으로 발작한다면, 바르바토스는 가슴이 들썩거리거나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 그때는 내가 바르바토스를 꾹 안아주었다. 바르바토스가 내게 그러했듯 나 역시 귓속말로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 시간쯤 흐르면 바르바토스도 기력이 다하여 지쳤다. 매일 밤마다 여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 서로가 탈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이미 지나치게 망가졌다. 바르바토스에게도 나에게도 하루하루가 빠듯한 한계였다. 정신. 육체. 어디든 불쾌하게 삐꺽거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아. 오늘은 꽃이 예쁘더라.” 그래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정상을 연기했다. 하루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 일상을 조작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유하듯이 식사하고 산책하고 웃고 떠들었다. 말을 주고받았다. 살을 섞었다. 부끄러워하고, 욕설을 내뱉고, 토라지고, 어쩔 수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순식간에 1년이 흘렀다. 우리는 아무런 언급도 꺼내지 않았다. 1년만 이곳에 머무르고 떠나겠다. 분명히 그런 약속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약속은 의미가 없을 터. 바르바토스도 나도, 당장 내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에게 속았다는 느낌도 적잖게 들었지만. 이 세계에서 단 하루라도 더 살아 남겠다는 내 목적은, 지금에 이르러서 바르바토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사라지면 나는 고작 사흘도 버티지 못해 자살하겠지. 우리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으며. 다만 서로가 서로를 향해 무너지고 있었기에, 아주 잠깐, 상대방의 몸에 기대어서 버틸 수 있었다. 약간의 유예. “단탈리안. 벚꽃이 피면 꽃놀이를 가자.” “수레에 술통을 잔뜩 실어서?” “역시 말이 통한다니까.” 그 유예된 공백을 색칠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리 없이 발버둥쳤다. 뒷산에 벚꽃이 찬란하게 꽃필 무렵이면 우리는 항상 놀러갔다. 금세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술을 통째로 가져가서 온갖 진상을 다 부렸다. 이백 년 전에 너와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벌였는지 기억하냐며 낄낄거렸다. 둘이서 옷을 벗어 던지고, 벚꽃나무 아래서 어린애처럼 와락 뒹굴었다. 모든 것이 필사적인 요행이었다. 힘겹게 2년을 버텼다. 여름에는 개천에 뛰어들어 일대 물장난을 펼쳤다. 바르바토스는 웃기게도 수영이 영 잼병이었다. 발목을 붙잡고 물 밑으로 끌어 내리면 진심으로 무서워했다. 바르바토스가 무서워하는 모습은 극히 드물었기에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니까 녀석이 발차기로 내 불알을 차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가을에는 낙엽을 침대로 삼아 느긋함을 즐겼다. 온도조절이 걸린 모포를 뒤집어 쓰면 딱히 춥지도 않았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누워서 끝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말수가 적어졌고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지만, 꼭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겨울에는 벚꽃을 기다리며 조용히 저택에 머물렀다. 바르바토스와 내가 취미에 가장 몰두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바르바토스는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끼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안경 낀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싫어했다. 여전히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시간이 흘렀지만.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겨울로 흘렀다. 5년을 버티지 못하겠지 싶었는데 자그마치 10년을 버텼다. 늘어난 시간만큼이나 새로운 기억이 생겼다. 다시 그것에 의지하여, 조금 더 버티기로 했다. 우리는 많이 괴로워했고. 자기도 모르게 많이 울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웃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17년. 우리 두 사람이 기적적으로 견뎌낸 시간이었다. “바르바토스.” “응, 단탈리안.”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손을 꾹 쥐었다. 둘 모두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이제 최후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이미지에 슬픔을 느낍니다.(...) 얀데레고양이// 얍얍. 마리오넷// 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이미지에(이하생략). 물ing// 예, 그렇습니다. 드림스윗// 맞습니다. 순위권 단골손님들은 항상 그런 꼼수를! 수천천사// 사실 바르바토스가 단탈리안을 처음으로 덮쳤을 때도 강간이나 다를 바가... Omicron// 믿어주십시오. 깨끗한 공백입니다. halem// 저 때문에 독자 여러분의 경계심이 야생의 맹수와 같이 날카로워졌군요. 책임을 느낍니다.(...) rrrt123// 히이이이익; 오룔리// 파이몬이 죽었을 때만큼 충격을 받겠지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ㅅ;   00507 Acta est Fabula =========================================================================                        한겨울에 아침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이 여태껏 기다려온 그 하루임을 느꼈다. 어떠한 말이 오가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침의 햇살이 눈꺼풀을 장난스럽게 쿡쿡 찔렀다. 나는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줄곧 기다린 것일까. 마침 바르바토스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나란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바로 오늘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맛있는 포도주나 한잔 하고 싶은데.” “그건 내가 싫어. 이런 날에는 맨정신으로 있고 싶은걸.” 우리는 한동안 침대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미지근하게 뒹굴거렸다. 따스한 시간. 햇빛이 우리를 침대째로 하얗게 감싸안고 있었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바르바토스가 징그럽다며 기겁했다. 복수해주마,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귓등을 깨물었다. 조금 아팠다. 가만히 있으면 내 성격이 울었으므로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입가에서 웃음이 끊기지 않았다. “후아아.” 우리 둘 다 기진맥진해져서 드러누웠다. 겨울날인데도 복날의 강아지마냥 헉헉거렸다. “너무 놀았잖아, 밥팅아. 이런 날에도 장난칠 마음이 들어?” “그럼 뭐하냐. 그림 그리거나 바이올린 연주하는 건 더 말도 안 되잖아.” “음, 그건 그렇지.” 바르바토스와 내가 고민에 잠겼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끄으응,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면서 이십 분 가량 머리를 싸맸다. 그때 바르바토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어조로 말했다. “야. 너 이 저택 가만히 내버려둘 거야?” “응?” “여기에 네가 그린 그림 졸라게 널려 있잖아. 다른 사람이 보면 곤란하지 않겠어?” 아차.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파이몬이나 라우라의 초상화가 위험했다. 두 사람은 마인과 인간종을 불문하고 아직까지도 최고의 인지도를 자랑했으니까. 만일 안목이 높은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일지라도, 이상한 추론을 해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진지하게 눈썹을 지그시 찡그렸다. “그러게. 이야깃거리가 되어서 나도는 것 자체가 꽤 위험하지…….” “응. 아예 화끈하게 불이라도 질러버리는 편이 좋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정말로 너답구나.” “왜? 마을이나 도시 같은 거 불지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냐. 막 흥분되고.” “…….” 실제로 인간종의 도시를 열댓 개쯤 태워버린 경력이 있었기에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본인의 뻔뻔한 표정을 보건대 농담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제까지나 바르바토스였다. 그렇게 오늘 일과가 정해졌다. 우리는 화실에 쌓여 있던 그림들을 전부 정원으로 옮겼다. 자그마치 수백 점의 그림을 옮겨야 했는지라 어마어마한 대작업이었다. 한 점을 그릴 때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십 일, 몇 달에 거쳐 완성했건만 지금은 아무렇게나 수레에 처박혀서 운반되는 신세. 나는 어쩐지 감상에 젖어서 한탄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만 다 거짓말이었어.” “맞아. 인생도 짧고 예술도 짧은 게 진실이지.” “삼천 년 넘게 살아온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조금 양심이 없는 것 아닐지.” “아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천 년만 더 살면 좋겠다.” 천하제일의 욕심쟁이가 여기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초상화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귀엽게 윙크했다. “당연히 너랑 같이 살고 싶다는 뜻이야.” “지나치게 부끄러운 말은 법적으로 금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됐네. 제국의 법무상에서 물러나서 지금 너한테는 아무런 권한이 없걸랑.” 바르바토스가 깔깔 웃었다. 대낮이 다 되어서야 그림을 전부 옮겼다. 천 점에 가까운 그림이 마당에 꽉 들이찼다. 장관이 따로 없었다. 그중에는 특별히 마무리가 훌륭하게 되어서 애착이 깊은 그림도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제는 나를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다만 축하해주고 싶었다. “자아. 점화!” “……어째 좀 너무 신나게 즐긴다, 너?” 바르바토스가 춤을 추듯 흥얼거리며 이곳저곳에 불을 지폈다. 그림들 둘레를 빙 순례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곁에 다가왔다. 행여나 산불로 옮지 않도록 주위에 마법적인 처리를 해두었다. 불길이 조금씩 치솟았다. 그때였다. 초상화들이 불꽃에 구멍이 뚫리면서 비명을 토해냈다. 처음에는 한 줄기에 불과했던 비명이 두 가락, 세 가락으로 늘어나더니 이윽고 수십수백 개의 갈래로 나뉘어졌다. 라우라의 목소리가. 라피스의 목소리가. 파이몬의 목소리가 대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 비명은 공기를 찢으면서 내 살결에 닿았으며, 순식간에 천 갈래로 찢어져서 신체를 관통했다. 가슴에서 끈적거리는 것이 흘렀다. 마음이 흘리는 피였다. 마음도 피를 흘릴 수 있었다. “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의 마음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간단히 뛰어넘었다. 저 앞에 환영들이 보였다. 끊임없이 아우성이 일렁거렸다. 그림자들은 살갗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물감이 진득하게 눌러붙었고, 구멍들이 그림을 잠식했으며, 연기가 모든 것을 뒤덮었다. 아, 라고 환영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술이 타버려서 발음이 안 되었다. 나는 숨을 쉬기가 벅찼다. 환영들은 나를 향해 다가오려고 했지만 이미 다리와 발이 전부 사라져서 불가능했다. 그들이 손길을 뻗었다. 손길을 들어올린 채로 몸뚱어리가 불살라졌다. 눈썹이 타닥거리고 눈동자가 허물어졌다. 그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단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진동음만이 아, 아, 하고 허공에 메아리쳤다. 나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내가 가야만 했다. 저들이 오지 못한다면 내가 그녀들을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당연한 귀결이지 않은가. 하지만 무언가가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바르바토스였다. 바르바토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나는 더 이상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그저 나에게 가능한 행위란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으, 아아……아아아…….” 마음이 녹았다. 녹아서, 흘러내렸다. 가슴에 쌓인 부패물이. 밑바닥까지 들러붙은 그을음이 쓸려서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불길은 모든 것을 불태우며 한참이나 샛붉은 혓바닥을 공중에다 내밀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혼이 빠져나간 인형마냥 불길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불이 잠잠해졌다. 검은 잿더미가 남아서 바람에 탄내를 실어 보냈다. 마음의 일부분이 죽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결코 청소될 수 없는 그을음이 한 군데 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씻을 수 없는 곳이라도 삭제될 수는 있었다. 아마도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겠지. “단탈리안.” “……그래.” 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무거웠다.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자 그녀도 지쳐 보였다. 언제나 밝았던 미소에 숨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웠다. 나도 조금 힘들었지만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아니. 될 수 있으면 높은 곳이 좋아. 내려다볼 수 있잖아.” “높은 곳이라.” 내가 고개를 들었다. 뒷산 정도면 올라갈 수 있을지 몰랐다. 과연 신체가 우리의 의지에 따라줄지, 그것만이 걱정되었다. 아마도 괜찮겠지. 바르바토스와 17년 동안 살면서 수도 없이 올라가본 산책로였다. 문제는 없었다. “갈까.” “응.” 우리는 산길에 올랐다. 빠르게 오를 수는 없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찌꺼기처럼 남은 체력을 조정하면서, 발자국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기울여야만 했다. 호흡도 제멋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천천히. 어디까지나 천천히. “…….” “…….” 겨울의 산길은 험난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까지도 수북하게 쌓였다. 들짐승조차 지나다니지 않은 눈밭에 우리의 발자국이 남았다.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황금색의 저녁 노을이 설원에 아득하게 내려앉았다. 바르바토스는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바르바토스는 비밀스러운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바르바토스는 몸이 기우뚱거릴 때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녀의 미안함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바르바토스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후우, 후욱……하아아.” 눈앞이 침침해졌다.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수시간에 걸쳐서 마침내 산꼭대기 부근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나뭇잎이 다 벗겨진 벚나무가 한 그루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봄이 와서 꽃놀이를 할 때면 이곳에 와서 종일토록 술을 마셨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꽃놀이.”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열었다. 겨울이었다. 그녀가 내쉬는 숨이 하얀 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작은 목소리.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 어느 비명과 목소리보다 그녀의 숨결이 뚜렷했다. “이번에도, 하고 싶었는데…….” “술통을 잔뜩 들고와서.” “응. 잔뜩……벚꽃도 무장무장, 흘러내리고.” “작년에 네가 술통에 빠진 거 웃겼어.” “바보야. 그건 작년이 아니라 재작년이야…….” 그랬나. 바르바토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이 없겠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었다. 어깨를 맡기고 머리를 맞대었다. 바르바토스의 무게가 온전히 전달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체온도. 나는 내 호흡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관이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숨은 충분하리 만치 느껴졌다. 조금씩 가빠지고, 아주 조금씩 길어졌다. “……바르바토스.” “응.”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한 여자야.”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팔뚝을 꾸욱 눌렀다. 이따금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고백이 있었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어쩌면 내 탓이 아닐 거다. 밤이 깊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둔탁하고 어수룩한 손길로 바르바토스의 외투를 매만졌다. 날씨가 추웠다. 그러니까 바르바토스가 걱정되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내 동작은 멈추었다. 가끔 바르바토스나 내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얼거렸다는 진동만이 느껴져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거나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도 충분했다. 진동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르바토스, 그렇지? ……. 정말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았다. 이런 곳에 떨어져버리고. 이런 곳까지 와버리고. 하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은 남아 있었다. 외면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걸로 괜찮은 거지, 바르바토스. …………. 내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꺼풀을 전부 들어올릴 힘이 없었다. 햇살이. 산 아래 풍경에 햇살이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대낮의 빛은 모든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냈지만 빛 그 자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될 수 있으면 먼눈으로 지평선을 응시했다. 착각일까. 시력이 지쳐서일까. 지평선이 환한 빛에 감싸여 흐릿해지고 있었다. 눈꺼풀이 닫혔다. 나뭇가지가 쏴아아 울었다. 미안할 필요가 없다. 바르바토스. 아주 조금 더 먼저 떠난다고 해서, 미안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아주 정말로 조금 먼저니까. 오히려 다행이다. 바르바토스보다 한 발자국 지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제법이지 않는가. 약골인 주제에 제대로 버텨주었다, 내 몸.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바르바토스.” “또 꽃놀이를 가자…….” “이번에는, 다른 애들도 다 불러서…….” “라우라도, 라피스도, 시트리도…….”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바르랑 데이지랑, 파이몬도.” “아하하…….” “……다 불러서.” “다음 봄에는…….” “……분명히…….” “…….” ……. 그래. 아마도, 분명히. 그렇게 영원히. ………. ………………. ………………………………. 다음에 찾아올 봄에는. ― END.   00508 후기 =========================================================================                        작년 7월부터 연재한 <던전 디펜스>가 507화만에 완결되었습니다. 종이책 권수로 따지자면 약 24권. 1년 4개월 동안 기나긴 연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께서 응원해주시고 질책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던전 디펜스>를 연재하기 전까지 기껏해야 1권 분량으로 두 편의 소설밖에 적어보지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함께해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마라톤 경주입니다. 진솔하게 말씀드려, 저는 처음에 <던전 디펜스>에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보다 먼저 글을 좋아해주신 독자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저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던전 디펜스>는 저에게 중대해졌습니다. 즉, 저는 연재라는 면에서나 소설에 대한 마음이라는 면에서나 독자 여러분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제가 소설의 내적인 측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에 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외적인 얘기만을 후기에 적고자 합니다. 1. <던전 디펜스>는 차후에 리메이크 되어 종이책으로 출간될 계획입니다! 영상출판미디어의 단행본 부문으로 출판될 예정이며, 책표지와 일러스트가 추가되어 새롭게 단장될 것입니다. 내용상의 수정도 가해질 것입니다. 하루마다 글을 써서 올려야 했던 일일연재 방식과 달리, 종이책에서는 보다 쉽게 소설의 리듬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했던 부분을 잘라내거나 다듬고, 인물 간의 구도를 보다 뚜렷하게 조정할 예정입니다. 아마 내년 1월에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다시 연재란에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만약 선호작 목록에서 <던전 디펜스>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고 알림이 뜨면, 부디 공지를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연재란과 공지란에 똑같은 내용의 소식글이 올라갈 것입니다. 요컨대 노블레스 이용권이 없는 분들께서도 공지사항만 확인하면 간단하게 새 소식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1권 표지는 이미 나왔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와 단탈리안의 투샷입니다. 상기의 표지는 '현재' 연재란 공지사항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 외전 및 if 시나리오는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소설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제가 문제점으로 받아들이고 끝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특정 독자분들께서 열렬히(...) 요구하셨던 데이지-해피엔딩 루트 등은 아마도 쓰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결말을 이대로 보존해두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제 마음에 강하게 들기 때문인 듯합니다. 물론 제 줏대 없음은 인류가 역사를 시작한 이래 가히 독보적이라 해도 모자를 만큼 훌륭한 레벨을 자랑하므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가령 "롱그위 성녀와 이어지는 루트를 써야겠어!" 하고 유령이 강림해버릴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죽을 때까지 노처녀로 지내게 된(공식설정) 자클린 롱그위 성녀의 원혼이 제게 씌인 것이겠지요. 무서워라, 무서워라. 부디 편안하게 성불해주세요. 정리하자면 현재 외전 및 후일담을 쓸 계획은 없습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마음속에 갈초를 떼거지로 키우는 인간인지라 갑자기 확돌아서 쓸지도 모릅니다. 여신들이시여. 제가 강철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보호해주소서. 3. 현재 쓰고 있는 차기작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아라가 아니라 다른 사이트에서 연재되고 있는지라, 제가 막 드러내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기가 죄송합니다. 혹시 차기작이 궁금하신 독자분께서는 언제든지 제게 쪽지를 보내주세요. 확인하는 대로 답장을 드리겠습니다. 제 첫 번째 장편을 봐주신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며. 지금까지 <던전 디펜스>를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