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오해 ‥‥‥‥‥‥‥‥‥‥‥‥‥ Chapter 02 좌충우돌 유한 ‥‥‥‥‥‥‥‥‥ Chapter 03 학원에 잠입하다‥‥‥‥‥‥‥‥ Chapter 04 통쾌한 복수 ‥‥‥‥‥‥‥‥‥‥ Chapter 05 다시 게임 속으로 ‥‥‥‥‥‥‥ Chapter 06 반지그 동맹 ‥‥‥‥‥‥‥‥‥‥ Chapter 07 학림고의 활극 ‥‥‥‥‥‥‥‥‥ Chapter 08 다시 나타난 해븐즈 게이트 ‥‥‥ Chapter 09 아이언 마스터 ‥‥‥‥‥‥‥‥‥ Epilogue ‥‥‥‥‥‥‥‥‥‥‥‥‥‥‥‥‥ Chapter 01 오해 1 "이게 뭐야! 뭐냐고 젠장!" 사진 파일올 보고 흥분한 유한은 주먹올 내리쳤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쳤던지, 주먹에 맞은 키보드 자판이 튀어나와 책상 위를 나뒹굴정도. "형. 왜 그래?" 자다가 물 마시러 나왔던 유현은 형이 발악하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유한은 재빨리 모니터에 든 사진올 없앴다. "별거 아니야. 가서 잠이나 자." "별거맞는것같은데?" 유현은 이렇게 흥분하는 형을 오랜만에 보았다. 형의 이런 모습은 예전에 학교를 그만뒀을 때와 무척 흡사했다. 그때도 아주 예민해져 별거 아닌 것에 흥분을 하고 화를 내곤 했었다. 그래서 유현은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무슨일이야? 내가 도와줘?" "그냥 가라니까!" "내가 남이야?" 유현의 물음에 유한은 더 윽박지르려다 말았다. 언제나 속을 살살 긁는 얄 미운 동생이지만. 지금은 걱정스런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젠장!"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 대던 유한은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유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유한이 보았던 사진 파일올 열었다. "전부 게임 스크린샷이잖아." 학교 같아 보이는 가상의 공간에서 채린과 어떤 남학생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같이 책올 보고, 던전 같은 곳에서 모험을 하는 사진들도 있었다. 그 정도였다면 형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으며 오해하기 쉬운 포즈를 취한 장면도 있었다. "참나, 요새 안 보인다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사진들을 보던 유현은 채린과 함께 찍힌 소년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걸 알았다. "이 자식 혹시 배히모스란 놈 아냐?" "그래, 베히모스 맞다." 캐릭터를 바꾸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놈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야. 정현일이라고 하는대, 학림 재단의 이사장 손자지. 나 학교 그만두개 만든 주동자다" "그 자식도 형이 지그란 걸 알아?"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런 수작 부리는 거 아니겠냐" 채린은 유한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모른다.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준 적이 없으니까. 유한은 자신이 이런저런 일들로 바쁠 때, 정현일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린에게 접근했을 거라 판단했다. 채린을 꼬셔 자신에게 북수를 하려는 생각일 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아니. 채린이 학림 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했을 때 분명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다른 학원에 다니게 만들려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어쩔 거야?" "어쩌긴, 박살을 내 놔야지." 이를 뿌드득 갈아붙인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현은 그런 그를 진정시켰다. 놈을 때려죽이고 싶은 형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렇게 열을 받은 상태에선 오히려 일이 엉뚱하게 될 수 있었다. "진정해, 형. 때려잡는 건 뒤로 미뤄도 늦지 않아." "그럼 그 자식이 계속 채린이 주변에 얼쩡대도록 놔두란 말이야?" "일단은 누나한테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채린이한테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이 상황에서 날뛰면 TV 드라마의 재현이 될 뿐이라고."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연인에게 접근하는 라이벌을 두들겨팬다. 영문도 모르고 라이벌과 가까워지고 있던 연인은 그런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비난한다. 연인의 그런 태도에 남자 주인공은 펄펄 뛰며 흥분하다 일은 더 커지기만 하고‥‥‥. 나중에 뒷수습을 하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간악한 라이벌이 주인공의 곤란한 상황올 악의적으로 이용하기에. "이게 드라마의 공식이지. 형도 이 삽질 할거야?" "아니." "그러니까 먼저 누님한테 말을 해. 형이 왜 학교를 잘렸고 베히모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자신이 바츠였다는 것은 저번에 채린의 앞에서 밝혔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퇴학당한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면, 정현일이 채린의 결에서 얼쩡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형이 숨기고 있는 걸 솔직하게 말하기만 해도 누님과의 사이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야.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는 건 그만큼 상대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니까." "그렇구나. 넌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냐? "누군가를 사귀는 데 있어선 내가 형보다 내공이 높으니까 그렇지. 친구든 연인이든." 잘난 척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유현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해도 결국 자신이 그녀에게 소홀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 테니까. 분명 그 점은 반성할 일이다. "네 말이 맞아. 일단 채린이한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렇게 하라고." 정현일을 때려잡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될 일. 유한은 흥분한 마을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가 생각을 잘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정현일이 어떤의도로, 어떤식으로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빼앗으려는 지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했다. 2 해가 뜨자 유한은 곧장 채린의학교로찾아갔다. 극기도 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서 고등학교가 채린이가 다니는 학교였다. 유한은 강서고 교문 근처에서 채린이 등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무리 기다려도 채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등교 시간이 거의 다 끝나 가는 데도 그랬다. "왜안오지? 유한이 초조해 할 즈음, 교문을 지키고 있던 체격 좋은 학생 주임 선생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행동에 교문을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니,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꼭 들소 떼를 보는 것 같네.' 유한은 그 들소 떼 중간에서 채린을 발견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교문으로 달려가는 그녀를 보고, 유한은 골목에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채린아!" "어머, 유한아!" 채린이 유한을 알아보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이끌린 유한은 들소 때(?)를 헤치고 채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요새 네 얼굴보기 힘들어서." "아, 미안."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얼마 없었다. 시계를 보고 있던 학생 주임이자 채린의 담임 선생이 카운터를 세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 십 초 남았다. 십, 구, 팔‥‥‥." 카운터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질주는 더욱 빨라졌다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채린도 서둘러 발걸음을 교문으로 옮겼다. "미안해, 유한아 나중에 전화할게."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러나 채린을 곤란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유한은 그녀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채린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채린이 들어가고 난 직후, 이태호 선생은 뒤이어 들어오는 지각생들을 한쪽으로 몰았다. "크흐흑! 늦다니‥‥‥." "늦을 줄 알았다, 인석아. 너 오늘 새벽가지 아르페디아 온라인 했지?" "아녜요, 영어 예습하다 그랬어요." "웃기고 있네. 내가 테시아스 필드에서 놀고 있는 널 봤거든." 이태호는 쭉 늘어진 지각생들의 앞을 지나가며 일일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던 그는 교문앞에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유한을 발겼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녀석인데, 생각해 내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누구더라?" "채린이 남자 친구인 것 같던데요." 지각생 중 채린과 같은 반인 여자애가 말했다. "채린이 남자 친구라고?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전사 아레스로 플레이를 할 때 본 적이 있었다. 채린과 같은 반 친구들이 늘 들락거리는 철공소, 아니 이젠 제철소의 주인. 이름이 지그라고 하던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꽤 유명한 녀석이다. 예전에 바츠 유저였던 것으로 알려져 공식 홈페이지를 아주 들썩거리게 만들어 놓았다. "점잖게 충고라도 해 줄 걸 잘못했군." 선생된 도리로서 연애질온 게임에서나 해라. 채린이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미 가 버린 녀석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는 없었다. 이태호는 지각생들에게 오리걸음으로 본관까지 가도록 지시를 한 뒤 교문 밖으로 나와 담장을 훑었다. 몰래 쥐구멍을 이용하거나 담치기 하려는 지각생들을 잡을 요량으로.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뼈리리리리---! "아침부터 누구지?" 모르는 번호였지만. 이태호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서고 이태호 선생님이십니까?"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그렇게 묻긴 했지만 이태호는 내심 짐작했다. 상대 목소리가 낯익었기 때문이다. '이자가 왠일이지?' 한때 같은 조직에 있었지만. 별로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티쳐스가 붕괴된 이후로는 더더욱. "정 교감이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티쳐스의 길드장이셨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태호의 물음에 정교감이 용건율 꺼냈다. "언제 이 선생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말입니다." "저는 정 교감님과 나눌 진지한 대화가 없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한번 시간을 내 주십시오. 티쳐스 때의 일은 저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태호는 끝까지 거절하려 했지만. 상대의 간곡한 청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정 교감과 오프라인에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 그는 전화를 끊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괜한 약속을 한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한편, 강서고 교문에서 물러난 유한은 채린이 휴대폰으 로 전화를 걸었다. 채린이 전화를 할 때까지 기다리려다 참지 못하고 먼저 건 것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에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채린은 금방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끝에 수화기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셔." "허걱!" 유한은 깜짝 놀랐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채린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아니라. 묵직하고 거친 사내의 음성이었다. 그것도 잘 아는 사람, 바로 채린의 부친인 송태수의 목소리였다. "너 유한이냐?" 송태수도 유한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유한은 원망 어린 투로 송태수에개 응답했다. "왜 채린이 휴대폰을 관장님이 갖고 계신 겁니까?" "현관에 놓고 갔던데? 늦잠 자다 지각한다고 설치다가 잊어버린 모양이야." "크윽!"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인지. 유한의 속도 모르고 송태수는 마침 기회라는 듯.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 요새 도장에 안 나오던데, 그럼 안돼, 인마. 근육이 살 되는 거 금방이다. 입시 공부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게임이나 하고 채린이를 꼬실 목적이라면‥‥‥." "관장님!" "잘못한 건 관장님이시죠. 왜 채린이를 학림 아카데미에 보내신 겁니까? 따지고 보면 채린이와 소원하게 된 원흉은 송태수이지 싶었다. 성적 올리자고 게임 내의 학원에 보내는 건 이해를 한다. 그러나 왜 그 하고많은 학원들 중에서 학림 아카데미인가! 비리 만연에 그 재수없는 녀석까지 다니는. "왜보냈긴. 거기가 잘 가르친다고 해서 보냈지."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만 올려 줄 뿐이라고요!" 유한의 외침에 송태수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이거 너답지 않게 왜 이러나? 채린이가 좋은 대학에 갈까 봐 걱정 돼? 그럼 너도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든가." "크아악! 그게 아니라니까요!" 왜 사람들은 성적만 잘 나오면 다라고 생각하는지. 성적 지상주의 속에 교묘히 포장되어 있는 비리와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지. 터질 것 같은 속을 간신히 진정시킨 유한이 학림 재단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할 때 송태수가 말했다. "난 이만 출근해야 하니까 더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도장으로 와." 뚜뚜뚜!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놔, 오늘따라 뭐 이래?"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유한이었다. 천생 채린이에게 말하는 것은 방과 후로 미뤄야 할 듯. 3 점심시간. 배식을 받기 위해 친구들과 식당으로 가던 채린은 다른 학교 교복올 입은 남학생이 교내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지? 전학생인가?" "멋지다. 연예인 같아." "멋지긴 개뿔.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네. 뭘." 여학생들에겐 찬사를. 남학생들에게 악평을 듣고 있던 남학생은 채린을 보고 반색을 하면서 다가왔다. "시아 맞지?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구나." "누구?" 누군데 자신의 아르페디아 온라인 캐릭터 이름을 알지, 물끄러미 상대를 살펴보던 채린은 손뼉을 마주쳤다. "아! 일현이구나! 일현이 맞지?" "그래. 맞아." 캐릭터명 일현(一賢). 채린이 게임 내에서 내에서 다니는 학원인 학림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였다. 그녀가 학림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가서 강의를 따라가지 못해 곤란해 하고 있올 때. 일현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격도 친절하고 매너도 좋은 일현은 강의 내용을 쉽게 풀이한 텍스트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 주기도 했고, 학원의 마탑 미궁올 탐험할 때 이런저런 도움올 주기도 했다. "우리 학교까진 무슨 일이니?" "내가 저번에 오프에서 만나서 점심 산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마탑 미궁 10층에서 두 사람은 중간 보스 '탐구의 악마'를 만났다. 레벨200대의 고렙 몬스터 탐구의 악마에게 같이 온 파티원들은 전멸 당했고, 일현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네 덕분에 살았잖아." 어디 살았을 뿐인가. 채린의 활약 덕분에 탐구의 악마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거기다 채린은 그때 획득한 아이템 '과학 탐구 완전 정복 문제집' 을 일현에게 양도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고마웠던 일현은 언제 오프에서 점심올 사겠노라고 약속했다. '과학은 별로 안 좋아해서 준 건데' 채린이 일현에게 아이템을 양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현이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냥 해 본 소리에,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일현은 찾아왔다. 그것도 점심시간에 맞춰서 불쑥. "너 우리 학교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하하. 학림 카데미 운영자에게 전화해서 부탁을 했지. 시아 네가 다니는 학교만 좀 알려 달라고" 그렇게 말한 일현은 시계를 슬찍 보았다가 다시 말을이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맛있는 데 알고 있는데 같이 갈래?" "안돼. 땡땡이치면 혼난단 말이야." "점심시간 내로 돌아오면 되잖아. 같이 가자, 응?" 체린은 거절하려 했지만, 거듭된 일현의 청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점심 약속을 지키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거절하는 건 미안한 일이었다. 거기다 채린은 일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일현을 몇 번 보자 생각난 일이었다. "멀리 있는 곳은 아니지?" "그리멀지 않아. 거기다 교문에 차가 대기해 있으니까 괜찮아." "차가 대기해 있다고?" "하하, 우리 집이 좀 부자라서‥‥‥." 학교 밖으로 나가는 채린과 일현읕 보며 학생들은 연방 수군거렸다. 하긴. 생각해 보라. 멋지게 생긴데다가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이는 애가 학교까지 찾아와 데려갔으니. "채린이 부럽다 애." "나도 저런 남친이 있었으면." 이들과 반대로 김준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률 갸웃했다. '채린이한테 저런 친구도 있었나?' 그런데 이번 일, 지그가 알면 펄쩍 뛰지 않을는지? "야, 그게 진짜냐? 아까 그놈이 진짜 그놈이야?" "그래, 맞다니까." 식당에서 배식을 받던 준수는 뒤에 애들이 떠드는 것을 들었다. 교내에서 문제아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양아치들. 싸움 이야기, 여자애들 이야기, 게임 이야기 등 언제나 가벼운 소재로 침을 튀기던 녀석들이 간만에 화재를 잡은 듯 입을 놀렸다. "학림고 일진 짱인 정현일이 맞아. 스타일을[본문에선 스타일이 라고 괴어있지만 스타일을 이 맞는것 같아 바꿉니다. by. 곰] 좀 바꿨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고." "그 자식이 울 학교에는 뭐 때문에 온 거야?" "아까 3반의 송채린을 데리고 가던데. 둘이 아는 사이 같더라." "그럼 정현일이 대장장이 지그, 아니 광전사 바츠인가?" "노노. 정현일 캐릭터는 내가 아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김준수의 일굴이 더 심각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 생각보다 더 크게 번질 듯싶었다. 4 일현, 아니 정현일이 채린을 데리고 간 곳은 근방의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평일이었지만 꽤 인기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고 북적거렷다. 정현일은 미리 예약한 자리고 채린을 데리고 가서 앉혔다. "시아는 뭐 먹고 싶어?" "글쎄. 여기 뭐가 맛있니?" 예약까지 해 놓은 것을 보면 잘 알 것 같아서 채린은 정현일에게 되물었다. "이 집은 돈가스를 잘하거든, 나랑 같이 커플돈가스먹자." "헤. 커플 돈가스? 일현이 너 점심이 목적이 아니였구나?" 채린이 살짝 째려보자. 정현일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 놓았다 점심이 목적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실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냐, 커플 돈가스는말이지‥‥‥." 정현일은 커플 돈가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트 모양의 커다란 돈가스는 두 사람이 하나를 먹어야 하기에 그렇게 이름이 불여졌지만. 무엇보다 맛이 좋고 푸짐하다고. "근데 그 맛있는 걸 혼자서 사 먹으러 오긴 쪽팔려서 말이야. 난 여자친구가 없어서." "알았다. 그거 먹자." 채린이 허락하자 정현일이 냉큼 점원올 불러 주문을 했다. "여기 커플 돈가스 하고요 음료수 한 병 주세요."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서로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모습올 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고경덕이었다. 학교를 조퇴하고 시내에 잠깐 물건을 사러 나온 그는 유하와 갈 다음 데이트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 광경을 목격했다. "앗! 저거 채린 누님이잖아?" 경덕은 레스토랑 창밖에서 한참 동안 두 사람의 행각을 지켜보다 바로 유한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음에도 유한이 받지 않는 게 아닌가. "아놔. 지금 자기 애인이 외간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데, 뭐 하는 거야?" 혹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경덕은 얼른 가까운 곳에 있는 캡슐방에 들어가 아르페디아온라인에 접속했다. <엔스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고운 음성과 함께 주위가 밝아졌다. 어제 마지막으로 접속을 종료한 사냥터였다. 쪽지나 귓속말을 보낼까 하다가 마침 사냥터가 제철소에서 가까워 직접 달려가 알려 주기로 했다. 유한은 제철소의 개인 작업실에서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입시 학원에 있어야 헀지만, 채린을 기다릴 겸,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해서 강서고 근방의 캡슐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바츠, 한가하구먼." "왜왔냐?" 요즘 에이린과 데이트한다고 바쁜 녀석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유한이었다. "요새 시아 누님이랑자주만나?" "그건 왜 묻는 건데?" 유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엔스는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요즘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한 모양. 옌스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오늘 시아 누님이 이상한 녀석과 데이트하는 거 봤다." "뭐라고?" 순간 유한은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누님이 어떤 희멀건 놈하고 데이트하는 걸 봤다고." "혹시 네가 잘못 본 건 아니고?" 사진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로까지 발전한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정현일이 채린이 곁에서 얼쩡거리는 수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두 사람이 식당에서 정답게 밥 먹는 걸 봤다고." "그냥 밥만 같이 먹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메뉴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더라니깐!" 그러면서 옌스는 문제의 요리가 어떻게 생겼고. 그걸 어떤 식으로 먹고 있던지,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 약간의 과장과 살이 덧불었다. "서, 설마!" 옌스의 설명을 들으니 진짜 채린이 바람을 피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정현일이 부린 수작은 아닐까. 하지만 그 수작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문제를 더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원래는 채린이 학교 수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바로 지금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옌스, 너 그 패밀리 레스토랑이 어딘지 알아?" "쳐들어가려고? 나야 위치도 알고 근방에 있지만,바츠 네가 멀리 있으면 소용이 없잖아." "상관없으니까 일단 위치나 말해!" 유한은 옌스에게서 패밀리 레스토랑의 위치를 들었다. 그는 바로 캡슐방에서 부리나케 튀어나와 두 사람이 있다는 곳으로 달렸다. 다행히 강서고 근방에 있는 곳이라 그리 멀지 않았다. '이 망할 자식! 정말 채린을 꼬신 거라면 내가 가만 안 놔둔다.' 바람같이 달려가는 유한의 두 눈은 불꽃같이 이글거렸다. 눈을 벌겋게 치켜뜬 유한이 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정현일은 채린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 가지곤. 내가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니깐." "그거 너무 심했다." 담담히 정현일의 이야를 듣고 있던 채린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점심시간 끝나기 10분전이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할 시간, 채린은 가기 전에 정현일에게 묻고 싶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정현일을 따라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현아. 너 혹시‥‥‥." "혹시 뭐?" "베히모스 아니니? 예전에 철십자 길드에 있던." 여유 만만하던 정현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긴장하는 그에게 채린이 계속 물었다. "너 볼 때마다 베히모스와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내가 게임하면서 베히모스를 본 적이 있거든." 실제로 정현일도 채린이 학림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대략 생각나는 것만 해도 두 번이었다. 뇌제의 능묘,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황궁에서. 그때 채린은 강유한 옆에 있는 짜증나는 궁수 계집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학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결에서 자세히 뜯어보니 상당한 미녀였다. 독차지하고 싶었고, 강유한의 여자 친구라면 더더욱 빼앗고 싶었다. "베히모스 유저는 내 사촌이야. "사촌이라고!" "나랑 많이 닮아서 사람들이 착각해서 묻곤 해. 덕분에 좀 난처하지." 정현일의 거짓말에 채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베히모스가 맞다면 한 대 날려 주려고 했었는데‥‥‥." '날 날린다고?' 채린의 실력을 모르는 정현일은 피식 웃었다. 그냥 해 본 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왜 날리려는 건데?" "배히모스가 지그틀 꽤 곤란하게 만들었거든. 뭐 지그는 그걸 훌률하게 극복해 냈지만 말이야." "정현일은 속에서 뭔가 꿈틀함을 느꼈다. 지그. 아니 유한에게 철저히 당한 일이 떠올라 불쾌하기도 했지만, 지그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채린의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요샌 학원 때문에 바빠서 지그를 많이 못 봐. 지그도 답답한가봐. 오늘 아침에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 있지. 전화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휴대폰을 깜박 놓고 와 버려서‥‥‥." 말을 하고 있는 채린은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정현일은 점점 더 짜중이 났다. 그동안 채린과 어울리면서 가유한 따위는 잊게 해 주겠노라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던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학교까지 직접 쳐들어가서 통학용 승용차와 운전기사까지 데리고 있는 부잣집 아들임을 뽐냈는데, 채린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제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한마디로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다. 그둥안 꼬셔 데리고 놀다가 차버렸던 여자애들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쉽지 않다 이건가?' 하지만 정현일은 그 점에서 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하든 채린을 자신의 여자 친구로 만들어 강유한이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었다. "어머, 늦었네. 얼른 가 봐야겠어" "걱정마, 태워다 줄께" 채린과 정현일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유한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놈이 언제?' 정현일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기뻣다. 눈이 뒤집어진 유한의 얼굴을 보았기에. 5 "유한아, 너 어떻게‥‥‥." 유한은 채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곧장 정현일의 앞으로 다가간 그는 주먹올 휘둘렀다. 처음에는 채린에게 베히모스의 수작을 설명하려 했지만, 둘의 다정한 모습에 그만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퍽! 느닷없이 날아온 주먹을 정현일은 피하지 못했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했을 때 이미 주먹은 뺨에 작렬하고 있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맞던 순각에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눈을 뜨자자 빙글거리는 세상 가운데 씩씩대는 강유한이 보였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게 과연 강유한이 맞긴 한가? 예전에 녀석이 악을 쓰며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어나. 자식아!" 유한은 쓰러진 정현일올 일으켜 세웠다. 정현일은 어떻게든 유한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방금 전에 받은 데미지는 상당했다. "유한아, 너 왜 그래?" 또다시 두들겨 맞을 뻔한 정현일을 채린이 살려 주었다. 그녀는 재차 날아가려는 유한의 주먹을 붙들고 그를 다독였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좀 진정하고‥‥‥." "진정하라고? 뭘 어떻게 진정하라는 건데!" 사정을 모르는 채린이 이렇게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정현일에게 다사 주먹올 날렸다. 턱! 그의 주먹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학생,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러서야 쓰나."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눈앞에 새까만 양복을 입은 까무잡잡한 사내가 서 있었다. '휴, 대철 아저씨 때문에 살았네.' 정현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철은 그의 통학 승용차 운전기사로. 예전엔 흑곰파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체격도 평범하고 암전한 인상이었지만, 싸움 실력은 뒷세계에서도 톱 수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게 만든 게 누군데요!" 상대의 점잖은 타이름에 화가 났던 유한은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대철은 손바닥으로 유한의 주먹올 가볍게 쳐 내곤 반대편 손끝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컥!" '고, 고수다.' 한순간 숨통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낀 유한은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찍었다.[본문은 찌었다 로 되어잇지만 찍었다고 바꿉니다. by. 곰] 대철은 그런 유한의 앞을 막아섰다. 쓰러졌긴 하지만 유한의 눈빛이 이글거렸기 때문이다. 뭐 그건 다 대철의 뒤에서 히죽대는 정현일 때문이었지만. "그만하지, 학생. 계속 이러면 경찰을 부르겠어.” "웃기고 자빠졌네, 깡패들 주제에 경찰을 부르겠다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유한을 본 채린은 다시 한번 그를 말렸다. "유한아, 그만해." 그러나 유한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했다. 채린은 자신을 밀치고 대철에게 다가서는 유한을 들려 세웠다. 그리고 따귀를 철씩 날렸다. 효과가 있었는지, 유한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크크크, 잘한다! 알아서 쪼개지는구나!' 싸늘한 기운이 맴도는 둘 사이를 보며 정현일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강유한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이만한 결과를 보는 셈 치면 싼 편이다 싶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채린의 말에 유한은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야. 송채린. 넌 뭘 안다고 자꾸 나서는 건데?" 그녀가 편을 들어 줘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딴죽을 걸자 유한은 짜중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래, 나 아는 거 없어. 들은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이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거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분명 유한이 이렇게 나타난 데는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현의 운전기사와 싸우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한눈에 봐도 대칠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아버지나 곽대발 아저씨에게는 못 미치지만. 하지만 유한은 채린의 이런 진심 어린 우려를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알아주기는커녕 오해하기만했다.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굴 위해서 그러는 건데?" "그거야‥‥‥." "됐어. 나 아무 말도 안 들을 거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귓구멍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유한은 채린이 정현일을 편드는 것 같아 더 엇나갔다. "뭐라고? 너 정말 이럴거야!" 그럼 내가 어째야 되는데? 네가 저 개자식하고 꼴을 손가락 물고 지켜보고 있을까?" "놀긴 누가 누구랑 논다고 그래?" "내가 두 눈으로 본 건 뭔데? 방금 전에 내가 본 건 뭐냐고!"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두 사람의 감정도 격해졌다, 유한은 믿었던 채린이 배신했다 생각해서 화가 났고, 채린은 유한이 자신을 불신하는 것처럼 느껴져 무척 기분이 나빳다. '제길,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유한은 자신의 감정을 누그릴 수 없었다. 분통은 화산처럼 터지는데 가슴은 미칠 듯이 답답했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닌데. 채린에게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정을 말하고. 정현일을 조심하라고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어쩌다가 TV드라마를 찍고 만 것일까. 문득 자신의 이런 모습이 우스워졌다. "나간다. 송채린. 잘있어라." 허탈함에 기운이 쏙 빠진 유한은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채린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야, 강유한!" 채린이 불렀지만, 유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떠나가는 유한을 보며 정현일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채린이 앞엥 ㅣㅆ어 그 기분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울 따름. "미안해, 일현아. 재가 평소에 저러지 않는데‥‥‥." "괜찮아. 그보다 늦었으니 얼른 가야지." 정현일은 차에 타라는 듯 손짓했지만, 채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기왕 늦었으니 그냥 걸어서 갈래." 유한만큼이나 채린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생각해 보면 뭔가 오해할 만한 장면을 보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유한이 너무하다 느껴졌다. 그런 불편한 채린의 마음도 모르고 정현일은 제속 치근덕댔다. "그러지 말고. 한낮에 걸어서 가다간 피부가‥‥‥" "괜찮다고 했잖아!" 채린이 쏘아붙인 말에 정현일은 움찔 놀랐다. 어느 틈엔지 그의 발은 채린에게서 뒷걸음질한 상태였다. "소리쳐서 미안해, 일현아. 나 좀 내버려 두지 않을래?" "으, 응."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린은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정현일은 그런 채린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위로하면서 자신에 대한 호감을 더 쌓게 만들 셈이었는데, 기회가 아깝게 날아가고 말았다. '뭐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는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채린이 완전하 자신의 여자가 된 모습을 유한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야 녀석이 더 미쳐 날뛸 테니까. "크크, 이제 시작일뿐이다." 히죽 웃던 정현일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유한에게 맞은 곳이 아팠기 때문이다. 차 유리에 얼굴을 비춰보니, 맞음쪽의 뺨이 불룩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점점 쓰려 오는 상처의 고통에 정현일은 이를 갈았다. "기대해라, 강유한. 오늘 받은 것의 몇 배로 돌려주마." Chapter 02 좌충우돌 유한 1 유한이 채린과 대판 싸운 그날 밤. 아바란 왕국 남쪽.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언데드 필드로 유명한 랑그리아 평원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다 싶더니 대지가 검은빛으로 물들었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력한 언데드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 어떤 자식들이 새로 발견한 던전에서 봉인 갈은 걸 뜯었다고 하던데‥‥‥." "그럼 히든 이벤트를 발동시킨 거야?" 유저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히든 이벤트에서 많은 경험지는 물론 진귀한 아이템도 휙득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난 유저들은 파티를 결성하고 새로 태어난 언데드 군단과 싸우기 시작했다. 일부 유저들은 성급하게 솔플로 달려들었다가 죽음을 맞기도 했다. - 흑영비 : 평원 중앙에 보스인 언데드 킹이 있다능! - 아이템먹자 : 이름이 바이레스라는데, 무지막지하게 세요. 저렙님들 도망가셈. - 백은의대미안 : 이놈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어요! 몇몇 유저들은 이번 이벤트의 주인공과 맞닥뜨린 모양 그들은 보스의 정보와 스크린샷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다. 왕관과 같은 투구를 쓰고 화려하지만 낡고 부서진 갑옷을 입은 언데드 킹의 이름은 바이레스였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마니아들은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연대표를 뒤지며 그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바이레스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맹왕(猛王) 바이레스. 아바란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정복왕으로 그로지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정복왕은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그로지아를 향해 검올 뽑아 들었다. -가자. 아바란의 용사들이여! 짐과 함께 동방의 오량캐들을 정벌하자! -우! 우! 우! 죽음에서 부활한 맹왕의 군대는 거침이 없었다. 과거 그들과 싸우다 언데드가 된 그로지아의 기사들이 맹왕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들의 뒤를 이어 아이템과 경험치를 노리고 모여든 유저들이 맞서 싸웠지만. 수만의 언데드 군단을 상대론 벅차기만 했다. "크읏, 우리 길드 녀석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 다 죽겠어!" 바이레스의 군대에 포위당한 유저들은 발을 동둥 굴렀다. 뒤가 열려 있으면 도망치기라도 하겠지만, 바이레스는 능수능란한 전술 운영을 보여 주며 삽시간에 그들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 죽어라! 짐의 앞읕 막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님아, 제발 자비 좀!" "딴 필드 가서 놀 테니까 한 번만 살려 주세요!" 견디다 못한 유저들은 바이레스에게 애원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포위된 유저들을 언데드 창병들이 압박하고 궁수들이 계속 화살을 날려 댔다. "크윽, 이대로 전멸인가?" 유저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을 때였다. 갑자기 언데드 군단의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번득이는 초열의 검기가 쓸고 지나가자. 언데드들의 몸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뭐- 뭐냐? "우와.저건!" 바이레스는 순간 당황했고,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소멸되는 언데드 병사들 사이에서 쌍검을 든 전사가 나타났다. 이미 몇몇 유저들은 그가 사용한 초열의 검기만 보고도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바츠다! 광전사 바츠야!" "만세! 우린 이제 살았다.!" 광전사 바츠 과거 광룡 카세라스를 물리치고, 언데드로 되살아난 광룡을 다시 스러트린 아르페디아의 특급 히어로가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비록 바츠 혼자서 수만의 언데드 군단을 물리칠 순 없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발견한 유저들은 기세를 붇돋았다. -저놈. 저놈부터 죽여라! 바츠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안 바이레스는 갖고 있는 모든 전력을 집중시켰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언데드 군단을 보며 바츠, 아니 유한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래, 와라. 몽땅 다 와라!" 유한은 언데드 군단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수십 개의 창칼들이 한꺼번에 날아오고. 화살들은[분문은 화살이 라고 되어있지만 화살들은 이 맞는것 같아 바꿉니다. by. 곰] 회피할 사각을 허용하지 않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보통 유저라면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유한은 앞으로, 또 앞으로 나갔다. "다 쓸어 주마." 그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가 거칠게 날뛰었다. 난폭하게 휘둘러지는 불꽃의 검에선 강력한 스킬들이 연방 번득였다. 그럴 때마다 바이레스의 언데드 군단은 잘려 나가고, 부서지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평소의 바츠가 광전사로서 유명하다지만. 오늘은 더한 것 같았다. "오오, 역시 바츠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바츠님을 돕자고." 힘을 얻은 유저들은 유한을 도와 언데드 군단을 공격했다. 점차 전세는 유저들에게로 기울어 갔다. 속속 도착하는 지원군들이 힘을 보태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선두에서 맹활약을 하는 유한의 덕이 컸다. -네 이놈. 짐이 손수 베어 주마! 전세가 역전되려 하자. 바이레스는 직접 검을 뽑아 들고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바이레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유한은 그가 탄 언데드 전마(戰馬)의 다리 베어 넘겼다. 다리를 잃은 말이 쓰러지려 하자. 바이레스는 바로 안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그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했던 유한은 플라잉 소드 스킬로 바이레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히든 이벤트의 주인공답게 바이레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서 검과 방패를 휘둘리 유한이 조종하는 플라잉 소드를 막아 내고는 가볍게 땅위로 안착했다. -제법이구나. 그로지아의 국왕이 보냈느냐? "그로지아랑 상관없어. 솔직하게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 - 그런데 왜 짐의 행보를 방해하느냐! "그냥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해서." 그렇게 응답한 유한은 곧장 바이레스를 공격했다. 빠르고 사나운 바츠의 검격이 연달아 바이레스에게로 떨어졌다. 바이래스는 침착하게 공격틀들 막고 흘렸다. 그러다가 유한을 향해 매섭게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닿지 않을 거리라 안심하던 유한은 바이래스의 검이 쭉 늘어나자 깜짝 놀랐다. 캉! 유한은 양손에 든 플레임 소드를 교차하며 간신히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바이레스는 유한이 주춤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연방 검격을 퍼부어 댔다. 길이가 제멋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바이레스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뱀 같았다. '뭔가 했더니 체인 소드(Chain Sword)였군.' 예전에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뉜 검신이 철사에 꿰여져 있는데, 철사를 교묘히 조종하면 검의 길이가 제멋대로 변하곤 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는 이제까지 나오지 않았던 무기. "바츠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유한이 바이레스에게 밀리자, 근처에 있던 기사 유저가 창을 들고 다가왔다. "비켜!" 하지만 그는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를 공격한 것은 바이레스가 아니라 유한이었다. "내 싸움에 끼어드는 자는 누굴 막론하고 죽는다." 바츠가 변했다고 하더니 헛소문이었던모양. 그리 판단하자 기사 유저는 잽싸게 유한의 결에서 물러났다. 틈을 봐가세하려던 다른 유저들 역시 아참가지였다. 꼽사리 껴서 경험치나 아이템을 챙기려다간 바츠의 손에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흥. 오만한 놈이로다 짐과 일대일로 겨루고 싶은 게냐? "말했잖아, 화 좀 풀려고 할 뿐이라고." 유한은 검을 앞으로 내밀어 날아든 체인 소드를 단단히 엮었다. 카가강![본문은 카카캉! 인데 카가강이 맞는것 같이 수정합니다. by. 곰] 체인 소드가 플래임 소드에 휘감겨 꼼짝도 하지 않자. 바이레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유한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바이레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넌 화풀이감도 안 되는 것 같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한의 모습이 바이레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초고속의 대쉬 스킬이 번뜩이자. 바이레스의 머리가 천천히 몸에서 떨어졌다. -크윽! 짐의 야망이 여기서 끝날 수는‥‥‥. "그런 건 널 약하게 만든 드림맥스에 따지라고." 바이레스가 죽자, 그의 언데드 군단을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잔달을 섬멸하며 경험치와 아이템을 챙기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게 마지막 언데드까지 때려잡은 뒤,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한참 신나게 떠들썩대던 유저들은 이번 싸움의 주인공이 없다는 것 알았다. "얼래? 바츠 어디 갔지?" "그러게, 방금 전만 해도 있었는데‥‥‥." 당황한 유저들은 곧 바츠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축배를 들었다. 바츠의 뒷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은 그들이었다. 2 바이레스를 때려잡은 유한은 인근의 사냥터 몇 개튤 더 초토화시킨 후 캡슐 밖으로 나왔다. "하아, 역시 이런 걸로는 화가 안 풀려." 예전하곤 달랐다. 교감과 정현일의 수작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을 땐, 게임 속 가상 공간에서 날뛰며 현실을 잊고 분노를 풀었다. 그러나 지금을 달랐다. 게임에서 괜한 화풀이를 해 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떄문이다. "역시 직접 작살을 내 놔야 해." 그렇게 마음먹은 유한은 다음 날 학원을 파하자마자 학림고로 쳐들어갔다. 하교시간에 정현일이 교문 밖으로 튀어나오면 반쯤 죽여 놓을 생각이었다. 그떄는 운전기사라는 변수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으니 운전기사가 등장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교 시간이 지나고, 해가 졌는데도 정현일은 나오지 않았다. '담 넘어서 튄 건가?' 학림고는 뒷문이 없다. 그리고 정현일은 자신이 매복해 있는 줄을 모른다. 혹시 예상할 수는 있지만 패거리를 불러다 동행시키는 건 몰라도 찌질하게 월담올 할 놈은 아니다. 결국 유한은 작전율 변경했다. 그는 학림고 근방의 캡슐방에 들어갔다. 대기실에 학림고 교복을 입은 양아치들이 담배를 피우며 떠들고 있었다. "야, 정현일이 지금 어디 있어?" "넌 뭐야? 누군데 현일이 형을 찾아?" 말하는 걸 봐서는 유한을 모르는 1, 2학년들인 모양. 유한은 건들대며 구긴 인상을 들이미는 덩치 큰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콩팥이 있는 곳을 제대로 맞은 녀석은 얼굴색이 새파랗게 바뀌며 고꾸라졌다. "이 자식이 미쳤나? 어디서 선방질이야?"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우리가 누군지 알아?" 양아치들이 우르르 일어섰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유한이 아니다. "정현일이 꼬봉이잖아. 말하기 싫은가 본데, 형이랑 밖에서 상담 좀 하자." 유한이 따라오라는 듯 대기실을 나가자. 양아치들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캡슐방 건물에서 나가기 전에 유한을 공격했다. 제일 선두에 있던 노랑머리 녀석이 유한의 둥올 노려 날아차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녀석의 발이 유한의 등에 닿기 전. 유한의 뒤 차기가 녀석의 복부에 꽃혔다. "크헉!" "기습을 하려면 살금살금 해야지." 날아 차기를 한답시고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들었다. 요새는 농떙이 중이라지만, 극기도 도장에서 감을 쌓은 유한은 그런 허술한 기습에 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상담할래? 뭐, 나야 좁은 곳에서 싸우면 유리해서 좋지만." "이 미친 새끼!" "밟아 버렷!" 양아치들은 한꺼번에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딴에 한 싸움하는 모양인데, 발차기만 봉쇄하면 저 망할 녀석도 별거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한은 녀석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무기가 있었다. 그건 주먹이었고, 발차기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며 사납게 후려칠 수 있었다. 좁은 곳에서 사용하기에도 무척 유용 했다. 유한은 침착하게 달려드는 녀석들의 턱과 코, 관자놀이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발치기라는 떡밥에 낚여 주먹이 날아 올 줄 몰랐던 바보 녀석들은 몽땅 건물 복도에 널브러졌다. "아오, 내 코! 내 코가!" "턱이 부서진 거 같아!" "이제 형이랑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냐?" 유한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양아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정현일이 어딨어?" "모, 몰라요. 요새 현일이 형 학교도 잘 안 와요." "학교에 안 온다고?" 유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채린올 불러내더니 이젠 아주 학교도 떼먹고 껄덕댈 속셈인 듯. "야, 인마. 학교 안 와도 그 새끼가 잘 들락거리는 데는 있을 거 아냐. 그래, 안 그래 ?" "그, 그래요." 유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주눅이 든 양아치들은 곧장 실토를 했다. "알고 있으면 안내해." "그. 근데 거긴 일진 간부들이나 가는 데고. 우리 같은 졸때기가 갔다간 맞아 죽는데요." "그래? 그럼 지금 내 손에 맞아 죽어야겠네. "아. 안내할게요." 때리는 건 좋아도, 맞는 건 싫은 녀석들은 정현일의 근거지로 안내했다. 유한은 녀석들을 따라가면서 미리 준비해 온 가죽장갑을 손에 꼈다. 근거지에는 정현일을 따르는 양아치들이 득실득실할 것이다. 어쩌면 운전기사도 옆에 있을지 모른다. '괜찮아, 만약을 대비해 챙겨 온 아이템이 있으니까.' 유한은 주머니 속에 있는 전기 충격기를 만지작 거렸다. 옛날에 아버지가 집에 도둑이 들면 쓸 거라며 구해놓은 것인데, 슬쩍 가지고 나왔다. '그 망할 운전기사 놈도 이것만 맞으면 구운 오징어처럼 널브러질걸, 크크크!' 유한이 그렇게 웃을 때였다. "경찰 아저씨! 살려 주세요!" "깡패가 우릴 괴롭혀요"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유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을 보니 길 안내를 하던 양아치들이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놔, 양아치 주제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해?' 유한은 양아치의 자존심을 팔아 버린 녀석들의 행각에 황당했다. 적어도 양아치라면 자신보다 고렙 몬스터인 조폭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않는가→않은가 by. 곰] 그러거나 말거나 NPC 민중의 지팡이는 법질서 확립을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학생. 이리 와 봐." "나 잘못한 거 없어요, 저놈들이 더 질이 나쁘다고요. 한 명이 여러 명을 괴롭히는 거 봤어요?" 유한의 말에 경찰은 양아치들을 돌아보았다. 유한의 말이 일견 타당해 보였기 때문. 녀석들은 최대한 불의에 시달리는 시민, 아니 학생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유한에게 맞아서 터지고 멍이 든 그들이기에, 연기는 경찰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빨리 이리 와 봐. 주머니에 있는 건 또 뭐야? 칼이나 나이프 같은 거 아냐?" 절대 칼이나 나이프보다 더한 물건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현일을 만나기 전에 경찰서 구경부터 하게 될 테니까. "아뇨, 지갑이에요. 지갑" "지갑이면 꺼내 보든가. 이리 오라는데 왜 자꾸 뒷걸음 질을 쳐?" 결국 주춤주춤 물러나던 유한은 돌아서 냅다 도망치고 말았다. 호각 소리와 함께 경찰의 고함 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야, 너! 당장 거기 안 서?" "난 무고하다니깐요!" 유한은 한 시간 이상의 하프 마라톤을 뛴 끝에 간신히 경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정현일을 손봐 주겠다는 계획은 좌절되었다. 정현일이 양아치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앞으로 놈을 두들겨 팰 기회를 만들기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크악!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어!" 죄 없는 거리의 가로수를 걷어찬 유한은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3 "지그 녀석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리지스는 비어 있는 회장 자리를 바라보며 연방 투덜거렸다. 삐쳐서 로그아웃을 한 다음에 잠시 돌아온 것 같더니, 어제는 하루 종일 접속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그 제철소의 쏟아지는 중요 업무와 거래를 혼자서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유한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까 바츠로 놀았다 이거야?" "응, 누님. 맹왕 바이레스랑 일대일로 싸워서 썰어 버렸대." 리지스에게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앤스였다. 바이레스 군단의 부활을 전해 들은 그는 서둘러 블루 라이언스들을 끌고 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싸움이 끝난 다음이었다. 유한에 대한 이야기도 전투에 참여한 유저들로부터 들었다. "난 서류 더미에 처박아 놓고, 저 혼자 특급 이벤트를 즐겨? 이건 배신이야, 배신!" "누님, 좀 봐주쇼. 바츠 요새 꽤 열 받을 일이 있어서 그래." "열 받올 일이라니?" 리지스의 물음에 엔스가 대답하려 했지만,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오펜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시아가 요새 바람를 피우나봐." "뭐? 정말?" "학교 점심시간 때 어떤 애랑 같이 가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어머나, 내 말이 씨가 됐네." 그제는 유한을 놀리느라 채린이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닌가 하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지스는 자신의 예상이 맞은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혹시 사귀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 "부자라던데? 통학용 승용차도 있는 것 같더라." 리지스는 오펜의 말을 듣고 두 눈을 반짝였다. "토, 통학용 승용차? 그럼 운전기사도 있겠네? 보디가드도! "뭐 그럴지도. 그리고 이건 애들에게 주워 들은 이야기긴데 그 일현인지 현일인지 하는 애가 학림고 일진 짱이래." "학림고 일진짱 정현일이라고?" 이번엔 옌스가 반응을 보였다. 리리스와 오펜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뭐 아는 거 있어, 불량배 학생?" "싸움 실력은 그저 그런데 머리를 잘 굴린다는 놈이던가? 돈도 많고 조폭들하고도 연줄이 있어서 그 근방 학교 패거리들은 다 녀석에게 굽실댄다 하더라고." 복성공고의 싸움 대장으로, 강북 지역을 평정한 옌스는 웬만한 학교의 일진 간부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현일에 대해서 이름만 알 뿐, 얼굴까지 알고 있진 않았다. 학림고와는 거리도 있고 충돌이 일어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이구. 채린이 얘는 하필이면 질 안 좋은 녀석이랑‥‥‥." 리지스가 혀를 쯧쯧 차자 옌스가 심드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님, 아까는 동경하는 것 같더니?"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돈 많고, 잘생겼고, 머리 좋고, 성실하고, 성격도 괜찮은 사람이야. 돈만 많고 싸가지에 애들 끝고 다니며 뒷골목 대장 노룻하는 양아치는 아니라고." 리지스의 말을 듭은 앤스는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무식한 그였지만. 그런 완벽한 사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재한다면 백사장에 진주가 떨어져 있을 확률만큼일 터. "누님은 이제 독신 당침이군. 노처녀 칭호도 달겠고" "카악! 뭐야!"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이러시나?" 펄펄 뛰는 리지스를 오펜이 간신히 붙들어 말렸다. 여전히 씩씩대는 그녀에게 오펜은 부드러운 충고를 해 주었다. "리지스.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만나는 방법이 뭔 줄 알아?" "뭔데?"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는거야. 그래야 이상형이 나타나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어." "그, 그렇구나." 리지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오펜을 바라보았다. 오펜은 생긴것이 깔끔한데다, 머리가 좋고, 성실하고 성격도 좋았다. 단 하나만 빼면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이었다. 부자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런 점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돈이야 나중에 일해서 잔뜩 벌면 되니까. '나 어쩌면 가까이에 있는 왕자님을 못 보고 있었는지도!' 머릿속이 장미빛으로 가득 찬 리지스는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는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실례합니다." "형, 칼 부러졌어. 수리 좀 해줘." 안으로 들어온 것은 얀과 베르디였다. 혹시나 유한이 접속한 건 아닌가 기대했던 리지스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어? 우리 형 접속 안 했어요>" "너네 형이니까 네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나랑 베르디는 지금 캡슐방에 있어서요." 데이트 중에 소나기를 만난 얀과 배르디는 잠시 비를 피할 겸 해서 캡슐방에 들어갔다. 유한의 동정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나 너네 형 때문에 결제 서류에 깔려 죽을 판이거든. 그러니까 빨리 접속하라고 해. 바츠 말고 지그로>" "알았어요, 전화해 볼게요." 리지스의 청을 받아들인 얀은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 밖 으로 나갔다. "아놔. 이 인간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유현은 짜증이 났다. 학원을 마쳤을 시간임에도 유한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다. 몇 번이고 전화를 했음에도 그랬다. 혹시나 해서 집 전화로 해 봤지만, 받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현재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신 중이라, 이래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브라더랑 통화 안 돼?" 유현이 금방 돌아오지 않자 베르디, 아니 세라도 접속을 종료하고 캡슐 밖으로 나왔다. "진짜 왜 이러나 몰라. 드라마 같은 상황이 됐다고 자기가 무슨 드라마 속의 주인공인 줄 아나." 드라마 같은 상황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음에도 그렇게 만들고 온 멍청한 형이었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유한의 표정만 보고도 유현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현, 혹시 큰일 난 게 아닐까?" "큰일이라니?" "깡패 시스터가 브라더 배신했다며? 브라더 쇼크 받고 스스로 kill 한 게‥‥‥." "자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일 없어." 유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요새 유한의 감정이 무척 격해진 상태가 아니었던가. 채린에게 사정을 말하러 갔다가 상황이 더 이상하게 되어버렸다면? 세라의 말대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집에 가 봐야겠어." "세라도 같이 갈래!" 캡슐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어둡고 싸늘한 침묵이 그들을 맞았다. 유현과 세라는 서둘러 유한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당도해서는 방문을 열지 못했다. 문을 열면 목을 맨 유한의 모습이나 피로 붉게 물든 방바닥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제발 멍청한 짓은 하지 마!' 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방문을 열었다. 어둠과 함께 답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 들어은 건가?" "그럼 혹시 밖에서‥‥‥." 안도하던 유현은 세라의 말에 다시 불길한 상상올 하였다. 유한이 빌딩 옥상에 서 있다거나, 으슥한 공원에서 목을 맨다거나. 그러나 그런 상상은 5분도 안 돼 깨지고 말았다. "망할 놈의 기상청. 비 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한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간 유현과 세라는 비를 쫄딱 맞은 유한을 볼 수 있었다. "브라더, 살아 있었네요!"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유한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집 안에서 동생 커플이 튀어나오더니 잔소리를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한은 어이없다는 둣. 언성을 높였다. "이 바보들아! 내가 그런 일로 자살할 것 갑냐!" "그럼 전화했을 때 받듣가! 안 받으니까 걱정이 되잖아." "전화?" 뒤늦게 유한은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부재중 통화가 여러 번 들어와 있었다. 하나같이 동생 번호. "아, 이거 좀 전에 경찰한테 쫓김 때‥‥‥." 시간대가 얼추 그때였다. 도망치느라 바빠서 전화벨이 울리는 줄도 몰랐다. "경찰에 쫓기다니? 형 설마 정현일 그놈을‥‥‥." "브라더!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안 돼요!" "그런 거 아니거든!"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는 동생커플이 못 마땅했지만, 한편으로 유한은 그들에게 고마음을 느꼈다. 괴롭고 답답한 자신을 걱정해 주었으니까. 4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유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유현과 세라가 있다가 그가 오자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야? 자살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 말고 나가. 세라 넌 얼른 집에 도라가고." "걱정해서 있는 게 아니라 세라가‥‥‥." "깡패 시스터의 불륜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서요." 불륜 상대라니.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할 말이다 세라는 아무래도 한국어 공부를 더 해야 할 듯싶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유한의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멋대로 유한의 컴퓨터를 뒤져 문제의 스크린샷 파일을 찾았다. "저 풀더 클릭해 봐. 내가 저번에 형 몰래 거기다 파일을 모아놨어." "보지 마! 당장 삭제해!" 유한의 만류에도 붙구하고. 세라는 스크린샷 파일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파일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현, 이 스크린샷 파일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깡패 시스터 얼굴, 몸이랑 안 맞아. 그림자 위치도 달라." 이게 무슨 말인가. 유한은 후다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두 번 다시 보지 않기로 했던 스크린샷 파일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세라의 말이 맞았다. 정현일과 다정하게 불어 있는 채린의 모습에서 군데군데 이상한 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몸의 그림자 방향이 다르다거나, 눈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거기다 이렇게 확대를 하면‥‥‥." 세라는 이미지 뷰어 프로그램의 확대 기능으로 얼굴의 취대한 확대시켰다. 얼굴 주변의 픽셀들이 다른 곳에 비해 부자연스러웠다. 같은 색으로 덧칠을 하거나, 문지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이 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포샵질!" 유한의 생각대로 이 스크린샷 파일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조작되어 있었다. 정현일이 학림 아카데미에서 채린에게 접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연인처럼 다정한 포즈를 취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지는 못했다. 채린이 다른 여자애들과 달리 쉽게 넘어오지 않은 탓이다. 이러다 보니 정현일은 조바심이 생겼다. 유한은 제철소를 완공하고, 과거에 바츠였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기세등등해 하는 유한의 얼굴을 구겨 놓고 싶었다. 그래서 정현일은 채린과 키와 몸매가 비슷한 여자에를 꼬셔 사진을 찍고 거기다 채린의 얼굴을 붙여넣었다. 물론 이것은 학림고에서 합성에 꽤 실력이 있다는 녀석을 시켜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대충 봐서는 합성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유한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안목은 둘째 치고, 정현일과 채린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에 너무 흥분해 파일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채린이 요근래 격조했었으니까. "이, 이거 진짜 합성된 거 맞아?" "세라가 본 거라면 틀림없어. 명색이 미술 대학 지망생이니까" 유한은 그 자리에 털씩 주저앉았다. 이게 합성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때 레스토랑에서의 일도 정현일의 수작이었던 것은 아닐까? 채린은 아무런 사심 없이 밥만 갑이 먹은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자신은 정말 실수한 셈이다. 채린을 믿어 주지 못하고 오해하여. 정현일이 좋아할 일만 하고 말았다. 아마 놈은 자신과 채린을 갈라놓는데 성공했다 생각하여 채린에게 더둑 껄떡대고 있을 터. "으악!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착가한 거라면 얼른 사과를 해야지." 동생의 말은 맞았다. 유한은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몇 번 울리다가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린아, 난데‥‥‥." "나 너랑 할 말 없거든." 유한이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채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안해진 유한은 다시 전화틀 걸었다. 그런데 몇 번이고 전화를 해도 채린은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 '그러게 왜 싸워서는‥‥‥.' 어두운 표정을 짓는 형을 보며 유현은 혀를 끌끌 찼다. 형이 오해한 만큼 채린 누나도 감정이 상한 게 를림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아무리 시원시원하다 해도 근본은 여자였으니까. 남자보다 감정이 섬세할 것이고, 그만큼 한번 삐치면 회복시키기도 어렵다. "이제 어쩌면 좋지?" 곤란한 표정을 짓던 유한이 물끄러미 동생과 세라를 바라보았다. 연애 고렙인 녀석들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가서 싹싹 빌어요. 브라더." "그래.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비록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깨트려 놓고 간단히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말에 유한은 내일 채린을 찾아가 제대로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부디 채린이 그 사과를 받아 주어야 할 텐데. '아. 신이여!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날 밤새도록 유한은 신을 찾아 구원을 갈구했다. Chapter 03 학원에 잠입하다 1 여느 때와 같은 여름날 아침. 교문 앞에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태호 선생은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 또 왔네." 얼쩡거리고 있는 녀석은 바로 유한이었다. 채린을 직접 만나 사과하기로 한 유한은 해가 뜨자마자 강서고 교문 앞으로 달려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거기 너. 이리 좀 와 봐." 이태호가 자신을 부르다, 유한은 주춤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저 수상한 놈 아닌데요." "그래, 안다. 너 지그지? 지그 제철소 회장인." "맞습니다. 강유한이라고 합니다." 유한도 이태호를 게임에서 몇 번 본 일이 있었고, 채린과 강서고 학생들에게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이 학교의 학생 주임이자 채린의 담임임을 알고 있었다. "너 채린이 때문에 온 거지?" 유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태호는 손에 든 굵직한 사랑의 매로 유한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인마, 연애질은 게임 속에서 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아? 요새 채린이 공부한다고 바뻐, 일, 이 학년 내내 성적도 나빳던 녀석이 대학은 중상위권에 같 거라고 업마나 열심인지." "그래요?" "그래. 에들한테 듣기론 남자 친구가 장학금 마련해 줘서 그렇다는데‥‥‥ 너 대체 걔한테 뭘 해 준 거냐?" 유한이 채린의 대학 장학금을 마련해 준 것은 맞았다. 예전에 국내 굴지의 기업인 미래 모터스가 광고 협찬을 하자고 찾아왔올 때, 그는 자신과 채린,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을 요청했었다. 미래 모터스는 장학금이란 명목으로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 이야기는 채린에게 하지 않았는데.' 아비지와 송코에게만 살짝 이야기했을 뿐이다. 아마 송코가 채린에게 말해 준 모양. '아! 그래서 채린이가 요즘 게임 속에서도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거구나.' 유한의 성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유한과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것도 모르고 유한은 채린이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다고 섭섭해 했고. 정현일의 꾐에 빠진 줄 알고 오해했다. 혹시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 것도 송태수가 보낸 것이 아니라 채린이 졸라서 간 건 아닐까. 다른 걸 떠나서 성적은 기가 막히게 올려 준다고 소문이 난 곳이니까. "아무튼 연애질은 밤에 게임에 접속해서 해라. 나는 연애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해도 안 늦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한다. 왜냐하면 그거 다 헛소리거든. 내가 너만 할 때 그 말 믿고 공부만 했다가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허망하게‥‥‥." 이태호의 설교를 유한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그러다 낯익은 목소리를 포착했다. 고개를 들린 유한의 눈에 또래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채린의 모습이 보였다. 유한은 곧장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채린은 잠깐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니?" "채린아, 저번에 그 일은 내가 오해해서 그런 거야. 너 하고 있던 녀석이 정현일이란 놈인데. 나하고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 그 자식이 보복한잡시고 날 이용해서 날 열받게 만들려고 했어. 난 네가 그놈 농간에 놀아나서 정말 그 자식이랑 사귀는 줄 알고‥‥‥." 유한은 복잡한 사정을 되도록 간략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 지겹게 느껴졌던지, 채린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오해해서 미안하다. 네 말 안 듣겠다고 한 것도 잘못 했어. 그러니까 우리 옛날처럼 사이좋게 지내자." "그래?" 채린이 밝게 미소를 지었다. 쌀쌀맞던 그녀의 얼굴에 맴도는 미소를 보고 유한은 환하게 웃었다. 채린이 이제야 자신의 사과를 받아 준다고 생각했다. "나도 널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근데‥‥‥." "커헉!" 유한의 환한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사과하던 채린이 야멸차게 움켜쥔 주먹을 그의 복부에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유한은 막을 틈이 없었다. "그때 나 무척 실망했어. 너랑 일현이, 아니 정현일인지 하는 애와 무슨 악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날 못 믿는 것 같아서 정말 싫었어. 나는 날 겨우 요만큼밖에 못 믿은 애랑 사귀고 있었구나 싶던 거 있지." "채, 채린아." 유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아 줘."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한 채린은 쌩하니 학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채린의 말에 유한은 석화 마법에라도 걸린 듯 단단히 굳어 버렸다. 그 이상 상태는 채린이 교문을 통과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태호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유한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운해서 저러는 거다, 며칠 지나면 화가 풀릴 테니까 너무 걱정 마라.' "선생님!" 채린의 마음을 완전히 푸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한은 진짜 선생님 같은 분의 말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2 유한이 채린을 다시 만난 그날 저녁 오랜만에 대장장이 지그가 아르페디아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헉! 이건 뭐냐?' 접속과 동시에 무섭게 밀려드는 어둠의 기운에 깝짝 놀란 유한은 검읕 뽑으며 돌아섰다. 어둠의 기운을 흘리는 주인공이 눈을 부라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지이이~ 그으으!" "아, 안녕 리지스." 유한에게 화가 난 소녀는 채린뿐만 아니었다. 그간 제철소 업무까지 몽땅 떠말아 했던 리지스는 자신을 고생시킨 원흉이 나타나자 악귀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기로서니, 날 이렇게 골탕을 먹여?" "미안하다. 리지스. 사과하는 뜻으로 백만 골드 줄게." "백만 골드?" 유한의 한마디에 리지스는 언제 화를 냈느냐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어몸둠의 원령에서 관대한 천사로 바뀌는 그녀의 모습에 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 "어머, 꼭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뭐 준다면 고맙게 받을게." '이 녀석은단순해서 좋군.' 채린이도 이렇게 마음을 풀어 주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그거랑은 상황이 달랐고, 동업자 수준인 리지스를 연인인 채린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농땡이 치고 싶으면 얼마든지 쳐도 좋아. 대신 농땡이 칠 때마다 백만골드씩 주기다." 백만 골드라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철공소를 하나 세울 수 있는 액수었으니까. 그리나 이제 아르페디아 갑부 소리를 듣는 유한에게는 껌 값일 뿐이다. "알았어. 근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리지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한은 곧장 질문을 던졌다. "요 며칠 사이에 시아가 제철소에 온 적 있어?" "없어, 쪽지를 보내니까 한동안 학림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공부할 거라던데. 그리고‥‥‥." "그리고 뭐?" 바람 피운 거냐고 물으니까 엄청 화를 내더라.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나도 자세히 좀 알자." "그냥 내가 경솔했기 때문에 작은 다툼이 있었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지라 유한은 대충얼버무렸다. 그는 리지스를 만난 김에 한 가지 더 물어보기로 했다. "너 혹시 아이템 현 거래 해 본적 있어?" "아이템 현 거래? 나더 그거 해서 돈 벌려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돈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다른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들과 같이 아르페디아 온라인도 아이템 현 거래가 존재한다. 대체로 게임을 편하게 하겠다는 사람들이 현금으로 게임 머니나 아이템을 사들이곤 했다. 현재 레어 급 아이템은 종류에 따라 몇 십에서 몇 백 만 원, 유니크 중 어떤 것은 천 만 원대에 거래되곤 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인기와 시장 점유율이 그런 가격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게임 머니도 환율이 있어. 거기다 현 거래만 전문적으로 하는 유저나 길드들도 있고.." "그런 놈들은 나도 본 적이 있지. 지난번에 레뮤다 대륙에 갈 적에 만났던 아르마달 길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은 왜 필요한 건데?" 유한이 가진 아이템 몇 가지만 팔아도 적지 않은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으응, 그게‥‥‥." "알겠다! 너도 시아 따라서 학림 아카데미에 가려는 거지? 바람날까 봐 옆에서 지키려고." "그거 아니거든!"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리지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했다. "아니라고? 분명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죽어도 학림 아카데미에는 안 갈 거거든? 학림 재단 놈들에게 돈을 갖다 줄 바에는 그냥 동네 초딩들한테 뿌리겠다!" 생쥐 스프를 주는 집단에게는 10원짜리 하나라도 주기 싫은 유한이었다. 그래서 채린이도 얼른 빼내서 다른 학원에 다니도록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학원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미래 모터스 관계자의 방문 이후로도 '게임=공부 방해'라는 부모님의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한이 게임 내 학원에 대해 말해 봤지만. 회의적으로 여길 뿐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공부 안 하고 게임만 더 하려는 게 아니나며 역정을 내셨다. 자연히 게임 내 학원에 등록하기위한 자금은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자금은 스스로 마련헤애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인 바로 현 거래였다. "일단 내가 가진 아이템들 중 일부를 처분했으면 하는데, 리지스 네가 거래 시세 좀 알려 줘." "그럴 게 아니라 직접 처분해 줄 테니까 나한테 맡겨, 수수료는‥‥‥‥ 지그 넌 동업자라 공짜로 해 줄게." "그래? 고마워." 유한은 리지스에계 현 거래를 믿고 말기기로 했다. 계산에 밝은 그녀라면 잘 처분해 줄 테니까. '일단 학원비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기로 하고‥‥‥.' 미리 봐 둔 학원도 있겠다, 이제 남은 것은 채린을 학림 아카데미에서 빼 오는 것뿐이다. 문제는 채린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인데, 현재 채린이 단단히 토라진 상태임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한다. 자칫 귀찮게 구는 둣한 느낌을 주면 역효과가 나기에. '일단 대화보다는‥‥‥.' 쪽지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학림고나 정현일에 대해선 말해야 할 것이 많고, 그것을 정확하게 정리하자면 귓속말보다 쪽지가 유리할 것 같았다. 더구나 볼쑥불쑥 눈앞에 떠오르는 귓속말보다 쪽지는 상대를 덜 귀찮게 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 내 한 맺힌 과거를 채린이에게 모두 이야기해 주는 거야.!" 유한은 자신이 갖고 있는 필력을 모두 동원하여 정성스레 쪽지를 작성했다. 학림고와 정현일의 만행을 유효적적하게 부풀리고, 그 뒤로 독불장군 바츠로 방황하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적어 나갔다. '됐다. 이만하면 채린이를 설득할 수 있겠지.' 프그램된 게임 이벤트에도 울고 웃던 채린이다. 그만큼 감정이 풍부하다는 말이고, 그런 그녀라면 이 쪽지를 보고 자신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럼 화를 풀 거고,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지' 유한은 희망올 품고 다 적은 쪽지를 채린에게로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안내 문구가 유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시아 님께 쪽지를 발송할 수 없습니다. 학원 필드는 면학 분위기 조성울 위해 외부에서 전달되는 쪽지와 귀솔말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건 뭔 개소리야!" 유한은 펄쩍 뛰었다. 기껏 정성 들여 적은 쪽지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 "왜 쪽지가 안 된다는 거야? 그럼 리지스가 보낸 건 뭔데!" 유한은 몰랐지만, 앞서 리지스가 보낸 쪽지가 채린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모르는 유한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다 생각했고. "제기랄, 드림맥스 이 자식들 제멋대로 굴고 있어!" 단단히 화가 난 그는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장 손석진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3 바츠 해킹 사건의 주범인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은 요즘 한창 바빳다. 이미 서비스되고 있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새로운 이벤트와 컨텐츠를 업데이트시키는 일도 하지만. 드림맥스의 신작 게임 개발에도 적극 창여하고 있었다. 그가 한창 신작 게임의 배경과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을 때, 유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유한 군.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 드림맥스 게임 시스템 진짜 대단하네요! 사람을 차별할 줄도 알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자세히 말해 보세요." "그러니까‥‥‥." 유한은 쪽지의 학원 필드 전달 불가와 관련해서 리지스의 쪽지가 채린에게 전달되고 자신의 쪽지는 차단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정을 들은 손석진은 손수 게임 데이터베이스를 살펴서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조사해 보았다. 유한의 말에 혹시 오류가 난 게 아닌가 우려했는데. 알고 보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한 군. 시스템에 오류가 있어서도 아니고 저희가 유한 군이 미워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마십쇼!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리지스 양의 쪽지가 시아 양에게 전달되었을 시간에 시아 양이 마침 학원 필드 밖에 있었습니다. 유한 군이 쪽지를 보냈다 거부된 시간에는 시아 양이 학원 필드 안에 있었고요." "그, 그런‥‥‥." 정확한 설명을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진 유한이었다. "아무 이상 없으니 안심하고 게임을 즐기세요. 그럼 이만." 손석진은 거기서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유한의 다급한 외침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개발자님,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 달라니요?" "얼마 전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 시아가 뼈쳐버렸거든요. 그래사 쪽지를 보내려는데 안 들어가져서‥‥‥ 제 쪽지만 어떻게 시아에게전달되게 해 줄 순 없습니까? 유한의 부탁에 손석진은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글쎄요. 그건 곤란합니다만." "곤란할 게 뭐 있어요? 개발자님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신이 잖아요, 창조주잖아요. 그 정도는 가볍게 주물러 처리하실 수 있지않습니까?" "뭐 못할 것은 없지만. 저번 일로 꽤 혼이 나서 말입니다." 바츠를 되살린 뒤로 손석진은 드림맥스외 감시를 받고 있었다. 또 뭔가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가 해서 말이다. 지금도 그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자. 부사장 정경욱이 달려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츠를 뭐하러 살렸냐고, 이 양반아!'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가 돌아온 탓에 중요한 순간에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니! "그냥 유한 군도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여친 분에게 직접 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미쳤습니까? 그런 도둑놈들에게 수강비를 주게요. 난 쪽지만 전달하면 된다고요." 하긴 그렇겠지. 유한이 과거 학림고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잘 아는 손석진은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좋습니다. 그런 이왕에 저지르는 김에 이렇게 합시다." "뭘 어떻게요?" 손석진은 힐끔 정경욱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가 조취를 취해 줄 테니, 유한 군이 학림 아카데미에 직접 들어가세요." "저더러 그곳에 들어가라고요?"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지금 저희도 이곳을 예의 주시 중인데, 유한 군이 한번 둘러보고 저에게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주면 좋겠군요." 손석진의 말에 유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직접 학림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나쁘지는 않았다. 채린을 설득하는 것은 물론, 정현일이 그녀에게 껄떡대는 걸 막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학림 아카데미에 가기 싫었던 건 예전에 퇴학당한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도둑놈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수강비를 요구한 탓이 컸다. '그림맥스에서도 주시 중이라면, 이놈들이 게임 내에서도 뭔가 구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가?'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 현실에서 학림 재단의 부정을 생각한가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좋습니다. 개발자님을 믿고 한번 들어가 보지요." 손석진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유한은 쾌히 그의 재의를 받아들였다. "가서 조심하십시오. 유한 군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이상 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당연히 그런 놈들이 있겠지.' 유한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손석진이 유한과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듣고 있먼 정경욱이 물었다.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고?" "꿍꿍이가 아니라 우리가 진행하는 조사를 보강하자는 검니다." 드림맥스도 얼마 전부터 학림 아카데미를 감시하고 있었다. 학림 아카데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흘러나왔기 때문. 뭔가 문제가 있다면 회사에서 먼저 밝혀내 시정하는 것 이 모양새가 좋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게임 데이터로 들어오는 정보로는 비리를 밝혀내기가 부족했고. 학림 아카데미의 학원장 제르달. 즉 정 교감은 예전에 티쳐스 때 당해본 적이 있어 그런지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다. "저번에 정 부사장님이 제안하섰죠. 우리 쪽 정보원을 학원생으로 넣어 보자고요." "그야 그랬지만‥‥‥." "유한 군은 예전에 학림고의 비리를 밝혀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퇴학을 당했고요. 학림고에 대해 우리보다 잘 알고 있는 유한 군이 좋은 정보를 가지고 올지도 모릅니다." "자네도 확신할 순 없는 거로군"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을 드림맥스 자체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향후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평판이 나빠질지도 모른다.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 봐야 했다. "알았어.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조심해야 돼. 잘못하면 저자들에게 역공을 당할 수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손석진은 게임 데이터배이스를 열어 유한의 개릭터 지그의 정보를 조금 수정했다. 학림 아카데미 학생으로 등록시키고. 인벤토리에 학원 교복도 넣어 두었다. 원래 이런 동록 작업은 학원에서 수강을 이수한 유적의 정보를 보내 주면 하는 일이었지만. 유한은 그 과정 없이 무단으로 처리되었다. "이제 유한 군이 정보튤 구해 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말인가?" "예,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요." 그렇게 말하면 손석진은 중단했던 신작 게임의 구상을 계속했다. 4 손석진의 도움으로 학림 아카데미 학생이 된 유한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마노스 제국으로 이동했다. 학림 아카데미는 마노스 제국의 황도에 있었다. 학원 앞에 당도한 유한은 화려하게 치장된 교문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만, 현실의 학림고 교문도 이렇게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나름 있어 보이려 노력한 듯한데 유한의 눈에는 암만 봐도 천박하게 보였다. "딱 지네들 수준에 맞게 노는군." 유한이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있다. 교문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 NPC가 유한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거기 당신!" '엥? 뭐야? 손석진 씨가 분명 손을 썼을 텐데.' 당황하고 있는 유한에게 다가온 경비 NPC들은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말을 늘어놓았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교복을 입어야 할 게 아닙니까!" "학원 내에선 던전을 제외하고 교복 이외의 차림이 허가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였던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유한은 착용하고 있던 불새의 코트를 벗고 인벤토리에 있던 학림 아카데미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됐수?" "그럼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교칙을 준수해 주십시오." "학생은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학생 주임 같은 소리를 하는 경비 NPC들이었다. 그렇게 교문을 통과해 학원 안으로 들어간 유한은 채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제길 아주 뻥튀기를 해 놨군.' 학림 아카데미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과 형형색색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정원들만 해도 웬만한 대학교를 능가할 정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둘러볼 수도 없는 노룻이고‥‥‥." 그러다 정현일 일당이나 학림고 선생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신을 도와준 손석진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래서 유한은 최대한 자신의 정체가 드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학원 안을 살펴보고 조사했다. 건물 안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교정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운동장에서 노는 학생들도 있었다. 떠드는 말을 들어 보니, 모든 학생이 같은 시간에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져 있거나. 대학교 강의처럼 수업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듯. '그런데 다들 주변에는 무신경하네.' 처음 걱정했던 거와 달리 학생들은 유한이 옆을 지나가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긴, 밖에서와 달리 학원 내의 유저들은 모두 교복으로 차림새가 통일되어 있었기에. 머리 위의 이름을 유심히 살펴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더구나 학원이라는 특수 공간은 친구나 성생임 외에는 신경 쓰지 않게 만들었으니. "심하게 티를 내거나 아는 놈과 마주치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겠는걸,' 그리 판단한 유한은 용기를 가지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붙들고 말을 건네 보았다. "저기, 시아라는 여학생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시아? 잘 모르겠는데요?" 몇 번이나 허탕을 쳤지만, 결국 채린을 아는 애와 만났다. "아, 시아요? 좀 전에 수업 마치고 월하의 공동묘지에 간다고 하던데?" "월하의 공동묘지요?" 유한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림 아카데미에 있논 3개의 던전 중의 하나다. 바로 저기 보이는 학원 뒷산에 있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한 유한은 후다닥 아카데미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학림 카데미는 3개의 던전과 2개의 사냥터를 가지고 있었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즐길 목적이라지만.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유료 던전인 셈. 그래서인지 이 던전과 사냥터에서는 몹이 주는 보상이 일반 던전보다 좋았고, 바깥에선 구할 수 없는 독특한 아이템들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수능 대비 문제집과 같은 학업과 관련된 아이템도 획득할 수 있다고. "학원 뒤에 묘지라‥‥‥ 그러고 보니 학림고에도 비슷한 게 있었지." 이사장의 부모라던가. 아무튼 꽤 호화로운 무덤이 학교 뒤에 있었다. 때때로 학생들을 동원해 풀올 뽑도록 시키기도 했다. "여기가 입구인가?" 뒷산 서면에는 월하의 공동묘지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유한이 묘지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하고 삭막한 풍경과 정체불명의 귀곡성이 그를 반겼다. 월하의 공동묘지는 넓고 을씨년스러웠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곳에서 채린을 어떻게 찾을지 걱정되었다. '하아, 결국 다 뒤져야 하나?' 곤란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유한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귓속말로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학원 필드는 외부의 쪽지와 귓속말을 차단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부의 것까지 차단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 밑져도 본전이니 한번 해 보자." 한편, 월하의 공동묘지 안으로 해온 채린은 약간 겁먹은 얼굴로 묘지를 해매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월하의 공동묘지는 무덤이 있는 지상과 각종 언데드 몬스터들이 배회하는 지하 납골당이 있는데 채올은 그만 지하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지하는 지상보다 훨씬 무서운데다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이다. 원래 어둡고 무서운 것은 질색이었던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간단했다. 월하의 공동묘지 보스 '천년호(千年狐)'를 쓰러트리면, '수능 족집게 예상 문제집' 얻을 수 있다고 학원 친구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수능 족집게 예상 문제집은 학림고에서 지난 수년간의 수능 기출 문제들을 정리하고, 서울대 입학생들의 수험 노트를 추가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밖에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오직 게임 내에서만 얻을 수 있는 레어 아이템. 안 그래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 애태우고 있던 그녀는 당장 그 문제집을 획득하기 위해 월하의 공동묘지로 왔다. 하지만 그 결과 이렇게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하를 헤매게 되었으니. 지상에는 그나마 애들이 많았는대, 지하에선 인적이 드물었다. "히잉, 이럴 줄 알았으면 파티를 짜서 오는건데."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울상을 지으며 전진하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것을 느꼈다. ᅳ어떤 놈이 내 무덩을 밟는 거냐! "꺅! 무덤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머리와 손을 보고 채린은 비명을 질렀다. 지하에 내려와서 몇 차례 겪어 봤지만 당최 적웅이 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채린은 자신의 다리를 불잡은 무덤귀의 머리를 들고 있던 랜턴으로 후려쳤다. -컥! 무덤귀가 손을 놓자 채린은 곧장 성월의 활로 바꿔 잡고 화살을 난사했다, "휴우, 간 떨어질 뻔했네." 무덤귀를 처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그녀, 그 틈을 노렸다는 듯이 허공을 맴돌던 퍼런 불덩이들이 달려들었다. -훔치자! 인간의 물건을 훔치자! -돈 내놔라, 돈! "꺄악! 이것들이!" 채린을 공격한 것은 '도둑깨비' 라는 몬스터로, 강하진 않지만 유저가 빈틈을 보일 때 아이템을 훔쳐 가는 고약한 놈들이었다. 달려든 도독깨비들을 밀쳐 낸 채린은 곧장 성월의 활을 쏘아 도둑깨비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도둑처럼 잽싼 녀석들은 이내 던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중요한 아이템이 없어지면 안 되는데‥‥‥." 다행히 고가의 아이템은 털리지 않았다. 도둑깨비들이 훔쳐 간 것은 소량의 골드와 인벤토리에 있던 여분의 랜턴이었다. "이런, 랜턴이 없잖아?" 랜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채린은 울상을 지었다. 하필이면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보게 해주는 이글 아이를 가져오지 않은 이때에 랜번을 모두 털리다니. 몬스터보다 어듬을 더 무서워하는 그녀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 이제 어떻게 나가지?" 채린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줄 귓속말이 날아왔다. -시아야, 나 너한테 할말이 있어. 지금 월하의 공동묘지 던전인데 어디 있는 거야? 유한이었다. 어떻게 학림 아카데미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비록 그에게 난 화가 덜 풀렸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 어둠 속에서 언제 흉측한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채린은 즉시 유한에게 귀속말을 보냈다. - 나 지금 지하의 미로야. 빨리 와 줘, 지그야. -알았어. 당장 달려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그곳에서 기다려. '히잉, 지그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어둠 속에서 채린이 손꼽아 유한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저벅이며 무언가가 다가왔다. '히익! 귀, 귀신이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깜짝 놀란 채린은 서둘러 근처 기둥 뒤에 숨었다. 그녀의 레벨이면 던전의 왠만한 몹들은 다 잡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숨기부터 하니.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것은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 그것도 여러 명. 그중에 선두에서 랜턴을 들고 있는 소년은 낯이 익었다. 그는 바로 일현. 아니 정현일이었다. "아!" 채린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려다 멈칫했다 랜턴의 불빛에 비친 정현일의 얼굴이 그녀가 알던 상냥한 일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드름과 야비함으로 가특찬 얼굴. 채린은 예전에 그런 얼굴을 한 유저를 본 적이 있었다. '베히모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도로 기둥 뒤로 숨었다. 정현일과 그의 일행은 그녀가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 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계속 키득거렸다. "그 계집애가 잘 안 넘어온다고?" 뒤에 있던 녀석의 물음에 정현일은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강유한을 담당했던 선생한테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지. 그 주소로 사진을 보내니까 둘이 알아서 싸우다가 갈라지더라고, 거기까진 성공했는데. 이게 잘 넘어오지 않네." "그래? 그럼 앞으로 어쩔 건데?" "제까짓 게 별수 있어? 계집애 들은 다 거기서 거기야. 시간이랴 좀 걸리겠지만, 내가 들이대는데 지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 기둥 뒤에서 듣고 있던 채린은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점잖고 상냥하던 일현의 목소리가 저리도 음흉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완전히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 '설마 나 재한테 속은 거야?'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정현일과 그의 패거리들은 계속 떠들어 댔다. "근데 그 계집에 꽤 예쁘다면서?" "얼굴도 얼굴이지만 몸매가 끝내 줘. 이제껏 만난 애들 중에 최고더라고. 강유한 그 새끼가 어디서 그런 애를 꼬셨는지." "게임하다가 알게 된 거 아냐? 그 자식이 지그라면서? 예전엔 바츠였고." 지그와 바츠의 명성으로 유혹한 건 아니냐는 뜻. "강유한 그 진따 새끼가 바츠였다니 상상이 안 간다." "그 자식 옛날하곤 다르더라. 방심하다 한 대 맞았는데. 어금니 다 나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정현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를 생각하자 유한에게 맞은 부위가 욱신거리는 듯했기에 "사실 현일아 너한테 이야기 안 했는데 그놈 싸움 잘 하는 거 맞아." 과거 김필중과 함께 유한을 상대했다가 흠뻑 두들겨 맞았던 일진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야? 넌 알고 있었어?" "쪽팔려서 이야기 못 했는데 김한중이 작년에 입원한 것도 놈의 짓이야" 다른 일진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그 진따 자식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지?" "이계 진입해서 드래곤 하트라도 삼켰나?" 학림고 임진들은 갑자기 강해진 유한을 화제 삼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강유한 그 자식에 대해 조사 좀 했거든. 알고 봤더니 극기도를 배운 것 갔더라. 저번에 흑곰 아저씨 부하들이 그 녀석 뒤를 밟은 적이 있었는데. 그놈이 극기도 관장이랑 수련생들 하고 만나더래" "헐. 극기도라면 수련하기 무척 빡세다던대." "우리 형도 사흘 정도 수련하다 골병들까 봐 포기했어." 강유한이 극기도를 배웠다니. 양아치들은 만만한 오리 새끼가 백조, 아니 독수리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새끼 독하게 맘먹었나 보네. 그거 다 현일이 너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 "복수? 뭐 게임에선 어쩌다 보니 그 새끼한테 엿 먹었긴 하지만 현실에서 마지막에 이기는 건 나야." "하긴 그 자식 여친을 네가 뺐으면 복장이 터지겠다." "크크크. 니들이 강유한이 풀이 죽어 돌아선 모습을 봤어야 하는 건데." 숨어서 엿듣고 있던 채린은 자신도 모르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유한이 그렇게 흥분했던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거니 생각은 했지만, 정현일이 저런 악질일 줄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더 미치고 발광하게 만들어야지. 저번엔 스크린샷 합성한 걸 보냈지만. 다음엔 현실에서 키스하는 걸로 보내 줄 생각이다. 그런 다음 점점 진한 사진으로다가‥‥‥ 흐흐흐." "와! 그러다 그 자식 인생까지 로그아웃하는 거 아냐?" "하든지 말든지. 자자, 그만 쉬고 이만 가자고." 채린은 벌떡 일어났다. 정현일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현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녀는 유한이 자신을 못 믿어 준다며 화를 냈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그때 흥분한 유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어 주지도 못했다. 유한을 만나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갑았다. '그 전에 저 자식 면상을 한 대 갈겨 놔야겠어.' 주먹을 붙끈 줜 채린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정헌일을 쫒아갔다. 그러나 그녀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채린의 어깨를 불잡았기 때문이다. Chapter 04 통쾌한 복수 1 "꺄아악! 누, 누구?" 화들짝 놀란 채린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절반쯤 썩어 문드러진 언데드 몬스터가 아닐까 걱정했지만, 상대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겨우 찾았네." 채린의 어깨를 잡은 것은 유한이었다. 반가워하던 그는 채린의 표정이 여전히 언짢은 것을 보곤 곧바로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화 아직 덜 풀렸지? 미안해, 그래도 나 꼭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화난거 아니야, 사실은‥‥‥." 채린은 좀 전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 주었다. '앗싸!' 유한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안 그래도 채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예전 일을 말해주려던 참이었는데, 놈이 고맙게 멍석을 깔아 주었기 때문이다. 채린의 하소연이 끝나자. 유한은 그녀가 아직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뇌리에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생쥐 스프 사건부터. "‥‥‥ 내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다 정현일 그 자식 때문이었어. 패거리를 부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서 날 괴롭히고 놀렸지. 저번에 내가 널 오해한 것도 저놈이 합성한 사진을 보내 날 화나게 만들어서 그래." 유한의 설명에 모든 전후를 알게 된 채린은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아냐, 성급했던 내가 잘못이지. 더구나 너한테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해 줬으니까." 잠깐 동안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깨진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유한은 자신에게 기대 오는 채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포시 끌어안았다. 싫지 않은 눈빛을 보이던 채린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물었다. "맞다! 너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학원에 등록한 거야?" 학림 아카데미에는 수강료를 낸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원의 결계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들어올 수 없었다. "훗, 비밀이야." 유한이 어깨를 으쓱하자 채린이 일부러 토라진 척하며 물었다. "또 비밀로 할 거야?"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채린과 오해가 생겨 싸우지 않았는가. "사실은‥‥‥ 해킹했어." "뭐? 해킹은 불법이잖아!" 채린이 깝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한은 다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주변에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또 모르지 않은가. 그는 채린의 귓가에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해. 난 널 이 학원에서 빼내려고 들어온 것이니까." "이 학원에서 날 빼내겠다고?" "내가 아까 학림고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 줬잖아. 너 그런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 밑에서 배우고 싶어?" "그야 싫지만‥‥‥." '비싼 돈을 들여 수강 등록을 했는데 관둔다고 하면 아빠가 펄쩍 뛰겠지.' 그 점이 걱정이 되었지만, 채린은 곧 떨쳐 냈다. 유한의 말래로 비열하고 비리투성이인 자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들이 성적을 대폭 올려 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기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아무리 수업을 듣고 공부를 했어도 성적이 오른다는 느낌은 안 들었으니까. "내가 너랑 다니려고 좋은 학원 하나 봐뒀어. 학원비도 내가 낼 테니까 여긴 그만둬, 시아야." "알았어. 하지만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 그녀가 말한 할 일이 무엇인지 눈치 챈 유한이 물었다. "그놈을 손 봐주자는 거겠지?" 여기서 놈이란 정현일을 말한다. 채린은주먹을 확 움켜쥐었다. 눈앞에 정현일이 있다면 그대로 날려 버릴 듯한 기세. "지금까지 날 농락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것도 이자까지 쳐서. 그런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채린은 유한의 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게임플레이 시스템을 이용. 아니 악용하는 데는 그가 전문가이기에. 유한은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되겠다" "어떻게?" "그러니까말이야‥‥‥." 유한은 채린에게 정현일 일당을 골탕 먹일 아이디어를 말했고. 이야기를 다 들은 채린도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애꿎은 애들이 피해를 입으면 곤란하잖아." "흠. 그건‥‥‥." 유한은 금방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채린이 제동을 걸었다. "리지스에게 협조 요청을 한다고? 어떻게? 걔는 학원에도 못 들어오고. 우린 지금 개한테 쪽지도 못 보내." 학원 필드는 외부의 쪽지나 귓속말을 차단함은 물론,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쪽지도 막고 있었다. "걱정 마, 바츠로 접속해서 리지스에게 쪽지를 보내면 돼." "맞다! 그럼 되겠네." 번거롭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잠깐 바츠로 접속했다 돌아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이쑈어, 알겠지?" "그래, 빨리 갔다 와." 채린의 눈앞에서 유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정현일 골탕 먹이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2 크크크크! 히히히히히! 코너를 돌자마자 몽달귀신과 손각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파이어 불라스트 (Fire Blast)!" 전사들이 앞에서 놈들을 막자. 정현일은 보유한 마법 스킬 중 하나를 사용하여 몬스터들을 죄다 태워 버렸다. 베히모스와 달리, 지금 그가 다루는 캐릭터 일현은 마법사였다. "대단한데, 현일아." "크크크. 이 정도는 껌이지." 일진들의 아부에 정현일은 마음껏 으스댔다. 마법사 일현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몬스터를 몰아서 죽여 댄 덕분에 그의 레벨은 벌써 120대에 올라 있었다. "학원 던전은 경험치를 많이 줘서 좋다니까." "아이템도 두둑이 주고‥‥‥ 히히히."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과 돈을 챙긴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전진하던 그들은 안전지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유저들을 발견했다. 뭔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지, 흥분한 그들의 이야기가 정현일 일당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교문 밖에서 지그제 무구를 팔고 있다고?" "그래. 학림 아카데미 학원생들에게만 오십 퍼센트 파격 세일이래. 지그와 동업자인 리지스가 직접 롸서 좌판을 열었어." "야. 거기 에르젠 합금 무구도 있냐?" "종류별로 죄다 갖고 왔대. 빨리 가자. 안 그럼 딴 애들이 다 사갈거야." 그들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던전 밖으로 나갔다. 정현일 일행은 이후로도 그런 이유로 던전을 나가는 파티를 여럿 보았다. 안 그래고 넓은 지하에 그나마 있는 유저들까지 모조리 나가자 고요하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거 어쩐지 우리만 남은 것 같은데?" "우리도 무구 사러 가 볼까?" 누군가가 구미가 당기는지 그렇게 말하자. 정현일이 버럭 화를 냈다. "니들은 자존심도 없냐! 그 진따 새끼가 만든 무구를 걸치고 다니게?" "아니. 그래도 아이템에 죄가 있는 건 아니잖아." "닥쳐! 그 새끼 무구 사는 놈은 당장 피떡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그렇게 을러대자 누구도 사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현일은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더구나 녀석 뒤에는 흑곰파라는 무서운 조폭들이 있지 않은가. 모두들 아쉬움을 접고 정현일의 뒤를 따랐다. 정현일은 너무 윽박만 질러 대서는 안 된다 생각했는지, 녀석들을 다독여 댔다. "경쟁자가 모두 사라진 지금이 레벨을 왕창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이걸 놓쳐선 안돼." 정현일은 파티원들을 이끌고 가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그 녀석이 동업자를 이용해 학원 교문 앞에서 좌판을 연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돈을 벌거나 고객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던 정현일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고함을 질렀다. "앗, 저 녀석은!" "왜? 중간 보스라도 나타났어?" 동료들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놈이야. 지그를 본 거 같아." "지그?" "그래. 우리 길드를 분해시킨 대장장이 지그 놈 말이야." 이 파티서 지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 철십자 길드의 간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놈 때문에 잘나가던 길드가 해체되었고. 전쟁 중에 죽어서 아이템을 잃고 경험치도 많이 날렸다. 더구나 그놈의 정체는 과거 자신들의 밥이었던 강유한이었다. "진짜 지그야? 잘못 본 거 아냐?" "진짜라니까!" 정현일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코너에서 낯익은 얼굴이 슬쩍 나왔다가 사라졌다. "지그다!" "대장장이 지그야!" 이번에는 꽤 많은 녀석들이 유한의 모습을 봤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세라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놈이 여기 있는지는 그리 증요하지 않았다. 그저 놈을 잡아 화풀이를 하고 싶을 뿐. "잡아!" "잡아서 죽여 버렷!" 복수에 눈이 멀어 버린 정현일과 그 일당은 전력을 다해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우르르릉! 발에 뭔가 걸린다 싶더니. 양쪽의 벽이 꺼지고 이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바위와 돌이 일행을 덮쳤다. "으악. 이게 뭐야!" "왜 멀쩡한 천장이‥‥‥!"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정현일 일당은 기겁해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재수 없는 세 사람이 바위에 깔려 비명횡사 하고 말았다. -아놔, 죽었다. -단테르의 검을 떨궜어 ㅠ.ㅠ "걱정마. 나한테 부활의 성수가 있어." 살아있는 녀석들은 바위들을 치우고 죽은 동료들을 되살려 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천장이 무너진거야? 월하의 공동묘지는 유령이나 언데드가 출몰하는 던전이지, 함정이나 기관 장치로 유저들을 곤란하게 만드는곳은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 파티가 수십 번이나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그런 것이 추가되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그들이 궁금해 할 때 다시 앞에서 사라졌던 유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머저리들. 거기서 뭐 하냐?" "지그다! 잡아!" 다시 한 번 추격이 시작되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놈의 모습에 정현일 일당은 분통이 터졌다. "너 이 새끼 오늘 죽었어!" "흥. 일단 잡고 나서 그런 소릴 하시지." "크아아악!" 발악하며 유한을 쫓아가던 정현일이 갑자기 아래로 쑥 사라졌다. 함정이 있었던 것이다 "엇, 현일아!" 함정 밑에는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창검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간신히 뒤에서 잡아 주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현일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휴, 위험했어." "그러게. 누가 여기다 함정을 파 놓은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들은 다시 유한을 쫒아 앞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코너을 돌 때마다 함정이 있었고. 정현일 일당은 조금씩 피해를 입으며 포션과 부활의 성수를 소모해야했다. "아무래도 지그 이놈이 수작을 부린 것 같다." 함정이 있는 던전이 아니다. 그런데 자꾸 함정이 나오니 그렇게 의심할 만했다. "뿌드득! 이 새끼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일단 지금 게임에서 조져 놓고. 그다음은‥‥‥." 정현일 일당은 이를 갈며 조심해서 앞으로 나갔다. 다시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렇게 몇 개의 함정을 피해 비교적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수백 마리의 유령, 언데드 몬스터들이 뒤엉켜 있다 그들을 향해고개를 돌렸다. 크르르? 키키? 정현일 일행을 인지한 몹들이 일시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헉! 뭐가 이렇게 많아!" 그들은 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몹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싸움에 임해야 했다. 공간이 넓다고 하지만 통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을 뿐, 수백 마리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기엔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기에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멸당하기 싫었던 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싸웠다. "파이어 볼!" "휠 슬래시!" "마나 블레이드!" 한참을 싸운 끝에 결국 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나마 정현일의 파티원들이 레벨 200이 넘는 고수들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피해는 만만찮았다. 갖고 있던 포션과 부활의 성수를 모두 소모했고. 파티 원들 중 반이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은 것은 정현일을 포함한 다섯 명뿐. 나중에 부활 포인트에서 합류하면 된다지만. 깎인 경험치와 날려버린 아이템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흘렀다. "왜 저 몬스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거지?" "그러게. 곳곳에 흩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유저들이 사냥하기 쉽게 차례대로 등장해야 할 놈들이 한곳에 다 모여 있었다. 이건 분명 비정상적인 상황. "지그 이 녀석이 몹 몰이를 한 게 아닐까?" "설마! 그런데 그 녀석은 어디로 갔어?" 분명 그의 뒤를 쫒아온 일행이었다.그렇다면 놈도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유한을 찾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대장간에서 쇠라도 부들기는 것처럼 망치질 소리의 박자는 일정했다. "강유한 그 자식이로군!" 지금 이곳에서 망치질을 할 사람은 놈밖에 없었다. "조심해! 함정일지도 몰라!" 정현일 일당은 당장 달려가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올 참고 조심조심 망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기왔다. 3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막다른 통로에서 유한이 태평하게 쇠를 두들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장간 설비가 마련된 짐마차까지 소환해 놓고 아주 대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강유한 이 새끼!" "헉! 큰일 났네. 아직 함정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유한은 절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정현일은 유한에게 달려드려는 둥료들을 말린 뒤 여유만만한 그에게 말을 건냈다. "너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냐? "뭐 어쩌다 보니까." "바른대로 불어, 이 새끼야!" 정현일이 윽박지르자. 유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은 대학 좀 가고 싶어서 돈 내고 들어왔다. 왜? 아니꼽냐?" 하지만 정현일은 유한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분명 학림 아카데미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홈페이지에서 수강신청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수강생의 정보를 드림맥스에 전송하기 전에 학생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는데, 거기서 유한이 통과될 가능성은 전무했다. 뭔가 얍삽한 수나 알려지지 않은 버그를 악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 진따 놈을 어떻게 요절내느냐 하는 것이다. "니 여친 때문이냐? 학원에 들어와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 말이야." "그래, 인마. 자식이 추접하게 그런 식으러 보복하냐?" 니가 그러고도 사내새끼나? 밑에 달린 방울 떼 버려, 병신아." 진짜 떼 내라는 듯 유한은 방금 완성한 단검을 정현일의 발치에 던졌다. 그 도발적인 행태에 정현일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여기서 약이 오른 모습을 보이면 유한이 더 기고만장해 할 테니까. "강유한. 너 지금 실수한게 뭔지 아냐?" "글쎄, 함정을 완성하지 못한 것?" "멍청한 놈, 이왕 오려면 바츠로 와야지. 깝(깜→깝. by. 곰)도 안 되는 지그로 접속해 와? 최소한 블랙인지 뭔지 하는 강철 골렘은 끌고 왔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 유한은 완전한 혼자다. 지그 정도는 둘만 나서도 제압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건 내 실수일지 몰라. 하지만 뇌제의 홀을 쓴다면 어떨까?" 뇌제의 홀. 5분 동안 벼락을 뿌리는 전신으로 만들어 주는 최강의 유니크 아이템. 원래 정현일이 가지려 했던 것인데 유한의 손에 들어갔다. "뇌제로 변신하기 전에 조져!" 정현일의 명령에 동료들은 검을 뽑고 대쉬와 갑은 돌격형 스킬을 가동하며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무섭게 달려들었지만. 유한은 허리에 차고 있는 뇌제의 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헉!" "커억!" 돌격하던 녀석들이 짧은 비명을 토하며 유한의 앞에서 쓰러졌다. 갑자기 목이 날아가고 몸이 동강 나 죽은 그들은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정현일은 크게 당황했다. 순식간에 동료들을 죽여 버리다니. 놈은 대체 어떤 스킬을 쓴 것인가? 당황하는 그의 귓가에 유한의 친절한 설명이 들려왔다. "내가 철공소 짓고 나서 블랙 아이언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블랙 아이언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가는 강철 와이어가 있지. 작은 부품을 움직이게 하거나 여럿을 꼬아서 근육 기능을 하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정현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다 살짝만 손질을 하면 꽤 위험한 무기가 되더라고. 어떤 멍청한 놈들이 불나방같이 달려들면 효과가 좋을 것 같고." 갈리가 만들어 준 와이어 건틀렛 덕분에 유한은 와이어를 전투에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유한은 인벤토리에 있던 블랙의 예비 부품 중. 가는 강철 와이어를 꺼내 거기다 아교를 바르고 사기그릇을 깬 가루를 묻힌다. 그리고 양쪽 벽에 팽팽하게 걸어 두었다. 결과는 아주 대만족이었다. "이 자식이!" 유한의 득의양양한 표정에 울컥 화가 난 정현일은 손에 든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법으로 유한을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유한이 왼팔에 찬 와이어 건들렛을 쏘아 보낸 것이 더 빨랐다. 와이어의 끝에 달린 강철 추는 주문을 외치려는 정현일의 턱을 후려갈겼다. "컥!" "정현일, 너 지금 실수한 게 뭔지 아냐?" 유한은 몸을 숙여 벽에 걸어 놓은 와이어를 지나 앞으로 나왔다. 조금 전 유한에게 던진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정현일은 수치와 분노로 부르르 떨었다. "날 잡고 싶거들랑 베히모스로 덤벼야지 깝(깜→깝.by 곰)도 안 되는 부캐로 덤비면 쓰나." "이 망할 새끼가!" 악을 쓰는 정현일의 눈앞으로 펜릴 소드가 갑자기 확대되었다. 정현일이 마법 스킬을 쓰기 전에 유한이 달려와 그의 목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급소를 맞았습니다. 크리티컬 데미지를 받았습니다.] '헉!' 캐릭터 일현의 레벨은 지그보다도 낮고. 마법사라는 직업은 근접 능력이 대장장이보다도 취약했다. 거기다 허를 찌른 유한의 공격을 정현일이 막아 낼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급소에 치명상을 입은 정현일의 HP 바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한이 검을 옆으로 확 뽑아 버리자. 그나마 간당간당 남아 있던 HP포인트도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정현일은 유한의 손에 쓰러졌다. 유한은 사망 판정을 받은 정현일 일당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마를 두들겼다. "아. 이런! 하나 말해 주는 걸 잊었네."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들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깜빡하고 말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유한은 히죽 웃으며 서둘러 이동할 준비를 했다. <사망하셨습니다. 다시 게임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유한에게 죽은 정현일은 서둘러 재접속했다. 방심하다 당하긴 했지만. 이제부터 지금까지 당한 것옵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다. "기다려라, 강유한이 새‥‥‥ 허어억!" 던전의 부활 포인트에 모습을 드러낸 정현일은 무섭정 떨어지는 HP를 보고 깝짝 놀랐다. [ -화상을 입었습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 -불길이 너무 뜨겁습니다. 어서 밖으로 탈출하십시오.] 정현일은 경고 메시지에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부활 포인트 인근이 온통 불바다였다. 바닥에 가득 쌓여 있는 장작들과 이상한 둥근 광석. 그리고 끈적한 검은 액체에선 예사롭지 않은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시뻘건 불꽃들에 닿을 때마다, HP가 쭉쭉 떨어졌다. "콜록! 콜록! 강유한 이 개자식!" "으악! 또 죽겠다!" "빌어먹을, 포션도 없는데!" 부활 포인트에는 정현일 말고 그의 동료들도 있었다 유한에게 죽고 부활 포인트에서 새로 시작한 그들을 맞은 것은 거센 불꽃의 벽이었다. 시커먼 연기와 불꽃은 그 들을 부활 포인트 안에 가둬 두고 살아나면 죽이기를 반복하였다. 불꽃은 그들이 떨어트린 아이템까지 불태워 없애고, 죽음은 그들이 열심히 쌓아 놓은 경험치를 앗아 갔다. '재기랄! 어찐지 먼저 죽은 녀석들이 안 오더라 했더니만!' 처음엔 미로 같은 던전에서 헤메거나 몬스터와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강유한의 수작 때문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이 이 불꽃은 유한이 준비해 둔 것이 맞았다. 정현일 일당을 유인하기 전 유한과 채린은 유저들을 다 보내고 부활 포인트에 다량의 장작과 초열탄을 쌓아 놓았다. 거기다 유한은 레뮤다 대륙 여행 이후로 쓸데가 있을까 싶어 갖고 있던 역청까지 뿌려 놓았다. 그렇게준비를 해 둔 다음. 유한에게서 정현일 일당을 유인한다는 귓속말올 받은 채린은 부활 포인트와 그 주변에 불을 지르고 물러났다. 그리고 벌어진 결과가 이거였다. "시발! 뭔 놈의 불이 아직도 안 꺼지나?" "현일아, 실드 마법만 쓰지 말고 아이스 계열 마법 점 써봐!" "아놔, 미치겠네! 이번에 죽으면 세 번째야!" 그들은 불이 꺼지길 기다렸지만, 쉽게 꺼지지 않았다. 철을 녹일 정도로 고열을 일으키는 초열탄과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않은→않는 by. 곰) 역청의 조합은 치가 떨릴 정도였다. "제길, 나 이번에 죽으면 접속 안 해!" "흑흑, 강유한 이 나쁜 시키." 경험치와 아이템만 잃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동료들이 하나둘 로그아웃했다. 정현일과 몇몇 녀석들은 끈질기게 버텼다 불꽃이 조금 누그러드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유한이 나타났다. "어이, 춥지 않냐?" 그러면서 친절히 초열탄과 장작을 던져 주는 유한이었다. 정현일과 그의 동료들은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야, 이 새끼야. 그만 좀 해!" "뭐? 더 달라고? 알았어." 유한은 울부짓는 그들을 위해 불꽃을 더 뜨겁게 피워 올렸다. '정현일 너 때문에 채린이랑 사이가 깨질 뻔했어. 내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스트레스 받은 줄 알아? 절대 못 봐준다. 이 자식아!" 결국 견디다 못한 정현일은 캐릭터 일현의 접속을 끊었다. 그러나 그는 유한에 대한 북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개자식! 그래. 네 말대로 베히모스로 덤벼 주마.' 정현일은 한동안 묵혀 둔 본캐 베히모스로 접속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캐릭터 대기실 한쪽에 있던 우체통에서 쪽지가 왔다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정현일은 일단 쪽지를 열어 보았다. 유한 놈이 놀려 대려 보낸 게 아닌가 했는데. 뜻밖에도 채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일현아, 나 시아인데. 요새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심란해. 네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런데 1시간 뒤에 반포 나들목 공원으로 올래? 너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오호라!' 유한 때문에 내내 일그러져 있던 정현일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채린의 쪽지를 보자니.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게임에서 자신을 엿 먹인 강유한에게 통한의 일격을 먹여 줄 찬스다. '추잡하다고? 웃기지 마라. 강유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종 승자는 암컷을 차지하는 수컷이라고.' 조만간에 강유한의 발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듯, 괜히 기분이 좋아진 정현일은 게임에서 겪었던 굴욕스런 일읕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채린을 만날 준비를 하러 나갔다. 채린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만나려는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4 정현일이 반포 나들목 공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밤10시를 넘어 있었다. 늦은 밤에 불러낸 채린에 한 치의 불만도 없었다. '후후, 이런 밤이 오히려 더 좋지.' 이렇게 늦고 조용한 밤 시간이야말로 분위기를 잡고 감정을 고조시키기에 더 좋다. 벌써 여러 여자애하고 상대 해 본 정현일이었기에 그렇게 만들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개인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인 대철이 물었지만 정현일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계집에 만나러 가는데 뭔 일이 있겠어요?" "그래도 지난번 같은 불미스런 일이 생기면‥‥‥." 대철은 패밀리 레스토랑 앞에서 정현일이 유한에게 맞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 일 때문에 그는 정현일의 할머니 홍영순에게 두 시간 넘게 잔소리를 들었다.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면 네 모가지가 날아갈 거란 경고와 함께. 덕분에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아. 괜찮다니까요. 날 반편이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렇게 정현일은 대천을 놔두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채린은 주차장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두커니 하늘의 별을 보고서 있던 그녀는 정현일이 다가오자 돌아서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왔니. 일현아." '뭐야.이 계집에 복장이 왜 이래?' 민소매 티에 헐렁한 건빵바지를 입은 채린의 패션은 심야 데이트(?)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낭 교복 차림이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정현일은 그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상냥하게 웃으며 채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시아야. 이 늦은 밤에 날 보자고 하고." "그게 저번에 유한이랑 싸우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놈과 찢어져야 할 것 같다 이거지? 정현일은 채린의 말을 그리 예상하고 뒤에 해 줄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힘내라든지, 그런 녀석은 잊어라, 이젠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등등. 그러나 정현일은 준비해 놓은 말을 떠벌릴 수가 없었다. 채린에게서 너무 예상 밖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널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라." "뭐?" 정현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채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짜-- 악! 고요한 공원 안에 경쾌하고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현일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도 그랬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왜, 왜 그래? 시아야." 그러나 채린은 물음에 답하는 대신 따귀를 또 한 대 쳤다. 이번엔 뺨이 아니라 귓방망이를 얻어맞은 정현일은 휘청거리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일어나. 그리고 가식적인 면상은 이제 쓸모없으니까 내다버려." 채린은 일부러 정현일이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냥 이대로 끝내 버리기에는 분이 플리지 않았다. 정현일은 어지러움이 가시자 서둘러 채린에게 말을 건넸다. "시아야 강유한 그 녀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화 모르지만, 그놈이 말하는 건 전부거짓말‥‥‥." "강유한을 담당했던 선생한테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냈지. 그 주소로 사진을 보내니까 둘이 알아서 싸우다가 갈라지더라고." 채린은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들었던 말의 일부를 고스란히 정현일에게 되돌려 주었다. 말투와 높낮이까지 흉내낸 그녀의 말에 현일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네가 했던 말이었어. 다른 말도 들었는데 도로 들려줄까? 정현일은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채린을 꼬시려는 자신의 계획이 들통 났다는 것을 말이다. 채린의 말대로 더 이상 가식적인 면상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인상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한 대 먹었네.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년 한테." 싸늘하던 채린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래, 그런 년한테 먼지나게 맞아야 할 거다. 난 날 농락한 녀석은 절대 용서 안 하거든." "웃기는 년이네. 내가 맞아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정현일은 슬그머니 뒤춤에서 삼단봉을 꺼내 들고 채린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미리 그가 뭔가 끄집어내 휘두를 것을 예상한 채린은 그 공격을 슬쩍 피해 버렸다. 정현일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채린에게 달려들며 삼단봉을 휘둘렀다. "덤벼 봐. 쌍! 먼지 나게 팬다더니 왜 피하기만 해?" "무기를 사용하다니‥‥‥ 비겁한 자식!" "하하하. 할 말은 그것밖에 없냐?" 본전이 드러난 정현일은 계획을 크게 수정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린의 모습을 유한에게 보여 주기로. 그러나 이성으 잃은 녀석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채린이 흑곰파 두목이 두려워했던 인간 병기 송태수의 딸이라는 것. '이때다!' 계속 삼단봉을 휘둘러 대던 정현일의 공격이 잠깐 느려졌다. 채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현일의 손을 발차기로 후려쳐 삼단봉을 떨어뜨려 버리곤. 곹장 달려들어 지옥의 귀싸대기를 날려 주었다. 짝 소리를 들은 순간 정현일의 눈앞에 블꽃이 일었다. '뭐 이런!' 싸움 좀 한다는 양아치들도 채린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하뭍며 잔머리를 굴리고 간계를 꾸미는 정현일이 정면 승부로 그녀를 이길 리 없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정현일은 자존심이 상해 고함을 질렀다. "이년이‥‥‥." 짝! "정말 죽여버릴 테‥‥‥." 짝짝! 성질이 매를 벌고 말았다. 한 번 맞을 때마다 골이 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현일은 이러다 맞아 죽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람을 농락하니 재밌니? 당하는 사람 기분은 생각해 봤니. 이 쓰레기 같은 자식아!" "그, 그만‥‥‥." 계속해서 따귀를 얻어맞은 정현일의 얼굴이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린은 이 정도로 녀석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먼지 하나도 안 일었어!" 채린은 재차 따귀률 날리려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정현일의 따귀로 날아가지 못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대현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하지 못하겠나!" 불안감에 정현일을 찾아온 대철은 곧장 따라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정현일이 투덜거리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묵사발이 나진 않았을 테니까. "이봐요, 아저씨. 남의 여친 손은 왜 잡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대철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히죽 유한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위험을 느낀 그는 재빨리 방어로 전환하려 했지만. 유한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로 파고드는 것이 더 빨랐다. "컥!" 대철이 크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지금 유한이 공격한 부위는 늑골의 11,12번째 뼈가 있는 부분으로 늑골들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다. 유한은 대철의 실력이 자신보다 월둥히 높다는 걸 알기에, 기습적으로 급소를 강타했다. 선방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대철은 더 이상 유한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정현일이 채린에 이어 유한에게까지 두들겨 맞으면 정말 죽고 말거라 생각했다. "그만해! 도련님께 더 손대면 경찰을 부르겠다!" "아놔, 또 경찰 부른데." 유한은 채린이 실컷 분풀이를 한 다음엔 자신이 넘겨받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철이 휴대폰까지 뽑아 들고 협박하자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어떡할까? 손대지 말라는데." 유한의 물음에 채린이 어쩐 일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잘 생각했다. 내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말을 하다 말고 대철은 입을 쩍 벌렸다. 채린과 유한이 돌아서는 척하다가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꾸에엑--!" "작별 인사 대신이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발차기는 연습을 한 것처럼 호흡이 딱 맞았다. 아름답고 시원한 커플 발차기를 맞은 정현일은 뒤로 벌렁 날아가 공원 쓰래기통에 거꾸로 처박혔다 쓰러졌다. "이것들이 진짜!" 눈이 뒤집힌 대철에게 유한과 채린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원하신 대로 손은 안 댔습니다>" "발만 썼어요. 정말이에요." 누가 발을 쓴 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대철이 정말 전화번호를 누르려 하자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럼 쓰레기 분리수거 잘하세요." '뭐 저런 녀석들이 다 있지?' 기가 막혀 입만 벌리고 있던 대철은 정현일의 신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달려가 정현일이 뒤집어쓴 쓰레기통을 던져 버리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도련님! 괜찮습니까? 야, 현일아!" 다급한 마음에 대철은 정현일의 이름을 불러 댔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현일은 흠칫 놀라 주변을 살펴 보았다. "그, 그 계집애는?" "벌써 갔습니다." 대철의 말을 들은 정현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얼얼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세상이 뒤집혀 보였다. 아니. 정말 세상이 뒤집혀 버린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대철에게 말했다. "이번 일‥‥‥ 비밀로 해 주세요." "무슨 말입니까? 이걸 어떻게 비밀로 합니까?" 홍영순이 정현일의 이 꼴을 본다면 발악을 하고 캐물을 것이다. "비밀로 해요! 무조건 비밀로 하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정현일은 질질 울고 있었다. 이가 갈렸지만. 계집애한테 맞았다고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수치스런 사건이 밖으로 알려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Chapter 05 다시 게임 속으로 1 정현일을 맘껏 손봐 준 다음 날 오후. 마침 공휴일이라 채린과 유한은 간만에 데이트를 즐겼다. 영화를 보고 거리를 걷는 등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는지라 꼭 잡은 손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각난 유한이 채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학림 아카데미는 어땠어?" "어땠냐니?" 채린이 영문을(영문으로→영문을 by. 곰)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자 유한이 은근슬쩍 말했다. "학원이 좀 이상하지 않았냐는 거지. 별로 공부도 안 하는데 성적이 부쩍 오른 학생이 있다거나. 학원에 수상 한사람들이 출입한다거나‥‥‥." "글쎄. 내가 알기에 수업은 평범했고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드나든 적도 없는 거 같아." "그래?" 내심 뭔가를 기대했던 유한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채린아. 학림 아카데미는 성적 잘 올려 주기로 유명하지?" "그래서 나도 거길 끊은 거야." "그런데도 수업이 평범해? 다른 학원들처럼?" 학림 데미의 강사진이 우수한 것도 아니고. 강의 내용도 비숫하단다. 그런데도 거기 다니는 학생들의 성적이 다른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보다 부쩍 잘 오른다니.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있어." "뭔데?" "성적이 엄청 오른 애가 있어서 그 비결이 원지 물어 봤거든. 그런데 대꾸도 안 해 주더라. 그냥 친하지 않으니까 그런 줄 알았지만‥‥‥." 학원의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적 향상의 비결에 대해 물으면 딴청을 피거나. '강의 듣고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는 원론적인 말만 늘어놓았다. "좀 있으면 기말고사니까, 그냥 기다려 보면 알아." 이렇게나마 가르쳐 준 사람은 일현, 아니 정현일뿐이었다. 호감을 사기 위해 말을 한 듯했지만. 그도 역시 자세한 것은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자식이 그렇게 말했다고?" "응. 그래서 시험을 앞두고 특별한 족집게 강의가 있지 않dmf까생각했어." 뭔가 이상하다. 그런 수업이 있다면 평소에는 왜 안 하는가? 단순히 힘들어서? 유한이 고개를 갸웃할 때. 채린이 누구를 발견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우리 선생님이다." "너희 선생님?" "저기, 저분. 우리 반 담임 이태호 선생님이셔." 그러고 보니 채린이 가리킨 곳에 이태호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유한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라? 저 인간 정석재잖아?" "누군데?" "학림고 교감." 유한과 채린이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이태호와 정 교감의 만남. 유한은 두 사람의 만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척이나 아는 사이라고 보기에도 정 교감을 대하는 이태호의 태도가 너무 딱딱했다. 그냥 학교 일 때문에 만나는 것일까? 하지만 학림고와 강서고는 거리도 멀고 재단도 달라 특별히 만날 일이 없을 텐데? "왜 우리 선생님이 학림고 교감이랑 만나는 거지?" "나도 그게 무척 궁금해. 우리 따라 들어가자." 유한은 채린과 함께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두 사람의 눈에 뜨지 않게 구석진 자리로 간 그들은 대충 아무거나 시킨 뒤, 정 교감과 이태호 쪽올 유심히 지켜보았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이태호는 정석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오늘 나오고 싶지 않았다. 만나 봐야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한 번쯤은 정리할 필요성이 있기에 약속 장소로 나왔다. "하하하. 뭘 그리 성급하게. 일단 시원한 차부터 마십시다." 넉살좋게 웃은 정 교감은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정 교감이 본론을 꺼냈다. "내가 이태호 선생님올 보자고 한 것은‥‥‥." 꿀꺽! 이태호가 살짝 긴장할 때, 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악! 바위벌레야. 바퀴벌레!" "뭐 이런 가게가 다 있어!" "쯧쯧, 호들갑은." 정 교감은 여대생들을 힐끔 보더니 혀를 찼다. 이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운다면 바퀴벌레 한 마리 봤다고 생난리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고한 교육자들이 학부모들로부터 돈 좀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휴, 다행이다.' 유한은 옆 자리의 여대생들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정 교감에게 들킬 뻔했다. 그러나 그 전에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린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정 교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태호 선생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군요." "제안이요." 이태호가 눈이 동그래져 묻자 정 교감은 상체를 가까이했다. "저희 재단에서 아르페디아 온라인 내에 학림 아카데미를 만든 것은 아십니까?" "그야 물론." 이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 교감이 악어를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학림 아카데미가 비싼 수강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를 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저희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확실히 올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신을 책임져 주는데 어느 학부모가 수강료가 비싸다고 투정을 부리겠습니까?" 학림 아카데미가 유명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거와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저에게 어떤 제안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거기 학원 선생이라도 되어 달라는 것인지? 수락할 의사도 없지만. 그 외에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이대호였다. 정 교감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착 깔며 말했다. "강서 고등학교의 시힘 문제를 빼내 주십시오." "뭐라고요?" 순간 이태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강서 고둥학교의 1학기 기말 문재를 빼내 달라는 말입니다. 물론 사례는 섭섭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탁자 위에다 하안 봉투를 올려놓더니 앞으로 쓱 내밀었다. 두툼해 보이는 것이 적지 않은 금액이 들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태호는 봉투를 받을 수 없었다. 아니 받고 말고 하기 전에 정 교감의 얼굴을 한 대 후려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적어서 그럽니까? 그럼 여기 하나 더." 능글맞게 웃으며 봉투를 하나 더 꺼내는 정 교감을 바라보며 이태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스캔본 파일이 없어서 두 페이지 건너 뜁니다.] "그건 왜 궁금하지? 넌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거야?" "예전에 유한이가 다니던 학교의 교감 선생님이래요." 유한 대신에 채린이 말해 주었다. 언짢은 유한의 표정에서 이태호는 그와 정석재 간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보니 이 녀석 검정고시를 패스했다고 했지? 학교를 그만둔 게 정 교감이랑 관계가 있나?' 대충 그렇게 이해한 이태호였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았다. 자첫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그게‥‥‥." 유한은 어쩔 수 없이 손석진과 전화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상대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밀도 하나쯤 이야기해 줘야 한다. "그러니까 드림맥스에서도 학림 아카데미를 유의 주시 하고 있다고?' "네. 뭔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학림 재단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태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드림맥스에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학림 아카데미를 주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선생님, 이야기해 주세요!" 제자인 채린마저 알려 달라고 조르자 이태호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내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알려지겠지."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정석재와 알게 되었는지,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유한에게 들려주었다. '하!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지?' 이야기를 들을수록 유한은 학림 재단이 썩어 빠졌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채린과 데이트를 끝낸 후. 유한은 손석진에계 전화를 걸었다. 손석진은 집에서 쉬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습니까, 유한 군. 여자 친구와는 화해했습니까?" "훗. 덕분에요. 그보다 학림 아카데미의 비리를 알아냈습니다." 유한의 말에 손석진이 구미가 당긴다는 듯 곧바로 물어왔다. "그래요? 어떤 거였습니까?" 학림 아카데미를 꾸준히 모니터링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만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선생들도 그저 평범한 이야기만 했고. 수업에서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아마도 게임 내에서는 그 어떤 수상한 짓도 벌이지 않는 모양. 하긴 드림맥스에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료 화면을 캡쳐할 수 있는 게임 공간 내에서 일을 벌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을 것이다. "바로 각 학교의 시힘지 유출이었습니다." "시험지 유출이요?" 유한은 이태호 선생에게 들은 것을 손석진에게 모두 알렸다. "과거 티쳐스 시절에 맺어 놓은 인맥을 이용해 각 학교에서 시험지를 빼돌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빼낸 시험지를 어떤 웅도로 쓰는지는 뻔하다. 학부모들에게 웃돈을 받고 답안을 팔 수도 있고. 해당 학교 학생들에게 시험 전 족집게 문제를 내주는 것도 가능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학림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학교 내신 성적과 석차를 부찍 올렸을 것이다. 유한의 설명에 손석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비리를 저지르다니! 그것도 자신이 만든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군요." "그렇죠? 경찰에 고발해 버리세요." 학림 재단과 정 교감 일당들은 콩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조속들이니까. "물론 경찰에 신고해야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증거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들을 고발한다 해도 금방 풀려날 것입니다. '끙, 그렇겠군.' 유한은 좋다가 말았다. 기껏 힘들게 고발해 봤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면 의미가 없다. 그가 입맛을 다실 때 손석진이 다시 말했다. "정말 귀한 정보를 주어서 고맙습니다, 유한 군. 이제부터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뭔가 더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유한은 학림 재단을 작살내는 데 자신도 한몫하고 싶었다. 정현일에겐 앙갚음을 했지만, 학림고나 재단은 아니다. 자신을 퇴학시킨 그 더럽고 사악한 자들을 직접 응징하고 싶었다. 그래야 제2의, 제3의 강유한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유한의 그런 마음을 읽은 손석진은 그가 실망하지 않게 응답했다. "저희가 유한 군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면 언제든 전화하겠습니다." "예, 꼭 좀 전화 주세요." 두 사람의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유한과 전화를 한 다음, 손석진은 곧장 부사장 정경욱에게 전화를 했다. "부사장님. 꼬리를 잡았습니다." 손석진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정경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신문 1면을 장식하고도 남을 대사건이니까. "일단 중거 확보가 우선입니다. 일단 우리 보안 직원들을 총동원해서 그 정석재란 사람과 학림고 선생들, 재단 관계자들의 뒤를 추적해 봐야 합니다." "알겠네. 내 그리 지시하지." 정경욱과 통화를 마친 손석진은 곧장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그리고 백업 폴더 한구석에 박아놨던 프로그램들을 가동시켰다. 프로그램들이 차례대로 가동하자, 그의 주변에는 금세 수많은 홀로그램 스크린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조커 시절로 돌아가 봐야겠군." 뒤져야 할 것은 많았다. 학림고와 학림 재단 중앙 컴퓨터, 그리고 정석재 교감과 그와 접선한 티쳐스 출신의 선생들의 개인 컴퓨터까지. 모조리 이 잡듯이 샅샅히 쓸어 보겠다 다짐하는 손석진이었다. 3 손석진에개 전화를 하고 얼마 뒤, 유한은 아르페이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정현일 때문에 한동안 제철소 운영에서 거의 손을 놓다 시피 했는데.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한산하냐?' 지그 제철소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운영과 생산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저번보다 제철소를 드나드는 유저들의 수가 급감한 상태였다. 방문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철소 직원으로 받아달라는 둥, 무구 좀 팔라는 둥. 인터뷰 좀 하자는 둥, 시끌벅적할 때와 천양지차었다. 그러나 유한은 그 점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재철소가 둥장한 초창기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리지스 있냐?" 유한은 제철소 한편에 있는 거래소를 찾아갔다. 거기 책임자는 리지스였고. 그곳엔 그녀의 전용 사무실도 있었다. "어서 와. 시아랑 사이가 원래대로 돌아갔다며?" "엥? 알고 있었냐?" "시아한테 쪽지 받았거든. 학원도 그만둔다고 하던데. 내일 남은 수강료 환불 받으러 간댔어." "그랬구나." 직접 이야기 해 줄 수고를 덜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유한에게 리지스가 여러 장의 서류들을 내밀었다. 거래 납품 계약서인가 싶어 살펴봤던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거래 파기 통보서? 이게 뭐야?" "뭐긴. 거기 적힌 대로지. 몇몇 상단에서 우리랑 거래를 취소했어. 위약금까지 지불했고. "아니, 왜?" 언제는 거래를 못해 난리더니. 왜 잘하던 거래를 파기 하자는 것인지? "이유가 뭐인지는 모르고?" "글쎄, 제철소 회장이 연애 때문에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닐까?" 리지스가 최근 유한의 행적을 빗대어 말하자, 유한은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에서 손올 놓은 지 계약을 파기하는 건 너무하잖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제철소를 지은 뒤론 바빠서 네가 직접 일을 한 적은 드물잖아." 그건 맞는 말이다. 커다란 제철소를 소유하고 나서 유한은 더 이상 대장장이가 아닌 경영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제철소의 많은 일꾼들과 휘하의 길드원들을 관리하고, 지그 제철소라는 거대 기업을 유지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유한이 직접 책임졌던 블랙 아이언 부품이나. 초열탄과 경매장에 갈 수제 무구의 생산, 그리고 고객들을 위한 몇 시간간의 수리 서비스를 게을리했다. "우리가 이만큼 클 수 있었던 건 지그 네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현재 네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시장에선 지그 제철소의 제품이 예전과 같겠냐고 의심 하는 모양이야." "그게 뭐 나만 그런가? 웬만큼 큰 대장장이들은 다 그럴텐데?" 유한의 말대로, 최근 철공소를 지으며 한 단계 성장한 몇몇 대장장이들은 실력으로 쌓은 자기 이름값을 내세우며 생산보다는 운영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유한보다 한발 앞서 나갔던 발리안도 마찬가지 더구나 그는 스스로 '경영자 타입의 대장장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운영과 거래에 몰두해왔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으론 치고 나갈 수 없어. 난 그걸 직접 겪어 보고 깨달았어." 이제는 리지스 코퍼레이션이라는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며, 아르페디아 대륙의 상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존재가 된 리지스. 그녀도 길드와 휘하 상단. 제철소의 운영과 일 때문에 바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행상을 나가곤 했다. 사무실에 박혀 서류만 보는 건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길드장이 직접 행상을 하면 휘하 길드원들과 상단 직원들을 독려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활동성을 남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니까 나도 틈나면 일을 하라 이거지?" "그래. 조금 더 노력하면 그만큼 좋은 소문이 나고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니까." '하긴, 게임에서 입소문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지그가 대장장이로써 명성을 떨친 것도 유저들의 입소을 통해서였다. 리지스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시간을 짜내서 제철소를 순시하여 직원들을 격려했고, 갈리를 위시한 드워프 장인들과 어올려 직접 블랙 아이언을 생산하기도 했다. [- 블랙 아이언을 만들었습니다. 상당한 파워를 자랑할 것 같습니다. *작동을 위해선 영혼을 빙의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좀 더 노력하자, 리지스의 말대로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 정밀 조립 스킬이 1랭크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2 올랐습니다. 솜씨가 2 올랐습니다.] [[신의 손] 칭호를 받았습니다.] "나이스!" 실력이 오른다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쭉 둘러보는 일 역시. 유한은 오랜 만에 대장장이 지그의 상태창올 살며보았다. [ [상태창] 이름 : 지그 칭호 : 오우거 헌터, 드워프외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 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 제작자, 사장, 엔지니어, 죽음의 상인, 노력가, 해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명장, 뇌제, 엘프의 친구, 재련의 달인, 영웅, 강철의 맹우, 회장, 신의 손 직업 : 대장장이 레벨 : 220 채력(HP) : 4.200/4.200 스태미나 : 3,700/3.700 마나(MP) : 200/200 힘 : 215 민첩성 : 172+25(펜립 소드) 인내심 : 180+10(투사의 슈즈) 지식 : 142+20(명장 칭호) 행운 : 140 솜씨 : 300+60(불새의 코트+명장 칭호) 명성 : 43.000 공격력 : 245+236(펜릴 소드+와이어 건틀렛+투사의 슈즈) 방어력 : 180+143(투사의 슈즈+불새의 코트+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 3,000/55,000 돈 : 25,000,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2랭크 벌목 스킬 2랭크 채굴 스킬 2랭크 채석 스킬 1랭크 제련 스킬 1랭크 합금 스킬 1랭크 정밀 조립 스킬 1랭크 수리 스킬 1랭크 주물 스킬 1랭크 도발 스킬 7랭크 쇼크 웨이브 4랭크 선동 스킬 7랭크 수리 성공률 85%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1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2랭크 [공작 기계 스킬] 선반 가공 스킬 3랭크 용접 스킬 4랭크 정단 스킬 4랭크 천공 스킬 4랭크 압력 가공 스킬 4랭크 ] 그 동안 경영에 치중하느라 그리 많이 오르진 않았다. 그래도 이만하면 대장장이치고는 괴물 수준. 이만한 대장장이는 아르페디아. 아니 해외 서버를 뒤져도 열 명이 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흐뭇해 하는 유한의 눈앞에 안내창이 하나 떠올랐다. [- 보다 고급 기습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륙, 아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여기에 도전해 보십시오.] 유한은 그 안내창을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세계를 누비라는 문구에서 드림맥스의 장삿속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단 대륙을 건너려면 통역 프로그램부터 사야 했고, 낯선 대륙에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려면 필요한 아이템이 한둘이 아니다. 이 모두 현금으로 질러야 할 터. '그래도 가 볼 곳은 있나?' 정밀 조립 스킬을 1랭크로 올리면 다시 만나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었다. 유한은 다시 북쪽의 노스아크로 떠났다, 조건을 맞투면 새로운 스킬을 가르쳐 주기로 약속한 드워프 NPC 구센도르프를 만나기 위해서. 4 "하하핫, 어서 오게." "잘 지냈습니까?" 구센도르프는 유한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유한을 찬찬히 훑어본 그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새 실력이 더 올라간 모양이군. 이젠 정밀 조립 제품올 눈감고도 만들 수 있게 된 건가?" 스킬이 1랭크가 되었냐는 물음이다.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르쳐 주시기로 약속한 기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가르쳐 주지. 가르쳐 주고말고." 구센도르프는 품속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낡은 책자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꺼풀에는 '기관 제작과 그 응용' 이라고 적혀 있었다. [[기관 제작과 그 응용 설명 : 선진 공업 기술을 가진 드워프들의 기계 설비 제작 노하 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이다. 읽으면 [기판 제작 스킬]을 익힐 수 있다.] 받은 책의 정보를 살펴본 유한은 페이지를 파라락 넘겼다. 책에 적힌 내용과 그림. 설계도들을 모두 보고 나자 책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와 유한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기관 제작 스킬]을 익히섰습니다. 공작 기계를 비롯해. 다양한 기계와 설비들을 제작할 수 있습니 .] '좋았어! 이걸로 제철소의 설비를 좀 더 효율적이고 다양하게만들 수 있겠군!' 제철소의 설비를 도입하는 데만 2천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유한이 쾌재를 부를 때 구센도르프가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제 자네도 우리 드워프 못지않은 장인일세. 앞으로 실력을 더욱 높여서 세상을 놀라게 해 보게, 구센도르프의 격려를 들은 유한은 기분 좋게 제철소로 돌아왔다. 새로 익힌 스킬을 써 볼 겸. 설비를 개량할 겸, 새로운 작업 기계들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 제철소의 분위기는 떠날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직원들은 서너 명씩 모여서 심각하게 수군거렸고. 거래소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뭐야, 이 사람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무슨 일이야, 리지스?" 유한은 흥분해 고함을 지르는 리지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유한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현재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키예프 공국의 철강 상인 연합 있잖아, 그들이 우리와 관계를 일방적으로 청산해 버렸어" "뭐라고?" 키예프의 철강 상인 연합은 제철소 설립 초기에 협력을 제안했다가. 결국 자금과 생산력, 시장 장악 능력 등 모든면에서 지그 철공소를 당해 내지 못하고 굴복한 세력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탈을 선언했단다. 그들의 영향력은 키예프 공국 일대에 불과하다지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그 철공소 산하로 들어온 대장장이와 상인들이 그들을 본따 연쇄 이탈을 할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그런 이탈은 일어나고 있는 중이란다. 대장간 열 곳이 지그 제철소에서 이탈을 선언했고, 몇몇 길드들은 블랙 아이언의 구입을 취소했다.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가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혹시 들은 거 없어?" "지그 제철소에 견줄 만한 세력이 나타난 것 같아. 아직 명확히 드러난 건 없지만‥‥‥." 어느 정도 예상할 수는 있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지그 제철소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브로인에 있는 발리안 철공소 자금력도 꽤 되는데다가, 유한에게 시장을 뺏겼다고 하지만 아직 대륙 북동부 일대는 발리안의 영향력이 강하다. 철공소도 새로 증설하면서 생산력을 더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관련 퀘스트를 아직 완성하지 못해인지, 발리안은 제철소를 짓지 못했다. 건물만 먼저 덩그러니 만들어 놓았을 뿐. 안에 시설은 하나도 없다.[없다고→없다.] 이렇게 보유 자금은 몰라도 설비와 생산력에서 뒤지는 발리안을 믿고 대장장이들과 철 상인들이 이탈을 했을 리 없다. 분명 뭔가 다른 게 있을 것이다. 유한과 리지스는 좀 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탈하는 대장장이와 상인들을 막으며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대항 세력의 실체가 드러났다. Chapter 06 반지그 동맹 1 "반지그 동맹?" "너한테 불만 많은 세력들이 작당을 하고 뭉친 것 같아." 반지그 동맹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그 제철소가 만들어진 이후로 손해를 본 자들이 뭉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예상 가능했던 세력인 발리안이 있었고, 광산과 대형 대장간을 운영하거나, 거대 강철 병기를 생산하는 상단과 길드들이 힘을 보탰다. 은밀히 야합한 그들은 물밑 접속을 통해 지그 제철소의 산하로 들어간 주요 세력들을 뜯어내고 대장장이와 상인들의 이탈을 부추겼다. "이런 망한 자식들. 부러우면 지들도 제철소를 짓던가." "지으려고 시도한데. 하지만 발리안은 아직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한 모양이라 발리안에 필적하는 대장장이를 영입해서 제철소를 지으려나봐." "발리안에 필적하는 대장장이라‥‥‥." "귀련 언니를 영입할 거라고 하던데?" "뭐!" 귀련은 아트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 경영에 관심이 없어서 계곡의 작은 대장간에 만족하고 있지만. 여차하면 언제든 철공소와 제철소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만약 그녀가 반지그 동맹에 가담하게 되면 큰일이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녀의 명성은 가뿐히 지그를 누를 만하기 때문이다. 활동이 뜸한 지금도 무구 시장에선 귀련의 무구가 유한의 핸드 메이드 제품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 언니 부캐 키우는 데 맛을 들여 놔서 복귀를 선언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정확히는 연애에 맛을 들여놓은 거지.' 현재 귀련. 아니 이혜련은 곽대발과 연애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극기도 도장의 솔로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대장이던 곽대발의 탈영을 굉장희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른 넘은 노총각에 전투적이고 조폭을 압도하는 인상을 한 곽대발이 멋지고 늘씬한 미녀와 사귄다니! 그건 다 이혜련의 취향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화기와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해병대 출신의 곽대발의 대시가 먹혔다. 덕분에 요즘 극기도장의 솔로 부대원들은 대량 탈영을 획책하고 있다고. '자칼 사범님한테 귀련 누나를 꽉 잡고 있으라고 해야 겠다.'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리지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쪽에서 그런다고 우리가 두들겨 맞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안 그래?" "물론이야. 까불어 댄 만큼 되돌려 쥐야지." 유한과 리지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반지그 동맹에 역공을 가할 방법을 논의했다. 이후. 반지그 동맹의 규모와 활동이 중가하면서 보다 많은 정보들이 지그 제철소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반지그 동맹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인맥과 막강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지그 제철소의 뿌리부터 조여갔다. "철광석 생산량을 증산할 수 없단 말입니까?" 광산왕 가스톤이 전한 말에 유한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좋은 설비를 갖췄다 하더라도. 원자재가 들어오지 않으면 생산에 차질이 생긴다. "광부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어. 유저는 물론이고 NPC들까지." "이유가 뭐랍니까?" "별거 없다. 임금을 더 많이 지불하고 복지 혜택을 더 잘해 준다니 그쪽 광산으로 빠져나는 거지." 유한은 이것이 반지그 동맹의 농간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광산왕인 영감님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은 겁니까?" "물론 예전부터 날 따르던 친구들은 괜찮아. 하지만 최근에 사업을 확장하면서 영입한 신입들은 쉽게 둥지를 떠나 버리더구나." "흠, 그랬군요." 조직이 방만해지면. 상하의 친밀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건 제철소도 마찬가지다. 친밀도 대신 정확한 역할 분담과 임금과 혜택을 통한 신용 관계로 조직을 운영해 가는 것이다. "나도 이번 일을 겪으며 새로 느꼈다만, 지그 너도 명심해 두는 것이 좋겠다." "뭘 말입니까?" "어떤 직종이든 정상에 서면 항상 도전과 질투를 받게 된다는 거 말이다. 도전을 이겨 내지 못하면 밀려나는 것이고, 이겨 내면 또 다른 이외 도전을 받게 되겠지." 그건 그랬다. 대장장이 지그가 아르페디아 대륙에 나타났을 때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는 귀련과 발리안이었다. 이 중에 경영에 관심이 없는 귀련은 한발 물러섰고. 발리안이 대륙의 철과 무구 시장을 주름잡았다. 후발 주자인 지그는 항상 그에게 도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철공소 건립과 블랙 아이언 생산으로 대등한 힘을 갖추었고. 제철소 설립으로 역전시켰다. 챔피언에서 밀려난 발리안은 다시 도전자가 되었고. 그 뒤로도 최고의 대장장이를 꿈꾸는 유저들이 차기 도전자로 즐비하게 늘어섰다. 지금 지그 제철소에 일하는 유저들 중에서도 그런 후보자가 있을 것이다. "항상 추격 받는 입장이기에 선두를 지키는 것은 쉽지않아. 심적으로 시달리게 되지. 도전자는 져도 손해 볼 건 없지만. 챔피언은 단 한 번의 패배로 타이틀을 빼앗기게 되니까." "확실히 그러네요." 대장장이로 발리안을 넘으려 덤벼들 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후발주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으니 내심 걱정과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유한은 가스톤이 참 고마웠다. 단순히 자신을 돕고 지원해 줘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 는 조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영감님." "고맙긴 뭘." "그런데 조언 하나 더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무얼 말이나?" 가스론의 물음에 유한이 당당히 물었다. "선두를 보다 편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요." "후후후. 그건 네 스스로 알아야지."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십쇼. 게임을 떠나서 저보다 오래 살고 여러 가지를 봐 오셨을 테니 여기에 적용할 만한 방법도 아실 거잖아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 번성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연장자를 존중했다는 점이다. 늙으면 힘이 없어 덜도끼를 들지 못하고, 사냥감을 쫓을 만큼 발도 빠르지 않지만, 살아온 세월 동안 보고 듣고 익힌 지식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축적한 지식을 후대에 전하고, 그 후대가 또 연장자가 되어 지식을 전수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축적된 지식은 인간이 우주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기여했다. 어떤 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지만, 노인을 위하지 않은 나라치고 성공한 나라는 없었다. 유한도 명확하진 않지만. 본능적으로 그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가르쳐 주십쇼. 예? 영감니~ 임!" "허허. 난 시커먼 사내자식의 아양을 듣고 가르쳐 주는 취미는 없는데‥‥‥." 호색한 가스톤은 쉽게 조언을 들려주지 않았다. 결국 유한 대신 리지스가 아양을 떨어 적절한 조언을 얻어 냈다. 지그 제철소를 위협하는 반지그 동맹의 도전을 뿌리칠 방법에 대한 조언을. 그리고 그 대가로 리지스는 엉덩이가 한 번 쓰다듬어 지고 게급츠레한 눈이 가슴에 머무는 것을 참아야 했다. 2 [버추얼 메이지 시청자 여러분 안냥하십니까! 여러분의 귀염둥이 요정 미루입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재미난 일이 벌어지면 어디든지 출동하는 버추얼 에이지의 사이버 캐릭터 MC 미루. 그녀와 버추얼 에이지 취재팀은 지금 브로인 왕국에 있는 발리안의 철공소 앞에 와 있었다. 최근에 또 한 번의 증축을 한 발리안 철공소의 건물 벽면에는 굵게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있었다. '타도. 지그! 깨부수자. 블랙 아이언!' 방송을 보는 전국의 아르페디아 온라인 팬들은 유한과 그가 생산하는 블랙 아이언을 향한 발리안의 원한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최근 반지그 동맹의 선두에 선 브로인 왕국의 명장 발리안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발리안 님.】 미루는 미리 자신의 옆에 와 있는 발리안에게 인사를 했다. 생방송 인터뷰 때문인지 멋지게 차려입은 발리안은 그녀에게 인사한 뒤 카메라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브로인의 대장장이이자, 현재 반지그 동맹의 총수를 맡고 있는 발리안입니다.] 인사 후, 본격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발리안님. 몇몇 분들은 발리안 님이 지그 님에 대한 앙심 때문에 반지그 동맹의 선두에 섰다고 하는데, 이 말이 맞습니까?] [앙심이라‥‥‥ 솔직히 저도 인간이다 보니 그런 소심한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장인이 된 지그 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결코 감정 떄문에 이번 거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화면에 비치지는 않았지만. 지금 버추얼 에이지 홈페이지의 게시판에는 '구라쟁이 발리안', '거짓말 마라', '가식 덩어리 자식' 등의 글들이 줄줄 올라왔다. [그럼 철공소 벽에 적힌 저 문구도 존경의 의미로 쓰신 겁니까?] [저건 직원들의 전의를 고취시키고 명확한 목표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썼을 뿐입니다. 결코 지그 님에 대한 악한 감정은 없습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 발리안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를 위시해 많은 분들이 이번 반지그 동맹을 결성한 이유도 단순히 지그 님이 밉다거나. 저희들의 이득을 침해해서가 아닙니다. 지그 제철소가 아르페디아 대륙 철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폐단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소 대장간의 몰락이 대표적인 이유겠지요?] [물론입니다. 제철소 건립으로 대장장이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꿈과 희망을 심어준 것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박수를 쳐 줄 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지그 제철소 때문에 성장해야 할 후발 주자들이 떡잎을 피우기도 전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에게 강정을 호소하려는 듯. 발리안은 여러가지 제스쳐를 유효 적절히 취했다. 스스로는 멋지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취재팀이 보기에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지그 님이 자신의 초보 시절을 생각했다면 이래서는 안되는 겁니다. 정치에 있어 독재가 극약이듯, 시장에 있어서 독점은 극약입니다. 반지그 동맹의 목표는 단순히 지그 제철소를 타도하자는 게 아닙니다. 시장에 균형을 가져오자는 겁니다.] 【하지만 시정에 균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지그 제철소 못지않은 생산력과 경쟁력이 필요한데. 여기에 관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미루의 말대로. 현재 반지그 동맹은 아직 지그 제철소를 능가하지 못했다. 발리안이 대안으로 철공소를 중축했다지만, 제철소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고 생산 효율도 나빴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물론 언제까지 그들에게 노력과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서둘러 제철소를 지을 예정입니다.] [저희 쪽에서 듣자니, 지그 제련강에 대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셨다는데 이 말이 맞습니까?] [사실입니다. 반지그 동맹에 참여 중인 아르마달 길드에세 최근에 헬라드 대륙의 광산을 매입했습니다. 노천광산이라 채굴도 쉽고, 철광석의 질도 우수합니다. 거기다‥‥‥ 인건비도 저렴하더군요.] 발리안은 중국인 유저들을 대거 고용해 작업장을 돌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은근슬쩍 넘어갔다. [여기에 우리는 웨스턴에서 재련 기술이 뛰어난 건스미스를 영입했습니다. 그가 만드는 제련강은 지그 제철소의 제련강에 손색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자신한 발리안은 주머니에서 재련강 덩어리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철 특유의 둔하고 무거운 빛이 감도는 최고급의 제련강 이었다. 현재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최고 품질로 인정받는 지그 제련강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 방송을 보시는 여러분. 반지그 동맹에 힘을 실어 주십시오. 저희들의 목표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안정과 모든 유저의 번영입니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버추얼 에이지 홈피 게시판에는 인터뷰를 본 유저들의 소감이 줄줄이 올라왔다. - 굵은망치 : 님들아. 반지그 동맹에 가입합시다! - 맥스 : 예전에 지금 님께 신세를 졌기에 그럴 수는‥‥‥. - 키★라 : 타도 지그! - 새콤달콤이 : FPS 겜소설 '대대장 이진구' 텍스트본 어디서 구할 길이 없을까요? ↘ 강찬 : 사서봐. -_-+ 철이 아르페디아 대륙을 움직이고 있는 지금 두 세력 의 싸움은 위기이자 곧 기회.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이번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고래등 싸움에 등 터지는 비극을 피함은 물론. 그 와중 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할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3 발리안의 인터뷰는 지그 제철소에 대한 반지그 동맹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제철소에 비해 떨어지는 생산력은 인해 전술로 해결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수많은 대장장이 유저들이 피땀으로 생산한 제련강을 지그 제련강보다 절반은 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았다. 헐값에 반한 유저들은 반지그 동맹의 제련강에 환호했고, 지그 제철소를 배신한 상단들은 이 제련강을 대량 매입했다. 그렇게 새롭게 등장한 제련강은 지그 제련강이 차지하고 있던 시장점유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물론. 지그 제철소는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유저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발 빠르게 상항을 분석하고 대응을 모색했다. "이게 반지그 동맹에서 만든 제련강이라고요?" 유한은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구해 온 제련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일단은 '동맹 제련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발리안님이 인터뷰에서 지그 제련강에 비해 손색없는 수준이라 말했지만. 실제로 나온 제련강의 품질은 그보다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딜론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인 스킬로 살펴보니 흠이 있있다. 제련이 꽤 잘된건 사실이지만. 지그 제련강에 비해 불순물이 많았던 것이다. 유한은 동맹 제련강을 옆에 있던 갈리에게 보여 주었다. 동맹 제련강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 보던 갈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철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 프로인이라는 놈이 만들었던 거랑 흡사해." 폭탄마 프로인. 예전에 유한에게 패했던 웨스턴 대륙 최고의 건스미스다. 그는 유한과의 첫 번째 경합에서 화약을 이용해 생산한 제련강을 만들어 냈었다. 드워프외 기술로 만든 유한의 제련강과 품질은 거의 동등했지만, 황 성분이 많아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동맹 제련강에서도 황이 섞여 있단 말입니까?" "그래. 훨씬 더 많아. 프로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대장장이가 만들었겠지." 동맹 제련강과 프로인의 재련강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반지그 동맹의 대장장이들은 발리안이 웨스턴에서 영입한 건스미스에게서 제련 기술을 배웠기 때문. "그래도 싸다 보니 잘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그 제철소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맹 제련강의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많습니다." "그래요? 까짓것 우리도 가격을 내려버릴까?" "출혈 경쟁을 벌일 생각입니까?" 딜론의 물음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충분히 여력은 있으니까요." 반지그 동맹의 공작으로 좀 흔들렸다고는 하지만 지그 제철소는 여전히 건재했다. 자금이나 생산력 모두 다. "하지만 출혈 경쟁은 양자 간에 타협이 없을 경우 공멸을 불러옵니다." 가격 인하로 인한 손해도 손해지만. 경쟁이 끝난 다음에 손해 본 자금을 메우려고 가격 인상을 시도하면, 소비자의 반발을 사고 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 딜론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현재 반지그 동맹에서 지그 제철소가 철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제 점유율은 약 6할 정도. 반지그 동맹이 2할가량이고, 나머지 2할은 수많은 중소 상단과 대장간들이 나눠 갖고 있었다. 이번에 반지그 동맹이 노리는 것은 지그 제철소의 점유율을 떨어트리자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4:4:2 혹은 4:5:1로 자기네가 유리하게 시장 점유율을 조정하고 싶어할 터. 목표 달성을 위해 지독하게 달려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반지그 동맹이나 지그 제철소의 피해가 만만찮을 것이다. "시장의 균형을 가져오자는 게 저들의 명분입니다. 장기 레이스를 할수록 지그 제철소가 명분에서 밀립니다." "그 점을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쇼." 다른 방법들도 있지만. 연륜 있는 가스톤이 조언을 해 준 덕분에 유한은 명분도 살리고 실익도 챙기는 최고의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 "지그야. 손님들이 찾아왔어. 네가 보낸 쪽지를 받고 왔다던데?" 송코가 회의실 안에 들어와서 말하자,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누굴 초청한 겁니까?" 딜론이 흥미가 생겨 물었다. 아르페디아의 철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지그가 초청할 만한 인물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한번 만나 보시렵니까? 안 그래도 딜론 님께 소개해 드릴까 십었는데요." "호, 그거 참 반가운 소리로군요." 유한은 딜론과 함께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찾아갔다. 응접실에 있는 손님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전사와 온잦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중무장의 여기사였다. 딜론은 전자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부대장 자칼이라는 겉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파우린이란 여기사에 대해서는 몰랐다. 하지만 차림새나 용모가 범상치 않아 가볍게 볼 수가 없었다. "오셨습니까?" "인마. 만나고 싶으면 니가 직접 찾아와야지 버릇없이 어른을 오라가라 해?" 자칼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유한을 째려보았다. 안 그래도 경치 좋고 몬스터 득실거리는 곳에서 재미있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는데. 유한이 산통을 깨 놨기 때문이다. "전 사범님은 오시라고 한 적 없습니다. 누님만 오시라고 한 것뿐인데요." "그게 그거지, 인마. 나랑 파우린 씨는 일심동체(一心同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사이란 말이다." '진짜 그렇까?' 그러나 파우린이 옅은 미소와 홍조를 띄는 것을 보니 자칼이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를 알 만했다. 잠시 유한과 자칼의 말다툼을 듣고 있던 파우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날 부른 데는 이유가 있겠지?" "물론입니다. 파우린, 아니 귀련 누나가 반지그 동맹의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유한의 말에 딜론은 깜짝 놀랐다. 아르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인 귀련의 주인이 눈앞의 아가씨라는 것도 놀랍지만, 지그와 친해 보이는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란 말인가. 파우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맞아. 정의를 위해서 꼭 가담해 달라고 하던걸." "발리안이 그랬습니까?" "아니. 다른 사람이 왔었어. 참가할까 말까 꽤 고민을 했었지." 파우린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유한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양. "하지만 그럴 순 없었지. 지그는 귀여운 내 동생이고. 난 지금 자칼 씨랑 지내는 게 더 즐거우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주 좋아 죽으려는 자칼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친구들 발리안이 제철소를 못 지으니까 누님을 대타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대타? 내가 발리안의 대타라고?" 파우린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현재 귀련을 캐릭터 대기실에 잠재워 두고 있다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자부심은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대타라니. 그것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 생각한 발리안의. "이것들이 감히 누구를!" 파우린보다 자칼이 더 흥분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발리안의 마리에 도끼를 박아 넣을 것처럼 흥분했다. "파우린 양, 절대 그놈들이랑 상종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셈이에요." 유한은 반지그 동맹에 대해 단단히 뿔이 난 듯한 파우린을 보고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2단계로 넘어같 때다. "누님. 그냥 그러고 말게 아니라 이놈들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는 건 어때요?" "뭘 어떻게?" "그러니까요‥‥‥." 유한은 자신의 계획을 파우린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디를 다 들은 파우린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게 해야 돼? 결국 사람 귀찮게 하는 건 너나 그 녀석들이나 똑같네." "잠깐이면 되요.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얼굴마담을 해 주면 돼요." "싫어. 난 그냥 우리 자칼 씨랑 모험이나 할래." "누님 한 번만 부탁해요, 네? 이 귀여운 동생을 봐서라도‥‥‥." "너 하나도 안 귀엽거든." 유한은 거절하는 파우린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몇 번을 사정한 끝에, 결국 유한은 파우린의 승낙을 받아냈다. "고맙습니다. 누님! 이 은혜 안 잊을 게요." "어휴. 징그러운 녀석. 이번 일 얼른 끝내야 해. 알겠니?" "당연하죠!" 그녀의 승낙을 받아 낸 유한은 당장 반지그 동맹을 분쇄할 '나누기 작전'을 개시했다. 4 지그 타도를 부르짖은 반지그 동맹은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동맹 제련강의 판매에 열을 올리고. 레기온 I, II 를 비롯해 반지그 동맹에서 생산하는 강철 골렘의 가격을 대폭 인하했다. 여기에 에르젠 합금 증산에소 힘썻다. 이 모든 것은 전 방위로 지그 제철소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주력 상품으로 파는 지그 제련강과 에르젠 합금, 블랙 아이언을 견제하기 위해서. 덕분에 시장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저들을 상대러 계속적인 홍보에 나서고, 게임 내의 NPC 상인들과 귀족, 국왕들을 상대로도 로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자금이 소모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갑부라 웬만한 금액엔 까닥하지 않는 발리안도 일주일 사이에 나간 돈을 보고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거액의 돈을 지출한 건 반지그 동맹에 참여한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 몇몇은 현질까지 해서 게임 머니를 마련해 버티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마노스 제국에 판매 제의를 하러 가는 발리안은 약해지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근래에 있었던 전란과 내란으로 마노스 제국의 재정은 상당히 궁핍한 상태다. 그렇기에 보다 저렴한 철과 강철 골렘에 미네르바여제가 호감을 가질 거라 생각했다. '비록 미네르바 여제가 지그의 도움으로 황위를 되찾았다고 하지만 원래 부국강병에 욕심이 많은 군주다. 국가에 이득이 된다면 사사로은 감정은 접어 둘 게 틀림없어.' 그래서 발리안은 이번 일이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노스 황궁 정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야. 저건?' 위이잉! 위잉! 크르르릉! 커다란 회전 톱날을 가진 수레들은 황궁 정원에 있던 나무들을 잘라 내고 있었고. 회전축에 삽날을 단 수레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가며 땅을 파 뒤집었다. 하르페디아 온라인에 저런 게 있었나? 눈앞에 보이니 일단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발리안온 그 기계들이 놀랍다기보다는 하찮아 보었다. 성능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구조도 상당히 조잡해 보였다. 그때 정원 한쪽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어떻습니까, 폐하? 이번에 저희 제철소의 지그회장이 새로 만들어 낸 벌목 기계와 밭갈이 기계이옵니다." "오오, 참으로 대단하구나." 리지스의 소개에 미네르바 여제와 마노스의 귀족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벌목 기계는와 밭갈이 기계는 유한이 새로 배운 기관 제작 스킬로 만들었다. 아직 스킬이 9랭크밖에 안 되는지라 이렇게 간단한 작업을 하는 기계들밖에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계들은 미네르바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현실 세계의 성능이 뛰어난 건설 장비나 농기구들을 아는 유저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기계 문명을 처음 접하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NPC들은 달랐다. "이것들도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냐?" "아닙니다. 기계와 태엽으로 움직입니다. 작동법을 알면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느려서 전투용으른 이용할 순 없겠지만, 남쪽의 밀림 개척과 농지 개발에 큰 도움이 되겠군.' 가뜩이나 전란으로 인구가 줄고, 농지가 황폐해진 마노스 제국이다. 미네르바는 이런 기계들이 충분하게 있으면 모자란 노동력을 만회하고, 식량 생산을 크게 중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개량의 여지가 있기에, 지그 회장은 폐하의 허락이 있다면 초기에 생산한 이 기계들을 마노스 제국에 바쳐 시험해 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오오, 얼마든지 시험해도 좋다." 기계들을 진상한 리지스는 다른 용건은 없다는 듯, 여제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여제를 알현하러 가는 발리안에게 옅은 비웃음을 짓고 지나갔다. '흥, 고물 기계들을 바치고 환심을 사시겠다?' 코웃음 친 발리안은 미네르바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대는누구인가?" "브로인의 대장장이 발리안입니다." "그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다. 최근 반지그 동맹의 총수를 맡고 있다는 명장이 그대인가?" "알고 계시다니 소인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미네르바가 용건을 묻자 발리안은 곧장 자신이 찾아온 연유를 말했다.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국가의 중요 물자인 철과 강철 병기를 판매하겠다고. 미네르바는 발리안의 제의에 생각을 좀 하는 듯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동맹 제련강이 웨스턴이라는 먼 서쪽 지방의 기술로 만든 것이라지?" "예, 그곳의 제철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옵니다. ㅈ;그 제련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짐이 듣자니 동맹 제련강은 화약이란 것으로 제련해 황이 섞여 있다 들었다. 황은 철의 품질과 수명을 떨어트린다고 하던데 맞느냐?" "그것이‥‥‥." 발리안은 쉬이 응답하지 못했다. 여제의 말은 사실이다. 문제는 반지그 동맹 내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미네르바가 알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동맹 제련강은 겉보기와 달리 그들이 홍보하는 만큼 내구도가 좋지는 않았다. '설마 아까 그 계집애가?' 리지스라는 여자애는 지그와 동업자다. 이쪽 제품의 단점을 여제에게 알려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들은 또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일까?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일까? 발리안이 뭔가 정리해서 말하기 전에 미네르바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싸도 그런 철은 쓸 수 없다. 그런 철로 만들어진 강철 골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폐하!" "이만 물러가거라." 그리고 미네르바는 발리안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할 거라고 예상 못했던 발리안은 정말이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쪽지가 왔습니다. 어서 확인하십시오.] 허탈한 기분으로 황궁을 나서던 발리안은 안내창을 보고 쪽지함을 살폈다. 방금 쪽지를 보낸 사람은 베레타 공화국에서 활동 중인 반지그 동맹의 상인 유저였다. 뭔 일인가 싶어 쪽지를 열어 본 발리안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급보! 귀련 님이 철공소를 지었음. "귀련 님이 철공소를?" 발리안은 이게 진짜라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귀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아르페디아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지만. 운영이나 세력 확장에는 뜻이 없어 장인의 길을 꿋꿋이 가고 있던 그녀였다. 그래서 얼마 전에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녀가 철공소를 지었다? '좋지않군, 무척 좋지 않아.' 발리안의 얼굴은 미네르바에게 바람을 맞았을 때보다도 더 어두워졌다. 5 귀련이 돌아왔다. 그리고 철공소를 지었다. 그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페디아 전역으로 좍 퍼졌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귀련 철공소가 있다는 베레타 공화국의 율리아 계곡으로 모여들었다. "이계 귀련 님의 철공소인가?" "엄청 큰데? 제철소보단 못하지만 말이야." 귀련의 철공소는 많은 자금을 투입하여 처음부터 크게 만들고. 설비들도 일반 철공소보다 서너 배 많이 들였다. 그래서 꽤 많은 임꾼들이 필요할 듯했지만, 귀련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유한에게 지원받은 일꾼들도 있었지만. 많은 대장장이들이 찾아와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귀련 님, 저 여기서 일하게 해 주십쇼!" "열심히 하겠습니다!" "급료는 필요 없으니 기술 하나만 가르쳐 주세요!" 그녀의명성을 듣고 대장장이 유저들과 NPC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일하겠노라고 난리를 쳤다 귀련은 그렇게 난리를 치는 이들을 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 지그 녀석 꾐에 넘어가는 아닌데." "하지안 이미 되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옆에 있던 딜론이 그리 말했다. 그는 유한의 주선으로 앞으로 귀련 철공소와의 거래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 귀찮아하는 귀련을 대신해 철공소의 경영을 맡기로 했다. '후후후. 리지스 양의 분해 하는 얼굴이 선하게 보이는 군.' 딜론의 예상대로 리지스는 이번 일로 단단히 뿔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곹 현실을 받아들었다. 아무리 상재에 능한 그녀라도 지그 제철소와 귀련 철공소를 동시에 감당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지그 제철소의 아낌없는 지원과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사무적인 도움으로. 귀련 철공소는 사람들외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게 귀련제 무구인가? 생각보다 저렴한 값이네?" "공장제니까 그렇지. 귀련 님 수제 무구는 엄청 비싸." 유저들은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무구점에서 파는 공제제 귀련 무구를 살펴보았다. 공장에 귀련 무구는 수제 무구와 달리. '鬼'자 마크 대신 도깨비 얼굴을 형상화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공장제의 품질은 수제보다 떨어졌지만, 그래고 비슷한 가격대의 무구들 보다 휠씬 가볍고 튼튼했다. 당연히 유저들은 좋아했고. 다른 무구들보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귀련제 무구를 사려고 했다. "귀련 님이 공장제까지 직접 만드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품질이 좋을까?" "그야 귀련 님 밑에 모인 대장장이들의 실력이 좋으니 그렇겠지, 거기다 귀련 님이 한 수 가르쳐 줬을 테고." "그것도 그렇지만. 철이 좋아서 그래. '귀련강'의 품질이 끝내 준다고." "귀련강이 동맹 제련강이나 지그 제련강보다 좋나?" "동맹 제련강보다 월등하고 지그 제련강보다 조금 더 좋대. 그래서 가격도 높게 거래되고 있어." 귀련강과 공장제 귀련 무구는 유저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가격이 다소 비싸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귀련의 이름값이나 품질올 생각하면 수긍할 만한 가격대였다. 그렇게 귀련 철공소는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며 시장에서 점유율은 차근차근 높여 갔다. "이거 완전 날벼락이군." "귀련 님에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귀련 철공소의 등장으로 당황한 것은 반지그 동맹이었다. 반지그 동맹을 받쳐 주고 있던 하부 대장장이와 상인들이 이탈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흡수하는 곳이 귀련 철공소였다. "귀련 님이 맘 잡고 철공소를 지었으니, 조만간에 제철소도 지을거야." "그렇게 되면 지그 제철소 부럽지 않은 세력이 되겠군." "먼저 달려가야 대접이 좋겠지?" 어차피 하부 세력들은 지그 제철소의 시장독점을 막기위해 반지그 동맹에 가담했다. 지그 제철소를 견제하자는 명분도 살리고 지그 제철소와의 출혈 전쟁으로 손해 본 것을 만회할 길을 찾다 보니. 자연스레 귀련 철공소로 향하게 되었다. 덕분에 반지그 동맹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무너져 내렸다. "제길 아르마달 길드가 발을 뺐습니다!" "베레타 공화국 광산 동맹도 귀련 철공소 쪽으로 돌아섰어요." "카잔 공국이 우리랑 거래를 안 할 거랍니다!" 발리안과 반지그 동맹의 핵심 간부들은 매번 비명처럼 들려오는 급보에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뿌린 만큼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나마 있는 기반도 다 날아가게 생겼다. "총수! 지, 지금 TV에, 버추얼 에이지에!" "또 뭡니까?" 발리안은 다크 서클이 낀 벌건 눈으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귀련 철공소가 등장한 뒤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잘 시간마저 아껴 가며 게임에 접속해 반지그 동맹을 전두지휘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말로 하자면 기니까 얼른 버추얼 에이지를 보십쇼, 어서요!"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보기 싫었지만. 이미 반쯤 체념한 상태였던 발리안은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을 나가 TV를 틀었다. 그리고 채널을 맞추자. 지그가 버추얼 에이지의 MC 미루와 인터뷰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그님, 어째서 방탄 실드와 방탄 장갑에 대한 이익의 삼십 퍼센트를 귀련 철공소에 주겠다고 발표하신 겁니까?] [방탄 실드와 방탄 장갑에 들어가는 주름 철판 제작 기술은 원래 제 것이 아니고 귀련 님의 기술입니다. 귀련님이 저에게 가르쳐 주셨지요. 그 기술로 귀련 님보다 제가 더 큰 이득을 취했기에. 뒤늦게나마 귀련 님께 그 이익을 나눠 드리는 게 마땅하다 생각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 사용료, 즉 로열티(Royalty)를 지불하시겠다는 거군요. 하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로열티에 대한 시스템 지원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만.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유한은 그런 핑계로 귀련 철공소를 계속 지원을 할 생각이었다. 귀련 철공소를 지그 제철소의 방패. 그리고 믿고 협력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었다. 저번에 가스혼은 후발 주자들의 도전을 차단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정상의 권좌에는 관심이 없고,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하며 도전자를 대신 물리쳐 줄 믿을 만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귀련 누님이 딱이지.' 귀련은 경영이나 확장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그녀가 어느 정도 시장 점유율을 갖게 된다면 지그 제철소는 독점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후발 주자들의 도전과 소비자들의 불만을 막아 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유한은 귀련에께 철공소를 지어 시장에 적극 참여할 것을 부탁했고. 이후 상당한 성과를 이뤄 냈다. 시장 균형의 명분을 내세우며 달려든 반지그 동맹을 주저앉힌 것이다. '귀련 누님은 반지그 동맹이 무너지면 손 뗀다고 하셨지만 절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내심 그녀를 계속 자신의 방패막이로 써야겠다고 생각 하는 유한이었다. "크아악? 지그 저 녀석이 또!" 한편. TV를 본 발리안은 펄펄 뛰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인터뷰를 통해 귀련 철공소의 등장과 시장 잠식 뒤에는 지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제길. 경솔했어! 지그와 귀련이 손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친한 만큼 둘이 작당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 그 때문에 귀련의 영입은 어렵다 보고 포기했었는데, 절대 포기해선 안 되었다. 어떻게든 끌어들였어야 했다. "휴! 이제 와서 그런 걸 후회해서 뭘 하냐." 발리안은 무얼 어떻게 되돌릴 수 없는 상황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버텨 봐야 소용없다는 것 역시. 이후 반지그 동맹은 일주일 조금 넘게 버티다가 끝내 와해되었다. 동맹의 총수 였던 발리안의 철공소가 파산했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도 그 즈음이었다. Chapter 07 학림고의 활극 1 반지그 동맹을 밟아 주느라. 며칠 밤을 새워 게임에 매진한 유한에게 전화가 왔다. "누구십니까?" 피곤에 절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상대는 혀를 찼다. "밤새 게임을 한 겁니까?" "개발자님이시군요. 무슨 일입니까?" 상대와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용건을 물었다. 잠시 혀를 찬 손석진은 본론을 꺼냈다. "제가 학림 아카데미와 관련해 조사를 했는데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손석진은 드림맥스를 움직여 학림재단과 관련 인물들을 감시하고, 전직 티쳐스의 선생들 컴퓨터까지 해킹했지만 좀저첨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계속 시간을 끌면 그들이 눈치를 채거나 다른 누군가 비리를 터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해진다. 그래서 손석진은 유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유한군이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지요?" "네. 뭘 도와드릴까요?" 학림고와 학림 재단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웬만한 것은 협조할 자세가 되어 있는 유한이었다. 그의 물음에 손석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학림고에 들어가 놈들의 장부와 시힘지를 빼 와 주십시오." "장부와 시험지요?" 유한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무리 그가 학림고를 싫어한다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중거 확보라는 명분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절도 아닌가. "제 해킹 실력을 아실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놈들의 컴퓨터에는 의심쩍은 장부나 문제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아마 회선이 단절된 컴퓨터나 금고 같은 곳에 보관해 두었나 봄니다." "하지만 전‥‥‥." 유한이 망설이자 손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보하지 못하면 학림 재단은 고발되어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겁니다. 유한 군은 그런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럼 반드시 그들을 파멸시켜 지금까지 부정 축재한 재산이 사회에 환원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장부가 꼭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지만, 그래도 사회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학림 재단의 부를 그런 이들에게 되돌리자는 말은 유한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무엇보다, 학림고가 부정 축재 한 재산으로 정현일 자식이 배 두들기며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안 들키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수락했다. "좋습니다. 제가 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개발자님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유한은 자신이 학림고에 침입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일들을 말해 주었고. 그의 말을 들은 손석진은 당연히 해 준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학림고 침투 계획은 완성되었고, 이제 실행을 남겨 두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다 끝내 버리는 거야.' 과거 자신의 악연은 물론 현재 학생들의 고통까지 그 모든 것을 청산하기로 다짐한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는 시간. 유한은 학림고 교문 근처에서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엿날에 입다 처박아 둔 교복을 어제 찾아 깨끗이 빤 뒤, 다림질까지 해서 입었다. 머리를 단정히 깎고, 입에 아이스바를 하나 물자. 누가 봐도 군것질 중인 학림고 학생으로 보였다. 용기를 낸 그는 당당하게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급식이 싫어 밖에서 점심을 사 먹는 학생도 있고, 교문 밖 분식집에서 군것질을 하고 오는 학생도 있기에. 누구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유한이 벌건 대낮에 학교에 침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은 죄(?)가 많은 학림고와 재단이 야간과 주말에 집중적으로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한과 손석진은 주중 대낮에 과감히 일을 벌이기로 정했다. '예상보다 정공법이 잘 통하는 군' 교문을 통과한 유한은 교무실이 있는 학교 본관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한때 학림고의 학생이이었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에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침내 유한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본관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시작인가?" 본관 앞에 다다른 그는 나무 뒤에 숨어서 숨을 들이켰다. 긴장되었기 때문이다. '가자!'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들긴 유한은 본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복을 입었기에 얼굴을 아는 사람들만 피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래도 주의해야 하지만 다행히 교무실이 있는 건물 3충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교무실 근방에 다다른 그는 근처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교무실 잠입을 손석진 씨가 확실히 책임져 준다고 했지?' 오후 1시 40분 유한이 손목시계를 보며 약속 시간을 확인했을 때였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학교 건물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재 경보였다. 손석진이 약속된 시간에 학림고의 시스템을 해킹해 울리게 만든 것이다. 화재 경보가 울리자. 교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불이 난 거야?" "어디? 어디?" "암튼 우린 수업 안 하는 거지?" "병신, 당연하지!" 불난 덕분에 수업을 재끼게 된 학생들이 복도에서 떠들어 대자, 뒤늦게 교실에서 나온 선생이 조용히 시켰다. "모두 조용히! 자자, 침착하게 줄을 서서 앞 열부터 계단을 내려간다, 실시!" 그렇게 교사들의 지도하에 학생들은 전부 운동장으로 나갔다. 건물을 빠져나온 선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눴다. "대체 불이 어디서 난 거야?" 연기라곤 한 줄기도 피어오르지 않자, 선생들은 어리둥절했던지 고개를 연방 갸웃거렸다. "혹시 오늘 소방 훈련한다는 말 있었습니까?" "그련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이거 혹시 어떤 녀석이 구석에서 담배 핀 것 때문에 센서가 작동한 게 아닐까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무시할 수도 없어 일단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다 나갔나?" 교사가 텅 비자. 유한은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근방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교무실익 문을 열었다. 교무실 안쪽에 교감실이 있는데, 다행히 교감실 문은 잠기지 않았고 안에 사람도 없었다. '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서둘러 교감실을 뒤졌다. 이번에 문제지 유출을 주도하고, 과거 티쳐스 선생들과 접선한 것은 교감인 정석재였기에 장부나 시힘지도 정석재가 관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게 아니면 곤란한데‥‥‥." 그러다 유한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홈칫 놀랐다. 그가 발견한 것은 교감실 한편에 설치되어 있는 CCTV.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있었던 터라 발견이 늦었다. 감시 카메라요? 제가 모조리 먹통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러니 뒤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석진의 말을 떠올린 유한은 CCTV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정말 전원이 나가 있었다. '손석진 씨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내심 안도한 유한은 다시 교감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당히 미심쩍은 금고를 하나 발견했다. 벽에 불어 있는 액자를 떼어 내자 나온 건데, 영화나 소설을 보면 악당들이 보통 그곳에 보석이나 중요한 서류 따위를 숨겨 놓곤 했다. '이거겠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손석진에게 받아 온 것이 있었다. 일명 만능열쇠. 현재 웬만한 금고는 전자적 장금 장치를 사용하는 데, 이를 교란시킬 수만 있으면 간단히 열 수 있었다. 유한은 서둘러 만능열쇠를 금고에 연결하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삑삑삑! 몇 번 전자음이 울리더니. 금고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됐다! 역시 세계적인 해커는 달라도 뭐가 달라." 기쁨의 을성을 토한 유한은 서둘러 안에 든 것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몇 개의 자질구레한 서류들이 나오고 드디어 유한이 찾던 것이 모습을 드리냈다. 학림 아카데미 고객 명단. 평범한 학원생들 명단이었으면 이렇게 보관하고 있을 리 없을 터. 유한은 서둘러 명부를 읽어 내려갔다. "역시!" 명부에는 누구누구에게 언제 얼마를 받고 문제지를 유출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학림 아카데미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그들이 문제지를 판 대상은 어림잡아 수백 명이 넘었다. 대부분 학부형들의 이름과 계좌 번호, 거래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이러니 학림 아카데미가 성직 잘 올려 준다고 소문이 날 수밖에." 혀를 끌끌 찬 유한은 다시 금고 안을 뒤졌다. 그리고 각 학교에서 빼 온 듯한 문제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유한도 익히 들어 본 강북의 명문 고등학교를 비롯한 십여 개 고등학교의 1학기 기말 문재지들이 들어있었다. 국어, 영어, 수학 등등 없는 과목이 없었다. 아마 이번에 팔아먹을 생각으로 고이 모셔 놓은 듯. '오냐. 너희들 이번에 콩밥 좀 제대로 먹어 봐라.' 내심 이를 간 유한은 발견한 문제지와 장부를 근처에 있던 서류 가방에 담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챙길 것도 챙겼으니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유한이 돌아섰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삐걱 열리더니 낯익은 낯짝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너는!" 2 '이크! 그걸 놔두고 나왔구나.' 정 교감은 화재 경보를 듣고 교사들과 본관 밖으로 빠져나오다 금고 안에 든 장부와 문제지들에 생각이 미쳤다. 만약 화재 경보가 사실이라면 혹시 그것들이 타 버리기 전에 꺼내 와야 한다. 그래야 하던 사업을 계속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 교감은 다시 본관을 올라 3층 교무실 안쪽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내가 안 닫고 나왔나?" 경황이 없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한 그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아니, 너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급식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학교 명성에 먹칠을 하더니, 끈질기게 자퇴하지 않고 버티던 녀석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게임에서 학생 유저들을 선동해 티쳐스를 박살 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정현일이 몸담고 있던 철십자 길드까지 해체시킨 놈도 이놈이다. 그런 놈이 자신의 방에 있었으니 정 교감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네놈이 여기 왜 있어!" "아하하. 그게 말이죠‥‥‥." 유한이 뭐라 변명을 하려다가 냅다 서류 가방을 휘둘렀다. "커억!" 머리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지자 정 교감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자리에 주저앉자 유한은 이때다 싶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잡아! 저새끼를 잡으란 말이야!" 정 교감이 새된 고함을 질러 보지만 지금 교무실에 사람이라고는 유한과 둘뿐, 그의 고함을 듣고 달려올 사람은 없었다. '근데 저놈이 왜 학교에 들어왔지?' 뒤늦게 이 사실을 인지한 정 교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 한쪽의 비밑 금고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시험지와 장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안색이 하양게 변한 정 교감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헉헉! 제기랄, 마지막에 가서‥‥‥." 죽어라고 복도와 계단을 뛰어 내려온 유한은 업굴이 벌개져 욕지거리를 밸어 냈다. 어쩐지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마지막에 가서 꼬여 버렸다. 유한은 본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운동장에 모여 있는 학림고 학생들과 선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들을 빙 둘러 교문으로 뛰어갔다. 뛰면 의심을 살까봐 잰걸음으로 걸었다. "어이. 너 어디 가는 거냐!" 유한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향하자 선생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유한이 힐끔 바라보니 체육 선생이었다. 과거 그가 학교에서 쫒겨날 때 정현일 일당의 편만 들어주던. '저 인간도 교감의 졸개갰지?' 유한이 대꾸도 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자 체육 선생이 다시 고함을 질렸다. "당장 이리 안 와!" 안 되겠다 싶은 유한이 뛰려고 할 때였다. 본관의 문이 열리더니 손으로 머리 한쪽을 감싸쥐 정 교감이 나놔 외쳤다. "저 새끼 잡아!" "예?" 어리둥절한 체육 선생이 물었다. "저 새끼 도둑놈이니까 잡으라고!" 채육 선생은 영문을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 정 교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유한을 향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왔다. 그러자 유한도 교문을 향해 뛰었다. 졸지에 추격전이 벌어졌다. 제일 앞에는 유한이 섰고, 그 뒤를 체육 선생과 다른 선생들이 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교문이 코앞까지 다가으자 유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 교문만 통과하면 자신은 자유였다. 그러나 그 환한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절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얼굴이 험악한 경비들이 교문 앞에 모여 있었다. 대충 세어 봐도 열은 넘을 듯. "허억! 헉! 이 도독놈의 새끼. 내가 널 이대로 보낼 줄 아느나?" 언제 도착했는지 정 교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교문의 경비들은 좀 전에 그가 전화를 해서 불러 모은 사람들이었다. 원래는 교내에 이렇게 숫자가 많지 않지만, 사건이 사건인 만큼 근처 재단 사무실에 있던 이들까지 모두 불러냈다. "어라, 넌?" 경비들 중에 유한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정현일의 개인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였던 대철이었다. "하아,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그건 전부 네 탓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으니까." 대철이 이를 뽀드득 갈며 말했다. 지난번 사건에 대해 정현일과 대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영순은 얻어터져 공처럼 얼굴이 부은 정현일을 보고 대철을 쫓아내 버렸다." 그 결과 대철은 학림 재단 정씨 일가의 운전기사 밑 보디가드에서 재단 사무실의 경비원으로 전락했다. "제길 완전 엎친 데 덮친 격이군." 유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철만 해도 벅찬데. 한눈에도 조폭스러운 경비들이 눈앞에 쫙 깔렸기 때문이다. "뭐하는 거야? 얼은 저 녀석을 잡아!" 정 교감의 고함에 대철과 경비들이 유한을 향해 다가왔다. 선생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흥미진진한 얼굴로 구경했다. 졸지에 앞뒤로 포위당한 유한. 그는 주먹을 쥐고 달려 나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 선생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 어?" 유한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체육 선생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한은 그런 그의 복부에 묵직한 주먹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크억!" 배를 움켜쥐고 무너지는 체육 선생 뒤로 빈틈이 보였다. 그러나 유한이 그곳으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둘 대철이 아니었다. 그는 몇 걸음 도약하더니 그대로 유한의 들을 걷어찼다. 바닥을 굴러 타격을 줄인 유한은 별수 없이 대철과 싸우기 시작했다. "제길! 비리 재단의 사낭개 노릇을 하니까 좋습니까?" "닥쳐!" 대철은 숙련된 싸움꾼의 실력으로 유한을 압박해 갔다. 우선 유한의 코와 눈을 때렸다. 코피가 나면 제대로 호흡하기 힘들고, 눈이 부으면 사방을 살피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치를 가볍게 갈겨 주면‥‥‥." 숨이 턱 막히면서 주저앉고 말리라. 그러나 유한을 차례대로 요리해 가던 그는 마지막에 방심을 하고 말았다. 유한에게 허를 찔려 안면 박치기를 당한 것이다. "커억! 내 얼굴!" 대철에 한 방 먹이긴 했지만, 유한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다른 결비들까지 가세하여 주먹을 휘두르자, 유한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야만 했다. "어린놈의 자식이 어른을 때려?" "죽어 봐라, 애새끼." 아무리 유한이 극기도를 수련하고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해도 상대는 경비의 탈을 쓴 조폭. 그것도 대철이란 뛰어난 싸움꾼이 포함된 조폭들이었다. 퍽퍽퍽! 순식간에 여러 군데를 두들겨 맞은 유한은 정신이 다 없었다. 그나마 맷집이 좋아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바닥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렇게 유한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을 때였다. 경비들을 멈춰 세운 정 교감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놔!" "뭘요?" "네가 아까 내 방에서 훔친 거 말이다 그 가방 안에 들었지? 그걸 주면 오늘 일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겠다." 피식! 정 교감의 말에 유한은 웃음이 나왔다. 독사처럼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누가 누굴 용서해준단 말인가. 차라리 이 자리에서 묻어 버린다고 하는 게 더 믿음이 같 것이다. "싫은데요," 유한이 거절하자 정 교감이 눈짓을 했고, 대철과 경비들이 다시 나서서 유한을 차고 밟기 시작했다. 유한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어떻게든 품에 든 가방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에썼다. "싸움이다!" "경비들하고 울 학교 학생이 싸우는 것 같은데?"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맞고 있잖아. 그런데 선생들은 왜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유한과 경비들과의 싸움이 길어지자, 운동장에 피신해 있던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긴 자신들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열이 넘는 경비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고 있으니 궁금증이 일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가 보자!" 호기심이 강한 학생 몇이 교문 쪽으로 움직이자. 상당수의 학생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뒤늦게 선생들이 말렸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학생들을 말리기는 역부족이었다. 퍽! 또다시 대철에게 차인 유한은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교복이 흙투성이가 되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머리를 대철이 발로 눌러 밟았다. "죽고 싶냐? 그만 포기하고 가방 얼른 내놔." "큭! 차라리 죽여라. 이 더러운 놈들아." "아직 입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덜 맞았구먼." 대철은 다시 발로 유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렇게 유한이 엉망진창으로 당하고 있읕 때였다. 갑자기 학생들 쪽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3 "그만해, 이 조폭 새끼야! 뭐 때문에 학생을 그렇게 두들겨 패는데? 개가 죽을죄라도 지었냐!" 갑자기 학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고함. 그 고함은 몰려온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저 경비들이 조폭이었나?" "그러고 보니 인상이 심상치 않았어." 조폭에게 경비 옷을 입혔다지만, 그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험악한 인상에 깍두기 머리. 그리고 건들거리는 태도는 누가 봐도 그들이 조폭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었다. "누, 누가 조폭이라는 거냐! 저들은 우리 학림고에서 고용한 경비‥‥‥." 정 교감이 반박을 하려 할 때 다시 학생들 사이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경비가 학생을 패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벌을 줄 게 있으면 선생님에게 말하면 되잖습니까! 그리고 선생님들은 왜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 겁니까!" "맞소!" "선생님들은그러고도 참 교육자입니까!" 학생들 속에서 호응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선생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경비들을 제지하자니 정 교감의 눈이 무섭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학생들에게 올바르지 못한 선생으로 낙인찍힐까 두렵다. "어떤 놈이 자꾸 선동하는 거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정 교감이 학생들 앞 나서서 호통을 쳤다. 평소 학생들을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던 그라서 펄펄 뛰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떤 호래자식인지는 몰라도 잡히면 한 달 정학에 부모님을 학교로 불러오도록 만들겠다!" "우우우!" 학생들이 야유하자 정 교감이 선생들을 향해 신경질을 냈다. "박 선생, 김 선생. 뭐 하는 거요? 학생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소. 저놈들을 얼른 교실로 돌려보내시오!" "아, 알겠습니다." 정 교감의 지시를 받은 선생들은 몽둥이를 휘드르며 학생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들 사이에서 덩치가 좋은 남학생이 뛰어나오더니 선생을 밀치고 경비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러 대는 사이, 엉망진창으로 밟히고 있던 유한이 경비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있던 것 중 일부를 학생들에게 확 뿌렸다. "억! 저것은!" 당황한 정 교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학생들 중 일부가 유한이 뿌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어? 이거 대진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문제?" "아니,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잖아?" "이건 청솔고 시험지‥‥‥앗! 우리 학교 시험지도 있어!" "뭐! 진짜?" 학생들의 동요가 커지자. 유한이 고함을 질렀다. "모두 다 똑똑히 들어! 내가 이걸 어디서 갖고 온 줄 아냐? 바로 교감실에서 꺼내 온 거다. 그걸 안 교감이 조폭을 동원해 날 잡으려 든 거고!" 학생들도 학림고와 재단의 비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재작년의 생쥐 스프 사건도 있었고, 수학 여행비를 비싸게 받아 놓고 식사나 부대시설은 형편없었다든지 하는 이런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 시험 문제지를 빼돌려 학생들의 내신 성적을 조작할 줄은 몰랐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모두 새까만 거짓말이다!" 뒤늦게 정 교감이[정 교감→ 정 교감이 by. 곰] 외쳐 보지만 이미 늦었다. 학생들의 목 소리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라고요? 그럼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시힘지는 뭡니까?" "왜 딴 학교 기말고사 시험지가 우리 학교에 있는 겁니까!" "게임에서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는 애들의 성적이 부쩍오른게 이것 때문인가요?" "선생님!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 보시죠!" 학생들의 쏟아지는 항의를 듣자니, 정 교감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옆의 선생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빼앗아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두들겨 패고 시험지를 빼앗아 찢어발겼다. "이놈의 새끼들! 돌아가라면 돌아갈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전부 퇴학당하고 싶어?" 그러나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항의 외의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유한은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자식들아, 왜 멍청이 서 있어? 상대가 선생이라고 언제까지 당하기만 할 거야! 이번에도 그냥 뒤에서 투덜거리고 말 거냐? 백날 그래 봐라! 손해 보기 싫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유한이 학생들을 선동하는 것을 본 정 교감은 펄펄 뛰었다. "뭣들 하는 거야! 저놈의 입을 막아! 얼른!" 정 교감의 말을 들은 대철이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좀 전에 조폭들에게 달려들어 유한을 구했던 덩치 큰 남학생이 그의 발을 붙들었다. "흥. 그렇게는 못 하지!" "이런 거머리 같은 놈이!" 덩치 큰 남학생은 대철과 조폭들이 두들겨 패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성난 곰처럼 일어나 경비들을 밀어불였다. 그가 그렇게 시간을 벌어 준 사이. 유한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외침을 울부짖었다. "싸워! 남의 구원 따위는 바라지 말고. 너희들 스스로 변화와 권리를 쟁취하는 거다!" 유한의 외침은 거대한 폭탄의 뇌관을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학림고와 재단에 불만이 쌓여 있던 학생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학생회는 학림 재단의 비리를 감사하라!" "감사하라!" "재단 이사장과 교장, 교감은 지금까지 저질러 온 비리를 모두 이실직고 하고 경찰에 자수하라!" "자수하라!" 정 교감은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눈앞에 벌어지는 이 광경은 예전에 게임 속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바로 티쳐스 사건 때였는데. 그때도 강유한이 애들을 선동했었다. "막아! 저놈들을 막으라고!" "우와아아아!" 하지만 성난 파도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학생들의 인해 물결을 대철을 비롯한 조폭들이 막아보려고 나섰지만, 오히려 그들은 학생들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기가 질려 주춤주춤 물러서던 선생들은 결국 몽둥이를 내버리고 도 망쳤다. 남은 것은 정 교감뿐. 그는 끝까지 몽둥이를 휘둘러 대며 발악했다. "이, 이놈들! 당장 그만하지 않으면 모두 퇴학이야, 퇴학!" "흥. 그래! 퇴학시켜라!" "더러워서 이딴 학교 안 다니련다!" 이미 저질러 버린 학생들은 꺼릴 것이 없었다. 남학생들이 정 교감의 몽둥이를 빼앗아 분질러 버리자. 여학생들은 머리털을 뽑고 팔을 꼬집었다. 평소 제왕처럼 학생들 위에 군림하던 정 교감은 거지꼴이 되어 달아났다. "흥, 꼴 좋~ 다!" 정 교감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 치던 유한은 찢어지고 흩어진 시힘지들을 주워 모았다. 좀 전에 뛰어나왔던 명치 큰 남학생이 그런 그를 도와주었다. "고마‥‥‥ 어, 넌?" 고마움을 표하다 말고 유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좀 전엔 경황이 없어 못 알아봤는데, 이제 보니 자신을 도와 준 인물이 상당히 낯익었다. 그는 유한에게 말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댔다가 말을 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학림고 학생들의 시위를 틈타 교문을 빠져나온 유한. 그는 자신을 구해 준 덩치 큰 남학생을 향해 물었다. "성덕이 네가 어떻게?" 유한의 말대로 그는 바로 고경덕이었다. 북성공고의 주먹대장인 녀석이 왜 학림고에 있는 건지? 그것도 학림교 교복을 입고. "아르페디아 온라인 개발자 씨가 나에게 전화를 했더군. 네가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데 도와주지 않겠냐고." 손석진은 유한과 작전을 짠 뒤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유한이 잠입했다가 잡히게 되면 그뿐만 아니라 드림맥스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불량아를 선동해 도둑질을 시켰다고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손석진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유한을 도울 사람을 들여보내기로 했고, 그 결과 뽑힌 인물이 고경덕이었다. 고경덕은 손석진이 마련해 준 학림고 교복을 입고. 유한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학림고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재경보기가 울렸을 때 학생들 틈에 섞여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너 왜 하필이면 내가 실컷 두들겨 맞은 뒤에 나선 거냐?" 유한이 원망스러운 얼굴로 묻자, 경덕은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다. "훗, 구원자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해야 멋지니까." "으이그! 이걸 그냥!" 유한은 하마터면 고경덕의 얼굴을 후려갈길 뻔했다. 그러나 이리저리 두들겨 맞고 진이 빠지 있었던 그는 움켜 쥐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만 가자. 손석진 씨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학림고를 나온 유한과 고경덕은 택시를 잡아타고 손석진과 사전에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4 학림고에서 초유의 학생 시위사태가 벌어진 다음 날. 재단 이사장의 부인인 홍순영 간사장은 교무실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태가 이렇게 번지도록 도대체 선생님들은 뭘 한 겁니까?" 그녀가 늦잠을 자다 말고 학림고로 달려온 이유는 지역 신문 1면에 난 기사 때문이었다. '학림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란 제목의 기사는 어제 학림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소요가 언급되어 있었다. 비록 자세한 내용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교감 선생님은 어딜 간 겁니까?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겁니까? 당장 전화해 보세요!" 그녀의 지시에 체육 선생이 정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이 양반이 사고는 자기가 다 쳐놓고 잠적한거야 뭐 야?' 일단 신문에 어제의 일이 기사로 나간 이상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고. 그러면 그날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학생들의 입을 죄다 막지 않는 이상 시험지 유출 건도 숨길 수 없게 된다. 홍순영이 속을 태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교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선생 하나가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사모님!" "왜요? 경찰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했습니까?" 홍순영의 말에 선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에?" 홍순영은 자신이 그저 해본 말이 현실이 되었다 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경찰들이 교문을 통과 했다고 합니다.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아, 안돼!' 경찰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뻔했다. 바로 문제지와 장부에 대해 추궁하러 오는 것일 것이다. 가방을 맨 홍순영은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경찰들이 그녀의 앞으로 들이닥치는 게 더 빨랐다. "홍순영 씨죠?" "그, 그런데요?" "당신을 시힘 문제지 유출과 부정 횡령 혐의로 체포합니다." "내, 내가 안 그랬어. 이 모든 것은 정석재가 그랬단 말이야!" 홍순영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고. 담당 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요. 정석재 교감은 홍순영 씨가 시켜서 한 일 이라고 하던데요." "그럴 리가! 정석재 어디 있어? 그 작자 어디 있냐고!" "걱정 마십시오. 곧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공항에서 출국하려다 체포 되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담당 형사는 홍영순에게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인이 하는 말을 당신에게 불리하계‥‥‥." 홍영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 오직 차가운 수갑의 감촉이 그녀를 어두운 내리막길로 이끌고 있었을 뿐. 시험지 유출을 주도했던 두 사람이 체포당한 그날 저녁. 얼굴에 이리저리 반창고를 불인 유한은 9시 뉴스 시간이 다가오자 냉큼 거실로 와서 TV를 틀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C 9시 뉴스 아나운서 전주일입니다. 오늘의 첫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교육계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아나운서의 장탄성과 함께 학림 재단의 시힘지 유출 범죄가 낱낱이 보도되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유한은 뉴스의 내용보다 경찰에 체포된 정 교감과 선생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오늘 그는 우거지상을 하고 잡혀 가는 선생들을 직접 보기 위해서 다시 학림고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경찰이 먼저 와서 다 잡아가 버린 뒤였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뉴스를 보며 달래고 있었다. 뉴스의 생생한 화면은 그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고도 남았다. '크크크, 나중에 면회 가서 약 올려 줘야지!' 구치장에 있으면 먹을 것도 시원찮을 터. 통락 한 마리 싸 들고 가서 눈앞에서 보란 듯이 쩝쩝 먹어 주리라. 유한이 통쾌한 상상을 하는 사이 뉴스는 계속되었다. "‥‥‥이들의 행각을 고발한 것은, 게임 내의 학원 시스템을 지원하는 D사로. D사는 이들의 수상한 행적을 보고 조사한 끝에 증거를 입수해 경찰에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서 기자. 이들이 예전에 게임 내에서 학생들의 아이템을 갈취해 유흥비로 탕진했던 적이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예. 이번에 체포된 정씨는 일명 티쳐스라 불리던 교사 집단의 수장으로, 이번 일은 과거 티쳐스에 가담했던 몇몇 교사들과 모의하여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면서 기자는 이번 사건이 매우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진행되었다는 둥. 정석재가 시험지 유출을 거부한 교사에게 협박과 린치를 가한 적도 있다는 둥. 학림고의 뒤에 국내 유명 폭력 조직이 있다는 둥 줄줄이 옮어 댔다. "공모자도 많고, 이들과 거래한 학생과 학부모도 굉장히 많으니 이들이 부정하게 거둔 수익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거래 금액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아나운서의 물음에 기자가 대답했다. "일단 장부상에 나타난 금액만 해도 엄청난 액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거둔 수익이 장부에 언급된 계좌에서 깨끗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학림 재단이 은행에 보유하던 자산도 어제 함께 사라졌습니다. "서 기자. 그것은 뭐라고 보아야 합니까?" "경찰은 정씨가 해의 도피를 시도했던 점으로 미루어 이들이 범죄 사실이 알려지자 먼저 자산을 해외로 밀반출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 점을 학림 재단 측에서는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했다. 오히려 그들은 재산을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다며 하소연하고 있다고. "다음 소식입니다. 앞에 전해 드린 것과 반대로 상당히 흐뭇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독지가가, 전국의 고아원과 요양원들에 수십 억대의 기부를 했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에 유한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독지가가 어디서 그런 돈을 가져왔는지도. "뉴스 방영 전 저의 방송사로 이 독지가 분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바로 제가 들고 있는 이 편지인데요. 이분은 앞으로도 불우 이웃과 소년 소녀 가장, 독거노인들을 상대로 기부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아나운서가 들고 있는 편지 뒷면에는 광대, 즉 조커의 그림과 큼지막한 망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유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TV를 껐다. '다 끝났군.' 가슴이 후련하고. 통쾌했다. 일전에 정현일을 목사발로 만들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진했는데. 오늘 그 미진한 것을 다 풀었다. 그의 인생 최대의 오점을 만들어 준 정 교감과 학림고. 하지만 그는 오점에 굴하지 않고 성장했고 그 성장을 발판으로 시원한 복수까지 했다. '이제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천장을 향해 두 팔을 볼끈 치켜든 유한은 오늘 학원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해 방으로 올라갔다. Chapter 08 다시 나타난 해븐즈 게이트 1 학림고와 학림 재단의 수뇌부들을 줄줄이 잡혀 들어가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유한은 이틀 정도를 쉰 다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지그, 너 그동안 접속 안 하고 뭘 했어?" 송코가 댓바람에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형?" "당연하지. 지금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난리도 아니야." "무엇 때문에요?" 유한의 물음에 송코는 유한이 지난 며칠 동안 접속하지 않은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헤븐즈 게이트 때문이야. 그저께 공식 홈페이지에 더스트 평원에서 헤븐즈 게이트로 보이는 유적을 발견했다는 글이 올라온 뒤로 한다 하는 유저들은 모두 그곳으로 몰려갔어." 그래서 재철소가 썰렁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리지스와 아스란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 둘도?" "그래. 나도 좀 있다 합류할 생각이었어." "허!" 유한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븐즈 게이트를 찾아도 스타레이가 없으면 열 수 없고 자격이 안 되면 천계에 올라도 바로 쫓겨난다. 그런데 무럭대고 헤븐즈 게이트로 향하다니. 유한은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누가 뭐래도 헤븐즈 게이트 처음 연 사람이 그였고. 토르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도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럼 우리도 출발하죠." 유한은 짐마차를 소환한 뒤 송코와 함께 헤븐즈 게이트가 발견되었다는 브로딘 왕국의 더스트 평원으로 향했다. 헤븐즈 게이트.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는 고렙 유저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 본 이름이다. 일정 자격을 갖추면 천사가 내려와 헤븐즈 게이트를 찾으라고 종용을 하는데, 헤븐즈 게이트를 열면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한다. "신들의 세계?" "일종의 천계겠지. 듣자니 각 직종의 신들과 만날 수 있다고 해." 대장장이면 대장장이의 신 토르. 상인이면 상인의 신 디요른. 전사나 기사면 전신(戰神) 아레스 등등. "그들을 만나서 뭐 하게?" "바보. 지금까지 신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저 그런 신이 존재한다고만 알려졌을 뿐. 그런데 직접 신을 만나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해 봐. 그 명예가 어마어마하지 않겠어?" "그럼 유니크 아이템이나 히든 스킬 같은 걸 줄지도 모르겠네?" "당연하지." 신이 인정한 유저. 그것은 각 직종에서 최고의 유저라는 말과도 같았다. 그 외에도 헤븐즈 게이트를 열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덕분에 랭커들뿐만 아니라 랭커에 들지 못한 유저들도 상당수가 헤븐즈 게이트를 찾아왔다. 그렇게 유저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지그다!" "대장장이 지그도 왔어!" 현재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를 꼽으라면 누구나 지그를 꼽을 것이다. 그는 아르페디아의 철 시장을 장악한 거물이며, 과거 혼자서 광룡 카세라스를 잡은 뛰어난 전사 바츠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반지그 동맹을 가뿐하게 밟아 준 겉로 유명세가 더해졌다. "쯧쯧! 아예 사람들로 평원이 가득 찬 것 같네요?" 짐마차를 몰고 있던 유한은 평원에 가득한 유저들을 보고 혀를 찼다. 헤븐즈 게이트는 누가 사용하든 한 번 사용한 뒤엔 자동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많이 온 건지. "그만큼 최고가 되고 싶다는 거겠지. 보상도 탐이 났을 거고." "형도 헤븐즈 게이트를 열고 싶어요?" 유한의 물음에 송코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글쎄.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 '하아. 오늘 일 쉽지 않겠군.' "지그야! 여기야. 여기." "어? 시아 너도 왔어?" "리지스가 혼자 가기 심심하다고 해서." 채린의 안내로 유한은 일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리지스. 옌스. 에이린. 오펜. 로키. 블랙. "어? 넌 왜 왔냐?" NPC인 블랙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자 유한이 의아해 물었다. 헤븐즈 게이트를 여는 것은 유저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후손. 이곳에서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마왕이 강림하는 거라면‥‥‥." "천계에서 내려오는 마왕도 있냐!" 유한은 블랙을 외면해 버리고는 리지스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때?" "일촉즉발이야." "일촉즉발?" "저길 봐." 리지스가 가리킨 곳은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유저들이 세 무리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는데, 헤븐즈 게이트 유적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를 빼앗으려는 자, 그리고 기회를 노려 어떻게든 차지하려는 자들이었다. "B.O.B 길드와 다크 나이트 길드가 한편을 먹었고, 나머지 십대 길드가 또 한편, 그리고 중소 길드나 소속이 없는 유저들이 나머지 한편을 먹었어." 자세히 바라보니 그들의 소속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헤븐즈 게이트가 발견된 것이 사흘 전이라고 하던데, 왜 아직까지 안 열고 있는 거지?" 로키는 처음 발견했을 때 열 것이지 왜 아직도 지켜보고만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게이트를 여는 결정적인 열쇠가 없기 때문이에요." "열쇠?" 로키는 유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천사가 천공의 문을 열기 위해선 별빛을 찾으라고 하잖아요. 별빛이 바로 열쇠인데. 그 별빛이 무슨 아이템을 지칭하는 건지 아직 모르니까요." 헤븐즈 게이트를 여는 데는 반드시 별빛, 스타레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스타레이는[스타레이가→스타레이는 by. 곰] 획득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신의 광물이라 불리는 운석을 제련해야 얻을 수 있는데, 일단 운석부터가 획득하기 굉장히 어렵다. 유한이 알기로, 국내외를 통틀어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운석을 소유하고 있는 유저는 열 사람이 채 안 되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는 자신과 귀련, 그리고 해외의 유저 중 몇 사람뿐인 것이다. 이 운석을 제련해 스타레이로 만들어야 헤븐즈 게이트의 열쇠로서 가치가 있다. '흐흐흐. 고로 저 게이트를 열 사람은 나와 귀련 누나밖에 없다는 말씀!' 유한이 내심 의기양양해 할 때 리지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엉덩이를 비볐다. "지그야.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싫어!" 유한이 내용을 듣지도 않고 딱 잘라 거절하자 리지스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어쩜 그럴 수 있어? 네가 없는 동안 제철소를 돌봐 준 게 누군데‥‥‥." '알았어, 일단 들어는 줄 테니까 말해 봐." 유한이 좀 너무했나 싶어 허락하자. 리지스가 웃으며 말했다. "시아한테 들었는데, 너 일전에 청해도에서 헤븐즈 게이트를 연 적 있다며? 그래서 말인데. 그때 사용했던 열쇠 좀 빌려 줄 수 없어?" 당시 청해도에 같이 있었던 동료들은 유한이 헤븐즈 게이트를 연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열쇠 일회용이던데." "진짜?" "그래, 쓰고 나니까 없어지더라고. 나 사실 그때 천계까지 갔었는데 자격이 안 된다고 문전 박대 당했어." 유한의 말을 듣고 리지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금새 기운을 차린 그녀는 다시 말을 건네 왔다. "그래도 열쇠로 쓰인 아이템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지?" "그렇긴 한데 워낙 구하기 힘든 거라‥‥‥ 그렇게 쫓겨 날 줄 알았으면 사용하지 않는 건데 말이야." 유한은 능청맞게 아쉽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리지스는 그런 그의 팔을 잡고 흔들어 댔다. "그게 뭔지 좀 가르쳐 줘! 나 이번에 '트레이드 퀸(Trade Queen)' 이라는[라는→이라는 by. 곰] 칭호를 받고 싶단 말이야. 상업의 신 디요른에게 인정받으면 트레이드 퀸이라는 칭호를 얻는 모양이다. 이렇게 리지스가 유한에게 로비를 하자 에이린과 옌스가 뒤질세라 나섰다. "지그 오빠. 나 홀리 세인티스(Holy Saintess)가 되고 싶어." "바츠, 난 배틀 마스터(Battle Master)가 되고 싶은데‥‥‥." "유한아. 나도 안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마지막은 한쪽에서 무게를 잡고 있던 로키의 말이었다. '허, 이 사람들이!'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유한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부터 뭐가 된 다음에 그들이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유한이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언덕 아래를 응시 하고 있던 오펜이 소리쳤다. "드디어 움직인다!" 2 김요셉과 아스란을 비롯한 몇몇 톱 랭커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 온 게 엊그제. 문제는 거의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데 있었다. 게이트는 하나인데 이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자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치고 나간 게 B.O.B 길드와 다크나이트 길드였다.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은 두 거대 길드는 길드원들을 동원해 헤븐즈 게이트 유적을 에워싸 버렸다. 자신들 외에 어느 누구도 차지할 수 없도록. 이에 뒤늦게 도착한 다른 십대 길드의 길드원들이 거칠게 항의했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유저들은 어부지리를 노리기 위해 호시탐탐 틈을 살피고 있었다. "이러다 큰 싸움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어이. 아스란. 네가 좀 말려봐." 나름 평화주의자(?)인 김요셉의 말에 아스란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이야기해 봤습니다. 하지만 제 말을 안 듣더군요." "그럼 어쩌지?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하나?" "그나마 어느 누구도 헤븐즈 게이트를 열 수 없어 다행입니다. 만약 어느 한쪽에서 열쇠를 가진 자가 나타나면 바로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요." 지금은 대치 상태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헤븐즈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느 한쪽에서 열쇠를 가진 자가 등장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열쇠를 빼앗기 위해서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곳 더스트 평원은 거대한 전쟁터로 변해 버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망할 자식이 열쇠를 가지고 있지? 설마 아직 게임에 등장 안 한 것 아냐?" 김요셉의 물음에 아스란이 집히는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 일전에 헤븐즈 게이트가 한번 열린 적이 있거든요. 제가 조사해 본 바로는 대장장이 지그가‥‥‥."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낯선 차림의 외국인들이 유저들을 가로지르며 헤븐즈 게이트 유적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들이 접근하자. 유적을 지키고 있먼 B.O.B&다크나이트 길드원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들은 누구요? "우린 찬드라 대륙의 제일 길드 흑룡방이다. 그리고 나는 그 흑룡방의 방주인 프랭클린이라고 한다." 찬드라 대륙을 양분하는 세력 중의 하나인 흑룡방. 이곳이 찬드라 대륙이었다면, 주변의 유저들은 물론 프랭클린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까지 모두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흑룡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자신들은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정상을 다투는 길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흑룡방이 여기는 무슨일이요?" "거기 유적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지." 헤븐즈 게이트를 찾으라는 천사의 명을 받은 것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한국인 유저들만이 아니었다. 찬드라나 후소를 비롯한 외국인 유저들에게도 천사는 나타났다. "별빛을 찾아 천공의 문을 열면 '무황(武皇)의 칭호를 준다고 하더군. 그래서 무황이 되기 위해서 이 먼 대륙까지 온 것이다." 프랭클린은 더스트 평원에서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지기 전에 이미 휘하의 문도들과 함께 아르페디아 대륙에 들어와 있었다. 철십자 길드의 대륙 통일 전쟁 때 상륙조차 못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헤븐즈 게이트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찬드라 대륙에선 사방팔방 다 찾아봤지만 없었기에. 그렇게 아르페디아 대륙 곳곳을 둘러보고 다니다가 더스트 평원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다행히 유적은 아직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듯. "다음 기회를 노리시오. 지금 이 유적은 B.O.B와 다크나이트 두 길드의 공동 소유요." "그건 너희들 멋대로 정한 것 아닌가. 별빛이 없어 유적을 가동시키지도 못하는 주제에 부둥켜안고만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프랭클린의 비웃음에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이 발끈했다. 그러나 그들은 경솔하게 덤비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섣불리 싸움을 벌이면 다른 유저들만 좋아할 것이기에. "가동 능력이 없으면 소유 자격 역시 없는 것. 그런 너희들과 달리, 나에겐 자격이 있다." 프랭클린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을 뽑아 들었다. 손잡이가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가늘고 긴 패검은 태양 아래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오오오!" 유저들이 감탄을 터트리자 프랭클린이 거만하게 말했다. "유성검(流星劍)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을 녹여 만든 신검이지." "별을 녹여 만든 신검이라고?" 유저들은 프랭클린의 손에 들린 유성검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예사롭지 않은 검의 빛은 정말 천상에 빛나는 별빛과도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천공의 문을 열 수 있는 별빛‥‥‥ 아, 아니! 이놈들이!" 말을 하다 말고 프랭클린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성검을 헤븐즈 게이트의 열쇠라 확신한 유저들이 흑룡방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저게 열쇠다! 뺏어!"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다!" "흥, 건방진 코리안들! 감히 나에게서 유성검을 빼앗겠다고?" 분노한 프랭클린은 공격하는 유저들에게 유성검을 휘둘렀다. 검은 무복을 입고 은빛 잔상을 남기는 유성검을 휘두르는 프랭클린의 모습은 날카로운 이를 번득이는 한 마리의 검은 용과도 같았다. "모조리 죽여라! 이 기회에 우리 흑룡방이 일마나 강한지 똑똑히 보여 줘라!" "복명!" 멘데이를 비롯한 흑룡방의 무사들은 달려드는 한국 유저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둘렀다. 과연 흑룡방의 고수들은 강했다. 프랭클린이 가려 뽑은 정예들답계 출수할 때마다 이성을 읽은 벌 떼처럼 덤벼들던 한국 유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점차 강한 유저들이 달려들고, 마법사와 성직자, 궁수들까지 가세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더구나 처음에는 무질서하게 덤벼 대던 한국 유저들은 시간이 갈수록 조직적으로 싸워 나갔다. 처음엔 단순히 검을 빼앗자는 욕심이 앞섰지만 프랭클린과 흑룡방의 실력을 보고 일단 먼저 그들을 쓰러트리자는 생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이런! 문도들을 더 끌고 올 걸 그랬나?' 100여 명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건만. 개미 떼같이 몰려 드는 한국 유저들을 상대로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인해 전술에 밀린 혹룡방은 하나하나 쓰러지기 시작, 마침내 프랭클린과 먼데이. 그리고 몇몇 고렙 문도들밖에 남지않았다. "내가 실수했군. 너무 배짱을 부린 게 화근이야. 얼른 이곳을 벗어난다!" "그렇게는 안 돼지." 프랭클린이 문도들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였다. 그의 뒤에 있던 흙바닥이 출렁거린다 싶더니 날렵한 슈트를 입은 사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검은 초승달 길드의 길드장 키라. 그것이 프랭클린의 배후에 나타난 사내의 이름이었다. 키라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손에 쥔 자마다르를 프랭클린의 들을 노려 찔렀다. "죽어라!" "크억!" 등 위에서 기습을 당한 프랭클린은 심장을 정확히 찔렸다. 찬드라 대륙에서 알아주는 고수인 그였지만, 다수의 유저와 싸운다고 힘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거기다 랭커급 어쎄신인 키라의 기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 "비, 비겁한‥‥‥." "훗, 당한 네가 멍청한 거야. 그런데 이게 헤븐즈 게이트의 열쇠란 말이지?" 키라는 프램클린이 죽어 가며 떨어트린 유성검을 주워 들고 히죽 웃었다. "감히 방주님을 해하다니!" "당장 저놈을 죽여라!" 아직 살아 있는 흑룡방 문도들이 분기탱천하여 키라에게 덤벼들었다. 눈앞으로 상대가 달려들고 있었지만, 키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크어어억!" 돌격하던 흑룡방 문도들의 몸에 창이 꽃혔다. 갑자기 땅에서 창이 솟구쳐 올라와 피할 틈이 전혀 없었다. 그들을 공격한 것은 검은 초승달 길드의 도적들이었다. 키라와 함께 땅을 파고 몸을 숨기고 있던 그들은 상대가 머리 위로 지나가기 무섭게 암습을 펼쳤다. "후후후. 멍청한 양키 놈들." 키라는 쓰러진 흑룡방 문도들을 비웃어 주며 헤븐즈 게이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못했다. 힘들게 흑룡방과 싸운 유저들이 키라가 헤븐즈 게이트를 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둘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라는 자신을 둘러싼 유저들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희생이 더 컸으니. 사나이답게 깨끗이 포기하죠." 그렇게 말하며 키라는 돌아서더니 손에 든 검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저기 유성검이 날아간다!" "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유저들은 키라가 검을 던진 쪽으로 몰려가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검은 초승달 길드원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키라를 바라보았다. "왜 겨우 빼앗은 검을 양보하신 겁니까?" "너희들도 바보군. 내가 진짜 앙보할 줄 알았나?" "앗!" 키라는 진짜 유성검을 슬쩍 보여 주며 씨익 웃었다. 좀 전에 집어 던진 검은 비슷하게 생긴 일반 강철검이있다. 돌아서는 순간, 진짜와 바꿔치기한 것이다. "이제 내가 헤븐즈 게이트를 열 것이다! 그리하여 어쎄신 헤드(Assassin Head)가 되는 거지!" "조용히 하십쇼. 주위에서 듣겠습니다." 부하들의 만류에 키라는 흠칫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성검을 차지하겠다고 아귀다툼 중인 유저들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유적을 지키고 있는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 그들은 좀 전에 흑룡방주가 유성검을 내밀었을 때도 꿈쩍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다른 욕심이 없다는 듯 그들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키라는 안심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아는가. 모두가 지쳤을 쯤에 덮쳐서 검을 빼앗으려 들지. 그러나 키라외 예상은 빗나갔다. '후중'이라는 이름의 다크나이트 길드의 간부가 키라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 "그 검으로 헤븐즈 게이트를 열고 싶습니까?" "마음은 그런데 댁들이 막을거 아니오?" 아무리 랭커 어쎄신이라지만. 키라는 기습이 아닌 싸움은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B.O.B나 다크나이트 길드같은 거대 길드와는 더더욱. "막지 않을 테니 어디 열어 보시죠." "엥?" "우리도 지키고만 있으려니 지루해서‥‥‥." 그러면서 후중은 유적을 지키는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에게 비켜 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키라의 앞으로 유적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좍 열렸다. 이들이 보인 뜻밖의 행동에 키라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저, 정말 나한테 양보해 주는 겁니까?" "고맙거든 나중에 우리들 의뢰나 공짜로 받아 주던가." "딴소리하기 없깁니다!" 키라는 헤븐즈 게이르 유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스톤헨지를 담은 유적 가운데 유성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 하늘의 문이 열린다!' 키라는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빛의 기둥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결국 10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키라는 유성검을 유적 이곳저곳에 옮겨 놓아 봤지만. 역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이거 왜 이래? 혹시 가짜인가?" "크크크, 머저리 같은 놈." 먼저 그를 들여보낸 후중을 위시하여 주변의 B.0.B길드&다크나이트 길드원들이 킬킬거리며 키라를 비웃었다.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한 키라에게 후중이 친절히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멍청아, 그딴 걸로는 천공의 문은 안 열려. 천공의 문을 열 수 있는 건 따로있다." B.O.B와 다크나이트는 철십자 길드 붕괴 이후, 협력 관계에서 대립 관계로 돌아섰다. 주된 이유는 아르페디아 최강 길드라는 명예와 마노스 제국의 이권 때문이었지만. 길드 상위 고렙들의 헤븐즈 게이트 수색과 탐문이 원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궤스트나 탐험을 통해 아르페디아 대륙 곳곳을 누비며. 헤븐즈 게이트와 연관된 모든 것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헤븐즈 게이트와 그것을 여는 별빛이 스타레이라는 특수한 물질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즉 유성검은 열쇠가 아니라는 사실. 스타레이에 대한 정보를 알려 온 것은 B.O.B 길드의 창설 멤버인 아크 위저드 아스란이있다. 그는 이 정보를 대가로 양 길드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더스트 평원에서 발견되자 두 길드는 협력하여 유적을 봉쇄하고, 먼저 스타레이를 갖고 오는 길드 쪽에 헤븐즈 게이트를 양보하기로 했다. 그리고 천공의 문을 연 쪽이 다음번에 못 연 쪽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현재 두 길드의 상위 고렙들은 스타래이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스란이 스타레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까지는 말해주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까. 댁들은 열쇠가 뭔지 알고 있어서 유성검을 뺏는 데 가담하지 않았던 거로군." "지키는 게 심심해서 네 삽질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하하! 그랬단 말이지?" 허무하게 웃던 키라는 인상을 무섭게 구기며 자마다르를 손에 들었다. "이것들이 누굴 광대로 알고!" "애들아, 구경 다 했다. 저 머저리 자식을 부활 포인트로 보내 줘라." 후중의 명령에 B.O.B의 마법사 유저들과 다크나이트의 궁수 유저들이 돌격하는 키라에께 마법과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키라는 장렬히 전사했다. 3 "뭐야. 이거 유성검이 아니잖아!" "키라 이색히! 우릴 속였어!" 키라가 죽기 전, 유적 밖에서 아귀다툼을 계속하던 유저들은 그가 던진 낚싯밥을 확인했다. 분개한 그들은 키라를 찾았지만, 이미 녀석은 유적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고, 얼마 후 엄청난 폭음이 헤븐즈 게이트 유적에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천공의 문이 열리는 소린 줄 알고 놀랐으나. 곧 키라가 마법에 맞아 죽은 소리라는 걸 알았다. "진짜 키라가 죽었냐?" "다크나이트 길드원인 내 친구가 귓속말을 보내 줬어. 유성검도 열쇠가 아니라고 하던데." 중요 정보릍 들은 유저들은 더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아놔. 그럼 우린 왜 싸운 거야!" "B.O.B랑 다크나이드 길드 자식들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단 말이잖아." "이런 망할 자식들!" 유저들은 살기등등해서 유적으로 다가갔다. 유적을 지키는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은 곧장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또다시 싸움이, 그것도 평원을 뒤흔들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쳐라!" 드림맥스 7층의 게임 관리실. 정경욱은 스크린을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흐흐흐, 그래! 이래야지. 이러라고 만든 건대 말이야!" 그는 B.O.B와 다크나이트 연합군이 유저 군단과 싸우는 것을 보며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더스트 평원에 헤븐즈 게이트 유적이 나타난 것은 정경욱의 농간이었다.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인데, 그 이유는 철십자 길드가 망한 이후 한동안 아르페디아 대륙이 조용하자 헤븐즈 게이트를 분쟁거리로 삼기 위해서었다. 그의 기대대로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는 유저들의 공적이 되었고, 오늘 더스트 평원에서의 전투를 기점으로 아르페디아 전역으로 분쟁이 확산될 것이다. 헤븐즈 게이트를 두고 고렙들은 혈투를 벌일 것이고, 철십자 길드의 대륙 통일 전쟁 때 패퇴했던 해외 거대 길드들도 다시 아르페디아 진출을 도모할 것이다. 그리되면 아르페디아 대륙은 또다시 대전란의 시대를 맞게 될 터. "좋으신가 봅니다?" "좋고말고!" 결에 있던 손석진의 물음에 정경욱은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대판 싸움이 나야 무구가 깨지고 아이템이 소모될 게 아닌가. 손해를 만회하려고 유저들은 게임을 더 할 것이고, 그럼 우리 회사 이윤이 올라가지." 그렇게 말하며 정경욱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네가 총애하는 지그 녀석의 수입이 짭짤해질 것 아닌가." "글쎄요, 유한 군 본인은 그 짭짤한 소득을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정경욱의 물음에 손석진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유한이 블랙을 대동한 채 싸우고 있는 유저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비치고 있있다. "모두 그만!" 유한은 더 이상의 난장판을 지켜보다 못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이름을 알아본 유저들이 일단 전투를 중지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헤븐즈 게이트를 차지하려는 거라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습니다." 유저들이 경계의 는빛을 보이자, 유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분들은 헤븐즈 게이트를 열 방법을 아십니까?" "당연히 별빛을 찾으면‥‥‥." "별빛이 뭔지 확실히 아십니까? 그리고 별빛이라 생각한 것을 찾았다 해도 유적이 작동되지 않으면요?" 이미 좀 전에 키라가 별빛이라 여겼던 유성검을 바쳤는데도 유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별빛은 운석이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면 거기에 또 다른 수수께끼가 있다는 뜻? 유한은 여기서 좀 더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별빛은 운석이 맞습니다. 하지만 운석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죠." "그러면요?" "운석을 정제한 스타레이라는 게 필요한 겁니다. 스타레이 정제법을 아는 유저는 저를 포함해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단둘밖에 없고요." 물론 드워프도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인간들, 그러니까 유저에게는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도 스타레이는 귀중한 비밀이니까. "지그 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유저 중의 한 명이 그렇게 물었다. 유한은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동료들을 소개하며 말했다. "예전에 저는 제 친구들과 청해도라는 섬에 가서 헤븐즈 게이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천공의 문을 열었죠." 유한의 말을 듣고 유저들이 웅성거렸다. 헤븐즈 게이트가 최초 등장한 곳이 바로 청해도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그 님이?" "예, 저와 제 친구들이 헤븐즈 게이트의 최초 발견자입니다. 이후로 헤븐즈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여러분들에게도 천사가 찾아올 수 있게 된 거지요." 유저들의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여기 있는 유저들 중에는 유한과 블랙이 당시 청해도에서 오와리 번과 싸우는 것을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있는 불신을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때 같이 갔던 제 친구들이 증언해 줄 겁니다." "친구 분들이랑 작당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지그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의 말이 모두 맞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경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건‥‥‥." 유한이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아스란이 나타나 그의 말을 받았다. "제가 보증합니다." "다, 당신은?" "아크 위저드 아스란입니다." "나도 보증하죠." 아스란의 뒤를 이어 김요셉, 아르샤, 카쉘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 보기 어렵다던 상위 10위까지의 톱랭커들 중 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스란과 김요셉은 유한의 말을 보중할 수 있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헤븐즈 게이트를 찾으면서 잠시 부캐를 키우는 귀련님과 동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귀련 님은 지그 님이 스타래이를 제련할 줄 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헤븐즈 게이트의 비밀을 풀기 위해 헬리오스 교단의 교황님에게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다 끝내고 나니 그 양반이 정보를 일러 줬는데. 신의 광석을 제련한 스타 레이라는 물질이 바로 별빛, 헤븐즈 게이트의 열쇠라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유저들은 그제야 수긍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먼저 유한에게 반박했던 유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혹시 두 분도 지그 님과 말을 맞추신 거 아닙니까?" "디질래요?" 김요셉의 정중하고 살기 넘친 한 마디에, 반박하던 그 유저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유한은 그 정도로는 사람들을 완전히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아 인벤토리에서 스타레이를 꺼냈다.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운석의 일부를 정제하여 만들어 둔 것이었다. 그는 꺼내 든 스타레이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손에 들고 높이 치켜 올렸다. "이게 바로 스타레이입니다. 바로 제가 정제한 것이죠." 꿀꺽! 곳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급기야 몇몇 유저들이 무기를 들고 유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블랙과 유한의 친구들을 비롯해 김요셉과 랭킹 10위의 초고렘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자, 감히 누구도 덤벼들지 못했다. "지금부터 지그 님께 칼을 겨누시는 분들은 제가 장송곡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7위 랭커인 음유시인 카셀의 싸늘한 엄포에, 그나마 미련이 남아있던 유저들도 공격을 포기했다. 하지만 카셀도 유저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거 보이신 이유가 뭡니까? 헤븐즈 게이트를 열 자격이 있다고 시위하는 겁니까?" 방금 전에 흑룡방주인 프랭클린이 그랬다. 그러나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스타레이를 이렇게 공개한 데는 한 가지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바로 무모한 싸움을 막고 싶다는 거죠." 유한은 한국 유저들끼리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것이 소규모 길드전이거나 사소한 분쟁이라면 끼어들지도 않았다. 그저 싸울 놈들 시원하게 싸우도록 부추긴 후 무기나 팔아먹으면 그만.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모여든 유저는 기천 명이 넘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아르페디아 대륙의 내로라하는 고렙들. 그들이 만약 오늘 이곳에서 서로 원한을 가지게 되면 앞으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쩌면‥‥‥. '혼란을 틈타 진출해 오는 해외 유저들한테 아르페디아 대륙이 먹혀 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씀.' 유한은 정경욱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점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스타레이를 여러분 앞에 내놓기로 했습니다." 유한의 한마디가 폭탄이 되어 유저들의 뇌리를 뒤혼들었다. 스타레이를 내놓는단다. 헤븐즈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열쇠인 스타레이를! 유저들은 저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에타게 유한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스타레이를 넘겨 달라는 듯. "하지만 지그 님. 스타레이는 하나고 여기 모인 유저들은 기천 명이 넘습니다. 그걸 누구에게 주실 겁니까?" 김요셉이 물었다. 유한은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기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4 "헤븐즈 게이트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들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저는 천계 문앞에서 쫒겨났죠. "그래서 최고 경지가 아닌 사람은 배제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뇨 헛되이 스타레이르 쓰지 않도록 미리 일러 주는 겁니다." 그렇게 응답한 유한은 다시 유적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열망은 같습니다. 언젠가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때 이 스타레이가 필요하겠지요." 사실 여기 모인 유저들 중에는 천사에게 아직 부적합하다는 말을 들은 이들도 있었다. 그저 뒤지지 않겠다는 오기로. 남에게 헤븐즈 게이트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욕심에 달려온 것이다. '하긴 지금은 실력이 모자라도 나중에는‥‥‥.' '미리 열쇠를 구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유저들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유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스타레이는 하나고, 원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전 가장 공정한 시합을 통해 스타레이의 주인을 뽑기로 결정했습니다." "공정한 시합이라고요?" "어떻게 공정한 시합을 할 수 있습니까?" 유저들에게서 다시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각 직업군의 능력에 차이가 있고, 역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공정한 시합을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싸움으로 하면 전투직 유저들이 유리하고, 뭔가 만드는 것으로 하자면 생산직이 유리하다. 또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할 지에 대해서도 복잡하게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공정한 시합을 치르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끼리끼리 모여 가위바위보라도 할까요? 수천 명이서?" "난 가위바위보 하면 매번 진다고요!" 유한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유저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그들을 일별한 유한은 진지한 업굴로 말했다. 마침 좋은 생각이 있었다. "퀴즈 시합으로 합니다." 그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유저들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아르패디아 온라인에 관한 문제들로 최후의 한 사람을 뽑는 겁니다. 열망이 강한 유저 분이라면 게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만하면 스타레이를 가질 자적이 있을 거고요." 설명을 들은 유저들은 수글 할만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유저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고렙들이었고,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도 편향된 문제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나 같은 궁수에게 대장장이가 잘 아는 문제들만 계속 나오면‥‥‥." 궁수인 어느 유저가 불만을 제기했다. 김요셉도 수긍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제 출제에 대해서도 공정성을 가해야 맞겠군. 그걸 공정하게 해 줄 사람은‥‥‥." "GM 한테 부탁해 볼까요?" 손석진과 안면이 있는 유한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불쑥 튀어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앗! 당신들은‥‥‥?" 유한의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게임 방송 버추얼 에이지의 취재팀이었다. 해설자 이정민은 카메라맨과 함께 더스트 평원의 상황을 취재하러 왔다가 유한의 말을 들었다. '이건 대박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맡아야 해!' 그렇게 생각한 이정민은 진심과 열의릍 담아 말했다. "지그 님이 생각하신 퀴즈 시합 이벤트 저희가 꼭 하고 싶습니다! 모든 준비를 저희가 책임질 테니 부디 맡겨 주심시오!" "하지만 드림맥스에서 허락할지‥‥‥." "드림맥스는 걱정 마십시오. 저희 쪽에서 다 알아서 설득하겠습니다." '하긴 이런 건 방송국에다 말기면 잘할 거야.'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버추얼 에이지 팀에 퀴즈 시합의 운영과 문제 출재를 맡기기로 했다. 방송국까지 나선다고 하자 더 이상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제3자가 말으면 확실히 공정성은 유지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댁들도 유적 수비는 그만하고 퀴즈 시합에 참가하는 게 어떻습니까?" 유한은 여전히 헤븐즈 게이트 유적을 지키고 있는 B.O.B와 다크나이트 길드원들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후중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길드 상위 고렙들이 언제 스타레이를 구해 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탁 트인 평원에 있는 유적을 언제까지 지킬 수도 없는 노릇. "일단 의향부터 물업봐야겠지." 그렇게 판단한 길드 간부들은 길드장을 비롯해, 탐험중인 상위 고렙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보냈다. 생각보다 답장은 빨리 도착했다. 내용은 '참가한다'였다. 아무래도 스타레이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던 모양. "좋습니다. 우리 길드는 참가합니다." "우리도!" 퀴즈 시합 참가를 결정한 두 길드는 헤븐즈 게이트 유적의 포위를 풀었다. 어차피 스타레이가 없으면 가동하지 않을 곳이니 더 이상 시간 낭비 하며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누구 맘대로 퀴즈 시합을 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경욱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르페디아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대전쟁을 고대하던 그는 지금의 상항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임의 주체는 유저들입니다. 유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죠." 손석진의 말에 정경욱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이벤트의 기획이나 진행은 오직 운영자인 우리가 할 일이야!" "왜 말이 안 됩니까? 그럼 유저들이 게임 내에서 소소하게 여는 사냥 시합니다 보물 찾기도 모두 금지해야 하겠군요." "그, 그건‥‥‥."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 정경욱이었다. 처음부터 회사 이익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꾸몄던 일, 명분이 없는 정경욱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손석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싱긋이 웃었다. "그럼 하는걸로 알겠습니다. 버추얼 에이지 팀과는 제가 이야기하지요." "이, 이봐!" 손석진을 말려 보려던 정경욱은 포기하고 그 자리에 푹 앉았다. 고개를 들자 스크린에는 오늘의 분쟁을 중재한 유한의 모습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는 자신도 퀴즈 시합에 참가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휴, 그래. 대장장이 지그 니가 최고다." 다음 날, 공식 홈페이지에는 퀴즈 이벤트와 관련한 공지가 대문짝만 하게 떠올랐다. Chapter 09 아이언 마스터 1 유한이 퀴즈시합을 선언한 3일 후. 더스트 평원에 가히 기록적인 인파가 모여들었다. 게시판과 방송, 그리고 각종 매체를 통해 퀴즈 시합 이야기를 들은 유저들이 자신들도 참가할 수 있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참가를 신청하고 평원으로 몰려온 것이다. 그중에는 외국 유저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사랑스럽고 깜찍한 MC 미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정민입니다.] MC와 해설자의 인사가 지나가고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정민 씨. 이곳 더스트 평원에 수많은 유저들이 모여들었는데요. 그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좀 전에 저희 방송국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오십만 명이 조금 넘는 숫자가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오, 오십만 명이요?] 【정확히는 51만 3.206명입니다.] 그 엄청난 숫자에 더스트 평원에 모인 유저들은 물론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기, 기록이다!' 단일 게임. 단일 장소에 이렇게 많은 유저가 모인 적은 전 세계 모든 게임 장르를 통틀어서 처음이었다.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 나중 이 소식을 접한 드림맥스가 기념 이벤트를 벌인다나 어쩐다나. [어, 엄청난 수로군요.] [그만큼 스타레이를 얻어 헤븐즈 게이트를 열고자 하는 유저들의 열망이 큰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보다 더 많은 분들이 올 수도 있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요?] [실제 아르페디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이보다 몇 배는 많은 분들이 참가 신청을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뽑힌 것은 50만 명 정도가 고작이다. 너무 많이 몰리면 통제도 어렵고. 렉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우려한 드림맥스에서 예심을 거쳤기 때문이다. 공식 홈페이지에 참가 신청을 하면 예심 문제가 나타났고 다섯 문제 중 세 문제 이상을 맞추면 참가 자격을 획득 할 수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있먼 미루는 정신을 차리곤 이정민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정말 헤븐즈 게이트를 열려면 스타레이거 있어아 하나요? 다른 열쇠나 아이템으로 열 수는 없는 겁니까?] [제가 드림맥스에 문의한 결과 아직까지 스타레이 외의 헤븐즈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그 님이 가지고 있는 스타레이가 유일한 열쇠라는 말인데. 지그 님이 그걸 왜 유저들에게 내놓겠다고 한거죠? 그냥 자신이 열어 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이정민은 3일 전 이곳 더스트 평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 미루가 연방 감탄사를 터트렸다. [제 손에 들린 이것이 바로 스타레이입니다. 지그 님이 우승자에게 주라며 이벤트를 주최한 저희에게 맡긴 거지요.] [이아! 지그님은 정말 통이 크고 위대한 유저로군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지그 님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며 세운 모든 업적을 합친 것보다 오늘의 일이 그에게 더 큰 명성을 안겨 줄 것입니다.] "와아. 지그 만세!" "지그! 지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더스트 평원에 모여 있던 유저들이 지그의 이름을 환호했다. 그러자 유한의 명성 수치가 쭉쭉 올라갔다. [ -수많은 유저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 -명성이 3.000 올랐습니다.] [ -명성이 3.000 올랐습니다.] [ -명성이‥‥‥.] [ [레전드(Legend)] 칭호를 받았습니다.] '허억!' 동료들과 함께 평원의 한편에 서 있던 유한은 떠오르는 메시지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저들이 함성을 한 번 지를 때마다 명성이 3천씩 올랐기 때문이다. 하긴, 한두 명도 아닌 무려 50만 명분의 환호다. 3천이라는 숫자가 오히려 작을지도. 그렇게 유한이 메시지창을 보며 놀라고 있을 때 화려한 폭죽과 함께 드디어 퀴즈 대회가 시작되었다. [자. 그럼 드디어 여러분들이[여러분들이 드디어→ 드디어 여러분들이 by. 곰] 기다리던 '스타레이 쟁탈배 퀴즈 대회' 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미루의 선언에 유저들이 다시 한 번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 소리에 더스트 평원이 떠내려갈 듯했다. [우선 참가자가 많은 관계로 ○X 문제를 풀겠습니다. 답이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왼쪽으로. X라 생각하시는 분은 오른쪽으로 가서 서시면 됩니다. 이동 시간은 1분입니다.] 미루의 말과 함께 초록색 평원에 하얀색의 커다란 ○,X의 문자가 생겨났다. [그럼 첫 번째 문제. 바르카스 왕국의 수도 이름은 발덴이다.] 첫 번째 문제인 만큼 쉬웠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바르카스 왕국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긴장해서 어리바리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 꽤 많은 유저들이 X쪽에 섰다가 탈락했다. 그 중에는 외국 유저들도 상당수 끼여 있었다. "이건 불공평하잖아!" "그래. 차라리 찬드라 대륙의 수도 이름을 대라고 해!" 하지만 그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헤븐즈 게이트가 아르페디아 대륙에 있는 고로, 아르페디아 대륙과 관련한 문제가 많아 나올 것이라고 이벤트 공지창에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항의하며 물러나지 않던 유저들은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모여 있던 GM들에 의해 강제 퇴장 당했다. [첫번째는 몸풀기였지만 두 번쨰부터는 많은 분들을 솎아 내기 위해 점점 어려운 문제가 나갈 겁니다. 모두 바짝 긴장하세요.] [그럼 두 번째 문제. 행운의 여신 이름온 티케다.] 순간 더스트 평원에 침묵이 감돌았다. 행운의 여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유저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 유저들이 다수 발생했다. "으악! 도대체 뭐냐고!" "좀 전에 ○가 나왔으니까 이번에는 X가‥‥‥." "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지." 우왕좌왕하는 사이 1분의 시간이 흘렀다. [정답은 ○였습니다!] 이정민의 선언에 유저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크아악! 이번에도 ○였나!" "아 많은 사람이 모두 허당이라니!" 그들 중에는 은근슬쩍 X에 있다 ○러 가랴다 GM에게 걸려 질질 끌려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2 ○X 문제는 모두 20문제가 출제되었고. 약 1만 명의 유저만 살아남았다. 그들이야아말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깊이 알고 있는 진짜배기 유저들. 대부분이 베타 테스트 때부터 게임을 해 오던 골수팬이었다. ○X 다음은 주관식 문제였다. 오래전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 프로그램을 차용한 것인데, 유저들 앞에 전자 보드가 하나씩 생겨났다. [일단 ○X 문제의 터널을 무사히 넘기신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금부터는 주관식 문제인데 여기 이정민 씨가 문제를 내면 여러분들이 그 답을 전자 보드에 적으시면 됩니다. 그럼 이정민 씨.] [네, 미루 씨. 첫 번째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르페디아 대륙과 레뮤다 대륙을 잇는 화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말론 회랑이지.' 과거 말론 회랑을 통해 레뮤다 대륙으로 간 적이 있는 유한은 손쉽게 전자 보드에 정답을 적었다. 힐끔. 유한의 옆에 있던 옌스가 그의 보드를 훔쳐봤다. 그 순간 경고창이 뜨며 GM이 옌스의 앞에 소환되었다. "부정행위입니다. 옌스 님은 행사장 밖으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아, 아니라고! 난 그저‥‥‥." "다 봤습니다. 증거 영상 띄울까요?" GM의 싸늘한 한마디에 옌스는 고개를 축 숙이고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괜히 우겼다가 증거 동영상 나오면 망신만 산다. [그럼 정답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답은 말론 회랑입니다.] "와아아!" 계속해서 문제는 나왔고 맞추는 자와 맞추지 못하는 자로 희비가 갈렸다. 유한은 그들 속에 섞여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그는 계속해서 문제를 맞혀 살아남았다. 바츠, 지그를 키우면서 게임도 많이 했거니와. 타 대륙 사이트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게임 요소들도 공식 홈페이지와 공략 사이트를 뒤지며 부지런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열세 번째 문제 플레임 마운트 지역의 보스 몬스터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자이언트 샌드웜입니다. 틀리신 분들은 퇴장해 주세요.] "아아. 틀렸다." 유한과 함께 퀴즈 시합에 참가한 채린은 그만 중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오답을 쓴 유저들과 함께 퇴장하던 그녀는 아쉬웠던지 GM에게 물었다. "저기 패자 부활전은 언제 하나요?" 그녀의 물음에 이미 탈락해 한쪽에서 구경 중인 유저들의 귀가 솔깃했다. 패자 부활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상냥한 단어란 말힌가. 보통 이런 퀴즈쇼에는 아쉽게 떨어진 사람들을 위한 패자부활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GM의 답변은 채린과 수많은 탈락자들의 기대와 사뭇 달랐다. "패자 부활전 안 합니다." "왜요!" 채린의 항의에 수천 명 유저들의 원망스런 외침이 더해졌다. 그러나 안색 하나 바꾸지 않는 GM이었다.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정말이었다. 이벤트 관련 공지창에는 패자 부활전이란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떨어지면 그냥 끝인 것이다. 하긴 예심부터 독하게 유저들을 추려 낸 드림맥스가 패자 부활전을 할 리가 없었다. "끝났다. 꿈도 희망도 날아가 버렸어." "흑흑, 내가 아는 문제 좀 내주지." 슬퍼하는 유저들과 달리 채린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은 아직 헤븐즈 게이트에 오를 자격이 되지 못했으니까. 이번 이벤트도 스타레이가 탐이 났다기보다 호기심이 생겨서 참가했을 뿐이다. "지그야. 내 몫까지 힘내!" "응! 꼭 우승할게." 채린의 응원을 받은 유한은 곧 이어진 다음 문제도 수월하게 풀었다. 3 20번째 문제까지 풀었을 때, 시합장 안에는 이제 100여 명의 유저만 남아 있었다. 거기서 참가자들에게 잠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으아아! 가만히 앉아서 문제만 푸는 데도 이거 쉽지 않구먼." "그럼 포기하시던가." 유한이 어깨를 두드리며 중얼거리자. 바로 옆에 있던 B.O.B 길드원이 빈정거렸다. 후중이라고 하는 그는 3일 전까지만 해도 헤븐즈 게이트 유적을 지키고 있었다. "퀴즈 대회에 참가할 것 같으면 상품은 왜 내놓았습니까?" "계속 가지고 있으면 재미없으니까 그렇죠. 좀 아슬아슬한 맛이 있어야 성취감이 느껴지고 단련도 되는 거라고요." "그렇다고 엄청난 가치를 가진 아이템을 덜렁 내놓다니‥‥‥ 나라면 절대 그런 어리석을 짓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후중은 유한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한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까 댁은 B.O.B 길드에서 상위 고렙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요?" "그에 반해 나는 바츠로 혼자 드래곤을 잡고, 지그로 제철소도 지었어요. 아까 봤으면 알겠지만 남부럽지 않은 애인도 있도 그게 다 남들 보기에 어렵고 어리석은 직을 한 대가죠." 유한의 말을 다 들은 후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번엔 아무 대가도 얻지 못하게 해 드리지." "뭐 그러시든가." 후중은 앞쪽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스타레이를 바라보았다. 이정민에게 맡겨졌다가 그 자리로 옮겨진 스타레이는 별빛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것만 있으면 길드 최고위 간부가 되는 건 금방이다!' 후중이 망상을 하거나 말거나. 유한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우리 애들이 얼마나 살아남았을까?" 저편에 오펜과 에이린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옌스는 진작에 자신의 것을 훔쳐보다 탈락했고, 채린은 열세 번째 문제에서 그리고 로키는 열다섯 번째 문제에서 탈락했다. 리지스는 어이없게도 ○X문제에서 탈락했다. 답이 애매한한 문제에서 갈피를 못 잡고 왔다 갔다 하다가 실격 처리된 것이다. "쯧쯧. 그러게 준비 좀 잘하고 올 것이지." 유한은 혀를 찬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휴식 사간은 이제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드디어 우승자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정민 씨, 과연 어느 유저가 스타레이를 차지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지그 님이 유라한 것 같습니다. 바츠 때 부터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골수팬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걸로 따지면 랭킹 1위의 김요셉 님이나 5위의 아스란 님도 유리하지 않을까요?] 그들도 클로즈 베타 테스트부터 게임을 해 오던 유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탈락하지 않고 다음 문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분들도 강력한 우승 후보입니다. 자, 그럼 다음 문제를 내겠습니다. 최초로 헤븐즈 게이트가 열린 청해도는 아르페디아 대륙과 후고 대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데요, 카잔 공국의 바니아스 항구에서 몇 해리 떨어져 있을까요?] 점점 같수록 난해한 문재들이 출제되었다. 그 결과 나름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대해 잘 안다던 유져들도 탈락하고. 급기야 김요셉과 아스란도 떨어졌다. 마흔아홉 번 문제까지 와서 단 두명의 유저만 살아남았다. 유한과 그의 옆에 있던 후중이었다. 두두두둥!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한 일대일 대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지그야, 지면 안돼!" "후중아! 우리 길드의 명운이 너에게 달렸다!" 유한과 후중을 응원하는 유저들은 저마다 함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 함성도 이정민이 50번째 문제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숸 번째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최후의 두 분은 미루양이 말하는 영어 구문을 듣고 해당 지역이 어디인지 답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This is the north of the continent. This is always covered with snow and Ice‥‥‥.] "이봐요!" 황당했던 나머지 후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한도 영덩이를 붙였을 뿐이지. 심정은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영어 구문으로 문제를 내면 어쩌자는 말인가? "아르페디아 대륙은 한국 유저들의 대륙이잖아요! 왜 영어로 문제를 내는 겁니까?" 후중의 항의에 근처에 있던 GM이 말했다. "후중 님. 이제 아르페디아 대륙에도 많은 외국 유저 분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분들과 대화하기 위해선 외국어 실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통역 서비스가 있잖아요! 댁들이 지원하면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러나 GM은 털끝 하나 당황하지 않고 응답했다. "통역 서비스는 그저 유저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상대의 마음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선 언어를 배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긴 그래서 세라가 한국어를 배우는 건가?' 유한은 동생의 여자친구인 세라를 떠올렸다. 자신과 달리, 유현이 영어에 유창함에도 세라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상대를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상대에게 우리의 말과 문화를 강요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입니다. 과거 강대국들이 그랬다고 우리까지 그래선 곤란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으으‥‥‥." GM의 대꾸는 더할 나위 없이 옳았다. 더 항의할 수 없었던 후중이 자리에 주저앉자. 그의 항의로 영어 구문 낭독을 중단했던 미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There are many dwarfs. This area Is the capital of‥‥‥.] '아놔 쓸데없이 혀 굴리지 마! 듣기 힘들잖아!' 유한은 미루가 말하는 영어 구문을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글을 보고 해석하는 것과 달리, 듣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금은 난대없이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 당황해서 풀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라한테 영어를 좀 배우는 건대.' 가까이에 좋은 선생을 두고 사용하지 못하다니. 그러나 지금은 후회할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유한은 미루가 말한 구문 중에서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어들을 떠올린 뒤 머리를 굴렸다. '보자! 북쪽에 눈과 얼음, 그리고 드워프들이라면‥‥‥.' 답은 대강 나왔다. 그러나 대강 나온 답을 그대러 적을 수는 없었다. '이게 대체 노스아크를 말하는 거야. 아님 배르겐을 말하는 거야?' 지역이란 게 국가를 말하는 건지, 도시를 말하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중간에 'capital' 이란 단어를 듣기도 했지만. 단순히 언급된 것인지 문제와 큰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에라이! 일단 적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한은 전자 보드에 답을 적어 들어 올 렸다. 그는 답을 베르겐이라고 적었고, 후중은 노스아크라고 적었다. 북소리가 심장 박동에 맞춰 뛰는 가운데, 이정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쉰 번째 문제. 정답은‥‥‥.] 이정민은 중간에 잠시 말을 끊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한과 후중에겐 매우 길게 느껴졌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고 마침내 그 짧고 긴 시간이 끝났다. [정답은 베르겐입니다.] "앗싸! 이겼다!"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치켜들었고.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이 달려와 그를 붙들고 헹가래를 쳤다. "지그야. 잘했어!" "자식, 틀리면 쥐어박아 주려고 했는데‥‥‥." 한편, 패배한 후중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이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마지막 문제는 엉터리다. 영어 구문 따위가 안 나왔으면 질 이유가 없었다. "결국 저 자식을 이기게 만들려고 수작을 부린 거지?" 퀴즈 대회를 제안한 지그와 진행한 방송국, 그리고 드림맥스가 서로 짜고 친 것이 틀림없다. 그리 판단한 그는 스타레이가 놓여 있는 상품 진열대로 달려갔다. "저건 내 거야! 내가 가져야 한다고!"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라 유저들도 GM도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비겁한 놈!" "크억!" 상품 진열대로 달려갔던 후중은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블랙의 일격을 맞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후중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최강의 블랙 아이언인 블랙이 단지 주먹의 풍압만으로 그를 날려 버렸기 때문에. 사실 블랙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상품 진열대에는 결계가 쳐져 있었는데. 그겉 깨고 스타레이를 쥘 수 있는 것은 오직 퀴즈 시합의 우승자뿐이었다. 그런 결계에 그런 시스템이니, 애초에 후중이 스타레이를 가로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길, 왜 이렇게‥‥‥." "후중 님!" 분에 겨워 부르르 떠는 후중을 부축하는 사람이 있었다. 예전 B.O.B 길드의 창립 멤버였던 아크 위저드 아스란. 후중보다 먼저 떨어졌던 그는 끝까지 싸워 준 후중을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절말 잘하셨어요. 힘내서 다음번엔 우리가 이기도록 하죠." "‥‥‥예." 후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갔다. 모두들 결과에 실망하긴 했지만. 상위 고렙도 아닌 후중이 끝까지 남아서 싸워준 것을 대견하게 여겼다. 길드원들의 위로와 다독임을 받고 마음을 추스른 후중은 여전히 기뻐하는 유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래도 인정해주기로 했다. 엄청난 가치의 아이템을 내놓고, 많은 유적들과 동등하게 겨뤄서 끝까지 승리한 대장장이 지그를. "모두 승자에게 박수를 쳐 줍시다." 후중이 먼저 박수를 치자. B.O.B 길드원들을 비롯해 이번 퀴즈 시합에 참여했던 수많은 유저들도 모두 유한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수십만의 박수와 갈채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퀴즈 시합은 막을 내렸다. 4 퀴즈 시합으로 진을 쏙 뺀 유한은 그날은 푹 쉬고. 다음 날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헤븐즈 게이트 주변에는 여진히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한의 앞을 막거나 스타레이를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한의 동료들처럼 헤븐즈 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구경하러 왔을 뿐. "자, 그럼 다녀올게." "잘 갔다 와." "지그 너 다음엔 나 도와주기다!" 친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헤븐즈 게이트 유적 안으로 들어온 유한은 스타레이를 내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에서 하늘까지 닿는 빛의 기둥이 세워졌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서 유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천상의 세계에 올라온 유한.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르페디아 온라인 대륙들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다시 이곳에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감회가 몰려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해 금방 쫒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있었다. '토르에게 반드시 인정을 받고 말겠어!' 그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리라 다짐한 유한은 구름 위의 신전으로 향하는 제단을 올랐다. 한참을 오른 뒤 신전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온몸에 빛을 두른 존재가 나타났다. 번쩍이는 방패와 긴 창을 든 천사였다. "멈추시오!" 과거 유한을 쫒아낸 장본인은 유한의 아래위를 한 번 살피더니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 자격을 갖추었구려." "그동안 고생 좀 했어요. 이제 안으로 들어가도 되죠?" "물론이요. 들어가시오." 천사가 길을 비켜 주자. 유한은 당당한 걸음으로 눈앞에 있는 신전에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커다란 문이 열리며 드넓은 신전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치 커다한 대장간처럼 생긴 신전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 끝에 커다란 화로가 있었고 예의 토르가 모루에다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토르는 뒤를 힐끔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왔느냐?" '왔느냐? 아놔 이 양반이!' 이놈의 게임은 NPC들이 왜 다 이따윈지! 토르는 대강 작업을 마무리하더니 유한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지그여. 이곳에 온 이유는?" "천사가 댁한테 도전해서 인정을 받으랍디다. 그럼 아이언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며." "훗, 루시엘이 그런 말을? 하긴 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구나."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다. 지금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지그만큼 자격을 충족시킨 대장장이 유저는 아마 없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토르는 망치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유한의 앞에 작업대가 하나 생겨났다. 작업대에는 몇 가지의 광물과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나에게 인정을 받고 싶으면 나와 생산 시합을 해서 이겨야하느니라. 하겠느냐?" [ -[대장장장이의 신 토르의 시험]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서는 대장장이의 신 토르와 경합을 해서 이겨야 한다. 경합에 패할 시 한 달 동안 천계의 재입성이 불가능하며 경합의 내용와 방법은 수시로 바뀐다. *보상 : 1.아이언 마스터의 칭호. 2.합금 창조 스킬.] '헉! 합금 창조 기술?' 엄청난 보상이 있을 거란 소문은 있었지만, 그게 설마 합금 창조 스킬 일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라. 유저가 원하는 합금을 만들 수 있다면, 언젠가 에르겐 합금 이상의 강도와 마법적 성질을 띄는 합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흐흐흐!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금속 시장은 아예 내 손 안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는 게 되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당장 수락했다. "토르 님의 시험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네가 거절했으면 당장 쫓아내려 했다." 토르외 말에 유한은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뭘 만들어야 합니까?" "한 시간 내로 여기 작업대 위의 광물들을 이용하여 검을 만들어야 한다. 검은 사람에게 있어 유용한 병기이자, 도구. 나보다 우수한 검을 만들었을 때. 너는 아이언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훗! 검 만들기라. 생각보다 쉽네요."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업대 위의 광물들을 본 유한의 안색이 싹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건 철. 이건 텅스텐, 망간이란 건 알겠는데 이쪽 금속들은 도대체 뭐지?' 몇 가지는 유한이 처음 보는 광물들이었다. 그는 손을 가져다 대 광물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마리나사이트] 설명 : 전설상의 광물로서 현존하지 않음. 신인들의 기술을 이어받은 고대 드워프 종족이 바닷물을 분해헤서 얻었다는 광물. 물 위에 떠 있을 정도로 가볍다.] [데모니움] 설명 : 마계의 광물. 마족들이 무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무척 무겁고 강도가 세서 제련이 쉽지 않다. [가드늄} 설명 : 대장장이의 신 토르가 만들었다는 광물. 이 세상의 그 어떤 금속보다 강하고 단단하다. 하나같이 대단한 광물들. 그러나 유한의 안색을 펴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광물들을 어떻게 제련해야 할지 막막했기 떄문. 토르를 바라보니,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몇 가지 광물들을 가져다 신전 안의 화로에 넣고 풀무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유한도 일단 짐마차를 소환해서 준비를 마쳤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익숙한 금들을 집어 들었다. '손석진 씨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이벤트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노림수를 파악해야 해.' 전사나 기사가 아레스를 이길 수 없듯 대장장이 유저가 아무리 노력해도 토르를 능가할 수는 없을 터. 그렇다면 여기에는 손석진이 유저들에게 바라는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면 토르와의 시합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유한은 곰곰이 생각하며 일단 집어 든 금속들을 각기 제련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토르와 지그 모두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 냈다. 토르는 유한의 검을 힐끔 바라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지 그런 평범한 광물들로 검을 만들었느냐? 내가 특별히 준비해 둔 것들도 많은데‥‥‥." "그저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처음 보는 금속을 사용하면 더 단단한 무구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련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도 높다. 그저 광물의 이름만 보고 혹해서 달려드는 대장장이는 진정한 고수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유한은 제련과 합금. 생산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지금까지 많은 무구를 생산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한 집중력과 정성으로 검을 만들었다. 여기서 패한다고 해도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토르는 두 검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부딪쳤다. 깡! 그런데 평범한 광물로 만든 유한의 검이 의외로 토르의 검을 깨 버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유한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했던 손석진의 노림수. 그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토르는 유한이 만든 검을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말을 건냈다. "이 검을 만든 비결은?" 유한은 자신감 있게 자신이 생각한 비결에 대해 설명했다. "대장장이가 생산으로 대장장이의 신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서 저는 어떻게 토르 님께 이길 수 있을까 깊이 생각했지요. 그 결과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저 전설의 광물들은 대장장이의 눈을 현혹하기 위한 미끼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결화 유한은 자신이 다뤄 본 광물들만 가지고 검을 만들었다, 그것도 기본에 충실해서. "아마 토르 님께서는 대장장이의 마음과 인성을 알고 싶으섰을 것입니다. 어설픈 기술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보다는 사용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검을 만드는." "흠. 계속 말해 보아라." "전사는 무기에 자신의 목습을 맡기고, 목수나 석공 같은 장인은 연장에 자신의 실력을 맡깁니다. 그들의 믿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하며, 낯설지 않고, 검증된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아는 것 외에 다른 광물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짝짝작! 유한의 설명이 끝나자 토르가 박수를 쳤다. "놀랍구나. 나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 보다니!" '네 생각이 아니라 손석진 씨의 생각이겠지.' 유한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지그 넌 정말 훌륭하게 나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상을 내리겠다." 토르의 말과 함께 유한의 앞에 메시지창들이 떠올랐다. [ -[대장장이의 신 토르의 시험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 -명성이10.000 올랐습니다.] [ -[아이언 마스터] 칭호를 받았습니다.] [ -[합금 창조] 스킬을 배웠습니다.] '오오. 드디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아이언 마스터 칭호를 받았다. 초보 대장장이 시절에 파부치에게 이야기만 들었던 그 전설의 칭호를! 이것은 아르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귀련조차도 얻지 못한 칭호. 이로써 유한은 귀련을 오롯이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 -[합금창조 스킬] 설명 : 몇 가지 조거을 갖추면 새로운 합급을 창조하고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 오리하르콘을 비롯해 전설 속에 사라진 합금들을 연구하고, 앞으로 전설이 될 합금들을 창조해 보도록 하자.] '후후후!' 앞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다 줄 노다지 스킬에 유한은 입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그렇 이곳에서의 일도 끝났으니 돌아가도록." 토르가 망치를 바닥에 한 번 내리치자 유한의 몸이 번쩍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게임 최초로 신의 시험을 통과한 유저가 나타났다. 한때 독불장굼이었던 바츠의 유저. 해킹을 당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또다시 일어나 모든 것을 되찾은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대장장이. 아이언 마스터 지그 드워프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대륙을 주름잡는 강철왕의 이름이었다. Epilogue 1 "신작 게임의 설정이 완성되었다고?" 정경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석진이 내미는 파일을 신주단지처럼 고이 받아 들었다. 그는 우선 표지의 제목부터 살폈다. 제목은 굵고 샤프한 필체로 '아이언 에이지(Iron Age)'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 아래에는 게임을 상징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는 강철 거인 병기의 디테일이 그려졌다. "흠.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있는 강철 골렘 같은 건가?" "아뇨, 이건 조종사가 직접 탑승하는 겁니다." "오호!" 정경욱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맨 앞의 1, 2 페이지에는 게임의 무대가 되는 대륙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유테라' 라고 이름 붙여진 이 대륙에서 유저들은 새로운 모험과 전투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유저들이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 직업군이 여럿 나왔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처럼 크게 생산직과 전투직으로 나뉠 수 있었으며, 그중에 가장 볼 만한 직업군이 '마이스터(Meister)' 와 '라이더(Rider)' 였다. "배경 스토리도 괜찮구먼. 여기 이건 주요 NPC들인가?" 정경욱은 페이지튤 넘기며 여러 NPC들의 러프 일러스트를 둘러보다가 한 군데에 집중했다. 의지가 강해 보이는 케이라는 이름의 소년 마법사였다. "거인의 전설을 알고 있는 강철 마법사?" "그 녀석은 중요 히든 피스 입니다. 유저들은 플레이하면서 그 녀석과의 관계를 돈독히 쌓으면 전설의 거인을 찾울 수 있습니다." "흠, 고놈 생긴 것도 깔끔한 게 여자 유저들이 좋아할 인상이군." 설정집을 다 본 정경욱은 손석진에게 그것을 돌려 주면서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수고했어. 앞으로 만들 차기작을 잘 부탁하네." "아르페디아 온라인보다 더 재미있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손석진이 물러나려 할 때, 정경욱은 아직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차기작 서비스되면 그 녀석이 할까?" "그 녀석이라 하면‥‥‥." "지그 말이야. 아이언 마스터 지그." 천공의 문을 열고 올라가 토르를 이겨 최고의 대장장이가 된 지그. 정경욱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 녀석이 차기작에서도 굉장한 활약을 보여 줄 것이라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좀 만에 안 드는 녀석이긴 하지만. "글쎄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하긴, 지존처럼 군림하는 게임을 놔두고 다른 게임에서 새로 시작하기는 쉽지 않겠지. 아르페디아 온라인 서비스를 중단하지 않는 이상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 혹시 손석진과 얽힌 어떤 개인적인 사정 때문인가? 그러나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아이언 에이지를 개발하고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할 쯤이면. 유한 군은 FPS게임을 겸한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고 있을 겁니다." "어? 그거 혹시?" "국가에서 무조건 의무적으로 하게 만드는 게임이죠." "그렇군!" 그 게임은 젊은 시절 정경욱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군대라는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 전방이란 지역에서 온갖 힘든 퀘스트를 완수한 끝에 말년 병장의 칭호를 받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동원 예비군 퀘스트를 수행한 뒤. 완전히 그 게임을 접었다. "하긴 그놈도 갈 때가 되었군." "어디 가서든 잘 지낼 겁니다. 유한 군은 강하니까요."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낄낄 웃은 정경욱은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마침 문제의 아이언 마스터 지그가 작업 중이었다. 그는 어떤 광석이 지천으로 깔린 바위산의 유적에서 열심히 쇠를 꼬아 두들기며 합금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지. 그는 집게로 합금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합금은 떠오르는 태양에서 떼 낸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어둠을 불사르는 또 다른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2 유한이 아이언 마스터가 된 지도 어느덧 7개월이 지났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한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금속 시장과 무구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고, 채린은 게임보다 성적을 올리는 데 열중하여, 유한과 같은 대학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리지스는 마침내 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누르고 최고의 상인이 되었다. 현재 그녀는 후소 대륙의 상권으로 마수를 뻗고 있는 중이다. 입시생이 된 옌스는 일시적인 좌절감에 빠졌다. 에이린이 가족들을 따라 해외로 이민을 가 버린 탓이다. 게임에서는 계속 만날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목표를 향하여 삶을 찾아 갔다. 게임에서든, 현실에서든 유한은 그들이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 이것으로 2035학년도 명일 대학교 신입생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와 함께 강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신입생과 학부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유한아!" 유한이 강당 밖으로 나오자 채린이 손을 혼들며 그를 반겼다. "어, 채린아! 근데 입학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어딜 간 거야?" "부모님이 늦게 오셔서 마중 나간다고‥‥‥." 그러고 보니 채린의 뒤에는 송태수와 황 여사가 서 있었다. 유한은 장래의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 다가가 얼른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호호. 유한이는 갈수록 듬직해 보이네. 수능이 끝난 뒤로 유한은 채린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처음엔 송태수에게 두들겨 맞을까 봐 안 가려 했지만, 황 여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기에 생각을 바꿨다. "아하하, 고맙습니다." 유한은 멋쩍어 뒤통수를 긁적였다. "흥, 듬직하기는. 비실비실해 빠져 가지곤." 황 여사는 투덜거리는 남편의 명치를 손등으로 퍽 하고 때렸다. 보기에는 가볍게 때린 것 같은데 생각보다 강했는지. 극기도의 창시자인 송태수가 고통에 몸을 비틀어야 했다. '역시 아주머니가 송건달보다 세구나.' 어릴 때도 그런 것은 느꼈고, 근래에 놀러 갔을 떄도 황 여사에게 꼼짝 못하는 송태수를 보았다. 황 여사는 단순히 기세만 높은 게 아니라 실제로도 송태수보다 고수인듯. 유한은 송태수가 당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불현듯 저것이 미래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지수 양은 어딜 갔죠?" "저와 함께 있었는데 곧 나올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입구를 통해 지수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송태수 부부를 발견하고는 조르르 달려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 "그래 너도 입학 축하한다." 황 여사는 유한과 지수에게 꽃다발을 하나씩 안겼다. 유한과 채린, 지수는 운 좋게도 모두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유한은 기계 공학과에 들어갔고 채린은 체육학과, 그리고 이지수는 수학 교육학과였다. "자자. 그럼 우리는 학교를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너희끼리 이야기 나누고 있으렴." 황 여사는 송태수의 팔을 끝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감격스러운 날, 그들끼리 할 말이 많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 세 명만 남게 되자 유한이 지수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넌 경제통상학과나 경영학과를 같 줄 알았는데 왜 수학 교육학과에 지원한 거냐?"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최고 상인이 된 리지스다. 돈에 환장한 그녀기 왜 장기를 살리지 않고 엉뚱한 수학 교육학과에 들어갔는지 그게 궁금했다. "아. 그거?" 이지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어떤 시대든 교육산업이 돈이 되니 말이지. 더구나 교사는 안전한 철밥통 직업이기도 하고‥‥‥." "역시 돈이냐?" 그러면 그렇지 싶은 유한과 채린이었다. "거기다 학부모들에게서 건네지는 격려금도 있잖아, 문제집 출판사에서 찔러 주는 로비 자금도 대단하다더라." "너 그러다 티쳐스 선생들 꼴 된다?" 작년에 시험지 유출로 물의를 일으켰던 학림 재단과 그들과 공모한 선생들은 3심까지 가는 재판 끝에 중형을 선고 받았다. 교육은 100년의 대계이고, 학생들은 국가의 미래다. 재판장은 국가의 미래를 무너트리는 이 같은 일이 두번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된다며 중형을 내렸고, 끈질기게 항소하던 학림 재단 일당은 완전히 나락으로 내려앉았다. 현재 학림고는 교육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조만간 이름까지 바뀌게 될 거라고 했다. "야, 농담이야. 농담! 내가 진짜 그런 작자들처럼 될 거라고 생각해?" "응!' "너, 이 자식!" 유한이 너무나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수는 발끈했다. 그녀는 유한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그 주먹은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의 외투 속에서 들려온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지수는 냉큼 휴대폰을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어머, 준수니? 응, 그래그래. 입학식 다 끝났어. 지금 시내에서 보자고? 아잉~ 뭘 그렇게 서두르니." 방금 전 울컥했을 때와 완선히 달라진 애교 섞인 말투였다. 유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지수가 오펜, 아니 준수와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 언제 순진한 준수와[준수를→준수와 by. 곰] 사귄 것, 아니 꼬신건지. 아무튼 통화를 끝낸 이지수는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그만 가 봐야겠어. 준수랑 약속 있어서." 김준수는 역시 전교 1등답게 서울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마침 입학식 날짜가 같았다. "그래. 다음에 보자." "준수 적당히 벗겨 먹어라." "어휴. 강유한 넌[이건→넌 by. 곰] 말하는 게 매번‥‥‥ 암튼 나 간다!" 이지수는 그렇게 바람같이 사라졌다. 장내에 남은 것은 유한과 채린뿐. 두 사람은 앞으로 자신들이 다닐 대학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캠퍼스를 천천히 거닐며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채린은 문득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와, 매화나무다." 아담한 매화나무에 붉은 꽃이 가득 핀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채린은 유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나니? 우리 초등학교 다닐 적에 교내에 매화나무가 있었던 거." "아, 그거? 그건 이거보다 작았어." 유한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 아마 기억 속에 그 작은 나무도 지금은 많이 자랐을 것이다. 자신과 채린이 이만큼 자라난 것처럼. "언제 한 번 찾아가 보자. 어떻게 변했을지 많이 궁금해." "그래? 그럼 지금 당장 가 볼까?" 유한이 팔을 내밀자. 체린은 냉큼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은 그리운 추억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앞으로 나가는 두 사람의 마음을 가득 가득 채워 주었다. (대장장이 지그 완결) 작가 후기 작년 7월에 책이 나왔으니 꼬박 1년 동안 대장장이 지그릍 쓴 셈이네요. 그동안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실 대장장이 지그는 저에게 매우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게임 판타지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14권이라는 긴 장편을 써 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도와 도전을 했고 또한 발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장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재밌는 작품으로 여러분들을 찾아가겠습니다. 차기작은 '강철 마법사'로 속칭 기갑 판타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왔던 숱한 기갑 판타지와 궤를 달리 하는 강찬만의 기갑 판타지를 만들었습니다. 앞서 에필로그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유테라 대륙의 케이가 주인공입니다. 강철 마법사 케이의 기간트를 만들기 위한 모험과 여정이 주 내용이 될 것입니다. 9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즈음에 '강철 마법사'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 무더운 여름 대구에서 강찬 드림.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