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해커 대면 .............................................7 Chapter 02 손석진의 꿈과 이상 ..............................41 Chapter 03 바츠, 부활하다.......................................71 Chapter 04 레뮤다 대륙^로 .................................107 Chapter 05 검투 동맹 글로리아 ..............................135 Chapter 06 황금 기계 도시 ....................................163 Chapter 07 고대의 기술 서적 .................................199 Chapter 08 강철의.맹우 .......................................235 Chapter 09 바츠, 폭풍이 되다 ..............................277 Chapter 10 제철소를 짓다 ..................................319 해커 대면 블라덱이 보내준 음성 파일을 들은 다음 날 아침. 학원 갈 준비를 마친 유한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더러 나오라고?" 블라덱이 물었다. "그래, 해커가 누군지 알아냈어." 블라덱도 문제의 파일을 들었지만, 음성만으로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오후 네 시쯤이 좋겠군. 학원 마치는 대로 바로 쳐들어갈 테니까 준비해.” "하지만 나까지 굳이 갈이유가……." "벌써 잊어버렸냐? 그 자식 때문에 누명을 덮어썼잖아.” 블라덱은 유한과 처음 만났을 때 엄청 두들겨 맞았다.때린 것은 유한이지만, 얻어맞은 것은 바츠를 해킹한 그 자식 덕분이다.너 따위는 날 찾을 수 없노라고 자랑하던 그놈 때문에. "끙! 알았어. 오후 네 시에 어디로 나가면 돼?” "장소는…….” 유한은 블라덱에게 만날 장소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유한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혼자 쳐들어가려 했었다. 자신의 바츠를 해킹한 녀석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잡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 상대가 증거를 숨기거나 인멸할 수 있었기에 놈의 컴퓨터를 뒤질 전문가가 한 사람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블라덱에게 연락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상대를 붙잡을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잠시만 기다려라! 곧 쳐들어가 줄 테니까!’ 집을 나서는 유한은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학원을 마친 유한은 곧장 약속 장소로 나갔다. 블라덱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학원에서 멀지 않은 지하철역이었다. 유한이 나타나자 그를 발견한 블라덱이 손을 흔들었다. "왜 이제 와? 한참 기다렸잖아.” "누가 일찍 나오래?" 유한이 늦은 것은 아니다. 블라덱이 30분 일찍 나와서 기다렸을 뿐. 블라덱은 유한 못지 않게 해커가 누군지 궁금했고, 또 예전의 굴욕을 갚아 주고 싶었다. "아침에 듣기론 분명 쳐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디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거야?" "물론이지. 여기서 가까워.” 유한은 앞장서서 블라덱을 안내했다. 지하철역을 나온 그들은 작은 거리를 지나 시끄럽고 복잡한 대학가 앞에 당도했다. "얼래, 여기는?" "신라 대학교야. 아르폐디아 온라인 개발자 손석진의 모교지.” “그럼…… 역시 범인은 손석진?" 블라덱의 말에 유한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두고보면알아.” 두 사람은 대학 캠퍼스 안으로 들어갔다. 축제 중이었는지 신라 대학교의 교정은 떠들썩했고, 여기저기 학생들이 연 노천카페와 음식점, 박물 시장이 펼쳐졌다. 대학생들이나 방문객들을 상대로 한 이벤트도 진행중이었다. <안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5시 창작학과 에서 김현우 작가님의 사인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관심 있 으신 분들은…….〉 구내방송을 들은 유한이 귀를 쫑긋하더니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사인이라도 받으려고?” 블라덱의 물음에 유한은 도리어 반문했다. "너 모르겠냐? "뭘?" "저 목소리를 모르겠냐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블라덱의 답답한 태도에 유한은 가슴을 두드렸다. "어이구, 등신! 네 친구가 분석해서 보낸 음성 파일이랑 목소리가 똑같잖아.” 해커와의 통화 중 깃든 잡음은 바로 신라 대학교의 구내방송이었다. 처음엔 간혹 말이 끊기고 음질이 떨어져서 못 알아들었지만, 음성을 증폭하고 노이즈를 제거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음성 파일의 내용은 이랬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68회 신라대 천마(天馬) 대동제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각 학과와 동아리는 내일까지 부스 운용 계획서 제출을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음성 파일 덕분에 유한은 해커가 어디서 전화를 걸었는지 알 수 있었고, 덕분에 범인이 누군지 확신했다. '내가 바보지. 진작 좀 더 생각을 했으면…….’ 유한이 그렇게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게 누구야?” “유한오빠다!” 유한이 고개를 돌리자 엔스와 에이린, 아니 고경덕과 소유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 유 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경덕오빠랑 놀러 온 거예요〜!" "놀러?” “훗,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공주님과 데이트를 즐기러 온거지.” 고경덕의 말에 유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둘이 사귀고 있었어?" "헤헷, 얼마 안 됐어요.” 고경덕이 소유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착하고 예쁜 유하가 고릴라같은 고경덕의 꾐에 넘어갈 줄은 몰랐다. 더욱이 둘 다 교복 차림인걸 보면 학교를 땡땡이 치고 놀러 온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고경덕과 소유하 커플의 진도가 빠른 듯. "후후후, 의외로군, 바츠. 시아 누님은 어딜 두고 저 음침한 형씨랑 놀러 온 거냐?” 고경덕의 물음에 유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놀러온 거 아니다.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다.” “볼일?” 대답하기가 귀찮았던 유한은 대충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먼저 간다. 재있게 놀아라.” "무슨 일이지?" 고경덕은 유한을 약 올릴 생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한은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놀려댄 경덕이 다 무안할 지경. "따라가볼까?" 고경덕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유한과 블라덱을 바라보다 옆에서 쿡쿡 찌르는 소유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 나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그래. 앙하고 깨물어도 좋으니까 뭐든 물어 봐.” 고경덕은 유한을 금세 잊어버렸다. 그러나 소유하가 다시 그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오빠는 왜 유한 오빠한테 매번 바츠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야놈이 바츠니까.” 고경덕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소유하는 못믿겠던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요? 지수 언니 말로는 오빠가 착각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아냐, 리지스 누님이 잘못 아는 거야. 생각해봐 유하야. 어째서 지그가 대장장이인데 전투에 그리 능한지를. 다 바츠 때 싸워본 가락이 있어서 그런 거야." “에이, 지그 오빠 정도는 아니지만 싸움 질하는 대장장이도 있잖아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싸움 잘하는 대장장이가 유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는 적지만 유한 못지않게 전투를 즐기고 싸움에 능한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그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그처럼 상식을 파괴할 정도로 강하진 않지. 넌 지그가 왜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대단한 대장장이가 될 수 있었는가 생각해 봤어?” "음......” "다른 게 없어. 바츠라는 캐릭터를 전에 키워봤기 때문에 지그라는 캐릭터를 그렇게 빨리 키울 수 있었던 거야. 그놈이 던전이나 필드에 대해서 잘 알고, 히든 피스를 잘 찾아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하지만 바츠는 성격이 까칠하다던데요.” 유하는 저번에 정령계에서 만났던 청동 바츠를 떠올렸다. 오리지널을 똑같이 재현한 청동 바츠와 달리, 지그는 동료들올 잘 살펴주는 상냥한 오빠였다. "예전엔 그랬지. 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야.” 고경덕도 처음엔 유한이 왜 그리 변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있다 보니 자연히 알 것 같았다, 사람과 함께하고 즐겁게 어울리다 보니 성격이나 생활패턴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오빠도 유하를 만나기 전에는 길거리에서 씨움만 하는 못된 놈이었어. 공부도 안 하고 부모님 속만 썩였지.” 사실 고경덕이 변한 건 소유하를 만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변했고, 주변에서도 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경덕이 대학에 갈 거라고 하니. 선생님들이 너 어디 아프냐? 라고 묻긴 했지만. “아무튼 지그는 바츠가 맞아. 틀림없어.그럼! 사나이의 이름을 걸고 진실만을 말하는 나라고!” 고경덕은 다소 막무가내에 과장스런 면이 있지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유하도 경덕과 사귀어 보면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고경덕의 말대로였다. 지그는 여느 대장장이들과 달랐다. 방송에 여러번 나올 정도로 화려한 모험을 펼치더니, 어느새 게임의 판세를 뒤바꿀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캐릭터를 키우고 랭커들을 상대로 당당한 것을 보면, 과거가 남달랐을 가능성이 있었다. '경덕 오빠 말대로 지그 오빠가 바츠가 맞다면?' 소유하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 오늘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또 한 번 들썩이게 될 것이다.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가 누군지 알렸을 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저들과 방송국의 관심이 쏟아지리라. 고경덕과 소유하 커플과 헤어진 유한은 컴퓨터 공학과 건물로 향했다. 컴퓨터 공학과에서도 건물 안팎에 부스를 마련해 컴퓨터 관련 물품올 팔거나,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들을 소개 하고 있었다. "이야! 저것 봐! 1980년대 8비트 MSX 컴퓨터야! 데이터 레코더 저장 방식이야! 카세트 테이프로 프로그램을 저장하는 거라고!” "구경은 나중에 하고 빨리 따라와.” “아, 저건 아버지가 하셨던 고전 패키지 게임 창세기 전!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라니!”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블라덱은 대학생들이 내놓은 초 레어 아이템들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유한은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당도했다. 바로 해킹 동아리 레볼루션의 방 앞에. 꽝! 유한은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동아리 방 안에는 다들 축제를 즐기러 나갔는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예전에 왔을 때 보았던 그 더벅머리 대학생. 그는 갑자기 동아리 방문이 열리자 놀랐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너였냐?" 김정균은 안도의 한숨올 내쉬며 슬쩍 컴퓨터 시스템을 종료시켰다. "뭘 그리 놀라죠? 수상한 짓이라도 했습니까?" "하하, 수상한 짓은... 그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려서 깜짝 놀랐을 뿐이야.” 그렇게 대충 얼버무린 김정균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우리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그는 마치 유한을 여전히 대학 신입생인 줄 알고 있다 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유한은 곧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죠. 전 아직 수험생이고, 여기 온 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 축제 때문이라면 밖에 관련 부스가 따로 있는데.” "축제하곤 상관없어요. 전 제 계정을 해킹한 범인을 찾으러 온 겁니다." 유한의 말에 김정균이 고개를 갸웃했다. "계정? 해킹?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는 연방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리 동아리가 네 게임 계정을 해킹했다고 의심 하는 거야? 우리가 비록 해킹 동아리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안해. 무슨 근거로 찾아왔는지 모르지만……" "난 게임 계정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유한의 날카로운 지적에 열변을 토하던 김정균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나 곧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야 보통 계정하면 게임 계정을 생각하니까…….” 더 이상 김정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던 유한은 중간에 그의 말을 끊었다. “그만! 전 댁이 해커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며칠 전에 해커가 나에게 전화했던 통화 기록이죠. 이것 때문에 내가 여기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는 김정균의 앞에서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해커의 통화음과 따로 발췌한 신라 대학의 구내방송이 흘러나오자 김정균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이쪽에서 음향 전문가를 고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뭐라고요?" 방금 전까지 안색이 파리하던 김정균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석진의 모교, 해킹 동아리, 대학구내방송. 그 세 가지 단서의 조합으로 여기 레볼루션에 바츠를 해킹한 범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좀 전의 굳은 김정균의 얼굴에서 그가 해킹범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상대는 계속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다. “네 계정을 해킹한 범인이 우리 대학에 있다고 쳐. 하지만 그게 우리 동아리 멤버, 혹은 나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어? 구내방송 스피커는 대학 건물 어디에나 있는 거잖아.” ‘이 자식이!’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김정균의 태도에 유한은 분통이 터졌지만, 곧장 달려들지 못했다. 김정균의 반론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애써 확보한 증거물도 소용이 없어질 판. 그러나 유한은 금세 자신감 있는 태도로 돌변했다. 방금 전 김정균의 반론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럼 당신은 해커가 아니라 이겁니까? 당신네 동아리멤버들도?” "당연하지! 말했잖아, 우린 합법적인 일만 한다고.” "그래요?” 김정균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유한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럼 동아리 방이나 컴퓨터 데이터를 뒤져도 불법적인 장비나 프로그램은 나오지 않겠군요.” "그, 그건…….” "왜요? 찔리는 게 있습니까?" 김정균의 얼굴에 깔려 있던 자신감이 녹아내렸다. 유한은 자신이 들이닥쳤을 때 허둥거린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뒤져보면 증거가나올 것이다. 뭐든지, 어떤 것이든! 유한은 확신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나갔다. "동아리 방을 좀 뒤져 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뒤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넌 경찰도 아니잖아!”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전에 왔을 팬 귀한 자료도 잘만 보여 줬으면서.” "그거야 그땐 널……아무튼 안돼!” 김정균은 악을 쓰며 유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유한을 동아리 방 밖으로 떠밀어내려던 그는 오히려 유한 의 힘에 떠밀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쪽이 결백하면 사과드리지요" 유한이 뒤를 향해 손짓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블라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고 김정균은 또 한 번 안색이 변했다. 블라덱은 김정균을 처음 보지만, 김정균은 아니다. 그는 블라덱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과거 정체를 감추고 게임 아이템을 블라덱에게 팔아먹은 자가 바로 그였으니까. 김정균의 떨리는 눈동자에서 유한은 그가 범인임을, 바츠를 해킹한 해커임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해커라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유한은 동아리 방을 뒤지며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뭐해! 얼른 컴퓨터를 뒤져 봐!” "아,알았어." 쭈뼛거리던 블라덱은 서둘러 김정균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 전원을 켜고, 하드 디스크를 뒤졌다. 수상한 파일과 폴더, 프로그램들을 체크하던 블라덱이 갑자가 품 속에서 넷북을 꺼내 컴퓨터에 연결하더니 키보드를 두들겼다. "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폴더에 패스워드가 걸려 있어.” "패스워드?풀수있어?" 유한이 눈이 초롱초롱해 묻자 블라덱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동안 레벨업 좀 했거든.” 본의 아니게 그를 레벨 업하게 만든 원흉은 유한이었다. 유한이 바츠 해킹범을 추적하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볶아 대니 실력을 쌓지 않으려야 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소 시간은 걸렸으나 결국 패스워드를 해제했다. 그러자 컴퓨터 하드 깊숙이 감춰져 있던 은밀한 프로그램이 블라덱과 유한의 눈앞에 드러났다. "호, 이건!” "이게 뭔데?" "안티 인스펙터 프로그램인 것 같아. 인스펙터를 무력화시키는 용도의.” 블라덱의 말에 김정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 짓지 마!” "단정 지은 적 없어. 추측만 한 거지.” 블라덱은 더미 인스펙터를 만들어 뿌렸던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문제의 프로그램이 대강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데이터를 모아 놓는 폴더는 여긴가?" "이 자식! 멋대로 만지지 마!” “아, 좀 봄시다. 본다고 닳는 건 아니잖아!” 김정균이 블라덱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유한은 계속 동아리 방을 뒤졌다. 그는 귀퉁이에 있는 작은 캐비넷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 있어 그런지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달라고 해도 주지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쾅! 유한의 강한 발길질에 얇은 양철로 된 캐비넷 문이 찌그러져 버렸다. 블라덱과 다투고 있던 김정균의 얼굴도 비슷한 꼴로 일그러졌다. “이건 뭐야?” 캐비넷문을 뜯다시피 열어젖히니, 케이스가 벗겨진 상태에서 이상한 장치들이 덕지덕지 붙은 휴대폰이 나왔다. 유한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추적 방지와 음성 변조 장치가 붙은 휴대폰이었다. 바로 해커, 아니 김정균이 유한에게 전화할 때 썼던 것. 그러나 휴대폰보다 더 결정적인 중거품들이 캐비넷 안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구겨진 채로 처박혀 있던 종이들이었다. 한 장 은 캐릭터 피규어를 주문 생산해 준다는 어느 완구사의 광고지였고, 또 한 장은 유한과 채린의 게임 내 모습이었다. 궁수 캐릭터 시아의 복장과 소지한 장비는 지난번 유한의 생일날 왔던 피규어와 동일했다. "이건 뭡니까?“ "그, 그건….” "뭐냐고요? 결백하다면서? 그러면서 왜 이런 게 나와? 당신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유한의 말투는 완전히 반말로 바뀌었다. 김정균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 보려 했지만,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려 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또 폭탄이 터졌다. "어이,이것 좀 봐.” 블라덱은 홀로그램 스크린을 유한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그 화면에는 유한의 바츠 시절 플레이가 찍힌 스크린샷들이 가득했다. 이후 지그로 플레이했을 때 찍은 듯한 스크린샷들도. 어떻게 이런 스크린샷들을 찍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꾸준히 감시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거냐? 끝까지 들통 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올 과신한 거냐고!” 유한은 언성을 높이며 김정균에게 다가갔다.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을 줄줄 홀리던 김정균은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유한의 눈올 피해 돌아섰다. "하하,그러니까 그게.......” 김정균은 딴청을 피며 책장 위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책상 위에 있던 메모리 박스와 잡지들을 유한에게 집어 던졌다. 유한이 움찔해 몸을 피하는 순간, 김정균은 동아리 방을 뛰쳐나갔다. “이 자식! 거기 서!” 유한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김정균을 쫓았다. 김정균은 상당히 빨랐다. 부리나케 컴퓨터 공학과 건물을 빠져나간 그는 마침 근처에 와 있던 자장면 배달부를 떠밀어 버리고, 스쿠터를 빼앗아탔다. “야, 너 뭐야!” 삿대질을 하며 욕하려던 자장면 배달부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저앉은 자신의 머리 위로 뭔가 획 지나갔기 때문이다. 비호처럼 몸을 날린 것은 바로 유한이었다. 그는 스쿠터의 뒤를 쫓아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김정균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크엑!마,말도 안돼!" "안되긴 뭐가 안 돼?" 김정균을 잡겠다는 각오로 미친 듯이 달린 유한이었다. 비록 스쿠터라 하나 최고 속도를 내기 전에 쫓아가 잡는 것은 가능한 일. 벌떡 일어난 김정균은 유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송태수와 곽대발 등 극기도 유단자들에게 얻어터지며 배워 온 유한에게 김정균의 어설픈 펀치는 솜방망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이자식이 어디다대고 주먹질이야?” “컥!” 유한의 야무진 주먹이 김정균의 얼굴로 날아갔다.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날아간 주먹은 둔중한 타격음을 울리며 우뚝 솟은 콧대를 납작하게 주저앉혔다. "크악! 내 코! 사, 사람살려! 경찰불러! 경찰!” "그래, 불러라. 도둑놈의 새끼야! 누가 쇠고랑 찰지 내기 한번 해보자!” 김정균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올 요청했지만, 유한 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두 번째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헉! 꺼…… 꺽!” 복부에 정확히 꽂힌 주먹은 김정균의 숨통을 꽉 막아 놓았다. 낯빛이 파리해진 김정균은 그 자리에 그대로 거꾸러졌다. "뭐야? 왜 싸우는 거야?" "글쎄. 축제 이벤트인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지만, 유한은 김정균의 멱살을 움켜잡아 일으켰다. 단 두 방에 끝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해킹으로 입은 피해와 스트레스를 풀자면 하루 종일 두들겨 패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런 그의 눈빛을 읽은 김정균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난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이 도둑놈의 새끼! 어디서 계속 발뺌하고 있어?" "난 아냐! 선배가 꾸민 짓이야. 선배가 시켰다고.” 그의 말에 유한이 세 번째로 날리려던 주먹이 멈첫했다. "선배라면 드림맥스의 손석진 씨를 말히는 거야?" "그래, 손 선배가 네 캐릭터를 해킹하라며 인스펙터 해킹 프로그램까지 줬어." 증거도 드러나고, 문자 그대로 박살(牌殺)당할 위기에 처한 김정균은 자신이 살기 위해 배후의 인물을 털어놓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것. 유한은 치켜든 주먹을 내렸다. 그러나 김정균의 역살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따라와, 인마.” 자백을 듣긴 했지만, 보다 자세한 것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유한은 김정균을 끌고 레볼루션 동아리방으로 되돌아갔다. 드디어 바츠의 해킹범을 잡았다. 힌트는 해킹범이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유한은 통화 음성 파일에서 신라 대학교 구내방송을 분리해 들었을 때, 해커가 분명 신라 대학교에,그것도 전에 갔던 해킹 동아리 레볼루션에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바츠의 해킹은 손석진과 관련이 있고, 레볼루션은 그와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해킹범인 김정균을 잡을 수 있었고, 배후에 손석진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왜 바츠를 해킹했지?" 유한은 레볼루션 동아리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김정균에게 그것을 따져 물었다. 손석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또 자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지만, 아직 자세한 사정은 모르기 때문이다. "난 몰라. 손 선배가 시킨 거니까 선배에게 물어봐.” 김정균은 모든 것을 손석진에게 떠넘겼다. 하수인에 불과한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유한은 김정균의 그런 비겁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의 소중했던 캐릭터를 지웠단 말이냐?” "나는 선배가시켜서…….” 끝까지 변명하던 김정균의 복부로 유한의 주먹이 날아 들었다. 김정균의 몸이 기역 자로 꺾어지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억!” "넌 선배가 시키면 사람도 죽일 거냐?" “끄으윽! 그건 그냥 캐릭터니까….” 변명을 내뱉던 김정균은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 유한이 캐릭터 바츠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주먹이 날아들 걸 생각하니 눈 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유한은 그저 김정균을 노려볼 뿐이다. "바츠는 소중했어,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귀한 게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바츠를 없애 버려서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덕분에 변할수 있었지. 그리고 잊어버렸던 걸 다시 알게 되었다.” 하나보단 여럿이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짓밟혀 막장이 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게 됐고, 미래도 생각하게 되었어.” "그,그럼 오히려 잘된 거네?" 김정균은 유한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유한은 김정균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곤 말했다. "그래, 오히려 잘됐지. 고마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바츠를 지워 버린 건 용서할 수 있어 그런데!” 유한은 갑자기 언성을 드높였다. 깜짝 놀란 김정균의 눈앞에 이글거리는 유한의 눈빛이 보였다. “계속 사람을 노리개 취급했어. 그리고 지그를 지우겠다고 협박했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바츠는 몰라도 지그는 절대 지워져선 안 된다. 자신을 변화시킨 계기가 된 캐릭터였고. 채린올 비롯해 여러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존재였다. 그 지그에 손대려 했던 것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봐. 난그저…" “입 닥쳐.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더 이상 없으니까.” 불끈 쥔 유한의 주먹이 김정균의 얼굴로 날아갔다. 하수인에 불과한 이놈은 바츠를 해킹한 이유를 모른다. 고로 김정균에게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최소한 김정균이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 한 마디 라도 했으면 이렇게 때리고 또 때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놈은 끝까지 발뺌한 것도 모자라 도망을 치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는 비겁한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유한은 연달아 날아가는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컥! 살려 줘! 다시는 안그럴..... 크악!" "입 닥치라고 했지!” "크어억!” 블라덱은 박살이 나는 김정균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원래 그도 바츠 해킹범과 대면하면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놈 때문에 유한에게 맞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지금 김정균을 보자니 불쌍해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예전에 유한을 처음 만났을 때 진탕 두들겨 맞던 자신의 모습이랑 지금 녀석의 모습이 겹쳐 보인 탓이다. '그래도 말리고 싶진 않아.’ 어쨋든 터져도 싼 녀석이었다. 블라덱은 김정균에게 손대는 대신, 보다 이득이 될 것들을 챙겼다. 김정균의 컴퓨터에는 그런 게 가득 들어 있었다. 해킹 프로그램을 비롯해, 희귀하고 중요해 보이는 데이터들까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 히히힛!’ 블라덱은 김정균의 컴퓨터에 들어있는 프로그램과 데이터들을 갖고 온 노트북에 죄다 복사해 넣었다. 그렇게 조커가 후배를 위해 남긴 희귀 아이템들은 유한의 동료 블라덱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드림맥스 고객상담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여직원은 전화벨이 울리자 잽싸게 수화기를 들었다. "네, 고객을 위해 항상 봉사히는 주식회사 드림맥스입 니다.무엇을도와드릴...." "입 닥치시고 손석진 씨나 바꿔 주시죠.” 전화를 건 고객은 다짜고짜 개발실장인 손석진을 찾았다. 이런 경우는 혼하지 않아서 여직원은 당황했지만.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응답했다. "고객님, 무슨 일이신지 말씀하시면 저희가 알아서…….” "고객 말씀 씹는 게 고객을 위해 항상 봉사히는 드림맥스의 자세인가요? 닥치고 손석진 씨나 바꿔 줘요.” "고객님, 죄송하지만 상담은 저희 쪽 업무입니다.” "빨리 바꿔! 계속 내 말을 씹으면 게임 업계에서 드림맥스 간판 내려가는 수가 있어!” 여직원은 기가 막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별별 사람들에게 전화가 다 온다. 온갖 욕설과 협박이 날아들지만, 이렇게 강경하게 희사 망하게 만든다 말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으른 감당이 안 된 여직원은 상담실장인 양호식을 바라보았다. 심상찮은 예감을 받은 양호식은 여직원 앞으로 온 상담 전화를 자신이 돌려받았다. “고객 상담실의 실장 양호식입니다. 고객님, 어떤 문제 때문에 그러십니까?" "하! 이거 아르페디아온라인이 아예 거덜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먼.” "고객님, 대체 무슨말씀인지.." “상담실 전화랑 공식 홈페이지를 폭주하게 만들 수도 있는 사안이니까 잘 생각하고 결정하시지. 한 번만 더 씹으면 정말 터트려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뭐야, 이건?' 장난 같긴 한데, 왠지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르패디아 온라인을 거덜나게 만들겠다느니, 상담실과 공식 홈패이지를 폭주하게 만들겠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설마해커?' 드림맥스는 아직 당한 바가 없지만, 몇몇 다른 게임사들은 전례가 있었다. 해커가 게임사 데이터베이스를 공격하겠다는 뉘앙스의 협박 전화를 하고, 공격을 무마하는 대가로 거액의 현찰을 요구하는.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양호식은 상대에게 장시 기다려 달라 양해를 구하고 개발실장인 손석진에게 화상통신을 연락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 실장님. 해커로 추정되는 인물이 손 실장님과 통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해커로추정된다고요?" 양호식은 상대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손석진에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손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에게 연결하십시오. 제가 타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양호식은 인스펙터를 만든 손석진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석진이 건방진 해커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것을 기대하며 상담 전화를 손석진 앞으로 연결했다. "드림맥스 개발실장 손석진입니다." "오호, 정말 연결해 줬네. 이참에 아예 떠벌릴까 싶었 는데 말이야." 전화기를 든 손석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이다. "유한군입니까?" "그래요, 접니다. 휴대폰은 안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한 겁니다." "미안합니다. 차기 업데이트 작업에 몰두하느라 전화가 온 줄 몰랐어요." 수신음을 진동으로 해 둔 원인도 있었다. 하지만 손석진은 이러한 점들을 떠나 유한이 자신을 찾고, 또 드림맥스 간판을 내리겠다고 옥박지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게 있으니 신라 대학교 레볼루션 동아리방으로 좀 와주시겠습니까? 저도 여기 있거든요."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는 유한이 지금 신라 대학교에 있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는 게 어떤 의미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참에 떠벌리겠다는 대목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알겠습니다.곧 나가도록 하죠."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부사장 정경욱이 손석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차기 업데이트 개발을 진두지휘하던 손석진이 갑자기 자리를 뜨려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어딜가는건가?" "결판을 지으러 갑니다.” "결판이라니?"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면 했지만. 분명히 정리해야 할 일이지요." 손석진은 그렇게 응답하고 개발실을 나갔다. 어깨에 힘이 빠져 있었던 손석진은 길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당히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손석진의 꿈과 이상 유한이 손석진이 오기를 기다리는동안, 레볼루션 동아리방 앞은 좀 전의 소란을 보고 달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몰려온 사람들은 출입문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시퍼렇게 묵사발이 난 김정균이 구석에 무릎 끓고 앉아 있고, 웬 녀석이 그를 무섭게 쏘아보는 중이었다. "뭐야? 저기 왜 저래?“ "아까 슬쩍 들었는데, 정균이가 누굴 해킹했다나 봐." "어이구,쳐맞을 짓을 하셨구먼." 소문올 듣고 달려온 레볼루션 동아리 회원들은 김정균을 구해줄 생각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피해버렸다.엄하게 휘말리면 자신들도 곤란해질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임과 인터넷 산업이 발전하며 계정 도용이나 해킹은 중범죄로 간주되었다. '의리 없는새끼들....' 김정균은 슬쩍 동정만 살피고 가는 동아리 회원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들은 바츠 해킹에 관여하기는커녕, 거기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직 손석진과 김정균 두 사람이 작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장인 자신이 두들겨 맞는 꼴을 보고도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자니 무척 괘씸하게 여겨졌다. 하다못해 중재나 변호를 해주면 오죽 좋은가. "지금 딴 데 눈 팔 때가 아닐 텐데." "아니. 난그저……."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한이 이를 갈자 김정균은 진땀올 뻘뻘 흘렸다. "대가리 처박고 반성해도 시원찮을 판에 눈을 돌려? 당장 대가리 박아." "응? 뭐라고?" "대가리 박으라고! 귓구멍 막혔냐?" 유한이 주먹을 치켜들자, 김정균이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처량한 꼬락서니를 보고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바츠를 지운 해킹범을 잡아 굴복시켰는데.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공허했다. 며칠 전만 해도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농락하던 상대가 지금은 흠씬 터진 상태에서 머리를 박고 있었다. '시시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니.' 사실 김정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 진짜 범인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이다. 그래도 그런, 거물의 하수인이니 나름 무게감이 있을 줄 알았다. 전화로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며 자신올 놀려 먹기까지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놈은 해킹 실력을 떠나서, 모든 것은 손석진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소인배 녀석이었다. 조금이라도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면 나름 조금은 대접해 줬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허한 마음을 느끼지도 않았을 터. '뭐 진짜 대마왕과 상대하면 달라지겠지.' 손석진은 분명 다를 것이다. 유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동안 몇 차례 그와 대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즐거를 획득한 지금도 그를 상대한다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끼이익. 동아리 방문이 열렸다. 손석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엔 미안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지만, 태도나 눈빛은 당당했다. 예전 같았다면 유한은 바로 달려들어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손석진이 어떤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해 줄까 생각하면서. "서, 선배왔습니까?" 손석진이 오자 머리를 박고 있던 김정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김정균을 내려다보며 손석진이 물었다. "정균아, 어떻게 된 거냐?" "그, 그게 해킹이 선배와 무관하다는 걸 유도하려고 며칠 전에 전화를 했다가....." "내가 그대로 놔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놔두면...." "네가 내 결정을 거스를 만한 위치니?" 그렇게 언성이 높지도 않고, 말투도 평이했다. 그런데 유한이나 블라덱이 듣고 움찔할 정도로, 손석진의 말엔 박력이 있었다. 김정균은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김정균에게서 고개를 돌린 손석진은 유한올 바라보았다. 무척 화가 나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눈빛이 잔잔했다. 하지만 손석진은 그런 유한의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콧대가 뭉개질 것은 각오하고 왔습니다만...." "뭉갤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뭉개졌을 텐데요." "그것도 그렇군요." 손석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수인인 김정균이 잡혀 정체가 드러나면서 그의 위신은 무너져 버렸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모든 말은 거짓이 되었고, 그의 목적의 순수성이 퇴색했다. "그런데 콧대만 뭉개질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다른 곳도 박살이 날 거라고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까?"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극기도를 일 년 가까이 수련한 주먹에서 뼈와 근육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이대로 졸개와 세트가 되도록 묵사발 내 버릴까. 유한은 크게 한 걸음 내딛으며 손석진의 얼굴로 주먹올 날렸다. 번개같이 날린 유한의 주먹은 손석진의 얼굴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눈빛 하나요동치지 않다니!’ 맞는 것을 각오했는지, 아님 유한이 때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손석진의 표정과 눈빛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주먹을 날린 유한이 질린 얼굴이 되었다. 유한은 자신의 살벌한 기세에도 밀리지 않는 뻔뻔한 상대를 바라보며.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목적이 됩니까?" "바츠를 해킹한 목적 말입니까?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요. 날 변화시키기 위해서겠죠? 그런데, 날 변화 시키는 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전에는 그저 바츠를 해킹한 범인이 사이코 같은 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허진태에게서 손석진이 어떤 인물인지 듣고 나자 그에게 뭔가 의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다. 지난번 TV 토론회 때 손석진의 발언에서 그가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변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명확히 모른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바츠 해킹 사건의 주범인 손석진에게. "좋습니다. 모두 다 말해 드리죠.” 유한과 손석진은 레볼루션 동아리방에서 나왔다. 동아리방은 밖에서 힐끔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 에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천마 대동제로 신라 대학교 전체가 들썩였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컴퓨터 공학과 건물 옥상. 손석진은 옥상 난간에 손을 얹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유한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가능성은 적었지만, 손석진이 도주를 시도할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손석진은 그저 시끌벅적한 대학 축제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끄럽지요? 내가 어릴 땐 나라 전체가 저렇게 축제를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밤마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두 모여 촛불을 밝히곤 했었죠. 축제가 아닌 투쟁올 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난 그저 축제인 정도가 좋았죠." 손석진은 시선을 돌려 유한을 바라보았다. "내 친구 진태에게서 어느 정도 들은 것이 있을 겁니다. 나는 보육원 출신이고, 이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극심한 진통기 때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손석진이 본 21세기 초의 대한민국은 혼란의 세계 그 자체였다. 불안정한 경제와 정치, 국제 정세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빛을 가져다 줄 초인이나 영웅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웅후보’들이 여럿 등장했다. 다양한 이상을 가진 영웅 후보들은 무대에 올라와 낡은 가치관과 대립하고, 사상이 다른 후보들과 겨뤄 가며 나라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사람들은 그런 영웅 후보들의 등장과 활약에 열광했다. 어린 손석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후의 승자가 세상을 바꿀 영웅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을 바꿀 영웅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어요. 모두 홀륭한 투사들이었지만 상대를 포용할 줄도, 타협올 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정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믿었지만, 그런 독단은 20세기 개발 도상국에나 통할 방식이었지요." "그래도 남이 나타나서 뭔가 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들 보다는 나아보이는데요." 유한의 빈정거림에 손석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영웅을 갈망한 만큼 실망도 컸던 저였기에 한때 제 스스로 영웅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죠." "그래서 조커가 된 거로군요." 해킹이라는 특기를 세상을 위해서 사용한 영웅 조커. 손석진의 그런 열망 때문에 조커가 등장했다. 유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당사자에게 들은 진실은 조금 달랐다. "조커가 된 게 아니라 조커에 합류한 겁니다." "합류하다니요?" "조커는 한 개인을 지칭하는 게 아님니다. 조커는 해커 조직의 이름입니다." "예?” 허진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조커는 손석진 혼자가 아니었다. 예전에 정부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은밀히 해커 부대를 만들었다. 적국의 해킹 시도를 차단하는 한편, 국내외의 기밀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였다. 그ㅍ부대의 이름이 조커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것이 저였고, 대외적으로 조커란 이름으로 활동을 했던 것도 접니다." 손석진이 그렇게 외부의 시선올 유도하는 동안, 그의 동료들은 은밀히 해킹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단다. "난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도... 그런 착각이 깨진 것은 오래지 않았다. 아무리 침략군의 작전을 떼내 알려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분쟁 당사자국들의 증오만을 깊게 해 줬을 뿐이다. 독재 정권의 비자금을 뜯어내 봤자, 그 나라 국민들이 수탈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비리를 공개해도 문제의 정치인은 철면피를 쓰고 정계에 다시 등장하곤 했다, 무엇보다 시선 유도용이라 해도 정부에서 손석진의 활동을 곱게 보지 않았다. 자칫 정체가 드러날 경우, 감수해야 할 일들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선 나에게 자제를 요구했죠. 하긴 제가 건드린 해외의 독재 정권 중에는 한국에 중요 자원을 수출하는 나라도 있었으니까요." 이리저리 회의가 생길 무렵, 조커 부대는 해산되었다. 쓸 만한 정보들을 충분히 끌어모았으니, 꼬리가 잡히기 전에 깨끗이 정리하자는 게 정부의 생각이었다. "결국 난 국가와 정권에 졸렬한 이익만 안겨 주었올 뿐 이었습니다. 덕분에 아직도 국가 정보부의 비호와 감시를 받고 있지요.” '허진태의 행적을 꿰뚫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인가?' 유한은 모르고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경찰이나 정보기관에서도 조커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것이었다. 감방에 있는 허진태로선 분통 터질 일이겠지만. "내가 가진 해킹 능력과 의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 개인이 했던 일들은 세상을 변화 시키는데 별 도음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죠.”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 무엇 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혼자의 힘으로 안 된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리고 뭔가 바꾸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요." 사실 그 점은 이미 손석진이 본 바 있던 것이었다. 거리로 뛰어나와 미래를 향해 촛불을 밝힌 사람들, 진승호 일당에게 분연히 대항한 학급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보잘 것 없으나 모두가 한 뜻 으로 뭉친 힘은 강했다. 그 힘이 미래로 나가는 밝은 등불 이 되었고. 급기야 평화와 번영을 쟁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작지만 분명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내 눈앞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더군요. 거대한 권력과 폭압. 재앙에 맞서는 그들이야말로 영웅이라 칭할만 했습니다.” 그것은 손석진이 자라면서 보았고,이 나라에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역사가 증명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힘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라고요?" "누가 선두에서 그들을 일깨우고 이끄는가 하는 점이죠. 기수(旗手)가 옳지 못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면 그 힘은 또 다른 폭압으로 변하고, 사회를 퇴보시킵니다. 히틀러와 나치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죠.” 1차 대전 이후에 만들어진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한국을 비롯해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훌륭한 법제를 만든 독일도 파시스트 국가로 전락해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되었다.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한답시고 나치당과 히를러가 정권을 잡고. 국민들이 이를 묵인했기 때문이다. 손석진은 자신이 중학교 시절 행한 일을 떠올렸다. 학급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꾸민 계략이었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따돌림시키는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새 시대의 영웅이 되도록 변화시키되 그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경험하고 보여주자." "그래서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이 게임입니까?" "게임, 즉 놀이는 룰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간단한 게임이든 룰이 정해져 있습니다. 룰이 없으면 게임 자체 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룰을 따라 승리하면 보상이 따르고, 룰을 어기면 패널티를 받게된다. 그것은 법과 질서가 있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손석진은 놀이의 원초적인 원리를 이용해 게임을 만들면 사회적으로 정체되고 외톨이가 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원활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게임 내에서 유도하자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개혁이나 혁명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전부터 꾸준히 노력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마침내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사회 활동에 올바르게 참여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진보하게 될 것이고, 그가 원하는 이상향이 될 것이다. 그렇게 믿은 손석진은 해킹에서 손을 떼고 그 재주를 게임 개발에 쏟아부었다. 대학 졸업 작품으로 게임을 만들고. 이후 드림맥스에 입사해 세상에 좋은 영향을 가져다줄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가지 종류의 게임이 있었지만,저는 온라인, 특히 가상현실 게임에 해법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상현실에선 사람의 본성이 쉽게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현실에선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 스스로 자제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법규와 질서가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의 공간에서 사람은 달라진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게임 속의 환경에서 아바타라는 가면을 쓴 사람들은 억눌려 있던 본성을 해방시키게 된다. 잘못을 하거나 아는 사람에게 들켜도 '게임이니까 뭐 어때’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 버린다. 키보드 워리어란 말이 달리 생긴 게 아니다. "유한군의 연인인 채린 양을 예로 들어 보지요. 채린 양은 평소에 선머슴처럼 보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녀의 내면은 부드럽다는 이야기지요." '이 인간, 그래도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유한은 손석진이 채린과의 사이를 연인이라 칭해준 데 대해서 무척 만족했다. 생각해 보면 손석진의 말이 맞았다. 단지 게임 스토리 인데도 불구하고 채린은 쉽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민하곤 했다. 어둡거나 귀신 같은 걸 무서워하기도 했고. "하지만 현실이나 게임에서나 행동이 같은 사람도 있던데요?" 저돌적인 성격의 엔스가 그렇고, 돈에 환장한 리지스가 그러했으며, 로키와 길포드 역시 그랬다. "성격이 단순하거나 자기 개성이나 신조가 굳은 사람이 그렇지요. 아무튼 전 본성이 드러나는 환경이 현실보다도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가상의 공간에선 여러 가지 시험과 변화를 주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쉬웠다. 그리고 게임 속의 퀘스트와 모험이리는 미명하에 사람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이게 할 수 도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통한 변화도 쉽지 않았습니다." 본성이 드러나는 것과 별개로, 사람들에게 한계가 있었다. 환경에 쉽게 적응해 버림으로서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일탈과 도전과 발전에 대한 보상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험한 길을 개척하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다채로운 환경과 콘텐츠를 마련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한 플레이와 즐길 거리들만 찾더군요.” '당연하지, 이 양반아. 누가 게임에서까지 빡빡하게 살려고 할까 봐. 사람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고달프다고.' 더구나 단지 ‘게임’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진지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가치라고 해봤자 단순히 금전적인 의미에서 해석하려 들뿐. 자신이 만든 게임이 100%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실망한 손석진은 게임 개발에서 손을 뗐다. 앞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게임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더 나은 게임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들어 봐야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손올 놓고 나오긴 했지만, 미련은 남았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있으면서도 계속 지켜보았죠.” 손석진은 도전하고 변화하는 극소수의 유저들을 추리고 조사해 보았다. 그들도 대부분은 아르폐디아 온라인에서의 경험을 단순한 게임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 몇몇 사람은 게임에서의 경험을 발판으로 현실에서도 변화한 성격을 보이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도 했다. “실망하긴 했지만, 덕분에 의도는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극소수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조금씩 세상을 움직여 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러던 손석진은 어느 날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게임상에서 거의 무적이라 할 수 있는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를 단신으로 쓰러트린 유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유저는 바츠라고 하는 악명 높은 외톨이 검사였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저들의 인식을 싹 바꾸어 버렸으니까요.” 카세라스는 개발자인 손석진이나 드림맥스의 운영자들 조차도 파티 플레이가 아니면 쓰러트릴 수 없는 존재라 믿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만들기도 했고. 손석진은 한동안 바츠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유저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이름은 강유한. 나이는 17세. 예전에 학교의 비리를 밝힌 정의감 넘치는 소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쳇. 고교 중퇴를 했다는 것도 알았겠네요.” "뭐 자세한 원인은 모릅니다.” 그래도 손석진은 어느 정도 알 만하다는 투였다. 하긴 학교 비리를 밝혔던 학생이 퇴학을 당했으니, 뒷 사정을 추리하는 일은 간단하다. 학림고에서는 대외적으로 '교직원 폭행죄’ 로 퇴학시켰다고 떠들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위험하다 생각했습니다. 고교 중퇴자에 하루 평균 열여섯 시간이상 플레이히는 게임 폐인. 거기다 게임상에서도 대인 관계가 전무할 정도로 진독한 외톨이였으니까요.” 유한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땐 정말 그랬으니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게임에 매달리고 현실에 등을 돌리고 사람들과 관계를 단절해왔다. "그렇게 위험하게 보였습니까?" 과거에도 그런 상황하에 있던 사람들이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거나, 위험한 망상을 꿈꾸는 일들이 있었으니 손석진은 틀을 깨버린 유한의 잠재된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는바츠를. 아니 유한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잠재된 의지를 좋은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래서 해킹을 했다는 거군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역시 바츠가 해킹된 것은 드림맥스의 책임이 컸다. 외도 중인 개발자가 멋대로 벌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근데 기가 막힌 시점에 해킹했네요. 하필 내가 일주일 동안 외갓집 가있을 때에.” “우연이 아닙니다. 허진태와 나의 대화를 엿들었으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 텐데요.” “설마…….” 허진태는 손석진더러 진실을 조작하는 인간이라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유한이 외갓집에 갔던 것도 그가 손을 썼다는 이야기. "우리 부모님올 꼬셨군요!” "아니요. 유한 군의 외할머님을 설득했습니다. 외손자 성격올 바꿔 주겠다고 하니 순순히 협조하시더군요." “대체 어떻게?” 최소한 외갓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는 말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단 말인가. 그건 게임 계정 정보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데. 아니, 충분히 가능했을지 모른다.예전에 손석진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 말이다. "정부 홈페이지를 해킹했군요." "저에게 그 정도는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웠 습니다." 그렇게 유한의 게임 접속을 일주일 동안 차단한 손석진은 후배인 김정균을 끌어들여 캐릭터 바츠를 없앴다. "어째서 바츠를 지우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 이제 알겠네요.” 말 그대로 그가 지운 것은 아니다. 김정균이 한 일이니, 엄격히 말해 손석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했는지도. "아니요. 바츠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다. "예?" “드림맥스 데이터베이스에서 사라졌을 뿐, 바츠의 데이터는 제 품 안에 살아 있습니다.” 손석진은 넥타이핀을 빼내 들었다. 넥타이핀의 끝에는 접속 단자가 붙어 있었다. 내부에 메모리 칩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제가 얼마 전 토론회에서 바츠를 돌려줄 수 있다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그럼 청동 바츠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안에 있는 바츠의 데이터를 참고한 겁니다.” 넥타이핀을 다시 원래대로 꽂은 손석진은 천천히 몸올 숙였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유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털썩. 손석진이 유한의 앞에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나는 유한 군이 변하기를 바랐습니다. 내재된 잠재력과 의지를 좋은 쪽으로 사용하기를 희망했지요. 제 희망 대로 유한 군은 훌륭히 변했고, 이전과 다른 모습들올 보여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다. 특유의 감각과 재치로 게임 내의 히든 피스와 숨겨진 스토리들을 파헤쳤고, 게임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 데 기여를 했다. 손석진이 원했고 보고팠던 ‘세상의 변화’를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사회에서도 훌륭히 활약할 유한 군의 모습이 기대됩니다. 게임에서처럼’ "의지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미래로 나가십시오.” 김정균의 뻘짓 탓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손석진은 유한과의 내기에서 졌다. 전화는 김정균이 했지만, 그 내기를 제안한 것은 손석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패자로서 승자의 처분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유한의 앞에 무릎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유한 군의 삶과 자유를 침해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죄할 일이고,유한 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제가 감수하고 존중해야 할 일입니다.” 유한은 한참 동안 손석진을 노려보았다. 삶과 지유를 침해했다는 손석진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도 없었다. 바츠 해킹범올 잡으려 한 것은 처음엔 바츠가 아까워서였지만. 이후엔 자신의 삶과 자유를 침해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손석진에게 다가갔다. "당신정말최악이로군. 최소한 사람이 화풀이를 할 수 있게는 만들어 달란 말이야!" 유한은 손석진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사실 이 상황에서 한 방 날린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분명 손석진은 유한의 결정을 존중하겠다 했으니까. 그러나 손석진의 눈빛을 보니 주먹을 날릴 수가 없었다. 동요 없이 당당해 보이는 눈빛 속에 어찐지 무척 고된 기색이 느껴졌다. 분명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을 지니고 좌절을 맛보고, 다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해킹이라는 범죄까지 감수하고. 유한이 보기에 손석진은 참 엉뚱한 몽상가였다. 게임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겠다니. 하지만 과연 그것올 비웃거나 나무랄 수 있을까. 세상을 위해 그만큼 고민하고 행동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오히려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분명히 유한은 손석진에게 삶과 자유를 침해당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 친구라든가, 미래라든가 하는 좋은 것들을. 그래서인지 해커를 잡으려는 그의 행동이 서서히 열의를 잃었다. 거기다 유한 자신도 이 부조리한 세상이 바뀌기를 원했다. 자신처럼 재단의 비리를 밝혔다고 퇴학당하는 학생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를 바랐다. "일어서세요. 그만하면 됐으니까.” 유한은 손석진을 일으켜 세웠다.한대 후려갈겨 주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여기서 이해해 주기로 했다. 물론 그냥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게임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신의 계획을 계속 진행해 나갈 거지요?"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손석진의 눈빛은 맑았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조금씩 조금씩 끌어모을 것이다. 언젠가 그 불씨들이 모이고 모여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테니까. "뭐 시원시원해서 좋군요.그래요,앞으로도 쭉 해나가세요. 이번 일은 제가 덮어 줄 테니까 세상올 변화시키든 말아먹든 당신 소신대로 하세요.” "유한군…….” "대신 지켜볼 겁니다. 당신 말대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 낸 작은 영웅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지를" 이것이 유한이 손석진이 벌인 일을 용서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그 조건에 한 가지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래도 앞으로 해킹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누구를 사주해서도 안 되고요.” "글쎄요, 그건 좀 약속할 자신이 없군요.” "뭐라고요?" 막판에 손석진이 뻔뻔하게 응답하자 유한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좋게 가다가 왜 또 삐딱하게 빠지는 건지. “필요하다면 해킹을 불사할 겁니다. 유한 군 같은 외톨이 소년이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하지 말라면 하지 말란 말입니다!” 유한은 폈던 주먹을 쥐고 손석진의 얼굴로 날렸다. 발끈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유한의 주먹은 손석진의 얼굴에 가기도 전에 막혔다. 어느 틈에 날아들었는지, 손석진의 손이 그의 주먹을 가로막고 있었다. "극기도는 더 단련하는 게 좋겠군요.” 손석진은 유한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인텔리답지 않게 크고 거친 그의 손은 강철 집게처럼 강하고 억셌다. "싸움 실력도 때론 필요합니다. 영웅에겐 힘을 써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크윽!” 유한은 손석진의 손올 뿌리치거나 반격을 날리고 싶었지만.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손석진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거인을 보는 듯한 느낌. 이런 기분은 송태수에게서만 느낄 수 있던 것이었다. 그 강한 느낌은 손석진이 주먹을 놔주면서 사라졌다. 마치 언제 그런 압박을 주었냐는 듯 깨끗이. "나와 내기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생각하진 마세요. 유한 군에겐 아직 풀어야 할 시련이 하나 남았으니까요.” 시련이 하나 더 남았다고? 그건 무슨 뜻일까? 또 손석진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그냥푸짐하게 갈겨줄걸그랬네.’ 좀 전에 그냥 놔준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쉽게 용서해 버린 것일까. 지금 와서 보니 싸움을 건다 해도 만만찮아 보이는 작자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물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룻. "쳇, 가겠습니다. 어차피 볼일은 다 끝났으니까.” 유한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손석진의 말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게임을 계속할 겁니까?" 손석진은 이번 일로 유한이 게임에 완전히 흥을 잃어버릴까 걱정되었다. 언젠가는 가상의 세계를 박차고 현실로 나가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 유한이 게임 속에서 해내야 할 것이 있었고, 손석진은 그것을 지켜보고 싶었다. 만약 지금 유한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가 버린다면... 그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든 말든 내 맘입니다. 앞으로 나한텐 신경 꺼 주시죠.” 유한은 퉁명스럽게 답하고 옥상에서 내려가 버렸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손석진은 다시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환한 축제의 불빛을 바라보며 손석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 정말 그 녀석을 이대로 놔둘 거예요?" 철십자 길드가 망한 후 정현일은 유한에 대한 복수심이 원한으로까지 발전했다. 할머니 홍순영 여사에게 평소 부리지 않던 애교까지 부려 가며 부탁을 했지만,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 “지금은 때가 아니다, 현일아. 네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 녀석을 혼찌검내줄테니 그만 가서 공부하거라." ‘챗,만날 공부,공부.’ 흑곰이 그의 부탁만 들어줬어도, 아니 일진 녀석들이 술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피하지만 않았어도 할머니에게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흑곰은 여전히 송태수가 두렵다고 할 뿐이고, 일진 녀석들에 대한 영향력은 철십자 길드가 망한 후로 예전 같지 않았다. 정현일의 입이 댓발은 튀어나오자 홍순영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사진 속에는 낯익은 궁수 차림을 한 몸매가 늘씬한 여자애가 서 있었다. "이건?” "네가 그토록 이를 가는 강유한 그놈의 여자 친구지. 마침 우리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더구나.” "그래서요?" 할머니가 자신에게 사진을 보여 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정현일이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홍순영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현재 우리 학림고가 벌여 놓은 사업 때문에 놈에게 직접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것은 힘들단다. 놈이 게임에서 워낙 유명한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부나 사회단체의 시선을 끌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여자 친구를 이용하는 것은 괜찮겠지.” "여자 친구를 이용하다니요?" "이참에 네가 놈의 여자 친구를 빼앗아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홍순영이 의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마노스 제국을 빼앗기고 철십자 길드가 조각조각 찢어진 뒤로 정현일의 캐릭터 베히모스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차에 할머니의 학림 아카데미에 머무는 것도 괜찮을 듯. “그럼 부캐를 키워야겠군요.” 베히모스는 너무나 잘 알려져있어 안 된다. 하지만 부캐라면 그녀의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하는 게 가능할 터. 눈이야 선글라스나 안경 같은 걸로 가리면 된다. 외모와 말빨에 자신이 있는 정현일이다. 그리고 돈도 많다. 여자 하나 꼬시는 것은 여반장이라 생각했다. "크크크! 여친을 빼앗긴 놈의 표정이 눈에 선한걸?" 정현일은 분통이 터져 펄쩍 뛰는 유한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악어가 악어새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과 같았다. 손자가 이사장실을 나가자 홍순영은 학림 아카데미를 책임지고 있는 정교감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이번에 현일이와 몇몇 친구들이 학림 카데미에 들어갈 겁니다. 잘보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업은 착착 잘 진행되고 있겠죠?" 홍순영의 물음에 정 교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받고 진행함에 있어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결코 외부에서 우리 계획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한 번 더 조심하세요. 만에 하나 우리가 벌인 일이 새어 나간다면 당신과 나 둘 다 파멸을 면치 못할 테니까.” "제가 몇 번이고 더 다짐을 받겠습니다.” "호호호, 그럼 정 교감만 믿어요.” 이번 사업은 대박이었다. 예전의 사업들도 손해가 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막대한 이익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더욱이 이번 사업은 학부모들의 사교육열올 더욱 부추기는 한편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기는 장점이 있었기에 학생을 모집하는 게 훨씬 쉬웠다. 손석진과 결판을 짓고 돌아온 유한은 3일 동안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하지 않았다. 바츠 해킹과 관련된 모든 일을 끝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 거기다 손석진은 자신에게 시련이 하나 더 남았다고 말했다. 아직 모든게 끝난게 아니라고. '이 작자가 또 뭔가를 꾸미는 건가?' 그런 불안감 때문에 게임에 접속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한동안 게임은 쉬고 공부에 열중하기로 마음먹 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채린이와 데이트를 즐기리라.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부가 게임을 할 때보다 집중이 안 되었고. 채린이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상의 학원에서 공부하느라 바빴다. 거기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내가 불안감 때문에 하던 걸 안 하 던 놈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위기가 오면 오히려 뛰어들어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던 것이 바로 자신이다. 거기다 군나르에게서 받은 퀘스트도 있었다. 그 퀘스트에는 시간 제한이 있는데, 시간 내에 완수하지 못하면 페널티를 받게 된다. 또 라이벌인 발리안이 먼저 제철소를 지어 버릴 거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하고자 한 것은 끝내 놓기로 마음먹었다. 옛말에도 그러지 않는가. 하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고. 그렇게 캡슐에 들어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한 유한은 캐릭터 대기실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캐릭터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랍쇼? 이게 왜?" 해킹을 당한 뒤 레벨 1의 초보 캐릭터로 전락한 바츠가 사라지고,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과 플레임 소드를 장착한 바츠가 서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설마…….” 저번에 손석진은 바츠를 지우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 말이 떠오른 유한은 캐릭터 대기실 한편에 있던 우체통을 뒤져 보았다. 그 우체통에는 각 캐릭터에게서 날아온 쪽지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유한은 그 쪽지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온 것을 집 었다. 유한이 수락하자, 쪽지가 펼쳐지며 안에 적힌 글이 눈 앞에 나타났다. 친애하는 유한 군에게. 비록 유한군이나를 용서해주었지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 바츠를 되돌려 드립니다. 레벨과 능력치는 시간의 흐름을 감안해 조금씩 조정했으니 오해 없길 바랍니다. 유한군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그만두지 않기를 바라는 손석진이. “크윽! 이 아저씨가!” 해킹당해 사라진 바츠를 되찾게 되어 한편으로 기쁘긴 했지만, 또 자신의 의시를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분명 저번에 바츠는 더 이상 필요 없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되돌려 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 저번에 시련 어쩌고 저쩌고,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 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쳇, 변화도 좋지만 이런 식으로 강요하진 말라고.’ 사실 이건 강요라고 할 순 없다. 바츠가 해킹되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지그가 건재했다. 지그든, 바츠든, 플레이하는 유한의 마음에 따라 어느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바츠가 싫으면 안 하면 된다. "이걸 그냥 지워 버려?" 지그로 즐겁게 플레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츠는 더 이상 끌리지 않았다. 더구나 오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손 석진이 주물럭거렸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거리감도 느껴졌다. 그러나 유한은 끝내 바츠를 삭제하지 못했다. 한때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바츠로 변신해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일단 한번 해보고나서 결정하자.” <바츠 님께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하셨습니다. 즐거운 게임이 되길 바랍니다.> 잠시 어지러운 기분을 느낀 유한은 천천히 눈을 떴다. 뿜어지는 환한 빛 사이로 주변 풍경이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듯, 발아래로 까마득한 지상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반투명한 하늘색 유리로 된 벽과 계단들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풍경의 던전. 하지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자 더 이상 낯선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맞아. 여긴 천공의 탑이었어.” 예전에 바츠로 플레이했던 마지막 장소. 100층을 돌파한 다음날 외갓집에 갔고. 며칠 후 바츠는 사라졌다. 거의 1년 만에 되찾은 바츠로 유한은 다시 그 천공의 탑에 우뚝 섰다. 감개무량보다 손석진이 바츠를 얼마만큼 손을 대놓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상태창확인!” 칭호 : 데보라 던전 발견자. 외로운 전사. 오우거 헌터. 베기의 달인. 찌르기의 달인. 몬스터 학살자. 시계탑 정복자. 소울 브레이커, 랭커 불꽃의 검사, 드래곤 술래이어. 천공의 탑 발견자. 부활한 용사 직업 : 전사 레벨 : 300 체력(HP) : 5,000/5,000 스태미나: 4,800/4,800 마나(MP) : 1,000/1,000 힘:420 + 250(드래곤건틀렛) 민첩성 : 280 + 150(이카루스 윙 부츠) 인내심:250 지식:97 공격력 : 430 + 250(플레임 소드) 방어력 : 300 + 400(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 경험치 : 1500/63000 돈 : 1,500,000골드 플라잉소드 스킬1랭크 마나 블레이드 스킬 1랭크 소울 크래쉬 스킬 1랭크 렘페지 어택 스킬 2랭크 도발 스킬 2랭크 [히든스킬】 무빙 카운터 스킬 2랭크 블레이즈 블레이드 스킬 3랭크 버서커 스킬 9랭크 "참나, 부활한 용사? 지 멋대로 죽이고 살려 놓곤 무슨." 유한은 새롭게 추가된 칭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활한 용사 칭호는 몇 달 동안.접속올 안 하다 한 사람 에게 생기는 칭호였다. 본의 아니게 플레이를 못한 자신이 받을 칭호가 아닌 것이다. 추가된 건 칭호뿐만 아니었다. 스탯도 예전보다 을라 있었는데, 쪽지에 적힌 대로 손석진이 그동안 시간이 흐른 걸 감안해 조금씩 상향해 놓은 듯했다. 스킬도 히든 스킬에 유한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응? 버서커(Berserker) 스킬? 이게 뭐지? 유한이 바츠 시절에 광전사라 불리긴 했지만, 그건 그의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와 불굴의 용기를 높이 사서 유저들이 그렇게 불러 준 것이지, 정말 광전사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르폐디아 온라인에 광전사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뭐 사용해보면 알겠지.’ 처음 듣는 스킬에 고개를 갸웃한 유한은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를 찾아보았다. 몬스터를 상대로 스킬이 어떤 성능과 효과가 있는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마침 장비도 예전에 사용하던 것들 그대로 장비하고 있 었다. 물론 그것은 예전에 사용하던 숙련된 것들이 아니다, 예전에 바츠가 사용하던 아이템은 이미 회수해서 철공소에 고이 모셔 놓았다. 지금 걸치고 있는 아이템들은 손석진이 만들어 준 것이다. 그 증거로 아이템에는 바츠의 소유라는 표식이 없었고, 인벤토리에는 돈과 지도, 포션과 몇 가지 응급 아이템들만 있었다. "이쯤이면 몬스터가 튀어나올 텐데.” 이곳 천공의 탑은 강력한 몹들이 득시글대는 곳. 천공의 탑은 먼 옛날 오만한 마도사들이 천계에 오르려고 허공에 쌓은 것이란 사연이 있었다. 그 마도사들은 외부로부터 탑을 보호하려고 가디언들을 잔뜩 풀어 놓았다는데, 그런 이유로 탑 안에는 키메라형의 강력한 몬스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쳇. 이제 보니 이놈의 탑도 미케니아 놈들이 쌓은 거였군.” 당시에는 미케니아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아 몰랐다. 미케니아의 잔당들은 그들을 부활시킨 지그의 손에 전멸했지만, 아직 이렇게 유적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바니우스 3세 말고 다른 잔당이 나타나 아르페디아 대륙을 어지럽힐 수도 있겠군. 아니, 그런 놈은 벌써 나타났나?" 손석진이 철십자 길드를 배후 조종한 것을 알 리 없는 유한은 거대 키메라의 제작자가 미케니아의 잔당일 것이라 추측했다. "크르르르르!” “키키키키키!” 몬스터를 찾아 헤매고 있던 유한의 앞에 두 마리 몬스터가 나타났다. ‘체퍼 솔져’ 라고 이름 붙은 이 키메라들은 풍뎅이 같이 생겼고, 4개의 손에는 투박한 검을 들고 있었다. 놈들은 딱딱한 외골격을 갖고 있어 방어력이 높고, 공격력도 강했다.거기다 레벨 230대에 선공성향, 협공능력까지 있기 때문에 왠만한 고렙이 아니고는 건드릴 수 없는 놈들이었다. 하늘올 날아다니던 체퍼 솔져들이 괴성을 토하며 공격해 왔다. 유한은 빠르게 검을 놀리며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소 감이 떨어져 있었지만, 월등히 높은 레벨과 스탯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 당할 염려는 없었다. "자, 그럼 끝장을 내 볼까? 암 브레이크!” 공격 스킬을 사용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뭐가 잘못되었나 잠시 생각해 보던 유한은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피식 웃었다. "멍청하긴, 바츠의 공격 스킬을 써야지.” 몸은 바츠인데 지그의 스킬을 썼으니 발동될 리 만무했다. 오랫동안 지그로 플레이하다 보니 너무 익숙해져버린 모양. 유한은 곧장 카운터 스킬을 사용했다. 체퍼 솔져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카운터 스킬 특유의 반동을 이용한 강력한 공격이 칼끝에서 터져 나왔다. "끼엑?" 비명과 함께 체퍼 솔져가 두동강 났다. 유한은 곧장 몸을 돌리며 또 다른 체퍼 솔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나블레이드!" 칼끝에서 터져 나은 V자의 검풍이 체퍼 솔져의 머리를 싹둑 동강냈다.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약한 상대와 싸워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 겨뤄 보십시오. 레벨 차이가 있다 보니 아이템은커녕 경험치도 제대로 챙기기 힘들었다. 오히려 군소리하는 안내창만 보았을 뿐. "쩝, 추가된 히든 스킬은 사용도 못해 봤네.” 유한은 검을 거두고 앞쪽에 보이는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무래도 부활한 바츠를 상대할 만한 몬스터는 더 높은 충에 있을 것 같았다. 코다인은 레벨 250대의 전사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나름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유저였다. 한때 바츠를 동경한 그는 직업도 같은 전사로 선택했고, 바츠가 사라진 뒤로는 제2의 바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닮고 싶은 것은 전투력일뿐, 성격이나 플레이 방식은 아니었다. "꺄아악" "앗! 티나!” 눈앞의 몬스터를 상대하던 코다인은 커플인 정령술사 티나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다. 당장 등을 돌리고 티나에게 달려간 코다인은 그녀를 공격하는 체퍼 솔져를 일격에 베어 없앴다. "괜찮아, 티나?" "꺄악! 조심해 코다인!” 티나의 상태를 살피던 코다인은 등을 후려치는 묵직한 일격에 몸올 휘청거렸다. 방금 전까지 코다인을 상대하던 레벨 253의 체퍼 나이트가 그를 쫓아와 철퇴를 휘두른 것이다. 그 일격으로 코다인은 hp 2,000 포인트를 한 번에 잃었고, 스턴 효과까지 덤으로 얻었다. "이런,오늘은 좀 재수가 없네.” "그, 그러게." 두 사람 앞으로 키메라들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얼른 랭커에 오르고자 하는 욕심에 천공의 탑 상층부로 올라왔는데. 아직은 이른 도전이었던 듯. 결국 두 사람은 사이좋게 키메라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힝! 코다인 나 신목의 목걸이를 떨어트렸어. -걱정마. 티나. 내가 새로 사줄게. -하지만 코다인도 폭염의 할버드를 떨어뜨렸잖아. -괘,괜찮아. 아깝긴해도 무기는 또 있으니까. -우리 그냥 로그아웃하지 말고 좀 기다려 보자. 누가 와서 부활시켜 줄지도 모르잖아. -누가 오긴 할까? 천공의 탑은 난이도 때문에 찾아오는 유저가 적었다. 죽은 자신들을 본다 해도 구해주리란 보장도 없다. 오히려 떨어트린 아이템을 얌체같이 주워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크윽! 무기가 아깝긴 하지만 부활 포인트에서 새로 시작하는게....." 여친을 설득하려던 코다인은 순간 놀랄 만한 광경을 보았다. "끼에에엑!” 뒤에서 찢어질 듯할 비명이 올리더니 키메라들의 사체가 공중에 흩날리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키메라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계단 쪽에서 방금 전 참살의 주인공인 듯한 유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오, 여긴 몹이 꽤 많은걸?" 즐거운 듯 중얼거리는 그를 보고서 키메라들은 순간 긴장했다.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은 월등히 높은 상대의 레벨에 반응한 시스템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레벨 230~250대인 키메라들은 여느 잡몹들과 달리 상대가 강하다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침입자는 무조건 제거하라고 설정된 그들은 협공 모드로 전환해 상대를 하늘과 땅에서 포위했다. "좋아. 이 정도 숫자라면 한번 써 봐도 되겠군" 지금 나타난 유저는 바로 유한이었다. 그는 곧장 추가된 히든 스킬 버서커를 시용했다. 그러자 불길한 효과음과 함께 전신에 붉은 기운이 스멀 스멀 치밀어 올랐다. -버서커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제한 시간은 5분입니다. 방어력이 소폭 하락합니다. 스태미나 소모가 2배 많아지며…… ‘뭐야, 나쁜 것뿐이잖아.’ 인상을 찌푸리던 유한은 다음에 이어지는 안내창의 문구에 눈을 번쩍 떴다. -데미지 딜레이가 사라집니다. 상대의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공격 속도와 공격력, 스킬 사용 시 마나 회복 속도가 상승합니다. ‘호, 양날의 검과 같은 스킬인가?' 안내창을 보고 있던 유한에게 키메라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유한은 일부러 체퍼 나이트의 공격을 맞아 보았다. 살벌하게 날아온 철퇴에 hp가 단숨에 1.000 포인트 넘게 깎여 나갔다. 그런데 이후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보통 강력한 공격을 허용하면 그 영향으로 떠밀려 주춤 하거나 스턴 상태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곧바로 스킬을 사용하거나 공격을 전개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타격을 무시하고 곧바로 공격을. 그것도 스킬을 시전할 수 있었다. 그것도 더 빠르고 더 강력하게. "꿰엑!” 방금 전 철퇴를 날렸던 체퍼 나이트의 목이 날아갔다. 연이어 소울 크래쉬 스킬을 사용한 유한은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베고 후려갈겼다. "크하핫! 모두 덤벼라!” 대장장이 지그라면 절대 펼칠 수 없는 위용. 간만에 접한 통쾌함에 유한은 연방 스킬들을 뿌려 가며 키메라들올 베어 갔다. 일부러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맞기도 했다 hp가 떨어지는 만큼 공격이 더 빠르고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뭐,뭐지 저 자람은? -랭커, 그것도 상급랭커인가 봐. 엄청 강한데? 죽은 코다인과 티나는 유한의 활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코다인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을 뿌리며 폭주하는 전사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된 덕분이다. 저런 광경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하던 코다인은 유한의 머리 위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 바츠?’ 5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장내에 있던 몬스터들은 완전히 씨가 말랐고, 바닥에는 동강난 키메라들의 몸뚱이들이 굴러다녔다. "후! 이거 대단한데?" 경험치와 아이템은 거의 얻지 못했지만, 유한은 버서커 스킬의 효과를 확인한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아니, 만족한데 그치지 않고 스킬에 매료되었다. 특히 hp가 떨어질수록 오히려 전투력이 상승하는 효 과는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맛올 느끼게 해 주었다 "쳇. 아주 사람 꼬드기려 작정하고 만든 스킬이로군." 자신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가볍게 빈정거린 유한은 몬스터에게 당해 쓰러진 코다인과 티나에게로 시선올 옮겼다. 그들의 옆에는 그들이 떨어트린 무기와 아이템이 놓여 있었다. 유한은 코다인이 떨어트린 폭염의 할버드를 보고 씩 웃었다. '저건 내 핸드메이드 제품이잖아.' 폭염의 할버드 도끼날에는 대장장이 지그가 손수 만든 것임을 알리는 'Z' 자 마크와 Handmade 란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무기의 주인은 지그의 고객이란 이야기. '후후후, 내 고객이라면 당연히 살려 드려야지.’ 사실 그런 것을 떠나서도 두 사람을 살려 주려고 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손맛을 본 터라 기분이 좋은 상태였고, 마침 인벤토리에 응급 아이템인 부활의 성수가 있었다. 유한은 부활의 성수를 뿌려 두 사람을 살려 주었다. "와아, 고맙습니다!" “이 은혜 절대 안 잊을 게요.” “뭘요. 조심해서 플레이하세요.” 등돌려 떠나던 유한을 코다인의 외침이 붙들었다. "잠깐만요. 정말 바츠님이 맞습니까?" 유한은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다인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계속 물어보았다. "예전의 그 바츠 님이 맞으십니까? 해킹되서 캐릭터가 지워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나신 겁니까?" "하하, 그게…….” 확 다 까발려 버릴까. 아마 바츠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손석진의 독단일 것이다. 바츠가 돌아오건 말건 이번 일의 전말이 알려지게 되면 드림맥스의 위신은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서 배려해줄 의리는 유한과 드림맥스 사이에 없었다. 유한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코다인의 옆에 있던 티나가 입을 열었다. "아냐, 이분은 예전의 그 바츠 님이 아닐 거야.” "무슨 소리야? 티나 너도 방금 전의 활약을 봤잖아 " "그거랑 상관없어.나 예전에 광전사 바츠님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님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살려 주는 친절한 행동은 안한다고.” 그때도 이번과 같이 죽어서 쓰러져 있던 티나였다. 바츠는 죽은 자신과 동료들을 무시하고 그냥 제 갈 길올 가버렸다. '확실히 옛날엔 그랬지.’ 예전을 생각하던 유한은 갑자기 얼굴올 굳혔다. 부활의 성수는 오직 타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해킹당하기 전에는 부활의 성수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을 때이므로, 남을 구해 주겠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 하지만 되돌아온 바츠의 인벤토리에는 부활의 성수가 들어 있었다. 단순히 구색 맞추기로 손석진이 넣어 둔 것일까? 아니, 뭔가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모른다. 정말 유한이 달라졌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한편, 코다인은 적잖게 긴장하고 있었다. 유한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방금 전 여친의 말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비위를 거슬렀다가 pk당하는 건 아닌지. 여긴 지나다니는 유저도 얼마 없고, 독불장군 바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티나, 너 왜 쓸데없는 소릴 하고 그래. -내가 뭐를!! 틀린 말했어? -얼굴 좀 봐! 본인이 아니라면 저렇게 인상을 쓰겠냐? -하지만 바츠는 없어졌잖아! 다른 사람이 바츠라는 아이디를 새로 만든 걸 수도 있고. -으이구, 이 바보야! 본인이 캐릭터를 새로 키웠다는 생각을 왜 안해? -그,그런가? 하지만 1년사이에 어떻게.. -한번 키운 거 두번 못 키우겠어? 사람 성격이야 살다 보면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귓속말로 수군거리던 그들은 슬그머니 유한의 곁을 떠났다. 유한은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훨씬 강화되어 돌아온 자신의 캐릭터를 살펴보았다. "결국 목적이 있어 돌려준 거라 이건가?" 분명히 신경 끄라고 말했는데, 손석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쾌했지만, 그 대담한 배짱과 의지는 가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뭐 그쪽이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다 있지." 그렇게 히죽거린 유한은 천공의 탑에서 내려갔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아예 확 저질러 버릴 생각이었다. 천공의 탑을 내려온 유한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로 이동했다. 유저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바츠의 존재는 천공의 탑에서 만난 커플에게 공개 되었기에 다시 노출된다 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되도록 바츠를 숨길 생각이었다. 딱히 바츠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지그로 플레이하는 것이 더 재밌고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석진이 자신을 여전히 간섭한다고 오해한 그는 손석진을 골탕 먹일 속셈으로 바츠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기로 했다. "우왓! 바츠다.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야!” "오, 광전사 바츠!” "저거 짝퉁 아냐?" “아냐,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진짜라고!” 군중 속에서 유저들의 감탄과 찬사가 이어졌다. 거기엔 놀라움도 뒤섞여 있었다. 바츠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킹당했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드림맥스에서 되살려 준 건가" "아니,무덤까지만들어놓곤무슨..." 유한은 수군거리는 유저들을 뒤로하고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장소를 골라 가면서 돌아다녔다. 덕분에 모두들 '바츠의 재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크크크. 똑똑하신 개발자님. 댁이 얼마나 이 사태를 잘 수습할지 두고 보겠습니다.' 알릴 만큼 충분히 알렸다 생각한 유한은 잠시 게임을 로그아웃하고 컴퓨터로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는 난리가 났다. 바츠를 목격했다는 유저들의 신고글과 그들이 올린 바츠의 스크린샷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천공의 탑에서 봤던 코다인이란 유저는 어느 틈에 찍었는지, 바츠의 전투 동영상까지 업데이트해 놓았다. -신궁전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임? -최강현 : 전투 스타일로 보면 바츠가 맞는데... -라칸 : 바츠 해킹됬다면서요? -마도과학자 : 그건 둘째 치고 저 붉은 기운을 뿌리는 스킬은 뭔가요? - 오르도스 : 새로 획득한 히든스킬이 아닐는지? 유저들의 문의가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계속 올라왔다. 다들 바츠 유저가 캐릭터를 다시 키웠을 거라는 둥. 동영상의 이상한 스킬을 보면 그럴 거라는 둥, 그게 아니라 드림맥스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는 둥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물론 단순히 떠들지만 않고 드림맥스에 어떻게 된 일인 캐묻는 유저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드림맥스의 공식 답변이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확인해 본 결과. 현재 출현한 바츠 캐릭터는 이번에 바츠님이 새로 키우고 있는 캐릭터로 밝혀졌습니다. 유저 여러분들은 착오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어쭈? 이것들 봐라?" 유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당사자가 눈올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드림맥스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대체 손석진은 관계자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 아니면 드림맥스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지? '그냥 확 까발려 버릴까보다.' 그러나 유한은 그런 마음을 접었다. 손석진은 물론 드림맥스 사람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다. 금세 탄로날 주장을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상황에서 괜히 분란을 일으켜 유한이 득 될 것은 없었다. "훗!좋아. 이쯤에서 너그럽게 넘어가주도록 하지." 작은 복수를 한 데 만족한 유한은 다시 캡술로 들어가 이번엔 지그로 게임에 접속했다. 환한 빛과 함께 유한은 아르페디아의 세계로 되돌아 왔다. 장소는 지난번에 접속을 종료했던 노스아크. 바츠의 재등장은 어느새 이곳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유저들은 그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 "동영상을 보니까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던데 대체 어디서 그렇게 캐릭터를 키운 걸까?" "혼자만 알고 있던 굉장한 던전이 있었겠지. 몇몇 고렙들은 그런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고 하더라." "다음 달 랭킹 순위가 요동치겠구나." 유한은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짐마차를 소환한 후 철공소로 출발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리지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 왔다. 제철소 견학 간다며 노스아크로 떠난 지가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견학하기가 그렇게 힘들었어?"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 그보다 다들 좀 불러 줄래?" "왜?퀘스트라도받았어?" "그래,다 모이면 이야기할게." 리지스는 친구들에게 호출 쪽지를 보냈다. 채린이는 아직 학림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송코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 사냥이나 퀘스트를 하고 있어 모이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유한이 시간도 아낄 겸 제철소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멘스였다. "여, 이제 오..." "죽어랏!" 엔스가 다짜고짜 검기를 뿌리자 유한은 기겁해서 몸을 날렸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사망을 면치 어려웠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인마, 뭐 하는 짓이야!" "뭐 하긴!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내가 뭘?" 유한의 물음에 엔스는 억울한 표정올 지었다. "동영상 봤다! 바츠를 새로 키웠더군! 섭섭하게 어떻게 그동안 한 마디도 안 할 수 있냐? 나와 너의 우정이 그것 밖에 안 되었나?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이젠 널 친구라 생각했거늘." "야, 그건..." 나도 얼마 전에 돌려받았노라고 이야기하려던 유한은 이 단순한 녀석을 그냥 다독이기로 했다. "나중에 화끈하게 붙어 줄 테니 화 풀어라, 응?" "정말이냐?" "그래, 예전의 바츠보다 더 강해졌으니까 기대해라. 대신 내가 바츠라는 사실을 잠시 좀 비밀로 해 주고." "비밀? 혹시 바츠로 시아 누님 말고 다른 여자랑 사귀려고?" "그런 거 아니거든! 소문나면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와서 귀찮단 말이다. 그럼 너도 나랑 대결하기 힘들어져." "음. 그런가?" 싸우기 좋아하는 엔스의 심리를 파고든 유한은 녀석을 구워삶는데 성공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철공소의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 다들 바츠를 소재로 잡담을 나누었다. 엔스를 제외하곤 모두 유한이 바츠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아니, 한 사람은 좀 다른 듯. "리지스 언니. 바츠 말인데 지그 오빠랑 닮은 것 같지?" "어이구, 지그가 바츠면 난 골드맨이게." 리지스는 믿지 않았지만. 에이린의 갑작스런 말에 유한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린은 유한을 바라보며 새침하게 웃었다. 뭔가를 아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당황한 유한은 서둘러 본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자, 모두 지방 방송 꺼 주시고.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는...." 그는 노스아크에 가서 겪은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녹색 수염 드워프 족장 군나르에게 퀘스트를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끝맺자, 리지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같이 갈 동료가 필요하다?" "응, 나랑 같이 레유다 대륙에 갈 사람?" 유한의 물음에 대부분 난색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동행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한을 따라가면 희귀한 퀘스트를 경험할 수 있고, 보상도 괜찮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거절해야 하는 데는 사정이 있었다. "난 아빠가 도장을 도와 달라고 해서." "저는 다음 주 모의고사 때문에 곤란해요." "모레 브로딘 왕국과 아주 중요한 계약이 있는데 어쩌나." 채린과 에이린, 리지스는 사정이 있어 못 간다고 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펜이었다. "나는 갈래. 전부터 레뮤다 대륙에 가고 싶있으니까." "오오, 고마워." 아크 위저드 아스란 정도는 아니지만, 오펜도 꽤 고랩 마법사가되어 있었다. 충분히 든든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만으로는 부족했다. 선두에서 근접전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한은 엔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게임 시간줄이고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거리원정은 어려워." "어이구, 알았다." 요즘 에이린 때문에 부쩍 공부에 열을 올리는 엔스였다. 덕분에 유한은 고개를 돌려 다른 동행자를 찾았다. 곤란하다는 표정들 틈에 유달리 반짝이는 눈빛이 있었다. 그는 바로 송코였다.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기, 내가 같이 가도 될까? 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데 말이야.” "송코 형은 그냥 철공소를 봐 주면 좋겠는데...." "그래? 난 평생 집만 뵈야 할 팔자인지도." 송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암울한 표정에 유한의 마음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송코가 불쌍했다. 그는 어느 때부턴가 집 보는 사람 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도 지그 철공소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인데, 한 번쯤은 그의 소원올 들어주고 싶었다. “이번엔 형도 함께 가죠. 바람도 쐴 겸.” “그럴까?" 단숨에 표정이 밝아지는 송코. "그런데 레뮤다 대륙에는 왜 가려는 거예요?" 유한의 물음에 송코가 입이 헤벌죽 벌어졌다. 입가에 침도 맺혔다. "호,거기에는 미녀가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이참에 하나 꼬셔야지.” 유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올 때 채린과 리지스, 에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응징했다. "모두 송코오빠 밟앗!" "크아악!뭐하는거야?" "오빠는 여자의 적이에요!" "이런 짐승!" 그렇게 송코는 저 히늘의 별이 되었다. 또 한 명의 동행자는 유저가 아닌 NPC로 채우기로 했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npc로. "뭐? 미지의 대륙에 가자고?" "그래, 신기한볼거리가 가득할 거야." 그러나 블랙은 그리 탐탁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안위가 우선이다. 방금 전에 사람들에게 듣자니 바츠라는 악명 높은 광전사 놈이 부활했다는데, 그놈을 무찔러야 할 필요성이 더 느껴진다." "그놈은 전혀 문제가 안 되니 그냥 같이 가시지요. 더구나 미지의 대륙에도 아르페디아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 이 있을지 모르고." 그의 말에 솔깃한 블랙은 결국 동행을 결정했다. 그렇게 레뮤다 대륙의 횡금 기계 도시로 떠날 멤버의 구성이 끝났다. 레뮤다 대륙으로 레뮤다 대륙은 작년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아르페디아 대륙 남서쪽에 나타난 대륙으로, 중남미 유저들의 터전이다. 타 대륙에 비해, 레뮤다 대륙은 아르페디아 대륙과 교류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르페디아와 레뮤다 대륙의 끄트머리가 살짝 닿아 있는 말론 회랑이 대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거기엔 고레벨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려 웬만한 유저가 아니면 오갈 수 없었다. 최가장 길드에선 항로를 개척해 레뮤다 대륙으로 가려 했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레뮤다 대륙에는 항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항구가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 블랙의 물음에 유한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레뮤다 대륙 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대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대륙 주변부가 모두 깎아지는 절벽이라 정박은커녕 난파되지 않는 게 다행이라 하더군." 덕분에 최가장 길드의 탐사선은 레뮤다 대륙을 한 바퀴 빙글 돌고 말았다고. "거 참 기이한 대륙이군." 블랙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흥미 있다는 눈빛을 보였다. 옆에서 곰곰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코가 의아하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하늘을 통해 갈수는 있을텐데?" "최정예 공중 몬스터가 늘어나서 쉽지 않대요. 더구나 우린 기구를 탈수 없는 멤버도 있고." "하긴..." 송코는 짐마차와 나란히 걸어가는 블랙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유저 10명분의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블랙은 기구는 물론 오펜의 부유 마법으로도 띄울 수 없었다. 결국 일행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육로뿐이었다. "자. 여기서부터 말론 회랑입니다.” “이야, 무척 험준한데?" 송코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연방 혀를 내둘렀다. 말론 회랑은 두 대륙의 지협 가운데 난 통로로, 고지대의 눈 덮인 산맥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이 어찌나 좁은지, 마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유한 일행은 짐마차를 소환 해제 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소문하고 달리 몬스터가 많지 않은걸?" "그러게. 왕래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나마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길목 길목에 죽치고 있는 유저들에게 처리되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나가던 유한은 중간에 길을 가로막은 높다란 관문을 보았다. 상인과 전사 등, 레뮤다 대륙으로 가는 유저들은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통행세를 지불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얼핏 지불하는 통행세가 적잖아 보였다. 유한은 옆을 지나는 상인 유저를 붙들었다. "말 좀 묻겠습니다. 저기 통행세가 얼만가요?" "초행인가 보군요. 여기 관문을 지나려면 최소 만 골드를 줘야 합니다." "뭐라고요?" 무슨 통행세가 만 골드씩 한단 말인가. 만 골드면 상당히 쓸 만한 검이나 방어구를 살 수 있는 가격. 유한은 상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았다. "래뮤다 대륙에서 대박을 터트린 유저들이 많아지니, 근래에 아르마달이라는 길드에서'이곳에 관문을 쌓고 통행세를 받기 시작했죠. 그네들이 몬스터까지 청소해 주기 때문에 왕래가 훨씬 수월해졌답니다." 군데군데 죽치고 리젠되는 몬스터를 잡는 유저들은 관문을 차지한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던 모양. "그런데 아르마달 길드라고요?" 유한은 길드의 이름에 주목했다. 아르마달 길드라면 예전에 노스아크에서 수정 광산올 차지하고 수정의 시세를 조작하던 놈들이었다. 소위 칭칭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을 대거 고용하여 작업장을 운영하는. "안전하게 오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통행세가 너무 비싸죠. 그래서 웬만한 유저들은 통행에 엄두를 못내지요" 상인의 말대로 통행료를 지불하고 가는 유저들은 대부분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돈이 모자라는 유저들은 사정을 해도 봐주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글째요, 몇몇 사람들이 관문올 우회하려고 산올 넘기도 했지만..." 대부분 산이 너무 험하고 가팔라서 포기해 버렸단다. 거기다 눈사태를 만나기라도 하면 곰짝없이 생매장당하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늘로 가기도 힘들죠. 공중에서 비행 몬스터를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산 사이를 흐르는 기류에 휘말리면 곧장 추락하고 만답니다." 결국은 돈을 내고 가는 방법뿐. 유한은 터무니없이 비싼 통행료가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서둘러 레뮤다 대륙에 가는 것이 중요 하니까. 더구나 예전과 달리 자신은 갑부급의 유저가 아닌가. 일인당 만 골드의 통행료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다만 그 통행료를 받아먹는 자들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다. '망할 자식들, 수정 광산에서 물 먹으니까 여기 와서 이런다 이거지?' 나중에 블랙 아이언 군단을 끌고 와 손봐주기로 결심한 유한은 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멈추시오.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소." "통행료 낼 거거든요." 관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은 후퍼라는 유저로, 예전에 수정 광산의 책임자였다. 후퍼는 지금 다가오는 이가 예전에 자신들을 물먹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시의 일은 수정 광산을 노린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짓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도 그때 일은 아르마달 길드에서 모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철저히 배후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후퍼는 검을 빼 들더니 유한의 통행을 가로막았다. "정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통행 금지요." "뭐라고? 왜 나만 안 된다는 겁니까?" 혹시 그때 배후에서 일을 꾸민 것이 들통 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대장장이의 통행을 막으라는 길드장의 엄명이 있었다." 후퍼의 설명에 의하면 다른 직종들은 다 통과가 되는데 대장장이만 안 된단다. "뭐? 그런 법이 어딨어? 길드장 나오라고 그래!" "길드장님은 지금 접속을 하지 않으셨소. 뭐 있다 해도 만나진 않으실 테지만." "뭐라고? 이것들이 진짜!" 유한이 발끈한 순간, 사방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주변은 아르마달 길드원들에게 포위당했다. 거기다 성벽과 주변 방어탑에 배치된 npc 병사들은 석궁과 캐터필드를 이쪽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형편. "후후, 거기 있는 블랙 아이언을 믿나 본데, 이 관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소." 후퍼는 슬찍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관문의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거대한 강철 골렘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바로 발리안 철공소의 레기온이었다. 그것도 신형인 레기온! "얌전히 물러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안 그러면 피떡이 될 테니까." "뭐라고? 짐의 앞에서 감히 저깟 덩치만 큰 쇳덩어리를 갖고 협박하는 것이냐!" 후퍼의 엄포에 블랙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러나 유한은 그런 블랙을 말렸다. 블랙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싸워서 좋올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좋아, 물러나 주지. 하지만 지그 철공소의 주인인 나를 이렇게 쫓아낸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훗, 후회할 일 없으니 얼른 사라지라고." 유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후퍼는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런 후퍼의 태도에 블랙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유한은 그를 말리며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바쁜 상황이지만, 지금은 한 발 물러날 때였다. "크악! 왜 말린 거냐. 후손!" 유한이 그냥 관문에서 물러난 것에 화가 난 블랙은 펄펄뛰었다. "너도 원통해 하지 않았나! 날 믿지 못하는 건가! 내가 그 쇳덩이보다 못하다고 보는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관문은 단숨에 점령할 수 있다 여긴 블랙이 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유한은 신중했다. "그리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야. 대장장이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해." "그래, 아무래도 이건 발리안 쪽에서 선수를 친 것 같아." 오펜이 유한을 거들고 나섰다. 이미 그는 출발하기 전에 자세한 상황올 전해 들었기에 이 일의 배후에 발리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리안 정도면 지그가 퀘스트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올 테니, 돈이든 뭐든 아르마달 길드장을 구워삶았을 거라고. "분명 황금 기계 도시를 독점하기 위해 지그의 통행올 막으려는 거야. 대장장이 유저들 모두를 통행금지 시킨 것은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얄팍한 수에 불과해.” "그래, 거기다 그놈들은 신형 레기온도 보유하고 있었어." 송코의 지적은 유한이나 오펜도 생각하던 바였다. 레기온표는 신품이라 아직 많은 수가 판매되지 않았다. 그런 물건을 이 변방의 중소 길드에서 가지고 있는 게 이상했다. 블랙 아이언에 대해 알고 있고 지그 철공소의 주인인 유한이 직접 경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수문장이 코웃음을 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배후에 발리안이 있다는 증거야." 유한의 말에 송코가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관문올 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요." 일행은 혹시 숨겨진 길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길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산을 넘기 위해서 는 암벽 등반올 각오해야 했고, 거센 기류 때문에 기구나 부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어차피 블랙 때문에 날아갈 수도 없지만. '젠장, 아스탄을 불러다가 관문을 확 없애 달라고 할까?' 아크위저드 아스란의 광역 마법이라면 저깟 관문쯤은 무너트리고도 남을 터. 그러나 지금 아스란은 바빴다. 한때 철십자 길드에 대항해 손을 잡았던 B.O.B 길드와 다크나이트 길드가 지난 번 전쟁으로 획득한 마노스 제국의 이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란이 B.O.B 길드에 힘을 보태 주러 간 상황이기에, 현재 그를 불러내는건 쉽지 않았다. '다이노스 왕국에 도움을 청해? 아냐, 걔들도 지금 너무 멀리 있어.' 그들을 불러오려면 시간이 걸렸다. "지그야,이것 좀 봐." 고민하고 있는 유한에게로 오펜이 달려왔다. 그는 근방에서 주운 돌을 유한에게 보여 주었다. 유한은 뭔가 싶어 살펴봤지만, 아무 쓸모없는 암석에 불과했다. "이게 뭐가 어떻다고?" "잘 봐. 이 돌멩이는 이 근방에서 볼수 있는 돌이 아니야." 오펜의 말대로였다. 근방에 있는 돌들은 검은빛올 띠고 있었지만, 지금오펜이 들고 온 돌은 청회색 빛깔이었다. "거기다 뒷면에 곡괭이나 삽으로 찍은 흔적이 있어." "그렇다면 이걸... 누가 파냈디는 건가?" "누군가 땅굴을 파고 있는 게 아닐까? 관문을 우회하는 용도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관문 주위에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심심해서 돌맹이에 곡괭이 자국을 낸 것도 아닐 테니까. 유한은 당장 일행과 함께 오펜이 돌을 주워온 곳으로 가보았다. 얼마쯤 몸을 숨기고 가만히 그 장소를 지켜보고 있자, 웬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소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던 소년은 가방에서 돌올 꺼내 쏟아 버리고는 슬그머니 그곳을 떠났다. "쫓아가보자" 일행은 몰래 소년을 따라가 보았다. 삐죽한 바위들이 솟구친 절벽에서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년이 사라진 곳을 살펴보던 일행은 주변 바위들과 비슷한 색의 천막을 발견했다. 워낙에 위장이 교묘해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못 알아 보았을 정도. "당신들 뭐야?" 유한 일행이 천막 가까이 접근했을 때였다. 갑자기 바위틈에서 유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저마다 활과 창칼을 든 그들은 유한 일행을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마달 길드원인가?" "아뇨, 그 우라질 놈들에게 쫓겨난 대장장이올시다." 유한의 말에 그들 중에 몇몇이 유한을 아는 척했다. "저사람지그잖아." "그러게. 뇌제에다 지그 철공소의 사장인." "내 친구가 지그 철공소에서 일하는데......." 아르마달 길드와 관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곧장 무기를 내렸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레이가르딘' 이란 도적 유저가 유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남의 눈올 피할 일을 하는지라." "알고 있습니다. 땅굴을 파고 계시죠?" "하하, 아셨습니까?" 레이가르딘은 유한을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오펜과 블랙, 송코가 함께 가려 했지만 유저들이 막았다. 유한은 천막 안에 있는 땅굴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지상에서 깊숙이 파 들어간 땅굴은 좁았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높이도 낮았다. 레이가르딘은 땅굴을 안내하면서 굴착을 시작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르마달 길드 놈들이 너무 통행료를 비싸게 받아서 땅굴을 파기로 작정했죠. 광부 유저들을 고용해서 여기서 보름동안 삽질을 했습니다. 그동안 아르마달 놈들의 눈을 피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지요." 레이가르딘은 땅굴을 파기로 한 유저들이 뽑은 대표였다. "그런데 얼마까지 팠습니까?" 유한이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잘하면 자신도 이 통로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 "관문 아래까지 파들어 갔어요. 한 일주일만 더 있으면 반대편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레이가르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땅굴 안쪽에서 낭패 어린 비명 소리가 터져 왔다. "아악! 제기랄!" "무슨 일이야?" 레이가르딘은 안쪽에서 나오는 광부 유저를 붙들고 물었다.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트린 광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어. 지금까지 한 게 죄다 물거품이 되었어." "무슨 말이냐니까?" "암벽에서 물이 새 나오더라고. 제길! 하필이면 지하수가 있는 지층이 나올게 뭐야." 더 작업을 하다간 모두가 익사당할 판. 그래서 광부들은 작업을 중단했단다. "다른 쪽으로 우회해서 굴착할 순 없어?" "그렇게 하면 시간이 많이 걸려. 게다가 작업을 중단했다 해도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꽤 많아. 우회고 뭐고 얼마 안있으면 땅굴이 지하수로 꽉 차버릴거야." 그 말을 들은 레이가르딘은 한숨을 폭 쉬었다. 작정을 하고 유저들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일인데 완전히 물거품이 되다니. "휴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레이가르딘이 한숨을 터트린 것과 다르게 유한은 눈빛을 번득였다. "잠깐, 지금 관문 아래쪽까지 팠다고 그랬죠? 거기서 지하수를 만났다고 했습니까?" "예. 그런데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유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레이가르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군가. 지그 칠공소의 주인이다. 단순한 생산직 유저가 아니라 해외 거대 길드들의 침략을 물리친 적이 있는 상당한 거물이다. 그런 그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진짜 될 것만 같았다. "그 방법이 뭡니까?" "그건..." 유한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레이가르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제대로 운이 따른다면 현재의 고착 상황올 단숨에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그야, 뭐 만드냐?" 유한이 짐마차를 소환해 뭔가 뚝딱이고 있자 송코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시계를 만들어요." "시계? 시계를 뭣 하러?" 송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한이 땅굴을 빨리 파는 기계나 도구를 만들고 있는 줄 알았다. "다 쓸모가 있죠. 형, 거기 부싯돌 좀 갖다 줄래요?" "부싯돌?" 송코는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부싯돌을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시계 부품에 부싯돌이 들어가던가? 의문스러웠던 송코지만 유한이 알아서 할 것이라 믿었다. "근데 천막 안에서 저 친구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땅굴은 더 이상 안 파는 거야?" 송코는 천막을 들락거리는 광부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광부들은 일체의 굴착 작업을 중단한 채 땅굴에 고인 물을 퍼내는 작업만 하고 있었다. "후후후,두고 보면 알아요." 유한이 시계를 거의 완성시켰을 때였다. 유한의 부탁으로 아이템을 사러 갔던 레이가르딘이 돌아왔다. "지그 님, 알려 주셨던 아이템을 사왔습니다." "빨리 갔다 왔네요. 혹시 비싸지 않았습니까?" "후후후, 말론 회랑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니까 상인 유저들이 거저 가져가라던데요." 레이가르딘이 갖고 온 것은 역청이었다. 손에 묻어나는 끈적한 역청을 보고 송코가 말했다. "이걸로 물이 새는곳을 막으려는 거야?" 역청은 방수 재료로 쓰인다. 역청으로 물이 새는 곳올 막고 다른 지층으로 우회 통로를 뚫으려는 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한 송코였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송코 형, 이걸 얌전하게 쓸 제가 아니라고요.” "웅? 얌전하게 안 쓴다고?" 송코가 궁금해 했지만,유한은 곧 있으면 알게 된다며 설명해 주지 않았다. 유한은 역청을 원래 용도로 시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역청이 든 통에 초열탄을 집어넣고, 잘게 부순 초열탄 가루를 완성된 시계에 넣고 혼들었다. 그리곤 시계태엽과 바늘을 돌려 시간을 맞추고 역청이 든 통에 같이 집어넣었다. -엉성한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위력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00 받았습니다. 솜씨가 1올랐습니다. 유한은 완성된 폭탄을 광부에게 건네주고 땅굴 제일 안쪽에 놓아둘 것올 지시했다. "폭탄이라니? 너 설마관문을 날려 버릴 생각이야?" 그제야 유한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된 송코가 놀라물었다. "후후, 물론이죠, 송코 형." 자신을 물 먹인 놈들은 절대 고이 두지 않는 것이 유한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유한은 실패한 땅굴을 이용해 관문을 무너트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역청이 터지는 정도로 관문이 내려앉을까?" 역청의 폭발력은 송코도 지난번 철공소 화재 사건 때 본 바 있었다. 하지만 그게 튼튼한 관문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라 판단했다. 아무리 화력이 좋은 초열탄을 섞어 넣었다하더라도. "차라리 철공소에 있는 카프한테 달라고 하지 그랬어. 카프라면 화약이나 폭약을 만들 줄 알 텐데.” 유한의 동창생이나 마찬가지인 대장장이 카프는 웨스턴에서 수행한 건스미스였다. "뭐, 이 방법이 실패하면 고려해 보죠." "고려해 본다고? 그럼 이걸로도충분하다 이거야?" "생각대로 잘만 된다면요." 밖에서 유한 일행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땅굴 끝에 놓인 역청통 속에선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겹쳐진 순간. 정오를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해 톱니바퀴가 회전했다. 그러나 시계는 종을 치는 대신 유한이 장치한 부싯돌을 때렸다. 첫 번째, 두 번째로 튀긴 부싯돌의 불꽃은 점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로 튀긴 부싯돌의 불꽃은 시계속에 흩날리던 초열탄 가루에 불을 지폈다. 좁은 공간에서 터진 불꽃의 폭발은 시계의 틈새로 빠져 나가 역청에 옮겨 불었다. 끈적한 역청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발화했고, 역청 속에 섞여 있던 초열탄도 연이어 발화했다. 콰아아앙! 땅 밑에서 육중하고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터져 나온 폭발의 화염은 땅굴 입구를 가리고 있던 천막을 한순 간에 태워 없앴다. 그 화끈한 화염을 보고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이대로 터져라!" 좁은 땅굴 속에서 억눌린 상태로 터진 폭발은 지하수층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벽을 뒤흔들었다. 벽에 굵은 금이 가고 연이어 그 틈으로 거센 물줄기가 새어나왔다. 그 물줄기는 점점 굵어지며 이내 벽올 완전히 무너트렸다. 그렇게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지자, 억눌려 있던 수압은 한꺼번에 터져 올랐다. "저게 대체 뭐야?" 관문에 있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어디선가 폭음이 울리더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둥이 터지는 게 아닌가. "뭔가 수상하군. 당장 정찰대를 파견해서 알아봐." "옙!" 뭔가 불길함을 느낀 후퍼는 당장 조사를 명령했다. 그러나 정찰대가 출발하기 전에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땅밑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리더니, 바닥이 거미줄처럼 굵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지진이다!" "으아아악!" 당황한 후퍼는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방어탑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뭔가 기우뚱한다 싶더니, 간신히 세워 놓은 수수깡처럼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철벽같이 튼튼한 관문의 성벽도 밑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후퍼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알지 못했지만, 관문 아래 에는 적잖게 지하수가 고여 있었다. 관문의 무게가 더해진 무거운 지층이 지하수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유한이 일으킨 폭발로 지하수가 땅굴올 통해 빠져나갔고. 이후 땅 속이 텅 비게 되면서 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 지반 위에 세워져 있던 관문은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으악!사람 살려!" "꿰에엑!" 관문 안에 있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놀란 개구리들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모두들 갑작스런 지진에 어쩔 줄을 몰랐다. 피하려 했지만, 그들이 피하는 속도보다도 땅이 꺼지고 성벽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발리안에게 얻은 막강한 레기온도 이 상황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채, 무너지는 땅속으로 빨려 내려갔다. "우와! 관문이 무너졌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캬하하하! 꼴좋다 아르마달 길드 놈들!" 레이가르딘과 그의 동료들은 폭삭 무너지는 관문을 보며 연방 만세를 불렀다. 그들의 환호성은 이어서 유한에게 쏟아졌다. "명장 지그 만세!" "악을 퇴치한 영웅 만세!" "지그오빠알라뷰!” 한동안 환호를 받은 유한은 일행과 함께 무너진 관문을 넘었다. 폐허 속에 생매장당한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통행료를 받을 수 없었다. 레뮤다 대륙북부 알데카 산맥. 황금 기계 도시로 가던 중에 '콘돌 전사의 요새' 라는 곳에서 쉬고 있던 발리안은 예상 밖의 비보를 접했다. "뭐라고요? 지그가 말론 회랑의 관문을 넘었단 말입니까?" "그게... 갑작스런 지진에 관문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아르페디아에서 오는 대장장이의 통행을 막아라. 아르마달 길드에 막대한 돈을 주고 그렇게 사주하긴 했지만, 발리안도 아르마달 길드가 유한의 행보를 완전히 막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벌어 줄 거라 생각했다.자신이 황금 기계 도시에 도착하고 기술을 발굴할 시간을. 그러나 아르마달 길드는 채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훗, 갑작스런 지진이라니. 운이 좋군요, 지그 님은." 발리안은 설마 그 지진을 유한이 일으켰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그저 유한의 운이 좋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접니다. 남자의 승리는 운보다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스스로를 노력하는 남자라 생각하는 발리안은 자신이 아르페디아 최초의 제철소를 세울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발리안의 노력은 불순했다. 그리고 비겁했다. "지그 님을 저리 둬선 곤란하군요. 아무래도 따로 처리 할 만한 사람을 고용해 봐야겠습니다. 혹시 이 근방에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로이디뉴라는 이름의 초고렙 유저가 있습니다. 직업은 검투사(Gladiator). 검투사 길드 '글로리아' 의 수장입니다. 중남미 유저들 중 세번째로 강한 사람이고. 이걸 특히 좋아한답니다." 전령은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 발리안은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전령이 참으로 부릴 만한 사람을 알아 온 것이다. "좋습니다. 당장 그에게 가 보도록 하지요." 콘돌 전사의 요새를 떠난 발리안은 글로리아 길드의 본부가 있다는 치클라요라는 도시로 떠났다. npc와 유저를 포함해 인구 10만의 도시 치클라요의 중앙에는 원형 검투장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글로리아의 본부였다. "당신이 날 보자고 한 코레아노인가" "그렇소. 세뇨르 로이디뉴." 발리안은 레뮤다 대륙에 들어온 직후 통역 서비스를 구매했기에 로이디뉴와 대화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대화나 협상보다 로이디뉴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가 하는 점. 로이디뉴는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갈색 피부의 호남으로 겉보기에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직업이 검투사라고 해서 발리안은 그가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진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발리안은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눈빛이다. 이자의 눈빛은 영민해 보여. 아마도 힘보다 지혜로 싸우는 타입이겠지' 아무래도 그런 스타일의 전사가 지그의 발목올 잡는데 더 쓸만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아르페디아에서 날 쫓아오는 숙적이 있습니다. 그자의 발목을 좀 잡아 주십시오.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숙적의 이름이?" "대장장이 지그라고 합니다." 발리안은 수하에게 부탁해 미리 준비한 유한의 인상 파기(스캔본에서도 이렇게 되 있네요. 인상 파기가 뭐지;)를 로이디뉴에게 건네주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발목을 잡아 준다면 금괴 백 개를 지불하겠습니다." 금괴 100개면 적어도 30만 골드가 넘는 금액. "호, 그만큼이나! 이 소년이 꽤 성가신 모양이군요, 세뇨르 발리안." "처음엔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되어 있더군요." "알았습니다. 그 의뢰 받아들이지요." 의뢰를 끝낸 발리안은 검투장에서 물러났다. 발리안이 가고 나서도 로이디뉴는 한참 동안이나 그가 두고 간 인상 파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영악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소년이었다. 굵은 얼굴 선과 입술에선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상대하기 쉽지 않을 타입 같았다. 인상 파기가 제대로 그려진 것이 맞다면. "지그라...어떤 친구인지 궁금한걸?" 검투 동맹 글로리아 "오! 여기가 레뮤다 대륙.” 말론 회랑을 지난 유한 일행은 레뮤다 대륙 북동쪽에 자리 잡은 도시 '쿠마나'에 도착했다. 레뮤다 대륙의 모델은 잉카 문명과 로마 문명인지, 쿠마나는 이 두 고대 문명의 스타일이 멋지게 조화되어 있었다. "흐흐흐,. 역시 라틴계 아가씨들의 미모는 세계 최고라니까!" 송코는 사방으로 눈알 굴리기에 바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다소 외모를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나 체형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것올 생각하면 송코의 말대로 중남미 여성 유저들의 미모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 맞는 듯했다. 사방에 늘씬한 미녀들 천지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송코는 물론이고 오펜도 연방 두리번거렸다.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은 유한뿐이었다. 유한의 마음속은 채린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 '나참, 중남미 녀석들은 연애질 하려고 게임하나?' 유한이 그리 생각한 것은 대부분의 중남미 유저들의 차림새가 화려하고 실용성이 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방에 커플들이 무성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과 포옹을 하고 키스를 나누곤 했다. 도시의 벽면에는 연인들이 새긴 듯한 사랑의 문구들이 잔뜩 있었다. '아놔, 이딴 걸 듣고 보려고 통역 서비스를 산 건 아닌 데...' 유한은 말론 회랑을 지나자마자 자칭 소리의 요정이라 하는 드림맥스의 사이버 판매원 랭글을 만났다. 랭글은 레뮤다 대륙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통역 서비스가 필요하다며 구매를 부추겼다. 스페인-포르투칼어 동시 통역 서비스의 한 달 이용료 는 6.000원. 크게 비싼 건 아니지만, 퀘스트만 끝내고 돌아갈 유한 입장에선 다소 아깝게 여겨졌다. "망할 드림맥스자식들." 유한과 같은 심정이었던지, 거리의 건물 곳곳에는 레뮤다 대륙을 방문한 한국 유저들이 새긴 글들이 남아 있었다. -쌍칼준규 : 레뮤다 대륙은 염장 대륙으로 이름을 바꿔라! -★키라★ :애인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무적해병대: 통역서비스는 시간정량제로 바꿔라! -살살이 : 소설 '대대장 이진구' 겜상에서 공유합니다. 갖고싶은 분은 저에게 쪽지 보내주셈~! -강찬:아놔 불법 스캔 좀 작작해라, 이것들아! "얼른 갑시다. 횡금 기계 도시까지 갈 길이 머니까." "천천히 구경하고 가면 안될까?" 송코의 속셈을 간파한 유한은 눈살을 확 찡그렸다. "퀘스트 끝나면 구경을 하던 여자를 꼬시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좀 가자고요. 잘못하면 사람들한테 포위당하니까!" 포위당한다는 유한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중남미 유저들은 흔하지 않은 한국 유저들의 등장에, 그것도 신기한 강철 거인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유한 일행을 졸졸 따라오다 못해 주위를 둘러싼 상태였다. "뭐 포위당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미모의 아가씨들이 알아서 접근해 오는 것을 마다하고 싶지 않은 송코였다. 그러나 이어진 유한의 말에 송코는 마음을 바꿔 먹게 되었다. "군중 속에 수상한 놈들이 있으니 문제죠. 그런 놈들에게 우리 정체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고요." 유한의 말이 맞는지 블랙이 아까부터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대다수의 낙천적인 사람들과 달리, 예사롭지 않은 눈매를 하고 따라붙는 놈들이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건 틀림없다. 후손 말대로 서둘러 가야 한다." 상점에서 레뮤다 대륙의 지도와 몇 가지 아이템을 구입한 일행은 서둘러 쿠마나를 떠났다. "아까 봤던 놈들 아직 따라오고 있어?" 도시 밖으로 나오자. 유한은 블랙에게 추적자의 동태를 물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 따라붙으면 잠복했다가 붙잡을 생각이었다. 무엇 때문에 추적하는지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 "아니,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군." 사라져서 다행이긴 했지만, 아주 마음을 놓올 수는 없었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도적 유저들이 아닐까? 듣자니 외국인 유저들을 털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던데" 그런 녀석들은 아르페디아 대륙은 물론 다른 대륙에도 존재한다. 지리적 물정이 어두운 유저들을 상대로 인벤토리를 쓰리하고 사기를 치는 비매너가 존재하는 것이다. "혹시 발리안의 끄나풀이 아닐까?" "뭐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저 낯선 대륙에 왔다거나, 발리안의 방해가 예상되어서만은 아니다. 유한은 쿠마나에서 산 레뮤다 대륙의 지도를 드워프 족장 군나르에게 받은 지도와 대조해 가며 살펴보았다. 북서부 방면에 군나르의 지도와 일치하는 지역이 있었다. 산과 강, 인근에 있는 마을의 위치까지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레뮤다 대륙의 지도에는 황금 기계 도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즉 유저들의 탐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소리. 대신 '녹색 죽음의 밀림' 이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녹색 죽음의 밀림이라..." "아마존밀림같은 건가 보군." "황금 기계 도시라는 게 전설의 도시 엘도라도가 모델이 된 모양이야." 쉽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주저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게임 속에서 힘든 모험과 역경을 이겨 낸 유한의 마음이었고, 그와 함께 가는 동료들의 마음이었다. "로이디뉴 님. 추적대가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검투사 동맹 글로리아의 길드원이 수장인 로이디뉴에게 보고를 올렸다. "목표물은 예상대로 쿠마나에 나타나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지금 붉은 기둥의 숲으로 길드원들을 파견하도록." 붉은 기둥의 숲은 쿠마나에서 치클라요로 오는 길에 있었다. 로이디뉴는 지그라는 소년 대장장이가 발리안이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올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붉은 기둥 의 숲에 몇을 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세뇨르 발리안의 뒤는 계속 추적하고 있겠지?" 로이디뉴의 눈빛은 방금 전 의뢰에 대해 논할 때보다도 더 반짝이고 있었다. "발리안의 일행인 쉐도우 워커 길드가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거기가 그들의 목적지인가?" 로이디뉴는 이번 의뢰를 맡으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다. 아직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진출한 중남미 유저의 수가 적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어에 능통한 길드원에게 시켜 인터넷에서 발리안과 지그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발리안뿐만 아니라 지그라는 녀석도 아르페디아에서 꽤 유명한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쉐도우 워커 길드가 던전이나 유적 탐사 전문이라고 했지?" "길드장인 인다아나정수라는 자가 꽤 수완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운석 쟁탈전에선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쉐도우 워커 길드는 이후 다른 의뢰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레기온의 핵심이 된 새로운 마나 콘트롤러 제조법을 발굴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래서 발리안은 쉐도우 워커와 그들의 길드장인 인디아나정수를 계속 신임하고 있었다. "녹색 죽음의 밀림이라면 꽤 위험한 곳인데...지금까지 들어가서 온전하게 나온 유저들이 없다지 아마?"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밀림 자체가 완전히 미궁과 같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녹색 죽음의 밀림을 탐험하는 유저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금은보화로 가득한 도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 분명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그곳 에 npc들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들은 아르패디아 대륙 북부에 산다는 드워프란 종족이었지요." "호.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손재주가 좋은 놈들이라지?" "예. 그들은 하얀 용의 지배를 받는데, 매년 그 몬스터 에게 금은보화를 갖다 바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석을 가공하는 기술과 금은 제련술도 뛰어나다고..." 드워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로이디뉴는 자신의 감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페디아의 대장장이 발리안이 뭔가 대단한 것올 찾고 있다고. 아니, 명장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발리안이 찾는 것이라면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닐 것이다. 유니크 급의 아이템이나 보물이 분명했다. "뭐 일단은 의뢰받은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말한 로이디뉴는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벌은 미리미리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 글로리아에서 예상한 대로 유한 일행은 붉은 기둥의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길이 좁고 울통불통했지만, 그래도 녹색 죽음의 숲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숲에 있는 나무의 껍질은 다 붉은색이군." "그래서 붉은 기둥의 숲이라 불리는 건가?" 처음에 유한은 붉은 기둥의 숲이라고 해서, 빨간 돌기둥들이 무수히 늘어선 광경을 생각했다. "나무의 향기도 짙고, 쭉 곧게 자란 게 척 봐도 고급 목재 같네요." "그래, 우리 교수님이 보면 군침깨나 흘리시겠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길을 가던 유한 일행은 길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몬스터인가 싶어 일행은 모두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것은 등에 희살을 맞은 미모의 아가씨였다. 유저인 듯 HP가 거의 다 떨어진 그녀는 비틀거리다 송코의 품에 안겼다. '이게 왠 떡이냐?' 입이 헤벌쪽 벌어진 송코는 그녀의 등에서 화살을 뽑고 힐링을 걸어 주었다. "이봐요, 아가씨! 괜찮습니까?” '호들갑은... 진짜 죽는 것도 아니구먼.’ 유한은 오버액션을 보인 아가씨와 송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에스텔라(Estella)' 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잠시 혼란해 하다가, 송코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세요. 지금 제 동료들이 습격을 받고 있어요." "어딥니까? 당장 구해드리죠!" "저 쪽 숲속에....." 에스텔라가 숲 속올 가리키자 송코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손에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씩씩하게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성직자가 아니라 용감한 용사와 같았다. "쯧쯧. 의욕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군." "자기가 무슨 김요셉인 줄 아나." 송코가 걱정된 일행은 곧장 뒤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에스델라는 일행을 숲 속에 있는 공터로 안내했다. 사방에 갈대가 무성한 그 자리에는 이 빠진 무기와 부러진 화살.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벌써 전멸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오펜은 바람이 슥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는 블랙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함정이다! 피해요!" "으응?헉!" 오펜을 따라 뒤를 돌아봤던 블랙은 나무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굵은 쇠사슬에 매달린 바위는 진자처럼 날아와 부딪쳤다. 블랙이 다급하게 팔을 교차시켜 막아 내기는 했지만, 뒷걸음질을 쳐야 했을 만큼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뒷걸음질을 쳤던 블랙의 몸이 땅 속으로 쑥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늪이다!" 갈대가 자라난 공터 가운데는 질척한 늪이 숨겨져 있었다. 블랙이 높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주변에서 무장한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검투사 같은 무장을 한 그들은 유한 일행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들이 습격자인가?" "아니요. 이들은 제 동료들이에요." 송코의 등 뒤에 있던 에스텔라는 단검을 꺼내 들더니, 송코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HP 1,800 포인트가 깎였습니다. -10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난데없는 기습을 당한 송코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송코를 바라보는 에스텔라는 차가운 조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전의 가날프고 연약한 느낌은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보니 우릴 유인한 거였군." "호호, 그걸 이제 알았나?" 에스텔라는 글로리아 길드 소속의 여검투사로 길드장인 로이디뉴의 오른팔이었다. "너희들에게 악의는 없어. 그러니까 한동안 여기서 얌전히 죽치고 있으라고." "흥, 웃기지 마라!" 유한은 검을 뽑아 에스텔라에게 휘둘렀다. 가볍게 공격을 피하며 물러난 에스텔라는 동료 검투사 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선두에 선 검투사들이 투척 무기를 꺼내서 빙글빙글 돌렸다. 가죽끈 양쪽에 돌덩이가 달린 기묘한 투척 무기였다. "조심해, 저건 볼라(Bola)야." 오펜의 경고에 유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볼라가 원데?" "남미 원주민들의 사냥도구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볼라가 날아왔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는 볼라에 제일 먼저 당한 사람은 송코였다. "우악! 이게 뭐야?" 힐링으로 상처를 회복하던 그는 날아온 볼라에 발이 걸렸다. 가죽끈이 송코의 발목을 휘감고 양쪽의 돌멩이들이 빙글빙글 꼬이더니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저렇게 만드는 거지." "포획 무기로군." 유한은 이들이 자신들을 죽일 뜻이 없다는 것올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화살이나 다른 살상용 무기를 쏘았을 것이다. 에스텔라도 말하지 않았는가. 한동안 여기서 얌전히 죽치고 있으라고. 죽으면 뒤에 있는 마올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산 채로 잡아 놓으려는 것이다. 나무에 꽁꽁 묶어 놓든 머리만 남기고 땅속에 파묻든 로그아웃을 한 뒤에 재접속을 하더라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누가 순순히 잡힐 줄 알아?" "우릴 우습게보지 마시죠!" 유한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볼라들을 잘라 버리고, 오펜은 검투사들을 향해 마법탄을 쏘아 댔다. 당황한 검투시들은 방패로 마법탄을 막으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글로리아 길드의 검투사들은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레뮤다 대륙의 검투사는 단순히 치고받고 싸우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은 기사나 전사와 달리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모든 스킬과 병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검으로 기습을 할 줄도 알았고, 볼라를 던져 상대를 포획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포획 도구는 볼라 뿐 만이 아니었다. "던져라!" 에스텔라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검투사들이 나섰다. 상어 머리처럼 생긴 투구에 비늘 갑옷올 입은 검투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그물을 유한과 오펜에게 집어 던졌다. 유한은 그물을 검으로 자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검투사들이 던진 그물은 쇠사슬로 민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그렇다면 암 브레이크로....' 하지만 그것도 맘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검투사가 쇠 그물을 쑥 잡아당기자 그물이 오므라들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한과 오펜은 검투사들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흥, 번거롭게 하다니." "더 번거롭게 해 줄까?" 죄여진 쇠그물 속에서 간신히 손올 놀린 유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그런 작은 망치로 뭘 어쩌겠다고?"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천둥은 나의 소리요, 번개는 나의 검이다!" 유한이 집어든 아이템은 뇌제의 홀이었다. 유한이 발동어을 외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유한을 얽매고 있던 쇠그물을 단숨에 찢었다. 강력한 전격의 충격파는 주변에 있던 검투사들까지 죄다 날려 보냈다. "크악, 이 힘은..." "다 죽었어, 이 자식들!"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검투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검투사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도망치는 속도보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숲속에서 번개와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번개가 한 번 떨어질 때마다 공터에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엑! 이건 사기야!" "오냐. 그래. 사기 유닛 발목 잡은 대가를 톡톡하게 치러 주마!" 훌륭하게 유한 일행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글로리아 길드의 검투사들은 그 대기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뇌제' 라는 중요한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임무에 실패했다고?" 로이디뉴는 되려 유한에게 맞아 죽고 돌아온 검투사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투사들은 길드장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로이디뉴의 태도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이유가 뭔가?" "상대가 갑자기 번개를 뿌리는 괴물로 변했습니다." 에스텔라의 말에 로이디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길드장의 태도에 에스텔라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괴물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말올 하지 않으셨습니까?" "뇌제라는 이야긴 들었지만,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몰랐지. 완전히 진 싸움을 뒤집을 정도라면 함부로 건드릴 상대는 아닌 것 같군." "그럼 의뢰는 포기하는 겁니까?" "중요한 건 의뢰가 아니야." 에스텔라는 짓궂게 변히는 로이디뉴의 눈빛을 보았다. 진지하면서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을 때 로이디뉴는 매번 기발한 발상을 해내곤 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정상을 다투는 대장장이들이 우리 대륙에 와서 뭔가를 찾고 있어. 아마도 의뢰비로 지불 할 금괴 백개는 껌처럼 씹고 버릴 만큼 값진 것이겠지." 로이디뉴의 말을 들은 검투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길드장은 의뢰인의 목표물을 가로채려는 모양. 그들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 레뮤다 대륙은 우리들의 터전이자 놀이터야. 그런 데 다른 대륙에서 온 도둑놈들이 우리 땅에 묻힌 보물을 홈쳐 가려 하고 있어. 이걸 과연 두고 봐야 할까?" 두고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 대륙의 명장들이 노리는 것이라면, 굉장한 유니크일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것을 차지할 수 있다면 레뮤다 대 륙 최강의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던 해외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될 지도. "하지만 가로채려 해도 우리가 가진 정보가 없습니다." 에스텔라의 지적대로였다. 지금 황금 기계 도시로 가는 지도는 유한과 발리안만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보물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뭔지 알아야 중간에 가로채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그래, 우리에겐 정보가 없지. 그저 놈들이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뭐, 그 정도 에 불과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거기서 말을 잠시 끊은 로이디뉴는 자신을 바라보는 길드원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동양 속담에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이 있던데 들어 본 적이 있나?" "아니, 없습니다." "그럼 내가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봐." 부하들에게 속담에 대해 설명하는 로이디뉴였다. 그는 그 속담 그대로 시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어부가 될 사람은 자신이고. 조개와 학은 유한과 발리안이 될 것 이다. 검투사들을 처리한 유한 일행은 다시 황금 기계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늪에 빠졌다가 간신히 기어 올라온 블랙은 연방 투덜거렸다. "크윽! 아직도 몸 속에 진흙이 남아 있는 것 같군. 옷 속에 들어온 벌레처럼 성가시기 짝이 없어." "참아. 좀 있으면 강이 나오니까 거기서 씻으면 돼." 유한은 블랙을 다독이곤 송코 쪽을 바라보았다. 송코는 상당히 시무룩한 상태였다. 반한 상대에게 험한 꼴올 당했던데다, 모두를 위험에 빠트려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그만 기운좀 차려요." "지그야, 난 여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신세인가 봐." 예전엔 유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플레임 마운트까지 끌려갔고. 거기서 리지스에게 코를 꿰인 이후로 대장간, 철공소의 관리인으로 전락했다. 이번에 아주 마음먹고 타 대륙에 와서 제대로 된 여자 친구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된통 당하고 말았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형도 여우 같은 여자들 말고 토끼같이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날 수 있 을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저나 엔스를 보세요." 그러나 송코의 기분은 풀리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일행이 치클라요라는 도시에 당도했을 때 전날 자신들을 속였던 에스텔라와 검투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비열한놈들, 이번엔 내가 네놈들을 응징해 주마!" 붉은 기둥의 숲에서는 늪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블랙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에스텔라 뒤에 있던 남자가 손을 가로저으며 앞 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글로리아의 길드장 로이디뉴였다. "진정하십시오. 우린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당신들 발리안에게 고용된 거 아닙니까?" 유한은 분명 이들이 발리안에게 고용되었을 거라 생각 했다. 아니면 숲에서 악의가 없다느니, 죽치고 있으라느니 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뭐 그에게 의뢰를 받긴 했습니다. 아르페디아에서 온 대장장이를 공격하라고. 그 대가로 금괴 백 개를 주겠다 고했습니다." "역시 그랬군.” "지금 그렇게 실토히는 이유가 뭡니까? 오펜은 이들이 순순히 다가와 자백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죠.” "어제 저희 길드의 정예 검투사들이 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그 님의 발목을 잡느니, 지그 님이 발리안 님을 따라잡게 만드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했습니다." 뇌제가 얼마나 강한지는 어제의 일로 알았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지그 패거리의 앞길을 막기보다는 의뢰를 역으로 받는 것은 어떨까? 로이디뉴의 탐욕스런 말과 표정에 기가 찬 나머지, 유한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뻔뻔해도 정도 가 있지,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먼저 출발한 사람을 어떻게 따라잡는단 말입니까?" "먼저 간 사람의 발목올 잡으면 될 일이지요. 녹색 죽음의 밀림에는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원주민 npc들이 가득합니다. 저희가 먼저 가서 그들에게 성역을 더럽힐 자들이 온다고 알리면...." 과연 그런 방법이라면 발리안의 행보를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올 것이다. 그사이 전력올 다해 나간다면 발리안을 따라잡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 "또 저희는 발리안 일행이 간 길보다 더 빠른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로이디뉴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혜택을 보는 만큼 의뢰인을 배신한 당신들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겠네요" "후후후, 계산이 빠르시군요." 로이디뉴는 손가락을 3개 펼쳐 보였다. "발리안 님이 제시한 금괴의 딱 세 배만 주시면 됩니다. 의뢰를 포기한 위약금으로 둘, 그리고 우리가 발리안 님의 발목을 잡을 대가로 하나입니다. 그만한 가치의 아이템을 주셔도 무방합니다." '흠, 금괴 삼백 개라....' 90만 골드를 달리는 건데 현재 유한의 입장에선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틈틈이 무구를 만들기 위해 소지한 에르젠 합금을 처분해도 그만한 액수는 나고도 남으니까. 그런데 유한이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반대하며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지그야, 거절해. 저 사람들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리 말한 것은 송코였다. 그는 미안한 감정 없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텔라에게 실망했다. "후손, 나도 반대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소인배들을 신용해선 안 된다." "맞아, 지름길로 데려다 준다면서 엉뚱한 곳으로 안내 할수도있잖아." 블랙과 오펜 역시 반대하고 나섰다. 유한도 그들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로이디뉴의 제안은 너무나 솔깃한 것이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어쩔지 몰라도 유한에게는 누가 먼저 제철소를 짓는가 하는 명예가 달려 있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습니까?" "성모 마리아께 맹세코 당신과의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성모님께 맹세 안 해도 좋으니 계약서나 씁시다." 유한은 거래를 할 때 쓰는 전자 계약서를 꺼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상대론 사용할 필요가 없지만, 안면도 없었고, 크게 신용도 할 수 없는 로이디뉴를 상대론 적격인 물건이었다. 유한과 로이디뉴가 한글과 스페인어로 쓴 계약서의 내 용은 이러했다. 글로리아 깅드는 3일 안에 발리안 일행을 따라잡도록 지그 파티를 안내한다. 의뢰가 성공했을 때 지그 파티는 글로리아 길드에 금괴 300개 혹은 그에 해당하는 가치의 아이템을 지불한다. 의뢰가 실패했을 때. 글로리아깉드는 지그 파티에게 의뢰금의 2배에 해당하는 위약금 혹은 그만한 가치의 아이템을 지불한다. 그렇게 적힌 계약서에 유한과 로이디뉴는 서명했다. 글로리아 길드와의 협력에 회의적이던 송코나, 블랙, 오팬도 이렇게 전자 문서로 명시하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한은 서명을 했어도 상대에게 단단히 엄포를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그쪽에서 패널티를 감수하고 날 배신한다면 그 날로 글로리아 길드는 레뮤다 대륙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지그 철공소가 가진 힘을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후후후,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하는 로이디뉴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지그가 발리안을 따라잡올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었다. 계약서의 내용을 절대 위반할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건 그 뒤의 일이지.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후후후, 동양엔 정말 재미난 속담이 많다니까.' 슬쩍 떠오르는 음흉한 웃음을 로이디뉴는 밝은 표정으로 덮었다. 황금 기계 도시 유한이 글로리아 길드와 계약한 지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발리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틀 전 에 황금 기계 도시가 숨겨진 땅 녹색 죽음의 밀림에 도착했지만, 이후론 어찌 된 상황인지 진척이 더뎠다. "휴우,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들어졌다고 느낀 건 저 뿐일까요? 용안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리안은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이답지 않은 건장한 체격과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엄청난 칭호를 가진 소년은 한참 후에 한 마디를 내뱉었다. "힘드네요." 드래곤 슬레이어 용안. 그는 아르페디아 랭킹 17위의 전사였다. 예전에 다크나이트 길드에 몸담고 있을 때 광룡 카세라스를 물리쳐 드래곤 슬레이어칭호를 얻었다. 물론 그 칭호는 길드원들과 함께 카세라스를 잡던 중 가장 많은 타격을 입히면서 얻게 된 전과였다. 혼자서 카세라스를 때려잡은 바츠와는 달랐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용안은 드래곤을 잡았다는 과거의 전과 덕분에 발리안에게 고용되었다. 지금 가는 황금 기계 도시라는 유적에서 드래곤의 레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을 잡을 때와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지금이 더 힘듭니다." 그때는 눈앞에 울부짖는 괴물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위험 투성이였다. 원주민에게 구입한 식량과 포션은 독이 들어 있었다. 밀림에는 과거 월남전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았던 부비트랩이 깔린 상태였고,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원주민 NPC들은 베트콩처럼 기습해 왔다. 독침을 날리고, 화살을 쏘고, 투창을 던지고. 심지어 아나콘다라든지, 재규어 같은 고렙 몬스터를 몰아오기도 했다. 발리안이 고용한 용병들은 하나하나 쓰러져 갔다. 부활 포인트에서 되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안전을 보장 받지 못했다. 부활 포인트가 있는 마을의 npc들이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틀동안 발리안은 이렇다 할 전진올 하지 못했다. "휴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안다. 습격한 원주민 NPC를 사로잡아 캐물으니 성역을 더럽힐 무리들이기에 공격했다고 한다. 처음엔 황금 기계 도시가 원주민들의 성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황금 기계 도시에 대해 설명해 주니 그곳은 ‘금역’ 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성역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누군가 우리 발을 잡으려고 작당을 한 것 같은데 용안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지그님이 손을 쓴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하지만 나도 없는 레뮤다 대륙의 인맥이 그에게 있을 리는 없는데.... 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네요." 발리안은 툭툭 말을 던지는 용안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별로 생각하는 타입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대화를 해봤자 입만 아프고 얻는 것도 없을 것 같았기에. "발리안 님! 큰일 났습니다." 근방에 수색을 나갔던 용병 유저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뭡니까? 또 원주민들의 습격입니까?" "그게 아니라 독수리 바위 고원에서 지그 일행을 봤습니다." 발리안은 돌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독수리 바위 고원은 황금 기계 도시 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런데 지그가 자신보다 앞서 독수리 바위 고원에 올라 가다니. 이건 믿을 수 없는 사태였다. 분명 먼저 출발한 것은 자신이고, 거액을 들여 발목을 잡아 둘 세력도 고용했다. 그런데 지그는 어느 틈엔지 자신보다 먼저 고원에 올라 갔다. 이러다 잘못하면 지그에게 뒤진다. 발리안은 레뮤다 대륙으로 떠나기 전, 지그의 동태틀 알아봐 달라고 정보 길드에 의뢰했다. 그 결과 그가 제철소 부지를 매입하고, 노스아크에 들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그가 제철소를 지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발리안은 한 발 먼저 가면서 방해 세력올 고용했다. 지그가 발목이 잡힌 사이 자신은 황금 기계 도시에 유유히 입성할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상황은 거짓말처럼 역전되었다. "쳇, 역시 지그 님은 깔봐선 안 될 사람이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용병이 물었다. "휴대용 기구를 쓰겠습니다." 휴대용 기구는 비행 몬스터의 공격에 취약해 레뮤다 대륙에서는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얼른 고원에 올라 지그보다 먼저 황금 기계 도시에 입성해야 한다. "하지만 기구의 탑승 인원수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발리안의 일행은 적지 않았다. 사실 그 때문이라도 기구는 더더욱 사용할 수 없었다. "레벨 높은 분들만 추려서 가겠습니다. 남은 분들은 돌아가도 좋습니다." 발리안은 서둘러 기구를 준비시킬 것을 지시하는 한편. 함께 가지 못하는 용병 유저들에겐 남은 기간의 일당까지 모두 지급했다. "그리고.... 인디아나정수 님께도 연락을 해야겠군요." 쉐도우 워커 길드는 황금 기계 도시 유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한 발 앞서 고원에 올라가 있었다. 전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발리안은 그들에게 지그 일행의 전진을 막게 할 생각이었다. 역전 당한 상황에서 다시 역전을 하려면 이판사판으로 나가야만 하니까. 글로리아 길드와 손을 잡은 유한은 발리안보다 한 발 앞서 황금 기계 도시가 있는 독수리 바위 고원에 오를 수 있었다. 유한은 처음에 검투사들의 길드라고 해서 그들의 영향력이 대단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검투사라는 말에 옛날 로마시대 영화에서 보았던, 원형 경기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뮤다 대륙의 검투사들은 콜로세움에서 시합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필드를 돌며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고, 모험을 즐기며 실력을 높였다. 거기다 토착 세력답게 아는 것도 많고 인맥도 넓었다. 유한이 녹색 죽음의 밀림을 수월하게 통과하고, 독수리 바위 고원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인맥 덕분이었다. 글로리아 길드의 검투사와 친분이 있는 원주민 npc가 밀림 속의 길을 안내했고, 고원에 쉽게 오를 수 있는 동굴 통로도 가르쳐 주었다. 거기다 글로리아 길드는 원주민들을 부추겨서 발리안 일행의 발목까지 잡았다. "여기가 독수리바위 고원인가?" 유한은 군나르가 건네준 지도를 살펴보았다. 드워프들 이 표시한 황금 기계 도시는 독수리가 비상하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있는 고원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발견한 독수리 바위는 지금 유한의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이제 목적지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군요." "다행이군요. 이만하면 우리들은 계약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지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이디뉴는 고원 아래 밀림에서 떠오르는 기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기구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발리안이 뒤쳐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기구를 동원했을 거라 생각했고 유한도 그리 판단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금괴 삼백 개에 해당하는 에르젠 합금입니다." 유한은 에르젠 합금괴 22개가 든 주머니를 로이디뉴에게 건네주었다. 에르젠의 가치에 대해 이미 들은 바 있었던 로이디뉴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좋아했다. 유한은 몰랐지만. 래뮤다 대륙에서 에르젠 합금은 아르페디아 시세의 3배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글로리아 길드가 일을 끝내고 유한이 대가를 치르자, 효력을 잃은 계약서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찾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손에 넣으시길." "잘가세요."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유한 일행과 헤어져 고원을 내려 가는 동굴 통로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동굴 통로에 거의 되돌아왔을 때였다. "쯧쯧, 정말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자들이로군. 금역에갈 생각을하다니." 여기까지 길을 안내했던 원주민 NPC가 혀를 차자, 로이디뉴가 피식 웃으며 입올 열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은 여기 또 있는데." 원주민 NPC는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에게 친근한 눈빛을 보내던 로이디뉴의 두 눈은 탐욕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글로리아의 다른 검투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안내해 주실까, 금역으로?" "이건 약속과 다르잖소!" 원주민들은 금역 언저리에 있는 독수리 바위까지만 안내하기로 했다. 유한 일행이 독수리 바위까지만 안내해 주면 남은 길은 알아서 찾아가겠다고 말했고, 금역까지 가기 꺼려하는 원주민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글로리아 길드는 그 약속을 깨려하고 있었다. "그럼 다시 약속하도록 하지. 금역까지 안내하기로." 이곳까지 오면서 유한 일행은 황금 기계 도시에 대해서 뻥긋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로이디뉴는 원주민들이 말하는 금역이 지그와 발리안의 최종 목적지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안에 그들이 찾는 보물이 있을 것이다. "자, 가지. 금역으로." "금역에 가는 것은 내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족의 일을 결정하는 것은 족장이다. 일개 전사에 불과한 자신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금역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아 자칫하면 부족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도 있기에. "네 멋대로 결정할 텐가, 아님 죽을 텐가?" 어느새 뽑힌 로이디뉴의 검이 원주민 npc의 목에 닿았다. 한참 동안 로이디뉴를 쏘아보던 원주민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다. "너희들은 후회하게 될 거다." "할지 안 할지는 일단 가 보면 알겠지." 로이디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가 유한에게서 황금 기계 도시에 관한 정보, 아니 드래곤 래어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면 그런 미소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금역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글로리아 길드와 헤어진 유한 일행은 군나르가 준 지도를 보며 황금 기계 도시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커다란 나무들을 쓰러트려 만든 급조한 바리케이드 위에는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발리안의 졸개들인가요?" "고용인이라는 좋은 단어가 있잖아." 유한의 물음에 기분이 상했는지, 길드장인 인디아나정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무튼 앞으로 가게 길 좀 열어 줄래요?" "안 된다. 절대 이 앞에 있는 유적으로 가선 안 돼." "후, 댁들은 아무래도 매가 고픈가 보군요." 유한은 슬쩍 블랙에게 눈치를 주었다. 유한의 뜻을 읽은 블랙은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며 앞으로 나섰다. 저깟 엉성한 바리케이드와 허접스러워 보이는 도둑들은 한 방에 날려버릴 자신이 있었다. "뭐 그렇게 발리안의 충복으로 남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시끄럽다! 너는 물론이고 발리안님도 유적으로 들어 가선 안 돼! 절대로 안 된단 말이다!" 인디아나정수의 외침에 유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물론 발리안도 안 된다니. 발리안이 그를 고용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안 된다니?" 이렇게 물은 것은 유한이 아니었다. 유한 일행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발리안이었다. 용안을 비롯해 소수의 전력만을 추려서 고원에 오른 발리안은 유한 일행이 선발대로 보낸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과 씨우기 시작하면 곧장 뒤를 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디아나정수의 말에 숨겼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해 보십시오. 나도 안 된다니. 대체 뭐 때문입니까? 혹 드래곤 때문입니까?" 유한 일행은 갑작스런 발리안의 둥장에 당황했지만, 그 와 인디아나정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예, 발리안 님. 저희가 유적에 은밀히 잠입해 놈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놈은 평범한 드래곤이 아닙니다. 그 놈은....." 적잖게 긴장한 인디아나정수를 보며 발리안은 조심스럽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언데드 드래곤이었습니다." "언데드드래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언데드 드래곤이라니, 드래곤 중에 그런 종류도 있었나? 보통 ‘언데드’ 라는 단어가 붙는 몬스터들은 오리지널들보다 훨씬 강하다. 질긴 생명력에 공격력도 높다. 언데드 나이트라든가, 언데드 메두사가 바로 그런 종류다. 그렇다면 지금 황금 기계 도시에 있는 언데드 드래곤도 일반 드래곤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제가 더 놀란 건 그놈의 이름이었습니다." 언데드 드래곤의 이름을 듣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인디아나정수의 입에서 문제의 언데드 드래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놈의 이름은 카세라스였습니다.” 광룡 카세라스. 한때 그로지아 왕국 남부에 터를 잡고 아르페디아 대륙을 어지럽히던 최강의 필드보스였다. 유저들에 의해 몇 차례 격퇴되고, 심지어 홀로 싸운 바츠에게마저 패한 뒤로 사라졌던 놈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니. 그것도 업그레이드(?)된 듯한 상태로 말이다. "광룡 카세라스가 여기 있었다니." "드림맥스도 재활용을 엄청 좋아하는군요." "힘들여 만든 보스 몬스터니까 그냥 버리긴 아깝다 싶었겠죠." 암울해 하는 유저들과 달리 기운이 넘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최강의 강철 거대 병기 블랙이었다. "역시 이 대륙엔 암혹의 세력이 있었군. 언데드 드래곤이라, 이 몸이 반드시 처단해 주도록 하지." "어이구, 처단하려다 네가 처단될 거다." 유한의 핀잔에 블랙이 발끈했다. "뭐라,후손!나를 못 믿는 거냐?" "솔직하게 말해 봐. 이길 자신이 있어? 없어?" 나에겐 광룡을 처단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아, 그래. 승산이 있냐고? 싸움에 의지만 있으면 다 이기냐?" 유한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블랙은 반박을 못했다. 그 에겐 분명 악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지만, 드래곤에게 필승을 거둘 자신감은 없었다. 블랙이 시무룩해진 채 주저앉자, 발리안은 함께 온 용안에게 말을 건넸다. "용안 님. 예전에 용안 님이 한번 싸워 봤던 카세라스 라고 합니다. 한 번 이긴 상대 두 번 못 이길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발리안의 말에 용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카세라스와 싸웠을 덴 다크나이트 길드의 정예 멤버들과 함께 싸웠었습니다. 더구나 간신히 이겼죠" 그 싸움에서 무려 300명의 정예 유저들이 죽었다. "제가 추려 온 용병 유저들도 그 정예 멤버에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용안 님이 드래곤을 물리쳐주리라 판단하고 고용한 거란 말입니다." "하지만언데드 드래곤은 좀..." 아무리 그래도 용안은 무모한 싸움을 하기는 싫었다. 언데드 드래곤이라니. 언데드의 특징상,죽이기 까다롭다는 걸 생각하면 자신의 실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용안을 바라보며 발리안은 내심 화가 치밀었다. '크윽! 이럴 줄 알았으면 김요셉 님을 영입해 오는 건데!' 최강의 성직자 김요셉이라면 언데드 드래곤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요셉을 영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은둔형 플레이를 히는 김요셉을 찾기가 힘들기에. 그는 저번에 철십자 길드의 대륙 통일 전쟁 때 잠시 얼굴을 보였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일설에는 후소 대륙으로 헤븐즈 게이트를 찾으러 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눈앞에 없는 김요셉을 아쉬워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그레이드된 카세라스를 물리치고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발굴해야 한다. 그리 판단한 발리안은 유한에게 다가갔다. "지그 님, 저는 지금 우리끼리 다투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그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니까,손을 잡자 이겁니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지요. 일단 서로 힘을 합쳐 카세라스부터 처리하고 다시 정정당당히 경쟁합시다" 발리안은 유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서로 협력하자는 그의 제의를 유한은 거부하지 않았다. 바츠를 데려왔다면 모를까, 바츠가 없는 지금 일행만으로는 언데드 드래곤으로 재탄생한 카세라스를 도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한은 발리안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게 협력을 약속한 두 사람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인디아나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제발 터무니없는 생각들은 하지 마십쇼. 잘못하면 벌통을 쑤시는 꼴이 된다는 걸 모르십니까?" 인디아나정수가 유한은 물론이고 발리안까지 황금 기계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으려 한 이유, 그것은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놈은 광룡이라 불리며 아르페디아 대륙을 어지럽혔던 최악의 몬스터였다. 왜 녹색 죽음의 밀림의 원주민 npc들이 이곳올 금역이라 칭했겠는가. 자칫 금역을 건드리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카세라스를 처치하는 데 실패하면 그 불똥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다른 애꿎은 유저들에게까지 튈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레뮤다 대륙의 주인인 중남미 유저들의 피해가 극심하겠지요." 한국 유저들이 일으킨 문제로 중남미 유저들이 피해를 본다면 이건 국제적인 문제가 된다. 그 점을 우려한 인디아나정수였지만, 유한이나 발리안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애질하러 게임하는 놈들은 좀 터져도 괜찮아요." "암요. 사람은 맞으면서 크는 법이지요." "거기다 레뮤다 대륙에 용을 잡을 용사가 없겠어요?" "그럼요.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현재 남의 대륙 사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싶은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게임인데 뭐 어쩌랴 싶기도 했다. 죽이 착착 맞는 그들의 사악한 태도에 인디아나정수도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제발 엄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인디아나정수는 최소한 악의 봉인을 뜯은 것이 자신들이란 게 소문나지 않기를 바랐다.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를 물리치지 않으면 퀘스트 완수가 어렵기에 유한과 발리안은 임시로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카세라스를 어떻게 무찌르죠?" 발리안의 물음에 유한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싸워서 이길 확률이......." 뇌제로 변신한다고 해도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를 물리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모험을 위해 이주 쓸 만한 머슴(?)인 블랙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 거기다 뇌제는 하루에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잖는가. 처음에 실패하면 그디음부터는 하루 종일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오펜이 전교 일등답게 한 가지 작전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꼭 쓰러트릴 필요는 없으니까, 카세라스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 내는 거야." 오펜은 일부가 드래곤 레어로 접근 후 카세라스를 어 내 최대한 멀리 유인해 내자고 했다. 그렇게 카세라스가 없는 틈을 타 도시에 진입해 기술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카세라스를 유인해 내지?" 유한의 물음에 발리안이 당연하다는듯 말했다. "일당백의 실력을 자랑하는 그쪽이 하시지요." "숫자가 많은 발리안 님 쪽이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우린 숫자만 많지 개별적으로 보면..." 그렇게 누가 미끼를 할지 서로 미루고 있을 때였다. 황금 기계 도시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쉐도우 워커 길드원이 그들에게 달려와 다급하게 보고했다. "지금 황금 기계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어?" 혹시 제3의 도전자가 있었단 말인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르페디아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는 건 유한과 발리안뿐이지만, 다른 대륙은 모른다. 타 대륙에서 철공소나 그에 준하는 시설을 운영하는 이가 두 사람과 같은 퀘스트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유한과 발리안은 서둘러 쉐도우 워커 길드원이 망보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황금 기계 도시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유한과 발리안은 밀림을 헤치고 도시로 향하는 일련의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저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차림새는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좀 전에 헤어졌던 검투 동맹 글로리아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 NPC를 앞세우고 계속 수풀을 헤치며 도시로 나아갔다. "저기가 바로 금역이오. 난 여기까지만 안내하겠소." 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원주민 NPC는 황금 기계 도시 유적을 가리키고는 돌아섰다. "그래, 수고 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로이디뉴는 허리에 차고 있던 손도끼를 원주민 npc에게 날렸다. 뒤통수를 정확하게 맞은 NPC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후후후, 녹색 죽음의 밀림 속에 이런 유적이 숨겨져 있다니." 잠시 황금 기계 도시를 바라보고 있던 로이디뉴는 길드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이만하면 큰 건수를 올린 것 같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스텔라만이 부정했다. "아직 얻은 게 없잖습니까." "깐깐하긴. 이만한 유적을 발견했다는 것만 해도 크게 횡재를 한거야."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유적 안으로 진입했다. 로이디뉴는 유적 입구에 세워진 돌기둥에 새겨진 글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유적은 발리안 선발대 파티가 최초 발견했습니다. -쿠스코왕립학술원-] "쳇, 최초 발견자가 되는 건 실패했군." 발리안 쪽에서 보낸 선발대가 이미 들렀던 모양. 그러나 로이디뉴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선발대라면 인원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만나면 해치워 버리고 보물을 독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직접 들어와 보니 엄청난 유적이로군." "그러게요." 황금 기계 도시는 녹슬고 부서진 기계 부품들로 가득했다. 자동차처럼 탈 것으로 보이는 4륜 수레도 있었고, 전성기 때는 동력을 얻는 데 사용되었을 풍차가 날개 뼈대만 앙상한 채로 뻐걱거렸다. 정체불명의 기계부품들이 나뒹굴고 있는걸 빼면 황금 기계 도시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마야나 잉카의 도시와 비슷했다. 그래서 상당히 퇴락해 있었지만, 웅장함과 신비함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로이디뉴와 글로리아 길드원들의 입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이대로 도시 중앙으로 가 보자." 유적 가장자리와 달리 중앙부는 멀쩡했다. 외벽에 횡금이라도 발랐는지, 중앙부의 건축물들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유흑의 광채는 로이디뉴와 글로리아 길드원들의 발걸음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은 것은 에스텔라뿐이었다. "무턱대고 들어가선 곤란해요. 중앙에 어떤 위험한 것들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여기서 죽어 버리면 원주민 마을의 부활 포인트에서 다시 와야 한다. 밀림의 온갖 몬스터와 해충, 그리고 이제는 적대적으로 변한 부족의 공격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소리.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에스텔라는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다. "훗, 이 안에 가디언 같은 게 있으면 입구에서 벌써 우릴 가로막았겠지. 그리고 좀 있으면 어때? 쳐 없애면 그만이야. 그리고 한국 놈들에게 보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해." 결국 로이디뉴의 주장대로 도시 중앙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모두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행군했으나, 별 다른 이상이 없자 경계를 풀었다. 나중에는 아예 관광이라도 온 것처럼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다. "우와, 저기 공중목욕탕 좀 봐." "저쪽은 광장인가?" 글로리아 길드원들이 떠들며 앞으로 나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앞에서 일행을 이끌던 로이디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왜 그래요? 몬스터라도 있나요?" 에스텔라의 물음에 로이디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띤 그는 저 앞에 보이는 피라미드를 가리켰다. "저, 저것은?" 황금 피라미드. 좀 전에 햇빛에 반짝이고 있던 건축물은 바로 그것이었다. 온통 황금으로 된 피라미드는 큼지막한 보석과 거대한 옥을 깎아 만든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맙소사! 황금으로 된 건물이라니!" "빨리가보자!" 모두들 앞을 다투며 황금 피라미드로 뛰어갔다. 황금 피라미드 주변은 금은보화들로 가득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창고에는 보석들로 채워져 있었고, 길바닥에 는 금화와 은화가 두껍게 깔려 있었다. 글로리아 길드원들의 눈빛은 횡금빛의 욕망으로 타올랐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들은 보물 더미에 몸을 던지고 보석과 금붙이들을 끌어안았다. "으하하하! 난 이제 부자다!" "이게 왠 떡이냐! 모두 쓸어 담아!"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보물을 주워 담았다. 보석만 줍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석으로 치장된 조각품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도끼로 내리쳐 피라미드의 계단석과 황금 문짝을 뜯어내기도 했다. "로이디뉴 님. 일단은 좀 진정시켜야하지 않올까요?"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에스텔라의 말은 주먹만 한 보석을 들고 웃고 있는 로이디뉴의 외침에 묻혀 버렸다. "에스텔라, 이것 봐! 이렇게 큰 보석은 처음 봐! 우리 길드는 이제 레뮤다 대륙 최고의 갑부가 되는 거야!" 보석에 눈이 뒤집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비록 그것이 게임속의 물건일지라도 마찬가지. "뭐 해, 에스텔라! 멍청히 있지 말고보물을 쓸어 담으라고." "아, 알겠습니다." 말리는 걸 포기한 에스텔라는 로이디뉴가 준 자루에 보석과 황금을 집어 넣었다. 그렇게 열심히 보물을 챙기던 그녀는 갑자기 사방이 어두컴컴해지자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갑자기 깜깜해진 거지?" "신경 꺼. 원래 정글엔 소나기가 잠깐씩 내리잖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들었다. "꺄아아아악!" 그건 에스텔라의 비명소리였다. 깜짝 놀란 그들은 에스텔라가 가리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세상을 온통 어돕게 가린 존재를 본 순간, 그들의 입에서도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그들의 눈동자는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피라미드보다 더 큰 붉은 드래곤은 온몸에 상처가 나 있었고, 검은 진물이 흘러내렸다. 뼈만 남은 앙상한 날개에서 사악한 검은 기운이 일렁였고, 빛을 잃은 탁한 두 눈은 분노와 욕망으로 가득했다.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 거대한 덩치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들의 발걸음을 땅에 들어붙게 만들었다. "크아아! 감히 나의 보물에 손을 대다니!" 카세라스는 입을 크게 벌리며 거세게 포효했다. 장내의 보물들이 흩날리고. 땅과 대기가 떨어 울렸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드래곤 피어에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전율에 감싸였다. 공포로 저도 모르게 무기를 떨어트린 사람도 있었고, 그대로 로그아웃이 된 이도 있었다. "이 더러운 버러지들! 날 이 꼴로 만든 것도 모자라 내 잠을 방해하고 보물까지 빼앗아?" 카세라스는 자신이 언데드 드래곤이 된 것을 인간들의 탓으로 여기고 있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깽판을 부리다 심한 상처를 입고 패퇴한 카세라스는 황금 기계 도시에서 숨올 거두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집착과 인간들에 대한 분노는 그를 죽지도, 살지도 않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물론 진실은 유저를 즐겁게(?) 하려는 드림맥스의 수작이었지만. 아무튼 언데드 드래곤이 되어서도 보물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카세라스는 쥐새끼 같은 인간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보물올 홈치려 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카세라스는 입과 코로 주위의 공기를 무섭게 빨아들이더니 지상의 인간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비록 레드 드래곤일 때의 화염 브레스는 아니지만. 독 과 사기(邪氣)로 이루어진 산성 브레스는 닿는 것은 족족 녹여 버리는 힘이 있었다. "히이익! 모두 도망쳐라!" "사람살려!" 레뮤다 대록에도 드래곤이 몇몇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어떤 길드도 사냥에 성공하지 못했다. 드래곤이란 몬스터는 아직 그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크아악!" "케엑!" 절반 이상의 글로리아 길드원들이 산성 브레스에 휘말렸다. 마치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소멸한 그들의 처절한 죽음에 기겁한 유저들은 철 만난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 버러지들아, 어딜 도망가느냐! 모두 나에게 목숨을 바쳐라!"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는 흩어져 달아나는 유저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브레스로 녹여 버리거나 발로 밟고 꼬리로 후려쳐 죽였다. 그렇게 글로리아 길드가 전멸했음에도, 카세라스는 분을 풀지 못했는지 연방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다. 그것은 분노의 외침만이 아닌 고통스런 외침이기도 했다. 엄청난 위세를 보였지만, 언데드인 몸올 움직이기 위해선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 고통은 그가 버러지로 여기는 인간들이 준 것이었다. 언데드답게 살아 있는 것을 증오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세라스는 분노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렸다. "크아아아! 망할 인간들! 모두 없애 버리겠다! 모두 쓸어버리겠다! 세상에서 모조리 멸종시켜 버리리라!" 그렇게 울부짖은 카세라스는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앙상한 날개를 퍼덕이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카세라스가 무섭게 날뛴 걸로 봐선...." 유적 안으로 들어간 글로리아 길드가 무엇때문인지 카세라스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래서 전멸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누가 미끼 역할올 할지 논의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카세라스가 외출한 틈을 타서 도시로...." 몸을 일으키던 유한에게 갑자기 발리안이 달려들었다. 발리안이 다리를 붙들어 넘어트리려 하자 유한은 다급히 그를 발로 차버리고 중심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이런 짓입니다." 씩 웃은 발리안은 열쇠 하나를 내보이더니 정글 속으로 집어 던졌다. 유한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발리안이 붙들었던 다리에는 커다란 철구가 달린 족쇄가 매달려 있었다. 발리안은 다리를 붙잡아 넘어트리려 한 게 아니라, 바로 이 족쇄를 채우려 한 것이다. "하하핫! 제가 특수 제작한 무겁고 튼튼한 텅스텐 족쇄입니다. 뛰려고 하면 애로 사항이 꽃필 겁니다." "이런 비겁한 새끼!" "푹 쉬고 계십시오! 내가 제철소를 지을 때까지! 하하" 발리안은 곧장 언덕을 내려가 횡금 기계 도시로 향했다. 그는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쏘았다. 탄두가 매섭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며 붉은 불빛을 터트렸다. "집결 신호다!" "발리안 님이 부르고 있어!" "유적이 있는 방향인데?" 블랙과 오펜, 송코 등과 함께 뒤에 남아 있던 발리안의 용병들은 하늘에 솟구친 불꽃을 보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발리안이 배신했다! 모두 유적으로 달려! 잠시 멍하게 있던 블랙 등은 유한의 귓속말을 받고 뒤늦게 황금 기계 도시로 달려갔다. 그들은 중간에 유한과 합류했는데. 발리안의 바람과 달리 유한은 그의 정성 어린 족쇄를 암 브레이크로 박살 내버렸다. "크악! 발리안 이 시박시키 잡히면 땅에 파묻어 버릴 겨!" 유한은 괴성을 지르며 발리안 일행의 뒤를 무섭게 쫓아갔다. 발리안이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먼저 손에 넣으면 큰일이다. 두 사람 중 먼저 기술을 가져오는 사람만이 제철소 설비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발 뒤쳐진 유한은 그것을 염려했지만, 도시 중앙에 와서는 그런 걱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황금 피라미드 앞에서 발리안 일행이 두 패로 갈려서 다투고 있었다. 다투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 때문이었다. 돈 많은 발리안과 랭커인 용안은 보물보단 임무가 우선 이었고, 선발대로 먼저 와 본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도 이 보물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손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용병 유저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들 조금 전의 글로리아 길드원들처럼 황금과 보석에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아,조금만 가져가자니깐요!" "저건 카세라스의 보물입니다! 그 미친 드래곤의 분노를 사고 싶습니까? 놔두고 횡금 기계 도시의 기술이나 찾으세요!" 발리안은 좀 전에 카세라스가 날뛴 것은 이 보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글로리아 길드원들은 이 보물에 손을 댔다가 전멸당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용병들은 그의 마음을 몰라 주고 계속 졸라 댔다. "좀 가져간다고 티가 나겠습니까?" "챙기는 사이에 카세라스가 돌아오면 어쩔 겁니까?" 발리안의 반박에 용병 유저들은 그를 흘겨보았다. "돌아오기 전에 잽싸게 튀면 되지요." "맞습니다. 이렇게 말다툼할 시간이 없다고요." "이 사람들이 정말...." 용병들에게 언성을 높이려던 발리안은 뒤를 쫓아온 유한 일행을 보고 움찔 놀랐다. 이렇게 빨리 쫓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한은 지은 죄 때문에 당황하는 발리안을 보며 히죽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땅에 파묻어 버리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패거리 수습이나 잘하셔!" "앗!" 유한 일행이 황금 피라미드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발리안은 펄쩍 뛰었다. 드워프 족장이 준 지도에는 피라미드 안에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서 지그 님을 잡아, 아니 죽이십시오!" 발리안이 명령을 내리자, 용안을 비롯해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이 유한 일행을 쫓아갔다. "흥! 채석!" 유한은 옥돌로 만든 신상을 부숴 계단에 굴렸다. 드르르르! 추적자들이 돌덩이를 피해 주춤하는 사이, 피라미드 중턱에 오른 유한은 문짝이 뜯어진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제길, 절대 놓쳐선 안됩니다!" 발리안과 쉐도우 워커들은 악을 쓰며 유한 일행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올랐다. 고대의 기술 서적 휘이이이잉~! 황량한 바람이 내부 공간을 휘돌다 나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황금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선 유한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 거창하게 보물이 쌓여 있던 것과 달리. 안에는 벽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비밀 금고라도...." 유한 일행이 벽을 더듬어 조사하려 했지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새 발리안과 그의 고용인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훗, 이런 걸 독 안에 든 쥐새끼라고 하지요." 발리안이 눈짓을 하자, 그의 옆에 있던 용안이 검을 뽑아들고 유한을 공격했다. '대쉬다!' 유한은 용안이 돌진하기 전에 취한 준비 자세를 보고, 그의 공격 스킬을 파악했다. 그는 곧장 몸을 비스듬히 기올여 용안의 공격을 피해냈다. "어라, 피했어?" 용안이 의외라는 눈빛을 보이자 유한은 히죽 웃었다. "내가 예전에 좀 싸워봤거든." "그래?" 용안은 뒤춤에서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유한은 그가 부메랑 엑스 스킬을 쓸 거라 예상하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용안은 손도끼를 유한에게 던지는 척 하다가 검으로 도끼를 후려쳐 부서트렸다. '앗! 저건!' 예전에 유한이 공중 요새에서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을 제압했던 공격법이었다. 그때 라스트모히칸 녀석의 도끼를 공중에서 암 브레이크로 부숴서 마도사들에게 파편을 날렸다. 용안은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한을 공격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암 브레이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뿐. "크윽!"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30초간 움직임이 굼떠집니다. 도끼 파편에 맞으면서 hp가 1000 포인트 떨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다리를 다쳐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다는 점이다. 유한이 부들거리는 것을 보고 용안은 검을 고쳐 잡고 다가왔다. 분위기로 보건데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는 듯. '쳇,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짤짤이로 딴 게 아니군.' 상대가 수준 이상의 탱커였다. 거기다 정해진 공격 스킬이 아닌 변칙 기술을 고안해 쓰는 것을 보면, 전투 경험도 풍부한 듯 했다. '좀 더 신중하게 상대해야 했는데....' 후회하는 유한을 향해 다가오며 용안은 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왜 날 돕지 않는 거지? 유한이 초조한 안색으로 일행들을 찾으려 할 때 거센 외침이 그의 귀청을 때렸다. "검을 버려라! 아니면 네 고용주는 죽는다!" 고개를 돌린 용안은 황당한 표정올 지었다. 어느 틈엔지, 발리안의 머리는 블랙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고,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은 죄다 바닥을 기고 있었다. 용안이 유한을 상대하는 사이, 피라미드 안의 발리안 패거리를 블랙과 송코, 오펜이 제압한 것이다. 용안은 검을 버리는 대신 유한을 블랙이 있는 곳으로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발리안 님을 이쪽으로 보내시오." "크크크, 바보 아냐? 우리가 미쳤냐? 이놈을 고이 보내 주게." 유한은 자신을 순순히 보내 준 용안을 비웃었다. 이대로 발리안을 죽여 버리면 앞으로 플레이는 편해진다. 발리안이 부활 포인트에서 다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느긋하게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훗,제법 사내다운 친구로군." "야!무슨짓이야!" 블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리안을 용안에게 보내 주었다.유한이 펄쩍 뛰었지만 블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후후, 이번엔 서로 비겼군요." "제길!멍청한 깡통 녀석때문에." 블랙의 정정당당한 행동에 분통이 터졌던 유한은 홧김에 주먹으로 가까운 벽면을 후려쳤다. 그저 분풀이로 휘둘렀올 뿐인데, 주먹에 맞은 벽돌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연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스르르 밑으로 내려갔다. "얼래?" "무,무슨 짓을 한거야?" 일행이 당황하는 사이, 바닥은 더 빨리 내려갔다. "무슨 함정 같은 거 건드린 거 아닙니까?" "함정이라면 뭔가 삐죽한 게 튀어나왔겠지!" 참으로 우연히 작동시켰지만, 유한은 이것을 엘리베이터 비슷한 장치라 생각했다. 도시 중앙에 있는 황금으로 치장된 피라미드라면 신전이나 왕의 무덤과 같은 중요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자신들의 월등한 지식과 기술을 좀 더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 깊숙한 비밀 공간에다 말이지.' 그의 예상대로, 고대 황금 기계 도시의 은밀한 장소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돌바닥이 완전히 내려앉자 사방에 환한 불이 들어오며 거대한 지하의 공간을 밝혔다. "우와, 이게 뭐지?" "도시 지하의 공장인가본데." 주변에는 커다란 반송대라든지. 물건을 찍어내는 듯한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연통과 도르래들이 가득했고, 화로나 보일러 같은 시설들도 여기저기 구비되어 있었다. "대체 여기서 뭘 만든 거지?" "저기에 답이 있을 것 같은데." 오펜이 지하 공장 벽에 그려진 벽화를 가리켰다. 고대 남미 문명의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한 그림들이었지만, 대충 내용을 아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벽화 제일 왼쪽에는 거대한 원반을 타고 고원에 내려오는 일곱 명의 신인이 그려져 있었다. 지상에 있는 드워프들은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에는 신인들이 드워프들에게 선진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었다. 세 번째 그림에는 그들의 지원 덕분에 크게 발전한 드워프들이 일곱 신인을 기리는 뜻에서 고원에 황금 기계 도시를 건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외계인 방문을 기념해서 건설된 것이로군." "의계인에게 기술올 받은 드워프라... 왜 드워프들이 비겁할 정도로 앞선 기술을 가졌는지 알겠군요." 뜬금없이 판타지 배경 게임에 외계 문명 같은 SF 소재가 끼다니. 사실 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레뮤다 대륙의 모태가 된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은 너무나 훌륭해서 외계인이 기술을 전수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드림맥스도 그런 설에 입각해 이런 스토리를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원반을 타고 내려왔다고 마냥 외계인으로 추정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무튼 이곳에서 발전된 기술을 습득한 드워프들이 아르페디아 대륙까지 진출한 건가?" "그 뒤의 역사도 궁금한걸? 이 황금 기계 도시가 폐허가 된 사연 말이야."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자고." 감춰진 역사와 유적을 발견하는 것은 유저의 의무이자 권리. 그러나 지금 유한과 발리안에게 우선되는 건 드워프의 역사가 아닌 기술이었다. '대체 어딜 가야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일단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황금 피라미드 안까지는 들어왔다. 하지만 피라미드 어디에 기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한과 발리안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직 확실한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자칫 헛다리를 짚으면 퀘스트를 실패할 수도 있기에. "여기 뭔가 있는데?" 블랙이 또 다른 벽면을 가리켰다. 그것은 지하 공장의 시설들이 배치된 지도였다. 유한과 발리안은 차근차근 지도를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이곳이 공장이라 치면....." "서쪽은 동력 생산 단지고, 남쪽은 연구소." 연구소라는 대목에서 두 사람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이번에 선수를 친 것은 유한이었다. 그는 발리안의 머리를 냅다 후려쳐 버리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크악! 비겁하지 않습니까?" "시끄럿! 먼저 비겁했던 건 누군데?" "으으으.... 용안 님 뭐하십니까? 얼른 잡으세요!" 용안이 곧장 유한의 뒤를 쫓아갔다. 그 뒤를 뒤통수를 움켜잡은 발리안이 따랐고, 블랙과 송코, 오팬이 혀를 차며 따라갔다. "하여간 둘 다 똑같다니까." 먼저 치고 나간 유한이었지만, 랭커인 용안은 무섭게 따라붙었다. 그가 대쉬 스킬올 사용할 때마다 두 사람의 격차가 곽팍 줄어들었다. 당황한 유한은 중간에 잡히는 녹슨 기계들이나 연장들을 뒤로 집어 던졌지만, 용안은 당황하지 않고 피해 가며 쫓아왔다. '제길, 더 빨리 달려갈 방법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유한은 강철 레일에 얹힌 짐차를 보았다. 생산품이나 자재를 옮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짐차는 예전에 어릴 적 광산 파크에 갔을때 타본 레일 바이크와 비슷했다. '저거다!' 곧장 짐차에 올라탄 유한은 발로 페달을 돌렸다. 삐걱거리며 움직이던 짐차는 곧 바람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좋았어! 하하핫!" 줄어들었던 용안과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자, 유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일그러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안과 발리안도 다른 짐차를 타고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 서십시오!" "택 같으면 서겠수?" 그렇게 레일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커다란 지하 광장에 신전처럼 생긴 크고 하얀 건물이 나왔다. 좀 전에 지도에서 보았던 연구소가 분명했다. 짐차에서 내린 유한은 서둘러 연구소 건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다가가자, 연구소 주변에 늘어서 있던 청동상들이 눈을 번뜩이며 음직였다. "헉! 가디언인가?" 청동상들은 유한의 앞을 가로막고 딱딱하고 기계적인 음성을 토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출입증을 제시 바랍니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유한이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자, 청동 가디언들은 허리에 차고 있던 거대한 도끼를 뽑아 들었다. -관계자가 아니면 돌아가시오. 불응시 공격하겠음. 그러나 유한은 물러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조금 있으면 발리안과 용안도 올 텐데 여기서 시간올 끌어서는 곤란하다. "흥, 기껏해야 청동 쪼가리 주제에." 유한은 펜릴 소드를 뽑아 들고 앞에 있는 청동 가디언을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스킬이 깃든 일격에 청동 가디언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별것도 아닌 녀석이...." 피식 웃던 유한은 이내 안색을 바꾸고 몸을 숙였다 머리가 부서진 청동 가디언이 도끼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침입자. 침입자 출현. -제압하라.제압하라. 부서진 놈뿐만 아니라 근처의 다른 녀석들도 공격해왔다. 어눌한 말투를 내뱉는 것과 달리 놈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유한을 압박했다. '헉, 이놈들 엄청 강하잖아!' 청동 가디언들의 실력은 왠만한 고렙 몬스터들의 전투력 이상이었다. 레벨이 최소 200은 넘을 듯.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황금 기계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의 지킴이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인의 기술올 전수받은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병기답게 강력함을 자랑했다. 유한이 청동 가디언들을 상대로 꾸물거리는 사이, 발리안과 용안이 도착했다. 두 사람은 고전하는 유한을 내버려두고 연구소로 들어가려 했지만 또 다른 청동 가디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출입증을 제시하시오 "용안님, 길을 뚫어주십시오." 발리안이 슬쩍 물러서자 용안이 청동 가디언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싱급 랭커답게 연달아 터져 나온 강력한 검격에 청동 가디언들이 산산 조각 났다. "아니!" 앞으로 나가던 용안과 발리안이 멈칫했다. 바닥에서 뭔가 불쑥 솟아난다 싶더니 부서진 수만큼의 청동 가디언들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청동 가디언들은 원래 배치되어 있던 녀 석과 달랐다. 놈들은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고, 실력도 도끼를 든 녀석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처음에 짚단 베듯이 청동 가디언을 베어 넘겼던 용안도 새롭게 나타난 녀석들은 쉽게 처리하지 못했다. 놈들은 상급 랭커인 용안의 공격을 막아 내고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크윽! 출입증을 가져올 테니까 제발 좀 뵈주라." 청동 가디언들을 상대로 견디다 못한 유한이 애원했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 이미 유한을 적으로 간주, 말살하기로 마음먹은 듯. 청동 가디언들에게 위태위태하게 밀려나던 유한은 뒤늦게 도착한 동료들 덕분에 한숨을 돌렸다. 선두로 나선 블랙은 마치 힘자랑을 하듯이 청동 가디언 하나를 번쩍 들어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청동 가디언은 찌그러진 상태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뒤이어 날아온 오펜의 마법탄에 맞고 박살이 났다. "지그야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까 년 얼른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 송코가 그렇게 말했지만, 유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과 오펜이 분투하여 청동 가디언들올 쓰러트리고 있지만, 쓰러진 만큼의 새로운 청동 가디언들이 땅속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제길, 바닥에 청동 가디언 씨라도 뿌려 두었나" 유한은 투덜거리면서도 연방 틈을 살폈다. 그것은 발리안도 마찬가지. 그는 용안이 싸우는 사이 인벤토리에서 원가를 한 움큼 꺼내어 바닥에 굴렸다. "베어링 어택(Bearing Attack)!" 발리안의 손에서 떠난 수십 개의 작은 쇠구슬들이 청동 가디언들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쿠당당탕! 구슬을 밟은 청동 가디언들이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방에 깔린 쇠구슬 때문에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하핫! 이거 의외로 잘 통하는군요!" 베어링 어택. 예전에 발리안이 익힌 대장장이의 공격 스킬로, 쇠구슬을 굴려 상대를 넘어트리는 방식이다. 그리 큰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니고, 발리안도 전투를 즐기지 않아 이 스킬의 숨겨진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용안을 지원하고자 했을 뿐인데, 의외로 좋은 효과를 보이지 않는가. 발리안은 계속해서 쇠구슬을 굴렸다. 장내에 수백 개의 쇠구슬들이 깔리자 청동 가디언들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용안 님,전 먼저 가겠습니다." "뒤는 나에게 맡기세요." 발리안은 청동 가디언들이 넘어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연구소 건물로 뛰어갔다. 물론 쇠구슬이 없는 곳을 밟고서 지나갔다. "저런 스킬이 있었을 줄이야!" 유한은 감탄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방탄 실드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올라탔다. 마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처럼 뒷발올 박차자, 방탄 실드는 쇠구슬이 깔린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갔다. 그렇게 유한도 청동 가디언들 사이를 뚫고 나갈 수 있었다. -침입자가 침투했다. -잡아라!잡아라! 청동 가디언들은 허우적거리면서 쫓아왔다. 먼저 연구소의 철문올 열고 들어간 발리안은 유한이 달려오자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유한은 발로 문올 박차고 들어갔다. "크엑!" "거, 치사하게 그러지 맙시다." 안으로 들어온 유한은 철문올 닫고 빗장올 걸어 잠갔다. 밖에서 청동 가디언들이 들어오려는 듯, 철문올 두들겨 댔지만, 단단히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한숨을 좀 돌리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한은 오래 쉬고 있올 수 없었다. 좀 전에 나가떨어졌던 발리안이 연구소 안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여간 기운도 좋아요." 투덜거리며 발리안을 쫓아간 유한은 그가 안쪽의 거대한 황금 문 앞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어떻게 여는 거지?" 문앞에선 발리안은 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높이가 5미터도 훨씬 넘는 크고 육중한 황금 문에는 손잡이도 없었고, 열쇠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문틈새로 쇠 지렛대를 집어넣어 보려 했지만, 문틈은 날카로운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했다. 유한이 다가와 살펴보았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부수기 위해 망치로 내리치고 암 브레이크를 날려 봤지만, 황금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거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무조건 안에서 열어주는 구조가 아닐지?"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라고요." 좀 전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두 사람은 문을 열기 위해 다시 손을 잡았다. 그들은 각각 황금 문의 좌우를 살펴보았다. 있는 거라곤 좌우의 녹슨 청동 화로와 부서진 쇳조각, 그리고 문 양쪽의 벽에 나 있는 작은 구멍뿐이었다. "이 구멍이 열쇠 구멍 같은 게 아닐까요?" "열쇠구멍치곤 너무 굵은데요." "큰 문이니까 큰 열쇠를 썼겠죠" 발리안은 인벤토리에서 가늘고 긴 쇠꼬챙이를 꺼내 구 멍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나 속이 텅 비었는지 아무리 쑤셔 봐도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뭘 어떻게해야 여는 건지...." 유한은 문 옆의 청동 화로를 살펴보았다. 문 옆에 왜 화로같은게 있는지 의문이었다. 꼼꼼히 화로를 살피던 유한은 화로의 뚜껑에 적힌 작은 문구를 발견했다. 지식의 성수를 붓고,기술의 성화를 피워라. "지식의 성수? 기술의 성화? 단단히 닫힌 화로의 뚜껑을 열어 보자, 안에서 주전자 같이 생긴 용기가 나왔다. 그 용기의 뚜껑은 화로 뚜껑만큼이나 튼튼히 잠겨 있어 열기 무척 힘들었고, 툭 튀어나 온 주둥이는 문 옆의 구멍과 그 크기가 비슷했다. 거기에 주목한 유한은 근처에 나뒹구는 부서진 쇳조각들을 살꼈다. 깨진 조각들을 몇 개 주워 맞춰 보니 파이프 모양이 나타났다. '연통은 아닌것 같은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유한은 박수를 쳤다. 그는 곧장 재료와 연장들을 꺼내서 부서진 파이프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었다. "갑자기 뭘 만드는 겁니까?" 발리안이 다가와 물었다. "나중에 가르쳐 줄 테니 댁도 얼른 만들어요!" 영문을 몰랐지만, 발리안도 유한을 도와 청동 파이프를 만들었다. 유한은 그렇게 만든 파이프로 석문 옆의 구명과 화로의 주전자 주둥이를 연결시켰다. "아! 이거...." 발리안도 이제 원가 알겠던지 주먹을 쳤다.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가죽 물통올 꺼내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예전에 에르젠 퀘스트를 할 때 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에, 그 뒤로는 항상 인벤토리에 여분의 물을 지니고 다녔다. 발리안도 유한이 하는 대로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 그는 유한이 일러 주지 않았음에도, 장작과 부싯돌을 꺼내 화로에 불을 피웠다. "불을 피워서 주전자 안의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생기죠." "그 수증기가 파이프를 통해 구멍으로 들어가고 수증기의 압력이 문 안의 장치를 돌린다?" "바로 그겁니다!" 두 사람의 말대로 얼마 후, 주전자에서 생겨난 중기가 쉬쉬 소리를 내며 구멍 속으로 홀러 들어갔다. 구멍 속으로 흘러간 수증기는 황금문 안쪽에 있던 실린더에 모이면서 안에 있던 풍차를 돌렸다. 풍차가 돌면서 실린더와 연결되어 있던 톱니바퀴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황금문에 매달린 쇠사슬올 잡아당겼다. 그러자 육중한 황금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 얼마 뒤에는 활짝 열렸다. "나참, 증기 기관 구조라니" "아마 이것도 어딘가에서 보고 참고했을 겁니다." 유한은 몰랐지만, 드림맥스는 고대 그리스의 해론이라는 사람이 만든 자동문을 참고했다. 유한과 발리안은 나란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경쟁 관계가 된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우와, 이게 다 뭐지?" 황금문을 지난 유한과 발리안 앞에 나타난 광경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쭉 늘어선 책상 위에는 이름 모를 온갖 연구 자재들이 가득했고, 만들다가 만 기계들이 녹슬고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한편에 마련된 서가에는 수없이 많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별자리를 그린 벽화가 가득한 천장에는 신인들이 타고온 원반의 모형이 매달려 있었다. "이 게임 나중에 가면 우주선까지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발리안은 유합이 건넨 농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천 권의 책들이 소장된 서가들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로 붸스트 조건인 황금 기계 도시 의 기술을 얻기 위해서. "이건가?아님 저건가?" 책들은 어떤 보존 마법이 걸렸는지 하나같이 상태가 좋아보였다. 천체 운행, 원소의 분류, 화학 작용과 기계적 응용.... 어느 것 하나 진지하지 않은 책이 없지만, 이 정도는 노스아크의 드워프들도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퀘스트에서 원하는 고대 드워프들의 기술서가 보이지 않자 마음 한편이 불안해졌다. "혹시 다른 곳에 있나?" 그리 생각하던 유한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서가 맞은편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었다. 황금 기계 도시 지하 연구소의 역대 소장 드워프들이 그려진 초상화 아래에는 그들의 업적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유한은 그중에서 19대 소장이었던 세크투스의 업적을 눈여겨 보았다. 세크투스 재직 : 신인력 1113~1123년. 업적 : 마나의 공명 현상읕 탐구하여. 그림과 문자를 수식과 신호로바꾸어 수정에 이록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고안하였다. '수정에 그림과 문자를 기록한다고?' 컴퓨터의 메모리 칩 비슷한 방식의 저장법을 발명해 낸 모양. 유한이 뭔가를 깨달았을 때, 발리안이 읽고 있던 책을 내팽겨 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유한은 방금 전에 발리안이 보고 있던 책을 들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기록의 혁명' 이었고, 저술자는 세크투스였다. 그는 방금 전에 발리안이 보던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내가 고안한 '세크투스식 입력'은 수백 권에 달하는 지식의 양을 작은 수정 하나에 보관하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이다. 재난으로부터 기록의 유실을 막을 수 있으며 문명의 되보를 방지할 수 있다. 나는 혹시 모를 변란으로부터 문명의 이록을 보존하고자 연구소 도서관 비밀 소장고에 수정들을 남겨..... '이거로군!' 수백 권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수정들이야말로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세크투스가 남겨 두었다는 수정을 찾아야 한다. 유한은 곧장 연구소 내의 도서관을 찾았다. 황금문의 반대편에 있는 통로로 나가자, 건물의 내부 구역을 알려 주는지도를 발견할수 있었다. "도서관은 이충인가?" 유한은 위로 올라가는 층계를 찾아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먼저 당도한 발리안에 의해 도서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유한은 사방으로 쏘다니며 비밀 소장고를 찾는 발리안을 볼 수 있었다. "여긴가? 아님 이쪽?" 발리안은 벽을 두들겨 보고 책장도 밀어 보며 비밀 소장고를 찾았다. 유한도 뒤질세라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다.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진 두 사람은 마침내 비밀 소장고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황금으로 만든 작은 방이 나왔다. 으리으리한 황금 소장고 안에는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수정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 이것들이 세크투스가 남긴 문명의 기록인 모양이다. 아마 수정 안에는 군나르가 찾는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과 고대 드워프의 기록이 가득할 터. 일단 슬쩍 수정을 만진 유한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레코딩 크리스털] -고대 드워프들이 그림이나 기록, 영상올 저장할 때 사용할 때 사용한 매체. 마나 영사기가 있으면 재생할 수 있다. "우하하핫! 찾았다!" 드디어 황금 기계 도시의 정수를 찾았다는 마음에 유한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것은 발리안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포도주와 술잔을 꺼내더니 유한에게 권했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져서는 안 돼지요." 그러나 유한은 발리안이 주는 술잔을 받아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발리안은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먼저 차지하겠다며 다투지 않았던가. "내가 왜 댁하고 마셔야 하는데요?" "하하하, 우리가 경쟁자로서 티격태격했지만 그래도 한 때는 같은 편에 서서 싸웠지 않습니까? 고대 드워프의 기술서를 발굴한 역사적 순간올 축하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게임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발리안의 순수한 호의에 유한의 마음이 살짝 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술잔을 선뜻 받아 들 수는 없었다. "난 미성년자인데요." "나참. 명성이 떨어져 봐야 10밖에 안 떨어집니다. 패널티는 권하는 제가 더 많이 받지요. 그러니까 한 잔하십시오." "그래도 연장자인 발리안 님이 먼저 드셔야...." 유한은 발리안이 먼저 마시기를 요구했고, 발리안은 순순히 포도주를 술잔에 따라 마셨다. 그가 마시는 것을 확인한 유한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포도주를 냉큼 받아 마셔 버렸다. -쿠궁! 19세 미만은 술을 마셔선 안 됩니다. 명성을 10 잃었습니다. 경고창이 떴지만, 유한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초보 시절이라면 모를까, 명성이 35,000이 넘는 지금은 10 정도 떨어지는 것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쿠쿵! 마비독에 걸렸습니다. 1시간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난데없는 경고 메시지에 유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독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같이 포도주를 마신 발리안은 저리 멀쩡한데. 발리안은 돌처럼 굳어 버린 유한을 보며 히죽 웃었다. "후후후, 순진하긴. 술에 독을 탔는가 살필 게 아니라 술잔에 독을 바를 것도 생각해야죠" 즉 유한이 마신 술잔에 미리 독올 발라 놓았다는 소리. 독을 바른술잔. 발리안이 만만치 않은 상대를 처리하기 위해 준비해 둔 회심의 아이템이었다. 보통은 술에 독이 있올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 버린다. "크아악! 이 비겁한 새끼!" 좀 전에 놈이 보인 호의에 잠깐이라도 마음을 놓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속은 지그 님이 멍청한 것이지요. 애초에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니었습니까." "당장 이 독을 풀지 않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하고 말 거야!" "후후후, 그러시던지요." 그 뒤로 발리안은 유한이 무슨 말이나 욕설을 내뱉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비밀 소장고 안에 있는 레코딩 크리스탈들을 모두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유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또 봅시다. 제철소를 완성하면 초청장을 보내 드리지요." "크악! 개자식 거기 안 서나!" 발리안은 유유히 비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완전히 그에게 당해버린 유한은 한참동안 캡슐 속에서 펄펄 뛰었다. "크아악! 내 다시는 그 새끼랑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린 유한은 이를 뿌드득 갈아 붙였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발리안이 이렇게 뒤통수를 후릴 줄은 몰랐다. "내가 이대로 가만있을 줄 알아? 잡아서 아주 작살을 내 주마!" 빼앗긴 수정을 되찾는 건 물론이다. 유한은 일단 동료들에게 귓속말올 보내기로 했다. 도망 친 발리안을 추적하라 이르기 위해서. -귓속말을 보낼 수 없습니다. 외부와 연락이 불가능합니다.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여기가 무슨 무의식의 방이냐?" 과거 청해도에서 데보라에게 잡혔을 때 그랬다. 그때 무의식의 방에 갇혀 귓속말도 쪽지도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기절해서 의식이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멀쩡하지 않은가. 유한은 다시 귓속말을 쳐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과 약간 다른 경고창이 떠올랐다. -이 연구소는 외부와의 통신이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안을 위한 강력한 결계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건 NPC만 적용되면 되지 왜 유저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건데?" 유저를 우롱해도 유분수지. 무슨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투덜거리던 유한은 일단 비밀 소장고에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놈의 마비독이 풀려야 음직이든 말든 하지.' 한시간 후, 유한의 몸에 걸려 있던 마비독이 풀렸다. 곧장 나가서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발리안이 무슨 수를 써 놓았는지, 비밀 소장고의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악! 진짜 돌아 버리겠네!" 펄펄 뛰던 유한은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침착하자.열 내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어.뒤져보면 비밀통로가 나올 거야.' 빠져나갈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남바린 영주성 지하에 있는 푸른 새벽 길드의 함정에 빠졌을 때도 그랬지 않는가. 유한은 비밀 소장고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정이 놓여 있던 진열장까지 일일이 확인했는데. 그럼에도 불구 하고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여기 갇힌 거야? 영영 갇혀 있어야 하는 거냐고?' 유한은 절망 어린 나머지 바닥을 북북 긁었다. 그러자 금박이 벗겨지며 뭔가 나타났다. 금박에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혹요석 석판이 깔려 있었다 '이게 뭐지?' 모습을 드러낸 혹요석 석판은 거울처럼 뭔가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획 드니 비밀 소장고의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는 지금까지 유한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다양한 도형과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유한은 진열장을 딛고 올라가 천장의 글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희열에 들떠 고함을 질렀다. "크하하핫! 이거다! 이게 진짜였어!!" 발리안이 가져간 수정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원하는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유한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끌과 망치를 꺼내 조심스레 천장의 황금을 한 꺼풀 뜯어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조각을 떼어 냈을 때, 안쪽에서 레코딩 크리스탈이 하나 툭 떨어졌다. 유한이 그것을 받아 든 순간,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서를 발굴했습니다. 녹색 수염 일족의 부족장 군나르에게 가져다주고 보상을 받으십시오. 메시지를 확인한 유한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밤이 늦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로그아웃 했다. 유한의 뒤통수를 갈기고 수정을 모두 가로챈 발리안은 서둘러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마침 들어온 방향과 반대편에 출구가 있었고, 그 출구 끝에는 지상으로 올라갈수 있는 승강기가 있었다. 밖으로 나온 발리안은 귓속말로 용안과 다른 용병 유저들을 유적에서 철수시켰다. 중간에 지그 일행 녀석들이 지그는 어떻게 되었냐며 귓속말로 귀찮게 물었지만, 대충 거짓으로 둘러 댔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아직 아르폐디아 대륙에만 있기에 서둘러 말론 회랑을 건넌 발리안은 가까운 도시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노스아크의 베르겐으로 단숨에 건너갔다. "호, 이게 바로 조상님들의 기술서란 말이지?" 노란 수염 일족의 족장은 발리안이 내민 수정들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발리안의 대답에 늙은 드워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 드워프에게 마나 영사기를 가져오게 했다. 마나 영사기는 고대에 기술이 사장되어 노스아크에서도 몇 대 남지 않은 귀한 유물이었지만, 선조들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면 박물관에 고이 모셔 놓은 것이라도 가져와야 했다. 잠시 후 마나 영사기가 대령되자 발리안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수정 하나를 골라 재생했다. 그러나 곧 인상을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영사기에서 낯 뜨거운 장면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자,잘못 고른 걸 겁니다." 얼굴을 붉힌 발리안은 재빨리 다른 수정을 재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하, 하, 하!" 당황한 발리안은 수정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재생시켜 보았으나 하나같이 야동이나 동물의 왕국같은 쓸데없는 자료들만 들어 있었다. 발리안은 몰랐지만. 그가 가져온 동영상은 세크투스의 개인 소장품이었다. 약간 변태 끼가 있었던 그는 비밀 소장고에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서를 숨기면서 자신이 모은 야동과 개인 수집 자료들을 레코딩 크리스털에 담아 보관했던 것이다. "이게 뭔가! 감히 날 놀리려는 건가!" 드워프 족장이 화를 내자 발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에게 밉보이면 제철소를 짓는데 피곤해진다. "뭐,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일주일 내로 진짜 기술서를 가져을 테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어허!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자네는 이제 끝이야!" 그렇게 외친 노란 수염 족장은 등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발리안의 눈앞에 암울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명성이 5.000 떨어졌습니다. -노란 수염 일족과의 친밀도가 최악이 되었습니다. 1달간 제철소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3연속으로 쏟아진 패널티에 발리안은 비명올 질렀다 "크아악! 이게 무슨!" 이 퀘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가 들인 돈과 노력이 얼마이던가. 그런데 실패, 그것도 대실패를 하고 말다니! '제길, 진열된 수정들이 아니라니. 그럼 진짜는 어디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진짜는 비밀 소장고 안에서도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는 모양. 어쩌면 안에 갇힌 지그가 그것을 손에 넣었올지 모른다. 유한이 비밀 소장고 탈출에 성공해 제철소를 짓는 모습을 떠올리자 발리안은 절로 두 주먹이 쥐어졌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되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중얼거린 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강철의 맹우 다음 날 늦잠을 잔 유한.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펜에게서 부재 중 통화가 몇 통 걸려와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자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걱정할텐데 전화해 줘야겠다.’ 유한은 오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뭐 하다가 이제야 전화를 거는 거야?" "미안. 휴대폰 확인하는 게 늦었어." "그보다 어젯밤은 어떻게 됐어?" 오펜의 물음에 유한은 비밀 소장고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발리안에게 당한 것과 비밀 소장고 자체가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 방이라는 것도. "그럼 기술서를 빼앗긴 거야?" "아니, 발리안이 가지고 간 것은 가짜야. 진짜는 내가 그 후에 발견했지. 학원 갔다 온 뒤에 접속할 테니까 그 때 자세히 알려 줄게" "알았어.” 오펜과 약속을 한 유한은 씻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을 마친 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한 그는 간신히 비밀 소장고에서 빠져나왔다. 뜯어낸 천장 위에는 마침 텅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콰직! 도서관 바닥을 부수고 올라온 유한은 비밀 소장고와 통하는 통로로 가보았다. 발리안은 유한이 나오지 못하도록 통로 문을 책장과 책을 쌓아 막아 놓았다. 안에서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발리안 이 자식, 걸리면 아주 파묻어 버릴겨.” 복수를 다짐한 유한은 밖으로 나왔다. 들어왔던 출입문으로 되돌아 가보니 동료들이 아직 청동 가디언들과 싸우고 있었다. “뭐야? 아직 여기서 싸우고 있었던 거야?" “어제 물러났다가 다시 왔는데 다짜고짜 공격하잖아" 청동 가디언들은 오펜 등을 아주 적으로 간주해 버린 듯했다. "일단 이곳을 나가자"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청동 가디언들에게 전격을 날렸다. 청동 가디언들이 주춤하는 사이, 유한과 동료들은 서둘러 연구소를 떠났다. 왔던 길로 되돌아간 그들은 혹시나 카세라스가 돌아오지 않았나 무척 걱정했다. 다행히도 카세라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리안 일당도 모두 떠났는지, 황금 기계 도시에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도 얼른 가죠?" "가기 전에 보물 좀 챙기면 안 될까?" 여전히 보물에 미련이 남았던지 송코가 그리 말했다. 발리안의 용병 유저들이 한 보따리씩 챙겨 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보물들이 황금 피라미드 주변에 널려 있었다. 한 자루만 챙겨도 근사한 곳에 멋진 별장올 짓고, 우아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맘대로 하세요. 그새 카세라스가 와도 난 모릅니다." "뭐 죽어도 보물만 챙길 수 있으면......." 진짜 죽는 것도 아니니 보물을 건지다 죽는다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몸은 죽어도 인벤토리에 들어 간 보물 중 일부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카세라스가 산 채로 잡아 놓고 뇌옥에 가둔다거나 아이템을 죄다 털고 몬스터 소굴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할겁니까?" 송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간혹 오크나 고블린 등 나름 지성이 있는 종족에게 포로로 잡히는 유저들이 있는데, 포로 생활은 그리 즐거운 것이 못 되었다. 포로로 잡히느니 자살올 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크나 고블린 정도만 해도 그런데, 드래곤은 어떻겠는가. 송코는 그것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떨칠 수 없었는지, 널린 보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유한은 송코의 발을 움직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했다. "으악! 저기 카세라스가 온다!" 유한이 기겁한 표정을 하고 달아났다. 블랙도 달렸고, 대강 눈치를 읽은 오펜도 열심히 뛰었다. 갑자기 동료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간이 작은 송코가 화들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기, 기다려! 같이 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송코는 허겁지겁 동료들을 쫓아갔다. 그렇게 유한의 기지 덕분에 일행은 카세라스가 돌아오기 전에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난 유한 일행은 며칠 후 치클라요에 도착했다. 검투 동맹 글로리아 길드가 자리 잡고 있던 도시 치클라요는 저번에 왔을 때와 영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사이 전쟁이라도 있었나?" 치클라요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도시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불탄 집들로 가득했다. 곳곳에 다친 NPC들의 울음과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넋이 나간 유저들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보세요,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오펜이 근처에 있던 상인 유저에게 물어보았다. 재난으로 자신의 점포를 잃은 유저는 한숨을 폭 내쉬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드래곤이 나타났었습니다." "드래곤요?" "붉은 드래곤이었는데 반쯤 썩다가 만 놈이었지요. 얼마나 흉폭한 놈인지, 보이는 건 모조리 다 박살 내 놓더군요." 범인은 카세라스였다.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났던 카세라스는 치클라요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떠난 것이다. '하여간 성질이 지랄 맞은 놈이라니까. 괜히 광룡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아르페디아에 있을 때도 그로지아 남부에 레어를 만들고, 예정도 없이 지나가는 유저들을 공격하거나 마을과 성을 불태우곤 했다, "이곳에는 드래곤을 잡을 만한 실력자가 없었나 보네." "연애질만 주로 하다 보니 실력을 못 쌓은 모양이죠." 유한 일행은 잿더미가 된 치클라요를 뒤로 하고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동쪽으로 갈수록 그들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툭하면 보이는 것이 잿더미가 된 마을이었고, 듣는 것은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가 습격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거 불안한데?" "그렇죠? 뭔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보여요." 마침내 그들은 말론 회랑 앞에 있는 도시 쿠마나에 도착했다. 쿠마나도 카세라스의 습격을 받았는지, 거리 절반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것은 마침 쿠마나에 레뮤다 대륙 최강의 길드인 '파라디수스'길드가 와 있었던 덕분이었다. 레뮤다 최강 유저인 ‘에스테반’ 이 이끄는 파라디수스 길드는 과거 레뮤다 남쪽에서 드래곤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때 패배했지만, 그 경험 덕분에 그들은 카세라스로부터 쿠마나의 절반은 지켜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파라디수스 길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아르페디아로 진출하겠다는 그들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단다. "파라디수스 길드가 카세라스를 죽였습니까?" 유한은 방금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뒷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드래곤은 난동올 부리다가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서쪽이 아니라 북쪽이요?" "예,뭐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레뮤다 대륙 북쪽에 아르페디아 대륙이 있다. 그 말인즉슨, 쿠바나까지 와서 깽판을 부린 카세라스가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에 행패를 부리던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간 것이다. '뭐, 큰일이야 있겠어?' 유한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르페디아 대륙에는 강한 랭커들과 길드가 많기 때문이다. 카세라스가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그레이드된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유저들도 과거보다 더 레벨이 올랐기에 대형 길드에선 충분히 카세라스룰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여차하면 바츠를 꺼내도 되고....' 손석진이 되돌려 준 바츠는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로 되돌아왔다. 만약 기회가 생기면 바츠로 다시 카세라스를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가 혹시 이걸 예상하고 되돌려 준 건가?' 카세라스의 재등장과 바츠의 복귀. 혹시 이 일이 손석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유한이었다. "드디어 카세라스가 움직였나?" 드림맥스의 부사장 정경욱은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업데이트 된 후 고이 잠자고 있던 카세라스를 중남미 유저들이 깨웠다. 그로 인해 레뮤다 대륙 북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도시와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NPC와 유저들이 죽었다. 하지만 카세라스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이 얼마나 날뛸지는 드림맥스도 모른다. 알고 있을 만한 인물은 딱 한 사람뿐. 정경욱은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르페디아의 창조주인 손석진에게로. "카세라스의 사망 조건이 뭔가?" "목을 자르거나 드래곤 하트를 파괴하면 죽습니다." 아무리 생명력이 질긴 언데드라고해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파괴되면 죽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도 마찬가지. "그럼 소멸 조건은?" 여기서 소멸이란 몬스터가 리젠되지 않는 조건을 뜻한다. 아예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 "유저들에게 3번 연속으로 잡히거나 레어에 숨겨 놓은 언데드 코어(Core)가 파괴당하면 소멸됩니다. 하지만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 잡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그레이드된 카세라스는 그 힘이 더욱 강해지고. 행동 패턴은 광룡 시절보다도 더욱 종잡을 수 없게끔 만들어졌다. 과거처럼 한 길드의 정예 유저들이 뭉치거나. 혼자 악을 쓰며 덤벼서는 이길 수 없었다. "설사 바츠라도 카세라스룰 쓰러트릴 수 없단 말인가?" "과거의 바츠라면 그렇습니다." 손석진은 과거라는 단서를 달았다. 현재의 바츠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물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승패는 직접 붙어봐야 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바츠를 되살려 준 이유가 뭔가?" 정경욱은 이미 벌써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다. 바츠가 재등장한 것은 드림맥스의 의사가 아니 었다. 손석진이 데이터베이스에 손을 대 사라진 바츠를 복구시켰던 것이다. 회사 몰래 행한 일이었기에 드림맥스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각종 게시판에 바츠 동영상이 오르고 유저들의 문의가 쇄도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손석진은 바츠 유저가 새로 키웠다는 공지를 올리면 된다고 했지만. 그게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당사자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준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드림맥스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실수가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고 해킹당한 유저를 복구시켜 준 적이 없었다. "대체 왜 되살려 준 건가? 카세라스랑 엮어서 뭔가 이벤트라도 꾸미려 했나?" "지난번 토론회 때 유한 군이 우릴 위해 한몫 해줬잖습니까. 그때 원한다면 바츠를 복구시켜 줄 수 있다고도 했었고요. 그땐 유한 군이 별로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바뀌더군요. 저번에 저한테 전화가 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손석진이 대충 얼버무렸지만, 정경욱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손석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경욱은 손석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혹시 자네가 바츠를 해킹했기 때문은 아니고?" 회사 간판을 내리게 만든다 어쩐다 하면서 온 이상한 전화. 그 전화를 건 사람은 계속 손석진을 찾았고, 손석진은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밤늦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라졌던 바츠가 다시 나타났다. 유저가 원해서 손석진이 복구했다지만, 이건 원가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경욱은 손석진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자신은 지시했을 뿐이고. 바츠를 해킹한 건 김정균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손석진은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정경욱도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영자였다. 회사의 이미지와 이익을 위해 서는 입을 다물고, 사건을 묻어버릴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바츠가 다시 나타난 것보다 다른 걸 신경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손석진은 슬찍 주제를 돌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정경욱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시궁쥐들이 우리 게임의 물을 버려 놓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경욱은 손석진이 제출한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예전에 게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유저들이 벌이고 있는 구린 행각이 낱낱이 정리되어 있었다. "생쥐 스프를 급식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벌이려는 모양 입니다." "생쥐 스프?" 정경욱은 손석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에서 뭔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서류에 적힌 게 사실이고. 진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면, 이건 정말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만으론 뭐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공개했다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오히려 그들이 결백하다면서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질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생각하면 명예 훼손 운운하며 악귀같이 달려들 테니까. "심증만 있어선 안 돼. 물증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 건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 같군.” "앞으로 밝혀낼 일이지요." 상대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상당히 치밀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온라인에서는 이렇다 할 증거를 캐내지 못했다. "진짜라면 대한민국이 들썩일 일이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회사나 게임도 영향을 받겠지요. 좋거나 아니면 나쁘거나.” 손석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경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선 게임이 항상 비난을 받는 처지였으니까. 이번이라고 그리 다를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말론 회랑을 통과한 유한은 노스아크로 갈 준비를 했다. 노스아크의 베르겐까지는 먼 거리이기에 처음에는 근처 도시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단숨에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접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수상해 보이는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쉐도우 워커 길드원이잖아.” “정말?" "황금 기계 도시에서 본 이름이 몇 개 있어.” 전교 1등답게 기억력이 좋은 오펜이 수상한 자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냈다. "쉐도우 워커라면 발리안의 용병들인데." "그런 자들이 왜 텔레포트 게이트에 있지?" "뭔가 꼼수를 쓰거나 훼방을 놓을 심산이겠지." 그동안 발리안이 한 짓이 있기에 무슨 의도로 어떤 짓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노스아크까지의 여정이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듯했다.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에서 노스아크까지 빨리 갈방법이 없을까?" 유한의 물음에 오팬이 대답했다. “기구를 타고 가면 되지만, 좀 위험한데......" 근래에 공중 몬스터가 늘어나고 습격도 잦아서 장거리 비행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공중전이라는 새로운 스릴감을 즐기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기구를 타고 가겠어" 유한은 기구 여행을 결정하고, 근처의 상점에서 휴대용 기구를 샀다. 블랙은 기구를 탈 수 없었기에 먼저 철공소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조심해라 후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일이다.” "충고 고마워, 블랙.” 블랙은 유한이 탄 기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더니 철공소로 돌아갔다. “아까 지그 님이 나에게서 휴대용 기구를 사갔습니다." 블랙이 말한 대로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유한에게 기구를 판 상인은 텔레포트 게이트 근처를 감시하고 있는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에게 달려와 이렇게 일러바쳤다. 발리안은 유한이 기구를 타고 노스아크까지 올 것도 생각했다. 그래서 말론 회랑 근방의 상인 유저들을 매수해서 지그가 휴대용 기구를 사거들랑 곧장 보고하도록 했다. "기구를 타고 온다? 그럼 이쪽에서도 준비를 해야겠군요.” 노스아크에서 쪽지로 소식을 받은 발리안은 서들러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 발리안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한은 기구를 타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공중 몬스터들이 중간 중간에 공격해 왔지만, 오펜의 마법탄이나 뇌제의 스킬로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 '공중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다고 들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걸?' 공중 몬스터들의 습격은 예전에 성지 로므나에 갈때보다도 드물었다. 딱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나타나곤 했다.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뭔데요?" 송코는 심상찮은 표정을 짓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기구를 사고 있을 때 다른 유저들에게서 들었는데, 우리가 오기 전에 붉은 드래곤이 남쪽에서 날아오는 걸 봤대." 역시 카세라스는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넘어온 것인가 "그런데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 사람들 말로는 드래곤이 나타난 뒤로 비행 몬스터의 습격이나 리젠이 많이 줄어들었다는데,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보통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뭔가 큰일이 생길 적에는 ‘징조'가 나타나곤 했다. 지진이 있기 전에는 새나 쥐들이 도망쳤고, 마왕 급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땐 신전의 신상이 피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도 그런 징조가 아닌지. 사악한 드래곤의 기운을 느끼고 비행 몬스터들이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지 모르는 것이다. "아르페디아에선 아직 카세라스의 습격이 없지 않아요?" "아직은 그렇지.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단 말이야." 이미 레뮤다 대륙 북부의 도시 몇 개를 쑥대밭으로 만든 카세라스라면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었다. "그냥 웨스턴이나 다른 대륙에 간 건 아닐까요?" "모르지...이 조용함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지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사이, 기구는 어느새 네메시스 산맥에 이르렀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한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왜 이 근처에는 기구들이 이렇게 많지?" 지금 네메시스 산맥의 하늘 위에는 기구들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마치 기구들로 진을 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 "저기요, 이 근방에서 뭔가 이벤트라도 합니까?" 유한은 근처에 있던 기구로 다가가 말을 건네 보았다. 기구 안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유저들은 유한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지그다! 대장장이 지그가 나타났다!" "서둘러 집결 쪽지를 보내!" "아냐, 신호탄을 쏘는 게 더 빠를 거야." 난리법석 끝에 신호탄을 쏘아 올린 유저들은 활과 화살을 들더니 유한 일행이 탄 기구를 공격했다. "으악!무슨짓이야?" 실드! 윈드 커터!" 오펜이 더블 캐스팅으로 두 개의 마법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날아온 화살들이 실드에 가로막히고,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궁수 유저들이 탄 기구의 기낭을 길게 찢어 버렸다. "크악!사람살려!" 상대방의 기구는 속절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갑자기 습격을 해 오다니, 대체 무엇 때문인가? 영문을 물라 어리둥절해 하던 유한은 주변의 기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전에 추락한 기구에서 쏜 신호탄 때문인 듯 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기구들의 중앙에는 왠만한 기구를 능가하는 대형 기구가 있었다. 비행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그 기구에는 V자의 름다운 문양이 찍혀 있었다 유한은 그 문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그 철공소의 숙적인 발리안 철공소의 문장이었다. "하하핫! 안녕하십니까, 지그 님."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발리안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전혀 반갑지 않은 유한이었다. "안녕 못해, 인간아. 또 뭔 수작을 벌이려는 거야?" "전 이번 제철소 퀘스트를 실패했습니다. 저만 퀘스트에 실패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지그 님도 다시 저와 같은 출발선에 서야지요." "아오! 이 사이코 자식아! 이딴 짓을 할 시간과 돈으로 좀 더 영양가있는 일을 해!" "저는 이게 충분히 영양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뻔뻔하게 대꾸한 발리안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형 기구와 주변의 기구에 타고 있던 발리안이 고용한 용병들이 활을 겨누고 마법 스킬올 캐스팅했다. "자, 이대로 저 아래 눈 덮인 산봉우리에 떨어져 동태가 되시겠습니까? 아님 순순히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저에게 넘기겠습니까?" "닥쳐, 동태가 되는 건 너희들일걸?" 유한이 되려 엄포를 놓자 발리안은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무엇올 믿고 이리 큰소리를 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지그 님의 명운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접니다." "이 바부팅아.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뇌제야,뇌제 지그!" 유한은 뇌제의 홀올 보란 듯이 꺼내 들었다. "니들이 공격하기 전에 벼락으로 죄다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 그런." 발리안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이곳이 땅이라면 피하거나 동료의 몸을 방패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운신이 폭이 자유롭지 못했다. 동영상에서 봤던 뇌제의 힘이라면, 자신의 기구 군단을 죄다 추락시키고도 남을 것. '제길! 그걸 생각했어야 히는데!' 발리안은 복수에 눈이 멀어 지그가 뇌제라는 사실을 깜빡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원망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하하하, 생각해 보니 제가 좀 심했던 것 같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이 자식아! 맞을 건 맞고 가야지!" 입장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발리안의 기구 군단은 유한의 기구를 피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대로 추락해서 눈 덮인 산봉우리에 떨어지면, 틀림없이 사망이다. 죽지 않더라도 눈이나 얼음에 파묻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일. "죄다 죽여주마!" "으아악!" 유한이 뇌제의 홀올 휘두르자 발리안과 그의 용병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벼락은커녕 정전기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발리안 패거리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유한은 무척 당황했다. '크악! 그러고 보니 오늘 뇌제로 한 번 변신했었구나!' 네메시스 산맥에 오기 전, 비행 몬스터 군단을 맞아 뇌제로 변신해서 쓸어버린 적이 있었다. 뇌제는 하루에 한 번밖에 변신하지 못한다. 발리안을 응징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상황은 이쪽이 불리해졌다. "험험, 다 죽여 버리려 했지만,불쌍해서 한 번은 봐준다." 유한은 불리한 티를 안 내려고 오히려 아량을 베푸는 척했다. 그러면서 오펜과 송코에게 얼른 기구를 움직여 도망치라고 손짓을 보냈다. "퀘스트에 실패한 거 불쌍해서 뵈주는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쫓아오면 그땐 정말 죽는다" 유한 일행이 탄 기구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지만, 유한은 판단을 잘못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배짱을 부렸으면, 발리안 쪽이 지레 겁먹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발을 뺌으로서. 이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후후후, 뭔지 모르지만 지금은 뇌제의 힘올 못 쓰는 모양이군요." 뇌제의 힘올 못 쓰는 지그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늘에서라면 더더욱. "쫓으십시오! 지그 님을 추락시키는 분께 십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오!” 발리안의 기구 군단이 유한이 탄 기구를 추격해 왔다. 점점 거리를 좁혀 온 그들은 유한 일행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마법탄을 쏘았다. 오펜이 실드 스킬로 막았지만, 그의 MP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까지나 방어하고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으으, 뭔가 수를 써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송코가 회의적으로 말했을 때, 유한은 그의 등 뒤에 있는 뾰족한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저건 블레이드 마운틴!" 산봉우리가 칼날처럼 뾰족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네메시스 산맥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이었고, 만만치 않은 고렙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다. 특히 강하고 성가신 녀석들이 정상 근처에 살았는데, 바츠 시절에 멋도 모르고 갔다가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 "기구를 저산으로 돌진시켜요!" "저기 뭔가 있어?" "가면 알아요!” 어차피 이판사판이었기에 송코는 유한이 시키는 대로 기구를 블레이드 마운틴 쪽으로 몰아갔다. 그들을 놓칠 생각이 없는 발리안의 기구 군단도 곧장 따라왔다. 그렇게 기구가 블레이드 마운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송코는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어? 저쪽은 왜 저렇게 까맣지?"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블레이드 마운틴도 정상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쪽만 새까맸다. 유한은 그 검은 사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펜, 저기 검은 쪽에 파이어볼 한 방 날려." "저기뭐가있는데?" "설명할 시간 없어.얼른!" 오펜은 유한이 시키는 대로 검은 사면에 파이어볼을 쏘았다. 쿵! 파이어 볼이 검은 사면 가운데 꽂히자, 그 검은 사면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사방으로 점점이 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쪽으로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저, 저건!" 오펜과 송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까맣게 날아오는 것은 바로 와이번. 크고 작은 와이번들이 날카로운 고성을 내지르며 기구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으악! 저게 뭐야?!" "와이번이다! 와이번이 떼거지로!" 그 검은 사면은 블레이드 마운틴에 있는 와이번들의 군락지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잠을 자던 수천 마리의 와이번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적들을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그들은 유한 일행이 탄 기구만이 아니라. 바로 뒤에 있는 발리안의 기구 군단까지 적으로 간주해 공격했다. "으아악!사람살려!" "추락한다-아!" 와이번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기구를 보이는 족족 찢어 버리고, 떨어지는 유저들을 깨물어 죽였다. 발리안이 선발한 용병 유저들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공중전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천 마리 와이번의 사나운 공격에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지그 너 너무 무모했어." 산봉우리에 착지한 유한 일행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와이번들이 공격해 왔을 때. 그들은 유한을 필두로 기구에서 뛰어내렸다. 그대로 있다간 와이번들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용감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오펜의 부유 마법. 하지만 오펜의 MP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추락하는 중에는 마법을 쓰기가 어려운 걸 생각하면 이판사판의 도박이었다. "발리안은 어떻게 됐을까?" 송코의 물음에 유한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은 뭐하러 걱정해요? 얼른 베르겐으로 가자고요. 여기서 미적거리면 위험해요.” 와이번 말고도 블레이드 마운틴엔 사나운 몬스터들이 많았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유한 일행의 머리 위로 찢어진 기구의 천조각이 눈처럼 휘날렸다. 그 중에는 발리안이 타고 있던 대형 기구의 천 조각도 있었다. 길게 찢어 발겨진 발리안 철공소의 문장은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다 망한 발리안의 최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지그 이 ㅅㅂㄹㅁ! 어디선가 들려온 메아리가 유한의 귀를 간질였다 블레이드 마운틴에서 발리안을 따돌린 유한은 베르겐에 입성해 녹색 수염 일족의 족장 군나르를 만났다. “오오! 정말 구해 온 모양이군." 군나르는 유한이 가져온 레코딩 크리스탈을 보고 감탄했다. 그는 당장 수하에게 마나 영사기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 다. 얼마 후 마나 영사기가 도착하자 그는 직접 수정을 끼워 넣고 내용을 살폈다. "오오! 이것이야말로 고대 선조님들이 갖고 있던 기술의 정화!” 레코딩 크리스탈 안에는 별별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순수한 금올 제련하는 법이라든가, 강철보다 더 튼튼한 섬유를 합성하는 법, 심지어 폭발력을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기계 장치의 설계도까지. "정말 고압네. 자네 덕분에 사라졌던 고대 드워프들의 문명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진심으로 고마웠던지 군나르는 유한의 손을 꼭 잡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유한은 그런 그의 모습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이 더 좋았다. 퀘스트의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 창은 이번 퀘스트로 얻은 보상들을 쭉 나열하고 있었다. [녹색 수염 일족의 족장 군나르의 의뢰]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명성이 8.000 올랐습니다. -녹색 수염 일족과 친밀도가 최고가 되었습니다. [강철의 맹우] 칭호를 받았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 같군. 앞으로 어려운 점이 있거나 뭔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오게. 전력을 다해 자네를 도와줄테니." 군나르는 그렇게 말하며 녹색 수실로 엮은 작은 해머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망치 훈장이라는 아이템은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망치 훈장] 설명 : 드워프 사회에 큰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지는 훈장. 이것을 지닌 자는 드워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으며 노스아크 어디든 둘러 볼 수 있다. “아, 그리고 제철소 설비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여기 설비 구입 허가증이네. 이것만 있으면 자네는 원하는 기자재를 뭐든 구입할 수 있네.” '앗싸! 드디어 됐다!’ 그렇게 퀘스트를 완료한 유한은 군나르에게 받은 설비 구입 허가증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펜과 송코는 볼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갔다. "구입하기 전에 직접 뵈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베르겐 북쪽에 있는 제철소로 향했다. 제철소는 여전했다. 신전이라 착각할 정도로 하얀 대리석 건물을 드워프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도. "멈춰라! 여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드워프 병사가 앞을 가로막자, 유한은 군나르가 내준 망치 훈장을 내보였다. "허허,자네는 특별한 존재로군.” 친근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드워프 병사들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유한은 안으로 들어갔다. 제철소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넓었다. 커다란 용광로에서 팔팔 끓는 쇳물이 흘러나오자 이를 평로에 넣어 강철을 뽑아냈다. 이렇게 뽑아낸 강철은 압연 공정을 거쳐 다양한 형태의 강재(鋼材)로 만들어 졌다. "오오, 역시 스케일이 달라, 스케일이!" 제철소 공정을 견학한 유한은 연방 감탄사를 발했다. 그도 나름 아르페디아에서 유명한 대장장이라 자부하고 있었지만, 드워프들의 기술과 규모엔 미치지 못했다. 이 제철소에서 하루에 만들어 내는 강재는 지그 철공소의 한달 생산물량과 맞먹을 정도였다. 거기다 필요에 따라 강재를 후판, 강관, 차륜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내 일감을 훨씬 줄여 주었다. "역시 아이언 마스터가 되려면 제철소가 있어야 해!” 견학으로 제철소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한 유한은 즉시 공업사를 운영하는 npc 구센도르프를 찾아갔다. "그래, 제철소 설비 구입 허가는 받았나?" "훗, 당연하죠." 유한은 허가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구센도르프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허, 자네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생각했지만, 정말 받아 낼 줄이야! 그래 무엇을 구입하겠나?" 그의 물음에 유한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우선 용광로와 평로, 압연기 등 제철소를 건립하는데 필요한 핵심 설비들과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반송대 설비들을 주세요.” "그 많은 걸 다 돌리려면 마법동력로도 필요한데 사겠나?” “필요하다면 당연히.” 마법 동력로는 일종의 발전기였다. 크고 무거운 제철소의 장비들을 움직이려면 인력만으로는 힘들기에, 마법 동력로는 필수적이었다. "전부 얼맙니까?" 유한이 구입할 물품들의 가격을 묻자 구센도르프는 손가락 두개를 폈다. "이백만골드요?" 철공소 설비를 구입하는 데 백만 골드가 들었으니 그 정도면 싼가격이었다. 그런데 구센도르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천만골드네.” "예?” 순간 유한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귀가 먹었나? 이천만골드라고.” '헉!그럴수가!’ 유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이거 바가지 아닙니까?!" "바가지는! 내 비록 인간들에게 기계와 공구를 팔고 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가격을 속인 적 없네. 내가 제시한 가격이 못미더우면 다른 데 가 봐.” 구센도르프가 삐진 듯 홱 돌아서자 유한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어허, 제가 언제 안 산다고 했습니까? 하하, 삽니다. 사요.” 드워프들이 괴짜이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유한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2천만골드를 내놓았다. '아놔! 제철소 두 번 지었다가는 거지 되겠네.’ 그나마 블랙 아이언 판매로 갑부가 되지 않았다면 설비 가격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건은 저번과 같이 준비되는 대로 택배로 보내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남달라 보여 이야기해 주는 건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쇼.” 유한은 구센도르프가 중요한 조언을 해주는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제철소 설비는 이렇게 사서 들여놔도 되지만, 직접 만들어도 되네. 경비가 줄어들기도 하지만 직접 만들면 기계 설비를 자신의 제철소 규모에 맞추고 조정할 수 있어. 그럼 효율이 높아져서 생산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지" "그렇습니까?" 하긴 저번에 대규모 업데이트가 되고 나서 토르가 말했던 것이 있었다. 제철소 전에 철공소를 짓는 것은 제철소에 필요한 기자재를 생산할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그런데 난 철공소를 블랙 아이언 생산에 전념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토르가 말한 대로 철공소를 기자재 생산의 용도로 운용하고 기술을 익혔으면, 제철소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2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아꼈을지도. '좀 어긋난 건가?' 그래도 제철소를 짓겠다는 목적은 달성했다.사실 철공소 건을 생각해도 그랬다. 유한은 칠공소 설비를 얻기 위해서 신의 광물을 구했지만 발리안은 돈으로 때워 버렸다. 그런 경우처럼 굳이 제철소를 짓기 위해 반드시 퀘스트를 해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유한의 뒤를 이어 제철소를 짓는 사람은 설비를 스스로 제작할지도. 그게 발리안이 될지, 다른 누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유한은 아르폐디아 최초의 제철소 건립자로 이름올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볼 때 자네는 아직 정밀 조립 제품을 생산하는 실력이 최고에 달하지 못한 것 같군. 그 실력올 최고까지 높여 봐. 그럼 이런저런 기자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내가 가르쳐주지." '정밀 조립 스킬을 1랭크까지 올리라 이건가?' 현재 유한의 정밀 조립 스킬 랭크는 2랭크였다. 1랭크까지 올리고 구센도르프를 찾아오면 엔지니어 칭호와 관련된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모양이다. 철공소나 제철소의 기계들을 만들 수 있는. 유한은 정밀 조립 스킬 1랭크를 찍고 다시 노스아크에 찾아오기로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가게. 토르의 가호가 있기를 빌지.” 구센도르프 공업사를 나온 유한은 철공소로 돌아가기 전 베르겐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빠, 최근 아르페디아 대륙의 시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자, 포션 사세요! 체력이 1 남은 사람도 벌떡 일으키는 정금당의 활력수입니다!” “상급 재봉사이신 앙드레 봉 님께서 만든 물개 가죽 옷 팝니다!” "지그 표 무구입니다! 아르페디아 명장인 지그 님이 손 수 만드신 무구! 단돈 오천 골드에 팝니다!” '뭐? 내 핸드메이드가 오천 골드라고?' 지그제 핸드메이드 무구는 경매로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고 가치도 상당하다. 그런 아이템이 단돈 오천 골드일 리는 없는 일. 유한은 당장 그 가격을 제시한 노점올 찾아가 보았다.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던 상인 유저는 유한의 머리 위에 적힌 이름 두 글자를 보고 바위처럼 굳어 버렸다. "뭐야?공장제잖아.” 확인해 보니 지그 표가 맞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공소에서 일꾼들이 생산한 제품이지, 유한의 핸드메이드는 아니었다. "과장 광고는 자제하세요." "네. 넵.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유한은 혀를 끌끌 차며 발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시장올 돌아본 그는 게임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 다는 것올 느낄 수 있었다. 아이템의 성능이나 질도 우수해졌고, 이전에는 보지 못한 아이템들도 등장했다. 화약이나 내단 같은, 해외에서 생산되는 희귀 아이템들이 판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한의 눈에 확 띈 것은 금속 원자재와 제품들의 거래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예전보다 금속의 수요가 늘었는지, 베르겐 시장의 경매장에는 철광석과 여러가지 비철 금속의 판매량이 늘어났고. 가격도 더 을랐다. "아니. 최가장 놈들은 왜 요새 철이란 철은 싹쓸이 하는 거야?" "못 들었냐? 그놈들 요새 철갑선을 개발 중이라잖아. " "나도 들었는데, 어디서 거북선 설계도를 입수했다고 하더라고." 조선 분야에서 금속 자재의 이용이 늘어난 듯했다. 최가장 길드처럼 철갑선까진 아니더라도 배 밑에 불이기 위해 구리판과 구리 리벳을 대량 구입하는 길드도 있단다 예전에 쇠로 된 조선 용품은 닻이나 쇠사슬, 대못이 고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무척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넌 목수가 뭔 쇠가 그리 많이 필요한 건데?" 대장장이 유저의 물음에 목수 유저가 대답했다. "철골을 세워서 콘크리트로 성벽을 만들 거다.” "풉! 판타지 게임에 공구리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짜샤.” "내가 최근에 새로운 건축법올 고대 유적에서 발견했거든. 그리고 시멘트나 콘크리트는 고대 이집트랑 로마에서 이미 만들어 시용했다고.” 건축이나 토목에서도 쇠의 사용이 늘어날 모양. 대장장이와 으르렁대고 있는 목수는 앞으로 철을 이용 한 새로운 건축법을 아르페디아에 선보일 모양이다. 아마 이전보다 훨씬 튼튼한 성과 요새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 다. '그렇게 되면 공성용 무기들도 훨씬 발전하겠군.’ 새롭게 강화된 무기들은 목재나 석재보다 철을 이용하 는 경우가 많을 테니 철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철의 가치가 오르는 만큼 그와 관련된 산업들은 더욱 각광을 받게 되고 그만큼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벌써부터 그런 힘을 얻으려는 유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 대화를 나누는 대장장이들만 해도 그렇다. "축하합니다, 맥스 님. 이번에 마야 님이랑 철공소를 지으신다면서요?" "예정보다 좀 늦었지만,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론 님은 어쩌실 겁니까?" "전 가능하다면 찬드라 대륙에 가서 철공소를 지어 볼 생각입니다. 그 대륙이 그런 산업은 아직 뒤쳐져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철공소를 만들어 찬드라의 철 시장을 장악할 겁니다,그리고....” 모두들 꿈꾸는 바가 있고, 노리는 목표가 있었다. 유한은 문득 예전에 토르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발전할 아르페디아는 더 많은 자원과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지그 너같은 대장장이들의 활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지.” 토르, 아니 드림맥스에선 아마 이런 것을 생각하고 대규모 업데이트를 시행했는지 모른다. 그전에 개발자인 손석진이 의도한 바도 있을 것이다. 대장장이든 뭐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그는 분명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 유한은 토르가 해 줬던 말을 되씹으며 앞으로 나갔다. 달라지고 있는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자신은 제철소라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최고가 되기 위한 시작이었다. “해 보지. 이 손으로 철을 지배해 보겠어.” 그리고 아이언 마스터가 되어 세상을 지배해 보이리라. 최종 목표를 굳힌 유한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바츠,폭풍이 되다 아이언 마스터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 날. 학원 강의를 마친 유한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게임 속 학원....이라고 치면 되려나?" 요새 아르페디아 온라인 내에는 학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먼저 만들어진 학원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생긴 현상이다. 게임 속의 학원들 중에는 현실의 교육 재단이나 학원에서 만든 것도 있지만, 오직 게임 내에만 존재하는 학원도 있었다. 유한은 그중에 실력 있고. 수강료가 저렴한 곳올 찾았다, 그러나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곳은 수강료가 비쌌고 수강료가 싼 곳은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괜찮은 곳을 찾아내야 채린이랑 같이 다닐 텐데......." 유한은 채린이 학림고가 세운 학림아카데미에 계속 다니게 할 생각이 없었다. 잘 가르치든 어떻든 그런 악의 복마전에서 얼른 그녀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 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괜찮을 것 같은데." 유한은 여러 학원들 중에서 벨로니 아카데미라는 곳이 제일 나아보였다. 명문으로 소문난 효명 학원이 운영하는 벨로니 아카데미는 현실에서 경력이 탄탄한 강사들에 정년퇴직한 학교 선생님들이 강의를 맡고 있었다. 수강료도 비교적 저렴했고 학원 건물도 멋졌다. 거기다 학원 내에는 '지식의 숲’ 과 '지하의 마성', '미궁 도서관' 이라는 3개의 던전이 있어 공부도 하고 게임도 즐길 수 있었다. "거기다 교복도 괜찮네." 남자 교복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 교복이 예쁘고 세련되어 보였다. 채린에게 정말 잘 어울릴 듯. '뭐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유한은 벨로니 아카데미 홈페이지 게시판을 클릭했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겉은 번지르르한 학원이라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물 흐리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다든지, 강사가 강의는 안 하고 학생들과 던전에 놀러 다닌다든지. 다행히 벨로니 아카데미에는 그런 문제는 없는 듯 했다. 소소한 불만이나 바람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 수준. "어라, 이거?" 글 몇 개를 살펴보는 사이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올라 왔다. 벨로니 아카데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었는데, 유한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라프레이스 : 님들아, 클났음. 카세라스떳어요 ㅠㅠ -시즈 : 악! 밟혀 죽었다능! -윤베이더 : 카세라스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글됐습니다. "카세라스가 다시 나타난 건가?" 레뮤다 대륙 북부를 초토화시키고 사라졌던 카세라스가 마침내 아르페디아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한은 서둘러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로 갔다, 아무래도 정보를 얻는 데는 그곳이 더 빠르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드림맥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홈페이지 접속 시 ‘돌아온 카세라스’ 라는 오프닝 무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홈페이지의 스킨이나 이미지도 모두 카세라스와 관련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드림맥스가 이렇게 준비해 둔 것과 달리, 대다수 유저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카세라스에 당한 유저들의 하소연으로 가득했다. -소년시대 : 카세라스 지금 아바렌 남서쪽 호텐 영지에 떳습니다! 저렙 분들 얼른 피하삼. -알스터 : 쌍칼준규님 덤비셨다 32초 만에 죽으셨음. -폭풍의길포드 : 으으! 하필 다른 대륙에 있을 때 저런 왕거니가! -클레인 : 제발 부탁이니 우리 영지론 오지 마라. -발리안 : 이 기회에 지그 철공소나 박살 났으면....... "이런, 왜 하필 아바란 왕국이야?" 글을 읽던 유한이 침음을 삼켰다. 호텐 영지와 철공소가 위치한 케이트 산맥이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언데드라 하나 그래도 드래곤이다. 먼 거리를 날아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고, 맘만 먹으면 텔레포트 마법으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버스에서 내린 유한은 총알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캡슐에 들어간 유한은 곧장 지그로 접속했다. <지그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 시길 바랍니다.> 짐마차를 타고 철공소에 오니 송코가 그를 반겼다. "어서 와, 보상은 잘 완수했고?" "며칠 뒤면 제철소 설비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왠 사람들이 이렇게 많죠?" 지그 철공소는 지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카세라스가 나타나 깽판을 부리면서 무구를 구입하려는 유저가 늘었기 때문이야. 덕분에 지그 표 핸드메이드 무구들이 평소의 세 배가 넘는 가격에 팔려 나가고 있어" "후후후, 그거 괜찮군요. 그런데 리지스 재는 왜 저런데요?" 유한은 반쯤 넋이 나간 리지스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전쟁이든 재앙이든, 무구가 잘 팔리고 돈만 잘 벌면 된다던 그녀가 아니던가. 카세라스에게 뽀뽀라도 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좌절하고 있었다. "호텐 영지에 있던 리지스 무기점이 카세라스에게 박살났대. 개점한 지 일주일도 안 되는 가게였는데....." 송코의 설명에 유한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 같은 가게를 잃었으니 좌절할 만도 했다. 아니, 좌절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리지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카악! 카세라스 이 썩어 빠진 도마뱀 시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말로는 카세라스를 천 갈래 만 갈래 도륙할 듯한 리지스였다. 유한은 방방 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송코와 갈리 등 철공소의 주요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채린이는 학원 때문에 못 온다고 했다. “이렇게 모두를 불러 모은 건 카세라스 때문입니다. 카세라스로부터 철공소를 보호할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한의 말에 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자야. 카세라스가 철공소에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 "스승님, 그때 가서 준비하면 늦습니다. 게다가 인근에 제철소까지 짓고 있잖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궁극의 결전 병기인 메카 드래곤을 제작....."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갈리의 의견은 무참하게 묵살되었다. 다음에 의견을 말한 것은 알세인이었다.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철공소를 숲으로 위장하는 건 어떻습니까? 위에서 보면 잘 알아보지 못할 텐데요." "그거 괜찮군요. 또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 갈리의 옆에 있던 비탈리가 일어나 말했다. "지난번처럼 지하동굴에 중요 설비를 옮겨 놓는 건 어떤가?" "고려해 보겠습니다. 또 다른 의견 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알세인과 비탈리의 의견이 가장 나아보였다. 일꾼들은 작업을 멈추고 철공소 주변에 나무를 심고, 건물을 초록색으로 새로 칠했다. 그리고 철공소의 중요 설비들을 동굴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철공소의 가동은 중단되었고 유저들을 돌려보내야했다. 뒤늦게 접속한 엔스는 유한의 이런 소심한 방식에 불만을 품었는지 곧장 따지고 들었다. "궁상맞게 뭐 하는 짓이야?" "궁상맞아도 좋으니까 이곳이 무사했으면 좋겠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싶었다. 엔스도 유한의 그런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예전에 다짜고짜 칼을 날려 대던 바츠와는 다른 녀석이니까. "까짓 것, 때려잡자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야!" "괜찮은 방법이군. 그런데 언제 어디에 나타날 줄 알고?" 상대는 광룡이다. 어디에 나타난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그거야.... 어쨌거나 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으면 웅크리지 말고 앞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 무대뽀이긴 해도 유한은 엔스의 그런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 과거 바츠 시절의 그도 그랬지 않은가. 일단 중요 설비를 어느 정도 숨겼으니, 엔스의 말대로 공격에 나서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아까운 캐릭터 묵혀 두지 말고 전설을 다시 재현해 보라고. 그럼 굉장히 멋있을 거야." 엔스의 말에 유한은 피식 웃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해낼 수 있을 지 의문스러웠다. 그때 어떻게 홀로 싸워 이겼는지 신기할 정도. "알겠지? 네가 못하면 내가 할 거야. 난 이만 간다." 대화를 끝낸 엔스는 철공소를 떠났다. 그는 사람들 앞 에서 카세라스의 목을 베어 오겠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갔다. 그렇게 엔스가 떠나고 나서 유한은 블랙을 찾아갔다. 여러 블랙 아이언들과 자재를 옮기는 것을 돕고 있던 블랙은 유한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철공소를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아" “광룡인지 뭔지 때문이냐?" 유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뇌제의 홀올 꺼내 블랙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여길 지켜 줬으면 좋겠어. 원조 뇌제님에게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이걸 나에게 넘기면 넌 어떻게 싸우려고?" 블랙도 유한이 나름 기지가 있고, 전투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뇌제의 힘 없이 카세라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다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진지한 유한의 눈빛에 블랙은 더 이상 걱정의 말은 하지 않았다. "반드시 돌아와라. 내가 다시 너에게 뇌제의 홀을 돌려줄 수 있도록.” "알았어. 반드시 돌아올게.” 블랙과 대화를 마친 유한은 남은 이들에게 뒷일을 부탁 하고 철공소를 떠났다. 그는 뇌제의 홀을 두고 갔지만, 대신 오래전에 시용하던 무기를 다시 꺼내 갈고 닦았다. 그것은 바로 바츠의 애병이었던 플레임 소드였다. 아바란 왕국의 수도 벨파스. 지방 영주들의 내전과 동떨어져 고요함을 유지하던 이 도시는 최근 여기저기서 모여든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유저들이 모여든 이유는 카세라스 때문이었다. 어제 카세라스는 벨파스 근방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그래서 유저들은 오늘 녀석이 벨파스를 노리고 나타날 것이라 판단하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유저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위험을 각오하고 구경 온 저랩 유저들도 있었고, 카세라스를 물리쳐 위명을 얻으려는 랭커들이나 거대 길드의 정예 부대도 있었다. 거기다 외국 유저들도 찾아왔다. 그들도 관광 혹은 전투를 위해 먼 걸음올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유저들에게 단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였다. “저거봐! 바츠다.진짜 바츠야!”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캐릭터를 다시 키웠다더니." "옛날보다 훨씬 강하다던데?" 유저들은 다시 등장한 바츠를 보며 연방 쑥덕였다. 바츠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위압감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울하고 사나운 눈빛 대신 맑고 강한 눈동자가 투구 안쪽에서 번뜩였다. "저것 봐. 쌍검이다. 허리에 검을 두 자루나 찼는데?" "둘 다 플레임 소드다. 저걸 대체 어디서 구했담?" 바츠의 허리에는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과거 화염의 신전에서 얻은 거고 다른 하나는 손석진이 만들어 준 것이다. 바츠는 쑥덕이며 따라오는 유저들을 획 돌아보았다. 움찔 놀란 유저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봤어? 방금 웃은 것 같은데.” "웃었다고? 바츠가?" "그보다, 우릴 그냥 내버려 두고 갔어. 예전 같으면 아예 무시하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텐데 말이야." 과연 예전의 바츠가 맞는지. 맞다면 정말 과거의 무위를 다시 보여줄 수 있을까? 카세라스를 쓰러트려 줄 것인가? 유저들은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하여간에 엄청 유명해졌다니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온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츠가 예전에도 유명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카세라스의 등장과 절묘하게 맞물려 유저들의 관심을 엄청 끌게 만들었다. “이쯤이라고 들었는데...." 유한이 벨파스에 온 것은 벨파스가 카세라스의 공격 예정지로 추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바츠 때 알던 NPC가 이곳으로 옮겨 갔다는 소문올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있군.” 골목 한편에 때 묻은 희색의 로브를 입은 노인이 있었다. 수염을 발끝까지 늘어트린 노인은 NPC 아이들을 모아 놓고 뭔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그는 다가온 유한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넌.....” "안녕하십니까, 하그레스 님.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현자 하그레스. 그는 과거 유한, 아니 바츠와 안면이 있던 NPC였다. 바츠 시절에 유저들과 거리를 멀리 했지만 NPC들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 중에서 하그레스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뭐 친하다는 것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수준에 불과 했지만. 하그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정말 바츠 너로구나.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되살아났더라는 소문은 없었습니까?” "대마왕이 되살렸더라는 헛소문은 있더군.” "그거 헛소문 아닙니다.” 유한의 대꾸에 하그레스의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졌다. “뭐? 정말 대마왕이 널 살렸어?" 손석진을 대마왕 급이라 생각하고 있는 유한은 하그레스의 말을 틀리지 않다고 여겼다. 물론 뒷사정을 모르는 하그레스는 당황할 따름이지만. "대마왕이 살린 것치고 눈빛이 너무 맑은걸? 너 정말 옛날의 백정 같은 놈이 맞는 게냐?" “예전의 바츠 맞습니다. 하그레스 님도 예전의 하그레스 님이 맞으시지요?" "그래, 나는 나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하그레스의 말에 만족한 유한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제가 왜 하그레스 님을 찾아왔는지 아시겠군요.” "카세라스 때문이냐?" 하그레스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다음번에 언제 어디를 노릴지 알고 싶습니다.” 엔스에게는 카세라스가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르페디아 대륙을 떠도는 현자 하그레스는 아는 것이 많았다. 점성술에도 능숙해서 미래에 대한 예언도 잘했다. 벨파스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벨파스가 맞다면 하그레스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 변덕스런 놈이 다음에 노릴 곳이라" 하그레스는 큼지막한 수정을 꺼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수정에서 환한 빛이 떠오르며 천체와 별자리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재앙의 별이 아바란 동북에 있구나.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때, 고대의 욕망과 비탄이 묻힌 땅이 파멸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야.” 예언이라고 정확히 집어 주지는 않는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늘어놓을뿐, 해석은 유저의 몫이었다. 다행히 별로 어렵지 않았다. 특히 유한은 고대의 욕망과 비탄이 묻힌 땅이라 할 만한 유력한 곳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고맙습니다, 하그레스 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냐, 다음에 올 땐 늙은이가 마실 술이라도 챙겨서 오너라" 남바린 영지. 케이트 산맥 아래에 자리한 이 영지는 소울리버 길드의 관리하에 있었다. 주변과 별다른 마찰 없이 영지를 운영해 온 소울리버 길드는 최근 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 근심은 아바란에 터를 두고 있는 다른 길드들과 같은 것이 었다. 바로 카세라스의 부활. 언데드 드래곤이 되어 돌아온 이놈은 하필이면 아바란 왕국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놈에게 쑥대밭이 된 도시와 영지가 무려 7개. 카세라스가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 몰라 길드원들의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우리 길드의 힘으로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안 오기를 빌어야지.” "그래도 길드장이 데려온 아크 위저드 아스탄 님 정도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지금까지 숱한 랭커들이 달려들었지만 줄줄이 깨진 것을 생각해 보면...” 성벽에 경계를 선 길드원들은 요즘 화제가 된 카세라스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왔다. 태양은 어두운 하늘을 붉게 태우며 솟구쳐 올랐다. "게임 속의 풍경이라지만, 참 장관이란 말이야.” "그러게. 드림맥스가 참 재주는 좋아.” 그렇게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이들의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두들겨 댔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날아온다!” 영주성 망루에 올라가 있던 NPC 병사가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전신에 시커먼 기운이 일렁이는 거대한 붉은 드래곤이 무섭게 날아오고 있었다. "카세라스다! 카세라스가 나타났다!” "전원 대공 전투 준비!” 소울리버 길드원들은 성벽 위에 올려 둔 캐터필터를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에 겨누었다. 사정거리 안으로 카세라스가 들어오자, 캐터필터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통! 퉁퉁! 육중한 통나무 화살들이 카세라스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러나 카세라스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통나무 화살들을 가볍게 피해 버리곤, 거대한 마법탄을 날렸다. 꽝! 꽈광! 검은 해골 모양의 음침한 마법탄은 서쪽 성벽을 뻥 뚫어 버리고, 남은 힘으로 성안의 가옥들을 부숴 버렸다. "크크크, 모조리 부숴 주마.” 유저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본 카세라스는 곧바로 성 안으로 난입해 마구 짓밟고 부수었다. 소울리버 길드원들이 악을 쓰며 덤벼들었지만, 그들은 카세라스가 뿜은 산성 브레스에 맞고 사망 판정을 받았다. 피식. 유저들을 비웃던 카세라스의 머리 위로 수백 개의 얼음 창들이 쏟아져 내렸다. 놀란 카세라스는 황급히 실드를 전개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감히 어떤 놈이?" 카세라스는 방금 마법을 날린 자를 찾았다. 동쪽 망루에서 강력한 마력을 감지한 카세라스는 망루 위에 서 있는 아크 위저드 아스탄을 발견했다. "흥! 제법이다만, 이것은 어떠냐?" 카세라스가 붉은 눈을 번득였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하늘에서 검은 꼬리를 달고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서, 설마 미티어 스트라이크(Meteo Strike)?" "아냐! 저건 흑마법인 다크 스타(Dark Star)야!" "으아악! 모두 피해라!” 최강의 혹마법이라 일컬어지는 다크 스타. 마왕 급의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으로 미티어 스트라이크와 효과는 비슷했다. '카세라스가 강해졌구나!' 과거 카세라스는 사라지기 전 유저들에게 몇 번 잡혔다 그래서 그의 능력이 대부분 알려졌는데 이런 강력한 마법을 시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데드 드래곤으로 재탄생하며 엄청 강해진 듯. “크윽! 스톰 오브 데저트!” 카세라스의 광대역 마법에 대항해, 아스탄도 광대역 마법을 전개했다. 트리플 캐스팅에 힘입어 나타난 세 개의 모래 폭풍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다크 스타와 충돌했다. 강력한 모래 폭풍과 충돌한 암혹의 유성은 마찰열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양처럼 불타오르던 암혹의 유성은 어느 순간 하얀 재를 날리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와아,다크 스타가 소멸했다!” "언데드 드래곤의 마법을 막다니, 역시 아크 위저드!”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세라스가 아스탄이 있는 망루로 해골 마법탄올 날렸기 때문이다. 한두 번은 실드 마법을 펼쳐 막아 냈지만, 연속된 광대역 마법의 사용으로 MP가 바닥까지 떨어진 아스란은 결국 방어를 포기하고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그에게 카세라스가 다가왔다. "버러지는 꾹 눌러 죽여야 적격이지.” 작은 언덕만한 카세라스가 앞발을 번쩍 들었다, 아스탄은 급히 엘릭서를 마셔 소진된 MP를 채우려 했지만, 카세라스의 발길질이 조금 더 빨랐다. 위기일발의 순간! 사망을 알리는 음성 대신 카세라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악!” 고개를 든 아스탄은 카세라스의 앞발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검을 보았다. 붉은빛이 일렁이는 그 검은 화염의 성검이라 일컬어지는 플레임 소드였다. "크아아!어떤 놈이냐!” 울부짖는 카세라스에게로 달려드는 이가 있었다. 어찌나 빠르게 돌진하는지, 붉은 잔영만 보일 뿐이었다. 최고 수준의 대쉬 스킬을 보여 준 그는 카세라스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허어억!"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한 드래곤 스케일과 강철보다 질긴 가죽이 검의 일격을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상쇄하진 못했다. 강렬한 충격은 카세라스의 드래곤 하트를 뒤흔들었고, 놀란 카세라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쳇, 대쉬 정도로는 안 되나?" "네놈은 바츠!” 카세라스는 자신을 공격한 전사를 보고 놀랐다. 그는 예전에 자신과 싸워 이긴 상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드림맥스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패배를 안겨 준 이를 상대로 더욱 분노하고 분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버러지 같은 놈! 또다시 내 앞길을 방해하려 드느냐?” 분노한 카세라스의 주변으로 어둠의 창이 무수히 생성되었다. 유한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어둠의 창을 피해 물러섰다. 물론 중간에 아스탄의 손을 낚아채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츠잖아. 바츠가 나를 구해줘?' 독불장군 바츠. 남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을 돕지도 않는다. 아스탄이 알고 있는 바츠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런 바츠가 자신을 구해주었다. 아스탄을 안전한 곳에 던져 놓은 유한은 다시 카세라스에게 달려들었다. 무섭게 돌진해 오는 유한의 모습에 놀랐던지, 카세라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플라잉 소드(Flying Sword)!" 유한이 공중으로 검을 날리자 플레임 소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누비며 카세라스를 공격했다. "이, 이런!” 유한의 손짓에 따라 검은 공중올 날며 카세라스를 찌르 기도 하고 베기도 했다. 집요하게 눈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 카세라스는 반격을 펼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와, 플라잉 소드를 저렇게 자유롭게 구사하다니!” "저 신들린 컨트를! 역시 바츠로구나.”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유저들은 연방 탄성을 아끼지 않 았다. 보통은 드래곤의 엄청난 덩치와 위압감에 짓눌려 제 플 래이를 하지 못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자연 공격 의 세밀함은 떨어지고 성공률도 낮아진다. 그러나 바츠는 카세라스룰 상대로 전혀 주눅이 들지 않 았다• 약점올 끈질기게 공략하며, 강한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크아아! 이 성가신 놈이!” 검이 살짝 빗나간 틈을 타서 카세라스는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다. 레벨이 낮은 유저들은 스턴에 걸리는 동시에 Hp가 떨어졌고. 고레벨 유저들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유한도 영향을 받았던지 플라잉 소드의 컨트롤이 흐트러졌다. 카세라스는 유한에게 해골 마법탄을 날렸다. 평! 몸을 숙이고 있던 유한은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마법탄이 터지며 생긴 반동을 이용, 하늘에 떠 있는 카세라스에게로 날아갔다. 카세라스에게 날아간 유한은 카세라스의 앞발에 박혀 있던 플레임 소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공격스킬을 시전했다. "브랜디쉬 (Brandish)!” 유한의 몸이 빙글 돌았다. 앞발에 박혀 있던 플레임 소드도 그에 이끌려 회전하며 카세라스의 앞발을 싹둑 잘라 냈다. "흐억, 이놈이!” 카세라스의 몸을 박차고 뛰어오른 유한은 플라잉 소드 스킬로 던졌던 검을 회수하여 지상으로 안착했다. '차, 차원이 달라!' ‘상위 랭커도 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는 못할 거야!’ 더 이상 내지를 탄성도 없었던 유저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를 든 바츠는 이전보다 2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왜 그래, 카세라스. 그 정도에 빌빌델 네가 아닐 텐데.” "이놈이!” 유한은 카세라스에게 맹공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도발 스킬까지 걸었다. 분노하는 카세라스의 몸에서 검붉은 빛의 진득한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전초전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분노한 카세라스가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공기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파에 카세라스 주변에 있던 것들이 휘날려 갔다. 유한은 그 충격파를 억지로 견디려 하지 않았다. 갈대는 거센 태풍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는다. 유한은 충격파에 몸올 맡기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속절없이 밀려나지는 않았다. 적당히 버티면서 충격파를 흘려냈다. "버러지 주제에 날 우롱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카세라스는 듬성듬성 빠진 비늘을 곤두세웠다. 곳곳이 일어난 비늘 끝이 칼날처럼 번득였다. 실제로 칼날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 상태로 돌진하면 무엇이든 갈아 버릴 수 있었으니까. 카세라스는 그렇게 비늘올 세우고 유한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흥! 썩은 고깃덩이 주제에!” 거대한 괴물이 달려들면 물러설 만도 하지만, 유한은 오히려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저렇게 비늘을 날카롭게 세웠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어설프게 피하려 하다간 오히려 믹서에 갈린 고기처럼 될 뿐. 반드시 정면에서 상대해야 한다. 바츠에게는 정면에서 상대할 만한 강력한 스킬도 있으니까. "블레이즈 블레이드!” 바츠 최강의 공격 스킬. 산도 잘라버릴 초열의 불꽃이 칼 끝에서 터져 나왔다. 카세라스가 칼날처럼 세운 비늘도 이 강력한 초열의 검기 앞에선 짚단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건 예전에 카세라스의 숨통을 끊었던 스킬. 정면으로 달려드는 놈에게 이 일격을 정확히 꽂을 수만 있다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웃었어?' 스킬을 발동하던 유한은 돌진해 오는 카세라스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장 스킬을 취소했다. 그 순간, 눈앞에서 카세라스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블링크 (Blink)!’ 워프나 텔레포트와 달리 단거리를 순간 이동하는 마법이다. 보통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용도로 잘 시용되는데, 고수일수록 남발하지 않는 마법 스킬이었다. 자주 쓰다 보면 상대에 간파당하니까. "죽어라, 버러지!” 카세라스는 커다란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순간 강풍이 일었다. 유한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재빠른 대처로 충격을 절반 이상 홀려 내긴 했지만, 그래도 hp가 1,000이 넘게 떨어졌다. 하지만 이만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스턴 상태가 되었다면 곧바로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 ‘휴, 큰일 날 뻔했네.’ 조금만 실수해도 죽는다. 왜냐하면. '잠깐, 이거 나 혼자만 싸우고 있잖아.’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남바린 영지에 있는 유저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싸우려고 나서는 유저가 있으면 말릴 정도였다. 카세라스가 너무 강하고 무서워서가 아니다. 바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츠는 다른 누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크 위저드인 아스란도 지켜보기만 하고 거들지는 않았다. "운이 좋았군. 그러나 거기까지다, 버러지!” 유한이 잠시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카세라스가 마법을 펼쳤다. 그의 몸 주위에서 어둠의 마법진이 전개되더니 메시지 창이 떴다. <월드 오브 인폐르노(World Of Inferno) 마법이 발동되었습니다. 서둘러 영향권 밖으로 피하십시오> '뭐야? 이런 건 예전에 쓰지 않았잖아!’ 아무래도 언데드 드래곤이 되면서 새로 익힌 모양. 땅이 뒤흔들린다 싶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지표가 갈라지고 검은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휘청이는 대지 위에선 제대로 몸올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중에 수백 개의 검은 불꽃올 생성시킨 카세라스는 마치 융단 폭격이라도 하듯이 쏘아 댔다. 유한은 무너지는 땅 위를 달리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불꽃들을 피해냈다. 그런데 카세라스는 이 정도도 모자라다 여겼던지, 또 다른 마법을 발동시켰다. '헉! 이건 그라비티 디스토션(Gravity Distotion)!’ 필드에 강력한 중력장을 가동해 상대를 찌그러트리는 마법 스킬이다. 갑자기 온몸을 옭아매는 강력한 중력장에 유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죽어라!” 멈춰선 유한에게로 검은 불꽃들이 쏟아져 내렸다. 검은 불꽃들이 떨어질 때마다 hp가 쭉쭉 닳았다. 위험과 상태 이상을 알리는 안내창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10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갑옷의 내구도가 떨어집니다. -벼락의 투구의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벼락의 투구가 부서졌습니다 '여기서 끝장인가?' 아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바츠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카드가 한 장 남아 있다. 그 카드를 잘만 이용한다면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버서커(Berserker) 스킬!” 검은 불꽃이 느슨하게 쏟아지는 틈을 타서 유한은 버서커 스킬을 가동했다. 5분간 데미지 딜레이가 사라지고, HP가 떨어진 만큼 공격 속도와 공격력, 그리고 마나 회복속도가 상승하는 스킬. 버서커 스킬을 사용하자 중력장에 묶여 있던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유한은 양손에 든 플레임 소드를 휘둘러 날아오는 검은 불꽃들을 베어 버리곤, 초고속의 스킬 대쉬를 써 카세라스에게 돌진했다. "죽어라, 카세라스!" 남은 hp는겨우230. 포션을 마시거나 몸올 회복할 틈은 없다. 죽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건방진놈!” 유한이 다가오자 카세라스가 산성 브레스를 뿜어냈다. 그런데 그가 뿜어낸 산성 브레스가 유한의 앞에서 찍 갈라졌다. 유한이 휘두른 필사의 마나 블레이드가 브레스를 갈라버린 것이다. 모세의 기적에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산성 브레스가 갈 라지자, 유한의 눈앞에 당황하는 카세라스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힘껏 뛰어오른 유한은 카세라스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아악!” 카세라스의 처절한 비명이 남바린 영지에 울려 퍼졌다. “어떻게 됐지?" "죽였나?" 유저들은 카세라스의 비명이 길게 울리자 모여들었다.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워낙에 위험한 마법들이 난무해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바츠가 결정을 지은 듯해 보이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볼 수 있었다. 카세라스의 머리에 검을 꽃은 바츠의 모습을. "와! 카세라스가 죽었다!” "바츠 최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지만, 단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바로 아크 위저드 아스탄이었다. “큰일 났네. 카세라스는 죽지 않았어요!" "예?” 그의 말에 유저들은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카세라스 의 머리 위에 있는 HP 바를. 텅 빈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는데 이게 어찌 된것인가? '제기랄, 빗나갔다!’ 카세라스의 머리 위에 있던 유한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노린 곳은 급소인 정수리. 그러나 막판에 카세라스가 고개를 비틀면서 플레임 소드는 녀석의 안구를 뚫고 들어갔다. 상당한 타격을 입힌 것은 틀림없지만, 끝장을 내는 데 는 실패했다. 유한은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크아아아아!” 카세라스가 괴성을 터트렸다. 그 충격파에 놈의 머리 위에 있던 유한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땅을 구른 유한은 HP가 겨우 5밖에, 안 남은 것을 보았다. '크윽, 다행히 죽진 않았군.’ 유한은 서둘러 포션을 마셔 HP를 회복했다. 그러나 회복한 것은 유한뿐만이 아니었다. 괴성을 터트리며 날뛰던 카세라스는 사방에 어둠의 기운을 퍼트렸다. 카세라스 주변의 대지가 마르고 초목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헉, 이게 뭐야?” "아앗! 내 HP가 떨어진다!” “라, 라이프 드레인(Life Drain)이다!” 사방의 생명력을 긁어모은 어둠의 기운은 다시 카세라스에게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던 카세라스의 HP가 원상 복구 되었다. "크윽! 기껏 다 죽여놓았더니!” 유한은 검을 고쳐 잡았다. 카세라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덤벼들 속셈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뒤에서 팔을 붙든 사람 덕분에 저지되었다. "뭡니까?" "지금 뛰어들면 개죽음 당합니다.” 유한을 말린 것은 아스탄이었다. 그는 충고를 해주면서 유한의 몸을 가리켰다. '헉! 방어구가!’ 좀 전에 카세라스의 공격에 시달려서 그런지 갑옷과 건틀렛의 내구도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투구는 이미 박살이 나 없어진 지 오래 아스탄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뛰어들면 개죽음인 것이다. "이놈들, 날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너희들에게 지옥이 어떤 것인가 보여 주겠다!" 카세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이 뒤흔들리고 땅에서 검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다시 한 번 월드 오브 인페르노 마법이 전개된 것이다. 이미 폐허가 된 남바린을, 카세라스는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로 작정한 듯 했다. "가세하겠습니다. 불만 없지요, 지그 님?"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혼자는....” "역시 지그 님이었군요.” 후드 아래로 씨익 쪼개지는 아스탄의 미소가 보였다. 아스탄은 바츠의 드러난 얼굴을 보고 지그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한번 슬쩍 넘겨짚어 봤는데, 유한이 걸려든 것이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하죠.” 그리 말한 유한은 검을 고쳐 잡고 카세라스를 향해 돌진했다. 카세라스의 주변에 암혹의 마법진이 수없이 나타났다. 유한은 또 뭔가 쏟아지려나 싶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저번과 달랐다. 마법진들에서 칠혹의 칼날이 쏘아진 것이다. "헉! 무슨 공격이....” 칠혹의 칼날이 박힌 땅이 순식간에 시커떻게 썩었다. 암흑의 기운이 대지를 순식간에 오염시킨 것이다. '제기랄, 이것도 예전에 없었는데!’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글 되면서 생긴 스킬이 몇 개나 되는 건지.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유한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뒤에서 아스탄이 마법 지원을 해 주며 카세라스의 공격을 상쇄시켜 주었기에 한결 편하게 싸울 수 있었다. "받아랏!” "크윽! 이놈이 아직도 꿈틀거리다니!” 유한이 옆구리를 베자, 카세라스는 곧장 반응하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공중의 암흑 마법진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유한에게 칠흑의 칼날을 쏘아 댔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피하던 유한은 결국 다리에 한방 맞고 말았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HP가 2,500 떨어졌습니다. -30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헉,벌써 오 분이?' 버서커 상태면 데미지 딜레이가 사라지는데 스턴이 걸렸다는 것은 5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유한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칠흑의 칼날은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 30초 동안 음직일 수 없다니! "크카카! 끝이다!” 암흑 마법진에 포위된 순간, 유한은 카세라스의 말대로 끝장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유한을 둘러싸고 있던 암혹 마법진들이 한순간에 찢어발기어 사라졌다. 검풍, 고속으로 날아든 검풍이 암흑 마법진을 베어버린 것이다. 유한은 번개같이 날아와 암흑 마법진을 없애 버린 전사를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덩치의 전사의 얼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바츠,혼자만 재미보지 말라고.” "엔스? 너 어떻게?" "어떻게는 어떻게.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보니까 남바린에서 바츠가 카세라스가 싸운다고 적혀 있더만.” 카세라스에게 당한 유저들이 올린 글이었다. 엔스는 그 글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 왔고. "마침 캐릭터가 멀지 않은곳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야, 뒤!" 엔스의 등 뒤로 카세라스가 날린 해골 마법탄이 날이왔다. 그러나 그 해골 마법탄은 홀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상쇄되었다. 유한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린이 카세라스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엔 오펜과 에이린, 로키도 있었고, 얀과 베르디도 와 있었다. "잘 만났다, 카세라스. 상인이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마!” "악룡 자식!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다!” 리지스와 포포,블랙도 나섰다. 모두가 줄줄이 사랑처럼 나타나자 유한은 엔스를 쏘아 보았다. "너 설마...." "난 비밀을 지켰다. 모두 철공소를 지키기 위해 온 거야.” .엔스는 남바린에 도착하기 직전 철공소에 들렀다. 남바린에 카세라스가 나타났다고 하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왔다. 남바린은 지그 철공소와 가까운 곳. 철공소가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들은 카세라스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 온 것이다. 철공소가 추억이 된 건 유한만이 아니었다. 정을 붙이게 된 건 모두가 마찬가지. 모두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그곳을 잃지 않기 위해 모두가 일어선 것이다. “감동은 나중에 하고 일단 싸우자고!” 기운차게 달려간 엔스는 대쉬로 카세라스의 몸을 베었다. 연이어 달려든 얀이 반대쪽 옆구리를 검으로 찔러 넣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로키가 공격에 나섰고, 오펜이 아스란과 함께 마법 공격을 지원했다. 에이린은 모두에게 바쁘게 힐과 버프를 걸어 주었다. “크으윽! 어디서 튀어나온 버러지들이...." 이를 갈던 카세라스의 눈앞으로 꼭두각시 인형들이 춤을 추었다. 베르디의 환술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카세라스의 앞으로 리지스를 등에 태운 포포가 날아들었다. “포포! 공격해!” 한껏 숨올 들이견 포포는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뿜었다. 평소에 철을 주식으로 했던 녀석답게 입으로 토한 것은 쇳가루와 쇳조각이었다. 먼저 유한에게 당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카세라스의 눈으로 그 쇳가루와 쇳조각들이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끝장을 내 주마, 카세라스!” 블랙은 불끈 움켜쥔 주먹을 카세라스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한 방 날리는 데 성공했지만, 끝장을 내는 데는 실패했다. 재차 공격하려 했지만. 오히려 날뛰는 카세라스의 꼬리에 맞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크윽. 이놈이.... " "블랙,뇌제의 홀을 가지고 있어?" 유한이 쓰러진 블랙에게 다가갔다. 블랙은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녀석에 대해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넌 누구냐? 누군데 뇌제의 홀을 알고 있지?" '그렇군. 난 지금 바츠지' 닮았다 해도 캐릭터가 다르다. 유저라면 모를까 Npc들은 동일 인물이 아닌 타인으로 여기게끔 설정되어 있다. "난 지그의 형제 바츠다. 지그의 부탁을 받아 카세라스를 쓰러트리러 왔지.” "호 그래? 그러고 보니 지그와 닮은 듯...” 지그와 알고 있다고 하자 블랙은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길게 이야기 할 틈은 없어. 저 광룡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뇌제의 홀이 필요해.” 이미 지그가 가진 힘, 바츠에게 없었던 친구라는 이름의 힘은 카세라스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고수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카세라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끝장을 내기 위해선 바츠와 지그가 힘을 합쳐야 한다. "뇌제의 홀은 지그가 나에게 맡긴 것이다. 아무에게 함부로 줄 수는 없어.” 역시 이 상태로는 어려운가. 실망하는 유한에게 블랙이 뇌제의 홀을 내밀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빌려 주지. 지그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너에게는.” “고맙다! 정말고마워!” 뇌제의 홀을 건네받은 유한은 곧바로 뇌제로 변신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전신에 검은 번개 문신이 생겨났다 '뇌제 바츠’가 완성되자 유한은 한손엔 플레임 소드를, 다른 한 손엔 뇌제의 홀을 들고 카세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선더 러쉬 스킬을 발동한 유한은 플레임 소드를 앞세우고 카세라스의 심장으로 뛰어들었다. 비늘과 가죽을 가르고 들어간 칼날은 카세라스가 품고 있던 드래곤 하트에 박혀들었다. "라이트닝 웨이브!” 이어서 뇌제의 홀에서 터져 나온 전격이 카세라스의 드래곤하트를 부쉈다. "크아아아악!” 전신에 전격으로 휘감은 카세라스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과거 바츠에게 무릎을 끓었던 광롱은 다시 한 번 바츠에게. 아니 새롭게 태어난 유한의 손에 쓰러졌다. 제철소를 짓다 바츠가 카세라스를 쓰러트렸다! 이 소식이 곧장 전해지자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가 또 한번 시끄럽게 들썩였다. 예전에 카세라스를 쓰러트린 바츠가 또다시 카세라스를 쓰러트린 것도 홍미로운 사실이지만, 그 바츠가 예전과 달리 여러 사람과 힘을 합쳐 싸웠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나상실여사 : 바츠 외톨이 생활 끝? -복면철호 : 내 친구가 봤는데 바츠 좀 변한 것 같대요. -라일레 : 캐릭터 새로 키우면서 뭔가를 느낀 모양이죠. 얼마 후, 전투 동영상이 공식 홈페이지에 업데이트되었다. 이번에 남바린이 초토화되면서 거덜난 소울리버 길드원이 올린 동영상이었는데, 이 동영상은 유저들을 또 한 번 충격에 몰아넣었다. -만주대장수 : 아니 이게 뭐임! 바츠가 변신? -포스트맨 : 어, 저거 뇌제 변신인데. -맥스♥마야 : 뇌제는 지그님만 변신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폭풍의기사 : 그러게요. 듣기로 뇌제는 유니크라던데. -나디아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바츠가 뇌제로 변신한 사건은 그날 하루 종일 유저들의 논란대상이 되었다. 뇌제로 변신 가능케 하는 뇌제의 홀이란 아이템에 대해서 정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지그가 바츠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바츠 님,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카세라스가 쓰러진 직후, 채린은 바츠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모두를 대표해서 그의 앞에 섰다. 분명히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츠가 뇌제로 변신한 사연도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코앞에 똑똑히 보이는 바츠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그들이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다. "뭐든지 물어봐도 돼.” 상당히 친근하게 응답하는 바츠의 태도에서 채린은 이 미 묻고 싶은 물음의 답을 얻었다. 그래도 확실히 넘어가고자, 그녀는 질문을 던졌다. “너 강유한이지?" 채린의 물음에 동료들의 시선이 바츠에게 쏠렸다. 정말 바츠가 유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그일까. 모두의 앞에서 유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숨겨 왔던 사실을 고백했다. "맞아. 나 강유한이야. 내가 바로 바츠고, 또 지그지.” 유한의 순순한 고백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특히 마지막까지 아닐 거라 여기고 있던 리지스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마치 순진한 옆방 총각이 조폭 두목 이었다는 사실을 안 하숙집 아주머니와 같은 얼굴. "어찐지 초보 때부터 게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더라 했어" "싸움도 잘하고 말이지." "뇌제의 홀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것도 그 때문 이었나?" 모두들 지금까지 지그에 대해서 궁금해 하던 것을 죄다 알 수 있었다. 얀도 형이 바츠였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랐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그럴 만하다는 투로 변했다. "하긴 퇴학당하고 하루 종일 캡술에 처박혀 살았으니까" 모두들 바츠가 유한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때, 차가운 냉소를 짓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엔스였다. "흥, 보라고. 지그가 바츠였잖아. 내가 예전부터 그랬는데도 내 말은 아무도 안 믿어 주고 말이지." 어디 믿어 주지 않기만 했던가? 거의 미친 놈 취급을 했었다. 그런 걸 생각하니 슬쩍 울화가 치미는 엔스였다. "바츠!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진작에 모두에게 말했으면 내가 미친놈 취급을 안 당했을 거 아냐!" "그때는 말해도 안 믿어 줄 것 같아서 그랬지. 증거도 없고.” 캐릭터가 사라졌는데, 무슨 근거로 바츠라고 주장한단 말인가. 오히려 미친놈이나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혔을 터 “그런데 대체 캐릭터를 어떻게 새로 키운 거예요?" "맞아, 지그를 하면서 또 따로 시간이 있었어?" “무척 힘들었을 텐데...” 뒷사정을 모르니, 모두들 드림맥스의 발표대로 유한이 캐릭터를 새로 키웠을 거라 생각했다. 유한의 표정은 어두웠다. 겨우 모두에게 진실올 이야기 해 줬는데 아직 숨겨야 할 사실이 있다니. 물론 진실을 이야기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러면 드림맥스는 물론 손석진에게 커다란 해 가 미칠 것이다. 그럼 게임을 통해 사람들을 바꾸고 세상 을 바꿔 가겠다는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될 터. 유한은 그가 한 일은 괘씸했지만, 그가 꿈꾸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았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렇게 작살 내고 싶었던 해커를 오히려 감싸주는 판 이니. "어떻게 다시 바츠를 키웠는지는 뻔하지 뭐. 분명 형이라면 학원 땡땡이 치고 그 시간에 캡슐방에서 놀았을 거야." "아니거든!” "맞으면서 뭘.” "어휴, 이게 진짜...... 너 내가 바츠일 때는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도 얼마나 지랄 같은지는 알지." "어이구 이걸 그냥 확!” 하마터면 형제간의 결투가 벌어질 뻔했다. 채린과 베르디의 만류로 둘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아무튼 유한의 사정이 밝혀졌지만, 채린은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그. 아니 바츠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너 앞으로 어쩔거야?” "어쩔 거냐니?" "지그로 플레이할 거야? 아님 다시 바츠를 플레이할 거야? 그게 아니면 둘 다?" 그 물음에 유한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지그지. 지그를 플레이하면서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니까.” "그래도 간혹 바츠도 플레이할 거죠?" 에이린의 물음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옛날 바츠처럼 독불장군식 플레이는 하지 않을 거야. 함께 플레이 하는 게 즐겁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모든게 잘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잊고 넘어간 것이 있었다. "헉! 그러고 보니 경험치가!’ 뇌제로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를 얻지 못한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유한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둥장한 최강의 필드 보스를 어렵게, 정말 힘들게 잡았는데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다니. 뇌제로 잡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지 같은 카세라스는 아이템도 주고 가지 않았다.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한은 곧 털어 냈다. '뭐, 괜찮아.’ 꼭 경험치나 아이템을 챙겨야 할 필요는 없다.이렇게 철공소를 지킨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카세라스를 처리한 다음날. 유한은 다시 지그로 접속해 철공소로 돌아왔다. 철공소는 변함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 많았다. 얼마나 많았으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들 속에는 뭔 일이 터졌다고 하면 찾아오는 버추얼 에이지의 사이버 MC 미루도 있었다. 그녀는 유한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가장 먼 저 질문을 던졌다. "지그 님, 바츠 님이 뇌제로 변신해서 카세라스를 잡았는데, 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노 코멘트.” 유한은 점잖게 응답을 거절하며 철공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미루는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질문을 던졌다. “에이린이란 제보자의 말론 지그 님이 바츠 님이라던 데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아놔, 에이린 이 녀석이!’ 에이린이 어제 들었던 것을 버추얼 에이지 팀에 제보한 모양이다. 어쩌면 이미 아르페디아 공식 홈페이지에 알려 졌을지도. 유한은 몰랐지만. 지금 공식 홈페이지는 지그가 바츠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게시판이 폭주하는 상태였다. -나상실여사 : 바츠가 지그래요. -복면달호 : 엑? 그게 사실? -폭풍의기사 : 에이린이란 사람이 밝혔답니다. -포스트맨 : 오! 그럼 보러 가야지. "험험, 거기에 대해서도 별로 할 말이 없군요.” “명확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천삼백만 아르페디아 유저분들이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3,300만 중 2,000만은 해외 유저다. '아놔, 그 사람들이 전부 진실올 알고 싶어 하는지 아 닌지 니가 어떻게 아냐고' 슬쩍 뿔이 난 유한은 미루의 말에 응답하지 않고 철공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고 송코에게는 출입을 통제하라 말했다. "난리도 아니구나. 너 이번에 엄청 뜨겠는걸.” 송코는 어제 바쁜 일이 있어서 게임에 접속하지 못했지만, 뒷사정은 전해 들었다. "대장장이 지그의 정체가 광전사 바츠였다니.” "그 이야긴 그만하지요. 그보다 제철소 공사는 어때요?" "아, 제철소는...” 철공소에서 멀지 않은 계곡에 자리한 제철소 부지는 이미 아버지가 기본 공사를 마쳐 놓은 상태라고 했다. 막대한 물을 얻기 위해 상류에 댐을 건설했고. 재료와 강재를 쌓아 놓기 위해 거대한 창고를 여러 동 건설했단다. 거기다 제철소에서 일할 일꾼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 놓았다고. 이제 제철소 건물에 설비를 들여놓고 그에 맞춰 건물을 마무리 지으면 끝이라고 했다. "직접 가서 볼까?” 아버지로부터 중간 중간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도록 해. 교수님도 네가 와서 좀 봤으면 하시더라고." "근데 밖에 저 많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가죠?" "뒷문으로 살짝 나가. 내가 사람들을 유도할게.” 송코가 사람들올 유인하는 사이, 유한은 제철소가 지어 지고 있는 계곡 강가로 갔다. 쿵쿵쿵! 똑딱똑딱! 제철소 부지는 마치 거대한 건축장 같았다. 수많은 NPC 일꾼들과 건축가 유저들이 개미 떼처럼 모여 길을 닦고 창틀을 올리고 건물을 완성하고 있었다. "자네 왔는가!” 상류의 댐 마무리 공사를 지휘하고 있던 아비지가 유한이 온 것을 알고 한달음에 달려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허허 나야 뭐 돈 받고 일하는 거니까. 그보다 자네가 고생했네.” 제철소를 짓기 위해 유한이 들인.돈이 설비 값을 제외 하고라도 자그마치 천만 골드다. 웬만한 영지 하나쯤은 사고도 남을 돈이 건축 비용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연히 이 돈올 마련하기 위해 유한이 엄청나게 고생했음올 짐작할 수 있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설비는 언제 도착하나?" “글쎄요. 완성하는 대로 보내 준다고 했으니 곧 도착하겠죠.” 마치 유한의 말을 들었을까. 갑자기 커다란 수레 수십 대가 제철소 쪽으로 다가오더니 택배가 왔다고 한다. 저번에 철공소를 지을 때 왔던 그 NPC 택배업자들이 구센도르프가 보낸 물건이라며 야적장에 설비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허! 역시 양이 많구먼.” "하하, 이게 얼마친데요.” 자그마치 2천만 골드어치의 설비다. 그런데 그 양이 적다면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교수님, 마지막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래, 우리 멋지게 한번 지어 보세.” 드워프들을 제외하고 아르페디아에서 처음으로 짓는 제철소였다. 당연히 건축가인 아버지로서도 흥분되기 시작했다. "어이, 거기! 반송로를 똑바로 설치해야 할 거 아냐!” "마법 동력로는 건물 밖에 발전실을 따로 만들어 설치 해야지!” "압연 설비는 압연 공장에 넣어!” 처음 만드는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아비지와 건축가 유저들의 열성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건물이 하나 둘 완성되기 시작했다. -용광로가 설치되었습니다. -평로가 완성되었습니다. -압연 공장이 완공되었습니다. 재철소의 모든 시설을 완성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제철소가 완공되었습니다. [회장] 칭호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많은 발전을 기대합니다. 제철소 완공 메시지가 뜨자 폭죽이 터지고 꽃잎이 날았다. 게임 시스템도 팡파레를 울리며 제철소 완공올 축하 해주었다. "축하해, 지그" "축하해요, 오빠.” "지그 님, 축하드립니다.” 친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지그 제철소’ 의 완공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 중에는 버추얼 에이지 팀의 미루를 비롯해, 게임 방송 리포터도 있었다. 그들은 유한에게서 제철소를 짓게 된 동기와 과정을 자세히 물어보고 돌아갔다. 그들은 지그와 바츠의 관계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했지만, 유한은 거기에 대해선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삐잇, 삐잇!” 포포도 축하해주었다. 놈은 자신의 먹이(?)가 많아질 것이 만족스러운지 흐뭇한 표정으로 제철소를 바라보았다. "너 쓸데없는 짓 하면 가만 안둔다.” 유한이 그런 포포의 눈치를 읽고 경고를 주었다. 이제 집채만 해진 녀석은 하루에 먹어치우는 철의 양이 엄청났다. 그래서 유한은 녀석이 엉뚱한 짓을 저지르면 바로 치워(?)버리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한편 포포의 주인인 리지스는 앞으로의 사업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그야. 제철소 어떻게 운영할 거야?"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강재 중 일부는 철공소에서 무구로 만들 생각이야. 나머지는 유저들에게 팔 거고.” 제철소와 철공소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유한의 말에 리지스가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강재의 판매는 나한테 맡겨. 비싼 가격에 팔아 줄 테니까.” 제철소에서 하루에 생산해 내는 강재의 양이 어마어마 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그 철공소와 지그 철강 조합원들이 소화하는 양은 생산량의 반에 반도 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엄청난 양을 자신이 유통시키게 된다. 거기서 남는 마진을 생각한 리지스는 자신도 모르게 헤벌레 입을 벌렸다. "무슨 소립니까! 저희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 맡겨 주셔 야죠! 옛날부터 거래해 왔던 거래처인데 저희가 맡아야 합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딜론이 자신에게 강재 유통권을 달라고 소리쳤다. 과거 지그 표 무구 판매권을 두고 싸움올 벌였던 이후 2차전인 셈. 현재 리지스코퍼레이션과 골드러시 상인 연합은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상인 길드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이 모두 유한이 생산한 무구와 에르젠을 판매하고 유통 하면서 덩치를 키운 덕분. 그래서인지 아르페디아 최고의 상인 길드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뭐예요, 아저씨! 남이 침 발라 놓은 장사에 끼지 마세요!” "어허, 이 아가씨가!” 두 사람은 정말 이 자리서 머리라도 쥐어뜯고 싸울 것처럼 나왔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유한이 그들올 중재하고 나섰다. "스톱! 자꾸 그러시면 아무에게도 안 줍니다" 유한의 말에 두 사람은 즉시 싸움을 중단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통권을 달라며 무한 눈빛 공격을 보냈다. '에휴! 애나 어른이나....."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에 결국 유한은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예전처럼 그들에게 반반씩 유통권을 나눠주었다. "쳇,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밟아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후후, 리지스 양이나 나중에 우리한테 밟히고 울지 마"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작은,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다. 유한은 이번에 그 점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제철소 하나 짓는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다수의 생산직이 있고 그중 하나인 대장장이가 제철소를 지은 게 뭐 대단하냐고.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아르폐디아 온라인을 즐기는 유저들 중 쇠와 무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령술사도 쇠로 만든 장신구 하나쯤은 차고 있으며, 재봉사가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바늘과 가위도 쇠로 만든다. 옷의 단추나 벨트의 버클도 마찬가지. 기사나 전사는 말할 것도 없고 마법사와 궁수도, 이제는 건축가와 조선공까지 쇠 없이는 성장할 수 없게 되었 다. 즉 쇠를 장악하는 사람이 아르폐디아 온라인을 장악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 주목한 유한은 광산왕 가스론의 신규 광산 개발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제철소를 본격적으로 가동해, 물량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중에 값싼 철이 많이 풀리자, 철강 자재와 무구 값이 폭락했다. 갑작스런 이런 가격의 변동은 게임 내 경제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오오, 이제 풀 플레이트 메일 세트를 살수 있겠다.” “휴, 이빈 공사에 철근 자재 공급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소비자인 대다수 유저들은 좋아했다. 철 값이 떨어지는 것만큼 무구와 기타 여러 가지 철 제품의 가격이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자인 대장장이들은 제철소의 물량 공세를 우려하고 유한을 원망했다. "아놔, 철 값이 왜 이래?" "제철소 하나 문 열더니 미친 듯이 폭락하는구나." “영세한 중소 대장간들은 죽으라는 거야, 뭐야?" "살려면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해야 하나?" 시간이 갈수록 지그 제철소와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대장간과 금속 상인들이 늘어났다. 유한과 리지스는 그렇게 파산한 대장장이와 상인들을 흡수했고, 철에 대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지그 님, 제가 잘 아는 대장장이 유저 분인데 우리 제철소에서 일하겠다며 왔습니다.” "카프 님이 대충 자리 마련해 주세요.” 유한은 제철소로 새로 영입되는 대장장이들의 배치를 카프에게 맡겼다. "지그. 키예프 공국의 철강 상인 연합에서 우리랑 협력 관계를 맺자고 하는데?" 리지스의 물음에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이나 시장의 영향력에서 키예프 공국의 철강 상인 연합은 자신들과 협력 관계를 제안할 만한 세력이 되지 못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 우리 밑으로 들어오든가 아님 폭삭 망하던가.” "훗! 역시 그렇지?” 리지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마노스 제국에서 풀 플레이트 메일 삼천 점과 타워 실드 오천 개, 그리고 장창 삼만 개를 팔 수 있냐고 문의해 왔는데?" “누가? 미네르바가?" "응. 직접 사신을 파견해 물었어. 어떻게 할까?" 제철소 건설로 지그의 명성과 영향력이 대륙 전체로 확대되어 유저건 NPC건 너도 나도 지그 표 무구를 사겠다며 주문을 넣고 있었다. “그 주문 물량은 우리 지그 철강 조합원들에게 줘.” "나도 말은 했지만, 꼭 지그 표 무구를 사겠다고 하던 걸.” "같은 강철로 만든 거니까 믿고 사도 괜찮다고 해. 이 쪽에서 책임진다고 하고. 조합원들에게도 단단히 일러 둬. 불량품 나오는 만큼 제련강 배급을 줄인다고.” "알았어. 그리고 레뮤다 대륙의 쿠스코 왕국에서 블랙 아이언 열 기를 주문해 왔어. 대금은 금괴로 지불한데. 다음 달까지 납품해 주면 두 배로 치러 주겠대.” "헐! 두배라고?” 블랙 아이언에 대한 주문은 끊일 줄을 몰랐다. 지금 지그 철공소는 24시간 3교대로 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이 주문량올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송코 형, 며칠 전에 새로 배치된 대장장이들 어떻게 됐어요?" 유한은 송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과 달리 송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육이 아직 덜 끝났어. 비탈리 님 말로는 블랙 아이언 생산에 써먹으려면 얼마 동안 더 가르쳐야 한대." “끙! 할 수 없지. 어떻게든 생산량을 늘리라고 해요.” 일꾼도 더 늘이고, 숙련공도 더 확보하고. 여기에 계획 중인 제2철공소의 건립이 완성되면 어느 정도 숨통을 트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그 제련강이 다 떨어졌다고 조합원들이 더 달라고 하는데?” "아. 그건 송코 형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유한은 제철소를 지은 뒤 하루가 3일같이 바쁘게 지냈다. 정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다. 각 파트별로 책임자를 정했지만 마지막 결재는 그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개인 작업실에서 따로 수련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회의실과 회장 집무실에서 보냈다. 대장장이였던 유한은 이제 완전히 경영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아는 요즘 통 모습올 보이지 않네. 몸이 세 개라도 바쁜 시기에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유한은 요즘 얼굴 보기 힘든 채린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 제철소 완공 때 축하하러 온 뒤로, 그녀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낮은 성적을 만회하려 학원에 다니느라 그렇다지만,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가뜩이나 현실에서도 잘 보지 못하는데. “호호호 혹시 요새 시아가 바람올 피우는 건 아닌지 몰라.” 리지스의 말에 유한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아는 그럴 애가 아니야” “글쎄, 그 학림 아카데미에 꽤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많아서 말이야.” "날고 긴다고?" "듣자니 재벌 2세에 아이돌 연예인도 있고, 정치인 아들네미들도 있다던가?" 현재 게임 내 학원들 중에 학림 아카데미가 발군이었다. 학생들의 성적 향상도 다른 학원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고, 학원 내에 여러 가지 여가 시설들도 타의 추종을 불가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학림 아카데미에는 목에 제법 힘 주고 다닌다는 사람들의 자식이 많이 들어왔단다. "그런 애들 속에 있다 보면 자연히 평범한 남친은 잊히기 마련이라고.” "너 님 기준에서 말하지 마시지요r?" 유한은 무척 기분이 상했다. 돈에 환장한 리지스라면 모를까 채린은 그런 애가 아니다.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구도 기억해 주고, 그를 감싸주고, 항상 곁에 있어 주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 좋은 녀석이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리지스가 말하는 그런 사태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채린이 보고 학원을 옮기라고 해야겠지? 바람피울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지만, 학림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원에는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 지그 너 어디가?" 유한이 밖으로 나가자 리지스가 물었다. "로그아웃 한다. 뒷일은 세상을 잘 이는 너에게 맡길게.” "너 삐졌니?" 삐졌다. 그래서 유한은 리지스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로그이웃올 하고 캡슐에서 나온 유한은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참 신호가 갔음에도 채린이는 전화 받지 않았다. "쩝,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런 거겠지.” 새벽 1시가 넘었다. 사실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것 자체가 실례다. "메일이라도 좀 써야지.” 그렇게 마음먹은 유한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 이메일 사이트에 들어가 아이디와 비번을 쳤다 곧장 새 편지 쓰기 버튼을 누르려던 유한은 메일함에 깜빡이는 신호를 발견했다. <새 편지가 왔습니다. 확인하겠습니까?> 혹시 채린이가 보낸 메일이 있는 건 아닐까. 유한은 그렇게 기대하고 메일함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채린이 보낸 편지는 없었다. 대신 이상한 놈들 이 보낸 편지들만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뭐야?" 최근에 온 듯 메일함 상단에 떡하니 자리한 메일. 'Jhi2693' 이라는 녀석에게 온 메일의 제목은 다소 도발적이었다. "강유한은 봐라? 날 아는 놈인가?" 유한은 메일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함께 동봉된 파일들이 유한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놀람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이게 대체 뭐야!” 동봉된 파일, 그 속에는 채린이 또래의 소년과 친근하게 서 있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다. (대장장이 지그 14권에서 계속)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