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장이 지그 -4권 1. 돌격왕 옌스 2. 정령계 3. 단골의 정체 4. 푸른새벽 길드 5. 남바린의 영주 6. 고대 드워프의 유적 7. 코스튬 페스티벌 8. 광렙을 하다 9. 길드전 발발 10. 움직이는 숲 11. 해커를 잡다 1.돌격왕 옌스 "너, 바츠지. 그렇지?" 사람의 인식이란 때론 날카로우면서도, 부정확하기 그지없다. 단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장비와 옷차림을 대장장이에 맞추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유한이 바츠라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유한의 물음에 사내는 비릿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유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누구냐고!" 그가 언성을 더 높이자 사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돌격왕 옌스라고 하면 웬만한 놈들은 다 알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이름 앞에 [돌격왕]이라는 칭호가 떠올랐다. 돌격왕은 공격 스킬인 대쉬(Dash)를 1만 번 이상 성공 했을 때 획득이 가능한 칭호다. 그만큼 사내의 성향이나 능력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잘 알려 주는 칭호지만, 유한이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난 당신이 왜 나더러 바츠라고 물었는가 알고 싶을 뿐이야." 자신이 바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다 그는 알세인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혹시 그가 해커거나 해커와 관련된 인물이 아닐까? "왜 너를 바츠라고 했냐고?" 옌스는 씨익 웃으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위험한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뭐야, 날 공격하려는 건가?' 유한은 뒤로 물러서려다가 재빨리 스텝을 바꿨다. 옌스가 검보다 어깨를 먼저 내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깊이 베기가 아냐! 저건 대쉬다!' 한 걸음 크게 내딛기에 깊이 베기를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 다음에 어깨를 내미는 걸 봐서는 직선 돌격 스킬인 대쉬였다.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주변의 대기가 크게 울렸다. 유한은 아슬아슬하게 옌스의 공격을 피해 냈다. 거칠고 육중한 충격파가 몸을 사납게 흔들고 지나가는 순간 머리털이 뜯겨져 후드득 흩날렸다. 대쉬는 정면에서 힘으로 몰아붙이는 단순한 공격 스킬, 그러나 그만큼 호쾌하고 위력도 강했다. 랜크가 높을수록 위력도 배가 된다. '젠장, 방금 오판을 했다면……!' 만약 간발의 차로 비켜서지 못했다면 끔찍한 결과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숄더 차지에 가드(Guard)가 풀린 다음, 상대의 양손검에 두 동강이 났을 터. 동강이 난 자신의 몸이 땅을 뒹구는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운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유한은 지그로 플레이하며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따. 아직까지 그럴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네, 대장장이지만 나름대로 강하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자는 위험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했다. 아니, 강한 것보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한 '적'이라는게 문제였다. 길포드나 로키도 강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적은 아니었으니까. 유한은 충분히 거리를 벌린 다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2차 공격을 해 올 줄 알았던 옌스가 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방금 이 일격이 생각나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일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초보 전사였을 때였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 라고 물어본 나에게 너는 이 스킬을 날렸다. 내 피통을 죽지 않을 만큼만 아슬아슬하게 깎아 놓은 것이지." "설마……." 옌스는 떨떠름해 하는 유한의 표정을 확인하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5살 때 본 아버지 친구 분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는 자신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헤어스타일이나 차림새는 바츠 때와 딴판이지만, 눈매나 얼굴 윤곽은 그때 머릿속에 새겨 넣었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 네놈에게 맞은 일격을 갚아 주고자 불철주야 광렙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수준에 다다랐지." 그날의 만남 이후 바츠에 대한 동경은 원한이 되었다. 미친 듯이 사냥을 하고, 수백의 몬스터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바츠처럼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말이다. 옌스는 두 눈을 감고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 처절했던 광렙의 시간을 떠올리니 파도 같은 감회가 밀려왔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그저 바츠에게 당했던?' 유한의 수비 자세가 맥없이 풀렸다. 허탈함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긴장감이 잔뜩 들어가 있던 근육과 신경이 흐물흐물해졌다. 태산 같은 파도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잔잔한 바다가 그를 반겼다. '제기랄! 뭐야 이놈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 이놈이 대장장이 엘프 알세인의 단골, 그러니까 바츠의 아이템을 팔아넘긴 해커가 아닌가 했는데, 다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 옌스라는 녀석은 바츠였던 시절, 자신이 독불장군인 걸 모르고 헤헤거리고 접근했다 한 방 맞고 나가떨어진 귀찮은 날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날파리를 어찌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 문제는 바츠 시절에 날파리였던 녀석이 왕파리가 되어 나타났다는 점이다. "널 찾아서 아르페디아 전체를 뒤지고 또 뒤졌다. 남들은 해킹이 되어 게임을 접었을 거라 했지만, 난 믿지 않았어! 바츠라면 분명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이봐, 나는 바츠가 아니라……." "부정해도 소용없다! 나를 보고 당황한 것이 그 증거!" "그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야!" "닥쳐라! 넌 바츠가 맞다! 비록 다른 캐릭터를 하고 있다 해도 혼이 바츠라면 바츠인 것이다!" 얼마 전, 옌스는 바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낙담을 했었다. 미친 듯이 광렙을 하고 랭커 수준으로 캐릭터를 키운 것은 다 바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지난번 인터넷 방속에서 버츄얼 에이지를 보았을 때. 환생(?)한 바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의외의 캐릭터를 하고 있어 남들은 몰랐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봤다. "네가 그날 나에게 준 치욕, 오늘 되갚아 주마!" 옌스가 벼락같이 한 발을 내딛으며 어깨를 내밀었다. '쳇, 빨라 봤자 직선 공격 따위!' 옌스의 몸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유한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기 때문에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똑같은 스킬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고렙 전사를 상대로 오만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킬 캔슬(Cancel)!" 유한이 공격을 피하자 옌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동했던 공격스킬을 중간에 취소해 버린 것이다. 스킬을 중간에 취소하려면 웬만한 숙련도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유한은 혀를 찔리고 말았다. "리(Re) 대쉬!" 옌스는 방향을 바꿔 다시 대쉬를 썼다. 그가 몸을 돌려 한 발 내딛는 순간, 그의 어깨가 유한에게 벼락같이 다가왔다. '저거 맞으면 최소 사망이다!' 카앙! 불꽃이 튀며 옌스의 어깨 보호구에 검격이 작렬했다. 충돌의 순간, 유한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의 어깨를 검으로 후려쳤다. "후후, 과연! 검격을 날려 그 반동으로 피한 건가." "제길, 난 바츠가 아니라고 했잖아!" 사실 맞지만, 유한은 계속 부정했다. 인정하면 이 이상한 작자가 계속 복수 운운하며 쫓아다닐 것이다. 그럼 굉장히 귀찮은 일이 될터. "나에게 그런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방금 일격만 해도 그렇다. 바츠가 아니라면, 대장장이가 그런 일격을 날릴수 있을 리 없다." "어때서 바츠라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데?" "물론 '바츠'니까!" 그야말로 벽창호.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옌스가 다시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유한은 곧장 왼손을 그를 향하여 펼쳤다. 피ㅡ 잉! 와이어의 추가 날카롭게 날아오자, 옌스는 고개를 돌렸다. 건틀렛에서 암기가 발사될 줄은 몰랐다, 급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한쪽 눈을 실명했을지도 모른다. "하하핫! 놀랍군! 과연 바츠!" "이거 전혀 바츠답지 않은 공격이거든요!" 바츠는 암기나 함정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힘에 부친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면 승부를 벌였다. 유한은 왼손 손목을 교묘히 비틀었다. 옌스를 지나친 와이어는 마치 독사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따.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제압해 놓으려는 것이 유한의 작전, 그러나 옌스는 휘감기는 와이어 사이를 손쉽게 빠져나갔다. "아니!" "하하핫, 너와 싸우기 위해 연마한 기술은 대쉬만이 아니지!" 방금 전 옌스가 쓴 것은 휠 슬래쉬였다. 범위 공격 스킬을 썼는데 어떻게 와이어를 피했냐고? 보통 검을 중단으로 놓고 휘두르는 휠 슬래쉬를 썼다. 그러자 그의 몸은 헬리콥터처럼 떠올랐고, 와이어는 허공만 움켜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고안한 플라잉 대쉬(Flying Dash)다! 죽어라, 바츠!"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에 떠 있던 옌스가 공중제비를 돌더니 곧장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게 아닌가.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회전력으로 돌격 에너지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참신했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쾅! 유한은 찰나의 순간 허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옌스는 정면의 나무와 충돌했다. 한 아름은 족히 될 아름드리나무가 중간에서 뚝 부러져 나갔다. 대단한 일격. 그 일격을 어깨도, 검으로도 한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해냈다는 사실은 정말 정말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옌스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후후, 어떠냐? 플라잉 대쉬의 위력이?" "롤링 대쉬(Rolling Dash)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이름도 괜찮군! 하하하핫! 과연 바츠! 내 숙적답게 네이밍 센스도 대단해!" 유한이 뭐라고만 하면 무조건 바츠답단다. '언제 댁이 내 숙적이 되었수?'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더리 정신 줄을 놓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튼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대쉬를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랭커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응용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특성과 전투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예상 불가능한 공격을 할 수있다니. '우습게볼 작자는 아니야.' "바츠 너와의 첫 대결을 기념해서, 이 기술을 플라이 롤링 대쉬(Fly Rolling Dash)라 이름 짓겠다." "누가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어? 그리고 나 바츠 아니랬잖아, 이 고릴라야!" 짜증 나는 작자였다. 유한이 뭐라 해도 전혀 들어 처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바츠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전투 감각 역시 바츠의 그것이었다. "자, 바츠! 다시 검을 들어라!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 싸움을 하겠다는 듯, 옌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싸움은 지속될 수 없었다. 유한이 피하기도 했지만, 숲의 주인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카앙! 옌스의 몸이 휘청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가 들고 있는 양손검의 검면을 때린 것이다. 소리는 한 번 울렸지만, 날아온 화살은 셋. 세 발 모두 파워샷 수준의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 발의 화살을 날린 것은 싸늘한 인상의 엘프 청년이었다. "전투를 중단하시지, 마을 안에서 분쟁은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경단원이라도 되는지, '렌슬리'라는 이름의 NPC 엘프는 그럴싸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척 봐도 레벨이나 실력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옌스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끄러! 이 역사적인 대결을 방해하는 놈은 GM이라도 베어 버릴거야!" "그 깨진 검으로?" 렌슬리의 조소에 옌스는 자신의 검을 살펴보았다. 세발의 파워샷이 명중된 부분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금이가 있었다. 이 상태라면 조금만 충격을 줘도 부서질 것이다. "맘대로 해 봐. 맨손으로 덤벼도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엘프 청년이 싸늘하게 말했다. "치잇!" "다시 말하지만 당장 전투를 중단해. 아니면 다음번 화살은 너희들 머리로 날아가게 될 거야." 옌스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었던지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엄포를 놓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물러나겠다, 바츠. 하지만 다음엔 반드시 나와 결판을 내야 할 거다." "아놔! 바츠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난 지그라고." "그럼 조만간에 다시 보자, 바츠." 유한이 끝까지 부정했지만, 옌스는 믿어주지 않았다. 옌스에게 질려 버린 유한은 걸음을 돌려 그가 부러트린 나무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알세인이 장작을 구해 오라고 했는데, 마침 쓰러진 이놈을 쓸 생각이었다. 나무가 꽤 컸기에 장작을 팬다면 충분할 것이다. "포악한 인간들 때문에 숲이 멍들어 가는군." 쓰러진 나무를 쳐다보던 렌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포악한 벽창호 고릴라를 통과시킨 너희들 잘못이야.' 대체 그 옌스라는 고릴라는 무슨 수로 엘프의 숲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정령과 친화도는 어떻게 쌓은 것일까? 정령 중에 단순하고 난폭한 놈이라도 있나? "대체 장로님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인간들이 설치는 걸 내버려 두다니." 렌슬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가 버렸다. 그는 인간과 교류하는 현재의 정책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장로보다 훨씬 높은 운영자의 뜻이다. NPC렌슬리가 이렇게 투정할 수 있는 것도 전능(?)한 드림맥스의 사전 설정 덕분이다. '위험한 녀석이군.' NPC라고 모두 조용하고, 수동적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게임 내에서 NPC가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뛰어난 오크 전사가 일족을 규합해 인간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거나, NPC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유저들이 반란군을 진압한다거나……. 메카 드래곤 사건만 해도 그렇다. NPC갈리의 터무니 없는 공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유저들이 피해를 입었는가. '조심해야겠군. 종족 차별 테러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잖아.' 렌슬리가 그저 그런 NPC라면 모를까, 꽤 실력 있는 유저를 위협할 만한 실력의 소유자다.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니까. 유한은 쓰러진 나무에 장작 패기 스킬을 써서 장작을 얻어 낸 다음, 곧장 잡화점으로 돌아갔다. 알세인이 원한 연료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잡화점에 도착한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바츠. 또 만나게 되었군." 유한의 손에 들려 있던 장작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대장간 안에서 옌스가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째서 이 벽창호 고릴라가 여기에? 그러고 보니 옌스가 돌아섰던 방향이 잡화점이었다는게 뒤늦게 생각났다. 그는 부서진 검을 고치기 위해 알세인을 찾아왔던 것이다. 엘프 마을에 대장간이라곤 여기 하나뿐이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역시 너와 난 그냥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인가 보군." 씨익! 미소 지어 보이는 옌스 였다. "지그야, 어이 지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한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채린과 리지스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아까 널 보고 바츠라고 하는데 왜 그러는 거야?" "……." "너 설마 예전에 바츠였어?" 올 것이 온 건가? 한 번도 정체를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채린은 물론이 거니와 리지스를 비롯해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대장장이 지그'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옌스 덕분에 이제 만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뭐 알려져도 상관이 있을까. 이미 해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지웠던 캐릭터의 유저가 대장장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지그가 바츠?" "설마 그런……." 놀라는 눈치의 두 소녀를 보며 유한은 앞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아주 좋아할 것이다. 버츄얼 에이지의 그미루라는 요정 MC가 번개같이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 다음 온 인터넷 공략 사이트와 카페, 블로그들이 떠들썩해질 것이고, 해커로부터 바츠의 장비를 입수한 자들은 전원 잠수를 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해커를 추적하는 일은 꽤 힘들어질 것이다. 뭐 알세인의 단골이라는 자가 해커가 맞다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지만……. "호호호! 그럴 리가 없잔아!" "깔깔깔! 맞아. 지그가 바츠라니, 상상이 안돼!" 다행이랄까. 채린과 리지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소꿉동무였던 채린은 어벙한 약골인 유한이 포악한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와 맞서 싸운 용사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리지스도 마찬가지였다. 바츠가 해킹당했다면 다시 전사를 하지 왜 대장장이를 했겠는가. 예전에 해 봤던 직업을 택하면 육성이 훨씬 빠르고 편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마음속에 오로지 불신만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번에 자이언트 스톤 골렘과 싸운 것을 보면…….' '지그 이 녀석 돈줄을 쭉 밟고 다니는게 혹시…….' 한 점의 의혹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설마'하는 생각이 '혹시'라고 판단할 수 있는 상태까지 커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불신이 더 강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유한의 모습은 석상으로 남았던 바츠의 모습과 매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미남이잖아.' '키도 지그 녀석보다 더 컷어.' 석상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두 소녀는 불신 쪽으로 무게를 잡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연방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데 왜 기쁘지가 않지?' 유한은 채린과 리지스가 안 믿는 듯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자랑이라 할 만한 과거를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섭섭한 일이었다. 사실 증명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당시에 찍어 놓은 스크린샷이나 기록한 모험 일지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믿어 주는 것은 저기 벽창호 같은 고릴라 사내뿐. 유한과 눈이 마주친 옌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라, 바츠! 내 검이 수리되는 순간, 다시 너와 승부를 낼 테니까!" "죄송합니다, 실수를 해서 검을 깨 먹고 말았습니다." "……." 알세인이 자루만 남은 검을 건네자, 옌스는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그의 양손검은 부서질 만했다. 오래 사용해서 내구가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렌슬리가 날린 파워샷 세 방을 맞고 거의 박살 났으니…….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렇게 부서질 것은 무엇인가. "이 자식, 너 일부러 그랬지?" "무슨 말입니까? 생트집 잡지 마십쇼. 수리하다 보면 깨질 수도 있단 말입니다." "닥쳐! 당장 변상해! 너 때문에 바츠와의 역사적인 대결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단 말이다!" 옌스가 성난 고릴라처럼 펄펄 날뛰자 알세인도 어쩔 수 없다 여겨졌는지 한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저도 책임은 있으니까 변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돈보다 쓸 만한 무기가 낫겠죠?" 알세인은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커다란 검을 하나 질질 끌고 나왔다. "단골에게 산 건데, 이거라면 손님에게 적절한 변상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어! 저,저거!" 알세인이 갖고 나온 검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비 소드(Heavy Sword)라 불리는 그 검은 B급 무기중에서 하류에 속하는 양손검이다. 이름에 걸맞게 굉장히 무거운 데다가 밸런스도 극악이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공격력은 높아서 일격필살의 공격을 날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유한도 바츠 시절에 한 자루 입수해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밸런스를 조금이라도 맞춰 보려고 칼자루 끝에 커다란 납덩이를 묶어 놓았었다. 알세인이 들고 나온 헤비 소드의 칼자루에도 뭉툭한 납덩이가 묶여 있었다. 또다시 바츠 때 썼던 장비가 나타난 것이다. "흠,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로 용서해 주도록 하지." "이봐, 그 칼은……." "왜 그러나 바츠? 뭔가 문제가 있나?" "아니, 아무것도." 유한은 그 검이 내 것이었다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말해 버리면, 자신이 바츠라는 걸 인정하게 되는 일. 그럼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둘째 치고 눈앞의 고릴라가 귀찮게 할 것이다. "후후, 바츠 너와의 대결은 좀 미뤄야겠군. 이 헤비 소드를 익숙하게 다루려면 감을 좀 잡아야 할 것 같으니까." 옌스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유한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채린과 리지스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옌스는 헤비 소드를 능숙하게 휘둘러 대고 있었다. 마치 가는 빗자루 휘두르듯이. 웬만한 유저들은 힘이 달려서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하는 걸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아무튼 저 작자에 대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알세인의 단골이 누군지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알세인과 친밀도를 높이기를 했지 않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한은 구해 온 장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필요하다고 했던 장작 갖고 왔어요." "예, 고맙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부탁할 일은 없습니까? 대장간 일도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 지금은 없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도와주세요." "그러지 말고. 전 수리도 매우 잘한다고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뿔싸! 괜히 신경을 건드린 것은 아닌지. "지금은 절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남의 도움을 바라면 늘릴 수 없는 재주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알세인은 묵묵히 망치질을 계속했다. 어떻게든 빨리 친밀도를 올려 보고자 했던 유한으로선 낭패가 아닌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질 것이 뻔했다. 일단 물러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 리지스. 저 미남 대장장이 꼬신다더니 어떻게 됐어?" "끄응, 그게 내 미모에 넘어오지 않잖아. 뇌물도 통하지 않고 말이야." 리지스도 낭패를 본 모양이다. 하긴 선남선녀가 사방에 널린 엘프의 숲에서 리지스의 미모가 통할 리 만무했다. 거기다 물질에 초탈한 엘프라 그런지 돈 욕심도 거의 없었다. "별수 없이 지금은 물러나야 하나?" "십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해 두지 뭐." "후후후. 두 사람, 일이 잘 안 되나 보네." 채린이 중간에 불쑥 끼어들었다. 알세인에게 물을 먹은 유한과 리지스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아마 알테나에게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나는 이제 한 군데만 들르면 여기 퀘스트는 다 끝나." "어딜 들러야 하는데?" "세계수 아래. 알테나 씨가 거기로 가 보래." 세계수는 엘프의 숲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신목(神木)이다. 이 숲은 물론이거니와, 엘프들이 근간이 되는 매우 신성한 나무다. 바로 그 나무 아래에 바람의 날개가 있다고 알테나가 알려 주었단다. "세계수라면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나무인데 인간이 함부로 다가가도 되는 거야?" "난 이미 접근 허락을 받아서 괜찮아. 저번에도 세계수의 잎을 가져와 달라는 퀘스트를 받았었는걸." "헉! 세계수의 잎!" 리지스의 눈동자에 돈(₩) 표시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수의 잎은 고가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고급 포션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재료였고. 잎 자체만 해도 일정 시간 동안 스텟을 올려 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헤헤, 시아야. 퀘스트 도와줄 테니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으음, 별로 어려울 건 없는데……." "그래도 혼자가면 심심하잖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몰라?" 세계수의 잎을 뭉텅이로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디 잎뿐인가. 재수만 좋으면 수액과 가지, 열매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잎에 비해 그런 것은 부르는 것이 값. "시아야, 나도 같이 가 줄게." "지그 너도 가겠다고?" 유한이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녀석의 만행을 감시해야 네 퀘스트 완수에 문제가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뭐야! 내가 사고라도 친다는 거야!" "뻔하지 뭐." 리지스라면 세계수의 잎을 몽땅 따거나, 수액을 받겠다고 나무에 대롱을 박는다거나, 아예 톱질을 하려 들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엘프들의 반응은 뻔하다. 신성한 세계수를 훼손한 인간을 가만히 두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게 적대적인 엘프가 존재하는 판국에 말이다. 자칫하면 퀘스트 실패는 물론 채린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내가 같이 가면 시아도 심심하진 않을 거 아냐." "후훗, 신경 써 줘서 고마운걸." "뭘, 친구니까 당연한거니." 친구니까. 그러나 왠지 채린은 그 말이 예전에 들었을 때보다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 당연하다 생각되면서도 뭔가 섭섭한 느낌. 뭔가 확실히 표현할 수 없었다. "여어, 바츠. 어디 모험이라도 떠나는 건가?" 근처에서 열심히 헤비 소드를 휘두르고 있던 옌스가 다가왔다. 그가 또 뭔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에 유한은 일단 거리를 벌리고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너답지 않을걸? 항상 솔플만 했었잖아." "내가 바츠도 아닌데 바츠 같은 플레이를 왜 하겠수?" "훗, 스스로를 부정하려고 무리를 하는군, 그런다고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스스로를 부정하는 건 맞지만 무리를 하는 건 아니다. 지그가 된 뒤로는 파티플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 그래서 파티원들과 모험을 떠나는 유한의 모습에는 어색함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었다. "자자, 저 고릴라 아저씨는 무시하고 바람의 날개를 찾으로 가자." "멋이? 이봐, 바츠! 기다리지 못해!" 옌스가 거듭 불렀지만, 유한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무시하다니. 정말 저놈은 바츠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차림새나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놈은 분명 바츠의 얼굴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한 방 갈기고 돌아섰던 오만한 바츠의 모습이나, 파티원들과 함께 떠나 버리는 저 대장장이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도 지금의 모습이 왠지 더 화가 났따. 놈의 파티원이 여자라는 것, 그것도 스타일 좋고 늘씬한 미소녀 궁수에 화려하고 도도한 미모의 상인이라는 사실이 질투심에 기름을 끼얹엇따. "기다렷, 바츠! 거기 서지 못해!" 옌스는 숲 속으로 사라지는 유한 일행을 쫓아갔다. 무거운 검을 쥔 그의 손은 필요 이상 힘이 들어가 있었다. 2.정령계 "생각보다 길이 꽤 험한걸?" 세계수를 향해 가면 갈수록,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따. 날이 저물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늘에 닿을 듯이 자라 오른 수목들 때문이었다. 빛이 비치지 않는 숲 속을 무척이나 어두웠고, 축축한 바닥은 진창처럼 푹신하고 미끄러웠다. "으아앗!" "조심해! 여긴 이끼가 껴서 꽤 미끄러우니까." 어둠에 익숙한 유한이나, 이글 아이를 가진 채린은 괜찮았지만, 리지스가 가기에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 등불을 비추랴, 카트를 끌고 가랴, 앞을 살피랴. 고난의 연속이지만, 리지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돈이 된다면 지옥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수 있음으로. "여전히 무정하군, 바츠. 힘없는 아녀자를 도와주지 않다니." 일행의 뒤를 따라온 옌스가 리지스의 카트를 밀어 주었다. "어머, 고마워요. 아저씨." "훗, 옌스라고 불러.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냐. 아직 팔팔한 십 대 인걸." "에이, 거짓말." 리지스는 옌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체 어딜 봐서 10대란 말인가. 190cm는 넘어 보이는 키에 고릴라 같은 체격은 그렇다 쳐도, 옌스의 얼굴은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진짜야. 증명해 줄 수도 있어." 그러면서 옌스는 자신의 정보창을 보여 주었따. 공개된 정보창에는 옌스의 증명사진과 '고경덕'이라는 본명. 그리고 생년월일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 리지스는 물론이요. 앞서 가던 유한과 채린도 그 정보창을 보고 놀랐다. 16세라니! 이 고릴라가 자신들보다도 1살 더 어리단 말인가? "덕분에 괜한 오해를 많이 사곤 하지만…… 나이트 갈땐 유리하더군. 하하핫!" '이 자식, 진짜 해커인 거 아냐?' 동생이나 조카의 개인 정보를 도용한 건 아닌지? 유한은 옌스의 신상 정보를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조작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16세 고교생이 어찌 저런 면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아저씨라고 하면 섭섭하니까. 옌스 오라버니 정도로 불러 줬으면 좋겠군." 옌스는 친근한 투로 리지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숙적 바츠처럼 강하게 되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외로운 전사의 길을 걸었지만, 그렇다고 외로운 늑대로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알았어. 그럼 옌스라고 부를게. 너도 날 누나라고 부르면 돼." "엑? 설마 연상?" "호호호, 그럼 내가 중딩인 줄 알았니?" 리지스는 옌스를 메신저 목록에 추가했다. 부가 정보에 '머습2호'라고 적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후후, 들이대는 만큼 아주 잘 부려 먹고 뜯어먹어야지' 아르페디아 최고의 상인이 되려면 재력뿐만 아니라 무력도 있어야 했다. 그런 무력은 재화로 얻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매력으로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녀의 메신저 목록에 올려진 '머슴1호'는 송코였고, 유한은 '돈줄1호'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그야, 저 사람 정말 우리보다 어린 걸까?" "모르지,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어서 그런 건지도." 정말 정보를 조작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걸 조작하고 공개해서 득이 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까지 보았던 옌스의 언행으로는 뭔가 숨길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 아직 세계수까지는 멀었어?" "이젠 거의 다 왔어." 먼저 세계수를 찾아가 본 적이 있는 채린은 모두를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우와! 이게 세계수!" 빽빽한 삼림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나무.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자라난 나무는 그 둥치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굵고, 나뭇가지는 사방에 뻗어 있었다. 세계수 주변에는 수많은 나비와 빛의 정령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세계수는 더 없이 아름답고 신비해 보였다. 사실 이 세계수는 전자 공간에 만들어진 허구의 산물일뿐이다. 그러나 유한 일행은 이것이 '허상'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눈앞에 보인 세계수는 아름답고 웅장했다. "대단하군. 진짜 딴 세상에 온 것 같아." "이럴 게 아니라 스크린샷을!" 세계수 주변에는 몇몇 유저들이 유한 일행처럼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퀘스트 때문에 온 것으로 보이지만 관광과 기록이 먼저였던 모양인지, 연방 주변을 돌면서 포즈를 잡고 스크린샷을 찍는다고 여념이 없엇다. "나무 위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끝내 줘. 숲 밖의 먼 풍경까지 보이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야." "세계수 위에 올라갈 수도 있어?" 리지스가 놀라 물었다. "보통은 금지되어 있지만, 내가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니까 괜찮아." "물론이지." 채린이 파티를 만들자 유한과 리지스가 곧장 파티에 들었다. 그리고 옌스 역시 채린의 파티에 끼어들었다. "어이, 고릴라. 넌 왜 끼는거야?" "내가 여기까지 괜히 온 줄 아나? 다 바츠 너와 승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그럼 넌 우리가 갔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봐, 섭섭하게 굴지 마. 승부는 승부일 뿐이야. 경치는 사이좋게 즐기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응, 좋은 거 아니니까 당장 꺼져." "이봐, 바츠.째쨰하게 굴지 마. 네 이름값이 떨어진다고." "나 바츠 아니거든." 그러나 옌스는 탈퇴하지 않았다. 채린도 굳이 강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유한이 불편해 하긴 했지만,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사이좋게 구경하고 내려오면 되잖아.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을 따돌리는 건 너무해." 파티장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유한도 더 반대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일행은 채린의 퀘스트를 수행한 다음 세계수 꼭대기의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들이 세계수 가까이 접근하자 주변에 번을 서던 엘프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을의 엘프들과 다른 고풍스런 차림을 한 이들은 하이엘프들로서 엘프의 성지를 굳건히 시키고 있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알테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세계수 아래에 바람의 날개가 있다고 해서요." 그러면서 채린은 알테나에게 받은 부적을 보여 주었다. '바람의 부적'을 본 하이엘프들은 일단 상급자에게 알리겠다며 일행을 그 자리에 대기시켰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상급자로 보이는 하이엘프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따. '키르케'라는 이름의 하이엘프는 사제복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바람의 날개를 찾으로 왔습니까?" "찾는 건 저구요, 이쪽은 제 친구들이에요." "그렇습니까? 저를 따라오시죠. 바람의 날개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키르케는 일행을 세계수 아래의 동굴로 인도 했다. 어둡고 좁은 땅속을 어느 정도 내려갔을까, 키르케는 돌로 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문 너머에 바람의 날개가 있습니다." 키르케가 석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석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들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석문은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열렸다. 휘이잉! 열려진 석문 안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빛에 유한 일행은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력이 돌아보자, 석문 너머의 풍경이 그들의 눈에 생생하게 비춰졌다. "이, 이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석문 너머는 전혀 다른 세상. 푸른 하늘 위로 풍선같이 생긴 반투명한 물고기들이 날아다니고, 눈, 코, 입 달린 나무와 바위들이 땅 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멀리 눈 덮인 산도 조금씩 움직이는 듯 했고, 시냇물도 움직이는 나무와 바위들을 피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런 괴이하고 동화 같은 풍경 속을 작은 요정들과 신비하게 생긴 짐승들이 누비고 다녔다. "설마 이 문 너머는……." "정령계입니다." "역시!" 유한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정령계는 아프레디아 온라인의 기본 배경이 되는 아르페디아 대륙과 다른 세계로, 정령들과 그에 가까운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 정령계와 연결된 통로는 대륙 각지에 있었다. 유한도 바츠 시절에 던전 하나를 깨고 정령계의 통로를 열어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정령계의 신기한 풍경에 감탄해 여기저기 쏘다니며 모험을 했었다. 그렇게 멋모르고 돌아다닐 때는 몰랐다. 정령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말이다. "정령계라니!" "잘못하면 캐릭터 접어야 할 곳에 가야 한다고?" 리지스와 옌스가 긴장하는 걸 보면 뭔가 들었거나 겪어 본 것이 있는 모양이다. 모르는 건 채린뿐이었다. "왜? 저기 뭔가 이상한 곳이야?" "방향 인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야.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떴다가 제멋대로인 데다, 별자리도 시시각각 바뀌지." 다시 말해서 동서남북 구분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보면 알겠지만, 풍경이 계속 바뀌어, 그래서 조그만 멀리 나오면 원래 들어왔던 통로를 찾을 수 없게되." "완전히 미아가 된다는 말이야. 길 찾는 거 포기하고 캐릭터 다시 만든 사람도 있을 정도라니까." 한 마디로 잘못 갔다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 유한도 바츠 때 정령계에서 탈출한다고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동안 토 나오게 돌아다녀야 했다. 그나마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돌아오는 데 한 달 이상 걸린 사람도 있었고, 귀환을 포기한 유저도 많았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정령계였지만, 그 신비한 풍경에 절대 속아서는 곤란했다. "우려하신 대로 정령계에서 일반적이 방향 인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저 안에서 바람의 날개를 찾으라는 겁니까?" 유한은 어쩐지 채린의 퀘스트가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아무리 채린이 엘프들과 친밀도를 올리느라 고생했다지만, 이렇게 쉽게 될 리는 만무했다. 어려운 퀘스트일수록, 막판에 뒤통수를 갈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따라 오십시오. 제가 직접 바람의 날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방향 인식이 통하지 않는다면서요?" "정령의 기운을 따라가면 간단합니다." 키르케는 정령계를 들어가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주저하던 일행은 키르케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꺅! 뭔가 발밑에서 꿈틀했어!" "괜찮아, 정령계는 원래 그래." 정령계의 모든 사물에는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그것은 물질계라 불리는 아르페디아 대륙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물질계에서는 영이 실체(實體)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정령계의 경우는 달랐다. 하늘에 있던 태양의 정령이 갑자기 산 아래로 숨어 버리는가 하면, 땅과 물의 정령들도 자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녔다. 채린이 발밑에서 꿈틀하는 것을 느낀 것도, 땅의 정령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행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작은 요정들은 물론이요 꽃과 풀들도 물러섰다. 작은 돌멩이조차도 밟히기 싫은지 스스로 굴러서 다른 곳으로 피했다. "정말 별의별 정령이 다 있네요. 정령은 다섯 가지 속성의 정령들뿐인 거 아니었나요?" "그들은 물질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령들일 뿐입니다. 실제론 모든 사물에 영이 깃들어있지요. 거기 상인 분이 끄는 카트에조차 영이 깃들어 있습니다." "에? 이건 사람이 만든 건데요?" 리지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연에만 영이 있는게 아닌가 싶었기네. "인공의 산물이라도 영이 존재합니다. 아니, 영이 깃든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오래 사용하면 단순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생명과 마음이 싹트게 됩니다." "명검(名劍)이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도 그런 거요?" "네, 명품일수록 장인의 마음과 생명이 전해지니까요." 옌스에게 대꾸해 준 키르케는 유한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강한 쇠 냄새와 이글거리는 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법 실력 있는 대장장이로 보였다. 하지만, "분발하십시오. 아직 영을 깃들게 하기는 멀었습니다." "댁이 말하지 않아도 분발하고 있다고요." 애초의 계획이라면 대장간으로 돌아가서 NPC들과 함께 열심히 무구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엘프의 숲에 해커의 단서가 있는 듯해 일정이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다. "자, 이제 도착했습니다. 바람의 날개가 있는 곳에." 키르케가 가리키는 곳은 꽃이 만발한 언덕 위였다.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그 나지막한 언덕에는 하얀 사제복을 입은 여자 엘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일행을 보더니 나비처럼 사뿐 날아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하얀 사제복을 펑럭이며 강림한 그녀는 천사처럼 아름다웠따. 그러나 그런 것보다 일행을 노라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 알테나 씨?" 알테나와 쏙 빼닮은 여성 엘프.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르네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바람의 무녀라 부르지요." "역시,그랬군!" 알테나의 12대 선조인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 제작자가 의도해서 그랬는지, 아님 귀찮아서 복사 신공을 발휘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알테나와 쏙 빼닮아 있었다. 목소리만 제외하고. 뭐 그런 뒷사정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람의 날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설마 아직도 살아있었을 줄이야 "바람의 날개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대에게 부탁을 한 것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이겠군요. 아니면 그들의 왕이거나." 오래 살다 득도라도 했는지, 아르네스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허공에 휘휘 돌렸다. 작은 바람들이 아르네스의 손으로 모인다 싶더니, 그녀의 오른손 위에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오래 전 생각이 어렸던 저는 바람의 날개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게 선(善)이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진실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더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네스는 채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 위에 있는 회오리가 점점 강해졌다. 강렬한 바람에 몸을 가누기 쉽지 않을 정도였고, 옷자락은 찢어질 것처럼 사납게 펄럭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시아라고 합니다!" 채린은 악을 쓰듯이 외쳐 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요, 시아. 어디 이 바람을 이겨 내 보세요." 아르네스는 손 위에 있던 회오리를 내려놓았다. 땅으로 내려온 회오리는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성정했다. 흙과 모래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들도 뿌리 채 뽑혀서 회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따. 리지스의 카트에 실린 물건들도 회오리 안으로 휩쓸려들어갔다. 물론 카트에 타고 있던 포포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삐잇!" "꺄악! 안 돼, 포포야!" "위험해!" 옌스가 리지스의 뒤춤을 잡았다. 리지스를 간신히 붙잡은 옌스는 쥐고 있던 헤비 소드를 땅에 박았다. 하지만, 중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채만 한 회오리에 질질 끌려갔다. 그나마 그는 나았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의 유한이나 채린은 버티기가 쉽지 안았다. "제길, 무슨 엘프가 이렇게 폭력적이야!" 정령계를 송두리째 없에 버릴 셈인가? 유한은 곡괭이를 땅에 찍어 버티다가 채린 쪽을 보았다. 시험의 당사자인 채린도 몸을 숙이고 회오리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버틸수 없었던지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회오리 쪽으로 끌려갔다. "꺄악!" "시아야, 이거 잡아!" 유한은 날려 가는 채린에게 와이어를 쏘아 보냈다. 채린은 거의 엉겁결에 와이어를 잡았다. 채린은 마치연이라도 된 것처럼 바람에 날렸다. 유한은 와이어를 회수하려 했지만, 건틀렛의 태엽은 쉽게 되감기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나 강했다. 이렇게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건 말도 안 돼. 버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이겨 내라는 거야?' 아무래도 이 시험은 어려워 보였다. 바람이 약해질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몰라도, 그 전에 회오리에 끌려가고 말 것이라는 게 현재 유한의 예상이었다. "제길! 대체 바람의 무녀는 무슨 뜻으로다가!"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한 바람의 무녀와 여기까지 자신들을 인도한 키르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일행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그들은 이 상황을 중지시킬 뜻이 없는 듯했다. 아직 피해자가 없으니 그런 건지 모른다. 회오리에 끌려간 것은 이상한 불가사리 생물뿐이니까. "삐삣! 삐삐삣!" 처음에 포포는 회오리 속에서 정신없이 돌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펴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활공하기도 하고, 일부로 빙글빙글 돌면서 재주를 넘고 춤도 추엇다.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가 노랫소리 비슷한 지저귐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포포는 '놀고 있었다'. '이 불가사리 자식! 남들은 심각한데 지는 놀고 있다니!' 유한은 어처구니 없는 포포의 행각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놀고 있는 상황'을 보고 보니 번쩍 떠오른 말이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건 곽대발이 했던 말이었다. 도장에 가서 첫 수련을 마치고 파김치처럼 쓰러졌을 때였다. 이걸 앞으로 어떻게 하나, 계속할 수나 있을까, 때려 쳐버릴까 생각하던 유한에게 곽대발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재미있다고 생각해 봐. 어려운 걸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법이야." "흥. 말이야 쉽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걸 어떻게 재밋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다. 게임이든 인생이든……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을 즐기면 나름대로 소득이 있지. 투덜거리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해 봤자 얻을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다." 그때는 그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고, 어려운 것일수록 재미있게 생각하라는 말 뜻이 어떤 것인지. "시아야! 무서워하지마!" "응? 뭐라고?" 여전히 와이어에 매달려 있던 채린은 유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유한은 아예 곡괭이를 놓아 버리고 회오리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냥 놀이기구라고 생각하면 돼!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놀이기구?" "까짓것,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 유한의 말에 채린도 뭔가 깨달았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도 회오리에 몸을 맡기고 노니는 포포를 보았다. 황당하기 그지 없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이 해답이었던것이다. "그래, 이걸 놀이기구라고 생각하면……." 채린은 쥐고 있던 와이어를 놓았다. 어차피 유한도 회오리에 휩쓸려 들어간 뒤라 헐렁해진 와이어를 계속 쥐고 있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다. "꺄아아!" 와이어를 놓은 채린은 순식간에 회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속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빨랐고, 흐름은 매우 거칠었다. 무엇보다 작은 나뭇가지나 돌멩이들이 화살이나 총알처럼 스쳐 지나가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들어와 버린 건 아닌지? '괜찬아. 이런 것도 재미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스릴도 있지 않는가. 채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오리바람에 맞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거친 흐름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적응해나갔다. '이건 놀이기구인 거야. 재미있고 스릴감이 넘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꾹 견디다 보니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다. 어지러운 것도 적응이 되었고, 느리지만 그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분 버티다 보니 회오리바람은 언제나 즐기는 놀이기구들과 별반 다름없게 느껴지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속도가 더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였다. "꺄하하하하!" 완전히 적응된 채린은 즐거운 비명을 마음껏 지르면 날아다녔다. 조금에 무서워했던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크아악! 살려줘어어어!" 채린과 달리 유한은 전혀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곽대발의 말을 빋고 뛰어들었건만, 애초부터 놀이기구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재미를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지만, 마음먹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각오했던 마음도 뺑뺑이 몇 번에 몽땅 풀려 버렸다. 그래도 곽대발이 말한 소득이란게 있을 것 같았다. 몇번만 더 고생하면 놀이기구들에 대한 강한 적응력이 생길 것 같으니 말이다. "끄,끝난 건가?" "그런 모양이야." 리지스와 옌스는 끝까지 회오리에 끌려가지 않고 버텼다. 원래의 위치보다 10m는 더 끌려왔다. 악몽 같은 시간은 겨우 10분에 불과했지만, 10년은 되는 줄 알았다. "꺄하핫! 너무 재밌네. 이거 한 번밖에 못 하는 거야?" 옌스와 리지스는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따. 남은 죽어라 버텨서 살아남았는데, 정작 회오리에 끌려 들어간 당사자가 한다는 말이 저럴 줄이야. "으음, 과연 바츠의 동료! 평범하지 않는 캐릭터라 이건가?" "닥치고 누나 물건 회수하는 거나 좀 도와줄래?" 리지스는 날려 갔던 물건들을 카트에 주워 담았다.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았다. 생각보다 물건들이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고. "삐이~! 삐이~!" "저리 가! 사람 약 올리지 말고!" 유한은 포포에게 발길질했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사람을 깔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유한의 발은 포포를 맞추지 못했다. 허공을 찬유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벌렁 쓰러졌다. 아직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잘했어요. 훌륭하게 바람을 이겨 냈군요." 바람의 무녀가 채린에게 다가와 칭찬을 했따. 그 친창에 채린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헷, 지그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이번 퀘스트는 유한 덕분이다. 유한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해서, 놀이기구라 생각하라고 해서 시험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뭐 따지고 보면 이 닭둘기 때문인걸." "삐잇!" 유한이 조언을 해 줄 수 있게 된 것도 포포가 회오리 안에서 노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포포도 자신의 공이 크다는 듯, 가슴을 떡 내밀며 으쓱댔다. "호호호, 그랬군요. 공로자는 '저분' 이었던 거군요." "네? 저분이라뇨?" "작지만 위대했던 분 말입니다. 잘 돌봐 드리세요. 새로 얻은 몸이 낯설어 고생하고 있는 듯하니까." 왜 바람의 무녀는 포포에게 존칭을 쓰는 걸까, 그리고 위대했다니 뭐가? 거기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것은 유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르네스는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따. "아무튼 누군가의 시범이나 조언이 있었다 해도 그대에겐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적대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바람을 이길 수 있다. "그래야 바람을 이해할 수도, 바람의 힘을 빌릴 수도 있는 것이죠." 아르네스는 소매 속에서 투명한 보석을 하나 꺼냈다. 은빛의 반투명한 깃털이 들어 있는 보석이 바로 바람의 날개였다. "시아, 그대는 이걸 가질 자격이 됩니다. 그러나 이걸 그대에게 구해 오라고 한자 들은 그 자격이 있을까 의문스럽군요." 바람의 날개를 사용하는 것은 채린이 아니다. 미케니아의 공중 요새를 부활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대는 미케니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오래전에 멸망당한 고대 문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들이 사악한 자들인가요?" 채린은 얼음 궁전의 보상방에서 보았던 벽화를 떠올렸다. 사람과 키메라가 사이좋게 살던 문명. 우월한 문명에 심취해 거짓된 신을 섬기다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멸망한 문명이 바로 미케니아였다. 신에게 멸망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악'이라 지칭될 수 있었다. "글쎄요. 그들은 악하다고 한다면 지금의 인간들이나 엘프들도 충분히 악한 존재지요." "그럼 어째서?" "그들은 너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긍심은 오만으로 변질되었고, 세상을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최고의 존재에게 최강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키메라를 부리고, 또 키메라가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더 강한 힘을 추구했고, 다른 문명이나 종족보다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네스 님이 탄생시킨 바람의 날개도 그들이 눈독들인 힘 중의 하나였습니다." 키르케가 이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시 엘프족의 제사장이었던 아르네스는 뛰어난 정령술사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원래 엘프들은 그 선조가 정령계에서 왔기 때문에 정령들과 친화도가 높았다. 그러나 아르네스의 정령 친화도는 그런 엘프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바람의 정령들과 유달리 친밀했던 그녀는 바람의 무녀라 불렸고, 정령들에게서 얻어 낸 힘을 하나의 결정체로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 결정체를 바람의 날개라고 불렀습니다. 바람의 날개는 소유자에게 바람의 힘을 발휘하게 해 줍니다. 하늘을 날고 폭풍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말입니다." "그래서 마도사들이 탐을 낸 거였군." 유한과 리지스, 옌스도 키르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특히 리지스의 경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아르네스의 손에 들린 바람의 날개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처음에 아르네스 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바람의 날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건설하는 도시에 이용할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데 악용되기라도 한 건가?' 앞서 바람의 무녀가 말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선하고 올바른 용도에 쓰일 것이라 생각되어 주었지만, 진실은 다르더라고. 아마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바람의 날개를 뭔가 나쁜 목적에 사용했던 모양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키르케도 언급하기 꺼려하는 것을 보면 꽤 악질적으로 악용했던 모양. '어쩐지 좀 음흉하게 생겼더라 했어.' 유한은 공중 요새에서 만났던 이바니우스 3세를 떠올렸다. 지나친 호의 때문에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바람의 날개를 만들지 않았고, 남아있는 것을 가지고 정령계로 들어왔습니다." "아르네스 님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때마침 미케니아에 신의 징벌이 떨어졌습니다. 미케니아는 멸망했지만, 그래도 아르네스 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반성하기 위함인가?' 위험도 없는데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지. 아무튼 이런 속사정을 듣게 되자 채린은 바람의 날개를 받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바로 눈앞에 바람의 날개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퀘스트를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저하시는군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해요. 자신의 선의(善意)가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문명의 유산을 부활시켜 보자고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문명이 실은 굉장히 위험한 자달의 것이었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살인마를 빼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째서 잘못될 수도 있는데 이걸 저에게 내놓으시는거죠?" "미래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만약 미케니아인들이 참회했다면 그들을 돕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아르네스는 채린의 손에 바람의 날개를 쥐어 주었따. 채린은 깜짝 놀랐다. 단지 바람의 날개가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다. 손에 들어온 바람의 날개는 2개 였다. "그대는 충분히 이것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그들을 위해 쓰고. 하나는 그대를 위해 가지세요." 채린의 마음은 결정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손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 올랐다. -바람의 날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바니우스 3세에게 전달해 보상을 받으십시오. 과연 이대로 퀘스트를 완수해도 될까? 채린은 손바닥 위에 놓인 바람의 날개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사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은 아니다. 현실이 아니니까. 그저 게임사에서 꾸민 설정이니 걱정할 이유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대마왕이 부활하건, 사악한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건 모두 게임 안에서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채린이 주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그 게임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가상현실의 공간에서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 만약 자신이 수행한 퀘스트 때문에 다른 유저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때도 그냥 게임에서 있었던 일일 뿐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지그야, 나 어쩌면 되는 거야?" "……." "만약에 내가 한 퀘스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면, 그건 나쁜 거잖아."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는 개인이 수행한 퀘스트가 단순히 경험치와 보상, 명성만 얻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한 사람의 모험이 게임상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무역로 개척이나 데보라 던전의 숨겨진 보상방 발견이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그러한 모험의 결과는 모두에게 이롭게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유한이 수행했던 드래곤 하트 획득 퀘스트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가 퀘스트에 실패했거나 포기했다면 노스아크에서 유저들이 억울한 떼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호의가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아.' 메카 드래곤과 연관이 있는 유한이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분명 갈리는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서 메카 드래곤을 만들었다. 안듀라스를 물리치고 드워프들에게 자유와 북x부 산맥의 노다지 광산을 안겨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의 연구는 동족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심지어 유저들까지 휘말리게 만들었다. 그런 사례를 생각하면 채린에게 바람의 날개를 공중 요새에 전달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칫 얼마나 많은 유저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건 고민할 필요 없어." 유한은 바람의 날개를 쥐고 있는 채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퀘스트란 유저가 수행하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아……." 게임이란 즐기는 것이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중요치 않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또 수습을 하면 그만이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상하며 미적거릴 필요는 없어." 어떻게 보면 앞뒤를 살피지 않는 막무가내. 그러나 채린은 그 말이 틀리다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지그 네 말이 맞아." 채린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유한이 어떠한 말을 해줄지 긴장하고 있던 리지스와 옌스는 박수를 쳐 주었따. "잘했어. 주는 걸 사양하는 건 유저의 도리가 아니야." "후후, 과연! 바츠라면 그렇게 말해 줘야지."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는 채린의 결정에 만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나는 시아 당신의 의지가 깃든 결정을 내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무녀님!" 아르네스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놀란 일행의 눈앞에서 아르네스는 마치 대기에 녹아들듯 조금씩 희미해져 갔지만, 키르케는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세요. 그리고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의 무녀는 마치 그곳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채린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르네스의 마지막 인사. 채린은 한참 동안 그 바람이 흘러간 곳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두 손엔 바람의 무녀가 건네준 바람의 날개를 꼭 잡고서. 3.단골의 정체 "무녀님은 이미 오래전에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키르케는 아르네스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누구보다 정령과 친했던 존재였기에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정령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그랬기에 만 년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유한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단다. "사실 나는 당신이나 아르네스 님의 결정이 탐탁지 않습니다. 자칫 엄청난 대란이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을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자코 있었던 이유가 뭐죠?" "인간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행동이 경솔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동적이니까요." 생각이 많으면 전진하기가 어려워진다. 엘프들에겐 자연과 세계에 대해 깊은 철학이 있지만, 그것이 그들을 정체시키고 말았다. 엘프는 나무 하나를 자르는 데도 많은 생각을 한다. 오늘 이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내일은 숲을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 배불리 살겠다는 인간에게 행동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역동성이 수차례 대륙을 구했습니다. 자기들 끼리 싸움을 벌이고 대립하고 하지만, 그렇게 싸우고 경쟁하면서 발전을 해 가고 있지요." 유한을 비롯해 모두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르케가 일행이 눈앞에 있다고 인간에게 금칠을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할 것이 분명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동성. 그것은 게임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랬다. 21세기 초에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둥, 대한민국 경제가 파탄날 거라는 둥 떠들어 댔지만, 유한 세대에도 지구는 멀쩡하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잘사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재빨리 대응책을 내놓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변화를 모색해 왔다. 혼란과 잡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길을 찾고 전진해 나갔다. 그 결과 생존은 물론이요, 화성에 유인 탐사선을 보내고 달에 정착 기지를 건설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핵전쟁 이후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고, 바이러스에 오염된 좀비들이 걸어다니는 세상은 그저 만화나 영화 속에나 존재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도 인간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숲을 찾아온 인간들도 엘프릐 문화나 사상을 배워 가고 있지요." 제약은 있지만 엘프의 숲이 개방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물론 설정은 전지전능한 제작자가 세워 놓았겠지만, 단순히 선남선녀 엘프들과 노닐어 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 볼일도 끝났으니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유한 일행은 키르케의 안내를 받아 정령계를 빠져나왔다,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일행은 채린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 위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그 아래에 펼쳐진 나무의 바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해(樹海)는 마치 녹색 비단폭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모두가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리지스는 키르케의 호의로 세계수의 잎을 얻었다. 잎사귀를 지폐처럼 헤아리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면…….' 족히 수만 골드는 벌 수 있으리라! 리지스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자, 이제 엘프 대장장이를 꼬시는 일만 남았군." 유한의 다음 목표는 알세인이었다. 알세인과 친밀도를 높여서 그의 단골, 그러니까 해커로 의심되는 자의 이름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나와의 대결도 잊지 마라,바츠." 옌스가 끼어들었지만,유한은 녀석과 칼을 맞댈 생각이 없었다. 실력 차이는 둘째 치고 이런 벽창호를 상대하기 싫었으니까. "……." "자꾸 무시할 거냐?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예스의 언성이 다소 거칠어지자, 유한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자꾸 날 바츠라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건 바로 네가……." "세상엔 비슷한 사람도 많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한은 그런 의미로 딱 잘라서 이야기했지만 옌스는 전혀 믿어 주지 않았다. "제길! 좋아, 정 그렇게 싸우고 싶다면 받아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어째서냐?" "나는 생산직인데다가 레벨도 이제 증렙이라 만족할만한 실력을 보일 수 없어. 너도 전력을 다할 상대를 맞아서 싸워 이기고 싶겠지?" 유한의 말에 옌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가 된 바츠를 때려눕혀 봤자 자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믿어 줄 사람도 없고, 오히려 기분만 비참해질지 모른다. "네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이거군." "날 바츠라고 생각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군." 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가 강해져 봤자 얼마나 강해지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옌스는 믿었다. 조만간 유한이 예전의 바츠만큼 강해질 것이라고, 바츠니까, 이 녀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츠 유저니까. "지금의 상황을 넘겨 보려는 비겁한 변명이 아니길 기대하겠다." "강해지면 붙어 줄 테니까 염려 마. 그리고 어차피 넌 지금 싸울 수도 없잔아." "내가 싸울 수 없다니?" 옌스가 의아해 하면 묻자 유한은 그가 들고 있는 헤비 소드를 가리켰다. 헤비 소드는 포포가 매달려서 칼날을 갉아먹고 있었다. 언제부터 매달려 갉아먹었는지, 검은 마치 쥐에게 파먹힌 치즈처럼 되어 있었다. "으악! 뭐야, 이 괴상한 몬스터는?" 옌스는 혼비백산했다. 새로 구한 검이 또 엉망이 되다니. '훗, 불가사리 괴생물체도 쓸 만할 때가 있군.' 유한은 새삼 포포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쇠를 먹는지. 그리구 바람의 무녀는 왜 녀석을 작지만 위대한 존재라고 지칭했는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문득 스쳐 가는 것도 있긴 했지만,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진 않았다. '뭐, 저놈에 관한 건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괜히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해 보려니 머리만 더 피곤해 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배도 많이 고프고. 그러고 보니 지금은 현실 시간으로 저녁때였다. "잠깐 두 시간 정도 쉬고 재접속하는 건 어떻까?" "그러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으니깐." "도망갈 수작이면 용서치 않겠다. 바츠!" 2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네 사람은 사이좋게 로그아웃을 했다. 내일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잠시 쉬어 갈 필요도 있었다. 얼마 후 재접속한 일행은 곧장 알테나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잡화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잡화점 앞에서 엘프 대장장이 알세인과 자경단원 렌슬리가 다투로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뭐? 네가 방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거냐?" "그만둰, 렌슬리! 왜 갑자기 동생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알테나가 말리려 했지만, 렌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까지 비난을 퍼부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위대한 바람의 무녀의 피를 이은 네가 한다는 일이 고작 인간들처럼 장사 일이야? 네가 이모양이니깐 네 동생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고!" "뭐야? 이 자식이?" 알세인이 열 받아서 나서려 하자 렌슬리도 마주 외쳤다. "그래, 덤벼 봐! 덤벼 보시라고!" 소란이 커지자 주변의 엘프들과 유저들이 잡화점 주위로 몰려들었다. 소식을 들은 장로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엘프들 간의 분쟁은 매우 드문, 아니 거의 처음 있는 경우라 유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그야,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돌발 이벤트인가?" "글쎄,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는걸." 렌슬리는 불만이 많은 엘프. 인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이보게, 렌슬리.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장로의 만류에 렌슬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제가 왜 그러냐고요? 화살촉이라도 좀 얻을까 해서 이 시끄러운 곳에 왔는데 저 멍청이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더군요." "아니 알세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드워프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그러더군요." "드워프의?" 주변의 엘프들이 수군거렸다. 엘프과 드워프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렌슬리는 잠시 엘프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드워프가 어떤 놈들입니까? 성스러운 대지를 파헤치고 나무를 잘라 불태우는 놈들이 아닙니까? 거기다 거칠고 식탐이 심한 주정쟁이 족속입니다." 단순한 시각으로 봤을 때 드워프가 그리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드워프가 땅을 파고 나무를 잘라 불태우는 것은 그들이 필요한 광물을 얻기 위함이고, 거칠고 먹는 걸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것은 그들의 작업이 고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엘프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몰랐고, 설령 안다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저열한 야만족을 동경하다니……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렌슬리의 말에 몇몇 엘프들이 동조하듯 불만의 말을 쏟아 냈다. "미친 거 아냐?" "그러게, 매일 시끄럽게 망치질을 하더니만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다행히 장로는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렌슬리를 설득했다. "그건 렌슬리가 대장장이니까 그런 게야. 자네도 강한 전사에 대한 동경은 있을 게 아닌가?" "장로님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전사라 해도 트롤이나 오우거를 동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비교 대상이 잘못된 거 같은데…….' 유한이 그리 생각하거나 말거나 렌슬리는 지가 하고 싶은 말만 계속 떠벌려 나갔따. "저는 장로님이 왜 알세인을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의 대장간에 대해서 불만인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에게 득이 될 뿐인 시끄러운 곳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그런 것이 없이도 우리 숲의 백성들은 풍요롭게 잘 살아왔습니다." 보다 못한 몇몇 유저들이 언성을 높였다. "야, 인마! 네가 차고 있는 검은 뭐야? 너도 화살촉 얻으러 대장단에 왔다면서?" "완전히 이뭐병한NPC구먼!" 유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렌슬리는 당황하지 않았디. "그래, 인간들아. 솔직히 알세인이 만드는 무기나 도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의 누이가 너희들에게 들여온 여러 가지 물건이 우릴 편하게 해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지." "그걸 아는 새끼가 왜 비난을 해?" "쇠로 된 무기와 도구, 그리고 알량한 상품들. 편하다는 이유로 들여온 인간의 물건들 때문에 우리 엘프들의 근본이 흐려지고 있단 말이다!" 렌슬리는 엘프의 문화가 변질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연에 조화, 순응하는 엘프의 문화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인간의 문화에 물드는 모습은 하나만 살펴봐도 알 수 있었따. "숲의 백성들이여! 모두 주변을 둘러보시오. 저기 있는 인간들과 여러분의 차림새가 다른 점이 있는지?" 정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장로같이 나이 지긋한 몇몇 엘프들만 전통의 복식을 하고 있을뿐 상당수의 엘프들은 최신 유행의 인간들 옷을 입고 있었다. 인간의 옷이 더 편하고 색이 화려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옷을 만들고 염색하기 위해 파괴되고 오염된 자연은 엘프 정서와 맞지 않았다. "저는 장로님이 숲을 개방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인간에게 잠식되고 있지 않습니까?" 동족들에게 피 끓는 호소를 하던 렌슬리는 불타는 눈동자로 유저들을 째려보며 언성을 더욱 높였다. "저들은 자신들의 문물을 쏟아 낼 생각밖에 안 합니다. 인간들이 우리를 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분쟁을 끌어 와서 숲을 망치고 있습니다! 거기다 알량한 재물을 미끼로 우리의 자매를 농락하기까지 합니다!" 그 말에 대부분의 남자 유저들이 머쓱해 하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신비로운 엘프의 숲을 탐험하자는 순수한 목적보다 아리따운 엘프 소녀와 친밀도를 높여 보자는 엉큼한 목적 때문에 이 숲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 때문에 엘프들과 크고 작은 마찰도 끊이지 않았다. "하여간 남자들이라……. NPC에게 퍼 줄 노력이면 벌써 여친을 만들고도 남았겠다." 혀를 차던 리지스는 옆에 있는 옌스를 쿡쿡 쑤셨다. "야, 너도 엘프 꼬시러 온 거지?"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이 몸은 바츠를 찾아 헤매다 들린 것뿐이다!" "부정하는 목소리가 왜 이리 클까나?" 얼굴을 붉힌 옌스는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렌슬리는 그렇게 유저들은 반성과 쪽팔림의 상태로 몰아넣고, 더욱더 설득력 있는 호소로 엘프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는 인간들에게 완전히 흡수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남매의 행동이 인간에게 득이 된다고 말한 겁니다." 엘프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고, 렌슬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는 엘프들이 늘어났다. "맞아, 숲에 인간들이 너무 들락거리고 있어." "시끄러워서 새들과 짐승들이 마을로 오려고 하지도 않아." "이게 다 인간들 때문이야." 렌슬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기회라 싶어서 동족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봤는데, 불길은 제대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근간을 지키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의 잔재를 떨쳐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숲에서 인간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옳소!" "인간들을 몰아내자!" "배신자도 쫓아내자고!" 렌슬리에 동의하는 엘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장로가 수습을 해 보려 노력했지만, 근간을 되찾자는 애국적인 호소에 대항하기 쉽지 않았다. "이거 정말 이러다가 큰일나겠는데?" "접속을 끊는 것이……." "귾었다가 돌아와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유저들은 슬금슬금 물러서며 도망칠 궁리를 했다. 이번 사건이 얼마만큼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들 하고 있네."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 어쩌려고!' 채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안 그래도 흥분해 있는 엘프들에게로 유한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리려 했을때 이미 유한은 렌슬리의 코앞까지 가 있었다. "뭐냐, 네놈은? 인간 주제에 엘프의 일에 나서지 마라." 렌슬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있어도 시원찮을 인가 놈이 건방지게 나서려 들다니. "나 몰라? NPC라 그러나? 완전 붕어 지능이네." "닥쳐라.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라." 렌슬리는 위협할 목적으로 슬쩍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유한은 알세인에게 볼일이 있다. 그런데 렌슬리가 그를 처단하자 선동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 렌슬리가 위협하건말건 유한은 조소를 짓고 있던 입을 열었다. "어이, 너. 원하는 게 뭐야?" "너 같은 인간과 인간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우리 엘프의 근본을 되찾는 일이다." "애들 선동해서 짱 먹으려는 건 아니고?" "뭐라?" 비아냥으로 한 방 날린 유한은 렌슬리를 강하게 몰아 붙였다. "맘에 안 든다고 깡그리 몰아내는 게 엘프의 방식이냐? 암만 봐도 그건 니가 혐오하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의 방식 같은데?" "그, 그것은 우리의 근본을 회복하기 위한……." 렌슬리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그가 알세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한도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엘프의 근간을 찾기 위해 엘프답지 않은 수단을 쓰겠다고? 지나가던 슬라임이 웃겠다. 인마." 유한의 말을 들은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종족이다. 분노와 증오는 지양해야 할 악. 미움 때문에 그 대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엘프를 위한다고 하지만, 인간과 똑같은 방식을 취해서야 어디 엘프의 근본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죄만 쌓는 꼴이 될 것이다. "듣고 보니 렌슬리가 틀린 것 같아." "그래, 저 인간의 말이 맞아." "그러면 껍질만 엘프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될 뿐이잖아." 유한의 반박이 제대로 통했는지, 흥분했던 엘프들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런 엘프들의 반응에 만족한 유한은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렌슬리를 보며 비웃음을 띠었다. "너 같은 놈이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는 당연해. 원해 사람은 자기하고 똑같은 놈을 싫어하거든. 그걸 전문적인 용어로 '동족혐오'라고 하지." "닥쳐라! 감히 인간 주제에 뭘 안다고 나서는 거냐?" 렌슬리는 진짜 검을 뽑으려고 칼자루를 쥐었다. 눈앞의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동족들에게 피어올랐던 불꽃이 빠르게 수그러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유한이 그의 칼자루를 움켜쥐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이놈이!" 렌슬리는 유한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유한은 작정하고 나섰다. 렌슬리가 엘프고 궁수라 스텟에서 솜씨는 높지만 힘은 약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민첩성도 높을 것이기에 렌슬리가 말을 마치기 전에 미리 행동에 나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무늬만 엘프였군. 제 뜻대로 안 되니깐 칼질부터해 보겠다 이거지?" "닥쳐!" 렌슬리가 몸을 날려 뒤로 훌쩍 물러났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은 유한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뒤춤에서 숏보우를 꺼내 들고 화살을 쏘았다. "위험해! 엎드려요!" 알세인이 외치기 전에 이미 유한은 몸을 숙였다. 녀석이 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면, 다음 공격을 어떻게 할지뻔했다. 예상대로 활을 쏘았고, 화살은 무서운 소리를 올리며 유한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한의 등 뒤에 세워져 있던 잡화점 간판이 흔들거렸다. 간판에 꽂힌 화살이 파르르 떨렸다. 돌아서서 그것을 확인한 유한은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피하지 않았다면 화살은 간판 대신 자신의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어허, 이 거리에서 못 맞추다니…… 너 정말 무늬만 엘프구나." 유한은 서늘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렌슬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급했다지만 그래도 단거리에서 날린 공격인데 그걸 피해 버릴 줄이야. "망할 인간 자식, 머리통을 날려 주마!" 이번에 렌슬리는 제대로 시위를 당겨 유한에게 화살을 날렸다. 트리플 파워샷(Triple Power Shot). 엘프들만 쓸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격 스킬이다. 옌스의 검을 박살 냈던 그 공격은 옆으로 몸을 날린 유한을 스치고 뒤에 있던 애꿏은 엘프들을 덮쳤다. "아앗! 피해!" '훗, 역시!' 유한은 이번 공격도 빗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활 공격은 집중력이 생명이다. 흥분한 상태에서 과녁을 제대로 맞출 리 만무햇다. 거기다 과녁(?)이 움직였으니 빗나갈 확률은 더 높아진다. '그래도 위험했어.' 화살이 스쳐 가는 소리에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화살촉을 보고 방향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렌슬리가 시위를 놓는 순간에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3발 모두 빗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1발만 맞았어도 유한은 그 자리에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와! 엘프를 위한다는 놈이 엘프를 잡고 있네!" "이 썩을 인간 놈이 계속!" 유한은 계속해서 렌슬리를 약 올렸다. 그가 흥분하는 만큼 명중률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이 바싹 오른 렌슬리는 다시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지만, 이번에는 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놓지 못해?" "렌슬리, 너나 활에서 손을 놔!" 주변의 엘프들이 렌슬리를 제압하려 나섰다. 아무리 그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다 해도 함부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엘프들이 나선 바람에, 그래서 유한은 무사할 수 있었다.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앞으로 갑자기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도발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 도발을 이용하면 적을 흥분시킬 수 있습니다. '도발?' 모르는 스킬은 아니다. 이미 게임상에 널리 알려진 스킬이니까. 실력이 높은 적을 상대로 수차례 조롱을 하고, 성과를 거두면 자연적으로 익혀지는 스킬이다. '몬스터와 유저 둘 다 상대로 해 봐야 한 댔는데…….' 유저를 상대로는 지난번 무역로 개척에서 검은 초승달 길드의 장 키라를 약 올려 봤었다. 몬스터를 상대로 약 올린 적은 없지만, 방금 상대한 렌슬리를 몬스터로 인정해 준 모양이다. 사실 지금 렌슬리는 껍질만 엘프일 뿐, 미친 소나 다름이 없는 상태니까. 그렇게 조건을 맞춰서 도발 스킬을 익히긴 했지만, 유한은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도발은 전투 직업군이나 생산 직업군을 망라하고 배울수 있는 국민 스킬인데다고, 그 효과는 미비하다고 평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공격 성공률을 떨어트린다고 하지만, 일단 도발이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았고, 오히려 화난 적이 자신만 공격을 함으로서 손해 보는 일도 있었다. 물론 잘 이용하면 유용하긴 하지만 널리 사용되진 않았다. '궁수를 상대론 쏠 만한 스킬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유한의 앞에 또 다른 안내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지헤야말로 최고의 스킬입니다. 순간의 판단과 찰나의 행동이 당신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공격 스킬이 없다고 투덜대는 생산직 유저를 다독이는 듯한 말이었다. 위로가 되기보다 어쩐지 조금 짜증이 났던 유한은 안내창을 휘휘 저어서 없애 버렸다. 이런 문구를 생각할 시간에 스킬이나 하나 더 만들어 주면 오죽 좋겠는가. 이를테면 대장장이 전용의 무한 해머 연타라든가, 대갑옷 오함마술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것 놓으란 말이야!"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유한은 렌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자신을 붙잡은 동족들을 뿌리치고, 나무 위로 날아 올랐다. 그리고 다시 활을 쏘기 위해 화살통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보다 유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피ㅡ 잉! "크윽!" 와이어에 매달린 추가 날아오자, 렌슬리는 당황하며 손을 물렸다. "흥, 궁수의 공격 모션이야 뻔하지." 분명 렌슬리가 민첩성이 더 높겠지만, 유한은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활은 화살이 있어야 무기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궁수가 공격을 하기 전 화살을 집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공격 패턴. 그 패턴을 노리고 미리 공격을 펼치면 상대를 봉쇄 할 수 있었다. "뻔하다고? 그럼 이건 어떠냐?" 바람같이 이동하며 동족들과 유한의 공격을 피하던 렌슬리는 화살도 없이 활의 시위를 잡아당겼다. 시위를 당긴 그의 손이 번쩍하는 순간, 유한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으악!" "지그야!" 지켜보던 동료들이 달려왔다.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는데, 유한이 고개가 젖혀지더니 벌렁 쓰러져 버리는게 아닌가. 대체 어떤 공격을 받은 것인지? "아야야, 제기랄!" 채린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유한은 자신의 HP가 반 넘게 닮았음을 보았다. 이마에선 피가 찔금 흘러내렸고, 바닥을 보니 금속 단추가 하나 나뒹굴고 있었다. 화살을 뽑을 수 없게 되자 렌슬리는 단추를 떼서 활의 시위에 걸어 날린 것이다. 마치 새총으로 돌맹이를 날리듯. "뭐해요! 공격하고 있잖아요! 얼른 저놈을 잡으세요!" 리지스의 고함에 유저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그들도 렌슬리를 그냥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프들을 선동해 유저를 공격하려던 녀석이 아니던가. 모두들 무기를 들고 렌슬리를 잡으러 쫓아갔다. "위험해!" 카ㅡ 앙! 옌스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이번엔 유한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던 채린이 위험했을 것이다. 렌슬리가 쏜 단추는 옌스가 휘두른 헤비 소드에 불꽃을 튀기며 튕겨났다. 단추와 헤비 소드가 만들어 낸 소음이 주위로 퍼지는 순간 렌슬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따. 바람같이 날렵하던 그의 몸이 주춤했고, 그를 쫓던 다른 엘프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 왜들 저러지?' 주춤하던 렌슬리는 재빨리 화살통에 손을 가져가 쫓아오는 유저들에게 파워샷을 날렸다. 까앙!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공격은 무위로 끝났다. 화살이 선두에 성 기사 유저의 강철 방패에 막힌 것이다. 강력한 파워샷을 얻어맞은 방패는 요란한 파열음을 울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방패가 부서지는 순간 렌슬리와 엘프들은 또 한 번 주춤했따.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엘프들이 움찍했다. 유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설마 소음 때문에?' 쇠를 부딪치는 소리를 싫어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렌슬리나 엘프들이 대장간이 시끄럽다고 불평하던 것이 떠올랐다. 원래 대장간은 시끄럽니만, 엘프들에게 유달리 더 시끄러워서 그런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한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인벤에서 끌을 꺼내서 렌슬리에게서 빼앗은 검의 칼날을 긁어 댔다. 최대한 거슬리는 소리를 내자고 긁어 댔는데, 제대로 효과가 있었다. 끼익ㅡ 끼끼끽ㅡ! 칼날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짧고도 화끈하게 울려 퍼졌다. 검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열음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엘프들의 귀청에 찔러 들었다. "머야 이 소리는!" "누구야? 누가 그랬어?" 알세인이나 알테나를 제외하고 엘프들은 안색을 붉히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온화한 얼굴의 장로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크윽! 이런!" 막 나무 위로 뛰어오르려던 렌슬리는 멈칫하다 그자리에 넘어졌다. 소음을 들은 순간 놀라서 스텝이 엉켜 버린 것이다. 유저들에겐 절호의 찬스였고, 렌슬리에겐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때다, 밟아 버렷!" 유저들은 렌슬리가 쓰러지자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일단 활을 빼앗고, 딴 짓을 하기 전에 가둬 놓고 몰매를 가했다.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NPC였던 만큼 유저들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유한은 그렇게 렌슬리가 박살 나는 것을 보고 칼을 긁어 대는 것을 멈추었다. "그만하시오! 그에 대한 처벌은 우리가 하겠소." 렌슬리는 맞아 죽기 직전에 동족들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렇게 엘프의 숲을 광풍에 몰아넣을 뻔한 사태는 유한의 말발과 기지에 힘입어 무사히 넘어갔다. 사태가 진정되고 난 다음. 유한은 자신의 눈앞에 불쑥 떠오른 안내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리의 위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조사하면 [쇼크 웨이브(Shock Wave) 스킬]을 익힐 수 있습니다. '어?' 쇼크 웨이브 이것은 음파로 상대를 공격하는 공격 스킬이다. 바드(Bard)나 싱어(Singer)같은 칭호를 달고 다니는 음악가들의 스킬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장장이가 익힐 수 있다는 건지? '혹시 버그?'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안내창이 냉큼 떠올랐다. -당신이 휘두르는 망치나 연장으로도 흥겨운 리듬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2 올랐습니다. 이렇게 일러 주는 걸 봐서는 버그는 아닌 모양이다. 대장장이도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아니 그럼 이 스킬은 요리사 같은 직업군도 배울 수 있는 건가?' 젓가락도 악기가 될 수 있음을 어릴 때 할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알았다. 칼을 도마에 두들겨 소리를 낼수도 있고, 물을 담은 그릇을 두들겨 소리를 낼수도 있고, 물을 담은 그릇을 두들겨 음정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은가? 주변에 요리사 유저가 있으면 해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유한이 아는 사람 중에는 요리사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유한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알세인이 오더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유한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는 모습이 꼭 은언을 대하는 듯했다. "정말 당신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저와 제 누이는 어찌 되었을지……." '어떻게 되었긴, 동네에서 쫓겨났겠지.' 엘프들이 렌슬리의 주장에 쉽게 동조한 이유는 잡화점에 붙어 있는 대장간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인간보다 청각에 예민한 엘프들인데, 매일마다 망치질로 뚝딱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괜히 뾰족귀 엘프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대장간을 좀 외진 곳으로 옮기는게 좋겠네요. 좀더 신경을 쓰면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킬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저야 매일 일을 하면서 이골이 났지만, 이웃들에겐 많이 불편했겠죠." 알세인은 유한의 말에 고대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보답은 꼭 하고 싶습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쇼.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심드렁하던 유한의 귀가 번쩍 열렸다. 돌발적인 이벤트 덕분에 알세인과 친밀도가 쭉 올라간 듯했다. 무엇 때문에 알세인과 친밀도를 올리려 했던가. 해커로 추정되는 알세인과 친밀도를 올리려 했던가. 해커로 추정되는 알세인의 단골을 알아내기 위함이 아닌가. "그럼 댁이 갖고 있는 중고 무구들을 전부 파세요." 이 말은 유한이 한 게 아니다. 옆에 있던 리지스가 이야기를 듣고 불쑥 끼어든 것이었다. 다 된 밥에 코딱지를 떨어뜨리는 그녀의 행각에 유한은 저도 모르게 리지스의 머리를 후려 갈겼다. "아얏! 지그 너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무슨 짓인데? 왜 산통을 다 깨려는 거야?" "산통을 깨다니! 원래 이럴 계획인 거잖아!" 물론 표면적인 목적은 그렇다. 중고품들을 건지자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한의 진짜 목적은 알세인에게 바츠의 아이템을 팔아넘긴 해커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넌 장사 하루 하고 말거냐? 알세인과 거래도 좋지만, 그에게 중고품을 판 사람을 알아 두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진 않냐?" "그건……그렇네." 잠깐 동안 만들어 낸 변명이지만, 돈벌레인 리지스를 상대로 먹혔다. 유통 단계를 하나 더 거치는 것보다 직통으로 이루어지는게 더 저렴할 테니까. "그런고로…… 알세인 씨, 당신에게 중고 무기를 판 단골 거래자가 누군지 알고 싶군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이전과 같은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유한과의 친밀도가 상당히 올라간 것이다. "시아에게 준 그라디우스를 판 사람 말입니까?" "예, 지금 옌스가 들고 있는 헤비 소드를 판 사람과 동일 인물이겠지요?" 유한이 옌스를 가리키자 알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다 같은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이 맞았다. "예, '블라덱'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블라덱. 해커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을 들은 유한은 뛸 듯이 기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정말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 "올 때마다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죠." '확실하군.' 일부러 통행에 제한이 있는 엘프의 숲에 와서 거래를 하고, 올 때마다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온다는 걸 보면 해커가 확실했다. 그 질 좋은 중고 무구들, 그러니까 숙련도가 쌓이거나 레어인 물건들이 다 어디서 얻어지겠는가? "자주 찾아오나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렸는데, 얼마 전부턴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그래서 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요." '얼마 전부터 발길을 끊었다면 나 때문은 아닐까.' 유한이 그리 여긴 것은 얼마 전에 해커가 직접 전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한번 자신을 잡아보라고. 그런 식으로 술래잡기 승부를 걸고 녀석은 거래처들을 모두 바꿔 버린 것이 틀림없다. 같은 거래처를 계속 애용 하다가는 꼬리를 밟히게 될 테니까. 만약 채린이 퀘스트 때문에 엘프의 숲에 오지 않았다면, 알세인에게 그라디우스를 받지 못했다면, 이렇게 추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 그런데 중고 무구의 거래는?" "그건 이 녀석이랑 이야기하세요." 유한은 나머지 뒤처리는 리지스에게 맡겼다. 리지스가 신이 나서 알세인과 거래하는 사이, 유한은 블라덱이라는 이름의 해커를 어찌 추적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거래처를 바꿨을 테니 엘프의 숲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거래처를 구하고 있다면…….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 의뢰해 봐야겠군.' 유한은 곧바로 발덴의 지부장인 딜론에게 쪽지를 보냈다. 블라덱이라는 유저가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잠적했는데,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좀 찾아 봐 달라고 말이다. NPC를 상대로 거래할 수도 있으니 신경을 써서 조사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같은 상인이니 분명 행방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느긋하게 게임을 즐기자.' 할 일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대장간도 운영해야 한다. 또 도발 스킬의 가능성도 연구해야 하고, 쇼크 웨이브 스킬을 어떻게 획득할지도 알아봐야 한다. '공격 스킬은 많이 배워 놓을수록 유리하니까.' 공격 스킬이 적으면 공격 대상도 고정되기 마련, 채석이나 벌목으로는 돌과 나무로 된 놈들밖에는 상대 못한다. 도발이나 쇼크 웨이브는 좀 더 다양한 부류를 대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중 요새도 부활시켜야 하고, 할 게 진짜 많구나.' 이런 재미들을 즐기면서 해커도 함께 추적해야 한다. 그러나 교활하고 조심성 많은 생쥐를 잡기 위해서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다가갈 필요가 있다. 해커의 뒷덜미를 잡을 때까지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오늘은 이 정도 할까?" "그래,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보자." 유한은 동료들과 내일 다시 만날 약속을 한 다음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 밖으로 나와 보니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어 있었따. "빨리 자야지." 날이 밝으면 학원도 가야 하고 도장에서 땀도 좀 흘려야 한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채린을 비롯한 동료들이 또 보고 싶어졌다. 내일 다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테지만, 그 시간까지 기다리려니 지루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 유한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4.푸른새벽 길드 드림맥스 본사 7층. 게임 관리실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군사령부나 기상청의 대책 본부를 방불케 했다. 중앙에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3D지도가 입체 영상으로 떠올라 있었고, 벽면과 허공에는 홀로그램 영상 화면들이 가득했다. 게임 관리실 직원들은 이곳에서 영상들을 체크하면서 게임 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대륙 동쪽은 별다른 일이 없는데, 서쪽은 어때?" "아직은 조용하지만, 나중엔 모르겠아. 요새 리저드맨들의 활동이 활발해. 마치 족쇄라도 풀린 것 같더군." "일단 체크해 놔. 연계되는 시나리오가 있는지 조사해 보고." 직원들은 몬스터의 움직임이나 국가의 동향, 심지어 날씨까지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러나 이것은 개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 버그가 있진 않은가 살피기 위함이었다. 버그가 없다면 유저가 길 가다 재수 없이 벼락을 맞아도 게임사에선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 현상 역시 게임의 일부로 치니까. 대신 게임 안에서 유저에게는 최대한 자유도를 보장한 다는게 드림맥스의 원칙. 웬만한 분쟁이나 어려움은 유저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내버려 두는 것만은 아닉다. 요주의 대상자들이나 중요 관찰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일 분 일 초도 감시와 관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허, 이 녀석이또……." 엘프의 숲을 감시하던 직원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죄다 몰려와 엘프의 숲이 비치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마침 게임 관리실을 찾았던 정경욱 부사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바츠, 아니 지그가 또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놈이 또 뭔 일을 저질렀는데?" "엘프의 숲에서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녹색의 난'을 저지했습니다." 녹색의 난은 엘프들이 봉기하면서 일어나는 시나리오다. 렌슬리라는 엘프 자경단원이 일족을 응집시켜 인간들을 몰아내고 반대파를 유폐한 뒤, 정령계의 통로를 완전 개방시켜 엘프의 숲을 정령계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기로 되어 있었다. 정령계에 잠식되는 대지가 넓어지면, 이를 타개하여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유저들의 몫. 이를 위한 퀘스트와 설정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한 때문에 그 방대한 모험극은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끙, 손석진이 꽤 공을 들인 시나리오인데, 애석하게 되었군." 전 개발실장 손석진이 고생하며 작업하던 때를 생각하던 정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지했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이번 일로 감금된 렌슬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탈출하면 녹색의 난 시나리오는 언제든 발동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도움이 있다면 말이지. NPC들이 꺼내 주는 걸로 되어 있진 않을텐데?" "당장은 힘들고, 조만간 대규모 패치가 되면 가능해집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개발실 쪽에서 꾸물거리고 있으니!" 사표 쓸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진척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모든 소스와 변수를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인사가 이탈한 타격이 만만찮았다. 작은 패치를 할 떄는 모르지만, 대규모 패치를 하려고 하니 전 개발실장 손석진의 존재감이 그리 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츠, 아니 지금 저놈은 엘프의 숲에 왜 간 거지?" "처음엔 여친 퀘스트를 도와주러 간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 바츠 여자 친구가 있어?" 이건 진짜 놀랄 이야기다. 독불장군 바츠가 여친이 있다니! 30년을 수도한 스님이 환속을 했다는 이야기랑 비슷하게 들렸다. "하나도 아닙니다. 무려 둘입니다." "허허, 그 자식 동자공(童子空) 수련을 때려 쳤나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 솔로면 메테오도 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모든 여자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는데……." 맞장구치며 주절거리던 노총각 직원은 정 부사장의 날카로워진 눈빛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목적은 거기 엘프 대장장이에게 있었습니다. 숙련 무기나 레어 무기를 입수하는 흔하지 않은 NPC인데 이 NPC를 상대로 누군가를 찾는 듯했습니다." "어, 그거 혹시 설마?" "예…… 아무래도 해커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게임을 접지 않고 다시 하고 있는 목적이 그것이었나?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게임을 어떻게 즐기든 그건 유저의 마음대로니까. "그래서 이름은 들었대?" "블라덱이라고 캐릭터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그놈 해커 맞나?" "더 파 봐야 알겠지만, 수상한 녀석임은 분명합니다. 요주의 대상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는 놈입니다. 레벨도 얼마 안 되는 녀석이 꽤 상급 아이템을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중간 세탁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아이템들로 말입니다." 직원은 관련 데이터가 기록된 홀로그램 영상을 정경욱에게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의심되는 내용들이 잔뜩 기록되어 있었다. 피싱 프로그램을 사용했든, 아님 정말 귀신같은 실력으로 회사 데이터를 건드렸든, 정말 해커라면 족치고 볼 일이다. "해커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장물 거래가 의심된다 이건가? 거기다 현거래에도 손을 대는 듯하다?" 잠시 블라덱에 대한 데이터를 살펴보던 정경욱은 홀로그램 영상 상단의 X단추를 눌렀다. "일단은 내버려 두자고. 우리 바츠, 아니 지그 군이 자력으로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 이것 때문에 게임을 한다면 복수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곤란하다. 운영자라면 유저가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법. 직원은 부사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개 직원이 부사장에 개길 수 없는 노릇인데다, 블라덱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었다. [부사장님! 부사장님!] 갑자기 정경욱 옆에 홀로그램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며칠간의 철야로 반쪽이 된 개발실장의 기쁨에 찬 목소리에 정 부사장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응? 무슨 일인가? 패치 다 끝냈나?" [그건 아니고…… 전 개발실장님에게서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뭐! 손석진이 말인가?" [예, 부사장님 안부를 묻겠다고…….] 정경욱은 부랴부랴 화상 전화를 바꿨다. 홀로그램 영상에서 모생긴 개발실장의 얼굴이 지워진다 싶더니, 이번엔 안경을 낀 깔끔한 용모의 남자 모습이 떠올랐다. 20대 중반의 준수한 청년으로 보였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그간 별고 없으시지요?] "이야! 진짜 반갑다! 자네 지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뒤에 보이시는지 모르지만, 설악산입니다.] "설악산?" 잘 살펴보니 과연 손석진의 등 뒤로 울산바위가 보였다. "자네 해외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귀국해서 백두대간을 관광하고 있습니다.] "연락 좀 하지 그랬어! 얼마나 자넬 찾았는지 알아?" [차기 패치 때문이겠지요?] 사실 손석진도 그 때문에 연락을 했다. 얼마 후에 있을 대규모 패치에 대해서 정경욱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부사장님, 그 패치는 제가 알기로 이 년은 더 지난 후에 적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원래 계획이야 그랬지. 하지만 사장님이 워낙 성화였던 데다가 우리도 되도록 빨리 본섭에 적용하고 싶어서……." [전 이번 패치는 성급했다고 봅니다.] 손석진이 정 부사장의 말을 끊어 버렸다. 평소에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점잖은 친구라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원가 불만이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들이대곤 했다. [부사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베타 서비스 때 적용되었던 데보라 던전의 비밀 보상방이 겨우 얼마 전에야 유저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패치는…….] "유저들이 못 따라갈 수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손석진의 주장이었다. 지금도 유저가 개봉을 뜯기를 기다리는 시나리오가 많고, 숨겨진 던전과 미지의 필드도 아직 많았다. "하지만 즐길 만한 요소가 무궁무진하면 그만큼 흥미를 더 끌 수 있지 않나. 더구나 자네도 알지만, 이번 패치는 회사서도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어." 계획 당시에도 사장을 비롯해 증역들은 꽤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패치로 인해 회사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있기 때문이다. 2년 후에 있을 패치를 앞당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네가 우려하는 부분은 요새 영악한 유저들이 많아지면서 하나 둘 풀려 가고 있어. 메카 드래곤 사건은 들어 봤겠지?" [예, 관련 유저를 직접 만나고 싶을 정도더군요.] 메카 드래곤 발동은 꽤 어려운 조건으로 맞춰 놓은 것이었다. 설마 그 시나리오를 발동시킬 유저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만나게 해 줄 수도 있어. 누군 줄 알면 자네도 굉장히 놀랄 거야." [그렇습니까? 정말 만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손석진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자네가 회사에 들어온다면 말이지. 꽤 우리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니까 이쪽도 실 개발자와의 만남을 사양하진 않을 거야." [하하하, 꼭 한번 만나고 싶군요. 좋습니다. 조만간에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좀 빨리 올 순 없나? 개발실에서 자네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네." [역시 패치가 문제군요. 알겠습니다. 주변 정리를 끝마치는 대로 가겠습니다. 늦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부사장은 그의 말이 영 미덥지 않았다. 손석진은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관두지 않는 친구였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뭔가를 마칠 때까지 절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놀거나 쉬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조만간에 온다고 했지만, 다음번엔 지리산에서 연락을 할지 모른다. "빨리 오게. 백두대간이 좋다고 미적거리면 서울에서 좋은 구경거리도 못 볼걸?" [좋은 구경거리요?] "얼마 후에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이 있어. 늦으면 영계로 눈을 정화시킬 기회가 없을 거야." [하하핫, 그럼 좀 더 서둘러야겠군요.] "그럼 돌아와서 보자고." [예, 그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홀로그램 영상이 꺼지자 정경욱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세계 여행 중이라더니 언제 또 국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인지. "아무튼 이걸로 한시름은 놓았군." 손석진만 돌아오면 차기 패치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귀환과 더불어 완성될 작품에 입을 떡 벌릴 유저들을 생각하니 정경욱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유한이 엘프의 숲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보름이 지났다. 그는 골드러시 상이 연합에서 블라덱의 정보를 보내 주기를 기다리며 생산 스킬들을 올리고, 대장간 운영을 본격화하는데 주력했다. 발덴에서 데려온 대장장이 NPC들은 솜씨가 꽤 좋았다. 사실 그들이 수월하게 질 좋은 무구와 생활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었던 데는 초열탄법으로 생산한 새로운 철괴의 공이 컸다. '황토 가루랑 송진 가루가 세 스푼, 짐승의 뼛가루 한 스푼……." 지금 유한은 대장간 한쪽에서 장인의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장인의 가루는 역청탄과 함께 초열탄을 만드는 재료다. 각 원료들의 비율을 제대로 맞춰 혼합한 다음, 역청탄과 섞어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초열탄을 만들 수 있었다. "좋아! 장인의 가루는 완성했고 다음은……." 유한은 역청탄 가루에 장인의 가루를 10대 1의 비율로 섞고 마지막으로 고래 기름 두 스푼을 넣어 둘그렇게 뭉쳤다. 그렇게 주먹만 한 크기의 새까만 초열탄이 만들어졌다. 완성한 초열탄을 고로에 넣자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얼마 후 고로 안의 온도는 2천 도를 넘어갔고, 새빨간 쇳물이 밖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철]을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100을 얻었습니다. 초열탄으로 만들어진 철괴들은 드워프의 철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인 철괴보다 더운 순수하고 단단한 이 철로 무기나 도구를 만드니 품질이 월등한 것은 당연지사.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역청탄을 공급해 주고 있고, 리지스가 장인의 가루를 만드는 재료들도 제때에 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걱정해야 할 거라곤 인지도뿐. 처음 대장간을 열었을 때는 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제외하고 찾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유한의 대장간이 인지도도 낮았고, 위치도 케이트 산맥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냥하다 들르는 유저들이 퍼트리는 입소문 덕분에 찾는 사람은 조금씩 늘어 갔다. "이제야 장사가 되는 모양이네요." "먼 곳까지 소문이 퍼졌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송코의 말에 유한은 기분이 좋아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암, 그래야죠. 내가 초열탄 제조 비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아바란 왕국은 길드전을 비롯해 분쟁이 빈번해서 유저들의 무구 소모가 다른 필드보다 몇 배는 빠르고 심한 지역이었다. 이 위험하고 혼란한 나라에서는 전투력이 약한 상인이나 장인의 활동이 여의치 않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아이템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비싼 것은 무구 역시 마찬가지인데, 몇 배로 비싸다 해도 무구들은 잘 팔려 나갔다. 영지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길드나 난세에서 용맹을 평쳐 보려는 유저들이 항상 강하고 우수한 무구를 구입하려 애쓰고 있는 덕분이었다. 아바란의 유저들에겐 어디 가까운 곳에 우수한 장인이 있는지, 좋은 무기를 거래하는 상인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조사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 유저들의 조사 목록에 유한의 대장간이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물론 팔을 걷어붙이고 홍보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자, 여러분! 케이트 산맥에 대장간이 하나 새로 생겼는데, 거기에 가 보시지 않으렵니까?" 근처의 영지로 상행을 나온 리지스는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지그의 대장간을 홍보했다. 그녀의 돋보이는 미모가 유저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것이 지그표 브레스트 아머! 어디 족보 없는 브레스트 아머에 비하면 무게도 훨씬 가볍고 방어력도 1.5배 더 높습니다!" "오호!" 주변의 유저들이 리지스가 내놓은 무구들을 구경하러 다가왔다. 광채부터가 다른 대장장이들이 파는 무구들과 사뭇 차이가 났다. "자, 이 칼을 보세요. 다들 잘 쓰시는 국민용 롱소드입니다. 같은 국민용이라지만 지그표 롱소드는 다릅니다!" "헉! 뭔가 기분 나쁘게 생겼어." 지그표 롱소드의 검푸른 칼날을 본 유저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따. "뭔가 섬뜩하지 않아요? 이건 포이즌 롱소드라고 합니다. 일반 롱소드랑 달라요. 스쳐도 사망이라 이 말씀!" 포이즌 롱소드는 유한이 플레임 마운트에서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만든 무기로 , 독초와 독버섯 같은 것을 우린 물에 식히고 단조한 검이었다. "독 옵션을 달고 있다고 혹신 약한 건 아니냐? 천만에 만만에 말씀입니다. 이런 족보도 없는 롱소드보다 훨씬. 강도가 뛰어납니다." 리지스가 상점용 롱소드를 포이즌 롱소드로 내리치자. 과연 상점용 롱소드는 뚝 부러져 나갔다. "저거 가격만 착하면 길드원들을 무장시키기 좋겠는걸?" "어디 있댔지? 케이트 산맥이라고 하던가?" "당장 찾아가 보자고." 리지스의 선전을 본 유저들은 곧장 케이트 산맥으로 몰려갔다. 거대 길드들은 대부분 자체 무기 생산 공방이 따로 있어 길드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무구들을 지급하지만, 그렇지 못한 중소 길드나 개인 유저들은 유한의 대장간을 찾았다. 포이즌이라는 쓸 만한 옵션이 달린 품질 좋은 무기에 방어력이 뛰어난 무구들. 직접 가서 대장간에 진열된 무구들을 본 유저들은 힘들게 걸음한 것이 조금도 헛되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만족 했다. 더구나 가격까지 저렴하지 않은가. 이만한 수준의 무기는 일반 상점표 가격의 4~5배, 심지어 10배를 줘야 하는데 유한은 2~3배의 정도의 가격만 받았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초열탄 덕분이었다. 제련이 5랭크인 유한은 원래 철괴 1개 만들려면 철광석을 5개 넣어야 했지만, 이제는 3개만 넣고도 더 좋은 철괴를 얻을 수 있었다. 무구를 만드는 데 원료가 줄어들고 채굴하는 시간을 아 낄 수 있으니 생산량도 늘어나고 그만큼 가격을 인하할수 있었다. 거기다 남바린을 비롯해 주변 영지들의 무구 값이 비싼 것도 유한의 대장간이 유명해지게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남바린의 영주관. 영주의 집무실에서 유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이번 달 세금이 왜이러냐?" 남바린의 영주이자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달 세금이 저번 달보다 무려 1/3로 줄어들었기 때문. "그게, 우리 영지의 주력 산업인 대장간과 무기 공방의 수입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재무 담당이었던 마법사의 말에 영주는 버럭 화를 냈따.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몰라? 우리가 철십자 길드에 내는 상납금만 해도 한 달에 무려 십만 골드가 넘는단 말이야!"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빌린 대가로 푸른새벽 길드는 철십자 길드에 매달 10만 골드의 거금을 상납금으로 바치고 있었다. 상납금은 길드가 소유한 각 영지들의 수입으로 마련하는데, 상납금의 할당을 채우지 못한 영지의 경우는 영주가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니 영주가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도대체 이유가 뭐야? 갑자기 무기가 안 팔리기 시작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남바린 영지는 광렙을 할 수 있는 2개의 사냥터와 1개의 던전 덕분에 유저들의 발걸음이 많은 편이다. 영지에선 이들을 대상으로 무구를 비싸게 팔아 짭짤하게 돈을 벌고 있었다. "그, 그게 케이트 산맥에 새로 들어선 대장간 때문에……." "뭐? 케이트 산맥에 대장간이 새로 들어섰어?" 영주는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바린 점령 이후 길드 수뇌들과 만난다, 그동안 못 가 본 던전에 가 본다, 여자 유저들 꼬신다 등등 이런저런 외유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걸 왜 내버려 둔 거야!" "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장사가 잘 안 될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거기 대장장이가 꽤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더라고." 그러면서 마법사는 유한의 대장간에 대해 조사한 바를 설명했다. 어떤 식으로 장사를 해서 돈방석을 몇 개나 만들고 있는지. "호오!" 감탄사를 발하는 영주의 눈이 빛을 발햇다. 그것은 탐스러운 먹이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과도 닮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손을 써 둬야겠군." 그는 그 자리서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깃털 펜으로 뭔가를 휘갈겨 썼따.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에게 건네주었다. "케이트 산맥의 대장간에 가서 이걸 전해. 그리고 만약……." 영주는 뒷말을 잇는 대신 주먹을 쥐어 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이봐, 여기가 지그 대장간이 맞아?" 오늘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듯한 유저 셋이 대장간 앞에 나타났따. 대장간 앞에 만든 가판대에서 상품을 정리 하고 있던 채린이 그들을 맞았다. "네, 어서 오세요, 무얼 찾으시나요?" 채린의 환한 미소에 세 사람은 잠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얼굴 한편에 발그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험험! 우리는 여기 대장장이를 만나려고 왔소." 대표로 말한 사람은 큰 덩치의 전사였다. "네, 무기를 주문 제작하실 모양이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채린은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백분 발휘하여 그들을 안내했다. "쳇, 저 여자애 저번에 TV에 나왔던 애 맞죠?" "응, 분명 공중 요새 발견자라던……." "실제로(?) 보니 엄청 예쁜데요." 수근거리던 세 사람은 왠지 뒤통수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돌아보니 가판대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던 손님들이 모두 자신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살 것은 없지만 채린을 보러 오는 유저들이 제법 있었다.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미소녀를 관람하는 즐거움을 앗아가 버렸으니 눈빛이 곱지 않을 수밖에. "어, 리지스. 또 나가는 거니?" 마침 대장간 안에서 리지스가 나왔다. 그녀는 새로 산 드레스로 화려하게 단장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트에 무기를 가득 싣고서 상행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호위로는 송코를 대동하고서. "응, 브로인에 갔다 올 거야. 물건도 팔고 가게도 봐 두려고." "가게?" "응, 거기다 무기점을 만들면 장사가 잘될 것 같아서." 브로인은 게임 내에서 3순위로 꼽히는 다크나이트 길드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였다. 수많은 길드들의 침략을 물리친 이 영지는 아바란의 대표적인 철옹성으로 유명했고, 그 덕분에 치안이나 경제가 다른 영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리지스는 다크나이트 길드에 무기를 팔고 브로인 성 안에 가게를 만들 생각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상행도 즐겁지만, 고정적인 수입원을 만드는 것도 상인에게는 중요햇다. 아르페디아의 상권을 석원할 야망이 있는 그녀에게는 포석을 박는 것과도 같은 일. 이미 가게를 세울 만큼 충분히 돈을 모았다. 물론 그건 다 유한 덕분이다. "그럼 조심하고 잘 갔다 와." "응, 지그 녀석 농땡이 안 부리는가 잘 봐 줘." 세 사람은 리지스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기 있는 채린의 미모도 대단 했지만, 화사한 리지스의 미모도 만만찮았다. 대체 이 대장간은 무엇인가? 아무리 대장장이 실력이 좋다고 하지만, 툭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 주제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소녀들이 둘이나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여기 들르는 유저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이 리지스는 돈줄을 놓아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채린은 유한이 정밀 조립 스킬 7랭크까지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공중 요새에 갈 생각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미소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나타나 물건을 홍보하고 팔자 대장간에는 여자 유저들보다 남자 유저들이 더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영주가 우릴 보낸 이유를 알겠군.' '영주가 되고도 매번 여자 유저들한테 퇴짜를 맞더니만…….' 세 사람이 영주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말거나. 채린은 그들을 대장간 안에서 무구를 수리하고 있던 유한에게 안내했다. 캉캉캉! 유한은 단지 무구를 만들어 파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전매 특허인 무구 수리도 같이 하고 있었다. 유저들이 여기 외딴 대장간을 들르는 이유는 채린이나 리지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한의 뛰어난 수리 실력 때문이기도 했다. 웬만한 것들을 뚝딱 잘 고쳐 주고, 내구가 많이 깍여 사망 일보 직전의 무구들까지 희생시켜 주니 먼 곳에 있어도 걸음을 옮겨 찾아오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유한은 게임하는 시간의 반은 무구 수리에 할당하고 있었다. -배틀 엑스를 수리하셨습니다. 새것이랑 다름없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수리 스킬이 4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 B급 무구를 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리 성공률이 65%가 되었습니다. *솜씨를 계속 올리면 수리 성공률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앗싸!" 유한이 주먹을 움켜쥐자, 배틀 엑스의 주인도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애병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레인 스킬을 익힌 뒤로 유한은 수리 성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무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칠 수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유한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상태창] 이름:지그 칭호:오우거헌터,드워프의 조수,공중 요새의 발견자,리저드의 친구 직업:대장장이 레벨:88 체력(HP)610/610 스테미나:420/420 마나(MP):41/41 힘:85 민첩성:65+10(바람의 부츠) 인내심:70 지식:46 행운:60 솜씨:125 명성:3800 공격력:92+112(포이즌 세이버+와이어 건틀렛) 방어력:68+98(바람의 부츠+장인의 코트+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1400/8800 돈:75,2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채굴 스킬 4랭크 채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4랭크 생산 스킬 4랭크 합금 스킬 7랭크 정밀 조립 스킬 8랭크 수리 스킬 4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65%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4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6랭크 미친 듯이 일을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스킬들이 많이 올랐다. 이제 합금이나 정밀 조립 스킬들만 좀 올리면 중급 대장장이를 넘어 상급 대장장이에 다다를수 있을 듯.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봐?" 유한이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언제 들어왓는지 채린이 옆에서 물었다. "수리 스킬이 4랭크가 되었다는 말씀. 이제 B급 무구도 만질 수 있어." "오! 축하해." "그런데 스텟은 별로야. 그동안 대장간에 너무 처박혀 있었나?" 레벨이나 스텟을 올리려면 사냥이나 던전 탐사가 최고였다. "그럼 내일은 일을 쉬도 던전에 한번 가 볼래?" "너도 많이 지겹지?" "당연하지, 하루 종일 가판대에서 물건만 파는데 안 지겨웠을까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채린은 생각보다 지겹다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일감과 주문 때문에 유한이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는 게 늦어져도 불만이 없었다. 파티 플레이를 하자고 친구들에게 쪽지가 온 적도 있었지만,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냥 유한과는 얼굴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따. 그저 어릴 때부터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좋아. 그럼 남바린 영지에 있는 던전에 가 볼까?" "안 그래도 옌스가 거기 괜찮은 던전이라고 하더라. 드워프와 관련된 던전이라는데, 미로 같은 던전에서 흥미진진한 탐험을 하다가 대박 아이템을 하나 건졌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옌스는 유한이 머무는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던전에서 모험을 하거나, 길드전에 용병으로 참가하거나. 바츠가 강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 옌스의 계획이었지만, 요즘은 은근히 자신의 무구 수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바츠라면 이 정도는 고쳐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그런데 거기 세 사람은?" 잠시 동안이지만, 세 사람은 자신들이 투명인간이 되는 기분을 맛봤다. 커플(?)의 즐거운 대화에 이렇게 잔인하게 소외될 수 있다니. 새삼 필드 곳곳에 한 맺히게 꽂혀 있는 '커플 숙처'이라는 팻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것은 그것이고, 임무가 있으니 수행을 해야 했다. 대표로 나선 덩치 큰 전사 사내는 나름대로 멋지고 위엄 있어 보인다 시픙ㄴ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험, 나는 남바린 여잊의 사자 폴크스요." "남바린에서?" 유한은 이들이 푸른새벽 길드원이라는 걸 알고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로 오셨수?" 남바린 영지에서 화려한 바가지를 써 봤기에, 이들을 맞는 유한의 태도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폴크스는 발끈했지만, 그 정도로 큰일을 망칭 수는 없었기에 꾹 참고 손에 들린 편지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남바린 영주님의 서찰이오, 그대에게 전하라 하셨소." 유한은 뭔가 싶어서 편지를 읽어 보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지그의 대장간이 있는 장소가 남바린 영지의 땅이니 세금을 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무려 1만 골드씩. "여긴 중립 지대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중립 지대였소. 하지만, 얼마 전에 우리 푸른새벽 길드가 영지의 경계를 넓히면서 우리 땅이 되었으니 세금을 내야 하오." "순 억지잖아!" 한 달에 1만 골드는 너무 많았따. 아까 리지스가 떠나기 전 상점 어쩌고 이야기를 했는데, 상점이나 대장간의 세금은 많아도 한 달에 1,000골드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 분명 시비였다. 거기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만약 이곳이 정말 남바린 영지에 속하게 되었다면, 저 녀석들이 찾아오기도 전에 유한에게 대장간의 소속을 알리는 메세지가 떴을 것이다. "난 경계와 관련된 메세지를 받은 적 없어." "뭐, 그대가 일하다 바빠서 지나쳤을지 모르지. 하여튼 이곳은 어제부로 우리 영지의 땅이 되었으니 세금을 내던가, 아님 당장 문을 닫고 떠나든가 하시오." "둘 다 싫다면 어쩔 거냐?" 척 봐도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놈들을 보내 시비를 걸다니. 푸른새벽 길드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것 같았다. 유한이 검을 슥 빼어 들자 폴크스를 포함한 세 사내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점잖은 기색은 이제 표정에서도 말투에서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에서 좋은 말로 할 때 따르는 게 좋을 텐데?" "점잖게 대해 주니까 이거 안 되겠구먼!" "죽고 싶어, 이 자식아!" 세 사내가 으르렁 거리며 본색을 드러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배틀 엑스의 주인은 슬그머니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이 사람들 시비 걸러 온 거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채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자릿세를 받으러 온 불한당이었다. 바닥에 침까지 찍찎 뱉는 모습이 혹시 진짜 깡패나 양아치는 아닌지? 채린은 유한을 바라보았다. 걱정되어 바라보았던 그의 얼굴이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가 많이 났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험악한 표정과 달리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은 왜일까? "좋은 말로 할 때 둘 중의 하나를 택해. 사람 성질 더럽게 만들지 말고." "울 형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게 좋을걸?" "너 이 분이 누군지 모르지? 푸른새벽에서도 한참 뜨고 있는 샛별이시라고." 세 녀석은 안면 근육을 환상적으로 일그러트리며 유한을 위협했다. 그들의 목적은 유한에게서 세금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바린 영지의 주요 소득원 중의 하나였던 무기 판매 시장을 빼앗아 간 괘씸한 대장장이 놈을 쫓아내는게 목적이었다. 물론 순순히 나가려 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손을 봐 줄 생각이었다. 이 허름한 대장간도 그냥 박살 내 버리고. "닥쳐, 당장 그 더러운 발 떼고 꺼져!" "허, 얘가 진짜 사람 성의를 무시하네, 너 그러다가 죽는 수가 있다." 폴크스는 기도 안 차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대장장이 주제에 전사에게 덤비려 들다니. 어지간히 억울하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흥, 꼭 별거 아닌 놈들이 죽인다고 악을 쓰지." "뭐? 이 새끼가 자꾸!" "죽여 봐. 멀찍이 떨어져서 죽인다고 하면 참 잘 죽겠다." "이 새끼가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나!" 전사 사내는 버럭 화를 내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투 핸드 엑스를 번쩍 치켜들었따. 그러나 녀석의 행동은 너무 성급했다. 도끼를 내리치는 것보다 유한이 들고 있는 포이즌 세이버가 찔러 드는 것이 더 빨랐다. "어, 어, 어!" 섬뜩하게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에 놀란 폴크스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대장장이가 휘두른 검에 놀라 쓰러질 줄이야. 그것도 미소녀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폴크스는 부끄러움을 유한에 대한 분노로 덮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괜찮습니까?" "나서지 마! 저 새끼 골통은 내가 부술 거니까!" 달려온 부하들의 손을 뿌리친 폴크스는 무섭게 유한에게 달려가며 투 핸드 엑스를 휘둘렀다. '흥, 깊이 베기인가?' 자세는 검으로 하는 깊이 베기와 반대지만, 발을 내딛는 첫 동작이나 휘두르는 폼을 보면 깊이 베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속도는 굼떴고, 뻔히 보이는 공격 패턴이다. 이 녀석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나 유저들과 싸워 봤던 유한은 한숨이 다 나올 정도였다. 폴크스의 도끼는 아래에서 위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뒤로 점프하며 물러섰던 유한은 몸을 튕기듯 날리며, 폴크스가 입고 있는 갑옷을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헉!" 단 일격에 판금 갑옷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유한의 암 브레이크는 자세 보기를 익힌 뒤로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빠각! 놀라 물러서는 폴크스의 머리 위로, 유한이 날린 제2타가 날아들었다. 머리가 욱신한 느낌보다 투구가 일격에 박살 났다는 충격이 폴크스의 정신을 더 아득한 곳으로 떨어트렸다. 어떻게 돈을 모아 샀던 투구였던가. 먹을 거 안 먹고 사고 싶은 거 안 사 가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장비였다. 그런데 그걸 한 방에 박살 내다니! "몸에 걸친 것은 몽땅 다 부셔 줄 테니까 각오해라!" "으아아아!" 폴크스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HP는 온전했지만, 피 같은 골드를 들여 산 무구가 대장장이의 공격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형님!" "막아! 저 새끼 막으라고!"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어쨌든 충성심 깊은 부하들은 그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유한은 멈칫하며 자세를 바꿨다. 일대일은 몰라도 전사 둘을 상대로는 주의를 하며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의 짐을 채린이 덜어 주었다. 달려가는 두 녀석 중 하나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것이다. "이, 이게! 비겁하게!" "둘이 하나한테 덤비는 게 더 비겁하잖아!" 채린에게 걸려 엎어진 녀석은 바로 일어나서 칼을 치켜들었다. 상대가 예쁘고 늘씬한 여자애라는 사실은 이 순간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상대가 궁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채린이 벼락같이 활을 꺼내 쏠 때까지는. "파워샷!" "으악!" 근거리에서 파워샷을 맞은 녀석은 복부에 화살이 꽂힌 채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벽에 장식처럼 박혀 버린녀석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유한에게 덤볐던 녀석은 폴크스와 마찬가지로 검과 방패가 암 브레이커에 박살 났다. 무기와 방어구를 잃은 녀석은 허둥거리며 도망치려다 채린이 날린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형님! 같이 가요!" 녀석은 화살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애원했지만, 자신을 희생시킨 형님은 거의 굴러가듯 달아나고 있었다. "이 자식! 곱게 튀게 내버려 둘 줄 알아!" "켁!" 유한이 날린 와이어가 폴크스의 목을 휘감았다. 그는 버둥거리는 폴크스를 질질 끌어당겼다. "뭐야? 월척이네." "시비 걸러 왔다 꼬라지 좋구먼." 대장간에 왔던 유저들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편없이 망가진 세 사람을 보고 깔깔거리면 웃었다. "이, 이봐, 이러지 말고 우리 되도록 말로……." "감정을 상했다면 차라리 우릴 죽여 줘." 제발 피와 살이나 다름없는 장비만은 놓아두기를. 그것이 세 녀석의 소원이었지만, 한번 검을 뽑아 든 유한은 가차 없었다. "암 브레이크! 암 브레이크! 암 브레이크!" 유한은 연속적으로 암 브레이크를 사용해 세 녀석의 무구를 모조리 깨 버렸다. 칼질에 HP가 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 녀석은 암 브레이크가 떨어질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스킬인가? 기껏 대장장이의 칼질 한번에 자신들의 무구는 왜 박살 나고 있는가? 설마 무구가 불량? 그건 아닐 것이다. 몇 번이고 확인을 했으니까.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되어 버렸을까? 장비가 모두 박살 날 때까지, 세 녀석은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유한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번엔 몽둥이를 들고 왔다. "장비는 박살났는데 HP는 멀쩡하면 억울하지. 안 그래?" "안 억울해! 아니, 안 억울합니다!" 부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도망을 치려 했지만, 채린이 활을 들고 입구를 딱 막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천사처럼 보이던 소녀가 지옥의 마녀처럼 보였다. 이판사판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반항하려 했지만, 빈손에 장비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에서 폭풍처럼 쳐 맞는 것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퍽! 퍼퍼퍽! "아악! 항복!" "그, 그만 때려!" 아주 급소만 노려서 치는 유한의 주도면밀한 모습이 채린에게는 조금 섬뜩해 보였다. 뭐 맞을 짓을 한 놈들이니, 터지는 건 당연했지만 말이다. 5.남바린의 영주 "캬캬캬! 속이 다 후련하군." 모든 장비가 박살나고 실컷 얻어맞은 뒤 천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폴크스 일당을 바라보며 유한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그야. 괜찮겠어?" 채린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실력이 변변찮은 세 녀석이지만, 그들 뒤에는 푸른새벽 길드가 있지 않은가. 영지까지 보유한 강력한 길드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훗, 걱정 마. 나 그 정도로 겁먹을 약한 캐릭은 아니니까." 유한이 바츠였을 때는 감히 누구도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나타나면 먼저 물러나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바츠가 아니라 대장장이 지그. 푸른새벽 길드에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약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다고, 상황이 불리하다고 미리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싸울 수 있는 데까지 싸워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유한의 다소 낙천적인 말에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안심되는 건 아니었다. '정말 괜찮을까? 아빠한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대장간에 십여 명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찾아왔따. 전원 전투 계열의 유저였는데, 한바탕 전쟁이라도 할듯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그들의 모습에 대장간을 찾았던 유저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거나 로그아웃을 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유한에게 묵사발이 난 폴크스 일당이 있었다. "저, 저놈입니다, 영주님!" "네가 이 대장간의 주인인 지그라는 녀석이야?"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남바린의 영주로 보이는 그의 이름은 '케이지'. 금발에 제법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눈매가 가늘고 입술이 얄팍한 것이 간사하게 생겼다. 거리에서 흔히 볼수 있는 날라리였지만, 유한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 두 눈을 치떴다. '이,이놈은!' 그는 케이지라는 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김필중 바로 유한이 다녔던 학림 고등학교의 일진인 녀석으로, 이사장 손자 정현일의 오른팔이었다. 녀석은 유한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괴롭혔었다. 틈만 나면 양아치들을 끌고 와서 때리고 차고 밟아 대곤 했다. "뭘 꼬나봐? 네가 지그냐고 묻고 있잖아?" 겨우 1년 반이 좀 지났을 뿐인데 놈은 유한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한은 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정말 이 순간만은 옌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쉽게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가해자를 절대 못잊으니까. "귀머거리냐? 내 말 안 들려?" "그러는 넌 눈이 멀었냐? 캐릭터 이름도 못 보고?" 유한의 반박에 김필중, 아니 케이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게임에선 항상 캐릭터 머리 위에 이름이 떠 있었다. 현실에서 늘 하던 대로 건들거리다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흥, 건방진 놈. 무단으로 우리 영지에서 장사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겁도 없이 우리 길드원을 두들겨 패? 거기다 영주인 날 비아냥거리기까지. 이거 간이 아주 탱탱하게 부었구먼." 유한은 일단 놈을 모르느 척하기로 했다. 아는 척했다간 괜히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내 간이 부었는지 궁금하면 직접 와서 째 보시지. 네 모가지 위에 달린 장식을 관람비로 내 놓을 다음에 말이야." "이 자식이 계속!" "지, 지그야." 유한의 비아냥에 뒤에 서 있던 채린이 그의 옷을 잡아 끌었다. 그가 싸우겠다면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괜찮아. 저런 놈들에게 쫄 필요는 없어." 저런 놈들의 심리는 유한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급식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시달렸으니까. 저런 양아치 새끼들에게는 절대 약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 기를 살려 주면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고 떠밀어버리낟.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크게 치고 나가는 것이 좋았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빌빌대는 놈들이다. 상대가 강하게 보이면 섣불리 덤비지 못한다. "흥! 대장장이 주제에 까불긴……." "그래서 패거리 끌고 직접 납셨나? 영주씩이나 되는 분이?" 케이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유한의 목을 날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어제 폴크스가 달려와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 지그란 녀석 조심해야 돼요.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고 무구를 한 번에 부수는 이상한 스킬을 쓴다고요.' 정체불명의 히든 스킬이 있는 대장장이. 대장장이 하나 잡으려다 비싼 무구라도 깨 먹으면 손해다. 되도록 말발로 눌러 버리는 게 이득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로 좋은 거라고 하니까. "뭐, 이 몸은 관대한 분이시니 어제 그 사소한 일은 문제 삼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당장 대장간 때려치우고 꺼지는게 신상에 좋을 거야." "싫다면?" 유한의 물움에 케이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영원히 죽도록 만들어 주마." 여기서 죽으면 부활할 곳은 뻔하다. 가장 가까운 영지인 남바린과 대장간 중에 하나.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두 곳에 배치해 놓고 부활할 때마다 죽여 줄 수 있었다. '흐흐흐, 오랜만에 장난감이 하나 걸려 들었군.' 케이지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때 채린이 나섰다. 가만히 두고 보자 싶었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따. "이봐요! 억지 부리지 말아요! 댁들 이러는 거 운영자가 알면 가만있을 줄 알아요?" 채린은 어제 아르페디아 공식 홈페이지에 들러 확인해보았다. 정말 이곳이 남바린 영지에 속해 있는가 아닌가. 그랬더니 유한의 대장간은 남바린 영지의 외곽에 있었다. "흥, 알 게 뭐야. 지금이라도 저 거지같은 대장간 밀어 버리고 요새를 만들면 여기도 우리 땅이 되는 건데. 나중에 가서 일러도 소용 없을걸." 거기다 현재 이 근방은 거의 푸른새벽 길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북동부 지역의 6개의 영지와 2개의 도시가 모두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아바란 왕국 북동부에서 그들에 대항할 길드는 사라졌다. "뭐 네가 내 애인이 되어 준다면야, 한 번쯤 봐줄 수 있지." 케이지는 음흉한 눈으로 채린을 슥 쓸어 보았다. 굳이 자신이 올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부하들을 인솔해서 온 이유는 눈앞의 이 미소녀 때문이다. 어제 세 녀석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얼짱에 몸애 착한 미소녀다. 기왕이면 현실에서도 애인을 삼고 싶을 정도로. '이 개자식이!' 유한은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제륵스와 알덴이라는 놈들도 그랬지만, 채릭에게 집적거리는 놈들은 정말 싫었다. 더구나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놈이 채린에게 치근덕 대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소꿉동무라서가 아니라……. "시아야, 저런 녀석과는 말을 나눌 필요 없어. 근본부터 썩은 놈이니까." 대장장이지만 자신에겐 힘이 있었다. 암 브레이크라는 히든 스킬이 있고, 바츠 시절에 쌓아 놓은 전투 감각이 있다. 거기다 함께 싸워 주려는 친구가 있었다. 채린이 함께 라면 싸우다 깨지고 죽는다 해도 결코 후회가 될 것 같이 않았다. "흥, 좋게 말로 하려니 안 되겠군." 케리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마법사들은 일제히 마법 주문을 외웠다. "전부 동작 그만!" 일촉즉발의 상황. 고함을 지르며 장내에 난입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레와 같은 고함을 지른 그는 바로 옌스였다. 유한이 강해지기를 기다리며 인근 지역에서 레벨을 올리고 있던 그는 아주 적절한 순간에 등장했다. 녀석을 반갑지 않게 생각하는 유한도 이 순간은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칼 좀 고치러 왓는데 웬 떨거지들이 이렇게 많아?" 옌스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노려보았다. 폼을 봐서는 '무기 고쳐 주세요'라고 찾아온 것 같진 않았다. 싸움을 걸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시식도 안 한 먹이에 손을 대려고 해?" "넌 뭐야?" 케이지는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녀석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돌격완 옌스다. 하찮은 네놈들이 이 몸을 알 리가 없지." "뭐? 돌격바보 옌스라고?" 푸른새벽 길드원 몇 명이 옌스를 알아보았다. 옌스가 주변에서 일어난 길드전에 용병으로 몇 번 참전 했기 때문인데, 조금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다. "바츠와 첫 대결을 하는 것은 이 몸이시다. 그 전에는 한 놈도 바츠에게 손댈 수 없다!" "바츠?" 해킹당해 사라진 캐릭터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인가. 말하는 폼을 보니 대장장이 지그 녀석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듯한데 놈더러 바츠라니? 그렇다면 설마……. "훗! 뭐야, 이놈 완전히 미친 거 아냐?" "캬캬캬, 아주 제대로 쳐 돌았네." "아놔! 너님, 정신 줄 놓았나요?" 케이지를 비롯해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옌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를 저 대장장이와 착각을 하다니, 바츠에 미쳐 버린 나머지 헛것을 보는 것이 틀림없다. "이놈들이!" 진실을 아는 자의 얼굴이 붉어졌따. 자신을 모독하는 놈들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쪽수가 많건, 마법사가 섞여 있건 간에. "야, 저 미친놈부터 묻어 버려." 케이지의 명령에 십여 명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전사나 기사들은 방패나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고, 마법사와 네크로맨서 계열은 뒤에서 마법으로 보조했다. "으아아아ㅡ 대쉬!" 그러나 이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이 미친(?)놈은 강했다. 갑자기 어꺠가 눈앞에 확대되는 듯하더니, 선두에 섰던 기사 둘이 옌스의 대쉬에 맞아 하늘로 튕겨 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들의 몸이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었다. 단 한 방에 절명(絶命). 케이지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어? 대체 어찌 된? -내 몸이 왜 두 동강 났나요? 죽은 기사들은 어이가 없던지 부활할 생각도 못했다. 진짜 엄청난 일격이었다. 차징과 동시에 검을 날리지 않았다면 저런 묘기는 부릴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은 눈앞의 이 돌격바보라는 녀석이 굉장한 고수라는 이야기인데? "뭐해, 마법사들! 공격하라고!" 케이지의 지시에 이미 공격 마법을 시전해 놓았떤 마법사들이 옌스에게 마법 공격을 집중시켰다. "파이어볼!" "아이스 스피어!" 옌스는 피할 틈도 없었는지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했다. 마법사가 여러 명이다 보니 공격은 연달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맙소사, 저러다 죽겠어!" 채린이 나서려는 데 유한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채린과 달리 그는 보다 유심히 옌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따. "기다려. 아직 괜찮은 것 같으니깐."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저만한 마법 공격에 맞으면 아무리 랭커라도 밀릴 만도 한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하핫! 그걸 공격이라고 하는 거냐?" 옌스는 멀쩡했따. 몸이 그을리고 성에가 좀 끼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휠 슬래쉬를 펼쳐 하늘로 떠오르더니 몸을 공처럼 말아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마법사들에게 내려 꽂혔다. "플라이 롤링 대쉬!" 유한과 엘프의 숲에서 싸움을 벌였을 때 썼던 기술이다. 그런데 회전 속도가 빨라진 걸 보니 위력이 한 차원 더 강해진 듯했다. "피, 피해라!" "으악!" 플라잉 롤링 대쉬의 작렬에 마법사와 네크로맨서들이 우르르 쓰러졌따. 직접 타격을 받은 자들은 크리티컬을 입고 쓰러졌고, 직접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충격 영향권에 있었던 자들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고, 고수다!" 피가 작게는 몇 십에서 크게는 몇 백에 닳은 이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흐흐흐, 이제야 이 몸의 실력을 알겠다? 하지만 빌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옌스는 의기양양해 소리쳤다.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케이지는 어이가 없었다. 비록 그가 데려온 부하들은 푸른새벽 길드에서 날고 기는 상위 랭커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영지를 책임질 만큼 강한 유저들이다. 그런데, 제대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전사들은 몰라도 마법사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놈이 걸치고 있는 갑옷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봉인의 갑옷?" "저 레어 아이템이 어째서?" 봉인의 갑옷은 B급 최고의 방어구로 착용자의 마법 방어력을 3배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당연히 파이어볼이나 아이스 스피어 같은 하급 마법들이 통할 리 없었다. "후후후. 남바린 던전을 열심히 돌다가 손에 넣은 거다. 드워프들이 마도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갑옷이라더군." "크윽!" 자신이 관리하는 던전에서 득템한 장비로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하자 케이지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뭐, 뭣들 하고 있어! 저 자식 얼른 죽여 버려!" 케이지의 명령에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기사들과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서둘러 공격 스킬을 시전했다. 상대가 어떤 실력자인지 알았으니 이번엔 충분히 준비해서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내에는 옌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새겹ㄱ 길드에 엄청난 유감을 지니고 있는 유한도 있었고, 채린도 있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우릴 무시했겠다!" 유한은 옌스에게만 신경을 쓰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채린도 바람의 활을 꺼내 연방 파워샷을 남발했다. 15 대 3. 숫자는 유한 측이 불리했지만, 옌스의 좌충우돌 돌격에 유한과 시아들이참여하자 싸움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으, 으으!' 케이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 자신이 데려온 공격대가 겨우 3명을 제압하지 못할 줄이야. 그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결국 고함을 질렀다. "후, 후퇴하라! 후퇴해!" 그는 제일 앞장서서 도망을 쳤다. "푸하하하, 도망치는 꼬라지 하고는!" 유한과 옌스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향해 맘껏 비웃어 주었다. "그떄문에 푸른새벽 길드 놈들과 싸웠따는 거야?" 싸움이 끝난 다음, 옌스는 유한과 채린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군." "마가 껴도 아주 더럽게 끼었다니까."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오늘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더 많은 길드원들을 앞세워 쳐들어올 게 분명해." 채린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따. 영주까지 직접 왔따가 망신을 당하고 쫓겨났는데 과연 얌전히 있을 길드가 몇이나 되겠는가? 뻔질나게 찾아와서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햇다. "거기다 내일이라도 와서 근방에 요새를 짓고 자기네 땅이라 우기면 손을 쓸 수가 없어." "흥, 그깟 허약해 빠진 녀석들이 깔짝대면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지, 이 돌격왕 옌스 님이 나서면 모두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 버릴걸?" "그 허약해진 놈들이 이천 명이 넘게 오면?" 유한은 어제 폴크스 일당을 패 버리고 난 뒤에 푸른새벽 길드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홈피까지 만들어져 있었기에 자세한 규모를 알 수있었다. 길드원의 총 수는 2,103명. 하지만, 동맹 길드와 보유 자금으로 동원할 수 있는 용병들까지 합친다면 전력은 3,000명까지 늘어난다. 3,000대 5. 바츠가 되살아나지 않는 이상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놈들의 뒷배를 봐준다는 철십자 길드까지 나선다면 바츠가 되살아나도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싸우지 않을 방법은 있지만…….' 이대로 대장간을 철거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 버리면 싸우지 않아도 된다. 개망신을 당한 김필중이야 펄펄 뛰겠지만. 하지만 유한은 대장간을 포기하기 싫었다. 대장간이 위치한 곳은 입지 조건이 최적인데다가 경치도 빼어난 곳이다. 거기다 자신이 처음으로 세운 대장간이다. 이제 단골손님도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었다. "돈 많이 벌었다고 다른 데 가게 세우면 잘될 것 같지? 단골손님을 배신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신의가 있어야지." 예전에 아버지 가게 일을 돕다가 들었던 이야기다. 유한네 행복 마트 앞에 잘 나가던 통닭집이 돈 좀 벌었다고 다른 동네에 큰 점포를 사서 나간 적이 있었다. 유한의 아버지는 통닭집 사장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했고, 얼마 후 이전한 통닭집은 근처에 개점한 프랜차이즈 업체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더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런 사례를 보고 들었던 유한은 대장간을 옮기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상황은 그 통닭집과 다르지만, 힘들게 이곳까지 찾아오는 유저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얼마인가. 대장간을 짓고, 장비를 들이고, 홍보를 하느라고 들인공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력들을 접고 이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김필중이라는 걸 안 이상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았다. 놈에게 당해서 쫓겨난 것은 현실의 학교로 족하니까.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우리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면 어떨까?" 채린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 무서운 극기도 사나이들의 집단으로 아르페이다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철십자 길드마저도 물 먹였을 정도니 따로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 아빠가 거기 대장이거든." "아니! 폭풍의 길포드가 시아 아빠였어?" 옌스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알고 있던 유한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채린이 내민 카드가 최고일지 모르지만, 유한은 그 카드를 쓸 수 없었다. 길포드, 아니 송태수가 자신이 채린과 함께 있는 것을 알면 푸른새벽 길드가 박살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박살 날 게 뻔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얼음 궁전에서 같이 방송 하번 탔다가 한 달 동안 죽는 줄 알았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두도록 하자. 웬만하면 우리들끼리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왜? 간단한 방법을 두고서." "어른한테 의지하고 싶지 않아." 사실은 송태수에게 맞기 싫을 뿐이다. "어린애처럼 고집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채린의 말에 유한은 먼산바라기 하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옌스가 나섰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남바린 영주란 놈을 잡아다 족쳐 버리는 거야."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채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따. 그러나 그 터무니 없는 소리가 유한에겐 솔깃하게 들렸따. "영주를 잡아다 족친다?" "가능할 리가 없잖아. 영주가 머무는 성이면 경계도 철저할 텐데 말이야." "그건 모를 일이야. 이쪽에서 먼저 공격할 줄은 생각지도 않을 테니까." 딸랑 3명이서 선공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것인가? 제대로 기습을 할 수 있다면 의외에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이쪽엔 옌스라는 막강한 전력도 있지 않은가? "해 보자. 직접 놈들의 본거지를 치는 거야." "너무 무모해! 성공한다 해도 보복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아니, 우리가 기습만 성공해도 그걸로 놈들과 거래를 할 수 있어." 거대 길드인 만큼 평판에 신경 쓰기 마련. 특히 보안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거운 세금이야 악평을 듣고 끝나겠찌만, 영주관에 적이 침투해 설치고 다녔다고 하면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침투한 상대가 별 볼일 없다면 더더욱 체면과 자존심을 구기게 되는 것이다. "영주관에 들어가서 스크린샷 한 장만 찍어도 우리의 승리라는 거지." "그러니깐 그걸로……." "계속 딴지 걸면 이걸 확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그럼 제 놈도 별수 없을걸?" 실제 아까 싸움도 증거를 남겨 두었다면, 꽤 협박할 만한 자료가 될 뻔했다. 물론 그땐 생각을 못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우릴 계속 괴롭히려들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각서를 쓰게 만들면 돼. 이 게임엔 그와 관련된 전자 문서들이 있으니까." 리지스가 송코를 코 꿰어 버린 거래 계약서뿐만 아니라. 길드 간의 협정을 맺는 조약서나, 포고문 같은 것들도 있었다. 영주 놈을 잡아 놓고 '케이트 산맥은 남바린의 영역이 아님을 인정한다'는 식의 문서에 서명하도록 만들면 되는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영주 녀석이 패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만약 이래도 실패하면 채린이 네 뜻대로 할게." "알았어. 그럼 지그 네가 말한 대로 먼저 해 보자." "뭔 소리! 이 몸이 세운 작전이야! 이 몸만 믿고 맡기시라고!" 앉아서 당할 바에는 뭔가 해봐야 한다.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드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아놔!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영지로 돌아온 케이지는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영주가 직접 공격대 15명이나 끌고 갔는데 겨우 대장장이, 궁수, 전사 세명에 박살이 났다. 전사가 실력이 뛰어났다지만, 쪽수에서 앞섰던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이 사실이 길드장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데…….' 푸른새벽 길드장이 자신의 무능을 듣기라도 하는 날엔 지부장 자리를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은 하나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다. 영주로서 적게는 수십 명에게 많게는 수백 명의 길드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자신의 영지에서는 거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중에서도 남바린 영지는 몹 리젠이 빠른 사냥터 2곳과 고대 드워프의 던전이 있어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많다. 그런 좋은 자리를 결코 잃을 수 없었다. 반드시 실수는 만회해야 한다. "이봐! 애들은 다 모았어?" 케이지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길드원들만 불러 모아 괘씸한 대장장이 녀석을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푸른새벽 길드 내에는 그와 절친한 유저가 약 100명 정도 되었다. 학교 선후배라든가, 거리에서 만날 녀석들이라든가. 케이지의 물음에 마법사 차림의 유저가 우물쭈물했다. "이, 일단 쪽지는 다 보냈는데 다들 내일은 되어야 모일 수 있다고 해." "좀 더 빨리 올 수 없는 거야?" 당장 오늘이라도 놈들을 응징하고 싶었따. "그게 지금 타국에 있는 녀석들이 많아서……." "제길! 그럼 모두 모이는 대로 나한테 연락해." "알았어." 케이지는 부하에게 화를 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받ㅂ하고 분한 기분을 풀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써진 '망신'이라는 단어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제길, 감춰 둔 보물이나 감상하며 기분 전환이나 해야지." 그는 책장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반쯤 빼냈다. 그러자 책장이 슥 돌아가더니 비밀 통로가 열렸다. 케이지가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은 다시 원래대로 닫히고 빠져 있던 책도 원래대로 꽂혔다. 어두운 밤. 남바린 영지의 성벽으로 몰래 접근하는 인영들이 있었따. 그들은 바로 유한과 동료들이었다. 유한을 영주를 족치자고 결의한 바로 그날 밤에 행동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놈을 족칠 바에는 조금이라도 빠른게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좋겠군." 보초가 없나 살펴본 유한은 곧장 성벽 위로 와이어를 날렸다. 와이어가 성가퀴에 잘 걸렸나 확인해 보고 왼 주먹을 움켜쥐어 성벽 위러 날아올랐다. 주변에 보초가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유한은 와이어를 떨어트려 채린과 옌스를 끌어올렸다. "좋았어. 여기까지는 성공이군." "쉿! 옌스, 너 목소리 낮춰." 세 사람은 인적이 드물고 그림자가 짙은 곳으로만 움직여 영주관에 도착했다. 3층 건물인 영주관은 드문드문 경비를 서는 NPC병사만 보일 뿐 고요했다. 아마 밤이 깊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듯. 일행은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뒷문을 찾았지만, 거기엔 튼튼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일행 중에 도적 유저가 있다면 금방 풀고 들어갔겠지만 셋중에 도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좀 살펴 줄래?" 유한은 채린과 옌스에게 경계를 맡기고, 주머니에서 관련 연장들을 끄집어냈다. 가느다란 끌과 송곳, 집게 등등…… 모두 정밀 조립을 할 때 필요한 연장들이다. 유한은 그 연장들을 이용해 자물쇠를 분해해 버렸다. 어차피 자물쇠도 정밀 조립 스킬로 만드는 물건 아닌가. 끌과 집게로 고정 리벳을 뽑아 버리고 안에 있는 스프링과 경첩 장치들을 뜯어냈다. 그렇게 자물쇠가 해체되자 불쑥 안내창이 떠올랐다. -자물쇠를 분해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30을 얻었습니다. -복잡한 제품을 자주 분해하면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는 데 도음이 됩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훗, 이런 식으로도 스킬 경험치를 주나?' 그저 조립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해본 것인데 의외의 성과였다. 아무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 사이에 경비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유한 일행은 뒷문으로 무사히 침투할 수 있었다. "정말 대장장이는 별 걸 다 하는군." "너도 전사 관두고 대장장이를 한번 해 보던가." "싫어. 어떻게 키운 캐릭인데." "쉿! 누가 오고 있어." 채린의 말에 유한과 옌스는 바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오른쪽 복도에서 걸어온 사람은 영주관의 NPC 시녀였다. 등불을 들고 걸어오던 그녀는 침입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다가오다 채린에게 제압당했다. 순식산에 시녀의 뒤로 돌아가 목에 그라디우스를 겨눠 버리는 그녀의 실력에 유한과 옌스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익!" "조용히! 소리 지르지 마. 묻는 말에만 대답해." NPC는 유저와 달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활할 수가 없다. 당연히 유저보다 생존 본능이 투철하도록 설정 되어 있었다. "영주는 지금 어디 있지?" "이, 일 층 중앙의 큰방에 계십니다." "고마워." 용건을 마친 채린은 손날로 시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시녀는 찍소리도 못하고 쓰러졌다. "죽인 거야?" "아냐, 죽였으면 내가 머더러가 되었게?" "실력 좋은데? 과연 길포드의 딸답군." '송건달의 딸이라 그럴 거다. 영주의 거처를 확인한 그들은 바로 1층의 큰방을 습격했다. "이 자식! 각오해라!" 방문을 쾅 부수고 들어간 옌스는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들어온 것은 휑한 찬바람뿐. "얼레? 아무도 없잖아?" "그러게. 혹시 로그아웃해 버린 거 아냐?"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겠지." 유한은 채팅창을 이용했다. 비주얼 키보드로 '@케이지'라고 입력하고, '형 왓다'라고 간단히 입력해 보았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유한은 확신할 수 있었따. 녀석이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고. 만약 로그아웃을 했다면 귓속말을 보내도 '해당 인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떴을 것이다. "놈은 아직 접속하고 있어. 숨겨진 방 같은게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자." "그 전에 스크린샷 한 장 찍고." 적의 심장부에 들어온 기록은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조롱거리로 삼아 협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방 안을 뒤져 보았다. 비밀 통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들이닥치면? 그때는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다. "여기다! 여기가 분명해!" 옌스는 책장 아래를 가리켰다. 책장 아래 바닥에 책장이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잔상 효과까지 남기는 드림맥스의 그래픽 기술은 혀를 두를 만했다. "분명 이 뒤에 비밀 통로가 있을 거야." 옌스는 검을 빙금 돌리더니 책장을 내리쳤다. 책장이 박살나고 꽂혀 있던 책들이 사방에 흩어졌다. 그의 무식한 처사에 유한이나 채린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지만, 성과는 인정해야 했다. 정말 뒤에 비밀 통로가 있었으니까. 아마 놈은 이곳을 통해 어딘가로 이동했을 거싱다. "좋아, 들어가 보자!" 세 사람은 비밀 통로로 들어갔따. 어두컴컴한 계단을 통해 길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한참 계단을 내려가니 복도가 나왔고, 복도 끝에 문이 있었는데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불이 켜지며 주위가 환해졌다. 커다란 대전에 20명가량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그들 중앙에 낯익은 금방이 서 있었다. "푸하하하!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따!" 바로 남바린의 영주 케이지였다. "뭐야? 우릴 기다린 거야?" "후후후, 너희들은 감쪽같이 이곳에 잠입했다고 생각 했겠지만, 이 남바린 성은 마법사들이 항상 수정을 통해 감시하고 있지. 즉 너희들의 침입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했다. 어쩐지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보이지 않더라니, 연락을 받고 이곳에서 죄다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을걸?" 유한이 검을 뽑아 들며 말하자 옌스도 거들고 나섰다. "흥! 잡것들을 모아 놔 봤자 이 몸에겐 소용없어." 낮에도 이와 비슷한 숫자를 격파한 적이 있었다. 비록 쉽진 않겠지만 옌스와 자신이 앞을 막고, 채린이 지원을 잘해 준다면 해 볼만 했다. "큭, 알고 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케이지는 자신의 옆에 있던 석상으로 향하더니 석상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철컥! 그르르릉! "어엇!" 기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졌다. 유한 일행이 미처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아래를 보니 시커먼 어둠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유한은 다급하게 위를 향해 와이어를 날렸지만, 불행하게도 걸리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크윽!" "갸아악!" 한참을 떨어진 유한과 동료들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엇다. 충격으로 피가 많이 닳았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크윽! 모두 괜찬아?" "응, 간신히 죽는 것은 면했어." "제길, 뭐 저런 비겁한 자식이 다 있어?" 옌스가 자신의 검을 주워 들고 투덜거릴 때. 위에서 케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핫, 내 말이 들리냐? 들리면 똑똑히 들어라. 거긴 너희같이 보물 창고로 들어온 쥐새끼들을 가두기 위해 고대인들이 만든 함정이다." 비밀 통로 아래에 있던 대전은 남바린 성의 보물 창고였던 모양이다. "거기 있으면 그걸 만든 게임사가 미워질 것다. 왜냐하면 거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거든. 거점 부활이 먹히지 않는 아주 지랄 같은 곳이지." "뭐라고?" 거점 부활이 안 되면 자살해도 탈출할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런 곳에 사람을 빠트리다니.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게임사보다 케이지가 더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상판대기에 메테오를 처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럼, 그곳에서 영원히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말을 끝으로 함정이 닫혔다. 순간 주위가 빛 한점 없는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했다. "정말 저곳에 갇히면 빠져나갈 수 없어?" 입을 벌렸던 바닥이 닫히자, 케이지의 부하 마법사가 물었다. 유저들이 상대편 길드의 유저나 자신의 길드에서 죄를 지은 유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사사로이 감옥을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페가나 버려진 우물을 파서 만들거나 부활 포인트를 철창으로 둘러 버리는 정도였다. 영주관 밑에 이런 거창한 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개미지옥. 부활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탈출할 수도 없는 감옥.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다 하여 개미지옥이라 불린다. 그곳에 갇힌 유저는 캐릭터를 포기하거나 싹싹 빌고 구조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던데." 김필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안 것은 성을 점령하고 거처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을 때였다. 성 아래 보물 창고를 뒤지다 우연히 석상을 건드려 숨겨진 함정을 가동시키자. '거점 부활이 안 되는 함정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뜬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성능 시험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을 가둬 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임사에서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뭐 그런가?" "그보다 길드원들은 내일 확실히 모이는 거야?" "그래, 내일 정오까지 영주관 앞에서 모이기로 했어. 근데 이제 와서 그건 소용없지 않아?" 놈들을 완전히 가둬 버렸는데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그건 케이지도 알고 있었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걸 대비해야 했다. "이놈의 게임이 워낙 유저들 뒤통수를 잘 후려쳐서 말이야." "하긴, 그런 경우가 많지." 그래서 케이지는 자신을 따르는 길드원들이 모이면 유한의 대장간을 박살 내러 가기로 했다. 지금 전력으로 달려가도 박살 내 놓을 수 있지만, 지하 감옥을 완전히 신뢰 할 수 없었따. 만에 하나 저 녀석들이 탈출에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오늘 낮처럼 또 당할 수 있었다. "하루 정도 지켜보자. 함정의 성능이 정말 설명대로인지 말이야." 그래서 그는 내일 정오까지 탈출의 유무를 확인해 보고 그 다음에 지그의 대장간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급할 것은 없으니까. 6.고대 드워프의 유적 칙, 화아악! 옌스가 갖고 있던 랜턴에 불을 붙이자 주위가 환해졌다. 유한들은 이곳이 어디인가 살폈다. 함정이라더니 정말 가로세로 정방형의 밀폐된 공간이었다. 천장을 제외하고 어디에도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없었다. "나한테 맡겨." 유한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과거 리저드맨에게 잡혔을 때도 와이어를 이용해 가볍게 탈출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한은 어두운 천정을 향해 건틀렛의 와이어를 발사했다. 그러나 와이어는 잘 날아가다가 무언가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한번 올라가 볼게." "시아야, 잡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가려고?" 벽에 박힌 돌들은 틈새 하나 없을 정도로 촘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린은 몸을 날려 벽을 박차고, 그반동으로 반대편 벽을 박차고, 또다시 벽을 박차는 식으로 올라갔다. "우와!" 유한은 물론이고 옌스의 눈도 휘둥그래졌다. 궁수로서 착실히 쌓아 놓은 민첩성 덕분이겠지만, 웬만한 감각과 집중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재주였다. 그렇게 채린은 한 마리 가벼운 새처럼 어두운 천자응로 날아올라 갔다. '이대로 나갈 수 있지 안을까?' 유한이 희망을 품었을 때였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채린이 아래로 추락했다. "아야야, 위에 무거운 덮개가 있어서 나갈 수 없어." 따로 붙잡을 만한 것도 없어서 덮개를 여는 건 불가능 하다고 했다. 보물 창고에 들어온 도둑을 가두는 곳이라더니 정말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곳인 모양이다. "그런 그놈 말대로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야?" "큭, 괜한 협박일걸. 내가 부활을 시도해 보지." 자살을 하면 가까운 마을이나 부활을 지정한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있다. 마침 옌스는 유한의 대장간을 부활점으로 지정해 놓았기에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헤비 소드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HP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옌스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독한 놈. 주저 없이 제 목을 찌르다니." "난 아무리 그래도 저런 짓은 못할 거야." 그러나 유한과 채린은 옌스가 무사히 대장간에서 부활했기를 빌었다. 하지만 얼마 뒤 옌스는 그들의 눈앞에 다시 나타 났다. 거점 부활이 안 된다는 케이지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크악! 이런 제기랄! 경험치만 날렸잖아!" 열 받은 옌스는 검을 들고 벽면을 마구 찍었다. 그러나 돌부스러기가 좀 떨어졌을 뿐 벽면은 멀쩡햇따. 고대인들이 만들었다더니 정말 단단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흥분하지 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런 것도 없이 이런 걸 만들어 둘 드림맥스가 아니니까." 바츠 때 숱한 퀘스트를 하면서 그런 일을 경험했다. 막힌 길이라고 하더니 실은 비밀 통로가 있다거나, 바닥에 쌓인 먼지를 털어 냈더니 순간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거나 등등. 얼음 궁전의 보상방에서도 그랬지 않았나. 잘 뒤져 보니 공중 요새로 가는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 틀림없다. 유한들은 희망을 가지고 주변의 벽과 바닥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자 벽과 바닥에서 예전에 이 함정에 빠졌던 이들이 남긴 듯한 글을 발견할 수있었다. <나의 분신 쾌도 크로우를 이곳에 봉하노라 ㅠ.ㅜ> <영자야, 이건 너무 했다.> <크크크, 멍청한 소울리버 놈들. 가둬 놓기만 하면 단가? 난 이카루스 윙(Icarus wing) 있지롱.> 이카루스 윙. 그것은 단거리 순간 이동 아이템이다. 소울리버 길드가 남바린 영지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여기 빠진 도적 유저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당 1만 골드나 하는 굉장히 비싼 아이템이지만 이 상황에선 전혀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아놔, 이것도 안 돼…… OTL.> 하지만 이카루스 윙이 실패했는지, 바로 아래에 좌절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제기랄!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물리적인 방법도 안 되고, 부활도 할 수 없고, 거기다 마법도 안 통한다니! 유한이 절망할 때 채린이 옆에서 이야기했다. "괜찮아. 마지막 카드가 있잖아. 아빠에게 부탁해서 구해 달라고 하면 돼." '안 돼! 그렇게 하면 난 사망이야.' 딸 사랑이 남다른 송태수 성격이라면 유한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샌드백으로 삼을 것이다. 절대 그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자력으로 탈출해야 한다. 분명 무엇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없다면 운영자 멱살을 잡고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응? 이건 뭐지?' 망치로 벽과 바닥을 대려 보던 유한은 바닥에 붙어 있는 큰 돌을 보았다. 그 돌은 주변의 돌들과 크기와 색깔이 틀렸고, 돌을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도 주변의 다른 돌들과 사뭇 달랐다. '오오! 이게 설마 탈출의 실마리?' 돌에는 단검이나 검, 둔기 등으로 긁어내고 내리친 흔적이 남아 있었따. 예전에 여기 갇혔던 유저들도 이 돌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도구와 스킬이 없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한 듯 했다. 노력은 했지만, 그들의 능력으론 이 큰돌을 빼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하핫! 하지만 난 다르다 이거지!" 지그가 어떤 캐릭터인가. 대장장이에다가 채굴과 채석스킬을 익혔고, 관련 도구들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지그야, 뭔가 발견했어?" "후후, 마지막 카드는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유한은 정과 망치를 꺼내서 바닥의 돌을 내리쳤다, 그레인 스킬을 발동해서 암석의 경계와 균열이 있나 곳을 집중적으로 노려 채석 스킬을 연달아 퍼부었다. 그렇게 몇 차례 돌에 충격을 가했을까. 돌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지더니 아래에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누군가 사용한 듯한 비밀 탈출구였다. "옌스, 그 랜턴 좀 줘 봐." 유한은 랜턴을 들고 앞장섰고, 채린과 옌스가 그 뒤를 바랐다. 통로는 비좁았지만, 못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유한과 나란히 가던 채린은 앞에 비치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꺄아악!" 정면에 있는 것은 뼈 무더기였다. 사람의 인골로 추정되는 두개골과 복사뼈 등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나참, 뭐 저런 걸 보고 놀라? 가상현실에 만들어 놓은 설정일 뿐인데. 바츠의 동료라면 대범함을 갖춰야지." "그래도 소름이 끼치잖아." 옌스와 채린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 유한은 뼈 무더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뼈 무더기 사이에서 녹슨 공괭이와 망치, 정이 발견되었다. '이들이 비밀 탈출구를 만든 자들인가?' 왜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것일까. 유한은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뼈 무더기 옆의 벽면에 뭔가 긁어 놓은 흔적 같은게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 내자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지하의 기록을 발견하셨습니다. 읽어 보시겠습니까? 아마 비밀 통로를 판 뼈의 주인들이 남긴 기록인 모양이다. 유한이 승낙하자 벽에 새겨진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따. '나는 검은 수염 드워프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 리카로스라고 한다.' 아마 저 기록을 남긴 자는 드워프인 듯했다. 유한은 벽면의 기록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말다툼을 하던 옌스와 채린도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록을 읽어 나갔다. '우리 검은 수염 일족은 이곳 아바란 평원과 케이트 산맥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우리는 풍요롭지는 않아도 케이트 산맥에서 출토되는 광물들을 이용해 이곳의 인간들과 교류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십 년 전 탐욕스런 마도사들이 이곳에 쳐들어 왔따. 키메라를 부리는 무시무시한 마도사들은 학살을 일삼으며 마을들을 파괴했다. 우리들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마도사들에 대항했지만…….' "결국 패배해서 아바란 평원의 드워프들과 인간들은 마도사들의 노예가 되어 버렸군." 드워프들의 마을을 파괴한 마도사들은 폐허가 된 땅 위에 새로운 성과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완성된 성과 도시는 이곳을 점령한 우두머리 마도사의 이름을 따 남바린이라고 불렀단다. "그럼 이 함증을 만든 고대인이란 게 바로 그 마도사들?" "던전에 드워프들의 흔적이 많은 이유가 있었구먼." 옌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봉인의 갑옷을 매만졌다. 갑옷에 대한 설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다 뒷사정이 있었다. 기록은 계속 아래로 이어졌다. '우리들은 마도사들의 노예가 되어 폐허 위에 그들의 도시를 건설했지만,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두운 지하에서 그들을 향한 복수의 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의 계획을 마도사들이 눈치 채고 말았다.' '도대체 드워프들이 뭘 준비했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마도사들은 지하에 내려와 드워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간신히 도망친 몇몇 드워프들은 힘을 모아 땅굴을 팠으나, 실수로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애써 판 땅굴이 엉뚤한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고. "바깥으로 통해야 할 땅굴이 남바린 성의 보물 창고 함정과 연결되어 버린 거로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땅굴을 파느라 남은 힘을 다 쓴 그들에게 더이상의 희망은 없었떤 모양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리카로스는 땅굴의 입구를 막은 뒤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허허……." 드워프들의 사연을 읽은 유한과 동료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따. 남바린 영지에 이런 비사(秘史)가 있었을 줄이야. '그런데, 고대의 키메라를 부리는 마도사들이라?' 딱 생각나는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공중 요새를 띄운 미케니아인들. 그리고 미케니아를 다스리는 이바니우스 3세. '역시 나쁜 놈들이었어.'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 고대의 마도사들이 저지른 것도, 그리고 드워프들이 희생당한 것도 게임사에서 세워 놓은 설정일 뿐이다. 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였고, 드워프들이 비참한 최후에 채린은 눈물을 왈칼 쏟았다. "흐윽! 드워프들이 불쌍해." "그냥 게임 안의 스토리일 뿐이야. 울지 마, 시아야." 유한이 토닥였지만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어엿한 소녀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마음도 여는 여자애들만큼이나 여려진 모양이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이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도 출구가 없을지 모른다는 거야." "훗, 거점 부활을 못하는 곳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다행이잖나. 다시 자살 신공을 발휘하면……." "하지 마! 아직 밖을 뒤져 보지도 않았는데 출구가 있을지 없을지 누가 알아?" 옌스가 또다시 자살 포즈를 잡자 채린이 반대하고 나섯따. 자살할 생각도 없고, 또 남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게임이지만 자살이란 단어는 듣기조차 꺼림칙했다. "시아 말대로야. 기왕에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둘러보자." 드워프들이 자하에 생매장된 것은 아주 옛날의 일이다. 그사이에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흙이 무너져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생겼다는 식의 설정을 드림맥스가 만들어 두었을지 모르고. 냉정을 되찾은 일행은 드워프들이 판 땅굴을 따라 계속 나갔다. 얼마쯤 내려가자 땅굴이 끝나는 곳을 바위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 바위를 밀고 나가자 커다란 동공이 나왔다. "우와! 엄청 크잖아?" "자연적인 동공은 아닌 것 같은데?" 사방에서 뻗어 오른 굵은 돌기둥들이 천장의 석재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런 돌기둥들이 족히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아마 이 위에 남바린 성이 있을 거야. 폐허 위에 도시를 세웠따니까." 이곳은 드워프들의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 형성된 지하 공간이었다. 동공에는 과거 드워프들이 지었던 건물들의 잔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무너진 드워프 신전과 밑동만 남은 첨탑, 그리고 철저히 부서진 집들. 검은 수염 일족의 도시로 보이는 이곳은 마도사들과 그들이 부리던 키메라들에게 철저히 파괴되었던 모양이다. 일행은 폐허를 둘러보며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때 효과음이 울리며 안내창들이 떠올랐다. [지그의 파티]가 고대 드워프의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지그의 파티]전원에게 명성치 2,500과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란 칭호가 주어집니다. "에에?" 기쁨과 동시에 암울한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고대 유적의 최초 발견자라는 사실은 기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전에 이곳을 찾은 유저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 말은 유한 일행이 들어온 통로 외엔 외부에서 이 유적으로 들어오는 길이 없음을 뜻햇다. 다시 말해 밖으로 나갈 통로가 없는 것이다. "참나, 여기 유저들은 그 동안 뭐 한거야? 이런 유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 유일한 통로가 거점 부활이 안 되는 함정과 연결되어 있으니 더더욱 찾기 어려웠던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적 발견은 유저의 공로. 일행의 앞에 있는 바위에 금박으로 멋들어진 글자가 새겨졌다. [남바린 영지 지하에 있는 고대의 드워프 유적은 지그의 파티가 최초로 발견하였습니다. -아바란 왕립 학술원- *지그의 파티 : 대장장이 지그,궁수 시아, 전사 옌스] 그들은 바위에 황금빛 글씨로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지는 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자살할 방법 외에 나가는 방법은 없을까?"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공중 요새에서도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었잖아." 마지막이 바위로 막혀 있긴 했어도 말이다. 이곳에도 비슷한 길이 있을지 모른다. 마도사들이 드워프들을 지하에 몰아넣고 생매장했다고 하지 않는가. 몰아 넣은 입구가 있었다면 그곳이 출구가 될 것이다. "막혀 있으면 이 대장장이께서 뚫어 버리면 그만이지." "후후, 과연 바츠로군. 여느 대장장이랑 확실히 달라." 일단 일행은 탈출로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이 유적에 있을지 모를 던전이나 보물의 수색은 살길을 발견한 다음이었다. 유한 일행은 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엄청난 것을 발견햇다. 오래 전에 죽었을 고대 드워프들, 그들의 유골이 지하 광장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학살의 현장이군." 분명 꾸며진 이야기에 가상현실 게임 속의 그래픽일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고대 마도사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전 '게임일 뿐'이라고 말하던 옌스조차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앞에 뭔가 있어!" 채린의 외침에 일행은 무기를 뽑아 들고 전투자세를 취했다. 앞쪽에 희뿌연 뭔가가 있었따.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드워프의 영체였다. 여기서 죽은 드워프의 원령으로 보였다. 그는 일행이 다가오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뻥 뚫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산 사람인가? 너희들은 누구지?" "우리는 이 유적의 발견자들입니다." "유적의 발견자? 여기가 유적이라 불릴 만큼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크흐흐……."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신음을 흘리던 드워프는 혼잣말을 하듯이 고대에 있었던 일을 일행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크크크, 마도사 놈들은 우리의 뛰어난 기술을 노리고 있었따. 그래서 우리를 정복하고 노예로 삼아 도시를 만들게 했지." 그것은 땅굴을 팠던 리카로스가 남긴 기록에서도 보았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드워프는 리카로스가 말했던 '복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 검은 수염 일족은 절대 자긍심을 버리지 않았어. 우리는 겉으로 놈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 도시의 기단에 몰래 기관 장치를 설치했다." "기관 장치?" "크크크, 살짝만 건드려도 한 번에 도시를 폭삭 내려앉게 만들 수 있는 장치지. 그 잔인한 악마놈들을 한 번에 폭삭 내려 앉히기 위해서 말이야." 그게 바로 리카로스의 기록에 있던 '복수의 칼'이었던 모양이다. 드워프답고, 드워프기에 가능했을일. 그 일이 통쾌했던지 드워프는 연방 웃었지마, 이내 표정이 침울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마도사 놈들이 눈치를 채고 말았어. 우리가 도시 기단에 손을 써 두고 있었다는 것을……." 리카로스의 기록에서 보았던 내용이 다시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따. "놈들은 지하로 키메라를 몰고 와서 우리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지라 우리는 기관장치를 가동시키려 햇지만, 이미 작동 부위가 놈들에게 점거되어 있었지." 그는 몇몇 드워프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마도사들이 그들을 살려 둔 것은 도시 기단부에 설치된 기관 장치를 해체하기 위함이었다. "놈들은 그것을 해체할 기술이 없었어.그래서 포로로 잡은 우리를 고문하고 협박했지만, 우리는 단 한 명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단 한 명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차례차례 죽음을 맞았지." "정말 악독한 자들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놈들에 대한 원한 때문에 말이지." 채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드워프는 일행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 우리의 한을 풀어 줄 자들을 말이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한들의 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망자의 부탁] -마도사들에게 박해받은 드워프들이 복수를 위해 힘을 모았따. 하지만, 그들이 막 복수의 칼날을 뽑아 들기도 전에 마도사들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정의에 불타는 자여, 남바린 성을 무너뜨려 드워프의 원혼들이 달래 주지 않겠는가? '남바린 성을 무너뜨려 달라고?' 지금은 남바린 성에는 드워프들은 박해했던 마도사들이 없다. 그것은 게임 설정 상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유한이나 채린만 해도 이미 몰락한 미케니아의 유적을 보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한을 풀어 드리죠." 유한은 물론이고, 채린과 옌스도 승낙을 했다. 과거와 상관없이 그들은 남바린의 푸른새벽 길드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성을 무너트리면 드워프들의 한도 풀고, 자신들의 복수도 하고 일석이조가 아닌가. "크크크,잘못하면 너희들이 죽을 수도 있다." "흥, 죽음 따위 겁나지 않아!" 옌스가 외치자 드워프는 대견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편에 있는 반쯤 무너진 신전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로 가라. 저 안에 기관의 작동 부위가 있다. 작동시키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 제단 위에 있는 둥근 돌을 밀어서 떨어트리면 된다." "알겠어요. 염려 말고 승천할 준비나 하세요." "크크크, 그럼 부탁하겠다." 드워프의 영체는 투명하게 변하더니 이내 일행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유한들은 드워츠가 일러 준 신전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전에 가까이 다가가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물러가라.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어눌하게 말하며 등장하는 놈들이 있었다. 미노타우르스와 켄타우로스를 섞어 놓은 듯한 거대한 괴물과 반인반조의 괴수, 그리고 몸에 철판으로 뒤덮고 기계 팔을 달고 있는 거인 전사. 키메라였다. 마도사들은 드워프들을 학살하고도 안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딘가 생존한 드워프들이 기관을 작동시킬까봐 이곳에 키메라를 남겨 둔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기관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도시는 무너지지 않으니까. "이것들이 퀘스트의 보스다 이거군." "다들 하나씩 맡아서 해치우자." "그럼 저 소 대가리는 내몫이다, 바츠." 커다란 창을 든 소 괴물은 옌스가 말았고, 하늘을 날며 활을 쏘는 반인반조의 괴수는 채린이 말았다. 유한의 몫은 쿵쿵 발소리를 올리며 다가오는 기계 거인이었따. 크기나 덩치의 위압감은 대단했고, 얼굴도 무섭게 생겼다. 물론 레벨도 꽤 높아 보였따. 평소라면 주춤하고 물러섰을 텐데, 유한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따. 두려움은 한 오라기도 없었다. 박해받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드워프들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분노와 투지가 솟구쳐 올랐다. '참 대단한 게임이란 말씀이야.' 단지 게임일 뿐인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다니. "침입자, 물러가라. 아니면 죽는다." "너나 비켜라, 이 잡탕아!" 키메라의 기계 주먹이 날아오자, 유한은 곧장 암 브레이크로 대응했다. 불꽃이 튀며 고요했던 지하가 함성과 굉음으로 들썩였다. 고대 드워프들의 오랜 한이 지금 막 풀리려 하고 있었다.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1,000골드를 얻었습니다. 키메라의 생체 합금을 얻었습니다. -암 브레이크 스킬이 5랭크로 올랐습니다. 힘이 2 올랐습니다. 민첩성이 1 올랐습니다. "휴우!" 격전 끝에 거인 키메라를 쓰러트린 유한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분기탱천하여 달려들긴 했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나마 대장장이와 상성이 잘 맞는 상대였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아직도 고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케엑!" 마침 반인반조 괴수도 비명과 함께 바닥에 툭 떨어졌다. 채린이 확인 사살을 끝내자 경험치 창이 떠올랐다. "여, 이제들 해치웟나? 기다리느라 지루했다고." 이미 소 괴물을 해치운 옌스는 느긋하게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 괴물을 쓰러트리고 획득한 키메라의 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아무래도 바츠 너, 레벨 좀 올려야겠다. 그래서 어느 세월에 나와 싸우겠냐?" "안 그래도 광렙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적당히 대꾸해 준 유한은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전 안에는 유령 드워프가 말한 대로 제단이 있었고, 그위에 축구공만 한 둥근 돌이 올려져 있었다. "이것만 떨어트리면 퀘스트는 끝나는 거야." 그리고 남바린 성은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 유한이 돌을 떨어트리려고 손을 내밀자 경고음과 함께 안내문이 불쑥 떠올랐다. -도시의 기탄을 무너트리면 매몰돼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돌을 밀어 떨어트리겠습니까? 안내창은 채린과 옌스도 볼 수 있었다. "까짓것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닌데." "뭐해, 바츠! 얼른 퀘스트를 수행하고 그 엿 같은 푸른새벽 길드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자고!" 유한 곧장 제단에 있는 돌을 밀어 떨어트렸다. 그러자 돌 아래 깔려 있던 나무 조각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면 물줄기가 약해진다 싶은 순간. 쿵! 쿠쿵! 그그그극! 뭔가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이 들썩이고, 사방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죽음을 각오한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지그의 파티]전원에게 보너스로 명성 500씩 수여합니다. -얼른 탈출하십시오.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안내창들이 연달아 떠올랐지만, 유한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신전에서 뛰어 나갔다. 지하 동공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기둥들도 내려 앉아 무너지고, 바닥도 쩍쩍 갈라졌다. 사방에서 돌과 바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얼른 뛰어! 잘못하면 진짜 깔려 죽게 돼!" 죽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유한일행은 생존 본능에 충실했다. 떨어지는 바위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길을 찾았다. 혹시 붕괴와 함께 통로가 생기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꺄아악!" "시아야!" 갑자기 바닥이 갈라지면서 채린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유한이 몸을 날려 그녀를 낚아챈 뒤 곧장 와이어를 발사했다. 그 와이어를 위에 있던 옌스가 잡았다. '나이스!' 유한은 곧장 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미안, 바츠, 발밑이 무너졌다." "켁!"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무너진 돌기둥과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희망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게임 시간으로 정오가 되자 케이지는 길드원들을 점검 했다. 연락한 녀석들이 모두 다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90명 이상 모이자, 유한의 대장간을 접수하기 위해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성안에서 길드원 하나가 총알같이 달려 나왔따. 지하 보물 창고의 함정을 확인하러 갔던 녀석이었다. "영주, 큰일 났어! 함정에 구멍이!" "흥, 역시 탈출했구먼 하여간 이놈의 게임은……." 뭐 상관없었다. 90명의 전투 유저들이면 놈들을 납작하게 밟아 줄 수 있을 테니까. "자,그럼 모두 출……." 그가 출발이라는 말을 하려는 때였다. 갑자기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남바린 성 곳곳의 건물들에 금이 갔다. 그리고 마치 유리가 깨지듯이 땅거죽이 갈라졌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케이지가 영문을 몰라 소리를 지를 때, 남바린 영지에 있던 모든 유저들에게 전체 공지가 떴다. -쿠쿵! 남바린 성이 무너집니다. 성안의 주민과 유저들은 얼른 대피하십시오. "지,지진?" "뭐? 갑자기 왜? 어째서?" 지진이 일어난다는 정보는 없었다. 보통 게임 내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새나 쥐들이 도망가거나, 이유 없이 개들이 짓어 대거나 물고기들이 수면위로 튀어 오르는 징조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보고들이 전혀 없었다. "제길, 뭐 이따위가 다 있어!" 뜬금없긴 하지만 유저들에게 있어 지진은 재앙. 과거 어느 필드에서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을 여행하던 많은 유저들이 피해를 입었었다, 죽은 것은 물론이고, 돌에 깔려서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구조만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얼른 피해!" "아놔, 밀지 마! 로그아웃 좀 하자고!"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공지를 본 유저들은 서로 먼저 성를 빠져나가려고 난리를 쳤고, 로그아웃을 하려는 아우성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러나 건물과 땅바닥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고, 로그아웃을 하려고 해도 '모든 상황이 끝난 다음에 로그아웃이 가능합니다'라는 창만 떠올랐다. 결국 성안에 있는 NPC와 유저 다수가 무너지는 성벽과 건물 더미에 깔려 다치거나 죽었다. 거기다 지반이 무너져 영주성이 수십 미터 정도 가라 앉았기에 그 피해는 더더욱 컸다. "으악! 내 병력들이!" 희생자들에는 영주 케이지와 그가 부른 90명의 길드원들, 그리고 남바린 영지를 운영하기 위해 파견 나와 있던 푸른새벽 길드원들도 끼어 있었다. "어? 성이 왜저러지?" 남바린 영지에 있던 유저들은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성을 멍하게 바라다보았다. "지진이 난 건가?" "뭐? 아무런 징조나 공지가 없었잖아." "지금 그게 중요해? 여기도 언제 무너질지 몰라! 얼른 대피해야 한다고!" 웅성거리던 유저들은 성을 뒤로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성이 폭삭 내려앉는 광경에 놀랐는지, 놀라서 다리가 얼어붙어 버린 유저들이 많았다. "엄마야, 안 가길 잘 했네." "그렇지?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상행을 마치고 잠시 남바린 성을 둘러볼까 했던 리지스는 서늘해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갔다가 휘말렸으면 처참한 꼴을 당했음은 물론이요, 벌어 놓은 돈도 다 날렸을 것이다. 그걸 상상해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아, 어지러워. 송코 오빠, 나 물 좀 주세요." "응, 기다려 봐." 송코는 근처에 있는 우물로 물을 뜨러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푸합!" "으아악!" 우물에서 갑자기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도 세사람이나. 거기다 아는 얼굴이었다. "어머, 시아 네가 왜?" "얼레? 리지스?" 유한과 채린, 엔스였다. 왜 이 세 사람은 우물에서 튀어나온 걸까. 리지스와 송코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운이 아주 좋았어." "그러게, 지하 수맥에 휩쓸렸던 게 이런 재수가……." 바닥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세 사람은 모두 죽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빝바닥에는 지하 수맥이 있었다. 무작정 위로 올라가는 수맥을 따라 헤엄치다 보니, 이렇게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망자의 부탁]퀘스트를 완수하셨습니다. -경험치 3,000을 얻었습니다. -[주물 입문서]를 얻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퀘스트 완수를 알리는 창이 떴다. 그리고 우물 위로 한 권의 책과 경갑 한 벌, 투구 하나가 떠올랐다. 죽은 드워프들이 주는 보상인 듯했다. 주물 입문서라는 책은 유한의 것이었고, 경갑과 투구는 각각 채린과 옌스의 것이었다. '헤, 예상 밖의 소득이군.' 주몰 입문서는 주몰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중상급의 대장장이가 꽤 까다롭고 지루한 조건의 퀘스트를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성을 하나 무너트린 것으로 이렇게 덜렁 손에 들어오게 되다니. "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너희들 왜 우물에서 나온 거야?" 리지스의 물음에 세 사람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에 정신이 팔려 지상의 상황이 어찌 되었나 살펴보지 못했다. "남바린 성은?" "갑자기 지진이 나서 폭삭 무너졌어." 유한과 채린, 옌스는 남바린 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던 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남바린 성의 참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성은 지하 수십 미터 아래로 폭삭 주저 앉았고,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다. "으하하! 아주 개 박살이 났구먼! 속이 다 시원하네!" 옌스가 고소하다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자 유한이 얼른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퉤퉤! 뭐하는 거야, 바츠?" "입 다물어 자식아! 그리고 저길 좀 봐." 유한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수십 명의 유저와 NPC들이 구조 활동을 평치고 있었다. 그렇게 구조하는 이들은 푸른새벽 길드원뿐만이 아니었다. 일반 유저들도 많았다. 그들은 저마다 동료나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님들아, 저 좀 구해주셈. -흑흑, 바위에 깔려서 꼼짝달싹도 못하겠다능. -친구들 하고 사냥 준비 왔다가 모두 죽었3ㅠ.ㅠ -뭔 놈의 지진이 예고도 없이 터짐? 혹시 버그? -샹, 이거 사람이 한 짓이면 저지른놈 찾아서 현피 뜬다. 잠시 남바린 지역의 채팅창을 훑어보던 유한은 채린과 옌스를 향해 속삭였다. "이번 일,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이다." 채린은 물론이고, 막가는 성격의 옌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들이 붕괴를 일으켰다는 것을 유저들이 안다면, 그때는 푸른새벽 길드와의 분쟁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이번 일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유저들이 벌 떼 같이 일어나 유한과 동료들을 처단하려고 달려들 테니까.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리지스의 답답한 물음만이 우물가에 맴돌았다. 7.코스튬페스티벌 "유한아, 내일 오전에 시간 있어?" 남바린 성을 무너트린 다음 날, 채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야 있지만……." 오랜만의 공휴일. 유한은 사냥터에서 광렙이나 할까 싶었다. 요즘 이래저래 바빠 레벨을 올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만 하려니 지겹지 않아? 나랑 같이 바람도 쐴 겸 놀러 가지 않을래?" "어디 가는데?" "코엑스 앞 광장. 10시까지 나와." 채린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유한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둘만의 나들이는 이터널 월드에 간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마치 데이트 약속이라도 한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아니 들뜨는 느낌이었다. 예쁜 여자 친구와 데이트라니. 암울한 자신의 인생에 이런 일도 다 있다니. '흥, 그냥 심심해서 놀러 가자고 부른 걸 거야.' 유한의 마음 안에 있는 외로운 바츠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여자 친구라지만 채린과는 그냥 '친구'일 뿐 아니냐고. '시끄럿! 자주 만나다 보면 친구 이상도 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외치며 등장한 것은 대장장이 지그였다. '흥.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지금의 친구 관계가 깨질지 모르는데?' '시끄럿! 넌 좀 닥치고 꺼져!' 지그는 바츠를 유한의 마음속에서 쫓아 버렸다. 바츠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유한은 친구 이상도 될 수 있을 거라는 지그의 말에 더 귀가 솔깃했다. 덕분에 기대치가 쭉 상승한 유한은 게임도 하지 않고 일찍 잠들었다. 내일 약속 시간까지 나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잘 흘러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끝내 태양은 떠올랐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유한의 어머니는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는 아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나갔다 올게요." "그, 그러렴." 또 하루 종일 관짝에 들어가 있을 요량이면 끄집어내 집안일이라도 부려 먹으려 했는데. 유한이 저렇게 밝은 얼굴로 나가니 어머니 김 여사는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유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코엑스로 향하는 2호선이 오늘따라 사람이 붐볐다. '다들 놀러 가는 사람인가?' 휴일에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수가 같은 역에서 내렸다, 유한은 인파로 북적이는 코엑스 앞 광장에서 간신히 채린을 찾을 수 있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산뜻한 차림을 한 채린은 유한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유한아!" "안녕, 채린아. 그런데 도대체 이 많은 인파는 뭐야?" 평일에도 코엑스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너 몰랐어? 오늘 이곳에서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 열려. 저들 중 반 이상은 거기에 참가하려고 온 사람들일 거야." "그, 그렇구나." 혹시 데이트가 아닌가 해서 들떠 있었는데, 코스튬 관람이라니. 유한은 내심 김이 샜따. 마음속에 있는 바츠가 낄낄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가자, 유한아." 채린은 마치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듯, 유한의 손을 잡고 코엑스 안으로 들어갔다. 종합무역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현실에서 보기 힘들 뿐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가면 흔히 접할 수 있는 마법사와, 기사, 신관 등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건물 안을 누비고 다녔다. "시아야!" 3층의 대형 전시실에 들어가자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상인 복장을 하고 손수 만든 카트를 밀고 있는 미소녀. 순간, 유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게임 속에서의 모습과 똑같아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리지스 였던 것이다. "채린이, 너?" "오늘 지수가 코스튬 대회에 참가한다고 해서 말이야." "지수?" "이지수. 그게 리지스 본명이야." 채린과 리지스는 그동안 상당히 친해졌다. 그래서 서로 전화번호도 주고 받았고, 실제 전화도 몇번 했다. 그 와중에 리지스가 코스튬 페스티벌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응원 차 온 것이다. 하지만, 혼자 오기는 뭐해 집에서 놀고(?) 있을 유한을 함께 데려왔다. '쳇, 그럼 그렇지.' 유한이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리지스, 아니 이지수가 다가왔다. "채린아, 와 줘서 고마워." "늦지 않았지?" "그럼, 아직 시간 남았어. 그런데, 여기는?" 그제야 유한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런데, 유한은 게임에서의 모습이 아닌 때 빼고 광을 내놨는지라 선뜻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지그야, 지그. 본명은 강유한." "지그라고?" "그래, 내가 같이 오자고 했어." 유한과 지수의 눈썹이 동시에 일그러졌따. '제길, 이 망할 계집애 때문에!' '이 쓸데없는 부록은 뭐람?' 유한은 데이트에 대한 기대가 깨진 게 리지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면 채린이 다른 곳에 놀러 가자고 전화를 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지수는 유한이 반갑지 않았다. 게임에서나 돈줄이지 현실에선 그렇지 않으니까. '흠, 그래도 제법 괜찮은걸?' 그건 두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 점이었다. 유한이 보기에 리지스보다 현실의 '지수'쪽이 인상이 부드러워 더 예뻐 보였따. 그리고 리지스가 보기에 유한은 생각보다 몸이 다부졌따. 게임을 많이 해서 비리비리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팔과 가슴 근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두사람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사이, 채린은 지수의 코스튬 복장을 보며 연방 감탕했다. "그런데, 솜씨 좋다. 정말 게임에서 입던 옷 같아." 유한이 보기에도 이건 아마추어의 솜씨가 아니었다. 채린의 칭찬에 지수는 얼굴이 밝아졌다. "호호호! 채린이 네 거도 있어." "내 것도?"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어 봤어. 가자, 내가 입혀 줄 테니까." 지수는 채린을 전시회장 한편에 있는 간이 탈의실로 끌고 갔따. 채린은 좀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못이기는 척 따라갔다. "그럼, 유한아. 좀 있다가 봐." 졸지에 혼자가 되어 버린 유한은 멍한 얼굴로 로비에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굉장히 낯익은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이게 누군가, 바츠 아냐?"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덩치 우람한 녀석이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던 유한은 인상을 썼따. "누가 바츠냐? 지그라고 해. 그리고 난 너보다 한 살이 많아." "흥, 겨우 한 살 정도로 재지 말라고." 그는 바로 옌스였다. 리지스는 한눈에 못 알아보던데 이놈은 정말 눈썰미가 좋은 모양이다. "너도 코스튬에 참가하기 위해서 왔냐?" 그러고 보니 옌스는 게임에서처럼 전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봉인의 갑옷을 흉내 낸 통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스티로폼을 깎아 만든 헤비 소드를 맸다. "이 몸은 비경쟁 부분에 신천했다. 그러는 넌?" "난 그냥 구경삼아서." 유한은 몰랐지만 드림맥스에서 주최하는 이번 코스튬 페스티벌은 두 개 부분으로 나눠서 참가자를 받았다. 경쟁 부분에는 주로 외모에 자신 있거나 손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고, 비경쟁 부분은 개인보다는 단체로 참가를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너 사실은 여자 꼬시러 왔지?" 유한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이리저리 눈을 돌리기에 바밨던 옌스가 쿨럭 기침을 했다. "무, 무슨 소리냐? 바람 이 몸의 우람한 근육과 살인미소를 알리기 위해 참가했다." "그래, 여자 꼬시러 온 거 맞네." "컥! 이 자식이!" 키 190cm의 거구가 잡아먹을 듯이 인상을 썼지만 유한은 왠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화를 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빠, 빨리 그 말을 취소해라!" "싫다." "뭐야? 이 자식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어라, 저거 옌스 아니니?" "그러케, 이런 데서도 다 볼 줄이야." 옷을 갈아입은 채린과 리지스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용케 유한을 잘 찾아냈다. 덤으로 옌스까지. 리지스의 용모도 예쁘지만, 레인저 갑옷 세트를 착용하고 등에 활을 맨 채린의 모습은 마치 사냥의 여신을 보는 듯했다. "제길, 너 혼자 온 게 아니었군." "훗, 내가 넌 줄 아냐?" '부러운 자식!' 미소녀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끼고 놀다니! 옌스는 부럽다 못해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등에 매고 있는 헤비 소드가 진짜(?)라면 내리쳐 버렸을 텐데. "유한아, 나 어때?" 채린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유한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에 한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다. "너,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 입에서 저절로 아부성 멘트가 흘러나왔다. "어휴,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 "컥!" 채린이 주먹으로 유한의 등을 후려쳤다. 부끄러운지, 아니면 유한의 말에 가슴이 두근 거렸는지,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옌스 너도 여기 참가하러 왔어?" "훗, 이 몸은 비경쟁 부분에 참가햇는데, 누님들은?" "호호, 우린 경쟁 부분이야." "엉? 채린이 너도 참가하는 거야?" 유한이 놀라 물었다. 그냥 한번 옷을 입어 보는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 참가 신청서까지 냈는지. "지수가 미리 내 것도 신청했더라구." 그들이 그렇게 웃고 즐길 때 갑자기 로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의 물결이 좌악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웬 아저씨 부대가 등장했다. 모두 용병 옷차림이었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하고 거칠어 보였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다!" "맞아, 길포드와 레드 타이거들이야!" 그들을 알아본 몇이 소리를 질렀다. 짧은 감탄사를 뒤이어 구시렁거림이 뒤따랐다. "나잇갓ㅂ 못하는 아저씨들이구나." "조용해, 인마. 실제로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어." "엥? 나는 군바리라고 들었는데?" "이거 페스티벌의 분위기만 험악해지는 거 아냐?" 게임에서야 그저 한 사람의 유저들일 뿐이지만, 현실에서 보는 그들의 위암감은 직접 마주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송태수, 곽대박, 표재훈 삼총사가 뿜어 내는 살기는 그저 사람을 눈빛만으로도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훗, 애들이 우릴 보고 감탄하는 것 같지 않냐?" "흐흐흐, 우리의 듬직한 모습을 보고 반한 애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옆에서 송태수와 곽대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표재훈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이럴 시간이 있으면 2달 후에 있을 L.O.K 대회의 연습이나 더 하고 싶었다. "헉!" "악!"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나타나자 유한과 채린은 얼른 옌스의 뒤에 숨었다. 유한은 자신이 채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면 송태수한테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고, 채린은 아빠한테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숨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을 향해 유한과 채린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자, 그럼 제2회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사회자의 선언에 전시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워낙 전시회장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차서 한순간 떠나가는 줄 알았다. 페스티벌은 먼저 비경쟁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비경쟁 부분은 주로 팀 단위로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마다 올라와 개성을 뽑내고 내려갔다. 그중 몇 팀은 즉석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은 아르페이다 온라인을 즐기는 유저들이 참가하는 대회로 게임 속의 캐릭터로 히어로를 흉내 내는 걸 모토로 삼았다. 그렇게 비경쟁 부분이 모두 끝나고 경쟁 부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의 백미로, 이를 촬영하기 위해 잡지사에서 기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망의 경쟁 부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관객석에서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유한은 한순간 귀가 마비되는 줄 알았다. "메이린! 메이린!" "우리의 호프 강인!" "벚꽃선녀 화이팅!" 관객들은 저마다 친구의 이름과 닉네임을 부르며 선전을 부탁했다. "그럼 일 번 참가자……." 잠시 후, 분위기가 가라 낮자 사회자는 1번 참가자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번호가 호명될 때마다 한 명씩 무대에 올라갔는데 하나같이 멋지거나 당당했고, 아름답거나 귀여웠다. 리지스는 8번, 채린은 32번이었는데, 두 사람이 무대에 올라왔을 때, 많은 남성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러 유한의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특히 채린이 등장했을 때는 함성이 더더욱 컸다. '채린이 저 녀석 왜 저렇게 예뻐진 거야?'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놀랐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심장이 더 두근거리고 있었다. 무대에 있는 채린이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을 때는 정말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채린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친구 정도일 뿐이지만……. "이어서 삼십삼 번 참가자 바츠!" "하하핫! 내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무대로 달려 나온 참가자는 바츠와 똑같은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플레임 소드를 들고 있었다. 정말 공을 들여 만든 듯한 코스튬.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유한은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깡통을 집어던졌다. "사기 치지 마, 인마!" "새꺄, 니가 왜 바츠냐?" "너, 검은 초승달 길드의 두목 키라인 거 다 알아!" 유한뿐만 아니라 '가짜 바츠'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 저마다 야유를 퍼부으며 물통이라든지, 과자 같은 것을 집어던졌다. 어쎄신 키라. 실명은 박건우인 그의 평은 유저들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어쎄신이다 보니 암살 퀘스트를 도맡아 했고, 그 덕분에 그에게 죽은 유저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들킬 줄이야." 자신의 캐릭터 코스튬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만, 유명인 바츠를 빙자한 죄는 컸다. 물론 그렇게 흥분하는 군중들은 자신들 속에 진짜 바츠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일행은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채린과 지수는 선전을 했다. 비록 영광의 1등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입선을 해서 1년치 아르페디아 온라인 무료이용권과 노트북을 상품으로 받은 것이다. 1등은 벚꽃선녀, 2등은 지수, 그리고 채린은 5등을 했다. "제길! 내가 그 꼬마 계집애한테 지다니!" 지수는 분통을 터트렸다. 벚꽃선녀는 이제 겨우 12살의 소녀였는데, 유한이 보기에도 상당히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애였다. 캐릭터는 마법사. 그러나 요술공주 같은 차림에 즉석에서 타로 카드를 뿌리며 보인 귀여운 춤과 퍼포먼스는 남자 관객들은 물론 여자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버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어떻게 그런 발육 부진 꼬맹이가 일 등을 하냐고!" 리지스는 몰랐지만, 이번 심사위원들은 로리교(敎)로 대동단결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보기에는 채린이가 가장 예뻣던 것 같은데." "뭐야? 그럼 내가 채린이보다 못하다는 거야?" 지수가 펄쩍 뛰며 따졌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성난 별통을 건드려 버린 유한은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런 유한을 구해 준 것은 채린이었다. "그런데 지수 넌 왜 그리 일 등에 집착하는 거야? 이 등도 좋은 결과잖아." 2등만 해도 잘한 거였따. 오늘 경쟁 부문에 출전한 사람이 모두 100명도 넘었으니까. 게다가 모두 한 외모를 자랑했고, 정교한 코스튬,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채린의 경우는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던 탓에 퍼포먼스에서 많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5등이면 선전한 것이지만. "일 등 상품이 가장 비싸단 말이야." 1등 상품은 시가 3백만원 상당의 신형 캡슐이었다. "내다 팔기만 해도 이백오심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데……." 역시 돈에 환장한 그녀다웠다. '대체 가정환경이 어떻기에?' 유한이 내심 지수에 대해 혀를 찰 때였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있었따. 그들도 오늘 코스튬을 구경하러 왔는지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야! 팔 번 봤어? 엄청 섹시하게 생겼지 않냐?" "걔는 좀 말라서 별로였어. 난 그보다 삼십이번이 더 예뻤던 것 같았어, 닉네임이 시아라고 하던가? 몸매 착한 글래머에 얼굴도 짱이더라." "아! 나도 그런 여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게임은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갑자기 채린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놈들이 채린에 대해서 주절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뭐 귀찮게 굴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이후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크크 병신아. 아무나 그런 여친을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여기 블라덱 님 정도는 되야지. 레벨은 몰라도 남자는 쩐이야, 쩐!" "제길, 나도 해킹 좀 해서 돈을 벌든가 해야……." "닥쳐, 이것들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미, 미안."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것이다. 그러나 유한의 심장은 마치 폭발할 것처럼 쿵쾅쿵쾅 거렸다. 머릿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블라덱!'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알세인에게 바츠의 무기들을 판 녀석의 이름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바츠의 계정을 해킹한 범인으로 유한이 지목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사내놈들 틈에서 그 녀석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아니, 이야기까지 한 것을 보면 블라덱 본인도 거기 끼여 있는듯했다. 그렇다면, 이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가 아닌가. "유한아! 어딜 가는 거야?" 채린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유한이 갑자기 뒤돌아서 뛰어가는 것인지? "나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 유한은 좀 전의 그 녀석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거기다 누군가와 부딪치기까지 했다. "어이쿠!" "죄, 죄송합니다." 유한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뒤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자, 잠깐만요!" 유한이 소리를 질렀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거기에 놈들이 타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자 유한은 계단으로 향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뛰고 또 뛰었다. 전력을 다해서. 하지만, 결국 놈들을 놓치고 말았다. 코엑스 1층과 지하를 모두 뒤져 보았지만, 좀 전에 본 놈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유한은 괜히 멀쩡한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진 단서였다. 해커 본인이었으면 절대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봐, 석진이. 괜찮나?" 정경욱의 물음에 손석진은 문제없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쯧쯧, 뭐가 급하다고 저러는지." 정경욱은 저 멀리 사라지는 유한을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뭔까 사정이 있겠죠. 그보다 오늘 사람이 정말 많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만큼 자네가 만든 게임이 재미있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그러니 이번 패치도 자네가 잘 도와줘야 해. 그래야 유저들이 더욱 열광할 게 아닌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들었는데 게임에 해커가 돌아다닌다면서요?" "아, 그거?" 정경욱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바츠 해킹 사건을 설명해 주었다. 캐릭이 삭제되고 아이템이 모조리 털렸다는 걸. 그리고 그 범인으로 의심되는 녀석이 버젓이 아이템을 팔고 다닌다는 것을. "바로 조치를 하시지 그랬습니까?" "물론 조치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잠시 지켜보기로 했어.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재밌는 일이라고요?" "아, 지금은 비밀이야. 나중에 가르쳐 주지. 크크크!" 그러면서 정경욱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가 묵을 곳은 회사에서 마련했어, 그러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부사장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재미있게 축제도 구경한 손석진은 천천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페디아의 세계의 창조자가 지금 걸어가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8.광렙을 하다 남바린 영지의 지진 사태는 한동안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따. 예고도 없던 지진에 대해서 드림맥스는 '버그가 아닙니다', '벌어질 만한 일이었습니다'라는 간략한 언급만 할 뿐이었다. 유저들은 이번 일의 원인에 대해 여러 추정을 했다. 최후에 가서는, 버그였는데 드림맥스가 변명을 하고 있다는 음모론과 게임사의 말대로 벌어질 만한 일이라는 근거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승자는 근거론이었는데, 그것을 주장한 '최강현'이란 유저는 게임상에서 버추얼 에이지의 MC 미루와 만나 단독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최강현 님은 이번 일이 근거가 있다 하셨는데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그건 사고 현장을 보면 압니다. 여느 지진과 달리 남바린 성은 수십 미터 지하로 폭삭 주저앉았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바로 그겁니다. 남바린 성 밑은 텅빈 지하 동공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표에 무거운 성벽과 집들이 들어서자…….] [아! 하중을 못 견디고 무너졌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더구나 남바린 성은 소울리버 길드의 소유때부터 대규모 증축이 있었고, 푸른새벽 길드는 점령 후 성벽을 더 두껍게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최강현이란 유저는 자료를 모아서 꽤 근거 있게 주장했다. 더구나 그는 이번 사고의 피해 집계까지 해서 인터뷰 때 공개했다. [이번 사고로 무려 383명의 유저가 죽거나 다쳤고, 159명의 NPC들이 돌무더기에 깔려 희생당했습니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재산 피해도 막대합니다. 부서진 집과 상점, 성곽 등의 피해를 다 합치면 무려 700만 골드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꽤 자세히 조사를 하셨네요?] [훗, 저희 길드가 이번에 구조 봉사를 하는 김에 조사를 한 겁니다. 우리 '최가장' 길드는 최 씨 성의 유저는 모두 환영합니다. 특히 경주 최씨 종친회에 속하신 분들은 하루 바삐…….] [네네! 여기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버추얼 에이지의 미루가 남바린 성 앞에서 전해 드렸습니다!] 유저가 길드 선전을 하려 하자 미루는 세련되고 재빠르게 인터뷰를 종료시켰다. 인터넷으로 버추얼 에이지를 시청했던 유한은 그저 멍하니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허허허!' 푸른새벽 길드에 한 방 먹일 셈으로 수행한 퀘스트였다. 하지만, 참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굉장한 피해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수치화된 걸로 다시 보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뭐, 한편으로 오해받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할까. 유저 최강현의 인터뷰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는 영지 관리를 제대로 못한 푸른새벽 길드를 성토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따. 유저의 퀘스트로 인한 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쩝 게임이나 해야지." 혹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싶었던 유한은 찝찝함을 덮어 버리고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푸른새벽 길드의 동태가 어떤가 싶어 잠시 남바린로 찾아가 봤더니, 피해 복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번 사태로 푸른새벽 길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려 주던 영지 하나가 완전히 박살나 버린 탓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바린 영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영주성이 파괴되었지만, 사냥터와 던전은 무사했기 때문이다. 이에 푸른새벽 길드는 영주성을 새로 짓기로 결정하고, 무너진 자리 옆에 다시 성을 쌓아 올렸다. 그들은 유한의 대장간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실제 케이지를 비롯해 남바린 지부의 누구도 유한의 대장간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급박한 것은 영지를 복구하고 타 길드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내는 일일테니까. "훗, 한동안은 조용히 지낼 수 있겠군." 유한은 대장간으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검 하나를 고치고 잠시 손을 쉬는 사이 유저 하나가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수리되나요?" 그가 내민 것은 전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대검(大劍) 클레이모어였다. "네, 됩니다. 그런데 주문이 많이 밀려 있어서 시간이……." "언제 오면 됩니까?"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세요." 유한의 말에 유저는 클레이모어를 놓고 나갔따. 대검이 놓여 있던 자리 옆에는 어제와 오늘 유저들이 맡기고 간 장비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냥터와 던전을 향한 유저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관리하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영주성 재건에 매달리면서, 이를 노리고 수많은 유저들이 들어와 사냥터와 던전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따. 그런데, 유저들은 그대로거나 숫자가 더 늘어났는데 이들이 무구를 수리하고 새로 장만할 가게가 없었다. 예전에는 남바린 영지에서 좀 비싸긴 하지만 구할 수 있었는데, 영지가 박살나면서 그곳의 가게들이 모두 사라졌다. 덕분에 유저들의 발걸음은 유한의 대장간으로 몰려들었다. "지그야! 바스타드 소드하고 배틀 엑스, 그리고 브레스트 아머가 다 떨어졌는데 더 없어? 손님들이 달라고 줄을 섰단 말이야." 리지스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늘어난 것은 수리 주문만이 아니었다. 생산 주문도 덩달아 늘어났다. 리지스가 브로인에서 무기점을 따로 연데다, 다크나이트 길드에 무기 공급을 계약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윽! 아침에 만든 게 벌써 다 팔렸단 말이야?" "순식간에 팔리더라." 그렇다! 유한의 대장간은 좀 바쁜 정도가 아니었다. 그와 10명의 NPC 대장장이들이 물건을 만들어 내놓은 즉시 유저들이 다 사가 버리는 것이다. 거기다 유한의 무기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투기 심리까지 생겨 필요하지도 않음에도 유저들은 물건들을 미리 사재기했다. 나중에 따로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속셈들이었다. 그래서 유한은 생산 무구의 값을 기존보다 2배로 올렸지만, 그래도 주문은 줄지 않았다. "에휴, 일꾼들을 더 늘려야 하나?" 무구 주문이 폭주하니 정밀 조립 스킬의 개인 수련을 할 시간도 없었다. 망자의 부탁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스킬북은 아직 펼쳐 보지도 못했다. "할 수 없군! 대장간을 증축한다!" 유한은 지금의 대장간을 2배 아니 3배로 증축하기로 했다. 이왕 증축하는 김에 좀 좋게 짓자 싶어서 송코에게 부탁해서 목수 NPC들도 고용했고, 리지스를 파부치 영감에게 보내 일꾼을 좀 더 꾸어 오도록 했다. 고로도 1개에서 3개로 늘렸고, 각 고로마다 믿을 수 있는 NPC 대장장이들을 배치했다. 그렇게 증축을 하는 와중에서도 유한과 NPC대장장이들은 밀려드는 주문과 대혈투를 벌였다. 워낙 시간이 없어서 검정고시 학원을 빼먹고 근처의 캡슐방에 들어가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혈투는 리지스가 신입 대장장이 NPC들을 대거 끌고 오면서 막을 내렸다. 새로 온 대장장이 NPC들의 수는 무려 20명. 처음에 데리고 왔을 때보다 2배나 많았다. 한 5~7명 정도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야! 리지스! 너 진짜 최곤데?" "훗, 내가 한 로비 하는 사람이잖아." 유한의 칭찬에 리지스는 으쓱해 했다. 유한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대혈투 끝에 온 천군만마였기 때문이다. "뭐, 솔직히 말하면 이보다 더 많이 데리고 올 수도 있었어." "응? 어째서?" 유한이 궁금해 하자 리지스는 발덴에 가서 보았던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파부치라는 영감, 엄청나게 큰 대장간을 새로 지었더라. 아냐, 거긴 대장간이 아니라 철공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어. 파부치 철공소." "철공소?" 대장간의 상위 개념인 것이다. 확실히 느낌부터가 달라 보였다. 어딘가 대장간보다 더 크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래, 제련만 전문으로 하는 건물이 따로 있더라. 거기서 철이 엄청나게 많이 생산되는데, 철괴만 팔면서도 엄청난 이득을 취하고 있었어." 리지스의 말에 유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애초에 파부치에게 초열탄 기술을 알려 준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까? 하긴 선발 업체(?)에 기술을 건네줬으니 그 발전이야 따로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서, 설마 그렇게 만든 철 모두가 드워프의 철?" "아니, 일반 철이던데." 리지스도 유한이 드워프에게 배운 비기로 우수한 철을 생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밀을 알아내면 엄청난 액수에 기술을 팔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술이 유출되면 지그표 무구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 눈앞의 이득보다는 꾸준히 장기적인 이득을 이어 가는 게 중요하다. 거기다 동료로서 신의를 배반하고 싶지도 않았다. 예전 같으면 그런 신의를 지키지도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렇게 된 것은 유한이 자신의 돈줄1호인 이유도 있지만……. "드워프의 철도 파부치 영감이 만들고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건 바르카스 왕국에서 전량 매입하더라." "흠, 전략물자라서 그런가?" "우수하고 질이 좋으니까. 그만큼 다른 나라나 일반에는 공개하고 싶지 않겠지. 그 때문인지 몰라도 들리는 이야기론 바르카스 국왕이 파부치 영감에게 작위도 줄 거래." 참 출세했다. 제자 하나 잘 키우더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 대장장이가 작위까지 받는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그럼 나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파부치 영감이 작위를 받는다면 유한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기술은 다름 아닌 유한이 갖고 온 것이니까. 아무튼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들은 셈이다. "지그 님이신가? 파부치 사장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나이도 젊은 분이 큰일을 해내셨다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장장이 NPC들이 앞을 다투어 유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파부치가 유한에 대한 이야기를 부하 대장장이들에게 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공손한 모습에 유한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대장장이들뿐이지만, 분명히 자신의 명성이 퍼지고 있었다. 바츠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는 대륙 전체에 지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지 모른다. 아니, 분명 없어지게 될 것이다. "자! 빨리 일합시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새로 온 대장장이들과 상견례를 마친 유한은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따라 손에 쥔 망치가 더욱 가볍게 느껴졌다. 증설과 새로 온 대장장이 NPC들 덕분에 지그 대장간은 주문량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쉴 틈 없이 바빴던 유한도 다소 여유를 갖게 되었다. 넓은 개인 작업실도 갖게 되었는데 그 안에는 고로를 비롯해 모루와 망치 등 모든 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곳은 유한만의 공간으로, 스킬의 수련과 획득, 그리고 초열탄의 제조를 위해 지은 것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유한은 새로운 스킬을 익히려 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주물이라?" 우한은 지난번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스킬북의 페이지를 넘겼다. 책에는 주물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주물제품을 만들 수 있으며, 어떤 시설과 도구가 사용되는지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따. ……무엇보다 주물에서 중요한 것은 거푸집이다. 거푸집을 얼마 만큼 잘 만드냐에 따라 복잡한 주물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거기다 거푸집은 무엇을 만드냐에 따라 재료와 제작을 달리해야 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물은 실력 좋은 조각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면 여간 힘들 일이 아니다. 거푸집을 찍을 모형이 좋을수록 주물 제품도 그만큼 우수해지기에……. 유한이 책을 다 읽고 덮자, 곧바라 스킬 습득 퀘스트가 날아왔다. [주물 스킬 익히기] -아령 제작. 아령 제작에는 아령의 모형과 모형을 뜬 거푸집, 그리고 재료인 철괴 2개가 필요하다. 거푸집을 만들고 거기다 철괴를 녹여 부은 다음, 제품을 꺼내 마지막 손질을 거치면 완성시킬 수 있다. 유한은 우선 아령의 모형부터 만들었다. 보통 나무로 만든다고 하기에 벌목 스킬로 잘라 온 통 나무를 깎아서 아령처럼 모양을 다듬어 만들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무 모형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모양이 나오자 안내창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조작 스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조각가를 찾아가 배우면 조각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참 대장장이가 별걸 다 배워야 하네.' 그래서 조각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 모양이다. 유한도 대장간을 짓고 증설하면서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각은 나중에 한가하면 배워야지.' 유한은 제작한 아령 모형을 점토판들에 눌러 한 쌍의 거푸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푸집을 합쳐서 그 틈에 철괴를 녹인 쇳물을 부었다. 쇠가 어느 정도 식자 거푸집을 갈라서 완성된 주물을 꺼냈다. 그리고 원형의 모양에 가깝게 다듬자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창이 떠올랐다. [주물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랭크를 높이면 보다 다양한 주물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크크크! 이걸로 무구를 왕창 양산할 수 있겠군.' 지금까지는 철괴를 일일이 망치로 두들겨 제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참 많이 걸렸다. 그런데 이제 거푸집에서 찍어 낼 수 있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물론 강화 목적으로 단조나 열처리가 필요하겠지만, 모양을 만든다고 다듬고 자르는 시간은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유한에게는 드워프의 철이라는 보다 우수하고 단단한 철이 있었다. 물론 주물 생산에 필요한 재료나 도구가 필요하겠지만,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딜론이나 리지스에게 구해 달라 부탁하면 되니까. "이제 주문이 더 들어와도 문제 없겠군." 생산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높아지게 될 것은 뻔한 일. 큰 길드에서 운영하는 대장간이나 공방과도 겨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푸른새벽 길드처럼 시비를 걸어 오는 길드가 나올지 모른다. 이제는 그에 대비해서도 분명 준비를 해 놓아야 한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채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그야. 바쁘니?" "응? 아니, 다 했어." 유한은 문을 열고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채린이 새로 얻음 경갑을 입고 활을 들고 서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사냥하러 가지 않을래?" "사냥? 좋지." 그동안 대장간에 너무 매진했었고, 저번에 옌스가 말한대로 광렙할 필요성도 있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레벨을 올리고 전투 감각을 생생하게 닦아 놓아야 했다. "나도 안 그래도 레벨 좀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어." "설마 의리 없이 둘만 가려는 건 아니겠지?" 불쑥 끼어든 것은 리지스였다. "나도 같이 갈래, 요새 장사만 한다고 레벨을 못 올렸으니까." "그럼 가게는 누가 보고?" 새로 번듯하게 증축한 대장간 앞에는 이전의 가판대와 달리 정식으로 가게가 만들어졌다. 거기엔 무기뿐만 아니라 사냥에 필요한 여러 아이템들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새로 점원을 고용했으니 괜찮아." 리지스의 말대로 가게에는 남녀 NPC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따. 채린에게 가판대를 부탁할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동안 돈을 참 많이 벌어들인 모양이다. "만약에 몬스터가 공격해 오면?" "손님들이 알아서 잡아 주겠지." 정말 그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따. 손님들 대부분이 사냥 온 유저들 아니면 무기 사러 온 전사들이니까. "나도 같이 가 줄게. 성직자가 있어야 사냥이 수월하지." 이야기를 들은 송코가 가세했다. 뒤이어 옌스가 무섭게 달려와 말했다. "후후, 바츠. 날 떼놓으면 섭하지!" "넌 안 돼!" "네가 끼면 손해란 말이야!" 유한뿐만 아니라 리지스도 반대했다. 옌스 같은 강자가 파티에 끼면 경험치는 몰라도 골드나 아이템 드랍에 손해가 있었다. 몬스터보다 레벨이 월등히 높은 유저가 학살전을 벌여 골드나 아이템을 싹쓸이하면 레벨이 낮은 유저들이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이에 게임사는 고렙 유저가 저렙 몬스터를 잡았을 때는 레벨 차이만큼 아이템 드랍율이 감소하도록 조정해 놓았다. "아 광렙한다며? 득템은 신경 안 쓸 거 아니야? 그리고 난 이 근방에서 광렙할 장소를 잘 알고 있다고." 옌스는 바츠가 다시 강해지기를 기다리며 근방의 필드와 던전을 섭렵했다. 어디에 뭐가 나오고, 뭘 잡아야 경험치와 아이템을 알차게 주는지 줄줄 외울 정도로. 그 말을 듣고 다들 생각을 바꾸었다. "좋아, 정보를 제공하고 날뛰지 않기로 약속한 거다?" "이 몸만 믿으라니깐!" '못 믿겠다, 이놈아.' 정작 가서는 혼자 싹 쓸어버리는 건 아닌지. 아무튼 이렇게 동행이 늘자 이번에는 채린이 나서서 한마디 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로키 오빠나 오펜, 에이린도 데려가면 안 될까? 사람이 많으면 더 재밌을 거 같아." '윽, 그럼 아주 동네 야유회가 돼 버린다고!' 분위기뿐만 아니라 몬스터를 잡은 경험치도 그만큼 나눠 먹어야 한다. 5인 파티가 경험치 500짜리 몬스터를 받으면 실제로 받는 경험치는 100. 이렇게 파티원이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광렙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유한은 반대하고 싶었지만, 초롱초롱한 채린의 두 눈을 보자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내가 연락을 해 볼게." 유한은 세 사람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시간 있으면 같이 사냥이나 하자고. 다행히 세 사람은 모두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 중이었고, 곧바로 응답해 왔다. -예? 지금 시아 언니랑 같이 있어요? 난 지금 루벨에 있는데 금 방 갈 테니 기다려요. -지그 님? 안 그래도 노턴의 탑에서 마법을 배우느라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는데 잘되었군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난 힘들 것 같다. 지금 관장님과 길드전에 참가했거든. 나중에 보자. 얼마 후 에이린은 큰 머리 독수리를 타고 날아왔고, 오펜은 남바린까지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이동한 뒤 부유마법으로 날아왔다. "언니!" "오랜만이야, 에이린." 에이린은 반갑다며 채린에게 덥석 안겨 들었다. 채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물었다. "그런데 웬 독수리니?" "호호, 걷는 게 싫어서 한 마리 구했어요."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넓은 대륙이다. 그렇다 보니 여러가지 탈것들이 존재했다. 그중에 하늘을 나는 큰 머리 독수리도 있었다. "재주도 좋네, 큰 머리 독수리는 테이밍하기 어려운데." 리지스는 신기하다는 듯 큰 머리 독수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테이밍이 힘든 만큼 큰 머리 독수리의 가격은 굉장히 비쌌다. "그래서 질렀어요." "지르다니, 너 골드가 그렇게 많아?" "헤헤헷, 현질했지요~!" 에이린은 모두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V자를 만들어 보였다. "캭! 이 부르조아 같으니!" "네네~ 에이린은 부잣집 딸네미예요." 누구는 게임상에서 뼈 빠지게 골드를 벌고 있건만, 누구는 현금으로 간단히 골드를 사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 했다. "독돌아, 이리 와! 여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아 언니야. 인사하렴." 에이린의 손짓에 타조만 한 독수리는 뒤뚱거리며 다가와 고개를 꾸벅했다.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채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런데, 오펜. 너 마법 다 배운 거야?" 오펜이 이바니우스 3세에게서 받은 퀘스트는 공중 요새 바닥에 부유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노턴 마탑에 가서 부유 마법을 배웠다. 그런데, 이렇게 날아왔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아니, 커다란 요새를 띄우려면 좀 더 배워야 해." "그렇구나, 아참! 여기 사람들하고 인사해. 지그는 알지? 여기는 상인인 리지스와 성직자인 송코 오빠, 그리고 전사인 옌스야." 채린의 소개에 오펜과 에이린은 그들과 정식으로 통성명을 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공중 요새 발견했었지? TV에서 봤어." 사냥을 떠날 인원이 2명에서 7명으로 늘었다. 제법 수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으니 좋은 점도 있었다. 그 것은 바로 파티가 시끌벅적하다는 것. "아하하!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 그때는 정말 죽는구나 싶었어." 채린은 에이린과 오펜에게 푸른새벽 길드와의 분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폴크스 일당이 시비를 걸러 왔다 쫓겨났던 일, 그리고 남바린 영주란 자가 부하들을 끌고 왔다가 망신만 잔뜩 산 일 등등. "옌스 오빠, 짱 쎈가 봐요." 붙임성이 좋은 에이린은 벌써부터 옌스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후, 이 몸은 지금까지 맞짱을 떠서 져 본 역사가 없지." 옌스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롤 찢어졌다. 에이린은 채린이나 리지스보다 조금 못하지만 어딜 보나 꽤 명랑하고 귀여운 소녀였다. "바츠한텐 쳐 맞고 뻗었다면서?" "그, 그건 초보 시절의 일이잖아!" 유한의 비아냥에 옌스는 크게 당황했다. 다행히 그런 과거의 굴욕도 에이린에게는 대단한 것으로 비춰졌다. "우와!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랑 만난 적도 있어요?" "으응, 옛날에……, 뭐 이젠 누구를 상대해도 절대 안져. 저번에도 푸른새벽인지 붉은 새벽인지 하는 녀석들이 쳐들어온 거 죄다 쓸어버렸으니까." "와! 옌스 오빠 진짜 세구나!" 옌스의 자랑에 에이린은 감탄을 했다. 그러나 곧 푸른새벽 길드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정말 질이 안 좋은 길드라니까요. 지그 오빠, 만약 그런 일이 또 발생하면 연락하세요. 당장 날아와서 한 팔 거들 테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우리 반 애들 다 데려올게요." 두 사람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화를 내자 유한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일에 이렇게 열성적으로 나선 사람은 채린을 제외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들이 옛날에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학교를 그만두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나 지나간 일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동네 야유회 분위기도 꽤나 괜찮은걸?' 채린의 말대로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따. 레어템을 얻었을 때보다 더 좋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네, 렛츠 고!" 이번 사냥의 목적은 광렙.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괜찮을 것 같았따. 이렇게 떠들썩하게 모여서 노는 것도 즐거우니까. 남바린 영지에는 광렙을 할 수 있는 사냥터가 2군데 존재했다. 그중 하나는 여지 남쪽에 있는 어둠의 늪지였고 또 하나는 북쪽에 있는 아홉 여우 꼬리 계곡이었다. 어둠의 늪지는 사시사철 안개가 끼어 있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곳은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 계열의 다크메이지와 소서러(Sorcerer)들에겐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아이템과 재료들이 잔뜩 널려 있기 때문이다. 아홉 여우 꼬리 계곡은 호리병처럼 생긴 계곡이 아홉개나 이어져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서식하는데, 주로 중렙 이상의 유저들이 경험치를 많이 얻어 가곤 했다. 유한과 동료들이 가는 곳은 바로 아홉 여우 꼬리 계곡이었다. "어이, 바츠! 생각 안 나?" 최근에 좀 조용하다 싶더니 옌스가 또 병이 도진 모양이다. "뭐가?" "이곳에서 네가 광렙을 했었다고 들었는데, 기억 안 나냐고?" 기억이 안 나긴 왜 안 나겠는가? 유한은 이곳의 몬스터 하나하나까지 다 외울 정도로 죽치고 놀았었다. 하지만, 여기서 안다고 했다가는 상당히 귀찮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에이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기억나긴 뭐가 기억나! 난 바츠가 아니라니까!" "후후후, 언제까지 그렇게 시치미를 떼려는 건지. 좋아, 남의 이목 때문이라면 나도 네가 일단 바츠가 아니라고 해 두지." '그런 식으로 다 떠벌리고 나서 아니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야!' 유한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외면해 버렸다. "언니, 무슨 소리에요?" 아니나 다를까 에이린이 채린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답한 것은 리지스였다. "신경 꺼. 저 고릴라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요?" "그렇다니까." 에이린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유한을 바라봤지만, 채린마저 그렇다고 하자 곧 관심을 끊어 버렸다. 푸른새벽 길드가 영주성의 복구로 정신이 없는 사이 아홉 여우 꼬리 계곡은 유저들로 북적였다. 모두들 터줏대감이 없는 틈에 레벨을 올리고 레어템을 획득하기 위해 모여든 80에서 120 사이의 중렙들이었다. "제가 정찰을 하고 오죠." 오펜이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계곡을 알아 왓다. "일곱 번째 계곡이 비교적 한산합니다. 그곳으로 가죠." 유한은 오펜이 거기를 언급할 줄 알고 있었다. 일곱 번째 계곡에 있는 몬스터들이 가장 레벨이 높고 사나웠기 때문이다. "후후후, 일곱 번째 좋지. 아주 끝내준다고. 몹들 레벨이 전부 백 이상이고 선공에 인식 범위도 넓어 떼거지로 달려드니까." "우웅, 난 그런 곳 싫어요." 옌스의 설명에 다들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이 몸이 있는 한 죽을 염려는 없을 테니까." "내가 듣기로 거기는 전술만 잘 짜면 큰 피해 없이 사냥을 할 수 있다고 했어. 어차피 유저들로 북적 대는 곳보다는 낫잖아?" 옌스의 큰소리는 못 미더웠지만, 유한의 말은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 파티 플레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무력보다 공수를 연계하는 전술과 협력 플레이다. 특히 몬스터가 강하고 그 수가 많다면 더더욱 그 점을 중시해야 마땅했다. "좋아, 일곱 번째 계곡으로 가자." 잠시 의논한 끝에 모두가 합의를 보았다. 맨 앞에 가장 강한 옌스를 세우고 후방은 유한이, 좌우로는 채린과 오펜, 중앙에는 리지스와 송코, 에이린이 포진했다.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몹들로 몸을 풀다 보니, 어느덧 일곱 번째 계곡에 다달았다. 주변의 바위산들 사이에 자리 잡은 입곱 번째 계곡은 입구부터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했다. 레벨 100의 악령의 나무와 103의 파이어 폭스, 그리고 107의 폭스 레인저가 유한의 파티를 보고 한꺼번에 몰려왔다. "맡겨 둬! 이 몸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직 진형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옌스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이, 잠깐!" 유한이 말렸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옌스는 선두에 선 파이어 폭스의 머리를 헤비 소드로 내리쳤다. 타는 듯한 붉은 털을 가진 거대한 여우는 옌스의 일격에 피가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다. "리볼빙 파이어!" "켕!" 오펜이 뒤에서 날린 5발의 연발 마법을 맞은 파이어 폭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운명을 달리했다. -경험치 550을 얻었습니다. -320골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흐뭇하게 안내창을 바라볼 틈은 없었다. 놈의 뒤를 이어 폭스 레인저들이 들이닥쳤다. 여우 머리에 경무장을 한 이 녀석들은 옌스를 피해서 송코와 에이린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이놈들이?" 옌스는 당황했다. 전에 왔을 땐 폭스 레인저들이 자신을 피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바츠 시절 여기서 잘 놀았던 유한도 놈들의 저런 행동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충분히 추정할 수 있었다. '성직자들부터 해치우자 이건가?' 성직자들의 힐링이 전투원들의 피를 항상 든든히 채워주니까, 상대하는 몬스터의 입장에선 앞을 막아선 전사나 기사보다도 힐을 쓰고 버프하는 성직자들이 더 성가실 것이다. "물러서!" 송코는 에이린을 피신시키곤 폭스 레인저에게 배틀 해머를 휘둘렀다. 그러나 배틀 해머에 얻어맞은 폭스 레인저의 뒤에는 또 다른 녀석이 있었다. 캉! 폭스 레인저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은 유한이 날린 와이어에 맞고 날아갔다. 주춤하는 폭스 레인저에게 채린이 날린 화살이 박혀 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죽지 않자 채린은 재차 활을 쏘기 위해 화살통에 손을 가져갔다. "언니, 위험해요!" 에이린의 외침은 다소 늦었다. 채린의 뒤로 돌아간 또 다른 폭스 레인저가 단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삐잇!" 그때 리지스의 가방 속에서 튀어나온 포포가 폭스 레인저의 얼굴에 몸통 박치기를 했다. 주춤하는 폭스 레인저에게 제2타가 날아들었따. "백 블러우!" "캐캥!" 리지스의 가방이 채린을 공격하려던 폭스 레인저를 후려 갈겼다. 가방에 깔려 버둥거리는 녀석을 에이린이 달려와 손에 든 큼지막한 성전(聖典)으로 마구 내리쳤다. "앗! 뒤에!" 에이린의 등 뒤로 파이어 폭스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급한 상황에 리지스가 동전을 던지려는 찰나, 하늘에서 내려온 큰 머리 독수리가 파이어 폭스를 낚아채 바위에 집어던졌다. "휴우, 고마워 독돌아!" 에이린은 자신을 구해 주고 하늘로 올라간 큰 머리 독수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영리한 녀석이네." "리지스 언니도 꽤 영리한 펫을 데리고 있네요. 이름이 뭐예요?" "아, 이 녀석은…… 싸움이 끝나면 알려 줄게." 지금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또다시 일련의 몬스터들이 옌스를 피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이 몸을 무시해?" 재차 몬스터들이 자신을 피해 내려가자, 옌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맡겨 두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상황이 이리되니 망신도 보통 망신이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놈들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을 지나치도록 허락할 수 없었다. 눈을 번쩍 뜬 옌스는 필살 스킬을 전개했다. "우오오! 대ㅡ쉬!" 옌스가 좌우로 오가며 대쉬를 남발하자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튕겨 나갔따. 엄청난 세기의, 그것도 연속으로 펼쳐지는 대쉬의 위력에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저거 완전 불도저잖아." 그러나 그 무적의 인간 불도저는 난데없이 날아온 마법에 맞아 땅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크윽! 뭐야?" 쓰러진 옌스의 눈앞으로 커다란 주먹들이 연달아 날아왔따.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던 악력의 나무들이 마법을 전개한 것이다. 나무에 깃든 악령들은 연달아 자이언트 너클을 날려 댔다. "허억!" 하급 마법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봉인의 갑옷이지만, 악령의 나무가 날리는 자이언트 너클은 하급 마법이 아니었다. 물리적 충격력도 굉장해 두들겨 맞을 때마다 옌스의 몸이 휘청휘청했다. "이놈의 나무 쪼가리들이!" 평소라면 당장 달려들어 해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옌스는 지금 그럴 수 없었다. 전사 캐릭터는 혼자뿐,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다른 파티원들은 그 틈을 노리고 벌 떼 같이 달려들 몬스터들을 쉽게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마법 공격을 묵묵히 견뎠다. '남을 지키는 싸움이 저렇게 힘든 건가?' 유한은 고전하는 옌스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바츠로 이 싸움에 임해도 옌스와 똑같은 꼴이 되었을 것 같았다. 바츠 때 스스로 무척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실은 그게 강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자신만이 아닌 타인도 얼마든지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 "암 브레이크!" 유한은 폭스 레인저가 휘두르는 단검을 박살 내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도끼로 바꿔 쥐고, 옌스를 공격하는 악령의 나무를 강하게 내리 찍었다. "벌목! 벌목! 벌목!" 연달아 세 개의 통나무가 떨어지며 악령의 나무가 쩍갈라져 쓰러졌다. 마법도 사용하는 악령의 나무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두 녀석은 동료가 어이없이 당하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녀석들에게는 더 어이없는 게 날아왔다. "리지스 스폐셜 화염병이닷!" 펑! 리지스는 악령의 나무에 화염병을 집어던졌다. 보드카에 설탕을 첨가한 화염병을 화끈한 화염을 끈적하게 발라 주었다. 악령의 나무는 잘 마른 장작처럼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날뛰는 파이어 폭스와 폭스 레인저를 상대로 유한과 옌스, 송코가 근접전으로 막아 내고, 채린과 오펜, 리지스가 화살과 마법, 동전을 사정없이 뿌려 댔다. 에이린도 뒤에서 아낌없이 힐링과 버프를 퍼부어 파티원들을 지원했다. -레벨92가 되었습니다. 민첩성이 2 올랐습니다. "에고, 간신히 다 처리했네." 유한은 스테미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입구에 있는 놈들을 처리했을 뿐인데 등이 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 계곡의 몬스터들이 만만치 않다는 소리였다. 닥치는 대로 잡고 또 잡다 보니 유한의 레벨이 어느덧 92. 싸우느라 바빠서 중간에 떠오르는 안내창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함부로 튀어나가지 말라고요! 지원 범위 내에 있어야 힐링을 쓰던 블레스(Bless)를 쓰던 할 거 아니에요! 잘못해서 나 죽으면 오빠가 경험치 떼서 줄 건가요?" 에이린이 옌스를 향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처음 그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공격 진형을 형성하지 못해 파티가 위험에 처했었기 때문이다. "미안, 이 몸이 방심했다." "이 바보 고릴라! 그때는 잘못했다고 해야지!" 리지스는 커다란 가방으로 옌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에이린과 리지스에 호되게 혼이 난 옌스는 더 이상 개인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입구의 몬스터를 쓸어버린 파티는 일곱 번째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도 수많은 몬스터를 만났지만, 초반에 벌어졌던 난전은 재현되지 않았다. 옌스가 지원 범위 안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냥은 다소 수월해졌다. 에이린과 오펜은 공중 요새 때보다 높아진 실력을 마음껏 발휘했고, 채린과 리지스는 유효적절하게 화살과 동전으로 지원 공격을 퍼부었다. 근접전은 옌스와 송코, 그리고 유한이 수행했다. "암 브레이크!" "캐캥!" 5랭크에 도달한 암 브레이크는 향상된 위력을 선보였다. 이전에는 무구만 부셧는데 이번엔 무구를 부수면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다. 부서진 칼날과 갑옷 조각이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했다. "지그 오빠! 아홉 시 방향에 악령의 나무!" "오케이! 장작 패기!" 위력이 올라간 것은 암 브레이크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위력이 더 강할 것 같아서 벌목 스킬을 썼지만, 얼마 후 7랭크의 벌목 스킬보다 4랭크의 장작 패기가 더 위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꾸에엑!" 유한의 장작 패기를 맞은 악령의 나무가 두 조각으로 쩍 쪼개진다 싶더니 이내 여러 조각의 장작을 남기며 뒹굴었다. -경험치 530을 얻었습니다. -장작 20개를 얻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대장간 고로의 연료 확보를 위해 계속 사용했던 장작패기가 정말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으음, 과연 바츠! 장작 패기 따위로 저런 무서운 위력을!" 이미 벌목 떄도 놀랐지만, 옌스는 생산 스킬들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그에게 유한이 다가와 말했다. "실은 전설의 금도끼 나무꾼 검법이라는 히든 스킬이다." "헛, 과연 그랬나!" '이 자식은 농담도 안 통하는 놈이군.' 전투를 거듭할수록 사냥은 쉬워졌다. 계곡 안에 있는 몬스터들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졌고, 레벨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재미를 들였는지 일행은 계곡에 죽친 채 몬스터 사냥에 매진했다. 그러다가 사냥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번개같이 개나리 스텝을 밟아 오는 파이어 폭스의 미간에 포이즌 세이버를 찔러 넣는 순간, 유한의 몸이 번쩍 빛나며 평소와 다른 효과음이 울렸다. -레벨 100이 되었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인내심이 2 올랐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지그 님. 앞으로 아르페디아 대륙의 많은 듀저들을 이끌어 주시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시길 바랍니다. -추가로 모든 스텟을 1씩 올려 드립니다. 드디어 레벨 100 고지에 올라섰다. 100레벨이 특별히 무슨 경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100레벨은 넘어야 어디 가도 서러움을 받지 않는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100레벨이 되어야 진짜로 즐길 수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유한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해킹된 이후로 지그를 대장장이로 키우며 얼마나 숱한 눈물과 땀방울을 흘렸던가! "앗싸! 대한민국 만세!" "뭐야? 100레벨 친 거야?" "와! 축하! 축하!" 다들 생산직이 레벨 100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한의 성과에 모두 아낌없는 축하와 박수를 보내 주었다. 유한은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 레벨 100의 자신을 확인해 보았다. [상태창] 이름:지그 칭호: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져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직업: 대장장이 레벨: 100 체력(HP):730/730 스테미나:500/500 마나(MP) 49/49 힘:97 민첩성:77+10(바람의 부츠) 인내심:81 지식:50 행운:73 솜씨:136 명성:6900 공격력:121+102(포이즌 세이버+와이어 건틀렛) 방어력:83+95(바람의 부츠+장인의 코트+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300/11200 돈:207,1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체굴 스킬 4랭크 체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4랭크 생산 스킬 4랭크 합금 스킬 7랭크 정밀조립 스킬 8랭크 수리 스킬 4랭크 주물 스킬 9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65%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4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5랭크 광렙한 보람이 있었는지 레벨뿐 아니라 스텟들도 꽤 올라갔다. '후후, 스크린샷 찍어야지. 모험 일지에 기록도 해 놓고.' 그렇게 유한이 기쁨의 기록을 작성했을 때였다. 갑자기 일곱 번째 계곡 전체가 어두워지더니 안개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길고 날카롭게 울리는 울음소리. 캬아아아아앙!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했던 유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 이건 나인 테일(Nine Tail)!" "나인 테일? 그게 뭔데?" 나인 테일. 아홉 꼬리 여우 계곡의 필드 보스다. 불규칙적으로 계곡 여기저기에 출현해 유저를 습격하는 녀석인데, 곰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진 여우였다. 레벨은 120 정도였는데, 교활한데다 마법을 쓸 수도 있고 수십마리의 부하 여우들까지 거느리고 다니기에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후후, 드디어 계곡의 주인이 납시는군." 파티원들 중에 긴장하지 않는 것은 옌스뿐. 다들 앞쪽에 번득이는 수십 개의 안광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웬만한 고수들로 이뤄진 파티가 아니면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 같았다. 특히 유달리 크게 번득이는 한 쌍의 눈동자는 은근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다들 도망가. 저놈들을 물리치는 건 몰라도, 모두를 지켜 주는 건 자신 없으니까." "하지만 옌스 너 혼자 싸우기엔……." "얼른 가! 죽어서 경험치랑 아이템 떨어트리고 싶어?" 옌스는 헤비 소드를 치켜들고 안개 속으로 달려갔다. 곧 치열한 일전이 벌어졌는지 안개 속에서 짐승의 비명 소리와 옌스의 고함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과연 저대로 두어도 될까? 옌스는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을 했지만 정말 그게 가능할는지. "일단 우리는 피하자." "하지만, 지그야. 우리만 이렇게 도망가는 건 옳지 못해!" 채린이 반대했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설프게 도와준답시고 나서는 게 저 녀석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거야." 옌스는 바츠를 이기기 위해 홀로 숱하게 전투를 치렀던 녀석이다. 제 몸 하나 간수하면서 싸울 만한 능력은 충분히 있다. 진짜 나인 테일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녀석을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섣불리 나인 테일의 인식 범위 안으로 들어가서는 곤란했다. 안 그래도 옌스가 파티를 인식 못할 거리에서 녀석들을 저지하고 있지 않은가? "삐이! 삐이!" "앗! 포포야, 왜 그래?" 포포가 갑자기 종종 걸음으로 계곡 위로 올라갔다. 포포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이썽ㅆ다. 녀석을 쫓아가던 유한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포포가 어디를 가려는지, 뭘 의도하려는 것인지. '저 녀석 진짜 위대한 존재인가?' 바람의 무녀를 만났을 때도 포포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한번은 놈의 정체를 캐기 위해 아르페디아 온라인과 관련된 게시판을 모조리 뒤진 적이 있었는데, 저런 괴생물체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걸 궁금해 할 때가 아니었다. 유한은 포포를 따라 올라가면서 의아해 하는 파티원들도 함께 불렀다. "다들 따라와, 옌스를 도와줄 방법이 생각났으니까." 유한의 말에 모두들 유한을, 그리고 포포를 따라갔다. 포포가 멈춰 선 곳은 계곡 위쪽에 톡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였다. 유한의 대장간만큼이나 커다란 바위를 포포는 조그만 몸으로 밀거나 앙증맞은 머리로 콩콩 들이받았다. "이 아래에서 옌스가 나인 테일 무리와 싸우고 있어." 비스듬히 올라온 계곡의 아래쪽이 바로 옌스가 나인 테일과 싸우고 있는 격전의 현장이었다. 안개가 자욱해서 전투가 어떻게 진해되어 가는지 볼 수 없었지만, 연방 대쉬를 외치는 옌스의 함성이 우렁찬 것을 봐서는 아직 잘 싸우고 있는 듯했다. "이 바위를 깨서 나인 테일에게 떨어트리는 거야." "오호!" 유한의 말에 모두들 감탄사를 터트렸다. 보통의 파티라면 불가능한 작전이다. 이 커다란 바위를 깰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파티에는 채석을 익힌 대장장이가 있었다. 거기에 필요한 도구들도 모두 갖추고 있고. "바위를 떨어트린 다음 모두 일제히 돌격하는 거야." "근데 떨어트린 바위가 나인 테일 대신 옌스를 덮치면?" "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 마." 아무튼 일단 바위부터 깨야 한다. 유한은 정과 망치, 곡괭이를 번갈아 사용하며 바위 아래쪽을 깎아 냈다. "채석! 채석! 채석!" "힘내요, 지그 오빠! 스트랭스(Strength)!" "퀴클리(Quickly)!" 에이린과 송코의 지원을 받자 유한의 채석 작업은 더 빨라졌다. 채린과 오펜, 리지스는 유한이 떼낸 석재를 부지런히 뒤로 옮겼다. 쿠쿠쿵! 밑이 허전해지자 바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한이 그 금에 힘차게 공괭이를 찍자 바위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깨져서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성공이다!" 커다란 바위는 굴러가면서 군데군데 박혀 있던 다른 바위들과 나무까지 부서트렸다. 그렇게 부서지고 부러진 바위와 나무들도 계곡 아래로 함께 떨어져 내렸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나인 테일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옌스는 커다란 굉음을 들었따. 나인 테일과 놈의 부하들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던지, 모두 계곡 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유한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아, 옌스. 돌 굴러간다. 얼른 피해. "뭐라고?"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옌스는 깜짝 놀랐다. 계곡 위에서 바위와 부러진 통나무들이 우르르 떨어지더니 여우 무리들을 덮친 것이다. "캐앵!" "캬아앙!" 그러나 그것은 재앙의 전조에 불과했다. 뒤이어 떨어진 집채만 한 바위는 계곡 아래 있던 나인 테일 무리들을 아주 알뜰하게 짓이기기 시작했다. "캬아악!" 곰같이 큰 덩치를 가진 나인 테일도 이 커다란 바위를 이길 수 없었다.좁은 계곡에서 움직일 곳은 많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는 나인 테일을 깔아뭉개고 옌스에게로 굴러갔다. "으아악! 바츠 이 미친 자식!" 옌스는 유한을 저주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를 쫓는 바위는 멈춤 없이 굴러갔다. 그렇게 그들(?)은 한동안 질주를 계속했다. "우와……." "이건 뭐 나설 껀덕지도 없네." 바위를 따라 돌격했던 유한들은 계곡 아래의 참상을 보고 멈칫했다. 나인 테일의 부하들은 태반이 죽어 버렸고, 그나마 살아 있는 녀석들 중에 멀쩡한 놈들은 없었다. 큰 타격을 입어 HP가 바닥에 다다랐거나 아님 혼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필드 보스인 나인 테일조차도 빈사 상태에 빠져 저승길을 오락가락하고 있을 정도였다. 큰 타격을 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예상보다 훨씬 더했다. -바츠 이 ㅅㅂㄹㅁ!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옌스에게서 이런 귓속말까지 날아왔다. 유한은 애써 무시했다. "자, 일단 뒷정리를 하자고." "그래. 흘린(?) 건 주워 먹어야겠지?" 그들은 광렙하러 온 자들답게 착실하게 목스터들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리고 유한은 또 레벨 업을 했다. 9.길드전 발발 남바린 영지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을 무렵. 앞으로 폭풍을 몰고 올 사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푸른새벽 길드의 본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간부 회의가 열렸다. 어제 길드원 하나가 찾아와 남바린 영주의 실정에 대해 보고했기 때문이다. "겨우 대장장이 하나한테 케이지가 깨졌다고?" "공격대를 열다섯 명이나 끌고 갔는데 도리어 쫓겨 왔습니다." 간부 회의에 참석해 케이지의 지난 과거를 고해바치는 이는 바로 부하 마법사였다. 그는 케이지를 쫓아내고 자신이 남바린 영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허! 영지를 제대로 관리는 못할망정……."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만약 유저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게 되면 길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리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음 날 대장장이 녀석을 공격하려고 길드원을 백 명이나 소집했습니다." "뭐야?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이 지부, 그러니까 영지에서 길드원을 동원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타 지부의 길드원을 동원하려면 반드시 간부 회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회의장 안이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졌다. "백작님! 당장 케이지를 소환해야 합니다!" "그럴 것도 없이 바로 지부장의 자리에서 파면해야 합니다!" "파면할 것도 없습니다. 이대로 길드에서 강퇴시킵시다!" 그동안 케이지의 성공 가도를 부러워한 간부들이 기회다 싶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회의작이 시끄러워지자 상석의 백작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백작 세이언. 30대 초반의 사내로 푸른새벽 길드의 장이다. 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간부들과 달리 사려 깊고 용의주도한 자였다. 푸른새벽 길드가 아바란의 북동부 영지들을 장악하면서 세이언은 아바란 국왕으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를 얻었다. 그래서 다들 그를 길드장이라고 하는 대신 백작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 어느 대기업의 회사원이었다고 하는데, 이곳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새로운 성공을 찾아 직장도 때려치웠다고 한다. "험험! 그는 우리 푸른새벽 길드의 인재이니 일단 불러서 소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싶소. 더구나 그는…… 잘들 알잖소?" 사실 케이지, 아니 김필중에게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백작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래서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다.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반대가 없다면 그를 부르도록 하겠소." 케이지는 그날 바로 푸른새벽 길드의 본부가 있는 랑스영지로 불려 왔다. 처음에 자신이 왜 소환을 당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는 회의장 안에 있는 부하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너, 너 이 새끼 어제부터 안 보인다 했더니……." 케이지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마법사를 요절낼 듯하자 백작이 말렸다. "어허, 케이지 영주.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한 가지 확인하고픈 것이 있기 때문이오." 김필중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 그렇지 않아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야기해 보시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모두 확인해 볼 터이니 결코 거짓이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하아, 완전히 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괘씸한 대장장이 녀석을 미리 짓밟아 놓는 건데. 그동안 영지를 복구하는 일로 바빠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케이지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한의 대장간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듣게 되었으며, 접촉은 어떻게 했고, 싸움은 또 어떻게 벌였는지. "뭐야? 지그 대장간이었어?" "제길, 우리 영지도 그 지그라는 새끼 때문에 수입이 반으로 뚝 떨어졌는데." 대장간 증축 이후로 유한은 지금 남바린 영지를 벗어나 그 이웃 영지에도 한창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조금 거리가 멀긴 해도 상당수의 유저들이 지그 대장간까지 와서 무구를 사거나 수리를 받는 것이다. 덕분에 이들 영지에 있는 대장간과 공방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사정을 다 이야기한 케이지는 백작을 향해 말했다. "백작님,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그 대장장이 놈을 쫓아내고 대장간을 길드에 헌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영지의 간부들이 이를 반대했다. "안 됩니다! 그는 한 번 길드의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 괘씸한 대장장이는 길드 차원에서 응징을 해야 합니다." 결국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백작도 더 이상 케이지를 옹호할 수 없었다. 그는 좌중을 조용히 시킨 후 케이지에게 판결을 내렸다. "케이지 영주는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으로서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길드의 명성에 먹칠을 했는바, 영주에서 해임하여 남바린의 기사단장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번 공격대를 맡겨 최소한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 이의 없는가?" "……없습니다." 그나마 케이지의 뒤에 버티고 있는 빽을 의식해 지위를 한 단계 강등시킨 것으로 끝났다. 만약 그 빽마저 없었다면 케이지는 평길드원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빠드득!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아예 게임을 접도록 만들어 주마.' 케이지는 내심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한을 향해 원한을 불태웠다. 광렙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새로 익힌 주물 스킬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검을 양산할 연구를 하던 유한에게 옌스가 찾아와 말했다. "어이, 바츠. 그 이야기 들었어?" "뭘 말이야?" "오다가 들었는데, 이웃 나라에 리저드 대군이 쳐들어 왔다더군. 지금 반쯤 점령을 당했다는데 유저들 사이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야." 그러면서 옌스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줬다. 아바란 왕국 서쪽에는 아바란 왕국보다 조금 작은 키예프 공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키예프 공국 서쪽에는 초원과 사막, 그리고 플레임 마운트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막에서 '리저드 히어로'가 등장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리저드맨들을 하나로 통합해 버렸다고 한다. 여기까지야 뭐 NPC들 간의 일이니 문제는 없었다. 그저 리저드맨 사이에서 히어로가 나왔다는 게 조금 신기했을 뿐. 그런데, 이 히어로가 통일된 부족들을 이끌고 동쪽의 키예프 공국을 침공해 버렸다. 처음에 키예프 공국의 유저들은 리저드맨들을 우습게 생각했지만, 놈들이 보통 리저드들과 달리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장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놀라게 되었다. 저돌적인 리저드맨들의 기세에 밀린 키예프 공국은 순식간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겨 버렸다. 덕분에 리저드맨 토벌과 관련된 퀘스트가 키예프 공국에서 발동되었고, 지금 그쪽은 인간 대 리저드맨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서, 설마!' 이야기들 다 들은 유한은 입을 쩍 벌렸다. '아닐 거야. 그놈들 머리가 얼마나 나쁜데…….' 유한은 그렇게 자위했다. "그럼 거기서 전쟁이 터졌다면 무기 값이 올라가겠네?" "그래, 듣자니 키예프 공국에서는 리저드맨과 싸울 용병을 모집하고 있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인접국에 사신단을 파견한다더군. 아바란에도 그 사신이 왔다고 해. 그래서 지금 서쪽 영지들의 대장간과 공방에서는 무기를 만든다고 난리라지 아마." 전쟁은 무기를 만들어 파는 자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바란 서쪽 영지들은 영지전이 벌어졌던 곳들도 휴전하고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생산량을 늘려야겠군." 유한도 당연 키예프 공국에게 무기를 팔 생각을 했다. 품질이 뛰어나고 가격도 저렴한 창이나 칼 등을 팔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이 수요가 더 많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유한과 옌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대장간 문이 열리더니 송코가 들어왔다. "지그야, 누가 널 찾아왔는데?" "에? 저를요?" "그래, 나가 봐." 유한은 누군가 싶어 밖으로 나갔다. 그를 찾은 사람은 바로 표재훈, 아르페디아에서 로키라 불리는 기사였다. "어라? 로키 형.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동안 곽대발을 비롯한 사범 몇몇이 이곳에 와서 무기를 새로 구입하거나 고치고 가긴 했다. 하지만, 로키는 처음이었다. 저번에 사냥터로 광렙을 하러 갈 때도 영지전에 참가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무기 고치러." 역시 무뚝뚝한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유한은 빙그레 웃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공짜로 고쳐 줄 테니까." 마침 채린은 대장간에 없었다. 리지스의 상행에 호위겸 말동무로 따라간 것이다. 둘은 코스튬 페스티벌 이후로 더 친해졌따. 듣기론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만나고 있다고. 아무튼 채린이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자칫 용병대원들의 입을 타고 길포드, 그러니까 송태수의 귀에 들어가면 유한은 그날로 사망이었다. "뭐? 공짜라고?"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로키를 앞장세우면 공짜로 고칠 수 있다고 했잖아." "나도 공짜로 고쳐 줘." 그런데 로키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한이 공짜란 말을 하자마자 대장간 옆의 숲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다들 극기도 수련생들 중에서도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다들 공짜란 소리에 싱글벙글했다. '윽! 당했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짜로 해 달란다. 이들을 모두 공짜로 고쳐 주면 적지 않은 손해를 봐야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 남도 아니고 한 식구 같은 존재니까.' 극기도 도장에서 같이 땀을 흘리며 친해진 사이 아닌가. 유한은 그들 모두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증축하면서 넓게 지었음에 불구하고, 유한의 개인 작업실은 덩치 큰 떡대들로 북적북적해졌다. 이렇게 되자 먼저 들어온 옌스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들은 누구요?" "그러는 넌 뭐냐?" 옌스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에게 살기를 뿜었다. 전사 특유의 기감이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살기를 뿜자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도 같이 살기를 뿜었다. "그만 ! 이쪽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형들이고, 여기는 옌스라고 제 동료예요." 유한은 서둘러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옌스, 넌 밖에 나가 있어." "흥, 사냥이나 다녀올란다." 옌스는 콧방귀를 뀌더니 나가 버렸따. "저 자식 꽤 셀 것 같지 않아요?" "뭐, 그래 봤자 우리한테는 잽도 안 될걸." 그렇게 주절거리며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내려놓은 무구들은 종류도 다양했고 그 상태도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비교적 양호한 반면, 어떤 것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내구가 닳아 있었다. 단체로 아바란 서쪽에 있는 길드에 고용되어 격렬한 영지전에 참여한 결과란다.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던 두 영주가 갑자기 화해하고 휴전하는 바람에 막판엔 싱겁게 끝났다고. "그런데, 다들 알고 계세요? 키예프 공국에 리저드맨들이 대거 쳐들어왔대요." "안 그래도 영지전이 그 때문에 휴전한 거야. 무구를 고치면 그쪽으로 가 보려는 중이야. 키예프 공국이 계속 밀린다더군." 서쪽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레드 타이서 용병대는 리저드맨 침공에 대해서 꽤나 많이 알고 있었다. "혹시 그 리저드 히어로가 어느 부족 출신인지 알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유한은 내심 자신이 아는 그 리저드맨들이 아니기를 빌었다. 만약 그들이라면 자신이 전해 준 철기 기술 때문에 이번 사건이 터진 셈이디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자꾸 게임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쳐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원래 이런 시스템의 게임이라지만 말이다. 캉캉캉! 유한은 웃통을 벗어던진 채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대장간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누군가 고함을 질러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그 이 새끼 어디 있어?" '아씨! 누가 욕질이야?' 유한은 옷을 걸치며 말했다. "제가 나가 보고 올 테니까 다들 여기 계세요." 밖으로 나오니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케이지를 중심으로 한 푸른새벽 길드 녀석들이었다. "뭐야, 너냐? 성이나 짓고 있지 뭐 하러 왔냐?" "닥쳐! 너 때매 내가 영주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늘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니까 각오해라." 김필중이 손짓을 하자 나무 뒤에서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꾸역꾸역 나왔다. 그 숫자는 무려 200명이 넘었다. 이들은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였는데, 이들을 확인한 유한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따. 한 1,20명이면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인원이 덤비면 아무리 용빼는 제주가 있더라도 이길 수 없다. "캬캬캬! 이제 와서 빌어 봤자 소용없다. 내가 아주 친절히 게임 접도록 만들어 주지." 유한의 굳은 얼굴을 확인했는지 케이지가 득의양양해 웃었다. "덤으로 이 대장간은 우리가 접수해 주마. 아, 그리고 NPC들도 잘 사용해 주고, 크크크!" '이 비겁한 자식이!' 전에도 그랬다. 케이지, 아니 김필중 이 자식은 학교에 있을 때도 혼자 자신을 괴롭히러 온 적이 없었다. 꼭 똘마니들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와서야 자신을 때리고 못살게 굴었다. 유한이 지난 기억과 오버랩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케이지는 유한이 그저 겁이 나서 부르르 떠는 줄 알고 시고만장했다. "뭐 일전의 그 깔쌈한 계집애를 나한테 넘겨주면 최소한 겜은 접지 않도록 해 주지." 케이지는 안 그래도 터지려는 폭탄의 신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닥쳐! 이 개새끼야!" 우레 같은 고함에 케이지는 움찔 놀랐다. 눈앞에 유한의 주먹이 날아온다 싶더니 그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컥! 이, 이 자식이!" HP가 그리 많이 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얼하게 터진 코피는 케이지를 당황하게 만들었따.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쳐 갈기다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무슨 일이냐?" 그때 대장간 문이 벌컥 열리며 로키가 나왔다. "이놈들이 떼거지로 와서 시비 걸고 있습니다." 유한에게서 사정을 들은 로키의 눈이 무섭게 치떠졌다. 평상시에는 살짝 쳐진 눈을 하고 있던 그가 이럴 때는 정말 화가 났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조그만 변화가 푸른새벽 길드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뭔지 몰라도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인상을 쓰는 것보다도 겁나게 느껴졌다. "저, 저 녀석은 뭐야?" 케이지는 그동안 유한의 대장간을 감시하고 있던 부하에게 물었따. 하지만 부하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로키가 대장간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제길, 상관없다! 대장장이 새끼와 연관이 있는 놈은 모두 죽여 버려!" 케이지는 유한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서 이놈을 무픔 꿇리고 어떻게 괴롭혀 줄지 고민하고 싶을 뿐. "야, 뭐야?" "밖이 왜 이리 시끄러워?" 푸른새벽 길드의 공격대가 막 공격을 펼치려는 찰나, 대장간 안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우르르 나왔따. 설마 그 많은 인원들이 안에 있을 줄은 몰랐던 케이지는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겁을 먹지 않았다. '한 팬가? 그래도 우린 이백 명이 넘는다. 거기다 길드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꾸린 공격대야.' 저번에 그가 데려왔던 공격대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지닌 유저들이다. 이들은 푸른새벽 길드의 전위 부대로서 항상 길드전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서 싸우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 중 레벨이 가장 낮은 이들이 100전후일 정도로 약한 자가 없었다. "전부 싸그리 묻어 버려!" 케이지의 결정에 주춤했던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사정없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니들 뭐야? 갑자기 우릴 왜 공격하는 거야?"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피하기만 하던 레드 타이거들은 점점 거세지는 공격에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따. "이 애새끼들이 어른 말이 귓구멍에 들리지도 않나!" "버릇없는 쌍놈의 쉐이들, 빌어도 소용없다!" "오냐, 오늘 몽땅 다 뒈져 봐라!" 그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한도 레드 타이거들과 함께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숫자가 우세한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 뒤에서 마법을 뿌리는 사이 기사들과 전사들이 앞으로 달려와 검과 각종 무기들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몰라본 것이 죄라면 죄였다. 겉보기에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 하나하나가 전투라면 이골이 난 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푸른새벽 놈들이 유한의 대장간을 노리고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야?" "순 날강도 같은 쉐이들!" 콰가ㅡ각! 뻐정ㅡ! 그들은 진정 성난 호랑이와도 같았다. 로키를 비롯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하늘을 날았따. "뭐하는 거야! 피하지 말고 공격을 하란 말이야, 공격을!" 뒤에서 케이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이미 한번 기울기 시작한 기세는 되돌릴 수 없었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눈앞의 용병들은 하나하나가 투신(鬪神)과도 같았다. 레벨도 높은 것 같았지만, 케이지를 더욱 질리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전투 스킬이 아닌 몸을 이용해 싸운다는 것이었다. 케이지도 오프에서 컴 좀 씹어 봤기에 잘 안다. 저들은 진정한 싸움꾼. 몸놀림이나 동작이 간결하면서도 가장 파괴적인 것들만을 취하는데 어설픈 싸움꾼과는 차원이 달랐다. '레, 레드 타이거 용병대?' 그제야 그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언제나 허름한 용병옷을 입고 다니기에 일반 유저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어때에 힘 좀 준다는 길드들은 모두 그들을 알고 있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전장의 사신(死紳)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장인 길포드는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길드인 철십자 길드의 길드장 노벨을 죽인 유명인이었다. '제, 제길 저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혹시 지그 놈 대장간의 배후에 저들이 있었던 건가? 그래,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저 새끼가 겁도 없이 우리한테 덤볐지.' 케이지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오늘의 일이 영 재미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함정이야! 저놈이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는 공격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모두 퇴각한다! 퇴각하라!" 그렇지 않아도 패색이 짙었던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크하하핫! 이놈들아 쳐들어왔으면 끝장을 봐야지!" "어린 것들이 인사도 없이 가다니, 정말 싸가지 좋구나!" "다음에 올 때는 좀 쓸 만한 녀석들로 데려와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레드 타이거 용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뭐야? 그래서 그냥 도망쳐 왔다고?" "도망친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를……."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가 돌아오자 길드 본부가 난리 났다.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고 보낸 전력인데 깨져 돌아왔기 때문이다. "허허! 도대체 자넨 뭐 하는 사람인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나?" "백작님, 사실은 대장장이 놈의 뒤에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있었습니다. 공격대가 패한 것도 놈들 때문이고요." 케이지는 서둘러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회의장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배후에 있으면 쉽게 생각할 게 아냐." "그렇다고 대장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길드의 재정을 잠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놈들에게 연속으로 박살 나 길드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게 더 큰일이니까." 아바란 왕국 동북부의 패자는 누가 뭐래도 푸른새벽 길드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소울리버 길드를 물리친 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드도 아니고 기껏 대장장이 한 녀석에게 연속으로 패했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주위의 길드들은 자신들을 우습게보고 칼을 들이밀 것이 틀림없다. 만약 여기서 더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게 될 거싱다. "그렇다고 레드 타이거와 전쟁을 벌이자고? 그 꼰대들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설마 무적이려고? 우리 길드원을 총 동원하면 놈들을 밟아 버릴 수 있을 거야." 간부들의 의견은 두 패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력을 동원해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싸우자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합의하고 끝내자는 쪽이었다. 쾅!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백작 세이언은 주먹을 내리쳐 그들을 조용시켰다. 그리고 차분한 시선으로 그들을 일별한뒤 말했다. "제군들, 우린 지금 쉽지 않은 적을 마주하고 있다. 길드의 전력을 총 동원하면 이길 수 있지만, 그 피해도 만만찮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두려워 싸움을 피한다면 다른 길드들이 우리를 더 우습게보게 될 거다." 세이언이 평소의 점잖은 높임말이 아닌 딱딱한 반말로 이야기해 가자 어느 누구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여기 그걸 원하는 사람 있나? 본인은 푸른새벽 길드가 그리 나약한 길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말한 그는 길드전을 선포했다. "오늘부로 우리 푸른새벽 길드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상대로 길드전을 선포한다. 전 길드원에게 이 사실을 홍보하고 빠른 시간 내에 본부로 집결할 수 있도록 하라, 알겠나!" "우리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또 터졌구나." 상행에서 돌아온 채린과 리지스는 유한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드디어 이놈들이 다시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다. "제길,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옌스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때 마침 사냥을 떠난 터라 싸움에 끼지 못했었다. "앞으로가 문제야.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니까." 레드 타이거 용병대 덕분에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이제 그들은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올 것이다. "아빠에게 부탁해 볼까?" '헉!' 채린의 말에 유한은 또 경기를 일으켰다. 길포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좋다. 하지만, 채린과 자신이 쭈욱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운명을 달리해야 한다. "아빠와 사범님, 오빠랑 아저씨들이 도와준다면 푸른새벽 길드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제기랄, 정말 그 수밖에 없는 건가.' 평소 친한 유저도 얼마 없고, 길드는 더더욱 없는 유한에게 힘을 빌려 줄 곳은 그곳밖에 없는 듯했다. 딜론의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상인. 그들의 힘을 빌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마 연합에 들어오라거나 초열탄 제조법을 알려 달라고 하겠지.' "그래도 힘들지 몰라." 유한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송코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푸른새벽 길드가 작정하고 나서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이천 명이 넘어. 아무리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강하다고 하나 이백 명이 채 안되는 인원으로 이기는 건좀……." 길드전에서 쪽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천하장사라도 다굴을 이겨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글쎄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한테 맡기라니까, 이천 명이 아니라 이만 명이 쳐들어와도 내가 다 박살 내 준다니까!" 옆에서 떠들어 대는 옌스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유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아야, 아무래도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힘을 좀 빌려야겠다." "잘 생각했어." 채린은 유한이 극기도 도장에 다니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송태수가 유한에게 엄포를 놓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래서 저렇게 밝게 웃으며 좋아할 수 있었다. '나도 너처럼 마냥 웃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아참! 오펜하고 에이린한테도 도움을 청하면 달려올거야." "그래, 그쪽에도 연락할게." 하지만, 유한은 그 정도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그 혼자라면 상관이 없었따. 그냥 싸우다 힘이 달리면 죽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제 싸움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채린이 있었고, 리지스도 있었으며, 송코와 옌스도 있었다. 자신과 함께 싸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우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쩌면…….' 유한은 마지막 희망에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그야! 어딜 가는 거야?" "어이, 바츠! 겁나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유한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잠깐 어디 다녀올게. 그러니까 대장간 좀 부탁해." 산 아래로 달려가는 그의 목에는 리저드 샤먼에게서 받은 동지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10.움직이는 숲 근처 영지의 목마장에서 말을 빌린 즉시 유한은 서쪽을 향해 달렸다. 아바란 왕국을 지나 키예프 공국에 들어선 그는 리저드맨들이 장악했다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경계를 선 NPC 병사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결국 리저드맨의 군영에 당도했다. "누구야! 들어오면 죽는다." 보초인 듯한 리저드 맨 두 마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푸르게 녹슨 창을 내밀었다. "난 너희들의 적이 아니다! 이걸 봐라." 유한은 리저드맨들에게 동지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런데, 내심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 나왔다. "그게 뭔가?" "이게 뭔지 모르겠어?" "모른다." 유한이 재차 확인했지만, 그들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러 칭호도 '리저드의 친구'로 달고 왔건만. '아놔! 내가 리저드 샤먼한테 속은 거야?' "아이템 확인!" 유한은 혹시 몰라서 동지의 목걸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동지의 목걸이] 방어 3 상승. 곤충류 몬스터에 대한 공격과 방어 20% 상승. 크리티컬 발동 10% 상승. 설명: 리저드맨 주술사가 만든 세공품. 머나먼 원시의 영혼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확인해 보니 동지의 목걸이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리저드들이 이상한 것이다. "너희들 어디 출신이야?" "우린 남쪽 늪지에서 왔다." 그럼 그렇지, 저들은 유한이 알고 있던 플레임 마운트의 리저드맨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리저드 히어로도 그쪽 출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유한은 문득 자신이 헛짚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너희들 중에 플레임 마운트 출신은 없나?" "플레임 마운트?" "그래, 서쪽 사막에 있는 불 뿜는 산 말이다." 리저드들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유한은 바짝 속이 타는 것 같았다. 녀석들의 한 마디에 자신과 동료들의 생사가 갈린다고 생각하니 일 분 일 초의 시간도 초조하게 느껴졌다. "아, 있다! 우리 대장이 거기 출신이다." "우리 대장. 이 창 만들어 줬다." 자세히 보니 놈들이 들고 있는 창은 푸르게 녹이 슨 것이 아니라 화산수를 이용해 식혔기에 독성이 스며든 것이었다. '빙고!' 쾌재를 부른 유한은 리저드맨들에게 말했다. "날 너희 대장에게 안내해라. 난 너희 대장의 스승이다." "스승? 스승이 뭐냐? 먹는 거냐?" "너희 대장의 대빵이라고, 이것들아!" 이런 돌대가리 녀석들이 대체 무슨 수로 키예프 공국의 절반 이상을 점령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돌적이라는건 인정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리저드맨들은 유한을 경계하며 자신들의 대장에게 데려갔다. 커다란 막사 상석에 앉아 있는 리저드맨은 하이에나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유한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인간 대장장이!" 이 지역에 파견 나온 리저드맨들의 대장은 유한의 생각대로 플레임 마운트의 리저드 대장장이였다. 유한에게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운 놈이 맞았다. "오랜만이다." "오오! 인간 대장장이. 리저드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인사하는 리저드맨은 연방 굽실거리고 있었다. 그 반응은 유한을 의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리저드맨들도 궁금하게 했다. 대장이 한낱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대장, 아프냐? 왜 절을 하나?" "닥쳐라! 너희도 숙여라! 인간 대장장이는 위대한 혼이 보낸 사자다!" "헉! 정말이냐?" 위대한 혼이 언급되자 리자드맨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따. "빛나는 손톱을 만드는 거 가르쳐 준 게 이 인간 대장장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갔다. 그러다 또 온 거다!" 그제야 리저드맨들도 유한의 위대함(?)을 알고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한 혼이 보낸 사자 대접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굽실거리지 않아도 돼. 내가 너흴 찾아온 건 좀 곤란한 처지에 빠졌기 때문이야. 너희 리저드맨들의 도움이 필요해, 도와줄 수 있나?" "말만 해라. 리저드 뭐든 돕겠다." "싸움이 벌어져서 전사들이 많이 필요해." "얼마나 핑요한가?" 유한은 푸른새벽 길드원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다 적정하다 싶은 숫자를 말했다. "한 삼천 정도면 될 것 같다." "삼천? 알았다. 대족장한테 말하겠다. 이런 거 대족장 허락 있어야 한다." "대족장? 그게 누군데?" "너도 알고 있다. 바로 우리 족장이다." 녀석에게 들어 보니 리저드 히어로는 바로 예전에 만났던 플레임 마운트에 사는 리저드맨들의 족장이었다. 그는 유한이 전수해 준 우수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주변 리저드맨들을 통합하고 복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식량이 풍부한 동쪽으로 진출한 것이고,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군.' 내심 아니길 바랐는데, 역시 나였다. 이렇게 자꾸 게임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다간 나중에 유저들의 원성을 살 수 있었다. 들키지 않으면 괜찮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그럼 잘 부탁한다." "잘 가라, 인간 대장장이. 또 와라.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게 놈에게 부탁한 유한은 다시 말을 타고 서둘러 대장간으로 향했다. "뭐야? 푸른새벽 놈들이 길드전을 선포했다고?" 유한이 대장간으로 돌아오니 황당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니까." 채린의 설명에 의하면 이랬다. 어제 푸른새벽 길드에서 사자가 와서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것은 유한들도 예측한 바다. 그래서 이리저리 도움을 요청했으니까. 그런데, 그 전쟁 방식이 문제였다. 놈들이 선포한 것은 바로 길드전이었다. "길드전? 난 어느 길드에도 속해 있지 않은데?" "킁, 그러니까 웃기는 놈들이지." 옆에서 옌스가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따. "그런데, 길드전의 상대가 레드 타이거 용병대야." "엥? 거긴 또 왜?" "아무래도 우리 뒤에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있다고 착각했나 봐." "허!" '이놈들이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누굴 누구 쫄다구로 보는 거야!' 하지만 덕분에 아주 대놓고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게 되었따. "자, 그럼 우리도 준비를 해 볼까?" 길드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따.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싸울 준비를 해 놓을 생각이다. 유한은 대장장이 NPC들을 총동원해 무기 생산을 늘렸고, 옌스와 나머지 동료들은 각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며 구하러 갔다. 길드전이 벌어지는 날. 나바린 평원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 서 있었는데 한쪽은 푸른새벽 길드였고, 다른 한쪽은 유한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였따. 그리고 마지막 한쪽은 이번 싸움의 관람자. 즉 구경꾼들이었다. 푸른새벽 길드는 승리를 확신하는지 길드전을 선포한직후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을 통해 이번 길드전을 홍보하고 다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한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꺾어 그들의 힘이 강하다는 걸 뽐내려는 수작인 모양인데, 그게 제대로 먹힐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쳇, 많이도 데려왔네." 리지스가 푸른새벽 길드 진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정확히 세어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충 3천 명은 넘어 보였다. 저들의 최대 길드원 수가 2천명이라고 들었는데, 용병으로만 천 명 넘게 끌어 모은 모양이다. "걱정 마, 누님. 아무리 상대가 많다고 해도 이 몸이 다 박살 낼 테니까." "어이구, 그래. 넌 단순해서 좋겠다." 유한의 진영에는 레드 타이거 용병들뿐 아니라 에이린과 오펜이 데려온 반 친구들과 리지스가 돈을 주고 고용한 몇몇 용병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압도적인 전력 차를 확인하고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은 다 합쳐 봐야 250명 정도밖에 안 되는데 저쪽은 그냥 봐도 3천이 넘어 보였다. "으악! 저 깃발을 봐! 철십자 길드야!" "이번에 참가한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이러다 우리 지는 거 아냐?" "그, 그래도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있잖아." "저 아저씨들이 아무리 강해도 다굴에 장사가 없는 법 이라구!"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그들을 보며 길포드는 눈살을 찌푸렸따. "요즘 애들은 영 패기가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싸움이란 아슬아슬해야 붙어 볼 맛이 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곽대발 아니, 자칼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채린이를 봤다는 애들이 있던데, 설마 지그 그놈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니겠지?" 자칼도 채린이가 유한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앗다. 자신이 대장간을 찾아가자 유한이가 다급히 누군가를 대피시키는 것을 보앗는데, 바로 채린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유한이 놈은……. 자칼은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설마요. 애들이 잘못 봤을 겁니다." "그나저나 빨리 전투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 "왜요?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십니까?" "나 아무래도 이곳 체질인가 봐. 하루도 싸우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는 거 같아." 길포드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빠진 이유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싸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장을 찾아오는 제자들과 몇 번 대련해 봐야 그의 갈증만 더 심해질 뿐이었따. 그렇다고 조폭들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나, 대회에 참가하려 해도 이런저런 규정 때문에 오히려 화만 나고 만다. "지그 오빠! 시아 언니는?" "어? 시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네." 에이린은 오늘 시아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 싸움은 그녀와도 관련이 있으니까. "시아는 오늘 못 나와." "에? 왜요?" 채린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 것을 각오했던 에이린으로서는 대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병원에 있어. 하교하다가 웬 할머니가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는데……." 채린은 구급차를 불러 쓰러진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다 드렸단다. 다행히 할머니 목숨은 구했지만, 의식불명 상태에 연고가 불분명해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미안, 나 반드시 오늘 길드전에서 아빠랑 너랑 같이 싸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어렵겠어. 정말 미안해." "아냐, 사람을 구하는 게 먼저지. 괜찬아, 잘했어." 채린은 많이 미안해 하고 또 아쉬워했다. 그리 미안해 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아아! 그랬군요. 역시 시아 언니는 멋져!" '멋진 것은 물론이고, 아주 잘된 거지.' 채린이 못 온다고 했을 때 유한은 내심 안심했다. 송태수가 있는 상황에서 채린이 접속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채린이야 평소대로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겠지만, 그 모습이 송태수의 눈에 띄었다간……. '아무렴, 이건 백번 잘된 거라고!' 채린의 희생은 오늘 사람의 생멸을 둘이나 살렸다. 이름 모를 할머니와 그리고 유한 자신. "그건 그렇고 오빠가 부른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거야?" 유한은 친구들에게 키예프 공국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라고 했다. 그들만 합류하면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벌써 길드전 시작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지원군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글쎄. 좀 늦네." '아놔! 장소를 말하지 않고 와 버렸잖아!' 유한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지원군 요청을 하러 갔을 때 급한 마음에 얼마만큼 병력을 달라고만 했지, 어디에서 싸움이 붙는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리자드맨들은 도와주러 오고 싶어도 못 오게 된것이다. '야단났네, 이를 어쩌지?' 어쩌고 싶어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유한의 머릿속에 '필패(必敗)' 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크크크, 저놈들 꼬라지를 보십시오." 케이지는 길드장인 백작 세이언 옆에서 열심히 아부를 떨고 있었다. 자신이 벌인 일이 길드전으로까지 확대되는 바람에 길드 내에서 위치가 대폭 축소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세이언에게 아부하고 있었다. "겁먹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쳐들어가면 바로 꽁지 빠져라 도망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오늘의 길드전을 위해 세이언은 다소 무리를 했다. 처음에는 그냥 길드 자체의 병력만 동원하려 했으면 좀더 확실한 승리를 얻기 위해, 그리고 만방에 푸른새벽 길드의 건재함을 보여 주기 위해 두 가지 준비를 더 했다. 하나는 케이지를 보내 철십자 길드에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병들을 최대한 많이 끌어 모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전력은 3천 명이 넘었다. "길드전의 시간은 ?" 세이언은 길드의 참모를 맡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이제 오 분 남았습니다. 오 분 후면 저놈들이 지닌 아이템은 모두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길드전은 GM의 참관하에 벌어진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를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상대편 유저들을 죽여 흘린 장비와 돈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길드전에만 전문으로 참여하는 용병들이 있을 정도였다. "좋아, 각 병단들마다 전투 준비를 하라고 해." 세이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앙 지휘소에서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뿔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멋지게 평원에 울려 퍼졌따. 굳이 이러지 않아도 충분히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많은 길드들은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중세풍의 요식행위를 선호했다. 신호가 떨어지자 각 병단들은 저마다 공격 진형을 갖추었따. 마법 병단은 후위에서 마법 지원에 최적화된 진형을 갖추었고, 전사나 기사로 이루어진 돌격 병단은 선두에서 세모꼴 진형을 짰다. 그리고 좌우의 궁수나 원거리 타격 능력을 보유한 유저들은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3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공격 준비를 하는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아, 안 돼! 난 그만둘 거야." "받은 돈의 다섯 배요. 용병대에서 탈퇴하겠소." "제길, 이런 승산도 없는 전쟁에 고용하다니! 당신 생각이 있어, 없어?" 그렇지 안하아도 단결력이 약한 용병들은 푸른새벽 길드 가 공격 준비를 하자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오펜의 급우들이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오펜과 에이린이 나서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있잖아. 그들을 믿어." "조금 있으면 지원군이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온다는 지원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길, 도대체 지원군이 어디서 온다는 거야?" "그러게. 이러다 돈과 아이템만 모두 잃어버리는 거 아냐?" "나 그만둘 거야." "미안, 나도 갈래." 한 명이 그만둔다고 하자, 오펜이 급우들도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떠나가 버렸다. 하긴, 그들은 돈을 받고 참전한 용병도 아니고 그냥 반장의 부탁으로 인원수만 채우러 나왔기에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크하하하!" "푸하핫!" 그 모습을 보고 푸른새벽 길드원들과 철십자에서 지원나온 녀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지그 오빠! 도대체 지원군은 언제 오는 거예요!" 얼굴이 벌겋게 변한 에이린이 다가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냥 뻥이였죠? 우리들이 기 죽을까 봐 뻥친 거죠? 차라리 없으면 없다고 솔직히 말해요. 그럼 덜 실망할 테니까." "아, 아니 그게……." "안이고 밖이고 간에 솔직히 말하라구요!" 에이린은 유한을 궁지에 몰아넣고 다그쳤다. '어휴, 돌대가리는 리저드맨이 아니라 나였군.' 몇 번을 후회해도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젠 그냥 깨끗이 포기하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죽기 살기로 싸우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지금은 그런 작은 기대에 모든 것을 걸어 보고 싶었다. 쿵! 쿵! 쿵! 그때였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레드 타이거 용병대 뒤쪽의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 길드전이 벌어지려고 할 때라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새파란 물결이 밀려오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뭐야?" "저기에 숲이 있었나?" 멀리서 볼때는 마치 숲이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이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리저드맨들이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지평선을 완전히 덮어 버릴 정도로 새까맣게 밀려오고 있었다. "리, 리저드맨이다!" "뭐야? 왜 여기 나타난 거야?" "설마 침공하려고?" 유저들이 놀라 호들갑을 떨 대 유한은 안도의 함숨을 내쉬었다. 이제 길드전에서 질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족히 수만은 될 것 같은 리저드 대군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에이린을 향해 말했다. "쟤들이 바로 우리 지원군이야." "인간 대장장이, 리저드 왔다." 리저드 족장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유한에게 다가왔다. 반가운 마음에 유한은 그에게 달려가 부둥켜안은 뒤 물었다. "어떻게 장소를 알고 찾아온 거야?" "인간 대장장이 네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 인간 군대를 피해서 온다고 늦었다. 미안하다." "괜찮아, 괜찬아.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워. 근데…… 꽤 숫자가 많네?" 삼천 정도 필요하다 했는데, 이건 아주 수만 대군이 왔다. 이렇게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온 이유를 족장은 간단명료하게 말해 주었다. "삼천 뽑으려다 귀찮아서 다 끌고 왔다." "하하핫! 그랬어?" 정말 리자드맨답다고 할 수밖에. 족장의 어깨를 다독인 유한은 영문을 몰라 하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자신의 동료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동지 여러분! 위대한 리저드 히어로가 우릴 도우러 대군을 이끌고 왓습니다! 더 이상 푸른새벽 길드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와아아!" 이건 기쁨의 함성이 아니라 놀라움의 함성이었다. 키예프 공국을 휩쓸고 있는 리저드 히어로가 길드전에 가담하다니, 그것도 인간을 돕기 위해서! "리자드 히어로라고?" "야! 이거 대박이다! 얼른 동영상 저장해!" 구경꾼들이 소란스러워졌고, 레드 타이거 용병대 측은 기세가 올라갔다. 그에 반해 아까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던 푸른새벽 길드는 사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시바! 이런 게 어딨어? 리저드 히어로아니!" "그래 봤자 리저드맨일 뿐이잖아." "닥쳐, 인마! 넌 키예프에 안 가 봐서 몰라! 저놈들 얼마나 질기고 무서운지 알기나 해?" 푸른새벽 길드가 고용한 용병 부대들부터 흔들렸따. 키예프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는 용병들부터 패널티를 각오하고 빠져나가자, 길드원들도 크게 술렁이기 시작해싿. "발리 알아 봐, GM에게 가서 항의하란 말이야!" 세이언은 참모 마법사를 서둘러 GM에게 보냈다. 뜬금없이 가담한 리저드맨 대군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중립 지역에 있는 GM에게 번개같이 달려갔던 참모는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전혀 문제가 없답니다. 유저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도 인정되는 거라면서……." 그 말을 들은 세이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격렬하게 토로했다. "미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렇게 많은 리저드맨을 동원할 수 있는 놈이 어딨어! 저기에 대마왕 캐릭터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거냐고!" 이건 세이언이 아는 상식 밖의 상황. 길드전에 테이밍한 몬스터를 전력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고, 몰이해 온 몬스터 떼들을 적진에 밀어 넣는 경우도 있다지만, 이런 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수만 단위의 리저드맨을 몰고 온 놈들과 길드전이라니! "리자드 공격!" "우! 우! 우!" 족자으이 외침에 리자드맨들이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창과 방패를 부딪치며 발을 크게 구르는 리자드맨들이 전진할 때마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뭐해, 자식들아! 공격해! 궁수는 놀고 자빠졌냐? 마법사 졸고 있어? 여기서 지면 우린 끝장이란 말이다!" 극도로 흥분한 세이언이 길드원들을 닦달했다. 그가 흔들리는 만큼이나 푸른새벽 길드원들도 흔들리고 있었따. 멋들어지게 포진한 진형은 개미 떼처럼 흐트러져 있었고, 발악하듯 날리는 화살이나 마법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날린 공격들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몇마리의 리저드맨들이 쓰러지자 리저드맨들이 쿵쿵 뛰며 달려오더니 들고 있는 창을 일제히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우와! 하늘이 쌔까매!" "저게 전부 다 창이냐?" 보는 구경꾼들은 감탄했지만, 그걸 맞는 추른새벽 측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온 수만 개의 투창들은 그야말로 폭우처럼 쏟아져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학살했다. "크악!" "으아악! 사람 살려!" 방패가 없는 궁수나 마법사들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전ㄱ사나 기사들도 방패를 부술 듯이 두들겨 대는 투창에 치를 떨었다. 왜 아까 키예프에서 왔다는 용병들이 악을 쓰며 가 버린지 알 것 같았다. "모두 돌격! 도마뱀한테 뒤쳐지면 지옥 훈련이다!" "우와아아!" 투창 세례가 끝나자 유한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 그리고 유한의 동료들도 함성을 지르며 푸른새벽 길드를향해 돌격해 갔다. 나름대로 강하다 자부하던 푸른새벽 길드였지만, 그들이 오늘 우위라고 생각했던 '쪽수'가 완전히 뒤집히면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리저드맨들의 무차별 돌격과 난전 방식의 전부는 진형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평소 그들의 스타일과 영 맞지 않는 싸움이었다. 리저드맨 하나를 베면 다른 놈이 찌르고, 옆에서 또 찌르고, 한 놈이 더 와서 밟고…… 거기다 그런대로 리저드맨을 상대로 싸울 만하면 레드 타이거 용병대나 그들의 동료들이가세해 균형을 기울여 버렸다. -아놔, 리자드맨 20마리가 한꺼번에……. -아이고, 내 갑옷! ㅜㅜ -길드장 이색히 어딨어! 쓰러진 시체들이 울려 대는 채팅 글과 그들이 떨어트린 검과 방패, 지팡이, 골드가 평원을 뒤덮었다. 구경꾼들은 그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고, 아까 불리하다며 레드 타이거 용병대 쪽에서 이탈한 유저들은 망연자실 한 표정을 짓거나 주먹으로 땅을 쳤다. "으윽, 이럴 줄 알았으면 남아 있을걸." "아씨! 반장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푸른새벽 길드는 완전히 전멸 단계로 나갔다. 살아남은 유저들도 패널티를 각오하고 이탈하거나, 몸값을 치르는 조건으로 포로가 되었따. '제길! 어쩌다 이렇게까지.' 요새 일진이 더럽게 없다 싶었던 케이지는 눈치를 보다가 시체들 틈에 죽은 척 엎어졌다. 싸움이 종료할 때까지 버텨 볼 생각이었지만,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분명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끄아악!" "일어나, 인마. 왜 뒈진 척을 해?" 유한은 케이지의 꽁꼬에다가 포이즌 세이버를 찔러 넣었다. 퍼떡 일어난 케이지는 자신을 노려보는 유한을 발견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꽤 격전을 치렀는지, 유한이 들고 있는 검은 이가 거의 다 빠져 있었다. 지금 이놈에게 덤비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주변에 리저드맨들이 너무 많았다. "하, 항복." 케이지는 손을 들어 올렸다. 포로가 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죽으면 더 손해였다. 아이템은 물론 경험치도 잃어야 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유한은 검을 아래로 내렸따. 케이지는 자신의 항복을 받아 주는 줄 알고 안심했지만, 유한은 자세를 바꾸기 위해 그랬을 뿐이다. "까고 있네!" 목을 베인 케이지는 진짜 시체가 되어 평원에 누웠다. 지지리 재수가 없었던지, 아이템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몽땅 떨어트렸다. 그리고 돈 주머니도. "이겼다! 우리의 승리다!" 얼마 후, 길포드가 푸른새벽 길드의 길드장 세이언을 쓰러트리면서 길드전이 끝났다. GM들은 정식으로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승리를 선언하고 전투 기록을 갖고 떠나 버렸따. 승리자들은 기쁨의 함성과 함께 전리품을 수거했다. 그러나 리저드 히어로와 수만 리저드맨이 가세한 길드전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아직까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1.해커를 잡다. 푸른새벽과의 길드전이 끝난 직후 아르페디아 온라인 관련 홈페이지에 동영상이 하나 떴따. 길드전을 구경한 유저가 올린 거였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외면받았다. 그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드전을 보앗다는 유저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심지어 화면 속의 리저드맨들에게 쳐 맞았다는 유저까지 나서면서 동영상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순간, 동영상은 하루 만에 폭발적인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네티즌들에 의해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면서 더 유명해졌다. 매일 길드전이 벌어지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임을 감안 했을 때 그 동영상이 유저들의 시선을 끈 비결은 바로 길드전에 몬스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무려 5만 마리나 되는 리저드맨이. 덕분에 상대 길드는 아주 죽사발이 났다. 길드원의 반이 리저드와 싸우다 죽었고, 나머지 반은 도망치거나 잡혀 항복했다. 그들이 처절하게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유저들은 온몸을 엄습하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 리저드들을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으면 아르페디아 대륙에 작은 나라를 세우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리저드맨이 왜 저기 나타난 거죠? -★☆승리의 리저드 히어로☆★ -제가 듣기로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 쪽에 리저드 족장과 친분이 있는 유저가 있었다고 해요. 그 유저를 돕기 위해 나타났다고 합니다. -허, 무서비! 유저들은 도대체 누가 저 많은 리저드들을 동원했는지 조사했다. 그리고 이번 길드전의 시발점이 된 대장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 빠른 게임 방송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분! 국민 요정 미루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그토록 궁금해 하셨던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케이트 산맥으로 왔습니다.] 버추얼 에이지가 생방을 시작하자마자 시청률이 급속하게 올라갔다. 모든 아르페디아 온라인 유저는 이번 사건의 배후 인물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제가 이렇게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를 알 수 있었던 것은 한 어여쁜 소녀의 제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보를 해 주신 분은 지난 길드전에 참가하신…….] [방가! 방가! 안녕하세요, 신의 귀염둥이 에이린입니다!] 미루가 제대로 소개하기도 전에 에이린이 화면에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미루는 에이린을 슬쩍 밀어내고 계속 방송을 진행했다. [에이린 양, 에이린 양은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가 누군지 아신다고요?] [실은 지그 오빠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헤헷. 지그 오빠를 알리는 게 오빠에게 시비 거는 사람이 적어질 거라 생각해서 제보했어요.] [지그…… 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시청자 전원은 지그라는 이름을 재빨리 머릿속에 입력했다. 몇몇 아르페디아 유저들은 그가 저번에 공중 요새를 발견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제보한 에이린이란 소녀도 바로 공중 요새를 발견한 1인이지 않은가? [저번에 에이린 양과 공중 요새를 발견한 대장장이 분이 맞죠?] 미루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에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기 계곡에 아름답게 자리를 잡고 있는 통나무 집이 지그 오빠의 대장간이에요.] [네! 여러분, 드디어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를 알아냈습니다. 빨리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은 대장간으로 달려가는 미루와 에이린의 뒷자태를 감상하면서 문제의 대장장이 지그가 누군지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잠시 후, 모두의 기대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지그 없는데요.] 대장간 앞에 있던 상인 소녀의 심드렁한 말에 미루의 귀와 어깨가 축 처졌다. 방송국 측에 충격과 공포가 회오리쳤다. 분명 드림맥스로부터 이 시간 대 지그의 접속률이 99%에 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생방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청률은 아직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동업자인 리지스입니다.] [지그 님은 왜 없다니까?] [아! 보면 몰라요? 대장간 문 닫고 잠수했어요.] 정말 대장간은 휴업 중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한동한 쉽니다'는 글이 적힌 팻말만 붙여진 채로. [도망간 건가요? 접속을 안 한 건가요?] [귓말 쳐도 없다는 걸 보니 접속을 안 하고 있나 봐요. 그 때문에 물건 떼서 파는 저도 장사에 지장이 많아요.] [왜 접속을 안 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사람들이 귀찮게 하니까요. 어떻게 해서 리저드맨의 친구가 되었냐는 둥, 우리 길드를 도와주면 안 되냐는 둥…….] 그런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길드전 자체만 해도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유저들이 얼마나 귀찮게 했을 것인가는 안 봐도 동영상이었다. [아쉽군요. 꼭 지그 님과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뭐 지그가 어떻게 리저드맨이랑 친구가 되었는지는 저도 알고 있어요.] [정말인가요? 들려 주실 수 있나요?] 미루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빛나는 건 미루의 눈만이 아니었다. 리지스의 눈 역시 황금빛으로 빚났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돈을 요구하면서.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맨입으론 안 돼죠.] [아, 그러니까 그냥은 곤란하시다?] 빛나던 미루의 두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곁에 있던 에이린도 할 말이 없던지 고개를 저레저레 저었다. [세종대왕 이백 분을 주신다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말해 줄 수가……] [네, 이상 버추얼 에이지의 MC 미루였습니다.] [야!] 미루가 거기서 방송을 종료해 버리자 리지스가 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루와 카메라맨은 순식간에 접속을 끊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루의, 아니 방송국의 처사는 시청자들의 부아를 치밀게 만들었다. -시바 돈이 그렇게 아까우삼? -어떻게 된지 끝까지 조사하는게 미디어의 역할 아니오! -제길, 리저드맨을 꼬시는 방법을 알 절호의 기회였는데. 대장간 문을 닫은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유한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하지 않았다. 접속해 봤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에 한 번씩 컴퓨터로 쪽지함을 확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비록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홈페이지에 로그인하면 메일이나 쪽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어휴, 오늘도 쓸데없는 쪽지가 가득하군." 거의 다가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내용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리저드맨과 친구가 되었냐 그것이겠지. 쪽지를 정리하다 보니 그냥 버릴 수 없는 쪽지가 한 통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딜론에게서 온 거였다. '무슨 일이지?' 그는 쪽지함을 눌러 내용을 확인했다. 지그님 안녕하세요? 의뢰하신 블라덱이란 자의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조만간 한번 만나지요. '헉 블라덱!' 설마 블라덱에 관한 것일 줄은 몰랐던 유한은 깜짝 놀랐다. 얼머나 놀랐냐 하면 들고 있던 우유 컵을 떨어트릴 정도였다. 그는 후다닥 바닥을 청소하고는 일주일째 놀리고 있던 캡슐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지그로 접속하시겠습니까?> 순간 승낙하려다가 유한은 입을 다물었다. 지그의 유명세가 생각난 것이다. 지금 그가 지그로 접속하면 대장간에서 생성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장간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유저들에게 포위될 것이다. "아니, 바츠로 접속할 거야." 순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그는 두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눈을 뜨자 그는 발덴의 중앙 분수대에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막 시작한 초보들을 헤치고 딜론의 상점으로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딜론은 비록 천바지의 면티 차림이었지만 초보 손님을 박대하지 않았다. "딜론 님, 저 지그입니다." "예?" 유한의 말에 딜론의 눈이 동그레졌다. "요새 절 찾는 사람들이 많아 서브 캐릭으로 들어왔어요." "아아,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지그와 얼굴이 똑같았다. 헤어스타일과 차림새가 달라 못 알아봤지만 말이다. "미리 눈치 채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그런데 그 캐릭터명은?" "아, 이거요? 바츠가 없어졌다기에 선점해서 만든 겁니다." "그렇군요. 유명 캐릭터의 이름을 노리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딜론은 그 정도로 알고 넘어갔다. 중요한 것은 유한에게 블라덱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는 일이었다. "레벨 60대의 상인입니다. 캐릭터를 몇 개 더 만들어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꽤 수상한 친굽니다." "수상하다고요?" "남들은 비싸게 팔려고 안달인 고가의 아이템을 NPC에게 헐값으로 넘기거나 처분하기 적당한 가격에 재빨리 팔아 치웁니다. 거기다 거래 방식도 괴이하지요." "괴이하다면 어떤 방식입니까? 어딘가 물건을 묻어 놓고, 살 사람에게 돈도 따로 묻어 놓으라고 합니까?" 유한은 예전에 레인저의 활을 추적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알리에트라는 여자 궁수가 이런 방식으로 거래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슷합니다. 먼저 돈을 받아 가고, 어디에 묻어 둔 봉인의 상자에 아무개 암호를 적용해서 무기를 넣어 두었으니 꺼내 가라는 식으로 판다고 하더군요." '이놈이 분명하군.' 연이어 유한의 확신을 더욱 무겁게 하는 말이 딜론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요새는 몸을 많이 사립니다. 거래도 거의 중지하고 게임에도 접속하는 일이 거의 없지요. 캐릭터도 바꾸고 오프에서 현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거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오프에서 현거래요?" "관련 무구를 찾는 사람에게 전화번호가 든 쪽지를 보냅니다. 만나서 현금을 건네받고, 곧바로 게임에 접속해서 봉인의 상자에 무기를 넣어 묻습니다. 그리고 묻어 둔 장고와 암호를 판매자에게 알려 주지요." "그런 식은 충분히 사기를 칠 수도 있을 텐데……." 돈을 받고 나 몰라라 잠수해 버리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사기를 치면 법의 제제를 받지요. 게임사에서도 좋아하지 않고요. 놈도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뭔가 구린 것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는겁니다." 전에 알리에트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던 바였다. 그냥 모르는 척 딜론에게 사기 가능성을 언급하니 유한의 생각과 똑같은 답을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혹시 오프에서 그 사람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딱히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사람이 에르젠도 꽤 많이 거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저도 이젠 에르젠 합금 무기에 도전해 볼까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블라덱이 에르젠을 거래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유한이 원하는 것은 놈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길드원에게 구한 그자의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몇 개씩 되더군요. 한번 차례대로 연결해 보십시오." "고맙습니다." 유한은 딜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막 가게를 나가려는 데 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게 아닌가. "지그 님, 아무리 저가에 아이템을 매입할 수 있다 해도 그런 자와 거래는 계속하지 마세요. 자칫 잘못하면 같이 엮여 버리게 됩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르젠도 필요하면 우리가 싸게 공급해 줄 테니 위험한 거래는 하지 마십시오. 호기심 정도로 이번 한 번으로 끝내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딜론은 진심으로 유한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하긴 유한이 계정 압류로 사라지면 그의 돈줄 중 하나가 끊어지는 것이니까. 뭐 그런 물질적인 이유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유한은 딜론에게 넘겨받은 전화번호들을 하나하나 걸어 보았다. 집 전화나 휴대폰을 이용하면 해커 녀석에게 발각이 될까 싶어 일부러 흔하지도 않은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는 모두 7개였는데 5개까지 국번이 없거나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해서 걸어 보라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다 6번째에서 신호가 가더니 수화기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블라덱 님이십니까?" 유한은 일부러 목소리를 굵직하게 바꿔서 이야기했다. 상대는 잠시 동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혹시 해커 녀석이 자신인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초조해 하던 유한에게 수화기 너머의 존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예, 그런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놈이다. 이놈이 틀림없다! 코엑스의 코스튬 페스티발에서 스쳐 지나갈 때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유한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좋은 아이템을 싸게 파신다고 들었습니다. 현금으로 드릴 테니 에르젠 백 개만 파시지 않겠습니까?" "에르젠이라…… 제가 가진 건 오십팔 개뿐입니다만." 58개 '뿐'이라고 한다. 에르젠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금속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다니. 이놈은 분명 남의 인벤을 터는 해커가 분명했다. "그거라도 파세요. 현금으로 백이십 만원 정도면 되겠습니까? 은행 계좌가 어떻게 되십니까?" 돈을 넣어 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유한은 놈의 계좌에 돈을 넣을 생각이 없었다. 그만한 돈도 없고, 계좌번호를 들으면 경찰에 바로 알릴생각이었다. 물론 놈이 은행 계좌를 이용하지 않을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딜론의 말대로 뒤가 구린 놈이라면 계좌 이용 같은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어디십니까? 멀지 않으면 지금 제가 나가서 직접 받고 싶은데요?" "마로니에 공원 근처입니다만." "나가겠습니다. 삽십 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온단다. 놈이 드디어 나온다고 말했다. 유한은 묘한 쾌감에 하마터면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기다리겠습니다." "파란 모자를 쓴 게 접니다. 찾기 쉽게 도로 근처로 나와 주십시오." 유한은 놈의 말대로 도로 근처로 나갔다. 30분이 300년은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찾아 헤맸던 시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 단서도 없느 상황에서 대장장이라는 어려운 캐릭터를 이용해 얼마나 게임 안의 세계를 뒤지고 다녔는가. 거기다 술래잡기를 하자는 놈의 조롱까지 받았다. '그래, 오늘이 네놈을 잡는 날이다.' 30분이 지났다. 그런데 녀석이 오지 않았다. 혹시 낌새를 챈 것은 아닐까? 집에 돌아가면 조롱 섞인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 하던 유한은 도로에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서는 것을 보았다. 타고 있던 사람은 천천히 헬멧을 벗더니, 파란 야구 모자로 바꿔 썼다. 나이는 20 전후? 키는 유한보다 작았고, 꽤 비썩 마른체구. 모자의 챙을 깊게 내리써서 얼굴은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입술도 얇고 턱도 좁은 것이 매우 간사해 보였다. 유한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이 먼저 말을 건넸다. "전화 주신 분입니까?" "당신이 블라덱?" 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돈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유한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척하다가 녀석의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녀석의 심장이 움찍하고 놀라는 게 동맥을 타고 똑똑히 느껴졌다. 이 순간, 유한의 온몸은 뭐라고 할 수 없는 쾌감에 휩싸였다. "내가 누군지 알아?" 당황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유한은 으르렁거리듯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내가 바로 바츠 유저인 강유한이다." (대장장이 지그 5권에서 계속) 막 돌아 다니면 더이상 배포 안하겠습니다 ^^ jbc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