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 지그 5 < 1. 현피를 뜨다 > < 2. 다시 북으로 > < 3. 공중 요새 입정 > < 4. 미케니아의 부활 > < 5. 추락하는 공중 요새 > < 6. 검정고시 퀘스트 > < 7. 대규모 업데이트 > < 8. 메이커의 공습 > < 9. 괴짜 광부 > < 10. 철의 도시 > < 11. 드림맥스의 초대 > <<< 1. 현피를 뜨다 > (1) "내가 바츠 유저인 강유한이다!" 유한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노심초사해 온 해커 녀석을 잡게 된 것이다. 녀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자챙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질려 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후후후, 기대하라. 내가 해킹으로 입은 정신적, 물적 피해를 배로 받아 내 주마!' "이거 놔!" 녀석은 다짜고짜 반대편 주먹을 휘둘렀다. 유한은 해커 놈을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며 약간 방심하고 있었다. 뺨을 정통으로 맞은 유한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한은 벌떡 일어났다. 방심하다 한 방 맞긴 했지만, 해커가 당황해서 날린 주먹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유한을 떼어 버린 해커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르릉! 엔진이 굉음을 토한다 싶더니, 오토바이가 앞으로 뛰어 나갔다. 유한은 놈을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오토바이가 조금 더 빨랐다. 놈은 곧장 속력을 낸 채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으아아악! 개자식! 거기 서지 못해!" 멀어져 가는 해커를 보며 유한은 괴성을 질렀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바츠를 날려 먹은 놈이다. 거기다 전화까지 걸어 조롱했다. 이놈을 잡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이 얼마였던가? 그동안 받은 심적 고통은 또 어떠했고? 그런데 다 잡은 놈을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불타는 분노 앞에 깨끗이 지워졌다. "그냥 도망가게 놔둘 것 같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 말겠다. 그렇게 다짐한 유한은 공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에게 부딪쳐 넘어진 사람들이 화를 냈지만, 유한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 '휴, 이만하면 쫓아오지 못하겠지?' 블라덱은 하마터면 경을 칠 뻔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짭짤하게 팔아먹었던 고가 장비의 주인이 나타날 줄이야. 그는 안심하며 오토바이의 속도를 늦췄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블라덱을 덮쳤다. 갑자기 옆에서 유한이 비호같이 뛰어나오더니 그의 목을 낚아챈 것이다. 우당탕탕! 주인 잃은 오토바이가 나뒹굴고, 블라덱과 유한도 도로 바닥에 나란히 내동댕이쳐졌다. 다행이 오늘이 휴일로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크윽, 이 새끼가!" "화가 나는 건 나라고, 이 자식아!" 온몸이 쓰라렸지만 해커보다 먼저 몸을 일으킨 유한은 다짜고짜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컥!" 막 일어나려던 블라덱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였다. "일어나, 인마! 아직 안 끝났어!" 유한이 블라덱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자 엉망이 된 놈이 도리질을 쳤다. "아, 아냐. 난..." "안이고 밖이고 일단 맞기나 해!" 유한은 얼굴에 주먹을 한 발 꽂아 넣었다. 좀 전에 녀석이 후려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분이 풀릴 리가 없다. 유한은 비틀거리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겨 박치기를 먹여 준 다음, 복부를 무릎으로 걷어차 올렸다. 그리고 들려진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녀석을 다시 일으켰다. 모자를 벗기고 덥수룩하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면상이나 자세히 보자 싶어 고개를 젖혀 놓았더니, 실눈에 얍삽하게 생긴 허여멀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경만 쓰면 정말 컴컴한 골방에서 해킹이나 할 만한 얼굴이다. 그 허연 얼굴은 아까 유한이 날린 주먹 때문에 한쪽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물론 동정심 같은 건 일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 바츠를 해킹하고 자신을 농락했다고 생각하니 주먹에 더 힘이 들어갔다. "크악! 그만 좀 때려!" "시끄러! 바츠 레벨이 얼마였는지 알아? 넌 앞으로 이백 방은 넘게 쳐맞아야 돼." 바츠의 레벨만큼 녀석을 두들게 패 주리라. 물론 그 정도로 때려도 분이 풀릴지 안 풀릴지는 유한 스스로 생각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으악! 난 아니란 말이야!" "입 닥치라고 했지!"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니까!" 마지막 말에 유한은 움찔했지만, 그대로 주먹을 날려 버렸다. 주먹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시뻘건 선지를 뽑아냈다. "큭, 내가 그따위 얄팍한 말을 믿을 것 같아? 네놈이 내 아이템을 몰래 판 거 다 알고 왔단 말이다." 유한은 알세인에게 놈이 바츠의 무구들을 판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그건..." "일단 너 같은 쓰레기는 맞아야 돼. 맞고 나서 이야기 하자." 유한은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는 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길을 오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저래?" "몰라, 갑자기 뛰어오더니 싸우던데?" "현피하는가 본데? 아이템 어쩌고 하던걸?" 근방의 사람들이 시선을 몽땅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긴 도로 위에서 갑자기 격렬하고 야만스런 액션이 벌어졌으니 관심을 두지 않을 리 없다. "이리 와, 인마." 유한은 녀석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경찰이 오면 사정 불문하고 끌고 갈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지기 마련, 패 버리더라도 조용한 곳에서 절단 내 놔야 한다. (2) "다시 말해 봐. 아까 뭐라고 그랬어?" "내,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고." "그럼 넌 뭐야? 블라덱이 아냐? 놈의 친구냐? 아님 똘마니?" 전화를 한 본인이 직접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하를 보냈거나, 코스튬 페스티벌 때 함께 했던 친구놈들 중 하나가 대신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맞다면 이 녀석은 좀 억울할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유한은 미안해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친구든 부하든 간에 이놈도 한 패라면 맞아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나 블라덱 맞아." "그럼 해킹한 게 맞겠네!" "아냐! 내가 블라덱인 건 맞지만 해킹은 안 했어?" 유한은 다시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자 놈이 서둘러 변명을 했다. 그러나 날아오는 주먹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개새끼! 술을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게 말이 돼?" "커억!" 블라덱의 변명은 유한에겐 그렇게 들렸다. 그러나 얼굴에 쌍코피와 피멍이 어우러진 블라덱은 정말 억울한 눈빛을 했다. "지, 진짜야. 다른 놈들은 몰라도 바츠는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니까." "바츠를 네가 해킹하지 않았다고?" "그래, 난 바츠 아이템만 넘겨받았을 뿐이야." 이건 무슨 소린지. 기껏 잡았다 싶었는데 고작 하수인일 뿐인가. 아니면 코앞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좋아, 네가 아니라고 치자. 그럼 누구한테 넘겨받았어?" 생각해 보니 블라덱과 해커의 말투가 달랐다. 음성변조를 했지만 자신만만하던 해커의 말투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내뱉는 놈의 말투는 동일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나, 나도 몰라. 갑자기 전화를 해서 바츠의 아이템을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어." 바츠가 해킹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당시 블라덱은 구미는 당겼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장물거래라도 서로 간데 신용이 있어야 가능하다. 게임에서 한 번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수상쩍은 녀석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후에 메일이 왔어." 황당하게도 상대는 공개하지도 않은 블라덱의 메일 주소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메일에는 한 개의 압축 파일이 동봉되어 있었다. 압축 파일 안에는 바츠의 아이템임을 증명하는 스크린샷과 그 아이템을 봉인의 상자에 집어넣는 동영상 파일이 들어 있었다. "제길, 그래서?" "메일에는 돈을 주면 상자가 묻힌 장소와 암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적혀 있었어. 진짜 바츠 것인지는 몰라도 흥미가 가더군. 아이템 가격이 시세의 절반도 안 되었으니까 한번 속는 셈 치고 사기로 했지." 하지만 가격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거래 방식이었다. "거래 방식이 어땠기에?" "전자거래는 싫다면서... 돈을 신문지에 싸서 쇼핑백에 넣고 거리 한곳에 놓아두라고 했어." "그래서? 그놈이 누군지 봤어? 돈 가방을 가져가는 사람이 누군지 봤냐고?" 유한은 분명히 블라덱이 해커를 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커의 메일을 훔쳐서 쓸 정도의 실력자다.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그의 예상대로 블라덱도 거래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래서 가방을 놓고 한쪽에 숨어 누가 가져가는지 살펴봤지만... "못 봤어. 거리에 사람이 워낙 많이 지나다녀서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어." "쳇!" 현실이니까 가능한 수법일 것이다. 게임 상에서 땅에 뭔가 떨어져 있으면 누구든 지나가면서 줍기 마련이고, 돈이나 유용한 아이템 같으면 날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2030년대의 대한민국은 부유한 나라고 시민 의식도 높은 편이다. 번화가 한쪽에 놓인 쇼핑백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물건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여져 있다면 더더욱. 아무튼 해커는 돈을 가져갔는지, 얼마 후 전화로 상자가 묻혀 있는 장소와 암호를 가르쳐 주었단다. 그리고, -너 내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인데 포기해. 나는 너를 볼 수 있어도 넌 나를 찾을 수 없어. 지금 여기서처럼 말이야. 가까운 곳에서 다 보고 있단 소리였다. 그러나 블라덱은 상대가 누군지는커녕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전화번호 추적은?" "그것도 해 봤어. 인터넷 전화였는데, 방글라데시로 나오더군." 블라덱도 나름대로 자랑할 만한 해킹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낸 거라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실력과 두뇌, 과감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추측뿐이었다. '하긴 그 녀석 입으로도 그랬지.'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해커라고. 확실히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 꼬리를 밟혀 정체를 드러낼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제기랄!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긴 했지만, 울화통이 터지지는 않았다. 상대는 수준급의 해커다. 놈을 잡는 것은 게임의 퀘스트로 따지면 특 A급, 아니 S급의 퀘스트였다. 그만한 퀘스트인데 벌써 최종 보스가 드러나겠는가?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야. 도움이 좀 되었으면 좋겠군." 블라덱은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다가 유한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왜 그래? 아는 걸 다 말했잖아." "닥쳐, 내 볼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블라덱도 유한이 왜 눈을 부라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녀석, 그러니까 바츠의 아이템을 거래했다. 유한이 무엇을 바라는가는 뻔한 일이다. "알았어, 때리지 마. 처분하지 않은 바츠의 아이템은 전부 돌려줄 테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유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내가 가진 아이템 대다수가 장물이야. 설마 그걸 가져가겠다고?"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바츠의 아이템은 당연히 돌려받아야지만, 그 외의 아이템을 먹을 생각은 없다. 먹어 봤자 체하기나 할 뿐이다. 이야기를 듣고 방금 전에 생각났는데, 블라덱에게는 아직 볼일이 더 남아 있었다. "네 본거지로 안내해." (3) 블라덱의 본거지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창고였다. 빈병과 폐지가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창고에선 곰팡이와 담배, 쉰내가 어우러진 역한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고, 여기저기 술병과 먹고 버린 컵라면 용기, 과자 봉지와 담배꽁초가 굴러다녔다. "여기가 내 비밀 아지트야." "귀신같은 곳이군." "흥, 네 방은 얼마나 깨끗하기에?" "죽고 싶냐? 내가 너랑 똑같을 줄 아냐!" 유한이 눈을 부라리자 블라덱이 움찔했다. "아, 알았어. 거 성질도..." 유한의 어머니 김 여사가 이 광경을 본다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할 것이다. 블라덱보다 덜하다고 하지만, 유한의 방도 꽤 지저분하니까.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아이템 흥정이 잘 안 되었냐?"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퍼질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마시던 녀석들이 있었다. 모두 6명. 목소리들을 들으니 전에 코스튬 페스티벌에서 블라덱 녀석이랑 함께 있었던 놈들이 분명했다. 순간 유한의 기에 눌려 있던 블라덱이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시팔, 재수가 없으려니까... 야. 저 새끼 손 좀 봐 주라." "뭐? 누구 말이야?" "누구긴! 날 따라온..." 돌아선 블라덱의 눈에 유한이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입구 쪽을 돌아봤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 방금 전까지 내 뒤에 있었는데." "너 대낮부터 귀신에게 홀렸냐?" "대체 누가 있다고... 으악!" 갑자기 폐지를 쌓아 올린 탑이 무너졌다. 모두 다급하게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두 녀석이 무거운 폐지 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유한은 무너진 폐지 더미 뒤에서 손을 털며 나왔다. 그는 블라덱이 수작을 부릴 거라 예상했다. 순순히 자신의 아지트로 안내한 것도 그렇고, 창고에 들어올 때 슬쩍 보았던 눈동자가 교활하게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새끼야! 저 새끼가 다짜고짜 날 팼어." 블라덱의 외침에 덩치들이 유한에게 다가왔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불량스러웠고, 일그러트리는 인상도 참 더러워 보였다. "야, 인마. 너 뭐야!"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구석에서 각목을 집어 든 녀석도 있었고, 깨진 병을 들고 건들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폐지 더미에 깔린 녀석들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부스스 일어났다. '우리 좀 논다'는 듯한 그들의 불량배 포스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한둘도 아니고 6명. 예전에 이렇게 건들거리며 다가와 에워싸는 놈들에게 참 많이 두들겨 맞았다. 절로 한 발 물러나려던 유한의 머릿속에 곽대발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 놈이 덤벼들 땐 어쩌냐고? 일단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자신이 약하다고 해도 배짱을 부려야 돼. 양아치 놈들은 기본적으로 하이에나 근성을 갖고 있으니까. 하이에나는 야비한 포식자로,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동물에겐 덤벼들지 않는 녀석이다. 동료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군가 먼저 상대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마지막 뼛조각까지 씹어 삼킨다. 쪽수를 내세워 덤벼드는 것은 약자의 전술이자 본능인 것이다. 혼자가 아니면 싸울 수 없는 놈들이나 우르르 몰려다니며 으스댔다. '그 말대로라면 이놈들은 별로 강하지 않다는 거지.' 유한은 6명의 불량배를 상대로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용기를 냈다. "합(合)!" 앞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디디며 강하게 발을 구르자, 주변의 양아치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이것은 이종 격투 대회에 나갔던 표재훈의 동영상을 보고 배운 것이다. 표재훈은 시합 전엔 반드시 이랬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포효(咆哮)는 상대 선수의 기세를 꺾어 놓고, 스스로는 호흡과 정신을 가다듬는 데 유리하다고. 사실 그건 표재훈보다 송태수가 원조였다. 폭풍의 길포드로 싸울 때마다 우렁찬 사자후를 터트리곤 하니까. '그다음엔... 선방이다!' 유한은 양아치들이 움찔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장 정면의 깨진 유리병을 든 녀석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빠--각! "컥!" 유한의 펀치를 맞은 녀석의 턱이 빙글 돌아간다 싶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곽대박 가라사대, 선방은 절대 어설프게 날리면 안 된다고 했다. 아주 기가 팍 꺾이도록 조져 놓으라 하셨다. 그래야 다른 하이에나들이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다고. "이 새끼가 죽으려고!" 옆에 있던 녀석이 손에 든 각목을 내리쳤다. 각목 끝에 유한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살갗이 찢기면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프지만 어설픈 공격이다. 좀 더 제대로 휘둘렀다면 각목은 살갗을 찢어 놓는 대신에 머리를 울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유한의 초반 선공에 놀란 양아치가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서둘러 각목을 휘둘렀기 때문. '큭, 아픈 기색을 보이면 안 되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러면 비열한 하이에나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든다. 사실 각목에 스친 아픔은 수련 때 맞앗던 곽대발의 살인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야야아!" 유한이 상처 입은 사자처럼 포효하며 주먹을 날렸다. 각목 든 녀석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비록 한 방에 완전히 보내지는 못했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녀석의 눈에는 두려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뭐 해? 얼른 조져 놓으라니까!" 블라덱의 고함에 멍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녀석들이 유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 기세등등하던 모습들은 어디에 가고 다들 약간씩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대로 완전히 기가 오른 유한은 마음껏 휘저으며 나머지 녀석들을 때리고 차면서 차례대로 쓰러트렸다. -사람이 가진 힘은 누구나 동등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약하고 어떤 사람은 강하지. 내면에 품고 있는 용기(勇氣)가 다르기 때문이야. 사범 곽대박은 이런 이야기도 해 주었다. 이미 유한 너에겐 충분한 힘이 있다고, 극기도의 수련은 그 용기를 강하게 키우고 잠자고 있는 육체의 힘을 일깨우는 것뿐이라고. '이, 이게 아닌데!' 블라덱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의 본거지에는 같이 어울려 노는 덩치들이 있었다. 싸움의 귀재들은 아니지만, 뒷골목에서 힘 좀 쓴다고 할 수는 있는 녀석들인데다가 숫자도 많았다. 당연히 자신을 두들긴 녀석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쓰레기가 가득한 바닥에 신음 소리를 토하며 나뒹구는 건 놈이 아닌 자신의 친구들이었다. "후후, 남은 건 너뿐이군." "하하하. 님, 우리 문화인답게 말로..." 간사하게 웃는 블라덱을 바라보며 유한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옆으론 굳게 쥔 주먹이 치켜들려 있었다. -------------------- "신분증." 유한의 말에 블라덱과 그의 친구들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경찰한테 찌를까? 아님 게임사에 이를까?" 해킹에, 해킹한 아이템을 몰래 거래했다. 죄의 경중으로 치자면 무단침입에 자신들을 두들겨 팬 유한이 더하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 그들은 유한의 박력에 밀려 버렸다. 잘못하면 또 맞을지도 모른다. 바츠 유저라더니 싸움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고 얌전히 학생증이나 신분증을 내놓았다. 블라덱만 대학교 1학년이고, 나머지는 모두 재수생이었다. 사실상 백수건달이라 할 수 있는. 모두 유한보다 형님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유한은 봐 주거나 한 수 접어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는 미리 챙겨 왔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호주머니 속에도 들어가는 이 작은 카메라는 할바어지가 쓰던 것이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아날로그 카메라로 필름을 쓰는 제품이다. 거실에 고이 모셔져 있던 것을 집어 온 유한은 우선 놈들의 학생증과 신분증부터 찍었다. "꽤나 고물딱지를 들고 다니는군." "이런 물건일수록 수작 부릴 가능성이 낮아지니까." "하긴 필름을 조작하기가 쉽지 않으니." 다지털 카메라는 편한 대신 편집 프로그램으로 조작하거나 데이터를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카메라는 그게 불가능했다. 대신 필름 간수를 잘 해야 하는 벌거로움이 있지만. 유한은 이 카메라의 필름을 구한다고 애를 먹었다. 이미 21세기 초에 아날로그 카메라는 그 운명을 다했다. 지금은 전문 사진작가를 제외하면 아무도 쓰지 않아서 필름 값도, 나중에 사진을 인화하는 비용도 굉장히 비싸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남길 수 있는 물건이기에 유한은 아낌없이 용돈을 투자했다. "어디 보자, 해커 일당이 쓰는 장비를 살펴볼까나?" 블라덱들은 창고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대는 유한을 잡을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될 대로 되라는 듯 체념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발각이 난 것도 처음이기에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유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 어떻게든 오늘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너저분한 창고 안에는 컴퓨터와 캡슐, 복합기를 비롯해 몇 가지 전기 기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컴퓨터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게임 세계가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공식 홈페이지의 라이브 스크린(Live Screen)이군." 라이브 스크린. 현재 게임 속 상황이 어떤가 보여 주는 영상이다. 아르페디아 대륙 몇 군데에 게임사에서 설치한 라이브 스크린이 있는데, 게임 중계와 달리 CCTV 비슷한 수준이라 보통 사람들은 대충 보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이걸 켜 놓은 이유가 뭐야?" 잠시 주저하던 블라덱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갑부 탐색용이다. 레벨이 높지 않더라도 돈 많은 놈들이 있거든. 보통 그런 놈들은 차림새부터가 다른데..." 라이브 스크린을 보고 '고객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고, 게임에 접속해서 그들의 정보를 조사한다고. 몰래 그들을 쫓아다니며 찾고 있는 물목이 무엇인지, 거래하고자 하는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해킹은?" "그런 건 따로 핵이나 프로그램을 뿌리는 거지. 공략 사이트나 카페 같은 곳에 게임할 때 유용한 프로그램이라고 던져 놓으면 알아서 입질을 하는 거야." 그런 프로그램들은 유한도 알고 있다. 몬스터의 레벨이나 정보를 표시해 주고, 날씨를 미리 알려 주는 등의 편리한 기능을 제공하는 유털리티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드림맥스가 금지하는 불법 프로그램이다. 자칫 이런 프로그램들이 게임 프로그램과 충돌해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반칙성 프로그램에는 위험한 해킹 프로그램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보안 프로그램인 '인스팩터(Inspecter)'는 이런 것들이 깔려 있으면 소거해 버리거나 게임 접속을 차단해 버린다. "하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인스펙터가 있잖아?" "그야 내려 버리면 되는 거고, 어디나 게임을 편하게 하려는 부류들이 있지." "인스펙터 자체를 없애 버린다고? 인스펙터가 없으면 게임에 접속을 못하는데?" "그렇지. 하지만 그런 건 손을 쓰면 간단하지." 더미 인스펙터(Dummy Inspecter). 해커들이 자신들의 밥이 될 자들을 위해 만든 보안 프로그램이다. 더미 인스펙터를 깔면 게임에는 접속할 수 있지만, 해킹에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게임사에선 나서지 않는 건가?" "당연히 안 나서지. 본인의 개인 정보 관리 소홀로 인해 벌어진 일은 게임사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약관에도 나와 있잖아." 그 말은 유한도 예전에 들어 보았다. 바츠를 해킹당했을 때 고객 상담실장이라는 작자가 그리 말하며 뻣뻣하게 나왔던 것이다. 물론 유한은 스스로 갑옷을 벗고 화살을 맞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깔지 않아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피해당한 유저에 대해서 복구를 안 해 준다는 것이고, 드림맥스에서도 해커 추적과 박멸은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도 항상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지." 창고 안에 흩어진 각종 장비들과 메모리 칩에 담긴 프로그램들은 드림맥스의 추적을 회피하기 위해 마련한 것들이라고. "따로 훔쳐 낸 개인 정보로 계정과 캐릭터를 만들고 친구들끼리 아이템을 돌려 가며 손을 써서 세탁을 하는 거지. 인챈트를 하거나 일부러 손상을 입히는 방식으로." "아이템의 정보를 바꾸는 거로군." "그래. 하지만 아주 완벽하다곤 할 수 없어. 직접 드림맥스의 데이터를 주무르기엔 너무 위험도 크고...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어.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블라덱은 이렇게 상대를 맞닥트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신이 해킹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구입한 아이템의 주인을. "자, 그런 이야기는 됐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사진을 충분히 찍은 유한은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던 것들을 블라덱에게 물어보았다. "피싱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해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해당 인물의 개인 정보가 웹에 공개되어 있다면."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유한은 자신이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인스펙터를 건드린 일도 없고, 수상한 사이트에 들락거린 적도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개인 정보를 알고 있으니 홀랑 벗겨 간 거겠지. 초 일류 해커라도 돼서 국가 기관의 데이터를 해킹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해." "날 해킹한 놈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해커라고 했어." 유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블라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허풍일걸. 그만한 해커가 찌질하게 남의 게임 캐릭터나 벗겨 먹을 리는 없잖아? 내가 그런 실력이었으면 벌써 스위스 은행을 털었을 거다." "뭐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더군." 확실히 바츠라면, 누구도 엄두를 못낸 레드 드래곤을 홀로 때려잡은 바츠라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금한 것과 아이템을 벗겨 먹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래도 바츠를 해킹한 녀석은 사이코인 모양이다. 간단히 쪽지나 메일로 만나자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해킹을 하다니. 하지만, 실력만큼은 분명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해킹을 어떻게 당한 거야?" "말했잖아. 피싱 프로그램하곤 상관없다고."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해킹당했을 때의 상황을 묻는 거야. 평소와 다른 일이 있지 않았어?" 유한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을 일일이 따져 보지 않았을까? 수사 범죄 드라마를 보아도 사건이 일어난 전후 상황을 면밀히 재구성하지 않는가. 아마 해킹당한 당시에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 이후에도 해커를 찾는다고 설치고, 대장장이 지그를 키운다고 바빴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유한은 해킹당했던 때의 상황을 모두 블라덱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4) "흠, 생각보다 의심 가는 사람이 많은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블라덱이 그렇게 말하자,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라면 우선 가족들을 의심할 거야. 서로의 개인 정보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뭔가 싶었던 유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명 부모님은 자신이 게임하는 것을 꽤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니까. 하지만 개인 정보만 안다고 해서, 그걸 기반으로 계정 정보를 알아냈다 해서 바츠를 홀랑 털고 캐릭터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바츠의 아이템을 털려면 게임에 접속을 해야 하는데,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하는 일은 과거처럼 ID와 비밀 번호만 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접속하는 당사자가 캡슐에 들어가 빠르지만 복잡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걸 패스할 방법은 관련 장치와 프로그램을 주물럭거리는 것뿐인데, 가족 중에 그런 실력자는 없다. 젊을 때 게임 좀 했다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요새 얼굴 보기 힘든 유현이 녀석조차도. 외할머니나 외가 쪽 사람들을 의심해 봐도 마찬가지. 외가 쪽 식구들은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농사일을 하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음흉하고 교활한 해커와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냐? 하필이면 네가 외가에 갔던 일주일 사이에 캐릭터가 털렸어. 마치 네가 접속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으음..." "네 가족 중에 해커가 없더라도 해킹에 가담할 만한 의사가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잖아." 확실히 그건 그랬다. 해커가 '아들을 게임 접게 해 드릴까요?'라고 제의하면 부모님은 얼싸 좋다 하고 협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을 것 같지도 않은 게, 유한의 가족들은 그리 엉큼하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들 방에 있는 컴퓨터랑 캡슐을 때려 부수고 내다 버렸으면 모를까. 임종이 눈앞이라고 거짓말을 한 외할머니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다. 손자의 게임 중독을 고치실 요량이라면 시골에 불러다가 웰빙스런 삻을 살게 하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해도 해커 녀석은 내 주위에 있는 게 틀림없어.' 옆집 형이거나, 아버지의 절친한 흑룡반점 박만철 사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놈의 가시권 안에 있는 건지도. 어쩌면 오늘 이렇게 블라덱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심해 볼 수 있는 게..." "뭔데?" "아니,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니 좀 터무니없는 거라서." 블라덱은 유한에게 이야기해 주려다 말았다. 분명 의심 가는 게 하나 더 있지만, 확증이 없는데다가 그런 짓을 해서 그쪽에서 딱히 득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그럼 그 생각이 맞나 네가 알아보면 되겠군." "뭐라고?" 블라덱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사람의 해커로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녀석은 엉뚱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네가 찾아봐. 바츠를 털어 간 해커를 말이야."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하는데!" "너도 그놈이랑 똑같은 놈이잖아. 얼마나 많은 유저들을 털었는지는 몰라도 네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가면 편히 살긴 어려울걸." 편히 살기는커녕 현피에, 경찰이 추적해 올지도 모른다. 유한은 카메라를 손 위에서 만지작거렸다. 잠시 유한을 노려보던 블라덱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과 다시 놈에게 덤벼 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까 맞은 상처가 쓰린 아픔에 아직도 얼얼했다. 힘으로 안 되면 어떻게든 다독여서 좋게 마무리해야 한다. "이봐, 내 실력이론 그놈을 찾는 건 무리야." "한번 해 보고 된다 안 된다는 말을 하시지. 누군 확신이 있어서 발품 팔고 쫓아다닌 줄 알아?" 대장장이가 되어 바츠의 아이템을 수색하고 그것을 추적하여 해커를 찾는 것. 확신은 없었다. 좁쌀보다도 작은 가능성만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해커를 찾는 것이 요원하다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무런 기약 없이 파부치 영감의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할 때보다도 많은 성과를 이뤄 냈다. "내가 요새 하고 있는 캐릭터는 대장장이 지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쪽으로 성과를 보고하도록 해." "켁! 리, 리자드 히어로의 친구가 너라고?" "바츠 유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옌스처럼 말하고 말았다. 놀라는 블라덱의 앞아세 으쓱대던 그는 눈빛을 다시 날카롭게 번득였다. "시끄러운 일은 사양이니까 함부로 떠벌렸다가는 죽을 줄 알고." "아, 알았어." "그리고 네가 갖고 있는 바츠 아이템을 전부 내 앞으로 보내. 지금 당장!" 유한의 명령에 블라덱은 인상을 구겼다. 생돈을 주고 산 아이템을 공짜로 내놔야 할 판이다. 그러나 자신은 불법을 저질렀고,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콩밥을 먹을지 모른다. 뭐 그 전에 이 녀석에게 묵사발이 나겠지만. 캡슐에 들어간 블라덱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그가 플레이 하는 모습이 스크린 하나에 그대로 비춰졌다. "인벤 몽땅 열어! 가방이고 은행이고 내가 일일이 다 확인할 테니까." 블라덱이 주저하자 유한은 캡슐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쾅! "얼른 안 열어? 캡슐째 땅에 묻어 줄까?" 캡슐 표면이 일그러졌지만, 그 정도로는 고장 나지 않는다. 겁에 질린 블라덱은 순순히 인벤토리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유한이 지켜보는 와중에 바츠의 아이템을 골라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수량이 적었다. 유한이 물으니 이미 교묘하게 세탁을 끝낸 것은 유저들에게 처분했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알세인의 경우처럼 싸게 NPC에게 팔아 버렸단다. "정말 이것뿐이야? 플레임 소드랑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바츠의 주력 장비가 없었다. 유한의 물음에 캡슐 안에 있던 블라덱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외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건 애초에 거래 품목에 없었어. 아마 그놈이 나보다 더 돈 많은 녀석에게 팔았을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유한의 머리에 새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뒤에서 주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니들도 게임 접속해서 인벤토리 다 열어 봐." "우, 우린 별로 가진 게 없어." "닥치고 접속이나 해!" 양아치들은 블라덱의 아이템 세탁을 도왔다. 당연히 바츠 아이템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예상대로 녀석들의 인벤토리에도 바츠의 아이템과 바츠 것으로 의심되는 장비들이 발견되었다. 유한은 그것마저 고스란히 챙겨 상자에 같이 담게 했다. 그리고 블라덱이 상자를 우편으로 보내는 것까지 모두 감시했다. "주소는 케이트 산맥의 지그 대장간이다. 곧장 돌아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엄한 수작은 하지 않는게 좋아." 우편은 인수되기 전에 반송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한은 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이런 협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블라덱과 그의 친구들은 꼬리를 내린 상태였지만. "명심해. 너희에 대한 정보는 모두 내가 찍어 두었다는 걸. 이상한 수작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찍을 것도 다 찍고, 들을 말도 다 듣고, 돌려받을 것도 다 돌려받았다. 협박과 위협까지 모두 마친 유한은 블라덱의 아지트에서 빠져나왔다. "하하하하핫!"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입이 벌어지며 커다란 웃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원하던 해커를 잡지 못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의 강함으 깨달았기 때문이다. 숫자도 많고 연장까지 들고 있는 양아치 놈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 거의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현실에서의 레벨 업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이야. "고마워요. 대발이 아저씨." 유한은 자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허공의 곽대발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렇게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과 반대로, 칙칙한 창고 안에 있는 블라덱 일당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아, 씨발! 이게 뭔 망신이야? 쪽팔려서 어디 말도 못하겠다." "너, 저딴 녀석은 왜 데려온 거야!" "시끄러! 니들은 여섯이나 되면서 다굴도 제대로 못하냐!" 블라덱과 녀석의 친구들은 서로 짜증을 냈다. 멀쩡히 잘 놀다가 날벼락을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앞으로, 바츠인지 지그인지 하는 놈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길, 이게 다 바츠를 해킹한 그 자식 때문이야.' 블라덱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유한에게 맞은 것도, 이렇게 코가 꿰여 버린 것도, 전부 그때 아이템을 사지 않겠냐며 꼬드긴 그놈 탓이다. 블라덱은 결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책하고 성찰할 녀석이 아니었다.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풀 정도의 소인배였다. '어떤 놈인지 나도 면상 좀 보고 처갈기기나 하자.' 허공에 날아가 버린 돈도 보상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블라덱은 곧장 게임 내에 나도는 바츠의 아이템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한과 함께 정체불명인 해커의 행방을 쫓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났다. < 1. 현피를 뜨다 >>> <<< 2. 다시 북으로 > (1) 블라덱을 만난 유한은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선택한 캐릭터는 대장장이 지그. 일주일간의 칩거를 깨고 그가 다시 아르페디아 세계에 등장하는 것이다. 지그가 된 유한은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앗다. 마지막으로 로그아웃을 한 자신의 대장간 개인 작업실이 보였다. 떠날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주일 동안 휴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간 주변에는 여전히 유저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일주일 전 리저드맨과 친구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며 수많은 유저들이 아우성을 칠 때보다는 적었다. 유한이 접속하지 않자 기다리다 지쳐 가 버린 것이다. 그나마 있는 유저들도 대장간 앞에 만든 리지스의 상점에서 아이템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런 유저들 틈에는 특이한 이들이 둘 있었다. 게임 분위기에 맞지 않게 방송 카메라를 든 남자와 마이크를 든 사이버 캐릭터 미루였다. "젠장, 아직도야?" 방송국에서는 여전히 리저드맨 사태에 대해 인터뷰하려는 모양이다. 하긴, 길드전에서 그 난리를 쳐 놨으니 며칠 가지고 관심이 식을 리 없다. "하긴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떻게 할지 결정을 지은 유한은 대장간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등장에 유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미루와 카메라맨이 그에게 달려왔다. "와! 지그 님이다!" "리저드맨과 친구 되는 거 좀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일주일을 꼬박 기다렸다구요!" 아우성치는 유저들을 내버려 둔 채 유한은 버추얼 에이지 팀과 만났다. 일일이 대답해 주기보다는 인터뷰 한 번으로 끝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유한은 커다란 투구를 꺼내더니 뒤집어썼다. "저, 지그 님. 시청자 여러분께 얼굴을 보여 주실 순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초상권을 보호해야겠습니다." "이미 지그 님의 얼굴은 알려졌습니다만?" 공중 요새 때 이미 유한의 얼굴은 방송을 탔다. 미루는 그 점을 지적했지만, 유한은 고개를 지었다. "그때는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 영상은 그때와 달리 상당수 유저들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게 유한의 판단이었다. 리저드 대군이 등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많은 유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터. 나중엔 다 알게 되겠지만 유한은 최소한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것은 막고 싶었다. 게임에선 어쩔 수 없겠지만, 옌스처럼 현실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알겠습니다. 대신 인터뷰에선, 리저드맨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알려 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스크린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버추얼 에이지 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의 상인 여자애처럼 돈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 녹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맨의 신호와 함께 사이버 캐릭터 미루가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전국의 버추얼 에이지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귀염둥이 미루입니다. 제가 오늘 드디어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 대장장이 지그 님을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그입니다." 유한은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시커먼 투구를 쓰고 있어 꼭 시위를 하는 듯했다. "많은 유저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데요, 대체 리저드와 친구가 된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뭐 별거 없습니다. 우연히 플레임 마운트에 갔다가 리저드맨들이랑 접촉했고,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것을 가르쳐 줬을 뿐이지요."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것 말입니까?" "예, 지금은 그리 절실하지 않은 것 같다군요." 주변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유저들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한이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리저드맨을 꼬실 방법이 사라진 탓이었다. 리저드맨들에게 절실했던 것, 그것은 바로 철제 무구였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리저드맨들이 철기로 무장하고, 그들과 접촉한 유한의 직업이 대장장이인 걸 생각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이다. "자신들의 절실한 것을 들어줘서 그런지, 리저드맨들은 저를 신이 보낸 사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랑 그때 갔던 제 동료만 특별할 대접을 해 주고 있지요." "그럼 그때 길드전에 나타낫던 오만의 리저드맨 증원군은 유니크 이벤트의 결과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런 셈이죠." 유저들의 실망감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 갔다. 유니크 이벤트라면 절대 되돌릴 수도, 다른 누군가가 경험할 수도 없는 이벤트다. "와! 굉장한 대박을 잡으셨군요." "후후, 지옥 같은 플레임 마운트에서 한 달 가까이 고생한 대가지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선구자들을 위한 혜택이 있었다. 공개되지 않은 지역이나 던전을 찾아내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유저들은 설마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모두가 꺼려했던 플레임 마운트에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유니크 이벤트가 숨겨져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플레임 마운트에는 왜 가셨나요?" "그게... 사나이라면 한번 가 볼 만한 곳이라 추천을 받아섭니다." "누구에게요?" "폭풍의 길포드라고,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일 겁니다." 유한의 대답에 주위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유저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있었다. "폭풍의 길포드!" "역시 지그와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보통 관계가 아니었어!" 길드전에 나선 것도 그렇고, 지금 대답한 것도 그렇고 유저들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유한은 인터뷰 중 플레임 마운트에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갔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그랬다간 베르겐 참사 당시에 피해를 입은 유저들이 메카 드래곤과 연관된 것을 알고 유한에게 책임과 보상을 물으려 할 테니까. "보다 적극적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저 같은 행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숨겨진 유니크를 찾아보십시오. 어쩌면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오, 유저 분들의 의욕을 불끈 일으키는 말이시군요." 미루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한의 말은 유저들에게 위로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니크 이벤트가 개나 소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제가 리저드맨들과 알고 지낸다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이나 길드들이 있는데요, 전 자신의 어려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한은 은근히 그런 쪽지들을 보낸 이들을 타이르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타이르는 말로만 끝나서는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자꾸 귀찮게 하는 분이나 길드에게는 제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직접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리저드맨 오만 마리와 싸울 수 있는 이벤트 말이지요." 다시 말해 날 귀찮게 하면 리저드맨으로 몽땅 밟아 버릴 거란 협박이었다. 유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유저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특히 청탁을 목적으로 그를 기다렸던 이들은 재빨리 유한의 곁에서 물러났다. 동영상으로 봤던 푸른새벽 길드의 참사를 자신들이 겪고 싶지는 않았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지그 님, 그럼 즐거운 게임 하십시오." "넵, 안녕히 가십시오." 인터뷰를 마친 미루는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유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리저드맨의 리자도 언급하는 유저들이 없었다. 다가온 유저들도 그저 수리나 해 달라고 온 이들뿐. 이제 귀찮은 일은 없어졌다. 남은 것은 게임을 즐기면서, 다시 해커를 찾는 일뿐이다. (2) 인터뷰를 끝낸 유한은 NPC 대장장이들을 찾아갔다. 오너가 기약 없이 휴점을 선언한 덕분에, 그동안 NPC 대장장이들은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앗! 지그 님 오셨습니까?" "모두 잘 지냈어요? 이런, 못 본 사이에 살들이 쪘네." 유한의 말에 대장장이들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 곧 근육이 될 살이지요." 잠시 환담이 오가는데, NPC 대장장이 중 하나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그의 앞으로 나왔다. "아까 지그 님에게 소포가 왔습니다. 뭔지 몰라도 꽤 무겁던데요?" "아, 그거. 열지 말고 내 개인 작업실로 옮겨 놔요." 상자는 블라덱이 보낸 것이다. 놈에게서 돌려받은 바츠의 아이템이 그 안에 잔뜩 들어 있었다. NPC 대장장이들은 충실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개인 작업실에서 유한은 상자 속의 든 바츠의 무구들을 모두 꺼내 살펴보았다. 블라덱이 수작을 부려 몇 개 빠지지 않았나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것 참 감회가 새로운걸?" 블라덱을 윽박질러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골라낼 때는 돌려받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직접 이렇게 예전의 자신의 아이템을 만져 보자 머릿속에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바로 이 무구들을 썼을 때 경험했던 바츠의 기억이다. 이 도끼는 어느 필드에서 얻었던 것이고, 이 검으로 100마리째 트롤의 목을 베었더라는 등의 기억.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는 그런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결국 이 바츠의 아이템들이 열쇠인 셈이었다. 지워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뭐 좋지 않은 기억도 같이 있지만 말이야.' 지금 유한이 쥔 '원령의 검'은 퇴학된 다음 날 하루 종일 캡슐에 처박혀 몬스터를 상대로 미친 듯이 휘둘렀던 검이다. 본래 상점표의 검이었지만, 리치라든가, 좀비 나이트, 자이언트 스켈레톤 같은 중상 급 언데드들을 죽이다 보니 그렇게 변해 버렸다. 무엇을 얼마나 죽였는지, 어떤 조건을 맞춰서 검이 그렇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울분을 토하고 풀어 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유한은 쓴웃음을 짓다가 원령의 검을 상자 안에 도로 넣었다. 일단은 이 무구들을 고이 모셔 두기로 했다. 추억 어린 바츠의 장비기는 하지만, 착용 조건이 맞지 않는 것들도 많았고, 직업상 사용하기엔 너무 튀는 것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C급 최상에서 B급의 무구들로, 개중엔 흔하지 않은 레어 품목도 있다.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무구들이니 잘 보관해 두어야 한다. 일단 유한은 상자에 자물쇠를 채우고 개인 작업실 바닥 아래 묻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으면 꺼내야지.' 그러나 되도록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쓸 무기는 스스로 만들어도 충분하니까. 거기다 바츠와 지그는 다르다. 다른 캐릭터만큼이나 플레이 스타일도, 대인 관계도 모두 다르다. 그래선지 바츠가 썼던 것은 지그가 쓰기에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대장간 문 열고 일합시다!" 일련의 작업을 끝낸 유한은 NPC 대장장이들에게 대장간 개점을 지시했다. 대장장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업장으로 달려가 고로에 불을 지피고 쇠를 뜨겁게 달구었다. 조용하던 숲 속에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어머, 대장간 열렸네!" 밖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채린이 유한의 개인 작업실에 불쑥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선지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안녕, 시아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난 별일 없었어." 유한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채린도 손을 들어 올렸다. 유한은 그것을 인사라고 생각했다. 채린의 주먹이 자신의 뺨을 질풍같이 후려갈기기 전까지. "크엑! 뭐, 뭐야!" "리지스가 너 접속한 거 보면 한 대 때려 주라고 하더라." 악의는 없었다는 듯, 채린은 사내아이처럼 씩 웃었다. "아놔, 그 기집애가!" "네가 투덜거려선 안 되지. 네가 잠수하는 바람에 리지스가 무척 고생했단 말이야. 드워프 철이 모자라 계약한 무기들의 납품을 보류하거나 미룬다고 쫓아다닌 것은 물론이고, 브로인 성의 무기점도 문을 닫아야 했다고." "아..." 유한은 일단 몰려드는 유저들을 피한다고 바빠서 그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리지스에 대해서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리지스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다이노스 왕국에 식량과 아이템을 팔러 갔어." "다이노스 왕국? 그런 나라도 있었나?" 유한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국가들은 다 외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노스 왕국이라는 나라는 처음 들어 보았다. 혹시 그사이 업데이트하고 새로 생겨난 나라라도 되는지? "아, 넌 일주일 동안 접속 안 했으니 몰랐겠구나. 다이노스 왕국은 얼마 전에 리저드맨들이 세운 나라야." "엥? 리저드맨들이 나라를 세웠다고?" 채린의 말에 따르면 지난번에 유한을 도우러 왔던 리저드 족장, 아니 리저드 히어로가 다시 키예프 공국으로 돌아가 리저드맨들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니, 걔들은 머리가 좀 둔할 텐데 무슨 수로 건국을?" "인간들의 체제를 보고 흉내 낸 모양이야." 이 역시 드림맥스의 농간인가. 인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다 못해 방해하려고 나선. 어쨌거나 플레임 마운트에서 키예프 공국의 서쪽 땅까지 넓은 사막과 초원, 그리고 서남쪽의 습지가 모두 리저드맨들의 영역이 되었다고 한다. 땅 크기로 치면 웬만한 인간 나라들보다도 컸다. '리저드 족장 전직 한번 화려하게 하는구나.' 일개 부족의 족장이었다가 리저드맨들의 영웅이 되더니, 이제는 리저드 킹이 되었다. 물론 족장이나 리저드맨들이 이렇게 출세한 것은 다 유한이 철기 제작 기술을 전수해 준 덕분이다. 그들은 정말 유한에게 감사해야 한다. "지그 네가 돌아와서 기뻐. 안 그래도 활 수리를 어디서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거든." "그것 때문에 기쁜 거냐? 내가 수리를 못 했으면 별로 기쁘지 않았겠네." 유한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자 채린은 깔깔 웃으며 전방 유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휴, 자식, 삐쳤니? 농담이야, 농담. 설마 수리 때문에 그러겠어? 하지만 채린이 내놓은 바람의 활은 농담 같지 않은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내구가 거의 다 떨어져 있었으니까. "참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너 없는 사이 반 친구들이랑 사냥을 갔거든. 센 몹들이 많아서 정신없이 활을 쏘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레벨 많이 올렸겠다." "응, 근데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어." 지겹게 사냥만 한 것만은 아니다. 수다도 떨고, 돌발 퀘스트도 했지만 채린은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왠지 지루한 느낌. 유한이나 녀석의 동료들과 함께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항상 스릴과 재미가 있었다. 대장간에거 무기 판매를 도우며 시간을 보낼 때조차도 지루하다는 기분은 털끝만치도 느낀 적이 없었다. "잘 고쳐야 돼. 내구 일씩 닳을 때마다 열 방이다." "야, 니가 무슨 깡패냐?" "후훗, 위기가 있어야 재미도 있는 법이라고!" 돌발적인 위기(?) 상황. 협박 때문인지 황당함 때문인지, 유한의 손은 살짝 떨렸다. -바람의 활을 수리하셨습니다. 내구가 온전히 수리되었습니다. -스킬경험치를 65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레인 스킬의 지원을 받는 유한의 실력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이스, 지그! 아주 잘했어!" 칭찬과 함께 채린이 날린 주먹이 유한의 옆구리에 꽂혔다. "컥! 잘 고쳤는데 왜 때리냐?" "작업 재개 축하빵." 그러면서 채린은 개구쟁이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괜한 이유를 만들어 후려 패다니. 그래도 유한은 채린이 밉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일찍 접속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3) 유한의 복귀와 함께, 대장간은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미뤄진 주문들도 하나하나 완료해 나가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저들은 다시 무기를 매입하고 수리를 요청했다. 더 이상 리저드맨과 사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뷰 내용이 방송을 타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한은 하루하루 평화롭고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유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NPC 상인이 찾아와 주문을 요청한 것이다. "자물쇠를 백 개 만들어 달라고요?" "이 근방에서 지그 대장간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유한의 명성이 올랐다는 증거다. 안 그러면 유저가 아닌 NPC가 산속에 있는 그의 대장간에 찾아올 리 없다. 그러나 유한은 상인 NPC에 말에 살짝 실망했다. 그동안 지그표 무구가 꽤 먼 곳까지 팔려 나가고 호평을 받아서, 극찬까지는 아니라도 평이 좋다 이상의 소리는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유저는 몰라도 NPC들의 반응은 아직 그 정도인 모양이다. 하긴,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유한이 지금가지 만든 무구는 대부분 유저들에게 팔렸지 NPC들에게 사용된 적은 없으니까. "아바란은 원래부터 치안이 안 좋았습니다만, 요즘은 도둑들이 더 극성을 부리는지라 자물쇠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만들어 달라는 거로군요." "평이 좋은 대장장이인 만큼 자물쇠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런 건 NPC 대장장이에게나 주문할 것이지. 정중히 거절하려던 유한은 낯익은 효과음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창이 하나 펼쳐졌다. (<상인 홉스의 주문>) -아바란 각지에 도둑들이 횡행하여 자물쇠 수요가 커졌다고 합니다. 대장장이로서 명성과 실력을 올릴 좋은 기회다. 홉스에게 자물쇠 100개를 만들어 주지 않겠는가? *퀘스트 기한은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입니다. '실력을 올릴 좋은 기회라...' 퀘스트 창을 본 유한은 생각을 바꿨다. 요사이 무구만 만드는 터라 정밀 조립 스킬에 대한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직도 8랭크에 머물러 있었다. 조금만 더 올리면 7랭크고 그렇게 되면 공중 요새 퀘스트도 완수할 수 있다. "좋습니다. 그 주문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자물쇠 부속은 놋쇠로 만들어 주세요. 쇠로 된 것들은 쉽게 녹이 슬어 고장이 잘 나니까요." "그렇게 하죠." 주문 퀘스트를 받아들인 유한은 곧장 자물쇠 제작에 들어갔다. 우선 관련된 설계도를 구해서 구조와 조립 방법을 숙지한 다음, 합금 스킬로 충분한 양의 놋쇠괴를 제련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놋쇠괴를 다듬고 두들겨 가며 자물쇠 부품들은 만들었다. "내부 장치들은 이 정도면 됐고, 다음은 스프링인가?" 일일이 조그만 장치들을 만들고 조립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100개의 자물쇠 실린더 내부와 이에 맞는 열쇠를 모두 제각각 다르게 만들어야 하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쿠쿵! 자물쇠 제작에 실패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5 얻었습니다. "캬악! 이 쪼그만 녀석이!" 자물쇠는 겉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완성을 하더라도 열쇠를 꽂아 돌려 보고 잘되는가 안 되는가 최종적인 확인을 거쳐야 했다. 실패한 것들은 고정 리벳을 빼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해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 -쓸만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40 얻었습니다. -단순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오크도 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2 얻었습니다. -정교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도둑이 절망할 듯합니다. -스킬 경험치를 65 얻었습니다. 만들다 보니 잘된 것도 있고, 못된 것들도 있었다. 유한은 '헐거운', '단순한', '불량한'이란 말이 붙은 자물쇠는 폐기하고, '튼튼한', '정교한', '쓸만한'이란 말이 붙은 자물쇠는 납품용으로 골라 놓았다. 불량품을 납품했다간 욕을 먹고 명성도 깎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자물쇠 100개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자물쇠를 만들고 뜯고 버리기를 되풀이해야 할 판이다. 다 정밀 조립 스킬의 랭크가 낮은 탓이었고, 지금까지 무구 생산에 유용하게 활용했던 그레인 스킬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로지 노력과 인내심만이 필요할 뿐이다. "뭐 그래도 하다 보니 요령은 알겠군." 만들면 만들수록 품질도 나아지고 작업 속도도 빨라졌다. 실패할 때마다 뜯고 나아지고 작업 속도도 빨라졌다. 실패할 때마다 뜯고 조립하길 되풀이하다 보니, 자연스레 머리와 손이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좋았어! 앞으로 삼십 개만 더 만들면..." 유한은 완성된 자물쇠를 놓아두려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방금 전까지 납품용으로 선별해 놓은 자물쇠는 모두 69개, 헤아리기 쉽게 10개씩 차례로 줄을 맞춰 놓았는데, 절반 정도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물쇠가 발이 달려 도망을 가진 않았을 것이고,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았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유한은 금방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슬그머니 출입문으로 빠져나가려던 포포와 눈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삐잇!" "이 망할 놈의 닭둘기 쉐이가!" 사실 닭둘기라 칭함은 옳지 않았다. 요사이 빠른 성장을 보이는 포포는 개만 한 덩치로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어리만 커졌을 뿐. 생긴 것이나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녀석은 유한이 홧김에 집어 던진 장도리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후다닥 달아났다. "어이구, 두(頭)야. 어째 하루 종일 쳐먹고도 또 먹냐그래?" 정체불명의 불가사리 생물 포포. 녀석은 이제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었다. 대장간에 들른 유저들이 쇠를 먹는 포포를 보고 신기해서 제보를 한 덕분이다. 유저들이 신기하고 귀엽다며 쇳조각이나 고철이 된 무기를 던져 준 덕분에 포포는 나날이 덩치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진 만큼 간덩이도 커졌는지, 녀석은 예전보다도 더 무구 훔쳐 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비싸고 질 좋은 것들만 골라서. "리지스 녀석, 자기가 키우기로 했으면 관리도 좀 잘하지." 투덜거리던 유한은 빗장으로 문을 꼭 닫아 잠갔다. 그렇게 며칠 더 작업에 집중한 끝에 소실한 분량도 채울 수 있었고, 나머지 주문량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에고, 드디어 이게 마지막인가?" 유한은 마지막으로 만든 자물쇠가 제대로 작동하길 바라며 열쇠를 끼워 돌려 보았다. 그러자 안내창이 뜨기를... -튼튼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금고를 든든히 지켜 줄 것 같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70 얻었습니다. -정밀 조립 스킬이 7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인내심이 3 올랐습니다. "앗싸! 드디어 7랭크다!" 이제 공중 요새 퀘스트를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대형 톱니바퀴와 제어장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뭐가 7랭크로 올랐는데?" 유한은 깜짝 놀랐다. 송코가 창문으로 작업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 숨기는 것은 없었지만, 갑자기 말을 거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 기척이라도 좀 하세요!" "아아, 미안. 뭐 하나 싶어서." 송코는 유한이 한쪽에 모아 놓은 100개의 자물쇠와 실패해서 수북하게 버려진 자물쇠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다 만든 거야?" "간신히요." "그랬구나. 리지스가 너 아직까지 자물쇠 만드나 살펴 보고 오라고 해서 말이야." 유한이 돈 되는 무구는 만들지 않고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혀 자물쇠랑 씨름하고 있자, 리지스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드워프의 철 때문에 NPC 대장장이들도 꽤 좋은 무구를 만들지만, 유한이 만든 것에 비하면 떨어지는 품질이었다. 그래서 같은 지그 대장간 무구라도, 유한이 직접 만든 것은 더 비싸게 팔렸다. 그렇기에 리지스 입장에선 유한이 일을 안 할수록 손해였다. "벌써 끝냈을 것을, 그놈의 닭둘기가 중간에 얌얌쩝쩝을 하는 바람에 늦어 버렸지 뭡니까." "하하하, 좀 봐줘. 포포도 제 밥벌이는 하고 있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사실 포포가 밥, 아니 쇠만 축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녀석은 그 불가사리한 능력과 희귀한 존재성 덕분에 사람을, 특히 여성 유저들을 불러 모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딱히 무기를 구할 일이 없는 유저들도 놈을 구경하러 왔다가 기념품을 겸해서 무구를 사 가지고 가곤 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본문에서는 개중에서 라고 표기되었음.) 사료(?) 주고 키우라며, 돈을 주거나 철괴나 고철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쇠를 먹는 포포, 녀석은 어느새 지그 대장간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지그 님, 자물쇠는 다 만드셨습니까?" "아, 방금 다 끝냈습니다." 마침 주어진 기한이 다 되어 NPC 상인 홉스가 물건을 수령받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자물쇠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해 보더니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 역시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군요. 하나같이 질이 좋아요. 이만하면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겠습니다." -(<상인 홉스의 주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경험치 600을 얻었습니다. -4,500 골드를 얻었습니다. -명성이 100 올랐습니다. 주문 퀘스트치곤 후하지만, 그동안 유한이 고생한 데 비하면 썩 좋은 보상은 아니었다. 유한은 그저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린 데 만족하기로 했다. "이렇게 자물쇠를 잘 만드시니 다른 걸 부탁해도 되겠군요. 이번엔 도어 핸들(Door Handle)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도어 핸들이요?" 도어 핸들은 잠금장치가 달린 문손잡이를 말한다. 역시나 주문 퀘스트였는지 관련 창이 떠올랐다. 자물쇠보다 제작이 어려운지 수효는 50개 정도, 보상이 좀 더 낫겠다 싶었지만, 유한은 이 주문 퀘스트를 받지 않았다. 정밀 조립 스킬이 7랭크로 올랐는지 이제 공중 요새 퀘스트를 수행하고 싶어진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 주문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요새 일이 꽤 많아서요." "그렇습니까? 이거 아쉬운 일이군요." 서운한 표정을 지은 홉스는 유한에게 명함을 하나 건네주고 갔다. 나중에 일거리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면서. "좋아, 이제 슬슬 준비해 볼까?" "무슨 준비?" 유한이 주먹을 불끈 쥐자, 송코가 옆에서 물었다. 혼잣말을 한다고 내뱉었던 것을 들은 모양이다. "자, 자물쇠 만든다고 대장간 일을 못했으니까, 이제 일 좀 하려고요." "그럼 수고해." 유한의 내심을 모르는 송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볼일을 보러 갔다. 사실 말해 줘도 상관없는 일이다. 예전에 받았던 퀘스트를 이제 수행하러 가겠다고 하면 누가 말리겠는가, 말릴 사람도 없을뿐더러 권한도 없다. '하지만 이걸 이야기하면 들러붙는 녀석들이 나오겠지.' 리지스는 돈 냄새가 난다며 덥석 끼어들 것이고 옌스는 바츠가 가는 곳으면 나도 간다며 따라올 게 틀림없다. 송코야 괜찮지만, 리지스의 머슴과 다름없으니 말하는 즉시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 유한은 송코는 몰라도 리지스와 옌스를 데리고 가고 싶진 않았다. 그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무랄 데 없는 능력을 지녔지만, 스토커 기질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스토킹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만은 놔두고 가고 싶었다. '아무튼 가기 전에 준비를 해 놓아야겠어.' 유한은 여행 준비를 하는 동시에, 초열탄이라든가 드워프의 철을 충분히 만들어 놓았다. 자신이 자릴 비운 동안에도 대장간에서 NPC 대장장이들이 무구 생산을 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한은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옛 동지들, 공중 요새 퀘스트 멤버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각자 퀘스트 진행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언제든지 불러요. 이미 부유 마법을 다 배우고 친구들이랑 레벨업을 하는 중이니까. -헤헷! 오늘 로므나 유적에서 성수를 떴어요! 에이린은 언제든 출격 가능 lㅇ.ㅇl -데보라가 마지막 흔적을 남긴 던전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로키가 아직 덜 끝난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좋아, 이제 채린이에게만 말하면 돼.' 채린은 이미 바람의 돌을 손에 넣었다. 그래서 유한의 무구 판매를 돕거나 리지스의 상행에 호위로 나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한은 상점 옆에서 무구 판매를 하고 있는 채린을 불러다가 공중 요새 퀘스트를 완수하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우리만 가는 거야?" "응, 이번은 우리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했어." "왜? 같이 가면 좋잖아." "공중 요새 퀘스트에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굳이 갈 필요 있겠어? 게다가 다들 바쁘잖아." 유한의 말대로 리지스는 아바란 왕국에서 자신의 상권을 구축하느라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옌스는 무엇을 하는지 며칠간 대장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갔다 오자." 유한의 말에 채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리지스에게 말해 놓고 가는 게 좋겠어." "시, 시아야!" 유한은 말리고 싶었다. 리지스라면 분명 아무리 바빠도 돈줄 1호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간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 하지만 유한은 채린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붙들기도 전에 그녀는 리지스 앞에 달려가 있었다. '크윽, 돈벌레는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 하나?' 유한은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리지스는 채린의 설명을 듣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잘 다녀와. 대신 레어 아이템 건지면 내 몫도 떼 놓고." '이, 이상해! 리지스 녀석이 맞나?' 뒤에서 지켜보던 유한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리지스의 계정을 해킹한 해커가 아닐까? 정말 해킹을 당했거나 아님 리지스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이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당장에 보따리를 싼 유한은 채린과 함께 서둘러 노스아크로 떠났다. -------------------- "훗! 우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바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험을 같이 떠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니었다. 유한과 채린을 배웅한 리지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옌스가 서 있었다. 그는 유한과 채린이 떠나기 전에 대장간에 와 있었다. 거기다 유한과 채린의 은밀한 대화까지 엿들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가만있어야 할까?" "무슨 소리! 언제 이 몸이 누구 허락 맡고 다닌 줄 아슈?"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골칫덩이다. "그럼 너도 나랑 똑같은 생각이겠네." "아무렴, 누님. 난 누구한테 따돌림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성인군자가 아니오. 우릴 떼어 버리려고 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야지, 흐흐흐!" 둘 다 이야기를 듣고도 따라가겠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본 송코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호호호, 어떤 얼굴을 할지 기대되는걸." "아마 기겁을 하겠지." 얼마 후, 리지스와 옌스의 모습이 대장간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송코만이 그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었다. < 2. 다시 북으로 >>> <<< 3. 공중 요새 입성 > (1) 유한은 케이트 산맥을 넘어 바르카스 왕국으로 갔다. 발덴에서 몇 가지 소모품을 산 뒤 역마차를 이용해 노스아크 왕국으로 가려는 것이다. 과거 유한이 뚫어 놓은 교역로를 통해 적지 않은 인원과 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역마차 여행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드림맥스는 유저들이 지루하지 말라고 배려하는 측면에서 간혹 몬스터나 산적 NPC가 마차를 습격하는 소소한 이벤트를 준비해 두었다. "암 브레이크!" "크엑!" "애로우 레인(Arrow Rain)!" "으아아! 도망치자!" 약한 유저에겐 재앙 같은 일이지만, 이미 레벨 100을 넘긴 유한과 채린에게 있어서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사나운 네메시스 산맥의 몬스터들도 두 사람에겐 몸풀이용일 뿐. "무역로라고 해 놓고 이렇게 몬스터가 나와도 되는 거야?" 채린의 물음에 유한은 피식 웃었다. "등굣길에도 몹이 튀어나오는 게 판타지 세상이잖아." "하긴, 현실에는 그런 게 없어서 다행이다, 그치?" "현실에도 있어. 골목마다 레벨 18의 양아치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니까." 레벨 18의 몬스터 양아치. 선공 성향에 다수 인식이며, 주요 스킬은 삥 뜯기, 껌 씹기, 줘 패기, 다굴 치기 등이다. 물리치면 '두고 보자' 라는 전형적인 대사를 남기고 도망가며, 다음에 같은 필드를 지나가면 '형님 양아치' 몬스터가 가로막곤 한다. 떨어트리는 아이템은 담배와 라이터, 커터 칼, 각목 등등. "호호호, 너 많이 당해 봤구나?" "흥, 이젠 안 당한다고." 현실에선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싸운다 해도 이제는 지지 않을 실력을 키워 놓았다. 블라덱 일당을 상대로 딱 1번밖에 발휘하지 못했지만. "손님들, 마차에 타십쇼. 곧 출발할 겁니다." 몬스터를 쫓아 버린 유한과 채린이 마차에 타자 역마차는 다시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역마차가 국경에 다다랐을 무렵. "마부 아저씨! 마차 좀 세워 주세요." 유한은 중간에 역마차에서 내렸다. 채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뒤이어 내렸다. "왜 그래?" "시아 넌 마차를 타고 먼저 공중 요새로 가. 난 너랑 같이 갈 수 없어."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같이 잘 와 놓고." "그게... 사정이 좀 있어." 그 사정이란 메카 드래곤 때문이다. 메카 드래곤의 난동 때문에 유한은 노스아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분명 드워프들은 관련자를 잡으려 할 게 틀림없다. 갈리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조수였던 유한도. 수배령이 내려져 있을지도 모르기에, 유한은 몰래 노스아크에 잠입해서 공중 요새에 가기로 한 것이다. 아니, 십중팔구 수배령이 내려져 있을 것이다. "무슨 사정인데? 꼴찌로 도착하면 벌칙받는단 말이야." "벌칙? 그런 건 퀘스트에 없었는데?" "내가 만든 거야. 딴 애들한테 그렇게 한다고 쪽지로 돌렸어." "큭! 그런 건 뭐 하러 만든 거야?" "그냥 모이면 재미없잖아. 긴장감이 좀 있어야지." 채린이답다고 할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휴, 너도 참... 얼른 마차에 타! 그냥 가 버리겠다." "야, 너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줄 알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친구를 두고 갈 생각은 없어."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결국 역마차는 그대로 떠났고, 유한과 채린은 도보로 국경을 넘었다. 물론 검문소를 피하기 위해 눈 덮인 숲 속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대체 뭐 때문에 검문을 피하니? 드워프에게 사기라도 쳤어?" "그런 건 아니지만, 꽤 곤란하게 만든 건 사실이야." 유한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나무 뒤에서 뭔가 불쑥불쑥 뛰어나왔다. 놀란 유한이 허리에 손을 가져간 순간, 석궁 화살 하나가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움직이지 마라! 허튼 행동을 하면 다음번엔 머리에 꽂히게 될 것이다." 유한과 채린은 포위한 것은 드워프 병사들이었다. 보통 병사들과 다르게 그들은 하얗게 칠한 가죽 갑옷을 입고 숏소드와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린 이곳을 순찰 중인 노스아크의 드워프 레인저들이다. 너희는 누군데 국경 초소를 우회하여 이리로 오느냐?" 드워프 레인저라. 유한은 뭔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우습게 보이지는 않았다. 척 봐도 레벨이 꽤 높아 보이는 움직임들이다. "첩자라도 되느냐? 어느 나라에서 보냈느냐?" "아닙니다. 저흰 몬스터에게 쫓기다 길을 잃었습니다." 유한은 스스로 생각해도 적당하다 싶은 핑계를 내뱉었다. 무엇보다 더듬지도 않고 아주 침착하게 잘 말했다. 이대로 잘 넘어갈 수 있을지도? "대장님! 저자는..." 그러나 뭔가 표정이 심상찮은 드워프가 레인저 대장에게 귓속말을 하는 순간,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다. "지그? 저자가 메카 드래곤을 만든 갈리의 조수 지그란 말인가?" "틀림없습니다. 예전에 대공방에서 보초를 설 때 봤습니다." 레인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명령을 내렸다. "포박해라. 그리고 곧바로 베르겐의 치안대로 송치하라." "잠깐만요. 쟤는 상관없으니 풀어 주세요!" "닥쳐라! 죄인이 말이 많구나!" 유한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국경을 우회했는데, 이렇게 잡히고 말다니, 거기다 채린까지 끌어들여서. '으악!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리냐고요!' -------------------- 유한과 채린은 베르겐의 구치소에 갇혔다. 유한은 이미 한 번 와 본 적이 있지만, 감옥에 처음 와본 채린은 연방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기하면서도 약간 두려운 모양이었다.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넌 괜찮을 거야. 단순 동행이었으니까." "그럼 넌?" "나야 뭐... 괜찮아.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경험치 깎이고 명성치 떨어지는 정도에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처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메카 드래곤 제작에 한 팔 거들었다고 알려지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때 피해를 입은 유저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게임을 접어야 하거나 캐릭터를 바꿔야 할지도. 사정을 알게 된 채린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메카 드래곤에 연관된 거야?" "에휴, 나도 몰라. 재수 없이 웬 괴짜 드워프에게 걸려 가지고..." 유한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드워프 병사가 와서 감방 문을 열더니 유한을 불러냈다. "죄인 지그는 어서 나오도록." "어디로 가는 겁니까? 처형대로 가는 겁니까?" "나도 몰라." "지그야!" 채린은 유한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유한은 괜찮다고, 너는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안심시키며 떠났다. 유한을 빼낸 드워프 병사는 그를 어느 어둡고 덩그런 방에 밀어 넣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한의 앞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환한 빛에는 6명의 드워프가 앉아 있었다. 유한은 눈이 부셔서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네가 지그라는 인간 대장장이냐?" "그렇습니다만... 어르신들은 뉘십니까?" 그들이 내보이는 기백이나, 대표해서 말하는 이의 근엄한 목소리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드워프 중에서도 보통 신분이 아닌 자들일 가능성이 컸다. 대단한 신분의 소유자들답게, 그들은 유한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고 자신들이 알고 싶은 질문만 계속했다. "갈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그날 일이 터지고 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토르 님께 맹세코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느냐?" 토르는 대장장이의 신. 드워프와 대장장이들에게는 주신(主神)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들은 유한도 대장장이니 토르에 맹세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유한은 토르든 뭐든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유저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갈리가 어디 있는지 안다면 먼저 고자질해 바쳤을 것이다. "예, 토르 님께 맹세코 전 정말 모릅니다." 여섯 드워프들은 잠시 수군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의 말을 믿어 주는 듯했다. "그럼 그것은 되었고, 얼마 전 너와 국경을 넘은 이가 시아라는 여자 궁수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예전에 너와 함께 노스아크 북쪽에서 공중 요새도 발견했으렸다? 다른 세 명의 인간들과 함께." "그렇습니다만,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유저가 발견한 유적은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국가에 자동적으로 통보가 된다. 당연히 노스아크 연맹에서도 공중 요새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지그여, 우리는 갈리의 수배 전단을 각지에 돌렸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아느냐?" 생각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NPC 병사에게 손찌검만 해도 수배 퀘스트에 얼굴과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수배 시스템이다. 유한은 메카 드래곤 사태에 연관되어 있는 인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미 지그에 대한 수배 퀘스트가 발동하고, 유저들이 불은 켜고 찾는 상황이 벌어져야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인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공중 요새와 관련된? "네가 현상금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네가 이후에 어떤 행적을 보이는가 지켜봐야 했기에." "저의 행적이요?" "네가 발견한 공중 요새에 우리도 조사단을 보냈다. 그러나 몇 차례 시도에도 불구하고 왕궁을 조사하는 것에 실패했다." "..." "너는 어땠느냐? 너의 일행도 왕궁에 들어가지 못했느냐?" "아니요. 들어갔었습니다." 드워프들 사이에서 '역시'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거기서 왕을 만났으렸다? 그자가 분명 너와 네 동료들에게 시킨 것이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만... 어떻게 아신 겁니까?" 유한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 싶다가 이들이 '드워프'라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우린 최초 발견자인 너희들의 행적을 주시했다. 물론 어떤 수단에 의해 가능했는지는 말해 줄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너희 다섯 중에 너를 포함해 세 명의 행보가 무척 수상했다는 것이다." "수상하다고요?" "한 사람은 역사에서 잊혀진 성지 로므나를 찾았고, 또 한 사람은 엘프의 숲에서 바람의 날개를 찾았다. 그리고 너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기술을 연마했지. 덕분에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하게 되었다." 거기까지 말한 드워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결정적인 단어를 뱉어 냈다. "미케니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유한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 대한 해답은 내려놓고 있었으니까. "드래곤보다 사악한 놈들이 아닙니까." 그의 대답에 드워프의 입에서 만족한 미소가 걸렸다. 심문은 거기서 끝났다. "따라와라, 지그여.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2) 유한은 얼마 후 채린과 함께 방면되었다. 치안대의 드워프들은 펄쩍 뛰었지만, 윗선에서의 결정을 거스를 수 없었다. 두 사람을 풀어 주고 모든 아이템들을 돌려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풀려난 거야?"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거래를 했지." "거래?" 어차피 채린도 알게 될 것, 유한은 여섯 드워프와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채린이 놀라 했다. "헤, 정말이야?" "그래서 나도 고민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새 얼음 궁전이 있는 계곡 입구에 다다랐다. 이미 다른 동료들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베르겐에서 잠깐 콩밥을 먹은 바람에 유한과 채린은 꼴찌의 명예를 안게 되었다. "언니이~!" 에이린이 달려와 채린의 품에 안겼다. "반가워, 그런데 로므나의 성수는 떠 왔어?" "여기 있지롱, 헤헤!" 그러면서 에이린이 품속에서 꺼내 보인 것은 작은 크리스털 병이었다. 그 안에는 파란색 액체가 들어 있었는데 은은한 향과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언니, 내가 로므나 성지를 어떻게 찾았냐 하면..." 에이린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조잘조잘 잘도 늘어놓았다. 그녀가 성지를 발견한 것은 금력(金力)의 힘 때문이었다. 푸른 새벽 길드와 길드전을 치른 후, 루벨로 돌아온 그녀는 정보 길드의 루벨 지부장과 만났다. 아무리 공략 게시판을 찾아보아도, 주위의 친분 있는 유저들에게 물어 보아도 로므나의 성지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한 것이다. 막대한 돈을 들인 만큼 정보 길드는 돈값을 톡톡히 했다. 몇 달간 찾아 해매도 찾을 수 없었던 로므나의 성지를 단 열흘 만에 알아낸 것이다. 성지 로므나는 아르페디아 대륙 남단에 있었다. 엘프의 숲보다도 더 남쪽에 원시림에 위치한 성지까지 찾아가느라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다행히 성지의 버려진 신전에서 성수를 뜰 수 있었다. "뭐 난 죽어라고 부유 마법을 배운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펜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노턴 마탑에서 자신이 고생한 바를 이야기했다. 노턴 마탑은 브로딘 왕국에 있었는데 테스트를 통과한 마법사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오펜은 마탑의 테스트에 통과했고, 마탑의 도서관에서 그가 배우고 싶은 부유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 마법을 익히는 조건이 꽤 까다로워 시간이 제법 걸렸다고 한다. "로키 형은 데보라의 흔적을 발견했다면서요?" 유한은 데보라의 흔적을 쫓고 있던 로키에게 물었다. 그에게는 데보라가 남긴 가디언의 설계도가 있었기에 데보라의 행적에 대해 이바니우스 3세 못지않게 궁금해 했다. "운 좋게 카잔 반도 끝에서 데보라가 잠시 머물렀던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로키가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자 유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데요?" "던전에서 발견한 건데 너한테 더 쓸모 있을 것 같아서." 유한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쳤다. -(=가디언 설계도=) '블랙 아이언'의 하체와 팔, 다리의 설계도. 설계도의 나머지 부분을 찾아 겹치면 블랙 아이언을 완성할 수 있다. *제조 시 필요조건 -합금 스킬 5랭크 이상 -정밀 조립 스킬 3랭크 이상 *완성 후 소환마법 7랭크 이상의 마법사 협조 필요. '우와!' 두루마리의 정체를 확인한 유한은 두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내심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디언의 나머지 반쪽 설계도일 줄은 몰랐다. "이, 이걸 나한테 줘도 돼요?"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내가 팔면 수백만 골드는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걸 선뜻 주다니 로키의 간이 큰 건지, 아님 물건의 가치를 모르는 건지. 로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텐 가방만 비좁게 하는 물건일 뿐이다." "고마워요, 형.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었어요. 나중에 이 은혜 갚을게요." 유한은 두루마리를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뭐에요? 뭔데 그래요?" 에이린이 역시나 그녀답게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와 물었다. 유한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가디언의 존재는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무것도 아냐." "에이, 뭔가 중요한 것 같은데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유한이 인상까지 쓰며 딱 잡아떼자 에이린은 관심을 거두었다. "치,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그런데, 오빠와 언니가 꼴찌로 도착했으니 벌칙을 받아야 해요." 벌칙은 제일 늦게 온 사람이 제일 빨리 온 사람을 업고 공중 요새까지 가기. 그런데 유한과 채린이 함께 왔으니 두 사람이 공동 꼴찌다. 그래서 유한은 오펜을, 그리고 채린은 에이린을 업었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헤헤헷. 신난다." 일행은 일전에 유한이 계곡 입구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중간에 마주치는 유저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지만, 유한은 무시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둡고 비좁은 통로를 지나자 낯익은 도시와 왕궁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유한들이 최초로 발견한 미케니아의 공중 요새 도시였다. 처음 발견했을 땐 정말 유령의 도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활기가 넘쳤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상인 유저들이 텅 빈 상점이나 식당을 대신해 좌판을 벌였다. 그리고 그런 유저들 사이를 원래 주인인 스펙터들이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사람이 꽤 늘었군." "우리가 다녀간 다음에 미로 같은 던전이 발견되었거든요. 거기서 고대 유적에 대한 힌트나 유물을 얻을 수 있대요." 에이린이 채린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기괴한 도자기와 석판, 처음 보는 무기들을 들고서 희희낙락하는 유저들이 종종 보였다. 그들은 서로 단서를 나누거나 정보를 주고받았다. "일설에 따르면 새로운 공중 요새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에이, 설마!" "실제로 단서를 찾은 파티들이 있다던데요?" "그보다 난 저 왕궁에 한번 들어가고 싶어요. 정말 최초 발견자 말고는 못 들어가는 겁니까?" 유저들의 최고 관심은 뭐니 뭐니 해도 왕궁이었다. 최초 발견자에 특혜가 있다는 건 알지만, 저 큰 왕궁을 다섯 사람만 독차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유저들은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꼼수를 찾았다. 비밀 통로를 찾는다거나, 월담을 시도하거나. 그중엔 왕궁을 지키는 키메라에게 덤비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둔한 만큼 HP도 많은 키메라라서 쓰러트리기가 쉽지 않았다. 힘들게 쓰러트린다 해도 얼마 뒤에 또 다른 놈이 리젠되어 나타나곤 했다. "근데 최초 발견자들은 뭐 하는 거죠?" "글쎄요. 다른데서 광렙하고 있을지 모르죠." 유한 일행은 되도록 유저들을 피해 다녔다. 공중 요새를 발견하고 나왔을 때처럼, 열광의 포위망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간 꼼짝달싹 못한다. 그래서 일행은 으슥한 골목길을 택해 왕궁으로 다가갔다. 조용히 왕궁으로 가는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은 장난기 다분한 몇 마리의 스펙터들뿐이었다. (3) 왕궁 앞에는 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왕궁 안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거나, 엄청난 위력의 무기를 얻을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었다.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볼까 궁리 중인 유저들을 헤치고 꽤 인상이 안 좋은 녀석 셋이 나타났다. 선두에 도끼를 든 덩치 큰 녀석의 이름은 라스트모히칸이었다. 녀석의 뒤로 건들거리는 기사와 도적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예전에 유한과 부딫친 적이 있는 비곗덩어리와 녀석의 똘마니 동생들이었다. "형, 정말 우리가 저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잖아요." "훗! 나만 믿어. 다른 녀석들은 명성이 낮아서 저길 못들어간 거야. 우린 그동안 주야장천 명성치만 높이는 퀘스트를 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대체 명성치가 높으면 공중 요새의 왕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린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지? 똘마니 동생들은 못 미더운 눈빛을 했지만, 별말 없이 라스트모히칸을 따랐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그들은 항상 형님이 하자는 대로 했다. 라스트모히칸은 한껏 거들먹거리며 왕궁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키메라들이 창을 교차시키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지! 이곳은 허락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야!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라스트모히칸이야. 명성이 자그마치 일만이야, 일만. 이 정도면 왕궁쯤은 누구의 허락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다고." 실제 다른 왕궁들은 그랬다. 명성 일만 정도 되면 '국왕도 무시하지 않는 인재'로 취급하니까. 라스트모히칸은 눈앞의 키메라들을 떠밀고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키메라들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허락을 받을 테니까 왕 불러와, 왕." "국왕 폐하께서는 천민 따위와 만나시지 않는다." 천민이라니, 명성치 1만을 무시하는 것인가. 출입은 둘째 치고 이런 언사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것들이 정말!" 화가 난 비곗덩어리는 자신의 애병인 오크니스 엑스를 치켜들었다. 어둠의 성에서 암흑 병사들을 학살한 자신의 실력에, 숙련도가 극에 달한 오크니스 엑스라면 이깟 키메라들은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퍽! "크엑!" 하지만 이게 웬걸. 키메라는 무척이나 강했다. 레벨 105인 비곗덩어리는 키메라가 휘두른 창대에 얻어맞고 공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킥킥킥!" "풋풋풋!"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내심 견제하고 있던 터라, 남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으로 느껴졌다. "뒈지고 싶나! 어떤 새끼가 이빨 까고 히죽거려!" 벌떡 일어난 라스트모히칸은 유저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를 똘마니 동생들이 말리고 나섰다. "형, 그러면 안돼. 이건 게임이야." "맞아요. 깡패라 소문나면 여자도 못 사귀어요." "놔, 자식들아! 아직 안 끝났어." 그저 방심해서 그런 것뿐이다. 라스트모히칸이 다시 도끼를 들고 키메라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이봐요. 능력이 안 되면 뒤로 비키시죠." 그를 제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대장장이 복장에 다소 낯익은 유저였는데,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뭐야? 넌 뭔데 감히 나에게... 허걱." 뭐라고 쏘아 주려던 라스트모히칸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유한의 뒤에 서 있는 로키가 뿜어낸 투기에 쫄아 버린 것이다. '무, 무슨 놈의 눈빛이 저리 살벌하다냐?' 자신도 제법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저런 눈빛을 한 자는 매우 위험한 부류에 속했다. 조폭 아니면 상당한 수련을 쌓은 무술인. 어느 쪽이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준은 아니다. 유한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는 비곗덩어리를 향해 피식 웃어 주고는 키메라에게 다가갔다. "이봐, 우린 들어가도 되지?" "지그 님과 일행 분이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키메라는 조금 전과 달리 너무도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이에 가까운 곳에 있던 유저가 거칠게 항의했다. "야, 우린 안 된다며!" "그거야 너희는 천민에 불과하니까." "그럼 저들은?" "저분들은 국왕 폐하의 귀빈이다. 당연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대체 뭐가 다르기에 자신들은 천민이라 깔보고, 새로 나타난 5명은 귀빈이라 우대하는 건지.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저 5명은 최초로 공중 요새를 발견한 이들이었으니까. "저, 저거 시아네 패밀리잖아." "지그다!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인 지그도 있어!" 유한은 자신들을 향해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저들의 시선을 느끼며 너무도 당당히 왕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훗! 이런 맛에 게임을 한다니까!' 게임을 통한 대리 만족. 이것이야말로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목적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문득 유한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라스트모히칸과 똘마니 동생들이 있었다. '후, 이놈들을 이런 데서 또 보게 되는군.' 사실 라스트모히칸, 그러니까 비곗덩어리와는 저번에 조우한 적이 있었다. 파부치에게서 갓 독립했을 무렵, 친절하게 무기를 수리해 줬다. 물론 마음속으론 나중에 만나면 작살을 내 놓으리라 다짐했지만. '키메라한테 시켜서 떡이 될 때까지 패라고 할까?' 그러나 유한 마음속의 사악한 바츠는 그걸로는 안 된다느니, 98% 부족하다느니 말하고 있었다. 유한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래서 키메라에게 말하기를... "같이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가능할까?"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그 말이 왕궁 앞에 모인 모든 유저들의 귀를 번쩍 트이게 했다. "절 데려가 주세요!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 "저 돈 많아요!" 유저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유한은 이미 결정해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비곗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보셔, 라스트모히칸 님. 왕궁 안을 구경하고 싶으며 내가 데리고 들어갈 수도 있는데?" "정말입니까!" 비곗덩어리는 방금 전에 저 낯익은 유저가 누군지 생각났다. 바르카스 왕국의 수도 발덴에서 자신의 오크니스 엑스를 수리해 준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이곳 공중 요새의 최초 발견자이기도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님이랑 님 동생들을 데려가 줄게요." "시, 시키는 대로 하면요?" "싫으면 말고요." 유한이 등을 돌리려 하자 비곗덩어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뭐든지 부려 먹으십시오." 과연 키메라들은 비곗덩어리와 놈의 동생들을 막지 않았다. 유한은 비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 녀석들을 지그시 째려보았다. 역시 곽대발이 말한 대로 양아치들은 하이에나 정도밖에 안 되는 모양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잔인하지만 강하고 잘난 사람에게는 전혀 맥을 못 추는. '크크크, 아주 피눈물을 쏟게 만들어 주마.' 유한은 그렇게 작정하고 씨익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라스트모히칸과 녀석의 두 똘마니 동생은 따라서 웃을 따름이었다. < 3. 공중 요새 입성 >>> <<< 4. 미케니아의 부활 > (1) 대전의 커다란 의자에 머리에 왕관을 쓴 희뿌연 영체가 앉아 있었다. 바로 이바니우스 3세였다. "어서 오너라, 짐은 너희들이 오기만을 기다히고 있었노라."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유한은 일행의 대표로 대답했다. "그래, 과인의 부탁은?" "모두 수행했습니다. 여기 그 결과가 있습니다." 유한은 파티원들이 퀘스트를 수행한 결과물들은 이바니우스 3세에게 제출했다. 로키가 던전에서 가져온 데보라의 일기와 에이린이 떠온 로므나의 성수, 그리고 채린이 내놓은 바람의 날개. 이 중에서 이바니우스 3세는 바람의 날개를 보고 눈빛을 날카롭게 번득였다. 가느다란 그 눈빛에는 음흉함과 탐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대형 톱니바퀴 제작과 동력 제어장치의 제작, 그리고 부유 마법진을 그리는 일은 지금 즉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최선을 다해 달라." 유한의 시원한 대답에 이바니우스 3세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대전 한쪽에 서 있는 키메라에게 말했다. "저자를 공방으로 안내하고, 마법사는 요새 최하단으로 안내해 부유 마법진을 그리게 하라."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전에서 물러나기 전, 유한은 마음속의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뭔가?" "혹시 남바린이란 영지를 아십니까?" 이바니우스 3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지, 과거 짐의 영토였던 땅이니라. 그 땅을 다스리던 마도사 남바린은 짐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지." 역시 과거 남바린 영지 일대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을 쌓은 것은 미케니아 왕국이 맞았다. "듣자니 오래 전 그곳에 살던 드워프들이 모두 죽었던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겠습니까?" 유한의 물음에 이바니우스 3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왜 그것을 짐에게 묻느냐?" "폐하의 충성스런 신하가 다스리던 땅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폐하라면 아시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바니우스 3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잠시 말문을 닫고 있던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구나." "어째서입니까?" 유한을 노려보던 왕은 순순히 대답했다. "짐은 그 드워프들을 미케니아의 신민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남바린을 속이고 짐의 나라를 능멸하려 했다." "그래서 전부 죽이셨습니까?" "전부 죽이라 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뉘앙스. 드워프들이 반항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투였다. 그러나 애초에 잘못은 미케니아에 있었다. 평화롭게 살던 드워프들을 강제로 정복한 것은 미케니아였으니까. "짐이 잔인하다 탓하지 마라. 국가란 지배와 통제에 의해 안정을 찾는 체제이니까. 누구라도 원칙을 어기면 징벌을 받아야 한다. 어설픈 동정심은 분란을 잠재울 수 없다. 그래서 짐은 불씨를 꺼야만 한다. 왜? 그 작은 불씨 때문에 국가라는 큰 집이 모두 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바니우스 3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을 끄는 방법이 너무 막되먹었다. 무엇보다 남바린이란 영지는 검은 수염 드워프 일족의 터전 위에 강제로 쌓아 올려졌다. 미케니아란 국가도 그와 다를 바 없겠지. "그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같은 결정을 하실 겁니까?" "짐은 미케니아의 왕이다." "그렇습니까." 왕이 동문서답식으로 답했지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한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키메라를 따라 유한 일행은 대전을 나섰다. 영문을 알수 없던 라스트모히칸과 똘마니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걸으며 채린이 귓속말로 물었다. -지그야, 정말 공중 요새를 부활시켜도 되겠어? 채린은 유한과 함께 남바린의 지하 유적을 목격한 당사자다. 그곳에서 처참하게 학살당한 드워프의 모습이 아직 생생했다. 거기다 이바니우스 3세는 스스로를 정당하게 여기고 그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공중 요새를 다시 부활시켜도 되는 것인지? -훗, 게임일 뿐이야. 그리고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 마. 유한은 최대한 맑은 목소리로 채린을 안심시켰다. 이바니우스 3세가 악당이라 해서 부활시키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단지 게임일 뿐인데. 그리고 유한에게는 내심 한 가지 복안이 있었다. 베르겐에서 여섯 드워프들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하나 골치를 썩여야 했겠지만... "그런데 지그 님. 여긴 왜 빈 방뿐이죠? 소문에는 엄청난 재화가 이곳에 있다고 하던데요." 라스트모히칸은 괜히 유한에게 친근한 척 굴었다. 녀석은 일행을 따라오면서 복도 좌우의 방들을 살펴봤지만, 재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글쎄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보물은 없던데요." "설마요! 여긴 왕궁이잖아요!" '왕궁=보물 창고'라고 생각했던 라스트모히칸의 입장에선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자존심까지 접고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왕궁에 따라온 결과가 텅 빈 왕궁을 보는 것뿐이었나? 그는 이러한 허망한 결과를 절대 인정하기 싫었다. "그, 그래도 특별한 퀘스트를 줄 만한 NPC는 있겠죠?" "이 성에는 키메라와 스펙터인 왕밖에 없어요. 아마 퀘스트도 우리가 받은 게 유일할걸요." "컥! 그, 그럴 수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과 동생들이 들인 공이 얼마인가. 명성치가 높아야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주야장천 명성치 높이는 퀘스트만 수행했다. 명성치 높이는 퀘스트에는 위기에 처한 마을을 몬스터로부터 구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퀘스트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NPC 노인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마을 청소를 하거나, 신전에서 교리 공부를 하는 등, 자질구레하고 취향에 안 맞는 일을 토 나오도록 수행했다. 그러나 그건 전부 허탕이었다. 아니 삽질이었다. "크아악! 아까운 내 시간, 내 피 같은 돈!" 비곗덩어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패닉에 빠진 그를 위로하는 건 같이 삽질을 한 똘마니 동생들뿐. "저 산돼지 같은 오빠는 왜 저런대요?" "몰라, 내버려 둬." 괴로워하는 비곗덩어리의 모습이 유한에겐 고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고소한 냄새를 맡은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피눈물을 쏟게 하기 위해선 아직 97% 모자랐다. (2) 왕궁의 지하 공방에는 거대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예전에 유한이 베르겐의 대공방에서 본 것들과 비슷했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인간이 눕기에 너무나 좁은 잠자리와 피로 얼룩진 옷가지는 예전에 이곳에서 일하던 이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제길, 이러니 노스아크의 드워프들이 방방 뛰지.' 유한은 우선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이건 이렇게 하는 건가?" 도가니, 용광로, 반송로, 기계 해머, 선반 등등. 모두 지그 대장간에서 사용하던 설비들보다 우수하고 거대한 것들이다. 가공된 재료와 생산에 필요한 설계도는 있어 그쪽으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처음 사용하는 도구들이 많아 작동법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거기다 혼자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아니, 혼자 할 수 있어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풀무질을 해 달라고요?" "님 힘 좀 세 보이는 것 같아서요." 비곗덩어리와 동생 놈들은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삽질 끝에 들어온 왕궁이 텅 빈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노가다를 하라니. "흥, 난 전사란 말입니다. 이런 건 대장장이인 님이나 하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면서요?" "그거야 뭐 건질 게 있었을 때 일이고." 녀석은 슬슬 본성을 드러냈다. 네가 꼬시지 않았다면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식으로 유한을 째려보기까지 했다. "뭐 할 수 없죠. 나중에 일 끝나고 드래곤 엑스라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요." "헉! 드래곤 엑스요?" B급 최강의 도끼, 드래곤 엑스. 드래곤의 가죽도 찢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무기다. "하, 합니다. 한다고요. 헤헤헤!" 비곗덩어리 일당은 언제 불만이 있었냐는 듯, 커다란 물레바퀴를 돌리며 헤프게 웃었다. 후루룽! 후루룽! 물레바퀴를 돌리자 용광로에 바람이 들어가며 불꽃이 타올랐다. 유한은 도가니에 충분한 양의 철괴를 넣고 반송대를 이용해 용광로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도가니에 쇳물이 끓자, 조심스럽게 꺼낸 유한은 대형 톱니바퀴 모양의 주물 틀에 붓고 식혔다. -대형 톱니바퀴를 주조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120을 얻었습니다. -주물 스킬을 이용하면 크고 다양한 제품을 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3개 중 1개의 대형 톱니바퀴가 완성이 되었다. 유한은 무식하게 큰 톱니바퀴를 보며 허를 내둘렀다. '이거 주물 스킬을 익혔기에 망정이지...' 설계도로 볼 때는 몰랐지만, 완성된 대형 톱니바퀴는 지름이 사람 키만 했다. 이렇게 큰 것을 자칫 망치로 두들기고 접붙여서 만들 뻔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약 그가 주물 스킬을 몰랐다면 톱니바퀴 하나 만드는 데 며칠은 걸렸을 것이다. 유한은 차례로 2번째 3번째 톱니바퀴도 만들었다. '앗싸! 톱니바퀴는 다 만들었고.' 그 다음에 만든 것은 제어장치. 작은 냉장고만 한 크기에 수십 개의 톱니바퀴와 회전축, 스프링, 전환 밸브들이 들어 있는 정밀기계 장치였다. 부속은 충분했기에 따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유한은 설계도를 보며 차례대로 부속을 끼우고 나사못을 죄어 제어장치를 완성했다. 그러나 완성했다는 안내창이 뜨지 않았다. "아오, 썅! 뭐가 또 틀렸다는 거야!" 부속이 하나만 잘못 들어가도 기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유한은 몇 번이나 뜯었다 고쳤다를 되풀이해야 했다. 정말 이러다가 대장장이 지그가 아닌 엔지니어 지그가 될 판이다. 그렇게 얼마를 고생했을까, 반가운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축하하듯 올라왔다. -제어장치를 완성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140을 얻었습니다. -이제 고장 난 공중 요새 동력로의 3개의 대형 톱니바퀴와 제어장치를 교체하십시오. 이제 동력로에 가서 마무리 짓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부품들이 하나같이 크고 무거워 혼자 옮길 수는 없었다. "정말 드래곤 엑스를 만들어 주는 거죠?" "하하하! 물론이죠! 최상의 품질을 자부합니다." 유한의 말발에 넘어간 라스트모히칸과 똘마니들은 낑낑거리며 톱니바퀴와 제어장치를 들어다 날랐다. "이게 공중 요새의 동력로인가?" 커다란 방 안에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기계 장치들이 들어서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공중 요새의 동력원이었다. "어서 동력로를 고치십시오." 동력로를 경비하는 키메라가 유한을 보챘다. 슬쩍 인벤토리 안의 아이템을 살펴본 유한은 빈자리에 톱니바퀴들을 끼워 넣고, 고장 난 제어장치를 빼낸 다음 새로 만든 장치를 끼워 넣었다. 이제 다 끝났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유한은 별문제 없이 작동하는 제어장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거 좀 조정을 해야겠는데? 어이, 키메라. 공구 가진 거 있냐?" "저는 전투용이라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 나도 놓고 왔는데... 빨리 공방에 가서 집게 하나만 가지고 올래?" 키메라는 유한이 시키는 대로 공방으로 달려갔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유한은 동력원 근처에 있던 장치를 하나 빼 내고 가방에 든 것을 대신 끼워 넣었다. "지그 님, 그게 뭔가요?" "좋은 거요." 유한은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만지면 다칩니다. 잘못 건들다가 이상이 생기면 키메라가 가만히 안 있을걸요?" 그 말에 비곗덩어리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었다. 잠시 후. -5명 모두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바니우스 3세를 찾아가 보상을 받으십시오. 이런 안내문이 뜨는 것을 보니 오펜이 부유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끝낸 모양이다. 유한은 모두와 함께 다시 대전으로 가 이바니우스 3세를 만났다. 퀘스트를 완료했으니 보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시 만난 이바니우스 3세는 그사이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스펙터였는데, 지금은 여느 NPC들처럼 온전한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놀란 유한이 묻자 이바니우스 3세가 웃었다. "후후후, 이것이 로므나의 성수가 가진 힘이니라." 마침 스펙터 하나가 대전으로 들어왔다. 이바니우스 3세가 눈짓을 보내자 키메라가 로므나의 성수를 들고 스펙터에게 다가갔다. 로므나의 성수에 스펙터는 환하게 빛난다 싶더니 이내 갑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소개하지, 짐의 호위대장이니라." "라이칸이라 하오." 짧게 말하는 그는 정말 강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뒤로 속속 스펙터들이 들어왔고 미케라는 그들에게 성수를 뿌렸다. 설마 저런 식으로 모든 스펙터를 살리려는 것은 아닌지? "폐하, 폐하께서 저희들에게 임무를 내리신 것은 역사에서 잊힌 공중 요새의 부활과 백성들을 성불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못다 누린 수명을 다하고 성불하는 쪽이 훨씬 낫지 않겠느냐?" 스펙터들을 부활시켜 다시금 자신의 왕국을 재건한다. 애초부터 이바니우스 3세는 그럴 계획이었다. '제길,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미 미케니아의 악랄함을 보았던 유한과 채린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일행의 얼굴엔 당혹감이 맴돌았다. 퀘스트가 본래와 다르게 진행되어 간다는 것은 곤란한 사건이 터지는 징조와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수고가 많았다. 너희들 덕분에 미케니아 왕국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 공을 높이 사 짐은 너희에게 큰 보상을 하려 한다," 이바니우스 3세의 손짓에 키메라들이 5개의 상자를 가져오더니 모두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유한은 보상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공중 요새 재건>)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미케니아의 은인+) 칭호를 얻었습니다. -(=기술관의 관복=)을 얻었습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제복이었다. 색상이나 모양은 조금씩 달랐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옵션도 대단한지 다들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한이 받은 기술관의 관복만 해도 지금까지 입고 있던 장인의 코트보다 방어력이 더 높고, 솜씨와 지식을 15씩 상승시켜 주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너희가 받은 것은 관복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바로 짐의 신하가 된다는 뜻이다." "예?" 보상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모두가 황당해 하건 말건 기분이 들뜬 이바니우스 3세는 키메라들에게 곧장 다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공중 요새에 있는 모든 천민들을 몰아내라. 그리고 공중 요새를 하늘로 띄워라! 짐은 천상에 올라 미케니아 왕국의 부활을 선포할 것이다!" "옛! 폐하." 명을 받은 키메라들이 재빨리 대전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왕궁 안에서 엄청난 숫자의 키메라들이 뛰어나왔다. 공중 요새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사정없이 유저들을 공중 요새 밖으로 쫓아내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폐하의 명이시다! 천민들은 어서 공중 요새에서 나가라!" "뭐가 어쩌구 어째? 누구 맘대로 나가라 마라 하는 거야?" 당연한 반응이지만, 순순히 공중 요새에서 나가는 유저는 없었다. 이제야 겨우 공중 요새의 모험을 즐기며 고대 문명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상황 아닌가. 레벨이 높은 유저들은 키메라에 밀리지 않고 싸웠고, 레벨이 낮은 유저들도 서로 힘을 합치며 키메라와 싸웠다. 전투력은 키메라들이 높았지만, 유저들의 단합된 힘과 전술은 키메라의 인공지능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님들, 힘내세요! 멍청한 키메라들에게 유저의 위대함을 보여 줍시다!" "와! 독재 왕조 타도하라!" "왕 나오라 그래! 왕이면 다냐, NPC 주제에!" 유저들은 거세게 반격하며 키메라들을 왕궁으로 몰아 붙였다. 평소와 달리 활짝 열린 왕궁의 문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키메라를 모조리 물리치고 나면 왕궁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유저들은 더 힘을 내어 키메라들을 베어 나갔다. 왕궁에서 더 많은 키메라들이 증원 병력으로 나왔지만, 누구 하나 뒷걸음치는 사람이 없었다. 고지는 바로 눈앞. 그러나 유저들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쿠르르르르릉! 갑자기 요새가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돌과 바위가 마구 떨어졌다. 곧바로 떠오른 안내창에 유저들의 안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쿠쿵! 공중 요새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모두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지, 지진인가?" "도망쳐! 깔리면 큰일 난다!" 유저들은 앞을 다투어 공중 요새에서 빠져나갔다. 남바린 성의 참극이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 지지 않았다. 산 채로 매몰되어 3일동안 아무것도 못한 유저의 이야기가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드드드드드! 유저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미친 듯이 흔들리던 공중 요새가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진 지상을 통하여 날아오르는 공중 요새의 모습을, 탈출한 유저들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막연하게 불길함을 느끼는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 "하하하핫! 이 얼마나 오랜만의 비상인가?" 왕궁의 테라스에 선 이바니우스 3세는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공중 요새를 보며 연방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가지 천민들이 날뛰던 왕궁 앞에는 오랫동안 스펙터로 지냈던 공중 요새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키메라가 갖고 온 로므나의 성수로 부활한 그들은 테라스에 선 국왕을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국왕 폐하 만세!" "미케니아 왕국 만세! 만만세!" 공중 요새 전체가 기쁨으로 들떠 있었지만, 한편으론 심각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유한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덤으로 낀 라스트모히칸과 그의 동생들이었다. "아까 유저들 몰아내던 거 봤어요?" 에이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공중 요새가 부상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그동안 충분히 구경할 수 있었다. "인정사정없이 패던데 이를 어쩌죠?" 유저들에게 밀렸다고 하지만, 천민 운운하며 유저들을 공격하던 그들의 모습은 일행을 후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왕의 성향과 주민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대륙에 큰 분란거리를 만들어 놓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린 악당들을 부활시켜 버린 것 같아요." 오펜의 말에 로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제 악당 박멸 퀘스트들이 줄줄이 뜨겠군." "키예프의 리저드맨들처럼요?" "그러고 보니 리저드맨들의 세력을 키운 것도 지그 오빠였죠?" 메카 드래곤이니 남바린 성 붕괴에도 관여했다는 걸 알면 다들 무슨 표정을 지을까. 하지만 이번 일은 로키가 말한 대로 미케니아 타도 퀘스트 같은 건 뜨지 않을 것이다. 유한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기술관 있느냐?" 이바니우스 3세가 유한을 찾았다. 그는 유한 일행의 뜻도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관직을 수여했는데, 유한은 기술관이라는 직책에 임명했다. 채린의 경우는 치안 장교, 로키는 근위 기사, 에이린은 대신전의 신관, 그리고 오펜은 왕궁 마법사 직책을 내렸다. 덤이었던 비곗덩어리 일행은 당연히 아무것도 받지 못해 천민이라고 키메라들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대에게 미케니아의 영광스런 과업에 동참할 기회를 주겠다." "영광스런 과업이라니요?" "바로 이것이다." 이바니우스 3세는 한번 보라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설계도를 건네주었다. 심드렁하게 설계도를 살펴보던 유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기후 조절기?" "말 그대로 그 기계를 완성하면 기후를 조정할 수 있느니라. 바람을 일으킨 수도 있고, 그로 인해 구름을 불러오는 일도, 비를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기계가 그런 걸 가능하게 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기술과 마법이 발달한 미케니아라도 그것은 허황된 일 같았다. 하지만 정말 가능하다면 아주 무서운 일이다. 비를 내리지 않는 것으로 한 나라의 농사를 쫄딱 망하게 할 수 있고, 태풍을 불게 만들어 수많은 이재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그럼 미케니아는 병사 한 명 내보내지 않고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게 된다. "기계와 마법만으로는 부족하지. 그러나 치안 장교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 이바니우스 3세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보였다. 그것은 채린이 가져왔던 바람의 날개였다. 바람의 날개는 소유자가 바람의 힘을 발휘하게 해 준다고 했다. 하늘을 날거나, 혹은 폭풍을 불러오거나. '이 자식! 처음부터 세계를 집어먹을 작정으로 우리를 이용한 거구나!' 대충 짐작은 했지만, 사실을 확인하자 분노가 치밀었다. 성질대로라면 다짜고짜 달려들어 반쯤 죽여 놓고 싶었지만, 왕의 주변에는 호위대장인 라이칸과 키메라들이 늘어서 있었다. "폐하께서는 정녕 기후 조절기를 만드셔야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엇으로 미케니아를 부흥시킨단 말이냐?" "공중 요새를 만들 정도의 기술과 마법이 있지 않습니까? 이웃 나라와 교류할 뜻은 없으십니까?" "교류? 교류라 했느냐?" 이바니우스 3세는 피식 웃더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교류란 서로가 대등한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 짐의 나라보다 뛰어난 나라가 있느냐? 있으면 말해 보라." 없다. 아르페디아 대륙의 어떤 국가도 미케니아만큼의 기술과 마법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건 노스아크의 드워프들도 마찬가지. "대등하지 못하면 지배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지배자는 항상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짐이 기후 조절기를 만들려는 이유다. 짐은 세상을 지배할 자이기에." 국왕은 마치 알아듣겠느냐는 듯 오만하게 유한을 내려다보았다. 유한은 말없이 이바니우스 3세를 바라보다가 건네받은 설계도를 쭉 찢어 버렸다. 왕과 호위대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짓이냐?" "당신이 생각하는 지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보란 듯이 설계도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왜 당신의 나라가 드래곤들에게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착취와 억압 위에 세워진 나라는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야.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묻어 주겠다!" 유한은 찢어 버린 설계도를 이바니우스 3세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분노로 얼굴이 쇳물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이바니우스 3세는 유한을 가리키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호위대장은 무얼 하느냐! 저 발칙한 대장장이 놈을 잡아 꿇리지 않고!" 명령을 받은 라이칸이 검을 뽑으며 유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로키의 견제를 받고 멈췄다. 키메라들이 돕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채린과 오펜이 날린 화살과 마법에 맞고 뒤로 밀려났다. "네, 네놈들이 모두 짐에게 반역을 꾀하려는 것이냐!" "흥! 우린 당신 부하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네요, 베~!" 에이린이 혀를 길게 내밀며 놀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은 불난 집에 휘발유를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움직이지 마!" 대전 안의 키메라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려는 그때, 유한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그것을 꺼내 들었다. 엄지손가락이 닿는 곳에 빨간 스워치가 달린 푸른 원통. 이바니우스 3세와 라이칸은 그것이 뭔지 아는지 흠칫하며 물러났다. 키메라들의 움직임도 뚝 그쳤다. "한 발짝만 더 떼었다가는 아주 골로 보내 버리겠어!" 유한이 들고 있는 것은 마법 폭탄의 원격 격발장치였다. 버튼을 누르면 그가 동력로에 설치해 놓은 마법 폭탄이 커다란 화염을 일으키며 터질 것이다. 원격 마법 폭탄은 유한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노스아크의 여섯 드워프 부족장들이 준 것으로, 이바니우스 3세의 공중 요새를 없애 달라는 퀘스트 아이템으로 받은 것이다. 사실 유한은 자신이 발견한 이 유적을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미케니아 국왕이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드워프 부족장들에게 받은 퀘스트를 물릴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두고 보자는 인내심은 바닥났고, 개념 없는 국왕 놈의 말에 더러운 성질이 폭발하고 말았다. "하하핫! 뭔가 했더니 겨우 그것이었나? 짐에게 그따위 허세가 통하리라 생각했느냐?" "허세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까?" 유한은 곧장 버튼을 눌렀다. 폭발한다 해도 동력로만 날아갈 뿐, 공중 요새가 몽땅 폭파되는 것은 아니다. 버튼을 눌러도 탈출할 시간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오만한 국왕을 후회하게 만든 시간도 있었다. < 4. 공중 요새 입성 >>> <<< 5. 추락하는 공중 요새 > (1) 유한은 힘차게 버튼을 눌렀다. 곧 엄청난 굉음이 터지며 폭발의 진동이 공중 요새를 뒤흔들 것이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연거푸 눌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 도대체 왜?" "으하하핫! 너에게 그것을 준 놈들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나 보구나." 광소를 터트린 이바니우스 3세는 한껏 비웃음을 띠었다. "그 원격 마법 폭탄은 애초에 우리 미케니아인들이 만든 것이다. 격발장치의 신호를 마나 흐름을 통해 폭탄으로 전달해 터트리는 방식이지. 꽤 편리하긴 하지만, 마법사가 마나 흐름을 차단하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송신을 막고 있다는 소리다. 분명 마나 흐름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이바니우스 3세일 것이다. 키메라와 마도사들의 왕이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닐 터. "분명 너에게 그것을 준 놈들은 우리 노예였던 드워프들이렸다?" 그랬다. 심문을 끝낸 다음, 드워프 부족장들이 유한에게 보여준 것은 원격 마법 폭탄만이 아니었다. 과거 일곱 드워프 부족이 미케니아의 지배를 받을 때의 역사도 보여 주었다. 유한은 아바란 평원에 살던 검은 수염 일족이 전멸당한 기록을 다시 보았고, 살아남은 여섯 부족의 드워프들이 미케니아 왕국에서 탈출해 먼 북쪽 땅까지 도망쳐 온 기록도 보았다. 미케니아 왕국에서 간신히 탈출한 드워프들이 단결하여 만든 나라가 바로 노스아크였던 것이다. "웃기는 일이로다. 감히 종놈들이 훔쳐간 상전의 장난감으로 상전을 해치라 시켰다니." '제길, 이제 어쩌지?' 회심의 한 방으로 준비했던 마법 폭탄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황하는 유한에게 오펜이 다가와서 낮게 말했다. "왕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게 만들어야 해요.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나 흐름의 차단도 풀릴 겁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왕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단 말인가. 왕에게 직접 공격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왕과 유한 일행의 사이에는 키메라들이 늘어서 있었다. 활도 마법 공격도 중간에 막히고 말 터. "뭐 하느냐. 얼른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국왕의 명령에 라이칸과 키메라들이 다시 일행에게로 달려들었다. 유한이 여전히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있는데, 라스트모히칸과 놈의 똘마니들이 앞으로 나갔다. 틈을 만들어 주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런 기특한 일을 할 정도로 착한 놈들이 아니었다. "우린 아니에요! 그냥 저놈들 따라왔다가 그만..." "미케니아 만세! 이바니우스 3세 폐하 만만세!"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세 녀석은 배신을 때렸다. 빈손으로 두 손을 번쩍 들고 키메라들에게 달려갔다. "저것들이!" "놔둬, 그보다..." 발끈한 유한이 나서려는 것을 로키가 막았다. 그는 유한의 귀에 뭔가 나지막하게 말하고 비곗덩어리의 뒤를 쫓아갔다. "어리석은 천민 놈들, 그런다고 네놈들을 살려 둘 성싶으냐?" 국왕이 명한 것은 놈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라이칸은 주저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깜짝 놀란 비곗덩어리가 물러나려 했지만, 오히려 앞으로 떠밀려 나갔다. "켁!" 비곗덩어리를 라이칸에게 떠민 것은 로키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유한쪽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뛰어!" 좀 전에 로키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유한은 곧장 앞으로 달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로키의 어깨를 밟고, 칼에 찔린 비곗덩어리의 등을 밟은 다음, 단숨에 라이칸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바니우스 3세에게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라이칸이 다급하게 돌아섰지만, 이미 유한을 막기엔 늦었다. 유한과 로키가 즉흥적으로 결행한 이 공격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제 화룡점정을 찍으면! "하찮은 놈!" "으아악!" 이바니우스 3세가 바람의 날개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그에게 돌격하던 유한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라이칸의 머리를 지나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쿠당탕탕! "크으으윽!" 안타깝게도 기습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더욱 최악인 것은 격발장치를 떨어트리고 왔다는 것이다. "후후후, 도박에 실패했구나." 라이칸은 격발장치를 주워 왕에게 공손히 바쳤다. 격발장치를 받아 든 이바니우스 3세는 양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대장장이여! 이제 무엇으로 짐을 막겠느냐?" '큭! 상황이 재미없게 되었네.' 비장의 한 수마저 빼앗겨 버리자 유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그 오빠, 좋은 수 없어? -없어. 열심히 튈 준비나 해. 에이린의 귓속말에 그렇게 대답한 유한이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편의 테라스를 통해 시커먼 무언가가 뛰어 들어오더니 그대로 이바니우스 3세의 손목을 그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악!" 잘려진 이바니우스 3세의 손에서 격발장치가 떨어졌다. 이를 시커먼 인영이 주워 유한에게 던졌다. 격발장치를 받은 유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자, 괴인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해? 얼른 눌러!" "예, 옌스?" 시커먼 인영은 바로 옌스였다. 어떻게 아바란 왕국에 있어야 할 녀석이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분명 녀석은 자신이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어디론가 떠나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는데. "눌러 버리라니까!" 그렇다.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손이 잘린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라이칸과 키메라들은 갑자기 난입하여 맹공을 퍼붓는 옌스를 상대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찌잉! 유한이 격발장치의 버튼을 누른 순간, 이전과 다른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렸다. 이바니우스 3세가 차단하던 마나 흐름이 풀린 것이다. 곧이어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쿵! 쿠쿠쿠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리고 벽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맹렬한 진동이 뒤흔들고 지나간 후, 바닥이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공중 요새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드워프 부족장들의 부탁>)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공중 요새가 추락합니다. 서둘러 탈출하십시오. "자, 얼른 탈출하자!" "서둘러! 이 요새는 지금 북해 위에 떠 있어!" 옌스의 말에 모두들 황급하게 왕궁을 빠져나갔다. 빙하가 떠다니는 북해 바다에 몸을 넣는 것만으로도 즉사다. 아니, 차라리 죽으면 다행이지만, 꽁꽁 얼어서 가사(假死) 상태가 되면 누가 풀어 주기 전까지 계속 얼음 바다를 떠다녀야 한다. 누구도 북해 바다를 떠다니는 동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비곗덩어리나 똘마니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칸의 칼에 찔리긴 했지만, 비곗덩어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가, 같이 가요!" "닥쳐, 이 배신자!" 녀석들은 유한 일행의 뒤를 허둥지둥 쫓아갔다. 장내에 남은 것은 이바니우스 3세와 여전히 혼란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 키메라들뿐이었다. "크아아악! 이 저주받을 대장장이 놈! 잡히면 천참만륙을 내 주리라!"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이바니우스 3세의 고함만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2) "야, 옌스. 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 유한은 달리는 와중에도 궁금해 하며 물었다. "후후후, 이 몸을 왕따시킬 수 있을 줄 알았나?" "인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왔냐고!" "당연히 미행했지." "큭!"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옌스는 공중 요새가 부양하는 혼란스런 상황에 은근슬쩍 왕궁 안으로 숨어들었다. 평상시라면 키메라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어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유저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성의 경비에 구멍이 뚫렸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옌스가 왔다면 리지스도 따라왔을 가능성이 높잖아!' 아니, 리지스가 먼저 옌스를 불러 미행하자고 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공중 요새로 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옌스는 유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놀렸다. "바츠, 누님이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굉장히 섭섭해 하던에 각오해야 할 거다." "제길! 자기가 둘이서 갔다 오라 해 놓고 뭔 소리야!" "둘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하려 했던 건 누구였더라?" "크윽, 이 자식! 다 엿들었구나!" 분통해 하며 달려가던 유한은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앞쪽 공간이 일렁인다 싶더니, 3명의 마도사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들은 강해 보이는 전투용 키메라들을 거느린 채 유한일행의 앞길을 막았다. "멈춰라, 이 역적 놈들!" "닥쳐! 네놈들을 상대할 틈은 없다!" 옌스가 곧장 어깨를 들이밀며 앞으로 맹렬히 뛰어나갔다. 그의 주특기인 대쉬 공격이었지만, 마도사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흥, 멍청한 놈. 아이스 그라운드(Ice Ground)!" "헛!" 바닥이 얼음판처럼 미끌미끌해졌다. 그 위에서 허둥거리던 옌스는 볼링공처럼 키메라들에게 돌진했다. 옌스와 부딪친 키메라들은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스트라이크! "미케니아의 전투 마도사를 우습게보지 마라. 파이어 레인(Fire Rain)!" "다들 물러나요! 마나 실드(Mana Shield)!" (아... 영어 쓰기 진짜 귀찮다. 젠장;) 마도사들이 만든 불비가 일행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오펜이 다급하게 방어하지 않았다면 모두 통구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후후후, 잘 막았다만 다음 공격도 막을 수 있을까?" "아차! 더블 캐스팅(Double Casting)이었나!" 더블 캐스팅.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도사의 능력. 처음에 날린 파이어 레인은 기만에 불과했다. 그들의 진짜 공격은 왼손에 준비되어 있었다. "야! 배신자! 니 도끼 얼른 던져!" "뭐라고요?" "닥치고 얼른 던져 인마! 여기서 죽고 싶어?" 유한의 윽박질에 머뭇거리던 라스트모히칸은 마도사를 향하여 자신의 애병 오크니스 엑스를 던졌다. "부메랑 엑스(Boomerang Axe)!" 도끼 투척 스킬을 펼쳤지만, 과연 마도사들에게 통할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괜히 따라온 거 아냐?" "간다! 장작 패기 검법!" 비곗덩어리가 도끼를 던진 것과 동시에 유한이 앞으로 달렸다. 막 공격 마법을 날리려던 마도사들은 비웃음을 지었다. 도끼에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 빈틈을 노려보려는 술책이겠지만, 그런 뻔한 공격에 당할 자신들이 아니다. 마도사 셋 중 한 사람의 손이 유한을 향하여 펼쳐졌다. 그가 막 공격 마법을 펼치려는 순간. "암 브레이크!" 유한의 필살기가 오크니스 엑스에 작렬했다. "아아악! 내 도끼가!" "헉!" 공중에서 산산조각 난 도끼 파편 수십 개가 마도사들을 덮쳤다. 마도사들이 주춤하는 사이, 파편 사이를 교묘히 파고든 유한의 포이즌 세이버가 선두에 선 마도사의 목을 베었다. -경험치 700을 얻었습니다. -마도사의 반지를 얻었습니다. "파워샷!" "커억!" 연이어 틈을 노리고 날아든 채린의 화살이 또 다른 마도사의 머리에 꽂히고, 로키가 마지막 마도사를 향해 돌진했다. "체, 체인 라이트..." "늦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마도사가 철퇴를 맞고 날아갔다. 하나같이 강한 마도사들이었지만, 유한의 재치에 허를 찔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전멸했다. 로키가 키메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도사들이 데려온 키메라는 이미 옌스가 모두 정리해 버린 뒤였다. "엥? 벌써 다 처리했어?" "그건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젠장, 마도사 놈에게 한 방 날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공중 요새는 계속 추락하고 있었고, 이번엔 뒤에서 라이칸이 키메라들을 거느리고 쫓아왔다. "뛰어! 성문이 바로 코앞이야!" "아이고, 내 도끼가..." "형, 얼른 가자고요!" 비곗덩어리는 애병을 잃은 충격에 반쯤 정신을 놓았다. 녀석의 동생들은 그런 그를 질질 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왕궁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유한은 곡괭이로 성문 양쪽의 기둥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폭발로 인해 금이 갔던 기둥은 그 일격에 완전히 무너져 버려 라이칸과 키메라들은 한동안 유한 일행을 쫓을 수 없게 되었다. "근데 나오긴 나왔는데 공중 요새에서 탈출은 어떻게 하지?" "구난 보트, 아니 기구 같은 거 없어?" 그런 건 없는 듯했다. 있다면 부활한 공중 요새의 주인들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며 패닉에 빠져 있진 않았을 테니까. "걱정 마, 우리에겐 오펜이 있잖아. 오펜의 부유 마법이라면 모두 탈출이 가능할 거야." "오! 그렇군." 유한의 말에 다들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오펜만이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한 명밖에 못 데려갑니다. 마법진을 그리면 되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려서..." 결국 다 함께 탈출할 수 없다는 소리다. "크아악!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묻지도 않았잖아요." 오펜을 믿었기에 유한은 주저 없이 폭발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불가능하다니,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이 맴돌았다. "그럼 모두 여기서 죽는 거야?" "오펜과 한 사람은 살겠지." 에이린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독돌이를 타고 가면 되니까. 하지만 나머진 모두 공중 요새를 빠져나가지 못해 죽게 될 것이다. 아니면 동태처럼 북해 바다를 둥둥 떠다니거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름대로 유한 일행을 쫓아왔던 라스트모히칸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 되었다. "뭐야! 남의 도끼까지 작살내 놓고 탈출 방법이 없다고?" "나도 있는 줄 알았다, 인마!" "시끄러, 새꺄!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몰라 인마! 배신할 땐 언제고 왜 엉겨 붙어서 지랄이야?" "살려 줘! 내 도끼 물어 줘! 드래곤 엑스 달란 말이야!" 비곗덩어리의 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짜증 난 유한이 검에 손을 가져가려는 그때, 비곗덩어리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수정이 떨어진 것이다. "케엑!" 그리고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 "어휴, 좀 더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하려고 했더니만." (3) "리지스!" 수정덩이로 라스트모히칸을 응징하며 나타난 것은 리지스였다. 모두의 앞에서 씽긋 미소를 지은 그녀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커다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이건?" "일회용 기구. 혹시나 해서 준비해 왔는데 다행이다, 그치?" "오오오!" 리지스는 기구에 연결된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압축되어 있던 헬륨이 풍선에 스며들며 기구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둥실 떠올랐다. "됐어! 이젠 살았다!" "얼른 타요, 형!" 언제 깨어났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은 비곗덩어리와 똘마니 동생들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리지스가 가로막았다. "어딜 함부로 타려고! 타고 싶으면 돈을 내! 돈을!" "뭐라는 거야! 이 발육부진이! 돈 없으니까 저리 비켜!" 비곗덩어리는 하면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동전 3개가 무섭게 비곗덩어리 일당의 이마빡에 날아가 꽂혔다. 리지스는 아까 던졌던 수정을 기구에 옮겨 실으며 말했다. "이 기구는 오 인승인데 지금은 네 명밖에 탈 수 없어. 그래서 자력으로 탈출 가능한 사람은 제외하겠어." "그 수정 내다 버리면 한 명 더 탈 수 있지 않을까?" "흥, 바랄 걸 바라야지." 지금 리지스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유한이 동력로에서 본 적이 있는 수정 기둥의 일부였다. 바로 공중 요새의 주 동력원이던. "그거 어디서 난 거야?" "바닥에서 뭔가 로켓처럼 튀어 나오기에 가 보니 이게 있더라고." 폭발의 여파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여간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녀석이라니까.' 아무튼 수정을 포기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을 듯했다. 설득될 리지스도 아니고, 어차피 모두 다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오펜은 시아를 챙겨 줘. 에이린은 독돌이를 타고, 나랑 로키 형은 리지스하고 옌스랑 같이 기구를 탈게." "잠깐! 우린 버려두려고?" 비곗덩어리 일당이 거세게 항의했다. 모두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울 공간도 없는데다가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이다. 더구나 배신까지 했던 녀석들. 다들 무정하게 나오니 비곗덩어리 일당도 어쩔 수 없었다. "제길! 이렇게 되면 길동무라도 하나 잡아 놔야겠어!" "꺄악! 왜 이래요? 놔요!" 라스트모히칸은 근처에 있던 에이린을 덥석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옌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더러운 손으로 귀여운 에이린을 붙들다니! (이뿨~ ㅋㅋㅋ;;) "너 이자식 죽고 싶냐!" "그래, 죽여 봐. 죽여 보라니까!" 라스트모히칸은 치사하게 에이린을 방패로 내세웠다. 덕분에 옌스는 검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유한이 말리고 나선 덕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만 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기구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 안 보여?" 유한의 말대로 주변으로 공중 요새의 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군중들에게 붙들려 탈출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어이, 돼지비계. 내가 네 길동무가 되겠다. 그러니 에이린은 풀어 줘." "지그야!" 채린이 펄쩍 뛰었지만, 유한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넌 나한테 감정이 있을 거 아냐. 너도 사내새끼라면 여자애 붙들고 징징거리는 짓은 하지 마." "...알았다." 라스트모히칸은 에이린을 놓아 주었다. 그가 생각해 봐도 확실히 길동무로는 대장장이가 제격이었다. 저놈이 꼬셔서 이번 일에 말려들었고, 저놈 덕분에 애병을 잃고 이렇게 북해 바다의 동태가 되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섰다. '그래, 이놈이면 적격이지!' 공중 요새가 바다에 추락할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 주리라. 그리고 약점을 잡아서 현실의 이름과 집 주소를 내뱉게 만들어 내내 괴롭혀 줄 것이다. '크크, 넌 이제 죽었어. 인마.; 얼마 후, 유한을 제외한 일행은 추락하는 공중 요새를 떠났다. 먼저 오펜이 시아를 데려가고, 에이린은 독돌이를 타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곧이어 리지스와 옌스, 로키가 탄 기구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살려 줘! 우리고 데려가 달라고!" "겨우 살아났는데 또 죽을 순 없단 말이야!" 공중 요새의 주민들은 떠나는 기구를 보며 아우성을 쳤다. 우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사람 등등 주민 NPC들은 저마다 다양한 행동을 했다. 이 같은 멸망의 순간, 공중 요새에 남겨진 유저들은 한탄도 발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어차피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비곗덩어리 일당은 손마디를 꺾으며 유한에게 다가갔다. 유한은 멍하니 떠나는 기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끝나는 순간까지 주먹의 대화나 나눠 볼까?" "싫다." "네가 싫다고 내가 안 때릴 줄 아냐!" 그러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유한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곗덩어리가 주먹을 날리기 직전 유한은 하늘의 기구를 향해 건틀렛의 와이어를 쏘았다. 피--잉! 기구에 탄 옌스가 와이어를 낚아챘고 유한은 유유히 와이어를 타고 기구에 올라탔다. 비곗덩어리와 똘마니 동생들은 한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 대장장이 녀석이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한이 탈출했다는 것이다. "너, 너, 너 이새끼!" "잘 있어라, 머리에 비계만 가득 찬 놈아." "크아악! 이 자식 안 내려와? 당장 내려와! 죽여 버리겠어!" "캬캬캬! 너라면 내려가겠냐?" 유한은 펄펄 뛰는 비곗덩어리들을 감상하며 유유히 공중 요새를 떠났다. 이윽고 차가운 북해 바다에 떨어진 공중 요새는 두 동강이 나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얀 물거품이 일어난 것도 잠시, 부활했던 미케니아의 유산은 3명의 불행한 유저를 길동무로 삼아 심해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4) "끝난 건가?" "예, 공중 요새가 북해로 추락했습니다." 게임 관리실에서 지그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던 정경욱 부사장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뒤에 있던 손석진을 바라보았다. "저거 좀 싱겁지 않나?"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러니까 마도사들의 왕인 미케니아 국왕이 제대로 활약도 못한 채 사라졌고, 기후 조절기라는 것도 선보이지 못했잖아." 정경욱은 그 꿈을 채 펼치지 못한 악당에 대해서 동정심이 일었다. 지그 녀석이 깽판만 안 쳤으면, 아르페디아 대륙은 어둠과 공포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텐데. 물론 게임 분위기가 너무 암울하게 흘러가면 그에 상응하는 퀘스트가 발동하게 되어 있었다. "국왕이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응? 이유라니?" 귀가 솔깃해 하는 정경욱을 바라보며 손석진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마왕이 처음부터 힘 다 쓰는 거 봤습니까?" "호오! 그렇군." 말뜻을 이해한 정경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석진의 말대로라면 아직 볼만한 것이 남아 있었다. 공중 요새에서 무사히 탈출한 유한 일행은 곧장 베르겐으로 향했다. 동료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유한은 노스아크의 여섯 드워프 부족장들을 만나러 갔다. 전날 퀘스트를 주었던 부족장들은 공중 요새를 북해에 침몰시켰다는 그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이제 검은 수염 일족의 한도 풀렸을 게야." 부족장들의 치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한의 눈앞에 안내창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명성이 1,200 올랐습니다. -경험치 3,500을 얻었습니다. -(=사면장=)을 얻었습니다. '엥? 뭐야 이거?' 유한은 드워프의 악적을 물리쳐 줬으니, 거창한 보상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에 들어온 아이템이라곤 딸랑 사면장 하나뿐. 사면장에는 '메카 드래곤 사건의 공범인 지그의 죄를 사면한다'라고만 달랑 적혀 있었다. 덕분에 이제부터 아무 문제없이 노스아크를 들락거릴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못마땅한 생각은 영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뭘 말입니까?" 보잘 것 없는 보상 덕분에 유한은 다소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미케니아의 왕은 죽었는가?" "공중 요새가 추락했으니 당연히 죽었겠지요." "확인하지 않았다 그 말이로군." 방금 말을 한 것은 부족장들이 아니었다. 다른 제 3자의 목소리였다. 보안이 철통같은 이곳에 타인이 발을 딛다니! 유한은 물론, 여섯 부족장들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하얀 모피에 금붙이를 주렁주렁 매단 붉은 눈의 청년이 서 있었다. 유한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메카 드래곤 사건 때였다. "당신은...?" "아, 안듀라스 님!" 화이트 드래곤 안듀라스. 여섯 부족장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들은 곧장 안듀라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전에 지은 죄가 있어 그를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게 떨 필요 없다. 난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니까." 고맙다니. 오만방자한 드래곤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물론 거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너희도 알 것이다. 오랜 옛날 미케니아를 멸하기 위해서 신께서 우리 드래곤에게 거병하라 하신 것을." 유한도 알고 있었다. 얼음 궁전의 벽화에서 보았으니까. "미케니아를 멸하는 것은 우리 드래곤들의 사명. 너희가 그 일을 대신 해 줬으니 고맙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다." "그렇습니까." "허나, 마무리가 시원찮은 것이 흠이야." 안듀라스는 유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 보라 인간이여, 망령으로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낸 그들이 이번에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느냐?" 분명 공중 요새는 추락했다. 그러나 국왕이나 그를 따르는 마도사들의 최후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뭔가 수를 써서 탈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유저들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공중 요새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으니... "그런 류의 악당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기지 않습니까." "후후후, 네 말이 맞다." 고개를 끄덕인 안듀라스는 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있으라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기억해라,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그러니 대비를 해라. 지금보다 더욱 실력을 높여야 놈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안듀라스는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이 유한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어쩌면 더 큰 싸움의 방아쇠를 당긴 것인지도 모른다. 안듀라스의 말대로 분명 다음번에 만나는 이바니우스 3세는 폭탄 하나로 끝낼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다른 것으로 상대해야겠지.'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 박아 둔 설계도가 다음번 승리의 열쇠가 될지도. 마녀의 유산으로 부활한 고대의 망령들을 상대한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 5, 추락하는 공중 요새 >>> <<< 6. 검정고시 퀘스트 > (1) 공중 요새를 추락시킨 지 며칠이 지났다. 노스아크에서 돌아온 유한은 대장간에서 생산과 스킬 수련에 힘썼다. 생산은 돈을 벌기 위함이고, 스킬 수련은 가디언을 제작하기 위함이다. 가디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합금 스킬이 5랭크, 정밀 조립 스킬이 3랭크 이상이 되어야 했다. 현재 그의 합금 스킬은 6랭크, 정밀 조립 스킬은 7랭크였다. "제길, 앞으로 갈 길이 멀구나." 그렇게 불철주야 게임에 몰두하던 유한에게 위기가 닥쳤다. 주말이라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을 때였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예?" 아버지의 물음에 유한은 국을 뜨려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정고시 시험 말이다. 어떻게 된 것이 자기가 공부하는 시험 날짜도 몰라? 너 공부는 하고 다니냐?" "아! 그게..." 아버지의 추궁에 유한은 답이 궁해졌다. 요즘 이래저래 게임을 하느라고 공부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간이 남아도 극기도장으로 달려가 땀을 빼기에 바빴다. 유한이 머뭇거리자 강영후는 자신의 아내를 나무랐다.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도대체 뭘 한 거야?" "제가 뭐 공부하지 말라 그랬나요? 공부해라 잔소리해도 관짝에 들어가 놀기만 하던데요." "에잇!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놈의 캡슐인지 버추얼 시뮬레이터인지를 당장 버려야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짜 캡슐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자 유한은 아버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으악! 안 돼요. 그게 얼마짜린데... 그리고 저 공부하고 있다니까요. 고시 학원도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가고 있어요." 사실 한 번도 안 빠진 것은 아니다. 두어 번 빼먹기도 했고, 요즘에는 거의 건성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긴, 머릿속이 아르페디아 온라인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 공부가 될리 만무하다. "공부를 하고 있다는 놈이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도 몰라? 너 시험 날자는 기억하고 있긴 한 거냐?" "아, 알아요. 10월 19일이잖아요. 조금 전에는 아직 잠이 덜 깨서 생각이 안 났어요." 간신히 날짜가 생각났다. 원래 1년에 2번 치던 검정고시는 제작년에 개정되어 3번으로 바뀌었다. 2월, 6월, 10월로. 유한도 이 날짜를 알고 있었고, 10월 시험에 원서도 넣어 놓았지만, 요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그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잔소리 좀 해야겠다. 너 요즘 성적이 자꾸 떨어지고 있던데 그래 가지고 대학에 가겠냐? 아니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이라도 하겠어?" 유한이 다니는 학원에서 매달 치르는 모의시험이 있는데 그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 걸 아버지께서 아신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학교를 자퇴할 때 부모님께 1년 안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런데 벌써 1년이 지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당장 캡슐을 내다 버려야지!" "아버지 제발 그것만은..." 유한은 아버지를 붙들고 빌고 또 빌었다. 캡슐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게임을 통해 이제야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오냐, 네가 그리 간청하니, 이번 시험에서 평균 80점을 넘으면 캡슐을 버리지 않으마." '으악 그것은!' 저번 달에 친 유한의 모의고사 성적이 평균 63점이다. 검정고시 합격점인 60점에 턱걸이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17점을 더 올리라니. 이것은 대장장이로 드래곤을 잡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의 입에서 '불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아버지는 정말 캡슐을 내다 버릴 테니까. 평소에 털털한 성격의 아버지였지만, 한번 한다고 다짐을 하면 꼭 하시는 분이었다. "하, 할게요. 반드시 80점을 넘어 보이겠습니다." 결국 유한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약조를 하고 말았다. 유한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공부를 하러 올라가자, 강영후는 부인을 바라보며 찡긋 윙크를 했다. "여보, 나 잘했지?" "후후후, 배우로 나서도 되겠어요." 사실 주말 아침의 소란은 부부의 철저한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한이 계속 공부는 안 하고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자, 보다 못한 어머니 김 여사가 이 같은 질책성 이벤트를 계획한 것이다. 각본은 엄마가 썼고, 주연은 아버지가 했다는 걸 유한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근데 평균 80점은 심하지 않았어요?" 원래 김 여사가 구상한 퀘스트(?) 충족 조건은 평균 70점이었다. 그런데 연기에 몰입한 남편이 10점이나 더 올려 버린 것이다. "괜찮아, 유한이 녀석 학교에 다닐 때도 그 정도는 했잖아." "학교 다닐 때랑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지." 하지만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닌지. 여전히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놈이지만, 어머니 김 여사는 예전과 다른 이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검정고시 학원에 갈 때가 아니면 두문불출, 아니 캡슐불출하던 녀석이 요즘은 무술 배운다고 도장에도 다녔고, 가끔 단장을 하고 외출하기도 했다. 표정도 예전에 비해 많이 밝아졌다. 이전엔 늘 어두운 인상이었고 잘 웃지도 않았는데. '지금 와서 캡슐을 버리면 안 좋은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약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일단은 아들놈의 성적이 더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 자신의 방에 들어온 유한은 시계를 보았다. 9시였다. 오늘부터 캡슐을 사수하러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야 하니 대장간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채린과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맑고 발랄한 목소리. 그러나 거기에 응답하는 유한의 목소리는 무겁고 침울했다. "채린아, 나 유한인데. 한동안 게임 못할 거 같다." "뭐? 왜?" 유한의 폭탄선언에 채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유한은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다. "사실 요새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시험 잘못 치면 아버지가 캡슐 내다 버리신대." 사정을 다 설명하자 채린이 쯧쯧 혀를 찼다. "어휴, 그러게 평소에 공부 좀 해 놓을 것이지." "그런 말을 하는 댁은 어떠십니까?" 유한이 달리 공부를 안 했겠는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료들 중에는 채린도 포함되었다. "나? 호호호, 난 나쁘지도 좋지도..." 채린도 성적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실은 성적이 지난번보다 떨어져 담임선생님께 꾸중도 들었다.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던 채린은 뭔가 번쩍 떠오른 게 있었는지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참! 나도 다음 주에 중간고사가 있는데 같이 공부할래? 같이 공부하면 모르는 것도 서로 가르쳐 줄 수 있고 좋잖아." "그건 그렇지만..." 유한은 내심 망설여졌다. 같이 공부하면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게 뽀록난다. 그는 아직 채린에게 퇴학생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한이 미처 반대하기도 전에 채린이 자기 할말만 하고 전화를 냉큼 끊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주소는 옛날 그대로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이따가 봐." "채린아! 야, 송채린!" 유한이 전화기를 붙들고 불러 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뚜뚜거리는 신호음뿐. 전화기를 내려놓는 유한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자신이 퇴학생인 걸 알면 과연 채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싫은 내색을 할까, 아님 동정 어린 눈빛을 지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꺼리는 내색을 하겠지만, 마음씨 착한 채린은 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유한이 화들짝 놀랐다. "아참, 이게 아니지!" 지금 그에겐 고민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채린이가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책상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와 아무렇게나 구겨져 나뒹구는 옷가지들, 수북하게 쌓이다 못해 넘쳐 버린 휴지통, 거기에 방바닥에 머리카락과 함께 굴러가는 먼지 뭉치. 유한의 방은 그야말로 거지가 "내 집일세" 하고 반길 만한 상태였다. "으악! 바쁘다 바빠!" 유한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청소 도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청소기를 민다, 휴지통을 비운다, 걸레로 닦는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웬일이니? 내일 우주에서 소행성이라도 떨어진다던?" 뒤에서 어머니가 나타나 물었다. "아놔, 비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이 녀석아, 네 방이니 네가 청소를 해야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유한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제길! 너무 일러!' 적당히 치우고, 닦고, 밀어 넣었지만 아직 방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유한은 최후의 1초까지 닦고 또 닦았다. "누구세요?" 김 여사는 인터폰을 받았다. 누가 찾아왔나 싶어 인터폰의 화면을 봤더니, 단정하게 옷을 입은 예쁜 여자애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 채린이에요. 혹시 기억나세요?" "어머, 꽃가게 채린이?" 옛날의 채린을 기억하는 김 여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머슴 같던 애가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지. '이 녀석이 왜 설치나 했더니.' 김 여사는 유한이 평소답지 않게 오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못난 아들놈도 사내자식이다. 옛날 친구가, 그것도 이렇게 예쁘게 변한 채린이 찾아온다니 허둥지둥 댔을 수밖에. 김 여사는 대문과 현관문을 열어 채린을 맞아들였다. 인터폰 화면이 아닌 실물이 더 예쁜 듯했다. "와, 아주머니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호호, 그렇니? 채린이는 정말 많이 예뻐졌구나."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늙지 않았다는 의미. 기분이 좋아진 김 여사는 옛날에 채린이 야구공으로 창문을 깬 일이라든가, 아끼던 도자기를 떨어트렸던 일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유한이는요?" "아, 그 녀석?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렴." 김 여사는 아들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주기로 했다. 매일 게임만 해서 속을 태우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자식 사랑은 부모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한이랑 언제 다시 만나게 된 거니?" "여름이 되기 전인데 길 가다 우연히 만났어요." 어머니가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유한은 어느 정도 만족한 수준까지 방을 치우고 채린을 만나러 나올 수 있었다. "왔어?" "응, 청소할 게 꽤 많았나 봐." "큭!" 채린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씩 웃었다.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유한은 대충 얼버무렸다. "주위 환경이 깨끗해야 공부할 때 집중도 잘될거 아냐. 얼른 올라가자." "알았어, 아주머니. 그럼 유한이 방에서 공부하다 갈게요." "오, 그래. 얼마든지 하고 가려무나." 김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놀러 왔으면 점잖게 타이를까 했는데, 이런 착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덕분에 아들놈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안 하던 청소도 다하는 걸 보면 말이다. "호호호, 이럴 게 아니지." 그녀는 아들과 채린을 위해서 과일이라도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 책상 위에 두 사람의 책과 교재가 올라왔다. 유한의 것을 본 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3학년 과목이잖아. 너 이것도 공부하고 있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유한은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거든." "검정고시? 왜?" 채린의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나 작년에 학교 관뒀어. 사정이 좀 있어서." 순간 의기소침해지는 유한이었다. '나에게 실망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채린이 손을 들어 유한의 어깨를 쾅쾅 두들겼다. "자식 힘내! 그런 것 갖고 기죽을 거 없어. 고등학교를 나와야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검정고시를 통해서도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 "으, 응. 고맙다." 결국 채린은 유한을 격려해 줬다. 괜한 걱정으로 갈팡질팡했던 게 우습게 여겨졌다. '역시 채린이는 좋은 녀석이야.' 의욕이 무럭무럭 솟구친 유한은 온 정신을 집중하며 기운차게 공부했다. 그런 유한에게 자극을 받은 채린도 시험 범위를 학습해 나갔다. -------------------- "호호호, 공부하느라 힘들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김 여사가 과일과 음료수를 갖고 유한의 방에 들어왔다. 사이좋게 공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눈앞의 광경은 그녀의 예상이랑 영 딴판이었다. "으으으..." "진짜 모르겠다." 김 여사는 책상 바닥에 머리를 박고 좌절하는 소년 소녀를 보았다. 농땡이를 부른 흔적은 없었다. 척 봐도 이건 공부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였으니까. "공부가 잘 안 되는 모양이구나." "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한이나 채린 둘 다 공부를 못했으니까. 유한은 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반 석차 10~15등 사이를 유지했는데, 퇴학당하고 난 다음 1년간을 거의 허송세월로 보내다시피 해서 학업 성취도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채린의 경우는 골목대장 시절부터 공부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다 요새 게임까지 하니 그나마 안 좋은 성적도 미끄러지고 있는 판이었다. "호호호, 아줌마가 좀 가르쳐 줄까?" "그래 주시겠어요?" 채린은 풀다 포기한 수학 문제를 김 여사에게 보여 주었다. 김 여사는 마치 메두사라도 본 듯 잠시 돌이 되었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분명 자신도 저만한 시절에 풀었던 것인데 왜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애들에게 공부하라 윽박지른 것이 부끄러웠다. "안 되겠어! 공부 잘하는 애를 불러야겠어." "아는 녀석이 있어?" "김준수." "응? 그게 누군데?" "우리 학교 전교 일등." 그녀는 다짜고짜 전화를 걸더니 김준수를 불러냈다. 어디까지 오라고 하더니 마중 나간다며 휙 나갔다가 잠시 후에 문제의 인물을 데려왔다. 누군가 해서 봤더니, 낯익은 인상이었다. 자세히 상대의 얼굴을 뜯어 본 유한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펜이었구나!' 채린이 반 친구인 마법사 오펜이 바로 그였다. "지그 님이죠? 김준수라고 합니다." "아, 강유한입니다." 같이 게임을 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오프에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임에서 오펜에게 반말을 하던 유한도 실제로 만나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그 님은 실물이 더 나은 것 같네요. 체격도 좋고." "그게 요새 운동 좀 해서... 편하게 말해요. 우리가 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하하하, 그럴까...요?" 서로 동갑이라는 것도 알지만, 오프에서의 만남은 생소하고 어색했다. 계속 말을 주고받다 보면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자자,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얼른 우리 공부 좀 봐줘." "채린아, 나 오늘 학원 펑크 내고 온 거다." "알았어! 나중에 내가 한턱 쏠게."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오펜, 아니 김준수는 스터디 파티(Study Party)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역시 전교 1등다웠다. 유한과 채린이 묻는 것을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술술 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쉽게 설명해 주는지 유한과 채린은 딱 한 번만 들어도 이해를 할 정도였다. "우와, 이러니까 되게 쉬운걸?" 아까까지만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던 문제들이 술술 풀렸다. "역시 반장이 최고라니까. 선생님들보다 훨씬 나아." "하하, 그건 과찬이야." "근데 나랑 채린이 때문에 학원도 못 가고 공부도 못하게 돼서 준수에게 미안한걸." "괜찮아. 가르쳐 주다 보니 나도 많은 도움이 되는걸. 복습도 되고." 준수는 참 성격도 좋았다. 학교 다닐 적에 봤었던 우등생이란 녀석들은 뭔가 거리감이나 교만함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한은 준수에게선 그런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게 같이 게임을 하고 친하게 지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모른 것이 있으면 준수에게 물어봐야지.' 시험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다. 준수의 도움이 절실했디. 80점 고지에 올라서지 못하면 사람 좋은 준수는 물론이고, 채린과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근데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 계속 앉아서 공부만 했더니 허리가 아파서 그래." "나도 화장실 가고 싶은데..." "그럼 십 분만 쉴까?" 유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채린과 준수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 보니 아르페디아 온라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 생각에는 전사의 시대가 지고 생산직 시대가 온단 말이지?" "응, 조금씩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규모 업데이트 후 게임에 일대 변화가 올 거야." "그럼 나 생산직으로 바꿀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다만 지금까지 홀대받던 생산직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거지 전사 직종이 전멸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업데이트라...'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대대적인 패치와 업데이트가 단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한 일자는 드림맥스에서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올 가을이 지나기 전에는 적용될 것이 유력하다고. 유한이 자리에 앉자 채린이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아참! 지수가 너한테 전하라는 말이 있더라." "뭔데?" "대장간 근처에서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한번 확인하러 오래." "뭐? 크롬!" 크롬 광맥이란다. 철광맥 하나만 발견해도 만세를 부를 상황인데, 그 몇배의 가치를 지닌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는 것은... 지금 대륙에 존재하는 크롬 광산은 10개가 넘지 않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발견했다는데?" 리지스는 상인이다. 광산을 살 수는 있어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한이 모르는 사이에 광부나 대장장이를 고용해 광맥을 찾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발견된 장소가 대장간 근처라잖은가. 그렇다면 유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만나서 물어봐." 역시 그 수밖에는 없을 듯했다. "자자, 여러분. 십 분이 지났으니까 공부를 합시다." 그 뒤로 유한은 참고서와 문제집을 붙들고 공부를 했지만, 처음만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크롬 광맥이라는 단어가 연방 번쩍거렸고, 어서 공부를 끝마치고 게임에 접속해 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3)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유한이 밤이 되어서야 접속하자, 리지스가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유한과 리지스는 동료다. 그리고 동업자이기도 하다. 유한이 만든 물건 중 반은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가져가지만, 나머지 반은 리지스가 자신의 상점을 통해 판매한다. 덕분에 유한이 놀면 리지스도 손해를 보게 된다. "사정이 있었어. 잘못하면 너나 나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고." "뭐라고?" 망한다는 소리가 상인에겐 가장 무서운 소리. 리지스는 무슨 일인가 물어봤지만, 유한은 그저 한동안 직접 무구를 생산할 수 없을 거라는 말만 했다. "드워프의 철은 충분히 만들어 놓을 테니까, NPC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구를 팔도록 해. 한동안 주문은 더 늘리지 말고." "너 또 어디 퀘스트하러 가는 거야?" "그래, 현실에서 강제 퀘스트가 하나 떴다." 리지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한이 평소 같지 않게 심각해 보이거니와,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요새 학교마다 중간고사 시즌이니 그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면서?" "아, 그거?" 리지스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유한은 김이 쭉 빠졌다. '혹시 별거 아닌 건가?' 광석 몇 개 발견한 것을 광맥이라 착각한 건 아닐까? 실제 광산을 만들려고 광맥을 찾을 때 그런 삽질을 많이 한다. 기껏 찾은 광맥도 채굴량이 시원치 않으면 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크롬 광맥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지. 하지만 그건 유한만의 착각이었다. "따라와." 리지스가 앞장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유한은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갔는데 지그 대장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그녀가 가리킨 곳은 어느 바위 옆이었다. 흙을 팠다가 다시 덮은 흔적을 빼면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제 포포가 하루 종일 보이지 않기에 찾으러 다녔는데..." 리지스의 이야기는 이랬다. 포포를 찾아 인근의 숲 속을 뒤지고 다닌 리지스. 그녀는 이곳에서 땅을 파헤치는 포포를 발견하게 되었다. 덩치가 커진 이후에는 자주 주위를 파헤치고 다녔기에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포포가 입에서 뭔가를 우물거리는 것을 보았다. 뭘 또 훔쳐 먹나 싶어 억지로 빼앗아 살펴봤더니 바로 크롬 광석이었단다. "허! 설마?" 유한이 믿겨 하지 않자 리지스는 땅속을 가리켰다.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 하지만, 땅을 파니까 계속 크롬 광석이 나오는 거야." 이곳이 크롬 광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난 그녀는 서둘러 흙을 덮어 버리고는 유한을 찾았다. 그러나 유한이 마침 접속해 있지 않았기에 대신 채린에게 말을 전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광맥이 있더라도, 산출량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더라고." 광산은 땅을 파는 비용 이상의 소득이 나와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광석 몇 개에 혹해서 삽질하다 실패하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참나, 그걸 걱정한 거냐?" "투자는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크롬 광석을 획득한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그리고 산출량이 얼마 안 된다 해도 지그 대장간에서 쓸 정도만 나와 주면 충분한 게 아닌지. 유한은 인벤에서 삽과 곡괭이를 꺼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들어가자 평범한 돌과 다른 광석이 튀어나왔다. 유한은 발치에 떨어진 광석을 주워 정보를 살펴보았다. -(=크롬 광석=) -설명: 크롬이 함유된 광석이다. 제련을 하면 크롬괴를 얻을 수 있다. 유한은 즉각 이곳이 크롬 광맥인지, 아님 그냥 크롬 덩어리가 하나 묻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얼마쯤 흙을 파고 나니 거대한 암반이 나타났다. 유한은 곡괭이로 바꿔 들고 채굴 스킬로 암반을 파기 시작했다. "채굴! 채굴!" 파고 들어갈 때마다 크롬 광석들이 그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깊숙하게 파면 팔수록 나타나는 광석의 크롬 함유량이 높아 갔다. 이 정도면 크롬 광맥이거나 최소한 광맥에 닿아 있는 것이 확실했고, 채굴량도 적지 않을 듯했다. "포포 이 자식! 네가 드디어 밥값을 했구나!" 유한은 리지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포포를 와락 끌어안았다. "삐잇! 삐잇!" 숨이 막히는지 바동거리는 녀석을 놓아 준 그는 리지스에게 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너와 나뿐이야." "잘했어. 괜히 소문나 봤자 똥파리만 날릴 테니까." 유한은 힘들게 판 광산을 도로 묻어 버리고, 채굴한 크롬 광석도 모두 주워 담았다. 나중에 알아볼 수 있게끔 근처 나무에 표시만 해 두었다. 크롬과 같은 희귀 금속의 광산은 대부분 거대 길드가 소유하고 있다. 소문이 나면 푸른새벽 길드보다 더 강한 길드들이 마수를 뻗어 올 것이다. 유한은 한동안 비밀로 하기로 했다. 거대 길드로부터 광맥을 지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분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눈앞에 다가온 검정고시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크롬 광산 개발은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4) 10월 19일 운명의 날. 태양은 떠올랐고, 유한은 비장하게 시험장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강제 퀘스트를 받은 이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손을 놓았던 교재를 탐독하고, 검정고시 학원에서 예상 문제라고 집어 주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게임하는 시간도 최대한 줄였다. 아니, 심지어 게임을 하면서도 공부를 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지그야, 그거 뭐야?" "공부할 거. 교재를 복사해서 가지고 왔어." "교재를 복사했다고? 야, 너 그거 불법인 거 몰라?" "괜찮아, 나만 볼 건데 뭐."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신고당했단 말이야." "내가 정리한 건데도?" 유한은 교재 내용이나 문제들을 발췌해서 텍스트 파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텍스트 파일을 게임에서 불러와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게임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보았다. 사실 이렇게 하는 건 오펜에게서 배운 것이다. 오펜이 들고 다니는 마법서는 무늬만 마법서일 뿐, 그 안에는 문학 해설이라든지, 영어 문법이라든지, 국사표 등 그가 정리한 학습 자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렇게 안 하던 공부를 했다. 덕분에 3일 전 학원 모의고사 때 점수가 껑충 뛰어오르긴 했지만... '으아아아악! 평균 10점을 어떻게 더 채우냐고요!' 그래서 시험 전날, 유한은 만들고야 말았다. 이게 들켰다간 실격은 물론이요 앞으로 3년 동안 관련 국가고시는 엄금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캡슐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신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유한은 가는 내내 두근거리는 심장을 쉬이 가라앉힐 수 없었다. 대장장이 지그의 운명이 걸린 시험이기도 하지만, 고사장이 생소하게도 대학교로 배정된 탓이다. 난생처음 대학교에 와 본 것이기에, 유한은 한참 동안 캠퍼스 안을 두리번거리고 해매야 했다. '휴, 다행히 제 시간에는 들어왔군.' 유한은 한림대 강의실에 들어와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수험 번호부터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자리도 별로였다. 구석이나 창문 쪽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중간 자리였다. '그래도 벽이 될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유한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혔다. 좌우 옆 자리는 체격이 작은 범생이와 할머니였고, 앞자리의 날라리는 시험에 관심도 없는지, 그냥 엎드려 잠만 잤다. 뒷자리의 수험생은 아예 오지도 않았다. '오 마이 갓! 저를 버리시나이까!' 절망하고 있는 유한이었지만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2명의 시험 감독관이 들어왔다. 유한은 시험 감독관 중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한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설마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는 건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다. 내심 찔려 하는 그의 곁으로 좀 전의 감독관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를 흘렸다. "요새 무구의 질이 좀 떨어진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군." ",,,!" 목소리를 듣고 유한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차림새가 틀리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시험 감독관은 바로 딜론이었다.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발덴 지부장인. 유한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거나 말거나 딜론은 수험생들과 시간을 체크하고는 칠판이 있는 단상으로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시험 감독관인 황세용입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정행위는 일제 용납되지 않습니다. 부디 삼 년 동안 후회하실 일을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시험이 시작되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받아 든 유한은 그동안 자신이 공부한 것의 120%를 짜내며 문제를 풀었다. 다행히 1교시 국어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과목이기도 하기에 유한은 품속에 넣어 둔 놈을 꺼내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부정행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정행위를 한 자는 바로 답안지를 뺏고 시험장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유한이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감독관 황세용은 부지런히 강의실을 돌면서 계속 부정행위 금지를 강보하고 다녔다. 1교시는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2교시 수학도 어렵긴 해도 준수와 공부한 것이 있어 만족할 수준으로 끝냈다. 하지만, 3교시 영어 시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영어는 항상 모의고사에서 성적을 팍팍 갉아먹던 주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긴 했지만, 영어 시험지는 아무리 봐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잉크였다. '캡슐을 지키려면...' 아이템 컨닝 페이퍼를 사용할 때였다. 유한은 일단 감시 몬스터 감독관의 인식 범위를 계산했다. 그리곤 컨닝 페이퍼를 슬그머니 꺼내려는데, 그만 딜론, 아니 황세용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부정행위는 안 됩니다." 아까부터 녹음기처럼 되풀이되던 대사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유한은 품속에 있던 컨닝 페이퍼에서 재빨리 손을 뺏다. '제길, 좀 봐달라고요!' 지지리 복도 없었다. 처음 딜론을 만났을 때만 해도 적당히 눈감아 줄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정도(正道)를 걸었고, 유한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아도 싹 무시해 버렸다. 이후 유한은 몇 번 더 컨닝 페이퍼를 만지작거렸지만, 그때마다 딜론이 눈을 번득이는 바람에 꺼내는 것을 포기했다. 게임에서 보았던 협력자의 눈빛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크아아! 망했다.' 그러나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마침 왼쪽에 범생이스런 녀석이 앉아 있었는데, 아주 막힘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옳거니!' 유한은 녀석의 답안지를 훔쳐보기로 했다. 또 다른 컨닝용 아이템 손목시계를 이용하면 되었다. 그의 손목시계는 표면이 검은색이라, 거울처럼 풍경이 반사되어 비치곤 했다. 각도를 잘만 맞추면 범생이가 몇번에 체크하는지 대충 알수 있었다. 슬쩍 시계를 들여다본 유한이 답을 체크하려던 순가. "부정행위는 안 됩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딜론이 옆에 서 있었다. 유한은 들켰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 표기를 하고 말았다. 범생이가 체크한 것은 1번이었는데 자신은 그만 2번에 체크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엉뚱한 곳에 표기한 바람에, 딜론이 컨니이라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유한은 다시 컨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시계를 들여다볼 적이면 딜론이 나타나서 예의 대사를 내뱉으며 답안지를 살펴보곤 했다. 그래서 유한은 컨닝한 문제 상당수를 엉뚱한 곳에 표기하고 말았다. 의심을 안 받기 위해선 범생이가 체크한 답과 틀린 곳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게 다 틀린다면 영어는 전멸이었고, 평균 80점을 만드는 것도 수포로 들아간다. '크으윽! 너무 밉다, 미워!' 어떻게 된 것이 자신의 근처만 맴도는 딜론이 정말 미웠다. 딩동댕동!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딜론을 쫓아갔다. 화장실 근처에서 그를 붙잡은 유한은 다짜고짜 항의부터 했다.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좀 봐주면 안 됩니까?" "허허, 내가 그럴 입장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시험 감독관이 컨닝을 방조해서야 되겠는가. "아니 그럼 차라리 아는 척을 하질 말던가요!" "반가운 얼굴을 봤는데 어찌 모르는 척을 하겠습니까." "어쨌거나 난 끝장이라고요! 아저씨 때문에 망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어허, 그깟 컨닝 못했다고 망하기까지야." "모르니까 그리 말할 수 있는 거라고요! 이 시험에 캡슐과 제 게임 인생이 걸려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제가 무기를 못 만들게 되면 모두 딜론 님 때문임을 아십쇼." 유한은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강의실로 돌아가 버렸다. "뭔가, 황 강사?" 마침 다가온 동료 감독관이 딜론에게 물었다. 딜론, 아니 한림대 경제학과 전임 강사인 황세용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동료는 강의실로 들어가는 유한을 슬쩍 바라보다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근데 자네 요새도 게임하나?" 가상현실 게임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대학교 강사인 황세용도 다를 바 없었다. "뭐, 재미있으니까." 현실에서 자본이 없어 포기했던 사업도 즐겨 볼 수 있었다. 또 그와 관련해 게임 내 인플레이션이나 독과점 현상, 유통 과정 등을 현실과 비교해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럼 밑에 데리고 있는 애들 조심하라 이르게. 요새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그들이 진출한 모양이야." "그들이라 하면?" "자네가 예상한 그게 맞아." 황세용의 안색이 굳어졌다. 몇 해 전, 다른 가상현실 게임에서 날뛰었던 '그들'에 대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티쳐스(Teachers)라..." (5) '크으윽! 난 끝났어.' 시험을 마친 다음, 유한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3교시 영어 시험과 4교시 과학을 죽 쑨 뒤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문제를 풀긴 했지만 평균 80점을 못 넘을 것 같아서다. 척척 문제를 풀어 가던 옆자리의 범생이와 품속의 컨닝 페이퍼를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쓰리는 그였다. "어서 와라. 시험 잘 쳤니?" 유한은 반가이 맞아 주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냉장고에 있던 냉수를 들이켰다. 그러나 답답한 속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어때? 문제가 어렵거나 하진 않았어?" "뭐 그럭저럭요." 어머니가 내내 옆에서 시험에 대해 물었지만, 유한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에 김 여사는 아들이 시험을 잘 못 쳤음을 알았다. 저녁 식사 후 유한은 인터넷에 올라온 해답들을 보며 따로 표기해 온 시험 답안을 맞춰 보았다. '다른 과목들은 그럭저럭 쳤는데...' 문제는 영어와 과학이다. 이 과목들은 마지막까지 해답을 맞춰 보지 않았다. 얼마나 점수가 개판으로 나올까 겁이 났기 때문. '아놔!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좀 봐주면 댁도 좋고 나도 좋을 텐데!' 유한은 딜론이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해 주었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교실에서 시험 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시험관이 적당히 봐줘서 컨닝도 하고 했다는데 말이다. '캡슐이 없어지면 다 딜론 때문이야.' 그렇게 그를 원망하며 유한은 두 과목의 해답을 비교해 보았다. 불길하게도 영어 1번 문제부터 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유한이 컨닝하다가 실패해서 찍을 문제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 이럴 줄 알았지. ㅎㅎ 반전!) 정답이라 나온 것은 범생이가 찍은 답이 아니라, 바로 유한이 얼떨결에 찍은 답이 아닌가. "어? 이, 이거?"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얼떨결에 찍은 것들이었지만 상당수가 정답이었다. 범생이가 자신 있게 체크한 답을 따랐었다간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옆 자리의 범생이 녀석은 생긴 것만 범생이었던 모양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유한이 컨닝을 시도했던 과학 과목도 범생이가 체크한 답은 오답인 것이 숱하게 많았다. '75점...' 지뢰 과목들의 점수가 80점을 넘지 못했지만, 국어나 사회, 국사 등 평소 잘하던 과목들에서 85점 넘게 선방을 하면서 평균점을 끌어올렸다. 거기다 예전 같으면 지뢰였을 수학도 80점으로 크게 선전했다. -축하합니다. 검정고시 퀘스트를 완수하셨습니다. -(+고졸 학력자+)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최종 평균 점수는 82점입니다. 캡슐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팡파르와 함께 눈앞에 이런 창이 떠오르는 듯했다. "우와아! 합격이다!" 유한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다. 그는 얼굴을 활짝 펴고 거실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점수를 자랑했다. "뭐야? 성적이 잘 나온 거니?" "예! 평균 82점 먹었어요!" "어머나, 정말?" "진짜라니깐요! 나중에 점수가 발표되면 보세요." 아들이 저리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걸 봐선 거짓이 아닌 모양. 내심 걱정했던 김 여사는 유한의 선전에 크게 기뻐했다. 더 이상 아들놈은 고교 중퇴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다면 하는 장한 자식이었다. "유한이 합격했다면서?" 진짜로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서둘러 가게를 닫고 집으로 달려왔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아들 녀석을 축하해 주기 위해 통닭과 피자 따위를 사 들고서. "허허! 이 녀석, 게임만 하는 줄 알았더니..." "훗, 게임하면서도 공부를 한다고요." 기분 좋게 검정고시 퀘스트를 완료한 유한은 보상으로 얻은 통닭 다리를 뜯으며 연방 으쓱거렸다. 그날 유한은 캡슐을 사수했다. < 6. 검정고시 퀘스트 >>> (뭐 이런 경우가!!!! 제가 쓰면서 가장 생각을 많이 했던 챕터랄까요. 무지 길기는 했지만요. ㅋㄷㅋㄷ) <<< 7. 대규모 업데이트 > (1) 검정고시 합격 축하 파티가 있은 다음 날. 유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오랜만에 신나게 달려 볼까?" 그동안 게임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어선지 해도 한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대장간에서 주야장천 일만 했으니. "으흐흐, 오늘은 하루 종일 해야지." 잔뜩 기대를 품고 캡슐에 들어갔건만 그를 반기는 것은 파란 공지 글뿐이었다. -금일 새벽 2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서버 점검 및 업데이트 작업이 있습니다. 유저 여러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엥? 이게 뭐야?"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점검과 업데이트를 한다고 서버를 닫아 놓은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대개 1~2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 점검과 업데이트를 하는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오픈 베타에서 정식 서비스로 넘어가던 때였다. "뭐야, 김 다 샜네." 도대체 무슨 업데이트길레 이리 길게 한단 말인가? 유한은 캡슐 밖으로 나와 PC로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공식 홈페이지는 폭발해 버릴 정도로 많은 유저들의 글들이 게시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런 글들 중에 불만이나 항의의 글은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영자 얼른 업데이트를 끝내라능! -드뎌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규모 패치가 적용되는구나. -원양항해가 뭔가요? 그거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으하하, 생산직도 이제 팔자 피며 살게 되었3! -이번 업데이트 충격과 공포라고 그러던데. 모두의 관심은 업데이트를 쏠려 있었다. 이전부터 대규모 패치가 될 거라며 게임 방송에 오르내린 덕분이다. 일부 정보들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소재의 다양화와 생산직에 대한 우대, 그리고 원양항해의 기능 등이었다. 소재의 다양화에 대해서는 사냥이나 공성전을 지양하고 가상현실 본연의 레저나 여가 분야를 강화한다는 것인데, 유한은 여기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생산직에 대한 우대에 귀가 솔깃하긴 했지만, 뭘 어떻게 해 준다는 언급이 없었기에 공연히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유한 본인은 물론이고 많은 유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원양항해였다. 지금까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의 항해는 연안항해가 고작이었다. 먼 바다로는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출된 정보에 따르면 이번 업데이트 이후에 원양항해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나 섬으로 모험을 떠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특히 섬 같은 경우엔 발견자의 이름이 용사의 집에 올라가는 건 물론, 섬의 이름도 지어 줄 수 있다고. "하아, 정말 대단한 회사로군. 본 대륙에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은데 새로운 대륙이 나온다고?" 이놈의 게임은 죽을 때까지 해도 모든 것이 다 밝혀지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정말 이 미친 게임을 만든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다. 아니 진짜 사람이 맞을까 싶었다. "아! 괜히 일찍 일어났잖아." 상쾌한 아침부터 게임을 즐기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못한 만큼 즐기려 했건만. 잠시 투덜거리던 유한은 대입 입시 학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장은 딴 셈, 앞으로 그가 해야 할 것은 수능 시험을 봐서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뭐 꼭 대학을 나와야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도 원하고 그 자신도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기에 될 수 있으면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웹서핑을 즐기며 몇 곳의 입시 학원 홈페이지를 둘러본 그는 벽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10시다!' 어느새 10시가 되어 있었다. 유한은 즉시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 순간 엄청난 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서버 점검 및 업데이트 작업 시간이 오후 2시까지 연장되었습니다. 게임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서둘러 작업을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켁! 뭐야!" 4시간이나 더 기다리라니. 유저들의 불만 글이 게시판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요금을 물어 달라는 글들도 보였고, 얼마나 대단한 업데이트인지 두고 보자는 글들도 있었다. 유한도 몇 마디 불평 글을 적어 놓고는 도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장에서도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업데이트가 큰 이슈가 되어 있었다. "유한아, 너 이번 업데이트에 대해 들은 거 있냐?" "글쎄요, 저도 그저 형들이 아는 수준밖에 모르는데요." 간만에 흠뻑 땀을 뺀 유한이 샤워를 하고 나오자 관장 송태수를 비롯해 여러 수련생들이 컴퓨터 앞에 모여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업데이트 작업 시간을 세 시간 더 연장한다고?" "아니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방금 전에 또다시 공지가 올라왔는데 3시간 더 연장한단다. 2차 연장 공지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다. "쯧쯧,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유저들을 농락해서야..." "관장님, 드림맥스 본사로 쳐들어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찾아가서 항의해야 합니다." 역시 사람이 모이니 성질 급한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병이 도졌다. 홀로 샌드백을 두들기던 표재훈은 펄펄 뛰는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속 편할 텐데." 유한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빌딩 전광판의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도 '아르페디아 온라인 초유의 사태' 라면서 이번 일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오늘 하루를 꼴딱 넘겨 버리는 것은 아닌지?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오후 6시에 드디어 서버가 열렸고, 업데이트 내용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업데이트는 대략 이러했다. (후와...길당.) -1) 하우스 시스템이 대폭 강화됩니다. -지금보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가옥과 별장, 가게 등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길드가 아닌 개인 소유의 '저택'과 '성'을 지을 수 있습니다. -2) 레저와 여가 시스템이 도입됩니다. -활쏘기, 마상창 시함, 폴로 등 고풍스런 스포츠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경기를 즐기거나 개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각종 경기장과 유원지의 건설이 가능해집니다. -3) 직종이 다양화됩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스킬과 직업들이 생겼습니다. 신종 직업군에 도전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존의 직업들도 조건에 맞춰 상위 직업의 칭호를 얻으면 새로운 스킬을 익힐 수 있습니다. -4) 원양항해 시스템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대륙과 섬들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모험을 떠나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발견한 섬에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그 밖에 여러 가지 패치를 했다며 아래로 내용이 쭉 이어졌다. 그러나 유한의 눈에 확 띄는 것은 위의 넷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11) 다음 달부터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서비스 가격을 인하합니다. 앞으로도 유저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오! 진짜냐?" 유한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혹시 만우절 공지가 아닌가 싶었지만, 엄연히 오늘 날짜는 10월 20일이었다. 확인해 보니 월간 정액을 30% 내린다고 했다. 지금까지 매월 계정 사용료가 30,000원이었으니 21,000원이 된다는 소리다. 이는 유한 같은 가난한 10대 청소년들을 환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 6개월 무료 이용권의 기한도 다 되어 가는 시점이니 유한으로선 굿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게임에 들어가는 용돈을 줄일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갑작스레 사용료를 내린 이유는 대체 뭘까. "드림맥스 이 인간들 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 답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용 요금이 내린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유한은 곧장 캡슐 안으로 들어가 게임에 접속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동안 못했던 게임을 마음껏 즐기는 일이다. 새로운 업데이트를 구경하면서 말이다. (2) 지그가 된 유한은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마지막으로 로그아웃을 한 작업실이 아니라 거대한 신전 안이었다. 카앙! 캉! 신전은 신전인데 좀 이상한 것이 신전 안이 대장간처럼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시뻘건 불을 토해 내는 거다란 화로도 보였고, 거대한 모루와 연방 망치질을 하는 거인도 보였다. 유한은 조심스럽게 거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거인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왔느냐, 지그여." "절... 아십니까?" "후후, 난 세상의 모든 대장장이들을 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한 거인은 정식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난 대장장이의 신인 토르다." "아, 토르 님이셨... 예?" 대답을 하다 말고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신이 직접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설정에만 있던 존재일 뿐. "하하하, 그렇게 놀랄 필요 없다. 내가 널 이곳 '불의 신전'으로 불러들인 것은 특별히 알려 줄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뭡니까?" 어차피 신이라 해도 NPC. 유한은 당당하게 나서기로 했다. "이번에 이 토르가 대장장이들을 위해 새로 마련한 것들이 있는데..." 토르의 설명은 이랬다. 우선 대장장이가 받을 수 있는 칭호를 늘렸다고 한다. 칭호를 얻게 되면 칭호에 따르는 새로운 스킬을 배우고 독특한 아이템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고. 예를 들어 '엔지니어(Engineer)'의 칭호를 획득하면 '기관 제작 스킬'이나 '용접 스킬'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기계들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이다. "그리고 대장장이가 만들 수 있는 작업장의 규모가 더 커진다." "대장간을 철공소로 만드는 것 말입니까?" 유한은 파부치가 그랬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자신도 그렇게 발전하고 싶다 생각했는데 이제 그것이 가능해진 것인지? "물론이다. 철공소뿐만 아니라 제철소까지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제철소요?" 철공소만 해도 뭔가 있어 보인다 생각했는데 그 위에 제철소라는 것이 있다니. 제철소. 철공소보다 더 멋있고 중량감 있어 보였다.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까?" 흥미가 생긴 유한이 물어보자, 토르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 네가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공소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제철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설비를 만들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 관련 설비 말이지요?" 유한은 베르겐의 드워프 대공방이나 공중 요새의 공방에서 본 것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만한 설비는 있어야 제철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리는 일꾼도 최소 삼백 명이 넘어야 한다." "켁! 삼백 명이나 말입니까?" 이제 NPC 대장장이를 30명 부리는 유한으로서는 입이 떡 벌어질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제철소를 지으려 하는 대장장이의 능력이 떨어져서는 안 되지. 제련과 생산, 주물, 합금 네 개의 스킬이 모두 1랭크가 1랭크가 되어야 한다." "허거걱!" 갈수록 태산이다. 제련이나 생산은 몰라도 아직 하위 랭크에 속한 주물이나 합금까지 1랭크를 만들자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제철소는 그 중량감만큼이나 힘든 조건을 맞추어야 했다. 더구나 제철 설비 같은 것을 만들려면 관련 설계도를 구해야 할 것이고, 제작에 필요한 특별한 스킬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 외에도 자잘한 조건들이 몇 개 더 있지만 그것은 네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제철소를 짓고 싶다면 일단 네 대장간을 철공소로 발전시킬 생각부터 하거라." 그러면서 토르는 철공소를 짓기 위한 조건도 가르쳐 주었다. 철공소는 제철소보다 작지만, 규모나 스킬 등 만만한 게 없었다. '굳이 철공소나 제철소로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을까?' 게임의 배경이 근세나 현대와 같은 공업 사회도 아니고 겨우 창칼이나 냄비 따위를 만드는 정도인데 말이다. 지금도 여러 길드에서 주문하는 수량을 NPC들과 함께 다 만들 수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대장간을 세운 이유도 해커를 추적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뭐 지금은 처음 계획과 좀 달라져 버렸지만. "작업장을 꼭 확장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거야 네 뜻에 달려 있다. 네가 지금 수준에 만족한다면 굳이 확장을 하지 않아도 되지. 그러나..." 토르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지금보다 발전할 아르페디아에는 더 많은 자원과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지그 너 같은 대장장이들의 활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지." 토르는 마치 이번 업데이트로 인해 대장장이의 역할이 커질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계속 이어 가기를. "네가 최고의 대장장이, 더 이상 대장장이로 불리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확장은 불가피할 것이다." 대장장이로 불리지 않는 최고의 대장장이. 유한은 예전에 파부치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전설의 아이언 마스터. 그게 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드림맥스에서는 이전부터 이번 업데이트를 염두에 두고 그런 설정과 단어를 만들어 두었는지 모른다. '하긴 게임에서 최고가 되는 게 유저의 로망이니까.' 바츠를 키울 때도 그랬다. 현실에선 고교 중퇴생일 뿐이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는 전무후무한 최강의 전사로 인정받고 싶었다. 물론 해킹 때문에 그 계획은 박살 났고, 해커 추적을 이유로 생산직인 대장장이를 하고 있지만. 해커 때문이라지만, 자신이 키우는 지그가 최고의 존재가 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지그는 유한에게 있어 또 다른 분신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철을 장악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 어떠냐? 너에게는 세상을 재패하고픈 욕망이 없느냐?" 유한의 가슴은 다시 한 번 최고가 되겠다는 꿈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유한의 말에 만족했는지, 토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최고를 향해 한번 달려가 보아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천상에서 너의 건투를 비마." 토르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망치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한순간 빛이 번쩍하더니 유한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환경이 변했다. 불의 신전에서 지그 대장간으로 바뀐 것이다. "야, 지그!" 유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개인 작업실에서 나오자, 리지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너도 혹시 만났어?" "너도라니? 그럼 리지스 너도?" "응! 나도 접속하다가 신을 만났어." 유한과 달리 리지스가 만난 신은 상업의 신인 디요론이었다. 디요론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상인이 받을 수 있는 칭호와 새로운 스킬, 다양한 사업들 등등. "또 상인은 지금까지 상단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을 넘어서 컴퍼니(Company)라고 불리는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대." 아무래도 이번 업데이트에서 각 직업군별로 추가된 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해 주는 모양이다. 그냥 공지로 날려도 될 것을 이런 식으로 이벤트화하다니. 역시 드림맥스답다고 할까. "그보다 너 시험은 어떻게 되었어? 잘 봤어?" 그제야 리지스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문제가 쉽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 봤어." "게임하는 데 지장 없는 거지?" "그래." 리지스는 유한이 시험을 잘 친 것보다 앞으로 장사하는 데 지장이 없다는 사실에 더 만족해 했다. "그럼 수고해. 좋은 무구 많이 만들고." "응, 너도 수고해라." 업데이트는 업데이트. 몇 가지 요소가 추가되었다고 당장 게임이 바뀌지는 않는다. 유한은 다시 망치를 들었다. 목표는 제철소였고, 그러기 위해선 대장간을 철공소로 키워야 한다. 열심히 일하며 스킬을 수련하면 목표가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3) "앗! 수리를 다시 시작한다!" 대장간 앞에 '수리합니다'란 푯말이 내걸리자, 무구를 사러 왔던 유저들이 반색을 하고 유한에게 달려왔다. 시험 공부하는 동안 유한은 틈틈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지만, 대장간 안에서 드워프의 철을 만드는 데 시간을 몽땅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유저들은 무구 수리를 요청하는 것은커녕 유한의 얼굴 보는 것도 힘들었다. "지그 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뭔 일 있었어요?" "수리 좀 해 주세요. 칼이 톱이 되려고 해요." 앞을 다투어 달려온 유저들이 먼저 자기 것부터 고쳐 달라며 무기들을 내놓았다. "다 고쳐 줄 테니까 줄 서요, 줄. 줄 안서는 사람은 안 고쳐 줄 겁니다!" 유저들이 후다닥 일렬로 줄을 서자, 유한은 맨 앞의 사람부터 차례대로 무구 수리를 해 주기 시작했다. 깡깡깡! 간만의 수리여서 그런지 망치를 휘두르는 손길이 여간 경쾌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씩 완벽한 모습을 갖춰 가고 있는 무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망치 소리도 멋진 연주로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지그 님. 이번 업데이트에 대해 보셨어요?" 그냥 기다리기 심심했던지, 뒤에 선 사람이 불쑥 말문을 건네 왔다. 역시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긴 지금 아르페디아 대륙 어딜 거나 업데이트 이야기가 유저들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예, 좀 전의 공지를 보고, 대장장이 신도 만났는데, 이것저것 많더군요." 대장장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드림맥스가 무척 야심차게 준비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번 패치가 좋은 평가를 받을지, 아님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균형을 무너트려 유저들의 원망을 살지는 나중에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아무튼 유한이 대꾸를 해 주자 그는 신이 나 떠들이 댔다. "괜히 게임의 밸런스나 안 무너트렸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드림맥스에서 무슨 배짱비로 월 계정비를 내렸을까요?" 생각해 보라. 1,200만이 넘는 유저의 계정비가 30% 줄어든다고. 그럼 드림맥스에서 손해 보는 금액이 엄청날 것이다. "글쎼요, 그동안 벌어 둔 돈이 많아서 그럴지도..." "경쟁작들을 죽이기 위한 드림맥스의 음모 아닐까요? 가상현실 게임 분야를 독식하려 하는 걸지도." 아르페디아 온라인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팬 층을 확보하고 있는 가상현실 게임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아르페디아 온라인보다 일찍 나온 전통있는 게임들로, 운영 요금이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이다. 그러나 이번에 드림맥스가 요금을 30%나 인하하면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나마 지조를 지키던 유저들도 아르페디아 온라인 쪽으로 돌아설 공산이 커진 것이다. 물론 정말 드림맥스가 그러려고 요금을 인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모론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동안 드림맥스의 사악한 작태를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니까.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해외 서비스에서 돈깨나 벌었다니까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요?"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유저가 또 다른 의견을 냈다. "외국 유저들이 봉이 돼서 그렇다고요?" "해외 유저들이 한국 유저들보다 더 많다잖아요." 얼마 전 집게된 한국의 아르페디아 온라인 유저는 1,202만 3,981명. 그리고 해외 유저들의 수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집계가 되지 않았지만, 대략 3천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보다 서비스가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조금 넘은 시간에 이만한 유저들이 모였다는 것은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재미있다는 이야기. "지금 해외 서비스가 어디 어디에서 되고 있답니까?" "미국, 유럽, 중국, 일본... 그리고 마지막이 중남미던가?" "마지막이 중남미 맞아요. 그쪽 오픈 베타 꽤 어렵게 끼어들어 해 본적이 있으니까요." "남의 나라 서비스엔 뭐 하러 접속하셨어요?" 유한과 주변 유저들은 다른 나라 서비스에 끼어들었다는 유저를 째려보았다. 분명히 국내 서버에서 짱 먹기 힘드니까 해외로 나간 게 틀림없었다. 한번 해 봤으니 캐릭터 육성이 그만큼 유리할 테니까. 그런데 보통 이런 유저들은 외국 유저들이 즐길 유니크 이벤트를 선점하거나, 저 잘났다고 설쳐 대서 나라 망신을 시키곤 했다. 중남미 오픈베타에 끼였다는 이 인간도 그런 부류는 아닌지?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유저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서둘러 변명했다. "아, 아니. 그게 국내 서버랑 많이 다르다고 들어서요." "다르다니요?" "아이템 드랍이나 경험치 획득이 국내 서버보다 많았거든요. 뭐 그것보다는 국내 서버와는 완전히 다른 필드였기 때문에 호기심이 더 든 거지만." "다른 필드요?" 모두들 눈이 둥그레졌다. 필드가 다르다니, 그럼 해외 서버는 전혀 다른 세계란 말인가? 확실히 그렇다면 호기심을 갖고 접속해 볼 만도 하다. "국내 서버의 필드와 완전 달라요. 등장하는 국가도 다르고, 언어도 그쪽 나라에 맞춰져서 나오고, 아이템이나 몬스터도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어요. 던전도 꽤 이국적이고." 대체 왜 그랬을까. 국내 서버에 있는 것과 똑같은 필드를 적용하는 게 개발비와 시간을 줄일 수 있어 더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는 게임 이름도 달랐어요. '레전드 오브 프론티어'였으니까."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것이랑 별개의 게임이라 이건가?" "뼈대가 되는 기본 시스템은 같았어요. 재밌는 건 중남미 서버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 서버도 필드가 각기 다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헤, 그럼 외국 서버에 가도 소용이 없었겠네요." "예, 국내랑 환경이 전혀 다르니까 처음부터 다시 적응해야 했어요, 거기다 말도 잘 안 통하고." 결국 오래 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해당 국가 유저들의 입맛에 맞게 게임을 변형시킨 건가?' 지금까지 유한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해외 서비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라곤 드림맥스가 해외 진출을 했다는 것과 꽤 많은 수익을 올렸다는 정도다. 딱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지금까진 그 정도로 알고 넘어갔다. 해외 서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왜 이런 정보는 게임 방송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을까?' 해외 서비스가 국내용과 다르다면 분명히 호기심에라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갈 만한데 말이다. 정말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취급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일반인들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일까? '뭐, 나랑은 상관없지.' 어차피 외국에서 서비스하는 서버. 지금까지 쌓아 놓은 기반을 버리고 갈 생각도 없거니와, 해커 놈을 잡기 위해서라도 한국 서버에서 계속 게임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블라덱 이놈은 해커 추적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쪽지에도 '아직 성과 없음', 혹은 '바츠 아이템 추적 중'이라는 성의 없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안 되겠군, 이 자식. 다시 불러내서 족치든지 해야지.' 유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채린이 2명의 유저들과 함께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지그야, 우리 좀 도와줘." "왜 그래?" 채린은 얼마나 급했는지 자세한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유한의 뒤에 있는 고로에 가서 몸을 숨겼다. 그녀와 함께 온 유저들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장작더미와 작업대 뒤에 숨었다. "잠깐, 잠깐만 좀 숨겨 줘. 티 내지 말고."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유한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웬 전사 아저씨가 대장간으로 다가왔다. 한번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서 그를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체 그를 어디서 봤을까? (4) "이봐, 시아라는 궁수 여자애랑 애들 둘이 이쪽으로 뛰어왔는데 보지 못했나?" '맞다, 얼음 궁전에 갈 때!' 유한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 아저씨가 누군지 생각났다. 노스아크에서 제2데보라 던전이라고 불리던 얼음 궁전으로 가기 전에 아레스란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채린은 깜짝 놀라 유한의 등 위로 숨으면서 부리나케 로그아웃을 했다. 그녀의 같은 반 친구인 오펜도 마찬가지였다. "내 말 못 들었냐? 이리로 뛰어온 애들을 못 봤냐고!" "저리로 가던데요?" 유한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레스는 유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섭게 장작더미로 돌진했다. 대쉬 스킬에 얻어맞은 장작더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으악!" 장작더미 뒤에 숨어 있던 뚱뚱한 마법사 소년이 혼비백산했다. 공처럼 구르듯이 도망을 가는 그의 뒷덜미를 아레스가 잡았다. "두철이 놈은 잡았고, 상구 요놈은 로그아웃을 했구먼."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 "야 임마, 내가 지금까지 봐준 것만 해도 골백번은 넘겠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유한은 아레스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때도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지금은 보다 명확하게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채린이네 학교 선생님이었나?' 하긴 그때도 아레스는 유한을 보고 이런 잔소리를 했다.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게임은 적당히 하도록 해. 학생이면 학생답게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지."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학교 선생님이 게임에서 애들을 직접 잡으러 다니다니.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설마 게임에서조차 복장 불량을 따지고 두발 단속이라는 전근대적인 제재를 할 셈인가? 이유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알 것 같았다. "두철이 너! 내가 성적 오르기 전까진 게임하지 말라고 했던 말 우습게 들렸냐?" "아아얏, 올랐잖아요!" "야, 인마. 점수만 오르면 뭐 해! 석차가 떨어졌는데!" 아레스는 실제 이름이 두철인 소년 마법사의 귀를 잡아 당기며 유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저들은 서로 수근대기 시작했다. 특히 유한 또래의 소년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거나 로그아웃했다. "야, 너!" "왜 그러십니까?" 유한은 아레스에게 심드렁하게 답했다. 예전에 겪은 일 때문에 학교 선생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저 뒤에 숨은 녀석에게 똑똑히 전해라. 성적 좀 올랐다고 놀지 말고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다음에 걸리면 국물도 없다고." 아레스는 채린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험 성적이 올랐기 때문에 한 번은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엄포를 끝낸 아레스는 두철을 데리고 대장간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고로 뒤에 숨어 있던 채린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방금 그 아저씨 뭐야?" 유한은 채린에게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 것 같지만, 그래도 보다 확실히 알고 싶었다. 짧게 한숨을 쉰 채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휴, 그 아저씨 우리 담임인 이태호 선생님이셔. 강서 고등학교 학생 주임이기도 하고." "그것뿐이야?" 채린이나 그녀의 친구들이 피한 이유는 알겠지만, 주변 유저들이 술렁이다가 흩어진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학교 선생님이 아닌 이상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 담임은 티쳐스의 일원이기도 하거든." "티쳐스? 티쳐스가 뭔데?" "얼마 전에 애들 게임하는 거 단속한다면서 중고등학교 선생들이 자기네들끼리 길드를 만들었어. 그게 티쳐스야." 교사들이 길드를 만들고 밤마다 여러 필드를 돌아다니며 게임을 즐기는 중고딩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고 있단다. 그동안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대장간에서 드워프의 철만 만들던 유한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니, 게임 좀 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유한은 살짝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단속을 하려면 학교에서 할 것이지 왜 자신의 대장간까지 쳐들어와서 손님들을 다 쫓아 버린단 말인가. "단속은 어떻게 하는데?" "각 학교에서 게임 좀 한다는 애들의 명단을 서로 주고 받나 봐. 이름을 모르면 용모파기를 만들어서 수배 전단처럼 들고 다니기도 해. 그렇게 잡히면 선생님한테 아이템을 다 뺏겨." 당연히 학부모들은 이런 티쳐스의 활동을 지지했고, 심지어는 숙직하는 교사들을 위해 캡슐을 기증한 학부모도 있었다. 자녀에게 캡슐을 빼앗는 것보다 게임 아이템 자체를 빼앗는 것이 더 효율적인 근절 방법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티쳐스는 이렇게 학부모들을 등에 업고 조직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단다. "확실히 아이템들을 다 빼앗기면 게임 접고 싶어지지." 그 심정을 유한이 모를 리가 없다. 자신도 해커에게 몽땅 털리고 게임을 접으려 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원한이 원동력이 되어 이렇게 새로운 캐릭터로 살고 있지만. 아무튼 해킹도 아니고 백주에 유저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템을 다 털어 가는 뻔뻔한 작자들이 있다니! "사실 티쳐스가 나타난 건 이번만이 아니래." 티쳐스란 조직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그 기원은 명확치 않다. 몇 년마다 유명 게임들이 세상을 한 번씩 뒤집고, 청소년들을 열광시킬 때마다 등장해서 악명을 떨쳐 왔단다. 과거의 티쳐스가 현재의 티쳐스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수시로 게임에 접속해 학생들을 단속할 뿐만 아니라 차고 있는 장비를 모조리 털고, 심지어는 창고에 있는 아이템까지 다 압수해 버리곤 했다. 얼마 전에 어떤 학생은 시가로 무려 200만원이 넘는 게임 아이템들을 빼앗기기도 했다고. "게임사에선 그걸 내버려 두나?" "그 정도로 게임은 안 한다나 봐. 이유야 어쨌든 애들 스스로 내놓은 거니까." "허허허!" 이러니 힘없는 학생들만 불쌍할 뿐이다. 이기적인 어른들에게 현실에서 혹사받는 것도 모자라 가상현실에서조차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짓밟힌다. "지그, 너도 조심해." "괜찮아, 난 학교 관뒀잖아." 학교를 관뒀는데 선생들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미 자신은 고등학교 졸업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꽤 거슬리는걸.' 티쳐스는 현실의 권위와 사제(師弟) 관계를 이용하고, 학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면학 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분을 들고 활개 친다. 이 점이 해커와 다르지만, 남의 소중한 아이템을 털어 간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유한의 입장에선 기분 나쁜 일이었다. 남의 아이템을 털어 가는 자들이 게임에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만약 나한테 시비를 걸면 아주 박살 내 버려야지." 유한은 티쳐스와 척을 지기로 결심했다. 아니, 오히려 이 날강도 같은 선생들이 먼저 자신을 건드려 주기를 바랐다. < 7. 대규모 업데이트 >>> (나쁜 티쳐스 놈들....@#$%&*!) <<< 8. 메이커의 공습 > (1) 업데이트가 되고 닷새 정도 시간이 지났다. 유저들이 새로운 업데이트에 흥분해서 돌아다니는 사이, 유한은 묵묵히 대장간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송코가 업데이트 된 거 확인하러 안 가냐고 물었지만, 당장 플레이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 그냥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유한은 그동안 손을 놓았던 생산과 합금, 주물 스킬의 수련에 힘을 쏟았고, 틈틈이 자물쇠나 시계 같은 것을 만들며 정밀 조립 스킬도 올려 나갔다. 철공소를 지을 수 있는 기본 능력과 데보라의 가디언인 블랙 아이언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맞추기 위함이다. 더구나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 태만했던 덕분에 지그표 무구의 질이 떨어졌다는 평이 들려서 생산 활동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성기사의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다소 품질이 떨어져 보입니다. 스킬 경험치 35를 얻었습니다. "아아! 젠장, 이번에도 실패인가?" 유한은 들고 있던 장도리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대로 잘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기사의 갑옷은 B급의 무구였기 때문이다. 유한은 요새 B급 무구 생산에 도전하고 있었다. 생산 스킬이 4랭크로 오르면서 B급 무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D급, C급 무구만 만드는 것으론 충분한 스킬 경험치를 얻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력이 올라간 만큼 더 높은 경지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리지스나 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통해 재료도 공급받고 있었기에 B급 무구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B급 무구가 지금까지 D, C급의 무구들과 달리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 지금 유한이 만들고 있는 성기사의 갑옷은 크롬 합금을 사용해야 하는데다가 모양도 복잡하고 손댈 곳이 많아 만드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나마 제작할 때 그레인 스킬을 사용하니 망정이지, 그냥 만들었다면 품질이 형편없었을 것이다. 유한은 그냥 어설프게 완성한 갑옷을 두들겨 부수고 고로 속에 녹여 버렸다. 적당한 값에 처분할 수도 있지만, 질이 떨어진 물건을 판다는 소리는 듣기가 싫었다. -크롬 합금을 5개 얻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합금 스킬이 6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수리 성공률이 70%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오른 만큼 당신의 수리 성공률도 계속 올라갑니다. 운이 좋았는지 솜씨가 오르며 수리 성공률도 함께 올랐다. 필요한 만큼 크롬 합금을 끌어 모은 유한은 다시 성기사의 갑옷 생산에 도전했다. 합금괴를 두들겨 펴고,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열처리를 하여 강도를 강화시키고 리벳과 철사를 끼워서 파트별로 조립했다. 거기다 성기사의 갑옷인 만큼 화려한 장식도 빠질 수 없었다. 그렇게 또 한차례 땀을 쏙 뺀 결과가 안내창으로 나타났다. -성기사의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전투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입니다. -스킬 경험치 90을 얻었습니다. -생산 스킬이 3랭크로 올랐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2 올랐습니다. "나이스!" 갑옷이 온전하게 완성되자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몇 번 실패하고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성기사의 갑옷 완성도는 장갑의 두께 때문에 있었다. 급소 부분을 두껍게 함으로서 방어 효과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저 매끈하게 홈 없이 만든다고 잘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장갑 두께 배분을 적절하게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의 숙련도를 쌓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랭크와 솜씨가 오르게 되어 있다. "크하핫! 이제 B급 무구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유한은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대장장이가 아니다. 그레인 스킬이라는 남보다 유리한 스킬을 가졌을 뿐 노력하지 않으면 성장도 더디고 랭크도 올릴 수 없다. 그는 최고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텟창이나 한번 볼까?" <상태창> -이름: 지그 -칭호: 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맨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이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직업: 대장장이 -레벨: 103 -체력(HP): 800/800 -스테미나: 550/550 -마나(MP): 50/50 -힘: 100 -민첩성: 80+10(바람의 부츠) -인내심: 85 -지식: 52+15(기술관의 관복) -행운: 75 -솜씨: 145+15(기술관의 관복) -명성: 9,200 -공격력: 125+102(포이즌 세이버+와이어 건틀렛) -방어력: 85+105(바람의 부츠+기술관의 관복+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2,500/12.000 -돈: 452,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채굴 스킬 4랭크 -채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3랭크 -생산 스킬 3랭크 -합금 스킬 6랭크 -정밀 조립 스킬 7랭크 -수리 스킬 3랭크 -주물 스킬 8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70%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3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5랭크 '오오오!' 예전부터 드워프의 철 생산을 부지런히 해 놓아선지 제련 스킬도 한 단계 올랐고, 수리 스킬도 더 높아졌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게임할 시간이 늘어나고, 대장간에서 부지런히 일만 한 덕분이다. 유한이 기분 좋게 스텟창을 쓸어 보다가 주물 스킬에 가서 인상이 구겨지고 있었다. 주물 스킬은 늦게 배운 만큼 랭크가 낮았다. 그나마 1랭크 오른 것도 요새 무구 생산에 주물을 응용한 데 힘입은 바가 컸다. 주물 스킬을 익힐 때도 예상했지만, 주물은 무기의 생산 시간을 단축시켜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해 주었다. "지그님, 사용하던 거푸집이 깨졌습니다요." "그래요?" 옆에 있던 NPC 대장장이가 깨진 거푸집을 보여 주었다. 롱소드의 칼날을 만들던 거푸집이었다. 별로 만들기 어려운 거푸집도 아니었다. 미리 만들어 놓은 롱소드 칼날을 점토판에 대고 찍으면 된다. 유한은 그렇게 만든 점토 거푸집에 철괴를 녹인 쇳물을 부었다. 쇳물이 식으며 칼날이 만들어지자 듣기 좋은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롱소드 칼날을 주조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2 얻었습니다. -주물 스킬을 다양하게 이용하면 스킬 경험치와 랭크를 빨리 올릴 수 있습니다. 주물은 스킬 경험치를 많이 주지 않았다. 랭크가 낮은 것도 다 그 때문. 유한은 칼날이나 도끼날, 무구의 장식 등등 주물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주물로 만들어 봤지만, 스킬 경험치를 만족할 만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매번 다양하게 이용해 보라는 잔소리가 뒤따랐다. '무구를 생산하는데 이용하는 건 다양하지 않다는 건가?' 아무튼 적은 경험치와 별개로 주물 스킬은 굉장히 유용했다.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제작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거기다 거푸집만 깨지지 않으면 몇 번이고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고, 경험치도 계속 얻을 수 있었다. 또 자신이 만든 거푸집을 NPC 대장장이에게 사용하도록 해서 대량 생산을 유도할 수 있었다. 덕분에 D급, C급의 무구들은 지금의 2배로 주문이 들어온다 해도 소화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대장간을 넘어선 수준인데..." 유한은 부지런히 일하는 대장장이들을 바라보았다. 30명의 NPC 대장장이들은 조를 나눠 분업을 하고 있었다. 제련을 하는 조,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조, 주조된 칼날이나 도끼날을 담금질하고 연마하는 조, 칼날에 자루를 끼우고 장식과 마무리를 하는 조 등등. 작업을 분업화하고 지루하지 않게 번갈아가며 맡기자 생산은 빨라지고, 제품의 질이 좋아졌다. 이렇게 지그 대장간은 평범한 대장간이 아닌, 공장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문제는 철공소를 건설하는 조건이란 말이야.' 유한은 토르 신에게 들었던 철공소릐 증축 조건을 떠올렸다. 제철소보다는 낮은 조건이지만, 철공소를 건설하려면 제련과 생산, 합금과 주물 스킬이 5랭크 이상이어야 한다. 거기다 종업원은 50명 이상. 일꾼이야 어떻게 더 구하면 될 것이고, 제련과 생산은 이미 조건을 충족했다. 합금은 조금만 더 올리면 맞출 수 있지만, 문제는 역시 주물이었다. 적은 스킬 경험치 때문에 랭크 업(Up)에 발목이 잡혀서, 철공소 단계로 올라가는 데도 차질을 빚고 있었다. "주물 스킬을 부쩍부쩍 올릴 방법을 찾아야 해." 공략 사이트를 한번 뒤져 봐야 할 것 같았다. 주물이 중상 급 대장장이의 전유물이라 공개되어 있는 팁(Tip)과 정보는 적겠지만, 혼자서 삽질을 하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2) "나 갔다 왔어." 유한이 주물 스킬의 랭크 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상행을 갔던 리지스가 돌아왔다. "수고했어, 주문은?" "여기 정리해서 적어 놨어." 유한은 리지스가 정리해 온 주문 목록을 보았다. 주문량이 늘지 않을까 했는데, 그다지 변동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줄어들기까지 했다. '무구 수요가 감소했나?' 다들 새 업데이트를 알아보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난세의 국가인 아바란 왕국에서도 길드전이 주춤해진 상태였다. 전쟁이 없으면 무구의 수요량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주문이 줄어든 이유에 대해서 유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리지스가 눈앞에 흔드는 포션을 보기 전까지는. "지그 너, 이런 거 본 적 없지?" "포션 아냐? '박하수'?" "요새 큰 마을이나 도시에 새로 생긴 상점들에서 팔더라."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하수는 유명 제약 회사의 강장 드링크로, 유한의 아버지가 코흘리개 때부터 존재했던 상품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유명한 이 드링크가 왜 가상현실 게임, 그것도 판타지 세계에 나타났느냐는 점이다. 방이나 라벨은 꽤 엔틱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제품의 효과도 게임 아이템답게 맞춰져 있었다. (=박하수=) -설명: HP를 30% 회복시켜준다. 단맛이 느껴져 음료수로 복용하기도 한다. 남용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자. 품질도 일반 포션에 비해 향상되어 있었다. 값이 비슷하거나 박하수 쪽이 조금 더 비싸다면 박하수를 선택하지 않을까. "왜 이런 게 생긴 거야?" "후후, 지그 너 업데이트 이후 마을에 나가 봤어?" "아니, 대장간에서 일만 했는데." "어휴, 내 그럴 줄 알았어." 유한은 그동안 열심히 생산 활동을 하고 스킬 수련만 했다. 사냥이나 퀘스트는 자제했다. 그것은 철공소, 나중에는 제철소까지 지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물론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어 보자는 목표 때문이기도 했고. "이 포션만 그런 게 아냐. 지금 NPC가 파는 제품들 중에 이런 것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어." 그러면서 리지스는 가방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 보였다. 거기엔 태연스럽게도 해외 유명 상표가 척 붙어 있었다. 그저 평범한 무명 셔츠임에도 불구하고 상표가 장식처럼 붙어 있으니 이미지가 확 달라 보였다. "이, 이건 설마?" "내 생각엔 드림맥스가 게임 요금을 내리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 가상현실 속에서의 상품 광고. 이번 방식의 선전은 예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광고 이미지를 남발해 유저들의 원성을 사고, 게임의 평판을 떨어트리기만 했다. 그러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등장한 이 현실의 메이커들은 달랐다. 전혀 아르페디아라는 배경 세계와 위화감이 없었다. 상표나 라벨, 제품 형태가 세계관에 걸맞게 맞춰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깜빡 속을 정도로. "그러니까 이렇게 상품 광고를 하는 대신에 유저들 요금을 깎아 준 거다?" "그래, 아마 업데이트 이전부터 관련 기업들과 협상이 다 된 모양이야. 바로 이렇게 제품들이 하나하나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 리지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기업 상표가 붙은 제품들의 품질과 디자인은 꽤 좋은 편이라고. 가격이야 다소 비싸지만, 골드 좀 갖고 있다는 유저들은 그런 거 안 따질 것이다. 특히 현실에서 돈이 없어 명품을 사지 못했던 사람들은 환장할 것이다. 이렇게 고급 상품들이 나타나 유저들의 흥미와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가운데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단사나 약사 유저들은 꽤 당황하는 듯했어. 자기네가 만든 제품이 순식간에 상점표 수준으로 전락했으니까." '설마 혹시 무구에도?' 그렇다면 큰일이다. 품질과 디자인에서 유저가 만든 것을 능가하고 가격마저 착하다면 대장장이 유저들의 수입은 크게 줄어든다. 아니, 설 자리조차 없어질지 모른다. '아뿔싸, 당했다!' 드림맥스가 왜 잘나가는 게임의 요금을 인하하는지 의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너도 대책을 세워야 해. 내가 공연히 이런 거 구경시켜 주려고 사온 건 아니란 말이야." 리지스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한의 무구가 리어커표 식칼로 전락해서, 팔리지 않으면 자신의 수입도 급감한다. "드림맥스 이 자식들! 생산직을 우대한다더니 다 헛소리였잖아!" "그렇게 투덜거리지 말고 대책을 모색해 보라니까. 투덜거린다고 이미 업데이트된 게 바뀌진 않는단 말이야." 리지스의 말대로였다. 이미 요금까지 인하하고 광고 유치를 한 드림맥스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다른 게 아닌 돈이 걸린 문제니 말이다. 유저의 요금을 인하할 정도로 기업들의 광고를 게임 속에 유치했다면 분명 인하한 액수 이상의 이득이 있다는 소리다. 생산직 유저들이 촛불시워를 한다 해도 눈도 깜짝 안 할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유한은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찾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다. 분명 이 위기를 이겨 낼 방법도 있을 것이다. -------------------- "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야." 드림맥스 대회의실. 그 자리에서 부사장 정경욱은 이렇게 말했다. 생산직 유저들이 불평을 쏟아 낸다는 상담실장의 이야기에 그가 한 말은 그뿐이었다. 그 말의 주체가 드림맥스인지 유저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태도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는 이번 광고 프로젝트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유저들을 못살게 굴면 역효과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회의 중에 누군가 우려 섞인 투로 말했지만, 정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기업들은 지나치게 게임에 개입하지 않도록 제약을 해 놓았잖아. 거기다 요금도 깎아 줬으니 불만은 곧 수그러들 거야." 확실히 요금 인하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드림맥스의 용단에 지지와 환호를 보냈고, 생산직 유저들의 불평은 소수라 치부될 뿐이다. "그들의 불만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노력 여하에 따라 이전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으니까 유저들은 꿋꿋이 극복해 낼 거야." 기업들이 유저들을 핍박하거나 게임머니를 긁어모으기 위해 가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사의 홍보와 제품의 선전일 뿐,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현실 제품과 유사한 상품들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드림맥스에서도 원치 않는 일이다. 그래서 유저들의 생산 시스템을 조금 손보기도 했다. "부사장님 말대로 오히려 유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뭐 아직은 처음이니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말이죠." 손석진의 말이었다. 이 광고 프로젝트는 그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효과와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했다. 오히려 이런 외부의 유입을 역으로 잘 이용하면 유저들의 경쟁을 유도하여 생산품의 품질을 올릴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원양항해는 어찌 된 건가?" "이제 겨우 몇몇 유저와 길드에서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달할 가능성은?" "첫 항해니까 많이 어려울 겁니다. 항로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해양 몬스터와 폭풍우라는 난관이 있으니까요." "후후후, 난파 가능성이 높다 이거군." "그걸 이겨 내고 신대륙에 간다면 굉장히 놀라겠지요." 회의의 주제는 원양항해로 넘어갔다. 어떻게 하면 유저를 더 놀라게 만들까 떠들고 토의하다 보니 금세 회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회의가 끝나자 손석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자리에는 '주동자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꺼풀을 한 장 넘기자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유저의 사진이 나타났다. 주동자 중 한 명이다. 근래 일어난 게임 내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을 저지른 녀석이었다. "지그라..." "그 친구, 조만간에 만날 수 있을 거다." 언제 왔는지 옆에 정경욱 부사장이 서 있었다. 손석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정 부사장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며칠 후에 업데이트 축하 리셉션을 거하게 열기로 했거든, 유저들도 다수 참가하게 되지." 초청자 명단에 슬쩍 끼워 넣겠다는 의미. "계획이 잡혔습니까? 잘됐군요." 드디어 녀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대장장이 지그를 내려다보는 손석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3) "아놔,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왜 이리 가렵지?" 유한은 귀를 슬쩍 후벼 팠다. 그는 지금 환경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겸,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을 겸해서 남바린 성내를 거닐고 있었다. 실제 그의 귀를 가렵게 한 범인은 드림맥스의 정 부사장과 손석진이었지만, 유한은 푸른새벽 길드 놈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지난 길드전 이후 푸른새벽 길드가 몰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나섰다가 리저드맨 군단에 무참하게 밟혀 버린 뒤, 길드원 다수가 보유한 무구와 아이템을 상실했다. 이는 길드 전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주변 지역의 길드들의 침공을 야기했다. 덕분에 아바란 왕국 북동부 지역의 패자였던 푸른새벽 길드는 이리저리 많은 영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길드원들도 적잖게 이탈해 버렸다. 유한 파티에 의해 한순간에 허물어진 남바린 성도 소울리버 길드에서 다시 점령했는데, 유한과 채린이 재건된 남바린 성을 태평하게 거닐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와! 지그야, 저 가방 좀 봐! 너무 예쁘지 않아?" 유한과 함께 남바린 성에 온 채린은 어느 가게 진열창을 바라보며 연방 눈을 반짝였다. 가죽으로 된 파우치백이었는데, 예쁘기도 하지만, 허리에 찰 수 있게 되어 있어 무척 편하고 실용적으로 보였다. 유한은 가벙은 건성으로 보고 가게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아스콰이어- 국내 유명 패션 브랜드가 게임 세계에 와서 떡하니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게임의 배경 세계와 위화감이 없으면서도 기존의 아이템들보다 세련되고 예쁜 디자인의 상품들을 내놓고서. "저거 가지고 싶어?" "아니, 그냥 예뻐서 본 거야." 유한은 단번에 그 말이 거짓말임을 알 수 있었다. 아쉬움이 짙은 저 눈동자는 어릴 때 친구의 장난감을 바라보던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빼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갖고 싶으면 내가 사 줄 테니까." "괜찮대두, 가방은 지금 쓰는 것으로 충분해." "이그, 내숭은 적당히 떨고 사 줄 테니까 그냥 따라와." "괜찮다니까!" 채린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유한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상점 안으로 들어오자, 세련된 차림을 한 NPC 점장이 깍듯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저기 저 가방이요." "아, 저 파우치백 말씀이십니까? 저건 여성용인데... 여친 분에게 선물이라도 하실 건가요?" 가게 주인은 유한의 옆에 서 있는 채린을 슬쩍 바라보며 은근한 눈빛과 미소를 보였다. 이번의 업데이트 때문인지 몰라도 예전 NPC 상인들보다도 표정이 더 풍부해진 듯했다. 이러다 NPC 인공지능이 유저들 머리 위에 올라가고 말지. "예, 뭐... 물건이나 좀 보여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색깔은 이대로도 괜찮으신지? 여기 카탈로그를 보면 아시겠지만, 총 5가지 색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연두색으로 주세요." 연두색이 채린의 현재 차림과 잘 어울릴 듯싶었다. 채린도 그쪽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창고로 갔던 NPC 가게 주인은 연두색 파우치백을 가지고 나왔다. (=아스콰이어 파우치백 라이트 그린=) -설명: 여행하는 여성을 위한 안성맞춤의 가방, 화장품이나 악세사리, 기타 소형의 아이템을 넣어 두기에 적당하다. *부가 기능: 스내칭(Snatching) 스킬에 대한 방어력이 50% 증가한다. 생긴 대로 인벤은 그리 넓지 않지만, 예쁘면서도 야무지게 생긴 데다 도적 계열 직업군의 날치기를 막아 주는 기능도 있었다. 이런 기능은 이전의 가방들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전의 가방들은 그저 인벤의 크기만 컸을 뿐. "가격은 일만 칠천 골드 되겠습니다." "엑!" 유한과 채린은 화들짝 놀랐다. 손바닥 만 한 가방이 1만 7천 골드나 하다니, 특별한 부가 기능이 있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1만 7천 골드면 쓸 만한 가방 10개는 사고도 남았다. "꽤... 비싸군요." "후훗, 저희 제품이 럭셔리한 만큼 좀 비쌉니다. 하지만 가치를 알아 주시는 분은 값을 따지지 않지요." 명품 브랜드답다고 할까.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많기에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국내 유명 브랜드가 이 정도인데, 해외 유명 브랜드는 또 얼마나 받아먹을까. 해외 유명 브랜드도 이번에 드림맥스와 제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그야, 됐어. 나 그냥 이거 필요 없으니까..." "일만 칠천 골드 맞죠?" "지그야!" "괜찮아, 나 돈 많아." "그래도 그렇지..." 채린이 뭐라거나 말거나 유한은 가방 값을 지불했다. 돈을 받아 든 주인은 여느 가게와 다르게 영수증까지 떼어 주었다. 상점 밖으로 나올 때까지 가방을 품에 꼭 쥐고 있던 채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 두고두고 잘 쓸게." '뭐,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까진 없는데.' 유한은 그저 사 주고 싶어서 사 준 것뿐이다. 설사 10배는 더 비쌌더라도 채린이 갖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사줬을 것이다. "잘 어울리네." "헤헷, 그래?" 궁수인 채린과 파우치백은 매우 잘 어울렸다. 유한은 채린의 가느다란 허리에 매여 있는 파우치백보다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환하게 웃는 채린의 모습이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메이커 상점들이 많지 않네." 남바린 영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생각보다 메이커 상점들이 많지 않았다. 리지스에게서 말을 들었을 때는 메이커 상점들이 대대적으로 공습해 온 줄 알았는데. "바르카스 왕국 같이 안정된 국가에는 더 많으려나?" "아직 초창기라서 그럴 거야.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많아 지겠지." 채린의 말대로 대규모 업데이트가 된 지 아직 일주일이 넘지 않았다. 드림맥스와 사전에 계약한 회사도 있겠지만, 지금 한창 협의 중이거나 이곳에 진출하려고 저울질하는 회사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메이커 상점들이 적다 해도 관심을 보이는 유저들은 많다는 것이다. 골드 좀 있어 보이는 유저들은 저마다 가게에서 한 보따리씩 물건을 사고 나왔다. 흥미 반 욕구 반인 듯했다. "어쨌든 그들이 최대한 늦게 들어왔으면 좋겠어. 저 메이커 공세를 이겨 낼 만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한 번만 더 둘러보고 가자 싶던 유한의 눈에 거리 한편에 좌판을 깐 상인이 보였다. 여러 가지 아이템을 파는 행상이었는데, 적잖은 유저들이 그가 파는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유한이나 채린도 흥미가 생겨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자, 이건 브로딘 왕국에서 날리고 있는 대장장이 '발리안'이 만든 칠흑의 단검이고, 이건 베레타 공화국에 사는 생산 스킬 1랭커 '귀련'이 만든 레이피어 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무구 쪽이었다. 고렙 대장장이들이 만든 듯한 무구는 척 봐도 상당히 품질이 좋았다. 가격이 다소 비싼 것이 흠이지만, 다들 그만한 가치는 되어 보였다. '어라, 저건?' 유한이 무구의 품질보다 더 관심을 가진 것은 무구들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었다. 무구를 보다 돋보이게 해 주는 그 문양을 자세히 살펴 보니 일련의 문자와 그림을 도안하여 만든 이니셜과 문장들이었다. 저 무구를 만든 상급 대장장이들은 저렇게 자신들이 만든 것에 선명하게 표시를 해 놓았다. 마치 다른 대장장이가 만든 것과 철저히 차별을 두겠다는 듯. 저러니 정말 당당한 유명 브랜드 제품같아 보였다.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유한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리지스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서 갈팡질팡했는데,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꿀리지 않을 만큼 멋진 메이커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나참,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해 가지곤...' 사실 이전에도 생산품에 이런 식의 흔적을 남기는 유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공명심에 이름자를 적거나 대충 표시를 했을 뿐, 이렇게 공을 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유명 메이커들이 들어오면서 입장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구를 애용해 준 유저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보다 멋지고 선명한 문장을 만듬으로써, 스스로 메이커가 되는 데 도전하는 것이다. "왜 그래? 방법을 찾았어?" 유한의 표정이 밟아지자 옆에 있던 채린이 물었다. "응! 선배 대장장이들 덕분이지." 유한은 당장 돌아와서 브랜드를 만들었다. 개인 작업실에서 여러 가지 이니셜과 문장을 그려 보며 고심했다. 그러나 맘에 차는 것들이 없었다. 멋지다 싶으면 상품 이미지와 맞지 않았고, 상품 이미지를 살리자니 또 멋이 없어졌다. "으음, 이런 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 유한은 현실의 유명 메이커들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간단했지만, 그것으로도 그 상품이 어느 회사 건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을 시키지 않았던가. 유한은 쉽고 간단하지만 한 번 보면 잘 잊히지 않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온 문양은 이러했다. Z 캐릭터명 지그(Zig)의 영문 앞 글자를 이용한 무늬였다. 강철을 연상시키도록, 단순하면서도 굵고 날카롭게 도안했다. 간단명료했지만, 유한은 풍분히 만족했다. 이 정도라면 지그표 무구임을 충분히 각인하고도 남을 것 같으니까. "뭐야, 이게? 설마 고전 애니 마징가의 Z?" "마스크 오브 조로겠지." "후훗, 어린애도 아니고 Z라니..." 애써 만든 문장을 보며 동료들이 다들 한 마디씩 쑥덕거렸다. "시꺼! 누가 뭐래도 난 이걸로 할 거야!" 아무도 유한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날 이후, 지그 대장간에서 나오는 무구들은 모두 선명한 Z자가 찍혀서 나갔다. < 8. 메이커 공습 >>> <<< 9. 괴짜 광부 > (1) 메이커 작전이 먹혔는지 무구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역시 드워프 제련 방식으로 만든 무구라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거래처로부터 한몫 단단히 챙겼는지 리지스는 연방 싱글벙글해 다녔고 유한도 대장장이 지그의 인지도가 높아짐에 만족했다. 하지만, 무구가 잘 팔린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무구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의 양도 많아지고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크롬이 많이 필요하다고요?" "예, 앞으로 성기사의 갑옷을 더 생산하려면 꼭 필요합니다." "구리는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죠?" "바이론 신전에서 청동제기 백 세트를 주문받았는데 이를 만들려면 더 필요합니다." NPC 대장장이들은 유한에게 찾아와 더 많은 재료를 구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유한은 근처 광맥에서 철광석과 크롬광석을 캐 오고 리지스로부터 각종 광물을 매입하며 버텼지만, 안정적인 공급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언제까지 혼자서 채굴을 하고 재료를 돈으로 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노다지가 묻혀 있는 땅을 이용해야 한다. '슬슬 광산을 개발해 볼까?' 시작은 철광산과 크롬광산 정도로. 일단 광맥은 봐 놨고, 돈도 무구를 만들면서 충분히 벌어 놓았다. 문제는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자신이 중소 길드의 장이라도 되면 별 문제가 없다. 길드원들에게 광부 부캐를 만들라고 해서, 하루에 30분 혹은 1시간씩 교대로 광 좀 캐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러나 유한은 일개 대장장이일 뿐, 아는 동료들이라곤 고작 7명 정도디. '레드 타이거 용병대... 도 무리려나?' 그 아저씨들에게 부캐 만들어 삽질 좀 해달라 했다간 오히려 삽자루로 두들겨 맞을 수 있다. 그것도 현실에서. 작업장 돌리는 인간들은 일명 '칭칭'이라 불리는 중국인 유저를 고용해서 삽질을 시키지만, 중국인을 부리려면 현금을 줘야 한다. 물론 그 현금은 광석을 팔아서 번 골드를 현거래 사이트에서 돈으로 바꿔도 되지만, 유한은 그 정도로 막장 운영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중국말 할 줄도 모른다. "결국 NPC밖에 없나?" 유저보다 효율이 좀 떨어지긴 해도 NPC 광부를 고용하는 방법이 최선인 듯했다. 하지만 NPC를 고용하는 것도 힘들다. 예전에 파부치에게 NPC 대장장이들을 영입했을 때처럼, 인력을 구하는 것은 친분 있는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밀도도 높아야 하지만, 인력 고용과 관련된 미끼나 보상을 주어야 한다. 파부치에게 초열탄 제조 비법을 알려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작업장 운영자들은 NPC보다 칭칭을 선호한다. 일도 그쪽이 더 잘하고 인력 확보가 수월하기에. "뭐 그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토지 매입부터 해야겠다." 토지 매입. 이번 업데이트된 것들 중의 하나인데, 개인이 골드를 지불하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전까지는 길드만이 영지라 불리는 토지를 소유하고 그 안에 상점과 집을 짓는 유저들에게 세금을 받았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개인도 가능해졌다. 물론 제한은 있었다. 이미 소유자가 있는 땅, 예를 들어 길드 소유의 영지는 매입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매입에 한도가 있다는 점이다. 유한은 대장간이 있는 계곡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남바린 성을 되찾은 소울리버 길드는 자신에게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고 있다지만, 크롬광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또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유한은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토지를 매입하려는 것이다. 토지를 가진 유저는 '자유민'으로 간주되어 영주의 간섭이 배제되어 농사를 짓든 광을 캐든, 제 땅에서 무엇을 하든 그건 토지 소유자의 마음대로다. "이런 건 빨리빨리 해 놓는 게 좋겠지?" 유한은 근처 영지에서 말을 빌려 타고 벨파스로 갔다. 벨파스는 아바란 왕국의 왕도로 국왕의 직할령이다. 왕도 밖은 영주들의 영지전으로 싸움이 끊일 새가 없지만, 왕도는 조용했다. 일단 아바란 왕국 내전이 영주들의 세력 다툼이고, 왕권은 약하다는 설정임으로 왕도는 전화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난세의 국가답게 수도는 활기가 없었다. 유일하게 시끄럽고 활기찬 곳은 국토 관리국뿐. 토지의 매매를 전담하는 이 기관 앞에는 부유한 차림을 한 유저들이 와글거렸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아바란에도 살 땅이 그리 많나?' 바르카스나 브로딘 같은 안정된 국가의 토지는 서로 매입을 하려고 난리들이다. 유한은 아바란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오래 전부터 영지들의 세력 확장이 이루어졌던 나라라서 노른자위 땅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일단 사 놓고 보자는 건가? 하긴 군중 심리란 것도 있으니까.' 그런데 유저들 중에 자신처럼 케이트 산맥에 땅을 사려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이 광산 때문에 와서 그런지 몰라도, 이 사람들도 다 광맥을 선점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토지를 매입하려면 관련 서류를 작성해 주시고, 매매를 하시려면 저쪽 창구에 가서 문의하십시오." 유한은 NPC 관리가 주는 서류를 받았다. 이름을 적고, 매입하고자 하는 땅의 위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관리에게 제출했다. 유한이 작성한 서류를 슥 훑어본 관리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귀하가 원하시는 토지는 땅값이 저렴하긴 하지만, 몬스터가 출현하는 지역입니다. 현재 우리 왕국은 귀하의 토지를 지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그리고 귀하는 바르카스 국적의 외국인이니 매입금과 토지세는 두 배로 내셔야 합니다. 그것도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럼 귀화를 하십시오. 원하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직접 처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유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국적을 바꾸기로 했다. 무역로 퀘스트에서처럼, 국적을 바꾸면 일부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게 될지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손을 쓰면 되는 문제다. "토지 매입금은 87,500 골드입니다. 12,500 골드 (본문에서는 12,500백 골드 라고 표기되었음.) 더 내시면 소유 토지 북쪽의 산과 숲에 대한 소유권도 가질 수 있으신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것도 포함해서 주세요." 더 지르라는 NPC에 낚여 버렸지만, 어차피 돈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장래를 보고 미리 사 놓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근데 이거 영주가 뺏고 그러진 못하는 거죠?" "귀하가 매입하신 땅의 소유는 국왕 폐하께서 소유를 인정하신 겁니다. 아무리 왕실의 힘이 약하다 하나, 이를 무시하는 건 왕실의 권위를 모욕한 것, 그럼 해당 영주는 공공의 적이 될 뿐입니다." 짧게 말해 안심하라는 것이다. 몬스터보다 인간을 더 경계해야 할 유한의 입장에선 이러한 보호 설정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토지세는 왕실의 특별세를 합쳐 매월 1,150 골드입니다. 세금만 제대로 내시면 귀하의 땅은 영구히 소유가 가능합니다." 유한은 왕가의 인장이 찍혀진 토지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이로서 광산을 개발할 1차적인 준비는 모두 끝났다. (2) 비록 영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한도 땅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당당하게 광산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로 생각했던 인력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 광물 상인 혹은 광산 십장 NPC를 찾아가 이야기를 해 봤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돈을 원하는 것 같아 돈도 좀 줘 보고, 술이나 기타 좋아할 만한 아이템으로 꼬셔 봤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매번 '이쪽도 사람이 부족해서' 따위의 대사나 읊조릴 뿐이었다. "쳇! 오늘도 실패로군." 유한이 투덜거리며 대장간에 돌아왔을 때였다. "지그야, 손님이 찾아와서 기다리는데?" "손님이요?" 송코의 말에 유한은 손님이란 사람을 만나러 갔다. 또 어떤 상인이 무구나 아이템을 주문하러 온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찾아온 손님은 전혀 상인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스톤이라는 초로의 노인. NPC인가 했는데 유저였다. 그는 고급스런 복장에 손에는 드래곤의 머리가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로브만 덮어쓰면 딱 마법사였다. "자네가 이 대장간의 주인이 맞나?" "그렇습니다만?" 대체 이 할아버지가 뭘 주문하려는 것일까. 궁금해 하는 유한의 귀에 가스톤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가 이곳을 샀다는 말을 듣고 왔네, 나에게 이 대장간, 아니 계곡 전체를 모두 팔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대체 매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팔라는 건지? "외지고 험한 곳이나 내 인심이 후하니 값은 넉넉하게 쳐 주지. 어떤가? 이십만 골드 정도면 되겠나?" 가스톤은 보란 듯이 20만 골드에 해당하는 수표를 꺼내 흔들었다. 그 오만한 모습에 유한의 마음이 울컥했다. '아놔, 이 영감탱이는 도대체 뭐야?' 유한에게 있어 이곳은 자신의 거점이다. 해커를 잡기 위해 차린 곳이며, 대장장이 지그로서 명성을 쌓으며 꿈을 키워 가고 있는 곳이다. 누구에게 팔고 자시고 할 계제가 못 된다. "싫은데요." 유한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 영감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스톤은 유한의 팔을 잡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나한테 팔라니까, 후하게 쳐 준다 하지 않았나." "후하게 쳐 주든 말든 팔 생각이 없는데요." "허허, 도대체 얼마를 받으려고 그러나? 삼십만? 아니면 사십만?" "아, 얼마를 부른데도 싫다니까요!" "아, 얼마든 낼 테니까 팔라니까!" 어찌나 끈질기게 구는지, 결국 유한의 성질이 폭발했다. 될 수 있으면 어른을 상대로 목청을 높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억지를 쓰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영감님! 도대체 목적이 뭐요? 뭣 때문에 안 팔겠다는 땅을 끝까지 팔라고 생떼를 쓰는 거냐고요?" 유한이 삐딱하게 나오자 노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허, 이놈이 예의를 중금속에 비벼 먹었나, 노인이 게임을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퇴짜를 놓아?" "참나! 노인이면 노인답게 골방에서 에뮬 게임이나 하라고요. 갤러그, 보글보글, 슈퍼마리오 이런 거!" "아니 이놈이 정말 버섯처럼 쳐 밟히고 싶나!"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졌다. 주위의 유저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싸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막 유한과 가스톤 노인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려는 그때,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어! 가스톤 할아버지!" "아니 넌 리지스가 아니냐?" 중간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리지스였다. 두 사람은 마치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는 듯 손을 마주잡으며 좋아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래, 넌 레벨이 오른 만큼 더 예뻐진 것 같구나." "꺄악! 할아버지도 참!" 가스톤은 리지스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남들이 보면 성희롱이라고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만, 리지스는 너그럽게 싱긋 웃으며 넘어갔다. 아니, 그냥 넘어간 것은 아니다. "호호호, 천 골드 주세요." "엥? 예전엔 백 골드였잖느냐?" "그때보다 레벨이 열 배 더 올랐으니까, 당연히 요금도 올랐어요." "거 원 참, 녀석도." 가스톤은 별말 없이 1,000골드짜리 수표를 내주었다. 잠시 소외되었던 유한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야, 리지스. 너 이 색골 할아범이랑 아는 사이냐?" "응, 내가 초보 시절 때 이것저것 도와주신 분이야." 그 도움이 왠지 순수했을 것 같진 않았다. 아까 영감이 나잇값도 못하고 했던 짓을 생각하면 말이다. '색골 영감,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리지스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대장장이 놈은 대체 누구냐?" "호호호, 제 남친이요." "너 죽을래!"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채린이 접속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뭐 보시면 알겠지만 그건 아니고요, 그냥 동업자에요." "그래? 그럼 네가 동업자 좀 설득해 보거라. 여기 땅을 좀 팔라고 말이다." "닥쳐, 색골 할아범. 난 안 판다고 했을 텐데!" "어허, 이놈이 자꾸! 넌 집에 어른도 안 계시냐!" "댁처럼 나잇값 못하는 어른은 없거든요!" 또다시 으르렁거리며 싸우려는 두 사람을 리지스가 진정시켰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치 않았다. 세 사람이 유한의 개인 작업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리지스는 무엇 때문에 가스톤이 여기 땅을 사려는지부터 물었다. "나야 당연히 광을 캐려는 거지." "광을 캐다니? 할아범이 광부라도 되슈?" 광부라고 보기에는 복장이 너무 화려했다. 차라리 마법사라고 할 것이지. "가스톤 할아버지 광부 맞아. 그냥 광부가 아니라 카잔 공국에서 다섯 개의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광산왕(鑛山王)이셔." "광산왕?" 가스톤의 차림새를 보면 전혀 광부 같지 않았다. 뭐 광산왕이라 불릴 정도니, 그만큼 갑부라선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광산을 찾다가 노다지를 보고 왔는데, 이놈이 땅을 절대 안 판다지 뭐냐." "새로운 광산요? 할아버지네 광산 광맥이 말랐어요?" 리지스는 그동안 가스톤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업데이트 이후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느라 바빴고, 아바란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멀리 동쪽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카잔 공국의 일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광맥은 멀쩡하지만, 뺏겼다." "뺏기다니요?" "광산을 기웃거리는 놈이 있기에 혼 좀 냈더니 철십자 길드가 싸움을 걸었단다. 그래서 광산은 물론 그 주위의 땅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어." "세상에 그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탐나는 성이나 광산이 있으면 먼저 시비를 걸고 이를 빌미로 싸움을 건다. "그런데 철십자 길드가 겨우 광산 몇 개를 뺏고자 할아버지께 싸움을 걸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리지스는 슬금슬금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가스톤의 손을 치우며 물었다. 이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작은 길드도 아니고 아르페디아 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길드가 그런 일을 저릴렀다는 것은 명성에 치명적이었다. "나도 그게 이상해서 조사를 했지. 그랬더니 내가 소유한 광산 중 하나에서 나온 이상한 것 때문이라는구나." "이상한 거요? 대체 뭐가 나왔는데요?" "글쎄, 로봇 같은 거였는데... 팔다리가 다 부서진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그랬는지." 설마 광산이 아니라 던전이었던 것일까. 유한은 가스톤의 이야기가 왠지 귀에 솔깃했다. 마녀 데보라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로키는 공중 요새 재건 퀘스트를 받았을 때, 데보라의 행방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았다는 데보라의 흔적은 카잔 반도 끝에 있었다. 그런데 카잔 공국에 있다는 가스톤의 광산에서 로봇 같은 게 나왔다면 그것은 설마? "아무튼 새 광산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이곳으로 왔지. 케이트 산맥은 개발되지 않은 광맥이 많으니까 말이다." 가스톤은 한동안 케이트 산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망한 광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가 최종적으로 광산을 만들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이 계곡이라고. "케이트 산맥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 근방만큼 광맥이 실한 곳은 없더구나. 그래서 내가 이곳을 사려고 하는 게다." "예? 이곳의 광맥이 실하다고요?" "그래, 여긴 철 광맥과 구리 광맥, 그리고..." "크롬 광맥도 있지요." 유한은 왜 가스톤이 이유 불문하고 땅을 팔라 했는지 알았다. 유망한 자원이 있다면, 땅 주인에게 그것을 숨기고 거래를 해야 싸게 매입할 수 있는 법. 실제 크롬 광맥이 있다는 게 공개되면 10만 골드인 유한의 땅은 100만 골드도 넘게 거래될 것이다. 크롬이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광석이니까. "네놈도 알고 있었던 거냐?" "할아범이야말로 무슨 수로 광맥을 찾은 겁니까?" 유한이 새로 찾은 것은 겨우 크롬 광맥 하나뿐, 그것도 포포의 도움 덕분이다. 그런데 이 영감은 2개의 광맥을 더 찾아냈다. "허허, 알고 싶으냐?" 알고 싶은 게 당연했다. 대장장이와 광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런 광석을 손쉽게 찾는 스킬을 알게, 아니 익히게 된다면 재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아니, 광맥을 소개해 주고 돈만 받아도 큰 벌이가 될 것이다. "따라 오너라, 가르쳐 줄 테니까." 가스톤이 앞장서서 가자, 유한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맘에 안 드는 영감이지만, 뭔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허리를 굽혀 줄 마음이 있었다. (3) 가스톤은 대장간을 나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지팡이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다, 바로 저기에 크롬 광맥이 있지." 그가 가리킨 곳은 얼마 전에 포포가 크롬 광맥을 발견한 곳이었다. 바로 유한이 광산을 만들려는 예정지인 것이다. "그런데 구리 광맥은 어디 있어요?" 같이 따라온 리지스가 물었다. 유한도 그게 궁금했다. 철과 크롬 광맥은 그렇다 쳐도 그는 이 주변에서 구리를 채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잘난 척 뻥친 거 아닙니까?" "허허, 이놈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오냐, 내 곧 구리 광맥을 찾아 보이마." 가스톤은 지팡이를 짚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한곳에서 뚝 멈춰 섰다. 날카로운 눈매로 땅 밑을 내려다보던 그는 지팡이를 쥐고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드래곤 머리 장식의 입 부분에서 길고 날카로운 날이 뉘어나왔다. "헉! 뭡니까, 그 지팡이는?" "광산왕의 칭호를 얻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이다." 가스톤은 변형된 지팡이로 땅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광산왕의 칭호를 갖고 있다더니, 과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순식간에 깊이 10미터는 족히 될 구덩이를 파내는 것이 아닌가. 전생에 두더쥐였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옛다. 구리 광석." 구덩이에서 나온 가스톤은 유한에게 채굴한 구리 광석을 던져 주었다. 척 봐도 구리의 순도가 높아 보이는 광석을 유한은 직접 확인해 보았다. (=구리 광석=) -설명: 구리가 함유된 광석이다. 제련을 하면 동괴를 얻을 수 있다. 유한은 직접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광맥을 채굴해 보았다. 가스톤이 건네준 것과 다르지 않은 높은 순도의 구리 광석들이 연달아 채굴되었다. "대단하네요!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거에요?" "훗, 지금 내 눈은 엑스레이와 똑같다. 이 아래 뭐가 있는지, 네가 인벤에 뭘 가지고 있는지도 다 알 수 있지." "정말입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지." "크윽!" 유한을 놀려 먹은 가스톤은 웃음을 지은 후에 제대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부지런히 광부 일을 한 덕분에 (-자원 탐사-)라는 히든 스킬을 익혔지. 땅속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다 그 때문이다." "자원 탐사 스킬요?" 금과 은, 철과 동, 니켈과 크롬 등의 특수 금속들. 대개 이런 것들이 광산에서 나온다고, 유저들은 이런 금속이나 값비싼 보석의 채굴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그런 광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석탄이나 석회석, 활석 같은 것들도 나오고, 암염(巖鹽)이나 유황 등 요리나 마법 재료들도 채굴된다. 히든 스킬 자원 탐사는 이런 비주류 광물들도 부지런히 채굴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말 그대로 자원을 탐사하는 데 무척 유용한 스킬. 가스톤은 그것을 익혀 두고 있었던 것이다. '흠, 역시 노력하는 자에겐 그에 걸맞은 보답이 있다는 건가?' 이래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재밌다. "자원 탐사 스킬을 쓰면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발밑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데, 이 떨림의 고저를 구분하면 광맥의 종류도 확실히 알 수 있지." "할아버지, 저도 떨리는데요? 혹시 저도 자원 탐사 스킬을 익힌 걸까요?" 구경하던 리지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나 발의 진동은 그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유한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스톤이 설명한 자원 탐사 스킬과 관련이 없는 듯했다. 진동은 점점 크게 느껴졌고, 지독한 악취도 풍겨 왔다. "이건 자원 탐사람 상관이 없어!" 가스톤은 지팡이를 고쳐 잡고서 악취가 풍겨 오는 쪽으로 돌아섰다. 앞쪽에 있는 나무가 부러진다 싶더니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뭔가 커다란 세 덩어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낫다. "오, 오우거!" 땅을 울리며 나타난 것은 오우거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3마리로 수컷, 암컷 오우거와 그 새끼로 보이는 가족이었다. 눈앞의 사람들을 본 오우거 부부는 곧장 손에 든 몽둥이를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쿠어어어어어!" (4) -(-오우거의 포효-)가 발동되었습니다. -5초간 동작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큭!" "이, 이런 전투 준비도 하기 전에!" 원래 대장간이 위치한 계곡의 몬스터는 유한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번 청소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물건을 사러 온 유저들이 보이는 족족 잡아서 더 이상 몬스터가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볼트나 오크도 아니고 오우거가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분명 북쪽의 네메시스 산맥에서 내려온 놈이 분명했다. 허나 지금은 그럼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벌써 수컷 오우거가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꺄아악!" 오우거의 포효 때문에 몸이 굳은 리지스는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레벨 100이 넘었지만,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가 주는 위압감은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작 패기!" "크릉?" 리지스를 내려치려던 오우거의 몽둥이가 2개로 쪼개졌다. 연이어 가스톤을 공격하려던 암컷 오우거의 몽둥이도 동강 났다. 재빠르게 동료들을 구원한 것은 유한이었다. 그는 오우거가 나타난 즉시 칭호를 '오우거 헌터'로 바꾸었다. 오우거를 잡을 정도로 강한 자가 되자 오우거의 포효도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덤벼 봐! 이 덩어리들아!" 수컷 오우거가 맨주먹으로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유한은 번개같이 품속에서 망치를 꺼내 던지곤 그것을 포이즌 세이버로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꾸어억!" 망치의 파편들이 수컷 오우거의 얼굴을 덮쳤다. 암 브레이크의 여파로 양쪽 눈을 상실한 수컷 오우거가 비틀거리자, 유한은 옆으로 빠져나가며 녀석의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오우거가 중독되었습니다. 5초당 HP가 30씩 닳습니다. 유한은 수컷 오우거의 중독을 확인하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암컷 오우거의 손이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컥!" "지그야!" 몸이 풀렸는지 리지스가 달려왔다. "괜찮아?" "안 괜찮아. 크윽, 빌어먹을!" 암컷 오우거의 따귀는 강렬했다. 순식간에 HP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으니까. 이렇게 당한 이상 저 오우거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제물로 만들 것이다. "그런데 영감님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유한이 가스톤을 찾았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오우거 포효에서 벗어난 가스톤이 지팡이를 들고 암컴 오우거를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파! 발파! 발파!" 가스톤이 지팡이를 한 번 내려칠 때마다 땅거죽이 쩍쩍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폭탄이 터지듯 뻥뻥 터져 나갔다. "뭐, 뭐야? 영감님 저렇게 강했어?" "혼자 다섯 개의 광산을 가지고 있을 정도인걸. 광산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을 모두 저렇게 혼내서 쫓아 버린대." 가스톤이 곡괭이를 가져다 대는 것은 흙이든, 바위든, 나무든 뭐든지 터져 나갔다. 유한이 가스톤의 기술에 놀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수컷 오우거가 가스톤의 등 뒤로 접근했다. 눈이 보이지 않자 소리와 냄새로 시각을 대신한 것이다. "위험해요 영감님!" 유한은 그 자리에서 건틀렛 와이어를 발사했다. 멋진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와이어는 막 가스톤을 후려치려던 수컷 오우거의 손목을 붙들었다. "발파!" "크어어어엉!" 가스톤의 지팡이가 암컷 오우거의 머리에 작렬했다. 막강한 위력의 발파는 순식간에 암컷 오우거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좋아, 이제 남은 놈은 하나뿐이다." 수컷 오우거는 유한이 날린 와이어에 붙들린 상태였고, 포이즌 세이버의 독 때문에 HP도 많이 깎여 있었다. 이제 제대로 한 방 날리기만 하면 끝장을 낼 수 있었다. "백 블로우!" 그런데 언제 다가갔는지 리지스가 커다란 가방으로 놈의 몸통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평상시라면 피를 좀 깍고 말았을 테지만, 독 때문에 놈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리지스의 공격은 크리티컬을 터트렸다. -경험치 800을 얻었습니다. -오우거의 근육을 얻었습니다. -명성이 100 상승했습니다. -(+오우거 헌터+)의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얏호! 이겼다!" 리지스는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안내창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녀를 바라보는 유한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야, 내가 다 잡은 걸 뺏기냐?" "흥, 너도 전에 그랬잖아." 유한의 항의에 리지스는 혀를 쏙 내밀었다. 스콜피언 퀸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독한 것!' 남은 것은 새끼 오우거뿐. 그러나 부모가 모두 죽자 새끼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유한은 이를 쫓아가려는 리지스를 붙들었다. "놔둬, 새끼는 잡아 봐야 경험치 얼마 주지도 않아." 그렇게 리지스를 말린 유한은 가스톤 쪽을 돌아보았다. "영감님 제법 강하십니다?" "하하하, 게임에 나이 개념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지." 늙은 사람도 게임에 접속하면 젊은 사람과 똑같은 힘을 지닌다. 늙었다고 근력이 떨어지고 힘이 처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캐릭터의 능력은 유저가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로 차이가 날분이다. "그런데 그 발파라는 기술은 뭡니까?" "허허, 발파 말이냐?" 가스톤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유한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발파 기술을 가르쳐 주면 대장간을 팔 테냐?" "크아아악! 안 판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후후후, 농담이고. 내 발파 스킬에 대해 가르쳐 주마." 그러면서 그는 광부의 고위 스킬 발파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유한도 익히고 있는 거지만 광부가 되면 기본적으로 채굴, 채석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훌륭한 광부가 될 수 없는 법. 그래서 그는 고단한 노력 끝에 채석의 1랭크에 도달하고, 그로 인해 받은 퀘스트를 수행해 상위 스킬인 발파 스킬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발파 스킬을 발동하게 되면 채굴이나 채석보다 훨씬 크고 많은 양의 바위를 단번에 깨트릴 수 있지. 그리고 네가 봤듯이 전투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즉, 발파는 광부들에게 있어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혹시 저도 발파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요?" 유한도 채석 스킬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 상위인 발파 스킬이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돼. 넌 광부가 아니라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없어." '쳇, 좋다가 말았네.' 발파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가스톤은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유한이 또 인상을 쓸 이야기로. "좀 전에 못한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정말 이 땅을 내게 팔 생각이 없나?" "휴우, 정말 끈질기시네. 그렇게 광물이 탐나세요? 리지스에게 들으니까 돈도 많은 것 같은데요." "내가 이 땅을 원하는 것은 돈을 벌자는 욕심 때문이 아니야. 그저 광물을 캐고 싶어서일 뿐이지." 그것은 가스톤이 광부를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젊은 시절 탄광에서 청춘을 보냈다. 다들 힘들다고 기피한 일을 했던 이유는 가정 사정이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탄가루를 마실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그는 계속 탄광에서 일했다. 고유가 시대, 연탄 한 장에 밝은 미소를 띤 소년 소녀 가장들이나 독거노인들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그것이 얼굴에 주름이 질 때까지 계속 탄광에서 땀을 흘리게끔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발달해서 더 이상 연탄도 필요없고 화석연료도 때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 그들의 미소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손자 놈의 캡슐에 들어갔다가 추억의 미소를 다시 볼 기회를 얻었다. 기운찼던 젊은 시절로 돌아갈 기회도. 그는 뼛속까지 광부였던 것이다. "난 그저 내가 캐낸 광물로 사람들이 흡족해 한다면 그것으로 족해. 돈은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이야." 가스톤의 이야기를 들은 유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유한은 도저히 이 찰거머리 같은 노인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뗄 수 없다면 포용해 버리는 것은 어떨까? "뭔가?" "할아버지께 땅을 팔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게 소중한 곳이라서요. 그 대신 이곳의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여기서 난 광물은 제가 다 쓰겠습니다." "음, 좋다!" 가스톤이 원하는 것은 광산 그 자체가 아니다. 다시 광물을 캘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 그런 면에서 보면 유한이 한 제안은 제법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럼 두 사람, 바로 계약서를 쓰는 게 어때요?" 리지스가 가방에서 전자 문서를 꺼내더니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용을 슥 읽어 본 가스톤은 주저 없이 사인을 했다. 유한도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 서명했다. "하하하, 그럼 앞으로 자네와 나는 이웃사촌이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유한은 또 다른 동료를 받아들였다. (5) "잘됐네, 지그 너 요새 힘이 부쳐 보이던데." 뒤늦게 접속해서 이야기를 들은 채린이 축하해 주었다. 대장장이라는 직업 때문이라지만, 매일 대장간에서 일만 하는 유한이 딱해 보였다. 대장간 일만 하면 그나마 나았다. 연료를 확보해야 한다며 나무를 하고, 모자라는 광물을 채우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 광맥을 파헤치기도 했다. 1인 3역. 대장간이 작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한 때에 잘된 거지. 이제 숨을 좀 돌릴 수 있게 되었어." "그래? 근데 그 할아버지 믿을 만 해?" 채린의 물음에 유한은 계약서를 작성한 직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신난다는 듯이 구리 광맥을 파헤치던 모습. 그것은 진정으로 땅을 파고 광을 캐는 일에 기뻐하는 순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더 봐야 알겠지만, 오랫동안 한 우물만 파서인지 사심은 없어 보이더라." "그래? 나도 한번 인사드리러 가 볼까?" "인사하러 가는 건 좋은데 너무 접근하지 마. 네 엉덩이 만지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으윽!" 채린이 질색했다. 가스톤은 단순하고 주책 맞은 면이 있긴 하지만, 뒷통수를 때릴 만한 사람으로 안 보였다. 유한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배신이다. 과거 학교를 그만둘 때 친구들과 선생님한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불신으로 똘똘 뭉쳐 키워진 캐릭터가 바로 광전사 바츠. 그러나 지금의 지그는 다르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변에 믿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동료들이 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채린이다. 채린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어울려 준 친구였고, 그것은 자신이 자퇴생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검정고시 시험을 잘 치게 된 것도 다 채린이 덕분인지도. "아, 그리고 너한테 말해 준다는 걸 까먹었는데, 나 이번 검정고시 시험에..." "알고 있어, 합격한 거지?" "엥? 어떻게 알았어?" "바보야, 전에 니 입으로 그랬잖아. 시험 잘못 치면 게임 못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신나서 게임을 하는데 그걸 모르겠니?" "하하하, 그랬나?" "아무튼 축하해, 강유한." 한동안 유한은 채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망치질을 해야 했지만, 유한은 채린과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디 갈 데라도 있는 거야?" "응, 그게... 운동할 시간이거든. 좀 있다가 또 보자." 슬쩍 시계를 본 유한은 채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로그아웃했다. 도장에 갈 시간이었다. 검정고시 시험을 친 이후로 유한은 다시 열심히 도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게임에 공부에, 수련을 좀 등한시했는데 그걸 이참에 만회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이 수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는 자신이 친구인 채린이를 지켜 주자 결심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절대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도장에 도착한 유한은 기운차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이 썰렁했다. 오늘이 휴일이라 평소보다 많은 수련생들이 땀과 기합을 내지르고 있어야 하건만, 도장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나?" 유한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가려고 할 때였다. 휴게실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다들 그곳에 모여 있었다. "여, 유한이 왔나?" 유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곽대발이 아는 척을 했다. "사범님, 다들 여기 모여서 뭐 하세요?" "응, 길드전 한다기에 그거 구경하고 있다. 아주 박터지게 싸우고 있으니까 너도 한번 봐라." "길드전요?" 길드전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벌어지는 아르페디아 대륙이다. 거기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길드전을 밥먹듯이 참여한 레드 타이거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볼 내용이라면 분명 심상치 않은 것일 거다. "도대체 누구와 누가 붙는 건데요?" "다크나이트와 B.O.B(Best Of Best) 길드 연합군이랑 철십자 길드." 과연 관심을 두고 볼 만한 싸움이었다. 게임 내 3, 5위 길드 연합과 1위 길드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니까. "왜 싸우는 건데요?" 길드전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지를 뺏겼다거나, 아니면 상대 길드가 이쪽 길드를 모욕했다거나. "얼마 전에 철십자 애새끼들이 노인네 소일거리 하는 광산을 빼앗았거든. 그러자 다크나이트 애들하고 B.O.B 애들이 경로사상이다 뭐다라며 길드전을 선포한 거지. 뭐, 실제론 경로사상은 핑계고 광산에서 나왔다는 이상한 것 때문이라나 봐." '노인네 소일거리 하는 광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유한의 머릿속에는 가스톤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자기 광산에 로봇 같은 게 나왔는데 그 때문에 광산을 빼앗겼다고 했었다. '그럼 이번 길드전은 그 광산을 놓고?' 유한도 한쪽에 앉아서 길드전을 지켜보았다. 전세는 다크나이트&B.O.B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다크나이트 길드가 자랑하는 흑표기(黑杓驥)들이 철십자 길드의 진영을 짓밟았고, B.O.B 길드의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연방 지원 마법과 버프를 퍼부어 댔다. 그러나 철십자 길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베히모스와 랭커들을 주축으로 몇 차례나 전력을 추스르며 끈질기게 싸웠다. 특히 레어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베히모스는 자기 앞에 달려드는 상대편 기사나 전사들을 가차 없이 쓰러트렸다. 그 어떤 랭커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압도적인 실력을 보였다. "베히모스 자식 잘 싸우는데." "저게 뭐가 잘 싸워? 게임 랭킹 4위가 지기 길드 발리는 것도 구원 못하냐?" "애가 아직 어리잖아. 저거 봐, 저거. 몸 사리면서 싸우고 있잖아. 조금만 더 치고 나가면 앞에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죄다 치워 버렸을 텐데 말이야." "에휴, 4위 랭킹이 아깝다." 유한의 눈에는 베히모스가 잘 싸우는 것으로 보이는데, 레드 타이거들에겐 그렇게 안 보인 모양이다. 다들 자기라면 그냥 닥치고 돌격했을 거라는 둥, 흑표기들을 죄다 밀어 버렸을 거라는 둥 떠들어 댔다. "어이구, 전열이 무너진다. 이제 끝장나겠구먼." "게임 오... 어!" 거의 철십자 길드가 끝장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땅속에서 뭔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니 다크나이트와 B.O.B 길드 연합군을 덮쳤다. 동시에 전열을 재빠르게 수습한 철십자 길드가 재반격에 나섰다. 철십자 길드의 회생에 장내 아나운서가 입에 거품을 물고 고함을 질렀다. "저게 뭐야?" "아니, 어디서 저런걸?"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켜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전세를 송두리째 바꿔 버린 그것. 그것은 거대 목인병이었다. 유한이 목인병이라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놈의 생김새가 얼음 궁전에서 봤던 신형 목인병이랑 붕어빵이었기 때문이다. 마녀 데보라의 유산임이 분명한 녀석들은 크기가 10미터가 넘었고, 전투력도 훨씬 막강한 듯했다. 거기다 그 숫자는 무려 20마리나 되었다. 녀석들은 길드 연합군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막판에 다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던 길드 연합군은 허를 찔려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1위 길드라는 놈들이 진짜 별걸 다 가지고 있구먼." "이건 도마뱀 러시 이상의 충격인데?" 싸움은 회심의 병기를 이용해 반격에 성공한 철십자 길드의 승리로 끝났다. 다크나이트와 B.O.B 연합군은 무수한 시체와 아이템들을 떨어트리고 패퇴했다. '영감님 말로는 팔다리가 다 부서졌다던데 대체 어떻게 고친거지?' 유한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반격의 리플레이 화면을 계속해서 보았다. 처음엔 거대 목인병이라는 충격 때문에였지만, 두 번째는 기계적인 흥미 때문이었다. 거대 목인병의 검은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속은 톱니바퀴와 와이어로 연결된 기계였다. 철십자 길드에는 마녀 데보라의 유산을 고칠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저 관절의 움직임은?' 분명히 겉은 목인병이지만, 저 저돌적인 움직임은 목인병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거대 목인병의 새로운 특징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관절의 움직임이 낯익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 9. 괴짜 광부 >>> <<< 10. 철의 도시 > (1) 가스톤이 온 지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유한은 NPC 대장장이들과 함께 대장간 뒤에 새로운 창고를 짓고 있었다. 광산에서 나온 광석들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쓰일 창고였다. 거의 완성했을 무렵, 가스톤이 채굴한 광물을 들고 찾아와 유한에게 말했다. "자네 나랑 같이 여행 좀 가지 않겠나?" 여행이란 좋은 것이다. 모험도 하고, 여러 곳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영감님이랑 여행 가는 것은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채린이나 다른 동료들이 끼면 모를까. "글쎄요, 전 할 일이 많아서." "그 일 좀 미루고 다녀와도 손해 볼 것은 없네. 오히려 갔다 온 다음엔 득이 될 테니 말이야." "득이 된다고요?" 가스톤은 뭐가 득이 되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목적지는 카잔 공국일세. 난 거기 가서 내가 예전에 부리던 일꾼들을 데려오려고 그러네. 생각보다 여기 채굴량이 많아서 여럿이 작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더군." "그래요?" "자네도 생각을 해 봐. 카잔 공국에는 쓸 만한 대장장이가 많아. 자네도 일꾼이 좀 더 늘면 좋을 게 아닌가?" 다시 들어 보니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일단은 철공소를 목표로 달려가는 지그 대장간에는 지금보다 20명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또 일꾼이 늘어나면 무구의 생산량도 늘릴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교대로 일하게 함으로써 일꾼들의 피로를 줄이고 작업의 집중력과 효율을 증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어때? 가 보겠나?" "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손익을 따져 본 유한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유한은 가스톤과 역마차를 타고 카잔 공국으로 향했다. -------------------- 카잔 공국. 아르페디아 대륙의 동쪽 카잔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험한 산맥과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다. 영토가 작고 던전이나 사냥터도 많지 않아 이곳에서 활동하는 유저의 수는 적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산맥에 광산이 많아 광부와 대장장이, 그리고 어부와 같은 생산 계열의 유저들이 다른 곳에 비해 많다는 것. "자네도 카잔 공국에서만 나는 해산물 요리를 맛보면 이곳을 쉬이 떠날 수 없을 거야." 유한은 이곳까지 오면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가스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생각보다 아르페디아 대륙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광부라기에 광산에 처박혀 광만 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채굴을 한다고 이곳저곳 여행을 하다 보니 각지의 특산물이나 음식, 문화에 대해도 해박해진 것이다. 유한도 바츠 시절에 카잔 공국에서 왔지만 사냥터에서 몬스터만 잡았을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아니, 당시엔 관심이 없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어르신, 정말 그곳에 가면 우수한 일꾼들이 많습니까?" "당연하지, 바르카스의 대장장이들도 실력이 괜찮지만, 철의 도시에는 비할 수가 없지. 내가 그 나쁜 놈들에게 광산을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을 거야." "아, 철의 도시라면 '스틸러스' 말입니까?" 스틸러스는 주변 산맥에서 생산되는 각종 광물이 모여드는 도시다. 그렇다 보니 광부와 대장장이들이 도시 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장장이들이 모이다 보니 경쟁이 심해졌고, 당연한 말이지만 실력도 올라갔다. 그래서 카잔 공국에서도 스틸러스시의 대장장이들이 가장 실력이 좋단다. '하긴, 상점표 중에서도 거기서 만든 게 노스아크의 드워프들이 만든 것 다음으로 괜찮았었지.' 바츠 시절에 사용한 무구들 중 스틸러스 장인 조합에서 만든 갑옷이 있었다. 상점표치고 다소 비쌌지만 내구와 방어력이 뛰어났고 옵션도 좋았다. 아쉽게도 그 갑옷은 광렙을 하다가 깨 먹고 말았다. 얼마 후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얻어 위안을 얻었지만. 유한과 가스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역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부 NPC의 작별 인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렸다. "스틸러스시에 도착했습니다. 좋은 여행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성문을 향해 도시로 들어갔다. 철의 도시 스틸러스. 산 중턱에 위치한 덕분에 대장장이나 광부를 빼면 거주인구가 많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사람들로 붐볐다.음악과 노랫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지며 꽃잎과 색종이가 휘날리고 사방에 축하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오늘이 뭔 날인가요?" 유한의 물음에 가스톤은 무릎을 탁 쳤다. "어허! 이런 내 정신좀 보게. 오늘이 바로 스틸러스시의 축제네. 매년 11월 2일이 되면 '강철의 향연'이라는 축제를 벌이지." 스틸러스시의 정체서을 나타내는 최대의 축제. 그래서인지 이맘때면 스틸러스에는 각지에서 온 대장장이와 광부들로 넘쳐난다고 했다. '호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유한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가스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내가 떠날 때보다 도시가 더 커진 것 같구먼." 그랬다. 스틸러스시는 가스톤이 광맥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전보다 집과 건물이 늘었고, NPC나 유저의 수도 많아졌다. '새 업데이트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해 보였다. 가격 인하 선포에 다른 게임들을 하던 유저가 다수 전향한 듯. 여기저기서 다른 게임과 비교하는 말들도 흘러나왔다. "난 NPC 광부들을 데리러 갈 테니까 자네도 자네 일을 보게." "예, 두 시간 뒤 이곳에서 보지요." 유한은 그렇게 가스톤과 헤어졌다. 가스톤의 말에 의하면 그가 예전에 데리고 있던 NPC 광부들 중 반은 다른 광산으로 일을 하러 떠났지만 나머지 반은 그가 새로운 광맥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영감님이 일꾼들에게 꽤 신망이 높았던 모양이군.' NPC라고 해서 무작정 주인에게 충성심을 보이진 않는다. 주인이 잘해 주고 배려해 주는 만큼 충성심도 높아지고 일의 성과도 좋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쁜 주인 밑에 있던 NPC들은 사표를 쓰고 떠나 버리거나 심지어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난 어디서 대장장이들을 모으지?" 유한은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의 머리를 콩 쳤다. "바보, 이곳의 태반이 대장장이인데 그것 좀 못 모을까봐. 그보다 시간이 좀 있으니까 우선 축제부터 즐기자." 유한은 거리를 거닐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마침 축제일이라 구경할 것이 많았다. 게임에 진출한 패스트푸드 업체와 혈투 중인 요리사 유저의 음식을 사 먹기도 하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직업인 '곡예사'의 차력과 공중제비, 저글링 등의 묘기도 구경했다. 그렇게 즐겁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며 요란하게 차려입은 NPC가 나타나 전단지를 뿌리며 외쳤다. "금일 2시부터 관청 앞 광장에서 '스틸러스 기능 경연대회'를 시작합니다. 아직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어서 관청으로 가 등록하도록 하시오!" 그 말이 들리자 유한과 같은 생산직 유저들이 하나 둘 관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능 경연 대회. 이 역시 이번 업데이트부터 등장한 이벤트다. 영주나 국왕이 산업 장려를 목적으로 여는 대회로, 생산직 유저라면 자기 직업의 종목에 참가해 우승에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우승자에게는 적잖은 보상과 명성이 주어지는데, 이것이 생산직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유한도 업데이트 이후 이런 대회에 꼭 참가해 보려 했지만,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다. 대장간에서 생산에 주력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아바란 왕국에서는 이런 이벤트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은 탓이다. 이런 이벤트는 보통 체제가 안정된 국가들의 도시와 영지에서 열린다고 한다. 당연히 아바란 왕국은 해당 사항이 없음이다. "나도 한번 참가해 볼까?" 유한은 문득 회가 댕겼다. 전단지를 보니 1등 상품이 마차였다. 그것도 말 1마리가 끄는 짐마차였는데, 상당히 튼튼해 보이는 게 생산직 유저들이 타고 다니거나 사용하면 좋을 듯했다. 거기다 밑에 달린 설명을 보면 이 짐마차는 기존의 일두(一頭) 짐마차보다 짐을 1.5배 더 싣고 속도도 30% 더 빠른 옵션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여기 짐칸에 고로 설비라든가 화로, 모루 같은 것을 두면 이동형 대장간으로 쓸 만하겠는걸?' 이전에도 화로나 망치 같은 도구들을 들고 다니며 생산을 해 보았지만, 생산량이나 품목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짐마차를 이용하면 작은 대장간 하나를 갖고 다니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당장 가서 등록해야지." 철의 도시인 만큼 쟁쟁한 경쟁자들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해 봐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에게서 신청서를 받아 든 NPC 관리는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유한을 요리조리 째려보았다. "지그라? 아바란 왕국 출신이라고?" "그렇습니다만... 혹시 외국인은 참가가 안 되는 겁니까?" 유한은 예전 무역로 퀘스트에 신청서를 낼 때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꽤 실력 있는 마법사였는데도 바르카스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혹시 이번에도 카잔 공국인만 참가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너무 성급했나?' 유한이 내심 후회하고 있을 때 NPC 관리가 말했다. "별로 문제될건 없네.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 보게." "아, 고맙습니다." 다행히 문제없이 넘어갔다. 유한은 안도하며 물러났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유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NPC 관리는 옆의 부하에게 참가 신청서들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번에 야장 분야에 참가한 대장장이들이 몇 명이라고?" "모두 163명입니다." "그중에 외국인은 몇이나 되지?" "방금 그자까지 합쳐서 17명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NPC 관리는 부하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적당히 손을 쓰도록 해. 본선까지 올라가는 것은 몰라도, 외국인에게 우승을 넘겨줄수는 없으니까."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자존심 강한 스틸러스시의 관리답게 우승자는 누가 되었든 간데 카잔 공국민이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 같은 설정을 한 것은 그들을 만들고 조작한 드림맥스다. 유한은 그렇게 숨겨진 함정이 있다는 것도 모른 체, 대회 준비에 열중했다.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을 하면서. (2) 도시의 특성에 맞게 스틸러스 기능 경연 대회는 광부 부분과 대장장이 부분으로 나뉘었다. 광부 부분은 '석탄 배달'이라는 명칭이 붙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석탄을 외발 수레로 나르는 사람이 이긴다. 지이잉! 병사가 관청 앞 광장에 세워진 커다란 징을 울리자 광장에 가득 모인 두 기능 종목의 선수들이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삽으로 석탄을 퍼 나르기 시작했고, 각자 1개의 철괴를 받은 대장장이들은 화로에 불을 지펴 쇠를 달구었다. 그렇게 달궈진 철괴를 모루에 놓고 망치질을 하여 모양을 다듬은 뒤 물로 식혀 담금질을 해 나갔다.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그들의 뒤에선 친구와 동료들이 응원을 보냈다. "아론 오빠, 파이팅!" "상길아, 힘내라!" 비록 유한을 응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작업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예선은 1개의 철괴로 제한 시간 안에 최고의 숏소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특별히 힘든 것은 없지만, 실수해서는 안 된다. 유한은 숏소드를 만드는 데 그레인 스킬을 사용하였다. 날이 새파랗게 선 숏소드는 그가 예선을 수월하게 통과하도록 해 주었다. "자, 그럼 본선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본선은 여덣명의 예선 통과자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 가장 자신 있는 무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선이 대장장이의 기본 실력을 겨루는 거라면 본선은 각자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거였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NPC 관리의 선언에 병사가 다시 징을 울렸다. 유한은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을 만들지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무구의 꽃은 검이지.' 무엇을 만들지 결정한 유한은 화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1시간 안에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나 도구는 주최 측에서 모두 준비해 주었다. 유한은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대로 철괴를 녹여 두들기기 시작했다. 카앙! 캉! 치이익! 치이익! 이곳저곳에서 망치질 소리와 담금질 소리가 들렸다. 다소 긴장될 법도 한데 유한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한 자루의 검을 만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꽤 괜찮을 물건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검날이 거의 다 완성되었을 즈음이다. 갑자기 망치 자루가 뚝 하고 부러지더니 손이 빗나갔다. "엇!" 빗나간 망치가 그만 검날의 한쪽을 부러트리고 말았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마침 시간이 다 되어 가던 때라 다시 만들 수도 없었다. 멀쩡하던 망치가 왜 갑자기 부러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유한은 서둘러 망치 자루를 고쳐 끼우고, 그레인 스킬을 펼쳐 부러진 검날을 가져다 붙였다. 비록 시간은 없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정해진 시간 내에 원하던 검을 완성했다. "상태 확인." 유한은 검의 옵션을 확인했다. (=마이티(Mighty) 소드=) -공격: 100 -내구: 88 -설명: 보기만 해도 튼튼하고 강해 보이는 검. 들고 있으면 없던 힘도 무럭무럭 솟구칠 것 같다. -부수 효과: 착용하면 힘이 10 증가한다. '큭! 내구가 떨어졌군.' 언뜻 보면 표시는 나지 않지만, 옵션은 정직했다. 완성품인 마이티 소드는 내구 100이 정상인데 좀 전의 실수로 12나 떨어진 것이다. 뭐 그런 것을 제외하면 무척 잘 만든 검이다. 허리에 차고 있는 포이즌 세이버보다도 공격력이 강했고, 중량감도 있고 폼도 났다. "오냐, 이제 네가 내 애병이다." 이벤트에서 스스로 만든 검을 갖고 다니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유한은 우승 여부와 관련 없이 이 검을 차기 주력 장비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각자 자신이 만든 것을 심사대에 내려놓으십시오." 유한이 심사대에 마이티 소드를 내려놓자 심사관들이 지나가며 일일이 살폈다. 모두 한 지방에서 한다 하는 대장장이들이 만든 것들이라 뛰어난 것들 일색이었다. 그러나 유한은 기죽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마이티 소드가 이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 같았기에. 물론 자신의 작품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유한만이 아니었다. 유한과 함께 늘어선 대장장이들도 저마다 자신이 최고라는 듯이 으스댔다. '오오! 내가 1등인가 보다!' 유한은 심사관들의 반응을 보고 그리 생각했다. 지금 심사관들은 그의 무기를 살펴보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잠시 후, 심사 발표가 있었다. "올해의 대장장이 부분 우승자는 카잔 공국의 대장장이이자 이곳 스틸러스의 자랑인 아론!" "와아아아!" 심사위원장의 발표가 있자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스틸러스 출신의 우승자가 나와 모두들 기쁜 듯했다. "그럼 그렇지." "아론 오빠를 능가할 대장장이는 드워프 말고는 없을걸?" "괜히 철십자 길드에서 모셔 가려는 게 아니라고." 아론의 친구들로 보이는 유저들이 으스대며 한두 마디씩 내뱉었다. 그런데, 그들의 우쭐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심사위원장이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아이템을 내려놓지 않는다 싶더니 곧장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한 사람의 공동 우승자는 아바란 왕국 출신의 대장장이 지그!" "앗싸! 해냈다!" 유한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조금 전 아론의 우승을 들었을 때만 해도 처음이니 우승을 못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었다. 비록 결판을 내지 못했지만, 공동 우승이라는 다소 만족스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누군가의 한 마디와 함께, 잠시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던 장내에 갑작스레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 "심사관들 뇌물 먹었냐!" "타국 출신 대장장이한테 우승이 웬 말이냐!" 관중들은 심사관들을 비난하고, 상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나가는 유한에게도 야유를 보냈다. 물론 이에 질 유한이 아니었다. "시끄러워! 망치만 안 미끄러졌으면 내가 압승이라고!" 유한은 지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관중들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야유 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든 상패를 받았고, 또 1등 상품으로 탐을 내던 짐마차도 함께 받았다. (3) 유한은 희희낙락거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서 다시 만난 가스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부하 광부들을 만나러 갔었는데, 다들 난색을 표하며 그의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허허, NPC들이지만 내 그리 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더 좋은 직장을 구한 거겠죠. 별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지금 유한은 기분이 꽤 좋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만약 경연대회에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면 그는 투덜거렸을 것이다. 유한은 가스톤을 짐마차에 태웠다. 천천히 도시를 돌며 사람을 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틸러스에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 어디죠?" "너트 거리 뒷골목이죠. 술집이 많아서 대장장이이나 광부들이 일 끝나면 한 잔씩 하러 간다네." 유한은 곧장 마차를 너트 거리 뒷골목으로 몰았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싶었을 때였다. 일련의 일물들이 나타나 골목길을 막아섰다. "뭐야? 양아치들?" 마차의 앞과 뒤를 가로막은 인간들은 말 그대로 양아치 NPC들이었다. 다소 껄렁해 보이는 동작과 몸짓으로 도시의 뒷골목에 기생하는. 그런데 그들의 뒤에 굉장히 낯익은 NPC가 하나 있었다. 바로 기능 경연 대회를 주관한 NPC 관리였다. "긴말하지 않겠다. 네놈이 받은 상패와 상품을 내놓고 가거라." "혹시 당신이?" 유한의 뇌리를 번뜩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중에 망치 자루가 왜 부러졌는지 살펴봤는데, 누가 부러지기 쉽도록 실톱으로 살짝 잘라 놓았다. 거기더 겉으로 보아선 알아보기 힘들게 교묘히 덧칠까지 해 놓았다. "후후후, 건방진 놈. 감히 우리 스틸러스의 축제에 참가해 일등을 먹을 생각을 하다니." "외국인도 참가해도 된다면서?" "물론 참가는 해도 되지. 하지만, 단순한 들러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겁도 없이 일등을 해?" 그런 것이었다. 이 도시의 인간들은 기술적 자부심을 강해 타국의 인물들이 우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한이 쓰는 장비에 수작을 부려 놓았고, 그래도 그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하니 이렇게 몰래 린치를 가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게임상의 설정일 뿐이지만, 그 더러운 수작은 유한의 성질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쳐라! 저놈이 가진 상패와 상품을 빼앗고 다시는 이곳에 올 생각을 못하게 흠씬 두들겨 줘라!" NPC 관리의 외침과 함께 퀘스트창이 불쑥 떠올랐다. (<부패한 관리의 음모>) -스틸러스 시의 부패한 관리는 경연 대회에서 타국인이 우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대 경연 대회의 우승자여! NPC 관리와 양아치들로부터 상패와 상품을 사수하라! '켁! 꼴에 연계 퀘스트라니.' 뭐 이런 황당 시추에이션이 다 있나 싶었다. 아무리 별별 퀘스트가 난무하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이지만 경연 대회에 우승했다고 집단 린치를 가하는 퀘스트가 있다니! 하지만, 엄연히 퀘스트는 퀘스트. 유한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듯해서 받은 것이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도와주겠네." "어르신은 그냥 쉬고 계세요. 금방 끝날 테니까." 가스톤이 한몫 거들려고 하자 유한이 말렸다. 그가 마차에서 내려오자 제일 앞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던 녀석이 커다란 해머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이야아아!" 역시 철의 도시쯤 되니 양아치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도 특별했다. 다른 곳 같으면 나이프나 단검 같은 것일 텐데. 유한은 슬쩍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한 뒤, 뒤에서 덤벼드는 놈을 향해 건틀렛의 와이어를 발사했다. '이거 죽여도 괜찮겠지?' NPC나 유저를 죽이게 되면 머더러가 된다. 하지만, 이건 퀘스트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퍼억!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양아치의 이마를 후려갈겼다. 한 놈을 그렇게 처리한 다음, 유한은 새로 만든 마이티 소드의 검면으로 연이어 달려드는 양아치들을 후려갈겼다. 퍽퍽퍽! 유한의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양아치 놈들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보통 대장장이라면 모를까 유한은 지금 어딜 가도 쉽사리 당하지 않는 100레벨 대의 유저였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골목의 양아치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히이익!" NPC 관리가 놀라 도망을 가려고 했다. 유한은 와이어를 던져 녀석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월척이라도 낚듯이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케엑! 사, 살려 주게. 날 살려 주면 보상을 하겠네." "보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차피 놈을 혼내 주면 퀘스트의 보상이 알아서 뜰 것이다. 유한이 주먹을 치켜들자 NPC 관리가 비명을 질렀다. "로, 로첼의 아들이 지금 사채업자에게 잡혀 있네. 날 풀어 주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려 주지." "로첼? 난 그런 사람 모르거든?" 보상금을 내놔도 시원찮을 판에 엉뚱한 소리를 하다니. 유한이 주먹을 내리치려 할 때, 갑자기 가스톤이 나서서 그를 말렸다. "잠깐! 다시 말해 봐. 로첼의 아들이 어찌 되었다고?" "어르신, 로첼이 누군데 그러세요?" 가스톤이 아는 사람인가, 그래서 관리 녀석이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다. "로첼이 내 부하 광부야.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지. 어쩐지 아까 표정이 어둡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사정을 들은 유한은 NPC 관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물었다. "어이, 그 사채업자라는 놈 어디 있어?" "볼트 거리 3번가 뒷골목." 유한은 관리를 놓아 주었다. 퀘스트 보상이 사라지겠지만, 보상도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았기에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를 처리하면 스틸러스에서 머물거나 사람을 구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다시 내 눈에 띄면 죽을 줄 알아!" 유한의 협박에 먹혔는지 모르지만, NPC 관리는 걸음아 나 살려가며 도망가 버렸다. "이제 인질을 구하러 가 볼까요?" "그러지, 서둘러야겠군." (4) 볼트 거리 위로 한 무리의 NPC 광부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곡괭이와 삽을 쥔 그들의 표정에는 비장감이 감돌았다. 절대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이봐, 로첼. 역시 어르신께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누군가 그리 말하자, 선두에 선 로첼이 곧바로 대꾸했다. "이건 내 일이야. 어르신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한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을 따르는 광부들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이건 내 일이다! 내가 사채업자에게 돈을 꿔서 생긴 일이다. 너희들까지 이럴 필요는 없다고!" "무슨 소리야? 우리가 남이냐? 어디 하루 이틀 같이 일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고." 다들 로첼을 도와주기 위해서 가스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구가 위기에 처했는데 맘 놓고 새로운 땅으로 일하러 갈 수는 없는 일. "위험하단 말이야! 멘슨 패거리가 얼마나 흉포한지 너희도 잘 알잖아." "잘 아니까 같이 간다는 거야. 너 혼자서 어쩌려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그것이 광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그들의 마음이었다. "쳇! 어떻게 되어도 난 몰라." 로첼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동료 광부들은 주저 없이 그를 따랐다. 마침내 그들은 사채업자 멘슨의 본거지인 3번가 뒷골목 창고에 당도했다. 그런데 창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입구에는 멘슨 패거리의 졸개들이 엎어져 있었다. 안쪽에서는 웬 폭음과 정체불명의 파열음, 그리고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쳐들어온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멘슨 패거리는 스틸러스에서도 흉포하기로 소문난 놈들로 관청에서도 손을 못 댈 정도로 숫자가 많다. 놈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 대체 쳐들어간 것은 누구인지? "가 보자!" 궁금해서 창고 안으로 달려간 광부들은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 널 부러진 건달들과, 아직 살아 있는(?) 양아치들을 발파로 날려 버리고 있는 가스톤. 그리고 악명 높은 멘슨을 두들기고 있는 대장장이 소년. "우왁! 왜 이러십니까? 마, 말로 합시다! 말로 해요!" 멘슨을 패고 있는 것은 유한이었다. 그는 애원하는 멘슨의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더 날려 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세상에서 배신자 다음으로 싫어하는 놈이 바로 사채업자야. 착한 사람들한테 친절한 척 돈 빌려 주고 등골까지 뽑아 먹는 거머리 같은 놈들이니까!" 쓰러진 멘슨의 두툼한 배를 밟은 유한은 저승사자 저리 가라 싶을 정도로 싸늘한 물음을 내뱉었다. "로첼의 아들은 어디에 있지?" "저, 저기에." 멘슨은 한쪽에 허름한 장롱을 가리켰다. "아들아!" 유한보다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아들을 빼앗긴 광부 NPC 로첼이었다. 그는 장롱 문을 부수고 안에 있는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이제 겨우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밤새 울었는지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NPC라지만 사채는 안 좋은 거야! 다시 한 번 내 눈에 사채 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그날로 NPC 생을 종칠 줄 알아!" 유한이 사채업자 놈들을 향해 훈계를 하고 있을 때, 가스톤은 광부들과 대면하고 있었다. 얼굴에 엄한 기색을 가득 띠운 그는 호되게 광부 NPC들을 호통 쳤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리 못 미더워 보였느냐?" "이건 어르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어떻게든 제 힘으로 수습하고 싶었습니다." 고개 숙인 로첼이 그리 말하자, 가스톤은 언성을 더욱 높였다. "어째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냐? 너희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바로 너희들 일인 것인데!" 그렇게 일갈한 가스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로첼의 어깨를 도닥였다. 따지고 보면 로첼이 사채를 쓴 이유도 자신이 광산을 철십자 길드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실직을 하지 않았으면 그리될 일은 없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라, 알겠느냐?" "예, 어르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유한과 가스톤, 그리고 광부 NPC들은 창고 밖으로 나왔다. 가스톤은 자신의 광부들을 정식으로 유한에게 소개시켰다. "여기 이들이 바로 내가 말한 광부들일세." "믿음직해 보이는군요." 유한도 대충 사정을 파악했다. 광부 로첼을 돕기 위해서 행동을 같이한 광부 NPC를 보자니, 이들이 현실의 비겁한 인간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라면 광산을 통째로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유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로첼이 아들과 함께 다가왔다. "아들을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은혜는 앞으로 새로 개발될 광산에서 갚으세요." 유한은 광부들에게 자신과 가스톤이 스틸러스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대략 이야기를 들은 광부들은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광산에서 일할 수 있어 좋았지만, 광산이 멀리 아바란에 있는데다가, 아바란은 내전 중인 위험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유한을 향해 말한 로첼은 동료 광부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 듯하더니 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닌가. "아니, 모두 어디 가는 겁니까?" 유한이 궁금해서 물었다. 기껏 모아 놓은 광부들이 모두 흩어지자 큰일이다 싶었다. 로첼은 그를 향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가족을 두고 혼자 먼 나라에 가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전 가족들을 데리고 어르신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는 것이라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은 모두들 가족을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는 것. 스틸러스는 부패 관료가 설치고 사채업자가 판을 치는 도시라 그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아바란이 위험한 나라라고 하나, 가스톤이나 친절한 대장장이와 함께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을 데리러 흩어진 것이다. "난 또 뭐라고..." 내심 긴장했던 유한은 한숨을 쉬며 씩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당혹감으로 뒤바뀌었다. '자, 잠깐! 그럼 숫자가...' 족히 100단위는 넘을 것이다. 정말 100단위가 넘는 NPC들이 따를까 생각하고 있는데, 흩어졌던 광부들이 돌아와서 말했다. "가스톤 님, 가족들도 모두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허허허, 그럼 모두 가세나." 가스톤마저 허락하자 유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 했다. 그날 스틸러스 시에서 10여 대의 마차에 짐과 사람을 가득 실은 행렬이 아바란 왕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 속에는 대장간에서 함께 일할 대장장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10. 철의 도시 >>> <<< 11. 드림맥스의 초대 > (1) 스틸러스에서의 일을 마친 유한은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 밖으로 나왓다. 이제 잠 좀 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창밖이 환했다. 시계를 보니 아침 5시 40분. 그저 새벽 2~3시밖에 안 된 줄 알았는데 날을 꼬박 세워 버렸다. 유한은 시계와 창문을 번갈아 보며 어찌할까 고민했다. 지금 잠을 자면 12시까지 곯아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박살 날 공산이 크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캡슐에 대한 어머니의 잔소리는 줄어들었지만, 요새 다시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계셨다. 식사 때마다 넌지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적당히 쉬고 이제 또 공부해야지. 학교에 안 가는 만큼 수능 준비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니?" 물런 이 같은 타이름에 유한은 '예'라고 착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어제다. 그래 놓고 게임으로 날밤 새운 모습을 보였다간 뭐라고 하시겠는가. 피곤하긴 해도 어머니를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또다시 캡슐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절대 사양이다. "그냥 일찍 일어난 척을 해야지." 유힌은 적당히 방을 치우고,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중간에 웬 사내자식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막 세수하고 나왔는지 목에 수건을 걸고 있는 그 녀석은 유한보다 키는 작지만, 상하체의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당돌한 눈빛에 갸름한 얼굴선 등, 어미니 김 여사를 무척 많이 닮아 있었다. 녀석은 유한을 소 닭 보듯이 바라보았다. "누구시더라?" "니 형이다, 이 썩을 놈아!" 유한의 동생 강유현. 유한보다 한 살 어린 유현은 꽤 활동적인 녀석이라, 평소에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 간다고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이상하네, 형 어제 저녁에 아이옥신이랑 멜라닌을 비벼 먹었어?" "뭐가 어째, 인마, 너 죽을래?" 유현이 하도 신기해서 하는 소리였다. 형이란 인간은 자퇴 이후에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난 적이 없었다. 요새 형이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근본이 어디 가겠는가. "날밤 새웠지?" "이렇게 팔팔한 모습이 날밤 새운 것처럼 보이냐?" "팔팔하니 문제지. 보통은 잠이 덜 깨서 게슴츠레해야 정상이라고." 눈치가 빠른 동생 놈이다. 유한은 안 그런 척 지나치며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나왔다. 증인이 한 놈 있긴 했지만 일단 부모님을 속이는 범죄에는 성공했다. "형, 근데 요새도 아르페디아 온라인 하고 있어?" "그런데?" "해킹당했다면서?" "누구한테서 들었냐?" "저번에 엄마가, 해킹당했다고 발광을 떨었다던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지난 일은 잊어라' 다독이며 '너는 이제 지그만 생각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해킹당해서도 다시 할 정도로 재미있나?" "너도 한번 해 봐라." "싫어. 새로 하면 지금 하는 거 때려치워야 된단 말이야." "너도 가상현실 게임 하냐? 너 캡슐은." 밖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동생이 가상현실 게임을 한다니 놀랄 일이다. 그보다, 유한이 알기에 유현은 캡슐이 없다. 밖에 캡슐방에서라도 한단 말인가. 용돈도 얼마 없는 녀석이. "형 저번에 하나 내다 버리드만." 그랬다. 드림맥스에서 위문품이라고 캡슐을 새로 줘 헌것은 내다 버렸다. 아니, 창고로 보냈다. "그거 네가 가져갔냐?" "멀쩡한 거 썩혀 두면 아깝잖아. 좀 때가 타긴 했지만." 아무튼 유현은 유한이 버린 캡슐을 가져다 가상현실 게임을 맛본 모양이다. 아직 부모님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 많이 하지는 않은 듯했다. "갑자기 게임 하겠다는 생각은 왜 한거냐? 매번 애들이랑 늦게까지 놀기 바쁘더니." "새로 사귄 여친이 게임을 하고 있거든. 뭐가 어떤가 싶어 나도 같이 해 보게 됐지, 뭐. 공부도 되고 좋더라." "공부가 되다니?" "응, NPC들이 영어로 말을 걸더라고." '외국 게임인가?' 도대체 유현이가 하는 게임이 무엇인지? 새로 사귄 여친은 또 누군데 그런 게임을 하는지? 유한은 궁금했지만, 거기서 동생과 대화를 중단해야 했다. 막 일어나신 아버지가 거실에 있는 아들 둘을 보고 반색을 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오! 웬일로 둘이 다 일어나 있냐?" "그게 뭐... 그렇게 됐네요." 유한은 동생에게 '나불대면 죽는다'의 신호를 보내고 적당히 대꾸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아침 가게 정리 퀘스트에 필요한 파티원 1호, 2호가 생겨서 기쁜 듯했다. "니들 시간 있으면 아버지 좀 도와줄래? 같이 하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다." "예. 뭐, 금방 끝날 거라면." 오랜만에 효자다운 모습을 보이자 싶었던 유한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현장으로 가 본 유한은 이게 D급 퀘스트를 빙자한 A급 퀘스트임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가게 정리를 한다고 해 놓고는 아예 물건 진열을 바꿔 버렸고, 이왕에 청소도 해야겠다며 유한에게 대걸레를 장비시켰다. "항상 가게 손질에 신경을 써야 손님들이 자주 드나드는 법이야. 조금만 바꿔 줘도 이미지가 확 달라지거든." 유한은 짜증이 났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버지의 거짓말+수면 부족+중간에 동생이 학교 간다고 파티에서 이탈' 때문이었다. 가게 정리는 아침 식사 후 오전 11시까지 계속되었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갈 쯤, 유한의 호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유한 고객님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다 싶었는데, 금세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지난번 해킹 때 전화를 했던 사람이었다. "전 드림맥스의 고객 상담실 실장 양호식입니다.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고객님을 저희 회사에 초청하기 위해섭니다." "초청이요?" "예, 사흘 뒤 본사에서 업데이트 기념 리셉션이 있습니다. 여러 유저 분들을 무작위로 뽑아 초청하기로 했는데, 고객님이 운 좋게 당첨이 되셨습니다." 유한은 좀 어이가 없었다. 드림맥스가 업데이트 기념 리셉션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그러나 자신이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자기네들이 뽑아서 초청을 하겠다니. 물론 드림맥스에선 유저를 깜짝 놀라고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드림맥스에 감정이 안 좋은 유한으로선 자신의 의사를 무시해 버린 듯해서 기분이 나빴다. 자기네들이 한다고 결정하면 다 따르고 승낙할 것이라 생각하는 오만함이 무척 거슬렸다. "초청장은 이미 자택으로 보내 드렸으니 들어오실 때 제시하시면 될 겁니다. 일자는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사흘 뒤 오후 5시, 장소는 저희 회사 본가 3층 연회실입니다." "글쎄요, 전 그날 바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못 가겠는데요." "그, 그렇습니까? 어떻게 꼭 오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오시면 가수나 연예인들도 만날 수 있고, 게임 제작자 분들이랑 대화, 토론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기념상품도 드립니다. 아! 맛있는 것도 많이 나오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안 가겠다고 하니 상대는 적잖게 당황했다. 말을 더듬는 것은 물론이요, 애원까지 하는 것이다. '내가 안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나?' 그런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유한은 가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냉정한 약관으로 자신에게 뻣뻣하게 대했던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쓴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저희는 고객님을 꼭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방문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글쎄요, 공부도 해야 해서 이만." "고객님!" 양호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후 몇 차례 그에게 전화가 더 왔지만, 유한은 아예 받지도 않았다. 가게 정리를 끝낸 유한은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우체통에 드림맥스에서 보낸 초청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드림맥스에게 한 방 먹이기로 작정한 유한은 뜯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졌다. -------------------- "그래서? 무시하기로 했다는 거야?" 저녁 때 게임에 접속했을 때, 유한은 동료들 앞에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자신이 드림맥스를 물먹였다고. 그러자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들은 유저 200명을 무작위 추첨으로 리셉션에 초대한다는 것을 이미 공식 홈페이지의 공지로 알고 있었다. "필요 없으면 차라리 날 주지." "바츠, 이 배부른 자식! 그 리셉션에 누가 오는지 알아? 은비 누님이 온단 말이다! 최강 아이돌인 은비 누님이!" 옌스가 흥분한 고릴라처럼 가슴을 두들겼다. 녀석은 리셉션 내용을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시꺼, 은비가 오는지, 금비가 오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닥치고 그걸 나한테 줘!" "벌써 버렸어." "아아!" 좌절한 옌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은 옌스뿐만이 아니라 리지스나 송코도 그랬다. 다들 배부른 유한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무슨 일이야?" 마침 채린이 접속을 했다. 리지스는 참 잘 만났다는 듯, 그녀에게 유한의 만행에 대해 털어놓았다. "저 바보가 육만 대 일의 확률에 당첨되고도 권리를 포기했어." "뭐? 지그도 리셉션 초청을 받은 거야?" "지그도라니? 그럼 시아, 너도?" 리지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채린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와 줬으면 한대." "크악! 내 주변에서 둘이나 추첨됐는데 왜 나는!" 다들 유한을 더욱 무섭게 째려보았다. 남은 뽑히고 싶어도 떨어졌는데, 어떤 놈은 당첨되어 놓고도 권리를 포기하다니. 이는 떨어진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시아 너 그 리셉션에 갈 거야?" "응, 꼭 와 달라고 하는데 무시하면 실례잖아." 유한은 채린이가 참 속이 넓다고 생각햇다. 어쩐지 그런 그녀를 보니 자신이 소인배같이 느껴졌다. "근데 지그 너는 정말 안 갈거야?" 유한은 채린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채린이 간다니까 은근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솟구쳐 올랐다. 초청장은 아직 휴지통 속에 남아 있다. 생각을 바꿀 기회는 아직 있었다. (2) 사흘이란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유한은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드림맥스 본사로 향했다. 드림맥스의 본사는 굉장히 세련된 양식으로 지어진 고층 빌딩으로 위풍당당하게 가상현실 세계를 접수하는 그들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유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처럼 초청받은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방송국과 신문사의 기자, 어딘가의 업체 쪽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끼리끼리 뭉쳐 본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채린이는 벌써 안으로 들어갔으려나?' 두리번거리던 유한은 저 멀리 걸어오는 채린을 발견했다. 채린 쪽에서도 유한을 봤는지 손을 흔들었다. "후후후, 결국은 왔구나." "너 혼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사이좋게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3층 연회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TV에서나 볼 수 있는 가수라든가 연예인들도 있었는데, 다들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제법 한다고 알려진 이들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업데이트 기념 리셉션을 거행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유명한 아이돌이자 가수인 은비가 오프닝을 겸해 노래를 불렀다. 이후, 업데이트 관련 영상이 스크린에 비춰졌는데 대체로 새로 적용된 업데이트의 콘텐츠를 소개하기보다 직원들의 노고와 유저들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뤘다. 영상이 끝난 다음엔 관련 업체 인사들이 나와 축하 인사와 격려를 했다. 그러나 유한과 채린을 비롯한 대다수 유저들은 아저씨들의 연설이나 인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요리들이나 연예인들 쪽에 관심을 두었다. 다음에 이어진 것은 게임 제작자들과의 대화였다. 이것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했다. 초반부터 업데이트 내용에 불만을 가진 유저들이 맹공을 펼쳤다. "최가장 길드의 최강현입니다. 이번에 우리 길드는 범선을 건조해서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했습니다. 실패한 것은 둘째 치고 왜 아이템의 일부를 상실해야 했는지, 왜 그런 식의 설정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뭔가를 걸고 위기를 이겨 냈을 때, 성취감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항해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많은 경험치와 명성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바다에서 잃어버린 아이템은 영영 없어지는 겁니까?" "고래나 원양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갈라 보십시오. 그럼 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실 개발자 손석진의 대답에 몇몇 유저들의 머리가 번득이며 돌아갔다. 바다에서 잃은 아이템을 고래나 물고기들이 꿀꺽한다는 말인가? '흐음, 조만간 원양어업이 활성화되겠군.' 그러면서 유한은 뒤이어 생각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녀석들도 있을 거라고. "랭크 78위 스코필드입니다. 저는 저번에 요트를 타고 바다로 갔다가 유령선 같은 걸 봤습니다. 정말 유령선이나 관련 몬스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근데 고객님께서 보신 건 어쩌면 유령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더 재미있을 겁니다." 대체로 개발자라는 사람은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곤 했다. 하기야 200명이나 되는 유저들의 공세에 일일이 답하자면 그 정도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 그런 식의 대답은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기 마련. 유저들과의 대담도 끝나고 일련의 공연이 이어졌다. 가수들이 노래도 부르고, 유명 MC들과 연예인들은 게임을 소재로 한 콩트를 보여서 유저들을 웃게 만들었다. 유한도 채린과 함께 마음껏 웃고 즐겼다.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드림맥스 직원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건넸다. "강유한 고객님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원 개발자님이 고객님을 따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원 개발자라면 아까 유저들의 질문에 답변해 주던 손석진이란 사람이다. 유한은 흥미가 끌렸다. 스스로가 매번 감탄하는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었다. 이미 누군지 얼굴을 봤지만, 따로 만나자고 하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유한은 아까 대담에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주변의 다른 유저들에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어디 계시죠?" "절 따라오십시오." 손석진이 있는 곳은 3층 연회실 한편의 휴게실이었다.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유한이 들어오자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바츠 유저 분이시죠? 반갑습니다, 손석진이라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한은 손석진이 내민 손을 잡았다. 게임 개발자라고 들어서 손이 하얗고 가늘 줄 알았는데, 크고 거칠었다. 거기다 약력도 묵직했다. 뭔가 운동 같은 것을 한 듯했다. "해킹당하신 일은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고, 생각하면 화만 날 뿐이니까. 손석진도 그런 유한을 이해했는지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말을 건네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대장장이는 재미있으십니까?" "힘이 들 때도 있지만, 해 보니 재밌더라고요. 특히 장작 패기로 우드 골렘을 잡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많이 놀랐어요." "하하하, 그러십니까?" "요새도 전투 때 곧잘 써먹고 있지요." 유한이 손석진과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었을 때였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유한은 손석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다, 날 기억하겠지?" "넌...!" 유한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변조된 음성. 그것은 바츠를 파멸시킨 그놈의 목소리였다. 해커, 해커 녀석이 다시 전화를 했다. 오랫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그 녀석이 다시 또. "하도 소식이 뜸해서 전화를 했다. 혹시 나와 한 내기를 잊은 건 아닌가 해서." "잊을 리가 없잖아!" 찾고 있다. 바츠의 아이템을 찾아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애송이 해커 한 놈을 잡아서 족치기도 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석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유한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 아니 사람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잊지 말라고, 네 소중한 것을 찾고 싶으면 말이야." "시끄러! 잊지 않았다고 했잖아!" "후후후, 여전히 잘 흥분하는군. 좋아, 노력하는 널 위해서 내가 한 번 특별한 기회를 주도록 하지." 해커는 유한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한도 녀석의 은근한 말투를 무시하려 했지만, 녀석이 뒤이어 말한 것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날 찾아봐라, 지금 네가 있는 그곳에 내가 있으니까." "뭐라고?" 해커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지금 이곳,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만든 드림맥스 본사 건물에. "난 지금 너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 11. 드림맥스의 초대 >>> (호..혹시 손석진은 아니겠죠..) - 끄읕~! - <<< 후기 > 후, 이번에도 오래 걸렸네요. 마음만 먹으면 2주일 내로 후다닥 끝낼 수 있는데, 게임도 같이 하느라고..헤헤; 근데 이제 게임 질렸거든요.. 여기에만 올인할 수 있습니당. 6권은 빨리 써볼게요! 댓글 달아주시고,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적발되면 안쓸거에요. 뭐, 암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