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월드(The World) 프롤로그 - The World의 탄생 20세기 말부터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은 21세기 초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온라인 머드게임 분야의 벤처기업들로 인하여 수많은 온라인 머드게임들이 개발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들 대부분은 일반 게임유저들에게 어필되지 못했고 하나 같이 2-3년의 시간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장되어 갔지만 소수의 게임들은 큰 성공을 거두어(일명 대박) 한국 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수출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리니지, 드래곤라자, 라그나로크 등등의 게임을 들 수가 있다. 그렇게 타국을 수출된 게임들은 게임을 제작한 회사에 큰 부를 안겨주었고 동시에 대한민국 내 경제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부는 게임산업의 미래성을 인식하고 즉시 게임산업의 인재양성 정책에 나섰고, 비록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보조아래 많은 질 높은 게임들이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연이은 히트를 치면서 결국 한국은 10년 동안 2차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다. 경제력은 세계 5위권에 들어섰고, 특히 인터넷 게임 분야에서는 세계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뒤늦게 인터넷 게임 산업에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이 뛰어들었지만 이미 한국의 게임제작 기술은 그들보다 최소 10년 이상이나 발전해 있는 상태였다. 이에 외국에서는 국내의 유능한 게임제작 프로그래머를 대거 스카우트하는 방법으로 정책을 변형시켰고 높은 보수를 약속하는 외국의 게임사로 국내의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빠져나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미국과 일본의 게임 제작사는 한국을 무섭게 추격했고 수 년 내로 한국을 추월할지도 모른다고 세계의 여러 게이머들은 판단했다. 많은 게이머들은 한국의 온라인 게임에서 일본과 미국의 온라인 게임으로 발길을 돌렸고 한국의 게임시장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2047년 한국의 신생 게임 제작사 (주)신화에서 새로운 형식의 온라인 머드게임 실시간 가상현실 온라인 머드게임 더 월드(R.T.V.R.O.M Game The World)를 내 놓았고 그 경이적인 시스템에 전 세계의 게이머는 물론 게임 제작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더 월드의 제작사인 (주)신화는 한국 내 많은 유능한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들이 외국 게임 제작사보다 열악한 환경에 불만을 품고 외국으로 빠져만 나가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두 명의 천재청년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회사였다. (주)신화에는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들뿐만이 아니라 각 분야의 최고 실력자들이 대거 영입되어 있었고 그들의 모든 지식과 실력, 노하우가 집대성되어 환상의 게임 더 월드가 탄생한 것이다. 더 월드는 이제까지의 온라인 게임과는 길을 달리한 획기적인 시스템을 주축으로 구동되는 게임이었다. 이전의 게임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입력장치를 이용한 2차원의 평면적인 시각 게임임에 반해, 더 월드는 게이머가 직접 링크헤드셋이라는 헬멧을 쓰고 (주)신화에서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의 세상에 들어가 체험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형식의 완벽한 가상현실 게임이었던 것이다. 특히 (주)신화에서 만든 더 월드는 게임으로서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다른 더 거대한 부가적 이득을 세상에 주었다. 그 중 가장 큰 효과는 가상현실 내의 시간과 실제현실의 시간의 격차를 들 수가 있었다. 실제현실에서 1시간을 가상현실에서는 최고 27시간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도 가능했지만 인간의 정신붕괴의 위험이 있었기에 대략 10배 정도의 시간흐름이 적당했다. 그냥 무시하고 넘길 사람들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너무도 대단한 시스템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이전까지 신에게 부여받은 시간의 십 수배의 시간을 더 부여받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기다리는 꿈의 게임 더 월드는 개발이 완료가 된 후 수년이 흐른 후에야 정식으로 게이머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인간의 정신에 시스템을 링크시켜야 하기 때문에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큰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각 국 정부와의 철저한 사전협의를 가져야 했던 것이다. 이미 2037년을 기점으로 최고조에 이른 서버시스템으로 인하여 이전까지처럼 하나의 게임을 각 국가별 서버로 나누고 국가 내 서버에서도 수십 개의 분할서버를 만드는 시대는 지나갔고, 당연히 더 월드 역시 한국에서 운영하는 서버로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접속을 해야 할 것인데 만약 한국이 불순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전 세계 수 십억의 게이머들이 한국의 손아귀에 목줄이 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을 제작하고 전체서버 운영권을 가진 (주)신화에서는 각 수출국에 기지국을 세우고 그 기지국의 운영권을 그 나라의 정부가 선출한 기업으로 넘겼다. 모든 외국의 게이머들은 자국내의 기지국으로 일차적인 정보가 모인 후 필요한 정보만을 복사하여 한국 내 통합서버로 보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방법은 게임 내에서 배 이상 많은 정보이동을 가져오기 때문에 렉과 같은 서버불안을 야기 시켰겠지만 (주)신화가 각 국 정부와 협상하는 몇 년 사이 시스템은 그 한계를 모르고 계속 발전했고 별 무리 없이 협상은 채결될 수 있었다. 2051년 드디어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밤을 설치며 기다렸던 더 월드의 서버가 열렸고 이전까지의 온라인 게임의 배 이상의 계정료를 지불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버오픈 일주일만에 가입유저 2억. 동시 접속자 9천만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해외 각 국의 게임 제작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국내의 게임사들까지도 (주)신화의 기술력을 도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주)신화는 철저하게 게임 제작 노하우를 감추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비밀로 간직하지는 않았다. 서버오픈 1년이 지난 후 더 월드가 이제는 전 세계 최고의 게임으로 자리 매김하였을 때 (주)신화는 대대적으로 더 월드 최고의 기술인 가상현실 시스템을 어둠에서 빛으로 내밀었다. 그것은 가상현실 시스템이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닌 전 세계의 기술을 한 단계 진화시킬 수 있는 인류의 보물이라 판단한 (주)신화 대표진들의 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몇몇의 대표들은 반대를 했지만 다수의 대표들과 특히 최고대표이자 (주)신화의 창립자인 이원철 사장과 강인성 대표이사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가진 기술을 끌어안고 몸을 움츠리기만 해서는 언젠가 도태가 될 것이라 소리치며 더 더욱 (주)신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라이벌들이 생겨나 뒤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주)신화가 발전하는 길이고 세계의 게임이 발전하는 길이라는 이원철사장과 강인성 대표이사의 연설은 그 후로 게임 산업계에 최고명언으로 남을 정도였다. (주)신화가 내놓은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가상현실 게임이 탄생했고 그것들은 각 회사만의 특색을 가지고 게이머들에게 어필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게임도 더 월드를 능가하진 못했다. 빠른 속도로 뒤를 추격하는 타 게임들에게 자리를 내 줄 수 없다는 의지인지 더 월드는 한 번씩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적용시켜 수많은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시도했고 그 때마다 유저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실증이 날 만 하면 새로운 업데이트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신화의 놀라운 운영 덕분에 6년이 지난 현 2057년에까지 R. T. V. R. O. M Game The World는 전 세계 최고의 게임황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 - 기막힌 우연 "그래서 접으려고?" 형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더 월드를 그만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요즘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지만 아직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게임을 해 보기도 했지만 더 월드에서 느꼈던 즐거움의 절반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건 아냐." 내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형은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했다. "그건 다행이다." "하하. 아무리 심심해도 더 월드를 그만 둘 수는 없어. 그나마 이 것이 유일한 낙인데 이것마저 그만 두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건 그렇군... 너 같은 문제아가 그나마 이 게임에 빠져 조용한 것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무한한 축복이 될 거야..." 그냥 한 장난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피식 웃어버리는 것으로 넘겼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객점 밖을 돌아보았다.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과거 중원의 성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더 월드의 중앙대륙의 크기는 거의 아시아와 유럽을 합친 크기의 1.5 배에 이른다. 더 월드의 세계가 열린 지 6년. 이 시간 더 월드의 넓은 땅덩어리에 퍼져있는 유저들의 수는 1억을 넘고, 접속하지 않고 있는 유저들까지 합치면 3억에 가깝다. 내가 더 월드를 시작한 것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클로우즈 베타에서는 아깝게 떨어졌고... 오픈 베타에서부터 시작해 현실시간으로 하루에 15시간씩 해왔다. 식사시간과 학교에 가는 시간만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더 월드의 세계에서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꿈에도 그리던 가상현실 세계에 빠져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운 일들뿐이었지만..... 요즘에는 그런 처음의 즐거움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냥 그만두지 못해 더 월드에 접속하는 것 같다고 할까...? "하아......" 뭔가 정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해 보고 싶은 일은 다 해 봤고... 나머지 일은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는다. "너도 문파나 하나 만들어 보지 그러냐? 마음만 먹는다면 최강의 문파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나도 도와 줄 것이고 말야." 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파만은 정말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쪽으로는 관심도 없고 생각도 없다. 머리만 아프거든..... "형도 내 성격 알잖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더 즐긴다는 것. 싸우고 싶으면 문파전에 잠깐 끼어 들면 되지... 꼭 문파를 만들어 이것저것 골치 썩기는 싫어." "하기야.. 너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아니지." "쳇. 형도 마찬가지면서..." 내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형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뜩 뭔가가 생각났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보다 너 이사했다며?" "어어. 어제. 오늘부터 다시 학교를 가야 하니 조금 있다가 가야해." 지난 며칠 동안은 이사하면서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냥 근처로 이사를 했으면 학교는 그대로 다녔겠지만, 지방으로 내려와 버렸거든. 당연히 전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고속열차를 타고 한 시간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수 있더라도 학교를 고속열차를 타고 통학할 인간은 없다. "어디로 이사했냐?" "광주. 아버지가 승진해서 여기 지사로 발령이 났거든." "그래? 이런.... 밖에서 더욱 네 녀석 얼굴 보기 힘들게 됐군." "기차타면 40분이면 서울인데 뭘 그 정도 가지고." "10분 거리도 오기 싫어서 한 달에 한 번 오는 녀석이." 하하. 그런가? 나는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 보니 형 말이 맞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게임센터도 가기 싫어 집에서 죽치고 있었던 나인데 아무리 한 시간도 안 걸린다지만 다른 도시로 가는 일이 쉽겠어? 아마 앞으로 현실 상에서 형을 만나려면 엄청난 다짐을 해야만 가능할 거다. "뭐.. 날마다 여기서 만나잖아." "여기서 보는 것이랑 실제로 보는 것이랑 같아?" "그렇군....." 아무리 가상현실에서 보는 것이지만.... 역시 실제로 만나는 것과는 뭔가 다르다. 말로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현실로 만나면 어떠한 뭔가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자연히 기분도 더 좋고 말야.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시간 내서 한 번 형 만나러 올라갈게." "나 죽은 후에?" "소식 들려오면 조의금 들고 달려갈게." 히죽 웃는 내 머리에 형의 주먹이 날아왔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맞아도 그다지 아프지도 않는데 뭐. 역시 새로운 세상이라 하지만 만들어진 가상현실이다. 모든 것이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곳곳에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간단하게 귓말을 보낼 수 있다던가, 상처를 입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이다. 현실에서 팔이 잘리면 죽을 정도로 아픔을 경험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런 고통이 없다. 물론 지금처럼 가볍게 알밤을 먹이는 행동은 친분의 표현이기 때문에 약간의 고통은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고통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것이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얼얼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보다 형. 뭐 재미있는 일 없어? 뭐 신기한 무공서라도 얻었다거나...." "그런 것이 있겠냐? 전에 너한테 준 것이 마지막이다." "아아.... 돌겠어~! 왜 이리 따분한 거야~!" 그나마 형을 만나면 조금 재미있는 일이 생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믿었던 형 마저...... 아아.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나.... "녀석. 내가 보기에는 부러워 죽겠고만.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 "심심한 것을 나보고 어쩌라고." 진짜 요즘 같아서는 생각 없이 보이는 사람마다 죽여서 PK로 악명을 날려볼까 하는 충동까지 생긴다. 그만큼 할 일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는 않았다. 다른 것은 다 하더라도 PK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누가 먼저 덤빈다면 상대를 해주지만... 먼저 싸움을 거는 것은 싫다. 여기서까지 과거 현실에서와 같은 짓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할까? "여자친구를 만들어 보던가." "아서요. 아서... 내 눈에 차는 여자가 어디 있어야지.." "하여간 눈만 10단이야..." 졌다는 듯이 형이 혀를 찼다. 하긴... 여자친구라..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뭐 눈에 차는 여자가 있어야지 말야. 예쁜 여자는 많다. 그러나 마음에 끌리지는 않는다. 내가 조금 이상한 것일까? 여자와 만나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생각해 볼게." "멀티비전에서 나오는 아이돌들을 보고도 눈살을 찌푸리는 네 녀석의 눈에 차는 여자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궁금하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설마 없겠어?" "그래. 네 짚신을 하루빨리 만나도록 기원하마. 그보다 방금 생각 난 건데. 할 일 없으면 이건 어떠냐?" "뭐?" 이제까지 형이 이렇다할 좋은 의견을 내놓지 않았기에 나는 이번에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듣기는 해야했기에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형이 씨익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일명 초보 키우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난데없이 초보 키우기라니... 나는 '형 뭐 잘못 먹었어?'라는 얼굴을 해보이며 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형은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유빈이 너는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죽겠다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내 말대로 해 봐. 우선은 그냥 밀고 나가는 거야! 뭐든지 막 밀고 나가다 보면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것하고 초보 키우기하고 무슨 상관이냐고요." "할 일 없으니 이 기회에 좋은 일이나 좀 해 보라는 것이다. 초보유저 하나 골라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거야. 이왕이면 빌붙으려 하지 않고 순진하게 게임을 시작한 애가 좋겠지. 물론 네 모든 실력을 보여주면 오히려 달라붙으려 할 수도 있으니까 힘은 감추고 말야. 초보유저와 인연을 만들면서 그가 모르게 뒤에서 한 번씩 천천히 도움을 주는 거야. 어떠냐?" "........형 해 봤어?" "무하하! 당연하지. 그거 의외로 재미있다는 것 아냐?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다. 좀 어느 정도 성장해서 홀로 살아갈 수 있다 싶으면 그 때 내 정체를 가르쳐 주고 폼 한 번 재면 기분 죽인다. 어떤 녀석은 사부~! 라고 하는 녀석도 있더라. 킥킥킥." ........상태가 심각하군. 어떻게 보면 변태 같기도 하고 말야... 하지만 한 편으로 형이 한 말은 의외로 호기심을 자극키도 했다. 초보유저를 몰래 뒤에서 도와 준다....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풋내기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신분을 감춘 고수... 풋내기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재빨리 나타나 도움을 주고 사라지고 다시 친구로 돌아와 친구가 위험에서 벗어나 다행이라는 듯이 거짓 쇼를 벌이는 것은...... 만화나 무협지에서 간간이 나오는 내용이군. 언젠가 신분이 드러날 때를 기다리며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그냥 보면 변태 짓 같기도 하겠지만 잘 생각을 해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순진한 초보를 구별해?" 고수라면 하수의 성취도를 대충 알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꼭 순진한 초보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최절정 고수라면 스스로의 능력정도는 조절이 가능하고 하수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최절정 고수는 대륙 내에 42명뿐이고 설령 실력을 감춘 최절정 고수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최고로 많게 잡아야 100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을 약속없이 이 넓은 한 제국에서 우연찮게 만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운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초보라 하더라도 순진한 초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더 월드에서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계정의 수는 하나 뿐이지만.... 꼭 하수 캐릭터가 막 게임을 시작한 유저라는 보장은 없다. 기존의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남의 등을 쳐 먹는 악질 유저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많은 정파의 고수들이 초보 유저라면 도움을 주러 하고있기 때문에 그에 빌붙어 여러 가지 아이템을 얻어 간단하게 무공과 금전을 벌려고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인심 좋은 절정고수유저라면 이류무공을 선물하는 경우까지 있다. 초보는 이류 무공이라 하더라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런 무공을 공짜로 얻는다면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삼류무공에 기본적인 아이템들만 받더라도 상점에 팔아 상당한 이윤을 얻는다. 물론 초보인척 하려면 엄청난 연기력과 얼굴에 철판을 까는 철면피가 존재해야 하지만..... 몇 번 해 보면 순진한 사람이라도 다 하게 된다.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바탕이 쌓이면 그 때부터 본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에 임하는 것이다. 이런 유저들 때문에 고수들은 이를 갈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 일수이다. 매너가 없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유저들이야 과거부터 얼마든지 존재했었으니. 나도 그런 유저들을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것을 가식으로 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이에게 주기는 싫다. 분명 형이 말한 방법을 시도해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진짜 초보유저가 아니라면 하기는 싫다. 진짜 초보유저를 알아 볼 수 없는 지금의 입장에서는 시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 하지만 형이 다음에 한 말은 나의 귀를 쫑긋 하게 만들었다. "내가 한 명 소개시켜 줄까?" "형이요?" "그래. 그제 만난 앤데 진짜 초보다. 순진함의 극치야. 원래 내가 과거에 도와줬던 녀석의 누나라던데 이제 막 더 월드를 시작했다더라. 전에 내가 말했지? 화산에 있는 진호라는 녀석." 아아. 들어 본 적은 있다. 나를 능가하는 엽기적인 녀석이라고 형이 배를 잡으며 웃었지... 뭐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아끼는 뱀술을 마셔버리고는 거기에 식용유 부어 놓았다던가? 그것도 모르고 아버지는 친구 분하고 같이 얼큰하게 술에 취해 들어와 뱀술이라며 즐겁게 마셨다는...... "언제 너 한 번 소개시켜 줄게. 그 녀석도 네가 이사간 광주에 사는 녀석이다. 나이도 너하고 같고. 만나면 좋을 거야. 괜찮은 녀석이니까. 아아. 물론 네 정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있어." "아아. 네. 그보다 그 진호라는 녀석의 누나는 어때요?" "녀석. 여자라니까 관심이 좀 가냐?" "그게 아니라는 것 잘 알잖아요." 진짜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니까. 물론 마음에 들면 인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그런 여자를 못 만나 봤거든. "알았다. 알았어. 원 농담도 못하냐? 어쨌든 그 애는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해서 진호의 도움으로 화산 있다. 당연히 지금은 기본무공을 익히고 있고. 검으로 익혔다고 하더구나. 뭐 너야 그런 것은 상관없겠지." 기본무공으로 검술을 배웠다면 후에 검술을 계속 익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성장이 빠른 것이다. 물론 검술을 기본으로 익히고 권법을 익히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였지... 덕분에 무지하게 힘들었지만 말야. 어쨌든 뭐를 익히건 기본은 하나를 골라 익히면 그만이다. 그 후로 삼류, 이류, 일류, 절정의 순으로 차근차근 길을 밟아야 한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본무공을 수련한 후 바로 절정무공을 배우면 고수가 된다고 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물론 절정무공을 배울 수는 있지만 아래 무공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절정무공은 그 힘의 1/10도 발휘되지 못한다. 기본 무공 다음에는 삼류무공을, 그 후로 이류무공을, 그 후로 일류무공, 그리고 절정무공 순으로 익혀야 진정한 절정무공의 힘을 낼 수가 있다. 특히 하위무공을 극성까지 익힌다면 절정무공은 더욱 강력한 힘을 낼 수가 있다. 더 월드가 나온 지 6년이 지나도록 최절정 고수가 거의 없는 이유도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조건은 똑같으니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소수이다. 최절정고수가 된 이들은 그만큼 노력을 한 이들이니까. 그리고 그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무공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태극권과 태극심결을 함께 익혀 상승효과를 노리는 것 같은 숨겨진 무공 상성이 말야. "화산이라면... 나쁘지는 않군요." "그렇지. 장문으로 있는 녀석도 성격이 좋고. 몇몇 짜증나는 녀석들이 끼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녀석들이야 어디에든 있지 않겠어. 어쨌든 한 번 해 볼래? 내가 소개시켜 줄 테니까." 으흠.. 해 볼까? 어차피 전부터 진호라는 녀석과는 한 번 만나보려 했었다. 형이 워낙에 말을 많이 해서 얼마나 괴짜인지 호기심도 생겼고 말이다. 그 녀석과 만나서 안면을 익혀도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진호의 누나라는 여자와도 친분을 쌓아도 나쁠 것은 없다. "그 동안 너는 혼자만 다녔잖아. 이번 기회에 친구 좀 사귀고 같이 놀아 봐. 둘 다 괜찮은 애들이더라." "흐음. 알았어. 그럼 형이 어떻게 좀 해 줘."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잘 생각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있다가 저녁 5시경에 화산성에 있는 화산마을 선유객잔에서 보도록 하자. 그 애들도 그 때쯤이면 접속을 할 것이거든." 저녁 6시는 이 더 월드의 시간이 아닌 현실시간이다. 현실보다 열 배나 빨리 지나가니 이 곳 시간으로는 사흘 후가 된다. 상당히 먼 거리이기는 하지만 나라면 이 곳 남연성에서 화산성까지 반나절이면 도착이 가능하니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아. 네. 저도 그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 열시인데 천천히 학교에 가서 전학수속을 해야겠죠." 보통 학교의 등교시간은 아홉시까지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전학생만의 특권이라고 할까? 과거에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등교를 해서 밤 12시가 거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중반이다. 그런 무식한 주입식 교육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현재는 고등학교도 9시 등교에 3시 하교이다. 거기에 주입식 교육이 아닌 개인의 적성에 맞추어 반을 분류해 학생 개개인의 재능을 갈고 닦는 것이 이 시대의 학교이다. 더구나 앞으로 5년 정도 뒤에는 학교도 전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바로 가상현실 시스템을 이용한 교육방법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지금의 교사들이 모두 잘릴 것이라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없다. 가상현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교사인 것이다. 뭐 그래보았자 내가 졸업을 하고 난 후에야 가능할 일일 터이니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 우선은 접속을 끊고 학교부터 가야겠어. "그럼 형 저 가 볼게요. 있다가 봐요." "그래. 나도 그만 일하러 가야겠다. 알바시간 다 됐거든." 히죽 웃는 형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나는 접속을 끊었다. [접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그래." [접속을 끊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안내 멘트가 나오고 눈앞이 어두워졌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머리에 쓰고있던 링크헤드셋을 벗었다. 곧 하얀 타일로 도배가 된 내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보 키우기라....." 훗.. 나름대로 흥미는 생기는 군... 뭐 우선은 학교부터 가 보아야겠지... 대충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내가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로 향했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길이지만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터라 잘못하면 길을 헤맬 수도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택시를 타고 간 것이다. -상화 고등학교 택시를 탄 지 5분만에 학교 교문 앞에 도착한 나는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학교 주위를 돌아보다가 교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시간은 11시에 가까워졌기에 교문은 한산했다. 하기야 이런 시간에 등교하는 애들은 나처럼 뭔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아들뿐일 테니까. "무슨 일이냐?" 수위로 보이는 아저씨가 물어왔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전학수속을 하려고 하는데.... 교무실은 어디로 가야 하죠?" 건물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교무실을 혼자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내 물음에 그 아저씨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 뒤쪽 건물의 이층으로 가 보거라."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나는 즉시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큰 학교였다. 건물만 해도 다섯이 넘었으니.... 이 정도라면 거의 대학교 크기였다. 뭐 요즘 학교는 거의 다 건물 두세 개는 되지만 그래도 다섯 개의 건물을 가진 학교는 대전에도 그다지 없었다. 목적지인 건물에 도착한 자는 즉시 교무실로 올라갔고 그 곳에서 한 선생님을 만나 어렵지 않게 전학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이미 아버지가 대충 손을 써 두셨는지 이미 거의 대부분의 수속은 끝이 나 있었고 내 반까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앞으로 네 담임이 되는 한영석이다. 잘 부탁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선생님이다. 웃으며 손을 내미는 선생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우직하게 생긴 것이... 꼭 전사의 이미지를 보는 것 같군... "최유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거 예절 바른 녀석이네. 그래 잘 부탁한다. 그보다 곧 2교시 수업이 끝나겠군. 자 올라가자." 오늘은 전학수속만 마치고 그냥 돌아갔으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지? 앞장서는 한영석 선생님의 뒤를 따라 교무실을 나섰다. 내가 들어가게 될 교실은 학교 동편에 있는 건물 3층에 있었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신화의 이곳 지사장이라지?" "......네." 우리 아버지는 더 월드의 개발회사인 신화의 임원이시다. 아버지 덕분에 나 역시 더 월드를 시작했고 말야... 하지만 더 월드와 아버지를 그다지 연결시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호기심이 일었기에 더 월드를 시작한 것이고 아버지가 하라고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럼 너도 더 월드를 하겠구나?" 요즘 세상에 게임만 한다고 혼내는 선생은 없다. 지금 한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부를 쌓은 이유도 바로 게임 때문이고, 정부에서도 게임산업 쪽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는 물론 유저들까지 육성하도록 장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는 게임을 만들고 게임 유저들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된다. 게임 제작 프로그래머들이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능가할 수가 없다. 때문에 게임을 하는 유저들도 육성을 장려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학교에서도 게임에 대해 배우겠는가.... 어쨌든 요즘 선생님들도 과거 게임을 하면서 자라왔고 당연히 지금도 게임을 즐기는 선생님들이 많다. 자연히 학생들과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다. "아.. 네.." "호오. 언제부터 했지?" "5년 전부터요. 한 제국에서 시작했어요." "5년? 그럼 상당한 고수이겠구나." 고수지.... 하지만 고수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웬만한 일은 다 체험을 해 보니 오히려 식상함을 느끼는 것이다. 목표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절정고수에요." 절정고수는 절정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 150이상의 레벨을 가진 고수를 말한다. 한 제국에서 게임을 즐기는 총 1억 정도의 유저들 중 2만 5000명 정도가 절정 고수이다. 그리고 200이상의 고수들을 최절정 고수라고 하는데 그 수는 겨우 42명뿐이다. 물론 밝혀지지 않은 몇이 더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만큼 절정고수가 되기는 어렵고 절정고수에서 최절정고수가 되기는 더욱 어렵다. 물론 방법만 알면 그나마 간단하지만..... "정말이냐?" 선생님은 깜짝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절정고수는 쉽게 보기 힘드니까. 이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선생님도 더 월드를 하고 계시는가 보다. "하기야... 5년 전부터 했다면 베타 때부터인데 절정고수가 될 수도 있었겠구나. 하아.. 부럽구나. 나는 이제 겨우 102레벨인데." 호오. 그 정도면 일류고수는 되는데. 선생님도 상당히 빠져 계신가 보다. "한 3년은 했나 보네요. 아니면 2년 전부터 죽어라 했거나. 부인이 뭐라 안 그래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것을 보면 분명히 두 번째다. 그냥 결혼을 한 것 같아서 찍어 본 것인데... 진짜 게임만 한다고 구박을 많이 받는 모양이다. 잠시 웃어 보이던 선생님은 즉시 발걸음 속도를 높였다.. "반 아이들 모두가 더 월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다들 한 제국에서 게임을 하는 애들이지. 만약 절정고수인 친구가 전학 왔다고 하면 모두 좋아 할 거다." .....분명히 말 돌리시는 것이다. 그보다 반 아이들 모두가 더 월드를 하고 있다 고? 그건 조금 예상왼데..... "아. 도착했구나. 여기다." 마침 선생님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GA 2-5 앞으로 내가 공부를 하게 될 반이다. 잠시 교실의 앞문 위쪽에 걸려있는 팻말을 살펴보던 나는 선생님과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쉬는 시간이었던지 조금은 시끌벅적 하던 교실이었는데 선생님과 내가 들어서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아이들의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자자. 오늘부터 너희들과 같은 반 친구가 될 녀석이다. 자 인사하도록." 전학생이 오면 왜 꼭 선생님들은 학생을 앞으로 내세워 인사를 시키는 것일까? 그냥 자기가 직접 이름 설명하고 자리로 보내주면 안 되나? 괜히 나서게 할 필요는 없는데 말야..... 이런 저런 불만을 가지면서도 나는 앞으로 나섰다. 학생의 행동성을 기르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보다 어떻게 하지... 뭐 대충 하면 되겠지. 나하고 같은 나이들일 것이니 존댓말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최유빈이다. 잘 부탁한다." 이쯤 되면 박수가 나와야 하는데.... 조용하군.. 하기야 내 외모가 조금 날카롭기 때문에 그냥 보면 상당한 위화감이 생긴다. 은연중에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랄까? 내가 과거에 좀 놀았거든.... 결국 보다못한 선생님이 나섰다. "우리 반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유빈이 더 월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지? 이 녀석은 5년 전 배타 때부터 하였고 지금은 절정고수라고 한다." "정말이요?!" "우와!" 절정고수라는 말이 가지는 힘을 알겠군.. 나를 보고 조용했던 녀석들이 순식간에 시끌벅적 해 졌으니 말야. 그런데 이 반에 들어왔으니 더 월드를 하는 것이라고? 그럼 더 월드를 해야 이 반에 들어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자자.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되니 잡담은 나중에 하고 준비를 하거라. 유빈이는 저기 빈자리에 가서 앉고. 보아하니 오늘은 교과서도 안 가져 온 것 같은데. 문진호! 네 교과서를 같이 보도록 해라." 그 말을 남기고 선생님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다시 들어오더니 뒷머리를 긁으며 어설프게 웃어 보인다. "생각해 보니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더구나. 아하하..." ..........평소 어떤 선생님인지 잘 알겠다. "반갑다. 나는 문진호라고 한다." 내가 자리를 앉자 옆자리에 있던 남학생이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맞잡았다. "최유빈.....이다." "하하. 너 눈초리 정말 죽인다야. 심장 약한 사람이라면 감히 마주보지도 못하겠어." 익히 들어 봤던 말이라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보다 이 녀석 이름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다. 문진호라.... 학교에 오기 전에 천희형에게 들었던 진호라는 녀석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뭐냐? 뭐.. 이 녀석이 그 녀석일 가능성은 없겠지. 피식 웃어버린 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리며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어제 밤새도록 게임을 했기에 몹시도 피곤했기 때문이다. 가수면 모드로 게임을 하면 피로가 좀 줄기는 하지만.. 감도가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그다지 이용하지 않는다. 덕분에 학교에서 수업은 듣지 않고 잠만 자 버리는 것이 내 생활 일과가 되어버렸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의무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꼭 수업을 들어야 하는 법은 없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건 다른 책을 읽건 그건 학생의 자유다. 수업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천천히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얘는 계속 자네..." "점심시간인데 깨워야 하는 것 아냐?" "내버려 둬. 괜히 깨웠다가 화내면 어쩌려고." 아이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점심시간이라고 했으니 3교시가 끝났을 것이고.... 대충 한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이들의 입이 즉시 닫혔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녀석으로 보이나..... 중학교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조용히 사는데 말야... 나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졸음을 밀어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점심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계를 보니 12시 20분 정도이다. 점심시간은 대충 40분 정도 남았군... "이제 일어났냐?" 진호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다른 애들은 날 깡패로 보는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아닌가 보다. 아니면 겁이 없거나..... "아아...." "가자. 너 때문에 나는 아직 점심도 안 먹었다." 날 기다린 것인가? 이거 좀 고맙다고 해야 하나.....? 히죽거리는 진호 녀석의 그렇게 밉게 보이지만은 않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진호와 함께 가는게 좋을 것이다. 꼴사납게 식당 찾아 헤매기는 싫으니까. 나는 진호와 함께 교실을 나와 식당 쪽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진호는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물론 중점은 더 월드였다. "5년 전이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한 거야?" "아아...."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였지. 게임을 시작한 지 이틀만에 새해가 되어 버렸고 말야.... 그렇게 따지고 보면 4년이라 하는 것이 정확할 지도 몰랐다. "헤에... 절정고수라... 부러워 죽겠다~!" 갑자기 녀석이 내 등을 쳤다. 어찌나 세게 맞아 버렸던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이 녀석 의외로 위험한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아프냐?" ".....부정하지는 않겠어." "하하하. 미안. 내 버릇이거든. 친구를 처음 만나면 기습적으로 등치는 것. 그냥 그러려니 해 줘." 역시 위험한 녀석이었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호는 그런 내 어깨에 손을 팔을 턱 하니 올리며 물어 왔다. "그런데 너 아이디 뭐냐? 나는 번쩍번쩍필살검이다." ........네이밍 센스하고는....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외우기도 쉽겠고 말이다. 아이디는 각 유저의 고유 계정으로 게임 상에서 메시지를 보낼 때를 위해서 알아야 한다. 주로 한국의 유저들은 한글로 만들고 외국은 영어로 만든다. 한글과 영어 외에는 쓰이지 않는다. 이게 다 제작회사가 한국기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흑풍행로." "호오~! 꽤 낭만적이네. 멋 좀 부렸어." 번쩍번쩍필살검보다는 훨씬 나은 아이디이지. 훗. "좋아. 그럼 있다가 접속해서 귓말 보내지." "마음대로..."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냥 대충 그러려니 넘어가 버렸다. 얼마 후 우리는 식당으로 통하는 지하계단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맞은 편에서 올라오는 두 명의 여학생들과 마주쳤는데 진호가 아는 애들이었는지 인사를 했다. "아! 누나~!" 하나는 세미단발에 큰 키의 성숙해 보이는 여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도수 높은... 그러니까 일명 잠자리 안경이라 불리는 안경을 쓰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평범한 키의 여학생이었다. 진호는 그 중에서 잠자리 안경에게 다가갔다. "늦었네." "좀 일이 있었어. 벌써 먹은 거야?" "으응...." 진호가 누나라고 했으니 3학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뜻 보아도 조용한 성격의 여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니?" 옆에 서 있던 진호 누나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애가 나를 가리키며 진호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 온 애. 놀라지 마. 저 녀석 절정고수라고!" ".......나는 더 월드 안 한다.." 학생 모두가 더 월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어쨌든 심드렁한 그 여자 애의 말에 진호는 열을 내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더 월드의 세계가 어떤데 거기서 절정고수라면 어떻다고 하면서.... 하지만 그 여자 애는 여전히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그런데 나 보다 한 살 더 많은데 계속 여자애, 여자애 해도 되나? ......앞으로 선배라고 해야겠군.... "유빈아 이 쪽은 우리누나. 그리고 옆에 성깔 더러운 여자는 우리누나 친군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말도 마치지 못하고 라이트 스트라이트를 맞고 굴러가 버리는 진호....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진호가 맞을 짓을 했다는 이유와 때린 여자가 한 성깔 하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아프잖아!! 누나 주먹은 흉기라는 것도 몰라?!" "맞을 짓을 하잖아." 티격태격 하는 진호와 그 여 선배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힐끔 진호의 누나를 돌아보았다. 친구와 동생을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일순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안경을 잡아챘다. "아!" 내 갑작스런 행동에 졸지에 안경을 뺏겨버린 그녀는 깜짝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안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얼굴을 보고 놀랐다. 세상에.. 이제까지 살면서 여자의 얼굴이 내 시선을 잡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믿음이 이 순간 무너져 버렸다. 예쁘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분명 예쁘게 생긴 얼굴이기는 하지만.. 그 보다... 눈이.... 눈이 너무 맑다. 이런 아름다운 눈을 왜 가리고 다닐까? 눈이 나빠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너무 아깝다. 나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물론 안경 대신 렌즈를 쓰고 다니면 어떻겠냐는 충고를 위해서였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내 입은 내 의지를 거절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우선 몸을 씻고 난 후에 간편한 티와 청바지를 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대략 4시가 조금 못 되었다. 6시에 형과 만나기로 했으니.. 지금 접속을 해 화산성으로 가면 시간은 충분했다. PC를 부팅 시키고 링크헤드셋을 들어 올리던 나는 오늘 점심때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황당하게도.. 내가 어째서 그런 소리를 했을까? 정말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입을 쩌억 벌리며 나를 바라보던 진호와 진호 누나의 친구.... 그리고 나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안경도 돌려 받지 않은 채 도망가 버린 진호의 누나... 분명히 그녀에게 완전히 이상한 녀석으로 찍혀 버렸을 것이다. "하아... 내가 그렇게 여자에게 굶주렸었나....?" 거기서 결혼을 해 달라고 하다니.. 누가 보더라도 정신나간 인간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상당히 시달렸지.... 알고 봤더니 진호의 누나는 학교에서 남학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받고 있었다. 하기야 그 잠자리 안경 때문에 얼굴이 가려진 것뿐이지 벗으면 상당한 미인이었으니까. 특히 눈이 너무 예뻤다. 어쨌든 팬클럽까지 존재하는 그녀에게 느닷없이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결혼하자며 프로포즈를 해 버렸으니.... 순식간에 소문은 학교 내로 퍼져버렸고....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일단의 남학생들이 달려와 나를 찾았다. ......뭐 내가 싸늘히 노려보자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그냥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만 하자. 그만해. 생각하니 또 골치만 아프다.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진호의 누나가 날 이상한 녀석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좀 되기는 하지만.. 걱정해서 뭐 하겠나.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말야. 나는 생각을 털어 버리듯 침대 위에 고개를 젓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링크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그래."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금새 환한 빛이 눈을 감쌌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나는 어느새 더 월드의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남연성의 리스장이었다. 주위에는 이제 막 접속한 사람들이 가끔씩 내 뒤를 따라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즉시 몸을 돌려 리스장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남연성 외곽 숲 가운데에 있는 내 집으로 향했다. 더 월드에서는 스스로의 집을 가질 수가 있다. 돈이 많은 이들은 거대한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큰집을 만들지 않았다. 괜히 집이 커 봤자 도둑만 들끓거든. 표국에 맡길 수 있는 물품은 한계가 있고 당연히 남은 물건은 집에다가 보관해야 한다. 더 월드는 너무도 현실성이 강한 게임이기에 남의 집에 숨어들어 물건을 훔쳐 달아 날 수도 있다. 물론 잡히면 바로 훔친 물건들을 수거 당하고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동안 철창행이지... 하지만 나는 표국을 이용하지도 않고 모든 수집품을 집에다 놓아둔다. 그리고 다른 사람처럼 큰집을 짓고 주위에 진을 설치하면서 여러 호위무사들을 고용해 요란하게 지키지도 않는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을 만들고 비밀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다른 서민들의 집과 똑같은데 설마 돈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게임성을 초월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면 결코 알아 볼 수가 없다. 더구나 나는 신분도 감추고 살아가는 터라 더더욱 위험할 것은 없다. 결과는 3년 동안 단 한번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 할 수가 있지... 뭐 언젠가는 도둑이 들 수도 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은근히 그런 도둑들을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고... 자연히 이 것 역시 나에게는 하나의 흥밋거리였던 것이다. 그 흥미를 완결시켜 준 도둑이라면 얼마든지 내 수집품을 가져가도 된다. 일종 의 보상이라고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집에 도착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지가 수북히 쌓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거의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누가 주인 없는 집으로 알고 들어와 살지도 모르겠네.... 뭐..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에 들어와서 사는 인간은 없겠지. 이 정도 집을 구하는 것은 간단하니까 말이다. 거기다 조금만 노력하면 이 보다 좋은 집에서 살아 갈 수도 있으니 몰래 들어와 살더라도 며칠 지나지 않아 나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할 것이다. 간만에 방문한 집을 대충 청소한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아궁이 왼쪽에 수북히 쌓여있는 장작들을 능공섭물로 들어올려 한 쪽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땅에 깔아 놓은 거적을 치우고 비밀통로를 열었다. "여기 들어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지하로 뻗어있는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간 나는 어둠 속에서 잠시 서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라이트." 그러자 주위가 일순간에 환해졌다. 내가 에리두에 갔을 때 구해 온 라이트 볼이라는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다. 상당히 비싸게 사 온 것이지만 쓸만한 것이기에 별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라이트 볼의 빛에서 찬란하게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는 수집품 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치 3년 동안 모은 것들이다. 한 쪽에는 수십 자루의 한 제국과 에리두의 무기들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옷과 갑옷들이... 또 다른 쪽에는 여러 가지 아이템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아마 여기에 있는 것들만 내다 팔아도 성 수백 개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옷들이 걸려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평소 나는 낡아빠진 흑의를 입고 다니는데..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천잠사로 짠 피풍의. 역시 천잠사로 짠 문사의. 에리두에서 구해 온 미스릴 실로 만든 청색 도복...... 하나같이 보물들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며 구석에 놓인 평범한 흰색 도복을 들어올렸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가치를 알아 볼 것이고 그렇다면 골치만 썩는데 내가 뭐 하러 그런 옷들을 입고 다니겠는가. 그냥 이런 평범한 흰색 도복이 가장 마음도 편하고 좋다. 어차피 다른 옷들의 방어력이 좋아봤자 지금의 나에게는 호수에 물방울 하나 더 떨어뜨린 정도일 뿐일 테니까. 입고 있는 낡은 흑의를 벗어버리고 흰색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허리에 걸어두었던 낡은 철검도 빼서 구석에 던져버렸다. "이 정도면 되겠군. 검은... 필요 없지.." 검이 아니더라도 다른 무공이 있으니까. 보통 검술을 배운 이는 끝까지 검술 하나만을 배우는데.... 나는 조금 청개구리 성격이었던지 기본무공으로 검을 배우고 삼류무공으로는 창을 배웠고, 이류무공으로는 도를 배웠으며, 일류무공으로는 암기술을 배웠고, 절정무공으로는 독공을 배웠다. 거기에 최절정무공으로는 권법을 배워 버렸으니.... 정말 누가 들으면 미친 짓이라고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처음 삼류무공인 삼화창법(三和槍法)과 이류무공인 반월도법(半月刀法)을 배울 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남들이 유야 무야 놀면서 반년이면 극성까지 연마 할 수 있는 삼류무공을 자그마치 1년 동안 미친 듯이 연마해서 극성이 되었으니 말 다 한 것이지... 거기에 이류무공도 자그마치 남들이 9개월이면 극성으로 익히는 것을 나는 1년 반이나 잠도 안 자고 미친 듯이 해서 극성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정도 되자 정말 내가 잘못 선택을 했나 하는 회의가 들고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 키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천희형도 나보고 미친 짓이라고 하면서 다시 키우라고 수없이 충고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갔었다. 어차피 한 것 악으로 깡으로 배워버리자 생각해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친 짓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엄청난 운을 안겨 주었다. 숨겨진 상성.... 이 세계의 무공들에는 여러 가지 상성이 존재한다. 비슷한 속성의 무공끼리 극성으로 익히면 서로 능력이 상충되어서 한 단계 높은 무공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에 미친 짓이라 생각했던 다른 종류의 무공 수련은 표류비(慓劉飛)라는 일류 암기술 무공을 8성까지 연마할 때까지 엄청나게 더딘 성장을 보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9성은 다른 이들과 비슷한 시간에 오를 수가 있었고 10성과 11성 12성에 오르는 시간은 오히려 단축되었다. 그 때의 기분이란 정말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즉시 천희형이 아르바이트로 있는 게임센터의 사장님께 당가독공(唐家毒功)이라는 절정독공을 얻어 익히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3개월만에 극성에 이르러 버렸다. 보통 절정무공은 극성으로 익히려면 2년은 족히 걸리는데 나는 그 보다 8배나 빠른 기간에 절정에 이르러 버린 것이다. 그 때 형과 사장님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하하. 나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즉시 몸을 돌려 비밀공간을 나왔다. 물론 중간에 라이트 볼을 끄는 것은 잊지 않았다. 수명이 있거든... 계속 켜 놨다간 다음에 왔을 때 작동불능이 될 수도 있다. 통로를 닫고 거적을 깐 후 구석에 놓아두었던 장작들을 능공섭물로 다시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즉시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남연성을 나선 즉시 북쪽의 화산성을 향해 경공을 전개했다. 대략 7시간 정도 달려(게임 시간으로 : 상당히 지루하지만 중간중간에 사냥을 하면서 가면 된다.) 남연성에서 화산성까지의 길 중 2/3정도를 도착했을 때 갑자기 메시지가 날아왔다. 나는 잠시 경공을 멈추고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여어~! 매형 있냐?!] .......진호녀석이다. 그냥 무시해 버리고 다시 길을 가 버릴까 하는 욕망이 생겼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뭐냐?] [있었구나. 너도 참 굉장하다. 학교 끝나자마자 들어와서 있냐?] [......할 말 그것 뿐?] [응. 그냥 해 본 거야. 하하. 바쁘냐?] [약속이 있어서 어디로 좀 가고 있는 중이다.] [나도 오늘 약속 있어.] [그거 다행이군.] [뭐야? 내가 연락해서 싫은 거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즉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별로. 나 바쁘니 이쯤에서 그만 하자. 바쁘니 나중에 연락할게. 너는 어디에 있지?] [나는 지금 화산성.] 화산성? 이거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 설마 저 녀석이 천희형이 말한 그 녀석 아냐? 설마.... 화산성에 있는 유저들만 해도 거의 수십만은 될 건데 같은 이름을 가진 녀석이 없을 턱이 없지.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나도 지금 화산성에 일이 있어 가는 중이야. 나중에 연락 해.] [오~! 그거 잘 됐다. 그럼 나중에 보자 매형~] .........저것을 그냥... 나는 입술을 잠시 씰룩거리다가 즉시 메시지를 날렸다. [여자에게 얻어터지기나 하는 허접세리~!] 그리고는 재빨리 진호에게 오는 귓말을 차단시켜 버렸다. 아마 녀석은 길길이 날뛸 것이지만 내가 신경 쓸 바 아니다. 흐흐. 나도 이 곳에서는 상당한 괴짜로 통한다고... 잠시 키득거리던 나는 다시 경공을 써 화산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후 화산성에 들어 설 수가 있었다. 화산성의 성문을 넘어 온 나는 우선 천희형에게 귓말을 보냈다. 현실시간으로 6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지금 와 보니 한 시간이 남아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게임시간으로 10시간이다. 만약 6시에 보자고 하면 조금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냥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형.] [응? 아. 왔냐?] 다행히 천희형이 접속해 있었는지 바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방금 화산성에 도착했어.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지금 만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너 부르려고 했다. 이 쪽도 지금 다 도착했어. 선유객잔에 있으니 여기로 와라.] [알았어.] 운이 좋다. 바로 만날 수 있다니... 나는 즉시 선유객잔으로 걸어갔다. 성내에서도 경공을 전개할 수 있지만 급한 일이 아니면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 경비병에게 걸리면 괜한 벌금을 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망을 갈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수배가 되어 버린다.. 기껏 돈 몇 푼 때문에 수배자가 되는 것은 결코 사양이다. 바삐 걸음을 옮겨 30분 정도 뒤에 선유객잔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화산성 구석에 있는 낡은 객잔인데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형은 주로 이런 객잔을 이용한다. 물론 시켜먹는 음식의 질이 조금 떨어지지만.... 그 정도는 그냥 무시해 버린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으면 좋은 객잔으로 한 번씩 찾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선유객잔은 작은 객잔이었기에 탁자도 적었고 손님은 하루에 한두 명이 찾을 정도였다. 당연히 현재 객잔 안에도 다른 손님은 없고 천희형과 형이 소개시켜 주기로 한 남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형!" "응? 아!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진호야. 진희야 여기 이 녀석이 내가 자주 말했던 그 녀석이다. 유빈아. 이....." "아악!!!!" 천희형이 서로의 소개를 시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진호라는 녀석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나 역시 머리를 누르며 신음을 흘려야 했다. 설마 했는데... 이 진호가 바로 그 진호였다니... 정말 이런 황당한 인연도 다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너 이 자식!! 감히 그 따위 귓말 보내고 차단을 시켜?! 미래의 처남에게 그럴 수 있는 거냐?! 앙?!!" 죽겠군.. 진호에게 멱살을 잡혀 앞뒤로 흔들리던 나는 힐끔 진희누나를 보았다.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누나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역시 나 미움받은 거야.... "너희들 알고 있었냐?" 천희형이 놀란 얼굴로 물어왔다. 그러자 진호는 여전히 내 멱살을 잡은 채 악을 질렀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요! 우리 반에 전학 온 녀석이 있는데 내 속 뒤집어놓고 귓말 차단 시켜 버렸다는 녀석... 바로 이 녀석이에요!" "........자기가 먼저 한 말은 생각도 안 나냐?" "시끄러! 너 우리 누나한테 프로포즈까지 했잖아! 그러니까 매형이라고 한 건데 그게 뭐가 어쨌다고!!" 아주 사람 억장을 갈기갈기 찢어 발겨라.... 진희누나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고 천희형은 그런 진희누나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프로포즈?" "그렇다니까요. 이 녀석 진짜 골 때리는 녀석이에요. 우리 누나를 처음 만나서 느닷없이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니까요." ".............푸웃... 큭... 크큭... 큭...." 잠시 나를 보던 진희형이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제 딴에는 참아보려 하는 듯 했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는 없었나 보다.. 형.. 그냥 웃어. 그렇게 웃으면 내가 더 비참해... "큭.. 크하하하하하!!!" 내 생각이 텔레파시로 통했을까? 참아내다 참아내다 더 이상 안 되겠다는 듯이 형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주 땅을 구르며 난리다. 아아. 사나이 최유빈. 오늘 아주 개 쪽 나는 구나..... "하아... 하아.. 배아파... 하하하.." 대략 5분 정도 웃던 천희형은 배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형이 불쌍하게 보이는 이유가 뭘까?" 어느새 화를 다 풀어냈는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 온 진호가 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나는 쓰게 웃을 뿐 이렇다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희누나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누나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누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아까는 어쩌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와 버렸는데... 사실은 누나가 안경보다 렌즈를 끼면 좋을 것 같아서 렌즈를 쓰라고 말하려 했는데... 저도 왜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쩝.. 대답이 없다. 하아.. 되도록 진희누나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군. 하필이면 왜 그런 소리를 해 버려 가지고..... "하하.. 이거 정말 놀랄 일이야.. 세상에 천하의 최유빈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다 하고 말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어느새 웃음을 멈춘 형이 내 옆자리에 앉으며 히죽 웃어 보였다. 나는 대답을 않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형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진희가 마음에 들더냐? 유빈이 너도 드디어 반대쪽 짚신을 찾은 모양이구나." 언제까지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형이라면 내가 입을 다문다고 평생동안 놀릴 것이다. "실수였어요." "실수로 프로포즈를 하냐?" "실수였어요." 끝까지 실수라는 것만 강조하기로 했다. 그런데 왜 형은 나를 귀여운 녀석 보는 눈으로 보는 거야.... 아.. 진짜 여긴 좌불안석이네. 형은 형대로 실실 웃으며 사람 속을 뒤집고. 진호는 녀석 나름대로 형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추가데미지를 준다. 거기다가 진희누나는 여전히 나와 시선이라도 마주칠라 싶으면 놀란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리고... 단 한번의 실수가 이렇게 굉장한 폭탄이 되어 날아 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말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 수가 있다. "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천희형이 놀라서 급히 나를 잡았다. "야!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 "먼저 가 볼게요. 그럼...." 형의 손을 떼어 낸 나는 그대로 경공을 발휘해 달렸다. 경비에게 걸리면 즉시 벌금이지만...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비에게 걸리지 않고 성을 벗어 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나는 몸을 멈추었다. "제길....."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몹시 저조했다. 근래에는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다 별로 화가 나는 일도 없었고. 그런데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크아앙!! 갑자기 오른쪽 숲에서 누런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어딘가 화풀이를 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나 잡아 넝쿨째 주라고 달려오는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백호신권(白虎神拳)! 나는 그대로 호랑이의 턱을 쳐 올렸다. 단 한 방이면 이 정도 호랑이는 끝이었다. 백호(白虎)나 흑호(黑虎) 같은 영물들이면 몰라도 이런 누렁이 정도야 백호신권을 쓴 것도 아까울 정도였다. ".....실수로군. 좀 더 주물러 줬어야 하는 건데." 축 늘어져 버리는 호랑이를 보니 괜히 짜증이 더 솟구친다. 화풀이도 제대로 못하고 끝이 나 버린 터라 오히려 더 기분이 상해 버렸다. 한 녀석 더 튀어나왔으면 좋겠지만....... "젠장!! 그건 내가 잡던 녀석이란 말이다!" ........이거 그나마 괜찮군. 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녀석에게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신나게 패 줄게. 샌드백이 되어 주어서 너무 고마워. 치료비는 나중에 주고 갈테니 걱정말고. 2 - 화산(華山)과 싸우다 신나게 패 버렸다. 그것도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끊어서 기본무공으로만 죽도록 패 버렸다. 물론 죽도록 팼다는 말과 죽여 버렸다는 말을 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삼재검법(三才劍法)으로 얻어터졌으니 당하는 쪽에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대자로 뻗어 헐떡거리는 녀석의 머리 위로 금화 하나를 던지고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금화 하나면 1000은이니... 엄청난 거금이다. 약방에서 치료를 하고도 거의 990은이 남을 것이다. 나는 화풀이해서 좋고. 그 쪽은 돈 벌어서 좋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괜히 친구들 끌고 와서 덤빈다면 그 녀석들도 다 같이 밟아주면 그만이지 않겠어. 으하함... 이제 뭘 하지? 사냥이나 할까? 화산성 근처에 괜찮은 사냥터라면..... 검의 무덤이던가? 내 기억이 어찌 되지 않는 이상은 틀림없었다. 검의 무덤은 전체 28층으로 된 사냥터인데 상당한 레벨의 사냥터이다.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20층 이상에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레벨의 사냥터이다. 당연히 이 검의 무덤에 들어오는 이는 최소 일류고수 이상의 유저들이 수십 명씩 파티를 이루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나도 전에 들어 가 봤는데 최하층에는 한 자루의 명검이 있다. 물론 최하층은 그냥 힘으로 뚫고 간다고 도달 할 수 없다. 27층이 끝으로 계단은 더 이상 없다. 당연히 다들 27층이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고. 하지만 설마 검의 무덤인데 그 곳에서 최하층까지 내려왔는데 아무것도 없을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수색을 했고 하루만에 겨우 비밀을 풀어내고 28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검도 보았고.... 뭐 그 검은 그냥 두고 왔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아 놓은 검도 많은데 또 얻어서 뭐 하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쓸 일도 없는데 괜히 짐만 늘리는 꼴일 뿐이다. 거기다 한 제국 내에 있는 던젼들을 내가 다 깨 버리고 물건들을 습득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뭘 얻으라는 말인가. 자연히 나는 검의 무덤의 비밀을 완전히 파해 쳤다는 것 정도에만 기뻐하고 검은 그냥 두었다. 문뜩 지금도 그 검이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그 사이에 누가 뽑았을 수도 있지만 이렇다할 소문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검의 무덤 최하층까지 갈 정도라면 최절정고수라는 말이고 최절정고수라면 검을 뽑고 나서 검을 노리는 자들이 생길까봐 두려워 숨길 인물은 아니다. 당연히 검이 뽑혔더라면 분명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것인데 말이다. 나는 즉시 검의 무덤 쪽으로 경공을 써서 향했다. 중간에 길을 막는 사냥감들을 상대하며 대략 두 시간 정도가 걸려 검의 무덤 입구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와 본 검의 무덤은 나에게 옛 향수를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지만 그 때는 정말 목숨을 걸고 검의 무덤을 정복했었다. 정확히 나흘이 걸렸다. 게임 시간이 아닌 현실시간으로 말이다. 그 때 방학이었기에 가능했지... 아니었으면 검의 무덤 정복은 애초부터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 가수면 모드로 플레이를 해도 힘들 시간이었다. 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 검의 무덤의 비밀을 풀어내고 그 후로 내리 이틀을 잤었다. 물론 호기심이 풀렸기에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고 그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며 잠에 빠져들었었다. 하아... 정말 그 때의 희열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다. 이제는 그 정도의 희열을 다시 느껴보기란 불가능한 것인가? 어디 내가 모르는 아직 안 밝혀진 사냥터가 없나..? 타 대륙으로 넘어 갈 방법만 찾으면 그런 희열을 또 한 번 느껴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2년 동안 찾아 헤매도 아직 그 것만은 못 찾고 있다. 웬만한 일은 최소 이틀. 최대 한 달이면 모두 풀어버리는 난데..... 진짜 타 대륙으로 넘어가는 방법만은 어두컴컴하다. 쳇. 우선은 검의 무덤이나 다시 돌파해 보자고.... 1층은 이미 먼저 사냥을 시작한 파티가 있는지 깨끗하게 쓸려 있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재빨리 2층이 있는 계단으로 경공을 썼다. 2층 역시도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누가 쓸고 갔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실력자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이거 혹시 최절정고수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약간 갈등이 되었다. 이거 괜히 갔다가 마주쳐서 좋은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최절정 고수들 중에서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천희형과 천희형이 알바로 있는 게임센터 사장님뿐이다. 그 외에는 나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거나 혹 나를 만났다 하더라도 내 정체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검의 무덤은 상당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20층 이상으로 내려가면 나도 절정무공 이상의 무공을 사용해야 하고 어쩌면 최절정무공 이상의 무공을 써야 할 때도 있다. 한마디로 정체를 의심받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잠시 고심하던 나는 그냥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정체를 숨기고 혹 걸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떠 안고 탐험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낡은 창을 들어올렸다. 이 검의 무덤 안에 있는 몬스터 중에서 창살귀라고 하는 녀석이 가지고 다니는 창이었다. 잠시 창을 휘둘러보고는 어느 정도 내구성이 남아 있음을 알고 만족했다. 이 정도면 다음 층부터 몬스터가 나온다는 전제 하에 15층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경공을 써서 달리기 시작했고 1시간 동안 3층과 4층 5층을 내려왔다. 그리고 6층에 도달해서야 먼저 들어와 사냥을 하고 있는 인물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핏빛 검을 든 적의(赤衣)의 여자 하나와 10대 중반의 청의(靑衣)를 입은 남자 하나였는데, 저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대번에 저들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살검후(殺劍后) 단리연화와 지왕(指王) 민소정. 각각 육살(六殺)과 팔왕(八王)의 가장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최절정고수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만났다는 것을 둘째 치고라도 그들이 함께 사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둘 다 낭인무사들로서 지왕 민소정은 몰라도 살검후 단리연화는 이제껏 동료와 함께 다니는 경우가 없는 유저로 유명했는데..... 그 소문이 잘못 된 것인가? 에이 설마.. 저들도 우연히 여기서 마주쳤겠지. "어라? 또 누가 왔네요." 민소정이 날 발견하고는 단리연화에게 말했고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돌연 단리연화의 표정이 약간 싸늘하게 변했다. 아마도 나를 아직 이류급유저로 보는 것이겠지. 내공도 대부분 갈무리 시켜 놓았고 옷도 평범한 백색 도복에.... 무기라고는 여기서 주울 수 있는 싸구려 낡은 창 하나 달랑 들고 있으니.... 내가 날 보더라도 삼류나 이류고수라고 말하겠다. 아무래 그렇다고 해도... 기분 나쁜데.... "여긴 일류급 이상의 고수들이 출입하는 곳입니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셨으면 하는데요." 민소정이 정중하게 나에게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이 자신들이 이 곳을 독식하고 싶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확실히 검의 무덤은 일류고수라 하더라도 벅찬 장소이고 하니 이류나 삼류가 들어왔다가는 송장 되어 나갈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그의 말은 고수가 하수에게 하는 충고정도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만약 단리연화가 그렇게 말했다면 독식하고 싶어 눈에 쌍심지 켜는 계집으로 믿어 버렸겠지만.... 민소정은 상당히 평판이 좋은 녀석이거든. "죄송합니다만.. 저도 여기서 버틸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우선은 정중하게. 정중하게. 그래야 반발도 없는 법...... "나가라. 강제로 리스하게 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눈깔에 피를 쳐 넣은 계집이 내 성질을 건드린다. 이거 진짜 나 조용히 살고 싶은데.... 자꾸 이렇게 시비를 건단 말야.... 단리연화가 나와 같은 낭인무사라 하더라도 열 받으면 용서 없다. 싹수없는 계집은 주먹으로 다스려야 하거든. 나는 씨익 웃으며 창을 들어 올리면서 단리연화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면 해 보시지요." 단리연화는 분노라 하기보다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 정도까지 내가 하수로 보이는가? 아마도 내 능력을 감추는 기술이 좋다는 의미이겠지만.. 흠..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거야..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거야? 잠시 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단리연화도 자신의 검인 혈영검(血零劍)을 들어올렸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죽고 나서 울지나 마라." "누. 누나!" 민소정이 당황해서 막아 보려 했지만... 단리연화는 민소정보다도 더 고수이거든. 얼마 전에 최절정고수가 된 민소정에 비해 단리연화는 최절정고수가 된 것이 거의 반년 전이니까. 순식간에 민소정을 뿌리치고 나에게 달려든 단리연화는 그대로 혈영검을 펼쳐냈다. 최절정고수이니 만큼 속도 면에서나 파괴력 면에서나 절정고수의 검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맞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즉시 주작신보(朱雀神步)를 펼쳐 단리연화의 검을 피해내고는 삼화창법(三和槍法)으로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눈앞에 열리는 메시지 창은 나의 공격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야!! 최유빈 임마!!] 메시지 창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반투명으로 보이기에 주위 전경은 다 보인다. 내가 흔들린 이유는 내용 때문이었다. 분명 천희형이 보낸 것인데 이렇게 욕까지 쓰는 것을 보면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말과도 같았으 니까. 재빨리 메시지 창을 지운 나는 단리연화의 검이 바로 가슴 앞까지 다가왔음을 보고는 재차 주작신보를 펼쳤다. 두 번이나 공격이 실패한 단리연화는 상당히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실력을 감춘 최절정고수?" "아 맘대로 생각해요. 그보다 잠깐 타임. 뭔가 일이 일어난 것 같거든요." 손을 흔들어 버리고는 재빨리 천희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단리연화가 무시하고 덤벼들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단리연화는 가볍게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형 무슨 일이야?] [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형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뭔 일 있어?] [너 미쳤냐? 화산을 왜 건드려?!!] 내가 무슨 화산을 건드렸다고 그러지?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지금 성에서 난리가 났단 말야!! 어떤 정신나간 녀석이 화산파 이대제자를 반죽을 때까지 패 버린 것도 모자라, 금화를 하나 던지고 조롱까지 하고 가 버렸다고 말야! 그거 네가 한 짓이지? 네가 자주 쓰는 방법이라는 것 잘 아니 발뺌하지 마라!] 있군..... 그 녀석이 화산파 제자였단 말야? 거 참.. 세상일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단 말이야.. "저는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없는 일로 해 두죠." 나는 메시지 창을 지운 후 단리연화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그녀 내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신경 쓸 것 없었다. 여기서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는 화산파와의 일이 더 중요하거든. 나는 즉시 몸을 돌리며 리스를 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단리연화가 나에게 물었다. "천희와 어떤 관계지?" 에? 천희형을 알고 있어? 거기다가 실명까지?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단리연화를 보았다. 천희형은 게임 상에서 가명을 쓰고 실명을 아는 사람은 형과 친한 몇몇 뿐이 없기 때문이다. "형을 알아요?" "네가 쓴 신법은 천희의 독문무공이다.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역시 천희형과 아는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 형이 단리연화와 아는 사이였다니... 이제까지 나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뭐 형도 나름대로의 사생활이 있는 것일 테니.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천희형의 무공은 제가 준 것이죠."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놀란 모습을 보니 조금 귀엽게 보이네. 나는 싱글거리며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검의 무덤의 27층에 도착하면 북극성을 찾으세요. 북극성과 다섯 발자국. 그것만 알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즉시 리스를 했다. 걸어서 나가는 방법이 있지만 이런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리스를 해 버리는 것이 훨씬 빠른 방법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녀가 나를 보았지만 이미 나는 할 말 다 했다고. 접속을 끊은 후 다시 재접속을 한 나는 검의 무덤 입구에 리스폰이 되었고 즉시 화산성 쪽으로 경공을 써 달렸다. 화산성은 난리가 나 있었다. 이미 내 얼굴이 찍혀있는 수배문들이 사방에 걸려 있었고 그 주위로는 사람들이 다수 몰려 있었다. 당연히 내가 화산성에 들어오자 모든 이들의 눈이 내 쪽으로 돌려졌다. "은 20만냥이다!!" ........이봐.. 내 이름은 최유빈이라고. 은 20만냥이라는 센스 없는 이름이 절대로 아니란 말씀이다! 이렇게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우르르 칼을 뽑고 달려드는 인간들에게 아무리 소리쳐 봤자 우이독경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재빨리 경공을 써 그들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실력발휘를 하면 그들 수백 정도는 어떻게 날려 버릴 수가 있지만 마을에서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내 신조(걸리면 벌금이다. 특별히 돈을 아끼지는 않지만 쓸데없이 날리기는 싫다. 경공을 써도 벌금이기는 하지만 이런 비상시에는 경비병도 묵인해 준다. 대단한 인공지능!!)가 존재했기에 우선 몸을 피하기로 한 것이다. "저쪽이다!!" 꼭 사냥 당하는 동물이 된 기분이군... 괜히 기분이 나빠진 나는 그들을 놀릴 생각으로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도망을 쳤고 그 때마다 추적해 오는 그들은 입에서 게거품을 물었다. 동시에 내가 한 번씩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면 그들은 피를 토하며 괴성을 내지른다. 무하핫! 이거 상당히 재미있네. "잘 논다...." 어느새 소란을 듣고 달려 온 천희형이 머리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달리면서 천희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이~!" "이 상황에서 그런 인사가 나오냐?" "하하하. 형도 알잖아. 나 과거에 엄청 쫓겨다녔다는 것." 한 2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진 비급을 노리던 인물들이 엄청나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었다. 결국 지쳐버린 나는 그대로 에리두로 도망을 쳐버렸었고. 한 1년 정도 에리두에서 놀다가 돌아오니 내 얼굴이 잊혀진 것이다. 거기다 에리두에서 구입한 물건으로 내 모습도 약간 바꾸었고 말야. 한 제국에서도 인피면구라는 얼굴을 감추는 도구가 있지만 절정고수라면 대번에 알아봐 버리고 괜히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기에 별로 쓰지 않는다. 인피면구를 쓰는 이는 대부분이 죄인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신분을 감추려 하는 이들인데 당연히 인피면구를 쓴 유저를 발견하게 되면 절정고수가 주시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두에서 구입한 폴리모프 마법이 걸려있는 반지는 이 곳의 고수들이 알아볼 수 없다. 물론 에리두에 가면 마법사들이 대번에 알아봐 버리지만.... 그러니 에리두에서는 인피면구를... 한 제국에서는 마법도구를 이용해 모습을 바꾸는 것이 좋다. "속 편한 녀석." 천희형의 말에 나는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보다 어떻게 할거냐?! 이대로 화산파와 싸우기라도 할거야?" "그게 가장 좋지." "아무리 너라 해도 화산파 전부를 상대 할 수는 없어!!" 형 말 대로이다. 아무리 내가 강하더라도 화산파 전체를 상대 할 수는 없다. 화산파는 정파의 기둥 중에 하나이다. 구대문파에서도 세 번째로 강한 문파인 것이다. 사방에 산재해 있는 평범한 문파 따위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이명학은 최절정고수이고 그 아래로 절정고수만 해도 거의 100에 가깝다. 일류고수는 1000명 정도이고 이류고수와 삼류고수는 최소 1만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 못 할 것도 없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형에게 말했다. "형. 나는 사룡(死龍) 암무(暗霧)를 무릎 꿇리고 수하로 삼은 검천지룡(劍天之龍)이야." 형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형은 안다. 내가 이렇게 웃을 때는 어떤 일을 벌이는지. 혼자서 사룡 암무와 싸우러 갔을 때도 이런 웃음을 지었었다. 그 때도 형은 막았고 나는 혼자서 사룡 암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룡 암무를 제압했다. 나와 천희형을 빼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 제국의 용과 그 동급인 신수들.... 그리고 에리두의 드래곤과 그와 동급인 최강의 마신들을 쓰러트리면 그들을 수하로 부릴 수가 있다. 물론 그냥 쓰러트리기만 해서는 되는 것이 아니다. 조건이 있다. 단 혼자의 힘으로 쓰러트리기만 할 뿐 죽이지 않았을 때만 그들은 유저의 수하로 들어온다. 나는 사룡 암무를 쓰러트렸고 그를 제압만 하였지 죽이지는 않았다. 그 후 이 숨겨진 이벤트를 알았다. 나는 사룡 암무의 주인이 되었고 사룡 암무는 내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나의 곁으로 날아와 내게 힘을 줄 것이다. 현재 나는 희열에 찬 상태였다. 식상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생각해 보니 구대문파와 전투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 "미친!!" 물론 미친 짓이겠지.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험은 없다. 사룡 암무가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짓은 마! 아무리 사룡 암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구대문파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다! 죽을 수도 있다! 네 레벨에서 한 번 죽는다면 모든 무공의 성취도가 세 단계는 하락하고 레벨도 30이나 떨어진다는 것을 알 터인데! 거기다 사룡 암무와의 계약도 네가 단 한 번도 죽지 않을 때까지만 유지된다고 하지 않았냐?!" 형의 말대로 이다. 나 같은 초절정고수는 한 번 죽는 것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다. 떨어져 버린 무공의 성취도와 레벨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나라고 해도 거의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거기다 사룡 암무와의 계약은 내가 죽으면서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어 버린다.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사룡 암무와 계약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형 말대로 물러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나는 더 월드에 식상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희열에 몸을 떨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죽을 수도 있지만 하고 말 것이다. 대가로 내 무공 성취도와 레벨, 사룡과의 계약이 내걸어야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죽지 않도록 노력하면 그만이고 설령 죽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기쁠 것이다. "먼저 화산으로 가겠어!" "최유빈!!" 형의 말을 듣지도 않고 나는 즉시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쳐 거리를 벌렸고 다음으로 창룡후(蒼龍吼)를 토해내며 어기충소(馭氣沖宵)를 펼쳐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이용해 하늘을 박차고는 화산(華山)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거기 유저님!! 성내에서 시끄럽게 창룡후를 외치는 것은 안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경공을 쓴 것에 대한 벌금은 제하겠지만 창룡후에 대한 벌금은 내셔야 하겠습니다. 벌금은 100은입니다." ........젠장.... 폼재다가 경비한테 걸려버렸다. "휴우......" 벌금을 물고 한숨을 푸욱 내쉬는 나에게 천희형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참 웃긴 녀석이다. 그냥 도망가면 되잖아?" 나 정도라면 경비병 정도는 충분히 떼어놓고 도주를 할 수가 있다. 아니 일류고수만 되어도 경비는 가뿐하게 죽일 수 있지.... 하지만 문제는 그런 짓을 했다가 는 당장 수배대상에 오른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화산파와 시비가 붙어 수배가 되어 버렸지만 유저들에게 수배를 당한 것과 게임 자체의 규칙을 어겨 수배를 당한 것은 차이가 크다. 적어도 나는 게임 규칙상 정해놓은 범위 내에서 이탈했을 때 받게 될 불이익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싶지 않다. "됐어.. 됐어.. 하아. 제길 더럽게 쪽팔리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허공답보까지 써 버린 터라 모두들 몸을 사리며 달려들고 있지 않은 것이지 (허공답보는 레벨 250이상만이 쓸 수 있다.) 지금도 주위에는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부끄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머리를 긁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내게 천희형이 웃으며 말한다. "큭큭큭. 하긴 진짜 압권이었어.. 최절정고수나 쓸 수 있는 어기충소에다가 창룡후, 허공답보 연계기술 까지 쓰고 나서 경비한테 걸려 벌금을 무는 장면은 말야. 내가 5년 동안 게임을 하면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최강의 코미디였어. 최유빈. 네가 왕이다!" "그만 합시다.. 아무리 형이라 해도 막 나가버리는 수가 있어...." 내가 이를 갈며 협박하자 형도 재빨리 정색을 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곧 비가 오겠구나... 흠..." .........형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괜스레 상대하기 귀찮아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은 우선 화산으로 가 시원하게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것만 생각하면 될 터이니까. 하지만 걸음을 내딛는 내 어깨를 천희형이 잡아챘다. "기다려 이 녀석아." "우씨.. 또 왜?!" "이대로 놔두면 그대로 네 녀석이 화산파로 가서 난동을 부릴 것인데 내가 그냥 두겠냐 그럼?" "형이 상관 할 바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화산파는 내 문파야." 무슨... 아.. 그러고 보니 형이 가장 처음 기본무공을 배운 곳이 바로 화산파였다. 하지만.... "파문 당한 주제에...." "파문이라니!! 내가 나간 거라고 했잖아!" 발끈하는 형을 보며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파문이었거든. 그때 정말 난리도 아니었었지... 경악하며 쓰러지던 구경꾼들... 피를 토하며 형을 윽박지르던 당시 화산파의 장문인.... 형의 실수에 나동그라져 실려간 동문.... 거의 질 뻔한 시합을 형 덕분에 이겨서 기뻐 날뛰던 무당.... 그리고 끝까지 못 피한 동문잘못이라고 우기던 천희형.... 당연히 죄를 물어 참회동 30일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주어졌지만... 간 크게도 형은 중간에 도망을 쳐버린 것이다. 당연히 즉각 파문조치가 내려졌고... 그런데 형은 끝까지 파문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나간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우스울 따름이다. "뭐. 덕분에 좋은 것 얻었지 않냐? 흐흐흐." 사악하게 웃는 형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형이 저렇게 웃는 이유를 나는 아주 자알 알고 있다. 참회동 30일의 체벌 중 참회동에 남아있었던 사흘동안 형은 그 곳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풀어버렸던 것이다. 이름하야 독고구검(獨孤九劍).....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4년이 조금 못 되는 때였지..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최절정무공이 있다고만 어렴풋이 소문이 났을 뿐이지 누구도 진의를 파악치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던 것을 형이 우연이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꼴로 발견해 버렸으니... 최초의 최절정무공 습득자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우리 사이에서만.... 아직까지도 형이 독고구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거든. 어쨌든 형은 독고구검이라는 최절정무공을 발견하고 나서 그대로 눈알이 돌아가 버렸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욕심에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화산파에서 도망을 쳐버렸었다. 그리고 심산에 숨어서 열심히 익혔지만... 이제 이류무공을 배우고 있던 형이 최절정무공을 제대로 습득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독고구검은 일단 포기하고 나와 같이 낭인계에 발을 들이며 여러 가지 무공들을 익히기 시작했지. 다행히도 형이 알바로 있는 사장님이 때마침 당문세가의 가주가 되었기에 자본적으로는 넉넉하게 클 수 있었다. 뭐 그 이후로 나는 여전히 미친놈 소리 들어가면서 가지가지 무공들을 느린 속도로 익혀갔고.. 형은 검 하나만 파고들어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었지... 하지만 결국은 형도 나처럼 미친 짓을 벌여야 했으니.. 나중에 가서 절정무공을 익힐 때의 엄청난 속도 때문이었다. 일전에 말했다 시피 나는 절정무공을 겨우 세 달만에 극성으로 익혀 버렸고 최절정 무공도 극성까지 가는데 여섯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놀라운 성취도에 천희형도 결국 나처럼 처음부터 수련을 해야만 했다. 내가 걸어왔던 미친놈의 길을 형도 걷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완성되어 버린 형은 나처럼 그렇게 큰 이득을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아주 성취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형은 작년에 독고구검을 극성까지 익힐 수 있었지만 끝까지 그 것은 마지막 절초로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무인이라면 최후의 절초는 하나씩 숨기고 있어야 한다나? 그건 그렇고 왜 나한테 진사신무를 뺏어 간 것인지 원... 진사신무나 독고구검이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최절정무공들인데 말야... 진사신무로 못 쓰러트리는 상대라면 독고구검으로도 그다지 효과를 보기는 힘들다. 뭐 기습의 효과라면 좀 있겠지만.... 분명 형이 독고구검을 익히고도 쓰지 않는 이유는 폼 재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나중에 더 멋지게 보이려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낭황이 진사신무 하나로 이름을 떨치다가 마지막에 멋지게 독고구검까지 선보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우와~~ 낭황이 검까지 쓰네! 라고 감탄을 내 뱉을 것이 분명하다. 형은 그런 쪽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조금 변태 끼가 다분한 성격이거든.... "뭐냐? 그 변태를 보는 것 같은 눈초리는?" 눈치도 좋아요... 나는 시선을 돌리며 혀를 찼다. 당연히 재깍 형의 목조임 무공이 펼쳐졌지만 나는 가볍게 주작신보를 펼치며 도망쳤다. "먼저 갈게요. 어쨌든 화산파에는 가 봐야 하니....." "아.. 야! 같이 가!!" 천희형이 재빨리 따라왔다. 그 뒤로 조용히 숨어서 보고 있던 다른 유저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나는 즉각 궁신탄영을 전개했고 궁신탄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대다수의 유저들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3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이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 천희형이 빠져 있을 이유는 없다. "내가 잘 말 해 볼 테니까 우선 먼저 힘으로 나가지는 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형이 조용히 말했지만 나는 가타부타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들과 싸우고 싶었다. 조금 전에 한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가서 생각해 볼게." "지금 여기서 약속해라. 너 분명히 거기 갔다가는 검부터 뽑아들 것이 뻔해." ".......그렇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야.. 진짜 조용히 살자.. 응? 거기에다가 너는 할 일도 있잖아." 할 일? 나는 의아한 눈으로 천희형을 돌아보았다. 내가 할 일이 어디 있다고? 이제까지 할 일이 없어서 막 살았던 몸이다. 그런 내가 할 일이 있다는 형의 말은 분명 이상했다. "내가 할 일이 뭔데?" "진희 키워주기로 했잖아. 너 설마 진희 키워주기로 했으면서 진희가 속한 화산파를 박살내 버릴 생각이냐?" 나는 재빨리 경공을 거두며 천희형을 노려보았다. "나는 아직 허락 한 적 없어." "어라? 그랬나......? 나는 소개시켜준 입장에서 허락까지 생각했는데. 네 성격으로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소개도 안 받잖아. 소개를 받았으니 곧 허락한 것 아니냐? 나 그렇게 알고 진희에게 말 해 뒀는데." .......다.. 당했다..... "피자타운입니다~!" 콜라로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주문했던 피자가 왔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었고 곧 붉은 색 줄무늬의 티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빨간 모자를 쓴 배달원을 맞았다. "얼마죠?" "8000원입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불한 나는 소형 피자 한 판과 콜라를 받아들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배달원의 '맛있게 드세요.'라는 작별인사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무마시키며 느긋하게 거실 소파에 몸을 앉혔다. -이놈아! 전화 받어~! 이놈아! 전화 받어~! 수화기로 대가리 뽀사 버린다~! 막 피자 한 조각을 들고 입에 물었을 때 전화기가 요동을 쳤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의 전화통... 언젠가 부셔버리던지 해야지...." 저따위 어처구니없는 벨소리를 쳐 집어넣은 우리 아버지의 센스는 참으로 빌어먹을 이다. 내가 새로 벨소리를 집어넣으려 했지만.... 망할 우리 아버지.. 암호까지 쳐 걸어 두셨다. 당연히 암호를 모르는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 뿐 여타 할 대한이 없었다. -이놈아! 전화 받어~! 이놈아! 전...... "여보세요!" 더 이상 눈 뒤집히는 전화 벨 소리를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나는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렸다. 그리고는 고함을 질러 버렸다. [.........거.. 거기 유빈이 집 아닌가요?] 잠시 말이 없던 상대편이 더듬더듬 물어왔다. 나를 찾는 전화였다. 천희형과 친한 몇몇이 아니라면 우리 집 전화번호를 모르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상을 열었다. 곧 전화기 위쪽으로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화상 창이 떴다. "진호...?" [아.. 너였구나.. 야. 무슨 전화를 그따위로 받는 거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무슨 일 있었냐?] 진호는 싱글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른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벨 소리가 하도 뭐 같아서 소리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일이 있었어.. 그보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천희형에게 들었지롱~!] 약간이나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더욱 허탈하다. 천희형..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진짜 나하고 진희누나를 이어주기 위해? 뻔하다. 요즘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니... 마침 재미있는 일거리 생겼다고 날뛰는 것이겠지..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진호에게 물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야?" [너 진짜 전화 성의 없게 받는다.] ".......습관이야." [........습관이냐?] "......그래. 용건이나 말 해." [쳇. 재미없는 자식. 알았다. 용건부터 말하마~! 천희형이 말하기를 식사 빨리 마치고 들어와서 화산파로 오란다. 대충 말 다 끝내 놨데. 그런데 네가 진짜 우리 문파 얼간이 하나 박살내 버렸냐?] 얼간이라.... 분명 얼간이이기는 했지. 겨우 이류고수 정도 되었으면 수련이나 할 것이지 뭐가 잘 났다고 공격을 하는 것인지.. 물론 내가 스틸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꼭 나한테 잘못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호랑이는 나를 공격한 것이고 나는 반격을 날린 것일 뿐이니까. 그 말은 곧 상대편에서 선을 때리지 않았다는 말이고 자연히 그 호랑이는 누가 잡더라도 죄는 없다. 내가 먼저 잡은 것뿐이다. 그런데 자기가 눈으로 찜 해 놨다고 달려들었으니.... 냉정히 따져보면 그 쪽에서 나에게 PK를 하려 했고 나는 반격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아.... 화산파 제자인지는 몰랐어." [아하하! 괜찮아. 괜찮아! 그 자식 평소 꼴 보기 싫었거든. 흐흐흐. 실력도 쥐뿔이 없는 것이 지 형만 믿고 깝죽대는데 아주 속이 끓더라. 거기다 뭐가 잘 났다고 우리 누나한테 꼬리까지 치고 말야. 흐흐흐. 너는 아주 잘 한 거야~!] 갑자기 내가 엄청나게 옳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역시 나 진희누나에게 반해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진짜 그런 다고 믿어버리고 있는 것인가? [아마 우리 누나도 너한테 고마워 할거다. 누나 바꿔 줄까?] "돼. 됐어." 기겁한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내 실수를 인식하며 얼굴을 굳혔고 진호는 그런 나를 보면서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흐흐흐. 농담농담. 누나 지금 집에 없어. 조금 전에 나갔거든.] 이.. 녀석 내일 학교에 가서 담가 버릴까? 아니면 더 월드에 들어가서 난도질을 해 버릴까? 이런 저런 생각을 내가 하고 있을 때 진호가 말을 이었다. [너 우리누나 왜 나갔는지 아냐?]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누나도 아닌데.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몰라. 끊는다." [아! 야! 잠깐 기다려!! 너하고 관계가 있단 말야!!] 나하고 관계가 있다고? 무슨 소리인가? 설마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아닐 테고 말야. 잠시 생각을 해 봤지만 진희 누나가 집을 나갔다는 것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역시 진호 녀석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판단을 내렸지만... 그래도 뭔가가 끝까지 부정 쪽으로 흘러가는 내 생각을 잡아끌었다. 잠시 후 나는 조용히 진호에게 물었다. ".......뭔데?" [흐흐흐. 그건.......] ".........빨리 말 해." [그건 말야... 비.밀.이.야~♡] 이.. 이 자식 진짜 죽인다. 게임에서건 현실에서건 마주치면 도살시켜 버리겠어. 마지막에 날아온 하트가 무척이나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통화/취소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꺼.져." [야!! 아직 말 안 끝났어!! 야!! 최유빈!! 매형!!!] 크아아악~!! 문진호 이 자식!!! 두고보자!!!! 피자 두 조각과 콜라 한 캔으로 가볍게 저녁을 마친 나는 즉시 방으로 들어가 링크헤드셋을 쓰고 더 월드에 접속했다. 화산성 내 리스장에 들어온하는 내게로 모여지는 시선을 피하여 급히 골목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저 녀석.. 수배된 그 녀석 아냐?" "맞는 것 같은데...." "20만 은이라고 했지?" "잡을까?" 금새 걸려 버리는 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즉시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시켰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유유히 골목을 나왔다. 중간에 뒤따라 온 몇몇과 마주쳤지만 이미 얼굴이 변해버린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흠.. 이 얼굴도 오랜만이군..." 품에서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추어 보며 씨익 웃어봤다. 약간은 갸름한 얼굴에... 새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과 약간 메마른 듯 한 입술... 왼쪽 눈 밑에 자리한 자그마한 상처가 유난히 시선을 잡았다... 바로 현실상의 내 얼굴이다. 이런 얼굴로 돌아다니면 과거 내 얼굴을 아는 이들이 알아 볼 수 있지만.... 뭐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지금은 낡은 흑의와 녹슨 철검도 안 들고 있으며... 무엇보다 거의 2년 전의 일인데 말야. 그것도 게임 시간이 아니라 현실로 말이다. 현실로 2년이면 게임 시간으로는 20년이다. 물론 언제나 게임만 할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의 1/3만 접속했어도 7년 이상이고... 그 시간이라면 내 얼굴 정도는 충분히 잊혀지고도 남는다. 여담이지만 현실의 10배의 시간을 할당받기 때문에 더 월드를 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히 성숙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더 싹수머리 없고 치사하며 부모 얼굴에 똥칠하는 추잡한 녀석도 널렸지만.... 뭐 이런 이야기는 제쳐두고.. 우선 천희형을 만나러 가야겠지? [형. 어디야?] 분명 화산파에 있겠지만... 말도 않고 내가 화산파로 막 들어 갈 수는 없다. 내 신분을 아는 이는 극 소수였고.... 당연히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런 명성도 없다. 그러니 화산파 내로 들어가는 것은 나로서는 힘든 일이다. 천희형이 나와서 나와 함께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자식아!! 빨리 오라니까 뭐 하다가 이제야 와?!] 상당히 기다렸는지 형은 즉각 욕설을 담아 메시지를 날렸다. 나는 히죽 웃으며 형에게 답장을 보냈다. [난 최대한 빨리 온 거야.] [아. 됐어! 빨리 화산파로 오기나 해!! 다들 너 기다리고 있는데 말야.]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아. 그보다 형이 좀 나와서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왜? 무슨 일 있냐?] [아아. 나 변장 풀었거든.] [알았다.] 형은 단번에 내 말을 알아들었다. 나는 메시지 창을 닫고 즉시 화산으로 향했다. 우선 화산성 내에서 마차를 잡아타고(경공은 금지. 때문에 바쁜 일이 있을 때는 마차를 이용한다. 요금은 그다지 비싸지 않다.) 화산성 북문으로 간 후 성을 나온 후 경공을 전개해 화산을 올랐다. 화산파로 통하는 길은 그런 대로 잘 포장되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파의 입구에 도착했다. 대화산파(大華山派) 멋진 글씨로 쓰여진 현판... 본래 현판이 있었는데 오래 전에 버렸고 지금 현판은 유저 중 하나가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꽤 유명한 서예가라 했는데.... 나는 서예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어서인지 과거 것이나 지금 것이나 그다지 틀린 것 같지는 않단 말야..... "왔냐?" 마침 형이 나왔다. 얼굴이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형은 가볍게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긴 현실 상으로도 수없이 봤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아아..." "게임에서 그 얼굴 참으로 오랜만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앞서가는 형을 뒤따라갔다. 중간에 나에게 화산파 문도 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곧 그냥 방문객 정도로 생각하는지 관심이 거두어졌다. 만약 변장한 채로 왔다면 대번에 알아보았겠지. 그보다... 형이 어떻게 처리한다고 했는데... 잘 됐나 몰라? "어떻게 됐어?" "대충 장문인과 이야기는 끝냈다. 우선 너를 좀 보고 싶다는 구나. 수배는 그 후에 취소한데." "먼저 덤빈 것이 그 쪽인데 무슨....."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천희형은 으쓱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네 말이고... 그 쪽에서는 네가 스틸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먼저 공격을 했다고 하던데." "망할... 진짜 죽여버릴걸." 그 자식 진짜 썩을 녀석일세. 그렇게 거짓말까지 했다는 말이지. 나는 이를 갈며 언젠가 날 잡아 다시금 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지가 화산파 제자면 제자지 나하고 상관은 없다. 기껏 이류고수인 이대제자다. 마음만 먹는다면 화산파도 무너뜨릴 수 있는데 그런 녀석 하나 정도 밟아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과 함께 나는 한 채의 건물로 들어섰다. 보아하니 화산파의 장로이상의 수뇌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 같았다. 넓은 마루의 한 쪽에는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유저들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는 과거 한 번 얼굴을 마주쳤던 이들도 몇 있었다. 마지막에 내 시선을 잡은 것은 구석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는 10대 후반의 남자였다. 기억이 희미하기는 했지만 분명 조금 전 내가 신나게 패 주었던 그 녀석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어서 오시오..."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 나와 천희형에게 중앙에 앉아있던 인물이 입을 열었다. 매화검(梅花劍) 이명학.... 현 화산파의 장문인. 한 제국 내 42대 고수 삼천(三天) 사황(四皇) 오마(五魔) 육살(六殺) 칠성(七聖) 팔왕(八王) 구정(九正) 중 구정에 속해있는 최절정고수였다. "오랜만입니다. 장문인." 내 말에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도 나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고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말을 이었다. "3년 전..... 서향에서 잠시 뵌 적이 있었죠. 그 때 제가 오해로 그 쪽에 실례를 범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헉!! 검....." 그는 나를 알아보며 기겁했다. 나는 재빨리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가져갔다. 내 이름을 밝히기 싫다는 뜻이었다. 이명학 장문인은 내 뜻을 이해하며 입을 다물어 주었다. 하지만 은은히 떨리는 눈으로 날 보는 것을 보니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운가 보다. "당신이 어째서...." "그 쪽 제자와 시비가 붙은 것이 바로 저이거든요." 내 말이 이명학 장문인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새 평온함을 되찾으며 나에게 물었다. "아직 어린 제자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습니까?" "먼저 저를 공격한 것은 그 쪽입니다만.... 저도 많이 봐 준 것입니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어디서 헛소리!!" 이명학 장문인의 왼쪽에 앉아있던 유저가 강하게 마루를 치며 소리쳤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보아하니 꽤 높은 수준의 절정고수였다. 아마도 장로 중에 하나인가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죠. 애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름께나 날리는 유저인 것 같은데... 정당하게 게임을 즐길 수는 없는 것인가?!"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죠. 그 쪽에서 문파의 제자 말을 믿는다는 것은 뭐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 정 아니 된다면 힘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지금 화산파 전체와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아.. 거 참 시끄러운 아저씨네. 나는 귀를 후비며 그에게 미소지었다. "못 할 것도 없지요." "뭐라?!!" "시끄럽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릴 테니 제대로 듣기를... 잘난 화산파.. 오늘 내로 멸문(滅門) 시켜 드릴까요?" "저런 싸가지 없는 자식이...." "뭐가 어째?!!" 이거... 난리네. 진짜 싸울 기세인데.... 나는 웃으며 천희형을 돌아보았다. 형은 미치겠다는 듯이 이마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한테 맡긴 내가 미친놈이다...." 결국 형한테 알밤 하나 얻어먹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형을 노려보았지만 형은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는 듯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네네. 사건만 몰고 다니는 유빈이는 조용히 있을 테니까 형이 알아서 하세요. "실례했습니다. 워낙에 이 녀석이 버릇이 없어서.... 하지만 제가 아는 이 녀석은 결코 이유 없이 타 유저를 공격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화산의 제자가 잘못했다고 만은 할 수도 없습니다. 서로 한 발 양보해서 절반씩의 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쯤에서 일을 털어 버렸으면 좋겠군요. 물론 나중에 피해를 본 이는 화산파의 제자 쪽이니 저희 측에서 약간의 보상은 해 드리겠습니다."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해 보이며 말했다. 뭐 그냥 말을 해도 되지만 일종의 게임상의 형식이었다. 무협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행동도 무협의 인사들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게 말하면 멋지게 폼을 잡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이 연기해 보이는 것이다. 형의 정중한 말에 이명학 장문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화산파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몇은 얼굴을 구기며 노성을 터트렸다. 그 중엔 나와 좀 전에 신나게 말다툼을 하던 아저씨도 끼어 있었다. "서로 잘못이 절반씩 있다고?! 허튼 소리 하지 마라! 떠돌아다니는 낭인 주제에 감히 화산파의 제자를 능멸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그의 말에 나와 천희형이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하여간 어디로가나 이런 인간들이 꼭 있다니까. 내가 문파를 안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꼴 보기 싫은 인간들 골라내는 것이 귀찮거든. "낭인이라.... 그럼 어디 낭인의 힘을 보시겠소?!" ......이런.. 형이 화를 내면 어쩌라는 거야? 중간에서 나와 화산파의 협상 교두보가 되어야 할 천희형이 싸울 기세로 이를 갈아버리자 대번에 분위기는 험악해져 버렸다. "송장로님! 그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천희형님도 화를 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이명학 장문인이 나서 분위기 쇄신에 일조 했다. 천희형과 이명학 장문인은 서로 비슷한 시기에 화산에 들어와 함께 수련한 사이로 형이 화산을 도망쳐 나온 후에도 연락을 가졌다. 지금도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종종 현실 상에서도 만난다고 한다. "쳇..." 이명학 장문인 때문에 참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나쁜지 천희형은 자리에 앉으며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송장로라는 기분 나쁜 아저씨도 얼굴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이명학 장문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천희형님은 한때 저희 화산파의 제자였습니다. 비록 중간에 탈퇴를 하시기는 했지만 저는 아직도 천희형님을 한 식구로 생각고 있습니다. 더구나 천희형님은 저희 화산에 종종 일이 생길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손을 내밀어 주셨던 화산의 은인 중에 한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천희형님은 저의 의형님이십니다. 그런 천희형님을 비하시는 것은 저를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말씀을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역시 장문인... 지금 현실 나이가 20세라고 하던데... 상당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그의 시선이 닿은 장로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고 결국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모든 장로들과 구석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건의 원흉까지 돌아 본 이명학 장문인은 나와 천희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희형님.. 정말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천희형님 측에서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희형님의 동생 분....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최유빈." 나는 순순히 이름을 밝혔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무시했다가는 이명학 장문인이 날 검천지룡이라고 불러버릴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대답에 이명학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최유빈군. 조금 전 유빈군이 한 말은 그냥 넘어 갈 수 없겠습니다. 저희 화산파를 멸문 시키겠다고 하셨습니까? 아무리 그대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저희는 화산파입니다. 저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시는 것입니까? 유빈군이 한 말은 저희 화산을 무시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지금 취소를 해 주기를 바랍니다만.." "미안하군..." 내 대신 천희형이 이명학 장문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명학 장문인은 고개를 저으며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천희형님의 사과를 받아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유빈군의 사과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의외로 강하게 나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희형을 한 번 돌아보았다. 천희형은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이명학 장문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그런 말못할 것은 없겠죠. 하지만... 지금은 하기 싫은데요." 순간 이명학 장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시에 뒤쪽에서 뿌드득거리는 이 갈리는 소리가 진동했다. 천희형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즉시 내 머리를 내리쳤지만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천희형의 공격을 피해냈다. "최유빈!" "형 조용히 있어.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가 웃음을 거두며 형에게 말했다. 형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 알았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이명학 장문인에게 말했다. "제 사과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약조를 받아야겠군요." "무슨 소리인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이명학 장문인. 나는 씨익 웃으며 뒤쪽의 송장로를 노려보았다. "대 문파라는 화산파를 농락한 죄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쪽에서도 저와 천희형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 주셔야 하겠군요. 우리를 떠돌아다니는 낭인따위라 말하며 화산파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저희들을 능멸한 당신이 말입니다." "그건...."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설마 화산파는 멸문 당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상대에게 사과를 받을 수 있고 낭인은 떠돌이 낭인 따위라는 소리를 듣고도 사과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떠는 송장로에게 나는 미소지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장로님." "이이.... 지금 나를 능멸하려 하는 것이냐?!" "능멸이라 하셨습니까? 저는 정당한 결과를 얻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애초에 시작은 저 녀석이 저에게 스틸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이 지경까지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쪽에서는 내가 이유 없이 저 녀석을 공격했다고 하시겠지만 그 것은 그쪽 생각입니다. 당사자인 제가 그 쪽 일을 신경 써 줄 일은 없겠지요. 더구나 나는 나에게 검을 들이댄 자를 죽이기는커녕 목숨을 보존시켜 주고 치료비까지 남겼습니다. 오히려 손해지요. 거기에 이런 엉뚱한 사건으로 번져 재수 없게 수배까지 당하고 지금은 화산파로 죄인취급 되어 들어오기까지 했지요. 기분까지 더럽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떠돌이 낭인 나부랭이 취급까지 당했으니 생각 같아서는 화산파 따위는 그냥 부셔버리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양보하겠습니다. 시작의 일은 제가 조금 돈만 손해를 본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겠습니다. 수배를 당한 것도 잊겠으며 지금까지 죄인취급 받았던 것도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 화산파를 멸문시키겠다는 허언을 입에 담은 것을 정중히 사과까지 하겠습니다. 그것에 대해 송장로님은 저와 저희 천희형님에게 단 한번의 사죄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저 혼자만의 일이라면 넘어가겠지만. 천희형님의 문제까지 걸린 것이라 그냥 넘길 수만은 없군요. 아 시겠지만.. 천희형님은 낭황(狼皇)입니다. 낭황을 앞에 두고 떠돌이 낭인 나부랭이라고 펌 하였으니 당연히 사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장로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뭐라 반박을 하고 싶겠지만 할 말이 없겠지. 안 그래? 내 말은 어디 찌를 데가 없거든. "이이......" "잠깐. 내가 송장로를 대신해 사죄하겠네." 이명학 장문인이 나섰다. 뒤이어 장로들의 말도 안 된다는 외침들이 이어졌지만 이명학 장문인은 철저하게 무시해 버렸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가차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는데요." "무슨....." "조금 전 장문인께서 말씀하셨지요. 천희형의 사과는 안 되고.. 꼭 제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장문인의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송장로님의 사과뿐입니다." 나 원래 무지 사악한 녀석이다. 질렸다는 듯이 입술을 깨무는 이명학 장문인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겉으로야 어쨌든 속으로는 '아싸! 낙승~ 낙승~'을 외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 진짜 지독한 놈이다.] 천희형한테 메시지가 날아왔다. 흐흐. 그거 이제 알았수? 나 원래 자라보다 독한 놈이야. "어찌하시겠습니까? 송장로님." ".......닥쳐라! 나는 대화산파 10대 장로의 수장 송인결이다! 낭황이라면 몰라도 어디서 굴러먹은 녀석인지도 모른 네 녀석에게 감히 허리를 숙일 수는 없다!" 뭐.. 예상했던 말이지만.... 굴러먹은 녀석이라... 역시 기분 나쁜 말이다. "협상 결렬이군요. 하아.. 이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한 판 할까요? 뭐 저 혼자의 힘으로 화산 전체를 상대하기는 힘들지만... 천희형과 같이 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천희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는 물러서야 겠지요. 그리고 근처에 숨어서 화산파 제자들만을 노리면 그만입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돌아다니면서 매화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자들은 모조리 베어버리는 방법도 있지요. 지금은 마땅히 할 일이 없으니 한 1년 동안만 유람을 하며 화산파의 제자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좋겠군요." 싱글싱글 웃으며 내가 말하자 이명학 장문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만 갔다. 그는 내 능력을 알고 있고 당연히 내가 밖에서 화산파 제자만을 노리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는 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서부 에리두까지 통틀어서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자는 단 둘 뿐이다. 한 제국 내에서는 1:1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내가 만약 여행중인 화산파 제자들을 노리면 결코 막을 방법이 없다.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두셋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데 그 누가 막을 것인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명학 장문인이었기에 저리 긴장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화산파를 협박하는 것인가?!!" "송장로님 말은 안 들려요~!" 송장로가 고함을 지르자 나는 귀를 막으며 혀를 내민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연히 완전히 무시를 당한 상태이니 머리로 피가 쏠리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이 싫고 자꾸 무시하고 싶단 말야~. 그때 이명학 장문인이 송장로에게 말했다. "송장로님. 이들에게 사과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장문인!!" "절대로 아니 됩니다!!" 송장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로들까지도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저었다. 대화산파.... 장로 되는 자로서 낭인 따위에게 허리를 숙일 수는 없다는 말인가? 쳇.. 역시 나는 이래서 문파가 싫어. "아 됐어요. 억지로 하는 사과를 받아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 그 일은 없던 것으로 하죠. 물론 저도 사과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이쯤에서 서로 대충 넘기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이명학 장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나에게 끌려가는 상황이지만 이명학 장문인으로서는 내가 이곳을 나가 화산파 제자들에게 칼을 들지 않은 것 하나만으로도 안도할 일인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죠.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끝을 냈으면 합니다. 저에게 걸었던 수배는 되도록 빨리 없던 것으로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 것외에 문제는 없겠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그전에 송장로님." "뭔가?!" 내가 송장로를 부르자 그는 분을 삭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당장에라도 죽여버리고 싶겠지만 천희형이 바로 옆에 버티고 있으니 함부로 날뛰지 못하겠지. 아무리 그가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천희형은 최절정고수거든. 절정고수와 최절정고수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때문에 200레벨 이상의 최절정고수들의 수는 극소수이고 그들의 이름이 대륙 전역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물론 최절정고수와 초절정고수의 차이도 엄청나다. 어쨌든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는 송장로에게 나는 마지막 일격을 먹였다. "꼬우면 덤벼요~!" 즉시 그 곳을 나온 나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괴성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3 - 내 눈에 콩깍지가 끼나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링크헤드셋을 벗고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하품을 하며 방을 나섰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시며 거실 쪽을 보니 소파 위에서 아버지가 옷도 벗지 않고 드러누워 코를 골고 계신다. 또 야근을 하고 오신 모양이다. 저러니 어머니가 싫다고 집을 나가지.... 일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나는 혀를 차며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양복 상의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모습이 새벽부터 또 술 한 잔 하시고 오셨나 보다. 아주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저렇게 술을 드시고도 눈만 뜨면 멀쩡하게 일어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출근을 하시는 분이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야..... ".......이씨.. 피자 내가 먹으려고 놔 둔 건데." 어제 시킨 피자는 절반만 먹고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먹으려고 놔두었는데... 아버지가 다 드셔버렸는지 조각하나 남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방으로 가야 했다. "밥이 남아 있으려나.....?" 밥통에 전원이나가 있었다. 한마디로 밥이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지... 뭐 밥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전기밥솥이 알아서 다 해 주니. "빵으로 때울까..?" 가볍게 계란 프라이에 토스트 우유면 아침은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곧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만이라도 제대로 차려 드려야지...." 큰방에서 이불을 하나 가져와 소파 위에서 주무시는 아버지에게 덮어 준 후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대충 전기밥솥에 쌀과 물을 맞추어 올리고 위쪽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 물을 부었다. 그저 가볍게 된장국으로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시지만. 특이하게도 두부와 참치가 들어가지 않은 김치찌개는 또 싫어하신다. 지금 참치는 몇 캔 있지만 두부가 없으니 김치찌개는 보류해야 했다. 남은 것은 콩나물국이나 된장국뿐이지... 보통이라면 숙취해소를 위해 북어국이나 콩나물국을 우선으로 치겠지만. 앞서 말했다 시피 우리 아버지는 아무리 술을 많이 드시더라도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는 철.인 이다. 아버지가 숙취로 고생하는 모습? 이제껏 본 적도 없다. 큼지막한 수저로 뜬 된장을 냄비에 담은 물에 풀고 거기에 약간의 김치 이파리와 파, 양파 등등을 썰어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 한 쪽에 놓아두었던 찍어놓은 마늘을 꺼내 한 수저 냄비 속으로 던져 넣고 조미료로 간을 했다. 그렇게 대충 일을 마인 후 냄비를 렌지에 올려놓고 전원을 눌렀다. 국이 끓을 동안 다른 몇 가지 반찬을 더 준비해야 했다. 된장국 하나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너무 재미없잖아. 물론 내가 그렇게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할 수 있거든. 우선 계란 프라이를 한 후 기름이 남은 프라이팬에 오래된 신 김치를 볶고 참기름을 가볍게 뿌렸다. 아버지나 나나 신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신 김치는 이런 식으로 해 먹는다. 마침 끓기 시작한 된장국을 렌지에서 식탁으로 옮겨놓고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밑반찬을 꺼냈다. "후아암.. 일어났냐?" 때맞춰 아버지가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오셨다. "빨리 일어나셨네요. 한두 시간 더 주무실줄 알았는데..." "그랬다가는 지각이야." "네네..." 하긴 열혈 일 매니아인 아버지가 지각 따위를 할 일은 없겠지. 나는 아버지 앞으로 물을 한 잔 따라 드리고는 식탁을 마저 차렸다. 마지막으로 밥통에서 밥 두 그릇을 담아 각각 아버지와 내 앞으로 놓으며 나도 자리에 앉았다. 곧 나와 아버지의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나의 사이가 소원하다는 것은 아니다. 보기에 조금 어색한 듯이 보이지만 실상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친밀하다 말하면 친밀하다고 할 수 있다. 일 중독증인 아버지이지만 나름대로 나에 대해 신경을 써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 역시도 게임 중독증이지만 아버지에게 신경을 쓰려 노력하고 있다. 집안에 어머니가 안 계시기 때문에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나 사이까지 삭막하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식사시간에 이렇게 조용한 것은 우리 아버지와 나의 '식사시간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고 밥만 먹는다'라는 신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말이 있다면 식사가 끝난 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거든. 대충 10분 정도가 흐른 후 나와 아버지는 그릇을 비웠다. 나는 아버지 앞에 놓인 그릇과 내 앞에 놓인 그릇, 계란 프라이를 놓았던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다가가 가볍게 설거지를 해 건조대 위에 놓아두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나머지 뒷정리를 마쳤다. 그리고는 냉장고로 다가가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커피?" "됐다. 콜라나 한 잔 줘. 귀찮게 커피는 무슨...." 내가 콜라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다 아버지 때문일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냉장고와 건조대에서 1.5ℓ의 콜라 병과 두 개의 유리컵을 꺼냈다. 컵에 각각 콜라를 적정 점까지 부운 후 콜라는 다시 냉장고에 넣고 컵을 들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고맙구나." "뭘요." 나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시자 향긋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입 속에 맴돌았다. 톡 쏘는 탄산은 멍했던 정신을 일깨웠다. "학교는 어떠냐?" "좋아요. 평범한 학교는 아니지만..." 어제 안 일인데 내가 전학을 간 상화 고등학교는 더 월드의 개발사인 (주)신화재단 산하의 특수 사립고등학교였다. 더구나 내가 들어간 반은 그 중에서도 더 월드의 유저들 중 한 제국 유저들만을 모아놓은 곳이었고... (주)신화 재단의 산하 특수 사립고등학교는 입학 시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다. 물론 통합적인 성적순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고, 게임운용이나 스토리 창작 쪽으로 어느 정도 재능을 인정받은 나라면 능히 입학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러타할 시험도 없이 하루만에 입학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아버지 입김이 작용했겠죠?" "뭐.. 부정하지는 않으마." 빙그레 웃는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왜죠?" 평소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나도 아버지의 힘을 이용해 그릇된 이득을 얻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주)신화의 임원이었고 어떻게 뒷줄을 이용하면 더 월드 내에서 내가 초보시절 무수한 이득을 얻으며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비밀로 남아있는 수많은 이벤트들을 모두 알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전혀 즐거운 것이 아니거든. 아버지도 내가 더 월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시지만 내가 전 서버에 이름이 알려지고 월드 레벨 리스트 1순위인 검천지룡이라는 것은 모르신다. 그저 절정고수 수준이라고만 알고 계실 뿐이다. 아버지와 나는 비록 부자지간 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비밀은 필수요소이고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는 비밀만이 아니라면 서로 비밀이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묵인해 주는 것이 아버지와 나와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에 대한 아버지의 자세 역시도 어느 정도 경계선이 존재한다. 아버지는 아들인 나를 사랑해 주지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으신다. 최소한의 용돈은 준다 하나 불필요하게 많은 돈을 주지는 않는다. 나 역시 기본적인 용돈은 받으나 그 이상의 돈은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언제까지고 아버지에게 얽매여 살수는 없다. 언제고 나는 성인이 될 것이고 그와 함께 나의 가정을 꾸려야 함을 아버지나 나나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경계선을 그어 둔 것이다. 그 경계선의 한도 내에서는 아버지는 얼마든지 나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주신다. 하지만 그밖에는 절대로 손을 내밀지 않으신다. 기본적인 힘은 밑에서 보태어 주시나, 나머지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고 부딪치고 익혀가며 성장해 나가기를 아버지는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러나 이번 입학문제는 아버지가 조금 그 경계선 외쪽의 손길을 내민 것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께 물은 것이다. 내 물음에 아버지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네 녀석이 친구 좀 사귀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구라....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의 생각은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이러타할 친구가 없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 해 보았자 천희형을 포함한 몇 명뿐이고.. 나머지는 완전히 남남같이 생활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내 인간관계는 무척이나 문제라 할 수도 있다. 아버지는 그 때문에 나를 상화 고등학교로 보낸 것이다. 같이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이 널렸으니 친구를 사귀기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셨을 것이다. 뭐. 불만이지는 않다. 나는 턱을 긁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침 맛있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주방을 나가셨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진호 녀석으로 보이는 인간이 달려와 멱살을 잡았다. "야 이 자슥아! 너 전화 매너 있게 받을 수 좀 없냐?!" 분명 어제 내가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이러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 녀석에게 불만이 많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분명 말했다. 보이면 갈아 버리겠다고... "앞으로 한 가족..... 꾸엑!!" 그렇지 않아도 맞을 녀석이 아주 매를 번다. 나는 그대로 녀석의 복부에 무릎을 찔러 넣고 등을 팔꿈치로 찍어 내렸다. 조금 심한 듯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정도는 최대한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갈아서 묻어버리지 않았으니.....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진호의 등을 자근자근 밟으며 나는 유유히 내 자리로 향했다. 당연히 내 발에 밟힐 때마다 진호는 비명을 내질렀고 종래에는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며 학질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반 아이들의 멍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무시. 책상에 가방을 던져놓은 나는 하품을 하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밤을 샌 터라 무지하게 졸렸다. 역시 학교는 나에게 있어 호텔이고, 교실은 침실이며 책상과 의자는 침대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면서 자리에 엎드렸다. 그때 진호가 벌떡 일어나 악을 질렀다. "야!!"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네. 한 삼십분 뻗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졸려죽겠는데... 상대하고 싶지 않아. 나는 가볍게 진호에게 오른손 중지를 세워주며 눈을 감아버렸다. "유빈아 밥 먹자!" 우우... 벌써 점심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엎드릴 때 폼이 좋지 못했는지 볼이 얼얼했다. 아마도 볼이 부어있을 것이다. 나는 볼을 누르며 진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배고파 죽겠다야. 밥 먹게." "아아.... 몇 시냐?" "12시 15분." 어제와 별로 차이 안 나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진호 이 녀석... 아침까지만 해도 나 죽이려고 날뛰던 그 녀석 맞아? 하여간 성격 하나 명확한 녀석이야.....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성격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토라져서 꿍얼거리면 정말 꼴 보기 싫을 것 아닌가. "후아아아암...." "넌 학교 자러 오는 거냐?" 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 진호가 손을 들어 내 등을 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밤에 잠을 안 자거든.... 학교에서 자야지." "에? 가수면 모드 안 써?" 보통 더 월드를 하는 아이들은 밤에 가수면 모드로 게임을 하다가 나중에 두시간 정도 완전한 수면을 취한다. 그러면 거의 다섯시간 이상을 잔 효과를 가질 수 있다나...? 하지만 나는 가수면 모드를 쓰지 않는다. "아아. 감도가 떨어지거든.. 거기에 나는 아주 잠을 자지 않으니 가수면 모드를 해도 별로 소용이 없어.." 가수면 모드라고 해서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두시간 정도는 잠을 자 주어야 한다. 나는 그 두 시간도 아까웠기에 오래 전부터 밤을 새면서 통상모드로 게임을 즐기고 학교에서 수면을 취해왔었다. "완전히 폐인일세..." "그러냐?" 폐인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나도 종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폐인이라는 말을 그렇게 나쁘게 만은 생각지 않는다. 뭔가 한 가지에 푹 빠져 볼 수 있다는 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이 비록 게임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유전이야." ".....너희 아버지도 게임 중독자냐?" "아니.. 일 중독자." "아... 식당 거의 왔다." 내 대답에 진호는 말과 고개를 한번에 돌려버린다. .........대충 판단해 보면 왜 그런지 알 수가 있다. 아마 내가 농담을 하면 재미가 없나보다. 앞으로 농담은 자제를 해야겠어. 식당으로 막 들어가려 할 때 진희누나와 마주쳤다. 나는 진희누나를 보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피해버렸다. 어제의 일도 있고... 또...... 누나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면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나? 그보다 이상한 것은 누나가 어제처럼 잠자리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야 지금의 누나가 더 좋지만..... 갑자기 왜 안경을 안 썼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 때문에? ......설마 그럴 일이야 없겠지? 안경을 쓸 때가 있고 안 쓸 때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내 귀에 진호가 웃으며 말했다. "야. 어제 누나 어디 나갔다고 했었지?" 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힐끔 진호를 보았다. 분명 어제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 있다고? 진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누나 어디 갔는지 아냐? 렌즈 맞추러 갔...." 퍼억!! 갑자기 뭐가 날아와 진호의 뒷머리를 쳐버렸다. 내 몸에 기대 부들부들 게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몸을 떠는 진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조금 전 진호의 머리를 때린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누나.. 주먹 세네요." 그렇지 않아도 새빨간 진희누나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홍시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버렸다. 그제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을 괜한 말을 해서 또 누나가 나 에 대한 호감도를 떨어트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는 누나가 너무 귀엽게 보였다. "진희 얘 생각 외로 주먹 세. 성격이 이래서 그렇지 실제로는 태권도 유단자. 것도 2단이야." "시.. 시연아!" 진희누나의 친구... 이름이 시연이라니 지금에서야 알았다. 아무튼 시연선배의 말에 진희누나는 놀라서 시연선배를 돌아보았지만... 시연선배는 실실 웃을 뿐이다. 문뜩 시연선배와 진호녀석이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의 착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보다 진희누나... 태권도 유단자라고? 상당히 놀랐다. 과거에는 조금만 하면 태권도 단증 정도는 어렵지 않게 딸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30년 전부터 태권도 단증을 따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워 졌다고 한다. 자연히 단증을 따고 유단자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장에서 거의 2년 이상을 수련해야 조금 가능성이 있다고 할까? 거기에 2단이라면.... 말 다 한 것이다. 어디 아무 도장이나 가서 사범으로 자리잡아도 될 실력이다. "헤에. 누나 굉장하네요." 이제까지 순진한 숙녀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이면이. 어째서일까? 더욱 누나에게 관심이 간다. 또 어떤 내가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자꾸 누나를 쳐다보자 누나는 계속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결국 재빨리 나를 지나쳐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뻗어진 내 손이 누나의 팔을 잡았다. "아! 미.. 미안해요."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하지만 내 손에는 잠깐동안 느껴보았던 누나의 손목의 감촉이 남아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가는 손목.... 나는 내 손을 잠시 바라보다 힐끔 진희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먼저 가 버리지 않은 것이고.... 나쁜 점이라면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겠다. 잠시 누나를 보던 나는 머리를 긁으며 누나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누나는 몸을 가늘게 떠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누나의 귀에 입을 대고 조용히 물었다. "혹시... 안경 벗고 렌즈 낀 것.. 제 말 때문이었어요?" 진희 누나가 흠칫 몸을 떤다. 얼굴은 더더욱 붉어진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정말 예뻐요." 아아~ 나 이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제 나도 몰라~! 될 대로 돼라!!! "누나. 나하고 진짜 결혼 안 할래요? 어제 한 질문의 대답 기다리고 있는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주위에 난동이 일어났다. 여학생들은 '꺅!꺅!'거리며 소리치기 바빴고 남학생들 중 일부는 괴성을 지르며 나에게 삿대질을 해 댄다. 분명 누나의 팬클럽에 들어있는 인간일 것이다. "역시 유빈이 너는 대단해!!" "어떻게 할래? 진희야. 이런 프로포즈 정말 나 생각도 못 했어. 꺄아~ 누가 나한테도 졸업하기 전에 프로포즈하는 남자 없나?" 진호 녀석이 다가와 웃으며 내 어깨를 막 쳤다. 시연선배는 진희누나에게 가서 부럽다고 말 하지만.... 실상은 놀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 누가 지금 누나의 말을 듣고 달려와 프로포즈를 하더라도 그걸 따라하냐며 야박을 줄 것이 틀림없다. "유빈이 너 진짜 우리 누나랑 결혼 할 거냐?" "해라. 해. 꺄! 이거 진짜 이야기책이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일 아니니? 나 이런 이야기 너~어무 좋아해." 당사자들은 조용히 있는데... 주위 인간들이 더 난리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허리를 약간 숙여 진희누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결혼에 대한 대답은 나중에 해 줘도 되요. 하지만 그 전에.... 오늘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누나 저랑 사귈래요?" 아아~ 사나이 최유빈. 이제껏 살아오면 여자보기를 돌같이 해 왔었다. 하지만 진희누나에게 만큼은 아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진희누나가 좋다. 어제 처음 본 누나이지만 그래도 좋은 것을 어쩌라는 것인가? 나도 내 마음속에 이런 감정이 숨어있음을 놀랐다. 허나 싫지는 않다. 너무도 두근거리는 가슴의 느낌이 좋다. 나는 미소지은 채 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누나가 거절한다면? 무척 슬플 것 같지만 그래도 좋았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최초로 마음에 담아버린 여자다. 열 번.. 아니 백 번, 천 번이라도 찍어서 내 마음속의 나무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나.. 난...." "제가 싫은 것은 아니죠?" 진희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게 안도했다. "다행이네요. 뭐 누나가 저를 이상한 애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말 누나가 좋아요. 정 힘들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이제부터 앞으로 제가 어떤 남자인지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저는 자신 있어요. 꼭 누나의 마음을 가지고 말 거예요." 누나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나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진희누나의 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기뻤다. 여전히 얼굴에 홍조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누나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누나는 눈이 참 예뻐요. 너무 맑아요. 제가 처음으로 타인을 보고 가슴이 뛴 것은 누나가 처음이었어요. 조금 염치없지만... 그 때문에 누나를 가지고 싶어요." 주위는 다시금 난장판이 되었다. 물론 주동자는 진호와 시연선배였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에 한 '가지고 싶다'라는 말은... 조금 원색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진희누나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는 가볍게 내 머리를 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뭐 부정을 하지는 않겠어요. 나는 누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것. 막 나간다. 이미 눈 돌아간 내가 아닌가. 겁먹을 것은 없다. 결혼하자고 프로포즈까지 한 입장에서 뭘 더 겁낸다는 말이겠는가. 나는 손을 뻗어 진희누나의 손을 잡았다. "저는 누나가 좋아요. 누나도 저를 좋아해 줄 수 있어요?" 가늘게 떨리던 진희누나의 손이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누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나와 눈을 마주했다. 희미하지만 누나의 얼굴이 미소가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희 누나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여지는 것을 본 나는 환호를 지르며 누나를 안아 버렸다. 게임에 접속하기 전 나는 진희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정말 누나를 생각만 해도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된다. 이거 콩깍지가 끼어버린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좋았다. 전에 천희형이 그랬는데... 남자로 태어나서 진짜 사랑한번 해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했다. 주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눈에 차는 그런 사랑을 해 봐야 진정한 사랑을 해 본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런 폭발적인 사랑은 금새 식어버릴 수 있다고 뒷말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라고 천희형은 말했다. 어쨌든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화끈새끈한(형의 표현이다.......-_-) 사랑을 하고 언젠가 그 사랑이 천천히 식어가더라도 남아있을 따뜻한 마음의 끈으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뜨거운 마음에 빠져 난리만 치지 않고 그 때에 하나씩 연인의 마음을 마음속에 담아둔다면 자그마한 온기까지도 사라질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쿠히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막 나온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누나가 허락하자 나도 모르게 누나를 안아 버렸다.진희누나의 가는 몸을 껴안고 진희누나의 머리에 코를 파묻었다. 지금도 코끝에 누나의 향기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내 몸은 누나의 감촉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참동안 침대를 구르며 누나를 생각하던 나는 문뜩 약속에 늦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다섯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빨리 링크헤드셋을 쓴 나는 접속을 시도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물론."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리스가 된 곳은 화산성 외곽의 사냥터였다. 어제 화산파와 신나게 말 격투를 벌인 후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했었다. 그리고 사냥터에서 리스를 하고 학교를 갔었으니 다시 여기로 리스가 된 것은 당연했다. 나는 우선 천희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의 아이디는 검신이다. 아이디 하나는 최강이 아닌가. 형이 이런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클로우즈 배타 때부터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형은 더 월드 7번째 접속자였으니까. 솔직히 조금은 부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아이디도 형에게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천희형. 어디?] [유빈이냐? 크흐흐. 녀석 오늘 저질러 버렸다며?] 뭘? 이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속 보이는 짓이지. 이미 형은 모든 소문을 다 들었나 보다. 하여간 진호녀석 입 하나는 무지 가볍다니까. 뭐 감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걸릴 것은 없었다. [하하하. 뭐 그렇게 됐어.] [놀랄 노자다. 세상에 네가 처음 본 여자한테 고백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나 너 죽을 때까지 홀애비로 늙어 죽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악담이우?] [큭큭. 네 하는 짓이 원래 그랬는데 어떠하냐? 솔직히 여자를 너무 기피하는 것 같아 너 호모기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까지 했었다.] ........형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야? 나는 갑자기 아파 오는 머리를 누르며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는 형은? 사귀는 여자라도 있어?!]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내가 소리칠 수 있다. 형에 대한 것은 대부분 알고 있고 내 정보에 형은 나와 안면을 익힌 지난 5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자도 사귀지 않았다. 하지만 형에게 온 답장은 예상외였다. [흐흐흐. 나를 뭐로 보고.] ......형이 사귀던 여자가 있었나? 문뜩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단리연화?] [..........어떻게 알았냐?] 찍었는데..... 그건 그렇고 형이 단리연화와 사귀고 있었다? 이거 진짜 뒤통수 카운터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나는 허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그냥 혹시 하고 말 해 본 거야. 어제 단리연화를 만났거든.] [아아. 그건 나도 들었다. 그보다 이 녀석아! 형수님 이름을 그따위로 막 부르면 안 되지!] [......형수님이라.. 벌써 일 치른 모양이네. 재미 많이 봤수?] [시끄러 임마!] 발끈하는 형. 나는 킥킥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발끈하는 것을 보니 이거 이미 물 끓고 밥 다 되 버린 경우다. 얼마 안 있으면 국수 얻어먹을 수도 있겠네. 솔직히 형이 그런 사실을 지금까지 나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불만은 아니다. 형 사생활이니까. [언제 국수 먹여 줄 거야?] [왜? 청첩장 보내면 올래?] [어라? 정말 거기까지 말 갔나 보네.] [하하... 사흘 전에 아버지 허락 받았다. 너한테도 슬슬 말하려고 했는데... 뭐 지금까지 숨겨서 조금 미안하다.] [미안할 것까지야... 축의금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어떻게 해서라도 받아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나는 화산성 쪽으로 달렸다. [날자는 잡았어?] [다다음달 두 번째 주 일요일이다. 메일로 자세한 사항 보낼 테니까 꼭 와.] 당연하지. 아무리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라고 하지만 형이 결혼한다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은 약속을 비워두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보다 형 지금 어디야?] [지금 화산파다. 너도 여기로 와. 빨리 와라. 중요한 일이니.] 에? 왜 또 거기로 가야 하는 건데? 솔직히 화산파와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는 나였기에 되도록 가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이 중요한 일이라고 한 상황에서 싫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데?] [네가 진희 성장 시켜 주기로 했잖아. 당연히 화산파에 허락을 받아야지.] 아아. 그렇군.. 진희누나는 화산파 수련제자였지. 한숨이 나왔다. 그냥 진희누나한테 화산파 탈퇴하라고 해 버릴까? 쳇.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괜히 나와 화산파의 문제를 진희누나에게까지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진희하고 진호가 기다리고 있다. 빨리 와라.] [OK!] "불가!" 내 저럴 줄 알았어. 송장로가 그냥 허락할 이유가 없겠지. 나를 갈아 마시고 싶어 악몽까지 꿀 것인데 말야. 나는 옆에 앉아있는 천희형과 진희누나, 진호를 보았다. 천희형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고 진희누나와 진호는 불안한 눈으로 나와 송장로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됩니까?"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송장로의 속을 긁으며 물었다. 송장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가 절정고수라는 것은 내 알고 있다. 절정고수라면 상당한 실력이라는 것도 인정한다.하지만 우리 화산파에는 그대를 넘어서는 고수가 수없이 있다. 진희소저라면 이미 우리 장로 중 하나가 제자로 거두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바. 그대 따위를 스승으로 할 이유는 없다." 아아. 그래. 대충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스승이 되기로 예정되었다는 장로 역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6장로 풍청환이겠지. 내가 어제 박살 내 버린 얼간이의 사촌 형님이라던가? 진호의 말로는 그 얼간이 녀석이 진희누나를 노리고 있다더라. 그래서 호감 좀 얻어 보려고 지 사촌 형에게 부탁해서 진희누나를 제자로 해 주라고 했다던가? 뭐 보지 않아도 비디오지. 뻔히 그 녀석의 생각이 보이는데 내가 여기서 '네 잘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몸을 돌릴까 보냐? 말해두지만...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진희누나에게 고백했고 사귀기로 한 사람이란 말야. 내 여자를 다른 녀석이 넘본다는데 미쳤다고 모르는 척 하겠나? "아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희누나의 의견이니까 우선 누나에게 묻고 나서 정하죠. 누나 제가 스승이 되면 좋겠어요? 아니면 저 능글맞은 지렁이 같은 화산파의 장로가 스승이 되면 좋겠어요?" 나는 진희누나를 보며 물었다. 당연히 능글맞은 지렁이로 둔갑되어 버린 화산파 장로들은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천희형이 싸늘하게 노려보고 이명학 장문인 이 손을 들어 제지를 가하자 소란은 금새 줄어들었다. 나는 진희누나가 대답을 하기를 기다렸다. 진희누나는 화산파 장로들과 나를 돌아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빈이 너..." 나의 얼굴에 씨익 미소가 걸렸고 화산파 장로들의 얼굴에는 띵한 식은땀에 매달렸다. 그들은 설마 누나가 나를 선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보게 진희소저. 잘 생각을 해 보게나. 그가 아무리 절정고수라 하지만 우리 화산파 장로들보다는 약하다네. 특히 그의 검술은 규칙적이지 않은 마구잡이형 식의 낭인 검술이야. 명문인 화산파에서 체계적인 검술을 배우는 것이 오히려 좋아. 비록 화산파에 최절정무공은 없지만 자하신공(紫霞神功)과 이십사수매화 검법(二十四數梅花劍法)을 함께 극성으로 익힌다면 능히 최절정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이들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라네. 명문 화산의 검술을 배우는 것이 미래를 생각하면 좋은 일이야." "그렇다네. 송장로의 말이 맞아. 다시 생각해 보고...." 장로들은 다급하게 진희누나를 설득하려 했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진희누나 정도야 나에게 넘기건 말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 진희누나를 넘긴다는 것은 장로들의 오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어제의 일이나 오늘의 내 객관적으로 싹수머리 없는 언사 때문에 저들은 나에게 어떻게 해서든 문파의 제자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할까. 하지만 말야... 이미 모든 것은 내 손에 쥐여 있다고. 나는 내 옆자리의 진희누나를 껴안으며 장로들에게 혀를 내밀었다. "진희누나는 내 꺼야. 내 여자야. 이 세상에서 누나를 소유할 사람은 나 하나 뿐이야. 알아?" 장로들의 머리가 일제히 폭발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송장로가 진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설마 둘이...." "사귀는 사이에요. 유빈이 녀석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네요." 히죽 웃으며 진호가 말했다. 평소 허튼 짓만 하는 녀석이지만.. 지금 만은 참으로 기특한 소리를 했다. 자식. 나중에 좋은 검이나 한 자루 선물해야지. 송장로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이 진희누나를 보았다. 참말이냐고 묻는 송장로의 눈빛에 진희누나는 내 품에 안긴 채로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송장로는 2차 폭발신공을 펼쳐냈다. "으아아아!! 제길!! 나가!! 너 데리고 가던 말던 신경 안 써!! 진희 너도 탈퇴하고 싶으면 해!! 아니다. 파문을 시켜 주겠다!!!" 나이스. 인간 하나 미치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공하면 무한한 희열을 느끼지.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진희누나의 머리에 볼을 비볐다. 아아. 가상공간임에도 너무 기분 좋아. 게임을 잘 만들었으니 이런 쪽으로도 좋네. "나가아아아아!!!" 나는 진희누나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산파를 나왔다. 그런 나를 진호와 천희형은 정신나간 인간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녀석 원래 이랬어요?" "나도 설마 저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세상에 진희가 천하의 유빈이를 저 지경까지 만들다니.. 역시 사랑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래. 그래. 신나게 씹어. 신나게. 지금의 내 상태로는 누가 뭐라 해도 좋으니까. 진희누나만 옆에 있으면 내 인생은 올 해피 데이~! "으아.. 진짜 못 봐 주겠다!" "가자! 가! 짜증이다 진짜!" 흠흠.. 내가 좀 심했나 보다. 나는 안고 있었던 누나를 내려놓으며 진호와 천희형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뭐. 잠깐 내가 장난을 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서 무안하게 해야 하나? "알았어. 안 할게. 그냥 못 본 척 해 주면 되지. 꼭 그래야 하나?" 내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천희형이 웃으며 답했다. "닭살이 돋아서 그런다. 거기다 진희가 불쌍하지도 않어? 사람들 앞에서 그러면 부끄러워하잖아." "다른 데서는 나도 안 해. 화산파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얼간이 녀석이 누나를 노린다는데. 이렇게 못을 박아 두어야 했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나도 자제를 할 것이다. 괜히 닭살모드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는 나도 싫었다. 나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둘째치고 누나에게 사람들의 눈이 모이는 것은 절대로 죽어도 원치 않았다. 내 말에 천희형과 진호는 졌다는 듯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진호가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화산파에서 파문 당해 버렸으니 어떻게 하지?" "파문이라니?" 나와 천희형은 의아한 얼굴로 진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진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장로님들을 노하게 했으니 어찌 화산파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아~ 이제 나도 유랑객이 되어 굶주리며 세상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미친 녀석. 낭인의 대표로서 너는 안 받아!" "네가 어떻게 낭인의 대표냐? 설마 네가 검천지룡이라는 말이냐? 아서라. 천희형이 그런 말을 했으면 몰라도 너는 택도 없다." 진호는 혀를 내밀며 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냥 여기서 내가 검천지룡이라는 것을 밝혀 버려? 그때 방금 전에 지나왔던 화산파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천희형님. 유빈군.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장문인인 이명학이었다. 그가 올 것이라고 대충 예상을 하고 있었고, 그가 할말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나와 천희형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아! 장문사숙!" 진호와 진희누나는 이명학을 알아보며 깜짝 놀랐다. 이명학은 둘에게 웃으며 손을 저어 보이고는 천희형에게 입을 열었다. "죄송했습니다." "아냐 됐어. 재미있었는걸. 유빈아 안 그러냐?" "신나게 놀았죠." 나는 천희형의 말을 받으며 맞장구를 쳤고 이명학 장문인의 얼굴은 희미하게 허탈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장문인이라는 자리에서 닦여진 냉정한 판단력은 금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그를 복원시켰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뭔가 말을 흐리는 것이... 쉽게 말하기 힘든 내용의 문제일 것이다. 뭐 나나 천희형은 앞에서 말했다 시피 대충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 "진호와 진희누나의 파문 건에 관해서 이겠죠?" 내가 웃으며 말하자 이명학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진희누나와 진호의 몸이 움찔했다. 솔직히 그들로서는 화산파에서 파문 당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 진희누나라면 몰라도 진호는 필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연히 녀석은 나와 이명학 장문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장문인께서 파문을 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말에 이명학 장문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장로들과 다르게 내 정체를 알고 있었고 당연히 나의 제자가 되는 진희누나가 어떻게 성장하게 될 지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보통 성장은 혼자서 하는 것 보다 스승을 모시고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아무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스승은 제자보다 기본적으로 100이상 레벨이 높아야 한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된다면 제자의 성장치는 혼자서 수련하는 것에 거의 두 배에 이른다. 특히 스승의 능력에 따라 그 성장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차이가 난다. 만약 그 차이가 150레벨 이상이라면 3배, 200레벨 이상이라면 4배, 250레벨이라면 5배, 300레벨이라면 거의 6배의 성장속도를 보인다. 현재 나의 레벨은 347. 진희누나의 레벨은 아직 20대일 것이다. 이 정도라면 얼마나 진희누나가 빠르게 성장할지 알겠지? 진희 누나가 47레벨이 될 때까지는 6배, 97레벨까지는 5배, 147레벨까지는 4배, 197레벨까지는 3배, 247레벨까지는 2배이니... 아마 진희누나는 2년도 안 돼서 최절정고수가 되어 버릴 것이다. 거기에 내가 가진 비급들까지 포함시키면 후에 진희누나가 얼마나 강한 고수가 될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으리라.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명학 장문인은 진희누나만은 꼭 파문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호는 한동안 천희형이 데리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지금 진호는 이류고수이니.. 어차피 여행을 해야 할 시기죠." 진호까지 천희형이 맡겠다고 하자 이명학 장문인은 입이 좌우로 쭈욱 찢어졌다. 천희형도 한 제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강의 고수이다. 더구나 한때 화산에 있던 형이 아닌가. 명분에서도 떨어질 것이 없었다. 이명학 장문인으로서는 거절할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이명학 장문인에게 작별인사를 한 우리 일행은 느긋하게 화산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화산의 근처 마을에서 일단 서로 갈라졌다. 나와 진희누나는 남연성으로 가기로 했고 천희형과 진호는 근처 사냥터에서 같이 사냥을 하기로 한 것이다. 천희형과 진호와 헤어진 나와 진희누나는 말 한 필을 구해 남연성으로 달렸다. 나 혼자라면 경공으로 가겠지만 누나가 따라오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뭐 안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러면 시선이 모이거든. 그리고 말을 두 필이 아니라 한 필만 구한 이유는 누나가 아직 말을 못 타기 때문이다. 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실상은 내가 누나와 달라붙어 있고 싶어서이다. 아... 나 진짜 변태가 되어 가나봐... 타고 다니는 말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 속도는 느리지만 지구력이 있어 많은 짐을 들고도 여유 있게 다닐 수 있는 노새에서부터 평범한 말은 물론이고 속도가 빠른 준마, 장시간 달릴 수 있는 지구력 있는 말까지.... 이런 말들은 대부분 마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진정한 명마가 아니다. 한혈보마(汗血寶馬)나 적토마(赤兎馬), 천리마(千里馬) 등과 같은 전설적인 명마들은 직접 산천을 떠돌며 잡아야만 한다. 그렇게 잡은 명마들은 주인의 말만 절대적으로 따르며 주인이 응하지 않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더라도 절대로 승복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갑자기 하는 이유는... 말을 타고 다니다 보니 문뜩 그런 명마를 하나 구해보고 싶어서이다. 이제까지 말은 안 타고 경공만 쓰면서 다녔기에 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말을 타고 다니자 의외로 맛이 있었다. 거기다 마시장에서 최고로 비싼 말을 구해왔는데도 2시간 정도 달리면 지쳐서 헥헥거리는 말을 보고 있자니 짜증까지 났다. 속도는 내 경공의 1/3도 나오지 않고.... 명마들은 하루 종일 달려도 지치지 않고 절정고수의 속도를 오히려 능가하기까지 한다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있을 때 하나 구해 놓을 것을.. 실수했다는 생각뿐이다. 뭐 지금 느닷없이 그런 명마가 내 눈앞에 나타날 일은 없으니 우선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말이 지치면 중간에 30분 정도 쉬고... 다시 출발해서 또 지치면 쉬고... 이렇게 재미없는 길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루동안 절반도 못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결국 나는 포기를 하고 말았다. "차라리 경공으로 간다!!" 타고 있던 말의 엉덩이를 쳐 보내버린 후 누나를 안아들고 즉시 경공을 썼다. 경험해 보지 못한 빠른 속도에 누나는 처음에는 놀라서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한 덕분인지 우리는 두 시간만에 남연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크네..." 이제까지 화산성에서만 살아왔던 누나는 남연성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남연성은 제국 동남부에 자리한 성중에서 가장 큰 성이거든. 크기 면으로만 봐도 화산성의 근 다섯 배나 된다. 자연히 사람도 많고 볼 것도 많다. 내가 이 남연성에 자리를 잡은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우선 내 집으로 가요." 나는 누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누나는 얼굴을 붉혔지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너무 예뻐!! 보는 사람만 없으면 껴안고 부비부비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끌어 오르는 욕망을 참아내며 나는 누나와 함께 내 집으로 향했다. 집은 남연성 외곽에 있었고 애초에 집과 가까운 쪽의 입구로 성에 들어왔으니 금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낡아빠진 작은 집을 누나에게 보이는 것이 조금 찜찜하기도 했지만... 누나는 신경도 안 쓸 것이라 믿고 가슴을 폈다. "깨끗하네. 자주 청소를 하나봐." 집 안을 둘러보며 누나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어제 들렸을 때 청소를 해 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다른 고 레벨 유저들은 좋은 집을 지어서 산다고 진호가 그러던데.... 유빈이는 안 그런가봐." "하하. 그게 귀찮거든요. 이게 오히려 더 편하고.. 왜요? 이런 집은 싫어요?" "아니... 나도 이게 더 좋아." 방긋 웃는 누나가 너무 예뻐 보인다. 여기는 보는 사람도 없겠다. 나는 즉시 누나를 안고 머리에 볼을 비비었다. 좋아좋아. 너무 좋아. "유.. 유빈아.... 아.. 아파." 누나의 아프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나의 몸을 감고있는 팔은 풀지 않았다. 누나는 약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누나의 그런 모습까지 예뻐 보인다. "미안해요. 너무 흥분해서 그만.... 이제 아프게 안 할게요. 대신 잠시동안만 누나를 안고 있으면 안될까요?" 진희누나는 잠시 나를 보다가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밝게 웃으며 누나를 더욱 품 깊숙이 안았다. 누나를 안 것은 어제였는데.. 불과 하루사이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지금 이것이 꿈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 꿈은 아니다. 생생한 감촉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더욱 나를 기쁘게 했다.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평생 함께 있고 싶다. 이미 진희누나는 내 모든 것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더 이상이면 내가 누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휴우.... 하하. 누나 저 참 애 같죠? 평소에는 이러치 않았는데.... 오늘따라 이상 하네요. 미안해요." 내 말에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누나에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기습적으로 누나를 안더라도 이해 해 줘요. 저도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여 버리거든요. 그래도 최대한 자제는 할 게요. 그리고 누나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은 절대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 그 이상이 뭘 의미하는 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역시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제가 갑자기 이 곳으로 온 이유가 궁금하죠?" "으응...." "그건 누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예요." 성장이라는 말에 누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여기에 오는 것과 성장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일 것이다. 나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다 방법이 있어요." "으응... 그런데 꼭 급하게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나는 싸우는 기술을 익히려고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만나 즐겁게 인연을 만들고 싶어서 게임을 시작했다는 것 진호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강해지는 것이 좋아요. 이 세계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악인도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요.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는 지키고 있는 것이 좋죠. 그리고 무공을 익혀야 혼자서도 여행을 하는데 여러모로 편하니까요." 진희누나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어쨌든 누나는 성장을 해야 할 터이고... 되도록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누나의 스승이 될 거예요. 누나도 알겠지만 스승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성장속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러니 우선 누나와 저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정해야 겠네요. 제 아이디는 흑풍행로예요. 누나는요?" 무협지에서 보면 스승은 제자에게 구배를 받고 문파의 전대 인물의 사당 앞에서 이런 저런 짓을 벌여야 하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그냥 말 한마디면 끝이다. "진희낭자..." 뭐 무난한 아이디다. 진호의 번쩍번쩍필살검에 비하면 그야말로 세련된 아이디이지. 진희누나가 진호와 같이 엽기성에 물들지 않았음을 기뻐하며 나는 잠시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즉시 사제성립 명령어를 내뱉었다. "나 흑풍행로는 진희낭자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누나는 멀뚱히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누나에게 말했다. "이게 사제성립 명령어예요. 누나가 여기서 '흑풍행로를 스승으로 모십니다'라고 말하면 누나는 제 제자가 되는 것이고 '거절합니다'라고 말하면 없던 것으로 되죠." "아... 흑풍행로를 스승으로 모십니다.... 이렇게?" 내 말에 누나는 즉시 대답했고 동시에 내 오른 손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누나의 이마에 대었고 곧 약한 빛이 누나의 이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됐어요. 이제 저는 누나의 스승이 된 거예요. 물론 게임상의 관계일 뿐이니 꼭 스승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이 사제관계를 해제하기 전까지 누나는 제 허락 없이 다른 스승을 마음대로 모실 수 없고... 뭐 등등 여러 가지 사항이 있지만 별로 필요 없겠죠?" "으응...."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누나가 성장할 방법을 논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혹시 누나 검천지룡이라고 들어 봤어요?" 나는 누나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이기로 했다. 내 모든 것을 줘도 아까울 것이 없는 진희누나였다. 그런 누나에게 언제까지 감추고 있는 것은 싫었다. "들어 봤어." 누나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재차 물었다. "어떻게요?" "얼마 전에 진호에게 듣기도 했고... 그 전에는 간혹 멀티비전에서 나오는 것을 보기도.....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확실히 더 월드를 하면서 검천지룡과 갓 소드 리마르딘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다. 멀티비전에까지 종종 등장하니 더 월드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대부분 이 두 이름은 들어 봤을 정도이다. 누나는 왜 그런 것을 갑자기 물어보냐는 의문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제가 검천지룡이라면 믿겠어요?" "..........믿을 것 같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것 아냐? 나는 누나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조금 맥이 빠지는데. "하하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나에게 진희누나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왜... 그래? 장난이었어?" "아뇨. 장난 아니에요. 제가 진짜 검천지룡 맞아요. 그냥 누나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너무 쉽게 믿어버리자 조금 허탈해서... 하하.." "미.. 미안해..." 이런.. 누나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누나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뭐 아직 누나는 이 세계의 일을 잘 모르니... 검천지룡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을 확실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대충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그보다는 누나의 얼굴에 이렇게 손을 대고 있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손으로 내 손을 포개며 그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누나를 보자 그냥 입맞춤을 해 버리고 싶은 욕구가 불끈 일어났다. 하지만 조금 전에 장담했다시피 포옹 이상의 것은 절대로 누나가 허락하기 전에는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누나에게 허락을 구하고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누나를 안 것은 단 하루뿐이다.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천천히 나가면 되는 것이다. 누나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낸 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따라 와 봐요. 그 누구에게도 안 보여준 제 비밀 창고를 보여 줄 게요. 이건 천희형도 모르는 거예요." 누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간 나는 구석에 놓여있는 장작더미를 능공섭물로 치우고 비밀통로를 열었다. 누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비밀통로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게 보여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해요. 어두우니까." 뒤따라 들어오는 누나에게 충고를 한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깊게 파지는 않았기에 금새 지하에 내려올 수가 있었다. 나는 즉시 라이트 볼의 발동주문을 외웠고 일순 빛이 생성되 어둠을 몰아내었다. "아!" 갑작스런 빛에 놀랐던 누나는 지하에 정돈되어 있는 내 수집품들을 보며 재차 탄성을 터트렸다. 누나는 이런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성격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감탄이었다. 이 곳 수집품 자체의 능력이 아닌 그것들이 내뿜는 아름다움이 누나의 시선을 잡은 것이다. "이건...." "내가 수 년 동안 모은 것들이에요. 누나가 원하면 다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누나는 별로 가지고 싶지는 않죠?" "응. 그냥 이렇게 정돈해 두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역시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나는 한 손으로 누나의 어깨를 껴안으며 기쁘게 웃었다. "누나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보다 누나. 지금 기본무공을 익히고 있죠? 얼마큼 익혔어요?" "7성정도..." 기본무공을 익히는 시간은 게임을 시작하고 현실시간으로 한 달간이다. 물론 기본무공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2주 정도만에 극성까지 충분히 익힐 수 있다. 기본 무공을 극성까지 연마하면 그제야 무사가 되면서 삼류무공부터 차례로 익히는 것이다. 뭐 기본무공을 다 익히지도 않고 바로 삼류무공으로 넘어가는 법도 있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다. 기본무공은 그야말로 기초. 특히 한 제국의 유저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기본적인 능력의 한계치 성장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기본무공을 천시한다면 후에 힘과 민첩과 같은 기본적인 능력치의 한계선이 금방 다가와 버린다. 잘못하면 50레벨 이상 레벨이 낮은 이를 못 이기는 사태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본 능력치는 중요하다. 극성은 12성이고... 누나가 게임을 시작한 것이 이제 2주일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이라면 충분히 극성까지 연마를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놀면서 해도 나흘이면 될 것이다. 괜히 내가 사부가 아니거든. "좋아요. 한 사흘 정도면 되겠네요. 늦어도 나흘 정도면 기본무공은 끝낼 수 있을 것 같고.... 그 후부터 삼류무공을 배워야 하는데... 누나 기본무공으로 검을 배웠죠?" "으응...." "그럼.. 검을 제외하고 뭐로 배울래요?" "검을 제외하고?" 누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하긴 그녀의 상식으로는 내가 한 말이 엉뚱한 말일 터이지. 비록 2주뿐이기는 하지만 화산파에 있었으니 수련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습득하고도 남을 시간일 것이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누나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을 빼고요." "....왜? 검을 안 배우고....?" "그게 나중에 훨씬 더 좋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배웠거든요. 제가 기본무공으로 배운 것은 검술이고, 삼류무공은 창술, 이류무공은 도술, 일류무공은 암기술, 절정무공으로는 독술을 배웠어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정도네요." "그래도 돼?" 누나는 상당히 놀란 듯 했다. 그건 당연하다. 내가 배운 무공들은 더 월드에서 상식적으로 미친 녀석이나 하는 짓인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모른다. 게임 개발자들은 간혹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유저를 기다리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2년 동안이나 해야 하는 미친 짓을 말이다. "물론... 처음에 성장은 정말 극악이라 할 정도로 느려요. 삼류무공과 이류무공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는데 둘 다 절정까지 익히는데 자그마치 2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2년 동안 천희형한테 미친 녀석이라는 소리 매일같이 들으면서 했어요. 근데 말이죠. 그게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좋아요. 2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하는 최고로 멍청한 짓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고 할까...? 일류무공의 8성까지는 여전히 느리게 오르는데.. 그 이후로는 하나만 꾸준히 익힌 사람과 똑같이 오르고... 절정무공 같은 경우는 수배는 빨리 마스터 할 수 있어요. 더구나 이런 수련은 그 장점 외에도 다른 큰 장점이 하나 더 있어요. 이건 천희형도 모르는 건데.... 한 가지만을 익히면 기본 무공 하나로 기본 능력치가 정해지는데 반해 이렇게 하면 절정무공을 극성까지 익힌 상태에서 지금까지 배운 무공들에 따라 나머지 능력치 한계선이 상승해요. 물론 가장 처음 배운 것들만에 한해서요. 저로 예를 들어 볼 까요? 우선 검술의 기본무공을 익혔으니 제 능력치는 평균적이 될 거예요. 거기에 창술의 삼류무공을 배웠으니 재차 모든 능력치가 평균적으로 오르게 되고 도술의 이류무공을 배웠으니 힘이 크게 또 한번 올랐죠. 암기술의 일류무공을 배웠으니 민첩성이 대폭 올랐고, 독공의 절정무공 덕분에 지력이 또 상승했죠. 현재 제 능력치는 근력 310, 민첩 375, 지력 322, 체력 280 이죠. 평균적으로 한 제국 무사들의 능력치가 150에서 250 사이인 것에 반해 제 능력치는 거의 1.5배 이상 높아요." 내가 홀로 사룡 암무를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기본 능력치는 에리두의 투 마스터와 거의 대등하고 오러의 수치는 쓰리 마스터의 두 배에서 세 배에 이른다. 종합적인 능력치를 살펴보면 에리두의 쓰리 마스터의 능력치 까지 상회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후훗. 그 누구도 모르는 감추어진 조각. 일명 히든피스라고 부르는 개발자의 농간이죠." 4 - 여름방학 이벤트 "방학이다~!!!!" 네네.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았으면 하는데요. 진호군. 머리가 울린답니다. "진호 Come." 담탱이의 호명이다. 당연하지... 담탱이 말 자르고 그 난리를 쳤으니 끌려나가지 않고 배기겠는가. 울상을 짓고 앞으로 나간 진호는 담탱이 스페셜을 당하고 알사탕 두 개 문 얼굴로 귀환했다. 담탱이 스페셜이 뭐냐고? 그건 우리 담탱이가 즐겨 쓰는 기술인데 학생의 양쪽 볼을 잡고 늘리고는 각각 반대 방향으로 시원스럽게 비틀어 버리는 살인기술이다. 나도 한 번 당해 봤는데.. 별로 안 아플 것 같으면서도 죽을 정도로 아프다. 거기다가 한 시간 정도는 알사탕 빠는 듯 한 얼굴로 있어야 하니 그것 또 나름대로 머리 아픈 일이다. 내가 전에 당했을 때는 종례시간이었는데.. 덕분에 진희누나한테 안 보이려고 도망을 쳤어야 했을 정도였다. "우씨.. 저나 아파." 원래는 '전나 아파'일 것인데... 입이 제 기능을 못하니 저런 말이 된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진호녀석의 볼을 콕 찔러주었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 덕분에 또 한번 말 끊었다고 진호녀석이 끌려갔다. 물론 나 때문이라고 담탱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재빨리 방금 잠에서 깬 듯이 멍하게 주위를 둘러봄으로서 진호의 외침을 흩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내 멍한 얼굴에 담탱이의 진호를 향한 싸늘한 시선이 파워 업을 하였다. 결국 2차 담탱이 스페셜을 당한 진호는 초죽음이 되어 자리에 돌아왔다. 진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치사한 자식...." "내가 걸려봤자 너도 당했을 것 아니냐? 차라리 혼자 총대 매는 것이 낫지." 내 말에 진호는 다시금 이를 마찰시켰다. 뭐 솔직히 조금 미안하고 하니... 다음에 절정무공이나 하나 선물해야지.. "네가 검천지룡이라는 것 소문내 버릴까 보다." 진호는 내가 검천지룡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희 누나가 가르쳐 줬거든. 다행히도 그 것을 지금까지 비밀로 해 주고 있기에 안심이다. 입이 가벼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 면에서는 입이 무거워지기도 하는 특이한 녀석이다. 진호의 협박에 나는 히죽 웃어 보일 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협박 들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누가 믿겠는가. "자자. 고로 오늘로서 1학기가 끝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방학이니 그동안 못 한 것들은 다 해 보도록. 매일 게임만 하지말고! 여행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 보고, 바다도 가보고! 공부도 좀 하고! 알았냐?!" 담탱이의 연설이 거의 끝을 보고 있었다. 다음 말은 분명 '해산!'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 언제 뜻대로만 돌아 간 적 있던가? 반 아이 하나가 내뱉은 말은 연설을 지속되는 촉매제가 되어 버렸다. "에~! 맨날 선생님은 게임에 접속 할 것이면서!" "맞아요!" "이.. 이 녀석들이!! 나는 선생이니까 괜찮아!" "우우~! 사모님한테 신경 좀 쓰시라구요~!" 진호 녀석까지 합세했다. 사모님이라는 말에 담탱이의 표정이 일변했다. 요즘에도 게임만 한다고 구박받나 보다. 차라리 사모님도 꼬셔서 함께 게임하면 좋을 것인데... 나처럼 말야. 밖에서도 보고 게임에서도 보고. 얼마나 좋아. "세상에 나만큼 마누라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호언장담을 하며 가슴을 탕탕 치는 우리 선생님.. 그런 담탱이에게 진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빈이요~!" "맞아요! 맞아!" "극악의 닭살 커플!!" "치킨러브~!!" 이.. 이 자식들이.. 나의 머리에 핏줄이 그려졌다. 이미 나와 진희누나의 소문은 학교 전체에 퍼져 있었다. 나에게는 아수라치킨백작이라는 엽기적인 별명까지 생긴 상태였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진희누나하고만 있으면 느끼해진다나.. 솔직히 내가 그 동안 누나하고 좀 느끼하게 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놀리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 분명 이건..... "야!! 부럽다면 부럽다고 말로 해!!!"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그대로 교실은 뒤집어졌다. 제길.. 난 웃으라고 한 말 아니란 말이다!!! 그때 담탱이가 신음하는 나에게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패배를 시인한다." .........망할.. "누나야~!" 등교와 하교시간에 누나를 껴안고 볼을 비비는 것은 내 일일 행사이다. 물론 이런 것을 학교 내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를 멀다하고 야유를 퍼붓는다. "으아~! 대패!!" "신이시여~! 저 닭살들을 정녕 어찌할 수 없는 것이오리까~!!" "다행히도 방학이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저 아수라치킨백작을 안 보겠구나." "넌 좋겠다. 난 아주 일상이 되어서 오히려 방학동안 저 꼴 안 보고 어떻게 살까 걱정까지 된다." 이건 우리 반 녀석들의 대화. "좋을 때다. 청춘이니 그런 짓도 하지." "너희들도 우리 나이 먹어 봐라. 포옹은 고사하고 눈 마주치기도 무서워진다." 이건 선생님들의 말이다. 나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며 진희누나의 몸을 껴안은 채 몸을 돌렸다. "자자!! 모두 넷 룸으로 고~!!" 전에는 언제나 집에서 혼자 게임을 즐기던 나였지만 진희누나와 사귀게 되면서 오히려 밖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에 재미를 붙여버렸다. 게임에 접속해 있을 때도 누나를 보고, 게임에 나가 있을 때도 누나를 보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천희형과 있을 때도 게임센터나 넷 룸에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갈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진희누나 때문에 매일 넷 룸에서 사는 실정이다. 덕분에 다른 친구녀석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반 아이들이 하나같이 더 월드를 하는 녀석들이니 어찌저찌 안면을 닦았고 진호 녀석이 워낙에 활달하고 발이 넓은 터라 정신을 차려보니 나까지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뭐 그렇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라서 지금은 오히려 즐기는 입장이다. 이제껏 있으나 마나 한 친구 따위는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는 꼭 가깝지 않은 친구라도 즐겁게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로 갈래? 학교에서 할까?" 우리 학교는 (주)신화에서 만든 학교이니 만큼 더 월드를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 각 학생마다 개인용 퍼스컴이 지급되고 그것만으로도 더 월드에 접속이 가능할 정도였다. 뭐 일주일 수업 중 하루는 더 월드를 하는 날이니 말 다 한 것이지. 교실로 돌아가서 더 월드를 즐기면 좋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노노! 역 앞에 좋은 넷 룸 내가 아는데 있다! 거기로 가자!" 연식이라는 녀석이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찬성했다. 솔직히 학교에 더 월드를 즐길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만 넷 룸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조금 돈이 들기는 하지만 넷 룸에는 더 월드 전용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서 더욱 편하게 게임을 즐길 여건이 되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중간에 휴식을 취할 공간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음료수는 공짜다.(이게 가장 중요하다...-_-) "오케이! 여학생들은 모두 타!!" 우리 담탱이가 소리친다. 그런데 하필 왜 여학생만이야~!!! 반 여자아이들은 환호를 내지르며 담탱이 차로 달려들었고 나를 포함한 남학생들은 먼 산 바라보듯 멍하니 손을 흔들고 떠나는 담탱이와 여학생들을 응시해야 했다. 뭐... 레이디 퍼스트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문뜩 빼 먹은 것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급히 소리쳤다. "으악!! 야!! 진희 누나도 태우고 가야지!!!" 결국 진희누나는 우리 남자들과 함께 걸어서 넷 룸으로 가야 했다. 뭐 여자가 하나 더 끼어 있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오직 진희누나만이 보일 뿐이라고. 남은 한 명의 여자는 진희 누나의 친구인 시연선배다. 과거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시연선배도 어쩌다 보니 진희누나를 따라 더 월드에 발을 들여버렸다. 시연선배의 스승은 천희형.... 바쁘다는 형에게 진호 녀석이 우기고 우겨서 만들어 낸 쾌거였다. 나는 힐끔 뒤쪽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시연선배는 진호와 티격태격 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별로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나와 진희누나 때문에...) 진호와 시연선배 사이에도 상당히 많은 스캔들이 존재한다. 뭐 내가 보기에도 둘 사이에 스캔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날마다 진호 녀석이 시연선배에게 맞고 살지만... 그것이 의외로 어울려 보인다. 폭력부인과 샌드백남편이라.... 솔직히 보는 것은 재미있지만 직접 경험하고 싶지 는 않다. 누가 뭐래도 진희누나처럼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그리고 여자다운 애인이 좋지 않겠어? "왜?" 내가 진희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저 빙긋 웃으며 누나의 머리를 껴안고 볼을 비비었다. 물론 뒤에서 진호를 포함한 반 남자아이들의 야유가 다시금 터져 나왔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나와 진희누나를 바라보았지만... 이것들아. 부러우면 너희들도 진희누나 같은 여자친구 사귀라니까. 야유하고 무시하고 하는 사이에 어느새 넷 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방학을 하는 학교는 우리학교 뿐이고 근처의 대부분 학교는 내일이나 모래 방학을 하기 때문에 넷 룸은 한산한 편이었다. 이미 도착해 있던 선생님들과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휴게실에 앉아 음료수로 입을 축이고 있었고 딱 하나.. 우리 담탱이만이 열혈 게임 매니아 티쳐라는 명성에 어울리게 벌써 한 쪽에서 자리를 잡고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빨리 좀 와라. 기다리다가 지쳤어." 민선이가 태선이의 머리를 탁 치며 말하고는 더 월드 전용석으로 갔고 뒤이어 여학생들이 하나씩 일어나 먼저 자리를 잡았다. 나와 친구들은 우선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였다. 넷 룸의 기본요금은 5000원이었다. 5000원은 2시간 요금으로 우선 기본요금을 내고 나중에 나갈 때 추가요금이 있다면 더 내고 나가는 방식이었다. 종종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몰상식한 인간들이 존재하기에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진희누나 것까지 1만원을 내고는 계산을 마쳐 버렸다. 지갑을 꺼내던 진희누나는 그런 나를 새초롬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재빨리 음료수를 하나 꺼내 진희누나에게 넘기면서 웃음으로 무마시켜 버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콜라이지만 누나는 콜라는 마시지 않는다. 몸에 좋지 않다나? 때문에 누나에게는 미네랄 워터를 뽑아주었고 나는 콜라를 뽑아 목을 축였다. 아직 완연한 여름은 아니지만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계절이라 여기까지 오는데 상당히 목이 말랐다. 이 와중에 마시게 된 콜라는 그야말로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휴우....." 콜라 한 켄을 단번에 원삿 해 버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캔을 분리수거통에 버리며 누나와 함께 자리로 향했다. 누나의 자리를 정해주고 그 옆자리에 앉은 나는 링크헤드셋을 머리에 쓰며 누나를 돌아보았다. 마침 누나도 날 보고 있었기에 우리는 빙긋 웃으며 더 월드에 접속을 시도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OK."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곧 나는 더 월드의 한 제국 남연성 리스장에서 눈을 떴다. 지난 한 달 동안 누나와 난 남연성을 떠나지 않고 근처를 돌며 누나의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남연성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에 접속을 하면 리스장에서 접속이 되는 것이다. 뭐.. 이제 차차 사냥 범위를 넓히려고 생각하는 중이다. 누나도 한 달 동안 조금은 실력이 붙었거든. 나는 대충 누나의 현 레벨에 맞는 사냥터를 생각하며 혹시 부재중 메시지나 메일이 오지 않았나 살폈다. 부재중 메시지는 없었고 메일은 세 통이 와 있었다. 나는 그 메일들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첫 번째는 천희형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충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요약해 청첩장 보냈으니까 결혼식 날 꼭 오라는 말이었다. 추신으로 축하금 많이 가져오라고 써 있었는데... 나는 가볍게 씹으며 휴지통으로 던져 주었다. 두 번째 메일은 천희형이 알바로 있는 게임센터의 사장님... 그러니까 민우형한테서 온 것이다. 민우형은 암왕으로 불리는 팔왕의 첫째로 현 당문세가의 가주였다. 그 형 덕분에 나나 천희형이 초반에 돈이 궁하지 않고 잘 클 수 있었다. 거기에 내가 절정무공을 배우는데도 큰 도움을 얻었고 말이다. 민우형의 메일도 주된 내용은 천희형은 결혼 이야기였다. 덤으로 오랜만에 나 좀 보고 싶다고.... 이왕이면 천희형 결혼식 며칠 전에 올라와 형 집에서 묶으면서 함께 게임이나 좀 하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형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민우형을 만나러 갈 생각 중이었다. 어차피 방학이고 하니 며칠 짐 싸서 올라가 민우형한테 신세 좀 질까 생각 중이었는데... 형 쪽에서 이렇게 손을 벌려주니 더 이상 망설 일 것도 없었다. 천희형 결혼식이 있기 일주일 전에 올라가겠다는 말을 써서 메일로 보내고 마지막 메일을 펼쳤다. <운영자 치우입니다.> 메일의 제목을 본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운영자 치우는 더 월드 최고 운영자로서 쉽게 표현하면 더 월드의 주신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이제까지 여러 운영자에게 메일을 받아봤지만 치우에게 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터라 나는 내용을 보기가 겁이 났다. "......또 이벤트 내용이겠지." 가볍게 중얼거리며 메일을 펴 보았다. 역시나 예상 대로였다. [더 월드 최고수이신 한 제국 검천지룡님께 보냅니다. 이렇게 불연 듯 메일을 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옵고 이번 여름을 맞아 가지게 될 회사 주최 이벤트에서 꼭 검천지룡님께서 참석을 해 주십사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여러번 부탁을 드려서 대충 내용은 검천지룡님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고 지금까지와 그랬듯이 거절하실 것 같지만 예의 상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더 월드 내 유저분들의 가장 큰 현관심사라 하면 바로 현 최고렙이신 검천지룡님과 갓 소드 리마르딘님의 승부라 할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유저분들이 두 분들의 대결을 보고 싶다고 의견을 주셨고 워낙에 많은 분들이 내 주신 의견이라 저희 측에서도 자리를 마련해 대련을 해 보십사 부탁했고 리마르딘님께서는 허락을 한 일이지만 검천지룡님께서 허락지 않아 시도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어느 세력에도 들지 않고 홀로 독행강호를 하시는 검천지룡님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싫어 대결을 기피하시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더 월드의 유저분들이 원하시는데... 저 역시 한 사람의 유저로서 그런 대결은 꼭 견식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일주일 후 여름 이벤트의 시작을 검천지룡님과 리마르딘님게서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얼굴을 알리기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가지 대비책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대결 장소는 운영자측에서 임의로 만든 공간이 될 것이고 대결의 상황은 멀티비전으로 공개가 될 뿐 누구도 직접적으로 와서 관람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인피면구를 쓰셔도 되고 마법구로 모습을 바꾸어도 걸릴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설사 대결 중 사망하신다 하더라도 레벨 다운도 없을 것이며..... (중략).......] 이런이런.. 운영자들도 갈수록 강력하게 밀어붙인단 말야. 솔직히 내가 리마르딘과 안 싸우는 것은 그들이 열거한 대로 얼굴을 밝히기 싫어서도 아니고, 레벨다운이 겁나서도 아니다. 게시판에 보면 내가 리마르딘을 겁내서 그렇다고 말들이 많지만.... 미쳤냐? 내가 겁을 내게. 솔직히 리마르딘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못 이길 것도 없다. 진짜 에리두의 강자는 다들 알고 있는 리마르딘이 아니거든. 리마르딘은 나와 레벨만 비슷할 뿐.... 진짜로 싸운다면 내가 십중팔구 승리한다. 그 사람은 너무 고지식하거든. "휴우.. 역시 이번에도 거절......" "응? 뭘?" 어느새 진희누나가 내 옆에 다가와 물었다. 아마도 내가 한 혼잣말을 들은 것 같았다. 깜짝 놀란 나는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그래?" 윽... 누나가 저렇게 보면 나 진짜 거짓말은 못 하는데.... 결국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운영자에게 메일이 왔어요... 이벤트에 출전해 달라고." "운영자?" "네. 잠깐만요. 누나한테 메일을 보낼 테니 보세요." 나는 즉시 내 메일함에 담겨있는 메일을 누나에게 보냈다. 누나는 나에게 받은 메일을 열어보고는 잠시 긁을 읽는 듯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와 리마르딘이라는 사람이 싸워서 이벤트를 연다고?" "하하. 네.. 그런데.. 말 좀 줄여줘요." "아.. 미.. 미안.." 다행히 누나의 말을 귀담아 들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자꾸 미안하다고 하면서 얼굴 붉히고 고개 숙이지 말아요. 저 진짜 참기 힘들어요." 내 말에 누나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아~ 신이시여.. 왜 나를 이리 시험하시는 겁니까? 참자. 참아~!! 여기는 대로다!! 보는 눈도 많은데 사람들 앞에서 누나를 동물원 원숭이 만들 수는 없다!! 나는 내 볼을 탁탁 치며 숨을 돌렸다. 그리고는 누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 그 메일은 매 행사 때마다 와요. 저하고 그 사람이 싸우는 것을 그렇게 보고 싶은가? 솔직히 자신이 싸우는 것도 아니고... 겨우 싸움하는 것 보는 것 가지고 뭘 그리...." "흐음.. 그래도 나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누나의 말에 내 표정이 돌변했다. 누나가 재미있을 것 같다고? 나는 즉시 누나의 손을 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으응.. 하지만.. 유빈이 네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아뇨!! 해요! 해!! 누나가 좋으면 나는 꼭 해요!! 아자!!!" 이것저것 잴 필요 없다!! 누나가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무조건 한다! 누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것이 내 신조가 아니었던가?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수 있다고!!!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괜한 말을 해서 내가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나 보다. 나는 잠시 흥분을 누르며 누나를 돌아보았다. 흐흐. 그렇다면 다른 수가 있지. "흠... 누나. 그럼 이건 어때요?" "으응?" "만약 내가 리마르딘을 이기면 누나가 뽀뽀 해 주는 것!" "에....?" 진희누나가 배운 무공은 대부분이 타격계 공격 무공이 아닌 보조계 전문지식이었다. 누나가 삼류무공으로 배운 무공은..... 진법계론.... 솔직히 이 진법계론은 무공으로 따지기도 힘든 보조스킬이다. 진법쪽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천시하는 계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상력이 없기에 레벨을 올리기도 골치가 아프고, 또 절정에 이르지 않으면 돈벌이도 힘든 것이 바로 이 진법계 지식이다. 비슷한 쪽으로 있는 의학계 지식은 그나마 돈벌이라도 되는데... 이 진법계는 돈도 모이지 않는다. 정말 내가 돈이 철철 넘쳐나지만 않았더라도 끝까지 반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반대를 했다. 하지만 누나가 배우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누나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나로서는 승낙을 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누나는 진법계론을 3성까지 성취를 이루었다. 만약 내가 스승이 아니었다면 정말 이 정도의 성취는 볼 수 없었으리라... 아마 아직도 1성에서 간당간당 하고 있었을 터이다. 뭐 진법계론이 아닌 다른 무공이었다면 거의 5성에 이르러 있었을 터이지만 말이다. 내가 진법술을 배우지 않고도 누나의 성장에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내 지력 때문이다. 300이상의 지력을 가진 이는 이 곳 한 제국에 나 뿐이다. 더구나 내 레벨은 300이상.. 거의 350에 가까워져 있다. 그 때문에 비록 배우지 않은 계열이라 하더라도 누나에게 상당한 어드벤티지를 주는 것이다. 보통 하위무공을 익히고 그 상위무공을 섭려함에 있어 하위무공을 최소 3성 이상 성취하고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턱대고 상위무공을 먼저 익히면 두 무공의 조화를 이루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지는 것이다. 때마침 오늘 누나가 진법계론을 3성 성취를 이루었고 나는 이류무공을 뭐로 배울 것인지 물었다. 그런데 누나의 대답은... "부작술." ".......부작?"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렇기에 누나에게 되물었고 누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내 귀가 정상임을 알고 기뻐했.....을 수가 없었다!! "누나... 부작술이라는 것은 말야." "부적을 이용해 파티원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올려주고 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부과효과를 주는 기술. 아냐?" 정확히 알고 있군.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대충 그 정도로만 보면 된다. 부작술 역시도 진법술과 같이 외적인 특수기술로 속한다. 더구나 부작술은 진법술보다 더 배우는 이들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진법술은 실패를 해도 그만이지만.. 부작술은 실패를 할 시 피시술자가 큰 피를 보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능력치 올려주겠다고 부작술을 썼는데 싸우던 이의 민첩성이 일순 절반으로 뚝 떨어져 머리면? 보고 말 것도 없이 죽음이다..... 높은 경지에 오르면 100%성공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앞서 진법술에서 말했다시피 부작술 역시도.... 공격이 가능한 것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야 가능하지 낮은 수준에서는 공격도 못한다. 고로 레벨 올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지.... 진법술까지는 이해를 하려고 했지만.. 부작술까지 익힌다고 하니 이거 누나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어야 하나 의문이 생겼다. 솔직히 할 수만 있다면 설득해서 다시 처음부터 무공을 익히게 하고 싶지만.... 누나는 끝까지 막무가내였다. "미안... 나 꼭 그것 배우고 싶은데...." "......이유가 있어요?" 내 물음에 진희누나는 우물쭈물 말을 못하다가 종래에 조용히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너를 돕고 싶어서...." 에? 나를 도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 머리로 순간 천사가 강림했다. 진법술이나 부작술이나 자기 자신보다는 동료를 위하는 기술이다. 누나가 나를 위해 이런 잡학들을 배우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안하던 나의 기분은 그야말로 육일승천 비상하는 용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요." ".....그게... 너는 강하잖아...... 그래서 내가 돕는다고 하면... 싫어할 것 같기도 하 고..." 아~! 어찌 이리 마음씨도 고운 것이란 말인가. 나는 대번에 그녀를 껴안으며 머리에 볼을 비비었다. 이 곳이 사냥터라 해도 상관없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이들이 못 볼 것을 봤다며 얼굴을 구기고 사라졌지만 나는 한참동안 누나를 안고 있다가 즐거운 기분으로 몸을 뺐다. "좋아요! 제가 누나를 꼭 도와 드릴게요. 그리고 일류무공은 어떤 것을 배우고 싶어요?" 나는 호언장담을 하며 누나에게 물었다. 이왕에 한 것 절정무공까지 누나가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지금부터 구해 두려는 것이다. 누나는 웃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일류무공은 용독술을 배우고... 절정무공은 의술을 배우고 싶어." "용독술이요?" 의술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용독술은 조금 고개가 갸웃거렸다. 나는 이미 만독불침이라 독이 침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곧 누나의 생각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누나가 나 하나만을 생각하라는 법은 없다. 동생인 진호나 주위 친구들을 생각해도 용독술을 익혀두면 분명 좋을 것이다. 만독불침은 금강불괴와 함께 레벨 300에나 가능한 능력인 것이다. 어디 보자.. 일류로 분류가 된 용독술은 나한테 몇 개가 있고... 절정의 의술은... 없는데.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절정에 분류된 의술이 문제였다. 그러다 문뜩 천희형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천희형이 의성수(醫聖手)라는 비급을 얻었던 것이다. 의성수는 어떻게 보면 수공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의술이 될 수도 있는 기묘한 무공이었다. 사용자의 뜻에 따라 활수가 되기도 하고 살수가 되기도 하는 무공인 것이다. 나는 즉시 천희형을 불렀다. [형!!] 하지만 형은 대답이 없었다. 민우형 게임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한동안 쉰다고 하던데... 역시 결혼식 준비에 바쁜가 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민우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의 아이디는 당가천하. 무협지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당문세가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형이 바로 민우형이다. [민우형. 있어요?] [응? 아.. 유빈이구나. 이 녀석 연락 좀 하고 살아라!] 다행히 민우형은 게임에 접속해 있었다. 게임센터 사장이라는 사람이 매일 가게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고 게임만 즐기다니.... 뭐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하하. 조금 바빠서요.] [녀석.. 여자친구 생기더니 형은 물로 보이냐?] [꼬우면 형도 여자친구 사귀세요. 아... 누나한테 걸리면 죽지.] 흐흐흐. 형은 이미 결혼까지 한 몸이다. 그것도 어렸을 때 소꿉친구와 말이다. 내가 보기에 아진누나에게 덜미를 잡힌 것 같지만. [말 마라... 그렇지 않아도 어제 외박했다고 집에서 쫓겨났다.] [아하하.] 역시 형도 공처가야. 나는 배를 잡으며 웃음을 흘리고는 문뜩 누나가 날 보고 있는 것을 보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형. 그보다 전에 천희형이 의성수라는 비급 얻었었죠?] [의성수? 아.. 그거? 내가 가지고 있는데.] [정말이에요? 지금 익히고 있어요?] [아니... 조금 익혀 보려다가... 포기했다. 치료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좋은데 공격력과 회복력에 지력이 관계가 있더라고. 내 지력이 좀 높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턱없이 높은 지력을 요구하는 관계로... 포기하고 말았다.] 지력이 관계가 있다고...? 잠깐. 민우형의 지력은 내가 알기로 280이 넘는 것으로 아는데. 나를 제외하면 한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력을 가진 형이 바로 민우형이다. 그런 형이 불가능하다 할 정도라면....? [몇이 필요하는데.] [말 마라. 너도 불가능해. 절정으로 익히려면 350, 제 능력 발휘하려면 자그마치 400이상은 되야 겠더라.] 켁.. 400? 말도 안 된다. 그 정도라면 에리두의 위저드 투 마스터나 가질 수 있는 지력이다. 범위계 최고위 마법을 익힐 수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까지 많은 지력을 먹는 무공이라니...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포기할까 생각을 했지만.... 자꾸만 뭔가가 걸렸다. 내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무공의 경우는 뭔가 기막힌 것이 숨겨진 경우가 많다. 어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네 번째 초절정무공과 관련된 단서가 될 가능성도 크다. 내가 얻은 무상검록도 검보(劍寶)라고 하는 절정무공 중 하나에서 비밀을 풀어 얻은 것이거든. [형! 그 책 저 줄 수 있어요?] [뭐? 아서라.. 익히지도 못하는 것을 가져서 뭐 하려고?]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힐끈 진희누나를 보았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며 의아한 눈을 반짝이는 진희누나... 순간 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필요한 데가 있어서 그래요.] [그래? 흠.. 알았다. 나는 지금 열창성에 있는데. 지금 받으러 올래?] [아뇨. 제가 있다가 저녁에 형한테 연락할게요.] [뭐 좋다. 어차피 오늘 집에도 못 들어가니 여기서 날 샐 생각이니까.] [네. 그럼 형 있다가 봐요. 아! 그리고 곧 대전에 올라갈게요. 형 집에서 며칠 신세 질 테니까 부탁해요.] [물론. 언제든지 와라. 제발 부탁한다. 진짜 네가 있어야 아진이 성깔도 조금 누그러지지.. 나 혼자서는 감당 불가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는 형과의 교신을 끊었다. 그리고는 진희누나를 보며 희열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왜 그래?" "아뇨. 그런 일이 있어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뭐.. 지금은 꼭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만약 잘못 짚은 것이라면 무슨 개망신이냐. 우선 민우형에게 의성수를 얻은 후 진희누나가 익힐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뭐 한 1년은 족히 걸리겠지만 시간이야 아무래도 좋다. 지력이 350이나 필요한 의성수를 진희누나가 어떻게 익힐까 걱정하는 무리들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 무리도 없다. 지금 누나가 배우고 앞으로 배울 것들이 무엇인가? 진법술, 부작술, 용독술, 의술이다. 하나같이 지력에 엄청난 보정을 주는 무공들인 것이다. 물론 의성수를 익히기 위해서는 다른 절정 의공서를 구해야 한다. 절정무공까지 극성으로 익혀야 능력치 보정이 주어지니 말이다. 의공서를 구하는 것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다. 어차피 의술은 절정때에나 배울 것이니 앞으로 한동안은 배울 일이 없다. 어쨌든 누나가 의술까지 절정으로 익힌다면 보정되는 지력수치는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400은 가뿐하게 넘고도 남으리라... 어쩌면 에리두의 마법사 쓰리 마스터에 버금가는 한계 지력치를 지니게 될 지도 모른다. 거기에 혹 의성수에 초절정무공에 대한 단서가 숨어 있다면?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희열이 온 몸을 감싼다. "유빈아.. 어디 아프니?" 내가 몸을 부르르 떨자 진희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그런 누나를 다시금 껴안으며 대소를 터트렸다.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오히려 좋아 죽을 지경이에요!! 누나! 제가 팍팍 밀어 줄 테니까 누나가 배우고 싶은 진법술, 부작술, 용독술, 의술 다 배워요! 하하하!!" 나와 누나가 잠깐 휴식이라도 취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위는 난리가 나있었다. 담탱이 주위로 애들이 모조리 몰려있는 것을 보며 나와 누나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현신이의 어깨를 치며 물었고 그 녀석은 감동에 겨운 얼굴로 나에게 소리쳤다. "검천지룡하고 갓 소드하고 싸운데. 우아아!! 나 이거 더 월드 시작하면서부터 기대했던 이벤트인데.... 드디어 볼 수 있다니. 감동이야!!" .....벌써 공지가 떴나보군. 하기야 내가 생각을 돌려 하기 싫다고 말하기 전에 공지를 띄어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술수일 것이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공지를 내 버리면 나로서는 나중에 거절을 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거짓말쟁이로 몰릴 테니까 말이다. 뭐 어차피 누나 때문에 그만 둘 생각은 결코 없으니 무시했다. 이기면 첫키스가 있을 것인데... 리마르딘이 싫다고 등을 돌리더라도 잡아서 강제로라도 싸울 생각이었다. 나는 담탱이의 자리 모니터에 떠 있는 공지문을 읽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운영자 치우입니다. 일주일 후에 있을 여름 이벤트에 대한 희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 예고에도 없는 공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 제국이나 에리두의 유저 분들이라면 누구나가 기다리던 대 이벤트가 이번 여름 이벤트에 있을 예정입니다. 바로 전 서버 레벨 순위 1위 검천지룡과 2위 갓 소드의 대결이 여름 이벤트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두 고수들의 대결을 많은 유저분들이 기대했지만 수 년 동안 검천지룡의 거절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대부분의 유저분들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오늘 검천지룡께서 허락을 하셨기에 수년간 기다렸던 결전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일시는 정확히 일주일 후 7월 1일 오후 두시가 되겠습니다. 검천지룡과 갓 소드의 뜻에 따라 관람은 불가하고 둘은 저희 운영자가 만든 공간에서 대전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둘의 대결은 전 세계의 멀티비전에 동시 생중계가 될 것이며 더 월드에 접속해서도 각 성과 마을에 설치될 가상멀티비전으로도 관람이 가능합니다. 무상검록의 주인이자 최초의 대륙 동서 횡단 주인공에, 중앙산맥의 마룡 사룡 암무를 물리친 한제국 최강의 고수 검천지룡과 에리두 최강의 국가 칼 하스렌드 제국의 황제이자 최초의 쓰리 마스터 갓 소드(신의 검) 리마르딘의 세기의 대결... 더 월드의 유저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게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최고의 이벤트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근일 내에 2차 공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월드 운영자 마스터 치우(蚩尤)] 거창하게도 써 놨네. 나는 약하게 실 웃음을 흘리며 진희누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누나는 방긋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검천지룡은 지금가지 계속 거절해 왔었잖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지?" "내가 어떻게 아냐? 혹시 모르지.. BBS에 검천지룡이 갓 소드에게 겁을 먹고 싸움을 회피한다는 말들이 계속 올라오니 화가 나서 승낙을 한 것일 수도..."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열에 다섯은 내가 대결을 회피한 이유를 저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겁을 먹어서 회피한 것이 아니다. 내가 대결을 피하는 이유는.... 에리두의 최강제국의 황제인 리마르딘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나는 리마르딘과 한 번 싸운 경험이 있다. 한때 에리두에서 여행을 즐겼던 나이고 정말 우연히... 운이 좋다 해야 나쁘다 해야하나 모르겠지만 리마르딘과 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황제라고 해서 성에서만 놀고 있으라는 법은 없다. 종종 신분을 속이고 잠행을 나와 용병 일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유희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우연히 용병길드간의 대결에 끼었는데 거기서 나와 리마르딘이 적으로 만난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가려 했지만... 자꾸 싸우다 보니 서로 진지하게 한 번 붙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에리두에서 1년 동안 돌아다니며 많은 강자를 봤지만 쓰리 마스터를 본 것은 처음이었고 자연히 그와 검을 겨루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쓰리 마스터라는 것은 싸워보고 알았다. 겨루기 전에는 그냥 강한 사람이구나... 한 번 싸워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고 주위 방해꾼들을 무시하고 1:1로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에리두에서 즐겨 사용했던 총으로 싸워보려 했지만.. 역시나 쓰리 마스터를 숙련도가 떨어지는 총으로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근처에 떨어진 장검 하나를 뽑아들고 숨겨왔던 무공을 펼쳤고 어이없게도 그는 내 무상검법을 막아 낸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그가 투 마스터 이상의 강자라는 것을.... 리마르딘 역시 당시에 엄청 놀랐을 것이다. 어쨌든 기분 좋게 싸우다 보니 어느 새 길드간의 싸움은 나와 리마르딘과의 싸움으로 변해 있었고 금방 전까지 칼을 겨누고 무식하게 싸우던 인간들은 멍하니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상대를 인정하며 무상검록 상의 최강기술들만을 연발했고 그 역시도 가진 바 모든 절기를 모조리 쏟아 부었다. 뭐 결국은 1000초만에 내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의 대결 때문에 내가 에리두로 넘어간 것이 알려졌지만 내가 싸웠던 상대가 리마르딘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제국의 황제라는 신분이었고 잠행을 나왔다가 나에게 패한 것이 알려지면 그의 명성에 큰 흠이 될 수도 있었기에 나와 그는 암묵적으로 입을 다문 것이다. 당시 나와 싸운 상대는 신분을 감추고 커 온 투 마스터라고 소문이 났고 모든 관심은 나에게로 쏘아지며 대충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아마 그 후부터였을 것이다. 리마르딘이 운영자의 최강고수 대결 요구에 응하기 시작한 것이. 한 번의 패배 이후 그는 나와의 재대결을 원했지만 나는 이날까지 거절만 했었다. 일차적으로 귀찮았고 그 때의 대결로 리마르딘이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재차 대결을 한다고 하더라도 승리는 내 것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뻔히 이길 시합을 하는 것은 내 성격상 맞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나의 키스가 걸린 일!!! 절대로 포기란 없다!! "무하하!! 리마르딘 죽여주마!!" 나는 호기롭게 외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문뜩 몸이 바늘에 쏘이는 듯 따끔따끔한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넷 룸 안의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별 미친 녀석 다 보겠다는 빛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하하... 장난. 장난말이야..." 나는 머리를 긁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내게 몰렸던 시선들이 다시 돌려졌다. 나는 몸을 축 늘어트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맥빠져... 살다보니 나도 이런 미친 짓을 하기는 하는 구나. 역시 나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거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쿡..." 그런 나를 보며 진희누나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희누나와 진호를 포함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저녁 8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나서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저녁을 챙겨먹은 후 내 방으로 올라갔다. 거의 게임을 할 때만 이용되는 내 방...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컴퓨터를 부팅 시키고 침대로 올라가 링크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OK."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역시나 리스가 된 곳은 남연성 리스장. 이제는 하도 많이 봐서 물릴 정도이다. 나는 부재중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했다. 비천검 : 얌마! 너 드디어 하는 구나! 자식 그동안 연락도 없더니 결국 이런 대 사건을 벌이네. 잘 하고.. 꼭 이겨!! 알았냐? 당가천하 : 너 나한테 이런 말 안 했잖아! 이 자식... 그렇게 싫어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냐? 혹시 이기면 여친이 뽀뽀해준다던? 검신 : 이 녀석... 나 없는 사이에 일 벌이네. 잘 해 봐라 임마. 혹 지면 알지? 그 양키 새끼 아주 박살 내 버려! 아랑 : 유빈아. 누나야. 사이트에서 공지 봤다. 잘 해! 그건 그렇고 언제 올라 올 거니? 천희 결혼식 전에는 올라 올 것이라 기대하는데... 선물은 꼭이다. 부재중 메시지는 네 통이었다. 모두 내가 대전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뭐 이 들이 내 친구 전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우선 비천검. 이 녀석은 나와 동갑으로 민호라는 이름인데 민우형 동생이다. 게임 상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진공.... 명호는 비천유흔(飛天流雲)으로 알려진 바로는 절정고수로 되어 있는데.. 실상은 실력을 감춘 최절정고수이다. 당근이... 신비스러움을 무진장 좋아하는 얼간이지.... 뭐 그렇게 따지면 내가 더 심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당가천하는 당삼빤스 민우형. 메시지를 본 나는 이 날카로운 직관력에 잠깐동안 몸을 떨어야 했다. 무서운 형.. 혹시 천리안이라도 가진 것 아냐? 검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희형. 형이 말한 대로 리마르딘은 양키. 즉 미국인이다. 나는 별 신경 안 쓰는데 천희형은 미국이라면 아주 이를 간다. 아마 행에라도 리마르딘에게 졌다가는 난 천희형에게 처형되고 말리라... 그것도 형의 결혼식장에서 말이다. 아랑은 민우형의 마누라인 아진누나다. 나한테는 사근사근하게 대해 주는데 남편인 민우형은 매일같이 구박만 하는... 전형적인 아주머니다. 물론 실제로 보면 외모는 아직 20대 초반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모두들 공지사항을 본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메일 창을 열어보았다. 텅 빈 메일 창을 본 나는 즉각 메일 창을 닫으며 민우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있어?] [있다. 왜 이제 오려고?] [아아. 지금 열창성으로 가려고.] [너 남연성이지?] [응.] [빨리 와라. 나 곧 사냥 나가야 되.] [그럼 의성수 비급을 가지고 사냥하고 있다가 나한테 줘. 내가 형 사냥하는 데로 갈게.] 여기 남연성에서 열창성으로 가려면 나라고 해도 게임시간으로 거의 하루가 걸린다. 현실시간으로 두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의미다. 민우형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알았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형과 대충 어디서 만날지 정한 나는 즉시 내 집으로 가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보물창고를 뒤져 두 가지를 꺼냈다. 하나는 천은수갑(天銀手鉀)이라는 장갑이었고 남은 하나는 천은장(天銀掌)이라는 절정무공 비급이었다. 형이 가진 의성수와 바꿀 일종의 보상품이었다. 천은수갑은 유니크아이템 중에 하나이고 천은장 또한 쉽게 구할 수 없는 최상급의 절정무공이다. 더구나 천은수갑을 끼고 천은장을 펼친다면 장력이 갑절이 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물건의 가치는 내가 가진 보물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물건들이지만 오히려 이것도 부족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저 가능성뿐이기는 하지만.. 혹 초절정무공을 얻기라도 한다면 지금 내가 가진 물건 따위는 쓰레기로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뭐... 보물은 비밀을 푸는 이가 주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소한 이 정도의 보상은 해 줘야 나도 마음이 편했다. 천은수갑과 천은장 비급을 품에 찔러 넣고 집을 나왔다. 열창성은 남연성의 북서쪽에 있기 때문에 나는 성의 서쪽 출구로 나가 즉시 전속력으로 경공을 써서 달렸다. 좀 있다가 누나가 접속할 것이니 최대한 빨리 민우형을 만나고 남연성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부신약영(浮身略影)까지 쓰며 달렸다. 무상검록 상에 수록된 부신약영은 현존하는 경공 중 가장 빠른 경공이지만 내력소모가 커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주로 강한 자들과 싸울 때 순간적으로 쓰는 것이 좋은 경공인 것이다. 하지만 레벨 300이 넘어 조화경을 넘어선 나는 움직일 때에도 자동적으로 운기가 이루어져 소모된 내력이 채워지니 지금같이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부신약영을 쓰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부신약영이 워낙 내력소모가 큰 터라 1시간마다 5분 정도씩 멈추고 다른 경공을 쓰면서 바닥에 다다른 내공을 채워야 했지만.... 길을 따라 갈 틈도 없었다. 나는 열창성과의 최단 거리를 잡아 무조건 앞으로만 달렸다. 중간에 산이 나오면 넘었고 강이 나오면 뛰었다. 절벽이 나오면 허공답보를 어김없이 쓰고 달렸다. 몬스터가 나오면 일부러 싸우기보다는 어기충소로 몸을 솟구쳐 포위망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해가 지고 날이 밝았을 무렵에야 나는 당문세가가 지배하는 열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형. 나 거의 도착했어. 어디야?] [유빈이냐?! 마침 잘 됐다!! 열창성 동쪽에 선홍의 계곡으로 와! 빨리!!] 에?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재빨리 선홍의 계곡으로 달렸다. 민우형이 이 정도까지 급하게 나를 부를 정도면 분명 무슨 큰 일이 생겼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부신약영을 사용하여 선홍의 계속에 도착한 나는 그 곳에 몰려든 사람 들을 보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우선 중요한 것은 민우형이었기에 다시금 메시지를 보냈다. [형. 도착했어. 무슨 일이야?] [이무기다!! 제길... 문파의 이류고수들을 끌고 레벨업이나 시켜 줄겸 나왔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이무기라니.. 나는 깜짝 놀랐다. 더 월드에 딱 하나씩만 존재하는 용과 신수, 드래곤, 마신들 유니크 몬스터는 아니지만 이무기는 레어 몬스터에 속하는 최강의 몬스터 중에 하나였다. 희귀한 확률로 리스폰이 되기 때문에 보기도 쉽지 않다. 이무기의 강함은 거의 신수에 육박한다. 이무기 하나를 잡기 위해서는 최절정고수 하나에 절정고수 열 이상이 달려들어야 할 정도이다. 나는 그제야 선홍의 계곡으로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분명 이무기가 잡힐 때 떨어지는 아이템이라도 스틸해 볼까 생각하며 몰려든 이들일 것이다. [빨리 와! 선홍의 계곡 가장 안쪽이다!! 나 혼자로는 역부족이야!!] 형의 메시지에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날려 선홍의 계곡으로 들어갔다. 물론 중간에 외모를 바꾸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레어 몬스터가 뜨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꼴이고 자연히 이건 하나의 작은 이벤트라 봐도 무방하다. 이미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려있을 것이고 분명 지금의 상황을 저장해 두었다가 사이트에 올리는 유저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본래 모습으로 설치면 어찌 되겠는가? 혹 학교 친구들에게 걸릴 위험도 있었다. 중간에 시체가 된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장검을 뽑아들고 재차 몸을 날린 나는 금새 선홍의 계속 안쪽에 이를 수 있었다. 흡사 용과 같이 생긴 거대한 이무기가 화염을 토하며 사방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고 그 사이에 민우형이 쉴새없이 움직이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으며 이무기의 공격이 닿지 않는 범위 밖에는 여러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무기가 죽을 것 같으면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 공격을 해 약간의 경험치와 아이템을 주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으리라. 민우형은 상당히 위태해 보였다. 구경하는 이들 중에 필히 절정고수들이 있을 것이지만.. 형과 같은 문파가 아닌지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더구나 형의 명성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 않고 오히려 구경을 하고 있다. 아무리 형이 암왕이라 해도 혼자서 레어 몬스터를 잡을 수는 없는 법. 이미 많은 타격을 받았는지 호흡이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가 있었다. "형!!" 나는 즉시 어기충소를 전개해 몸을 띄우고 궁신탄영으로 이무기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형이 이무기에게 당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막 형의 몸에 불길을 뿜는 이무기에게 검을 날렸다. 이기어검술이었다. "이 자식아!! 빨리 오라니까 뭐 하다 이제 와?!!" "나도 최대한 빨리 온 거야!" 내가 옆에 내려서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솔직히 남연성에서 열창성까지 18시간만에 올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잘났다. 제길... 체력 다 떨어졌다. 나는 운기 좀 할 테니까 네가 어떻게 해 봐." 운기행공을 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형 정도의 최절정고수라면 서서도 어느 정도 운기를 할 수 있고 혹 위험이 있다 싶으면 즉각 행공을 멈추고 몸을 피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장소에서 형을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이무기뿐이었으니 내가 이무기만 막으면 되는 것이다. "OK!" 고개를 끄덕인 나는 즉각 검을 회수하며 이무기에게 달려들었다. 레어 몬스터이니 만큼 절정무공 이상만이 통하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파천황검(破天荒劍) 일식(一式) 출검(出劍)!! 파천황검. 내가 익히고 있는 절정무공 중에 하나이다. 일종의 중검술로 거의 도술에 맞먹는 강력한 파괴력을 내는 무공이 바로 파천황검이었다. 얻은 지 얼마되지 않아 아직 성취도가 9성 정도이지만 워낙에 내 기본 능력치가 높기 때문에 타 절정무고의 11성 정도의 위력까지도 충분히 낼 수가 있었다. 출검은 일종의 발도술로 검을 뽑으면서 빠른 속도로 검기를 날리는 기술이었다. 출검으로 이무기의 불길을 양단한 나는 즉시 어기충소로 몸을 솟구쳐 이무기의 머리에 이르렀다. "이거나 먹어!!" 파천황검(破天荒劍) 사식(四式) 천락(天落)! 거의 변화가 없이 강력한 일격의 중검술로 이루어진 파천황검의 초식 중에서 유일하게 다변을 이루는 초식이다. 순간적으로 내 손에 들린 검이 수십 개로 분리되며 하늘을 찢어버리듯이 사방으로 검기를 발산했다. 크아아아!!! 내 검은 그대로 이무기의 얼굴을 난도질했고 이무기는 피를 뿌리며 목이 꺾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이무기가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이무기는 그대로 불길을 내뿜었고 나는 검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파천황검 삼식 천지분쇄(天地分碎)!! 내 검에서 뻗어나간 검기는 불길은 그대로 두 개로 양분시켜 버렸고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이무기의 머리에 또 다른 큰 상처를 입혔다. 화끈한 열기가 몸을 감쌌지만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길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바로 머리위로 떨어져 내리는 이무기의 거대한 꼬리를 본 것이다. 실수였다. 이무기 정도의 레어 몬스터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안일하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다. "유빈아!!!" 내 위험을 본 민우형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피하기는 늦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들며 가장 몸에 익은 검술을 펼쳐냈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일장(一章) 이절(二絶) 단(斷)! 내 검이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였고 순간 천지를 꿰뚫는 하나의 빛이 천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제길....." 내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자 그에 맞추어 이무기의 몸이 머리에서 꼬리까지 세로로 선이 그려졌다. 그 선이 완전한 형태를 이룸과 동시에 이무기는 머리부터 두 조각으로 벌어졌다. "무상검이다!!!" 구경하던 유저 하나가 소리쳤다. 그 하나의 외침의 파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퍼져나갔다. "검천지룡!!!" "정말이야?!! 저 사람이 검천지룡 맞아?!!" "전에 봤어!! 저건 분명히 무상검록의 무공이야!" 걸렸군.... 나는 쓰게 웃으며 주위에 떨어진 아이템들을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아이템을 먹기 위해 유저들이 몰려들어야 할 것이지만.. 내 이름이 가지는 파장때문에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도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야!! 뭐해?!! 아이템 안 챙기냐?!!" 어느새 다가온 민우형이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을 미친 듯이 수거하기 시작했다. 나도 형을 따라 아이템들을 주워담았다. 그제야 주위의 사람들도 몰려들었지만 이미 이무기에게서 나온 아이템은 나와 형이 모두 수거를 한 상태였다. "굿 럭~!!" 절규하는 유저들의 속을 가볍게 긁어 준 민우형은 쓴웃음을 머금는 나와 함께 도망치듯이 경공을 써서 선홍의 계곡을 벗어났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망쳐 온 나와 민우형은 즉시 얻은 아이템들을 감정했다. 검 한 자루에 비급서 두 개. 단약 한 개에 삼 다섯 뿌리... 마지막으로 이무기의 내단이었다. 특히 비급서 두 개 중에 하나는 절정무공이었다. "이거 운 좋은데. 화룡무(火龍舞)다. 이거 절정무공 중에서도 최상위 위력을 가진 무공 중에 하나인데. 이거 내가 가질란다. 괜찮냐?" 민우형은 나에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무가 좋은 무공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민우형에게도 맞지 않는다. 민우형의 무공 기반은 독공이고 극성의 화룡무는 익혀봤자 손해만 보는 무공이다. "또 팔아먹으려고?" "당근이다야. 이 비급 하나면 우리 당가의 한 달 재정인데." 하긴.. 나는 혼자 사는 터라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지만 민우형은 아니다. 먹여 살리는 식솔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무기의 내단까지도 형에게 넘겼다. "이것도 가져가. 나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응? 왜? 가져가서 네 애인 주면 좋잖아." "됐어. 어차피 양강무공을 배우지 않을 거니까 필요 없어. 그보다 부탁했던 의성수나 줘." "뭐.. 나야 좋지만...." 입맛을 다시며 내단을 품에 넣은 형은 의성수 비급을 꺼내어 나에게 주었다. 잠시 비급을 살펴보던 나는 나중에 비밀을 풀어보기로 하며 품에 넣고는 준비해 왔던 천은수갑과 천은장을 형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의성수 댓가." "에? 야! 이건...." 형도 천은수갑과 천은장을 알아보며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 몸을 돌려버렸다. "형이 배우면 좋을 거야. 어쩌면 절정으로 익히면 오마와도 대결할 수 있을걸." "어차피 의성수는 배우지도 못할 무공이잖아. 그런 것을 주고 이 것까지 받을 수는 없다." "혹시 몰라. 그 것으로 부족할 지도." 내 말에 형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히죽 웃으며 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는 갈게. 누나가 기다리거든. 그리고 나중에 배 아파 하지 마. 뭐 알아도 형에게는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야.. 대체 무슨 소리야? 혹시 그거....." "확신하지는 못 해.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럼 나갈게. 또 봐!" 나는 즉시 경공을 전개해 남연성으로 달렸다. 숨겨진 네 번째 초절정무공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는 비급... 내 품에 들어있는 그 비급이 무척이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무기를 잡고 나서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소문은 더 월드 전체로 퍼져 나가 버렸다. -검천지룡 재등장! 더 월드의 홈페이지 BBS에는 이런 제목으로 된 글들이 난무했고, 순식간에 몰려든 유저들로 인해 사이트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와 리마르딘의 대결 공지로 사이트가 땀빼고 있는데... 이런 사건까지 또 일어나 버렸으니. 고생하는 홈페이지에 묵념을...... 다음날 누군가가 올린 비디오 파일은 불과 30분만에 조회 수 10만을 돌파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활약하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파일이 수없이 있었지만 내가 잠적을 해 버린 후로는 이러타할 나와 관련된 영상이 없었던 것이다. 중간에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일년에 한 번 꼴이었으니 그 때마다 게시물은 폭발적인 조회 수를 자랑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내가 이무기를 단번에 일도양단 시켜버리는 모습이 담겨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구도가 괜찮았던 작품은 그 날의 최고의 스크린 샷으로 뽑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달의 최고 스크린 샷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올해의 최고 스크린 샷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뭐 나와 리마르딘이 싸우는 모습을 스크린 샷 하는 것에 빼앗기겠지만.... 이 정도라도 충분히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 달의 최고의 스크린 샷이었으니 절정무공 한 권을 받았을 것이고.... 찍은 영상은 연일 게임 프로그램에 방영이 되었으니 현금까지도 짭짤하게 먹었으리라.... 완전히 재주는 누가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겨간 형상이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거든. 현재 나에게 중요한 것은 리마르딘과의 대결뿐이었다. 아니 그 후에 있을 진희누나와의 뜨~거운 키스가 중요할 뿐이다. 진짜 이벤트 시작이 빨리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오죽하면 이 내가 기다리다 지쳐 발광을 할 정도였다. 게임에 접속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더 시간이 안 가거든. 하루를 100일같이 기다렸다. 수면제를 먹으면서 강제로 잠을 자며 기다렸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은 흘러갔고 결국 운명의 날이 밝았다. 지금 시간 1시 40분. 이제 남은 시간은 20분이다. 뭐 게임에 접속하면 3시간도 더 뒤지만... "가 볼까?" 이미 모든 준비는 다 해 두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링크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그래."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빛의 터널... 그 끝에 더 월드의 세계가 펼쳐졌다. 남연성의 리스장에 들어 온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훗.. 오늘 날씨는 맑군. "야야. 저기.... 저 사람... 검천지룡 아냐?" "설마..." "봐.. 흑의에 낡은 철검... 산발한 머리. 똑같잖아." "따라하는 사람이 한둘이겠어?" 주위가 소란스러워 졌다. 이미 어제 리스를 하기 전에 과거에 입었던 옷을 꺼내 입고 쓰던 검을 허리에 차 두었다. 그리고 단정하게 묶어두었던 머리도 풀어 산발을 했다. 이왕에 공식적으로 나갈 것. 이렇게 하고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주위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때 내 앞쪽에 빛이 번쩍이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텔레포트다... 에리두에서도 최고의 마법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한 제국에서는 결코 보기 힘든 스킬.. 하지만 그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검천지룡님 되시죠?" "그렇게 불리죠." "운영자 치우라 합니다. 제 시간에 맞추어 주셨군요." 운영자 등장. 고래로 운영자의 등장은 유저들에게 최고의 이벤트 중에 하나였다. 게임 상에서 운영자란 일종의 신. 관조하며 지탱하는 신이다. 그런 신을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유저들은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나까지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주위에 유저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치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여기는 좀 위험하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결전장에서 하도록 하죠. 리마르딘님께선 벌써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과 함께 나와 치우는 텔레포트가 되었다. 빛이 사라지고 도착한 곳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평야였다. 그 곳에는 이미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의 갑주에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장신의 사내... 허리에 걸린 검이 햇빛을 머금으며 찬란하게 빛을 뿌리고 있다. "오랜만이다." 리마르딘. 에리두 최강의 유저. 뭐 공식상으로는 말이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나 역시 마주 손을 잡으며 답했다. "1년만이군요. 아니.. 2년인가?" "하하. 정확히 1년 7개월 만이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일순 표정을 굳히며 나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다. "일전의 일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감사? 아.... 분명 그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감사를 받았다. 상대방이 고맙다는 뜻을 표할 때 거절하는 것은 예절이 아니라는 것이 내 지론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싸움은 제가 겨우 이긴 것이니까요." 뭐 지금은 더 쉽게 이길 수 있겠지만.. 실상 나는 그 때 갓 레벨이 300이 넘은 상태였다. 거기에 기본 능력치도 한계에 다다르지 못했었다. 내가 모든 능력치를 한계에 달한 것은 레벨이 339가 되었을 때다. 뭐 이건 꼭 말할 필요가 없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에는 내가 겨우 이긴 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고 잘못 했으면 내가 질 수도 있었으니까. "어라? 두 분 만난 적이 있으셨습니까?" 치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그저 웃어 보였고 리마르딘이 치우에게 대답했다. "작년에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잠행 중에 용병으로 가입해 길드전에 참가했는데 거기에서 이 친구를 만났죠. 처음에는 설마 그 유명한 검천지룡이라는 것을 몰랐고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져 버렸답니다. 하하하." 그의 말에 치우는 탄성을 터트렸다. 그 때의 사건은 워낙에 유명해서 치우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때... 의문의 투 마스터가...?" "바로 저였습니다." "이거 정말 놀라운 사실이로군요. 유저들에게 밝혀도 됩니까?" 이것도 하나의 유저들을 이벤트에 열광케 하는 방법일 것이다. 리마르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다시 대결이 가능해 졌으니 밝혀도 무방합니다." "하하. 그럼 오늘의 결투는 과거의 패배에 대한 도전이 되겠군요." 리마르딘은 웃으며 긍정을 표했다. "좋습니다. 그럼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 하고... 두 분 모두 마지막 준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확히 이 곳 시간으로 2시간 후 대결이 있을 것입니다." 나와 리마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각각 반대편 자리에 앉으며 대충 몸 상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리마르딘은 장비를 점검중이고 나는 운기를 하며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었다. 눈을 감고 얼마나 운기를 했을까...? 치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지금부터 전 세계 게임 유저들이 기다리던 더 월드 최강자전 이벤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길.... 이건 완전히 판단 미스다.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벌써 두시간 동안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리마르딘에게 자그마한 상처도 못입히고 있는 상태였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삼장(三章) 일절(一絶) 만(滿)!" 공식적으로 대련이기 때문에 기술을 쓰면서 무공 이름을 외쳐야 했다. 나는 무상검의 만을 펼쳐냈고 내 검에서 수십만의 기검이 만들어지며 리마르딘의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절대방어!!" 크아아악!! 또 저거야!! 리마르딘이 검을 세로로 세우며 외치자 그의 몸 주위로 백색의 방어벽이 펼쳐지며 내 모든 공격을 차단해 버린다. 사룡 암무마저도 피를 토하게 했던 무공인 데 리마르딘에게는 작은 생채기 하나 만들 수 없었다. "제길....." 이게 다 저 빌어먹을 검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검인지 뒷골이 당길 정도로 열이 받는다. "타핫!!" 한번의 공격을 막아 낸 리마르딘은 즉시 나에게 몸을 날려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나는 재빨리 부신약영을 전개해 리마르딘의 뒤편으로 움직이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채앵!! 또 막혔군... 역시 이 상태로는 안 되겠어.... 더 이상 직접적인 공격은 불가능함을 느낀 나는 몸을 뒤로 빼며 리마르딘과 거리를 늘리고 숨을 골랐다. "대체 그 검 뭡니까?" 저런 검이 있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세상에 절대방어를 행할 수 있는 아티팩트라니. "성검 알케스트라고 부른다." 그냥 얻을 수 있는 검은 분명 아니다. 저 검의 능력이라면 유니크 몬스터와도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방어력뿐이니 상대를 할 뿐이지 이기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현재 리마르딘의 매직 아이템들은 검뿐만이 아니다. 그가 입고있는 갑옷은 마스터 아이템이었고 별에 별 마법들이 걸려 있다. 방어력 상승은 물론이고 자체 치유력까지 있는지 상처를 입혀도 대부분 치료가 되어버린다. 부츠는 아무래도 속도향상에 지형효과를 무시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 그 외에도 건틀렛에 서클렛 할 것 없이 모조리 매직 레어 아이템이다. "그런 검이 있었으면 왜 전에는 안 쓴 겁니까?" "얼마 전에 구한 검이지." 잘났수다. 완전한 아이템발... 죽이는군요. 이제까지 별로 아이템으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지 않았던 나였다. 나 역시도 여러 가지 유니크아이템을 가지고 있지만 그다지 필요가 없어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중에 몇 가지 들고 올 것을 실수했다는 생각뿐이다. "벌써 끝난 것인가?" 말도 안 되지. 누나의 키스가 걸린 일인데 내가 이대로 포기할까 보냐? 나는 혀를 차며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일종의 '이제는 제대로 하겠다'라는 표현이었다. "인정하겠소. 솔직히 이 것까지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까지 사룡 암무와 싸울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후에 그 녀석을 보게 되면 쓸 것이라 아껴둔 것인데 무지하게 아까웠다. 더구나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닐 터. 이런 비장의 기술을 만인 앞에서 선보이는 것은 못내 찜찜했다. 허나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유?! 당연히 누나의 키스가 걸리지 않았느냐?!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이 불필요하다. "조심하시오. 아무리 절대방어라지만... 이 것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오." "어디 해 보게." "하지 말라고 해도 할거요. 흐읍!!" 나는 즉시 이제껏 사용하던 검선공을 풀고 무상공(無上功)을 펼쳤다. 내가 주로 쓰는 검선공은 무상검록에 수록된 무공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무상검록을 얻기 전 단서가 되었던 검보에 실려있는 무공이라 해야 정확할 것이다. 무상검록의 무상검법에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신공은 바로 무상공이다. 아니 무상검록에 수록된 모든 무공에 기틀이 되는 신공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이 무상공은 무상검록이 있다고 해서 익힐 수 있지 않다. 검보와 무상검록이 함께 자리하고 또 한가지 조건에 충족이 되어야 얻을 수 있는 신공이다. 내가 보기에 더 월드에 존재하는 신공 중 최강의 신공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설명해도 될 일이고... 지금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내가 보여준 무상검법이 완성된 것이 아닌 짜투리라는 것이지... 무상공을 펼치며 부신약영을 펼치면..... "허억!!!" 바로 이렇게 되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내가 갑자기 바로 코앞에 나타나 버리자 리마르딘은 오늘 처음으로 기겁하며 비명을 토해냈다. 재빨리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아 보이지만 이미 늦었어!! "진사신무(眞四神武) 청룡신퇴(靑龍神腿) 팔성(八成) 광파(光波)!" 처음에는 무상검으로 보내버릴까 했지만 이대로 끝내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사신무의 청룡신퇴로 복부를 날려버렸다. 검을 들 세도 없이 맞아버렸으니 절대방어고 뭐고 필요도 없지 않겠어? "으윽.... 방금 그 기술은....?" 나는 히죽 웃어 보일 뿐 이렇다할 대답은 해 주지 않았다. 리마르딘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도 내가 일부로 봐 준 것이라는 것을 알아 본 모양이다. 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겠지. "회복 다 되지 않았나요?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일종의 도발이었다. 하지만 리마르딘은 거의 천만에 육박하는 군대를 가진 대제국의 황제였다. 처음에는 얼굴을 일그렸지만 금새 마음을 다잡으며 회복에만 전념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다." "........어서 하세요." 이거 본전도 못 찾은 기분이다. 그냥 아무 말도 않고 공격을 해 버렸으면 어떻게든 부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었는데.... 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입 맛을 다셨다. 잠시 후 완전히 타격에 대한 회복이 되었는지 리마르딘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에게 물었다. "왜 이제까지 실력을 감추고 있었지?" "가진바 능력의 3푼을 숨기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물론 이건 우리나라나 중국의 이야기지. 서양인들이 듣기에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것이다. 역시나 리마르딘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숨겨서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저도 몰라요. 그냥 오래 전에 읽었던 무협지에서 종종 그렇게 말하기에 따라하는 것 뿐." "흠... 그럼 지금은 모든 것을 다 보여 주겠다는 것인가?" "알아서 생각하시죠."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 리마르딘의 목에 가리켰다. 리마르딘도 검을 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는 일종의 지역 차로 인한 생각의 차이로 결론지어 버린 듯 했다. 에고.. 조금 더 생각하면서 골치 좀 썩지... 진짜 잘 안 걸리네. 머리가 좋은 거야? 아니면 단순한 거야? "좋아! 조금 전에 비해 얼마나 달라지는지 보고 싶군! 와라!!" "그렇지 않아도 갈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기고 나서 누나를 찾아가 상품을 받아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슬슬 지겨워 졌거든. 무상공은 쓰기 싫었었지만 이미 쓴 것. 더 이상 감출 것도 없다. 나는 무상공을 일으키며 부신약영을 펼쳤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일장(一章) 이절(二絶) 단(斷)!!" 얼마 전 이무기를 베어버린 초식이다. 나는 즉시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리그었고 리마르딘도 어김없이 검을 세우며 절대방어를 구사했다. 이제까지도 막아냈으니 이번에도 막아 낼 수 있으리라는 그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은 모든 것을 절단해 버리거든. 모든 것을 막아내는 절대방어와 모든 것을 절단해 버리는 검. 일명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와 모든 방패를 뚫어버리는 창의 대결이라고 할까? 결론은.... "말도 안 되는!!!" 창의 승리였다. 양분되어 버린 자신의 검을 보며 신음을 흘리는 리마르딘에게 나는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속을 긁었다. 졸지에 고철이 되어버린 성검에게 묵념을..... "이건 말도 안 돼!" 드디어 리마르딘이 평정심을 잃었다. 나는 이제까지의 장난스런 웃음이 아닌 약간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뭐가요? 검이 부러진 거요? 솔직히 성검 정도면 시간이 르면 저절로 붙지 않나요?" 물론 리마르딘이 이런 것 때문에 소리가 지른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소리친 이유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절대방어가 부수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시치미를 뚝 떼었다. "그런데 그만 항복하실 건가요? 검이 한 자루 더 있으니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항복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지만...." 리마르딘의 허리에는 다른 한 자루의 검이 더 매달려 있다. 저 검은 그랜마스터의 마스터 아이템으로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이러타할 마법은 걸려있지 않고 오로지 공격력 보정 300%가 걸려있다고 한다. 기본 공격력도 도끼계열의 마스터 아이템을 제외하고는 최고로 높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검 중에서는 최강의 검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성검 알 어쩌구 하는 검보다는 저 검이 더 좋게 보이는데.... 리마르딘은 그게 아닌가 보다. "쳇... 재미없네요." 나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 아저씨는 고지식한 아저씨란 말야. 두 번이나 봐 줬는데 여전히 재미를 못 느끼고 있다. 이왕에 싸우는 것 재미있게 싸우기를 바랬는데 말이다. "그만 하죠." 나는 몸을 돌려 치우를 찾았다. 하지만 그 보다 먼저 리마르딘이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절대방어를 뚫을 수 있었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요." ".....장난으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이라니까요. 단은 모든 것을 자르는 기술이고... 절대방어는 모든 것을 막아내는 것이죠. 모든 것을 자르는 것과 모든 것을 막는 것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요?" 내 물음에 리마르딘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알 수 있을 턱이 있어? "모르겠군. 어떻게 되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둘 중에 하나가 이기는 것으로 끝나죠." 나의 말에 리마르딘은 띵한 얼굴을 해 보였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잘리거나 막히거나 둘 중에 하나죠. 저로서는 잘리면 좋은 것이고 막히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걱정 없이 단을 쓴 거죠. 운 좋게 잘렸고 제가 이긴 거죠. 그게 다예요." "그런가....?" 뭐 그렇지. 그럼 뭘 더 바래?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치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치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더니.... 이거 진짜 나오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 어쩌지?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리마르딘이 기권을 해 주는 방법이지만 뭔가 생각하는 듯한 그는 승패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결국 여기서 가장 빨리 나가는 방법은 내가 기권을 하는 것인데..... 그랬다가는 누나의 키스를 못 받는다는 말이다! 별 수 없군... 저 아저씨를 정신차리게 만들어야지... "그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일인가요?" 말이 없다. 질렸군. 진짜 고지식한 양반이다.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내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다니까. 나는 머리를 긁으며 그에게 말했다. "고지식한 아저씨." "뭔가?" 듣고 있기는 하는군. "레벨이 높으면 장땡이고 장비가 좋으면 지존이라고 생각하나요?" "그건....." 물론 그렇게 하면 지존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일단은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나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만 가지말고 샛길로 한 번 들어가 봐요. 재미있는 아이템이 놓여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절대방어 하나만 믿고 성검을 써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소. 나 같으면 차라리 뒤에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마스터 아이템을 쓰겠네.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있는 매직 아이템이 좋기는 하죠. 일종의 강해지는 길이니... 허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길을 가는데 꼭 자신까지 가야 하겠어요? 한 번 미친 짓 해 봐요. 남들이 가는 길 무시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아보세요. 물통 하나 들지 않고 사막횡단을 해 보세요. 어떤 이들은 미친 짓이라 하지만 혹시 알아요? 말라죽는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모래 속 고대유적에 들어가서 그곳에 잠들어 있는 미녀를 얻을지... 뭐 진짜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난 것 아닌가요? 어차피 게임인데." "무슨 소리지?" 역시 둔해. 어떻게 저 정도로 사람 말을 못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리마르딘을 보았다. 이거 진짜 그냥 모른 척 해 버려? 아니면 진짜 미친 짓 해 버릴까? 여기서 미친 짓 하면 대 사건 터지는데 말야. 보는 눈이 족히 수십 억은 될 터인데. "큭큭큭...." 문뜩 미친 짓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어차피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검천지룡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한 번 대 사건 터트려 보는 것도 좋겠지. "암무(暗霧). Come." 내 갑작스런 말에 리마르딘은 의아한 눈을 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버렸다. 쩌억 벌린 얼굴로 나를.. 아니 내 뒤에 버티고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는 거대한 흑룡을 보며 말이다. 나는 암무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을 반 죽여놓고 귀찮아서 등을 돌렸더니 제 자가용이 된다고 하데요." 이날 내 이름 앞에 또 하나의 수식어가 붙어 버렸다. 바로 사룡 암무의 주인이라는....... 5 - 천희형의 결혼식 -삐!!! 서울행 열차가 14:00에 출발합니다. 탑승을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 6번 통로로 향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무던히도 귀를 자극한다. 나는 시계와 화장실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안내방송이 한창인 열차는 내가 타야 하는 열차이다. 출발 시간까지는 앞으로 5분. 두말할 나위 없이 지금 바로 열차에 탑승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자식 왜 안 나와?" 문제는 화장실 안에 들어가 있는 진호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20분 동안 소식이 불통이다. 시골에나 유물로 남아있을 고전의 화장실도 아니니 빠질 일도 없을 것인데 말이다. 내 속을 새까맣게 태워 놓은 진호는 그 후로 2분이 지나서야 배를 쓰다듬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아... 죽을 것 같아..." "죽을 때 죽더라도 기차에 타고나서 죽어!" 나는 즉시 진호의 팔을 잡고 6번 통로로 달렸다. 거의 나에게 끌려가다 시피 한 진호는 좀 천천히 가자고 소리를 쳤지만... 기차 놓치며 책이 질껴? "왜 이리 늦었어?!" 시연선배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우리를 보며 빽 소리를 친다. 그 옆에 진희누나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진호를 시연선배에게 던지듯이 보내버리고는 누나에게 맡겨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불평은 기차에 타고나서. 우선은 달려요!!" "으윽.. 또야!! 화장실!!" "기차에서 싸!!" 지금 나와 진희누나, 진호, 시연선배는 대전으로 가는 중이다. 목적은 당연히 천희형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나는 어쨌든 가야 했고 진호도 오래 전부터 형과 인연이 있었기에 참석하기로 했다. 진희누나와 시연선배는 천희형을 그다지 오래 안 것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 무척이나 친해져서 기꺼이 우리들을 따랐다. 아직 형의 결혼식 날까지는 사흘이 남았지만 이 기회에 대전에서 며칠 머무를 생각으로 오늘 출발키로 한 것이다. 진희누나와 시연선배가 조금 문제였지만 천희형과 민우형이 보호자로 나서 어떻게 부모님들을 설득한 것 같았다. 기차표에 적혀있는 번호와 맞는 좌석에 앉은 나는 즉시 눈을 감았다. 어제도 밤을 새서 게임을 하고 오늘 아침까지 잠을 자지 않아서 무척이나 졸렸다. 뭐 40 분이면 대전에 도착하니 지금 자더라도 금방 일어나야 하지만... 안 자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다. "누나.. 도착하면 깨워줘요..." "응." 나는 누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말했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누나의 손길을 음미하며 나는 수마(睡魔)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어서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유빈이잖아!" 내가 게임센터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아진누나가 날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웃으며 누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 오랜만이... 웁." 인사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누나에게 안겨버렸다. 누나는 자신의 가슴에 내 얼굴을 묻히고는 너무 반갑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나야 기분은 좋았지만 그 이전에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우우... 웁!! 수... 숨막혀...." 아진누나의 가슴은 무지 크다. 민우형이 아진누나의 가슴이 글래머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누나의 가슴은 예술이다.. 라고 민우형과 천희형은 툭하면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간에 살인무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버둥거리던 나는 결국 산소결핍으로 추욱 늘어졌고 그제야 내 상태를 알아 본 아진누나는 '어마 난 몰라! 또 저질러 버렸네~!'를 연발하며 허둥거렸다. 한 마디로 이건 누나를 만날 때마다 겪는 연례행사라는 말씀이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누군가가 나의 몸을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힐끔 눈을 떠보니 진희누나가 내 몸을 잡은 채 아진누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어~! 유빈이구나!! 오늘도 살아 남았냐?" 그때 아진누나의 뒤쪽에서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기른 20대 후반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남자 주제에 머리를 기른 것도 모자라 머리에 별 짓을 다해 오색 찬란 무지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저 펑키가 민우형이다. 형의 저 긴머리는 종종 아진누나의 손에 잡혀 고문도구로 이용되지만 형은 끝까지 멋을 고수한다며 자르지 않는다. 나 같으면 백 번도 더 자르고 남았으리라... "녀석.. 눈이 풀렸네.. 아진아 좀 심하지 않아?" "너무 오랜만에 보는 통에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아진누나가 나에게 미안하다는 눈으로 용서를 빌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아아. 네. 괜찮아요. 그보다. 누나하고 형.. 화해했나 보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게임 상에서 본 민우형은 나 죽네, 이혼하네 난리이던데 말야. 뭐 이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누나와 형을 본 것이 벌써 몇 년인데... 그 동안 싸운 것만 치더라도 책으로 15편짜리 장편소설을 쓸 수 있을걸.. "그냥 봐 주기로 했어.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 무릎까지 꿇고 미안하다 하는데 용서해 줘야지." "아.. 하하하하..." 그렇군... 법원 간다며 장엄하게 외치고 리스를 하더니... 술집 가서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누나에게 울면서 애원했다는 말이지... 어설프게 웃는 형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진짜 몇 년 동안 보아서 이미 느끼고 있는데... 역시 형은 공처가야. "그것보다... 이 애가 네 애인이냐?"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형은 재빨리 진희누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게임 상에서 진희누나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형은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누구라는 것은 모른다. 당연히 지금 우리 일행 중에 여자가 둘 뿐이니 형이 알 턱이 없지만.... 진희누나가 내 팔을 껴안고 있는 것을 보며 단번에 찍어낸 것이다. "맞아요. 진희누나 인사해요. 이쪽은 민우형." "안녕하세요..." 누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민우형은 그런 진희누나를 보며 흡족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녀석... 재주도 좋네.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는데 이유가 있었군. 아진이 보다 백 배 여..........자 답지 못하군." 형이 그러면 그렇지. 열심히 진희누나를 칭찬하던 형은 아진누나가 팔짱을 끼며 노려보며 즉시 뒷말을 바꾸었다. 본래는 '아진이 보다 백 배 여자답군'이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아하하. 누가 뭐래도 우리 아진이가 최고지. 안 그래?" "어련하시겠어요." 나를 포함한 진희누나, 진호, 시연선배의 맥풀린 시선이 민우형을 강타했다. 점점 고립되어 가던 민우형은 이래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하하... 그. 그보다 옆엔 누구냐? 친구들?" 불쌍한 형.. 나라도 형의 장단에 맞춰줘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진호와 시연선배를 소개했다. "이쪽은 진호. 그리고 옆에는 시연선배. 진희누나 친구예요. 둘 다 지금 천희형이 맡고 있어요." "호오. 이 애들이? 반갑다. 나는 노민우라 한다." 민우형은 이미 진호와 시연선배에 대해 들어본 듯 하다. 하기야 천희형이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듣지 못할 일이 없다. 지금은 비록 천희형이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잘 찾아오지 않지만 말이다. 형이 자기소개를 하며 손을 내밀자 넉살좋은 진호가 재빨리 형의 손을 잡으며 웃어 보였다. "문진호입니다. 그보다 형이 암왕이라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하하. 별로 대단한 것은 아냐. 나보다는 천희나... 여기 유빈이 녀석이 더 대단하지." 대단하지 않다니... 최절정고수가? 수천만의 한 제국 유저 중에 최상위 50명안에 드는 존재가 대단하지 않다고 하면 진호는 뭐가 되겠는가. "형이 안 대단하면 저는 뭐죠?" 역시 진호도 나와 같은 생각에서인지 히죽거리며 되물었다. 민우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아!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손님을 여기에 세워 둘 수야 없지. 자자. 들어 와." 그제야 게임센터 입구에서 이제까지 죽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민우형은 재빨리 우리들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나와 일행은 형을 따라 안쪽의 휴게실로 향했다. 그 곳엔 내 또래의 남자아이 하나가 머리에 책을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얌마! 일어나!!" 민우형은 그 남자아이를 발로 뻥 차 버렸다. 진호나 진희누나, 시연선배는 그런 민우형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앞으로 나가 민우형과 같이 그 남자아이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형님 오셨다!! 빨리 안 일어 나냐?!" "우씨!! 누구야!!!" 내 발길질에 녀석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잠시 두 눈을 깜박거리더니 다시 돌아누워 버린다. "유빈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꿈이군..." "............형.. 나 오늘 온다고 말 안 했어?" 어이가 없어진 나는 민우형을 돌아보며 물었다. 형은 그제야 손을 탁 치며 소리쳤다. "깜박 했다!" ".......그렇게 살면 재밌수?" "아하하. 미안미안. 나 진짜 네가 오늘 올 줄은 몰랐다." 민호는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이런 녀석이 8년 동안 함께 해 온 친구라니... 새삼스레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리고 꼭 내 잘못 만은 아니잖아. 너도 나한테 말 안 했잖아." ".......형에게 메일 쓰면서 너한테도 같이 보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랬냐? 나 메일 검사 안 하거든." 그렇지. 이 녀석은 메일은 절대로 안 본다. 녀석의 메일 함을 보면 읽지 않은 메일이 수북히 쌓여있을 것이다. 가끔씩 시간 나면 읽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 두 개고 나머지는 그냥 읽지도 않은 채 휴지통에 버려 버린다. 그 때문에 민우형에게 부탁해 민호에게 전해 주라 했던 것인데... 민우형도 깜박 했단다. 어쩌겠어.. 이 형제가 원래 이런데 말야.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됐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흐흐. 그것보다 옆에 여자가 네 여자친구냐?" 민호는 진희누나를 보며 음흉한 눈빛을 해 보였다. 움찔한 진희누나는 민호의 시선을 피하며 더욱 나에게 달라붙었다. "이런... 저 나쁜 놈 아니에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하죠. 전 노민호라 합니다! 저 불쌍한 양아치 최유빈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자그마치 8년 동안 함께 놀아 준 아~아주 착한 인간이랍니다." "문진희라고 해요..." "진희씨 반가워요. 정말 예쁜 분이네요. 유빈이가 뻑 갈 이유가 있어요. 어때요? 저런 재미없는 유빈이는 차 버리고 저하고...." 차긴 뭘 차!! 나는 그대로 민호의 면상을 발로 차 버리곤 녀석의 몸을 시원하게 밟았다. 어느새 합류한 진호가 함께 밟아주었다. 나이스 진호! 한참 뒤 넝마가 된 민호는 신음을 하며 울먹였다. "우씨... 장난도 못 하나.... 그리고 그 쪽은 뭔데 밟어!!" "누나를 꼬이는 바퀴벌레 퇴치!" 당당하게 외치는 진호에게 민호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진호나 민호나 성격이 조금 닮은 것 같다. 내가 전학을 가 처음 본 진호와 쉽게 친해 진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세상에 인간을 보고 바퀴벌레라니..... 네 눈은 어찌 된 거냐?" "........바퀴벌레가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다니... 네 머리는 어찌 된 거냐?" 진호의 멋진 반격이다. 졸지에 바퀴벌레가 된 민호는 절규했다. "크아아악!!!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유빈이 너 이... 야! 넌 또 어디가?" "아아. 바퀴벌레 약 사러. 간만에 오니 여기도 많이 더러워 졌다." "이 자식들!!!" 이렇게 노는 우리들을 보며 진희누나와 시연선배는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민호의 성격이 워낙에 밝고 진호도 만만치 않아 우리 셋은 금새 의기투합해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에 진희누나와 시연선배도 자유롭게 합류해 분위기는 절정을 이루었다. 민호는 나를 제외하면 처음 만나는 사이이지만 10년을 사귀어 온 것처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처음에 서로의 배경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은 게임으로 넘어갔다. 모두들 공통된 관심사가 게임이다 보니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진희누나와 시연선배는 주로 듣는 쪽이었고 나는 간간이 끼어 드는 쪽.... 이야기의 주도는 민호와 진호가 이끌어 나갔다. "데인져 플레니트 하냐?" "전에 해 봤는데. 어려워서 지금은 안 해." 데인져 플레니트. 20세기 말 일본에서 나온 만화 브레이크 에이지에 등장하는 게임이다. 그 만화에 등장하는 데인져 플레니트를 실제로 만든 게임으로 현재 더 월드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유저 수를 가지고 있다. 무협과 판타지의 더 월드와 다르게 VP라고 하는 기체를 조정해 가상공간의 혹성에서 타 유저들과 전투를 즐기는 게임이 바로 데인져 플레니트이다. 만든 회사는 일본... 2038년에 최초로 기동을 시작했고 현재 7번째 버전이 시행되고 있다. 더 월드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고의 게임으로 불렸던 터라 나도 상당히 빠졌던 적이 있다. 이 게임의 랭크는 점수제로 SA랭크에서부터 A,B,C,D,E,F까지 전에 7가지의 등급이 있다. SA랭크는 최고 고수들로 한 나라에 10명이 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 나는 A랭크까지 올라갔었는데... 거의 5년 동안 더 월드만 하다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히 랭크가 떨어졌을 것이다. 잘 하면 B랭크일 것이고 어쩌면 D랭크까지 떨어졌을 수도 있다. 뭐 대충 C랭크 정도 되어 있겠지. "유빈아. 오랜만에 한 판 붙어 볼래?" 민호가 나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별로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됐다. VP도 없고...." "랜탈하면 되잖아. 얼마 전에 7이 가동됐잖아. 한 번 해 봤는데 꽤 재미있는 것들이 추가됐더라고." "손을 뗀 지 5년이야. 실수로 VP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슨 꼴이냐?" "A랭크까지 올랐던 녀석이 잘도 그러겠다." 그러는 지는 SA랭크였던 녀석이.... 민호는 데인져 플레니트 최고수 중에 하나이다. 전국대회에서도 5번이나 우승했고 세계대회 우승 경력까지 있다. 그러니 이제껏 데인져 플레니트에서 내가 민호를 이겨 본 경험은 단 한번도 없다. "또 지는 게임은 하기 싫어. 정 뭐 하면 더 월드에서 1:1로 한 번 붙어 볼까?" 내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민호는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데인져 플레니트라면 몰라도 더 월드에서는 나를 당할 수가 없거든. 민호는 주로 빠른 컨트롤과 조작성을 중요시하는 시뮬레이션 게임... 대표적으로 데인져 플레니트 같은 게임에 강한 반면 나는 여행을 하며 작은 단서들을 모아 큰 비밀을 밝혀내는 스타일의 게임에 강하다. RPG계열이라 할까? 우리는 서로 친구라 하지만.. 한편으로는 라이벌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 때문에 종종 싸우기도 하는데 어쩔 때는 주먹이 서로 오갈 때도 있다. 뭐 대부분은 이렇게 서로 잘 하는 분야의 게임을 하자고 우기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으갸갸갸... 그럼 오랜만에 이 곳의 시설점검 좀 해 볼까? 누나. 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희누나와 함께 더 월드 전용좌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진호와 시연선배가 따라왔다. 민호는 칫칫거리면서도 별 수 없다는 듯 우리를 따라왔다. 현재 진희누나의 진법술과 부작술은 각각 7성과 3성의 성취도를 이루었다. 거의 두 달 동안 이룬 성과치고는 무척이나 빠르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누나가 빠르게 성장을 한 이유는 지금이 바로 이벤트 시즌이기 때문이다. 더 월드의 이벤트는 한 번에 한 달간 지속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온갖 이벤트들이 난무한다. 무한대로 레어 몬스터들이 리스폰 되는 지역이 생기기도 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다른 때보다 금전과 경험치의 습득률이 두 배가되기도 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수련시 무공의 성취도가 크게 오르기도 한다. 이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장소는 누가 뭐래도 레어 몬스터의 리스폰 장소이다. 이 기간 동안 그 곳에서 떨어지는 절정무공의 수는 거의 100권에 육박한다. 1년 중 이벤트의 기간은 여름과 겨울 단 두 번뿐이고 그 때 떨어지는 절정무공의 수는 200권 이상. 게임시간으로 1년 동안 떨어지는 절정무공의 수는 30권. 당연히 현실시간으로 1년 동안 떨어지는 절정무공의 수가 300권 가량이니 이벤트 기간 동안 2/3의 절정무공이 더 월드에 나온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더 월드 한 제국의 유저 수는 거의 1억에 육박한다. (에리두는 1억 5천 이상) 그런데 이제까지 나온 절정무공의 수는 모두 합쳐봐야 2000권을 넘지 않는다. 사냥을 통해서 얻거나 혹은 초절정고수가 1/500분의 확률로 만들어 내야 하는데 둘 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당연히 절정무공 비급은 한 제국 유저들 중 최고수들 만이 소유할 수 있는 초 레어 아이템이고 절정무공 비급을 하나만 얻어도 그 사람은 팔자를 펴는 것이다. 절정무공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1만에 육박하는 당문세가의 문도 들을 한 달간 흥청망청 먹여 살릴 정도이다. 그 때문에 이벤트 기간동안 절정무공을 얻기 위해 대부분의 유저들이 레어 몬스터 리스폰 장으로 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진희누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나 누나에게 있어 현재 필요한 것은 절정무공이 아닌 누나의 레벨업과 무공 상승이었으니 말이다. 자연히 우리가 찾는 곳은 경험치 습득 지역과 무공 성취도 상승 지역이었다. 이 지역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는 했지만 사람이 미어 터지는 레어 몬스터 리스장에 비하면 썰렁하다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누나. 다음." "알았어." 나의 외침에 누나는 즉시 붉은 색 부적 두 장을 꺼내 날렸다. 그 부적들은 공중에서 불이 붙으며 연기로 화하더니 내 몸으로 빨려들었고 순간 내 몸의 공격력이 희미하게 상승했다. 현재 나와 누나가 있는 곳은 남연성 남쪽 남연산의 중턱이었다. 이 곳도 무공 성취도 상승지역이었고 여기서 누나의 진법술과 부작술의 수련을 하는 중이다. 아직 이벤트가 끝나려면 보름 이상 남아있는 상태였고 최대한 이 기회를 이용해야 했다. 내 성장방식은 초반에 느리고 후반에 빠르다. 막 수련을 시작한 시점에서 이벤트 기간이 도래한 것은 나나 진희누나에게 있어 커다란 이득이었다. 비록 이 기간동안 누나가 일류무공 8성까지 이를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4성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3달 정도만 더 노력하면 어려움은 끝이다. 금새 일류무공은 극성에 도달할 것이고 절정무공도 1달이면 극성이 될 수 있으리라... 아니.. 1달도 안 걸릴 수 있다. 나 혼자서 세 달만에 극성에 이르렀는데 내가 도움을 주는 누나는 1달도 족할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이번 이벤트를 이용해서 나도 레벨업을 하고 있을 터이지만 이미 그 쪽으로는 욕심을 버렸다. 우선 지금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 레벨이 아니라 누나의 성장이었던 것이다. 아직 350레벨의 유저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350레벨이 되어 얻게 될 이득을 밝히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것보다 누나가 후에 배우게 될 의성수의 비밀을 푸는 것이 더 관심을 자극했다. 만약 초절정무공이 감추어져 있다면? 으흐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짜릿 하다. 꼭 번개를 맞은 것 같이..... "유.. 유빈아.. 미안해...." 그때 누나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 왔다. 잠시 내 몸을 살펴본 나는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내 몸이 넝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나의 속도향상 부적이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민첩성 136 잠시 내 스테이터스 창을 띄어 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200이상이 떨어져 있는 내 민첩성... 정말 심각하다. 성공하면 쥐꼬리만치 상승하면서 실패하면 아주 피떡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으로 다시 올라올 것이지만... 혹 지금 레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분명 죽었으리라.... 그 동안 실패확률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간간이 실패를 하기도 한다. 하루라도 빨리 누나의 부작술 성공률을 높여야 했다. "정말 미안해...." 누나가 실패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미안해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아직 성취도가 낮아서 그런 것인데 말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누나를 안심시켰다. "뽀뽀 해 주면 용서해 드릴게요." .......아.. 이건 협박인가? 시간은 흘러 어느덧 천희형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역시 가장 쇼킹한 사건이라 하면 천희형의 결혼 상대자가 바로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같은 한국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천희형은 생각보다 심각한 국수주의였고 미국과 일본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런 천희형의 반려자가 엉뚱하게도 일본여자였으니 나는 그야말로 폭주를 할 정도로 놀랐다. 다른 나라의 여자도 아니고 일본 여자라니.... 이보다 쇼킹한 사건은 정말 없었다. 나는 형이 제정신인가 궁금해 어떻게 결혼을 할 생각을 다 했나 물었고 형은 당연하다는 듯이 외쳤다. "사랑은 국경을 초월하는 거다!!" 이게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형이 좋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제발 형의 고지식한 국수주의 모드가 발동되지 않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를 바랄 뿐이다. 뭐 그렇다고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민우형과 마찬가지로 형도 심각한 페미니스트거든. 여자 말이라면 끔벅 죽는다. 그것이 비록 평소 저주해 마지않는 일본여자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형이 결혼 할 여자의 이름은 다치바나 유키코. 형과는 동갑인 21살로 더 월드에서 살검후라 불리는 아가씨이다. 게임에서는 상당히 차갑고 말보다 검이 먼저 나가는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보니 아진누나와 버금갈 정도로 밝은 성격의 누나였다. 지금은 유학중이라는데 한국사를 전공해서인지 한국어도 능통하고... 아무튼 여러모로 게임에서와는 매치가 잘 되지 않는 누나였던 것이다. 나의 이런 의문에 천희형은 이렇게 말한다. "하하! 유키코가 부끄럼이 많거든. 처음 본 사람에게는 말도 잘 하지 못하고. 그리고 더 월드가 여자 혼자 즐기기에는 조금 무서운 세상이잖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차가워져야 했다고 하더라. 뭐 그런 것도 매력 있지 않냐?" 네네. 제 눈에 안경이죠. 형이 좋다는데 제가 뭐라 할 까요. 유키코 누나를 끌어안고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맞추는 천희형을 보자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문뜩 나와 진희누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의심이 갔다. 이거 나도 자제를 해야 할 듯 하다. 형의 결혼식은 간단하게 치러졌다. 복잡한 것을 무던히도 싫어하는 천희형이었기에 교회에서 얼마 되지 않는 축하객들만 받고 목사님께 주례를 서게 해 단 30분만에 결혼식을 끝마쳐 버렸다. 재미없게 시리..... 결혼식 중에 안 사실인데 유키코 누나는 고아였다. 부모님이 계셨지만 3년 전 교통사고로 한날 한시에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가족이라고는 언니 하나 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신랑신부 입장 때 누나와 형이 함께 들어가는 형식에 어긋나는 입장을 선보였다. 나중에 천희형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던 유키코 누나는 울음을 터트려 버렸고 보고있는 나까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 진희누나는 나에게 기대 눈물을 흘려버렸고 말이다. 간단하게 끝낸 결혼식. 그 후로 당연히 천희형과 유키코 누나는 신혼여행을 떠났어야 정상이지만 그건 아니 될 말이었다. 민우형과 민호가 나서 천희형을 납치했고 아진누나가 유키코누나를 잡아끌고 우리는 게임센터로 향했다. 비행기 시간 늦는다고 천희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우리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발버둥치는 형에게 링크헤드셋을 씌어주고 더 월드에 접속한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결혼식을 차려 주었다. 게임 중 만난 친구들을 모조리 불러모았고 민우형과 내가 돈을 내 잔치를 벌였다. 아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불러모아 거대한 잔치를 열었다. 낭황과 살검후의 결혼에 모두들 놀라하면서도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비록 게임 속에서일 뿐이지만 형과 누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았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형도 결국은 눈시울을 붉히며 우리에게 고맙다고 허리를 숙였다. 고집하면 아진누나도 한 수 접어주는 천희형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을 줄은 정말 나도 생각 못했다. 그만큼 형이 감동 먹었다는 말일 것이다. 물론 그 감동도...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고래로부터 결혼식 날 신랑을 패는 것이 하나의 결혼식 이벤트가 아니겠는가? 그날 우리는 천희형을 신나게 패 버렸다. 게임이니 만큼 봐 줄 필요도 없을 터이고 있는 힘을 다 해 축복을 주먹에 담아 날려주었다. 어찌나 신나게 형을 팼던지 실수로 진짜 죽여버릴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넝마가 된 형을 살펴봤을 때 천희형의 남은 체력은 42뿐이었다나.....? 이미 최절정고수인 민우형이나 초절정고수인 내가 가볍게 한 대만 때려도 사망이었으리라. 천희형은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비행기 시간 때문에 훗날을 기약하며 접속을 끊었고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그 날의 축제를 이쯤에서 접어야 했다. 게임상과 현실에 10배의 시간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행히도 천희형과 유키코 누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 행 비행기에 타는 천희형과 유키코누나를 배웅해주며 나는 문뜩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형처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신혼여행을 떠날 것이다. 물론 그 때 내 옆에는 진희누나가 있을 것이고... 그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나는 진희누나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유빈아 부럽냐?" 진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진희누나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웃었다. "당근이지." 외전 - 그와 그녀의 만남 "뭐죠?" 그녀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 그를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대는 넉살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요." 헌팅? 워낙에 자주 당해 본 터라 그녀는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를 그는 졸졸 따라왔다. "어디 살아요? 저는 한국에 사는데."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대부분은 무시를 하면 무안해서 제 갈 길을 가는데 이 남자는 끈덕지게도 따라붙었다. 물론 이런 종자들이 종종 있기는 하다. 그녀는 더욱 표정을 굳히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제가 지금 무지 심심하거든요. 평소 어울려 다니던 동생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이 나만 두고 멀리 가 버려서 말이죠." 그녀는 무시하는데 그는 끝까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결국 귀찮아진 그녀는 재빨리 검을 뽑아 그의 목으로 휘둘렀다. "으악!! 뭐.. 뭐예요?! 까딱 했으면 죽을 뻔 봤잖아요!" 죽으라고 공격 한 거다. 그럼 살리려고 공격했겠나?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재차 검을 날렸다. 그녀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모조리 피해냈다. 문뜩 그녀는 상대가 고수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레벨은 192. 거의 최절정 고수에 가까운 레벨이었다. 아무리 온 힘을 다 한 것은 아니더라도 일류고수 조차 쉽게 피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과 같은 절정고수 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더욱 살기를 높였다. "꺼져!" "싫어요." "그럼 죽어." "싫어요." "..........죽인다." "싫어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무슨 말을 해도 실실 웃으며 대꾸한다. 그녀는 더욱 울분이 솟구쳤다. 혈영검(血零劍) 이식(二式) 혈광사(血光死)! 그녀의 검이 매섭게 빛을 뿌리며 그의 몸을 찔렀다. 이제까지의 검식과는 다르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검식이었다. 그녀의 검이 그대로 그의 몸을 찔러버렸다. 하지만 피를 뿌리며 쓰러져야 정상인 그의 몸이 불연 듯 연기처럼 흩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의 흔적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의 흔적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대단히 위험했다. 그런 그녀의 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아... 위험했네. 혈영검이라니 역시 당신이 살검후였군요. 앗!! 빨간색!" "..........어딜 봐?!!" 엉뚱하게도 그는 바로 그녀의 뒤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허락도 않고 치마를 들쳐 아이스깨끼를 하는 그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후 얼굴을 붉히며 발길질을 날렸다. 이번에는 그가 피하지 못했다. 졸지에 사타구니를 맞아버린 그는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나.. 죽네...." "죽어!" 차갑게 쏘아붙인 그녀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버렸다. 점차 멀어지는 그의 신음소리를 무시하며 그녀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후 멈칫하며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쓰러진 채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렇게 아픈가? 분명.... 사타구니가 남자의 급소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불연듯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 "잡았다!!" 사과를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환호한다. "옷!! C컵!!" 그제야 그녀는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일정 이상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게임 내인 것이다. 여기서 사타구니를 맞았다고 해서 고통에 절규할 이유는 없었다. 이마에 핏줄을 돋은 그녀는 입에서 불길을 토하며 그를 팼다. "으악!! 장난!! 장난이었어요~!! 그만 그만!! 헉!! 뒤에 몬스터!!!" "시끄러!! 이젠 안 속......" 크아아아앙!!! 느닷없이 뒤에서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경직시키며 천천히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리곤 뒤에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징그럽게 생긴 몬스터를 보며 흠칫했다. "천마강시!" 최상급 몬스터의 하나로 레어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이다.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결코 상대 할 수 없는 괴물을 보며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 했다. 현재 그녀의 혈영검 성취도는 7성... 9성만 되더라도 어찌 해 볼 수 있겠지만 7 성인 지금의 상태로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엄마야~! 천마강시다! 무서워~!" 하지만 그가 느닷없이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엄마를 찾았고 그녀의 도주계획은 초반부터 불가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정말 그에 대한 살인욕구가 머리끝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죽이는 것 보다 저 천마강시를 상대하거나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두 달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해 버릴 터이니까. "이것 놔!" "싫어요~! 무서워요~!" 이... 인간 정말 나중에 죽여버리겠다!! 그녀는 다짐에 다짐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천마강시는 거리를 좁혀왔다. 금새 그녀와 그의 앞까지 다가온 천마강시는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며 팔을 휘둘렀다. "치잇!!" 재빨리 혈영검을 들어 막았지만 타격은 검을 뚫고 몸을 강타했다. 아픔은 없지만 체력치가 급격히 떨어짐을 느끼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막아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재차 떨어져 내리는 천마강시의 팔을 보며 그녀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기다려도 몸에 타격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눈을 떠보았고 곧 자신의 머리 바로 위에 천마강시의 팔이 멈추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천마강시의 팔을 막고 있는 또 하나의 손도.... 그 손의 주인은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속을 불태우던 그였다. "이 아가씨는 내가 찍었다. 추잡한 녀석아." "크르르륵...." "침흘리지 말고 이거나 먹고 꺼져!! 진사신무(眞四神武) 백호신권(白虎神拳) 오성(五成) 뇌락(雷落)!" 벼락과 같은 일격이었다. 단 일격에 천마강시는 머리만 남기고 땅으로 심어져 버렸다. 그는 머리만 남은 천마강시를 신나게 밟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어쩐지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그녀는 식은땀을 삐질 흘려야 했다. 천마강시가 반죽을 때까지 밟던 그는 마지막으로 품에서 붓과 벼루를 꺼냈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무시한 채 그는 앉아서 벼루를 갈기 시작했고 잠시 후 먹물을 붓에 묻혀 천마강시를 돌아보았다. "흐흐흐..." 소름이 돋는 웃음을 흘린 그는 붓을 천마강시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제야 그녀도 그가 하는 짓을 알아보았다. 황당하게도 그는 천마강시의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아 남의 여자 꼬시려 한 죄다." "...........남의 여자?" 언제 자신이 그의 여자가 됐다는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진 그녀는 그를 노려 보았지만 그는 천마강시의 얼굴에 낙서하는 것을 열중할 뿐이었다. 괜히 맥이 풀린 그녀는 몸을 일으킨 후 그를 무시한 채 발길을 돌렸다. 그제야 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뒤따라 왔다. "그냥 가요? 저 천마강시 잡으면 꽤 많은 경험치를 얻을 건데."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는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뜩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아앗!! 저건!!!" 무시하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힐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지만 어느새 그 역시 사라져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의 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신은 빨간색이 어울려요." 또 한번 아이스깨끼를 당한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 6 - 반 대항 전투 3달 정도가 더 지났을 때 진희누나는 어려움의 고비를 넘어섰다. 삼류무공과 이류무공은 극성. 일류무공은 8성에 이른 것이다. 레벨도 100이 넘었다. 레벨만으로 보면 일류고수라 해도 무방했지만 실상 누나가 익힌 공격무공은 화산에서 배운 기본검술 뿐이었으니 일류고수라 하기에는 어려웠다. 삼류고수까지는 어찌 상대하겠지만 이류고수와는 대결이 어려울 것이다. 뭐 누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런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으니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이 후부터는 누가 뭐래도 탄탄대로다. 방학 때 이벤트 기간 동안 잠을 자는 시간까지 줄이고 하루의 대부분을 게임에서 살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거의 2년이 걸렸던 것을 진희누나는 네 달만에 달성해 버린 것이다. 물론 내 도움이 컸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진희누나의 케릭터는 지력수치가 높았던 것이다. 한 제국 유저의 일차적인 능력치 설정은 랜덤이고 그 후 기본무공으로 보너스 수치가 주어지는데 일차적인 능력치 설정에서 누나의 능력치는 지력으로 대부분이 몰려있었던 것이다. 지력은 곧 오성이었고 오성은 무공을 익히는데 시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누나의 성장속도는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빨랐다. 반대로 좋지 못한 점도 있었다. 능력치의 대부분이 지력으로 몰렸는데 거기에 나중에 있을 보너스 수치도 하나같이 지력향상 뿐이라서 다른 능력치가 현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지력향상과 함께 다른 능력치도 어느 정도 성장을 하기는 하지만 내 수치에 비하면 너무 떨어졌다. 아마 진희누나의 지력을 제외한 다른 수치의 최고수치는 200에서 250사이일 것이다. 뭐 다른 유저들보다는 비슷하거나 약간 높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단 말야.... 에라 깊게 생각하지 말자. 떨어지는 능력치는 누나의 부작술로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니 말이다. 지력 수치가 높다는 것에 정말 기뻐할 일이다. 분명 진희누나의 지력 한계수치는 엄청나게 높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기로는 최소 450이고 어쩌면 500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 500이라면 잘 하면 범위계 최강마법인 헬파이어 정도까지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메이지 투 마스터의 마법까지 배운다니..... 누가 들으면 거품 물고 뒤집어 질 말이었다. 거기에 의성수의 비밀을 풀어 혹 초절정무공을 발견해 익힌다면? 어쩌면 나와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지 모른다. ......누나의 성격이 조금만 더 야무지다면 말야. 하지만 누나는 싸우는 것을 싫어하니 나와 싸울 일은 결코 없겠지. 어쨌건 지금은 일류무공을 빨리 극성까지 익히면서 절정무공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이건....?" "청낭서(靑囊書)요. 누나가 배울 무공이죠." 청낭서는 내가 지난 네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게시판과 각 성 장터를 돌아다니며 구한 의술서이다. 유비, 관우, 장비가 나오는 삼국지에서 등장하는 전설의 신의 화타가 집필한 의서(醫書)라고 하는데....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의서가 절정의 의서라는 것이다. 다른 타격 무공에 비하여 진법서나 의서 같은 경우는 그 수가 희박하다. 때문에 구하기도 만만치 않다. 당연히 가격은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다.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한 제국 유저 중에 의원도 상당수 되고 문파 같은 경우에서도 의원이 꼭 필요한 실정이다. 전투에서 부상자가 생겼을 때 치료를 하거나, 그냥 삼이나 영약을 먹는 것 보다 더 높은 효능을 자랑하는 단약같은 것을 제작하기 위해서도 높은 수준의 의원이 필수이다. 그래서인지 절정의 의서가 나오면 대문파에서 즉시 사 가 버리는 실정이었다. 이 청낭서도 청성파에서 사 가려는 것을 내가 가로채 온 것이다. 자그마치 금100만을 주고 말이다. 보통 절정 무공비급이 금10만이면 살 수 있음에 반해 절정의 의서는 그 열 배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천희형과 민우형이 의성수를 팔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고 볼 수도 있다. 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팔 수도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이건 얼마나 걸리는데?" 누나는 청낭서를 받아들며 나에게 물었다. 요즘 이렇다할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수련만 하는 터라 지겨운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누나에게 답했다. "어려운 고비는 다 넘겼으니 앞으로 2달이면 될 거예요.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제가 스승으로 있다고 해도 3달 이상은 걸릴 것이지만 누나는 지력이 높아서 2달도 안 걸릴지 몰라요." "2달?!" 나는 2달 '밖에' 이지만 누나에게 있어서는 2달 '씩'이나 인가 보다. 하기야 4달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게임을 하면서 수련만 했으니.. 지겹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흐음.. 그럼 조금 쉬기로 하고 어디 놀러 갈까요?" "응!" 대번에 누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틈이 날 때마다 남연성 근처에 볼만한 곳은 다 돌아 본 터라 더 이상 근방에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누나와 나는 말을 한 필 구입해 느긋하게 남연성 동문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한수성이었다. 거대한 상업도시인 남연성과 다르게 한진성은 관광도시라 불리는 곳이었다. 도시 곳곳에 호수가 있었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남연성에게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말을 타고 하루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누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기분으로 한수성 방향 관도를 달렸다. 우리가 남연성과 한수성 사이에 있는 무연산을 지날 무렵이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다수의 유저들이 경공을 발휘하여 달려왔다. 보아하니 한 명은 절정고수였고 나머지는 모두 일류고수였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그들은 스스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경공을 쓰고 있었다. 우리를 지나쳐 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서 경공을 쓰면서 가는 경우는 쉽게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서 경공을 쓰면서 달려가는 경우는 쉽게 보기 힘들다. 그것도 관도에서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금새 고개를 저으며 신경을 거두어 버렸다. 뭐 문파간의 싸움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무리가 재차 달려옴을 느끼고는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누나도 이상한 듯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천희형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 [형. 남연성하고 한수성 중간에 무슨 일 있어?] [유빈이냐?] [어.] [흠.. 한수성하고 남연성 중간이라면... 무연산이지?] [그렇지.] [잠깐만 기다려 봐.] 나에 비해 천희형은 상당히 발이 넓다. 뭐 형도 모른다면 민우형에게 물어보면 되니 다급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천희형한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야. 거기에 천리마가 떴다더라. 아마 그 때문일 거다.] [천리마?] [그래. 그것도 그냥 천리마가 아니라 천리신마(千里神馬)래.] 형의 말에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말 한 필 구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기회가 온 것이다. 천리신마는 이제껏 단 두 번만 나온 최고의 명마였다. 보통의 천리마나 적토마보다도 한 단계 뛰어난 말이었기에 그 가치는 최절정무공에 버금간다 할 정도였다. 지금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 천리신마를 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스스로 소유해도 그만이고 팔아먹어도 좋다. 최소한 절정무공 2권 이상은 구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대 문파로 들어가 최절정무공을 사사 받을 수도 있으니 천리신마를 잡기만 하면 대번에 고수의 반열에 들어설 기반을 마련한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일이래?"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요. 천리신마가 나왔다네요." "천리신마?" 누나는 천리신마의 가치를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누나를 안아들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명마 하나 구하려고 했는데.. 잘 됐어요. 그 말 우리가 잡아요." "잡을 수 있어?" "도전은 해 봐야죠." 명마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명마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현실에서도 야생마를 타고 굴복시키면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하던가? 이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도망가는 명마를 따라잡아 잡아타고 발버둥치는 명마의 위에서 일정시간 동안 버텨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속도부터 절정경공에 버금가고 힘도 무지막지하게 세서 실수로라도 발길질에 채이면 일류고수도 단번에 명을 달리해 버릴 수 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뭐.. 나에게는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말을 버리고 나는 누나를 안은 채 경공을 전개했다. 마시장에서 구입한 저 말로는 결코 천리신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저 말을 타고 천리신마가 출몰한 곳으로 갔다가는 도착하기도 전에 주인이 정해져 버렸을 가능성도 크다. 나는 궁신탄영을 전개해 앞서가는 유저들을 뒤따랐다. 정확히 어디서 천리신마가 출몰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내가 뒤를 따르자 그들은 힐끔 고개를 돌렸지만 금새 나를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어차피 모여든 유저들은 한둘이 아닐 터인데 내가 하나 더해진다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약 1시간 30분 정도로 달려서 천리신마가 날뛰는 장소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무연산 동쪽의 평원이었다.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는지 천리신마는 은빛의 갈기를 휘날리며 사방으로 날뛰고 있었다. "크악!!!!!" 한 명의 유저가 천리신마에게 달라붙었다가 뒷발을 맞고 날려가 버렸다. 절정고수 같았는데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듯 싶었다. 뭐 한동안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이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듯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시체의 대부분이 이류고수일 것이다. 한 번 덤벼 봤다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고 나서 재차 덤비기를 포기하고 시체인 채로 구경하고 있는 부류들이다. 일류고수라면 즉시 리스를 해서 이 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누나를 내려놓고 잠시 천리신마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히죽 웃음을 흘렸다. 역시 천리신마이니 만큼 보통의 말보다 훨씬 멋졌다. 윤기가 흐르는 은빛의 털에 바람에 휘날리는 긴 갈기들... 총은 보통 말보다 배나 풍성했고 발목 부근에도 긴 갈기가 나 있었다. 흡사 구름을 타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누나 멋있죠?" "응. 그런데 저렇게 빠른 것을 어떻게 잡으려고 그래?" "보고만 있어요!" 나는 즉시 천리신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때마침 대부분의 유저들이 덤비지 못하고 구경만 하던 터라 이 때가 기회라 생각했다. 천리신마도 나를 발견하고는 즉시 앞발을 들어 내려쳤지만 나는 연환보(連環步)를 펼치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내가 천리신마의 뒤쪽으로 이동하자 뒷발차기가 뻗어왔다. 나는 어기충소로 몸을 솟구쳤고 곧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기충소는 200레벨 이상의 고수들이 쓰는 무공이거든. 최절정고수들의 전용경공이라는 말씀. 나는 그대로 천리신마의 등에 내려서며 갈기를 움켜쥐었다. 자! 날뛰어 봐라!! 그 때부터 나와 천리신마의 물고늘어지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거의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천리신마의 몸에서 버티기 위해 나는 은연중에 무상공을 운용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정신이 멍 할 정도로 흔들렸지만 나는 손을 풀지 않았다. 몸이 천리신마의 등에서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나는 허공답보로 허공을 박차며 방향을 틀어 재차 천리신마의 등으로 내려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의 1시간 가량을 그렇게 버텨낸 것 같다. 발악을 하며 날뛰던 천리신마도 점차 힘이 빠진 듯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15분이 더 지났을 때 결국 녀석은 나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움직임을 멈추고 푸르륵 거리는 천리신마의 갈기를 잡고 오른쪽으로 틀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의 내 뜻대로 움직였다. 누가 보더라도 완전히 나에게 길들여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심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상당히 약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내가 잡고있던 갈기에서 손을 놓자 천리신마는 기회라는 듯 그대로 앞발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미 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손을 뻗어 천리신마의 머리를 누르면서 내력의 8성을 일으켜 천근추를 펼쳤다. 천리신마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아마 이제는 완전히 승복했을 것이다. 내가 녀석을 쓰다듬어 주자 꼬리를 흔들 어 댄다. 그제야 나는 안심을 하며 녀석의 등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여든 유저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주 보아 온 모습이니 새삼스레 신경 쓰지도 않았다. 더 월드에선 강한 자만이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이다. 나는 이제까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능력을 키운 적이 없었고 남들보다 어려운 길을 걸으며 지금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 힘을 이용해 어떠한 것을 얻고... 그 것을 못 얻은 인간들에게 미안할 마음을 가질 이유는 결코 없었다. "흠흠... 본인은 일성검문(一聖劍門)을 맡고 있는 일위성검(一爲聖劍) 무량이라 하오.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소만.." 일위성검이라... 외호 하나는 멋지게 지었군... 그런데 일성검문이라니. 그런 곳이 있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성검문에 대해 생각을 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더 월드에 존재하는 문파만 해도 작은 문파까지 합치면 수만 개가 넘을 터인데 내가 모두 알고 있을 턱이 없다. 문주인 무량의 내공을 봐도 이제 막 절정고수가 된 것 같으니... 안 봐도 조그마한 문파라는 것을 알겠다. "유빈." "혹시.. 창천유검(蒼天流劍) 유빈대협이시오?!" .....대협까지야. 창천유검은 내가 신분을 감추고 놀다가 얻게 된 외호였다. 내 진짜 힘을 모르는 학교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도 다들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무량이라는 아저씨는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 사이에 최절정고수가 되었나 보군요. 이제 한 제국의 최절정고수는 43명이라 봐야 겠소이다. 하하하." 듣기 좋은 소리를 연신 날리지만 그의 눈은 한번씩 내 뒤에서 무릎꿇고 있는 천리신마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천리신마를 가지고 싶다는 듯이 탐욕에 번뜩이는 것을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서라... 강탈한다고 해도 한 번 주인이 정해진 천리신마는 결코 주인을 바꾸지 않아. 뭐 내가 죽는다면 몰라도 말이다. "내 오늘 유빈대협을 보고 크게 개안을 하였소이다. 혹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문파에 들려 담소라도 나누었으면 하오만... 어떠하리까?" "싫은데." 나는 가차없이 거절을 했다. 무량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지만 나는 무시했다. 분명 그 곳으로 가면 문원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나를 치려 할 것인데 내가 뭐 하러 가겠는가? 괜히 퇴로까지 막히면 복잡해진다. 뭐 이류고수야 아무리 많아도 가뿐하지만 일류고수가 1000명 정도 모이면 조금 복잡해진다. 그리고 절정고수가 몇 더해지면 피를 볼 수밖에 없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선 아무리 자신이 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무식하게 덤벼서는 안 된다. 우선 몸을 뒤로 빼 어떻게 해서든 1:1이나 1:2의 상황을 만들고 하나씩 제거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승률이 현격하게 줄어든다. 뭐 절대고수이니 만큼 경공도 장난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혹 포위라도 되면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다. 문파 안에서 습격을 당하면 십중팔구 포위 당할 수밖에 없고... 능력을 자제하는 입장에서 도망치거나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뭐 암무를 불러 가볍게 도주하거나 싹 쓸어버리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랬다간 몇 시간 뒤에 '검천지룡과 창천유검은 동일인물이다!'라는 글이 게시판에 떠올라 버릴 터이다. 당연히 내일 학교에 가서 반 애들에게 사망직전까지 밟힐 것이고... 절대로 내가 검천지룡이라는 것을 알려져서는 아니 된다. 한마디로 사건을 애초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누가 오라고 하면 쫄래쫄래 따라가는 어린 녀석이 되지 말아야 한다. "흠흠..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럼 후에 한번 저희 문파를 찾아 주시는 것은......" "그것도 싫어." 무량의 이마가 빠직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면서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 호의로 대하려 했는데 자꾸 그렇게 무안을 주어야 하겠소!? 거절을 하더라도 정중하게 하는 수는 없는 것이오?!" "꼬우면 덤벼." 내가 전매 특허 낸 한 마디. 요즘 진짜 자주 써먹는다. 얼굴을 붉히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무량에게 씨익 미소를 날려보내자 결국 폭발한다. "내 비록 그대에게 닿지 못하는 실력을 가졌으나 이런 모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만은 없소!! 일성검문의 문주로서 일위성검 무량!! 창천유검 유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소!!!" "싫어. 안 해." 무량의 몸이 휘청한다. "꼬우면 덤비라고 했잖아!!! 이 치사한 자식아!!!" 어찌나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으면 문주 체면 다 날리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실실 웃으며 그런 무량의 속을 더더욱 긁어 주었다. 곧 무량의 검이 예고도 없이 날아왔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며 가볍게 피해주었다. 때마침 천리신마가 몸을 일으켰고 나는 재빨리 천리신마의 등에 올라탔다. 아마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나 보다. "가자!! 저 능글맞은 녀석 밟아!!" "으학!!!" 내 명령에 따라 천리신마가 앞발을 들며 내려찍자 무량은 기겁하며 몸을 굴렸다. 오~! 나려타곤?! 정파의 문주 체면에 저게 뭔지. 나는 혀를 차며 천리신마를 달렸고 곧 누나의 옆을 지나가며 손을 뻗어 진희누나의 허리를 잡아 올렸다. "잡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잡아 죽여!!!!!" 뒤에서 무량의 악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맞추어 무량의 수하로 보이는 유저들이 달려들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 실력으로 천리신마를 따라 올 수는 없다. 나는 유유히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감자바위를 먹여드렸다. "괜찮을까?" 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누나의 허리를 감고있는 팔에 힘을 더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능구렁이 안 죽인 것만 해도 제가 많이 참은 거라고요. 말만 번들어지게 했지 나를 자기 문파로 데리고 가서 뒤를 치려는 거죠."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천리신마를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데 안 봐도 뻔하죠. 그보다 이대로 한수성으로 가요. 천리신마라면 금방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니까." 여전히 불안한 듯 했지만 결국 나를 믿는 것인지 누나도 걱정을 떨쳐냈다.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누나의 모습이 저녁노을에 물들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역시!! 나는 복 받은 놈이야~!!! 다음날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빈이 너 200레벨 넘었다며?!" "정말이냐? 진짜 최절정고수가 된 거야?!" 소문 한 번 빠르군. 하기야 42명뿐이라는 200레벨 유저에 또 한 명이 들어섰다는 이유 때문이겠지. 이거 어제 어기충소를 쓴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팍 든다. "캬아!! 이건 신의 계시다!!! 다음주에 있을 반 대항전에서 우리 반이 우승할 수 있어!!" 그러고 보니 곧 반 대항전이 있구나. 반 대항전은 공식적으로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 행사였다. 1,2,3학년 전체 30개 반이 각 클래스 별로 팀을 이루어 전투를 벌여 우승팀을 고르는 것이 목적이다. 그냥 반 대항전이라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여기서 우승을 한 클래스는 큰 혜택을 받게 되고 그 클래스와 떨어진 클래스 중 높은 점수를 받은 유저들을 모아 12월 달에 있을 전국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 학교뿐만이 아니라 각 도시에 하나씩 (주)신화 재단의 학교에서 대표로 뽑힌 클래스와 유저들이 출전하게 되고 여기서도 우승을 하게 되면 (주)신화와 자매결연을 맺은 중국, 일본의 학교대표와 내년 3월에 세계대회를 치르는 영광이주어진다. (에리두의 유저들은 중국, 일본, 미국, 영국대표와 대회를 치른다.) 이 대회에 걸린 상품은 대단히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졸업 후 신화 엔터테이너먼트에 취직을 할 수 있는 우선권까지 주어진다는 점이다. 꼭 (주)신화 재단의 학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학생이라면 팀을 만들어 예선대회를 치러 지역별로 2개의 팀을 따로 선발하니 한국의 더 월드 유저 학생이라면 누구나 바래마지 않는 학생만의 이벤트이다. 아직 학생 중에서는 최절정고수가 된 유저의 수가 적기 때문에 최절정고수가 하나라도 끼어있는 팀은 대단히 우승할 확률이 높아진다. 최절정고수 혼자서 무공만 제대로 따라주고 전투경험이 많다면 절정고수 10까지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00레벨 이상부터 구사할 수 있는 검강. 바로 이 기술 덕분이다. 검기에 배해 거의 3배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하는 검강을 쓸 수 있다는 것으로 최절정고수는 최강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빈아!! 우리는 너만 믿는다!! 우승 상품이 뭔지 알지?!" 우승상품이 뭐였더라....?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내 기억력 외곽의 지식이었다. 어차피 나는 나갈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귀찮게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는 녀석이 꼭 아는 것처럼 왜 웃는 것이냐?" 현신이 녀석은 이마를 누르며 신음했다.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자세를 취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그만 해라. 너하고 이야기 하다가 내가 이상해지겠다. 어쨌든 이번 우승상품은 최신 링크헤드셋에 더 월드 1년 무료 이용권이다!!!" 순간 내 귀가 솔깃했다. 최신 링크헤드셋은 둘째 치더라도 더 월드 1년 무료 이용권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내 용돈은 한정되어 있었고 근래 진희누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상당히 많은 돈이 깨져 재정이 간당간당 했다. 특히 저번 달에 누나를 만난 지 100일되는 기념으로 커플링을 사는 터라 완전히 이번 달은 적자였다. 그동안 모아놓은 금전을 현금으로 팔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할부를 받아야 하나 걱정까지 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 상태에서 1년 동안 더 월드 이용료가 굳는다는 것은 앞으로 어느 정도 재정이 트인다는 말과도 같았다. 더 월드 한달 이용료는 14만원. 1년이면 자그마치 168만원이 굳는 것이다. "친구!! 우리 우승해 보세나!!" "잘 생각했네 친구!! 나는 그대만 믿겠네!!" 나와 현신이는 당장 의기투합해서 서로의 손을 불끈 쥐었고 뒤이어 반 아이들이 손을 내밀었다. "우승은 우리 2학년 5반이다!!!" "그래서 나가려고?" "네. 우흐흐... 200일 기념선물은 기대 하세요." 내 말에 누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때 시연선배가 우유를 마시다 나에게 물었다. "우승 할 자신 있어?" "물론이죠!" "뭐.. 네가 고수인 것은 아는데.... 그래도 3학년 1반에는 절정고수가 셋이나 있다고 하던데..." 누나도 4달 동안 더 월드를 하더니 상당한 지식을 익혔다. 전에는 절정고수가 뭔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절정고수와 최절정고수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지. 나는 크림방을 베어 물며 장담했다. "간단해요." "우움..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지만.... 그래도 너 힘을 숨기면서 해야 할 것 아냐?"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시연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런다고 그러면 그렇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긴 선배의 게임 경력은 기껏해야 4달이거든. 5년이 되어 가는 나에 비하면 이제 갓 걸음마 하는 어린애 수준이다. 선배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 유빈아..." 갑자기 누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누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에? 왜요?" "여기...." 누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 오른쪽 밑 부분을 가리켰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다는 말인가? 나는 내 오른쪽 입 밑을 쓸었지만 아무것도 묻은 것은 없었다. 의아한 나에게 진호가 턱을 괴며 말했다. "반대쪽. 크림 묻었다." "아...." 진호의 말대로 왼쪽 볼에 크림이 묻어 있었다. 진희누나와 내가 마주보고 앉아있는 터라 방향의 오차가 생긴 모양이다. 나는 손으로 크림을 닦아 내 입으로 가져갔다. "윽.. 더러." 진호가 얼굴을 구기며 나와의 거리를 벌였지만 나는 꿋꿋하게 크림을 빨아먹었다. 아깝거든.... 그리고 내 얼굴에 묻은 것인데 더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유빈이 너 생긴 것 답지 않게 엉뚱한 구석이 많아." "맞아." 시연선배가 말했고 진호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합동으로 씹어라. 크림과 씹히는 것을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크림을 택할 것이니까. 진희누나는 그저 웃고 있을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더럽다고 해도 누나만 안 그러면 나는 만사 OK이다. "윽!"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내 뒷머리를 때렸다.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차가운 뭔가가 뿌려졌다. 머리를 적시고 얼굴로 흘러내리는 흰색의 액체를 보며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런 미안하다." 누군가가 급하게 사과를 해 온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쫙 찢어진 뱁새눈을 가진 남학생 하나가 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가 지나 가다가 팔이 내 머리에 부딪쳐 급식을 쏟아버린 듯 했다. 그가 건네 준 손수건을 받은 나는 얼굴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려던 나는 문뜩 손수건에 달라붙어 있는 짓눌려진 바퀴벌레를 보곤 미소를 머금었다. 고의였군.... "미안하다. 실수였어. 옷에 물들기 전에 빨리 닦는 것이 좋을 것인데." 넉살스럽게 말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녀석의 일행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학생들이 뒤에서 피식피식 웃고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놓여있는 우유 컵을 잡았다. 그리고는 즉시 일어나 녀석의 면상을 잡고 입에다 찔러 넣었다. "욱!!!" 동시에 식판을 들어 녀석의 면상을 후려 쳐버렸다. 순식간에 식당은 적막에 휩싸였다. 당한 녀석은 눈알이 풀려 뒹굴었고 일행으로 보이는 녀석들은 멍한 얼굴로 쓰러진 친구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웃음을 머금으며 녀석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실수다 이 새꺄!"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녀석들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나에게 소리쳤다. 워낙에 순식간에 당해버린 터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이.. 이 자식이!! 너 2학년이지?!! 우린 네 선배야!!" "그 글세... 실수였다니까!" 진짜 오랜만에 머리꼭지 돌아버렸다. 선배? 그게 뭐 밥 먹여 주나? 지금 내 기분으로는 이 새끼들 전부 모가지를 비틀어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미친 녀석 아냐?" "사람 함부로 정신병동 보낼 말하지 마라." 차갑게 미소지으며 나는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고 나는 키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선물 받은 바퀴벌레 묻은 손수건을 쓰러진 녀석의 얼굴에 던졌다. 그 후 발끝을 이용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녀석의 얼굴에도 우유가 번져 있었거든.. 큭큭... "닦아주는 거야. 왜 불만 있어? 꼬우면 덤벼." 재차 엿을 날리며 녀석들을 도발했다. 결국 한 녀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멱살을 쥐었지만..... 퍼억!! 나는 그대로 머리로 얼굴을 찍어 버렸다. "꺄악!!!" 식당 안에 있던 여학생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나는 무시 한 채 내 멱살을 잡고있는 3학년 녀석의 손을 풀어내며 다시 한번 웃었다. 오~ 이런.. 코피가 나는군. 아까운 피인데 흘리지 말고 핥아먹어. "이.. 이 자식...." "아아.. 또 실수야. 이거 진짜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바퀴벌레 묻은 손수건을 들어올려 녀석의 얼굴에 신나게 문질러 주었다. "크아악!!!" "왜 그래? 깨끗한 손수건이야. 네 친구 거잖아. 그렇게 비명 지를 이유 하나 없다고. 안 그래? 나는 그냥 실수로 하늘같은 선배 코피 나게 한 사과로 닦아주려 한 것 뿐이야." "이 자식!! 죽여버려!!!" 주먹이 날아온다. 하지만 느리고 단순하다. 큭. 민호녀석의 주먹은 이것 보다 두 배는 빠르겠다. 가볍게 고개를 꺾어 공격을 피해내고 녀석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곤 남은 팔의 팔꿈치로 재차 면상을 찍어버렸다. "아프냐? 이건 실수 아냐. 반격이야. 알아? 정당방위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어차피 팬 것 이 정도로 끝내지 않는다. 녀석의 머리채를 잡고 식탁으로 두어 번 찍어 주었다. 순식간에 식탁은 피로 물들어 버렸고 나는 축 늘어진 녀석을 두고 몸을 돌렸다. "후아... 시팔... 기분 더럽네... 이게 다 네 놈 때문이다!!!" 다시 몸을 돌려 복부를 발로 차 버렸다. 녀석은 의자 세 개를 쓰러트리며 날려갔고 나는 목이 갑갑해 상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그리곤 이제 혼자 남은 선배를 돌아보았다. "꼬아? 꼬아 죽겠지? 미치겠지? 그럼 덤벼. 친구들처럼 사이좋게 보내 줄 테니까. 덤비기 싫으면 꺼져! 네놈 면상보고 있으려니까 속 뒤집힌다." 내 말에 그는 움찔하더니 주위를 힐끔거린다. 보는 사람도 많은데 여기서 도망가면 그야말로 겁쟁이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더구나 친구들까지 버린 녀석으로 말이야. 그렇다고 덤비자니.. 겁나겠지. 안 그래? 보니까 깡패새끼도 아니고 그냥 양아치 새끼다. 이런 녀석의 행동반경이야 뻔하지. 나는 내 옆에 있는 의자를 들어 녀석에게 던졌다. "꺼지려면 빨리 꺼지라고 했잖아!!!" 의자는 녀석의 바로 옆을 지나쳐 뒤쪽의 식탁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터트렸다. 동시에 재차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며 근처에 있던 학생들은 우르르 몸을 피했다. 나는 다시 의자 하나를 들어올리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빗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냥 녀석의 면상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순간 내 손을 잡는 누군가의 손 때문에 나의 의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 그만해!" 진희누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에 눈물을 매달고 내 손을 잡고 있다. 순간 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누나를 겁먹게 한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일어났다. "하아... 미.. 미안해요...." 다시 의자를 내려놓으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중간에 목숨을 건진 녀석이 슬금슬금 출구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평소의 나라면 쫓아가서 밟아버렸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유빈이 네가 아닌 것 같아... 무섭단 말야! 그러니까 그만... 해....." 제길.. 나 진짜 한심한 놈이다. 그냥 웃으면서 넘겨 버렸으면 되는데... 누나가 바로 앞에 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해 버린 거야? 나는 손을 뻗어 누나의 몸을 안았다. 중간에 멈칫하기는 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누나를 끌어안았다. 누나의 체온이 내 몸에 퍼지며 희미하게 남아있던 분노마저도 사라지게 해 주었다. "미안해요. 정말....." 나 진짜 오늘 너무 큰 죄를 저질러 버렸다. 평생 아끼겠다고 다짐 한 누나를 슬프게 해 버렸다. 나는... 정말 바보다. 누나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지만.... 학교에서는 정학을 당해 버렸다. 다행인 점이라면 원래는 무기정학 감인데 어찌된 일인지 한 달 정학만 받았다는 것뿐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호출되었고 어찌저찌 학교를 나와 지금은 집으로 돌아 온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 아버지와 내 앞에는 열여섯 병의 소주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샷이다." ".......아버지.. 저 죽어요." "원샷이다." ".......죄송해요. 두 번 다시 이럴 일은 없을 겁니다." "원샷이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소주병을 들어야 했다. 앞으로 여덟 병을 원샷하려면 진짜 죽었다. 거의 술의 신의 정기를 타고난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술에는 진짜 약하다. 소주 한 병도 겨우 마실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미 지은 죄가 있는 이상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다. 아버지는 내가 사고를 피우고 학교를 정학 먹을 때마다 언제나 소주로 대작을 하신다. 아버지의 말로는 술을 먹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 나름대로 나에게 하는 복수이다. 일 하던 중에 학교로 불러냈다고...... 분명하다! "원샷이다!" "알았어요!" 에라. 먹자! 인생은 뒤끝 없는 원샷 인생이로소이다!! 화끈한 알콜이 목을 타고 위로 넘어간다.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라 종종 역순환 된 소주가 제 갈길 못 찾고 코로 넘어오기도 한다. 그 때마다 타격치는 두 배이다. 하지만 사나이 한 번 잡은 길에 후퇴도 샛길도 없다!! 나도 독종이라고!! 천희형에게 미친놈 소리 들으며 2년 동안 엉텅구리 무공 배웠던 몸이란 말야!!! "크하~!!!! 딸랑딸랑~!" 아버지 주특기다. 술 다 마시고 머리 위에 병 거꾸로 세워 흔드는 것... 아직 나는 절반도 못 마셨는데 아버지는 벌써 다 마시고 새로운 소주병을 들고 계신다. "빨랑빨랑 마셔라!" 알았어요. 알았어! 거의 다 마셨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요!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깨끗하게 비운 후 나는 병에서 입을 떼었다. "끄윽......" 배따지가 뜨뜻하고 머리가 띵하다. 잠시 몸이 휘청하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몸을 지탱하며 빈 병을 들고 머리 위에 거꾸로 세웠다. "딸랑..... 큭.. 딸랑~!" 아버지와 나는 두 번째 병을 물었다. 한번에 마셔서인지 뭔가 올라오는 기분은 느꼈지만 아직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알콜이 몸으로 퍼지지 않은 것이다. 거의 악으로 깡으로 비우고 드디어 세 번째. 역시 통과했다. 네 번째도 비우고 딸랑딸랑을 했다. 동시에 술기운이 일시에 솟구쳤다. 눈앞이 흐려지고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항복이더냐?" "말도 안 되요!!" 남은 것은 깡밖에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술기운을 조금이라도 몰아내 보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실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흔들기까지 해 버렸으니 더욱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우욱...." "뱉으면 죽는다. 삼켜!!" 아버지!! 오늘 진정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잡으실 작정이십니까? 올라온 것을 다시 삼키라니요!! 솔직히 말해서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삼켜보았자 더욱 속은 요동치고 이차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깡이다!" 잘났수. 하지만 아버지의 한 마디는 나의 의지를 불태웠다. 깡! 깡이다!! 나는 이를 악물며 다섯 번째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된 것 여덟 병 연속으로 비우고 화장실로 튀어가야 할 것 같았다. "꿀컥... 우욱.. 꿀컥... 우욱...." 넘어오는 것을 새로운 소주로 밀어 넣었다. 잠시라도 쉬었다가는 이제까지 마신 것이 한번에 넘어 올 듯 싶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섯! 일곱!!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소주병이 내 손에 잡혔다. "한 병이다!! 아들아 너는 할 수 있어!!" "아자우!!!" 한 병이 더럽게 안 줄어든다. 조금씩 넣었다가도 다시 올라오는 것이 원위치를 시켜 버린다. 이거 술기운보다도 배가 불러 죽겠다. 이러다가 위 구멍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이다. 꼴꼴꼴..... 이미 아버지는 모든 술을 비우며 나를 응원하고 있다. 두 손을 꽉 쥐고 '넌 할 수 있어!!'를 계속해서 외치는 아버지의 기대를 부흥하기 위해서 나는 젓 먹던 힘까지 짜내 최후의 발악을 했다. "꼬르륵..... 우욱!!!" 결국 임무를 완료했다. 동시에 나는 술병을 던지며 화장실로 튀어갔다. 문을 박차고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즉시 변기에 얼굴을 묻으며 넘어오는 것을 시원스럽게 뿜어버렸다. "우에에에에에엑!!!" 소주와 위액이 어우러져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위가 펌프로 변했는지 출력도 기똥차다. "우에에에엑!! 허억... 허억.. 우욱!!!" 오바이트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원하지도 않는데 눈물과 콧물이 나와 얼굴을 적시는 것을.... 시큼한 위액이 코로 넘어올 때도 있다. 거의 대부분 위를 비워버린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변기의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향했다. 찬물을 틀어 세수를 하자 조금은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눈앞은 침침했고 귀로 위잉~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우욱!!" 이차 폭발이다. 아직도 넘어 올 것이 있을까? 나는 다급히 재차 변기에 얼굴을 들이댔다. "우엑.. 우에엑... 우엑!!" 술은 다 빠져나왔나 보다. 헛구역질만 나올 뿐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었다. 시큼한 위액이 약간씩 나올 뿐이다. "아아.. 나 죽어......" "내 아들이 그 정도로 죽겠냐? 다 비웠으면 빨리 나와. 아빠 오줌 마렵다." 아버지도 상당히 취한 듯 하다. 하긴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깡소주 여덟 병을 한순간에 비워 버렸는데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세수를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거실의 소파로 다가가 쓰러지듯이 앉아 천장을 응시했다. 하늘이 빙빙 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진짜로 현실이 되어서 다가온다. 눈앞이 침침하다. 버텨야 하는데.... 눈이 뜨여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시체처럼 옆으로 쓰러지며 눈을 감아 버렸다. "이.. 녀석... 아비가 할 말이 있다는데 듣고 않고 자네... 그래 자라 자!" 수마의 아가리 앞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띵동! 띵동!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결국 나는 그 소리가 초인종 소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으윽.... 누구야?"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나는 이불을 젖히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만 팔에 힘이 풀렸고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버렸다. "아우...."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뜬 나는 그제야 내가 방이 아닌 거실의 소파에서 잤다는 것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탁자 위에 빈 소주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안주로 보이는 과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아.. 맞아... 어제 아버지와....." 어떻게 잠을 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중간에 필름이 끊겼다고 할까? 그런데 안주는 없이 술을 먹었는데... 아마 내 기억의 공백 중에 안주를 꺼냈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안주를 꺼내 홀로 자작하셨나 보다. 여전히 초인종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시계를 찾았다. 16:27 오후 4시 27분이다. 정말 많이도 잤다. 하긴 그렇게 먹고 죽지 않은 것이 용하지.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술기운을 억누르며 비틀비틀 현관으로 다가갔다. "네에.... 누구세요~?" 목에서 평소와 다른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온다. 불덩이라도 목에 걸려 있는지 화끈거린다. 술을 마시면 물을 찾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갈증 때문이다. 물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잠시 누르며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 "있었네. 나는 없는 줄 알았는데...." "아아.. 누나? 어쩐 일이에요?" 진희누나였다. 몇 번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던 누나였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나가 찾아 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터라 조금 놀라기는 했다. "술 냄새. 술 마신 거야?" 누나는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나도 코가 지끈거릴 정도인데 누나는 오죽 하겠는가.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아버지하고 좀 마셨어요.... 그보다 집안이 지저분한데.. 들어올래요?" "아버지는?" "일 나가셨죠.. 하여간 우리 아버지지만 정말 괴물이에요. 그렇게 마시고 다음날이면 멀쩡해지니....." 나는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말야. 누나가 들어오게 길을 비켜 준 나는 누나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문을 닫고 비틀비틀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중간에 다리가 풀려 휘청 쓰러질 뻔했다. 재빨리 누나가 잡아줬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어지럽고.. 속 쓰리고.... 죽겠어요. 누나 해장국 끓일 줄 알아요?" "콩나물국이라면..... 그거라도 괜찮아?" "헤에... 저야 좋죠." 누나가 끓여주는 콩나물 국...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콩나물은 냉장고 제일 위칸에 다듬어 놓은 것 있어요." "응." 물을 한 잔 마신 나는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아 누나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서 있는 누나의 모습이 너무 어울려 보인다. 분명 집에서도 자주 요리를 할 것이다. 간간이 필요한 물품들을 찾지 못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었고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냄비를 렌지에 올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안색이 안 좋은데.. 정말 괜찮니?" "네네. 숙취에요.. 몇 번 겪어 봐서 알아요." "그래도... 열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내 머리에 손을 대며 누나가 걱정스런 얼굴을 해 보인다. 나는 누나의 서늘한 손을 음미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걱정 되요?" 내 물음에 누나는 얼굴을 붉혔다. 희미하게 끄덕여지는 고개가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만들었다. "나.. 거실 좀 치울게.. 지저분해서 못 보겠어." 내가 웃으면서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어지러진 거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털어 낸 후 접어서 소파 위에 올려놓고 큰 쓰레기를 하나씩 주어 모았다. 그리곤 청소기를 이용해 작은 쓰레기를 한번에 치워 버린다. 청소하는 누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누나에게 다가갔다. 누나의 이런 모습은 나에게 이상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평소라면 자제를 하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리라... 나는 그대로 뒤에서 누나를 안아버렸고 누나는 깜짝 놀라서 나를 돌아보았다. "유빈아.. 왜?" "누나 안고 싶어요...." 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진희누나는 결국 쓰러졌고 나는 위에서 누나의 몸을 누른 채 손으로 누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누나의 몸을 돌려 나와 마주보게 만들고 손가락으로 누나의 이마에서부터 천천히 쓸어 내렸다.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누나가 너무 예쁘다. 내가 얼굴을 가져가자 표정을 상기시키며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짧은 입맞춤.... 처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온 몸에 짜릿한 전류를 흘려준다. 나는 다시금 누나의 입술을 점령했다. 이번에는 가볍게 끝나지 않았다. 나는 혀를 이용해 누나의 다물어진 치아를 벌렸다. 처음에는 호응하지 않던 누나도 결국은 내 끈질긴 공략에 무너졌다. 누나의 혀와 내 혀가 끈적하게 엮어졌다. 한 손으로는 누나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긴 프렌치 키스가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온통 세상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이런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랬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얼굴을 지나쳐 목을 넘어서 결국 내 손은 누나의 봉긋 솟은 가슴에 닿았다. 내가 누나의 가슴을 약하게 쥐자 누나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동시에 누나는 나의 입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손을 떼었지만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 하지만.. 나 이런 것은 싫어." "아니요.. 제가 오히려 미안해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누나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금 정적이 이어졌다. 이런 어색함을 깬 것은 주방의 냄비였다. 삐이이이~! 국이 다 됐음을 알리는 냄비의 비명소리. 누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나는 길을 비켜 주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재빨리 옆을 지나쳐 가는 누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시금 내 품에 안긴 누나의 입술을 재빨리 훔친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뭐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으로 만족할게요. 그리고 이 다음은 누나가 내 프로포즈를 받아 준 다음이에요." 다시금 누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나는 누나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아.. 이것도 고문이야~!! 빨리 누나를 안고 싶은데.... 과연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모르겠어~!!! "그럼 나 그만 갈게. 오늘은 게임 하지말고 푹 쉬어야 해. 알았어?"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누나 걱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누나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나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는 듯이 현관에서 발을 떨어뜨릴 줄 몰랐다. "만약에 게임에 접속해서 너 있으면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한 시간마다 확인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다니까요. 자자. 그만 가 봐요. 늦었잖아요." 시간은 벌써 8시다.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 해 져 있었고... 더 늦어서 좋을 것은 없다. 내가 이왕이면 누나의 집까지 배웅을 해 주고 싶지만 그건 누나가 끝까지 거부하니 어쩔 수가 없다. 뭐... 바로 앞이 정류장이니 걱정 할 필요 없을 것이다. 누나 집도 골목이 아니라 대로에서 바로 들어가면 되니까. "그럼.... 나오지는 마."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 봐요. 부모님 걱정하시겠어요." 현관 밖까지 배웅을 했다. 누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점차 작별시간이 가까워짐을 알았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올라왔을 때였다. 갑자기 누나가 나를 돌아보더니 내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 버렸다. 느닷없이 당한 키스라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곧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누나의 허리를 껴안았다. 한줌도 안 되는 가는 허리가 내 팔에 쏙 들어왔다. "너 때문이야... 나 이상해졌어." "저는 좋은데요." 히죽 웃으며 다시금 누나와 입을 맞추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 도착했는지 '띵동'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동시에 여자의 깜짝 놀란 목소리도.. "어마낫!!" 그 쪽도 놀란 것 같지만... 진짜 놀란 것은 나와 진희누나일 것이다. 화들짝 놀라 나와 누나는 떨어졌고 힐끔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았다. 앞집 아주머니가 처음에는 놀란 얼굴로 우리를 보다가 종래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걸어나오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유빈군 여자친구야?" "아.. 그게.... 하하.."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고.. 진희누나는 새빨간 얼굴을 가리며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갈게. 유빈아...." "잘 가요."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고 누나와 나는 헤어졌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옆집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해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좋으 밤 되세요. 아주머니~!"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도망치듯이 집으로 들어왔다. 뒤에서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절망 어린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아!!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더구나 내일이면 아파트 전체로 소문이 퍼질 건데.... 아빠가 아는 것도 시간문제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에서 보냈다.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까지는 잠을 자고 나머지는 모조리 게임만 했다. 물론 중간에 화장실 가는 시간과 식사시간은 존재했다. 저녁에는 누나와 함께 돌아다녔지만 낮에는 간만에 얻은 시간을 이용해 내 수련을 했다. 그 동안 누나만 신경 쓰는 터라 여전히 내 레벨은 347이었다. 지금 내 레벨에서 1레벨은 현실시간으로 3달간 죽어라 해야 가능하다. 그런데 내 신경은 전혀 쓰지 않았으니... 이 상태로 가면 350레벨이 되려면 몇 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뭐... 내 레벨보다 누나가 더 소중하니 아무래도 좋다. 누나만 생각하면 그 날의 뜨거운 키스가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혀 버린다. 온 몸을 뒤덮는 짜릿한 쾌감이 너무 좋다. .......아파트 내에 소문이 퍼져 버려 골치 아픈 것만 빼면... 어쨌든 그렇게 내가 정학을 먹은 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우리 학교의 반 대항전이 있는 날이다. 물론 정학 건 때문에 나는 출전을 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얼마 전에 안 것인데 내가 아주 박살을 내 버린 그 세 3학년은... 시연선배가 말했던 3학년의 절정고수들이라고 한다. 평소 진희누나에게 마음이 있었던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상태였는데 우연히 식당에서 내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을 듣고 시비를 건 것이다. 그들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히 누구한테 시비를 건다는 말인가? 시원하게 밟아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녀석들에게 향한 불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게임에 접속해 머리를 풀고, 흑의를 입고, 철검을 허리에 맨 채 진호에게 들었던 반 대항전이 열리는 오악성으로 향했다. 중간에 종종 나에게 시선이 모이기는 했지만 진짜 검천지룡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저 짜가라고 판단한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릴 뿐이다. 사람이 없을 때는 경공을 쓰고 사람이 보이면 느긋하게 걸으면서 대략 16시간 만에 오악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악성에 들어선 나는 즉시 중앙의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무도회장. 오악성의 명물로 본래 게임 내에 있던 것이 아닌 유저들이 만든 거대한 콜로세움이다. 검투회라는 집단이 장사를 하는 장소인데 이 검투회는 문파라고 보기도 뭐하고... 상인집단이라고 보기도 뭐한 조금 특이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어둠 속의 기업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이 검투회는 실력이 비슷한 두 명의 유저들을 포섭해 무도회장에서 시합을 벌이게 하고 그것을 관람하기 원하는 유저들에게 돈을 받고 자리를 내어주는 집단인 것이다. 물론 수입의 일정금은 시합을 한 이들에게 넘겨주고 말이다. 당연히 승리한 쪽에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 외에도 검투회에서 하는 일은 누가 승리를 할 것인지 내기를 거는 도박업이있다. 그러니 선량한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욕을 먹어도 시원찮을 집단이지만.... 비리는 거의 없고 때때로 그들이 만든 무도회장을 개방해 유저들의 이벤트에 도움을 주기도 하니 웬만한 유저들은 그들을 싫어하지 않고 운영자들 측에서도 검투회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어쨌든 오늘 우리 학교 더 월드 한제국 유저들이 시합을 벌이는 곳은 바로 이 오악성의 무도회장이다. 당연히 오늘은 시합이 없고 무도회장이 임시로 개방된 날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학교의 시합은 회사주최의 행사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검투회 측으로 돌아갈 이윤도 컸다. 나는 무도회장 입구에 자리한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합에 출전하지 못하는 나였기에 이렇게 표를 구입해 관객으로 입장을 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내 자리는 무도회장 동문이 있는 방향의 가장 뒤쪽 자리였다. 먼 거리이기 때문에 시합을 관람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못하기에 가장 싼 자리였지만 나 정도의 레벨이라면 이 정도의 거리에서도 시합장 위의 바늘까지 찾아 낼 수 있으니 상관할 바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 내가 저지를 일을 생가하면 도망갈 때 이 자리가 가장 좋거든. 전국대회도 아니고 지방대회도 아닌, 그저 한 학교의 선발전이었으니 관람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할 일이 없어 심심한 터에 구경이나 할까 오는 이들이거나, 아니면 매일같이 무도회장에서 사는 죽돌이, 죽순이들 뿐일 것이다. 뭐... 오늘 이들은 여기에 온 것을 후에 대단히 행운이라 생각할 터이다. 나는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합이 빨리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때 누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유빈아. 어디야?] [무도회장~. 구경하러 왔어요.] [어? 나도 거긴데... 어디에 있어?] 오~ 누나도 여기라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나를 찾았다. 그렇게 관중이 많지 않아 누나를 찾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저기 맞은편의 가장 앞자리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누나를 찾은 나는 히죽 웃었다. [나는 누나 찾았는데.] [정말이야? 나는 아직 못 찾았어. 어디야?] [하하. 찾아 봐요.] [너무해. 정말 어디야? 여기 있는 거야?] [당연하죠. 누나 왼쪽에는 시연선배가 턱을 괴고 호떡을 물고 있네요. 그렇게 먹다가 살찐다고 선배한테 전해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볼살이 통통해 졌는데.] [정말 여기 있나 보네.....] 다시금 누나가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누나의 레벨로는 이렇게 먼 거리에 있는 나를 찾기는 힘들다. 평소의 나라면 즉시 누나에게 달려가겠지만.. 오늘은 조금 힘들다. [저 여기 분명 있어요... 못 찾겠으면 기다려요. 조금 있다가 제가 깜짝 이벤트 벌여 줄 테니까요.] [무슨 이벤트인데?] [보면 알아요.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거의 환상이지. 흐흐흐.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결국 나를 찾는 것을 중단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시연선배에게 뭐라 한 마디 했는데.... 갑자기 시연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에서 불을 뿜는다. 갑자기 왜 그러지....?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 징이 울리며 30명의 사람들이 시합장 위로 올라왔다. 그 중에 진호와 며칠 전 박살낸 뱁새 눈이 끼어있었다. 아마도 각 반 대표인가 보다. 원래 내가 올라갔을지도 모르는데... 뭐 내가 시합에 나가더라도 귀찮은 것이 싫으니 진호를 보냈을 것이지만... 현재 진호의 레벨은 145이다. 조금만 더 하면 절정고수가 되지만... 그 레벨이라면 아무리 천희형이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레벨을 올리기 힘들다. 100레벨 이상부터 레벨을 올리는데 그 이전보다 근 세배의 노력이 필요로 하거든. 그리고 150레벨부터는 더 심하다. 괜히 절정고수의 수가 적은 것이 아니다. 어쨌든 그들을 추첨을 하면서 대전상대를 정했다. 다행히도 우리 반은 부전승으로 2차 전에 그냥 오르는 영광을 거머쥐었다. 진호녀석... 평소 시간 날 때마다 복권 긁더니... 이런데서 뽑히네 그래... 곧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시합은 3:3 토너먼트로 세 번의 시합을 벌여 먼저 2승을 거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대부분이 일류고수였던 지라 한 시합 당 가지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절정고수끼리의 시합은 종종 한시간 이상이 넘어가지만 일류고수는 체력적으로나 내공이 크게 높은 편은 아니라서 길어도 30분 정도면 체력과 내공저하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이다. 대략 한 시간 정도씩 해서 한 시합이 끝이 났고... 전체 14시합이 10시간 정도만에 끝이 났다. 현실로 치면 1시간이 걸린 것이지... 통과한 클래스는 재차 16강을 치렀고 뱁새눈 패거리는 셋 다 절정고수라는 것을 자랑하듯이 가볍게 승리를 거둔다. 다행히도 우리 반 역시 1학년 팀을 만나 현신이가 나간 첫 번째 시합은 졌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민선이와 진호가 이겨 역전승리를 거두었다. 8강전. 기적적으로 우리 반은 통과했다. 역시 첫 번째 시합은 졌고, 두 번째 무승부.. 세 번째는 상대가 절정고수였는데 천운으로 진호가 승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재시합에서 진호는 다시 한 번 절정고수를 꺾어버렸고 시합장을 환호로 물들여 버렸다. 아무리 천희형이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아직 일류고수가 절정고수를 연패시켜 버리다니.... 이건 정말 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 반의 기적은 4강에서 무너져 버렸다. 하긴 일류고수 둘과 이류고수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 온 것도 대단한 일이다. 처음 8강만 올라가도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이라 생각했는데 준결승까지 진출을 했으니 말이다. 현신이 녀석과 민선이 눈물을 흘리며 진호의 위로를 받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볍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은 대단원의 결승전. 역시나 결승 진출자 중 하나는 뱁새 눈패거리였다. 반대측에는 그들의 라이벌이라는 3학년 2반. 절정고수 둘과 일류고수 하나로 이루어진 팀으로 진호를 이기고 올라온 클래스이다. 심판이 나와 시합 전 지시를 내리고 있고 두 팀은 각자 준비를 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합이 시작될 것.... 하지만 그대로 두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 "암무! 나와!!!" 나는 즉시 암무를 불렀고 곧 거대한 응룡이 광풍을 몰고 하늘을 날아왔다. 느닷없이 주위가 어두워지고 바람이 일어나자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고 곧 거대한 응룡을 발견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동양의 용은 그냥 뱀같이 생긴 녀석이 여의주를 물고 다니는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많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날개를 단 용도 얼마든지 있다. 그 수가 적더라도 말이다. 이무기가 용으로 승격하면 교룡(較龍)이 불리는 어린 용이 된다. 그리고 그 교룡이 1000년을 살면 용이 된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말이다. 그 후 용이 1000년을 더 살면 각룡(角龍)이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아는 용이다. 머리에 뿔 이 난 용. 사신 중 청룡이 바로 이 각룡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 각룡이 1000년을 살면 날개가 돋아나는데 이를 응룡이라 부르며 거의 신에 준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암무가 바로 그 응룡이다. 암무의 진정한 힘을 보면 나를 능가한다. 내가 그런 암무를 제압하고 수하로 삼은 것은 거의 천운이라 봐도 무방하다. 뭐 무상공에 무상검, 그 오의(奧義)에 무상천검(無上穿劍)이 없었다면 그 천운도 얻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암무를 본 이들은 처음에는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지만 곧 내 근처에 있는 유저 하나가 '검천지룡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비명은 환호로 바뀌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검천지룡'과 '사룡지주'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이거... 내가 뭘 하기 위해 여기에 왔는지 전혀 모르는 군. 뭐 나는 내 할 일만 하고 가면 되니 신경쓸 것도 없다. 나는 웃으며 검지와 중지를 들며 시합장에 있는 뱁새는 패거리 셋을 응시했다. 시합이 시작하면 시합장 위는 일종의 페널티 지역이 되어 죽어도 경험치와 레벨 손실이 없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날려버려!" 동시에 암무가 그대로 레이져 브레스를 뿜어 버렸다. 암무는 동방의 용이지만 응룡이고 무엇보다 중앙대륙에 기거한 터라 서양의 드래곤의 기술까지도 대부분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빛이 시합장을 강타했고 그 위에 있던 뱁새 눈 패거리는 비명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타격을 받은 것은 시합장 오른쪽에 있던 뱁새 눈 패거리뿐이었다. 오오~ 레벨이 팍팍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리스를 하고 재 시합을 벌여도 절대로 우승은 못 할 것이다. 갓 절정고수가 되었던 녀석들이라 이번 죽음으로 두 녀석이나 일류고수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렙따! 일명 레벨 다운이다. 히죽 웃은 나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채 재빨리 암무의 등을 타고 도주를 해 버렸다. 무하하하~!!! 7 - 의성수의 비밀 어느새 완연한 겨울이다. 나는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황급히 창문을 열어제쳤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와 방안의 따뜻한 공기를 밀어낸다. "후아..." 전에는 눈이 와도 이러치 않았는데.. 그 사이에 내가 많이 변하기는 했다. 이게 다 누나 덕분이다. 누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세상에 서 있었을 것이다. 친구도 없었을 것이고 말야... "좋았어!! 오늘은 꼭 비밀을 풀어버리고 말겠다!!" 호기롭게 외친 나는 다시 창문을 닫고 침대위로 올라섰다. 링크헤드셋을 쓰며 자리에 누운 나는 즉시 더 월드에 접속을 했다. 어김없이 남연성의 리스장에 들어선 나는 우선 누나가 접속을 했는지 살폈다. 아직 누나는 접속을 하지 않은 듯 하다. 뭐 곧 들어 올 것이라 믿으며 그 사이에 사냥이나 할 겸 성을 나섰다. 이미 누나는 청낭서를 극성으로 익히고 레벨도 190대가 되었다. 현재 누나의 지력은 자그마치 367. 지력 하나만 보면 나를 띄어 넘고도 남았다. 아직 지력의 최고수치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500이 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그 엄청난 지력 때문인지 오성이 높아 웬만한 무공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익혀 버릴 정도였다. 각각 다른 무공을 익히면 절정무공 이상부터 엄청난 속도로 성취도를 보이는 히든피스와 누나의 엄청난 지력이 어우러져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누나의 성취는 빨랐다. 지금의 나도 삼류무공을 극성으로 익히려면 현실시간으로 일주일은 걸리는데.... 누나는 사흘만에 끝을 보아버릴 정도였다. 청낭서를 완전히 익혀 추가 능력치를 얻은 후부터 누나는 지력이 350이 넘을 때까지 레벨업을 하면서 겸사겸사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혔다. 삼류에는 부작술과, 용독술, 의술, 검술을 추가로 익혔고 이류 역시도 진법술, 용독술, 의술, 검술을 익혔다. 나머지 일류와 절정도 처음 균형을 맞추었다. 아직 일류와 절정의 무공들은 극성에 이르지 않았지만 급할 것은 없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올 여름까지면 충분히 그것들 역시도 절정으로 올릴 수 있으리라.... 나 역시도 처음에 당가독공을 절정까지 익히고 누나처럼 균형을 맞추었었다. 하나의 무공을 배우는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지만 그건 성질이 다른 무공일 때뿐이다. 내가 발견한 히든피스는 여러 무공을 어렵게 익혀야 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어렵지만 후에는 여러 분야를 배웠기에 이제까지 배운 것들을 쉽게 익힐 수 있는 또 다른 장점까지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 성취도도 한 가지만 익힌 이들에 비할 바가 없었다. 물론 그 것들이 아닌 것은 배우려면 죽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진법술이나 부작술을 배운다면 진짜 피가 말릴 것이다. 지력이 350이 넘었을 때부터 누나는 의성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홀로 의성수의 비밀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비밀은 의성수를 절정으로 익혀야만 단서를 보일 지도 모른다. 내가 무상검록을 얻게 되었던 검보는 그렇지 않았는데 말야.... 아! 검보의 비밀은 뭐였었냐고? 검보의 비밀은... 물에 버리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기에 쉽게 설명을 하겠다. 정말 검보의 비밀을 안 것은 우연이었다. 검보에 들어 있는 것은 검술이 아닌 단 하나의 신공뿐이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검선공 말이다. 분명 종류는 검법서인데 엉뚱하게도 내공운용술 하나뿐이니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검선공의 취득 시 필요 능력치도 어이가 없을 정도다. 지력을 제외한 근력과 민첩, 체력의 수치 220이상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다른 최절정고수라 하더라도 그가 배운 무공에 따라서 한 가지만이 250이 넘을 뿐이지 다른 능력치는 대부분 180에서 200을 오갈 따름이다. 그것도 최절정 고수가 되었을 때 극에 이르러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후의 능력치가 말이다. 당연히 검보는 모든 이들의 손에서 버그로 만들어진 절정무공서라고 불리며 천대받았고 어찌하다가 내 손에 들어 온 것이다. 다행히 나는 엽기적인 성장으로 인해 검선공을 익힐 수 있는 능력치가 있었고 즉시 호기심을 가지고 수련을 시작했었다. 버그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최소한 익힐 수 있는 내가 있지 않은가? 분명 뭔가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네 달이라는 검선공을 극성까지 익혔을 때까지도 비밀을 풀지 못했다. 더구나 검선공이라는 신공은 어울리는 무공도 없었다. 절정무공서에 적혀있는 신공이니 만큼 최소한의 힘을 내야 할 터인데.... 이 신공을 운용하며 이류무공을 쓰면 오히려 삼류무공보다도 더 작은 공격력을 가질 정도였다. 그 외에도 검선공은 성취도가 올라도 내공 상승이 없다. 더 월드에 존재하는 신공이나 심결은 1성이 오를 때마다 오러. 즉 내공의 상승이 있는데 검선공은 그것이 없었다. 완전히 필요 능력치만 높고 얻는 것은 없는 쓰레기였던 것이다. 이러니 내가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내심 하면 극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내가 폭주를 해 버릴 정도로 검보는 나를 절벽 끝으로 밀어 넣었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나는 검보를 던져버렸고 때마침 근처에 강이 하나 있었던 터라 검보는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검보를 찾았다. 아무리 열이 받는다 해도 중간에 포기를 하는 것은 결코 내 성격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평생이 걸리더라도 검보의 비밀을 풀어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고 별 수 없이 강속으로 뛰어들어 검보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검보는 온데간데없고 한 장의 종이쪼가리만이 유유히 강을 타고 하류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그 종이를 건져 올렸고 그것이 바로 절대검공이라는 무상검록을 얻는 시발점이 되었다. 종이는 어떠한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였다. 나는 당장 지도에 표기된 그 곳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아무것도 없던 장소였는데 내가 다가가자 그 장소에 하나의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동굴 안에서 나는 한 노인을 만났다. 무협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기연 주는 시체였다. 그 시체의 앞에 놓여있는 책이 바로 무상검록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쓰여져 있는 글귀.... 지금도 잊지 않는다. [연자여. 나는 한 제국에 의해 멸망한 주 제국의 태자 주천이라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저 이름뿐인 나그네일 뿐이지만..... 주 제국이 멸망한 이후 나는 강호에 몸을 투신하며 어렸을 때부터 뜻을 주었던 검의 끝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황궁제일고수라는 칭호가 있었던 나는 수많은 황궁무고의 검술을 모두 섭렵하였지만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나는 강호를 유랑하며 수많은 검수들과 검을 겨루었다. 그 중에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도 끼어 있었고, 마교의 거마들도 존재했으며 이름도 없는 삼류무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나에게 충족감을 주지는 못하였다. 무상검신이라는 허무한 외호를 얻었지만 그런 이름 따위야 어찌하랴. 수많은 이들이 나의 검학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그 누구도 제자로 받지 않았다. 나는 제자를 원하지 않는다. 내 나이 90세가 되던 해 더 이상 강호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음을 느낀 나는 결국 이 곳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나의 남은 생명의 혼을 불태우며 이제까지의 내 과거를 집대성 시켰다. 그것이 지금 내 앞에 놓인 무상검록이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긴 적이 없지만 이 무상검록만은 다르다. 이 검도는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검도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이것이 진정한 검의 끝이라고 확신한다. 허허허.. 하지만...... 내가 만든 검술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이 아쉽구나. 너무나 뛰어난 검술이지만 이는 인간이 익힐 수 없는 검술이 되어 버렸으니..... 결국 모든 것이 만류귀종임을 망각한 나의 편협함이 종래에 이런 결과를 낳아버렸구나. 연자여... 그대가 이 검술을 익힐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욕심을 버리길 충고한다. 그러나 만약... 만약 그대가 전설의 천무성체(天武聖體)를 타고난 아이라면 이 무상검록을 취해도 무방하다. 무상검록을 얻고 싶다면 내 앞에서 구배를 올리고 제자로서 예를 올리도록 하라. 그렇다면 그대에게 좋은 또 하나의 선물이 있을 것이니라.] 그 때 얼마나 희열에 찼었던가.... 그냥 대번에 구배를 올려.... 버리려고 했었지만 문뜩 이상함을 느꼈었다. 주천의 말에는 분명 자신은 제자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참을 고심했었다. 이거 구배를 올려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상검록만 들고 돌아설 것인가를 말이다. 결국 나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소리쳤었다. "제자는 싫소!! 나는 그대를 선배로 모시겠소! 나는 그대를 친우로 생각하겠소!" 다행히 내 말이 정답이었다. 그는 결코 제자 따위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친우였던 것이다. 수십 년을 강호를 떠돌며 적만이 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열 친구는 얻지 못했던 절대 강자.... 비록 게임 속의 만들어진 인형일 뿐이지만 나는 그 순간 주천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존재로 인식했다. 내 외침과 동시에 주천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그 자리에 한 자루의 검과 한 장의 양피지가 남았던 것이다. 무상천검(無上穿劍) 무상공(無上功) 무상을 꿰뚫는 검. 진정한 무상검록의 위력을 발휘하게끔 만드는 무상검록만을 위한 검이었다. 무상공 역시도 무상검록을 위한 신공이었다. 무상공은 검선공을 극성까지 익힌 자만이 배울 수 있었고 무상검록상의 무공들은 근력, 민첩, 체력이 250이상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나를 위한 무공들이었다. 그 날 나는 무상검록과 무상공, 무상천검을 얻었고 덕분에 사룡 암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현재 무상천검은 암무가 가지고 있다. 그렇게 호화롭지는 않지만 묵빛의 현철로 만들어진 검이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는 귀찮거든. 현철을 알아보는 이라면 당장이라도 가치를 알아보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것이 내가 무상검록을 얻을 때의 사건이고... 당연히 의성수 역시도 남은 두 가지 초절정무공의 단서가 될 가능성이 컸다. 뭐 잘못 찍었을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말이다. 대략 2시간 정도를 성 근처에서 놀고 있자 누나가 접속을 했다. 나는 즉시 남연성으로 돌아왔고 누나와 만났다. "일찍 일어났네." "저야 할 일은 이것뿐이잖아요." 지금은 겨울방학인 터라 학교는 가지 않는다. 당연히 언제나 그렇듯 나는 하루 중 20시간 가량을 게임에 투자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겨울이벤트 기간이다. 누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최고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밖에 눈 오던데. 봤니?" "네. 왜요? 나가고 싶어요?" "그러고 싶지만... 나 추운 것은 정말 싫어....." 하하하. 누나는 눈을 좋아하지만 추위에는 진짜 약하다. 전에 첫눈이 내릴 때 데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새파랗게 얼굴이 질리는 것이.... 음.. 지금 생각하니 무척이나 귀여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누나가 제 품에 안겨서 집까지 갔던 것." "몰라...." 얼굴을 붉히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히죽 웃었다. 그 때 추위를 참지 못하는 누나를 껴안은 채 나는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쳐다보던 터라 당시 누나는 상당히 부끄러웠을 것이다. 뭐 나야 좋았지만 말이다. "그보다 오늘은 어떻게 할거야?" 누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흠.. 그 때의 이야기를 하기 싫은가 보다. 뭐 누나의 뜻에 따라 줘야하지 않겠어? 괜히 누나가 토라지기라도 하면 나만 진땀빼야 하니 말이다. "누나 지금 의성수 몇 성까지 올렸어요?" "11성. 99%" 어제 듣기는 했지만... 흐흐 그래도 들을 때마다 희열에 몸이 떨린다. 앞으로 1%만 더 올리면 되는 것이다!! 무공의 성취는 6성까지는 쉽게 올라간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성취가 더디고 특히 10성 이상부터는 죽음의 시간이다. 삼류무공과 이류무공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일류무공과 절정무공은 진짜 장난이 아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10성에서 11성, 11성에서 12성으로 오를 때이다. 이 두 번의 성장에서는 랜덤법칙이 적용된다. 1%에서 99%까지는 일정하게 성장을 하지만 마지막 1%가 진짜 오르기 힘들다. 여기서 랜덤법칙이 적용이 되면서 희미한 확률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고 수준의 무공일수록 그 랜덤허용 수치가 현격하게 줄어든다. 때때로는 마지막 1%를 올리기 어려워 몇 달을 소모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희박하고 절정무공이라면 대부분 일주일 정도 죽어라 연마하면 1%를 올릴 수 있다. 운이 좋다면 하루면 끝이다. 이건 나나 다른 사람이나 상관없는 일이다. 나 역시도 무상검의 마지막 경지에 오르기까지 1%를 올리기 위해 한 달이 필요했거든. 오늘은 기필코 12성 성취를 이루고 말리라!!! 그리고 의성수의 비밀을 풀어버리리라!!!! "좋아요! 오늘도 녹환림으로 가죠. 어떻게 해서든 12성을 만들어야 해요!"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즉시 나와 함께 성을 나왔다. 내가 휘파람을 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천리신마가 달려왔고 나와 누나는 천리신마를 타고 녹환림이 있는 서남쪽으로 달렸다. 대략 7시간 정도가 걸려 녹환림에 도착했다. 녹환림은 남연성 근방의 사냥터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이다. 거대한 죽림(竹林)으로 레벨 150대의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팀을 이루어 사냥을 올 정도로 이 곳에서 출연하는 몹들은 대단히 고 레벨의 몹들뿐이다. 주로 등장하는 몹은 녹림백호, 흑수리, 사령강시, 음양쌍두사, 은혈독사로 이 중 가장 레벨이 떨어지는 녹림백호도 175레벨이니 일류고수라도 실수로 들어왔다가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특히 녹환림의 가장 안쪽에 있는 녹환봉에는 천환쌍수리라는 보스급 몹이 존재하는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터라 이들은 최절정고수라 하더라도 상대하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 레어 몬스터는 아니지만 까다롭기로는 레어 몬스터를 능가하는 몹이 바로 천환쌍수리이다. 각각 천수리와 환수리라 불리는 두 마리의 독수리로 녀석들의 레벨은 자그마치 각각 235와 230. 특히 두 녀석이 펼치는 연환 공격은 천희형이 260레벨일 때 하늘을 보게 만들 정도였다. 만약 그 때 눕지만 않았어도 천희형은 이황이 아닌 일황의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녹환림에 들어선 우리들을 제일 처음 맞은 몹은 흑수리였다. 녹환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잇는 몹이라 하면 바로 저 흑수리를 꼽을 수 있다. 레벨은 180.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순식간에 고공낙하를 해 공격하기 때문에 쉽게 잡기가 힘들다. 물론 나라면 간단하게 어기충소를 써서 날아올라 일검에 베어버릴 터이지만.. 아직 누나는 어기충소를 쓸 수 없다. 현재 필요한 것은 누나의 의성수 수련인터라 내가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나는 누나의 주위를 돌며 흑수리의 시선을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수리가 빠른 속도로 나를 공격해 왔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피하며 땅을 박찼고 거의 지상까지 내려 온 흑수리의 몸 위로 내려섰다. 그리곤 천근추의 수법을 써 흑수리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뒤이어 누나가 나서 의성수를 펼쳤다. 의성수(醫聖手) 이절(二絶) 일파(一派) 광(光)! 의성수는 의성신공(醫聖神功)을 기반으로 펼쳐지는데 초식은 각각 일절(一絶)과 이절(二絶)로 나뉜다. 이 중 일절은 치유의 수(手)이고 이절은 공격의 수이다. 각 절은 다시 삼파(三派)로 나뉘고 현재 누나가 펼치는 광은 공격의 절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지는 초식이다. 내가 무상검록을 배우기 전에 익혔던 검선공과 다르게 의성수는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무공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절정무공을 넘어선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쾅! 누나가 광을 펼치자 섬광이 일었고 그대로 흑수리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가차없는 일격이었다. 전에는 몹도 죽이기 힘들어 울먹이던 누나인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물론 그 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게 어디인가. 내가 한 번 몹에게 당한 척 연기를 한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물론 그 것이 연기라는 것은 아직까지도 누나에게는 비밀이다.... 일수에 흑수리는 명을 달리했고 곧 약간의 금전과 금창약 몇 개가 떨어졌다. 나는 금전과 금창약을 버려 두고 누나와 함께 녹환림 안쪽으로 걸어갔다. 돈은 이미 더 이상 전장에 맡기지 못할 정도로 쌓여 있고... 금창약은 필요도 없다. 누나의 의술이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뭐 다칠 일도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더 월드에서는 무척이나 현실성을 중요시한다. 그 때문에 약초나 회복약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쓴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회복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게임은 수백 개의 회복약을 들고 다니면서 전투를 하며 먹는데 반해 더 월드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일반적인 상처의 치료는 금창약을 바르면 게임 시간으로 하루 이틀 정도가 흘러서야 낫는다. 다른 방법으로는 운기를 하는 방법인데 내상과 외상에 대단히 높은 치유력을 보이지만... 사냥터에서 운기 하다가 몬스터를 만나면 최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사망이다. 당연히 제 몸을 지킬 실력이 없다면 혼자 다니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에리두에서는 특히 더하다. 한 제국의 유저라면 운기를 해서 치료를 할 수 있지만 에리두는 다르다. 소드유저나, 파이터 같은 경우는 상처가 생기면 진짜 피곤해 진다. 때문에 클레릭이 존재하는 것이다. 클레릭은 치유마법을 행할 수 있고 그 효능도 즉흥적이면서 효과도 좋아 파티에는 꼭 한 명 이상의 클레릭을 끼우는 것이 필수이다. 꼭 클레릭이 아니더라도 성기사 같은 치유마법을 행할 수 있는 자라도 상관은 없다. 물론 고레벨이라면 포션을 한두 개 챙겨들고 혼자 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회복제나 치료약과는 다르게 포션은 즉흥적으로 큰 상처도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포션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포션 한 개당 부피도 커서 많이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다. 배낭에 포션을 넣어 봤자 수십 개가 한계다. 물론 그렇게 포션을 들고 다니면 다른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진짜 피곤하다. 특히 건육의 부피를 무시할 수 없다. 한 제국의 고수들은 사나흘 정도는 식사를 하지 않고도 쌩쌩하지만 에리두의 유저들은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식사를 해야 하거든. 포션만 바리바리 싸고 다녔다가는 중간에 아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될 수 있으면 파티를 짜 치유마법을 쓸 수 있는 유저를 꼭 넣고 다닌다. 일반 게임에서 보면 별다른 공격 마법이 없는 클레릭이 천시 받기 마련인데 위의 이유 때문에 더 월드에서 최고로 각광받는 세 가지 직업 가운데 당당히 2위 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클레릭이다. 참고로 1위는 모든 게임이 그렇듯 소드유저이고 3위는 다른 게임에서와 반대로 클레릭에게 2위를 빼앗긴 불쌍한 메이지이다. 어쨌든 말이 길어졌는데 중요한 것은 금창약이나 회복제 등은 들고 다녀 보았자 아무 필요도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미 금창약 몇 개는 내 품에 들어 있고 이것도 역시 쓸 일은 없다. 누나의 의성수가 있거든. 다른 의술과 다르게 의성수 일절은 에리두의 치유마법과 같이 즉흥적인 치료를 하는 무척이나 쓸모 있는 무공이다. 특히 아직 이절은 극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일절은 극성에 이른 상태였다. 간단하게 한 번 녹환림 중앙의 녹환봉으로 가 천환쌍수리를 이용했거든. 내가 천환쌍수리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면 누나가 뒤에서 열심히 의성수로 치료를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3주 동안 줄기차게 썼더니 어느새 극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두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뭐 안 죽었으니 됐지. 흠... 이왕 여기에 온 김에 오늘은 천환쌍수리나 잡아 봐?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아직 못 풀었는데..... 누나와 함께 여섯시간 정도를 녹환림에서 사냥을 했지만 여전히 1%만 남은 의성수의 이절은 극성에 오르지 않는다. 시간은 아직 많으니 여유 있게 하면 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안 오르니 짜증이 나 미칠 지경이다. 결국 나는 누나에게 제안했다. "천환쌍수리를 잡아요!" "뭐?" 누나는 깜짝 놀랐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언제까지 쫄따구들을 잡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천환쌍수리를 잡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잡아버리는 것이다. 뭐 그 녀석들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경험치가 오를 확률은 적지만... 최소한 쫄따구보다는 더 확률이 높을 것이다. 강한 몹과 싸울수록 그 경험치 성장 랜덤허용범위가 넓어지거든. "자! 녹환봉으로 고~!!" "자.. 잠깐 유빈아! 전에도 죽을 뻔했잖아!" "그 때는 누나를 수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맞고만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맞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이 아니 될 턱이 없지. 그 천희형을 다운시킨 괴물들인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천희형과 다르다고.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걱정 말아요. 누나 저는 검천지룡이란 말이에요." "으응...."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불안한 듯 보였지만... 종래에는 환하게 웃으며 불안을 털어 냈다. 나를 믿는다는 표현이었다. 나와 누나는 녹환림 중앙의 녹환봉으로 향하며 간간이 나오는 몹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여전히 누나의 의성수는 극성에 이르지 못했다. 이거 이러다가 몇 달이 걸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불안한 생각을 털어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내로 극성을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의성수에 얽혀있는 비밀을 풀어버리겠다!! 노력이 있다면 운도 달려오리라!! 얼마 후 누나와 나는 녹환봉에 이를 수 있었다. 아직 천환쌍수리는 리스폰되지 않았다. 뭐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것이다. 유저가 다가가면 금방 리스폰이 되거든. 저기 위에 있는 절벽의 동굴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흡사 우리들을 사냥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 몇 마리의 녹림백호와 은혈독사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기에 천환쌍수리가 나올 때까지 녀석들을 밟아 주었다. 막 마지막 은혈독사를 누나의 의성수로 박살냈을 때 위쪽에서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환쌍수리가 나오는 것이다. "빙고~!" 나는 환호를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나를 누나가 다급히 불렀다. "저기 유빈아....." "응? 왜요? 뭐 저 녀석들부터 잡고 듣죠." 나는 누나의 말도 듣지 않고 재빨리 어기충소를 펼쳤다. 두 녀석을 다 상대하기에는 나로서도 조금 벅찬 일이거든. 우선 한 녀석을 떨쳐야 했다. 물론 완전히 죽이기보다는 누나가 쉽게 죽일 수 있도록 절반만 죽여놔야 한다. 진사신무(眞四神武) 청룡신퇴(靑龍神腿) 이성(二成) 낙뢰(落雷)! 내가 공격을 한 녀석은 천수리였다. 암놈인 환수리보다 천수리의 레벨이 약간 더 높기 때문이다. 내가 펼친 낙뢰로 인하여 천수리는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환수리가 광풍을 일으키며 나에게 날아들었지만 나는 즉시 허공답보를 펼쳐 공격을 피해내고는 지상으로 몸을 날렸다. 콰앙!! 천수리의 거대한 몸이 땅에 충돌하며 굉음을 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닌지 금새 고개를 쳐든다. 그것을 기다렸어! 진사신무(眞四神武) 백호신권(白虎神拳) 삼성(三成) 일파(一破)! 내 주먹이 그대로 천수리의 머리를 강타했고 기껏 들려졌던 천수리의 머리는 다시금 땅 속으로 파고들었다. "누나! 지금이야!!" "으응!" 누나는 즉시 미끄러지듯이 천수리에게로 다가가 손으로 무수한 잔영을 그렸다. 의성수(醫聖手) 이절(二絶) 이파(二派) 환(幻)! 거의 마교의 환영마수(幻影魔手)와 비교되는 절정의 환수(幻手)가 바로 의성수 이절 이파의 환이다. 하늘을 어지러이 덮은 백색의 수영(手影)이 그대로 천수리를 매타작했다. 파티를 맺으면 비슷하게 경험치가 배분이 되지만 이왕이면 쪽에서 조금은 더 많은 경험치를 얻는다. 그 때문에 누나에게 천수리를 죽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두 번의 공격과 누나의 환에 당한 천수리는 상당한 부상을 입었고 그 정도라면 현재의 누나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듯 보였다. 그 사이에 나는 남은 환수리를 상대했다. 되도록 환수리가 죽지 않도록 힘을 자제했다. 이 녀석도 누나의 먹이거든.... 하지만 잠시동안 환수리와 놀고 있던 나는 천수리와 상대하던 누나가 쓰는 무공을 보며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한 번의 섬광에 이어지는 눈으로 셀 수도 없는 거대한 빛의 광선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두려울 정도로 절대적인 파괴력을 담은 빛줄기.... 저건.. 못 보던 건데.. 설마 의성수의 이절 오의 아냐? 오의는 극성에 이르러서 야 쓸 수 있는 것인데... 그럼? 나는 재빨리 허리에서 검을 뽑아 무상검을 펼쳤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삼장(三章) 일절(一絶) 만(滿)! 하늘을 뒤덮는 검 무리... 그것은 그대로 환수리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미 극성에 이른 내 무상검이기에 제대로 적중만 한다면 아무리 환수리라 하더라도 두 번은 없었다. 천환쌍수리 두 마리의 협공이라면 몰라도 한 마리라면 껌이거든.. 다른 보스급 몹보다도 약하다. 단 일검에 환수리를 보내버린 나는 즉시 누나에게 달려갔다. "누나! 방금 그거 의성수 오의죠?" "으응..." "대체 언제 극성에 이른 거예요?" "조금 전에....." 조금 전? 혹시 천환쌍수리를 상대하기 바로 전에 죽인 은혈독사? 나는 내 추측을 물었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나는 허탈함을 느꼈다. "왜 말 안 한 거예요?" "말하려고 했는데... 유빈이 네가 듣지도 않고....." 그러고 보니 누나는 조금 전 뭔가 나에게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것을 내가 무시한 것이지.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천환쌍수리와 싸울 필요도 없었는데 말야....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는 히죽거리며 누나를 보았다. "왜 그래?" "아니에요. 그냥.... 하하! 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는 나를 누나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런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제가 너무 바보같아서요... 하하. 뭐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들을 죽이려고 했었으니까요. 그보다 뭐가 나왔나...?" 나는 천환쌍수리가 떨어트린 아이템들을 수거했다. 비급 세 권과 내단 두 개. 그 외에 잡다한 아이템들이었다. 비급은 두 권이 이류무공이었고 한 권은 일류무공이었다. "흠.. 이류무공은 다 나한테 있는 거고... 낙성창법? 이건 처음 보는 거네." 이류무공은 버리고 일류무공은 챙겨두었다. 그리고 두 개의 내단 중에서 환수리에게서 나온 내단을 누나에게 주었다. "누나 이걸 먹고 운기를 해요." "응? 왜?" 누나의 레벨이라면 내단을 먹어도 그다지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환쌍수리의 내단은 다르다. 다른 내단과는 다르게 천환쌍수리의 내단은 특이한 효능이 있었다. 그건..... "천환쌍수리의 내단을 나누어 먹으면 한 가지 재미있는 능력이 생기거든요." "능력?" "네. 이건 연인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인데... 이걸 먹은 남자와 여자는 교감능력을 가지게 되요. 게임에 접속을 해 있을 때 반려자가 위험에 처하면 남은 한 쪽이 그 위험을 알아보거든요.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반려가 보는 것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말이죠." "헤에....." 누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천환쌍수리의 내단을 바라보았다. 곧 누나는 환수리의 내단을 섭취했고 운기에 들어갔다. 나는 누나의 옆에서 호법을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가 운기를 끝내고 일어나자 나도 천수리의 내단을 먹고 운기를 했다. 운기를 끝내고 내가 일어서자 누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별로 변한 것은 없는데..." "누나나 내가 위험을 겪지 않아서 그래요. 나중에 내가 위험한 일을 당하면 분명 누나는 내 위험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런데 네가 위험할 일이 있을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 아마 남은 나를 제외한 이천과 천희형을 뺀 사황이 동시에 덤벼들지 않는 이상은 누나도 천환쌍수리 내단의 효능을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그 만큼 나는 이 대륙 최강이거든. 한마디로 나 잘났다는 소리다. 무하하! "그보다 누나. 의성수 비급 좀 꺼내봐요." 내 말에 누나는 즉시 품에서 비급을 꺼내었다. 나는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을 드디어 시험할 수 있음을 알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성신공을 극성으로 펼치고...." "응... 그리고?" "의성수 이절 오의로 그 책을 찢어버려요." "에? 그래도 돼?" 누나는 깜짝 놀라서 나를 보았다. 비급을 날려버리라니... 누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있는 수법 없는 수법 다 써 봤다. 의성신공을 비급에 주입해 보기도 했고 의성수 일절의 오의를 비급에 사용해도 보았다. 검보처럼 물에 적셔도 보고 그 외에 다른 방법도 할 만큼 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비밀을 풀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의성수 이절 오의뿐이었다. 뭐 이것도 실패라면 깨끗하게 포기 할 수밖에 없다. 검보와 다르게 의성수는 절정무공.. 아니 최절정무공에 버금가는 강력한 무공이었고 다른 쓰임새도 많으니 초절정무공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했다. 초절정무공이 없더라도 지금의 누나가 레벨만 조금 올리면 오마와도 대결이 가능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 도박이었다. "알았어." 누나는 내 말대로 즉시 의성수 비급을 공중으로 던지고는 오의를 펼쳤다. 의성수(醫聖手) 이절(二絶) 오의(奧義) 파결신수(破決神手)! 조금 전 누나가 천수리에게 펼쳐 보였던 무공이 재차 누나의 고운 손에서 펼쳐졌다. 처음에는 일파 광(光), 뒤이어 이파 환(幻), 마지막으로 삼파(三派) 멸(滅)이 이어졌다. 광과 환, 멸은 하나로 화하여 한 줄기 빛이 되어 의성수 비급을 때렸고 그 거대한 힘을 견디지 못한 의성수 비급은 갈가리 찢겨졌다. 역시.. 아무것도 아닌 그냥 무공이었나? 잠시 실망이 내 눈에 스쳐갔지만 곧 찢겨진 비급의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 장의 종이를 보며 내 표정은 금새 밝아졌다. "역시!!!"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양피지를 잡아 든 나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건 진짜 초절정무공에 관한 단서였다. 하하하!!! 이로서 나는 두 가지 초절정 무공을 밝혀낸 유저가 된 것인가? "그건....?" 내 손에 들린 양피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누나... 나는 즉시 그런 누나를 안아들며 웃음을 터트렸다. "찾았어요!! 찾았다구요!!! 하하하!! 누나와 제가 찾은 거라고요!!" "뭐.. 뭘 찾았다는 건데?" 나는 누나를 안은 채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으로 긴 입맞춤을 하고는 양피지를 누나의 앞으로 보였다. 누나는 키스 때문인지 얼굴을 붉힌 채 양피지를 보았다. 양피지에는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은색의 바다에서 엎드린 호랑이를 찾아라.] 이것으로 끝이다. 누나는 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무슨 무공비급이니?" "이걸로는 무공비급이라 할 수 없죠. 하지만.... 이 글귀가 암시하는 장소를 찾으면 대단한 비급이 들어오죠." "대단한 비급?" "네. 바로 초절정무공의 비급이요." 그제야 누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초절정무공. 이 더 월드 내에 단 5권뿐이라는 절대의 무학... 그 중 지금까지 나온 것은 단 3권뿐이다. 하나는 마교(魔敎)의 교주(敎主) 마천지존(魔天之尊) 유진성이 소유하고 있는 천마신공(天魔神功)이고, 다른 하나는 무림맹(武林盟)의 무상(武上) 권황(拳皇) 일권이 소유하고 있는 천무진경(天武眞經)이며 나머지 한 권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무상검록(無上劍錄)이다. 이 초절정무학을 소유한 이들 중에 절대고수가 아닌 이는 하나도 없다. 절정무공이 레어아이템이라면, 최절정무공은 유니크아이템이고 초절정 무공은 초유니크아이템인 것이다. 더 월드 유저 수 3억 중에서 단 5명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이 초 유니크 무공을 누나가 가지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다. "대단하네...." "그렇죠? 이건 이제 누나의 무공이 되는 거예요. 하하." "꼭 그렇게 필요하지는....." "아니요. 나 검천지룡의 반려자가 평범한 무공만 익히고 다닐 수는 없죠." 나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누나는 잠시 맥이 풀린 듯 하더니 곧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누나의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어하듯 누나도 내 말이라면 대부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래서 누나가 너무 좋다. "그런데 이 글귀는 무엇을 뜻하는 거야?" "흠... 은색의 바다에서 엎드린 호랑이를 찾아라......? 아!! 은자림(隱者林)!!" "은자림?" 바다를 찾으라고 했는데 갑자기 내가 숲을 떠올리자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감을 믿었다. "은자림이 확실해요. 은색의 바다라고 해서 꼭 바다를 찾을 수는 없어요. 세상에 은색으로 빛나는 바다가 어디에 있어요? 거기다 바다에서 호랑이가 어떻게 살아요?" "그렇다고 해서... 느닷없이 은자림이라니..." "하하. 누나 은자림이 어디에 있죠?" 내 물음에 누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대륙의 북쪽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죠. 대륙의 북쪽.... 당연히 그 곳의 기후는 낮아요. 특히 은자림의 북쪽은 일년 중 눈이 녹지 않는 곳이라고요." 그제야 누나도 뭔가 감이 잡힌 듯 탄성을 터트렸다. 아직 서두만 꺼냈을 뿐인데도 알아채다니. 누나도 머리가 상당히 좋다는 말이다. 진호 같으면 평생을 기다려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여간 남매인데 왜 이리 다른지 몰라. "그렇구나! 숲을 종종 수해(樹海)라고 표현도 하니.... 수해면 나무의 바다이니까 틀린 말은 아냐." "그렇죠. 그리고 눈이 쌓여 있다면 누가 보더라도 은색의 바다가 되요. 마지막으로 제 기억으로 은자림 북쪽에는 복호석(伏虎石)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어요. 분명 거기가 틀림없어요." "헤에.. 유빈이 이제 보니 엄청 똑똑하네." 그걸 이제 알았수? 내 아이큐는 자그마치 190이라는 말씀. 뭐 대부분이 잔머리쪽으로 흘러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때문에 나를 볼 때마다 천희형은 천고의 잔머리를 발휘할 수 있는 대가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평한다. 장래의 남편이 될 사람인데 이렇게 모르고 있으면 어떻게 해? 벌로 키스다~! 나는 누나를 안아 올려 재차 뜨거운 키스를 하고는 즉시 녹환림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천리신마를 불러 즉시 은자림이 있는 제국 북부로 달렸다. 네 번째 초절정무공이여!! 기다리거라!! 네 주인과 주인의 남편께서 가신다~!!! 8 - 네 번째 초절정무공 그리고 대립 남연성에서 은자림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다. 아니 거의 대륙의 끝에서 끝이라봐도 무방했다. 남연성은 대륙의 동남부였고 은자림은 대륙의 북부였던 것이다. 내가 부신약영을 써서 전력으로 달려도 한 제국의 남북 횡단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게임 시간으로 자그마치 5일이다. 절정의 경공을 배운 이라면 최대한 빨리 가도 15일은 걸릴 것이다. 만약 걸어서 간다면 1년도 더 걸리리라. 그만큼 더 월드의 대륙은 넓다. 하루에 천리를 더 간다는 천리신마를 타고도 최소한 7일은 필요했다. 그 정도라면 현실로도 하루로는 불가능했다. 누나와 나는 중간에 잠시 리스를 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재차 북쪽으로 말을 달렸다. 천리신마는 명마 중에서도 최고의 명마였고 다른 말처럼 지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달릴수록 더 체력이 회복될 정도이다. 그 날은 저녁때까지 종일 천리신마 위에 타고 달리기만 했다. 중간에 천희형이나 민우형, 진호, 민호가 메시지를 보내도 바쁘다고 말하며 끊어버리기 일수였다. 나중에 한 소리 듣겠지만 지금은 초절정무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현실시간으로 새벽 3시가 되었을 때에 대략 총 일정의 2/3를 갈 수 있었다. 내일도 현실시간으로 5시간 정도만 달리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누나와 일단 잠을 자기 위해 헤어졌다. 링크헤드셋을 벗고 그대로 잠에 골아 떨어진 나는 7시 무렵에 눈을 떴다. 대략 4시간 정도를 잔 것이다. 누나와는 7시 30분 경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 사이에 아침식사를 마쳤다. 마침 출근을 하시던 아버지가 '너무 게임만 하지 마라'라고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게임을 많이많이 해 주라고 홍보했죠?'라고 물음으로서 아버지에게 헛기침을 연발토록 했다. 우리 아버지는 (주)신화의 홍보부 부장이었거든. 지금은 광주의 지사장이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것을 배웅한 후 방으로 돌아오자 시간은 대략 7시 20분이 조금 넘고 있었다. 나는 즉시 링크헤드셋을 쓰고 더 월드에 접속했다. 리스가 된 곳은 연북성이었다. 잠시 리스장 주위에서 앉아 누나를 기다렸고 한 시간 정도가 흐르자 누나가 들어왔다. 나와 누나는 즉시 성을 나와 천리신마를 불러 타고 재차 북쪽으로 달렸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에 은자림 외곽에 이를 수 있었다. 일단 점심을 먹고 누나와 나는 즉시 은자림에 돌입했다. 이제 거의 도착을 한 것이지만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은자림은 은거기인들의 집합지였다. 더 월드 한 제국 최고의 사냥터인 은자림을 그 강대한 마교에서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곳에 거주하는 은자들 때문이었다. 일황인 은황(隱皇) 무무. 칠성의 삼, 사, 오성을 차지하고 있는 은림검성(隱林劍聖) 검무자. 은림권성(隱林拳聖) 이학. 은림도성(隱林道聖) 유진. 팔왕의 사, 오, 육, 칠왕을 차지하고 있는 은림권왕(隱林拳王) 방세옥. 은림창왕(隱林槍王) 조운. 은림검왕(隱林劍王) 시류. 은림도왕(隱林刀王) 황상. 이 들 뿐만이 아니라 1000명에 이르는 150레벨 이상의 절정고수가 이 은자림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일 최대의 문파라는 마교조차도 최절정고수는 5명에 절정고수의 수는 500명을 조금 웃도는 정도이다. 그런데 은자림은 최절정 고수 8명에 절정고수 1000명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한 제국의 최대 문파는 마교가 아닌 은자림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로지 무공만을 일로(一路)하는 단순치 들이다. 다른 쪽으로는 꽉 막혔고 오로지 무공이고 자신보다 강한 자와 대련하기를 즐긴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문제이다. 은자림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은자림의 은거 기인들과 마주칠 것이고 그들이 나를 그냥 보내 줄 이유는 없다. 은자림에서는 서로 마주치는 자와 대결부터 하는 것이 인사로 통하거든... 세상에 이보다 귀찮은 일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더더욱 없다. 어떻게든 초절정무공을 얻으려면 은자림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누나의 손을 꽉 잡으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 가 보자고!!!! "나 은자림(隱者林)의 빙환무결(氷幻無缺) 옥수환! 그대 검천지룡에게 비무(比武)를 청하오!!" 제길 이로서 17번째로군. 네 번째 만난 녀석이 하필이면 은림검왕 시류였고 최대한 빨리 지나치기 위해 무상검을 펼친 것이 실수였다. 순식간에 검천지룡이 은자림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졌고 싸움에 미친 은자림의 무광자(武狂者)들이 쉴새없이 나에게 달려든 것이다. 나는 내 눈앞에 뜨는 비무신청에 승낙을 하며 그에게 몸을 날렸다. 비무는 서로 실력을 겨루는 방식으로 비록 패배해 목숨을 잃더라도 경험치와 무공손실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비무신청에 거절을 해 버리고 그냥 목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은자림 전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절망적인 일인 것이다. 누나를 한 손으로 안고 있기 때문에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옥수환이라는 녀석은 대충 170레벨 대의 절정고수였기에 상대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기에 나는 초반부터 무상검을 전개했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일장(一章) 일절(一絶) 섬(閃)!" 내 허리에서 뽑힌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갔다. 옥수환은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의 실력으로 무상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 검은 대번에 옥수환의 가슴을 뚫어 버렸고 그의 몸이 천천히 회색으로 물들었다. "역시... 검천지룡...... 대단하군...." "이제 가 보겠소!" 나는 검을 회수하고 재차 부신약영을 전개했다. 아직도 복호석에 도착하려면 한참을 가야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수들의 도전을 받게 될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쉬운 길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괜찮아?" 나에게 안긴 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누나를 안심시켰다. "거뜬해요!" 극성의 부신약영을 펼치는 내 몸은 바람을 가를 정도였다. 내가 지나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주위로 광풍이 몰아쳤다. 바람도 나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중간에 나무를 박차며 어기충소를 펼친 나는 공중에서 그대로 재차 부신약영을 전개했다. 땅으로만 달리다간 또 옥수환과 같은 녀석들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쓰는 방법이었다. 어기충소는 200레벨 이상의 경공이었기에 최절정고수가 아니라면 나의 앞으로 뛰어올라 비무신청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이런 방식이 효과를 두었는지 그 후로 3시간 동안 이렇다할 제지를 받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을 그랬다. 내력소모는 조금 더 크겠지만 그래도 누가 안 덤비는 것이 어딘가.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더욱 힘차게 허공을 밟았다. -휘이이이이이이익!!! 그때였다. 느닷없이 서쪽 숲 너머에서 긴 창룡후가 터졌다. 창룡후는 250레벨 이상의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음공이다. 소림의 사자후가 이와 비슷하지만 창룡후는 그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법이었다. 창룡후를 펼치는 고수라... 혹시!! 피잉!!! 순간 누군가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섰다. 은색의 장포를 걸친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 제길 하필이면 저 사람이라니... "나 은자림의 은황(隱皇) 무무! 그대 검천지룡에게 비무를 청하오!!!" 바로 사황의 수좌 은황 무무였다. "아저씨까지 이럴 겁니까?!!!" "너와 비무 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는데 내가 왜 모르는 척 해야 하지?" 히죽 웃으며 대꾸하는 무무아저씨. 나는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무무아저씨는 중국 산동성에 사는 분으로 내가 오픈베타를 할 때부터 인연을 가져 온 아저씨였다. 실력은 확실하게 최상. 삼천은 아니지만 같은 삼천인 마천지존과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이다. 제발 이 아저씨와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랬는데 진짜 빌어먹을 인생이라니.... 제길. 이렇게 된 이상 무무아저씨를 이용해야 겠다. "조건이 있어요!" "뭐지?" "내가 이기면 앞으로 아저씨의 수하들에게 제 앞을 막지 말라고 부탁해 주세요." "호오. 무슨 급한 일이 있나보군. 무슨 일이지?" 무무아저씨는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랜 인연을 가져 온 아저씨이지만 현실에서는 만난 적이 없었다. 현실 친구도 완전히 믿지 않는 나인데 무무아저씨를 어떻게 믿고 초절정무공을 찾으러 간다 말하겠는가? "알 것 없수다." "쳇. 여전히 입이 거친 녀석이구나." "뭐 보태 준 것도 없잖아요. 그보다 어떻게 할 겁니까? 싫다면 나는 절대로 비무허락 안 할 겁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좋다!" 무무아저씨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나는 땅으로 내려서며 누나를 내려주었다. 무무아저씨와 비무를 하는 것은 나로서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누나를 안은 채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내 맞은편에 내려선 무무아저씨는 진희누나를 보며 호기심을 일으켰다. "호~. 이 아가씨가 천이가 말한 그 아이냐? 네가 완전히 콩깍지가 끼어 버렸다는?" 무무아저씨가 말한 천이는 천희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게임 안에서 형은 낭황 강천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여간 천희형도... 무무아저씨에게 그런 것까지 다 고해 받치고 말야.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보다 저 바빠요. 빨리 덤벼요." "하하하. 알았다. 이거 정말 기대 되는데. 너하고 붙어 본 것은 2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니 말이다. 어디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몸 풀 것도 없수다. 한 큐에 보내 줄 테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긴장을 하고 있다. 내공만으로 보면 무무아저씨는 한 제국 최강이다. 뭐 나를 빼고 말이다. 하지만 무무아저씨는 나와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다 무무아저씨가 익힌 구음진경(九陰眞經) 때문이다. 한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서들 중에서 최고로 칭해지는 내공비급서가 바로 구음진경이다. 만약 내가 엉뚱한 방법으로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나조차도 무무아저씨에게 내공으로는 현격히 밀렸을 터이다. 뭐.. 그랬다면 무상검록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니까 지금의 검천지룡이 될 수도 없었겠지만.... 검을 빼 들며 자세를 잡았다. 무무아저씨는 연장자로서 첫 수는 양보한다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쳇! 그건 내가 할 것이라고!! 누가 뭐래도 내가 아저씨 보다 고수잖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괜한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즉시 무상공을 전개하며 검을 하단세로 내렸다. 초반부터 최대로 간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장(五章) 이절(二絶) 지(地)!!"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고 곧 거대한 충격파가 순차적으로 대지를 폭발시키며 무무아저씨에게 날아갔다. 무무아저씨는 재빨리 팔을 휘둘렀다. "구음진경(九陰眞經) 구음신공(九陰神功) 십성(十成) 구음호신강(九陰護身剛)!!" 콰앙!!! 내가 펼친 지가 무무아저씨의 몸을 강타했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고 시간이 흐르자 점차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나는 무무아저씨의 상태를 살폈다. 뒤로 일장 정도를 밀려나가 있었지만... 그렇게 큰 타격을 받지는 않은 듯 하다. 쳇.... 조금이라도 부상을 입었으면 했는데... "역시 무상검록은 대단하군... 아찔했어. 하하. 이제 인사는 다 한 건가?" "인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이거나 받아요!!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장(五章) 일절(一絶) 천(天)!!" 나는 검을 상단세로 들어올리며 강하게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강이 천지개벽을 일으키며 무무아저씨의 몸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무무아저씨는 신비로운 보법을 밟으며 공세를 흘려내면서 나에게 쇄도해 왔다. "구음진경(九陰眞經) 구음신장(九陰神掌) 이성(二成) 음한(陰寒)!" 나의 허리를 노리며 뻗어오는 무무아저씨의 손을 팔꿈치를 들어 쳐 올렸다. 무무아저씨의 공세는 그대로 허공으로 뻗어갔다. 하지만 무무아저씨는 재차 발길질을 날렸다. 나는 부신약영을 펼쳐 뒤로 물러섰다가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일장(一章) 일절(一絶) 섬(閃)!!" "구음진경(九陰眞經) 구음신장(九陰神掌) 삼성(三成) 광빙(狂氷)!" 콰앙!!! 팔이 저리다. 역시 무무아저씨는 사황의 일황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은림검왕 시류도 어렵지 않게 이겼는데..... "겨우 이 정도냐?! 검천지룡이라는 이름이 울겠다!" "시끄럽습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요!!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육장(六章) 이절(二絶) 어검(御劍)!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칠장(七章) 이절(二絶) 파천(播遷)!!" 어검은 검을 다루는 기술로 250레벨에 배우는 어검술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어검술이다. 레벨로 얻는 어검술이 검의 공격력을 4배로 상승시키는 무공이라면 무상검의 어검술은 공격력 자체가 없다. 당한 자는 그대로 잘려버리는 신검을 만들어 내는 무공인 것이다. 일장 이절의 단(斷)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단은 수직공격이 한계라면 어검은 어떠한 공세라도 취할 수 있다. 칠장 이절 파천은 일검에 하늘을 깨트리는 무상검에 속한 무공 중 오의를 제외하면 최고로 강한 무공이다. 어검과 함께 펼쳐지는 파천은 순간적으로 무무아저씨의 표정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구음진경 구음신공 십성 구음호신강!! 구음진경(九陰眞經) 구음신장(九陰神掌) 십성(十成) 빙하만천(氷河滿天)!!" 다급하게 두 가지 무공을 펼쳐내는 무무아저씨.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타격이 있었다. 입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밀려가는 무무아저씨에게 나는 즉시 검을 겨누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의(奧義) 무진(無盡)!!" 이제까지 단 한 번 쓴 기술. 사룡 암무를 제압한... 순간 나의 몸이 검이 되어 공간을 격하였다. 한순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던 내 몸은 순식간에 무무아저씨의 뒤쪽 5장 너머로 이동을 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서 있었던 장소에서부터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까지 하 나의 길이 그려졌다. 검이 지나가며 생긴 장소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기술.... 갈라진 틈은 이미 세상이 아닌 허무의 공간이었다. 나뉘었던 공간이 다시 접합되었고 뒤이어 거대한 파동이 대지를 진동시킨다. 절반으로 몸이 잘리었던 무무아저씨의 몸이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졌다. 나는 천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방금.... 그건....." "무진(無盡)." "무상검의 오의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무아저씨는 마지막으로 히죽 웃으며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최강의 무학을 보아.. 후회는 없다." 끝까지 폼을 재는 아저씨야. 그냥 조용히 죽고 리스하면 될 것을 말이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한 쪽에서 누나가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누나가 보기에도 무진의 위력은 놀라울 정도일 것이다. 나는 누나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내가 누나를 안아들자 그제야 누나는 정신을 차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유진아...." "끝났어요. 가요." "으응.... 그런데 방금 전에...." "무진. 제가 가진 최강의 기술이에요. 멋있죠?" 결국 누나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그 한 번의 인정이 나에게는 세상의 그 어떠한 칭찬과 경탄보다 기뻤다. 나는 누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즉시 부신수영을 펼쳤다. 목적지는 복호석이었다. 다행히 무무아저씨가 약속을 지켜주었는지 앞을 막아서는 이들은 없었다. 다만 중간에 누군가가 나를 따르고 있는 것 같기는 했는데.... 내가 경공을 전력으로 펼치자 곧 떨어져 나갔다. 감히 누구를 따라 오려고. 괜히 날파리들이 꼬이는 것은 싫었다. 숨겨진 초절정무공을 얻고 나서는 바로 암무를 불러 타고 도주를 해 버릴 생각이다. 암무를 타고 올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히 선전 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암무의 덩치가 워낙에 커서 어디에서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아마 날파리 한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가 몰려들어 버릴 것이다. 추격자가 더 없음을 느낀 나는 즉시 방향을 틀어 복호석으로 향했다. 이제까지는 복호석으로 일직선으로 달리지는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무무아저씨가 눈치를 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은자림에 들어 온 지 12시간이 걸려서야 복호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랑이가 엎드린 것과 같은 모양의 거대한 바위. 나는 누나를 안은 채 복호석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단서가 되는 양피지를 가지고 왔으니 근처에 다가가면 통로가 열릴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복호석의 아랫배 부근에 생겨난 동굴을 발견 한 나는 누나를 내려주며 활짝 웃음을 피웠다. "찾았다~!" "여기야?" "틀림 없어요. 제가 무상검록을 얻을 때도 이랬거든요. 어서 들어 가 봐요."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통로로 들어갔다. 무상검록을 얻을 때와 같이 통로는 길지 않았다. 대략 30장 정도를 들어가자 운동장 넓이 정도의 동공이 나왔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 듯 어둡지는 않았다. 천장의 종유석을 보며 누나는 감탄을 터트렸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가장 안쪽의 거대한 종유석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상풍운조화서(萬狀風雲造化書)...." 아마 저게 4번째 초절정무공의 이름인가 보다. 나는 안력을 돋구어 그 밑에 쓰여진 글귀를 읽어내렸다. [내 이름은 만상운자(萬狀雲者)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에....] .......자기 자랑이군... 불필요한 말들을 싹 제해보자 내용은 대충 얼마 없었다. 이 곳에 온 자는 분명 천시 받는 진법술과 부작술등을 섭려한 자일 것이고 천운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난 오성을 가지게 된 만상지체(萬狀之體)라 것이라는 것. 그 자신이 남긴 천지간의 조화를 부릴 수 있고 세상의 이치를 담은 만상풍운조화서를 거두어 달리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을 스승으로 인정하고 구배를 올리라는 말은 역시나 끼어 있었다. 이 인간들은 저 말을 하지 않으면 죽지 못하나? "뭐야?" 누나는 내가 눈가에 주름을 잡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대충 누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누나와 함께 안쪽으로 걸어갔다. 글귀가 적힌 종유석 아래에는 하나의 재단이 있었고 역시나 무상검록 때와 같이 죽고 나서도 썩지 않는 세상에 미련 많은 시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상검신이 고독해 보이는 낭인과 같다면 만상운자는 문사 풍의 청수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의 앞에는 역시나 한 권의 책자가 놓여있었다. "절을 해야 하는 거야?" "흠.... 나는 안 하고 얻었는데.. 이번에도 그렇다는 법은 없죠.. 그리고 이 노인을 보자니.. 절 받고 싶어 죽을 것 같아요. 하세요. 제가 허락하죠." 아직까지는 내가 누나의 스승이었다. 당연히 새로운 스승을 모심에 있어서 내가 하락을 해 주어야 가능하다. 내 말에 누나는 즉시 절 받고 싶어 환장한 만상운자에게 구배를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가루로 변하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한 개의 옥소와 금빛 함이 자리했다. 역시... 이번에는 절을 해야 했던 거야.... 나는 즉시 금빛 함을 들어올려 열어보았다. 근 백여 개는 되는 금침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세어보니 같은 크기의 금침이 16개씩 한 줄에 놓여있었고 그것은 각각 6종류였다. 다 합쳐 108개인가? 108금침이라 부르면 되겠군. "그건 108금침이고. 이 옥소는 청류옥소(淸流玉簫)라고 하네요." 흠.. 역시 주인이 누나이니 만큼 누나는 이름을 알게 되네. 뭐 나도 무상천검과 무상공을 얻었을 때 단번에 그 이름을 알았으니 그와 비슷한 것일 터이다. 나는 108금침을 누나에게 주었고 누나는 잠시 그것과 나를 번갈아 보다 내가 웃어 보이자 마주 웃어주며 품에 넣었다. 누나가 108금침을 품에 넣는 것을 본 나는 마지막으로 만상풍운조화서를 들어서 펼쳤다. 만상풍운조화서는 일종의 무공이라 하기보다는 기문총결서(奇文總結書)라 불려야 어울릴 것 같았다. 진법과 부작, 독술, 용독술, 의술, 심지어는 만수통령신공이라 하는 동물을 부리는 기술까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 책자에 들어있는 내용 중 어느 하나 초절정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이 한 권을 모조리 익힌다면 한 대륙 최고의 진법가에, 독술가에,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지력이 400이 넘어야 하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누나도 레벨이 230정도가 되어야 어느 정도 익힘을 시작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누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익히지도 못할 것이다. 심지어는 나도 말이다. 이건 완전히 누나만을 위한 책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고 가장 뒤에는 두 가지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었다. 풍운조화검결(風雲造化劍訣) 만상조화심결(萬狀造化心訣) 풍운조화검결은 장검이 아닌 단검으로 구사하는 검법이었다. 척 보기에도 누나가 가진 청류옥소로 펼치기 위해 만들어진 검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전체 삼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장은 다시 삼결로 세분되어 있다. 일장은 풍(風)의 조화를.... 이장은 운(雲)의 조화를... 삼장은 풍과 운을 어우르게 하여 뇌(雷)의 조화를 일으키는 초절정의 검공이었다. 내가 습득한 무상검에 비하면 어딘지 부족한 감이 느껴졌지만 결코 초절정무공에 부족함이 없었다. 익히기 위해서는 오성.. 즉 지력이 350이 필요하다. 이건 지금의 누나라면 충분히 익힐 수 있겠다. 만상조화심결은 만상풍운조화서의 술법들이나 무공들의 기본이 되는 심결이었다. 세상의 그 어떠한 심결로도 만상풍운조화서의 기술들을 펼칠 수 없다. 오로지 이 만상조화심결이 필요할 뿐이다. 이 심결 역시 익히려면 풍운조화검결과 같이 350이라는 오성이 필요로 했다. 역 시나 지금의 누나라도 충분히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책을 덮어 누나에게 넘겼다. 나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물건... 이 물건의 주인은 누나뿐이다. "받아요. 그리고 지금 즉시 이 책의 내용 중 가장 뒤쪽에 있는 검술 하나와 심결 하나를 익혀요. 누나의 지력이면 익힐 수 있을 거예요." "으응." 누나는 책의 뒤쪽을 펼쳐 내가 지시한대로 풍운조화검결과 만상조화심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려면 그 무공서를 한 번 읽어보면 된다. 오성이 부족한 이라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습득이 될 때까지 읽어야 하지만... 누나는 언제나 한방에 OK였다. "익혔어." 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익히기만 한 것뿐이고 쓰지는 못할 지라도 괜찮다. 천천히 수련을 하면 되는 것이니까. "좋아요. 그럼 이만 나가......" 문뜩 이상한 기척이 잡혔다. 나는 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린 채 출구를 응시했다. 뭐지? 상당히 많은 수다. 족히 700은 넘는다..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이 절정고수였다. 몇몇이기는 하지만 최절정고수도 있는 것 같았다. "제길!" 나는 이를 갈았다. 때마침 안쪽으로 수많은 유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나는 그들은 나와 누나를 포위하며 살기를 뿌렸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이제야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은색의 장포를 걸친 청수한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무아저씨!!" 무무아저씨는 내 외침에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 아주 좋은 향기가 나서 말이네. 나도 뭔가 얻어 볼까 하고 겸사겸사 출두한 것이라네."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만." "이런 너무하네. 이미 그대는 무상검록을 얻지 않았나? 그러면서 또 하나의 초절정무공을 얻어 가면 어떻게 하나? 이 게임은 모두가 즐기는 게임이지 자네 혼자서 즐기는 게임은 아니지 않나?" 말은 잘 하는군. 이미 무무아저... 아니 이제 아저씨라 부르기도 뭐하군. 이미 무무 늙은이는 이 곳에 초절정무공이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대충 추측을 하는 것일 터이지만.... 더 감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뭐라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미친 소리 지껄이네! 그렇게 배가 아프면 스스로 머리 좀 써서 얻어 보지 그랬나?!! 나와 진희누나가 몇 달 동안 머리 싸매며 겨우 풀어냈더니 애들 끌고 와서 강탈하려 들어? 이 빌어먹을 늙은 종자 같으니라고!! 네 에비어머니가 그따위로 가르치던?! 내 욕에 무무 늙은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더 날렸다. "에라 이 머리도 못 쓰는 골 빈 얼간아!!" 동시에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줬다. 오~ 연기까지 솟아오르네. "큭.. 좋게 말로 타협하려 했는데... 안 되겠군. 힘으로 할 수밖에." "해 볼 테면 해 봐!!" 나는 즉시 검을 뽑으며 무상공을 일으켰다. 그러자 내 몸 주위로 무색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솟아올랐다. "목숨이 하찮은 녀석들은 덤벼. 비무 따위는 받아주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렙따를 시켜 줄 테니까 어디 덤벼 봐! 이 망할 자식들아!!" "쳐!!!" 큭. 다수가 가지는 용기인가? 무무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절정고수들이 궁신탄영을 전개하며 나와 누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즉시 누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세웠다. 그나마 완전한 포위가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었다. 뒤쪽이 벽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 쪽이 뚫려 다른 출구가 나 있었다면 더 고마웠겠지만 말이다. 뭐 사람은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 되겠지. "오라!! 모조리 날려버릴 테니!!"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삼장(三章) 일절(一絶) 만(滿)!!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이만한 무공도 없다. 나는 검을 빙글 돌리며 세차게 전방으로 뿌렸고 만의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 했다. 일수에 가장 앞쪽에서 달려오던 절정고수 수십이 절명했다. 하지만 남은 이들은 아직도 650명이 넘는다. 그들은 동료가 당하자 더욱 살기를 불태우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오랜만에 진짜 빡도네!!!!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장(五章) 일절(一絶) 천(天)!!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장(五章) 이절(二絶) 지(地)!!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칠장(七章) 일절(一絶) 광살(狂殺)!!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칠장(七章) 이절(二絶) 파천(播遷)!! 나의 검에서 쉴새없이 무상검록의 절기가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200여명의 절정고수들이 몰살당해 버렸다. 그제야 은자림의 고수들도 질린 얼굴로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내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연달아 체력소모가 심한 무상검을 펼친 터라 이미 체력이 바닥이 되어 있었다. 거칠게 호흡을 토해내며 나는 무무를 노려보았다. 무무 늙은이는 내가 지친 것을 알아보고 웃음을 머금으며 다가왔다. "이제 끝인 것 같군. 어쩌겠나? 비급을 넘기겠나?" "싫은데." "거 참 고집이 심한 아이구나. 여기서 죽어 보았자 좋을 것이 없을 터인데 말이야. 이미 너에게는 무상검록이라고 하는 최강의 무공이 있지 않느냐? 새로 얻은 초절정무공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닌가?" "누구 말대로 나는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욕심쟁이거든." "그런가? 아쉽군...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피를 보기는 싫었는데 말이야." 칫.... 잘도 지껄인다. 옛정? 말아먹어 버려도 시원치 않다. 저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나는 힐끔 누나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가슴을 누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누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뜩 이 곳에 오기 전에 누나와 나누어 먹었던 천환쌍수리의 내단을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내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웃으며 누나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절대로 누나와 함께 이 곳을 벗어 날 테니까...." "믿어..." "누나... 체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어떻게 좀 해 줘요." 내 부탁에 누나는 즉시 의성수를 펼쳤다. 일절(一絶) 일파(一派) 회(回)였다. 이미 오의까지 얻은 누나였기에 효능은 대단히 뛰어났다. 바닥을 기는 내 체력을 단 한번에 거의 80%까지 채워 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검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내가 누나의 손길 한 번에 체력을 회복하여 버리자 무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어떻게?" "재미있는 무공을 익혔거든. 자.. 다시 한 번 해 볼까? 오늘밤을 새서 말야." "이익!!! 모두 다시 덤벼라!! 저 녀석을 죽여!!!" 이봐!! 차라리 네가 덤비란 말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차라리 절정고수들을 상대하는 것이 편했다. 체력은 회복되었지만 내공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아직 절반 정도의 내공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로는 무무와 대결했을 때 모조리 소진되어 버릴 것이다. 뭐 나중에 싸울 때 더 위험할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 보다는 낫다. 어떻게든 잔챙이들을 상대하면서 탈출로를 물색해야 했다. 다시금 나의 검에서 무상검록의 절기가 뿜어졌고 달려드는 은자림 절정고수들이 갈대처럼 무너졌다. 하지만 그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갈수록 내 내력은 떨어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퇴로를 찾기도 전에 게임오버가 되 버릴 것이 뻔했다. 제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는 몸으로는 적들을 베면서도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만상풍운조화서를 넘겨? 미쳤다!! 그건 누나의 것이다. 절대로 무무 따위에게 줄 수는 없다! 차라리.... 차라리? 순간 내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나는 즉시 내력을 모아 소리쳤다. "잠깐!!!!" 내 외침에 은자림 고수들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어느새 무무가 손을 들어 공격을 중지시킨 것이다. 뒤로 물러서는 은자림 고수들과 다르게 무무는 앞으로 나오며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러나? 드디어 그 무공서를 넘길 생각이 든 것인가?" "만상풍운조화서는 안 돼!" "그럼?" "대신 다른 것을 주겠다." 내 말에 무무는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초절정무공서가 아니면 안 돼. 혹시 네 무상검록이라도 줄 셈이냐?" 나는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 내 말에 그는 놀라는 듯 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 내가 선뜻 무상검록을 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사실인가?" "나를 당신과 같이 보지 마!" "좋아. 그럼 당장 무상검록을 이 쪽으로 던지게. 그럼 즉시 포위망을 풀어 주도록 하지." 쳇. 내가 그 말을 믿을까? 그랬다가는 분명 누나가 가진 만상풍운조화서까지 갈취하려 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입장에서 나는 결코 무무를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 당장 포위망을 풀고 이 곳에서 나가라. 그럼 우리의 안전이 확인되는 즉시 무상검록을 넘기도록 하겠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나는 누구처럼 약속을 가지고 뒤치기를 하지 않아!" 내가 말한 그 누구가 무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업을 것이다. 무무도 역시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미묘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곧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안 되겠군. 믿을 수 없어." "칫..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 나도 그 쪽을 못 믿는 것은 마찬가지야!!" "이건 어떤가? 네 뒤쪽의 아가씨가 인질이 되는 거다. 우선 아가씨가 우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그 뒤에 네가 나오는 것이지. 그리고 밖에서 우리는 인질과 비급을 교환하는 거야. 좋은 생각이지 않나?" "미친! 네가 너 같은 녀석한테 누나를 맡길까 보냐?!!"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겠다. 나는 절대로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누나가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요." "누나!!" 나는 깜짝 놀라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도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누나는 전혀 걱정 없다는 듯이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네가 꼭 구해 줄 거잖아. 그리고.. 이건 유빈이 네가 가지고 있어야 겠어." 누나가 나에게 준 것은 만상풍운조화서와 청류옥소, 108금침이었다. 만상풍운조화서를 본 무무의 눈이 탐욕을 발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다행이라면 청류옥소와 108금침이 만상풍운조화서와 쌍을 이루는 물건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행동은 곧 무무는 초절정무공을 얻을 시 선택에 따라 값진 보물을 더 습득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누나에게 받은 3개의 보물을 품에 넣고 무상검록을 빼내었다. 이미 나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비급이지만 언제나 품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뭐 이것을 무무에게 주더라도 그는 익힐 수도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도 않는다. 혹 지금의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 키운다 하더라도 그 비법을 모르면 절대로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니 걱정하지도 않는다. 천운으로 그 비법을 알아내더라도 그만이다. 무상공이 없는 무상검록은 반쪽 짜리 비급이거든. 거기에 무상천검이 없는 상태에서는 또 반쪽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가 무상검록을 익히더라도 절대로 나를 이기지는 못한다. 뭐 거의 300레벨이 가까워진 지금에서야 캐릭터를 지울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천천히 무무에게로 다가가는 누나를 지켜보던 나는 무무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만약 누나에게 허튼 짓이라도 하면.... 무상검록이건 만상풍운조화서이건 모조리 태워버릴 거다." 무공비급을 소거시키는 방법도 존재한다. 분명 재질이 종이었으니까.. 삼매진화만 일으키면 간단하게 불타버린다. 내 협박에 무무의 몸이 움찔했다. 뭔가 수를 쓰려고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큭큭. 진짜 그러면 나 진짜 눈 돌아가 버린다고. 할 수 있으면 중국까지 달려가 네 녀석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한 번만 믿겠어." 내 말을 들은 무무는 누나를 데리고 부하들과 함께 동굴을 나가버렸다. 그들이 동굴 밖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느낀 나는 천천히 발을 떼었다. 혹 중간에 무무가 무슨 짓을 벌여놓지 않았나 살피며 조심스럽게 동굴을 벗어 난 나는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은자림 고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누나가 인질로 잡혀 있는데 내가 도망갈 일이 어디에 있다고... 하여간 저런 인간들이라니....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내가 한심스럽다. 나는 동굴을 완전히 나와 무무를 노려보았다. "자. 거래를 시작하자. 여기서부터 네 여자가 천천히 걷기 시작할 것이다. 아가씨가 너와 나의 중간까지 가면 너는 이 쪽으로 비급을 던져라. 혹시라도 허튼 짓을 하면.... 당장에 화살이 네 여자의 몸을 뚫을 것이다. 보아하니 거의 최절정 고수에 이른 것 같은데.. 한 번 죽으면 손실이 크겠지? 아니 그냥 죽이지 않겠어. 최대한 치욕을 주어 두 번 다시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그리고 네 녀석이나 허튼 짓 마라. 열 받으면 진짜 불질러 버릴 테니까." "인류의 보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초절정무공인데.. 그것도 사룡까지 무릎 꿀릴 수 있는 최강의 무학이 담겨있는 무공비급을 얻을 수 있는 기회에 내가 무슨 짓을 하겠나." "좋아. 시작하지. 누나 이 쪽으로 와요." 나는 누나를 불렀고 누나는 힐끔 무무를 바라보곤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누나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누나가 절반 가량 왔을 때 나는 즉시 오른 쪽으로 비급을 던지며 누나에게 몸을 날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화살이 누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 무무 늙은이!! 이럴 줄 알았어!! "암무!!!!!!!" 누나를 안으며 호신강기를 전개했다. 동시에 암무를 소리 높여 불렀고 곧 천공을 뚫으며 검은 빛의 응룡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지상을 스칠 듯이 지나간 암무는 나와 누나를 태우고 다시 공중으로 비상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 녀석이 절정무공을 주워 도망치려다가 뒤따라 온 무무의 손에 살해되는 것이 보였다. 참 가지가지 하는군..... 무무는 무상검록을 얻은 채 희희낙락하며 대소를 터트렸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려줬다. 그 책은 분명 무상검록이지만... 네 녀석은 절대로 못 익힐 것이다! 그리고...... "암무!!! 날려버려!!!" 내 명령에 암무는 그대로 레이저 브레스를 뿜었다. 범위는 최대였다. 어디 살아 남아서 무상검록을 지켜보라고!! 까딱하면 기껏 얻은 비급 홀랑 태워먹을 수도 있어! 지상을 강타하는 거대한 브레스.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무무를 포함한 은자림의 최절정고수들은 급히 호신강기를 펼쳐 버텨낸 것 같았지만 대부분의 절정고수는 사망신고를 받고 말았다. 천운으로 몇 명 살아남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시체를 보며 혼이 나간 듯 보였다. "무무!! 이 망할 자식아!!! 두고보자!!" 나는 무무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 후 재빨리 암무를 타고 은자림을 벗어났다. "뭐? 무상검록을 뺏겼다고?!!!!!" 시.. 시끄러!! 그렇지 않아도 주위에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냐? 진호의 외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렸다. 무상검록... 그 한마디가 주는 파장은 거대했다. 내 귀로 쉴새없이 '방금 들었어? 무상검록이래.', '설마 저 중에 검천지룡이 있단 말야?', '그런데 뺏겼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실일까?' 등등의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나는 진호의 얼굴에 사과하나를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 낮춰 임마." "지금 내가 조용하게 생겼냐? 무상검록을 빼앗겼다는데!! 어떤 자식이야? 앙?! 천희형!! 형도 뭐라고 좀 해 봐요! 이 자식 진짜 엉뚱한 놈이네. 초절정무공 날리고 아무렇지도 않는 듯 말하는 꼴 좀 봐요! 지금 입으로 국수가 들어 가냐?!" "진호야... 우선 유빈이 말 좀 들어보자." 천희형이 말하자 진호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형은 나를 노려보며 어서 말해보라는 듯 표정을 굳혔다. 진희만큼 날뛰지는 않았지만 형 역시도 나에게 해명을 듣고싶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국수를 한 줄기 빨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나 진희누나나 어떻게 될지 몰랐거든요. 그리고 무상검록은 이미 다 익혀서 더 배울 것도 없고.... 더구나 무무 그 늙은이가 가져봤자 익히지도 못 해요. 그 것으로 진희누나가 배울 만상풍운조화서를 지켰으니 된 거죠." "되긴 뭐가 돼?!!" 진호가 또 설친다. 나는 벌어진 진호의 입으로 사과조각 하나를 던졌다. 그대로 목이 막힌 진호는 잠시 움찔거리다가 결국 사과를 씹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조용하니 그나마 편하다. "그걸로 된 거냐?" 천희형이 다시금 물어왔다.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네가 반 년 동안이나 밤잠 설치며 매달려 비밀을 푼 것이다. 그 노력이 너에게는 겨우 그 정도였냐?" 분명 천희형 말 대로다. 무상검록은 나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천희형도 나에게 무상검록을 원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형으로는 배울 수 없지만 형이 마음만 먹는다면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 키워도 된다. 내가 스승으로 있다면 1년 반 정도라면 지금과 거의 대등한 레벨로 오를 수 있다. 더구나 그 능력은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무상검록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에 형은 절대로 무상검록을 탐하지 않았다. 그건 민우형도 마찬가지였고 민호도 같았다. 그런 무상검록을 간단하게 날름 삼켜버린 무무 늙은이가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누나가 더 소중해요." 나는 웃으며 옆자리의 누나 손을 잡았다. 누나도 나를 돌아보며 웃음을 지어 주었다. 결국 천희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는 '아우~ 저 아수라 닭살백작...'이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거냐? 이대로 끝낼 생각은 아니지?" "당연하죠. 그 망할 늙은이....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레벨 1이 될 때까지 렙따를 시켜도 분이 안 풀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거예요. 우선은 누나의 성장이 더 중요해요. 저 혼자서 하는 것 보다 누나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아요. 반년이면 되요. 그 후에는..... 게임을 접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보복을 할겁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요." 내가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천희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너답다. 그리고 네 보물도 다시 돌려 받고 말이야." "당연하죠." 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무 늙은이 그 동안 익힐 수도 없는 비급 들고 속 좀 썩어 봐라. 아주 머리에 흰머리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보물 간수나 잘 하고 있어. 다시 찾아갔을 때 만약 잃어버리기나 했을 때는.... 진짜 죽여버린다. 9 - 어머니 벌써 며칠만 있으면 3월이다. 나와 누나가 만상풍운조화서를 얻고 무무 늙은이에게 무상검록을 빼앗긴 지도 벌써 두 달째이다. 그 사이에 현실이나 게임에서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뭐 게임은 나중에 접속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우선 현실에서는.... 누나가 졸업을 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대학에 들어간다! 비록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 안심이지만 나에게는 이것도 크나큰 타격이다. 으아아~!!! 난 이제 무슨 재미로 학교를 가란 말인가? 누나는 매일같이 만나자고 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질 수도 있는 법! 물론 나는 나 자신을 믿고 누나도 믿는다. 하지만 세상사 왕왕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내가 없을 때 꼬여들 날파리들이 문제이다. 누나는 싫다 하는데도 자꾸 덤벼들면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누나는 아직 순진하고 착해서 타인에게 험한 소리를 못하는데.... 괜히 그것을 이용해 어떤 삐리리~한 녀석이 누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버린다면? 아무리 누나가 태권도 2단의 유단자라 해도 그 착한 성격으로는 사람도 못 때릴 터이다. 그럼.. 그럼.... 으아아~!!!! 아냐아냐! 최유빈! 좋게 생각하자... 괜히 그런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거기에 누나 옆에는 시연선배가 딱 붙어 있잖아. 그래! 시연선배라면 믿을 만 해. 그리고 매일같이 내가 누나를 마중 나갈 거잖아. 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구나. 뭐 다음에 누나 입학식 날 학교 땡땡이 치고 따라가 그 대학 안의 늑대녀석들에게 누나는 몸도 마음도 모조리 내 것이라는 것을 증명시켜 버리리라... 그러면 달라붙는 녀석이 조금 줄어들겠지? 최소한 강렬한 인상을 날려야 해. 당연히 만인의 앞에서 키스를 해 버리면 되는 거야. 누나가 조금 화를 내겠지만 차라리 누나에게 한 소리 듣고 말지 다른 녀석이 누나에게 달라붙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 .....그런데 나 이거 의처증 증세가 있는 것 아냐?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의처증을 가진 남자가 미쳐 가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던 나다. 나도 나중에 누나를 믿지 못하고 술 먹고 폭력을 행하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되면 어쩌지? 아아.... 누군가가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것이 이렇게 고달픈 것이구나... 더욱더 가까이 있게 하고 싶고.. 더욱더 나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은데... 그것이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되니.... 휴우.. 누나의 입학식 날 따라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할 듯 싶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내 손바닥 크기 정도의 액자를 들어올리며 나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나 중증인가 봐..." 액자에 끼워진 사진은 나와 진희누나가 저번 여름에 남해바다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뒤쪽에서 누나를 안고 있는 포즈의 사진이었는데 누나의 밝은 미소가 사진 속임에도 너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오렌지 빛의 원피스형 수영복을 입은 누나... 상체에 대충 걸친 내 티셔츠 때문에 수영복은 대부분 가려져 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자꾸 누나를 돌아보는 것 같아서 내가 강제로 입힌 것인데... 지금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쳇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 때 돌아오기 바로 전 디지털카메라가 진호의 실수로 물 속에 빠져버린 터라 겨우 남은 사진은 이것뿐이다. 거의 수백 장의 누나의 수영복 사진을 찍었는데 말야... 건진 것은 한 장이라니! 이건 진짜 신의 농간... 아니 진호의 농간이야~!! 우우~! 누나가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야~! .....흠흠... 이거 요즘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아무래도 누나와 학교에서 만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가 보다. 거기다가 요즘은 누나도 바쁘다고 잘 게임에 접속도 안 하고 말이야. 물론 그대로 하루에 10시간 가량은 게임을 함께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20시간을 게임에서 함께 즐겼던 터라 절반으로 줄어버린 시간이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오늘도 누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시연선배와 함께 학교로 갔고 나는 홀로 방에서 뒹굴 뿐이다. 처음 며칠은 혼자 레벨 업을 했지만... 매일같이 옆에 있었던 누나가 없어서 그런지 금방 식상해져 버렸다. 뭐.. 그나마 레벨을 1 올렸다는 것에 기뻐하자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다시금 침대로 돌아갔다. 그때 거실에서 벨소리가 울렸고 나는 후닥닥 달려나갔다. 누나의 전화일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 몸은 더 월드 안에서 부신약영을 쓰는 것을 능가할 정도의 속도로 전화기로 뻗어갔다. (물론 과장법이다.) 즉시 통화버튼을 누른 나는 화상이 뜨기도 전에 소리쳤다. "누나?!! 집이야?!" [............아무리 내가 젊게 보인다고 해도.. 누나라니. 빈말이라도 고맙구나.] 에?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누나의 목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은 있는데 말이다. 우씨.. 궁금해 죽겠는데 이 놈의 화상은 왜 하필 말썽이야? 아직 10년도 안 된 건데 말야. 나는 손가락으로 톡톡 화상장치를 두드렸다. 효과가 있었는지 금새 일그러졌던 화상이 깨끗하게 변했다. 동시에 나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화상 너머로 보이는 어떻게 봐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캐리어 한 아가씨.... 라고 종종 밖에서 불리는 아주머니.... 라고 칭해지는. "어머니!!"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나는 급히 옷을 챙겨 입으며 시계를 돌아보았다. 14:28 제길.. 이거 제때 만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진짜 어머니도 너무 한다. 한국에 왔었다면 즉각 연락 좀 해 주시면 어디가 덧나나?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한국에 들린 김에 얼굴 좀 보자 15까지 공항으로 와라' 라고 말만하고 끊으면 어쩌라는 것인가? 만약 내가 성질 고약한 아들이었다면 '안 나가!'라고 소리치며 전화를 열 번은 더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타인에게는 몰라도 진희누나나 부모님들한테는 철저하게 복종을 하는 최유빈이다. 대충 옷을 챙겨 입은 후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낚아채고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렸다. 느긋하게 신반을 신고 있을 시간도 없다. 거의 구겨진 듯이 운동화를 신은 나는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한 발로 깡충거리며 뛰어갔다. 그렇게 하면서 한 쪽 신발을 옳게 신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즉시 발을 바꾸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 도착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확실하게 양쪽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타고 1층 버튼을 눌렀다. 초고속 엘리베이터이니 만큼 몇 초 지나지 않아 25층을 단번에 내려가 버렸다. 띵~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 뒤이어 스르륵 소음도 없이 문이 열렸고 나는 재차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유빈군 어디가나? 또 여자친구한테 뽀뽀하러 가나?" 수위 할아버지다. 이미 이 아파트에서 나와 진희누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벌써 반년이 다 되가는 데도 여전히 나만 보면 진희누나의 안부를 물어온다. 덕분에 진희누나도 우리 집에 오기를 꺼려할 정도이다. 크윽...!! 진희누나와 또 단둘이 남게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응응응 한 것도 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원대한 계획이 아파트 주민들의 철저한 계략(?)하에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되 버린 것이다. 제발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하소연을 하고 싶지만.. 그게 원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니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상태다. 언젠가는 잠잠해 지겠지....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수위아저씨에게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재빨리 아파트를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중간에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이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고,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마지막에는 꼭 진희누나를 들먹인다. 택시를 타기 전까지 나는 다섯 명의 아주머니들에게 씹혔고 극심한 정신혼란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나에게 가장 큰 정신적 타격을 준 것은 예닐곱 살은 되어 보이는 꼬마아이였다. 느닷없이 나를 가리키며 '앗!! 뽀뽀오빠다~!!'라고 소리를 쳐버리는데.. 순식간에 주위의 아주머니들이 배를 잡고 포복절도했다. 크으... 저 꼬맹이... 진짜 여자애만 아니었다면 달려가서 발로 뻥 차 버렸을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탄 나는 목적지를 공항으로 부르고는 시계를 보았다. 14:34 우리 집에서 공항까지는 조금 먼 길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차가 밀릴 시간이 아니니 충분히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오밀조밀하게 배치된 도시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 나는 그런 모습을 감상하고 있지 않았다. 눈으로는 도시를 바라보지만 머리로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컴퓨터박사이시다. 보통 사람은 우리 어머니를 모르지만 그쪽 계통의 사람들에게 우리 어머니 이름 세 자만 되면 대번에 '아! 그 분!!'이라고 탄성을 터트릴 정도다. 어머니는 대단한 천재로... 불과 16살에 MIT를 수석으로 졸업한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분이다. 그 덕분인지 나도 상당히 좋은 머리를 타고날 수 있었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 IQ검사를 했을 때 190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 대단한 어머니가 평범한 셀러리맨인 아버지와 결혼을 한 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분명 아버지도 유능한 캐리어였지만... 역시 어머니와 비교하면 범인에 불과할 것이다. 뭐... 사랑이라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은 사랑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어머니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분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를 했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 아버지는 가족이 없으셨다. 고아라고 할까? 국내 1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명문가이니 근본도 모르는 아버지를 사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엘리트들의 생각이 아닌가. 뭐 결론은 어떻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을 하기는 했다.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어머니는 가족과의 연까지 끊어야 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지금 내 기억에 남아있는 과거는 2살 때부터였으니 말이다. 분명 그 때는 대단히 행복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행복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사이가 한 번 틀어지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때부터 부모님은 하루의 시작을 말다툼으로 시작하고 하루의 끝을 말다툼으로 끝냈던 것 같다. 그 때가.... 내가 3살 때였었나...? 아무튼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가 분명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지금은 대충 가치관 대립이라고 생각해 버릴 뿐이다. 그렇게 3년 동안을 부모님들은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셨다. 그리고 결국은 이혼을 하셔 버렸다. 내 나이 6살 때였다. 어머니는 나를 데려가려 하셨지만 아버지께서 반대를 하셨고, 다시 어머니를 가족으로 인정한 외가 측에서도 나를 받지 않는다고 한 터라 결국 나는 아버지의 옆에 남게 되었다. 아마도 외가에서는 어머니가 제대로 된 남자와 결혼을 하기를 바랬을 것이고 당연히 나라는 혹이 딸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리라. 뭐 덕분에 아버지의 옆에서 편안하게 자랄 수 있었으니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나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외가로 가 보았자 결국은 구박밖에 더 당하겠는가? 아무리 부자면 뭐 해? 우선 내가 편해야지. 더구나 우리 집도 지금은 상류층이 되었고 말이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힘이었다. 비록... 일에 빠져 있는 아버지가 마음에 꼭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미친 듯이 일에 빠져 든 것은 어머니와의 말다툼이 시작될 무렵부터였다. 아버지는 뭔가에 쫓기는 듯이 일에 몰두했고 그 때부터 아버지가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아버지가 모든 것을 일로 돌리지만 않으셨어도... 어쩌면 어머니와 이혼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뭐..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조금만 더 어머니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으면 이혼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아버지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어머니는 떠나버렸고... 아버지는 여전히 일에 중독되어 살아가시지만.... 이 정도도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자주는 아니지만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은 어머니를 볼 수도 있고 말이다. "다 왔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힐끔 미터기를 바라보니 3만 2천 원이 나왔다. 생각보다 적게 나왔네... 한 4만 원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소리도 없이 떠나가는 택시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곧 어머니에게로 생각이 미쳤고 재빨리 공항안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을 지나서 공항 안으로 들어선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이 넓은 공항에서 어찌 어머니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제야 나는 이제까지 신경 쓰지 않았던 거대한 문제가 존재함을 알아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진짜 이러다간 여기서 어머니를 찾다가 15시가 넘어버릴 터였다. 어찌해야 할까 난감한 얼굴로 허둥거리는 나의 귀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미아가 되신 최유빈 학생. 미아가 되신 최유빈 학생. 지금 어머니께서 2층 찻집에서 기다리고 계시오니 즉시........] ......역시 우리 어머니다. 거의 감탄이 나올 정도라니까.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나는 찻집을 찾았고 다행히도 금새 찻집을 찾을 수 있었다. 딸랑.... 찻집 문을 열고 안으러 들어가자 문 위쪽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며 주인에게 '손님 왔어요~'를 외친다. 곧 종업원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혼자이십니까?" "아니요... 일행이 있는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머니를 찾았다. 곧 창가 쪽 자리에 우아하게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나는 종업원에게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의 행동이 일행을 찾은 것이라고 판단한 종업원은 나와 같은 미소로 답해주며 몸을 돌렸다. 나는 어머니가 있는 자리로 갔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흠흠' 헛기침을 해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른 손목에 차여져 있는 시계를 보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13초 지각이구나." "제 배꼽 시계로는 47초 일찍 도착했는데요." 히죽 웃으며 답했다. 어머니는 그제야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화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반갑구나 유빈아."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나를 안으셨다. 그리고는 가볍게 내 왼쪽 볼에 입술을 맞추시고는 다시 자리에 앉으셨다. 나도 어머니의 맞은편에 앉았고 곧 다가오는 여종업원에게 콜라를 한 잔 주문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여종업원이 날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아니.. 미소라 하기보다는... 꼭 웃음을 참는 듯 한.... 의아한 얼굴로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잠시 어머니를 보더니 몸을 돌려 부리나케 도망쳐 버린다. "왜 저러죠?"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내가 어찌 알겠니? 혹시 저 아가씨가 너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것 아니니?" ".......꼭 웃음을 참는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것이다." 아아. 그래. 어머니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곧 방 전의 여종업원이 콜라를 한 잔 가지고 와 내 자리에 놓았고 이번에도 역시나 입을 가리고 도망쳐 버렸다. 진짜 나한테 관심 있는 것 아냐? 안 되는데.. 나는 오로지 진희누나 뿐인데 말야.... "그보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는 거지? 누나라니.... 언제 네 아빠가 누나를 데리고 오던?" 문뜩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마.. 어머니는 질투하는 것인가? 역시 이혼을 하셨지만 아직 애정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러니까 외가에게 그렇게 결혼을하라 해도 아직까지 혼자 살고 계시지... 솔직히 우리 어머니 정도라면 어느 남자이건 물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 번 결혼을 하셨지만... 요즘 세상에 여자가 이혼했다고 문제삼을 남자는 거의 없다. 외가와 같은 엘리트 집안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혹이 달린 것 정도이다. 어머니의 나이는 지금 36세이다.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 엄청나게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신 것이다. 뭐 18세만 되면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쨌든 지금의 어머니는 10대의 풋풋함이나 20대의 활기참은 없으나 30대의 완숙함을 가지고 계신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20대의 활기참 역시도 충분하다 할 정도로 가지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나이보다도 젊어 보이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20대 후반이라고 할 정도이다. 집안 빵빵하겠다. (물론 나는 이를 갈 정도로 싫어하는 곳이지만) 미모 확실하겠다. 사회적 배경 최고이겠다. 꼬이지 않을 날파리가 없을 턱이 없다. 그 중에는 분명 잘생기고 매너 좋고 능력까지 겸비한 완벽한 남자들도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아직까지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새 누나를 데리고 왔다. 조금 돌려 말하면 '아버지가 재혼을 했느냐?'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뭐... 좀 더 심각하게 나가면 '아버지가 어디서 애 하나 만들어 들어왔느냐?'라는 말까지 확산될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아닐터이다. 각설하고... 아버지의 재혼문제에 이토록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들떴다. 아직 아버지도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는 안다. 거기에 어머니도 아버지와 같다면? 내가 중간에서 잘 조정만 하면 어떻게 과거의 단란한 가정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과민반응을 보이세요?" 나는 히죽 웃으며 어머니에게 되물었다. 내 말에 어머니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신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아들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에 대한 무안함으로 판단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갑자기 어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러 버리셨다. 상당히 컸기에 찻집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어머니에게로 향해졌다. 그제야 어머니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았는지 숨을 고르며 나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나는 어머니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내가 너무 성급하게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으셨어요. 조금만 알아보면 어머니도 알 수 있을 건데.."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재차 말을 이었다. "제가 전화에서 말한 누나는... 그러니까 지금 저와 사귀고 있는 누나예요." 어머니에게 진희누나를 이야기하는 것... 어쩐지 부끄러웠다. 말을 마친 나는 오른손 검지로 턱을 긁으며 무안함을 달랬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셨다. "여자친구.. 생겼니?" "네.. 저도 이제 17살이라고요." "그렇구나... 너도 이제 곧 있으면 성인이구나."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속에 함축된 미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키도 이렇게 컸고.... 이제는 이 엄마보다도 더 크겠네." "남자잖아요." "그래.." 어머니가 나의 손을 잡으신다.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씩 펴낸 어머니는 펼쳐진 내 손을 자신의 볼로 가져가신다. 따뜻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이렇게 만져 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어머니를 만나더라도 서로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헤어질 분이었다. 1년.. 혹은 2년에 한 번식 찾아오는 만남... 오랜 기다림의 보상치고는 만남의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30분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긴 것이다. 심할 때는 그냥 눈만 마주치고 헤어질 때도 있었다. "유빈아.. 엄마가 밉지?"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말을 믿지 않으셨다. "아니야... 유빈이는 엄마가 미울 거야. 엄마인데... 엄마인데 유빈이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 결국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이제껏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너무도 놀랐다. 아버지와 싸울 때도... 이혼을 할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던 분인데... "어.. 어머니."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울어 버렸네." 어머니는 급히 티슈로 눈가를 닦으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가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얼굴로만 웃는 모습.... 그것이 바로 지금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말 할 것은 아니지만.... 꼭 하고 싶었다. 이날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왔지만.. 나도 역시 몰래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해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머니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학예회 때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와 자신의 재능을 뽐냈는데.. 나는 부모님 대신에 선생님 앞에서 장기자랑을 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는 울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절규를 했었다. 나는.....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희미한... 그리고 짤막한 2살 때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난.. 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요." 결국 말해 버렸다. 이날 이때까지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 오히려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살아왔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면을 벗어 버렸다.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보았다.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어머니... 하지만 금새 미소를 머금으신다. "나도.. 그렇단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아버지도 아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세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저와 아버지... 둘 다 아무 이상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분명 정상은 아니에요. 아버지는 하루종일 일 속에 파묻혀 살고.. 저는 게임 속의 세상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해요.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에요. 현실이 싫어서.. 그래서 그 곳으로 도망치는 거예요......" 내가 더 월드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도피처를 잃기 싫어서였다. 어머니가 없는 이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이다. 더 월드에 들어가면 잠깐이나마 잊을 수가 있다. 그 세계에서 나는 검천지룡이 되어 현실의 나를 부정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게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근래에 여러 친구들이 생겼고... 진희누나라는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싶은 여인을 만났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 줄 어머니라는 존재..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울 뿐이다. "어머니... 저 이 상태로는 언젠가 미치고 말 거예요." 나는 긴장하며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보면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정말 이대로 가면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부탁해요." "유빈아.. 난....." 어머니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안 되는 것인가?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두 분은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신다. 잊었다면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할 이유가 없고, 아버지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을 굳히며 방으로 들어가실 이유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면서 등을 돌리는 것일까? 자존심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정말 아버지와 어머니가 싫어질 것 같았다. 어른이라는 존재 자체가 싫어질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다른... 또 다른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애써 곱씹었다. "박사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뒤 쪽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서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익히 본 적이 있는 아저씨다... 바로 어머니의 보디가드다. "벌써?" 어머니는 대번에 냉정한 얼굴로 돌아간다. 조금 전까지의 슬픈 기운 따위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나 어머니로서의 어머니가 아닌.... 바다건너 외국에서의 어머니이다. "늦으면 비행기를 놓칠 것입니다. 이번 비행기를 타야 약속시간 내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휴... 알았어요. 유빈아. 먼저 가 보겠다. 미안하구나. 조심해서 들어가렴.." 어머니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보디가드들과 함께 가 버리셨다. 홀로 남겨진 나는 이를 악물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어머니를 믿고 싶다. 믿고 싶었다.. 믿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비릿한 뭔가가 입술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너무 세게 아랫입술을 깨문터라 상처가 나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은 만남.. 언제나 똑같은 이별... 오늘도 어김없었다. 기대를 가지고 달려왔지만 나에게 남겨진 것은 공허함뿐이다. 그 공허함이 아픔으로 채워졌다. 부족한 곳은 분노가 자리잡았다.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피가 어우러져 있었는지 비릿했다. 그 기분 나쁜 느낌 은 내 마음속 불길을 부채질했다. 손을 뻗었다. 잡히는 것은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콜라가 들어있는 글라스였다. 갈증이 난다. 나는 단숨에 콜라를 비웠다. 하지만 마음속의 불길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그 크기를 더해갈 뿐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이를 갈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연약한 글라스가 파삭 하는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갔다. 하지만 나는 더욱 손아귀의 힘을 가중시켰고 결국 글라스는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은 없다. "괜찮으세요?!" 조금 전 주문을 받았던 여종업원이 다급하게 달려와 나에게 물어왔다. 예쁘장한 얼굴.... 하지만 그녀도 아니다. 내가 찾는 사람... 내 지금 분노를 잠재워줄 단 하나의 존재....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지? 어디 있어? "이.. 이봐요?! 괜찮아요? 갑자기 왜 그래요?" "시끄러!! 닥치고 꺼져!!" 나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귀찮았다. 누군데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건가? 나는 내가 그녀를 찾고 있다. 그녀.. 그녀? 그녀는... 그녀는 누구지? "손에 상처가 심해요! 빨리 유리조각을 꺼내야지..." 종업원이 다급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손을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누나가 아니면 누구도 날 손대면 안 돼!!" 누나? 그래.. 누나... 찾아야 해. 누나뿐이다. 나를 다독거려 줄 존재는. 진희누나. 누나를 찾아야 한다. 나는 앞을 가로막는 여종업원을 밀쳐내며 걸음을 내딛었다. 주위 사물이 어지럽게 꼬인다. 술 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몸의 균형을 잡기 힘들다. 휘청 다리가 풀린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뭔가를 잡았다. 장식용으로 놓여있는 화분이 손아귀에 잡혔다. 하지만 그 것으로는 내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화분과 함께 내 몸이 바닥을 굴렀다.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나 손의 상처에서 퍼지는 고통이 나의 의식의 끈을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걸어갔다. 길을 막고있던 이들은 내가 다가서자 흡사 전염병자를 대하듯이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키득 웃음을 흘렸다. "계산........" 카운터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허둥지둥 손을 흔들었다. "이미 먼저 번 손님께서 계산을 마치셨습니다." "깨진.. 화분과... 글라스는...?" "괜찮습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큭... 내가 병을 옮기는 환자인가? 에이즈 환자라도 되는 것인가?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받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줄 이유는 없다. 나는 비틀비틀 찻집을 나섰다. 공항을 나온 나는 즉시 택시를 잡았다. 겨우 억눌러 두었던 분노가 다시금 터져오를 것 같다. 한시라도 빨리 누나를 만나야 했다. "상처가 심하군. 병원으로 갈까?" 운전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를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나는 가슴을 누르며 목적지를 밝혔다. "혜하대학교...." 그는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는 듯 즉시 차를 출발시켰다. 혜하대학교에는 부속병원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그 병원으로 가려는 구나 생각할 것이다. 환자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택시는 제한속도를 초과하며 달렸다. 중간에 몇 번 검문에 걸렸지만 경찰도 뒷좌석의 나를 보곤 재빨리 경례를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20분 정도가 걸려 혜하대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혜하대학교 부속병원 앞에 택시를 멈춘 운전사는 즉시 좌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에게 카드를 넘겼다. "요금은 됐네. 그보다 빨리 병원으로....." 거 참... 인정 많은 아저씨네... 이런 사람 쉽게 보기 힘든데. 평소라면 기분이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결코 병원 따위를 가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차 카드를 건네자 운전사 아저씨는 결국 카드를 받아들고 요금지급기에 대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요금이 결산되었고 운전사 아저씨는 다시 나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카드를 받은 나는 그것을 지갑에 넣고 즉시 몸을 돌렸다. "이. 이봐!! 학생!!" 병원과 반대편으로 가는 나를 운전사 아저씨가 급히 잡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나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재차 걸음을 옮겼다. 느낄 수 있었다. 누나가 근처에 있음을.... 걸음을 옮길수록 심장이 뛴다. 만나고 싶다. 누나를 만나고 싶다. 누나뿐이다.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존재는 이 세상에서 누나뿐이 없다. 누나를 만나지 않으면 나는 어찌 될지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주할 지도 모른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그 분들이 나를 아프게 해도.. 아무리 그 분들이 나를 슬프게 해도 부모님을 저주하기는 싫다. 찾아야 한다.. 누나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다. 내 안식처... 도피처가 아닌 마음의 안식처... 세상에 내 안식처는 그 곳 뿐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나..?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된다. 분명 누나가 근처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도무지 다가가지 못하겠다. 세상이 미친 듯이 일그러진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며 발길질을 가한다. 꺼지라고 소리친다.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 따위는 없다고 잘도 주절거린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세상이 나에게 말하지만... 나는 세상에게 소리친다. 이런 나 역시도 환영해 주는 존재가 세상에 있다고....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기대고 싶다. 난 그녀에게...... "진희누나!!!" 그녀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공허함 뿐... 역시 나에게 기댈 자리는 없다는 것일까? 허탈함.... 절망감... 다리가 풀린다. 뭔가를 잡고 싶지도 않다. 나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져 갔다. 빌어먹을 아버지 어머니.... 진정으로 당신들을 저....... 그때 누군가가 나의 몸을 부축했다. 따뜻한 손이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유빈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역시.. 누나는 내 진정한 안식처이다. 나는 손을 뻗었다. 오른 손을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왼 손으로 누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누구 때문인데!" "헤헤...." 나는 헤프게 웃으며 누나의 품으로 몸을 기대었다. 따뜻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새삼스럽게 누나의 품이 따뜻하다고 생각되었다. 내 마음속 불길이 식어간다. 늘어졌던 감각의 끈이 풀려간다. "고마워요....." 나의 의식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10 - 잠겨진 문을 열고 "......박혀있던 유리조각 들은 모두 제거했어. 다행이 뼈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고 손목의 상처도 혈관은 건드리지 않았어. 되도록 며칠 입원을 해서 뭔가 다른 상처가 없나 살펴보는 것이 권하지만 지금 상태로 봐서는 오늘 퇴원을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군."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의 침상에 있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기절하기 전의 일을 떠올린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왜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거죠?" 진희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마음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래. 뭐 금방 정신을 차릴 것이니 걱정하지는 말아. 아! 마침 일어났군."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의사가 말했다. 그러자 누나는 황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여 보였다. "저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누나는 그런 나에게 다가와 매서운 눈을 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누나는 허리를 숙이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더욱 움찔한 나는 또 한 번 뒤로 물러섰지만.... "으악!!!" "유빈아!!" 뒤에는 절벽이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거꾸로 떨어져 버렸고 화를 내던 누나는 깜짝 놀라 침대를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야야.... 머리야.." "괜찮아?" "괜찮아요. 윽!" 머리에 큰 혹이 생겨버렸다. 얼얼한 부위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댔는데 더 큰 통증이 엄습했다. "어디 봐." "괜찮다니까..... 아악!!!" "이게 괜찮은 거야? 정말... 너 자꾸 나한테 걱정만 시킬래?" "그래도.. 이건 내가 일부러 다친 것은.... 으아악!!" 조용히 투덜거리는 내 머리를 누나가 가볍게 탁 쳤다. 그 고통에 나는 절규해야 했다. 누나... 많이 잔인해 졌어.... "오빠. 유빈이 머리의 상처.. 잘못되지 않을까요?" 누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사에게 물었다. 나에게로 다가온 의사는 거칠게 내 머리의 혹을 살펴보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냥 혹만 난 거야. 며칠 지나면 사라 질 테니 걱정할 것 없어." 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씨이... 내가 괜찮다고 할 때는 믿지도 않으면서 의사가 한 말은 대번에 믿네..... 뭐 이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듯 세상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물론 인간은 과학발달에 따라 밤의 어둠까지도 몰아낸다. 도시 전체가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였지만 그래도 지금이 낮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계를 보니 오후 10시 40분을 막 넘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의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뒤에서부터 누나를 안았다. 누나의 몸이 경직되었고 의사의 이마에는 삐질 식은땀이 매달렸다. "뭐.. 뭐야?!" "누나. 집에 가자." 얼굴을 붉히는 누나에게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던 누나는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어야지.. 이미 누나도 면역이 조금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의사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듣던 것 보다... 더 심하군...." 에? 무슨 소리?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대략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상당히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나보다야 부드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대로 미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누군가를 떠올리려 용을 쓸 때 진희누나가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연이 큰오빠야." "아!" 그러고 보니 진자 시연선배와 닮았다. 특히 조금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완전히 시연선배의 판박이였다. 저런 눈을 선배가 가졌을 때는 확실하게 눈에 띄었는데 남자가 가지고 있으니 의외로 어울린 터라 한번에 못 알아 본 것이다. "헤에.... 시연선배 오빠가 있었어? 하긴... 그 성격 보면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지.. 분명 형제 중에 남자가 둘 이상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게 아니면 그런 성격이 나오지 않아. 그리고 분명 선배는 막내 일 거야." 나는 고개를 내 의견을 내보였다. 정확했는지 시연선배의 오빠... 그러니까 명찰에 적힌 이름이... 한류연이군. 어쨌든 류연씨는 머리를 누르며 신음을 토해냈다. 분명 여자답지 않게 거센 성격을 가진 시연선배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는 것이리라. "하아.. 눈치가 보통이 아니군. 자자. 잡설은 그만 하고 이제 더 볼일이 없으면 그만 가 봐라. 그렇지 않아도 내일까지 제출할 서류가 있는데 너희들 때문에 손도 못 대고 있다." 류연씨는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나와 진희누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쩌면 더 이상 있다가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선수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개기면서 장난을 쳐볼까 했지만.... 누나가 먼저 류연씨에게 인사를 올리자 나는 생각을 접어야 했다. "그럼 오늘 죄송했어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아. 그래." 누나의 인사에 류연씨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내가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올 게요." "오지 마." 거 참... 야박도 하여라. 나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리고는 진희누나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런 나를 류연씨가 불러 세웠다. "유빈군.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네? 무슨?" "큰 일은 아니라네. 진희야. 너는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끝날 거야." 류연씨의 말에 누나는 의아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진료실을 나갔다. 류연씨와 단둘이만 남게 된 나는 류연씨가 내 준 자리에 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내 물음에 류연씨는 대답은 않고 의사가운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무테 안경이었는데 류연씨가 안경을 쓰자 조금 전까지의 제비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지적으로 생긴 의사선생님으로 둔갑되었다. 나도 안경이나 하나 구해서 쓰고 다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류연씨가 노트북을 잠시 두드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손의 상처를 치료하던 중... 진료기록을 보고 알았는데 말야.. 자네 7살 때부터 11살 때까지 4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더군." 순간 내 몸이 경직되었다. "오빠와 무슨 이야기 한 거야?" 내가 류연씨의 진료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진희누나가 재빨리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누나가 나와 류연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이 듣지 못한 듯 했다. 하기야 요즘 건물들은 하나같이 방음은 기본이니까. "별거 아니었어요." 나는 웃으며 누나를 안심시켰다. 누나는 처음에는 못미더운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금새 별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듯 그 의문을 털어 냈다. 나는 왼팔로 누나의 어깨를 감싸며 병원을 나섰다. 혜하대학교 부속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탄 나와 누나는 잠시 다툼을 해야 했다. 나는 누나의 집으로 먼저 가 누나를 들여보내고 내 집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누나는 나와 반대였다. 끝까지 나를 먼저 들여보내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아마도 오늘의 일에 대해 아직도 걱정이 다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결국 내가 항복을 하고 말았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갔다. 30분 정도가 지나서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저 들어갈게요." "응. 들어가면 바로 자. 오늘은 게임하지 마." "알았어요." 누나를 걱정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택시에서 내렸다. "잘 가요. 들어가서 전화하고요." "응. 내일 봐." 그렇게 누나와 헤어졌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누나와 헤어지자 다시금 가슴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렸다. 내일이면 또 볼 수 있다. 비록 게임에서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직접 보고 싶으면 찾아가면 된다. "어. 유빈군 이제 오나?" 수위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수위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곤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늦은 밤까지 수고하십니다." "허허허. 뭐 직업인 것을 어찌하나? 응? 그보다 유빈군 손 왜 그러나?" 내 오른손을 감고있는 붕대를 보며 수위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조금... 놀다가 다쳤어요." "쯧쯧. 젊은 사람이 조심성이 없어 가지고 하등 좋을 것 없네. 자네가 다친 것을 알면 자네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게나." "네에. 그보다 저희 아버지는 돌아 오셨나요?" "아직이네. 왜 무슨 일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야근을 하실 모양인가 보다. 어머니가 오셨다 갔다는 것을 알기라도 할까? 쳇... 내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그 일에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자게나." "할아버지도요." "허허허. 알았네. 끄응.. 이거 그만 자던지 해야지... 졸려서 도무지 못 참겠어." 수위 할아버지의 말에 빙긋 웃은 나는 몸을 돌려 통로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1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5층의 버튼을 눌렀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는 25층에 도착했고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나는 통로 우측의 집으로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곧 지문인식이 있었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 나는 어두운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움직임 인식 장치로 작동되는 자동전등이 불을 밝혔다.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소파에 몸을 던지며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춥군......" 분명 난방이 될 것인데.. 어째서인지 추위가 느껴진다. 나는 오슬오슬 떨리는 몸을 손으로 감싸며 소파위로 몸을 뉘였다. 적막이 몸을 감싼다. 혼자 있다는 공허함.... 언제나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느끼는 감정이다. 다른 때는 정신적으로 제어가 되는데... 어머니를 만난 날만은 나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다. 쓸쓸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멀티비전. 채널 07." 내 말에 맞은 편 벽이 열리며 화상이 생성되었다. 조용하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 소란스러움을 연출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채널에서 나오는 것은 뉴스였다. 잠시 뉴스를 바라보던 나는 다른 채널로 바꾸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를 자극하지 못했다. "쳇... 이 정도로 풀리면 그 동안 걱정은 하지 않았지..." 나는 가볍게 혀를 차며 멀티비전을 꺼 버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누나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 나는 그 액자를 들어올려 품에 가져갔다. 서늘한 유리의 감촉이 느껴져야 하지만.... 나는 희미하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오늘은 이 액자를 품고 자야겠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것이라도 있어서..... 뭐. 잠은 조금 더 있다가 자야할 듯 하다. 분명 누나가 전화를 할 것이니까.. 잠은 누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자도 충분하다. 띵동~ 그때였다. 느닷없이 초인종이 울렸고 나는 감고있던 눈을 떴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누구세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폰을 살폈다. 누군가가 분명 밖에 있기는 했지만... 카메라에서 몸을 돌리고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도 충분했다.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누나!" 역시 진희누나였다. 누나는 나를 보곤 빙그레 웃어 보였다. 누나의 긴 생머리가 출렁이며 아름다운 율동을 자아낸다. 나는 누나를 집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냥...." 그냥? 그냥 이 밤중에 남자 혼자 있는 집으로 와? 거기다가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쯤이면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누나가 느닷없이 우리 집으로 온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나는 머리를 긁었다. "어쨌든 우선 앉아요." 나는 누나를 거실의 소파에 앉히고 주방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내가 느꼈던 공허함과 쓸쓸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커피? 아. 누나 커피 안 마시죠? 녹차 어때요?" "좋아."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즉시 찬장을 뒤져 얼마 전에 구입해 두었던 녹차 잎을 찾아냈다. 물을 올이고 녹차 잔을 찬장에서 꺼낸 후 약간의 찻잎을 나누어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끓었고 나는 끓는 물을 녹차 잔에 부었다. 쟁반을 꺼내 두 잔의 녹차를 가지고 거실로 간 나는 그 중 하나를 누나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오늘도 야근이세요. 뭐 우리 아버지가 원래 그런 분이니까. 분명 모래 아침에나 들어오실 거예요." 내 말을 들으며 누나는 녹차를 마셨다. 나는 누나에게 물었다. "어때요?" "좋아." "그런데 집에 안 들어가고 갑자기 무슨 일로 저희 집에 온 거예요?" 첫 번째 질문은 미소와 함께 답을 내어 주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나는 잠시 누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연락은 했어요?" "으응... 시연이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아... 누나.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는 거예요? 저는 남자예요. 지금 누나의 행동의 저의가 어쨌든..... 저는 저 나름대로 해석해 버리고 늑대가 되어 버릴 수도 있어요." 내 말에 누나는 몸을 움찔했다. 나는 약간 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찻잔을 내려놓고 누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왼손을 뻗어 누나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누나는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내 손이 누나의 얼굴 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다. 내 손끝의 신경에 누나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묘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내 손은 누나의 턱 끝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목을 따라 내려갔다. 누나의 쇠골을 잠시 맴돌다가 천천히 오른 쪽으로 미끄러지게 했다. 동시에 나는 얼굴을 누나의 목으로 향했다. 가늘고.. 흰 누나의 긴 뒷목... 일순 욕망이 불끈 일어난다. 나는 누나의 목을 살짝 핥았다. 순간 누나의 몸이 움찔한다. 혀를 움직여 보았다. 누나의 떨림이 더욱 커져만 간다. 그와 함께 내 흥분도 더욱 한계수치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누나의 허리를 안으며 몸을 밀었다. 그러자 누나는 반항도 못하고 소파 위로 넘어져 버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고 있는 누나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인다. 나는 재차 누나의 목에 키스를 하며 천천히 방향을 누나의 입술 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귀를 잠깐 들려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자 내 옷을 쥐고있는 누나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간다. 손으로 누나의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보게 했다. 그리고는 누나의 턱에 입술을 맞추었다. 천천히 위로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앵두같이 작고.... 붉은 누나의 입술.. 전에 이미 취하였지만 오늘은 그 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연하게 한 화장 때문일까? 누나의 입술이 여느 때보다 더 달콤한 과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과실을 따먹었다. 우선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리고는 누나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며 두 번째 입맞춤을 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어서일까? 공략은 쉬웠다. 처음에는 몸을 떨던 누나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움직임에 맞춰 주었다. 뜨겁고 긴 입맞춤이 끝났을 때 나는 누나가 양팔로 내 목을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빙긋 웃었고 누나도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누나를 보자 나는 다시금 불끈 일어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행위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누나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조금 전의 키스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누나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것 같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누나를 가지고 싶을 뿐 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누나의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부드럽고 뭉클한 젖무덤이 몇 장의 천 조각을 사이에 두고 내 손에 수용되었다. 누나도 몸을 움찔 경직시켰지만 전처럼 피하지는 않았다. 입술을 떼고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부의 표정은 없었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조심스럽게 누나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겹쳐있던 천 조각이 조금씩 열릴 때마다 나의 눈은 충혈 되어갔다. 어느새 나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든 단추를 풀자 바로 하얀 브레지어와 그보다 더 하얀 누나의 속살이 드러났다. 전등의 빛을 반사시키며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누나의 살결이 너무도 곱다. 그건.. 그렇고. 봄이 가까워지고 있다지만 아직은 추운데... 누나가 블라우스 밑에 속옷 하나만 입고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렇지 않아도 추위를 많이 타는 누나인데 말이다. 의문이 생긴 나는 누나의 귀에 대고 물었다. "브레지어뿐이네요. 안 추워요?" "으응.... 그래서 겉옷을 몇 개 더 껴입었잖아." "불편하잖아요." "속옷 여러 개 껴입는 것이 더 불편해."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누나의 배를 핥았다. "흐응..." 내 욕망을 부채질하는 신음을 토해내며 누나가 허리를 꺾었다. 나는 오른팔로 누나의 허리를 안으며 누나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누나는 나의 하체 위에 앉아 나를 마주보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나는 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왼손으로 브레지어를 들추었다. 곧 눈 덮인 산과 같이 새하얀 두 개의 가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작지도 크지도 않는... 손으로 쥐면 딱 맞을 정도로 아담한 가슴이었다. 중앙의 핑크빛 유두가 파르르 떠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아...." 나는 누나의 왼쪽 가슴을 빨면서 손으로 누나의 허리 버클을 풀었다. 치마가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누나가 움찔하더니 급히 나를 밀어냈다. 생각지도 못하게 거절을 당해 버린 터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내 물음에 누나는 가슴을 가리며 조용히 말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안 돼...." "왜요?" 이제까지 허락해 놓고 갑자기 안 된다니...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누나를 보았다. 안고 싶다. 누나를 안고 싶다. 누나도 허락을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안 된다니... 설마... "겁나는 거예요? 제가 못할 짓을 하는 건가요?" "아냐. 그건....." "그럼 대체 뭐예요?" 누나는 입술을 우물거릴 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그 점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누나를 노려보았다. 결국 누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깜빡 했는데... 나 오늘 그 날이야...." 띵...... 일순 내 머리에서 타종이 일었다. 나도 순둥이는 아니고 누나가 말한 그 날이 어떤 날을 지칭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 날이 되면 신경이 날카로워 진다고 하던데.... 누나는 전혀 그런 변화가 없어서 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에고야..."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나는 몸을 축 늘이며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여전히 미안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양손으로 블라우스를 이용해 가슴을 가린 채로 말이다. 치마가 조금 내려가 팬티가 보이는데 그건 아무렇지 않나? 나는 히죽 웃으며 누나를 끌어안았다. "누나 오늘 나와 같이 자요... 물론 이상한 짓은 안 할게요. 그냥 누나를 안은 채 자고 싶어서 그래요." 잠시 나를 바라보던 누나는 얼마 후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누나의 머리에 볼을 비빈 후 문뜩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누나. 보통 여자들은 그 날이면 신경이 날카로워 져서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그런다던데.. 누나는 전혀 안 그러네요. 사람에 따라 다른 건가요?" "으응... 꼭 화만 내는 것은 아냐... 뭔가를 사고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여자도 있고 어떤 여자는....." 누나는 내 귀에 소곤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누나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황당한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남자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으응." 허허... 이거 정말 놀랄 일이네. 잠깐 그럼 누나는 어떤 경우지? 화도 아니고.. 낭비벽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혹시 제일 마지막? 하하. 설마 그럴 일은 없다. 마지막에 나를 거절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나는 웃으며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욕 물 데울게요. 누나 먼저 할거죠?" "아니. 유빈이 너 먼저 해." "우움.. 그럼 우리 같이 할래요?" 내 말에 누나는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나는 낄낄 웃으며 욕실로 들어가 물을 받았다. 그러며 조금 전 누나와의 일을 생각했다. 쩝.. 다시 생각해도 아깝단 말야. 분위기도 그만이었고... 진짜 그 날이라는 복병만 아니라면 누나와 하나가 될 수도 있었는데. 다음에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오늘은 어떻게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서 누나가 허락을 했지만.... 후에도 내가 '누나 가지고 싶어'라고 말하면 누나가 고개를 끄덕 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히려 나를 밝히기만 하는 그런 남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 다시 생각해 보아도 오늘 일은 아까움 그 자체였다. "하아... 이거 누가 나에게 저주를 건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 시도를 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누나의 반나체까지 보아버린 지금은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눈만 감으면 누나의 야릇한 얼굴과 새하얀 가슴이 어른거리는데.. "하아아아......." 재차 긴 한숨을 내뿜으며 나는 물의 온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목욕을 끝내고 잠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누나가 내 방 침대 위에 앉아 베개를 안고 있었다. 내 남은 잠옷을 빌려 주었는데... 역시 누나에게는 무척이나 컸다. 뭐 그 덕분에 더 귀여웠지만 말이다. "으랏차~!!" "꺄악!" 나는 침대 위로 점프를 해 누나를 안고 한 바퀴를 굴렀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없는 행동은 내 머리가 벽에 부딪치는 상황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으아아... 아파....." "쿡..." 누나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재차 누나를 안았다. 따뜻한 누나의 몸이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아까 까지만 해도 누나의 사진을 안고 자려 했는데... 그 사이에 누나를 안고 잘 수 있게 되다니... 아아.. 너무 기뻐~. "그러고 보니 나 유빈이의 침대에 누어보는 것 처음이야." "감상은?" "유빈이 체취가 느껴져." 에? 내 체취? 나는 문뜩 불안함을 느꼈다. 이번 겨울에 춥다는 이유로 목욕을 2주일에 한 번만 했는데... 설마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겠지? "제 체취가 어떤데요?" "달콤해... 그러면서도 포근해." 내 몸에서 그런 향기가 나나? 나는 팔을 코앞으로 옮겨 킁킁거렸다. 내 행동을 본 누나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가 웃으면 나도 기분이 좋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등." 곧 내 방에 전등이 꺼졌고 어둠이 우리를 감쌌다. 어둠은 쓸쓸함과 두려움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안락함을 선사한다. 나 혼자였을 때라면 쓸쓸함을 느끼며 공허함 속에서 하루빨리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나가 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로 나는 한없는 편안한 밤을 맞이했다. 영원히 지금의 밤이 지속되기를 바랄 정도였다. 나는 누나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었다. 상큼한 샴푸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너무도 좋은 향기다. 누나의 체취를 음미하며 나는 누나를 불렀다. "누나." "응?" 누나는 즉시 대답했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쓸어 내리며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의문을 표했다. 누나가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으로 왔을 때부터 가져야 했던 궁금함이었다. "왜 집으로 안 갔어요?" 누나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한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누나의 모습을 볼 수는 있었다. 다만 표정만은 알 수 없었다. 더 월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의 나는 그냥 평범한 남자아이인 것이다. "왜 저를 찾아 온 거예요?" "나도 잘 몰라...."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약간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날 찾아 온 거야? 의외의 곳에서 엉뚱한 행동을 보여주는 누나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나는 이런 누나가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누나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 때는 그냥... 나도 모르게 돌아왔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너 때문인 것 같아." "저 때문이요?" 내가 의문을 표하자 누나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아파트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슬퍼 보였어. 왜 그런지 몰라도.... 그 순간 네가 너무 불안해 보였어. 꼭 내가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택시에서 내려 여기로 달려오고 있었어." 그랬나? 하하.... 어쩐지 기쁘다. 실제로 당시의 나는 불안한 상태였다. 가늘어질대로 가늘어진 이성의 끈이 당장이라도 끊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만약 누나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무슨 짓이던 저지를 수도 있었다. 누나는 그런 내 내면을 본 것이다. 너무도 좋아하는 누나이기에.... 그런 누나가 나의 아픔을 보고 달래주려 한다는 것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온 거예요? 하하. 누나도 참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이네요. 혹시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아니... 수위 할아버지는 보았을 지도 모르겠네." 내 말에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때 수위 할아버지는 자고 있었어. 아무도 본 사람 없을 거야." 그럼 다행이다. 솔직히 나야 상관은 없지만.... 누나에게 있어서는 소문이 퍼져봐야 좋을 것은 없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누가 믿겠는가. 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지만... 어쨌건 결론으로는 미수였으니까.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내 말에 누나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아니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인가. 나는 누나를 안은 팔에 약간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뭐.. 내일 가서 생각해요. 하아.. 편하다.. 정말 오랜만에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어.. 유빈아." 문뜩 누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그게... 아까 류연오빠랑 무슨 이야기 한 거야?" 누나의 물음에 내 몸이 경직되었다. 느낀 것일까? 누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을 보탰다. "말 해 주기 싫으면 꼭 하지 않아도 되. 그냥 궁금한 것뿐이니까." 나는 잠시 누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누나라면 괜찮을 것이다. 스스로 언제나 '누나의 몸과 마음 영혼은 나의 것이고, 나의 몸과 마음 영혼은 누나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언제까지나 숨기고만 살수는 없다. 나는 결코 누나와 헤어지기 싫다. 당연히 언제고 누나도 알게 될 일이다. 그럴 바에야 후에 누나가 알아 충격을 받기 전에.... 지금 누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누나라면 이해를 해 줄 것이다. 분명..... "실은.... 저 어렸을 때 정신병원에 있었던 적이 있어요. 4년 동안." 일단 말을 끊은 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누나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나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이다. 나는 안심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몇 가지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요. 각각 고독감과 슬픔, 분노의 감정들이에요. 일단 고독감에 빠지면 저는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해요. 그리고 그 자리에 나머지 두 가지.. 슬픔과 분노가 자리하죠. 슬픔도 그와 비슷해요. 나머지 분노가 가장 심한데.... 분노를 하게 되면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고 오로지 분노 한 가지만 가져 버려요. 작년에..... 식당에서 제가 3학년 둘을 구타하고 정학 먹은 일이 있었죠? 그 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거예요." 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분노가 눈을 뜨면 나는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다. 오로지 분노 하나로 몸을 지탱시킨다. 그 분노의 근원지를 완전히 제해버리지 않는 이상 나의 분노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나머지 하나의 분노의 근원이 있음에도 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로 진희누나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줄 존재가 진희누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늘도 본능적으로 누나를 찾은 것이다. "저는 평소 그 세 가지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감정들까지도 거의 대부분이 죽어 버렸어요. 불필요한 것은 고독, 분노, 슬픔 세 가지인데 그 세 가지를 제어하기 위해 모든 감정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 죽어버린 감정들을 다시 살려 준 고마운 존재가 바로 누나예요. 알아요? 제가 처음 누나를 봤을 때 놀람이라는 감정을 눈떴고 두 번째 누나를 봤을 때 가지고 싶다는 감정과 기쁨이라는 감정을 일깨울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때부터 나는 누나에게 내 마음속 그늘에 봉해진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털어 놓았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시절.... 깨져버린 행복... 파국으로 치닫는 부모님.. 그리고 남겨진 나..... 버려지다 시피 했고.... 모든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결국... 나는 내 감정 중 세 가지의 제어 권한을 잃어버렸고 그 것으로 평소 나를 따돌리는데 주동을 한 녀석을 학교 옥상에서 던져버렸었다. 그 녀석은 중간에 나무에 걸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 때 당한 충격으로 백치가 되어 버렸었다. 뭐..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후 나는 병원에 감금된 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곳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었다. 밀폐된 공간... 별 효과도 없는 치료.. 하루의 대부분을 묶여 지내야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나 누군가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결국 나는 4년 만에 감정을 지워버리는 편법을 습득하고 겨우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모든 감정을 버리고... 그 위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거짓된 감정들로 덧칠을 했다. 웃고 있지만 진실로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울고 있지만 진실로 우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지옥을 나오고 싶었기에 감정을 버렸다. 그 후 중1년으로 편입이 되었다. 어머니의 피를 타고난 것인지 진도를 따라잡기에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때 나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더 월드였다. 단 한번의 경험... 그것은 나를 그곳으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현실에서는 거짓된 모습을 쓰고 있었지만.. 더 월드에서는 진실 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현실은 거짓이었고 가상현실은 진실이 되어버리는 웃지 못하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고의 도피처가 된 더 월드에서 나는 발을 빼지 못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누나는 손을 들어 내 눈 밑을 닦아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눈물이라니.... 나는 너무도 놀랐다. 자그마치 10년 만에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지? 우는 것이니까 슬픈 얼굴을 해야 하 는 건가? 아니면.... 잃어 버렸던 것을 찾았으니 기쁜 얼굴을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는 나에게 누나가 말했다. "울어... 내가 다 닦아줄게." 그 한마디는 나의 혼란스러움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누나는 나의 머리를 보듬어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누나의 가슴에 안긴 채 이제껏 참았던 눈물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11 - 새로운 칭호와 구룡삼봉 게임에 접속을 하자 시끌벅적한 남연성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제국 최대의 상업도시이니 만큼 평소에도 소란스럽기로 유명하지만.... 어째 오늘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운 것 같다. "혜혜선녀(慧慧仙女)가 나타났데." "어디?!" "남문." 주위 유저들의 대화를 들어본 나는 소란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아.. 역시 또 그게 이유인가...? 나는 머리를 긁고는 즉시 사람들이 향하는 남문으로 달렸다. 그리곤 진희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유빈이 왔니?] [네.. 그보다 누나 또 초보 존에서 저렙들 도왔죠?] 내 질문에 누나는 잠시 말이 없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유저들이 몰려가고 있으니까 우선 피해요.] [하지만 함께 사냥하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한데.....] [파티원들에게는 사정 설명을 하고 와요. 그들도 뭐라 할 수는 없어요. 설마 저보다 오늘 만난 저렙들이 더 좋은 건 아니죠?] 내가 보낸 메시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답장이 왔다. 나는 히죽 웃으며 누나의 메시지를 읽었다. [절대로 아냐! 알았어. 잘 말하고 빠져나갈게. 어디서 볼까?] [무황목 앞으로 와요. 저도 거기로 갈 테니까.] [응.] 나는 입맛을 다시며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고... 되도록 눈에 띄지 말라고 했는데도 누나는 꼭 한번씩 이렇게 주위를 소란스럽게 만든다... 남이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고 저렙이 위험한 꼴은 절대로 못 본다. 이번에도 역시 혼자 사냥을 하러 나가다가 저렙 무리들에게 얽매이게 된 것일 터였다. 저렙 무리들은 누나의 외모를 보고 파티를 맺고 사냥을 하자고 꼬셨을 것이다. 설마 누나가 그 유명한 혜혜선녀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누나는 그들이 끈덕지게 물고늘어지자 별 수 없이 허락을 하였을 것이다. 고렙이라면 몰라도 저렙이라면 더욱 거절을 못 하니 말이다. 이미 누나의 레벨도 230이 넘었다. 얼마 전부터 만상풍운조화서 내에 수록된 지식들을 습득하고 있었고 풍운조화검결과 만상조화심결도 각각 6성과 5성씩의 성취를 이루었다. 그와 함께 혼자서 사냥하는 법쯤은 충분하다 할 정도로 익히고 있었다. 이미 누나도 한 제국 내에서 최고의 무력을 가진 인물들 중 하나인 것이다. 정말 마음만 조금 더 모질다면 좋을 터인데 말이다. 현실에서 웬만큼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라도 게임을 하다보면 단물 쓴물 다 보게 되면서 이기주의로 변하는데 말야... 내가 처음부터 보호만 해 줘서 그런가? 누나는 여전히 레벨은 높으면서도 순수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니 그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최절정고수임에도 지금처럼 순진한 누나가 더 누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분명... 능구렁이가 몇 마리 속에 들어있는 누나는 누나가 아냐.... 아아. 그런데 혜혜선녀가 뭐냐고? 그야 당연히 누나의 외호이다. 누나는 구룡삼봉(九龍三鳳) 중 삼봉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구룡삼봉은 근래에 모습을 드러낸 12명의 신진 최절정고수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가 무무에게 무상검록을 빼앗긴 지 4달. 그 사이에 한 제국의 많은 것이 변하였다. 처음에는 무무가 나에게 무상검록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진상으로 확인되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자림 내에서도 무무가 무상검록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취한 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았고, 대략 300여명의 절정고수들이 은자림에서 등을 돌렸다. 물론 그들 중에는 무무가 무상검록을 얻은 것에 배가 아파 등을 돌린 자들도 있었을 터이지만 사람 속을 알 수는 없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등을 돌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특히 그 중에 전 은림창왕 조운과, 은림검왕 시류가 끼어있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조운과 시류는 이제껏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한 하며 외호를 불구창과 불구검으로 바꾸고 낭인이 되어 버렸다. 그와 함께 이제까지 존재했던 삼천(三天), 사황(四皇), 오마(五魔), 육살(六殺), 칠성(七聖), 팔왕(八王), 구정(九正)이 사라지고 대신 일신(一神), 이천(二天), 삼황(三皇), 사강(四强), 오제(五帝), 육마(六魔), 칠왕(七王), 팔은(八隱), 구정(九正)이 이루어졌고 뒤이어 속속 실력을 감춘 고수들과 갓 200레벨이 넘은 새로운 최절정고수들이 등장해 구룡삼봉(九龍三鳳)이 결성되었다. 우선 일신(一神). 사룡검신(死龍劍神) 무상으로 불리는 이 일신은 다 예상하고 있듯이 바로 나다. 비록 무상검록을 무무에게 빼앗기기는 했지만 이미 나는 비급의 필요성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거기에 네 번째 초절정무공까지 발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저들은 나의 이름을 당당히 일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로서 나는 한 제국의 최강자 사룡검신임과 동시에 범인이라면 하나도 찾기 힘든 초절정무공을 두 가지나 발견해 낸 입지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더욱 신분을 감춰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이천(二天)은 나를 제외한 과거의 삼천(三天)이었다. 사파의 종주 마천지존(魔天之尊) 유진성과, 정파의 신성(神聖) 도천지선(道天之仙) 천선이 현 이천이었다. 세 번째 삼황(三皇)은 은황(隱皇) 무무가 제외된 전 사황(四皇)이 차지하고 있다. 은황 무무는 은황이라는 외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적되어 버린 것이다. 삼황에서 빠진 무무는 그 아래 사강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강(四强). 각각 제국의 동, 서, 남, 북의 종주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우선 북강(北强)으로 망할 무무가 지칭되었다. 외호는 은자지악(隱者之惡). 고상한 지난날의 평판은 온데간데없고 이름에 악(惡)이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악(惡)이나 마(魔)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악과 마는 분명 다르다. 악이 그냥 말 그대로 악이라면 한 제국에서의 마는 규제를 벗어버리는 자유로움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이제까지 악이라는 글자를 외호를 받은 존재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한 제국 최고의 PK, 무진악도 받지 못한 악을 그가 당당히 받아버린 것이다. 뭐 실제로 무진악은 PK범으로는 이름이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죽인 유저들의 아이템을 갈취하지는 않으니 오히려 멋있다고 말하며 추종하는 인물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반대로 죽어서 수십일 치의 경험치를 날린 사람은 이를 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가 악을 얻은 이유는 나에게 강탈한 무상검록이 다른 유저들은 무척이나 배가 아팠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저들은 알까? 지금 무무는 그 무상검록 때문에 입에서 불을 뿜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큭큭큭.... 뭐.. 무상검록을 직접 수련해 보는 사람만이 알 일이니... 모든 유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무가 나에 버금가는 고수가 될 것이라고 믿는 듯 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내가 나서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 해 줄 필요도 없고 그냥 무시하고 있다. 아아. 이런 무무의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군... 그 인간에게 내가 좀 쌓인 것이 많아서 말이다. 어쨌든 무무 다음의 사강은 남강(南强)으로 일수만검(一手萬劍) 백검운이다. 이 사람은 전에 팔왕으로 일수만검왕이라 불렸지만 그 사이에 엄청난 수련을 거듭해서 인지 당당히 사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실제로 남해에서는 해남검문이 구대문파의 위세를 능가할 정도라고 하니 다 이 백검운이라는 유저 때문이다. 그리고 서강(西强)은 무영살검(無影殺劍) 진군으로 살막(殺幕)의 막주이다. 전 육살의 수좌였던 그가 사강의 일인이 되어 서쪽의 최강자라 불리는 이유는 최절정살인무서 월영살검무(月影殺劍舞)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살수들이 쓰는 살인검술은 그 수가 극히 적었다. 최절정무공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절정무공도 일살검(一殺劍)이라 불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살수의 힘은 검술뿐만이 아니라 은신술로 기척을 숨기고 상대의 빈틈을 노려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직접대결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임무를 마치고 도주를 할 때에 필연적으로 무공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인검의 기본무공을 배운 이들은 많은 내공을 쌓기가 어렵다. 살수들은 내공보다 감각의 극대화를 수련하게 되고 그 때문에 살수로 일류고수가 되어도 내공에서는 이류고수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살수들을 위하여 나온 것이 바로 일살검으로 이름 그대로 일격필살의 수법이다. 하지만 이 일살검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 보다 살을 주고 뼈를 부순다는 동귀어진의 수법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분명 잘만 수련하면 최절정고수의 가슴에라도 단번에 검을 찔러 넣을 수가 있지만 그와 함께 자신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살수의 취약점을 보안한 검술이 바로 월영살검무(月影殺劍舞)였다. 분류는 최절정무공. 하지만 사용되는 내공의 수치는 이류무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가치로 보면 초절정무공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만 초절정무공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떨어지는 것들이 존재했다. 특히 이 월영살검무를 익히기 위해서는 일살검을 극성으로 익혀야 하는 전제가 붙기에 살수가 아니라면 익힐 수도 없다. 진군은 이 월영살검무를 얻어 서쪽의 최강자가 된 것이다. 마지막 사강(四强)은 동강(東强)으로 유림일검(儒林一劍) 강현후이다. 전 칠성의 일원으로 유림검성으로 불렸던 그는 클로즈 베타 때부터 더 월드를 즐긴 더 월드 최장시간 플레이유저 중 하나이다. 더 월드는 클로즈 베타 테스트 때부터 이제까지 단 한번도 초기화를 시키지 않았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는 게임을 만들고 시운을 하면서 버그를 잡아내기 위한 테스트라는 성격이 강했고 그 때문에 테스트에 선출된 유저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을 주며 게임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이 다반사다. 자연히 그 혜택을 가지고 오픈 베타까지 가면 안 되는 터라 오픈 베타가 되기 전에 초기화를 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오픈 베타부터 하는 유저들이 커다란 불만을 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월드는 그런 절차가 없었다. 분명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있었지만 그건 버그 테스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험 운행이었다. 게임이 개발 된 후로 수년동안 운행에 필요한 절차를 거쳤고 그 사이에 대부분의 버그들은 잡혀버린 것이다. 한국 내에서 클로즈 베타 테스트의 경쟁률은 자그마치 1:1000이었다고 한다. 이러니 내가 떨어졌지 않겠는가... 여기에 뽑힌 500명은 그야말로 전날 모조리 용꿈을 꾸었을 것이다. 실제로 천희형은 용꿈을 꾸었다고 하더라..... 아무튼 그렇게 뽑힌 500명은 한 달 동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주워졌지만 그 뿐이었다. 그 어떠한 다른 특권은 없었다. 그냥 게임을 즐기고 그 감상을 회사측에 하는 것뿐이었다. 아이템 드롭 확률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경험치 배분도 마찬가지였다. 최절정무공 하나씩을 선물로 주는 경우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게임을 먼저 즐길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진짜 그 때부터 한 달 동안 나는 천희형의 그림자도 못 봤다. 집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한 달 동안 게임만 할 정도로 빠져있었던 것이다. 뭐 나도 오픈 때 해 보고는 천희형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그만큼 더 월드는 일단 한 번 발을 들이면 도무지 벗어나기 힘든 게임이었다. 그렇다고 게임에만 빠져 있다가 아사하거나 그런 경우는 없었다. 링크헤드셋에서 자체적으로 유저의 신체를 스캔하여 몸에 무리가 왔다 싶으면 알아서 접속을 해제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복이 도를 넘어서면 저절로 접속이 끊기고 배를 채우기 전에는 절대로 재접속이 불가능하다. 흠.. 말이 이상한 쪽으로 흘렀는데.... 어쨌든 그 클로즈 베타 테스트 때 딱 한 사람 혜택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최초로 50레벨 달성자이면서 그 누구도 발견 치 못했던 버그를 발견해 회사로 신고를 한 것 등등... 클로즈 베타 테스트 당시 게임을 즐긴 유저 중 최고로 이름을 날린 유저가 바로 유림일검이었다. 회사는 그 보답으로 한 가지 선물을 주었는데.... 그 누구도 당시 유림일검이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2년 전에야 그 선물의 내용이 밝혀졌는데 당시 유림일검이 회사로부터 받은 선물은 최절정무공인 유림선공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강현후라는 사람은 유저들 사이에서 나보다도 더 유명할지 모른다. 특히 동부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공부를 하기 위해 게임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 이게 강현후를 칭하는 말이다. 게임에 접속해 사냥을 하고 사람과의 커뮤니티를 즐기는 것이 아닌 수험준비를 위해 게임에 접속하는 유저.. 그게 바로 강현후였다. 현실 시간은 1시간이지만 게임에서는 10시간이다. 더구나 더 월드 내에서도 공부를 할 여건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자연히 독서실이 아닌 더 월드의 유림에 모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 그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림일검 강현후였다. 강현후는 게임이 아닌 공부를 위해 접속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최장시간게임 유저임에도 그는 얼마 전까지 200레벨 초중반의 레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제껏 유림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오지 않던 그가 작년 12월부터 유림을 나와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에 와서 동쪽의 최강자라는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가 갑자기 활동을 시작한 이유......... 단 한가지뿐이다. 간단하게 알 수 있으리라.. 참고로 11월 말은 대입 시험이 있다. 오제(五帝)는 각 분야의 최강고수들 이었다. 우선 첫째가 혼원마제(混元魔帝) 이영학으로 전 마교 교주였지만 마천지존 유진성에게 패하고 교주의 자리를 넘겨준 채 장로원에 머무는 초절정고수였다. 현마교의 2인자였고 사파의 2인자였다. 두 번째는 삼화일제(三和一帝) 모용추리로 혼원마제가 사파의 고수이면 모용추리는 정파의 고수다. 모용세가(慕容世家)의 가주임과 동시에 무림맹(武林盟)의 맹주인 그는 최절정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그가 난화보(亂花步)를 펼치며 난화장(亂花掌)과 추혼지(追魂指)를 구사하면 최절정무공을 지닌 고수라도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만천무제(萬天武帝) 당천우.. 나와 친한 민우형이다. 당문세가의 가주로 암기술에 관해서는 더 월드 최강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낭황제후(狼皇帝后) 단리연화. 천희형의 마누라로 과거 육살의 일인이었지만 지금의 낭인의 대표로 검의 절대자였다. 다섯 번째는 살영혈제(殺影血帝) 무진악인데... 더 월드 최고의 PK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 사람이라 소리칠 수 있다. 육마(六魔)는 사파의 최절정고수들이다. 과거 오마(五魔)의 일마(一魔)였던 혼원마 이영학이 오제가 되면서 남은 사마(四魔)에 육살(六殺)이었던 궁백과 애령이 더해져 현재의 육마가 되었다. 사술로 유명한 사사천(邪邪天)의 천주(天主) 사중유마(邪中劉魔) 단풍파. 혈도궁(血刀宮)의 궁주(宮主) 거력도마(巨力刀魔) 악왕. 강시 하면 떠오르는 혈교(血敎)의 교주(敎主) 혈인잔마(血刃殘魔) 단리신한. 마교(魔敎) 최강의 검수이면서 전혀 마교인 같지 않은 군자마검(君子魔劍) 갈중혁. 마교 살수대(殺手隊)의 대장 환살검마(幻殺劍魔) 궁백. 살막의 부막주 희살마녀(喜殺魔女) 애령이 바로 그들이었다. 육마 다음으로는 칠왕(七王)인데 그들은 전 팔왕(八王)의 인물들 다섯과 전 육살 한 명, 전 칠성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독문(天毒門)의 문주(門主) 천독군왕(千毒君王) 현현군. 소림 최강의 고수 소림불왕(少林佛王) 광무. 마교 살수대의 부대장 추혼살왕(追魂殺王) 전백광.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가주 파천도왕(破天刀王) 종리신영. 은자림을 나와 낭인이 된 불구창왕(不具槍王) 조운과 불구검왕(不具劍王) 시류. 그리고 지법으로 이름을 날리는 낭인 일지낭왕(一指狼王) 민소정이 현 칠왕이었다. 팔은(八隱)은 은자림 소속의 무무의 부하들이었다. 스스로는 자신들을 은림팔성(隱林八聖)이라 칭하지만... 다른 유저들은 그들을 은림팔견(隱林八犬)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이들을 은림팔견이라 부른다. 은림일견(隱林一犬) 검무자. 은림이견(隱林二犬) 이학. 은림삼견(隱林三犬) 유진. 은림사견(隱林四犬) 방세옥. 은림오견(隱林五犬) 황상 이들은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고 이번에 새로 최절정고수가 된 은림육견(隱林六犬) 이제마. 은림칠견(隱林七犬) 무룡. 은림팔견(隱林八犬) 예천화가 더해져 팔은이 되었다. 구정은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구대문파의 문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새로 문주가 바뀐 문파도 없었다. 소림(少林) 장문 불인검(佛人劍) 혜능. 무당(武當) 장문 태극검(太極劍) 현무. 화산(華山) 장문 매화검(梅花劍) 이명학. 청성(靑城) 장문 청풍검(淸風劍) 장신성. 곤륜(崑崙) 장문 태청검(太淸劍) 영신. 아미(峨嵋) 장문 아미검(峨嵋劍) 능혜미. 점창(點蒼) 장문 사일검(射日劍) 진유준. 황산(黃山) 장문 분광검(分光劍) 유형준. 종남(終南) 장문 천성검(天星劍) 한성. 이들이 구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새로이 이름을 날리는 신진고수들을 구룡삼봉(九龍三鳳)이라 하는데 각각 구룡은 아홉의 남성 유저, 삼봉은 셋의 여성유저들이었다. 구룡(九龍)의 첫째는 비천유운(飛天流雲) 진공. 바로 민호녀석이다. 이제까지 실력을 감추고 신비함을 연출하던 그 녀석은 내가 무무에게 뒤통수를 맞고 무상검록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그대로 눈에 불을 켜고 은자림으로 달려가 절정고수 100여명을 베어버렸다. 그 소문이 퍼지며 녀석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민호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도(刀)인데 그보다 녀석은 경공으로 더 이름이 높다. 민호가 경공을 쓰면 나조차도 부신약영을 쓰지 않으면 뒤쳐질 정도이다. 구룡의 두 번째는 창천유협(蒼天流俠) 유빈. 바로 나다. 사룡검신의 신분을 감추다 보니 이런 신분까지 얻게 되었는데.... 본래는 창천유검(蒼天流劍)이었지만 내가 검뿐만이 아니라 도, 창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창천유협으로 바뀐 것이다. 솔직히 협(俠)이라는 글자가 들어갈 정도로 착한 짓을 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세 번째는 혈룡검마(血龍劍魔) 검천. 얼굴도 실력도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고수이다. 무창성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육성검문 이라는 정파계열의 문파를 하루 아침에 멸문 시켜 버리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네 번째는 독고구검(獨孤九劍) 무호이다. 화산파 소속의 최절정무공인 독고구검을 구사하는 고수로.... 천희형이 가진 독고구검을 왜 그가 익히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무호 녀석이 바로 진호이기 때문이다. 진짜 천희형이 진호에게 독고구검까지 전수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뭐 천희형의 마음이니 내가 뭐라 할 이유는 없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모두 이제는 사라진 개방의 무공을 사용하는 이들로 각각 타구취개(打狗取 ) 홍팔공과 황룡무개(黃龍武 ) 홍칠공이다. 본시 과거에 더 월드가 막 시작되었을 때 기본 문파로 개방( 房)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개방에는 절정무공이 없었다. 아니 황룡십팔장(黃龍十八掌)이라는 절정무공이 존재했지만 이상하게도 전체 18식 중에서 후반부의 6식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후반부가 빠진 황룡십팔장은 일류무공과 비교할 정도로 질이 떨어졌고 이렇다할 무공이 없는 개방은 점차 유저들의 외면을 받고 멸문을 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2년 전부터 한 제국에서 개방을 찾아보기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등장한 타구취개와 황룡무개는 어찌된 일인지 개방의 절정비급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타구취개는 타구봉법(打狗棒法)을... 황룡무개는 실전된 후반 6식을 포함한 완벽한 황룡십팔장으로 무너진 개방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있다 한다. 구룡의 일곱 번째는 백룡신권(白龍神拳) 나선우이다. 백룡권(白龍拳)이라는 절정무공을 사용한다는데..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여덟 번째는 천기신자(天氣神者) 이한으로 무공이 아닌 진법술로 이름을 날리는 유저이다. 언젠가 누나가 만상풍운조화서의 진법편을 완전히 익히고 나면 그를 찾아 대결을 벌여보려 생각중이다. 구룡의 막내는 흑룡궁귀(黑龍弓鬼) 해모수로 궁술의 고수였다. 수백 리 밖의 사과도 단번에 맞출 수 있다는 대단한 신궁이라고 한다.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구룡과 다르게 삼봉(三鳳)은 여자들로만 이루어졌다. 그 첫째는 혜혜선녀(慧慧仙女) 진희. 하하 바로 진희누나이다. 이 외호는 내가 지어준 것이다. 슬기로움을 뜻하는 혜(慧)가 두 개나 붙을 정도로 총명한 누나가 아닌가. 언제나 나와 함께 다니기 때문에 이미 유저들 사이에는 창천유협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나만 남성 유저들의 원성을 받을 뿐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다. 두 번째는 백의선자(白衣仙子) 나선영으로 한 제국 최고의 미녀로 불린다. 물론 나에게는 쓸데없는 소리다. 누가 뭐래도 내 눈에는 진희 누나가 최고로 예쁘거든. 구룡 중 칠룡(七龍)인 백룡신권과 쌍둥이 남매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세 번째는 빙혼검녀(氷魂劍女) 냉월영이다. 과거 살검후로 불렸던 유키코 누나보다 더 차가운 성격을 가진 여성유저라고 한다. 뭐 이 아가씨도 유키코 누나처럼 게임에서만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여기까지가 지금 한 제국에서 200레벨을 넘은 고수들이다. 아직 모습을 감추고 있는 최절정고수도 물론 있을 것 같지만.. 그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아 그리고 한 두 달 정도만 더 지나면 삼봉은 사봉(四鳳)이 될 것이다. 시연누나가 곧 있으면 200레벨이 넘을 것 같거든. 천희형이 사부로 있으니 시연누나도 불과 1년 정도만에 200레벨이 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알짤 없이 지금도 100레벨을 못 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을 하며 이동하는 중에 어느새 무황목이 있는 황산(黃山) 언저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경공의 속도를 높였다. 곧 나의 눈에 거대한 나무가 들어왔고 그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누나의 옆에는 날파리로 보이는 인간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구기며 재빨리 부신약영을 펼쳐 순식간에 누나의 앞으로 이동했다. 내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날파리 녀석은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유빈아. 어서 와." "네. 좀 늦었어요. 그런데 누구십니까?" 나는 누나의 인사를 받고 날파리 녀석을 응시하며 물었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 대번에 제비가 떠올랐다. 백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부근에 수놓아져 있는 용 한 마리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대충 살펴보니 최소한 190레벨의 절정고수였다. 어쩌면 200레벨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곧 웃음을 흘리며 포권을 취했다. "반갑워. 나선우라 한다." 근데 자세와는 다르게 왜 반말이냐? 이를 갈던 나는 문뜩 그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나선우? 설마....? 나는 약간 놀라며 그를 보았다. "백룡신권?" "하하. 허명이야. 그러는 그 쪽이 더욱 유명하지 않나? 창천유협." 역시.... 나는 혀를 찼다. 설마하니 진짜 구룡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이 사람 왜 나한테 자꾸 반말이야? 분명 나 보다 나이가 많게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반말을 날릴 정도로 만만한 세상이 아니다. 얼마든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도 있고... 또 게임 내에서는 어린 사람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존대를 하는 것이 기본 예절이다. 물론 나도 그런 예절 따위는 오줌 갈겨 버렸지만... 그래도 내가 당하니 기분 더럽다. 나는 이를 갈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진희누나와 함께 있는 거냐?" 한마디로 일 없으면 가라는 말이다. 거기다 나도 반말을 던졌다. 그는 잠시 어이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금새 넉살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연히 진희를 보았는데 아는 사람과 닮아서 따라와 본 것뿐이다." 지인희? 이게 감히 누구 이름을 막 불러?!! 거기다 닮은 사람이라서 따라 와 말을 건 것은 전형적인 꼬시기 수법이잖아! 나는 눈살을 가볍게 찡그렸다. 대번에 기분이 잡쳤다. 감히 노릴 사람을 노려야지 말야. "그럼 잘못 본 것임을 알았을 것 같군. 진희 누나는 당신을 모를 테니 말야. 그만 가 주겠어?" "진희는 나를 알고 있어. 내 사람 보는 눈도 정확했고.... 내가 찾는 사람이 진희가 맞았어." 에?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진희누나를 돌아보았다. '이 인간 알아?'라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 진희누나에게 보내졌다. 누나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나선우를 소개시켰다. "우리 학교 선배야." 띵~! 또 한 번 들어보는군. 요 머릿속의 타종소리 말야.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는 멍청하니 나선우를 바라보았다.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보는 그 인간의 면상이 참으로 기분 나쁘다. 흡사 동물을 보는 듯한..... 설마 저 인간 나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헉!! 설마 누나에게 마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누나는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예쁘다. 더구나 요즘은 보기 힘든 전형적인 요조숙녀 타입이 아닌가. 남자라면 관심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분명 저 인간도 누나에게 호감이 있다. 동시에 나와 누나의 사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인간이 어떤 방법을 취하겠는가? 십중팔구 나를 치우려 할 것이다. 옛말에 적 장수를 사로잡으려면 우선 말의 목을 베라 하지 않았던가? 이 망할 자식... 나를 분명 말로보고 있다!! 나는 누나를 끌어안으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가 식은땀을 흘린다. "......나를 남의 여자나 탐하는 인간으로 보지 마라." "시끄러! 나를 말로보고 있지? 흐흐흐. 발 뒷발에 채여 봤냐?" ".....뭔 소리냐?" 흠흠... 이건 너무 앞서간 것 같다. 나선우뿐만이 아니라 진희누나까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할 정도이니 말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곤 누나를 더욱 힘을 주어 껴안았다. "어쨌든 누나를 노리려면 생각 버려! 누나의 몸도 내 것이고 마음도 내 것이고 영혼도 내 것이야! 쓸데없는 생각 품으면 알짤 없이 죽을 줄 알아!" "야야. 그럴 생각 없으니 안심 해. 나는 진희보다 너한테 관심이 있었으니까 말야." 그의 말에 나의 몸으로 소름이 쫘악 돋았다. 설마... 방금 한 말은... "으악!! 변태다!!" "야!!! 정상적인 사람 변태로 몰지 마!!" 결국 그도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나는 이제까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진희누나도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실상 나는 처음부터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나에게 선우라는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지난 달 내가 누나의 학교로 찾아가 쓰러졌을 때부터였다.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은 누나의 학교로 퍼져 있었고 내가 진희누나의 남자친구라는 것도 혜하대학교 학생이라면 다 알고 있다고 한다. 선우형은 그 때 누나와 함께 있었고 나에게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진희누나의 말로 알았는데 선우형은 오래 전부터 글을 써 온 작가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젊은 작가로 그의 글은 기발한 발상이 번뜩이는 것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한 번 호기심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그 호기심을 분석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것을 취미로 가지고 있단다. 당시 선우형은 한 손이 거의 피투성이가 돼서 진희누나를 찾아 온 나를 보곤 나와 진희누나 사이에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두 달 동안 학교에서 진희누나를 보면 재미난 에피소드가 없냐며 이야기 해달라 졸랐지만 그런 쪽으로 부끄럼이 많은 누나는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근래에는 선우형만 봐도 도망을 쳐버린단다. 하지만 선우형은 포기를 않고 진희누나에게 달라붙었고... 종래에는 진희누나에게는 힘들다 생각했는지 나를 한 번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단다. 만약 나를 한 번만 만나게 해 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약조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 때문에 진희누나는 나에게 선우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고...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왔다. 나로서는 누나의 말을 듣고 난 후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진희누나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괜히 화를 낼 필요도 없었고.... 선우형의 엉뚱함이 오히려 유쾌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귀찮은 것이 싫었기에 선우형을 만나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는데.. 황당하게도 더 월드에서 선우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설마 형이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백룡신권일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진희누나도 조금 전에야 알았다고 하며 놀랐다 한다. 뭐 선우형도 마찬가지로 놀랐지만 말이다. 형 역시도 학교 후배가 그 유명한 혜혜선녀이고 후배의 애인이 창천유협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만약 내가 일신 사룡검신이라는 것을 알면 충격으로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하하. 어쨌든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이었고 또 더 월드라는 공통적인 취미가 있었기에 우리는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선우형은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달라붙어 진희누나와의 재미있는 일이 없었나 물었다. 처음에는 손을 흔들던 나도 결국은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런 찰거머리를 방불케 하는 선우형의 공세에 꿋꿋하게 두 달을 버틴 진희누나를 진정으로 존경한다. "첫 만남부터 프로포즈를 했다고?!!" 나는 그냥 간단하게 누나를 처음 만났을 때 일을 말 해 주었고 선우형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와 진희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후 박장대소했다. "크하하!!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그래 그 때 상황 좀 자세하게 설명 해 봐." 뭐.. 이왕에 하는 김에 확실하게 해 버리자는 생각으로 나는 당시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누나의 안경을 벗기고... 누나의 눈을 보곤 나도 모르게 프로포즈를 해 버린 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게임에 들어왔고, 천희형과 약속한데로 화산성에 갔다가 그 곳에서 다시 진희누나를 만나게 된 일.... 다음날 진희누나를 보았고 이번에는 진짜로 내 마음속 말을 뱉어낸 일까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선우형은 탄성을 터트리기도 하고 웃어 보이기도 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좋아. 하하하. 이거 조금만 손을 보면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이대로는 조금 식상할 수도 있으니.... 음... 그 부분을 조금 바꾸고... 보충하고 하면..." 중얼거리는 형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더 필요 한가요?" 형은 대번에 눈을 번뜩였다. "더 있냐?" "있어도 이제는 해 주기 싫어요."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선우형은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뭐냐?" 나는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형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무든지 들어 주겠다! 내가 가진 비급을 달래도 준다!" "흠.... 비급은 필요 없는데..." "그럼 뭐? 뭐든지 말만 해 봐~!" 이거 글에 쓰일 이야기와.... 영감을 위해서라면 자기 심장까지 꺼내 줄 사람이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 같다니까.... 나는 입가를 말아 올리며 선우형에게 말했다. "제가 속한 회(會)에 가입할래요?" "회?" "네. 일명 응룡회(應龍會)라고 불리죠." 12 - 응룡회(應龍會) 응룡회(應龍會) 내가 은자림(隱者林)에 대항키 위해 결성한 조직이다. 현재 내가 회주(會主)로 있고 천희형, 민우형, 현후형, 유키코누나, 아진누나, 진악형, 성국형, 가성형, 명학형, 진희누나, 민호, 진호, 소정이가 회원이다. 전 구성원 수가 불과 14명뿐이지만 실상 이 중에서 최절정 고수가 아닌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우선 낭황(狼皇) 강천인 천희형. 얼마 전 진사신무를 극성으로 연마했고 숨겨진 독고구검까지 극성으로 익히고 있으니 형 혼자서도 무무와 대결이 가능하다. 아니 지금의 형이라면 이천(二天)과도 능히 자웅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민우형은 만천무제(萬天武帝)로 암기술의 최 고수이면서 현 당문세가(唐門世家)의 가주이다. 형이 움직이면 곧 당문세가가 움직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후형도 마찬가지다. 유림(儒林)의 림주(林主). 나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지만 천희형과는 엄청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이 바로 유림일검(儒林一劍) 강현후이다. 같은 클로즈 베타 테스트 유저라는 것 하나로도 천희형과 현후형은 둘도 없는 친구사이다. 유키코누나 역시 낭황제후 단리연화로서 무공 면에서는 오히려 민우형을 능가한다. 아진누나. 민우형의 부인으로 게임 내에서도 당문세가의 안방마님이다. 유저들에게는 당가일미(唐家一美)라는 외호로 그냥 절정고수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현재 레벨 240대의 최절정고수다. 특히 아진누나의 독술은 내가 알기로 천독문의 문주 천독군왕(千毒君王) 현현군보다 한 수 높다. 진악형은 민우형이 끌어 들였는데 한 제국 최강의 PK유저라는 살영혈제 무진악이다. 암살 면에서 보면 무영살검(無影殺劍) 진군을 제외하고 이 형을 당할 자는 없다. 그리고 성국형과 가성형은 현재 불구창왕과 불구검왕으로 불리는 최절정고수들이다. 그 형들도 무무와 싸우기 위해 기꺼이 내가 만든 응룡회에 들어와 주었던 것이다. 명학형은 화산파 장문인인 매화검(梅花劍) 이명학이고, 민호는 단신으로 은자림에 쳐들어가 1백 여의 고수를 베어버리고 유유히 도주를 할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다. 진호 역시 근래 천희형에게 받은 독고구검(獨孤九劍)을 수련하여 이름을 날리고 있고 소정이는 지법으로 무림일절의 자리에 오른 일지낭왕(一指狼王)이다. 마지막으로 진희누나... 아직 무공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아서 그렇지 시간이 흘러 누나가 만상풍운조화서의 모든 것을 습득하면 나조차도 능가할 가능성이 컸다. 물론 직접적인 대결에서는 내가 우위를 점하겠지만 종합적인 평가를 하면 누나는 나를 훨씬 앞서고도 남는다. 나를 포함한 이들 14명이 움직이면 설령 구대문파라 하더라도 하루면 먼지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아직 소문이 나는 것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만 알고 있지.... 만약 소문이 퍼지면 한 제국 모든 유저가 경악할 것이다. 나는 이 응룡회에 선우형을 가입시키기로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믿을만한 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절정고수이니 만큼 응룡회에 들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직 최절정고수가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어차피 은자림과 싸울 시기는 앞으로 몇 달이나 남아 있다. 그 사이에 노력하면 250레벨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에 힘써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만은 아니다. 나나 다른 회원들이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회주는 사룡검신(死龍劍神) 무상입니다." "일신(一神) 사룡검신(死龍劍神)이 만든 회라고?" 나의 말을 들은 선우형은 기겁했다. 구성원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아마 졸도를 할 것 같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선우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하긴 대단할 만도 하다. 이제까지 나는 낭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다니지도 않았다. 부하 따위는 귀찮아서라도 만들지 않았다. 이번에 내가 만든 응룡회 역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모은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최절정고수 이상들만 말이다. "해 보겠어요?" 내 말에 선우형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조용히 형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형이 나에게 물어왔다. "은자림과 싸우기 위해서 만든 조직인가?" 이미 나와 은자림의 원한은 더 월드 유저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그리고 살막과도 싸우게 될 것 같아요." "어째서지?" "이유는 형이 가입하겠다고 하면 가르쳐 드릴게요.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건 우리 내부의 문제거든. 혹시라도 형이 거절을 한다면 나는 손해만 본다. 아직 구성원을 말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흐흠... 좋다! 이거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가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형 성격이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오늘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이 있어요. 함께 가서 회주님께 허락을 받으면 되죠." "사룡검신을 만나러 간다고?" 형의 얼굴에 기대가 어렸다. 내가 그 사룡검신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금 당장 가자!! 빨리!!" "네네." "아! 잠깐. 한 사람 추천해도 될까?" 갑자기 형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잠시 형을 바라보았다. 나는 응룡회에 최절정고수만을 가입시킬 생각이었다. 그 때문에 아직 최절정고수가 안 된 시연누나는 들어오지 못했다. 뭐 누나도 곧 있으면 최절정고수가 될 수 있으니 응룡회의 회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뭐.. 우선 들어보고 결정하면 되리라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죠?" "내 동생. 백의선자라고 불리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백룡신권과 백의선자는 쌍둥이 남매라고 했었지!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도 최절정고수니 전혀 부족할 것이 없었다. "충분하군요. 좋아요. 그럼 형이 동생 분께 한수성으로 오라고 해 주세요."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 메시지를 보내는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기다리자 형이 일이 잘 되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 애도 한수성 근처에 있다고 한다. 우리도 가도록 하자." 고개를 끄덕인 나와 진희누나는 즉시 선우형을 따라 한수성이 있는 동쪽으로 경공을 써서 달렸다. 누나와 둘 뿐이라면 천리신마를 불러 함께 타고 갔겠지만 선우형이 함께이니 어쩔 수 없이 경공으로 달려야 했다. 이미 최절정고수인 우리 셋은 불과 12시간만에 한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우형은 백의선자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한수성에서 가장 유명한 청운루였다. 동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한수성 최고의 명소들 중 하나가 바로 청운루다. 이 루를 운영하는 사람은 NPC가 아니라 유저라는 사실은 그냥 알아두기만 하도록 하자. 전체 3층으로 이루어진 청운루는 1층은 일반 손님을, 2층은 어느 정도 이름이 높은 손님을... 그리고 3층은 최고의 귀빈만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와 진희누나는 선우형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늦었잖아!!!" 우리가 3층에 들어서자마자 한 백의를 입은 젊은 여자가 달려와 선우형의 머리를 때려버렸다. 졸지에 당한 선우형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선우형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눈에도 형과 쌍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긴 검은머리는 위로 틀어 올렸는데 이런저런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흠.. 진희누나도 저렇게 하면 어울리려나...? 나는 진희누나를 돌아보며 머릿속에 머리를 틀어 올린 누나를 그려보았다. 크윽.. 섹시할 것 같아~! "왜 그래?" 누나의 물음에 나는 상념을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선우형을 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아파... 제길... 저 녀석이 어떻게 백의선자(白衣仙子)라는 외호와 어울려? 여기 인간들 눈은 다 동태눈이라니까." 하하... 인정한다. 나는 재차 백의선자에게 밟히는 선우형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내 얼굴에 '인정한다'라는 표정이 적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분명 형처럼 밟히리라잠시 후 폭풍이 지나가고 나는 선우형에게 백의선자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유빈아. 이 쪽은 내 동생 나선영이라 하고... 이 쪽은 모르겠네... 이 사람 누군지 아냐?" 백의선자와 함께 앉아있는 남자를 소개하려던 형은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형이 모르는 것을 나한테 물으면 어쩌라는 것인지 원.. 내가 허탈하게 형을 바라보자 상대측에서 먼저 나서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한이라고 합니다. 과분하게도 천기신자(天氣神者)라는 외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아. 이 사람이 구룡 중 여덟 번째인 천기신자 이한이었군. 제국 최고의 진법술사라는 사람. 언젠가 만나서 누나로 하여금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안면을 트게 되었다. 나는 마주 포권을 취하며 답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유빈이라 하고.. 이 쪽은 진희라 합니다." 내 말에 이한과 나선영이 눈을 반짝였다. "이거 오늘 운이 좋군요. 그 유명한 창천유협과 혜혜선녀를 동시에 보다니. 하하." 같은 구룡삼봉이지만 나와 누나는 다른 구룡삼봉보다 더 유명하다. 바로 나와 누나가 연인사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이야기는 최고의 아이템이거든. 이한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반대로 나선영은 진희누나를 보고 있다. 같은 삼봉이면서 오히려 자신보다 더 명성이 높은 진희누나에게 눈길이 가지 않을 턱이 없을 것이다. "내가 더 예쁜데..." .....공주로군. 이한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고 나와 진희누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선우형은 고개를 저어 보이다 나에게 시선을 돌려 미안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참 형도 동생 복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느닷없이 만나자니..." 모두를 충격 받게 만들었던 나선영이 선우형에게 물었다. 선우형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이한을 보았다. 설명을 하자니 이한이 자꾸 걸린 것이다. 나는 우선 이한에게 물었다. "백의선자와 잘 아시는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희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흠.. 제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한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조금 아쉬운 기운이 어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를 해 보겠습니다. 선영소저. 이야기 즐거웠습니다." "네. 잘 가세요. 다음에 또 뵀으면 하군요." "미안하군요. 후에 기회가 되면 만나도록 하죠." "잘 가시오." "하하. 그럼." 그렇게 혹은 떨어져 나갔다. 나는 즉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현재 3층에는 우리일행 뿐인 터라 걱정은 없었다. "이렇게 만나고자 청한 이유는 이번에 제가 선우형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선우형을 제가 하나의 회에 가입시키기를 원하는데... 선우형이 선영소저를 추천하였고 선영소저의 의견을 듣고 싶어 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회?" 나선영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이름은 응룡회. 회주는 한 제국 최강의 유저인 일신 사룡검신 무상입니다. 저희로서는 선영소저가 허락만......" "무상?!!!" 갑자기 나선영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며 나선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나의 팔을 잡으며 그녀가 소리쳐 물었다. "정말인가요?! 진짜 회주가 무상 맞나요? 혹시 가짜 아니죠?" "진짜.... 무상이 맞습니다만.." 나는 더듬더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선영은 갑자기 소녀가 왕자님을 그리는 듯한 눈을 하며 몸을 꼬았다. "아아~ 무상사마~!! 꺄아~!" 무.. 무상사마? 나는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대체 나선영이 외저러냐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선우형을 보았다. 형은 머리를 누르며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녀석 무상의 팬이야. 거의 빠순이 수준이지. 게임을 한 것도 검천지룡의 활약이 담긴 비디오파일을 보고 나서고... 덕분에 나도 초반에 없는 아이템 엄청나게 뜯겼다." 내.. 팬이라고?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힐끔 진희누나를 보자 누나는 뭐가 그리 웃긴지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당장 가입할게요! 당장!! 그러니 빨리 무상님께 데려다 주세요~!" 나는 바로 앞에 있는데....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 여자의 반짝거리는 눈이 나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나선영을 받아들이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아까웠다.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최절정고수다. 은자림과 싸워 확실하게 이기려면 최절정고수 하나가 시급한 실정이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결국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뭐... 내 팬이라는 것도 좋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럼... 회주님을 뵈러 가지요...." 우리는 한수성을 나와 경공을 써 남서쪽으로 내려갔다. 목적지는 녹환림이었다. 회주를 만나러 가면서 왜 녹환림으로 가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선영누나와 선우형이 날 보았지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녹환림의 몹들은 하나같이 고렙들이지만 최절정고수가 넷이나 되는 입장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우리는 몰려드는 몹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가며 녹환봉으로 향했다. 녹환봉에 도착한 나는 즉시 누나를 안고 어기충소를 썼다. 목적지는 녹환봉의 꼭대기였던 것이다.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아직 레벨이 안 된 터라 어기충소를 쓰지 못하고 절벽을 박차면서 녹환봉을 올랐다. 거의 경사가 80도 정도는 되는 녹환봉이지만 최절정고수라면 가볍게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천환쌍수리가 나오지 않나?" 선우형이 몸을 날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형의 말 대로였다. 본래 대로라면 녹환봉에는 천환쌍수리가 나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천환쌍수리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대충 알고 있었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온 누군가가 처리했을 것이다. 대략 5분 정도가 지나서 우리들은 녹환봉의 정상에 도착했다. 대략 운동장 정도의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먼저 도착한 사람을 찾았다. "이제 오냐?" 갑자기 땅에서 한 사람이 솟아올랐다. 낡은 흑의에 삿갓을 쓴고 허리에는 한 자루의 묵빛 검을 착용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바로 살영혈제 무진악이라 불리는 진악형이었다. "진악이 형이 먼저 왔군요. 형이 천환쌍수리를 처리했나요?" "아니. 천희가 제일 먼저 와 처리했더라. 참 잔인하더군. 그냥 죽이지 않고 아주 회를 뜨더라.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나?" 하하... 그렇지.. 전에 형이 천환쌍수리에게 누웠었거든. 나는 빙그레 웃으며 진악형에게 물었다. "천희형은 어디 갔어요?" "진호를 데리러 갔다. 그 녀석 길을 잊어버렸다고 천희를 부르더구나." "끄응....." 나는 머리를 누르며 신음했다. 하여간 진호 녀석... 문제야 문제. 그 녀석을 전담한 천희형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심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뒤쪽의 둘은 못 보던 사람들이구나. 누구냐?" 진악형은 선우형과 선영누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선우형이 앞으로 나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저는 나선우라 하고 제 옆은 동생인 나선영입니다. 이번에 유빈이의 권유로 응룡회를 가입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아아. 요즘 한창 뜨는 백룡신권과 백의선자가 너희들이구나."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의아한 눈으로 진악형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알아보면서도 별로 놀라지 않은 듯 말해서 그런 것이다. 최소한 감탄이라도 터트릴 것이어야 정상인데 말이다. 하지만... 진악형의 신분을 알면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선우형과 선영누나에게 진악형을 소개했다. "이 형은 무진악이라 해요." "무진악.... 설마?!!" "살영혈제?!!" 기겁하는 형과 누나를 보며 진악형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후 천희형과 진호가 올라왔다. 둘의 소개를 받은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다시 한번 까무러쳤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부터 놀라면 어떻게 해? "오~! 먼저들 와 있는 녀석들이 있군.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꺄아~ 유빈아~! 진희야~! 정말 오랜만이야~!" 민우형과 아진누나가 도착했고 뒤이어 민호가 멋진 신법을 뽐내며 하늘에서부터 허공답보를 펼치며 걸어 내려왔다. 역시 저 녀석은 폼생폼사다. "이런... 최대한 빨리 온 건데.. 역시 무한성에서 녹환림까지는 너무 멀었어." 속속 회원들이 도착했다. 현후형에 이어 성국형과 가성형이 동시에 올라왔고 십분 정도가 더 흘러 유키코 누나가 도착했다. 누나와 천희형 만나자마자 달라 붙어 닭살모드를 연출했다. 당연히 우리들은 우우~ 아우성을 쳤지만 천희형은 굳건했다. 민우형이 도전을 한다며 아진누나를 껴안았다가 느끼한 짓 한다고 구타를 당한 후 녹환봉 아래로 던져질 뻔했다. 그런 민우형을 비웃으며 나는 진희누나를 안고 천희형과 유키코누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어린것들이 솔로 염장 지른다며 현후형과 진악형에게 무한솔로콤보를 먹어야 했다. 크윽.. 회주를 때리다니.... 명학형에 이어 가장 막내인 소정이가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도착하자 모든 회원이 다 모이게 되었다. 이미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더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형 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회원들이 다 모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내 뒤를 누나가 따라왔다. 남은 회원들은 그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자. 그럼 이제 모임을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기쁘게도 2명의 동료들이 더 생기게 되었군요. 우선 백룡신권 나선우와 백의선자 나선영의 응룡회 가입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합시다." 나의 말에 형, 누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우형이 나에게 물었다. "무상이 회주라고 하지 않았냐? 왜 네가 나서서 설치냐? 아직 회주가 오지도 않았잖아." 선영누나는 선우형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회원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진호나 민호녀석은 킥킥거리며 배를 잡기도 했다. "야야. 아직 말 안한 거냐?" 진호의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선우형과 선영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진희누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낡은 철검은 근래 진희누나가 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누나는 나에게 철검을 주었고 나는 그것을 허리에 매었다. 옷은 애초부터 낡은 흑의를 입고 있다. 머리만 잘 정돈해서 묶으면 누구도 내가 사룡검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허리에 검을 맬 때 누나는 내 머리를 풀어주었다. 나는 치렁치렁하게 흘러 내리는 머리를 흩트리며 입가를 말아 올렸다.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그런 나를 보곤 '헉!'하며 신음을 토해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로 일신 사룡검신 응룡지주이며 응룡회의 회주인 무상입니다." 선우형과 선영누나의 입이 쩌억 벌여졌다. 파리가 집단으로 들어가도 될 정도이다. 둘의 그런 모습을 보며 회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그들과 함께 웃던 나는 손뼉을 치며 장내를 진정시켰다. "자아. 그럼 다시 시작하죠. 선우형. 선영누나. 앞으로 나와 주세요." 내 말에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주춤거리며 걸어나왔다. 나는 품에서 두 개의 묵빛 철패를 꺼내며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곧 둘은 내 앞에 섰고 나는 회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두 분을 우리 응룡회에 가입시키기를 원합니다. 형님들과 누님들. 중에서 반대를 하시는 분이 계시면 말씀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말에 천희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회주가 한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찬성해야지. 우리는 모두 찬성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우형과 선영누나에게 능공섭물로 응룡패를 건넸다. 묵철패는 우리 응룡회의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현철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철패에 앞에는 비상하는 응룡이 양각되어 있었고 뒤에는 한자로 응룡이라는 글자가 음각 되어 있다. 민우형이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 응룡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월드에서 우리 응룡회의 회원들뿐이다. 선우형과 선영누나가 묵철패를 받아들자 나는 우리 응룡회에 대해서 말했다. "본 응룡회는 본시 은자림과 저에 대한 은원(恩怨)을 결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입니다. 두 분도 저와 은자림과의 원한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형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차 말을 이었다. "현 목표는 우선 은자림의 멸입니다. 거사는 앞으로 5개월 뒤에나 있을 터이니 지금은 스스로의 단련을 중요해야 할 터입니다. 두 분은 앞으 은자림과의 결전이 있기 전까지 최소한 어검술을 구사하는 어검술을 구사하는 경지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내 말에 형과 누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검술은 250레벨의 고수들만이 쓸 수 있다. 아직 200레벨 대인 둘에게는 꿈의 경지인 것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나 뒤쪽의 형님들.. 누님들이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제야 둘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는 힘들지라도 나와 같은 초절정고수가 도움을 주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한 것이다. "노력해 보지." "나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때는 은자림과 싸울 때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철저하게 우리 응룡회의 모습을 감추고 단련에만 힘을 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응룡회는 문파가 아닙니다. 동지들의 모임입니다. 제가 비록 회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평소 회원들에게 명령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분을 형님과 누님이라 부를 것이고 두 분도 저를 동생으로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른 회원 분들과도 그렇게 해 주십시오. 같은 나이라면 친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면 형님이나 누님, 오라버니, 언니로 부르면 됩니다. 나이가 어리면 동생이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본 응룡회는 언제까지나 모임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문파는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동지가 피해를 당한다면 힘을 합쳐 적을 쓸어버릴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잠을 잘 것입니다. 스스로 응룡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은자림과의 전투가 있을 때에도 신분은 감출 것입니다." 내 말에 선우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이 있는데....." "네. 하세요." "모습을 감추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무공까지 감출 수는 없어. 은자림과 싸울 때는 당연히 내가 백룡권을 써야 하는데. 누구라도 나라는 것을 알아 볼 것 아닌가?" 형의 지적은 정확했다. 하지만 이미 그 것에 생각을 해 둔 것이 있었다. 나는 웃으며 품에서 두 권의 비급을 꺼냈다. 그 것을 각각 선우형과 선영누나에게 주었다. "응룡신권보(應龍神拳寶)?" "응룡신검보(應龍神劍寶)?" 둘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준 비급은 모두 절정무공이었거든. 그것도 상급의 절정무공이었다. "이건...?" "제가 만든 비급입니다. 앞으로 두 분은 그 무공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타인에게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극성에 이른다면 소거하십시오. 최소한 지금 두 분이 익힌 무공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위력을 지닌 무공일 것입니다." 응룡회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나는 지난 네 달 동안 응룡회의 무공을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응룡신검보와 응룡신권보, 응룡신도보, 응룡신창보였다. 이 4가지의 비급에는 각각 응룡신검(應龍神劍), 응룡신창(應龍神槍), 응룡신도(應龍神刀), 응룡신권(應龍神拳)이라는 무공들과 함께 응룡심결(應龍心訣)과 응룡신법(應龍身法), 응룡비행(應龍飛行)이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어느 하나 절정의 무공이지 아니한 것이 없고 특히 응룡비행은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을 기반으로 한 경공이기에 무림일절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 응룡비행을 능가하는 신법은 초절정무공상의 경공술뿐일 것이다. 나는 이 네 가지 무공을 창안하고 그 후 회원들에게 필사를 해서 각각 성격에 맞는 무공들을 나누어주었다. 보통 무공은 필사본을 만들 수 있다. 조건이 있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최소한 6성 이상 필사할 무공을 익히고 있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런 조건이 완료되면 내용이 없는 빈책을 구입해 필사를 하면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를 할 확률도 있지만 분명 필사본을 만들 수는 있다. (그 때문에 삼류와 이류의 무공이 필사본으로 나돌지 않는다. 노력해서 필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돈낭비, 시간낭비일 뿐이니 말이다. 성공하더라도 이득이 큰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에도 절정무공의 필사본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그 가치를 아는 유저들이 필사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절정무공을 6성까지 익히고 필사해서 팔아먹을 유저는 없다. 특히 절정무공일 수록 실패확률이 장난이 아니다. 100권을 필사시도를 했을 때 한 권이 필사되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최절정무공과 초절정무공은 필사본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최절정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때는 최절정무공의 비급을 주거나 아니면 직접 사제간의 관계를 맺어 전수를 해 줄 뿐이다. 참고로 비급이 없더라도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 타인에게 무공을 전수할 수도 있다. 극성으로 익히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전수자의 성장속도가 늦고 무공을 익혀도 스승과 비슷한 경지가 한계이다. "이거 대단한데...." 나에게 받은 비급을 살펴보며 선우형이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무공을 쓸 때는 응룡회의 회원으로 결전을 벌일 때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응룡보(應龍寶)의 무공은 저희 응룡회만을 위한 무공입니다. 제가 한 밀을 꼭 마음에 담아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선우형과 선영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이제부터 백룡신권 나선우와 백의선자 나선영을 저희 응룡회의 가족으로 인정하겠습니다!" 13 - 에리두로 모임을 끝내고 형들이 돌아가자 어느새 녹환봉 정상에는 나와 누나만이 남게 되었다. 선영누나가 나와 함께 남겠다고 땡깡을 부렸지만 천희형과 민우형이 자신만의 레벨 업 터를 가르쳐 준다며 강제적으로 끌고 가 주었다. 천희형 민우형 땡스~. 대략 10분 정도 자리에 앉아 일행이 모두 떠났음을 살핀 나는 즉시 암무를 불렀다. 그리고는 누나와 함께 암무에 올라 즉시 서쪽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에리두였다. 내가 갑자기 에리두로 가기로 한 이유는 그 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누나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본시 무공을 익힐 때는 실전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무공의 성질과 맞는 장소에서 수련을 쌓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가령 마공(魔功)을 익힐 경우에는 마기(魔氣)가 집합된 중앙산맥이나 십만대산(十萬大山), 마황곡(魔皇谷)이 좋고 선공(仙功)을 익힐 때는 맑은 기운이 충만한 성산(聖山) 은자림이 유리하다. 현재 누나가 익히고 있는 만상풍운조화서의 무공은 선공(仙功)의 극에 이른 무공이다. 자연히 그런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이제까지 성산 등지를 돌며 수련을 했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이 무공을 제대로 익히려면 은자림과 같은 최고의 성역으로 가야 할 듯 했다. 한 제국에서 최고로 성기가 강한 곳이라면 바로 은자림이다. 그 때문에 은자림에는 수많은 고급 신수들이 자리하고 있고 최고의 레벨 업 장소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은자림은 현재 우리가 가지 못하는 장소이다. 자연히 그런 곳을 찾아야 하는데 한 제국에는 은자림 만한 곳이 없다. 남은 곳은 에리두뿐이다. 에리두의 북서쪽에 위치한 엘프의 숲... 그 곳이 더 월드에서 은자림과 버금가는 성스러운 장소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누나와 함께 에리두로 가기로 한 것이다. 에리두에 가기 위해서는 중앙산맥을 넘어야 한다. 레벨 250의 고수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1시간을 버티기 힘들다는 절대의 금역이 바로 중앙산맥이다.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그 곳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자그마치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 족히 걸린다. 그런 시간조차도 아까웠기에 평소는 잘 이용하지 않았던 암무를 이용한 것이다. 암무는 중앙산맥의 지배자였으니 그 곳에 존재하는 모든 몹들의 우두머리나 다름이 없다. 자연히 암무를 타고 날아가면 안전하게 중앙산맥을 넘을 수가 있다. 아! 암무를 타고 타 대륙으로 넘어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천희형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나도 암무를 타고 타 대륙으로 넘어가 보려고 했었던 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대륙을 벗어나 바다를 날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룡의 공격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암무보다 족히 세 배는 더 큰 무식한 녀석이었는데.... 덩치만큼이나 힘도 장난이 아니었다. 응룡에 이른 암무가 오히려 몸을 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중에 암무에게 들어서 안 것인데 그 해룡은 창세의 신룡 중에 하나라고 한다. 하늘을 지키는 천룡과 지상을 지키는 태룡과 함께 바다를 지키는 해룡으로 이들 셋을 합쳐 삼신룡이라 한다는데 아무리 암무라 하더라도 결코 그 해룡만은 이길 수 없단다. 몇 번 재도전을 하다가 결국은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는 진짜 암무가 죽을 뻔했거든.... 암무의 몸의 절반을 날려버렸던 무상검 오의 무진도 그 해룡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대항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할 수 있다면 부탁이라도 하고 싶지만.. 말도 통하지 않으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암무와 싸우기 전에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싸웠었는데 그 해룡은 '잠깐 타임~!'이라고 외쳐도 '크오오오~!'하며 꼬리를 휘둘러 버린다. 혹시 그 자식 삼신룡이라고 하면서 말도 못 하는 얼간이 아닌가 몰라....? 중앙산맥을 넘은 나와 누나는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 경공을 써서 달렸다. 그리고는 마을 내에서도 경공을 극성으로 전개해 의류점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현재 우리들이 입고 있는 옷은 한 제국의 옷이었기에 만약 사람들의 눈에 띄면 결코 좋은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의류점에는 손님이 없었다. 물론 주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NPC였고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옷을 골라 탈의실에서 갈아입었다. 시골마을이었기에 그렇게 좋은 옷은 없었지만 괜히 비싼 옷을 입어서 사람들 시선을 잡고싶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이것이 더 좋았다. 나는 상하 검은색의 한 벌의 여행자 옷에 회색의 망토를 둘렀고 누나는 연한 하늘색의 블라우스에 무릎에서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입었다. 그렇게 좋은 옷이 아닌데도 누나가 입으니 완전히 최고급 비단으로 의복제작 스킬 마스터의 유저가 제작한 옷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크윽~! 우리가 입고 왔던 옷은 접어서 의류점에서 얻은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는 즉시 돈을 지불했다. 이미 에리두의 돈을 어느 정도 챙겨왔기에 돈은 충분했다. 뭐 부족하면 중간에 벌면 되는 것이고.... 옷값을 지불하고 의류점을 나와 도구점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여행을 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암무를 타고 엘프의 숲까지 직통으로 날아가면 좋을 터이지만.... 솔직히 에리두에서는 그것이 힘들다. 한 제국에서는 하늘만 쳐다볼 얼간이가 없기에 마음놓고 암무를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에리두에서는 암무를 타고 다녔다가는 직빵으로 걸려버린다. 바로 마법사들 때문이었다. 암무가 하늘을 나는 것은 순전히 마법의 힘이다. 설마 암무가 그 거대한 몸을 날개 짓으로 떠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암무가 그렇게 마법을 이용해서 하늘을 날면 마법사들이 기운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물론 웬만한 마법사는 무리이겠지만 실력이 좀 되는 마법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용이 하늘을 날아간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벤트 아니면 십중팔구 내가 에리두로 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현재 더 월드에서 용을 부리는 유저는 나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골치 아픈 사태는 절대로 사양이다. 조금 힘들더라도 도보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현재 내가 에리두로 온 것은 천희형과 민우형만이 알고 있다. 같은 응룡회 회원들도 모르고 있는 극비사항인 것이다.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무무의 귀로도 들어간다는 말일 터였다. 그럼 내가 이 곳에서 얻어갈 비장의 한 수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도구점을 들려 여행용 가방을 하나 구입해 봉투에 넣어두었던 내 옷과 누나의 옷을 넣어두었다. 도구점에서 더 이상 볼일이 없게 되자 이번에는 무기점으로 향했다. 에리두의 무기와 한 제국의 무기는 차이가 나는 것도 있고 닮은 것도 있다. 내가 주로 들고 다니는 철검은 이 중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에 속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기를 바꿀 필요가 없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무흐흣. 에리두에 와서까지 검을 휘두를 이유가 있겠는가? 에리두에서 나는 서부의 총잡이가 되는 것이다. 전에 에리두에 왔을 때도 나는 총을 들고 돌아다녔었다. 물론 총에 관련된 스킬은 단 하나도 습득하지 못했지만.. 내 민첩성이 워낙에 높아서 연사능력과 명중률이 장난이 아니다. 누가 보면 내가 연사스킬을 사용하는 줄 알 정도이다. 무기점에서 총기를 취급하는 곳으로 가 피스톨 두 개를 구입했다. 문뜩 내 보물 창고에 던져둔 나이트메어를 꺼내올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트메어는 총기류 상위 5위안에 드는 레어무기로 악몽이라는 이름의 관통스킬과 절망이라는 이름의 완벽명중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총이었다. 그 총이 있다면 에리두에서도 무서울 것이 없는데 말야....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 초 레어아이템을 들고 다녔다가는 괜히 골치 아픈 사건에만 휘말릴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총기를 꽃아 두는 벨트를 구입해 착용하고 구입한 피스톨 두 개를 넣어둔 후 즉시 누나의 무기를 구하러 마법사길드로 향했다. 에리두에서 누나의 모티브는 미소녀 마법사다! 지력도 빵빵하니 마법 정도는 가뿐하게 배울 수 있을 터.... 우선은 기본마법을 이 곳 마법사길드에서 배우게 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던젼을 돌아다니며 마법서를 얻어 누나에게 최고의 마법들을 배우게 할 생각이었다. 물론 트리플마스터에서나 배우게 될 마법들은 불가능하겠지만... 더블마스터의 마법만 배워도 어디인가.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하핫~!!!! .......그런데 마법사 길드가 어디에 있지? 설마 시골 깡촌이라 마법사 길드가 없는 것 아냐? 결국 마법사길드를 찾지 못했다. 보통 마을에도 마법사길드가 하나쯤은 있는데... 여기는 너무도 작은 마을이었나 보다. 별 수 없이 조금 더 큰 마을이나 도시로 가서 마법사길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우선 길을 떠나기 전 나와 누나는 주점으로 향했다. 일행이 되어 줄 유저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한 제국에서는 웬만한 곳에서는 몹이 나오지 않고 일정한 사냥터로 가야 몹을 볼 수 있지만 에리두는 달랐다. 마을을 벗어나 조금만 가면 몹을 쉽게 볼 수 있다. 때때로 몹들이 마을이나 도시에 침입을 할 정도로 에리두는 몹이 넘쳐나는 곳이다. 한 제국과 에리두에서 이렇게 몹의 수요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수련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한 제국에서는 꼭 사냥뿐만이 아니라도 홀로 능력치를 상승시키면서 수련을 할 수 있지만 에리두는 다르다. 마법사 같은 경우나 홀로 도서관을 찾아 마법을 습득 할 수 있지... 대부분은 직접 사냥을 해서 경험치를 얻는 방법으로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에리두전역에는 몹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그런 몹들은 대부분이 100레벨 이하의 몹들뿐이다. 진짜 강한 몹들은 한 제국과 같이 고레벨의 사냥터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고레벨의 몹의 수요는 한 제국이나 에리두나 별 차이가 없다. 어쨌든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몹들과 만나게 될 터인데 누나와 나 둘만이 갈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몹들 정도는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다. 초보자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가볍게 몹들을 처리하면서 단 둘이서 여행을 하면 보는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겠는가? 분명 엄청난 고렙이라고 생각하며 주시할 것이 분명하다. 평균적으로 어설프게 강한 이들이 삐까번쩍하게 차려입지 더블마스터 정도 되면 대부분 일반유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을 하고 다닌다. 물론 안쪽에는 온갖 레어아이템으로 도배를 하지만 겉은 어쨌든 초보나 다름없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이유는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다. 괜히 사람들이 몰려들고.... 뭐 하나 얻어볼까 하고 침을 질질 흘리며 따라오는 이들도 있다. 주점으로 들어선 나와 누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NPC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요구했다. 나는 그냥 음료 두 잔을 시키고 종업원이 물러가자 힐끔 가장 눈에 띄는 일행을 보았다. 전사 둘에 마법사로 보이는 유저 하나... 신관이 하나였다. 저 정도면 상당히 균형 잡힌 파티이다. 오러의 수치를 살펴보니 전사 하나는 120레벨이 넘는 싱글마스터인 듯 했고 나머지 하나는 80레벨쯤 되어 보인다. 그리고 마법사는 거의 마스터에 다다른 듯 하다. 아니면 오러만 팍팍 올렸다거나.... 신관도 대충 그 정도 레벨인 듯 하다. 일단 나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로렌시아 공국의 수도라고 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로렌시아 공국이다. 에리두의 동편에 위치한 산악국가로 레인저 부대로 유명하다. 어차피 나와 누나도 엘프의 숲으로 가는 길에 로렌시아 공국의 수도 한발트에 들려야 했기 때문에 나는 저들에게 동행을 청해보기로 했다. 누나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내가 입을 열자 그들은 입을 다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한발트로 가시는 듯 하더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제 동행을 파티에 끼워주지 않겠습니까?" "흠.... 검을 착용하고 있군. 검사인가?"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가장 레벨이 높은 남성검사가 내 망토 사이로 조금 튀어 나온 철검을 보며 물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그냥 멋이고... 진짜는 이것입니다." 나는 슬쩍 망토를 들어 올려 허리에 매어져 있는 두 자루의 베레타를 보였다.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솔직히 우리도 건유저나 보우유저를 구하고 있었던 차에 잘 된 것 같군.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마법사가 하나 있지만 마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니 말야. 그래 그 쪽은 레벨이 어떻게 되는가?" "별로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에 70이 넘었습니다." 건유저는 70레벨에 점사(點射)라 하는 스킬을 배우는데 이건 명중률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50레벨엔 연사(演士)를 배울 수 있다. 나는 민첩성을 이용해 쏘면 거의 점사나 연사에 버금가는 사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70 레벨이라고 말을 한 것이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리고 자네 동료는....?" "아.. 제 여자친구인데... 오늘부터 게임을 하는 것이라 아직 직업도 없습니다. 그녀가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데 엉뚱하게 이 곳으로 스타트가 되어 버린 터라.... 겨우 마법사길드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가장 가까운 마을에 와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친구와 함께 돌아가려 하니... 일행으로 왔던 자들이 먼저 떠나버린 터라....." "호오.. 텔레포트마법이라면 상당한 돈이 들었겠는걸. 이제 70레벨이라면서?" "덕분에 대부분의 비상금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언제까지나 여기에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누나에게 메시지 창으로 대충 상황을 설명하고 누나를 불러 그들과 인사를 시켰다. 누나의 연기력도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들은 별로 의심하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이 일행의 리더를 맡고 있는 제이슨이라고 하네. 그리고 이 쪽은 내 동생인 로윌. 그리고 저 쪽 아름다운 마법사는 오래 전부터 게임에서 나와 인연을 맺어 온 셀리. 신관은 이번에 파티에 들어온 아인돌프라고 하지." "저는 칼리. 이 쪽은 아리스라 합니다." 그렇게 나와 진희누나는 제이슨 일행과 안면을 트고 합석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충 이 일행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제이슨은 아버지 같은 스타일로 일행의 버팀목이었고 로윌은 상당히 덤벙대는 성격이다. 그리고 셀리는 자기가 공주인줄 아는 선영누나에 버금가는 공주병 환자였고 아인돌프는 꽤나 유머감각이 띄어난 아저씨였다. 나이를 보면 제이슨은 28세. 로윌은 24세. 셀리는 25세. 아인돌프씨는 31세였다. 하나같이 나나 누나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존댓말을 썼고 그들은 우리를 동생같이 대해주었다. 그냥 만난 것인데... 의외로 괜찮은 일행을 동행으로 한 것 같다. "자. 그럼 곧 있으면 날이 밝을 것 같군. 슬슬 출발을 해 보도록 하지." 주로 여행은 낮에 하는 것이 좋다. 밤에는 음기가 강해지기 때문에 몹들의 능력치가 높아지고 시야까지 좁아진다. 때때로 언데드계열의 몹을 만나게 되면 정말 피곤해진다. 언데드계열의 몹들은 일반 무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으로 된 검이나 마법무기 외에는 상처를 입힐 수 없다. 화살도 촉을 은으로 만들고 총알도 은탄을 써야 한다. ......물론 최고로 좋은 방법은 클레릭 계열의 턴 언데드 마법이지만... 제이슨 일행은 은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관까지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몹이 강해지는 것은 둘째치고 시야가 좁다는 것은 진짜 열 받거든... 천천히 날이 밝는 것을 보며 우리 일행은 주점을 나섰다. 우선 마을을 나와 남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현재 우리는 에리두 가장 동쪽 끝에 있었기에 어디를 가던지 간에 서쪽으로 우선은 가야만 했다. 후아아.. 1년 만에 와 보는 에리두라... 무척이나 반갑구나~! 오~ 오크야~! 너 잘있었냐? 기념으로이거나 한 방 먹어라. 탕!!! 마을을 나온 지 10분만에 마주친 오크 한 마리의 머리를 가볍게 뚫어 주었다. 하하하 이것이 바로 내 탁월한 민첩성이 만들어 낸 점사를 능가하는 사격실력이지. 아마 더블마스터 초반의 건유저가 되어야 나와 비슷한 민첩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동료가 있으니 편하군. 좋아. 이제부터 잘 부탁하네." 나는 총을 빙그르 돌려 허리에 꽂으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이틀정도가 흘러 우리는 헤른이라는 상당히 큰 마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우리들은 일단 여관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헤어졌다. 방학기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와 누나는 학교를 가야했던 것이다. 뭐 오늘은 금요일이니 일찍 오전수업 뿐일 것이다. 그리고 내일과 모래는 쉬는 날이고 말야. 로그아웃을 하기 전 만날 시간을 정했다. 대충 나와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게임에 접속할 수 있는 오후 1시 정도에 만나기로 했는데 여기서 잠깐 문제가 생겼다. 제이슨과 로윌이 독일의 유저였고 셀리가 영국의 유저였기 때문에 시차가 생긴 것이다. 대략 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 이상이었다. 한마디로 이제부터 그들은 밤을 새도록 게임을 할 시간이고 나와 누나가 학교를 끝내고 게임에 접속을 하면 그들은 밤새도록 게임을 하면서 얻은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잘 시간인 것이다. 다행인 점이라면 그들 모두가 집에서 일을 하는 터라 언제라도 게임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 정도였다. 결국 우리들은 한국 시간으로 4시 정도에 만나기로 했다. 그 시간이면 제이슨 일행이 사는 곳도 대략 아침 8시 정도이고... 충분히 피로를 풀 수 있었다. 뭐.. 나야 누나와 만나 잠시 데이트를 즐기고 집에 들어와서 게임에 접속하면 되니 크게 무리라 할 것도 없다. 대충 타협을 본 우리들은 작별을 했고 나와 누나는 로그아웃을 하고 학교를 갈 준비를 했다. "수업 끝나고 전화 해."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누나가 웃으며 로그아웃을 하자 따라서 접속을 끊었다. 링크헤드셋을 벗고 나서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요즘은 누나와 함께 로그아웃을 하는 터라 조금 일찍 접속을 끊게 되었다. 전에는 7시 정도에나 게임을 나와 학교로 갔는데.... 근래에는 아침에 약간 잠을 잘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계 타이머를 맞추어 놓고 이불을 들어 몸에 덮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누나의 사진을 가져와 품에 안았다. "누나 잘 자요..." 이러고 있으면 전에 누나를 안고 잤던 날 밤이 떠오른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점차 수마가 나를 덮쳐간다.... "여어~ 모두 방가~!" 나는 교실에 들어서며 반 친구들에게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반응은 내 기분을 순식간에 잡치게 한다. "......저 녀석 어제 무슨 일 있는 것 아냐?" "분명 또 진희누나와 이상한 짓을 했을 거야..." "혹시 일 저지른 것 아냐?" "맞아. 난 저 녀석이 웃으면서 말을 걸면 괜히 불안해 지더라." ......이 자식들이.... 물론 내가 진희누나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웃는 얼굴로 교실에 들어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친구가 좋은 일이 있으면 칭찬을 해 주어야 정상이건만 이 녀석들은 오히려 배를 아파하니... 하아.. 내 인생은 실패한 거야~! "안 들어가고 뭐 하냐?" 내가 문 앞에서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쥐고 서 있을 때 진호가 뒤에서 삐딱한 얼굴로 물었다. 이 녀석은 또 왜 이리 저기압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길을 비켜주었고 진호는 찬바람을 쌩 풍기며 교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버린다. 내가 진호의 옆자리에 앉으며 바라보자 이제는 고개까지 돌린다. "......너 그 날이냐?" 진호의 몸이 그대로 옆으로 기운다. 너무 정확하게 찍어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반 아이들의 큭큭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진호에게 건넸고 진호는 이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날 보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대신 막고 있으라고. 있다가 내가 몰래 월담해서 화이트로 하나 사다 주마." "이 자식아!!" 결국 진호는 폭주했고 교실은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나는 유유히 진호의 손길을 피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화이트 싫으면 그렇다고 말로 하지 왜 화를 내냐? 하긴 그건 좀 구식이지? 그럼 요즘 새로 나온 순간흡수 기능이 담긴 3중 흡수 층 로얄로 사 주랴? 근데 그건 좀 비싸다." "크아아악~!!!" 의자를 들고 발광하는 진호를 피해 도망을 친 나는 문뜩 진호에게 다가가는 우리 반 여자아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민선이었다. 저 애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그러나? 민선이는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히죽 웃으며 진호에게 내밀었다. "자 네가 그렇게 원하는 로얄이야. 그러니 화 풀어." ".........." 순간 교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민선아. 네가 왕이다. "아아. 메시지 수신을 꺼 놨다고 화가 난거냐?" "누가 화났다고 했냐? 그냥 기분이 더럽다고 했지. 대체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 거냐? 누나도 메시지를 꺼 놓고... 둘이 뭔 짓 한 거야?" 난 그냥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실제로는 메시지를 꺼 놓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중앙산맥을 기점으로 에리두와 한 제국은 완전히 별도의 공간으로 나뉜다. 서로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은 같은 지역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에리두에서 한 제국에 있는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는 없다. "무흐흣. 비.밀.이.야~!" "나한테도 말이냐? 장래의 처남에게?" "어쩔 수 없어. 비밀 특훈 중이거든." 잠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꼴아 보았지만 진호도 곧 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누나와 함께 비밀 특훈을 한다고 메시지를 차단하고 잠적할 때가 있었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훈을 하기에 메시지 창까지 꺼 놓냐?" "못 들었냐? 비밀 특훈이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고 너도 응룡신검보를 완벽하게 익혀 둬. 독고구검을 익히는 것을 잠시 중단하더라도 말야." "그렇지 않아도 그러고 있다." 진호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문뜩 진호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열에 아홉은 그냥 심심해서 보낸 것이겠지만 혹시 모르지 않은가? 나는 진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냐?" "아. 별로 중요한 것은 아냐.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이상한 소문? 뭐 소문이라는 것이 대부분 진실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진짜배기도 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며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머리를 긁으며 손에 들린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말했다. "다섯 번째 초절정무공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분명 뜬소문일 것이지만 그래도 혹시 해서 말야." 뭐? 나는 깜짝 놀랐다. 다섯 번째 초절정무공이라니.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모든 초절정무공이 다 나온 것이 된다. 진호의 말대로 뜬소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혹 모르는 일이다. 나는 마지막 초절정무공을 얻는 법을 대충 추측하고 있다. 예기치 못할 기연. 바로 이것이다. 오래 전부터 무협을 보면 그저 순수하게 운 하나로 기연을 얻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더 월드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다. 이제까지 나온 최절정무공이나 초절정무공은 하나같이 생각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단서를 우연히 찾고.. 그 단서를 이용해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가며 종래에 최종적으로 무공을 얻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비급을 얻은 이들은 하나같이 운도 좋아야 하지만 스스로 노력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운 하나로 얻는 비급은 없을까 하는 의문을 오래 전부터 가졌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면 마지막 초절정무공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물론 최절정무공 중에서도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거 재미있는 소문이네. 뭐 언젠가는 나올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주인은 누구래?" "아직 누구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구룡 중 세 번째인 혈룡검마 검천이라고 하더군." 혈룡검마 검천이라.... 나는 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그 녀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주 피가 말리겠군." 내가 당해봐서 알지. 뜬소문이건 진짜이건 간에 비급을 노리는 이들이 수없이 몰려들 것이다. 인피면구를 써도 어찌 할 수 없다. 인피면구를 쓴다는 것부터 신분을 감추고 싶어한다는 말이고... 절정고수라면 대번에 그것이 인피면구라는 것을 알아보고 길을 막아 설 것이다. 필연적으로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정체가 탄로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내가 괜히 과거에 에리두로 도망을 친 것이 아니란 말씀. 내 말에 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솔직히.... 내가 가지고 있다는 독고구검을 빼앗으려고 덤벼드는 녀석들도 한둘이 아닌데 초절정무공이면 얼마나 짜증날까. 나는 귀찮아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릴 것 같다." 말은 그래도 부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진호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무에게서 무상검록을 되찾으면 너한테 줄까?" "됐다 임마. 익히지도 못할 것을 내가 미쳤다고 들고 다녀서 뭐해? 그리고 나는 지금으로 만족 해. 내 꿈은 최고의 자리가 아니라 최고의 자리를 떠받쳐 주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진호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나는 그런 진호의 목을 조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짜식!! 잘났다!!" "하하하! 나 잘난 것 이제 알았냐?" 14 - 파워 길드 누나와 데이트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3시 40분이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4시였으니 지금 들어가면 충분할 듯 싶었다. 주방에서 캔 콜라 하나를 꺼내 물고 방으로 들어간 나는 콜라를 모두 마신 후 링크헤드셋을 들었다. 어김없이 미성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그래."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헤른 마을에 들어선 나는 우선 누나를 찾았다. 누나도 게임에 접속을 했다면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어서 와." 목소리만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다. 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일찍 왔네요." 내 말에 누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방금 온 거야."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고 왔거든. 뭐 게임에 접속하지 않고 내가 들어갈 시간을 기다렸다고 하더라도 대략 게임시간으로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렸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르는 척 했다. 누나의 배려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럼 갈까요? 어디 보자.. 마법사길드가...?" 아직 제이슨 일행을 만나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에 진희누나에게 마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 보았자 지금은 3서클이 한계이겠지만 그것만 있어도 우선은 충분하다. 역시 큰 마을이니 만큼 마법사길드가 존재했다. 사람에게 길을 물어 마법사길드에 도착한 누나와 나는 안내 NPC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이미 한 번 와서 기본적인 마법 몇 가지를 배워 보았기에 대충 절차는 알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만." "계열이 어떻게 되시죠?" 계열은 마법의 분류이다. 보통 마법의 종류는 원소, 암흑, 백, 원진, 정령으로 나누어지고 이 중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마법은 정령을 제외한 앞의 네 가지이다. 원소는 화(火), 수(水), 풍(風), 지(地)의 4대 속성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네 가지 모두를 배울 수도 있고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다른 한 가지를 보조로 배우는 방법의 두 가지의 성장 방법이 존재한다. 앞의 방법은 성장속도가 느리지만 안정적인 성장을 보일 수 있고 뒤쪽 방법은 성장속도가 빠른 대신 때에 따라서 페널티를 입을 수 있다. 하위계열은 주로 이 곳 마법사길드에서 배우고 상위마법은 사냥을 통해 마법서를 얻거나 마법사길드의 상위조직인 마도사길드에 들어 수련을 해야 습득이 가능하다. 암흑마법은 마족과 계약을 통해 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으로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공격계열과 상대의 정신에 타격을 가하는 정신계열, 저주를 거는 저주계열로 나뉜다. 이는 계약을 맺는 마족의 능력에 따라 갈라지게 되는 것으로 때에 따라서 마왕급 이상과 계약을 맺을 때는 두 가지 이상의 계열을 동시에 습득할 수도 있다.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물과 레벨이 필요하며 마도사길드에서는 습득이 불가능하고 암흑신전을 찾아가 재물을 받치고 의식을 행해야 한다. 백마법은 주로 보조계열 마법이다. 약간의 물론 공격계열도 존재하지만 그 공격력은 암흑마법이나 원소마법에 비하면 떨어진다. 그 외에도 회복계열과 함께 보조계열이 존재하는데 이 역시도 클레릭이 사용하는 신성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계열을 선택하는 유저들은 공격, 회복, 보조를 동시에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마법사 길드에서 습득이 가능하다. 원진마법은 어떻게 보면 계열이라 하기 보다 공중이나 땅에 마법진을 그려 타마법을 증폭시키는 기술이다. 주로 원소마법이나 백마법과 함께 배우면 좋은데 이 원진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200레벨 이상의 고레벨을 요구하며 문 스태프라는 레어아이템이 필요하다. 덕분에 더 월드에서 이 원진마법을 익힌 유저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정령마법은 엘프들의 전용마법으로 4대 정령을 소환하는 자연계와 사람의 감정을 다스리는 정령들을 소환하는 정신계로 나뉜다. 보통 앞의 자연계를 익히면 주로 네이쳐엘프라 불리고 정신계를 익히면 주로 섀도우엘프라 불린다. 정령의 힘은 대단해서 4대 정령 같은 경우는 원소마법의 위력을 넘어서고 정신계열은 암흑마법의 정신계를 능가한다고 한다. 특히 정신계열의 자애의 정령은 신성력의 치료와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 어떤 면에서는 축복까지 내리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뭐 설명이 길어졌는데... 어차피 누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일차적으로 누나는 마법사가 아니거든.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무속성." "마법사가 아닌가 보군요. 그럼 요구되는 지력수치가 두 배가 될 터인데. 괜찮나요?" 물론. 나도 다 배운 것을 누나가 못 배울 이유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안내원은 서류를 작성하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이 곳에 배우고 싶은 마법을 작성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즉시 서류를 받아들고 펜을 들었다. 배울 마법은 원소계열. 풍(風)과 수(水)였다. 보통 서로 상성이 되는 풍과 화, 이라던가 지와 수를 배우기 마련인데 나는 누나가 풍과 수를 배우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누나가 익히고 있는 풍운조화검결 때문이었다. 내가 누나에게 마법을 배우게 하는 것은 최후의 숨겨진 기술임과 동시에 누나가 익힌 무공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마법과 무공에도 어느 정도 상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내가 익힌 무상검록의 최종오의는 음과 양의 결합으로 생겨나는 멸의 기운이다. 그 때문에 내가 익힌 마법은 화와 수였다. 서로 상반된 마법이었기에 습득하기도 힘들었고 수련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무상검록의 최종오의 무진에 상당한 향상을 볼 수 있었다. 누나의 무공인 풍운조화검결은 누가 보더라도 풍과 수이다. 구름이 수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어쨌든 그 때문에 나는 누나에게 풍과 수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우선 여기서 익힐 수 있는 3서클까지 배워야 할 터였다. 서류를 작성한 나는 다시 안내원에게 넘겼고 안내원을 서류를 살펴보더니 도장을 몇 곳에 찍더니 밑 부분을 뜯어 나에게 주었다. "이 것을 가지고 3층의 도서관으로 가면 열람이 가능할 것입니다. 요금은 500루펠입니다." 돈을 지불한 나는 누나와 함께 3층의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관리인에게 허가증을 건네고 누나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당연히 여기에 남아야 했다. 허가가 난 것은 누나뿐이거든. 나는 대충 누나에게 마법을 익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나는 NPC 관리인과 농담 따먹기를 즐겨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얼마 안 있으면 제이슨 일행과 만나야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누나의 지력이라면 한 번 읽고 끝이거든. 분명 금방 나올 것.... 벌써 나왔다. "가요." 내 말에 누나는 빙긋 웃으며 내 팔짱을 끼었다. 마법사길드를 나온 우리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마을 중앙의 분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수대에 도착한 나는 금방 셀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수대 부근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그 중앙에서 셀리가 한 검사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워 길드원이면 다야?! 앙!! 1:1로 붙으면 한 방에 나뒹굴 녀석이 뭐가 잘났다고 지랄이야?!!" "뭐가 어째? 한 방? 진짜 이 계집이!! 죽으려고 용쓰나!!!" "오호라 죽이겠다?! 살살 꼬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죽이네 살리네 하네! 그래 죽여 봐라!! 죽여 봐!!!" 오오. 셀리 한 마디도 안 지네. 나는 실실 웃으며 셀리와 그 검사의 말다툼을 구경했다. 진희누나가 도와주지 않느냐고 내 어깨를 콕콕 찔렀지만 나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구경하고 나서 도와줘도 상관없잖아. 말다툼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무력대결까지 갈 정도였다. 검사가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실제로 마법사는 물리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에 취약하기 때문에 셀리가 아무리 싱글마스터에 거의 이른 유저라 하더라도 저렇게 가까운 거 리에서는 결코 검사를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들어 검사의 뒷머리에 겨누었다. "검 거두세요. 쏴 버립니다." 누차 말했지만 더 월드는 현실성을 중시한다. 재수 없으면 고수라도 초보의 빗나간 총탄에 맞고 피를 토하고 게임 오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수일수록 신체의 급소에 대한 방어력이 높고 회피율이 높기 때문에 잘 죽지 않을 뿐이지 한번 급소에 총탄이 박히면 알짤 없이 즉사다. 하물며 고수가 그럴 것인데 이런 풋내기 정도야 가뿐하다. "뭐.. 뭐냐?!" "칼리! 마침 잘 왔어. 아리스도 왔네. 누가 연인 아니랄까봐 올 때도 같이 오니?" 검사는 질겁해서 검을 내렸고 셀리는 웃으며 나와 누나를 반겼다. 나는 셀리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에게 제압되어 있던 검사가 재빨리 몸을 숙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느리잖아. 탕!! 내 총구가 검사의 손목에 겨누어지며 불을 뿜었다. 검사는 검을 놓치고 말았고 나는 떨어진 검을 밟으며 히죽 웃었다. 그리곤 다른 총을 한 개 더 꺼내 하나는 검사의 이마에.. 다른 하나의 입에 찔러 넣고 씨익 웃었다. "죽여줄까?" 그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아... 불쌍해. 너무 불쌍해. 이렇게 불쌍한 녀석을 보면... "더 죽이고 싶은데....." "히익!" "쳇. 김 샜다. 한 번만 봐 주지. 셋 세겠다. 꺼져." 나는 그렇게 총을 거두어 들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검사는 떨어진 검을 들자마자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나에게 휘둘렀다. 내가 너 이럴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임마. 나는 발로 녀석의 팔을 차 버리며 그대로 총을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피는 나오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당장 이 게임은 18세 이상 등급 판정 받았을걸.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해 가는 그를 발로 툭 쳐 넘어트린 나는 저 멀리서 창을 꼬나 쥐고 달려오는 경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을 안에서 살인이라니!!!" "정당방위~!" 나를 닦달하던 경비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없지? 당연하다. 나는 말 그대로 정당방위였거든. 그 이전의 협박 건은 이렇게 말하면 된다. "먼저 총을 겨눈 것은 그 쪽이라고 들었다." "장난~!" ".........." 주위의 유저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NPC경비는 잠시 나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그냥 경고만 하고 돌아갔다. 나는 히죽 웃으며 구석에서 웃음을 참으려고 신음하는 셀리에게 말을 걸었다. "제이슨과 다른 사람들은요?" "흐흑... 아직 안 왔어... 히히.. 배 아파......" "그런데 왜 싸우고 있었던 거죠?" "하하... 그게... 그 자식이 자꾸 추근덕 거리잖아. 지가 무슨 파워길드의 길드장 조카인데 어쩌고 하면서 키워주겠다고 그러더라고... 괜찮다고 거부했는데도 자꾸 달라붙기에 한 소리 했더니 계집이 목소리만 크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열 받아서 발을 밟아 버렸고... 그 후 부 터는 본 대로야." .....그렇게 된 거군. 그런데 파워길드라면...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그 길드 아닌가? 물론 아직 에리두 10대 길드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20대 길드 안에는 들 것이다. 길드장은 다크나이트 클래스의 더블마스터라고 하는데... 만약 녀석이 진짜 길드장의 조카라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저 녀석들이에요!!" ........낮은 확률로 당첨이 되어 버린 듯 하다. 우르르 달려와 우리를 포위하는 무리들을 돌아보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누나는 내 팔을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고 셀리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 나에게 게임오버를 당했던 얼간이 검사를 쏘아보았다. 그렇다고 그 사이에 길드원 십여 명을 끌고 오다니.... "너 진짜 구제불능이구나." "시끄러!! 네 놈들... 감히 나를 물 먹였겠다!!!" 내가 언제 물을 먹였다는 건데? 거 참 사람 누명 씌우네. 이렇게 말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장난을 칠 시간은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이 녀석들 무서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실력을 감추고 총으로만 싸워야 하는 지금은 이길 가능성이 전무했다. 적어도 제이슨과 로윌, 아인돌프가 있으면 어떻게든 돌파를 해 볼 수도 있겠건만.... "여어~! 일찍들 왔........"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내가 생각했던 일행 셋이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파워길드의 길드원들을 보며 즉시 입을 다물며 몸을 돌렸다. "사람 잘못 봤군요." .........그렇다고 동료를 버리고 가냐?!!!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즉시 소리쳤다. "형!! 살려줘~!!!" 효과는 직빵이었다. 파워길드원들의 싸늘한 시선이 대번에 제이슨 패거리에게 돌려졌다. "저 녀석들도 한 패다!! 잡아!!" "저기.. 그냥 보내 주면 안 될까?" .....로윌 생각보다 무지 비굴하다. 그리고 제이슨과 아인돌프는 주춤주춤 도망갈 퇴로를 물색한다. 나는 셀리를 돌아보며 저 인간들 원래 저러냐고 물었다. 셀리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때때로 저런 꼴 보면 진짜 동료라도 죽이고 싶어져..." 충분히 셀리의 심정이 수긍된다. 뭐 그것보다 언제까지 여기서 놀고 있을 수는 없지. 때마침 녀석들의 시선이 제이슨들에게 돌아가 있고 말야. 이 기회를 내가 놓칠 이유가 없었다. 나의 손이 빠르게 허리에 닿았고 순식간에 두 자루의 베레타를 뽑아들었다. 탕!탕!탕!탕!탕!탕!!! 연사로 쏘아진 총탄은 순식간에 파워길드원 대여섯을 게임오버 시켰다. 절반 정도는 다행히 급히 몸을 피했는지 게임오버는 당하지 않았다. 뭐 그 중 몇몇은 몸의 다른 부위에 총탄이 박혔지만 말이다. "비겁한 녀석들...." 살아남은 녀석들이 이를 갈며 나에게 말한다. 하지만 나도 받아칠 말은 있다. "3명 잡으려고 14명이 몰려오는 쪽은 안 비겁하냐?" "그럼그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로윌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인간... 상황이 역전되니까 그대로 돌아오네. 혹시 전생에 박쥐 아니었어? "덤빌래? 아니면 그냥 갈래?" 나는 탄창을 교체하며 파워길드원들에게 물었다. 분명 십중팔구는 덤빌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은 에리두 길드순위 18위의 파워길드인 것이다.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도 덤비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시 예상대로 그들은 자세를 잡으며 우리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운 상태다. 조금 전 내 공격으로 파워길드 측의 마법사와 신관이 전부 몰살당해 버렸거든. 검사나 파이터들은 민첩성을 이용해 어찌 회피를 할 수 있었지만 마법사와 신관이 피하기는 힘들었거든. 그에 반해서 우리측에는 마법사에 신관, 건유저, 검사까지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균형이 맞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까딱했다. 덤비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는 없었다. 분명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조금 뒤에 동료들이 재 접속을 해서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그 꼴을 그대로 보고 있을 턱이 없다. 탕!! 한 발의 총성이 터졌고 가장 앞쪽에 있는 길드원이 급히 몸을 숙였다. 뭐 첫 번째는 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알란가 모르겠네. 나는 총이 두 개야. 탕!! 다른 총에서 쏘아져 나간 총탄이 그대로 길드원의 머리를 관통했다. 이로서 한 명 더 게임 오버~. "빨리 끝내고 가자고요." 내 말에 우리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아인돌프씨가 보조마법으로 일행을 보조했고 로윌과 제이슨이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누나와 셀리는 마법을 준비한다. 나는 있는 대로 총알을 퍼부으며 길드원들의 혼을 빼놓았다. 순식간에 전투는 종결되어 버렸다. 어떻게 버티던 파워길드원들은 누나와 셀리의 마법이 터짐과 동시에 모조리 몰살당해 버렸다. 아! 그 지 삼촌 믿고 깝치는 얼간이 하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히죽 웃으며 다시금 그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그 녀석은 로그아웃을 하고 싶어 죽겠지만...... 전투 중에는 불가능하거든. "이거 어쩌나? 오늘 2레벨 다운을 하겠네." 레벨 1-50까지는 두 번 죽어야 1레벨이 다운되고 50부터 100까지는 한 번 죽으면 1레벨 다운이다. 그리고 100부터 150까지는 한 번 죽으면 5레벨 다운이며 200까지는 10레벨다운, 250까지는 15레벨다운, 300레벨까지는 20레벨다운. 마지막으로 300레벨 이상은 한 번 죽을 때마다 30레벨 다운을 먹는다. 이 녀석은 대충 50레벨 이상으로 보이니 당연히 한 번 죽을 때마다 1레벨이 다운된다. 이미 한 번 죽어 다운을 경험했고... 이번에 또 죽게 생겼으니 도합 2레벨 다운일 수밖에 없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렸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이로서 2레벨다운 확정~! 쓰러지는 얼간이 녀석을 바라보며 로윌이 혀를 찬다. "쳇.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말야." 듣고 보니 어이없다. 이봐... 로윌 당신이 그렇게 말 할 자격이라도 있어? 나는 허탈한 얼굴로 로윌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서 있다. 얼굴을 철판으로 도배를 했나 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싸운 건가?" 제이슨이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대충 상황설명을 해 주었다. 중간중간에 셀리가 나서 그 얼간이 녀석이 얼마나 치사한 녀석인지 세심하게 보충설명도 해 주었다. "........그래서 녀석이 보복한다며 파워길드원을 이끌고 덤벼 온 거죠." "음.. 그렇.... 뭐? 파워길드?!" 아직 자신들이 싸운 녀석들이 파워길드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제이슨과 로윌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악!!! 말도 안 돼!!! 셀리!! 그렇게 사고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 왜 하필 건드려도 파워길드냐?!!" 로윌의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파워길드는 앞에서 말했다 시피 에리두 길드순위 18위의 최강길드중 하나이다. 에리두 전역에 퍼져있는 길드원의 수만 해도 10만에 이를 정도이다. 분명 오늘 일로 우리 일행은 길드원들에게 수배가 될 것이다. "파티 해체다!! 당하려면 셀리 너나 당해!" ".......저기하고.. 저기.. 저기 세 녀석 로윌이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았어요?" 내가 세 녀석을 찍으며 묻자 로윌의 몸이 그대로 경직되었다. 그제야 파티해제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챈 것이다. "아흑.. 형 우리 이제 어떻게 해. 게임 접어야 할 것 같아." "울 시간 있으면 도망부터 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곧 있으면 또 우르르 몰려 올 것인데. 그리고 그 때는 조금 전과 같이 쉽게 이길 수 없을 거예요." "칼리의 말이 맞아. 우선 자리를 피하자고." 내 말에 셀리가 동의했고 아인돌프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선 마을을 벗어나기로 하고 즉시 도구점으로 가서 여행식량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마을을 재빨리 빠져나와 서쪽으로 난 길을 걸었다. 다행히 마을을 빠져 나올 때까지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다행한 일이 아님을 안 것은 마을을 나온 지 1시간이 지난 후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군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의 중간에 펄럭이고 있는 PG라는 이니셜이 쓰여진 깃발... 당연히 파워길드였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내가 실력을 발휘하면 충분히 어찌 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에리두에 온 것은 은자림과 결전이 있을 때까지는 비밀이다. "제길. 난 몰라! 그래 죽이려면 죽여라!!" 로윌이 검을 내팽개치며 이를 갈았다. 제이슨과 아인돌프씨도 격한 감정표현을 하지 않고 있을 뿐 로윌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뜩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힘도 쥐뿔도 없는 녀석이 여자나 꼬시다가 당했다고 삼촌 힘을 이용해 복수하는 꼴이 같잖게 보였다. 저 뒤에서 우리를 발견하며 비릿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을 그대로 짓이겨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일행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신경을 꺼 버린다. 하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겠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어느 순간 주작신보를 펼쳤다. 순간 나의 몸이 검은 잔상을 만들며 다가오는 군대의 틈을 누볐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나를 잡으려 했지만 최절정무공인 진사신무의 신법이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의 속도에 잡힐 일은 없다. 나는 목표로 정했던 삼촌 믿고 까부는 얼간이 녀석의 말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즉시 청룡신퇴로 녀석의 면상을 차올렸다. 내공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다. 나는 재차 발길질을 날리다가 나에게 뻗어오는 검을 피해 어기충소를 써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허억!!!"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천상제(天上梯 : 허공답보와 비슷한 경지)를 펼치며 서서히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재차 얼간이 녀석을 발로 찼다. 이미 내가 보인 무공 때문에 그 누구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나는 얼간이의 체력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에야 공격을 멈추고 녀석을 들어 말 아래로 패대기쳤다. 그리곤 주위를 돌아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판 붙어 보겠나?"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 나에게 물었다. "한 제국 유저인 것 같은데... 어찌하여 에리두에 온 것인가?"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야. 무슨 상관이지?" "그럼 왜 우리 길드와 반목하는가?" "먼저 덤빈 쪽은 그 쪽이야. 그리고... 애 간수를 잘 해야지 않나?" 나는 얼간이 녀석을 발로 들어 길드원에게 던졌다. 얼간이를 받아 든 길드원은 얼굴을 붉혔다. "그대의 이름은?" 훗. 내 이름? 나는 씨익 웃으며 농을 깠다. "일황(一皇) 낭황(狼皇) 강천." 17 - 현자의 탑 내 말에 그들은 기겁했다. 나는 재빨리 뒷말을 붙였다. "......의 동생 강민이라고 합니다." 순간 제이슨 일행의 몸이 휘청였고 몇 명의 파워길드원이 낙마했다. 훗~. 얼마 후 파워길드원들이 물러났다. 그들로서는 나와 대립해 보았자 머리만 피곤해 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 본 것이다. 물론 나 혼자서 10만의 파워길드 전체를 상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얼마든지 골치 썩게 해 줄 수는 있다. 전에 화산파와 싸우려 할 때도 말한 대로 내가 철저하게 게릴라전을 펴면 피곤한 것은 그들뿐이다. 특히 한 제국의 유저들은 하나같이 경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사로잡기도 여간 벅찬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때문에 한 제국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상은 한 제국이나 에리두나 서로 좋은 점 나쁜 점이 각각 나뉘어져 있어 종합적인 평가는 비슷하다. 한 제국의 고수들이 절정의 경공을 쓰는 대신 에리두의 절정 마법사들은 한 순간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동료들까지 수천 리를 이동시키는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 더구나 고레벨의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각 마을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에리두의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도 가능하다. 물론 요금이 장난이 아니라 고레벨이 가끔 사용할 뿐이지만.. 그 외에도 수련을 통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검술을 사용하는 한 제국의 유저들과 반대로 에리두의 유저들은 레어아이템이나 유니크아이템을 얻어 엄청난 위력을 구사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한 제국이나 에리두나 결국은 일장일단, 비등비등, 꼬추고추, 피차일반 이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승패의 지름길은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제대로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경공술을 이용해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것은 분명 최고의 선택이다. 파워길드 측에서는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기에 별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린것이다. 물론 고수들이 연합해 나를 잡으려 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사태만 악화될 뿐이다. 나를 이겼다고 해도 그들은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나는 강천의 동생이라고 말을 해 두었다. 당연히 나를 건들면 강천이 은원을 청산하기 위해 올 것이라는 뜻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에리두의 파워길드와 한 제국 낭황의 싸움이 일어 날 수도 있다. 물론 혼자서 열 손을 못 당한다고 낭황이 이길 가능성은 적다. 십중팔구 낭황은 패하리라...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후부터이다. 낭황 강천이 당했다는데 한 제국에서 그냥 보고만 있을 턱이 없다. 한 제국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대로 들고일어날 것이다. 더구나 한 제국 최절정고수 대부분은 우리 한국유저이다. 일본이나 중국도 있지만 그 수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한국사람이 게임을 하면 확실하게 끝을 봐 버리지 않는가. 한국의 폐인 게임유저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더구나 평소에 단결이 안 돼서 그러지 이런 게임에서의 단결력은 세계 최강이다. 50명에 가까운 최절정고수가 연합해 에리두를 넘어와 버리면 대륙 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에리두에 있는 한국유저들도 분명 한 제국의 고수들 측으로 붙을 것이다. 게임에서 아무리 에리두에서 플레이를 하더라도 그들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뭉치면 최소한 파워길드는 일주일도 안 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가끔씩 한 제국의 최절정고수가 에리두에 놀러 오더라도 모르는 척 넘기는 것이다. 시비가 붙더라도 지금처럼 그냥 조용히 물러서고 오히려 시비가 붙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감출 때도 있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소문은 퍼지지만 말이다. 파워길드원들이 물러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힐끔 제이슨 일행을 보았다. 그들은 역시나 놀란 모습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정말 낭황 강천의 동생이야?" "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나 아무래도 구라스킬 마스터를 했나 봐. 어떻게 이렇게 표정한번 안 바꾸고 능숙하게 거짓말을 깔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내가 천희형의 동생인 것은 사실이지만 친동생은 아니잖아. 제이슨 일행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재차 물어왔다. "조금 전 하늘을 날아오른 스킬은 내가 알기로 한 제국에서 25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사용하는 스킬로 아는데." "맞아요." "그럼 너도 낭황 강천과 거의 비슷한 고렙이라는 말이잖아." "그렇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기충소를 보여주고 250레벨이 아니라고 해 보았자 괜히 의심을 살뿐이다. "저는 강천의 동생이에요. 이 곳 에리두에 온 것은 몇 가지 일이 있어서이고.." 제이슨 일행은 내 말을 믿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뜩 진희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 제국의 최절정고수라면 진희누나도 한 제국의 고수는 아닌가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누나도 한 제국의 고수 맞아요. 하지만 아직 200레벨은 넘지 못했죠." 거짓말만 하면 어떻게든 의심을 사게 마련이다. 적절한 사실과 거짓을 잘 혼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누나가 한 제국의 고수라는 사실은 알렸지만 혜혜선녀라는 사실은 감추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어떻게 마법을 배운 거지?" 셀리가 순간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몰라요? 에리두의 마법사가 아닌 다른 클래스도 마법을 배울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법사가 아니라면 지력수치가 3배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마법을 배우지 못해." 셀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제국 유저도 마법을 배울 수 있어요. 물론 에리두의 마법사보다 지력의 필요수치가 2배가 필요해요. 반대로 에리두의 유저들도 한 제국에서 무공을 배울 수 있잖아요. 일류무공까지이지만. 그것으로도 상당한 오러의 상승효과를 볼 수 있죠."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헤에.. 그거 진짜였단 말야?" 소문은 익히 퍼져 있지만 실제로 확인해 본 사람이 없기에 대부분 믿지 않는 것이다. 중앙산맥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 보아야 200레벨 이상의 100여명 정도의 유저이다. 그런 초 고렙유저들은 하나같이 신분을 감추고 잠행을 행한다. 에리두 유저가 한 제국으로 가거나 혹 그 반대이거나 모두 자신이 중앙산맥을 넘었다는 사실은 되도록 밝히지 않는 것이다. "호. 그럼 우리도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잖아. 이봐 칼리. 우리가 배울만한 무공 뭐 없나?" 로윌이 기대를 가지고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직은 안 배우는 것이 좋아요. 적어도 200레벨이 가까워졌을 때 배워야 하죠. 그 이전에 배우면 오히려 성장에 무리를 줄 수도 있어요. 이 곳 에리두에서 한제국의 무공은 고레벨 스킬로 치부가 되기 때문이죠. 기본스킬을 완전히 배우지 않고 고레벨 스킬을 배우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시죠?" 내 말에 로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두 유저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스킬이 꼬여버리지...." 빙고. "그런데 말야. 마법은 그렇다 치고 칼리 너는 어떻게 건유저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지?" 오~ 제이슨 날카로워~. 순간 움찔하기는 했지만 나는 재빨리 웃으며 답을 주었다. "스킬이 아니에요. 그냥 막 쏘는 것뿐이죠." "에? 그게 스킬이 아니라고?" 제이슨뿐만이 아니라 로윌과 셀리, 아인돌프까지 동시에 놀라서 부르짖었다. "대체 민첩성이 얼마이기에?"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에요. 다 아이템 발이죠." "하긴... 250레벨이라면 민첩성 향상 마법아이템을 안 가지고 있을 턱이 없지." 훗. 이 사람들 너무 순진한 거야? 아니면 내가 거짓말에 도가 튼 거야? 아무리 민첩성 향상 아이템이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오를 수는 없다. 나 정도의 연사와 점사를 행하려면 최소한 300이상의 민첩성이 필요한데.... 솔직히 한 제국 유저가 그 정도의 민첩성을 얻으려면 온 몸에 매직아이템을 도배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입가를 사악하게 말아 올렸다. 한발트에 도착한 우리는 아쉬운 이별을 가졌다. 제이슨 일행은 로렌시아 공국에서 주로 일을 맡아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었고, 우리들은 로렌시아 공국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제이슨 일행이 우리를 따라 오겠다고 하기도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내가 가야할 곳은 저들과 함께 가기 힘든 곳이기 때문이다. 제이슨 일행과 헤어진 나와 누나는 즉시 마도사길드를 찾았다. 일국(一國)의 수도이니 만큼 모든 길드가 존재했고 마도사길드 역시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나와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NPC안내원이 물어왔다. 나는 즉시 입을 열었다. "텔레포트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 서류를 작성해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건넨 서류를 받아들고 펜을 들었다. 내 이름과... 국적. 이동지점 등등을 기입하고 넘기자 그녀는 잠시 멀뚱한 얼굴로 서류를 훑어보았다. "목적지가 현자의 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맞아요." "죄송합니다. 현자의 탑은 일반인 출입 금지의 지역입니다." 그녀의 말 대로이다. 현자의 탑은 마도사 길드 중추가 모인 곳이니까. 현자에 탑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더블마스터의 위저드마스터들뿐이고 일반유저는 절대로 발을 드려놓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걱정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라키니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안내원의 표정이 일변한다. 나는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라키니스. 현 현자의 탑의 최고장로이다. 내가 알기로 최초의 메이지 더블마스터이면서 에리두 최강의 원진마법사. 엘프이면서도 정령마법은 안 배우고 엉뚱하게 원진마법과 백마법에 손을 댄 녀석인데 워낙 신비로운 것을 좋아해서 이 녀석을 알고 있는 유저는 현자의 탑 관계자 몇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라키니스가 해 낸 일 중에서 최고의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코 텔레포트 마법진의 발명이라 말 할 수 있다. 모든 에리두 유저들은 텔레포트 마법진이 그저 회사에서 만든 업데이트라 생각하는데 절대로 아니다. 라키니스 녀석이 만들어 에리두 전 지역에 퍼트린 것이다. 덕분에 녀석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은 10만 로얄이 넘는다. 10만 로얄이면 한제국의 10만금이니.... 이 정도면 민우형의 당문세가를 두 달간 먹여 살릴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더 월드 최고의 갑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먼지만 휘날리는데... 그 이유는 이 녀석의 지독한 도박성 때문이다. 도박을 밥 먹는 것 보다 좋아하는 녀석이라 툭 하면 도박장에 들어가 수입을 모조리 탕진하는 것이다. 물론 실력이 있다면 돈을 더 벌어 오겠지만... 이 녀석은 도박 쪽으로는 재능이 영~없다. 가지고 간 돈의 1/10만 남기고 돌아와도 그 날은 엄청나게 운이 좋은 날인 것이다. 거기에 심심하면 별 희한한 실험을 한다고 난리를 치면서 실패를 해 대니 그나마 있는 돈도 날려버리기 일쑤이다. 당연히 몇 안 되는 녀석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나의 입에서 현자의 탑 기밀에 속하는 라키니스의 이름이 나오자 안내원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현재 마도사길드 내에 손님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뭐 만약 다른 귀가 있었으면 내가 라키니스의 이름을 꺼낼 이유도 없었다.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급히 뒤쪽 방으로 들어갔고 나와 누나는 느긋하게 한 쪽의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문뜩 누나가 나에게 물어왔다. "라키니스가 누구야?" 나는 누나의 다리에 머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2년 전에 만난 녀석인데... 제가 알기로 이 곳 에리두의 마법사 중에서 최고로 강한 녀석이에요." "으응...."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지 입을 열었다. "왜 그를 만나려는 건데?" "무무 늙은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요." 누나는 내 말을 못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부드러운 허벅지에 볼을 비비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고 최강의 백마법사에 원진마법사예요. 또한 그의 특기는 텔레포트죠. 본래 텔레포트는 아무리 마법사의 레벨이 높아도 5명 이상은 이동을 못 시키죠. 하지만 라키니스는 그 것을 원진마법으로 극복했어요. 좌표만 있으면 최대 50명까지 한 순간에 어디든지 이동을 시켜 버릴 수 있어요." 그제야 누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듯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네. 이미 여기에 오기 전에 천희형과 민우형에게 은자림의 좌표를 구할 수 있을 데까지 구해 보라고 부탁을 해 두었어요. 그 것만 있으면 단번에 녀석들의 심장부에 들어가서 모조리 부수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죠." 에리두라면 텔레포트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어 있지만 한 제국은 아니다. 라키니스의 텔레포트로 무무의 뒤통수를 친다면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은자림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다. 내가 에리두에 온 것을 비밀로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무무가 알게 되면 혹시라도 내가 텔레포트를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내 뜻을 알아버리고 에리두의 마법사들을 한 제국으로 불러들여 방어를 한다면 내 생각은 단번에 물거품으로 되어버릴 것이다. 누나에게 라키니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을 때 안으로 들어갔던 안내원이 밖으로 나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누나의 다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보았다. "엔드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엔드라... 그 녀석이 언제부터 현자의 탑으로 갔지? 독고다이를 하는 녀석이기 때문에 길드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데.... 더구나 그 녀석은 암흑 마도사다. 현자의 탑과는 어울리지 않는데.... 뭐 만나보면 알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 녀석도 끌어들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나와 함께 안내원의 뒤를 따랐다. 안내원을 따라 5층의 방에 도착한 나와 누나는 중앙의 마법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마법진 안에 올라서자 곧 마법진에서 빛이 솟구쳤다. 주위에 마법사들이 없는데도 마법진이 발동되다니... 아마도 도착점에서 마법을 발동시킨 듯 하다... 뭐. 현자의 탑에는 150레벨 이상의 마도사가 널렸고 200레벨 이상의 마도사까지도 몇 상주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가뿐하겠지. 빛이 화악 눈앞을 가렸고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빛이 사라졌을 때 조금 전과 비슷한 방이었지만 나는 이 곳이 대륙 북부 케르시온산맥 중앙에 위치한 현자의 탑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안내원은 사라지고 대신 몇 명의 마도사들이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오. 한 제국의 최강자여." 문뜩 내 앞에 서 있던 마도사 중에서 검은색의 로브를 걸친 동안의 소년이 히죽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평소대로 해라 또라이야." 뒤쪽의 마도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동시에 엔드 녀석은 근엄함을 버렸다. "뭐 하러 왔냐? 이 씨바로마~!" 굿. 이제야 내 친구로군. 일단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몇 몇의 마도사들이 내 정체를 알기는 했지만 상관 없다. 엔드 녀석이 믿을만한 애들이라고 했으니까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엔드의 집무실로 간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나나 엔드나 복잡하게 말 돌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무무와 싸운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것 때문에 좀 준비할 것이 있어서 말야. 그보다 너는 어째서 현자의 탑에 있는 것이지? 물론... 라키와 친분이 있으니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너는 이런 것 싫어하잖아. 독고다이파 아니었냐?" 라키와 엔드... 그리고 나는 나이가 같다. 그리고 셋 다 한국인이다. 라키는 현재 평양에 살고 있고 엔드는 미국에 유학을 가 있는 상태인데 실제로 몇 번 보기도 했다. 나이도 같고.. 성격도 비슷하고 해서 우리는 금새 의기투합 한 것이다. 다만 내가 한 제국에서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할 뿐이지 메일로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라키는 엉뚱한 짓을 하기로 유명하고... 엔드는 나와 같이 낭인으로 사는 것을즐긴다. 그런데 엔드가 느닷없이 에리두 길드순위 2위의 마도사길드 수뇌부들이 모여있는 현자의 탑에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내 물음에 엔드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다. 분명 네가 여기로 올 줄 알았거든. 분명 전에 생각해 두었던 그것을 쓰려고 하는 거지?" 엔드의 말에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라키의 텔레포트를 이용한 한 제국에서의 전술은 이미 오래 전에 이들과 생각해 두었던 것이다. 거기다 엔드까지 추가하면 더 엄청난 짓을 벌일 수도 있다. 훗. 그 엄청난 짓이 뭐냐고? 그건 나중에 직접 보여주도록 하지.... "그런데 옆에 아가씨는? 네가 말한 애인이냐?" 대충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난 후 우리들은 이제 주위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엔드는 내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누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메일로 들었을 때는 구라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 안녕하세요. 저는 신지량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엔드 더 퍼시발... 그냥 엔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문진희라고 해요...." "하하. 그냥 말 놓으세요. 유빈이보다 연상이라면서요? 저 유빈이와 동갑입니다." 참 넉살도 좋다. 진희누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엔드의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우리는 말을 잠깐 멈춰야 했다. 난 내 앞으로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엔드에게 물었다. "그보다 라키녀석은 어디로 갔지?" "내가 아냐? 뭐 그 녀석 행동반경이야 뻔하지만.... 분명 어디 도박장에서 돈 뿌리고 있을 거다. 조금 전에 메시지 날려 봤는데 꺼 놨어." "여전하군...."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엔드도 동감한다는 듯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거기다 요즘에는 또 이상한 짓을 한다고 난리야." "이상한 짓?" 나는 문뜩 호기심이 일었다. 라키가 하는 일들은 100에 99는 실패이지만 1가지는 성공이다. 그것도 그냥 성공이 아닌 대박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텔레포트 마법으로 장사를 해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마도사길드는 상당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법 실험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법물품이 필요 하는데 그것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물품을 구입해 실험을 한다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실패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는가. 그런 재정적 압박을 한순간에 무너뜨려 버린 녀석이 바로 라키다. 처음에는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반대했었단다. 텔레포트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도사가 얼마 안 되니 시도조차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라키는 몇 달 동안 연구실에 들어박혀 결국 텔레포트 마법진을 만들어 내었고, 손수 에리두 전역을 돌며 각 지역 마도사길드 안에다가 마법진을 그렸다. 자그마치 1년이라는 시간동안 말이다. 정말 인간승리이지 않은가? 어쨌든 덕분에 마도사길드는 엄청난 재정적 이득을 얻게 되었고 순식간에 에리두 최강길드 2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외에도 라키가 엉뚱한 생각으로 대박 터트린 사건은 몇 개가 더 있다. 거의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지만 만약 성공만 하면 그건 십중팔구 대박이었다. "라키가 뭘 하겠다고 했는데?" "극대소멸마법을 개발하겠단다." "푸웃!" 나는 그만 입안에 있던 차를 뿜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엔드의 얼굴을 강타했다. 엔드는 얼굴을 구기며 수건을 찾았고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미.. 미안... 너무 놀라서.. 그런데 그 녀석 갑자기 왜?" "나도 몰라. 듣기로는 우연히 몇 십 년 전의 만화를 보고 나서 그런다고 하던데... 뭐 화계열의 원소와 수계열의 원소를 충돌시켜 어쩌고 설명하는데 나는 잘모르겠고... 어쨌든 그 때문에 한동안 원소마법을 배우더니 얼마 전에 실험을 하더라.. 뭐 결국은 폭발... 실험실 몇 번 박살나고 라키녀석 폭발에 휘말려 두 번 게임오버 당했다." 게임오버? 잠깐 그 녀석 얼마 전에 트리플마스터가 되었었는데... 그럼 설마? "그 자식 지금 260레벨이야." 역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라키의 실험에는 상당한 관심이 갔다. 실제로 화계열과 수계열의 원소 충돌은 나도 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다. 내가 익히고 있는 무상검록의 최종오의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간의 소멸을 행하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뭐 안쪽의 사항은 시스템 설정문제이니 넘어가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설정 상 화기(火氣)와 빙기(氷氣)의 충돌로 공간소멸을 행하니 마법으로도 그런 비슷한 것을 행하지 않을까? 무식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라키의 실험이 성공하도록 빌었다. "그래도 성공하면 끝내줄 것 같지 않아?" "나는 모르겠다. 분명 마법창조도 가능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해. 벌써 두 번이나 죽었고.. 더구나 근처에 있던 길드원들까지 휘말려 게임오버를 당했다. 뭐 내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있는 녀석이 죽어서 100 레벨대로 떨어지는 꼴은 보기 싫어." 뭐 그것도 맞는 말이다. 무모한 도전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 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드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 말꼬리를 돌렸다. "그보다... 무무를 이길 방법은 있냐? 솔직히 너는 배경이 없잖아. 뭐 문파를 만들면 되겠지만... 너는 그런 것 싫어하잖아. 괜히 밑에 애들 관리하면서 시비에 휘말리고 싫다며 절대로 문파는 만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냐?" 엔드의 말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두 개의 응룡패를 꺼냈다. 내가 꺼낸 응룡패를 보며 엔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그래도 너희들이 도와 주겠지?" "뭐... 안 도와 줄 이유가 없지." 가뿐하게 허락하는군. 나는 웃으며 응룡패를 그에게 던졌다. "하나는 네 것이고. 하나는 라키에게 줘. 그리고 5개월 뒤 한 제국으로 건너와라. 나머지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 줄게." "5개월?" 라키는 깜짝 놀랐다. 언제고 나와 무무가 싸울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5개월로는 너무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일 터이다. 은자림과 대항할 정도의 문파를 만들려면 최소한 1년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문파원들을 받고 체재를 정비하며 단합력을 길러야 한다. 그런 것들을 할 시간은 1년도 빠듯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5개월 뒤에 끝을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리 아니냐?" "충분해." 나는 문파는 만들지 않을 것이거든. 응룡회 하나로 은자림의 수뇌부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현재 나와 뜻을 같이 해주는 형, 누나...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특히 라키와 엔드가 도와주면 거의 확실하지. ".....흠.. 너한테 무슨 복안이 있겠지. 알았다. 그럼 라키한테도 내가 전하마. 그럼 이제부터 너는 어떻게 할거냐? 다시 한 제국으로 돌아갈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 곳으로 온 가장 큰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엘프의 숲으로 가 보려고 한다." "엘프의 숲? 중요한 일이냐?" 나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엔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흠... 좋아. 바쁜 일 같군... 텔레포트로 그 근처 도시까지 이동시켜 줄게." "고맙군." 18 - 초대 -내일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어제 누나가 나에게 한 말이다. 덕분에 현재 내 기분은 육일승천 창공을 누비는 천룡이라 말 할 수 있겠다. 냐하핫~! 더구나 그 뒤에 이은 누나의 말은... -요즘 제대로 식사도 안 하고 다니잖아. 알고 있어. 아침과 저녁도 다 빵으로 때우고 제대로 된 식사는 학교 급식 뿐이라는 것. 다 내 몸을 생각해서란다. 누나의 애정이 팍팍! 담긴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아아! 나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앗차차.. 이렇게 감동에만 빠져 설치고 있을 시간 없다. 벌써 11시가 아닌가. 빨리 준비하고 누나 집으로 가야 한다. 어디 보자... 어떤 옷을 입어야 어울리려나? 밥 먹으러 간다고 대충 차려입고 갈 수는 없다. 어쩌면 누나의 부모님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괜히 칙칙하게 하고 가면 옐로우 카드 감이다. -너 같은 추접스런 아이에게 내 사랑스런 딸을 줄 수는 없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찌하겠는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누나의 부모님의 눈에 꼭 들어맞는 단정한 모습으로 가야만 한다. 흠... 단정하게 보이는데는 정장이 좋지? 하지만... 그건 조금 내 나이와는 맞지 않다. 캐주얼 한 정장이 없나? 몇 벌 사 놓은 것이 있을 것인데 이사오면서 한 번에 싹 쳐 집어넣고 신경도 안 쓴 터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정장 좀 입고 다닐 것을 그랬다. 날마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대충 걸치고 편한 대로 다녔으니... 이제 와서 정장을 찾으려 해도 안 보이지... 아니 최소한 이사를 와서 잘 정돈이나 해 두었으면... 아! 찾았다. 쥐색 정장 한 벌이 내 손에 이끌려 나왔다. 하지만 얼마나 구석에 찔러져 있었는지 곳곳이 구겨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걸 이대로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 시계를 보고 시간을 계산해 본 나는 즉시 정장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아파트 상가의 세탁소로 향한 나는 재빨리 급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정장의 다림질을 부탁했고 주인 아저씨는 자신을 믿으라는 듯 신의 솜씨를 발휘해 구겨진 캐주얼 정장을 매끈하게 펴 주었다. 돈을 지불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손질했다. 처음에는 그냥 단정하게 드라이를 할까 하다가 너무 범생이 같이 보일 것 같아서 무스를 조금 이용해 세팅을 끝냈다. 그리고는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다 좋은데 눈이 문제였다. 내 눈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날카로운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이대로는 분명 마이너스 감이었다. 문뜩 안경을 쓰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류연씨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안경을 쓰지 지적으로 보이지 않았던가? 잠시 내가 안경을 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결론은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은 안경이 없으니 가는 길에 하나 맞추기로 한 나는 대충 뒷정리를 하곤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서며 수위 할아버지에게 '오늘도 데이트인가?' 라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보였다. 거기에 대해 수위 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오늘은 점령 해 버려!'라고 소리쳤고 나는 그대로 다리를 접질려 비틀거려야 했다. 호탕하게 웃는 수위 할아버지를 무시하며 나는 아파트를 나섰다. 그리고는 근처 안경점을 찾아 들어갔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안경을 하나 구입하려 하는데요." "시력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뇨. 도수가 없는 것으로 구합니다." 내 말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진열장으로 안내했다. 나는 잠시 진열장에 진열된 안경을 살피며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골랐다. 무테 하나와 타원형의 은테 하나... 정원형의 금테 하나였다. 세 가지 안경을 눈에 써 보고 나와 가장 어울리는 것을 찾아보았다. 흠... 역시 무테 쪽이 가장 나은가? 옆에 누나가 있다면 누나에게 묻고 구입을 하겠지만... 지금은 누나가 없으니 내가 그냥 대충 골라야 할 듯 싶었다. 나는 무테 안경을 선택하였다. "이 것으로 하고 싶군요." "렌즈는 그냥 렌즈로.. 아니면 칼라?" "칼라요. 연한 하늘색이 좋을 것 같군요." 내 말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경테를 가지고 뒤쪽 작업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렌즈를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주인이 테에 렌즈를 깨워 가지고 나왔다. 안경을 받아 든 나는 즉시 착용을 했다. 거울을 보니 썩 잘 어울렸다. 상당히 지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적어도 안경을 쓰지 않은 것보다는 좋았다. "얼마죠?" "10만원입니다." 카드를 꺼내 요금을 지불한 나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는 당연히 누나의 집!! 자!! 결전의 시간이다~!!! "어서 와. 일찍 왔네." 초인종을 누르자 누나가 웃으며 문을 열어준다.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누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누나의 집임에 앞서 진호의 집이기도 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고 종종 와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다르다. 이제까지는 누나의 부모님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만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호기롭게 결전이다~! 라고 외치고 택시에서 내린 지가 불과 몇 분전인데... 그 사이에 이렇게 주눅이 들다니 역시 나도 인간은 인간인가 보다. "부모님은요?" "나가셨어." 나가셨다... 누나의 이 한마디에 왜 이리 안정이 되는 것일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되니까." 이제야 나는 누나의 차림새에 시선이 갔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집에서나 입는 편한 티에 치마... 무엇보다 눈을 사로잡는 것은 에이프런!! 그런데 왜 갑자기 아무것도 안 입고 에이프런만 걸친 누나가 생각나는 거지...? 그래도... 만약 그럼 정말... 끝내 줄 거야.. 헤~. "왜 그래?" 누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침이 흘러내리지 않았나 걱정하며 재빨리 입술을 훔쳤다. 다행히 지저분하게 침을 흘리지는 않았나 보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누나가 만든 점심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감동이 일어서....." 내 말에 누나는 방긋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잡지를 들척이던 나는 문뜩 진호생각이 나서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그런데 진호는요? 아직 자요?" "진호? 아침에 나갔어~! 시연이랑 영화 본다고." 아아... 에? 잠깐?!! 그럼!!!! 지금 이 집에는 누나와 나 뿐이라는 말이잖아!!!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힐끔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바삐 움직이고 있는 누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윽...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거실을 맴돌다 그래도 자꾸만 쓸데없는 쪽으로 머리가 기울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몸을 혹사시키면 머리가 혼자 폭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행동인데... 결과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자 더욱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최종적으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수위 할아버지였다. -오늘은 점령해 버려!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왜 떠오르는 거야~!!!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던 나는 문뜩 뒤통수가 따가움을 느끼고 힐끔 시선을 돌렸다. 누나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멍청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 쪽이냐 진짜...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하하하.. 그냥 조금 몸이 나른해서...." 멀뚱하니 나를 보던 누나는 곧 풋 웃고는 몸을 돌렸다. "점심 다 됐어. 들어 와." 나는 재빨리 누나의 뒤를 따라서 식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위를 보며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이거 누나가 다 만든 거예요?" "응.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하하. 안 맞을 일이 있나? 이미 누나의 요리실력은 알고 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즉시 수저를 들었다. "이따다끼마스~!" 국을 한 수저 떠 먹어 보았다. 크으~! 이것이 바로 인생의 즐거움이다~!! 근래에 아버지가 야근하는 날이 많아져서 집에는 나 혼자만 남아있을 때가 빈번했고 당연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빵과 우유가 식사였고 조금 괜찮게 먹는다 싶으면 라면이었다. 당연히 이렇게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 되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늘이여~! 내가 누나를 만나게 해 준 것 정말 감사해~! 넌 정말 복 받을 거야~!! "근데 누나는 안 먹어요?" 문뜩 누나는 먹지 않음을 느끼고 의아함을 느낀 나는 물었다. 누나는 식탁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다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들면서 이것저것 주워먹다 보니 배불러. 그보다 이 나물 좀 먹어 봐. 맛있어." 누나는 나에게 고사리나물 무친 것을 밀어 주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는 누나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누나가 활짝 미소를 피운다. 정말 누나는 왜 이리도 웃는 모습이 예쁜 거야.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건 완전히 인내심 테스트 같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풀었다가는 그대로 누나에게 달려들어 버릴 것만 같아. 역시 남자는 다 늑대인가 보다. 그보다 지금 우리의 모습... 꼭 신혼부부 같지 않은가? 언젠가는 신혼부부 같지 않은가?가 아니라 진짜 신혼부부가 되기를 기원한다. "왜 그래?" 내가 누나를 보며 실실 웃자 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그냥 나중에 누나랑 결혼하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서요."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나는 꼭 누나와 결혼하고 말 것이다. 내 말에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날 바라보았다. 나는 빙긋 웃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얼마 후 나는 포만감을 느끼며 수저를 놓았다. 그렇게 많이 먹지 않는 나인데 어쩌다 보니 두 그릇이나 비워 버렸다. 누나가 애써 차려준 것을 남기기 싫어서 반찬도 모조리 쓸어 버렸다. 덕분에 위장이 아프다고 고함을 지른다. "누나.. 소화제 없어요?" "그러기에 조금만 먹으라고 했잖아." "너무 맛있어서요." 내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누나는 새침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분은 좋은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빙긋 웃는다. 누나가 준 소화제를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 후 누나가 홍차 두 잔을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마실 수 있겠어?" "잠시만요... 좀 있으면 괜찮아 질 거예요." "훗. 무리하지는 마.." 아아. 나도 좀 무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뭐 하겠나? 한시라도 빨리 소화를 시켜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한 누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누나가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누나가 양손을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뭐가 달라 진 거지? "눈감아 볼래?" 눈?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곧 무흣한 웃음을 흘렸다. 누나의 부탁대로 눈을 감아 주었다. 곧이어 예상대로 내 이마에 누나의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 입술에 한 키스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 섭섭하기는 하다. 뭐 내가 직접 하면 되지. "꺅!" 나는 즉시 누나를 안고 소파 위로 쓰러졌다. 짤막하게 비명을 내지르는 누나..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흥분제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고 보니까.. 누나랑 상당히 오랫동안 키스를 못 한 것 같아요."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던 누나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린다. 나는 양손으로 누나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너무나 좋다. "키스해도 되죠?" 누나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지만 미약하게 끄덕여지는 고개는 분명 허락을 뜻한다. 나는 웃으며 누나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난 나는 이제 진짜 목표지점에 번지를 했다. 근 한 달만에 느껴보는 누나의 입술 감촉... 순간적으로 내 몸이 화학 달아오른다. 천상의 과실보다도 더 달콤한 누나의 입술을 탐하며 나는 왼손을 누나의 허리로 향하였다. "으흠...." 희미하게 표현되는 누나의 신음소리가 내 욕망을 더욱 부채질한다. 순간 머릿속에서 수위 할아버지가 재차 '오늘 점령해 버려!'라고 소리친다. 나는 수위할아버지에게 대답해 주었다. '아듀~.' 오른 손을 이용해 누나의 길다란 목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살결.... 만지기가 겁날 정도다. 누나의 맞댄 입술을 떼며 가빠오는 숨을 골랐다. 누나도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다듬으며 날 올려다보았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던 나는 누나에게 허락을 구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누나가 내 눈앞에 내민 포장된 상자가 먼저였다. ".....이거 뭐예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선물." 선물....? 오늘이 무슨 날인가? 내 생일은 아닌데. 누나의 생일? 아니다. 더구나 누나 생일이라면 누나가 나에게 선물을 줄 이유가 없잖아. 발렌타인 데이? 쓸데없는 소리... 지금은 늦봄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누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음을 느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순간 누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헉!! 설마 오늘 그렇게 중요한 날이었나? 으아!! 기억해 내라!! 이 망할 머리야~!! 아이큐 190이라고 잘난 체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리 구식 컴퓨터로 다운된 거냐~?!!! "정말 몰라?" 누나가 실망한 얼굴로 물어온다. 머리를 잡고 신음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동시에 누나가 선물을 나에게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보!" 으악!!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야? 설마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헉!!!! 그러고 보니 오늘 며칠이지? 5월 12일? 크아악!!!! 진짜 누나와 내가 만난 1주년이었잖아!!!!!!!! "누나! 정말 미안!!" 나는 양손을 모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누나는 나를 잠시 노려보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짜 화가 난 모양이다. 이거 최유빈 일생 일대의 대 실수다!! 어떻게든 누나의 화를 풀어야 했다. 나는 부리나케 누나가 던진 선물을 주머니에 넣고 누나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누나는 침대 위에서 팬더 인형을 안고 풀죽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미안! 정말 미안해!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어!" "흥." 내 사과를 받지도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하긴 나라도 누나가 기념일을 잊는다면 무척이나 슬플 것이다. 누나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정말 내가 나쁜 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나 제발 화 풀어요~! 제가 뭐든지 다 할게요! 네?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밖으로 나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라고 소리치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비굴하다 욕하지 마라. 남자망신 다 시킨다고 혀를 차지 마라... 남자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병신이 되는 법이다. 이건 정상이다! 나는 누나 앞에서 그야말로 싹싹 빌었다. 파리가 되었다. 이런 나를 잠시 바라보던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내 모든 신경이 누나의 다음 행동으로 향했다. 용서를 해 줄 것인가? 아니면? 누나는 내 옆을 지나쳐 갔다. 힐끔 고개를 돌려보았다. 누나가 책상 위에 있는 링크헤드셋을 들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대체 지금 왜? 의아한 얼굴로 누나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링크헤드셋을 들고 다시 침대 위로 돌아온 누나는 머리에 링크헤드셋을 썼다. 순간 나는 누나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누나!!!!" 누나는 그대로 더 월드에 접속을 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내가 아무리 여기서 누나에게 사과를 해도 말짱 헛것이 되어 버렸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나는 결국 결심을 하고는 즉시 누나의 집을 나와 근처 넷 룸을 찾았다. 대략 20분 정도를 헤매다 넷 룸 하나를 발견한 나는 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자리 하나 주세요!!" "..........기본요금은........." "여기 카드요!" 나는 카드를 던지다 시피 주인에게 주고는 즉시 몸을 돌렸다. 주인이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기.. 카드는......." "더 월드 자리나 줘요!!" 지금 카드가 급한 것이 아니다. 주인은 황급히 요금을 계산하고는 나에게 카드를 넘겼다. "5번 자....." 뒷말은 듣지도 않았다. 5번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즉시 더 월드에 접속했다. 리스가 된 곳은 에리두의 엘프의 숲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나르실이었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누나가 근처에 있나 살폈다. 하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는지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나!] 두 번째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재차 메시지를 보냈고 돌아오는 것은 '차단되었습니다'라는 차가운 문구뿐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게임에 접속되어 있다는 말이니 안도했다. 우선 마을은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누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르실은 상당히 큰 마을이어서 누나를 찾기가 힘들었다. 지나는 유저들에게 물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최후의 방법을 생각했다. 어디... 이래도 안 나오나 보자고!!!! "누나!!!!!!!!!!!!!!!!" 나는 창룡후를 펼치며 목청껏 누나를 불렀다. 어찌나 우렁찼는지 나르실 마을이 일순간 들렸다 내려앉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를 막고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재차 창룡후를 펼쳤다. "제가 진짜 죽일 놈이에요~!!!!!!!!! 그래도 최소한 사과를 할 여지는주어도 되잖아요!!!!!!!! 누나!!!!!! 제발 좀 나와요!!!!!!!!!!!" 주위에서 점차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듯 싶었다. 나는 열심히 누나를 부르며 사과를 했고 결국 마을은 폭소로 물들었다. "큭큭.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만 용서 해 주지 그래." "그래도 저런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맞아." 사람들도 내 편이 되어주었다. 나는 더더욱 목소리를 높여 누나를 불렀다. 결국 내 의도가 성공했는지 누나가 얼굴을 붉히며 달려와 내 손을 잡고 골목으로 달렸다. 삐익~하는 휘파람 소리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나와 누나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안 보이는 곳에 도착한 누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리곤 나를 쏘아보았다. "바보야! 그렇다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해?!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잖아." 누나가 소리쳤지만 그래도 화는 많이 풀린 듯 싶다. 여자는 의외의 상황에서 감동을 받은 법이다. 아무리 부끄러운 상황이라 해도 그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사과를 했으니 충분히 감동하고도 남으리라... 나는 웃으며 누나의 몸을 껴안았다. "용서 해 주는 거죠?" "몰라! 정말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니 역시 용서해 주는 거네요." 누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 우리 나갈래요?" "어딜?" "오늘 같은 날에 집에만 있어서 뭐 해요? 나가서 놀아요. 영화도 보고." 잊어버린 만큼 더욱 누나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누나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고 싶었다. 나는 누나를 보며 미소지었고 누나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고 있어요. 금방 누나 집으로 갈 테니까." "으응...." "예쁜 옷으로 입고 있어야 되요." 내 말에 누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넷 룸에서 나온 나는 즉시 누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10분 정도를 달려서 누나의 집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곧 안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누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 온 것인가? 그건 아니었다. 설마 누나의 어머니가 돌아 온 것인가? "진희누나 있어요?" 내 물음이 끝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 사이에 진희누나의 어머니가 돌아오셨나 보다. "누구지?" "최유빈이라고 합니다." "최유빈....?" 진희누나의 어머니의 표정이 약하게 찡그러졌다. 왜 그러지? "혹시 아버지 성함이....?" 아버지? 그건 왜 묻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정중히 말했다. "최 성자 훈자 쓰시는......" 나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진희누나의 어머니의 표정이 무척이나 싸늘하게 변했던 것이다. 설마..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나? "아! 유빈아! 왔어?" 때마침 누나가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나는 생각을 접고 누나에게 웃어 보였다. 진희누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진희.. 너 잠시 나 좀 보자." 갑자기 진희누나의 어머니가 누나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빈군. 진희는 바빠서 안 되겠어. 오늘은 그만 가 보도록 하세요." 동시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나는 굳게 닫친 진희누나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나 장래의 장모님께 미움을 받은 것인가?!! Oh!! My god~!!!!!! 19 - 드디어.... 며칠 동안 누나를 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 거의 매일을 게임에서 만났는데 그렇지 못하자 나까지 게임에 흥미를 잃어버릴 정도였다. 진호에게 들어보니 그 날 진희누나와 어머니가 대판 싸웠다고 한다. 이유는 진호도 모른다고 했고.. 어쨌든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집안에 찬바람이 쌩쌩 분단다. 무서워서 진호와 진호의 아버지는 입도 뻥긋 못하고 산단다. 대충 추측을 해 볼 수 있었다. 진희누나의 어머니가 진희누나에게 나를 만나지 말라고 했고.... 누나는 그것에 반대해서 의견대립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아.. 나 그 정도까지 어머님께 미움을 받은 것인가? 허탈한 한숨만 나올 뿐이다. 분명 내 눈초리가 사나워 건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날 이때까지 내 눈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좋아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이 날카로운 눈이 처음으로 싫게 느껴진다. 결국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우선 누나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즉시 누나가 다니는 혜하대학교로 향했다. 이미 누나의 시간표는 모조리 꿰고 있는 나다. 지금 가면 누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혜하대학교에 도착한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누나가 수업을 듣는 강의실을 찾았다. 마침 수업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강의실 앞에서 벽에 등을 대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약 10분 정도가 흐른 후 수업이 끝났는지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곧 강사가 나왔고 뒤이어 학생들이 하나 둘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몇몇은 나를 힐끔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무시해 주고 누나만 찾았다. 그들도 곧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제 갈 길을 갔다. "누나~!" 얼마 후 진희누나와 시연누나가 나왔다. 나는 웃으며 누나를 불렀고 둘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진희누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뜨거워.. 뜨거워.. 방해자는 이만~." 시연누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시연누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곤 누나에게 다가갔다. "왜 요즘에 게임에 접속 안 해요?" "으응......" 누나는 머뭇거리며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와 싸웠다면서요?" 누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재차 물었다. "저 때문이죠?" "으응....." "흐음...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누나의 어머님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할게요." 내 말에 누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으며 누나의 앞머리를 쓸어 내렸다. "시간은 많잖아요." 잠시 후 누나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어렸다. 내 팔을 잡은 누나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끼었다. "오늘 과 선배들하고 술자리가 있는데.. 같이 갈래?" 술자리....?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누나는 왜 그러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버지하고만 술을 마셔 본 터라........" 누나는 잠시 나를 보더니 풋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도 우리 아버지의 주량을 나에게 많이 들어 알고 있다. 더구나 종종 내가 아버지와 술을 먹고 취해서 다음 날 비틀거리는 모습도 보았고 말이다. "그냥 가볍게 마시는 거야." "하하.. 그렇겠죠?" 세상에 우리 아버지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저 미성년잔데 괜찮을까요?" "술 마실 생각이었어? 유빈이 너는 그냥 콜라나 마셔." 누나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내 머리를 콕 찔렀다. 그러고 보니... 술자리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했지 나보고 술을 마시라는 말은 안 했잖아. 이거 혼자 삽질한 꼴이었다. 나는 무안함에 턱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교가 있으면 의례 그 근처에는 대학로가 생기는 것이다. 대학로를 그저 뜻풀이를 해 보면 대학교 근방의 길이 되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다른 뜻으로 쓴다. 상가 밀집지역. 대학교 근처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상가 밀집지역이 생겨난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만큼 편하고 이윤이 남는 장사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호황을 이루는 것이 바로 술집이다. 소주방이나 호프집은 대학로에 널렸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더 하고 싶은 법이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술을 못 마시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 와중에 성년이 되어서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면 주체를 못하고 모든 일에 술을 곁들이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술자리.... 이건 하나의 문화다. 어떤 곳은 거의 매일을 술자리를 가지는 곳도 있을 정도이니까... "진희야! 여기다! 여기~!! 어라? 유빈이 넌 왜 왔냐?" 선우형이다. 벌써부터 술자리가 한창이다. 참나.. 아직 4시 정도인데... 이거 좀 이른 것 아닌가 몰라....? 나는 진희누나와 함께 시연누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히죽 웃으며 선우형에게 답했다. "누나를 지켜야죠. 늑대들이 이렇게 널렸는데 제가 어찌 안심하고 있을 수가 있을까요?" 몇몇 남성들이 괴성을 지르며 술잔을 치켜든다. 나 참..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할 것이지... 야유를 보내다니. 그렇게 꼬우면 형님들도 여자친구 만드시죠. 이미 상당량 술을 마셨는지, 아니면 술에 약한 것인지 몇몇은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하지만 선우형은 아직 꿋꿋하다. "그래도 임마. 너는 미성년자야!" "그래서 술은 안 마실 거예요. 그냥 저는 누나의 보디가드라니까요." 하지만 선우형은 손을 저으며 나에게 잔을 하나 넘긴다. "우우~! 술자리에서 그렇게 빼면 재미없지~!!!" ......미성년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술잔을 내미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야? 나는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손을 내저었다. "누나가 마시지 말랬단 말이에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차 폭주가 일어났다. "으악~!! 야! 방금 들었냐?!" "누나가 마시지 말랬단 말이에요~!" "이 자식아! 남자 망신 그만 시켜!" 선우형이 그대로 내 입에다가 술을 들이부었다. 나는 반항을 했지만 다른 형들이 합류해 내 몸을 잡고 선우형의 행위를 도왔다. 나는 누나를 힐끔 보았다. 일종의 구조요청이었다. 하지만 누나도 시연누나에게 잡혀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결국 나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종래에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포기를 해 버렸다. 될 대로 되라~. 벌써 7시이다. 거의 3시간이 흐른 것이다. 술이 약한 사람들은 벌써 쓰러져 헤롱헤롱거리고 있다. 나야 물론 멀쩡하다. 자제를 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와 상대하다 보니 맥주 정도는 술도 아니게 되어버린 이유가 더 크다. 분명 나는 술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에 비했을 때다. 타인과 비교하면 내 주량은 평균을 조금 웃돈다. 본래는 평균이하였지만... 자꾸 마시다 보니 내성이 생겨 버리더라고... 소주 8병을 원샷 때린 경험이 있는 내가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쓰러지면 아버지가 분명 특훈을 부르짖으며 달려들리라... 이런 나에 비해 누나는 조금 취한 듯 보였다. 지금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가는 숨을 내쉬고 있으니 말이다. 취기가 올라 붉게 물든 뺨이 자꾸만 내 시선을 잡는다. "2차다!! 2차~!!" 그때 마침 선우형이 호기롭게 외친다. 동시에 뻗어있던 형들이 고개를 들고 호흥을 한다. "와아~!" 하지만 힘은 없다. 어렵게 든 손은 그대로 추락한다. 저 상태로 어떻게 2차를 가려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래도 안 되면 친구까지 이용하라... 곧 죽어도 시원찮을 모습을 해 가지고 끝까지 발악을 한다. 그 집념에 감탄을 한 것일까? 아직 멀쩡한 친구들이 손길을 내밀어 준다. "고맙네 친구." "무슨 말씀을.... 2차는 네가 쏴!" ......여기서 제 정신이면 그대로 손을 쳐내며 '미친!'이라고 소리칠 것이지만.. 누누이 말해 현재 그 형은 제정신이 아니다. 술 취하면 무모한 도전을 실행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 분명 언젠가 카드 값 청구서를 보고 절규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3차까지 쏘마~!!! 그리고 이번 술값도 내가 내지!" .....나중에 청구서 날아오면 저 형 자살기도를 하지 않을까...? 뭐... 설마 그 정도까지야 가겠어? 선우형이 팔을 들며 소리쳤다. "자자! 그럼 2차는 소주방이다!" "와우~!" "그리고 3차는 단란주점!!" "와아아~!!!" 갈수록 가관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뭐 나와 누나는 여기서 빠질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호프집을 나온 나는 누나를 부축하며 선우형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뭐라?!! 유빈군! 도망치는 것인가?!" 선우형과 다른 형들이 대번에 악귀같이 얼굴을 구기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서요." "안돼!" "그럼 전 갑니다." 무시하며 누나와 함께 몸을 돌렸다. 동시에 선우형이 따라와 길을 막았다. 나는 재빨리 오른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파라다이스다!" 파라다이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기 아이돌 그룹이다.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아이돌 그룹이기도 했다.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내가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유명하겠는가. 예상대로 선우형과 다른 형들의 고개가 대번에 돌아갔다. "어디? 어디?!" 어디긴 어디야? 방송국에 가서 찾아야지. 나는 혀를 삐죽 내밀고 선우형을 지나쳐 달렸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눈치챈 형들이 광분하며 뒤따라 왔지만 이미 술에 취할 대로 취한 그들이 나를 따라 올 수 있을 턱이 없다. 금새 거리를 벌인 나는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크아악!! 최유빈!! 남자로서 그건 배신! 배반이야!! 알아?!" 형한테까지 남자이고 싶은 생각 없네요. 나는 누나의 남자면 그만이다. 히죽 웃어 보이고 재차 길을 갔다. 악을 지르던 형들도 결국은 포기하고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소리를 지른 후 누나들과 함께 근처 소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나는 누나에게 말했다. "가요. 택시 잡을 게요." 그렇게 말한 나는 길 쪽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누나가 잡았다. 내 옷깃을 잡는 누나를 돌아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누나는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누나를 바라보았고 얼마 후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작은 목소리였기에 자세히 들을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히려 노력했다. "잘 못 들었어요. 다시 한 번 말해 줘요."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에....? 나의 머리에서 타종이 인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곧 이어 내 기분은 급격히 상승했다. 동시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어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몰라도 누나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다. 그런 누나의 머리에 잠시 내 이마를 가져다 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할 수만 있다면 단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누나를 보내려 한 것은 누나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누나도 나와 함께 조금 더 있고 싶다고 하는데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나와 누나는 걸었다. 어디로 갈까?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냥 지금의 만족감을 음미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누나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나의 팔짱을 끼고... 나에게 몸을 기댄 채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온다. 얼마를 걸었을까...? 문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번쩍이는 네온사인들이었다. 물론 밤이니 만큼 어느 가게나 간판에 붉을 밝힌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간판의 글귀였다. -Hotel ........이거 잘 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팍팍 든다. 누나도 주위를 둘러보며 아연한 얼굴이다. 나에게로 돌려지는 누나의 시선을 슬쩍 피하였다. 이거... 일부러 이곳으로 왔다고 의심받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즉시 몸을 돌렸다. 어차피 들어 갈 곳도 아니다. 그럴 바에야 미련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 그런 나의 옷깃을 누나가 잡아챘다. "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누나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전보다 더욱 붉어진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누나가 조용히 말했다. "나... 오늘은 괜찮아." 무슨 말이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정신을 차려보니 호텔 방이었다. 정말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귓가를 맴도는 물소리... 누나가 샤워를 하는 것이리라... 갑자기 온 몸이 달아오른다. 이런 진행을 나도 바래왔다. 누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꼭 누나의 모든 것을 가지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내 다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몸에 힘을 빼고 풀썩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괜히 실실 웃음이 나왔다. 허탈해서..? 아니다. 너무 좋아서다. 나는 볼을 꼬집어보았다. 짜릿한 아픔이 지금 상황이 결코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현실인 것이다. 므하하하!! 즐거운 기분으로 침대를 굴렀다. 솟구치는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고... 한 바퀴. 두 바퀴.. 에라 그냥 끝까지 구른다!!! 쿵!!! 침대에서 떨어졌지만 아프지 않다. 물론 몸이 얼얼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바닥에서도 다시 뒹굴며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한시라도 빨리 누나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바랬다. 얼마 후 물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열리며 누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부끄러운 듯 붉게 물든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누나...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인다. 누나가 천천히 욕실에서 나왔다. 옷은 입고 있지 않다. 그냥 큰 타올로 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이 나에게 기묘한 흥분을 선사한다. 누나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아직 물기가 묻어있는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다가와 내 정신을 일깨운다. 나는 손을 들어 누나를 안았다. 촉촉한 살결이 내 손끝 신경을 자극한다. "안 씻을 거야?" 생각 같아서는 그냥 누나를 이대로 가져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누르며 누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욕실로 향했다. 급할 것은 없다. 누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 잠깐의 시간도 못 참는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욕실로 들어섰다.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탈의실이나왔다. 한 쪽에는 누나가 벗어놓은 옷들이 놓여있다. 옷 틈으로 보이는 속옷을 보며 나는 다시금 흥분하고 말았다. 흠... 저 속옷을 들고.. 변태 짓 했다가... 일 나겠지? 잠시 과거에 보았던 변태만화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던 나는 시선을 거두고 옷을 벗었다. 옷을 입고 샤워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벗은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진다. 그 습한 기운을 타고 누나의 체취가 전해지는 것 같다. 나는 물이 나오는 곳으로 가 온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천장에서 비처럼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따뜻한 물기가 내 몸에 닿으며 건조한 육체를 촉촉하게 물들였다. 10분 정도 쏟아지던 물방울들이 멈추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자극하는 물기를 밀어냈다. 그리곤 타올을 하나 주워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먼저 머리를 대충 털고 난 후 얼굴부터 시작해 물기를 지워 나갔다. 몸을 다 닦자 타올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젖은 타올을 구석으로 던져놓고 새 타올을 꺼내 하체를 가렸다. 대충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욕실을 나왔다. 누나는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누구에게 전화가 온 것인가? "누구예요?" 내가 묻자 누나는 휴대폰 전원을 끄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다가 전화 한 거야." "아아... 네. 어머님이 받아요?" "아니... 아무도 없어. 진호가 있을 것인데 게임을 하고 있나봐." 누나의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이시다. 때문에 두 분 모두 저녁 늦게나 들어오시는 경우가 많으시단다. 오늘도 늦게 들어오시는 것 같다며 누나는 안심하는 듯 했다. 나는 누나의 옆에 앉으며 빙긋 웃었다. 손을 뻗어 누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나는 천천히 몸을 누나에게로 기울였다. 누나는 눈을 감았고 나는 누나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오른 손으로 누나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누나의 몸에 일순 힘이 들어갔지만 곧 힘을 빼고 내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나는 누나의 몸을 눕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상기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누나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응...." "후회 안 하죠?" "안 해." 누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누나의 몸을 껴안았다. 이제부터는 누나가 싫다고 해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누나는 내 것이다. 누나의 몸은 내 것이다. 반항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것이다. 누나의 몸에 감겨있는 타올을 벗겨냈다. 곧 누나의 새하얀 나신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누나는 몸을 비틀며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그런 누나의 자세가 더욱 섹시해 보일 뿐이다. 내 하체를 감싸고 있는 타올도 던졌다. 이미 나도 흥분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나를 보던 누나는 눈을 질끔 감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누나의 목을 핥으며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나... 처음이야......" 알고 있다. 누나는 처음일 것이라고 이미 예전부터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는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누나는 내 보물이니까. 하지만 문뜩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실상.... 나는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사귀는 여자는 분명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안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 사라져 버린 내 감정을 되돌려 준다며 천희형이 그렇고 그런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총각딱지를 떼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자를 안으면 혹시 강렬한 충격으로 감정이 분출될 수도 있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 때는 누나도 몰랐고.. 후에 누나를 사랑하게 될 지도 몰랐기에 내 동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었다. 그저 형의 말대로 감정을 되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곳의 창녀를 안았었다. 뭐.. 결론은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았다. 이런 사실을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로 인해 누나가 날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나에게는 언제나 정직해지고 싶었다. 내가 행위를 멈추자 누나도 눈을 뜨며 날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누나에게 말했다. "저.. 사실 처음이 아니에요." 누나는 조금 놀란 듯 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변명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의 일을 말하였다. 이미 내가 과거에 어떠한 상태였는지 알고 있는 누나였기에 설명하기는 쉬웠다. 대략 1분간 상황설명을 한 나는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누나가 용서해주기를 바랬다. 최소한 따귀 한 대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기를 바랬다. 나를 제발 밀어내지 않기를 바랬다. 내 목을 감싸는 누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조금 뒤에 누나가 나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누나...." "앞으로는.... 나만 봐 줄 수 있어?" 나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내 얼굴을 쓰다듬는 누나의 손길이 너무도 감미롭다. "고마워요...." "조금은 나도 화났어. 하지만... 숨기지 않고 말해줘서 용서해 준거야. 숨겼으면 나는 평생 몰랐을 것이니까." 따뜻하게 웃는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나는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가슴이 내 손에 일그러진다. 조금은 딱딱해진 유실이 손바닥을 자극해왔다. 누나는 '으흠...'신음을 흘렸다. 너무도 사랑스런 누나... 내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다. 누나는 영원히 내 보물로 남을 것이다. 절대로 슬프지 않게 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것이다. 나는 서서히 누나를 소유해 나갔다. 이날 누나는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20 - 숨겨진 계곡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당근."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빛의 내 몸을 감싼다. 눈앞을 가리는 백색의 광원에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빛의 입자가 수없이 내 몸을 스쳐갔다. 빛으로 된 터널을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저 멀리 세상이 보인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더 월드의 세상.... 나는 종래에 또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흠.. 누나는 아직 안 왔나?" 잠시 누나의 접속 현황을 살펴본 나는 입맛을 다시고 근처 주점을 찾았다. 누나가 들어 올 때까지 시간이라도 때울 생각이었다. "어서 오세요." 주점의 점원이 밝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빈자리에 찾았다. 손님이 많았지만 큰 주점이라 빈자리는 곳곳에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며 뒤따라온 점원에게 물을 한 잔 주문했다. 툴툴거리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NPC가 아닌 플레이 유저인가 보다. 돈이 궁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저이겠지... 툴툴거리는 것은 주점에 와서 물을 찾는 나에게 불만을 표현한 것이리라... 나는 점원의 뒷모습을 잠시 보며 피식 웃다가 시끌벅적한 주점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이런 주점에서 재미있는 정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아는 나이기에 유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호기심을 무식하게 돋구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대부분은 별로 신경쓸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뭐 별것 없을 것 같았기에 신경을 끄려하는 내 귀로 한 유저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게 뭐지?" "응? 아.. 어제 그리폰을 사냥해서 얻은 거야.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주워 온 것인데.....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계곡...... 나를 찾으라? 이게 뭐야?" 나는 그들이 살펴보고 있는 돌 조각을 응시했다. 원래 하나의 석판인 듯 싶었는데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진 것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결코 내 눈을 잡을 수 없는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전에 저런 석판을 나도 얻어 본 적이 있었던 지라 내 모든 신경은 일시에 그 석판으로 향했다. "계곡과 나를 찾으라? 흠.... 전에 내가 얻은 것은.....?" 숨겨진이라는 글자와 하늘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별로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냥 던져버렸는데... 실수했나? 그 때는 그냥 어디 석상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라고만 생각했었기에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 내용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다. 물론 저 석판과 당시 내가 얻은 석판조각이 한 쌍이라는 것을 알 수 없지만... 저 석판조각을 보자마자 당시의 석판조각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흠.. 숨겨진과 계곡이 연결되는 건가? 그럼 숨겨진 계곡? 거긴 엘프의 숲 북쪽에 위치한 최고레벨 사냥터인데. 흠.. 단서는 거기에 있는가? 그럼... 하늘과 나를 찾으라는 뭐지? 머리를 누르며 생각을 해 보았지만 결론은 '여기서는 확인 불가'였다. 어쩔 수 없이 숨겨진 계 곡에 가야 한다. 조금 뒤에 누나가 들어오면 함께 가 보기로 다짐했다. 마침 누나가 게임에 접속했는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찍 왔네. 어디야?] [리스장 바로 앞에 있는 주점이에요. 제가 나갈게요.] [알았어.] 나는 즉시 주점을 나와 누나를 찾았다. 리스장 앞에서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에 몇 마리의 날파리들이 날아다녔지만.... 내가 가볍게 총을 꺼내 웃으며 겨누자 자진해서 다른 곳으로 사라져 주었다. 물론 몇몇은 자기 실력을 뽐내며 시비를 걸어오기는 했지만 내가 누나의 몸을 껴안고 이마에 입술을 맞추자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한 달 전 내가 누나를 완전히 소유한 그 날부터 나와 누나는 더욱 거리감이 없어졌다. 물론 누나는 아직 주위에 사람이 있을 때는 자제를 하지만,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귀엽게 웃으며 자진해서 나에게 입술을 맞추어 줄 정도이다. 나야 본래부터 그랬는데 뭘 더 거리끼겠는가...?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 아수라 치킨공작으로 불린다. 백작에서 두 단계나 상승한 것이다. 언젠가는 황제자리까지 노려볼 생각이다. 훗~. "오늘도 엘프의 숲에 갈 거야?" 마을을 나서며 누나가 물어왔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뇨. 다른데 가 볼 데가 있어요." "다른데?" "네. 따라 와 보면 알아요." 누나는 호기심을 가지며 나를 따라왔다. 하긴 근 세 달 이상 엘프의 숲에서만 수련을 쌓은 터라 지루했을 것이다. 뭐 덕분에 현재 누나는 상당한 레벨 업을 이루었다. 이미 내가 누나의 스승으로 있어 보았자 어떤 이득도 없는 터라 사제관계도 청산시켰다. 현재 누나의 레벨은 258이다. 나의 레벨은 349.... 이 망할 놈의 1레벨이 죽어라 오르지 않는다. 에고야.. 뭐 언젠가는 오르겠지.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나의 레벨 업이니 말이다. 나는 은자림과 싸우기 전에 누나의 레벨을 최소한 280이상으로 올리려고 한다. 250레벨부터는 레벨 업이 정말 노동이나 다름없지만... 얼마 안 있으면 여름방학과 함께 여름이벤트 기간이 온다. 그 때 죽어라 노력하면 280레벨도 충분히 가능할 듯 싶었다. 280레벨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의 레벨이 되어야 누나의 지력을 제외한 기본능력이 극성에 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최대한 능력을 높여 놓아야 은자림과 싸울 때 누나가 죽을 위험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누나는 빼고 싶지만.... 그건 누나를 무시하는 처사 같기도 하고 누나도 절대로 빠지고 싶지 않다고 하니... 능력이라도 최대한으로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나의 풍운조화검결은 9성.. 만상조화심결은 8성에 이르렀다.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때까지 극성에 이르기 불가능할 듯 싶었다. 그 외에 만상풍운조화서에 수록된 여러 가지 기술들은 대략 80% 가량을 익혔다. 늦게 익히기 시작한 것들이 오히려 풍운조화검결의 성취를 넘어서 버린 이유는 누나의 지력 때문이었다. 무공에도 오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복합적인 상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진법술과 의술 같은 것들은 오로지 지력수치 하나만을 필요로 하니 금새 성취도를 보인 것이다. 이건 놀면서 익혀도 몇 달이면 극성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법술은 완전히 절정에 이르러 있고.... 의술은 거의 극에 다다른 상태다. 부작술도 의술과 거의 비슷하고.... 문제는 동물과 심령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화통령공(調和通靈功)뿐인데 이건 아직 6성에 머무른 상태였다. 뭐.. 현재는 꼭 필요한 기술이 아니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보다 근래에 누나와 나는 하나의 진법을 연마하고 있다. 일종의 이인 합격진인데 한마디로 둘이서 힘 합쳐 적을 몰살시키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만상풍운조화서에 수록되어 있는 천지진결(天地陳結)이라는 합격진법이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겨우 사성의 성취를 이루었을 뿐인데도 에리두 일반 몬스터 중에서 최강이라고 알려진 사이클롭스 열 세 마리를 금새 제압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절정으로 연마했을 때 한 대륙의 절정고수 열 정도와도 나와 누나 둘이서 대적할 수 있을 듯 싶었다. 때문에 우선 현재의 최대 목표는 이 천지진결을 최대한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뭐 그 외에도 누나의 레벨업, 무공수련 등등의 목표가 있지만... 역시 그래도 최대의 목표는 천지진결이라고 말 할 수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는 경공을 쓰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걸어서 겨우 숨겨진 계곡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숨겨진 계곡.... 남방의 화룡의 둥지와 서쪽의 절망의 늪과 함께 에리두 3대 금지로 속하는 지역으로 출현하는 몹들은 하나같이 최상급 몹들뿐.... 웬만한 고렙 유저로 이루어진 파티가 아니라면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게임오버 되기 딱 좋은 곳이다. 특히 계곡 중앙에 있는 아르멜의 타워의 꼭대기에는 유니크 몹인 아크데몬이 존재했었다. 지금은 데몬 헌터 케리온이 사로잡아 버려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참고로 유니크 몬스터는 사냥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터라 더 월드에 각 하나씩만 존재할 뿐이고... 죽으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 내 자가용이 된 암무 역시도 유니크 몹이다. 현재까지 잡힌 유니크 몹은 암무와 아크데몬 단 둘 뿐이다. 각설하고 숨겨진 계곡의 출현 몹의 평균 레벨은 190레벨이니 나와 누나가 한 제국에서 주로 사냥터로 삼았던 녹환림보다 한 단계 높은 사냥터였다. 특히 레벨 220의 준 보스급 몹인 드레이크가 곳곳에서 리스폰이 되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드레이크 부대에 포위가 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150레벨로 이루어진 파티라 하더라도 한 순간에 알짤 없이 전멸이다. 3대 금지이니 만큼 이 곳에서 사냥을 하는 유저는 극소수였다. 엘프의 숲에서 수련을 할 때는 무공을 쓸 때에 주위에 보는 눈이 없나 온 신경을 기울여야 했지만 이 곳에서는 조금은 더 편하게 사냥에 전념할 수 있었다. 뭐.. 중요한 것은 사냥이 아니지만 말이다. 나와 누나는 천지진결의 수련을 하며 숨겨진 계곡을 돌아보았다. 이제까지의 단서는 '숨겨진 계곡', '하늘', '나를 찾아라' 이 세 가지뿐이니 직접 몸으로 돌아보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결론은 단서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라는 말에 어기충소를 이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지만.. 역시나 무엇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공중을 노닐던 드레이크들의 집단구타를 당하고 게임오버를 당할 뻔했다. 하아...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숨겨진'과 '계곡'이 있었다고 꼭 두 개가 하나의 말이 되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다른 계곡의 숨겨진 어떠한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포기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에리두에 존재하는 계곡의 수만 해도 수백.. 아니 수천 곳이 넘는다. 그 모든 곳을 다 돌아보았다가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차라리 '숨겨진'과 '계곡'이 연결된 말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여기 한 곳만을 파버리는 것이 편하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다른 수천 개의 계곡들을 잡고 설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악과 깡 하면 나 아닌가? 더구나 이 곳은 최고의 사냥터였다. 천지진결을 수련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또 없을 것이다. 누나의 풍운조화검결과 만상조화심결의 수련에는 잘 맞지 않는 장소이지만 어차피 극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면 우선 여기서 천지진결을 더 연마하는 것이 좋을 것 싶다. 그 후에 은자림을 탈환하고 거기서 수련을 하면 되는 것이다. 괜히 엘프의 숲에 숨어서 사람들 시선 피해 수련하는 것 보다 당당하게 수련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 날부터 나와 누나는 매일같이 숨겨진 계곡에서 수련을 했다. 틈틈이 비밀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단 하나의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한 달이 지나 버렸다. 단 하나의 수확이라면 천지진결을 7성까지 익혔다는 것이다. 이제는 드레이크 네 마리의 합동 공세도 충분히 누나와 함께 버텨 낼 수가 있을 정도 였다. 누나의 레벨도 3레벨 업을 해서 261이 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349다. 이거 진짜 빡 돌 지경이다. 340레벨 이상부터 평균 1레벨 업을 하려면 3달 가량이 필요하다. 작년 초에 내 레벨은 347이었으니 지금쯤이면 충분히 350은 넘고도 남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벌써 반 년 동안 349레벨에서 정차해 있는 것이다. 문뜩 349레벨에서도 무공의 11성 이상처럼 랜덤법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상황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혹시 350레벨이 되면 어떤 굉장한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 나는 기대를 가지고 미친 듯이 레벨 업에 몰두했다. 6월 말 학교는 여름방학에 들어갔고 나와 누나는 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하였다. 은자림과 결전을 벌이기로 한 날은 앞으로 세 달이 남았을 뿐이다. 9월 중순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천지진결을 10성 이상 연마하고 내 레벨도 350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숨겨진 계곡보다 한 단계 더 레벨이 높은 아르멜의 타워를 점령키로 했다. 이미 최상층에 버티고 있을 아크데몬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르멜의 타워에 출현하는 몹들은 최하레벨 210의 준 보스급 몬스터들뿐이다. 거의 중앙산맥의 난이도와 비등하다 할 수 있다. 이런 곳을 단신으로 뚫고 올라 가 최상층의 아크데몬까지 베어 버린 케리온은 정말 괴물이다. 분명 그도 나와 같이 엄청난 히든피스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벌일 수는 없다. 내가 현재 이 더 월드에서 단 하나의 적수로 생각하는 존재가 바로 케리온이다. 아크데몬을 이겼다는 하나로도 그는 충분히 나와 자웅을 가릴 자격이 있었다. 모두들 갓 소드 리마르딘이 나의 뒤를 이은 2인자라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레벨 업만을 최고로 생각하는 꽉 막힌 사람은 트럭으로 덤벼도 가뿐하게 이길 수 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덤비면 절대로 이기지는 못한다. 어디까지나 과장법이라는 것을 알아 둬라... 대충 두 명 정도라면 어떻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케리온이 사라진 지가 벌써 1년 반이 넘어가는데... 대체 이 인간은 어디서 놀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문대로 한 제국에서 숨어서 무공을 수련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 게임을 접은 것인가? 정말 그러면 실망인데 말이다. 뭐.. 게임을 접지 않았다면 언제고 나타나겠지... 그리고 혹 게임을 접었더라도 다시 재기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보다는 우선 은자림과의 결전을 생각해서 최대한 수련을 해야 할 것이다. 나와 누나는 준비를 마치고 즉시 숨겨진 계곡의 중앙 아르멜의 타워로 향했다. 아르멜 타워는 아크데몬이 오래 전부터 유저들의 발길이 끊긴 곳이다. 초반에는 유니크 몬스터 중에서 비교적 레벨이 낮다고 알려진 아크데몬을 잡기 위해 수 많은 길드연합과 왕국에서 유저들이 아르멜 타워 점령에 나섰었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한 전례는 없었다. 대부분이 아크데몬을 보지도 못하고 탑의 몬스터들에게 게임오버를 당했고 어떻게 최상층에 도착한 유저들이라도 아크데몬에게 모조리 몰살을 당한 것이다. 최후에는 에리두 최강길드 샤이닝 길드에서 두 명의 더블마스터와 500명의 싱글마스터를 파견해 아르멜 타워 정벌에 나섰지만.... 그 역시도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 후 아르멜 타워는 정복 불가능의 지역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유저들 중에는 갓 소드 리마르딘이 나서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리마르딘은 나와의 대결에 패하고 나서 그런 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뭐... 리마르딘이 갔더라도 아크데몬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걸 알겠는가? 내가 중앙산맥의 사룡을 제압했으니 나와 거의 대등한 명성을 가진 리마르딘이라면 충분히 아크데몬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믿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점차 아르멜 타워 정벌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한 인간이 사고를 쳐버렸다. 그 중인공이 바로 케리온 다크마스터다. 내가 홀로 중앙산맥에 들어가 몹의 장벽을 뚫고 사룡 암무의 레어까지 들어가 사룡 암무를 제압했던 것처럼 케리온도 혼자서 아르멜 타워를 들어가 최상층까지 도달해 아크데몬을 베어 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케리온이 단번에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바로 자취를 감추고 아직까지도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헤유...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진짜 그와 꼭 싸워보고 싶었는데..... "유빈아!" 응? 갑자기 들려온 누나의 외침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내 머리를 부수기 위해 떨어지는 묵직한 도끼였다. "뭐야?!!" 깜짝 놀란 나는 즉시 부신수영을 펼쳐 공격을 피했다. 다행히 치명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상당히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으윽... 체력수치 2000감소라니!! 겨우 운기조식으로 채운 체력이 절반이나 날아가 버렸다. 제길!! 내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누나가 재빨리 풍운조화검결상의 일장 풍(風)의 묘를 이용한 검술로 주위의 몹들을 처리했다. 나도 재빨리 검을 들고 무상검록의 삼장 일절 만(滿)을 펼쳐 누나를 도왔다. 처음에 따로따로 움직이던 누나와 나는 곧 규칙을 이루는 보법을 펼치며 천지진결상의 투로에 따라 움직였고 정확한 공격과 정확한 수비로 하나씩 몹들을 제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스폰 된 몹들을 모조리 처리한 나는 숨을 골랐고 누나는 나에게 다가와 내 상처를 의성수로 치료했다. 운기조식을 하던 중에 당했던 거라 정말 아찔했다. 누나 말로는 갑자기 몹들이 리스폰이 되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내 바로 앞으로 리스폰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누나가 조금만 더 늦게 날 불렀으면 게임오버 당할 뻔했다. 그렇게 됐으면 진짜 일 나는 것이다. 레벨 다운도 문제이지만 무공 성취도 다운이 더 큰 문제다. 물론 한 번 극성까지 익힌 것이니 비급이 없더라도 충분히 다시 극성까지 수련은 가능하지만... 최소한 1년은 수련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자림과의 대결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하하.. 조금요..." 누나의 질책에 나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내 레벨이라면 운기조식 중이라도 충분히 위험을 느끼고 운기조식을 중단할 수 있다. 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은 순전히 내 실수였다. 괜히 무안함을 느낀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보다 이제 몇 층 안 남았네요. 서두르도록 하죠." 아르멜 타워는 전체 17층으로 되어 있다. 현재 나와 누나가 있는 곳은 13층. 앞으로 4층만 더 돌파하면 최고층이다. 솔직히 최고층에 가더라도 아크데몬이 없는 이상 아무것도 없을 터이지만 이왕에 아르멜 타워에 온 김에 최고층에 올라가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아크데몬이 있었던 곳을 구경하고 싶다고 할까? 나는 즉시 걸음을 내딛었고 누나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별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왔다. 14층에도 역시나 몹 천지였다. 비홀더킹에 블랙 사이클롭스... 그레이오거까지 하나같이 220레벨 이상의 준 보스급 몹들뿐이다. 나 혼자라면 무상천검을 들고 무상공을 운용하며 무상검을 펼쳐야 겨우 정리 할 수 있는 몹들이었지만 누나와 함께 천지진결을 펼치자 그나마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누나가 앞으로 나서 풍운조화검결을 펼치면 나는 뒤에서 검막을 펼쳐 방어에 나섰고 누나가 뒤로 물러서 체력회복을 도모하며 방어로 나서면 내가 앞으로 나가 방어를 무시한 공격뿐인 무상검을 펼치며 몹들을 죽여 나갔다. 모든 방어는 함께 합격진을 펼치는 동료에게 일임하고 오로지 공격만을 하게 되는 천지진결의 특징이었다. 특히 천지진결의 진세는 신기할 정도로 무상검과 풍운조화검결을 조화롭게 엮었기에 나 혼자서 무상검을 펼치는 것 보다 배 이상의 위력을 보이면서 내력소모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정말 천지진결을 극성까지 익히면 누나와 나 둘이서 은자림 고수 1/3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4층과 15층을 정리하고 난 후 다시 한 번 운기조식을 했다. 아마 천지진결이 없었다면 한 층에서 한 번씩 운기조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아직 내력이 1/3 정도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운기조식을 가졌다. 16층에서 몹들과 싸우다가 혹 내력이 모조리 소모되어 버리면 정말 큰일이지 않은가. 이번에는 저번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간에 몹들이 리스폰 되지는 않았다. 운기조식을 끝낸 나와 누나는 즉시 16층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도처에 널려있는 몹들.... 보스도 없는데 대체 여기에 뭐 하러 남아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뭐... 운영자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겠지.... 근데 운영자도 모른다고 하면 어쩌지? 16층을 깨끗이 청소한 나와 누나는 마지막 17층으로 올라갔다. 이제까지의 1층부터 16층까지와는 다르게 17층은 하나의 거대한 홀이었다. 계단에서 올라서는 즉시 보이는 것은 맞은편의 웅장한 의자였다. 아마도 아크데몬이 사용하던 것이라 생각된다. 몹은 없었다. 하긴... 여긴 아크데몬만을 위한 자리였을 터이니 몹이 있을 턱이 없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별로 눈을 잡는 것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가장 처음 보았던 아크데몬의 의자와 벽의 벽화정도 뿐일 것이다. "별 것 없네....." 나는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겨 벽화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내 눈에 띈 것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벽화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 벽화를 살폈다. '의' '정상에 올라' '로 향하여' 남아 있는 글자는 이 세 가지였다. 나는 여기에 즉시 내가 알고 있는 글자들을 대입시켜 보았다. "숨겨진 계곡의 정상에 올라 하늘로 향하여 나를 찾아라?" 나의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확실하다!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어떠한 것에 대한 단서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만상풍운조화서를 찾을 때와 비슷한 흥분이 내 몸을 감쌌다. 어디보자.. 숨겨진 계곡의 정상? 그건 분명 이 곳 아르멜 타워이다. 아르멜 타워의 최상층인 여기라면 분명 숨겨진 계곡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늘로 향하는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하늘로 향하여....? 잠시 머리를 싸매던 나는 결론을 얻지 못하고 우선 몸으로 때워 보기로 했다. 주위를 돌며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았다. 여기서 하늘로 향하려면.... 옥상으로 올라가라는 말인가? 하지만 어디에 올라가는 길이 있지? 사방이 막혀있고 계단도 없는 터라 옥상으로 가는 길은 전무했다. 혹시 벽을 부수고 가는 것인가? 아냐아냐... 그런 간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유빈아...." 엄지를 깨물며 초조함을 누르는 나를 누나가 불렀다. 나는 누나를 돌아보았다. "왜요?" "저기... 이상하지 않아?" 누나가 이상하다고 한 곳을 보았다. 누나가 가리킨 곳은 계단 양옆에 세워져 있는 두 개의 악마 조각상이었다. 각각 푸른색의 악마와 붉은색의 악마였다. 그런데 저게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지? "뭐가 이상해요?" "그게.... 눈동자가." 눈동자? 나는 조각상의 눈동자를 살폈다. 조각상의 눈동자는 빛을 발하는 보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누나의 말대로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두 개의 조각상 다 서로 눈동자 색이 달랐던 것이다. 한 쪽은 푸른색이고.. 다른 한 쪽은 붉은색이다. 나는 조각상으로 다가가 눈에 박힌 구슬을 잡고 당겨보았다. 조금 힘을 주자 구슬이 뽑혀져 나왔다. 푸른 악마상에서는 붉은 구슬을 뽑고 붉은 악마상에서는 푸른 구슬을 뽑았다. 그리고 뽑은 두 구슬을 서로 교체했다. 쿠르르릉.... 순간 뒤쪽에서 어떠한 기계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누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자가 천천히 뒤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의자가 있던 자리에서 계단이 올라왔다. 나의 입가에 흥분의 미소가 어려가기 시작했다. 저 계단을 오르면 분명 어떠한 재미있는 뭔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꺅!" 나는 즉시 누나를 안아 올렸다. 누나는 짤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다시 누나를 내려놓았다. 생각도 못하게 입술을 빼앗긴 누나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놀랐잖아....." "하하. 너무 기뻐서요. 이게 다 누나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키스를 하지 않고는 못 버티겠더라고요." "약았어..." 눈살을 가볍게 찡그리는 누나에게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21 - 조우(遭遇), 패배(敗北), 결의(決意) 타워 최상층으로 올라간 나와 누나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부터 아르멜 타워는 숨겨진 계곡의 가장 높은 지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꼭대기까지 올라오자 숨겨진 계곡 대부분의 전역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기충소를 써서 공중에 날아올랐을 때도 대략 1/3 정도밖에 살피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누나의 말대로 타워의 최상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썰렁한 바람만이 쉴새없이 불어올 뿐이었다. "숨겨진 계곡의 정상에 올라 하늘로 향하여 나를 찾아라....." 나는 단 하나의 단서인 석판의 글귀를 읊어 보았다. 숨겨진 계곡의 정상이라면 바로 여기이다... 여기서 다시 하늘로 향하라면...? 하늘을 보라는 것인가? 하지만 하늘은 그저 하늘이다. 그 무엇도 없다. 그럼..... "날아오르라는 것인가?" 나는 즉시 어기충소를 펼쳤다. 다행히 이 근방에는 드레이크가 나오지 않았기에 무리가 없이 허공으로 날아오를 수가 있었다. 진기가 끊길 때까지 날아오른 나는 재차 호흡을 가다듬고 허공답보를 구사했다. 순식간에 아르멜의 타워가 점으로 보일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나는 천상제를 펼쳐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주위를 살폈다. 나를 찾아라.... 분명 이 숨겨진 계곡 어딘가에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괜히 이름이 숨겨진 계곡이 아닐 터이다. 그러고 보니 숨겨진 계곡이라는 이름만 가졌지.... 그냥 고레벨의 몹들만 출현하는 사냥터라고 알려져 있다. 뭔가 숨겨진 것이 있기 때문에 숨겨진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한참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문뜩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제까지 어느 한 지점씩을 살펴서 느끼지 못했었는데... 조금 생각을 시야 넓게 보자 대번에 그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하하하.. 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 정말 이 게임을 만 제작자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을 따름이다. 다시 누나가 있는 곳에 내려선 나는 킥킥 웃음을 흘렸다. "왜.. 그래?" 누나가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트렸다. "찾았어요! 하하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설마 지금까지 우리가 돌아다니던 곳이 해답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하하하하...." "무슨.. 소리야?" 하긴... 누나에게는 뚱딴지 없는 소리일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늘로 올라가 본 것을 누나에게 설명했다. "이 숨겨진 계곡은 사냥터라는 의미보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지금까지 정말 몰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보자 계곡의 틈은 하나의 단어를 그리고 있었어요." "단어?" "네. 필기체로 미끄러지듯이 쓰여 있고.. 순서가 뒤바뀌어 있지만... 하하. 여기까지 왔으면 그건 약과죠. retnec... 큭큭...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처음에는 retnec라는 단어가 무엇을 암시할까 무던히도 고심했다. 영어단어 중에서 그런 글자는 결코 없었다. 혹시 어떤 약어는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도 아니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거꾸로 뒤집히니 하나의 단어가 되었던 것이다. Center! 센터. 중앙을 암시하는 단어. 어디의 중앙일까? 단연코 이 숨겨진 계곡의 중앙이 아니면 어디이겠는가. 숨겨진 계곡의 중앙이면.....? "여기?" "맞아요. 바로 아르멜의 타워!" "하지만... 여긴 아무것도...." 누나의 말대로 여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꼭 여기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내가 누차 말하지만 생각의 폭을 넓게 가져야 한다. 여기서 단서를 발견했다고 해서 꼭 여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숨겨진 계곡의 중앙이라고 하면 아르멜 타워다. 아르멜 타워의 최상층이 아닌 것이다. 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1층일 거예요." "1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1층에 비밀이 있을 것이다. 보통 던젼이나 타워의 1층은 입구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몹도 나오지 않고, 혹 몹이 나온다 하더라도 비교적 쉬운 몹들이 출 현한다. 숨겨진 다른 통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아르멜 타워도 예외란 없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은 유저들의 뒤통수를 치기를 좋아한다. 다른 곳은 그렇게 설정을 하더라도 어떤 곳에는 엄청난 비밀을 감추어 놓을 수도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큰 비밀을 감출 사람은 없다. 예상할 수 없는 그런 곳이 최고의 보물창고인 것이다. 나와 누나는 즉시 1층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몹들이 리스폰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무시하고 최대한 빨리 1층으로 향했다. 올라올 때는 레벨 업이라는 목적이 컸기에 나오는 몹이란 몹은 다 잡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 불가피하게 싸워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모두 무시했다. 1시간 정도를 달려 1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17층과 같이 거대한 홀... 하지만 한 쪽에 입구를 제외하면 그 무엇도 없다. 몹도 출현하지 않는다. 사방에 자리한 마법등불이 어두운 공간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나는 홀 곳곳에 있는 마법등불을 하나씩 당겨 보았다. 보통 영화를 보면 이런 곳에 비밀통로를 여는 기관장치가 있지 않은가. 내 예상대로 하나의 마법 등이 움직였다. 드륵.... 쿵!! 뭔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홀 한 쪽의 벽이 열렸다. 나는 혀를 찼다. "마지막에는 너무 쉽네...."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와 누나는 열려진 통로로 들어섰다. 과연 이 끝에 뭐가 있을까? 나는 다시금 솟구쳐 오르는 흥분이라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계단....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상대하기 벅찬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죽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혹시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은자림과의 전투를 생각하자면 자제를 해야 할 터이지만 이미 흥분에 잠식되어 버린 내 머릿속엔 은자림이라는 이름이 지워진지 오래였다. "가요."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통로에 들어섰다. 우리가 들어가자 열렸던 통로가 다시 닫쳤다. 다시 나갈 방법이 뭐지? 잠시 고심하던 나는 닫혀진 벽에 손을 대 보았다. 그러자 그대로 스르륵 다시 벽이 열렸다. 밖에서는 비밀장치를 이용하지만 안에서는 간단하게 열 수 있나 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누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좌우에 마법 등불이 존재했기에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불이 들어왔다가 멀어지면 꺼졌다. 통로는 생각보다도 더 길었다. 거의 40분 정도를 걸어 내려왔는데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라 믿으며 나는 더욱 조급해 하지않고 걸음을 계속 옮겼다. 3시간 정도를 내려와서야 결국 계단은 끝이 났다. 계단의 끝은 작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전방에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나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는 누나와 함께 통로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통로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몹인가? 그 가능성이 가장 크다. 혹시 유저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질 확률보다도 작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 곳을 발견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나와 진희누나는 긴장하며 통로를 응시했다. 서서히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잿빛 머리카락... 빛에 물든 망토와 검은 갑주... 등에 걸린 두 개의 기형 시미터... 순간 나의 두 눈이 크게 팽창되었다. "어라? 유저인가?" 그가 나와 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나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천천히 입가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데몬 헌터. 케리온 다크마스터." 그의 몸이 움찔한다. 역시...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 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거든... 케리온은 두 개의 기형 시미터를 사용한다고 말이다. 형태는 권정을 닮은 시미터이다. 미국의 경찰진압봉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의 등에 걸려있는 두 개의 기형 시미터는 분명 권정과 비슷한 형태의 무기였다. "나를 알고 있나? 흠.... 나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야..." "찍어 본 거죠. 이런 숨겨진 장소를 저 말고 또 누가 찾았을까...?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이 곳에서 아크데몬을 베어버린 당신뿐이지 않을까요?" 내 말에 그는 감탄했다는 듯이 작게 탄성을 터트리곤 곧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전혀 틀린 것이 없어. 내가 바로 케리온이야. 그런 그 쪽은 누구지? 한제국의 검천지룡... 아니 지금은 사룡검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튼 그 유명한 무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말야." 이번에는 내 몸이 움찔했다. 한 방 먹인 것 다시 가져왔군... 케리온은 히죽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틀리지 않은 것 같군." ".....어떻게 알았죠?" 내 물음에 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냥 감이지. 이제까지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것은 검천지룡뿐이었거든. 내가 어렵게 발견한 곳이니 만큼... 혼자의 힘으로 이 곳을 또 발견할 사람은 내가 인정한 검천지룡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야." 그 역시도 나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연 듯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당신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분 좋군요." "하하. 그런가? 이거 정말 좋군. 나는 나 혼자만 그런 줄 알았어. 그 쪽에서는 나를 그저 그런 유저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어쩔까 참으로 고심했었지.. 그런데 다행이야.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으니." 의외로 마음이 통하는 상대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말이 너무도 잘 통한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만나지는 못해도 상대를 의식하며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옆에 아가씨는?" 그가 진희누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누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제 애인이죠." "흠.. 그런가? 혹시... 혜혜선녀로 불리는 진희가 아닌가?" "어떻게?" 나는 너무 놀랐다. 현재 누나는 약간의 변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단번에 알아보다니.... "전에 멀티비전에서 본 적이 있거든. 상당히 분위기가 비슷해서 말야. 그런데 혜혜선녀라면 창천유협 유빈의 애인이라고 했는데..... 역시 창천유협은 사룡검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나 보군." 저.. 사람.. 역시 엄청나다. 이 정도면 눈치가 빠른 정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모두 알고 있다니.... 나와 누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하하... 뭘 그렇게 보고 그러나?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춘 거야." "그 감으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 퀘스트를 클리어 하였겠죠?" "뭐... 그건 그렇지. 그런 자네도 마찬가지 안인가?" 확실히 나도 모든 일의 첫 시작은 감으로 시작한다. 무상검록을 얻을 때에도 그랬고 만상풍운조화서를 얻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우연히 주점에서 듣게 된 유저들의 대화에서 얻은 감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감처럼 불확실한 것도 없지만 한편으로는 감만큼 확실한 것 또한 없다. 비록 허튼 짓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지금과 같이 대단히 재미있는 퀘스트를 발견하는 경우 역시도 있다. 레벨 업과 좋은 무기를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일순간의 감으로 흥분을 참을 길이 없는 숨겨진 비밀들을 발견해 내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의 가장 큰 재미가 아니겠는가? "확실히 퍼즐을 푸는 재미가 끝내주지." "하하. 맞아요. 역시 저와 뭐가 통하네요." 나와 케리온은 금새 의기투합해서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누나는 조용히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오! 너도 2년 동안 하수로 살았냐?" "그럼 형도? 이야... 형 역시도 독종이네요." 케리온의 나이는 올해 23세. 나 보다 4살이나 더 많기에 형이라고 불렀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알았는데... 그 역시도 2년 간 나처럼 기본 수련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하하. 규칙적으로 스킬을 익히지 않아 스킬이 꼬여 버렸거든. 그거 수정하려고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저도 이것저것 막 익히다 보니 수련이 되야 말이죠. 뭐 덕분에 좋은 것을 얻었지만...." "흠.. 한 제국에도 그런가 보군. 에리두에서도 여러 스킬을 익히다 보면 스킬이 꼬여 성장이 안 되. 그러다가 어느 정도 꼬인 스킬들을 분류시키고 조합시키다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나오더라고. 예를 들어 검사의 파워스텝과 도적의 문스텝을 조합시키는 거지." 파워스텝은 검사가 초반에 익히는 스킬로 일종의 진각이었다. 강하게 땅을 밟으며 일순 강력한 일격을 먹이는 기술이 바로 파워스텝이다. 그리고 문스텝은 도적들의 기술로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걸음걸이를 일컫는다. 하나는 파괴력을 중시하는 것이고.. 하나는 기척을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이 두가지 스킬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고 조합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케리온은 이것을 조합시켜 버린 것이다. 참고로 스스로의 직업이 아니더라도 스킬북을 얻어 익힐 수는 있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게 정상이다. 극까지 익힐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직업에 맞는 스킬을 익히기도 벅찬 상황에서 다른 직업의 스킬까지 익힐 시간이 없다. 더구나 그런 짓을 하면 열에 아홉은 스킬이 꼬여버린다. 본래 스킬은 사라져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조합이 되어 엉뚱한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이 쓸데없는 것들뿐이다. 당연히 꼬여버린 스킬을 지우고 새로 익혀야 하니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만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케리온은 그런 것을 각오하고 무식하게 스킬들을 조합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 얻은 것을 본 나는 너무 놀랐다. 파워스텝과 문스텝을 조합시켜 만들었다는 일루전스텝... 이건 거의 궁신탄영에 맞먹는 속도에다가 환영보 까지 더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극성의 절정무공이 아쉽지 않을 정도였다. "대단하네요...." "그렇지? 고생은 죽어라 했지만 익히고 나니 정말 좋더라고."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나 역시도 느껴보았던 감정이니까. 고생은 정말 죽을 정도로 하지만.. 최후에 얻는 보상은 너무도 기쁜 것들이다. 남들이 하지 못한 것에 성취를 이루었다는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나와 함께 웃던 케리온이 문뜩 물어왔다. "그런데 왜 에리두로 온 거지? 나는 자네가 은자림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준비 때문에 에리두로 온 거죠. 뭐 여기를 찾은 것은 우연이지만." 이미 내가 사룡검신이라는 것을 들킨 이상 감출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밖으로 나가서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퍼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조금 있었다. 그는 나와 너무 닮았다. 내가 그를 인정하는 만큼 그도 나를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함부로 입을 여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하하. 그런가? 역시 은자림과 싸울 준비는 하고 있군. 이거 어쩌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한 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말야. 기왕이면 진짜로 싸우고 싶은데... 그건 불가능할 듯 싶군." 나 역시도 그와 싸우고 싶다. 지금도 온 몸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은자림과 싸우고 난 후로 미루기로 했다. 이렇게 안면을 익혀 두었으니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그래도 이대로 끝내기는 뭐 하지? 대련으로 하는 것이 어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바라는 바니까요.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저 사룡검신 유빈. 그대 데몬헌터 케리온 다크마스터에게 비무를 신청하오!" 나는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케리온도 무기를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인다!" 비무이기 때문에 설령 죽더라도 레벨다운과 무공성취 하락은 없다. 그것을 알기에 누나도 걱정 없이 나에게 잘 하라는 응원을 던지고는 한 쪽으로 물러섰다. 나는 검을 케리온에게 겨누며 무상공을 펼쳤다. 상대는 분명 더 월드 최강의 유저다.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이길 확률은 절반이다. 더구나 그 1년 반 동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수련을 쌓았을 터.... 1년 동안 이러타할 성장이 없는 나라면 질 확률이 컸다. 쓸데없는 무공 따위는 오히려 통하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무상공을 이용한 무상검으로 초반부터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와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부신약영을 펼쳐 일순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내리그었다. 무상검결 일장 이절 단이었다. 대련이라면 기술의 이름을 외쳐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련이지만 최대한 실전처럼 즐기고 싶은 것이다. 케리온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지 빙그레 웃어보였다. "타핫!!" 케리온이 오른손에 들린 백색의 검으로 내 공격을 쳐냈다. 단으로 자르지 못하는 검... 아니 오히려 내 검이 희미하게 날이 나가버렸다. 나는 일순 놀랐지만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케리온은 쌍검을 다룬다. 멍하니 있다가 다른 검에 몸을 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예상대로 내가 뒤로 물러서자 내 자리에 케리온의 왼손에 들린 검이 흑색의 빛을 뿌렸다. 펄럭.... 내 앞섬이 잘려나갔다. 부신약영을 이용해서도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것이다.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서로 인사는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이제부터 제대로 하겠어." 나는 경각심을 일깨웠다. 희미하게 그가 나보다도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케리온의 검에서 서로 상반된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나는 결국 경악해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 쪽은 어둠의 기운이 담긴 암흑투기였고.. 다른 한 쪽은 황당하게도 신성력을 담은 팔라딘들이 쓰는 세인트 오러 블레이드였던 것이다. 분명 그도 한 때 팔라딘이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케리온은 소드유저에서 클레릭으로 전직해 성기사가 되었고, 다시 메이지로 전직해 다크나이트가 된 후 최종적으로 데스나이트가 된 유저이다. 중간에 팔라딘으로 있었던 때가 있으니 세인트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 더 월드를 해 보지 않은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팔라딘에서 다크나이트로 전직하면 그 동안 익히고 있는 성기사의 기술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속성이 다르기에 구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케리온은 그런 상식을 무시하고 있다. 무기의 영향인가?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다. 분명 케리온의 검은 한 쪽은 성속성이고 다른 한쪽은 암속성이지만.... 그렇다면 암속성쪽의 검기가 더 강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 둘의 기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그 말은 곧 케리온이 암흑투기 뿐만이 아니라 빛의투기 까지도 구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법사가 화의 마법과 수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술이다. 불과 물이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이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다니... 저 인간.. 역시 괴물이다. 그런데 케리온은 데스나이트인데.... 어둠속성의 데스나이트가 어떻게 빛의투기를 쓰는 거지? 저.. 사람 진짜 데스나이트 맞아? "간닷!!" 케리온의 몸이 폭발하듯이 거세한 기세를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내 쪽으로 뻗어왔다. 나는 의문을 접고 우선 이 대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케리온의 기술.... 궁신탄영? 아니다! 거기에 더해 환영까지 곁들어져 있다. 이건 일루전스텝이었다. 케리온의 환영들이 순식간에 내 몸을 휘감았다. 실내였기에 위쪽으로 뛰기도 힘들었다. 물론 천장이 그런대로 높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위로 피했다가는 열에 아홉은 당할 위험이 컸다. 나도 즉시 보법을 밟으며 케리온에 대항해 나갔다. 얼마 전에 얻은 낙성창법에 수록되어 있었던 낙환성보(落幻星步)였다. 비록 일류무공이었지만 거기에 부신약영을 첨가시키자 최절정의 공경에 부럽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환영은 말 그대로 환영이다. 잔상일 뿐이지 실상이 아닌 것이다. 나는 어지럽게 사방을 맴도는 케리온의 환영들을 무시하며 실상을 찾았다. 실상을 찾는 법은 간단하다. 그림자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케리온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른 환영들을 무시하며 나에게 달려왔고 그대로 검을 뿌렸다. 나는 케리온의 검을 쳐내며 진사신무의 무공들을 펼쳐냈다. 분명 무상검록이 최고의 무공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하나만으로는 너무 단조롭다. 빈틈이 생기면 단번에 허점을 찔러 내가 자신 있는 무공들을 펼쳐내는 것이 좋았다. "치잇!" 청룡신퇴에 왼쪽 어깨를 당한 케리온은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고 나는 즉시 그의 몸을 따라가며 무상검록 일장 일절 섬을 펼쳤다. 무상검록 상의 무학 중에서 무진을 제외하고 가장 빠른 검세이다. 케리온은 허리를 뒤로 굽히며 내 공격을 피해냈다. 무공으로 보면 철판교라 해야 할까? 나는 재빨리 섬을 단으로 바꾸었다. 섬이 찌르는 기술이라면 단은 베는 기술이다. 일직선으로 뻗어가던 내 검이 그대로 방향을 틀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케리온의 몸이 오른쪽으로 빙글 돌았다. 그러며 오른손에 들린 시미터로 내 검을 쳐냈다.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세에서 회피까지 하다니..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저릿한 팔에 힘을 주며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한 번 잡은 공세를 놓치기는 아까웠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케리온은 나 보다 더 강할 가능성이 크다. 수세로 돌아가면 즉시 패배이다. 나는 부신약영과 주작신보를 동시에 펼치며 몸을 두 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케리온의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뻗어갔다. 흡사 내 몸이 주작의 날개가 되어 케리온을 감싸듯 움직였다. 이건 평범한 환영이 아니다. 그림자까지도 만들어 내는 최고의 신법인 것이다. 케리온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빛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즐거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몸이 내 쪽으로 향했다. 어떻게... 단번에 알아 본 거지? "다크 브레이크!!!" 케리온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암흑투기가 솟구쳤다. 동시에 내 몸을 결박하는 무형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즉시 뒤로 몸을 빼었다. 이대로는 공격을 해도 내가 당할 확률이 너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기운은 내 퇴로까지 봉쇄를 한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피하기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케리온의 검이 나에게로 뻗어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최강의 기술로 단번에 부수어 버리는 수밖에!! 무상검록(無上劍錄) 무상검(無上劍) 오의(奧義) 무진(無盡)! 몸 전체로 터져 나가는 무상공의 기운. 그것은 나의 몸을 한 자루의 신검으로 바꾼다. 동시에 피어오르는 화기와 빙기과 어우러지며 솟아오른다. 하지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두 개의 기운은 서로 충돌하며 멸의 공간을 창조해낸다. 나의 몸이 공간을 갈랐다. 앞을 막고 있는 어둠의 기운도 무시했다. 공간 그 자체를 잘라버렸다. 콰앙!!! 순식간에 내 몸이 본래의 자리에서 5장 정도를 이동하였다. 동시에 내가 격하였던 공간이 멸하였다. 나는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기술이라면 아무리 케리온이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공간이 잘리다 말았다. 정확히 케리온의 앞까지는 공간이 잘렸지만... 그 이후로는 공간이 잘리지 못했다. 겹쳐진 케리온의 검이 공간의 균열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다. 쩌엉!! 열렸던 공간이 다시 본래대로 닫침과 동시에 케리온의 검이 부러졌다. "이런... 정말 죽을 뻔했네... 대단한 기술이었어." 멍청히 서 있는 나에게 케리온이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를 보았다. "어떻게....?" "그게 네가 가진 최강의 기술이었나 보지? 하.... 정말 대단하더군. 역시 사룡검신이라는 이름이 그냥 붙은 것이 아니었어." 그럼 그걸 막아낸 당신은 대체 뭐야? 내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건 말건 그는 부러진 검을 보며 혀를 찼다. "아깝네...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인데.... 고치기도 불가능하겠군. 새로 만들어야겠어." ....뭐야? 그 검... 유니크아이템이 아니라.. 그냥 만든 검이었단 말야? 나는 다시 한 번 뻥진 얼굴이 되어야 했다. 이제까지 너무 대단한 성능을 가진 검이라 알려지지 않은 유니크아이템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유니크아이템이라면 부러지더라도 스스로 재생을 하기 때문에 고칠 필요가 없다. 조용히 구석에 처박아 두면 자기가 알아서 본래대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건 유니크아이템에 준하는 유저가 만든 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케리온의 검은 스스로 수복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유니크아이템에 비하면 턱없이 떨어지는 검이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도 무상천검이 아닌 그냥 평범한 철검으로 싸웠다고 하지만.... 무상공을 이용한 무진을 유니크아이템이 아닌 검으로 막아내다니.... "검이 이 모양이니 오늘 대결은 무승부로 해야겠군. 뭐 다음에 만나서 다시 대결해 보기로 하지. 그 때는 진짜 대련이 아닌 실전으로 말이야." 케리온이 웃으며 들고있던 검들을 던져버리곤 말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의 말에 답했다. "제 패배입니다." "응? 왜?" 정말 모르겠다는 것인가? 나는 내가 가진 최강의 기술을 사용했다. 그것이 막혀버린 것이다. 그에 반해 케리온은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을 집어넣으며 몸을 돌렸다. "다음에는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흠.. 그런가? 좋아. 그럼 내가 은자림에서 기다리고 있지." 그의 말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은자림에서 기다린다니... 설마 무무를 돕겠다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적은 거대할수록 좋지 않겠는가? 어차피 케리온과 동료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나의 라이벌이다. 죽어도 동료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맞아서 서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평생 검을 겨눌 상대였다. 다음 대결은.... 은자림에서 해도 좋을 듯 싶었다. "3개월 뒤에 찾아가겠습니다." "이왕이면 강해져서 왔으면 좋겠군. 저 곳을 들어가 본다면 한 가지 길을 찾게 될 거야. 내가 비록 먼저 찾은 장소이지만.... 자네들도 누구의 도움 없이 찾은 것이니까 들어갈 자격이 있겠지." 빙그레 웃으며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곤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기다리고 있겠다." 은은히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3년 만에 당해 본 패배... 무무에게도 뒤통수를 얻어맞기는 했지만.. 그건 내가 무무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케리온에겐 1:1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패한 것이다. 훗... 무패의 한 제국 최강자 사룡검신 무상? 이제는 개가 웃을 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웃고싶을 정도로 즐겁다. 목표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운 일인 것이다. "유빈아...." 누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웃어 보였다. "하하. 져버렸어요.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지지 않아요." 3개월 뒤에는 꼭 이긴다. 나는 이를 강하게 깨물며 다짐했다. 22 - 마대륙(魔大陸) 누나와 난 조금 전 케리온이 나온 통로로 들어갔다. 이미 케리온이 먼저 찾은 곳이지만... 나 역시도 누나와 함께 누구의 도움 없이 찾은 곳이다. 순서가 뒤쪽일 뿐이지 내가 저 곳을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결코 없다. 케리온 역시도 그렇게 말했고...... 긴 통로가 이어졌다. 꺾여진 곳도 없고, 나누어진 곳도 없었다. 오로지 한 방향으로 만 나 있는 길이었다. 2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또 하나의 원형 홀이 나왔다. 다만 이전의 홀과 다른 점은 이 곳에 중앙에는 마법진이 하나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며 마법진으로 다가갔다. 문뜩 마법진 옆에 검으로 쓰여진 글귀가 보였다. -300레벨 이상이 아닌 유저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케리온 다크마스터. 케리온이 써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300레벨이라니...?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들어가 보면 안다는 것 정도였다. 내 레벨은 300을 넘은 지 벌써 오래 전이니 말이다. 누나도 아직 300레벨은 아니었지만 걱정 없었다.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지 못 들어간다는 말은 없었으니 말이다. "가요." 나는 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도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빛이 나와 누나의 몸을 감쌌다. 역시.. 텔레포트 마법진이었나? 나는 과연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 호기심을 가지며 이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곧 눈앞을 가리는 빛이 사라졌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굴 안이었는데 상당히 우중충한 느낌이 드는 장소였다. 나와 누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보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드넓게 펼쳐진 검붉은 숲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간간이 가까운 숲의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분명..... 데몬인 것 같았는데.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데몬이라면 보통 중상위권 던젼의 보스급 몬스터로 등장하는 녀석이다. 쉽게 보기 힘들뿐더러.... 레벨도 장난이 아니기에 이기기도 힘들다. 그런 녀석이 다수 눈에 띈다는 것은 대체 뭐라 설명을 해야 할까? "유빈아.. 저기...." "네?" 그 때 누나가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저 하늘에 날아다니는 녀석들은 드레이크였다. 그것도 그냥 드레이크가 아닌 블랙드레이크... 숨겨진 계곡에서도 간간이 등장하는 250레벨대의 녀석들이 거의 수십 마리가 짝지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300레벨 이하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던 케리온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네..." 아니.. 이 정도면 300레벨이라도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았다. 케리온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수련...? 혹시 여기서 지난 1년 반 동안 산 것 아냐? 그렇다면 그 인간 레벨은 대체 몇이란 말이지?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더더욱 그와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만 같다. 그런 나의 손을 잡으며 누나가 말했다. "저기.. 유빈아....." "응? 왜요?" "저.. 애들 우리 본 것 같아." 저 애들? 아! 블랙드레이크? 그게... 뭐가 아니잖아!!!!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나의 말대로 블랙드레이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폭격기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한두 마리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족히 20마리가 넘어가니 덤비고 자시고도 없었다. 저 녀석들 전부를 상대하려면 나라고 해도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나와 누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즉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다행히 근처에 우리가 나왔던 동굴이 있었기에 그 곳으로 피하면 될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막 동굴에 들어서기 전에 블랙드레이크 한 마리가 입구를 막아 버렸다. 약은 녀석..... "망할!!!" 나는 이를 갈며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어떻게든 녀석을 베고 동굴로 들어가야 했다.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품에서 청류옥소를 꺼내들었다. 시간이 없었다. 누나와 나는 즉시 천지진결을 펼치며 블랙드레이크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250레벨의 블랙드레이크를 한 순간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속속 다른 블랙드레이크가 땅으로 내려섰고 졸지에 우리는 20여 마리의 블랙드레이크에게 포위를 당해 버렸다. 이거.. 까딱 실수를 하면 게임오버다. 나는 긴장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퇴로물색이었지만... 역시 결론은 싸워서 '이기면 사는 것이고 지면 죽는 것이다' 하나 뿐이었다. 블랙 드레이크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퇴화한 용이라 하지만 덩치는 정말 크다. 거의 와이번의 5배는 되니 말이다. 거의 내 키의 10배라고 할까? 나는 즉시 달려오는 녀석에게 부신약영을 펼쳐 마주 달려가며 검강을 써 블랙 드레이크의 얼굴을 쳤다. 대번에 머리가 잘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비늘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블랙 드레이크였기에 머리가 잘리지는 않았다. 쾅! 나는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을 받고 다른 방향으로 날려 가는 블랙드레이크를 내버려두고 재빨리 누나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다른 녀석들 셋이서 누나를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아직 누나의 레벨은 260대이다. 블랙드레이크 1마리보다는 높지만 결코 세 마리 이상을 이길 수는 없다. 더구나 누나는 무공의 성취도가 떨어지는 터라 1마리도 상대하기 벅찰 것이다. 1마리의 블랙드레이크의 목을 쳐 땅으로 엎드리게 만들고 천근추를 이용해 일어나지 못하게 눌렀다. 그리곤 어검술을 펼쳐 다른 블랙드레이크의 눈을 향해 검을 날렸다. 크아아아악!! 피를 뿌리며 고개를 치며드는 블랙드레이크의 머리를 백호신권으로 쳐 올리고 청룡신퇴로 다시 찍어 내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눈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들고 전방을 향해 무상검 삼장 일절 만을 펼쳤다. 만은 검강을 여러 개로 나누는 터라 공격력이 떨어진다. 그 때문에 블랙드레이크에게는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만을 펼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블랙드레이크가 물러서자 나는 즉시 뒤로 신형을 날려 누나의 앞으로 내려섰다. 누나는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 듯 약간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괜찮아요?" "으응...."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섰다. 지능이 띄어난 블랙드레이크이기 때문에 내 강함을 알아보고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분명 빈틈을 노리고 있을 터이다. 나는 힐끔 주위를 살펴보며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잘 들어요. 제가 입구를 막고 있는 녀석을 무진으로 날려버릴 것이에요. 그러면 누나는 정확히 무진이 쓰여진 뒤 3초 후에 저를 따라 동굴로 들어오세요." 무진을 펼치면 그 공간은 3초 동안 멸과 그에 이은 파동의 힘에 휩싸인다. 잘못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 공간으로 들어서 버린다면 누나는 그대로 게임오버를 당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3초 이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를 따라오기는 힘들다. 아마 내가 누나의 옆을 떠난다면 블랙드레이크들이 즉시 누나를 공격할 것이다. 수십 마리의 블랙드레이크의 협공을 받는다면 누나는 1초도 버티기 힘들다. 나는 무진을 쓰기 전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을 펼칠 생각이다. 최대한으로 펼치면 최소 1초에서 최대 2초 정도는 검강이 허공에 남아 블랙드레이크의 접근을 막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후에 검막이 사라지고 블랙드레이크가 누나에게 달려들기까지 대략 1초 정도... 이건 정말 타이밍 싸움이다. 조금이라도 빠르면 무진에 휘말려 게임오버이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블랙드레이크에게 포위 당해 게임오버이다. "할 수 있겠어요?" "해 볼게." 누나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런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면 나는 살고 누나는 죽는 것이다. 거기에 누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차라리 내가 누나의 입장이 되었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무리 게임이라 하지만... 누나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에게 있어 이 더 월드는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게임이다. 과거 잃어버렸던 감정을 이 곳에서만 느낄 수가 있었다. 나에게 있어 한 때 더 월드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장소였다. 물론 지금은 누나가 있기에 현실에 더 마음을 두지만... 그래도 여전히 더 월드는 내 마음속의 휴식처였다. 이런 곳에서 누나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만은 결코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게임인데 뭐... 물론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무리 게임이라도 유빈이... 네 앞에서 죽는 모습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나 역시도 누나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 그리고 누나가 죽는 모습도 보기 싫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를 믿어보는 거다. 나는 즉시 무상공을 펼치며 만을 써 주위에 검막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재빨리 검을 들어올려 동굴 입구를 막고있는 블랙드레이크에게 겨누었다. 이 녀석아.. 이거나 먹고 꺼져버려!! 무상검록 무상검 오의 무진!! 공간을 가른 나의 몸이 블랙드레이크를 지나쳐 동굴의 입구에 내려섰다. 동시에 뒤쪽에서 거센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뉘어졌던 공간이 다시 합쳐지며 생기는 파동이었다. 나는 즉시 고개를 돌려 누나를 찾았다. 누나는 침착한 얼굴로 무진으로 발생한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누나의 주위에 생성되었던 만의 검강들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블랙드레이크들이 누나에게 달려들었다... 1초가 1분... 1시간처럼 흘러간다. 천천히 누나가 땅을 박찼다. 무진의 파동은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타이밍은 거의 맞는 것 같았다. 다행히 블랙드레이크의 공격이 있기 전에 동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을 듯 싶었다. 나는 누나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과 누나의 손이 자석에 끌려가듯이 서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크아아아!!! 갑자기 블랙드레이크 한 마리가 동굴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나는 깜짝 놀라 급히 검을 들어올렸다. 제길.. 이 녀석들의 지능이 높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 녀석을 베어버리고 누나를 들어오게 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일격에 블랙드레이크를 보내 버리려면 무진을 써야만 한다. 하지만 무진은 제어가 불가능한 기술이다. 정확히 5장의 범위를 초토화 시켜버리는 기술인 것이다. 잘못하면 내가 누나를 죽이는 사태가 올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아!! 비켜!!!" 나는 이를 갈며 무상검록상의 기술들을 연달아 펼쳐냈다. 순식간에 블랙드레이크의 피부가 터져 나갔지만 죽지는 않았다. 점차 나의 마음이 다급해 졌다. 누나가 살아 있을까? 입구를 막고 있는 녀석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블랙드레이크의 울음소리가 불안을 더욱 가속시킨다. "누나!!!!" 나는 목소리를 높여 누나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벌써 게임오버를 당한 것? 아니면.. 블랙드레이크의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은 것인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나는 다시 한 번 무진을 펼쳤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블랙드레이크를 뚫으며 밖으로 뛰쳐나간 나는 즉시 누나를 찾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일순 몸을 경직시켜야 했다. "뭐야......?" 그 많던 블랙드레이크가.. 전멸 당해 있었다. 다행히 누나는 무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옆에 있는 한 제비녀석이다. 제비가 누나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레이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포션이나 한 잔 들이키며 이야기라도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녀석 뭐야? 포션 한 잔 어째? 나는 잠시 허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곧 누나가 어떻게 좀 해 주라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고 나는 재빨리 다가가 뒤에서 누나를 안았다. 그리곤 제비 녀석을 노려보았다. "으악!! 너는 또 뭐냐?!! 그 레이디는 내가 찍은 레이디야!!" 제비가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누나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제비에게 미소를 지어보냈다. "내 여자야." "........훗. 그랬나? 하지만 너는 그 레이디의 남자가 될 자격이 없다! 자기 여자를 내버려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녀석은 여자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법! 눈물을 머금고 꺼져라!" ........미친 인간이군. 더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 나는 누나와 함께 몸을 돌렸다. 저런 녀석까지 꼬이다니.. 누나의 인생도 참으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뭐 앞으로 내가 언제까지고 지켜주면 되는 일이지. "이봐!! 내 말이 개소리로 들리냐?! 앙?!! 야!! 난 운영자야!! 알아?!! 이 마대륙의 운영자 하데스라고!!!" 그의 말에 나는 움찔하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스스로를 하데스라고 칭한 녀석을 보았다. 분명.... 운영자이니 블랙드레이크 스무 마리를 한 순간에 보내 버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보다 내 귀를 사로잡은 것은 운영자 하데스 앞에 붙은 말이었다. "마대륙?" "....어라? 그것도 모르고 여기에 온 거냐?" 여기... 중앙대륙이 아니었어? 설마... 그 두 개의 타 대륙 중 하나? 나는 허탈한 얼굴로 하데스를 보았다. 그렇게 바랬던 것인데.. 너무 어이없게 이루어져 버린 터라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케리온이 떠난 뒤 얼마 안 있어 새로운 손님들이 왔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자기가 어디에 온 지도 모르는 바보잖아. 이봐요 레이디~. 그런 바보 같은 남자는 내버려두고 나 같이 멋진 남자와 사귀어 보는 것은 어때?" 녀석이 꼬리를 살살 치며 누나에게 다가온다. 누나는 움찔하며 내 뒤로 숨어버렸다. 그것이 하데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녀석은 절규하더니 구석으로 가 쪼그려 앉아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칫.... 그래. 그래 그렇게 솔로 염장 팍팍 지르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세상에 여자가 하나 뿐이냐? 언젠가는 여기에 솔로인 여자가 들어 올 것이고 나의 멋진 신위를 보면 한 눈에 뿅 갈 거야. 그런데 그 때가 언제지?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케리온에게 그 검을 뇌물로 주고 여자 하나 데려다 주라고 할걸..." .........저 인간.. 진짜 운영자 맞는 거냐? 문뜩 의문이 생겼다. 보통 운영자는 유저의 일에 절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벤트가 아니라면 유저 앞에 나타나는 법도 없다. 그런데 운영자가 나타나 누나를 구하다니.... 이거 징계 감 아닌가? 나는 이런 의문을 하데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하세스는 그리던 그림을 중단하고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그거 말야? 물론 징계 감이지." ".......징계 감의 일을 벌인 사람이 그렇게 태평합니까?" "하하하. 나는 괜찮아. 여긴 마대륙이잖아. 본래 이 마대륙에는 운영자가 없어. 그런데 운영자가 생긴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이 곳이 너무 고 레벨의 지역이기 때문이야. 너처럼 멋모르고 들어왔다가는 그대로 죽거든. 그래서 내가 여기 운영자가 된 거지. 뭐 나 말고도 두 녀석이 더 있지만..... 어쨌든 나와 그 녀석들의 임무는 여기에 가장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마대륙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거야. 그러니까 레벨이 부족하면 알아서 돌아가라. 이런 말을 하는 일이지." 아아.. 그래? 하긴.. 분명 이 곳의 레벨은 장난이 아니다. 우연찮게 마대륙으로 넘어오는 방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레벨이 안 된다면 죽어버릴 터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우리가 막 여기에 도착했을 때 안 나온 거죠?" "하하.. 그게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왔거든. 돌아와 보니 저 아가씨가 당하고 있잖아. 그래서 즉시 달려가서 도왔지. 실제로 그럼 안 되는 것인데 내가 실수를 한 것도 있고 해서 말야... 이봐. 이건 비밀이야. 회사측에 알리면 난 바로 징계를 먹는다고." 그렇군.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야겠군요." "하하 그래. 당연히 알려야..... 야~!!!!" 하데스가 질겁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무시해 주었다. 이런 좋은 약점을 잡았는데 그냥 놔두겠는가? 이런 사실은 본인이 숨겼어야 하는 것이다. 괜히 나 같은 녀석에게 밝힌 하데스의 잘못이 크다. 흐흐흐. 평생동안 내 꼬봉으로 만들어 주겠어. 다른 때라면 나도 귀찮아서라도 모르는 척 해 주는데 하데스가 감히 누나를 꼬시려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래뵈도 나 누나에 관해서는 소유욕이 장난이 아니거든. "어디 보자... (주)신화의 이메일주소가....?" 나는 머리를 누르며 생각에 잠기는 자세를 취했다. 실제로 신화의 이메일주소 따위는 필요도 없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에 대고 '운영자 비리!'라고 떡하니 써 붙여놓기만 하면 대박 터트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더더욱 하데스를 불안하게 만들이 위해서였다. 동시에 협상의 여지도 만들어 놓고 말이다. "......원하는 것이 뭐냐?" 오~ 그냥 새대가리인줄(제비니까) 알았는데 의외로 머리를 쓸 줄 아네. 나는 히죽 웃으며 조건을 말했다. "이 대륙에서 가장 위험성이 적으면서도 레벨 업을 하기 좋은 장소로 데려다 주는 것." 어디에건 이런 장소는 있다. 일종의 대박 사냥터라고 할까? 몹들이 너무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리스폰이 되면서 제법 경험치가 짭짤한 몹들만 나오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중앙대륙이라면 그런 장소에는 언제나 많은 유저들이 자리를 노리고 죽치고 있지만 이 곳은 현재 나와 누나뿐이지 않은가. 뭐 언젠가는 이 대륙도 유저들에게 정벌이 될 터이다. 하지만 앞으로 수 년 동안은 아니다. 그 사이에 여기를 누나와 나만의 장소로 이용할 수 있다. ".......그걸로 된 거냐?" 내가 너무 쉬운 요구를 했다고 생각했나? 확실히 별로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싹수없는 녀석이라면 최강의 검을 요구하거나 별에 별 아이템에... 심지어는 레벨을 조작해 주라고 하는 녀석들까지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원래는 이런 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이번은 예외거든.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케리온에 근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또 다른 것을 요구해도 되나요?" "아.. 아니... 거 참.. 난 레벨 업을 쉽게 하도록 몹을 병신으로 만들어 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사냥터를 주선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가르쳐 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것도 불법이기는 하지만... 걸릴 가능성은 없다. 뭐 할 일 없는 게임 관리자가 유저들의 대화내용을 청취하고 있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따라와라. 아! 그리고 이것 받고." 하데스가 몸을 돌리다 문뜩 나와 누나에게 목걸이를 던졌다. 별로 특징이 없는 목걸이였는데 나는 의아한 얼굴로 하데스를 보았다. "이건 뭐죠?" "뭐긴 뭐야? 최초로 마대륙에 들어선 10명에게만 특별히 지급되는 아이템이지. 그것을 착용하고 있으면 몹들이 인식을 못 해. 일종의 신대륙을 발견한 이들만의 특권이야. 마대륙에 들어온 자가 10명이 넘으면 그 아이템은 자동적으로 사라지니 그렇게 알고. 아. 마대륙에서 나가도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도 다시 발급 받지는 못 해." 흐음..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다. 확실히 혼자서 이 마대륙에서 버티려면 이런 아이템이 필수일 것이다. 나중에 유저들이 여럿이서 팀플을 오지 않은 한은 말이다. 한 열 명 정도의 유저가 여기에 온다면.. 어느 정도 소문은 퍼질 것이고 많은 유저들이 마대륙을 정벌하기 위해 오겠지. 그러고 보니 케리온이 여기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것 때문이었군... 하긴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여기에서 버텨날 수는 없었겠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나와 누나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하데스의 뒤를 따라갔다. 목걸이가 제 성능을 발휘하는지 몹들이 우리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도 인식을 하지 못한다. 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데스를 따라갔다. 얼마 후 우리는 하나의 분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포탈이 존재했는데 나는 상당히 감동을 했다. 세상에 포탈이라니... 이건 더 월드의 초기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성과 성 사이를 이동할 때 쓰이던 것으로서 상용화가 되면서 현실성에 위배된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 추억의 포탈을 다시 보게 되다니..... 감동의 물결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이봐. 언제까지 감동만 하고 있을 거야? 빨리 따라 와." 포탈 중 가장 가운데 포탈로 하데스가 들어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누나와 함께 하데스가 들어간 포탈로 뛰어들었다. 누나는 처음 본 포탈에 조금 긴장한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생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도착한 곳에는 초원 위의 재단이었는데 역시나 주위에 또 다른 세 개의 포탈이 있었다. 하데스는 이번에는 오른쪽 포탈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포탈이동이 있었고 최후로 도착한 곳은 멀리 해변이 보이는 숲의 가장자리였다. 앞서가는 하데스를 따라 종래에 넓은 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지 주위에는 블랙데몬과 블랙드레이크, 사이클롭스킹 등의 최상급 몹들이 몇 마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여기다. 나오는 몹은 블랙드레이크, 사이클롭스킹, 블랙데몬, 오우거로드이고 각 몹들은 두 마리 이상은 리스폰 되지 않아. 한마디로 최대한 많이 리스폰되는 몹의 수는 4마리라는 것이지. 몹들이 죽으면 1분 내에 한 마리가 리스폰되니 사로잡으면 되고... 위험하다 싶으면 목걸이를 착용하면 그만이겠지. 또 근처에 살펴보면 식량으로 쓸 것들도 널렸어. 뭐 너희들은 한 제국의 유저들 같으니 사나흘에 한 번씩 배고픔을 채우면 되니 더 편하겠군." 헤에... 좋은 장소네. 블랙드레이크는 250레벨, 사이클롭스킹과 오우거로드는 260레벨이다. 그리고 블랙데몬은 아크데몬을 제외하고 데몬들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으로 자그마치 300레벨의 레벨을 가진 괴물이다. 이런 녀석들이 하나씩 리스폰되니 레벨을 올리는 데는 최고의 장소일 것이다. "게임 리스는 어디서 하죠?" "조금 전 우리가 마지막에 도착했던 포탈 앞." "포탈은 사라지지 않죠?" "걱정 마. 이 대륙에 나라가 하나 세워지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까. 아무리 빨라도 1년 내에는 포탈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걸." 하데스의 말에 나는 안심했다. 포탈이 사라지면 돌아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말이다. 대충 설명을 끝낸 하데스는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아마도 자기 본 캐릭터로 게임 을 즐기려는 심사일 것이다. 운영자도 노멀 캐릭터를 가지고 게임을 즐길 수가 있다. 그 캐릭터는 운영자캐릭터와 서로 공유가 되어 있어 운영자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즉시 신호가 와서 운영자캐릭터로 전환되는 것이다. 덧붙여 운영자의 힘을 이용해서 노멀 캐릭터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영자의 노멀 캐릭터는 철저하게 하루에 한 번씩 회사의 검사를 받기 때문이다. 그와 덧붙여 숨겨진 이벤트 같은 것도 클리어 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바로 캐릭터는 삭제되고 회사에서 퇴출당한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 덕분이다. 전에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거든. "아! 맞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시간은 저녁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다. 한동안은 그 때만 이 곳을 이용하도록. 혹시라도 다른 운영자들이 보게 되면 골치가 아픈 일이 있을 수도 있거든. 뭐 한동안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 장소를 찾은 것처럼 행동하면 될 거다." 하데스의 말에 나는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데스는 다시 한 번 당부를 하고는 사라졌다. 자자. 그럼 이제부터 광렙을 해 보도록 할까? 나와 누나는 웃으며 서로를 본 후 천천히 목걸이를 벗었다. 23 - 무극지체(無極之體) 그 날부터 나와 누나는 그 곳에서 레벨 업을 했다. 하나같이 최고급 몹이니 만큼 주는 경험치도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349에서 버둥거리고 있지만 누나는 사흘에 한 번씩 레벨 업을 할 정도였다. 이대로 가면 운이 좋으면 3개월 내로 300레벨을 달성시킬 수도 있을 듯 싶었다. 물론 여전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이다. 무공의 성취도는 풍운조화검결과 만상조화심결 모두 9성에 이른 상태다. 형은 모두 익힌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특히 이 마대륙은 이름 그대로 마기가 넘치는 대륙이라 누나의 무공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때부터 성취도는 짜증나다 할 정도로 느렸다. 3개월 안에 10성이 되면 정말 엄청나게 올린 것일 터였다. 마대륙의 일은 천희형과 민우형, 진호, 민호에게만 알렸다. 그들과 협의해서 3개월 뒤 은자림을 무너뜨리고 마대륙을 정벌하기로 했고 그 사이에는 나와 진희누나만 여기서 레벨 업을 하기로 했다. 되도록 천희형과 민우형도 함께 불러 레벨 업을 하고 싶었지만 형들도 그 곳에서 할 일이 있었기에 그건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특히 민우형은 본래부터 당문세가의 가주였으니 장시간은 몸을 빼지 못한 상태였다. 문제는 진호와 민호였다.... 그들도 마대륙에 오고 싶어 광분했지만 결국 천희형과 민우형에게 사로잡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감히 형님들도 못 가는데 어린것들이 설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하하. "후아...." 콜라를 한 잔 마시고 한숨을 토해냈다. 아버지는 어젯밤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마 내일 아침에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뭐... 아버지의 인생이니 내가 뭐라 할 것은 없겠지... 그보다 문제는 349레벨에서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랜덤인가? 그것도 초절정무공보다 더 확률이 낮은 것 같았다. 벌써 349레벨에서 반년 째 버둥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케리온은 분명 이 벽을 넘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강할 수 없을 것이다. 제길... 시간은 흘러가는데 막막할 따름이다. 벌써 1달이 흘러버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2달뿐이다. 그 사이에 벽을 넘지 못하면 나는 확실하게 케리온에게 질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무가 아닌 실전. 패배는 곧 레벨다운이고 무성성취도 하락이며 암무와의 계약의 종결을 뜻한다. 아마.. 그렇게 되면 게임을 접고싶을지도 모른다. 하하.. 답답하다. 뭐.. 여기서 이렇게 한숨만 내쉰다고 뭐가 되는 일은 아니니 우선 한 숨 자야겠다. 다시 방으로 돌아 온 나는 침대에 시계의 타이머를 맞추어 놓고 침대에 누웠다. 밤새도록 게임을 즐겼던 터라 눈을 감자마자 수마가 들이닥쳤고 금새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태양이 완연하게 떠오른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누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12시였기에 11시 반으로 타이머를 맞추어 놓았는데.... 이거 너무 빨리 일어나 버렸다. 나는 시계의 알람을 꺼 버리고 즉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뭘 하고 시간을 때울까 고심하던 나는 결국 게임에 들어가기로 했다. 누나가 오기 전에 혼자 사냥을 할 생각이었다. 누나가 함께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지만 혼자서도 못할 것은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목걸이를 써 버리면 되니까.... 정말 최초의 신대륙 발견자라는 이유 때문에 선물 받은 목걸이 치고 너무도 유용했다. 오늘은 어디서 사냥을 할까 생각하던 나는 결국 언제나 사냥을 하던 그 사냥터에서 하기로 했다. 그 곳보다 더 좋은 사냥터는 없기 때문이었다. 링크헤드셋을 쓰고 더 월드에 접속한 나는 즉시 하데스가 알려준 사냥터로 향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철저한 연막전술을 펼쳐 다른 운영자들도 나와 누나가 그 사냥터를 우연히 발견한 것 정도로 알고 있기에 요즘에는 거리낄 것도 없이 그곳을 이용하고 있었다. 숲의 분지에 도착하자 역시나 네 마리의 보스급 몹들이 리스폰 되어 있었다. 나는 즉시 목걸이를 벗었고 곧 몹들이 날 인식했다. 처음에는 목걸이를 차고 몹들을 처리할 수 없을까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그건 불가능했다. 공격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기야...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데 거기까지 가면 난리도 아니지. 단조로운 게임이 지속되었다. 그냥 몹들을 베고... 내력과 체력이 부족하면 목걸이를 쓰고 운기조식을 하고.. 그러다 다시 목걸이를 벗고 싸우고.. 또 운기조식.. 지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거사가 2달 밖에 남지 않은 입장에서는 지겨워도 해야만 했다. 분명 케리온도 이런 과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라도 못할 것은 없다. 오기로라도 2개월 내로 벽을 넘어버릴 것이다. 얼마쯤 싸웠을까? 게임 시간으로 거의 10시간 정도는 흐른 것 같다. 문뜩 출출해짐을 느낀 나는 잠시 사냥을 접고 식사시간을 가졌다. 근처를 돌며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따 하나씩 깨물며 다시 사냥터로 돌아가는 내 눈에 뭔가가 잡혔다. "유저?" 분명 인간형의 그림자였다. 일순간이었지만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틀림없었다. 나는 재빨리 그 그림자가 있던 장소로 몸을 날렸다. 그 동안 누나를 제외한 유저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평소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반가운 기분에 휩싸였다. 역시 인간이었다. 이제껏 이 곳에서 몹을 제외한 NPC를 본 적은 없었기에 나는 그가 유저라고 판단했다. 그럼 저 사람이 4번째 대륙 발견자인가? "이봐요."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의 어깨를 쳤다. 그가 퍼뜩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지금에서 안 것인데... 그의 얼굴은 시퍼렇다. 흑인은 보아 왔어도 청인은 처음보는 터라 나는 잠시 당황해야 했다. "NPC?" "인간? 오라.. 네 녀석이 케리온인가 하는 망나니였군!" 에? 뭐? 케리온? 나는 잠시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가 허리에서 검을 뽑 아들며 차갑게 웃는다. "감히 내 동생 녀석을 죽이고... 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튀었겠다." ........케리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런 희한한 인간이 복수심을 불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 당신은 누구죠?" "흥! 감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마족 7대 마공작이자 마신 루시퍼님의 충실한 부하! 바알베리트님이다!" 순간 내 머리에 번개가 강타했다. 마공작이라니.... 내가 알기로 이 녀석은 유니크 몹이었던 것이다. 비록 암무에 비하면 한 단계 떨어지는 녀석이지만 싸우려면 목숨을 내 걸어야 한다. 설마 여기서 이런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던 나는 속으로 미치고 광분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종종 어떤 유니크 몹은 자기 거처를 나와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다더니... 이 녀석을 지칭한 말이었나 보다. 어쨌든 싸워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그에게 소리쳤다. "자.. 잠깐!!!!" 유니크 몹들은 상당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 제대로 말만 통한다면 싸우지 않고도 넘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외침에는 바알베리트는 눈썹을 찡그리며 날 노려 보였다. "뭐지? 유언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 난 케리온이 아닌데." 나는 분명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믿어주지 않았다. 머리에 핏줄을 돋구곤 이를 가는 바알베리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너 같은 겁쟁이 녀석이 어찌 내 동생 베에모트를 이겼는지 알 길이 없구나. 뭐 상관없다. 내 너를 가장 처참하게 죽여주도록 하지...." .......망할.... 믿으면 어디 덧나냐? 그보다 케리온! 나중에 만나면 이 일에 대한 보상은 꼭 받아내고 말거닷!! "이 망할 자식아!! 나 케리온 아니라고 했잖아!!!" 협상이 깨진 이상 존댓말을 써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바알베리트의 검을 피하며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만국 공통의 최대 욕인 가운데 손가락 치켜들기는 대번에 바알베리트의 푸른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생각을 바꿨다. 평생동안 죽이지 않고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어 주겠다." 오 그러셔?! 나는 리스하면 그만이네요. 이번에는 조 더 큰 감자바위를 먹이고 재차 달렸다. 그러자 바알베리트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쫓아왔다. 부신수영을 극성으로 펼치는 데도 따라오다니 역시 유니크 몹은 유니크 몹이다. 더구나 거리도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다. 나는 위급한 상황이 왔음을 알고 재빨리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잠깐!!!" "크아악!! 또 뭐?!!!" "오줌 마려워. 잠깐 타임." 바알베리트의 몸이 휘청 인다. 그러면서도 내가 바지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만 보는데... 저 녀석 혹시 얼간이 아냐? 솔직히 아무리 현실성을 준수한다는 게임이라 해도 대소변을 보는 시스템이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야야!! 빨리 못 끝내냐?" "네가 자꾸 보니까 안 나오잖아. 잠깐만 뒤돌아서 있어." 툴툴거리면서도 뒤로 돌아선다. 역시 저 녀석 얼간이였어... 나는 재빨리 바지를 올리고는 도망쳤다. "야! 아직 멀었냐?! 응?! 으악!! 이 망할 자식!! 또 날 속였겠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온다. 하지만 나는 이미 거리를 늘릴 대로 늘렸다. 한동안 잡힐 일은 없는 것이다. 그보다 누나가 들어 올 때가 되었는데.... 솔직히 나 혼자서는 잡기 벅찬 녀석이니 누나와 힘을 합치려고 이렇게 도망만 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싸우면 못 이길 것도 없지만 질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만 도와준다면 이길 확률이 대폭 상승한다. 아니.. 그것 이전에 이런 거물급 몹을 나 혼자만 독식하기에도 그랬다. 누나에게도 경험치를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유빈아. 어디야?] 마침 누나가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누나에게 답신을 보냈다. [지금 어디에요?] [포탈 앞인데... 왜?] [마침 잘 됐어요. 거기 그냥 있어요. 제가 얼간이 하나 끌고 갈게요.] [얼간이?] [보면 알아요. ^^] 메시지 창을 닫은 나는 즉시 누나가 있는 포탈로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근방만 돌고 있었던 터라 포탈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 지금까지 이 근방만 수십 바퀴는 돌았을 것이다. 곧 포탈이 있는 곳에 도착한 나는 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나의 옆에 내려선 나는 겁을 뽑아들며 누나에게 말했다. "전투 준비 해요." "왜?" "얼간이랑 시비......"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알베리트가 달려와 소리쳤다. "이 자식 드디어 잡았다!!!" 잡은 것이 아니라.. 내가 멈춘 거야 이 얼간아. "흥! 혼자서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동료를 불렀군. 뭐 어차피 하나 더 더해진다해서 상관은 없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나는 혀를 차며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 때 바알베리트를 바라보던 누나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빈이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제가 사과를 드릴 테니 용서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누나 저 녀석을 유저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누나에게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누나가 말을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얼간이님." "푸웃!!!" 순간 바알베리트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나는 입을 가리며 신음했다. 하지만 도저히 넘어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누나는 여전히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이 나와 바알베리트를 번갈아 볼뿐이었다. 의외로.. 이런 상황에서 둔한 면을 보여주는 누나다. "누가 얼간이라는 것이냐?!!! 나는 그 유명한 마족 7대 마공작......." 내가 재빨리 소리쳤다. "얼간이." "얼간이 님이시다!!" 역시 저 녀석은 얼간이였어. 큭큭... 나는 다시 한 번 배를 잡고 쓰러졌고 바알베리트는 스스로의 실수를 눈치채고 절규했다. "으아악!!! 나는 얼간이가 아냐~!!!! 얼간이가 아니란 말야!!! 내 이름은 바알베리트란 말이닷!!!" 생각보다 더 오버한다. 어쩌면 저 녀석 같은 마공작 사이에서 이미 얼간이로 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 때문에 집 나와 가출한 것 아냐? "저.. 사람 이름이 바알베리트였니?" 누나가 나에게 불안한 눈으로 물어왔다. 나는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말아요. 유저가 아니라 몹이니까." "몹? 사람인데?" "유니크 몹이에요. 사람처럼 생겼을 뿐이죠." 내 말에 누나는 여전히 절규하고 있는 바알베리트를 돌아보았다. "진짜 사람 같아." 확실히 나도 처음에 유저인줄 알고 말을 걸었을 정도이다. 더구나 행동도 더 사람 같지 않은가. 조금 모자란 듯 해서 문제이지. 하지만 아무리 인공지능이 띄어나더라도 프로그램일 뿐이다. 법칙에 움직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프로그램. 그렇기에 나는 거리낄 것도 없이 검을 들었다. "죽이려고?" "몹이니까요." 내 말에 누나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바알베리트를 응시했다. 너무 인간과 닮아서 죽이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거 자꾸 이러면 나도 마음이 약해지는데... 누나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기회를 놓치기도 그렇다.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는 바알베리트를 모르는 척 넘기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다. "괜찮아요. 그리고 저 녀석을 놔두면 다른 유저가 당할지도 모르잖아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녀석이라 언제고 유저들과 마주칠 것인데요." 결국 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누나가 인정을 하자 즉시 검을 바알베리트에게 겨누고 무상공을 끌어 올렸다. 여전히 바알베리트는 '난 얼간이가 아냐~!'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훗. 그렇게 놀다가 죽으라고.... 무상검 오의 무진!!! 파앙!!! 나의 몸이 공간을 갈랐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본래대로라면 바알베리트의 뒤 쪽에 이동해 있어야 하는데 바알베리트의 바로 앞에서 멈춰서 버렸다. 나는 흠칫했고 동시에 바알베리트가 비릿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흥! 간교한 녀석 같으니라고..." 무진이 막혀 버린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요즘 여러 곳에서 깨지네... 아무리 무상천검을 쓰지 않아 위력이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바알베리트의 검이 빛을 발했다. 나는 위압감을 느끼고 즉시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바알베리트의 검이 더 빨랐다. "기습 따위를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네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까앙!!! 그때 내가 위험함을 느낀 누나가 청류옥소로 바알베리트의 머리를 때렸고 그것이 그대로 명중해 버렸다. 개구리 압사된 모양으로 널브러져 버린 바알베리트를 보며 나와 누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나도 설마 자신의 공격이 통할 줄은 생각도 못했으리라... ".......기습은 안 통한다며?" 내 말에 바알베리트는 쓰러진 폼 그대로 움찔했다. 역시.. 이 녀석은 얼간이였다. 내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자 바알베리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자식들... 죽여버리겠다." ".....그 말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세기도 지겨워." "시끄럽다!!!!" 벌떡 몸을 일으킨 바알베리트가 그대로 누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지금 누나의 능력으로는 피하기 힘든 일검이었기에 나는 재빨리 누나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들어올렸다. 펑!!!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폭발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온 몸이 울리는 충격을 경험하며 울컥 피를 쏟아냈다. 제길... 역시 유니크 몹이라는 것인가? "유빈아!" "괜찮아요. 그보다 이번에는 진짜 같네요." 나는 히죽 웃으며 바알베리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에서는 어느새 거대한 악마 날개가 솟아있었고 머리에는 뿔이 자리해 있었다. 이제야 좀 악마 같군. "내 10만년의 생애에 이런 모욕은 못 받아 보았다.. 네 놈들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으리라....." .........더 월드가 생긴 지 올해로 7년째인데.. 십만 년은 개뿔이. 솔직히 나보다도 어린 녀석이 까분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유빈아. 정말 10만년을 산 몹이니?" 누나.. 그걸 믿으면 어떻게 해요...? 이럴 때는 정말 허탈해진다. 하지만 순진한 누나가 귀여워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순간 바알베리트의 신형이 나와 누나에게로 뻗어왔다.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공세를 취하였고 누나는 뒤쪽에서 수세를 취했다. 이미 나와 누나는 눈빛과 행동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천지진결을 펼치며 나와 누나는 바알베리트를 상대해 나갔다. 그 동안 천지진결은 11성에 올랐고 완벽한 공수전환으로 쉴새없이 바알베리트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간간이 바알베리트의 공세가 천지진결을 뚫고 들어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힘이 소진된 공세였고 그것마저도 누나의 의성수로 말끔하게 치유가 되어 버렸다. 점차 바알베리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나와 누나의 공세에 손이 어지러워진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유니크 몹이라고 해도 체력과 오러가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협력해서 최대한 체력과 내력을 아끼는 우리와 반대로 바알베리트는 초반부터 모든 힘을 사용해 갔고 결국 지쳐버린 것이다. 바알베리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싶자 나는 즉시 천지진결의 진세를 풀고 앞으로 나서 검을 바알베리트에게 향했다. 조금 전에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충분했다. 재차 무진이 펼쳐졌고 나의 몸은 바알베리트를 뚫고 지나갔다. 처음 완전히 막혀버린 것에 비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나는 힐끔 바알베리트를 돌아보았다. 일전에 케리온이 그랬던 것처럼 바알베리트도 스스로의 검으로 갈라지는 공간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체력을 대부분 소진해 버린 그는 결국 검을 놓쳐버렸고 순식간에 갈라진 공간이 그의 몸을 잘라버렸다. "크아아아악!!!!!" 뒤이어 생긴 폭풍... 바알베리트의 몸이 산산이 찢겨져 나갔다. 순간 나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레벨 업? 아니다.. 분명 레벨 업을 하면 뭔가 현상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몸에서 터져 나온 빛은 회오리 치듯이 회전하며 사방으로 빛을 뿌렸고 결국 거대한 빛줄기가 되어 천공으로 비상했다. 하늘을 뚫으며 솟구친 빛줄기는 구름들을 모조리 흩어버렸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이 현상을 지켜보았다. 대략 1분 정도 지속된 빛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유빈아." 누나가 놀란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능력치 창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겁하고 말았다. 하지만 잠시 후 희열에 몸을 떨어야 했다. 드디어 레벨이 350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모든 능력치가 30씩 이나 상승해 있었다. 근력 340, 민첩 405, 지력 352, 체력 310...... 더구나 체력(HP)수치는 2000이나 올라 있었고 내공(오러)수치는 두 배나 뛰어올랐다. 현재 내 체력은 거의 7000에 육박했고 내공은 1만 5000에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천무지체였던 체질이 무극지체로 바뀌어 있었다. 체질은 초반에는 일반으로 통일되고 150레벨 때 그 동안 익힌 무공에 따라 나뉘어진다. 가령 마공을 주로 익혔다면 마인지체가 되고 양의 속성의 강맹한 무공을 익혔다면 양강지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천무지체라는 체질이 되었었다. 그것이 지금 무극지체로 바뀐 것이다.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이번에는 무공 창을 열어보았다. 어떤 새로운 무공이 생겼나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공이... "무공이!! 무공이!!!!" "무슨 일 있어?" 누나가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무공이 모조리 사라졌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동안 얻었던 무공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검기는 물론이고 검풍, 검막, 검강, 어검술까지도 모두 사라졌다. 더구나 그 뿐이면 말도 안 한다. 경공술뿐만이 아니라.... 무상검록의 무공까지도 모조리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무형무극검결. 무형무극창결. 무형무극권결. 무형무극도결. 무형무극심결. 무형무극보법. 무형무극신법....? 이게 다 뭐야?!" 물론 무상검록의 무공이 사라지고 생긴 무공이니 분명 대단한 무공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성취도였다. 하나같이 성취도 제로였던 것이다. 이 것들을 언제 다시 극성까지 익힌다는 말야?!!!!! 정말 절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텄다. 텄어... 이제는 은자림과의 대결이고 뭐고 없다.... 이런 성취도 제로의 무공 가지고 무슨 짓을 하라는 말인가? 무상검록의 무공이 남아 있다면 모른다. 그 것들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이상은 이길 도리가 없었다. 기본 능력과 체력... 내공은 써도써도 바닥을 보이지 않을 터이나 다 빛 좋은 개살구다. 아냐.. 혹시 모른다. 이 무공이 엄청 강한 무공이라서 성취도가 낮아도 무식한 파괴력을 낼 지도.... 나는 검을 들고 무공을 펼쳐보려 했다. 하지만 문뜩 또 하나의 문제점에 봉착했다. 본시 무공을 쓸 때는 그 기본 자세를 알아야 한다. 가령 무상검록 무상검 일장 일절 섬을 쓸 땐 검을 일직선으로 찌르며 섬을 쓴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섬을 쓴다고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자세는 비급에 나와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무공의 비급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그럴 지인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어떤 무공을 쓰겠는가... 잠시 허탈한 한숨을 흘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유빈아....." 누나가 내 손을 잡으며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누나의 그런 행동 덕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누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 무공이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혹시 이거 버그 아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역시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 물어봐야 할 듯 싶었다. 설마 버그라면 다시 수정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버그가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으아!! 복잡해!!!! 머리를 세차게 비벼댄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냥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세를 취하자 문뜩 무진이 떠올랐다. 무진의 자세가 바로 이것이 었.................. 콰앙!!!!! "꺄악!!!" 순간 내 몸이 무진을 펼쳐냈다. 너무 갑작스럽게 펼쳐진 것이라 누나가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진짜 놀란 것은 나였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20여장 뒤쪽에 누나가 있었다. 그리고 누나와 내 사이의 공간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이....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방금 무진을 쓴 것 맞아? 그런데 이게 무진이야? 무진을 쓴 것도 의심스럽고 내가 쓴 것이 무진인지도 의심이 되었다. 실상 나는 무진을 제어하지 못한다. 언제나 무진을 쓰면 5장의 공간만을 가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20여장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설마... 이 무형무극검결은...?" 나는 즉시 실험을 위해 땅을 향하여 검을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무상검 오장 이절 지를 떠올렸다. 콰콰콰콰쾅!!!! 추측대로 무상검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일전까지와는 궤를 달리했다. 2배? 아니... 이 정도면 거의 3배 이상의 파괴력이다. 점차 내 얼굴에 희열에 찬 미소가 번져갔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그 동안 익힌 무공들이 모두 들어있는 상태다. 무공 창에만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모두 쓸 수 있다면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크큭.... 크하하하하하!!!!"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웃음으로 터트렸다. 큭큭.. 무무 늙은이.. 기다리고 있으라고. 24 - 휴식 지저귀는 산새 소리와 녹음의 향취가 물씬 풍겨온다. 나는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우리는 지리산에 왔다. 방학이라고 집에서 침대에만 누워 게임만 하면 몸에 좋지 않다는 천희형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비롯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학 때 종종 여행을 했던 나로서는 거부할 일이 없어 찬성했고 민호와 진호, 시연누나, 진희누나를 끌어들여 지리산 등정에 오른 것이다. 진희누나는 어머님이 여행에 반대를 한 듯 했지만 (아마도 나 때문인 듯 하다. 여전히 나는 어머님께 미움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쏘냐?!) 그냥 아침 일찍 가방을 챙겨들고 진호와 함께 집을 나와 버렸단다. 진희누나... 의외로 막 나가는 성격도 있다니까.... 민우형과 아진누나는 올 수 없었다. 그 인간들 근래에 또 냉전이거든... 발단은 게임센터에 찾아온 여성 손님들에게 민우형이 꼬리치는 것을 (민우형은 단골손님 유치에 힘을 쏟은 것이라 말하지만......) 아진누나가 보아버린 것이었다. 아진누나는 이제는 진짜 못 산다고 친정으로 가 버렸고 민우형은 홀로 게임센터를 지키고 있는 상태다. 뭐.. 우리가 다시 돌아가면 평소와 다름없이 둘이 놀고 있을 것이니 걱정 없다. 그 두 사람 너무 자주 싸우는 터라.. 이제는 싸움이 아니라 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이니 말이다. 이건 천희형과 민호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에휴.....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 얼굴을 비춘다. 저 멀리 보이는 구름이 걸린 산봉우리들이 장관이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가 근처에 계곡이 존재함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으아... 힘들어. 그러니까 바다로 가자니까." 앞서가는 진호가 툴툴거린다. 진호의 옆에 있는 시연누나는 멀쩡한데 말야... "시끄러! 겨우 한시간 산을 올랐다고 그 모양이냐?!" 천희형이 웃으며 진호를 구박한다. 진호는 입술을 삐죽 내밀지만 무슨 말은 못한다. 천희형의 손을 잡고있는 유키코누나가 그런 진호를 보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쿡.." 내 옆에 있는 진희누나도 웃었다. 졸지에 일행에게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진호는 얼굴을 구기며 천희형을 노려보았다. "씨이.. 형은 왜 나만 구박해?" "너 밖에 불평하는 애가 없잖아. 진호야... 여자들도 잘 따라오는데 남자가 돼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형이 짐짓 근엄하게 진호를 꾸짖자 결국 우리는 모두 참았던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괜히 투덜거렸다가 본전도 못 찾은 진호는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시연누나가 그대로 진호의 머리를 때려버리는 것을 보니 쓸데없는 말이었음에 틀림없다. "좀 조용히 올라오면 안 돼?!!!" 가장 앞쪽에서 가던 민호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진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익히 알고있는 우리들은 히죽 웃어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너도 여자친구 만들어서 함께 왔으면 됐잖아." 당하기만 한 것이 화가 났을까? 진호가 민호에게 일격을 먹였다. 그리고 과감하게도 시연누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즉각 시연누나의 팔꿈치가 진호의 복부를 파고들었지만... 우리의 진호 민호를 놀리는 것이 더 중요한지 꿋꿋하게 버텨냈다. "으악!! 내가 뭐 하러 따라왔을까?!!!" 민호는 절규를 하고는 더욱 발길을 빨리 해 올라가 버렸다. 나는 그런 민호를 보며 혀를 찼다. 솔직히 민호는 주위에 여자가 많다. 조금 문제아처럼 보이지만 워낙에 성격이 화통하고 말재간도 좋아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이다. 내가 민호와 같은 학교에 다닐 때 남녀 불문하고 시선을 피하게 만드는 나와 반대로 민호의 주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몰려들었었다. 발렌타인데이 같은 날에는 아침에 등교를 하면 쏟아지는 초콜릿으로 산을 만들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집안 유전일까? 민호는 조금 바람기가 많은 녀석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녀석의 학교에서의 별명은 설탕이었다. 입에 넣으면 달콤하지만 금방 녹아 사라져 버리는.... 천고의 바람둥이로 통했던 것이다. 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민호의 생활을 보면 괜히 불쌍해 보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아마 내가 진희누나와 사귀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듯 싶다. 언제까지고 옆에 있어 줄 연인.... 이런 좋은 것을 안 만들다니... 역시 민호는 너무 불쌍해..... "으악~!!! 저 녀석 또 시작이야?!!!!" "유빈이 저 녀석이 제일 문제야!!!!" 진호의 외침에 본능적으로 뒤돌아본 민호가 발광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더욱 민호를 놀릴 생각으로 진희누나의 머리에 볼을 비볐다. 부럽지? 부럽지? 그러면 너도 여자친구 사귀어 임마! "최유빈!! 네 녀석이 감히 형님께 도전을 하는 것이더냐?!!! 유키코!! 우리의 러브리 파워로 저 가증스러운 녀석을 날려버립시다!!!" .......천희형은 나의 행동을 도전으로 인식했다. 형.. 나는 민호를 놀리려는 것뿐이었단 말야.... "오늘이야말로 너에게 간발의 차이로 빼앗겨 버린 아수라치킨공작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아내고야 말겠다." 유키코 누나를 껴안으며 천희형이 소리쳤다. 나와 진희누나, 유키코누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천희형을 보았다. 진호와 시연누나는 못 보겠다는 듯이 민호를 따라 먼저 올라가 버린 후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요."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샌 지도 모르고 한 다는 말이 있는데 딱 천희형이 그 짝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자에게는 친절하기는 했지만 저 정도로 망가지는 형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도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아수라치킨공작이라는 말을 영예롭게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다. "누나.. 고생이 심하겠어요..." 나는 유키코누나를 보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러자 유키코누나는 힐끔 천희형을 보며 웃었다. "귀엽잖아." 192cm의 키에.... 운동으로 단련된 탄탄한 체격... 인상도 저 정도면 깡패도 울고 갈 정도이겠다. 그런데 귀여워? 누나의 눈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역시.. 유키코누나도 눈에 뭐가 쓰인 건가 보다. 내가 유키코 누나를 띵한 얼굴로 바라보자 진희누나가 웃으며 나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너도 귀여워..." 뭐 나야 원래 귀엽지. 하지만 천희형은 결코 귀엽지 않아~!! 문뜩 위쪽에서 진호와 민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냥 산사태나 일어나서 저 인간들 묻어버렸으면!!!" "지리산의 산신령이시여~!! 이 성산을 느끼버터로 도배하는 저 인간들을 벌하소서!!" 아.. 글세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로 하라니까 자꾸 그러네... 24 - 심봤다!!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래쪽 계곡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진희누나 를 보았다. 산을 오르느라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있는 누나들이었다. 그 와 반대로 우리 남자들은...... "야!! 뻘 짓 하지말고 빨리 안 세우냐?!!" .......노동중이다. 민호 녀석이 작은 삽을 들고 나에게 이를 간다. 나는 마시던 콜라를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텐트 하나 사라. 이 구식 텐트를 언제까지 사용할 거냐? 요즘 새로 나온 텐트 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기가 알아서 땅 파고 펴지고 다 하던데 말야." 나는 텐트를 가지고 온 민호녀석을 원망했다. 하지만 민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에게 대꾸한다. "녀석... 진정한 피크닉을 모르는군! 그런 재미없는 사고방식을 가져 좋을 것 하 나 없다. 자고로 이런 곳에 오면 직접 수동으로 텐트를 세우는 거야! 너 이 텐 트가 요즘 얼마나 비싸게 먹히는 줄 아냐? 자그마치 40년이나 된 텐트라고! 이 거 인터넷에 내 놓으면 완전히 대박이야! 전에 한 번 심심해서 올려 봤는데 기 본이 천만 원이더라. 너는 오늘 천만 원짜리 텐트에서 자게 된 거야! 다 이 형 님 덕분이지." 잘났다. 벌써 몇 년 째 들어 온 말이라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나는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텐트 살을 끼워 맞췄다. 제길.... 그보다 진호와 천희형은 어디로 간 거야? 자기들 텐트는 자기들이 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천희형과 진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 다. 잠깐 주위를 돌아보고 온다더니... 벌써 30분 동안 소식이 불통이다. 혹시 무 슨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천희형을 생각하면 사고는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여~ 우리 왔다~!!" 생각하기 무섭게 천희형과 진호가 돌아왔다. 하여간 저 인간들은 양반 되기 글 렀다니까.. 쯧쯧.... "어라. 뭐예요?" 천희형과 진호는 뭔가를 옷에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민호의 물음에 진호가 웃 으며 자신의 옷에 들린 것들을 쏟아냈다. "버섯이잖아." "돌아다니다가 발견했어. 그리고 이건...." 뒤이어 천희형이 꺼낸 것은.... 어라? 저건.....? "만년삼황이다!!!" 당당하게 외치는 형을 잠시 바라보던 나와 민호는 동시에 한숨을 토해냈다. 솔 직히... 산삼을 쉽게 볼 수나 있나? 산삼 하나 발견하면 그야말로 때 부자가 되 는 것이다. 괜히 산삼이 아닌 것이다. 분명 도라지일 것이다. 설마 산삼일 가능성은... 일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형.. 그건 도라지라니까요." 진호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질렸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마 오면서 서로 의견반목을 했나 보다. "아냐!! 이건 진짜 산삼이라니까! 너도 봤잖아 이거 옆에 백사 한 마리가 설치 고 있던 것!!" 뱀이 옆에 있다고 그게 다 산삼일까? 말도 안 된다. 그건 무협지에나 나오는 이 야기지.... 때마침 소란을 듣고 누나들이 올라왔다. "무슨 일이야?" "유키코! 봐!! 이거 산삼이야! 그것도 자그마치 1만년이나 먹은!!" 형이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유키코누나와 진희누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천 희형이 들고 있는 도라지(로 추정되는.......) 뿌리를 응시했다. "어머나!" 유키코누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누나 진짜로 믿나봐... 나와 진호, 민 호는 질렸다는 듯이 재차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때 유키코 누나가 멍한 얼굴 로 소리쳤다. "이거 진짜 산삼이잖아!" 에...... 뭐? 순간 모두의 눈이 크게 팽창하며 황급히 천희형의 손에 들린 도라지 (로 지금까지 추정한) 뿌리로 돌려졌다. "누나... 설마... 진담이에요?" 내가 놀란 얼굴로 유키코누나에게 물었다. 그러자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본 적 있어. 이 꽃은 분명 산삼이야.. 그런데 이거 진짜 크네... 족히 수백 년은 된 것 같은데." 지.. 진짜야? 나는 황급히 일어나 천희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제까지 도라지 라고 무시했던 산삼을 보았다. 굵기는 족히 3cm는 됐고 길이는 20cm가까이 되 었다. 그냥 엄청나게 큰 도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내 말 맞잖아. 산삼이라니까." 천희형은 기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나는 천희형의 말을 무시하 며 유키코 누나를 보았다. "누나... 이거 진짜 산삼 맞아요?" "맞을 거야. 뭐 더 정확한 것은 감정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지만.... 거의 정확할 걸..." 지.. 진짜 산삼? 이게? 난 생전 처음 보는 산삼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산삼으로 눈을 모았다. "그런데... 이거 진짜 산삼이라면 얼마에 팔릴까?" 진호가 물어왔다. 나는 잠시 계산을 해 보았다. 전에 200년짜리 산삼이 엄청 부 자에게 몇 십 억에 팔려갔다는 말도 들었거든. 이게 만약 그보다 더 오래된 산 삼이라면....? "형!! 우리 이거 나눠요!!" 돈! 돈!! 돈!!!!! 순간 나의 눈이 돌아갔다. 뭐 내가 한 일은 없지만... 이걸 그대 로 형에게만 줄 수는 없었다. "미쳤냐? 이건 내 거야!!!" 천희형은 대번에 산삼을 품에 안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 는 일이다. 나와 진호, 민호는 그대로 형에게 달려들었다. "형이 5먹고, 내가 3, 진호 민호가 각각 1씩 먹으면 되잖아요!! 그것만해도 얼마 예요?!" "야!! 왜 네가 3이야?!!!" 진호와 민호가 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즉시 들고 있던 텐트 살로 그들의 이 마를 시원하게 쳐 날려버리곤 의견을 묵살시켜 버렸다. 재차 발광을 막기 위해 근처에 놓인 끈을 들어 녀석들을 묶은 나는 다시 형에게 달려들었다. "방해자는 모두 보냈어요! 다시 타협하죠. 형이 6, 제가 4 어때요?" "내가 찾은 건데 왜 너한테 4할이나 넘겨야 하는데?!" "지리산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저라고요!!" 이런 나와 천희형을 누나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천희형은 산삼을 사이에 두고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옥신각신할 뿐이었다. "좋아요!! 제가 이번에 무무녀석 박살 내 버리고 구음진경 얻고 나면 형에게 줄 게요! 어때요?" "필요 없어!! 그것말고도 최절정무공을 두 개나 익히고 있다!" "전부터 형이 눈독들이던 태양신검 드릴게요! 아니.. 거기다가 월령신검까지 줄 게요! 형하고 유키코누나가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 좋잖아요!" 24 - 심봤다!!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천희형의 눈빛이 약간이나마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양신검과 월령신검은 한 제국에 몇 개 안 되는 유니크아이템이거든. 천희형이 부단하게도 눈독들이던 것이지만 언젠가 진희누나와 내가 들고 다니려고 끝가지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덤으로 태극이열검결도 드릴게요!" 태극이열검결은 천지진결과 비슷한 합격진이었다. 시전자 둘 모두 250레벨을 필요로 하는 합격진으로, 천지진결에 비하면 조금 떨 어지지만 천지진결을 제외하곤 현존하는 최고최강의 합격진이다. 처음에는 나와 누나가 이것을 배우려고 했는데 천지진결 때문에 수장되어 버린 녀석이었다. 이런 이인 합격진은 주로 연인끼리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받고 있는 무공으로서 팔면 족히 절정무공 열권 이상의 가격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태양신검과 월령신검.. 그리고 태극이열검결까지... 모두 합치면 현금거래를 했을 때 족히 수 천만 원.... 아니 잘만 팔면 수억을 호가하는 물건들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되도록 게임상의 돈을 현실과 결부시키는 것은 하고싶지 않은 나이고... 또 그것 이전에 수백 년 먹은 산삼이라면 4할 만 받더라도 그에 열 갑절은 이득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으윽... 태양신검에.. 월령신검.. 태극이열검결? 그건....." 형이 흔들린다. 나는 더더욱 형의 혼란스러움을 부채질했다. "네... 그리고 또 형이 원한다면 뭐든지 드릴게요. 아! 그건 어때요? 저한테 있는 미스릴 실 전부다 드릴게요. 그것으로 유키코누나 옷을 만들어 주면 좋잖아요." "그것도 좋을 지도..... 아!! 안 돼!! 이건 나와 유키코를 위한 거라고!!" 이런.. 망할.. 다 넘어 왔는데.... 나는 울분으로 땅을 차며 이를 갈았다. 그런 나 를 노려보며 천희형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증스러운 녀석.. 그런 게임상의 물건으로 나를 현혹하려 들다니...." "형이야말로 너무합니다!! 겨우 산삼 한 뿌리 가지고 우리의 우정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생각입니까?" "겨우 산삼 한 뿌리라니!! 이건 앞으로 나와 유키코의 즐거운 신혼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거란 말이다!! 우정? 개나 주라지!! 솔직히 말해서 네가 이걸 얻었다 면 나에게 주겠냐?" 뭐라고 반박할 말은 없었다. 형의 말처럼 내가 산삼을 얻었다면 나 혼자 꿀꺽 해 버렸을 터이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을 말하고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줄 것입니다!" "고래가 알 낳는 소리 지껄이네!!" 크억!!! 그런 힘 실린 카운터를? 이렇게 된 이상 말로는 안 된다! 힘으로라도 빼 앗고 말리라!! 나는 즉시 형에게 달려들었다. 힘으로는 형에게 당할 수 없더라도 나에게는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악과 깡이 있었다. "내 놔요!!" "싫다 임마!!" 나와 형이 몸으로 부딪치자 이제까지 한숨쉬며 바라만 보고 있던 누나들이 나 섰다. 진짜 못 봐주겠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진희누나와 유키코누나가 나와 천 희형을 떼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천희씨!" "유빈이 너도 그만 해!" 누나의 약간 화 난 목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하지만 산삼을 안 빼앗겼다는 것에 안심하며 히죽 웃는 천희형을 보자 다시금 머리로 피가 몰렸다. 나는 재차 천희형에게 달려들었고 때마침 밧줄을 풀어 낸 민호와 진호도 합세 했다. 결국 사파전이 되어 버렸고 누나들은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우 리들을 무시해 버렸다. "우리는 저녁이나 준비하자... 바보들은 그냥 바보들끼리 놀라고 놔두고..." 유키코누나의 말에 진희누나와 시연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 고는 가방에서 준비해 온 취사도구를 꺼내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기로 열을 발생시키는 취사도구였기에 산불 위험은 없어 오래 전부터 산에서 취사는 허락된 상태였다. 물론 쓰레기 처리는 확실하게 해야 하지만... 그건 상 식 아니겠는가.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천희형이 혼자서 꿀꺽 하려고 하는 산삼이었다. 잠 시 누나들을 응시하던 나는 재차 천희형에게 몸을 날렸다. 이미 천희형은 진호 와 민호에게 잡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산삼!! 산삼!! 산삼!!!!" "정력제!! 정력제!! 정력제!!!" 앞의 산삼을 부르짖는 인간은 진호였고 뒤의 정력제를 부르짖는 인간은 민호였 다. 그러고 보니 산삼이 정력증진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말은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산삼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형만 책임져야 할 여자가 있는 것 아냐!!!!" 나는 이를 갈며 천희형의 손목을 잡아챘다. 워낙에 키가 큰 형이었기에 내가 폴 짝 뛰어올라도 손에 들려있는 산삼을 잡아 챌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천희형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산삼으로 남은 손 을 뻗었다. 결국 내 손에 산삼이 잡혔다. "야!! 이거 못 놔?!!" "죽어도 안 놔!!! 형이 유키코누나를 위하듯이 나도 진희누나를 위해서 절대로 못 놔!!!" "아직 성인도 안 된 녀석이 어째서 이런게 필요하단 말이냐?!!!" "내년이면 성인이야!! 그리고 지금 성인이 아니더라도 할 건 다 한다고!! 누나에 게 세 번밖에 못 해 준단 말야! 이게 있으면 다섯 번도 무리가......" 까앙!!! 순간 내 머리에 뭔가가 날아와 박혔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고 산삼을 잡고있던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땅에 떨어진 나는 얼얼한 뒷머리를 누르며 내 머리를 때린 물건을 찾았다. 한 쪽에 냄비 하나가 뒹굴고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대체 저게 어디서 날아 온 거지...? 나는 띵한 정신을 원래대로 돌리며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희형과 진호, 민 호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산삼 쟁탈전 따위는 이미 잊은 듯 그들 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뜩 살기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살기의 진원지를 찾은 나는 진희누나의 싸늘 한 시선을 볼 수가 있었다. 누나의 옆에서는 유키코누나와 시연누나가 입을 가 리고 배를 누른 채 뒹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순간 진희누나가 다른 냄비를 들어 올렸다. 나는 온 몸에 오한이 이는 것을 느 끼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런 나에게 얼굴을 붉히고 성큼성큼 다 가온 진희누나는 순간적으로 냄비를 휘둘러 버렸다. 까앙!!! 피할 틈도 없었다. 어찌나 빠른 한 수였는지... 역시 누나가 괜히 태권도 유단자 가 아니었다. "바보!! 해삼! 멍청이!!! 말미잘!!!!" "으악!! 누나!!! 왜.. 왜 그래요?!!! 말로... 말로 해요!!!" 쉴새없이 날아오는 공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만 있 다가는 진짜 병신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누나의 손을 잡았다. 나 에게 손목이 잡힌 누나는 잠시 씩씩거리더니 결국은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으앙!!! 유빈이 너 진짜 싫어!!!" 나.. 어떻게 해서 누나를 울린 거지? 아직까지도 내가 왜 누나에게 맞아야 하는 지... 누나가 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귀로 천희형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벌써 일 치른 거냐?" 순간 내 몸의 핏기가 싸악 가셨다.... 25 - 빙혼검녀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25 - 빙혼검녀 지리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째 누나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누나의 어머님 때문 에 집으로 찾아가기도 힘들고.... 학교는 방학이라 갈 수도 없고.... 게임에는 접 속을 하는 듯 하지만..... 역시나 언제나 내 메시지는 차단시켜 버리고 혼자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하아.. 그 놈의 산삼 한 뿌리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하긴 내가 너무 흥분해서 미친 듯이 입을 놀린 죄이지... 참고로 그 산삼은 분란조성이 된다는 이유로 유키코누나의 손에 들린 식칼에 의해 가루로 화해 국 속으로 뿌려졌다. 덕분에 그게 진짜 산삼이었는지.. 아니면 산삼을 닮은 도라지 뿌리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어졌다. 뭐.. 민호가 그러는데 정력에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니 산삼이 아니라고 자위하 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누나의 화를 풀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인 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제길.... 최유빈 인생 일대의 대 핀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희형과 유키코누나, 시연누나, 진호, 민호가 그 때 들은 이야기를 함구해 주겠다고 한 것 정도일 것이다. 그들의 그런 약조마저도 없었 다면 나는 앞으로 누나 앞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유빈아.] 진호의 메시지다. 현재 나와 누나는 한 제국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에리두로 가 서 마대륙으로 넘어간 이유도 내 레벨 업보다는 누나의 레벨 업이 목표였었다. 누나를 조금이라도 강하게 만들어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나라고 해도 보호 해 줄 수 없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레벨이 350을 넘으면서 무극지체로 승격해 최고의 힘을 손에 넣었고 덕분에 누나를 지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 일단 마대륙을 나와 한 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누나도 레벨 업만 하고 지내는 것은 싫어하는 터였고... 이왕 이렇게 된 것 남은 1달 반 동안은 한 제국 곳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때우면서 데이트를 즐길 생각 이었는데... 그런 즐거운 시간들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린 것이다!! [유빈아!] 재차 진호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서 그냥 차단을 시켜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혹시라도 누나의 이야 기가 나올지도 모르는 터라 나는 진호에게 답신을 보냈다. [뭐냐?] [어디냐?] [흑룡성....] 흑룡성은 한 제국 최 서부에 위치한 성이었다. 조금만 남부로 내려가면 사파의 종주문파인 마교가 버티고 있는 십만대산이 나오는 터라 이 성에 발을 들이는 대부분의 유저들은 사파이고 그 외 남은 이들은 낭인들이다. 정파는 눈을 씻고 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곳 흑룡성이다. 여기서 괜히 정파 행세하고 돌아다니다가는 칼 맞기 일수이거든. [아직도 거기냐?] [누나를 찾아야 다른 곳으로 가건 할 거 아냐! 제길.. 누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누나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어떻게든 누나의 화를 풀게 하고 싶었다. 하 지만... 만나지를 못하니 방법이 없었다. 전에 한 번 쓴 마을에서 고함지르기까지 해 보았지만 이번에는 이렇다할 수확 이 없었다. 오히려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벌금만 무식하게 물었다. 수배를 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헛물만 킨 꼴이다. 하긴 누나에게는 외모를 바 꿀 수 있는 아이템이 있으니..... 에리두에서라면 몰라도 한 제국에서는 누나가 그 아이템을 사용하면 알아 볼 사람이 없을 터이다. [너도 참... 그럼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거냐?] [누나를 찾을 때까지.] [아직 거기에 있은 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누나가 이 흑룡성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 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호 네가 누나한테 말 좀 해 주면 안 되냐?] [불가능해... 나도 요즘 누나 얼굴 무서워서 못 볼 지경이다.] 하아... 진짜 막막하다. 그나마 진호가 진희누나와 함께 살고 있으니 어떻게 다 리를 놓아주면 좋을 터인데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니 진짜 어떻게 파고들 틈이 없다. 정말 순진한 사람이 한 번 화가 나면 더 무섭다더니.. 누나가 딱 그 표본 이다. [그럼 수고해라. 나는 누나랑 약속이 있어서.] 진호가 말하는 누나는 시연누나다. 괜히 배알이 꼴린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메 시지 창을 닫았다. 제길.. 누구는 속이 타 죽겠는데 데이트나 즐기시겠다? 다음에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고 말리라..... ...... 하아.....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이 어디에 있는가. 우선 누나를 찾아야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흑룡성 성내를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누나를 만 나야 한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하 나같이 100레벨 이하의 유저들뿐이었다. 현재 누나를 찾을 단서는 내공수치를 살피는 것뿐이었다. 누나의 레벨은 250이 넘으니 이 흑룡성에서 그런 레벨에 어울리는 내공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을 것 이다. 더구나 여성은 그 수가 더욱 적을 것이다. 에리두 전역을 뒤져도 누나 레벨 대 의 여성 유저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 모두가 여기에 모여 있다 해도 세 사람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런 일은 없을 터이고 분명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나일 것이다. 아무리 누나가 내공을 감춘다 해도 내 눈을 벗어 날 수는 없다. 대략 한 시간 정도 흑룡성을 돌아다닌 나는 전방에 소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어쩌면 누나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만 불행히도 소란은 누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돌려 줬잖아요! 뭘 더 내 놓으라는 말이죠?!" "분명 금 20냥이 들어 있었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아... 미치네... 처음부터 은 20냥만 든 전낭을 가지고 어디서 거짓말이죠?!" "소매치기한 주제에 경비에게 넘기지 않은 것도 감사히 여겨!! 당장 훔친 돈 안 내놓겠어?!" "내가 언제 훔쳤다는 거야!! 땅에 떨어진 것 주워주니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 누나를 찾기에도 바쁜데 여기서 구경이나 할 틈은 없었다.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그 아가씨가 소 리쳤다. "오빠! 마침 잘 왔어. 저 인간이 날 자꾸 소매치기로 몰아 붙이잖아. 히잉... 오 빠가 뭐라고 좀 해 줘!" .......지나가는 사람 골라잡아 사건에 개입시키는 방법은 종종 쓰이는 방법이다. 당연히 내가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내가 골라 잡히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놔." 나는 이를 갈며 그 아가씨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욱 울먹이며 나에게 달 라붙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별 것이 길 막네... 콱 베어버리고 가 버릴 까 보다. 25 - 빙혼검녀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이 아가씨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나는 곧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게임오 버 시켜 버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괜히 경비병들 몰려오는 일은 사양하 고 싶었다. 나는 내 허리를 감고 있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 내 앞을 몇몇 무리가 막아섰다. "오호.. 일행이 있었군. 그냥 가려고? 안 되지. 적어도 동생이 한 짓에 대한 보 상은 해 줘야 하는 것 아냐?" 보아하니.. 세 명 다 절정고수다. 그러니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앞을 막는 것이 겠지. 현재 내가 드러내 놓고 있는 내공은 대략 100레벨 정도의 수치였다. 당연히 저 들은 나를 하찮게 볼 터이다. 내공을 감출 수 있는 200레벨 이상의 최절정고수는 한 제국 전체를 뒤져도 60 명 안팎이다. 설마 내가 그 60명안에 들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 다. 나도 그것을 밝히고 싶지는 않다. 누나를 찾는 것이 급선무인 이상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나는 품에서 금 10냥 짜리 전표 두 개를 꺼내 던졌다. 그들은 내가 품에 손을 넣자 암기라도 던지려는 줄 알고 움찔했지만 날아온 것이 전표라는 것을 알고 검으로 가져갔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전표를 받아들고 희희낙락했다. "오빠 쪽은 조금 말이 통하는군." 더 이상 볼 것도 없었기에 나는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금 내 앞을 막았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또 뭐야?" "몰라서 그러나? 지금 받은 것은 잃어버린 돈이고... 아직 보상금을 못 받았거 든. 우리는 소매치기를 당하고도 관가에 동생을 넘기지 않았어. 최소한의 성의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것 아냐?" 누가 사파 아니랄까봐... 아주 대 놓고 나오네. 나는 잠시 머리를 누르며 분을 삭혔다. 진짜 이 자식들 다 보내버리고 싶다. 그래도... 최소한 얼마 정도를 원하 는지는 들어봐야겠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녀석들이라면 넘어가기로 하자 고.... "얼마를 원하는데?" "금 100냥." 잘 났군. 나는 쓰게 웃으며 목을 주물렀다. 나에게 있어서 금 100냥은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이런 녀석들에게 주기는 싫었다. 한 99냥까지라면 봐 주려고 했는데 말야...... 쳇.. 1냥 때문에 싸우게 생겼군. 나는 품에서 금 100냥 짜리 전표를 꺼내며 히죽 웃었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 그들의 눈이 사악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한 녀석이 도를 들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피해냈다. 좌우에서 검이 뻗어 온다. 몸을 뒤로 꺾어 흘려낸 후 그대로 뒤돌기를 했다. "그나마 재주가 있군." 눈치가 코치냐? 절정고수 셋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을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해야지.... 그나마 재주가 좋군? 참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그보다... 경비병은 왜 안 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나에게 생대가 비 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경비병을 기다리나? 하핫. 어쩔까? 여긴 흑룡성이라네." 흑룡성? 아!! 맞다!! 제길 여기는 사파구역이었지... 사파구역은 워낙에 빈번하게 싸움이 일어나는 지역이라 경비병들도 유저들의 싸움에는 잘 끼지 않는다. 무분별한 PK라면 몰라도 이런 시비로 비롯된 싸움에 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제까지 정파의 구역인 남연성에서만 너무 살아버린 터라 잠시 이런 사실을 망각한 듯 싶다. 아니면 누나만 생각하다가 머리가 굳어버렸거나.... 괜히 지금까지 혼자 삽질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짜증이 났다. 처음부터 이 녀 석들을 모조리 쳐내고 가도 아무 무리가 없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삼매진화를 일으켜 손에 들린 전표를 태워버렸다. 순간 주위가 술렁 거렸다. 삼매진화는 150레벨이면 가능하지만 무엇을 태울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180은 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겨우 100레벨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삼매진화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연히 열에 아홉은 실력을 감춘 최절정고수라는 것을 뜻한다. 전표의 재를 털어 내 버린 나는 그대로 몸을 날리며 풍뢰십삼격(風雷十三擊)을 펼쳐냈다. 일류무공이었지만 무극지체에 들어서며 무형무극권결을 익힌 내가 펼 치는 풍뢰십삼격은 절정무공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순식간에 3명을 날려버린 나는 이제 하나 남은 녀석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 속을 박박 긁던 녀석은 어깨를 움츠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어떻게 죽을래?" "하하.... 그게.. 살려주세요! 저 이번에 죽으면 140레벨대로 떨어진다구요~!" 오호~ 그래? 그거 마침 잘 됐군.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녀석에게 나는 히죽 웃었다. "죽이고 리스장에서 기다리다가 또 죽여줄까? 좋군... 한 열 번만 그렇게 죽여주 면 대번에 100레벨 이하로 떨어질 테니 말야." "히익!" 물론 실현 가능성은 적다. 접속을 안 해버리면 되거든. 내가 언제까지고 리스장 에서 기다릴 수도 없고 말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번 한 번은 죽일 수 있다. 그것만해도 이 녀석에게는 충분히 고달픈 일이다. 졸지에 일류고수로 떨어지게 생겼으니.... "어떻게 죽을래?"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그대로 도망을 친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그대로 경공을 써 그 녀석과의 거리를 좁히고는 주 먹을 내질렀다. 쾅!! 그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다. 나는 무릎으로 녀석의 가슴을 쳐 세우고는 재차 주먹을 뻗었다. 서서히 회색 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니 게임오버를 당한 듯 싶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털며 몸을 돌렸다. 짜증나는 녀석을 보내버린 터라 조금은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누나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뜩 허리를 감싸는 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헤헤. 오빠 고수인가 봐. 나 좀 키워주면 안 돼?" 조금 전 그 아가씨다. 나는 힐끔 뒤돌아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세웠다. "이거나 먹고 꺼져." "윽!! 이래봬도 나는 여자야! 어떻게 여자한테 그런......" 헛소리. 나에게 진정한 여자는 진희누나 뿐이다. 다른 여자를 여자로 보고픈 마 음은 없다. 물론 유키코누나나 아진누나, 시연누나 같은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만 처음 보는 여자는 내 관할 밖이다. 나는 허리에 걸린 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죽여줄까?" "쳇. 무슨 남자가 이래? 당신 같은 남자는 내가 사양한다." 그녀는 나에게서 떨어진 후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 었다. "잠깐." "뭐? 나한테는 관심 없다며?" 관심이 있을 턱이 있나. 나는 다른 용건이 있단 말야. "물론 관심 없어.... 네가 가져간 내 전낭에 관심이 있지." **** 25 - 빙혼검녀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그녀의 몸이 움찔한다. 하지만 재빨리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무.. 무슨 소리야?!! 날 소매치기 따위로 보다니!! 아무리 당신이 고수라고 해도 못 참아!!" "뭐.... 상관없어. 별로 돈도 안 들었으니까. 그래도 내 돈을 아무 보상도 없이 주는 것은 그렇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게임오버 해라." 아무리 100레벨 이하의 유저라고 하지만 게임오버 당하는 것이 달가울 리는 없 다. 그녀의 표정이 가볍게 질려갔다. "농담이죠?" "알짤 없이 거짓하나 안 보탠 진담이야." 나는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더니 얼마 후 부리나 케 몸을 돌려 도주했다. 하지만 절정고수도 못 도망갔는데 이제 겨우 이류고수 인 그녀가 어찌 내 손을 피할까. 나는 즉시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갑자기 우측에서 한 자 루의 검이 뻗어와 내 검을 막아냈다. 그냥 가볍게 휘두른 검이라지만 그래도 절정고수가 아닌 이상 쉽게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다. 그것을 가볍게 막아냈다는 것에 나는 좀 놀라며 힐끔 시선을 돌 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치고는 꽤나 장신인 아가씨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뭡니......." "누나!!" 내가 막 뭐냐고 물으려는 순간 소매치기 아가씨가 그녀를 보며 소리쳤다. 뭐 야... 아는 사이였어? 그렇다면 이 여자도 한.......... 잠깐?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나는 머리를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누나는 남동생이 여자 형제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여자라면 '누나'가 아닌 '언니'라는 말이 정상이지 않은가? 설마 저 소매치기가.. 남자라는 말? 하지만 어디를 보더라도 여자인데... 더 월드는 아이디를 만들면서 신체스캔을 하기 때문에 보통 기본 바탕은 현실의 자신과 동일하다. 몸의 상처를 사라지게 한다던가... 아니면 없는 상처를 멋으로 달고 다닐 수 있고, 머리카락 길이를 조 정하는 등의 변화는 줄 수 있지만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기는 힘든 법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뭐야? 누가 보더라도 여자다. 가슴이야 뭘 집어넣었다고 보면 넘어가더라도... 저 한줌도 안 되는 가는 허리와 자세에서 은연중에 풍기는 여성 스러움은 분명 그.... 그녀... 아무튼!! 저 녀석이 여자라고 증명하고 있다. 설마... 변태? "너... 남자였냐?" 내 말에 녀석의 몸이 움찔했다. 남자가 맞나 보다. "오호호... 시.. 실수였어요.. 저는 여자예요. 여자! 어떻게 저를 남자로 보고..." 너 갖으면 믿겠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으로는 안 믿는다는 감정을 팍팍 드러냈다. 녀석의 얼굴에 더더욱 많은 식은땀이 흘렀다. "저 진짜 여자라니까요!" "안 믿어. 뭐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지.... 나는 그 쪽을 게임오버 시키고 가면 그 만이니까 말야."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힐끔 녀석의 누나를 보았다. 대충 살펴보아도 절정고수 이상이다. 어쩌면 최절정고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내가 지금 할 일은 저 짜증나는 변태 녀석을 골로 보내고 다시 진희누나를 찾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막아서면 그녀도 처리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최절정고수라고 하더 라도 나에게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막을 겁니까?" 나의 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동생이 게임오버 당하는 것 을 누나로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이다. 어차피 싸우게 될 것이라면 강한 쪽부터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다. 괜히 뒤에 폭탄을 두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흥! 우리 언니가 뭐로 보여? 네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 언니한테는 한 주먹 감 이야." 언니...? 구역질난다. 이미 녀석을 사내로 판단하고 있는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도 동생에게 언니라고 불린 그녀까지도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니 더더욱 녀석이 남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참 누나로서 고생도 많군... 약간 불쌍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기에 나는 약간의 내력만을 써서 검을 휘둘렀 고 그녀는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했다. 순간 폭발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쪽으 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비록 제대로 방어를 해서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이 한 수로 서로의 격차를 충분히 인식시켜 줄 수 있었다. 그녀도 그 차이를 알았는지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가진바 최강의 기술을 사용하길 충고 드립니다. 최소한 제 몸에 상처를 입히고 싶다면 말이죠." 나 보다 세네 살 많은 듯 보이기에 존대를 해 준 것이다. 더구나 저런 얼간이 같은 동생을 감싸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기에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것도 있었다. 나는 외동아들이기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설령 저런 변태 동생이 있었다면 아마 다락에 가두어 놓고 아사를 시켜 버렸을 것이다. 물 론 진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야오이는 용납해도 변태는 절대로 용납 못하거든.... .....아.. 두 개가 같은 것인가? "뭐 하냐?" 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야오이와 변태의 상관관계 고찰을 하고 있을 때 누군 가가 내 등을 쳤다. "응?" 고개를 돌린 나는 뒤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민호를 보곤 조금 놀랐다. 이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냐?" "나 원래 이 근처에서 놀잖아." 아.. 그러고 보니 민호는 사파 쪽 계열이다. 익히고 있는 무공도 수라참마도법 (修羅斬魔刀法)이라는 사파계열의 절정무공이고 말이다. "어라.. 누님 오랜만이네요." 민호가 나와 대치하던 여성유저에게 아는 체를 했다. 민호와 알고 있는 사이인 가 보다. 그녀도 민호를 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아직도 여장하고 다니냐?" 이번에는 그 변태녀석을 보고 묻는다. 그러자 변태녀석은 얼굴을 구기며 민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겠다. 저 녀석은 여장을 취미로 하는 변태였어.... "그런데 싸우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조금 시비가 붙었어..." 민호의 물음에 나는 검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답했다. 민호와 아는 사이이니 만 큼 내가 한 수 물려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상한 쪽으로 해석한 녀석이 있 다. 바로 변태녀석..... "다행인줄 알라고. 우리 누.... 언니와 싸웠으면 너는 가차없이 게임오버였을 테 니까." 아.. 진짜 저 녀석만이라도 죽여 버릴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을 노려보 았다. 하지만 녀석은 겁도 없이 나를 마주보았다. 진짜 죽여버릴까 보다... "큭큭.. 너희들 오랜만에 만나서... 왜 그러냐?" 갑자기 민호가 배를 잡고 웃었다. 나와 변태는 고개를 갸웃하며 민호를 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다니...? 내가 저 녀석을 언제 봤다고 그래?" "어라? 유빈이 너 진짜 저 녀석 몰라? 네 동창이잖아." 동창? 저 변태가?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변태를 돌아보았다. 그도 황당해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유빈....? 설마.. 최유빈?!" 어...? 내 이름을 듣고 성까지 맞추네. 진짜 나를 알고 있는.....? 잠깐 그러고 보 니 어디선가 본 듯한 녀석인데.... 여자같이 예쁘장하게 생긴........ 순간 내 머리에 불빛이 번뜩였다. "변태 하수린?!!!" 중학교 동창?! 학교 축제 때마다 여장해서 상이란 상은 싹 쓸어버렸던 그 인간? 내 외침에 녀석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망할!!! 누가 변태야?!!! 이건 장난이라고!!!" "세상에나...... 너 그새 수술했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저 녀석 여전하네. 중학교 때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안 갔는데 말이다. 수술이라는 말에 발광하는 수린이를 무시하고 나는 수린이의 옆에 있는 수린이 누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누나가........" "주린이 누나지 누구겠냐? 뭐 여기서는 빙혼검녀 냉월영이라고 불리지만... 누나 유빈이 기억나죠?" 나와 누나는 한참동안을 멍청하게 서로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싸우려 했던 상대가 설마 중학교 동창의 누나라니... 머리가 어지러 울 정도였다. 거기다가 빙혼검녀 냉월영? 주린이 누나가 삼봉 중에 하나였을 줄 은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하......" 결국 나와 누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 우유를 잘못 먹어 배탈이 나 버렸습니다...-_- 하루종일 죽을 뻔했네요...... 그렇지 않아도 입이 심심하다고 요구르트 세 줄을 옆에 두고 하나씩 빨았는데.. 거기에 상한 우유까지 먹어 버렸으니.... 진짜 하늘이 노래질 지경입니다... 하아... 26 - 잃어버린 자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26 - 잃어버린 자 "정말 오랜만이네." "저도 설마 누나를 여기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주린이 누나는 수린이 녀석의 누나로 내가 대전에 있을 때 아진누나를 제외하 고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누나이다. 누나와는 첫 만남부터 파격적이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어김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하교를 해 집으로 달려가 더 월드를 만끽하려던 내 앞을 막아 선 것 은 수린이 녀석이었다. 민호와 장난치던 수린이 녀석의 실수로 그만 걸레를 빨았던 구정물이 든 양동 이가 그대로 내 머리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당시 우리 집은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이었고 수린이 집이 학교 바로 옆에 있 었기 때문에 수린이 손에 이끌려 녀석의 집으로 가야 했다. 악취가 풍기는 상태 로 집까지 가는 것은 나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하지는 않았다. 수린이 집에는 아무도 없었던 터라 젖어버린 옷을 벗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 다. 그리고 한참 샤워를 하고 수건 하나만 두르고 막 욕실을 나서려는데.... 그만 주린이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수린이 녀석 말로는 근래 누나가 늦게 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걱 정이 없었었다. 옷도 샤워를 끝낸 후 수린이에게 빌려 입으면 될 것이라고 가볍 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욕실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었고 말이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그 때 하필이면 주린이 누나가 학교에서 돌 아와 버린 것이다. 마침 수린이라도 집에 있었다면 몰라도 하필이면 슈퍼에 가서 뭐 좀 사온다고 잠깐 나간 상황이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욕실에서 수건 하나로 몸을 가린 채 숨을 죽이고 수린이가 돌 아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온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 믿 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야속한 것이 아니었던가?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 은 터라 밖은 푹푹 찌는 더위로 물들어 있었고 당연히 주린이 누나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욕실로 향했던 것이다. 내가 욕실에서 빨리 수린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욕실 문 이 열리며 주린이 누나가 들어왔고 순간 세상의 시간은 정지했다. 욕실에 옷 입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주린이 누나도 옷을 모두 벗고 들어왔었다. 나는 그나마 하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누나는 그런 것도 없었고 순 식간에 나에게 나신을 보여버린 것이다. 그 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는 보지 않아도 비디오다. 물론 시끄러운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린이 누나는 엄청나게 냉철한 성격이거든.... 누나는 그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나에게 던져버렸고 나는 날아오는 물건을 피 하지 못하고 넉 다운 당해 버렸다. 당시 나를 뻗게 한 물건은 드라이기라고 기 억하고 있다. 그렇게 단번에 나를 눕혀버린 주린이 누나는 그대로 욕실을 나가 침착하게 옷 을 다시 입고 전화기를 들어 경찰에 '변태가 집에 있다'라고 신고를 해 버렸다. 불과 1분만에 경찰이 수린이 집으로 출두했고 나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그 때까지 나는 주린이 누나에게 당했던 충격으로 정신이 멍해있는 상태였다. 해명 이고 뭐고 할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다행히 때마침 돌아온 수린이 덕분에 오해가 풀려 연행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입이 가벼운 수린이 녀석이 그 일을 학교에 퍼트려 버렸고 나는 한동안 수린이 와 더불어 학교에서 2대 변태지존으로 불려야 했다. 물론 나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인간은 없었지만 나 역시 귀가 있으니 음지 에서 퍼지는 소문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주린이 누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처음에는 서먹했지 만 주린이 누나가 먼저 나에게 사과를 해 오면서 관계는 급진전되었다. 그 때부 터 대략 2년 정도를 누나와 어울렸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주린이 누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누나는 대학을 한국에서 다니는 것이 아닌 외국 유학을 가는 쪽으로 택했다. 때문에 그 후로는 누나를 보지 못했었다. 수린이와 연락을 하였다면 어떻게 누나의 주소를 알아 연락을 했을 수도 있지 만... 나와 수린이는 각각 다른 고등학교로 갈라졌고 그렇게 수린이 남매와 나의 인연은 흐지부지 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나는 아직도 미국에 있어요?" "아니. 작년에 돌아왔어. 너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연락이 되야 말이지. 몇 달 전에 우연히 민호를 만났는데... 민호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그러 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늘 만나니 정말 반갑네." 에? 민호가 모른다고 그랬다고? 나는 의아한 얼굴로 민호를 돌아보았다. 민호는 내 시선을 받자마자 움찔해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저 녀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데 유빈이 너 상당히 변했다." 누나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평소 잘 웃지 않는 누나인데 한 번씩 웃으면 내가 보더라도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외보도 상당히 성숙함이 느껴진다. 거기에 미 소를 머금자 섹시하다는 느낌이 물신 풍겨온다. "그래요?" 나는 마주 웃어주며 되물었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어딘지 뭐랄까.... 모든 일에 귀찮아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어." 그런가...? 나는 머리를 긁적였고 누나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키도 상당히 커졌고.... 이제 어른이네." 누나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문뜩 내 눈가를 응시하며 한숨지었다. "이.. 상처 여전히 남았구나." 내 왼쪽 눈 밑에 나 있는 상처.... 이건 누나와 관련된 일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실제로는 거의 안 보일 정도예요. 게임이라서 그냥 멋으로 상처를 뚜렷하게 해 둔 것뿐이죠."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미안함이 사라지지 않은 듯 손가락으로 내 상 처를 쓸어주었다. 나는 그냥 누나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웃어주었다. 문뜩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힐끔 보니 민호가 몸을 부르르 떨며 날 노려보 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수린이가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들의 시 선이었나....?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저 멀리서 나를 차가운 눈으 로 응시하는 여성유저가 포착되었다. 거의 천희형에 맞먹는 내공수치? 레벨은 숨기려 하고 있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누나!!!"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분명 진희누나다. 누나가 아니라 면 270레벨로 300레벨 이상의 천희형과 비슷한 내공을 가지고 있을 유저는 없 다. 그런데 왜 날 노려본 거지? 설마.... 주린이 누나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오해를 한 것은? 나의 마음에 더욱 다급해졌다. 나는 그대로 부신약영을 펼쳐 진희누나에게 몸을 날렸다. "유빈아!!" 뒤쪽에서 주린이 누나가 날 불렀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진희누나가 그 누구보다 중요했다. "누나!" 즉시 진희누나의 옆으로 내려선 나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누나는 내 시선을 피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길... 진짜 오해했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누나와 냉 전중인데 이런 페널티까지 당해야 하다니.... 대체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누구지?" 누나의 옆에 서 있던 남자 셋과 여자 둘 중에서 가장 키가 큰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누나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버리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누나!!" 나는 소리쳐 누나를 불렀다. 하지만 누나는 날 무시하며 그 인간의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려버린다. "가요.. 여기서 시간낭비 할 틈 없잖아요." 순간.. 내 눈에 핏발이 섰다. **** 아아. 유빈이 폭주.... 사룡이 강림하네... 26 - 잃어버린 자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누나가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속에서 불길이 일어 난다. 그것이 비록 현실이 아닌 이런 가상공간 안이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즉시 검을 뽑아들고 누나의 옆에 있는 유저의 팔을 베어버렸다. 게임이기 에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팔이 떨어져 나간 그 유저는 멍한 얼굴로 자 신의 잘려버린 팔을 응시했다. 나는 즉시 누나의 손을 잡아채고 몸을 돌렸다. "이거 놔!" 누나가 나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는 누나의 손목을 잡은 팔에 더 힘을 주 었다. "따라 와요!" 나는 이를 갈며 누나를 노려보았다. 누나는 움찔하며 반항을 멈추었다. 나는 재 차 누나의 몸을 잡아끌었다. 그때 나에게 당한 유저의 동료들이 주위를 포위했 다. "이 자식.. 무슨 짓을....." "당장 그 손 못 놔?!" 짜증이 솟구친다. 모든 감정이 사라져 간다. 오로지 분노 단 하나의 감정이 내 몸을 지배해 간다. 이제껏 더 월드는 나의 안식처였다. 이곳에서만은 분노라는 감정 하나에 지배당 하지 않았었다. 비록 분노할 때도 있었지만 동시에 즐거움이 함께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에서까지도 나는 감정을 잃어버린다. "꺼져라...." "닥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검을 뻗어온다. 이류무공인 흑혈검법이 다. 나는 검을 빙글 돌리고는 그대로 땅으로 휘둘렀다. 무상검(無上劍) 오장(五章) 이절(二絶) 지(地)! 대지가 갈라진다. 솟아오른 땅덩어리가 나에게 덤벼들던 남자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낸다. "무상검?!!!!" 주위에서 누군가가 무상검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나에게 검을 겨누었던 이들이 멍한 얼굴로 뒤로 물러선다. 나는 그들에게 부신약영을 써 몸을 날렸다. 무상검(無上劍) 일장(一章) 일절(一絶) 섬(閃)! 살려주고픈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내보였다. 순식간 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회색으로 물들며 사라져갔다. 그들뿐만이 아니 었다.. 구경하고 있던 이들까지 재수 없는 이들은 게임오버를 당했다. 하지만 나 는 무시했다.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더 불길이 세기를 더해간다. 그 불길은 그대로 심 장을 태울 것만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들고있던 검을 내던져 버렸다. 그리 고는 멍하니 나를 보는 누나의 손을 다시 잡고 몸을 날렸다. 멍한 사람들의 시선을 흘리며 나와 누나는 순식간에 흑룡성을 벗어났다. 흑룡성 밖 인적이 없는 숲에 도착한 나는 누나를 나무쪽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누나는 내 거라고요!! 알아요?! 누나는 나만의 것이란 말입니다!!" 누나의 몸이 떨린다. 내가 무서운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누나 를 놓아줄 수는 없다. 누나는 내 것이다. 나에게 있어 누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 인 존재이다. 누나가 없으면 내가 없다. 누나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다. "절대로 안 놓쳐요!! 만약 누나가 날 피해도 상관없어요!! 어떻게든 찾아내고 말 거니까요!! 누나는 나만 바라봐야 해요!! 다른 사람을 보지 마요!! 만약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보면 그 자식은 내가 죽여버리겠어!!!" 죽인다.. 나에게 누나를 빼앗아 가는 존재가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두 번 다시 누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게 만들어 버리겠어... 나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누나를 보았다. 한참 뒤에야 누나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난 물건이 아냐...." 물건...? 제길!!! "난 누나를 물건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럼 뭔데? 난 너에게 뭐야? 너는 그냥 나를 가지고 싶다고만 하잖아! 난 인간 이야! 너 혼자서만 소유하는 너만의 물건은 아니야! 나.. 유빈이 네가 좋아.. 하 지만 가끔씩 네가 무서워..... 이럴 때 너는 꼭......." 무서워? 이럴 때 내가 어떻다고? 난 머리를 강타하는 아찔한 충격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난... 나에게는 누나뿐인데... 누나는 내가 무섭다고 시선을 피한다...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내가 무섭다....? 대전에서 학교에 다닐 때 자주 들어봤던 말이다. 그 때문에 나 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누구나 나를 피하고 가끔 눈이라도 마주친다 싶으면 도 망치듯이 달려가 버린다. 뒤에서는 별에 별 소문이 난무한다. 폭력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 시하며 살아왔고... 오히려 그것이 더 편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누나에 게만은 듣고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몸 전체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분노마저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 다. 나는 누나에게 사과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유빈아. 잠깐만!!" 누나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한 귀로 흘렸다. 나는 이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로그아웃...." 링크헤드셋을 벗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새벽의 푸르스름함이 거 실을 감싸고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콜라를 꺼냈다. 멍한 정신을 시원한 콜라를 마 시며 정상으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차가운 음료가 몸을 적셔도 여전히 정신 은 멍하다. 콜라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주방을 나서려던 나는 문뜩 식탁 위에 놓여진 메모를 보았다. [일주일 동안 해외 출장을 다녀오마... 게임만 하지말고 좀 돌아다니고 하거라. 젊었을 때 몸 챙겨야 하는 거다.] 아버지의 메모다... 또 출장이신가..? 일주일...? 일주일이면.... 언제지? 잠시 눈살 을 찌푸리던 나는 고개를 저어버리고 메모를 던져버렸다. 뭐... 때가 되면 돌아 올 것이니까.... 주방을 나온 나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적막이 소용돌이친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손을 들어 머리를 눌 렀다. 싸늘한 체온이 이마를 때리지만 흐릿한 정신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나... 왜 사는 거지?" 문뜩 의문이 혼란을 짓누른다. 나 왜 사는 걸까?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일까? 태어나서...? 나 뭐 하러 태어난 거지?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서 한 일이 뭐일 까? 그건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가....? 내가 할 일은..... 없다. 내가 손을 내밀 곳 도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뭐일까..? 아들....? 아들인데... 왜 얼굴 보기 가 그렇게 힘들지...? 그분들에게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일까...? 아닐 것 같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것만 같았다. 천희형... 민우형.... 친한 형들... 하지만 그 뿐이다.. 그 형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 냥 알고 지내는 동생일 것이다. 내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인연으로 잠 시 묶인 사이.... 다른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럼 진희누나는...? 얼마 전까지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진희누나 때문이라 믿었 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누나에게도 역시... 나라는 존재는 있어도 그 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일 것만 같다. "하하....." 웃고싶다. 그러나 힘이 없다. 나는 머리를 누르며 나오지 않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에게... 나에게 삶의 이유는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26 - 잃어버린 자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 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21 : 17 9시... 20분 정도 되었다. 얼마나 잔 것이지...? 아니.. 그보다 내가 하루만에 눈을 뜬 것인지도 의문이다. 전자달력을 살폈다. 8월 19일... 며칠이 지났을까...? 모르겠다. 귀찮다.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다시금 눈앞이 침침해진다. 거부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온다. 그렇게 잠을 자고 도... 또 졸리다니... 나 정상이 아닌 건가? 의문...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나는 공허함 속에 의문을 떨쳐냈다. 생각하고 싶 지 않았다... 그냥 잠을 자고싶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수마가 나의 몸을 짓누른다....... 시끄러운 소리가 내 귀를 자극한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밝은 빛이 내 시야를 흰색으로 물들인다. 또 날을 샌 것인가.... 얼마나 잤지...? 여전히 주위가 소란스럽다. 한참 뒤에야 나는 그 소리가 우리 집 전화기 벨소리 라는 것을 알았다. 전화가 왔나 보다. 받아야 할 듯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전화기를 보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거실풍경... 그 사 이에 불빛이 깜박거리는 전화기가 있다. -이놈아! 전화 받어~! 이놈아! 전화 받어~! 수화기로 대가리 뽀사 버린다~! 시끄럽다... 당장 일어나 전화기를 부셔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 지 않는다. 결국 나는 포기를 하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여전히 소란스럽게 전화기가 울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지금의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 조금 지나면... 끊어 질 것이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럽던 전화 벨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편안함을 느끼며 다시금 잠 속에 빠져들었다. -쾅쾅쾅!!!!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야....? 제발 잠 좀 자자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떠나가 버린 잠을 아쉬워했다. "야!! 최유빈!! 너 집에 있지?!! 이 자식아!! 빨리 문 좀 열어 봐!!!" 누구의 목소리일까...? 들어 본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곧 그 목 소리가 진호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호녀석... 왜 우리 집에 온 거지? 나가봐야 하는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은 석상이 되어버린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전까지만 해도 목은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힘 들었다. 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포기하며 눈을 감았다. "유빈아!! 제발 문 좀 열어 봐!! 유빈아!!" 이번에는 여자 목소리다. 진희누나 목소리 같았다. 감겼던 내 눈이 다시금 뜨여 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약하게 열렸던 내 눈꺼풀이 그대로 내리 앉았다. 졸리다.. 이제는 다시 눈을 뜨고싶지 않다. 영원히... 영원히 잠을 자고 싶다. 한 번씩 누나의 모습이 어른거렸지만 나는 애써 흘려보냈다. 잊고싶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잠만 자고 싶다. 어차피 나에게 움직여 야 할 이유는 없었다. 조용히 자고싶다. 언제까지고.... 자고싶다.. 그리고 꿈을 꾸고 싶다. 그 꿈에서는 모두에게 사랑 받고 싶었다. 꿈속에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 것이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살 것 이다. 형 누나들과 즐겁게 살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진희누나와 서로 에게 미소지어 주며 살 것이다. 비록 꿈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좋을 것이다. 현실보다 행복하면... 그 게 꿈이더라도 상관없다. 그게.... 내가 죽어 가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대로 숨이 끊긴다 하더라도.. 잠 깐동안 꿈을 꾸고 사라져 버린다더라도.... 나는 잠시만이라도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것이.. 단 하나 남은 나의 바램이다... "유...... 빈아..... 유빈........."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어둠 속에서 잠들어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흐릿하게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흔들리던 선들이 조용히 겹쳐가며 안개를 몰 아내었다. "누나.....?" "유빈아!" 누나가 활짝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그런 누나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몸의 감 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만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유빈아!" "이 자식!!!"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려보았 다. 천희형.... 민호.... 진호.. 민우형.... 아진누나... 유키코누나...... 주린누나.... 모두 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망할 자식아!!" 순간 천희형이 악을 지르며 달려든다. 그런 천희형을 민우형이 재빨리 막았다. "야!! 참아!!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빌어먹을... 최유빈 너 퇴원만 해 봐라!! 내가 진짜 죽여버린다!!" 천희형.. 엄청 화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두렵다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즐거운 웃음이 나온다. 내가 원하던 꿈을 꾸게 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제까지의 일이 꿈이고 지 금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바보.... 바보야....." 누나가 내 볼을 쓰다듬으며 울먹인다. 나는 웃으며 누나에게 말했다. "다행이에요... 꿈이어서........." 다행이다... 그게 꿈이어서.. 누나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누나가 나를 피하 지 않아서... 너무도 다행이다. 실제로는 지금이 꿈이고... 그 때가 현실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이 꿈이라 하더라도 내가 현실로 믿으면 된다. 언제 꿈이 깰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꿈을 꿨어요....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지는... 주위에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내 손에 닿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일이 파묻혀 살아가고..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볼 수 있고... 천희형과 민우형... 진호... 민호가 있지만 내 공허 함은 채워지지 않았어요... 모두들 내 앞에서 웃어주지만.. 뒤돌아서면 신기루처 럼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도 즐겁게 살았어요... 누나가 있어서.. 너무 좋아하는 누나가 있어서.... 그런데 그런 누나마저도 사라졌어요...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 랐어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머릿속이 멍했어요. 가슴이 텅 빈 것 같았어요.... 쉴새없이 졸음이 밀려왔고.. 나는 그 수마를 이기 지 못하고 잠을 잤어요.... 눈을 뜰 때도 있었지만.. 짧았어요... 가끔씩 눈을 떠보 았지만 금새 졸려왔고.. 다시 잠을 자야 했어요...... 그래도 오히려 그게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였을까요....? 다행히 잠을 잘 때는 혼자라는 사실을 못 느꼈기 때문일까요...? 정말 혼자 남는 것은 싫어요... 그런 허전함... 그런 공허함은 다시 느껴보고 싶지 않아요. 생각하니 두려워요.... 정말... 정말......." "미안해... 미안해 유빈아..... 미안해..." 누나가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감싸쥐었다. 그런 누나에게 나는 빙그레 미소지 었다. "괜찮아요... 꿈이었잖아요. 꿈이었는데 누나가 사과할 필요가 없잖아요." 27 - 봉황곡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27 - 봉황곡(鳳凰谷) "누나~!" 보름만에 접속한 더 월드... 흑룡성 리스장에서 누나를 발견한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를 돌아본 누나는 미소를 지으며 즉시 나에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아?" "말짱해요." 보름 전 나는 영양실조로 병원에 실려갔었고 엿새 전에야 퇴원을 했었다. 한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누나는 절대로 게임에 접속하지 말라고 했다. 당연 히 누나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나였기에 절대로 게임에 접속하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더 월드에 들어온 것이다.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생기면 나 정말 너를 용서 안 해." "아하하..... 알았어요. 제가 진짜 잘못 했어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금 누나에게 사과를 했다. 나중에야 안 것인데 나는 닷새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거실의 소파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단다. 누나는 당시 내가 그 정도까지 충격을 받았는지는 몰랐단다. 시간이 지나면 털 어 버리고 언제나처럼 웃으며 누나를 찾을 것이라 믿었다고... 평소 내가 워낙에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흘동안 소식이 없자 점차 불안해져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단다. 그러나 나는 당시 잠에 취해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누나는 점차 불안감만 키 워갔고 나흘째에는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왔었단다. 그러나 설마 내가 다 죽어가고 있는지는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든 처 리를 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허나 당시 우리 아버지는 해외출장 중이었지 아마.... 닷새 째에 드디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누나는 진호와 함께 우리 집을 다시금 찾아왔고 이번에는 강제로 현관문을 열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었단다. 그 리고 거실에서 거의 반 죽어가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곤 즉시 병원으로 옮겼다 고 했다. 소식을 듣고 대전에 있던 형과 누나들이 달려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이틀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하루 동안 입원한 뒤 우기고 우겨서 다 시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퇴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아파트 전체로 내 입원 소문이 퍼져버린 터라 아버지도 아시 게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병원 침대에서 아버지를 맞이하기는 싫었다. 퇴원수속을 받고 나왔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희형에게 정말 죽도록 맞았다. 복날 때 구타당하는 개의 고통을 실감했다고 할까...? 앞으로 두 번 다 시 개고기는 먹지 않을 생각이다. 먼저 번에는 말려 주었던 민우형도 이번에는 눈 딱 감고 못 본 척 해 버렸다. 아마 민우형도 겉으로 내색만 하지 않았지 엄청 화가 나 있었던 것 같다. 천희형의 주먹은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했다. 형과 나의 사이가 그냥 아는 형, 동생 사이가 아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내가 아직 환자라는 생각 때문인지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만약 평소라 면 그대로 병원 영안실로 실려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 천희형은 분노했고 나는 진심으로 형, 누나들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해야 했다. 그 후로 집에 돌아와서 하루 뒤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또 한 번 죽을 뻔 했다.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내 생전 처음 보는 일이었다. 과 거 어머니와 다툴 때도 큰소리를 내지 않던 분이셨는데... 그야말로 집이 붕괴도 리 정도로 소리를 지르시며 내 따귀를 날려버리셨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악의 체벌인 '소주 16병 원샷'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번에 8병이었으니 이번에는 16병이거든.... 만약 이번에 그 체벌을 당했다면 난 진짜 죽었을 것이다... 하하.... 어쨌든... 아버지나 형들... 누나들... 그리고 친구들의 분노 속에서 난 내가 세상 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5일 동안 집에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더 월드에 접속한 것이다. "이 녀석! 드디어 복귀냐?" 누군가가 내 머리를 내려치며 말했다. 나는 띠잉~ 울리는 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민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아. 너냐?" "자식. 성안에서 유저들 수십명을 PK해 버리고는 사라지더니.... 영양실조로 병 원에나 실려가고 참 잘하는 짓이다." 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보름 전 누나와 다툴 때 나는 이제껏 하지 않았 던 무차별 PK를 해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하필이면 무상검까지 써 버렸으니... 사룡검신이 흑룡성에서 무차별 PK를 했다고 진짜 난리가 난리도 아니었다. 거기에 그 뿐이라면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사룡검신 무상이 창천유협 유빈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져 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여~! 유빈아~!!!" 바로... 수린이 때문이었다. 저 망할 자식이 그만 BBS에 소문을 퍼트려 버린 것 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민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녀석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준거냐?" "하하... 나도 설마 수린이가 게시판에 올려버릴 줄은 몰랐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제 몸은 좀 괜찮니?" 수린이와 함께 온 주린이 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여 보였 지만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차 물어왔다. "그런데.. 안색이 좋지 않은데...." "별 것 아니에요... 다 수린이 때문이죠."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수린이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여장을 하고 있는 수린이 녀석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자라면 진짜 깨물어 주고 싶 을 정도로 귀엽겠지만... 남자인 것을 알고 있기에 이마에 핏줄만 솟을 뿐이다. "너... BBS에 참으로 재미있는 말을 올려 두었더구나...." "응? 아.... 하하.. 봤냐?" 보지 못할 도리가 없지. 올해 최고의 화재거리로 부각된 게시물이었는데 말이 야. 나는 주먹을 말아 쥐며 이를 갈았다. "이 망할 자식아!! 그렇다고 그런 사진을 게시하면 어떻게 해?!!!!" "왜? 멋지지 않았냐?" 멋져? 그게? 이 자식이 진짜!!!! 나는 입에서 불을 뿜으며 수린이를 밟기 시작했 다. 죽여버리겠어!!!! "큭큭...." "푸웃...." 뒤에서 민호와 진희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수린이가 게시해 버린 사진 을 본 이유 때문이었다. 더더욱 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민호나 주린이 누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 기에 상관이 없더라도... 진희누나에게만큼은 진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진이었 던 것이다. "내 사진 내가 게시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물론 그렇다. 그 사진은 수린이 소유였으니 게시를 하건 말건 내가 신경을 쓸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진 속에 나까지 들어있다는 것이 문제 다. 중학교 3학년 축제 때 찍은 사진.... 수린이와 민호의 뒷공작으로 어처구니없이 당해버렸던 처절한 기억.... 그 사진 속에는 내가 여장한 모습이 담겨있었던 것 이다. 나는 미친 듯이 수린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에 누나가 한 말 때문 에 나의 몸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그래도.... 사진 속에 유빈이 너 정말 예뻤어." 누나~!!!!!! 제발 잊어주란 말야~!!! 27 - 봉황곡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그런데 유빈이 네가 설마 그 사룡검신 무상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주루에 들어온 우리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고 수린이가 즉시 물어왔다. 다행히 인적이 뜸한 외곽의 허름한 주루였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 녀석 잔머리는 죽이거든." 민호가 내 머리를 누르며 이죽거렸다. 나는 팔꿈치로 민호의 옆구리를 치며 답 했다. "노력이얌마." "제길. 나는 3년 동안 여전히 100레벨도 못 넘겼는데..." 수린이가 툴툴거리며 턱을 괴었다. 그런 수린이를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응시 했다. "여장하고 타 유저 등쳐먹을 시간 있으면 레벨 업이나 해라." "귀찮은걸... 네가 키워주면 안 되냐?" 내가 미쳤다고 수린이를 키워 주겠는가. 나는 알짤 없다는 듯이 가운데 손가락 을 세워주었다. 그러자 수린이의 얼굴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야!! 친구 좋다는 것이 뭔데?!!" "게시판에 그따위 사진 올린 녀석에게 줄 것은 땡전 한 푼 없어!" 내 말에 수린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 린이 누나를 보았다. "그리고... 네 누나에게 키워 주라 하면 되잖아." 주린이 누나는 빙혼검녀다. 레벨도 200이상... 수린이를 키워주기에 결코 부족함 이 없다. 누나 정도라면 일류무공도 상당수 가지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수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절정무공 아니면 상종 안 해." 잘 났다. 솔직히 절정무공을 가지고 있더라도 기본, 삼류, 이류, 일류무공이 받 쳐 주어야 그 능력이 발휘된다. 수린이 말처럼 절정무공 하나만 익혀서 강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귀찮아진 나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목마 른 사람이 우물 찾는다고... 아쉬우면 지가 알아서 찾겠지 뭐.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니까. 나는 주린이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전에 제가 한 말 생각해 봤어요?"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수린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무슨 말을 했는데?" "넌 몰라도 돼." 수린이가 알면 또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릴지 모른다. 나는 가차없이 엿을 먹여주 었다. "우린 친구 아이가?" "너를 친구로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싫을 따름이다." "제길..." 엿 날리기 연발에 수린이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수린이에게서 신경을 꺼 버리고 주린이 누나를 보았다. "허락 해 주실 건가요?" 주린이 누나는 잠시 나를 보더니.. 곧 내 옆에 있는 진희누나를 보았다. 나와 진 희누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주린이 누나가 작게 한숨 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생각이 없어." "....그래요?" 뭐....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쉽다. 누나 정도라면 응룡회의 회원이 되 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말이다. 근데 대체 왜 거절한 거지...? 거의 열에 아홉은 승낙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퍽!!! 그때 갑자기 내 옆에 앉아있던 민호가 내 머리를 날려버렸다. 얼얼한 머리를 누 르며 나는 멍하니 민호를 돌아보았다. "왜 때리냐?" "몰라도 돼 임마."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나는 민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 사이에 갑자기 주먹을 날리는 일은 일상이라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 다. 최소한 장난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 시선을 피하는 민호를 보니 이 녀석이 진짜 민호인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혹시 민호를 사칭한 가짜 아냐? "너.. 민호 맞냐?" "미친 녀석.. 병원에 입원하더니 눈까지 맛이 갔냐?" "그 싸가지 없는 답변.. 민호가 확실하군." 내 말에 민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없는 녀석.... 할 일 없으면 난 간다. 누나도 그만 가죠. 제가 재미있는 곳 가 르쳐 줄게요. 함께 가요." 그렇게 말한 민호는 주린이 누나의 손을 잡고 끌었다. 잠시 날 보던 주린이 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순식간에 민호와 함께 사라져 버렸 다. "........뭐야?"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민호와 주린이 누나가 나간 주루의 출구를 돌아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뭔가가 걸렸다. 꼭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롱~." 수린이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수린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민호와 주린이 누나.. 왜 저런 거지?" 내 물음에 수린이는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절정비급 한 권." ......망할 자식. 순간적으로 욕지기가 나왔다. 하지만 궁금함을 풀고싶은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욕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절정비급 한 권.. 분명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있어도 그 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민호와 주린이 누나가 저렇게 나가버린 이유를 듣 지 못하면 나는 궁금함에 밤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절정비급을 주고 궁 금함을 푸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수린이에게 절정비급을 그냥 내주기에는 아까웠다. 이 녀석에게 절정비급을 줘 보았자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다. 그럴 바에..... 응? 잠 깐... 지금 뭔가 스쳐간 것 같은데... 뭐였더라... 그게.......... 아!!! 맞다! 그러고 보 니 그게 있었지!! 나는 씨익 웃으며 수린이를 보았다. 내 갑작스런 웃음에 수린이는 움찔했다. "뭐.. 뭐냐?" "흐흐. 아냐... 절정무공? 알았어. 너한테 딱 어울리는 것이 하나 재고가 있었거 든. 그것으로 줄게. 그러니 민호와 주린이 누나가 왜 저렇게 나가버렸는지 말 해 봐." 내 말에 수린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응시했다. "진짜 절정무공이냐?" "거짓하나 보내지 않았어~! 거기다 절정무공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 비급이 지." 약간의 제재가 가해지는 무공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큭큭큭.... 수린이는 뭔가 미심쩍어 하는 듯 했지만 곧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정무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좋아." "그럼 어디 들어볼까? 왜 민호와 주린이 누나가 저런 반응을 보인 것이지?" 내 말에 수린이는 나와 진희누나를 가리켰다. 나와 누나는 의아한 눈으로 수린 이를 보아야 했다. 그러자 수린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직도 모르겠냐? 너도 참 둔하다.... 우리 누나는 말야. 널 좋아한다고." ............뭐?! 나는 귀를 후비며 수린이에게 '장난이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수린이는 가차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진짜야. 누나가 2년도 안돼서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유도 너 때문이야. 너 진짜 모르고 있었냐?" 알 턱이 없잖아!!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진희누나를 보았다. 누나도 상당히 놀 란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지...?" 내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분명히 나는 주 린이 누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자로서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진심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진희누나 뿐이다. 나는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도... 그 언니에게 미안해서......." "그럼.. 제가 누나랑 헤어지고 주린이 누나와 사귀어야 하나요?" 내 말에 누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히 죽 웃으며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뜩 주린이 누나의 이상한 점은 알았는데 민호의 이상한 점은 아직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민호는?" 수린이는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민호 녀석이 우리 누나에게 마음이 있는 거겠지." .......그렇군.... 27 - 봉황곡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규화보전(葵花寶典) 내가 수린이에게 준 비급이름이다. 암무에게 맡겨놓은 몇 안 되는 비급인데 아 마 이 비급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 과거 소오강호라는 소설에서 동방불패라는 변태남자가 익히고 있었던 환관전용무공이 바로 이 규화보전이다. 나는 이 규화보전을 정말 우연히 얻었다. 과거에 내가 무상검록을 가지고 있다 는 소문이 퍼지고 수많은 유저들의 협공을 받았을 때 전투 후 전리품으로 챙긴 것 중에 이 규화보전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원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지도 못한다. 어쨌든 이 규화보전을 얻고 나서 장난삼아 익혀보려다가 워낙에 황당한 페널티 가 주어진 터라 결국 포기하고 말았었다. 규화보전의 페널티는.... -성행위 금지 .....이었던 것이다. 실상 이 더 월드는 남녀간의 성교도 가능하다. 물론 성인 유저들에 한해서이다. 그것도 서로 쌍방의 협의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한 쪽에서 거부하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성폭행 같은 범죄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각 성에는 성인 유저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기루도 있고 그 기루에는 NPC 기녀들이 상시대기를 하고 있다. 종종 돈을 벌기 위해 유저들이 기녀가 되는 경 우도 있지만 그런 일은 얼마 없다. 기녀가 되면 후에 무공을 익히는데 상당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규화보전은 남성 유저만이 익힐 수 있는데, 이 무공을 익히면 성인유 저로서 즐길 수 있는 특권(?)이 불가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규화보전은 상당히 다른 혜택들을 가질 수 있다. 절정무공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거의 최절정무공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부터... 익힐수록 꽃미녀가 되어 가는 것하며.... 무엇보다도 삼류, 이류, 일류 무공을 익 히지 않고 처음부터 규화보전만을 배우더라도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성인의 특권만 버린다면 최강의 무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인특 권 불가라는 단 하나의 페널티 때문에 무무까지도 거부해 버린 최악의 비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때 무무에게 선물해 본 적이 있다.) "오옷!! 이건 나를 위한 무공이야!!!" 그런데.... 드디어 그 규화보전이 주인을 찾은 듯 싶다. 암무를 시켜 가져오게 한 규화보전을 건네 받은 수린이는 감격에 찬 얼굴이다. 규화보전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진희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끝이지 만, 규화보전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릴 수밖에 없 었다. 놀리려고 준 것인데...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진짜 예상도 못했다. "......역시 너는 수술을 받아야 해." "무슨 소리냐?!!" "그게 아니라면 그 것을 받고 그리 좋아할 이유가 없어." 물론 아직은 성인이 아니기에 상관이 없지만... 내년이면 수린이도 성인이다. 그 렇게 되면 진짜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린이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았다. "상관없어. 게임은 즐기는 것이잖아. 그게 하고 싶으면 밖에서도 충분해." ......그러고 보니 수린이는 꽃미남이다. 수린이를 직접 보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이 대번에 떠오른다. 나야 꼴 보기 싫은 모습이지만 대 부분의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수린이의 모습에 환장한다. 녀석의 말대로 하고 싶으면 밖에서도 충분한 녀석인 것이다. 제비로 나가면 최 고의 제비가 될 수 있는 녀석이니 말이다. "수고해라...." 그렇지 않아도 여자같이 곱살하게 생겨 여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이... 규 화보전을 익히고 나서 보면 정말 끝내줄 것이다. 정말 두 번 다시 보기 싫을 정 도로 말이다. 나는 얼굴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누나와 함께 흑룡성 동문으로 향했 다. "땡큐~!! 다음에는 벽사검결을 부탁해!!" 뒤에서 수린이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는 갑자기 아파 오는 머리를 누르며 신음해야 했다. 벽사검결..... 역시도 규화보전과 비슷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누나와 난 오랜만에 불러낸 천리신마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천리신마를 보고 내 정체를 다른 유저들이 알아 낼 수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떨거지 유저들은 천리신마를 따라올 수 없었고, 그나마 천리신마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절정고수들 이상은 나에게 뭐를 얻어먹기 보다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따 라오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P VS P..... 현재 누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했다. 누나도 이제까지 많은 전투를 경 험했지만 하나같이 PC(플레이어 캐릭터)가 아닌 NPC(논 플레이어 캐릭터)들 뿐이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난 NPC라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 직접 조종하 는 PC와는 격차가 크다. 은자림과의 전투에서는 어찌되었건 P VS P를 해야 하는데 이대로는 누나에게 너무 불리했다. 그 때문에 일부로 우리의 흔적을 남기며 실력 있는 고수들로 하 여금 길을 막게 하고 누나의 경험을 늘리려는 것이다. 누나가 P VS P를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는 없었다. 뭐 대부분은 내가 처리 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누나가 전투를 하게 했다. 이미 상급의 최절정고수인 누나였기에 다른 고수들에 비하면 실력은 월등히 앞 섰지만 역시 상대가 유저들이라는 것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위 험한 상황에 놓여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나도 이게 게임일 뿐이라 는 사실을 인식해 간 듯 했다. 당문세가가 있는 열창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누나도 망설임 없이 P VS P전을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도 한 가지 더 성장한 것이 있다면 만수통령신공이었다. 동물과 의사를 나눌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마대륙을 나온 후부터 누나는 만나는 동물마다 만 수통령신공을 펼쳐 대화를 나누었고 그 성취도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현재는 10성의 성취를 이루었을 정도다. 9성 때부터 상급의 몹과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고 10성에 이른 지금은 레 어 NPC인 천리신마와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종종 나 를 두고 천리신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누나를 볼 때마다 나는 천리신마에게 질 투를 느껴야 했다. 동시에 NPC에게 질투를 하는 내 자신이 처량해 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만수통령신공을 펼쳐 천리신마와 대화를 나누는 누나를 보면 서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 때 문뜩 의문이 생긴 듯 누나가 나에게 물어왔다.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그 동안 P VS P를 벌이면서도 나와 누나는 한 제국 곳곳의 명소를 돌아다녔었 다. 일종의 데이트라고 할까나? 이제까지 급한 레벨 업 덕에 누나는 남연성 근 처를 제외하고는 이러타할 명소를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다. "열창성 부근에 가 볼만한 곳은 봉황곡이죠." "봉황곡?" "네... 뭐 정경은 그렇게 좋다고 만은 볼 수 없는데... 재미난 NPC가 있거든요." 누나는 호기심을 가지며 나를 보았다. 그 재미난 NPC가 대체 무엇이냐는 의문 이 담긴 누나의 눈빛을 받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천리신마의 고삐를 잡아 봉황 곡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가 보면 알아요." 봉황곡은 열창성의 북쪽에 위치한다. 청궁산 너머에 위치한 봉황곡은 비록 고레 벨의 몹들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지세가 험하고 짙은 안개가 껴 있기 때문에 어 느 정도 레벨이 되지 않는 유저는 쉽게 돌아다니기 힘들다. 청궁산을 지나 운무가 가득한 봉황곡에 도착한 나는 일단 천리신마를 보내고 누나와 함께 봉황곡 안쪽으로 경공을 써 날아갔다. 27 - 봉황곡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안개가 끼어있기 때문에 한치 앞도 보기 힘든 봉황곡이지만 저 레벨 유저들에 게나 페널티를 가할 뿐이다. 나나 누나정도의 고레벨 유저라면 이런 안개 정도 는 아무런 위험을 주지 못한다. 종종 나오는 몹들도 그렇게 강한 몹들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누나의 만수통령 신공 덕분으로 가볍게 지나칠 수 있었다. 몇몇 몹들은 자기보다 레벨이 높은 유 저들에게까지 덤비는 저돌적인 녀석들인데 역시나 만수통령신공을 어찌 할 수 는 없었다. "그런데 이 계곡이 왜 봉황곡이지?" 누나의 질문에 나는 설명을 했다. 사람들이 이 계곡을 봉황곡이라 부르는 이유 는 바로 계곡의 모양이 비상하는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유저들이 알고있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그건 이 계곡에 봉황의 둥지로 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봉황은 사룡 암무와 같은 유니크 몹으로서 대부분의 저돌적인 유니크 몹들과는 다르고 온순한 성격을 지닌 아름다운 새였다. 그 때문에 유저가 먼저 공격을 하 지 않는다면 봉황도 공격을 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유저와 이런저런 이야기 까지 나누고 마음에 든다며 선물까지 주는 녀석이다. 나도 과거에 녀석을 만나 태양신검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만나려고 하는 것이 그 봉황이야?" "맞아요." 누나의 추측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봉황이 누나를 마음에 들 어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충분히 누나가 봉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 라 믿었다. 거기다 봉황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아마 한 제국에 나오는 모든 NPC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봉황을 누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기 도 했다. 내 말을 들은 누나는 상당히 기대하는 듯 보였다. 나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고 대략 20분 정도를 달려 봉황곡 가장 안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충 봉황의 머 리부근일 것이다.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렇게 쉽게 봉황의 둥지로 통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을 이유가 없다. 여기서는 약간의 작업이 필 요한 것이다. 지금의 시간을 살펴본 나는 게임시간으로 오후 4시가 조금 못 되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남동쪽인가?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남동쪽으로 달렸다. 우리가 목표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시간이 딱 맞았는지 주위의 안개가 사라졌다. 의아해 하는 누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다시 봉황의 머리에서 10시 방향 으로 달렸다. 우리가 간 방향으로 안개가 갈라졌고 나는 재차 2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마 지막으로 8시 방향으로 달린 나는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알고 가장 처음 도착 했던 중앙으로 향했다. "와아!" 어느새 중앙에는 하나의 빛의 통로가 생성되어 있었다. 나는 탄성을 터트리는 누나를 이끌고 즉시 통로로 몸을 날렸다. 우리가 들어가자 통로는 그대로 닫쳤 다. "여긴...?" "봉황의 길이라 부르는 통로예요. 끝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죠." 누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포탈을 타는 것 같아." "하하. 그렇죠?" 포탈과 똑같지는 않다. 포탈이 검은 게이트라면 이 봉황의 길은 백색의 게이트 이거든. 그리고 포탈은 저절로 이동이 가능하지만 봉황의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나와 누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봉황의 길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금새 우 리는 봉황의 둥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봉황의 둥지는 하나의 동공이었는데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천 장은 구멍이 뚫려 밝은 빛이 내려 쬐고 있다. [암무의 주인이던가요? 오랜만이로군요.] 문뜩 누군가의 목소리가 주위를 은은하게 진동시켰다. 누나는 깜짝 놀라 좌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거목의 꼭대기를 보았다. 그곳에는 한 마 리의 새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여~! 오랜만이야~ 예쁘니~!" [........그 주둥이는 여전하군요.] 내 말에 봉황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대꾸해 왔다. 나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 쓱거렸고 얼마 후 봉황이 가볍게 날갯짓을 하더니 내 어깨로 내려왔다. 누나는 봉황의 보석 같이 아름다운 붉은 깃털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예쁘네요." [어머나. 고마워요. 처음 보는 손님인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진희라고 해요." 누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NPC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유저는 진희누나 뿐일 것이다. 나는 봉황을 처음 만나 가운데 손가락부터 날리 며 '네가 계집이냐? 목소리가 왜 그래?'라고 소리쳤는데 말야.... [참 예의가 바른 분이시네요. 이 쪽 싸가지 없는 남자와는 대조적이예요.] 그래.. 나 싸가지 없다. 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봉황을 보았다. 말투 같은 것을 보면 숙녀인데... 싸가 지라든지 주둥이라던지 조금 거친 말을 쓰는 것이 이상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누나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다 저 때문이에요... 이 녀석이 이렇게 된 것은.." [흥. 알기는 아는군요.] 대번에 봉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안하다. 널 이따위로 망쳐놔서... 내가 한숨을 내쉬자 누나는 무슨 뜻이냐는 듯이 나를 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 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을 가장 처음 발견한 것은 저예요. 그 때 일주일 정도 이 녀석과 여기 서 어울리며 놀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게 제 말투를 배워버린 거죠. 하하..." 성장하는 NPC.... 그것이 바로 봉황이었다. 누나는 감탄을 하며 봉황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러자 봉황은 내 어깨에서 누나의 어깨로 옮겨가며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런데... 혹시 만수통령신공을 익히지 않았나요?] 봉황의 물음에 나와 누나는 조금 놀랐다. 뭐 NPC이니 만큼 유저가 익힌 무공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누나가 익힌 만수통령신공 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조금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저랑 종속의 계약을 하지 않을래요?] 이번에는 진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유니크 몹의 종속 계약은 1:1 전투에서 승리할 때에야 가능했다. 그런데 봉황은 그런 것도 없이 바로 종 속의 계약을 제의해 온 것이다. "종속의 계약이라니요?" 아직 누나는 종속의 계약을 몰랐다. 물론 나와 암무의 계약을 알고 있지만 그것 을 종속의 계약이라 부르는 지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설명을 해 주려는 순간 먼저 봉황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진희님께 종속되는 것이랍니다. 저 싸가지 없는 유빈님과 불쌍한 암무님 의 관계처럼 말이죠. 본래는 저를 제압한 유저야 하지만... 진희님께서 만수통령 신공을 10성까지 익히고 있으니 상관이 없군요.] 만수통령신공에 그런 기능까지 있었나?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봉황을 보아야 했다. 봉황이 계속 말을 이었다. [뭐... 12성까지 익히고 청류옥소라는 유니크아이템을 소유하고 있으면 삼신룡과 도 종속의 계약이 가능하지만 솔직히 그건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아저씨들 은 무척이나 콧대가 높거든요. 성격도 더럽고... 그나마 천룡아저씨는 괜찮지만 지룡아저씨와 해룡아저씨는 괴팍하고 사악해요. 자기가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유저가 종속되기를 원하고.... 아주 종으로 부려먹으러 할 거예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저 같은 착한 NPC와 계약을 하는 것이 편하죠. 아마 지금 다른 NPC와 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진희님이 만수통령신공을 12성까지 익혔을 때 삼신룡이 스스로 찾아 올 거예요. 보아하니 진희님은 청류옥소까지 가지고 계시는군요. 삼신룡의 계약요구에 거절이란 있을 수 없어요. 거절하면 바로 전투죠. 그리고 나서 강제로 계약을 맺게 하고 자기들 집으로 끌고 가 버리죠.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 몰라요.] ........삼신룡?! 이거 갈수록 태산이네... 나와 암무가 합동공격을 퍼부어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던 그 괴물과도 계약이 가능하단 말야? 나는 허탈하게 웃을 수 밖에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누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죠." 봉황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편하다. 전투능력을 암무에 비해 무척이나 떨 어지지만 다른 능력들은 어떠한 유니크 몬스터도 가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부작술과 비슷한 유저의 능력상승과 부활능력을 들 수가 있다. 특히 부활능력은 봉황과 피닉스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스킬이다. 죽은 유저를 부활시키는 기술인데 부활한 유저는 원래 당해야 할 레벨과 능력치 하락을 절 반정도만 당하게 된다. 처음 이 봉황의 둥지에 들어와 봉황이 가진 부활능력을 알고 계약을 맺고 싶었 지만 이미 암무와 계약을 해 버린 터라 어찌하지 못하고 혼자 절규한 적이 있 었다. 그러니 만큼 누나가 봉황과 계약을 맺게 된 것은 나로서도 무척이나 반기는 일 이었다. 물론 나중에 삼신룡과의 계약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봉황의 말을 들어보면 삼신룡과의 계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성격이 괴팍하면 오 히려 골치만 아플 뿐이다. 거기다 누나만 데리고 가 버리고 나를 두고 간다면? 그건 진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내 허락에 누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봉황을 쓰다듬었다. 누나도 봉황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계약을 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그냥 그 말이면 되요. 그럼 앞으로 저는 진희님께 종속되도록 하겠습니다.] 종속의 계약이 뭐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어렵지.... 일단 과정을 통과하 면 유니크 몹이 허락을 구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계약은 완료되어 버린다. 그리고 계약은 주인이 파기를 하거나, 주인이 사망하기 전까지 유지된 다. 이거.. 앞으로 더욱더 누나가 죽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듯 싶다. 기껏 얻은 봉황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 [그보다 주인님. 이건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입니다. 저런 싸가지 없는 남자는 차 버리고 성실하고 착한 남자를 새로 사귀세요.] ..........그냥 콱 계약 파기를 해 버려라 시켜버릴까 보다! 31 - 다가오는 불안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1 - 다가오는 불안 "눈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솜 덩어리들.... 가장 처음 발견한 아이의 외침에 교 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쯧.... 나잇살 먹어도 눈 온다고 저 난리를 피우나...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성인인 녀석들이 말이다. "첫눈이다!" "쌓일까?" 그걸 알면 때부자 되겠다. 점장이로 나가면 될 테니 말이다. 나는 턱을 괴며 창 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얼마 전 대입고사도 끝났겠다...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다. 학교에 등교하기는 하지만 수업보다는 수업시간 채우기 위해 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생님들도 수업시간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덕분에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잠을 자거나... 어느 학교에 원서를 낼까 진지하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둥..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야 가고싶은 학교는 혜하대학교뿐이다. 조금 성적이 간당간당하기는 하지만 못 들어 갈 것도 없다. 뭐 안 되면 내년이 있으니까. 다른 학교에는 가고 싶지 않다. 혜하대학교를 뺀 어느 학교에도 진희누나는 없 거든... 흐흣. C.C는 꼭 해 보고 싶었어! 누나~! 조금만 기다려!! 우리 둘이서 즐 겁게 캠퍼스를 거닐자고~!! 흠흠.. 자제자제.. 또 폭주했다간 진짜 애들에게 밟힌다. 나는 위로 상승하는 입 가를 급히 내리며 표정을 굳혔다. 이미 아이들은 내가 진희누나 생각만 하면 알 아 맞출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괜히 실실 웃었다가는 또 혼자 닭살 날린다며 구타와 폭행이 나에게 떨어질 것 이다. 쳇.... 그러니까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를 사귀라니까. 솔로가 어찌 커플의 즐거움을 알리요~! "무슨 생각 하냐?" 진호가 내 어깨를 치며 물었다. 나는 힐끔 진호를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진호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며 혀를 찬다. "또 그 일 생각 하냐? 아서라..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 나중에 도전하면 되 잖아." 진호녀석... 3개월 전에 있었던 나와 케리온과의 대결을 생각한 모양이다. 그다 지 틀렸다고 면박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 었다. 그러자 진호는 내 등을 탕탕 치며 히죽 웃었다. "아프다...." "힘내라는 주문이야!" 쳇.. 두 번 힘내다가 죽겠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찌릿한 등을 움찔거렸다. 손 이 쉽게 닿는 부위라면 쓰다듬기라도 할 것인데... 그것이 안 되니 등 쪽의 근육 을 움직여 약간이나마 고통을 달래어 본다. "그보다 진짜 다시 생각해도 그 싸움은 아까웠어." 아까웠다....? 솔직히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케리온은 여러모로 나 보 다 뛰어났고... 그 결과가 제대로 나온 것이다. 능력치 면으로 보나.. 레벨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나의 패배가 확실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케리온을 이긴다면 진짜 기적이라 해야 했을 것이다. 케리온이 도르오라를 펼친 상황에서 나의 패배는 정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도르 오라를 무진으로 맞선 것은 최후의 도박이었다. 그나마 도르오라를 뚫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뭐.. 이제 와서 후회는 없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결이었고 즐거운 전투였으니 말이다. 내가 인정한 상대였다. 내가 인정한 결말이었다. 패배가 아쉽기는 하지 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내가 도전할 상대가 남아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그래도.. 케리온 진짜 멋졌어." 진호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졌다... 정말이지.. 케리온은 멋졌다. 나는 천천히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 다. 바람이 불어온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주위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도 맑고 시원한 바람이다. 나는 천천히 검을 떨구며 케리온을 보았다. "대단하군..." 케리온은 진심으로 나에게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케리온이야 말로요...." 쉴새없이 들려오던 함성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멍한 얼굴로 나와 케리온을 보고 있는 수십만의 눈들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맑은 공기를 힘차게 들어 마시고는 무상천검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는 품 에서 무상검록을 꺼내어 무상천검 옆에 던졌다. 마지막으로 케리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나의 패배이다. 도르오라를 뚫었지만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전투를 행할 여건은 남아있지 않다. 체력은 100이하로 떨어져 있고 내력도 대부분이 소진되어 버렸 다. 도르오라를 뚫은 것으로 나의 모든 능력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도르오라가 원거리 공격을 행하는 기술이라면 무진은 돌진형의 기술이다. 도르 오라가 막혔다고 하더라도 케리온은 이러타할 충격을 먹지는 않지만 나는 그렇 지 못한다. 도르오라를 뚫은 것은 기적이었다. 부딪쳐 보고서야 나는 도르오라가 무진을 능 가하는 파괴력을 가진 기술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르오라를 넘지 못 하고 그 자리에서 게임오버가 되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중간에 나의 무진은 와해되어 버렸다. 맨몸으로 도르오라를 견뎌낸 것은 진정으 로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은 할 수가 없다. 나는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케리온의 심 판을 기다렸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게임오버를 당하는 그 순간까지 케리온을 보고 싶었다. 나를 이긴 사람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하하.. 너무 감상적인가? 잠시 나를 바라보던 케리온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 투기가 생 성된다. 그냥 베어버려도 될 것인데.... 투기까지 만들어서 공격하려 하니 감동을 느낄 정도이다. 투기는 그 나름대로의 배려일 터이다. 현재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투기로 나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려는 케리온의 의지일 것이다. 그런 케리온의 뜻에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검을 들어올리며 케리온이 물어왔다. "게임오버를 당한 후... 어떻게 할 생각이냐? 게임을 접을 것이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케리온을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단 한 번 죽었다고 게임을 접는다... 하하하. 절대로 그럴 생각은 없다. 물론 케리온과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져 버릴 것이고.. 무상천검까지 잃게 되 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케리온과 대결을 벌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 은 없다. 케리온과의 전투만이 내가 이 게임을 하는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희누나와 즐겁게 이 가상세계를 여행하고 싶다. 그런 목표에 꼭 지금의 강함 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빈아...] 누나의 메시지가 왔다. 나는 답신을 보냈다. [하하. 져 버렸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재미있었으니까요. 누나도 즐거웠죠?] 한동안 누나에게 답신이 오지 않았다. 뭐... 솔직히 누나는 내가 게임오버를 당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번도 누나 앞에서 죽는 모 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누나 역시도 내 앞에서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예외로 해야겠지... 케리온과 싸우기 전에 한 약속이니 말이다. 하하하... 솔직히 말해서 아깝기는 하다. 고생해서 올린 능력치가 다운되는 것도 아쉽고... 무엇보다도 케리온과 대결이 이로서 끝나는 것은 무척이나 아쉽다. 그 러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혹시 모른다... 새로운 히든피스를 발견해 다시금 기회가 올 지도.... 아직도 이 더 월드는 무한한 비밀을 감추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케리온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케리온은 안심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나 역시도 웃어주었다. 순간 케리온의 투기를 포함한 검이 내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 아아.. 나 절단마공이 12성에 이르렀나봐~!! 31 - 다가오는 불안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똑바로 내 머리위로 떨어지던 케리온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카락 몇 가닥만을 벤 후 허공을 갈랐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케리온을 보았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는 듯한 나의 눈빛에 케리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검을 거두어들인다. "네가 없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말야." 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게임을 접겠다고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동시에 나와 다시 싸우겠다고 하지는 않았어. 더 월드를 하면서 오늘만큼 즐거 운 적은 없었거든." 히죽 웃어 보인 케리온은 내가 땅에 꽂아 두었던 무상천검을 뽑아 던졌다. 얼떨 결에 무상천검을 받아든 나는 무상검록을 들어 올리는 케리온을 멍하니 보았다. 케리온은 무상검록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가지. 인질이야." ......인질...? 겨우 아이템인 무상검록을 인질이라고 부를 수 있나? "반년만 기다리겠어. 그 사이에 찾으러 오지 않으면 내가 익혀버릴 거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케리온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도 모 르게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큭... 크큭... 크하하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미친 듯이 웃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참기 힘들 정도로 폭소가 터져 나온 것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인생에도 얼마 없었다. 한참을 배가 당길 정도로 웃던 나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무상천검을 허리에 걸린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정확히 반년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그 때는 이길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어." "혹시 그 때 제가 이기더라도 오늘처럼 봐 줄 것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바라던 바야." 나는 히죽 웃어 보이곤 응룡회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은 다 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멍한 얼굴로 케리온을 보고 있었다. 나를 살려둔 이유 를 이해할 수 없나보다. "유빈아!" 단 한 사람... 진희누나만이 기쁘게 달려와 나에게 안겨들었다. 나는 누나의 머 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반년 동안 또 바빠지게 됐어요. 누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나중으로 미루어야 될 것 같아요. 괜찮죠?"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이런 누나가 정말이지 좋다. "역시 누나는 착해....." ".....어떻게 하면 생각이 꼭 그 쪽으로 흐르냐?" 진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내가 생각 해도 내가 조금 문제가 있는 듯 싶다. 무슨 생각을 해도 종래에는 누나의 생각 으로 흘러버리니 말이다. 이러니 애들이 그 난리를 치지....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이자 진호는 질렸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였다. "누나를 생각하면 기쁘기는 한데 말야.. 한편으로는 네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어..." "아하하.. 그러냐?" "어쩌겠냐..? 내가 이해를 해야지... 그보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냐?" 진호의 질문은 더 월드 이야기다. 오늘은 마대륙 어디를 정벌할 것인지 묻는 것 이다. 3개월 전 은자림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은자림을 단 18명으로 이루어진 응룡회 가 괴멸시켜 버린 사건은 현재까지도 종종 유저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이다. 특히 은자림과 전투당시 있었던 리키와 엔드의 마신소환은 나와 케리온의 대결 과 함께 올해의 최고 이벤트로 선정되어 있을 정도이다. 아니 이제까지의 더 월 드 역사상 최고의 뉴스로 지정되어 있을 것이다. 리키와 엔드의 마신소환 장면과 케리온의 도르오라와 나의 무진이 부딪치는 장 면은 다음날 비디오 파일로 리코딩 되어 더 월드 홈페이지에 올라왔고 지금에 와서는 조회 수 20억, 다운 수 10억의 대 기록을 세워버렸다. 더구나 그 수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오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그런 대 사건을 만들어 낸 장본인인 나와 응룡회는 은자림을 괴멸시킨 후, 즉시 리키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한 제국 서쪽 열사의 사막 너머의 망령산으 로 향했다. 그리곤 망령산에 있는 살막의 본부를 습격해 살막마저도 초토화를 시켜 버렸다. 기습의 이점과 함께 다시금 펼쳐진 리키와 엔드의 합동기... 마신초래의 힘으로 살막은 몇 시간만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더불어 살막주 무영살검 진군과 부막주 희살마녀 애령도 사망.... 살막주 무영살검 진군은 월영살검무 비급을 떨구었고 고스란히 진악형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로도 우리는 종종 시간이 날 때마다 은자림의 잔당들과 살막의 고수들을 볼 때마다 가볍게 게임오버를 시켜 주었고 지금에 와서는 더 월드에서 은자림 과 살막은 흔적조차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무무와 진군, 애령은 게임을 접었는지 아니면 어디 숨어서 수련을 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새로 캐릭터를 만들어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근래에는 흔적 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살막과 은자림과의 은원을 정리한 우리들은 다음 목표인 마대륙 정벌에 나섰다. 애초부터 마대륙 정벌을 하기로 했었고 거기다 언젠가 케리온에게 다시 한번 도전하기 위해서는 레벨 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미 한 번 마대륙에 들어갔다가 나온 나였기에 몹의 인식을 거부하는 목걸이 는 사라졌지만 어차피 필요는 없었다. 응룡회 전부가 마대륙에 들어간 터라 10 명이 넘어버렸고 그 목걸이는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지난 3개월 동안 우리들은 마대륙을 10%정도 정벌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의 레벨도 357로 올라있는 상태다. 350레벨인 내가 7레벨을 올렸을 정도이니 얼마 나 마대륙 몹들이 주는 경험치가 높은지 알 수 있으리라... 나를 제외한 응룡회 의 전체적인 레벨도 20이나 상승해 있는 상태였다. "또 안 가 본 곳을 찾으러 갈 거냐? 아니면.... 황혼의 숲에서 사냥을 할거냐?" 황혼의 숲은 이제까지 우리가 정벌한 마대륙에서 가장 레벨 업을 하기 좋은 곳 이다. 전에 하데스에게 안내 받은 곳이 레벨 업을 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이지만 그 곳은 몹의 리스폰수가 적으니 1명에서 2명 정도의 소수가 사냥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와 반대로 황혼의 숲은 마대륙에 나오는 몹들 중에서 상급에 속하는 몹들이 다수 출몰하기 때문에 응룡회 전부가 사냥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모험을 한다면 새로운 곳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레벨 업을 한다면 황혼의 숲이 좋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내가 응룡회의 회주이기 때문에 이런 선 택권은 대부분 나에게 일임된 상태였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고 대답을 기다리던 진호는 문뜩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보다 전에 그 것은 어떻게 됐냐? 진도가 좀 나갔냐?" "그거... 아직 별로 얻은 것은 없어." "그래...? 이왕이면 빨리 만들어야 할 건데..."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진호의 말대로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무공을 만들 어내야 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리 레벨을 올려도 케리온을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직접 무공을 창조시키는 것은 아니다. 무공의 창조라고 하기보다는 무공과 무공의 결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리두에서 종종 쓰는 스킬과 스 킬의 결합과 비슷한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얻어왔던 무공들만을 사용했었다. 무공의 결합은 생각지도 못했 었다. 내 머리가 굳었던 것일까? 에리두에서는 스킬을 결합시키는데 무공은 결 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무상검록이 너무 강해서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무상검록 하나로는 버틸 수가 없다. 무진을 능가하는 새 로운 무공을 만들어 내야 케리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케리온 역시도 도르오 라라는 기술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그가 한 일이니 나 역시도 해야 할 일 이다. 못 한다면 도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욕에 비해 그다지 성과는 없다. 무공결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 번 해 보니 간단하게 됐거든.... 문제가 있다면 결합시킨 무공이 사용하지도 못 하는 쓰레기 무공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내가 이제까지 익힌 무공들을 하나씩 결합시켜 보았는데... 어느 하나 할 것 없 이 이류무공 이하의 파괴력을 낼뿐이다. 수개월 동안 제자리를 맴돈 셈이라고 할까...? **** 31 - 다가오는 불안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이론적으로 생각한 것은 있다. 바로 무상검록의 무진과 진사신무의 천지번복의 결합이다. 하지만 세 번 결합을 시도해 봤는데 말짱 꽝이었다. 에휴... "뭐.. 천천히 하면 되겠지.." 실험해 보고서 알았는데 무공조합을 하면 그 무공은 성취도가 없다. 당연히 만 들면 바로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약속된 반년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3개월이나 남아있다. 그 사이에 무진을 능가 하는 무공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말야.. 그래도 조급해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니까. 그보다 오늘은 사냥을 할까 탐험을 할까? 하아.. 몰라.. 귀찮아.... 결국 귀차나즘에 휘말려 버린 나는 고개를 흔들며 책상에 머리를 기대었다. "나중에 가서 동전으로 정하지 뭐...." 앞면이 나오면 탐험.. 뒷면이 나오면 사냥....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다. 그래. 그 렇고 말고..... 수업이 끝난 후 학교를 나선 나와 진호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다른 때 라면 집이나 넷룸으로 직행해 더 월드에 접속했을 터이지만 오늘은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관련된 일은 아니다. 진호에게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기에 휴대폰을 왜 던지냐?" "그 정도로 부서질 줄은 몰랐지." 이 엉뚱한 녀석이 며칠 전 교실에서 애들과 놀다가 휴대폰을 수류탄으로 사용 해 버린 것이다. 다른 던질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잘 부서지는 휴대폰을 던지다 니... 진짜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그냥 주문하지... 인터넷 쇼핑으로 주문하면 그날 바로 오잖아." "안 돼.. 직접 가서 기능을 보고 살펴야지. 무흐흣~! 3년이나 써 온 구형 휴대폰 이여 안녕! 최신형이여! 날 기다리거라!" ......이 녀석 혹시 일부로 휴대폰을 던져 버린 것은 아냐? 나는 잠시 미심쩍은 눈으로 진호를 노려보았다. 움찔한 진호는 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연발했 다. 역시.... 일부로 휴대폰 부순 거다. 나는 그대로 진호의 머리에 알밤을 날려주었 다. "아야.. 왜 때리냐?" "누나에게 고해버린다." "헉!!" 대번에 진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만약 내가 진희누나에게 사실을 말하는 진호는 진짜 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희누나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거기다 구형이라는 이유로 일부로 부수고 새로운 최신형을 맞추었다는 것을 진 희누나가 알면 진호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진희누나는 조신한 듯 하면서도 한 번 화가 나면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이번 여름에 지리산에 갔을 때 내가 말실수를 한 후 엄청나게 얻어맞은 것을 아는 사람이면 공감할 것이다. 평소에는 개미 한 마리 못 잡으면서 화가 나면 앞뒤 재지 않고 폭력을 행해 버리지 않던가... "유.. 유빈아..." "왜?" "살려줘~!" 구차하다 문진호.... 진호는 나위 몸을 껴안으며 '친구여!'를 외쳤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진호의 머리에 알밤을 날렸다. "달아 둔다." "고마워! 역시 넌 내 친구야!" ".....알았어.. 그러니까 이것 좀 놔.. 쪽팔리다." 앞서 말했다 시피 여긴 버스다. 물론 만원버스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많은 눈이 존재한다. 꼴사납게 남자가 남자를 껴안으며 '우정!'을 외치는데 안 돌아 볼 사 람은 없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우리는 친구잖아!" 얼굴에 철판 깐 녀석 같으니라고... 나를 너와 동류로 보지 말란 말야! "누나에게 말해야겠군." 내 말에 진호는 미끄러지듯이 물러섰다. 진짜 누나가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신호등에 걸려있었기에 버스 밖 도심의 풍경을 충분히 살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거리 는 벌써 성탄절 기운이 물씬 풍겼다. 그러고 보니 누나에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가 좋을까? 비싼 것은 능력도 안 되고.. 누나도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 않다. 그저 내 수준 에 맞는.. 그러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선물이어야 하는데.....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문뜩 반대쪽 건물 2층 창가에 비치는 사람을 발견 하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머니?" 먼 거리라서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어머니와 닮은 사람이었다. 맞 은편에 있는 여인은 커튼에 가려져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응? 뭐가? 어머니라니?" 진호의 말을 무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먼 거리였기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때맞추어 신호등이 녹색 불로 바뀌었고 버스는 무 정히도 출발해 버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건물의 창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빈아. 왜 그래?" "아.. 아니... 내가 잘못 봤나봐...." 재차 물어오는 진호에게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래... 어머니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바쁘신 어머니가 왜 이런 곳에 와서 차를 마시고 있겠는가. 그냥 어머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착각을 한 거 야... 분명해... 분명.... "휴우......" 심호흡을 하며 세차게 뛰는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왜? 가슴이 아프냐? 병원으로 가 볼까?"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진호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재차 흥분을 가라앉혔다. 노력의 결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희미하게 가슴을 조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불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불행이 다가올 것만 같다. 나에게 있어 불행이라면....? 쳇... 그만 하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닌데 미래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혼자 지레짐작 하다가 흥 분한 것일 터이다. 나는 불안을 털어 버리며 눈을 감았다. -이번 정차할 구역은...... 희미하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내려야 할 곳이다. **** 32 - 분열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2 - 분열(分裂) "어라? 누나는?" 진호는 들어왔는데 진희누나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호 에게 물었다. 그러자 진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직 안 들어왔어." "집에?" "응." 지금 몇 시지? 나는 현실시계를 호출해 보았다. 저녁 8시 30분...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는 7시 정도면 들어왔었는데.... "선배들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나 보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우형은 들어왔는데. 나는 선우형을 돌아보며 물었 다. "오늘 회식 있어요?" "없는데... 있으면 내가 빠질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형이 그런 자리에 빠질 이유가 없다. 그럼 과 회식이 아니라 동아리 회식인가? 하지만... 내가 알기로 누나는 동아리에 들지 않았다. 나는 눈살을 찌 푸렸다. 어째서일까...? 불안이 다시금 치솟는다. 오늘 오후에 우연히 보았던 어머니와 닮은 여자.... 불연 듯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누나가 애냐? 곧 들어 올 거다. 그 동안 우리먼저 한 판 뛰고 있자고." 진호가 내 어깨를 치며 웃었다. 나는 진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호 말 대로다. 누나가 조금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불안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누나도 성인이 다. 자신의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거냐?" 천희형이 물어온다. 한시라도 빨리 싸우고 싶어 근질거리나 보다. 이 곳 마대륙 에서 출몰하는 몹들은 하나같이 강한 녀석들뿐이기 때문에 형은 요즘 즐거워 죽으려고 한다. 혼자 사냥을 다니기는 힘들기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메시 지까지 꺼 놓고 마대륙 전역을 질주할 인간이다. "탐험으로 나왔어요." ".....또 동전 던졌냐?" 천희형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어왔다. 나는 가뿐하게 엄지를 세우며 히죽 웃 었다. 그러자 천희형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좀 고상한 방법 좀 쓰면 안 되냐?" "얼씨구. 고르는 것이 싫어서 모두 나한테 맡긴 주제에 말야. 그러면서 내가 탐 험하자고 해 아무것도 못 찾으면 투덜거리고, 사냥만 하면 지겹다고 또 난리고.. 형은 나에게 불만 품을 자격 없어! 내가 동전을 던지건 지폐를 던지건 형이 무 슨 상관이야? 동전으로 정하는 것이 싫으면 형이 선택 해. 지금까지 당한 것 그 대로 갈궈 줄 테니까." 내 강력한 대응에 천희형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유키코누나에게 달려가 처절하게 울어 짖었다. 100Kg이 넘어가는 덩치가 50Kg도 안 되는 여자 에게 안겨서 우는 모습은....... "진짜 꼴불견이야..." 선영누나가 대신 말 해 주는군. 하아... 저런 사람이 낭황이라니... 천희형은 평소에는 카리스마가 넘치다가도 우 리와 함께 있을 때는 심각하게 망가진다. 낭황을 멋지다고 소리치는 더 월드의 유저들이 보면 쇼크사 할 일이다 진짜. "그런데 민호는?" 나는 천희형에게서 신경을 거두며 민우형에게 물었다. 민우형은 어깨를 으쓱이 며 답했다. "집에 없다." 흠... 주린이 누나도 없는데.. 설마 둘이 데이트하러 간 건가? 주린이 누나와 민호가 요즘 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으로는 둘 이 엮어지면 좋을 것 같다. 민호는 내 친구고.... 그 녀석이 주린이 누나를 좋아하니 말이다. 주린이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민호 같은 녀석에게 마음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인데... 나는 진희누나 말고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리키녀석은 오늘 데이트가 있다고 했고...." 그 외에도 진악형과 명학형은 다른 약속이 있다고 오늘은 빠졌다. 소정이도 친 척집에 갈 일이 있다고 오늘은 못 들어온다고 했고.... 그럼 올 사람은 다 온 것 인가? "자자.. 그럼 가 보자고요. 오늘은 에밀고원 북쪽을 탐험하는 겁니다. 천희형 그 만 칭얼거리고 준비해요. 아! 그리고 엔디 너 포션 챙겨 왔지?" 말만 회주지 완전히 노동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 생각하지 않아도 입에서 술술 말이 나오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처량함을 한탄하며 회원들을 독려해 북쪽의 에밀고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은 좀 끝내주는 사냥터를 발견할 수 있으려나? 던젼 같은 곳도 좋은데 말 이다. 이제까지 몇 군데 발견했지만 영..... 뭐 운이 좋다면 발견할 수도 있겠지. 그럼 가 보자고~! "이런 망할!! 튀어!!!" 내 입에서 몹을 앞에 두고 '튀어'라는 말이 나올 줄은 정말이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천희형을 포함한 한 제국을 진동시킨 응룡회 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크아악!! 문진호!!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달리는 와중에도 진호의 머리에 주먹을 심어주었다. 이게 다 이 녀석 때문 이거든... [감히 나의 여의주에 손을 대고 도망치려 하는 것이더냐?!!!] 대지를 쩌렁쩌렁 울리는 분노에 찬 목소리.... 바로 우리의 뒤쪽에서 고개를 치 켜드는 거대한 용의 외침이었다. 암무보다 족히 세 배는 거대한 몸체.... 몸 천체가 강철로 되어있는 것처럼 윤기 를 발한다. 휘둘러진 꼬리에 나무 수십 그루가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저.. 저거 대체 뭐냐? 암무보다 더하잖아!!" 천희형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신음했다. 나는 머리를 누르며 천희형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삼신룡 중 대지의 신룡 태룡이에요." "저.. 녀석이?" "그래요. 전에 제가 본 해룡도 저만한 크기였거든요."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날 보았지만 나는 진짜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분명 태룡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클 이유가 없다. 제길!! 왜 저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냐고?!! 마대륙에 태룡이 있다는 것도 어이 가 없지만 하필이면 오늘 우리가 사냥을 나온 이 곳에 태룡이 둥지를 틀고 있 을 줄은 진짜 생각도 못했었다. 물론 조용히 지나갔으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망할 사고뭉치 진호 녀석이 태 룡의 여의주에 손을 대 버린 것이다. 진호 이 녀석.... 여기서 살아나가더라도 살아남을 생각 말이라! 내가 게임오버 시켜 버리겠어!! ****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한 편... ^^ 32 - 분열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허억.. 허억.. 살았다. 도망치면 따라붙지 않는 해룡과 다르게 태룡은 진짜 찰거 머리 같은 녀석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이건 진짜 기적이 나 다름없다. 나와 형, 누나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희를 만끽했다. 그때 리스를 한 진호가 괴성을 내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개자식아!! 그렇다고 친구를 재물로 바치냐?!!" 미친 녀석 상대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이 존재하는 나이기에 웃으며 진호에게 사과했다. "우리도 살아야지... 너 하나만 죽으면 되는 일이었잖아." ......사과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꺼져 가는 불씨에 기름을 뿌려 버렸다. 진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쪽 의 형님, 누님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내리려 하네...'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치사한 인간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호를 재물로 태룡에게 내던진 것을 잘했 다고 칭찬한 주제에.. 이제 와서 입술 딱 닦고 오리발을 내미네. "최유빈.... 죽여버릴 거야... 너 때문에 레벨이 20이나 떨어졌어... 그리고 겨우 11성에 올랐던 독고구검도 9성이 되어 버렸어.... 이걸 어찌 할 거냐!!!!" 하하... 이거 진짜 미안하네... 진짜 사과해야 할 듯 싶다. 아무리 진호가 먼저 일 을 벌였다고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던 것이다. 나는 내 잘못을 사과하지 못 할 정도로 양심이 썩은 인간이 절대로 아니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크악!! 나 오늘 진짜 왜 이래?!! 나는 분명히 사과를 하려 했단 말야! 이 놈 의 주둥이가 자기 혼자 움직인 거야!! 진호야!! 믿어 줘!! 내 진심이 아냐!! "아주 유조차를 들이받아라..." 뒤에서 천희형이 끌끌거리며 속을 긁었다. 나는 인상을 구기며 천희형에게 소리 쳤다. "형도 진호를 재물로 주자고 했잖아요!! 왜 나한테만 그래요?!!!" "시끄러!! 모든 잘못은 최유빈 너한테 있어!!!" ....썩었다. 썩었어! 어찌 인간이 저리 치사할 수가 있을까...? 저런 인간을 이제까 지 형이라 부르며 살아온 내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다. 내가 인생한탄을 하고 있을 때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한 진호가 검을 뽑아 공 격해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부신약영을 펼쳐 진호의 공격을 피해냈다. 레벨다운을 당하기 전에도 진호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 지금은 눈을 감고 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연달아 진호의 검에서 터져 나오는 독고구검의 절기들을 피해내며 나는 손을 모아 빌었다. "겨우 레벨다운 한 번 한 것 가지고 뭘 그래? 다시 키우면 되잖아!!" ......이게 진짜 아닌데... 자꾸만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재차 진호의 검을 피해냈다. 그래도 내 잘못이 분명 있다는 것을 알기에 검을 뽑아 대항하지는 않았다. 차앙!! .....진짜 뽑을 생각 없었는데.. 이제는 몸까지 자기 마음대로 노네... "크윽.... 최유빈!! 이 망할 자식아!!!" 결국 진호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로그아웃을 해 버렸다. 나는 진호가 사라 져 버린 자리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진짜 화가 나 버린 모양이 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천희형이 재차 내 속을 긁었다. "오~! 우정이 드디어 깨졌구나... 유빈아 진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망할... 이게 다 천희형 때문이라고!!!!!! 순간 내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으아아악!!! 유빈아!! 장난이었어!!!!" "시끄러!!!! 무상검록 무상검 오의 무진!!!!!!!!!!" -띠리리리리!! 아침이다!! 일어나!! 아침이다!! 일어....... 시끄럽게 울리는 시계의 알람을 누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늘어 지게 하품을 한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8시 20분... 오늘은 휴일이기 때문에 학교에 갈 필요가 없는 터라 느긋할 뿐이다. 방에서 나와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벌써 출근하셨을 것이 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을 생각에 토스트를 두 개 굽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 다. "프라이라도 하나 할 것을 그랬나...?" 뭐... 필요 없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곤 토스트를 입에 물고, 우유가 든 컵을 들고는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은 나는 멀티비전을 켰다. "멀티비전 채널 136." 136번은 언제나 더 월드의 소식이 전해지는 방송이다. 마침 3개월 전 나와 케리 온이 싸우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벌써 3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하루에 두 번씩 방송을 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인기가 폭발이다. 잠시 방송을 보던 나는 곧 식상함을 느끼며 채널을 돌려버렸다. 뉴스가 나오는 채널을 맞춘 후 탁자에 놓여진 내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진희누나의 번호를 누르곤 신호가 가기를 기다렸다. -휴대폰의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음성사서함으로..... 어라.. 아직도 꺼져 있네.. 어제도 그렇던데....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통화를 끊 었다. 슬슬 불안해 진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아냐? 혹시... 어제 집에 안 들 어온 것은....? 어떻게든 알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진호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어제 일 로 한동안은 진호에게 전화를 하기가 꺼려진다. 분명 진호는 내 얼굴을 보자마 자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전원을 끊어버릴 것이다. "하아.... 복잡해...." 누나에 대한 걱정과.. 진호에 대한 일...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결국 진호의 휴대폰 번호를 눌러야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역시 나에게는 누나 가 가장 중요했다. 잠깐의 시간동안 신호가 울리더니 곧 화상창이 뜨며 진호가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뭐냐? 너냐?] ......가시가 팍팍 돋쳐있군... 그냥 끊는 것이 정신건강상 좋을 것 같았지만 그래 도 진희누나의 문제가 걸린 일이라 나는 애써 웃어보이며 진호에게 인사를 건 넸다. "하하.. 잘 잤냐?" [물론 아주 잘 잤어... 어제 당한 일이 꿈에서 자꾸만 나타나 즐.겁.더.구.나." "그... 그러냐?" [용건 없으면 끊는다.] **** 32 - 분열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토라졌네.... 나는 머리를 긁으며 재빨리 진호에게 말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또 뭐가 있는데?] "그게.. 어제 미안했다고...." 이거.. 사과하기 힘드네.. 이제까지 또래의 남자에게 사과를 해 본 적이 없던 터 라 무던히도 얼굴이 따갑다. 내 사과에 진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그 말하려고 꼭두새벽부터 전화를 한 거냐?] 언제 8시 30분이 꼭두새벽이 되었지? 이런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극한의 인내력을 발휘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아쉬운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괜히 평소처럼 입을 놀려 진호의 이마에 금을 가도록 하면 나만 손해 였다. "그것도 있고... 또 진희누나 일도 좀...." [누나? 들어왔는데....] 다행히도 누나는 집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왜 휴대폰이 꺼져 있을까? 거기다가 진호의 행동도 조금 이상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 분명 무슨 일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무슨 일 있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진호를 보았다. 진호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곧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어제부터 누나가 조금 이상해.] 이상해? 분명 이가 상했다는 둥의 어처구니없는 농담은 아닐 터였다. 나는 진호 에게 자세한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무슨 일이야?" [나도 잘 몰라. 갑자기 들어와서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아.] "언제 들어 왔는데?" [늦게 들어왔어. 11시가 좀 넘었을 때야.] 11시? 누나가 그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나는 더더욱 불안을 느끼며 진호에게 물었다. "누나 왜 그런데?" [나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제길... 걱정 되 죽겠다. 대체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 야? 지금이라도 당장 누나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누 나의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누나의 집으로는 가기가 힘들었다. "누나... 지금 방에 있지?" [그럴 거야... 그보다 어제 내가 들었는데... 누나 울더라고..] 울어? 망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누나가 운다는 말야!!! 나는 재빨리 진호에게 부탁했다. "진호야.. 지금 바로 누나 방으로 가서 누나 좀 바꿔 줘." 어떻게든 누나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걱정되어서 죽겠다.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휴대폰의 화상창이 사라졌다. 전화가 끊긴 것 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들고 움직이는 터라 화상창이 사라진 것뿐이다. 잠시 후 진호가 진희누나의 방에 도착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진희누나를 부르 는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유빈이가 누나 좀 바꿔 달래! 누나! 자는 거야?] 하지만 누나의 방문은 묵묵부답이다. 곧 진호가 한숨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아. 자는가 본데.] "문은? 잠겨있어?" [당연하지.] "평소에는? 평소에 누나 방문 잠그지 않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고 보니 진짜 이상하네.] 제길!!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재빨리 진호에게 소리쳤다. "열쇠? 열쇠 없어? 빨리 열고 들어가 봐!!!" [왜 그래? 꼭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닥치고 빨리 누나 좀 살펴봐!!" [아.. 알았어.] 내가 소리를 치자 진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아련 하게 들려온다. 아마도 열쇠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나보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한시라도 빨리 진호가 진희누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를 기다렸다. 1분 정도가 흐른 후 진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다 지칠 지경이다! 그런 소리 지껄일 시간 있으면 빨리 문이나 열란 말 야!! 당장에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잠시 후 진호가 진희누나의 방에 들어갔는지 누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호의 목소리가 다급한 것 같다. [유빈아!! 진희누나가 이상해!! 제길... 누나!!!] 동시에 나는 휴대폰을 내던지며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어떻게 옷을 갈아입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이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지갑을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은 계단으로 내달렸다. 냉정히 생각하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그런 냉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었 다. 중간에 한 번 계단에서 굴러버렸다. 하지만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재차 계단을 내려갔고 금새 1층에 도착했다. "유빈군. 아침부터 어딜......?" 수위 할아버지가 나에게 물어왔지만 무시하며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아파 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진희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도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빨리 달리라고 기사에게 닦달을 했다. 30분의 시간이 그렇게 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것이 현실임이 아쉬웠다. 게임 이라면 부신약영을 펼쳐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인데.... 게임이 아닌 현실 임이 미칠 정도로 머리를 죄어왔다. 누나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요금을 계산하고는 그대로 택시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누나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누나!!!! 진호야!! 이 망할 자식아!! 빨리 문 열어!!!!" 다행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진호가 금새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진호에게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신발을 벗고 진희누나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박차고 누 나의 방으로 들어간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누나를 볼 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제길!!" 나는 누나에게 다가갔다. 누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멍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손 을 뻗어 누나의 볼에 대어 보았다. 순간적으로 누나의 눈동자가 약하게 생기를 되찾았다. "누나. 저예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유빈아......" 축축하게 젖어있는 누나의 목소리... 더더욱 불안을 증가시킨다. 동시에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누나!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유빈아... 미안해.... 미안해......"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한다. 점차 나의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불안 은 답답함에 어울리며 커져만 간다. 그리고 누나의 다음 말과 함께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 너를 만나면 안 돼.... 미안해... 미안해....." **** 발동된 현오의 사악마공....-0- 무하핫~!!! 이 날을 위하여 유빈이와 진희를 닭살 커플로 만들었도다!!! 파국으로 치닷는 거얏!!! 33 - 절망의 끝에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3 - 절망(絶望)의 끝에는.... "무... 무슨 소리죠?" 나는 멍한 얼굴로 누나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 믿고 싶 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나는......... "미안해.... 나 앞으로 유빈이 너 만날 수 없어...." 하지만.... 누나는 다시 한번 내 기대를 무너뜨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림을 막 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비틀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유빈아! 누나!! 갑자기 왜 이래?!" 진호가 진희누나에게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누나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 고 울뿐이다. 나의 시선은 누나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누나의 우는 모습만이 나에게 각인될 뿐이다. 혼란스럽다. 의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이제 만날 수 없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누나에게로 다가갔다. 이대로는 용납할 수 없다. 어떠 한 이유라도 들어야 했다. "전...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누나의 어깨가 움찔한다. 나는 그런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를 갈았다. "말했잖아요... 언제까지고 내 옆에 있어 준다고... 알잖아요.. 저 누나 없으면 어 떻게 되는지... 저 누나가 없으면 미쳐버릴 거라는 것 잘 알잖아요!!! 그런데.. 그 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말 해 봐요!! 대체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 죠? 괜찮아요... 다 말 해 봐요... 다 말 해 보란 말이에요!!!!" "유빈아!!! 너까지 왜 이래?!!!!" 진호가 내 팔을 잡고 끌었다. 나는 거칠게 몸을 비틀며 재차 누나에게 소리쳤 다. "누나가 아니면 안 돼요!! 누나가 아니면 난 살 수가 없다고요!!! 누나도 알잖아 요!! 내 과거!! 내 아픔!! 내 고통!! 모두 누나가 알고 있잖아요!!! 저 또 미친 녀 석이 되야 하는 건가요?! 이제까지 되찾았던 감정들 모두 버리고 옛날처럼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하나요?!! 아니면 진짜 미쳐버려서 다시 한 번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기라도 하란 말인가요?!!!! 말 해 봐요!!!! 제발 말 좀 해 보란 말이에요!!!!" "유빈아!!!!" 미칠 것 같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제발 이게 꿈이기를 바란다. 악몽이기를 바란 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진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악몽이라면... 악몽이라면 제발 깨란 말야!!!!! 나는 있는 힘을 다 해 진호의 팔을 풀어내며 누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장난이라고 말 해 줘요... 장난이죠? 장난이죠? 누나!!!" ".....미안해......"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해? 이유가 대체 뭐야? 최소한 나를 납득시키는 이유 라도 말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냐?! 그렇게 미안하다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인정 을 하란 말야? 누나는 잔인하다.... 오늘에서야 알았다. 너무 잔인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 이야? 그냥 인정하고 누나를 잊어버리라는 거야?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미친 소리다! 나는 절대로 누나를 잊을 수 없어! 누나는 내 모든 것이다! 누나 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만약 누나가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 "으.....으아아아아아아!!!!!!!" 부셔버리고 싶다! 이 망할 놈의 세상 따위는 산산이 박살내 버리고 싶다. 조각 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울고 싶을 정 도이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금 눈물이 메말라 버린 것일까? 다 시 또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말이지 싫다. 하지만.... 잡아 줄 사람이 없다. 몸을 돌리고 싶어도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어간다. 아니... 식어간다기 보 다는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공허함.... 모든 것이 도망쳐 버린다. 기쁨.. 즐거움... 슬픔... 아픔... 분노... 그것들 이 도망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그때였다. 갑자기 문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어 느새 돌아온 진희누나의 어머님이 분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분은 나에게 다가와 그대로 내 뺨을 쳐버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 로 그분을 응시했다. "너희 집안은 언제까지 나와 진희를 괴롭힐 작정이지?! 왜?!!! 왜!!!!!" 그분의 외침이 내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선사한다. 흐린 하늘은 어느새 검은 먹구름에 뒤덮였다.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이 내 몸을 적신다. 하지만 나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타다 남은 불길의 씨앗이 요동 친다. 온 몸을 태울 듯한 열기가 육체를 감싼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머릿속은 차갑 게 식어 있다. 황량한 벌판의 느낌....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허무의 공간에 내던 져진 느낌이다. 하릴없이 걸었다. 그저 몸이 가는 데로 걸을 뿐이었다. 온 몸이 무거웠지만 쓰 러지지는 않았다. 가끔씩 휘청하며 균형을 잃었으나 몸은 오뚜기가 되어 버린 듯 재차 균형을 잡아 보였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어 진다. 그와 함께 나의 몸은 더욱 무거워져 간다. 빗물 때 문일까? 모르겠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물웅덩이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와 함께 뿌려진 물벼락이 내 몸을 덮친다. 자조적인 웃음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멈추지 않고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어디까지 걸어 갈 것인지 어느 하나 아는 것은 없었다. 그냥 내 몸에 익은 대로... 본능적으로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도착한 곳은... 바로 우리 집이었다. 나는 잠시 비를 맞으며 높게 솟아있는 아파 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통로에 들어섰다. "아니.. 유빈군! 괜찮나? 흠뻑 젖었지 않나?" 수위 할아버지...? 그 분의 물음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엘리베이 터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내려와 문이 열렸다. 나는 열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다시 닫쳤다. 하지만.... 움직이는 않는다. ".....아.. 버튼을...." 몇 층이었지...? 맞아.. 25층.... 힘겹게 25층 버튼을 찾아 눌렀다. 희미한 기계소 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조금만 있으면 집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진다. 나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벽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의 등불이 눈을 따갑게 자극한다. '미안해....' 누나..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거야? 대체 나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미안하다고 만 하는 거지? 모르겠다.... '너희 집안은 언제까지 나와 진희를 괴롭힐 작정이지?!' 누나의 어머님이 하신 말씀은 대체 뭘까? 내 집안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러 고 보니 내 아버지와 아시는 사이 같았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인 가? 머리가 아프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 럽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단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25층에 도착했는지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 개를 숙인 채 누나를 생각했다. 그때 내 귀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아!" **** 33 - 절망의 끝에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깜짝 놀란 나는 급히 고개를 들어 나를 부른 누나를 보았다. 하지만... 내가 기 다리는 진희누나는 아니었다. 누나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착각이 었나 보다. ".....주린이.. 누나?" 내 고개가 다시 한번 떨구어졌다.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제까지보다 더 큰 허탈함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유빈아. 왜 그래?" 주린이 누나가 나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 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자조적인 느낌이 강할 것 같다. "비 맞은 거니? 몸이 불덩이 같잖아." 누나는 급히 나를 부축해 일어서게 만들었다. 누나에게 기대어 몸을 일으킨 나 는 겨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누나... 언제 온 거예요?" "조금 전에." 그런가..... 그런데 왜 나를 찾아 온 거지? 누나는 광주에 살지도 않는데 말이다. 뭐... 기차만 타면 금방 이지만.....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곧 의문을 지워버렸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피곤하다... 잠을 자고 싶다... 모든 것을 잊고... 그냥 잠을 자고 싶다. 깨지 않을 잠을....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변함 없는 모습... 하지만 오랫동안 느끼지 못 했던 차가움이 몸에 엄습해 온다. 춥다... 몸이 떨려온다. 한겨울에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 느 껴진다. 숨을 쉴 때마다 목이 얼어버리는 것 같다. 그런데도... 머리는 뜨겁다. 몸은 얼음물 속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머리에는 불 길이 이는 것처럼 열기가 느껴진다. 그와 함께 눈앞이 침침해지며 세상이 일그 러져만 간다. "유빈아!" 어지럽다. 차가운 거실바닥의 감촉과 함께 희미하게 누군가의 외침이 귀를 자극 해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생각해 낸 나는, 그게 주린이 누 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정신을 잃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무슨 말? 아... 시험 컨닝 좀 도와달라는 것? 못 도와 줄 것은 없지만... 매일 나 를 따돌리던 너 같은 녀석에게 도움을 줄 이유는 없어. 나는 그 아이를 무시하며 교실을 나섰다. 하지만 갑자기 그 녀석이 내 목덜미를 잡고 등에 발길질을 해 왔다. 동시에 녀석을 따르는 반 아이들가지 합세해 나를 밟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매일같이 당하는 것이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은 더럽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을 뿐인데 말이다.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당한다. 남은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도움을 줄 생각은 전혀 없는 듯이.... 그저 바라 보기만 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맞기만 하는 나를 흡사 벌레 보듯이 하는 아이 들도 있다. 몸을 구부리며 최대한 급소를 보호했다. 너무 많이 맞고 살다보니 몸에도 맞으 면 아픈 부위가 있고, 조금은 아픔이 덜 하는 부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 었다. 폭풍과 같은 구타의 시간이 지나갔다. 울리는 종소리... 수업시간을 알리는 것이 다. 나를 때리던 아이들은 깜짝 놀라 구타를 멈춘다. -어.. 어떻게 하지? 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을 하냐? 선생님이 들어와서 내 꼴을 보고 화를 낼까봐 그러냐? 자기가 혼 날 것이 그렇게 무서운 거냐? 어차피 말로만 혼을 낼뿐인데 말이다. 그저 반성하는 것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으면 다 끝이 아 닌가? 나처럼 이렇게 아픔을 겪지는 않지 않냐? 이 개 같은 자식들아. 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터진 것인 지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온 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뭘 노려봐! 노려본 적 없어. 그냥 본 것 뿐이야.... 나는 녀석에게 피식 미소를 지어주고는 교실을 나섰다. -선생님한테 이르면 진짜 죽인다! 미친... 그럴 생각도 없어. 나를 불쌍한 어린애로 보는 그 인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나로서도 바라지 않는 것이거든. 배알이 꼬인단 말야... 녀석의 협박을 무시해 주며 걸음을 내딛었다. 수업종이 울린 덕분에 복도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곧 있으면 선생님들이 올라올 것이다. 마주쳐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중앙계단이 아닌 건물 서편의 작은 계 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쪽의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종종 아이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옥상 이지만 지금은 어떠한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수업시간만은 이 옥상이 나의 쉼터가 된다. 옥상과 계단의 경계에 엉덩이를 붙이며 몸을 뉘였다. 서늘한 바닥의 감촉이 등 을 자극한다.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음미했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을 일으켰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여자의 우는 소리였다. 나는 소리의 흐름을 되짚어 갔다. 옥상의 한 쪽에 있는 작은 창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얼마 지나 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창고는 밖에서 열쇠로 잠겨 있었다. 안에 누가 갇혀 있는 것인가 보다. 나는 몸 을 돌려 다른 통로를 찾았다. 왼쪽 벽 위쪽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었다. 어른이 라는 못 지나갈 것 같았지만..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다. 나는 점프를 해 창틀을 잡고 팔에 힘을 주어 턱걸이를 하듯이 몸을 올렸다. 그 리고는 창문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도 창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리자 여태까지 들려오던 흐느끼는 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열린 창 안쪽으로 넣어 보았다. 안쪽은 어두웠기에 한 순간 사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구석에 앉아있는 아이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세요? 내 또래의 여자아이다. 하긴.. 초등학교에 고등학생이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창문을 넘어 창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곳이기 때문에 땅과의 거리를 정확히 잴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창 바로 아 래에 매트가 쌓여있어 어렵지 않게 뛰어 나릴 수 있었다. 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내가 다가 오자 몸을 움츠리며 경계를 했다. 나는 그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왜 여기에 있지? 내 말에 그 아이는 다시금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 시 모르겠다.. 이 아이도 나처럼 따돌림을 받는 아이일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이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울먹이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나갈래? 움찔하며 나를 보던 그 아이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금 물었다. -왜? 여기 무섭지 않아? -무서워... 그래도 나가면 미혜가..... 역시... 따돌림을 받는 아이인가 보다. 괜히 이 아이와 친해지고 싶다. 아 아이가 좋아질 것 같다. 휴.. 이런 감정을 동질감이라고 하나? 나는 그 아이 옆에 주저앉으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 아이의 시선이 느껴진 다.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너 애들한테 따돌림당하지? 내 물음에 그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긍정을 표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왕따야. 그 애의 시선이 다시금 나에게로 돌려졌다. -....정말... 이야? -봐. 오늘도 애들한테 맞고 수업 땡땡이 치고 있는 거야. 입술 다 터지고.. 눈 시퍼렇게 멍들고.. 안 보여? -...잘 안 보여...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두운 창고지... 희미하게 사람의 윤곽을 볼 수는 있지 만 세세한 얼굴은 볼 수 없다. 별 수 없이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상처가 난 내 얼굴에 가져갔다. 터져 버린 입술에 그 아이의 손가락이 닿자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거.. 다친 거니? -응.. 아파 죽겠어. -어떻게 하지? 나 지금 약 없는데.... 걱정해 주는 건가? 헤헤.. 기분 좋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주었지만 문뜩 여기서 웃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별 수 없이 손을 들어 그 아 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친구들한테 따돌림을 당하는 거야? 얼마 후 그 아이가 물어왔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없다고 그런 것 같은데... 지금은 이유도 모르겠어. -엄마가 없니...? -응.. 우리 아빠하고 엄마하고 이혼했거든. -그래? 나도 아빠 없는데...... -혹시.. 너 아빠 없다고 왕따 된 거야? -....응... 헤에... 이 아이도 나와 같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너희 엄마랑 우리 아빠랑 결혼하면 되겠다. 아니... 아니다.. 너 나랑 커서 결혼 할래? 그 아이가 날 바라본다.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멍하니 두 눈을 깜박거리고 있 을 것 같다. 나는 히죽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난 최유빈이야. 넌? 우물쭈물하던 그 아이가 얼마 후 소곤거리듯이 답해 주었다. -김진희.... 33 - 절망의 끝에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진희누나....." 눈을 뜨며 진희누나를 불러보았다. 잠들기 전의 일이 꿈만 같았다. 악몽...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악몽만 같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꿈이 아니라 는...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놓여있던 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수건 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가슴 부근에 무엇인가가 놓여있는 듯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내 가슴에 기대어 자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주린이 누나.... 그녀가 단정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다. 아마도 밤새도록 나를 간 호한 듯 보였다. 누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이불을 들어 누나의 몸을 감싸주었다. 할 수 있다면 침대 위에 눕혀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누 나가 깰 것 같아 포기했다. 방을 나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머리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이 조금 내렸지만.... 아직도 상당한 열기가 손을 타고 흐른다. 문뜩 옷을 살폈다. 어제 입었던 옷이 아닌 것 같다... 간편한 티셔츠에... 잠옷 하 의.... 누나가 갈아 입혀 주었나..? 그런데.. 속옷을 안 입고 있는 것 같은데.... 하... 상관없겠지....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꺼내 마시고는 주방을 나왔다. 그때 내 방에서 주린이 누 나가 다급한 얼굴로 나왔다. 그리곤 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니?" 누나의 물음에 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 어 내 머리를 만졌다. "아직 열이 있는데...." "이제.. 괜찮아요." 천천히 누나의 손을 떼어내곤 거실 소파로 향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자 다시금 눈이 감겨온다. 하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 진 몸이지만... 피곤만 할 뿐이다. "뭐 좀 먹을래?" 주린이 누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뱃속이 텅 비었지만 들어갈 것 같지 가 않았다. 주린이 누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니?" 무슨 일....? 있었죠... 너무 심각한 일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 까요? 지금까지... 진희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은 뭘까? 그냥 달콤한 꿈을 꾸었다고 생 각하면 그만일까? 그것으로 족할까? 그리고 다시 과거처럼 행복을 모르고.. 불 행을 모른 척 하며 살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행복을 몰랐더라면 가능하겠지만... 행복 이라는 단맛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더 이상은 과거처럼 살아갈 수 없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고 싶다.. 하지만 역시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다시금 인형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주린이 누나가 내 얼굴을 보듬어 안았다. 나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균형을 잃고 누나에게 안겨들었다. 누나의 품은 따뜻하다... 하지만... 진희누나만큼은 아니다... 진희누나에게 안긴 것과는 다르다. 진희누나에게 안겼을 때는... 나 역시도 가슴이 따뜻해 져왔다. 하지만... 주린이 누나에게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역시.. 나에게는 진희누나가 필요하다. "나.. 유빈이 너 좋아해...." 알고 있다... 수린이에게 들었었다. 주린이 누나가 날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만 누나의 그 마음에 나는 답하지 못한다. 나에게 있어 주린이 누나는 연인이 아닌 말 그대로 누나일 뿐이다. "나는 안 되니?" 누나의 고백.... 떨리는 주린이 누나의 손을 느끼며 나는 누나가 얼마나 많은 용 기를 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누나를 받아들이고 싶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 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진희누나 생각뿐이니 말이다. 고백을 받는 순간에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다니... 주린이 누나에게는 정말 미안 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역시 안 웃는구나....." ".....미안해요." 이제는 어떻게 하면 웃는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진희누나의 앞에서는 자연스럽 게 나오던 미소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희가 너무 부러워.... 그리고... 미워...." "미안해요... 누나...." 나는 천천히 누나를 밀어냈다. 누나는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며 고개를 숙였다. 누나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 한방울.. 한방울... 파문을 일으키며 나의 가슴을 죄책감으로 물들인다. 위로를 하고 싶다. 그러나 생각뿐이다. 행동으로 보일 수가 없다. 얼마 후 누나는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다. "진희와 헤어질 거니?"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금새 사그라졌다. 지 금의 내 상태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나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걸었다. 서쪽 하늘에 서서히 태양이 지고 있 다. 문뜩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누나에게 다녀온 날 이 오늘이던가..? 아니면 어제였나? 잠시 후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 지금 생각해서 뭘 하겠는가... 하루면 어떻고 이 틀이면 어떠할까... "유빈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누나에게 이유를 듣지 못했어요. 듣고 생각할 거예요. 만약... 누나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제가 도울 수 없는 이유라면... 어쩔 수 없이......" 듣지 못했다. 누나가 나에게 울면서 미안하다 말 한 이유를... 이제는 날 보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다. 이유를 알고 싶다. 그 이 유를 들어야 했다. 그 전에는... 절대로 누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 거짓말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되기를 기원해."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돌려 주린이 누나를 보았다. "고마워요." "......이만 가 볼게... 집에다가 오늘 돌아가겠다고 했거든." 소파에서 일어난 누나는 한 쪽에 걸어 둔 코트를 걸치며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누나를 현관 밖까지 배웅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누나는 말이 없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누나는 엘리베이터에 탔고 곧 문이 닫쳤다. 그때 누 나가 나를 불렀다. "유빈아...." "네..." "힘들면... 날 찾아와. 어깨 정도는 빌려 줄 수 있으니까." 내가 대답을 하기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완전히 닫쳐버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의 차가운 문에 손을 대며 누나에게 하지 못한 답을 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 배드엔딩은....? 침대에서 엔딩? 퍽!!!! 34 - 파멸, 도피... 그리고 초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4 - 파멸(破滅), 도피(逃避)... 그리고 초월(超越) 주린이 누나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외출준비를 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왔지만... 아직 누나에게 듣지 못한 것이 있 다. 나와 만나지 않겠다는 이유... 그것을 꼭 들어야만 했다. 분명 누나에게도 어떠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밝히기 힘든 어떠한 진실 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누나를 생각한다면 모른 척 해 주어야 하겠지만... 지금 에 와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만약 누나가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절대로 누나를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다. 아직까지 누나는 내 것이니까. 옷을 대충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즉시 택시를 타고 누나의 집으로 향 했다. 누나의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누나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역시 나 아직도 전원이 꺼져 있었다. 대충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별로 실망하지 않고 진호에게 전화를 걸 었다. 벨이 네 번 정도 울리고 진호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다..." [누구..? 아! 유빈이냐?] "그래..." [누나 바꿔 줄까?] 진호는 단번에 내 의도를 실행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부탁해... 그보다 누나는 좀 어때?" [여전하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식사도 하루종일 거르고.. 물 한 모 금 안 마시고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도 않고... 불안해 죽겠다. 네가 좀 어 떻게 할 수 있으면 해 봐.] "알았어.. 누나나 좀 바꿔 줘." [조금만 기다려.] 쿵쾅거리는 소리와 들려왔다. 나는 누나의 아파트 통로 벽에 기대어 누나가 전 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얼마 후 이어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진호의 목소리였다. [누나가 안 받는다는데.] "어떻게든 해." [불가능해.. 나 지금 누나 방에서 쫓겨났어.] ........저런 녀석을 믿은 내가 바보지... 나는 머리를 누르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 다. 제길.. 이렇게 된 것 강행돌파다. "집에 누구 있냐?" [누나와 나 뿐이야.] 거 마침 잘 됐군... 뭐 누나의 부모님이 있어도 밀어 붙어 버릴 것이지만.. 여간 골치가 아픈게 아니거든... 없는 편이 더 쉽게 누나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말이 다. "그럼 지금 빨리 문 열어." [에...? 문까지 잠갔는데. 열쇠 찾아서 들어갈까?] .....누가 그 문 말하냐? "너희 집 현관문 열라고." [너 지금 어디인데?] "너희 집 앞."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통화/취소 버튼을 눌러버렸다. 곧 누나의 집 안쪽에서 쿵 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라? 왔으면 벨을 누르지 왜 전화를 하고 그러냐?" 진호가 고개를 내밀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런 진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며 답했다. "너희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으면 골치 아프잖아." "하긴... 대체 왜 엄마가 널 미워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진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즉시 누나의 방으로 향했다. 누나의 방문은 진호의 말대로 잠 겨 있었다. 나는 진호를 돌아보며 눈짓으로 열쇠를 가져 오라 시켰다. 그러나 진호는 내 말뜻을 이해 못했다. "....왜?" 이 인간... 왜 이렇게 둔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열쇠." "아! 잠깐 기다려." 진호는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 열쇠를 가져왔다. 일전에 열쇠를 찾은 적이 있어 서인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져온 열쇠를 열쇠구멍에 밀어 넣고 돌려보았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이 열쇠가 맞는지 진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잘못 가져 온 것 아냐?" "어라.. 아까는 그것으로 열었는데... 혹시 누나가 문을 잡고 있는 것 아냐?" 아.. 그렇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열쇠를 진호에게 던졌다. 그리곤 문에 대고 작게 숨을 골랐다. "누나... 제 말 듣고 있죠?"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나는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문 열어 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만하지 말고 우선 문 좀 열어요. 셋 세겠어요... 만약 그 사이에 안 열면 제가 어떤 짓을 할 지도 몰라요.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어요... 아.. 이건 누나가 다칠지도 모르니 안 되겠네요... 그럼 다른 방법을 쓰죠. 베란 다 쪽으로 해서 누나 방 창가로 갈 거예요. 그리고 창문을 부수고 들어갈 겁니 다. 저 알죠? 저 진짜 한다면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셋 셀게요. 그러니 빨리 열어요. 하나.. 둘....." 나는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만약 셋을 셀 동안 문을 열지 않으면 진짜로 창문 을 부수고 들어가 버릴 것이다. 내가 막 셋을 말하려고 할 때 누나방 문의 잠금 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보았다. 문은 쉽게 열렸다. 안쪽을 들어다 보니 누나는 어느새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진호를 돌아보며 부탁했다. 진호는 웃으며 내 어깨를 치고는 자신의 방으 로 들어갔다. 그런 진호에게 마주 웃어주고 싶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진호를 바라보던 나는 곧 누나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문을 닫고.... 혹 있을 방해꾼을 경계하기 위해 문을 잠갔다. 잠금 장치가 잠기 는 소리에 누나의 몸이 움찔함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누나의 침대로 다가가 바닥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는 힘겹게 누나 를 불러보았다. "누나......" 34 - 파멸, 도피... 그리고 초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내 부름에 누나는 묵묵부답이다. 나는 다시 한번 누나를 불렀다. "누나..." 역시 대답은 없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누나가 덮고있던 이불 을 거두어 갔다. 누나는 이불 아래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울고 있다는 것을 대 번에 알 수 있었다. "말 해 봐요...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 건지."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누나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폭 발해 버릴 것만 같다. 왜 누나가 나를 피하는 것인지... 왜 내 앞에서 울기만 하 는 것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다. "절 납득 시켜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누나를 안 놓아 줄 거예요." ".....미안해.. 미안해. 유빈아...." "제길! 말을 하라고요!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말을 해야 제가 알 수가 있잖아 요!!" 나는 누나의 몸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누나는 거칠게 반항했지만 나는 이를 악 물며 누나와의 시선을 맞추었다. "말했죠? 누나는 내 거라고! 누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모조리 내 것이 라고!! 누나가 도망가고 싶어한다고 해도 나는 안 놔 줘요!" 누나는 멍한 시선으로 날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눈물 을 흘려낸다. 그런 누나를 볼 때마다 진짜 미칠 것 같다. 답답함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말해요... 말 좀 해 보란 말이에요! 누나가 왜 이러는지!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그 이유를 말 해 보란 말이에요!" 왜 말을 못한단 말인가? 머리로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칠게 누나를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섰다. "하... 하지 마!" "말해요...." 누나는 반항했지만 내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록 지금 내 몸이 정상이 아니 지만... 누나 역시도 진호의 말대로 하루종일 굶었을 터이다.. 아니 어제부터라면 이틀동안이다. 이미 누나에게는 나를 밀쳐낼 힘도 없을 것이다. "말해요." "싫어!" "그래요? 그럼 절대로 누나를 안 놔요. 난 누나 포기할 생각 없어요." 허리를 숙여 얼굴을 누나의 얼굴로 가져갔다. 누나는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상 관없었다. 나는 누나의 목에 키스를 하곤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누나는 어떻게 든 벗어나려는 듯 했지만 이미 누나의 양팔은 내 손에 의해 묶여있는 상태다. 결국 누나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유빈아... 이러면 안 돼.... 절대로..." "왜 날 피하죠?"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다. 그 이외의 말은 무의미하다. 다시금 누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즉시 누나의 왼팔을 누르고 있던 손을 들 어 누나의 블라우스를 잡았다. 누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 런 누나의 얼굴을 무시하고 거칠게 손을 당겼다. 몇 개의 단추가 떨어지며 속옷에 감싸 있는 새하얀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는 재차 누나의 가슴을 거칠게 쥐었다. 순간 누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넌 내 동생이란 말야!!" 뭐...? 순간적으로 내 몸이 경직되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 라고 강하게 생각했다. "하하... 저.. 누나 동생 맞잖아요. 누나보다 나이가 적으니까... 그런데 그게 어쨌 다는 거죠?" 부정했다. 내 생각을 부정했다. 그런 나에게 누나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와... 유빈이 너의 아버지가 같데... 어제 네 어머니를 만났어.. 그리고 들었어..... 어쩔 수 없어.... 난... 난 너를 사랑하면 안 돼....." 빠르게 내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져 갔다. 그건.... 지독히도 아픈 경험이다. 천천히 떠오르는 기억....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 어머니의 차가운 외침이 내 귓가를 맴돈다. -말해요!! 그 아이... 당신과 윤지혜의 아이 맞죠?! 다 알고 있어요! 증거까지 모 두 있으니 발뺌할 생각 마요!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잊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잊은게 아니다. 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했던 사실이다. 그 런데..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일이 나를 방해하는 거야? 왜?!! "누나... 누나의 어머니 성함이... 윤지혜.... 인가요?" 여기서 누나가 고개를 흔들면.... 그렇다면 오해일 것이 된다... 제발 누나가 아니 라고 해 주기를 하늘에 빌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하늘은 나에게 언제나 개 같은 인생만을 선사한다. "맞아.... 우리 엄마 이름이야...." "하하하..... 그럼.. 진호는? 진호는 누나의 친동생이 맞아요?" "아냐... 진호 내 친동생 아냐...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재혼한 거야... 진호는 아버지가 데려온 애야..." 망할 놈의.... 빌어먹을..... 나는 비틀거리며 누나에게서 떨어졌다. 누나는 가슴을 가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나와의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제길.. 뭐 이따위 인연이 다 있어? 그럼... 그럼 난.... 내 친누나와 관계를 가진 거야? 친누나를 사랑해 버린 거야? 이제... 이제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미안해....." 누나가 사과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다 내 잘못인데... 다 내 운명이 이따위 것 인데.... "하하하......" 눈물이 나온다... 이제 와서 사라졌던 눈물이 다시 나온다.. 하지만 기쁘지 않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축축하고도 끈적한 물기가 손바닥을 적신다. 나는 몸을 돌렸다. 누나의 방을 나오자 진호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녀 석도 나와 누나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유빈아......" "하하하... 미안... 미안해.... 네 어머니 말이 맞았어... 나... 나와 우리 아버지... 너 희 가족에게 엄청난 짓을 해 버렸어....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거야...." 평생을 사죄해도 씻을 수 없는 죄다. 누나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누나 까지도...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것 같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진호는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진 희누나의 방으로 들어가는 진호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진호의 집을 나섰다. 다리에 힘이 없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어버리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 곳으로 가야만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쳤던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늘.... 이런 위로 따위 는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 유빈이와 진희는 남매? 과연 진실은....-_- 34 - 파멸, 도피... 그리고 초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이.. 이봐요!! 여긴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내 앞을 막아서는 아가씨를 거칠게 밀어내며 나는 문을 열어제쳤다. "무슨 일이지?" 안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비서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 였다. "지사장님.. 그게....." "응? 유빈이 아니냐?"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며 고개를 갸웃하셨다. 그러자 비서는 멍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시는.... 사이입니까?" "내 아들이네... 그만 나가 보게. 수건좀 가져다 주고... 차 좀 내 오면 좋겠군." "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한 쪽의 소파에 앉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내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 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아버지도 별로 신경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 어쩐 일이냐? 다 젖은 채로...." 아버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어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입을 열었다. "진희누나 아시죠?" "네 여자친구 아니냐? 왜?" "문진희... 아니.. 이제 최진희라 불러야 겠군요." "무슨 소리냐?"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보셨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를 갈았다. "윤지혜..." 내 말에 아버지의 몸이 움찔하셨다. 이로서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희누나... 어머니 성함입니다." 아버지는 입에서 담배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나를 돌아보셨다. 그런 아버지에 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미 확인해 버린 이상... 더 이 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유빈아! 잠깐 기다려라!" "왜요...? 변명이라도 하시려고요? 하하하.... 듣지 않겠습니다. 다 기억해 버렸거 든요... 어머니가 저와 아버지를 두고 떠나버린 이유도.... 아버지가 일에 파묻혀 지내야만 했던 이유까지도 말입니다." 모르고 있었다면 그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모두 알아버렸다. 더 이상...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믿거라.. 모두 오해다! 네 어머니도 오해를 한 것이야! 모두 네 외......" 나는 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어떻게요?!!! 어떻게 제가 믿을 수 있죠?! 어머니도 아버지를 믿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믿지 못하는 아버지인데...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만약 오해 라 하면... 그렇다면 왜 어머니를 잡지 않으신 거죠?! 오해를 풀었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어진 내 주먹이 고통을 호소한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어 버렸는지 핏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재차 아버지에게 외쳤다. "네! 믿어 드리죠!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어찌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 만 말이죠.... 그러면 끝인가요? 저만 믿으면 그만인가요? 어머니도 믿지 않고... 진희누나도 믿지 않아요! 제가 믿어봤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가슴을 짓누르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여전히 나를 응시 하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저... 아버지를 증오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려 방을 나와버렸다. 뒤쪽에서 아버지가 나를 급하 게 불러 세웠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침 수건과 차를 준비해 온 비서가 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달리기 시작 했다. 더 이상 이 곳에 있기 싫었다. 그랬다가는 진짜 아버지를 증오할지도 모 를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으니 말이다. 하지 만....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오가 크기를 더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밖에는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거칠 것 없이 빗속을 내달렸다. 몸 을 이렇게 라도 혹사시켜 타오르는 분노를 삭히고 싶었다. "꺄악!! 뭐야?!!" "저 자식 뭐 하는 자식이야!!!"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나에게 소리쳤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주말.. 비록 비가 내리지만 지나는 사람은 많았다. 피하지 못하고 나와 부딪치는 사람 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누군가의 몸과 충돌한 나는 균형을 잃고 빗물이 흐르는 땅 위를 굴러야 했다. "이 자식!! 똑바로 안 다녀?!! 이 길 네가 전세 냈냐?!!" 쓰러진 내 몸을 한 남자가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운동께나 한 듯이 팔뚝이 코끼리 팔뚝이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고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가 우습다고......" "놔라." "뭐? 이 자식이 진짜!!!" 그가 주먹을 뒤로 당겼다. 나는 재빨리 박치기로 상대의 얼굴을 찍었다. 얼굴이 함몰되며 피가 튀었다. 손을 들어 비틀거리는 그의 목을 쥐었다. 그리고는 길 한 쪽에 솟아있는 가로수에 머리를 찍어버렸다. "꺄악!!!!"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무시한 채 쓰러진 상대의 복부를 발로 두어 번 차 주고는 몸을 돌렸다. "개자식... 사람보고 덤벼..." 이를 갈며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급히 몸을 피하며 길 을 만들어 주었다. 문뜩 하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피아 넷룸이다.. 큼지막한 글자 밑에는 자그마한 크기로 '가상기계 완비'등등의 말들 이 쓰여 있었다. 순간 나는 더 월드를 생각했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더 이상 이 곳에 있고싶 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더 월드... 나의 안식처가 된 곳.... 그 곳으로 영원히 가고 싶었다. 가상공간이라 하지만...... 나에게는 현실보다도 더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즉시 넷룸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넷룸에 들어서자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반겨 준다. 나는 카드를 꺼 내며 자리를 요구했다. "더 월드...." "비를 맞으셨군요. 그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우선 수건으로 닦고....." "닥치고 빨리 자리나 줘!" 짜증이 난다. 아르바이트생은 움찔하더니 자리를 하나 지정해 주고는 수건을 건 네주었다. "66번 자리입니다. 기계에 좋지 못한 작용을 할 수가 있으니.. 물기는 닦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수건을 받아들고 지정 받은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물기를 닦지는 않았다. 빨리 더 월드에 접속하고 싶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물기는......" 그대로 링크헤드셋을 쓰는 나를 보며 아르바이트생이 급히 달려왔다. 나는 무시 하며 접속을 시도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더 월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그래."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흑풍행로" [뇌파검사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기계적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다시 한번 아이디를 불러주세요.] 빌어먹을. 나는 이를 갈며 다시금 아이디를 불렀다. "흑풍행로!" [뇌파검사를 실행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순간 뇌에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하지만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버텨냈다. 곧 안내문구가 들려왔다. [뇌파검사를 완료했습니다. 흑풍행로 유저님 뇌파와 일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월드에 접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검은 터널이 나의 앞으로 펼쳐졌다. 35 - 변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5 - 변화 [최유빈!! 너 진짜 어디야?!!] 현후형의 메시지다. 이제는 현후형까지 동원하네... 조금 전에는 소정이던데 말 야... 나는 그대로 현후형의 메시지를 차단시켜 버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 다 또 다른 사람을 이용할 것 같아 모든 메시지 차단을 했다. "휴우...." 게임에 접속한지 오늘로서 나흘째다. 보통 사흘정도 게임에 접속해 있으면 강제 적으로 종료가 될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종료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나는 가 수면 모드로 접속을 한 것도 아니다. 일반모드라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것인데 말이다. 뭐... 상관없겠지..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일이다. 가능하다면 영원토록 이 곳에 서 살고 싶으니 말이다. "암무...." 내가 부르자 암무가 고개를 들었다. [용건은?] 쳇... 봉황은 존대를 해 주는데... 이 녀석은 꼭 말을 할 때마다 반말을 찍찍 날 린단 말야. 잠시 불만을 품은 나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다. 마을로 내려가자." 게임시간으로 열흘에 한 번은 식사를 해 주어야 한다. 본래는 사흘이지만 무극 지체가 된 후부터는 그 시간이 열흘로 늘어버렸다. 내 말에 암무는 투덜거리며 날개를 펼쳤다. [너는 발이 없냐?] "귀찮아..." [내가 날아가면 더 소란스러워 지는 것을 알잖아.] "마을 근처에서 내려주면 되잖아." [쳇...] 결국 암무는 입을 다물며 날갯짓을 시작했다. 천천히 날아오르는 암무의 등에 들어 누우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속 편한 녀석....] "하암.... 졸리는 것을 어쩌라고. 하루종일 잤더니 나른해 죽겠다." [제길 그러면 마을의 객잔을 잡아서 자면 되잖아. 왜 하필이면 내 집으로 와서 자는 거냐?] 아.. 그건... "침대는 매트리스가 생명이거든." [........내가 네 놈 침대냐?!!] 거 참.. 당연한 것을 묻네. 네 등만큼 푹신한 것이 어디에 있다고.. 부드러운 털 까지 있어서 따뜻하기도 하고 푹신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순간 암무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암무표 매트리스의 기능 을 하나 더 추가시켰다. "진동기능까지 있잖아." [크아아악!!!] 암무는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느긋하게 누워있던 나 는 졸지에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 망할 도마뱀아!!!" [샤랍!] ......이 녀석.. 나와 좀 돌아다니더니 저런 고단수의 언어까지 사용하네. 나는 황 당한 얼굴로 하늘을 맴도는 암무를 올려다보았다. [마을 근처다. 난 돌아갈 테니까 용건 있으면 불러라.] 그렇게 말한 암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중앙산맥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암무의 뒤통수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준 후 지상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재빨리 천상제를 펼쳤다. 이대로 떨어지면 아무리 나라해도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볍게 땅으로 내려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암무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나는 가볍게 경공을 써 그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들어선 나는 우선 이 곳이 어 디인지부터 살폈다. 대충 마곡성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인 것 같았다. 사파구역이니 만큼 역시나 사파 유저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객잔이 어디에 있나...?" 보통은 마을의 입구 근처에 객잔이 눈에 띄기 마련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마 을에는 그렇지 않았다. 머리를 긁으며 객잔을 찾던 나는 마을 중앙에서 객잔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운성객잔...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나는 주로 작은 객잔을 선호하는 입장이니 상 관없었다. 객잔에 들어가 만두와 국수를 시킨 나는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창 밖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문뜩 객잔 안의 유저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여있다 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그러고 보니 여기에 오면서도 종종 날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며 의문을 불태우는 나에게 한 유저가 다가와 포권을 취해 보였 다. "실례하오. 혹시 사룡검신 무상이 아닙니까?" .....에? 어떻게 단번에 알아보는 거야? 지금은 머리까지 단정하게 묶고 있는 상 태인데 말이다. 더구나 나를 흉내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한 번에 나 를 알아보는 거지? 의문이 계속 이어졌지만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의문을 접어버리 며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유저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그렇습니까?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왜 사룡검신이라 생각하셨습니까?"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에게 물어봤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 를 갸웃했다. "모르는 거요?" "....뭘 말입니까?" "허 참... 그렇게 사룡검신과 똑같이 생겨 놓고 어찌 모른다는 것인지..." 에...? 똑같다고? 설마.... 나는 이제까지 사룡검신으로 돌아다닐 때는 언제나 머 리를 풀어 얼굴을 감추었다. 그리고 창천유협으로 있을 때도 마법구로 얼굴을 바꾸고 돌아다녔다. 당연히 대부분의 유저들은 지금의 내 얼굴을 모르는 것이 다. 천희형을 비롯한 몇몇과 우리 반 아이들을 포함한 소수만이 알고 있을까..? "얼굴도 똑같고. 눈 밑에 상처까지 같은데 왜 착각을 하지 않겠소." ".......뭐라고요?" "답답한 사람이네. 정 궁금하면 저 쪽을 보시구려." 그가 가리킨 곳은 객잔의 입구 쪽이었다. 출입문의 왼쪽 벽에 달라붙어 있는 벽 보를 본 나는 그대로 몸을 휘청하고 말았다. 35 - 변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사룡검신 무상. 현상금 금 100만 냥. 이라는 글귀와 함께 그 밑으로 내 얼굴이 상세히 그려진 현상지가 벽에 붙어 있었다. 금 10만 냥이라면 절정비급 10권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분명히 큰돈이지만..... "끄응...." 가장 밑에는 의뢰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낭황 강천'이라는 글 자가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이 황당한 현상금을 내건 사람이 바로 천희형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를 악물며 몸을 떨었다. "제길!! 내 몸값이 겨우 금 100만 냥 밖에 안 되냐?!!!" .......실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나에게 몰렸다. 점차 주위가 소란스러워 진다. 수군거 리는 유저들을 돌아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서는 역시.... 도망가야겠지? 나는 재빨리 창을 넘어 경공을 써 달렸다. 곧 뒤쪽으로 '사룡검신이다!!'라는 유 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망할!! 배고파 죽겠는데!! 별 수 없이 사냥을 해서 배고픔을 채워야 할 상태다. 그보다 천희형!! 메시지 좀 안 받는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현상금 을 걸다니..... 복수해 줄 테다! 마을을 벗어난 나는 즉시 암무를 불러 중앙산맥으로 향했다. 중간에 노루 한 마 리를 사냥해 고기를 습득한 것도 잊지 않았다. 암무의 거처로 도착한 나는 장작을 모아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웠다. 암무가 투덜 거리기는 했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내가 주인인데 지가 어쩔 거야? 열 받 으면 암무의 등위에 올라가 고기를 구워 버리겠다고 일침을 가해주자 녀석도 입을 다물었다. 대충 고기가 익자 가볍게 배를 채우고 즉시 천희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어떻게 현상금을 걸 수가 있어?!!!] [유빈이냐? 이 자식!! 너 대체 어디야?!!] 어쭈구리. 뭐 낀 놈이 성낸다고... 어디서 큰 소리야? 잠시 황당한 마음을 감추 지 못하고 허탈한 한숨을 내쉰 나는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당장 취소 해!] [닥치고 어디에 있는지 말 해!! 아니다!! 빨리 로그아웃부터 해!] 로그아웃....? 싫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싫어.] [망할! 너 진짜 죽으려고 작정했냐?! 벌써 나흘째 로그아웃 안 하고 있잖아! 밖 은 지금 난리도 아냐! 걱정 그만 시키고 빨리 로그아웃 해!] [안 해. 나 여기서 살 거야.] 나가면 슬플 뿐이다. 또 아픔을 겪을 뿐이다. 거긴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누나를 생각하면 아픈데.... 여기서 나간다면 나는 진짜 미치고 말 것이 다. [너 어린애도 아니면서 자꾸 애처럼 그럴 거냐?! 네 아버지 걱정하는 것은 생각 도 안 할래?! 최유빈! 당장 로그아웃해라! 너 그러다 진짜 죽어!] 죽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살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에야 여기서 마 지막 남은 생을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가서 미쳐죽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이지.... [나쁘지 않군...] [이 미친 자식아!!] 내 마음을 이해 못해주는 천희형이 야속하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제길... 나보고 어쩌라고!!! 형도 다 들었지? 그래!! 진희누나와 나 남매라고! 진 희누나 내 이복누나라고!! 이런데 내가 어떻게 그 곳에서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어?! 형이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형까지 진짜 왜 이래?!!!] [그래 나 이해 못한다! 그렇다고 죽겠다는 거냐?!!] [망할!! 그럼 형과 유키코누나가 알고 보니 남매였다고 하면 어쩔 건데? 형이라 면 누나 포기하고.... 다 잊고 웃으면서 살 수 있겠어?!!] 형의 답변은 날아오지 않았다. 나는 킥킥 웃으며 재차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형에 대해 잘 알아... 형도 나하고 같잖아.... 제발 나 좀 이해 해 주란 말야!] [아무리 그래도 죽을 것까지는 없잖아!] [아니.. 있어.] [제정신 좀 차려 임마! 그리고 아직 진희와 네가 남매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 아! 너는 네 아버지 말도 못 믿는 거냐?!] 아버지의 말...?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대체 아버지의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최유빈!!] [이만 끊을게. 다시 연락할 일 없을 거야.] 나는 그대로 메시지 창을 닫고 모든 메시지 차단을 걸었다. 그리곤 암무의 등으 로 올라가 자리를 펴고 누워 눈을 감았다. [또 자냐?] 암무가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무의 털을 쓰다듬 었다. 문뜩 암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속의 만들어진 존재... 그는 어 떠한 아픔도 모를 것이고 걱정 역시도 없을 것이다. 누구를 사랑할 일도 없으니 헤어짐의 슬픔을 겪을 일도 없겠지...? 나도 차라리 암무와 같았다면... 진희누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플 이유는 없을 것 인데 말이다. "네가 부럽다." [.......어디 아프냐?] 내 말에 암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뜸 나를 환자로 몰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 며 암무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아프다." [내상약 먹고 운기행공 해라.] "하하.. 그걸로 나을 수 있는 아픔이 아닌데." [헛소리 그만 하고 잠이나 자라.. 네 놈 장난질 상대 해 주기도 귀찮다.] 쳇.. 재미없는 녀석...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감았다. 마침 태양이 하늘 중간에 떠 있는 정오였기 에 암무의 동굴 위쪽에 터져 있는 공간으로 햇빛이 강하게 내려 쬔다. 내가 눈 살을 찌푸리고 암무에게 뭐라 하려고 할 때 암무가 먼저 날개를 펼쳐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고맙군." 나는 나름대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암무는 뚱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네 녀석이 발광하기 전에 먼저 선수 친 거다.] "쳇... 사람이 고마움을 표하면 웃으며 받아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 [난 인간이 아니라 용이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을 써 봤자 나와는 별개야.] ......그래 너 잘났다. 이 투덜아.... "용지상정으로 고치마......" 내 말에 암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돌아보았다. 용의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저 건 분명히 질렸다는 표정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지기 싫으냐?] 거 봐라. 맞지? **** 35 - 변화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꼬르륵....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나는 밥 달라고 요동치는 위장 덕분에 눈을 떠야만 했 다. 쩝.. 별로 잔 것도 같지 않은데... 벌써 배가 고프다니... 내가 대체 얼마나 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암무에게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지?" [일주일. 네 놈 배꼽시계는 정말 환상적이로구나.] .....내가 일주일이나 잔 거야? 무슨 잠 귀신이 붙었나...? 하아.. 그건 그렇고 역시 강제 로그아웃은 되지 않았군. 지금쯤이라면 닷새동안 로그아웃을 안 한 것이 되는데..... 역시 나는 강제 로그아웃을 당하지 않게 되었 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잘 된 것이겠지... 머리를 긁적거린 나는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았다. 배고픔 수치가 얼마나 되는 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테이터스 창이 열리지 않았다. "어라...?" 이제까지 이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다른 창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호출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 수신이나 메일 수신확인 역시도 불가능이었다. 혹시 무공도 못 쓰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검을 들어 검강을 펼쳐 보았는데 다행히 무공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뭐가 말인가?] "아냐.. 아무것도." 암무에게 게임 시스템 적인 버그를 물어보아도 얻을 것은 없다. 나는 대충 고개 를 흔들며 최후의 방법을 써 보았다. "로그아웃." 이 말만하면 당연히 나와야 할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라는 안내문구가 뜨지 않았다. 한마디로 로그아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아있던 나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넘겨 버렸다. 어차 피 게임에서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잘 됐지 뭐... 그보다 배가 고픈데.. 뭐라도 먹어야 하겠어. 기지개를 펴며 일말의 잠 기운까지 날려버린 나는 암무의 동굴을 나섰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먹을만한 것을 찾아보았지만.... 얼마 후 한숨을 내쉬며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몹 천지인 이 곳에서 사냥할 만한 작은 동물이 존재하기를 기대한 내가 바보다 진짜. 몹을 사냥해 고기를 얻어볼까 생각을 했지만.... 마기를 풀풀 풍기는 중앙산맥의 몹은 역시 먹기가 껄끄러웠다. 물론 먹고 죽을 일은 없겠지만 혹 어떠한 페널티를 당할 위험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지금은 스테이터스 창도 열어보지 못하는 상태다. 무슨 페널티를 당하는 지 조차도 확인불능인 것이다. 다시 암무의 동굴로 돌아간 나는 암무의 등에 올라타며 명령을 내렸다. "마을로!" [......젠장.] 역시나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알아서 날아오른다. 나는 느긋하게 암무의 등에 누 우며 왼손 약지에 끼워놓은 마법구를 발동시켰다. 이 반지는 마도사가 아니더라도 모습변환 마법을 시전케 해 주는 반지로 에리 두에서도 최고급으로 치부되는 물품이다. 200레벨 이상의 더블 마스터 위자드가 아니라면 모습변환이 있는지 조차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 외에도 스트렝스(근력상승) 프로텍트(방어력 상승)에 4서클 이하의 마법 자 체 디스펠 기능까지 걸려있는 환상의 유니크아이템이 바로 이 마스터즈 링이다. 원래 한 쌍이었는데 남은 하나는 누나의 손에 끼어준 상태였다. 일종의 기념품 이라고 할까..? ....쳇... 또 누나 생각을 해 버렸네... 누나를 잊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할 때마다 슬퍼지는 것이 싫었다. 훗.. 어쩌라는 것인지.... [마을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공중에서 나를 떨구어 버리는 암무 자식이다. 빌어먹을... [일 있으면 불러라.] 몸을 돌려 중앙산맥 쪽으로 날아가는 암무에게 역시나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워준 나는 천상제를 펼쳐 부드럽게 땅으로 내려섰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일주일 전에 들렸던 마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었다. 모습도 바꾸었으니 걱정 없이 마을로 향했다. 예상대로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바로 옆에 내 얼굴이 그려진 현상지가 걸려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혹시 알아보는 것은 아닌가 섬뜩할 때가 있다. 하하... 이게 바로 수배자의 기분이라는 것인가? 의외로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일전에 들렸다가 식사도 못 하고 도망쳤던 운성객잔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자 작은 키의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저희 운성객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만두 한 접시와 국수 한 그릇." 객잔자랑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중간에 말을 끊으며 주문을 했다. 점소 이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소리치곤 즉시 달려가 버렸다. 거 참... 발 바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나는 재빨리 만두 하나를 집어먹었다. 크윽! 맛있다~!! 평소에도 이런 만두의 맛 정도는 느낄 수 있지만 고통에 대한 감각을 제한하면 서 미각까지도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에 완벽한 맛을 느낀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평소보다 더 확실한 미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또다시 의문이 들었지만 접어 버렸다. 뭐.. 그 사이에 업데이트라도 있었나보지. 물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든 창이 뜨지를 않으니 뭘 알 수가 있어야지... 한마디로 공지 확인도 불가능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미각을 제대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안심하며 즐겁게 식사를 끝마쳤다. 탁자 위에 식사 값으로 은자 한 냥을 올려놓고 객잔을 나섰다. "으갸갸갸갸....." 배가 두둑하니 다시금 졸음이 밀려온다. 빨리 암무를 불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 한 나는 즉시 마을 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내가 막 마을을 나서려 는 찰나 암무에게서 공명이 왔다. [주인이여.] 어라..? 이 녀석이 나에게 먼저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는 이제까지 없었는데... 나 역시도 암무에게 공명을 보내려 했지만.... 순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껏 경험이 없던 것이라 암무에게 먼 거리에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몰 랐던 것이다. 메시지 전달을 하는 것처럼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 한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기는. 그냥 말로 하면 된다.] 에...?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디에서건 암무를 불러도 녀석은 알아서 찾 아 왔었지. 그 말은 곧 녀석이 언제나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먼 곳에서도 말이다. 괜히 혼자 쇼했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인 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갔다. 길 한가운데서 혼자 중얼거리면 분명 미친놈 취급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건은?" [방문자가 있다.] ....에 방문자? 그게 뭐 어쨌다고? "유저들인가?" [그렇다.] "그럼 평소처럼 네가 알아서 게임오버 시켜 주면 되잖아." 다른 때는 그렇게 잘 하면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나한테 묻는 건지 모르 겠다. 그때 암무가 의사를 전해왔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둘은 너의 친구이다.] "내... 친구?" [그렇다. 낭황 강천과 낭황제후 단리연화.... 그리고 운영자 치우가 바로 방문객 이다.] **** 유빈이의 현재 상태는... 바로 NPC... 암무와 같은 보스급 유니크 몹이나 다름없습니다. 벌써 120편이네요...-_-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오옷~! 오늘 내로 완결 시킨다!!! **** 소재목 수정이 있었습니다. 36 - 방랑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6 - 방랑(放浪) 하긴.. 천희형이야 언제고 중앙산맥으로 나를 찾아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 만 운영자 치우까지 같이 왔다는 것에 불안이 싹텄다. 분명 지금의 내 처지는 더 월드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닷새 동안 로 그아웃을 못한 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운 영자 측에서 조사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럴 바에야 나를 찾아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시스템의 전반 적인 것을 체크할 수 있는 운영자라면 나를 찾아내는 것은 간단한데 말이다. 혹 시 나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어떻게 할까?] 암무가 다시금 물어왔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를 찾아 온 거겠지?" [그렇다.] "모른다고 해 줘." [알았다.] 그렇게 말한 암무는 더 이상 의사를 전해오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 각을 정리했다. 운영자 치우가 나를 찾아오지 않고 암무를 찾아가 내 행방을 묻는 것.... 로그아 웃이 되지 않는 점... 스테이터스 창이 뜨지 않는 점... 그리고... 이상하리 만치 확실한 감각.... 나는 즉시 검을 뽑아들어 팔뚝을 그어보았다. "윽!!"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결코 게임 상에서 느끼는 통증이 아니었다. 잠시 멍한 얼굴로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던 나는 한가지 결론을 도출시킬 수 있었다. "혹시... 나 NPC가 되어 버린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게임에서 이러한 통증을 느 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는 NPC뿐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크다고 믿었다. 창이 뜨지 않는 점이나 로그아웃 이 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하하하... 내가 NPC라니... 잠시간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렀다. 어차피 나는 여기서 살고 싶다. 그렇다면 차라리 NPC가 되어버린 것이 좋을지 도 모른다. NPC라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내가 바라는 일일 지 도 모른다. "하하... 하하하하하!!!" 나는 대소를 터트렸다. 지나는 유저들이 날 돌아보았지만 얼마 후 관심을 거두 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것.... 계속 여기서 살면 된다.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을을 나가려던 생각을 접고 마시장을 찾았다. 어차피 암무를 부를 수 없 는 상태.... 그냥 여행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경공을 써서 할 수도 있지만.. 그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노새라도 하나 구해 타고 느긋하게 세상을 유람해 볼 생각이다. 천리신마가 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에 내 정체가 발각되어 버릴 터이니 눈에 띄지 않는 노새가 여러모로 편했다. 잠시 마을을 둘러 본 나는 워낙에 작은 마을이라 마시장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 했다. 별 수 없이 조금 더 큰 마을로 가야할 듯 싶었다. 나는 마을을 나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마곡성이 있을 것이 니 우선 거기로 가보기로 했다. 경공을 쓰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서 갔다. 그 덕분에 마곡성까지 도착하는데 이 틀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어 버렸다. 뭐....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 마곡성은 역시 성이니 만큼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번창해 있었다. 서부의 성중에서는 그나마 작은 성이었지만 그래도 성이니 없는 것은 없었다. 우선 마시장에 들러 작은 노새 한 마리를 구입했다. 그리곤 하루정도 쉬다 갈 요량으로 객잔을 찾았다. 어차피 알아 볼 사람도 없으니 되도록 좋은 객잔을 선택했다. 청평객잔이라고 하는 큰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달려왔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휴식까지." 내 말에 점소이는 나를 2층의 빈자리로 안내했다. 전망이 좋은 창가 쪽 자리는 이미 다른 유저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야 했다. 물론 이런 것에 불만을 가질 나는 아니다. "식사는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저희 청평객잔은....." "만두하고 국수." 나는 그 것 밖에 안 먹어. 내 말에 점소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큰 객잔에 찾아와 겨우 만두하고 국수 를 주문한 것이 불만인가 보다. 장사가 잘 되는 객잔이니 만큼 주인은 분명 NPC가 아닌 유저일 터이다. 어쩌면 저 점소이도 유저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뭐 NPC일 가능성 도 부정할 수 없다. 큰 객잔의 점소이들은 콧대가 높기로 설정이 되어 있거든. 휑하니 몸을 돌려 사라져 버린 점소이를 보며 나는 히죽 웃었다. 분명 주문한 식사도 늦게늦게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느긋하게 기다리며 객잔 안의 유저 들을 살폈다. 아직 식사를 한 지 이틀밖에 안 지났기에 꼭 식사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주문한 식사는 여래 내로 나오면 된다. 설마 그 사이에 안 나오겠어? "사룡검신은 아직도 잡히지 않은 것인가?" 문뜩 옆자리에 있는 유저들의 대화가 귀를 자극했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나는 관심을 두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매부리코 사내가 한 한 말에 삐적 마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군." "얼마 전에 마곡성 북쪽의 소전마을에 사룡검신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마을이 소전마을이었군.... 뭐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작은 마을 이름까지 외워둬서 뭐에 쓸까? "나도 들었어. 사실이었을 거야. 사흘 전 그 곳에 응룡회가 나타났거든. 나도 때 마침 소전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응룡회를 볼 수가 있었지. 정말 장난이 아니더 군. 갑자기 하늘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천상제를 펼치며 내려오는데... 천신이 강림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니... 흑의에 은색의 가면을 쓰고 있으니 사신으로 보이기도 하더군." "헤에... 나도 응룡회에 가입하고 싶은데...." "절대로 불가능이다. 들어보니까 응룡회의 회원들은 전부다 250레벨 이상의 최 절정고수라고 하더라고. 특히 현재 응룡회를 이끌고 있는 낭황 강천의 레벨은 340이 넘었다는 소문까지 있던데. 하긴 그 정도가 되니 겨우 20명도 안 되는 숫 자로 이틀 사이에 단일 최대 문파인 은자림과 우리 사파의 기둥인 살막까지 멸 문 시켜 버렸겠지." "하아... 나는 언제나 그런 레벨을 이룰까.. 그보다 왜 응룡회에서 사룡검신을 찾 고 있는 거지? 원래 응룡회의 회주는 사룡검신 무상이잖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갑자기 무상이 응룡회에서 등을 돌리고 잠적을 해서 찾고 있다는 말도 있고...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응룡회원들과 사룡검신과 반목이 있다는 말이 있지. 그래도 분명한 것은 사룡검신이 응룡회에 서 등을 돌렸다는 거야. 더구나 요즘에는 봉황신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여 러모로 복잡한 상황이 있나봐." "그렇군...." "뭐. 우리가 상관할 바는 없지. 다 그들의 문제 아니겠어?" "그래도 사룡검신이 내 앞에 나타나면 좋겠어. 전에 사룡검신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은 금 100만 냥을 받았다더군. 사로잡지 않고 행방만을 신고해도 금 100만 냥이라니... 대단하지 않아?" "솔직히 사룡검신을 잡으라고 하면 누가 나서겠나? 자네도 봤잖아. 데몬헌터 사 룡검신이 싸우는 모습을... 비록 데몬헌터에게 졌기는 했지만 우리 같은 허접들 은 칼날만 스쳐도 게임오버일 거야." "하하. 그것도 그래." 별로 들을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 죽이기로는 충분했다. 다른 이야기로 흥미를 돌리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마침 식사가 나왔기에 신경을 끄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 때 조금 전 대화를 나누던 인물 중 마른 사내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 다. **** 36 - 방랑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다섯 번째 초절정무공에 대해 들어 봤나?" 뭐? 마지막 초절정무공? 나는 막 먹으려던 만두를 놓으며 그들의 말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과거 혈룡검마 검천이 마지막 초절정무공을 습득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 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 마지막 초절정무공에 대한 이야기는 시들었는데... 또 새로운 소문이 생긴 것 같았다. 물론 이번 역시도 거짓일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관심을 사로잡기 에 충분했다. "또 헛소리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에는 신빙성이 있어." "그래?" 매부리코의 사내도 호기심이 동한 듯 수수깡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수 깡 사내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내가 어떤 직위에 있는지 알겠지?" "천이문(天耳門)의 당주아닌가." 천이문은 정보문파이다. 한 제국의 문파 중에서 정보력만을 보자면 수위를 다투 는 문파가 바로 천이문이다. 그런 문파의 당주라면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이건 얼마 전에 극비리에 들어온 소문인데 말야... 마치막 초절정무공 은 암살무공이라더라고." 암살무공? 분명히.....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이제까지 나온 초절정무공들은 하 나같이 분야별로 나뉘어 있었다. 천마신공은 마공이고 천무진경은 정공이다. 그리고 내가 익힌 무상검록은 모든 무공을 두루 섭려해야 익힐 자격이 주어지는 무공이며 진희누나의 만상풍운조 화서는 무공보다는 잡학 계열이다. 그럼 남은 것은 살수들의 전용인 암살무공뿐 이다. "제길.. 그럼 우리들이 익히기는 텄군." "그렇지. 듣고 보니 초절정무공은 하나같이 특색이 있다고 하더라고. 천마신공 은 사파의 무공만을 익힌 사람이 배울 수 있고 천무진경은 정파의 무공을 익혀 야 습득이 가능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그럼 무상검록과 만상풍운조화서는?" "그건 아직 확인이 불가능이야. 하지만 둘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을 거야. 그 때문에 무무가 무상검록을 무상에게 빼앗고 나서도 익히지 못했지. 전에 은 자림과 응룡회와 전쟁이 있을 때 무무는 무상검록의 무공을 쓰지 않고 오로지 구음진경상의 무공만을 사용하지 않았나." 천이문... 상당히 정보력이 좋은 문파이다. 나는 조금이나마 천이문에 대해 감탄 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초절정무공은 누가 가졌다고 하던가?" "극비라 나도 알지 못해.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누군가가 얻기는 했다는 말이야." "쳇. 뭐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잖아. 용두사미의 절정이로군." 매부리코의 말에 공감한다. 머쓱하게 웃는 수수깡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완전히 그들에게서 관심을 접어 버렸다. 뭐.. 마지막 초절정무공이 암살무공이라면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익힐 수 도 없을 것이고.. 혹 익힐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암살무공은 배우지 않을 터 이다. 암살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PK이다. 그것도 빠른 성취 를 위해서는 무차별 PK를 해야만 한다. 나와는 여러모로 적성이 맞지 않는다. 초절정무공에 대해서도 관심을 버리며 대충 식사를 끝낸 나는 방을 하나 얻어 휴식을 취하고는 다음날 아침 구입한 노새를 타고 마곡성을 나섰다. 자..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 갈 곳을 정하던 나는 곧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 처음 누 나를 만났던 화산성부터 차근차근 돌아보기로 했다. 누나와 함께 돌아다녔던 곳 을 다시금 여행하며 추억을 곱씹어 볼 생각이었다. 간간이 몹들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대로로만 다녀서인지 강한 몹들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가장 강한 녀석들도 늑대무리 정도였다. 물론 떼지어 이동하는 그들이기에 이류무사 정도라도 혼자서는 상대하기 어렵지만... 나에게는 상관없 는 이야기였다. 대략 네 달 정도가 걸려서 정파와 사파 세력의 중간인 무량성에 도착할 수 있 었다. 그 사이에 나에게 걸린 현상금은 두 배나 뛰어올라 버렸다. 이제는 나를 찾아 신고하는 것 하나로도 금으로 200만 냥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훗.. 졸지에 한 제국 최고의 현상범이 되어 버렸다. 무량성에서 하루 숙박을 한 나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내가 로그아웃을 하지 않은 지도 벌써 20일이 가까워져 간다. 아마 대충 그 정 도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현실시간도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뭐 여기서 살겠다 고 했으니 이제는 현실시간 따위는 상관할 바 없겠지... 어쨌든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완전하게 NPC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현실의 내 몸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가끔씩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 럴 때마다 애써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식물인간은 되어 있지 않 을까? 하하.. 여기서 여행하고 있는데 몸은 식물인간일 것이라 생각하자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만 생각하자... 지금으로서는 돌아갈 방법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문뜩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현실의 몸이 죽으면 나 도 죽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현실의 몸이 죽어도 나는 여기서 영원히 사는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현실의 내 몸은 죽 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후자이겠지.... 만약 후자라면 내가 죽는 때는 언제일까? 이 게임에서 게임오버를 했을 때? 그 럴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나를 보자면 유니크 몹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말이다. 유니크 몹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그러나... 꼭 유니크 몹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니 확신할 수는 없다. 죽고 나서 능 력이 깎기고 리스폰이 될 지도.... 결국... 알아보려면 죽어봐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죽는 것이 겁나다 하기보다는... 엄청 아플 것 같거든.. 하하하. 전에 팔을 한 번 그어보는 것으로도 아파 죽을 뻔했는데 사망할 정도면 얼마나 아프겠어. 절대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주정뱅이가 비틀거린다. 주정뱅이는 내가 구 입한 노새 이름인데.... 종종 이렇게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녀석이라 이름 을 그렇게 지어 준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 녀석이 비틀거리는 경우는 근처에 몹이 나 타나거나 싸움이 있을 때만 그렇거든.... 참 희한한 녀석이라니까. 그보다 이 녀석이 비틀거리는 것은 곧 근처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데... 평소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지만 지금은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 문에 구경을 하기로 했다. 자고로 불구경과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즉시 주정뱅이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전 투가 한창인 듯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에 구경할 것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구경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주 정뱅이를 한 쪽에 세워두고 몸을 돌렸다. 주정뱅이는 휴식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지 느긋하게 주저앉아 잠을 자기 시작했다. 보통 녀석들은 이런 곳에서 세워두면 긴장을 해 절대로 앉지 않는데.. 저 녀석 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모조리 마이 페이스이다. 처음 구입할 때는 안 그랬는데... 한 일주일 정도 끌고 다니다 보니 저런 황당한 노새로 변해버린 것 이다. 잠시 주정뱅이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경공을 써 이동했다. **** 36 - 방랑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평원이었다. 전황이 확실하게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나는 백색의 옷을 입은 문파와 적색의 옷을 입 은 문파간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대충 보아도 정파와 사파간의 문파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본래부터 이 곳 무량성 부근에는 정파와 사파가 비슷한 비율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파전이 많은 것이다. 나를 빼고도 몇몇 유저들이 근처에서 문파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역시 싸움구경 과 불 구경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숫자적으로는 정파로 보이는 백색 옷을 입은 문파가 1.5배정도 많아 보였지만 전체적인 레벨은 적색 옷을 입은 사파가 높은지 시종일관 사파가 유리한 상태 로 전투가 지속되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사파의 승리가 확실할 듯 보인다. 정파 측에서는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려 하고 있었지만 이러타할 진형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일류고수의 수도 부족한 터라 겨우 수세를 지키 고 있을 뿐이었다. 반대로 사파 측에서는 인원이 부족하지만 정파보다 일류고수의 수가 배는 많아 보였고, 상당한 전투를 경험해 보았을 듯 문주로 보이는 유저의 지휘아래 일사 불란하게 정파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마 남아있던 정파의 일류고수들이 몇 게임오버를 당하며 전세가 급격히 사파 쪽으로 기울어갔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사파의 문주로 보이는 유저였다. 적의에 거대한 적 색의 박도를 들고 흡사 전장의 사신처럼 미친 듯이 적들을 베어나갔다. 일류고 수라 하더라도 그의 도가 휘둘러지면 1합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거의 최절정고수에 근접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레벨로 보 면 190이상이려나? 그의 주위로 일류고수로 보이는 열 명 정도의 정파 유저들이 달려들었지만 그 가 펼쳐낸 무공에서 발생한 거대한 핏빛 도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터져 나가 며 일격에 2/3정도의 정파 일류고수가 몰살되어 버렸다. 나는 작게 탄성을 흘리며 그가 펼친 무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마혈도법(魔血 刀法)이었는데... 그런데 마혈도법은 혈도궁의 고수들이 익히는 무공이다. 설마 저 적의를 입은 문파들이 혈도궁인가? ......그건 아닐 것 같았다. 혈도궁처럼 거대문파가 이런 변방까지 와서 문파전이 나 하고 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혈도궁의 고수였던 문주가 혈도궁 을 나와 새로운 문파를 창설했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는 사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구경하고 있던 이들 중 사 파 유저들은 환호를 지르며 승리한 문파를 응원했고 정파로 보이는 유저들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몇몇 유저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볼 것은 다 봤기 때문에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어왔다. "네 녀석도 정파구나. 하하하. 허약해 빠진 정파 놈들보다 사파가 얼마나 위대 한지 충분히 느꼈겠지?" .....무시하자. 이런 얼간이를 상대해 보았자 내 시간만 아까울 뿐이다. 나는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얼간이가 막아서며 웃는다. "왜 겁나나?" 참으로 할 말 없다. 보아하니 일류고수처럼 보이는데.... 내가 그렇게 허접하게 보이나? 종종 이런 녀석이 있다.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유저에게 도발을 해서 달려들게 만들어 싸워 이긴 후 경험치를 얻고... 한편으로는 명성도 알리려는 이들이 말이 다. 정파와 사파가 나뉘는 법은 일차적으로 무공이 있고 이차적으로 문파에 있으며 삼차적으로 활동 지역에 있다. 처음 무공을 배울 때 사파의 무공을 배운다면 정파의 문파에는 들어갈 수가 없 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정파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상당시간 거주하며 여러 가지 퀘스트를 클리어 해야 하고, 그와 함께 사파유저들을 다수 죽이며 정파 쪽으로 명성을 쌓아야 하는 것 이다. 사파의 무공을 익히면서 정파의 구역에서 설치면 당장 사파로 낙인찍히며 추살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만약 뒤 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상당한 레벨과 무공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어쨌든 사파인으로서 정파인을 베는 것은 사파로서 명성을 날리는 일이 되고 그와 함께 높은 명성을 필요로 하는 대문파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건 정파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진희누나 같은 경우야 백으로 화산파에 들어갔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다면 자신 의 명성을 올리는 것으로 대문파의 가입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문파의 책임자가 우선 가입을 원하는 유저의 실력을 보고 뒤에 명성을 봄으로서 가입 을 받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렇게 사파인이 정파인을 보면 시비를 걸어 전투를 하는 일이 빈번하 게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정파인 역시도 사파인을 보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다 반사다. "난 낭인이야." "에?" 내 말에 그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제까지 나를 알짤 없이 정파로 믿었 던 모양이다. 멍청한 자식.. 눈은 뒀다가 뭐에 슬래? 국 끓여 먹을 거냐?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끼지 않고 중간에 위치한 유저들은 대부분 낭인이다. 어 디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홀로 독고다이를 즐긴다고 할까? 낭인계열 역시도 나름대로의 명성치가 존재한다. 낭인의 명성치를 올리는 법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오랫동안 문파에 가입하지 않고 정파건 사파건 간에 자신보다 실력이 비슷하거나 높은 유저와 대결을 벌여 승리하면 명성치가 쌓이는 것이다. 정파와 사파가 실력이 떨어지는 적을 베어도 명성치가 일정량 오르는 것에 반 해 낭인은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 이상의 적을 베어야만 명성치가 오른다. 그 때문에 낭인들 중에서는 함부로 다른 유저에게 시비를 걸어 전투를 벌이는 유저는 얼마 없다. 물론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하지 말아라! 겁나니까 빼는 것인 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그렇게 꼬우면 덤벼. 주둥이 놀리지 말고." 아~ 진짜 간만에 해 보는군. 꼬워면 덤벼! 진짜 이 말을 쓸 때마다 카타르시스 가 느껴진다. 나 변태기질이 조금 있나봐. 내 말에 이제까지 '꼬우면 덤벼'라는 말을 들었던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게 그 녀석도 얼굴을 울그락불그락 카멜레온처럼 변화시키고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등에 걸린 도를 꺼내며 나에게 태산압정을 펼치는 녀석에게 한걸음 다가간 나 는 팔꿈치로 상대의 복부를 시원하게 찔러 주었다. "크윽!!" 대번에 땅을 구르는 녀석에게 나는 혀를 삐죽 내밀고 말했다. "팔.극.권.이.다. 바보야." 팔극권은 권법계열의 이류무공으로 내공심법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서 그렇지 제대로 된 심법만 받쳐 준다면 일류무공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이었 다. 더구나 현재 나는 무극지체이기 때문에 팔극권의 위력도 엄청나게 상승해 잘만 하면 절정무공과도 대결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이류무공 몇 가지 익힌 일류고수급 유저 하나쯤이야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다는 말이지. 얼마 후 몸을 일으킨 녀석은 이를 갈며 재차 도를 휘둘러왔다. 쯧쯧...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고... 실력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덤비다니 바보 같다. 일부로 봐 준 건데.. 이렇게 되면 내가 봐준 이유가 물거품이 되잖아..... 몸을 꺾으며 녀석의 도를 피한 도가 회수되는 타이밍을 맞추어 몸을 일으키며 오른손 손등으로 그대로 녀석의 오른쪽 턱을 후려갈겼다. 조금 힘을 줬기 때문에 녀석은 대번에 눈이 풀려 날려갔다. 하지만 이왕에 한 것 확실한 결말을 보아 버리기로 한 나는 날려 가는 녀석을 따라가 왼손 주먹 으로 재차 얼굴을 가격했다. 쾅!! 땅에 한 번 충돌한 녀석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 올랐고 나는 마지막 일 격을 먹여주었다. 저 멀리 날아가며 회색 빛으로 물들어 가는 얼간이... 한마디로 게임오버. "굿 럭~!" 죽인 놈에게 행운은 무슨... 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한 말이다. 다음에는 제발 제대로 된 상대에게 싸움을 걸 수 있기를 기원 해준 것이라고 할까? 냐하하~!!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정뱅이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나는 문뜩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유저들을 보며 움찔했다. 뭐야... 동료가 있었던 거야? **** 37 - 재회와 진실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7 - 재회(再逢)와 진실(眞實) 무엇보다도 문제는 그들 사이에 조금 전 전투 중 눈에 띄었던 적의의 무사가 끼어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죽여버린 녀석도 적의를 입고 있었 는데... 어쩌면 그 문파의 문도 일지도 모른다. 피할까? 잘못하면 문파 전체와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 이길 확률도 적고 더구 나 내 실력을 상당량 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역시 피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대로 어기충소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를 포위하고 있던 유저들이나 구경하고 있던 유저들이나 하나 할 것 없이 '헉!'하며 탄성을 토해냈다. 허공답보를 펼쳐 허공을 박차며 재차 어기충소를 펼친 나는 즉시 소리쳤다. "암무!!!"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암무를 타고 멀리 도망을 가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무가 구름을 뚫고 내려와 나를 등에 태우고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희미하게 '사룡검신이다!'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거야? 지들이 날 잡을 거야? 구름위로 올라가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니 걱정이 없었다. 곧 암무는 구름을 뚫고 창공에 이르렀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로는 푸른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하얀 구름의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다. 나는 느긋하게 암무의 등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잘 지냈냐?" [조금 전까지는.] 그러니까 내가 불러서 조금 전부터는 잘 못 지냈다는 말이다. 나는 눈가를 약하 게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욕을 참아냈다. 그보다 암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됐어?" [뭐가 말인가?] "날 찾아서 치우랑 천희형, 유키코 누나가 왔잖아. 그 후에 어떻게 됐냐고?" [별 것 없었다. 잠시 내 몸을 조사하더니 굳은 얼굴로 돌아갔다.] 에? 암무의 몸을 조사했다고? 흠.... 암무의 데이터를 읽은 것인가? 그렇다면 내 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았을 것인데.... 굳은 얼굴로 돌아갔다는 것은 읽어 내지 못했다? 운영자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나는 웃으며 그 일을 잊어버렸다. [어디로 가기를 원하나?] 암무가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잠시 머리를 누르며 고심했다. 이대로 인적이 없 는 곳으로 내려가 다시 여행을 할까? 하지만... 그렇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너 무 심심했던 것이다. 그러면 암무의 동굴로 가서 다시 잠을 자? 그것도 좀 그렇다. 언제 다시 형과 치우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느긋하게 거기서 어떻게 잠을 자겠나. 하아... 도망자의 신분이 이렇게 고달플 줄이야... 그냥 어디 산 속에서 은거를 해 버릴까? 그런데 어디서 은거를 한단 말인가..? 은거를 하더라도 좀 재미있는 곳으로 해야 하는데...... ".....은자림?" 그나마 그 곳이 가장 나을 것 같다. 넓기도 하니 천희형에게 발각 될 위험도 적 을 것이고... 더구나 강력한 신수들도 많아서 심심지 않게 지낼 수도 있을 것 같 다. 무엇보다도 그 곳에는 누나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가 있다. [은자림이면 되는가?] "아아. 거기로 좀 가 줘. 이왕이면 은자림 북부의 복호석이 있는 곳으로."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암무는 창공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즉시 북쪽으로 바람을 가르 며 날아갔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며칠이 걸리는 거리이지만 암무라면 몇 시간 이면 도착할 수 있다. 잠깐 눈을 붙이자 어느새 은자림이 내려다보이는 하늘에 도착해 있었다. 그다지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암무에게 모습을 감추기를 권했다. 암무는 내 말대로 자신과 내 몸에 일시적인 투명화 마법을 걸고는 지상 에 가까이 다가갔고 나는 즉시 암무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암무는 다시 허공으로 비상해 구름위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무 가 걸어두었던 투명화 마법이 사라짐을 느낀 나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마침 암무가 내려 준 곳이 복호석 위였던지라 복호석을 찾아 헤매는 수고는 하 지 않아도 되었다. 암무 녀석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종종 감동하게 만든단 말야. 복호석 아래로 내려온 나는 만상풍운조화서를 찾았던 동굴 입구를 찾아 걸었다. 아직 동굴은 그대로 존재했기 때문에 찾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동굴 입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무무와 거래를 했었지. 망할 무무 늙은이.. 내가 무상검록을 던지자마자 그 인간은 누나에게 화살을 날려버렸었다. 아마 내가 누나를 구하고 다시 무상검록을 갈취할 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어쨌든 그 때 까딱했으면 누나는 고슴도치가 될 뻔했었다. 내가 대비를 하고 바 로 누나에게 달려들어 호신강기를 쓰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자 다시금 무무에게 이가 갈린다. 물론 무무를 한 번 죽이기는 했지만...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그 후로는 무무 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게임을 접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디에 숨어서 레벨 업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언젠가 다시 그 인간이 나오면... 진짜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금새 만상풍운조화서를 얻었던 동굴의 안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이벤트 지역 이기 때문에 출몰하는 몹도 없었고 동굴의 길이도 짧은 곳이다. 천장에 쓰여있는 '만상풍운조화서'라는 글귀를 보자 만감이 교차한다. 이 곳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누나와 나의 노력으로 찾아낸 곳... 이 곳은 누나와 함께 한 장소 중에 최고의 추억이 긷든 장소라고 해도 무방할 것 이다. 걸음을 옮겨 가장 안쪽에 솟아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과거 만상풍운조화서와 만 상운자의 시체가 놓여있던 장소이다. 물론 지금은 수북히 쌓인 먼지만이 자리해 있지만...... 환상처럼 나와 누나가 만상풍운조화서와 108금침, 청류옥소를 구하던 모습이 그 려진다. 너무도 행복했던 시간... 그러나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일순 눈시 울이 뜨거워짐을 참을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추억의 장소에 한시라도 빨리 오고 싶었지만... 막상 도착하 자 누나생각에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누나를 보고 싶다. 다시 한 번 누나를 안고 싶다. 다시 한 번 누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모두 내 허황한 꿈일 뿐이다. 진희누나는 나와 피를 나는 형제... 누 나를 만나더라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아니... 이제 나에게는 누나를 만날 자 격조차 없을 것이다. 한때 만상운자가 앉아있었던 단상에 올라가 주저앉아 보았다. 차가운 한기가 느 껴진다. 나의 마음까지 얼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였다. 그러나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런 한기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나마 머리의 열기를 식힐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온 몸에 한기가 엄습해 왔다. 눈을 감았다. 잠을 자며 꿈을 꾸고 싶다... 현실에서는 불가능 하지만... 꿈속에서 라도 누나를 만나고 누나를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꿈에서라면 죄가 되지 않을 터이니까..... **** 37 - 재회와 진실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유빈아...." 누나의 목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내 앞에 누나가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하며 눈 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댔다. 하지만...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하기야... 더 월드에서 잠을 잔다고 꿈 따위는 꾸지 않지만 말이다. "진희 누나....?" 누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누나를 보았다. 그런 나에게 누나가 안겨들었다. "바보야... 바보......" 누나가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나를 보다 가 결국 천천히 손을 뻗어 누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게임 속이지만 완전하게 개방되어 버린 나의 감각.... 나의 팔을 통해 누나의 감 촉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진희누나다... 누나가 내 품에 안겨있는 것이다. 누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향기가 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누나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내 의식의 일부가 외친다. 이 이상 나갔다가는 더욱더 누나를 슬프게 만들 것이 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무시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이 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켰다. 여기에서라면 누나를 사랑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미안해 유빈아....." 누나가 미안해 할 것이 뭐가 있을까...? 누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나는 고개 를 흔들며 더욱더 누나를 힘주어 안았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 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다시 누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흠흠..... 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냐?" 문뜩 한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내 주위에 누나뿐만 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희형." "이제 보이냐?" 제길... 왜 형까지 온 거야? 더구나 민우형에 아진누나.. 유키코누나까지... 주린 이 누나는 물론이고 민호까지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 운영자 치우가 존재했다. 현재 나는 어떤 면에서 보면 버그유저다. 운영자와 마주쳐서 좋을 것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사방이 포위 당해 버린 상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천희형을 포 함한 형과 누나들을 어찌할 수는 없다. 거기에 치우까지 합세해 있다면 도망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다. 결국 나는 전의를 버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길.... 마음대로 해! 하지만 잘 들어!! 이 곳을 나가면 난 그대로 손목을 칼로 그어버릴 거니까!" 나의 외침에 천희형이 그대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즉시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지만 나는 승복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천희형을 노려보았다. "절대로 안 나가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희형이 주먹이 나의 얼굴을 강타했다. 아찔한 고통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대로 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재차 천희형을 노려보았다. 진희누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천희형은 진희누나를 밀어내며 다 시금 나의 빰을 때리며 소리쳤다. "이 자식아!!! 죽는다는 소리가 그렇게 쉽게 나오냐?!!!" "적어도 사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 같으니까요!" "그럼 남겨진 사람은 어쩌라는 것이냐? 진희는?!! 그리고 네 아이는?!!" 순간 내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내가 잘못 들었을 것이다. "......아이라고요?" "그래 임마!!" 서.. 설마...... 나는 멍한 얼굴로 진희누나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희미하게 긍정을 표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는 않았다. 지.. 진짜였어? 누나가... 누나가 내 아이를 가진 거야? 기쁘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혼란스러웠다. 누나와 난 비록 어머니가 다르지 만.. 피를 통한 형제다. 절대로 맺어 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나와 누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니....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소문은 퍼져나갈 것 이고... 그 아이는..... 내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천희형은 손을 풀었고 나는 그 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가슴이 아프다... 나.. 나 또 누나에게 죄를 지어버렸다. 누나의 어머님에게 죄를 지어 버렸다. 이제는... 이제는 진짜 용서받지 못한다. "제길.... 제기랄......" 얼굴을 누르며 눈물을 삼켰다. 그런 나를 누나가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우리 남매 아냐." .....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웃으며 내 얼굴을 쓸어주었다. 동시에 천희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네 녀석이 오해한 거다. 진희와 너 남매 아냐 임마." 믿어야 하는 거야?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형에게 말했다. "장난하지마!" "장난 아냐. 이미 모두 확인했다. 네 아버지와 진희가 DNA검사까지 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라고 확인됐어. 내가 설마 여기서 거짓말 할 군번이 냐?" 정말이야? 거짓말 아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천희형을 보다가 진희누나를 돌 아보았다. 누나도 웃으며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어떻게...?" "네 어머니가 착각한 거다. 더 자세한 내용은 네 아버지에게 들어라. 곧 있으면 들어오실 거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온 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리는 것이리라... 누나가 나의 머리를 보듬어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내가 믿지 않 아서 유빈이 너한테 너무 큰 잘못을 했어.... 미안해 유빈아...."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나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누나에게 잘못 이 있다면 나는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누 나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그 때문에 누나는 나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찾으며 고생했을 누나를 생각하자 너무나 미안했다. 나는 누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지었다. 편안했다. 너무도 편했다. 이제 까지의 아픔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녹아 내림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아버지를 데리고 온다며 치우가 사라졌고 잠시 시간이 흘러 돌아왔다. 치우와 함께 온 유저는 아버지였다. 아마 방금 캐릭터를 만들어 들어오셨을 것 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막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려할 때 아 버지의 손이 날아왔다. 화끈한 충격이 뺨에 전해져왔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 다. 오히려 아버지의 손이 너무도 따뜻하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에게 사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안아주셨다. 생 전 처음으로 안겨 본 아버지의 품은 너무도 넓은 것 같았다. **** 해피? 과연......-_- 邪惡玄烏 37 - 재회와 진실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그럼......" "그래.. 다 네 외가에서 꾸민 일이다." 뿌드득... 나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외가에서 꾸민 일이었다니... 아버지의 말씀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어머니가 오해를 하 게 되었는지도 이해가 갔고.... 진희누나의 어머님이 나를 기피한 이유도 알 수 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오해를 풀 수 없었던 이유도 역시...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진희누나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의 대학 후배라고 한다. 그 분의 성함은 김한성... 순간 나는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만 났던 여자아이가 바로 진희누나였음을... 누나와 나는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한성씨는 아버지가 대학에 다닐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후배였고 당연히 후 배의 여자친구였던 진희누나의 어머님과도 많은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귀고 있었고 어머니가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 만 되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집안.. 그러니까 내 외가 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했다. 고아에다가 이러타할 수입도 없는 그저 대학생인 아버지를 명문가라 고 지껄이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진희누나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사건이 그 때 일어났다. 진희 누나의 어머님과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날에서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고... 평소 아끼던 후배였기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슬퍼하셨고, 당연히 홀로 남아버린 진희누나의 어머니를 돕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 오해가 생겨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믿었던 어머니이지만 당신보다 진희누나의 어머님을 위해 바삐 돌아다니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점차 불만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그 불만 은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이라는 의심으로 번져갔고 그 사이에 외가 쪽에서 음 모를 끼워 넣어 버린 것이다. 외가에서 이용한 것은 진희누나와 진희누나의 어머님이었다. 진희누나의 어머님 은 진희누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에야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주위의 많은 충고를 들어야 하셨단다. 미혼모가 되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너무도 힘든 일이다. 당연히 많은 친인들 은 진희누나의 어머니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진희누나의 어머 님은 끝까지 아이를 낳기를 고집했고 그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이 바로 우 리 아버지였다고....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내 외가에서 나중에 사건을 조작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 버린 것이다. 돈이라면 모든지 되는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거짓이라 도 진실로 둔갑시켜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인 것이다. 어쨌든 얼마 후 어머니의 뱃속에는 내가 자리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가 측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내가 태어났고 우리 세 가족은 한 동안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 때 사건이 터진 것이다. 외가 측에서는 조작한 거짓으로 진희누나가 아버지 의 아이라고 어머니에게 고했고 일전부터 약간씩 의심을 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결국 만들어진 DNA검사 결과를 보곤 외가의 말을 믿어버리셨단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외가 측은 집요했다.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만들어 두지도 않았고.. 단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진희누나와 진 희누나의 어머니까지도 어디론가 빼돌려 버렸단다. 진희누나의 어머니가 일전에 나에게 했던 이야기.... 그건 우리 아버지를 증오하 는 것이 아닌 나의 외가 쪽 사람들을 증오하여 한 말이었던 것이다. 종래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십여 년 동안 진희누나와 진희누나의 어머니를 찾아다니 셨단다. 동시에 외가 측의 비리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고... 하지만 외가 측의 힘이 너무 강해 이제까지 별다른 증거를 잡지 못했고... 진희 누나와 진희누나의 행방도 찾지 못하셨단다. 더구나 진희누나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진희가 아닌 승희였기 때문에 설마 내 여자친구가 당신이 찾던 그 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하셨다. 누나의 이름이 진희로 바뀐 것은 외가 측에서 누나와 누나의 어머님을 빼돌릴 때 아버지가 찾지 못하게 하도록 서류조작을 해서 이름을 바꾸어 버린 것이란 다. 망할.... 정말 이날 이때까지 이토록 외가가 저주스러울 때는 없었다. 돈이라면 모든지 된다는 그들의 심리.... 자신들이 최고라는 우월주의.... 빌어먹을 그들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우리가족 뿐만이 아니라 진희누나의 가족까지도 상처 입혔 다. 그런 그들이... 과연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말인가? 모든 이야기를 들은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제까지 아버지가 야간근무를 하신 것은... 회사의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다 시 찾기 위해서.... 다시 한번 과거의 행복했던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버 지는 노력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일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펌하며 마음 속으로 미음을 키워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어머니를 위해서 노력하고 계 셨는데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드리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됐다 이 녀석아. 그럴 말 할 시간 있으면 빨리 이 곳에서 나가 거하게 아침이 나 차려 줘." 아버지는 웃으시며 내 머리를 치셨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것이 다. 그러나 걱정은 없었다. 운영자 치우가 어떻게든 해결책을 만들어 주리라 믿 기 때문이다. 나는 치우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치우가 나의 시선을 받 고 앞으로 나섰다. "흠..... 이런 말씀을 드리기 힘들지만.... 유빈군. 당신의 현 상황은 무척이나 좋 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진희누나를 포함한 형, 누나들.. 그 리고 민호와 진호...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간 나는 불안을 느끼며 치 우에게 물었다. "설마...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는....?" ".......현재까지는 방법이 없습니다." 망할!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유빈아..." 누나가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하며 다시금 치우에 게 물었다. "그럼 언제나 나갈 수 있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이미 누나를 사랑할 자격이 있었기에... 더 이상 이런 가상세계에서 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현실로 달려가 실재하는 진희누나를 안고 싶다. 그러나 치우는 그런 내 기대를 무너트리며 한숨과 함께 말했다. "현재로서는 뭐라 확신할 수 없군요...." ".......그럼 제 몸은...?" 불안했다. 혹시라도 내 몸이 죽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만약 내 몸이 죽는다면... 나는 두 번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이 곳에서마 저 사라질 수 있다. "네 몸은 지금 병원에 있어. 비록 가사상태이기는 하지만.... 한동안은 괜찮을 거 야." 누나가 내 머리를 쓸어주며 답했다. 그나마 안심되었다. 치우가 말을 이었다. "병원이라 하지만 이미 모든 가상기기를 완비해 두었기 때문에 링크가 끊길 위 험은 없습니다. 지금 회사측에서도 최대한 빨리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라는 말이 평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급하게 나서 지 않았다. 여기서 혼자 날뛰어 보았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 문이다. "......왜 제가 로그아웃을 못하는 것이죠?" 38 - 기다림의 시간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38 - 기다림의 시간 "이 녀석아. 좀 조용히 좀 있어라. 시끄러 죽겠다." 나는 시끄럽게 짖어대는 백호의 머리에 주먹을 갈기며 명했다. 하지만 백호 이 녀석은 여전히 '컹컹'거릴 뿐이다. 지가 개인 줄 아는 어처구니없는 백호다. "개도 아닌 녀석이 개처럼 짖는 것은 대체 뭐냐?" [한 번 심심해서 그렇게 울어 봤다.] 망할.... 내가 왜 이런 녀석을 거두어 들여서... 암무는 너무 덩치가 커서 함께 지 내기 힘들어 백호를 잡았는데... 갈수록 엉뚱해 진다. 역시 이것도 나 때문인가? 하지만 치우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은 모두 차단시켰다고 했는데.... 결론은 이 녀석 성격이 원래 이렇다는 것이다. 나는 백호의 등에 걸터앉으며 혀를 찼다. 진짜 대 실수다. 주제에 입은 고급이라고 고급 고기 아니면 먹지도 않고, 심심 할 때마다 별 미친 짓을 벌이는가 하면 잠도 폭신한 이불이 없으면 자지도 않 는다. 만약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미친 듯이 날뛰며 집을 박살내지를 않나... 혼자 있기 적적해 거두어들인 백호가 이런 황당한 녀석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 는가...? [그보다 주인... 곧 있으면 신년인데 잔치 안 하냐?] ......꼴에 또 그런 것은 죽어라 챙겨요. 안 해 준다고 하면 또 겨우 세워 놓은 집 을 박살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국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히죽 웃는 백호를 보며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눌렀다. 문뜩 하늘에서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내 손등에 머물렀다가 물로 화하였다. 나 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는군...." [내일이면 새해인데.. 잘 됐어.] 그래... 새해.... 내가 이 게임에 머무른 지도 벌써 20년째이다. 현실로는 2년.. 그 동안 나는 여전히 게임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현실상의 내 몸도 여전 히 가사상태이다. 망할 놈의 블랙피스... 내가 다 이 꼴이 된 것은 바로 그 블랙피스라는 컴퓨터의 발광 때문이었다. 치우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인데... 이 더 월드를 만든 개발진 중에 한 녀석이 중추 시스템에 패턴을 벗어난 사고논리와 그 논리의 성장을 부여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몹들이 정해진 패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천마강시가 있다고 치자. 그 천마강시는 설정부터 발은 쓰지 못하고 오로 지 손만을 사용할 수 있다고 설정을 해 두면서 간혹 가다 엉뚱한 방식의 공격 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패턴대로라면 손만을 써야 하는데 어쩌다가 패턴을 거부하고 박치기를 하거나 발길질을 가하는 둥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패턴을 점차 성장시켜 연 속적인 기술구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프로그래밍 쪽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치우의 말로는 그랬다. 어쨌든 그런 시스템을 부여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이제까지 몰랐다고 한다. 처음 그런 시스템을 구축한 이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실패로 보고 무시를 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것이 느닷없이 발동되어 버린 것이다. 블랙피스.... 말 그대로 어두운 조각.... 중추 시스템은 자기 스스로 블랙피스라는 알 수 없는 기능을 만들어 내는 엉뚱한 짓을 벌여버렸고 마침 내가 그 사이로 빠져들어 버린 것이다. 나를 게임 속에 잡아 둔 블랙피스는 그대로 나의 정보를 블랙박스에 저장시키 고 수만 겹의 방호벽을 걸어 버렸고 나는 그대로 더 월드의 세계에 있지만 그 와는 별개의... 독립된 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중에 회사측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처에 나섰다고 한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블랙피스를 완전히 제거해 냈지만 이미 블랙피스에 당 해버린 나는 그들의 능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었다. 우선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블랙피스가 만들어 놓은 수만 겹의 방호벽을 뚫 고 블랙박스를 해독해 내야 하는데 그것이 장난이 아니란다. 이제까지 방호벽은 모조리 부수었지만 마지막 남은 블랙박스가 문제라고 했다. 함부로 해독을 하려 하면 나의 정보까지도 날아가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2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방법은 오로지 블랙피스가 만들어 놓은 암호를 찾아내는 것인데 그 암호가 무 식하게 길고... 더구나 한 번 암호를 틀릴 때마다 컴퓨터를 자동적으로 포맷시켜 버리기 때문에 풀어내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란다. 물론 블랙박스의 자료를 복사해서 다른 컴퓨터에서 암호를 찾고 있으니 컴퓨터 가 모조리 포맷이 되더라도 나에게는 무리가 없다... 그것보다 이러다가 나 평생동안 여기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하루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 현실의 누나를 만나고 싶고, 내 아이도 안아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 누나는 작년에 딸을 낳았다. 무하하! 당연히 아빠는 나다. 하지만 아빠가 되 어서 이제까지 딸을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다. 그것이 무척이나 나를 슬프게 한 다. "휴우....." [웬 한숨이냐?] "남이야 한숨을 쉬건 재채기를 하건 무슨 상관이야?" [듣고 있는 내가 힘 빠져서 그랴.] 잘났어.. 한 마디도 안 지고 대든다. 감히 집 지키는 똥개 주제에 말이다. 아.. 백호니까 고양이인가...? 나는 몸을 일으키며 힐끔 백호를 보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백호가 그 렇게 아니꼽게 보일 수가 없다. 나는 그대로 뒷발차기를 날려 백호의 옆구리를 차 주었다. [꾸엑!!!] 올~! 제대로 박혔군. [크악!!! 이 자식!! 오늘 사생결단을 내자!!] 미친 듯이 달려오는 백호를 피해 나는 총총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러면서도 경공을 써 백호와의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다. "자자~! 내일은 새해니까 도시에 가서 여러 가지 준비해 와야 겠지? 백호야! 너 는 집이나 지키고 있어라~!" [제길! 최고급 사슴고기를 사오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라!] 돼지 비계만 잔뜩 사다줄라. 나는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세워주곤 경공 을 써서 숲을 내달렸다. 과거라면 벗어나는데 하루 정도는 걸릴 정도로 넓은 은자림이지만 지금의 나에 게 있어서는 한시간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에 은자림에 거주하며 할 일없이 빈둥거리면서도 레벨을 올려왔다. 물론 내 상태 창을 열어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많은 레벨 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450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500이 넘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는 암무마저도 1:1 대결로 가뿐하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니... 완 전 괴물 다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레벨 업을 한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현재 나는 게임오버를 한 번만 당하면 그대로 죽어버릴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서라도 게임 상에서 죽음의 고통을 느낀다면 현실로서도 쇼크사를 해 버릴 것 이다. 그 때문에 회사측에서 내가 거주하는 은자림 최북단을 나와 나를 아는 친구들, 그리고 형 누나들을 제외한 모든 유저들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해 두었지만 솔직히 언제까지 내가 그 곳에서만 살수는 없었다. 나는 인간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인간인 것이다. 비록 과거에 마 음을 닫고 살아갔지만 그래도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과 알지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아무리 진희누나나 천희형, 유키코누나, 민우형, 아진누나, 민호, 진호가 시간이 날 때마다 놀러 와 주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내 거처를 벗어나 많은 사람들을 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만약 잘못했 다가 유저들과 시비가 붙어 내가 게임오버를 당하는 일이 생겨버린다면 그 날 로 내 생명은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에 대한 일은 현재 완전히 비밀로 붙여져 있는 상태다. 이유는 뻔하다. 바로 회사사정....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도 만약 내 소 문이 퍼져 버리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회사로서는 큰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뭐.. 기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뭐라 할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종종 사람들은 엉뚱한 짓을 벌이기 마 련이다. 게임 속의 나를 죽임으로서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에 나에게 칼을 들이미는 자들도 분명 존재할 것 이다. 거기다 소문이 와전되어 엉뚱하게 내가 최고의 유니크 몹으로 둔갑해 버릴 위 험성도 있었다. 한편으로 과거 나에게 원수를 졌던 유저들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나의 존재는 현재 은폐된 채였다. 뭐 덕분에 운 영자들의 도움으로 이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혼자서 몇 십 년 동안 살아가는 것은 인간을 미치게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나의 상황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지치게 할 수 있다는 의견아래 나의 자유외출 은 허용되었고, 혹 나가서 죽지 않기 위해 엄청난 레벨 업을 하도록 그들이 손 을 써 준 것이다. 내 모든 정보는 아직 해독이 되지 않은 블랙박스 안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직접적인 사냥을 통한 레벨 업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운영자들 은 이 중앙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모든 몹들을 모조리 불러내 움직임을 묶어두 고 내가 죽이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엄청난 녀석들을 잡아 보았다. 그 중에는 과거 내 속을 뒤집어 놓 은 해룡도 끼어 있었다는 사실.. 비록 내 힘으로 잡은 것은 아니지만 해룡을 난 도질 한 기분은 진짜 환상이었다. 무하핫~!! **** 유빈이.. 2년 동안... 게임시간으로는 20년 동안 갇혀 있습니다. 무흐흐.... 38 - 기다림의 시간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얼마 후 은자림을 거의 벗어났을 무렵 나는 저 멀리에서 숲을 가로지르고 있는 유저를 발견했다. 은자림이 한제국에서는 최고의 사냥터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유저가 들어온 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유저가 진희누나라는 사실을 금새 파악한 나는 즉시 몸을 돌려 진희누나에 게로 다가갔다. 누나도 2년 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더 예뻐졌다고 할까? 하하하. 이렇게 말하 면 천희형이나 민우형은 내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고 소리치지만 그래도 나는 누나가 더 예뻐졌고 계속 예뻐진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성숙한 멋에... 섹시함까지도 엿보이니... 역시 내가 마누라 하나는 잘 얻었다니까. 내가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아직 누나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왁!"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누나의 뒤쪽으로 몰래 이동해 소리를 지르며 누나를 껴 안았다. 누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잖아." "하하... 미안해요." 내 사과에 누나는 빙그레 웃은 후 주위를 둘러보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재빨리 나에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이런 가상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그나마 내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누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나가 매일같이 나를 만나러 들어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오 래 전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누나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하현이는요?" 하현이는 내 딸이다. 얼마 전에 사진을 찍어 그것을 치우가 게임상의 아이템으로 바꾸어 나에게 주 어서 볼 수 있었는데... 누나를 닮아서 너무도 예뻤다. 내 피의 영향인지 눈초리 가 조금 날카롭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님이 봐 주고 계셔." 어머니도 오해를 풀고 다시 아버지와 결합하셨다. 종종 게임에 접속해 나를 찾 아오시는데 그 때마다 나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신다. 정말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어머니에게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것인데.... "장모님은 어떠셔요?" "많이 좋아지셨어." 누나의 어머님.... 그러니까 내 장모님은 작년부터 병이 나셨다. 그 동안 너무 큰 심적 고통을 겪으셨고... 거기에 더해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일을 해 오셨기 때 문이라 한다. 그 분에게도 이러타할 효도를 하지 못했는데... 정말 이 곳을 나가 면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어디 가는 중이었어?" "아아. 백호가 내일이 설이라고 잔치하자고 졸라서요. 이 기회에 잠시 성에 좀 다녀오려고요." "후훗.. 다행이 엇갈리지는 않았네." 누나의 말 대로다. 나는 현재 메시지 수신조차도 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엇갈렸 다면 한참 후에야 누나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 만났잖아요." "그래.. 다행이야." 고개를 끄덕인 누나는 다시금 나에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누나의 숨결이 느껴 진다. 그럴 때마다 나의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된 것 함께 가요. 오랜만에 데이트도 좀 하고."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즉시 누나의 손을 잡고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은자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 빨라...." 누나가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키운 것도 아니잖아요. 거기다 어차피 제가 로그아웃이 되는 순간 이 캐 릭터는 삭제가 될 건데요." 내 캐릭터는 버그 캐릭터에다가 운영자까지 개입해 키워준 비리 캐릭터이기도 하다. 당연히 언젠가 내가 더 월드를 나갈 수 있게 되면 이 캐릭터는 지워질 수 밖에 없다. 삭제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계정이 압류는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가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어차피 로그아웃만 되면 더 이상 더 월드를 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삭제가 되건 말건 나에게는 별 상관은 없다. 현실로 2년... 게임 시 간으로는 20년 동안 여기서 살다보니 완전히 질려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나중에 하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뭐... 제 본래 캐릭터를 백업시켜둔 자료가 남아 있겠죠. 아마 그 것으로 새로 만들어 줄 것 같아요." "으응...."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은림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누나는 천천 히 경공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은림성에 도착하자 경공을 거두고 걸어서 성에 들어섰다. "흐음... 4달 만인가...?" 한 때는 부단히도 돌아다녔었지만.. 지금은 워낙에 처소에서 백호와만 놀던 터 라 가장 가까운 은림성에 오는 것도 근 4달 만이다. "그런데 요즘에 무슨 일 없어요?" 이거 완전히 은거하여 세상물정 모르는 기인이 되어 버렸군. 다른 사람들이라면 BBS에서 정보를 얻겠지만.. 나는 그것도 불가능하니 방법은 근래에 소식들을 아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묻는 방법뿐이었다. "사신이 소란을 피우는 것 외에는 없어." 사신이라... 그 녀석 아직도 PK를 하고 돌아다니나? 사신은 현실시간으로 1년쯤 전부터 날뛰기 시작한 PK유저다. 소문으로는 마지 막 초절정무공인 살인비급을 가지고 있다 하는데 은잠술이 어찌나 뛰어난지 그 정체를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역시 초절정무공을 익힌 녀석이니 만큼 암살술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는 녀석이다. 오죽하면 유키코누나가 암살을 당해 버렸겠어. 덕분에 한동안 천희형이 그 녀석을 잡겠다고 날뛴 적이 있었다. 물론 결론은 말짱 꽝~! 한 때 내가 여행을 다닐 때 혹 마주쳤다면 박살을 내 주었을 터이지만... 불행히 도 그 녀석과는 자꾸만 엇갈리기만 해서 손을 봐 주지 못했다. 녀석이 운이 좋 은 것이었지.... 뭐.. 녀석이 어떻게 날뛰건 말건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지. 누나만 당하지 않는다 면 평생 무시해 줄 수도 있다. 나는 사신에 대한 생각을 접으며 우선 지금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했다. 늦게 돌아가면 백호 그 녀석이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 댈 것인데.... 그래도 이왕 에 나온 것 한 며칠 누나와 놀다가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우선 객잔으로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한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객잔으로 향했다. 혹시 재미있는 소문을 듣게 될 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간만에 나온 김 에 우선 비싼 음식으로 입에 기름칠 좀 해야하지 않겠어? 이제는 혼자 요리해 먹는 것도 지겹다고.... 물론.. 거의 대부분은 누나가 와서 해 주지만...... **** Last - 게임오버(Game Over) 유빈이 가사상태에 빠진 시간 2년을 1년으로 수정했습니다. 2년이면 정신을 차려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군요.. 1년 정도가 적당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루라님 감사...-0-;;; 그런 쪽 지식은 짧아서...-_-;; ================================================================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Last - 게임오버(Game Over) "아 글쎄 은 100냥 이하로는 절대로 안 돼!"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에~! 이게 어떻게 은 100냥이나 해요? 아무리 봐도 특등급이 아니라 일등급 사 슴고기 같은데. 이건 알짤 없이 은 50냥이라니까요." "크어억!!! 이 날강도 같은 녀석아!! 그 가격에는 절대로 못 판다! 안 사라면 그 만 꺼져!!" 피를 토하시는군.... 하지만 여기서 물러 설 수는 없지.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들 으라는 듯이 목청껏 소리쳤다. "우우~! 손님은 왕이다~! 그런데 손님을 내쫓다니~!! 그따위로 장사했다가 가게 말아먹기 십상이에요~!" 이렇게 하면 진짜 내쫓을 수도 없다. 정육점 할아버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는 여유 있게 받아 넘겨주었다. 얼마 후 주인 할아버지가 입가를 실룩거리며 새로운 가격을 제시했다. "95냥." "55냥." 나는 즉시 대꾸했다. 재차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90냥!!" "흠.. 인심 썼다! 60냥에 5냥 더 보태 65냥~!" "85냥!!" 쫀쫀하게 자꾸 5씩 줄이네... 좋다. 그럼 나도 따라 줘야지. "70냥." "80냥!" "75냥!" "79냥!" 헐... 1냥 줄였어? 좋다! 그럼 나는...... "75냥 1문!" 내 말에 주인 할아버지가 비틀거렸다. 무하핫! 동전 1문 더 보탠다! "이... 치사한 자식아!! 78냥!! 이 이상은 더 이상 안 돼!!!" "뭐 그렇게 하죠." 어차피 78냥만 해도 자그마치 22냥이나 깎은 것이다. 충분히 즐기기도 했으니 이 정도로 만족키로 했다. "내 살다살다 이 정도로 깎여 보기는 또 처음 보는군... 거 아가씨 남자친구 같 은데 결혼해도 굶어죽지는 않아서 좋겠어." 주인 할아버지가 한 쪽에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진희누나에게 소리쳤다. 분 명 '이 같은 노랭이 남자친구 가져서 어따 쓰냐? 차 버리고 제대로 된 인간 찾 아라'라는 말뜻이 담겼을 것이다. 누나도 그 말의 속뜻을 알아들은 것일까? 내게로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희 부부인데요." "...........흥.. 진짜 굶어죽지 않을 것이니 좋겠군."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며 사슴고기를 종이에 싸더니 나에게 휙 던졌다. 가볍게 포 장된 고깃덩어리를 받은 나는 요금을 지불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흠.. 맞군... 그보다 요즘은 사냥을 하지 않나? 전처럼 양혈각사를 잡아 와주면 내 후하게 쳐 줄 것인데 말야." 양혈각사는 일종의 정력제이다. 게임인데 무슨 정력제?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에도 말했다 시피 더 월드에서는 성인이라면 여성유저나 기루 의 NPC기녀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스테이터스 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남성 유저들에게는 각각 정력수치라 는 것이 있어서 그 수치가 낮으면 제대로 된 거사(?)를 치를 수가 없다고 한다. 평균 적으로 하루에 한 번 할 수 있지만.... 너무 자주 힘을 써 주다 보면 불능 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대체 이 시스템을 만든 인간의 대가리를 해부 해 보고 싶을 따름이다. 어쨌든 그렇게 정력이 딸릴 때 양혈각사 같은 정력제(?)를 먹으면 정력이 회복 되고 종종 전보다 더 힘을 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가령 하루에 한 번 할 것을 두 번 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이다. 특히 양혈각사는 정력제 중에서도 최고의 정력 제이기 때문에 아마 다섯 번까지도 가능하게 될걸... 하하하... "할아버지가 드실 건가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팔 거다 임마! 내가 이 나이에 정력제 먹어서 뭐에 쓰라고?!!" "에이~ 그러면서 날마다 홍매루에 가서 명월이를 찾는다고 하던데요?" "컥!! 어.. 어떤 자식이 그래?!!! 누구야?!!" 농담인데.... 생각보다 더 심하게 발광하네... 나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할아버지 를 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 할아버지는 헛기 침을 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래봐야 버스 떠난 후이지만...... "뭐.. 안 팔리면 내가 먹을 수도 있지만......" "큭... 아.. 알았어요.. 나중에 중앙산맥 쪽에 가서 한 마리 잡아올게요." 은자림은 성지와 같은 곳이라 그런 몹보다는 신수에 가까운 몹들이 주로 서식 한다. 양혈각사 같은 경우는 최고의 정력제이기 때문에 쉽게 찾아보기도 힘들 다. 중앙산맥이나 마곡 같은 곳에서만 소수가 등장할 뿐이다. 가격 역시도 부르는 것이 값이다. 고래로부터 남자는 정력제 하면 사족을 못 쓰 지 않았던가? 호랑이 고환까지도 삶아먹을 정도인데... 아무리 게임이라고 하지 만 폭주하는 남성들은 한둘이 아니다. "정말인가?" 내 말에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반색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뭐 중앙산맥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경공을 써서 가도 되고 암 무를 타고 가면 하루에 왕복도 가능하다. "흠흠.. 고맙네... 잡아만 온다면 내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주지." "네네. 알겠습니다. 영감님이나 명월이를 위해서 꼭 잡아다 드리죠." "팔거라니까!!" 다시금 발끈한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누나와 함께 정육점을 나섰다. 뒤에서 할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못들은 척 했다. "장난이 너무 심했어." "재미있었잖아요." "그래도 어른인데......" "그렇게 말하면서 자꾸만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요?" 나는 히죽 웃으며 누나를 보았고 누나는 얼굴을 붉혔다. "웃긴 것을 어떻게 해?" "하하하..."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대꾸하는 누나가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애 엄마가 돼서도 이렇게 귀여움을 느끼게 해 주다니... 역시 누나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연인이다. "웃지 마..." "미안해요. 누나가 너무 귀여워서... 그보다 이제 또 뭘 사야하죠?" "으음.... 고기는 됐고... 떡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아.. 맞다. 설날에는 떡국을 먹어야 하지. 어디 보자... 방앗간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방앗간을 찾았다. 그러다 문뜩 지나는 유저들 중에 한 사 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 잠깐만요... 객잔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래요?" "응? 왜?" 누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누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누구 만나볼 사람이 있거든요." "같이 가면 안 돼?" "아뇨. 저 혼자 금방 갔다 올게요.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으응....." 누나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 추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사람들을 헤치며 빠른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큭...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침 잘 됐어.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거든....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추격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만나 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를 때까지 기척을 숨기고 추적만 했다. 다행히도 그는 곧 골목으로 들어섰다. 작은 골목이었기에 지나는 사람들은 어쩌 다가 하나씩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즉시 그가 들어간 골목으로 뒤따라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잠깐 사 이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설마... 내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설마...? 그가 내 기척을 느낄 레벨 은 아닐 것인데.... 어쩌면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공을 써서 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즉시 경공을 쓰며 골목을 달렸다. 곧 하나의 구석진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한가운데에는 내 가 찾던 그가 서 있었다. 꼭..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오랜만이군요... 무무." 내 말에 그가 몸을 돌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그보다 단번에 나를 알아보다니... 대단하군." "그까짓 마법구 정도로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죠." 나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무무는 혀를 차며 모습변환 마법을 해제했다. 곧 무 무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라면 날 알아보고 따라올 줄 알았어." "역시.. 유인을 한 건가요?" "설마 이렇게 쉽게 걸릴 줄은 몰랐거든." 저 비릿하고도 재수 없는 웃음은 여전하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곳곳에 200레벨 이상의 고수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0레벨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도 없다. 1년 전에야 200레벨의 수가 극소수였지 만 지난 1년 사이에 마대륙이 유저들에게 개방되었고 또 많은 고수들이 새로 등장하면서 더 이상 200레벨은 최강의 고수라 부르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200레벨 이상의 유저들의 수는 2만 명에 이를 정도이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것이다. 그만큼 마대륙이라는 새로운 레벨 업 사냥터의 효능이 대단한 것이다. 참고로 내가 만든 응룡회의 평균레벨은 현재 340이 넘는다. 마의 벽이라는 350 레벨의 벽을 넘은 회원들은 자그마치 8명이나 된다. 그 때문에 응룡회는 아직까 지도 한 제국 최강의 문파로 불린다. 냐하하~! "겨우 저들을 믿고 저를 유인한 건가요?" "겨우 라고 불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그리고 나 역시도 상당한 레벨 업을 했고 말야." 하긴... 무무도 레벨이 장난이 아닌 것 같다. 그 동안 미친 듯이 레벨 업만 했을 것이다. 대충 봐도 370이상인 것 같은데.... 370레벨 이상의 고수 하나에... 200레벨 이상의 고수 열 셋.. 아니 열 넷이군.. 아 무튼 이들의 합공은 분명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 있어 나는 예외다. 해룡까지 잡으며 레벨 업을 한 내가 아닌가. 물론 내가 내 힘으로 잡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잡기는 잡은 것이다!!! 암무마저도 가볍게 밟아주는 내가 겨우 이런 녀석들 몇을 어찌하지 못할 이유 는 없다. "시험해 보실 건가요?" 내 자신만만한 말에 무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며 힐끔 눈알을 좌우로 굴렸 다. 나는 그것이 무슨 행동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 내 동료 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살피는 것일 터였다. "저 혼자 입니다만...." 내 말에 무무는 얼굴을 구겼다. 흠... 실수로군..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먼저 선 수치는 것은 때에 따라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는데 내가 그것을 잠깐 망각한 것이다. "미안하네요.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엉뚱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독설은 여전하군." "거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나는 웃으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보 통은 고개를 숙이기 마련인데 무무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아 검지를 구부렸다 펴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무를 더욱 열 받게 했나 보다. 이를 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을 보니.... 폭주라도 할 것만 같다. "흥! 더 이상 말로는 못 하겠군. 쳐라!!!" 무무의 명령과 함께 팔방에서 유저들이 달려들었다. 궁신탄영을 펼치며 나에게 달려드는 무무의 부하들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나는 그들이 거의 나에게 다가왔을 때 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십여 명의 유저들이 공격을 가하며 폭발이 일어 났다. 아직 내가 피한 것인지 모르는 듯 무무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리 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깁니다." 나는 무무의 뒤편에서 입을 열었다. 재빨리 몸을 돌린 무무는 나를 발견하며 이 를 갈았다. "어떻게 피한 거냐?" "그냥요."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을 것인데...." "없으면 만들면 되죠." 나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한 유저가 회색 빛으로 물들며 쓰러졌다. 분명 피할 곳은 없었지만... 그렇다면 한 쪽을 뚫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상 태에서는 방어를 하기보다는 달려드는 적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1:1로 제압해 버 리고 돌파하는 것이 좋다. 1:1로 보면 내가 훨씬 레벨이 높으니 뚫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괴물 같은 녀석....." "알면 됐어요. 그보다 저 시간이 없는데.. 빨리 끝내도록 하죠. 아내가 기다리거 든요." 히죽 웃은 나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검을 앞으로 세웠다. 나의 자세를 본 무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취한 자세를 알아 본 것이다. "피해라!! 무진이다!!" 무무가 몸을 날리며 외치자 다른 녀석들도 황급히 몸을 피했다. 무진은 일직선 상의 적을 베는 기술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방으로 도주를 하면 한번에 잡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보통 무진의 이야기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반년쯤 전에 만들어 낸 무공을 펼쳐냈다. 무진(無盡) 천지번복(天地飜覆) 합(合) 일식(一式) 무극천세(無極天世)!! 순간 내 몸이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 내며 일시에 허공을 갈랐다. 일시에 수 십 방향으로 뻗어간 분신들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무진을 구사했고 순식간에 무무만을 남겨두고 모든 유저들이 게임오버 되어 버렸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퇴로를 막은 나를 바라보는 무무에게 검을 들어 보이며 나 는 히죽 웃었다. "그.. 그건 대체 무슨 무공이더냐?" "무극천세. 진사신무의 최종오의 천지번복과 무상검의 오의 무진을 합쳤죠." 이걸 만들어 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계속 실패를 하다가 어느 날 성공 을 했는데.. 알고 보니 무공과 무공의 결합은 성취도를 올리는 것이 아닌 성공 률을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장장 반년간 두 무공을 합친 무공을 죽어라 실패하며 구사했고 결국 지금에 와 서는 거의 열 번 중 아홉 번은 성공할 정도로 확률을 올릴 수 있었다. 무진과 천지번복을 합쳐 만들어 낸 무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금 펼친 일식 무극천세였고 다른 하나는 이식(二式) 무극멸세(無極滅世)였다. 일식 무극천세가 다수의 적을 베는데 유용하다면 이식 무극멸세는 단 하나의 적을 완벽하게 게임오버 시켜 버리는 무공이었다. 일시에 사신을 쏘아보낸 후 그대로 다섯 번의 무진을 먹여버리는데 피하지 않 는 이상은 대항할 수단이 없을 무공이다. 물론 피하는 것도 무진을 피해야 하 니... 거의 불가능이지만... "무공의 조합이라고? 어떻게...?" "노코멘트. 그 이상은 스스로 알아보시죠. 물론 게임오버 한 번 당하시고 난 후 로그인하고 나서 생각하시길... 봐 드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무무는 무극멸세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무무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아~! 자꾸 그렇게 불쌍한 얼굴을 하면 미안해지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는 히죽 웃으며 무극멸세를 펼치려 했다. 하지만 순간 무무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동시에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 한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다. "큭!!!" 어느새 내 가슴에는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와 있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서 찔러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무무 외에는 그 누구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 체 누가? 내 감각을 피하고? 천천히 뒤를 돌아 본 나는 이를 갈았다. "진....군......" 설마... 저 인간과 무무가 한 패? 혹시 진군이 마지막 초절정무공 살인비급을 가 진 사신.....? 분명 그럴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내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을 터 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내 실수다. 아무리 사신이 기척과 살기를 감추고 있더 라도 공격을 하기 전에는 느껴질 것인데... 무무를 베어버릴 수 있다는 희열 때 문에 나도 모르게 그 기척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건.. 분명 내 실수다.... "하하하! 드디어 복수를 했구나!!!" 망할... 무무 늙은이.... 크악!!! 진군이 내 가슴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냈다. 순간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고통이 몸을 엄습했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유저를 찔렀는데 피가......?" "어떻게 된 거지?"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 질기군. 보통은 이러면 게임오버인데... 역시 목을 베어 버려야 하겠어." 망할..... 개자식들..... 빌어먹을.... 저주해 버리겠다... 죽어서라도 네 놈들은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저주를 걸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진군이 검을 들어올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진군을 노려보았다. 순간 진군의 검이 핏빛 곡선을 그리며 내 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꺄악!!!! 안 돼!!!!!!!!" 목이 잘리기 전... 어렴풋이 들려오는 비명소리..... 분명.. 진희누나의 목소리였다. -맥박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젠장! 출력 올려!!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대로 두면 죽어! -유빈아!! -으아아앙!!! ......어머니.... 아버지.... 하현이.... 그리고... 진희누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이대로는... 절대로..... .....죽을...... Epilogue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더 월드(The World) R. T. V. R. O. M Game The World 주 - R. T. V. R. O. M. U. D Game : Real Time Virtual Reality On-line Multiple User Dungeon Game Epilogue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찾았다!" 현수의 외침에 하현과 진명, 우혁, 히카루, 레나는 재빨리 현수가 소리친 방향으 로 달려갔다. "어디?!" 성질 급한 우혁은 쉴새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즉시 히카루가 그런 우혁의 머리를 주먹으로 갈겼다. "바로 앞에 있잖아. 바보." 히카루의 말대로 바로 앞에 자그마한 통나무집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혁은 머쓱 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자자. 들어가 보자고. 흐흐. 검천지룡의 거처라니.... 정말 여기에 오고 싶어서 얼마나 피나는 레벨업을 했던가?!!!" 현수가 감동이 어린 얼굴로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러자 하현을 포함한 남은 아 이들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웃음 짓던 아이들은 곧 먼지를 뿌리며 달려 집 안으로 달려들 어갔다. 올해로 정확히 서버오픈 20주년을 맞이하는 더 월드... 그 사이에 수많은 업데이 트가 지속되었고 여전히 더 월드는 세계 최고의 가상온라인 게임 지존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고수들이 더 월드에서 이름을 날렸고 또 사라졌으며 새로운 고수들이 등장하기를 수차례.... 하지만 지금까지도 모든 유저들에게 전설로 남 은 고수는 한 제국의 검천지룡 사룡검신 응룡지주 무상과, 그 무상을 이긴 에리 두의 최강유저 데몬헌터 케리온 다크마스터뿐이었다. 아직까지도 십 수년 전 무상과 케리온의 대결장면이 담겨있는 비디오 파일은 더 월드 홈페이지는 물론 각 사이트 자료실에 특급 자료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 이다. 하현을 포함한 아이들도 무상과 케리온의 전투를 보고 단번에 둘의 팬이 되어 버렸고, 어떻게든 은자림 최북단에 존재하는 무상의 거처에 오고싶어 몇 달 동 안 피나는 레벨 업을 실행했고, 오늘에서야 한 제국 최고의 사냥터인 은자림에 들어선 것이다. "헤에... 무상의 거처라고 하기에 특별한 것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별것 없 네." 진명의 말대로 그다지 특이할만한 것은 없었다. 탁자 하나와.. 의자 셋... 한 쪽 은 주방이었고 다른 쪽은 침실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러타할 장식도 없는 그저 평범한 통나무집일 뿐이었다. 무슨 기대를 하고 왔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 현만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그 때 침시로 들어갔던 우혁이 소리쳤다. "야~!! 여기 사진이 있어!!" 사진? 아이들은 재빨리 침실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라도 무상의 사진일 지도 모 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디에 사진이 있는데?" "저기 벽에..." 우혁이 가리킨 곳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작은 것은 어린 아이의 사진이었고 큰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단체로 찍혀있는 단체사진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단체사진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무상의 얼굴을 보고 싶 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하현은 의아한 얼굴로 어린아이의 사진을 응시했다. "어라...? 이거 내 사진인데." ".....뭐?" 하현의 말에 놀란 아이들은 사진에서 눈을 떼며 하현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장난이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하현은 고개를 흔들며 단 언했다. "이거 내 사진 맞아. 내 백일사진인데... 앨범에 있어. 못 믿겠으면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와 봐. 보여 줄 테니까." "....정말이야?" "응." 하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 움을 느꼈다. 왜 무상의 집에 하현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일까? 설마 하현과 무 상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어...? 우리 엄마하고 아빠잖아." "에엑?!!"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하지만 말을 한 하현도 놀란 얼굴로 단체사진을 응시하 고 있었다. 가장 중앙에 앉아있는 사내와... 그 사내의 품에 안겨있는 여인은 분명 하현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 있는 사람들은..... "여긴... 천희 아저씨고.. 어? 유키코 아줌마.... 민우아저씨도 있네. 이 사람은 진 호외삼촌 같고.... 아진아줌마... 시연외숙모... 민호아저씨.. 주린이 아줌마.. 우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 ".....그 사람들... 다 아는 사람들이야?" "응.. 진짜 닮았어. 그리고 여기 아빠와 엄마는 젊었을 때 사진하고 똑같아." 아이들은 입을 쩌억 벌리고 사진과 하현을 번갈아 보았다. 이걸 믿어야 하는 것 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무상의 거처이고 당연히 이 곳에 걸려있는 사진속의 인물들은 무상과 그 연인인 봉황신녀 진희.... 그리고 무상을 보필하던 최강의 문파 응룡회의 회원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정확하게 18인이었다. 이 숫자는 응룡회의 전체 회원 숫자와 동일하다. 단 18인으로 3만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은자림을 멸문 시켜 버린 그 누구도 이 루지 못한 전설을 이루어 버린 응룡회.... 그런 응룡회의 회원들 중에서 일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가장 중 앙에 있는 응룡회주 무상과 봉황신녀 진희로 추정되는 남녀를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니..... "그.. 그럼 너희 아버지가 무상이고... 어머니가 진희였단 말야?" "우움.... 나도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이름이랑 봉 황신녀 이름이랑 같네.... 이제까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가?" 하현의 말이 결정타였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성질 급한 우혁이 가장 먼저 나섰다. "하현아~!!!!" "응...? 왜...?" 우혁의 박력에 움찔한 하현은 주춤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우혁은 한 걸음 다시 앞으로 다가와 하현의 손을 잡고 물었다. "너희 집 어디냐?" "과.. 광주...." "오케!! 전번도 불러!! 나 지금 당장 달려간다!!!" "나도!!" 뒤따라 아이들이 자기도 간다고 소리쳤다. 일본에 사는 히카루와 레나는 당장이 라도 비행기 표를 구해야겠다고 로그아웃을 할 준비까지 한다. "저... 저기 잠깐!!" 할 말이 있었던 하현이 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아이들은 모두 로그아웃을 해 버린 후였다. 좁게 느껴졌던 무상의 침실이 무척이나 넓게 느껴졌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실내에 멍하니 서서 하현은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빠는 안 계시는데....." -Fin 마감후기 어찌저찌해서 끝이 났군요... ^^ 많이 부족한 글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더 길게 쓰기를 원하시는 분이 많으셨는데.... 그랬다가는 제가 본래 정해두었던 스토리가 아닌... 목적도 없는 방황이 계속 이어질 뿐일것 같아.. 저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이쯤에서 완결을 하게 하였습니다... 미흡한 글이지만... 그것으로도 즐거우셨기를 기원드립니다.. ^^ 그럼 사악현오는 시끄러운 까마귀 울음 소리와 함께 사라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