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 10권 1.과거와의 싸움 "소개하마! 짐의 검이 된 광전사 바츠니라!" 이바니우스 3세의 선언에 유한 일행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녀석을 바라보았다. 바츠라니, 어쨰서 해킹되어 사라진 바츠가 NPC의 부하가 되어 나타날 수 있는가? 모두 놀라고 당황하는 가이, 바츠가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때 게임을 떠들썩하게 했던 광전사의 위풍당당한 모습. 부황한 바츠를 보고 유한 일행은 또 다른 충격과 놀람을 맛봤다. 그이유는 바로....... "청동 바츠?"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녀석은 바로 그로지아 왕국에있는 바츠의 무덤에서 사라진 동상이었다.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유한이 투덜거렸었던. '그런데 저건 뭐지?' 유한은 동상에게서 예전에 없던 것을 보았다. 미간에 음침한 빛을 흘리는 흑수정이 박혀 있었는데 동상이 움직일 때마다 검게 빛났다. "아쉽게도 육신은 얻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청동으로 된 몽뚱이를 얻었지. 그래서 짐은 비전의 마법으로 갑옷에 있는 바츠의 사념을 모아 그를 부활시킨 것이니라." 다시 말해, 이바니우스 3세는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입혀 노흔 동상을 부하로 삼았다고 자랑하고 있는것이다. 그 어이없는 짓에 모두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동상이라는 거잖아." "에이, 진짜 바츠라도 나오는 중 알고 깜짝 놀랐네. 근데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거에요?" 에이린의 물음에 오펜이 대답했다. "지간 대규마 업데이트 이후에 숙련도 높은 장비로 이상한 소환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헤에, 그럼 그거 새로 나온 히든 스킬......" 에이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청동 바츠가 공격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청동 바츠의 스피드는 에이린의 예상을 초월했다. "떨어져!" "까악!" 유한이 다급하게 에이린의 뒤춤을 잡고 끌어당겼다. 돌진해 온 청동 바츠의 검이 에이린의 몸을 아슬아슬게 스쳐 지나갔다. "몰러서! 가까이 다가가지 마!" 유한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일행은 거리를 벌린 채 전투 준비를 했다. 에이린을 구해 낸 유한도 재빨리 청동 바츠에게서 물러났다. "후후후,청동상이라고 우습게 영기지 마라. 바츠의 사념이 조종하니 살아생전의 그와 다를 바가 없음이야" 이바니우스 3세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5명의 마도사들을 지목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청동 바츠와 함께 역적들을 포박해 오도록 해라. 짐은 먼저 바람의 무녀를 찾으러 가겟다." 지금 이바니우스 3세에게 있어 아르네스를 찾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었다. 직접 역적들을 치죄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아르네스가 다른 곳에 숨어 버리기 전에 서둘러 붙잡아야 한다. "기다려! 거기 서지 못해?" 유한은 달려가 이바니우스 3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청동 바츠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한과 청동 바츠의 거리는 겨우 세 걸음 남짓. 이바니우스 3세의 말이 사실이면 서둘러 물러나는게 당연했지만, 유한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어쩐지 오기가 생겼고, 분기가 끓어올라 한 마디 쏘아붙였다. "비켜" 친구들은 유한의 이런 언행에 기겁했다. "지그야, 조심해!" "오빠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요!" 꼭 사워 봐야 강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동 바츠는 바츠의 화신이 아니더라도 정말 강하게 느껴졌다. 이제 지그는 죽었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청동 바츠는 오히려 검을 아래 떨어트리며 공격 자세를 풀었다. "훗!" '웃어?' 예전에 바츠였을 때도 이런식으로 웃었다. 하수가 분명한 상대가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때. 이렇게 코웃음을 치곤 했다. 청동 바츠는 비록 외모는 닮지 않았지만, 바츠의 버릇까지 고스란히 따라 할 줄 알았다. 단순한 모션이 이렇다면, 보유한 스킬이나 능력은 물어보나 마나일 터. '제기랄,왜 이딴 게 나오는 거야!' 유한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츠가 해킹당해 짜증났는데, 이렇게 대놓고 짝퉁을 등장시켯으니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도대체 드림맥스는 유저를 뭐라 생각하는 거지!' 적어도 유저에세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아니면....... 유한은 불연 듯 오만하게 웃고 있는 허진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바츠를 해킹한 것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이라 주장했다. 그럼 바츠가 해킹된 것도, 청동 바츠가 나오게 된 것도 다 그의 농간이란 말인가. 정말 손석진이 범인인가? 하지만 리셉션 파티 때 걸려 온 전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끄때 손석진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해커는 전화를 해서 멋대로 떠들어 댔다. 캉! 유한은 격렬하게 울리는 쇳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자신에게 공격을 날렸던 것인지, 청동 바츠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뭐 하는 것냐, 후손, 죽을 뻔하지 않았나?" 청동 바츠의 공격을 막은 것은 블랙이었다. 꽤 강력한 공격이었는지, 블랙의 오른팔 장갑에 깊은 검상이 남아 있었다. 유저의 공격에도 잔기스밖에 나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청동 바츠는 재차 공격을 하려는지 자세를 바꾸었다. "물러나라, 저 청동 조각은 내가 처리하겟다." '그래, 나중에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유한은 일단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싸움을 끝내고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보기로 했다. 청동 바츠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진짜 해킹범인인지. "허. 바츠와 바츠가 만나다니!" 화면을 들여다보던 게임 관리실의 드림맥스 직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과거의 바츠였던 유한과 그의 바츠 시절 데이터를 이식 받은 청동 바츠가 마주치는 진충경이 벌어진 것이다. 부하 직원들처럼 멍하니 입 벌리고 있던 정경욱은 옆에서 가느다랗게 미소 짓고 있는 손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청동 바츠의 등장. 이 같은 깜짝 이벤트를 생각해 낼 사람은 원개발자인 손석진밖에 없었다. "자네 설마..... 저 상황을 유발하려고 히든 스킬 '인커네이션(Incarnation)'을 만든 건가?" 사라진 고대 흑바법으로 설정된 인커네이션. 그것은 버려지는 무구를 재활용하자는 취지에서 개발된 스킬이었다. 숙련도가 높으면 무구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향상된다 그러나 랭크가 낮거나 내구가 거의 바닥일 때는 전투에서 계속 사용하기 어렵다. 그새서 드림맥스는 숙련도가 쌓인 만큼 무구에 사용자의 사념이 깃들었다고 설명하고, 이 사념을 이용해 무구를 우래 사용한 캐릭터의 화신을 불러내는 히든 스킬을 만들었다. 화신의 능력은 마법사의 스킬 랭크에 따라 원캐릭의 30%에서 90%까지 능력을 낼 수 있었다. 이는 특별한 퀘스트를 수행한 흑마법사들에게 주어지는 히든 스킬이지만, 이바니우스 3세도 사용할 수 있게끔 패치되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설정상 고대 마도 문명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의도는 했지만, 정말 저런 광경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유저가 알세인의 퀘스트를 수행한다면, 그저 '바츠가 부활했다!'고 화들짝 놀라는 것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바츠 유저였던 유한이 퀘스트를 맡으면서 이렇게 기가 막힌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데이터를 복제했다지만, 너무 똑같은 거 아닌가?" 보통 인커네이션으로 소환된 화신은 스텟과 스킬만 같은 짝퉁일 뿐이다. 그러나 저 청동 바츠는 예사롭지 않았다. 전투 패턴이나 행동 양식까지 거의 같은 것이다. 유한이 적잖게 놀란 것이 바로 그 증거. "저 녀석은 이벤트용이라 신경을 좀 썻습니다. 바츠의 데이터를 연구해서 집어넣지요." "그걸 어디서 구했는데?" 유저가 게임을 하면 플레이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쌓인다. 그러나 아이템을 제외하고 드림맥스 서버의 바츠 관련 정보는 일 년 전에 해킹당해 지워지지 않았던가. "...... 미흡하지만 바츠의 동영상들을 보고 재현했습니다." "음, 그랬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인터넷의 여러사이트에는 바츠 동영상들이 남아 있었다. 손석진은 그걸 연구해서 적용한 모양이다. "애 좀 썻겟구먼." "하지만 성격까지 제대로 재현되었는지는 모르겟습니다." 손석진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자신 없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정경욱은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석진이 공을 들인 '짝퉁'이 얼마나 활약을 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소울 크래쉬(Soul crash)!" "어딜 감히! 카이저 실드!" 청동 바츠가 오러가 듬뿍 담긴 공격을 날리자 곧장 블랙이 가로막았다. 연이어 블랙이 발을 크게 구르며 스턴을 유도하자, 청동 바츠는 땅에서 뛰어올라 사가운 검격을 내리쳤다. 이에 블랙은 육중한 철권을 날리며 응전했다. 일진일퇴의 용호상박. 블랙은 광전사 바츠의 능력을 복제한 괴물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 오히려 힘에 이써서 압도하는 면모를 보여 주었다. 청동 바츠도 그 점을 인식했는지, 우월한 스피드를 이용해 전투를 전개하고, 블랙을 상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한 일행과 마케니아 마도사들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심해, 마도사들이 언제 싸움에 끼어들지 몰라." "알고있어, 저쪽도 분명 우리처럼 생각하고 있겟지?" 채린의 망대로 미케니아 마도사들 역시 호시탐탐 한 수거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막상막하의 대결은 누군가의 개입에 따라 전세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유한 일행과 마도사들은 기회를 엿보며 서로를 견제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블랙과 청동 바츠의 팽팽한 접전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동 바츠가 검을 양손으로 쥔 채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유한이 다급하게 외쳤다. "물러나! BB어택이야!" "뭐어?" 자세를 낮춘 상대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일렁인다 싶더니, 시뻘건 불꽃이 눈앞에서 번득였다. "크윽!" 블랙은 다급하게 피했지만, 양쪽 무릎의 장갑을 잘리고 말았다. 그는 적잖게 놀랐다. 갑자기 상대의 검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싶더니 공격력이 배나 강해졌다. 강철 합금으로 된 장갑을 밀랍처럼 녹여 버리는 위력이라니! "브, 블레이즈 블레이드(Blaze Blade)다!" 채린과 에이린, 오펜은 깜짝 놀랐다. 언젠가 동영상으로 한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청동 바츠가 쓴 스킬은 오직 살아생전(?)의 바츠만이 익혔다고 알려진 유니크 스킬이었다. 유한은 이 스킬을 앞의 알파벳을 따서 bb어택이라 줄여서 부르곤 했다. 광룡 키세라스의 최후 숨통을 끊을 때도 바로 이 스킬을 사용했었다. 설마 청동 바츠가 이마저 쓸 줄이야! 그러나 유한은 그저 경악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공격해! 지금이 기화야!" 비록 충격은 컷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번쩍 정신을 차린 블랙은 검을 늘어트리고 있는 청동 바츠에게 달려들었다. 쿵! 몸통에 회심의 일격을 맞은 청동 바츠는 뒤로 벌렁 나자빠져볐다. '공격력은 강하지만 마지막에 빈틈이 생기지' 바츠였던 유한은 블레이즈 블레이드의 단점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옛난에도 되도록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했다. 아마 청동 바츠는 블랙이 피할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블레이즈 블레이드를 쓰면서 그 뒤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 이것은 인공지능의 한꼐였다.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주마!" 상황을 역전시킨 블랙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대로 쓰러진 청동 바츠를 밟아 부서트리려 했다. "리볼빙 파이어!" 마지막 순간, 미케도니아 마도사들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마법을 연사하여 공중에 떠 있는 블랙을 밀어냈다. "치잇, 방해를 하다니!" 바닥을 구른 블랙은 몸을 일으켯다. 그러나 무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니, 끼긱거리며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런! 장갑만 잘렸던 게 아니었나?' 아무래도 방금 전 청동 바츠의 일격에 무릎 관절이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다시 뛰고 착지하는 등, 무리하게 움직이다 보니 상태가 더 심해졌던 것. 블랙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 청동 바츠가 일어섰다. HP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청동 바츠가 공격을 해 온다면 블랙은 소멸될지도 모른다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그러나 청동 바츠는 블랙이 아닌 미케니아 마도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야 네놈이 위험해 보였으니까." "큭, 우리가 도와준 걸 고마워해라." 마도사들은 오만한 모습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자 청동 바츠의 미산에 있는 흑수정이 번뜩였다. 그는 몸을 낮추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설마 하던 마법사들의 눈앞으로 초열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끄아악!" 순식간에 마도사 셋이 운명을 달리했다. 새까맣게 타 버린 세 마도사의 몸이 모래 탑처럼 허물어졌다. 비명은 블레이즈 블레이드 공격을 간신히 피한 마도사들이 지른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살아남은 두 마도사는 무척 당황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싸움을 방해했으니 죽어야지." 청동 바츠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방해하다니? 우린 너를 도운 거다!" "쓰레기들에게 도움을 청한 적 없다." "쓰레기라니! 우린 네놈을 되살린 은인이다!" "감히 창조주에게 그런 망발을 하다니!" 마도사들이 펄펄 뛰었지만, 날아오는 것은 싸늘한 칼날. 나머지 두 마도사들도 순식간에 베어 버린 청동 바츠는 차갑게 내뱉었다. "언제 살려 달랬나?" 블랙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겟군. 왜 같은 편을 죽였지?" 블랙의 중얼거림에 그의 상태를 살피러 온 오펜과 에이린이 설명을 해 주었다. "자기 싸움에 끼어들었다고 화내는 거에요. 생전의 바츠는 남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도 싫어했거든요" "저런 걸 전문 용어로 '바츠스럽다'고 하죠" "흐음, 다시 말해 성격이 지랄 같다는 거로군" 블랙의 평가에 유한은 울컥했다. 그리고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점에 더 화가 났다. 바츠가 저런 건 다 학림고에서 당한 일때문이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강한 힘을 갖게 되자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필요 없다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바츠가 사라지면서, 유한은 또 다르게 변했다. 아이템을 추적해서 해커를 찾자며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대장장이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함꼐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과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지그야." 채린의 부름에 유한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런 눈빛을 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해. 평소보다 더 많이 흥분한 것 같고, 제대로 게임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유한은 그 말을 집어삼키고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 왠지 그녀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채린에게 사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다 정리되면. 블랙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저 무릎 관절에 있는 부품들이 조금 부서진 줄만 알았는데, 불꽃의 검기에 녹아 버린 것도 있고, 이가 빠지고 위어 버린 톱니바퀴도 있었다. 고치기 위해서는 꺠어진 부품들을 갈아 끼워야 했다. 유한의 인벤토리에는 블랙의 예비 부품이 있었지만 수리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같은 편을 해치운 청동 바츠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나 보군." 비아냥거리는 청동 바츠에게 오펜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미안한데, 고칠 때까지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내가 왜 너희 사정을 봐줘야 하지?" 오펜은 얄짤없다는 말이 이 경우에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 날수는 없었다. 블랙은 파티에 있어 최강의 무력.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엔 에이린이 나섰다. 그녀는 애교를 잔뜩섞어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에잉, 바츠 오빠는 강하잖아요. 그만큼 강한 상대랑 싸우는 게 좋죠? 그러니까 지그 오빠가 블랙 님을 고칠떄까지 잠깐, 아주 잠깐만 기다려....." "닥쳐. 싸울 수 없으면 징징거리지 말고 죽어." 에이린은 크게 실망했다. 바츠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긴 했지만, 저리 매정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정성 어린 애교 공세까지 무시하다니! "아, 진짜 왕재수네요. 오리지널 바츠도 저럴까요?" "오리지널을 충실히 재현한 거라면 같겟지." "저런 왕재수 좋다는 사람들이 있는 게 신기해요" "바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의 무위에 반한 것뿐이야." 오펜의 평가는 냉정했다. 덕분에 유한은 왜 바츠가 해킹되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그가 없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쉬워할까?' 채란과 여러 친구들은 분명 안타까워 할 것이고, 철공소의 단골들도 펄쩍 뛸것이다. 다만 경쟁자인 발리안은 축배를 들지도. "이봐, 쓰레기들. 죽기 전에 실컷 떠들었나?" "누가 쓰레기에요! 우리가 쓰레기면 댁은 잡동사니 고철이에요! 댁 같은 고철은 우리 지그 오빠가 녹여서 재활용해 줄 테니 기대하라고요!" 청동 바츠의 비아냥거림에 에이린이 앙칼지게 대꾸했다. 에이린이 유한에게 기대하는 이유는 이판사판이라서가 아니다. 다 전례가 있기 때문. 그녀가 아는 지그는 금속과 돌, 나무로 된 몬스터들을 암 브레이크라는 히든 스킬과 생산 스킬로 해치우는 기인 유저였다. 그렇기에 청동 바츠도 유한이 해치워 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다는 게 맞을지도. "누가 날 박살 낸다고?" "내가." 청동 바츠의 물음에 유한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에이린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청동 바츠와 싸울 생각이었다. 자신과 닮지 않은 청동상이 자신인 척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지그야, 너 미쳤어?" "후손, 아직 인생을 포기하긴 이르다." 채린과 블랙이 말렸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죽으려고 나서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틈을 만들 테니까 오펜이랑 같이 공격해. 그리고 에이린." "네, 지그 오빠." "MP 다 털어서 나한테 버프 걸어라, 나 혼자서는 저놈한테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겨." "알았어요. 블레스! 귀글리! 스트랭스! 디바인 프로텍션!......." 연달아 쏟아지는 신성력 스킬에 유한의 스탯과 전투력이 부쩍 올랐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강화했다 해도 청동 바츠의 전투력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해 보는 거다. 이놈이 정말 바츠의 복제품이라면, 그리고 놈의 약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승산은 있다. 그리고 옆에는 자신을 지원해 줄 동료들도 있다. 자신감에 차 자신을 노려보는 유한이 기가 막혔던지, 청동 바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죽을 준비는 다 끝냈나?" "그래, 널 죽일 준비가 다 끝났다." 유한의 말이 끝나자, 청동바츠가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유한의 뒤에서 나타났다. "바, 방금 그건 대쉬?" 동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같은 대쉬지만, 청동 바츠의 대쉬는 동력왕 옌스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어느새 강했는지 지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정도. "하, 대단하군. 그걸 피했나?" 그런데 대쉬가 성공하지 않았는지 청동 바츠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 웃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뭐가 말이냐?"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청동 바츠의 미간에 박힌 검은 흑수정이 흉하게 번득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말을 마저 했다. "왜냐고? 넌 불량품이니까." "웃기는 놈이군. 운 좋게 한 번 피한 것 가지고 우쭐대다니." "그럼 한 번 더 해 봐. 또다시 피해 줄 테니까." 유한의 자신감에 청동 바츠는 살벌한 기운을 띄며 다가왔다. 유한은 청동 바츠의 발걸음을 속으로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셋까지 헤아렷을 때 청동 바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으로 따르지 못할 정도로 고속 기동을 한것이다. '칼을 아래로 찌르겟지.' 앞에서 대쉬를 누워 피하며 '떡밥'을 던져 놓았기에 상대의 공격 방향을 정해 둘 수 있었다. 유한은 옆으로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펑! 맹렬한 폭음과 함께 유한이 들고 있던 마이티 소드가 뚝 부러졌다. 청동 바츠가 입고 있는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의 독특한 방어 기능 때문이다. 그러나 당황하는 쪽은 유한이 아니라 청동 바츠였다. 두 번쨰 공격도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상대는 한술더 꺼서 반격까지 했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피한것이 아니라는 소리. "이 자식이!" "말했지, 넌 불량품이라고." 청동 바츠가 불량품이 된 이유는 너무 잘 만들어져서다. 왁벽하게 만들었는데고 불량품이다? 보통은 그 반대라 칭하겟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스킬의 공격 패턴과 사전 동작 하나까지도 똑같이 복제했기에, 유한은 한 수 앞서 상대의 행동을 읽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다 청동 바츠를 도발시켜 특정한 스킬을 쓰도록 유도했다. 이러니 제아무리 전투력이 월등해도 청동 바츠는 미리알고 피하는 유한을 적중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까불고 있군, 너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줄까?" "호, 블레이즈 블레이드? 그거 지금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유한의 말에 청동 바츠는 움찔 놀랐다. 슬쩍 겁을 줘 보려고 한 말인데, 오히려 상대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후후! 블레이즈 블레이드를 사용하느라 소모한MP와 스테미나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리지.' 게임상에 완벽한 스킬을 없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어느 것이든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스킬을 익힌 존재가 무적의 먼치킨이 될 테니까. 유니크 스킬인 블레이즈 블레이드도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넌 대체 뭐냐? 어떻게 내 필살기의 비밀을 알고 있지?" "글쎄, 너 같은 불량품은 들어도 이해 못할걸?" 빠득! 청동 바츠가 이를 가는 동시에, 미간에 박힌 흑수정에서 진득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단단히 화가 났다는 증거다. 분명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로 덤벼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한의 예상이 빗나갓다. 청동 바츠는 동진하며 검을 횡으로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제길, 소울 크래쉬인가.' 좀 더 화려한 공격 스킬을 쑬 줄 알았는데, 청동 바츠는 의외로 빠르고 단순한 소울 크래쉬를 선택했다. 이번엔 미처 스킬을 유도할 시간이 없었다. 쩌엉~!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한의 눈앞에서 청동 바츠의 검이 멈춰 섰다. 에이린이 버프로 걸어 준 디바인 프로텍션 덕분이다. 신성력으로 대상자에게 강력한 방어막을 선사하는 디바인 프로텍션은 바츠의 검으로부터 유한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청동 바츠의 공격이 워낙 강했던 탓에, 디바인 프로텍션은 단 한 번밖에 방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한에게 있어 방어는 그 한 번으로 충분했다. "암 브레이크!" 청동 바츠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그는 반격을 날렸다. "이 느려 터진 자식이!" 한 번 유한에게 반격을 당한 바 있던 청동 바츠는 이번엔 방심하지 않았다. 청동 바츠는 다리 쪽으로 날오오는 암 브레이크를 가볍게 피하고는 곧장 반격으로 전환했다. 번개같이 몸을 돌린 그는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찔러 넣었다. 빠각! "지그야!" 모두들 유한이 청동 바츠의 검에 찔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은 유한의 옆구리를 스쳣을 뿐이고, 오히려 유한이 검 손잡이 밑 부분으로 청동 바츠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확리 미간에 박힌 흑수정을 얻어 맞은 청동 바츠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흑수정은 바츠의 사념이 모인 곳으로, 청동 바츠를 움직이는 중추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을 타격했을 때보다 반응이 격렬했다. '성공이다! 역시 미간의 흑수정이 약점이었군.' "크으으! 이놈이 감히!" 유한은 멧돼지처럼 흥분해 달려드는 청동 바츠를 피해 집중적으로 흑수정만 노리고 공격했다. "암 브레이크!" 몇 차례 이어진 유한의 반격에 청동 바츠의 HP가 뚝떨어졌다. 블래과 싸워도 별로 닳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3분의 1이 떨어져 있었다.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흑수정은 아직까지는 멀쩡했지만, 청동 바츠의 머리에는 굵고 가는 금들이 생겨났다. 또 한 번 제대로 타격한다면 아주 끝장낼 수 있을지도. 비틀거리는 청동 바츠에 유한은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죽어랏!" 그런데 청동 바츠의 움직임이 갑자기 돌변했다. 반동강 난 유한의 검을 후려쳐 버린 그는 유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놈! 잡히고도 피할 수 있나 보자." 유한이 지금까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수세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청동 바츠였다. "멍청아, 난 잡히러 온 게 아니라 잡으러 온 거야." "뭐?" 유한은 청동 바츠의 다리를 노려 건틀렛의 와이어를 쏘았다. 와이어는 다리를 휘감아 묶었고, 유한은 몸을 숙이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때다, 모두 공격해!"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이 드디러 가세했다. "파워 샷!" "매직 애로우!" "세인트 레이(Saint Ray)!" 유한이 틈을 만들자, 가장 먼저 채린이 화살을 날려 정동 바츠의 손에서 검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오펜과 에이린의 공격이 놈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청동 바츠는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와이어가 휘감긴 다리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다 유한까지 멱살로 잡은 팔을 붙들고 늘어지자 더욱 더 운신하기가 어려워졌다. "이거 풀어! 당장 안 놔!" 당황한 청동 바츠는 유한을 마구 때렸다. 월등한 스탯에 청동 주먹이 더해지자 여느 무기 못지않은 살벌한 데미지가 나왔다. 주먹이 한 번 닿을 때마다 유한의 HP가 뚝뚝 떨어졌다. - 체력이 300 닳았습니다. - 체력이 250 닳았습니다. 생명이 휘험합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커억, 이런 막무가내 공격이 더 위험하구나!' 공격스킬이라면 나름 예상해 피할 수 있는데 이건 당최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한은 쓰러지지 않았다. HP가 떨어지면 에이린이 그때그때 힐을 퍼부어 주었기 때문. 덕분에 살벌한 주먹세례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청동 바츠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자식들, 비겁하게 여럿이서......" "네 존재 자체가 비겁이야!" HP가 많이 닳은 청동 바츠는 지금까지와 달리 주먹을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었다. 유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일격에 끝장낼 생각이었다. "버스터 샷!" 그러나 바로 그때, 채린이 날린 회심의 화살이 그의 미간에 박혀 들었다. 또 한 번 흑수정에 강력한 공격이 떨어지자, 금이 간 머리가 쩍 갈라졌다. 머리통이 반쯤 떨어져 나갔지만, 청동 바츠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제길, 이대로 죽을 수는." 허나 청동 바츠에게는 힐을 써 줄 성직자도, 엄호해 줄 마법사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동료들도 제 손으로 모두 없애 버렸다. "나는, 나는 위대한 광전사 바츠......" "짝퉁 주제에 시끄럽다!" 울부짓는 청동 바츠에게 유한이 헤등 박치기를 선사했다. 그의 머리는 정확히 이마를 가격했고, 흑수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안돼에에에! 나는 바츠란 말이다!" 부서진 흑수정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이바니우스 3세가 봉인한 바츠의 사념이 흩어지는 것이다. 사념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지막까지 울부짖던 청동 바츠가 그 자리에 무릎을 끓고 주저않았다. 마치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 경험치 9,000을 얻었습니다. -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얻었습니다. - 펜릴 소드(Fenrir Sword)를 얻었습니다. 청동 바츠를 쓰러트리고, 유한은 바츠 때 입고 있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과 청동바츠가 휘둘러 대던 검을 얻었다. 전사와 기사 캐릭터 전용인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착용할 수 없지만, 펜릴 소드는 유한도 사용이 가능했다. [펜릴 소드] 공격 : 150 내구 : 130 설명 : 검신에 늑대 문장이 새겨져 있는 명검. 명검이 높은 자에게나 어울릴 것 같다. 부수효과 : 착용하면 민첩성이 25 증가한다. 사용제한 : 명성이 20,000이상의 유저만 장비 가능. '마이티 소드가 부러졌는데 마침 잘됐군.' 검을 장비한 유한은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블랙의 관절부품들을 꺼대 수리하기 시작했다. 청동 바츠 때문에 적잖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수리를 마치고 마케니아 일당을 추적해야 한다. 유한이 블랙을 수리하는 사이, 동료들은 부서진 청동 바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놀랐어, 바츠가 이런 식으로 등장한 것도 그렇지만, 지그가 해치울 줄이야." "네. 저도 큰소리치긴 했지만 정말 지그 오빠가 해낼줄은 몰랐어요." 이기긴 했지만, 모두 기분이 얼떨떨한 모양이다. 하긴 블랙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강했던 청동 바츠가 유한에겐 전혀 맥을 추지 못했으니. "분명 레벨과 스탯, 스킬 모두 지그 오빠가 낮았을 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혹시 스피드 핵이나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 건 아닐까?" 채린의 물음에 오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드림맥스가 가만두지 않았을걸. 그리고 지그의 움직임은 분명 정상이었어." 그는 뒤에서 유한과 청동 바츠의 전투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청동 바츠를 앞에 두고도 유한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몰론 적잖게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절망감이나 두려움, 초조한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었을까. '분명 지그는 청동 바츠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 그래서 월등히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기가 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상대를 농락하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건 단순히 선전했다거나 대등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쩐지 전투를 '지배'했다는 느낌이었어.' 오펜의 생각이 맞았다. 예전에 바츠였던 유한에게 있어, 자신과 똑같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일리었으니까/ 청동 바츠와의 승부는 바로 그런 '경험'이 변수가 되었고, 경험릏 바탕으로 전투를 지배했다. 하지만 유한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츠가 해킹당해 사라진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 과거 캐릭터가 동작 패턴과 움직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그만큼 바츠가 나에게 중요했던건가?' 그건 단순히 드래곤을 홀로 잡았거나, 50위권의 랭커 캐릭터라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도 예전보다는 덜했다. 친구들의 애원을 거절하고 조롱하는 청동 바츠를 보았을 때,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꼇으니까. 예전에 자신이 그런 캐릭터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인걸. 넌 정말 그랬어.' 마음속의 바츠가 얄밉게 속삭였다. 홀로 수많은 적과 싸우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섭섭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겪은 불합이하고 억울한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현실에서 겪은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 때문이었다면 훨씬 더 일찍.... '제기랄, 모르겟어!'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의 행보에 대해 후회감은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바츠를 없애 버린 해커에 대한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좋았든 나빳든, 어쨋서나 바츠는 자신의 일부다. 그걸 멋대로 주물럭거린 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놈이 어떤 뜻을 가지고 그런 일을 벌였다 해도 분명 거기에 대한 책임은 물을 것이다. "다 고쳤어. 얼른 마케이나 일당을 쫓아가자." 그리고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방향은 스스로 정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친구들과 게임을 즐길 것이고, 마케니아 일당의 악행을 막아 낼 것이다. 2. 정령들의 궐기 1 드림맥스 본사 게임 관리실. 시계바늘이 새벽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경욱과 손석진은 여전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캐릭터가 바뀌고 플레이 스타일이 변한 주제에 아직도 예전 캐릭터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하고 이쓴ㄴ게 아니라 남아 있었을 겁니다." "흐음, 내면에 말인가?" 그러나 손석진은 그것보다 다른 데 무게를 두고 있었다. 현재 지그인 유한이 과거의 바츠를 이겼다. 캐릭터 성향과 데이터를 분석해서 재현한 몬스터일 뿐이라지만, 기본적인 능력 차이가 월등이 남에도 불구하고 이겼다는 것은 큰의미를 가진다. '보통은 흥분해서 날뛰다 자멸하기 마련인데,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건가?' 이 점이 중요했다. 정경욱이나 다른 직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유한의 플레이는 바로 여기에 정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과 다른 과거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과거를 발판으로 앞으로 나가는 사람도 존재한다. 화려하든 어둡든, 그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현재에 정체될 뿐이다. 과거를 외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난 일을 돌아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좋건 나쁘건 과거를 어떤 형식으로든 발판으로 삼아 오르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지.' 대장장이 지그는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지도않고 계속 모험을 즐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번에 청동 바츠와의 싸움에서도 이긴 것은 당연한다. 과거를 발판으로 삼은 사람이 옛날의 자신에게 질 이유가 없으니까. 손석진이 지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녀석은 계속 앞으로 나가면서 길을 만들고, 미래를 열어 간다. 남들과 다른, 깜짝 놀랄 만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흐뭇하게 스크린을 보고 있던 손석진은 정경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사장님, 이번에 TV 토론회에 나갈 유저는 뽑았습니까?" "그거? 아직 안 뽑았는데." 얼마전 한강 둔치에서 학생 100여 명이 영켜 싸운 집단 현피 사건이 터졌다. 게임 내의 길드전 때문이었다. 이문제로 티쳐스 이후에 잠잠했던 언론이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고, 시민 단체들은 현재의 게임 문화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떠들어 댔다. 그들은 드림맥스에서 올바른 게임 문화 정착을 위해 진지하게 토론을 해 보자며 TV 토론회 참석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장은 참석을 수락했다. "끄응. 이 자식들은 왜 하필이면 우리 회사에....." "그야 우리가 업계 1위니까요." 아무튼 드림맥스는 이번 TV 토론회에 부사장 정경욱과 개발자 손석진, 그리고 유저 한명을 뽑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럼 유한군을 참석자로 넣도록 하지요." "저녀석을? 오려고 할까?" 지난번 리셉션 파티 때 초청되고도 튕겼던 녀석이다. 결국 참석은 했지만, 토론회 같은 함품나고 닥딱한 자리에 오려 할지 의문이다. "참석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으니까요." "이 친구도 참. 누굴 이기려고 토론하는 건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경욱도 나가서 밀리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손석진이 추천한 유한을 뽑기로 했다. 2 블랙을 수리한 유한 일행은 서둘러 미케니아 일당을 쫓아갔다. 이바니우스 3세가 간 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반결할 수 있었다. "크하하하! 바람의 무녀여!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바니우스 3세의 광소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다급히 달려가 보니, 정말 미케니아 일당의 앞에 아르네스가 서 있었다. 정령들이 계속 희생되자, 보다 못한 그녀는 하이엘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바니우스 3세의 앞에 모습을 내민 것이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대왕. 바람의 날개가 하나로는 모자란가요?" "크크크, 바람의 날개라...." 이바니우스 3세는 품속에서 바람의 날개를 꺼냈다. 예전에 채린이 가져다주었던 바람의 날개를, 이바니우스 3세는 주저 없이 아르네스의 발치에 던졌다. "짐은 이제 이따위 돌멩이가 필요 없도다." "그럼 뭘 원하지요? 설마 돌려주려 오신 건 아니겠지요?" 그녀의 물음에 음흄하게 웃은 이바니우스 3세는 아르네스에게 다가가며 마기를 뿜어 댔다. "짐은 그대의 영혼을 원한다. 정령계와 동화된 그대의 영혼을 나의 마기로 물들여 정령계 전체를 지배할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령계 전체를 죽일 셈입니까!" 아르네스와 하이엘프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변했다. 정령계는 지상 세계의 뿌리와 같은곳. 실체화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물질계에서도 정령들은 그 힘을 미치고 있다. 태양이 빛나고 물이 순환되고 꽃과 나무가 자라는 이유가 다 정령들의 활동 때문이다. 만약 아르네스의 영혼이 이바니우스 3세에게 빼앗겨 정령계가 오염되면 그 영향은 물질계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게 된다. 원인 모를 지진과 폭풍이 세상을 파괴시킬 것이고, 순환이 멈춘 땅은 삭막하게 메말라 갈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 생물이 사멸하고 말 터. "그런짓은 세상의 멸망을 불러올 뿐입니다." "후후후. 멸망이라..... 불탄 자리에 싹이 돋는 것은 그대도 잘 알것이다." 아르네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하이엘프들은 치를 떨었다. 이바니우스 3세가 무슨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만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법. 짐은 기존의 세계를 멸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이바니우스 3세는 사방으로 마기를 뻗치며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핫! 알겠느냐? 짐은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되려는 것이니라!" "흥! 누가 되게 내버려 둘둘알고!" 앙칼진 대꾸에 이바니우스 3세는 흠칫 놀랐다. 그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뒤를 돌아 보았다. 좀전에 청동 바츠에게 맡겼던 역적들이 어느새 당도해 있었다. "니놈들이 어떻게?" 분명히 청동 바츠에게 결박된 채로 끌려올거라는 생각햇는데 그게 아니었다. "짐의 검은, 바츠는 어찌되었느냐?" "어찌 되긴? 이렇게 되었지." 유한은 청동 바츠의 잔해를 이바니우스 3세에게 집어던졋다. 처참히 부서진 청동 바츠의 얼굴을 본 국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정말 네놈은 짐을 놀라게 하는구나. 설마 드래곤을 죽인 전사의 화신을 쓰러트릴 줄이야." 허탈하게 웃고 있던 이바니우스 3세는 와락 인상을 이그러트렸다. 필발 선 두 눈을 부라리는 그의 입에선 인간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괘씸한 놈! 감히 천한 대장장이 주제에 짐을 능멸해?" 이바니우스 3세가 유한을 향해 손을 펼쳤다. 손에서 뻗어 나간 검은 마기가 화살처럼 변하더니, 일행에거 소나기 처럼 쏟아졌다. '이건!' 상당히 낯익은 공격이라 생각했는데, 헬리오스 신전의 봉인에서 풀려난 마물이 썼던 다크 애로우였다. 쏟아지는 화살의 비 앞으로 블랙이 나서더니, 거대한 황금빛 방패를 만들어 냈다. "카이저 실드!" "크으윽! 이 빌어먹을망령이!" 자신이 쏜 다크 에로우가 블랙의 방패에 막혀 소멸되자 이바니우스 3세는 펄쩍 뛰었다. 그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고개를 돌려 윽박질렀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역적들을 찢어 죽여라!" 국왕의 명이 떨어지자 마도사들이 주문을 외우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런 마법들을 쓸 기회가 없었다. "파이어....커억!" "아이스 랜스.....끄아악!"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화살들이 마도사들에게 박혀 들었다. 이바니우스 3세에게도 화살이 날와았는데 라이칸의 검에 모두 가로막혔다. "우리가 있다는걸 잊지 마시오!" 공격을 한 것은 키르케를 비롯한 하이엘프들이었다. 그들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과 키메라들을 향해 계속 시위들 당겼다. "이, 이! 뭣들 하느냐! 모조리 죽여 없애라!" "캬오오오! "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국왕의 명령에 키메라들이 유한일행과 하이엘프들에게 덤벼들었다. 원래 근접전용으로 만들어진 키메라들인지라 화살 한두 방 맞았다고 쓰러지지 않았다. "바람이여, 나의 적을 날려 버려라!" 채린이 바람의 날개를 쥐고 외치자, 달려들던 키메라들이 뒤로 날아갔다. 동시에 오펜이 스태프를 땅에 내리 꽂으며 공격 마법을 전개했다. "스톤 엣지(Stone Edge)!" 바닥에서 뾰족한 바위들이 튀어나와 키메라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방어력이 강한 키메라들은 피가 닳을지언정 죽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놈들은 어느 정도 다격은 감당할 수 있다는듯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펜릴 소드를 꺼내든 유한이 블랙과 함께 일행의 앞에서 키메라들의 공격을 막았다. "저리 꺼져!" "죽어라, 이 더러운 미물들아!" 정령계에 유래가 없었던 큰 싸움이 벌어졌다. 정령들은 이바니우스 3세가 뿜어내는 마기와 양측이 뿜어내는 살기에 꼭꼭 숨어 버렸고, 개중에 호기심 많은 몇몇은 구경하러 나왔다가 화들짝 놀라 도망쳐 버렸다. "에잇! 성가신 놈들 같으니!" 블랙은 달려들던 키메라의 발목을 잡고, 녀석을 무기삼아 키메라들을 두들겼다. 무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지자, 블랙은 곧장 그것을 던져 버리고 딴 놈을 집었다. 블랙의 손을 떠난 키메라는 주인인 이바니우스 3세의 품으로 날아갔다. 야박하게도 국왕은 녀석을 받아주는 대신 마기로 갈가리 찌어 버렸다. 예상보다 싸움이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무능한 졸개들에 보다 못한 이바니우스 3세는 결국 직접 나섰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 모두 물러서라! 짐이 처리할 것이다!" 그가 양팔을 벌리자, 주변을 옅은 마기가 감쌌다.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키메라의 사체나 무기 파편들이 기털처럼 떠올랏다. "헉! 제로 그라비티다. 모두 피해!" 유한의 경고에 동료들은 서둘러 마기의 영향권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한번도 이런 마법을 겪어 보지 못한 하이엘프들은 피하지 못했다. "허억!" "아니, 이건 대체?" 그드른 허공에 둥실 뜬 상태에서 어쩔줄을 몰라 했다. 당황하는 하이엘프들을 보며, 이바니우스 3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죽어라!" 국왕의 손에서 펼쳐지자, 하이엘프들을 향해 다크 애로우와 다크 블레이드가 날아갔다. "크아악!" 허공에 몸이 뜨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못한 하이엘프들은 제대로 방어하지도 못한 채 마기의 화살과 칼날에 맞았다. 개중 몇이 피하긴 했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 "저러다 전멸하고 말겠군." "바보야, 가지마!" 유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블랙은 하이엘프들을 구하러 달려갔다. 마기에 대항하는 황금빛 기운을 몸에 휘감은 블랙은 제로 그라비티의 영향권 안에서도 성큼성큼 이바니우스 3세에게 다가갔다. "각오해라, 악당! 네놈의 머리통을 날려주마." "크크,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봐라." 마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블랙을 앞에 두고도, 이바니우스 3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우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블랙의 발밑에 마법진이 생겨나더니 환한 빛을 뿜어냈다. "아, 아니 이건!" 당황하던 블랙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약간은 방심했던터라 피하지 못한 것이다. "텔레포트 게이트!" "맙소사, 저걸 저렇게 빨리 만들다니!" 경악하는 유한 일행을 보며 이바니우스 3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귀찮은 놈까지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지." 암흑의 심장을 취한 이바니우스 3세였지만, 마기를 소멸 시키는 능력이 있는 블랙은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래서 텔레포트 마법을 써서 정령계 밖으로 내보내 버린 것이다. "너무 걱정 마라. 단거리 텔레포트라 멀리 가진 않았다. 아마 엘프의 숲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겠지." "크윽...." 빈정거리는 국왕을 보며 유한 일행은 침음을 흘렸다. 이동 마법을 저런식으로 악용할 줄은 몰랐다. 어쨋거나 유한 일행에게 최강의 전력인 블랙이 사라지자, 미케니아 일당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곧 죽이진 않으마. 너희 역전들은 편히 죽기에는 그 과오가 너무나 크다." 이바니우스 3세는 먼저 하이엘프를 처리할 요량인지 아직 살아 있는 하이엘프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만! 이제 그만 하세요!" 아르네스는 더 이상 동족들의 죽음을 볼 수 없었던지,,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가냘픈외침은 사악한 마왕의 흉심을 자극할 뿐이다. "크하핫, 싸움이 벌어진 이상 끝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바람의 무녀여." "당신에게 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남은 이들의 목숨만은..... 정령계는 살려 주십시오." "건방지구나. 감히 짐을 상대로 거래를 할 셈이냐?" 이바니우스 3세는 남아 있는 하이엘프들을 한 번에 처치할 속셈인지 더 많은 다크 애로우와 다크 블레이드를 만들었다. "아, 안돼요! 제발!" 아르네스는 급한 마음에 하이엘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굴복한 모습에 만족했는ㄴ지, 이바니우스 3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크크크, 좋다 그럼 네 영혼을 취하겠노라." 어짜피 그녀의 영혼을 오염시키면 정령계는 알아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이바니우스 3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쳤다. 오른손 손바닥에서 촉수처럼 뻗어 나온 마기가 아르네스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3 "에잇! 제기랄!" 유하는 달려드는 키메라들을 검으로 내리쳤다. 용전분투했지만, 상황이 불리했다. 블랙이 빠진 공백은 너무나도 컸다. 궁수인 채린도 활을 접고 검으로 맞서는 지경이었고, 에이린은 파티원들에게 힐을 퍼붓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가장 곤란한 사람은 오펜이었다. 그는 홀로 미케니아 마도사들의 마법을 막아 내고 있었다. 한껏 비웃음을 띤 마도사들이 조롱하듯이 마법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이미 훨씬 전에 오펜과 유한 일행은 전멸 했을 것이다. "하하핫! 벌써 힘이 빠진 거냐, 역적!" "컥!" 키메라에 맞서고 있던 유한은 이베나우스 3세의 호위 라이칸에게 공격을 당했다. -크리티컬이 터졌습니다. HP가 1,200 닳았습니다. 즉각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경고창이 뜨자 유한은 서둘러 포션을 마셨다. 라이칸은 유한이 회복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공격하려는 키메라를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배려해서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 얼른 일어나라. 네놈이 그렇게 간단히 죽어 버리면 내가 폐하께 꾸중을 듣는단 말이다." 그저 가지고 놀려고 할 뿐. '개자식들!' 유한은 이를 갈았다. 블랙이 없어진 뒤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되려 하고 있었다. 동족들이 죽는것을 보고 아르네스가 정항할 뜻을 접었는지. 무릎까지 꿇어 버렸다. '젠장, 아무런 방법이 없는 건가?' 이대로 아르페디아는 암흑시대를 맞이하는 것인지. 드림맥스에서는 오히려 그쪽을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유한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암흑시대가 열리는 것을 본 최초의 목격자로 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한은 라이칸이 휘두르는 검을 막으며 필사적으로 블랙에게 귓속말을 보내 보았다. -블랙, 뭐 하는 거야? 당장 이리로 안와! -미안하다. 후손, 길을 잃은 것 같다. 분명 여긴 엘프의 숲 같긴한데..... '크악! 미치겠네, 진짜!' 블랙은 금방 돌아올 수 있을것같지 않았다. 타계책이 없다. 자신들은 이렇게 미케니아 일당에게 조롱당하고 있는 판이고, 이바니우스 3세는 아르네스의 영혼을 취하려고 마기를 뻗고 있었다. 정령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웅크리거나 지켜보고 있을뿐. 그런 정령들의 모습에 유한은 제대로 열 받았다. "뭐해. 멍청이들아! 구경만 할 생각이야? 나와서 싸워!" "......" 유한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령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이칸은 그런 유한과 정령들을 동시에 비웃었다. "훗, 저런 겁쟁이들에게 도움을 청해 어쩌려고?" 라이칸이 비웃든 말든 유한은 계속 정령들에게 외쳤다. "이 바보들아. 그냥 눈뜨고 있다가 다 죽을거냐!" 유한의 외침에 정령들이 조금 동요하긴 했지만, 이렇다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정령들은 조화의 존재. 싸움과는 속성이 맞지 않았다. 낭패 어린 표정을 짓는 유한의 앞으로 안내창이 불쑥 떠올랏다 - 호소력이 부족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흔들려면 그냥 외치는 것으론 되지 않습니다. '이건?' 뭔가 힌트를 주고 있었다. 그냥 외치는 걸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럼 제대로 외치면 정령들을 싸우게 만들수 있다는말? 찰나의 순간,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던 유한은 그 답을 찾았다. '그렇군, 선동 스킬!' 이건 게임이다. 게임 속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게임 속의 단서를 찾으면 된다. 유한은 한동안 쓸 일이 없었던 선동 스킬을 쓰면서 정령들에게 다시 한 번 외쳤다. "싸워! 스스로 너희 세계를 지키라고!" 유한의 호소력 깊은 외침이 조금 전과 사뭇 다르게 울려 퍼졌다. 부르르르! 지키라는 음성을 들은 정령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더이상 떨거나 숨지 않았고, 두려움에 물든 눈빛도 많이 가라 앉았다. "우리랑 같이 정령계를 지키는 거야! 이놈들은 물리치고!" 유한은 여전히 비웃고 있는 라이칸에게 기습적으로 검격을 날렸다. 라이칸은 여유잇게 그의 공격을 피해 냈지만, 유한이 필사의 의지로 들이민 박치기를 회피하지는 못했다. "크악!" 콧등에 박치기를 제대로 맞은 라이칸은 쌍코피를 흘리며 벌렁 자빠졋다. 방심하고 있다가 수치를 당한 라이칸은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이놈이 봐주니까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고 해?" 라이칸은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대로 유한의 몸을 반으로 가를 기세. 그러나 그는 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갑자기 뭔가 그의 손을 붙들었기 때문. 무엇인가 해서 돌아봤더니, 멀리 있던 나무의 정령 하나가 가지를 길게 뻗어서 자신의 손을 휘감고 있었다. "감히 미물 주제에!" 이를 갈던 라이칸은 뭔가 가슴을 때리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주먹만 한 돌멩이가 그의 눈을 노리고 날아왔다. 돌의 정령은 다시 한 번 몸을 힘차게 날려 라이칸의 눈을 때렸다. 미약한 공격이었지만,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 추분했다. "이, 이것들이!" "무슨 일이냐?" 막 아르네스의 영혼을 흡수하려던 이바니우스 3세는 고개를 돌렸다. 뒤쪽이 뭔가 부산해졌기 때문이다. 역적들이 또 무슨 작당을 했나 싶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갓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엄청난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정령들이. -정령들은 선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스킬 경험치300을 얻습니다. -선동스킬이 7랭크로 올랐습니다. -행운이 2올랐습니다. '우왓! 성공했다.' 유한은 기쁨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뭐냐? 오지마라!" 방금 전까지만해도 벌벌 떨고 있던 정령들이 몰려오자 미케니아 일당들은 당황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한번 들불처럼 일어난 정령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주변에 퍼진 마기에 중독돼 쓰러지면서도 동료들의 시신을 밟고 끈임없이 밀려왔다. 쓰저려간 정령들의 희생덕분인지 마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키메라들과 마도사들은 마구잡이로 정령들에게 공격들 날렸다. 이에 수많은 정령들이 쓰러졌지만, 그둘은 굴하지 않았다. 정령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서 미케니아 일당을 공격했다. 바위의 정령들이 굴러와 미케니아 일당을 깔아뭉개고, 나무의 정령들이 가지와 뿌리를 뻗어 그들의 몸을 결박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어푸! 사람 살려!" "끼에엑!" 연이어 몰려온 물의 정령들에게 마도사들은 허우적 거려야 했고, 키메라들은 늑대나 곰같이 생긴 동물의 정령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크악! 이놈들! 이 잡스런 놈들이!" 호위대장 라이칸을 상대하는것은 수백개의 크고작은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어 라이칸의 몸에 부딪쳤다. 라이칸은 검을 휘두르며 악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달려드는 돌멩이만 늘어날뿐. 급기야 서로 몸을 동여맨 풀과 꽃의 정령들에게 걸려 넘어지기까지했다. "이때다! 놈들을 쓰러트리자!" 정령들이 가세하자 유한 일행의 기세도 되살아났다. 그들은 정령들에게 몰리는 키메라의 숨통을 끊고, 발악하는 마도사들에게 검과 화살을 날렸다. "아니 어째서.....!" 이바니우스 3세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겁많은 정령들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다니! 정령들은 졸개들만 공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바니우스 3세에게도 달려들었다. 이바니우스 3세 주변에 깔린 마기들에 오염되어 숱하게 쓰러지면서도 그들은 아르네스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안돼. 오지마요, 물러서요." 아르네스가 정령들을 말려봤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지독한 마기를 동료들의 희생으로 지워가며 기어코 이바니우스3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이런 벌레같은 놈들!" 하찮은 것들이 덤벼든다는 사실에 진노한 국왕은 진득한 마기를 흘려 대며 수백개의 다크애로우와 다크 블레이드를 뿌렸다. "끼이이!" "까악!" 수십 수백의 정령들이 비명을 흘리며 죽어 갔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4 "감히 신이 될 짐의 앞길을 가로막....커억!" 미친듯이 마기를 뿜어대던 이바니우스 3세가 휘청거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별동별이 그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별동별은 하나에 그치지 않고 수백개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령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던 별의 정령들도 싸움에 가세한것이다. 가세한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산의 정령들도 큰 몸뚱이를 움직여 이쪽으로 다가왔고, 불과바람, 물과 대지, 빛의 상급정령들도 몰려와 이바니우스 3세를 공격했다. 힘이 약한 친구들도 용감히 싸우고 있는데,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르네스와 살아남은 하이엘프들을 구해내고, 이바니우스 3세를 공격했다. 불로 굽고, 바람으로 베고, 물로 얼리고..... 상급 정령들이 가진 파괴적인 힘이 연달아 국왕의 몸을 강타했다. 한순간 지독했던 마기가 사라졌다. '후아, 정령들도 화나면 장난 아니네.' 정령술사가 정령을 부려 공격을 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령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때거지로 몰려오니 정말 그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크아악! 이놈들! 이 천한 놈들!" 그러나 이바니우스 3세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고 진득한 마기를 뿜어 대며 달려드는 정령들을 족족 쓰러트렷다. "저, 망할 괴물 같으니라고." "HP도 도로 회복되었어요. 어떻게 쓰러트릴 방법이 없을까요? 보스 급 몬스터답게 이바니우스 3세는체력이 떨어지면다시 채우고있었다. 유한은 살기등등하게 마기를 내뿜는 이바ㅣ우스 3세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그의 마기는 심장 부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심장을 공격하면 상당한 타격을 받지 않을까? "에이린, 너 무기에 신성력을 깃들게 할 수 있지?" "홀리 웨폰(Holly Waepon)말이죠? 당연히 할 수 있죠." "시아 화살에 그 스킬을 걸어, 그리고 시아는 그걸 국왕 녀석의 심장에 쏘는거야." 채린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잘될까? 정령들이 저렇게 공격하는 데도 끄덕 않는데" "어짜피 이판사판이야." 유한의 말에 채린은 인벤에서 야껴 두고 있던 에르젠 화살을 꺼냈다. 딱 세 개뿐인 에르젠 화살은 화살촉이 에르젠으로 도금되어 있었고, 두꺼운 합금 강판도 꿰뚫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홀리 웨폰!" 에이린이 에르젠 화살에 신성력을 담자, 채린은 곧장 이바니우스 3세를 노려 시위를 당겼다. '빗나가면 안 되는데.....' 궁수의 기습은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게 철칙. 빗나가면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게 되고, 두번째, 세 번째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채린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바니우스 3세를 주시하고 있던 그녀의 눈앞에 바람의 날개가 불쑥 나타 났다. -그대는 바람의 날개를 지닌자. -바람은 그대에게 머물고 그대를 도우리. "에?" 갑자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실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바람의 정령들이 몰려와 있었다. 순중의 정령 웬투스, 쾌풍의 실피드, 폭풍의 템페스타, 질풍의 칼레, 북풍의 미스트라 등등. "우와! 이게뭐야?" "이벤트인가?" 유한과 다른 동료들이 놀라는 사이. 바람의 날개가 환하게 빛났다. 정령들이 바람의 날개로 자신들의 힘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힘이 모일 때마다 바람의 날개는 찬란하게 빛났다. -바람은 그대의 힘이 되리. -바람을 지닌 그대여. 정령계를 지켜라! 빛나고 있던 바람의 날개는 채린의 몸에 흡수되듯이 스며들었다. 깜짝 놀란 채린의 눈앞에 안내창이 불쑥 떠올랐다. -바람의 힘을 받았습니다. 5분간 모든 스탯이 50씩 상승합니다. 채린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솜씨가 상승되었기 때문인지, 이바니우스 3세의 움직임이 똑똑히 보였다. 좀 전에 주저하던 때와 다리, 채린은 곧장 시위를 당겨 이바니우스 3세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버스터 샷!" 쒜에에에에엑ㅡ! 신성력이 깃든 에르젠의 화살이 무서운 소리를 울리며 이바니우스 3세에게 날아갔다. 상급 정령들을 상대하던 국왕은 갑작스럽게 화살이 날아들자 깜짝 놀랐다. 그는 다급하게 방어막을 전개했다. "다크 베리어(Dark Barrier)!" 순식간에 이바니우스 3세의 코앞에 검은 마기의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람의 정령들의 인도받은 성스러운 화살은마기의 방어막을 부숴 버리고 이바니우스 3세의 손마저 꿰뚫었다. 그리고 암흑의 심장이 있는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크아아아악!" 성스러운 빛의 폭풍이 이바니우스 3세의 심장을 강타했다. 엄청난 충격력으로 뒤로 벌렁 날아간 이바니우스 3세는 땅바닥을 연달아 굴렀따. 그의 HP는 처참할 만한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페, 폐하!" 키메라들은 다 죽었지만, 라이칸과 몇몇 마도사들은 정령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도 아직 살아 있었따. 그들은 쓰러진 이바니우스 3세의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따.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에잇! 못난 놈들, 이것 놔라!" 이바니우스 3세는 신하들의 손을 뿌리치고, 심장에 박힌 화살을 뽑아 냈다. 비록 화살은 뽑아 냈지만 심한 타격을 받은 암흑의 심장은 금방 회복되지 않았따. "크아악! 이 역적놈들! 또다시 짐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그게 우리 일이니끼." 유한은 발악하는 국왕에게로 다가갔따. 이미 동료들과 정령들이 미케니아 일당을 빙 둘러싼 뒤었다. "모두 앞에서 네놈이 죽인 정령들에게 사과해라." "흥! 천한 대장장이의 말에 딸을 짐이 아니니라." 막다른 상황에 물리고도 이바니우스 3세의 자존심과 자세는 낮아지지 않았따. 뭐 이렇게 뻔뻔하고 당당한 놈이 있을까. 악당NPC라곤 하지만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짐은 미케니아의 지존! 세계를 다스릴 패왕이다! 결코 천한것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숙이도록 해주지. 니 모가지를 잘라서 말이야." 살벌하게 내뱉은 유한은 성큼성큼 미케니아 일당에게 다가갔다. 이바니우스 3세는 다가오는 유한을 보며 웃었다. 비록 심장을 다쳐 암흑의 마기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놈에게 당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가 재빠르게 주문을 읊조리자 그와 졸개들의 주변으로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따. "저건!" 낯익은 마법진. "좀 전에도 본 적이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이었따. 놈들은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유한은 다급하게 미케니아 일당에게 달려들었다. "거기 서지 못해? "후후후! 오늘 이겼다고 좋아하지 마라. 다음번엔 반드시 짐이 너희 역적들을 처지할 것이야." 악을 쓰며 날린 유한의검은 이바니우스 3세의 옷자락밖에 자르지 못햇따. 미케니아 일당은 순식간에 정령계에서 사라졌다. 정령계의 운명을 건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5 "분명 이 근처 였는데....." 유한 일행이 정령계에서 미케니아 일당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로키는 마론 신관에게세 받은 퀘스트를 수행 하고 있었다. 오랜 조사와 추적 끝에 신종을 훼손한 자들과 마물을 획들한 무리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기까진 좋았으나 그다음 그들을 추적하는 일이 문제 였다. 도대체 놈들은 한곳에 가만히 있질 않았다. 뒤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다른 지방으로 이동한 뒤였고, 가까쓰로 쫓아가 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딘가로 모습을 감춘 후 였다. 덕분에 그는 4개월이 넘게 놈들의 뒤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 온 것도 놈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흔적을 놓쳐 버린 로키가 엘프의 숲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부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한 기운이 느껴지자, 그는 황급히 몸을 낮췄다. 상대도 로키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숨지 말고 나와라!" 상대방이 먼저 모습을 보이며 외쳤다. 로키는 그를 보고 경계를 풀었따. 저 육중하고 커다란 녀석은 안면이 있었다. 상대도 로키를 알아봤는지 아는척을 했다. "아, 넌 아까 보았던 후손의 동지로군." 로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블랙이었다. 이바니우스 3세의 계략에 빠져 정령계 밖으로 쫓겨난 그는 서둘러 세계수로 돌아가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따. "애들은 어쩌고 당신만 있는거지?" "그게.....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 블랙은 로키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쪽 숲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저 의아하게 여긴 로키와 달리 블랙은 눈을 번쩍였다. 그들은 바로 정령계에서 도망친 이바니우스 3세와 그 부하들이었다. "저놈들은!" "알고 있는 자들인가?" 블랙을 따라온 로키가 물었따. 그는 미케니아 일당을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당연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웠으니까." '이바니우스 3세와 싸웠다고?' 대체 유한 일행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로키는 중앙에 있는 이바니우스 3세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를 보았다. 그는 품속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이 나침반은 마론 신관이 건네준 것인데, 마물의 파동을 감지하면 비늘이 빙글빙글 회전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나침반의 바늘은 굉장히 빠르게 돌고 있었다. 넉 달 동안 이렇게 강한 반응이 나온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바니우스 3세가 마물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런!" 한숨을 돌리던 이바니우스 3세가 갑자기 펄쩍 뛰었다. 신하들은 영문을 몰라 사색이 된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따. "열쇠, 열쇠가 없어졌느리라." "열쇠라 하읍시면?" "그래, 바로 그 열쇠다!" 분명히 품속에 단단히 넣어두었는데 이게 어디로 갔딴 말인가. 몸을 뒤적이던 이바니우스 3세는 자신의 베여진 옷자락을 보았다. 좀전에 아슬아슬 하게 정령계를 떠나면서 대장장이 놈의 칼에 베였던 자국인데. '설마 그때.....' 품속에 갈무리해 두었던 열쇠가 떨어진 게 아닐지? 이바니우스 3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대장장이 놈! 끝까지 짐을 화나게 만드는구나!" "이 몸이 더 화나게 만들어 줄까?" 낯익은 목소리에 미케니아 일당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눈에 살기등등한 블랙의 모습이 보였다. "네,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여기에 있낀! 네가 나를 내쫓았잖아!" 그건 사실이다. 싸움을 피하고자 텔레포트 마법으로 정령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마주칠 것은 무엇인가. '아뿔사! 다급하게 주문을 외다보니 좌표가 비슷하게 나왔구나.' 낭패 어린 표정을 짓는 이바니우스 3세의 눈앞으로 블랙의 쇠주먹이 날아들었다. 그의 철권은 사악한 기운을 죽이는 황금빛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잔머리를 굴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폐하, 피하십시오!" 마도사들이 블랙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전개한 마나 실드가 잠시 블랙을 막는 사이, 라이칸이 이바니우스 3세를 부축해서 허둥지둥 달아났따. 그러나 그들은 멀리가지 못했다. 바로 앞길을 로키가 뛰어나와 막아섰기 때문이다. "헉! 여기에도 역적놈이....." "이제 보니 당시닝 원흉이었군." 당황한 라이칸은 질풍같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로키의 커다란 방패에 막혔다. 한수앞서 여유롭게 공격을 막응ㄴ 로키는 반대편 손에 쥔 모닝스타로 ㄹ이칸의 머리를 내리쳤다. "크악!" "약하군. 좀 더 강할거라 생각했는데." 로키는 이들을 쫓아다니는 동안 실력과 레벨이 많이올랐따. 랭킹 120권까지 올라서, 랭커 칭호를 얻는 것도 이제 꿈은 아니었따. 그만큼 로키가 강하긴 했지만 라이칸도 약한것은 아니었다. 정령계에서 달려드는 정령들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다 보니 힘이 빠졌을뿐. 단숨에 라이칸을 척살한 로키는 천천히 이바니우스 3세에게 다가갔따. "망할 역적 놈들! 사방에서 짐의 행보를 막아서는구나!" 이를 갈며 통탄한 이바니우스 3세는 마지막남은 마기를 쥐어짜 또 한 번 텔레포트 주문을 외웠다. 빛과 함께 그가 사라져 버리자 로키는 당황했다. 국왕이 그리 잽싸게 도망을 칠 줄은 몰랐다. 튀더라도 마법을 날리거나 마물을 이용한 특이한 공격을 펼칠 거라 생각해 경계하고 있엇는데. 그러나 정령계에서 심한 타격을 입은 이바니우스 3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싸우기에는 상태가 너무 좋지않았따. "이런, 또 놓치고 말았군." 소득이라곤 마물을 훔쳐 간 자가 미케니아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뿐이다. 이젠 또 어디서부터 추적을 시작해야 할지..... "뭐야! 놓친건가!" 마도사들을 모조리 처리한 블랙이 허둥대며 다가왔다. "미안하다. 내 실수다." "끄응!" 로키가 사내답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자, 블랙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일단 엘프 마을로 가지." 로키의 말에 블랙이 반색해 물었다. "길을 알고 있나?" "물론이다." 블랙은 로키의 뒤를 따랐다. 일단 일행의 상황은 모르지만, 엘프 마을로 가서 그들과 합류할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Chapter3. 섭외 1 유한 일행의 부축을 받고 하이엘프들이 세계수 밖으로 나오자, 엘프들은 난리가 났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게……." 장로의 물음에 유한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미케니아 일당의 음모와 정령들의 궐기, 그리고 미케니아 일당의 도주 등등. "아아, 그런 일이!" 수많은 정령들이 정령계를 지키다 산화했다는 말에 장로는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바람의 무녀님은? 무녀님은 무사하신가." "정령들과 마기로 오염된 정령계를 정화하고 계십니다." "아아, 어리석은 우리들 때문에……." 문제의 쇠기둥 키메라가 나타났을 때, 서둘러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후회하고 있을 틈은 없다. 장로는 서둘러 엘프들을 보내 정령계의 정화를 돕도록 하고, 부상당한 하이엘프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또 엘프 마법사들에게 지시해 세계수 주변에 이중 삼중의 결계를 만들도록 했다. 이 같은 참담한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엘프들에게 모든 일을 지시한 장로는 다시 유한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군."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 미케니아의 왕이 도망쳤다고 했지." 근심 어린 얼굴을 하던 장로는 일행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그를 반드시 꺾어 주게. 또 어디선가 음모를 꾸밀지 모르네. 그의 야망이 꺾이지 않는 한, 이 아르페디아 대륙은 편안치 않을 것이야." 장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말소리가 들리며 퀘스트 안내창이 떠올랐다. - 연계 퀘스트를 받으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유한은 안내창에 적힌 퀘스트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미케니아 잔당의 섬멸] - 간악한 미케니아의 잔당들 때문에 정령계가 큰 위기를 맞을 뻔했다. 엘프의 장로는 또다시 그들이 준동할 것을 우려하여 악의 뿌리가 완전히 뽑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 용사여, 되살아난 과거의 망령들에게서 대륙을 지키지 않겠는가? 조건: 이바니우스 3세의 처단. 그런데 퀘스트는 유한 혼자만이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에서 미케니아 일당들과 싸운 일행들 모두에게 떴다. 파티원 모두는 흔쾌히 연계 퀘스트를 수락했다. 보상도 기대되었지만, 그들은 얼음 궁전 때부터 미케니아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뿌린 씨는 자신들이 거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놈들은 반드시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오오, 꼭 부탁하네." 장로의 기대 어린 얼굴을 뒤로 하고 일행은 세계수를 떠났다. 그들은 일단 엘프 마을로 나와서 숨을 돌리고 장비를 정비한 뒤 로그아웃을 할 생각이었다. 현실의 시계 바늘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잇었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오늘 플레이는 일단 이 정도에서 마쳐야 했다. "지그 오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에이린?" 에이린은 유한을 빤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미케니아 국왕이 도망가고 나서 주웠던 게 뭐예요?" "그거?"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좀 전에 주웠던 것을 꺼냈다. 황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장신구였다. 유한은 이것이 이바니우스 3세가 흘렸기에 미케니아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여기고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다 깜짝 놀랐다. [반크의 열쇠] - 고대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던 황제 테라칸의 가신 반크가 남긴 열쇠. 이 열쇠를 가진 자는 테라칸의 보물에 한반 다가설 수 있다. 반크의 열쇠는 지난번 그로지아 왕국 배틀 폴로 대회에 걸렸던 상품이었다. 우승팀에게 부상으로 수여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반크의 열쇠를 훔쳐 간 것은 꽤 실력 있는 마도사들이라고 했는데……. '제길, 그게 미케니아 놈들이었던 거야.' 아무튼 반크의 열쇠는 원래 받기로 했던 유한의 손으로 돌아왔다, 동료들은 유한이 보여 준 아이템 정보를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어, 테라칸 황제라면 바로 블랙이잖아." "그러게. 그럼 이건 블랙이 생전에 숨겨 둔 보물의 단서?" "헤헤헤, 황제의 보물이라……. 블랙 님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유한도 그럴 생각이었다. 문제는 블랙의 행방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엘프의 숲에서 해매고 있다는 귓속말을 마지막으로. - 어디 있어, 이 깡통! 당장 응답해! 유한은 싸우느라 바빠서 보내지 못한 귓속말을 블랙에게 날렸다.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 엇! 살아 있었나, 후손. 대체 어떻게ㅡㅡ. - 닥치고 어디 있는지 말씀하시지요, 테라칸 황제 폐하! - 엘프 마을에 있다. 전에 만났던 기사와 함께 있다. 유한 일행은 서둘러 엘프 마을로 달려갔다. 블랙은 알세인의 대장간에서 기름칠을 하는 중이었다. 태평하게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블랙의 옆에는 로키가 서 있었다. "무사했구나, 너희들." "예, 로키 형. 정령들 덕분이었어요. 저 깡통이 중간에 없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런 희생도 없었을 텐데." 유한이 째려보자 블랙은 펄쩍 뛰었다. -잘림-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자고로 악의 수장이라면 당당히 자웅을 겨뤄야 하거늘." "그건 네 생각이고……." 현실은 냉정하다 쏘아붙이려던 유한은 블랙에게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치졸한 술수를 쓴 덕분에 천벌을 받았지. 좀 전에 놈은 나에게 수하를 모두 잃고 쥐새끼처럼 도주했다." "뭐? 이바니우스 3세랑 만났어?" "그래, 끝장 낼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연계 퀘스트가 발동된 이유가 그 때문인가?' 만약 이바니우스 3세가 죽었다면 게임 시스템이 알아서 스토리 진행을 거기서 중단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도망쳤기에 연계 퀘스트가 발동된 것. "그건 그렇고, 너 이거 뭔지 알아?" 유한은 반크의 열쇠를 블랙에게 보여 주었다. 정의의 사도답게 쾌활하던 블랙의 얼굴이 열쇠를 보던 순간 침울하게 변했다. "왜 그래?" "이것은……. 내 무덤을 열 수 잇는 열쇠다." "무덤이라면 테라칸 황제의 무덤?" "그래, 생전에 반크가 무덤 축조를 끝냈다며 보여 주었지." 에이린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살아 있는데도 무덤을 만든 거에요?" "아리엘이 권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일거리를 주자면서."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거로군."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공공 근로 산업이라지만, 블랙, 아니 테라칸은 자신의 무덤이 생전에 만들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따. 무덤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반크의 열쇠만으로 능묘를 열 수는 없어. 능묘를 열려면 짐의 충실한 세 가신이 남긴 단서인 '반크의 열쇠'와 '투사의 슈즈', 그리고 '아리엘의 오르골'이 있어야 하지." "엥? 투사의 슈즈? 그건 나한테 있는데." 유한은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군바리 워커, 딱 그렇게 생겼는데 이게 황제 테라칸의 무덤을 여는 단서였다니! "하지만 아리엘의 오르골은 없지. 단서가 아나라도 없으면 능묘는 못 연다. 그런데 후손, 반크의 열쇠는 대체 어디서 얻은 거냐?" "미케니아의 왕이 흘리고 가던데?" "그놈이 갖고 있었다고? 그럼 혹시 그놈이 노린건……." 블랙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는 유한 일행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덤에 특별히 중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 뭐……. 그저 놈이 짐의 부장품을 사악한 데 사용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서." 유한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블랙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니 뭔가 대단한 것이 능묘에 있는 모양이다. "예상보다 부장품이 꽤 많나 본데요?" "대륙을 통일한 황제라잖아." "우리 한번 가 볼까?" 보물에 눈이 어두운 일행은 테라칸의 능묘를 발견하고 싶은 욕심이 무럭무럭 생겼다. 그러나 그런 뜻을 본인 앞에서 드러낸 것이 문제였다. 블랙은 붉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엄중 경고 했다. "이봐, 너희들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망자의 안식을 깨트렸다간 저주를 받을 테니까!" 블랙은 오버액션까지 취하며 강조했지만, 유한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살아난 망자의 저주 따위 있을 리 만무하니까.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자." 미케니아의 왕을 쫓을지,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을지는 다시 만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일행은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고 게임에서 로그아웃했다. 2 유한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의식이 말똥말똥했다. 미케니아와의 일전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해킹 문제. "손석진이 바로 조커야." "그놈이 바츠를 해킹했을 거다." 게임 속에서 싸웠던 청동 바츠의 모습이 아른아른 떠오르며 허진태의 말이 계속해서 귓속을 맴돌았다. '설마 그런 이벤트 때문에 드림맥스에서 바츠를 해킹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건 비약이 너무 큰 것 같았다. 드림맥스는 고객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게임회사다. 그런 그들에게 고객을 상대로 뻘짓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드러나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고, 회사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 '회사가 아니라 개인이 그랬을 수도 있지.' 개발자인 손석진이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회사도 모르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석진을 범인으로 치자니, 리셉션 파티 때 해커에게서 온 전화가 문제였다. 그가 해커가 맞는다면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 그런 전화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냐, 만약 공범이 있다면…….' 손석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진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게임 내에서 묘한 이벤트를 겪고 나니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바츠를 지운 이유 말이냐? 이런 강한 캐릭터를 키우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서 말이다." "너라는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더군." "나랑 내기하지 않겠나? 나에게 이기면 네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 찾을 수 있다." 예전에 해커가 전화해서 했던 말들도 떠올랐다. 해커가 게임사의 개발자라면 잃어버린 소중한 것, 그러니깐 캐릭터 바츠를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캐릭터라는 보장은 있을까? 그냥 떠본다고 그런 소릴 지껄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과연 바츠가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맞기나 한가?' 유한은 그런 생각도 들었따. 지금 와서 바츠와 지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자신은 지그를 선택할 것이다. 바츠는 명성과 아이템 말고는 없지만, 지그는 그보다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게임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아우, 제길! 왜 이리 생각할 게 많은 거야?" 유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7시,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한다고 한숨도 못 잤다. "밥 먹고 학원이나 가야지." 머릿속에 엉켜 버린 생각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잡아당겨서도 곤란하다. 조바심은 나지만 유한은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기로 했다. 너무 하나에 매달려서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유한이 바츠를 경험해 보고, 이후에 깨달은 교훈이었다. "후아암!" 꾸벅거리며 학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유한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눈에 익진 않지만,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번호였다. 누군가 싶어 휴대폰을 열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한 군이지요?" "그런데요?" "드림맥스의 손석진입니다. 유한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내일 오후 여섯 시에 본사로 와 줄 수 있겠습니까?" 유한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단번에 거절했을 텐데, 허진태의 이야기와 청동 바츠 사건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강유한 군?" '그래. 일단 직접 만나서 물어보자. 그럼 뭔가 나오는 게 있겠지' 어떨 때는 변화구보다 직구가 더 잘 먹힌다. 지지부진한 해커 색출의 돌파구가 될지도 .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본사로 가죠."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정면 승부로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해커를 잡을 구체적인 작전은 세워 두지 않았다. 내일 오후 6시까지 그 점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3 이튿날. 유한은 드림맥스 본사로 가기 전에 블라덱의 아지트에 들렀다. 행여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싶어서다. 평소 유한이 오면 쩔쩔매던 블라덱은 오늘따라 표정이 훤했다. "어서 와,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좋은 소식이 두 가지 있어." "그게 뭔데?" 좋은 소식이라면 혹시 해커를 찾은 걸까. 유한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블라덱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네가 저번에 보여 줬던 지포라이터 속의 파일 보호 프로그램이 누가 만든 건지 알아냈어. 크래커 세계에서 악명을 떨치던 진태무쌍이란 자의 것이지." "……." 유한의 표정이 의외로 뚱하자 블라덱은 서둘러 다음을 말했다. "두 번째는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의 행방을 알아냈어. 일설에 따르면 현재 그걸 소유한 자는 유저가 아닌 NPC일 가능성이 높다더군. 이건 얼마 전 내가 드림맥스에 연줄이 닿은 사람을 통해 알아낸 정말 대단한 정보야."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더니. 유한은 자기도 모르게 블라덱의 뺨에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퍼억! "아얏! 무슨 짓이야! 남은 힘들게 좋은 소식을 얻었구먼!" "시끄러, 밥통! 진태무쌍, 허진ㅌ채 그 작자는 이미 경찰에 체포되었고 NPC에게 있다는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이젠 내가 갖고 있어." "그, 그건……." 블라덱은 울상을 지었다. 유한에게 맞은 사실보다 자신이 최신 정보라고 알고 있던 정보를 해커도 아닌 녀석이 먼저 알고 있다는 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흐흐흑! 그래, 난 쓸모없는 밥통이야." "어이.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라고." 블라덱이 훌쩍이자 어쩐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유한이 그를 다독였다. 그리고 블라덱에게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내가 바츠를 해킹한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손석진이야." "손석진? 드림맥스 개발자잖아. 그 사람이 왜?" 블라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세한 건 몰라. 근데 허진태가 말하길 그 사람이 왕년에 조커였대." "헉! 그게 진짜야?"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은 높아." 유한의 말에 블라덱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내가 지금까지 난다 긴다 하는 회사들 서버를 다 열어 봤지만, 드림맥스는 실패했어. 접근하다 인생 종칠 뻔한 적도 있었지." "네 실력이 낮은 건 아니고?" 잠시 블라덱의 실력을 폄하한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소 늦긴 했지만, 이 녀석도 나름 관련 있는 정보를 얻어내고 있었다. 버리기 보단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손석진에 대한 정보를 모아 줘. 바츠가 해킹될 전후로 그가 무얼 햇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알았어." 블라덱에게 일을 지시한 유한은 드림맥스 본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한이 본사 앞에 나타나자 손석진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유한 군." "잘 지내셨어요?" 두 사람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유한은 눈앞의 상대가 해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반갑게 인사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없고, 맞다 해도 내심을 드러내서는 곤란하다. "자, 일단 차에 타시죠." 손석진은 미리 대기해 잇는 차에 유한을 태웠다. 이미 차에는 부사장 정경욱이 한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여어, 평화의 사자 지그 군이 아닌가. 반갑구먼." "아, 예. 안녕하세요. 근데 지금 어디 멀리 가는 겁니까?" 손석진까지 차에 오르자 앞좌석의 기사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일단 부사장님이 쏘는 근사한 저녁을 먹고 방송국으로 갈 겁니다." "방송국이요? 거긴 왜요?" "MBS 생방송 시사 토론회에 나가야 하거든요." 손석진의 대답에 유한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경욱이 말을 이어 나갔다. "주제가 '가상현실 게임 문화 이대로 좋은가'인데, 자네가 우리 쪽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게 되었네." "에에엑!" 유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본사에서 손석진을 만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방송 출현이라니, 그것도 생방송 시사 토론회의 패널이라니! 예상치 못한 사태에 하루 꼬박 구상한 준비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왜 접니까? 전 일개 유저일 뿐인데요?" 유한은 가기 싫어 항변했다. "그야 일개 유저의 의견이 필요하니까." "크악! 대한민국 천만여 유저 중에 왜 하필 저냐고요!" 자신은 패널로 참가할 만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조리 있게 할 자신도 없다. 더구나 생방이라지 않는가. 까닥 실수하면 대망신이고 대중의 조롱거리가 된다. "안돼요. 전 자신 없습니다. 딴 사람 구해서 가세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도와준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강유한 군이 가서 제일 말을 잘한 것 같아서 추천한 겁니다." '커억! 이 작자가!' 이럴 줄 알았으면 조사고 뭐고 안 만났을 터인데. 유한은 드림맥스 측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번에 블랙에게 드림맥스가 진정한 악의 배후라는 식으로 말해 준 적이 있는데 그걸 본 것은 아닌지? "그래도 제가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아르페디아 온라인 일 년 무료 이용권을 줄 건데도?" 정경욱이 입가에 짓궃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 거에 안 넘어갑니다." "신형 캡슐이 나오면 자네에게 꽁짜로 지급하지." "그래도 싫거든요!" '허어, 이 녀석이!' 유한이 여간해서 넘어오지 않자 손석진이 대신 나섰다.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유한 군이 생방송에 출연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습니다." 그 말에 흥분을 가라앉힌 유한은 손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말을 던졌다. "그럼 바츠를 복구시켜 주세요." 손석진은 곧장 응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한은 쏘아 대듯 말을 날려 보냇다. "왜요? 뭐든지 들어준다면서요? 바츠가 다시 게임에 나타나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덤까지 만들어놓아서요? 아님 청동 쪼가리 몬스터로 복제했기 때문입니까?" "유한 군, 그건……." 손석진이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유한은 언성을 높였다. "혹시 이벤트 같은 걸로 써먹으려고 남의 캐릭터를 지운 거 아닙니까? 회사 서버니까 멋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봐, 강 군. 억측이 너무 심하잖아!" 유한의 말을 들은 정경욱이 펄쩍 뛰었다. 청동 바츠 이벤트를 만든 것은 바츠가 해킹되고 한참 후의 일이다. 계획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고작 이벤트 하나 만들고자 유저의 소중한 캐릭터를 지울 리는 없지 않는가. 물론 당사자 입장에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겠지만. "유한 군이 바츠의 복구를 원한다면 들어줄 수 있습니다. 데이터만 같은 짝퉁을 만들어서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대답했던 손석진은 잠시 말은 끊었다가 이어 갔다. "지금 유한 군에게 바츠가 필요한가요?" "……." "지그로 즐기는 플레이가 재미없습니까? 예전의 광전사를 플레이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ㄱ요? 그렇다면 바츠를 복구시켜 주지요." 유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전으로 돌아간다. 광전사 바츠였던 때로. 다시 주변과 벽을 쌓고 혼자만의 플레이와 광렙으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유한 군이 이전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유한 군을 시사 토론회에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츠가 아닌 지그를 즐기는 유한 군을 부른 거니까요." 외로운 광전사 바츠에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대장장이 지그로. 그 변화한 모습 때문에 손석진은 유한을 꼭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분명 변하면서 뭔가 개달은 바가 있을 테니까.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바츠를 복구해 달라고 한 거죠?" '댁을 한번 떠보려고요.' 유한은 이 말을 혀끝까지 뱉었다가 도로 집어삼켰다. 솔직히 바츠에 대한 미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해커에 대한 복수심만 있을 뿐. 그가 바츠를 복구해 달라 운운한 것은 손석진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가 정말 해커라면 당황하거나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 싶었다. 그러나 손석진의 얼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이상 자극하는 건 위험해.' 자신의 무례한 언사 때문에 드림맥스나 손석진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 큰일이다. 확신을 얻기 전에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 그래서 유한은 머릿속에 재빨리 정리한 말로 응답했다. "그냥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요. 청동 바츠를 보고 느낀건데, 내가 바츠였을 때 다른 사람들과 친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렇군요. 단지 옛날이 그리워서는 아니란 말이군요." "그리고 아깝기도 하잖아요. 랭커 캐릭터를 키우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당연한 말입니다." 유한은 다시 여기서 손석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그가 이런 자신의 뜻을 알고 흔쾌히 바츠를 복구 시켜주겠다고 하면, 그는 해커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석진은 엉뚱한 말을 했따. "지난 일이 아쉽다면 앞으로 아쉬워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되지요. 유한 군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손석진의 눈빛은 어린 아이처럼 맑았다. 음울하기만 한 허진태의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의도하는 대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유한은 그가 해커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그에 대한 의심은 남아 있었다.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던 해커의 말과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손석진이 뭔가 연관이 있어 보였다. 4.TV 토론회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방속으로 간 유한과 드림맥스 관계자들은 토론회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이미 해당 스튜디오는 방송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상대편 패너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 시간이 흐를 수록 방청객들도 도착해 한 자리씩 채워 나갔다. 방송 시작 전까지 유한은 드림맥스 관계자들과 함께 준비를 했다. 토론회의 격식을 미리 인지해 두고 , 상개 패널의 발언을 예상 , 대응할 말들도 미리 염두해 두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공격이 날아오면 어쩌죠?" 유한의 물음에 정경욱이 대답했다. "그럼 즉흥적으로 때울 수 밖에" "보통 그런 상황에서 사고가 많이 터집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맞서려니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상식을 내팽개치고 개념을 날려 버린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경우가 생긴다. "말못하면 시청자들에게 일 년 정도 까이겠는데요." "토론 방송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까고 까이는 재미니까." 방송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 유한과 드림맥스 관계자들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유한은 반대편 자리에 앉은 패널들을 바라보았다. 표독스러운 인상의 할머니와 음침한 분위기의 청년,그리고 좀 뺀질하게 생긴 안경 쓴 중년의 남자. 중년 남자를 알아본 유한은 깜작 놀랐다. '켁 전종원이잖아!' 전종원 모 대학 사회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독설가다. 그는 여러 방송국 토론회에 참석해 상대 패널을 침몰시킨 상당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크아악! 하필이면 저런 고레벨이!' 유한을 바라보는 전종원이 입술을 슬쩍 말아 올렸다.마치 먹잇감을 코앞에 두고 있는 야수의 미소와 같았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떨지마세요." 손혁진이 긴장한 유한을 다독였다. 그는 자신의 정면에 있는 정종원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5,4,3,2,1 시작!" 담당 PD의 사인으로 시사 토론회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MBS 시사 토론 '이것이 말한다' 의 사회자 주광국입니다." 효과음이 나가고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사회자가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내뱉었다. 그는 이어서 오늘의 주제를 말하고 , 현재 가상현실의 게임의 사회적 영향력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언급했다. 이어서 토론회는 게임에 긍정적인 패널들과 부정적인 패널들의 간의 토론 격론으로 이어졌다. "현재 우리 청소년 학생들이 점점 난폭해지는 이유는 게임에 있습니다. 가상현실에서 사냥과 광렙에 홀린 아이들이 폭력에 쉽게 익숙해지고 , 남을 해치는 데 둔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 기독교 여성 단체 대표라는 홍영순 간사장의 말이었다.그녀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정격욱을 바라보면서 말을이어 나갔다. "정 부사장님께 묻습니다. 학생들이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폭력적으로 변해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영향을 끼친 데는 책임을 느끼지만 , 무조건 게임탓이라 여기시는 건 억측이라 생각합니다." "게임 탓이 아니면 어째서 지난번과 같은 대규모 현피사건이 터질 수 있겠습니까?" "한강에서의 그 사건은 게임이 '빌미' 가 되었을 뿐입니다. 온라인 이전의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도 그런 일을 있었습니다." 정격욱은 어릴 적 동네 오락실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격투 게임을 하다가 도전한 상대를 퍼펙트로 이겼는데 패한 당사자가 하필 동네에서 좀 논다는 양아치였다. 어린 정격욱은 양아치에게 허벌나게 터지고 갖고 있던 동전도 다 뜯겼다. "그 시절보다 게임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온라인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성장시키는 캐릭터의 가지도 날로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의 일을 현실로까지 끌고 나오는 사람들은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인성을 형성하는 데는 게임이 원인 되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게임 이전에 가정과 학교, 주변 사회가 인성의 형성에 더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에서의 문제도 사실 현실에서 옳게 배우지 못한 심성이 표출되면서 벌어 지는 것이니까요." 정경욱의 응답에 홍영순은 일단 입을 닫았다. 그러나 고비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전초전을 지켜보고 있던 거물 전종원 교수가 포문을 열었으니까. 독설가답게 그는 처음부터 중심을 지르고 들어왔다. "부사장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옮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온라인에서라도 올바르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캡슐 , 아니 버츄얼 시물레이터는 원래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장비가 아닙니까?" "하지만 게임은 교육보다는 엔터테인머틀르 위해 제작되는 것인지라....." "그러니까 사회에 책임이 있을 뿐이고 , 게임은 엔터테인머트를 위한 것이니, 그런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그런 방관과 냉소가 사람들의 인상을 더욱 거칠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십니까?" "그것은....." 정경욱은 뭐라고 답하려고 했지만 , 주도권음 움겨진 전종줜은 틈을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게임의 중독성입니다. 한번 시작하면 쉽게 그만둘 수가 없게 되지요. 게임 외에 다른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면 누군가 자신의 플레이에 관여하는 데 공격적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정경욱과 손석지은 안색을 굳혔다. 이대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 전종원은 노련하게 끼어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랑 비슷합니까? 마약 아닙니까 , 마약 환각을 보여주고 거기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꼬박꼬박 계정비를 거둬들이고 현거래 사이트에선 중요 아이템들이 현금으로 맞바꾸어집니다. 그것도 상황에 따라 가격이 두배 , 세 배까지 뚜지요." 전종원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게임은 마약과 유사하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전종원의 특유의 공격적인 어투로 그 심각성을 시청자들에게 보다 강렬하게 주시시키고 있었다. '이 자식 , 그럼 우리가 마약 판매상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정경욱은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전 교수님 말은 게임이 예상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사회자의 물음에 전종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게 합법이라는 겁니다. 더 심각한 건 가상현실 게임은 그 중독의 강도가 이전의 다른 게임들보다 훨씬 더 높다는 거지요. 더더욱 심각한 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가상현실 게임을 즐긴다는 겁니다." 유한은 생방송으로 보는 시청자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특히 마약상(?)과 같은 패가 되어 버린 자신을 보고 부모님은 뭐라고 생각하실지? "중국 청조 말에 아편이 창궐해서 나라가 망국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중국에 아편을 뿌린 건 영국인들이지만 , 현재 대한민국에 가상현실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는건 대한민국의 회사들입니다." '우아 , 마약상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망국 사범으로 몰고 있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유한은 전종원의 혀놀림에 감탄했다. 그러나가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전종원이 음칭한 청년 쪽에서 나섰다. "한산대 국문학과 4학년 조문기라고 합니다. 전 중학교때부터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을 했고 , 대학교 입학 이후에는 완전히 게임에 빠져 살았습니다. 휴학도 여러번 했고요." '게임 페인이구먼.' 유한은 자신도 페인이지만 ,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원도 다니고 있고 도장에서 수련도 하고 있으니까. "나이가 서른이 다 되었고 , 졸업반인데 딱히 뭐 하나 해놓은 것은 없고 , 친구도 사귀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군입대도 계속 미뤘고 .... 이런 상황인데도 저는 캡슐에 들어가 하루 종일 게임을 즐기곤 합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만두고 싶지만...." 정경욱은 횡설수설하는 조문기의 말을 들으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뭔가 반격을 하긴 해야 하는데 마땅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는 반격만 당할 뿐 , 손석진도 그래선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종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집단 현피 사건은 그저 한 단면에 지낮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게임에 빠져 시간과 젊음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에 큰 손해입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홍영순도 기가 살았는지 거들고 나섰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두고 , 인간이 다른 거짓된 세상을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짓된 전자 공간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합니다. 할렐루야!" 스튜디오 분위기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전종원 교수는 아예 홍영순 간사장을 외면해버렸다. 공연 방송에서 특정의 종교의 교리를 언급하다니. '저 할머니가 오늘의 스타가 되겠군.' 유한은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신나게 까댈 말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자신이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 오늘의 스타는 홍영순으로 확정될 것이다. '오늘도 사고 났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회자는 얼른 드림맥스 관계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대쪽 패널들의 의견이 이러한데 , 정 부사장님과 손개발자님은 뭔가 하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데 저희가 없을리 있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손석진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무겁게 닫고 있던 연 손석진은 전종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게임은 어느정도 중독성이 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약 수준으로 과장한 전 교수님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요?" 사회자자의 말에 손석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예로 들자면 , 현재 가입한 유저 분들이 천팔백만 명이 넘습니다." 물론 한국인들만 고려한 수다. "엄청난 수로군요." "예. 그런데 일인당 하루 평균 플레이 시간은 두 시간 삼심 분 정도입니다. 십 대 청소년층이 더 길다고 하지만 네 시간은 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학업이나 다른 곳에 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켁, 나는 평균 이상이로군.' 생각보다 유저들의 일일 평균 게임 시간이 적었다. 유한은 송태수에게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할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 지금처럼 마냥 게임에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이가 아니라 레벨순으로 플레이 시간을 따져 보면. 레벨이 높을수록 평균 플레이 시간이 줄어듭니다. 대부분의 상위 랭커들은 퀘스트를 수행할 때가 아니면 거의 꿈쩍도 안 합니다." '하긴 , 생각해 보면 나도 줄었네.' 초창기 초보 대장ㅈ이 시절에는 지금보다 플레이 시간이 많았다. 서둘러 캐릭터를 키워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철공소도 짓고 일꾼도 줄어들었다.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돈이 모이고 명성이 모였기 때문. 손석진이 말한 대로 특별한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을 때는 플레이 시간이 짧았다. 할 거 다하고 스킬 올릴 거 다 올린 최상위 랭커들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웬만한 퀘스트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고, 새로 뭔가 패치되어야 거기에 흥미를 보일 터 , 실제 일반 유저들 중에서도 어느 선에서 레벨 업을 포기하고 단지 게임 내 컨테츠만 즐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저번에 유한이 심연의 호수에서 목격했던 바퀴벌레 커플들이 대표적이었다. "교수님 말씀대로 마약 수준이라면 플레이 시간이 계속 증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근거 있는 주장이십니까?" 전종원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하자 , 손석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료를 내밀었다. "이 통계 자료는 정부 기관의 감사를 거친 것입니다. 전 교수님은 게임이 합법적이라고 우려하시는데 , 합법이기에 안전한 겁니다. 유해하다 판단되었으면 정부 기관에서 즉각 저희 회사에 영업 중단 조치를 내렸을 겁니다." 전종원은 게임의 유해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 그 유해성을 막아 보고자 힘쓰는 정부의 제도적 조치나 게임사의 기술적 조치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외면해 버렸는지도. '쳇 , 꽤 침작하시군. 재미없게 시리.' 전종원 속으로 투덜거렸다. 준비를 많이 해도 막상 토론회에 나가게 되면 버벅대기 마련이다. 미리 염두해 둔 것도 말로 잘 나오지 않고, 정리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마냥 자기 주장에 언성을 높이다 침몰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 손석진은 그런 바보가 아니었다. 마약 운운이 먹혀들지 않자 전종원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하지만 정부 기관의 기준을 맹신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게임 페인 예방 문제에 회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실 의사는 없으십니까?" "통계에서 나타났듯이 게임 페인은 실제 많지 않고...." 정경욱은 슬쩍 끼어들었다가 된서리만 맞았다. "많지 않으니 무시해 버리자. 이런 , 드림맥스의 기업 윤리는 그렇게 냉정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저는 많지 않을 때 문제를 해결하자 , 뭐 그렇게 말하려 햇던 겁니다. 아하하!" 정경욱이 서둘러 수습하자 , 손석진은 게임 페인인 조문기를 바라보면 말문을 열었다. "조문기 씨는 게임을 오래 하셨다고 하셨지요? 그럼 여러 가지 게임을 해 보셨겠군요."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고객이셨군요." "예, 오픈 베타 때부터 했습니다." "하시니 어떻습니까? 지루하다 여기신 적은 없습니까?"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조문기는 눈을 끔뻑이면 대답했다. "아니요 , 지루하기는커녕 너무 재미있어서 헤어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게임 말고 흥미를 가시지는 건 있습니까?" "그게....." 순간 조문기의 말문이 막혔다. 표정도 더 어두워졌다. 손석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한도 조문기가 순식간에 버로우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이 아저씨 현실이 시궁창인가 보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현실에 만족을 느낄 만한 일이 벗으니 게임 속의 환상에만 매달리고 있을 것이다. 유한도 예전에 겪어 봐서 잘 안다. 현실에서 더러움을 맛보고 게임에 내내 빠져 살았으니까. 그래서 게임 말고는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학업이 뒤처지건 , 방이 더러워지건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러나 지금은 공부도 나름 신경 쓰고 있고 , 채린의 침공(?)에 대비해 방 청소도 어느 정도 해 놓고 있다. 가족들이나 송태수의 눈길도 신경 쓰게 되었다. "게임에 헤어나기 어렵다고 하셨지요? 군 입댁도 미루 셨다니 일단 군복무부터 마치시는 건 어떻습니까?" 손석진이 조문기에 권한 것은 입대였다. 군에 들어가면 자연히 게임과도 멀어지게 된다. 한동안 미련은 남겠지만 , 사람은 곧 현실에 적응해 가기 마련. 또 군에서는 사병들이 면허증이나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는 것도 지원해 주기에 이후 취직에도 도움이 된다. '쳇, 한 방 먹었군.' 전종원 침몰하는 조문기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손석진을 노려보던 그는 손석진 옆 자리에 앉은 유한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 학생 분은 아까부터 말이 벗으시군요. 이름을 물어도 되겟습니?" 전종원이 자신에게 포문을 돌리자 유한은 깜짝 놀랐다. "아 , 전 강유한이라고 합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대장장이 캐릭터를 키우고 있는 유저입니다." 내심 긴장을 많이 해 실수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 잘 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적응을 했는지도. "학생이십니까?" 전종원은 손석진이 자기네 패널을 심문(?)햇던 것을 앙갚음해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수험생입니다. 수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마치 학교를 안 다닌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예, 뭐....그래도 검정고시를 패스했습니다." "혹시 게임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둔 건 아닙니까?" '이 인간이!'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 괜히 나섰다간 망신을 살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만히 잇을 수 없게 되었다. "학생에게 생쥐 스프를 처먹이느 학교에 잇기 싫어서 나온 겁니다." 순간 스튜디오 안이 고요해졋다. 유한은 뒤늦게 자신이 말실수를 햇다는 걸 깨달았다. 방송에서 처먹인다는 상스러운 표현을 하다니! 다들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 유독 홍영순 간사장의 눈만 예리하게 빛났다. 마치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그녀는 곧장 입을 열려 했지만 , 전종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 학교라면 나올 만하군요. 아무튼 가상현실 게임에 긍정적이라 여기시기에 그쪽에 앉아 있는게 맞습니까?" "예 , 가상현실 게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학업을 저하시키고, 현실 감각을 둔하게 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전 가상현실 게임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유한은 금방 말을 잊지 못햇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종원은 유한의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흔들어 댔다. "설마 이유는 없는 겁니까? 그냥 해 본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유한은 큰 창피를 당할 것이고 찬성 측 패널들의 주장이 많이 깍일 것이다. 전종원 속으로 히죽 웃엇다. 유한이 당황해서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햇다. "그 , 그것은 ....가상현실 게임이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놀이라....." "제 또래의 학생들은 학업과 진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학교와 학원을 마치면 늦은 밤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곤란하고 어른드르이 눈길도 좋지 않아요." "그래서 가상공간을 대안으로 삼고 여럿이 몰려다니며 게임을 즐기며 논다는 거군요." 전종원의 비웃음이 조금 풀어졌다. 애송이가 제풀에 넘어질 줄 알았는데 나름 그럴싸한 대답을 해냈다. "예, 노는 겁니다 하지만 함께 어울려 놀면서 한 가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혼자는 약하지만 모두가 힘을 모으면 강해질 수 있다 고." 그런데 단순히 버텨 낸 것만이 아니엇다. 이어지는 유한의 말을 들은 전종원의 입에서 비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좋지 않아.' 기껏 공격해서 망신을 주려 했는데, 오히려 띄워 줄 것 같았다. "전 게임을 하다가 옛날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났습니다. 참 반가웠지요 지금도 계속 만나고 있고, 게임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다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유한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나이가 들고 학교가 바뀌면 원래 사귀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또 멀어집니다. 하지만 가상공간에서라면 계속 만날 수 있지요. 저는 게임을 하면서 최가장 길드라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경주 최씨 종친 회원들이 추축이 된 최가장 길드. 그들은 각기 다른 지방에 살고 있지만 , 게임 속에서 매일 만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1년에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한 다른 가문의 종친회원들보다 강한 친밀도를 자랑했다. "그런 돈독함이 참 부러웠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있어도 그래도 가까이 지낼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가상현실 게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곁에서 유한의 이야기를 들은 손석진은 이때다 싶어 정리해서 말했다. 굳이 유한을 데려온 것도 그가 바로 이런 말을 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유한 군이 말한 것이 바로 '소통' 입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우리 사회에 문제로 지목되었던 소통의 부재를 가상현실 게임이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이전 시대의 매체들과 다른 혁신을 이뤄 냈다. 단순히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던 때와 달리 , 이전보다 다양한 소통을 이뤄 낸 것이다. "단순히 만나고 대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퀘스트라는 어려운 과업을 함께 해결하면서 서로 돈독한 정을 쌓게 됩니다." 그것이 가상현실 게임의 장점이자 긍정적인면이었다. "이것이 단지 혈족이나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 와 이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소통이 원할해질수록 인류는 보다 가까워질 것이고 , 그럼 전쟁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막는 것도 가능해질 겁니다." 손석진의 말에 패널들은 물론 , 방청객들도 입을 쩍 벌렸다. '이 친구 설마 그 때문에 따로 노는 해외 서버들을 통합하자고 한 건가?' 정경욱은 손석진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게임 개발자 , 부하 직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 굉장히 커 보엿다. 지금 이자리서 손석진은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현피 같은 일들도 벌어지지 않습니까? 너무 가까이 지내다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종원은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애썻다. 끝까지 초를 치려는 그의 노력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완벽하다 말하진 않겟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 줫으면 합니다. 사고를 우려해 자동차를 통행을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손석진의 말을 거기까지였다. 사회자는 슬쩍 시계를 보았다. 끝날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양측 모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셧는데 방청객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알아보겠습니다." 마이크는 먼저 반대 측 패널의 어느 아주머니에게로 넘어갔다. "저는 딸에가 게임에 너무 빠져 있어 가상현실 게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석진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런 장정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군요." 반대 측 방청객이 가상현실 게임을 긍정적으로 봐 주는 듯하자 정경욱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이대로만 간다면 현피 사건으로 불거진 게임의 부정적 여론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청객 아주머니의 말은 계속되었다. "저희 친정은 땅끝 마을 해남입니다. 바빠서 자주 내려 가지도 못하지요. 가상현실 게임에 그런 장점이 잇다니 친정에 캡슐 하나 보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엇습니다." '쳇, 캡슐 광고 찍나.' 패배한 전종원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실 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TV로 방송을 보고 잇던 신형 캡슐CF 기획자는 실제 과거 보일러 광고를 참고하여 CF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고 다른 반대 측 방청객들의 말도 이어졌지만 , 다들 가상현실 게임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끝냈다. 그리고 마이크는 찬성 측 방청객들에게로 넘어갔다. 찬성 측 방청객들의 반응 당연히 긍정적이었다. 물론 가상현실 게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모두들 유한이나 손석진이 말한 소통의 매화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렇게 시사 토혼회는 가상현실 게임에 문제는 있지만 나름 큰 장점이 잇기에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끝났다. 공개 방송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나오면서 유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전종원에게 질문을 받는 바람에 이리저리 말하긴 했지만 , 오히려 그것이 좋게 풀렸다. "도와줘서 덕분에 쪽팔림을 면했습니다." 유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침표를 찍어 준 손석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니요. 오히려 유한 군이 중요한 이야기를 언급해 줘서 좋게 끝낼 수 있얶어요. 역시 유한 군에게 부탁하기를 잘햇습니다." 손석진은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런 손석진을 바라보던 유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뭐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했던 거 말인데요...." "아. 그거라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바츠를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지그만으로 충분해요 대신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뭐가 궁금하지요?" 말하기 전에 유한은 정경욱 쪽을 돌아보았다. "부사장님은 먼저 차에 가 계시겠어요? 개발실장님하고만 이야길르 나누고 싶어서 그럽니다." "뭐야? 난 들으면 안 되는 건가?" 정경욱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 유한의 뜻대로 해 주었다. 정경욱이 물러나자 유한은 손석진을 촬영이 없는 텅 빈 스튜디오로 데리고 갔다. "뭔가 대단한 것을 물어보려는 모양이군요." 손석진은 진지하게 변한 유한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 "이제 한가지 질문을 할 테니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오늘 토론회에 참석한 진정한 목적이니까요." 유한은 손석진을 똑바로 바라보면 물었다. "바츠를 해킹해서 지운 게 당신입니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싸늘 냉기가 감돌았다. 유한은 손석진의 자그마한 변화 하나라도 놓지지 않으려고 그를 뜷어져라 쳐다보았다. 손석진의 표정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표정은 굳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나라고 생각하나요?" "누군가 드림맥스 보안 프로그램을 해킹하고 유저의 데이터를 손댈 수 있는 사람은 예전에 조커엿던 당신뿐이라고 하던군요." 순간 손석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당신이 다닌 대학교 해킹 동아리에 가 봣습니다. 당신이 만든 게임 설정집도 봤습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 이야기를 해준 사람 말대로군요." 허진태에게 들엇던 손석진은 세계에 희망이 없으면 희망을 뿌리겠다고 한 사람이다. 방금 전 토론회에서도 손석진은 소통을 통해 세상이 보다 가까워지면 전쟁도 막을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들은 유한은 과거 조커의 행보가 곧장 떠올랐다. 평화와 불의의 타도를 위해 자신의 재주를 쓴 정의로운 해커. 거기서 유한은 손석진이 조커임을 의심했다. 그리고 조커가 맞다면 허진태의 말대로 바츠를 해킹햇을 거라고 판단했다. "제 친구 허진태를 만난 모양이군요." 손석진은 습쓸한 미소를 지었다. 허진태와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계속 악연으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제가 누구를 만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당신이 바츠를 해킹햇는지 아닌지 그것을 말하십시오." 유한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손석진이 해킹멉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누차 다짐했듯 두들겨 패 버려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유한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 손석진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바츠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신에게! 당신이 창조한 세계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유한은 손석진의 얼굴을 뜷어져라 쳐다보았는데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손석진은 그런 유한을 일으켜 주며 말했다. "허진태 그 친구와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그는 지우지 못한 증오로 세상을 삐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유한 군의 마음도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 "몇번이고 그 친구를 바꾸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나중엔 무서웟습니다. 내 마음조차 흔들릴까 봐." 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사람 , 허진태를 경계하고 있어? 아무런 잘못도 없다면서 왜? 아마 이세상에서 허진태가 손석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손석진의 당당한 맹세에 해커라는 의심이 한풀 꺽이긴 핵지만 , 그것도 잠깐이다. 자신을 철저히 숨길 줄 아는 해커라면 그것도 해킹한 상대를 제 눈앞에 불러올 만큼 뻔뻔한 인사라면, 그만한 철편피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손석진은 충고하는 투로 나섯다가 허진태를 경계하는 속내를 비치고 말았다. ' 내가 제풀에 쓰러지니까, 자시돈 모르게 경계를 푼 거야.' 물론 마지막에 보인 손석진의 빈틈은 바츠를 해킹한 해커라서가 아니라 , 과거에 조커였던 사실이 알려질까 싶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래, 계속 조사해 보자. 확실하게 알 때까지.' 하지만 유한은 곧장 허진태를 만날 계획은 없었다. 이미 손석진에게 허진태를 만낫다는 사실을 들켰다. 손석진은 이제 자신이나 허진태의 행동을 주시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게임 설정집의 조커 그림은 뭐였습니까?" "하하하 , 그걸 보고 의심했나요? 그건 내가 그린게 아니에요. 허진태 그 친구가 그린겁니다." "그렇군요. 제길, 날 속인 거로군요!" 유한은 겉으로 분학 척했지만 , 속은 그렇지 않았다. 손석진의 여전히 의심스러웠으며 , 그이 말은 100퍼 센트 신회할 수 없었다. "늦엇습니다. 이제 가지요. 집까지 태워다 주겟습니다." 유한은 순순히 손석진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소득은 적었지만, 그래도 진실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다. 방송을 끝내고 나온 홍영순 간사장은 기사다 대기해 둔 차에 올랐다. 막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 때마침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가 마침 전화를 하려 했던 상대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정석재입니다." "교감 선생님이시군요. 방송은 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드림맥스 측 패널로 나온 녀석 있잖습니까? 강유한이라고. 설마 그 녀석이 TV에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 , 나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방송의 질 떨어지게 그런 몰상식한 녀석을 출연시키다니요." 홍영순은 기독교 여성 단체보다 신경 쓰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남편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림 재단과 학림 고등학교. 정석재는 바로 그 학림 고등학교의 교감이었다. 정현일과 일진들을 부추겨 유한을 학교에서 쫒아낸 자가 바로 그였던 것. 정교감은 방송에서 유한이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유한이 생쥐 스프 운운했을 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사장 부인니 나온다니 보고 있었을 뿐. 나중에 자막으로 그의 이름이 나온 것을 보고 알았다. '그 비리비리하던 자식이 언제 저렇게 변했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늘 인상이 어둡고 어깨가 처진 녀석이었는데, 딴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유한을 알고 있던 정 교감이 이 정도였으니 , 한 번 본것이 전부였던 이사장 부인인 홍영순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튼 그 녀석이 내 일에 훼방을 놓았어요." 홍영순은 가상현실 게임 문화의 페단을 뜯어고치자고 나선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모종의 목적이 있었다. 사실 지난번 한강 집단 현피 사건은 조작된 것이었다. 정현일이 자신과 아는 다른 학교 일진 짱들에게 몰래 돈을 주고 현피를 빙자해 대형 폭력 사건을 벌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자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인 것이 홍영순과 학림 재단 관련 있는 시민 단체들이었다. 신문과 방송 쪽에 흩어진 인맥도 동원해서 일을 더 부풀리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매스컴에서 주목하면 자신과 자신이 활동하는 기독교 여성 단체의 명성이 올라갈 것이다. 지난 몇 년동안 활동이 미미해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웠던 것을 한 번에 일소하게 되는 것이다. 뭐 그 과정에서 곤경에 처한 드림맥스에 '건전한 게임 문화 정착을 위한 기금' 을 받아 낼 생각도 있었다. 기금은 어떻케 사용할지는 순전히 자기 마음이지만. 그러나 이번 TV 토론회에서 드림맥스는 기사회생했다. 드림맥스가 승리한 데는 손석진의 역할이 컸지만 , 홍영순 손석진이 아닌 유한을 찍어 둔 상태였다. 여기는 잘린 부분입니다 . 스캔본 리사이즈 구해도 다 흐리게 보여서 도저히 못쓰는 부분입니다. 지그 철강 조합 1 어둠 속에서 과거의 악연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유한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해커를 쫓는 데, 손석진의 정체를 캐내는 데 만 계속 신경을 기울였다. '한동안은 의심받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집으로 돌아온 유한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게임에 접속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로그아웃을 했던 장소에 동료들은 아무도 없고 블랙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제 온 거냐, 후손." "딴 애들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니가 오지 않아서 다들 먼저 가 버렸다." "으악! 맞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유한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령계를 구한 다음 날, 아니 그날 밤. 다시 모인 유한 일행은 아리엘의 오르골을 먼저 찾기로 결정했다. 블랙이 이바니우스 3세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어차피 우리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어." "어째서 말이냐?" "네가 말했잖아. 그 자식이 반크의 열쇠를 흘리고 펄쩍 뛰었다고, 분명 열쇠가 나한테 있다는 걸 알고 접근해 올거야." 미케니아의 국왕은 바로 그때 때려잡으면 된다는 게 유한의 주장이었고, 동료들도 거기에 동의했다. 사실 어디갔는지 알 수 없는 악당을 쫓기보다 보물찾기를 즐기고 싶은 그들이었다. 그래서 유한 일행은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기로 했고, 엘프의 숲에서 그로지아의 왕도 슈탈린으로 왔다. 반크의 열쇠와 투사의 슈즈를 모두 그로지아 왕궁에서 보관하고 있었으니, 아리엘의 오르골도 왕궁 보물 창고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행은 슈탈린에서 관련 정보를 모으다가 시간이 늦어지자 모두 접속을 종료했다. 그런데 유한은 여기서 중대 실수를 했다. TV 토론회에 참석하느라 내일 늦을 거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으으, 모두들 화가 났을 거야." 유한은 서둘러 동료들에게 사과의 쪽지를 보냈다. 모두들 접속하고 있었고, 열심히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정보를 찾는 중이었다. 모두에게서 답장이 곧장 날아왔다. - 에이린:헤헤헤, 괜찮아요. 에이린도 지각했거든요. - 오펜:늦으면 늦는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 로키:사나이가 약속 시간을 지켜야지. - 시아:너 TV나오는 거 봤어. 말 잘하던데? 다행이 모두들 그리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서둘러 합류한 유한은 동료들이 알아낸 정보를 전해 들었다. "왕립 대학 교수에게 들었는데, 예전에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서 세 가지 보물을 발견했대." 발굴된 유물은 학자들이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 탐욕스런 왕립 학술원장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학술원장은 그 세 가지 보물을 왕실에 진상했다고. "엄청난 비밀을 가진 보물일지도 모르는데 배틀 폴로 경기 대회의 상품으로 걸려서 무척 실망했다고 하더라." 그게 바로 반크의 열쇠다. "그럼 아리엘의 오르골은?" "배틀 폴로 경기가 있기 전에 없어졌데요." 에이린의 말에 유한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것도 도난당한 거야?" "아뇨, 그로지아의 공주가 바르카스의 왕자에게 시집 갈 때 혼수품으로 끼여 갔데요." "켁!" 그로지아에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아리엘의 오르골이 바르카스 왕실로 넘어갔다는 정보를 얻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일이 너무 쉽게 되어도 재미없는 법. 어려운 만큼 오기가 생기고, 그 결실을 얻었을 때 느끼는 기분도 더 달콤하다. "문제는 바르카스 왕실에서 어떻게 오르골을 빼내느냐는 건데……." 명성치는 왕궁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 쌓아 놓았다. 하지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함부로 왕실의 물건을 반출할 수는 없다. 까딱 잘못하다간 '왕실의 적' 칭호를 받고 수배 퀘스트에 내걸려 다른 유저를 즐겁게 해 주고 말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보물을 가진 NPC를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주 NPC를 어떻게 구워삶지?' 일단 바르카스에 시집갔다는 그로지아의 공주에 대한 정보부터 모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유한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쪽지가 왔습니다. 빨리 확인하세요.> 효과음이 울리며 안내창이 불쑥 떠올랐다. 유한은 곧장 도착한 쪽지를 살펴보았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리지스였다. 지그 사장 보아라. 철공소 확장이 다 끝났다. 건물도 완공되고 노스아크에서 주문된 공작기계들도 도착했어. 그런데 사장이 놀러 다니니 일꾼들이 자꾸 농땡이를 부리고, 난쟁이 영감은 자꾸 쓸데없는 걸 만드네. 거기다 요새 블랙아이언을 주문한 길드들은 얼른 납품해 달라고 난리고. 딴말 안할게. 너 빨리 안 오면 철공소에 불 지르고 공작기계는 포포 밥으로 줘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 - 동업자의 농땡이에 화가 난 리지스가. "이 자식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유한을 보고 채린이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아, 글쎄 리지스 녀석이……." 유한이 리지스에게서 온 쪽지 내용을 이야기하자 채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럴 만하네, 뭐. 네가 농땡이를 부린 것도 사실이잖아." "그건 퀘스트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퀘스트 중이 아니다. 테라칸 황제의 보물에 넋을 잃어 철공소가 어떻게 돌아가느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리지스가 정말 철공소를 어쩌진 않겠지만, 일꾼들이 농땡이를 부리고, 갈리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난 일단 철공소로 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바르카스에서 가서 계속 정보를 모아 줘." "알았어. 걱정 말고 일하고 있어." 동료들은 바르카스 왕국으로 떠나고, 유한은 소환한 짐마차를 타고 케이트 산맥에 있는 자신의 철공소로 돌아갔다. 2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여러 번. 부지런히 짐마차를 몬 유한은 마침내 철공소에 당도했다. "늦어서 미안." 유한이 인사하자 리지스가 째려보며 말했다. "흥! 나를 쏙 빼놓고 너희들끼리 놀러가서 재미있었니?" "놀러 간 게 아니라 엘프의 숲에 퀘스트를 수행하러 간거야." "시끄러! 그게 그거지!" 리지스는 자신만 빼놓은 게 분했는지 펄쩍 뛰었다. 유한은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다독였다. "미안, 다음에는 너도 꼭 데려갈게." "쳇, 뭐 나름 성과가 있느니 용서는 해 주지." "성과?" 유한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 리지스가 자신이 득템한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알고 있을지 모른다. 채린과 리지스는 무척 친하니까. 왕따한 것을 용서해 줄 테니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러나 리지스가 말한 성과는 유한의 예상과 달랐다. "이봐요, 미남 오빠. 노닥거리지 말고 이리 와 봐요." 리지스는 한쪽에서 여성 유저들에게 둘러싸인 NPC를 불렀다. 유한은 누군가 싶어 봤다가 깜짝 놀랐다. 문제의 NPC는 엘프의 숲 대장장이 알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지그 님." "아니, 댁이 왜 이곳에?" "이번 일로 제 실력이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알아서요. 인간사회에 나와서 좀 더 수준 높은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알세인은 유한 일행이 떠난 뒤에 곧장 숲을 나와 유한의 철공소로 온 것이다. 그는 유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믿을 만한 인간 대장장이는 지그 님밖에 없어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배우게 해 주세요." 그래도 댁이 여기 있으면 엘프 분들이 곤란한 거 아닙니까?" 알세인은 엘프의 숲에 있는 유일한 대장장이. 그가 이런 식으로 덜렁 나오게 되면 엘프들보다도 유저들이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엘프의 마을에서 무구 수리를 못 받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이미 장로님과 여러 형제자매들의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그래, 드림맥스에서 알아서 하겠지.' 새로운 대장장이 NPC를 박아 넣든지 어떻든지 할 것이다. 유한은 절대 알세인의 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안그래도 유저든 NPC든 실력 있는 대장장장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알세인이 얼마나 실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굴러들어온 호박을 차 버릴 필요는 없다. "좋습니다. 허락하지요. 대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지그 님. 아니, 이제 사장님이라 불러야 겠군요." 유한은 일단 알세인에게 다른 NPC 대장장이들과 함께 무구를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싹싹한 알세인은 곧장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어때? 앞으로 여성 유저들이 구름같이 몰려올 것 같지 않아?" 리지스가 알세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장장이는 실력이 중요한 거야." "흥, 늘씬한 여자 엘프 대장장이라도 그런 소리를 했을까?" 유한은 리지스의 빈정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송코쪽을 바라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송코 형, 철공소 증축은 다 했다면서요?" 리지스가 보낸 쪽지에는 증축이 완료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응, 교수님이 완벽하게 해 놓고 가셨어. 노스아크에서 배달된 공작기계들도 다설치했고." "그래요? 예전과 그리 달라진 것 같지가 않은데요." "하하하, 입구 정면에서 보니까 그런 거야." 송코는 유한을 철공소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측면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증축된 철공소의 위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우와! 멋지다." 새로 증측된 철공소 건물의 외벽에는 블랙아이언의 투구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심플하면서도 강인한 도안이 유한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저건 우리 교수님의 서비스야." "제가 정말 고마워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유한은 새로운 철공소 안을 둘러보았다. 리지스의 말과 다르게, 일꾼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잡담을 하긴 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공작기계에 대한 일꾼들의 반응도 많이 나아졌다. 젊은 일꾼들뿐만 아니라 제법 나이 있는 일꾼들도 이리저리 공작기계를 다루며 무구 생산에 이용하고 있었다. "어디 농땡이를 부린다는 거야? 리지스 녀석 엄살은." "하하, 그래야 네가 기겁하고 온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갈리도 딱히 쓸대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새로이 증축한 블랙아이언 전용 공방의 한 자리를 차지해서 블랙아이언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뭔고 하니……. "흠, 역시 인간보다 드워프를 형상으로 한 병기가 멋있어!" 지금 갈리가 만드는 블랙아이언은 드워프처럼 생겼다. 크기가 조금 작지만 체형이 옆으로 떡 벌어지고 장갑이 두꺼웠다. 좋게 말하면 다부져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땅딸보 같았다. "스승님, 지금 뭐 하십니까?" "오, 지그 돌아왔느냐? 보아라. 내가 블랙아이언을 한층 더 개량시켰다. 이제 조금만 더 개량하면 드래곤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게야." 하지만 이건 개량된 게 아니라 퇴보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만들면 어떻합니까? 원형하고 다르잖아요." 블랙아이언을 주문한 사람들은 블랙의 균형감 있고 위풍당당한 모습에 반했다. 양산형이 원판인 블랙보다 파워가 떨어져도 반품이나 불만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다 그때문. 하지만 이런 땅딸보 블랙아이언을 만들어 줬다간 당장 불만이 치솟을 게 뻔하다. "걱정 마라. 내 이론상 원형보다 이 녀석이 훨씬 더 강하다." "그저 이론일 뿐이겠죠." "시험해 보면 알 게 될 게다." "하나 마나 뻔하죠! 블랙아이언에 들어가는 건 인간의 영혼이란 말입니다. 드워프 몸통에 사람 혼이 들어가면 참 잘 움직이겠습니다." "그, 그건……. 드워프의 혼을 불러오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엿장수 맘대로 됩니까? 뭐 불러온다고 쳐요. 불러온 드워프의 혼이 어지간히 말을 잘 듣겠네요." 드워프는 대체로 기가 드세고 자존심이 센 종족이다. 오죽했으면 고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도 완전히 굴복 시키지 못했을 정도. 그런 종족의 영혼이 들어간 블랙아이언은 보나 마나다.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날뛸 것이 뻔하다. 그런 물건을 대체 어디가 쓰겠는가? "크윽! 성능은 훨씬 더 강한데……." "징징 거리지 마십쇼. 갈리 님이 헛짓하느라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고요." 유한은 팔을 걷어붙이고 블랙아이언 생산 작업을 시작했다. 주문이 밀려 있다. 언제까지 납품하겠다는 약속은 안했지만, 그래도 지지부진 늦어진다면 고객들의 원성이 높아질 것이다. - 블랙아이언의 구동부를 완성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150을 얻었습니다. - 블랙아이언을 만들었습니다. 균형감이 뛰어나 한층 더 나은 성능이 나올 것 같습니다. * 영혼을 빙의시키면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블랙아이언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옆에서 갈리가 핵심 장치들을 만들어 줘서 그 속도는 혼자 일할 때보다 배는 빨라졌다. 완성된 블랙아이언들은 창고로 차곡차곡 옮겨졌다. 나중에 베르디에게 부탁해 한꺼번에 영혼을 빙의시켜 납품할 생각이었다. 유한은 블랙아이언을 만드는 중에도 다른 무구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무구 공방에 들러 생산 과정을 점검하고 일꾼들은 독려했다. 나날이 사업은 번창하고 주머니에 돈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철공소 영업이 잘되어 가고 있을 때, 유한에게 또 한 번 전환기를 맞이할 일이 발생했다. 3 "지그야, 손님 찾아왔어." 유한이 철공소에 복귀한 며칠 후, 리지스가 뒤에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벨파스에서 온 쿠퍼입니다." "전 오고타이라고 합니다." "난 칼틴의 카루라." 모두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재 아바란 왕국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장장이 유저들이었다. 이들은 유한처럼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장간을 운영하며 질 좋은 무구를 생산하고 있었다. "다들 어쩐 일입니까?"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하지요." 쿠퍼의 말대로 지금 유한이 있는 무구 공방은 일꾼들의 망치 소리와 풀무질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기가 불편했다. 유한은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넓은 집무실 안의 가구와 집기들은 예술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모두 유한이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어느 길드가 돈이 부족하다며 블랙아이언의 대금을 길드장의 컬렉션으로 지불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그런 뒷사정을 모르는 대장장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원망 어린 눈빛을 유한에게 던지던 그들은 소파에 앉아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지그님을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탁이라뇨?" "그것이……." 요즘 아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은 파산하기 일보 직전이라고한다. 그 이유는 지그 철공소가 왕국 내의 무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도 양산 무구의 품질은 지그 철공소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만, 문제는 물량입니다. 그쪽에서 푸는 물량이 적지 않은데다 가격까지 싸니 우리들이 불리한 상황입니다." "거기다 저기 리지스 님이 어찌나 악착같이 영업을 하는지 저희가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장사는 그렇다 치고 뭔가 팔아서 재료를 확보해야 스킬 랭크를 높일 수 있는데, 요새는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발 좀 같이 먹고 살자고요!" 모두들 유한에게 통사정했다. 이들이 이렇게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애걸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그 철공소의 영업이 잘되고 있다는 뜻이리라. 문제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이대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것. 그들도 나름 아바란 왕국에서 구축해 놓은 인맥이 있을텐데 이들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면 유한에게 귀찮은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비록 게임이지만 지그 철공소는 대기업 아닙니까? 저희 같은 중소기업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사정 좀 봐주세요." 그렇다. 이건 게임이다. 유한이 뭘 하든 자유였으며, 독과점을 제한하는 현실의 공정거래법과 같은 규칙도 없다. 더구나 게임 내 아바란 왕국의 배경은 난세 그 자체고, 약육강식의 환경이다. 그냥 이대로 경쟁자를 죄다 눌러 버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한은 동네에서 작은 마트를 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니 매정하게 내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골치 아픈 몇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그야 잠깐 나 좀……." 유한이 곰곰히 생각하자, 리지스가 그를 불러서 집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쩔 생각이야?"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유한이 되묻자 리지스는 당연하다는 듯 응답했다. "거절해야지. 경쟁자들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평소 아르페디아 대륙의 상권을 장악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녀였다. 유한의 경쟁자들이 망하게 생겼다고 하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난 아니라고 봐." "왜?" 유한의 말에 리지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란 왕국의 무기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 데 그게 아니라니. "블랙아이언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너도 알지?" "당연하지. 대박이잖아." 현재 거대 병기 생산 판매는 지그 철공소가 선두에 있었다. 라이벌인 발리안의 철공소는 여전히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고, 몇몇 대장장이들이 만든 거대 병기들은 생산도 느리고 성능도 다소 미흡했다. 또 생산 능력을 가진 거대 길드들은 길드의 전력을 축적할 뿐, 여전히 판매에는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지그 철공소의 블랙아이언이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기본으로 한 달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주문량도 폭주하고 있었다. "우리 주력 사업은 이제 블랙아이언 쪽으로 넘어왔어. 수익 면에 있어서도 양산 무구는 블랙아이언에 상대가 안돼." "하긴 그렇지." 양산 무구 수백 수천 점을 팔아야 벌 돈을 블랙아이언은 단 한 대 파는 것으로 얻고 있었다. 블랙아이언 생산은 유한과 갈리만 전담하고, 무구 생산은 철공소 일꾼들이 매진하는데도 그런 수익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무구 생산을 계속하고 블랙아이언까지 만들기엔 일손이 모자라. 아니, 무구 생산하는 일손과 비용이 아깝다는게 맞겠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일꾼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지금 수익이 떨어지는 일에 많은 일꾼과 재료를 투입하는 것은 손해다. 무구 생산을 하는 일꾼들을 교육시켜 블랙아이언 제조에 투입하면 생산속도도 빨라지고, 수익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은 철공소가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됨을 의미했다. "앞으로 거대 병기 시장이 커지면 완제품 판매는 물론이고, 부품 판매나 수리 영업도 할 수 있어. 제품도 계속 개량될 것니까 나중에 신제품을 개발, 판매 하는 일로 이어지겠지." "그래서 무구 생산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우리 종자 사업이었잖아." "고래가 되려면 큰 바다에 나가야 하는 법이야. 언제까지 냇가에서 촐랑거릴 순 없다고." 리지스는 더 반박하지 못했다. 유한의 말이 맞았다. 아르페디아의 상권을 장악할 자신이 언제까지 무구 판매 같은 작은 일에 매달려 쫓아다닐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릴 이만큼 키워 준 사업인데 그만두기는 섭섭한걸." "아무튼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맡겨 줘."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둘이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대장장이 유저들이 그들을 바라봤다. 유한은 자리에 앉아 잠시 분위기를 잡다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전 무구 생산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순간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기껏 같이 좀 살자고 했는데, 그걸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얼굴이 험악해지고, 리지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만 해도 유한은 무구 생산을 가만 둘 것처럼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혼자만 살겠다는 겁니까? 우린 다 게임 접고요?" "그건 아닙니다. 무구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생산량을 차차 줄일 계획입니다." 유한은 현재 지그 철공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며, 수익성이 떨어지는 무구 생산에 더 매달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험악해졌던 대장장이들의 인상이 풀렸다. "앞으로 우리 철공소는 물량을 줄이는 대신 무구의 질을 높이는데 전념할 겁니다. 저가의 양산 무구들도 철공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만 소량 생산 할 거고요." 생산량을 점차 줄이고 그 공백은 다른 대장장이 유저들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그 님." "역시 아르페디아를 대표하는 대장장이시군요!" 유한의 대승적인 결정에 대장장이 유저들은 연방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유한이 마냥 호의만 베푸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세 가지 조건이요?" "전 앞으로 '지그 철강 조합'이라는 길드를 만들 생각입니다. 길드원들은 당연히 대장장이 분들이 주축이 될 겁니다.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여러분들이 제가 만드는 길드에 가입하는 겁니다." 유한은 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을 아예 동료로 만들어 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필요할 때 일손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철공소의 생산량을 높여 아르페디아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의 무기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길드 가입이라……." 다들 길드에 예속된 상태가 아니라 유한의 요구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두 번째 조건은 여러분들이 우리 지그 철공소에서 제련되는 철을 사서 무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은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우리더러 종속이 되라는 겁니까." 제련된 쳘을 사 쓰라는 것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지그 철공소가 멋대로 철의 양을 줄이고, 가격을 높이면 그들은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 "제가 원하는 건 동맹입니다. 여러분들을 종속시킬 욕심이 있었다면 이전에 아바란의 철 시장을 장악했을 겁니다." "음……." "아시는지 모르지만, 지그 철공소에서 제련된 철은 다른 철보다 순도가 뛰어납니다. 양산 무구의 질이 좋았던 것도 다 그 때문이지요." 초열탄으로 제련하는 드워프의 철. 그것이 유한을 지금에 이르게 한 기반이다. 우수한 철로 만든 무기로 시장을 석권했고, 그렇게 쌓은 부로 여러 재료들을 사들여 랭크를 손쉽게 올려 갔다. "이미 유저들은 우리 철공소의 값싸고 우수한 제품에 매료된 상태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장을 양보한다고 해서 유저들의 마음까지 바꿔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군요." 자신들이 만든 무구가 품질 면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해도 약간의 손색은 있었다. "제가 제공하는 철에 여러분의 실력이 더해지면 훨씬 더 좋은 무구가 만들어질 거라 봅니다만?" 대장장이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쪽이 더 이득이다. 지그 철공소에서 적정 수준의 가격으로 양질의 철을 제공해 준다면 말이다. 다들 수긍하는 눈빛을 보이자 유한은 바로 세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세 번째는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한 분들은 자기 대장간 간판에 조합의 문장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제공하는 철로 만든 무구에는 'Iron of ZIG' 라고 명시해 주십시오." '확실히 그러면 지그 철공소의 명성에 기댈 수 있겠군.'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이미 그것을 내버리고 온 그들이었다. 대장장이 유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한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모두 수락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우린 같은 식구가 된 겁니다." 리지스는 유한이 대장장이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만 손해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아쉬워 하는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아, 참. 앞으로 판매가 걱정되면 여기 리지스 사장과 상의하십시오. 재고 없이 깨끗이 정리해 줄 겁니다." "그래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렇게 리지스는 계속 무구 판매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유한은 무구 독점 생산이라는 패를 버렸지만, 철공소의 효율적인 운용과 대장장이 유저들과의 동맹이라는 귀중한 패를 얻었다. 그것은 그가 또 한 단계 도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 마노스 제국 황궁. 얼마 전 리트만은 황궁 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철십자 길드의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으로서,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신민으로 지난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훈을 세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두커니 대문을 지켜야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임무는 내팽개친 리트만은 단짝인 유나를 만나서 잡담에 열중했다. "들었어? 지그 자식이 길드를 만들었다더군." "알아. 대장장이 길드라지." "가서 확 박살 내 버릴까?" "기왕이면 그 녀석 가디언도 고철로 만들고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다. 실제로 실행할 용기가 그들에게 없었다. 마음속으로 지그를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는 그들이지만, 실제로 만나면 눈을 피해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힘이 뭔지. 마음이 우울해진 그들은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남쪽엔 왜구들이 득실득실한다지?" "후소 대륙에서 온 일본유저들? 하긴 그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더라고." 현재 마노스 제국 남부는 약탈과 침범을 일삼는 일본 유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철십자 길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곤 있지만, 치고 빠지는 해적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는 최가장 길드 놈들이 꽉 쥐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최가장 놈들은 일부러 일본 애들이 설치게 놔두는거야. 마노스 제국이 아닌 우리 길드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라고." 베히모스나 길드장인 노벨이 마노스 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기에, 철십자 길드도 제국의 일에 이리저리 참여하고 있었다. 전쟁은 물론, 치안이나 생산에 관련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길드가 최가장하고 원수진 일이 있었던가?" "케이지 녀석이 배틀 폴로 대회에서 벌였던 수작이 들켰는지도 모르지. 아님 저번 무인도 쟁탈전에 소수 파견된 우리 뒤치기 부대의 정체를 알았다거나……." "여왕이 해군을 양성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군." 신대륙에 대한 정보가 속속 올라오자, 미네르바 여제는 신대륙 선점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상 전력이 필요하기에 베히모스도 그녀의 뜻을 막지는 않았다. "그런데 리트만, 너 이렇게 계속 농땡이 부려도 괜찮아?" "차라리 잘렸으면 좋겠다. 좌천돼서 남쪽에 가면 이렇게 심심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 때문에 리트만은 태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서 쪽바리들 화끈하게 작살내면서 광렙에 득템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멀뚱히 대문만 지키는 임무 퀘스트는 경험치나 보상을 얼마 주지 않는다. 물론 일을 잘하면 승진이 되기도 하지만 리트만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아무튼 여긴 심심해 죽겠어. 누가 황궁에 안 쳐들어오나?" 그런데 그의 바람이 하늘에 통했던지 갑자기 황궁 정문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깜짝 놀란 라트만은 손에 창을 뒤고 곧장 정문으로 달려갔다. 이미 정문은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원흉이 천천히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온몽에 검은 마기를 휘감은 적을 본 리트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만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상대는 실력이나 레벨이 무척 높아 보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리트만의 외침에 상대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트만은 상대를 감싸고 있는 마기가 수백 개의 검은 화살로 변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 수백 개의 화살이 노릴 상대는 뻔했다. 예상대로 검은 화살의 비는 그에게 쏟아졌다. "크아아!" 리트만은 미친 듯이 검은 화살을 막고 피했다. 그러나 치명상은 피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HP바가 달랑달랑한 그에게 상대가 다가왔다. "제법이구나. 꽤 쓸만한 실력이야." 오만한 미소를 잔뜩 머금은 상대는 날카로운 눈으로 리트만을 내려 보며 말했다. "묻겠다. 여기가 미네르바라는 계집이 사는 소굴이 맞느냐?"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정문을 돌파한 침입자가 황궁 안으로 들어와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침입자와 조우한 수문장 리트만의 보고에 근위 기사들과 황궁 마법사들은 여제가 있는 방을 철통같이 지켰다. 침입자의 기습에 철저히 대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침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그냥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침입자는 엉뚱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대가 베히모스인가?" "내가 베히모스요. 그러는 당신은?" 막 게임에 접속한 베히모스는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건 상대를 경계했다. "짐은 미케니아의 지존 이바니우스 3세라고 한다." 이바니우스 3세. 정령계에서 유한 일행에게 패하고 도주했던 그가 이곳 마노스 제국의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가 정체를 밝히자 베히모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지난번 우리 회수대를 전멸시킨 패거리의 두령이시군." 그는 슬쩍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다. 이대로 놈을 잡아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이바니우스 3세가 손사래를 쳤다. "그만둬라. 짐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런 사람이 황궁 정문을 박살 내 놓나?" 방금 접속했지만, 베히모스는 대강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황궁 요소에 흩어져 있는 길드원들이 계속 귓속말을 보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와 조용히 대화를 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여제의 목을 따러 온 것처럼 굴어야 멍청한 것들이 죄다 그 계집에게로 달려갈 게 아닌가." "하!" 베히모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눈앞에 있는 이 NPC는 미네르바 따위와는 상대도 안될 정도로 간교한 지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믿어 보지. 싸우러 온 게 아니면 목적이 뭐요?" "짐은 얼마 전 역적들의 손에 수하를 다 잃었다. 아무리 짐이 강하다 하나 뒤를 받쳐 주는 버팀목이 없으면 곤란하지." "그래서 우릴 버팀목으로 삼으시겠다?" "잠시 동안만 협력하자는 게 짐의 조건이다. 물론 짐의 행보는 은밀히 할 것이다. 그대가 짐의 뜻을 들어준다면 짐도 그대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지." "구체적으로 어떤?" 베히모스의 물음에 이바니우스 3세는 집무실 한편에 놓인 거대 목인병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를테면, 짐은 저까짓 물건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거대 키메라의 제조법을 그대에게 일러 줄 수도 있다. 지금 그대들에게 필요한 건 적국에 대항할 병기가 아닌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갈리가 사라진 뒤로 철십자 길드는 거대 목인병을 유지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지금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는 기체는 단 3기에 불과했다. 거대 병기 전력을 증강 중인 다른 길드들에 비해 불리한 입장. 거대 병기 관련 기술을 빼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훨씬 강력한 키메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니. 베히모스 입장에선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짐에게도 귀가 있다. 그대에게 야심이 있다는건 익히 들어 알고 있어. 길드의 수장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부하들을 지도하고, 여제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좌우한다지?" "……." "그대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잘 안다. 이 제국의 황좌겠지. 그러려면 여제 계집이 순순히 물러나야 하겠는데 그게 힘이 들지? 짐의 말이 맞는가?" '대단한 NPC로군.' 일개 NPC가 유저의 속마음까지 알아내다니 그저 드림맥스의 인공지능이 가공하단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흡족한 미소를 띤 그는 보다 공손하고 은근한 태도로 이바니우스 3세를 대했다. "정말 절 제위에 올려놓으실 수 있습니까?" "흐흐흐, 짐은 마도 문명의 지존이었다. 계집년 하나 세뇌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이바니우스 3세가 정말 그렇게만 해 준다면 굳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고도 황제의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 대륙의 패권을 노려 볼 수도 있다. 잘하면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우리의 동맹기간은 언제까집니까?" "짐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때까지다. 그대가 잘만 협조해 주면 보물을 획득 후, 그대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베히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바니우스 3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단번에 간파했다. 저번에 테라칸의 무덤에서 회수대가 전멸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미케니아의 왕은 뇌제의 홀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 이바니우스 3세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때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베히모스는 수락하기 전에 퀘스트 관련 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여 속임수라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바니우스 3세와의 동맹] - 부하들을 모두 잃은 이바니우스 3세는 지금 곤궁에 처해 있다. 이바니우스 3세를 도우면 당신과 당신의 길드에 적지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와 동맹을 맺어 대륙 제패에 도전해 보지 않겠는가? * 보상 1. 거대 키메라 제조법 획득. 2. 마노스 제국의 제위. '수락해야지. 날 황제로 만들어 준다는데 말이야.' 잘만하면 이 퀘스트를 통해 지지부진한 철십자 길드의 현 상황을 타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베히모스는 이바니우스 3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NPC 따위에게 아부를 떤다는 게 고까웠지만, 보상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기꺼이 폐하의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후후후, 청을 받아 줘서 고맙구나." 그러나 베히모스는 뇌제의 홀을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얻을 건 다 얻은 다음 이바니우스 3세를 없애고 뇌제의 홀을 빼앗을 것이다. 지금은 잠시 상대를 이용하는 것뿐. 하지만 그것은 이바니우스 3세도 마찬가지였다. 반크의 열쇠를 되찾고, 투사의 슈즈를 획득하기 위해 대륙 최강의 힘을 가진 철십자 길드를 이용하겠다는 게 그의 계락이었다. 보상? 그건 그대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서로의 본심을 숨긴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으며 웃었다. 그리하여 철십자 길드와 미케니아 국왕의 짧은 동맹이 시작되었다. 아리엘의 오르골 1 지그 철강 조합을 발족한 후, 블랙아이언 생산은 제대로 급물살을 탔다. 무구 생산을 점차 줄이면서 제련과 블랙아이언 부품 만드는 쪽으로 일을 집중시키자 예상대로 작업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진 것이다. 유한이 앞으로 블랙아이언 생산에 매진하겠다고 발표하자 많은 일꾼들이 흥미를 가지고 동참하겠다 나섰다. 그러나 지원한다고 아무나 다 동참시킬 수는 없는 일. 일단 미세한 부품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생산 스킬도 높아야 하고, 정밀 조립 스킬의 랭크도 높아야 한다. 그래서 유한은 블랙아이언 생산 공방의 일꾼은 테스트를 거쳐 선발했다. 테스트 내용은 완제품에 실제로 들어가는 파트를 제작, 조립하는 것이었다. "호오, 이게 알세인 씨가 만든 건가요?" 유한은 알세인이 만든 파트를 보고 감탄했다. 부품들이 섬세하게 제작되어 있는 것은 물론, 소음이나 마찰음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구동 능력을 보였다. "저도 쇠 거인님들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어 최선을 다해 만들어 봤습니다." 알세인은 쇠기둥 키메라를 해치운 블랙의 위용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의로운 쇠 거인들님이 많아야 미케니아 일당과 같은 악적들이 없을 테지요. 저는 제 삶을 쇠 거인님들의 제작에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봐요,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블랙아이언은 주인의 말에 절대 충성하는 가디언이다. 주인의 의사에 따라 정의로운 활약을 할 수도,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는 병기다. 정의로운 쇠 거인은 주인의 말을 안듣는 실패작(?) 블랙만이 보여 주는 모습일 뿐이다. "하아, 그랬습니까." 유한의 설명을 들은 알세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는 그냥 무구나 만들랍니다." "에이,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라고요. 나쁜 놈들한테 팔지 않으면 되니까." "음, 악인의 손에만 넘어가지 않는다면야……." 유한은 알세인을 간신히 설득했다. 뛰어난 대장장이를 비전도 없는 사업에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렇게 유한은 알세인을 비롯해 실력 있는 대장장이들을 블랙아이언의 부품 생산에 투입시켰다. 무구 생산 공방에는 그 방면에 특출한 대장장이들만으로 점차 규모를 줄여 나갔고, 나머지 일꾼들은 유한이 만든 초열탄으로 제련 작업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이는 지그 철강 조합 길드원들에게 판매할 철을 대량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사업 구조를 혁신하다 보니, 블랙아이언 공방과 제련 공방의 규모가 커지고, 무구 생산 공방의 규모는 반대로 작아졌다. 그리고 이전보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지그 님, 저도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하겠습니다." "제 대장간은 키예프 공국에 있는 데 철을 배달해 주실수 있나요?" "전 초보인데 제련 스킬만 올리게 여기서 일하게 해 주세요." 먼저 가입한 대장장이들이 두각을 보이자, 사방에서 길드 가입자들이 줄을 이었다. 단순히 가입만이 아니라 지그 철공소에서 일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철공소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 길드를 만들었을 뿐인데, 이는 유한도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그는 필요한 만큼 유저 일꾼을 뽑았다. 예전에 휴이 일당에게 한 것 정도는 아니더라도 노동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흐흐! 이제 제철소도 멀지 않았어.' 철공소에 우글거리는 일꾼들을 보며 유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제철소를 만들기 위해선 아직 높여야 할 스킬들이 있었다. 제련, 생산, 합금, 주물 스킬을 모두 1랭크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제철소 건설 이후에도 또 다른 목표가 있다. 최고의 대장장이인 아이언 마스터. 유한은 기왕에 시작한 대장장이 캐릭터를 귀련이나 발리안을 능가하는 최고의 명장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블랙아이언을 생산하는 와중에도 각종 스킬들을 수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진리의 메이스를 만들었습니다. 무척 성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생산 스킬 경험치가 120 올랐습니다. 그레인 스킬 경험치가 50 올랐습니다. 제작한 메이스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유한에게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 생산 스킬이 1랭크가 되었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 [명장]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 축하합니다, 지그 님. 드디어 명장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더욱더 노력해 아르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십시오. "앗싸! 나도 이젠 명장이다!" 유한은 눈앞에 뜬 안내창을 보고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명장. 이제 유한도 귀련이나 발리안이 갖고 있는 최상급 대장장이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과 같은 수준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한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유한은 방금 전에 만든 진리의 메이스에 글자를 조각해 넣었다. 'ZIG's Handmade' 라고 먼저 새겨 넣고 '생산 1랭크 돌파 기념'이라고 적어 넣었다. "후후후, 이건 팔지 말고 집무실에 전시해 놓아야지." 유한은 지그 캐릭터를 점검하기 위해 상태창을 불렀다. [상태창] 이름:지그 칭호: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 제작자, 사장, 엔지니어, 죽음의 상인, 노력가, 헤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명장 직업:대장장이 레벨:180 체력(HP):2,500/2,500 스테미나:2,200/2,200 마나(MP):125/125 힘:185 민첩성: 140+25(펜릴 소드) 인내심:153+10(투사의 슈즈) 지식:110+35(기술관의 관복+명장 칭호) 행운:120 솜씨:230+45(기술관의 관복+명장 칭호) 명성:27,000 공격력:205+236(펜릴 소드+와이어 건틀렛+투사의 슈즈) 방어력:150+118(투사의 슈즈+기술관의 관복+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2,000/35,000 돈:7,900,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2랭크 벌목 스킬 4랭크 채굴 스킬 2랭크 채석 스킬 3랭크 제련 스킬 2랭크 생산 스킬 1랭크 합금 스킬 2랭크 정밀 조립 스킬 2랭크 수리 스킬 2랭크 주물 스킬 2랭크 도발 스킬 8랭크 쇼크 웨이브 6랭크 선동 스킬 7랭크 수리 성공률 80%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2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3랭크 [공작 기계 스킬] 선반 가공 스킬 5랭크 용접 스킬 6랭크 절단 스킬 6랭크 천공 스킬 6랭크 압력 가공 스킬 5랭크 '후후후! 그동안 스탯이 많이 올랐군.' 생산에 매진한 결과 스킬들도 골고루 올랐다. "뭐가 좋아서 싱글벙글이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유한은 대번에 문 쪽으로 돌아섰다. 찾아온 손님은 채린과 에이린, 오펜과 로키였다. 슈탈린에서 헤어진 뒤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들이 돌아왔다. "일 열심히 하고 있었나 보네. 게으름 피면 한 대 먹여주려고 그랬는데." "하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근데, 다들 조금씩 달라진 것 같은데?" 동료들의 차림새와 칭호 등이 다소 변해 있었다. "에헴, 전 이전에 하이 프리스트 칭호를 땄답니다." "나도 마도사 칭호를 얻었어." "오오오! 축하해!" 에이린과 오펜을 축하해 준 유한은 이번에 얻은 자신의 칭호를 보여 주었다. "나도 새로운 칭호 땄어. 명장이라고." "우와! 그럼 지그 오빠도 귀련 언니 급이 되는 건가요?" "헤에,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너한테 수리 부탁하려고 했었는데." 그러면서 모두들 유한에게 수리할 무구들을 주섬주섬 내놓았다. 하나같이 상태들이 심각했다. 특히 채린이 사용했던 성월의 활은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그동안 뭘 했기에 이 지경들이 된 거야?" 유한은 수리를 위해 집게와 망치를 집어 들며 물었다.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다닌 것뿐이야." "그런데도 이렇게 되었다고?" "그게, 정보를 빼내는 게 쉽지 않더군." 로키의 말에 따르면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정보 획득이 이상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한다. 다들 명성치 10,000이 넘어서 바르카스 왕궁에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그로지아의 공주나 공주의 측근 NPC들이 관련 정보를 말하는 데 무척 인색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 사람들 마음에 들려고 온갖 퀘스트를 다 수행해야 했어요."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에 대한 토벌이라든가, 모 던전에서만 나오는 특정 아이템의 획득, 중요 문서 배송과 요인 호위 임무 등등……. 유한은 망치질을 하면서 물었다. "그래서 알아내긴 한 거야?" "말해 주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있더라. 그 아리엘의 오르골이란 아이템, 공주님이 끔찍하게 아끼는 건데 측근들 중에 누군가 고장을 낸 모양이야." "공주님은 한동안 '범인은 이 안에 있다'며 펄펄 뛰셨대요." 에이린이 옆에서 한 마디 덧붙였다. 과연 측근들이 언급을 안 하려 할 만했다. 상전이 아끼는 보물을 망가트렸으니 이후에 당한 곤욕은 장난이 아니었을 터. 공주 역시 아랫사람 단속을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며 비웃음을 당할까 봐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언급도, 고장 났다는 이야기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한 거란다. "결국은 체면 문제인가? 아무튼 아리엘의 오르골은 고장 난 채 계속 방치되었단 말이고?" "몰래 유명한 장인들을 불러와선 수리를 맡겼지만, 번번히 고치는 데는 실패했대." "갈수록 공주님 심기가 불편해져서 다들 좌불안석이래요. 더구나 요새 시어머니인 왕비님이 오르골 소리 좀 들어 보자며 졸라 대서 공주님 입장이 난처하대요." 어떻게든 서둘러 오르골을 고쳐야 하는 상황. 이에 채린 일행은 잘나가는 대장장이이자, 자신들의 친구인 유한을 찾아온 것이다. "어때? 아리엘의 오르골을 고칠 수 있겠어?" "일단 봐야 알겠지만, 못 고칠 것 같진 않아." 명장 칭호를 얻고 나니 유한은 자신감이 넘쳤다. 단순히 심리적인 요인만은 아니다. 명장의 칭호를 달아 보니 지식이 20, 솜씨가 30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생산은 물론 수리 스킬을 쓸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리 성공률이 80%로 올라섰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자. 서둘러야 하니까." 행여 다른 대장장이가 오르골을 고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마침 수리를 끝마친 유한은 채린 일행이 결성한 '보물 탐사대' 파티애 들어갔다. 그런데 막 철공소를 떠나려던 순간, 유한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왜? 뭐 빠트린 거라도 있어?" "아니, 생각해 보니까 한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그게 누군데?" "이번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야." 대체 그가 누구기에 유한이 꼭 데려가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잠시 후, 일행은 유한이 철공소 안에서 데려온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지그 철공소에 고용된 일꾼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구나.' 다만 채린만이 유한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번 일, 어쩌면 예상보다 잘될 것 같았다. 2 유한과 또 한 명의 파티원을 합류시킨 보물 탐사대는 곧장 바르카스 왕국의 왕도 발덴으로 갔다. 초보들의 영원한 고향인 발덴. 유한 일행이 나타나자 초보 유저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 "와! 대장장이 지그다!" "지그 님, TV 토론회에 나온 거 지그 님 맞죠?" "오펜 님, 이 불쌍한 초보에게 아이템 좀……." "꺄악! 로키오빠!" "바람의 궁수 시아다! 빛의 신관 에이린도 있어!" 유한 말고도 다들 유명세가 올랐는지, 초보들이 병아리 처럼 졸졸 따라왔다. 거의 뛰다시피 하며 초보 대군을 떨쳐 낸 일행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한숨을 돌렸다. "휴우, 유명하다고 좋은 건 아니군." "그러게 말이야." 그들은 되도록 인적이 뜸한 길을 찾아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 정문은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잡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지만, 명성이 높은 유한 일행은 제재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오오, 이렇게 유명한 분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방문해 주시다니, 폐하께서도 반가워 하실 겁니다." 그러나 일행 중 한 명은 출입 금지를당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휴이라고 하는데요. 저분들이랑 같은 파티입니다." 유한이 데려온 사람은 바로 휴이였다. 그는 지금 무명의 설움을 톡톡히 느끼고 있었다. 같은 파티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그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궁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썩 물러나시오." "잠깐만요. 저 친구는 제 조수인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휴이의 통행이 금지되자, 유한은 수문장을 설득하고 나섰다. 어떻게든 휴이를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 이번 일에서 휴이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원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아놔, 키메라보다 더 깐깐하게 굴긴' 예전에 공중요새의 궁성을 지키던 키메라들은 대충 통과시켜 주던데 이 수문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유한은 인벤에서 돈을 한 움큼 꺼내 수문장의 손에 쥐어 주었다. 리지스에게 배운 뇌물 스킬을 써먹은 것이다. "그러지 말고 좀 봐주시죠." 그러나 수문장은 오히려 엄한 표정을 지었다. "소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전 이런 것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쳇!' 뇌물 스킬은 실패였다. NPC의 성격에 따라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이번이 그런 모양이다. 실망하는 유한에게 수문장이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고명하신 지그 님께서 멋진 검 한 자루를 만들어 주신다면야……." NPC의 성격에 따라 제공해야 할 뇌물의 형태가 달랐다. 번쩍 정신을 차린 유한은 수문장의 제의에 응했다. "나중에 멋진 칼 한 자루 만들어 드리죠." "후후후, 감사합니다." 그렇게 휴이의 통행도 허락되었다. 왕궁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곧장 태자비, 그로지아의 공주가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일행을 알아봤는지 공주를 지키던 기사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별궁 안으로 들어가자 공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녀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그녀는 유한 일행에게로 눈을 돌렸다. "시아가 공주님께 문안 여쭈옵니다." 채린을 시작으로 일행이 공주에게 인사하며 예를 올리자, 유한과 휴이도 따라서 꾸벅 예를 올렸다. "또 왔군요. 반가워요. 오늘은 어쩐 일이죠?" 이름이 '에반젤린'이라고 하는 그로지아의 공주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아리엘의 오르골 문제로 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 "공주님의 근심을 덜어 드릴 사람을 구해 왔습니다." "나의 근심을 덜어 줄 사람?" "아바란 왕국에서 제일 유명한 대장장이를 데려왔사옵니다. 지그라고 하옵는데 그라면 아리엘의 오르골을 고칠 수가……." 탁! 채린의 이야기를 듯던 에반젤린 공주는 펼치고 있던 책을 강하게 덮었다. 그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려보자 시녀들과 시종들이 '제가 말 안 했습니다' 라는 식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누가 보면 단체로 거북이가 된 줄로 알 것이다. "입 밖에 내지 말라 했거늘, 아랫것들이 함부로 입을 놀린 모양이군요." "공주님, 다 주인을 위한 충심 때문이니 고정하시지요."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조심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혀를 차던 에반젤린 공주는 유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지그라는 대장장이인가요?"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드세요. 내 그대의 이름은 익히 들었어요. 그대가 만드는 강철 거인은 폐하께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세요." 조만간에 바르카스 왕국에서 블랙아이언을 주문할지도. 온 김에 국왕을 만나 계약을 맺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아리엘의 오르골을 획득하는 것임으로 일단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강철 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꽤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들었는데, 내 말이 맞나요?" "그러하옵니다." "그럼 그대에게 부탁해도 되겠군요. 사실 그동안 일을 맡겼던 장인들의 실력이 대단하지 못했어요. 소문만 그럴싸했을 뿐, 뭐 사람을 은밀히 구하다 보니 그런 자들밖에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웅얼거리던 공주는 손을 모아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늙은 시종이 상전의 뜻을 알아채고 잽싸게 한쪽 구석에 있던 은빛 상자를 가지고 왔다. '저게 아리엘의 오르골인가?' 주먹만 한 크기의 네모난 상자 바깥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한쪽 면에는 T자형 막대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게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는 장치인 듯했다. 공주는 막대를 돌려 태엽을 감았다. 그러나 태엽은 돌아가도 오르골에선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오르골의 음색은 꿈결같이 아름다워서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죠. 듣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 버리곤 해요." '설마 소리가 조금만 틀려도 안 된다고 하진 않겠지?' 유한은 토 나오던 신종 퀘스트 때의 일을 떠올렸다. 수없이 종을 만들고도 음색이 원본 같지 않다며 퇴짜를 맞았고, 결국엔 소중한 연장들을 희생시킨 끝에 완성할 수 있었다. "요즘 왕비 마마께서 불면증이 심하시어 이 오르골 소리를 듣고 편안한 숙면에 들고 싶어 하세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청을 거절했지만, 이젠 더 버틸 수 없어요." 에반젤린 공주가 여기까지 말하자 유한에게 효과음이 들리며 퀘스트 안내창이 불쑥 떠올랐다. 유한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퀘스트창이 떠올랐나 살펴봤지만, 아무래도 이 퀘스트는 대장장이인 자신에게만 날아온 듯했다. [에반젤린 공주의 의뢰] - 에반젤린 공주가 애지중지하던 아리엘의 오르골이 그만 고장나고 말았다. 오르골을 빌려 달라는 왕비의 요청도 있어 그녀는 이만저만 곤란한 입장이 아니다. 은밀히 아리엘의 오르골을 고쳐 공주의 근심을 없애고, 그녀의 체면도 지켜 주도록 하자. * 공주에게 필요한 재료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 게임 시간으로 3일 안에 수리를 완료해야 합니다. * 기한 안에 수리하지 못하면 에반젤린 공주와의 호감도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명성도 3,000 이 깎입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유한은 당연히 수락했다. 나중의 계획이야 어떻든 일단 오르골을 원래대로 고쳐 놔야 한다.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아, 그대만 믿겠어요." 유한의 진짜 본심도 모르고, 에반젤린 공주는 굉장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미안해진 유한이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3 아리엘의 오르골을 넘겨받은 유한은 일단 오르골을 완전히 분해하기로 했다. 물론 그냥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서 어떤 부품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종이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사장, 동력 전달 장치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태엽은 잘 돌아가잖아요." 휴이의 의견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왜요?" "부품이 몇 개 사라진 것 같아." 고장 나면서 부서졌는지, 아님 어설픈 장인들이 고치려다가 망가졌는지. 아무튼 부품이 있었음 직한데 텅 빈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골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금속 원통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여기 원통에 돌출 된 핀(Pin)이 얇은 금속 건반을 때리면 소리가 나는 거로군요." "음, 제일 중요한 원통도 금속 건반도 멀쩡해." 이게 망가졌으면 원래의 음률을 되찾는 데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다. 오르골을 분해해서 고장의 원인을 파악한 유한은 지금부터 휴이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었다. "휴이 넌 지금부터 이 오르골 박스를 똑같이 만들어." "예? 박스는 멀쩡하잖아요? 고장 난 건 속에 있는 부품……." "시키는 대로 해, 내 말대로만 하면 내가 너랑 밎은 계약서 내용을 수정해 줄 수도 있어." 유한의 말에 휴이의 귀가 솔깃해졌다.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계약서 내용을 고쳐 준다고 하니 궁금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똑같이 만들면 되는 거죠?" "그래, 똑같이. 너한테 그런 히든 스킬이 있잖아, 안 그래?" "크크크, 그렇죠." 휴이의 히든 스킬 레플리카 물건을 복제할 수 있는 이 히든 스킬 때문에 유한은 휴이를 이번 여행에 참가시킨 것이다. "똑같이 복제해야 돼. 원본이랑 똑같이." "알았어요. 걱정 말라고요." 휴이가 레플리카. 스킬로 오르골 박스를 복제하는 사이, 유한은 분해한 오르골의 부품들을 복제했다. 사실 처음엔 이 작업도 휴이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레플리카 스킬은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보일 뿐이지, 성능이나 부품의 정밀도는 보장하지 않는다. 오르골은 매우 정밀한 구조로 되어 있다. 부품의 규격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그러면 음색이 변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부품은 유한이 직접 복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일단 주물 스킬로 오르골의 금속 원통을 복제하고, 나머지 부품들로 청동판이나 크롬 합금을 잘라서 만들었다. 퀘스트 내용에 적힌 대로, 필요한 재료는 공주에게 요청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사장, 이 기회에 재료를 확 긁어내죠?" 휴이가 입에 군침을 흘리며 물었다. "아서라, 꼬리가 너무 길면 밟히는 법이야." 의심 받을 짓은 안 하는 게 좋다. 더구나 상대는 일국의 왕가가 아닌가. 대신 에르젠과 같이 비싸고 희귀한 재료들을 조금씩 얻어냈다. - 오르골의 회전축을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60을 얻었습니다. - 오르골의 금속 건반을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한참을 깎고 다듬던 유한은 마침내 모든 부품들을 복제할 수 있었다. "좋아, 다 만들었다." "나도 복제 다 했어요. 겉보기에는 '원본과 다름없는'수준이래요." "그래, 잘했어." 휴이가 레플리카 스킬로 복제한 오르골 박스는 원본과 똑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박스 안쪽에 '복제품'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 글자 그냥 둬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예요. 이 글자는 유저 눈에만 보이는 거니까." '상관없겠지. 부품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위치기도 하고.' 복제가 끝났지만 오르골을 고쳐야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유한은 빠진 부품이 무엇인지, 어떻게 태엽의 동력을 전달하는지 연구해 보았다. 하지만 그냥 눈으로만 보는 것만으론 잘 알 수가 없어서, 동료들에게 가게에 가서 오르골들을 사 오게 해서 모조리 분해해 구조를 살폈다. 여러 가지 구조의 오르골들을 살펴보자 빠진 퍼즐을 하나씩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라진 부품들을 만들어 오르골을 조립하고, 태엽을 돌려 소리가 나는지 작동시켜 보았다. "앗! 소리가 나요!" 휴이가 쾌재를 불렀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에반젤린 공주는 분명 음색이 꿈결같이 아름다워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말했다. 지금 오르골에서 나는 소리는 아름답긴 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거기다 다음과 같은 안내창이 떠올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 재생속도가 빠릅니다.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거야." "거 그냥 대충 좀 하지." "대충했다 퀘스트에 실패하면 니가 책임질래?" 유한은 오르골을 도로 분해해서 원인을 살폈다. 음악의 재생속도를 늦출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쉽게 해결되지가 않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부품을 살펴보고, 공주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던 유한은 결국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래! 문제는 이거였어. 금속 원통을 돌리는 톱니바퀴!' 문제의 톱니바퀴는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부품이 아니었다. 원래 톱니바퀴보다 작은 것이 금속 원통에 끼워져 돌아가다 보니 재생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에반젤린 공주는 이전에 별로 실력이 좋지 못한 장인들을 고용했었다고 했다. 그 어설픈 장인들이 고친답시고 이리저리 끼워 맞추다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할 부품을 엉뚱한 곳에 넣은 게 틀림없다. 그리고 유한은 그걸 원래 부품의 배치인 것으로 믿었고. "크윽, 진작에 그걸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유한은 비슷하게 생긴 부품들을 빼내 자리를 바꿔 끼었다. 그리고 다시 재생을 해 보았다. -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잘못 고친 것 같습니다. - 짜증날 정도로 느린 재생속도입니다. - 재생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부품들을 온전한 위치에 맞춰 넣을 수 있었다. 태엽을 돌려 재생을 하자, 에반젤린 공주가 말했떤 꿈결같이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 완벽한 음률이 재생됩니다. 꿈결같이 감미롭고 아름답습니다. "좋았어! 이제 완벽해." "헤, 진짜 잠이 올 것 같아요." 아리엘의 오르골을 완벽하게 고쳤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음으로. "자, 이제 원본을 조립했던 대로 복제품도 조립하자." "근데, 사장. 복제품은 어디 쓰려고 그래요?" 휴이는 아까부터 그것이 궁금했다. 원본을 수리한답시고 멀쩡한 오르골 박스를 복제했고, 오르골 하나 더 만들어도 될 만큼 부품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복제한 건 따로 쓸 곳이 있어." "역시, 단순히 오르골을 수리하러 왕궁에 온 게 아니군요. 다른 목적이 있는 거죠?" 단순한 플레이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휴이가 아는 지그라는 유저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도 그런 플레이를 해야 평범한 대장장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휴이야." "예, 사장님." "너 계약서 고치기 싫냐?" 휴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4 아리엘의 오르골이 고쳐졌다고 하자 에반젤린 공주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수리된 오르골의 소리를 듣고 매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보았던 불편한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수고 많았어요. 이제야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공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한의 눈앞에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창이 떠올랐다. [에반젤린 공주의 부탁]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 경험치 1,200을 얻었습니다. - 명성이 1,500 올랐습니다. - 상금으로 30,000골드를 받았습니다. '제법 괜찮은 보상이군.' 작은 오르골 하나 고친 것 치고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대는 원래 바르카스 출신이라 들었어요.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겠어요? 내 그대를 기꺼이 천거하겠어요." "말씀은 고맙지만, 전 이대로가 좋사옵니다." 명성이 높고 능력이 뛰어난 유저들 중에 이렇게 발탁되어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위나 관직을 얻으면 혜택이 많지만, 그만큼 제약도 많다. 그래서 유한은 공주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럼,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날 찾아오도록 하세요." "예.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왕궁에서 나온 유한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과 합류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동료들은 유한이 나오자, 그에게로 달려왔다. "잘됐나 보네." "백 퍼센트 만족하더라. 일이 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퀘스트 포상도 넉넉하게 주더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오르골을 꺼냈다. 그것을 본 일행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배어 나왔다. "정말 대단해요, 지그 오빠, 수리하면서 복제품을 만들어 내다니." "역시 휴이를 데리고 가자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복제 임무를 마친 휴이는 먼저 철공소로 돌아간 상태였다. 유한이 노예 계약서를 갱신해 줬지만, 그가 유한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복제품으로도 능묘를 열 수 있을까?" 로키의 지적에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부정적인 태도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복제품으로 불가능하다면 왜 힘들게 오르골을 복제했단 말인가. "기껏 왕궁에 들어가서 복제품만 만들고 나오면 손해잖아요." "서, 설마 너……." 채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진짜 아리엘의 오르골이란 소리지." 모두들 기겁했다. 유한의 손에 들린 것을 복제품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그런데 복제는 그렇다 쳐도 어떻게 공주를 완벽히 속여 넘겼는지 궁금했다. "뭐, 생김새가 똑같고 소리도 똑같으니까 속아 넘어간거지." "지그 오빠, 퀘스트로 오르골 고치는 일 받은 거 아니에요?" "그러게. 가짜를 주고도 퀘스트 포상을 받을 수 있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유한은 게임 시스템마저 속인 것이 된다. "후후후, 당연히 받을 수 있지. 조건을 맞췄으니까." 퀘스트 성공 조건은 '기한내에 오르골을 수리하는 것'이다. '수리한 오르골을 공주에게 가져다주라'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유한은 원본을 복제한 아이템을 주고도 보상을 받았고, 진짜를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니깐." "만약에 공주님에게 바치는 게 조건이었다면요?" "그때는 뭐 다른 방법으로 빼돌렸겠지." 불면증인 왕비가 오르골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유한은 공주가 왕비에게 아리엘의 오르골을 보내는 때를 이용해 바꿔치기를 할 계획도 세웠다. 에반젤린 공주가 복제품에 홀딱 넘어간 덕분에 그런 수고는 덜었지만. "근데 이거 알려지면 왕실 기만죄 아닌가?" 오펜의 지적에 모두들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광장에서 목이 대롱대롱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명성치가 바닥까지 떨어지겠지?" "그러니까 다들 입 다물라고." 그러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일행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왕궁 정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다가왔던 것이다. '이런! 흥분해서 주위를 살피지 못했어!' 일행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한은 서둘러 아리엘의 오르골을 숨겼다. 그리고 정신없이 대책을 강구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수문장을 치고 튈까?" 그럼 앞으로 바르카스 왕국엔 영영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유한의 코앞에 수문장이 당도했다. "지그 님." "그, 그게 저 어떻게 된 건가 하면……."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는 유한을 보고 수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냥 이대로 가실 겁니까? 제 칼은 안 만들어 주고요?" 그가 다가온 이유는 유한이 입궁하면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도 못했다. '제길,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출발은 조금 지체되었다. 유한이 왕궁 수문장에게 멋짐 검 한 자루 만들어 주고 나서야 일행은 남쪽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테라칸 황제의 무덤 오르골을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한 유한 일행은 일단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바르카스 왕국을 서둘러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테라칸 황제의 무덤도 남쪽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로지아 왕국이 유력할 거야. 세 개의 보물도 그로지아 왕국에서 발견되었으니까." "그런데, 지그야. 나 오르골에 대해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오르골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자고 했잖아."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다. 자꾸 떠들다 보면 언젠가 유한일행이 진짜를 빼돌렸다는 이야기가 바르카스 왕실에 전해질지도 모른다. - 귓말이라면 괜찮겠지? '채린이 너도 참 잔머리 잘 굴린다.' 말하지 말자고 하니까 귓속말로 대호를 거는 센스란. 유한은 그 성의를 생각해서 채린의 질문을 받아 주었다. -잘 만들어도 소리를 똑같이 하는 건 힘들 텐데 어떻게 복제한거야? 너 프라테우스 신종 만들땐 애먹었잖아. -그건 신종이 워낙 특이해서 그런거고……. 오르골은 다르다. 오르골에 들어 있는 금속원통은 오디오로 치면 레코드 판과 마찬가지, 금속 원통에 도드라진 못의 위차만 정확히 맞추면 원칙상 원본과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 난 금속 원통을 주물 스킬로 그대로 복제했어. 그래서 완전히 같은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거야. - 그래도 나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명장' 지그라고. 유한은 유달리 자신의 칭호를 강조했다. 그렇게 콧대 높아진 유한을 보며 채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유한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블랙을 불러서 무덤 위치를 물어봐요." 두 사람이 한창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에이린이 말했다. "하지만 쉽게 알려줄까? 저번 엘프의 숲에서도 싫어했잖아." "하긴." "일단 우리끼리 한번 알아보자." 일행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그로지아 왕국입니다." 역마차를 타고 온 일행은 마주의 말에 국경 마을에서 내렸다. 마을 주민 NPC들을 상대로 테라칸 황제와 그의 무덤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테라칸 황제에 대해서 NPC들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래전 이야기책에 나온 대륙 통일의 영웅이라는, 평범하고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여긴 잘 모르나 봐. 다른 마을에 가서 알아보자." 오펜의 의견에 일행은 몇몇 마을과 도시를 더 들러 정보를 모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그러다가 나름 테라칸에 대해 잘 아는 늙은 음유시인NPC를 만났다. "호오, 테라칸 황제 말인가? 대륙을 통일했다는 영웅이 아닌가, 뇌제라 불렸었던……." "뇌제라고요?" 처음 듣는 말에 유한은 눈을 동그랗게 떳다. "전설에 따르면 테라칸은 그의 적들을 천둥 번개로 쓸어버렸다는군, 물론 정말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그의 막강한 무위가 부풀려지면서 지어진 호칭일 게야."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블랙의 신위를 떠올려 보았다. 과연 그만한 실력이면 뇌제라는 호칭을 얻을만 하다 싶었다. "혹시 테라칸 황제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 "뇌제의 무덤? 글쎄…… 거기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군. 전설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래전의 인물이라서 말이야." 역시 이 음유시인도 무덤에 대해서 아는것은 없는듯 했다. "그로지아 왕국이 당시 그가 세운 아르페디아 제국의 중심이었던 건 분명하니 왕국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겠지. 젊은이들이 어디 기운차게 찾아보게나. 후후훗." 그 말을 남기고 늙은 음유시인 NPC는 갈길을 가버렸다. 분명 그로지아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완전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인 것이다. "역시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일단 불러와서 설득해 보자고." 유한은 즉시 귓속말로 블랙을 호출했다. 얼마 후, 지그 철공소를 지키고 있던 블랙이 일행이 머물고 있는 도시에 당도했다. "후손, 날 불럿는가? 그 미케니아인지 미역국인지 하는 패거리의 왕이 널 노리고 있는가?" "부른건 맞는데 이바니우스 3 세 때문은 아니야." 유한은 블랙에게 테라칸 황제의 무덤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블랙은 시큰중한 태도로 응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던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은 건가?" "그래요 능묘를 여는 세가지 단서를 모두 갖고 있어요." "너희들 참 대단하군. 대단한 집념이야. 그러나 그런 너희들에게서 사악한 욕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정곡을 찔린 일행에게 정의로우신 블랙의 설교가 이어졌다. "과한 욕심은 오히려 화를 부를 뿐이다. 내 능묘에 있는 보물은 값나가긴 하지만 결코 깨끗한 것이 못된다. 대륙 통일 이전 수많은 군웅들이 서로 빼앗고 다투고 피를 묻힌것들이지. 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 저주 받은 보물들이 다시 세상에 풀리길 원치 않는다." 이것이 만약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다면, 블랙의 설교는 일행에게 먹혀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이다. 보물은 찾으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세상이 어지럽던 말던 그건 게임의 설정일 뿐이다. 일행이 블랙을 설득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뒤에서 응원군이 나타났다. "보물이 무슨 죄가 있어? 그걸두고 다툰 인가들이 잘못이지." 모두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리지스가 서 있었다, 고딕 스타일의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당당한 자세로 블랙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뭘 모르나 본데, 인간에겐 욕망이 바로 그들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야. 따뜻해지고 싶어서 불을 발견하고 더많은 알곡을 얻고자 넓은 땅을 갈기 시작했지." 더 빨리 가기 위해서 기차를, 그리고 자동차를 발명했다. 하늘을 날기 위해 비행기를 발견했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렸다. 보다 평등하기 위해 계급의 압제에 대항해 싸웠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상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게 바로 인간이고, 그런 인간을 발전시킨 근본에는 리지스가 말한 욕망이 있었다. "넌 저주받은 유산을 봉인했다고 좋았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인간의 발전을 늦춰 놓은 것에 불과해. 네가 아니었으면 아르페디아는 훨씬 더 풍요롭고 발전된 세상이 되었을지도 몰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냐?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욕심많은 군웅들을 벌하고 대륙을 통일한 영웅인 내가!" 블랙이 서슬 퍼런 기세로 리지스를 쏘아 붙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리지스가 주저하면 그대로 그녀를 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지스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 네가 틀린거야." "커억!" 무지막지한 블랙을 침몰시키는 그녀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디서 저런 당당함과 기백이 나온단 말인가? "저 애 정말 대단한걸 ?" 로키도 감탄했는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돈 문제에 관해선 신하고 논쟁해서도 이길 겁니다." 리지스를 잘 아는 유한은 그녀에게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을거라 믿었다. 문제는 리지스가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냐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건만.. "야, 걍유한." 기분이 상했는지 리지스는 지그라고 부르지 않고 본명을 부르며 다가왔다. 두눈에 살기를 담은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너 또 날 왕따 시켰어. 다음번엔 데려간다고 했잖아!" "미, 미안 좀 바쁘다 보니 너한테 연락한다는 걸 그만 잊었어." "닥쳐!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잖아!" 리지스는 불 맞은 망아지 처럼 펄펄 뛰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철공소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던 블랙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분명 블랙이 가는곳에 유한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적중했고, 이곳에 와서 블랙이 일행에게 하는 설교를 들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대번에 끼어든 것이고. "내가 저 쇳덩어릴 설득했으니까 보물 절반은 내꺼야, 알간 ?" 유한의 행동이 괘씸해 보물의 절반을 차지해야 분이 풀릴것 같다고 떼쓰는 리지스 였다. "아직 설득되었다는 보장이 없잖아." 블랙이 제 입으로 무덤의 위치를 말해야 설득되었다 할수 있을 것이다. 블랙은 단지 언쟁에 져서 좌절했을 뿐이다. "내가, 내가 틀렸다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블랙님." 에이린이 블랙을 다독이며 슬쩍 설득했다. "보물을 묵혀 두는 것보다 좋은 일에 써도 되잖아요 불쌍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용도로요." "그런가?" 블랙의 마음은 기울어 지는 듯 했다. 페이린은 아직 온전히 기울지 않은 그의 마음을 한번더 흔들었다. "블랙 님이 보물을 좋은 데 쓰시면 사람들이 잊혀진 전설의 영웅을 다시 기억할 거예요." 그 말에 솔깃한 블랙은 완전히 마음을 바꾸었다. "험험, 뭐 그렇다면야. 대중적인 차원에서 짐의 재보를 풀 수도 있지." "능묘의 위치를 가르쳐 주시는 거죠?" "물론이다." 블랙이 약조하자 일행은 쾌재를 불렀다. 설마 대륙을 통일한 영웅이 한 입으로 두말 하겠는가. "후후후, 이러면 우리 귀여운 에이린의 승리로군."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 들려왔다. 그곳에는 옌스가 서있었다. 녀석도 리지스처럼 블랙을 보고 따라온 모양. "리지스 누님, 능묘의 보물 절반은 에이린 거요." "누구 맘대로! 저 쇳덩이를 꺽어놓은건 나라고!" 옌스에 일방적인 선언에 리지스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설득한 것은 우리 에이린이란 말입니다!" "싫어! 안 돼 ! 양보못해!" 둘이 다투거나 말거나 일행은 블랙을 앞세우고 테라칸 황제의 무덤이 있는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그로지아 왕국 남쪽 타사르 평원. 능묘의 보물에 넋을 뺀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은밀히 쫓는 유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 마노스 제국의 황도. 화려한 집무실에 두사람이 앉아 있었다. "뭐? 놈들이 타사르 평원으로?" "감시자에게 연락이 왔어. 그래서 일차로 회수대를 출발시켰어." 길드장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히죽 웃었다. 드디어 뇌제의 홀을 찾을 시간이 된 것이다. "그 시건방진 NPC에겐 연락했고?" "당연하지. 테라칸 황제의 무덤에서 만나자던데?" 그동안 철십자 길드는 지그와 그의 동료들을 예의 주시 해왔다. 동맹을 맺은 이바니우스 3세가 현재 반크의 열쇠는 지그의 수중에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한 일행이 정보를 모으고 다닌다는 말에 각지에 파견된 길드원들을 이용해 그들을 감시해 왔다. 유한일행이 테라칸의 무덤을 찾고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단서를 얻은 녀석들은 지금 무덤이 있는 타사르 평원으로 가고 있었다. "회수대에겐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해." "왜? 그 시커먼 쇳덩어리 때문에?" "그도 그렇지만, 놈들이 능묘를 연 다음에 가로채도 늦지 않아 다된밥에 코 빠트리면 굉장히 열받을거 아니야." "하긴 그렇군." 노벨과 베히모스도 그런 경험을 맛봤다. 베레타-마노스 전쟁에서 완수를 눈앞에 뒀던 '철혈 여제의 특명' 퀘스트를 막판에 망쳐 버렸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단결된 힘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얄미운 건 그 때 유저들을 충동질한 지그라는 녀석 이었다. "크크크, 이번에 제대로 복수를 해주겠어." 대장장이 지그와는 푸른 새벽 길드와의 길드전 이후 계속해서 악연으로 맺어져 왔다. 아니, 지그가 일방적으로 철십자 길드의 행보를 방해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 그런녀석을 곱게 죽이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놈의 눈앞에서 보물을 가로챈 후 실컷 조롱하고 괴롭히다 없애 버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놈이 게임에 쌓아 놓았던 기반도 하나하나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놈에게 농락당한 수모가 풀릴 것 아닌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전개시켰어. 길드원들도 모두 소집되었고." "좋아! 타사르 평원으로 가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일만 끝나면 거대 키메라 제조법과 마노스 제국의 황위가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다음엔 뇌제의 홀이. 지그에 대한 앙갚음은 물론 길드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황량한 타스르 평원 가운데 불룩 솟은 부분이 있었다. 블랙을 따라 이곳까지 온 일행은 주위가 썰렁한 무덤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기가 맞아?" "그렇다. 이곳이 바로 짐의 무덤이다." 블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설득당해 무덤을 안내했지만, 그래도 선뜻 내키지는 않은 모양. "그런데, 왜 이리 작아?" 잘쳐줘도 고위 귀족의 무덤 정도로밖에 안되어 보인다. 명색이 최초로 아르페디아 대륙을 통일한 황제의 무덤인데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되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은 유한 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의 생각 이었다. "훗. 생각이 짧군 이건 겉보기에 지나지 않아. 무덤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 짐의 시신과 보물이 묻혀있지." "진시황릉처럼 되어 있는 건가?" 백성들을 위한 공공 근로 사업이라서 피라미드 같은 줄 알았는데, 진시황릉과 비슷한 모양이다. TV에서 본 진시황릉은 엄청난 지하공간을 자랑했다. 축조에 동원된 인원은 이집트 피라미드 못지 않았고, 도기인형을 비로한 부장품도 엄청난 수준. 아마 테라칸 황제의 무덤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돌아가지." 블랙이 동굴 입구를 찾아 문을 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자 커다란 지하 광장이 나왔는데.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지하 광장에는 부서진 석상 조각이나 돌조각 밖에 없었다. 황폐한 모습에 실망한 리지스가 입술을 삐죽이자 클락이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기에 안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곳은 짐을 지키던 호위 병사들의 석상이 있던 곳이지." 진시황제의 병마용갱(兵馬俑坑)처럼 아마 이곳은 황제의 안식을 지키는 병사들의 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황폐하게 되었던 것. 아무튼 이곳에 볼일이 없는 일행은 블랙이 가리킨 벽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커다란 석문이 있었고, 석문옆에는 작음 홈이 있었다. "여기가 열쇠 구멍인가 봐." 채린의 말에 유한은 반크의 열쇠를 꺼내 홈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육중한 소리가 울리며 커다란 석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별다른 위험이 느껴지지 않자. 그들의 경계심은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맞아. 화살이 날아오거나 바위가 굴러나오는 장치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단서 찾는다고 고생했는데 그런 것 까지 있으면 너무 하잖아요." 희희낙락하며 들어가던 일행은 얼마 후 묘한 통로로 들어 서게 되었다. 흐릿한 안개가 서려 있는 통로. 혹시 독 안개가 아닌가 했지만, 안개는 일행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안심한 일행은 마음을 놓고 안개의 통로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유한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틈엔지 주변의 동료들이 사라지고 자신 혼자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아야! 에이린! 로키형! 다들 어디갔어?" 유한은 동료들을 소리쳐 불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귓속말을 보내도 응답이 없는것은 마찬가지. "나참! 다들 어디로 간거야?" 유한은 투덜거리며 통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 속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전갈과 사마귀를 섞어 놓은 듯한 몬스터는 예전에 플레임 마운트에서 보았던 스콜피언 퀸과 비슷하게 생겼다. "으악, 이게 대체 어디서?" 유한은 깜짝 놀라 펜릴 소드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나 몬스터는 유한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리고는 괴성을 지르며 낫같이 생긴 앞다리를 휘둘렀다. 유한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비좁은 통로에서 몸을 놀릴 공간이 부족했다. 엎드려서 황급히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이어서 날아오는 꼬리치기는 정통으로 얻어 맞았다. 퍽! "크악!" 몬스터의 꼬리에 얻어맞은 유한은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제대로 얻어맞은 덕분에 HP가 절반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몬스터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방금 공격했던 몬스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던 유한은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뭔가 기척이 있어 돌아봤더니, 데보라의 목인병이 우두커니 서있는게 아닌가. "아니, 이게 어째서 여기에?" 유한이 황당해 하거나 말거나 목인병은 두 팔에 장치된 석궁을 그에게로 겨냥하더니, 화살을 쏘아 보냈다. 화살은 한두 발에 그치지 않고 소나기 처럼 계속 날아왔다. "무, 무슨 목인병이 이렇게 강해?" 기겁한 유한은 정신없이 몸을 날려 화살을 피했다. 최선을 다해 피했지만, 결국 화살이 그의 다리와 어깨에 연달아 꽂혔다. HP도 바닥에 다다랐다. - 위험합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제길, 갑자기 이게 뭐야?" 달아나는 와중에 황급히 포션을 들이키던 유한은 눈앞에 로키와 블랙이 나타나자 황급히 그들에게로 달려갔따. "형! 살려 줘요.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서……." "진정하고 저길 봐." 로키가 가리킨 곳을 본 유한은 깜짝 놀랐다. 흐릿한 안개 통로 안에서 동료들이 멍한 표정으로 허우적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린, 어디있어?" "지그 너 장난치면 맞는다!" "이 바보 고릴라가 대체 어딜 간거야?"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통로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무색하게 서로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칼을 뽑아들고 서로에게 공격을 퍼부어 댔다. "꺄악! 트롤이다!" "앗! 스톤 골렘이잖아?" "죽어라, 괴물!" 상대방이 몬스터로 보이는 모양. 유한은 아까 자신을 공격했던 몬스터가 바로 동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일단은 말려야 했다. "모두 그만둬! 같은 편이란 말이야!" 그러나 유한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모두들 계속 상잔을 펼치고 있을 따름 이었다. "이 통로엔 황상 마법진이 깔려있다. 발 딛는 자는 환각에 빠져 길을 잃게 되고, 눈앞의 동료를 알아보지 못하게된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 것은 블랙 이었다. 그의 뒷북스런 작태에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글쎄, 해 주려고 했는데 모두 촐랑거리며 가 버려서 말이야."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로키뿐이다. 그는 블랙이 안개통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정지 했다. 블랙의 행동에서 뭔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해, 실은 알려주기 싫었던거지?" "천만에, 같은편에게 짐이 그럴리가 있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블랙은 애초부터 가르쳐 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자신의 무덤을 건드리는 일행이 골탕 먹는것을 보고 싶었는지도, "망할 불량 가디언 같으니라고!" 입술이 툭 튀어나온 유한에게 로키가 말했다. "서둘러 애들을 구해야 해.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날 거야." 그 말이 맞았다. 안그래도 지금 채린이 옌스의 참마도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한 상태 였다. 그러나 함부로 안으로 발을 내딛을 수는 없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구조는 커녕 또다시 환각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될것이다. 로키가 손도 못 쓰고 우두커니 빠져나오길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뭔가 동료들을 구조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래, 그렇게 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른 유한은 곧장 왼손을 펼쳤다. 그러자 왼팔에 끼고 있던 건틀렛에서 와이어가 날아가 옌스의 목을 빙글빙글 감았다. "켁! 뭐, 뭐야?" 옌스가 낚이자 유한은 서둘러 녀석을 안개통로 밖으로 끌어 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옌스를 놔두고 유한은 이번엔 오펜에게 와이어를 날렸다. 그렇게 유한은 낚시 구조법을 통해 동료들을 모두 구출해 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리둥절해 하는 일행에게 로키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블랙을 노려 보았따. 그러나 블랙은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는 듯 뻔뻔함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이 환상 마법진의 통로를 어떻게 빠져나가죠?" 에이린의 말에 유한은 블랙을 바라보았다. 어서 알고 있는 것을 털어 놓으라는듯. "짐은 이곳에 환상 마법진이 설치되었다는 것만 알뿐. 파훼법은 모른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실직고 하라고." "어허, 모른다니까." 블랙의 비협조의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았다. 모두의 시선이 유한이 신고 있는 투사의 슈즈로 모여들었다. "반크의 열쇠를 썻으니까 이번엔 투사의 슈즈 차례겠지?" "글쎄, 내가 이걸 신고 들어갔지만 너희랑 똑같이 환각에 빠졌는데."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 "숨겨진 우회로 같은게 있지 않을까?" 로키의 의견에 모두들 근처의 벽과 바닥을 훑어보며 비밀 통로를 찾았다. 그러다 오펜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일행을 불렀다. "여기 좀 봐!" "왜 ? 뭔데?" 모두들 오펜이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따. 오펜은 벽면에 적힌 시구절을 가리켰다. 투사의 발걸음을 따르는 자, 테라칸 페하의 곁으로 가리라. 예전에 이곳을 찾아온 미케니아 일당들이 발견했던 시구 였다. "이게 뭔 뜻이지? 투사의 발걸음을 따르라고?"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시구를 풀이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체 투사가 누구죠?" "이계에서 온 말년 용사 파일런이야. 예전에 테라칸의 신하였대." 유한은 투사의 슈즈에 적힌 설명과 예전에 블랙이 자신에게 파일런의 후예 운운했던것을 떠올렸다. 분명 투사의 슈즈에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 비밀 이란게 바로 이 통로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그럼, 파일런의 발걸음을 따라가라는 소리인데 파일런이 어디로 간줄알고 따라가라는 거죠?" "상대를 따라가려면 그의 발자국을 찾는것이 먼저지." 유한은 안개 통로의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발자국 같은것이 찍혀 있었다. 좀전에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먼저 가 보지." 침착한 로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유한이 발견한 발자국을 따라 걸었지만, 결국 어느순간 환상 마법진에 걸려 길을 헤맸다. 낚시로 로키를 구조한 유한은 이번엔 자신이 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투사의 슈즈를 신은 자신이라야 안개통로를 통과할 수 있을것 같았다. '조심, 조심." 유한은 천천히 바닥의발자국에 자신이 신은 투사의 슈즈를 가져다 댔다. 투사의 슈즈가 발자국을 딱 맞게 덮어 버리자, 묘한 울림 소리가 들리며 주변의 안개가 그에게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신발 주인이 직접 나서는게 답이었군.' 유한은 계속 발자국을 밟으며 앞으로 나갔다. 계속해서 안개는 물러났고, 마침내 유한이 건너편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안개는 통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됐어! 이젠 괜찮을 거야." 유한의 말대로 일행이 지나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한이 트랩을 풀면서 환상 마법진이 소멸된 것이다. 어렵게 2차 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앞으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3 환상 마법진이 걸린 통로를 지나니 이번에는 제법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이 통로만 지나면 시신이 안치된 방이 나올 거다." 블랙의 설명에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통로 마지막에 와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따. 묘실로 통하는 문을 엄청난 괴물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ㅡ! 낮게 으르렁 거리며 눈을 번뜩이는 괴수는 지옥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켈베로스였다. 황소만 한 덩치에 머리가 셋, 꼬리가 다섯 개인 켈베로스는 흉악한 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낯선 칩입자들을 노려 보았다. "오오, 삼돌아!" 잔뜩 경계하는 일행과 달리, 블랙은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가이 두팔을 벌리며 뛰어 나갔다. 하지만, 켈베로스는 반가이 달려온 블랙을 머리로 받아 버렸다. 어찌나 강하게 들이 받았는지, 블랙은 공중에 붕 떠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쿠웅! 블랙이 벽에 처박히자 유한이 황급히 달려갔다. "야, 블랙 너 괜찮냐?" "크윽, 등쪽 장갑이 깨졌지만, 뭐 그럭저럭." 벽에 부딪친 쪽이 부서졌기에 유한은 그 자리서 수리에 들어갔다. 부서진 장갑을 떼 내고 예비용으로 인벤에 보관하고 있던 장갑을 대신 끼워 넣었다. "그런데, 너 저 괴물이랑 아는 사이냐?" "저 녀석은 생전에 짐과 아리엘이 기르던 강아지였다." "강아지?" 블랙의 말에 일행은 전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켈베로스를 바라보았다. 흉악한 눈빛에 강철이라도 뜯어발길것 같은 이빨, 그리고 발톱은 어떤가? 저기에 걸리면 블랙의 단단한 몸뚱이라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강아지라고 하긴 좀 큰 것 같은데 ?" "원래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 블랙의 설명에 따르면 대륙을 통일하던 중 악신(惡神)'카르마'를 믿는 사교 집단을 퇴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빛의 성녀인 아리엘이 카르마의 대신전 지하에서 작고 앙증맞은 녀석을 발견했단다. "다들 삼돌이를 죽이라 했지만, 아리엘이 반대했다. 어찌 되었건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건 옳지 못하다면서……." 그래서 블랙, 아니 테라칸은 황궁에서 켈베로스를 키웠고, 켈베로스도 자신을 길러 준 테라칸과 아리엘을 몹시 따랐다고 한다. "근데 왜 이름이 삼돌이예요?" "머리가 셋이니까." "극악의 작명 센스로군." 문제는 켈베로스가 일행을 곱게 보내 주겠냐는 것이다. 자신을 키워 준 주인의 시신을 이때까지 지키고 있는 충성스런 녀석이 정체 불명의 칩입자를 고이 들여보내 줄리 만무했다. "블랙이 한번 더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무리야 , 새로운 몸을 얻은 블랙을 녀석이 알아보겠어?" 유한의 지적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다면 처음부터 박치기를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흥! 설득이 안 된다면 해치울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나선것은 옌스였다. 그는 기다란 참마도를 쥐고 켈베로스에게 다가갔다. 아니 돌격해갔다. "그만둬!" 블랙의 만류는 이미 늦었다. 대쉬스킬로 전환한 옌스는 순식간에 켈베로스의 코앞까지다가갔다. 켈베로스는 맹렬히 돌진해온 적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니, 놀란것은 가운데 머리 하나 뿐이다. 남은 좌우 두개의 머리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지옥의 푸른 불꽃을 뿜어댔다. "크아아악!" "옌스!" 푸른 불꽃에 휘감긴 옌스가 일행이 있는 곳 까지 굴러왔다. 에이린이 서둘러 힐을 뿌렸지만, 이미 옌스는 사망한 뒤였다. - 크윽! 이몸이 일격에 죽다니. 죽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옌스는 비주얼 키보드를 두들겨 가며 원통함을 호소했다. 시체가 사라지면 되살아 나겠지만 ,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부활포인트가 3일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게 문제 였다. 즉, 부활하면 3일, 현재시간으로는 하루를 열나게 달려와야 무덤에 올수 있었다. -미안하다, 에이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ㅠㅠ "헤헤, 괜찮아요 최소한 켈베로스가 무척 강하다는 건 알았으니까요." 에이린은 옌스를 위로하며 신성력을 전개했다. "레져렉션(Resurrection)!" 기도를 하는 에이린에게서 흘러나온 성스러운 빛이 죽은 옌스의 몸을 감쌋다. 오색 찬란한 빛들이 옌스에게 스며든다 싶더니 그의 HP와 MP, 스테미나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죽었던 옌스가 벌떡 일으켰다. "우와, 에이린 너 이제 부활도 할수 있는 거니?" 리지스가 감탄하자 에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헤헷, 저도 이제 하이 프리스트 라구요." 하이 프리스트 칭호를 얻으면서 그에 걸맞은 스킬도 습득한 에이린 이었다. 덕분에 옌스는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좋았어! 이번에야말로 저 똥개를 해치우겠다!" 기세 좋게 뛰쳐 나가던 옌스는 유한이 내건 발에 걸려 넘어졌다. 벌떡 일어난 옌스가 유한의 멱살을 잡았다. "크윽! 무슨 짓이냐, 바츠!" "너 바보냐? 랭커를 일격에 죽이는 괴물에게 또 덤벼들게." 그랬다. 이제 옌스는 랭커급이 아닌 진짜 랭커였다. 아르페디아 100 순위에 손꼽히는 강자인 것이다. 그런 강자가 켈베로스의 화염 브레스 한 방에 죽었다. "훗, 그건 이 몸이 방심을 해서……." "에이린, 이번에 옌스 또 죽으면 살려 주지 마라." "넵넵. 어차피 랭크가 낮아서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써요." 이렇게 되자 옌스는 포기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나름 에이린이 또 살려 줄 거라 믿고 덤비려 했는데, 레저렉션 스킬에 그런 제약이 있었다니. "그나저나 저 녀석 문 앞에서 떡 버티고 나오질 않는군." "그러게요." 켈베로스는 마치 묘실의 문을 지키는것이 잣니의 숙명이라는 듯. 멀리 떨어진 일행은 노려보기만 하고 덤비진 않았다. 유한일행의 입장에선 천만다행이었다. 저 흉폭한 지옥의 투견이 덤벼 들었으면. 곧장 게임 오버 상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저 똥개 레벨이 얼마나 될까?" "한 250정도? 아님 300?" 동료들의 의견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레벨을 떠나서 켈베로스는 게임 시스템상 '무적'의 기능이 있을거야. 랭커라도 쓰러트릴 수 없게 말이야." 채린은 찰스턴 공방전 당시 방패로 써먹은 버추얼 에이지 방송팀의 MC 이정민을 떠올렸다. 당시 이정민은 화살이건 창칼이건 마법이건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극강의 탱커(Tanker)였다. "하지만, 그러면 저 문을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잖아." 그럼 던전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아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는 것이 이번 관문의 과제겠지." 유한의 말에 오펜이 신화적이며 정석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켈베로스를 벌꿀과 겨자 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떡으로 잠재웠다고 하는데, 이 방법을 써 보면 어떨까?" "하지만, 벌꿀과 겨자 가루가 어디 있다고요?" "걱정마, 나한테 비슷한게 있으니까." 리지스가 인벤을 뒤지더니 꿀과 초코렛 케이크, 그리고 수면제를 끄집어냈다. "드래곤도 잠재울수 있다는 초강력 수면제야 이거라면 저 녀석도 정신없이 골아 떨어질걸." "리지스 언니는 별 걸 다 갖고 다니네요." "후후후, 나 상인인 거 몰라?" 리지스는 초코렛 케이크 속에 수면제를 넣은 뒤, 겉에 꿀을 듬뿍 부어 냄새를 없앴다. 그리고 켈베로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케이크를 휙 던져주고는 총알같이 돌아왔다. "크릉?" 눈앞에 달콤한 냄새가 나며 먹을 것이 있자 켈베로스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 먹어라! 먹는거야!' 유한을 비롯해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로 켈베로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켈베로스는 초코렛 케이크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앞발로 초콜렛 케이크를 툭 쳐서 일행에게로 던져 버렸다. "우리 삼돌이는 남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교육 참 잘 시키셨네요." 칭찬이 아닌 칭찬 아무튼 신화에서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아리엘의 오르골을 사용해 볼까?" 묘실을 여는 세가지 열쇠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아리엘의 오르골이 저 흉폭한 켈베로스까지 잠재워 줄지는 의문 이었다. "한번 해보자. 남은 방법은 이것 뿐이잖아." 채린의 설득에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아리엘의 오르골을 꺼내 태엽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을 켈베로스 가까운 곳에 두었다. 태엽이 풀리면서 아름다우면서도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전에 한 번 들어 보았지만, 다시들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음악이었다. "크르르?" 켈베로스가 반응을 보였다. 놈은 오르골 상자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리고……. "아우우우우ㅡ!" 녀석은 세 개의 머리를 쳐들고 마치 늑대처럼 울부 짖었다. 잠이 들기는 커녕 이상 반응을 보이자 일행은 깜짝 놀랐다. 오히려 켈베로스를 더 자극 시킨 것은 아닌지? 하지만 그런것은 아니었다. "울고 있어요." 에이린의 말대로 켈베로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방금 전의 흉악한 모습은 간데 없었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녀석의 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울던 켈베로스는 스르륵 배를 깔고 드러눕기 시작했다. "앗! 통한다!" "쉬잇! 조용히." 리지스가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드러누운 켈베로스는 계속 오르골 음악을 감상하더니 어느 순간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자 일행은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묘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진짜 잠든건가?" "옌스 너 죽을래!" 일행은 잠이 든 켈베로스를 쿡쿡 찌르는 옌스를 보고 기겁했다. 하지만 옌스가 아무리 건들고 찔러대도 켈베로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리지스나 채린이 툭툭 건드려 봐도 마찬가지. 그녀들은 켈베로스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이 녀석 죽었잖아." "그, 그러게"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도 멈춰진 상태. 방금 전까지 흉폭하게 날뛰던 녀석이 어째서 오르골 소리를 듣고 영원한 수면에 빠져 버린 것일까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름 원인을 알고있던것은 블랙뿐이었다. "사실 그 오르골의 음악은 아리엘이 녀석에게 불러주던 자장가 소리지." "……." "오랜 세월 녀석은 이 자리를 지켜 왔을거다. 아리엘이 없는 기나긴 세월을, 참으로 힘들게……." 익숙한 자장가를 다시 듣게 되자 감정이 북받쳤을 것이다. 그리움 앞에 무너진 감정은 켈베로스의 영혼을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던 것.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서 아리엘을 만났는지 켈베로스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수고 많았다. 나중에 저세상에서 보자꾸나." 블랙은 음악이 멈춘 오르골을 켈베로스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 모습을 유한 일행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채린과 에이린, 리지스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글썽글썽 했다. "크흐흑! 불쌍한 삼돌이." "옌스 넌 왜 우냐?" "슬프니까!" "사내자식이 질질 짜기는." 그렇게 말하는 유한도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다. 묘실의 문 쪽으로 돌아선 유한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테라칸 황제의 묘실을 열었습니다. -명성이 2,000 올랐습니다. 드디어 테라칸의 묘실이 열렸다. 그러나 유한은 안내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물론이고 모두가 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4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방은 화려한 궁전을 방불케 했다. 광장이라 해도 손색없을 거대한 대전은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고, 사방에 온갖 금은 보화들이 깔려 있었다. 그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보고 유한일행은 눈을 감지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침착한 로키도 이순간만은 넋을 완전히 빼놓고 있었다. "우와아아!"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 하는거 란게 이런거군요." 대전 중앙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이 안치되어 있었고, 양옆으로 또 다른 보물이 보관된 창고인지 방인지 문이 여럿 있었다. "블랙, 너 아주 부자였구나." "흥! 짐을 뭘로보고." 하긴, 테라칸 황제는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자다 그의 발아래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굴복했으니, 진상된 보물만도 커다란 창고를 몇 개는 채우고 남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 있는 것은 생전에 소유했던 것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어라, 저건?" 유한은 관 뒤의 단상위에 있는 옥좌를 보았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옥좌에는 위풍당당한 황금갑옷을 입은 시신이 앉아 있었다. 시신은 번개모양의 기괴한 황금 지팡이를 쥐고 대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블랙 너냐?" "그래, 짐의 시신을 짐이 직접 보자니 기분이 참 그렇군." "그럼 중앙의 황금관속에 있는건 누구고?" "나의 충실한 신하이자 사랑스런 반려인 아리엘이다." 그말에 황금관의 뚜껑을 열어보려던 리지스는 재빨리 손을 뗏다. 아무리 블랙이 보물을 양보하겠다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에 손대는 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뭐, 다른 것도 많으니까.' 사방에 깔린게 금은 보화다. 거기다 대전 양옆에 있는 방안에는 보물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쪽 방에는 금괴와 은괴들이 가득했고, 또 다른 방에는 온갖 보석과 진주로 된 장신구로 가득했다. 화려한 의상과 공단으로 가득한 방도 있었고, 진귀한 고대의 무구로 채워진 방도 있었다. 그 밖에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예술품과 도자기, 값비싼 향신료와 약재들도 가득했다. 마법서와 갖가지 고서가 가득 찬 방은 오펜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게 좋을까? 아님 저게 좋을까?" "뭘 망설여? 어차피 다 가져갈건데." "일단은 구경부터 하자고요." 채린과 리지스 에이린은 마치 쇼핑이라도 하는것처럼 갖가지 화려한 의상들을 골라보고 또 입어 보았다. 여자애들이 깔깔 대는 사이, 남자들은 고대 무구가 진열된 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옌스와 로키는 전투 직종이었기에 그쪽으로 관심이 많았고, 유한도 대장장이 였기에 관심을 두는건 당연했다. "전부 바츠 네가 만든 것보다 좋아 보이는걸?" "옌스 너 다음부터 수리 안 해 준다?" "치사하게 그러기냐?" 유한은 무기고 안의 무구들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러던 그는 이 보물창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쇠로된 자루에 금박을 입힌 작은 망치, 측 장도리였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금박이 되어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할만한 점도 없었다. 나무 자루가 아니라 오래 쥐기도 불편했고, 무게 균형도 별로라 작업 도구로도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이런물건을 여기다?" "앗! 그건……." 무기고로 동정을 살피러온 블랙은 유한의 손에 들린 장도리를 보고 감짝 놀랐다. "이게 뭔데?" "그, 그건 좀 쪽팔리는 물건이야." "쪽팔리다니?" 잠시 말하길 주저하던 블랙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옛날에 내가 호두를 까먹을때 쓰던 것이지." "껍직 깨는 용도였냐?" 정말 딱 그 정도에 걸맞은 도구 같았다, 꼴에 황제가 쓰던 거라고 금박을 씌운 모양이고. 유한은 이것으로 호두를 까먹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위엄있는 황금 갑옷을 걸치고 조그만 장도리로 호두를 툭툭 때리는 테라칸을 생각하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과연 쪽팔려 할 만한 물건이다. "이걸 왜 여기다 둔 거지?" "하하, 그래도 생전에 짐이 쓰던 거니까 챙겨 둔 걸 거다." "저승에서도 호두를 까먹으란 건가? 꼼꼼한 신하들이네." "그런 물건은 내버려 두고 딴 걸 찾아봐. 여긴 진귀한 무기들이 꽤 많은……." 유한에게 친절히 권하던 블랙은 갑자기 뒤로 홱 돌아섰다. 무기고에서 대전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그의 모습이 뭔가 심상찮아 보였다. 로키가 블랙을 따라 곧장 무기고를 나갔고, 옌스도 그 뒤를 따랐다. 유한도 손에 쥔 장도리를 내버릴 틈없이 뒤 따라 나왔다. "크크크, 고맙구나. 문을 죄다 열어 줘서." 대전으로 나온 블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옥좌를 바라보았다. 옥좌에 있는 테라칸의 시신은 단상 아래로 내팽겨져 있었고,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저, 저놈은!" 마기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바로 이바니우스 3세 였다. 그는 테라칸 황제의 시신이 갖고 있던 번개 모양의 지팡이를 움켜쥐고 연방 광소를 내뱉었다. "음하하하핫! 드디어 손에 들어왔도다! 황제 테라칸의 보물, 뇌제의 홀이!" 뇌제 탄생 1 이바니우스 3세와 무덤 입구에서 만난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원들은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광장이 나왔고, 광장 너머의 문이 열려 있었다. 열려진 문을 통해 계속 전진한 그들은 이바니우스 3세의 제지에 멈춰섰다. "조심해라, 이곳은 환상 마법진이 설치 되어있다." 그러나 환상 마법진은 발동되지 않았다. 유한 일행이 앞서가며 환상 마법진을 해체 했기 때문이다. "큭! 짐이 역적 놈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다니." 예전에는 이곳을 뚫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었는데. 이바니우스 3세와 철십자 길드원들은 계속해서 전진해 갔다. 두 번째 문을 열고 다음 통로로 들어서자 뭔가 큼지막한 짐승이 누워있는게 보였다. "확인해 봐." 베히모스의 명령에 도적 유저 몇명이 조심스럽게 짐승에게로 다가갔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접근했던 그들은 짐승의 상태를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재빨리 돌아와 자신들이 본것을 보고 했다. "켈베로스입니다만, 이미 죽었습니다." "역시 놈들 짓인가?" 그들 말고는 이곳에 들어온 자가 없으니 분명했다. "사체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걸 봐선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한 유저의 말에 이바니우스 3세는 곧장 테라칸 황제의 묘실로 들어갔다.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베히모스는 깜짝 놀랐다. 적에게는 블랙이라 불리는 거대 강철 병기가 있다. 나름 대비해도 시원찮을 판에 적들이 있는 묘실로 막무가내로 들어가다니. "제길, 거대 목인병은?" 베히모스의 물음에 노벨이 다급히 말했다. "이 근처로 이동시켜 놨는데 이 안으로 소환하려면 시간이 걸려, 전송 마법진 구축이 상당히 까다로운 거라……." "쳇, 망할 NPC 같으니라고!" 욕심 많은 NPC 떄문에 일을 망치게 생겼다. 괜히 놈들을 건드려 도망치거나 방비할 시간을 주게되면 고생하는것은 자신들일 테니까. 베히모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묘실 안으로 들어갔따. 이렇게 된 이상 이바니우스 3세가 지그 패거리와 싸우는 틈을 타서 뇌제의 홀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음하하하핫! 드디어 손에 들어왔도다! 황제 테라칸의 보물, 뇌제의 홀이!" 안으로 들어간 베히모스가 본것은 대전 단상의 옥좌를 차지한 이바니우스 3세와 지그 패거리들이 황당하다는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뭐야? 안 싸운 건가?" 싸우지도 않고 뇌제의 홀을 넘겨줬단 말인가. 지그패거리들은 다 멍청이들이란 말인가. 눈앞에 보물이 많다지만, 이곳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뇌제의 홀이 아니었던가. 아무튼,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일이 잘 풀리자 베히모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바니우스 3세에게서 보상을 받은 후 그동안 딴죽을 걸어온 앙갚음을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뇌제의 홀? 그게 뭐지?" "저 번개 모양의 작대기를 말하는건가?" 유한과 옌스가 지껄이는 이야기를 듣고 베히모스는 어이가 없었다. 이 바보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테라칸의 무덤에 찾아왔단 말인가.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뇌제의 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것 같았다. "어머, 분위기가 왜 이래?" "꺄악 ! 언니 저것봐요. 이바니우스 3세예요." "앗! 저건 철십자 길드잖아!" 의상실에서 신나게 이것저것 입어 보던 여자애들은 밖으로 나오다가 입구에 가득 몰려 있는 유저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물과 화려한 의상에 눈이 어두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철십자 길드?" "아니, 이 자식들이 언제?" 유한과 옌스는 뒤늦게 베히모스 패거리들이 대전에 들어온 것을 보고 놀랐다. 로키가 미리 알고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그들은 기습을 당햇을지도 모른다. "네놈들이 내 수하들을 모두 죽여 준 바람에 짐은 새로운 수하들을 받아들였지, 새로 짐의 검이된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니라." 이바니우스 3세의 말에 유한 일행은 놀랐지만, 베히모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바니우스 3세와 조건부로 동맹을 맺은 것뿐이다. 그런데도 저 건방진 NPC는 자신과 길드원들을 수하 운운하고 있었다. "천하의 베히모스가 NPC 쫄따구가 되다니." "그러게, 그것도 우리한테 진 상대에게 말이야." 일부러 도발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리지스와 채린의 발언은 베히모스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계집애들, 기억해 두겠다. 니들도 지그랑 같이 끝장내 주마!" 그렇게 다짐한 그는 이바니우스 3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뇌제의 홀을 얻었으면 보상을……." "짐의 일이 다 끝나면 어련히 알아서 줄까? 기다리거라." 그렇게 베히모스의 입을 막아버린 이바니우스 3세는 유한 일행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참 어리석구나. 역적들이여, 너희들은 여기서 무엇을 찾으려 한 것이냐?" "그야 당연히 보물이지." 유한은 주변에 널린 금은 보화들을 가리켰다. "쯧쯧쯧, 진짜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물을 찾겠다니. 너희들 눈은 정말 쓸데 없는 것이로구나, 하긴 돼지가 진주목걸이를 알아볼 리는 만무한 일." "뭐라고?" "우리가 돼지란 말이예욧!" 일행이 발끈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이바니우스 3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리석은 역적들이여, 테라칸 황제의 보물 중에 가장 진귀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뇌제의 홀이다. 바로 짐의 손에 들린 이것이지." 이바니우스 3세가 능묘에서 손에 넣으려 한 것은 뇌제의 홀뿐이다. 그래서 유한 일행이 먼저 능묘를 열었다고 생각하자 앞 뒤 안가리고 뛰어 들어간 것이다. 뇌제의 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벌써 놈들이 손아귀에 넣었다면 빼앗기 위해서. 그런데 다른 쓸데 없는 보물에 눈이먼 유한일행은 옥좌의 시신이 쥐고있는 뇌제의 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뇌제의 홀은 천둥 번개를 부리는 힘을 가진 패왕의 상징. 짐에게 걸맞은 신물이라 할 수 있다." "그게 천둥 번개를 부리는 힘이 있다고?" "물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짐이 기를 쓰고 이것을 손에 넣으려 할리가 없지 않겠느냐." 유한은 믿을수 없엇다. 그저 좀 괴상하게 생긴 막대기라 생각했을 뿐인데, 그런힘이 있다니. '아놔, 미리 좀 살펴볼걸.' 블랙의 눈앞에서 녀석의 시신을 건드리기 미안해서 놔둔 건데 엉뚱한 녀석이 득템하고 말았다. "천한 것들은 테라칸의 무위를 꾸며 댄것이라 운운하지만, 실제 테라칸에겐 천둥 번개를 부리는 힘이 있었따. 바로 그힘을 바탕으로 그는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지." 뇌제라 불렸던 진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유한은 슬쩍 블랙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심각한 걸로 봐서 미케니아 국왕의 말에는 전혀 거짓이 없는 모양이다. "이제 그 힘은 짐의 것이다. 과거 테라칸이 가진 힘으로 짐은 이제 아르페디아는 물론 다른 대륙도 정벌하여 진정한 세계의 지존이 될 것이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야망이었다. 그러나 이바니우스 3세가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있었다. 바로 그가 역적이라 지칭하는 유한 일행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것 같으냐!" 블랙이 눈을 번뜩이며 이바니우스 3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강철 육신은 마기를 분쇄하는 황금빛의 카이저 소울로 휘감겨 있었다. 달려드는 블랙을 보고 이바니우스 3세는 비웃음을 띠며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발밑에 본 적이 있는 마법진이 그려지자 블랙은 황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고속으로 발동시킨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상대를 날려 버리는 얍삽한 술책. 그러나 이것은 이바니우스 3세가 던져놓은 떡밥일뿐이었다. 블랙이 몸을 피한 자리엔 이미 그가 더블 캐스팅으로 발동시킨 마법진이 하나 더있었다. "커어억! 이건!" 이바니우스 3세가 만든 마법진에 갇힌 블랙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는 악당의 앞에선 무릎 꿇을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마법진의 마력에 대항했다. "고강도의 마그네트 마법진이니라, 네놈 같은 망령이든 쇳덩이를 붙잡아 두는 덴 그만한 게 없지." '그렇군, 마법진에 자력(藉力)이……." 왜 블랙이 꿈쩍도 못할까 어리둥절해 하던 유한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자석 수법은 자신이 그로지아의 배틀 폴로 대회에서 가우리 길드를 상대로 써먹은 적이 있었따. '흥 역시 교활한 NPC란 말이야.'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히모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따. 이바니우스 3세 덕분에 껄끄러운 강철 병기를 상대하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자, 이제 역적들을 처단해 볼까? 부하들의 원혼이 저세상에서 울고 있을 테니……." "저놈들의 처리는 우리한테 맡겨 주시죠." 베히모스가 패거리들을 끌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바니우스 3세가 뇌제의 홀을 겨누며 경고했다. "역적들은 짐이 처리할 것이다. 그러니 나서지말라." "우리도 저놈들에게 갚을것이 있소!" "나서지 말라 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자신의 말을 거스르면 정말 공격이라도 할 기세였다. 베히모스는 이바니우스 3세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뇌제의 홀을 가진 미케니아의 왕을 상대하기도 껄끄럽지만, 이대로 동맹이 깨지면 퀘스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좋다. 이번엔 양보한다.' 유저는 NPC와 다르다. 몇 번이고 되살아나니 지그는 나중에 게임을 접고 싶을 때까지 괴롭히면 된다. 베히모스는 그런일에는 재주가 있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말이다. 자신의 맘에 안드는 놈들, 어른들이 아니꼽게 여기는 놈들은 학교에서 제발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런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헤아리는 것도 포기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지그란 자식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예전에 봤을 때부터 어딘가 낯이 익은 인상이었다. 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골몰히 생각하는 베히모스의 귀에 이바니우스 3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천둥은 나의 소리요, 번개는 나의 검이다! 사라져라, 역적들아! 짐의 분노가 서린 번개를 받아라!" 2 이바니우스 3세가 뇌제의 홀을 내리치자 유한일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거대한 번개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 벼락같은 고함소리만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을 뿐이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당황한 이바니우스 3세는 몇번이고 뇌제의 홀을 허공에 내리쳤다. 그러나 번개는 커녕 정전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저러는 거야?" 밖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노벨이 묘실 안으로 들어와서 물었다. 베히모스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따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푸하하하핫!" 바로 그때 마그네트 마법진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잇던 블랙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당황하는 이바니우스 3세에게 비웃음의 눈길을 보냈다. "멍청한 악당 녀석. 짐의 시신이 들고 있엇다고 해서 그게 뇌제의 홀이라 믿었느냐?" "무, 무슨 소리냐?" 이바니우스 3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놀랐다. 첫째는 저 쇳덩이가 자신을 테라칸이라 지칭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번개 모양의 지팡이가 뇌제의 홀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같은 멍청이를 위해서 짐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약간 장난을 쳐 놨지. 그럴듯한 물건을 만들어 짐의 시신에 쥐어 준 것이다." "뭐, 뭐라고!" 테라칸의 손에 들려 있고, 모양도 번개모양이라서 뇌제의 홀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런 사정을 몰랐던 이바니우세 3세는 제대로 속은셈 이었다. 유한일행이나 베히모스 일당 입장에선 자기네 손에 없으니 확인할수 없어 속았던 것이고. "이 망할 고철 놈. 진짜, 진짜는 어디있느냐! 당장 말을 하라!" 악당의 말에 응답할 블랙이 아니었다. 그가 비웃음만 보내고 있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이바니우스 3세는 펄쩍 뛰었다. "말해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저 역적 놈들을 모조리 키메라 재료로 쓰겠다!" 협박에도 불구하고 블랙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원래 유한 일행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으려 했던 것도 단순히 보물 때문이 아니라 뇌제의 홀 때문이다. 뇌제의 홀이 자칫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대륙은 도탄에 빠질것 이기 때문에.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놈들은 뇌제의 홀을 찾을 것이다.' 이 능묘 안에 있는 보물을 모조리 뒤져서라도 끝내 손에 넣고 말겠지. 착잡한 기분을 느끼던 블랙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떳다. 유한의 손에 들려 있던 장도리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쪽팔리는 물건, 호두 껍질이나 까는 물건이라 해서 유한에게 내버려 두라고 했는데, 아직 유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하핫, 차라리 잘되었군."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바니우스 3세가 뭐라고 하자 블랙은 유한을 바라보고 외쳤다. "파일런의 후손이여! 너를 믿겠다! 네손에 들린것을 치켜들고 외쳐라! 천둥은 나의 소리요, 번개는 나의 검이다!" "뭐라고?"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유한은 영문을 몰라했다. 눈치가 빠른것은 베히모스 였다, 그는 유한의 손에 들린 볼품없는 장도리가 진짜 뇌제의 홀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뺏어! 지그 놈의 손에 있는게 진짜다!" 그 말과 동시에 베히모스는 검을 뽑아 들고 유한일행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원들을 막기위해 로키와 옌스가 앞으로 나섰다. "플라잉 롤링 대쉬!" "디펜더." 옌스가 철십자 길드원들을 치는 사이, 로키는 베히모스를 막았다. 랭킹은 한참 뒤졌지만 로키는 탱커로서 방어력을 우선으로 키워 놓았기에 베히모스의 공격을 밀리지 않고 막을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베히모스를 막아설수 있을지 그도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얼른 블랙이 시킨 대로 해!" 어찌나 다급했는지, 로키는 평소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유한은 주춤하고 있었다. 해보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철십자 길드장인 노벨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크크크, 그건 우리 거……." 유한에게 득의 만만하게 접근했던 노벨은 측면에서 날아온 파이어 볼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제길, 누구야?" "킥 롤링 파이어!" 상대는 노벨에게 응답하지 않고 계속 마법을 퍼부었다. 유한을 구한 것은 바로 오펜 이었다. 진귀한 마법서가 있는 서고에 있던 그는 바깥 상황이 심각해 지는것을 보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숨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기회를 보아 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맙다, 오펜." "인사는 나중에 ! 얼른 뇌제의 홀을 발동시켜." 오펠은 말을 마치고 서둘러 유한의 앞으로 가 날아드는 다크 에로우를 막았다. 이번에 공격한 것은 이바니우스 3세였다. "뇌제의 홀은 짐의 것이다!" "마나 실드!" 오펜은 소나기 처럼 쏟아지는 다크 애로우를 막아냈다. 힘겹게 이바니우스 3세의 공격을 막는 가운데 그는 왼손을 블랙에게로 뻗었다. "매직 브레이크(Magic Break)!" "아뿔사, 이놈이 더블 캐스팅을!" 오펜도 마도사 칭호를 얻으면서 익힌 스킬들이 있었다. 에이린이 하이 프리스트가 되어 레저렉션을 익힌것처럼, 그도 더블캐스팅 스킬을 익혔다. 아직 랭크가 낮아 여러 번 사용하진 못하지만 현재와 같이 긴요한 상황에 써먹을 수는 있었다. "좋아! 마법진이 깨졌군!" 오펜 덕분에 블랙은 마그네트 마법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두리번 거리다가 막 오펜을 공격하려는 노벨을 보았다. "어림없다!" "크아악!" 번개같이 몸을 날린 블랙은 쇠주먹으로 노벨을 후려쳤다. 40위권의 랭커지만, 마법사라 체력이 허약하기 짝이없던 노벨은 단 일격에 사망 판정을 받고 말았다. '씨이, 난 왜 매번 이모양이냐.' 길포드에게도 그렇고, 키라란 녀석에게도 그렇고. 아무래도 자신은 전투에 소질도 없고 도움도 안되는 것 같았다. 서글픈 마음이 든 노벨은 마법사 그만두고 전사나 해볼까 생각하면서 접속을 종료했다. "뭐 하는거냐, 후손 ! 얼른 뇌제의 홀을 발동시켜라!" 블랙의 외침과 동시에 유한은 뇌제의 홀을 치켜들었다. 3 "천둥은 나의 소리요, 번개는 나의 검이다." 유한은 블랙이 일러 준 대로 장도리, 아니 뇌제의 홀을 치켜들고 발동 주문을 외웠다. 처음 몇 초 동안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뭐야? 나도 속은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무시무시한 굉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따. 콰콰쾅ㅡ! 무덤의 천장을 뚫고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은 유한이 치켜든 뇌제의 홀에 떨어졌다. 격렬한굉음이 대전을 뒤흔들고, 번개의 섬광이 사방을 환하게 비쳤다. "무, 무슨일이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한의 친구들과 철십자 길드원들, 그리고 이바니우스 3세도싸움을 멈추고 벼락이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따. 번개의 섬광이 번득였던 그자리에 유한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솟구치고 입고있던 코트의 소매가 갈가리 찢어진것 외에는 그다지 달라진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몸 주변에는 가늘면서도 선명한 스파크가 연달아 튀었고, 얼굴과 팔 등, 피부가 드러난 부위에 검은 문신 같은 자국이 생겨났다. 그 검은 자국은 마치 번갯불을 연상 시켰다. 그리고 뇌제의 홀이 변했다. 유한의 손에들려 있던 볼품없던 장도리가 황금 빛을 뿐는 커다란 해머로 변했다. 이제야 뇌제라 불리는 자에게 걸맞은 무기처럼 보였다. '이것이 뇌제의 홀이 가진힘?' 유한은 기분이 상당히 고무 되는걸 느꼇다. 얼떨결에 블랙이 알려준 대로 하긴 했지만,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지금 유한의 상태는 주변 사람들이 겉으로 보는것보다 상당히 달라져 있었따. 눈앞에 어지럽게 떠오른 안내창을 봐도 알수 있었다. - [뇌제]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 뇌제의홀이 있으면 뇌제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뇌제로 변신하면 5분간 힘과 민첩성, 솜씨가 100 씩 증가하고 방어력이 2배로 상승합니다. 변신 상태에서 범위공격 스킬 '라이트닝 웨이브(Lightning Wave)' , 원거리 공격스킬 '선더 스피어(Thunder Spear)' , 돌격 스킬 '선더 러쉬 (Thunder Rush)' 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게임시간으로 하루에 한번만 뇌제로 변신 할수 있습니다. ● '변신 해제' 를 외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호오, 꽤 괜찮은데 ?" 유한은 크게 만족했다. 스탯을 올려주고 방어력을 상승시키는 것은 물론, 유용하고 위력있어 보이는 공격스킬을 3개나 주다니. 하루에 한 번, 그것도 5분밖에 변신할수 없다는 점도 게임 밸런스를 생각해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생산직인 자신이 이만한 능력을 가지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런데 다소 맘에 안드는 문제점도 있었따. - 변신한 상태에선 경험치를 습득할 수 없습니다. 변신시간 5분을 초과할 경우, HP가 빠르게 하락합니다. 제한시간을 초과하는 만큼 폭주 확률이 증가합니다. "크악! 이건 뭐야!" 변신한 상태에선 경험치를 못얻고, 시간 초과를 하면 HP가 떨어진다니. 더구나 폭주 확률이 증가한다고 했따. 폭주는 캐릭터가 유저의 의사와 상관없이 날뛰는 것을 의미한다. 제멋대로 날뛰다 어이없이 죽을수도 있고, 같은편을 해칠수도 있다. 아무래도 뇌제의 홀은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듯 싶었다. "뭐 해! 얼른 공격해! 뇌제의 홀을 빼앗으란 말이야!" 베히모스의 명령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철십자 길드원들이 유한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제길, 오 분이라고 했겠다." 유한은 5분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철십자 길드와 베히모스, 그리고 이바니우스 3세까지. "죽어라 , 대장장이!" "어림도 없다!" 유한은 철십자 길드원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뇌제의 홀을 휘둘렀다. 해머로 변한 뇌제의 홀에 맞은 유저는 타격을 입는것은 물론, 전격의 추가 데미지 까지 입고서 뒤로 날아갔다. "받아라, 라이트닝 웨이브!" 유한은 크게 망치를 내리치며 뇌제의 스킬을 전개했다. 콰콰쾅! 망치가 바닥을 때리자 격렬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전격의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유한에게 달려들던 철십자 길드원들이 살충제를 맞은 파리 떼처럼 우수수 쓰러져 나갔다. '우와, 이거 대단한데?" 뇌제의 스킬에 감탄한 유한은 입구에서 또 다른 철십자 길드원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따. 범위 공격 스킬을 써봤으니 이번엔 원거리 공격 스킬을 써 보기로 했다. "가랏! 선더 스피어!" 유한이 스킬을 발동하자 뇌제의 홀에서 번갯불이 튀어 나갔다. 어지럽게 흩어진 번갯불들은 돌격해 오던 철십자 길드원들에게 날아갔따. 선더 스피어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길드원 서너명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졌다. "우와, 저게 뇌제의 홀이 가진 위력인가!" "지그 오빠가 랭커라도 된 것 같아요." 리지스와 에이린은 유한이 보여주는 무위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떤 유니크 아이템이기에 생산직 대장장이를 저런 괴물로 만든단 말인가. 공격 2번에 고위급 유저 수십명이 사라졌다. 유한의 무위에 정신이 팔린 두사람은 몇몇 철십자 길드원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트리플 샷!" "커억!" 채린이 날린 화살이 두 소녀를 기습 하려던 철십자 길드원들의 가슴에 박혔다. 뒤늦게 정신차린 리지스와 에이린에게 채린의 따끔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정신차려! 지금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랬다. 지금은 구경할 떄가 아니라 싸울때였다. 옌스와 오펜은 철십자 길드원들을 상대로 쉴 새 없이 공격을 전개했고, 로키는 베히모스를 상대로 선전을 펼쳤다. "더러운 악당 놈. 뇌제의 홀을 탐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닥쳐라, 쇳조각! 짐의 앞길을 가로막지 마라!" 한쪽에선 한때 아르페디아를 주름잡은 왕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절정의 무위를 가진 블랙을 상대로 이바니우스3세는 자신의 마력을 총 동원하여 대등하게 싸웠다. "제길, 이게 뭐야! 한줌도 안되는 놈들을 상대로!"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베히모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보상은 보상대로 미뤄지고, 그렇다고 뇌제의 홀을 차지한것도 아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탱커를 죽여 버리고 지그 놈에게 달려들고 싶은데 상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공격은 몰라도 방어에 있어선 여느 랭커 못지않은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로키가 가진 능력에 표재훈의 격투기 지식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래, 이자식 방어만 할 뿐이군.' 베히모스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로키가 자신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방어 뿐임을 간과해싿. 벽을 상대로 칼질을 한들 소득이 있겠는가. 로키를 슬쩍 부하들에게 떠맡긴 베히모스는 비호 같이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조심해, 베히모스가 간다!" 로키의 경고를 들은 유한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페디아 4위에 랭크된 최강의 기사가 자신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유한은 피하는 척 몸을 빼다가 한순간 앞으로 달려 들어갔다. '오냐, 언젠간 너와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선더 러쉬!" 뇌제의 돌격스킬이 발동하자, 유한의 앞에 있던 철십자 길드원들이 번개 폭풍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튕겨나가지 않은 것은 베히모스 뿐이다. 뇌제의 힘을 가진 유한도 그의 굳건한 디펜스를 완전히 무력화 시키지 못했다. "과연 4위의 랭커로군!" "까불지 마라, 대장장이 자식! 뇌제의 홀은 네놈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야!" 베히모스는 유한이 자신을 아래로 보는 투로 말하자 발끈하여 공격에 속도를 높여갔다. 그러나 눈앞의 황당한 대장장이 자식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냄은 물론 오히려 피하고 반격까지 날렸다. "그럼 너한텐 어울리는 물건일 것 같냐?" 유한은 베히모스의 검을 막고 그의 발을 강하게 밟았다. 주춤하는 베히모스에게 유한은 어깨를 들이 밀어 그의 가슴에 강하게 부딪쳤다. "커억! 이 자식이!" '웃긴 놈이네, 4위 랭커가 이런 단순한 공격도 못 피해?' 유한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뇌제의 홀이라는 사기성 유니크 아이템으로 전투력을 뻥튀겼다지만, 베히모스가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4위 랭커라면 레벨이 족히 250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300에 다다랐을 수도 있따. 그만하면 아이템 발로 능력을 높인 유한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을 터. 그러나 오히려 당하고 있는것은 베히모스 쪽이었다. 유한은 베히모스가 강하다는 소문을 바츠 시절부터 들었다. 바츠처럼 홀로 드래곤을 잡을 수 있는 강자라고 소문이 자자 했다. 바츠가 사라질 때도 베히모스는 기사 유저중에 최고의 캐릭터 였다. "크아악! 소닉 블레이드!" 그런데 이건 무엇인가. 분명 스탯은 높은것 같고, 스킬에 맞아보니 나름 위력은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위력을 가진 스킬에 비해 동작이 너무 평범하기 이를데 없다. 몬스터나 일반 유저라면 몰라도 고단수의 플레이 능력을 가진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을 전투력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도장에서도 그랬지.' 예전에 송태수를 비롯해, 곽대발 등 도장 사람들은 베히모스의 전투 동영상을 보고 4위 랭커 답지 않다며 혀를 찼었다. 그렇게 4위 랭커를 우습게 보는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무술에 관해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이고, 게임플레이에 있어서도 스킬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사인 송태수는 게임에서 유술가를 상대로 노 스킬로 두들겨 준적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전투 시스템에서 스킬은 그저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을 뿐이고, 평범한 칼질이라도 급소에 맞으면 데미지가 크다. 그 묘미를 잘 아는 사람은 스킬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아니면 옌스처럼 스킬 자체를 다양한 패턴으로 변화 시켜 사용한다. 그런데 4위 랭커에 오를 정도로 게임을 오래한 베히모스가 그런 것도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은 레벨에 비해 경험이 심하게 모자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아니면……. "너 만만한 상대하고만 싸우면서 레벨 올렸지?" 유한의 지적에 베히모스는 움찔 놀랐다. "아니면 길드전에 묻어가서 경험치를 뜯어먹었거나." "이 자식이!" "하긴 길드 간부쯤 되면 경험치도 더 많이 얻겠군." 유한의 추측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는지 베히모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는 들고 있는 칼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화를 냈지만, 그만큼 당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4위 랭커라는 놈이 고레벨 몬스터를 잡은 동영상이 없어 이상하다 했더니 그 이유를 이제 알겠군.' 베히모스는 소문에 비해 알려진 동영상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길드전이나 평범한 사냥터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뿐 "뭘 안다고 함부로 주절 거리는 거냐?" "그야 너하고 똑같은 놈을 하나 아니까!" 그놈도 베히모스처럼 고레벨, 아니 고위층의 자녀다. 학교 이사장의 손자로 학교에선 놈이 왕이었다. 주먹 쓴다는, 힘좀 쓴다는 양아치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면서 거들먹 거렸다. 그러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놈이었다. 애들 때리고 괴롭혔던 범생이가 마지막에 악을 쓰고 덤벼들 떄는 그저 어쩔줄 모르고 밀대자루에 두들겨 맞던 그런녀석이었으니까. 생긴 것도 베히모스 이놈이랑 짜증날 정도로 닮았다. 그 짜증스런 목소리 까지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철십자 기사단에 김필중을 비롯해 학림 고등학교 일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보니 똑같은 놈이 아니라 니가 바로 그놈이구나." "뭐, 뭐?" "너 정현일이지?" 유한의 물음에 베히모스는 눈을 둥그렇게 떳다. 아마 게임을 하면서 아는 녀석 말고 다른 놈에게 본명을 불리게 될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그란 놈은 자신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할지도.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녀석이다. 생각이 날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 너 누구야!" '이놈도 김필중 그놈이랑 다를게 없군.' 하긴 누군지 분간하지도 못할 정도로 숱한 학생들을 괴롭힌 녀석이니 이렇게 묻는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한 가지는 분명 가르쳐 주고 싶었다. 만만하다 여기고 마음껏 짓밟은 상대가 이빨을 들이밀고 물어뜯을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마. 내가 누군지." 묘한 쾌감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4 -믿을수가 없군. -저놈들 대체 누구지? 쓰러진 철십자 길드원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부활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상대는 겨우 다섯, 가디언 까지 합치면 여섯이다. 자신들은 베히모스와 길드장 노벨이 있었고 수적으로도 우위였는데도 오히려 수세에 빠진 상태였다. 길드장은 손도 못 써보고 가디언에게 죽임을 당했고. 베히모스는 뇌제의 홀을 쥔 대장장이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다. '제길, 초반에 피해가 너무 컸다.' 베히모스는 얼마 남지 않은 길드원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리하게 뇌제의 홀을 빼앗으라 명령한게 화근이었다.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얼마만큼의 위력이 있는지는 몰랐다. 초반에 뇌제의 홀을 이용한 대장장이의 공격에 길드원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기세가 팍 꺾여 버렸다. 거기다 옌스와 오펜, 아까 자신을 상대했던 로키라는 놈도 무척 강했다. '계집애들조차도 쓰러트리지 못하다니…….' 몇몇 길드원들은 여자애들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당하기만 했다. 화살에 맞고 돈주머니에 맞고, 두꺼운 법전에 맞고, '이게 우리 철십자 길드가 맞는가,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길드인 ?' 현재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베히모스였다. 아니, 자신이 두들겨 맞고 있는것 자체가 꿈같았다. "이 와중에 딴 데 신경 쓸 틈이 있어?" "커억!" 유한의 발길질에 차인 베히모스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굴욕감을 느낀 베히모스는 벌떡 일어나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스킬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찌 된게 저 대장장이 놈은 공격스킬은 매우 높은 확률로 피해버렸다. "죽어!" 베히모스가 평범한 칼질로 전환하자 유한도 위험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과연 4위 랭커 답게 스탯 수치가 높은지, 빠르고 사나운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만약 베히모스가 좀 더 경험이 있었으면 벌써 유한을 궁지에 몰아 붙였을지도 모른다. 푸윽! "크윽!" 정신없이 검을 피하던 유한은 베히모스의 칼에 왼쪽 허벅다리를 찔렸다. '잡았다!' 히죽웃던 베히모스의 머리 가운데로 뇌제의 홀이 떨어 졌다. "라이트닝 웨이브!" 콰콰쾅! 굉음과 함께 격렬한 전격이 베히모스의 몸을 뒤흔들었다. 강렬한 일격을 맞은 베히모스의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비틀거렸다. -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쇼크가 10초간 유지됩니다. 방금전 그 공격에 HP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리고 캐릭터의 제어도 되지않았다. 베히모스의 의사와 달리 몸은 멋대로 비틀거렸다. '제길, 뭐야! 움직여! 움직이라고!' 다리에서 칼을뺀 대장장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야수처럼 으르렁 대면서. "아직도 기억 안 나냐!" 커다란 망치를 손에 들고 달려드는 대장장이를 보고 순간, 베히모스는 녀석이 누군가 생각해 냈다. 교장이 쫓아내라 했었던 1학년 범생이 예전에도 이모습과 똑같았다. 밀대 자루를 손에 들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었다. '그래, 그놈이군!' 기억이 났다, 분명 그 범생이 이름이……." "강유한!" 그것이 베히모스가 쓰러지기 직전에 내뱉은 말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유한이 내리쳐 뇌제의 홀이 베히모스의 정수리를 후려갈겼다. - 안보여요 ㅠ.ㅠ 죗송합니다 여기만 넘어갈게요 - 여기도 PASS 죄송 .. "헉 ! 베히모스가 죽었어!" "도, 도망가자!" 유한이 안내창들을 보고 있는 사이 철십자 길드원들이 기겁하고 도주했다. 사기가 내려간 길드원들은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쫒을까?" 옌스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놔둬 정작 해치워야 할놈은 따로 있다고" 유한은 이바니우스 3세 쪽을 바라보았다. 싸움의 쉽게 끝나지 않고 사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쉽게 승부가 날것 같지가 않았다. 블랙은 ??????(죄송합니다 이건 도저히 안보이네요 ;;) 하며 ?????, 이바니우스 3세는 ?? ????????? 를 뿌리며 그를 떨어내려 애썻다. 팽팽한 상황이었지만 그건 우리 일행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츠, 저 영창 번개로 멋지게 해치워 버리지 그래?" "그렇게 하고 싶긴 하지만……." 이미 뇌제 제한 시간을 초과했다. HP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무리를 해서라도 쓸쑤는 있었지만 폭주라도 하게 되면 상황을 장담할수 없었다. "젠장! 해제!" 유한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왔다. 그러자 멍해지던 이상현상도 사라지고, 뇌제의 홀도 원래의 초라한 장도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바니우스 3세의 소원을 들어줄까?" "무슨 생각인거야?" 어리둥절해 하던 옌스를 내버려 두고. 유한은 이바니우스 3세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봐, 국왕! 당신이 갖고 싶어했던 뇌제의 홀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바니우스 3세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유한을 돌아보았다. "부슨 간교한 수작을 부릴셈이냐!" 인상을 찌푸리던 이바니우스 3세는 유한이 정말 자신에게 뇌제의 홀을 던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돌발 상황이어씨에 동료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짓을 한건가? 지그가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걸까? "오오! 뇌제의 홀 !" 이바니우스 3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뇌제의 홀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유한이 날카롭게 외쳤다. "지금이다. 블랙!" 블랙 역시 처음엔 유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했다. 뇌제의 홀에 정신이 팔린 이바니우스 3세가 깜빡 블랙의 존재를 잊어버린것이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공격을 피한다고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빳는데, "아뿔사!" 이바니우스 3세는 뒤늦게 유한의 계략을 눈치챘다. 그는 재빨리 뇌제의 홀을 잡으며 블랙을 상대하려 했지만, 어이 없게도 날아오던 뇌제의 홀은 다시 유한에게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유한은 뇌제의 홀을 그냥 던진게 아니었다. 건틀렛의 와이어에 감아서 던졌던 것이다. "잘 가시오, 마도사의 왕!" "이놈! 이 대장장이 놈이 짐을 끝까지!" 유한의 인사가 끝난 바로 그때, 황금빛의 카이저 소울로 휘감긴 블랙의 주먹이 이바니우스 3세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흑!" 미케니아의 왕은 입에서 검은 피를 왈칵 토했다. 그의 심장을 꿰뚫은 블랙의 손에는 일전에 헬리오스 신전에서 사라진 마물, 암흑의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카이저 소울의 빛에 마기가 소멸된 암흑의 심장은 블랙이 움켜쥐자 완전히 가루가 되고말았다. "크으윽, 짐이…… 미케니아의 지존인 짐이…… 세계의 패왕인……." 이바니우스 3세는 비틀거리며 블랙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가슴에 구멍이 난 상태로 살수는 없었다. 거기다 힘의 원천인 암흑의 심장도 소멸되었다. "천한 놈들…… 끝까지 짐을 농락하다니……." 죽음을 눈앞에 둔 이바니우스 3세의 눈이 붉게 번득였다. 그는 식어가는 몸에서 마지막 마력을 짜내어 마법을 발동시켰다. "크하하핫! 짐 혼자 지옥으로 가기엔 따분하구나! 너희 천민들이 길동무가 되어야겠다!" "안 돼! 저걸 막아!" 뭔가를 느낀 오펜이 다급하게 나섰지만, 이미 이바니우스 3세의 발치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전개된 다음이었다. "땅이여 울어라! 불이여 춤춰라! 바이올런트 볼케이노(Violent Volcano)!" 마법진이 붉은빛으로 빛났다. 대전의 바닥이 과자처럼 부서지고 기둥과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런 사태에 유한 일행은 어쩔줄을 몰라했다. "얼른 빠져나가야해! 화산이 터질거야!" "화산이라고?" "그치만 이 많은 보물들은……." "지금 보물이 문제야?" 화산이 터져서 용암목욕이라도 하는날엔 갖고있던 아이템이 죄다 증발한다. 그 점을 모르지 않는 일행은 서둘러 입구로 달려갔다. "아이고, 아까운 내 보물들!" "보물 타령 그만 하고 얼른 뛰기나 해!" 리지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기는 싫은지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묘실로 통하는 통로도 점점 무너져 내렸고, 일행의 뒤로 텁텁한 화산가스와 뜨근한 마그마가 쫓아오기 시작 했다. "출구다!" 모두들 서둘러 무덤 밖으로 뛰쳐 나갔따. 불룩 솟았던 무덤이 무너져 내리고 지면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능묘 중앙이 터지며 돌과 화염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일행은 열심히 달렸지만, 아무래도 화산 폭발의 영향에서 벗어날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여기서 죽는 건가?' 모두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때, 하얀 설풍이 일행에게 쏟아지는 화산탄을 날려버렸다. 갑자기 설풍이라니? 어리둥절해 하는 일행 앞에 희고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는 바로 아르페디아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이었다. 모두가 멍하니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유한이 화이트드래곤의 이름을 불렀다. "안듀라스?" 노스아크 북동부 산맥의 터줏대감. 유한이 자신을 알아보자 안듀라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웬일로?" "후후, 우리 드래곤들이 신에게 부여 받은 임무가 바로 미케니아의 소멸. 그런데 내가할일을 그대들이 다 해버리더군." 다시말해 안듀라스는 계속 미케니아 일당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드래곤이 나서면 유저가 재미없음 으로 시스템상 그의 간섭은 차단되었을테지만. "미케니아의 왕은 죽였는가?" "이번엔 확실히 죽였습니다." "수고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모두 내등 위로 올라타거라." 일행이 등에 오르자 안듀라스는 서둘러 땅을 박차고 타사르 평원을 벗어났다. 안듀라스의 등 위에서 화염과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테라칸의 무덤을 바라보는 일행의 얼굴은 허탈함 그 자체였다. 그토록 고생하며 찾은 던전인데. "구경만 하지말고 보물 좀 인벤에 쑤셔 넣을걸 그랬어요." "망할 국왕자식. 죽으려면 곱게 죽던가." "후후후, 모든게 신의 뜻이다." "드림맥스의 수작이지, 무슨……." 블랙의 말에 불만스럽게 답하던 유한은 눈앞에 떠오르는 안내창을 보았다. [미케니아 잔당의 섬멸]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 엘프의 장로를 찾아가 보상을 받으십시오. '오잉?' 생각해보니 엘프 장로에게 받은 연계 퀘스트가 있었다. 그 퀘스트를 못 얻은 옌스와 리지스는 이번 여행에서 건진게 하나도 없었다. 워낙에 대박을 놓쳤기 때문인지 모험을 했다는 즐거움보다 허탈감이 더 큰듯 했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가? 세상 끝이라도 좋으니 내가 태워다 주지." 안듀라스의 말에 일행의 의견은 한곳으로 모였다. "멀리 말고 엘프의 숲으로 가주세요." "알았다." 안듀라스는 곧장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실전 격투 1 엘프의 숲에 도착한 유한 일행은 장로를 만나 미케니아 국왕이 죽었음을 알렸다. 장로는 무척 기뻐했고, 소문을 들은 다른 엘프들도 환호성을 질렀다. 세계수와 정령계 사건 이후로 시무룩하던 엘프 마을이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들썩거렸다. "수고했네, 우리 형제 자매들은 자네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야." "잊어도 좋으니 좋은 보상이나주세요." 유한의 바람이 그렇거나 말거나 연계 퀘스트의 보상이 주어졌다. 같이 퀘스트를 수행한 채린과 에이린, 오펜 역시 보상을 받았다. - 명성이 2,500 올랐습니다. - 경험치 6,000 을 얻었습니다. - [엘프의 친구]칭호를 얻었습니다. - 정령의 반지를 얻었습니다. 유한은 슬쩍 정령의 반지를 살펴보았다. 민첩성을 20 올려주고 마법방어력을 30% 증가시켜 주는 기능이 있었다. 친구들은 유한과 다른 아이템을 받았다. 나름 괜찮아 보이지만, 눈앞에서 산더미 같은 보물을 날려 버린 충격때문인지 모두들 표정이 밝지 못했다. "표정들이 안 좋군. 혹시 보상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뇨, 좀 피곤해서요." 보상을 받은 유한 일행은 철공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엘프들이 놀다가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지금 그럴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보물은 너무 아깝단 말이야." "지그 넌 아까워할 필요없어. 그래도 넌 유니크 아이템 하나 건졌잖아." "뇌제의 홀? 이거 그리 좋은 거 아니야." 잘못 다루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물건이다. 더구나 이것을 이용해서 쓰러트린 상대에게선 경험치도 얻을수 없다. "4위 랭커를 꺾었는데 경험치 하나도 못 얻었어." "네가 생각을 잘 했어야지. 안 죽을만큼만 패고 변신 해제해서 죽였으면 경험치 땄을꺼 아냐." "그 와중에 일일이 그런걸 어떻게 생각하냐?" 유한은 그리 말하자 블랙이 충고라도 하듯이 말문을 열었다. "잘 생각하고 써야 한다. 나도 옛날에 뇌제의 홀을 잘못 다루어 몸을 크게 해쳤다." "근데 그거 정말이야?" "무엇말이냐?" "뇌제의 홀로 호두를 까먹었다는 거." 잠시 머뭇거리던 블랙은 진실을 내뱉었다. "그런 용도로도 썼다." "스스로 쪽팔리는 물건으로 만든 거로구먼."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뇌제의 홀은 쪽팔리는 물건이 맞다. 그안에 있는 힘은 내것이 아니야. 대륙통일의 대업이 아니면 뇌제의 홀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블랙은 진지한 눈빛으로 유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왠만하면 뇌제의 홀은 쓰지 마라, 아니 아예 폐기해 버려라. 이제 암흑의 무리들도 모두 소탕했지 않나." "뭘 모르시는군. 미케니아 말고 암흑의 무리는 또 있거든요." "또 있다고!" "세계는 넓고 악당은 많은 법이지." "휴우, 난세로군.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된건지. 이것도 그 드림맥스라는 놈들 때문인가?" 미케니아는 사라졌지만, 유한에겐 또 다른 큰 적이 남아 있었다. 예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충돌했었던 철십자 길드. 이번에 그들은 길드장과 베히모스가 죽는 참패를 맛봤다. 분명히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아야 했다. "일단은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까지." "그래요, 에이린도 이제 자러 갈래요." 철공소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허탈감도 적지 않고 몹시 졸리기도 한 일행은 가도에서 로그아웃을 했다. 2 늦게까지 게임을 한 유한은 임시 학원에서 반쯤 졸면서 강의를 들었다. 그렇게 수업을 파했을 때 블라덱에게서 전화가 왔다. "손석진의 과거 행적을 알아냈다고?" "그래, 내가 그 때문에 발품 좀 팔았어." 바츠를 해킹한 해커를 잡고 싶은 것은 블라덱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고수라 자부하는 자신을 상대는 아주 간단하게 농락했기 때문이다. 바츠 아이템을 구입했을 때 당했던 치욕을 생각하면 반드시 정체를 알아내서 면상을 보고 싶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 수상하긴 하더라고, 자세한 건 네가 오면 말해 줄게." 유한은 부리나케 블라덱의 아지트로 달려갔다. 블라덱은 정말 며칠 동안 날밤을 새웠는지 두 눈에 다크 서클이 짙게 끼어 있었다. "내가 정부서버를 해킹해 봤는데, 손석진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개발한 후에 외국으로 나갔어." 그건 유한도 게임 잡지를 통해 알고 잇었다. 천재 개발자 손석진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개발한 후 '이보다 나은 게임을 만들수 없다'며 출국한 사건으로 한때 게임계에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런데, 네 바츠가 해킹당한 작년 삼월 중순경 한국에 잠깐 입국한 기록이 있더라고, 그것도 드림맥스 본사옆의 프린스 호텔에 며칠동안 머물렀지." 대외적으로는 손석진은 그동안 해외여행을 하다 드림맥스가 대규모 업데이트를 하기 직전에 귀국한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전에 한국에 잠깐 들렀다니. "그게 정말이야?" 유한의 물음에 블라덱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프린스 호텔 홈페이지를 해킹해서 투숙객 기록을 알아봤어." "크음," 손석진은 왜 아무도 모르게 한국에 잠깐 들른 걸까? 그것도 하필이면 바츠가 해킹되던 시점에? 물론 그정도로 손석진을 해킹범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정말 그는 다른 급한 용무가 있어 한국에 들렀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상당히 미심쩍은 것만은 분명했다. "수고했어. 앞으로도 부탁해." 블라덱의 어깨를 두드려 준 유한은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떨어졌는지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도장에 나가 볼까?' 저번에 채린이 문제로 송태수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이후로 유한은 한동안 도장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다가 안 가니 몸이 둔해지고 뱃살에 기름이 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자 생각했지만. 도장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분명 그 곰탱이 아저씨 내가 무서워서 안 온다고 생각하고 있을거야.' 송태수의 득의의 찬 얼굴을 생각하자니 더욱 안갈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라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따. 그리고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정현일이 그 자식, 나라는 걸 알았으니 가만있지 않겠지.' 게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놈은 충분히 현실에서도 앙갚음을 해 올 녀석이다. 유한은 혼자고 그놈은 졸개가 많다. 물론 양아치들과의 싸움은 저번에 김필중 패거리와 싸워 봐서 그리 두렵진 않았다. 하지만 정현일은 김필중과 다르다. 둘다 패거리가 없으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놈들이지만, 정현일에겐 김필중과 다른 리더쉽이라는 게 있었다. 놈은 일진의 짱일 뿐만 아니라 게임상에서 철십자 길드라는 거대 길드를 움직이는 간부 중의 한 명이다. 테라칸의 무덤에서 싸웠을 때도 놈의 성격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눈앞에 상대를 두고도 자기 패거리의 상황을 분석하고 타계해 보려고 애썼다. 그런 능력이 있는 녀석과의 싸움은 김필중 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단 현실에서 해야 하는건 더 강해지는 거다.'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수련밖에 없다. 송건달 정도의 괴물은 아니더라도 상대가 함부로 볼수 없을 만큼은 강해져야 한다. "안녕하십니까!" "여, 유한이 왔냐?" 유한이 도장 안에 들어서자 여러 수련생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가장 기운차게 맞아 준 것은 사범인 곽대발이었다. 그는 유한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척 팔을 올리다가 목을 조였다. "짜식, 얼굴 좀 내밀고 살지 뭐가 그리바빠?" "켁! 수험생은 바쁘다고요!" "바쁜거 좋아하네 , 게임하고 연애질할 시간은 있고?" 저번에 송태수와의 충돌 덕분에 유한이 채린이랑 사귄다는 소문이 수련생들에게 좍 퍼졌다. 이미 게임에서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긴 했지만 현실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다. "얼른 옷 갈아입고 튀어나와." 유한은 냉큼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막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도장 문이 드륵 열리며 관장인 송태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따라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송태수는 자신을 따라 들어온 청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가라니까!" "싫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청년의 억양과 말투는 이상했다. 외국에서 왔는지, 귀에 통역기를 꽂은 청년은 송태수가 싫다는데도 자꾸 매달리고 애원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한은 곽대발에게 물었다. "사범님, 무슨 일이죠?" "아, 저 일본친구. 너 없는 동안 나타난 녀석인데 관장님께 한수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있어. 관장님이 아무리 거절해도 계속 나타나더라고." "그래요?" 드문 케이스가 아닌지라 유한은 상대에 관심을 끄고 계속 몸을 풀었다. 송태수는 아무에게나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가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리 졸라도 소용이 없었다. "이봐, 자넨 이미 고무술로 근골이 다져진 상태야. 나한테 배우는 건 시간 낭비야. 하던거나 계속 수련 하도록해." "저 강한사람 되려 합니다. 관장님도 젊을 때 여러 무술 배웠지 않습니까?" 송태수는 이 일본 녀석 때문에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도대체가 아무리 충고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닷새 동안 오리 새끼처럼 계속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었다. '끄응, 이럴줄 알았으면 적당히 손봐 주는 건데.' 실명이 카즈마 마사요시라는 이 일본 청년은 바로 게임에서 길포드에 도전했던 유술가 카즈마 였다. 카즈마는 그때 신나게 두들겨 맞은 뒤 상대의 드 높은 실력에 반해 버렸다. 그래서……. '대체 누구십니까? 존명을 알려주십시오.' '후후후, 난 송태수라 하네.' '송태수! 설마 극기도 창시자인?'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덜렁 물 건너와서 가르침을 달라고 졸라 댈 줄은. 상대의 공손한 태도에 넘어가 실명을 알려준 것이 화근 이었다. "내밑에서 한 수 배우려다간 죽을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으이구, 이 고래심줄 같은 자식!' 그냥 확 안 죽을 만큼만 패서 쫓아 버릴까. 그리 생각하던 송태수의 눈에 유한의 모습이 띄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좋아, 그렇다면 하나 조건이 있다!" "조건입니까?" "나에게 배울 만한 그릇인지 시험해 보고 싶군. 저기 저 녀석을 이기고 오면 가르침을 주지." 카즈마는 송태수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몸을 풀고 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ㅏ "저 강합니다. 저 학생 간단히 이깁니다." 고무술 유단자인 카즈마도 자존심이 있었다. 저런 애송이를 밟고 올라서기는 싫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송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도 강하다. 그러니 네가 강한걸 증명해봐. 난 입으로 강하다는 놈들은 믿지 않는다." 송태수의 빈정거림에 카즈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3 '아놔, 왜 날 걸고 넘어지는 거야!' 유한은 몸을 풀면서 송태수와 카즈마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송태수가 슬쩍 봤을 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고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투덜거리는 유한에게로 카즈마와 송태수가 다가왔다. "나랑 대련해 줘야 하겠슴니다." "유한이 네가 이 친구에게 가르침 좀 줘라." "내가 무슨 재주로요?" 유한은 불가능 하다 여겼다. 자신이 극기도를 수련을 한 것은 1년 남짓이다. 중간에 농땡이 좀 부린걸 생각하면 그리 오래 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상대방이다. 카즈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체격도 송태수처럼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어느 곳 하나 허술해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아 보이는데…….' 가르침을 주긴 커녕, 되려 가르침을 받아야할 판이다. 그럼에도 송태수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만약 진다면 유한이 넌 내일부터 지옥 훈련이다." "켁! 그런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분명 채린이랑 가까이 지내는 것이 맘에 들지 않으니 심술을 부리는 것이다. '확 때려 치우고 나가 버릴까 보다.' 도장 그만둔다고 채린이랑 못 사귀는 건 아니라 생각되었다. 사실 채린이는 자신이 아버지 도장에 다니는걸 아직 모르고 있으니까. '그래도 물러나긴 싫어!' 송태수는 마치 '니가 별수 있겠냐'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한은 그런 그의 눈빛이 싫었다. '분명 내가 왕창 얻어터지는 걸 감상하고 굴리실 참인 모양인데, 그렇겐 안된다고요.' 오기가 생긴 유한은 글러브와 호구를 착용하고 링 위로 올라갔다. 그사이 카즈마도 탈의실에서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검도복과 비슷하게 생긴 도복을 입은 카즈마의 모습에 유한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얼래, 저사람 설마?' 게임 방송에서 보았던 일본인 유술가랑 비슷했다. 아니, 완벽히 갖춰진 폼을 보자니 당사자임을 확신할수 있었다. 카즈마는 호구에 손가락이 노출된 글러브를 끼고 링 위로 올라왔다. 땡ㅡ! 카즈마가 올라가자 곧장 공이 울렸다. 유한은 거리를 두고 돌면서 상대를 탐색했다. 하지만 카즈마는 고딩을 상대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단숨에 자신의 주특기로 상대를 꺾어 버리곤 송태수에게 인정을 받고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배울 만한 그릇이라고. '그리고 다음엔 또 한번 당신과 자웅을…….' 딴생각을 하던 카즈마에게 유한의 발차기가 날아왔다. 예상보다 예리한 발차기는 카즈마의 옆구리에 아릿하게 작렬했다. "크윽!" 다른 수련생들에 비하면 수련 정도가 일천한 유한이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은 실력이 있었다. 덕분에 카즈마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한 방 날려 주었다. '해, 생각보단 대단하지 않잖아.' 초반의 일격에 기가오른 유한은 그만 상대를 얕보고 말았다. 그런 방심은 곧장 호된 대가로 이어졌다.ㅏ 체면을 구긴 카즈마가 번개같이 달려들더니 유한을 패쳐 버린 것이다. 쿵! "크억!" 유한은 낙법도 못하고 제대로 내동댕이 쳐졌다. 숨이 막혀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에게 카즈마가 또 한번 마수를 뻗어 왔다. "제길, 또 당할까 봐!" 유한은 연달아 주먹과 발차기를 날리며 카즈마를 공격했다. 어지럽게 날아온 공격을 쳐 낸 카즈마는 유한이 하이킥을 날리자 옆으로 비스듬히 빠지며 유한의 반대편 다리를 후려차서 넘어트렸다. "크윽! 제길!" 또 한번 엉덩방아를 찧은 유한은 황급히 구석으로 물러났다. "바보 자식, 계속 움직여야지!" 코너에 몰리면 운신이 더 어려워질 뿐이다. 근접전에 강한 카즈마는 유한을 가둬 놓고 마음껏 기술을 펼칠게 틀림없다. 안타깝게도 곽대발의 충고는 유한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지 마! 저리 가!" 코너에 들어간 유한은 연방 정권과 발차기를 날리며 카즈마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언제까지 통할까. 유한은 연달아 주먹과 발차기를 날리다 지쳐 버렸다. 그틈을 타서 카즈마가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관절 기술을 펼쳤다. 순식간에 잡혀 오른팔이 뒤로 꺾인 유한은 카즈마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처럼 한 바퀴 팽그르르 돌았다. "항복하세요, 버티면 팔 부러집니다." "크윽 ! 이렇게 질 수는……." 유한은 계속 버텼다. 흡족한 얼굴의 송태수를 보자니 이대로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무럭무럭 솟구쳤다. 그는 발버둥을 치면서 카즈마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카즈마도 놀면서 고무술 유단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 고딩이 송태수 같은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살쾡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놓아주기는 커녕 더욱 팔을 꺾어 올리는 카즈마 였다. "아아악!" "항복하란 말입니다. 당신 크게 다쳐요." 계속 유한이 버티자 카즈마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이대로 상대를 봐주면 시간을 끌게 되고, 그리되면 고무술 유단자로서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장내면 상대의 팔을 완전히 부러진다. "유한아, 항복해!" "그래, 처음에 한 방 날린것만으로도 넌 잘한 거야!" 상황이 심각해지자 수련생들이 유한을 설득하고 나섰다. 송태수의 표정도 달라졌다. 그는 유한이 혼쭐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지 크게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시합을 중단시키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진드기같은 카즈마는 다시 들어붙을 것이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유한이 녀석은 콧대가 치솟을 터. '그래도…….' 유한이 크게 다치는 것보다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게 낫다. 그리생각한 송태수는 대련을 중지시키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런 그를 보고 유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요! 난 절대 안진다고요!" "인마,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원래 니 상대가 아니었어." "천만에요! 이길수 있어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 계속 버티는 것인가. 아파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들부들 떨면서, 진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유한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유한이 계속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솔직히 모두가 설득 했을때 항복하려 했었다. 그런데 포기하려던 바로 그때 유한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채린이었다. 4 약 10분 전. 학교를 파한 채린은 도장 근처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고 있었다. "오늘도 아버지 도장에 가는 거니?" "네, 오빠들한테 시원한 것좀 갖다 주려고요." 마트 주인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채린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론 바쁘다는 핑계로 도장을 거의 찾지 않던 그녀가 요즘 불티나게 들락거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가 도장에 오지 않나 확인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누구란 바로 유한이었다. '그때 유한이 녀석 분명히 극기도 기술을 썼어.' 밸런타인데이 때 유한이 양아치들과 싸웠다. 그 용감한 모습은 예전에 채린이 알고 있던 유한이 아니었다. 아니, 그저 게임에서만 볼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한은 수적으로 우세한 양아치들을 오히려 압도하며 싸웠다. 상대의 기를 죽이는 패도적인 공격과 기술은 분명 아버지의 극기도 였다. 개중에는 사범인 곽대발이 따로 개발한 기술도 있었다. 그 말인 즉슨, 유한이가 몰래 극기도를 배우고 있었다는 거다.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몰라. 다른 도장에서 배울 수도 있는데…….' 그래도 나름 확인을 하고 싶어도 요 근래엔 계속 도장을 찾았다. "유한아, 항복해!" "그래, 처음에 한 방 날린 것만 으로도 넌 잘한거야!" 도장 가까이 오자 안에서 함성과 고함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 지 밖에까지 쩌렁쩌렁 울릴정도다. '유한이?' 함성 속에 아는 이름이 있자 그녀는 부리나케 도장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함성속에 아는 이름이 있자 그녀는 부리나케 도장 문을 열고 아능로 뛰어 들어갔다. 링에선 차림새가 이상한 무술가가 유한의 팔을 꺾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서서 말리려 했을 때 채린은 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듯한 유한의 얼굴은 어릴때 몰래 과자를 먹다 들켰을 때와 같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이내 불타오르는 투지에 묻혀 버렸다. "그만둬요! 난 절대 안진다고요!" "인마,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원래 니 상대가 아니었어." "천만에요! 이길수 있어요!" 채린이 눈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순 없다. 상대가 제 아무리 레벨이 높더라도, 상당한 유단자라도. 유한의 마음가짐은 그랬다. 덕분에 오히려 붙잡고 있는 카즈마가 애원했다. "이러지 말고 항복해요. 나 나쁜사람 되기 싫습니다." 당황했기 때문인지 유한의 팔을 꺾은 카즈마의 손속이 조금 느슨해졌다. 유한은 그 틈을 눟치지 않았다. 고통으로 흩어진 힘을 모은 유한은 발을 들어 카즈마의 발등을 세게 내리 찍었다. "헛!" 카즈마가 놀라 피했지만, 그는 여전히 유한의 팔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유한이 뒤로 허리를 재껴 박치기를 날리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윽!" 재빨리 물러났지만 카즈마는 유한이 날린 회심의 박치기를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콧잔등에 찌릿한 느낌이 들면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이때다!' 카즈마가 비틀거리자 유한은 한 바퀴 몸을 크게 돌리며 그의 머리로 발차기를 날렸다. 빠악ㅡ! 혼신의 힘을 다한 발차기는 카즈마가 들어올린 팔에 막혔지만, 결국 카즈마의 한쪽 무릎을 링에 꿇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런!" 벌떡 일어선 카즈마는 유한이 여전히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오른팔에 고통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앞으로 쭉 뻗으며 자신을 견제했다. 두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절대 굴복하지 않을 기세였다. "후, 좋은 자세!" "이 자식, 날 갖고 놀았겠다! 용서 못한다!" 두 사람은 다시 치열하게 얽혀 들었다. 유한은 연달아 발차기와 정권을 날리고, 카즈마는 흘려내기와 걸기 기술로 유한의 공격에 맞섰다. 그러나 카즈마는 다시 관절 기술을 쓰지 않았다. 땡땡땡땡ㅡ! 약속된 시간이 지나자 곽대발이 올라가 두 사람을 양쪽으로 떨어트려 놓았다. "헉헉, 제기랄!" "내가 졌습니다." 유한이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카즈마가 자신의 패배를 선언했다. 사실 실력은 그가 유한보다 한단계이상 높았다. 그러나 상대의 투지에 밀려 시간만 끌고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건 자신의 패배나 마찬가지. 카즈마는 그대로 링에서 내려갔고, 유한은 오른팔을 붙을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처음에 관절기에 상한모양. "유한아!" 채린이 후다닥 링위로 올라가 그런 유한을 부축했다. 모두가 흐믓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송태수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유한의 부상은 크지 않았다. 카즈마가 더 심하게 꺾지는 않았기에 인대가 살짝 늘어난 정도에 그쳤다. 채린은 찜질용 팩을 수건에 싸서 유한의 오른팔에 씌워 주었다. "앗, 뜨거!" "어이구, 엄살은……." 혀를 차곤 있지만, 유한을 내려다 보는 채린의 눈빛은 따뜻했다. "뭐 하러 특기도 아닌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냥 좀 강해지고 싶어서." 유한이 대충 얼버무렸지만, 채린은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밸런타인 데이 때 유한은 자신을 뒤에 두고 양아치들과 용감히 싸웠다. "그럼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 아까처럼 꼴사나운 모습보이지 말고." "알았어, 다음엔 완벽히 이길게." 유한과 채린이 화기애애하게 웃는 사이 카즈마는 송태수에게 고별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돌아가려는 건가?" "예, 이미 큰 가르침 얻었습니다." 카즈마는 이번에 자신의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강하다. 허나 그 강함은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저 으스대고 싶어서 쌓은 힘은 매번 상대를 깔보고 경솔한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선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없다. 교만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다면 오늘 자신과 상대했던 저 소년이 다음에 자신을 넘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부끄럽지않겠습니다." "허허허, 이제 그릇이 되었군. 물을 담으면 꽉 차겠는데?" 송태수는 카즈마의 어개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성향은 다르지만, 그래도 내밑에서 배우고 싶다면 내 힘껏 자네를 가르쳐주지." "정말입니까?" 예상치 못했던 말에 카즈마는 깜짝 놀랐다. 나름 마음 한편에 미련이 남아 있었기에 송태수의 말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극기도도 더 발전해야 할 점이 많아. 자네가 그 점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제가 말입니까?" "싫은가?" "아닙니다! 전력 다 하겠습니다!" 카즈마는 송태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아르페디아를 어지럽히던 고무술 유단자 카즈마도 극기도, 아니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첫 외인 용병이라고 할까. "쳇, 이랬다가 저랬다가 멋대로라니깐." 투덜거리는 유한에게 송태수의 호통이 떨어졌다. "뭐 해. 강유한이. 여기가 니 집 안방인줄 알아? 놀지말고 당장 수련시작해." "저는 부상자라고요!" "다르 두 짝은 멀쩡하잖아. 오리걸음으로 뺑뺑이 돈다. 실시!" 결국 유한은 남는 시간동안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수련해야 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갈땐 카즈마에게 다친 오른팔 보다 두 다리가 더 아팠다. "아우씨, 종아리가 퉁퉁 부었어." "그러기에 왜 아빠 도장에 와 가지곤 고생이니?" 골목에서 채린이 불쑥 튀어 나왔다. 아버지의 성화에 먼저 돌아가는 척했지만 근처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그녀는 어깆거리는 유한의 손을 붙잡고 나란히 걸어갔다. 작고 따스한 채린의 손에서 온기를 느끼던 유한은 슬쩍 채린의 팔을 끌어당겨 팔짱을 꼈다. '조심해라, 복부로 무릎차기 날아온다.' 마음속에 있는 바츠가 경고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채린은 유한의 품에 바싹 다가왔다. "아직 밤날씨는 춥네." "응, 감기 조심해야해. 우리 옆집에 사는 강찬 아저씨는 감기걸려 고생이더라. 이번에 소설 마감도 그래서 미뤘대." 그렇지만 유한은 계속 날씨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길도 계속 이어졌으면……. 드러나는 해커의 정체 1 채린과의 심야 산책을 즐긴 다음 날 아침. 유한은 방을 나오다 동생과 마주쳤다. 학교갈 준비를 서두르는 동생은 요새 유달리 멋을 내고 외모와 체격관리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 이유를 유한은 잘 안다. 자신도 같은 이유였기에. "너 밤늦게까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냐?" 요즘 유현은 11시가 넘어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동생의 성격을 잘 아는 유한은 녀석이 공부하다 늦은 건 아니란 걸 알고있었다. "누가보면 형이 내 아버진 줄 알겠네." "마! 형은 그렇게 물어보면 안되냐!" "안돼. 형은 나보다 정신연령이 어리니까." "이 자식이 죽으려고." 개김 스킬 1랭크인 유현이는 오늘도 여전했다. "뭐 들으면 배 아파서 못 견딜텐데." "아파도 좋으니 말이나 들어보자." "후후후, 그녀와 함께 열심히 추억을 만들고 있지." 날마다 세라랑 심야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극장구경도 가고, 콘서트에도 가고, 유명한 맛집을 찾기도 하고, 나이속이고 나이트에서 놀기도 한다고. "주말에는 실내 수영장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어." "니네 참 잘나가는구나." "물론이지. 이제 겨우 팔짱 끼는 초딩 커플과는 다르다고 할까?" '이 자식, 봤구나!" 유현이 말대로 정말 배아픈 이야기 였다. 자신과 채린은 진도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데, 동생과 세라는 초음속 전투기를 타고 가는듯 했다. 배가 아프다 못해 쓰린 유한은 은근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게 데이트 한다고 바빠 가지곤 게임할 시간은 전혀 없겠네?" "천만에, 현실에서 데이트가 1차라면 게임에서는 2차라고." 할 건 다 하는 동생 커플이었다. 쓰리다 못한 유한은 이제 오기가 생겼다. 형이 되어서 동생에게 질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채린과의 관계를 좀 더 발전 시킬 방법을 찾아야한다. "아무튼, 화산파의 전대 고수는 찾았냐?" 얀과 베르디는 화산파 전대 고수를 찾는다고 지그 철공소의 붙어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덕분에 블랙 아이언의 영혼을 강신하는 작업은 일주일에 한번 한꺼번에 모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응, 며칠 전에 카잔 공국 북쪽 산속에 은거중인 고수를 찾아냈어. 덕분에 검술스킬이 부쩍 늘었지." "그럼 네가 이제 찬드라 대륙에 최고수가 되는 거냐?" "글쎄, 아직은. 검술 스킬 랭크를 어느 정도 올려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거 같아." 겉보기엔 뺀질뺀질 노는 거 같더니만 언제 이렇게 캐릭터를 성장 시켰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아직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지 못했는데. "그럼, 찬드라 대륙으로 돌아갈 거냐?" "언젠간 돌아가서 정식으로 문파를 열고 장문인이 될생각이지만, 아직은 아니야. 좀 더 둘러볼게 있으니까." "그냥 눌러 사는 건 어때? 아르페디아에서는 문파 못만드는 거냐?" "왜? 되면 돈이라도 보태 주시게?" "뭐 내가 니형 아니냐." 동생이 예뻐서가 아니라 세라, 아니 베르디가 예뻐서 였다. 여전히 쓸 만한 소환 마법사를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의 강신술은 필수적이다. "아르페디아에선 문파 못만들어. 시스템이 다르니까. 뭐 이쪽에서 나름 세력을 구축하면 나도 길드장이 될수 있고 영주도 될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은 그런게 아니거든." "그래?" 드림맥스의 농간으로 게임을 퓨전 판타지스럽게 진행하게된 유현이지만, 그래도 무협스런 곳이 익숙한 모양. 유한은 베르디가 떠날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소환 마법사를 구해 보기로 했다. 구할 수 없으면 초보 마법사를 지원해서 키워낼 생각이었다. "그만 가 볼게. 꾸물거리면 지각할 것 같아서." "잘 갔다 와라." 형제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유한도 슬슬 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가방을 챙겨 들고 대문 밖을 나간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누군가 싶어 받아 봤더니 허진태의 변호사라고 했다. "무슨 일입니까?" "허진태 씨가 한번 면회를 왔으면 하던데요." '내가 무슨 심심풀이 땅콩인가.' 내심 기분이 나빴고, 저번에 손석진과 만난 뒤로 행동에 주의할 필요도 있었기에 변호사의 청을 거절하기로 했다. "글쎄요, 요즘 바빠서 곤란한데요." "그러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허진태씨는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가 없어요. 심신이 무척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나한테 매달리냐?' 허진태가 체포된 원인을 따져보면 유한 책임이 컸다. 자길 처넣는데 공헌한 사람에게 자꾸 면회를 오라니. 복수하자는 수작이 아닐까? 괜히 불러서 불분명한 정보를 주고 사람을 골탕 먹이자는. 손석진이 의심스럽다하면 허진태는 기분나쁜 인간이었다. 해킹범에 대한 일만 아니면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정보도 일러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알았어요. 한번 가 보죠. 뭐." 정보라는 말에 구미가 당긴 유한은 학원 마치고 오후에 서울 구치소로 향했다. 변호사 말이 그리 거짓이 아닌지 허진태는 그 사이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눈빛엔 여전히 생생한 광기가 맴돌았지만. "어서 오라고." 유한이 면회실에 들어오자 허진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유한은 투덜거리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쳇, 네가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야." "후후, 이해해줘. 이곳에 있으면 아주 심심하니까." "그래서? 중요한 정보란게 뭐지?" 유한의 물음에 허진태는 손을 들어 올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저번에 내가 주었던 정보의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겠나?" 허진태는 저번에 유한에게 신라 대학교의 해킹 동아리레볼루션에 대해 알려 주었다. 손석진이 조커라는 것을 알았으면 당장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유한의 소식이 깜깜하자 변호사를 통해 연락한 것이다. 그런데 유한의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손석진이 해커라는 증거는 없던데?" "무슨! 놈이 해커로 활동한 걸 알았을 거 아냐? 놈이 만든 게임 설정집을 보지 못했나? 거기 조커였다는 증거가 있단 말이야!" "아, 설정집의 조커 그림?" "그래, 바로 그거." 그것을 봤다면 유한도 손석진이 해커, 그것도 조커라는 거물임을 알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지만, 그 조커 그림을 네가 그렸다면서?" "누가? 누가 그런소리를?" "손석진이 그러더군." 유한의 대답에 허진태는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설마 손석진에게 직접 물은 건 아니겠지?" "어쩌다 보니." 유한은 TV 토론회에 참석하게 된 것 부터 그날 있었던 일까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허진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하긴! 너 같으면 '내가 범인이오' 라고 말하겠나?" "하지만 바츠의 해킹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손석진이 조커였던 건 둘째치고 그가 바츠를 해킹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모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확심과 정황증거뿐. "내가 그 불분명한 정보 때문에 얼마나 민망했는 줄 알아? 이제 드러내 놓고 의심할 수도 없게 되었단 말이다." "드러내진 못하지만 이제 의심은 하고 있지. 안그런가?" 허진태가 눈을 번득이자 유한은 말문을 닫았다. 생각해 보면 많이 변했다. 처음 허진태에게 면회를 왔을적엔 단연코 손석진이 해커가 아닐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허진태가 내놓는 정보에 그에 대한 신용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하나만 물어보자." "뭘 말이야?" 유한의 물음에 허진태는 흥미 있다는 듯 눈을 번득였다. "너 말인데 그저 심심해서 날 도와주는건 아니지? 나름 목적이 있는거 아니야?" "후후후, 목적이라……. 그야 네가 싸들고올 바삭한 통닭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할까." "갈 거야!" 유한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자 허진태가 서둘러 그를 다독였다. "농담이야, 농담. 그래, 네 말대로 나에게도 목적이 있어." 허진태의 눈빛은 방금전의 장난스런 눈빛이 아니었다. 광기와 증오를 가득 담고 있는 그는 말문을 이어 나갔다. "나나 손석진이나 근본은 똑같아. 성장과정도 같고 해커일을 한것도 똑같지. 뭐 세상을 보는 관점이 그놈이나 나나 다르다고 하지만 그건 종이의 앞면이냐 뒷면이냐 그 차이에 불과하지." "……." "우린 똑같아. 목적을 위해 불법을 저질렀고, 남을 기만하고 이용해 먹지. 그런데 엿같은 세상은 정의의사도 행세 하는 놈은 놔두고 본능에 충실한 나를 집요하게 두들겨 패더군." 유한은 깊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만 감옥의 가기 억울하다'는 식으로 해석해 들을수는 있었다. "난 그놈이 한 껍질만 벗기면 똑같은 놈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거야. 오히려 그놈이 더하지.내가 사람들에게 뜯어내는 건 돈 뿐이지만, 녀석은 자기 이상을 위해서 사람들을 자기 장기패로 이용해 먹으니까." '한 껍질만 벗기면 똑같다고? 아니, 더하다고?' 곰곰이 생각하는 유한에게 허진태가 잔뜩 흥분한 투로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내가 더 나쁜것 같나? 그놈이 더 나쁜놈 같나?" 유한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둘다 나쁜놈이다, 그나마 손석진이 낫다 등등 속에서 와글와글 싸우고 있었기에 응답해 줄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놈의 가식에 속아 내 말을 믿지 않아. 하지만 넌 달라. 손석진을 의심할 만한 계기가 있었고, 또 지금은 녀석을 의심하고 있으니 내가 널 돕는 거야." 과연 돕기만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걸까. 한참 말문을 닫고 있던 유한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했다. "나한테 일러 줄 중요한 정보라는 건?" "손석진이 바츠를 해킹했다는 증거." 예전과 같으면 유한이 덥석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게 정말 있나? 있으면 내놔 봐. 더 이상 골탕먹는 건 질색이니까." 유한의 차가운 응답에 허진태는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였다. "내일 다시 이 시간에 찾아와라. 내일 확실히 증거를 보여주지." "지금 당장 보여 줄 순 없고?" "성격 급한 녀석이군. 일 년 가까이 쫓아 다녔으면서 하루를 못 참는 거냐?" 유한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진태가 말하는 증거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 기대는 되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다시오지." 그렇게 유한은 내일을 기약하고 면회실을 나왔다. 2 유한이 나가자 허진태는 간수에게 부탁해 구치소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이자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진태 너인가?" 상대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을 알아챘는지 바로 그렇게 물어왔다. 허진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래, 나 허진태다. 요즘 TV에도 출연하고 잘 지낸다며?" "구치소에서 많이 심심한가 보군. 어린 학생을 충동질해 이상한 질문이나 하게 만들고 말이야." "훗, 이상한 질문?" "그래. 나랑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하더군." 손석진의 말에 허진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후후, 정말 상관없는 일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묻고는 있지만, 이미 손석진은 답을 알고있었다. 예상대로 허진태는 그 문제를 들먹였다. "네가 정말 바츠를 해킹하지 않았느냐 이말이야." "난 해킹 따위 손 끊은지 오래되었다." 손석진의 말에 허진태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핫!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릴 지껄이는군. 난 널 잘알아. 넌 결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야. 해킹? 뭐 목적이 있다면 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너에겐 바츠를 해킹할 이유가 있고, 그걸 이용해 놈에게 다가갔다. 어때 내말이 틀린가?" "정말 많이 심심한가 보군, 구치소에 책이라도 보내 줄까? 망상은 좀 적당히 하라고." 손석진의 응답에 허진태가 언성을 높였다. "망상은 항상 네놈이 하는 거잖아! 자꾸 그런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 거냐? 너 자꾸 그런 식으로 굴면 재미없어." "그건 무슨 소리냐?" 손석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만의 생각이었을까. 비웃음을 띤 허진태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요새 정보기관에서 날마다 찾아와서 날 볶아 대고 있어. 지금까지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캐내는게 일상인 모양이더군." "그런가?" "그런가라고? 하긴 가식이라는게 참 좋군. 난 그렇게 볶아 대면서 너에 대해선…… 조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더군." 손석진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진태는 그가 꽤 긴장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짜증이 나서 나도 실컷 떠벌릴 생각이야. 정보기관 멍청이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매스컴이라도 불러서 과거 해킹 세계에 대해서 낱낱이 토로할 거야. 일단 공개되면 멋지겠군. 드림맥스의 손석진 개발자님이 옛날에 조커였다…… 세상이 들썩일 일이지." "멋대로 해라. 난 결백하다. 그런 협박이 통하지 않아." 손석진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황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왜 전화를 끊지 않고 허진태의 뒷말을 기다리겠는가. "뒷정리를 잘했다 이건가? 아니면 스스로 한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건가? 뭐 아무래도 좋아. 그러나 정부의 멍청이들이 가만 놔둔다고 해도 너한테 물먹은 놈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껄?" 예전에 조커에게 당한 자들은 꽤 많다. 거대한 세력을 가진 부패 정치인, 군벌조직, 모 국가의 독재자들과 테러리스트, 비밀 정보기관 등등……. 손석진이 결백하다 해도 그런 자들은 앙갚음을 위해 분명 뒷조사를 할것이고, 그럼 손석진은 이리저리 귀찮고 난처한 입장에 처할 것이다. "날 귀찮게 하려는 이유가 뭐냐? 원하는게 뭐지? 합의에 의한 석방인가? 그건 내맘대로 되는게 아니야." "일단 날 찾아와라. 얼굴이라도 보면서 이야기 하자. 장소는 이미 알겠지? 시간은 내일 오후 네 시다." 여기까지 말한 허진태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어차피 손석진은 오지않고 못배길 것이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과거를 아는 자신에게 뻣뻣한 입장이 되진 못할 테니까. 그는 다시 전화기를 들고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내일을 위해 몇가지 준비물과 부탁할 것이 있었다. 면회를 다녀온 날 밤 유한은 한잠도 자지 못했다. 정말 허진태가 손석진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이번에도 그냥 뻥을 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가서 확인해 보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아침이 밝자 일단 입시 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 곧바로 서울 구치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유한 군." 그런데 그가 구치소 입구에 들어가려고 할때 낯선 정장차림의 중년사내가 그를 붙잡았다. "누구십니까?" 유한이 경계하며 묻자 사내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전 허진태 씨의 변호사로 있는 국선명이라 합니다." 명함에는 모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라 적혀 있었다. "허진태 씨가 당신을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따라 오시죠." "전 그 허진태를 면회하러 가야 하는데요?" 유한이 버티자 국선명은 주위를 살피더니 귓속말을 했다. "손석진이 해킹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순간 그 말에 유한은 흠칫했다.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국선명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알게 될 겁니다." '제길, 뭐 하는 시츄에이션이냐!'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해서 왔는데 변호사를 따라가라니. 하지만, 그의 의미심장한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 일단 따르기로 했다. "앞장 서시죠." 국선명은 유한을 구치소 옆 으쓱한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데리고 갔다. '설마 날 납치해서 새우잡이 배에 팔아먹는 건 아니겠지?' 한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으나 피식 웃었다. 자신이 순순히 잡힐 사람인가? 게다가 그렇다고 해도 현대는 첨단 과학이 발달한 2030년 대다. 인공위성 추적을 하면 손쉽게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수 있는 시대에 그런 구시대적인 범죄를 저지를 리 없다. 유한이 차에 타자 국선명이 무선헤드셋을 건넸다. "들어 보시죠." '끙!' 이 알수 없는 행위에 따른 다는게 불쾌하긴 했지만 일단 건네받았다. 헤드셋을 머리에 씌우자 낯익은 두사람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이야기도. "아니, 이들은?" (대장장이 지그 11권에서 계속)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