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초대받지 않은 손님 ……… 7 Chapter 02 신전의 의뢰………………… 39 Chapter 03 프라테우스 신종…………… 63 Chapter 04 천상의 소리………………… 93 Chapter 05 지포라이터………………… 135 Chapter 06 이것이 복수다……………… 173 Chapter 07 티쳐스 붕괴………………… 215 Chapter 08 배틀 폴로 대회 …………… 263 Chapter 09 명장 귀련…………………… 289 Chapter 10 비밀 병기…………………… 313 Chapter 01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난 지금 너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해커는 전화를 끊어 버렸고,놈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한이 나가려고 하자 손석진이 붙잡았다. 오랫동안 게임 개발에 미쳐 산 그라 해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자신과 한창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얼굴이 벌개져 뛰쳐나가려고한다. 당연히 그에게 문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아,그게…." 유한은 뿌리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기는 드림맥스 본사인데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르페디아 온라인 을 만든 원개발자다. 그의 힘을 빌리면 해커를 잡는 게 한층 쉬울것이다. "절 해킹한 해커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바츠를 해킹한 자에게서 전화가 왔다고요?" 손석진은 놀란 듯 눈을 동그렇게 떳다. "제가 얼마 전부터 해커를 쫓고 있었는데,이 망할 놈이 지금 자기가 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유한의 말을 불쑥 자르고 나타난 사람은 드림맥스 부사장 정경욱이었다. 그는 손석진을 찾아왔다가 유한과 그의 대화를 본의가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바츠를 해킹한 해커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단다. 이것이 뜻하는바가 무엇일까? 손석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바츠를 해킹한 해커가 지금 본사 안에 있습니다. 그것도 이 행사장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허허,자네 말이 사실이면 간을 아주 분식점에 팔아버린 놈이군" 정경옥은 기가 막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킹당한 상대를 놀리기 위한 장난 전화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경욱은 그 장난 전화를 결코 가볍게 넘길수 없었다. 해킹범이 유한과 술래잡기만 하란 법은 없으니까. 그는바로 본사 경비실의 책임자에게 연락했다. 휴대폰을 꺼내 일련번호를 누르자 정경욱의 눈앞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본사 안에서 이용되는 단거리 화상 통신 이었다. "지금 당장 본사 건물 전체를 통제하고 폐쇄시키도록." [무슨 일입니까? 지금 파티중인거 아닙니까?] "군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지금부터 개미 새끼 한마리 빠져나가선 안되고, 소란이 일어도 안돼. 무슨 말인지 알겠나?" 경비 책임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일이 터진것이 틀림없다. 부사장이 저러는 것을보면 다급한 사안이고, 더불어 외부인에게 알려져서 좋을게 없는 일이다. 경비 책임자에게 지시를 하달한 정 부사장은 연이어 고객상당실과 홍보실을 연결했다. "부사장이다. 오늘 리셉션에 초대한 유저 이백명의 데이터를 지금 즉시 조사해봐." "오늘 리셉션에 초청된 사람들 명단을 확보해. 기자고 연예인이고 업계사람들이고 가릴것없이 전부." 이런 일련의 지시사항들은 1분도 안되는 시간에 모두다 이루어졌다. 재빠르고 과감한 지시에 유한은 감탄을하지않을수가없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도했다. 이곳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드림맥스의 심장부다. 자신과의 술래잡기 외에 해커가 '다른 장난'을 친다면 상황은 심각해지는것이다. "리셉션은 이대로 중지되는 겁니까?" 손석진이 물었다. "아니.예정되로 진행될거야.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있어. 다들 웃고 즐길 동안에 해결하면돼." 가급적이면 소란없이 조용히, 그리고 빨리 끝내야 한다. 언론사 기자들까지 온 상황에서 자칫 일이 잘못되거나 보여지게되면 큰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어디 망신뿐이랴,자칙하면 금전적,시간적,신용적 손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정 부사장은 유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휴대폰 좀 빌려 주겠니?" "예." 유한은 속으로 궁시렁대며 정경욱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드림맥스가 해커 색출에 서두르는것이 반갑기는 했지만,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진작 자신이 해킹당했을 때 손을 썻다면 오늘 같은 난리법석은 부리지 않아도 될것아닌가? 아마 해커가 본사안이 아닌 밖에 있다고 했으면 신경도 안썻을것이다. '데이터가 확 털렸으면 좋겠다.' 이런 괘씸한 생각이 드는것은 왜인지. 그러나 그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해킹되면 자칫 지금의 지그에게도 문제가 생길수 있으니까. "근데 제 휴대폰은 뭐 하시려고요?" "번호 추적을 해보려고." 막 유한의 휴대폰을 받아든 정경욱의 옆에 홀로그램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경비실에서 온 화살 통신이었다. [부사장님.초청자 한 사람이 없습니다.] "없다니?" 커다랗게 확대된 홀로그램 화면에는오늘 본사로 들어온 사람들의수와 지금 연회실에있는 사람들의수가 동시에 떠올랐다. 경비 직원이 말한대로 한 사람이 모자랐다. "누군지 확인할 수 있나?" 정경욱의 말에 출입 때 CCTV에 찍힌 초청자들의 사진과 현재 연회실의 CCTV에 찍힌 초청자들의 사진들이 대조되고 겹쳐졌다. 한참 겹쳐지다가 단 한사람만이 남았다. 주걱턱과 가는 눈매가 인상적인, 30대 후반의 중년 사내였다. "누군지 알 수 있나?" [한민족 일보 문화부 유세창 기자입니다.] 출입시 제시된 신상 정보가 홀로그램 화면에 떠올랐다.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던 정경욱은 홍보실을 연결했다. 유세창이란 기자에 대해서 보다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않아 홍보실에서 연락이 왔다. 한민족 일보 문화부에 유세창이라는 기자가 있다면서 신문사 홈페이지에 실린 프로필과 사진을 보내왔다. "이건!" 닮긴 했지만 다른 사람. 언뜻 봐서는 동일 인물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이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놈이 해커인가?' 유한은 유세창,아니 유세창 기자라고 꾸며 대고 들어온 해커의 면상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과연 해킹같은 음흉한 짓을 할 만큼 교활한 인상이었다. 비슷하게 생겨도 눈빛과 표정에 특종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유세창 기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장 이놈을 찾아내! 어디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역시 정경욱은 유한보다 드림맥스에 피해가 올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최종 동선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드림맥스 본사에는 보안을 위해서 요소요소에 감시 카메라를 숨겨 두었다. 카메라들에 녹화된 정보를 추적하면 해커의 움직임이나 소재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한 시스템을 능가하는 두뇌를 가진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삼층 자재 창고에 있을겁니다." 손석진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는듯,유한과 정경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곧장 해답을 일러주었다. "거긴 이번 리셉션 때문에 임시 폐쇄된 구역입니다. 카메라 수도 적어서 감시가 소훌한 쪽은 거기가 유일하지요. 아마 삼층을 벗어나지 못햇다면 분명…."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유한은 번개같이 튀어나갔다. 정경욱이나 손석진이 말릴 틈은 전혀 없었다. "이런,이런! 우리 경비 직원들을 보내면 되는 일인데." "놔둬 보죠. 당사자에게 맡기는것도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손석진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대체 어떤 놈이지?' 오늘 손석진이 유한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는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뿐이 었다면 벌써 따로 만났을테니까. 유한의 행동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더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이로 인해 중단되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훼방 놓은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2 "자재 창고가 어디에요?" 휴개실을 뛰쳐나간 유한은 근처에 있는 드림맥스 직원을 붙들고 위치를 물었다. 어찌나 다급하고 맹렬했던지,직원은 엉겁결에 대답을 해 주고 말았다. "자재 창고는 저쪽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고마워요!" "근데 거긴 폐쇄된 구역이야!" 직원은 뒤늦게 유한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유한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알려주는 방향으로 달려간 유한은 통로 중간을 가로막은 칸막이들을 떠밀어 버리곤 자재 창고 앞에 당도했다. 안에서는 뭔가 타자 같은것을 열심히 두들기는 소리가났다. 유한이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돌렸지만, 덜컥이기만 할뿐이었다. "흥! 잠갔다 이거지?" 뒤로 물러난 유한은 문으로 달려가 어깨를 강하게 부딛쳤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유한은 곧장 자재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는 자재 창고란 이름답게 인쇄용 종이와 의자,책상과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창고 구석 바닥에는 넷북 크기의 미니 노트북 하나가 놓여있었다. 노트북으로 무슨 작업을 했는지 몰라도,화면에는 해킹 프로그램으로 의심되는것이 떠있었고, 주변에는 해킹에 사용한듯한 수상한 전자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방금 전가지만해도 해커가 여기서 무언가를 했다는증거였다. '이놈은 대체 어디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유한은 번개같은 뒤차기를 날렸다. 비품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오려던 해커가 유한의 발차기를맞고 벌렁자빠졌다. 우당탕! 해커는 누군가 창고로 들어오려하자,교묘히 비품들속으로 숨었다. 마침 작업은 거의다 끝났고, 훔쳐낸 정보도 메모리에 옮겨 담은후였다. 창고로 들이친 상대가 앞쪽에 신경을 쓸 틈에 빠져나가려 했는데,그만 들통 나고말앗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지못했다면 꼼짝없이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복수는커녕 또다시 놈에게 농락당했을터. "어딜 도망가!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어!" 해커가 일어나려 하자 유한은 녀석이 쓰던 노트북을 냅다 집어던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트북을 받아든 해커는 유한이 무섭게 달려드는것을 보았다. "제기랄!" 해커의 소매 속에서 칼 한자루가 튀어나왔다. 달려들던 유한은 순간 놀라서 멈추려 했지만, 이미 피하기는 늦었다. 해커가 들이면 나이프가 그의 북부로 찔러들어온것이다. 푹! 이번에 놀란것은 해커였다. 분명히 칼을 제대로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뭔가에 부딪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하필이면 벨트에!' 회심의 일격이라고 날린 것이 벨트의 버클에 막혔다. 해커는 다른곳을 찌르려고 했지만, 유한의 발차기가 더 빨랐다. "이 개자식! 어디다 칼질을!" "크악!" 가슴에 강하게 얻어맞은 해커가 주르륵 밀려났다. 손에 들린 나이프는 발차기를 맞을때 떨어트려 버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더 심각하게 만든건 애지중지하던 지포라이터도 흘렸다는 점이다. 놀란 해커는 지포라이터를 회수하려 했지만,유한이 휘두른 주먹에 물러나야만했다. "크윽,제기랄!" "괞찮습니까?" 유한을 노려보며 이를갈던 해커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놀랐다. 드림맥스 경비 직원들이었다. 한창 잘나가는 게임회사답게 경비직원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강해보였다. 유한과 그들 사이에 포위되어 어쩔줄 몰라하던 해커는 곧바로 돌아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두꺼운 유리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해커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미친!" 빌딩 3층에서 뛰어내리다니 제정신인가? 놀란 유한은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해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것이 보였다. 본사 앞에있는 화단으로 떨어진 덕분인지 크게 다친것같진 않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해커는 쩔둑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는 유한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도망친다! 일층에 당장 연락해!" 연락받은 1층의 경비직원들이 곧장 해커를 쫓았지만, 잡는데는 실패했다. 갑자기 새까만 스포츠카 한대가 달려오더니 해커를 태우고가버린 덕분이었다. "젠장!" 3층에서 지켜보고있던 유한은 분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다잡은 녀석을 눈앞에서 놓쳐 버리다니! 분해 하던 유한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발에 뭔가 밟힌다 싶어 봤더니 해커가 떨어트리고 간 지포라이터가 있었다. 주워서 살펴보니 꽤 고급이었다. 은으로 도금이 된 표면에는 도깨비 문양의 장식이 새겨져 잇었다. 대량 생상된것이 아니라 개인이 제조한 물건인지,G.Y 라고 찍힌 제작자의 이니셜도 있었다. "훗,레어 아이템인가?" 도망가면서도 되찾으려고했던 물건이다. 희소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그 주인을 찾는데 요긴하게 써먹을수 있는법. 그렇게 판단한 유한은 해커의 지포라이터를 품속에 단단히 챙겼다. 놈을 잡는 단서가 될 물건이니 함부로 다룰수는 없었다. 3 유한이 해커와 싸우고 있을때,정경욱과 손석진은 개발실에서 회사의 중요 데이터를 살펴보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리 없다고 생각해서 개발 내역의 유출이나 게임 데이터베이스의 이상 유무를 확인해 보고 있는것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합니다." "다행이군." 정경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장 걱정하던것이 그 부분이었다. 만약 해커로인해 게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면 금전적 피해는 둘째치고 회사의 신뢰가 엄청 추락했을 것이다. "그 외 서비스되고 있는 다른 게임들의 데이터도 무사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것이……." "뭔데? 뭐가 문제야?"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의 정보가 일부 유출되었습니다." 정경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은 현재의 캡슐보다 진보적인 기술이 적용될 예정이었다. 통신,가전제품에서 세계 굴지의 실력을 자랑하는 호성 전자와 의학 분야에서 신기술을 보유한 주식회사 메티스와협력하여 개발한지 벌써 3년하고 7개월. 이게 실용화되면 또다시 세상에 정치풍파를 일으킬 것인데, 일부지만 시스템 데이터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니! '역시 장난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러 들어왔던 건가!' 놈은 단순한 해커가 아닌 산업스파이였다. 그냥 데이터만 훔쳐 가는것으로도 모자라 회사 보안의 신용성에 흠집까지 입히려 했다. 바츠 유저에게 도발적인 전화를 한 것은 드림맥스를 해킹했다는 증인을 남기려는 수작일 것이다. 자기 시스템을 해킹당한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회사로서는 분명 대망신 이니까. '바츠가 해킹된 것은 이번일의 전조였던 건가?' 그런데 정경욱은 한 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었다. "근데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의 개발은 대외비밀인데 대체 어떻게……." "오성이나 메티스쪽에서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모르죠. 개발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충분히 흘러나올 가능성이 있지않습니까?" 손석직의 말은 정경욱에게 '드림맥스 내에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는 식으로 들렷다. 외부로 성과가 알려지지 않은채 묵묵히 개방에 열중인 팀원들에게 회식비를 찔러 준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더구나 정경욱 스스로 그 돈을 챙겨주거나 카드를 긁어 주지않았던가. 누군지 모르지만, 회사 내부에 해커의 협력자가 있었을것이다. 지금 정경욱이 바라보는 홀로그램 화면에는 3층 자재 창고에서 발견된 해킹 관련 장비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저런것들은 절대 방문자가 들고 들어올 수 없는 물건들이다. 입구의 검문 시스템에 걸리게 되어있으니까. 분명 내통한 인사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반입시켜 준비해 둔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아주 단단히 준비해 두었다. 외부에서 접속했다간 차단을 당할까 싶어 리셉션 파티에 묻어 들어와 사내에서 해킹을 시도했으니까. 또 인터넷 회선으로 해킹 데이터를 전송하는 대신 대용량 메모리를 이용햇는지, 해커의 노트북에는 전송 케이블이 이어져 있었다. "허허, 우리 회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털릴 줄이야." "세상에 완벽한 방패는 없는 셈이니까요." 정경욱은 손석진을 서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떠나지 않고 계속 회사에 남아 주었다면 보안이 이렇게 헐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석진은 보안 프로그램 인스펙터를 개발할 정도로 보안 프로그램 분야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니까. "덕분에 용의자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회사의 보안을 뚫을 만한 실력자는 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자들의 뒤에는 그들의 실력을 사는 기관이나 기업이 있지요." 그 말에 정경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앗다. 해커가 훔쳐간 데이터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의심가는 곳 이있나?" "샹화(想華)소프트, 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내로라는 해커들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정경욱의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샹화 소프트는 샹화 그룹 휘하에 있는 중국 최고의 게임사로, 전 세계 게임 업체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잘나가는 게임이 있으면 그들의 빵빵한 자본력으로 흡수해 버리거나 홀랑 베껴서 서비스를 하곤 했다. 현재 샹화 소프트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흡사하게 베낀 '은영전기(恩靈轉記)' 라는 게임을 주력으로 서비스하고 있었다. 물론 급하게 베껴 만든 게임이라 아르페디아 온라인만큼의 완성도는 없었다. '하긴, 그쪽이 제일 의심되는군.' 샹화 소프트가 게임 관련 업체이기 대문에 손석진이 용의선상 1순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샹화 소프트는 드림맥스에 불편한 접근을 자주 했었다. 게임을 베끼는 것은 물론 개발자나 기술자를 스카웃해 가는 식으로. "일단 조사해 봐야 알겟지만, 내부 청소부터 해야 될듯합니다." "물론이지." 드림맥스 내부의 암세포들을 적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같은 일이 몇번이고 반복될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용감한 바츠 유저님은 어찌 되셧나?" "해커를 거의 잡을 뻔했다는군요." 화면에 빈손으로 돌아노는 유한의 모습이 보였다. 정경욱과 손석진은 다시 3층으로 내려가 유한을 만났다. 아쉬움이 역력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당장 해커를 잡아 달라고 조를것 같지는 않았다. "다친데는 없습니까?" "큰일 날 뻔하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어요." 유한은 벨트 버클을 어루만졌다. 금속으로 된 버클에는 칼에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안도하는 정경욱의 얼굴에 살짝 후회의 감정이 깃들었다. 바츠가 해킹되었다고 했을 때 문제를 감지해야만 했다. 유저의 책임이 아닌 내부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오만하지 않고 좀더 확실히 캐보았다면 이런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삐리리리리-! 정경욱이 유한에게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자신의 휴대폰인가 해서 살펴봤던 정경욱은 유한의 휴대폰임을 곧 알게되었다. '해커인가?' 정경욱에게 전화를 돌려받은 유한은 그리 생각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채린이었다. "뭐하는 거니?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아?" "미,미안. 그리 오래 걸렸나?" "얼른와.리셉션이 거의 다 끝나 간단 말이야. 지금 은비 언니가 유저들이랑 같이 사진 찍어주고있어. 늦으면 우리만 못찍게 될거야." "알았어. 금방 갈게." 자신이랑 같이 사진을 찍겠다고 기다리는 채린을 생각 하자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해커는 놓쳐 버렸지만, 그걸 계속 아쉬워하고 분해할 필요는 없다. 놈을 추적할 아이템을 하나 건졌으니까.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군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만나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손석진은 정말 유한에 대해 많을것을 알고 싶었다. 그는 바츠시절부터 자신이 만든 게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저였으니까. "그럼,다음을 기대하겠습니다." 손석진과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유한을 부사장인 정경욱이 붙잡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게." 부탁이 아닌 명령조의 말투. 정경욱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무슨 짓이라도 불사할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죠." 유한은 울컥했지만 일단 허락했다. 여기서 싫다고 하면 아예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 붙잡아 두려고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비밀 엄수에 대한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드림맥스에 대한 악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더 커졌으니까. 유한이 비밀 엄수를 약속하고 연회실로 돌아가자 정경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연회실 안에 있는 초청객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비록 산업 스파이를 놓쳤지만, 사건이 밖으로 불거져 나가는 것은 막았다. "일단 마무리는 됐고, 이젠 청소를 해야겠구먼." "그전에 유리창부터 얼른 갈아 끼워야 합니다." 손석진은 방금 전송되어진 따끈따끈한 영상을 정경욱에게 보여 주었다. 해커가 도망치면서 뻥 뚫어 놓은 구멍. 그것을 바라보는 정경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깨진 유리창이 뻥 뚫려버린 드림맥스의 보안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제길,오늘 전부 야근이야!" 4 리셉션 파티에서 돌아온 유한은 지포라이터의 출처를 조사해 보았다. 일단 수재(手載) 지포라이터를 전시하는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둘러본 다음, 관련 판매업체쪽의 홈페이지들을 순례했다. "똑같이 생긴건 없네."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들을 모두 다 살펴봤지만 해커가 떨어트리고간 도깨비 문양의 지포라이터는 없었다. G.Y 라는 제작자의 이니셜도 조사해 봤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이거 무슨 유니크 아이템이라도 되나?" 게임이라면 기뻐했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답답하기만했다. 투덜거리던 유한은 지포라이터와 관련된 공예 동호회 홈페이지의 채팅방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세 사람이 즐겁게 정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곰돌이K군 : 하이요 -텍사스전기톱 : 어서 53 -용접달인 :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분이네요. -Zig : 안녕하세요, 뭐좀 여쭐것이 있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유한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지포라이터 사진을 채팅방에 올려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Zig : 저거랑 같은 물건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곰돌이K군 : 오오, 세공이 멋지구리 하군요. -텍사스전기톱 : 헐~ 저런건 처음 보는 듯. -용접달인 : G.Y? 이니셜도 못보던 거네요. 유한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흔한 물건이 아니라지만, 꽤 비싸 보이고 잘만든 물건이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줄 알았다. 물론 여기있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 '그냥 경찰에 보내서 지문이나 조사해 달라고 할까?' 유한이 다른 방법을 궁리 중 일때 대화방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초합금 님이 들어오셧습니다.> -곰돌이K군 : 오오! 합금형 어서 와요. -텍사스전기톱 : )△(/반갑슴! -용접달인 : 합금님 격조하셧습니다. -초합금 : 미안,작품 만드느라 바빠서. 초합금. 뭔가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다들 그에게 굽신모드 였는데, 유한도 곧 그 이유를 알수있었다. 이 홈페이지에 올라온 지포라이터 사진의 절반 이상이 그가 올린것이었다. 그것도 직접 제작한 것이라면서. -용접달인 : 합금님,이런 라이터 보신적 있어요? -텍사스전기톱 : 저기 Zig라는 님이 보여줬3. 용접달인은 좀 전에 유한이 올린 사진을 초합금에게 보여 주었다. 과연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까. 놀랍게도 초합금은 해커의 지포라이터에 대해서, 아니 지포라이터의 제작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듯했다. -초합금 : G.Y ? 이거 길용이 꺼네. -Zig : 길용이가 누굽니까? -초합금 : 휴대폰 튜닝해주는 녀석입니다. 근데 지포라이터까지 손댄적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곰돌이K군 : 숨은 고수로군요. -텍사스전기톱 : 아니,그보다 영역 침해인듯. G.Y 이니셜의 주인은 휴대폰 튜닝의 전문가라고 한다. 원래 지포라이터는 다루지 않던 사람이니 지포라이터쪽으로 파고 들어갔던 유한이 그를 찾을 수 있을리 만무 했다. 초합금이라는 사람이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길용이라…….' 유한은 휴대폰 튜닝쪽으로 조사해 보았다. 길용은 그방면에서 유명했던지 찾는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니셜도 지포라이터에 새겨진것과 똑같았다. '좋았어! 홍대 근처라 이거지?' 길용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작업하는 공방의 위치가 약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유한은 그 약도를 인쇄해 두었다. '내일 한번 찾아가 봐야지.' 지금은 밤이 늦어서 곤란하다. 마음은 초조했지만,일단 내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5 날이 밝자 유한은 곧바로 홍대쪽으로 갔다. 약도를 보고,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본 덕분에 길용의 공방을 찾아가는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참 가게 이름도." 내 멋대로 니 멋대로 그것이 길용의 공방 이름이었다. 설마 홈페이지 이름을 그대로 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장사는잘되는 모양이네.' 오전부터 그의 가게앞에는 여대생들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개조한휴대폰 껍질들은 소녀 취향이나 여성 취향의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옵쇼!" 공방안으로 들어가자 작업용 앞치마를 걸친 남자가 유한을 맞았다. 그가 바로 길용이었다. 20대 중반의 길용은 무척이나 유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뭘 사시렵니까? 아님 개조하시렵니까? 휴대폰 기종은 어떻게되세요?" "그보다 이 지포라이터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유한은 해커의 지포라이터를 길용에게 쑥 내밀었다. 라이터를 본 길용의 눈빛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이건 예전에 심심풀이로 만든건데……대체 이걸 어디서 손에 넣으신겁니까?"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요. 혹시 사간사람을 기억하세요?" "글쎄요, 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길용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은 생각나지 않겠다 싶어 유한은 어제 봤던 해커의 인상을 설명해 주었다. "주걱턱에 가는 눈매라……글쌔요,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혹시 그 사람 이름을 아세요?" "이름이요? 단골도 아닌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겟습니까." 하루에도 수백명의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가게다. 단골이 아니면 이름을 알기란 쉽지 않다. 거기다 머리위에 이름이 뜨는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선 얼굴만 보고 누군지 알 수 없다. '바보같이… 괞히 헛걸음을 했잖아.' 가상현실 게임을 오래하면 현실감각이 없어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어쨋거나 유한이 얻은 소득이라곤 '해커가 여기서 지포라이터를 샀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해커를 잡는 데는 그다지 도움을 될 것 같지 않았다. 유한이 빈손으로 공방을 나가는 순간,길용의휴대폰이 울렸다. 삐리리리리-! "참나, 오늘만 다섯통째로군." 길용은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받았다. 이상한 번호로 연락한 상대는 똑같은 질문을 5번째 되풀이하고 있었다. "당신이 개조한 지포라이터를 들고 온 사람이 있나?" "그래요,있어요.대체 뭐가 궁금해서 사람을 귀찮게하는 겁니까?" 5번째 만에 원하는 답을얻은 상대방은 전화를 끊지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경찰이던가? 아님 회사원 같은 사람이었나?" "학생 같던데?" "학생? 설마…그놈이?" "그놈이라니?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전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마치 용건이 다 끝났다는듯. "뭐야,이거." 뚝 끊겨진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길용은 가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유한을 찾았지만, 이미 유한은 사라진 뒤였다. '이야기해 줄 걸 그랬나?'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전화는 왔다고.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던 길용은 도로 공방으로 들어갔다. 도음을 줄 기회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 지금 할 수 있는건 좀 전에 찾아온 소년에게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것뿐. 신전의 의뢰 1 길용의 공방에 갔다 온 유한은 곧장 게임에 접속했다. 해커의 일로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쉴 수는 없었다. 벌려 놓은 일이 많았고, 대장간도 빨리 업그레이드해야 했으니까. "지그, 리셉션 어땟어? 재미있었어?" "은비 누님은? 은비 누님과 찍은 사진 없냐?" 유한이 접속하자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지스와 옌스가 가장 궁금해 했다. "뭐 그럭저럭. 그런데 시아는 아직 안 왔냐?" "볼일 있다며 하루 정도 접속을 못한대." 유한이 해커를 찾느라고 하루를 쉬었던거와 같이 그녀도 리셉션에 다녀온 이후 아직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다. "어이! 은비누님 사진 있으면 내놓으라니까!" 옌스가 아이돌 은비와 찍은 사진이 있으면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유한은 내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미쳤냐? 힘들게 찍은 사진을 너 주게." 달라붙은 옌스를 떼어 낸 유한은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대장간 뒤의 공터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그곳은 얼마 전에 유한이 가스톤에 빌려준 땅이었는데, 카잔에서 데려온 NPC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아갈 마을이 지어지고 있었다. 곳곳마다 목재와 벽돌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주춧돌을 박고 기둥을 세우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용수를 끌어들일 수로를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론 곤란합니다. 몬스터를 막을 방책이 없잖습니까." "근처에 유저들이 우글우글한데 괞찮지 않나?" "어르신,그러다가 갑자기 몬스터 무리라도 들이닥치면 어쩌실겁니까? 유저들이야 죽어도 부활할 수 있지만 NPC는요?" 마을입구에서 초빙된 목수 유저와 가스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목수는 연방 뭔가를 만들라며 부추겼고, 가스톤은 될 수 있으면 안 지으려 했다. "그리고 놀이터를 꼭 만들어야 하나?" "어르신께서 악덕 업주가 아니시라면 노동자와 그 일가를 위한 복지 시설은 기본입니다." "끄응!" 이번에 초빙한 목수는 [빌더(Builder)] 칭호를 가진 남바린 목수 유니온의 두령이자 건설업자였다. 마을 건설 같은 대규모 사업은 그에게 있어 큰돈을 벌기회이자 경험을 쌓을 기회였기에 뭐든지 더 지어 보려 애썻다. 처음의 예상과 달리 점점 늘어나는 건물과 공사비에 가스톤은 머리를 싸맸다. "어휴,뭐 하러 저리 거창하게 하시나." 유한은 자신이라면 마을 같은 것은 결코 짓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했다. NPC 대장장이들을 위한 숙소는 몰라도, 그들의 식솔들까지 책임져 줄 생각이 모래알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스톤이 지금 삽질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NPC들의 사기가 높으면 충성도가 올라가고 이는 곧 작업장에서의 능률 향상으로 직결되기 때문. 현실도가 높은 가상현실 게임이니만큼 NPC들도 집이 있어야 잘 수 있고, 먹어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으며, 벌어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만약 NPC라고 막 대했다가는 몇일 지나지 않아 파업이나 폭동이 일어난다. 실제로 NPC라고 영지민들을 막 대했던 길드가 있었는데, 민란이 일어나서 영지민들과 그들의 의뢰를 받은 유저들에게 내쫓기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지그 너도 보고 배워야할걸?" 리지스의 말에 유한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 난 가스톤 영감님처럼 부자가 아냐!" 그는 마을을 지어줄 생각,아니 돈이 없었다. 지어야 할 것이 있다면 철공소,그리고 그 위의 단계인 제철소뿐. 그러나 세상일이란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것이 아니다. "그래도 지어야 할 거야. 일꾼들이 광부들을 무척 부러워하더라고." 송코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유한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대장간을 책임진것은 송코다. 그러다 아예 대장간 회계 담당으로 자릴 잡았고, 자재를 구입하거나 NPC대장장이들에게 급료를 나눠주는일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NPC들의 불만 사항이라든가, 요구 사항을 듣게 되었다. "뭐가 부럽다는 건데요?" "지그 대장간에 일하는 대장장이들은 외지에 홀로 나와서 일하는 사람들이잖아. 저렇게 가까이 가족과 함께 지내는걸 부러워하는거지." "그럼 설마?" "걱정마, 아직은 괞찮으니까." 아직은 괞찮다. 그러나 나중엔 어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 대장장이들은 별 불만 없이 일해 왔지만, 광산 마을이 건설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달라지고 있었다. 남들이 누리는 해택을 부러워하고 자신도 누리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여간 이놈의 게임, 쓸데없는 데까지 신경을 써 놓긴!' 유한은 얼마전에 만났던 손석진이 원망스러웠다. 게임이면 게임답게 만들어 놓을것이지, 이렇게 현실도를 높여 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얼마 전 중원한 인원까지 합치면 현재 대장간의 일꾼은 총 50명. 만약 가스톤처럼 그들의 식솔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 '일인당 가족이 네명이라 생각하면……아놔! 내가 돌봐야할 NPC가 모두 이백명이 되잖아!' 어찌된것이 가스톤 영감이 데리고있는 광부들의 식솔보다 더 많았다. 가스톤만큼 돈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신경 써 주기위해서는 많은돈이 나갈 것이 틀림없다. 미래의 일이라지만,이건 정말 골치 아픈 문제였다. '제길, 철공소 만드는데도 적잖게 돈이 들어갈 판인데…….' 몇일 전 브로딘 왕국에서 대장장이 빌리안이 철공소를 지었다. 그는 유한보다 스킬 랭크도 높고, 명성도 높고, 돈도 많은 유저였는데, 철공소를 만들고 난 후 거기에 들어간 비용을 공략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그가 투입한 자금은 무려 100만골드. 너무나 막대한 금액을 두고 후발 주자들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지저분한 술책이라느니, 쓸데없는데 돈을 써서 그렇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다. 어쨋거나 빌리안의 사례는 철공소 건설에 많은돈이 들어간다는것을 의미했다. 지금 유한이 보유한 돈으로는 철공소 건설은 어림도 없었다. "어이, 리지스! 나 오늘부터 무구 생산량을 두배로 늘릴거야. 그러니까 주문 더 받아와!" "왜? 스킬 수련때문에 거절할땐 언제고?" 얼마 전 리지스가 다른 영지에서 꽤 짭짭할 거래처를 알아 왔는데, 유한이 거절한적이 있었다. 지금은 스킬 올리는게 우선이라면서. "수련도 수련이지만, 아무래도 돈을 좀 벌어 놔야겠어." 송코와 이야기하더니 생각이 달라진 것일까. 어쨋거나 리지스 입장에서는 유한을 말릴 이유가 없었다. "훗, 잘 생각했어. 그렇게 해주면 나야 좋지." 리지스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주문을 따오면 만드는것은 유한이 하지만 납품하는것은 리지스 상단의 몫. 당연히 그 차익은 고스란히 그녀의 주머니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만 믿고 기다려.안그래도 이곳저곳 알아보고있는 중이었으니까." 리지스는 당장 거래처를 알아 오겠다며 보따리를 쌋다. "그래, 너만 믿는다." 대장간으로 돌아온 유한은 일꾼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오늘부터 근무 체계를 바꾸겠습니다." "네에?" 유한의 갑작스런 발표에 대장장이 NPC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정시 출근에 정시 퇴근을 칼같이 지켜 주던 유한이었다. "대장간을 24시간 풀 생간 체계로 돌리려 합니다. 기존의 대장장이들은 지금과 같이 낮 시간에 근무하고, 이번에 새로 영입된 대장장이들은 밤 시간 대에 근무 하겠습니다." 현재 대장간 규모에 비해 일꾼들이 많았다. 철공소를 염두에 두고 미리 20명의 대장장이 NPC들을 더 영입했기 때문이다. 새로 온 대장장이들은 물 긷기나 장작 패기등 보조적인 일들을 했지만, 일거리가 없어 대장간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자기네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유한은 놀고있는 자원을 모조리 없앨겸, 2교대 근무를 도입하려했다. 낮보다 적지만,밤에도 20명이 일하면 생간량은 더 늘어나게 될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연장 근무도 각오해야 할겁니다." 이런 유한의 말에 대장장이들이 반발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피로가 장난 아닐 텐데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좋은 무구를 만들수 있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편하게 일해온 대장장이들은 근로 환경이 열악해지는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급료 1.5배 인상에 야근 수당도 줄 건데 싫습니가? 그럼 관두던가." "하하, 저희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걱정 마시고 맡겨만 주십쇼!" 유한의 강수에 대장장이들은 언제 대들었냐는듯 고분고분해졌다. 그렇게 휘하 NPC대장장이들의 불만을 잠재운 그는 당장 일꾼들의 시간표를 짯다. 2 유한이 재배치한 대장장이 NPC들과 한창 무구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때였다. 거래처를 알아본다며 나간 리지스가 단정한 제복 차림의 중년 NPC를 데리고 들어왔다. "지그야, 이분이 일거리를 맡기신데." 자신을 호베론 자작가의 집사라 소개한 그는 주인의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전신상을 만들어 달라고요?" "네,주인 나리께서 자신의 모습을 본뜬 동상을 만드시고 싶어 하십니다. 상인 홉스가 당신을 추천하더 군요. 꽤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라면서 말입니다." 홉스는 지난번 자물쇠 만드는것을 맡겼었던 NPC 상인이다. "홉스를 아세요?" "우리 호메론 자작가는 그의 단골입니다." 홉스의 의뢰를 받아들였을 땐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게임 내에 존재하는 NPC들과의 인연과 높아진 유한의 명성은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흐뭇한 마음에 미소를 짓는 유한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떳다. [호메론 자작의 의뢰] -아바란 왕국 남쪽의 영주인 호메론 자작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신상을 만들고 싶어 한다. 호메론 자작에게 가서 동상을 만들어 주자. "오천 골드에 지그씨의 솜씨를 사고싶습니다. 잘만해 주시면 추가로 보상을 더 드릴수도 있습니다." 퀘스트 1건에 5천 골드라면 충분히 해볼만하다. 더구나 저번에 공략 사이트를 보니, 주물 스킬은 동상이나 예술품 같은것을 만들면 잘 올라간다고 적혀 있었다. 돈도 벌고 주물 스킬도 올리고 , 그야말로 일석이조.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유한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비록 동상을 만들어 본적은 없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때가 아디었다. 호메론 자작의 영지는 유한의 대장간에서 남서쪽으로 약 한나절 거리에 있었다. 유한은 공구는 물론 화로나 고로 등의 설비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설비를 들고 이동하는 것이 어림도 없었지만, 스틸러스시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받은 짐마차가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짐마차에 설비를 가득 실은 유한은 송코에게 대장간을 맡긴 뒤 집사가 타고 온 마차를 따라 호메론 영지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 자작을 만날 수 있었다. 호메론 자작은 뚱뚱한 몸매에 둘창코를 지닌 전형적인 비호감형 인물이었다. "킁,자네가 내 동상을 만들 대장장이라고?" "그렇습니다, 자작님!" 유한은 일단 물주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내 동상을 멋지게 만들어 주면 사례를 후하게 하겠네." "이 지그를 믿어 주십시오!" 물주가 사례를 후하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유한은 자신의 가슴을 펑펑 두들기며 맡겨 달라고만 했다. 동상을 만들려면 주물 스킬을 이용해야 한다. 모형을 거푸집에 찍고, 그렇게 만들어진 빈 거푸집에 청동 쇳물을 부어 식히면 동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유한은 주물 스킬을 익혀 놓았기에 작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모형을 제작할줄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난 조각에는 영 잼병인데….' 모형은 조각 스킬을통해 보통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다. 허나 유한은 조각 스킬을 배우지도 않았거니와, 지금 배운다 해도 단시간에 사람의 형상을 깎을 만큼 숙련도가 오르진 않을것이다. 유한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때, 일꾼들이 목각 인형을 하나 들고왔다. 호베론 자작은 목각 인형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동상을 만들 수 있도록 조각가에게 내 목상을 완성해 놓도록 했지." 주물을 뜰 모형이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미리 만들어 놓았다는 자작의 목상은 실물 크기로 날씬하면서도 강인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물살과 들창코는 보이지 않았다. "저, 이게…." "내 목상일세." 유한이 어리둥절해 묻자, 호메론 자작은 목소리에 힘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머뭇거렸던 유한은 감탄을 하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야! 정말 잘 만든 목상이네요. 이거 자작님과 똑같습니다!" "하하핫! 그렇지?" "앞으로 백년, 아니 천년후의 사람들도 자작님의 용맹한 모습을 길이 기억할 겁니다." "으하하핫! 그건 자네 실력에 달렸네." "저만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유한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하인들이 미리 준비한 진흙을 이용해 동상의 거푸집을 찍어 낸 뒤 고로에서 청동괴를 녹여 쇳물을 만들엇다. 충분한 양의 쇳물이 모이자 거푸집에 부었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식히 다음 거푸집을 떼어냈다. -청동상을 완성했습니다. 손질만 잘하면 멋진 동상이 될 것 같습니다. 스킬 경험치 150을 받았습니다. -주물 스킬이 7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인내심이 1 올랐습니다. '앗싸! 주물 스킬 올랐다.' 공략 사이트에서 본 대로 동상은 주물 스킬에 많은 경험치를 안겨 주었다. 덕분에 유한의 주물 스킬은 7랭크로 한단계 더 올라갔다. "음,마냥 기뻐하고 있을때가 아니지." 주물 스킬의 경험치를 받았지만, 아직 동상이 완성된것은 아니다. 유한은 동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거푸집을 틈으로 톡 튀어나온 부분을 끌로 문질러 매끈하게 만들고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부분도 연마재로 문질러 번쩍이게 만들었다. "좋았어! 이정도면 충분해!" 작업을 끝마친 호베론 자작의 동상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또렸한 이목구비와 군살이 없는 완벽 몸매. 후대의 사람들이 보면 자작이 엘프가 아닌가 착각할지도 모른다. "오∼ 이게 바로 나란 말인가?" 동상이 완성되었다는 말을 들은 호베론 자작이 나타나 감탄사를 발했다. 번쩍이는 동상은 누가봐도 훌륭하다 탄성이 터질 만했다. 원형인 목상도 잘 만든 것이지만,동상의 휘황찬란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앞으로 이 동상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작님의 고대한 인격과 뛰어난 업적을 칭송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옆에서 집사가 아부를 떨었다. '이 NPC도 입심이 장난 아니군.' 목상을 깎은 조각가가 NPC인지 유저인지는 몰라도 정말 처신을 잘했다. 덕분에 유한이 동상을 잘 만들어 자작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었으니까. "하하하, 이렇게 훌륭한 동상을 만들어 준 대장장이에게 사례를 하지 않을 수 없지. 여봐라, 수고한 대장장이에게 보상을 내리도록 하라." 자작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언 시녀가 유한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호메론 자작의 의뢰]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7,000골드 얻었습니다. -명성이 300 올랐습니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원래 집사가 제시한 보상보다 무려 2,000골드나 더 많았다. 그만큼 호베론 자작이 동상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넙죽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유한에게 자작이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런데 말이야. 영지의 신전에서 유능한 대장장이를 찾고 있는데, 자네가 한번 가 보지 않겠나?" 띠링! 순간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연계 퀘스트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신전에서 대장장이를 찾을 일은 뻔했다. 제기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대뜸 수락했다.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킁,원래는 내가 함께 가야 하지만,영지에 바쁜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네. 대신 이 추천장을 줄테니 마론 신관을 찾도록 하게." 자작의 추천장을 받아든 유한은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은 자작의 영지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하늘을 향해 솟은 뾰족한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광명과 음악의신 헬리오스 고대 주신의 품에서 태어난 12명의 하위 신들 중 하나인 헬리오스 교단은 아바란 왕국에서 제법 교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이를 증명하듯 신전이 크고 웅장했다. "무슨 일이요?" "자작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유한은 신전을 지키는 병사에게 추천장을 내밀었다. 추천장을 받은 병사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겨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병사는 중년의 신관 한 사람과 함께 나왔다. "자네가 호메론 자작님의 소개로 온 대장장인가?"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신전 안은 조용했다. 아니, 적막하다고 해야 할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신전 안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만한 규모의 신전이라면 많은 신관과 신도들이 있을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난 마론이라고 하네." 자신의 신분을 밝힌 그는 유한에게 자리를 권했다. "추천장에는 자네가 호메론 자작님의 동상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더군, 혹시 그래서 말인데…자네 혹시 종도 만들줄 아나?" "종이요?" 뜬금없이 종 이야기가 나오자 유한은 눈을 동그랗게 떳다. 신전에서 대장장이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종을 만들어 달랄 줄이야. 종도 금속으로 된 물건이니 대장장이가 만드는 것임엔 틀림없지만, 제기나 신상 정도 만들겠지 싶었던 유한으로선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번도 동상처럼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 아닌가. "실은 우리 신전에는 매시간을 알려주는 종이 있네. 그런데 그종이 열흘 전에 그만 깨지고 말았어. 덕분에 이곳에서 수향하는 사람들이 여간 불편하기 짝이 없네. 자네가 새로운 종을 만들어 줄 수 있겠나?" 마론 신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효과음과 함께 퀘스트창이 떳다. [헬리오스 신전의 종] -열흘 전 그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신전의 종이 깨지고 말았다. 이에 신전에서 수행하는 신관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는 바 이를 해결해주자. * [호메론 자작의 의뢰]에 이은 연계 퀘스트. * 게임 시간으로 15일 안에 완성해야 합니다. 기한을 초과하면 퀘스트는 실패하고 불이익을 받습니다. 불이익이 있다는 것에 유한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전에 한번도 도전해 보지 못한 동상도 잘 만들었는데, 그보다 단순한 구조의 종이야무엇이 어렵겠는가. 주물 스킬을 이용하면 별문제 없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만 해 주면 섭섭잖은 보상을 해 주겠네." '그래,큰 신전이니까 보상도 짜진 않겠지?' 신전에서 내는 퀘스트는 보상이 후한 편이다. 하물며 이만한 규모의 신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유한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 퀘스트를 수락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오오, 그래. 자네만 믿겠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마론 신관은 유한의 두손을 마주 잡고 고마워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하네. 종이 깨졌다는 이야기는 외부에 비밀로 해주게."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그런가?' 종 하나 깨진거 가지고 비밀로 할 것까지 있나 싶었지만, 유한은 흔쾌히 승낙했다. 신전의 일이야 어떻든 자신은 종만 만들면 그만이다. "걱정 마십시오. 전 입이 무거우니까요." "고맙네!" 지나칠 정도로 고마워하는 마론 신관의 반응이 좀 의야했지만, 유한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후아암! 오늘은 피곤하니까 여기까지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벌써 시간이 자정을 넘었다. 캡슐에서 나온 유한은 어머니 김 여사가 잔소리를 하기전에 서둘러 잠자리로 들어갔다. 프라테우스 신종 연계 퀘스트를 받은 다음날. 유하은 며칠 전 새로 등록한 입시 학원에 다녀오자마자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신전에서 받은 종 만들기 퀘스트를 후딱 해치우기 위함이다. '그런데.......신전에서 쓰는 종의 크기는 어느정도지?' 크기만 아니라 모양도 알아야한다. 무턱대고 만들었다가 이게 아니라고 퇴짜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깨어진 종이 있는 종각으로 가보았다. 젊은 신관의 안내를 받아 종각에 간 유한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 저게?" "얼마전까지만해도 우리에게 시간을정도겠지 싶었는데, 신전의 종은 정말 컸다. 둘레는 어른 세사람이 손을 마주 잡아야 할 정도였고, 높이는 2미터를 넘었다. 중학교때 수학여행가서 봤던 에밀레종보다는 작았지만, 큰 사찰의 범종만 한 크기는 될것이다. '하, 하하하핫! 이렇게 큰 것을 어떻게 만들어!' 섣불리 퀘스트를 수락한 자신을 원망해 보았지만, 이미 배 떠나고 손 흔드는 격이다. '일꾼들을 불러와야겠군.' 이건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못할 것도 없지만, 보름이라는 기간안에 하려면 여러손이 필요했다. 유한은 당장 송코에게 귓말을 넣어 호메론 자작령의 신전으로 일꾼과 필요한 도구들을 보내도록 했다. "엄청난 퀘스트를 받았다면서?" 채린이 직접 일꾼들을 인솔해서 왔다. 리셉션 뒤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였기에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신전의 종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중압감이 유한의 가슴을 눌렀다. "종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제법 큰 거라서." "호호호, 큰일 났네., 한 번도 안 해 본 일일 텐데." "크윽, 돈 좀 벌어 볼까 해서 수락한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쯧쯧 그러게 왜 욕심을 부리니." 후회는 후회고, 일단 받아들인 퀘스트니 실패할 수는 없었다. 유한은 당장 대장장이 NPC들을 부려 신전의 뒷마당에 임시 대장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전에서 준비해 준 구리와 주석들을 녹여 충분한 양의 청동을 만들었다. 신전에서 원하는 크기의 종을 만들려고 하니 엄청난양의 광물이 소비되었다. '허걱! 이게 다 얼마치냐!' 구리와 주석 이2가지 광물은 장신구나 정밀한 조립 제품을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광물이라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제법 비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그런 광물들을 달라는 대로 제궁해 주는 신전의 재력이 그저 놀라울 뿐. '흐흐, 그럼 보상도 만만치 않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깨를 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제련 작업을 끝낸 유한은 곧바로 거푸집의 제작에 들어갔다. 워낙 큰 종이라 거푸집을 뜰 모형도없었다. 더구나 종을 만드는 과정에선 꽤 세밀한 작업이 필요했다. 공략사이트에 나온 종 제작법에 따르면 일단 진흙으로 모형을 만들고, 그위에 밀랍을 바른후, 그위다시 진흙과 이암, 활석을 섞어만든 점토를 단단히 바르라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끝내고 충분히 건조시킨 다음 열을 가하면 안에 있는 밀랍이 녹으면서 텅빈 공간 그렇게 완성된 거푸집의 빈공간에 쇳물을 흘려 넣으면 종이 완성되는 것이다. "거참 더럽게 까다롭그먼." 작업을 하면서 유한은 몇번이나 투덜거렸다. 워낙 큰종이다 보니 거푸집의 제작이 쉽지 않았고, 여기저기 손댈 곳도 많았다. 거푸집 하나를 완성하는 것만해도 무려 한나절이 걸렸다. 다음은 완성된 거푸집에 녹인 쇳불을 붓는일이었다.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커다란 도가니에 청동을 녹여서 기중기로 조심스레 옮겨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야 하는 것이다. "조심해! 조심! 잘못 쏟으면 대참사야!" 기중기는 신전 지붕을 수리할 때 쓰는 것이었는데, 엔진의 힘을 빌리는 현실의 것과 달리 100%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힘도 부족하고 균형 잡는 것도 위태로웠다. 다행히 신전에서 힘든 일을 맡아 하는 젊은 신관들이 기중기의 조작에 능술하고, 유한이 위치를 잘 잡아 줘 쇳물을 제대로 부을 수 있었다. 쇳물이 식자 유한은 서둘러 거푸집을 벗겨 냈다. -큰 종을 만들었습니다. 크기만 할 뿐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ㄴ디ㅏ. 스킬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완성하긴 했는데, 떠오른 안내차잉 영 시원찮았다. '시원찮을 수 밖에. 대충 종 모양을 본떠서 만든 거니까.' 정확히 모양과 크기를 잰 것은 아니다. 장식도 빼먹엇다. 장식을 하려면 종 표면에 무늬가 생기도록 손을 써야 하는데, 번거롭고 복잡한 일이라 그냥 넘어갔다. "종이야 소리만 잘나면 장땡이지." 유한은 시험을 히 볼겸 해서 기중기에 종을 매달고 나무망치로 두드려 보았다. 텅~~! 종이울리는 소리를 들은 신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종소리?" "냄비를 두들겨도 이보단 좋은 소리가 나오겠습니다." "애초에 젊은 친구에게 일을 덥석 맡기는게 아닌데 말이죠." "그러게요. 이런일은 실력보다 경험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젊은 신관들의 쑥덕거림은 유한의 속을 긁ㄱ기에 충분했다. "으아악! 암 브레이크!" 그는 완성된 종을 두들겨 깨버린 뒤 깨진 조각들을 도가니에 밀어넣었다. "종이 너무 두꺼웠나 봅니다. 다시 만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법. 좀 더 노력해 보도록하게." 마론신관은 너그럽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 유한은 대장장이들에게 청동을 녹이도록 한 뒤 종각으로 돌아가 깨진 종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엔 수박 겉핧기로 보고 갔지만, 이번엔 종의 두께를 재어 보고, 모양과 크기도 꼼꼼히 따졌다. "좋아! 이정도면 됐어." 충분한 조사가 끝나자, 유한은 다시 거푸집을 제작했다. 그리고 다시 완성된 거푸집에 청동쇳물을 붓고 식혔다. -큰 종을 만들었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소리가 울릴것 같습니다. 스킬경험치 150 얻었습니다. '앗싸아!' 완성된 종은 장식만 없다 뿐이지 원래 신종과 모양과 크기가 똑같았다. 비꼬던 신관들도 낮은 탄성을 내뱉을 정도였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해.'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완성된 종을 나무망치로 두들겨 보았다. 뎅~~! 좀 전과 달리 제대로 된 종소리가 울렸다. 환한 표정을 지은 유한은 신관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처럼 조롱하고 솜씨를 탓하는 신관들은 없었다. 그러나 뭐가 문제인지 그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신전의 종으로 쓸 만하지 않습니까?" 유한의 물음에 마론신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그저 평범한 종일 뿐이야. 우리가 원하는 종은 좀더 맑으면서도 경건한 소리가 나는 종일세." '이 아저씨가!' 유한은 울컥하는 마음에 나무망치를 집어던질 뻔했다. 제대로 만들었는데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다시한번 만들어 보지요." "잘 부탁하네." 유한은 다시 종을 부숴 고로에 녹였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채린이 한 마디 했다. "좀 더 외양에 신경을 써봐. 네가 만든 종은 밋밋했어." "외양에 신경 쓰라고? 그런 장식 같은 걸 붙이란 말이야?" 유한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마 그럼 더 좋은 소리가 나지 않을까?" "설마! 장식은 소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단정할 수 있어?" 궁수인 채린은 이쪽 방면에 있어서 비전문가다. 그래서 그녀의 의견이 유한에겐 다소 주제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장식이 소리와 관계가 없다고 막잘라 말할 수도 없었다. 유한도 종을 여러번 만들어 본 전문가가 아니니까. "네 말대로 장식은 소리를 내는데 불필요한 요소일지도 몰라. 하지만 장식은 장인이 자신의 정성을 보이는 표현 수단이기도해. 정성이 깃든 종이 그렇지 않은 종보다 말고 경건한 소리가 나지않을까?" "음......." "사실 이건 게임이잖아. 내 행동 여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거야. 만약 경건한 소리가 소리를 내는데 필요한 조건이 정성이고, 그 정성을 보이는 방법이 장식을 하는 거라면?" 채린의 말대로 퀘스트는 조건을 얼마나 맞추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황당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제대로된 보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크를 토벌해 달라는 퀘스트를 받는다 치자. 마을을 침입해 온 오크 몇마리 잡는 것과 오크의 본거지인 오크부락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그 보상이나 결과에 상당한 차이가 잇엇다. "정성, 정성이라......." "너무 고민하지마. 나도 도와줄게." 유한은 채린과 함께 또다시 종각으로 갔다. 두사람은 갖고 간 진흙으로 깨진종의 표면에 양각된 장식들의 본을 떴다. "좋아 이번에는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복제해 보는거야!" 유한은 장식을 찍은 진흙판에 밀랍을 녹여 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밀랍 장식한을 종의 원형에 붙였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지만, 채린이 옆에서 일을 거들어 준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이야, 시아 너 제법 하는걸?" 채린은 제법 훌륭하게 외장을 붙여나갔다. 틈이 있는 곳은 녹은 밀랍을 부어 말끔하게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훗, 내가 이래 뵈도 손재주가 좀있거든." "그럼 부캐로 생산직 캐릭터를 키워보는 건 어때?" "싫어, 궁수만 해도 벅차단 말이야." 외장이 끝나자 유한은 조심스럽게 거푸집 외벽을 바른 뒤 열을 가해 밀랍을 빼냈다. 그리고 쇳물을 퍼부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헬리오스 신에게 비나이다! 이번엔 성공하게 해 주옵소서." 거푸집 안의 쇳물이 식는 동안, 유한은 정성 들여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는지, 거푸집을 벗겨 내자 휘황찬란한 종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오! 프라테우스 신종이다!" "이렇게 똑같이 만들어 내다니!" 주변의 신관들이 만들어진 종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정도로 3번째 종은 완벽했다. 유한도 이번에는 완벽하다고 확신했다. 안내창의 문구 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큰 종을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소리가 울릴 듯한 걸작입니다. 스킬 경험치 225 얻었습니다. '됐어!' 삽질의 대가를 이제야 받아 낼 수 있을 듯싶었다. 유한은 기중기에 들린 종을 나무망치로 두드렸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소리가 울릴 거라 확신하면서. 데에--에엥! 종의 울음이 맑고 길었다. 거기다 가볍시 않은 육중한 떨림까지! 이것이야말로 신전에 어울리는 경건한 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관들도 흥분했다. 예전에 들엇던 프라테우스 신종과 그 울음이 비슷했기 때문에. "정숙! 정숙하게나!" 호들갑을 떠는 젊은 신관들과 달리 마론 신관은 냉정했다. '쳇! 또 어떤 트짐을 잡으려고 저러는 거야?' 유한은 확신 했다. 이번에야 말로 마론신관이 승복할수 없을 것이라고, 3번째로 만든 종은 프라테우스 신종을 완벽하게 복제해 낸것이 아닌가? 어디 단순히 복제만 했나. 정성도 꽤 들었다. "자네는 얼른 가서 확인해 보게." 마론은 중년의 신관 한 사람을 어디론가 보냈다. 그 신관은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되돌아왓다. 종이 만들어졌을 때 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긍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론 신관 앞에 선 중년 신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뭐, 뭐야. 그럼 또 실패?' 유한은 중년의 신관의 행동에 불길한 느낌은 받았다.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그의 앞으로 다가온 마론 신관은 안타깝다는 듯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종도 아닌 모양이네." 순간 유한의 목구멍에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간신히 올라온 욕설을 도러 넘긴 유한은 마론 신관을 바라보며 인상을 늘였다. "아것도 아니라고요? 그럼 도대체 뭘 어떻게 만들어야 됩니까?" "말하지 않았나, 말고 경견한 음을 내야 한다고." "이 정도면 충분히 맑고 경건하잖습니까! 감탄까지 해 놓고 퇴짜를 놓는 이유가 뭡니까? 사람을 놀려도 정도가 있는 법.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이는게 어디있단 말인가. 식식거리는 유한을 바라보고 있던 마론 신관은 아주 힘들게 말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만든 종의 소리도 좋았지만, 예전의 신종은 그보다 더좋은 소리를 내었네. 얼마나 좋았는가 하면.......한마다로 천상의 소리라 칭할 만했지." "천상의 소리요?" "사람은 종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울기도 했고, 몬스터들은 종소리에 놀라 도망을 칠 정도였네." "하, 하하하!"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란 말인가! 종소리가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울고 몬스터가 도망간단 말인가. '차라리 돈을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세상에 그런 종이 어딨습니까? 도대체 만들걸 만들라고 하십시오!" "세상에 있엇으니까 제네더러 만들라고 한 것일세. 못한다ㅏ면 지금 당장 그만두게. 다른 사람을 찾아볼 테니까." "다른 대장장이를 찾겠다고요? 내가 실력이 없어서 못 만드니까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까?'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 유한은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신관만 아니면, 나이 많은 NPC만아니면 정말 한대 갈겨 주었을 것이다. "정성이나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네. 원래 신종을 만든 사람도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 대장장이는 아니라고 하니까." "저도 할 만큼 은 다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다르지 않는가? 할 수 없다면 지금 여기서 포기하게." 이가 절로 갈렸다. 유한은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절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까지 수락한 퀘스트를 포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지그야......." 채린이 옆에서 보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친구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반드시 끝장을 볼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간에. 몇번이고 종을 만들어 그 천상의 소리란 것에 도전할 것이다. "계속하겠습니다. 저도 자존심이란게 있으니까요.' "그럼 부탁하네." 마론신관은 별말 없이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던 유한은 허탕이 되어 버린 종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미안, 내가 생각한 대로 하면 잘될거라 생각했는데." "아냐, 내가 못 만들엇을 뿐이야." 채린의 잘못은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시킨대로 해서 종소리는 더 좋아졌다. 그저 마론 신관의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뿐. "처음부터 다시 해 보자." 유한은 다시 공구를 집어들었다. 헬리오스 신전의 지하. 지하 기도실의 한쪽 벽이 갈라지더니 그안에서 초로의 신관이 나왔다. 나이도 나이지만, 그의 초췌함은 나이를 훌쩍 넘어서 잇었다. 무척이나 힘겨운 고행이라도 한것처럼, 그의 몸은 바싹 마르고 이마에는 주름이 패여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신종은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나?" 초로의 신관은 자신의 몸보다 종의 완성에 더 집착했다. 안타깝게 그를 바라보던 마론 신관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대장장이 청년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신종은 찬생하지 못했습니다. "허, 벌써 십일이나 지났는데도 말인가?' 초로의 신관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그라는 대장장이 청년이 ㅣ불성실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종과 똑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고, 그것이 실패하였음에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을 만들고 있다. 여러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실해와 성공을 되풀이하면서. 그러나 완성된 종들 중에서도 프라테우스 신종에 걸맞은 능력을 가진 종은 없었다. '휴우, 그가 신종을 만드는데 실패하면 큰일이네. 이제 우리의 힘으로 마물을 억제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말일세. 놈의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잇어." "그럼 닷새도 버티기 힘들단 말입니까?' "불가능해. 자네가 들어와서 보면 알게야." 마론은 직접 비밀 통로안으로 들어갔다. 긴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거대한 지하광장이 나왔다.다. 지하 광장에는 큐빅 모양의 검은 물체가 있었고, 바닥에는 태양신 핼리오스의 디바인 마크(Divine Mark)가 새겨져 있었다. 둥근 우너형에 12방향으로 햇살이 뻗은 디바인 마크 그 12방향의 끝에는 각각 신관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를 연결하는 금줄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금줄을 쥔 신관들의 표정은 힘겹기 짝이 없었다. 다들 창백하다 못해 핏줄이 튀어나왔고, 어느 신관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만, 중앙에 놓엔 큐빅에선 검은 마기가 연방 흘러나왔다. 검은 마기는 금줄에 닿을때마다 스파크를 일으켰고, 그때마다 12명의 신관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더 이상 저런 식으로 결계를 유지하는 건 무릴세. 신관들이 다 쓰러져 죽던지, 아니면 놈이 결계를 깨뜨리던지 둘 중 하나야." 어쨌거나 결과는 저 마물이 부활하고 만다는 것이다. 프라테우스 신종과 같은 능력을 가진 종이 만들어지지않는다면 말이다. "휴우, 천년 전의 기적을 재현하기란 무리인가." "벅찬 일이지요. 더구나 그는 일개 대장장이에 불과하니......" 100년 전, 신종을 만든 프라테우스는 신관이자 대장장이였던 인물이다. 그는 고대의 마물이 부활하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기술 신앙심을 바쳐 신종을 만들어 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만든 신종의 위력은 엄청났다. 신성력이 충만한 신종은 한번의 울림에 사악한 기운을 소멸시키고, 두번의 울림에 마물을 쓰러트리는 힘이 있었다. 덕분에 부활했던 고대의 마물은 그 힘을 상실하고 봉인 되었다. 그러한 신종이 깨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어떤 불측한 무리들에 의해서. "일이 있기 며칠 전 부터 마을에 나타나 전설의 마물에 대해서 캐묻고 다닌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음, 그이야기는 나도 들었네 최초로 마물이 부활한 유적에도 다녀간 자들이 있다고." 현재 신전에서는 그 불측한 무리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력을 기울여 마물의 부활을 막아야 하는 것이 신전의 입장인지라 그들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부터 총교단이나 다른 교단에 도움을 요청할 것을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상황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 역시 신의 뜻. 천년동안 우리는 옛성인의 유산 덕분에 안락을 누려오지 않았나. 나는 지금의 고난이 헬리오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이라 생각하네.우리가 이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다면 그분께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야." 대신관의 굳건한 의지에 마론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변함없는 믿음에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답답하기도 했다. "과연 우리들의 힘만으로 마물을 억제할 수 있을까?" "휴으, 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될 것이네. 우리의 기원이 하늘에 닿으면, 기적은 또다시 일어날 것이야."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금불을 잡고 있던 신관한사람이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이 급히 나서서 금줄을 잡았다. 과연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 마론 신관의 마음속에 뭉글뭉글 커져 가는 의혹과 불신은 그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때마다 마론 신관은 고개를 저으며 의혹과 불신을 떨쳐 냈다. '버텨야 한다. 우리의 기원이 그분께 닿을 때까지! 또다시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믿어야한다. 지금은 믿음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힘이었다. 또하나의 종이 완성되었다. -큰종을 만들었습니다. 온세상에 맑고 고운 소리를 울릴 듯합니다. 스킬 경험치 230을 얻었습니다. -주물 스킬이 6랭크로 올랐스비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저번보다 훨씬 좋은 종을 완성햇고 덕분에 주물 스킬도 한단계 올랐지만 유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쳇! 이번에도 실패인가?' 완성된 종소리를 들은 신관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유한은 또다시 허탕임을 확신했다. 벌써 몇 번쨰인지 모르겟다. 이젠 눈 감고도 종의 거푸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되었음에도 천상의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잘 만들었다 싶어도 뭔가 부족했고, 뭔가 획기적이다 싶은 방법을 적용하면 제작에 실패하거나 엉뚱하나 소리를 내곤 했다. 정말 별별 짓을 다해 보았다. 쇳물을 녹이는 동안 기도도 해 보았고, 헬리오스 교단의 성수로 종을 식혀 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종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송코를 불러와 종에다 버프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수단들은 모조리 실패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사흘 정도, 과연 그안에 천상의 소리를 내는 종을 완성할 수 있을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기술적인 문제인가? 아님 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 청동합금 비율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르고, 신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상 이상의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에밀레종처럼 해야 되는 거 아닐까?" 곁에 있던 송코의 말에 유한은 귀가 솔깃했다. "성덕대왕신종. 그거 만들 때도 몇번이나 실패했는데 어린 아기를 제물로 넣어서 간신히 왓성했다고 하잖아." 전설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솔깃한 이야기. 더구나 지금 유한은 한계에 봉착해 있지 않은가. "어딜가?" "어딜 가겠습니까?" 송코는 유한의 말을 듣고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지그 너 설마?" 비록 자신이 말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지켜보기 답답한 마음에 한 마디 한 것뿐이다. 그런데 유한이 정말 실행하려 하자 덜컥 겁이났다. "괜찮아요. 어차피 게임인 걸요." 유한은 호메론 영지성 중앙 광장으로 나갔다. 그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릴 잡고 준비해온 팻말을 세웠다. 팻말에는 크게 '아기 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저거 뭐하는 놈이야?" "차림새는 대장장이 같은데 아기를 산다니?" 영지에 사는 NPC는 물론이고 유저들까지 유한의 곁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이를 업고 잇는 아줌마도 있었다. 그것을 본 유한은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아기 파실 건가요?" 아기 엄마는 기겁했다. "미쳤어? 금덩이 같은 자식을 내가 왜 팔아?" "이왕이면 좀 파시죠." "젊은 놈이 실성을 했나!" 유한은 짝 소리가 나도록 따귀를 맞았다. 피통을 한칸 쭉 내려보낸 아줌마, 아니 어머니의 힘은 위대했다. -쿠궁! 욕먹을 짓을 하셧습니다. 명성이 50떨어졌습니다. '젠장 욕먹을 짓을 하도록 만든 건 드림맥스 니들이잖아!' 투덜거리는 유한에게 NPC 노인이 말을 건넷다. "거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 왜 이런 짓을 하는겐가?" "누군 좋아서 하는 줄 아십니까? 신종을 만들려니 별수 없잖습니까." "신종? 신종을 왜 만들려는 건가?" "그거야......." 망할 신종이 깨졌으니까. 말을 하려던 유한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신종이 깨졌다는 것을 비밀로 하기로 마론 신관과 약속한게 떠올랐기 때문. '으이그!' 성질 같아선 그냥 내빝고 싶지만, 그랬다가 자칫 퀘스트 수행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다. 신종이라 불릴 만한 종이 깨진 것은 신전의 입장에서 대망신이다. 이일이 종교단에 알려지면 관리 소홀로 문책을 당할 인사가 한둘이 아닐 터. 마론 신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노력한것도 허공으로 날려 보내게 될것이다. 절대 그럴수 는 없었다. '젠장! 생각보다 복잡한 일에 휘말렸어!' 그제야 유한은 자신이 단순히 종만 만드는 퀘스트에 휘말린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유한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노인 NPC가 또다시 물음을 건네 왔다. "이보게. 왜 신종을 만들려는지 뭍고 있지 않나." "그게... 옆 동네 영주가 샘이나서 자기네 신전에도 신종을 만들어 두고 싶어 해서요." 유한의 거짓말이 통했는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하지만 악마를 잠재울 수 있는 신종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수 있는 건 아니라네." "영감님, 그건 그냥 전설이잖아요. 종이 무슨 힘이 있다고." 노인의 옆에 있던 청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전설이 아니야. 우리 영지에 몬스터가 없는 것도 다 그 신종 덕분이란 말이다." "우리 영지에는 원래 몬스터가 없잖아요." 청년의 말대로 호메론 영지에는 몬스터가 없었다. 몬스터가 살만한 환경이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없긴 없었다. "아무튼 그만큼 큰 종을 쉽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그렇고 말고. 괜히 신종이라 불리는 게 아니지."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헬리오스 신전의 종은 영지민들에게 전설이자 자부심인 모양이다. "그런 신종은 어린 아기를 제물로 바친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지." 어느 NPC의 말에 유한은 깜짝 놀랐다. 부뚜막에서 생선을 훔치다 걸린 고양이의 기분이 어떨까. 방금 그말을 했던 중년 NPC는 유한과 같은 대장장이인지. 허리의 오대에 망치와 끌, 집게 따위를 차고 있었다.. "흥,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한 얼굴이로 구먼. 이 바닥의 어두운 전설이지. 무기를 만들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훨씬 잘 만들어 진다고 하거든." "아......그건?" "미친놈들의 망상이지. 그딴 망상을 믿고 신종을 만들겟다고? 차라리 드래곤에게 비늘을 떼 달라고 하지 그라나?" "아하하, 저는 그저!" 유한은 식은 땀을 삐질 흘렸다. 대장장이 NPC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살벌하게 바뀌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몰매를 가할 분위기였다. 아니 벌써 빨랫방망이를 든 아줌마, 이미 돌팔매를 날린 할머니도 있었다. "이런 미친놈이 어디서 뻘짓을!" "왜 옆 영지 신종에 바칠 제물을 여기서 찾고 지랄이야!" "신종이고 복종이고, 니 인생 부터 종 쳐주마!" "켁! 그게 아니고! 잠시 내말을......크악!" 유한은 마을 사람들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사정없ㅅ이 두들겨 패고 마구 짓밟은 사람들은 어느정도 분이 풀리자 식식거리면서 돌아섰다. "나참, 세상이 흉흉하니 별 미친놈이 다 돌아다니는군." "신전에 도둑까지 들었다지? 말세야 말세." 주변이 썰렁해지자 유한은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엉망진창에 HP가 바닥으로 떨어졌있었다. -쿠궁! 딱 안 죽을 만큼 얻어 맞았습니다. 명성이200떨어졌습니다. "시끄럿!" 유한은 복장을 긁는 안내창을 손으로 휘저어 없앴다. 아무래도 아기를 제물로 하는 건 안되는 모양이다.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구한다 해도 완성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참나.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유한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신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천상의 소리 투덜거리며 신전으로 돌아온 유한은 다시 종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직 천상의 소리를 울릴 종을 만드는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퀘스트 종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데다가 삽질을 하더라도 주물스킬경험치는 주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종을 만드는 대장장이인가?" 막 종의 원형에다가 밀랍을 바르고 있을 때였다.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늙은 신관이 유한을 찾아왔다. "누구십니까?" "하든이라고 하네. 이 신전을 책임진 대신관이지" "아,그러십니까?" 유한은 지금까지 마론이 신전의 최고 신관인 줄 알았다.그런데 대신관이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대신관이라면서 왜 이제 나타난 거지?' 혹 작업이 지지부진하고 있으니 잔소리라도 하려는 건 아닐까.정말 그렇다면 안 옷것만 못했다. "많이 힘든 것 같군" "보면 모르십니까." 대신관의 말에 유한은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진작 끝났을 일을 천상의 소린지 뭔지 때문에 계속 퇴짜를 먹고있었다. "그래,종을 만들 방법은 찾았나?" "찾았을 것 같습니까?" 하든 대신관은 쓴웃음을 지었다.꼬인 듯한 상대의 말투에서 현재 그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잇었다. 지금까지 종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혹시 바쁘지 않다면 이것 좀 고쳐주지않겠나?" 하든은 유한에게 피리 한 자루를 내밀었다.구리로 된 피리는 아래쪽 3분의 1쯤 되는 부분이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뭐 이런 거야 간단히......". 유한은 구부러진 피리의 양쪽을 잡고 힘을 주었다. 퀘스트로 받은 의뢰가 아니라서 적당히 힘을 줘서 펴보려고 했지만,쉽지 않았다.결국 모루 위에 피리를 놓고 망치로 두들겨야 했다. "응?" 망치질을 하고 있던 유한의 귀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끄집어냈는지,하든이 작은 하프를 들고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이 영감이 지금?' 누군 일하고 있는데 누군 속 편히 놀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유한은 한 마디 쏘아 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든의 노래 소리가 망치질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정신이 사나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작업에 집중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요.구부러진 거 다 폈습니다." "고맙네." 하든은 수리된 피리를 입에 대고 불었다. 별 볼일 없는 구리 피리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나왔다. "잘부시네요." "허허,세상에 빛을 주시고 음악으로 만물을 교화하는 헬리오스 님을 섬기는 종이 노래 한 곳 연주 못해서 쓰겠나." 하든의 연주 실력은 정말 뛰어났다.높고 맑은 피리 소리를 들으니 초조하고 복잡한 마음이 실타래처럼 풀리는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헬리오스를 믿는 신관들의 능력?' 얼마 후 연주를 끝낸 하든이 유한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어떤가?늙은이의 연주가 들을 만 했는가?" "훌룡했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유한의 칭찬에 미소를 띤 하든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니 기쁘군. 난 실수를 할까 봐 걱정을 했었다네. 원래 난 악기를 다루는 데 그다지 소질이 없었으니까." "소질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부신 겁니까?" "연습하고 또 연습을 했지. 한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한 적도 있었지." "수백 수천 번이라고요?" 과장이 아닐까? 겨우 한 곡 연주하자고 수천 번을 연습한다니. 유한 자신도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알아주는 노가다쟁이지만, 저 영감은 더한 거 같았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연주라면 몇 번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연주는 다르지." "마음을 울려요?" "마음을 울리면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교화할 수 있지. 슬픔을 씻어 내는 것도, 분노를 다독이는 것도, 싸움을 말리는 것도 가능하다네." 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연주 한 번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그는 음악의 신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게임. 그런 일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음유시인 유저들은 여러 가지 특이한 스킬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이 하든 대신관이 말하는 그것과 관련이 있다면? "마음을 울리는 것은 매우 힘들어. 같은 음이라 해도 오묘한 차이가 있지. 그 오묘한 속에 숨겨진 소리를 꺼내기 위해서 숱한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거기까지 이야기한 하든은 유한을 바라보면 말했다. 지금까지 가볍게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과 다른 진지한 눈빛이었다. "자네는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어떤 노력을 하다니요?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방법을 찾아 전력을 다하고 잇는 중입니다." "정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뭐라고요? 영감님이 몰라서 그렇지 제가 그동안 고생한...." 유한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든이 들고 있는 구리 피리로 그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다. "이 피리, 처음에 간단하게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 "하지만 어떤가? 자네는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손에 힘을 줘 펴려고만 했지. 그래서 처음엔 허탕을 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 같았다. 종의 제작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스스로 전력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종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야.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그럼 분명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하든은 유한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대신관의 등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한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악! 무슨 놈의 NPC가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냐? 처음으로 돌아가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대신관은 유한의 경솔함에 대해서 탓했다. 이번 퀘스트를 맡으면서 자신은 계속 진지하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일까? 유한은 종 만드는 작업을 중지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 무턱대고 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정말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거랍면 말이다. "내가 도대체 뭘 실수한 거지." 유한은 작업장 주변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다. 돌면서 종 제작을 의뢰받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떠올려 보았다. 뭐가 잘못이었는지, 아님 무엇을 그냥 지나쳤던 것인지. 제작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천상의 소리가 나야 할 종을 만드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투가 너무 불손했던 것일까. 여러가지 요인들을 살펴보던 유한은 문득 광장에서 만난 노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악마를 잠재울 수 있는 신종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네." 유한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아까부터 일도 안 하고 빙글빙글 돌던 유한이 멈춰 서자, 채린과 송코가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난 거야?" "또 아기를 제물을 쓰려는 건 아니지?" 유한은 그들의 말을 듣는 둥 했다. 뭐가 문제였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그는 곧장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젊은 신관에게 달려갔다. "고문서 보관실이 어딥니까?" "거긴 왜 가시려는 겁니까? 거기는 상급 신관 이상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잔만 말고 안내나 하셔." 유한의 시퍼런 기세에 눌린 신관은 신전의 고문서 보관실로 그를 안내했다. 고문서 보관실의 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암 브레이크!" "으악! 뭐 하는 겁니까!" "지그야!" 안내한 신관은 물론이고 채린과 송코도 깜짝 놀랐다. 유한이 아주 막무가내로 고문서 보관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니 , 들어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서를 마구 빼서 살펴보았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옛날 기록을 좀 보려고, 일단 신종에 대한 기록을 모조리 찾아 줘." "지그야 , 이런 짓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괜찮으니까 일단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유한의 기세에 이끌린 채린과 송코는 장서들을 뒤져 가며 신종에 대한 기록들을 찾았다. 이곳까지 유한을 안내해 왔던 신관은 뒤에서 '나는 이제 죽었다'는 소리만 연거푸 반복했다. '이건.....!'서고를 뒤지던 유한은 신종과 관련된 기록을 발견했다. 300년 전 , 어느 신관이 남긴 기록에 프라테우스 신종의 단면도와 종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적혀 있었다. '마물을 잠재운 종?' 신종에 대한 믿기 어려운 기록들은 유한을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종의 울림만으로 고대의 마물을 봉인하고 , 몬스터를 쫒아 버리는 게 가능했단 말인가. ....옛 기록을 미신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 프라테우스 신종의 구조를 파악해 본 사람은 그 기록이 진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신종은7음계 중 가장 맑은 음을 육중하게 울리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파동은 신성력이 발휘될 때의 파동과 동일하다.즉,어둡고 사악한 기운을 소멸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마물이라도 자신의 근본을 파괴하는 파동에 당할 재간이 없다.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칠백 년 전 이 종을 만든 신관 프라테우스는 신앙심이 투철할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해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일부러 종을 크고 두껍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물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독특한 파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파동이 단순히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한은 이미 3번째 신종을 완벽하게 복제해 냈다. 종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이 마물을 제압할 수 잇기 위해서는 분명 다른 뭔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그야, 이걸 봐." 채린이 또 다른 기록을 찾아 유한에게 보여 주었다. 그녀가 찾아낸 고서는 프라테우스 신관의 일대기였다. 거기엔 그가 신종을 만들 때 치렀던 의식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갑자기 들려오는 엄한 호통 소리. 고개를 돌린 유한의 눈에 마론 신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미 읽을 만한 것을 전부 다 읽은 유한은 책을 내려 놓고 마론 신관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짓이냐고요? 그럼 신관님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하다니?" "종을 만들라고 시켰으면 그 종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정확히 알려 줬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그랬다. 지금까지 유한이 실패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그 이유가 가장 큰 실패 요인이었다. 칼을 한 자루 만들어도 그것이 요리에 쓰일지 전투에 쓰일지 알아야 정확히 만들지 않는가. 목적을 제대로 밝히지도 않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겠는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마론 신관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직도 종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그의 탓이 컸다. "미안하네. 신종에 대한 비밀을 숨기려다 보니, 자네에게 핵심을 알려 주지 못했네." "도대체 종을 만드는 사람에게도 비밀을 숨겨야 할 이유가 뭡니까?" 외부에 알려지면 망신이기에 말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책에서 본 대로 고대의 마물이 관련되어 있다면,이건 굉장히 큰일이니까. "마물의 존재 때문이네. 프라테우스 신종이 만들어진것은 천 년 전이지. 천 년의 세월은 역사를 전설로, 진실을 허구로 바꾸기게 충분했어." 신관들은 그렇게 된 데 만족했다. 죽지 않은 채 봉인된 마물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 그리고 엉뚱한 호기심과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이 나라는 내전 중일세. 영주들은 보다 강력한 힘을 갖기를 바라지. 그 힘이 악마의 것이라도 주저 없이 탐을 낼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이제 유한도 마론 신관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이해했다. 그러나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을까. 마물이 달리 마물이라 불리지 않는다. 마물을 손에 넣는 자는 세상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멸로 이끈다고 하지 않는가. "섣불리 손을 대려는 자들이 있겠습니까?" "자네들은 듣지 못했나 보군. 마녀 데보라의 유산을 스스럼없이 사용자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철십자 길드를 말하는 모양이다. 분명 저번 길드전에서 철십자 길드는 다크나이트&B.O.B길드를 상대로 마녀 데보라의 유산으로 추정되는 거대 목인병을 투입해서 승리했다. "그뿐만이 아니지. 자신의 이득 때문에 리저드맨에게 인간의 기술을 팔아먹은 자도 있어. 키예프 공국에는 그들과 거래하는 장사치들도 있다고 하더군." 설자 자신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유한이었다. 다소 불분명하고 왜곡된 정보로 전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게 인가이야. 욕망에 눈이 멀면 악마 ,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가 될 수도 있지. '죄송합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악마 같은 자들이 나타났네. 서슴없이 신종을 부숴 버렸지. 신종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뭐야, 누군가가 일부러 신종을 깻다고?"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그랫단 말인가? 일단 그건 나중에 알아볼 일이다.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꾸물거리면 그 고대의 마물인지 뭔지가 부활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정은 대충 이해했으니 다시 종을 만들겠습니다." "부탁하네. 이제 더 이상 오래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야." 서둘러 종을 만들어야 한다. 마론 신관의 말과 표정을 미루어 보건데 금방이라도 마물이 부활해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남아 있는 기한이고 뭐고 퀘스트는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기회는 한 번뿐인가?' 분위기도 그랫지만, 고서에서 본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앞으로 기회는 한 번뿐이다. 유한이 그 기회를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상황이 결정 날 것이다. "서둘러!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작업장으로 돌아온 유한은 일꾼들을 독려했다. 그가 신종의 거푸집을 제작하는 사이, 일꾼들은 부지런히 도가니에 불을 붙여 청동을 녹였다. '채린이 말이 맞았어!' 신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채린의 말은 맞았다. 하든 대신관도 '최선의 노력'을 강조하지않았나. 하지만 정성을 보이는 방법이 틀렸다. 유한과 채린은 신종의 장식을 똑같이 떴지만, 그게 아니었다.정성을 보이는 방법은 바로‥. "쇳물은 아직 덜 녹았나?"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푸집은 완성했는데 청동 쇳물이 아직 덜 준비되었다. 서둘러 종을 완성해야 할 상황이기에 유한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젠장.빨리 청동을 녹일 방법이!' 화력을 좀 더 높여 보면 어떨까? 거기에 생각이 미친 유한은 인벤 구석에서 초열탄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몇 개 가지고 다녔는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부글부글. 도가니에 있는 청동 쇳물이 벌겋게 끓어올랐다. 태양처럼 드겁고 붉은빛. 유한은 그 쇳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뭘 어쩌려고 저러지?" "글쌔요.지금까지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요." 거푸집이 다른 것도 아니고,합급 비율을 바꾼 것도 아니다. 송코와 채린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유한을 바라보았다. 특히 채린은 신종을 만들 때의 의식이 적혀진 기록을 본 바가 있기에 그 불안이 더욱더 컸다. '신관 프라테우스는 신종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혼을 바쳤다.' 신종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의식 그것은 제작자의 혼을 신종에 바치는 일이었다.그 덕분에 신종은 사악한 기운을 멸하는 천상의 소리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성을 보인다는 것을 바로 이런 희생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처음에 유한도 프라테우스 신관이 쇳물에 몸을 던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서의 아래쪽 기록에는 프라테우스 신관이 이후로도 용맹정진하여 불우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살다가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즉, 신종을 만들고도 생존을 했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데 혼을 바쳤다면 자신의 혼에 필적하는 뭔가를 바쳤다는 말인데….' 프라테우스는 신관이면서 대장장이. 그런 그에게 자신의 생명에 필적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장인인 그의 혼이 담겨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와 같은 대장장이인 유한은 해답을 알 것 같았다. 좌악! 유한은 갖고 있던 공구들을 인벤에서 꺼냈다. 대장장이로 독립했을 때부터 사용했던 손때 묻은 공구들.단순히 상점에 진열되어 있던 것을 샀을 뿐이지만,이 녀석들을 손에 쥐고 수많은 무기들을 만들고 고쳤다. "그래,이것이 내 혼이다!" 자신과 함께 숱한 탄생과 재구성을 일으켰던 공구들. 대장장이 지그의 일부나 다름없는 이 공구들이 흔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유한은 주저 없이 공구들을 끓는 쇳물 속에 집어넣었다. "저,저런!" 유한이 공구를 쓸어 넣는 것을 보고 주변의 NPC 대장장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인에게 있어 손에 익은 공구란 함부로 버릴 것이아니다. 그것은 유저도 마찬가지다.숙련도가 높은 장비는 스킬이나 생산의 성공률에 영향을 주기에 커다란 가치를 가진다. 만약 유한이 오판을 한 것이라면 그는 굉장한 실수를 한 셈이었다. 되돌릴 방법이 없는 실수를. '나는 틀리지 않았어!' 유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끓는 쇳물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기록이 정확하다면,자신의 행동이 옳다면 분명 이적이 일어날것이다. 우우우웅! 낮은 울음과 함께 도가니 안의 쇳물이 환하게 빛났다. 태양보다 훨씬 더 밝은 그야말로 광명 그 자체의 빛 밤하늘로 솟구치는 빛을 본 신관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손을 모았다. "오오 헬리오스여!" "쇳물을 부어라!" 유한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젊은 신관들은 기중기를 조작해서 거푸집에 청동 쇳물을 부었다. 광명의 빛을 담은 뜨거운 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벽히 거푸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지그야 드디어 완성한 거지?그렇지?" "아직!아직 아니야" 채린은 흥분했지만,유한은 냉정했다. 아직 종은 완성되지 않았다.뜨거운 혼이 식어 완성된 종에 깃들어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드드드드드--! "뭐,뭐야?" 모든 사람들이 거푸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땅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신종의 탄생과 관계있는 현상일까.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모두들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땅에서 돋아난 풀들이 누렇게 메마르고,딱딱하게 굳은 땅은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진 땅에선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크악 !이것은!" 연기에 닿은 사람들은 미라가 된 것처럼 비썩 말라 쓰러졌다. 유한 일행도 HP가 쭉 떨어지는 것에 놀라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큰일 났군 봉인이 풀렸어!" 어느새 나타났는지 하든 대신관이 옆에서 침음을 삼켰다.마론과 디바인 마크에 참가한 상급 신관들이 굳은 얼굴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저게 그 마물인가요?" "그렇네 천 년 전 선배 신관들께서 봉인한 것으로 세상에 나가면 엄청난 평지풍파가 일걸세"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허공의 검은 연기는 공중에서 자줏빛 큐빅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감히 나를 천 년 동안 봉인하다니! 마기가 일렁이며 큐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유부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에 채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이런 거에 약했기에 유한의 뒤에 숨으며 물었다. "지,지그야 이젠 어쩌지?" "어쩌긴,놈을 잡아야지" 다행이 퀘스트가 실패했다는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만약 그랬다면 유한은 뒤도 볼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퀘스트가 진행 중이었으니까 종이 완성될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모두 대(大)결계를 쳐라!" 하든 대신관의 외침에 수십 명의 신관들은 마물을 중심으로 몇 겹의 디바인 마크를 만들었다. 이대로 영창을 불러 놈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 하지만 먼저 움직인 것은 마물이었다. -크크크!감히 이 위대한 암흑의 전사님께 대항을 하겠다고?좋다, 모두 죽어라 다크레인! 큐빅이 들썩인다 싶더니 검은 마기들이 창처럼 변해 지상에 소나기처럼 떨어졋다. "크악!" "모,모두 피해라!" "홀리 실드!" 행동이 빠른 신관들은 피하거나 신성력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힘을 되찾은 마물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기의 창들은 몇몇 신관들의 홀리 실드를 꿰뚫고 들어갔다 "어쩌지? 이 상태론 공격할 수없어" "기다려봐 저놈도 계속 공격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유한과 채린은 송코의 등 뒤에 바싹 붙었다.레벨이 어느 정도 되는 송코엿기에 그의 홀리 실드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흥! 제로 그라비티(Zero Gravity)! "우아아았!" 공격의 효과가 떨어지자,마물은 전술을 바꾸었다. 창내를 옅은 마기가 감싼다 싶더니 사람이고 물건이고 할 것없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조심해! 이 상태에서 공격을 받으면……!" 허공에 둥실 뜬 상태에선 방어는커녕 몸을 바로 잡기도 쉽지 않았다.그 점을 노렸던 마물은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했따 -다크 블레이드! 마물의 주변에 초승달 모양의 검은 칼날들이 생겨났다. 빙글빙글 도는 칼날은 무중력 상태로 떠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악!" "송코 오빠!" 송코는 무중력 상태에서도 홀리 실드를 유지했지만,마물의 다크 블레이드가 선회해 들어오면서 송코의 등을 베고 지나갔다. 다크 블레이드의 공격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재차 송코를 공격하려는지 궤적을 바꾸어 또다시 날아들었다. "제기랄, 안 돼!" 유한이 안타깝게 외쳐 보았지만, 말로는 암흑의 칼날을 막을 수 없었다.뒤에서 몇몇 신관들이 필사적으로 찬송가를 불러 보았지만 마물의 힘을 약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였다. "바람이여!나의 적을 날려 버려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히이 다크 블레이드를 밀어냈다. 채린의 손에서 은빛의 바람이 일어나더니 송코를 베려던 다크 블레이드를 멀리 날려 보냈따 놀란 유한이 채린을 바라보았다.궁수인 그녀에게 어디서 그런 신비한 힘이 생겨났을까. "시아야,방금 그건?" "바람의 날개야 아직은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해" 채린의 손에는 투명한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일전에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가 채린에게 주었던 바람의 날개였다. 그 보석은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그 힘을 톡톡히 발휘했다. 바람은 무중력 상태에서 채린의 몸을 바로 잡아 주는 한편,주변에서 날아오는 다크 블레이드들도 떠밀어 보냈다 "대단한데! 언제 사용하는 법을 익힌 거야?"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연구해 봤어" 나중에 위력이 강해지면,그때 친구들에게 자랑하려 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덕분에 앞당겨졌지만,바람의 날개는 만족할 만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유한에게 이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역전의 카드가 되었다. "시아야,바람으로 날 날려 보낼 수도 있지?" "응 그런데?" "날 종이 있는 곳으로 떠밀어 줘" 지금쯤이면 거푸집 안에 있던 쇳물이 다 식었을 터 프라테우스 신종과 같은 능력을 가진 저 종을 두드리면 마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채린도 유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바람이여!나의 친구를 인도하라!" 채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바람이 유한의 등을 떠밀었다. 유한이 움직이자,마물도 그의 행동을 감지했다.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지만,마물은 유한의 행동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감히! 다크 애로우! "크허억!" 마기가 똘똘 뭉친 화살이 신종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유한의 몸에 꽂혔다.HP가 쭉 닳았지만,인벤에 있는 포션을 마시면서 버텼다. 'hp포인트가 0이 되지않는 한 나의 승리다!' 마물은 오판했다 녀석은 유한을 죽이기보다 종에 다가가지 못하게 밀어내는 공격을 했어야 옳았다. 그 오판은 마물에게 있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 했다. "울려라! 나의 종아!" 신종으로 날아간 유한은 온 힘을 다해 나무망치를 휘둘렀다. 필사의 망치는 단단한 거푸집 외벽을 깨트리고,완성된 종을 두드렸다.종을 감싸고 있던 거푸집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성스러운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졋다. 데--에------엥! 맑고 경건한 울림이 길고 넓게 퍼져 나갔다. 갑자기 마기가 걷히고 사방이 환해지는 느낌 장내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보았다.천상의 울음을 토하는 신종이 광명의 빛을 내뿜는 것을 -크아아아악! 마물의 비명은 성스러운 종소리에 묻혀 버렸다. 마물의 몸이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마기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따.힘도 약해져서 무중력 상태로 떠올랐던 모든 사람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유한과 유한이 만든 신종도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 큰 종을 만들었습니다. 천상의 소리가 울리는 신종입니다. 스킬 경험치를 500얻었습니다. [신종 제작자]칭호를 얻으셨습니다. [헬리오스 신전의 종]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만세!" 유한은 자신의 옆에 뜬 안내창들을 보고 손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 누구도 뭐랄 수 없는 신종을 탄생시켰다.퀘스트도 완수했고 부활했던 마물도 제압했다. 이제 한 번만 더 종을 울리면 마물은 완전히 그 힘을 잃을 것이다. 데---에-----엥! 유한은 또 한번 나무망치로 종을 두들겼다.좀 전보다 소리가 약하긴 했지만 마물의 힘을 꺾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마물이 부활했을때 암담한 얼굴을 하던 신관들도 흩어지는 마기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소리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쇼크 웨이브]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음의 파동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오! 쇼크 웨이브!" 엘프의 숲에서 알게 된 쇼크 웨이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소리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았다고 하는데,이번에 신종을 울려 마물을 제압한 것이 습득 조건을 충족시켰던 모양이다 비록 히든스킬은 아니지만,유한은 공격 스킬을 하나 더 보유하게 되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딱 맞았다. "앗!저게 뭐야?" 기뻐하는 유한의 귀에 당황하는 신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공중에 빛이 번득인다 싶더니 마법진 하나가 그려졌다.그 마법진은 유한과 채린이 얼음 궁전의 보상방에서 본 적이 있는 이동 마법진이었다. '대체 저게 왜?' 유한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단지 이동 마법진이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다.문제의 이동 마법진은 힘이 약해진 마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처,천 년 만에 나온 세상이거늘! 내 네님들을 잊이 않겠다.케에엑! 마물은 끌려가지 않으려 했지만,순식간에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물이 사라지자 이동 마법진도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마,마물이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신관들은 패닉에 빠졌다.봉인해야 할 마물이 사라져 버리다니,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달아났는가?그렇지 않으면.....? '헐,끝이 뭐 이래?' 당황스럽기는 유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금방 냉정과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흐흐흐,어쨋거나 퀘스트를 완수했다." 마물따위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어디 다른 곳으로가 사람들을 죽이든,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힘을 기르든 그건 그때 가서의 일이다. 유한은 일단 힘들었던 퀘스트를 끝낸 것에 만족했다. "크크크, 암흑의 심장도 짐의 손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히죽거리는 늙은 왕이 있었다. 기사와 마도사들을 거느린 왕의 손에는 헬리오스 신전에서 사라진 큐빅이 들려 있었다. "오라! 그리고 나의 힘이 되어라!" 왕은 마기를 흘리는 큐빅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크아악! 감히 날.... 검은 마기들이 왕의 몸을 세차게 휘감았다. 마치 그의 명령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친 듯이 날뛰던 마기는 왕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아! 꽤 사나운 놈이로구나." 마기를 모두 흡수한 왕은 사우나라도 한 듯이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만족한 모습에 곁에 있던 기사가 부복하며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감축드리옵니다, 페하 이것으로 미케니아의 재건이 보다 빨라졌사옵니다." "그러지 마도 왕국의 재건에 한 발 더...." 거기까지 말한 왕의 눈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오랜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부활했던 미케니아 왕국 공중 요새 자신의 왕국이 있던 수도는 차디찬 북해의 심해로 가라앉았다. 충선스런 신민들과 함께. 늙은 왕은 부활한 미메키아의 국왕 이바니우스 3세였다. 추락하는 공중 요새에서 몇몇 신하들과 간신히 탈출해 이렇게 마도 왕국의 부활을 꾀하고 있었다. "페하, 암흑의 심장이 봉인된 신전에 그놈이 있었사옵니다." 근위대장 라이칸의 말에 이나비우스 3세의 눈이 번득였다. "그놈이라 하면?" "페하를 능멸한 그 괘씸한 대장장이 말이옵니다." 라이칸은 신종을 깨트린 다음, 신전을 동태를 몰래 살피고 있었다. 당연히 유한이 종을 만드는 것을 목격했다. "그놈이 거기서 뭘 하더냐?" "암흑의 심장을 가두는 봉인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구나. 봉인구 제작은 십지 않을 작업일 텐데." "마지막에는 결국 완성을 했사옵니다. 마도사들이 이동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이 늦었다면 암흑의 심장을 회수하지 못햇을 것이옵니다." 평범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마물의 봉인구까지 만들 줄이야. 어쨋든 고약한 놈이었다. 공중 요새를 침몰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암흑의 심장까지 봉인하려 하다니. 일개 대장장이 주제에 패왕의 행보를 막아서는 꼴이 매우 괘씸했다. "페하, 제가 그놈을 처단하겠사옵니다. 소신에게 맡겨주소서." "으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불필요한 분란은 자제해야하느니라." 원한에 얼매어 대의를 그르칠 수 없었다. 지금은 대장장이 놈을 없애는 것보다. 봉인된 미케니아의 마도 병기와 유산을 부활시키는게 우선이다. 이 암흑의 심장을 손에 넣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냐?" "옛, 페하 뇌제의 홀이 묻혔을 타사르 평원이옵니다. 현재 그로지아라는 천민의 나라가 그 땅을 관리하고 있사옵니다." "이동할 준비를 하라. 신의 종자들에게 꼬리를 밝히기 전에 떠나야 한다." 이바니우스 3세의 명령에 마도사들은 이동 마법진을 구축했다. 얼마 후 , 마법진이 완성되고 미케니아의 잔당들은 그 자리에 사라졌다. 드림맥스 본사 4층의 게임 관리실. 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닠터링하는 관리실 직원들은 지금 하나의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미케니아의 잔당을 이끌고 있는 이바니우스 3세가 그로지아로 떠나는 모습이 나오고 잇었다. "지그 녀석이 저걸 알고 있을까?" "전혀 모르고 있을 겁니다." 정경욱 부사장의 말에 손석진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럼 지그는 이바니우스 3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걸 전혀 모르겠군. 나중에 맞붙을 때 너무 불리해지는거 아니야?" 일전에 손석진이 대마왕이라 칭했던 미케니아의 국왕은 이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과거에 읽어버린 힘을 되찾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가 힘을 되찾으면 가장 먼저 찾아갈 유저가 아마 지그가 아닐까 싶었다. "상관없습니다. 지그 유저가 이나비우스 3세의 손에 죽으면 그 또한 스토리의 일부이니까요." "하긴, 그자신이 원한을 만들었으니."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NPC들은 고도의 인공지능으로 인간과 거의 같은 사고를 한다. 원한을 가지면 복수할 줄알고, 은혜를 입으면 갚을 줄도 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몇몇 스토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NPC들만이 그러는 것이지만, 이바니우스 3세는 그중에서도 핵심이다. "그보다 저 미케니아의 잔당들 , 예상보다 행보가 빠르구먼." "원래 본격적인 행보는 게임 시간으로 육 개월 정도 뒤가 될 예정이었습니다만...." 손석진이 손을 튕기자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화면에 재생되는 동영상은 공중요새가 추락지 일주일 뒤에 찍은 것이었다. 이바니우스3세와 미케니아의 잔당들은 북해 가운데를 떠다니는 빙하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구조해 준 유저들이 있었다. 범선을 타고 향해 중이던 모험가 그룹은 미케니아 잔당들을 친절히 구조했고, 이바니우스 3세는 항로를 잃은 그들에게 가까운 육지로 가는 방향을 일러 주었다. 그렇게 배가 거의 육지에 다다랏을 때였다. 힘을 회복한 미케니아 잔당들은 배에 타고 잇던 유저들은 공격했다. 유저들은 뒤늦게 반격했지만, 결국 모두 죽임을 당하고 바다에 던져졌다. "쩝, 불쌍하게도...." "호의가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요." 정경욱은 씁슬한 미소를 지었다. 손석진이 창조한 이 방대한 가상 세게는 때로 현실만큼이나 냉정하고 , 비정했다. 물론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따슴함과 넉넉한 인정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되살아난 고대의 망령들이 음지에서 준동하고 있었지만 , 당사자인 유한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문제의 마물을 빨아들인 이동 마법진이 얼음 궁정의 보상방에서 본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미케니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알아챌 수 있겟지만 , 지금 유한에게는 그런 것보다 퀘스트의 보상이 더 중요했다. "수고했네 잘해 주었어." 유한은 칭찬하는 마론 신관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신종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지만 , 마물의 행방이 사라져 버린 탓이다. 지금 신관들이 은밀히 추적에 나서고 있지만 , 쉽게 찾을 수 잇을지는 미지수였다. 신종을 깬 자들이 마물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그자들이 누군지 자세히 모른다는 것이고 ,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저기, 보수는?" "아! 미안하네 .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중이라." 마론 신관은 집무실 한쪽에 있던 금고를 열어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그와 동시에 보상창들이 유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명성이 1,500 올랐습니다. -경험치 5,000을 얻었습니다. -레벨108이 되었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민첨성이 1 올랐습니다. 행운이 1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유한이 주목한 것은 마론 신관이 내놓은 상자와 관련된 문구였다. [오래된 나무 상자]를 받앗습니다. '안에 뭐가 있나?' 상자가 작았기에 돈이 많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앗다. 유한은 혹시 금덩이나 보석이 아닐까 하고 뚜껑을 열어 봤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떳다. "이, 이건!" 상장 안에 든 것은 탁구공만 한 크기의 은빛 금속 덩어리들이엇다. 혹시나 하고 아이템을 감정해 본 결과 유한의 눈앞에 다음과 같은 안내창이 떠올랐다. [에르젠 합금] 설명:은에 몇가지 원소가 더해진 마법 금속 강철보다 강한 강도에 마법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킨다. 누구나 탐을 내지만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수량이 적다. 무구의 수준을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마법 급속 에르젠 피 토하는 퀘스트를 안수한 합금 3랭크 이상의 유저들만 생산할 수 있다는 금속이다. 피 토하는 퀘스트를 완수한 합금 3랭크 이상의 유저들만 생산할 수 잇다는 금속이다. 워낙에 생산량이 적어서 던전 탐사나 몬스터 사냥을 통해 흭득하는 일이 더 많은 아이템이기도 했다. 정해진 시세가 없고 거래할 때마다 달라지기에 현질로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에르젠이 유한의 손에 들어왔다. "그만하면 적정한 보상이 되리라 생각하네만?" "저, 적할하다 마다요!" 역시 큰 신전답게 보상도 화끈했다. 쉽지 않은 퀘스트 였기에 더욱 그랬을 테지만. '우헤헤! 이게 웬 떡이냐! 눈앞에 마론 신관만 아니라면 덩실덩실 춤을 추엇을 것이다.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기분. 그러나 이것은 복권과 달랐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 낸 결과물인 것이다. '이걸 당장 경매장에 넘기면...아냐 , 아냐 한탕거리로 삼기보단 더 건설적인으로 생각해야 해. 에르젠보다 에르젠이 들어간 마법 무구들이 더 비싸게 거래된다. 새삼 자신이 대장장이라는 걸 상기한 유한은 이놈으로 명품 무구를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크크큭, 이건 걸 재투자라고 말하지.'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도 에르젠 무구를 못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랭크가 낮고 제작 경험이 일천하기에 자칫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유한의 생산 스킬은 3랭크 A급 무구를 무난하게 만들 수 잇응 2랭크가 된 뒤에 손을 대도 늦이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 부탁이 있네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유한은 마론 신관의 말을 들었다.혹시 마물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는 연계 퀘스트가 뜨지 않을까 싶었지만 ,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겠나? 자게 같은 대장장이라면 뛰어난 전사나 기사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하! 이게 이렇게 되는군.' 마물과 관련된 연계 퀘스트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유한이 아니라 그가 추천하는 사람이 맡게 될 줄이야. 물론 '아는 사람 없습니다.'라고 하면 마론 신관은 사람을 따로 찾을 것이다. 그러나 유한은 실력이 뛰어난 전사를 무수히 알고 있었다. 귀찮게 하는 옌스만 해도 여느 랭커 못지않았고,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아저씨들도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장인 길포드는 말할 것도 없고, 그중에서 유한이 선택한 사람은... "로키라는 기사에 대해서 들어 보셧습니까?" "로키?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철벽기사 로키 말인가?" 마론 신관도 로키에 대해 들어 본 모양이다. 그만큼 현재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로키의 명성이 드높다는 반중이기도 했다. 유한이 로키를 추천한 것은 블랙 아이언의 나머지 설계도를 양도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로키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데보라의 나머지 설계도를 찾아 발품을 팔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 그라면 믿을 수 있겠군. 과묵하다 알려진 데다 실력도 광전사 바츠에 버금갈 것이라 하니까." "...." 이런 데서 바츠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캐릭터는 사라져도 그 명성은 NPC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제길 , 바츠가 있었으면 이번 퀘스트는 내가 맡는 건데.'본인이 본인을 추천한다는 게 조금 쪽팔리기는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반드시 자신을 추천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츠가 있엇으면 지그가 생겼을까? 흔한 말로 캐릭터가 바뀐 데는 이유가 있고 , 그게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그렇게 변화햇다면 억울하지도 않지만, 유한의 경우 그런 변화의 선택을 , 가능성을 타인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변화를 강요당했다. '오냐 , 내가 이번엔 네놈의 변화를 강요해 주마!'유한은 드림맥스 본사에서 봣던 해커를 떠올렸다. 비록 정체를 알아내진 못했지만 , 실제 면상을 봤을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 '크크크. 그때 놀라서 도망치는 꼬락서니하곤...' 놈이 창문을 깨고 도주했을 땐 어이없고 분할 따름이지만, 지금 생각하니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까이 있으니 잡아 보란 식으로 오만방자하게 굴던 녀석이 3층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허겁지겁 도망을 가는 꼴이라니. 작으나마 놈에게 한 방 먹였는지 모른다. 아니 , 먹였을 것이다. 이번에 아쉽게 놓쳤지만 , 다음엔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여 줄 것이다. 다음이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Chapter05 지포 라이터 찌뿌듯한 몸을 풀기 위해 찾은 극기도장. 탈의실에서 도복을 갈아입던 유한은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지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해커가 떨어뜨린 레어 아이템 지포라이터. 잃어버리지 않게, 뭔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물건이다. '근데 이제 놈을 어떻게 찾는다?' 지포라이터를 개조한 길용이라는 사람도 사 간 해커의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서가 끊긴 것일까? '이미 지문은 뭉개졌을 테고…….' 하도 만지작거려서 지문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경찰에 갖다 줄 것을. 그랬다면 혼자 설치는 것보다 소득이 있지 않았을까? 당시 해커는 유한과 술래잡기를 하는 동시에 드림맥스 본사 데이터를 털고 있었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드림맥스와 경찰에서 큰 관심을 보였을 수 있다. 아마 이 같은 단서가 있다는 걸 알면, 그 부사장이란 사람은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아니, 그 인간은 고생 좀 해야 돼.' 유한은 정경욱이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렸다. 감히 하늘 같은 고객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지금쯤 본사 해킹 문제로 사장에게 한창 박살 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즐거워져 큰 단서가 될지도 모를 지포라이터를 제공할 의사가 더더욱 사라졌다. '크크큭, 피똥 좀 싸 보라지.' 자신이 해커를 찾는다고 했던 고생을 드림맥스도 겪어 봐야 마땅했다. 그렇게 유한이 지포라이터를 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휙! 갑자기 옆에서 뭔가 어른거리더니 지포라이터를 채 가는 것이 아닌가. "유한이 너 담배 피웠냐?" 고개를 돌리자 곽대발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불량 청소년을 계도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부터 담배질이냐? 청소년기에 담배 많이 피우면 키가 안 자라는 걸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 이건 압수야." 곽대발이 지포라이터를 가져가려고 하자 유한은 후다닥 달려들었다. "저한테 중요한 물건이에요! 돌려주세요." 도망치던 해커가 회수하려 했을 만큼 귀중한 물건이다. 한 번 허탕을 치긴 했어도 해커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텐대, 그런 물건을 곽대발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돌려 달라고요!" "어허! 이놈의 자식! 너 맞을래?"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곽대발은 이미 유한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굴하지 않고 그의 도복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동안 배워 놓은 가락이 있는지라, 유한은 곽대발의 주막이 두렵지 않았다. "곽 사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관장 송태수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시끄러운가 했더니 유한과 곽대발이 라이터를 가운데 두고 다투고 있었다. "관장님, 유한이 자식이 담배를 피웁니다.!" "저한텐 소중한 지포라이터라고요!" 송태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을 떼어 내고 지포라이터를 압수했다. 곽대발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남의 라이터를 뺏으면 쓰나." 유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뺏으려면 담배도 뺏어야지 얼른 뒤져서 압수하도록." "앗! 그렇군요. 근원을 뿌리 뽑아야……." "뭐가 그런 건데요!" 유한은 이번에는 송태수에게 달려들었다. 곽대발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복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극기도 창시자에게 그렇게 덤빈 것은 뿅망치를 들고 탱크에게 달려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놈의 자식이 어디 어른에게!" "크엑!" 송태수의 큼지막한 주먹에 맞은 유한은 탈의실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가볍게 유한을 제압한 송태수는 지포라이터의 뚜껌을 열고 부싯돌을 튕겨 보았다. "어디 보자, 쓸 만한가?" 쓸 만하면 예연가인 장인어른께 상납할까 생각 중인 송태수였다. 그런데 아무리 부싯돌을 튕겨도 불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불꽃만 튀길 뿐. "기름이 없는 모양이군." 송태수는 지포라이터를 케이스에서 뽑았다. 그런데 안에 라이터 기름을 채울 곳이 없었다. 기름통 대신 다른 물건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이거 라이터가 아닌가?" 의문의 물건은 메모리 전용 접속 단자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해커의 라이터에 저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이제 왜 해커가 떨어트린 지포라이터를 회수해 가려고 악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해커의 라이터는 지포라이터로 위장한 휴대용 메모리였던 것이다. 유한은 라이터에 감춰진 비밀을 알게 돼 기뻤다. 이제 담배 피운다는 누명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곽 사범이 오버했구먼, 이거 라이터가 아니야." "야동이 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곽대발은 유한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몰아세웠다. 그 말에 송태수가 또 한 번 눈을 부릅떴다. 얼마 전, 채린이가 유한의 대장간에 자릴 펴고 지내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다 채린이 유한이랑 드림맥스 리셉션에 같이 갔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둘이 가까이 지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유한이 놈이 메모리에 야동을 넣고 다닌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설마……." "니가 내일의 태양을 보고 싶지 않나 보구나!" 송태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근거 없는 오해라고요!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유한도 확인하고 싶었다. 곽대발이 씌운 누명을 벗고 싶기도 했지만, 해커의 메모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오냐, 그래 확인해 보자!" 사무실로 달려간 송태수는 컴퓨터 메모리를 꽂았다. 유한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고, 곽대발도 따라 들어왔다. "오! 뜬다, 떠!" 컴퓨터는 메모리에 있는 폴더를 읽어 냈다. 송태수는 그중 '내 파일' 이란 폴더를 클릭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뭐야, 이거?" 폴더를 여는 데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니. 과연 해커다운 행동이었다. 폴더의 패스워드 입력은 라이터가 분실되거나 남의 손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수였을 것이다. 과연 폴더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짐작은 가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수상하군!" "무척 수상합니다." "수상할 수밖에요." 해커에서 입수한 것이니까. 유한은 그렇게 생각해 대꾸한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송태수와 곽대발의 생각은 달랐다. "비번이 뭐야?" "예?" "비번이 뭐냐고! 빨리 말 안 해?"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 거잖아." 송태수와 곽대발, 두 사람은 지포라이터 메모리는 유한의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비번을 입력하면 폴더 안에 있는 적나라한 파일들이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유한에게 참으로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얼른 말 안 해?" "크엑! 내 게 아니라고요!" "이놈이 어디서 거짓부렁을!" 지포라이터의 비밀을 캐어 낸 뜻 깊은 날, 유한은 딱 안 죽을 만큼 얻어맞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게임이 아니라 명성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동 보유자'의 불명예 스러운 칭호를 얻은 것 같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한은 간신히 돌려받은 기포라이터 메모리를 노려보며 고민, 또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열지?' 유한은 컴퓨터에 박식한 편이 아니다. 그는 여느 사람들처럼 인터넷을 검색하고, 워드를 치거나 동영상이나 그림을 살짝 편집할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해커가 폴더에 걸어 놓은 락(Lock)을 풀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걸 풀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유한은 무릎을 탁 쳤다. 뒤늦게 머릿속에 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그 녀석이라면!' 이이제이(以夷製夷). 해커엔 해커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걸 풀 만한 존재를 떠올린 유한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빈 병과 폐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창고 안. 덩치가 큰 녀석과 작고 왜소한 청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모가 깃든 눈빛을 번쩍이는 청년은 덩치를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좀 있다가 들어오는 녀석을 손봐 주면 된다?" "그래, 불을 꺼 둘 테니까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밟아버려." "훗! 그런 거야 내 전공이니까 문제는 없는데, 보수는?" 커다란 덩치의 물음에 왜소한 청년, 블라덱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싸움꾼인 이녀석을 움직이려면 적당할 만큼의 돈을 찔러 주어야 한다. "오십 만원. 놈을 확실히 손본 뒤에 지급하지." "훗! 좋아. 놈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곧 올 거야. 올 때가 됐어." 몇 시까지 갈 거니 아지트에서 기다리라고. 그냥 들이쳤으면 자신이 아무런 준비도 못했을 텐데. 이렇게 기회를 주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끼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블라덱은 재빨리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창문도 미리 가려 놓았기에 창고 안은 암흑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야, 블라덱. 불은 왜 끈 거냐?" 방문자는 바로 유한이였다. 유한이 아는 해커는 블라덱이었다. 그를 통해 메모리의 락을 풀고 해커 추적에 대한 성과도 들을 겸해서 찾아온 것이다. "크크크! 감히 형님의 존함을 막 부르다니, 역시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녀석이로군." "너 뭐 잘못 먹었냐? 당장 불 안켜?" 유한은 갑자기 블라덱이 반항적으로 나오자 어리둥절했다. 저번에 자신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로는 고분고분 하더니 오늘은 갑자기 태도가 확 변했다. "흥, 그동안 내가 너 따위가 무서워서 기었는 줄 아냐? 그냥 네놈한테 조금 미안해서 협조했을 뿐이야." "이게 진짜 돌았나! 야! 너 빨리 불 안 켜면 맞는다?" 유한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나려 할 때였다. 블라덱이 갑자기 고함을 빽 질렀다. "어이, 불곰! 놈을 확 조져 버려!" "누가 불곰이라는 거냐!" 블라덱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듯 유한의 앞에 갑자기 시커먼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유한을 붙잡아 번쩍 들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쾅! "크윽!" 난데없는 일격에 유한은 정신이 아찔했다. 방심한 것도 있지만, 상대의 실력도 강해 보였다. 전광석화 처럼 나타나 자신을 들어 던진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놈의 새끼가……." 유한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자 덩치는 유한의 다리를 잡아 그대로 던져버렸다. 한 손으로 사람을 집어던지다니, 정말 힘 하나는 장사였다. 쿠웅! 다행히 폐지 더미에 떨어졌지만,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정신 줄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한은 곽대발의 살인 킥을 맞고도 버텨 냈다. 어제 송태수에게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도 무사히 생존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후후후,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돌 거다." 덩치가 빈정거리더니 유한의 뒤춤을 잡았다. 그런데 뭔가 가벼웠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덩치는 오른쪽 무릎을 강력하게 얻어맞고 신음을 흘렸다. "두 번은 몰라도 세번은 안 통해!" 유한은 또다시 덩치에게 잡히자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버렸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상대의 다리를 걷어찼다. 어두워서 실루엣만 보였지만, 덩치는 상체 근육을 꽤나 단련시킨 듯했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던지는 걸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잘 단련된 상체와 달리 하체는 다소 약해 보였다. 그래서 무릎에 들어간 발차기도 효과가 있었다. "이 자식이!" 불격의 일격을 당한 덩치는 버럭 화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유한은 덩치가 내민 손을 피한 뒤 녀석의 측면으로 비스듬히 빠져나가며 또 한 번 로우 킥을 날렸다. 퍽! 발차기가 작렬하자 덩치의 몸이 휘청거렸다. 유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달아 덩치ㅡ이 다리를 노려 발차기를 날렸다. 다리는 사람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아무릭 건장한 상대라도 다리에 충격을 받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하체 수련을 게을리 한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제길! 오십 만원 갖곤 안 돼! 백 만원은 받아야겠어!" 그러나 덩치는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유한의 발차기를 껑충 뛰어 피하더니,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붙잡았다. '이크!' 이대로 들리면 끝장이다. 유한은 덩치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제대로 타격이 갔는지, 허리를 잡고 있던 덩치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힘이 약해졌다 뿐이지 덩치는 아직 유한을 잡고 있었다. 그녀석은 들기를 포기한 듯 뒤로 유한을 밀쳤다. 넘어지는 것 역시 끝장임을 알고 있는 유한은 다리를 뒤로 빼고 버텼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얼은 없애 버리란 말이야!" 계속 엎치락뒤치락, 두 사람이 밀고 당기며 싸우고 있자 ㅂㄹ라덱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덩치 놈이 이기면 그나마 낫지만, 만약 유한이 이기게 되면? 그런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덩치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오만방자한 모습을 다 보였지 않은가. '제길, 구경만 하고 있어선 안 되겠어.' 블라덱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덩치가 유한을 잡고 있을 때 지원 공격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각목이나 쇠파이프 같은 몽둥이를 찾았지만, 어두워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원을 다시 올려야 할 듯했다. 팟! 창고 안에 환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빛을 보게 되자 눈이 무척 부셨다. 유한은 물론이요, 덩치도 공격을 중단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물러섰다. "잠깐, 스톱!" "알았다. 치사하게 공격하기 없기다." 두 사람은 떨어져서 시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하하하, 나랑 비등하게 싸울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길, 나도 너같이 무식한 놈이랑 싸우게 될 줄 ……." 유한은 말을 하다 말았다. 눈부심이 사라지며 주위 사물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는데, 정말 엉뚱한 인간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설마 죽어라 싸웠던 상대가 이놈일 줄이야!" "에, 옌스?" "넌……바츠?" 눈앞의 덩치는 다름 아닌 옌스였다. 저번에 코스튬 페스티벌에서 실물을 본 적이 있기에 확실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처리해야 될 놈이 너였냐?"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몽둥이를 찾은 블라덱은 팔뚝을 걷어붙이며 유한에게 다가왔다. "강유한 이 자식!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던 블라덱은 옌스가 유한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자 버럭 소리르 질렀다. "야, 고경덕! 뭐 하는 거야? 저 자식 붙들지 않고!" "미안하지만 응이 좀 깨졌수." "뭐? 이유가 뭐야!" "푸하하하핫!" 유한은 어리둥절해 하는 블라덱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손봐 주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게 고경덕, 옌스였다니. "바츠는 나랑 아는 사이다." "아, 아는 사이?"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이, 즉 동료다. '킁, 제법인데?' 고경덕은 예전부터 바츠와 캐릭터로 승부를 내겠다며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현피를 먼저 뜨게 될 줄이야. 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북성 기계공고 최고의 싸움꾼인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한가락하지 않는가. "후후후, 역시 바츠 유저답군." 유한은 고경덕이 자신과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고경덕에겐 볼일이 끝난 셈. 이제 즐라덱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할 일만 남았다. "감히 용병을 고용했겠다?" "아, 아니그게 아니고……. 야 경덕아, 뭐 하는 거야! 빨리 저놈을 박살 내란 말이야!" 유한을 향해 뭐라 변명을 하려던 블라덱은 고경덕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고경덕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미안, 형씨. 이놈은 나랑 동료라서." "야, 불곰 너……!" 이렇게 배신을 때리는 것이 어디 있는가! 안 그래도 웬만한 조폭과 싸워도 지지 않을 거라는 고경덕만 믿고 다른 친구들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유한이 다가올수록, 블라덱의 얼굴은 점점 새파랗게 변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해야겠지?" 유한이 주먹을 뿌드득거리며 다가오자 블라덱은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 오늘 컨디션도 안 좋을 텐데 그냥 대화로 풀면 안될까?" "아냐, 컨디션은 문제없어. 누구 덕분에 몸이 다 풀렸거든." 유한은 블라덱을 구석에 몰아놓고 마구 두들겨 팼다. 이런 녀석은 어설프게 때려서는 안된다. 하이에나 근성을 갖고 있음으로 확실히 상대가 어떤지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터. 다시는 잔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밟아 놔야 한다. "크아악!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용서해줘!" "안 돼! 이 정도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우악! 케에에엑!" 무려 1시간에 걸쳐 두들겨 패는 유한이었다. "그러니까 이 메모리의 폴더에 락이 걸려 있다는 거야?" 마치 단풍이 든 것처럼 울긋불긋한 얼굴이 된 블라덱은 유한에게서 지포라이터 메모리를 넘겨받았다. 신명나게 두들겨 맞을 때는 죽고 싶었지만, 지포라이터로 위장된 메모리를 보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이거 개조품인가? 우와, 감쪽같은데?" "닥치고 해제나 하시지."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주먹은 좀 내려 줘." 블라덱은 컴푸터에 메모리를 꽂았다. 도장에서처럼 컴퓨터는 메모리를 인식했고, 폴더를 클릭하자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안내창이 떴다. "어때? 락을 풀 수 있겠어?" "걱정 마, 이런 걸 푸는 게 내 전공이니까." 언제 쳐맞았냐는 듯 블라덱은 자신만만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해커는 해커다운 일을 할 때 가장 힘이 나는 모양이다. 블라덱은 컴퓨터 옆에 있는 상자에서 메모리 칩들을 뒤적이더니그중의 한 개를 꽂아 넣었더.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자 락을 해제하는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이, 바츠. 저 메모리 안에 든 게 뭐야?" 지금까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고경덕이 다가와 물었다. "매우 중요한 단서." "단서?" "더 이상은 알면 다쳐." 유한의 짧은 대답에 고경덕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물어도 쉽게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삐이이이이--! 갑자기 컴퓨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잘 돌아가던 해킹 프로그램이 뚝 멈췄고, 이내 화면은 공포의 푸른색으로 물들며 수천수만 개의 숫자와 문자응 토해 내기 시작했다. "으악! 안 돼!" 뭐가 잘못된 모양. 블라덱은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컴퓨터를 이용해 또 다른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드 안의 파일은 남김없이 파괴도었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컴퓨터의 상태도 이상해졌다. 결국 블라덱은 메인 컴퓨터에 연결된 케이블을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유한이 묻자 블라덱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비정상적으로 락을 해제하면 해당 컴퓨터를 공격하는 프로그램이 들어 있었나 봐."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고?" "제길, 누군지 몰라도 보통 실력이 아냐." 블라덱은 분통을 터트렸다. 컴퓨터가 부셔진 것보다 자시느이 실력으로 락을 해제 못했다는 게 더 화가 났다. "그럼 못하는 거야?" "지금은, 하지만 곧 방법을 찾을 테니까 시간을 좀 줘" 블라덱은 노트북에 메모리를 꽂고 안에 든 파일을 복사했다. 통째로 복사해서 분석하려 했는데, 그런 시도도 용납되지 않았다. 복사하는 데도 패스워드를 입력하라 했기때문. "쳇, 까다롭게 구는군." "됐어, 그만 하고 돌려줘." 유한은 메모리를 도로 회수했다. 처음엔 블라덱에게 맡겨 놓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중요한 단서를 못 믿을 놈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왜?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아니, 나중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동안 락을 풀 방법을 찾아 봐, 그리고 바츠를 해킹한 놈은 추적해 봤어?" "미안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그런데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 "소문?" "누가 바츠가 쓰던 칼을 사용하고 있대." 분명 플레임 소드를 말하는 것이리라. 바츠의 대표 장비 중 하나였으니까. 플레임 소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화염의 신전 퀘스트를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검이다. 유니크 아이템은 아니지만, 게임에서 몇 자루 없는 상급 레어 품목에 속했다. "믿을 만한 이야기야?" "글쎄, 그게 정말 바츠가 쓰던 것인지, 아닌 다른 플레임 소드를 보고 착각한 것인지 몰라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지 않겠어?" "소유자가 누군지는 모르고?"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어, 나이는 십 대 후반에 생긴건 금발에 날라리 같다던가?" 그동안 블라덱이 보내 온 정보 중에서 제일 나았다. 물론 유한이 실제로 해커와 맞닥트려 싸우고 얻어 낸 단서에 비하면 신뢰성이나 관심도가 낮았지만. '아무래도 천천히 알아봐야겠군.' 급한 길도 돌아가라고 했다. 조바심을 내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고 일을 급하게 진행하다간 중간에 중요한 힌트를 놓칠 수도 있었다. 웃기게도 그렇게 찬찬히 알아보는 것은 게임을 통해 배웠다. 얼마 전에 끝냈던 헬리오스 신전의 종 퀘스트를 통해서. 블라덱의 아지트에서 볼일을 마친 유한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고경덕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처음엔 이 스토커 같은 놈이 자신에게 볼일이 있나 싶어는데, 경덕이 유한을 따라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가는 길이 같을 뿐이라나. "난 또…… 네가 우리 집까지 쳐들어오는 건 아닌 가 했다." "훗, 미소녀의 저택이라면 몰라도 뭐 하러 냄새나는 사내놈의 집을." 그렇게 피식거리던 고경덕은 살짝 눈빛을 바꾸더니 은근히 말했다. "사실은 수상한 놈이 쫓아오고 있어서 우회하려는 거야." 고경덕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 20미터 뒤에 있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척하고 있었지만, 옷차림이나 눈빛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너 무슨 죄 지었냐?" "그건 아니고 …… 일단 모른 척해. 도망쳐 버릴지 모르니까." "대체 누군데?" "나도 모르지. 확실한 건 창고에서 나왔을 때부터 따라왔다는 거야." "재주도 좋군.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후후, 워낙에 이 몸의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고경덕은 뒤통수 감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양아치들과 곧잘 충돌하는 그는 기습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정면 승부에서 그를 상대할 자신이 없는 놈들이 길목에서 버티거나 몰래 따라와선 한 방 갈기고 도망가곤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며 뒤통수가 수차례 터지자, 감각이 남다르게 변하게 되었다. "일단 모른 척하고 같이 좀 가 줘." 인적 드문 곳에서 잡아서 어떤 놈인지 족쳐 보자는 것이 경덕의 작전. 유한은 녀석의 작전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고경덕이 자신을 졸졸 따라오자 어쩔 수 없이 한패가 되고 말았다. "젠장,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냥 잡아서 줘패!" "안 돼. 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잖아, 좀 더 확인해야해." 사내는 줄기차게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잠시 걸음을 멈췄을 때는 그도 멈췄고, 두 사람이 가게에서 물건을 볼 때는 맞은편 가게에서 뭔가 사는 척했다. 가면 갈수록 미행은 은밀해졌다. 멀어지는 척하면서도 어느새 근처에 와 있곤 했다. "참 끈질긴 인간이네." "제길!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렇게 뒤통수가 근지러워서야!" 두 사람은 네거리에서 왼쪽 코너로 꺽어 들어갔다. 경덕은 근처에 세워진 간판 뒤에 숨었고. 유한은 가로수에 몸을 바짝 기댔다. 거들 생각은 없었고, 고경덕이 추적자를 어찌 처리하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코너를 돌아올 것이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고경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추적자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게 만들 셈이었는데, 정작 놀란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아니라 괸장히 낮익은 얼굴들. 둘 중에 유한이 너무나 잘 아는 여고생이 버럭 화를 내면서 고경덕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왜 고함을 지르는 거야!" "컥! 시아 누님이 왜?" 분명히 추적자가 튀어나와야 할 상황에 왜 채린이 나오는 것인지?" "히잉, 옌스 오빠가 나한테 욕했어." 채린의 옆에 있던 소녀가 울먹거렸다. "잘한다. 여자애나 울리고." "시끄러, 바츠! 미안, 이 오빠는 너희를 놀라게 하려던게 아니라 ……." 고경덕은 울먹이는 소녀를 달래려고 애썼다. 실물은 처음 보지만, 귀여운 차림새와 말투 덕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공중 요새를 같이 추락시키고, 광렙도 함께 했었던 신관 에이린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울리고 말았다. "어휴, 너흴 놀래 주려고 했다가 우리가 놀라 버렸으니 ……." 채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황은 이랬다. 학교를 마치고 에이린과 만나서 쇼핑을 하고 있다가 유한과 옌스가 함께 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몰래 따라가 놀래 주려고 했는데, 그만 발각이 되고 말았다고. "누님, 혹시 이상한 아저씨가 우릴 쫓아오는 거 못 봤어?" "아저씨? 아! 중간에 마주친 사람이 있긴 있었지." "맞아요. 내 어깨를 확 치고 갔어요. 사과도 안 하고." 추적자는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도망친 모양이다. 참 눈치가 빠른 인간이다. 덕분에 고경덕만 물먹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기 무슨 일이야? 나랑 유하처럼 쇼핑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뭐 우린 그저…… 근데 에이린 본명이 유하였어?" "소유하에요. 옌스 오빠 본명은 뭐에요?" "아, 난 고…… 종수." 경덕이란 이름을 대려다 얼은 다른 이름으로 둘러댔다. 옌스는 평소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덕아, 왜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바꾸고 그러냐." "바츠 너!" "여기 바츠가 어디 있냐? 난 강유한이라고." "웃기지 마! 너 바츠 맞잖아!" 둘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채린과 유하는 깔깔 웃었다. 좀 전의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게임 속에서 어울리던 분위기 그대로였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그래요. 유하는 목이 말라요~." 네 사람은 사이좋게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유한과 고경덕의 뒤를 쫓아다녔던 자였다. 여전히 두 사람을 추적하고 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자리를 옮겼다. 마치 진짜 추적은 이제부터라는 듯,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카페에서 생과일 쥬스를 마신 뒤 유한은 친구들과 헤어졌다. 집으로 가던 유한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칫했다. 옷가게의 쇼윈도에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이 흐릿하게 비쳤는데, 상당히 낯익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 고경덕을 쫓아왔던 남자로 재빨리 몸을 돌리긴 했지만, 이미 유한의 눈에 띈 뒤였다. '옌스 녀석을 쫓던게 아니었나?' 고경덕의 말로는 블라덱의 본거지에서부터 쫓아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을 쫓고 있는 거라면 무엇 때문일까. 죄 지은 것이라곤 없었고, 양아치나 조폭과 다툰 적도 없다. 게임에서도 현피를 뜰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는데. '설마 …… 잃어버린 메모리 때문에?' 해커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딱 맞게 스포츠카가 나타나 놈을 태우고 도망친 것을 생각하면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지포라이터를 주워 갔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때 현장에는 드림맥스 경비직원들뿐이었다. 그들은 유한이 지포라이터를 줍는 것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 잠깐! 만약에…….' 유한은 생각을 집중해 가능성을 추론해 보았다. 보안이 철저한 드림맥스 본사에 침입해 해킹을 시도했다는 것은, 뭐가 믿을 구석이 있다는 소리다. 만약 드림맥스 내부에 해커와 내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혹시 경비직원이라면? 내통한 경비직원으로부터 현장에 있던 학생이 뭘 주워가더라는 말을 들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커가 자신의 분실물을 유한이 주워 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연히 잃어버린 메모리를 되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제길, 처음부터 날 쫒는 거였어!' 유한은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일부러 복잡한 곳을 골라 가며 추적자를 따돌리려 했는데, 계획을 수정했다 . 상대가 집요하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근처의 노점을 구경하는 척하며 다가갔다 액세서리를 파는 노젬에는 벨트 버클과 반지, 목걸이등의 여러 가지 금속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얼마죠?" "팔천 원인데 칠천 원에 드리죠." 유한은 구입한 액세서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었다. 느긋하게 두 손을 점퍼 주머니 안에 넣고 있던 유한은 한순간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갑자기 유한이 뛰자 추적하던 남자는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휴대폰으로 동료들에게 연락을 했다. "목표물이 뛴다! B조 추적에 나서라!" [알았다, C조는 예상 루트에 대기하라.] 유한은 인도 옆 도로로 달려오는 까만 스포츠카를 보았다. 해커를 태웠던 차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골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달려가는 그의 어깨를 확 잡았다. "야야, 어딜 가냐. 물건은 놓고 가야지." 옌스보다는 못했지만 제법 덩치가 당당한 사내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 했지만, 유한의 어깨를 집는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한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컥!"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가격한 유한은 서둘러 그의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달렸다. 더 이상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지만, 쫓아오는 사람이 하나에서 셋으로 늘었다. 셋 다 짧은 머리에 깍두기 스타일이였다. "거기 서!" "도둑 잡아라! 소매치기 잡아라!" 유한이 잘 도망가자 세 녀석은 거짓말을 해서 유한을 붙들려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 행인들은 냉정했고, 그나마 정의로운(?) 시민들은 유한에게 떠밀려 넘어졌다. "젠장! 좀 서라고!" "무슨 고삐리 새끼가 저렇게 잘 뛰어?" 세 추적자는 유한의 지치지 않은 지구력에 이가 갈릴 지경이였다, 마치 마라톤을 하듯 뛰어가고 있지 않은가. 유한이 극기도장에서 체력 단련을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그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헉헉! 제발 좀 서라!" "A조, B조 새끼들은 뭐 하는 거야!" 유한을 쫓는 C조 추적자들은 정말 입에서 거품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복잡한 거리레서 빠져나온 유한은 강남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강의 다리 위를 지나던 유한은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며 몸을 돌렸다. C조 추적자들도 발걸음을 늦췄다. 비 오듯이 땀을 흘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웬만하면 라이터만 뺏고 끝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저 고삐리 자식을 반쯤 죽여 놓지 않으면 분이 안풀릴 것 같았다. "젠장, 더럽게 끈질기네." 세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자, 유한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어 뚜껑을 열어 보였다. "찾는 게 이거 맞습니까?" "그래, 맞으니까 얼른 내놔!" "쳐 죽이기 전에 안 내놓냐? 사내들이 유한을 무섭게 을러댔다. 그들의 눈은 유한이 들고 있는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지포라이터에 집중되어 있었다. '꿀꺽! 저걸 가져가면…….' 의뢰인은 엄청난 보상을 약속했다. 그들이 몇 년을 열심히 자릿세를 삥 뜯어도 모으기 힘든. "알았어요, 들릴게여. 저도 오래 살고 싶거든요." 유한은 순순히 사내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포기하는 듯하자 사내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유한이 그들 앞 3미터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자. 가져가세요." "으악, 안 돼!" 지포리이터가 하늘을 날았다. 우아하게 짧은 비행을 끝낸 은색의 지포라이터는 시퍼런 한강물로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고딩 새끼가!" "뭐 해, 얼른 건져 내!" 눈앞에 유한이 있음에도, 그들은 두들겨 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청난 노다지나 다름없는 물건을 건져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풍덩! 풍덩! 그들은 앞 다투어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하핫! 추운데 고생 많이 하십쇼!" 유한은 얄밉게도 다리 아래의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한은 유일한 단서를 버린 것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던져 버린 것은 가짜였으니까. '바보들, 내가 진짜를 던졌을까 봐?' 주머니 안에는 메모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한은 좀 전 악세사리 노점에서 7,000원을 주고 지포 라이터를 하나 샀다. 그 뒤 주머니 속에서 살그머니 두 라이터의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다. 사실 껍데기만 버릴 수도 있었지만, 알맹이가 빼 놓았을 수 있다는 의혹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크크, 어디 한번 싸늘한 강바닥을 실컷 뒤져 보슈.' 땀빼고 7,000원을 날렸지만, 그래도 악당들에게 골탕을 먹였으니 되었다. "이 고삐리 새끼! 잡히면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한강에서 허우적거리던 세 사람은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고함을 들어줄 사람은 이미 멀리 가 버리고 없었다. 6.이것이 복수다 1 해커의 부하들을 골탕 먹인 다음 날 아침. 유한은 휴일의 느긋함을 만끽하며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좋은시간 되십시오.> 마치 청룡열차를 타는 듯한 어지럼증이 가심과 동시에, 대장장이 지그가 가도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에서 퀘스트를 마치고 귀환하다 시간이 늦어 이곳에서 접속을 종료했던 것이다. "푸르릉~!" 유한이 접속함과 동시에 짐마차도 함께 소환되었다. 반갑게 투레질을 하는 말을 다독이고 있는 유한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봐, 학생." 유한을 부른 마법사 차림의 아저씨는 다소 고압적인 말투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아침부터 게임에 접속해서야 되겠어? 부모님이 그렇게 하라시던?" 유한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짜고짜 나타나 훈계라니, 아저씨야말로 뭐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대충 상대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다. 길을 가는 어린 유저들이 얼굴을 보일 새라 후드를 꼭 눌러쓰고 후다닥 달려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마법사 아저씨, 요새 아이들 사이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티쳐스임이 분명했다. "캐릭터 이름이 지그? 어느학교 몇 학년 몇반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마법서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니, 마법서가 아니라 마법서인 척 하는 명단 목록이다. 여러학교의 학생들이 감시대상에 있는지, 이름이 적힌 목록은 마치 전화번호부처럼 빽빽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뭔데 이래라저래라 간섭해요?" 아침부터 기분이 확 잡친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마 호구가 반항할 줄 몰랐던지 마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떳다. "너, 너. 내가 누군줄 알고!" "알게 뭐요! 그리고 난 졸업했으니 신경끄시지!" 검정고시를 통과했으니 졸업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유한은 톡 쏘아 붙이며 삿대질 하는 마법사를 떠밀었다. 마음같아선 그냥 칼로 푹 찔러주고 싶었지만, 그래선 자신에게 득 되는 일이 없다. "이, 이이!" 뒤로 떠밀려 넘어진 마법사는 유한을 붙잡지 못했다. 망신을 당해서 얼굴이 뻘게진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야, 너희들 어느 학교 몇학년 몇반이야?" "왜 대딩한테 엿먹고 초딩에게 시비예요." "아, 절라 왕재수. 티쳐스 즐이삼!"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지 유한은 대장간으로 말을 몰았다. 찝찝해진 기분을 씻고 싶었기에 짐마차의 속도를 최고로 올렸다. "하여간 별의별 인간들이 다 설쳐요." 평일도 아닌 일요일에도 게임한다고 간섭하다니. 현실에서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까 싶었다. 얼마 후, 짐마차는 케이트 산맥의 지그 대장간에 도착했다. 쿵쿵! 뚝딱뚝딱! 마을공사하는 소리가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그리고 돈이라면 지옥 불길 속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리지스가 그를 찾았다. "어서와. 퀘스트 이야긴 시아에게 들었어. 신전에서 한건 했다며?" "응, 근데 그건 새로 주문 들어온 거야?" "그래, 없어서 못 팔 정도니까 서둘러 제작해 줘." 뭐가 그리 대단한지 유한은 주문서를 봤다. 대부분 강철로된 투구들이었다. 그것도 얼굴 전체를 가리거나 눈가리개 차양이 달린. '이게 뭐야?' 참 이상한 일이었다. 주문서의 투구들은 방어력이 좀더 높긴 하지만 시야를 가리는 불편함이 있어 유저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이 갑자기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는 건지? "요새 이런 투구랑 후드, 수염가면 같은게 애들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거든. 티쳐스 때문에." "엥? 선생 패거리 때문이라고?" 티쳐스라고 해서 학생들 캐릭터를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본캐를 족쳐도 부캐가 있고, 제 3의 캐릭터가 있을수도 있다. 그래서 티쳐스의 선생들은 학생들의 캐릭터 명단을 공유하고, 그것도 미흡하다 싶으면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유저들을 마구잡이로 붙잡는단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는 물건들이 인기짱이야." 이걸 좋아해야 하는건지. 그러고 보니 리지스도 차림새가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키를 높이는 구두를 신고, 후드가 달린 로브를 덧입었다. 거기다 화장까지 진하게 해서 언뜻 봐서는 여대생처럼 보일 정도였다. "네 랭크에 별로 어렵지 않을테니 얼른 만들어줘. 아 ! 그리고 지그 너 골렘 부품 만들생각 없어?" "골렘 부품이라니?" 유한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리지스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만 하지말고 손님들에게 정보 좀 들어. 얼마 전에 철십자 길드의 거대 목인병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는거 몰라?" "그건 알지. 근데 그거랑 골렘 부품이랑 무슨 상관인데?" 철십자 길드가 거대 목인병ㅇ르 이용해 패색이 짙은 길드전을 이겨 버린것이 몇몇 길드를 크게 자극했다고 한다. 지난번 길드 전에서 패배한 다크나이트&B.O.B 길드도 충격을 받은건 마찬가지. "그래서 정보를 입수한 길드들이 카잔 공국 일대의 던전과 유적들을 들쑤시고 다녔는데, 거대 목인병과 비슷한 수준의 골렘을 개발할 수 있는 단서들을 발견했대." 그게 마녀 데보라가 남긴것인지, 아님 데보라에게 영향을 준 고대유산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조만간 몇몇길드들이 거대 병기를 보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 큰 길드들이 톱니바퀴나 강철와이어따위를 주문하고 있어." "아하, 그것들이 골렘을 만드는 부품이 되는 거구나?" "어때? 지그 넌 생각 없어?" "글쎄, 주문받은 부품만 만드는 거라면 별로 흥미가 없는걸." 현재 정밀 조립스킬은 7랭크. 블랙아이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밀 조립 스킬이 3랭크가 되어야한다. 만약 골렘 조립에 한몫 거드는 것이라면 적극 동참했을 테지만, 단순 부품 생산이면 사정이 다르다. 부품만 생산하는 것이면 정밀 조립스킬의 랭크를 그닥 올릴 수 없을 테니까. 흥미가 없다는 유한의 말에 리지스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나중에 생각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해. 일단은 주문받은 투구들을 서둘러 만들어 주고." "오케이." 대장간으로 들어간 유한은 일꾼들에게 최대한 빨리 투구들을 만들어 리지스 상단에 넘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개인 작업실에서 부족한 스킬수련에 들어갔다. 철공소를 짓기 위해서는 제련, 생산, 합금, 주물 스킬이 모두 5랭크 이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 지그는 제련과 생산은 3랭크로 조건을 충족시켰지만, 합금과 주물은 부족했다. '어디 또 동상이나 종을 만들어 달라는 데 없나?" 예술품을 만들면 주물의 스킬 경험치를 많이 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술품을 만드는 퀘스트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재료를 구해 예술품을 만들 수도 없는 것이 재료비도 재료비지만 퀘스트로 만드는 것과 달리 스킬 경험치를 적게 준다는 문제가 있었다. 드림맥스가 단순 노가다로는 스킬랭크를 올리기 힘들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유한이 아쉬워하고 있을때, 대장간 문이 열리더니 유저 하나가 들어왔다. "저기 이거 수리 가능합니까?" 그가 내민 것은 시퍼렇게 녹슨 검이었다. 한창 합금 작업에 열중하던 유한은 내심 귀찮았지만, 그래도 찾아온 손님을 박대할 수 없는지라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유저에게서 검을 건네받은 유한은 찬찬히 살폈다. 비록 시퍼렇게 녹이 슬어 있었지만, 물결문양을 이루고 있는날이 인상적이었다. 유한은 수리에 앞서 검을 감정했다. [플랑베르주] 공격:70 내구:45 설명:물결모양의 날을 가진 살벌한 검. 베이면 상처부위가 잘 낫지 않는다. 부수효과: 그리티컬이 20% 증가한다. 상대의 회복속도를 30 % 느리게 만든다. '이건 처음 보는 검인데…….'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유한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무기들을 대부분 만져 봤고, 공식 홈페이지나 공략사이트에 소개되어있는 레어무기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 플랑베르주라는 녀석은 정보에 없는 것이었다. "이걸 어디서 구했어요?" 유한이 검을 수리하며 은근슬쩍 물어보자, 유저는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얼마 전 내가 카잔공국의 바닷가 마을에 퀘스트를 하러 갔었는데 말입니다……." 자신을 레벨 120대의 전사라고 소개한 유저는 바다에 출몰해 어부들을 잡아먹는 거대식인 상어를 퇴치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약 이틀간 바다에서 악전고투 끝에 거대식인상어를 잡았는데, 놈의 뱃속에서 이 검이 나왔다고. "나도 검이라면 제법 만져 봤는데, 이건 참……." 그도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유한은 유저와 몇 마디 더 나눴는데, 그처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나 해양 몬스터에서 아이템을 습득 했다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더구나 그런 아이템은 지금까지 게임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 대부분이라고. '요즘은 바다가 대세인가?' 저번의 대규모 업데이트도 그렇고, 이젠 사냥을 산이나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해야하는 모양이다. 2 s낯선 검을 수리해 준 유한이 다시 합금과 주물스킬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개인 작업실의 문이 열리더니 채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거기다 언제나 활을 들고 다니는 손이 비어있었다. "어서 와. 근데 너 왜그래?" "저기, 지그야……." 유한이 빤히바라보자 채린은 우왕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네가 준 가방 잃어버렸어." "뭐?" 일전에 유한은 남바린 영지의 아스콰이어 상점에서 파우치백을 사 준 적이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연두색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야?" "그게 있잖아……." 간만에 반 친구들하고 사냥터에서 신나게 광렙한 채린. 그녀는 획득한 아이템들을 정리하기 위해 가까운 영지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야. 하필이면 선생한테 걸리고 말았어. 그래서 바람의 활이랑 아이템들을 뺏기고…… 흐흑!" 가방도 털렸다. 채린은 다른 아이템은 몰라도 유한이 선물해 주었던 가방은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악귀 같은 선생은 온갖 으름장과 협박을 늘어 놓으며 앗아가 버렸다. "선생이라면 혹시 저번에?" "아니, 우리 담임 선생님은 아니지만 그 선생도 티쳐스래." 순간 유한의 얼굴이 아귀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내가 채린이한테 준 선물을?" 비록 가방 하나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것은 유한이 채린에게 사 준 최초의 선물이자 우정의 징표였다. 그런데 그걸 강탈해 가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티쳐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이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시아야, 그 선생 어디서 만났어?" "왜? 거기 가려고?" "내가 가서 다시 받아올게." 유한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채린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할텐데. 그선생 지독하다고 소문이 자자해." "걱정 마, 다 돌려 받을 방법이 있으니까." 유한은 채린에게 물어서 그 선생이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걱정돼 따라오겠다는 채린은 간신히 말린뒤 여행을 떠났다. 티쳐스의 그 선생이 있다는 곳은 랑스 영지였다. 과거 푸른 새벽 길드의 본부가 있던 곳으로 남바린 영지와는 한시간 거리였다. 아바란 왕국 동부의 도시 랑스. 크고 번화한 성으로 들어간 유한은 지나가는 유저를 붙들고 물었다. "저기요, 혹시 아틸라란 유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 선생요?" 역시 채린의 말대로 그 선생은 랑스에서 꽤나 악명을 떨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는데 바로 아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빌어먹을 선생은 왜 찾습니까?" 말이 곱지 않은걸 보니 이 유저도 티쳐스에 당한듯해 보였다. 나이도 유한 또래 정도였으니. "그게, 돌려받을 물건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요." "어휴, 그 물건이 무언지 모르겟지만, 돌려받을 생각은 안하는게 좋아요." 그러면서 유저는 아틸라란 선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가 랑스에 나타난 것은 약 한달 전이었다. 처음에는 몇몇 티쳐스의 다른 선생들과 함께 학생 단속에 나섰던 그는 합법적인 아이템 강탈에 재미를 들인 뒤 혼자 남아 단속을 계속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랑스이 유저들이 그를 알고 피하자 최근에는 도시보다 인근의 사냥터나 던전에 자주 출몰한단다. "흥, 아틸라? 이름 한번 어울리게 지었군." 아틸라. 고대 동로마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훈족의 왕으로 약탈과 방화, 파괴에 능했다고 한다. 그런 이름을 캐릭터 명으로 하다니, 이 선생도 참 어지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저에게서 대충 들을 걸 다 들은 유한은 가까운 사냥터와 던전을 뒤지기 시작했고, 반나절을 꼬박 허비한 끝에 목표로 하는 인물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작자인가?' 눈이 쭉 찢어지고 턱이 뾰족하게 생긴 30대 초반의 몽크가 바로 아틸라였다. 그는 사냥터를 어슬렁 거리다가 목표를 발견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덮쳤다.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하는 학생들을 일명 계도라는 명분아래 가차없이 벗겨 먹었다. "어허! 너 부모님이 이렇게 게임하고 노는 거 아시냐?" "학교 어디야? 너희 선생님은 공부하지말고 이렇게 게임하고 놀라던?" "어쭈? 로그아웃 하려고? 벌써 스크린샷 찍었거든. 니이름 티쳐스의 수배명단에 올라갈 텐데 그래도 튈래?" 학생유저들에게 있어 티쳐스 수배 명단에 올라가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수배명단에 올라가면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난다 해도 또 언제 다른 선생에게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스크린샷이 찍히면, 로그아웃으로 튀든, 한동안 게임을 접든 소용이 없었다. 스크린샷의 정보가 티쳐스 홈페이지에 올라가면, 각 학교 선생들이 자기네 학생인지 아닌지 파악해서 현실에서 압박을 가해온다. 아이템 다 토해 놓으라고 말이다. "아 그러지 마시고 한번만 봐주세요." "삼만 골드 드릴테니까 홈피에 신고는 제발……." "전 거지에요. 갑부녀석 가르쳐 줄 테니 그녀석 벗기세요." 빈털터리가 되는 것만은 피하고자 하는 학생유저들이 타협을 요구했다. "오냐, 이 선생님도 너희들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 교활한 아틸라는 선처를 베푸는 척하며 타협을 받아들였다. 자기네 학교 학생이 아니면 몽땅 벗겨 먹는 것이 불가능한데다, 아이템 다 내놓으라고 하다 로그아웃해 버리면 자신은 얻는게 없다. 적당히 협박해서 뜯어내고,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또 뜯고. 끝까지 도망친 괘씸한 녀석들은 찍어서 티쳐스 홈페이지에 올리고. 아틸라는 이런 식으로 학생 유저들에게서 엄청난 골드와 아이템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아니 뭐 저런게 다 있어?'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한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해커에게 바츠를 해킹당한 뒤로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털어 가는 놈들이 가장 얄미웠는데 저 선생은 벌건 대낮에 보란듯이 학생 유저들을 뜯어 먹고 있었다. '이 망할 꼰대. 넌 이제 내 손에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티쳐스가 한번 걸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물 먹여 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죽여달라고 땅을 파고 있으니 묻어 줄 수밖에. 어느 정도 아틸라란 선생에 대해 정보를 수집한 유한은 일단 로그아웃을 했다. 3 '오늘은 또 어느 놈을 털까.' 아틸라는 오늘 밤도 어김없이 랑스 인근의 사냥터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평범한 학교 선생에 지나지 않았다. 퇴근하면 자취방에 갖다놓은 캡슐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즐기기도 했지만, 게임 속에서도 그는 평범한 존재로 살고 있었다. 변한 것은 한달 전부터. 그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이웃학교의 선생들과 필드에서 만나 '특별한 사냥'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선생들은 티쳐스라고 불리는 길드의 일원이었다. 그들과 함께 게임 세상을 누비며 학생들을 맘껏꾸짖고, 아이템을 팔아 현질한 돈으로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보니 더 이상 평범하게 게임을 즐길수가 없었다. 합법적인(?) 강탈에 재미를 들여 버린것이다. 그는 곧장 티쳐스에 가입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은 선생이 필요했던 티쳐스는 그를 환영했고, 랑스 인근의 단속을 그에게 위임했다. 이후로 아틸라는 랑스에서 제왕처럼 군림했다. 아무리 레벨이 높은 유저라도 현실에서 신분이 학생이면 그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간혹 대학생이나 일반인 유저가 '애들 벗겨 먹는 게 좋냐'며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무시해 버렸다. 그에겐 좋은 명분이 있었다. 학생들을 계도하겠다는. '헐헐헐! 오늘은 제법 왕건이가 걸려야 할텐데.' 마치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 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아틸라의 눈에 고슴도치와 놀고있는 유저 하나가 보였다. 제법 돈이 많은지 차림새가 괜찮았다. 요새 간접광고다, 메이커다 뭐다 하면서 디자인과 옵션이 괜찮은 고가의 아이템들이 팔리고 있었는데, 저 유저는 바로 그런 아이템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 살펴보니 대충 고교 2, 3학년쯤 되는것 같았다. '흐흐! 일단은 스크린샷 부터 콱!' 최대로 확대해서 상대방을 찍은 아틸라는 번개같이 달려가서 상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놈 자식! 학생이 벌건 대낮에 공부는 안 하고 게임질이냐? 너 학교 어디야?" "자,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 유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싹싹빌었다. '으흐흐! 알아서 숙여 주는구나.' 약삭빠른 녀석들은 잽싸게 튀거나 로그아웃을 하는데, 이녀석은 연방 굽실거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녀석의 이런 태도 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꼭 아이템을 갈취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상대의 굽힌 모습을 보면 교감이나 자취방 할멍구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죄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짐짓 거만한 얼굴로 물었다. "오냐, 내가 용서하면 다시는 게임 안 할 거지?" "예, 공부만 죽어라고 파겠습니다." "좋아. 그럼 아이템 다내놔." "예?" 그의 말에 유저는 눈을 의아하게 떳다. 아틸라는 이쯤에서 한번 강하게 밀어붙일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일부러 무서운 얼굴을 했다. "어허!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할건지 안할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다시는 게임 안한다며? 그런데 아이템이 뭐가 아까워?" "그, 그래도 그렇죠." "이거 안 되겠구먼! 스크린샷을 티쳐스 홈페이지에 올려놔야 정신을 차리려나……." "안돼요! 우리선생님한테 들키면 전 죽어요." 울상을 짓던 유저는 착용하고 있던 장비와 무기들을 아틸라에게 넘겨주었다. 제법 럭셔리한 차림이었던 유저는 한순간에 천옷 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짜식, 진작에 내주면 얼마나 좋아.' 아틸라는 희희낙락하며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서 얼마 걸어가지 않아 그의 귀에 원한이 깃든 욕설이 들려왔다. "야이 돼지 같은 놈아! 남의 아이템 그렇게 처먹으면 좋냐!" "뭐! 뭐라고?" 방금 아틸라에게 욕을 한 것은 좀전에 아이템이 털린 유저였다. 그는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던지, 악을 쓰듯 욕설을 내뱉었다. "대가리나 확 벗겨져라! 엿같은 인간아!" "이, 이 자식이 진짜!" 유저에게 있어 아이템은 생명과 같다. 아틸라도 예전엔 평범하게 게임을 했었기에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간신히 획득한 아이템을 빼앗기면 분한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욕설을 들어줄 만큼 아틸라는 속이 넓지 못했다. 조카뻘밖에 안 될 녀석이 감히 자신에게 욕설을 하다니! 단숨에 유저 앞에 달려간 아틸라는 그대로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렸다. 화끈하게 따귀를 맞은 유저는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너 이 자식 어디 감히 어른에게 욕설을……." 아틸라는 말을 하다가 말았다. 불길한 효과음과 함께 갑자기 안내창이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다. -쿠쿵! PK를 했습니다. -레벨 10이하의 초보자를 죽이셨음으로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게임시간으로 120시간 동안 머더러 상태를 유지합니다. '뭐? 머더러? 내가 머더러라고?' 갑자기 머더러가 되었다고 하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틸라도 초보를 PK하면 가중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초보를 보호하고, PK에도 정도를 두기위해서 게임 초창기부터 드림맥스에서 그렇게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싸대기 한방에 쓰러진 유저가 초보라니! 분명 초보답지 않은 호화로운 차림새 였고, 랑스는 레벨10이하의 초보가 돌아다녀도 될 만만한 필드가 아니었다. '제길, 지금 이 상태로 남들 눈에 띄게 되면?' 조만간 자신에 대한 수배 퀘스트가 발동될 것이다. 학생유저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겠지만, 일반인들은 다르다. 이근처에서 워낙 분탕질을 쳤기에 그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자들에게 걸리게 된다면? '이,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돼. 아니, 그냥 로그아웃할까?' 아틸라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옆의 풀숲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 하고 있던 아틸라는 심장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헐, 이게 뭐야. 머더러 아냐?" 때 맞춰 나타난 것은 바로 유한이었다. 그는 기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틸라를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4 랑스에서 아틸라의 뒤를 미행하던 유한은 로그아웃을 한 뒤에 레벨 1의 바츠 캐릭터로 접속했다. 여전히 발덴에 머물고 있었던 바츠. 그 생초보 캐릭터를 선택한 유한은 곧장 골드러시 상인연합의 발덴 지부로 찾아갔다. 이미 한 번 유한의 부캐를 만난적이 있었던 딜론은 반갑게 그를 맞아줬다. 유한은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돈을 좀 빌려 달라고요?" "한 오만 골드 정도요, 일이 끝나면 바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오만 골드가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돈이 궁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유한은 티쳐스와 랑스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아틸라란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아틸라를 손봐주려 한다고 하자, 딜론은 냉큼 5만 골드를 건네 주었다. "안 갚으셔도 됩니다." "예?" "나도 교육계에 몸담고 있지만, 그선생들은 혼 좀 나야됩니다. 스스로 학생을 계도 한다면서 오히려 온갖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까요." 얼마전 딜론 휘하에 있는 상인들 중 티쳐스에 걸린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티쳐스는 학생들의 아이템뿐만 아니라 길드에서 거래할 물건들까지 몽땅 먹어치웠다. 항의를 해봤지만, "왜 애들을 당신 장사하는 데 이용해먹냐'는 소리만 들었다. "무법자도 그런 무법자들이 없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혼을 내세요." "크크, 기대하고 계십시오." 유한은 딜론에게 받은 돈으로 유명 메이커가찍힌 옷과 무기들을 샀다. 그렇게 차려입고 남은 돈으로 이용료가 비싼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랑스까지 왔다. 랑스에 도착한 유한은 미리 지그를 로그아웃시켜둔 필드로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틸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가만, 아무리 생초보라도 이 정도 피통이면 한 방에 가기 어렵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필드에서 가장 약한 동물인 고슴도치를 건드렸다. 고슴도치의 레벨은 3 정도로 캐릭터 바츠를 상대하기에 딱 적당했다. "끽!" 한창 먹이를 먹고 있던 중에 공격을 받은 고슴도치는 유한을 향해 가시를 내밀었다. 그러나 옵션이 좋은 옷을 입고 있어 바츠의 피통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저 님 뭐하는 거지?" "갑부 같은데 고슴도치를 테이밍 하려나 보지." "테이밍 하는거야, 아님 노는거야?" 근처를 지나가던 유저들이 한마디씩 쑥덕거렸다. 유한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슴도치의 공격을 허용했다. 천천히 레벨 1인 바츠의 피통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고슴도치의 가시에 여러번 찔리자 HP가 거의 바닥에 다다랐다. 이제 스치기만 해도 죽을 정도가 되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목표물인 아틸라가 나타났다. '나이스 타이밍~!' 유한은 아틸라에게 쩔쩔매는 척 연기를 한 뒤 욕설을 뱉어 그를 도발했다. 그렇게 아틸라의 화를 북돋은 그는 귀싸대기 한방에 장렬히 전사했다. '크하하하!' 유한은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바로 아틸라의 머리위에 떠오른 붉은 글씨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망하셨습니다. 다시 게임에 접속하겠습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지그로 접속 할거야." <지그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즐거운 게임 되십시오.> 요정의 귀여운 목소리를 들으며 유한은 다시 아르페디아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장이 지그의 모습으로. 서둘러 바츠가 죽은 지점으로 달려간 유한은 기겁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틸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헐, 이게 뭐야. 머더러 아냐?" 쾌재를 부른 유한은 마이티소드를 뽑아 들었다. 머더러는 모든 유저들의 적. 현상범 퀘스트가 내걸리지만, 퀘스트와 상관없이 가까이 있는 유저라면 누구나 죽여도 된다. 머더러가 된 유저는 죽을때 아이템을 높은 확률로 떨어뜨리기에 머더러만 찾아서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유저들이 있을 정도였다. "큭!" 아틸라는 유한이 휘드른 마이티 소드를 막았다. 머더러가 되었지만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유한의 일검은 그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틸라가 전투형 신관인 몽크였지만, 레벨은 고작 32. 학생유저들을 착취한다고 레벨 업에 소홀했던 그가 레벨 108인 유한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유한이 대장장이라도 76의 레벨 차이는 속되게 말해 '넘사벽'의 수준이었다. 캉! "아이고!" 유한의 일검이 또 한번 떨어지자 아틸라는 볼썽사나운 꼴로 바닥을 뒹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던 그는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대장장이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대장장이 녀석은 아까 죽었던 갑부초보였다. 캐릭이 바뀌엇다지만, 이목구비라든지 얼굴 생김새가 똑같았다. "훗,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씁니다. 선.생.님?" "나, 난 널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 변명은 들을 필요 없고 아까 날 죽인 대가를 이제부터 치르시면 됩니다." 그때부터 유한의 처절한 응징이 시작 되었다. 그는 일부러 칼을 안 쓰고 발로 자근자근 밟으며 아틸라의 피통을 깎아 나갔다. 게임이라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조카뻘밖에 되지 않는 녀석에게 두들겨 맞는다 생각하니 아틸라는 온몸이 수치심으로 부들부들떨렸다. "너 이새끼 어디 학생이야? 감히 선생님한테 폭력을 휘두르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아아, 저 학교 안다니거든요. 그리고 이건 게임 아닙니까, 게임." 유한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아틸라를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 머더러를 죽였습니다. 경험치를 100얻었습니다. [참나무 몽둥이]를 얻었습니다. [바람의 활]을 얻었습니다. 아틸라가 떨어트리고 간 아이템 중에서 채린의 장비로 보이는 것이 나왔다. 활대를 살펴보자 시아라는 이름이 확실히 새겨져 있었다. '훗, 이걸론 아직 멀었다.'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은 유한은 근처의 부활 포인트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마침 유한의 손에 죽은 아틸라가 부활하고 있었다. "죽어라, 악덕 선생!" "크악!" 유한은 다짜고짜 이단 옆차기로 아틸라의 옆구리를 날렸다. 아틸라는 기겁한 얼굴로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유한은 건틀렛의 와이어를 날려 도망치는 아틸라를 월척을 낚듯 끌어당겼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유한은 씨익 웃었다. 그 미소가 아틸라에게는 대마왕의 미소만큼이나 잔인하게 보였다. "너, 너 이새끼 이거 안놓을래!" "어허! 아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시나 봐요. 선.생.님?" 유한이 검을 뽑아 그의 목을 슬쩍 찔렀다. 화들짝 놀란 아틸라는 근처의 유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람 살려! 불량 학생이 선생을 팬……." 아틸라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부활 포인트 주변에서 쉬고 있던 유저들은 그의 머리위에 뜬 붉은 글씨를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머더러다." "오잉? 머더러가 떳네." "죽여! 먼저 죽이는 사람이 아이템 먹는다." 누군가의 선창과 함께 유저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칼을 박아 넣은 것은 아틸라를 잡고있던 유한이었다. "케에엑!" 결국 아틸라는 부활 1분만에 유한에게 죽었다. 또 다시 아이템을 잔뜩 떨어트린것은 물론이다. 5 아틸라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가 접속할 때마다 유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번 유한에게 두들겨 맞아 죽었고, 유한이 없을때는 부활포인트에 있던 유저들에게 죽었다. 그렇게 몇번 죽고나자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들을 거의 다 떨어트리고 말았다. '제길!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하지만 부캐로는 아틸라로 은행에 넣어둔 골드와 아이템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도움을 청해 봐?' 티쳐스 길드원들에게 부탁해 머더러 카운터가 끝날때까지 지켜달라고 하면 될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같은 티쳐스라도 친한 선생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결국 유저들이 잘 접속하지 않는 늦은 새벽 시간을 노려 부활했다. 그런데 이 징한 대장장이 놈은 부활포인트옆에 아주 간이 대장간까지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어이구, 이제 오십니까? 많이 기다렸습니다." "으아아아!" 아틸라는 그대로 미친 바퀴벌레 처럼 달렸다. 또다시 와이어에 끌려 갈까봐 지그재그로 뛰는 그의 질주는 정말 처절해 보였다. 유한은 이번에 와이어 건틀렛을 쏘지 않았다. 얼마전에 배워서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은 스킬이 있었기 때문이다. "쇼크웨이브!" 유한은 망치와 끌을 들고 머리 위에서 긁었다. 순간 소름끼칠 정도로 섬뜩한 쇳소리가 일어 아틸라를 향해 날아갔다. 끼아아아아아악ㅡ! "으악! 뭐, 뭐냐!" 마치 선반 위에서 쇠를 가는 듯한 음성이 귀를 파고 든다 싶더니 HP바가 쭉 떨어졌다. 얼마 후 또다시 파공성이 들렸고, 아틸라는 그 자리에 엎어져 절명했다. -머더러를 죽였습니다. 경험치를 100 얻었습니다. -350골드를 얻었습니다. 묵주를 얻었습니다. -쇼크웨이브가 성공했습니다. 경험치가 30올랐습니다. 소리를 울리는 방법을 다양하게 하면 스킬을 폭넓게 응용할수 있습니다. "헐, 이젠 이런 것밖에 안 남았나?" 유한은 아틸라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주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한 아틸라가 식식거리며 다가와서 삿대질을 했다. "너 인마 버그 캐릭터지!" "아니거든요." "아닌데 어떻게 대장장이가 쇼크웨이브를 써!" 음유시인들이나 쓰는 스킬을 대장장이가 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분명 버그캐릭터나 아님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해 게임의 설정을 파괴한 것이라 생각했다. "너 같은 놈은 내가 운영자에게 신고하면……." "아, 얼마든지 신고해 보슈. 그건 그렇고 이제 또 죽으셔야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한 유한의 칼질에 아틸라는 또 다시 사망했다. "크아악! 이 망할 놈을!" 분이 풀리지 않은 아틸라는 캡슐 안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래봤자 자신의 귀청만 아플뿐. 그래도 복수 수단을 찾은 그는 캡슐에서 나와 자신을 괴롭히는 버그 캐릭터가 있다며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해당 캐릭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는 거였다. "크아악! 이게 말이 되냐고!" 펄펄 뛰던 그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일단 며칠 쉬면 놈도 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아틸라는 3일 동안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하지 않았다.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 동안은 120시간의 머더러 카운터가 정지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 지긋지긋한 놈에게서 벗어나는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3일 후, 망할 대장장이 놈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이제 갔나 보군." "우와! 머더러가 떳다!" 유한은 갔어도 그 자리를 지키는 유저들은 있었다. 그들은 아이템을 노리고 아틸라를 공격했고, 머더러 카운터가 끝날때까지 아틸라는 죽었다 살아나기를 계속 반복했다. 이미 떨어트릴 아이템은 죄다 떨어트렸지만, 죽는다는게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거기다 경험치까지 쭉쭉빠지고 레벨까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레벨 업에 신경 쓰지 않았다지만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아이고. 이제 다끝났구나." 간신히 120시간의 머더러 카운터에서 벗어난 아틸라는 터덜터덜 마을로 돌아왔다. 인벤은 몽땅털렸지만, 그래도 마을 은행 금고에는 그동안 모아둔 골드와 아이템들이 많았다. 이번에 머더러가 되어 털린 수당은 그가쌓아놓은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부라도 상실의 아픔은 컸다. 그것도 아주 집요한 놈에게 털렸기에 마음이 더 쓰리고 기분은 더러웠다. "망할 자식! 내 이놈을 가만 두나 봐라!" 아틸라가 식식거리며 은행에서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목을 강하게 휘감는 것이 아닌가. '헉! 설마 이것은!' 속절없이 뒤로 끌려간 아틸라는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유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어, 오랜만 입니다. 선생님." "으아악!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래?" 겨우 한번 죽었다고 그러는 것은 아닐것이다. 부활포인트에서 기다렸다가 몇번을 죽이고, 또 머더러 카운터가 끝난 이상황에서도 공격을 하는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훗, 이제 그걸 물어보십니까?" 마침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대장간에 다녀왔던 유한은 안색을 싸늘하게 바꾸고 말문을 이어 나갔다. "며칠 전에 궁수 여자애한테서 연두색 파우치백을 압수하셨죠?" "겨, 겨우 가방 하나 때문에?" 기억은 한다. 아스콰이어라고 제법 알아주는 브랜드의 가방이라 아직 처분하지 않고 은행에 넣어 두었다. 아틸라의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에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겨우 가방 하나가 아닙니다. 제 정성이 담긴 선물이었다고요!" "선물? 참나 웃기는군. 버튼 하나면 바로 삭제할 수 있는 아이템에 정성을 담았다니…… 요즘 애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깐." 유한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아틸라가 반성하기는 커녕 비웃고 있지 않는가. 유한의 무시무시한 눈길에 아틸라는 주눅 들었지만, 그래도 뻔뻔한 기색을 버리진 않았다. 여기는 마을 한복판이다. 이놈이 자신을 죽여봤자. 이놈만 손해다. "문제고 뭐고 간에 돌려줄 겁니까? 말겁니까?" "돌려주긴 뭘돌려줘, 이놈아. 니가 나한테 털어간거나 내놔!" 머더러 카운터도 끝났겠다. 꿀릴 것이 없는 아틸라는 용감하게 대들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죽었지만, 이번만은 유한이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이놈도 자신이 당한 것을 고스란히 당하지 않겠는가. "아놔, 말로 좋게 끝내려고 했더니 안되겠구먼." "어쩔 건데? 답답하면 칼로 푹 찌르던가. 죽여봐, 죽여보라고!" "그렇게 말하면 못죽일거 같수?" "유한은 아틸라를 꽁꽁묶어서 근처 나무로 끌고 갔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밧줄을 가방에서 꺼내 나무의 굵은 가지에 걸었다. 그리고 한쪽끝을 동그랗게 말아 아틸라의 목에 걸었다. '뭐, 뭐야? 이놈 설마 날 교수형시키려고?' 진짜 할까 싶었는데, 유한은 정말 저질러 버렸다. 그가 밧줄을 끌어 당기자 아틸라의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케엑!" -목이 졸렸습니다. 3분 안에 벗어나지 못하면 HP가 지속적으로 떨어집니다. 정말 죽이려는 것인가. 머더러가 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유한이 막무가내로 이런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 생각이 있었다. "아이템이란거, 챙기지 않으면 내 게 아니게 되지요." 아틸라는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도 똑똑히 보았다. 유한이 두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나무둥치에 빙글빙글 감아 묶는것을. "그리고 그렇게 챙기지 않은 아이템은 삼십초 안에 줍지 않으면 완전히 버려진 것이 돼 버리죠. 그뒤에 남이 주워가도 어쩔수 없는 겁니다. 뭐 쏴버린 화살이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유한이 밧줄을 버렸다해도 현재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여전히 밧줄에 목이 졸린 상태인 것이다. "즉, 잠시후에 선생님은 내가 아니라 누가 내다버린 임자없는 아이템에 죽는겁니다." "……!" 한마디로 유한이 손을 다 쓰고도 머더러가 되지않는다는 소리다. 아틸라는 이제야 저 대장장이 녀석이 보통 영악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임설정을 그런식으로 파고들어 이용하다니! "헉!" 아틸라는 목졸려 죽기 일보 직전에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유한이 밧줄을 검으로 잘라버린 덕분이었다. 유한은 땅에 떨어진 아틸라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앞으로 임자없는 아이템에 계속 죽어보실래요? 아님 가방 돌려주실래요?" "도, 돌려주마." 아틸라는 은행에서 연두색 파우치백을 꺼내 주었다. 가방을 건네받은 유한은 계속해서 말했다. "학생들에게 빼앗았던 아이템도 모두 돌려주세요." "하지만 나머지 물건은 너하곤 상관없는……." "임자없는 창에 꿰뚫리고 싶으십니까?" 아틸라는 소름이 쫙 돋는줄알았다. 이놈은 자신을 매달아 놓고 땅에 꽂은 창에 떨어트릴 생각인 모양이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그런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걸 견뎌 낸다 해도 이놈은 그보다 더한짓을 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 할 놈이다. 어른을 상대로 몹쓸짓들을. 아틸라는 포기하고 은행 안에 있는 아이템을 모두 꺼냈다. 빼앗은 아이템을 돌려준다고 하자, 소눔을 듣고 찾아온 학생 유저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제물건을 찾아갔다. 그리고 아틸라는 완벽하게 거지가 되었다. "앞으로 또 한번 학생들의 아이템을 털면 그때는 정말 캡슐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은 유한은 휙하고 등을 돌렸다. 그는 아틸라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자신의 길을갔다. 7. 티쳐스 붕괴 1 "뭐야? 구 선생? 애한테 탈탈 털렸다고?" "아이고, 진 선생님. 이거 정말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아틸라, 아니 구 선생은 자신이 어제 당한 일을 같은 티쳐스의 일원인 진 선생에게 이야기했다. 쪽팔려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절친한 진 선생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게 어떻게 되였냐 하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진 선생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지독한…….그 자식 정체는 알아냈소? 하다못해 다니는 학교라도." 학교들 알면 당장 쳐들어가 박살 낼 수 있다. 선생을 팼다고(?) 정학을 먹이거나, 학부모를 불러 크게 혼낼 수 있다. "그놈 이미 학교를 졸업했답니다." "그래도 가만둘 수 없군. 내가 길드에 알려 놈에 대한 응징을 강력히 주장하겠소." "뭐, 그래 주신다면야." 비록 쪽팔리는 일이지만, 놈을 응징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구 선생, 오늘도?" 진 선생은 술잔을 들어 마시는 흉내를 냈다. 그의 얼굴이 기대로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전 어제 개털이 되는 바람에 돈이……." "하하하, 걱정 마시오. 오늘은 내가 쏠 테니까." 어제 왕건이 하나를 잡은 진 선생은 괜찮은 아이템을 압수했다. 그걸 현질로 처분해 마련한 돈으로 오늘도 단골 술집에 가려는 것이다. "그럼, 저야 좋지요." "하하하, 그럼 출발!"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한 채 번화가로 나갔다. "제길, 왜 이리 귀가 가렵냐?" 대장간에 돌아와 주물 스킬을 올리고 있던 유한은 잠시 손을 놓았다. 귀가 가려운 것 때문은 아니었다. 아틸라를 손 봐 주고 채린에게 가방을 돌려주었을 때만 해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학교를 관뒀으니까 티쳐스가 손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돌연 예전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도 분명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과거 학교 급식 문제를 폭로했을 때 일이다. 그때 네티즌들이 학교를 맹비난했고, 교육청에서도 장학사를 파견하는 등, 학림고는 찍 소리도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유한에게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당연했고 말이다. 그러나 교감은 애들을 꼬드겨 왕따를 유도하고, 일진 양아치들을 부추겨 유한에게 린치를 가했다. 그런 식으로 괴롭혀서 학교에서 유한을 내몰았다. '물론 티쳐스 선생들이 그 빌어먹을 교감이랑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 한 차례 '어른들의 비열한 수'를 경험했던 유한이기에, 티쳐스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확신으로 굳어 갔다. '차라리 내가 먼저 행동에 나설까?' 보복을 당하기 전에 티쳐스에게 선공을 날리는 게 낫지 않을까? 꼭 보복 때문이 아니더라도 티쳐스는 손을 봐줄 필요가 있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송코를 제외하고 자신의 동료들은 모두 현실에서 학생 신분이다. 언제든 채린처럼 피해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유한의 고객 상당수가 또래의 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이 게임을 하지 못하면 유한도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 오늘 티쳐스 선생이랑 마주쳤다가 털렸어." "어, 왜? 너 일부러 얼굴 가리는 투구까지 샀잖아." "그랬지. 근데 수상하다면서 투구를 벗어 보라는 거야. 안 벗으면 티쳐스 홈페이지에 내 캐릭터를 소개하겠데." "귀신은 뭐 하냐? 티쳐스 박살 안 내고……." "확 게임 그만둬 버릴까?" 대장간에 온 유저들이 그렇게 쑥덕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큼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에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에엥~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니?" 채린의 품으로 뛰어든 에이린은 훌쩍이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담임선생님이 내가 던전에서 힘들게 얻은 성물을 빼앗아 가 버렸어. 퀘스트 단서가 되는 소중한 아이템인데 말이야." "뭐시라!" 벌컥 화를 낸 것은 한쪽에 서 있던 엔스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에이린의 담임선생을 잡으러 갈 것처럼 식식거렸다. "어디 있어? 그 망할 선생! 이 몸이 아주 요절을 내 주마!" "아서라, 인마. 괜히 너만 뜯기게 될 거야." "흥! 선생 따위에 뜯길 내가 아니다." 유한의 충고에 엔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걸리는 게 없었다. 게임해도 좋으니 제발 말썽만 부리지 말아 달라고 학교 선생들이 사정을 할 정도인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티쳐스가 학교에 연락해 봤자 무시해 버리면 그만. "어떻게 안 될까, 지그야? 너 아틸라 선생한테서 내 가방 되찾아 온 적 있잖아." 채린의 말에 주변의 유저들이 솔깃해져 귀를 기울였다. 대장장이 지그가 티쳐스 선생에게서 빼앗긴 물건을 되찾아오다니. 그것도 상대가 랑스의 악명 높은 약탈자 아틸라였다? 그들은 유한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그 님. 정말 티쳐스 선생한테서 물건 돌려받으셨어요?" "대체 뭐라고 하신 건데요? 리자드맨 대군으로 밟아 버린다고 하셨습니까?" "지그 님, 우리 담탱이한테서 제 물건도 좀……." "아이템은 됐고, 티쳐스 아주 개박살 내 주세요!" 유저들은 유한이 나서 주기를 애원했다. 유한은 그들의 아우성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티쳐스를 없애고 싶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이봐, 뭘 고민하는 거야? 그냥 쳐들어가서 박살 내 버리자!" 엔스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티쳐스는 선생들로 이루어진 길드다. 당연히 아르페디아 대륙 내에 근거지를 가졌고, 그곳은 학생 유저들이 절대 발을 들여놓지 않는 금단의 땅이 되었다. 현재 티쳐스에게 불만을 품은 길드는 많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길드원들이 갈취를 당하는 걸 알면서도 티쳐스에게 길드전을 선포하지 못했다. "단순히 싸움을 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리저드맨들을 몽땅 동원하면 티쳐스의 근거지를 박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 식의 보복은 한 차례 통쾌할 따름이지, 티쳐스를 뿌리 뽑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티쳐스는 학생들을 계도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섣부른 행동을 했다간 안팎으로 비난을 당할 수 있고, 애들은 어쩔 수 없다는 비아냥을 들을 게 번하다. "어떻게 티쳐스를 게임에서 아주 추방해 버릴 방법이 없을까?"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유한은 동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로고 함께 머리를 맞댔다. 송코가 제일 먼저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이야기했다. "학생들이 당한 것처럼 그들의 아이템을 빼앗으면 어떨까?" "구체적인 방법은요? 그리고 선생들이 자기 거 털리면 애들에게서 또 빼앗으려 들 텐데요." "그럼, 사기를 쳐 보는 게 어떨까? 티쳐스도 길드니까 필요한 물품들이 있을 거야냐. 거기에 납품한다고 접근해서 돈 떼먹고 달아나 는 거야." "리지스 너다운 생각이다만, 그럼 우린 사기꾼이 될 거야." 사기꾼도 머더러 못지않은 패널티를 받기에 그런 짓은 곤란했다. "그냥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확 쓸어버리자니까! 이 몸이 선두에 서 주지!" "인마, 그건 소용없을 거라 했잖아!"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도대체 뭘 해야 되는 걸까. 다들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뒤늦게 나타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면 어떨까요?" 그는 바로 마법사 오펜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던전을 탐사하던 중 유한의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사실은 내가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게 하나 있는 데요……." 그러면서 오펜은 자신이 구상한 '티쳐스 말살 계획'을 이야기했다. IQ 180에 전교 1등을 하는 수재가 짜낸 작전답게 그의 계획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으며, 게임 내에서 티쳐스를 뿌리 뽑는다는 취지 에도 적합했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계속되고, 미약하거나 허술한 부분은 다른 사람이 제시한 방법을 더해가며 보강해 갔다. 그렇게 티쳐스 말살 계획이 완벽하게 완성되자, 모두의 입가에 감탄이 떠올랐다. "오펜 너, 원래 이렇게 무서운 놈이었냐?" "후후후, 날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에요." 오펜은 웃음을 지었지만, 모두는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도 티쳐스에게 맺힌 게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런 무서운 계획을 구상했을 터. 어쨌든 그렇게 해서 티쳐스를 궁지로 몰 계획이 모두 세워졌다. 남은 것은 계획을 실행하는 일뿐. "근데 비밀 임무를 수행할 사람을 구하기 쉬울까 모르겠네." 송코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가장 중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아는 사람들 중에선 그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유한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 말아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알긴 아는데 친하지 않다는 것. 친하기는커녕 만나면 곧바로 칼을 뽑아 들 인물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구워삶아야 해.' 승리의 키는 바로 그에게 달려 있으니까. 2 베레타 공화국의 찰스턴 영지. 이곳이 바로 티쳐스의 본부가 있는 땅으로 , 나이 어린 유저들의 모습을 보기 힘든 곳이다. 원래 이찰스턴 영지는 이스라는 길드의 소유였는데, 티쳐스 길드에서 힘하나 안들이고 통째로 접수했다. 학생 신분인 이스의 길드장과 길드의 주력 인사들을 해당 학교 선생들이 볶아 댄 결과였다. "여기가 티쳐스의 본거지라 이거지?" 어두운 밤. 찰스턴 영지의 하늘을 지나는 기구가 하나 있었다. 야음을 틈타 영지에 안착한 기구에서 2명의 소녀와 펫1마리가 내렸다. 그들은 숲 속에 기구를 숨겨 놓고 근방의 묘지로 달려갔다. 으스스한 분위기의 묘지에 겁을 먹었던지, 궁수 소녀는 앞서 가는 앞서가는 상인 소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휴, 호위인 네가 떨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묘지로 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채린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묘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꾹 참고 들어가야만 했다. "정말 여기에 영주성으로 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게 맞아?" "틀림없어. 예전 이스 길드장에게서 들었는걸." 채린의 물음에 리지스는 들고 있던 지도를 보여 주었다. 이 지도는 예전에 찰스턴의 영주였던 이스 길드장을 수소문해 찾아가 받은 것으로, 성내로 침투하는 비밀 통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스 길드장은 몰락 귀족이 의뢰한 퀘스트의 보상으로 이 지도를 받아 찰스턴 영지를 함락시켰다고 한다. 비밀 통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와 이스 길드원들뿐, 티쳐스의 선생들은 몰랐다. 날로 빼앗긴 것이 분해서 선생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고. "비밀 통로 같은 것도 알아내고, 리지스 너 정말 대단한데." "후후, 내가 대단하다기보다 금력이 대단한 거지." 리지스는 티쳐스 덕분에 거지가 된 이스 길드장에거 적잖은 골드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비밀 통로의 지도뿐만이 아니라 영주성의 자세한 구조와 각각의 용도 등도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이번 작전은 무척이나 수월해졌다. "바로 여기야." 리지스는 사자 석상이 있는 묘 앞으로 갔다. 그녀는 이스 길드장이 알려 준 대로 사자 석상의 입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레버를 비틀자 묘의 윗부분이 열리며 비밀 통로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비밀 통로를 따라 영주성 내로 잠입했다. 출구는 이스 길드장이 일러 준 대로 성 서쪽의 마른 우물이었다. 채린이 먼저 우물 위로 올라가 주변에 경비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서둘러 밧줄을 내려 리지스와 포포를 끌어올렸다. "무기 창고는 어디라고 했니?" "영주관 뒤뜰." 그들은 NPC경비병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며 무기 창고가 있는 영주관 뒤뜰로 갔다. 무기 창고는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입구에는 2명의 NPC병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리지스는 여기까지 자신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포포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너 배고프지?" "삐이!" 포포는 쇳조각이라면 환장을 하는데, 지난 며칠 동안 그녀와 유한의 방해로 한 조각도 먹지 못했다. 유저들이 건네는 고철도 '먹이 주지 마시요' 라는 팻말을 내세워 차단시켰다. 그래서 대답하는 포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훗! 화가 많이 났구나.' 포포를 굶기는 것은 가슴이 아팠으나 목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저기 , 저 앞에 보이는 창고 있지? 저기에 가면 맛있는 무기가 잔뜩 있거든. 나랑 시아는 먼저 돌아가 있을 테니까 들어가서 맘껏 먹고 나와." "삐이?" 리지스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포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대장간이나 상점에서 무구에 조금만 입을 대도 혼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선지 실컷 먹으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포포가 움직이려 하지 않자 리지스는 억지로 떠밀어 보냈다. "괜찮다니까. 얼른 가." "삐이?삐이?" 연방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던 포포는 리지스가 계속 손짓하자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의 창틀에 매달린 녀석은 날카로운 이빨로 쇠창살을 뜯어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삐이!삐이!" 주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창고 안에는 포포가 좋아해 마지않는 금속 무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종류도 다양해서 진수성찬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삐이!" 누군가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한 포포는 닥치는 대로 무기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무기 창고로 번을 교대하러 2명의 NPC병사가 다가왔다. "여, 수고했어." "후아함! 이제 잠이나 좀 자 볼까?" 병사들이 막 교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엄청난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창고 안에서 괴생명체가 지붕을 뚫고 나왔던 것이다. "삐이!삐이!" 굵고 짜리몽땅한 팔다리에 작은 날개를 가진 녀석은 파닥파닥하며 창고 주위를 날아다녔다. "몬스터다! 괴물이 나타났다!" 곰만 한 덩치의 괴생물체의 등장에 찰스턴 영지는 난리가 났다. 괴생물체를 처리하겠다며 티쳐스 소속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달려왔지만, 놈은 여유롭게 유저들과 NPC들을 희롱한 채 하늘을 날아 사 라졌다. "저게 대체 뭡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드래곤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그레이크나 와이번 같아 보이지도 않고." 정말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등장하는 그 어떤 몬스터와도 생김새가 달랐다. "그런데 무기 창고는 어떻습니까?" 그제야 무기 창고의 지붕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한 기사 하나가 물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던 마법사는 충격적인 광 경을 보았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응? 몬스터가 나타난 건가?" 혹시 또 다른 괴생물체가 나타났나 싶어 티쳐스 길드원들은 서둘러 무기 창고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이럴 수가!" 무기 창고 안이 썰렁했다.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구와 금속 아이템들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나무로 된 창대나 칼집, 그리고 쥐가 파먹 은 듯이 깨어진 금속 파편들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들은 방금 전에 지붕을 뚫고 날아간 괴생물체가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몬스터가 무기나 아이템을 들고 갈 리가 없이 때문이다. 이 무기 창고에는 찰스턴 영지의 유저와 NPC병사들이 사용할 무구들 외에도 티쳐스의 선생들이 땀 흘려(?) 앗아 온 학생 유저들의 각 종 아이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분명 누군가 몰래 침입해서 아이템들을 죄다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 "일급 비상이다! 당장 길드의 간부 회의를 소집해!" 길드원 한 사람이 비상종을 울리며 고함을 질렀다. 3 어쎄신 키라. 오랫동안 카므나의 저주 대문에 고생했던 그는 간신히 하이 프리스트 유저를 만나 원래의 능력을 회복했다. 그가 브로딘 왕국의 본거지로 복귀하자 검은 초승달 길드의 도적 길드원들이 대문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오셨습니까." "응, 근데 이 상자는 뭐야?" "길드장님 앞으로 온 소포입니다." "나한테?"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든 키라. 그는 발송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에게 소포를 보낸 사람은 지그였다. 그놈이 누군지 똑똑히 기억하는 키라는 상자를 땅에 내던졌다. "뭐야, 이 자식!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나무 상자가 박살나면서 자마다르 하나와 편지가 나왔다. 이니셜 Z가 새겨진 자마다르는 크롬 합금이라 상당히 가볍고 튼튼했다. 거기다 칼날은 홈을 파고 황금으로 상감해서 무척이나 멋있었다. 굉장한 선물을 받은 키라의 표정이 살벌함에서 짜증 정도의 수준으로 완화되었다. "흥! 이제 화서 이딴 걸로 용서를 구하자는 건가?" "길드장님의 보복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길드원의 아부에 키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훗, 제 놈도 매일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싶진 않겠지." 안 그래도 저주에서 회복되면 망할 대장장이 녀석부터 족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이런 식으로 머리를 숙여 오다니. 키라는 유한이 보낸 사과 편지(?)를 읽어 나갔다. 편지 중반에 눈길이 닿는 순간, 키라의 표정이 또다시 험악하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놈이 혹시 무례한 언사라도?" "아니, 그런 건 없었어. 그저 일을 하나 맡아 달라고 하더군." "감히 길드장님을 부려 먹겠단 말입니까?" 길드원들이 마치 제 일인 양 분해 했지만, 키라는 별말 없이 편지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는 유한의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유한이 이 일의 대가로 미리 지급한 명품 자마다르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수락한 데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 '흥, 그래. 이번만은 네놈에게 협력하지.' 본거지를 떠난 키라는 베레타 공화국으로 향했다. 얼마 후, 키라가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베레타 공화국의 찰스턴 영지였다. 이곳은 며칠 전에 괴생물체가 난동을 부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경계가 무척 강화되어 있었다. 덕분에 거리를 활보하는 유저들도 전무한 지경이 되었다. "이쯤이 좋겠군."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던 키라는 은신 스킬을 발동했다. 그의 몸이 희미해진다 싶더니 이내 감쪽같이 사라졌다. 완전한 은신 모드로 들어간 키라는 영주관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갔지만, 그가 들어가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랭크 100인 안에 들어가는 암살 자답게 발소리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그렇게 키라는 아무도 모르게 영주관 안으로 들어왔다. "휴, 숨 좀 돌리고 갈까?" 조용한 곳에서 은신을 푼 키라는 인벤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서 꿀꺽 삼켰다. 은신 스킬은 MP를 많이 고갈시키기에 틈틈이 채워 두어 야만 했다. MP의 보충이 끝나자 그는 영주관 내부의 구조를 파악했다. 병사들과 하인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내부를 둘러보던 그는 마침내 집무실을 발견했다. 때마침 차를 가져온 하녀가 집무실 문을 열자 그는 그녀를 따라 공기처럼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집 무실에는 마침 간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50대 초반에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는 티쳐스의 길드장 같아 보였고, 안경을 쓴 40대의 마법사는 회계 담당 같았다. 중요 인물로 보이는 자들이 하녀가 갖고 온 다과를 들며 이야기를 하려 하자, 키라는 재빨리 시선을 그들에게 돌리며 게임의 기능창을 띄웠다. 반투명하게 떠오른 기능창의 단추들 중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영상 녹화'였다. '좋아! 시작해 볼까.' "이보게, 김 선생." 소파에 거만한 태도로 앉아 있던 영주가 마법사에게 말을 건넸다. "예, 교감 선생님." "티쳐스의 이번 달 활동비는 언제 나오나?" "그, 그게 일전의 무기 창고 도난 사건으로 길드의 수입이 급감하는 바람에……." 무기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일반 무기들을 잃은 것도 큰 손실이지만 , 티쳐스로서는 자신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학생 유저들에게서 압 수한 아이템이 사라진 것이 타격이 컸다. "어허! 그러니까 내가 좀 더 선생들을 내보내 애들을 단속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단속이 심해질수록 애들도 영악해져서 실적을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압수품들 외에 마땅한 수입처가 없었던 티쳐스는 학생 단속을 더욱 강화했고, 이에 학생들은 선생들의 지도, 단속에 더욱 불만을 품 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는 그들의 다속에 거세게 항의하는 한편, 그들의 위치를 공개해 다른 학생들이 피해 갈 수 있도록 했다. "쯧쯧, 그러게 처음부터 창고 관리를 잘할 것이지." 혀를 차던 영주는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래도 이번 달 용돈은 마련이 되겠지?" 영주가 말하는 용돈이란 유흥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티쳐스의 일부 선생들은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아이템을 몰래 팔아 치워 단란주점이나 노래방 같은 곳에서 유흥비로 쓰고 있었다. 김 선생이란 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핫! 어떻게든 용돈은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군. 여러 선생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느라고 불철주야 고생하는데 그에 대한 보답이 없어서야 쓰나. 김 선생도 날 잡아서 단란주점에 한번 다녀오도록 하게. 저번에 보니까 오 양이 애교덩인 게 아주 죽이더구먼." "오! 그렇습니까?" "고년이 아주 사람을 살살 녹이는 게……." 그때부터 두 선생은 음담패설을 이어 나갔다. '저런 망할 놈의 꼰대들!' 벽장에 숨어 그들의 이야기를 녹화하고 있던 키라는 순간 뛰쳐나갈 뻔했다. 망할 대장장이 녀석에게 받은 일만 아니면 당장 저 선생 들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버렸을 것이다. '이놈들 때문에 나의 문혜옥 양이!' 7년 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키라, 아니 박건우는 당시 인기 절정의 가상현실 무협 온라인 게임인 '청풍명월(淸風明月)'을 하고 있 었다. 당시 그는 백도 무림에 속한 검수 캐릭터였는데, 문혜옥이란 아리따운 소녀 검수와 커플을 이뤄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불행이 시작된 것은 '교사맹(敎師盟)'이라는 세력이 게임에 나타나면서였다. 교사맹은 그 전부터 온라인 게임에서 악명을 떨치던 티 쳐스의 무협 버전이었다. 교사맹 선생들은 백도 흑도를 가리지 않고, 청소년들을 마구잡이로 털어 갔다. 그들은 무기와 영약, 무공서 같은 값진 아이템을 앗아 간 것도 모자라, 학생 유저들의 캐릭터에 점혈을 눌러 무공까지 제한 혹은 폐지시켰다. 이 같은 패악에 수많은 기인 영재들이 강호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박건우의 짝인 문혜옥도 교사맹 고수의 손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고 상실감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게임을 접었고, 박건우는 영영 그 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박건우도 즐겁게 하던 청풍명월을 접었다. 키라가 원한에 이빨을 뿌드득 갈아붙일 때 교감이란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시간이 늦었구먼. 이만 가 봐야 할 듯하이."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로그아웃을 하자 키라는 은신술을 풀었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집무실을 샅샅이 뒤져 티쳐스의 비리와 관련된 서류들을 찾았다. "후후후,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다시는 온라인 게임에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리라. 몇장의 서류를 스크린 샷으로 찍은 키라는 그 자리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 일은 이렇게 찍은 파일들을 공개하는 일뿐이다. 4 "티쳐스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선생들은 지금까지 학생들에게서 압수한 아이템을 돌려 달라!" "돌려 달라!" 선두에 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유저가 확성 마법이 걸린 마이크를 붙들고 선창하지 광장을 가득 메운 앳되어 보이는 유저들이 따 라서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한 중년 전사가 이 모습을 보고 의아해 동료에게 물었다. "어이, 지금 애들이 뭐 하는 거야?" "쯧쯧, 이렇게 정보에 귀가 어두워서야. 잘 듣게. 한번만 말해 줄 테니까. 저 애들은 지금까지 티쳐스에 피해를 입은 학생 유저들이 야. 그동안 압수당한 아이템과 돈들을 돌려 달라고 이렇게 몰려온 거지." "뭐? 그런다고 티쳐스가 돌려주겠나?" "물론 예전이었으면 씨도 안 먹힐 소리지. 하지만 말이야. 며칠 전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폭로 동영상과 파일 때문에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져 버렸어." "오잉, 폭로 동영상?" 중년 전사가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티쳐스 일부 선생들이 학생 유저들에게서 압수한 아이템을 팔아 유흥비로 사용했다는 증거와 함께 음담패설을 입에 담는 동영상이 올라와 엄청난 이슈가 되었지." "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정말 말세야, 말세. 선생들마저 저렇게 썩었다니 이젠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두 중년 유저는 서로 혀를 차며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여러분! 우리들의 요구가 저들의 귀에 아직 안 들리는 모양입니다. 조금 더 크게 고함을 지릅시다. 티쳐스는 물러가라! 그리고 우리 에게서 빼앗아 간 아이템을 돌려 달라!" "티쳐스는 물러가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아이템을 돌려 달라!" 함성을 지르는 유저들 가운데는 이번에 계획을 구상해 티쳐스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유한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피켓을 치켜들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오펜 오빠,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티쳐스 선생님들이 그런 비리를 저지를 거라 예상했어요?" 에이린의 감탄에 오펜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가를 저었다. "훗, 원래 명분이 걸린 일이라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들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별로 없거든." "그럼 확신을 했다는 거예요?" "좋은 명분이라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절제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 절제가 부족해지면 비리가 생기는 게 당연하지." 오펜의 말에 동료들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그들은 다시 시선을 앞쪽으로 돌렸다. 선두에서 빨간 띠를 두르고 유저들의 함성을 모으고 있는 유저는 바로 유한이었다. "큭, 지그 녀석 완전히 정치인 같잖아."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도 되겠어!" 그들이 키득거리고 있을 때 효과음과 함께 휴한에게 안내창이 떠올랐다. -1,000명 이상 유저를 1시간 동안 충동질하셨습니다. 선동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동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유저나 NPC를 선동하면 일정 시간 동안 전투력과 사기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풋! 어쩌다 보니 선동까지 익히게 되었군.' 유한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선동 스킬은 도발과 같이 모든 유저가 배울 수 있는 국민 스킬이다. 위력은 약하지만, 버프 효과가 있기에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획득 조건이 다소 번거로워 익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킬 획득에 좋아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유한은 새로 익힌 선동 스킬을 가동한 채 목소리를 더욱 크게 질렀다. 불끈 쥔 그의 오른 주먹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힘차게 외칩시다! 티쳐스는 물러가라! 우리에게서 빼앗은 아이템을 돌려 달라!" 유한이 광장에서 학생 유저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영주 집무실의 테라스에도 몇 명의 선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 선생! 저들을 당장 몰아내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저, 그게 교감 선생님. 우리들의 입장이 난처해 함부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티쳐스는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명분 아래 학부모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활동해 왔다. 그들의 명분에는 게임 개발사인 드림 맥스도 쉬이 간섭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동영상과 문서가 찍힌 스크린샷 파일로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누군가 침투해서 자신들의 대화 장면을 녹화 해 갔고, 아이템 거래 내역 서류까지 찍어 갔다. 이건 정말 크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명분이 아무리 좋더라도 선도 세력이 도덕적 문제를 드러내면 지지를 받기는커녕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건 합성이라고, 조작된 영상이라고 주장하세요!" "하지만 함께 공개된 자료가 너무 구체적인지라 저희들의 말이 먹히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학부모들이 등을 돌렸고, 그 다음으로는 GM이 티쳐스 활동을 중지하라는 권고문을 주고 갔다. 길드전이 아니면 여간해서 볼 수 없는 GM들이 이번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심각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권고문에는 차후 티쳐스 활동을 지속할 시에는 전원 계정을 영구 압류하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미 우리가 쓸 카드는 없습니다. 동영상이 올라간 뒤로, 길드를 탈퇴하고 애들에게서 빼앗은 아이템을 돌려주겠다는 선생님들이 속 출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의 말에 여러 선생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이번 일은 티쳐스가 생겨난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이번 사건 덕분에 지금까지 학생계도를 명분으로 여러 게임에서 보였던 그들의 활약이 학생들을 착취하기 위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앞으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물론이고 다른 게임들에서 티쳐스의 활동이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교육청에서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갈까?' 선생들이 제일 두려운 건 그 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들은 선생입니다. 이 나라의 후진들을 육성하는 교육자라고요. 당장 드림팩스에 항의하세요. 그리고 저 발칙한 것들은 당장 해산시키도록 하세요!" 그는 바로 티쳐스의 길드장인 정 교감이었다. 정 교감은 아직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아니, 이해한다 해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대로 물러나고 인정하면 지금까지 누려 온 모든 것을 다 잃고 만다. "교감 선생님, 지금은 고집을 부리실 때가……." "어허! 김 선생! 당장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할 거요!" 김 선생은 학교에서 상사이기도 한, 정 교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드원들과 NPC병사들을 보내 시위대를 해산케 했다. '어쭈구리! 우리들을 해산시키시겠다?'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을 본 유한은 쾌재를 불렀다. 처음에는 그냥 티쳐스의 사과와 압수한 아이템들을 보상받는 선에서 일을 끝내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저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여러분! 이대로 저들에게 질 수 없습니다. 모두 떨쳐 일어나 우리들의 단합된 힘을 보여 줍시다!" "우와아아아!" 그동안 티쳐스에 피해를 본 학생 유저들이 모두 떨치고 일어섰다. 그들은 영주관으로 전진하며 병사들과 충돌했다. 처음엔 밀고 당기는 식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그마한 불꽃이라도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뭐 하는 건가! 당장 저놈들을 해산시켜! 안 되면 때려 눕혀! 대가리를 터트려 확 죽여 버리란 말이야!" 불꽃은 영주 집무실 테라스에 서 있던 길드장 정 교감이 떨어트렸다. 교육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의 외침에 NPC들이 무기를 빼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고, 선두에 섰던 시위대 학생들이 우수수 쓰러져 나 갔다. "모두 공격! 타락한 선생들에게 학생들의 정의를 보여줍시다!" 유한의 외침에 시위대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본격적인 유혈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내 아이템 내놔라, 꼰대들아!" "남의 피땀 어린 아이템을 팔아 처마신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디까!" 처음에는 선공을 날린 티쳐스들의 우세로 시작되었으나,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 유저들이 속속 가담하자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을 정 도로 커져 버렸다. 빽빽이 일어난 창칼들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마법과 버프의 물결이 영주관 앞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광포중 선생님들더러 빨리 접속해 들어오라고 하세요!" "카잔 방면 길드원들이 오려면 아직 멀었나?" 티쳐스는 티쳐스대로 전력을 총동원하고, 학생들도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들을 모두 동원했다. "이형복 선생님, 칠 년 전 청풍명월의 원한을 지금 풀어야겠습니다!" "경복고 학주 다마네기! 거기 있는거 아니까 얼른 튀어나와!" 과거에 티쳐스에게 당했던 대학생, 일반인 유저들도 달려와 학생들의 전력에 힘을 보태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 측의 전력은 점점 증가하였고, 티쳐스 쪽은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교사와 학생의 싸움이 벌어진 지 3시간 후, 티쳐스 길드가 찰스턴 영지의 영주관을 버리고 퇴각함으로써 장렬하고 역사적인 전투는 끝을 맺었다. 5 밤 9시. 이 시간은 대다수 TV 채널들이 뉴스를 방송하는 시간이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C 9시 뉴스 아나운서 전주일입니다." KBC 9시 뉴스는 전통적인 공영방송 뉴스 프로그램으로 다소 보수적이라 평가받지만 정치, 시사, 경제 관련 소식들을 시청자들에게 꾸 준히 전해 오고 있었다. 몇 개의 보도가 흘러가고 전주일 아나운서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여러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심지어 이런 일까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교사가 게임에서 학생 들에게 빼앗은 아이템을 처분해 유흥비로 탕진하고, 분노한 학생들이 교사들을 폭력으로 보복한 참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보도에 서준한 기자입니다." 전국 시정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사적인 전투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양 말하는 아나운서의 말에 분노가 치밀었다. 시청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화면은 뒤바뀌어 찰스턴 영지의 영주관이 나오더니 자신의 캐릭터로 접속한 서준환이란 기자가 보도를 시 작했다. "오늘 새벽 0시 5분. 유명한 D사의 A게임 내 이곳 c영지에서 예정이 없었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후 관련 영상이 떠오르며, '학생 혁명'이라 불리게 된 전투가 벌어진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아나운서의 다소 편파적인 말과는 달리 기자는 티쳐스의 비리와 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충돌에 대해 비교적 공평하게 소개했다. "서 기자, 교사 측에선 학생들이 위협을 해서 먼저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이 영주관 쪽으로 진입을 시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교사 측이 학생들과의 대 화를 단절했고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이후 뉴스는 현재 찰스턴 영지의 동향이라든가, 쫓겨 간 티쳐스의 상황 같은 것들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게 가상현실에 얽매인 사회적 병폐라느니, 교사도 학생도 이래선 안 된다느니 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또 여기에 언제 인터뷰를 했는지, 이번 사건에 대한 모 대학 사회학과 교수의 의견이 뒤이었다. "이는 교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과연 그들이 순수한 뜻으로 그런 활동을 했는지 의문스럽고, 아이템 압수는 교육자의 행동으로 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뉴스는 중도성을 유지하기 위함인지 선생들을 응호하는 일선 모 교사의 인터뷰도 소개되었다. "이걸 해도 안 되고 저걸 해도 안 되니 급기야 아이템 압수를 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처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잘못이죠. 하지만 선생들도 사람이고, 이대로 놔두면 애들 학업은 둘째 치고 현실 감각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방송을 보고 있던 학생들은 분개했다. 얼마나 자신의 말에 자신이 없었으면 얼굴에 모자이크 떡칠을 하고, 음성변조까지 했겠는가. -교사만 사람이냐? 학생도 사람임! -학생이 어디 사람인가. 축생이지ㅋㅋ. -우리 선생은 출석부를 때 한 마리, 두 마리 하는 식으로 헤아립디다ㅠ.ㅠ -학생은 죄수에요. 이름으로 안 불리거든요. 전 1학년 때 12번이고, 2학년 때 19번이고, 3학년 때 8번이었습니다. -이놈의 교육 활경은 30년이나 넘게 지나도 이따구여? -대한민국이 교육계가 그렇지 뭐. 뉴스가 진행되는 중에 뉴스 게시판에 시청자들의 글들이 쉬지 않고 올라왔다. 대부분이 티쳐스를 비난하는 글이었고, 간혹 티쳐스를 옹호하는 글들은 올라와도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9시 뉴스의 바톤을 이어받은 것은 케이블 TV의 인기 게임 프로그램 버추얼 에이지였다. 그들이 다룰 주제도 학생 혁명이었다. 하지만 버추얼 에이지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자 방송 들어갑니다, 셋, 둘, 하나!" PD의 신호와 함께 방송 화면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귀엽고 깜찍한 여러분들의 요정 미루입니다.] [이정민입니다.] 특유의 제스처로 시청자들을 향해 인사한 사이버 캐릭터 미루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보이며 귀엽고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저희는 오늘 새벽에 있었던 학생 혁명의 뒷이야기를 들려 드리기 위해 역사의 현장에 와 있습니다.] 미루와 이정민은 찰스턴 영지의 영주관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주변이 깨끗이 정리되어 새벽의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유저들이 흥분한 상태로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와우! 분위기가 대단하네요. 독재자를 물리친 나라에 온것 같아요.]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같으니까요.] 카메라맨은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고, 승전가를 부르는 유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정민 씨, 이번 학생 혁명을 이끈 유저가 누구인지 밝혀졌습니까?] 비록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지만, 그들의 힘이 하나로 단합되지 않았다면 티쳐스를 몰아내기는커녕 그들에게 맞아 쫓겨났을 것이다. 시청자들도 이 같은 거사를 치른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아, 그건 일단 자료 화면을 보시죠.] 이정민의 눈짓에 화면 한쪽에 창이 뜨더니,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찰스턴 영지의 광장에 앉아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나왔다. 그 선두에서는 머리에 붉은 띠를 맨 한 유저가 열심히 고함을 지르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어머, 굉장히 낯익은 유저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요. 그는 공중 요새의 최초 발견자이자 리저드맨 대군을 끌어들여 푸른새벽 길드와의 길드전에서 승리한 대장장이 지그이니까요.] [아, 그 대장장이 지그 님이었군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미루가 손뼉을 쳤다. [정말 요즘 들어 이래저래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분이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화제를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찰스턴 영지를 처분하는 일로 말입니다.] [찰스턴 영지를 처분한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미루는 얼른 바르쳐 달라는 듯 커다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하하, 일단 알려 드리기 전에 오늘 저녁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상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정민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그들이 있던 화면이 사라지고, 몇 시간 전 누군가가 찍은 동영상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치열한 사움이 벌어진 영주관 앞의 광장. 싸움은 끝났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은 수백 명의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티쳐스가 몰락하면서 모든 것이 끝났지만, 한 가지 문제를 풀지 못해 갑론을박을 하는 중이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티쳐스를 몰아내고 손에 넣은 찰스턴 영지의 처분 문제였다. 애초에 시위만 하려고 모였지, 영지 점령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찰스턴 영지를 재력이 있는 길드에 팔아 그 돈을 공평하게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리지스의 의견에 같은 상인 유저들이 찬성을 보냈지만, 석궁을 어개에 걸친 궁수 유저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차라리 학생 길드를 만들고 길드 공동의 소유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몇몇은 찬성했지만, 타당하지 않다 여겨졌는지 대부분 유저들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유저들 중에는 이미 길드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가입된 길드에서 탈퇴하고 새로운 길드에 투신하는 일은 쉽게 결정 내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영지는 원래 이스 길드의 소유였다고 들었어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건 어떻습니까?" "글쎄 그것도 좀 아니라고 보는데요? 다 같이 힘을 모아 거둔 결과인데 원래 주인이라고 덥석 맡겨 버리기엔……." "그냥 깨끗이 포기합시다. 우리가 영지 먹으려고 모여서 싸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냥 버리고 가긴 아깝습니다." 한 시간도 넘게 토론이 벌어졌지만, 의견이 분분해 어느 하나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한은 묵묵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여러 의견들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중앙으로 나갔다. 모든 유저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대장장이 지그는 이번 학생 혁명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고객들을 필두로 하여 사람들을 설득하고, 아르페디아와 관련된 여러 게시판에 글을 올려 학생 유저들의 참가를 이끌어냤다. 그가 조직한 시위대에 자극을 받아 용기를 낸 다른 학생 유저들이 하나 둘 가담했고, 그렇게 뭉쳐진 커다란 힘이 결국 티쳐스를 무찌르게 되었다. "저에게 괜찮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겠습니까?" "말해보시죠." 대장장이 지그가 그 어떤 유저보다 공헌이 크다는 걸 알기에, 유저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우리끼리 길드를 만드는 것도 힘들고, 영지를 팔아서 돈으로 나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치부하게 되면 우리도 티쳐스의 선생들과 다를 게 없게 됩니다." 티쳐스도 학생 계도라는 좋은 명분을 갖고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변질되었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거둬들인 아이템을 팔아서 자기네 하고 싶은 대로 먹고 마시며 아가씨들에게 팁까지 찔러 주었다. 빼앗은 영지를 팔아서 서로의 주머니를 채우게 되면, 사람들은 학생 유저들의 의거(義擧)를 불순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이 영지를 자유도시로 만드는 겁니다." "자유도시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명의로 이 도시를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도시로 만드는 겁니다." 자유도시. 약간의 상업세와 토지세를 제외하면 거의 세금이 없어 유저들이 장사나 활동하기에 좋긴 하지만 제대로 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 몇 개의 자유도시가 있긴 하지만 3~5개의 중소 길드들이 연합체를 이루고 협의를 하여 이끌어가는 방식이었다. 티쳐스 타도라는 목적 아래 모였던 유저들이 그들처럼 영지의 지배난 행정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어렵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이 영지는 부당한 폭압에 대항해 승리한 학생 유저들의 성지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있다면 혼란은 줄어든다. 학생 유저의 성지. 이번에 거사에 참가한 유저들이나, 비록 참가하진 못했어도 암묵적인 지지를 보낸 학생 유저들에게 찰스턴 영지는 영원히 유지해야 할 신성한 땅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거대 길드가 이 영지를 노리고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티쳐스가 돌아오게 된다면요?" 한 유저가 그 가능성을 제시햇지만, 유한도 그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우리는 다시 한 번 단합된 힘을 보여 주면 됩니다. 한 번 했으니, 두 번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 모인 유저 전체의 명의로 이 도시를 건드리는 자에게 처절한 응징을 약속한다면 누가 감히 이곳을 노리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유저들의 수가 수백. 거기다 그들의 인맥까지 동원하고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는 유저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가히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할 것이다. 그런 유저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누가 감히 이곳을 먹으려고 덤벼들 것인가. 행여 그럴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겨우 작은 영지 하나 먹자고 수많은 유저들을 영구히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길드는 없을 것이다. 유한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자유도시의 영주와 행정관들은 석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투표를 통해 뽑으면 됩니다." "오오, 좋습니다!" "나도 찬성이요! 그렇게 합시다!" 유한의 설명이 끝나자 유저들이 곳곳에서 찬성을 표했다. 민주주의 식으로 누구나 영지를 지배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 학생 혁명 의의를 기리기 위해 찰스턴 영지를 자유도시로 선포하는 바입니다." 유한의 선언이 끝나자 모든 유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열렬히 박수쳤다. 거기서 자료 화면이 끝났다. [오오, 영지를 자유도시로 만들기로 결정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선포를 한 후, 지금 대장장이 지그님의 새로운 작업에 착수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새로운 작업이요? 어떤 건가요?] [직접 한번 보시죠.] 이정민과 미루는 인파를 헤치고 광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현재 광장에 모인 유저들은 광장 중앙에서 유한이 하고 있는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각가 유저의 협력을 받은 유한은 광장 가운데 청동 기념상을 만들었다. 이 청동 기념상은 학생 혁명의 전승탑이자, 자유도시 찰스턴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구심점이 될 상징이었다. 폭압에 항거하는 학생 유저의 모습은 조각가 유저가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을 유한이 청동 주물로 완성했고, 그렇게 완성된 동상을 미리 준비된 단상에 올렸다. 2미터 높이의 단상 사방에는 티쳐스에 대항한 유저들의 역사적인 전투 기록과 자유도시르 ㄹ선포한 지그 외 756명의 유저들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기념상이 완성되자 유저들은 또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야, 정말 멋지군요.] [혁명의 마무리로 참 근사하지 않습니까?] 이정민의 짧은 감평을 끝으로 버추얼 에이지는 다음 코너로 넘어갔다. [자, 다음으로 그로지아 왕국에서 준비 중이 국왕배 배틀 폴로 대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8.배틀 폴로 대회 1 "형님, 찾았습니다!" 사무실의 문이 부서져라 열리더니, 온몸에 물기가 뚝뚝흐르는 덩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비슷한 몰골의 사내 몇이 더있었다. 어떤 사내는 이마에 물안경을 걸치고 있었고, 산소통을 짊어지고 오리발을 신은 사내도 있었다. "뭐야? 정말 찾았어?" 앉아서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깍두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료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로또에 당첨된 듯 흥분한 얼굴 이었다. "고생은 했지만, 결국 강바닥에서 이놈을 찾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덩치가 앞으로 내민 것은 도깨비 문양의 장식이 있는 지포라이터였다. 겨우 지포라이터 하나 찾은 것 갖고 이리 난리 일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 아니 그들 조직에 있어 이 지포라이터는 몇년치 수입을 한번에 안겨줄 복덩이였다. 부르르떨리는 손으로 지포 라이터를 확인한 깍두기는 얼른 전화기 앞의 부하에게 소리를 질렀다. "도끼야! 당장 그자식에게 전화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도끼라 불린 부하는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의뢰인은 직접 지포라이터를 받으러 가겠다고 통보해왔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주걱턱에 가는 눈매를 지닌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바로 드림맥스에서 데이터를 턴 해커였다. "라이터는?" 성격이 급한지 그는 인사도 생략한 채 바로 지포라이터 부터 찾았다. 그러나 순순히 물건을 넘겨줄 정도로 순진한 깍두기가 아니었다. "물건을 받기 전에 돈부터 줘야 하지 않겠소?" "쩝, 할 수 없지." 깍두기에게서 지포라이터를 넘겨받은 해커는 라이터를 살폈다. 확실히 자신이 잃어버린 지포라이터가 맞았다. 그는 뚜껑을 열어 라이터를 뽑아냈다. 그런데 뒤에 달려 있어야할 그것이 없는게 아닌가? "이게 뭐야?" "뭐라니?" "이곳엔 원래 기름통 대신 메모리 장치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해커가 목청을 높이자 깍두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자식 이거 돈 주기 싫어 쇼하는거 아냐?" 지포라이터는 그의 동생들이 무려 열흘 넘게 한강 바닥을 뒤져서 건져 낸 것이다. 이를 위해 잠수 장비와 수중 금속 탐지기 까지 동원하지 않았는가. "그런 말은 없었잖소?" "그 메모리에는 내가 샹……." 해커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샹화소프트의 이름이 언급 되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드림맥스의 차기 게임 데이터를 훔쳐 달라고 한샹화 소프트의 관계자는 절대 자기 회사 이름이 언급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제길, 하여튼 내가 원한 것은 이깟 지포라이터가 아니라 그 속에 든 메모리 장치였단 말이야! 고삐리 녀석에게서 메모리 장치를 찾아 주지 않으면 절대 돈을 주지 않겠어." 해커가 완전 배 째라고 나오자 깍두기는 안색을 굳혔다. 이놈을 콘크리트에 묻어 인천 앞바다에 던져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그동안 고생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될것이다ㅏ. "좋수다. 놈에게서 메모리인지 메뚜기인지 찾아주지. 하지만 약속한 금액에서 오천 만원은 더 줘야겠어." "흥, 메모리만 제대로 전해 준다면 그 두배를 주지." 데이터만 건네주면 샹화소프트에서 받기로한 돈이 무려 30억이다. 그중에서 1억을 더 못줄까. "대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움직여야 해." "보채지 마슈. 그 고딩 녀석을 손대기가 쉽지 않단 말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해커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 멍청한 조폭놈들은 어째 일을 시원하게 하는 법이 없다. "그 고딩 놈 집 근처에 이상한 놈들이 깔렸소. 사복형사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껄끄럽수." "설마……?" "걱정말고 기다리슈. 애새끼 동선을 파악하고 있으니까." 틈만 보이면 달려들어 메모리를 탈취할 것이다. 물론 깍두기는 메모리만 뺏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싸늘한 11월에 동생들을 용궁 유람 다녀오게 해 준 대가는 치러 줘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슈. 조금만……." 깍두기는 그렇게 말했지만, 해커는 느긋한 입장이 되지 못했다. 예정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초과한 상태다. 1분 1초가 지날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2 학생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유한은 수많은 길드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의 대장장이 로서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번 혁명에서 보여 준 리더십을 높게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 밑에 들어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유한은 모든 제안을 뿌리친 채 부족한 스킬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얼마 전 NPC 상인 홉스가 주문한 상품이었다. "앵커(Anchor)를 제작해 달라고요?" "후후후, 요새 조선업이 흥해서 말이지요. 조선소에서 배에 필요한 이런저런 물건들을 주문하곤 한답니다." 그렇게 주문하는 물건들 중에서 앵커, 우리말로 닻이라 불리는 것도 있단다. 닻은 정박할 때 필요하기에 배에선 빠질수 없는 장비였다. 닻은 주물스킬로 만드는 상품 이기에 유한은 이 주문퀘스트를 덥석 받아들였다. "쇠는 아직 덜 녹았나?" "지금 갑니다." 유한은 모래로 만든 거푸집에 펄펄끓는 쇳물을 부었다. 쇠가 다 식은 다음 거푸집을 떼내자 갈고리 모양의 시커먼 무쇠 닻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범선의 닻을 만들었습니다.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주물스킬이 5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3올랐습니다. '오오, 드디어 주물 스킬이 5랭크로 올랐다!' 역시 단순한 물건 만드는 것보다 예술품이나 이렇게 다소 복잡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스킬 향상에 훨씬 도움이 된다. "상태창 확인!" [상태창] 이름:지그 칭호: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요새의 발견자,리저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제작자 직업:대장장이 레벨:110 체력(HP):900/900 스테미나:620/620 마나(MP):55/55 힘:110 민첩성:85+10(바람의 부츠) 인내심 :86 지식:55+15(기술관의 관복) 행운:78 솜씨:150+15(기술관의 관복) 명성:10,500 공격력: 130+130(마이티소드+ 와이어 건틀렛) 방어력:90+105(바람의부츠+기술관의관복+와이어건틀렛+동지의목걸이) 경험치:3,000/14,000 돈:152,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채굴 스킬 4랭크 채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3랭크 생산 스킬 3랭크 합금 스킬 6랭크 정밀조립 스킬 7랭크 수리 스킬 3랭크 주물 스킬 5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쇼크 웨이브 9랭크 선동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72%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3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5랭크 '이제 합금만 한 단계 더 올리면 철공소 짓는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거야.' 고지가 곧 눈앞에 보였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유한이 다시 스킬 수련에 매진하려 할 때였다. 작업실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그야, 잘 있었냐?" 그는 바로 곽대발, 아니 자칼이었다. "여긴 어쩐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왔지." "볼일요?" "그래. 레드 타이거 용병대에서 그로지아 왕국에서 벌어지는 배틀 폴로 대회에 나가기로 했는데, 무구나 경기용품을 만들어 줄 대장장이가 필요해서 말이야." 배틀 폴로에는 선수 외에도 신관과 마법사, 대장장이같은 스태프가 필요하단다. 신관은 부상 입은 선수를 치료하기 위해서고, 마법사는 아이템 인첸트, 그리고 대장장이는 무구 제작및 수리를 위해서 라고. 마침 철공소가 코앞에 와 있는지라 유한은 거절했다. "바쁜 일이 있어서 못 가겠습니다." "너 인마, 이러기냐?" 유한이 거절하자 자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러기라뇨? 저도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고요." "어허, 내 너를 이렇게 안 가르쳤는데." "그래도 어쩔수 없습니다. 저 철공소 만들어야 해요." 유한은 움츠러 들려는 마음을 다 잡았다. "좋아, 할수 없지. 대장님껜 네가 시아랑 데이트중이라 못간다고 말해두마." "뭔 소리예요. 데이트는 무슨놈의 데이트……." 지금 일하는거 보이지 않느냐고 하려던 유한은 자칼의 음흉한 미소를 보았다. 만약 자칼이 송태수, 아니 길포드에게 그렇게 거짓으로 이야기한다면 길포드는 불문곡직하고 쳐들어와 유한을 박살낼 것이다. 저번에 메모리에 야동이 들었다는 누명을 쓰고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았던가. "자, 그럼 난 간다. 시아랑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라." "기, 기다려요!" 유한은 떠나려는 자칼의 소매를 잡아 붙들었다. 비겁한 술수에 이가 갈렸지만, 지금 상황에선 두손을 들수밖에 없었다. "가면 되잖아요! 가면!" "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서 주니 이 사부도 무척 기쁘구나." '개뿔이 자발적이우!' 유한이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자칼은 뒷말을 이어나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빼먹은게 있는데……." 자칼이 말을 끌자 유한은 짜증 난 목소리로 물었다. "또 뭔데요?" "만약 우리팀이 우승해서 상금을 타더라도 네몫은 없다. 어디까지나 넌 자.발.적으로 형님들을 돕기위해 나서는 것이니까. 알았지?" '켁! 이건 아주 날 공짜로 부려 먹겠다는 거잖아!' 빙그레 웃고있는 자칼이 미워 죽겠지만, 지금은 약점을 잡힌 상황이라 잠자코 있어야했다. "알았어요. 빨리 가기나 하죠." 서둘러 배틀폴론지 뭔지를 끝내고 오리라 다짐하는 유한 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합금 스킬을 올리기위해. 3 마노스 제국 그로지아 왕국의 동쪽, 베레타 공화국의 남쪽에 위치한 이 나라는 30년 전 마노스 왕국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제국으로 거듭난 곳이다. 철혈의 여제 미네르바가 다스리는 이 나라는 유저들에게 공개된 지 1년이 넘지 않았는데, 이곳에 철십자 길드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퀘스트르르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크의 열쇠'가 필요하단 말이지?" "그래, 대장. 그러니까 나에게 부하들을 좀 빌려줘." 케이지의 말에 철십자 길드의 운영위원이자 무력을 담당하고 있는 베히모스가 생각에 빠졌다. 지금 철십자 길드는 저번의 길드전으로 수많은 길드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다크나이트 길드와 B.O.B 길드를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지만, 거대 목인병을 등장시킴으로써 다른 길드들의 시기와 질투를 산것이다. 그래서 철십자 길드는 지금 한창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드의 핵심 기사단을 한낱 열쇠 하나 얻자고 그로지아 왕국에 파견하자니 신경이 쓰일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뇌제의 홀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길드의 전력을 한층 업그레이드 할 수 있어." 케이지, 아니 김필중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대 아르페디아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영웅 테라칸 황제, 일명 뇌제라 불리는 그의 능력을 손에 넣을수만 있다면 철십자 길드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좋아, 승낙하지. 하지만!" 베히모스의 허락에 희희낙락했던 케이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땐 정말 길드에서 추방해 버릴테니까 제대로해, 알겠어?" "아, 알았어.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 케이지는 과거 철십자 길드의 분파인 푸른새벽 길드를 말아먹은 일로 운영진의 눈 밖에 났다. 길드전의 원인이 그가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는것이 밝혀 지면서 철십자 길드내의 지지기반이 등을 돌린 것이다. 그나마 베히모스가 그를 감싸 주지 않았다면 벌써 추방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뿌드득! 지그 녀석! 내힘을 되찾는 즉시 아주 작살내 버리겠다.' 케이지, 아니 김필중은 자신의 몰락을 초래한 대장장이 녀석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멍청한 녀석, 네 역할은 반크의 열쇠를 찾는 데 까지야.' 김필중이 나가자 베히모스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실망시킨 녀석을 곁에 둘 만큼 너그러운 성격의 그가 아니었다. 베히모스가 저 멍청한 녀석을 감싼 이유는 학교 친구이기에 앞서 녀석이 뇌제의 홀을 찾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황궁에 들어가 볼까?' 베히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노스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이기도 한 백작, 어떻게든 여황을 매혹시켜 제국의 힘을 얻을 생각이었다. 유한이 얼마 전 엘프의 숲에 가면서 들른적이있는 그로지아 왕국에 최근 많은 유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로지아의 국왕이 배틀 폴로 대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이봐, 배틀폴로가 뭐야?" 왕도 슈탈린에서 한 유저가 지나가는 NPC를 붙들고 물었다. 유저의 반말이 다소 기분 나빴는지, NPC의 말투도 공손하지 못했다. "왜요? 매틀폴로 경기에 참가하시려고?" "그러니까 배틀 폴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는 거 아냐." 유저가 살짝 신경질 난 표정을 짓자 주민NPC는 입술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설명해주었다. 일반주민 NPC는 유저가 물으면 설명해 줘야 한다고 프로그램 되어 있었기 때문. "배틀폴로는 우리 그로지아의 전통 놀이인데, 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기존의 폴로 경기를 보다 전투적으로 변화시킨겁니다. 보통 한팀에 모두……." NPC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이랬다. 배틀폴로란 말을타고 하는 하키랑 비슷하다는 것. 한팀은 모두 7명의 선수들로 이루어 지는데, 상대 골대에 더 많은 골을 넣은 팀이 이기는 경기였다. 배틀 폴로란 이름에 걸맞게 , 공을 지닌 사람을 공격할수 있으나, 말이나 소환수, 그리고 공을 갖지 않은 선수를 공격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을 몰고갈 스틱 외에 다른 무기의 사용도 허가되며, 때에 따라선 골키퍼를 빼고 필드플레이어를 한명 더 집어넣을 수도 있단다. "허, 이거 완전 전쟁이군." "그래서 시합도중에 종종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발생하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한이 자칼에게 물었다. "원래 이런 대회가 있었나요?" 유한이 알기로 배틀 폴로라는 대회는 없었다. 저번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기사나 전사들의 용력을 가리는 무투대회가 곧잘 열린다고 들었지만, 이런 식의 시합은 금시 초문이었다. "이번이 처음이지.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구경삼아 오는거야." "그렇군요. 그런데 상금은 얼마죠?" 도대체 얼마기에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하는 자칼이 자신을 강제로 끌고 오기까지 했을까. "우승 상금이 백만 골드에, 준우승 상금이 오십만 골드라고 하더군. 그리고 8강까지 가기만 해도 십만골드는 받을 수 있다지. 그런데 더 탐이 나는건 우승자에게는 국왕이 특별한 아이템을 하사한다는 거야." '허억!' 100만 골드면 철공소를 지을수 있을 만큼의 큰돈이다. 거기다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특별아이템까지. "백만 골드나 되는데 저한테 땡전 하나 안준다는 겁니까!" "어린놈이 벌써부터 돈을 밝히면 못써." "그걸 잘 아는 어른이 무보수 착취를 해서야 쓰겠습니까?" 유한의 눈길이 따가워지자, 자칼은 일부러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잠시 끊겼던 대화는 유한이 다른 주제를 언급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길포드 대장님이랑 로키형은 왜 안왔어요?" "그 두사람은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 대장님은 이런 대회는 시시하다며 빠지셨고, 로키는 헬리오스 신전에서 받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고 하더군." '음, 로키 형을 참가 못하게 한건 나였구나.' 헬리오스신전에 믿을만한 사람을 추천했던 일이 생각난 유한이었다. 아마 로키는 사라진 마물을 추적하고 있을터. "뭐 그 두 사람이 빠진다고 전력에 차질이 생긱는 건 아니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않나?" "물론입니다!" "당연하죠!" 꽤나 승리를 자신하는 듯, 레드 타이거 용병대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배짱 하나는 누구에게 안 뒤질 사람들이다. "자! 밥부터 먹을까. 일단 먹어야 힘을 쓸수 있을 테니까." "오! 안그래도 배가 출출했습니다." "기왕이면 맛있는거 먹으러 가죠." 자칼의 말에 레드 타이거 용병들이 군침을 흘리며 좋아했다. 역시 단순한 인간들. 예로부터 힘쓰기 좋아하는 인간들 치고 먹는 거 싫어하는 인간은 못봤다. 유한과 레드타이거 용병들이 찾아간 식당은 '먹을래 죽을래'라고 하는 고기 뷔페였다. 요리스킬 1랭크 유저가 운영하는 식당이라는 문구가 간판아래 자랑스럽게 적혀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문가에서 친절하게 인사하던 여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것이 덩치가 산만한 장정들 십 여명이 우르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집 오늘 매상은 끝장났군.' 유한은 울상을 짓고 있는 식당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 든든하게 먹고 내일 아침 첫 시합을 준비한다. 알겠나?" "옛ㅡ 썰!" 자칼의 말에 다들 쟁반을 들고가 양념된 고기를 가득 가득 담았다. 그리고 불판에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고기굽는 냄새가 향긋했다. "캬! 씹는 맛이 예술이네." "젠장, 왜 게임에서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지." 요리스킬 1랭크 유저가 양념한 고기답게 불판에 구워낸 고기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환상적인 맛과 부가기능을 안겨 주었다. -영양가 풍부한 식사야말로 진정한 보약입니다. 하루동안 스태미너가 20% 증가합니다. -고기를 먹으면 기운이 세집니다. 하루동안 힘이 3증가합니다. 오늘 한턱 쏘기로한 곽대발은 술까지 주문해서 용병대원들에게 돌렸다. 물론 길포드와 달리 명성이 떨어지기 싫었던 그는 유한에게는 주스를 주었다. "자! 모두 우리의 우승을 위해 건배!" "건배!" 레드타이거 용병대들이 기운좋게 잔을 치켜 올렸을 때였다. "푸하하하!" 때맞춰 들려온 웃음소리가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음색에 조롱기가 가득한 것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무릎에 물 찬 노땅들이 우승을 운운하다니, 머리에까지 물이 차셧수?" "어떤 놈이냐!" 자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 살벌함에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우린 아닙니다'는 식으로 눈을 내리 깔았다. 눈을 깔지 않은것은 반대편 쪽 자리에 있는 한 무리의 덩치 큰 소년들. 그리고, "후후훗, 확실히 목소리만은 우승할 만하군." "네놈은!" "옌스?" 자칼의 말에 빈정거린것은 바로 옌스였다. 며칠전부터 안보인다 했더니 그로지아에 와있던 것인가. 더구나 언제나 솔플을 하던 녀석이 오늘은 처음보는 거친 녀석들과 함께 있었다. 옌스는 질겅질겅 씹고있던 고기를 꿀꺽삼키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진짜로 우승하는 것은 이 몸이 이끄는 블루 라이언스다." 자칼은 옌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놈이 자신의 눈에 기죽지 않을 놈이라는 건 이미 알고있다. 유한의 대장간에 들르면서 몇번 봤던 놈이고, 푸른새벽 길드와의 싸움도 함께하기도 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이나 배짱은 뛰어났다. 버릇이 없지만 않으면 레드 타이거 용병대에 넣어 주고 싶을 정도로……. "블루 라이언스? 그래, 새파랗게 어린 사자새끼들이 감히 호랑이 형님들에게 이길수있다 이거냐?" "물론, 이몸이 이끄는 사자들은 최강의 팀웍을 가졌으니까!" 잠시 말문은 끊었던 옌스는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최고의 지구력을 가졌지. 노땅들은 어떻수? 한 경기에 빌빌거릴 정도면 그냥 관람하는게 좋을거요. 안그래도 이번 배틀 폴로대회엔 쟁쟁한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쟁쟁한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자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무작정 대회에 참가하려고만 했지, 상대팀에 대한 정보 수집을 전혀 하지 않았다. 까짓것, 모두 때려눕히면 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한 것이다. "다크나이트 길드가 참가를 결정했고, 스타 더스트, 가우리, 최가장 길드도 참가할 거라 그럽디다. 아! 철십자 놈들을 빼놓을뻔했군." "다크나이트에 철십자 길드까지?" 지금 옌스가 내뱉은 길드들 모두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길드들이었다. 어디 유명세 뿐인가, 길드의 규모나 전력이 10순위 안에 드는 길드들이다. 그런 길드들이 배틀폴로 대회에 고만고만한 길드원을 출전시키지는 않을터. "거기다 철십자 길드에선 아주 깜짝 놀랄 비밀 병기를 준비중이라는 소문이우." "깜짝 놀랄 비밀 병기?" "게임이 홀랑 뒤집어 질지 모른다고 하는데, 뭐 내가 볼땐 공갈에 사기일 뿐인것 같수." 대체 철십자 길드의 비밀병기란 무엇일까. 옌스가 공갈이나 사기라고 할 정도면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기계목마를 타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경기규칙에는 말을 대신해 소환수를 타도 된다고 했다. 일전에 철십자 길드의 거대 목인병을 본적이 있었기에 유한은 그들이 그와 흡사한 병기를 대회에 사용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아무튼 우승은 우리 블루 라이언스의 것!" "닥쳐 애송아. 그딴 놈들은 물론이고 너희들까지 우리가 모조리 날려주마!" "뭐라? 이 늙탱이들이!" "훗, 덩치만 큰 코 찔찔이 주제에." 자칼과 옌스를 필두로 호랑이와 사자 양쪽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으르렁 거렸다. 그들이 그렇게 대치하든 말든 한때 아르페디아 대륙의 외로운 늑대였던 인물은 열심히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어느쪽이든 바보들 싸움에 끼이고 싶지 않은 유한이었다. 9. 명장 귀련 1 뷔페에서 식사를 끝낸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왕궁으로 가서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대진표를 받았다. "첫 시합 상대가 누굽니까?" 성격급한 대원 하나가 물었다. "아직 결정 나지 않았어. 대진표를 짜고 있는 중이거든, 아마 첫 상대는 시시한 놈들이 될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초반부터 강자들을 흩어 놔야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 법이니까." 한 마디로 시드 배정을 할 거라는 소리다. 자칼이 그것을 확인했다. 명성이 높은 길드들은 토너먼트 대진표에서 되도록 떨어지게 배치해 둔 것을 본 것이다. "그건 그렇고, 경기용품 제작은 하고 있는 거겠지?"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왕궁에 간 사이, 유한은 짐마차에 구비한 대장간 설비들로 배틀 폴로의 경기용품을 만들었다. "일단 스틱부터 만들어 봤어요." "호오, 이게 스틱이라고?" 자칼은 유한이 만든 스틱이 마음에 들었다, 하키나 아이스하키를 할 때 쓰는 스틱 정도려니 했는데, 유한이 만든 것은 배틀 폴로라는 이름에 걸맞는 물건 이었다, 길이나 생김새는 하키 스틱과 비슷하거나 좀 더 길었지만, 공을 때리는 타격부의 형태는 길게 튀어나온 도끼날처럼 생겼다. 끝부분은 실제로 날카롭게 벼린 상태. "이걸로 잘못 치면 죽겠는데?" "죽으라고 만들었으니 죽어야죠." 배틀 폴로느느 스틱 외에 각자의 고유 무기를 사용할 수 이다지만, 치열한 경기를 치르는 중에 무기를 바꿔 쥘 틈이 있겠는가. 그냥 손에 쥐고 있는 스틱으로 갈기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것은 유한만이 아니었다. 그처럼 간이 대장간을 설치하고 작업중인 대장장이들은 스틱부터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머처럼 생긴 스틱, 낫이나 칼날이 달린 스틱, 손잡이를 비틀면 독침이 발사되는 스틱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하고 독창적인 스틱들이 만들어졌다. "스틱은 됐다 치고, 갑옷이랑 투구는?" 갑옷이랑 투구는 유니폼과 마찬가지이다. 격렬한 배틀 폴로 경기에 견뎌 낼 수 있도록 방어력도 높아야 하지만, 독창적인 모양과 색상을 갖추는 것도 중요했다. 시합을 할 양쪽이 비슷한 모양과 색상의 차림새를 하면 경기 진행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갑옷은 지금부터 일일이 제작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판매용으로 챙겨온 성기사의 갑옷을 개조하기로 했어요." "그래? 이왕이면 붉게 칠하고 검은 얼룩무늬를 넣어. 우리가 레드 타이거 용병대임을 만인이 알 수 있게끔." '켁, 성기사의 갑옷에 그런 색과 무늬면 최악인데.' "원래 복장에는 신경 안 쓰셧잖아요?" 항상 추례한 용병 복장을 하고 다니던 레드 타이거 용병대였다. 그래서 오해를 사기도 많이 샀다. "훗, 그건 대장님 생각이고, 이런 큰 대회에까지 거지꼴을 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그래, 원하는대로 하쇼.' 유한은 자칼에게 생각을 바꿔 보라고 권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착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 자칼이 상금의 1%라도 준다고 했다면 뜯어말렸을 지도 모르지만, "뭐? 네 가 뭔데 나더러 장사를 하라 마라야?" 갑자기 한쪽에서 성난 고성이 들려왔다, 서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고, 그것은 유한도 마찬가지 였다. 고성이 들려온 쪽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유한은 잔뜩 인상을 찡그린 남자보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여자에게 더 눈길이 갔다.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무장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등에는 장창과 방패를 짊어졌고, 오른쪽 허리에는 짧고 긴 2자루의 검을, 왼쪽 허리에는 활과 화살통을 찼다. 거기가 요대에는 단검을 잔뜩 꽂았고, 표창들이 드레스 치맛자락에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런 무기들만 봐도 참 무거워 보이는데 그녀는 화려한 투구에 판금으로 된 흉갑을 착용하고, 두꺼운 건틀렛을 낀 손에는 커다란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으음, 완전무장이 어떤건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군." '파우린'이란 이름의 여기사에 대한 자칼의 평이었다, 그러나 유한의 평가는 달랐다. "완전무장이 아니라 과잉무장이겠죠." 저상태로 과연 전투를 치를 수 있을까? 무거워 조금만 격렬하게 움직여도 스테미나가 바닥을 드러낼 텐데. "아저씨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이대로 사기꾼으로 낙인찍히고 싶어요?" "내가 사기꾼이라니? 난 정당한 거래를 하고 있단 말이야!" 사내는 펄쩍 뛰었다. 무척이나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왜 이 파우린이란 아가씨가 그를 사기꾼이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판 깔고 물건 파는 것은 상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닌가. 간혹 껌 좀 씹게 생긴 유저가 10골드짜리 포션을 단돈(?) 1000골드에 사라고 강요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사내는 그런 상인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강매를 하지도 않았고, 상품의 시세보다도 저렴한 가격에 무기를 파고 있었다. 평범하게 호객활돌을 했고, 거래도 정상적. 이런 대회 이벤트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떠돌이 상인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말해 봐! 왜 내가 사기꾼이라는 거냐!" "사기꾼이라고 한 적 없어요. 사기꾼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 했으르 뿐이지." 파우린은 손을 들어 좌판 뒤에 걸린 현수막을 가리켰다. 현수막에는 '100%귀련이 제작한 무기'라고 적혀 있었다. "뭐? 저게 뭐가 어때서?" "정말 이 무기들 전부 귀련이 만든 거 맞아요?" 그 물음에 잠시 주춤하던 사내는 당연한 게 아니냐는듯, 언성을 높였다. "틀림없어! 눈이 있으면 보라고. 이 고아택을 봐! 품질은 어떻고. 여느 대장장이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일 것 같아?" 그는 칼 한자루를 들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보다 확실한 건 바로 이 문양이야. 귀련 님이 만든 문구에는 이렇게 '鬼'자가 새겨져 있단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파우린이 말을 이어 가려 했을 때였다. 불쑥 끼어든 제3자의 말이 그녀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2 "꽤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만든 것 같긴 하지만, 귀련이 만든 것 같지는 않군요." "넌 또 뭐야?" 사내는 또 다른 훼방꾼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장장이 차림의 소년. 그는 소년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지그?" "설마 리저드맨들의 친구라는 그 대장장이 지그?" "얼마 전에 티쳐스 타도에도 앞장섰다는?" 주변에서 구경하던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최근 들어 지그라는 이름이 게임과 방송에서 곧잘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지그는 대장장이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주름잡으며 그 이름을 당당히 알리고 있었다, 거기다 품질이 좋은 무구를 만들 뿐만 아니라 수리 성공률도 높은 실력 있는 대장장이다. 저렙 유저들이 사용하는 무구 중에서 가격대 성능이 가장 좋은 것이 지그표 무구라 할 만큼 인지도도 꽤 높았다. '후후후, 지그도 이제 유명 캐릭터가 되었군.' 유한은 사람들의 시선에 꽤 만족했다. 해킹당하고 무명 캐릭터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 땐 서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저는 물론이요, NPC에게조차 무시당했는데 이제는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캐릭터가 되었다. "저 님이 지그 님이구나. 네 창이나 좀 수리해 달라고 할까?" "관둬, 인마. 대회 관람하러 온 것 같은데 성가시게 굴면 좋아할 것 같아?" "마,맞다! 저님 귀찮게 하면 리저드 대군의 압박이......." 저번에 버추얼 에이지 팀과 했던 인터뷰 때문인지, 쉬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 애가 지그?' 파우린은 유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근 고렙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유저 지그. 짧은 시간 동안 무서운 성장과 발전을 보이고 있기에, 다들 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직업상 많은 대장장이들을 만나 봤던 파우린이지만, 지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근거로 귀련이 만든게 아니라고 하는거야? 합당한 이유라고 있어?" "아, 있죠." 유한은 좌판에 전시되어 있던 검 하나를 들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일전에 귀련이 만든 무기를 본 적이 있어요. 무척 훌륭하더군요. 지금 여기 있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요." "무, 무슨 소리야? 내가 파는 것도 훌륭해." "글쎄요, 겉은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그레인 스킬로 쓸어보자 여러개의 균열이 눈에 띄었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균열이지만,균열 하나 없이 말끔했던 귀련의 무기에 비하면 불만족스러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자, 내가 이 검을 부러트려 보죠. 이 검은 아마 대충 이런식으로 깨져 버릴 겁니다." 유한은 분필을 꺼내 그어서 검신의 균열을 표시했다. 그냥 부러트려서는 사람들이 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하여도 적당한 충격을 가하면 부러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검이 미리 말하대로 부러진다면? 유한은 검을 들고 그대로 땅에 내리쳤다. 단단한 포장석에 부딪친 검은 날카로운 비명을 토하며 부러졌다. "헛! 정말이네." 검의 부러진 조각들을 본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검은 유한이 분필료 그은 자리에 금이 가서 부러져 있었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꼼꼼하게 손질되진 않았어요, 생산 1랭크라는 사람이 물건을 이따위 엉터리로 만들 것 같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그런 건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난 주는 대로 받아서 팔았을 뿐이라고." 사내는 자신은 몰랐다며 발뺌했다. 그 태도는 아까 틀림없다며 큰소리 쳤을 때와 많이 달랐다. "누구에서 받은 건데요? 귀련 님 본인입니까?" "그야 당연히 본인에게......받았지." 그의 말에 파우린이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무구들, 절.대.로귀련이 만든게 아니에요." 사내가 뭐라고 반박을 하려는 찰나, 파우린이 손에 든 클레이모러을 검 집에서 뽑아 땅 위에 꽂았다. 감을 뽑는 것이나, 땅에 검을 꽂는것이나,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볼 수 없는 깔끔하고 번개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놀랄 만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게 진짜 귀련이 만든 검이에요." 칼날이 묵색을 띄 클레이모어는 포장석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검신에는 '鬼'자가 아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귀련의 검이다!" "세상에! 돌이 아니라 두부에 칼을 찔러 넣은 것 같잖아." 사람들이 감탄하는 만큼 유한도 놀랐다. 클레이모어의 아름답고 오묘한 묵빛도 감탄할 지경이지만, 그레인 스킬로 쓸어 봐도 검신엔 흠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데체 귀련이란 사람은 무슨 수로 저렇게 완벽한 검을 만들었을까? 생산 스킬이 1랭크쯤 되면 자연히 손재주가 저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설마 저 여자가 가진 무기들이 전부?' 전부 귀련이 만든 무리가면? 그럼 단순히 완전무장이라고만 말할 게 아니다. 황금으로 온몸을 두른 것이나 진배없다. 귀련은 유한이 파부치의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으 ㄹ때부터 이미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대장장이다. 유한처럼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장장이의 이름값만으로도 최상급에 올라 있었다. 그런 사람이 만든 무기는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지닌다. "귀련은 이런 고철은 절대 만들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으으으......." 사내는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파우린이 보인 박력에 눌려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뭐야, 그럼 내가 산 건 짝퉁이란 거야?" "가짜를 그렇게 비싼 값에 팔았따고?" 사내에게서 무기를 산 유저들이 흥분하며 앞으로 나왔다, 100% 귀련이 만든 무기라고 해서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무기를 샀는데, '오리지널'이 아니라 '가리지널'이라니! "이런 짱개 같은 자식!" "얼른 내 돈 물어내!" 사내는 파우린의 말대로 정말 사기꾼으로 낙인찍혔다. 끝까지 귀련에게 받았다며 거짓말을 한 게 화근이었다. 그냥 자신도 속아서 입수한 물건이라고 둘러댔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피해자들이 몰려와 드잡이를 시작했다. 사내는 그들을 뿌리치고 로그아웃을 하려 했지만, 벌써 놓은 좌판을 수습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나, 하여간 별꼴을 다 보네." 유한은 몰매를 맞는 사내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메이커가 뜬다 싶으니 바로 짝퉁까지 등장하다니. 누구 말대로 가상현실도 어쩔 수 없은 현실의 연장선인 모양이다. "조심해라, 지그야 네 짝퉁도 돌앚다닐지 모르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자칼의 말에 유한은 벌컥 화를 냈다. 만약 자신의 짝퉁을 만드는 놈이 있다면, 상표 Z를 함부로 쓰는 놈들이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근데 아까 그 아가씨는 어로 갔지? 완전 내 이상형이었는데 말이야." "몰라요,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는데." 파우린은 어느새 사리지고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 버렸는지, 아니면 로그아웃을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쩝, 하나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귀련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분명 그녀는 귀련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귀련표 무구들로 도배를 할 수 없었다. 유한은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3 짝퉁을 파는 상인을 퇴치한 파우린은 슈탈린 동쪽 거리를 걷고 있었다. 중간에 노점에서 구입한 솜사탕을 뜯어먹던 그녀는 갑자기 걸을을 멈춰 섰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눈앞에 중무장한 기사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가우리 길드의 최정예 철갑기마대 유저들이었다. 파우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피곤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를 대표해서 '협부'라는 유저가 파우린에게 말을 건넸다. "한참 찾았습니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신 겁니까?"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오는 길이야." "그런 구경은 일을 마친 다음 하셔도 되잖습니까. 귀련님." 파우린을 귀련이라 불렀다. 그렇게 불리고도 파우린은 전혀 부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귀련이었기에. 베레타 공화국, 아니 아르페이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유저가 바로 그녀였다. 지금의 파우린은 그저 조용히(?) 돌아다닐 때 사용하는 그녀의 2번째 캐릭터였다. 물론 부캐도 약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냐가 짊어지고 있는 무구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봐, 협부, 탐문도 중요한 거야. 이번 대회에 우수한 대장장이들도 여러 팀의 스태프로 참가한 것 같으니까." 귀련도 마찬가지이다. 가우리 길드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번 대회동안 철갑기마대의 스태프로 일하기로 했. "눈여겨볼 자라도 있었습니다?" "응. 지그란 녀석이 있었어." "아, 그자라면......." 협부도 알고 있었다. 요사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말로는 대장장이답지 않은 대장장이라 하던데 어떻습니따?" 대장장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모험을 즐기는 대장장이 지그. 그는 공중 요새를 발견했으며, 험한 플레임 마운트에 가서 리저드맨을 친구로 삼았고, 얼마 전에는 학생 혁명을 주도하여 티쳐스와 싸웠다, "뭐 대장장이가 분명 하던걸, 그것도 예상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였어." 짝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도 쉽게 간파 할 수 없는 감춰진 균열들까지 정확하게 집어냈다. 그런 능력은 자신만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려지지 않은 히든스킬이라도 보유하고 있는 겁니까? 혹시 귀련 님과 같은?" "아니, 내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았어." 지그라는 캐릭터가 나타난 지 1년이 채 안 된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상급 대장장이로 올라설 정도라면. 지그의 유저는 보통 폐인이 아니거나, 특별한 히든스킬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파우린. 아니 귀련은 후자에 무게를 두었다. 대장장이 캐릭터를 키우기가 얼마나 고된지 잘 아는 그녀였기에 폐인 짓을 해서 단시일에 상급 대장장이가 됏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시죠. 시합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가서 작업을 하도록 할게." 가우리 길드원들의 눈앞에서 파우린이 사라졌다. 진짜 대장장이 귀련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그아웃한 것이리라. "돌아가자, 내일 첫 시합을 준비해야 한다." 실종된(?) 귀련을 찾은 절갑기마대는 본진으로 귀한했다. 아르페디아 최고의 대장장이를 스태프로 영입한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었다. 4 드디어 시합날이 밝았다. 유한은 밤새 만들고 개조한 레드 타이거들의 스틱과 무구들을 건네주었다. 경기에 나갈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유한이 개조해 준 성기하의 갑옷을 입고, 호랑이가 입을 벌린 듯한 모양의 투구를 썼다. '뭐 그럭저럭 괜찮네.' 성기하의 갑옷에 붉은색과 검은색 얼룩무늬를 넣으면 최악이라 생각했는데 사람이 입어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약간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뭐 어떠리. 자기들이 좋다며 희희낙락하는데. "수고 많았다, 지그야." 호리호리한 체격의 마검사가 유한의 등을 두들겼다. 헨리라는 이름의 그는 과거 무역로 개척 퀘스트 때 자칼과 함께 유한과 싸웠던 이들 중 하나였다. "근데 이Z자는 꼭 넣어야 했냐?" 헨리는 갑옷 흉부에 새겨진 Z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따. 그는 지그표 무ㅜ의 상표인 Z를 좀 유치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도 아님 게임에서 브랜드라니. 눈에 잘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유한이 거기만 색을 칠하지 않아 하얗게 잘 드라나 보였다. "아놔, 상금도 못먹는데 이런 식의 간접광도라고 해야할 것 아닙니까!" "짜식, 많이 삐졌나 보구나." "아무튼 우승하세요. 그냥 우승이 아니라 압도적인 전승 가도로! 해트트릭은 기본이고 아예 콜드 게임까지 만드는 겁니다."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우승할수록, 압도적인 실력을 보일수록 지그표 무구도 더욱 빛을 발하고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다. 이번 대회에 그런 목적으로 참가한 대장장이들이 많았따. 특히 무명인 대장장이들은 이번에 어떻게든 자기 무구를 알려 보려고 애썼다. 자진해서 무보수로 일하는 유저도 있을 정도였다. "자,가자!" "옛--썰!" 레드 타이거들의 준비가 끝나자 자칼이 그들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대회 기간 동안 참가팀이 머무는 숙소는 왕실의 별궁이었는데, 그로지아 국왕이 특별히 선심을 써 준 거싱다. 별궁 앞뜰에는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타고 가려는 다양한 생명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인물도 있었다. "여, 노땅님들. 결국 포기 안 했네?" 어제 식장에서 설전을 벌였던 옌스가 블루 라이언스들을 데리고 와 시비를 걸었다. "어이구!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자칼이 이마를 부여잡자 옆에 있던 헨리가 말렸다. "참으세요, 원래 질풍노도의 십 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보다 우리 시합은 언젭니까?" 자칼은 어제 주최 측에 등록하고 받은 대진표를 꺼내 들었따. "어디 보자. 어라, 십 분 후 제8경기장에서 벌어지잖아?" "그럼 빨리 가야겠는데요?" "그러게, 빨리 가자." 시합에 5분 이상 늦으면 실격패로 간주하기에 그들은 저8경기장으로 달려갔다. "늙탱이들. 그냥 콱 져버리라구!" "으하하하!" 옌스의 고함에 블루 라이언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바라보는 팀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말을 몰아 천천히 나오던 한 무리의 인형들오 멀리 사라지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군바리들도 결국 참가를 한 모양입니다." "그러게, 하지만 폭풍의 길포드는 없는 모양인데." 키라는 레드 타이거들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 옆에 있던 부하가 말을 건넸다. "누굴 찾으십니까?" "아, 아니, 그냥. 그보다 우리 상대는 누구지?"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는 키라의 물음에 부하는 대진표를 바라봤다. "'황야의 승냥이들'이라는 길드입니다. 뭐,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 보니까 별 볼일 없는 놈들일 겁니다." "훗, 가지고 놀기에 적당하겠군, 얼른 끝내고 다음 시합을 준비하도록 하자고." 최대한 힘을 아껴야 한다. 쟁쟁한 길드들은 물론 레드 타이거 용병대까지 참가하고 있다. 그들과 만날 때까지 자신들의 전력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후후후! 두고 봐라. 네놈이 선물한 자마다르로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죄다 쓸어주마.' 그 다음 목표는 건방진 대장장이 지그 녀석. 그렇게 계획을 잡은 키라였지만, 잘 될지 어떨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10.비밀병기 1 제8경기장은 빈 공터에 나무와 합판으로 만든 간이 경기장이었다. 하긴, 그루지아와 같은 작은 왕국에 여러 경기를 동시에 치를 만큼 경기장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자, 그럼 출전 선수들은 입장해 주십시오!' 이번 대회의 심판으로 배정된 그루지아 왕국의 기사가 증폭 마법이 걸린 확성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양쪽에서 모두 14기의 기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아아아!' 비록 간이 경기장의 예선전이지만,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관객은 많았다. 그루지아의 왕성에 사는 주민NPC들 외에도 시합에 참가하는 동료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유저들도 있었다. '순돌이 할아버지, 파이팅!' '예선은 우승을 위한 관문일 뿐인 겨!' 귓들으로 관객들의 응원을 들으며 선두에 선 자칼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상대침을 응원하는 소리였었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렵기는 커녕 황당하기만 했다. 눈앞에 번쩍이는 갑옷을 차려 입은 상대는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영감님들이었다. 제일 젊어 보이는 사람이 60대 초중반일 정도로 상대팀은 무척이나 노련해(?)보였다. '참나, 어느 노인정 할배들이야?' '배짱 하나 끝내 주는군요.' 몇 분 전만 해도 새파란 놈들에게 늙탱이 소리를 듣고 온 레드타이거 용병대였다. 평소에도 젊은 애들에게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저런 어르신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칼을 비롯해 레드 타이거 용병대 전원의 마음에 상대에 대한 존견심이 새록새록 솟아 올랐다. '어르신들, 적당히 봐 드리겠습니다!' '뭐래?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감히 노인네를 우습게 보는거여!'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란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들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놈들아, 전력을 다혀라! 나가 동네 오락실 때부터 이어 온 오십년 게임인생을 죄다 걸어 부릴텡게.' '이보게, 황씨, 진정혀, 애들 도발에 쉽게 넘어가면 안돼 이 사람아.' 아마 이 노인들은 가상현실 게임, 아니 온라인 게임이 라는게 있기 전부터 게임을 즐겼을 것이다. 저 중에는 50원에 보글보글 끝판까지 간 고수도 있을 것이고, 테트리스 9레벨의 속도에도 굴하지 않는 동체 시각과 현란한 손놀림을 자랑하는 기인도 있을터다. 그러나 저 노인들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오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몰라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이가 많다고, 늙었다고 게임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 게임에서는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케릭터의 기본 능력치는 같다. 다만 사람마다 케릭을 조종하는 반사 신경과 임기응변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게임을 얼마나 오래했느냐, 제대로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펑! 마법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시합이 시작되었다. 자칼은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와 함께 어제 유한이 만들어 준 강철 스틱을 휘둘렀다. 뻑! '어이쿠!' 좀 전에 황씨라 분린 노인이 스틱에 맞아 낙마했다. 신나게 공을 몰아오던 중이었는데, 정말 단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이런 예의도 모르는 놈! 감히 젊은 것이 어른을 쳐!' '경로사상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놈이구먼!' 전력을 다하라 할 땐 언제고, 이리저리 황당하기만 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었다. '어르신들, 이건 게임이라고요. 그리고 배틀 폴로 경기에서는 공을 가진 상대편을 공격해도 됩니다.' '시끄럽다, 이놈아, 넌 집에 애비 애미도 없냐!' 경로사상이 없다며 펄펄 날뛰는 노친네들을 상대로 일일이 설명을 해 주기 귀찮았던 자칼은 돌격 명령을 내렸다. '달려라! 열 골 이상 못 넣으면 단체 기합이다!' 자칼의 명령에 레드 타이거들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어이쿠!' '아이고머니나!' 영감님들은 슬쩍 부딪치기만 해도 말에서 떨어지고 스틱을 놓치곤 했다. 승마술조차 형쳔없는 것이 말을 탄지 얼마 되지 않은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대에게는 전략이니 전술이니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 붙여 골을 밀어 넣으면 되었다. '시합 종료!' 최종 스코어 15:0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큰 점수차로 이겼다. '우우! 노인을 상대로 이기면 기분이 좋냐!' 장내에는 환호성은 커녕 야우만 울려 퍼졌다. 이겨도 기쁘지 않았던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관중들이 던져 대는 빈 포션 병을 피해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2번째 시합. 자칼은 2번째, 상대팀은 자신들보다 젊은 녀석들이길 바랐다. 또 나이 많은 어른들을 상대해서 이겼다고 욕먹기 싫었지 때문이다. '야야, 진짜 젊은 팀이네.' 레드 타이거 진영에서 구경하던 유한은 상대팀의 면면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2번째 상대는 젊었다. 그것도 너무할 정도로 코를 찔찔 흘리는 꼬마들. 이제 갓 초딩이 되었을 상대방을 보자니 자칼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어떤 놈이 대진을 이따위로 짰단 말인가. '이 게임 이용 연령이 이렇게 낮았나?' 칼부림하고 피 튀기고 목이 휙휙 날아가는 게임에 어린 새싹들이 웬말인가. 그러나 그들을 포옹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아르페디아온라인은 관대했다. 아니 시스템이 잘 준비되어 있다. '이용자가 저연령층인 경우에는 잔인한 장면은 알아서 편집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이번에도 이겨도 욕먹을 것 같았다. 어제까지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영 딴판, 골을 넣을 때마다 관중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승리한 자신들에세 미인들이 꽃다발을 던져 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찌들, 조심하셈.' 나의 뿅망치가 용서하지 않을 거심!'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더니 이 애들이 딱 드랬다. 시합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자, 붉은 호랑이들은 무섭게 하룻강아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칼은 시합을 오래 끌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야유를 받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았다. '우에에엥! 조폭이다!' '우아앙!' 어린애들답게 조금만 건드리고 겁을 줘도 울음을 터트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팀의 팀플레이는 붕괴, 결국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20점을 넣어 콜드 게임으로 경기를 일찍 종료 시켰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 승!' '우우우!' 예상한 대로 들려오는 것은 야유뿐. 유저뿐만 아니라 NPC들도 야유의 물결에 동참했다. 자칼은 당장이라도 드림맥스 본사에 쳐들어가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일은 제대로 된 상대가 나올 것이다! 전원 정신 똑바로 차리조록!' 어쨌거나 첫날 경기는 정말 싱겁게 끝났다. 2 '어때? 우리가 걱정할 만한 상대는 알아봤어?' 양쪽 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는 투구를 쓴 기사가 주위를 향해 물었다. '다크나이트 길드의 흑표기와 스타 더스트 길드의 머큐리 기사단, 그리고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 정도가 요주의 상대야.' '레드 타이거 용병대도 나왔다고 하던데 그들은?' '비록 용병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긴 하지만, 배틀 폴로는 승마술과 조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기야,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활약할 무대는 아니지'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소규모 집단이다. 개개인의 무력은 막강할지라고 솔플 성격이 강해 전술과 조직력이 떨어졌다. 그런 전투 스타일로 배틀 폴로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예선 첫날을 손쉽게 이겼다고 하던데?' '훗, 노인정과 초딩을 상대했는데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게임을 접어야지.' 이들은 바로 철십자 길드에서 출전한 아이언사이드 기사잔이었다. 그리고 머리에 뿔 달린 투구를 쓴 이는 그들을 임시로 이끄는 단장이었고, '그럼 흑표기와 머큐리 기사단, 철갑기마대에 손을 써야 겠군.' 임시 단장이 그리 말하자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렇게 해야겠어?. 우리 실력이면 저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난 100% 완벽한 승리를 원해, 1%라도 질수 있는 확률은 필요 없어' 투구를 쓴 임시 단장은 바로 김필중이었다. 베히모스로부터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할 경우 길드에서 쫗겨날 거라는 언질을 박은 그는 무는 수단을 쓰던간에 승리를 쟁취해야 했다. '쳇, 그럼 할 수 없지, 그런데, 단장은 언제부터 출전할거야?' '나?' '그래, 설마 우리들만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김필중과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의 관계는 동등, 임시로 김필중이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의 단장 직을 맡았지만, 그를 진짜 단장으로 생각하믄 단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 시합도 베피모스의 지시가 없었다면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크크크, 당연히 나가야지' '그게 언젠데?' '바로 나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을 때!' 김필중은 이번 대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철십자 길드의 신뢰를 다시 얻어 이를 기반으로 제2의 푸른새벽 길드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럼 본선부터 뛰겠다는 거야?' '그렇게 될 것 같다. 길드의 비밀 병기도 그때쯤 도착할 것 같으니까' '도대체 그 비밀병기라는게 뭐야?' 철십자 길드에선 이번 대회 우승을 위해 비밀병기를 내놓기로 했다. 길드 고위 인사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김필중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베히모스가 허락하면서 배틀폴로 대회 때 공개되게 되었다. 문제는 이 비밀 병기가 무엇인지 길드 고위 인사들을 빼고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 알게 될거야' 그 비밀 경기가 등장하면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은 물론기고, 대회에 참가하고 구경하는 유저들 모두. 비밀 병기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할 자신을 생각하지 김필중은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크크크! 빨리 그 시간이 다가와야 할텐데, 크크킄!' 연방 킬킬거리는 그를 보고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은 다들 속으로 똑같이 중얼거렸다. 미침놈이라고. 제대로 된 상대는 시합 둘째 날부터 나왔다. 예선 첫때 날에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떨어졌는지 제법 강해 보이는 팀이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최강의 용병대다웠다. 그들은 자신에 도전하는 팀들을 모조리 격파하며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자자, 마셔, 마셔,!' 본선 진출을 축하하는 자리 자칼은 수고한 레드 타이거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다. 비록 게임이라 마셔도 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게임시간으로는 내일, 현실 시작으로는 3시간 후가 본선 시합이었기에 휴한은 내심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참!, 이렇게 즐겨도 되요?' '왜? 걱정되냐?' '되죠! 다른 팀들은 어떤지 아세요?' 경기 용품을 수리하는 일 빼고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유한은 틈틈이 다른 길드의 팀들을 살펴 보았다. 그들은 경기가 끝나면 본선 시합에서 사용할 작전을 구상하고, 팀플레이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전술 연습에 구슬땀을 흘렸다. 그런데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마! 괜찮아, 연습은 약한 놈들이나 하는거야.' '그렇게 방심하다가 허를 찔릴 수 있습니다.' 유한이 싸늘한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자칼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은 그저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뭐 찔리면 찔리는 대로 싸워서 이기면 되는거지' '맞아, 생각나는 데로 싸워서 이기면 되는 거지' '걱정 마라 지그야, 우리들은 전재으이 프로니까' 신나게 말하는 그들의 모습에 유한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처럼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대에 대해 지나친 경계는 자칫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움직임을 굳게 만든다. 유한이 바츠 시절 이름을 드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려움 없이 상대를 공격할수 있었지 때문이다.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를 잡을 때도 이놈은 강하다고 생각만 했지, 그 이상 위험하다느니, 무섭다느니 하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 외의 잡념은 전투에 방해만 될뿐이었으니까. '하긴, 큰소리 칠 만하니까'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자신감에는 실력이 바탕이되어 있다. 이들은 싸우는데 환장한 인간들. 현실의 능력이 게임 내에서의 케릭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 또한 아니다. 유저 본래의 능력과 경험이 반영된 캐릭터는 성장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전투나 싸움에서 상이한 결과를 도출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대부분 군 출신에 전원 극기도 유단자들인 이들은 전투의 프로가 분명했다. '근데 전투의 포로는 경기의 프로를 이길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싸움이 허용되는 배틀 폴로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룰에 따라 움직이는 스포츠이다. 거기다 이들은 배틀 폴로 연습을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스포츠에 특화된 세력이 상대라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해 왔던, 개개인의 뛰어난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뭐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어차피 생사가 걸린 시합에 불과하다. 지면 지고 이기면 이기는 것일뿐,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유한은 그저 느긋이 구경하면 된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이기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3 뿌우우우웅-! 빰빠라- 빰!빰!빰1 우렁찬 고동과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본선 대회가 개최됨을 알렸다. 본선대회부터는 간이 경기장이 아닌 왕도의 콜로세움에서 치뤄진다. 수많은 백성들과 유저들이 관람하러 왔고, 심지어 그로지아 국왕 내외까지 참석해 대회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본선에 출전한 16개 팀들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던 대로 거대 길드 소속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시커먼 망토를 온몸을 칭칭 감싸 매고 있는 사내들을 보고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 저놈들은!' '크하하핫! 지그! 드디어 네놈과 만났구나!' 유한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든 자, 그는 바로 검은 초승달 길드의 키라였다. 얼마 전, 티처스 퇴치를 위해 잠시 협력하기도 했었지만, 키라는 아직 그날의 원한을 잊지 못한 상태였다. '네놈으로 인해 받았던 굴욕과 고통을 오늘 모누 갚아 주마!' '쪼잔한 놈, 퀘스트 하나 실패한 것 가지고' 100위권 안의 랭커라면서 저리 속이 좁아서야, 키라가 당했던 로므나의 저주를 모르는 유한은 그리 생각 할수 밖에 없었다. 물론 로므나의 저주 자체도 키라 스스로 제 발목을 건고 넘어진 것에 불과했지만. '압허, 네 상대는 우리야' 자칼이 말했지만, 그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키라였다. '푸하하핫! 두고 봐라, 지그! 네가 응원하는 팀을 아주 박살을 내 줄테니까' '예예, 그러시든지요' 유한은 대충 대꾸해 주고 말았다. 키라는 그런 유한의 모습이 자신에거 겁을 먹었디 때문이라 생각하고 더욱 크게 웃었다. '이 자식이 감히 날 무시해?' 키라는 몰랐다. 유한에게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호랑이 코털을 건드렸다는 것을 말이다. 펑! 시합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돠 동시에 검은 초승달 길드원들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 레드 타이거 진영으로 집어 던졌다. 펑! 퍼퍼퍼펑! 뭔가 사과처럼 동그란 것이 굴러온다 싶더니, 폭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사방에 자욱하게 드리웠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연기,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봐, 심판! 이래도 되는 거야?' 자칼이 심판을 맡은 기사를 향해 물었다. '연막탄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경기에 집중해 주십시오' 배트 폴로는 개인이 소지한 무기를 사용해도 되는 시합. 당연히 연막탄도 사용이 가능했다. 물론 공을 가지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룰이 있지만, 연막탄 자체가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니 따질 수 없었다. '모두 조심해라!' 상대가 어디로 공격해 올지 모른다. 연기 속에서 뭔가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확실히 판단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연기가 좀 옆어 진다 싶으면 놈들은 또다시 연막탄을 던지고 도망가곤 했다. '이놈! 거기 있구나!' '헛! 제법이시군' 자칼은 공을 몰고 가는 키라를 발견했다. 시각에 대한 의존도를 버리고 공이 굴러가는 소리에만 집중한 덕분이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휘리리리릭! 자칼이 던진 손도끼가 멋지게 회전하며 키라의 등에 박혔다. 레드 타이거 쪽 골대로 돌격하던 키라의 몸이 휘청하더니 축 늘어졌다. '훗, 역시 부대장님' 레드 타이거의 골키퍼는 키라가 흘린 공을 줍기 위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손도끼에 맞은 키라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다 싶더니 허수아비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설마?' '하하핫, 헛짚으셨습니다!' 진짜 키라는 말의 배에 달라 붙어 있었다. 전진한 골키퍼가 당황하는 사이, 그대로 공을 도로 몰고 간 키라는 텅 빈 골대로 공을 쳐 넣었다. ' 슛-! 골인!' '와아아아아!' 많은 관객들이 첫 골에 환호했다. 환호성이 다소 늦었는데, 자욱한 연막 때문에 골이 들어간 것을 관객들이 뒤늦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크하하하하!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허수아비 분신 슛이다!' 어쌔신의 분신스킬을 백분 발휘한 공격. 키라는 스틱을 번쩍 쳐들고 자신들을 응원하는 관중들에게로 말을 달려갔다. 신이 난 세레모니에 자칼의 얼굴 흉터가 꿈틀거렸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처음에는 그저 좀 별나고 건방진 놈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는 꼬라지가 아주 눈꼴사나운 것이 아닌가, 세레모니를 하려면 관중들에게 얌전하게 할 것이지, 자신에게 감자는 왜 치켜드는 것인지! '야! 공 갖고 와!'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 하나가 재빨리 공을 중앙선상에 올려놓자 자칼은 텅 빈 검은 초승달 길드의 진영으로 몰고 가더니 골대를 향해 중거리포를 날렸다. 뻥-! 좌악! 공이 스틱에 맞자 무섭게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런 일격, 세레모니를 마치고 설렁설렁 진영으로 들어오고 있던 키라와 검은 초승달 길드원들은 입을 쫙 벌렸다. 황당한 것은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환호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뿐이었다. '일대일, 이것으로 시합은 다시 원점!' 골이 승인되자 키라가 무섭게 심판에게 말을 몰고가 따졌다. '이거 이럴 수 있는거야!' '뭘 말이요?' '아직 우리팀이 자리를 잡지도 않았는데 시작하는게 어딨어!' 누가 시합 중에 정신을 팔랍니까?' 심판인 기사 NPC는 무척이나 냉정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키라의 부아를 치밀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비겁하잖아! 당신 기사 맞지! 이걸 보고 아무런 감정을 못느끼는 거야!' '당신들이 연막탄을 던지고 다녔을 때 좀 울컥합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선호하는 기사답게 심판 성향은 다소 레드 타이거 쪽이었다. 그런 심판의 성향을 읽은 레드 타이거들은 희희낙락했고, 키라는 잠시 동안 얼굴을 삶은 문어처럼 벌겋게 달구어야 했다. '길드장님, 참으십쇼, 이제 초반일 뿐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까짓거 골이야 또 넣으면 되지' 그리고 그 다음에 방심을 하지 않으면 된다. 진형을 추스른 검은 초승달 길드는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도 그들은 사방에 연칵탄을 뿌리며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러나 같은 패턴의 공격을 2번 허용할 정도로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그리 물렁하지 않았다. '전원 수비 라인으로 후퇴!' 자칼의 명령에 따라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재빨리 골대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골대 근처에서 말을 멈추고 대기했다. '움직이지 마라! 귀를 기울여 상대의 움직임을 쫗아라' 자칼은 대원들에게 일일이 지시하는 한편, 스스로도 상대의 움직임을 쫗았다. 검은 초승달은 연막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레드 타이거의 빈틈을 노렸다. 그라나 워낙에 레드 타이거 대원들이 골대 앞에 촘촘히 포진해 있어 뚫고 가기가 쉽지 않았다. '슛해라, 슛!' '패스하다 끝낼거냐! 얼른 때렷!' 연막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유저들은 답답해서 소리를 질렀다. 시원하게 골이라도 나오면 환호성이라도 지를 텐데 그것도 아닌 상황이니. '멍청하게 공만 돌리지 말고 돌파구를 만들어!' 부하에게 공을 받은 키라는 전진해 들어가면서 암기를 날렸다. 공을 가진 상태라면 가로막는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가 스텔스 어택으로 날린 암기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사정없이 두들겼지만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방어력이 높은 성기사의 갑옷이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을 지켜 준 덕분이었다. '참나, 저래서는 끝도 없겠군' 유한은 시합을 보다 못해 고개를 저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삐삑! 심판의 호각소리와 함께 시합이 잠시 중단되고, 양 팀선수들이 자기 진영이 있는 벤치로 모여들었다. 한참 시합에 열을 올리고 있던 자칼은 유한의 독선적인 행동에 화가 났다. '무슨 짓이야, 인마! 누가 너더러 감독하랬어?' '감독할 사람이 없으니 할 일 없는 저라도 해야죠'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유한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계속 두들겨 맞다가 경기 끝낼 겁니까? 분위기를 전환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승리의 비책이 떠올랐는데 쓰지 않을 수 없잖아요' '이길 방법이 있다고?' 자칼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유한의 생각해 낸 승리의 비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일단은....' 4 유한이 한창 레드 타이거 용병대에게 작전을 설명해 주고 있을 때, 키라는 소중한 작전타임을 길드원들의 사기를 북돋는 데 사용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자! 두들기다 보면 틈새가 열릴 것이다!' 키라의 말이 끝나자 한쪽에 후보로 있던 길드원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나섰다. '뭔가?' '승리의 계책이 있습니다. 잠시 귀 좀....' 길드원은 옆쪽의 레드 타이거에게 듣릴 새라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키라는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심한 놈, 그걸 작전이라고 내놓냐?' '왜요? 공중에 독을 살포 하면 저놈들 다 중독될 거 아닙니까?'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어도 독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독 살포는 키라도 생각해 본 작전이었다. 사용하지 않은 것은 룰에 어긋나기 때문, '배틀 폴로에선 공을 가지지 않은 상대를 공격하는 건 반칙이야, 공하고 상관없는 상대가 독에 중독되면 어떻게 되겠나?' '앗! 그렇군요. 제가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작전은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판단한 키라는 작전시간을 종료하는 호각이 울리자 다시 필드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이번에 확실히 뚫고 들어가서 한 골 넣자!' 마침 기회가 생겼다. 작전타임을 끝내고 들어와 어수선한 상황이었는지,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포진이 다소 느슨해졌다. '이때다!' 공을 가진 검은 초승달 길드원이 단독 돌파를 시도했다. 그는 주변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다가오자 암기를 뿌려 가며 골대로 공을 몰아갔다. 그리고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닥트렸다. '멍청한 놈! 무리하지 마! 패스를 해라! 패스를!' 그러나 길드원의 귀에는 키라의 경고가 들리지 않았다. 골키퍼를 앞에 둔 길드원은 슛을 시도했다. 그러나 긴 장창을 든 골키퍼는 창을 뻗어 길드원의 스틱을 날려 버렸다. 그 사이 공은 옆에 있던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이 빼냈다. '좋다! 역습이다, 달려라!' 유한이 첫 번째로 제시한 작전이 성공했다. 꽁꽁 잠그기보다 적당히 길을 터주면서 공을 가로채는 것, 다소 위험했지만 성공했고, 이제 역전골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쳇, 전원 수비로 전환한다!' 검은 초승달 길드원들이 진영으로 돌아가는 사이, 키라는 공을 몰고 들어오는 용병대원에게 단검을 던졌다. '크악!' 공은 뒤따라가던 다른 용병대원이 몰고 나갔다. 키라는 재차 단검을 날렸지만, 그가 날린 단검은 자칼이 날린 손도끼를 맞고 튕겨 났다. '무슨 짓이냐! 공이 없는 자를 공격하는 건 반칙이란거 몰라!' '아, 그런 널 공격한게 아니거든' 정확하게 말해 자칼은 키라를 공격한것이 아니라 키라의 단검을 공격했다. 얄밉게 말한 자칼은 말을 몰고 와서 키라의 옆에 바싹 붙었다. '공이 없을 때는 공격하는 건 반칙이라니까!' 키라는 짜증을 내며 자칼을 밀쳤다. 그러나 자칼은 또 다시 바싹 붙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공격하려는거 아니야, 그냥 네 옆에 붙을 뿐이지' 주요 인물에 대한 밀착 마크를 하라. 이것이 유한이 2번째로 제시한 작전이었다. 밖에서 유한이 보기에 랭커이자 뛰어난 암살자인 키라는 손을 써 둘 필요가 있었다. 분신에 은신까지 쓰는 놈을 제멋대로 활개 치게 내버려 두면 시합이 꽤나 어려워질 것이기에. '훗, 지그 녀석 예상대로군' 유한이 이야기한 대로 키라가 마크당하자 검은 초승달 길드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전력에서 1명이 더 빠진 것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도 마찬가지였지만, 검은 초승달 길드와 달리 개인 능력이 탁월한 그들은 자칼의 지시 없이도 공격을 잘 수행해 나갔다. '후후후, 그러나 밀착 마크를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댔지?' 그것이 유한의 3번째 작전. 자칼은 키라가 성가시게 느낄 정도로 계속 가까이 달라 붙었다. '에잇!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참다 못한 키라는 손에 든 자미다르를 휘둘렀다. 적당히 위협을 주고 떼 낼 생각이었는데, 자칼이 키라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자칼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공격이 들어오면 유한이 피하지 말고 맞으라고 했다. '헉!' 자칼이 외마디 비명을 지며 비틀거리자,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깨 심판이 키라의 앞으로 달려와 노란 카드를 내밀었다. '삼 분간 퇴장' '아니 왜?' 왜는 왜겠소. 공도 없는데 상대를 공격햇으니 반칙이오' 자신이 공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칼이 공을 몰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그게 무슨! 저 인간이 먼저 붙었잖아!' '하지만 먼저 친건 당신이지' 이것이 자칼이 키라를 밀착 마크한 진짜 이유였다. 유한의 3번째 작전은 상대팀의 가장 큰 전력인 키라를 잠시 동안 필드 밖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이잇! 두고 보자' '크크크, 삼분간 잘 쉬고 들어오게' 키라가 퇴장당한 사이, 수적으로 열세가 된 검은 초승달 길드는 거센 공격에 나선 레드 타이거 용병대에 통한의 역전곳을 허용하고 말았다. 겨우 3분 사이에 역전이 되자, 키라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더욱 약기 오른 것은 자칼 이하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라인 밖에 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골을 잘 넣었다는 듯이, 3분 후, 다시 키라가 필드 안으로 들어왔다. 자칼은 이번에도 잽싸게 키라를 밀착 마크 했다. '이쪽으로 패스해!' 공을 갖고 있다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유한에게 언질을 받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키라 쪽으로 공이 굴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밀고 당기는 접전이 계속 되며 시간이 흘러 갔지만, 더 이상 골은 터지지 않았다. '경기 종료!' 최종 스코어는 2:1 승자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 였다. 검은 초승달 길드는 또다시 유한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에게 쓴물으 마시고 말았다. '으으! 지그 이 자식!'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유한을 바라보면서 패자인 키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승자가 예전에 주었던 자마다르를 물어 뜯는 일뿐이었다. 5 시합을 승리로 끝낸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관중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선 첫 시합은 결코 시원스럽게 이겼다고 볼 수 없는 것, 그만큼 본선 상대들이 만만치 않았다. 관중석으로 자릴 옮긴 것은 다른 팀들의 경기를 보고, 그들을 분석하고 대비 하기 위함이었다. '저게 스타 더스트 길드의 머큐리 기사단인가?' '아마 다음 시합에 우리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요' 유한의 예상대로 머큐리 기사단이 승리했다. 머큐리 기사단은 전원이 마검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법을 전술에 잘 응용하여 상대팀을 가볍게 요리했다. 덕분에 유한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바멈에 대한 대응을 숙제로 떠안게 되었다. '다음은 가우리 길드 철갑기마대와 게세르 용병단의 시합입니다!' 단상의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경기장에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와 게세르 용병단이 등장했다. 게세르 용병단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같은 소수 정예의 강력한 힘을 가진 길드였다. 이들은 기마전와 마상궁술이 주특기라, 배틀 폴로에 매우 능숙하게 적응했다. 그들을 상대하는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 욘락대왕으로 유명한 가우리 길드는 아르페디아 10대 길두 중의 하나로, 꽤 탄탄하고 건실한 전력을 자랑했다. 그런 그들이 가장 자신하는 전력이 바로 중장기병 부대인 철갑기마대였다. '철갑기마대 녀석들 갑옷이 좀 이상한걸?' 머리에서 발끝까지 풀 플레이트 메일,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별로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갑옷 여기저기 삐죽 튀어나오고, 표면의 철판이 슬레이 지붕처럼 울퉁불퉁하다는 것, '되게 불편하게 생겼군' '저쪽 대장장이가 누군지 참 궁금하네요' 유한은 갑옷을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단순히 멋을 내거나 상대를 위압하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누군지 궁금하다고? 그럼 이누나가 가르쳐 줄까?' 낯익은 목소리. 유한과 자칼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와 있었는지, 그들 옆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기들로 도배한 여기사 파우린이 서 있었다. '저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바로 귀련이 만들었어' '귀련이요!' 파우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설마 가우린 길드가 이번 대회를 위해 영입한 대장장이가 아르페디아 최고의 실력을 가졌따는 명장 귀련일 줄이야. '귀련은 저거 다 만들고 도망쳤대, 만드는게 하도 힘들어서' 그렇게 말하며 파우린은 방긋 웃었다. 유한의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그러나 알고 싶은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귀련이랑 아는 사이세요?' '응, 애무 가까운 사이지, 내가 가진 무기도 다 귀련이 만든거야' 역시 그랫던 것일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유한과 달리 주변의 유저들은 파우린의 무기들을 보면서 군침을 뚝뚝 흘렸다. 저 중 하나만 손에 넣어도 좋으련만. '혹시 귀련이 왜 철갑기마대의 갑옷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아세요?' '그거? 그건 말을 듣는 것보다 시합을 보는게 이해가 빠를 거야' 파우린은 막 시합이 시작된 경기장을 가리켰다. 선공에 나선 것은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였다. 그들이 돌진해 오자, 게세르 용병단은 말을 달리며 화살을 날렸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쏘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날린 화살은 공을 몰고가는 철갑기마대원에게 정확히 날아갔다. 캉! 카카캉! 7발의 화살이 정확히 모두 명중되었지만, 철갑기마대원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화살이 갑옷에 명중되는 순간 튕겨날아가 버린 것이다. '저런 말도 안돼는!' 그 광경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세르 용병단이 장비하고 있는 활은 시시한 활이 아니었다. 사거리와 공격력이 무척 높은 푸른 늑대의 활이다. 그런 황이 날린 화살을 20보도 안되는 거리에서 맞았음에도 모조리 튕겨 내다니! '귀련 님이 또 엄청난 걸 만들었군' '게세르 용병단 완전 지못미네' 주변의 유저들은 연방 혀를 찼다 게세르 용병단의 뛰어난 마상궁술은 귀련이 만든 갑옷때문에 전혀 위력을 발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방어력이 얼마야? 그리고 옵션은?' 간혹 파워 샷 스킬로 날린 듯한 화살 몇발이 장갑이 얇은 부분에 꽂혔지만, 착용자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한 듯했다. 주특기가 먹히지 않으니 게세르 용병단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활을 주력으로 한 경무장이라 철갑기마대에게 크게 밀렸고, 공격을 할때도 상대의 수비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시합은 3:0 가우리 길드 철갑기마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갑옷 모양이 이상했던 건 방어력 강화와 관련이 있었나?' 문제는 귀련이 어떻게 저런 갑옷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생산 스킬 1랭크가 되면 생기는 비결이 있는지? 아님 특별한 설계도라도 손에 넣은 것인지 모르겠다. ' 저 갑옷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 '그냐 당연히....' 파우린의 은근한 물음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대단한 갑옷을 만드는 비법은 대장장이 유저라면 누구라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유한을 보고 미소를 짓던 파우린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하나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귀련은 베레타 공화국의 율리아 계곡에 살고 있어,찾아가서 파우린이 보냈다고 하면 이것저것 잘 가르쳐 줄어거야' '정말 고맙습니다. 근데 왜 제게 이렇게 까지?' '짝퉁을 밝혀 준 것에 대한 보답 정도로만 생각해. 자, 그럼 난 이제 간다.' 거기까지 말하고 파우린은 돌연 사라져 버렸다. 로그아웃을 한 듯했는데, 내심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던 유한으로선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자식은 무슨 여자 복이 이리 많아? 시아에 리지스라는 상인 여자애에 이어 이젠 완전무장 누님이냐?' 질투심을 느끼는지 자칼이 옆에서 궁시렁거렸다. '그냥 이야기만 한 건데 여자 복이 어쩌고 할 게 뭐 있어요?' '마! 평생 여자랑 이야기 한번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이 바로 자칼인 모양이다. 아니,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 중 대부분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다른 유한을 보는 눈빛이 질투와 부러운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잘하면 여기서 사람 하나 잡을 듯. 그런 그를 구해 준것은 사회자였다. '다음은 블루 라이언스 대 게이트키퍼스의 시합입니다!' 이후로도 본선 16개 팀들의 시합이 계속 되었다. 본선에 올라온 옌스의 블루라이언스는 게이트 키퍼스를 상대로 무난히 승리를 거두었고, 그 외에 내노라하는 길드들도 이변없이 8강전에 진출했다. 그리고 본선1회전의 마지막 시합. 유한 일행은 물론이고 많은 유저들이 이 시합에 관심을 가졌다. 그고 그럴 것이 다크나이트 길드와 철십자 길드의 시합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사실상 결승전이라며, 본선 1회정에서 두 팀이 맞붙은 것을 다소 아쉬워하였다. '과연 누가 이길까?' '다크나이트가 이긴다에 내 돈 일만 곹드를 거마. 지크 넌 철십자가 이긴다에 걸고 파우린씨 단검을 걸어라' '왜 그 단검을 걸어야 하는데요? 그 단검은 귀련 님을 만나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란 말입니다.' '시꺼 인마, 정식 퀘스트도 아니잖아!' 다들 다크나이트 길드가 승리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 번 길드전에서 다크나이트길드는 눈앞의 승리를 철십자 길드의 거대 목인병때문에 놓쳐 버렸다. 아마 철십자 길드에 대한 원한이 장난이 아닐터. 실제로 길드전 이후로 흑표기들이 광렙 수련을 했다느니, 새로운 전력을 마련했다느니, 철십자 길드에서 긴장을 타고 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양쪽의 비밀 병기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상당히 근거 있어 보이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드래곤을 용병으로 고용했느니 하는 허황된 소문도 있었다. 여러 소문들 중에는 유저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것도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내 친구가 철십자 길드원인데, 경기 대기실에서 분명히 봤대!' 유한은 한쪽에서 유저들이 흥분해서 하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다. 하지만 제대로 들을수가 없었다.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 경기장으로 다크나이트 길드의 호표기와 철십자 길드의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장내에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함성에는 적잖은 탄성이 뒤섞여 있었다. '랜드 러너(Land Runner)다!' '저게 흑표기의 비밀병기인가?' 가장 먼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것은 흑표기가 말 대신 타고 있는 생물이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것은 랜드 러너라고 불리는 타조와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였다. 놈은 두 다리가 타조보다 튼튼하고, 머리와 부리가 더 크며, 말보다 빠르고 늑대보다 더 포악했다. 랜드 러너는 대륙 서북부 초원에 분포하는 몬스터다. 잡기도 힘들지만 길들이기는 더 힘들어, 랜드 러너 한 마리가 전마 10마리 값에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 '다크나이트 녀석들 꽤 작정하고 나왔구나' '그래도 저런 통닭은 내가 들은 철십자 길드의 비밀병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대체 철십자 길드의 비밀병기가 뭔데?' ' 너 아직 못들었냐?' 유저들의 이야기가 분분한 가운데 철십자 길드의 아이언사이에서, 누군가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장내에 흑표기에 쏟아지던 탄성과 환호성이 뚝 멎었다.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이 홀로 나타난 그 사내에게 집중되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 깊게 눌러쓴 투구 안쪽에서 짙은 광기 어린 눈빛이 번들거렸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살짝 삐닥하게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에서 오만함과 패기, 태산을 무너트릴 긋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무엇보가 눈에 띄는 것은 검붉은 빛의 갑옷과 불꼿처럼 새빨갛게 불타는 검. 그것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때 보다도 커다랗게 치켜 떠져 있었다. '나는 광전사 바츠다! 내가 다시 아르페디아에 돌아왔다!' 천지를 무너트릴 듯한 고함 소리는 안 그래도 설마 하던 사람들의 정신을 충격과 공포로 몰고 갔다. '바츠다! 바츠의 장비가 맞아!' '바, 바츠라니?' 해킹당한 바츠가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놀란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운데는 분노로 눈빛을 벌겋게 불태우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진짜 바츠였던 유한이었다. '누구냐! 저놈은 대체 누구냐고!' 7권에 계속 텍본제작자 : 독불장군 블로그의 타이핑팀. ★이 텍스트는 독불장군 블로그에서 타이핑팀이 제작한 텍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