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도청 .............................................7 Chapter 02 마노스 제국의 변란 ..............................43 Chapter 03 자원 대란.............................................. 83 Chapter 04 에르젠 합금 기술 .................................117 Chapter 05 험난한 퀘스트.......................................151 Chapter 06 지그 합금 상사 ...................................187 Chapter 07 생일파티 ..........................................229 Chapter 08 지그를 찾는 사람들 ..........................................271 Chapter 09 조여 오는 손길 .................................305 도청 도청 1 다음날오후4시. 손석진은 시간에 딱 맞춰 허진태를 면회하러 왔다. "잘 왔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게 오래 간만이지?" "확실히." 반갑게 말을 거는 허진태와 달리 손석진의 태도는 씨늘 했다. 하긴, 원가를 얻어 낼 것이 있는 허진태와 달리 손석진 은 마지 듯해이 곳에나왔으니. "정보기관에서 볶아 댄다는 말 진짜더군. 난 네가 펜히 오버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곳에 오기 전, 손석진은 허진태의 그간 정황에 대해 알아봤다. 정말 정보기관에서는 허진태의 범죄와 행적을 조사하 고 있었다. 그의 수척한 얼굴만 봐도 수사가 얼마나 강도 있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조커가 누군지 쉽게 입을 열 허진태가 아니라는 건 손석진도 잘 안다. "후후후, 꽤 졸았나 보군. 그사이 내 뒷조사를 한 건 가?" "주의하는 것뿐이다. 넌 일단 위험 인물이니까." "확실히 너에게는 그렇겠지. 그런데 그 조사는 맨발로 뛴 건가, 아님 옛날 실력을 발휘한 건가?" 여기서 옛날 실력이란 해킹을 말한다. 손석진은 이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나랑 만나서 하려는 이야기가 뭐냐?" "좀 억을해서 말이야. 그 고딩 녀석이 쫓는 해커는 너인데 엉뚱하게 내가 덜미를 잡혔으니까." "바츠 해킹 건을 말하는 건가? 그건 이미 말했다시피 내가 한 게 아니다." 손석진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허진태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럼 왜 박차고 나갔던 회사에 다시 돌아온 거지? 이보다 나은 게임을 만들 수 없다고 했던 놈이 말이야." "그것은…." "처리할 게 있어서가 아닌가? 아마도 회사에 원가 발목잡힐 게 남아 있다든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든가." 허진태는 자신을 노려보는 친구를 바라보며 즐겁게 말을 이어 갔다. "넌 옛날부터 그랬어. 사람을 장기짝처럼 조종하면서 상황을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곤 했지. 진승호 패거리의 일만해도 그랬다." 허진태는 중학교 때의 일을 떠을렸다. 2학넌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같은 반에 진승호란 녀석과 놈을 따르는 패거리들이 있 었다. 놈들은 무척 불량하고 난폭해서 학생들 모두가 겁먹고 무서워했다. 그건 허진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손석진은 좀 달랐다. 그는 진승호 패거리를 두려워하면서도 어떻게든 반 분 위기를 위해 그들을 눌러 버리려고 했다. 싸우자며 아이 들을 설득하기도 하고. 물래 학생 주임 선생님에게 찾아가 놈들의 행실을 일러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동의하는 학생들은 없었고, 학주에게 혼쭐이 나도 녀석들의 행패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석진이 흠씬 두들겨 맞은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진승호 패거리에게 당한 게 분명해 보였지만 누구도 복수해 줄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진승호 패거리가 거들먹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진승호는 손석진의 멱살을 잡고 혼들면서 윽박질렀다. "너 한 번만 더 깝치면 그때 진짜 뒈진다. 알겠냐?"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그만해! 너 언제까지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할 거야?" 소리 친 것은 소희라는 여학생이었다. 토끼처럼 예쁘고 순한 아이라 이렇게 진승호에게 대들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기가 막혔던 진승호는 소희에게 건들거리며 다가갔다. "이넌이 쳐 맞고 싶어 환장했나? 여자라고 내가 못 때릴 줄 알아?" "때, 때려 봐! 때린다고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소희는 파르르 떨면서도 진승호를 똑바로 노려보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 꺼릴 것 없었던 진승호는 바로 소희의 따귀를 날렸다. 짝! 뺨을 경쾌하게 을리는 소리와 함께 소희가 교실 바닥에 쓰러졌다.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을리는 가운데, 허진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자식 죽여 버리겠어!" 그는 소희를 은근히 짝사랑하고 있었다. 소희가 맞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힌 허진태는 무작정 진승호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허진태는 진승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두들겨 맞으면서도 악을 쓰고 계속 달려드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남학생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이것들이단체로미쳤나?" 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진승호는 당황했다. 패거리가 있었지만, 여자애들까지 빗자루와 밀대 자루를 들고 나서자 그들 일당은 평소처럼 으스대지 못했다. 그날 진승호 패거리는 아이들에게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맞았다. 이후로 기가 꺾인 녀석들은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숨죽어 지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난 그때 감동했었다. 내가 두들겨 맞으면서도 용감히 싸웠기 때문에 다른 애들이 힘을 낸 거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진실은 다르더군." 일이 터지기 전날, 손석진은 소희를 계속 설득했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그녀가 용감히 나서 준다면 봉기가 손쉬워질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겁이 많았던 그녀는 거절했었다." 손석진의 말을 허진태가 바로 받았다. "그래서 넌 일부러 진승호 패거리에 덤벼들어 두들겨 맞은 거잖아. 소희가 널 좋아하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한 거지." 손석진이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은 것을 보고, 소희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희를 움직인 손석진은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허진태와 여러 남학생들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의도한 대로 진승호 일당을 완전히 꺾어 버렸다. "전부 네가 꾸미고 조장한 거야. 반 아이들 모두 네 손에 놀아났던 거였지. 진실을 파니 진실은 없었던 셈이야." 물론 결과는 좋았다. 학급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으니까. 그러나 허진태는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과정이 짜증나고 화가 났다. 무엇보다 소희를 이용했던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넌 계속 그런 식이었어. 방식은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면에선 달라진 게 없었지. 좋은 일을 한답시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조작하려 했어." "……부정하진 않겠다." 손석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친구가 삐뚤어지게 된 것은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원하는, 모두가 좋아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면 된다고 여겼는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네가 조커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세상을 위한 일을 한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 그러나 넌 그리 오래 활동하진 않았어. 해커로서는 세상을 바꾸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지. 현실이 네가 생각한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번에도 손석진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진태는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쯤 엿듣고 있을 녀석도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아니면 애써 이 자리를 만든 보람이 없었다. 허진태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2 "해킹 세계를 떠난 넌 게임 업계에 투신했지. 뭐 넌 대학 다닐 때부터 그쪽에 눈길은 두고 있었어. 남들을 즐겁게 해 주기보다는 네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쉬웠기 때문이야."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손석진은 졸업 후 드림맥스의 창립 맴버로 입사했다. 그리고 여러 명작 게임들을 만들어 냈다. "너에겐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넌 개발자로 서 만족할 수가 없었지. 넌 옛날부터 지켜보기보다 개입 해서 조정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었으니까. 자신이 손쓸 수 있는 영역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지." "……."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드림맥스를 털 수 있었던데는 내부에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 협력자에게서 많은 정보를 입수했지. 인스펙터와 관련해서 손석진 네 이야기도 들었다." 그 내부 협력자는 손석진의 귀환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개발실 직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대규모 업그레이드 때문이라지만, 게임계를 떠나겠다고 했던 사람이 언제 떠났느냐는 듯이 복귀한 게 이상하게 보였단다. "거기엔 이유가 있겠지. 네가 떠날 땐 만족할 만한 뭔가가 없었겠지만 돌아왔을 팬 상황이 달라졌을 거야." "잘도 아는군." 손석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족했다면 떠날 이유가 없다. 떠났던 것은 한계를 느낀 탓이었다. 뭔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었지만, 그게 마 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상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말이다. "넌 돌아온 뒤로 해킹당한 바츠 유저와 계속 접촉했어. 네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들을 생각하면, 그가 단순히 잘나가는 유저라서가 아니야. 넌 녀석에게 바라는 목적이 있었고 그놈이 그것을 성취해 주었기 때문이다." 허진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결에 있는 교도관이 보건 말건 유리창 너머의 손석진을 노려보며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틀렸나? 그게 아니면 저번에 네가 어둠만 보던 사람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며 자랑할 리가 없지. 모든 게 네놈이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까! 네가 바츠를 해킹하고, 그 결과 네가 원하던 것을 얻어 냈으니까!" 고막을 쩌렁 을리는 고함 소리에도 불구하고, 손석진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다 입을 열었다. "나름 아귀를 잘 맞추는군. 뭐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 때문에 유저의 캐릭터를 해킹 할 정도로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 "그럼 왜 바츠가 해킹될 쯤 몰래 국내에 들어와 있었지?" 허진태가 비밀 입국을 언급한 순간, 손석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표정엔 변함이 없었지만 낯빛이 살짝 변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후후후, 역시 그 일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무슨 일 말이냐?" "흥, 아직도 발뺌을 할 셈인가? 이봐, 석진이. 나에겐 네가 바츠 해킹에 개입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있어. 그 증거를 말해 줄까?" 어제 변호사 국선명이 그 중거를 발굴해 왔다. 그는 허진태에게 협력한 내부 협력자를 찾아갔다. 내부 협력자는 드림맥스의 보안 직원이었는데, 내통 행위가 발각된 후로 구속된 상태였다. 변호사는 그를 찾아가 바츠가 해킹될 쯤에 드림맥스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는가 물어보았다. 한동안 기억을 더 듬던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 무렵에 인스펙터 업데이트를 맡은 보안실 팀원들이 버전 2.0을 내놓았습니다. 예상 이상으로 성능이 향상된 놈이었죠." 문제는 이 팀원들의 능력이 고만고만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기는커녕 매일 저녁 본사 옆에 있는 프린스 호텔 나이트로 달려가더란다. "오죽하면 그들이 놀 때 누가 대신 일을 해 줬을 거란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인스펙터 2.0은 패치가 되자마자 드림맥스의 기대를 저버렸다. 바츠 해킹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보안실에선 외부 침입이 전혀 없었다고 보고했지만 실은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했다. "업데이트 된 인스팩터가 성능이 획기적으로 좋긴 했지만, 예상 밖의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해커가 그 빈틈을 노려서 바츠 유저의 계정 정보를 빼냈을 가능성이 언급되었죠." 당시 드림맥스 내부에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무성했다고 한다. 보안실에서 그와 관련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다는 둥, 책임은 유저에게 떠넘기기로 작정했다는 둥. 그러나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회사 이미지를 고려한 드림맥스의 수뇌부가 일을 적당한 선에서 덮어 버리고 사원들이 쓸데없는 루머를 언급하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새로운 인스펙터가 슬그머니 깔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내 변호시는 보안실 팀원들을 의심 했고, 그때 그 녀석들이 프린스 호텔 나이트에서 누구를 만났을까 조사해 보았지." "……." "변호사가 나이트 기도에게 네 사진을 보여 줬어. 얼굴을 알고 있더군. 바츠가 해킹되었을 쯤에 네가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아냈어." 허진태는 유리창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래야 자신의 말소리가 보다 똑똑히 전달될 것이다. 손석진이 앉아 있는 의자 밑에 붙은 도청 장치를 통해서. "넌 그때 보안실 팀원들과 접촉했을 거야. 그리고 놈들에게 인스펙터 2.0 파일을 줬겠지." 실력 좋은 원개발자가 건네준 것이니 보안실 팀원들은 그 성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마 손석진이 이것을 이용해 해킹을 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터. "그렇게 손쓰기 편하게 만들어 놓고 넌 드림맥스 서버에 침입해서 바츠를 해킹했어. 그렇지 않나?" 손석진은 계속 침묵을 유지했다. 낯빛이 살짝 변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동요하지 않았다. '흥, 끝까지 발뺌을 하겠다 이건가?' 그래도 내심 크게 동요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손석진을 완벽히 격침시키기 위해 허진태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로 했다. "그만 실토하시지. 네가 그때 프린스 호텔에 투숙한 기록을 내 변호사가 입수했어. 그리고 네가 보안실 녀석들과 나이트에서 어울리는 것이 찍힌 CCTV 영상까지 손에 넣었다." 허진태의 말은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국선명이 투숙객 기록을 보긴 했지만, 나이트 CCTV 영상은 입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부 협력자의 말과 당시 투숙객 기록, 나이트 기도의 목격담을 생각하면 손석진이 보안실 팀원들을 이용했을 가농성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CCTV 영상에 대해 언급한 것은 손석진이 백기(白旗)를 들게할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자, 이제 실토해. 네가 바츠를 해킹했다고 말이야.' 허진태는 손석진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무게를 잡고 있던 손석진이 웃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허탈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어이없을 때 짓는 미소였다. "이봐, 진태. 공갈이 너무 심하군." "뭐? 공갈이라니!" 허진태가 발끈해서 달려들었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지만 그의 의지와 행동은 둘 사이를 갈라놓은 유리벽에 가로막혔다. 콧둥에서 조금 미끄러진 안경을 고쳐 쓴 손석진은 너무나 당당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보안실 친구들은 날 만난 적이 없어." 3 '젠장,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이?' 승용차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유한은 답답한 나머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좀 전에 허진태가 열변을 토할 때까지만 해도 손석진이 정말 바츠를 해킹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손석진의 과거와 그의 성향은 충분히 의심을 살 만했고, 허진태가 말한 증거는 무척 근거가 있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손석진은 매우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의혹 하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말투였다. 직접 얼굴을 보면 어떨까? 아무래도 말투와 마찬가지일 듯싶었다. 예전에 자신에게 보여 줬을 때처럼 당당한 표정이리라.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유한은 허진태의 고함 소리에 정신을차렸다. "만난 적이 없다고?" "그때 몰래 입국한 것은 사실이다. 본사 옆의 호텔에 머물렀고, 나이트에 간 적도 있었지. 보안실의 농땡이들이 놀러 오는 것을 보기도 했어. 하지만 그 녀석들은 날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그 친구들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쾅! 허진태는 움켜진 주먹을 탁자에 내리쳤다. 당황해서 버벅대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얄미운 자식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반론을 펴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은 네가 했다. 정말 내가 보안실 팀원들과 어울리는 것이 찍힌 CCTV 영상을 갖고 있나?" "그. 그것은……." "그저 떠보려는 속셈이었지? 하지만 난 꺼릴 것이 없으니 그런 뻔한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 이번엔 허진태가 말문이 막혔다. 그가 진땀을 훌리는 사이 손석진의 반격이 계속 이어졌다. "너도 보육원장님 생신이 언제인지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회사 물래 입국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원장님 육순 잔치가 프린스 호텔 실버 홀에서 열렸거든. 오랜만에 보육원 친구들도 만나서 나이트에서 뒤풀이도 했지." "……!" "내가 그때 보안실 친구들에게 들켰다면 곧장 붙들려서 회사로 잡혀갔을 거다. 사장님이나 부사장님이 내 소식을 알아 오거나 날 붙들어 오는 사람에겐 특별 보너스를 준다고 했을 정도니까." 드림맥스에선 홀연히 은퇴를 선언하고 떠나 버린 손석진을 찾는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정말 보안실 팀원들이 손석진을 봤다면 업데이트 파일을 받은 것에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말대로 내가 바츠를 해킹했다고 치자. 하지만 뭐하러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나? 인스펙터를 만든 건 나다. 업데이트 몇 번 되어 있어 봤자 뚫고 빼내는 건 일도 아니야." 과거에 조커였던 손석진이다. 보안실 팀원들을 이용하다가는 오히려 의심만 살 뿐이다. "그, 그럼 그때 인스펙터 2.0은 뭐야?" "그 친구들이 부킹을 한답시고 나이트에 들락거린 건 나름 믿을 구석이 있었겠지. 달리 도외줄 사람이 있었거나 아님 운이 좋았을 수도. 나도 나중에 그 버전의 업데이트 파일을 보았다. 획기적으로 성능을 향상시켜 놓긴 했더군. 치명적인 문제점이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믿을 수 없어!" 허진태는 손석진의 반론을 부정했다. 그의 말대로 원장님 생일이 그쯤이고, 작넌이 예순이라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분명하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긋날 수 있나! 이렇게 되면 자신의 입장이 어떻게 되는가? 그 고딩 녀석에게 큰소리를 뻥뻥 쳐 놨는데 말이다. "국선명이라 했나? 자네 변호사에게 원장님과 보육원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지. 그 친구들에게 물어봐. 그때 입국했던 기간 내내 난 그 친구들과 어울렸으니까." "크아악! 너, 너야! 네가 바츠를 해킹한 거야!" 허진태가 울부짖든 말든 손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끝났군. 난 이만 가겠다." "빌어먹을! 거기 서지 못해!" 손석진은 악을 쓰는 허진태를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4 대화가 끝나자 유한은 헤드셋을 벗었다. 쿵광거리던 심장이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유감입니다." 다른 헤드셋으로 듣고 있던 국선명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설마 사건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정말 밝혀지는 줄 알았는데.' 유한은 차에서 내리며 입맛을 다셨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장기짝으로 다루는것도 서슴지 않는 사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그저 천재 게임 개발자로만 알고 있는 손석진의 본모습이었다. 충분히 바츠를 해킹한 자로 여길 만했다. 허진태는 과거의 사례와 변호사가 입수한 정보돌을 근거로 손석진을 벼랑 끝까지 밀어불였다. 그는 분명 손석진이 자백하도록 유도할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했다. 완벽한 중거가 없었던 탓이다. 오히려 알리바이가 있는 손석진에게 반박만 당했고, 단숨에 기세가 역전되었다. '호텔에 가서 물어볼까?' 손석진의 말이 정말 맞나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석진의 말이 허세 같지 않았다. 만약 빈틈이 있었다면 허진태가 먼저 꼬투리를 잡고 재반격을 했을 터. '하지만 해커는 손석진임이 틀림없어.' 손석진은 부정했지만 허진태의 추론도 나름 설득력은 있었다. 손석진이 수많은 유저와 랭커들을 놔두고 TV 토론회에 유한을 데려간 이유도 있을 테고. 그렇게 유한이 손석진을 의심하고 있을 때였다. "남의 이야기를 엿들은 소감이 어떻던가요?" "헉!" 유한은 등 뒤에서 들려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손석진이 서 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는 흠칫 굳어 버린 유한에게 다가왔다. '당황해 할 필요 없어.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유한은 안색을 편 뒤 다가오는 손석진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자신은 그저 헤드셋을 주기에 들은 것밖에 없다. 도청기를 설치한 사람은 국선명이란 변호사이지 그가 아니다. 오히려 해킹을 했을 손석진이 범죄자라 할 수 있었다. 아직은 명확한 중거가 없어 의심만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소감이라? 글쌔요. 좀 아깝다고 할까요?" 유한의 비꼼에 손석진이 담담히 말했다. "그렇습니까? 실망했겠군요." "그래도 나름 소득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청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허진태 그 친구가 바츠 해킹에 관련해 계속 추궁하더군요. 당연히 유한 군과 관련이 있고. 어떤 방식이든지 대화를 엿듣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상대는 천재라는 칭호를 달고 사는 게임 개발자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짜는 데 능통할 테니 상대의 의도나 행동을 간파해 내는 능력도 뛰어날 터. 지금 이렇게 만나는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제 충고를 무시했군요. 허진태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거야 내 맘이죠. 그리고 별로 친한 것은 아닌데요." 유한은 상관 말라는 투로 강조했다. "제가 개발자님 부하 직원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없는데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뭐,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허진태 그 친구는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얼래? 충고는 그뿐인 거야?' 전처럼 만나지 말라는 둥, 마음이 흐려진다는 둥의 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려진 상태에서 예전과 같은 충고를 되풀이하면 상대의 의심을 더 불거지게 만드니까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하던 유한은 손석진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유감이지만, 전 개발자님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보다 더 심하게 말이죠." "예, 압니다. 제 행실이 좋지 못한 덕분이니 의심하고 조사하신다 해도 제가 간섭할 수는 없겠지요." 손석진도 고단수였다. 유한의 파고들기에 흔들리지 않고, 곧장 맞받아쳤다. '역시 만만치 않은작자야.' 서로 웃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눈빛만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유한은 이 정도까지 몰아붙인 것에 만족했다. 확실한 증도 없는데 상대를 계속 자극할 수는 없었다. 섣부른 행동을 하다간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된다. 예전에 교감과 정현일의 수작을 듣고 눈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교직원 폭행죄' 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던 일을 잊지 않았다. 어설프게 두들겨 패는 것보다 완전히 주저앉힐 결정적인 펀치를 날려야 한다. 복수는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얼마든지 접어 주고 숙여 주리라!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유한은 인사를 하고 먼저 그 자리를 떠났고, 손석진은 멀어지는 유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손석진의 뒤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차림새가 후줄근한 더벅머리 청넌이었다. 그는 이미 멀 리가 버린 유한을 바라보다 손석진에게 말을 건넸다. "저 녀석이 바츠 유저였던 겁니까?" "왜? 정균이 너랑 안면이 있나?" 손석진의 물음에 김정균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번에 동아리방에 찾아왔었거든요." "하긴, 진태에게 듣고 가 봤다고 하더군." 김정균은 저번에 유한이 신라 대학의 해킹 동아리 레볼루션에 찾아갔을 때 만났던 대학생이었다. "신입생이라더니…… 생긴 것보다 엉큼한 녀석이네요." "뭐 그래야 재밌는 거 아닌가?" 손석진은 피식 웃었지만, 김정균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저대로 둘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손석진이 돌아서서 묻자 김정균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처리를 해야죠. 아예 선배님 사람으로 만들든 가, 아님 모든 걸 알기전에 손을 보든지." "둘 다 맘에 들지 않는군." 고개를 가로저은 손석진이 입을 열었다. "정균아, 난 저 애를 그대로 놔두고 싶다." "그러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던가, 콩밥을 먹어야 할 지도 모르는데요?" "하하, 그럼 별수 없고." 손석진은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지만 김정균은 그렇지 않았다. 저 고딩 녀석은 레볼루션 동아리방까지 찾아왔었다. 관련 정보를 준 것은 감방에 있는 허진태라지만, 이리저리 알아보고 쫓아다니는 걸 보면 꽤 집요한 녀석 같았다. "난 내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움직여 왔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세상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어." "그랬습니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사람들이 변해야 해. 누군가에게 조종받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은 변하기가 어렵지." "쳇, 난 변하는 케이스는 아니겠군요." 김정균은 섭섭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별로 기분 나빠 하지는 않았다. 그는 현재의 환경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그 때문에 세상의 다른 면을 보게 된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 중에 뚜렷한 소신을 갖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크게 바꿔 놓곤 하지." "그래서? 저 고딩 녀석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깁니까?" "좀 더 경험을 쌓으면 그럴지도. 저 애는 이제 겨우 앞으로 나가는 중이니까." 손석진을 바라보던 김정균은 어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 그러다가 판타지의 대마왕 꼴 납니다." "여유를 부리다가 용사에게 처단된단 말인가?" "그러니까 옛날부터 선조들이 삭초제근(削革除根)하라 말한 겁니다." "뭐 그런 사자성어가 있는 걸 보면 동양의 위정자들은 지배에 탁월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을 끊은 손석진은 불만 어린 얼굴의 김정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변화하는데 실패했어." 그 때문에 근대의 동양 사회는 오랫동안 외부의 침입과 간섭을 받았다. 문화의 주도권도 서구 사회에 빼앗긴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변화와 진보를 위해선 반드시 누군가를 밟고 가야 하지. 대마왕 을 쓰러트려야 비로소 용사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야." 손석진은 마치 초탈한 사람처럼 말하며 돌아섰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김정균은 여전히 불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5 손석진과 헤어진 유한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아버지는 물론이고, 늦은 귀가를 일삼던 유현도 일찍 들어와 있었다. 유현의 옆에 찰싹 불어 있던 세라가 유한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Hi. 브라더! 세라 저녁 얻으러 왔다!" "얻으러가 아니라 얻어먹으려겠지." "헤헤, 실수. 실수." 여전히 한국말에 서툰 세라였다. 하지만 그런 세라가 유한에겐 귀엽게 느껴질 뿐이다. 어쩌다 이런 귀여운 녀석이 유현과 사귀게 된 건지. "늦었잖아, 형. 기다리다 등가죽하고 뱃가죽이 랑데부하는 줄 알았어." "아예 도킹이라도 하지 그랬냐, 자식아." 유한이 씻고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온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들었다. 식사 후에는 거실에 둘러앉아 디저트로 사과를 깎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자, 자연스래 TV가 켜졌다. 뉴스를 보던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키자 세라가 슬쩍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마침 사이버 캐릭터 미루와 이정민이 진행하는 버츄얼 에이지가 나왔고, 모두의 눈과 귀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고정되었다. [이정민 씨. 은거한 랭커들이 속속 복귀 중이라지요?] [그렇습니다. 천사의 강림을 경험한 랭커들이 신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아르페디아 대륙은 물론 타 대륙까지 돌아다니며 '하늘의 문'과 '별빛'울 찾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방송에서는 오랜만에 모습을 보인 랭킹 7위의 랭커 '카 셀' 을 보여 주었다. 음유 시인으로서 톱 10에 낀 카셀은 수많은 유저들 앞에서 만돌린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의 문이 해븐즈 게이트라는 실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요, 아직 이것의 위치가 파익되지 인았다고 하죠?] [유저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청해도에 있었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드림맥스에서도 이게 이동히는 유적이라 밝혔는 데…….] 방송을 보고 있던 세라는 유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현, 현도 천사 왔어?" "응. 자격을 갖췄으니까 얼른 하늘의 문과 별빛을 찾으래." 세라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아마도 헤븐즈 게이트를 여는 것은 한국 유저들만 해당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유한이 청해도에서 헤본즈 게이트를 열었을 때 같이 있었던 그들은 자연히 관심의 시선을 유한에게로 돌렸다. "형, 그때 헤븐즈 게이트 연 거 맞지?"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하늘로 빛이 솟구쳤을 때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잖아! 도대체 뭔 수로 열었어? 별빛이랑 관련 있어?" "당최 뭔 소린지……." "정말 이럴 거야!" "브라더, 너무해!" 톱 10의 랭커들이 나타났든, 동생 커플이 펄펄 뛰든, 유한은 관련 정보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신의 시험을 통과히는 사람은 자신이 최초이고 싶었으니까. 물론 자신 말고도 스타레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긴하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대장장이 귀련. 그러나 그녀는 스타레이와 관련해 아무런 정보를 흘리지 않은 듯했다. 귀련이 철공소나 제철소를 짓는다는 이야기도 없으니, 그녀는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거나 신의 시험이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녀는 대장장이 캐릭터 귀련이 아닌 기사 캐릭터인 파우린으로 신의 시험에 도전하고 싶은 걸지도. [다음 소식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뇌제가 탄생했습니다. 드림맥스에서 적어도 6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가능하다는 히어로 뇌제가 탄생한 겁니다. 저희가 입수한 자료 화면을 보시죠.] 유한은 그만 눈이 튀어나을 뻔했다. 미루가 갑자기 뇌제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새 얼마나 되었다고 관련 동영상이 방송되는 건지! TV 화면에선 유한이 뇌제의 홀을 들고 철십자 길드원 들과 베히모스를 박살 내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유저 하나가 캡처한 동영상을 방송국에 보낸 모양. 아무튼 랭킹 4위의 베히모스도 쓰러트리는 뇌제의 힘에 경악했던지, 방송 화면 아래 자막으로 시청자들이 보낸 리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키라☆ : 개사기다! -역습의 달호 :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 ㅠㅠ -1서클 대마법사 : 획득하인 님은 정말 땡잡은 듯. -갑부초딩 : 님들아, 저거 헌질하면 살 수 있나요? -이계군바리 : 소 팔고 개 팔면 가능할 듯.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미루의 질문에 옆에 있던 이정민이 자료를 보며 설명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나흘 전에 벌어졌습니다. 그로지아 왕국 남쪽의 타사르 평원에 있는 고대 무덤에서 '보물 탐험대' 파티와 NPC 이바니우스 3세와 철십자 길드원들의 연합 간에…….] 이정민은 두 집단이 어떻게 무덤에 들어갔으며, 묘실에서 어떤 싸움을 벌였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뇌제가 정확히 뭐죠? 드림맥스에서 준비한 히든 클래스인가요?] 히든 클래스라면 다른 유저들도 될 수 있다는 말. 조건만 충족시키면 누구나 뇌제가 될 수 있다. TV를 시청히는 유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게임 속에 하나뿐인 유니크 아이템의 효과 같은데, 자세한 것은 좀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뇌제란 칭호에 대해 정의 내리자면, 게임 설정상, 고대 아르페디아 대륙을 통일한 초대 황제 테라칸의 별호라고 나옵니다.] [아! 손짓 하나로 번개를 부르고, 적병들을 모조리 태워 죽였다는…….] 미루의 말에 이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르페디아 온리인의 설정집을 보면 테라칸 황제의 무위를 두려워한 고대인들이 뇌제란 칭호를 불인 걸로 나옵니다. 하지만 자료 화면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실제 번개를 다루는 권능이 테라칸에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저기 유저의 손에 들린 밍치가 테라칸의 권능 이라는 건가요?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빛과 함께 번개가 튀어나오고 있는데 말이죠.] [말씀하신 대롭니다.] 자료 화면에는 망치를 휘두르고 땅을 내리치는 유한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뇌제 칭호틀 획득한 유저의 모습이 매우 낯익 데요?] 미루의 물음에 이정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제가 일아본 바에 의하면 저 유저는 바로 저희 방송에서도 몇 번 나왔던 대장장이 지그…….] 픽─! TV가꺼졌다. 어느 새 슬쩍 리모콘을 집어 든 유한의 짓이었다.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회장실에 다녀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 용모가 다소 다르다지만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볼 부모는 없다. 그리고 유한의 부모님은 TV에 출연할 정도로 게임 잘하는 자식을 대견하게 여길 분이 아니었다. 특히 게임으로 날린 젊음을 후회하시는 아버지는 더더욱. "이놈의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 아니에요. 저건 제가 아니라고요. 저 닮은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곽윤환이라고 우리 도장 사범님 동생의 친구의 친구인데 저랑 진짜 똑같이 생겼어요." 유한의 필사적인 변명은통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믿을 미음이 1%도 없었고, 동생 커플은 좀 전의 일을 보복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유한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형 왜 그래? 저거 형 맞잖아." "브라더,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프라이드를 가져요." '크악! 이것들이!' 아버지는 유한을 더 꾸짖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유한의 방으로 을라가서 캡슐의 콘센트와 통신 케이블을 빼가지고 내려왔다. 코드와 케이블 없는 캡슐은 그저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된 관일 뿐이다. "유한이 너 삼 일간 게임 금지야." "아버지!" "어기면 그놈의 캡술을 두들겨 부술 테니까 그리 알아!" 그래도 아예 하지 말라고는 않는 아버지였다. 예전과 달리 유한이 달라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입시생인 만큼 엄포를 놓을 필요는 있었다. 마노스 제국의 변란 마노스 제국의 변란 방송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은 유한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얼굴이 팔린 베히모스는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강의 기사인 그가 랭커에도 끼지 못한 대장장이에게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비록 그 대장장이가 꽤 유명한 지그이고, 그가 이긴 건 뇌제의 홀 덕분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정까지 생각해 주지 않았다. 핑소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이 것을 기회로 삼고 공식 홈페이지와 아르페디아 관련 사이트들에 글을 을려 베히모스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반대급부로, 베히모스를 쓰러트린 지그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크아악! 대체 어떤 새끼가 동영상을 넘긴 거야!" 현실에서도 일진 똘마니들에게 화풀이를 했던 베히모 스는 게임에 접속해서도 성질을 죽이지 못했다. 버추얼 에이지에 방송된 동영상의 화면의 구도나 각도를 보건데, 영상을 캡쳐한 것은 그때 같이 있던 철십자 길드원들 중의 한 명이 분명했다. "지. 진정을……." "이 판국에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당장 노벨을 불러 와! 그때 나랑 같이 간 새끼들 죄다 불러와! 찾아내서 아주 작살내……." 베히모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집무실 문이 열리 더니 NPC 근위 기사가 들어와 보고를 했다. "베히모스 단장님, 단장님을 뵙겠다며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저 평범한 보고였지만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베히모스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NPC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 내가 지금 사람 만날 기분인 줄 알아!" 베히모스는 탁자에서 잉크병을 들어 NPC 근위 기사에게 집어 던졌다. "당장 꺼져 버려. 가서 나 없다고 해!" 그러나 이 눈치 없는 NPC는 간곡히 설득하고 나섰다. "백작님께 큰 도움이 되겠다며 찾아왔다고 합니다. 미케니라고 하면 알 거라면서……." "뭐? 미케니아?" 미케니아라면 이미 죽어 버린 이바니우스 3세가 다스렸던 고대 마도 왕국이 아닌가. 이바니우스 3세가 죽였는 데 왜 다시 그 이름이 언급되는 건지? "만나보시겠습니까?" "큭! 알았다. 둘여보내도록." 만약 별것 아니라면, 자신을 우롱한 것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잠시 후, 근위 기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온 것은 검은색의 로브를 걸친 마법사 NPC였다. 베히모스는 여느 NPC답지 않게 풍부한 표정과 오만한 눈빛을 한 그를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날 만나자고 한 게 너 인가?" "예, 전 미케니아의 마도사 아벨이라고 합니다." "미케니아의 마도사라고?" NPC의 자기소개에 베히모스는 미심찍은 눈빛을 했다. 그가 알기로 미케니아 일당은 전멸했다. 부하들은 다 죽었다고 이바니우스 3세가 직접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놈이 있다? '국왕 녀석미 거짓말을 한 건가?' 그 간교한 NPC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어쩌면 국왕 모르게 생존한 부하인지도. "제가 베히모스 님을 찾아온 것은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선물이라고?" 베히모스의 심드렁한 울음에 아벨은 품속에 간직하고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폐하께서 베히모스 님께 드리기로 했던 거대 키메라의 제조법입니다." "뭐라?" 베히모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받아 얼른 확인을 해 보았다. [거대키메라제조법] 설명 : 고대 미케니아의 마도 공학으로 만든 거대 괴수 키메라의 재조 방법. 생명을 경시하는 비륜른적이며 잔인한 방법이 지만 이 비법으로 탄생한 키메라는 신화 시대의 거인 종족 타이탄과 맞먹는 힘을 지닌다고 알려져 있다. 내용을 확인한 베히모스는 탐욕스런 표정으로 군침을 삼켰다. 이바니우스 3세가 죽는 바람에 보상이 물 건너 간 줄 알았는데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오다니. 그는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는? 사실 딱 까놓고 말하면 난 이걸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 말이야." 뇌제의 홀을 획득하기는커녕 중간에 죽어 버렸으니 [이바니우스 3세와의 동맹] 퀘스트는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아니, 실패했었다. "원래는 이걸 드릴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국왕 폐하의 복수를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혼자서는 대장장이 지그와 그 일당들에게 복수하기 힘드니 자신의 힘을 빌리겠다는 말이다. 거대 키메라의 제조법은 그 대가로 주는 것이고. 베히모스는 내심 반색했다. 현재 철십자 길드는 거대 병기가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흐음, 이왕이면 선물을 하나 더 줄 순 없을까?"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너의 주군은 나에게 왕관을 씌워 준다고 했었지. 내가 마노스 제국의 황제가 되면 네 복수를 더 빨리 이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사실 복수는 황제가 되지 않아도 해 줄 수 있다. 다만 거대 키메라 제조법이 손에 들어오자 황위에도 욕심이 나 밀했을 뿐. "제 마법은 국왕 폐하에 미치지 못해 여제를 세뇌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뭐 어절 수 없지." 아쉽지만 거대 키메라 제조법을 안 것에만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아벨의 다음 행동이 베히모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벨은 베히모스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러나 저를 참모로 삼아 주신다면, 열홀 안으로 황위 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베히모스는 충성을 서약하는 듯한 아벨의 언행이 마음에 들었다. 능력 있는 마법사를 부하로 거느리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더구나 길드장이라고 거들먹대는 노벨 녀석은 전투고 생산이고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었다. "좋다. 널 참모로 받아들이지. 일단은 거대 키메라 제조를 시작하도록." "감사합니다. 앞으로 당신을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겠 습니다!" 베히모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아벨의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는 것을. 2 "뭐야? 왜 갑자기 길드 운영 회의를 소집한 거야?" "그러게. 베히모스 이 자식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테라칸 황제의 무덤에서의 싸움이 방송을 탄 뒤로 베히모스에 대한 길드원들의 지지가 예전만 못했다. 베히모스가 망신당한 만큼, 철십자 길드의 명성도 떨어진 탓이다. 그래서 베히모스의 비상소집 요구를 받고 은 길드 고위 간부들의 반옹이 썩 좋지 않았다. 베레타-마노스 전쟁 이후 철십자 길드의 연이은 실패와 베히모스의 추태는 평소 학림고 인맥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간부들의 마음을 혼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간부 중에 몇 명은 은근히 자기네 세력을 이끌고 길드를 탈퇴하려는 마음까지 품고 있었다. "모두 다 모였나?" 베히모스는 길드장인 노벨보다도 늦게 도착했다. 그는 간부들의 반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내가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한 가지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다." "그게 뭔데?" "이번엔 여신의 효자손이라도 찾자는 건가?" 간부 하나가 빈정대면서 말했다. 베히모스가 뇌제의 홀을 구한답시고 길드 전력을 말아먹은 것을 풍자한 것이다. 간부들은 베히모스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면 다 같이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훗! 저번괴는 달라. 내가 지금 말하려고 히는 것은 우리 철십자 길드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제패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일, 바로 마노스 제국을 장악하는 것이다." "마노스 제국을 장악해?" "설마 네가 황제가 되겠다는 거냐?" 설마가 아니라 바로 그거였다. 베히모스는 철십자 길드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굳건히 하고, 지지부진한 대륙 제패의 야망을 앞당기기 위해 큰 사고를 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에겐 그럴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고, 계획도 확실하다고 믿고 있으니까. "지금 네가 제위에 오르는 건 무리야!" "맞아. 아직 대공 자리도 얻지 못했는데 무슨!" 대부분의 간부들이 반대했다. 철십자 길드원들이 마노스 제국의 요직을 두루 장악하고 있다지만, 수천만에 이르는 제국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려면 합법적으로 황위를 찬탈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베히모스를 여제의 남편으로 만들고 난 뒤, 은근슬적 여제를 암살하기로 했지 않은가. "후후, 물론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당장 황위를 차지할 가능성은 낮아. 하지만 새로운 계획을 들으면 생각이 바뀌게 될 거다" "새로운 계획?" "내 참모인 아벨이 설명할 것이다." 베히모스의 손짓에 미케니아의 마도사 아벨이 들어왔 다. "뭐야? npc잖아?" "처음 보는 녀석인데?" "왜 저 녀석이 회의에 참석하는 거야?" 아벨은 웅성거리는 간부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베히모스 님의 새로운 참모인 아벨입니다. 지금부터 작전명 '여우사냥 에 대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철십자 길드에 계공한 무기와 자신이 세 운 계획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심적어 하던 간부들도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관심을 보였고, 나중에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자 만장일치로 '여우사냥' 작전을 승인했다. 이제 간부들 얼굴 어디에도 베히모스에 대한 불만은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내가 NPC 하나는 잘 얻었단 말이야." 베히모스는 순식간에 간부들을 휘어잡은 아벨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원하던 제국의 황좌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3 현재 마노스 제국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남쪽에서 준동하는 후소 대륙 해적들의 토벌이 시원치 않은데다가, 근래에는 제국 황도에 도적이 들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적도 그냥 도둑 무리가 아니었다. 떼를 지어 다니며 귀족과 부유 상인들의 저택을 습격하고, 수도 거리를 약탈과 방화로 어지럽혔다. 베레타-마노스 전쟁이 별 성과 없이 종전을 맺은 상황에서 이런 일들이 잇달마 터지자 민심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상황이 이리되자 미네르바 여제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그녀는 근위 기사단장인 베히모스를 불렀다. 황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치안대장 NPC의 몫이지만, 얼마 전 치안대장 NPC는 도적 떼를 토벌하다 죽임을 당했다. "백작!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이요! 대마노스 제국의 황도에 도적 떼가 창궐하고 치안대장까지 죽다니!" "송구하옵니다, 폐하. 실은 그 도적들이 평범한 도적이 아니라 반란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하옵니다." "반란 세력과 관련이 있다?" 마노스 제국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세워진 나라다. 그래서 헤레타 해방군을 비롯해, 제국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각지에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방 영지에서도 반란 세력이 준동한다고 하소연을 하더군." 여제의 말대로 황도의 혼란과 맞물려 지방에서도 레지스탕스들이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지난 전쟁 이후로 반란 세력이 황가를 우습게보고 있고, 제국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사옵니다." "괘씸한 것들!" 여제는 분통이 터지는지 주먹으로 황죄를 내리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베히모스는 슬그머니 웃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소신에게 도적 떼의 준동을 막고 토벌할 비책이 있사옵니다." "비책이라? 그것이 무엇이오?" 여계가 반색을 하며물어왔다. "이번에 소신과 소신의 친우들이 힘을 합하여 개발한 거대 키메라이옵니다." "거대 키메라?" 미네르바의 물음에 베히모스는 별것 아니리는 투로 말했다. "일전에 보셨던 거대 목인병과 비슷한 거라 생각하시면 되옵니다. 그들을 황도의 곳곳에 배치해 놓으면 도적 떼가 감히 날뛰지 못할 것이옵니다. 날뛴다 해도 거대 키메라의 손에 토벌될 것이옵니다. 허나……." 베히모스가 조금 곤란한 문제가 있다는 듯 말을 줄이 자. 답답했던 여제가 그를 보챘다. "허나 뭐가 문제란 말이요?" "거대 키메라의 배치에 패하의 윤허가 필요하옵니다. 키메라라는 것에 많은 귀족들이 반감을 보이는지라." 골렘류와 달리 키메라에 대한 NPC들의 인식은 나빴다. 보통 키메라는 사악한 마법의 산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특히 신관들이 입에 거품을 물며 반대했다. "내 윤허하겠소. 키메라라 한들 좋게 쓰면 괜찮을 것 아니요? 그대에게 황도 치안의 전권을 맡길 것인즉, 서둘러 황도를 안정시키도록 하시오." '됐다!' 미네르바의 허락이 떨어지와 베히모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번 계획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할 거대 키메라를 합법적으로 황도에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계속 수고하시오." 알현을 마치고 대전에서 물러나온 베히모스는 길드 간 부들에게 쪽지를 날렸다. 이제 최종 단계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쿵쿵쿵! 크기가 족히 10여 미터는 되는 괴 생명체들이 황도 안 으르 들어왔다. 예티의 몸에 악어의 꼬리, 늑대의 머리를 한 괴 생명체의 행진에 NPC들과 유저들이 기겁을 하며 분분히 길을 비켜섰다. "저건 뭐야?" "거대 키메라라고 하던데, 여제가 황도의 치안을 위해 투입한 병기래." "그럼 마노스 제국에서 만든 건가?" "아냐, 철십자 길드에서 만들었을걸. 옆에 있는 놈들이 모두 철십자 길드원들이잖아." 유저들의 말처럼 거대 키메라들의 어깨에는 철십자 길드의 마법시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거대 키메라들을 통솔하여 황도 곳곳으로 흩어졌다. 거대 키메라들은 황도를 경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은근히 황궁과 황도 치안청, 근위 사령부 둥, 중요 거점부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어서 서둘러 NPC 놈들이 눈치 채기 전에 끝내야 한다!" "야! 너 뭐히는 거야! 키메라가 엉뚱한 곳으로 가려고 하잖아!" 황도의 주요 시설 장악 임무를 맡은 노벨은 키메라 조종을 맡은 마법사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계획대로 거대 키메라를 황도 안으로 반입하는데는 성공했다. 이제 불시에 황궁을 기습해 미네르바 여제와 고위 귀족 NPC들을 잡아 거사를 완수하면 된다. "계획대로 잘되어야 할 텐데……." 작전명 여우사냥. 베히모스와 그의 참모 아벨이 구상한 작전은 이러했다. 먼저 남쪽의 왜구 토벌을 느슨히 하고 실력 좋은 도적 유저들을 끌어들여 황도를 습격한다. 덤으로 해례타 해방 군을 비롯한 여러 레지스탕스들을 지원하여 제국을 더옥 혼란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당연히 치안이 나빠질 것이고 민심은 바닥까지 떨어진다. 이 상황에서 여제의 실정을 탓하고 역성 혁명을 일으키면 큰 반감 없이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 물론 예전에도 이 같은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황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이 적지 않은데다가 강력하다는 것이다. NPC 주제에 황실을 보위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근위 병사들의 레벨은 150이 넘었고, 기사의 경우 180이 넘는 자가 수두룩했다. 철십자 길드가 전력을 기을이면 처리 못할 세력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숫자를 움직여서는 기습이 불가능하고, 여제나 그녀를따르는 NPC들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소수 정예의 전력으로 황도를 장악해야 하는데, 기존의 거대 목인병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하릴없이 베히모스가 미네르바의 남편 되기를 바라고 있던 상황에서 거대 키메라를 제조하는 비법이 손에 들어왔다. 비밀리에 거대 키메라를 제조하고 테스트한 결과, 거대 목인병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입증되었다. 거기다 재료만 있으면 짧은 시간에 여러 마리를 생산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계산해서 판단한 결과, 황도를 장악하고 근위 사령부를 뒤집는 데 필요한 숫자는 50마리. 지난 이를 동안 철십자 길드는 길드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서 50기의 거대 키메라를 만들어 냈다. 엄청난 재원과 인력이 소모된 것은 불문가지. 만약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면? "실패할 리 없어. 들인 공이 얼마인데." 노벨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의 장악에 길드의 모든 것을 다 건 상태에서 실패는 절대 있어서도, 생각해서도 안되었다. 4 베히모스는 황궁 근처에 있는 근위 사령부로 향하고 있 었다. 유유히 본부로 걸어가는 그의 뒤로 도적 유저들아 뒤따랐다. 그들은 햇별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으로 날렵하게 이동하며 근위 사령부를 눈 깝짝할 사이에 포위했다. 베히모스는 선두에서 경계병을 처리하고 곧바로 변장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도적 유저들의 실력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검은 초승달 길드 놈들, 실력이 더 늘었군.' 어쌔신 키라가 길드장을 맡고 있는 검은 초승달 길드. 베레타-마노스 전쟁 때는 철십자 길드와 적대 관계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금전에 따라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일이 흔했고, 어쌔신 키라는 액수만 맞으면 원한과 지조를 잊어주는 대인배였다. -경계병은 다 처리했다. 사령부 주변도 모조리 포위했고. 키라에게서 귓속말이 오자 베히모스는 곧장 답신을 보냈다. -좋아, 그럼 내가 신호를 하면 공겨하도록. 그렇게 귓속말을 보내고 나서 베히모스는 부관과 함께 말을 타고 근위 사령부로 다가갔다. 마노스 제국 근위대는 총 5천 명의 병사와 3백 명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3교대로 번을 서며 황궁을 수호하고, 가까이서 여제를 경호했다. 근위 사령부 건물은 성채와 다름이 없을 정도로 견고한데다가 황궁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횡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근위 사령부부터 잽싸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충! 기사단장님 오셨습니까?" 베히모스가 다가가자 정문의 경비를 보고 있던 병사 NPC들이 경례를 을렸다. "그래, 수고가 많다." 베히모스는 정문을 통과하다 말고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참! 지금 정문의 경비 책임자가 누구지?" "아르핸 남작입니다." 근위 기사단 제 13조를 맡고 있는 NPC 기사였다. 딴에 명문가 출신이라며 베히모스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녀석이다. "당장 불러 오도록. 현재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도 모두 그의 명령에 병사는 정문 옆에 마련되어 있는 감시 초소로 달려가 아르헨 남작을 불러왔다. "무슨 일입니까?" 뚱한 기색의 아르헨 남작이 기사들을 데리고 와 물었다. "누군가 반란을 모의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근위 사령부부터 공격할 거라고 하더군." "에? 대체 누가?" 아르헨 남작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베히모스의 말이 놀랍기도 했지만, 지금 그의 칼이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나다." 친절하게 일러 준 베히모스는 순식간에 아르헨 남작의 목을 베어 버렸다. -크리티컬이터졌습니다. 아르헨 남작은 레벨 195의 강한 기사였지만,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고,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무, 무슨!" 아르헨 남작이 쓰러지자 NPC 기사와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들이 제대로 대응하는 것보다 베히모스와 그의 부관의 공격이 더 빨랐다. "크에엑!" "카악!" 정문 책임자를 비롯해 NPC 10여 명을 단번에 도륙한 베히모스는 미리 준비한 마법탄을 히늘로 쏘아 올렸다. 휘잉ᅳ펑! 하늘에 녹색의 연기가 퍼지자 거대 키메라가 근위 사령부 정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평범한 차림을 하고 근처에 숨어 있던 철십자 길드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전원 공격!" 베히모스와 부관이 사령부 안으로 들어가자 키라와 검 은 초승달 길드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사령부 안으로 진입해 가며 맞닥뜨리는 NPC들은 모조리 죽였다. 강력한 전력을 가진 근위대였으나, 갑작스런 기습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거기다 키라와 검은 초승달 길드원들이 본부 안에 연막 탄을 마구잡이로 던져 놓고 활개 치는 덕분에 그들은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적이다! 적이 공격해 왔다!" "어, 어디야?" "이쪽이다!" 연막탄 속에서 베히모스는 근위대 NPC들을 제멋대로 농락했다. 근위 기사단장이라는 직책 덕분에 그들을 마음 대로 우왕좌왕 혼들어 대고 죽여 버릴 수 있었다. "됐다, 이제 황궁이다!" 어느 정도 근위대를 제압했다고 판단한 베히모스는 바로 거대 키메라와 철십자 길드원들을 보내 황궁 장악에 나섰다. 제국의 기사로 임명된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 이 내부에서 호응하는 바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저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습격이다! 반란이 일어났다!" "놈들을 막아라!" 곳곳에서 NPC들이 튀어나오며 저항했지만, 이미 한번 기울어진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크워워워워─!" 간혹 마법사나 기사들이 뭉쳐 강력히 저항하면 거대 키메라가 나서서 쓸어 버렸다.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모두 죽여 버려!" 베히모스는 황궁을 장악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도 황궁 밖의 상황을 살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치안청 장악 완료. -고위 인사들도 제압했어. -황도 수비병들도 향복했다. 기습의 효과는 대단했다. 설마 대낮에, 그것도 제국에 충성하고 있던 철십자 길드가 반역을 저지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거대 키메라의 공격력은 대단해서, NPC들은 제대로 대항할 생각도 못했다. 거기다 수뇌부와 지휘 계통의 인시들을 기습해서 암살하니 나머지는 일까서 와해되었다. 그렇게 1시간을 싸웠을까. 황궁은 물론이고 황도 전체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철십자 길드원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베히모스는 아직 기뻐하지 않았다. 여제를 잡으러 간 녀석들에게서 보고가 을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는 여제 NPC를 확보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다리다 못 한 베히모스는 직접 여제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5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황궁의 집무실에서 국정에 몰두하고 있던 미네르바는 밖이 소란스럽자 시종장을 내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했다. 얼마 후 내보냈던 시종장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폐하, 황궁에 적도(賊徒)들이 침입했사옵니다!" "뭐라?" 깜짝 놀란 미네르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도적 떼를 끌고 대(大)마노스 제국의 횡궁을 공격한단 말이냐!" "그, 그게……." 시종장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미네르바가 목소리에 힘을 담아 외쳤다. "당장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한때 아르페디아 대륙을 통일하려 했을 만큼 야심에 찬 그녀다. 일개 시종장으로서는 그녀의 박력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위 기사단장인 베히모스 백작이옵니다." 이번에는 미네르바가 할 말을 잃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제일 먼저 황제와 황궁을 지켜야 할 근위 기사단장이 황궁을 공격했다니 "그, 그럴 리가……." 미네르바의 중얼거림에 시종장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베히모스 백작이 황도에 들인 괴물이 황궁에 난입했 사옵니다. 궁정 마법사 노벨 역시 선두에서 반란군을 지휘하고 있고, 백작과 친한 기사들이 사방에서 살육을 저지르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베히모스가 반란을 일으킨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네르바는 현재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근래에 나라가 혼란했다지만 반란이 일어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도 근위 기사단장이 중심이 되었다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이럴 리가 없어!" 미네르바가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밖은 더 시끄러워졌고,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약삭 빠른 신하와 시종들은 슬그머니 그녀의 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시종장과 충성스런 호위 기사들뿐. "폐하! 당장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옵소서! 한시라도 빨리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피하다니, 그 무슨 말이냐? 짐은 이 나라의 황제다. 반란 도당들에게 굴복할 것 같으냐? 근위대를 불러라! 당장 베히모스 백작을 짐의 앞으로 잡아와라!" "폐하, 근위대는 이미 우리에게 제압당했습니다." 방금 말을 한 것은 흐느끼고 있는 시종장이 아니었다.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리트만이었다. 단짝인 유나와 다른 철십자 길드원들과 함께 온 그는 베히모스로 부터 여제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냉소를 띤 리트만을 보고, 호위 기사들은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여제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레벨이 만만찮았지만. 리트만은 단짝인 유나와 함께 온 길드원들을 믿었다. 숫자도 자신들 쪽이 더 많으니 처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폐하, 순순히 항복하시죠. 가는 길은 편히 보내 드리겠습니다." "닥쳐라! 네놈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짐에게 충성을 다한다 맹세했던 네놈이 어찌……." "내가 미쳤냐. NPC 따위에게 충성하게." 리트만은 들고 있던 창끝을 미네르바 쪽으로 향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제를 죽이면 경험치를 얼마나 주는지 한번 알아볼까?" "폐하, 어서 피하소서!" 선두의 호위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리트만과 철십자 길드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벽이 된 틈에, 후방에 있던 호위 기사들과 시종장이 미네르바를 부축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놈들, 이것 놔라! 짐은가지않겠다!" "폐하, 마노스 황가의 칠백 년 역사를 여기서 끝내실 것이옵니까?" 시종장의 피 토하는 외침에 미네르바의 마음이 바뀌었다. 눈빛이 싹 달라진 그녀는 근처에 있던 조각의 손을 비 틀었다. 그러자 미네르바 일행의 둥 뒤에 있던 벽이 스륵 열리며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앗! 저, 저거!" 철십자 길드원들은 여제 일행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서들러 미네르바를 잡으려 했지만, 뒤에 남은 호위 기사들의 저항이 너무 완강했다. 그들은 HP가 바닥에 이른 순간에도 철십자 길드원들의 창칼을 맨몸으로 막아 내며 여제의 도주를 도왔다. "뿌드득! 베히모스 백작, 내 오늘의 원한을 잊지 않겠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며 미네르바가 이를 갈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자 벽이 다시 닫혔다. 뒤늦게 철십자 길드원들이 달려들었지만, 한 번 닫혀 버린 벽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여제의 집무실에 온 베히모스는 미네르바가 도주한 것을 알고 펄펄 뛰었다. 면목이 없어 보고를 못 올린 리트만은 베히모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여제를 잡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길드원들에게 퍼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감에 달아올라 있던 고위 간부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거 큰일이군. 미네르바가 가만있지 않을 덴데." "황도 밖으로 탈출해서 지방군이라도 끌고 오면 큰일이잖아." 그팬 마노스 제국이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철십자 길드는 마노스 제국군 전체와 싸워야 한다.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소모전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간부들의 시선이 베히모스에게 향했다. 그러나 대답은 그의 참모인 NPC 아벨에게서 나왔다. "여우사냥이 실패했으니 발키리 작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발키리 작전은 또 뭐야?" "예, 발키리 작전이라 함은……." 일단 황도를 완전무결하게 제압하고 출입을 통제한다. 황도의 주요 귀족들을 처단 혹은 구금하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황도의 상황을 외부로 알리지 않는다. "다행히 미네르바가 옥새는 갖고 가지 못했습니다. 옥새가 있으면 지방에 황명을 조작해 보낼 수 있습니다." "조작해서 뭘 어쩔 건데?" 길드 간부라 해도 국가의 운영과 체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미네르바에 충성하는 영주와 지방군 사령관들을 갈아 치워야 합니다. 황명으로 그들을 황도로 불러 모은 다음……." "처리해 버리자 이건가?" "예, 그리고 우리 쪽 사람들로 그 공백을 메우는 거지요.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면 미네르바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마노스 제국은 군사 국가다. 상명하복의 체제가 굳어진 국가이기에, 우두머리들을 제압할 수 있다면 쉽게 장악할 수 있다. "하지만 미노스 제국은 넓어. 철십자 길드원들만으로 NPC들의 공백을 채우기엔 부족할 수도 있어." 누군가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아벨이 곧장 방안을 제시했다. "레지스탕스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됩니다." "NPC 해방군들을?" "그들에게 원래의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 약속하고 우리에게 협력해 달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뭐? 그럼 기껏 얻은 나라가 쪼개지잖아." 철십자 길드가 원한 것은 거대한 제국이지, 분열된 국가는 아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각 왕국들의 자치톨 인정하는 대신, 마노스의 새 황제를 통수권자로 인정해 달라고 하면 그들도 수락할 겁니다. 독립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으음……." "그리고 그들에게 지방을 장악하게 하면 미네르바가 황도를 빠져나가더라도 꽤 곤란해질 겁니다." 이 녀석이 정말 NPC일까. 베히모스는 아벨의 정체에 대해 살짝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전에 봤던 이바니우스 3세도 충분히 간 교한 NPC였던 걸 생각하니 의심은 사그라들었다. 아무튼 머리 좋은 참모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현실에서도 이런 놈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황도의 백성들은 어떻게 설득하지?" "맞아, 우리가 하는 걸 다 봤잖아." "NPC라고 해도 다 죽일 순 없는 일이라고." "유저들도 있고 말이야." 간부들의 또 다른 걱정거리에 아벨은 염려 말리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건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황도의 완전 제압과 통제에 신경을 써 주십시오." 6 철십자 길드원들은 아벨이 말한 대로 황도의 성문을 닫고 출입을 제한했다. 그리고 미네르바에 충성한 NPC 관료와 귀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단하고 일부는 구금했다. 그사이 아벨은 바람잡이들을 동원해 황도에 소문을 퍼트렸다. "황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뻔했다더군." "빈란군이 도적 떼와 결탁해 황도를 어지럽혔다는 거야." "반란군은 지난 전쟁의 강경파들이라는데, 베레타 공화국과의 휴전에 앙심을 품고……." "반란군에 매수당한 자들아 하나둘이 아니래. 황도 치안청은 물론, 근위 사령부, 심지어 황궁에도 반란 세력이 있었대." "베히모스 백작이 먼저 알고 거대 키메라를 동원해서 제입한 거래. 그런데 대응이 좀 늦어서 폐하는 중상을 입으셨다고……." "폐하께서 생명이 위태로우시다는데?" 아벨은 철십자 길드원들이 일으킨 반란 사건을 이번에 잡혀서 처형된 귀족과 관료둘, 그리고 반란에 희생된 기 사들에게 덮어씌웠다. 죽은 NPC는 말이 없고, 제법 아귀도 맞아서 NPC는 물론, 유저들도 '그런가 보다' 라는 식으로 넘어갔다. 아벨이 열심히 헛소문을 퍼트리는 사이, 황궁에선 철십자 길드 간부들이 가짜 칙서를 만들어 지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가까운 지역부터 영주와 군 사령관들을 하나하나 갈아 치웠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네르바의 행방을 계속 추적했다. 그러나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미네르바는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행방이 묘연했다. "아무래도 손을 써 두는 게 좋겠습니다." 아벨의 의견에 따라 다음과 같은 공고가 마노스 제국 각지에 붙여졌다. 왕도의 변란을틈타 제국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 있다. 짐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들은 이번 반란과 관계된 역적의 무리 들이니 지체 없이 신고하기 바란다. -황제미네르바 진짜를 가짜로 몰아붙이는 걸로 미네르바가 지방에서 준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쯤이면 제법 수습이 된 것 같은데?" 발키리 작전은 성공했다. 반대 세력을 쓸어버린 황도는 조용했다. 몇몇 지방군이 술렁이기는 했지만 반란군 딱지를 붙여 곧장 제압해 버렸다. "이젠 황위를 넘겨받아도 될 것 같아." "뭐 넘겨줄 사람은 없지만." 하지만 제위 찬탈은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다. 자첫하면 캐릭터의 명성은 물론 길드 전체에 큰 패널티가 붙게 되니까. 손해가 안 가게 하려면 '명분'을 쥐어야 한다. 그리고 민심을 이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야,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철십자 길드원들은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아벨이 시키는 대로 변란 당시 반란군에게 피습당한 미네르바의 상태가 악화되어 조만간에 죽을지 모른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나중엔 정말 죽었다고 소문을 냈고 미네르바가 죽기 전에 베히모스에게 황위를 양위했다며 제국 각지에 파발을 보냈다. 얼마 후, 베히모스는 정식으로(?) 마노스 제국의 황위 에올랐다. 거창하게 대관식을 치르고 황좌에 앉은 베히모스에게 팡파레가 터지며 안내창들이 떠을랐다. -황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노스 제국외 황제] 칭호를 얻었습니다. -국가 운영 창을 열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국가 상황과 평가를 보고 통치에 반영하십시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초로 '황제'가 되었으니까. -당신은 쿠데타로 황위를 찬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교묘히 덮어 버렸습니다.【뻔뻔한 반역자] 칭호를 추가로 드립니다. 당신의 명성이 20,000 하락했습니다. 안내창을 본 베히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표정이 굳어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을 먹었다 고 좋아하던 철십자 길드원들에게도 날벼락이 떨어졌다. -반란에 참가한 철십자 길드원들에개 [쿠데타 가담자] 칭호가 주어집니다. 1달간 전 스탯이 20% 하락합니다. NPC들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게임 시 스템까지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거대한 제국을 장악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 패널티는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 다만 문제라 할 적이 있다 면……. [현재국가상황] *100점 만점 기준 민심 : 20 귀족들의 충성도 : 10 재정 수치 : 27 치안 수치 : 21 대외 관계 : 9 문화 수준 : 63 기술력 : 55 군사력 : 87 경제력 : 18 "크아악!" 국가 운영창을 띄어 본 베히모스는 비명을 질렀다. 이놈의 나라가 상황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점수 아래로 자세한 설명이 나왔다. [현재 국가 평가] -갑작 스런 양위로 인해 백성들이 새로운 황제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반란 후유증과 양위로 귀족과 관료의 충성심이 최하로 떨어졌으며. 제정이 빈약하며 치안과 경제가 극히 불안합니다. 주변국과 관계도 최악으로……. 베히모스는 차마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좌절한 모습에 의아했던 노벨이 말을 건넸다. "왜? 무슨 일이야?" "이놈의 나라 망하기 일보직전이다." 길드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껏 차지한 마노스 제국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니. 미네르바 통치 시절부터 군사력 중강에만 신경을 써서 경제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존망까지 염려해야 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말 상황이 안 좋은 거야?" "경제도 개판에 백성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우릴 의심하고 있어." 등극 축하 파티는 물 건너갔다. 베히모스는 노벨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길드에 운영 자금이 얼마 남았지?" "거대 키메라를 제조하고 이천만 골드 정도 남았어. 여우사냥에 참가한 길드원들에게 우선적으로 보상을 줄 예정이야." 스텟이 한 달 동안 20% 하락하는 패널티를 받은 자들 이다. 그 정도의 보상은 해 줘야 한다. 하지만 발등의 불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일단 뒷전으로 미뤄. 이대로 두면 반란이나 민란이 일어날지 몰라! 당장 돈을 풀어서라도 백성들의 호감을 사야 해." "하지만 그럼 길드원들이 반발할 텐데……." "그들에게는 나중에 배로 보상해 주면 돼." 그렇게 결정하고 돈을 풀었지만 결괴는 신통치 않았다. 민심이 겨우 3점 을랐다. 2,000만 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제국의 규모로 볼 때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그리고 민심 외에도 다른 영역을 회복시키는 데도 돈은 필요했다. 치안을 확립하고, 경제를 살리고, 기술을 발전 시키는 데도 돈이 들었다. 한 나라의 운영이라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아아! 어디 돈 나오는 구멍 없나?" 베히모스가 이마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잠자코 베히모스의 통치를 지켜보던 아벨이 입을 열었다. "폐하, 돈이 필요하십니까? 소신에게 돈을 갈퀴로 끌어 모읕 수 있는 방법이 있사온데." "뭐냐? 당장 말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히모스가 고힘을 질렀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리. 아벨은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고,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원들은 감탄사를 터트리게 되었다. "좋아! 당장 시행하도록!" 베히모스의 명령에 아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을랐다. NPC라고 하기 힘든 싸늘한 그 미소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원 대란 자원 대란 1 아버지의 엄포로 유한은 사흘 후에야 간신히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다. <아트페디아 대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게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유한의 눈앞에 한적한 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번에 엘프의 숲에 들렀다가 지그 철공소로 돌아가던 중 종료해서 그리되었다. 퀘스트를 같이 했던 동료들은 제각기 플레이를 하기 위해 흩어진 모양이고, 블랙은 귓속말로 연락을 해 보니 먼저 철공소에 당도해 있었다. "이런, 의리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유한은 짐마차를 타고 철공소로 향했다. 그런데 게임 내의 분위기가 묘했다. 마치 무슨 큰 사건 이 벌어진 듯 유저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웅성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나중에 리지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가 케이트 산맥에 도착하자 철공소 주변에 모여 있던 유저들이 파도같이 몰려들었다. "우아, 지그 님이다!" "지그 님! 뇌제로 변신해 봐요!" "버츄얼 에이지의 리포터 미루입니다. 뇌제가 되면 어떤 능력이 생기죠?" 보통 때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유한에게 달려들어 뇌제의 홀을 보여 달라거나 뇌계로 변신해 보라고 난리였다. 사이버 캐릭터 미루는 유한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인터뷰를 요구하기도 했다. 저번처럼 유한이 나타나기를 진을 치고 기다렸던 모양. 그러나 유한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가 일언반구 없이 인파의 물결을 뚫고 철공소로 다가 오자 입구에 서 있던 블랙이 점잖게 타일렀다. "다들 오래 기다렸는데 한 번 보여 주지 그래?" "냉정하군, 후손." "냉정해야지. 저 많은 사람 중에 뇌제의 홀을 노리는 암흑의 무리가 있으면 어떻게 해?" "음, 확실히 그건 그렇군." 유한이 대충 꾸며댄 변명이 수긍이 갔던 모양인지,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철공소로 들어오려는 사람은 네가 막아줘" "알았다. 그건 염려하지 마라." 그렇게 군중들을 블랙에게 말겨 버린 유한은 철공소 안으로 들어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인기 많네, 뇌제 양반. 뭐하느라 이제 나타나는 거야?" 철공소 안에 기다리고 있던 리지스가 삐딱한 자세로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긴, 이런저런 일로 5일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가뜩이나 퀘스트니 뭐니 해서 작업에 손을 놓고 있지 않았던가. "미안, 사정이 좀 있었어." "미안한 거 알면 당장 가서 작업을 해. 네가 농땡이 치는 동안 생산 물량이 절반으로 똑 떨어졌으니까." 리지스는 유한을 블랙 아이언 생산 공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선 알세인을 비롯한 NPC 대장장이들이 부지런히 부품을 생산하는 중이었고, 한쪽 구석에선 갈리가 블랙 아이언을 조립하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갈리가 농땡이를 부리지 않았지만, 유한이 만들어야 할 몫의 블랙 아이언 부품은 창고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저기 쌓인 부품들의 몇 배나 되는 고객들의 항의가 내 가슴에 쌓여 있지." "앵? 항의가 들어왔단 말이야?" 지금까지 납품이 늦어진다고 투덜대긴 해도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거대 강칠 병기라는 게 워낙에 많은 재료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라,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게 수긍하던 고객들은 게임 방송에 나온 지그를 보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지그가 뇌제가 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그가 모험을 하는 동안 주문한 블랙 아이언의 생산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짜증이 치민 것이다. "얼른 납품을 해 달라고 보채는 사람들이 늘었어." "알았어. 이제부터 열심히 만들 테니까 걱정 마." 그러나 작업장에 복귀한 유한에게 고객들의 또 다른 요구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블랙 아이언과 구분이 되게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도장을 해 달라는 사람도 있어. 뿔이나 장식 같은 걸 달아 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앞서 납품된 블랙 아이언은 다 블랙과 똑같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구매자가 손을 써서 외양을 바꾸었지만, 많이 불편했던 모양. "만들기도 바쁜데 귀찮은 걸 다 요구하네." "이 바보야, 그게 바로 비즈니스야. 자동차가 한 가지 색깔만 찍어 내는 거 봤어? 자기 게 남 거랑 똑같은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 "알았어. 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공짜는 아니지?" "크크크, 당연하지!" 외양을 바꿔 주는 대신 추가로 돈을 받기로 했다는 리지스다. "아참, 그리고 철 생산량을 좀 더 늘리도록 해." "왜? 나 없는 사이에 조합원이 더 늘었어?" 유한이 의아한듯 물었다. "그게 아니라 뭔가 심상찮은 일이 터질 것 같아서 말이야." "심상찮은 일이라니?" 그가 전혀 모르는 듯하자, 리지스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너 게임은 안 하더라도 정보는 좀 알고 다녀라." "알았어. 노력할게.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벌어졌지. 그것도 이주 대형 사고가. 마노스 제국에서 변란이 벌어진 모양이더라." "변란이라고?" 게임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했더니, 그 때문이었던 것일까. "대체 무슨 변란이래?" "반란이 일어났대. 그거 진압한다고 철십자 길드가 황도를 봉쇄하고 NPC도 막 죽이고 난리도 아니라나 봐." 리지스의 말에 유한은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반란이라니. 철혈의 여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도대체 누가 반린을 일으켰단 말인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쪽지랑 귓속말로 들려오는 정보에 따르면 제국 내 강경파가 그랬다는 말도 있고, 철십자 길드가 반란을 유도했다는 소문도 있어. 아무른 철십자 길드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뒷정리를 한다고 나섰는데 쉽지가 않은가봐." "그래서? 잘못하면 내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거야?" "가능성이 있으니까 준비해 두자는 거야. 너도 알다시 피 전쟁 나면 무구 수요가 폭증하잖아." 그래서 리지스가 지그 철의 생산량을 늘리라고 한 것이 었다. 유한은 무구 생산에서 손을 뗐지만 지그 철강 조합의 길드원들이 대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만든 무구를 팔아 주는 사람은 다름이 아닌 리지스였다. "철십자 길드라면 내전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텐데." 누가 뭐래도 철십자 길드는 아르페디아 최고의 거대 길드다. 자신들이 터 잡고 있는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는 걸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알아? 예전의 우리처럼 뒷 공작을 펼치는 사람이 있을지." 그 덕분에 죽음의 상인이란 영광스럽지 않은 칭호를 받은 유한이다. "야, 리지스. 너 입 조심해. 남들 귀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알았어, 미안." 그녀에게 주의를 준 유한은 곧바로 블랙 아이언 생산을 시작했다. 그동안 게으름 핀 것을 만회해야 하기에 '노력 가' 칭호를 달고 작업에 속도를 높였다. -블랙 아이언의 마력 콘트롤러를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협치 200을 얻었습니다. -블랙 아이언을 조립했습니다. 괜찮은 제품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유한은 블랙 아이언 생산에 몰두하는 한편, 블랙 아이언에 색을 칠하고 장신구를 달 대장장이들을 뽑아서 작업을 맡겼다. 공방에서 완성된 블랙 아이언들은 창고에 보관되거나 영혼이 깃들기 전에 고객이 요구하는 색으로 칠해지고 장식이 달렸다. 이렇게 색다른 블랙 아이언들이 하나둘 납품되자, 고객들의 요구도 보다 다양해졌는데. " "머리에서 발끝까지 순금으로 도금해 달라고?" "응, 따로 금괴까지 잔뜩 보내왔어." "도대체 누가 그런 요구를 한 거야?" "골드맨이라는 유럽 유저인데, 웨스턴 최고의 갑부래." "완전 돈 지랄이군." 유한이 돌아오면서 블랙 아이언의 생산과 납품은 빨라 졌고, 수출(?)도 조금씩 늘어났다. 주문 역시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최근엔 국왕이나 공작 같은 고위 귀족 NPC들 로부터도 주문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줄어든 것도 있었다. 뇌제 출현 이후 지그 철공소에 몰려들었던 유저들이다. "흥을 잃었나 봐. 깜짝 출현한 뇌제가 철공소에 처박혀 잠자코 있기만 하니까." "그럼 세계 정복이라도 할 줄 알았나?" 채린의 말에 유한은 코웃음을 쳤다. 뇌제의 홀은 그에게 있어 가지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다. 전투 직업군이라면 모를까 지그는 생산직의 대장장이 캐릭터가 아닌가. 이미 게임에서 대장장이로 출세한 유한이기에 그와 상관없는 쪽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호기심 때문에 몰려온 유저들을 위해 쇼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뇌제의 홀을 사용할 뜻은 있지만 말이다. "정말 세계 정복 할 생각 없어? 너한테 깨진 베히모스 는 얼마 전에 마노스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고 하던데?" "아아, 그거?" 유한이 작업에 몰두하는 사이, 마노스 제국에 변화가 있었다. 리지스가 은근히 원하던 내전은 터지지 않았고, 반란을 진압했다는 철십자 길드가 계국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베히모스는 황제가 되었다. 유저가 일국의 지배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방송으로부터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베히모스는 버추얼 에이지 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바쁘다는 핑계였지만, 저번에 망신살을 뻗친 동영상을 방송한 데 대한 앙갚음이라는 말도 있었다. 대신 재상이자 수석 궁정 마법사가 된 노벨이 대관식 장면을 공식 홈페이지에 을려 대단한 반향을 샀다. "그런데 지그야, 너 블랙 아이언 만들어야 하지 않아?" "만들어야지." "그런데 왜 오늘은 일반 무구를 만들고 있어?" 채린의 말대로 지금 유한은 개인 작업실에서 무구를 만들고 있었다. 리지스가 보면 펄쩍 뛸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만들고 싶어도 이젠 만들 수가 없어." "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떨어졌거든. 그거 없으면 블랙 아이언을 생산 못해." 그 때문에 오늘 아침부터 유한도 갈리도 손을 놓고 있었다. "재료가 떨어져? 재료는 항상 리지스나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대 줬잖아."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문제가 생겼어." '그걸' 구하기 위해서 사장의 칭호를 가진 리지스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 어느 정도 기반이 닦인 뒤로는 늘 NPC 일꾼들이나 휘하의 상인 유저들을 부려 먹던 그녀 였는데. "대체 그 중요한 재료라는 게 뭐야?" "그게……." 유한이 막 설명하려는 그때, 개인 작업실 문이 덜컹 열리며 송코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예요?" "손님이 찾아왔어. 복장을 보아하니 상인 같던걸." 혹시 블랙 아이언을 주문하러 온 것인가. 지금은 재료가 떨어져서 곤란한데. 어쨌거나 찾아온 손님을 의면할 수는 없는 노룻이라 유한은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2 응접실에는 상인 복장의 NPC가 유한을 기다리고 있었 다. 혹시 홉스인가 했는데 그가 아니었다. 말상에 째진 눈을 가진, 스톤이란 이름의 처음 보는 NPC였다. 스톤은 유한이 응접실로 들어오자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지그 님이십니까?" "그런데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전 카잔 공국에서 온 스톤이라 하는데, 철이나 금속을 주로 거래하는 광물상입니다. 이번에 지그 님을 찾아 븬 것은 제가 가진 광물을 판매하기 위해서입니다." "광물이요? 광물이라면 쓰고 남을 정도로 충분히 있는데요." 유한이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스톤이 철공소 근처에 광산촌을 건설한 뒤로 근방에 대규모 철광산과 구리 광산, 크롬 광산이 들어섰다. 가스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근방의 토지들을 더 사들여 납, 주석, 아연 둥의 광산도 개발히는 중이었다. 이런 광산들에서 생산된 광물들은 대부분 지그 철공소에서 소모되고 남은 것들은 리지스가 3번째로 만든 '리지스 종합 상사' 를 통해 판매되었다. 덕분에 철공소에 광물은 충분히 있었고, 그 밖의 것들은 동업자인 리지스와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구해다 주었다. 그렇기에 유한은 다른 광물 상인으로부터 핑물을 구입 할 이유가 없었다. 간혹 팔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리지스나 골드러시 상인 연합과의 관계를 생각해 거절했다. "저도 지그 철공소가 어떤 곳인지 잘 압니다. 리지스 종합 상사와 골드러시 상인 연합, 그리고 광산왕 가스톤 씨와 동업읕 하고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을 끊은 스톤은 주머니 속에서 네모난 금속괴 룔 하나 꺼내서 유한에게 보여 주었다. 심드렁하던 유한의 눈빛이 단숨에 진지하게 바뀌었다. "에르젠 합금은 쉽게 구할 수 없을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스톤이 꺼낸 것은 에르젠 합금괴였다. 안 그래도 현재 철공소에서 뚝 떨어진 재료가 에르젠이다. 에르젠은 마법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키는 금속. 블랙 아이언의 심장과 마력 컨트를러, 동력 전달 장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로, 그동안 리지스와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납품해 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에르젠 가격이 슬슬 오른다 싶더니 납품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리지스와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입수되는 에르젠을 최우선적으로 유한에게 보내는 데도 그렇게 되었다. "요즘 해의 무역이 빈번하다는 것은 아시지요? 덕분에 에르젠도 가격이 많이 을랐습니다." 관련한 이야기는 유한도 들었다. 다른 대륙의 외국 유저들이 아르페디아의 마법 무구나 아티펙트들을 탐내면서 수출이 늘어났디는 이야기. 수요가 더 늘었는데, 공급이 한정적이면 값은 당연히 오르기 마련. 그리고 자금이 모자라는 이의 손에는 들어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유한에겐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많았다. 리지스 신용 금고에 맡겨 놓은 돈과 철공소 집무실의 금고, 인벤토리에 있는 돈을 모두 합치면 천만 골드는 족히 되었으니까. 지금 에르젠이 떨어져 작업이 일시 중단 되었다고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 오르면 오른 만큼 값을 주고 사면 되는 일이니까. "듣자니 요즘 지그 철공소가 에르젠 수급에 애로 사항 이 많다고 합니다만?" "뭐 애로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요." 말은 그리했지만, 유한은 속으로 상계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긴 물품의 이동과 납품 수량, 가격 둥을 파악하면 상단이나 공방의 운영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저랑 거래하시겠습니까?" 스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한에게 거래와 관련한 창이 떠올랐다. [상인 스톤의 거래】 판매 상품 : 에르젠 합금괴 가격 : 합금괴 하나당 10만 골드 '헉, 10만골드이라고?' 10만 골드라면 유한이 알기로 에르젠 현 시세의 2배다. 에르젠이 희귀해서 비싸다고 하지만 완성된 마법 무구나 아티펙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저 재료인 합금괴가 10만 골드씩 하는 경우는 없었다. "열 개 이상 구입하시면, 구만오천 골드까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게 누구한테 바가지를 씌우려고!' 유한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참았다. NPC 에게 회를 내 봐야 뭐하겠는가. 자신의 입만 아플 뿐이지. "됐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 보세요." "허허, 그러지 마시고.……." 스톤이 계속 거래를 요청했지만, 유한은 모두 거절했다. 다급한 상황은 아니니, 좀 더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럼 리지스와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에르젠을 다시 공급해 줄테니까. 유한의 거듭된 거절에 실망했는지, 스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시면 저희 '미네랄 상회'로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남바린 영지에 지점이 있으니 그쪽을 이용하십시오." NPC 스톤이 나가자 유한은 블랙 아이언 공방으로 향했다. 유한과 갈리가 손을 놓았다고 하지만 공방은 여전히 돌아가는 중이다. 에르젠이 필요한 부품들은 만들지 못하지만 뼈대라든가 장갑 같은 부품들을 생산히는 데는 차질이 없었다. 유한은 알세인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의 작업을 지도하고 있는 갈리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지요." "뭘 말이냐? 뭐든지 물어보거라." "혹시 에르젠 합금 만드는 법을 아세요?" 유한의 물음에 갈리는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 해도 자신만만하던 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제가 듣기로 실력 좋은 대장장이들은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고 있다고 하던데, 드워프인 스승님도 알고 계시지 않나 해서요." "어흠, 그게……." "메카 드래곤도 만드는 실력을 가진 스승님이시니 에르젠 합금 기술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 때문에 유한은 갈리에게 달려온 것이다. 드워프는 인간보다 기술이 뛰어나니까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갈리가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고 있다면. 현 상황을 타계할 수 있다. "그, 그게 난 제조 방면 특기라서 말이다. 소재 방면은 아무래도 조금 뒤쳐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에르젠 합금 기술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이놈아, 그거 알면 내가 이렇게 손 놓고 있겠냐?" 유한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를렸다. 드워프라고 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 었다. 갈리는 에르젠 합금 기술을 모르고 있었다. "그건 합금술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 기술이야. 드워프 중에 그걸 알고 있는 자들은 부족의 고위층 인사 정도지." "그래요?" 유저의 경우는 합금 3랭크가 되면 퀘스트를 통해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힐 수 있다. 그러나 그 퀘스트라는 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공략 사이트의 정보에 따르면, 진행 상황이나 친밀도에 따라 수행 과제가 들쑥날쑥하게 변한다고 한다. 거기다 워낙에 어렵고 까다롭다 보니 열에 다섯은 하기도 전에 포기해 버린다 하고, 퀘스트 진행 중에 그만두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덕분에 현재 아르페디아에서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고 있는 유저는 극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소문에 따르면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도 구하기 만만찮은 모양.. 그래서 거래되는 에르젠들도 대부분 몬스터가 드랍한 것들이다. "아무튼 드워프들도 제조법은 알고 있다 이거네요." "그렇지." "그럼 어떻게 노스아크에서 에르젠을 구입할 방법이 없을까요?" "무리야. 에르젠은 중요 물자라서 철저하게 관리되고있다. 대의 판매는 엄금인데다가 밀수하다 들키면 그냥!" 갈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유한은 드워프들에게서 에르젠 을 구입할 생각을 접었다. 간신히 드워프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바했는데 에르젠 좀 얻겠다고 다시 악연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일단은 리지스 녀석을 기다려 봐야겠군.' 그렇게 결정했지만 유한은 마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공식 홈페이지와 공략 사이트의 게시판마다 지그 철공소에서 에르젠을 매입한다고 광고 글을 을렸다. 그러는 사이 리지스가 돌아왔다. 유한은 한달음에 달려 나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수고했어. 에르젠은?" "구해 가지고 왔어." 리지스가 작은 나무 상자에 고이 담겨 있는 에르젠 괴들을 보여 주었다. 저 정도면 블랙 아이언 5대 분의 심장과 마나 콘트를러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가격은 개당 십이 만 골드야." "뭐어!" 유한은 그 자리서 펄적 뛰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리지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하루가 다르게 에르젠 시세가 오르고 있으니까." "수출 때문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수출로 인해 에르젠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한다 해도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리지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배후 세력이 있는 것 같아.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군소 상단들이 한꺼번에 움직여 에르젠을 사들였거든. 누군가 사재기를 부추긴 세력이 있는 모양이야." 항상 그렇게 자기네 이득만 보겠다고 시장에 깽판을 놓 는 세력들이 있다. 리지스는 물론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 서도 배후 세력을 캐는 중이지만, 아직 알아낸 것은 없다고. "아무튼 그나마 싼 곳을 찾던 중에 발리안한테서 에르젠을 매입했어." "뭐? 그 인간한테서?" 유한의 눈이 둥그레졌다. "발리안은 에르젠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 '그 작자가 에르젠 합금 기술을?' 사실 발리안이 익히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는 귀련과 더불어 아트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아 아닌가. 피 토하는 퀘스트를 돈질로 해결했는지, 아님 실력으로 돌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재 발리안의 철공소는 재건되었고, 그가 만드 는 거대 병기인 레기온도 차질 없이 생산되고 있단다. 거기다 부수적으로 에르젠 판매에 나서 고수입을 을리고 있다고. "지그 너도 이참에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혀. 조건은 충분히 되지 않아?" "조건이야 충분히 되지. 하지만 익히는 게 쉽지 않다고."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기 위해선 힘든 퀘스트를 수행 해야 한다.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럼 자연히 블랙 아이언 생산에 소홀해지게 된다. '하지만 계속 중요 재료를 외부로부터 도입만 해선 안 돼.' 그것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상황으로 알았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떻게든지 말이다. 3 며칠 후, 유한은 오랜만에 남바린 영지에 나왔다. 리지스가 준 에르젠이 다 떨어져 미네랄 상회에서 구입하기 위해서 였다. 리지스에게 에르젠을 넘겨받고 나서 그는 여러 곳을 돌 아보며 에르젠 시세를 알아보았다. 어느 순간 껑충 뛰어오른 에르젠의 시세는 12∼15만 골드 사이. 어디를 봐도 미네랄 상회가 제시한 가격보다 비쌌다. 골드러시 상인 연합조차도 12만 골드 이하로는 넘겨주기 어렵다고 할 정도다. "여기가 미네랄 상회의 남바린 지점인가." 유한은 미네랄 상회의 지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건물의 외양은 화려하긴 하지만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히려 유한의 철공소 쪽이 더 품위가 있어 보일 정도였다. "실례합니다." 유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원으로 보이는 NPC가 넘죽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에르젠을 좀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그러십니까? 그럼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지점장님을 불러 오겠습니다." 점원은 유한이 꽤 큰 거래를 하러 온 고객임을 확인하곤, 즉각 지점장을 찾으러 사라졌다. 잠시 후 지점장이 나왔다. '코렐' 이라는 이름의 지점장은 NPC가 아닌 유저였다. NPC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유한도 초보 시절엔 NPC 대장장이 파부치 밑에서 일했으니까. 코렐은 인상이 너무 안 좋았다. 매부리코에 압삽한 눈빛을 한 것이 상인이라기보다 사기꾼처럼 보였다. "에르젠을 사러 오셨다고요?" "케이트 산맥에서 철공소를 하고 있는 지그라고 합니다." 유한의 소개에 지점장 코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마치 맛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과도 같이. "저희가 가진 에르젠 합금괴가 삼십 개 정도입니다만" "모두 파십시오." "그럼 가격이…… 육백만 골드로군요." "뭐라고요?"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톤이 말한 10만 골드거나 그것보다 조금 더 비쌀 거라 생각했기에 그 2배나 되는 가격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번에 스톤이란 NPC가 왔을 땐 개당 십만에 팔겠다고 했다고요!" "그거야 저번엔 그랬겠지만…… 최근에 여러 곳에서 매입을 원하고 있어 괴 한 개당 이십만 골드에 팔기로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저번이라고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2배나 더 올리다니 더구나 20만 골드면 블랙 아이언 1기 가격의 절반에 가까운 액수였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었다.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유한이 항의하자 코렐은 매몰차게 말했다. "뭐 싫으시면 말고요. 저희도 팔곳은 많으니까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왜 그리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지그 님이 손해 볼 일도 아니잖습니까? 다른 대장장이들처럼 지그 님도 생산한 마법 무구나 골렘을 더 비싸게 팔면 되는 일 아닙니까?" 사실 코렐의 말대로 해도 유한이 손해 볼 것은 없다. 기존에 50만 골드에 판매하던 블랙 아이언을 에르젠이 오른 만큼 을려 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가격을 을리면 금전적인 손해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뢰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갑자기 가격이 오르면 고객은 불만을 쏟아 낼 것이다. 이리저리 흉을 잡는 사람도 나을 것이고, 그리되면 블랙 아이언과 지그 철공소의 평판이 떨어진다. 거기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가진 발리안에게 뒤지게 될 것은 뻔한 일. "어쩌겠습니까? 사시겠습니까?" "그만두겠습니다." 유한은 곧바로 미네랄 상회의 지부틀 박차고 나가 버렸다. 거래가 깨지자 점원 NPC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지부장인 코텔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딴 데도 마찬가지다, 멍청아. 어디 실컷 고생을 해 보시지." 미네랄 상회 지부를 나온 유한은 다른 상회들로부터 에르젠을 매입하려 했다. 그러나 시중에 깔린 에르젠의 물량은 적었고 다들 턱없는 가격에 거래하려고 들었다. 심지어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아니. 저 사람한테는 십오만 골드에 팔았으면서 난 왜 이십만 골드를 받겠다는 겁니까?" "그거야 지그 님은 부자니까 그렇죠." 노골적으로 유한에게만 가격을 높여 부르는 상인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간 유한이 잘나가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파서인지. 이렇게 빈정거리는 치들도 있었다. "님 뇌제라면서요. 필드 나가서 광랩하며 에르젠 구해 보세요." "맞아, 그럼 돈 안 들고 좋겠네." 유한은 번갯불로 볶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별다른 소득 없이 철공소로 들아와야 했다. 그런 데 그가 나간 사이 철공소에 반가운 손님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지그. 그동안 잘 지냈니?" 유한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중무장의 여기사를 보고 반색했다. "귀련 누나!" "바보녀석.지금은파우린이야." 귀련이든 파우린이든 상관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왔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동안 뭐하셨어요?" "자칼 씨랑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유적을 발견하고 레벨을 올렸어." 파우린의 뒤에 서 있던 자칼이 씨익 웃어 주었다. 한동안 게임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파우린과 같이 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의 플레이가 행복했던지 그의 인상은 무척 밝았다. "저 녀석은 중간에 만났어.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는데, 요새 해본즈 게이트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 귀련은 자칼의 결에 서 있는 마법사를 가리켰다. 유한은 시커먼 로브를 덮어쓰고 커다란 수정 구술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노는 마법사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스란? 아르페디아 랭커 5위 아스란?" 아크 위저드 아스란.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강의 마법사다. 항상 로브를 덮어 쓰고 다니고 말수도 적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유저였다. 한때 B.O.B길드의 창설 멤버였지만, 톱 10 랭커 안에 들어간 뒤론 활동이 줄어들었다가 아크 위저드 칭호를 얻은 뒤로는 유저들 앞에서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파우린과 함께 유한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인마, 사람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자칼이 아스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자 아스란은 유한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스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지그라고합니다." '여자야? 아니면 어린애야?' 키도 작았고. 목소리도 어중간하게 엣되어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칼이 쥐어박는 걸 보면 나이가 어린 남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자칼은 여자의 머리를 쥐어박는 만행을 저지를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랭커 5위를 만났다는 게 아니다. 현재 유한은 아크 위저드보다 파우린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안 그래도 귀련 누나를 찾아갈까 생각했었어요." "나를? 왜?" 유한은 에르젠 가격 상승으로 생긴 문제들을 파우린에게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파우린은 알 만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 아니 귀련이라면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 고 있다고 생각한 거구나?" "귀련 누나는 아르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잖아요." "그래, 알고 있지. 나도 관련 퀘스트를 수행했었으니까." 유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귀련이 협조만 해 준다면 현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 터. "도와주실 거죠?" "미안하지만 곤란해. 난 요새 일이 바빠서 접속 시간도 많지 않은데다가 그 시간도 전부 파우린을 키우는 데 투자하고 있어서 말이야." 즉 에르젠 합금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럼 에르젠 합금 기술이라도 좀……." "안됐지만, 그건 단지 알려 준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야. 퀘스트를 완수해야 에르젠 제작이 가능한 능력이 생기는 거니까." 하긴 남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기술이었다면, 좀 더 많은 대장장이 유저들이 에르젠을 제조했을 것이다. 힘든 웨스 트를 수행할 필요 없이 말이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돈 주고 에르젠을 사거나 네가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 히는 방법밖에 없지 뭐." 이미 시장에서 쓴맛을 보고 온 유한은 더 이상 돈을 주고 사고 싶지 않았다. 악덕 상인 놈들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유한은 좀 힘들더라도 제조법을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퀘스트가 굉장히 어렵다고 하던데, 어땠어요?" "말도 마. 지금도 그거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올 정도야."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던지 파우린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 정도로 어렵단말인가. 지금까지 몇몇의 대장장이들이 퀘스트를 완수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수행한 정보를 올리지 않았다. 천하의 귀련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상상 이상일 게 틀림없다. "아무튼 해 봐. 어려워도 지그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거 야. 넌 보통 대장장이가 아니니까." "물론이죠." 파우린이, 명장 귀련을 키워 낸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유한도 자신감이 생겼다. 까짓 거해 보는것이다. 무척 어렵다고 하지만 이미 해낸 사람도 존재하는 완수 가능한 퀘스트가아닌가. 할 수 있다.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4 "지그 녀석이 에르젠 합금술을 배우려 한다?" 직원의 보고에 부사장 정경욱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TV 토론회에서 도음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지그가 잘 나가는 꼴은 배 아파서 못 봐주는 그였다. "이 자식 뇌제까지 된 주제에 뭐가 그리 아쉬운 게 있 다고. 돈도 허벌나게 많은 자식이 말이야." "가진 놈이 더하다고 하잖습니까." 정경욱과 직원들은 공식적으로 '드림맥스 사원'의 칭호를 갖고 있었다. 아르페디아 세계를 감시하고 관리하는 절대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집에 가서 개인 아이디로 접속하면 평범 한 유저다. 드림맥스 사원이라고 게임상에서 주어지는 혜택은 전혀 없다. 게임에 있는 수많은 유저들 중에 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난 세상의 평범한 유저들을 위해서 이 녀석을 갈구고 싶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찬성입니다." "저 역시 찬성입니다. 지그 녀석 인생, 아니 게임의 쓴 맛 좀 봐야합니다." 이렇게 쑥덕이는 이들을 보고 옆에 있던 이가 슬쩍 한 마디 날렸다. "사적인 감정으로 게임에 개입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만." 손석진의 말에 정경욱과 여러 직원들은 움찔했다. 확실히 자신들의 행동은 옳지 못한 짓이다. 외부에 자 신들의 작당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분명히 비난을 받을 터. 자칫 드림맥스의 평판이 나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얼어붙게 민들었던 손석진이 해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저의 성장을 위해 좀 더 어려운 시련을 던져 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석진의 의견에 누구도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거 좋군. 유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뭐……." "후후후. 보리는 밟을수록 성장하는 법이지요."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두들 사심(?)을 버리고 유저의 성장을 위해 모든 것 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한마음으로 뭉친 그들의 결정으로, 그날 '일부' 퀘스트 의 알고리즘과 조건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에르젠 합금 기술 에르젠 합금 기술 누군가 음모를 꾸미는 것도 모른 채, 유한은 에르젠 합금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부산하게 음직였다. 일단 유한은 베레타 공화국의 수도 페르사로 가서 국립대 연금학과 교수인 NPC 베스킨을 만났다. 그와 친밀도 를 높이면 에르젠 합금 기술을 가진 명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명장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귀련에게서 들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가르쳐 주는 NPC는 3명 있는데, 베스킨은 그중에서 한 사람을 랜덤하게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문제는 베스킨의 소개와 추천장이 없으면 그 기술자들 이 전혀 상대를 해 주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추천장을 얻어 내려면 NPC 베스킨과 친밀도를 높여야 하고, 그를 위해선 베스킨이 좋아히는 아이템을 주거나 그가 시키는 심부름 퀘스트들을 수행해 야했다. "어떻습니까?" "흠,매우 좋군." "그렇죠? 끝내주지요? 이게 바르카스 최고의 농부라는 '칠갑산' 님이 재배하고 숙성시켜 만든 포도주거든요." 유한은 베스킨에게 포도주를 선물로 주었다. 귀련에게서 베스킨이 포도주를 무척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와인 계조의 대가' 칭호를 가진 유저 칠갑산의 와인은 무척 비쌌다. 최고급 와인 1병에 1만 골드나 할 정도로. 그러나 유한은 미래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자, 한 잔 더 드시죠." "고맙네. 예쁜 아가씨가 따라 주었으면 더 맛있었으련만……." 베스킨의 말을 듣고 유한은 울컥했다. NPC 주제에 베스킨은 제법 밝히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유한이 바친 포도주는 귀련이 준 포도주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백포도주는 생선 요리와 잘 어을리지. 자네 그거 아나? 요즘 먼바다에서 잡히는 참다랑어라는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참치 말입니까r "뭐 그렇게도 부르더군. 아무튼 나이를 먹고 보니 식탐이 늘어서 말이야. 이것저것 먹고 싶은것이 많아지더군" 베스킨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한의 앞에 심부름 퀘스트 창이 짠하고 떠을랐다. [베스킨의식도락] -베레타 국립대학 교수 베스킨은 최근 참다랑어 스테이크가 먹고 싶은 모양이다. 원양에 사는 참다랑어는 잡기도 구하기도 힘들다. 그에게 맛있는 참다랑어 한 마리를 구해다 주지 않겠는가? 배스킨과의 호감도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유한은 왠지 찌중이 났지만, 그래도 심부름 퀘스트를 수락했다. 아무래도 곧장 바다로 나가 보아야 할듯. "제가 그 참치란 거 구해 오도록 하지요." "오오, 그래 주겠나?" 베스킨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유한은 속으로 투덜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막 자리를 뜨려는 때, 베스킨의 실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일련의 대장장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교수님, 말씀하신 곳에서 수은 광석을 채취해 왔습니다." "학생들의 레포트 정리를 다 했습니다." "맛보길 원하시던 바다제비집을 구해 왔습니다." 저마다 성괴물을 내놓자, 베스킨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이번에는 내 친구에게 편지를 좀 전해 주지 않겠나?" 베스킨은 수은 광석을 채취해 온 유저에게 다른 심부름 퀘스트를 내고, 연이어 다른 대장장이 유저들에게도 심부름 퀘스트들을 던졌다. 가네는 바르카스 왕립 대학에 가서 '연금술의 둥가교환 법칙' 이라는 책을 좀 빌려다 주게. 그리고 자네는 베레타 최고의 요리사였던 불꽃의 달인 길버트의 소재를 좀 알아봐주고……." 유한은 나가다 말고 베스킨을 둘러싼 대장장이들을 멍하니 바라다보았다. 꼴을 보아하니 모두 유한처럼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 려고 온 대장장이들이었다. 베스킨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공개 되어 있었다. 에르젠 값이 워낙 오르다 보니, 힘든 퀘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제조법을 익히려고 나선 모양.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에르젠을 제조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에르젠 가격도 인하될 것이니까. '좀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들었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저 중에 몇 명이 퀘스트를 완수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명장이란 호칭을 얻은 대장장이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에르젠 합금 기술 같은 고급 기술을 모른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귀련도 발리안도 모두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럼 바다로 가 볼까?" 짐마차를 소환한 유한은 곧장 동쪽의 어항(漁港) 빌트론으로 떠났다. 빌트론에서 참다랑어를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2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유한은 청해도에 가본 뒤 오랜만에 대양으로 나왔다. 빌트론에서 참다랑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부 유저들 말로는 참다랑어는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원양 어업이 가능해지면서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잡기 힘들지만 귀족과 부자들이 무척 좋아하는 식재료 라고. 그래서 그들에게 어업 췌스트를 받아들여 참다랑어를 갖다 주면 포상금과 함께 적잖은 경험치를 준다고 했다. 덕분에 구입은 실패했다. 한참 동안 항구를 돌아다녀 봤지만 참다랑어는 눈 씻고 볼 수가 없었다. 에르젠 보다 구하기 힘든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참다랑어를 자주 잡아 봤다는 고레벨 어부를 만날 수 있었다. 유한은 그의 배를 얻어 타고 직접 참다랑어를 잡으러 바다에 니왔다. "여기가 참다랑어 어장이 맞아요?" "예전에 이 좌표 근처에서 잡았죠 어군(漁群)이 이동하지 않았다면 또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워낙에 고기를 잘 잡아 '만선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어부 라셀은 마치 바닷속이 보이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면을 응시했다. 한참 바다를 살펴보던 라셀은 남동쪽을 살피보다가 재 빨리 그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돛 올려! 그물 준비!" 라셀의 고함에 그에게 고용된 NPC 어부들이 부지런히 어구를 준비했다. 어군이 몰린 해역에 당도하자 라셀과 어부들은 서들러 그물을 넓게 펴서 집어 던졌다. "영차! 영차!" 라셀과 어부들은 열심히 그물을 끌어을렸다. 그냥 지켜 . 보기가 지루했던 유한은 달려들어 그들과 함께 그물을 잡아당겼다. 그물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잔뜩 잡혀 올라왔다. "와! 칼이다. 컷틀러스야." "이 상자에는 뭐가 들었을까?" 그물에 걸린 건 물고기만이 아니었다. 바다에 빠진 유저나 NPC들이 남겼을 아이템도 간혹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한은 다른 물고기나 부가 획득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그물에 참다랑어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만 확인했다. 그물에 걸린 참다랑어는 모두 3마리. 유한은 그중에서 라셀의 추천을 받아 가장 맛있어 보이는 녀석을 골랐다. [참다랑어] 길이 : 92cm 무게 :137kg 설명 : 먼바다에 사는 농어목 고둥어과외 터까지 자라며 몽둥하게 생긴 것이 무척 먹음직스럽다. 호화로은 요리에 사용되는 최고급 어종이다. 참다랑어는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힘이 셌다. 인벤토리에 넣자 꽤 큰 자리를 차지했고, 이런 안내 창까지 떴다. -참다랑어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서둘러 베스킨을 찾아가십시오. -중량을 초과했습니다. 이동속도가 30% 떨어집니다. 그나마 게임이기 망정이지 현실이었다면 유한은 참다랑어를 도저히 운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놈이라면 베스킨라빈스지 원지 하는 교수 NPC도 좋아할겁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뭘요. 지그 님이 최고급 작살을 만들어 주신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라셀의 말대로 유한은 공짜로 그의 배를 탄 것이 아니 었다. 니켈 합금강으로 만든 작살을 선사했던 것이다. 아무튼 참다랑어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유한은 서둘러 육지로 돌아와 베스킨을 찾아갔다. 베스킨은 여전히 대장장이 유저들에게 들러싸여 이런 저런 심부름 퀘스트를 내주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유한은 힘들게 들고 온 참다랑어를 건네주었다. "참치갖고왔습니다." "세상에! 이 귀한 걸 정말 구해 온 건가?" 베스킨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이 눈으로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베스킨의 식도락] 퀘스트틀 성공했습니다. 명성이100을랐습니다. 베스킨과의친밀도가20을랐습니다.. 유한은 떠오르는 안내창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베스킨에게 말을 건넸다. "교수님, 이제 에르젠 제조법을 알고 있는 명장을 가르쳐 주시죠." 유한은 이만하면 베스킨이 알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최고급 와인도 와인이지만, 이놈의 참치를 구해 온다고 한 일이 얼마인가. 빌트론 항구까지 가서 샅샅이 뒤지고 다녔고, 최고급 작살을 만들어 라셀에게 선물해 주고 배를 얻어 탔다. 어디 그뿐인가. 같이 먼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기까지 했다. 추천장 하나를 얻으려고 한 퀘스트치고 제법 파란만장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유한의 의사와 관계없이 베스킨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 갈지도 모른다. 투실투실한 참치에 눈이 팔렸던 베스킨은 유한의 말에 즉각 반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렇게 멋진 선물을 줬는데 나도 보답을 해야지." 베스킨은 책상에서 종이를 꺼내 뭔가 끼적이다가 유한에게 건넸다. "이걸 갖고 파르가스를 찾아가게. 그가 자네에게 에르젠 합금 기술을 가르쳐 줄 걸세." -배스킨의 추천장을 받았습니다. 유한이 베스킨의 추천장을 받자 주변의 다른 대장장이 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얻었건만, 웬일인지 유한의 인상이 뒤틀려 있었다. "파르가스요? 설마 아바란 왕국 남쪽에 있는 랑그리아 평원에 사는 파르가스를 말하는 겁니까?" "홈, 자네도 들어 본 모양이군." 유한은 파르가스라는 NPC를 알고 있었다. 그가 단지 에르젠 합금 기술을 알려 주는 3인방 중 하나이기 때문은 아니다. 바츠로 플레이하던 시절, 잠시 랑그리아 평원에서 플레이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에게 찾아가 무구를 수리 받은 적이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세 명 중에 파르가스야!' 유한이 기억하는 파르가스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괴팍 하고 성질 더럽기 짝이 없는 대장장이 NPC였다. 무기 수리를 받으려면 돈 대신 장작 같은 연료와 철광 석이나 가죽 등의 재료들을 줘야 했고, 뭔가 잘못해서 자기 비위를 거스르는 유저에겐 일절 수리를 해 주지 않았다. 거기다 대장장이 NPC 주제에 어찌나 강한지 몬스터나 시비 거는 유저를 두들겨 패 죽일 정도로 힘이 셌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괜찮았다. 파르가스가 정말 곤란한 점은 '떠돌이'라는 것이다. 랑그리아 평원 밖으론 나가지 않지만, 매번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유저를 헛걸음하게 만들곤 했다. "가서 잘해. 파르가스 그 친구는 성격이 무척 깐깐하니까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게." '쩝, 알고 있다고. 성질이 지랄같다는 거.' 랜덤하게 걸린 것치고는 재수 없다고 여기는 유한이었다. 그는 이것이 드림맥스 일동의 수작이라고는 전혀 생각 지 못했다. 지금 자신을 보며 정경욱이 히죽거리고, 손석진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 역시도. 3 유한은 베스킨과 작별하고 랑그리아 평원으로 떠났다. 그로지아 왕국을 쭉 가로질러 가면 나오는 랑그리아 평원은 과거 아바란 왕국과 그로지아 왕국이 전쟁을 하면서 대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였다. 그렇게 설정된 탓에, 이 필드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스켈레톤이나 좀비류의 언데드 몬스터들이 많았다. 덕분에 이 필드에서 노는 유저들의 대부분이 성직자들과 네크로멘서 계열이었다. "퓨리파이!" "홀리 웨폰!" "물러서지 마! 여기서 밀리면 안 돼!" 유한은 짐마차를 타고 가까운 곳에서 한창 사냥 중인 성직자 파티에 다가갔다. "말 좀 묻겠습니다." "뭡니까? 얼른 물어요. 우리 지금 바쁘니까!" 어찌나 사냥에 바쁜지, 그들은 유한의 일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파르가스가 현재 어디 있는지 아세요?" "파르가스? 무기 수리해 주는 NPC 말이죠?" 성직자 유저 하나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비를 메이스로 두들겨 패 버리곤 응답했다. 그는 땅속에서 불쑥 뒤어 나와 발목을 붙드는 스켈레론의 머리를 지그시 밟아 버리며 말을 이었다. "파르가스 그 깡패는 요즘 무너진 요새에 살고 있어요. 여기서 서북쪽으로 이십 킬로쯤 가다 보면 나오죠." 혹시 유저들도 모를 정도로 행방이 묘연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님도 그 깡패한테 볼일 있어요? 얼마 전에도 대장장이 유저 몇이 파르가스가 어디 있는지 찾던데." "아, 그냥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유한의 대꾸에 성직자 유저는 한참 언데드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뛰어가며 말했다. "그럼, 원하시는 바를 이루길 바랄게요." "님도 수고하세요." 유한은 성직자 유저와의 대화로 자신보다 앞서 간 이들이 있음을 알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파르가스의 거처로 말을 몰았다. 멈춰 있으면 근방에서 언데드 몬스터들이 우르르 물려 오거니와 파르가스가 또 어디로 가 버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직자 파티와 해어지고 서북쪽으로 얼마쯤 가다 보니 반쯤 무너진 요새가 보였다. 을씨넌스런 요새에 강하고 짧은 망치 소리가 연달아 을려 퍼지고 있었다. 망치 소리를 따라가 보니 간이 대장간과 그곳에서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NPC를 볼 수 있 었다. 랑그리아 평원의 떠돌이 대장장이 파르가스. 산적같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그는 2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갖고 있었다. 조폭도 두려워할 흉악한 인상에는 온갖 흉터들이 가득했다. "실례합니다." "네놈은 뭐야? 설마 대장장이 주제에 나더러 수리해 달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소리를 내밸으면 들고 있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갈길 것만 같았다. 그 흉폭한 기세에 잠시 입을 닫았던 유한은 베스킨의 추천장을 보여 주며 공손하게 말문을 열었다. "베스킨 님께 파르가스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단한 명인이시고, 에르젠 합금 기술도 알고 계신다 고하던데……." "이런 젠장! 네놈도 그 때문에 찾아온 거냐?" 파르가스는 유한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벌컥 짜증을 냈다. 밀하는 것을 보면 역시 다른 대장장이들이 먼저 찾아왔 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는지,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시달릴 줄 알았다면. 드워프 놈들에게 기술을 훔쳐 내지 않는 건데!" '이 자식 산업 스파이였군.' 어찐지 생긴 게 범죄형이다 싶었다. 혹시 파트가스가 이런 황량한 곳에 살고 있는 이유도 드워프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파르가스로부터 에르젠 제조법 퀘스트를 받는 일이다. 유한은 파르가스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입을 꾹 다 물고 있었다. 괜히 대꾸했다간 불똥이 튄다는 걸 과거에 경험했었다. "어이. 너! 이름이 뭐야?" "지그라고 합니다." "지그? 요새 블랙 아이언이란 장난감을 만들어서 비싸게 팔아먹는다는 잡놈이 너였나?" '아놔, 꼭 말을 해도!' NPC에게 잡놈 소리를 들으니 화가 난 유한은 파르가스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파르가스도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아? 안 맞아?" "예! 제가 그 잡놈 맞습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울 때까지는 져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려는 이유가 뭐야?" "그게 말이죠……." 유한은 에르젠이 블랙 아이언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소재며, 요즘 값이 많이 을랐기에 직접 제조법을 익히기로 했다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조건은 돼? 난 합금 기술 낮은 놈들에겐 안 가르쳐 주는데." "합금 스킬은 2랭크까지 을렸습니다." "그래? 하긴 이름 꽤나 날리는 녀석이니 그 정도 되는 건 당연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파르가스는 좀 전까지 두들기던 쇠를 화로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알겠지만, 나랑 에르젠 제조법을 알고 있는 다른 두 놈은 아무에게나 기술을 알려주지 않아. 기술은 바른 의지를 가진 사람이 배워야 세상에 유익하게 사용되는 법이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술을 알려 주기 전에 네놈을 시험할 거다. 네가 바른 의지를 가졌는지 알아보려는 것이고, 그게 없으면 심어 주려는 이유에서지." 거기까지 말한 파르가스는 엄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유한을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내 시힘은 무척 힘들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한 녀석에게는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아. 그래도 내 시힘을 받아들이겠나?" 파르가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한의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을랐다. [파르가스의 시험] -대장장이 파르가스에게 에르젠 합금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선 혹독한 시힘을 거쳐야 한다. 모두 5단계의 수행을 완수하면 파르가스의 인정을 받고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힐 수 있다. 최고의 합금을 만들기 위해 파르가스의 시험에 도전해 보지 안겠는가? *5단계 수행 1 단계. 위론 숲에서 송진 채취. 2 단계. 원소 합성로 제작. 3 단계. 최상급 순도의 은괴 생산. 4 단계. 불, 물, 바람, 빛의 5대 원소 광석 습득. 5 단계. 에르젠 합금 제조. * 이 퀘스트는 중도에 포기하면 다시 수행할 수 없습니다. * 상황에 따라 수행 조건이 다소 달라질 수 있습니다. * 퀘스트를 완수하면 에르젠을 재조할 수 있게 됩니다. '뭐가 이리많아!' 귀련 누님에게 듣기론 3가지 정도를 수행했다고 한다. 귀련이 퀘스트를 했을 때와 상황이 다르거나 파르가스와 친밀도가 안 좋은 것일까? 하지만 베스킨을 찾아가 다른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룻. "파르가스 님의 시험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유한이 퀘스트를 수락하차 파르가스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고덕였다. "하하핫! 생긴 것과 달리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중간에 그만두면 영영 에르젠 힘금 기술을 익힐 수 없다.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될 퀘스트였다. '헹, 포기할 리가 없잖아!' 한 번 결심하면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때려잡는다. 이것이 바츠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는 유한의 굳은 의지였다. 4 유한이 퀘스트를 수락하자, 파르가스는 5단계의 수행 중에 가장 첫 번째인 송진 채취부터 시켰다. "여기서 북쪽으로 사 킬로쯤 가다 보면 위론 숲이 나온다. 거기는 소나무가 많아서 송진을 채취하기 좋지." 송진은 화력이 세서 불의 온도를 높이는 데 유용한 물질이다. 유한이 드워프의 철을 생산하는 데 사용히는 초열탄에도 송진 가루가 들어간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 홀러내리는 송진을 모으면 돼. 어린애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지." 그렇게 말한 파르가스는 작은 나무통 3개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작다고 하지만 찔끔찔끔 흘러내리는 송진을 일일이 받아 모아야 히는 걸 생각하면 통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다. ' 거기다 유한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 통이나 받아 오라고요?" "왜 불만이야?" "보통은 한 통 아닙니까?" 귀련도 한 통을 모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세 통 인 것인가! 상황에 따라 수행 조건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했다. "보통은 한 통이지. 하지만 네놈은 다른 놈들이랑 똑같이 대우를 할 수 없어서 말이야." "왜 똑같이 대우할 수 없다는 겁니까?" 예전에 파부치가 그랬던 때처럼 상성이나 친화도에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너 철공소 운영한다며? 듣자니 물건을 잘 만들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번다며?" "그것과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상관? 상관이야 있지. 다른 놈들보다 재주가 좋으니 더 힘들게 해 주려는 거다. 일을 쉽게 해서는 몰라. 어렵게 해봐야 공부가 되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법이지. 크크크!" 결국은 유한이 돈 잘 버는 게 시샘 나서 3통으로 을렸다는 소리. '아 열 받아!' 유한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옷고 있는 파르가스를 확 쥐어 패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성질을 부리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물거품이 된다. "불만이면 그만뒤. 대륙은 넓고 너 말고도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울 대장장이는 많으니까." "아닙니다, 갔다 오겠습니다." 유한은 이를 뿌득 갈면서 북쪽의 위론 숲으로 떠났다. 숲에 당도해 보니, 먼저 온 대장장이 유저들이 보였다. 모두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유한처럼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파르가스의 시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한도 그들 무리에 끼여 송진 채취에 동참했다. "와! 뇌제다!" "뇌제 지그?" "지그 님도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우려는 건가?" "일단은 대장장이니까." 유저들이 유힌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갈 길이 멀었던 유한은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송진 채취에 열중했다. '이거 쉽긴 한데 좀 귀찮네.' 소나무 껍질을 벗긴다고 송진이 콸콸 홀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홀러내렸다. 그마저도 이내 딱딱하게 굳어 버려 통에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굳어 버린 송진을 긁어내 일일이 통에 담아야 했는데, 참 번거롭고도 따분했다. "그 소나무는 제가 아까 채취해서 송진이 잘 안 나오는데요." "껍질을 좀 더 넓게 벗겨 봐요. 그럼 잘 나와요." 대장장이 유저들이 다가와서 조언을 해 주었다. 일단 완수만 하면 되는 퀘스트였기에 유저들 간에 다투는 일은 없었다. 경쟁을 하기는커녕 아예 끼리끼리 몰려 다니며 잡담을 나누며 지루함을 달랠 정도였다. "지그 님은 뭐가 급해서 그리 분주하십니까?" "보면 모릅니까? 전 님들보다 세 배는 더 모아야 한다고요." 곁에 있던 대장장이의 물음에 유한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하, 파르가스에게 뭐 잘못 보이셨어요?" "잘못 보인 건 없는데, 다만……." 유한은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대장장이 유저를 뒤로 떠밀어 넘어트렸다. "무슨 짓을!" 엉덩방아를 지은 유저가 따지려 들다 입을 다물었다. 좀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살에 실린 힘이 얼마나 셌던지 그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엎드려요! 화살에 맞아 죽기 싫으면!" 화살이 연달아 날아왔다. 유한은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들고 앞을 가렸다. 유한 덕분에 목숨을 건진 대장장이 유저는 개구리 처럼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으악! 몬스터다!" 숲 속 여기저기에서 대장장이 유저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공격해 은 것은 한 무리의 기사들로, 핏물과 때로 지저분한 그로지아 왕국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지아 왕국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한때 그로지아의 기사였던, 언데드 나이트들이었다. -죽여라! 적군을 섬멸하라! -섬멸하라! 그들은 대장장이 유저들을 적군으로 생각했다. 반쯤 썩어 문드러진 군마에 탄 언데드 나이트들은 귀성을 내지르면서 대장장이 유저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석궁을 쏘기도 하고 창이나 검을 휘둘러 대기도 했다. '그래, 순순히 채집만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했었지.' 귀련은 분명 몬스터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했다. 편하게 송진을 채취할 수 있으면 누가 이 퀘스트를 어렵다고 생각하겠는가. -악! 어디서 튀어나온 몹이냐! -아놔, 또 마을에서 뛰어와야겠네. ㅜㅜ 언데드 나이트들에 죽은 유저들이 끼적인 글들이 이곳 저곳에서 떠을랐다. 사실 대장장이 유저들도 채집 중에 몬스터가 덤빌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위론 숲이 한동안 잠잠 해서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공격! 돈 받은 값어치를 하자!" "어떤 놈이 감히 우리 고객을 공격해?" 그나마 몇몇 대장장이들이 고용한 용병 NPC와 전사 유저들 덕분에 일방적인 학살은 피할 수 있었다. 제법 경험이 있는 대장장이들은 유한처럼 무장을 갖추 고 대항하기도 했다. -죽어라! 아바란의졸개야! 계속 방패로 화살을 막아 내던 유한에게 언데드 나이트 하나가 덤벼들었다. 유한은 자신을 찌르는 창을 피하고 펜릴 소드를 꺼내 말의 앞다리를 베었다. 언데드 군마가 다리가 잘려 엎어지자 언데드 나이트도 속절없이 땅바닥에 패대기처졌다. 유한은 재빨리 펜릴 소드를 휘둘러 언데드 나이트의 목숨을끊었다. -경험치 30을 얻었습니다. -약한 몬스터를 물리쳐선 얻는 게 없습니다. 자신과 어울리는 상대와 겨루십시오. 레벨 150대의 언데드 나이트는 레벨 180의 유한의 상대가 아니었다. 덕분에 획득한 경험치는 얼마 안 되었고 아이템 드랍를도 최저인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레벨이 낮다고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언데드 나이트들의 숫자는 많았고, 몬스터 간의 연계 능력이 뛰어났으니까. 유한이 조금만 방심한다 치면 화살을 쏘고 창을 들이밀었고 동료를 위해 방패로 막아 주기도 했다. 지금은 몬스터라지만 생전에 기사들이라는 설정 탓이다. 유한은 포위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교적 나무가 많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갔다. "저러다 당하는 거 아냐?" "설마. 지그 님에겐 뇌제의 홀이 있잖아!" 지금은 변신을 위해 잠시 몸을 피했을 뿐일 터. 몬스터들의 공격을 피해 숨은 대장장이 유저들은 유한이 뇌제가 되어 몬스터를 섬멸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에 벌어진 광경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필살! 소나무 쓰러트리기!" 와찌끈! 쿵! 유한의 외침과 함께 커다란 소나무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언데드 나이트들은 피하려 했지만, 우거진 숲 속에서 운신이 쉽지 않았다. -크악! 적의 함정이다! -이히히힝! 유한에게로 몰려왔던 언데드 나이트들이 쓰러진. 소나무에 깔렸다. 간신히 압사를 면한 녀석들도 소나무 가지에 걸려 낙마하는 둥, 대혼란에 빠졌다. "흥! 너희들 따위는 벌목 스킬로도 충분하다!" 유한은 버둥대는 언데드 나이트들을 처치하면서 작으나마 경험치를 챙겼다. 사실 뇌제의 홉을 사용하면 이나 마도 챙길수 없었으리라. "받아라! 필살 소나무 쓰러트리기! 통나무는 덤이다!" 4랭크에 달한 유한의 벌목 스킬에 웬만한 나무는 일격에 잘려 나갔다. 유한은 계속 벌목 스킬로 소나무를 쓰러트리고, 그 와 중에 획득한 통나무도 굴려 가며 언데드 나이트들을 공격 했다. -크으! 비열한 아바란 놈들! "케엑! 지그 님, 매너요!" 불행하게도 유한의 공격은 유저들에게도 피해가 갔다. 그러나 '필살 소나무 쓰러트리기'에 심취한 유한에게 유저들의 비명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유저와 몬스터가 사이좋게 숲 속에서 우왕좌왕 뛰어다녀야했다. -후퇴! 전군 후퇴하라! 상식을 넘어선 이 같은 공격에 견딜 수가 없었던 언데드 나이트들은 후퇴를 외치더니 이내 필드에서 사라져 버렸다. "뭐 저런 캐릭터가 다 있냐?" "나무꾼도 아닌데, 도끼질 한 방에 아름드리나무가 그냥…." 유저들은 유한이 단지 운이 좋아서 뇌제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자신들괴는 다른 플레이를 했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았기에 지그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벌목 스킬을 을려 볼까?" "아서라. 그냥 올린다고 되겠냐?" 유저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유한은 다시 송진 채취를 시작했다. 자신이 채취할 양은 다른 사람의 3배. 얼른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혀서 블랙 아이언 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하기에 미적거릴 틈은 없었다. 그렇게 송진을 모으고 있을 때, "지그 님, 좀 전에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그럼 제가 데이트 해 드릴 게요" 여성 유저 한 명이 유한에게 다가와 살살 꼬리를 쳤다. 꽤 예쁘장하게 생긴 대장장이 소녀였지만 마음속에 채린이 가득한 유한의 눈엔 그녀가 들어오지 않았다. "저 바쁩니다." "에이, 그러지 말구요." 눈치가 빠른 소녀는 자신의 통에서 송진을 꺼내 유한의 통에 부었다. 그 양이 적지 않아 통 하나가 금방 차 버렸다. 순간 유한의 마음이 너그럽게 바뀌었다. "험, 사실은 말이죠. 데보라의 던전에서 마땅한 공격 스킬이 없어 개고생을하다가……." 유한이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다른 대장장 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대장장이 지그의 행적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캐릭터를 어떻게 키웠는지는 빠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입을 여니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막가 보자는 생각에 장작 패기 스킬을 썼더니 우드 골렘이 부서지더라고요. 혹시 해서 벌목 스킬도 써보니 유효하더군요." "오오, 생산 스킬을 그런 용도로도 쓸 수가!" "하지만 제가 했을 때는 안 되던데요?" 과거 지그 동영상을 보고 따라했던 어느 대장장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건 아무 데나 찍어선 안 되고 약점을 노려서 공격해야 돼요. 우드 골렘 같은 경우엔 다리부터 작살내면 쉽게 처리할수있죠." "오호!" "그리고 나무를 자를 때는 요령이 있어요. 그냥 힘으로 하려 들지 말고 이렇게 나무에 난 결을 따라……." 유한은 유저들에게 나무 자르는 요령을 알려 주었다. 그는 대장간 때부터 자기가 쓸 연료는 직접 채집했기에 벌목도, 장작 패기도 랭크가 높았고, 또 '나무를 잘 자르는' 요령도 알고 있었다. 유한이 소나무에 펜릴 소드를 몇 차례 가볍게 휘두르자 나무는 밑동에서부터 잘려 스르르 넘어갔다. "참 쉽죠? 여러분도 한번 해 보세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유한이 둥을 돌리자 유저들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들려주세요." "장작 패기만 있었던 거 아니죠? 다른 것도 있죠?" 유저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쳐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지금 유한이 무엇을 원히는지 알고 있던 그들은 자신의 통에서 송진을 조금씩 꺼내 유한의 통에 담아주었다. 여러 명이 건네준 송진이 묵직한 덩어리가 된 것을 보 고 유한의 머릿속 전구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실은 제가 채굴 스킬도 좀 익혔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유저들은 더 모여들었고, 송진도 더 많이 모였다. 유한은 가만히 앉아 입을 놀리는 것으로 3개의 통을 다 채웠다. 생산 스킬의 비밀을 송진과 맞바꾼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래인 스킬이 있으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했다가는 이를 알려 달라는 유 저들에게 밤낮으로 시달릴 게 뻔했으니. 그렇게 유한은 지루한 첫 번째 수행을 예상보다 빠르게 종료할 수있었다. 험난한 퀘스트 험난한 퀘스트 "벌써 다 했다고?" 파르가스는 유한이 내놓은 통 3개를 보았다. 모두 송진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혹시 밑에는 다른 것을 담고 눈속임을 한 게 아닌가 싶어 뒤적여 봤지만 부정은 찾을 수없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금방 모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송진을 일일이 긁어 채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몬스터도 곧잘 나타나는 위론 숲에서 채집에만 신경 쓰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지그라는 녀석은 다른 놈들이 1통을 채워 오기도 전에 3통을 채워서 보란 듯이 돌아와 버렸다. 그렇다는 말은……. "이 자식, 이거 누구 걸 홈쳤어? 바른대로 말해!" "훔치긴 누가 홈쳐요! 사람 모함하지 말라고요!" 파르가스가 멱살을 잡자 유한은 그의 손을 뿌리치곤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파르가스 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좀 잘난 놈이란 거 말입니다. 생각보다 통 세 개 채우는 거 안 어렵던데요?" 모험담을 말해 주고다른 유저들에게서 얻어 왔다고 하면 어떤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유한은 끝까지 진실을 감추고 결과만을 내세웠다. "흥! 이럴 줄 알았으면 열 통쯤 줄 걸 그랬군." '이런 사악한 NPC같으니!' 투덜거리긴 했지만 파르가스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다음 수행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원소 합성로의 제작이다. 이건 만만하지 않으니 제대로 각오하도록." 파르가스는 유한에게 1장의 설계도를 건네주었다. 원소 합성로는 에르젠 합금을 만들기 위한 특수 고로였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길쭉한 주전자처럼 생겼고 내부 구조는 만두 찌는 냄비랑 비슷했다. '흠, 만드는 데 별로 어렵진 않겠는걸.' "방금 만드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 유한은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설마 NPC가 정말 자기 마음을 읽었을 리는 없을 터. 그저 그럴 것이라는 추측하에 대사를 내뱉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쇠로 만드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멍청아. 쇠로 만들면 용융점이 높은 에르젠이 만들어지기 전에 합성로부터 녹아 버릴 거다." 그렇게 쏘아붙인 파르가스는 랑그리아 평원이 상세히 표시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원소 합성로를 제작하는 재료가있는곳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엠돈이라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가 나와. 그 불모지에 입자가 고운 찰흙이 무진장 깔려 있는데, 그 찰흙으로 만든 용기는 내화성(耐火性)이 뛰어나서 에르젠 합금에 필요한 고온의 열을 견뎌 내지." 일단 엠든이란 곳에 있는 찰흙을 구해 오는 것이 우선. 유한은 짐마차를 소환해 서둘러 서쪽으로 떠났다. 언데드 몬스터 몇 마리를 해치우며 가다 보니 파르가스의 말대로 불모지가 나왔다. 붉은 불모지에도 몇 명의 대장장이들이 있었는데, 역시 에르젠 관련 퀘스트 때문에 찰흙을 구하러 온 유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과 자세가 뭔가 좀 이상했다. "살려 주세요!" "아니, 이쪽으로 오지는 말고요!" 구해 달라면서 오지는 말라니?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유한은 의아해 하면서도 유저 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얼미쯤 걸어가다 보니 발이 폭 빠졌다. 빠진 발을 들어 올리던 유한은 발목을 휘감는 끈적거림에 깜짝 놀랐다. "어? 이게 뭐야!" 억지로 발을 뽑아 내자, 땅에서 흑갈색의 물질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바로 근방을 뒤덮고 있는 찰흙이었다. "아니, 무슨 찰흙이?" 이렇게 끈기가 있는 것일까. "얼른 물러나요! 우리 꼴 되기 전에!" 대장장이 유저들의 외침에 유한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엎어져서 꼼짝달싹도 못히는 이도 있었고, 허리까지 빠져서 낑낑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끈끈이 풀에 들러붙은 파리들처럼 말이다. 유한은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찰흙 지대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건 쉬웠던 찰흙 지대는 나가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두 발이 당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유한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나 이거야 원. 이건 찰흙이 아니라 찰떡이잖아!" 유한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손으로 살짝 집어 들어 봤더니 껌처럼 쭉 늘어나는 것이었다. 어찌나 점성이 좋은지, 접착제로 써도 괜찮을 듯. "아무튼 일단 빠져나가자."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삽을 하나 꺼내 발이 빠진 자리를 파헤쳤다. 아니, 파헤치려고 했다. 이번엔 땅에 푹 들어간 삽이 꿈쩍 하지 않았다. 억지로 삽을 당겼더니 삽자루가 중간에서 뚝 부러졌다. "아놔! 뭐 이딴 게 다 있어?" 화가 난 유한은 부러진 삽자루로 찰흙을 내리쳤다. 그러나 두들겨 패면 팰수록 찰흙은 더 찰지기만 해질 뿐. 득이 되는 건 없었다. '흥분하지 말고 생각을 해라, 강유한. 분명히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야.' 찰흙의 점성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물을 뿌리면 되는 것이다. 물 때문에 찰흙의 농도가 묽어지면 자연히 점성도 약해질 테니까. "여기 혹시 인벤에 물 갖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내가 먼저 썼지요." 유저들도 바보는 아니다. 방법은 알지만, 수단이 없었기에 계속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여행을 하는데 물도 안 갖고 다녀요?" "그러는 지그 님은요?" 유한 역시 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 현실과 다른 게임이다 보니 물을 충분히 갖고 다녀야 한다는 개념을 갖추지 못했다. 사실 물이야 사막을 빼면 게임 내에 어디든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고. "물 비슷한 거라도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유가 하나 있는데요." "여기 오렌지 쥬스가……." "으윽, 와인 이거 비싼 건데." 몇몇 사람들이 취양에 따라 음료수를 하나둘씩 꺼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포션도 물이잖아요! 몽땅 다 털어 봐요." "아니 포션 그 작은 걸 부어 봤자 얼마나 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몰라요? 전부 나한테 줘 봐요." 지금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사람이 발만 빠진 유한이다. 대장장이들은 그에게 우유와 쥬스. 와인, 포션이 든 병을 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유한은 그것을 모두 받아 발치에 부어 자신을 불들고 있는 찰흙을 묽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찰흙 지옥에 서 탈출했다. "아, 덕분에 잘 빠져 나왔습니다." "설마 혼자 의리 없이 가 버리는 건 아니겠죠?" 대장장이들은 그냥 가 버리면 평생을 저주할 것처럼 유한을 노려보았다. 물론 유한은 홀랑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이름까지 알려진 판국에 비매너 짓을 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걱정 마세요. 곧 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짐마차를 타고 떠났던 유한은 얼마 후 짐마차에 큰 돌을 잔뜩 싣고 돌아왔다. 근처의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나무통에 물도 잔뜩 실어 왔다. 유한은 돌을 찰흙 지대에 던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이른바 징검다리를 만든 셈이다. 찰흙의 점성이 강하기 때문에 돌은 쉽게 아래로 빠지지 않았다. 돌을 밟으며 유저들이 있는 곳까지 간 유한은 물을 뿌려 가며 제일 다급한 상황인 유저부터 구조했다. "자, 이제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찰흙의 점성이 강해서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모두 구조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윙윙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곤충들이 유저들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어? 저 큰 잠자리는 뭐지?" "못 보던 녀석인데." 몬스터인 것은 알지만 저렇게 생긴 녀석은 처음. 그것은 유한도 마찬가지였다. 바츠 때부터 플레이해서 웬만한 몬스터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저런 놈은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유저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나 저거 알아요! 레뮤다 대륙에 산다는 '데빌플라이'라는 몬스터예요!" "데빌플라이?" "아르페디아 대륙의 몬스터가 아니라고요?" 유저뿐만 아니라 몬스터까지 이제 원정 플레이를 한단 말인가. 아니면 누가 일부러 옮겨 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데빌플라이에 대해 아는 유저를 제외하고 모두들 현재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데빌플라이가 어떤 놈인지 알게 되었다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던 놈들 중에 한 마리가 찰흙 지옥에 빠진 유저에게 달려든 것이다. "으악! 사람 살려!" 데빌플라이는 공중에 정지한 상태에서 꼬리의 긴 침을 유저의 몸에 푹 질러 넣었다. 공격당한 유저는 야위어 간다 싶더니 HP 칸이 쭉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라 같은 몰골이 되어 사망 판정을 받았다. "맙소사, 체액을 빨렸어!" "꺄아아악!" 유저 한 명이 죽임당한 걸 보곤, 모두들 어쩔 줄을 몰랐다. 안 그래도 싸움괴는 거리가 있는 대장장이들인 데다가 본 적이 없는 몬스터의 공포스러운 살해 방식은 모두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으악! 수입산 몬스터가 사람 잡는다!" "정신 차려요! 빈틈을 보여선 안 돼!" 그나마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한은 검을 뽑아 들고 연방 주변을 경계했다. 데빌플라이들은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았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 유저에게 빈틈이 생기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침을 찔러 대곤 했다. "이 자식이!" 유한은 자신의 뒤로 몰래 접근한 데빌플라이에게 펜릴 소드를 휘둘렀다. 꼬리가 잘린 데빌플라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버렸다. "흥! 놓칠 줄 알고?" 유한은 왼손을 도망치는 녀석에게 내밀면서 건틀렛 와이어를 쏘았다.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데빌플라이의 몸 통을 뚫고 지나갔다. -경험치 600을 얻었습니다. -레벨 183이 되었습니다. 힘이2 을랐습니다. '호오, 이 녀석들 제법 경험치를 많이 주잖아.' 위론 숲에서 만났던 언데드 나이트들은 레벨이 너무 차이 나서 경험치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크크크. 별로 강하지도 않구먼! 몽땅 다 잡아야지.' 그렇게 히죽대던 유한은 측면에서 데빌플라이가 다가 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대응하기에 너무 늦었다. 한 마리를 가볍게 해치워서 너무 방심한 것이다. '아차!' 데빌플라이가 뻗은 침이 코앞에서 번득였다. 2 탕! 절체절명의 순간, 총성이 엠논 불모지에 울려 퍼졌다. 막 그를 공격하려던 데빌플라이가 푸들거리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총소리?" 유한은 살았다는 것보다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에 더 놀랐다. 총성이 난 곳을 돌아보니, 가죽 재킷에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유저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설마 프로인?' 유한은 예전에 박살 냈던 유럽 최악의 폭탄마가 떠을랐다. 혹시 자신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러 온 게 아닐까. 그러나 프로인이었다면 좀 전에 자신을 살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총으로 자신을 쏘아 버렸을 것. 머리 위의 '카프' 라는 이름을 봐도 그가 프로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펑! 카프는 인벤에서 주둥이가 나팔처럼 벌어진 총을 꺼내 더니 데빌플라이 무리들을 향해 쏘았다. 묵직한 총성이 을리며 서너 마리가 한 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오호, 산탄총인가?' 감탄하던 유한은 카프의 등 뒤에서 데빌플라이가 슬그머니 달려들려는 것을 보았다. "엎드려요!" "……!" 유한의 경고에 카프가 몸을 숙였다. 유한의 손에서 떠난 펜릴 소드가 구원자를 공격하려던 데빌플라이에 푹 꽂혔다. "고밥습니다, 지그 님." "아뇨,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카프의 총격은 계속 이어졌다. 산탄총이 연달아 터지자 견딜 수 없다 여긴 모양인지 남은 데빌플라이들은 등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몬스터들이 멀리 사라지자 카프도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유한에게 반갑게 말을 건네 왔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오랜만이라니, 언제 본 적이 있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유한은 반가운 탄성을 내뱉었다. "아! 파부치 영감 밑에서 함께 일했던!" "이제 생각나시는 모양이네요." 지그의 초보 시절, 같이 대장장이 견습생을 하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던 유저 카프. 그 뒤론 전혀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동안 뭘 하며 지낸 겁니까? 그리고 그 총은 어떻게?" "하하, 이야기를 하려면 좀 길지요." 카프는 유한과 함께 대장장이 유저들을 구조하며 자신이 현재에 이른 과정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파부치 영감 밑에서 나온 뒤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리도 하고 생산도 해주며 랭크를 높였죠."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대장장이 육성기였다. 카프는 실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유한과 같은 수준의 명성은 얻지 못했다. "지그 님이 부러웠어요. 같이 시작했는데 나와 다르게 부쩍 성장하는 걸 보고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느꼈죠." "하하, 그랬습니까?" "그러다가 폭탄마 사건 이후, 기회가 되어서 웨스턴에 탐험 가는 파티에 끼이게 되었어요." 통역 서비스도 지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웨스턴의 대장간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그곳에서 총기 제조와 사격에 관련된 스킬을 익힌 카프는 예전과 다른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건 스미스 칭호를 얻고 완전히 총기 제작자가 되 버렸죠. 아마 저쪽에서 기술을 배워 온 대장장이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건 스미스가 된 데에는 나름 비결이 있을 테지만 유한은 묻지 않았다. 물어봐도 쉽게 가르쳐 줄 리 없고, 건 스미스리는 칭호에도 그리 미련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프 역시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에르젠을 총기 제작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나. "어제 송진 채취를 끝내고 이 근처에 와서 로그아웃 했는데, 오늘 접속하니까 시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달려와 봤더니 지그 님이 이상한 몬스터와 싸우고 있기에……." 그 뒤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카프가 나서지 않았다면, 유한은 물론 다른 대장장이 유저들까지 데빌플라이에 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카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한은 유저들의 구조에 전력을 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찰흙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모두 다 빼낼 수 있었다. "아직 못 빠져나온 사람 없죠?" "지그 님이 오기 전에 기다리다 지쳐 로그아웃한 사람들이 있는데……." "쩝, 그분들의 운명은 팔자에 맡기도록 하죠." 구한답시고 그들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또 무슨 이상한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는가? 유한의 의견에 동의한 대장장이들은 떠나기 전에 찰흙을 수집했다. 또다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찰떡 같은 찰흙을 칼로 조금씩 떼 내어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채집이 끝나자 그들은 미련 없이 찰흙 지옥에서 등을 돌렸다. 유한은 떠나기 전에 후발 주자들을 위해서 선물을 남겼다. 그가 선물로 남기고 간 팻말에는 '찰흙 지옥-접근 금지' 라는 말이 굵게 적혀 있었다. 유한은 여러 대장장이들과 함께 반쯤 무너진 요새로 돌아왔다. 그런데 요새는 텅 비어 있었고 파르가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놔, 이 자식 또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방랑벽을 가진 NPC 파르가스. 유저가 중요 퀘스트를 수행 중임에도 그 점은 변함이 없었다. "흩어져서 찾아보죠." "몬스터가 있으니까 뭉쳐서 다니는 게 좋겠어요." 유한은 카프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예전에 바츠 시절 랑그리아 평원 남쪽에 버려진 신전에 파르가스가 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의 정보는 쓸모가 없었다. 신전에 가 봤지만 파르가스가 없었던 것이다. 낭패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유한에게 누군가의 귓속말이 떠을랐다. -파르가스, 지금 동북쪽의 낡은 오두막에 있어요. 찰흙 지옥에서 구조받은 유저가 은혜를 감기 위해서인지 친절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 서둘러 알려 준 곳에 달려간 유한은 대장장이들을 지도하는 파르가스를 보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하고 내빼면 어떡합니까!" "뭐, 인마. 내가 언제 말해 주고 떠난다는 약속이라도했냐?" 오히려 뻔뻔하게 대꾸하는 파르가스였다. 유한은 한 대 때려 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아직 에르젠 합금 스킬을 익히지 못했다. 분통이 터져도 참아야 했다. '이 거지 같은 퀘스트가 끝나기만 해 봐라. 끝낸 다음엔 그냥!' 유한은 투덜거리며 수집해 온 찰흙을 꺼냈다. 그는 파르가스가 시키는 대로 찰흙에 물을 부은 뒤, 원소 합성로의 형태로 빚어 나갔다. 모양을 다 빚은 다음, 불을 피워 원형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소 합성로는 별게 아니었다. 고온의 열을 견딜 수 있는 찰흙으로 만들고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는 것뿐. 찰흙 지옥에서 땀을 뺐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리고 세 번째 수행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에르젠을 만드는 데는 다섯 가지 원소와 순도 높은 은이 필요하지. 은의 순도에 따라 에르젠 합금의 완성도가 달라지니까 매우 신경을 써야 해." 파르가스의 말에 대장장이들은 흩어져 은광석을 구해 온다, 은을 제련한다며 부산을 떨었다. 유한도 잠시 철공소로 돌아갔다가 필요한 은광석을 갖고 돌아왔다. 그새 파르가스가 이사를 했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파르가스는 그 자리에서 대장장이들을 갈구고 있었다. "야, 이 썩을 놈아! 은에 불순물을 이렇게 많이 남겨 두고 에르젠을 만들겠다고? 다시 제련해!" 파르가스는 웬만하게 은을 제련해서는 받아 주지 않았다. 유한은 초열탄을 사용해 충분한 고열을 만든 다음 은을 제련했다. 그는 한 차례 제련해서 만든 은괴를 살펴보았다. 그냥 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그레인 스킬로 살펴보자 여기저기 가느다란 균열들이 나타났다. 균열이 있다는 건 은과 맞지 않는 성질을 가진 물질이 섞여 있다는 증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해야지.' 유한은 일단 거기까지 하기로 하고 로그아웃했다. 다음 날 학원에서 돌아온 유한은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그런데 망할 파르가스는 그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젠장. 아예 족쇄를 채우든가 해야지." 일단 순도가 높은 은을 완벽하게 제련한 다음 파르가스를 찾기로 했다. 놈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서는 일도 제대로 안 될 테니까. "이번이 열두 번째……." 유한은 12번째로 제련된 은괴를 살펴보았다. 그래인 스킬로 쓸어 봐도 아무런 티가 없는 매우 순수한 은이었다. "좋았어! 이 정도면 그 망할 털보도 딴죽을 못 걸겠지." "그 망할 털보라는 게 나를 말히는 거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한은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파르가스가 서 있었다.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맨 꼴을 보아하니 어딘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모양. 그의 뒤로는 병아리처럼 몇 명의 대장장이 유저들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리 내 봐. 제대로 안 됐으면 망할 털보의 주먹맛을 보여 줄 테니까." 파르가스는 으름장을 내뱉으며 유한의 손에 들려 있던 은괴를 빼앗아갔다. 그는 이리저리 은괴를 살펴보고, 망치로 두들겨 보고, 물통에 넣어서 물이 얼마나 넘치는지 재어 보았다. 그러다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유한에게 은괴를 돌려주었다. "쳇! 합격." "크크크, 그럴 줄 알았습니다." 유한은 구겨진 파르가스를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못마땅한 파르가스의 표정을 보자니 기분이 더 좋았다. "그럴 줄 알았다라…… 역시 네놈에겐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군." 파르가스의 말에 유한은 움찔했다. 혹시 이걸 꼬투리로 잡고 뭔가 이상한 수행을 시키려는 건 아닌지? "예전에도 한 번만에 검사를 통과한 녀석이 있었지. 그 녀석도 너처럼 그럴 줄 알았다고 지껄이더군." "혹시 그 사람의 이름이 귀련 아닙니까?" "맞아. 그 계집애랑 아는 사이냐?" "저랑 친한 누나예요." "그랬나? 미안하다. 내가 널 너무 우습게보았군." "아닙니다. 하하핫." 파르가스가 사과를 하자 유한은 괜히 우쭐해졌다. 그러나 그 우쭐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너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더욱 힘든 수행을 하도록 해주지." "크엑! 그게 어째서 사과하는 의미가 됩니까!"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르가스는 유한에게 자원 표시가 된 지도를 건네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에르젠 합금에 필요한 5대 원소 광물은 이 근방에서도 구할 수 있지. 화염의 속성을 지닌 플레이마, 물의 아쿠아틴, 바람의 에어리, 땅의 테라톤, 마지막으로 빛의 광물 레이디안이다." "그걸 모아 오면 됩니까?" 보통은 그랬지만, 유한은 아니었다. "아니. 그 광물들 중에서도 순도가 높고 성질이 더 우수한 코어 스톤을 찾아 가지고 와라. 너라면 충분히 가지고 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파르가스는 히죽 웃었다. 마치 '찾기 무척 어려울걸?' 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망할 자식!' 유한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나거나 튀게 되면 손해 보는 경우도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2 파르가스에게 광물 지도를 받은 유한은 5대 원소 광물의 코어 스톤을 찾아 헤맸다. 우선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입수하기로 하고, 플레이마가 매장되어 있다는 마스카 산으로 향했다. 마스카 산은 랑그리아 평원 가운데 홀로 우뚝 선 산으로, 오랜 옛날 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산이었다. 그것을 중언이라도 해 주듯, 꼭대기에는 움푹 팬 분화구가 있었다. 이미 순수한 은괴 생산에 성공한 대장장이 몇이 마스카 산의 동굴 속에서 채굴 작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바로 플레이마를 획득하기 위해서. 유한도 열심히 동굴을 돌아다니고, 채굴을 하며 플레이마, 아니 플레이마의 코어 스톤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파도 코어 스톤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간혹 불꽃처럼 붉고 뜨거운 광석이 나오긴 했는데, 그것은 평범한 플레이마였을 뿐이다. "지그 님, 이거 필요 없으신가요? 제가 가져도 되나요?" "아아, 맘대로 하세요." 하루 종일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고도 소득이 없었다. 남 좋은 일만 했을 뿐. 홧김에 곡괭이를 내팽개친 유한은 펄펄 뛰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썅! 내가 신이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걸 갖고 오게!" 유한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드림맥스의 부사장 정경욱과 사원들. 유한을 생고생시키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크크큭, 지그 녀석도 이번엔 별수 없을걸." '그럼요. 산을 아주 뒤집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유한이 포기해 버릴 거라 생각했지만 손석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한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믿었다. 아직 유한은 포기하고 있지 않으니까. "제길, 어두워졌잖아."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램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팟! 램프에 불이 들어오자 유한은 동굴 속을 이리저리 비춰 보면서 계속 앞으로 나갔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간다고 될 일은 아닌데…….' 그냥 동굴 끝에 코어 스톤이 있고, 중간 보스 급 몬스터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그러나 이놈의 게임은, 그리고 퀘스트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골탕 먹이기라도 작정이나 한 것처럼. 아니면 램프의 불도 이리 둘쭉날쭉 타오를 리가 없지 않은가. "응? 불빛이?" 유한은 좀 전에 불꽃이 길게 타을랐던 곳에 다시 램프를 가져다 댔다. 보통 크기로 줄어들었던 램프의 불꽃은 다시 길게 피어을랐다. '설마!' 유한은 불꽃이 길게 피어을랐던 자리를 곡괭이로 파 보았다. 얼마쯤 파 보니 그곳에서 플레이마 광물이 하나 튀어나왔다. 획득한 플레이마 광물을 램프에 가까이 갖다 대자, 램프 불꽃은 훨씬 더 길어졌다. 아니, 불꽃이 플레이마 광물이 있는 곳으로 휘어졌다. '그래! 이 광물은 화염 속성을 띄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불꽃이 광물에 반응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말은? 유한은 램프를 들고 복잡한 동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플레이마 코어 스톤이 있는 곳에선 분명 불꽃이 훨씬 더 강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불꽃이 거세게 피어을랐다. 화르르륵! 유한은 하마터면 램프를 떨어트릴 뻔했다. 램프 유리관에서 피어오른 불꽃에 덴 것이다. 그는 곡괭이 끝에 램프를 매달고 앞으로 계속 나갔다 유리관 밖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방향을 잡아 주었다 "여긴가?" 램프 불꽃이 반응한 동굴의 벽면은 다른 곳에 비해 유달리 따뜻했다. 유한은 곡괭이로 벽면을 파헤쳤다. 딱딱한 벽을 얼마쯤 파 들어가다 보니 루비처럼 붉은 광물이 튀어나왔다. 광물에 손을 댔던 유한은 화들짝 놀랐다. 붉은 광물은 불속에서 금방 끄집어낸 군고구마처럼 뜨거웠다. 유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광물에 손을 대어 광물의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플레이마 코어 스톤] 설명 : 타오르는 불꽃의 기운을 머금은 광석. 보통의 풀레이마보다 훨씬 순도가 높고 성질이 우수하다. 연금술이나 합금 등의 작업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만세! 찾았다!" 힘들게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찾아낸 것도 기뻤지만 코어 스톤을 발견할 방법을 알아낸 것도 큰 소득이었다. '분명 다른 광물도 플레이마와 같은 성질이 있을 거야.' 아쿠아틴은 물에, 에어리는 바람에, 테라톤은 땅. 레이디안은 빛에 반응할 것이다. 유한은 곧장 다음 코어 스톤을 찾아 떠났다. 마스카 산에서 가까운 곳은 에어리가 있다는 타르스 필드였다. 갈대가 무성한 타르스 필드는 바람이 불 때마다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귀곡성이야. 전사자들의 울음소리지." "어째 으스스하다 했더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유저들은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그러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은 타르스 필드에 깔린 에어리 때문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뒤져 보자 구멍이 숭숭 뚫린 못생긴 돌이 뒤어나왔다. 그 못생긴 돌이 바로 에어리였다. '흠, 이 녀석은 바람을 빨아들이는구나.' 바람이 에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에어리 내부에 뚫린 구멍에 바람이 맴돌면서 기이한 울음이 나게 되는 것이다. 힌트를 얻은 유한은 울음소리가 다른 곳보다 강하게 들리는 곳을 찾아가보았다. 갈대숲 한편에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바람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곳이 있었다. 갈대를 베어 내고 땅을 파 보자, 에어리 코어 스톤이 나타났다. "훗, 간단하네. 이제 로비아 숲에 있는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으러 가 볼까?" 유한은 서들러 로비아 숲으로 향했다. 쉽게 코어 스톤을 찾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은 퀘스트를 수락했던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5 드림맥스 7층 게임 관리실은 침을 그 자체였다. 유한이 처음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찾는다고 헤멜 때만 해도 다들 낄낄거리며 좋아했지만, 그가 2개의 코어 스톤을 연달아 획득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다. "지그 자식! 쓸데없을 정도로 예리해 가지고……." "걱정 마십쇼, 부사장님. 레이디안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직원 한 명이 장담했다. 레이디안은 플레이마처럼 불빛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 지금 유한이 하는 것처럼. 램프를 비춰서는 찾아낼 수 없다. "그리고 만에 하나 운이 좋아 찾는다고 해도 레이디안 코어 스톤은 죽었다 깨도 못 찾을 겁니다." 거기다 로비아 숲은 햇볕이 안 드는 음침한 곳답게 강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득실했다. 용병을 호위로 거느리지 않은 대장장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서 죽어 나자빠진다. "지그 녀석이 아무리 싸움 좀 한다고 해도, 레벨 200대의 필드 보스인 안개의 마도사에게 걸리기만 하면……." "근데 저놈은 뇌제잖아." 여차하면 뇌제가 되어 해치우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경욱의 지적이었다. 그의 지적대로 유한은 힘에 부치는 몬스터들이 등장하자 곧장 뇌제로 변신해서 싸웠다. 필드 보스 안개의 마도사는 뇌제 지그가 날린 선더 스피어에 두들겨 맞고 널부러져 버렸다. 뇌제라는 변수를 잠시 잊었던 직원은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기란 불가능……." "그런데 저 자식은 갑자기 왜 저렇게 번개를 남발하는거야?" 주변에 몬스터도 없는데 뇌제 상태의 유한은 계속 번개를 뿌려 댔다. "하루에 한 번밖에 변신할 수 없으니 아까워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한이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렷한 목적이 있었다. 유한이 숲에 번개를 떨어트릴 때마다 숲 속에서 불빛들이 번쩍였다. 뇌전의 기운을 흡수한 레이디안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이디안의 특성을 파악한 유한은 하루에 한 번 뇌제로 변신할 때마다 숲에 번개를 뿌려 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환한 빛을 번득이는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아냈다. "죽었다 깨도 못 찾는다며?" "그, 그게…… 그래도 테라톤 코어 스톤은 절대 획득 불가능할 겁니다" "테라톤이나 테라톤 코어 스톤은 동굴 벽에 노출되어 있잖아. 다른 것들보다 찾기 쉽다고." "그 동굴이 도르고라 동굴이라는 걸 생각하셔야지요." 랑그리아 평원 아래 토굴인 도르고라 동굴엔 아무나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강한 몬스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보다 더 성가신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앗 따거! 제기랄! 이놈의 벌레들!" "크악! 불개미 떼다!" "까아악! 지네야! 지네!" 멋모르고 도르고라 동굴에 들어간 유저들은 쓴맛을 보고 있었다. 덩치 큰 몬스터라면 칼로 푹 찔러 죽이기라도하지만 작은 벌레들은 그렇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이 성가신 벌레들은 레벨 100이 넘었고, 만만찮은 공격력에 흉측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뭔 놈의 퀘스트가 이리 어려워?" "그러게. 내가 듣기로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유저들은 생각보다 어려운 퀘스트에 서로 불만을 터트렸다. '음, 잘하고 있어!' 정경욱은 유저들을 공격하는 벌레들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았다. 어떤 몬스터든 약점이 한 가지씩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독창적인 벌레 대항책을 갖고 들어온 유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유한과 함께 다녀 눈에 익은 카프라는 유저였다. 아르페디아 대륙 출신 대장장이로는 최초로 건 스미스가 된 그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시옹했다. "여긴 벌레가 너무 많네." 인벤토리에서 기름통을 꺼낸 카프는 동굴에 기름을 쭉 뿌리더니 불을 질러 버렸다. 불과 연기에 놀란 벌레들은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 나오지 않았다. 벌레들을 쫓아 버린 카프는 유유히 테라톤을 채굴해서 둥굴을 떠났다. "걱정 마십쇼. 테라톤 코어 스톤은 동굴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기름을 어지간히 퍼붓지 않는 이상 손댈 수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지그 녀석이 동굴에 다가오고 있구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고." 유한도 처음엔 무턱대고 진입했다가 쓴맛을 보고 물러섰다. 한동안 방법을 강구하던 그는 벌떡 일어나 짐마차의 대장간 설비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 자식 도대체 뭘 만드는……." "어! 저, 저건!" 정경욱과 드림맥스 직원들의 눈은 휘둥그래졌고, 손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이 만든 것은 청동으로 만든 체인 메일이었다. 손과 발목까지 뒤덮는 치렁치렁한 체인 메일은 갑옷이라기보다 로브처럼 보였다. 철보다 강도가 약한 구리나 구리 합금으로는 방어구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구리로 방어구를 만들었을 때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벌레를 쫓아 버린다는 것이다. "헷! 갈리 영감 말대로잖아." 청동 체인 메일을 만들기 전, 유한은 처음 합금 스킬을 배을 때 갈리가 들려주었던 말을 떠을렸다. "구리 합금은 더러운 균을 죽이고 벌레를 쫓는 신기한 힘이 있어. 그래서 신전에서 제기로 곧잘 만들어 쓰지." 갈리의 말대로 청동 체인 메일은 제대로 효괴를 발휘했다. 도르고라 동굴의 벌레들은 유한에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몇 마리가 들러붙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청동 체인 메일을 걸치고 도르고라 동굴 끝까지 들어간 유한은 그곳에 있는 테라톤 코어 스톤을 획득했다. "이제 하나 남았군." 마지막으로 획득해야 할 것은 아쿠아틴 코어 스톤. 그러나 유한은 거기서 로그아웃을 한 뒤 캡슐에서 나왔다. "더 하면 내일 강의 시간에 졸지도 모르니까." 게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나중을 생각해야 한다. 모의고사가 얼마 안 남았고 연말에는 수능 시험도 치러야한다. 만약 잘못해서 '재수생' 칭호를 얻게 된다면……. 아니, 그 경우는 생각하기 싫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예전과는 다르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미래도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유한은 오늘의 플레이를 그쯤에서 끝냈다. 지그 합금 상사 지그 합금 상사 1 게임 플레이 시간을 조절한 덕분에 유한은 강의 시간에 졸지 않아도 되었다. 나름 재수생 칭호를 따지 말자고 각오한 까닭인지 몰라도 강의 내용도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강사의 말이 끝나자 유한은 다른 학원 원생들과 마찬가지로 교재를 덮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유한은 버스 안에 걸린 모니터 쪽으로 눈을 옮겼다. 마침 게임과 관련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근 간 선생님을 잊지 못한 초등학생들이 게임 속에서 선생님을 찾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뉴스에 따르면, 서해 낙도(落島)의 분교에 재직하던 선생님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갔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 인자했던 선생님을 몹시 따르던 아이들은 혹시 게임상에서 존재할지 모르는 선생님의 캐릭터를 수배했다고. 이 선생님은 게임에 취미가 없었으나, 지인에게서 제자 들이 게임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캡슐을 마련하고 계정을 만들어 제자들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매일 제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학습 지도에도 도움을 주고 있단다. 예전에 손석진이 말했던 가상현실 게임의 소통 능력으로 인한 흐뭇한 결과었다. '참 좋은 선생님이네.' 유한은 저런 사람이야말로 '스승님' 칭호를 얻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교육 노동자' 수준도 안 되는 교사들을 봐 온 그에게 있어 낙도의 초등학생들이 무척 부러웠다. [게임과 관련한 뉴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게임 내 아이템을 두고 다투던 20대 부부가 급기야 이혼을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좋은 뉴스가 있으면 나쁜 뉴스도 있었다. 남편이 고가의 아이템 A를 획득했는데, 마침 이것이 필요했던 부인이 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남편은 거절하고 아이템을 팔았고, 그 돈을 게임 내 몬스터 경주 시합에 걸었다가 몽땅 다 날렸다. 격분한 부인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남편은 자신의 플레이를 간섭하는 부인을 비난했단다. 결국 안 그래도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부부는 이혼 도장을 찍어 버렸다고 한다. "저거 에르젠이잖아?" 뉴스에 나온 아이템 A의 정체는 에르젠이었다. 방송에서 부부가 한 게임과 아이템의 이름이 나오진 않 았지만, 유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에르젠 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야.' 에르젠이 예전 시세 정도였다면 부부가 저리 다투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부터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다음은 문화계 소식입니다. 업로더들이 신간 스캔본을 돌리는 데 격분한 장르 소설가 강찬 씨가…….] 다음 뉴스가 이어졌지만, 이미 유한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퀘스트를 마저 완수하고 에르젠 제조법을 익히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2 랑그리아 평원 남쪽에는 카마라 해(海)라 불리는 작은 바다가 있었다. 남쪽을 제외하고 육지로 빙 둘러싸인 이 바다의 밑바닥에는 아쿠아틴이 무진장 깔려 있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려는 대장장이 유저들은 해저에 있는 아쿠아틴을 인양하기 위해서 바다에 잠수해 들어갔다. 그러나 카마라 해는 의외로 수심이 깊어 해저에 있는 아쿠아틴을 인양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잠수 스킬에 능한 유저를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 "쌍끌이 어선 같은 걸로 바다 밑바닥을 싹 훑어 버리면……." 그러나 대타를 불러오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언데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랑그리아 평원에는 항구도 없고, 자연히 이곳에서 활동하는 어부나 어선이 전무했다. 거가다 인양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카마라 해로 몰려온 바다의 폭군들 탓이다. 수면에 뾰족한 삼각 지느러미를 내놓고 활개 치는 녀석 들은 바로 레벨 190대의 샤크와 놈들의 두령 격인 필드 보스 죠스. 녀석들은 해안 근처까지 와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덕분에 놈들이 등장한 이후 바다에 들어가려는 유저는 전무했다. "후후후, 이러면 제아무리 지그 녀석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상어 작전을 입안한 직원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정경욱은 고개를 저었다. "민폐야. 다른 유저들의 플레이까지 막고 있잖아." 사실 민폐를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퀘스트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한다. "지그가 퀘스트를 포기하는 즉시 상어들을 다른 바다로 이동시키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지그가 퀘스트를 포기할까? 지금까지 유한이 해 온 것을 봐 온 정경욱으로선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상어라…… 거기다 해저에 있다 이거지?" 카마라 해에 도착한 유한은 유저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어차피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퀘스트. 대장장이 유저들은 그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그들은 명성이 높은 지그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흠, 일단 뇌제로 변신하고……." 뇌제가 된 유한은 한 대장장이가 데려온 용병 NPC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용병 NPC는 방패와 삼지창, 트라이던트를 들고 있었다. "어이, 이봐요. 그 트라이던트를 상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던질 수 있겠어요?" 유한의 물음에 용병 NPC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회의적인 눈빛을 보였다. "지금 놈들이 해안 가까이 있으니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이걸 던진다고 해서 놈들을 쫓아 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는데요." "그래도 일단 던져 보라고요." 용병 NPC는 자신을 고용한 대장장이 쪽을 바라보았다. 물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장 들고 있던 창을 상어 무리 쪽으로 던졌다. 상어들은 해안에서 뭔가 날아오자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그런데 트라이던트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서 무엇인가 번찍 떨어졌다. "선더 스피어!" 번개의 전격은 트라이던트 창대를 타고 바다로 퍼져 나갔다. 트라이던트를 피했다고 안심하고 있던 상어들은 강력한 전격에 휘말려 굉장한 쇼크를 받았다. HP가 뚝 떨어진 상어들은 허연 배를 드러내곤 수면 위로 떠을랐다. 쇼크로 정신을 차리지 듯한 상어들은 파도에 의해 유저 들이 있는 해안으로 밀려왔다. "아직 안 죽었네?" "그럼 죽여야지." "하지만……." 유저들은 유한의 눈치를 보았다. 상어 군단을 잡은 건 그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원래의 지그로 돌아간 유한은 상어 군단의 두령인 죠스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저들에게 흔쾌히 선심을 썼다. "나머지는 님들이 알아서 하세요." 유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저들은 창칼을 뽑아 들고 널부러진 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앗싸! 경험치 챙기자!" "비켜! 저 지느러미는 내 거야!" 상어가 강한 것은 바다에서일 뿐이다. 땅에서는 버둥거려 봤자 속수무책. 상어 군단은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유저들의 손에 난도질을 당했다. -경힘치 6.000을 얻었습니다. -죠스의 지느러미를 얻었습니다. -레밸 190이 되었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행운이 1 올랐습니다 죠스를 처치한 유한은 해저에서 아쿠아틴 코어 스톤을 찾을 방법을 강구했다. 수영이나 잠수 스킬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이상, 물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어렵다는 건 심연의 호수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그때 호수 바닥에 있는 운석을 건진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렇지! 그게 있었지!" 심연의 호수 일을 떠올리던 유한은 손가락을 튕기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인벤 구석에 있는 아이템을 주워 든 유한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네시의 비늘] 설명 : 네시의 아가미를 덮고 있던 비늘. 잠수할 때 이것을 입에 물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심연의 호수의 필드 보스안 네시를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 네시의 비늘. 혹시 쓸 일이 생길지 모른다 생각해서 놔뒀는데 이번에 톡톡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후후후,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물속에서 돌아다닐수 있다는 말씀." 유한은 네시의 비늘을 입에 물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쿠아틴 코어 스톤을 들고 해안으로 올라왔다. 유저들은 한참 동안 잠수를 하고도 멀쩡한 유한을 부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저번에 찰흙 지옥에서 유한을 구해 주었던 카프도 끼여 있었다. '그래, 빚 감는 셈 치자.' 유한은 제 몫을 다한 네시의 비늘을 카프에게 내밀었다. "빌려 줄 테니 쓸래요?" "고맙습니다." 카프가 네시의 비늘을 물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자 유저들이 유한의 팔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지그님, 우리도 좀!" "빌려 주시기만 하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 가려던 유한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번 에르젠 사태로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무정하게 돌아서 버리면 앙심을 품는 사람이 적잖게 나을 것이다. 조그마한 호외를 베풀면 많은 대장장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푼 은혜는 자신에게 득이 되어 돌아을 터. "싸우지 말고 돌아가면서 쓰세요. 다 쓰고 저한테 돌려주는거 잊지 말고요." "고맙습니다!" 기뻐하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보며 유한은 슬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저희 지그 철강 조합에……." 지그 철강 조합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원 보강부터 해야 한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획득하겠다고 달려든 대장장이치고 실력이 낮은 이들은 없다. 그들을 받아들이면 조합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 예상한 유한은 대장장이 유저들을 상대로 스카우트 작업을 벌였다. "저 가입하겠습니다." "정말 스킬 랭크를 을리는 거 도와주시는 거지요?" "지그 님께 도움을 받았는데 저도 도와 드려야죠." 카프를 비롯해 꽤 전도유망한 대장장이 유저들이 지그 철강 조합의 길드원으로 가입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운다고 이리저리 고생한 퀘스트 였지만,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한은 에르젠 합금 기술보다도 더 귀한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3 쾅! 망치를 내리치자 큼지막한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래도 성질이 풀리지 않았는지 파르가스는 조각난 바위를 다시 내리치며 가루로 만들었다. "제기랄! 이런 망할!" 한참 동안 펄펄 뛰던 따르가스는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한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뭐냐? 대체 어찌 된 놈이기에 이렇게 빨리 코어 스톤들을 모아 올 수 있었냐고!" 사실 유한 입장에선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파르가스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유한이 1달, 아니 몇 달은 넘게 고생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넌 대체 정체가 뭐냐고!" "뭐긴요. 지그라는 잡놈입니다." 히죽이며 답한 유한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험하는 대장장이랍니다." 유한의 응담에 파르가스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더니 욕지거리를 마구 늘어놓았다. "이런 빌어먹다 썩을 놈 같으니! 뭐가 어쩌고 어째? 모험하는 대장장이? 젠장!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한참 구시렁거리던 파른가스는 유한에게 책 한 권을 집어 던졌다. 머리를 노려 날렸지만 유한은 능숙하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가져가! 거기 에르젠 합금 기술이 적혀 있다. 그 기술을 익힌다면 너도 에르젠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책을 받은 순간, 유한의 눈앞에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파르가스와 시힘]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경험치 3,000을 얻었습니다. -에르젠 합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기를 든 파르가스는 여전히 약이 올랐는지. 유한에게 망치를 집어 던졌다. 물론, 유한은 망치를 가법게 피해 버렸다. "꺼져! 다신 오지 마! 내 눈에 또 띄면 죽을 줄 알아!" "저도 다시 파르가스 님을 만나고 싶진 않네요. 안녕히 계세요." 파르가스에게서 물러난 유한은 뇌제의 홀을 꺼내 들고 뇌제로 변신했다. 그리고 여전히 투덜거리는 파르가스의 머리 위로 선더 스피어 한 방을 날려 보냈다. "크악! 어떤 놈이야!" 괴물 같은 파르가스는 번개에 직격을 당하고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펄쩍 뛰는 그를 보고 만족한 유한은 재빨리 짐마차를 타고 철공소로 돌아갔다. "어디보자, 에르젠 제조법이라……." 철공소로 돌아온 유한은 개인 작업실에 원소 합성로를 설치하고 에르젠을 생산할 준비를 했다. "합성로 중앙에 은괴를 놓고 주변으로 다섯 가지 원소 광물을 배치하라 이거지?" 파르가스가 건네준 책에 적힌 대로 작업을 진행하던 유한은 파르가스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정보를 책 속에서 발견했다. 바로 코어 스톤에 관한 것이었다. ……원소광물중에 유달리 순도가높고성질이 우수한것을 코어 스톤이라 칭한다. 이것은 식물로 치면 종자와 같은 것으로. 코어 스론을 채굴해 다른곳에 놓아두면, 얼마후 그 자리에 원소 광물이 생성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다른 코어 스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을 생각하면 코어 스톤은 보다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시대에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던 연금술사들은 귀중한 코어 스톤을 헛되게 낭비하고 말았다. 부디 후학들은 황금알을 많이 얻읕 욕심에 거위를 죽이는 짓을 하지 않기를……. 다른 대장장이들이 파르가스에게서 받은 책에서 이 내용을 본다면 곧장 코어 스톤울 찾겠다 나설지도 모른다. 귀한 광물을 농사짓는 것처럼 생산해 낼 수 있다지 않는가. "하마터면 진짜 귀한 걸 날려 버릴 뻔했네." 유한은 코어 스톤으로 에르젠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근방에 코어 스톤을 묻어 두었다. 철공소 제련 공방 근처에는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계곡에는 아쿠아틱 코어 스톤을 묻었고, 나머지 코어 스톤들도 적절한 곳에다가 묻어 두었다. 그리고 코어 스톤을 묻어 둔 곳에는 블랙 아이언을 배치해 함부로 홈쳐 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다음 날, 학원을 갔다 온 유한은 곧장 게임에 접속해 코어 스톤이 묻힌 곳을 파 보았다. 그러자 책에 적힌 대로, 코어 스톤 근처에 있는 몇 개의 돌멩이들이 원소 광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크크, 좋았어! 이걸로 에르젠을 왕창 만들어 내는 거다!" 새로 만들어진 원소 광물들을 가지고 개인 작업실에 돌아온 유한은 곧장 에르젠 합금 제조를 시작했다. 은괴와 원소 광물을 배치하고, 책에 적힌 대로 불의 온도를 조정하고, 시간에 맞춰 원소 합성로를 가열했다가 식히기를 되풀이했다. -에르젠 합금 생산에 실패했습니다.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합금 스킬 경험치10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에르젠 생산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재료가 모이고 설비가 갖춰지면 얼마든지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하긴 쉽게 만들어지면 비싸지도 않겠지.' 유한은 첫 번째 실패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에르젠 합금 생산에 도전했다. -에르젠 재조에 실패했습니다. 냉각 시간을 재대로 맞춰야 합니다. -에르젠이 아닌. 이상한 금속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소 광물의 배치가 틀렸습니다. "카악! 그만 완성 좀 되라고!" 계속 실패를 되풀이하자 유한은 펄쩍 뛰었다. 사실 실패하고 있는 것은 유한뿐만이 아니다. 지그 철공소에 와서 에르젠 합금 생산에 도전하고 있는 카프와 다른 대장장이들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진정해라, 강유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다시 에르젠 합금을 제조했다. 여러 번의 실패 덕분에 유한은 무척 신중하게 되었고, 작업에 대한 집중력도 올라갔다. 사실 연이어 실패했던 것은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기도 했다. 악명 높은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기쁨에 마음가짐이 해이해져 있었던 것. "이번에는꼭!" 유한은 이글거리는 원소 합성로 앞에서 손을 모아 기도 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작업까지 한순간도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았다. 반드시 에르젠이 만들 거라 확신했다. -에르젠 합금을 만들었습니다. 합금 스킬 경힘치 200을 얻었습니다. -에르젠으로 여러 가지 무구와 아티펙트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야호, 드디어 만들었다!" 유한은 자신이 완성한 에르젠 합금괴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제 블랙 아이언을 다시 정상적으로 생산 할 수 있다. 더해서 에르젠 가격만큼 마진을 남길 수 있다. "성공했대요!" "우와! 정말 지그가 에르젠을 만들었어?" "조수가 큰일을 해냈구나!" 유한의 성공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침체되어 있던 블랙 아이언 생산 공방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유한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카프 외 다른 대장장이들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카프도 에르젠 생산에 성공했고, 다른 대장장이들 중에서도 에르젠을 만든 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차 실수가 적어지고 에르젠 생산도 많아지자 유한은 정식으로 에르젠 생산 공방을 열었다. "좋아. 이제 슬슬 반격을 해 볼까?" 에르젠을 생산한 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만든 고마운 녀석들에게 갚아 줘야 할 것이 있었다. "아주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마!" 유한은 에르젠을 독점해서 자원 대란을 일으킨 놈들과 그 배후 세력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4 근래에 아르페디아에서 가장 값이 많이 오른 아이템은 에르젠이다. 원래 시세보다 몇 배 뛰어오른 에르젠은 현재 25∼30만골드 사이에 거래될 정도로 값이 을랐다. 덕분에 에르젠이 들어간 마법 무구와 아티펙트들의 가격도 덩달아 히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고, 에르젠을 매입 하고 판매하는 상단들의 이문도 날로 중가했다. 그 상단들 중에서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곳이 미네랄 상회였다. 그들은 거미줄 같은 매입망을 구축해 발리안 칠공소와 함께 에르젠 시장을 양분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키예프 공국에서 에르젠 추가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상회장님, 후소 대록의 다카미 영주가 에르젠 합금 검 삼십 자루를 주문 요청해 왔습니다." NPC 상인 스톤은 쏟아지는 주문과 돈을 보곤 연방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내수면 내수. 수출이면 수출. 어느 것 하나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장사가 잘되어 가는 모양이네." 카잔 공국에 있는 미네랄 상회 본점에 화려한 차림의 여마법사가 둘어왔다. 그녀를 본 스톤은 한걸음에 달려가 꾸벅허리를 숙였다. "유나 님 오셨습니까?" 유나는 스톤의 인시를 대충 받아 주고 그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거래 장부를 멋대로 살펴보았다. 마치 자신이 미네랄 상회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어디 보자, 이번 주 매상이 칠백팔십이만 골드라…… 나쁘지 않은걸?" "하하하, 이게 모두 베히모스 폐하와 노벨 재상님 덕분이지요." 반역에 성공한 뒤 철십자 길드의 간부들은 마노스 제국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 스톤의 말에 유나의 가느다란 실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베히모스랑 노벨은 고맙고 나는 고말지 않다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유나 님이 제 은인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NPC 스톤은 철이나 구리를 거래하는 그저 핑범한 광물 상인이었다. 그런 그를 유나가 발견해 철십자 길드에 추천해 주었고, 철십자 길드는 그들이 가진 인맥과 정보력, 자금을 동원해 스톤을 지원해 주었다. 스톤이 미네랄 상회를 세우고 에르젠 거래로 성공하게 된 것은 다 그 때문이다. "길드 상납금으로 사백만 골드를 가져가겠어. 그리고 이십만은…… 알지?" "물론입니다. 소인이 유나 님께 드리는 성의 아닙니까?" "호호호, 언제나 고마워." 유나는 슬쩍 떼먹은 20만 골드로 유명 메이커에서 내 놓은 명품 구두를 살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 옷은 새로 맞췄지만, 신발이 코디가 되지 않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가볼게. 장사 잘하고." "살펴 가십시오." 스톤은 떠나는 유나를 배웅했다. 때마침 미네랄 상회의 본점으로 들어서려던 소녀가 유나를 보았다. '메이지스' 라는 이름의 그녀는 장미꽃처럼 도도하고 꽤 성격 있어 보였다. 그녀는 유나를 슬쩍 째려보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무슨 일이십니까?" "갖고 있는 에르젠을 판매하러 왔는데요." 메이지스의 말에 스톤이 냉큼 달려와 거래에 응했다. 에르젠은 사는 족족 큰돈을 벌어다 주는 횡금알 낳는 거위였기 때문이다. "에르젠을 얼마나 파시렵니까?" "이만큼이요." 그녀는 들고 있던 네모난 여행 가방의 뚜껑을 열었다. 찬란한 광택을 내쁨는 에르젠 합금괴가 가방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스톤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모두 이십 개예요. 한 번에 이만한 물량을 받아 줄 곳은 미네랄 상회뿐이라 생각해서 찾아왔어요." "무, 물론입니다. 개당 이십만 골드. 어떻습니까?" "이십삼만 골드는 받아야겠는데요." "허허, 매입 시세가 이십만 골드입니다. 이십일만까지 해 드리지요." 밀고 당기던 두 사람은 결국 22만 골드에서 합의를 보았다. 스론이 메이지스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은 총 440만 골드.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현금으로 지불하기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유나가 좀 전에 상납금이라며 왕창 뜯어 가지 않았던가. "실례지만 일단은 어음으로 지불 약속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일주일 안에 리지스 신용 금고의 메이지스 계좌로 넣어 주세요." 스톤은 그렇게 지불키로 하고 어음을 작성했다. 거래를 끝내고 메이지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톤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슬찍 말을 건넸다. "그런데 메이지스 님은 리지스 님과 많이 닮은 것 같군요?" 리지스가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상인들 중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호호호, 그런 이야긴 많이 들어요. 하지만 제 쪽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하하핫, 물론입니다." 실은 메이지스는 리지스가 새로 만든 부캐였다. 그녀가 미네랄 상회와 거래를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옌스가 다가와 물었다. "누님은 얼마에 팔았수?" "개당 이십이만. 넌 이십일만 골드에서 적당히 처리해. 똑같은 값을 달라고 하면 의심할지 모르니까." "알아. 나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다고." "그럼 난 다른 데 또 팔러 갈 거니까. 수고!" "발덴 지부엔 가지 마슈. 그쪽으론 에이린이 갔으니까." "알았어." 유한의 친구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지그 철공소에서 만든 에르젠을 판매했다. 그날 하루,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평소보다 많은 에르젠이 풀렸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5 "흐흐흐,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라서 이리 운수가 좋았을까." NPC 스톤은 매입한 에르젠들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웬 부잣집 아가씨로 보이는 소녀가 에르젠괴 20개를 팔았고, 용병 같아 보이는 녀석이 와서는 또 10개를 팔았다. 모두 30개. 개당 30만 골드에 팔면 총 900만 골드라는 거금이 손에 들어은다. 물론 어음을 대신해 판매자들에게 지불할 돈을 빼야 하지만, 그래도 250만 골드라는 수익이 남는다. 거래 2건으로 250만 골드를 남겼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에르젠 시장을 장악했지만, 한 번에 100만 골드 이상 차익을 남긴 경우는 드물었기에. "자, 이걸 누구에게 팔아 버린다?" 다음 날, 스톤은 평소 자주 거래했던 대장장이 아론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론은 스톤이 부르는 값에 에르젠을 매입하지 않았다. 평소에 에르젠이 모자라다며 비싼 값에도 넙죽넙죽 사들일 때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아론에게 퇴짜를 맞은 스톤은 맥스&마야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거래를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현 시세보다도 훨씬 낮은 가격을 요구했다. "거참 이상한 일이군. 발리안 철공소에서 수작이라도 부렸나?" 에르젠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발리안 철공소에서 에르젠 값을 후려친게 아닌가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발리안 철공소에서 에르젠 가격을 좀 내리긴 했지만, 그리 큰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시세가 떨어지고 있는 건가? 에잉! 그래선 곤란한데." 헛걸음을 하고 본점으로 돌아온 스톤에게 점원 NPC가 묵직한 서류를 내밀었다. "상회장님, 지부들에서 온 거래 보고서입니다." 스톤은 거래 보고서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나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남바린 지부가 에르젠 합금괴 오십 개 매입, 발덴 지부가 칠십 개 매입, 브로인 지부가 사십 개 매입……." 스톤은 지부들의 에르젠 매입 거래를 살펴보다가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했다. 평소보다 에르젠 매입량이 많았다. 예전 같으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래 거부와 가격 인하 요구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만큼의 물량이 풀렸다는 것은 에르젠 가격이 떨어질 징조였다. 분명 늘어난 물량을 미네랄 상회에서만 매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젠을 거래하는 다른 상단에서도 이만한 물량을 매입했다면……. "당장 마노스 제국에 보고해라. 에르젠 물량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해라!" 스톤은 마노스 제국뿐만 아니라 상계의 인맥을 동원해서도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가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사이, 에르젠 시세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보유한 에르젠을 제대로 판매하지도 못했는데, 시세는 매입가인 20만 골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이래선 이익을 남길 수 없다. 막대한 적자를 짊어져야 할 뿐. "스톤님! 큰일 났습니다!" 에르젠 시세가 13만 골드까지 떨어졌을 때, 정보 파악을 위해 내보냈던 일꾼이 돌아왔다. "에르젠 합금을 제조하는 대장장이들이 늘었답니다." "뭐라고?" 기겁한 것은 스톤뿐만이 아니다. 마노스 제국에 있는 철십자 길드도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길드가 가진 힘으로 여러 상단을 조정하여 에르젠의 시세를 올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이문을 챙겨 왔다. 그런데 에르젠 가격이 갑자기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에르젠 합금을 제조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많아져 시중에 풀린 양이 급격히 늘어난 덕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에르젠 힐금 기술은 웬만해선 배울 수 없다면서?" 베히모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길드의 정보 담당 카르산이 자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퀘스트가 어려운 건 사실이고, 최근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난이도가 올랐어. 하지만 완수한 유저들이 적지 않았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카르산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그란 놈 때문이야. 그 자식이 대장장이들이 퀘스트 하는 걸 도와줬다고 하더군." 몬스터도 잡아 주고, 곤경에 처한 유저를 구해 주기도 했단다. 거기다 바닷속에 들어가라고 중요한 아이템을 빌려 준 적도 있다고. "제기랄! 또 그 빌어먹을 대장장이 놈이냐!" 어떻게 된 게 자신과 철십자 길드의 행사에 번번이 방해가 되는 지그였다. "그런데 에르젠은 대장장이만 많다고 해서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에르젠을 만들기 위해서는 은 외에 5대 원소 광물이 필요했다. "그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지그 철공소 인근에서 5대 원소 광물이 대량으로 나온다고……." "크아악!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한이 또 무슨 일을 벌이는가를 알면 베히모스는 고함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철십자 길드원들에게는 아직 속이 터질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지그 합금 상사. 오늘 막 남바린 영지에 문을 연 상회다. 이 상회의 주인은 요즘 한창 아르페디아에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상계의 큰손 리지스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회사들과 달리 지그의 이름을 내세운 이유는 대장장이로서 유명한 유한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유한도 이름을 빌려 주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합금 상사? 합금 위주로 파는 데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유저들이 웅성이며 모여든 가운데, 상사 본점 앞의 단상으로 리지스와 유한이 나란히 올라갔다. 리지스는 예전에 행상을 하며 무구를 팔던 시절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새로 만든 회사의 선전과 홍보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르페디아 상계의 큰손 리지스 입니다. 오늘 저의 네 번째 회사의 창업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호기심 때문이지 딱히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미녀가 정중히 예를 표하는 데 싫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지그 합금 상사는 말 그대로 합금을 거래하는 회사입 니다. 여러 가지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합금을 보다 싸고 원활하게 공급해 드리고자 만든 거지요. 구리, 니켈, 크롬, 그리고 에르젠 합금까지 말이에요." 에르젠이란 말이 나오자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비록 대장장이 유저는 몇 없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에르젠 값이 터무니없이 오르는 바람에 마법 무구 값이 천정부지로 을랐다는 것을. 그런 에르젠을 싸고 원활하게 공급해 준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그 대답은 리지스의 옆에 있는 유한이 해 줬다. "저는 지그 철공소의 사장이자 지그 철강 조합장 지그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에르젠 대란 덕분에 저와 몇 명의 길드원들은 에르젠 제조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에르젠 제조에 필요한 원료도 대량 구할 수 있게 되었죠." 유저들의 심장은 두근두근했다. 이런저런 유한의 사정보다 그가 에르젠 값을 얼마에 책정할지 얼른 알고 싶었다. "몇 차례 실패가 있었고 현재도 제조가 까다롭긴 하지만, 적지 않은 에르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는 길드원들에게 싸게 공급하고, 또 남는 것은 많은 분들께 저림한 가격에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얼만데요?" "빨리빨리 말해 주세요!" 유저들의 애간장을 잠시 끓이던 유한은 오른손을 유저들 앞에 확 펼쳤다. 그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만." "오만 골드라고요?" 얼마 전 떨어지긴 했지만 에르젠은 여전히 괴 하나가 10만 골드를 넘었다. 그런데 유한은 그걸 더 깎아서 원래의 시세가로 불러 버린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근래의 에르젠 시세 폭등은 정상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전 그걸 다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원래 유한은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바가지 씌우려 했던 미네랄 상회와 그 배후 세력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려고만 했는데, 생각보다 에르젠 생산량이 많자 아예 가격을 원상태로 돌리기로 했다. "와아아!" 유한의 말에 유저들이 함성을 질렀다. 에르젠 가격이 내리면 마법 무구와 아티펙트의 가격도 떨어지게 될 터. 이것은 단지 대장장이들에게만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다 안정된 에르젠 생산이 가농해지면 더 값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그 님 최고!" "사랑해요, 지그 님!" 말만이라도 좋았다. 파는 수량이 적어도 괜찮았다. 정말 그렇게만 팔아 준다면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유저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단상을 내려간 유한과 리지스는 망치를 하나씩 잡고 방금 전에 서 있던 단상을 두들겨 부셨다. 나무 단상이 부서지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눈부시게 환한 에르젠 합금괴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며칠 동안 카프를 비롯한 에르젠 생산 공방의 대장장이들이 쉬지 않고 생산했던 땀의 결실이었다. "오늘 특별히 이곳에 모인 분들에게는 개당 삼만 골드에 팔겠습니다!" "우와아아아!" 유저들은 앞다투어 유한과 리지스에게 몰려갔다. 앞으로 싸게 팔든 어떻든 지금의 이 같은 행운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줄 서요! 줄!" "줄 안서면 번개 날립니다!" 지그 합금 상사 창립 기념 대(大)바겐세일은 성황리에 끝마쳤다, 값싸게 에르젠을 사 간 유저들은 사방팔방으로 소문을 퍼트렸고, 대량의 에르젠 구입을 원하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지그 합금 상사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장장이들뿐만 아니라 타 대륙과 교역을 하는 길드의 상인들도 있었고 NPC들도 있었다. 찾아오는 고객들을 상대로 리지스는 에르젠을 판매하고 또 납품 계약을 맺었다. 유한은 다시 철공소로 돌아가 부지런히 에르젠 생산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6 지그 합금 상사의 창립과 에르젠 저가 판매 선언은 공식 홈페이지와 게임 관련 웹사이트의 큰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지그 합금 상사의 저가 판매 선언으로 안 그래도 떨어졌던 에르젠 시세가 완전히 폭락한 탓이다. 앞으로 에르젠은 유한이 공언한 5만 골드 그러니까 예전의 시세대로 복귀할 거리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 이야기는 에르젠을 현질 거래 하는 사람들에게서 언급되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발리안 : 쯧쯧, 고귀한 금속을 싸구려로 만들다니……. -포란 : 고귀한 게 밥 먹여 주냐, 란? -제물포상인 : 난 이제 파산 ㅜ.ㅠ 아놔! 어쩔 거나는! -질주상가 : 앗싸∼ 버틴 보람 있네! -강철의 열정 : OTL 대부분의 유저들이 유한의 결단을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날린 에르젠 투기 세력은 유한을 비난하고 저주했다. "으아악! 난 망했다! 망했다고!" 이번 사태로 가장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미네랄 상회였다. 에르젠이 폭락하기 전까지 고가에 에르젠을 사들였던 그들은 갚아야 할 어음을 움켜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음 지불 기간을 넘기자. 미네랄 상회에 속한 유저들은 전원 신용불량자 칭호를 달게 되었다. 이 같은 상횡을 보고받은 철십자 길드에서는 황급히 미네랄 상회 책임자인 유나를 파견했다. 유나는 카잔 공국에 있는 미네랄 상회 본점에 와서 NPC 스톤부터 찾았다. "스톤 어디 간 거야? 상회장은. 대체 어딜 간 거냐고?" "그게……." "얼른 말하지 못해!" 유나의 실눈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떠졌다. 살벌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NPC 점원은 버벅이며 말했다. "사, 상회장님은 도망치셨습니다." "뭐? 도망이라니?" "상회에 남아 있는 현금을 모두 가지고 어디론가……." "유나는 정말 기가 막혀 환장할 노룻이었다. NPC 주제에 공금 횡령에 잠적까지 할 줄 알다니.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인공지능이 황당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어쩌면 좋습니까, 유나 님.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 '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미네랄 상회의 지부가 남발한 어음이었다. 지부는 본점의 자금력을 믿고 거래를 해 왔다. 그러나 본점의 자금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철십자 길드에서 꼬박꼬박 상납금을 뜯어 간 덕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뜯어 간 상납금은 마노스 제국의 안정을 위해 뿌려져 회수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본점에 남아 있던 돈은 스톤이 모조리 들고 날아 버려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미치겠군.' 그러나 유나를 더 미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쾅! 본점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서슬이 퍼런 표정의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바로 사홀 전 에르젠 판매 대금을 받기로 했던 메이지스였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그녀는 껌 좀 씹고 동네에서 좀 놀 것 같은 유저들을 잔뜩 대동해서 나타났다. "어음을 결제하기로 한 지가 사흘이 넘었는데. 대체 내 돈은 언제 갚을 거야?" 메이지스의 말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을 것이다. 메이지스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의자를 걷어차고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던졌다. "뭐야 이거! 상회장 어디 갔어? 당장 책임자 불러와!" 메이지스가 앞장서서 채권자의 권리를 행세하자 그녀와 함께 들어온 건달 같은 유저들도 NPC 점원들을 협박했다. "아그들아, 누님 말하는 거 못 들었냐? 빨리 대장 델고 나오그라잉∼!" "이 자식들 확 땅속에 파묻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평소 고경덕, 아니 옌스와 어을려 다니던 블루 라이언스들은 톡톡히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힘없는 NPC 점원들은 시선을 일제히 유나에게 돌렸다. 평소 유나가 상회장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 탓 때문이다. 메이지스는 팔짱을 끼고 유나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책임자야? 내 돈 사백사십 만 골드는 어쩔 거야?" "그게……. 다시 에르젠으로 돌려 드리면 안 될까요?" 돈은 없지만 매각되지 못한 애물덩이 에르젠은 그대로 본점에 남아 있었다. 물론 유나의 이런 제의를 받아들일 메이지스, 아니 리지스가 아니었다. "이 아줌마가 지금 장난해? 어음까지 다 써 놓고 이제 와서 뭐하자는 거야!" '아, 아줌마라고?' 마음 같아선 자이언트 너클 마법으로 이 건방진 계집애를 피떡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하면 이리저리 문제가 골치 아파진다.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는 그녀의 마음을 이는지 모르는지 리지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얘들아. 돈 되는 거 죄다 깡∼그리 챙겨 봐!" "옛, 누님!" 블루 라이언스들은 본점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마구잡이로 상품과 고가의 가구들을 들고 나갔다.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팔십만 골드는 갚은 걸로 해주지." '이런 도둑넌!' 유나는 메이지스가 네모난 가방을 흔드는 걸 보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가방은 메이지스가 일전에 놓고 간 것 으르, 처분되지 못한 에르젠 합금괴 20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지금 시세로 따져도 100만 골드는 가뿐한 금액. "내일까지 나머지 삼백육십만 골드를 준비해 놓으셔. 아님 이 거지 같은 본사 건물을 몽땅 차압하고 점원들은 새우잡이 어선에 팔아 버릴 테니까." "히익!" 메이지스의 서슬 퍼런 선언에 NPC 점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과 분해서 일굴이 빨갛게 변한 유나를 보고 리지스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일까지야. 알아서 해." 미네랄 상회 본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메이지스는 룰루랄라 발걸음을 돌렸다. 생일 파티 생일파티 1 에르젠 가격 폭락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은 미네랄 상회뿐만이 아니었다. 철십자 길드의 지원과 권유로 에르젠 거래에 뛰어든 상단들도 큰 손해를 보았다. 그 상단들에는 메이지스의 경우처럼, 에르젠을 판매한 채권자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상회의 신용도는 하락했고, 거래와 수입도 확 줄어들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부도와 폐업을 선언한 상단들도 나타났다. NPC 상인들은 야반도주를 하거나 길거리에 나앉았지만. 유저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철십자 길드의 본부가 자리 잡은 마노스 제국의 황궁으로 찾아가 항의와 보상을 요구했다. "어쩔 거야? 니들 말대로 했다가 쫄딱 망했잖아!" "힘들여 세운 내 상점이 딴 놈 손에 넘어갔다고!" 상인 유저들의 거센 항의에 철십자 길드도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노력했다. "보상해 주겠습니다. 하지만 금방은 곤란합니다. 저희도 현재 국가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지라……." "뭐가 어쩌고 어째? 길드장 나오라 그래! 베히모스 당장 불러오라고!" "재상님이나 황제 폐하는 현재 국정에 바쁘셔서 곤란합니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게임에서 왕이니까 진짜 지가 왕이 된 줄 아나?" 유저들의 원성은 황궁 안에 있는 베히모스와 노벨도 다 듣고 있었다. 그들도 나름 해결 방안을 모색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이번 일로 거둔 수입과 상납금들은 마노스 제국의 운영에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 사실 그 자금을 회수하려고 하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랬다간. 민심이 혼들릴 것이고. 국정은 파탄에 이를것이다. "이봐, 아벨. 뭐 좋은 방법이 없나?" 베히모스는 자신의 옆에 있는 NPC 마도사 아벨에게 조언을 구했다. 웬만한 유저보다 머리가 좋은 아벨이니 분명 이번 일도 수습할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다. "간단합니다. 지금 소란을 부리고 있는 상인들을 모두 잡아다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이봐, 그걸 말이라고……." "감히 천한 상인들 주제에 황제 폐하와 제국을 능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제국을 손에 넣을 때 보여 줬던 명석함과 간교함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지금 아벨은 멍청하고 무식한 말만 내밸고 있었다. 더구나 평소답지 않게 말투도 뭔가 자연스럽지 못했고, 눈빛도 멍했다. 마치 혼이 빠진 것 같았다. "어차피 장기짝으로 쓰다 버릴 패가 아니었사옵니까? 모조리 처단해 버리십시오." 아벨은 현재 상횡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NPC라면 아벨이 밀한 대로 해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유저를 상대로 그래선 곤란하다. '쳇, NPC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리 생각한 베히모스는 아벨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 황좌에서 일어난 그는 대전을 나가 황궁 정문으로 나갔다. 직접 상인 유저들과 만나 그들을 다독여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NPC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 들어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베히모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어딘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게 아닐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은 피하고 싶은데. 그러나 반란은 아니었다. 아니, 반란보다 더 큰일이 벌어졌다. "전쟁입니다! 베레타 공화국군이 국경을 넘어 북부의 성과 요새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베히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당장 길드원을 닦달해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게끔 했다. 얼마 후, 북쪽 전선의 상황이 속속들이 보고되어 올라왔다. "그라간 성이 베레타 공화국 1군에 함락되었습니다." "공화국 특전대 삼천과 아서스 관문에서 교전 중!" "크루노 성의 영주가 적 총사령관 란데르트에게 투항했습니다!" 을라오는 소식마다 암울하고 실망스러운 것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베히모스의 분통이 터지는 것은 베래타 공화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점이다. 워낙 대외 관계가 안 좋아서, 얼마 전 베레타 공화국에 교감 선생님, 아니 제르달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특사로 간 제르달은 공화국 의장을 만나, 새 황제가 기존의 군사 우선 정책과 대외 정벌 정책을 폐기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공회국과 우호 관계를 바란다는 의사도 전했다. 철십자 길드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제패였지만, 워낙에 제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잠시 보류를 한 것이다. 아무튼 공화국 의장은 만족하는 눈치였고, 베히모스의 안녕까지 기원해 주었다. 그래 놓곤 이렇게 전면 침공을 해 온 것이다. 의장의 호의만을 믿고 불가침 조약을 맺어 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 "베레타 공화국에 있는 길드원들 말로는 다크나이트 길드랑 B.O.B 길드 녀석들이 한동안 의장 관저를 드나들었대." 전쟁 원인에 대해서 정보 담당인 카르산이 보고해 왔다. 전정의 배후에는 유저들. 그것도 자신들과 적대적인 놈들의 입김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두 거대 길드는 마노스 제국을 장악한 철십자 길드가 국내를 안정시키고 성장히는 걸 원치 않았다. 거기다 유저 최초로 황제가 되었다며 거들먹거리는 베히모스의 작태에 눈꼴이 시렸는데. "이후 의장이 관료들을 모아 놓고 서둘러 전쟁 준비 할 것을 명했어. 현재 새 황제의 등극으로 어수선한 마노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면서……." 그리곤 의장은 베레타 공화국군 총사령관인 란데르트를 불러다가 [마노스 제국 정벌] 퀘스트를 내렸단다. "'점령' 이 아닌 '정벌' 이었기에 란데르트가 부담 없이 받아들인 모양이더라고. 안 그래도 지난번 전쟁 이후로 베레타 공화국의 전력도 중강되었으니까." "빌어먹을 꼰대 같으니. 회사에 다니며 돈이나 벌 것이지!" 전황을 살피던 베히모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벨이 슬쩍 조언을 건넸다. "란데르트의 직장 상사에게 일러 버리는 건 어때? 일은 안 하고 게임만 한다고. 그럼 퀘스트를 중단할 수밖에 없을지도……." "인마, 어디서 일하는 줄 알고?" 란데르트에 대해 알려진 정보라곤 그가 '직장인'이라는 것뿐이다. 뭘 제대로 알아야 현실에서 압박을 가할 게 아닌가. "폐하, 란데르트를 암살하는 건 어떻습니까r NPC 아벨이 그리 말했지만, 역시 영양가 없는 조언이었다. NPC라면 몰라도 유저는 죽었다고 해도 다시 부활하면 그만이다. 적군의 작전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급보입니다!" 마침 NPC 전령이 황궁의 사령실로 뛰어 들어왔다. 베히모스는 나름 적을 무질렀다거나 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이젠 성이 점령당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도이젠 성이 제국 북부에서 가장 큰 거점이라서 놀란 게 아니다. 철십자 길드에서는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하여 도이젠 성에 거대 키메라 10마리를 파견해 놓았다. 그 정도로 수많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점령을 당했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적군의 거대 병기 때문에……." "거대 병기 때문이라고?" 베레타 공화국이 개발할 거대 병기로는 거대 키메라를 이길 수 없다. 의아한 마음에 로그아웃을 한 베히모스 아니 정현일은 도르젠 성이 힘락되는 동영상을 공식 홈폐이지에서 보았다. 마노스 정벌에 한몫 끼어든 유저가 을린 동영상인데, 거대 키메라들이 무참하게 당하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다. 초반에 거대 키메라들은 성 위에서 바위를 던지며 베레타 공화국군의 공성을 저지했다. 거대 강철 병기들이 다가왔지만,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거대 키메라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베레타 진영에 새로운 놈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좀 전에 둥장한 거대 강철 병기들보다 작은 크기의 강철 골렘이 앞으로 나서더니 거대 키메리를 향해 커다란 석궁을 쏘아 대는 게 아닌가. "저, 저저!" 사냥꾼 유저가 쏘아 대는 것과 같이 자유자재로 발사되는 석궁. 이 석궁에 거대 키메라들이 하나둘 맞아쓰러졌다. 베히모스가 알기에 이렇게 무기까지 조작 가능한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강철 골렘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블랙 아이언!" 지그란 놈이 만들어 팔고 있다는 강철 골렘. 작지만 날렵하고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블랙 아이언은 현재 유저들은 물론 게임 내 국가를 다스리는 국왕과 귀족 NPC들에게도 팔리고 있었다. 베레타 공화국 의장도 유한에게서 블랙 아이언을 매입했다. 그는 자국의 군대에 블랙 아이언을 배치 전선에 투입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뤄 냈다. 베히모스, 아니 정현일 입장에선 복장이 터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강유한 이 자식,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유한이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저 그가 만든 블랙 아이언이 베레타 공화국에 납품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일은 계속 유한과 충돌하며 피해를 보고 있던 정현일의 뚜껑을 완전히 열어 버렸다. 불난 집에 살며시 기름을 끼얹었다고 할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저번에 할머니 홍영순 간사장이 녀석을 처리하라 했을 때는 그냥 적당히 날 잡아 손봐 주려고 했었다. 그맨 녀석이 대장장이 지그였던 것도 몰랐고, 그냥 학교에서 쫓겨난 찐따 녀석,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갈굴 수 있는 놈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뇌제의 홀 이후로, 이 망할 진따 녀석은 계속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젠 적당히 날 잡아 손봐주는 정도로는 안 되었다. 끌고 와서 박살을 내 놓아야 성이 풀릴 것이다. "각오해라, 이 새끼. 게임도 못하는 팔 병신으로 만들어 주마." 분노에 타오른 정현일의 두 눈에 광기가 맺혔다. 2 다음 날 학교에 간 정현일은 학람고 일진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당장 강유한을 잡아 오라고 지시했다. "강유한? 그게 누군데?" "까먹었냐? 재작년에 국에서 생쥐 나왔다고 찌질 댔던 놈 말이야." "아, 그놈……." 그래도 일진 녀석들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생쥐국 사건 다음에 입학한 1, 2학넌 녀석들의 경우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놈 주소는 여기 있어. 한 시간 내로 잡아서 체육관 뒤로 끌고와." 정현일은 이미 교무실에 남아 있던 유한의 신상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에게 주소를 넘겨받은 일진 양아치들은 곧장 유한을 잡으러 떠났다. 1시간 후, 양아치들이 정현일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떠났던 그들은 빈손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왜 그냥 왔어?" 정현일이 윽박지르자 녀석들은 머뭇머뭇하며 대답했다. "그, 그 자식 없던데?" "학원 갔다고 그래서……." 그러나 녀석들의 대답은 거짓말 같았다. 허탕을 친 것 치고 놈들은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는 거야?' 실은 정현일이 유한을 잡아 오라며 보낸 녀석들은 작넌 말에 김필중을 따라갔다가 유한에게 터진 놈들이었다. 좀 전에 녀석들은 유한의 집에 찾아갔었고, 유한이 학원 간다며 집을 나서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확인했다. 진따 강유한과 작년에 자신들을 두들겨 팬 무지막지한 놈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을 했지만, 녀석들은 유한의 앞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유한을 보자니, 그때 맞았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 했기에. 더구나 김필중이 처참하게 두들겨 맞던 모습이 떠을랐다.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병신 새끼들. 좀 있다 수업 마치고 다시 모여." 이번엔 자신이 직접 갈 생각이었다. 바보들만 보내선 또 일이 삐딱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정말 그 녀석 족칠 생각이야?" 일진 중의 하나가 쭈뼛거리며 물어 왔다. "왜? 싫어?" 살기가 번득이는 정현일의 눈빛과 마주친 녀석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작년에 김필중을 따라나섰다 놈에게 단체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정현일은 비웃을 것이다. 아니,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개소리를 한다며 두들겨 팰지도. 그 때문에 일진에서 제명당한 김필중도 아직 아무 말도 못하는 게 아닌가. '이것들이 정말 왜 이래?' 안색이 어두워진 놈들을 본 정현일도 조금은 심상찮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뿐. 그는 유한을 박살 낸다는 마음을 접지 않았다. 삐리리리─! 학원 수업을 마친 유한은 집으로 돌아오다 핸드폰 벨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채린이였다. 뭐 때문에 전화를 했을까. 요즘 고3이라서 많이 바쁘다더니. 아무튼 기쁜 마음에 유한은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채린이니?" "물론이지. 이 번호로 전화 걸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니." 그렇게 응답한 채린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 저녁 일곱 시에 '하베스트'로 나을래? 하베스트 알지?" 하베스트는 시내에 있는 카페 이름이다. 브랜드 커피는 아니지만 맛있는 음료들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가 많았고, 모임 장소로도 각광을 받는 곳이다. 작넌에 블라덱이 옌스, 아니 고경덕을 꼬드겨 자신과 싸우게 만들었던 날에 처음 찾아가 봤다. 거기 생과일 쥬스가 일품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뭐야, 데이트? 얼마 뒤에 중간고사라며?" 그래서 요즘 게임에서 유한이 에르젠을 만든다고 정신 없을 때, 채린은 오펜이 정리해 준 요점들을 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 "싫어? 싫으면 말고." "아니 싫을 리가 없지!" 채린이 그만두려는 것처럼 뾰로통하게 말하자, 유한은 서둘러 그녀를 다독였다. "후훗, 그럼 나오는 걸로 알고 준비할게. 거지 같은 차림으로 오면 날려 버린다." "아, 예. 걱정 마십쇼. 공주님." 통화는 그것으로 끝. 즐거운 기분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흥에 겨운 유한을 멀리서 지켜보는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정현일과 학림고 일진들이었다. "개자식, 아주 신났구먼." 정현일은 유한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즐거워하는 저놈을 잡아다가 묵사발 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는 유한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주변에 흩어진 일진들도 그와 발걸음을 맞췄다. 서서히 거리를 좁힌 다음 일시에 달려들 생각이었다. "어이!" 누군가 큰 소리로 유한을 부르며 다가오자, 깜짝 놀란 정현일과 일진들은 재빨리 흩어져 몸을 숨겼다. 숨지 못 한 녀석들은 슬쩍 가로수를 돌아보는 척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녀석들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사실 쫓고 있다는 사실부터 몰랐으니까. 그는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옌스, 아니 고경덕에게 시선을모았다. "무슨 일이야?" "바츠, 아니 유한, 아니지! 유한이 형님! 나 부탁이 있는데!" 평소와 달리 고경덕은 유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굽실 굽실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이러는 것인지? "나 공부 좀 가르쳐 줘. 문제집이나 참고서도 안 쓰는 거 있으면 좀 주고." "뭐라고? 너 뭐 잘못 먹었냐?" 유한이 알기론 고경덕은 공부와 담을 쌓은 녀석이다. 그래서 자신과 친구들이 중간고사다, 검정고시다 비명을 지를 때도 한가롭게 게임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부를 가르쳐 달라니? "잘못 먹은 건 아니고. 공부를 해야 해. 대학에 가야 하거든."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뭐냐?" 이 녀석도 현실에 눈을 뜨고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일까. 대체 누가 이 녀석에게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든 것일까. 분명 고경덕 본인은 아니다. 워낙 제멋대로이고 단순무식한 녀석이니. "얼마 전에 길에서 유하를 만났어." "유하? 아, 에이린 말이구나." "우리 귀여운 공주님을 감히 레벨 5에 불과한 중딩 양아치들이 괴롭히고 있더군. 그래서 난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놈들을 처단해 버렸지." '동화 속의 왕자님? 누가?' 고경덕의 분위기로 보면 만화속의 용병이 딱이다. "아무튼 집까지 데려다 줬어. 꽤 번듯한 저택이더군. 그냥 가려는데 유하가 음료수라도 먹고 가라는 거야." 그래서 유하네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마당에 있던 유하네 할아버지가 달려들어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더란다. '당연하지. 누가 봐도 넌 범죄형이라고.' 오해는 곧 풀렸지만, 여전히 유하네 할아버지는 경덕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경덕이 유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하기를……. "내 손녀딸 못 준다?" "그 정도면 말도 인하지. 그 영감님 왈, '돈도 차도 없는 주제에, 머리에 든 것은 없고 집안도 부실해 보이는 것이, 생긴 것은 조폭에 버금가고 이름조차 경박한 경덕이 네 이놈, 내 손녀딸 근처에는 오지도 마라!'고 하시더군." '설마 정말 그렇게 장황하게 말했을까? 정말이라면 유한은 경덕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이해했다. 앞뒤를 떠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 정도 비난을 받는다면 사람이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한 건, 고2나 되는데 유하가 공부하면서 궁금해 히는 걸 하나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거야!" 아마 경덕이는 유하에게 힘 세고, 자상하고, 공부 잘하는 멋진 오빠로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난 변할 거야. 현실에서 지식 200을 찍을 거라고! 국영수 랭크도 을려서 대학 입학 퀘스트를 완수하고 말거야!" 그렇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고경덕은 다시 한 번 유한에게 요청했다. "그러니 공부 좀 가르쳐 줘. 문제집, 참고서도 있음 넘겨주고." "오펜, 아니 준수에게 가르쳐 달라고 해. 채린이 말로는 그 녀석 전교1둥이래." "안 돼! 그 자식은 레벨이 너무 높아! 갑자기 마스터 급의 스승을 만나면 내가 못 따라갈 거야." "괜찮아, 준수은 저레벨 학생도 잘 가르치니까." "정말?" "그래, 걔 성격도 정말 좋다." 고경덕은 솔깃해 하며 유한에게 달라불었다. 한편, 정현일 일당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유한과 고경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특히 정현일은 고경덕이 유한에게 굽실굽실 두 손을 모아 애원하는 것을 보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저놈은 북성 기계공고의 고경덕이잖아. 어째서 저놈이 강유한 같은 진따 녀석에게…….' 믿을 수 없었다. 강북 지역 학교들을 평정한 녀석이 강유한 따위에게 빌빌거리다니. 강유한이 고경덕보다 강한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여겨졌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침에 보낸 녀석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도 강유한이 고경덕과 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대로는 안 되겠군.' 끌고 온 패거리는 10여 명 남짓. 강유한이라면 물라도 고경덕을 상대로 싸워서 숭산이 없다. 무엇보다 강유한의 뒤에 고경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양아치 녀석들이 주저할 것이다. "그만 가자." 정현일의 말에 일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유한, 그리고 고경덕과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러나 정현일은 유한을 박살 내는 걸 포기한 게 아니었다. '양아치 패거리론 안 돼.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연락해야겠어.' 전문가들. 주먹으로 먹고 사는 어둠의 프로들. 학림재단의 정씨 일가는 그들과 돈독하다.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평소엔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연락하면 두 손 두 발 다 걷고 달려온다. 재단 이사장, 그러니까 정현일의 할아버지가 예전에 그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전문가들이라면 보다 확실하겠지.' 이주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꼴이 된 강유한을 생각하자 정현일은 절로 흐뭇해 지고, 묘한 쾌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운이 좋구나, 강유한.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라.' 오늘은 일단 물러가지만, 내일은 반드시 처참하게 묵사발을 내 놓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서는 정현일이었다. 3 다음 날, 학원에서 돌아온 유한은 바삐 집으로 돌이왔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채린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어? 아무도 없나?" 시대에 어을리지 않는 전업주부로, 항상 집을 금건하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가 오늘은 집에 없었다. '시장에 가셨나?' 그리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문득 오늘 아침 분위기가 이상하게 냉랭했던 것이 떠을랐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동생 유현이나,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말을 걸어도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예전과 같은 게임 폐인이었다면 가족들의 반응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요즘은 달랐다. 아침에 가족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무척 섭섭함을 느꼈다. "쩝, 뭔가 사정이 있겠지." 가족들을 이해하기로 한 유한은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도 새로 꺼내 갈아입었다. 괜찮은가 싶어 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표정이 밝고 체격이 듬직한 옷걸이가 제법 괜찮은 녀석이 한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헷, 부지런히 운동한 보람이 있네." 스스로에게 만족을 느낀 유한은 곧장 집을 나와 하베스트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로 묵직하고 새까만 승용차가 따라왔다. "왜 지금 잡지 않는 겁니까?" 승용차에 타고 있던 정현일이 불민을 터트렸다 전문가라고 불러왔는데,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못 본 척하는 게 아닌가. "혹곰 아저씨도 저 자식이 겁나는 겁니까?" 정현일의 비아냥에 그의 곁에 앉은 거대한 체격의 사내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이봐, 조카. 우린 프로라고. 프로는 완벽을 기하는 법이지." 혹곰은 품속에서 굵은 시가(Cigar)를 꺼내 날카로운 나이프로 앞을 잘라내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짙은 연기를 길게 한 번 내뿜고 말을 이었다. "아직 날이 밝아. 근방에 사람들도 많고. 녀석이 납치 되었다는 걸 사방팔방에 알리고 싶어?" "아!" 그제야 정현일도 혹곰이 왜 유한을 놓아 준 것인지 알았다. 분명 자신이 저지르려는 일은 불법적인 수준을 넘어 범죄와 같은 짓이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게 좋다. 구설수가 적어야 자신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학림 재단에도 해가 되지 않는다. "어두워지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사나이답게 느긋하게 참아봐." "예!" 지금은 강유한의 뒤를 쫓는 데만 전념하면 된다. 흑곰, 그리고 흑곰파의 조직원들은 유한의 뒤를 조용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정현일은 뒷세계 최고의 은밀성을 자랑하는 흑곰파를 믿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경험할 통쾌한 결과를 기대했다. 반드시 오늘은 저 망할 놈을 뭉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한 유한은 카페 하베스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움찔하거나 딴청을 부리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없었다. "이상하다. 누가 따라오는 느낌이었는데." 예전에 허진태의 지포라이터를 갖고 있었을 때, 덕근이 파인지 뭔지가 자신을 쫓아다녔을 때도 딱 이런 기분이었다. 뭔가 뒤가 간질간질한 듯한 느낌. "잘못 안 건가?" 유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하베스트로 걸어갔다. 실제 추적자는 있었다. 그러나 흑곰파의 조직원들은 상대가 의심한다고 해서 놀라 내색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았다. "저 새끼 감이 제법 좋은데요?" "조심해야겠다. 잘못하면 들통 나겠어."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혹곰파의 추적자들은 유한이 하베스트라는 카페로 들어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승용차로 천천히 따라오는 보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한편, 하베스트로 들어간 유한은 순간 엄청난 폭음을 들었다. 팡! 파팡! 불꽃이 번득이고 색종이들이 눈앞을 가로질러 간다 싶더니, 누군가가 머리에 뭔가를 푹 눌러 씌웠다. "뭐, 뭐야?" 머리에 씌워진 고깔모자를 벗은 유한은 눈앞에 채린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터져서 연기만 솔솔 피어나는 폭죽을 들고 있는 채린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생일 축하해! 유한아." "생일 축하한다!" 채린의 외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내뱉은 측하의 외침이 유한의 고막을 때렸다. 어리벙벙했던 유한은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사람둘이 잔똑 보였다. 극기도장 식구들과, 리지스와 옌스, 오펜을 비롯해 게임 속에서 언제나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들, 거기다 아침에 싸늘하게 굴었던 가족들까지. 모두들 환한 얼굴로 유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생일? 내 생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4월 28일이 자신의 생일이 맞았다. 오늘따라 가족들의 반응이 무척 섭섭하다 여겼는데,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바보, 그것도 모르고 있었니? 나도 기억하고 있는데." 채린이 핀잔을 주자 머쓱했던 유한은 괜히 기족들 핑계를 댔다. "난 아무도 언질을 안 줘서……." "이 녀석아, 말해 주면 감동이 덜할 거 아니냐." 송태수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 김 여사는 다가와 유한의 뼘을 쭉 늘이며 쏘아붙였다.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 끓여 줬잖니! 그 힌트를 보고도 몰라?" "아야! 미역국이야 평소에도 잘 끓이시면서." 김 여사는 계속 유한의 뺨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채린이한테 고맙다고 해. 오늘 생일 파티는 채린이가 계획한 거니까." "에? 정말?" 채린은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깜짝 파티를 열어 주기로 계획했다. 처음엔 같이 게임을 즐기는 친구들만 모아서 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유한의 부모님과 송태수와 극기도 수련생들까지 몽땅 다 나왔다. 채린에게 이야기를 들은 유현이 부모님께 말했고, 표재훈은 곽대발에게, 곽대발은 또 송태수와 극기도 수련생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왔다니.' 작넌 이맘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어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유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아, 정말…… 정말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우우! 생일날 우는 바보는 어떤 놈이냐?" "울면 생일 축하 노래 안 불러 준다!" 18개의 초가 꽂힌 커다란 케이크가 유한의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생일 축하송을 소리 높여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유한은 입김을 혹 불어 촛불을 껐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울리고 난 후, 선물 공세가 뒤이어졌다. "자, 의리의 선물." 이지수가 자그마한 봉투를 내밀었다. "고마워." "생일 축하요, 브라더!" "고맙다, 세라야 너도 왔구나." 선물을 주는 이들 중에는 오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송코와 귀련이었다. 그들도 게임에서 채린에게 이야기를 듣고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 "입시 준비 한다며? 열심히 해." "고마워요, 누나." '으흐흐, 천사다, 천사야!' 귀련을 본 곽대발의 입이 귀에 가서 걸렸다. 오늘 그가 이곳에 나은 이유는 바로 유한의 생일 때문이 아니라 귀련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채린이 게임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부를꺼라 했었으니까. 곽대발은 귀련이 유한에게 선물을 주고 제 자리로 물러 나자. 슬그머니 그녀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아, 자칼 씨군요." 귀련이 아는 척을 하자 곽대발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곽대발이라고 합니다." "호호, 이혜련이예요. 대발 씨는 실제로도 듬직하고 용감하게 생겼네요." "하하, 혜련 씨야말로 훨씬 더 아름다우신……." 분위기가 무르익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유한과 채린에게 쏠려 있었다. "자, 이제 나만 선물을 주면 되나?" 오늘 생일 파티의 주최자인 채린이 유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한은 그녀에게 충분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화려한 생일 파티는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그때 환하게 웃는 채린의 얼굴이 다가온다 싶더니 유한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춰 주었다. 달콤한 채린의 입맞춤에 유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와아아아─!" "삐익! 채린이 생각보다 과감한걸?" 카페 안에 부러움의 환호성과 휘파람이 터져 나왔다.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건 동생 유현과 송태수뿐이었다. 유현은 유치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송태수는 얼굴이 굳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빠?" 채린은 아버지가 유한에게 뚜벅뚜벅 걸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물러났다. 행복감에 젖어 있던 유한도 움찔 놀랐다. 버럭 화를 내는 게 당연할 텐데, 송태수는 지금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연애에 빠진 곽대발과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표재훈을 빼고 극기도 수련생들도 송태수 처럼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이라니 빵을 줘야지." "예? 빵이라뇨?" 생일에 빵 준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생일 빵, 인마." 송태수는 어금니 꽉 깨물라는 표정으로 주먹을 치켜 들었다. 유한은 어금니 꽉 깨무는 대신 서둘러 뒤로 몸을 뺐다. 이제 보니 송태수와 극기도 일당은 생일 축하를 빌미로 자신을 두들겨 패러 온 모양이다. "이 녀석아, 어딜 가냐? 생일이면 생일 빵을 먹어야지!" "크악! 생일날을 제삿날로 만들 셈이세요?" "허허! 녀석, 엄살은……." 극기도 수련생들은 유한이 도망 못 가게 둘러싸고. 송태수는 장난이라도 치는 듯이 가법게 주먹을 날렸다. 유한의 부모님도 장난으로 여길 정도로 송태수의 연기는 능청맞았지만, 그의 주먹 끝에 맺힌 육중한 기운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해 주는 부녀 덕분에 천당과 지옥을 두루 경험하는 유한이었다. 4 유한을 쫓아 하베스트 안으로 들어온 흑곰파의 조직원 들은 지금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유한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본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커피 나왔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커피 잔을 내려놓자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아가씨. 우린 아직 주문을 안 했는데……." "내가 사는 겁니다." 낮지만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 슬그머니 다가온 표재훈은 조직원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이, 이 녀석은…….' 조직원들은 표재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종격투기 선수. 데뷔와 동시에 L.O.K 대회 8강에 오른 폭풍의 신인. 그러나 대한민국 최강의 야수가 키우고 있는 이 젊은 호랑이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무서운 놈 같았 다. 자신들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걸 보면 말이다. "아까 카페에 들어온 내내 유한이를 감시하더군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뭘 노리는지 모르지만, 그만두라 권하고 싶군요. 보시다시피 저 녀석은 우리 식구입니다." 말은 점잖게 했지만 이것운 경고였다. 만약 강유한이라는 저 고딩 녀석을 손대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서 표재훈은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뭔가 서늘한 기분에 커피잔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슬그머니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보스인 흑곰에게 전화를 걸었다. 느긋하게 쿠바산(産) 시가를 태우고 있던 흑곰은 부하들의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를 마친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같이 창백하게 변했다. "계획취소다. 애들 다 철수시켜." "뭐예요?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런 혹곰의 지시에 정현일은 당황했다. 흑시 강유한이 경찰에 신고라도 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말이다. "이봐, 조카. 그 녀석 손보는 거 포기해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현일이 따지고 들자 흑곰은 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길게 내쁨으며 말했다. "그놈 뒤에 극기도의 송태수가 있다." "예에?" 극기도에 관한 건 정현일도 대충 들어 봤다. 요즘 잘나가는 신종 무술 극기도. 그 창시자인 송태수란 작자는 인간일까 싶을 정도로 괴물이라고 하던가? "포기해. 만약 수련생에 손댄 걸 송태수가 알면 우린 끝장이야." "뭐라고요? 대체 관장 나부랭이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요?" 싸움 잘하는 것과 강한 것은 별개다. 정현일은 그리 믿고 있었다. 일진 세계에도 싸움 잘하는 녀석들이 수두룩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해 낼 수 없다. 송태수가 괴물같이 강하다 해도 그뿐. 든든한 배경이 있는 자신들에 비하면 별거 아닐 것 같았다. "조카는 뭘 모르는 모양이군. 흑시 칠성파라고 들어 봤나?" "예전 연예계에서 세븐스타 엔터테이먼트를 운영하던. 조직 말입니까?" "그래, 보스인 김칠성 그 양반은 거느린 애들도 많았고. 정재계에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 그런데 김칠성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연예 기획사도 문을 닫았고, 그 많던 부하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다. "조카는 김칠성 그 양반이 지금 뭐하는지 알고 있나?" "들리는 소문으론 시골에서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이야. 춘천의 어느 병원에서 꿈쩍도 못하고 누워 있어. 팔다리 다 못 쓰고 음식은 씹지도 못해서 죽만 먹고 있지." "아니, 어쩌다가?" 정현일이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송태수 그 무지막지한 작자한테 깨져서 그래." 예전에 잘나가는 연예인을 하나 빼 간다고 어느 연예 기획사 사장을 칠성파가 손봐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리가 부러진 이 사장은 송태수와 같은 부대를 나온 둥기의 형님 친구란다. "부대 동기의 형님 친구…… 요?" "김칠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과장된 거라고 생각했지." 동기의 형님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송태수가 칠성파를 공격했다. 그때 그를 도우러 동행한 무술가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사실 그들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고. 쪽수도, 쇠파이프도, 사시미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공기총을 쏴 갈기려 했지만 송태수가 던진 벽돌에 맞아서 저승 문턱까지 갔었다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어. 마침 김칠성이랑 사업 이야기 때문에 왔다가 진짜 골로 갈 뻔했지." "……." 영화 속 터미네이터를 실제로 만난 김칠성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7충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단다.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원 침상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칠성파 간부들이 연줄을 동원해 복수하려 했지만, 그 연줄들이 다 외면했지. 송태수도 적잖은 연줄이 있기 때문이었어."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연줄을 갖고 있는 거죠? 그냥 땀내 나는 무술가일 뿐이잖아요." "'한 가지의 극에 달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법이거든." 관심을 갖게 되면 살펴주기 마련. 송태수는 젊은 시절 아프간에서의 일로 군 고위 관계자들과도 안면이 넓었고, 무술 수련을 하면서 양아치나 조폭들을 두들겨 팬 덕분에 경찰 쪽 사람들과도 알고 지냈다. 거기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련생들이 정재계 인사의 경호원이나 비서로 들어가면서 그쪽의 비호도 받게 되었다. "뭐 이건 소문인데 현직 대통령도 취임 전에 송태수에게 경호원들을 교육시키는 교관 자리를 주려고 했다 하더군." "믿을 수 없어요." "믿어. 그리고 절대 그 작자와 안 좋게 꼬이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 "그럼 강유한 저 자식을 그냥 두라고요?" "놔두든 패든 그건 조카 맘이지. 대신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무튼 결론은 흑곰파는 이 일에 절대 가담하지 않겠다는 것. 정현일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벽에 가로막히다니. '제길, 좋다. 박살 내는 건 일단 다음으로 미뤄 주마.' 그러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박살을 내 놓을 절호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5 하베스트에서 떠들썩한 생일 파티를 마치고 유한은 기 분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보자, 지수 이 녀석은 문화상품권을 줬구나" 방에서 친구들이 건네준 선물들을 뜯어 보는 유한의 마음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어떤 것은 평범하고, 어떤 것은 취양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준 사람의 마음이 깃든 소중한 선물들이었다. "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은……." 유한은 채린이 뽀뽀해 준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의 달콤한 향기와 촉촉한 감촉이 되살아났다. 어찐지 붕붕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걸렸다. '채린이 정말 키스해 줄지는 몰랐어.' 부모님에, 송태수까지 있는데 말이다. 채린의 키스는 마치 '넌 내 거' 라고 도장을 찍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그야말로 우정을 넘어 애정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평소에 비아냥거리던 미음속의 바츠도 오늘의 이 대사건엔 할 말이 없었는지, 구석에 콕 처박혀서 니을 줄을 몰랐다. 마음속의 지그는 행복에 젖은 유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채린이 생일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그 말에 유한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채린의 생일이 언제였더라? 그는 필사적으로 옛날 기억을 더듬었다. 다행히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채린의 생일은 8월 15일, 그러니까 광복절과 한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넌에는 그냥 넘어갔었군.' 그땐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핑계를 대기엔 너무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닌가 후회되었다. "으음, 올해는 작넌에 못한 걸 두 배로 해서 화려하게 챙겨 줘야지." 선물도 멋진 걸 준비하고, 지난번의 답례라고 키스도 해 주는 것이다. 채린이는 뺨에 했지만 자신은 용감하게 입술에다가……. "흐흐흐!" "대마왕이 따로 없군."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놀란 유한은 입에 흐르는 침을 닦고 돌아섰다. 눈앞에 목소리의 주인 유현이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형한테 택배 왔던데. 중국에서." "중국?" 중국에서 자신에게 올 택배가 있던가? 유한은 궁금해 하면서도 포장을 풀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종이 상자 안에는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피규어 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바디 라인이 드러나는 경갑에 멋진 활을 든 늘씬한 미소녀 궁수 피규어. 고정시키는 발판에는 '시아' 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채린의 캐릭터 이름. "와우, 형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이런데 취미 없어, 인마!" 취미는 없지만 좋긴 했다. 마치 작아진 채린을 앞에 두고 있는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이건 주문 제작형 피규어야. 값도 무지 비싼데 대체 돈을 어디서 마련한 거야? 아이템 현질이라도 했어?" "내가 산 거아니라니까!" "아아, 우리형이 덕후였을 줄이야……." "야! 사람 말 좀 들어!" 유현은 들은 척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어처구니없게 미소녀 오타쿠로 누명을 쓴 유한은 택배 상자를 다시 잘 살펴보았다. 처음엔 내용물이 궁금해서 누가 보냈는지 제대로 살펴 보지 않았다. 발신 주소와 보낸 사람의 이름은 한자로 적혀 있었다. 베이징에서 유한에게 택배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홍객(紅客)?" 홍객이란 중국어로 해커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이 택배를 보낸 것은 해커, 바츠를 해킹한 해커라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자신을 잡아 보라는 도발인가? 아님 순수한 생일에 대한 축하인가? 유한은 해커가 준 생일 선물을 버리려다 말았다. 절대 채린을 닮아서가 아니었다. 지그를 찾는 사람들 지그를 찾는 사람들 1 생일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게임 방송에서 베레타 공화국과 마노스 제국의 싸움을 여러 번 방영했지만 유한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누가 이기든 자신과 상관없었다. 리지스의 경우엔 두 나라의 전쟁으로 무구도 많이 팔고 블랙 아이언도 더 팔 수 있어 신이 나는 모양이지만. '그러고 보니 리지스 녀석, 요사이 많이 컸어.' 지그 합금 상사를 세우면서 에르젠 시장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에르젠 폭락으로 파산한 상회들을 악착같이 인수, 합병하면서 세도 엄청나게 불렸다. 얼마 전에 리지스는 '리지스 코퍼레이션' 이라는 상인 길드를 만들어 아르페디아 상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그녀를 우습게 봤던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발덴 지부장 딜론도 요즘 리지스를 바싹 경계하는 눈치였다. "빼액! 빼액!" "으악! 안 돼, 포포! 이건 길드원들에게 줄 제련강이란 말이야!" '저 자식도 많이 컸군.' 불가사의하고 불가사리스러운 괴생명체 포포도 많이 자랐다. 처음 만났울 땐 조그마했던 녀석이 이계는 집채만 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블랙 말고 양산형 블랙 아이언들은 녀석에게 먹힐까 봐 피해 다닐 정도로. 다행히 포포는 블랙 아이언을 씹어 먹는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리지스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 손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사장님, 블랙 아이언의 부품 배치를 끝냈습니다." "수고했어." 창밖으로 포포를 바라보고 있던 유한은 정신을 차리고 블랙 아이언 조립에 매진했다. -블랙 아이언을 만들었습니다. -상당히 날렵해 보입니다. -영혼을 빙의시키면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휴우, 다 됐다." 유한이 완성한 블랙 아이언을 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놀고 있던 시커먼 로브의 마법사가 말을 건네 왔다. "이제 소환 마법을 쓰면 되는 거죠?" "아, 저번처럼 부탁해요. 아스란 님." 아트페디아 5위 랭커 아스란. 한때 헤븐즈 게이트를 찾는다고 귀련의 부캐 파우린과 자칼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요사이 유한의 철공소에 눌러 살고 있었다. 철공소 견학을 핑계로 댔지만 유한은 그의 목적이 그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분명히 나한테 운석이 있다는 걸 들은 거야. 헤븐즈 게아트를 열기 위해선 스타레이가 필요하니까.' 현재 스타레이의 정보는 드워프를 제외하고 유한과 귀련 둘만 알고 있다. 아직 공식 홈페이지나 공략 사이트들 에서 스타레이라는 단어가 검색되지 않는 걸 봐서 확실히 그랬다. 아마 아스란은 귀련에게서 스타레이에 대해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원료가 되는 '운석 덩어리'가 유한의 손에 있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부려먹어도 찍소리 안 하는 거지.' 유한은 철공소, 아니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는 아스란을 보고 소환 마법을 익혔는지 물어보았다. 아스탄이 2랭크까지 찍었노라고 발하자, 유한은 블랙 아이언을 완성시키는 것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아스란은 이를 혼쾌히 받아들여 이후 생산되는 블랙 아이언들에 속속 영혼을 빙의시켰다. 아스란이 도외준 덕분에 조립을 마친 블랙 아이언이 창고에서 쿨쿨 자고 있는 일은 없었다. 요사이 동생 커플은 게임도 잘 안 하고 현실에서 데이트에만 열중하는지라 아스란의 존재는 참으로 든든했다. '조만간에 운석 좀 떼 줘야겠군.' 그리고정식으로 '채용'도 해 볼 생각이었다. 아스란이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영입에만 성공하면 블랙 아이언의 신용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여느 마법사가 아닌 아르페디아의 유일한 아크 위저드가 완성시킨 블랙 아이언이니까. "좋아. 블랙 아이언 납품에 여유가 생겼으니 이젠 제련을 좀 해볼까?" 유한의 명성이 을라가는 만큼, 지그 철강 조합의 길드원들도 늘고 있었다. 그들에게 납품할 철을 만들어 낸다고 제련 공방의 고로는 꺼질 줄을 몰랐다. -제련 스킬이 1랭크가 되었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재련의 달인]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주물 스킬을 마저 올려 제철소에 도전하십시오. "앗싸!" 며칠간 부지런히 초열탄을 만들어 제련을 하다 보니 드디어 제련 스킬도 1랭크에 도달했다. 합금 스킬의 경우는 지난번에 에르젠 합금괴를 대량으로 만들면서 이미 1랭크에 을라 있었다. 안내창에서 말한 대로 이제 제철소에 도전하기 위해 남은 것은 주물 스킬뿐. 주먹을 불끈 움켜쥔 유한은 상태창을 띄웠다. [상태창] 이름 : 지그 칭호 : 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 제작자, 사장, 엔지니어, 죽음의 상인, 노력가, 헤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명장, 뇌제, 엘프의 친구, 제련의 달인 직업 : 대장장이 레벨 : 193 체력(HP) : 2,900/2,900 스태미나 : 2,500/2,500 마나(MP) : 150/150 힘 : 192 민첩성 : 150+25(팬릴 소드) 인내심 : 160+10(투사의 슈즈) 지식 : 120+20K명장 칭호) 행운 : 130 솜씨 : 240+60(불새의코트+명장칭호) 명성 : 33,000 공격력 : 220+236(팬릴 소드+와이어 건틀렛+투사의 슈즈) 방어력 : 160+143(투사의 슈즈+불새의 코트+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 5,000/41,000 돈 : 35,000,000골드 [습득스킬] 장작 패기 스킬 2랭크 벌목 스킬 3랭크 채굴 스킬 2랭크 채석 스킬 2랭크 제련 스킬 1랭크 생산 스킬 1랭크 합금 스킬 1랭크 정밀 조립 스킬 2랭크 수리 스킬 2랭크 주물 스킬 2랭크 도발 스킬 8랭크 쇼크 웨이브 6랭크 선동 스킬 7랭크 수리 성공를 81% [히든스킬] 그래인 스킬 2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3랭크 [공작 기계 스킬] 선반 가공 스킬 4랭크 용접 스킬 5랭크 절단 스킬 5랭크 '후후후, 제철소는 발리안보다 먼저 지어야지.' 아르페디아 최초의 철공소는 발리안이 지었다. 유한이 초보 대장장이였을 적에 이미 명장의 경지에 올라 있던 발리안이었기에 그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한도 명장이다. 돈도 갑부라고 자부해도 충분할 만큼 있고 NPC와 유저를 합쳐 휘하의 일꾼들도 바글바글하다.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힘과 능력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제철소만큼은 그 어떤 대장장이보다 먼저 짓고 싶었다. 바츠 시절에 자주 느꼈던 승부욕이 들끓었다고 할까. "자자, 얼른 주물 1랭크를 찍자!" 유한이 주물 스킬을 을리기 위해 모형을 뜨고 있을 때였다. 공방 안으로 송코가 들어와 손님들이 찾아왔다고한다. "블랙 아이언을 사러 온 사람들인가요?" "그건 아니야. 개인적으로 널 꼭 만나고 싶어 하더라고." "개인적인 만남? 뭐야, 한창 바쁜데……." 유한은 투덜거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 유저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게 욕심이 많아 보였다. "무슨 일로 절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유한의 물음에 선두의 신관이 나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신을 믿으십니까?" 신? 신이란 존재는 믿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 하지도 않는 유한이었다. 그런데 겨우 그걸 물기 위해 자신을 만나고 싶다 한 것 인가? 유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뒤의 신관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길 잃은 양이여, 신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의 존재를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참되고 복 된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신은……."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게 되자 사이버 포교단이 생겨났다고 하더니 그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게임에서도 포교를 하러 다니는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유한은 이들이 믿는 신을 영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하는 걸 보면 어디 족보도 없는 사이비 교단이었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길 잃은 양의 구원이 아닌 듯했으니까. "재물은 헛된 것입니다. 모든 물질을 그분께 바치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십시오." "영원이고 빵원이고 구원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썩 나가세요." 괜히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한 유한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사이비 교단의 선교사들은 유한을 졸졸 따라오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어허! 불쌍한지고. 불신자에게 신의 징벌이 있읕지니!" "징벌이 있을지니!" '아놔, 이거 완전 똘아이들 아냐?' 현실에서도 이런 인간을 만나면 싫겠지만 여긴 게임이다. 그저 즐기기 위해 오는 장소에서까지 저런 뇌 없는 이야길 들어야 한다니 울컥 짜중이 치밀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신의 벼락을 피할 수 있을지니!" "오, 그래? 그럼 한번 시험해 볼까?" 유한은 뇌제의 홀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그들을 번개로 지저 주었다. "크아악!" 단 한 발의 벼락에 절반의 성직자들이 운명을, 아니 플레이를 달리했다. "히이익!" "도망가자!" 살아남은 성직자들은 유한이 다시 번개를 치는 시늉을 하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한마디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오오! 저 간악한 악귀를 보라!" "악마에 영혼을 판 저 이름이 붉은 자를 보라!" 어쩌다 울컥해서 번개를 날렸더니 PK가 되고 머더러가 되어 버렸다. 그저 게임의 시스템일 뿐이지만 사이비 교단의 선교사들은 그마저 불신자의 상징이니 어쩌니 떠들어 댔다. "야이 자식들아! 그래 오늘 악마한테 뒈져 봐라!" "히이익! 신이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신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고 철공소에 있는 유저들도 유한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은근히 다리를 거는 등 응원했다. 뇌제라는 칭호를 가진 악마는 머더러 카운터를 지난 다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2 머더러 카운터를 넘길 동안 불쾌한 기분을 가라앉힌 유한은 다시 주물 스킬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손님이 왔다고 한다. 이번엔 중요한 볼일이 있다는 손님이었다. 다시 응접실로 가 보니 두루마기를 걸치고 수염을 길게 기른 장넌의 유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사, 아니 술법사인가? 혹시 찬드라 대륙에서 왔나?' 그러나 상대는 한국인이었다. 뭐 카프의 경우처럼 저쪽으로 넘어가서 술법사가 되었는지, 아님 찬드라 대륙의 의상을 걸치기만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용건부터 물어볼 일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이가 적지 않아 보여 유한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지그 군. 자네는 조국의 미래를 어찌 생각하나?" 중요한 볼일이라 하더니 뭔가 진지한 주제를 내뱉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와 뜬금없이 조국의 미래를 물어보다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유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 나라는 크게 잘못되었네! 올바른 자주의 길을 걷지 못하고 외국의 눈치를 보고 있어! 젊은이들은 외래문화에 취해 타락해 가고 있고, 단일 민족의 혈통마저 무너지고 있네." 장넌의 사내는 피를 토하는 듯한 연설을 이어 갔다. "대통령부터 퇴진시켜야 하네! 이 정권을 바꾸지 않으면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구원할 수 없어." "대체 누구십니까?" 유한의 물음에 남자는 자신의 머리 위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진조국당 대표 장원갑일세. 이번 오월 재보궐선거에……." "나가!" 뭔가 했더니 자신의 당을 지지해 달라 유세하러 온 것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들어 보지도 못한 3류 야당을. "지그 군! 조국과 민족의 미래가 걱정이 되지 않나?" "예! 걱정됩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요." 울컥 화가 치민 유한은 그에게 쏘아붙여 주고는 밖에서 일꾼들을 불렀다. 건장한 체격의 NPC 일꾼들은 장원갑의 양팔을 붙들고 응접실에서 끌어냈다. "무슨 짓이냐, 이놈들! 당장 놓지 못해? 내가 누군 줄 알고!" 장원갑이 펄펄 뛰었지만, 현실 세계의 정치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 리 없는 NPC 일꾼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철공소 밖으로 내쳐진 장원갑은 분에 못 이겨 악담을 늘어놓았다. "지그 이놈, 듣던 대로 친일파로구나!" "뭔 개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왜 친일파예요?" 하다못해 별 해괴한 말까지 다 나오자 이번에는 유한이 펄쩍 뛸 지경이었다. "일본 놈들에게 저 골렘을 팔았다면서? 그러니까 넌 친일파라는 거다!" 유한이 오와리 번의 영주 오다에게 블랙 아이언을 판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친일파 운운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여긴 자유도가 보장되는 가상현실 게임이고 오다도 유저들 중의 하나였으니까. "친일파 꼴통 자식! 네 할아비의 할아비도 쪽바리에게 나라를 팔았으렸다!" "블랙! 저 인간 당장 하늘의 별로 만들어 버렷!" "알았다." 원지 몰라도 귀가 따가웠던 블랙은 장원갑을 들어 하늘로 집어 던졌다. 장원갑의 외마디 비명을 마지막으로 철공소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아놔, 진짜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다 설치네." "왜 그래?" 유한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송코가 다가와 물었다. "아 글쌔. 좀 전에는 이상한 사이비 교도들이 찾아오더니 이제는 삼류 정치인이 와서 시끄럽게 굴잖아요." "하하, 그랬어?" "지금까지는 전혀 안 그렇더니 왜 저런 놈들이 찾아오는 걸까요?" 수천만의 유저들 중에 별의별 놈들이 다 있겠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유한의 물음에 송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건 아마 지그 네가 명성도 높고 부자여서가 아닐까?" "명성도 높고 부자여서라고요?" "그래, 단순히 전도만 할 목적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건넸을 텐데 너한테만 매달리잖아." 그건 그렇다. 지그 철공소에는 유한 말고도 수십 명의 유저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일언반구 안 하고 자신만 찾는다는 게 좀 이상했다. 신의 은총은 사람을 가리는 게 아닐진대 말이다. 사실 유한이 부자이긴 했다. 기존의 블랙 아이언 생산으로 돈을 많이 버는데다 얼마 전부터는 에르젠을 대량 생산하면서 갈퀴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으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곧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갑부라는 발리안과 맞먹게 될지도. "사람들 중에는 유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특정한 목적으로 게임을 히는 사람들은 많은 유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접근한단다. 그들의 명성과 자금, 인맥을 이용해야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제길, 다음부터는 저런 놈들은 안으로 들이지 마세요." 그러나 유한의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용건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기 시작하자, 방문 목적을 감추거나 속이는 이들이 생겨났다. "지그 님! '빛과 소금 운동 본부'에서 나왔습니다.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기부 좀 하시지요." 옷차림이 번드르르 한 음유 시인은 불우 이웃 돕기를 할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정말 불우 이웃 돕기를 할 생각이 있다면 정식으로 드림맥스에 협조 요청을 했으리라. "돈 없습니다." "돈 없으면 아이템도 괜찮습니다. 저희가 현질로 처분 해서……." "아, 댁들한테 줄 거 없다니까요!" 유한은 진드기처럼 매달리는 녀석을 쫓아 버리곤, 문가에 소금까지 뿌렸다. "핸만하면 좀 주지그래?" 언제 접속했는지 옌스가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흥! 저런 사이비들한테 한번 돈 주면 밑도 끝도 없이 물려들어 온다. 그런데 너 시험은 다 끝났냐?" 저번에 꼭 대학에 갈 거라고 하도 애원하기에 오펜을 소개시켜 주었다. 덕분에 한동안 게임에서 오펜과 함께 돌아다니며 열공 모드에 빠져 있더니 이제 다 끝난 모양. "훗! 다 끝냈지. 이 몸이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성적이 오를 듯해." "그러냐?" 유한은 밖으로 살짝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잘 보이지 않던 중·고등학생 유저들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중간고사 시즌이 끝난 모양인지 그들의 표정은 무척 밝고 개운했다. "와! 시험 끝났다!" "지금까지 못한 거 다 해야지!" "지그 님! 수리 좀 해 주세요!" 많은 유저들이 유한의 핸드메이드 무구를 사거나 수리를 받기 위해 찾아왔다. 그동안 못한 사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준비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꺄아악! 숨어! 숨어!" 채린이 개인 작업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저곳 둘러보다 원소 합성로 뒤에 몸을 숨겼다. "뭐야? 무슨 일……." 유한이 다가가 물으려고 할 때, 채린이 검지손가락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말을 걸지 말라는 표시. '이거 어디서 보던 상황인데?'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아니나 다를까. 유한이 그 상횡을 떠올릴 때, 개인 작업실로 낯익은 인물이 들어왔다. "시아, 너 여기 숨은 거 다 안다! 당장 안 나올래?" 그는 채린이네 학교 선생님인 아레스였다. 작년에 이어 을해도 채린의 담임이 된 아레스는 여전히 학생들 관리에 열심이었다. 채린은 원소 합성로 뒤에서 고개를 빼끔히 내밀고는 외쳤다. "선생님, 중간고사 끝났잖아요! 좀 놀게 해 주세요!" "시꺼! 고3이면 공부를 해야지! 그리고 놀 만한 성적이 되면 또 몰라, 시험을 고따위로 치고 놀겠다고?" 아레스의 말에 채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 벌써 시험 점수 나왔어요?" "니 점수만 채점해 봤는데 아주 엉망이더라. 너 그래서 대학 못 가, 인마." "우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랬어요." "그렇게 떠든 녀석들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를 하지. 얼른 안 텨 나올래?" 결국 채린은 아레스의 엄포에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에는 채린의 반 친구인 듯한 소넌 소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담임을 향해 다시 한 번 애걸했다. "선생님! 오늘만 좀 봐주세요!" "내일은 공부할게요." "시꺼! 다들 이거 받고 저쪽 공터에 앉아." 아레스는 학생들에게 책 한 권씩을 나누어 주었다. 책에는 '고등학교 국어'라고 굵게 적혀 있었다. "와, 불법 복제본이다. 선생님 고발해야지." "언놈이야? 죽을래?" 아래스는 엄포를 하고도 좀 찔리긴 했는지 아이들을 다독였다. "이 자식들아, 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희들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선생님은 어디 레벨 안 올리고 모험 안 가고 싶은 줄 아냐? 선생님이 이렇게 시간 쪼개서 쫓아다니며 가르쳐 주면 제발 좀 고마운 줄 알아라." 그렇게 하소연한 아레스는 자신들을 멀둥히 바라보고 있는 유한과 옌스를 보았다. "뭘봐. 니들도 이리 와서 앉아." "왜요? 전 그쪽 학교 학생도 아닌데요." "전 이미 대입 검정고시 패스했습니다만." 두 사람은 아래레가 자신들을 끌어들이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도 입시 준비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 "내가 어디 틀린 말이라도?" "아뇨,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찐지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에 유한과 옌스도 학생들 틈에 끼여서 앉았다 옌스는 요즘 부쩍 성적과 입시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갖고 있어서 그랬지만, 유한의 경우는 좀 달랐다. '후후, 채린이랑 같은 반이 된 기분인걸.' 채린이 옆에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하자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정말 채린이랑 같은 학교에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아아, 게임에서 공부하다니 최악이야." 어쨌거나 좋은 유한과 달리 채린은 영 싫은 기색이었다. 홍미진진한 모험을 즐겨야 할 환상의 공간에서까지 입시의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입이 툭 튀어나은 그녀는 수업 준비를 히는 아레스를 바라보며 따지듯이 이야기했다. "게임에서 공부하는 불쌍한 애들은 우리뿐일 거예요!" "뭐가 니들뿐이야. 이야기 못 들었냐? 게임에 학원이 생겼다는 거?" 작넌의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드림맥스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대한 기업의 참여를 권장했다. 그 결과 기업체의 이름을 딴 상점이나 음식 체인점 같은 점포들이 들어섰고, 얼마 전에는 사립 학원까지 생겼다. "그렇게 세운 학원에선 강의뿐만 아니라 학원 전용 교재에 학원 전용 교복까지 판매하고 있다." "컥! 그런……." 그건 유한도 처음 듣는 이야긴지라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버추얼 시뮬레이터용 가상 강의가 있는데, 뭐 하러 게임 세계에 학원을 따로 만드는 거죠?" 채린의 말대로 수강료만 지불하면 들을 수 있는 가상 강의들이 캡술의 발명 이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런 강의들은 왠지 갇혀 있는 기분이 드니까." 아레스의 말대로 가상 강의는 부자연스럽고 일방적이다. 유한도 갑갑한 기분이 들어 예전에 듣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실제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더구나 게임상의 학원은 공부 마치고 곧장 놀러갈 수 있다는 장점 아닌 장점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원의 경우는 학원 전용 지하 던전이나 도서관 던전 같은 걸 마련해 둔 모양이고……." "이야! 그것 재밌겠는데!" 옌스가 홍미가 있었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의 머릿속에선 에이린이랑 학원 교복을 맞춰 입고 학원 던전을 탐험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강의를 통한 성적 향상의 효과를 주는 것만도 아니야. 현실의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컨텐츠를 제공하기도 하지. 서클 활동이라든가, 학원 폭력 방지 등에선 현실의 학교보다 더 낫기도 하단다." 점점 말을 할수록 아레스의 목소리에선 힘이 빠졌다. 표정도 시무록해졌다. "벌써 몇몇 학생들은 게임 속의 학원이 더 낫다며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기도 한다는구나. 어차피 고둥학교 졸업장은 검정고시 같은 걸로 딸 수 있으니까……." '실망스러운 건가?' 유한은 어찐지 아레스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 하긴 교사된 입장에서 학생들이 현실 학교보다 가상의 교육 환경과 선생님들을 더 선호한다면,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만큼 현실의 교육자들이 잘못 했기 때문이니까. 아니면 게임 속의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성적이 그렇게 일취월장할 리가 없지." 사실 아레스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는 이유는 단지 학생들을 쫓아다니며 지도하거나 공부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가상현실에서 교육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현실에 반영하거나 도입할 수 없을까 연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가상현실의 환경이 더 좋다고 아이들을 그쪽에 내맡길 수는 없다. 분명 가상현실에서도 뭔가 배우는 것이 있을 테지만, 결국 아이들은 보다 거칠고 복잡한 현실에서 살아야 하니까.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책 펴라. 55페이지부터 시작하겠다." 학생들은 모두 선생님이 준 교과서 복사본을 펼쳤다. 좀 전에 투덜거리던 채린도 선생님의 수업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 중에 더 이상 누구도 짜증 내거나 불만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선생님은 자신들을 위해 이곳에 있으니까. 3 드림맥스 본사 7층 게임 관리실. 직원들이 하품을 하며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3교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래도 지겨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룻. 이를 잊기 위해 아르페디아 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곧 흥미를 잃고 만다. "아아,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건 역시 지겨워." "맞아. NPC로 접속해서 감시하는 게 더 재미있을 텐데 말이야." 게임 내에는 수많은 NPC들이 있다. 보통 이들은 인공지능으로 움직이지만, 게임사의 특수한 목적에 따라 수동으로 조정되거나 직원이 직접 접속해 콘트롤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NPC를 이용하지 않는다. 잘못 남발하다간 회사가 게임에 개입해 간섭하고 조종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얼른 일 끝내고 집에 가서 따로 접속하든가 해야지." 모니터링 직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르페디아 대륙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참 화면을 넘기던 그는 어느 곳에서 스크린을 딱 멈추었다. 스크린에는 멋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게임 내에 자리 잡은 몇몇 사립 학원에 등교하는 이들이었다. "게임 속에서 환상의 학창 생활이라……" "저기 들어가는 데 연령 제한이 있다면서?" "당연하지. 아저씨가 학생이면 이상할 것 아니야." 그러나 이러한 제한에 항거(?)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배움에 나이를 따지냐며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는 유저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렇게 요구하는 유저들은 어이없게도 정규 교육 과정을 다 마친 사람들이었다. "그 양반들은 암울했던 과거 현실에서의 학창 생활을 게임에서나마 되돌리고 싶다……. 뭐 그렇게 이야기 하던데?" "핑계지. 열에 아홉은 여학생 유저들에게 껄떡델 속셈일 거다." 직원들의 눈길은 어느 학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화려한 장식과 문양이 새겨져 있는 문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원 학생들 간의 싸움이 아니라, 학원 생이 아닌 일반유저와 경비 NPC들과의 싸움이었다. "아놔! 그냥 들어가서 구경 좀 하고 나올 거라니까!" "학원에 금이라도 처발랐냐!" 유저들은 그렇게 항의하며 강력한 공격 스킬을 날리고 화려한 이펙트의 마법 스킬을 터트렸다. 척 봐도 레벨이 200은 넘어 보이는 고렙 유저들이다. 그러나 학원 경비 NPC들은 그런 그들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 버리곤 역공을 날려 유저들을 해치워 버렸다. 웬만한 보스 급 몬스터 못지않은 실력. "우리 '학림 아카데미'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입학을 원하시면 정식 수속을 밟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세계에 가서 허가를 받으십시오." 경비 NPC가 말한 다른 세계란 바로 현실 세계를 말한다. 게임 내 학원을 다니고 싶은 유저는 현실에 있는 학원 을 찾아가거나 홈페이지에 접속해 입학 신청서를 작성하고, 수강료를 납부해야 한다. 입학 신청서에는 유저의 ID와 캐릭터 이름을 적게 되는데, 승인이 되면 유저는 학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승인을 받지 못한 유저는 무슨 수를 쓰든 학원에 들어 갈 수 없다. 정문이 아닌 월장이나 땅굴, 공중 침투를 해도 마찬가지다. '학원의 결계'로 외부인은 항상 튕겨 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네 그 이야기 들었어?"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홀짝이던 직원이 옆의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뭐가?" "저 학림 아카데미 말인데 현실에서도 있는 학교래." "그래서?" 동료는 별것 아니리는 듯이 응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에 '분교'를 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립 학교들도 몇 곳 있기 때문이다. "근데 그 학교, 꽤 문제 있는 학교라는 모양이야." 직원은 인터넷에 을라온 학림 재단의 부정과 비리 의혹들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학교 공금 횡령, 촌지 사건, 특정 업체 비호 등등. "거기다 재작넌에 학교 급식에 쥐가 나와서 난리가 났었지." "우웩, 그거 진짜야?" "신문하고 뉴스에도 나온 거야." 인상을 확 찡그린 동료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게임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겠지?" "뭐, 학원 식당 NPC들은 쥐고기를 재료로 쓰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직원은 학림 아카데미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저기서 수업을 듣는 강의료가 비싸. 우리 조카가 저기 등록했는데 한 달 수강비만 이백만 원이래." "헉! 뭐가 그리 비싼 거야?" 현재 게임 내 학원들의 한 달 수강비는 대략 30만원 정도였다. 여섯 배가 넘는 비싼 값을 받는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내고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일단 시험 성적을 잘 을려 줘서 그렇대. 전교 300등을 밑돌던 학생들이 저기 다닌 지 한 달 만에 100둥 안에 들어왔다 하더라고." "오! 그거 대단한데!" 그래서 현재 전국적으로 이곳에 자식을 등록시키려는 학부모들로 아우성이었다. 이곳에 들어간 학생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적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놀라운 결과를 보고 놀란 교육 방송에서 나와 취재해 가기도 했다. "실력은 있는 학교인 모양이군." "학림고가 공부는 잘 시킨대. 애들 전국 석차도 높고. 이미 저거 이전에 학림 재단에서 운영하던 사이버 학원에서도 성과가 상당했다는 소문이야." "흐음, 그래서 부정이나 비리 의혹이 많아도 버티고 있는 건가? 학교야 애들 성적만 잘 올리면 그만이라고들 생각하니……." 현재 학림 아카데미의 성공은 사이버 학원에서 보여 준 성과가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고 그 사이버 학원의 체제가 고스란히 아르페디아 온라인으로 이식되었다. "그런데 조카 녀석 말로는 학원 강의가 다른 곳에 비해 그리 특출 나지 않다고 하더군. 비싼 학원비나 명성에 비해서 말이야. 그래서 계속 다닐지 말지 고민 중이래" "그래도 한술 밥에 배부르는 건 아니니까 계속 다녀 보면……." 그 후로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대화에 집중한 그들은 자신들의 뒤에 손석진이 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들을 만큼 들은 손석진은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뭔가 잠시 두들겨 대던 그는 주변에 이미지와 텍스트가 빽빽한 스크린들을 가득 띄워 올렸다. "학림 재단이라……." 학림 재단과 게임 내의 학림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던 손석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눈여겨 볼 만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장 제르달. 현재 마노스 제국의 국무대신." 그는 지난 번 베레타 공화국에 특사로도 갔었다. 철십자 길드의 일원이라 그런지, 현재 학림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명목으로 베레타 공화국과의 전쟁에 참전시키기도 했다. "예전에 티쳐스의 수장이셨군." 손석진이 가장 눈여겨보는 정보는 바로 그것이었다. 예전에 게임을 이용하여 사사로이 잇속을 채운 죄로 징계를 받았던 자. 그런 자가 또다시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두고 봐 주지." 그는 눈앞에 떠을랐던 스크린들을 죄다 꺼 버리고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우리의 베히모스는 잘하고 있나? 이런 내가 잠깐 바빠 손을 놓은 사이에 곤경에 처해 있군. 얼른 달려가서 도와줘야지." 손석진은 직원들 몰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조여 오는 손길 조여 오는 손길 1 베레타 공화국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초반의 불꽃같던 맹위는 다소 꺾였지만 여전히 남진을 멈추지 않았다. 다크나이트 길드와 B.O.B 길드가 베레타 공화국군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전부터 기가 꺾인 마노스 제국군은 여전히 제대로 된 반격을 펼치지 못했다. 철십자 길드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현재 다수의 NPC 병사들은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천하의 마노스 제국군이 이 정도밖에 안 돼?" "아무래도 정권이 바뀐 여파가 큰 것 같아." 베히모스 등극 이전 미네르바 치세에선 마노스는 군사 국가로서 군대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몰라도, 기사나 병시들은 여제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그러나 미네르바가 죽고(?) 베히모스가 등극하면서 국가 정책은 이전과 완전히 뒤바뀌었다. 형편이 어려워서라지만, 군비가 줄어들고 대접이 소홀해지다 보니 병사들의 사기가 상당히 꺾여 버린 것이다. "거기다 우리가 반란을 예방한다고 영주나 지휘관급 NPC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잖아." "그랬지." 다 NPC 마도사 아벨의 조언 때문이었다. 여제를 놓치는 바람에 발키리 작전인가 뭔가로 전환하자면서. "그게 일단 초기의 수습에는 좋았지만, 전쟁 상황에선 쥐약이 된 거야. 군대를 지휘해야 할 노련한 NPC들을 죄다 없애 버렸으니 전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노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밀리터리 마니아인 몇몇 간부들은 2차 대전의 동부 전선 초창기의 전사(戰史)를 떠올렸다. 나치 독일이 침공하기 전,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를 위해 처절한 숙청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유능한 장교들이 꽤 많이 죽었다. 후대 학자들은 이것이 독소전 초반에 소련이 처참한 패주를 한 원인이라 말했다. '현재 우리가 딱 그 짝이잖아!' 무서울 정도로 닮지 않았는가. 영주와 지휘관들을 길드원들이나 협력을 약속한 레지스탕스 NPC들로 교체하긴 했지만, 머리가 바뀐 군대가 정상화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유저들이 NPC보다 자연스런 판단과 대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군대의 통제 능력은 NPC 지휘관들보다 떨어진다. 군대 경험이 없는 유저의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스텟의 경우도 쿠데타의 여파로 패널티를 받아 다들 떨어진 상태가 아닌가.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베히모스의 물음에 노벨이 대답했다. "일단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야 해. 내 의견은 북부의 영토 일부를 베레타 공화국에 넘겨주고 불가침 협정을 맺는 게 어떨까 하는데……." "땅을 떼 주자고?" 베히모스는 물론 다른 간부들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싫은 건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재 이 방법밖에는 없잖아!" 노벨의 주장에 베히모스는 슬쩍 옆에 선 아벨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뇌를 팔아먹은 듯한 소릴 지껄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과 같은 기발한 조언과 작전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슬쩍 살펴보니 멍청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행동도 자연스럽고 눈빛도 지혜로 가득 차 보였다. "일단은 노벨 님 말대로 히는 게 좋겠습니다, 패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힌 베히모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그를 아벨이 다독였다. "열 걸음을 나가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수치가 아닙니다." "알았어, 그리하도록 하지." 베히모스는 노벨을 특사로 삼아, 황제인 자신의 뜻을 적은 친서를 베레타 공화국군 진영에 보냈다. 얼마 후, 노벨이 상대방의 답신을 가지고 들어왔다. "의장은 만나지도 못했고, 총사령관인 란데르트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 아직 접속을 안 했어. 하지만 부관이라는 녀석은 만날 수 있었지. 란데르트가 그놈한테 전권을 맡기고 갔더라고." "그래, 전권을 받은 그 부관 녀석이 뭐라던데?" 노벨은 말하는 대신에 답신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KIN' 이라는 간단명료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베히모스는 답신을 와락 구겨 버리며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어떻게 하지? 지금 자금도 모자라서 거대 키메라를 충분히 생산할 수가 없어." 베히모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전력을 보강하고 재원을 마련할 만한. "있다!" "있다고? 어떤 방법인데?" 베히모스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튕기자 모두들 시선을 그에게로 모았다. "영지랑 작위를 파는 거야!" "그, 그러니까 지금 매관매직을 하자고?" 노벨을 비롯해 간부들은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베히모스가 생각해 낸 특단의 대책이 설마 매관매직인 줄은 몰랐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영주가 되려거나 귀족 칭호를 얻고 싶어 하는 놈들이 꽤 있어. 그런 놈들이 가진 돈을 끌어들이자는 거지." "하지만 영지나 관직은 이미 공을 세운 길드원들에게 나눠 줬잖아." "다시 회수하면 돼." "멋대로 처리할 일이 아니야!" 간부들이 언성을높였다. 손에 쥐어 준 사탕을 도로 뺏어 간다는 데 가만히 있을 녀석이 누가 있겠는가. 다들 심한 반발을 하기 마련이다. 당장 간부들만 해도 저번 쿠데타 이후 지방의 대영지를 차지하고 공작이나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잘못하면 그것도 내뱉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황제야! 내 나라의 영지와 작위를 내가 멋대로 못할 게 뭐 있어?" "너 혼자 황제가 되었냐? 누가 널 황제로 올려 주었는데!"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있으면 철회하지!" 베히모스의 말에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원통하게도 현재 그 막장스런 방법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알았으면 서둘러 시행하자고. 늑장 부리면 팔아 버릴 영지와 작위도 없을 거야." 확실히 마노스 제국이 망하기라도 하면 그나마도 기회가 없다. 모든 걸 제국의 찬탈에 걸었던 철십자 길드 입장에선 어떻게든 제국을 지켜 내야 했다. 2 간부들과 결판을 본 베히모스는 그날 곧장 길드원들에 게 배분한 영지와 작위를 회수했다. 그리고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다. 마노스 제국의 영지를 분양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철십자 길드의 홈폐이지에 접속하셔서 확인하십시오!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와 여러 관련 사이트에 올라온 이 글을 본 유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쳇,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며 으스대더니 꼴좋군." "그래도 영주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대체 얼마에 파는 거야?" 유저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베히모스는 홈페이지 전체 공지를 통해 길드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든 것은 재정을 확보하고, 전력을 마련하여 베레타 공화국군을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 마땅한 대가를 치를 거라고. 그러나 이 같은 통보에도 불구하고 길드원들의 반발은 결코 작지 않았다. 베히모스를 비난하는 글들이 게시판에 가득 을라왔고, 길드를 탈퇴하겠다는 유저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베히모스는 영지 분양 프로젝트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책정한 마노스 제국의 영지 가격은 다음과 같았다. 남작 위와 인구 3만 명의 영지, 800만 골드. 자작 위와 인구 6만 명의 영지, 1,500만 골드. 백작 위와 인구 10만 명의 영지, 2,000만 골드. 하나같이 눈이 튀어나을 정도의 고가들이지만 영주가 되고 싶어 하는 유저들은 많았다. 우선 재빠르게 소식을 접한 재력이 있는 중소 길드들과 자력으로 영주가 되기 힘든 생산직 유저들이 마노스 제국으르 달려가 영지를 분양받았다. 그들이 갖고 온 막대한 자금은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의 숨통을 터 주었다. 거기다 그들은 마노스 제국군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하얀여우들' 길드에서 궁수 유저 삼백 명을 보내 줬습니다." "드럼통타이거 님이 최상급 HP포션 오백 개를 쓰라면서……." "87위 랭커인 쌍칼준규 님이 한몫 거드시겠답니다!" 영지를 분양받은 길드와 유저들이 많아질수록 지원도 늘어났다. 덕분에 베레타 공화국군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예상외의 결관데? 이렇게 도와줄 줄은 몰랐어!" "크크, 당연히 도와야지. 우리가 망하면 자기네 영지도 날아가니까." 그런 이유였다. 결코 철십자 길드와 사이가 돈독하다거나 인심을 크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큰일 났다! 큰일!" 황궁 안으로 철십자 길드원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호들갑을 떨며 들어온 길드원에게 베히모스가 물었다. "무슨 큰일인데?" "골드맨이 영지를 사겠대요!" 다행히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골드맨에 대해서 그리 아는 바가 없었던 베히모스는 그가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골드맨이 누구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베히모스 너 아직 모르냐? 웨스턴 최고의 갑부잖아." "프로인이 사라진 뒤로 유럽 서버 최강자이기도 하지." 영지 분양에 대한 소식이 외국에까지 알려진 모양이다. 골드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간부들이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금광을 10개 넘게 가지고 있다는 둥, 황금으로 저택을 지었다는 둥, 엄청난수의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둥. "흠, 대단히 좋은 소식이군. 만약 그 작자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런데 일반 영지는 안 사겠대요." "그럼?" "웨스턴 최강자 대접을 해 달랍니다. 적어도 후작, 아님 공작급 영지를 달라고……." 후작이나 공작급 영지는 간부들이나 보유하고 있다. 어떻게든 양보를 받아 내면 괜찮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돈은 그만큼 있기나 하데?" "오천만 골드면 되겠냐고 하던데요?" 베히모스를 비롯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히모스는 당장 간부 한 명이 가진 공작령을 회수해 골드맨에게 팔았다. 이후로도 외국 유저 몇 명이 마노스 제국의 영지에 대해 구매 의사를 밝혀 왔다. 돈이 아닌 용병으로서 유저나 NPC 병사를 보내 준 이도 있었는데. 이 역시 철십자 길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미봉책이지만 재원과 병력을 마련한 철십자 길드는 베레타 공화국군의 남진을 완전 저지하고 빼앗겼던 성과 영지들도 차차 되찾을 수 있었다. "베히모스, 베레타 공화국이 휴전을 제의했는데 어떻게 할 거야?" 마노스 제국군의 반격에 당황했는지, 아님 [마노스 제국 정벌] 퀘스트의 조건을 충분히 달성했는지 란데르트가 휴전을 제의해 왔다. "휴전? 웃기지 말라고 해! 느닷없이 뒤통수 때릴 땐 언제고 여기서 휴전을 하자고?" 아직 북부에 빼앗긴 영토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벌써 란데르트는 약삭빠르게 전쟁을 끝내고 발을 빼려 들었다." "휴전은 없어! 둘 중 하나가 망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전해!" "하지만, 란데르트가 말이야……." 란데르트는 철십자 길드의 고딩 황제께서 어떤 생각인지 잘 아는 듯, 휴전 제의 서신에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만약 전쟁읕 계속하겠다면 우리 쪽에서도 영지를 팔겠네. 이왕이면 승리했읕 때를 생각해 마노스 제국 영토도 미리 팥아 버리려 생각하고 있는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철십자 길드 간부들은 심장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들은 최후의 막장스런 결단을 내린 뒤에야 베레타 공화국군을 밀어 낼 수 있었지만, 베레타 공화국군은 아직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한다면 마노스 제국의 영토도 미리 팔아 버린다고 한다. 더한 수단을 쓸 자신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다른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란데르트의 서신을 본 NPC 아벨이 입을 열었다. "미리 팔아 버리는 대신, 이미 마노스 제국의 영지를 산 사람들의 소유권을 베레타 공화국에서 인정한다고 말할 수도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말이 이해가 안 된 베히모스가 물었다. "저쪽에서 그렇게 말하면 우리한테서 영지를 샀던 자들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만약 베레타 공화국이 결단을 내리고 다시 마노스 제국을 압박한다면 영지를 산 유저들은 기을어 가는 마노스 대신 베레타에 손을 내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제길!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건가?" "너무 분해 하지 마십시오. 치욕을 만회할 기회는 반드시 올 겁니다." 결국 베히모스는 베레타 공화국과의 휴전을 받아들였다. 베레타 공화국은 지난 전쟁 때 당했던 참담함을 갚아 준데 만족했고, 란데르트는 퀘스트를 완수하고 공작 작위를 받는데 만족했다. 다크나이트 길드와 B.O.B길드는 다소 아쉬워했지만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가 보여 준 막장 결단의 추태를 감상한 데 만족하기로 했다. 거기다 거대 키메라라는 새로운 병기의 데이터를 입수 한 것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큰 소득이다. 자신들이 보유 한 거대 골렘의 음직임을 지그 철공소의 블랙 아이언 수준으로 을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마노스 제국을 패망에서 건져 냈다지만, 이번 전쟁에서 이런 저런 망신을 당하고 길드원들의 신망을 잃은 베히모스는 가장 큰 손해를 본 유저였다. "뿌드득! 이 모든 것은 다 지그라는 놈 때문이야!" 딱히 지그 때문은 아니지만 무조건 죄를 덮어씌우는 그였다. 그러나 분하게도 아직은 현실에서 놈을 박살 낼 만한 좋은 방법이 없었다, 흑곰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었고 일진들 가지고는 고경덕 하나 이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일단 게임에서 먼저 한 방 갈겨 줘야 한다. 자신이 약 오른 만큼 펄펄뛰도록. 그렇게 생각한 베히모스는 대장장이 지그를 응징할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노벨을 불렀다. 휴전 이후 다른 간부들은 그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여기기에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노벨뿐이었다. 지그 응징 방법에 대해서 한참 머리를 굴리던 노벨은 일단 간단한 방법부터 이야기 했다. "그냥 길드전을 선포하는 게 어때?"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노스 제국과 아바란 왕국은 거리가 멀어. 그렇다고 철십자 길드원들만 데려가서 공격하기도 그렇고." 안 그래도 요즘 길드원들의 신망을 많이 잃은 베히모스다. 잘나가다 못해 질주 중인 지그를 공격한다고 하면 몇 명이 찬성해 주겠는가. 더구나 지그는 반칙 같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얼마 전에 획득한 뇌제의 홀, 그리고 철공소에서 민들어 내는 블랙 아이언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다 놈에겐 리저드 군단도 있다. 그 리저드 군단은 이후로 부찍 성장해 다이노스 왕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다. 아마 지그 놈이 불러온다면 이전보다도 더 많이 오면 왔지. 덜 오진 않을 것이다. "제길. 아무런 방법도 없는 건가?" "폐하! 그럼 이 방법은 어떻사옵니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서 있던 NPC 마도사 아벨이 나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은 명석함과 교활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베히모스의 물음에 그는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듣던 베히모스와 노벨도 나중에는 만족한 기색을 보였다. "괜찮군. 하긴 꼭 두들겨 패는 방법이 능사는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방법이 그 자식에겐 더 괴로을지도 모르겠어." 베히모스는 곧장 아벨의 계획을 실행했다. 3 쿠퍼는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한 대장장이 유저로, 아바란 왕국의 수도 벨파스에 대장간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한에게서 질 좋은 제련철을 수급받은 뒤로 그의 대장간의 매상은 예전보다 크게 오른 상태였다. 손님들도 많아지고, 덕분에 무구를 만드느라 생산 스킬의 랭크도 부쩍 올랐다. '더도 덜도 말고 요즘만 같아라!' 그럼 머지않아 지그처럼 철공소를 짓는 것도 가능하리라. 쿠퍼가 흥겨운 얼굴로 갑옷을 뚝딱거리며 만들고 있을 때였다. 대장간 문이 열리더니 상인 복장의 유저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옵셔!" 쿠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절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저돌 하나하나가 자신의 성장을 돕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상인 유저는 대장간 안을 스옥 훑어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푸힌 상회의 리치라고 합니다." "아, 리치 님이셨군요. 무일 찾으시는지?" 쿠퍼의 물음에 리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희 상회에서 브로딘 왕국에 대량의 무기 납품 계약을 맺었는데……." 리치의 말에 의하면 푸힌 상회는 브로딘 왕국에 1만 점의 검과 5천 점의 방패를 납품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상회 소속의 대장장이들이 파업을 벌이는 바람에 물건 납기를 맞추기 어려워졌다고. "그래서 말인데,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오백 개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어이쿠, 이런 큰 거래가!'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5백 개면 적어도 10만 골드는 나간다. 뜻하지 않는 큰 건수에 쿠퍼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자신의 대장간에서 단기간에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니지만, 이런 거래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당연합지요. 언제 어디로 가져다 드릴까요?" "보름 후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점으로 가져다주십시오. 저는 그럼 바빠서 이만." 용건을 마친 리치는 서둘러 대장간을 떠났다. 또 다른 대장장이에게 주문을 하러 가는 모양이다. 하긴, 브로딘 왕국과 주문을 생각하면 서두를 수밖에 없을 터. 대장간 문 앞에서 리치를 배웅한 쿠퍼는 순간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런, 멍청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걸 까먹었잖아!" 보통 1만 골드 이상의 큰 거래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상식이었다. 거래의 안전과 신용을 위해서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큰 행운에 쿠퍼는 그만 계약서를 작성하는 걸 잊어버렸다. 거기다 바빠 보이는 리치가 서둘러 가 버리기도 했고. "뭐 문제가 있으려고. 푸힌 상회가 작은 곳도 아니고 말이야." 브로딘 왕국을 중심으로 꽤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푸힌 상회다. 그렇게 생각한 쿠퍼는 도시 중앙에 있는 구인 게시판에 잠시 아르바이트 할 대장장이들과 일꾼들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열흘 안에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5백 개를 만들려면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쿠퍼가 주문을 받은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10명의 대장장이 유저와 NPC들을 고용해 밤낮으로 주문 받은 무기들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아직 5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에휴, 힘들다. 잠시 좀 쉬었다 할까?" 그가 허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일전에 보았던 리치란 상인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리치 님이 아니십니까? 주문 날짜가 아직 안 된 걸로 아는데……." 의아해 입을 여는 그에게 리치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저번에 했던 주문을 취소해야겠습니다" "뭐라고요?" "파업을 한 대장장이들이 다시 생산에 나서기로 했거든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또 들르겠습니다. 그럼 수고 하세요." 쿠퍼의 눈이 놀라 부릅떠질 때 리치는 서둘러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자, 잠깐만요!" 쿠퍼는 서둘러 리치를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리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귓속말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응담이 없었다. 로그아웃을 한 것이다. "망했다!"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비상금까지 톡톡 털어 재료를 사들이고 일꾼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공으로 증발하게 생겼으니. "이럴 수는 없어!"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짓던 쿠퍼는 화가 난 얼굴로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부로 향했다. 그곳에 가 자신의 억울힘을 말하고 보상을 받을 생각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부장이라는 유저가 나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주문을 했으면 지켜야지 중간에서 취소하면……." 쿠퍼는 자신이 당한 일을 상세하 설명했다. 지부장은 정말 푸힌 상회에 책임이 있다면 보상해 줄 용의가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쿠퍼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본점에 알아보겠습니다." 본점의 길드원들에게 쪽지를 보낸 지부장은 답신을 기다렸다. 쿠퍼도 안절부절못하며 제발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얼마 후 답신이 왔는지, 지부장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쿠퍼에게 말을 건냈다. "계약한 대장장이들이 파업한 것도 사실이고 외부에 주문을 맡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뭡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푸힌 상회에는 리치란 이름의 유저 가 없습니다." "네에?" "종종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 상회 소속이라 속이고 사기를 치고 다니는 유저가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쿠퍼 님은 그런 비매너 유저에게 속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가슴에 분명 푸힌 상회의 문장이 있었다고요!" 분명 월계수가 둘러싼 금화를 보았다. 그러자 한숨을 쉰 지부장은 종이 뭉치를 꺼내더니 쿠퍼 에게 보여 주었다. 종이마다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문장들은 푸힌 상회의 문장과 엇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이, 이건……?" "사기꾼들은 문장을 내새워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래에서는 철저히 계약서를 사용하고 평소 신용하는 상인들이 아니면 공증을 받거나……." 지부장의 이야기는 더 이상 쿠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결론은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 아닌가. 쿠퍼는 힘없이 푸힌 상회의 지부에서 나왔다. 사기꾼에 속아서 아까운 돈과 시간, 노력을 날려 버린 그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혔다. 4 카루라는 최근 들어 칼틴 시에 있는 자신의 대장간을 확장했다. 지그 철강 조합에 든 이후로 매상이 부쩍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쪽쭉 뻗어나가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사업에 먹구름이 끼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옆에 대장간이 새로 생긴 것이다. "뭐야? 저 주인은 최소한의 매너도 없나?"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도덕이라는게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선 대장간이 여럿 있어도 상관 없지만, 이곳 칼틴 시는 다소 한산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한 블록은 떨어져야 예의인데, 새로 생긴 대장간의 주인은 그마저도 없는 듯했다. "뭐, 그렇게 나오면 싸고 질 좋은 제품으로 눌러 주지." 카루라는 자신이 있었다. 지그 철공소에서 제공받는 제련강을 사용해 만든 무구는 값도 싸고 품질도 좋아 고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 그러나 그런 카루라의 자신이 바닥을 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뭐 이런 가격이 있는 거냐고!"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에 100골드를 받았다. 재료값의 반에 반도 안 나오는 가격이다. 그러나 바스타드 소드만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특정 제품을 전략 할인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 대장간 안의 제품들은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C급의 방패가 200골드에, 체인 메일 한 벌의 가격이 300골드. "아니,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야!" 카루라는 당장 옆 대장간에 쳐들어갔다. "어서 옵셔!" 싹싹하게 보이는 점원 NPC가 카루라를 반겼다. "당장 주인 나오라고 해!" 카루라의 호통에 가게 안에서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주인이 나왔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넌 유저였다. "니마, 무슨 일이심?" 카루라는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는 무구들의 가격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가격을 붙인 거야?" "남이사!" 카루라는 이 싸가지 없는 초딩 녀석을 두들겨 패 버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고 다시 말했다. "유니온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가격표 바꿔." "지금 우리 가게에 시비 거는 거심?" "그래. 시비 건다 어쩔래?" 키루라의 말에 초딩 녀석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를 향해 말했다. "형아들!" 초딩 녀석의 외침에 가게 안에서 기사와 용병으로 보이는 유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얼굴에 한 성질 하게 생겼다. "뭐냐? 누가 우리 꼬맹이 괴롭히는 거냐?" "대장장이 계집애 너냐? 너 죽고 잡냐?" 사내들이 건들거리며 묻는 말에 카루라는 맹렬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안이고 밖이고 간에 다시 한 번 우리 꼬맹이를 괴톱히면 아예 게임 접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알아서 해!" "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카루라는 도망치듯 가게에서 빠져 나왔다. "휴우!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지!" 한숨을 내쉰 카루라는 칼틴 시의 대장장이 유니은을 찾아가 새로 생긴 가게의 만행을 성토했다. 그러나 같은 직종들 간의 경쟁을 조질하고 상거래 질서를 지켜야 할 유니은 수장 NPC의 말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비싸게 받는 것도 아니고 싸게 받을 뿐인데. 그게 뭐 어때서?" '캬아악! 이놈의 NPC 자식! 꼬박꼬박 회비는 잘 받아 챙겨놓고 이래도 되는 거야!' 만약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얼굴에 왕복 5차선 도로를 그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니은의 수장이 이렇게 띠껍게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유니온 사무실 안으로 아까 그 무개념 초딩 대장장이가 덜렁 들어왔다. "님아, 반가요. 저 회비 내러 왔삼." "오, 자네 왔나?" 유니온 수장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귀여운 손자라도 발견한 듯했다. "자요, 이번 회비." 카루라는 초딩 녀석이 낸 회비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금화가 한 주머니. 족히 1만 골드는 되어 보였다. 그렇게 물건을 싸게 팔면서 어떻게 저만큼 돈을 낼 수 있는지? 아니, 그보다 회비를 저만큼 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유니온에 내는 돈이라고 해 봤자 가입비 50골드, 월 회비 100골드 정도다. 다시 말해 저 초딩은 유니은 수장에게 뇌물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이후로 유니온의 비호를 받는 초딩의 대장간은 성황을 이루고 카루라의 대장간은 판매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단골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들을 옆 가게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5 학원에 다녀온 유한은 오늘도 어김없이 게임에 접속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주위가 밝아지더니 지그 철공소가 눈앞에 보였다. "지그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자." "에? 뭐, 뭐예요?" 송코가 획 손목을 낚아채더니 옹접실로 데리고 갔다. 철공소 응접실 안에는 무슨 일인지 지그 철강 조합의 조합원들, 주로 아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이제 오셨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변 주 제련강은 모두 보내 줬는데요" "하아,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닙니다." 한숨을 폭 쉰 쿠퍼는 유한에게 덥석 달려들어 애원했다. "길드장님, 저 좀 도외주십시오" "저도요. 이대로 가다가는 대장간을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대장장이 유저들은 유한의 팔을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바람에 유한은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었다. "모두 조용!" 장내를 진정시킨 것은 리지스였다. 팔짱을 끼고 대장장이들을 쫙 노려보던 그녀는 우선 쿠퍼에게 먼저 잔소리를 퍼부었다. "쿠퍼 씨, 내가 예전에 이야기 했었죠? 잡상인이랑은 거래하지 말라고!" "그, 그게 워낙 큰 주문이 들어와서 그만 욕심에……." 사실 리지스와 거래를 했으면 사기당할 일은 없었을 것 이다. 리지스는 길드장인 지그와 동업자니까. 리지스는 우물쭈물히는 쿠퍼에게서 카루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카루라 양, 내가 푼돈 아끼지 말고 유니온 꽉 잡아 놓으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 말 코로 들었어요? 그러니까 초딩에게 발리지!" 초딩에게 발렸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카루라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대장장이 둘이 반박을 못하고 침몰했다 사기를 당하거나 영업난에 빠져 유한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다른 대장장이들은 리지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대장장이들은 지그 철강 조합에 들어온 뒤로 모두 리지스와 거래를 텄다. 상계에서 산전수전 다 경험한 리지스는 그들에게 거래나 운영에 필요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장이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고, 여자인 리지스를 다소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한과 달리 리지스 말고도 다른 상인들과 종종 거래를 트고 멋대로 사업을 확장하곤 했다. "자기들이 경솔해서 손해 봐 놓고 지그에게 징징거리면 되겠어요?" "됐어, 그만해. 게임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유한이 점잖게 다독이자 리지스도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리지스가 한발 물러서자 유한은 대장장이들 앞으로 나서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한 번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실수를 하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되지요. 이번에 큰 교훈을 얻었다 여기시고 다음부터 모두 조심하세요." 유한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멋지게 훈계했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길드의 장이되었기 때문일까. 대장간 때부터 일꾼들을 이리저리 부리면서 늘게 된 재주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여러분의 자본 문제에 관해서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비상식적으로 거래를 한다는 곳의 배후는 리지스나 제가 알아보고 손을 쓸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길드장님만 믿습니다." 냉정하게 내치면 어쩌나 걱정했던 대장장이들은 진심으로 유한의 배려에 고마워했다. 유한이 길드원들을 살려 준 이유는 어려음이 있어도 항상 휘하의 사람들을 챙겨 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 철십자 길드의 영지 분양 건을 보면서였다. 정현일, 아니 베히모스가 무리한 수를 쓴 바람에 길드 원들이 원성을 터트리고 탈퇴를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베히모스는 길드를 위해서, 마노스 제국을 살리려 영지를 판 거라고 했지만, 진실된 이유는 자신의 머리에 쓰고있는 왕관 때문이었다. 정말 길드를 위하고 마노스 제국을 살리려 했다면 길드원들을 무시하고 그런 결정을 멋대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란테르트에게 애원하고 부탁하는 방법도 있지 않는가. "으아악! 사람 살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유한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 봤더니 철공소와 광산 마을 일대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입니까?" 유한은 남쪽에서 도망쳐 온 유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그들은 다급하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몬스터가 떼거지로 물려오고 있습니다." "몬스터가요?" 유한은 그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그 철공소가 자리 잡은 케이트 산맥의 계곡은 비교적 몬스터의 위험에서 안전한 곳이다. 왜냐하면 유한이 주기적으로 블랙을 이용해 몬스터 토벌을 하고 있는데다가 지그 철공소를 찾는 손님들도 심심 풀이로 사냥을 하러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몬스터 떼가 물려왔다니. 유한은 곧장 사람들이 달려오는 광산 마을 남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수백 수천 마리의 몬스터 무리를. "뭐가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거야!" 고블린부터 시작해, 오크, 트롤, 오우거까지. 마치 케이트 산맥의 몬스터들이 죄다 몰려온 듯했다. 이제는 유한의 레벨에서 한참 떨어지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한꺼번에 구름같이 몰려오니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짓밟혀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블랙!" "알고 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블랙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가서 몬스터들을 상대 했다.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벼락을 날리며 블랙을 지원했다. 블랙과 유한이 분전하자 당황해서 도망치던 유저들도 되돌아와 둘에게 힘을 보탰다. 덕분에 몬스터들이 철공소와 광산 마을로 진입하는 것은 막아 낼 수 있었다. 아니, 몬스터들은 애초부터 철공소와 광산 마을의 습격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몬스터들은 유저들과 제대로 응전하려 들지도 않았다 틈만 나면 밀치고 도망가려고 안달이었다. '이 녀석들이 왜 이러지?' "후손! 전방을 봐라!" 블랙의 말에 유한은 몬스터들이 달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유한만이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다. 왜 수많은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물려왔는가의 해답이 그쪽에 있었다. 시커먼 연기를 쁨어 대는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바람을 받으며 남쪽의 숲을 먹어 치운 화마는 철공소와 광산 마을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대장장이 지그 12권에서 계속)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