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지그 9 Chapter 01 데보라의 자취 Chapter 02 블랙의 신위 Chapter 03 마녀 등장 Chapter 04 상처받은 자 Chapter 05 헤븐즈 게이트 Chapter 06 밸런타인데이에 생긴 일 Chapter 07 폭탄마와 유술가 Chapter 08 불꽃 대결 Chapter 09 엘프 숲의 위기 Chapter 10 미케니아의 역습 chapter 01 데보라의 자취 데보라의 자취 - 마녀 데보라의 유적을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이 1,500 올랐습니다. 마녀 데보라. 300여 년 전, 용사 카웬에게 패한 뒤 홀연히 사라진 그녀가 이런 망망대해의 무인도에 왔을 줄이야! '하긴 데보라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카잔 공국이었지.' 유한은 표재훈, 아니 로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바니우스 3세의 의뢰로 데보라의 행방을 추적하던 로키는 카잔 공국 남쪽에서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던전율 탐사했다. 그는 거기서 발견한 볼랙 아이언의 나 머지 설계도를 유한에게 넘겨주었다. 카잔 반도는 아르페디아 대록 동쪽 끝의 땅. 데보라는 거기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르페디아 대륙올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카잔 공국에 남은 흔적이나 공중 요새에서 미케니아의 지식을 훔쳐 도망친 사례를 보면, 이후에 자신의 세력을 재건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돌연 바다로 나가 버렸을까? 그리고 어쩌다 무인도의 이상한 땅속 유적에서 생을 마감한(?) 것인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스토리상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기에 게임 제작자는 데보라를 이곳으로 끌고 왔을 것이다. 유한은 그 비밀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것이 과거 바츠로서 데보라 던전을 최초 발견하고, 지그로서 데보라의 유산을 접수한 자신의 권리이자 책임이라 여겼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도?" 유한은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데보라 양 옆에 기립해 있던 블랙 아이언들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라? 아까도 저랬나?' 조금 전과는 뭔가 달랐다. 들고 있는 창이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았고, 기계 특유의 금속 마찰음이 놈들의 몸에서 들렸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유한은 슬그머니 허리에 차고 있던 마이티 소드에 손을 가져갔다. "침입자……." "침입자에게 죽음을." 블랙 아이언들의 입에서 음산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블랙에 비하면 흐리고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한은 점차 활발해지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의도를 완전히 확인했다. 블랙 아이언들을 그에게 다가오면서 창을 휘둘렀다. "죽어라, 침입자!" 유한은 서둘러 블랙 아이언들이 휘두르는 창날을 피해냈다. 쾅! 큰 소리와 함께 2자루의 창날이 벽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따. 블랙 아이언들은 곧장 창을 뽑아 내 투창 포즈를 잡았따. '앞으로 튀어나가!' 찰나의 순간, 유한의 마음속에 사라아 있는 바츠가 다급하게 외쳤다. 피할까 하고 주춤하던 유한은 곧장 몸응 낮추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 투창의 투척 각도는……!' 도망치면 죽는다. 오히려 투척 각도 안으로 파고들면 공격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격을 날릴 수도 있다. 유한은 바츠 시절에 쌓아 놓은 전투 감각을 믿었다. 그 전투 감각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2자루의 창은 유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차례 바닥으 구르며 돌진한 유한의 눈에 블랙 아이언의 다리가보였다. 그는 자신의 히든 스킬인, 용사 카웬이 남겨 준 필살기를 날렸다. "암 브레이크!" 콰직! 블랙 아이언의 무릎 관절을 감싸고 있던 강철 장갑이 찌그러졌다. 아쉽지만 반격의 성과는 그 정도였다. 유한은 더 나은 성과를 올리기보다 재빨리 피하는 것을 선택했따. 그는 상대가 둘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이크!" 유한은 다른 블랙 아이언이 내리찍는 발을 피해 물러났다.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쓸만한 히든 스킬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전투 직종의 유저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는 데보라가 만든 강철의 전투 병기다. 그것도 4m의 거구에 막강한 파워를 가졌고, 둘이 함께 공격을 해 오고 있었다. '그래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은 아니야.' 300여 년 만에 움직인 때문인지, 블랙 아이언들의 움직임은 시원찮았따. 하긴 오랫동안 방치되었기에 부품에 녹이 슬고 이끼가 끼엇을 것이다. 그러나 게속 움직이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기에, 서둘러 제압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유한은 블랙 아이언들의 공격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당연할 것이기에, 녀석들의 동작을 보고, 공격을 예상해 몸을 피했다. 물론 대놓고 물러서는 것은 멍청한 짓이므로 두 녀석의 다리 사이를 오가며 교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블랙 아이언들은 유한을 때리거나 잡으려다가 자신들끼리 뒤엉키고 상잔하는 일이 잦아졌다. "침입자를……!" "이크!" 돌아서 피하는 유한을 보고, 블랙 아이언 하나가 허리를 돌리며 주먹을 내려쳤다. 이대로 맞으면 피가 반 이상 닳을 상황. 그러나 녀석의 주먹은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손목 관절을 휘감은 강철 와이어 탓이었다. "나이스! 드디어 꼼짝없이 걸렸군." 유한은 와이어에 엉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블랙 아이언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그는 단순히 블랙 아이언들 사이로 생쥐같이 도망만 다닌 것이 아니었다. 건틀렛에서 와이어를 줄줄 뽑아내서 블랙 아이언들의 관절과 몸통, 사지를 뒤엉키게 만든 것 이다. 유한을 잡는 데 급급했던 블랙 아이언들은 가느다란 강 철선이 자신들의 사지를 결박하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나중에 끊어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드워프 갈리가 제조한 텅스텐 와이어는 무척이나 질겼고, 끌어당길수록 와이어가 파고든 관절과 마디의 틈새에 손상을 줄뿐이었다. "자, 이제 해체 작업을 해 볼까나?"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 유한은 망치와 집게를 들고 꼼짝 못하는 블랙 아이언들에게 다가갔다. 일단 더 날뛰지 못하도록 가슴의 장갑을 듣어내 동력원 인 심장을 꺼냈다. 그러자 바동거리던 블랙 아이언들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데보라의 블랙 아이언들을처치했습니다. - 경험치 4,500올 얻었습니다. 안내창 덕분에 유한은 블랙 아이언이 완전히 정지했다 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각종 공구들을 꺼내서 본격적인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찝,생각보다 쓸만한 게없네." 데보라가 만든 블랙 아이언은 기대 이하였다. 심장과 마력 컨트롤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이 녹슬 거나 낡아 빠진 상태였다. 움직임이 시원찮았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더구나 유한의 교란에 말려서 서로 치고받다가 부서지고 으깨진 부품들도 있었다. "그래도 블랙의 예비 부품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 유한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부품만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방 안올 뒤지며 데보라의 유물을 찾아보았다. "이쪽 벽이 수상하군.” 유한은 숨겨진 방이나 장소를 찾다가 한쪽에 멈춰 섰다. 망치로 두들겼는데, 단상 뒤쪽의 벽에서 맑게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 빈 공간이 있다는 중거였다. 유한은 곧장 곡괭이를 꺼내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벽에는 흔한 균열 하나 없었고, 그레인 스킬로 쓸어 봐도 완벽할 정도로 하나의 암석 덩어리로 되어 있 었다. 20분 정도 벽을 때리던 유한은 결국 포기해 버렸다. 벽은 마치 무슨 마법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부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들러보던 유한은 데보라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참 의자를 노려보던 유한은 의자를 한번 밀어 보았다. 끼익ㅡ! 으지직ᅳ! 나무 긁히는 소리와 얼음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그러나 의자는 심지라도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의자에 앉아 있는 마녀를 일으켜야 히는 건가? 단생각을 하던 유한은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힘이 비틀려 똑바로 밀던 것올 비스듬하게 밀었다. 끼익一쿵! 쿠쿵! 그런데 의자가 빙글 돌아가더니, 데보라의 시신이 벽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단상 뒤의 벽이 거짓말처 럼 천천히 열리더니 시커먼통로가 나타났다. "아, 의자를 미는 게 아니라돌리는 거였군.” 의자가 꿈찍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유한은 머쏙하 게 웃다가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걸어갔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쯤 걸어가자 청동으로 장식된 돌문이 나왔고,그것을 밀고 들어가자 작은 방이 나왔다. 방 안의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했고, 침대 옆에 있는 책 장에도 책과 색이 바랜 종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헉, 이런." 책 한 권을 빼서 보려던 유한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많이 낡은 데다 냉기에 얼어붙어 있던 책은 그가 펼치자마자, 과자처럼 부서져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책과 종이들이 다 그런 상태였다. 얼어붙어서 페이지가 펼쳐지지 않거나, 바스라지는. 그러나 유한은 개중에 가장 은전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상 서랍 안에 있던 것이었는데,그것을 손에 들자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 마녀데보라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장이라고?" 흥미가 생긴 유한은 곧장 패이지를 펼쳤다. 그러나 환하게 밝았던 유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장 온전한 상태라지만, 책으로서의 상태만 그러할 뿐, 기록은 그렇지 못했다. 페이지 곳곳의 잉크가 오래돼 흐리거나 번져 있어 안 그래도 악필인 데보라의 일기는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디 보자,이건 좀 읽을 수 있군." 유한은 드문드문 읽을 수 있는 구문들올 찾아 살펴보았다. 신성력 3977년 6월 3일. 카잔의 산골에서 광부이 발견했다는 기록읕 입수했다. 그 안에는 고대 마도 문명과 그 문명이 만들었던 도구들의 제조법이 적혀 있었다.대륙이 발칵뒤집힐 일이다. 늙은 마법사들의 놀란 눈빛이 눈에 선하다. 신성력 3978년 1월 28일. 반년간의내연구성과를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시제품을 보고도 다들 고개를 돌렸다. 마법학계의 늙은이들은 노예의 딸년이 고대 문명의 이기를 재현해 낸 일이 망에 들지 않는모양이다. 신성력 3978님 3월 7일. 보이드 노턴이 이번 대륙 마법 총회에서 내 고대 문명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다들 차기 노턴의 탑주가 큰일읕 해냈다고 난리다. 그러나 공동 연구자로 올라가기로 약속된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제 나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행동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읕 사랑한다 속삭이던 사람이……. 나는 이젠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할수만 있다면 이 더러운 세상을 끝장……. 일기장의 앞쪽에는 평범한 마법사였올 적의 데보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왜 그녀가 인형 군단을 만들어 대륙을 휘몰아쳤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내용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후 연인의 배신에 분노한 데보라는 방황 끝에 록스턴 산속에서 고대의 병기 생산 시설을 발견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목인병과 골렘 등의 인형 병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다. 그 이야기는 여러 유저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인형술사 데보라의 난. 용사 카웬의 등장. 그리고 데보라의 패배. 패자로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데보라의 이야기가 일기장에 쭉 이어졌다. 신성력 3981년 8월 19일. 용사에게 패한 마녀가 먼 남쪽 나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내가 있는 노스아크 북북까지 들려왔다. 그나저나 은거지러 삼은 이 얼음 궁전은 원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그 비밀이 재기를 위한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력 3982년 9월 7일. 미에니아의 공중요새에서 꽤 많은 고대의 기록과 지식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내 눈물 휘둥그렇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이바니우스3세의 배려에 감사한다. 하지만 난 그의 계략과 술수에 놀아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공중 요새에서 고대의 지식을 입수한 데보라는 자신이 고대문명의 기록올 발견한 카잔 공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동안 카잔 각지에 머물며 뭔가를 조사한 데보라는 배를 마련해 먼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무인도였다. 일기장에는 데보라가 무인도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듯 한 기록들이 쭉 적혀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는 기록의 훼손이 심해 당최 무엇을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유한의 눈에 확 띄는 문장이 있었다. ……하늘이 베푸는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타레이가 필요……. '스타레이라고?' 스타레이는 율리아 계곡에서 얻은 신의 광물인 운석을 정제하여 얻은 금속이다. 운석을 획득한 유한이나, 그것을 정제한 귀련이나 그 쓰임새를 전혀 몰랐다. 드워프 구센도르프가 알고 있는 듯했는데, 자세한 사항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안 사실이라곤 단순히 무구를 제작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레이의 정확한 용도는 무엇인가? "일단 나머지는 나가서 알아봐야겠군." 유한은 작은 방에서 원래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부서진 블랙 아이언들의 잔해는 그대로였고, 얼어붙은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데보라도 변한 점이 없었다. "열망이라……. 스타레이로 댁이 이루려던 열망이 뭡니까?" 유한은 문득 데보라에게 물었다. 그러나 꽁꽁 얼어 있는 데보라는 아무런 응답도 해 주지 않았다. 하긴 살아 있다면 블랙 아이언들이 날뛸 때나 의자를 밀 때 깨어났을 터.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아무런 반옹이 없었다. 냉동된 상태로 오매불망 하늘이 베푸는 기회를 기다리다 그대로 이승을 하직한 모양. 혹시 데보라가 깨어나지 않올까 적정 반, 기대 반 하던 유한은 결국 실밍하고 발걸음올 돌렸다. "쩝, 밖에 일본 녀석들이 없어야 할 텐데." 유한은 방 안의 은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난 뒤에도 방 안 온도는 점차 올라갔고. 냉기는 사라지고 성애는 녹아내렸다. 빠직_빠지직.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어 있던 데보라의 손끝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얀 얼굴에 보기 좋은 혈색이 돌고 도롬한 입술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굳게 감겨 있던 눈동자가 떠졌다. 유한은 건를랫의 와이어를 이용해 수직 동굴올 빠져 나왔다. 그는 혹시 주변에 있을지 모를 일본 유저들올 조심하면서 최가장의 요새로 되돌아왔다. 요새에는 막 전투를 준비 중인 유저들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중에 끼여 있던 옌스가 유한을 보고 다기왔다. "어이, 대체 어딜 자꾸 쏘다니는 거야?" 옌스의 표정에는 불만이 기득했다. 유한은 이 섬에 와서 전투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고, 병장기 제조나 수리도 게을리했다. 더구나 이미 섬 안으로 옮겨 놓은 블랙도 대기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블랙은 놔뒀다가 국 끓여 먹을 거야?" "오냐. 이 형님은 가장 화려한 순간에 끓여 드실 참이다" 시시한 싸움에는 절대 블랙을 투입하고 싶지 않은 유한 이었다. 그래서 일본 유저들에게 쫓길 때도 블랙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 이번 전투에 끓여 드셔야겠구먼. 지금 후소 대륙 에서 일본 쪽의 중원군이 잔똑 도착했으니까." "증원군? 얼마나 되는데?" "척후병 말로는 삼천은 족히 넘을 거라더라. 지금 우리 쪽수보다세배는더 많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질. 일진일퇴를 벌이면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일본 쪽도 마찬가지다. 분명 질적으로도 레벨이 높은 유저들로 채웠을 터. 멋들어지게 천수각을 지을 정도로 재력이 있는 놈들이니, 분명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좋았어. 이번 전투에 블랙을 투입한다." 숫자나 질적으로 우세한 적군올 물리치면, 유저들에게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널리 알릴 수 있다. 그리 되면 양산형 블랙 아이언의 판매도 쉬워질 것이다. "제발 그래 주라. 이번에 일본 녀석들을 섬에서 몰아내면 특별 보너스를 준다고 최가장의 길드장이 발표했으니까." 유한의 결정이 자칫 번복되는 게 두려웠던지, 옌스는 덩치답지 않게 싹싹 빌며 애원했다. 평소 그럴 녀석이 아니라 의아했다. "뭐 좋은 아이템이라도 주냐?" "그런 사소한 게 아냐." 옌스는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쳐 보였다. 두루마리에는 류트를 든 어여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엘프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외모에 잘빠진 팔등신 몸매. "이거 어디서 본 얼굴인데?" 유한의 물음에 옌스는 두 눈이 몽롱해졌다. "당연하지. 나의 우상 은비 누님이시다.” "엥? 그 유명한 아이돌?" 은비라면 유한도 알고 있었다. 드림맥스 리셉션 파티에 왔었고, 채린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드림맥스 측 발표에 의하면 파티에 참석한 연예인들은 틈틈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는사람들이라고 했다. 초특급 아이돌인 은비도 아르패디아 은라인을 즐긴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래. 은비 누님의 게임 내 캐릭터다. 캐릭터 이름은 금영." 이제야 이해했던지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하나 남았다. "근데 그거랑 특별 보너스랑 무슨 상관인데?" "실은 길드장인 최강현이 은비 누님이랑 아는 사이래. 뭐 남친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좀 헛소문 같고……." 옌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번에 일본 유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은비가 게임 내 캐릭터로 접속해서 특별 공연과 팬 사인회를 해주기로 했단다. 이것은 최가장 길드장이 내놓은 특단의 조치라고. "구라 아냐?" 유한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요새 연예계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아이돌 스타가 뭐가 아쉬워 이곳에 오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행사로 스케줄이 빡빡할 텐데. "최강현이 장담했어.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 허튼 소리를 했다간 위신이 바닥에 처박힌다는 거 물라?" 하긴 그런 거짓말올 함부로 할 리가 없다. 만약 진짜로 거짓말을 했다면 최강현은 게임은 물론, 현실에서도 옌스에게 살아남기 어려올 것이다. 아니, 분노하는 것은 엔스뿐만이 아닐 것이다. 섬을 몽땅 태워 먹고도 남을 정도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남자 유저들에게 처절히 응징당하고 말 것이다. 최악의 경우 최가장 길드가 해체될 수도. '아무튼 정말 은비가 온다면.' 유한은 유명 아이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은비가 온다면 꼭 만나고 싶었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다음 전투에서 눈에 확 듸는 활약을 해야 한다. 자신이, 그리고 블랙이 말이다. 하늘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데보라는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올 호위하던 블랙 아이언들은 무참하게 해체돼 나뒹굴고 있었고 비밀 통로 너머의 방은 멋대로 어질러진 상태. "침입자가 있었나?" 처음에 데보라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면 마법은 남의 도움이 있어야 해제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오히려 누군가 찾아와 바위를 깨트려 온도를 바꿔 주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 임무를 마치고 죽어 줘야 할 침입자가 오히려 블랙 아이언들을 쓰러트렸다는 점이다. 거기다 비밀의 방으로 통하는 통로도 열었고, 일기장까지 홈쳐 갔다. 대체 어떤 놈일까. 침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거기다 발자국들 이 동일한 것을 봐서 들어온 지는 단 한 명. 데보라는 발걸음을 돌려 부서진 블랙 아이언들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은신처의 통로를 막아 놓았던 바위의 상태도 파악했다. 덕분에 침입자의 정체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미세한 균열에 치명적인 일격을 퍼부었군. 이런 재주 를 갖고 있는 것은 아마도……." 데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이건 강철이건 이런 식으로 박살내는 자는 그녀가 알기에 단 한 명뿐이다. 세상을 뒤집어엎으려 했던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 떠들기 좋아하는 세상 인간들은 그를 용사라 칭송했다. 용사 카웬이 자신을 쫓아 이 섬까지 찾아온 것일까? "나와라, 클락(Clock)!" 데보라가 스태프를 살짝 휘두르며 외치자 공간이 갈라 지며 목인병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가 마련한 이旗)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던 목인병 의 몸통은 시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계는 시간뿐만 아 니라, 연도와 날짜까지 알려 주게끔 되어 있었다. "삼백 년이 넘게 홀렸군." 그렇다면 침입자는 카웬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 카웬과 연관이 있을 터. 그놈은 자신의 일기장을 갖고 갔다. 자신이 이 섬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적어 놓은 일기장을. 물론 가장 중요한 정보는 빼놓았기에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고, 모험자랍 시고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이 들어와 헤집고 다닐 게 분명하다. 데보라는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갔다. 깊숙한 수직 동굴이지만, 부유 마법을 알고 있는 그녀 에게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삼백 년이 지났어도 노턴의 탑은 남아 있겠지?" 노턴의 탑, 혹은 노턴 마탑으로 불리는 곳. 먼 고대부터 존재했던 그곳은 진귀한 고대 마법을 계승, 연구하고 있었다. 데보라는 예전에 그 탑을 이어받을 남자에게서 부유 마법을 배웠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사랑한 대상은 데보라가 아닌 그녀가 가진 고대 문명의 연구 기록이었다. "뿌득! 새로운 힘을 얻으면 그 알량한 마탑부터 없애 버리겠다." 300여 년 전엔 카웬의 방해로 이루지 못했지만, 이번엔 기필코 말살하겠다며 다짐했다. 흔적은 물론 탑이 존재했다는 기록이나 소문까지. 노턴 의 탑에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는 물론, 그 탑을 아는 자들 까지모두 없애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손에 넣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기다리기 위해 위험을 각오하고 300여 년의 동면에 들어갔었으니까. "누구냐?" 동굴 밖을 빠져나간 데보라는 일마 가지 않아 일련의 무리에 포위당했다. 데보라는 그들에 적의를 보이는 한편, 호기심을 느꼈다. 처음 보는 복장에 처음 듣는 이상한 언어. 운 좋게도 이방인들 중의 한 명은 아르페디아의 말올 할 줄 알았다. '이 여자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수색 중에 마주친 NPC 여성. 히로시가 알기론 이 섬에는 NPC가 없었다. 괜히 무인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유저들이 데리고 왔을 가능성은 있다. 친근한 NPC와 행동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나 차림새로 볼 때 이 NPC는 후소 대륙 출신이 아니다. "누구냐?한국 유저를 따라왔나?" "나는 데보라. 날 따르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나 자신 뿐.” 말을 마친 데보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몇몇 일본 유저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그만큼 데보라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눈빛은 살기로 이글 거렸다. 누구보다 먼저 살기를 감지한 히로시는 검을 고쳐 잡고 물러섰다. "정신 차려! 그 여자에서 떨어져!" 그러나 때늦은 경고였다. 창칼을 슬쩍 내리고 데보라에게 다가가던 일본 유저들은 싸늘한 주문을 들었다. "나오너라, 메두사.”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데보라 양옆의 공간이 찢어지더니, 몬스터 메두사 2마리가 튀어나왔다. 메두사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몬스터. 당연히 일본 유저 들은 지금까지 메두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으악!” "이, 이건 뭐야!" 한국 랭커들마저 치를 떨게 만드는 아르페디아 최강의 흉물은 면역성이 전무한 일본 유저들을 삽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던 히로시는 메두사가 자신의 코앞 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 정신올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상냥한 여성의 말소리를 들었다. <히로시 님의 심적 상태가 불안정하여 게임에서 강제로 접속을 종료하겠습니다.〉 유저를 보호하기 위한 자동 프로그램이 발동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캡슐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히로시는 그만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캡술을 열고 나온 히로시는 거올을 보고 놀랬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몽땅 곤두서 있었다. 그만큼 아까 그 괴물을 보고 놀랐다는 증거다. "제기랄, 면상을 본 것만으로 이렇게 되었다는거야?" 고작 가상 세계의 이미지였을 뿐이지 않는가. 히로시는 메두사의 얼굴을 떠올리려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징그럽고 흉악한 몰골 이었다. 후소 대륙에도 흉한 요괴들이 많지만, 메두사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삐리리ᅳ! 히로시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받아 보니 좀 전에 같이 수색을 하고 있었던 학교 후배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후배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 시바 선배! 아까 우리가 본 게 대체 뭡니까?" "아마 한국 쪽 요괴가 아닐까?” "그런 게 우글거리면 난 아르페디아 대륙엔 절대 안 갈 겁니다! 죽어도 안 가요! 차라리 게임 접을랍니다!" 후배는 그렇게 발악하며 전화를 끊었다. 설마 우글거리기나 할까. 정말 우글거린다면……. 메두사가 우글우글한 대륙을 상상하던 히로시는 좀 전 에 저녁으로 먹었던 청국장이 역류함을 느꼈다. "끄응,절대 상상해선 안돼!" 이무른 저런 괴물이 있다는, 그 괴물올 소환하는 NPC 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얼른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 캡술에 다시 들어갔다. <컨디션이 평상시와 다릅니다. 안정을 취한 후에 접속 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6시간이 지나야 접속이 가능합니다.> "쳇!" 강제 종료가 되었던 덕분에, 히로시의 재접속은 6시간 뒤로 미뤄졌다. 그날을 시작으로 메두사의 악명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chapter 02 블랙의 신위 블랙의 신위 척!척!척!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섬 중앙의 개활지에 한일 양측의 유저들이 모여들었다. 이전의 소규모 교전 때와는 다른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개활지에서 조금 떨어진 중립 지역에는 전투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드림맥스의 GM들이 나와 있었고, 한일 양국의 게임 전문 채널에서도 MC들을 파견했다. 이번 전투는 사상 최초의 국가 간 길드전이었고, 한일 전이라는 흥행요소도 있었다. "응?" 막 녹화 준비를 하던 버추얼 에이지의 MC 이정민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뒤쪽 숲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이정민 씨?" 근처에 있던 GM의 물음에 이정민은 곧장 답했다. "숲 속에 원가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 유저들이 복병을 숨겨 둔 건 아닌지……." "하하핫,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쪽은 중립 지역입니다." 항의나 기권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중립 지역에 유저가 접근할 수 없다. 다가온 유저들도 GM의 허락이 있어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의 전투 포진은 불가능합니다. 뭔 가 있다면 그건 유저가 아닐 겁니다." "그럼 몬스터겠군요." "뭐 그럴지도요. 하지만 우릴 공격하진 않을 겁니다.” 이정민에게 그렇게 답해 준 GM은 뒤를 슬찍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는 지금 이 싸움을 지켜보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늘 싸움으로 이 섬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일본 유저들을 이끌고 있는 오다는 맨 앞쪽에 서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다이묘’ 칭호를 가진 후소 대륙의 영주 유저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가였다. 거기다 가장 먼저 원양 항해에 도전했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 무인도는 오다가 발견한 섬들 중에 제일 큰 섬이었다. 아르페디아 대륙 진출을 노리는 그는 중간 지점에 해당 이 섬을 반드시 점령하려 애썼다. "이번에야말로 한국 녀석들에게 우리 오와리 번의, 그리고 후소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아!" 최가장과의 싸움을 위해 오다는 자신이 지배하는 번의 유저들은 물론, 동맹 관계의 번들과 고레벨의 유저들을 초청했다. '큰 배가 더 많았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오다는 자신의 전력\을 모두 동원하지 못했다. 먼 항해가 가능한 배는 얼마 안 되었고, 그렇게 해서 실어 나를 수 있는 유저들에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상대인 최가장도 마찬가지였고, 삼 천의 유저들도 나름 정예들이었기에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적들이 돌격해 오면 선두 진영은 물러선다. 이때 후방 의 부대들은 재빨리 좌우 측면으로 이동, 적을 포위한다." 오다의 지시에 그의 가신 격인 유저 카타케는 머릿속에 전투상황을 그려나갔다. "적을 끌어들인 뒤, 측면을 감싸 포위해 섬멸하는 작전 인겁니까?" "우리 쪽의 숫자가 많으니 가능한 전법이지, 흐흐흐." 오디는 승리를확신하고있었다. 처음엔 최가장이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길드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중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몇 번 교전해 본 결과. 상대가 개인 능력은 뛰어 나지만 집단전 능력은 자기네보다 떨어지는 수준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르페디아와 후소의 문화적, 시스템적인 차이 때문이다. 모힘과 탐험이 중요시되는 아르페디아 대륙과 달리, 일본의 전국시대를 고스란히 옮긴 듯한 후소 대륙은 각 번국 간의 전투와 약탈이 빈번했다. 밤낮으로 전쟁을 즐기는 일본 유저들 쪽이 집단전 능력 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녀석들 개개인의 레벨이 높다 해도 이기는 건 우리 일본 유저들이다." 오다가 생각하는 일본 유저들은 흙이고, 한국 유저들은 모래였다. 흙은 뭉쳐서 도자기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래는 아무리 뭉치려 해도 몽쳐지지 않는다. 뭉쳐지지 않는 모래를 뿌려 봤자 도자기는 깨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이 궁수와 마법사들올 대거 증원했다는 소문입니다. 우리 쪽 피해가 만만찮을 겁니다." "걱정 마라. 거기에 대해서도 손을 써 놓았으니까." "손을 쓰다니요?" 카타케의 물음에 오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좀 이따 보면 알 것이다." 오다는 승리를 99% 확신했다. 그만큼 그의 준비는 철저했다. 다만 1% 찝찝한 일이 하나 있다면……. "좀 전에 실종된 수색대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 "녀석들과 친분이 있는 놈들의 말로는 메신저에서도 사라졌답니다. 아무래도 로그아웃을 한 모양입니다." 대전투를 앞에 두고 로그아웃을 한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오다가 아는 히로시는 그런 녀석이 아니었다. 실력이 높진 않지만, 번에 대한 충성심과 의욕만은 랭커 못지않았다. 혹시 대전투를 앞두고 한국 녀석들이 수작을 벌인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런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분명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오다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적과의 전투에 집중할 시간이다. "자. 오너라! 모래들아!" 오다의 호기 있는 외침이 한국 진영까지 울려 퍼졌다. "저 바퀴벌레 대장이 뭐라는 거야?" 한국 유저들은 일본 유저들을 바퀴벌레라 불렀다. 투구의 뿔과 여러 가지 장식이 달린 일본 전통의 갑옷이 멀리서 볼 때 마치 바퀴벌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했는지는 나중에 잡아 놓고 물어보죠." 이렇게 말한 것은 유한이었다. 적이 3배가 넘었지만. 아무도 유한의 말올 얼토당토않게 여기지 않았다. 쪽수에서 뒤지고, 획기적인 작전도 없었지만, 한국 유저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아무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흐흐흐, 이기면 은비를 본다!" "완소 은비 누님! 완소 은비 누님!" "내가 일등으로 싸인 받아야지!" 최가장이 던진 떡밥은 대단했다. 유저들은 사기가 드높다 못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마치 사악한 마법에 걸린 악의 군단 같구나. 수풀 속에 대기해 있던 블랙은 한국 유저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유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여봐라, 후손. 혹시 사악한 건 너의들 쪽이 아니나? -무슨 소리! 나쁜 건 저기 일본 놈들이야.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는걸? 진영이 잘 정돈된 것을 보니 군율이 엄하고 훈련이 잘된 것 같았다. 거기다 잔뜩 흥분한 이쪽에 비해 차분하기 그지없다.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기야. 저놈들은 남의 섬을 제 거 라고 우기는 놈들이라고. _흐음……. -더구나 놈들이 섬만 뺏고 말까? 나중엔 아르페디아 대륙까지 집어삼키러 올걸? 지금 유한은 그저 현실에 비춰 말했을 뿐이다. 허나 아르페디아를 노린다는 그의 말은 블랙의 마음을 바로잡기에 충분했다. -으음, 바다로부터 오는 침략자들이란 말이나? 그럼 절대 용서 할수없지! 때마침 공격을 준비하라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로이 보강된 신관들이 선두의 유저들에게 아낌없이 버프를 퍼부어 주었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며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궁수들은 미리 화살을 자신의 발 앞에 꽂아 두었고, 선두의 기사와 전사들은 창칼을 움켜쥐고 돌격 명령을 기다렸다. "전군 돌격하라!" "우와아아아!" 길드장 최강현의 명령에 한국 유저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했다. 성난 들소같이 돌진하는 그들의 기세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모래들이 날아오는군. 장창 부대 앞으로!" 오다의 명령에 긴 창을 든 창술가들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자 한국 진영 후방에서 날아온 마법과 화살들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일본 유저들은 당황하지 않고, 뒤에 있던 유저가 쓰러진 자의 빈자리를 메워 나갔다. 그리고 음양술사들이 주술을 외워 부상자를 치유하고 적의 마법을 중화시켰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후방의 궁술가들이 돌격하는 한국 유저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댔다. 수많은 한국 유저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그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발악하듯이 함성을 지르며 일본 진영을 향하여 달려갔다. "몽땅 다 죽여 없애!" "완소 은비 누님을 위하여!" 진정 버서커가 따로 없었다. 일본 진영 선두에 선 창술가들과 거세게 달려 들어온 한국 유저들이 격돌했다. 쿵! 과작! 양측 유저들이 충돌하며 방패와 창, 갑옷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먼저 밀리면 지는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잠시 팽팽하게 전투가 벌어지더니 일본 유저들이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에 힘을 얻은 한국 유저들이 더욱 강하게 밀고 들어 갔다. "이때다! 청색 깃발을 올려라!" 오다의 명령에 기수를 맡은 창술가가 청색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한국 진영에서 쏟아지던 화살과 마법 공격의 일부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크악! 어째서?" "빌어먹을 자식들아! 아군한테 쏘면 어떻게 해!" 지원 공격의 일부가 돌격하는 한국 유저들의 등 뒤로 떨어졌다. 일부였다고 하지만 한국 유저들은 크게 당황했다. 모든 신경을 앞에 있는 적에게 기율이고 있는 마당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으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최가장 소속의 마법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좀 전에 한국 유저의 등판에 희살을 날린 궁수 유저가 피식 웃었다. "아,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병신, 보고도 몰라? 지금 우린 배신 때린 거야, 배신!" "크아악! 이놈들 당장 다 죽여 버려!" 한국 진영 후방에서 말다틈이 시작되더니 곧 궁수와 마 법사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한국 측의 공격은 전후방을 통틀어 무뎌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서 일본 진영 후방의 사무라이들과 궁술가들이 측면으로 이동했다. "아니, 대체 어째서?" 카타케는 한국 측이 동족상잔을 벌이는 상황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마치 광전사가 된 듯 밀어붙였는데, 갑자기 내분이라니! 오다를 바라보자 그는 이 상황을 예상, 아니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에 한국 쪽 공략 사이트와 게임 카페들을 뒤지며 최가장과 경쟁 관계인 길드들을 조사했지. 그리고……." 오다는 그 길드장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최가장을 치는 데 협력해 주면 보상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네 길드원들의 부캐를 최가장의 지원병으로 보냈다. 그리고 미리 약조한 대로 청색 깃발이 올라오자 이반 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밀어붙여라! 한국 녀석들은 이제 모조리 전멸이다." 오다는 쓰러지는 한국 유저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상황은 작전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 측의 예봉은 꺾였고, 돌격해 온 기사와 전사들은 우왕좌왕 혼란에 빠졌다. 이제 측면에서의포위가 완성되면 독 안에 든 쥐처럼 한국 유저들을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크하하핫! 이제 이 섬은 우리 오와리 번의 것이 될 것 이다!" [아아,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갑자기 한국 유저들이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한 몸으로 뭉쳐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할 전투를 내분으로 망쳐 놓았습니다!] 중립 지역에서 이정민이 마이크에 침을 뒤겨 가며 고함을 질렀다. 사이버 캐릭터 미루도 옆에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가면 한국 측의 패배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았을까? 미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데, 이정민 씨. 저건 뭐죠?] [뭐 말입니까?] [저기 수풀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일본 유저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상황이 갑자기 돌변했다. 한국 진영의 뒤에 있던 수풀에서 거대한 존재가 일어나더니 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새, 새로 나온 거대 병기일까요?] [최가장이 이런 거대 병기를 보유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 데요.] 최근 들어 몇몇 길드와 대장장이들이 거대 병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가장에서 거대 병기를 만들었다는 말은 없었다. 미루와 이정민이 블랙의 정체에 대해 의논을 나누는 사이, 일본 유저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으악! 저게 뭐냐!” "괴, 괴물이다!" 블랙이 팔을 휘두르자 선두에 있던 칭술가들이 하늘로 날려 갔다.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오다와 여러 부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도대체?" 블랙은 손에 든 통나무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일본 진영을 짓이겨 나갔다. "감히 아르페디아를 침공하려 들다니! 한 놈도 용서치 않겠다!" "와아!" 블랙의 가세에 한국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자세한 정체는 몰랐지만, 지난 베레타-마노스 전쟁 때 쓰였던 거대 병기의 일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적이라면 몰라도 아군으로서 일본 진영을 다져 주는데 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이땝니다! 다시 밀어붙여요!" "전투는 이제부터라고!" 블랙과 함께 달려온 유한과 옌스가 유저들을 독려했다. 유한은 한국 측이 불리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한국 측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던 건 의외지만, 오히려 그런 위기 상황이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블랙의 막강할 위력을 선보일 기회가! "가자! 저게 우리 편이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하마터면 은비 누나 못 보는 줄 알았네." 한국 유저들은 모두 블랙의 뒤를 따르며 열심히 창칼을 휘둘렀다. 덕분에 일본 진영 중앙부는 완전히 짓밟혔고. 측면에서의 포위도 중단되었다. 잘못하다가는 부대가 양분될 판이기 때문이다. 반란도 진압되었는지, 한국 측의 혼란도 많이 가라앉았다. 애초에 이반을 획책한 녀석들은 숫자가 적은 데다 부캐라 레벨도 낮았다.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진압이 어렵진 않았다. 물론 그 '약간의 시간' 을 일본 측은 기회로 잡지 못했다. 다 저기 날뛰는 시커먼 괴물 때문이다. "막아! 저 괴물 딱지를 쓰러트려라!" 오다의 명령에 백여 명의 창술가와 사무라이들이 블랙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어딜 감히!" 쿵! 적군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자, 블랙은 크게 발을 굴렀다. - 충격에 빠졌습니다. 30초간 몸올 움직일 수 없습니다. 스턴 상태에 빠져 꼼짝달싹도 못하는 일본 유저들의 머리 위로 통나무가 날아들었다. 블랙은 마치 추수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 유저들을 사정없이 쓰러트렸다. 치고 밟고 날려 버리는 것이 완전 블랙의 독무대였다. "이것은 예상에 없던 것인데!" 오다는 한국 측에 저런 막강한 병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마치 양 떼에 뛰어든 사자처럼 보였다. 후소 대륙에도 덩치가 큰 나무 인형이나 쇠 인형이 있었지만, 저 정도의 위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모래 속에 차돌이 들어있었구나!' 그 차돌이 도자기 같은 일본 진영을 두들겨 부수고 있었다. 덕분에 계획했던 포위 섬멸전이 소용없게 되었다. 진영은 전방부터 빠르게 분쇄되고 있었고, 한국 유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전투를 난전 상태로 몰아갔다. 이렇게 되니 전세는 자연히 한국 쪽으로 기울어졌다. "저걸 쓰러트릴 방안이 없나?" 오다가 날뛰는 블랙을 바라보며 말하자, 카타케가 서둘러 방법을 제시했다. "음양사 나루토가 '그것’을 소환한다면……." 나루토는 후소 대륙의 음양사들 중에서도 소환 스킬이 1랭크에 이른 고수다. 그는 오와리 번의 음양사 전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음양사 나루토의 그것이 무엇임을 잘 아는 오다 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건안돼." "그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패배하고 밥니 다!" 패배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오다의 마음도 흔들렸다. 예상외의 전력이 나타났다지만,상대보다 3배나 많은 군세를 가지고도 지면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다. 후소 대륙의 경쟁자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다. '하긴, 진영도 다 깨져 버렸으니까.' 아군의 피해가 걱정되지만 일단 승리를 챙기는 것이 먼저다. 그리 생각한 오다는 카타캐의 방안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나루토에게 얼른 소환하라 이르도록." "크크크, 역시 강하다니까." 전투 지역에 달려온 유한은 연방 블랙의 곁을 맴돌았다. 그는 지금 기능창의 영상 녹화를 이용해 블랙의 활약을 동영상 파일로 저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장한 동영상을 공식 홈페이지나 공략 사이트에 올려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선전할 생각이다. 물론 목적은 원활한 판매를 위해서다. 그래서 유한은 블랙의 활약을 빼놓지 않고 담았다. 일본 유저들을 쓸어버리는 모습과 화살에 맞아도 고떡 없는 모습, 그리고 일본 측 음양사가 외뿔의 거대한 붉은 귀신을 소환하는 모습까지. "헉! 저 자식들 저런 게있었나?" 유한은 촬영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도깨비같이 생긴 녀석은 대체 무엇인지? 그는 몰랐지만, 저 도깨비는 후소 대륙의 '오니' 라는 소환귀였다. 일반적인 소환귀와 달리, 오니는 음양사의 레벨이 높을수록 덩치도 크고 전투력도 강해지는 '발전 형' 타입이었다. 지금 오니의 크기는 블랙보다 더 커 보였다. 아무튼 이 거대한 덩치의 오니가 소환되자, 근처에 있던 일본 유저들은 기겁을 하고 물리섰다. "도망쳐! 휘말리면 죽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창 전투 중에 저걸 불러내다니……." 강력한 힘을 가진 오니였지만,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적이건 아군이건 가리지 않고 쓸어버린다. 그만큼 녀석은 흉폭한 소환귀였다. "흥, 감히 잡귀 따위로 짐을 막겠다고?" 블랙은 들고 있던 통나무를 오니에게 던졌다. 오니는 날아오던 통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쳐 다른 곳으로 날려 보냈다. 덕분에 애꿎은 일본 유저 수십 명이 통나무에 얻어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헉, 엄청 세다!’ 유한이 보니 저 도깨비는 단순한 잡귀 같지 않았다. 힘도 센 데다가 블랙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체격도 좋았다. 거기다 뿔과 송곳니가 날카로운 면상은 무척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덕분에 정체는 몰라도 한국 유저들도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캬오오오오!" 오니가 괴성을 지르며 블랙에게 달려들었다. 블랙은 오니가 거세게 휘두르는 주먹올 쳐 내며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뒤이어 블랙의 펀치와 킥이 오니에게 연달아 쏟아졌다. "오오, 역시!" 유한은 쾌재를 불렀다. 힘과 덩치는 몰라도 싸움 실력은 블랙이 한 수 위였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현재 블랙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전설 속의 뇌제 테리칸이 아닌가.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답게 테리칸의 무예는 현란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니도 만만하지 않았다. 녀석은 얻어맞으면서도 어깨를 들이밀어 블랙을 밀었다. 기술이 안 되니 힘으로 상대하겠다는 심산. 쿠당탕! 뒤로 넘어진 블랙은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이놈, 감히 짐에게 흙먼지를 마시게 했겠다!" 오니가 달려들자, 블랙은 피하지 않고 녀석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곧장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뿌드득! 카카카캉! 블랙의 관절에서 위힘한 소리들이 연달아 들렸다. 유한은 저러다 블랙이 부서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한 수 위의 체격만큼이나 오니는 강해 보였다. 그런데 블랙이 오니에게 밀린다 싶던 바로 그때, "하앗! 카이저 소울(Kaiser SoulM)!" 기합을 토하는 블랙의 눈이 번득인다 싶더니, 그의 몸 에서 강렬한 황금빛 기운이 퍼져 나왔다. 테라칸 황제의 혼이 블랙 아이언에 깃들 때 보였던 바로 그 빛이었다. "크아아아아!" 강렬한 황금빛 기운에 오니의 몸이 녹아내렸다. 양초처럼 녹아내리던 오니는 황금빛 기운이 맴도는 블랙의 주먹을 맞고 완전히 소멸했다. "우와아이아!" "이럴수가!" 환호하는 한국 유저들과 반대로 일본 유저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나름 상황을 역전시켜 줄 거라 생각했던 존재가 저리 허무하게 당하고 말다니. "후퇴하라!전군 후퇴하라!" 최후의 카드조차 실패로 끝나자 오다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일본 유저들을 보며 한국 유저들은 연방 만세를 불렀다. 승리의 최대 공신인 블랙은 그들 가운데 서서 늠름한 자태를 마음껏 뽐냈다. "놀랍군. 놀라워." 중립 지역 뒤쪽의 숲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데보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방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설계한 블랙 아이언을 다른 이가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만도 했다. 카웬에게 지고 나서 몸을 피하고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수습을 못한 자료가 있었으니까. 타인이 자신의 분실물을 수거해서 제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블랙 아인언이 가진 힘이다. 지금 전장에 나타난 저 블랙 아이언은 자신이 만든 블랙 아이언들보다 배는 강력한 힘을 자랑했고, 깃들어 있는 혼령도 범상치 않았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했을까. 그것도 의문이지만, 데보라로서는 한 가지 더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다. "저 블랙 아이언의 주인이 신의 광물올 가지고 있다?" 데보라는 블랙 아이언의 이상 여부를 살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복장으로 보아하니 대장장이 같았다. 그 소년은 바로 유한이었다. 그녀가 유한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이유는 손에 들고 있는 운석 탐지기 때문이다. 인챈트 된 수정과 자석, 복잡한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이 탐지기는 고대 미케니아 마도사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데보라가 공중 요새에서 여러 가지 지식과 함께 홈쳐 낸 아티펙트 중의 하나였다. 손바닥만 한 탐지기는 근방에 운석이 있으면 작은 진동 과 함께 수정에 운석의 위치가 비춰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수정은 유한민을 계속 비추고 있었다. "계획을 바꿔야겠군." 원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섬을 빠져나가 신의 광물올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의 광물이 섬에 있다면 굳이 섬을 떠날 필요는 없다. 동면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300년 정도 뒤에야 운석이 하나 떨어질 것이란 계산이 나와서 그리 했던 것이 아닌가. 일단 목표는 신의 광물을 얻고 거기서 스타레이를 정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섬에 있는 유적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원하던 열망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데보라가 스타레이를 탈취하기 위해 나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수풀이 갈라지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누구냐!" 데보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상대가 일전에 자신을 적대시한 일본 수색대와 한편이 아닌가 의심했다. "후후후!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지." "무슨 소리냐?" 상대방의 느긋한 목소리에 왠지 데보라는 기분이 나빠 졌다. 마법 한 방이면 간단히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해 보였는데, 왠지 그를 거역해선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나가 뵈야 사기가 오른 유저들의 경험치만 채워 줄뿐이다. 나중에 충분히 준비해서 오너라." "건방진!" 데보라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목을 비틀어 버리려고 했다. 마법사 같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기나 방어구를 착용한 것도 아니다. 맨손으로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이익!" 필사적으로 육체에 명령을 내려 보았지만, 그녀의 몸은 전혀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걸 보았는지 상대는 피식 웃었다. "넌 절대 날 거역할 수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런 빛을 본 순간, 데보라는 자신의 적의가 눈 녹듯이 사라짐을 느꼈다. 자신의 마음까지 바꿔 버리는 절대적인 존재. 데보라는 그의 앞에서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돌렸다. 감히 겨룰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 서둘러서 좋을 건 없어.' 자신이 만든 블랙 아이언보다 강력한 블랙 아이언을 소유한 녀석이다. 정면 승부를 벌이려다가 자칫 낭패를 당하는 것은 이쪽일 터. 그녀는 일단 거리를 두며 틈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래야 사건이 더 재밌어지지." 데보라가 수풀 속으로 사라지자 사내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GM으로 분장한 손석진이었다. 참패를 당하고 후퇴한 일본 측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오다는 병력을 재편하고 새로 작전을 짜서 반격을 도모할 계획이었지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니. 왜 이리 많이 줄어든 거야?" 병력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게임이니 진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활 포인트에서 되살아난 유저들의 상당수가 복귀하지 않았다. 그나마 죽지 않고 생존한 유저들도 하나 둘 이탈하고 있었다. "우리 번은 이 싸움에서 빠질랍니다" 동맹 관계인 작은 번의 영주가 이탈을 선언하자 오다는 펄적 뛰었다. "뭐라고? 이유가 뭐요?" "뭐긴 뭐겠습니까. 오니도 못 쓰러트리는 괴물이랑 어떻게 싸웁니까?" 원인은 그것이었다. 블랙 때문에 상당수 일본 유저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상대가 블랙이 아닌, 평범한 블랙 아이언이었다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기가 꺽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블랙은 블랙 아이언의 탈을 쓴 테라칸 황제다. 그 자체의 무력도 대단하지만 생전 테라칸 황제가 구사하던 몇 가지 스킬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건 완전 괴물이잖아!" 몇몇 유저들이 '드림맥스가 한국에만 좋은 걸 줬다' 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단지 그뿐. 그 분노가 전의로 이어지 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런 상대와 싸우길 거부하고 있었다. "한심하긴! 강한 만큼 쓰러트릴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니?" 오다와 그의 부장인 카타케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아, 그러니까 뭘로 쓰러트리냐고요?" "이가 없으면 잇몸. 불타는 정신력으로……." "이게 무슨 태평양 전쟁이냐? 죽창으로 탱크에 돌격하게. 너 극우 히키코모리지?" 설득은 쉽지 않았다. 오다의 오와리 빈에 소속된 유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유저들이 이탈을 선언했다. 이 같은 그들의 태도에 오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절대로 이탈은 용납 못해! 우리 오와리 번을 배신하는 놈들에겐 절대 배를 내주지 마라!" 모두들 오와리 번의 배를 타고 이 섬에 왔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걸어서 바다를 건너갈 방법 같은 건 없다. 오다는 그리 생각하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멋대로 하슈. 아저씨. 배가 어디 오와리 번에만 있나." "뭐라고? 네놈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한국 진영으로." "커억!" 항복한다며 이탈하는 놈들을 보자니, 오다는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 번 깨진 항아리를 복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본 유저들은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고, 전투에서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카타케의 말에 오디는 남아 있는 자기 번의 유저을 살펴보았다. 오와리 번 유저들은 대다수가 그대로 남았다. 번의 영주를 배신하면 명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시스템 덕분에 이탈이 적었다. "이 인원으로 야전을 치루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일단은 성으로 돌아간다." 오다는 수성전으로 버티면서 본토의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은 후소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다이묘. 더 많은 중원군과 고래벨 유저들올 끌어올 재력은 충분 했다.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오와리 그룹’으로부터 자금 지원도 받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참패하여 오와리의 명성이 떨어지면 그 자금 지원은 위힘해진다. 그럼 게임은 물론이고 실생활에도 애로 사항이 꽃핀다. "서둘러라! 언제 한국 놈들이 올지 모른다!" 전투 종료 후, 개활지에 진을 친 최가장 길드는 배신자들의 색출에 나섰다. 한참 배신자들을 골라내고 있는데 또 다른 일이 생겼다. 갑자기 적진에서 투항병들이 몰려온 것이다. 간혹 한두명씩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떼로 항복해 오는 경우는 전무했다. 그래서 몰려오는 투항병을 선별하고 관리하느라, 일본측 본거지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늦춰지게 되었다. "저 녀석들 가짜로 항복하고 뒤통수치려는 거 아냐?" 옌스는 또 한 무리의 일본 유저들이 백기를 흔들며 오는 것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배신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죄다 박살내면 그만이지." 유한은 별문제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적을 압도하는 병기가 있는데, 그런 일을 왜 걱정한단 말인가. 물론 그 병기를 관리하는 것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유한은 블랙을 눕혀 놓고 각 부분을 세심하게 점검했다. 오니와 싸우면서 뭔가 고장이 나지 않았나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これが 馬巨人!" "すごい!" 뭔가 시끄럽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더니, 투항한 일본 유저들이 잔똑 몰려와 떠들고 있었다. 자신들올 패퇴시킨 존재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보인 모양. "저리 가! 다들 꺼져! 이건 일급 기밀 병기란 말이다!" 유한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일본 유저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물러나려는 이들은 적었고, 슬쩍 유한을 피해 블랙을 만져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눋이 감히 짐의 육체를!" 블랙이 일어나자 일본 유저들은 도망을 쳤다. 뒤늦게 달려온 최가장 길드원들은 남은 일본 유저들올 해산시키고 주변을 통제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길드원들을 이끌고 온 외국인이 유한에게 말을 건넸다. 백금발에 파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워터 워리어스(Water Warriors) 기사단장인 스코필드요." "아!" 유한도 스코필드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었다. 그는 꽤 유명한 외국인 유저였다. 의국 서버가 통합되기 전에 한국에서 게임을 시작해서 랭커 78순위에 오른 실력자였다. 한국에 사는 사람답게 한국어도 무척 유창했다. "어딘가 크게 고장 난 건 아니겠지요?" 아직 큰 싸음이 한 번 더 남아 있는 최가장 길드는 블랙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블랙이 소문의 골렘 병기들보다 작아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의 엄청난 활약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괜찮아요. 저도 염려되서 살펴봤지만, 그리 크게 고장 난 건 없더군요. 그저 관절에 톱니바퀴 몇 개가 어긋난 정도?" "다행이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스코필드가 은근한 투로 뭔가 말하려 하자 유한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래 이야긴 싸음을 끝내고 천천히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스코필드도 유한의 태도에 만족했다. 혹시 판매 의사가 없으면 어쩌나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 내일 전투가 끝난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유한이나 최가장이나 일단 서로의 의사를 안 것에서 끝냈다. 스코필드가 돌아가자 유한은 데보라의 은거지에서 노획한 블랙 아이언의 부품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짐마차도 소환해 짐칸에 든 고로에 불을 지폈다. "어이, 바츠. 지금뭐하는거야" 옌스가 다가와 물었다. 실은 블랙이 보기와 달리 크게 고장 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옌스의 우려와 달리 블랙의 상태가 심각해서 유한이 팔을 걷어붙인 건 아니었다. "내일 전투 좀 날로 먹어 보려고." "뭐어?" 유한의 계획을 모르는 옌스로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대체 바츠 녀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섬의 남쪽에 있는 일본 측 근거지는 방어가 매우 견고 했다. 성벽은 이중, 두꺼운 성문 앞에는 돌격을 저지할 목적 의 목책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거기다 중앙의 천수각과 망루들은 적진을 살피거나 활을 쏘기에 무척 유리해 보였다. "성도 잘 지었지만. 부지부터가 명당이네." 유한은 성이 자리 잡은 돌산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해안 가까이의 돌산은 성문이 위치한 북쪽을 제외하고 모든 곳이 높고 가파른 절벽이었다. 점령이 불가능하진 않지만,공격 측도 피해가 상당히 클 것 같았다. "공격하라! 돌격 부대 앞으로!" "발리스타 발사 준비!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전사와 기사 유저들이 방패와 사다리를 들고 성문으로 달려갔다. 용감히 달려드는 그들에게로 일본 유저들이 화살을 날렸고, 한국 진영에서도 엄호 사격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격! 공격!" 기사들이 방패로 회살을 막는 사이. 전사들은 성문에 도끼를 투척했다. 그러자 그들의 뒤를 따르던 도적 유저들이 날렵하게 내달리며 성문에 박힌 도끼를 밟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오, 작전 좋은데!" 유한은 성벽 위에 을라간 도적들이 암기를 던지며 성문을 장악하려 드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도적들 틈에는 닌자 유저들도 있었다. 기사들과 전사들 틈에도 창술가와 사무라이들이 섞여 공격에 힘을 보태 주었다. 바로 어제 최가장 측에 투항했던 일본 유저들이었다. "이 배신자놈들아!" 천수각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오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국 놈들에게 항복한 것도 모자라 아예 칼을 이쪽으로 겨눌줄이야. 강한 편에 붙어 손해 본 경험치와 아이템올 충당하자는 수작이겠지만 좀 너무하지 않는가. "성문 쪽에 병력을 집중시켜라! 어서!" 이미 전 병력이 성문이 있는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절벽이 있는 방향으로는 적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막아라! 절대 기어오르게 만들지 마라!" "이 자식들! 조국을 배신하니 좋냐?" "게임인데 좀 배신하면 어때?" 성문 앞에서 한 치와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 그사이 남쪽에선 시커면 녀석을 필두로 몇 명의 유저들 이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문제의 시커먼 녀석은 바로 블랙이었다. 무거운 쇳덩이가 능숙하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최가장 길드원들은 연방 탄성을 내뱉었다. "힘만 센 줄 알았는데, 저 정도까지 움직일 줄이야" 블랙은 지금 공개된 그 어떤 거대 병기들도 보여 주지 못한 민첩한 음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어!위험해!" 길드원 하나가 다급하게 외쳐 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북쪽 성벽 위에 갑자기 오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병력을 북쪽으로 돌리긴 했지만. 경계병까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급보를 듣고 달려은 음양사가 오니를 소환했고, 소환된 오니는 바위를 들어 블랙에게 떨어트렸다. "으라차차, 채석!" 블랙의 어깨에 타고 있던 유한은 떨어지는 바위를 노려 곡괭이를 휘둘렀다. 무모했지만 어차피 이판사판. - 대리석 1개를 얻었습니다. - 스킬 경험치를 55 얻었습니다. "앗싸! 성공!" 곡괭이에 맞은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떨어지는 바위를 그레인 스킬로 살펴보며 두들겨 부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기적적으로 성공시키고 말았다. "자식, 굿(Good)이다!" "오, 역시 파일런의 후예답구나." 같이 벼랑을 오르던 옌스와 블랙이 칭찬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한 유한은 자신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흥! 얼마든지 떨어트려 보라고!" 그런 유한의 마음에 응했는지, 오니는 좀 전보다 3배는 더 큰 바위를 손에 들었다. "크악! 그건 반칙이야! 스톱!" 유한이 악을 쓰건 말건 오니는 바위를 집어 던지기 위해 번적 치켜들었다. "우오오! 플라잉 롤링 대쉬!" 위기 상황에 옌스가 눈을 번쩍이며 대쉬 스킬을 가동했다. 공중제비를 돌면서 절벽을 단숨에 뛰어올라 간 옌스는 참마도를 휘둘러 오니의 얼굴을 베었다. "크아아악!" 얼굴이 크게 베인 오니는 뒤로 벌렁 자빠지며 바위를 떨어트렸다. "이놈이!" 경계병들이 옌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옌스가 대쉬를 쓰며 돌진한 순간, 그들의 몸은 양분되었다. 단숨에 경계병들을 베어 버린 옌스는 음양사 나루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은 건 너뿐이지?" 위기의 상황임에 불구하고 나루토는 침착했다. 그가 침착한 이유가 무엇인지 옌스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가 서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바위가 날아와 박혔다. 공격해 온 것은 좀 전에 쓰러트렸던 오니였다. 녀석은 자신의 일굴을 밴 옌스에게로 사납게 덤벼들었다. "흥 멍청이." 엔스는 덤벼드는 오니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돌덩이와 같던 오니의 주먹이 그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블랙이 녀석의 팔을 붙잡은 덕분이다. 녀석은 옌스에게 신경 쓰느라 블랙이 절벽을 다 기어오른지도 몰랐다. "잡귀 녀석, 당장사라지거라!" 블랙이 황금빛 기운이 맴도는 철권을 오니에게 날렸다. 뇌제의 기운이 깃든 강력한 철권은 일격에 오니를 소멸 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음양사 나루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어딜 가려고?" 유한이 도주하는 나루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루토가 손을 모아 수인을 맺으려 하자, 유한은 지체 없이 검을 날렸다. 음양사에 대해서 잘 몰라도, 상대가 섣부른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건 바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크윽!" 음양사는 마법사와 같이 근접 전투력이 빈약했다. 순식간에 목이 짤린 나루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절명했다. "자! 이제 우릴 막을 놈들은 없다!" 유한은 성문 쪽에 있는 최가장 길드원에게 '그것' 을 준비하도록 귓속말을 보냈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카타케가 천수각 위로 달려와 다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가 따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다 역시 모두 보고 있었다. 남쪽에서 절벽을 타고 적의 별동대, 그것도 개활지에서 날뛰었던 검은 쇳덩이가 들어와 날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다 북쪽 성문 앞에는 또 다른 녀석들이 출현했다. "큭! 하나뿐이 아니었단 말인가!" 오다는 성문 앞쪽의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블랙 아이언 두 기를 보고 좌절했다. 안 그래도 하나가 이미 성안에 들어와 날뛰는데 둘이 더 달려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근근이 버티던 성문은 단숨에 박살 날 것이고.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주군, 이제 어찌해야합니까?" 상황이 불리했지만, 카타케의 눈빛은 적의로 힐할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책으로 보았던 최후의 항전이니, 옥쇄니 하는 단어들! 떠올렸다. 그것이 시무라이다운 아름다운 최후라 여겼다. "백기 올려." "예? 무슨 그런 말씀을……." "항복하라고! 고작 무인도 하나 때문에 다 잃을 수는 없어!"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래야 번에 소속된 유저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여기서 고집을 부리다 번민들의 신망을 잃으면 본토에 있는 번을 유지할 수 없다. '본거지만 유지하면 재기는 얼마든지 가능해!' 승패병기상사(勝敗兵家常事). 오늘의 패배는 내일의 전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오다는 다음에 더 착실한 준비를 해서 다시 이 섬을 도모하기로 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천수각 꼭대기에 백기가 올라오자, 한국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성내에 들어와 블랙과 함께 날뛰고 있던 유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예상은 했지만, 이리 쉽게 낚여 줄 지는 몰랐다. "생각보다 심하게 주눅 든 모양이군." 뒤늦게 나타난 2대가 그냥 철판과 부품을 끼워 맞춘 껍데기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튼 싸움은 끝났다. 사상 첫 국가 길드전 겸 한일전은 한국 측 최가장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최고 공신은 대장장이 지그가 만든 블랙이었다. "대장장이 지그 만세!" "블랙 아이언 만세!" chapter 03 마녀 등장 마녀등장 무인도의 소유권을 둘러싼 전쟁이 끝났다. 섬의 이름은 최가장이 원한 대로 청해도로 정식 등재되었다. 패배한 오와리 번 유저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공지 창을 바라보았다. 섬 쟁탈전은 최가장 길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섬의 이름은 '청해도' 가 되었습니다. 이제 청해도에서 PK를 저지르면 제재를 받게 됩니다. 쟁탈전은 끝났지만, 상당수 일본 유저들이 청해도에 남았다. 청해도의 소유권을 가진 최가장은 그들을 축출하지 않았다. 한국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통행세를 받을 뿐, 섬에서 사냥을 하든 탐사를 하든 내버려 두었다. "젠장, 내가 이런 결과를 보려고 싸운 건 아닌데!" 일본 유저들은 죄다 쫓겨날 거라 생각한 옌스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유한은 최가장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길드전에는 막대한 돈과 아이템이 소모되고, 유저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더욱더 그렇다. "괜히 민족적인 감정을 앞세워 분란을 자초하면 제이, 제삼의 분정이 일어나. 그럴 때마다 적잖은 출혈을 감수 할 걸 생각하면 최가장에서 잘 처신히는 거지. 최대한 분란을 피하는 것이 섬의 지배권을 공고히 히는 데도 더 큰 도음이 되고." "아무튼 은비 누님 공연 안 해 주기만 해 봐라!" 길드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유저들이 아직 섬을 떠나지 않은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최가장이 떡밥으로 던진 아이돌 은비의 공연과 팬 사인회. 소문을 들었는지, 일본 유저들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일본에서 데뷔한 은비의 앨범이 불티나게 팔린 덕분이다. 유한은 상당수 투항병이 발생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정말 공연을 해 줄 건지는 직접 물어보면 알겠군." 유한은 최가장의 길드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단순한 맴버들이 아닌지. 그들 속에는 워터 워리어스 단장이라는 스코필드도 있었고, 길드장인 최강현도 끼여 있었다. 유한의 앞으로 걸어온 최강현은 호의적인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 "지그 님이시죠?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최강현은 지나칠 정도로 유한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늦게 인사드려 죄송하군요. 지그 님의 명성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정중하지만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멘트. 그러나 게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길드의 장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단지 그게 중요한 거래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귀하께서 보유하신 저 검둥이를 저희 길드에 팔지 않으시렵니까?" 최강현은 저쪽에 유저들에게 둘러싸인 블랙을 가리켰다. 놈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하긴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골렘류를 능가하는 막강파워에 절벽을 기어오를 정도로 뛰어난 움직임을 가졌는데,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 이다. 최강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블랙을 팔 수는 없었다. 블랙은 그야말로 사기 유닛. 다시 만든다 해도 저것과 똑같은 놈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저 녀석은 비매품입니다. 대신 제가 블랙 아이언을 또 만들면 제일 먼저 최가장에 팔겠습니다." "그럼 저걸 양산할 계획이란 말씀입니까?" "지그 철공소에서 한창 준비 중이랍니다." 유한의 대답에 최강현을 포함 최가장 길드의 수뇌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눈앞의 녀석과 같은 성능이라면 좋다. 하지만 양산품이 그리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가치가 뛰어난 아이템이나 무구일수록 똑같이 만드는게 얼마나 힘든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저 녀석을 파시면 안 됩니까?" "하하, 그건 곤란합니다. 저건 시제품이라 재료도 희귀 한 게 들어갔고 공정 또한……." "얼마를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우린 저 녀석을 반드시 사고 싶습니다." 아이템으로 치면 유니크, 아니 그 이상이다. 그간 최강현은 해양 진출에 내내 매달려 있었지만, 그도 베레타-마노스 간의 전쟁을 여러 동영상을 통해 지켜 보았다. 그 전쟁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인 것이 저런 거대 병기 였다. 그러나 대장장이 지그가 만든 저 블랙 아이언은 특별했다. 다른 거대 병기들보다 작음에도 힘은 더 강했고, 스피드와 기동성도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황금빛 기운을 뿜어내 소환귀를 소멸시키는 독특한 능력까지. '저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백만 골드든 이백만 골드든 부르는 대로 쳐줄 생각이었다. 길드가 보유한 액수로 모자라면 현질을 해서라도, 아니 직접 당사자를 오프라인에서 만나 현금으로 찔러 줄 용의도 있었다. 그리나 그런 제의를 해도 유한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안 판다니깐요. 저 녀석은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습니다." "섬을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것보단 파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어쭈, 이것 봐라?' 최강현은 지금 은근히 협박을 해 오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협박은 먹힐 만했다. 블랙이 이 섬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최가장이 보유한 범선이 있었기 때문. 만약 최가장에서 배를 내주지 않으면 블랙은 꼼짝없이 이 섬에 묶여 있어야 한다. 물론 싸워서 배를 빼앗을 수도 있지만, 유한은 항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했다. "섭섭하게 해 드리진 않겠습니다. 충분한 값을 치를 테니……." "뭐가 이리 시끄러워?" 최강현이 은근히 어르고 달래려 할 때 블랙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몇몇 유저들이 성가시게 굴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홈칫! 랭커인 최강현과 스코필드를 제외한 최가장 일동은 자신들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4m가 넘는 강철 거구와 번득이는 붉은 는빛은 평범한 사람의 기를 죽여 놓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 사람들이 널 좀 사고 싶어 하잖아." "나를 사겠다고?" 블랙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난 거절했는데 자꾸 조르는 거 있지? 저 사람들, 널 내 노예쯤으로 생긱하는 모양이야." 유한은 일부러 블랙의 속을 긁었다. 최강현이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블랙은 노예라는 단어에 발끈했는지, 육중한 다리를 들더니 크게 바닥을 굴렀다. 쿠웅! 땅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고, 주변 나무들의 이파리가 몽땅 떨어졌다. 엄청난 진동에 최가장 일동의 심장은 발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튀어 올라왔다. - 강력한 충격파를 맞았습니다.HP가 200떨어졌습니다. 30초 동안 스턴 상태 유지됩니다. 저렙이었다면 단숨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죽게 될 것 같았다. 블랙이 찍을 듯이 주먹을 치켜들었으니까. 랭커라도 과연 저 일격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이놈들이 감히 날 뮐로 보고 그따위 망동을!" 블랙은 정말 기분이 나빴다. 한때 대륙을 제패했던 뇌제였던 만큼 그의 영혼은 긍지와 자부심이 드높았다. 그런데 이 눈앞의 비리비리해 보이는 인간들이 감히 자신을 노예 취급하다니! 그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아니요! 오해입니다. 저희는 단지 당신을 닮은 양산형을 사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위기의 순간, 최강현이 총알같이 변명을 내뱉었다. 스턴이 걸려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다행히 입은 열렸다. 청해도에 있는 부하들을 동원하면 블랙 아이언과 저 대장장이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가 막심할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도 못할 터. 좋게 해결하자 마음먹은 최강현의 변명이 통했는지, 블랙이 치켜든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서로 간의 의사 전달에 문제가 있었을 뿐입니다." 최강현은 재빨리 유한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더 이상 조르지 않을 테니 원만하게 넘어가자고. '약삭빠른 녀석이군.' 유한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는 최강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르페디아 10대 길드의 하나라지만, 최가장 길드의 역사는 다른 거대 길드에 비해 짧다. 최강현이 랭커로 그 이름을 드날린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섬 쟁탈전 이후의 조치도 그렇고, 아무래도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인 듯했다. 이런 녀석과 완전히 등을 지게 되면 적장게 괴로올 터. 유한은 이 정도 선에서 그치고 화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었나 봐." "흠……." 블랙은 미심쩍인 눈빛으로 최강현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최가장 일동에게 유한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양산형 판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뉘 볼까요?" 그렇게 거래 이야기가 원만히 끝나자 유한은 은근술쩍 최강현에게 한 가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은비 씨랑 댁은 어떤 사이입니까?"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그 초절정 인기 아이돌 스타를 이곳에 불러온다 운운한단 말인가. 그것은 유한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유저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하는 이유라도?" "만약 당신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굉장히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근처에서 대화를 들었는지, 유저들이 잔똑 몰려와 있었다. 그들의 심상찮은 기세에 잠시 머뭇거리던 최강현은 사실을 실토했다. "그게 실은 은비는 내 여친……." 순간, 옌스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 유저들이 최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가장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 "이 색히 거짓말하지 마라!" "어디서 죽으려고 구라를!" "아무리 길드장이라도 은비 누님을 모욕하는 건 용서 못해!" 퍽퍽퍽퍽! 분노와 질투에 눈먼 이들은 그 누구도 진실을 믿어 주지 않았다. 아니, 진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크아악! 왜 이래? 사실이라니깐!" 그날 최가장 길드는 하마터면 해체될 뻔했다 이틀 후, 청해도에 천사가 강림했다. 최가장 길드에서 약속한 대로 아이돌 은비가 정말 나타난 것이다. 비록 게임 내 바드 캐릭터의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저들은 만족하고 또 열광했다. "여러분, 득템하시고 고렙되세요!" 섬의 개활지에 준비된 무대에서 은비가 라이브 공연을 시작하자, 섬에 있던 모든 남자 유저들이 개활지로 달려 왔다. "우왕! 은비 누나 알라뷰!" "好きです~!" 국적 불문하고 팬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여 주었다. 게임상의 이 라이브 공연으로 인해 최가장 길드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유저들의 눈을 확 뜨게 하는 동영상이 공식 홈페이지와 각 공략 사이트에 올라왔다. "폭풍 같은 스피드와 대지를 진동시키는 힘! 차세대 전장의 주인공은 이제 지그표 블랙 아이언입니다!" 동영상에서 아이돌 스타 은비가 블랙 아이언이라 불리는 강철 인형 병기의 위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광고를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게임 내의 뒷거래가 있었다. 유한은 최가장 길드에 판매할 블랙 아이언의 가격을 50% 깎아 주는 대신, 길드장과 연줄이 있는 은비의 광고 동영상 출현을 요쳥했다. 길드장 최강현은 난색을 보였지만, 블랙 아이언에 흥미를 보인 은비 쪽에서 흔쾌히 출연에 동의했다. 덕분에 유한은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인 은비를 섭외해 광고 동영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은비의 매니저가 안다면 펄펄 뛸 일이겠지만. 유한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굉장하다! 정말 굉장해!" 은비도 은비였지만, 유저들은 수십 수백의 적국을 날려 버리고, 거대 도깨비를 소멸시키고, 절벽까지 기어오르는 블랙 아이언의 성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광고 동영상을 본 유저들의 감평이 줄을 이었다. -빌리안:여려분, 허위 광고에 주의합시다. -막시무스:산다! 두 개 산다! -yam:저리 강한 건 다 내 귀여운 여친 덕분. -인민의별:빈익빈 부익부를 유발하는 게임은 반성하라! -라스트모히칸:지그 이 ㅅㅂ색히야! 채린도 집에서 문제의 동영상을 보았다. 이미 블랙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던 그녀는 블랙의 성능보다 아이돌 스타 은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창력은 몰라도 외모나 몸매에선 은비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채린이었다. 은비에게 악감정은 없다. 문제는 제작자랍시고 동영상에 같이 출연한 유한이었다. 아이돌에게 관심도 없다는 녀석이 은비를 보고 헬렐렐하고 있었다. 직접 보고 나니 마음이 달라진 것인지? 아무튼 유한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채린은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채린의 입이 주전자처럼 뛰어나올 쯤. 유한은 쏟아지는 쪽지를 보며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가격을 물어보고 있었고. 제법 이름있는 길드들도 판매를 요청해 왔다. 매입할 자금은 없는지, 길드전 때 잠깐 빌려 주면 안 되는지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 뭐 하는 거야! 볼일 다 마쳤으면 당장 돌아와! 지금 사람들이 철공소로 몰려와서 블랙 아이언을 만들어 달라고 난리란 말이야! 유한이 며칠 동안 섬에 뭉그적거리고 있자 철공소에 있는 리지스가 이런 쪽지를 보내 왔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나 유한은 바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돌아가는 즉시 조립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갈리에게 말해 블랙 아이언의 부품을 충분히 생산해 놓으라고 했다. 물론 추신으로 자신이 청해도에 남은 사정도 대강 밝혔다. '이 섬엔 데보라가 찾던 뭔가가 있어. 그걸 찾고 떠나야 해.' 뭔지 모르지만, 남의 손에 넘겼다간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것은 현재 유한이 가진 신의 광물과 연관이 있었다.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신의 광물을 정제한 스타레이가 필요하다고 했을까? 부지런히 섬을 돌아다니던 유한은 발걸음을 뚝 멈췄다. 천천히 그를 따라오던 블랙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근처에 적이나 몬스터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데 어째서? "왜 그러는 거냐? 뭔가 발견한 거냐?"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상하다니 뭐가?" 유한은 눈앞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봐. 저건 추운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침엽수야. 그리고 저건 열대 지방에 자생하는 바나나 나무고." "흐음……." 그 말을 듣고서야 블랙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전쟁한다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몰랐는데, 청해도에는 열대 지방에선 볼 수 없는 나무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실수일까. 아님 의도적으로 꾸며 놓은 걸까.' 유한은 게임사가 무슨 뜻으로 이래 놓았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일 확률은 적었다. 가상현실이라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첨단 기ㅏ술을 동원해 최대한 실감 나는 환경으로 꾸민 게임이 아닌가. 의도적이라면 왜 그렇게 했는지 조사를 해 봐야 한다. 수상한 것을 뒤지다 득템하는 게임이 바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이니까. '만약 버그라면 그것도 나름 땡잡은 거야.' 버그를 신고하는 유저에게는 드림맥스의 포상이 뒤따른다. 물론 실수한 관계자는 괴로울 테지만 유한이 알바 아니다. 유한은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섬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헉! 이봐, 후손! 저기 봐라, 바위가 움직인다!" "거북이잖아." 커다란 육지 거북이 느릿느릿하게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녀석은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숲 속에 핀 꽃을 따먹으며 배를 채웠다. 유한은 육지 거북을 뒤로하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섬의 동쪽 해안 지대에 이르렀다. 검은 바위로 된 해안에는 수많은 동물과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개중에는 레벨 165의 코모도 도마뱁도 있었다. 아르페디아 남부의 밀림과 해안 지역에 등장하는 놈들인데, 독니를 가진 포악한 선공 몬스터였다. "퀴이이이!" "조심해라, 후손! 이놈들 무척 강하다!" "아, 그럼 팔짱만 끼지 말고 도와주던가!" 유한은 공격해 오는 코모도 도마뱀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어찌나 비늘이 딱딱한지 검을 내려치니 맑은 쇳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그러나 놈은 '생물' 이 분명하기에 암 브레이크 같은 스킬은 통하지 않았다. "뒤져! 쇼크 웨이브!" 유한은 코모도 도마뱀을 두들기며 쇼크 웨이브 스킬을 썼다. 소리를 울릴 도구만 있으면 발동 가능한 공격 스킬 쇼크 웨이브. 끼이이이익! 귀를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소리가 퍼지자, 코모도 도마뱀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아마 귓속의 신경 조직이 파괴되어 방향감을 상실한 모양. 유한은 그 틈을 노려 녀석들의 비늘 안쪽이나 눈, 주둥이 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경험치 720을 얻었습니다. -코모도의 비늘을 얻었습니다. -레벨 160이 되었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헉헉, 에구 힘들어라." 5마리의 코모도 도마뱀을 쓰러트린 뒤에야 유한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블랙은 옆에서 팔짱을 낀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왜 도와주지 않은 거야?" "위험하면 도와주려고 했지. 그러나 잘 싸우더군." '이런 불량 가디언 같으니라고!' 잠시 투털거리던 유한은 다시 한 번 해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해안에는 유저들이 꽤 많았다. 최가장이 청해도를 완전히 장악하자,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적지 않은 유저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바위 해안 이곳저곳에서 사냥을 하거나, 귀여운 동물들을 먹이로 꾀어냈다. "이리 와, 이리 와." "아앙~ 너무 귀엽다!" 유한은 여성 유저들이 테이밍하고 있는 동물을 보았다. 하얗고 검은 뚱뚱한 몸통. 길쭉한 부리 앙증맞은 날개를 퍼덕이며 뒤뚱거리는 녀석은 바로 펭귄이었다. "아니, 펭귄이 어째서 더운 지방에!" 펭귄은 북극이나 남극 같은 추운 곳에 사는 녀석이 아닌가. 경악하는 유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누군가의 말소리가 뒤따랐다. "후훗, 뭘 모르는군. 펭귄은 더운데 살기도 한다고." 어느 틈에 따라왔는지, 뒤에 옌스가 서 있었다. 한 손엔 생선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서. "더운 데도 펭귄이 산다고?" "못 믿겠거든 로그아웃하고 갈라파고스 펭귄이라고 검색해 봐. 갈라파고스 퓅귄은 더운 데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버그는 아니란 뜻. "근데 너도 펭귄 테이밍하러 왔냐?" "그야 꽤 비싸게 거래되니까." "여자애 꼬시려고 잡으려는 건 아니고?" "……시꺼." 유한이 옌스를 무안 주고 있을 때, 블랙은 천천히 해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빛이 심각한 게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그러다 그는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알겠군. 이제야 알겠어. 왜 섬이 이모양인지!" "왜 이런지 알겠다고?" 유한이 다가와 물었다. 블랙은 자신 있는 투로 말했다. "이 섬에 알 수 없는 악의 세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놈들이 사술로 이 섬의 환경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 정의의 용사답게 말하는 블랙에게 유한은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봐라, 저것이 증거다. 저런 괴상한 키메라를 본 적이 있나?" 블랙이 가리키는 것은 이구아나였다. 징그러운 생김새와 달리 온순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은 물끄러미 블랙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죄가 있냐는 듯. "시아한테 펭귄 선물하면 좋아할까?" "이구아나를 선물해 보는 건 어때? 나름 귀여우니까." 유한과 옌스를 블랙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들의 냉정한 행동에 블랙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유한은 블랙이 펄펄 뛰건 말건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근처 수풀 속에서 데보라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동쪽 해안에서 펭귄을 테이밍하는 데 성공한 유한 일행은 남쪽의 요새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도 끝났고 펭귄도 손에 넣은 옌스는 더 이상 이 섬에서 볼 일이 없었다. 그는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유한은 녀석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남쪽 요새로 왔다. 청해도 남쪽의 요새는 원래 일본 요새였던 곳이다. 최가장이 접수한 뒤로 그 주변에는 시장과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매일 아르페디아와 후소 대륙으로 떠나려는 유저들이 이곳에서 배를 탔다. "블랙 녀석은 어디 간 거야?" "몰라,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악의 세력, 키메라를 운운할 때 무시했더니 단단히 삐져 버린 모양이다. 오면서부터 천천히 거리를 벌리더니 요새로 와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간 별난 놈이라니까. 양산품은 그렇게 만들지 마라." "나도 알아, 인마." 두 사람이 떠들면서 부두로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모두들 바다에 떠 있는, 아니 가라앉고 있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게 왜 저래?" "몰라요. 갑자기 꽝 하고 기울어지더니……." "아무튼 사람부터 구하고 봐!" 최가장 길드원들이 보트를 타고 선원들을 구조하러 갔다. 서두르긴 했지만, 모든 선원들을 구조하지는 못했다. 배 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선원 유저들은 부활 포인트에서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어째서 멀쩡한 배가 침몰한 거야?" 소식을 듣고 부두에 달려온 최강현은 펄펄 뛰었다. 배1척 만드는 데 들어간 돈과 재료, 시간이 얼마던가? 침몰한 배의 선장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갑자기 어뢰 같은게 물살을 가르며 와서 부딪쳤는데……." "어뢰? 판타지 게임에 어뢰가 왜 나오나?" "혹시 알아요? 다른 대륙에 비슷한 게 있는지." 아무튼 배가 가라앉은 덕분에 엔스를 비롯해 섬을 떠나 려던 유저들은 잠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최가장에선 서둘러 다른 배를 준비하였다. 그렇게 임시 정기선이 부두로 접근할 때였다. 뭔가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다가왔다. "벼, 변침하라!" 임시 정기선이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가까스로 피해 냈지만, 배를 스쳐 간 그것은 방향을 틀더니 다시 다가와 부딪쳤다. 쿵! 배가 크게 들썩이더니 한쪽이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 했다. "선창이 침수 중입니다!" "망할! 얼른 목수들 보내서 터진 곳을 막아!" 선장은 선원들을 향해 악을 썼다. 목수들은 부서진 부위를 수리하고, 선원들은 부지런히 물을 퍼냈다. 덕분에 임시 정기선은 가까스로 침몰은 면했다. 그러나 항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봤어? 또 똑같은 일이벌어졌어." 선착장에 모여 있는 유저들이 웅성거렸다. 좀 전의 사고도 그렇고, 지금 사고도 자연 재해가 아닌 걸로 보였다. "대채 이유가 뭐지?" "바다 몬스터의 소행이 아닐까?" 사고 원인을 찾는다고 골몰하던 사이, 또 사고가 터졌다. 이번엔 후소 대륙에서 오던 무역선이 피해를 입었다. 유저 30여 명이 긴급히 구원을 받았지만, 배에 실린 아이템을 건지지는 못했다. "사고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잠시 운항을 중단합니다." 최가장 길드의 이 같은 공고에 옌스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얼른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돌아가 팽권을 에이린에게 선물해주려고 했건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좀 전까지는 안 그랬잖아!" "섬에 주인이 생기고 나서 뭔가 바뀐 거겠지." 유한은 필필 뛰는 옌스를 다독였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도미노와 같다. 게임의 시나리오가 하나 시작되면, 그 뒤에 이어진 시나리오들이 등장하고, 관련된 설정들이 등장한다. 섬에 주인이 생기자 이를 노리는 몬스터나 다른 세력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놔, 드림맥스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네!" "니가 환장할 게 뭐 있냐? 배 잃은 최가장이나 아이템 날린 일본 유저들이라면 또 물라." 유한은 부두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어이, 바츠 어디가?" "확인해 불 게 있어서." 만약 배를 공격한 놈들이 유저가 아닌 몬스터나 NPC 라면? 유한의 머릿속에는 유력한 후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데보라가…….'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데보라가 실은 죽지 않았다면? 유한은 부활한 그녀가 섬에 들어온 유저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요새를 떠나 수직 동굴에 도착한 유한은 아래로 내려가 데보라의 은거지를 조사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달리 은거지는 아늑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데보라가 없다!' 그녀의 시신이 있던 자리는 물만 흥건할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그녀가 살아났거나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 일단 그녀의 흔적을 추적해야 했다. 유한이 다급히 수직 동굴을 빠져나오자 시커먼 얼굴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그 밑에 뭐가있어?" "헉! 놀랬잖아, 인마!" 얼굴의 주인은 옌스였다. 이 스토커 기질이 있는 녀석 이 어느 틈에 또 따라온 모양이다. "아, 미안. 근데 밑에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어?" "물라. 그보다……." 적당히 대꾸해 주려던 유한은 근처 풀숲이 바스락거리 는 것을 보고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몬스터일까, 아님 근방을 지나는 유저일까. 그것도 아니면 동굴에서 사라진 데보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유한은 시커먼 몸뚱이를 보고 맥을 탁풀었다. 블랙이었다. 뭘 하다 왔는지, 녀석의 몸뚱이는 기름 때로 번질번질 했다. "너였나?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녔던 거야?" 그러나 여전히 뼈진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블랙은 유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았다. '전설의 뇌제 테라칸이었다는 놈이 원 속이 이리 좁아?' 유한이 구시렁거리건 말건, 녀석은 유한을 밀치고 옌스 쪽으로 쿵쿵 걸어갔다. "왜? 나한테 볼일 있냐. 블랙?" 옌스를 노려보는 블랙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화를 내면 사방에 살기를 뻗치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녀석인데, 지금은 그냥 싸늘하기만 하다. 가만히 블랙을 살펴보던 유한이 무얼 발견했는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옌스, 얼른 피해!" "뭐?" "이 바보야 빨리 피하라니까!" 그러나 유한의 경고는 늦었다. 블랙이 번개같이 주먹을 후려치자. 옌스는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서 수직 동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랭커인 그라 해도 블랙이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진 이상 죽거나 빈사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이 자식이!" 유한의 강력한 암 브레이크에 블랙 아이언이 휘청했다. 유한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녀석의 관절 틈을 노려 암 브레이크를 연달아 날렸다. 그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놈은 블랙이 아니잖아!' 갑자기 나타난 블랙 아이언은 블랙이 아니었다. 생긴 게 비슷해 블랙인 줄 알았는데, 동작이라든지 분위기가달랐다. '제길, 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그가 연속으로 암 브래이크를 날릴 때 뒤에서 얼음장 같은 씨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구나,카웬의 후인(後A)." 말을 건넨 상대가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번개같이 돌아서며 검을 던진 유한의 눈에 아름답고 살벌한 마녀 데보라의 얼굴이 보였다. 아쉽게도 그가 던진 검은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한은 데보라의 수정 스태프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환한 빛이 쏟아진다 싶더니,이내 짙은 암흑이 그를 둘러쌌다. 안간힘을 써 봤지만, 유한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의식을 잃었다 chapter 04 상처받은 자 상처받은자 유한과 옌스가 남쪽 요새의 부두를 떠날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1척의 무역선이 당도했다. 그러나 배는 섬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한참을 지나도 배가 움직이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승객 한 명이 선장에 게다가와 항의했다. "왜 섬이 바로 코앞인데 배를 멈춘 거예요?" "죄송합니다. 길드의 지시라 어쩔 수 없습니다." 선장은 시아라는 궁수 소녀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섬에 정박하려는 배들마다 족족 사고가 나서,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입항을 금지하고 있다고. 선장 앞에서 물러난 채린은 선실로 와서 얀과 베르디에게 들은 걸 전했다. "그래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거예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까." "방법이 하나 있다면요?" 얀은 씩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일희용 기구였다. 찬드라 대륙에 없는 유용한 이동 아이템이라 사 둔 것인데, 정말 제대로 도움이 될 듯했다. "이야, 유현이 너 준비성 좋다." "아무렴요. 막무가내로 길을 떠나는 누구랑은 다르죠." 얀의 말에 안색이 굳은 채린이 일회용 기구를 움켜쥐었다. "막무가내로 길 떠나는 사람이 이 기구 찢어 볼까?" "미쳤어요?" "그래, 나 미쳤다.어쩔래?" 잠시 소란 끝에 채린 일행은 갑판에 올라 기구를 띄웠다. 정원이 남아 두 사람을 호의로 더 태운 그들은 남쪽 요새의 부두에 기구를 내렸다. "자, 이제 도착했으니 지그를 찾자." 채린이 청해도에 온 것은 유한을 찾기 위함이었다. 유한을 잡아 오라는 리지스의 부탁 때문은 아니다. 유한이 없으니 흥이 나지 않았다. 일상이 심심했다. 게임에서라도 그 바보의 얼굴을 보고 떠드는 즐거음으로 사는데, 녀석은 혼자 망망대해의 섬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그 섬에서 아이돌 은비를 만나 시시덕거렸다. "만나면 옆구리에 한 방 날려 줘야지." "그 전에 잠시 구경 좀 하는 건 어때요?" 베르디가 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르페디아 대륙과 다른 신기한 풍물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흠, 일본 쪽 대륙에서 온 아이템인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상당히 번화하네요." 시장에는 한국과 일본의 상인 유저들이 자리를 잡고 자기 대륙의 특산품들을 팔고 있었다. "플로나의 열매 팝니다. 아르페디아 최고의 영약입니 다. HP, MP, 스테미나 다 회복해 줍니다!" "후소 대륙 무구 팔아요. 아르페디아 거랑 교환도 해줍니다." "이 마법 스크롤만 있으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행운의 고양이 인형 단돈 오 골드에 팝니다." 단시간에 시장이 번화하게 된 것은 청해도에 있는 유저들의 왕성한 플레이 때문이다. 한국 유저 건 일본 유저 건, 길드전으로 상실한 경험치와 아이템을 만회한다고 바빴다. 그런 그들의 플레이를 지원하고,이윤을 얻기 위해 두 대륙의 상인 유저들이 물려든 것이다. "제기랄, 저리 비켜!" 시장 한구석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부활 포인트가 있는 곳이었는데, 덩치 큰 유저가 식식 거리며 사람들을 밀치고 나왔다. 그를 본 채린 일행은 깜짝 놀랐다. "어머, 저거 옌스 아냐!" "우리 형더러 바츠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녀석이요?" 얀도 옌스를 알고 있었다. 유한의 철공소에 눌러 박고 지낸 덕분이다. 그러나 알고만 있을 뿐 친하진 않다. 친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여친도 없는 바보 고릴라와 가까이 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바보 바이러스에 감염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여! 이게 누구야. 시아 누님이잖아?" 사람들을 밀치고 나오던 옌스는 채린을 보고 강아지처럼 달려왔다. 에이린이 같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지만, 슬프게도 에이린은 보이지 않았다. "잘 있었니, 옌스. 지그는 어디 있어?" "아! 지금 그 때문에 서두르는 중이우." 시무룩하던 옌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가디언 있잖수. 그 블랙이란 녀석. 우리가 좀 무시했다고 삐져서 공격을 해 오는 거야. 그래서 그만 동굴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수직 동굴 밑에서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돌무더 기가 쏟아져 그만 죽고 말았단다. "블랙 녀석. 바츠를 죽일지도 몰라. 아니,벌써 죽였는 지도 모르지." "바보야, 죽었으면 부활 포인트에 나타나야지." "뭐?" 얀의 말에 발끈한 옌스는 참마도를 손에 들었다. 당장이 라도 얀을 쪼갤 기세였지만, 채린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니잖아. 옌스, 너 지그에게 귓말 보내 봤어?" "좀 전에 보냈는데 응답을 하지 않던걸. 로그아웃 한 것 같진 않은데……." 채린은 일단 수직 동굴로 가 보기로 했다. 부랴부랴 도착한 수직 동굴의 입구에는 블랙 아이언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발자국과 유한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자국도 있었다. "이건 뭐지? 옌스, 네 발자국 아냐?" "내 발은 이렇게 작지 않다고." "여자 발자국 같은데요." 베르디의 말대로 여자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옌스는 사고 당시에 여자는 없었다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여기서 본인이란 유한을 가리킨다. 얀의 말에 옌스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비웃고 나섰다. "명청한 자식. 본인이 없는데 어떻게 물어본다는 거야?" "여기 없으면 찾아가면 되지." "뭐?" 너무나 침착한 얀의 응답에 옌스는 무안할 지경이었다. "잠깐 로그아웃 할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어." 게임에선 몰라도 현실에선 형의 위치를 알고 있다. 당장 로그아웃을 하고 캡술을 나온 얀, 아니 유현은 곧장 2층 유한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흑, 매우 짙은 암흑. 유한은 밑도 끝도 없는 그 공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긴 어디야?" 처음엔 데보라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망했다는 말이 들려오지도, 부활 포인트로 이동되지도 않았다. 아마 아직 죽지는 않은 듯. 한참을 헤매던 유한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팻말을 하나 발견했다. 팻말에는 ‘무의식의 방' 이라는 굵직한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설명이 쭉 이어졌다. 이곳은 당신의 내면 속의 공간입니다. 평소에 이곳에 올 방법은 없지만, 게임을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기절하면 일정 확률로 들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귓속말도 쪽지도 받거나 쓸 수 없습니다. 이 고요한 공간에서 잠시 사색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시기바랍니다. *게임 시간으로 3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깨어납니다 '컥! 세 시간이나!’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3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유한은 기겁을 했다. 당장 깨어나서 데보라와 사생결단 내도 부족할 판에 기절해 있어야 하다니.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거야.’ 유한은 출구를 찾아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그러나 빛의 주인공은 아까 봤던 팻말이었다. "아놔, 분명 똑바로 앞만 보고 걸었는데 이게 왜 나와?" 짜증이 확 치민 유한은 낮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뭔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니 누군가가 캡슐을 두들기고 있었다. '헉, 어머닌가?' 밤늦게까지 게임을 한다고 혼나는 건 아닌지. 유한은 얼른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 뚜껑을 열었다. 적벽가처럼 긴 잔소리를 각오했건만, 눈에 보이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이었다. "너였냐?" 유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이 형님의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다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긴 인마, 여기 있지." "그게 아니라 게임 속 어디 있냐고?" 유현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채린과 함께 청해도에 와서 형을 찾았지만,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더라는 것. 유한은 채린이 섬에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뻤지만, 이내 난색했다. 대답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글쎄, 나도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사방이 시커 멓고, 그나마 하나 있는 팻말에 무의식의 방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최 나갈 방법을 모르겠어." "아! 무의식의 방?" 유현이 뭔가 아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유한은 재빨리 물었다. "너 혹시 아냐?" "게임하면서 몇 번 가 봤어." 몇 번 가 봤다? 동생 성격에 시간을 꼭꼭 다 채우고 나오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그곳을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니 유현은 힌트를 가르쳐 주었다. "중요한 건 팻말의 마지막 문구야.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는 대목이 탈출 열쇠지." "그게 열쇠라고?" 유한은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갑자기 철학 수업도 아니고,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니. 유한은 좀 더 자세한 답을 원했지만, 유현은 짓궂은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무의식의 방에서 돌아오면 현재 위치를 가르쳐 줘. 우리가 찾아갈 테니까." '제길, 좀 친절히 가르쳐 주면 덧나기라도 하나?' 투덜거리던 유한은 일단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여전히 캐릭터 지그는 무의식의 방에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하면 이곳에서 꼬박 3시간을 채워야 할지 모른다.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고……." 팻말의 문구를 되씹으며 유한은 장고를 거듭했다. 실제로 사색에 잠겨 옛일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생각나는 것들은 다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악! 해도 안 되잖아!" 혹시 유현이 거짓말을 한 건아닐까. 그러나 동생이 불친절하지만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었다. 놈이 말한 힌트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힌트가 탈출의 열쇠라면 게임 시스템과 연관이 있을 터……. "아! 이제야 알겠군!" 뭔가 생각이 떠오른 유한은 기능창을 열어 '스크린샷 감상' 을 눌렀다. 그러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더니 그동안 대장장이 지그로 플레이하면서 찍어 놓았던 스크린샷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웨스트를 받고 랑켈산에 간 것부터 시작해, 데보라 던전의 숨겨진 보상방을 찾은 일, 푸른 새벽 길드와의 싸움, 학생 혁명 당시의 영광스런 순간등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블랙의 활약으로 무인도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둔 장면이 마지막으로 지나가자, 어둡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성공인가?' 눈부신 빛에 어지러음을 느끼던 유한은 눈을 꼭 감았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어두운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유한의 앞에 동료들의 귓속말이 쏟아졌다. -지그야, 지금 어디 있니? -바츠! 살아 있으면 응답을 해라! -브라더, 어디에요? 유한은 곧장 귓속말을 보냈다. -여기 동굴 이야. -동굴? 어디 있는 동굴인데? 채린이 금방 달려올 것처럼, 총알같이 대답했다. _위치는 나도 어딘지 모르겠어. -지도에 안 나와 있어? -지금 지도 없거든. 인벤토리가 털렸다. 그것도 동전 하나 남겨 두지 않고. '도대체 언놈이 내 인벤을 턴 거야?' 투덜거리던 유한은 동굴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자신의 가방과 소지품들을 보았다. 반색을 하며 가방을 향해 손을 내밀던 그는 따끔한 전격을 맛보곤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널 가둬 놓은 나의 마법이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용모에 차가운 눈빛을 가진 여인. 블랙 아이언과 함께 유한을 공격했던 마녀 데보라였다. 유한은 흠짓하며 허리춤에 손올 가져갔다. 그러나 손에 쥐어져야 할 검이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지, 좀 전에 던져 버렸지.' 정신을 잃기 전 데보라를 향해 다급하게 공격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물론 던지지 않았더라도 지금 상황이면 빼앗겼을 테지만. '그래도 아직 카드는 한 장 남아 있어.' 왼팔엔 아직 와이어 건틀렛이 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데보라와 싸우는 것은 무리. 자칫 이마저 빼앗길 수 있기에 유한은 괜히 건틀렛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데보라가 눈치를 채서 좋을 것은 없을 테니까. 일단은 기다렸다가 상대의 빈틈을 공격해야 한다. "부두에서 배를 침몰시킨 게 당신인가?" "내가 갖고 있던 수중 목인병을 이용했지." 그 어뢰 같은 것이 데보라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다 네놈이 배를 타고 떠나려 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섬을 따나려 한건 자신이 아니라 옌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배웅하러 갔을 뿐인데, 데보라가 오해하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입었다. "네놈에게 반드시 받아 내야 할 것이 있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을 서두를 수 있게 되었지.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데보라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허공이 갈라지면서 돌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건 내 운석이잖아!" "호호호, 이젠 내 것이다." 데보라가 연이어 스태프를 휘두르자 갈라진 공간의 틈 에서 실험 기구들과 제련 장비들, 그리고 작업용으로 보이는 목인병들이 나타났다. "설마! 스타레이를 제련할 셈인가?" "호오, 스타레이에 대해서 알고 있나? 하긴 알고 있으니 들고 다닌 거겠지." 데보라는 운석의 일부를 떼 내 목인병에게 건네주었다. 작업용 목인병이 운석을 가루로 만들어 바치자, 데보라는 그 가루를 광천수에 넣어 결정을 생성시켰다. 그리고 그 결정을 고로에 넣어 스타레이를 제련해 냈다. '귀련 누님과 작업 과정이 똑같다!' 설마 하던 유한은 데보라가 정말 스타레이를 제련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드워프들의 비전인데, 어떻게?" "드워프들의 비전을 강탈한 마도사들의 지식을 홈쳤지." 그 말에 유한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데보라가 미케니아의 지식을 홈쳐 갔다고 이바니우스 3세가 투덜거렸던 일이.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 "과연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구나. 네놈은 용사 카웬 과도 연관이 있겠지?" 유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팬히 입을 잘못 놀려 귀찮아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던지, 데보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완성된 스타레이에 있었다. 그녀는 식어서 반투명한 은빛으로 빛나는 스타레이를 감상하며 연방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 거지?" 질문을 던지던 유한은 데보라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난번 유치장에서 만났던 허진태의 눈빛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세상을 끝장낼 것이다." "이런 밥통!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유한은 데보라가 세상을 끝장내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게임인 세상. 어떻게 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보다 그가 궁금한 것은 스타레이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였다. 구센도르프가 가르쳐 주지 않아 도무지 용법을 알수 없었는데, 데보라에게서 혹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구체적인 걸 듣고 싶은 거냐? 난 이걸 이용해 점잖은 척, 깨끗한 척, 고귀한 척하는 쓰레기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세상은 내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에휴, 물은 내가 잘못이다.’ 고개를 가로젓던 유한은 데보라를 쏘아보았다. "기왕이면 잘난 척, 위대한 척, 상처받은 척하는 골동품도 없애 버리지?" 유한의 비아냥에 데보라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방금 전 그의 말은 데보라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걸 알았는지 데보라는 유한을 잡아먹을 듯이 살기를 뿜어냈다. 단순한 게임 내 비주얼일 뿐이지만, 유한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살기에 억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한은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세, 세상 너무 삐딱하게 보지 마라, 데보라, 불우했던만큼 세상에 증오를 가지는 건 당연해. 그건 나도 이해할수 있어. 하지만…… 크아악!" 유한은 말을 잇다 말고 바닥을 뒹굴었다. 데보라의 전격 마법이 그에게 작렬한 것이다. 어찌나 강력했던지, 온몸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HP도 많이 닳았다. -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쇼크로 20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젠장! 나도 알고 있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거리는 있었다. 무지막지한 전격 마법 덕분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마법이 사라진 점이다. "오호호홋! 어린놈이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이해를 한다고? 일기장 몇 장 홈쳐보고 남의 인생을 이해하겠다니, 네놈도 카웬이랑 다를 바가 없어." 데보라는 살기등등하게 다가와서 말을 이어 나갔다. "카웬 그놈도 그랬다. 나에 대한 소문 몇 조각을 듣고서 날 이해한다고 말했지. 그러면서 하는 짓은 매번 내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잘난 척하지 마라. 난 너 같은 위선자가 제일 역겹다." "그럼 스스로도 역겨우시겠군." 유한의 대꾸에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린 데보라는 하얀 전격이 맴도는 수정 스태프를 유한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법을 쏘는 것보다 유한이 말을 퍼붓는 것이 더 빨랐다. "데보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잘난 척하는 건 너도 똑같다. 네 주변만 보고 세상이 어떻다 함부로 재단하지마!" "닥쳐라!" 앙칼지게 고함쳤지만, 그녀의 스태프는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 HP가 바닥에 떨어진 유한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망설이면 죽음뿐이다. 오히려기세를 더욱 북돋았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네놈이 뭘 안다고……." "세상의 천대에 상처받고, 실연과 배신에 절망했겠지. 당신에게 남은 건 증오와 불신뿐 아닌가?" 유한은 천대나 실연의 아픔은 물라도 배신과 짓밟힌 약자의 아픔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의 비리를 폭로했단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선생들은(을이라고되있네요..) 물론 친구라 믿있던 녀석들까지 시험 답안 몇 개에 등을 돌렸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유한은 세상올 증오하고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유한은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했고, 광전사 바츠를 만들어 냈다. 독불장군 바츠는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혼자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도 때려잡았을 정도니까. 욕구의 분출을 느꼈고, 파괴의 쾌감을 즐겼다. 그러나 그뿐. 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 은 얻을 수 없었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증오와 불신이라는 벽에 막혀 한치 앞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바츠가 아니기에, 지그로서 다른 즐거움을 맛보고 있기에 유한은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이야야,데보라 당신은……." 드림맥스 본사 7층 게임 관리실. 이곳에서 드림맥스 직원들은 데보라와 대장장이 지그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녀 데보라라는 최고의 히든 피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느냐 마느냐가 이 일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죽여 버렷!" 부사장 정경욱은 불만스럽고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한 방만 때려도 저 지그란 녀석이 죽을 텐데, 데보라는 결정타를 날리지 않고 있었다. 얼른 지그를 쓰러트려야 데보라가 스타레이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아르페디아는 물론 온 게임 세상을 뒤흔들 것이고 유저들은 새로운 시나리오와 투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벌어지는 거라곤 말싸움뿐. 정경욱이 짜증내고 있는 것과 달리, 손석진은 흐뭇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 다음엔 뭐라고 할 텐가, 강유한 군!'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유한은 데보라 반응과 행동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체력이 바닥나 스쳐도 사망인 상태다. 상대의 감정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최대한 상황을 유리 하게 만들어야 한다. '할 수 있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어!' 말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믿었다. 데보라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기에, 상대의 기분이나 반응을 파악 할 수 있었다. "뭐라고 했느냐? 잘못 들었다. 다시 말해 보겠나?" "당신이 불쌍하다고." 말을 마친 동시에, 유한은 재빨리 옆으로 물러섰다. 역시 예상대로 데보라의 전격 마법이 떨어졌다.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있는 이를 데보라가 아닌 바츠라 여겼기 때문이다. 바츠 역시 그 상황에선 살수를 날렸을 테니까. 그리고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을 터. 유한은 재빨리 바닥을 뒹굴며 연이어 떨어지는 전격을 피해 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유한에겐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미꾸라지 같은 놈! 입만 살아서 제멋대로 나불대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어쩌나! 당신이 불쌍한 건 사실 인걸." 데보라의 공격이 멈췄다. 유한은 멈출 거라 예상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뭐라고 지낄이는지 입단 들어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유한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데보라 당신은 당신을 천대한 자들을 미워하지? 그들이 다스리고 만든 세상이 싫은 거지?" "그래, 그래서 뒤집어엎으려는 거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그들과 똑같으니까." "뭐라고?" 데보라는 '이놈이 뭔 소릴 하냐' 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인간들과 자신이 똑같다니. "출생 때문에 사람을 천대하고, 천대받았다고 세상에 증오심을 품고……. 달라 보여도 똑같아. 자기 기준과 감정만을 잣대로 해서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 "……!" "독같이 이기적이야. 난 그래서 당신이 불쌍하다는 거야, 데보라. 당신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대상과 다를바가 없으니까." 데보라는 입을 벌리고도 아무런 말을 못했다. 방금 전유한이 한 말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똑같다고?' 유한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데보라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들과 똑같아지지 마. 아픔을 안다면 남들이 상처 입을 짓을 하지 마." 증오로 세상을 흔들지 마라. 유한은 몰랐지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말을 손석진도 함께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증오가 남길 수 있는 건 증오뿐이야." 한 말을 다 했다. 유한은 개심까지는 아니지만, 데보라가 엉뚱한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설득이 통했는지 데보라는 수정 스태프의 끝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광기에 젖은 웃음을 내뱉었다. "오호호, 오호호호호훗!" '이, 이게 미쳤나?' 한참을 웃던 데보라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알겠다. 이제 알겠어. 날 이해한다 했던 카웬이 나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이유를……." 유한은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데보라의 스태프에 다시 전격이 맴돌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 이미 엇나간 나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 엇나간 가지는 자를 수밖에." 다음 순간. 데보라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스태프를 들이밀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잘려 나갈 내가 아니다!" 데보라의 스태프에서 강력한 전격이 터져 나왔다. 동굴 안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마법 공격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런 소리가 되냐고!' 유한은 자신의 말을 오해한 데보라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살기 위해서 피하고 볼 일이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우뚝 멈추어 섰다. "블랙!" 유한은 다급히 불량 가디언을 찾았다. 자시을 무시했다고 삐져서 어디론가 가 버린 블랙. 녀석이 지금 동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큰 몸집으로 어찌나 살금살금 접근하는지 데보라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 유한은 방금 전에야 비로소 녀석이 온 것을 알았다. "카이저 실드(Kaiser Shield)!" 번개같이 튀어나온 블랙은 황금빛 기운을 모아 방패로 만들었다. 블랙이 데보라의 전격 공격을 막아 내자, 유한은 그의 다리 사이로 뛰어나가며 컨틀렛의 와이어를 날렸다. 쉬이익ㅡ!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데보라의 손을 후려쳐 수정 스태프를 떨어트렸다. "이게 끝은 아니지!" 유한은 왼팔을 휘둘러 와이어의 궤적을 바꾸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춤을 추던 와이어는 뱀처럼 데보라의 목을 휘감았다. "끄으윽!" 숨통이 막히는지 데보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스 급 몬스터인 마녀 데보라. 그녀의 주특기는 마법과 인형 병기 소환이다. 그녀에게 수정 스태프가 쥐어져 있다면, 목이 막히지 않아 주문을 원 없이 외울 수 있었다면, 블랙이 가세했다 한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보라는 방심하다 블랙에게 공격이 가로막혔고, 당황하는 틈을 노린 유한에 의해 마법을 봉쇄당했다. "이, 이놈이!" 데보라는 자신의 목을 휘감은 와이어를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강철 와이어는 살 속에 단단히 파고든 상태였고, 연약한 마법사의 힘으로는 와이어를 끊어 낼 수 없었다. 데보라의 얼굴이 벌겋다 못해 터지려고 했다. 그 모습에 유한은 흠칫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데보라가 아닌 자신이 죽을 것이니까. '엇나간 가지도 태양을 보고 꽃을 피울 수 있을 텐데.' 허나 빛을 거부한 데보라는 마지막까지 증오를 선택했다. 결국 유한은 엇나간 가지를 잘라 냈다. 데보라의 눈자위가 뒤집어지고, 그녀의 HP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던 데보라의 몸이 쓰러졌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 유한의 눈앞에 승리를 알리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 마녀 데보라를 쓰러트렸습니다. - 경험치 8,000을 얻었습니다. - 스타레이를 얻었습니다. "거 봐라. 내가 뭐랬나? 악의 세력이 있다고 했잖아." 유한이 안내창을 지우자, 블랙이 다가와 우쭐거렸다. 그는 뭐라고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나름 사실이었고, 이 녀석 덕분에 막판 위기를 넘기고 역전을 이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따질 건 따져야 했다. "어딜 갔았어, 이 깡통!" "무엄하다! 감히 짐에게 발길질을 하다니!" 사실 블랙은 멀리 가지 않았단다. 보이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너 그럼 내가 납치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거야!" "악의 세력의 존재를 네가 실감하기를 바랐다." '아놔, 뭐 이런 게 다 있냐?' 유니크고 뭐고 해체해 버릴까. 유한은 간신히 그런 욕구를 참아 내고는, 가방과 아이템들을 회수했다. 물론 데보라가 떨어트린 스타레이를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라, 이게 왜 저러지?" "뭔데 그러냐?" 유한은 스타레이를 줍다가 데보라의 시신이 급격히 말라 가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비쩍 마른다 싶더니, 딱딱하게 마른 가죽이 부서지고 양상한 백골이 드러났다. 그것은 팔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번쩍! 눈알이 빠진 검은 해골에서 요사스런 푸른빛이 번득였다. "물러서라, 후손! 마녀의 사술이다!" 블랙이 말하지 않아도 유한은 허겁지겁 물러나고 있었다. 앙상한 백골이 천천히 일어났다. 불그스름한 빛을 띤 수정 스태프를 집어 든 데보라의 이름이 바뀌었다. '마녀 데보라' 에서 '리치 데보라' 로. "리치? 아니 어떻게 리치 상태로?" 유한은 현재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때 주문 하나 내뱉지 못하고 죽었던 데보라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로 리치가 되었던 말인가. "크크크, 그게 다 미케니아 놈들 덕분이지." 리치가 되어 그런지 데보라의 목소리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쇠에 쇠를 긁듯 듣기 거북했다. 그런데 미케니아 덕분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죽음을 두려워 한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육신이 사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리치가 되는 마법을 만들어 냈다." 미케니아의 지식을 훔치면서 그 마법도 알게 된 모양이다. 데보라의 설명이 뒤이어졌다. "피가 식으면 몸에 새긴 마법진이 자동으로 발동하지. 간편하긴 하지만 심각한 약점이 있어서 놈들은 저희가 만들어 놓고도 사용하지 않았다." "저기…… 그 약점이 뭔데?" 유한은 스스로 멍청하다 여기면서도 한 번 물어보았다. 그러나 게임 설정상, 리치가 된 사정은 이야기해 줘도 약점을 비밀로 하는 모양이다. 데보라는 유한의 물음에 답하기는 커녕 이를 갈며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날 이런 흉물로 만들었겠다! 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겠다.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아니,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만든 놈들은 쓰지 않는 마법을 사용한 사람 잘못이 아닌가. 그러나 증오에 휩싸인 데보라는 그것을 몰랐다. 모든것이 세상 탓이라 생각했고, 눈앞에 있는 대장장이 놈 때문이라 여겼다. 리치가 되면서 그런 증오심은 더욱더 짙어졌다. 데보라는 수정 스태프를 거세게 휘둘렀다. "나와라, 나의 군단이여!" 공간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스톤 골렘과 리빙아머, 여러 종류의 목인병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쏟아지는 인형 군단을 보며 유한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쉽게 죽더라 했지." 데보라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NPC.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여도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 덤빌 줄은 몰랐다. '뭐, 한 번 더 싸우라면 싸워야지.' 물러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최강의 가디언과 함께 잇지 않은가. 게다가 포션을 마셔 체력도 회복해 놓았다. 유한은 인벤에서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돌진해오는 목인병들에게 덤벼들었다. chapter 05 헤븐즈 게이트 헤븐즈 게이트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채린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동굴에 있다는 귓속말을 받고 근방에 있는 동굴들을 죄다 뒤졌지만, 유한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그야, 어디 있는 거야? 대답 좀 해! 채린은 계속 귓속말을 보냈지만 일절 응답이 없었다. 유한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한창 데보라와 논쟁을 벌이느라 채린이 보내 온 귓속말을 보지 못했는데, 이 같은 사정을 채린과 다른 동료들이 알 길은 없었다. "누나,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얀이 그만두자고 했다. 형 찾는다고 아까운 시간 다날기리보단 섬부터 둘러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그가 죽으면 어떡해?" "그럼 부활 포인트에서 만나면 되지, 뭐." 오히려 그 편이 덜 번거롭고 좋을 것 같았다. "혹시 캡슐 안에서 디비자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밤이잖아." 옌스의 말에 얀은 고개를 저었다. 캡슐 안에서 수면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아무 이상 없는데 꼼짝도 안 하는 캐릭터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러나 얀은 형을 잟 안다. 유한은 게임을 하다 졸 인간이 절대 아니다. 할 거 다 하고 나중에 졸면 졸았지. 하지만 정말 졸고 있다면? 일단 확인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제가 다시 한 번 가 보고 올게요." 얀이 로그아웃을 하려 들 때였다. 앞쪽 수풀 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모두 무기를 뽑아 들었다. 몬스터라고 생각했지만, 튀어나온 것은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도와주십쇼, 지금 저쪽에서 제 일행이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받고있습니다." 유저인가 했는데 NPC였다. 최가장 섬을 장악하니 NPC들이 하나 둘 유저를 따라 들어온 모양이다. "일행이라고요?" "급합니다. 얼른요." NPC 남자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행은 채린을 필두로 NPC의 뒤를 쫓아갔다. "언니, 브라더는 포기한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위험한 사람부터 도와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브라더가 더 위험하면 어쩌죠?" 생각해 보면, 귓속말에 응답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중이라거나, 아님 전투 중이라거나. "그땐 팔자려니 해야지, 뭐." 그래도 쉽게 죽거나 당하진 않을 것이다. 채린이 아는 유한, 아니 지그는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플레이를 하는 녀석이니까. "여깁니다. 이 넝쿨에 가려진 동굴 속이예요." NPC 남자가 넝쿨을 헤집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러 이런 동굴 속으로 들어간 걸까? 혹시 NPC 모험가? 아님 탐험대? 동굴 안쪽에서는 기괴한 소음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뭔가 크게 부서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도대체 뭐랑 싸우기에……." 채린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안내해 온 NPC 남자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꺄악! 유, 유령?" "설마요!" "이미 죽었는데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거나……." "참 감동적인 스토리네. 대단한 NPC고." 주위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옌스는 인상을 쓴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사라진 NPC의 이름이 왠지 걸렸기 때문이다. '카웬이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낯이 익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안쪽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다. 다들 무기를 고쳐 잡고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제 끝장이다. 카웬의 후인!" 날카롭게 회전하는 바람의 칼날. 어째 데보라는 리치가 되더니 마법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이크!' 장작 패기와 벌목으로 목인병들을 박살내고 있던 유한은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근처에 있던 수십 기의 목인병들이 거대한 윈드 커터에 맞아 두 동강이 났다. "고맙군, 부하들을 없애 줘서." "캬악! 건방을 떠는 것도 거기까지다!" 데보라가 발악을 하자 이공간이 열리며 다시 목인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만들어 놓았으면 끝도 없이 나오는 걸까? 그러나 절반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스톤 골렘의 잔해가 날아와 아공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스톤 골렘을 박살 내서 집어던진 이는 다름이 아닌 블랙이었다. 블랙이 소환을 방해하자 리치 데보라는 펄쩍 뛰었다. "이런 괘씸한 것! 내 손에 설계된 주제에 감히 나를 거역해?" "닥쳐라, 마녀. 뇌제 데라칸의 이름으로 너와 네 졸개들을 멸하여 주겠다!" 블랙은 남은 골렘의 잔해를 데보라에게 집어 던졌다.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잔해에 맞은 데보라의 해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해골들은 이내 되돌아와 원래의 형상으로 뭉쳤다. 재생되는 데보라를 보며 블랙은 분통을 터트렸다. "에잇! 이래서 리치란 것들은 성가시다니깐!" 블랙은 재차 공격을 하려 했지만, 자신과 똑같은 녀석들의 방해를 받았다. 바로 데보라의 블랙 아이언들이었다. "이놈들! 저리 꺼지지 못하겠느냐?" 지능이나 힘, 스피드 모든 면에서 블랙이 우월했지만, 한 손이 여러 손을 당해 내지 못하는 법이다. 뿌리쳐도 엉겨 붙고 매달리는 통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블랙이 동족(?)들에게 잡힌 사이, 그를 상대하던 스톤 골렘이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스톤 골렘들이 돌주먹을 내리치고, 발로 밟아 대는 통에 유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레인 스킬로 보고 반격이라도 할라 치면 때 맞춰 데보라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매직 미사일!" "아낙! 들겠네!" 매직 미사일은 간단한 공격 마법이었지만, 데보라 같은 거물이 사용하자 양상이 또 틀렸다. 일격에 바위를 박살내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수십 개씩 쏟아지는 매직 미사일은 그야말로 융단폭격 수준. 유한은 스톤 골렘들의 다리 시이로 열심히 피해 도망 다녔지만, 끈질기게 추적하는 매직 미사일들을 모두 뿌리 칠수는 없었다. 그가 잠시 스톤 골렘에 신경을 쓰는 사이 데보라가 날린 매직 미사일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젠장, 끝인가?' 절망이 엄습해 온 그 순간, 둥 뒤에서 돌과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애로우 레인!" "석(石)! 산(散)!" 꽈꽈꽈꽝! 무섭게 쏟아진 화살과 돌들이 매직 미사일들과 부딪쳐 깡그리 없애 버렸다. 방해자들의 출현에 데보라의 눈빛이 회번득거렸다. "어떤 놈들이냐? 여길 어떻게 알고?" 그러나 방해자들의 시선은 데보라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간신히 살아난 유한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너였어? 안에서 씨운다는 일행이?" "채린이 너 어떻게 알고 여길……." 그러나 제대로 대화를 나눌 틈은 없었다. 스톤 골렘들이 무섭게 유한과 채린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자세한 이야기는 깡그리 쓸어버린 뒤에 하자고!" "동감." 옌스가 대쉬 스킬을 쓰며 튀어나갔다. 얀도 지지 않고 고속발검 스킬로 스톤 골렘과 목인병 무리들을 베어 버렸다. "이이…… 나선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이공간에서 수백 대의 목인병과 리빙아머, 스켈렉톤들이 쏟아져 나왔다. 레벨이 낮은 놈들이라도 쪽수로 밀어 붙여 덤벼드니 이만저만 성가신 게 아니었다. 거기다 데보라가 엄청난 위력의 공격 마법을 연방 떨어 트려 대기까지. 기세 좋게 나섰던 채린 일행도 상대의 엄청난 공세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저 해골딱지는 뭐야?" 채린의 물음에 유한과 블랙이 동시에 대답했다. "리치 데보라!" "이 섬에 있는 악의 세력이다!" 얀과 베르디는 몰랐지만, 채린과 옌스는 곧장 반응을 보였다. 데보라와 관련된 던전을 탐험해 봤고, 그녀가 만든 몬스터들과 싸워봤으니까. 옛 기억을 떠올리던 채린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서,설마 그게 나타나진 않겠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 법. 소환된 인형 군단이 절반 정도 쓰러지자, 데보라가 다시 스태프를 휘두르며 몬스터를 소환하려 했다. "나와라, 메두…… 컥!" 막 주문을 끝내려는 순간, 데보라의 턱뼈가 날아갔다. 유한이 다급하게 망치를 던진 덕분이었다. "헉, 큰일 날 뻔했다." 유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난전 상태에서 메두사가 등장하면 끝장이다. 메두사는 면상으로 유저를 제압하는 몬스터. 메두사의 악명을 전혀 모를 동생 커플이 맞닥뜨리게 되면 뒷 상황은 안 봐도 DVD 다. "캬악! 이 지겨운 대장장이 놈! 지옥으로 떨어트려 주마!" 어느새 턱뼈가 돌아왔는지. 데보라가 유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그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욕을 할틈에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지옥엔 너나 가라, 데보라!" "크윽, 네놈은 또 뭐냐!" 옌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데보라의 해골을 부셨다. 연이어 참마도를 휘둘러 스태프를 쥐고 있는 손뼈도 박살냈다. 옌스는 절대 데보라가 주문을 외울 틈을 주지 않았다. 틈을 주게 되면 분명 메두사를 불러낼 테니까. 리치가 되었지만 데보라는 여전히 근접 전투 능력이 약했다. 몬스터들이 데보라의 구원에 나섰지만, 유한과 얀에게 저지당했다. "훗, 이제 조금만 더 공격하면 죽겠군." 옌스는 데보라의 뼈를 부수다 못해 아예 가루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처치했다 싶은 순간, 땅에 떨어진 수정 스태프가 희미하게 번득였다. 그러자 부서진 뼛조각들이 무서운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거의 다 닳은 HP도 100% 회복되었다. "아악, 이런 게 어딨어! 이건 사기야!" 옌스가 머리를 싸매며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 아직 리치하곤 안 싸워 봤군.' 유한은 바츠 시절에 리치와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브로딘 왕국 서쪽의 던전에서 만난 리치는 레벨도 높고, 마법 공격력도 상당했다. 질리는 건 몇 번이고 되살아 난다는 점이다. 결국 약점을 알아내서 물리치긴 했지만. '라이프 베슬(Life Vessel)을 찾아야 해.' 라이프 베슬은 리치의 생명력이 담겨진 아이템. 바츠 때도 리치와 전투를 회피하고 라이프 베슬을 찾아 파괴함으로써 놈을 쓰러트렸다. 데보라도 리치가 되었으니 라이프 베슬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보통 리치가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자신의 라이프 베슬을 숨기는 일이니까. 그러나 데보라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리치가 되고 나서 곧장 덤벼들기만 했다. '도대체 라이프 베슬을 어디다 숨겨 놨지?' "나와라, 메두사!" "헉, 제길!" 유한이 생각에 빠진 사이, 데보라가 재빨리 소환 마법을 외쳤다. 방해 받을 것이 두려웠던지 주문 외는 속도가 보통 때보다 3배 정도 더 빨랐다. 공간이 갈라지더니. 메두사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런!큰일났다!' 유한의 가슴이 철렁하는 그 순간, 블랙이 갈라진 공간 앞을 가로막아 섰다. 메두사들이 나가려고 악을 썼지만, 블랙은 비켜 주지 않았다. "내가 사수하겠다! 너희는 어서 저 마녀를 쓰러트리라!" "장하다. 블랙!" 블랙이 막아 주는 사이, 얀과 옌스가 다시 데보라에게 덤벼들었다. 채린과 베르디는 두 사람이 마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목인병과 골렘들을 견제했다. 그사이 유한은 데보라의 라이프 베슬을 찾았다. '분명 리치니까 라이프 베슬이 있을 거야. 그것도 이 동굴 안 어딘가에…….’ 유한은 데보라가 리치가 된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생성된 직후에 이런 말을 했었다. 미케니아 마도사 들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리치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그 치명적인 약점이란 무엇일까? 데보라를 자세히 살피던 유한의 눈에 수정 스태프가 들어왔다. 수정 스태프는 연방 붉은 빛이 맴돌고 있었다. 데보라가 살아 있을 때와 상태가 달랐다. 그렇다면? "그거다! 수정 스태프를 공격해!" "뭐?" 동료들은 유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리치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도 드문 몬스터이다 보니 리치와 싸워 본 경험이 전무했던 탓. 그러나 치를 떠는 데보라의 반응을 보고, 수정 스태프가 데보라의 약점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망할 대장장이 녀석이!" 리치가 되면서 빠져나간 데보라의 생명력은 마력이 강한 수정 스태프에 모여들었다. 수정 스태프가 바로 라이프 베슬이 된 것. 치명적인 약점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라이프 베슬이 가까이에 생성되는 것. "이잇, 물러서라! 플래시(Flash)!" "크웃!" 모두의 공격이 수정 스태프에 집중되자, 당황한 데보라는 섬광 마법을 터트리며 도망쳤다. 분하지만 일단은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라이프 베슬을 안전한 곳에 숨기기만 하면…….' 자신은 죽을 염려가 없다. 그러나 데보라의 앞길을 유한이 가로막았다. 섬광 마법 범위 밖에 있다가 달려든 것이다. 데보라는 황급히 마법을 쏘려 했지만, 유한이 건틀렛 와이어를 쏜 것이 더 빨랐다. 빠악!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수정 스태프를 때렸다. 거미줄 같은 금이 생긴 수정은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안에 모여 있던 데보라의 생명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캬아아악! 안 돼ㅡㅡ에!" 처절한 비명과 함께 데보라의 몸이 모래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길고 힘들었던 씨움은 거기서 끝났다. - 리치 데보라를 쓰러트렸습니다. - 경험치 12,000을 얻었습니다. - 데보라의 지도를 얻었습니다. 데보라가 모래로 산화한 뒤, 어김없이 성과를 알리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리치 데보라의 경힘치는 마녀 데보라였을 때보다 더 많았다. 덕분에 레벨 업을 알리는 안내창도 연이어 떴다. _ 레벨 163 이되었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그사이 레벨이 많이 올랐군.' 리치 데보라가 불러낸 인형 군단을 쓰러트리면서 경험치를 꽤 얻었던 모양이다. 싸우느라 정신없어서 이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런데 아이템 드랍은 왜 이리 짠거야?' 유한은 데보라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데보라 정도의 거물이면 유니크 아이템을 여럿 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준 것이리곤 딸랑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도 하나. [데보라의지도] 설명 : 마녀 데보라가 제작한 섬의 지도. 지도에 표기된 곳에 가면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있을지도? 있다는 거냐, 아님 없다는 거냐?' 유한은 불성실한 지도의 설명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사실 데보라는 돈과 아이템을 넉넉히 주고 갔다. 동굴 바닥 곳곳에 떨어진 아이템과 돈들이 바로 그 증거다. 데보라의 부하 몬스터들이 떨어트린 것이긴 하지만, 어차피 피차일반. 유한은 아이템을 쓸어 담고 있는 동료을 바라보다 불쑥 말을 건넸다. "너희들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브라더의 일행이라는 NPC가 가르쳐 줬어요." "근데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유령처럼 사라졌어. 혹시 전투 중에 NPC 동료가 죽기라도 했어?" 동생 커플의 대답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청해도에서의 파티라고는 옌스와 블랙뿐. 무의식의 방에서 깨어났을 때도 혼자였다. 뜬금없는 전사 NPC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고 하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동료들 중에 그 NPC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아! NPC가 누군지 이제 생각났다!" 옌스가 손바닥을 탁 치니, 모두들 다가와 물었다. "누군데?" "이름이 카웬이었잖아. 이만하면 바츠 너도 알 테지?" "카웬? 용사 카웬이라고?"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300여 년 전 데보라의 인형 군단을 물리친 용사가 자신을 구해 줬다니! "이름만 같은 NPC 아닐까?" "아냐, 누님. 드림맥스가 이름을 중복으로 쓸 정도로 성의 없지는 않아. 분명 이벤트의 하나가 분명해. 카웬의 영혼이 마녀와 씨우는 자의 동료를 불러 주는." "헤! 어떤지 숙연한 느낌이 드네." 다들 이벤트였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유한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카웬이 어떻게 동료들을 알이봤을까? 자신이 채린 일행과 파티 설정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메신저에 등록된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아님 다른 시스템적인 설정과 장치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뭔가 이상해. 그리고 찝찝해.' 결과가 좋게 끝났지만, 어찐지 자꾸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경욱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데보라가 리치가 되어 부활했을 때만 해도 나름 기대를 했었는데, 저 영악한 지그 놈은 리치 데보라마저 쓰러트리고 말았다. '데보라의 재림' 시나리오가 영영 사라진 것이다. 이 시나리오를 만든다고 애썼던 개발진의 노고와 시간 자금이 허무하게 증발해 버렸다. '크윽, 밉다! 지그 저 녀석이 너무 미워!' 사사건건 자신이 미는 스토리에 개입해 초를 치는 녀석이 정말 얄미웠다. 바츠가 해킹당했을 때 무시했다고, 이런 방식으로 복수를 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끝났군요." 좌절하는 부사장과 달리 손석진은 싱글벙글했다. 정경욱은 손석진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좀 전에 데보라가 리치로 부활하기 직전, 손석진은 화장실에 간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중간에 황당한 NPC가 나타나 지그의 동료들을 불러왔고, 그들 덕분에 지그는 리치 데보라를 쓰러트릴수 있었다. "석진이 자네 짓인가?" "뭘 말입니까?" "NPC 카웬 말이야! 자네가 맞지? 자네가 지그 패거리를 불러온 거지?" 손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바로 긍정. 얼굴이 벌겋게 변한 정경욱은 손석진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자네 날더러 게임에 개입하는 걸 자제하라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정경욱은 아까 유한이 데보라와 말싸움을 할 때 게임에 개입하려 했었다. 데보라의 재림 시나리오를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데보라를 살짝 컨트롤해서 지그 녀석을 죽여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게임사가 게임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손석진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그랬던 인사가 오히려 개입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진정하십시오. 아까운 시나리오가 날아가긴 했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시나리오가 나타나게 되었으니까요." "뭐? 다른 시나리오가 있다고?" "운명이란 하나만 결정된 게 아니니까요." 데보라가 죽음으로서 '데보라의 재림’ 시나리오는 사라졌지만, 또 다른 시나리오가 발동하게 되었다. 정경욱은 그 또 다른 시나리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게임에 준비된 수많은 시나리오와 컨텐츠들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손석진과 몇몇 개발팀 직원들뿐이다. 과연 또 다른 시나리오는 뭘까? 아니 그것보다, '또 다른’ 시나리오가 과연 사라진 시나리오만큼 유저들의 흥미를 불러올 수 있을까? 그러나 개발자인 손석진은 그에 대해서 장담했다. "이제 새로운 문이 열릴 겁니다.그리고……" "그리고?" 손석진은 기대 어린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었다. "무료한 초인들이 다시 일어날 겁니다." 정경욱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석진도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에 벌어질 일일 테니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동굴에서 나온 유한 일행은 북쪽에 있는 산 정상으로 향했다. 데보라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데보라의 지도’ 에는 청해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그 정도에 그쳤다면 대단하지 않은 물건이 되었을 테지만, 뭔가 심상찮은 기호가 찍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뭔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도의 설명이 애매하기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허탕이기만 해 봐라, 드림맥스 가만두지 않겠어!' 유한은 굳게 다짐하며 정상으로 한 발짝, 한 발짝 올라 갔다. "조심해, 조심. 발 헛디디면 큰일 나." "이거 완전 난코스로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깍아지는는 암벽에 겨우 발 디딜 공간이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은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잘 따라왔다. 자신이 발 디딜 곳이 없으면 바위를 부숴서 길을 만들기도했다. "됐다, 정상이다!" 산정상은 평평한분지였다. 일행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분지를 돌아다니며 눈에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유적은 커녕 벽돌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데보라, 아니 드림맥스가 우릴 낚은 거 아닐까?" "설마 그럴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한도 내심 불안과 실망을 느끼 고 있었다. 그만 내려갈까 생각하던 그때, 베르디가 힌트를 찾아냈다. "모두 이리 좀 와 봐요!" 베르디가 찾은 것은 어느 커다란 나무였다. 다들 던전이나 유적 같은 것만 신경을 쓰느라, 산에 어떤 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았다. 처음엔 영문을 알지 못했던 유한도 나무와 그 근저에 자라난 똑같은 수목들을 보고 무릎을 탁쳤다. "그렇군! 이 침엽수들이 힌트였나?" 열대지방에 어올리지 않은 커다란 침엽수들. 유한도 데보라에게 잡혀 가기 전에 청해도의 식생이 좀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식물군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긴 다른 데와 달리 묘한 기운이 느껴져요. 사실 여기보다 저 안쪽이 그런 기운이 더 짙은 것 같지만요." 베르디가 가리키는 곳에 침엽수가 더 많았다. 아니, 아주 숲을 이룬 상태였다. 데보라도 이곳에 와서 뭔가 이상한 기운, 아니 마나를 느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기서 흘러나온 마나가 청해도 전체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저 안에 뭔가 있다!' 침엽수림을 뒤지던 유한의 발에 무언가가 밝혔다. 자연 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반질반질하게 손질된 돌이었다. 그 돌을 유심히 살펴보던 유한은 동료들을 근처로 불러 모았다. "이 밑에 뭔가 있는 것 같아." 유한의 말에 모두들 풀을 뽑고, 이끼와 흙을 걷어 냈다. 그러자 대리석으로된 커다란 원형 석판이 나왔다. 밖에서 안으로 3개로 나뉜 석판에는 복잡한 도형들이 가득했고, 정중앙에는 굵직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빛을 부른 자여, 혼돈을 끝내라……. 이게 무슨 뜻이?" "글쎄. 형, 일단 빛을 부른 자는 우리를 말히는 것 같은데." 얀이 자신한 데는 자신들이 풀을 뽑고 홁을 걷어 내 이 석판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그 해석에 동의했다. 문제는 혼돈을 끝내라는 말인데, 이건 무슨 뜻인지? 그때 석판을 유심히 살펴보던 채린이 입을 열었다. "이 석판 돌려야 하는 거 아닐까?" "돌리다니?" "석판이 셋으로 나뉘어 있잖아. 여기 도형도 제멋대로 야. 세 개의 석판을 돌리면서 도형의 모양을 맞춰 보면……." "아하, 그렇군!" 석판의 도형은 제멋대로 그려진 것 같아도 실은 일정한 간격과 형태가 있었다. 3개로 나뉜 석판이 제각각 돌아가면서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보인 것이다. 혼들을 끝내라는 말은, 석판의 도형을 올바르게 맞추라는 뜻이었던 것. 답을 알게 된 유한은 바같쪽 석판부터 돌려 보았다. 석판의 홈을 잡고 한껏 용을 써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안 되는데. 아예 안 돌아가는 거 아냐?" "혼자서 하니까 그렇지. 내가 도와줄게." 얀이 힘을 보탰고, 나중에는 옌스와 블랙도 가세했따. 그러자 석판은 무서운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돌아가던 석판은 뭔가 모양을 맞췄다 싶은 순간, 덜컥 소리가 나며 멈춰 섰다. 바같쪽과 가운데 있는 석판이 한 덩어리가 도니 것처럼 딱 들어붙었다. "됐어. 이제 안쪽의 석판을 맞춰 봐." "아니, 그쪽 말고요. 석판을 맞춰봐." 넷은 채린과 베르디의 지시에 따라 다시 석판을 돌렸다. 얼마쯤 돌리자, 역시 맞춰지는 소리가 울리며 석판이 멈춰 섰다. "됐다!" 모두 환호성을 터트린 순간, 석판이 아래로 덜컹 내려 앉았다. 그리고 지진이 난 것처럼 주변이 흔들리더니 땅이 갈라지고 나무들이 쓰러졌다. "이, 이거 왜 이러지?" "마왕이라도 봉인되어 있는 거 아닐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갈라진 땅 속에서 고인돌 같은 바위들이 솟구치고, 석판을 중심으로 기단석들이 나타났다. 잠시 후, 숨겨져 있던 유적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이게 뭐야?" "모양이 꼭 스톤헨지 같아." 모두들 탄성을 내뱉고 있을 때, 아름다운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불쑥 떠올랐다. [지그 탐험대 파티]가 헤븐즈 게이브(Heavens Gate)를 발견했습니다. [지그 탐험대 파티] 전원에게 명성치 3,500과 '헤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라는 칭호가 주어집니다. "헤븐즈 게이트?" "그런데 이 유적은 최초 발견자 표시를 안 해 주나?" 유적이나 미개척지를 발견하면 표지판에 금박으로 이름을 새겨 주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유한은 천천히 유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드러난 기단석에 적힌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별빛이 빛나면 하늘의 문이 열린다. '별빛이 빛난다고? 스타레이를 말하는 건가?' 데보라가 찾아낸 유적 헤븐즈 게이트. 그 유적을 가동하기 위한 열쇠가 스타레이였던 모양이다.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낀 유한은 ㄷ게보라가 제련한 스타레이를 꺼내서 유적가운데 갖다 놓았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던 유한의 눈앞에서 스타레이가 환하게 빛났다. 네모난 형태로 제련된 스타레이는 빛 속에서 천천히 별의 모양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빛은 훨씬 더 밝아졌다. "이, 이 빛은 뭐지?" 일행이 뭔가 낌새를 눈치 챘을 때, 이미 스타레이의 환한 별빛은 높고 푸른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하늘에 닿은 별빛은 푸른 하늘을 하얗게 열었다. 지상에서 천상에 닿은 장엄한 빛의 기둥. 눈앞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에 모두들 입을 쩍 벌렸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오래 했지만, 이런 괴사가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들은 유한이 사라진 것조차 알지 못했다. 빛의 기둥을 본 것은 유한 일행만이 아니었다. 청해도에 있는 모든 유저들이 빛의 기둥과 하얗게 열린 하늘을 보았다. 목격자는 청해도 유저들뿐만 아니었다. 하늘에 닿은 빛의 기둥은 후소 대륙과 찬드라 대륙, 아르페디아 서쪽의 웨스턴 지방에서도 목격되었다. 전 세계의 모든 유저들이 빛의 기둥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빛의 기둥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아르페디아 북부 노스아크에서 흘러나왔다. "헤븐즈 게이트? 대체 누가 찾아서 연 거지?" 전설에나 언급된 광경이 실제로 벌어지자, 몇몇 드워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저들은 그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헤븐즈 게이트라는 단어는 빠르게 퍼져 나갔고, 그것에 대한 정보를 찾는 사람들이 폭주했다. -황[: 혹시 헤븐즈 게이트가 뭔지 아는 사람? -초딩무적: 네이놈 지식인에 물어보삼. -예쁜분홍이: 드림맥스에 물어봐도 안 가르쳐 주던데, 낚시 아닐까요? -내일부터마왕: 낚시 100골드. -벚꽃선녀: 그럼 난 낚시가 아니라는데 200골드ㅋㅋ. 게임 세상이 난리가 났다는 것도 모른 채, 유한은 멍하니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천상의 세계에 도착하셨습니다. -명성이 2,000 올랐습니다. '천상의 세계라고, 여기가?' 그름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신전들이 보였다. 유한은 그 신전에서 쭉 내려온 계단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온 세상이 한눈에 보였다. 아르페디아대륙과 청해도, 그 아래의 후소 대륙, 그리고 그 밖에 다른 대륙들. 까마득하게 먼 지상을 한눈에 보자니, 유한은 자신이 하늘 위에 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아찔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이었다. 미지의 땅에 다다랐다 생각하니 탐험 정신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헤븐즈 게이트…… 천상의 세계로 올 수 있는 문이었구나!" 천상의 세계. 아르페디아의 설정상 그곳은 신들의 영역이다. 유한이 알기로 지금까지 이곳에 다다른 사람은 없다. 아니, 그곳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 자체를 안 했다. 그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영역에 자신이 올랐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이곳에선 과연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또 무엇을 배우고 해낼 수 있을까. 유한은 일단 스크린샷을 찍고 모험 일지를 기록했다. 흥분과 긴장을 다소 죽여 놓기 위함이었다. 너무 흥분하면 상황 대처를 하기 힘들어진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다음에, 유한은 구름 위의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오르면 오를수록 아름다운 음악과 노랫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올라가 신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다. "거기 오는 자여, 당장 걸음을 멈추시오." 유한의 눈앞에 빛을 휘감고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번쩍이는 방패와 긴 창을 든 천사였다. 유한보다 머리가 2개는 더 큰 천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빛으로 하늘의 문을 연 이였구려. 놀랍소. 오랜 세월 동안 헤븐즈 게이트는 굳게 닫혀 있었건만." 그렇게 말하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유한을 쓸어 보았다. "이곳까지 온 그대의 노력은 대단하오. 하지만, 그대는 자격 미달이오. 지금 그대의 능력으로 그분과 자웅을 겨루기 어렵소."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웅을 겨루다니. 신의 세계에 와서 누군가와 다투어야할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했다. '헤븐즈 게이트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가?' 구센도르프는 스타레이로 뒤집을 힘을 얻을 거라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한 가지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 "돌아가시오. 그대의 능력이 극한에 이루었을 때,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다시 이곳을 찾아오시오." "뭐라고요? 그냥 가라고요?" 아직 구경을 시작도 못했는데 쫓아내려 한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펄쩍 뛸 일이었다. 여기까지 온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냥 가라니! "가시오. 다시 와서 그분에게 도전하여 인정받으면 그대는 '아이언 마스터' 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아이언 마스터!' 유한의 두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졌다. 대장장이들에게 전설로 여겨지는 존재. 천상의 세계에 와서 시험을 치르고, 인정을 받아야 전설의 아이언 마스터가 될 수 있는 모이양이다. 스킬 랭크를 올리고 철공소와 제철소를 건설하는 건 그저 과정에 불과 했던 것. "돌아가시오. 다음번엔 자격을 갖추고 헤븐즈 게이트를 찾아 여시오." 천사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 나왔다. 그 환한 빛은 유한을 천상의 세계에서 밀어냈다. "아, 안돼!" 유한은 몸부림을 쳤지만 도저히 그 빛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천상의 세계를 보며 유한은 아쉬움을 달래지 못했다. '그래도 소중한 정보는 얻었어.' 소득이 없진 않았다. 아이언 마스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 도전하기 위해선 아직 많은 과정이 남아 있지만. "지그야!" 채린의 외침에 유한은 번쩍 눈을 떴다. 천상의 세계에서 쫓겨났다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지상이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너 어딜 갔었던 거야?"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그게 말이야……." "유, 유적은? 헤븐즈 게이트는?" 장소는 방금 전의 침엽수림이 맞았다. 그러나 주변엔 둥그런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돌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 "좀 전에 빛의 기둥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졌어." "사라졌다고?" 잠시 당황했던 유한은 천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쫓아내기 전에 천사는 말했따. 자격을 갖추고 헤븐즈 게이트를 '찾아' 열라고. '이런! 한 번 쓰면 다른 필드로 이동되는 유적인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고대 신전이나 유적들 중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동하는 유적이 있다고.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갔을까 아님 찬드라나 후소 대륙으로 갔을까? 아무튼 새로 헤븐즈 게이트를 찾아야 한다. 조만간엔 닷 ㅣ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유저들이 쉽게 천상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 드림맥스의 수작일 터. "너,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야?" "응? 뭐가?" "어디에 갔었냐고. 벌써 세 번쨰 묻고 있잖아." 채린은 물론이고, 동료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헤븐즈 게이트가 사라진 원인이 유한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서 있던 곳에서 빛이 솟구쳤고,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이렇게 나타났다. '이거 말해 줘야 하나?' 이야기해 주는 게 옳다. 혼자서 헤븐즈 게이트를 찾은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헤븐즈 게이트가 사라진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의 반응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한 일. 그래서 유한은 슬그머니 발을 뺏다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앗, 강유한! 너 어딜 도망가!" "바츠 이 자식, 안 서면 죽는다!" "로그아웃하기만 해 봐. 곧장 방으로 쳐들어갈 거야!" 그 어떤 협박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의 문을 염으로써 자신이 게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그는 뛰고 또 뛰었다. chapter 06 밸런타인데이에 생긴 일 밸런타인 데이에 생긴 일 "크으! 아침인가?" 유한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께 늦게까지 게임을 해서, 어제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의 눈빛이 요사이 심상찮아진 탓이다. 이럴 땐 살짝 패턴을 바꾸는 게 좋다. 일찍 잔 덕분인지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도장에서 배운 체조로 몸을 푼 유한은 세수를 하고,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먹었다. "쯧쯧쯧, 이래서야 원." "왜 그래요?" 식사 중에 신문을 보던 유한의 아버지가 연방 혀를 찼다. 그는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말이야, 해킹으로 은행 돈을 빼내려다 죄다 잡혔다는군." "어머나! 부모들이 도대체 뭘 가르쳤는지, 쯧쯧쯧." "사람이 근면하게 일해서 벌 생각을 해야지." 해킹 범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히 자신이찾고 있는 해커가 절로 떠올랐다. 바츠를 해킹한 녀석. 일전에 만났던 허진태는 그 해커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일 거라 했고, 그걸 알고 싶으면 전설적인 해커 조커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말했다. 유한은 틈틈이 조커란 해커에 대해 알아봤지만 도저히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허진태의 말대로 그와 손석진이 연관이 있긴 한 것인지? '좀 더 확실히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유한은 서울 구치소로 허진태를 찾아갔다. 이번엔 통닭 1마리를 미리 사 들고 갔다. "어서 와. 어때? 조커에 대해선 찾아봤나?"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초췌해진 허진태였지만, 눈빛은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도저히 조커가 누군지 알 수 없더군. 도대체 손석진씨가 내 바츠를 해킹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지? 날 놀리려는 거냐?" "그럴 리가 있나. 난 그저 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 생각해서 언급했을 뿐. 앞서 말했지만 드림맥스 보안 프로그램을 뚫을 고수는……." "은거기인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숨은 실력자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해서 허진태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 바닥에서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어. 은거기인 같은 건 없다." 거기에서 잠시 대화를 끊었던 허진태는 뭔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손석진이 조커라는 사실부터 확실히 알려 주도록 하지. 그럼 너도 내 말을 믿게 될 테니까." "어떤 방식으로 알려 주겠다는 거지?" 유한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묻자 허진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와 그놈이 다녔던 대학교를 가르쳐 주지. 그곳 컴퓨터 공학과에 '레볼루션(Revolution)' 이란 해킹 동아리가 있는데, 거기 가면 과거 손석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유한은 허진태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이번에도 허탕을 치면 다시는 널 만나러 오지 않겠다. 해킹범은 나 혼자 잡겠어." "뭐 그러던가." 유한은 허진태에게서 손석진이 다녔던 대학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내고는 구치소를 나왔다. "여기가 신라 대학교인가?" 유한은 대학 캠퍼스에 들어와 연방 두리번거렸다. 의외로 손석진은 그리 좋은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천재 개발자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에, 최소한 란국 최고의 명문 대학이나 해외 유학파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허진태, 그 인간 설마 거짓말을 한 건…….' 미심쩍긴 했지만, 유한은 일단 레볼류션이란 해킹 동아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대학생에게 말을 건넸다. "말 좀 묻겠습니다. 레볼루션이란 동아리가……." "뭐?" 유한은 묻다가 말았따.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는 대학생 형님이 사납게 부라려 보았기 때문이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그의 몸에서 칙칙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여친한테 차였나?' 잠시 주저하던 유한은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레볼루션이란 컴퓨터 동아리를 찾는데 혹시 아세요?" "몰라, 여긴 미술학부다." 담배꽁초를 짓밟아 끈 대학생은 획 하니 돌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쳇! 좀 친절히 가르쳐 주면 덧나나.' 투덜거리며 유한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2월이라 대학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2월이 끝나고 개학을 해야 학생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도 표정이 어둡고 신경질적이어서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말을 붙여도 무시하고 그냥가기 일쑤. '이거 다들 왜 이래? 오늘이 무슨 날인가?' 연이어 낭패를 당한 유한은 맞은편에서 오던 커플과 마주쳤다. "아잉, 선배도 참." "하핫, 뭐 그걸 갖고 그래?" 다른 대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표정도 밝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쌍의 바퀴벌레 같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유한은 궁금했지만, 일단 레볼루션 동아리의 위치부터 물어보았다. 그 커플은 흔쾌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전자전기공학부는 저리로 쭉 가면 돼. 네가 말하는 동아리도 그쪽에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친절한 커플 덕분에 유한은 컴퓨터 공학과가 있는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컴퓨터 공학과 건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아리 레볼루션 방 앞은 술병과 각종 쓰레기로 어지러웠다. '블라덱 녀석 소굴과 비슷하군. 해킹하는 작자들은 다이런가?' 아무튼 유한은 동아리 방문을 두들겨 보았다. 몇 번 두들기지 않아, 머리가 더부룩한 대학생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응? 넌 누구냐? 무슨 일이야?" 낯선 이의 방문이 탐탁지 않았던지, 그는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밖에서 봤던 솔로들처럼, 어딘가 칙칙한 기운을 흘리고 있기도 했다. "저 그게…… 삼월에 입학할 신입생인데요. 이곳 동아리가 유명하다고 해서요." "아! 그래?" 후배가 될 병아리가 왔다니, 더벅머리 대학생의 눈빛이 달라졌다. 유한은 급조한 변명이 먹힌 것에 안도했다. "미리 구경 온 거냐? 하하, 이럴 거면 정리 좀 해 놓을걸 그랬네." "다른 사람은 없어요?" "뭐 방학인데다 애인 만난다고 다들 시내로 뛰쳐나갔어." 따로 말은 안 했지만, 더벅머리는 '애인이 없는 나는 동아리방이나 지키고 있다' 는 듯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제대로 구경할 게 있을까 모르겠지만." 더벅머리의 말에 유한은 동아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한 대로 동아리 방에는 그리 대단한 것들은 없었다. 해킹 동아리답게 책상 위에는 낡은 컴퓨터와 정체를 알수 없는 전자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한쪽 벽에는 진열장과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을 뿐. 유한은 벽으로 다가가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역대 동아리 회원들의 사진 같았는데, 낯익은 인물이 한 사람 보였다. 유한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자, 더벅머리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저 사람 누군지 아니? 손석진 선배님이야.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만든 천재 개발자시지." '헐, 진짜였잖아!' 혹시 허진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닌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한은 사진을 좀 더 훑어보았다. 2019년 여름 MT 사진이라는 적혀 있는 사진에는 손석진이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다소 귀찮다는 눈빛. "저기, 손석진 개발자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죠?" 더벅머리가 쓱 다가와 보더니 말했다. "허진태 선배야." "예에?" 사진 속의 허진태는 지금의 허진태와 용모가 달랐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가 성형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유한은 크게 놀랄 따름이었다. "허진태 선배는 졸업 후 크래커로 활동했다 하던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됬어. 손석진 선배와 맞먹는 천재였다고 하던데 안타까운 일이지." 이로서 허진태가 손석진과 같이 공부를 했다는 말은 진실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손석진이 조커였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지? "손석직 개발자님도 해커로 유명했다던데 정말입니까?" 유한이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은근슬쩍 묻자 더벅머리는 지저분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너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냐? 손석진선배님이 해커로 활동한 것은 대학 다닐 때 잠깐이었는데. 한 일 년 정도 활동하다 그만두었다던가?" '빙고!' 유한의 눈 깊은 곳에서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허진태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손석진이 바츠를 해킹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좀 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야 한다. "혹시 손석진 개발자님이 해커로 활동할 때 별명이나 닉네임을 쓰진 않았어요?" "썼지. 'J' 라고 아마추어 해커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단다." 조커란 이름이 나오길 내심 기대했는데. 엉뚱한 이름이 나왔다. 유한은 실망했다. 하지만, '가만, 조커도 첫 글자가 J로 시작하잖아.' 그리고 보니 J가 조커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조커라는 이름으로는 안 불렸어요?" "조커? 푸하하핫!" 갑자기 더벅머리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는 유한을 향해 엉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말이야,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한참 잘못 짚었어." "잘못 짚었다고요?" "그래. 손석진 선배님이 해커로서 좀 능력이 있긴 했지만, 조커와는 비교가 안 되지. 조커는 말이야 한국 최고,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일지도……." 그러면서 더벅머리는 조커에 대해 일장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블라덱이 그에게 해 준 거랑 비슷했다. 결론은 손석진은 조커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아닌가?' 실력이 늘었을 수도 있고, 실력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허진태의 말이 줄줄이 진실로 드러나다 보니, 더벅머리의 말이 왠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물론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다. 손석진이 조커라는 확실한 증거가. 유한이 생각에 잠긴 사이, 더벅머리가 진열장에서 검은 바탕의 서류 파일을 끄집어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손석진 선배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게임의 설정집이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기본 설정과 흡사해." 그 말에 흥미를 느낀 유한은 서류를 열고 파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페이지마다 글과 그림들, 알고리즘 등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지도도 있네.' 지도 주변에는 낙서 같은 그림들이 그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우승꽝스러운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광대들의 모습. 유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조……커?' 조커라는 언급은 없지만, 유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쩐지 다른 캐릭터들보다 이 광대가 더욱 더 눈에 들어왔다. 허진태의 말, 손석진의 대학 시절 별명 J, 설정집의 조커.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삐리리리ㅡ!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채린의 번호가 액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유한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안 받으면 나중에 죽는다. "여보세요, 채린이?" "응, 나야. 저녁에 시간 있니?" "시간? 시간이야 많지." 도장에 가야 하지만 채린이 놀러 가자고 하면 살짝 빠질 의향이 있었다. 왜 안 왔느냐고 하면 아팠다거나 공부하느라 바빳다고 하면 그만. "그럼 다섯 시에 강남역 앞에서 만나. 너저분하게 나오면 날려 버릴 거다." "오케이, 알았어." 유한은 흐뭇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좀 남지만 집에 들렀다가 나름 준비하고 나가려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 그러렴." 어쩐지 더벅머리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곧장 인사를 하고 동아리방을 나갔다. "좋~ 겠다. 이런 날 여친 만나는 놈은." 무적의 솔로부대원이었던 더벅머리는 투덜거리며 손석진의 설성집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강남역으로 나가자 채린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채린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다 불러내고?" 유한의 물음에 채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따. "어휴, 너도 참.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오늘? 빨간 날은 아닌데……아, 그렇구나!"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는 유한이었다. 2월 14일.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외로운 남자들이 어둠의 오라를 뿜고 다닌다 했다. '설마 채린이가 나한테 초콜릿을 주려고?' 유한의 마음속에 있는 바츠는 쓸데없는 망상이라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은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자, 받아. 몸에 좋은 초콜릿이야." "우와! 고마워, 잘 먹을게." 유한은 곧장 포장을 풀고 초콜릿을 먹었다. "맛있다, 정말 맜있어!" 농도 99%의 카카오 초콜릿이었지만, 그는 쓴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달콤했다. 이런 단맛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고맙다, 채린아. 나 발렌타인 초콜릿은 태어나서 첨받아 봤어.' '그, 그렇게 맜있나?' 채린은 내심 놀랐다. 장난 반으로 선물해 줬는데 이렇게 맛있게 먹다니. 반쯤 장난인 자신과 다르게 유한은 진심인 모양. 어쩐지 미안했고, 또 나름 기분이 좋았다. "이거 화이트 데이 때 톡톡히 갚아야겠는걸." "당장 갚아. 나 배고프니까." "그래? 그럼 저기 스파게티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 갈래?" "으음…… 피자도 같이 해? 피자도 먹고 싶은데." "그럼. 근데 너 그거까지 먹으면 살찔걸. 굴러다녀야 할지 몰라." "뭐야!"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두 사람은 마치 주위의 솔로들을 약 올리는 듯, 행복 바이러스를 잔뜩 뿌리며 지나갔다. 발란타인 데이 저녁 시내 한복판. 당연히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와 몸을 부딪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툭! "앗, 죄송합니다." 채린과 함께 깨를 볶아 대던 유한은 어깨를 부딪치자마자 바로 사과했다. 오늘같이 좋은 날 괜히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좋게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딪친 상대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런~ 썅! 앞 잘 보고 다녀!" "새끼가 여친 있다고 유세 떠나?" 덩치가 큰 비곗덩어리가 입술을 실룩이자, 뒤의 다섯명의 똘마니들도 따라서 저마다 한 마디씩 욕설을 주절거렸다. 한눈에 봐도 건수를 찾아 나온 양아치들. 상대해서 좋을 게 없다 여긴 유한과 채린은 서둘러 그들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잠깐, 너 왠지 낯이 익은데?" 비곗덩어리가 유한의 어깨를 붙잡고 늘어졌다. 놈의 손을 뿌리치려 고개를 돌렸던 유한도 녀석이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이놈은 바로 자신과 악연이 있는 라스트모히칸이었다. 마침 똘마니 중 하나가 유한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고함을 질렀다. "형! 이 자식 공중 요새에서 우릴 물 먹인 새끼예요." "뭬야? 그 대장장이 새끼라고?" 비곗덩어리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는 유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 잘 만났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지?" "지금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좋은 말로 하지." 유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비곗덩어리의 언성은 더 높아졌다. "닥쳐! 너 때문에 내 캐릭이 지금도 북해에 동태 꼴로 떠다니고 있단 말이다!" 공중 요새가 차가운 북해에 처박히는 바람에 비곗덩어리의 캐릭터 라스트모히칸과 두 똘마니들은 지금도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를 깨어나게 하려면 누군가 찾아와 구조해 줘야 하는데, 문제는 반쯤 얼음으로 덥혀 있는 북해를 항해하는 배가 잘 없다는 점이다. "따라와, 새꺄. 넌 오늘 아주……." "따라갈 테니까 이것 좀 놓고 말하지." 유한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비곗덩어리의 손을 잡고 슬쩍 비틀었다. 비곗덩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화가 나서 그런것은 아니고 아팠기 때문이다. 놈이 손을 치우자 속절없이 어깨에서 손을 떼야 했다. '크윽, 이 자식을 그냥!' 그냥 여기서 한 대 후려갈길까 싶었지만, 놈의 말대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주위에서 똘마니들도 눈치를 주고 있었다. 비곗덩어리는 등을 돌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똘마니들은 유한과 채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골목으로 유도했다. 도망갈 생각이 없었던 유한은 순순히 녀석을 따라갔다. 채린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지켜보자는 생각에 유한과 함께 갔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골목 깊숙한 곳에 들어서자 비곗덩어리는 본색을 드러냈다. 녀석은 유한의 멱살을 움켜잡고선 살찐 곰처럼 으르렁댔다. "딴말 안 한다. 당장 보상해!" "보상? 무슨 보상?" "내가 힘들여 키운 캐릭터를 니가 망쳐 놓았으니 당연히 보상을 해야지?" 대충 놈의 속셈이 보였다. 유한을 호구로 여기고 둔과 아이템을 잔뜩 뜯어낼 생각인 것이다. 하긴 유한은 아르페디아에서도 꽤 잘나가는 캐릭터니까. "싫다면 어쩔 건데?" 유한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비곗덩어리는 한쪽으로 물러선 채린을 힐끔거리더니 음흉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 여친이 몸으로 갚는 수밖에." 이번엔 유한의 표정이 틀어졌다. 칭얼대는 꼴을 보고 적당히 손봐 줄 생각이었는데, 적당히 봐줘선 안 될 듯했다. 놈에 대한 처우는 완전히 결정 났다. "뭐야, 꼬라보면 어쩔……." 을러대던 비곗덩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옆구리에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하필이면 비계도 두껍지 않은 부분에. "꺼윽!" 멱살을 놓은 비곗덩어리의 몸이 뒤로 비틀거렸다. "돼지 새끼. 넌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큰소리를 아니지만,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고꾸라진 비곗덩어리의 얼굴로 유한의 발차기가 날아갔다. "이, 이게 우리 형을!" 처음에 똘마니들은 갑자기 상황이 돌변해서 무슨 일이 터진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곗덩어리가 쌍코피가 터진 채 벌렁 나자빠지자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덤벼들었다. "그래 와라. 몽땅 작살내 줄 테니까." 안 그래도 이놈들 다시 만나면 진득하게 손봐 줄 생각이었다. 채린과 다시 만났던 날, 이놈들에게 얻어맞고 얼마나 추레한 모습을 보였던가. 그때 굴욕을 몽땅 다 갚아 줄 생각이었다. 일부러 놈들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유한은 가장 앞서 달려드는 똘마니에게 하이킥을 날렸다. "크엑!" 제일 앞에 있던 녀석이 벌렁 쓰러지자, 뒤따르던 녀석들이 주춤하고 멈춰 섰다. 그러자 유한은 놈들 틈을 번개 같이 빠져나가며 주먹을 날렸다. "치잇! 뭐 하는 거야! 잡아서 족쳐야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비곗덩어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5:1의 싸움이 벌어졌다. 다소 부담스러운 숫자이기는 했지만, 조폭이 아니라 대부분 그저 눈깔에 힘만 주고 다니는 양아치들이라 별로 힘들지 않았다. 유한은 곽대발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다. 한 번 때릴때 뇌가 울릴 때까지 후려쳐야 겁을 먹고 덤벼들지 않는다는 것. 과연 사부의 가르침은 위대했다. 몇 대 후려 맞은 똘마니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피했고, 오직 비곗덩어리만 식식거리며 덤벼들었다. "이 새끼 잡히기만 하면……!" 일단 바닥에 쓰러트린 뒤 체중으로 깔아뭉개고 주먹을 퍼붓겠다는 게 비곗덩어리의 생각이었다. "안 잡히겠다면 어쩔 건데?" 그러나 유한의 허리를 잡으러 접근하던 그는 유한이 들이민 무릎차기에 맞고 또 한 번 나자빠졌다. '헤에, 유한이 잘 싸우네.' 채린은 한쪽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릴 때 허약하던 녀석이고, 다시 만났을 때도 깡패들에게 맞고 있었는데 언제 저리 실력이 늘었는지? 상황에 따라 거들어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그런데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채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유한의 사납고 거친 공격 패턴이 어딘가 상당히 낯익었던 것이다. '설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채린은 비곗덩어리가 허겁지겁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제길, 이대로 계속 맞을까 봐.' 덤비는 족족 유한에게 깨진 비곗덩어리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는 한쪽에서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채린에게 달려가 팔로 목을 감아 인질로 삼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 당장 무릎 꿇어!" 비곗덩어리는 놈이 의외로 고수이기는 하지만, 일단 여친을 잡은 이상 끝이라 생각했다. 똘마니들도 그리 생각했는지 몸을 사리고 있다가 다시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똘마니들에게 유한은 거침없이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 "이것들이 돌았나." "야, 인마! 미친 건 너야!" 비곗덩어리는 분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여친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자신의 부하들을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똘마니들은 잘근잘근 밟아 버린 유한은 비곗덩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비곗덩어리는 흠칫 뒤로 한발 물러났다. "야, 너희 후회하기 전에 그 손 놔라." "후회?" "채린아, 언제까지 약한 척할 거야." 유한의 말에 채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땐, 왕자님이 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공주님이 더 먼치킨이잖아." 비곗덩어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악!" 그러나 다음 순간, 비곗덩어리는 엄청 매섭고 아린 고통에 채린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채린이 부츠 굽으로 그의 발을 인정사정없이 찍었던 것이다. 정확히 새끼발가락에 찍혔던 비곗덩어리는 껑충껑충 뛰다가 채린이 날린 따귀를 맞고 옆으로 쓰러졌다. 설마 이 연약해 보이는 여자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야, 너 어떻게 죽여 줄까?" 유한은 뺨에 벌건 낙인이 찍힌 비곗덩어리를 발로 툭툭 던드리며 물었다.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비곗덩어리는 바로 무릎을 꿇고, 파리처럼 싹싹 빌었다. "혀, 형님!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왜? 보상하라며?" "나보고 몸으로 갚으라고도 했어." 채린이 다가와 한 마디 보태자, 비곗덩어리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까 그 싸대기는 정말 아팠다. 이빨이 다 흔들거릴 정도로. '무슨 계집애가 손이…….' 그러나 행동은 생각과 달랐다. "제가 순간 쳐 돌았나 봅니다. 감히 어떻게 누님에게……." "난 너같이 징그러운 동생 없거든!" 찌ㅡ악! 이번엔 반대편 볼에 불이 붙었다. 잠시 광할한 우주를 경험했던 비곗덩어리는 손을 호호 불고 있는 유한을 보았다. 계집애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자식도 손이 보통 매운 게 아니었다. "보상을 받기 싫다면 보상해야지." 비곗덩어리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눞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들 기분 좋은 날, 분위기 망치고 땀 빼게 만들었으니 보상을 해야잖아, 안 그러냐?" "그, 그렇습니다."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 자리서 작살이 날 것 같았다. 그리서 비곗덩어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그럼 보상을 받아 볼까?" "저, 근데 가진 건 이것밖에……." 비곗덩어리가 쭈빗거리며 돈을 내밀자 유한은 냅다 주먹을 날렸다. "짜시강, 누가 돈 달래! 몸으로 갚차, 몸으로!" "크에에엑!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날 골목 안에서 1시간이나 개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플들의 아름다운 날에 심술을 부리려던 솔로는 그렇게 무참하게 응징을 당하고 말았다. chapter 07 폭탄마와 유술가 폭탄마와 유술가 밸런타인데이가 지나고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들썩이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나타난 빛의 기둥 때문은 아니다. 한때 빛의 기둥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긴 했지만, 곧 시들해졌다. 빛의 기둥에 대해 알려진 게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르페디아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것은 해외 랭커 들이었다. 1달 전부터 아르페디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해외 랭커들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 선두에 웨스턴의 테러리스트 프로인과 후소 대륙에서 온 유술가 카즈마가 있었다. 이 둘은 아르페디아 각지를 들쑤시고 다녔다. 프로인은 가는 곳마다 폭탄 테러를 일삼았고, 카즈마는 상위 랭커들을 차례대로 쓰러트리고 있었다. "누가 이놈들을 처리해 주지 않나?" "이것들 때문에 외국 녀석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는데 말이야." "카즈마란 녀석은 그렇다 쳐도, 프로인이란 놈은 누가 확실히 작살내 줬으면 좋겠어." 잠시 일손을 놓은 유저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잡담의 주제는 '침략자', 특히 테러리스트 프로인이었다. "프로인 이놈은 진짜 악질이야. 좀 유명한 대장장이가 있다고 하면 타짜고짜 찾아가서 폭탄을 던진대." "카잔 왕국의 아론도 이놈 손에 당했다지." "이러다가 우리한테도 불똥이 튀는 거 아니야? 우리 사장만 해도……." 이들은 모두 대장장이 유저들이었다. 다들 명성이 낮은 평범한 대장장이였지만, 프로인에게 테러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일터는 바로 브로딘 왕국에 소재한 발리안철공소. 이곳은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귀련 다음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장의 작업장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않듯, 프로인도 이곳을 그냥 두지 않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대장장이들이 불안에 수군거리고 있을 때였다. 화려한 복장을 한 대장장이 유저가 무구 공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잡담이나 하라고 고용한줄 아십니까? 당장 무구 생산에 집중하십시오!" 그는 바로 발리안이었다. 사장의 강림에 놀란 대장장이들은 재빨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재료 수급이나 시설 여건이 좋은 철공소는 스킬 랭크를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는 좋은 장소. 사장에게 밉보여 쫓겨나면 자신만 손해다. 모두들 부지런히 망치질을 하고, 제련 작업에 열중했다. 발리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유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골렘 공방으로 발걸음을 옳겼다. 그곳에도 많은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NPC들이었지만, 유저도 적지 않았다. 철공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도 꽤 유명한 유저였다. "제작 공정은 어떻습니까?" "90%까지 완성했습니다. 닷새 후면 '레기온(Legion)' 을 스타더스트 길드에 납품할 수 있습니다." 소장의 말에 발리안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레기온은 발리안 철공소에서 생산하는 거대 인형 병기. 지금 발리안 철공소는 얼마 전에 선보인 거대 병기의 주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장을 크게 확장하고, 일꾼들도 새로 많이 영입했다. "스타더스트 길드가 길드전을 준비 중이라지요? 그때 우리 레기온의 활약을 찍어 두었다가 광고 동영상을 만듭시다." "지그 철공소의 블랙 아이언처럼 말입니까?" "뭐 꼭 그치들처럼 과장 광고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요." 내색은 하지 않지만, 발리안은 광고 속의 블랙 아이언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설마 특급 아이돌을 광고에 동원했을 줄이야. "우리도 연예인에 연줄 닿은 유저들을 찾아보세요. 아니, 연예인 급 미모를 갖춘 아가씨들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이건 좀 별개의 문제인데……." 발리안은 잠시 말을 끊었다. 소장에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끝내 말문을 이어 나갔다. "내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말씁하십시오." "혹시 근래에 로그인을 하니, 천사가 나타났던 적이 있습니까?" "천사요? 예, 있었습니다. 빨리 자격을 갖춰야 토르의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다른 말은 없고요?" "예, 그뿐이었습니다만." 발리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로그인을 했을 때,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대 마지막 자격을 갖추고 별빛을 찾으시오. 그리고 하늘의 문을 열어 토르 님의 시험을 받으시오." 처음엔 왜 천사가 나타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천사의 강림이 그 이전에 나타났던 빛의 기둥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스아크에서 헤븐즈 게이트의 정보가 들어온 덕분이었다. '헤븐즈 게이트. 말 그대로 그게 하늘의 문임에 틀림없어. 누군가가 헤븐즈 게이트를 열었고…….' 그 영향으로 천사가 강림해 뭔가를 일러 주었다. 그러나 개나 소나 다 나타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소장에게 묻기 전에 다른 유저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저렙이나 중렙의 경우엔 그런 일이 없었다고, 고렙 유저들부터 슬슬 언급이 되었는데, 그들도 소장처럼 자격을 갖추란 소리만 들었단다. 다른 것은 언급된 신의 이름뿐이다. 대장장이 유저는 토르, 상인은 디요른,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유저들의 직업에 따라 시험을 주관하는 신들이 다른 모양. '아무튼 난 자격을 거의 갖췄다 이거지?' 그렇기에 천사가 별빛을 찾으라는 둥, 하늘의 문을 열라는 둥의 남들과 다른 조언을 해 줬을 것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손꼽히는 대장장이였기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토르의 시험을 받으러 가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그럼 귀련 님을 능가할 수 있을지도!' 마년 2인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핮디만 분명 귀련에게도 천사가 강림했을 터. 천사가 그녀에게도 남다른 조언을 해 줬을 게 틀림없다. '서둘러야겠군. 일단 도적 길드에 요청해 정보부터…….' 발리안의 부산하게 설치고 있을 때였다. 철공소 밖에서 손님을 대접하던 NPC 직원들이 들어왔다. "사장님, 웬 손님이 오셔서 사장님을 찾습니다." "그래요?" 보나마나 레기온을 구입하러 온 유저일 터. 발리안은 거만한 눈으로 일꾼들을 쓰윽 둘러보다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중년의 외국인 유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훗, 내 레기온의 명성이 벌써 해외에까지 퍼진 건가?' 발리안은 내심 어깨가 으쓱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살펴보던 외국인 유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발리안인가?" "그렇습니다만." 발리안은 상대가 원한다면 레기온의 가격을 최대 10%까지 깎아 줄 의향이 있었다. 첫 해외 수출이니까. 그런데 상대가 원하는 건 레기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아르페디아에서 손꼽히는 대장장리나느 소리를 들었다. 나와 한번 실력을 겨루어 보자!" 외국인 유저가 발리안을 향해 도전젃인 눈빛을 보냈다. 발리안의 표정이 변했다. 실망하던 그의 눈빛은 상대의 이름을 보고 날카롭게 빛났다. '프로인? 테러리스트 프로인!' 발리안도 소문을 들었다. 아르페디아에 와서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폭탄마. 이름 있는 대장장이들을 찾아다니며 행패를 부린다더니, 결국 이곳에 당도하고 만 것인가. '꽤 많인 분탕 쳤다고 들었는데…… 머더러 상태는 아니군.' 죽인 사람이 적은 건지, 아님 머더러 카운터가 풀릴 때까지 어디 숨어 있었던 건지. 곰곰이 생각하는 발리안에게 프로인이 다시 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나와 실력을 겨루자." 프로인이 아르페디아 대륙에 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의 대장장이들을 꺾고 자신이 최고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싫습니다." 발리안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프로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난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다. 네가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최고라 생각하면 나와 대결을 해야 한다." "웨스턴 최악의 머더러겠지요. 난 당신 같은 사람과 쓸데없는 데 시간을 할애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장 나가 주십시오." 발리안의 냉랭한 축객령에 프로인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게 될 텐데?" "남이야 후회하든 말든 신경 끄십시오. 뭐 합니까? 이야기 끝났습니다. 손님 내보내십시오." 발리안의 외침에 양쪽 벽의 비밀문이 열리며 호위 용병들이 들어왔다. "서투른 짓 하면 그냥 베어 버리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철공소 호위 용병들은 랭커는 아니지만, 저마다 한가락 한다고 자부하는 실력자들이다. 발리안도 그들의 실력을 믿고 고용했다. 그리고, '아무리 폭탄마라도 근거리에서 폭탄을 던지진 않겠지.' 자폭은 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주먹만 한 폭탄이 눈앞으로 굴러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사장님을 지켜라!" 당황한 호위 용병들이 방패를 들고 발리안을 둘러쌌다. 심지가 모두 타들어 간 폭탄이 번쩍 빛을 발했다. 펑! 예상과 달리 폭음과 폭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는 발리안과 호위 용병들을 한 치 앞다 못 보게 만들었다. "이놈이 대체 어디 갔지?" "조심하세요. 연기 속에서 총을 쏠지 모릅니다." 호위 용병들은 방패를 앞세우곤 천천히 프로인을 찾았다. 그러나 놈은 응접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따. "도망친 건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엄청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쾅! 콰콰쾅! 콰쾅! 발리안의 안색이 하얗에 변했다. 폭음이 울린 곳은 공방들이 있는 구역이었다. 놀란 발리안은 다급히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불이야! 불!" "지붕이 무너진다, 모두 피해라!" 철공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공방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고, 건물 벽면 하나는 아예 사라지고 없었다. 그 안에서 일을 하던 대장장이들과 일꾼들은 마치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크하하하! 이 프로인의 도전을 거부한 대가다!" 프로인은 불꽃과 검은 연기 속에서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의 광소에 맞춰 연달아 폭발이 일어나고, 철공소의 기둥과 대들보들이 무너졌다.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일꾼들은 거기에 깔려 죽음을 당했다. '이럴 수가!' 테러리스트 프로인. 분명 발리안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놈의 테러에 그동안 대장간을 날려 먹은 유저가 한둘이 아니고, 복수를 하려다 당한 유저들도 부지기수라고. 하지만 자신은 피해 갈 거라 믿었다. 제아무리 폭탄마가 설쳐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공소가 이렇게 무참하게 파괴되다니……. "이, 이, 개자식! 죽여 버리곘어!" 발리안의 차분하던 얼굴이 귀신같이 일그러졌다. 평소에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니 엄청 무서웠다. 주변에 있던 호위 용병들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나와라, 제네시스!" 폭음을 능가하는 발리안의 고함에 레기온 1기가 무너진 철공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제네시스는 철공소 앞에 전시되고 있던 레기온의 시제품. 시제품이라고 하지만 전투 능력은 충분했다. 그리고 제작자이자 조종수인 발리안의 말에 절대 충성했다. "이 미친 폭탄마 자식! 네놈의 뼈와 살을 다져 주마!" 얼마나 힘들게 만든 철공소였던가. 들어간 돈만 해도 2백만 골드가 넘는다. 건설비와 설비값, 일꾼들의 영입 자금과 증축 자금까지. 아니, 그것은 돈으로 말할 수 없는 땀가 노력의 결정체였다. 그 결정체가 미친 폭탄마 녀석의 손에 무너지고 있었다. "제네시스, 당장 저 미친 녀석을……." 탕! 날카로운 총성이 들려오더니 발리안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이마에 정확히 총탄을 적중당한 발리안은 원통하게도 그대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헤드샷을 당했습니다. 부활 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사장님이 당했다.!" "저 망할 놈을 죽여!" 물러서 있던 호위 용병들이 발리안의 죽음에 분기탱천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프로인을 향해 돌격했다. 그런 그들에게 프로인은 아낌없이 폭탄을 뿌리고, 총격을 퍼부었다. "으하하핫! 덤벼라, 아르페디아의 떨거지들아!" 송태수는 요새 한 가지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채린이 여전히 유한과 어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은 물론, 현실에서도.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학교에 갔다 와서 곧장 옷 갈아입고 외출하는 채린을 따라가 봤더니 시내에서 유한을 만나는 게 아닌가. '크아악! 내 이 자식을!'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 유한을 피떡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채린이 곁에 있으니 손대기가 껄끄러웠다. 제 엄마를 닮아 한번 삐치면 물불을 안 가리는 딸내미였다.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는 수밖에. "에잇, 유한이 놈 내일 도장에 오면 다리몽둥이를 확분질러야지."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송태수는 캡슐에 들어가 로그인했다. 꿀꿀한 기분을 사냥으로 풀어 버리기 위해. "대장님, 오셨습니까." 송태수, 아니 길포드의 눈에 낯익은 방과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사무실이었다. 한동안 엘프의 숲 남서쪽에 새로 나타난 '레뮤다' 대륙을 탐험했던 그는 어제 돌아와 이곳에서 로그아웃했다. <쪽지가 왔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응? 쪽지?" 쪽지 확인 안내창이 떠오르자, 길포드는 곧장 쪽지함을 열었다. 이름이 한자로 된 녀석의 보낸 쪽지였다. 쪽지를 꺼내 읽던 길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큭!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군." 쪽지의 내용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길포드 양반. 그대가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제법 잘나가는 전사라는 소문을 들었소. 지금까지 이곳의 숱한 랭커들과 싸웠지만, 하나같이 변변찮은 실력이었소. 그러니 그대가 나 카즈마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 주었으면 좋겠소. 아래에는 시간과 약속 장소가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이 쪽지는 도전장인 셈이다. 길포드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고, 약속 장소도 용병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사무실 한쪽에서 손도끼를 닦고 있던 자칼이 물었다. 길포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잠깐 산보나 좀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럼 다녀 오십시오." 그렇게 길포드는 용병대 사무실을 나섰다. 카즈마는 약속 장소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좀 있으면 길포드라는 랭커가 나올 것이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놈을 무찌를 것이다. '아르페디아에서 나 카즈마의 전설을 만들 것이다.!' 한국 랭커들을 모조리 쓰러트린 최강의 일본 유저가 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후소 대륙을 변경 취급하고 아르페디아를 중심부로 여기는 드림맥스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카즈마는 아르페디아에 넘어와 한국 랭커들과 일대일 긍부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저, 카즈마 님?" 열심이 몸을 풀고 있는 카즈마에게 어쎄신 복장을 한 유저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보니 주변에 꽤 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오?" 카즈마는 슬쩍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혹시 이들이 떼로 덤벼들지 않나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자기네 길드 랭커를 쓰러트렸다고, 감히 쪽바리가 설쳐 댄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물론 카즈마는 그런 녀석들도 모조리 때려눕혔다. "하하, 전 카즈마 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여기 사인좀." 어쎄신 청년은 카즈마에게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카즈마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사인을 해 줬다. 후소 대륙에서도 이런 자들이 꽤 많았다. '후후, 이제 보니 여기 모인 이들도 다 내 싸움을 구경하러 온 거로군.' 구경꾼들에게 적의는 없었다. 한 20명쯤의 랭커들을 거꾸러뜨린 후부터 그를 알아보는 한국 유저들이 꽤 많아졌고, 싸움을 구경하러 졸졸 따라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국적을 떠나 나름 통쾌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들먹거리는 랭커들이 처참하게 박살 나 쓰러지는 모습이 고소하게 느껴졌기에. 카즈마는 멋지게 사인한 종이를 어쌔신 청년에게 건네 주었따. 청년은 기쁜 얼굴로 굽실거리더니, 품속에서 드링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고맙소." 카즈마는 별 생각 없이 병뚜껑을 따고 드렁크를 마셨다.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쿠쿵! 카므나의 저주에 중독되었습니다. HP와 MP, 스테미나는 물론 전 스텟이 절반으로 떨어집니다. '컥! 이것은!’ 카즈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팬의 호의 정도로 생각한 드링크가 독이었을 줄이야! 그는 드링크를 건네준 어쌔신 청년을 노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년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후후, 아무나 주는 걸 넙죽 받아먹으면 안 되지." "너 이놈!" "그건 카므나의 저주라는 극독이다. 로그아웃해도 소용없지." 하이 프리스트 칭호를 가진 성직자의 퓨리파이에 치료가 되지만, 어쌔신 청년은 그런 걸 알려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곧장 카즈마에게 달려들어 자마다르를 휘둘렀다. 카즈마는 황급히 피했지만, 스탯이 떨어진 만큼 몸놀림도 둔해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서둘러 치료를 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이미 반으로 줄어든 HP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카즈마는 황급히 어쌔신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여유 있게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어쌔신에게 소리쳤다. "어떤 놈들이냐! 누가 널 고용했나?" 그는 이 암습에는 배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길드와 유저들이 많으니까. "내가 날 고용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성질나서 너한테 덤비는 거라고, 이 쪽발이 자식아! 니가 감히 이 키라 님을 무시해?" 어쌔신 청년은 바로 검은 초승달 길드의 키라였다. 요새 랭크 순위 변동이 있어서 조금 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는 100위권 안의 랭커였다. 그런데 저 일본 녀석은 처음부터 자신을 깨끗이 무시했다. 키라는 그것이 참을 수 없었다. 마법사라지만 얼마 전엔 랭크 40위대의 철십자 길드장 노벨까지 쓰러트린 자신이 아닌가! "날 무시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해 주마!" 키라는 카즈마에게 달려들어 자마다르를 휘두르고 발차기를 날렸다. 이미 상태가 일반 고렙 수준으로 전락한 카즈마는 필사적으로 키라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카즈마의 HP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떨어졌다. 사실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키라였지만, 최대한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조금씩 HP를 깎아 나갔다. 결국 HP와 스테미나가 바닥에 떨어진 카즈마가 땅바닥에 몸을 뉘었다. "캬캬캬! 이 키라 님이 카즈마를 잡았다!" 키라는 카즈마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고 승리의 V를 펼쳐 보였다. 스크린 샷도 몇 장 찍었다. 나중에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자랑할 속셈이었다. 아르페디아를 어지럽힌 일본인 초고수를 자신이 쓰러트렸다면서. "우우, 비겁하다!" "치사 빤스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유저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아무리 상대가 일본 유저고, 한국 랭커들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자라 해도 이렇게 비겁한 방법을 쓰다니. 알려지면 이건 국가 망신이다. "시꺼! 이게 내 방식이야! 어쌔신이 이런 거 몰라?" 빽 소리를 지른 키라는 자마다르를 치켜들고 카즈마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 캉! 카즈마에게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 달려와 휘두른 검에 키라의 자마다르가 날아갔다. 활들짝 놀란 키라는 자신에게 진득한 살기를 뿌리는 사내를 보았다. "당신은……." "그 발 떼고 물러나지 않으면 죽는다." 폭풍의 길포드. 결투장으로 나온 그는 처음부터 전부 다 지켜보았다. 길포드의 등장에 유저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그와 반대로 키라의 마음은 철렁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사무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가 나타잘 줄은 몰랐다. '설마, 이 쪽발이 녀석 상대가 길포드?' 그럼 자신은 호랑이의 먹이를 가로챈 승냥이인 셈이다. 안 그래도 문제의 호랑이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키라는 곱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 아저씨에게도 갚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무역로 개척 퀘스트 때의. "흥, 그리는 못하겠습니다만." "너 죽고 싶냐?" "내가 당신을 죽여 드리죠!" 키라는 자신만만한 말을 내뱉은 동시에 스텔즈 어택을 날렸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가볍게 후려친 길포드는 번개 같이 간격을 좁히더니 검을 내리그었다. 재빨리 자마다르를 회수한 키라는 그 공격을 막아 냈다. '어라, 검격이 가볍다?' 키라는 놀랐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길포드의 진짜 일격은 반대편 손에 들린 검집에 실려 있었다. 그 검집은 키라의 덕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빠각! "크업!" HP가 좍 떨어지고 안내창에 뭐라고 떠오른 것 같은데, 키라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번갯불이 번쩍인순간, 몸이 붕 떠올랐고 머리부터 바닥에 거꾸로 처박혔다. "안 그래도 깐죽대는 네놈을 한번 손봐 줄 생각이었다." 길포드는 키라를 향해 폭풍같이 손발을 뻗었다. 퍽퍽! 퍼퍼퍽! 당황한 키라는 은신술을 펼쳐 도망치려 했지만, 길포드는 주먹에 레이더라도 달렸는지 숨는 족족 찾아내 쥐어박았다. "커억! 하, 항복! 그만 때리세요!" "어허, 젊은이가 이리 약해서야. 아까 날 죽이겠따는 기백은 어디로 갔누?"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맞은 키라는 그 자리에 대자로 쓰러졌다. "쯧쯧, 젊은 놈이 얍삽해 빠져 가지곤." 키라가 무의식의 방을 헤매고 있는 동안, 길포드는 키라의 주머니를 뒤져 카므나의 저주 해독약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해독약은 나오지 않았다. 나온 거라곤 카브나의 저주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독약과 암기들뿐. "이런, 이거 곤란한걸." 길포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키라를 깨워서 물어보려 했는데, 이놈이 로그아웃을 했는지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흥, 비겁한 조센징 같으니." 그사이 포션을 마셨는지, 카즈마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길포드를 한번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카므나의 저주에 중독된 이상, 대결은 무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카즈마가 돌아보자 길포드가 씨익 웃었다. "나에게 도전장을 보냈으면 승부를 내야 하지 않겠나?" "큭, 이 지경이 된 나를 이기시겠다?" "물론 이대로 널 이겨 봐야 의미가 없지.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길포드는 키라의 주머니에서 꺼낸 카므나의 저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뜨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즈마를 향해 물었다. "이러면 공평하겠지?" 그는 이대로 카즈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채린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이놈을 손봐 줄 생각이었기 때문.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도전한 자를 한 번도 고이 보내준 적이 없었다. "당신도 참 별종이군요." 옅게 웃던 카즈마는 곧장 전투 자세를 잡았다. <두 사람의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죽여도 PK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카즈마의 이번 결투 상대가 길포드였던 거야?" "정말 그런 것 같은데?" 소문을 듣고 더 많은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카즈마는 관중들에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길포드를 주시했다. 그는 길포드가 검을 손에서 놓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슨 짓이오? 당장 검을 드시오." "후후, 너도 빈손인데 내가 무기를 쓸 수 있나."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은 길포드의 말은 광오하기 짝이 없었다. 나름 자신의 명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카즈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감히! 후회하지나 마시오!" 카즈마는 곧장 길포드를 향해 달려갔다. '멍청한 작자. 내가 일반 유저로 보였나?' 카므나의 독에 중독되어 모든 능력치가 반감되었지만, 카즈마는 일본 고무술(古武術)의 유단자였다. 레전드 오브 프론티어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되는 그가 일본 서버의 최강자에 손꼽힐 수 있었던 데는 고무술이 한몫 단단히 했다. 고무술을 익히면서 쌓았던 공수 패턴과 전투에 대한 여러 기술과 지식들은 게임에서도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덕분에 카즈마는 자신보다 빨리 게임을 시작한 유저들 보다 더 빨리 스킬을 익히고 스텟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팔짱을 낀 채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길포드는 정말 가소로워 보였다. "죽어랏!" 게임의 유술가 스킬은 필요도없다.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고무술의 기술을 먹여 줄 생각이다. 눈을 수도로 찌르는 척하면 상대는 움찔하기 마련. 그렇게 당황한 틈에 섬전과 같은 바르기로 달려들어 팔을 비틀고, 다리를 꺾고, 목을 돌릴 것이다. 상대는 자신이 어떻게 당한지도 모르고 사망하게 될 터. '아니, 왜 피하지 않지?' 손끝이 눈을 찌를지도 모르는데 길포드는 피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눈을 찔리겠다는 것인가. "헉!" 외마디 비명을 내빝은 카즈마는 그 자리에 휘청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길포드가 자신의 수도를 낚아채 옆으로 길게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길포드가 다리를 살짝 걸어준 덕분에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크읏!" 카즈마는 몸을 굴리며 길포드에게서 떨어졌다. 재빨리 손을 뿌리쳤으니 망정이지, 잘못하면 잡혀서 제2, 2제3의 공격을 허용할 뻔했다. "오오, 길포드가 선빵을 먹였다!" 구경하던 유저들이 함성을 질렀다. 조금 전 키라 녀석이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분위기가 침체되긴 했지만, 모두들 길포드가 승승장구하는 일본 유저를 꺽어 주기를 바랐다. '실수다. 너무 얕잡아 봤어.' 카즈마는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었다. 상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반격을 펼쳤다. 만약 상대가 다리를 거느 대신 반대편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카즈마는 허리를 튕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길포드를 향해 물었다. "당신도 무술가입니까?" 좀 전 길포드는 걸고 당기는 간단한 동작으로 자신을 제압했다. 간단한 동작이지만, 그 속에 무리(武理)가 담겨 있었다. 무작정 스킬부터 남발하고 보는 사람은 모르는 지식이다. 분명 상대는 현실에서 경험이 있어 보였다. "알고 싶으면 더 덤벼 보던가." 길포드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카즈마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만만찮은 상대라는 건 인정하지만, 오만하게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얕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오." 카즈마는 다시 길포드를 향해 달려갔다. 무술 좀 하나다고 뻐기는 모양인데, 이번에야말로 콧대는 납작하게 해 주겠다 다짐했다. 자신은 일본 고무술의 당대 전승자에게서 직접 배운 몸이다. 진심으로 상대하면 그저 동네 도장에서 수련했을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카즈마는 재빠르게 몸을 날리며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 자신의 허초에 길포드가 반응하자, 그는 재빨리 길포드의 팔을 잡아 메쳤다. '됐다!' 그러나 길포드가 넘어간단 싶던 그 순간, 번개같이 발을 빼 지탱한 길포드는 역으로 카즈마의 팔을 잡고 휘둘렀다. 단순한 완력이 아닌 몸의 탄력을 유효 적절히 이용한 반격이었다. "크악!" 카즈마는 이번에도 땅바닥을 굴렀다. 완전히 중심을 잃고 내다 꽂혔기에, 조금 전보다 피해가 더 컸다. HP 포인트가 한 마디 정도로 뚝 떨어진 것이다. '크으윽! 이런 수모가!' 무정할 정도로 리얼한 게임 덕분에 카즈마는 더욱 심한 굴욕을 느껴야 했다.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 썼고, 입 속에도 텁텁하고 바삭거리는 흙 맛이 느껴졌다. 길포드는 그런 카즈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띠운 미소를 아직 지우지 않았다. "이번에도 날 얕본 거 아닌가?" "크아아!" 발끈한 카즈마는 성난 황소처럼 길포드를 향해 연속으로 살수를 펼쳤다. 자랑스런 고무술의 유단자인 자신이 정체도 알 수 없는 한국 무술가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뭐야? 왜 스킬은 하나도 안 쓰는 거지?" "그래도 굉장한 몸놀림인데?" 카므나의 독에 중독되었지만, 두 사람의 움직임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발걸음이나 동작 하나하나에 안배가 있었고, 유저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꺽기나 메치기 등의 기술이 펼쳐졌다. '쳇! 도댗페 뭐야, 이 괴물은?' 카즈마는 자신이 아는 고무술의 공격디들은 모두 펼쳤다. 그러나 상대는 번번이 자신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고 여유 있게 반격을 날리곤 했다. "에잇! 벽라수(碧羅手)!" 밑천이 드러난 그는 익혀 놓은 게임 스킬까지 사용했지만, 결국 또 한 번 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이럴 수가!' 카즈마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고무술은 후소 대륙에서도 막을 자가 없었고, 아르페디아의 랭커들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자는 마치 자신을 가지고 놀 듯하지 않는가. '고수다. 일반 무술가는 아니야.'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어 보는 것 같은 능력. 카즈마는 멍청한 자신을 자책했다. 얕보지 않겠다 운운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꼴이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항복을 해야 할지도. "이제 공격은 원 없이 했겠지?" 카즈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길포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공격을 해야겠구먼. 난 자네와 달리 타격기 전문이니 조심해야 할 거야." 최근 유한과 채린의 문제로 속을 썩였던 길포드였다. 그래서 어느 놈이든 한 놈만 걸리라고 생각하던 차에 카즈마가 도전장을 보내왔다. "단단히 각오하라고. 내가 요새 기분이 안 좋으니까." "자, 잠깐. 당신은 대체?" 길포드의 정체가 궁금했던 카즈마였다. 대체 어디에서 수도를 하시는 은거기인인지?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하지 않은 길포드는 자신의 별명처럼 폭풍같이 카즈마에게 주먹과 발차기를 퍼부었다. 카므나의 저주에 중독되었을 텐데 움직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크억! 컥! 크아악!" 카즈마는 살벌하게 매섭게 날아와 꽂히는 공격에 전율했다. 게임이라 실제 같은 통증은 느껴지지 않지만, 급소에 사나운 공격이 날아들 때마다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이 아닌 눈과 두뇌가 통증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뭐해? 반격 안 하나? 고무술 배운 거 다 어디 팽개쳤어?" 한동안 아르페디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유술가 카즈마. 그는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Chapter 08 불꽃 대결 불꽃 대결 청해도에서 돌아온 유한은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빳다. 리지스가 주문을 왕창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한은 블랙 아이언의 부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조립하느라 정신없었다. "조립 다 했다! 베르디, 이번엔 네 차례야." "맡겨만 주세요, 브라더." 조립이 완료된 블랙 아이언에 베르디가 강신술 스킬을 써서 영혼을 불어넣었다. 블랙 아이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유한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난 너를 만든 주인이다. 내 명령을 따라라." "예, 주인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블래과 달리 양산품들은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이번에 완성된 녀석도 순순히 유한의 말에 복종했다. -블랙 아이언을 완성하셨습니다. 매우 충성스러워 보입니다. 스킬 경험치 250을 얻었습니다. 또 한 대의 블랙 아이언을 완성한 유한은 어느 정도 실력이 올랐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지그 칭호: 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 제작자, 사장, 엔지니어, 죽음의 상인, 노력가, 헤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직업: 대장장이 레벨: 165 체력(HP): 1,900/1,900 스테미나: 1,700/1,700 마나(MP): 110/110 힘: 165 민첩성: 120 인내심: 142+10(투사의 슈즈) 지식: 103+15(기술관의 관복) 행운: 110 솜씨: 215+15(기술관의 관복) 명성: 23,000 공격력: 185+186(마이티 소드+와이어 건틀렛+투사의 슈즈) 방어력: 165+118(투사의 슈즈+기술관의 관복+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5,000/28,000 돈: 2,580,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2랭크 벌못 스킬 5랭크 채굴 스킬 2랭크 채석 스킬 4랭크 제련 스킬 2랭크 생산 스킬 2랭크 합금 스킬 3랭크 정밀 조립 스킬 2랭크 수리 스킬 2랭크 주물 스킬 3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쇼크 웨이브 7랭크 선동 스킬 8랭크 수리 성공률 79%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2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3랭크 [공장 기계 스킬] 선박 가공 스킬 6랭크 용접 스킬 7랭크 절단 스킬 7랭크 천공 스킬 7랭크 압력 가공 스킬 6랭크 '생각보다 많이 올랐군.' 블랙 아이언을 게속해서 만들다 보니 스탯뿐만 아니라 스킬들도 전반적으로 1단계씩 올라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한이 일반 무구 생산이나 유저들을 상대로 한 무기 수리에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틈틈이 핸드메이드(Handmade) 지그표 무구를 생산하기도 했고, 일정 시간에 맞춰 단골들에게 수리를 해 주기도 했다. "지그 님, 그 소식 들었어요?" 한창 바스타드 소리를 수리하고 있는데, 입이 간질간질했던 검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뭘요?" 유한이 대꾸하자 상대는 입에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그 일본 유술가 있잖아요? 카즈만가, 가자미인가 하는 녀석. 그 녀석 이번에 길포드 꼰대한테 걸려 아주 박살이 았답니다." "그래요?" 간만에 길포드가 한 건 한 모양이다. 다 유한이 약을 올려놓을 탓이었지만, 뒷사정을 모르는 그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들었다. "어제 제 친구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보고 동영상으로 녹화했는데요. 정말 가관도 아니었대요. 나중에 일본 녀석이 살려 달라고 싹싹 빌었다고 해요."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살려 달라고 싹싹 빌 정도였다면 길포드가 어지간히 괴롭힌게 아닌 모양이다. "나중에 공식 홈페이지 가서 동영상 한번 보세요." "그러죠." 유한이 다시 작업에 집중하려고 할 때 개인 작업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유한은 하마터면 망치를 미끄러트려 바스타드 소드를 부숴 먹을 뻔했다.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옌스인 줄 알았는데, 리지스였다. "지그야, 큰일 났어!" "왜? 드림맥스가 망한데?" "그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던 리지스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발리안의 철공소가 망했어!"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르페디아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돈이 많은 녀석이 아닌가. 더구나 요새 레기온인지 뭔지를 거대 길드들에 팔면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고 들었건만. "그 폭탄 테러범 있잖아. 그놈이 이번엔 발리안의 철공소를 죄다 날려 버렸대." "진짜냐?" "그래, 공식 홈페이지에서 지금 스샷이 떴는데 난리도 아니야." 폭탄 테러라는 무시무시한 사태가 벌어졌음에 불구하고, 리지스는 씩 웃고 있었다. 지그와 동업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발리안의 철공소는 경쟁 대상이었다. 그것이 이번에 홀랑 날아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유한도 잠시 로그아웃을하고 나와 공식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글을 보니, 스샷에 처참하게 불타고 무너진 철공소와 정신 줄을 놓고 있는 발리안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유저들이 리플이 이어졌다. -잎흔겅듀: 아이고 우리 발리안님 불쌍해서 어쩌냐.ㅠㅠ -팅커벨: 아놔, 프로인 이 시키 누가 좀 잡아 족쳐여! -니그랏토: 드림맥스 유저를 다 죽일 것이다. -한배달쥬신: 허무의 종족 꼴라짱에 대해 아십니까? -폴커: 윗분들 화제에 집중합시데이. "어때? 보고 왔어?" 유한이 재접속하자 리지스가 냉큼 말을 건넸다. 그러나 유한이 좋아할 거라 생각한 그녀의 예상과 달리 유한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발리안 녀석 불쌍한걸."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돈 많으니까 금방 재건할 거야." "인마, 그건 돈이 문제가 아니야." 유한은 같은 대장장이었기에, 아니 당해 본 적이 있기에 지금 발리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누군가의 잔인한 폭력과 유희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아마 발리안의 지금 심정은 바츠를 해킹당했을 적 자신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린 지금의 회기를 살려야 해. 발리안 철공소에 거대 병기를 주문했던 길드들이 주문을 취소하고 있다니까 이틈에 우리 블랙 아이언을……." "으아악! 도망쳐!" 갑자기 들려온 비명이 리지스의 말을 묻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가스톤이 이곳에 광산 마을을 세운 뒤로는 근방에 몬스터가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필드 보스라도 기어들어 왔나?' 그런 유한의 생각은 갑자기 들려온 폭음에 사라져 버렸다. 쾅! 콰쾅!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가 보니, 옌스와 철공소 단골들이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자는 프로인. 유한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켜라, 너희들을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닥쳐! 이 알 카에다 같은 자식! 넌 오늘 내 손에 죽을줄 알아!" 옌스가 성난 고릴라처럼 펄펄 뛰었다. 마침 채린을 찾아왔던 에이린이 폭탄 파편에 맞았다. 살짝 스쳐서 피가 난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절대 용납할수 없는 옌스였다. "사이좋게 반 동강 내 주마, 대ㅡ!" 타앙 ㅡ! 옌스가 미처 스킬을 쓰기도 전에 프로인이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옌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냐? 누가 날 방해했나?" 프로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처음 그는 옌스의 머리를 쏠 셈이었다. 헤드샷으로 한방에 죽일 속셈.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돌을 던졌고, 덕분에 총알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내가 했다. 당신이 프로인인가?" 유한이 앞으로 나서자, 프로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바로 대장장이 지그로군." 프로인은 대장장이 차림 덕분에 유한을 알아보았다. 그저 실력만 좋은 대장장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들관느 다른 베짱이 넘쳤다. 지금까지 만난 대장장이치고 이런 놈은 없었다. "용건이 뭐요?" "나는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다. 나와 한번 실력을 겨뤄 보지 않겠나?" 프로인은 상대의 대답 여하에 따라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이 녀석에게도 화염지옥을 보여 줄 셈이었다. 발리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좋습니다. 어디 한번 겨뤄 보죠." "이봐, 후손!" 블랙이 뒤에서 펄쩍 뛰었다. 눈앞의 정체불명의 상대는 상당히 사이한 기운을 흘리는 자였다. 그런 자가 과연 제대로 실력을 겨루려 하겠는가? "지그 님, 안돼요. 저놈 굉장한 악질이라고요!" "네,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단골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유한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의외라는 눈빛을 보이는 프로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근데 당신 나와 겨룰 만한 실력이 되는지 모르겠군." 한마디로 실력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 프로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다. 자신에게 이런 망언을 하는 녀석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무섭게 유한을 쏘아보던 프로인은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큰소리 칠 정도인지 어디 한번 볼까?" 그리하여 유한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와 맞붙게 되었다. 아르페디아의 모든 대장장이들을 대표해서 말이다. 대결을 하기로 한 유한과 프로인은 장소를 옮겼다. 바로 연못이 있는 숲 속의 공터였다. 유한은 일꾼들을 시켜 그곳에 2개의 고로와 모루 등 작업 도구를 가져다 놓도록 했다.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라도 있나?" 프로인이 궁금해 물었다. 처음 대결 장소를 따로 잡자고 한 건 유한이었다. 장소는 아무 곳이나 상관없었던 프로인은 동의해 주었고. "내 철공소에선 당신이 불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뭐가 문제지?" "당신이 내 철공소를 날려 버릴지 모르니까." "크크큭, 그렇군." 프로인은 이 영악한 코리안 꼬마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여차하면 철공소를 박살 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철공소와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자릴 잡았다. 뭐 상관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깟 철공소쯤은 언제든 박살 낼 수 있으니까. "그래, 무엇으로 나랑 대결할 텐가?" "장소는 내가 잡았으니, 종목은 아저씨가 정하죠." '흥, 뭐든지 자신 있다는 건가?' 유한의 오만함이 거슬렀지만, 프로인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코를 납작하게 해 준 다음 불지옥을 경험하게 해줘도 늦지 않으니까. "좋다. 그럼 대결은 제련으로 하자. 제련이야말로 대장장이의 기본이니까." "제련 좋죠. 재료는 철입니까?" "그래, 가장 우수한 강철을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프로인은 강철 제련에 자신이 있었다. 질 좋은 강철을 만드는 일은 건 스미스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강철의 질이 좋아야 총신의 화약의 폭발력을 충분히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 스미스들은 일반 대장장이들보다 강하고 순도 높은 강철을 만들어 낸다. '난 그런 건 스미스 중에서도 최고다, 애송아.' 프로인은 먼저 작업을 시작하는 유한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는 여유 있게 제련을 시작했다. 작업 도구는 웨스턴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프로인은 빈고로에 숯을 다져 넣고 철광석을 넣은 다음 땔감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유한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풀무질을 하기 시작했다. "와! 시작했다. 시작했어." 근처 수풀 속에는 대결을 지켜보려 온 유저들이 있었다. 유한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단골과 소문을 듣고 온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물론 폭탄마의 악명 덕분에 감히 접근을 시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기를 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누가 이길까?" "지그 님이 이기는 데 백 골드." "하지만 상대는 유럽 서버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들었어. 귀련 님 정도의 실력자가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그 님이 이겨!" 모두들 유한이 이기기를 바랐다. 이겨서 저 폭탄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기를. "구경꾼이 꽤 많이 몰려왔군.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겠는걸." 프로인은 잠시 풀무질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던 유한은 그에게 퉁명스럽게 답했다. "댁이 게으름을 피는 이점이 더 클 것 같은데요." "후후후, 걱정 마라. 풀무만 죽어라 밀고 당긴다고 좋은 철이 얻어지는 건 아니니까." 프로인은 인벤에서 뭔가를 보란 듯이 꺼내 들었다. 기름종이에 곱게 싸인 검은 가루, 그것은 바로 그에게 폭탄마의 악명을 떨치게 해 준 화약이었다.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 비겁하게 날 암살하려고요?" "그럴 리가. 화약은 평화적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 그러면서 프로인은 화약 가루를 고로 속으로 집어 던졌다. 화약 가루가 던져질 때마다 고로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철을 제련하는 덴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이렇게 화약을 뿌려 주면 손쉽게 고온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지." "그게 당신 비법인가요?" "웨스턴에 건 스미스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중요한건 화약 재료의 비율이다. 작업 용도의 화약을 제작하려면 재료의 비유을 잘 맞춰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뻥! 폭발이라 이거군요." 프로인이 자신하고 화약을 던지는 걸 봐서 제련에 적합한 화약의 재료 비율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유한이 덤덤히 바라보고 있자 프로인은 입맛을 다셨다. "뭐야, 좀 부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왜 그래야 하죠? 나도 비슷한 게 있는데." 유한은 피식 웃으며 고로에 초열탄을 집어넣었다. 둥그런 초열탄이 들어가기 무섭게 유한의 고로 불꽃도 거세게 피어올랐다. "훗, 이건 예상 밖인데." "나도 화약을 그런 식으로 쓸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유한은 적잖게 긴장했다. 초열탄으로 가볍게 이길 줄 알았는데, 상대에게 그런 비법이 있었을 줄은. '그래도 내가 이긴다!' 휴안은 갈리가 가르쳐 준 드워프의 기술을 믿었다. 제아무리 웨스턴 건 스미스들의 기술이 뛰어나다 한들, 강철의 종족인 드워프의 제련 기술보단 뛰어나지 않을 것이다. "슬슬 철이 흘러나오는군." 유한과 프로인은 재빨리 흘러나오는 철을 틀에 받아 식히고, 그렇게 생산된 철들을 다시 한 번 제련해 강철로 만들어 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만든 강철이 벌겋게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강철은 차차 식어 가며 둔한 빛을 발했다. 불순물이 거의 없는 극상의 강철이었다. "잘 만들었군요." "너도 대단하군. 근데 심사는 누가 하지?" "적합한 사람이 있죠. 갈리 님!" 유한의 부름에 수풀 속에서 갈리가 걸어 나왔다. 폭탄마가 뭔지 몰라도 조수가 대결을 한다니 구경 나왔던 것이다. 갈리를 본 프로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드워프인가?" "웨스턴에도 있습니까?" "아니, 아르페디아에 와서 처음 봤지. 철의 종족이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그러면 심사 위원으로 제격이겠군." 그리하여 갈리가 심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제련한 강철을 유심히 살펴보고 또 망치로 두들겨 보았다. 심지어 냄새를 맡거나 혀를 데 보기도 했다. "어뜨뜨뜨뜨ㅡ" 아직 덜 식은 강철에 혀를 대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프로인은 그 꼴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웃지 마, 이놈아! 난 공정한 심사를 하려는 거란 말이다!" "그럼 공정하게 판결을 내 보시지." 프로인의 말에 갈리는 유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그의 승리다." "아싸!" 좋아하는 유한과 달리 프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갈리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유한의 승리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설마 동료라고 편든 건 아니겠지?" "날 뭘로 보는 거냐! 난 붉은 수염 일족의 갈리다! 내가 이런 일에 공정성을 잃을 것 같나!" 그렇게 일갈한 갈리는 곧장 유한이 승리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둘 다 강도와 연성에 별 차이 없지만, 프로인 자네가 만든 강철은 황 성분이 많더군." 프로인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련에서 인과 황의 비율을 얼마나 낮추느냐에 따라서 철의 질이 좌우되기 때문. '제길, 그렇군. 화약을 써서…….' 곰곰이 생각해 본 프로인은 자신이 패배한 이유를 알았다. 고로의 온도를 높이려고 화약 가루를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강철의 순도에 영향을 끼쳤던 모양이다. 화약에 들어가는 중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황이었으니까. "크윽, 질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 "나도 질 거라곤 생각 안 했습니다. 자, 볼일 다 끝마치셨으면 이제 그만 가시죠." 유한의 당당한 언사에 프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제련이 비록 기본이라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대장장이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나? 다른 스킬로도 겨뤄 봐야지." "음, 삼세판이라 그거죠,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합의를 본 유한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두 번째 시함을 치르기로 했다. 두 번째 시합은 합금 대결이었다. 제련 다음으로 대장장이에게 중요한 기술이 바로 합금이었기 때문. 공평하게 주어진 재료들을 가지고 최고의 니켈 합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승자가 되기로 했다. 치이익! 치익! 화르륵 ㅡ! 유한은 지금까지 읶힌 모든 합금 노하우를 동원해 나름 최고의 니켈 합금을 만들어 냈고, 프로인도 웨스턴에서 쌓은 합금 기술을 총동원해서 시합에 임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만든 합금이 갈리의 앞으로 제출되었다. 한번 쓱 둘러본 갈리는 볼 것도 없다는 듯, 프로인의 손을 들어 주었ㅋ다. "프로인 승!" "후후후, 역시." 분하지만, 유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인의 니켈 합금은 자신이 봐도 훌륭했다. '합금 스킬 3랭크 정도론 무리였나?' 프로인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유럽 서버 최고의 대장장이라 일컬으니 적어도 1랭크 이상은 될 것이다. 제련은 나름 갈리에게 배운 비법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지만 합금에는 그런 게 없었다. 이러다가 마지막 한 판도 져서 역전패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결과가 못마땅하지는 않나?" "내가 댁인 줄 압니까?" 진 건 진 거다.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 시합에 집중하는게 낫다. 아직은 1:1 상황이니까. "후후후, 그럼 기권하는 건 어때?" '아윽! 한 판 이겼다고 아주 기가 살았구만!' 유한은 속에서 분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수풀속에서 유저들이 응원을 보내 주고 있었고, 아르페디아의 모든 유저들이 프로인의 콧대를 꺾기를 원하지 않는가. "세 번째 시합은 생산 대결로 하겠다." 시합 종목이 결정되자 갈리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양, 똑같은 질의 강철괴와 합금을 나줘 주었다. "만들어야 할 것은 방패.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동원해서 최고의 방패를 만들어라. 크기는 가로세로 30cm를 넘어선 안 되고, 두께는 1cm를 넘어선 안 된다. 이 점을 반드시 지키도록." 갈리의 말이 끝나자 프로인은 대결이 완전히 끝났다는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건 스미스라면서요. 방패도 자신 있습니까?" 유한은 내심 불안했는지 프로인을 떠보았다. "물론이지. 뛰어난 건 스미스는 방탄 실드도 만든다." '오, 마이 갓!' 유한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총알도 막는 방패를 만드는 작자에게 이길 수 있을까. 더구나 적의 수준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 무력뿐만 아니라 실력에서도 단연 톱으로 꼽히는 상대다. '대체 뭔 수로 방탄 실드를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지?' 총알도 막는 방패에 견줄 물건이 있을까. 유한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무적의 방어구를 떠올리다 보니 생각나느 게 있었다. 그는 갈리가 준 강철괴 중 일부를 고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주물 틀을 가져와서 진흙을 퍼 담고, 나무를 깎아 모형을 만들었다. "훗, 주물 스킬을 이용해 방패를 제작하려는 건가?" 옆에서 프로인이 비웃었지만, 유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완성된 주무 틀에 쇳물을 부어 뭔가를 만들어 냈다. "저게 뭐지? 방패의 일부분인가?" "두께 1cm를 넘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두꺼운걸." "그런데 왜 합금은 사용하지 않는 거야?" 채린을 비롯한 친구들은 유한이 이상한 것을 만드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프로인은 열심히 강철괴와 합금을 달구고 두들겨 방패 모양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유한은 아직 방패 같은 것은 만들지도 않았다. 프로인도 유한의 그런 행동이 의문스러웠는지 말을 건냈다. "꽤 꾸물대는군. 대체 뭘 만들려는 거지?" "연장이 하나 더 필요해서 그걸 만드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과 재료를 쪼개 주물 작업을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유한이 원하던 연장이 만들어졌다. 연장이 만들어지자 유한은 서둘러 남은 강철괴와 합금을 달구고 두들겨 열심히 강판을 만들어 냈다. "좋아! 이제 이 연장을 쓸 차례다!" '대체 무슨 연장인 거야?' 대장장이로서 흥미가 생긴 프로인은 잠시 손을 놓고 유한의 작업을 훔쳐보려 했다. 그러나 유한이 등을 지고 작업을 하는 통에 자세하게 볼 수가 없었다. 뭔가 일반 망치 소리와 다른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올 뿐. "시간 됐자. 완성품을 제출해!" 갈리가 망치를 두들기며 외치자, 유한과 프로인이 냉큼 완성한 방패를 내놓았다. 프로인의 방패는 직사각형 모양에 가장자리가 살짝 휘어진 방패였고, 유한의 방패는 둥그렇고 불록한 모양의 라운드 실드였다. "그게 방탄 실드입니까?" "그래, 그에 비하면 네 방패는 너무 평범한 것 같군." 유한은 포로인의 조소를 무시해 버렸다. 갈리는 먼저 줄자를 꺼내 두 방패의 크기를 검사해 보았다. "흠, 크기나 두께는 양쪽 모두 어기지 않았군." 모두 치수가 30cm 미만에 두께도 1cm를 넘지 않았다. 프로인은 시간이 남아돌았는지, 표면에 얇게 음각을 파서 멋진 야생마의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러나 드워프인 갈리는 인간의 예술 따윈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방패를 들었다 놨다. 이리저리 두들겨 보다가 말했다. "방어력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직접 테스트를 해 보지 않는 이상 강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던 모양. "그러면 이걸로 하지." 프로인이 인벤에서 부싯돌 권총 2자루를 꺼냈다. 흠칫 놀라는 유한을 보고 그는 비웃음을 지었다. "놀라지 마라. 이건 빈총이야. 아직 장전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기름종이 뭉치 2개를 꺼냈다. 그 안엔 화약과 총알이 함께 들어 있었다. 프로인은 먼저 총구에 화약을 붓고 기름종이에 돌돌 만 총알을 넣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지, 권총 아래에 꽂혀 있던 쇠막대기로 눌러서 쑤셔 넣었다. '대발 사부 말대로구나.' 유한은 장전 과정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예전에 곽대발에게 들었던 대로 구식 총을 장전이 느렸다. 아니, 과정이 많아 몹시 불편해 보였다. 장전 작업이 끝난 다음에도 화약 접시에 또 한 번 곱게 간 화약을 붓는등 시간이 걸렸다. "화약 량과 총알은 똑같다. 고로 위력은 동일하지. 같은 거리에 방패를 놓고 쏘아 보면 누구의 것이 더 좋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갈리는 30m 정도 떨어진 나무에 2개의 방패를 걸어 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프로인은 먼저 자신의 방패를 겨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은 멋지게 방패에 틀어 박혔다. '뭐야, 튕겨 내지도 못했잖아?' 프로인이 하도 자신만만해 하기에 방패에 기스도 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총알엔 장사가 없는 모양. 프로인은 권총을 바꿔 들고 이번에는 유한의 방패에 총탄을 날렸다. 타앙! 이번에도 총알은 방패에 명중했다. "자, 그럼 방패의 상태를 볼까?" 갈리가 방패를 갖고 와서 탄흔을 살펴보았다. 먼저 본 것은 프로인의 방탄 실드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총알은 방패를 반 정도 뚫고 박혀 있었다. "이게 내 방탄 실드의 위력이지. 좀 더 거리가 멀면 이런 식으로 박히지도 않아." 유한이 만든 라운드 실드도 총알이 박혀 있었다. 프로인의 방탄 실드만큼 방어력이 우수했던 것. "이거 예상외로군. 그럼 이번은 무승부인가?" "아니, 지그의 승리다." 갈리의 판정에 프로인은 발끈하고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두 방패의 방어력은 똑같잖나!" 갈리는 프로인에게 두 방패를 건네주었다. 양손에 방패를 하나씩 들어 본 프로인은 흠칫 놀랐다. 유한이 만든 라운드 실드가 자신의 방패보다 훨씬 가벼웠다. "어, 어째서? 이건 말도 안돼!" 프로인이 봤을 때 두 방패의 두께는 똑같았다. 똑같은 재료를 사용했는데 어째서 지그란 놈의 방패가 훨씬 더 가벼운 걸까. '설마!' 프로인은 지그가 작업했던 모루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방패를 만들고 남은 재료들이 남아 있었다. 유한이 남긴 재료의 양은 프로인이 남긴 양과 비슷했다. 아니, 연장을 하나 더 만들었으니 자신보다 더 적은 양의 재료를 쓴 셈이다. 더 적은 재료를 썼으니 가벼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떻게 방어력을 높인 것일까? "이건 사기야!" "사기가 아닙니다. 남다른 비법이 있을 뿐." 유한은 라운드 실드에 박힌 총알을 빼냈다. 프로인은 총알이 박혀 깨진 자리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강판의 내부 구조를 본 프로인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철판을 구겨서!" 프로인이 본 것은 주름 철판이었다. 유한은 라운드 실드를 만들 때 주름 철판을 사용했다. 주름 철판은 귀련이 배를 폴로 대회 당시 가우리 길드에 만들어 준 갑옷의 소재로, 화살과 중병기의 타격을 튕겨 낼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유한은 그 제작법을 귀련을 찾아갈 때 배웠다. 방패 제작 전에 주물로 만든 연장은 바로 그 주름 철판을 만드는 특수 연장이었다. "그런가. 이게 방어력과 경량화를 높인 원인인가?" 프로인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만든 주름 철판에 유한은 즉석에서 자신의 지식을 가미했다. 2개의 알반 철판 사이에 주름 철판을 끼워 넣어 골판지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도가 같은 두께의 철판보다 훨씬 강해질 거라 믿었다. 그런 강판 3개를 겹쳐 만든 방패가 '지그표 방탄 실드'. 성능은 나타난 바와 같았다. '멍청하게…… 지금까지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 유한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귀련에게서이 철판 제작 기술을 배웠을 때만 해도 널리 사용하자 했었는데. 뭐 이제부터라도 널리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번 대결은 2:1로 지그의 승리다." 갈리의 판정 선언에 유한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이들도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대장장이 지그 만세!" "만만세!" 제멋대로 날뛰던 폭탄마의 콧대가 납작해졌다. 숲 속에 대장장이 지그의 이름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대단하구나. 조수야. 나도 네가 이길 줄 몰랐다." 갈리의 축하에 유한의 어깨가 으쓱했다. 웨스턴 최고라는 대장장이를 쓰러트렸다. 그것도 순수하게 대장장이 스킬을 겨뤄서 말이다. '사실 남들 덕이 컸지.' 제련 시합은 갈리가 가르쳐 준 초열탄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생산 시합은 최고의 명장 귀련의 주름 철판 덕분에 승리했다. 그들에게 배운 바가 있었기에, 프로인에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히든 피스들을 얻어 낸 것은 다 그만큼 유한이 모험을 하고 사람들을 사귄 덕분. 대장장이라고 마냥 대장간에 들어앉아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크크크, 이거야 원. 이렇게 망신을 당할 줄은 몰랐는걸."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프로인이 갑자기 웃었다. 그의 기묘한 웃음에 모두의 환호성이 뚝 그쳤다. 경계심이 생긴 것이다. 저 미친 폭탄마가 무슨 짓을 할지 알수 없었기에. "지그라고 했나? 너 정말 대단하군. 솔직히 귀련 말고는 날 패배하게 만들 녀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많을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승부를 받아 주지 않더군." 그런 건방진 녀석들에게 폭탄 맛을 보여 줬다. 유한도 거절했으면 같은 꼴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거야 댁이 인덕이 없어서겠죠." "말조심해라, 꼬마야. 발리안 이전에 네가 먼저 날아갈수 있었다." 사실 프로인은 이전에 유한의 철공소를 찾아왔었다. 그러나 마침 유한이 청해도에 가 있었던 덕분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그러웠기에 네 철공소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거다." "당사자 앞에서 부실 속셈은 아니었습니까?" 정곡을 찔린 프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유한의 말이 맞았다. 당사자 앞에서 그가 가진 것을 파괴하면 몇 배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잠시 말을 끊었던 프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웨스턴 최고의 건 스미스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뭔지 아느냐?"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유한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예상기 갔기 때문이다. 역시 프로인은 유한이 예상한 답을 내뱉었다. "바로 나보다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들을 없애 왔기 때문이다." 저격을 하기도 하고, 폭탄을 던져 공방을 날려 버리고도 하면서. 그런 식으로 유럽의 실력 있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줄줄이 접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이젠 아르페디아의 대장장이들을 접게 만드시겠다?" "잘 아는군. 넌 역시 영리한 꼬마야." 프로인은 곧장 총을 꺼내 유한을 향해 겨냥했다. 그리고 막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 뭔가 날아와 총에 부딪쳐 터졌다. 그것은 물풍선이었다. 그 물풍선을 던진 사람은 다름아닌 유한. "화약은 물에 젖으면 소용없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이 자식이!" 프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빨리 대응을 할 줄은 몰랐다. 보통 유저들은 총을 겨누면 얼어서 꿈쩍도 못하거나 도망치기 바빴는데.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마주쳤다면 유한도 그랬겠지만, 그에겐 조언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상대가 총을 들었다고 절대 쫄면 안돼. 폭음과 연기에 놀라지 말고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다." 존경하는 대발 사부는 그리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한은 쫄지 않았고, 냉정하게 대응했다. 맨 먼저 한 것이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는 것. 상대가 가진 힘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것을 봉쇄하는 일이다. "총이 흠뻑 젖은 것 같은데 발사가 될지 모르겠네요." "망할 자식!" 프로인은 곧바로 인벤에서 다른 총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총을 꺼내는 족족 유한이 물풍선을 꺼내 던져 적셔 버렸다. 폭탄마가 날뛴다는 동영상을 보고 나름 대응 방안으로 미리 만들어 둔 것인데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물풍선에 맞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는 프로인의 모습이란. "잡아라!" "이 기회에 아주 아작을 내 놔야 해!" 프로인이 총을 들고도 아무 짓도 못하는 걸 본 유저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여기서 놈을 잡아 한국 유저들의 복수도 하고, 명성도 높일 속셈이었다. "제길, 꽁무늬를 빼는 것도 오랜만이군." 프로인은 일단 등을 돌려 달아났다. 그리고 쫓아오는 유저들에게 폭탄을 선물했다. 툭! 데구르르! 폭탄이 굴러오자 유저들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유한이 하는 것을 본 바가 있기에 유저들은 재빨리 대응했따. "운디네여, 심지를 꺼 버려라!" 정령술사 유저가 불러낸 운디네가 가볍게 폭탄을 무력화시켰다. 프로인은 연속으로 폭탄을 던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프로인은 폭탄만 낭비하고 도주해야 했다. "프로인 이 자식 어디 갔어?" "저쪽으로 간 것 같은데." 도망치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프로인은 유한을 향해 이를 갈았다. "날 이 지경에 빠트리다니, 톡톡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유저들을 따돌리기 위해 대부분의 폭탄을 써 버렸다. 다행히 화약과 총알은 충분히 남아 있어 재빨리 인벤토리에 든 총을 재장전했다. 그의 인벤토리에는 다해서 50자루의 총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주위가 좀 조용해진다 싶자 그는 철공소를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옳겼다. 망할 코리안 꼬마의 철공소를 날려 줄 생각이었다. 놈이 보고 발악하도록. "어딜 그리 가십니까?" 그런데 프로인의 앞에 유한이 불쑥 나타났다. 프로인이 철공소를 노릴 거라 예상하고 먼저 지름길로와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인은 방아쇠를 다익려 했지만, 유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손바닥으로 쳐서 총구를 하늘로 들어 올린 뒤 팔꿈치로 프로인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크윽!" 프로인은 곧장 근접전에 유리한 권총으로 바꿔 쥐었다. 그러나 그사이 유한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프로인은 오른쪽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냐?" 곧장 그쪽으로 총을 쏴 됐지만, 아무것도 맞지 않았따. 이번엔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인은 다시 총을 쏘았지만 잡힌 것은 지나가던 오크였다. "크아악! 어디 있느냐, 이 쥐새끼 같은 놈아!" 프로인은 사방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빨리 철공소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또 어디서 튀어나와 기습을 할지 모르기에. 한참을 난사한 후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오자 프로인은 그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장전한 총을 다쏘고도 몰랐던 탓이다. 당황하는 프로인에게 유한의 빈정거리른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 쐈습니까? 큰일이네요.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릴텐데." 유한은 한자리에 계속 숨어 있었다. 그저 돌을 던지며 소리를 유발했을 뿐. 프로인이 총을 다 쏜 것을 확인하자 유한은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프로인이 소매 속에서 아주 작은 총을 꺼내 드는 게 아닌가. "애송이 녀석! 너 같은 놈 때문에 이런 걸 남겨 뒀다!" 그러나 프로인 회심의 일격은 유한이 들이민 방패에 가로막혔다. 좀 전에 만들었던 지그표 방탄 실드였다. 지근거리였지만, 총이 작은 만큼 위력도 형편없었다. "또 남은 거 있습니까?" "망할!" 급한 마음에 화약을 꺼내 재장전하려던 프로인은 물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돌아보니 시커먼 로봇 같은 게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살기등등한 유저들이 잔뜩 진을 친 상태였다. 다들 엉뚱한 곳에서 프로인을 찾고 있다가 총소리를 듣고 이리로 달려온 것이다. "내 손을 더럽히기 싫으니, 그대들이 알아서 하도록." 블랙이 비켜서자, 유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가하기 시작했다. 발길질을 하고 무기를 휘둘렀다. 퍽퍽퍽! 프로인은 장전은 커녕 반항할 틈도 없이 죽었다. 프론인이 죽어서 사라지자, 유저들은 이번엔 근처 부활 포인트로 달려가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부활하자 인정사정없이 밟아 댔다. "크아악! 그만 해라, 코리안들아!" "그만 하긴 뭘 그만 해, 짜식아!" 그런 식으로 프로인은 죽고 또 죽었다. PK가 되어 머더러가 되는 유저들이 속출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다구리가 계속되자 프로인은 접속을 끊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접속했다. 악바리같이 공격하던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흥, 근성 없는 코리안들.' 그러나 참을성 없는 한국인 유저들은 부활 포인트를 아주 깊숙이 파헤쳐 놓고 갔다. 이 구덩이에서 프로인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누, 누구 없어? GM! GM 소환!" 그러나 무정하게도 아무도 우지 않았고,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보던 GM 조차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자, 최악의 테러리스트 프로인은 머나먼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캐릭터를 접어야할 위기에 빠졌다. 마노스 제국의 철십자 길드 사무실. 그곳에서 베히모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로인과 카즈마가 실패했다고?" "예. 카즈마는 폭풍의 길포드한테 박살 났고, 프로인은 대장장이 지그한테 졌다고 합니다." "쳇, 멍청한 자식들." 베히모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신대륙이 연결되고 갑작스레 두 유저가 나타나 아르페디아에 깽판을 놓기 시작한 데는 철십자 길드, 정확히 말해서는 베히모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철십작 길드는 아르페디아 대륙을 잘 모르는 두 유저에게 랭커들의 위치와 실력 좋은 대장장이들의 명단과 소재지를 쪽지로 알려 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카즈마와 프로인은 이 정보를 매우 감사히 이용했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제 잘났다고 날뛰던 녀석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았으니 된 거 아닙니까?" 찰스턴 공방전에서 유저들의 단합된 힘을 뼈저리게 느낀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는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외 유저를 이용했다. 그중에서도 베레타 공화국에 거대 골렘을 만들어 준 대장장이 녀석들을 내버려 둘 수 업었다. 복수도 복수지만, 앞으로 놈들이 거대 병기르를 만들어 팔면 철십자 길드의 행보에 지대한 방해가 될 테니까. "지그 놈의 명성만 올려 주다니. 바보 같은 프로인 자식." 베히모스는 프로인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가,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그 미케니아 녀석들은 아직 찾지 못했나?" 뇌제의 무덤에서 놈들과 충돌한 후 철십자 길드의 회수대와 미케니아의 잔당들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었다. 대륙을 제패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뇌제의 홀이 필요했고, 뇌제의 무덤을 열기 위해서는 놈들이 빼앗가 간 반크의 열쇠가 꼭 필요했다. "그, 그게 회수대의 보고로는 엘프의 숲 근방에서 놈들의 종적을 놓쳤다고 합니다." "엘프의 숲 근방이라고?" 베히모스는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놈들이 엘프의 숲에 들어갔으면 추적하기가 곤란해진다. 엘프으 ㅣ숲은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정령과 친화도가 있는 유저들만 들여보내 주는 것이다. 철십자 기륻에는 정령 친화도가 높은 길드원이 몇 안된다. 놈들이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지 못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놈들을 잡으라고 해! 한 날 내로 뇌제의 홀을 가져오지 않으면 길드에서 모두 추방시켜 버린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부하는 서둘러 회수대의 대장에게 쪽지를 보내 베히모스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길! 내 주위에는 하나같이 병신들뿐이군."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베히모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Chapter 09 엘프 숲의 위기 엘프 숲의 위기 테러리스트 프로인을 이겨 다시 한 번 명성을 드날린 유한은 지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따. 그 이유는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딜론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신들에게도 블랙 아이언의 판매권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돼! 못해! 죽어도 그럴 수 없어!" 하지만 유한에게서 먼저 판매권을 따낸 리지스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티자 협상이 꼬여 버렸다. 현재 블랙 아이언은 꽤 비싼 값에 거대 길드와 고렙 유저들에게 판매되고 있었기에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권이었다. "리지스 양,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곤란해요. 우리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지그 님과 계약한 바가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 매주 생산한 물목의 일부를 넘겨주는 건 너도 알잖아." "그건 무구 이야기 아닌가요? 블랙 아이언은 해당 사항이 안 되니 양보할 수 없어요." "블랙 아이언이 어디 무기가 아니랍니까? 리지스 양, 어느 정도 선에서 양보해 주세요." "제가 지그랑 같이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절대 양보 못해요! 아저씬 지그가 블랙 아이언 만들 때 보태 준 것도 없잖아요!" "정말 이럴 겁니까!" "정말 이럴 겁니다. 왜요, 한 대 치시게요?"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신경전을 넘어 다툼으로 빈지려 하자 유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휴, 좀 그만들 하세요! 자꾸 싸우면 나 이제 블랙 아이언 안 만듭니다!" 유한이 그리 엄포하자 리지스와 딜론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리지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따. "9:1로 양보하겠어요, 지그가 열 대 생산되면 한 대는 아저씨가 갖고 가세요." "혼자 다 먹으려단 체해요, 리지스 양, 5:5로 하지요." "8:2에서 더 이상 양보 안 해 줘요!" "허허, 리지스 양, '상계의 샛별' 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통이 좁군요." 유한은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을 사무실에 내버려 두고 나왔다. "하여튼 상인 유저들이란……." 유한은 상인 캐릭터로 플레이 안 하기를 잘했다 여겼다. 고개를 저은 그가 공방으로 들어가 작업에 매진하려 할때였다. 채린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지그야, 손님들이 왔어. 널 꼭만났으면 하던데?" 그 말을 듣고 유한은 응접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요즘 친목을 다지자며 중소 길드의 길드장들이나 유명 랭커들이 곧잘 찾아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어라? 이 사람들은…….' 바퀴벌레 같은 모양의 화려한 갑옷을 걸친 중년 남자와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유저들. 바로 후소 대륙에서 온 일본인 유저들이었다. "당신이 검은 거인을 만든다는 사람이오?" 말은 건 것은 중년 남자의 옆에 있던 사무라이였다. 유한은 히로시라는 이름의 이 사무라이와는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 청해도에 와서 멋모르고 일본 요새까지 갔다가 그가 이끄는 수색대와 딱 마주쳤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로시는 유한을 기억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요?" "이분은 나의 주군이신 오와리 번의 영주 오다 장군이시오." 오다가 유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와리 번은 최가장 길드와 싸웠던 일본 쪽 길드. 이들이 아르페디아 대륙에 온 이유는 블랙 아이언 때문이다. "우리 주군께선 귀하의 검은 거인을 구입하길 원하시오." "아하하, 그래요?" 사실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랙과 싸워 본 일본 유저들이다. 그들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거대 병기가 여러 대 있다면 후소 대륙의 통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자신들을 박살 낸 병기를 사겠다고 나설 줄이야.' 하지만 팔고 싶어도 이미 공급을 못 댈 정도로 주문이 밀린 상태. 유한은 난처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다른 대장장이들도 거대 병기를 만드는데 그쪽으로 가서 물어보시죠." 현재 아르페디아에서는 유한과 발리안 말고도 거대 병기를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철십자 길드와 같은 거대 길드들. 하지만 지금은 그들 외에도 몇몇 대장장이들이 거대 병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리안이란 사람의 철공소에 이미 들렀다 오는 길이오. 하지만 거긴 당분간 생산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 발리안의 철공소는 아직 프로인에게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곳의 거대 병기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 수준이라 주군께서 성에 안 차 하시오." 다른 대장장이들에도 안 가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블랙의 뛰어난 위력에 매료가 된 오와리 번의 수뇌들은 프로토 타입의 거대 병기들이 양에 찰 리가 없었다. 거대 길드들이 자신들이 만든 거대 병기를 판매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대륙 제패를 위해 절대 거대 병기를 매물로 내놓지 않았다. 결국 유한은 일본 유저들에게 블랙 아이언을 판매하기로 했다. "뭐 인수 시기가 늦어져도 상관없다면 제가 판매하죠." "잘 부탁하오." 일본 유저들이 돌아가자, 곁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채린이 걱정스런 눈빛을 보았다. "지그야, 지금만으로도 벅차지 않아?" 현재 1달에 지그 철공소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은 10여기 정도. 그런데 주문은 벌써 30기 넘게 들어와 있었다. "뭐, 그럼 철공소를 증축하면 되지." 어차피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면서 전용 공방을 따로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밀린 주문을 소화한다고 증축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참에 일을 벌리면 된다. "송코 형, 교수님한테 말 좀 전해 줘요." "알았어." 먼저 지그 철공소를 지은 아비지라면 튼튼하고 효율적인 공방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날 찾았나?" 다음 날, 아비지가 송코의 연락을 받고 왔다. 안경 쓴 노신사는 여전히 노련한 건축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철공소 옆에 새로운 공방을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시간 되세요?" "나야 뭐 일거리를 준다니 고마울 뿐이지. 언제 시작할까?" "지금 당장 시작해 주세요." 그렇게 아비지에게 블랙 아이언 전용 공방의 설계를 맡긴 유한은 그 안을 채울 각종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노스아크로 떠났다. 드워프표 공작 기계와 설비들은 꽤 비쌌지만 블랙 아이언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이 꽤 되었기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했다. "여긴 여전하네." 좁은 길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공업사들이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 썰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동안 스킬과 랭크를 올리고 돈을 축적한 대장장이들이 드워프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헤, 나도 분발해야겠는걸?" 몇 달 전 대규모 패치가 이뤄진 뒤, 생잔직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대장장이들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그 덕분에 철공소 짓는 조건을 달성한 대장장이들이 부쩍 늘었다. "어소 오게." 유한이 공업사로 들어가자 구센도르프가 반겼다. 과거신의 광물 퀘스트를 완수한 후 그와 친밀도가 높아졌다. "요새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하! 그래 봤자 대부분 가격만 물어보고 돌아가는 수준이지." 아무래도 기계 구입 대가로 100만 골드를 선뜻 낼 수 있는 유저가 아직 많지 않은 모양. "그래, 무슨 일로 왔나?" "당연히 기계 구입 때문에 왔죠. 제가 필요한 장비입니다." 유한은 예전에 구입했던 5가지 공작 기계를 포함해, 갈리가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는 데 유용할 거라 추천한 장비들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보여 주었다. "흐음, 이 중에는 몇 가지는 여기 있고, 나머지는 나도 만들어야 하네, 며칠 걸릴 것 같은 데 기다려 주겠나?" "저도 바쁘니 다 만들면 지그 철공소로 보내 주십시오."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기에, 유한은 일단 값부터 치렀다. 모두 150만 골드가 들었지만, 주머니에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럼, 이만." 공업사를 나선 유한은 남문으로 향했다. 증축을 하면 일꾼도 더 뽑아야 한다. 바르카스 왕국이 나 카잔 공국에 들려 NPC 일꾼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대장장이 유저를 고용해 봐?' 발리안이 그런 식으로 재미를 봤다고 들었다. 지금 유한의 공방에도 저번에 짝퉁을 만들자 잡혀 온 휴이란 녀석과 그 일당이 일하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던 녀석들은 이 기회에 스킬 랭크나 올려 보자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NPC일꾼들보다 일을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블랙 아이언을 같이 만들 정도면 실력도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그런 대장장이는 흔치 않았다. 베레타에서 거대 골렘을 만들다 친해진 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자신의 갈 길을 가 버렸다. 고민하면 거리를 걷전 유한은 베르겐 남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보았다. "이게 누군가? 고귀하신 숲의 백성께서 여긴 어인 일인가?" "드워프님들께 부탁할 일이 있어 그럽니다. 제발 들여 보내 주세요." "부탁? 웃기고 있네. 뭔 개수작인지 몰라도 썩 꺼져!" 성문을 지키던 드워프 병사들은 애원하는 상대를 떠밀어 버렸다. 뒤로 넘어지면서 후드가 벗겨진 그를 본 유한과 여러 유저들이 깜짝 놀랐다. 상대는 뾰족귀의 엘프였기 때문이다. "엘프가 여기까지 웬일이래?" "그러게. 정신 나간 엘프인가 보다." "남자 엘프잖아. 여자 엘프면 좋았을걸." 엘프는 설정상 드워프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따. 사는 곳도 아르페디아 대륙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유한은 문제의 엘프를 알아보았다. 예전에 엘프의 숲에 갔을 때 만났던 엘프 대장장이 알세인이었다. 동네에서 쫓겨날 뻔했던 것을 유한이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런 그가 여기까진 어인 일인지? "어이, 이봐요!" 유한의 부름에 알세인이 고개를 돌렸다. 유한을 알아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지그 님 아니십니까?" "반갑네요. 여긴 웬일인가요?" 유한이 목적을 묻자 알세인의 환한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게 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련하다 숲을 홀랑 태워 먹었나?' 그러나 그건 아닌 듯했다. 좀 전에 알세인은 드워프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드워프와 앙숙인 엘프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일단 뜨끈한 거라도 먹으며 이갸기하죠." 옷을 두껍게 입고 이지만 알세인은 몹시 추위를 타는지 귀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래선 말도 잘 나오지 않을 듯. 마침 남문 밖에 요리사 유저가 열어 놓은 포장마차가 있어, 유한은 그곳으로 알세인을 데리고 갔다. "캬아! 좋군요." "추위에 콩나물국이 최고죠." 뜨겁고 얼큰한 국물에 속이 풀렸던지, 알세인은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엘프의 숲에 신성한 세계수가 있다는 건 아시지요?" "직접 가서 봤습니다." 채린의 퀘스트 때문에 따라갔다가 좋은 구경을 했었다. "그 신성한 세계수가 지금 고사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 말라 간다고요?"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수 앞에 박힌 쇠기둥 때문이란다. 언제 누가 와서 그 쇠기둥을 박아 놓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면 엘프들은 그 쇠기둥을 그냥 내버려 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쇠기둥이 박힌 후로 세계수가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쇳덩이가 지맥을 막고 세계수에 흡수되어야 할 양분과 마나를 빨아당기고 있더란다. '아니, 무슨 쇳덩이가 양분이랑 마나를 처먹어?' 지가 무슨 생명체도 아니고.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다 보니 별별 일이 있을거라 여겼지만, 이런 괴사는 처음. 알세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없애려고 했지만, 워낙에 크고 무거운 쇠기둥이라 뽑아낼 수도 없었고, 마법도 정령술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령들은 접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흐음……." "장로님께선 자세한 원인을 파악할 겸, 쇠기둥의 성분을 분석코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장장이인 제가 조사를 해 봤습니다만, 그 쇠기둥은 전혀 모르는 금속이었습니다." "에르젠이나 오리하르콘 같은 거 아닙니까?" "지그 님, 저도 그 정도는 알아볼 안목은 있습니다." 그래서 알세인은 전문가에게 문의할까 해서 노스아크에 찾아왔다. 기왕이면 드워프를 한 사람 초빙해 갈 생각이었지만,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다고. "이렇게 만나 것도 인연인데 지그 님이 좀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알세인은 갑자기 유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 내가요?" "숲 속에 있다지만, 지그 님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습니다. 커다란 기계인형도 만들고 그랬다면서요?" 요즘 유한의 명성은 꽤 많이 올라갔다. 유저들뿐만 아니라 NPC들에게도 그런 모양이다. 하긴 2만이 넘는 명성치는 게임 내에서 제법 이름을 떨칠 만했다. "하지만 난 지금 바빠서……." "부탁드립니다! 이건 세상의 운명이 달린 일입니다!" 알세인이 또 한 번 간곡의 청한 순간, 유한의 눈앞에 오랜만에 퀘스트 안내창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위기] -신성한 세계수가 정체불명의 쇠기둥 때문에 말라 가고 있다. 덕분에 엘프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세계수가 죽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기 때문. 세계수를 고사시키는 쇠기둥을 제거하고 엘프들의 근심을 없 애 주도록 하자. *옵션: 퀘스트를 수행하느 동안 엘프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 을 수 있습니다. '이걸 수락해, 아님 말어?' 지금 철공소 증축을 하고 있는데다가, 생산해야 할 블랙 아이언들도 밀려 있다. 그러나 세상의 운명이 달렸다는 알세이의 말이나, 안내창의 멸망 운운하는 대목에서 유한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설마 이 퀘스트 안 했다가 세계가 멸망, 아니 드림맥스가 게임 서비스를 중단하기까지야 하겠느냐만, 이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면 보상도 크지 않겠는가. '에라이! 일단 하고 보자.' 유한은 퀘스트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그는 모험을 하는 대장장이. 모험을 하면서 실력 높여 가는 괴짜 대장장이다. 이번 퀘스트도 지그의 성장에 뭔가 큰 도움을 줄지 모른다. 더구나 블랙 아이언의 주문을 받긴 했지만, 언제까지 납품하겠다고 날짜를 못 박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철공소에는 혼자서 메카 드래곤 같은 거작을 만드는 위대한 분도 계시지 않은가. 급하면 그에게 부탁하면 된다. 리지스야 펄펄 뛰겠지만 살짝 무시하면 그만. "알았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한 유한은 송코에게 쪽지를 보내 철공소의 증축을 부탁했다. 그리고 채린을 비롯해 몇몇의 동료들에게 쪽지를 보냈따. 세계의 멸망 운운하는 퀘스트다. 엘프들이 전폭 협조한다고 했지만, 유한의 직감으론 동료들의 힘이 더 필요할것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유한은 알세인과 함께 남쪽의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거대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 유한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쾅! 게임 관리실에 분에 찬 발 울림 소리가 울려 푸졌다. 부사장 정경욱을 떨리는 손끝으로 스크린에 비치는 지그를 가리켰다. "저, 저 자식. 지그 놈은 왜 또 끼어든 거야?" 청해도에서 데보라의 재림 스토리가 실패한 후 정경욱은 엘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서 뭔가 새로운 시나리오가 움트고 있었기 때문. "그게……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정경욱의 불타는 눈을 본 직원을 재빨리 데이터를 모으고 개발실과 연락해 유한이 퀘스트를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조사했다. "문제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답니다. 첫째로 알세인과 호감도가 높은 것. 둘째로 상급 대장장이일 것." "그게 왜 하필 지그냐고!" 원래 이 퀘스트는 되도록 여성 대장장이 유저들이 수행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래서 잘생기고 갑빠 좋은 엘프 꽃미남을 등장시켰다. 여성 유저들이 드워프에게 타박받는 알세인을 구해 주고, 그로 인해 알세인의 호감도를 높이고 퀘스트를받아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데 엉뚱한 놈이 떡밥을 가로채고 말았다. "사실 알세인이 지그에게 퀘스트를 안 줄 수도 있었지만, 콩나물국에 호감도가 50 상승한 것 때문에 조건이 충족되고 말았습니다." "아, 진짜 저 자식 하필이면 이때 노스아크에 와 가지곤……." 정말 온갖 맛있는 퀘스트는 다 먹는 놈이다. 아니, 일단 퀘스트가 날아오면 무조건 집어먹고 보는 놈이다. 자칫 퀘스트에 실패해 손해를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지. "아주 난 놈이지요. 지그로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안 죽었습니다." "조금만 더 플레이 하면 '신의 아들' 이 될 겁니다." 산의 아들은 오랫동안 플레하면서 1번도 죽지 않는 유저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칭호다. 이와 반대로 너무 잘 죽는 유저는 '어둠의 자식' 이라는 암울한 칭호를 얻는다. "중간에 한 번 죽지 않았나? 티쳐스 선생한테 말이야." "그건 부캐였을 때고, 지그는 한 번도 안 죽었습니다." 참 얄미운 녀석이다. 어째 게임을 하면서 한 번도 안 죽을 수가 있나. 심술이 난 정격욱은 직원에게 일렀다. "언제 비 오는 날에 저 자식 머리 위에 커다란 벼락을 한번 떨어트려 봐. 그걸 맞고 안 죽나 보자." "크크큭. 알겠습니다." 게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드림맥스의 신조였지만, 정격욱이나 직원들도 사람이었다. 그들도 집에 가면 자사의 게임을 즐기는 한 명의 유저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수준의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벨 업이나 퀘스트도 힘들게 하고, 그 과정에서 몬스터에 당해 죽거나, 퀘스트에 실패했다고 NPC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게임 잘하는 녀석들을 보면 질투심이 느껴지곤 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지? 그래, 빨리빨리 가거라." 정경욱은 아르페디아 남쪽에서 북상하는 먹구름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정경욱의 소원대로 유한은 남쪽에서 비를 만났다. 천둥 번개를 울리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유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비가 오고 난리야." "비가 와야 초목도 자라는 법입니다." "엘프다운 멋진 말이네요. 하지만 덕분에 마차는 기고 있단 말입니다." 엘프의 숲으로 향하는 그로지아의 초원길은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비가 오니 길이 질척거렸고, 덕분에 짐마차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니, 얼마쯤 가다 아예 멈춰 버렸다. "어휴, 완전히 빠졌군." 마차에서 내린 유한은 뒷바퀴가 완전히 침몰 상태에 놓인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대로 짐마차를 소환 해제할까.' 걸어가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창에 허우적거리는 짐마차보단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와 드릴까요?" 뒤에서 말을 탄 기사 유저가 나타났따. 유한은 그를 알아보았다. 분명 귀련의 갑옷을 입고 출전했던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 리더 협루나느 사람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소환 해제하면……." 그러나 사람 좋아 보이는 협부의 유한이 괜찮다는데 도움을 주려 했다. 사실 단순히 호의로 도움을 주려는 건 아니다. 협부는 유한을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 두는게 좋겠지.' 지금 모르는 척 호의를 베풀어 두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그럼 나중에 길드가 블랙 아이언을 매입할 때 도움이 될 것이고. 협부는 들고 있전 장착을 진득거리는 땅에 박아 놓은뒤 유한의 마차를 들어 올렸다. 우르릉ㅡ콰쾅! "으악!"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유한과 알세인, 협부는 놀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리얼한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번개 하나도 예사롭지 않았다. "다, 다친 사람 없습니까?" "없습니다." 협부의 말에 유한과 알세인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만 땅에 박아 놓았던 장창만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이게 피뢰침이 되었던 모양이군." "아아, 천만다행입니다." 유한과 협부가 안도하는 동안, 드림맥스 게임 관리실의 정경욱은 좌절했다. 같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직원 하나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신의 아들 맞구먼." 이런 사악한 뒷공작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한은 마차를 소환 해제하고 비와 번개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느닷없이 번개에 맞아 죽을 뻔하다니……" "이게 이 게임의 매력 아닙니까. 조금만 더 가면 비를 피할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시죠." 벼락 덕분에 유한에게 크게 점수를 딴 협부가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비를 피할 곳이 나왔다. 그 장소는 다름이 아닌 광전사 바츠의 무덤. 그곳은 예전에 유한이 왔을 때와 다르게 또 다르게 변해 있었다. 무덤 주위의 풍경을 본 유한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것들이 아주 테마 파크로 만들었구먼!' 바츠의 무덤은 완전한 관광지가 되어 곳곳에 기념품을파는 가게들과 유저들의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자자, 플래임 소드 레플리카를 매우 싸게 팝니다." "광룡 카세라스 인형 사세요." "잠시 후 소극장에서 '광룡을 무찌른 영웅' 공연이 있습니다." 드림맥스의 수작인지, 유저들의 행각인지 몰라도 유한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꼭 죽은 자신을 이용해 먹는것 같아서. '카세라스' 라는 이름의 찻집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유한은 협부에게 물었다. "협부 님은 이곳에 웬일입니까?" "여기 바츠의 무덤에서 벌어진 일 떄문에 왔습니다." "왜 안 좋은 일이라도?"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의아하게 느껴졌던 유환은 협부와 함께 바츠의 무덤에가 보았다. 다행이 비가 그쳐 많은 유저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협부의 말이 맞는지, 유저들의 표정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무덤 가까이 가 본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기 동상이 어디로 갔죠?" 카세라스와 대치하는 바츠의 동상이 분명 비석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건 모릅니다. 며칠 전 유저들이 뜸한 새벽에 시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로지아 왕실에선 도난을 의심하고 있는데 이게 유저의 짓읹, 아님 NPC의 짓인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커다란 동상을 대체 무슨 수로 들고 갔는지도 의문이다란다. 뭐 마법이라는 사기스런 힘이 존재하는 게임 세상이니 훔쳐 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을지도. "바츠의 동상은 조각가 우트 님의 작품입니다. 요새 갑부 유저들 사이에서 우트 님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으니, 돈을 노린 자의 소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협부는 그로지아 왕실로부터 바츠의 동상을 되찾으라는 퀘스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바츠의 무덤으로 온 것이라고. '하여간 이놈의 게임…… 별별 일이 다 생겨요.' 벼락이 떨어지지 않나, 죽은(?) 캐릭터의 무덤이 만들어지지 않나, 거기다 동상의 도난까지. 협부나 다른 유저들과 달리 유한이 이번 일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미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도 있는데 다가, 바츠와 전혀 닮지 않은 동상 따위 어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비가 그치자 유한은 다시 알세인과 함께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이미 동료들이 도착해 있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다. Chapter 10 미케니아의 역습 미케니아의 역습 엘프의 숲에 들어간 유한. 마을에서 그는 동료들을 만났다. 채린과 블랙, 오펜과 에이린이 손을 흔들며 반겨 주었다. "안녕, 지그 오빠!" "지그, 안녕!" "안녕, 에이린! 오펜도 오랜만이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유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땅히 왔을 거라 생각한 녀석들이 않았기 때문이다. "옌스는?" "레벨 업 한다고 사냥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채린이 대답해 주었다. 쪽지까지 보냈는데, 안 온 것을 보면 꽤 멀리 간 모양이다. 어쩌면 다른 대륙에 가 있는지도. "얀과 베르디도 안 왔군." "둘은 무슨 무공 서적을 찾으러 간다던데?" 동생 커플은 아직도 전대의 화산파 고수를 찾지 못한 모양이다. '짜식! 그냥 게시판에 대고 물어보면 될 것을…….' 혹시 또 아는가? 누가 좋은 정보를 줄지. "그런데, 블랙. 넌 여길 어떻게 들어왔냐?" 엘프의 숲에 들어오려면 정령과의 친화력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저 쇳덩이 같은 녀석이 어떻게 그걸 통과했을까? "후후, 내가 눈에 힘을 팍 주고 손을 내미니까 정령 녀석들이 알아서 악수를 하더군." 한마디로 양아치처럼 굴었단 거다. '저게 정말 황제 맞자?' 어깨를 으쓱대는 게 아무리 봐도 최초로 대륙을 통일했다는 황제의 위엄은 보이지 않았다. 대륙 최초 통일 황제라면 좀 더 근엄할 거라 생각했건만. "그런데 지그 오빠. 대체 무슨 퀘스트예요?" 채린과 함께 온 에이린이 귀엽게 물었다. 사실 유한이 퀘스트를 도와 달래서 달려오긴 했지만, 무슨 퀘스트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유한도 쪽지를 보내면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곳 엘프의 숲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수가 갑자기 마르기 시작했는데……." 유한의 옆에 있던 알세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알세인이 세상이 멸망할지 몰른다고 말하자, 다들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블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웃음이 나오는가!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정의 모드" 가 발동한 블랙은 일행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퀘스트가 어려우면 보상도 클 것 같아서." "경험치도 많이 주겠지?" "이번에 명성 많이 얻으면 하이 프리스트 칭호를 딸 수 있을 것 같아요. 헤헷!" 일행의 이 같은 답변에 블랙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보상에 눈이 멀다니……. 왜 어둠의 세력이 날뛰는지 알겠군. 다 사람들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보야, 그건 드림맥스 때문이야." 유한의 대꾸에 블랙의 눈이 번득였다. "드림맥스?" "드림맥스가 퀘스트를 양산해서 대륙을 항상 위기에 몰어넣고 있거든." 덕분에 유저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며 즐기지만, 선량한 NPC의 입장에선 죽을 맛일 터. "흠, 무슨 말이진 모르지만, 드림맥스라는 놈들이 진정한 악의 배후인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고얀 놈들이군. 언젠가 만나면 요절을 내고 말겠다." '진짜 GM이라도 불러 주고 싶군.' 이들의 이런 장난스런 대화를 '악의 배후' 드림맥스 일당들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속칭 '까댐' 을 들은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유저는 몰라도 피조물 따위에게 이딴 소릴 듣다니. "아무튼 사안이 급하니 빨리 가도록 하죠." 알세인의 재촉에 유한은 동료들과 파티를 결성하고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파티의 이름은 '엘프 숲 원정대' 였다. 그런데 미처 마을을 빠져나가기 전에 반가운 인물을 발견했다. "어, 로키 형 아냐?" "그러게. 여긴 어쩐 일이지?" 게임에선 참 오랜만에 만나는 로키였다. 그사이 무기와 장비가 다소 바뀌었지만, 그의 과묵한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로키 형!" 일행이 로키를 부르자, 로키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로키에게 쪼르르 달려가 인사를 건넸따. "형, 안녕하세요?" "너희들이구나." 로키도 일행을 반겨 주었다. "그런데 형.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사냥이나 던전?" "그것도 아니면 예쁜 엘프 언니라도 꼬시러 왔나요?" 에이린의 장난스런 말에, 로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 떄문이다." "퀘스트요?" "예전에 어떤 신관에게 퀘스트를 받았어.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만만치 않더군." '아! 그거…….' 유한은 문제의 신관이 신종 퀘스트 때 만났던 마론이라는 걸 알았다. 신종 퀘스트가 끝나고 마론 신관이 그에게 입이 무거운 기사를 한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다. 프라테우스 신종을 훼손한 세력을 추적하고 마물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그런 모양인데. '그게 아직 안 끝났나?' 꽤 어려운 퀘스트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다면 그때 로키를 추천하지 않을 것을 그랬다. "그럼 나중에 보자. 시아도 수고하고." "네, 나중에 봐요!" "즐겜하세요, 로키 오빠." 그렇게 로키는 일행과 헤어져 숲 속으로 사라졌다. 로키가 사라지자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블랙이 다가와 물었다. "후손, 저자는 강한가?" "강하지. 실제론 더 강해." 현실에서 표재훈의 실력을 말한 거지만, 블랙은 엉뚱하게 해석했다. "흐음, 겉보기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붙어 보고 싶군." '이 자식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한동안 옌스와 붙어 다니더니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자, 빨리 세계수로 갑시다!" 일행은 다시 알세인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로 향했다. 빽빽한 삼림 가운데 우뚝 선 세계수. 많은 가지와 나뭇잎으로 우거져야 할 세계수가 생기를 잃고 비쩍 말라 있었다. 거기다 색색의 수를 놓던 나비와 빛의ㅏ 정령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저거 세계수 맞아?" "그러게, 그냥 한 그루 고목나무라 해도 믿겠어." 일전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수가 맞는가 싶었다. 세계수 앞에는 장로를 비롯해 수많은 엘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안 하나같이 얼굴이 어두웠다. 세계수가 죽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을 진실로 믿고 있는 듯. 알세인이 나타나자 장로가 다가와서 물었다. "왔는가. 드워프는?"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알세인의 말에 장로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하긴, 우릴 싫어하는 자들이니 올 리가 없겠지." "드워프를 데려오지 못했지만, 여기 이분이 쇠기둥을 제거해 주실 겁니다." 알세인은 유한을 가리켰다. 장로를 비롯해 몇몇 엘프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아, 자네는?" "일전에 사이를 따라 바람의 무녀님을 뵈었던 지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장로님?" 채린이 유한과 함께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시아 양. 그런데 자네, 대장장이였나?" "드워프보다 실력은 모자라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장로에게서 물러난 유한은 우선 문제의 쇠기둥을 유심히 살펴봤다. 쇠기둥은 파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꿈틀꿈틀 땅으로부터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알세인이 말했던 대로 세계수에 갈 양분과 마나를 가로채는 모양. "쇠기둥은처음 목격되었을 때보다 세 배 이상 커졌습니다." "자세히 보면 지금도 조금씩 커지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있던 엘프들의 말에 유한은 정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물건은 처음이었다. '무슨 놈의 쇠기둥이!' 일단은 쇠기둥의 성분 분석부터 하기로 했다.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끝이 날카로운 정과 망치를 꺼내 쇠기둥의 밑동을 내리쳤다. 조금 떼 내서 살펴보자는 심산이었지만, "앗, 조심……." "크에엑!" 미처 옆의 엘프가 경고하기도 전에 유한은 감전이 되어 뒤로 벌렁 튕겨 나갔다. 머리털은 솟구치고 전신이 검게 그을렸다. -HP가 200 떨어졌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이런 망할!' 비록 큰 부상은 아니지만, 엘프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만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자네 괜찮은가?" 장로와 달려와 걱정된 얼굴로 물었다. 유한이 툭툭 털고 일어서자, 안도항 장로는 쇠기둥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 쇠기둥에 어떤 조치가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 능력이 있더군. 이를 막으려면 마법으로 미리 보호를 해야 하네." '캬악! 그런 건 좀 일찍 가르쳐 달라고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린 유한은 오펜을 바라보았다. 유한의 뜻을 알았는지, 오펜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읊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마나여. 나의 친구 지그를 보호해 다오. 프로텍션(Protection)!" 순간 우유빛 마나가 유한의 몸을 둘러싸며 보호막을 만들었다. 보호막이 갖춰지자, 유한은 다시 쇠기둥에 정을 대고 망치를 내리쳤다. 파지직! 이번에도 강력한 전기가 흘렀지만, 보호막에 가로막혀 유한의 몸을 지질 수는 없었다. 유한이 연거푸 정을 두둘기자 마침내 쇠기둥의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와! 떼 냈다!" 엘프들이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손도 몼쓰고 있던 터라 기쁨은 더욱 더 컸다. 기뻐하는 엘프들과 달리 유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정의 끝이 뭉특해진 것이다. '헐! 이거 꽤 단단한 건데.' 텅스텐 합금을 섞어 굉장힌 튼튼하게 만든 정이다. 주로 단단한 암석과 금속을 쪼갤 때 사용하는 것인데, 단 한번의 작업으로 못쓰게 되었다. "도대체 이 쇠기둥 강도가 어느 정도인 거야?" 그런데, 더웃기는 것은 쇠기둥이 자라 잘라 놓은 부위를 슬그머니 메워 놓았다는 것이다. 얼마쯤 지나자 떼어낸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헐, 재생도 된다니……"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네요." "설마 액체 금속 터미네이터 T-1000?" 뒤에서 보고 있던 동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일단 한번 살펴볼까?"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돋보기를 꺼내 잘라낸 금속을 살펴보았다. 그가 가진 돋보기는 얼마 전 블랙 아이언을 사 갔던 랭커 마법사가 선물로 준 것이다. 확대 마법이 인챈트된 돋보기는 최대 50배율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으음, 이건 당최……." 요리저리 뜯어보던 유한은 연방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그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금속과도 닮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갈리를 불러와서 물어볼까?' 일단은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니 이런 걸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이 났다. '가만있자…… 이걸 내가 어디서 보았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유한은 딱 머리를 쳤다. '그래! 남바린의 고대 드워프의 유적에서!' 예전에 남바린 영지 지하 유적의 신전을 지키던 3마리의키메라를 물리치고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키메라의 생체 합금. 관련 지식도 없고, 용도도 모르고, 자세히 연구할 시간도 없어 그냥 인벤토리에 내내 처박아 두고 있었다. 유한은 당장 키메라의 생체 합금을 꺼내 돋보기로 살펴보았다. 색상에선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쇠기둥의 것과 똑같은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뭔지 정체를 알아냈나?" 유한의 얼굴이 밝아지자 장로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이건 키메라의 생체 합금입니다." "키메라? 그건 저 쇠기둥이 사실은 키메라란 말인가?" "믿기진 않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쇠기둥 주제에 세계수의 마나와 양분을 가로채 빨아먹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 쇠기둥 키메라를 박았냐는 것이다. 일단 용의자는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키메라 생체 합금을 제조할 수 있는 자들은 제가 알기로 고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뿐입니다." "미, 미케니아!" 미케니아란 말이 나오자 모여 있던 엘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따. 유한과 일행의 눈이 의아해졌다. "왜요, 짚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미케니아라면 고대 세상을 어지럽힌 마도사들의 나라가 아닙니까?" 알세인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 님이 그들에게 바람의 날개를 주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르네스 본인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녀의 후손인 알세인도 알고 있는지, 유한의 말에 곧장 답했다. "그들이 바람의 날개를 어떤 용도로 악용하려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기후를 조정하는 목적이라 들었습니다." 유한은 그것도 본인, 이바니우스 3세게에 직접 들었다. 놈은 자신을 졸개로 사목 기후 조절 장치를 만들어 세계를 정복하려 했다. 물론 유한이 공중 요새를 침콜시키면서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렇습니다. 그런 자들입니다. 힘에 취해 악에 물들게된 불쌍한 인간들이죠." 알세인은 미케니아의 엘프 종족이 얽힌 과거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1만 년 전 마도 문명을 이룩한 미케니아 왕국. 처음엔 그들도 여느 인간 국가들과 다를 것이 없었단다. 그저 다른 나라보다 마법이 발전했다는 것 외엔. 그러나 발전한 마법은 갈수록 그들에게 막대한 힘을 안겨 주었다. 강력한 힘을 다슬리 만큼 사상이 발전하지 않은 미케니아는 이후 폭주를 하게 되었고, 키메라 제조라는 금단의 영역에까지 손을 대었다. "당시 많은 인간 국가들과 이종족들이 그들에게 정복되고 멸망당했습니다. 우리 엘프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요." 처음에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엘프들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단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에게서 얻어 낼 것이 있었기 때문. 바람의 날개를 얻고 나자 미케니아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들의 진심을 알게 된 아르네스는 바람의 날개를 가지고 정령계로 가버렸다. "아르네스 님이 사라지고, 우리 엘프들의 수난은 더욱 심패졌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날개를 얻을 수 없게 되자, 미케니아인들은 다른 힘을 얻으려 들었습니다." 알세인의 이야기는 대부분 모험을 하다 보면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진지한 자세로 듣는 블랙을 제외하고, 유한 일행은 다소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알세인이 말한 '다른 힘' 이라는 말에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세계수를 건드리려 했습니다. 세계수는 무한한 생명력과 마나를 품고 있는 세계의 분신이니까요. 하지만 그만큼 세계수에 손을 대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미케니아인들은 악행과 오만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고 있었다. 그들이 세계수까지 건드리자, 분노가 극에 달한 신은 드래곤들을 동원하여 미케니아를 멸망시켜 버렸다. 문제는 드래곤들이 너무 화끈하게 멸망시키다 보니, 애꿎은 이종족들과 인간들의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 당대 미케니아의 멸망은 문명 쇠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 엘프들은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세계수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일이 벌어졌고, 그게 미케니아의 관련이 있다고 하니……." 우려와 분노의 웅성임이 엘프들에게서 흘러나왔다. 또 다시 미케니아에 천벌이 내려질 것이라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이번엔 천벌 안 내릴걸.' 유저들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가 드림맥스의 신조니까. 아무튼 이번 사태는 미케니아가 배후에 있음이 명확해 졌다. 유한은 공중 요새 추락 이후로 한동안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안듀라스가 마무리가 시원찮았던 것을 탓하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경고했었는데다 그 이유가 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이 자식들, 이런 식으로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사실 이후에도 미케니아 일당은 부지런히 활동했지만, 유한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세계수를 고사시키고 있는 쇠기둥 키메라를 제거하는 것. "그런데, 이걸 어떻게 제거하지?" 쇠기둥의 성분은 밝혀 냈으나 제거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워낙 큰 덩치라 뽑아 내기도 뭐 했고, 웬만한 칼날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자를 수도 없었다. "일단 두들겨 패 보자. 용가리 통뼈가 아닌 이상 제 놈도 견뎌 내지는 못할 테니까." 유한이 곡괭이를 들고 쇠기둥을 후려치자, 다른 동료들도 나름 효과 있을 공격을 퍼부어 댔다. "버스트 샷(Burst Shot)!" "바람의 칼날이여! 나의 명을 들을지다, 윈드 커터!" "성스런 빛을 받으세요, 홀리 라이트!" 채린의 새로운 스킬이나, 오펜의 마법, 에이린의 신성력도 통하지 않았다. 유한이 오만상을 쓰고 있을 때,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블랙이 나섰다. "후손, 내가 한번 해 볼까?" "그러던가." 유한은 별 기대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블랙의 힘이 강하다지만 저 쇠기둥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 나선 블랙은 잠시 쇠기둥을 노려보다가, 묵직한 철권을 날렸다. 쇠기둥이 전격을 뿜어냈지만, 블랙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역시 안 되는군.' 블랙이 한참을 두들겨도 소용이 없자, 유한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블랙에게서 황금빛 기운이 터져 나왔다. "카이저 소울!" 블랙의 몸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이 쇠기둥에 닿자, 지금까지 멀쩡하던 쇠기둥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끼끼끼끼ㅡ! 입이 있으면 소리라도 지르련만, 놈은 쇠 긁는 소리만 냈다. 그러나 반응이 있다는 것은 효과가 있다는 증거! "블랙! 네 기운으로 저놈을 목사발 내 버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후손!" 황금빛 기운이 블랙의 오른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블랙은 태양과 같은 강렬한빛을 머금은 주먹을 거침없이 쇠기둥에 질러 넣었다. 끼아ㅡ아아앙! 비명도 쇠울림도 아닌 괴이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소리에 예민한 엘프들은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오만방자하게 우뚝 서 있던 쇠기둥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기 때문. 그냥 봐도 힘이 많이 쇠한 것 같았다. 그레인 스킬을 쓴 유한의 눈에는 보다 확실히 보였다 좀 전에 보이지 않던 균열들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기회다!' 유한은 즉시 앞으로 나서 암 브레이크로 쇠기둥을 두들겼고, 동료들도 공격을 퍼부어 댔다. 마침내 쇠기둥은 큰 소리를 울리며 부러졌다. 남아 있던 아래 부위는 블랙이 두 팔로 감싸 뽑아 버렸다. "와! 쇠기둥이 뽑혔다." "만세! 이제 살았다." 엘프들이 기쁜지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쇠기둥이 제거되자 세계수는 기력을 되찾은 듯 축 늘어트렸던 기지를 조금씩 들어 올렸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풍성함을 되찾을 것이다. 엘프들은 아주 축제를 벌일 분위기였다. 하긴, 축제를 할만했다. 그들에게 목숨이나 다름없는 세계수를 구했으니. [세계수의 위기]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 명성이 2,000 올랐습니다. - 경험치 5,500을 얻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엘프 장로로에게 보상을 받으십시오. 유한 일행은 떠오르는 창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퀘스트다. 세계의 운명 운운할 정도면 적어도 B급 이상의 퀘스트. 그러나 막강한 블랙의 존재는 고난이도의 퀘스트를 쉽게 완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정말 만들기 잘했다니깐!' 유한은 엘프들 사이에서 으스대는 블랙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건방지든, 불량하든 간에 녀석은 정말 최강의 가디언이 틀림없다. "정말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세계수가 다시 살 수 있었어." 장로는 유한 일행의 공을 치하하며 일행에게 보상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채린은 '성월의 활' 이라는 걸 받았고, 오펜은 '엘더의 자핑이', 에이린은 '천사의 귀걸이' 를 받았다. 다들 만족하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유한이 받은 것은 '불새의 코드' 였다. [불새의 코드] 방어력 105상승 솜씨 30상승 화염계 공격 방어율 30%증가 설명: 전설의 피닉스가 수놓은 호화로운 코드, 이걸 입고 불속에 들어가면 별로 뜨겁지 않을 것 같다. 유한은 바로 불새의 코트로 바꿔 입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의 입에서 곧바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멎지다." "지그 오빠, 옷걸이가 좀 되는군요!" 어쩐지 채린은 얼굴이 좀 발그레해진 듯. 보상이라지만, 멋진 새 옷에 만족한 유한은 장로에게 연방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던 옛날 물건들일 뿐인데." 겸손하게 답한 장로는 블랙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블랙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쇠 거인님. 쇠 거인님. 쇠 거인님께 마땅히 드릴 것이……." 가장 큰 활약을 한 건 블랙이다. 그 점에서 장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블랙이야 상관없어 했지만. "훗, 괜찮소. 난 저거 소인배들과 달리 마음만으로 충분하오." '아, 자식이 말을 해도 꼭…….' 동료들이 쏘아보거나 말거나 블랙은 계속 거들먹거리며 폼을 잡았다. 유한은 생생하게 살아난 셰계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것은 세계수를 지키던 키르케와 다른 하이엘프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쇠기둥을 뽑았으니 한 번쯤 모습을 보일 만도 한데. 유한이 묻자 장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세계수에 정신이 팔려 미처 하이엘프들에 신경을 못 쓴 것이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네." "저희도 같이 가죠." 장로가 앞장서자 유한 일행도 뒤를 따랐다. "크윽!" 왕관을 쓴 검은 인영이 비틀거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신하들이 부축하려 들자 왕은 손을 내저었다. "짐은 무탈하다. 그저 갑자기 '단절' 을 느꼈을 뿐." "단절이라 하옵시면?" "외부에 있던 기생몽(寄生木)이 제압당한 듯하다." 왕의 말에 신하들은 흠칫 놀랐다. 기생목은 자신들이 만든 키메라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이다. 지맥에 그 씨를 뿌려 두면, 삽시간에 자라나 주변 식물들로부터 마나와 양분을 흡수한다. 그렇게 흡수한 마나와 양분은 동종(同種)의 씨앗을 몸에 품고 있는 이에게 전송한다. 기생목은 쉽게 제거할 수 없도록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 졌고, 자체 방어 능력도 있다. 하찮은 엘프들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압당했다니. 신하들은 1만 년 전, 끔찍한 그때를 떠올랐다. 잠자코 있던 신이 분노했고, 드래곤들이 미케니아의 마도 문명을 멸망시켰다. "그것은 아니다. 벌레 같은 놈들이 방해를 했을 뿐." 비록 세계수가 가진 마나와 양분을 모두 흡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바니우스 3세는 충분하다 할 만큼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만큼 예민한 감각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겠다. 꽤 성가신 벌레들이 안으로 들어올 것 같으니 말이다. 더구나 한 놈은 죽었다 살아난 버러지다." 마도사들은 이바니우스 3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준비를 하라는 그의 명예는 충실했다. "폐하, 그럼 일전에 얻은 그것을 사용할까요?" "그래, 버러지들에게 과분할지 모르지만 그리하라." '그것' 을 준비하도록 명을 내린 이바니우스 3세는 호위대장인 라이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곤 말했다. "도망간 하이엘프 놈들의 흔적은 찾았느냐?" "송구하옵니다. 예상보다 흔적을 찾기 힘드옵니다." 흔적을 찾기는커녕 하마터면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그렇겠지. 일 만 년 전에도 그랬으니." 예전에도 이렇게 정령계로 들어와 바람의 무녀를 찾았지만, 찾기는커녕 영영 밖으로 나가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때와 다른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응흉하게 웃은 이바니우스 3세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일렁였다. 그 마기를 본 정령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아니,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기다려라, 바람의 무녀여. 이번엔 짐을 박대할 수 없을 것이야." 유한은 장로를 따라 세계수를 아래의 동굴로 들어갔다. 하이엘프들의 흔적이 이 동굴에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세계수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정령계에 있는 바람의 무녀를 찾아간 모양이다. "이거 너무 좁은데. 좀 큰 길은 없소?" "죄송합니다, 쇠 거인님.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이제 곧 정령계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덩키 큰 블랙은 힘들게 동굴을 기어 내려가야 했다. 중간에 좁은 곳에 덜컥 걸려 버린 블랙을 보고 유한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남아 있으라고 했잖아. 왜 따라와서 이 고생이야?" "암흑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어찌 남아 있겠나!" 블랙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사이한 기운이 동굴 아래로 내려간 것을 엘프 장로도 감지하고 일러 주었다. 유한 일행은 그 사이한 기운이 미케니아 놈들의 것이라 확신했다. "다 왓……헉!" 정령계 입구에 도착한 장로는 깜짝 놀랐다. 입구를 막고 있는 석문이 부서져 있었다. 아니, 그 정도라면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부서진 석문 너머에 정령계가 보였는데, 문제는 그곳에 있는 정령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던 정령계가 마치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있었다. 강물은 멈추고, 꽃은 시들고, 나무들은 힘없이 쓰러졌다. 도화지에 검은색의 굵은 사인펜이 그어진 것처럼, 직선으로 쭉 그어진 길 위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그 위에 쓰러진 정령들은자신이 가진 빛을 잃었다. 살라맨더는 불꽃을, 운디네는 물빛을, 실프는 바람을, 주변의 정령들은 그 회색의 길을 밟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빛을 잃고 쓰러진 친구들을 보며 슬퍼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크으윽" 회색의 길위에 발을 내딛었던 장로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는 전율했다. 밖에서 느껴 보지 못했던 강한 마기가 회색의 길 위에 뿌려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유한 일행은 장로를 재빨리 길 밖으로 끌어냈다. 간신히 숨을 돌린 장로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난 더 이상 안내해 줄 수 없을 것 같군." "괜찮습니다. 이제부턴 우리들이 알아서 가겠습니다." 회색의 길만 따라가면 이번 사건을 일으킨 놈들을 만날수 있을 것이다. 유한 일행은 장로를 그 자리에 두고 회색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엘프들만큼 정령에 가까운 존재가 아니라 유한 일행은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길을 따라 쭉 쓰러진 정령들을 보자니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이 자식들,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어!" 다행히 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회색의 길이 끝나는 곳에 검은 로브를 걸친 마도사들과 그들의 왕인 이바니우스 3세가 있었다. 유한은 예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이바니우스 3세를 보았다. 그는 전신에서 줄기줄기 검은 마기를 뿌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검은 마기에 닿은 땅은 회색으로 빛을 잃었다. '역시 저놈이 그랬군!' 이바니우스 3세가 마기를 뿌리고 다녔기에 정령들이 죽었던 것이다. 미케니아 일당은 바람의 무녀와 하이엘프들이 정령계 어디에 숨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계속 이렇게 걸어가면서 정령들을 살육하면, 바람의 무녀가 튀어나올 테니까. 지금 그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아르네스보다 먼저 나타난 것은 대장장이 지그였다. "야! 이바니우스 3세!" 유한은 고함을 지르며 미케니아의 국왕에게 달려갔다. 이바니우스 3세는 마기를 뿌리며 근업하게 돌아섰다. 건방진 대장장이 놈이 악을 쓰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도사들이 나서서 처리하려 하자,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저 고약한 대장장이 녀석은 자신이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크크크, 무모하기 짝이 없구나." 이바니우스 3세는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대장장이는 그저 검을 들고 무모하게 달려올 뿐이었다. 그는 유한의 정성을 봐서 바로 코앞에서 헤치우기로 했다. 근업하게 손을 들어 올렸던 이바니우스 3세는 펄럭이는 한 벌의 옷을 보았다. '기술관의 관복?' 그것은 일전에 자신이 대장장이에게 하사했던 관복이다. 신하가 되라고 관복을 내려 주었건만, 대장장이 녀석은 자신을 배신하고, 이제는 관복까지 집어 던졌다. "관복을 던져서 짐에게 뭘 어쩌려는……." 비웃음을 띠던 이바니우스 3세는 기술관의 관복을 뚫고 날아드는 차가운 칼날을 보았다. 검은 관복을 뚫고, 이바니우스 3세의 머리를 찔렀다. 땅! "폐하!" 마도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처구니없게도 국왕이 대장장이의 기습에 당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바니우스 3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유한으로선 불행이었지만. "후후후! 간교하구나, 대장장이여." "쳇!" 유한은 바로 뒤로 물러섰다. 한 번의 기습을 성공시켜 일격에 머리를 꿰뚫을 생각이었는데, 검 끝이 왕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훌륭하게 국왕을 지킨 왕관은 쩍 갈라져 떨어졌다. 나름 검에 여력이 남았던지, 이바니우스 3세의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역한 마기를 풍기는 진득한 검은 피가. '제길, 끝낼 수 있었는데.' "지그야, 괜찮아?" 안타까워하는 유한에게로 동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갑자기 유한이 검을 뽑고 달려가서 깜짝 놀랐다.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그들은 서둘러 전투 준비를 해야 했다. 이바니우스 3세를 비롯해 마도사들이 포위하고 나선 데다, 키메라들까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허허허, 이게 누군가. 침을 배신한 역적들이 아닌가." 여기서 역적들이란 유한의 동료들을 가리켜서 한 말이었다. "닥쳐라! 난 네놈 따위 섬긴 적 없다!" 블랙의 일갈에 정령계가 쩌렁쩌렁 울렸다. 예상보다 쇳덩이에 들어앉은 망령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냥 죽었다 살아난 버러지라 생각했는데 잠들었다 깬 호랑이였다. 그냥 싸워서는 만만하게 쓰러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역시, 그걸 준비해 두길 잘했군." '뭐라는 거야?' 유한 일행이 어리둥절해 하건 말건, 이바니우스 3세는 마도사들을 돌아보며 신호를 보냈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마도사들은 허공에 재빠르게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법진이 완성되고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대장장이여, 짐은 네 덕분에 공중 요새를 잃었고, 세상 구경을 원 없이 했도다." "꽤나 재미이었겠군. 여행이란 즐거운 거니까." 유한의 대꾸에 이바니우스 3세는 이를 갈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즐거운 여행이었지, 짐과 신하들은 신전에 들어가 고물 같은 종을 부셔 보기도 했고, 그로지아 왕실에서 도둑질도 했느니라. 그리고 철심자 길드라던가? 하여간 귀찮게 구는 천민들도 잡아 죽였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미케니아 일당의 행보가 언급되자, 유한의 얼굴은 멍해졌다. 설마 헬리오스 신전에서 종을 부셨던 놈들이 이 녀석들이었던 것인가. "나름 돌아다니면서 구한 것도 많았지. 개중에는 홀로 드래곤을 잡았다는 광전사의 갑옷도 있느니라." "뭐!" 유한의 언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곁에 있던 동료들이 다 놀랄 정도로.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반응은 관심이 없었다. 지금 눈앞의 미케니아 국왕이 분명 바츠의 것이라 여겨지는 갑옷,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 "만 년 만에 세상에 나오니 별 녀석이 다 있더구나. 대단하지 않느냐? 천한 인간의 몸으로 광룡이라 불리는 드래곤을 홀로 잡다니." "지, 지그야, 왜 그래?" 채린은 평소와 다른 유한의 모습에 당황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흥분하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놈이 그걸 갖고 있지?' 유한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혼란에 빠진상태에서도 이바니우스 3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광전사는 꽤 고독한 자라 들었다. 갑옷데고 어두운 사념이 많이 남아 있더구나. 그래서 아주 쉽게 이용할 방법을 찾았지." 순간 마기가 일렁이는 마법진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한손에 검을 들고 붉은 갑옷을 입은 인영. 이바니우스 3세는 서서히 마법진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그를 소개했다. "소개하마! 짐의 검이 된 광전사 바츠니라!"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 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