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공학자> #1 (1) 서장 하늘의 장난인지 아직 해가 중천이어야 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구름이 하늘을 가려 어두움을 뿌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가 하늘의 변고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북적거릴 시간에도 저잣거리는 몇몇 사람만이 지나다닐 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 저잣거리 를 따라 일 다경(15분)가량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한양에서 꽤나 유명한 서낭당이 나온다. 그곳에는 얼핏 봐도 입이 벌어질 만큼 거대한 감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는데 서낭신을 모시는 제단의 모양새는 다른 서낭당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이 엄청나 게 거대한 감나무 때문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 다면, 이 마을은 예로부터 유달리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그것이 모두 서낭신 덕 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전에 따르면 무려 천년이나 된 감나무라 하였다. 물론 말 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 일 수도 있겠지만 우람하게 서있는 이 감 나무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어 느 방향에선가 바람이 불어오는지 무성한 감나무의 잎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나 뭇가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뭇가지의 흔들림은 거세어져 갔고,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가 점 차 커지는 듯 싶더니 놀랍게도 사람의 목소리가 나뭇잎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비록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또렷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은은히 들려오 는 소리가 마치 천상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인양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 자정을 지나면 인세의 세월로 천년이 지나는구나... 이곳에서 서낭신으로 지낸 것이 벌써 천년이나 되었단 말인가... 나름대로 긴 시간이었지... 이제 옥황상 제님의 33대신중의 하나가 되겠군... 다음에는 어떤 신령이 이곳의 서낭신으로 오게 될지...] 신비한 목소리의 중얼거림이 잠시 들리더니, 원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듯 신비한 목소리는 바람사이로 흩날려 사라져 버렸다. 이제 울먹이던 하늘이 참지 못했 는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마을로 이어진 길 끝에서 한 작은 소년이 빠르게 발을 놀려 감나무 밑으로 몸을 들였다. 그는 길을 지 나다 갑작스럽게 비를 만났는지 길게 땋은 댕기는 이미 모두 젖어있었고, 빨갛게 상 기된 볼 옆으로 물방울들이 흘러 내렸다. 육, 칠세나 되었을까? 비록 어린 나이였지 만 그의 생김새는 제법 비범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이목구비가 뚜렸 했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듯 악다문 입술이 수려했다. 또한 검은 눈동자 역시 맑고, 깊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소년의 굳게 다물려진 입이 열리며 하얀 입김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아버님께서 걱정을 하시겠군... 아무 말도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낭 패야..." 소년은 자책을 하며 감나무 아래 몸을 웅크려 앉았다. 그 모습으로 비가 그치기를 기 다리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나저나 이 감나무는 정말 거대하구나. 내 나이 6세. 많은 것을 익혔다고 자 부하나, 이 인고의 세월을 겪은 나무에 비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배움이랴..." 나이답지 않게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소년은 나무를 물끄러미 올려 보다가 무슨 생각 이 들었는지 몸을 옮겨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나무의 잎사귀들이 흔들리 며 다시 공명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소년의 귀에는 그저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일 뿐이었다. [무엄하게 나를 밟고 오르는 이 아해는 또 무엇인가... 쯔쯧... 아직 어려서 그러겠 거니... 허허 저러다 떨어지면 어찌하려고...] 감나무의 서낭신은 마치 재롱을 피우는 손자를 대하듯이 자신의 선체를 기어오르는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 큰 장정이 올라도 힘이들 만큼 거대한 나무였지만 소년 은 가진 힘을 다하여 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태위태했지만 소년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린 자의 치기이리라... 어른 키의 서너 배가되는 높이까지 오르자 잠 시 쉬기 위해서인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잠시 눈을 돌렸다. "명신아... 겨우 이 정도를 올라온 것뿐인데 벌써 지쳤단 말이냐? 여섯 살의 나이로 천년의 끝을 보는 것이 쉬울 줄 알았더냐..." 스스로를 명신이라 칭한 소년은 자신을 한번 꾸짖고서 다시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얼마 오르지 못하고 다시 몸놀림을 멈추어야 했다. 그 위로는 손을 뻗을 가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살펴보자 그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나뭇가지 가 하나있었는데 뒤꿈치를 들어도 손이 닫지 않았다. "이 정도에서 뜻을 굽히면 장부라 할 수 없다." 명신은 어떠한 뜻을 굳혔는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힘껏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나뭇 가지를 향해 뛰어 올랐다. 나름대로의 눈대중이 맞았는지 손을 타고 전해오는 나뭇가 지의 촉감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명신의 몸은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사실 감나무라는 것이 썩은 가지나 온전한 가지나 겉모습으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였기에 명신의 실수는 아 니었다. 구태여 잘못이라면 감나무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 잘못이랄까? -우지끈! 명신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은 머리 뒤쪽으로 둔중한 충격을 받으며 의식을 잃었다. 물기로 촉촉히 젖은 땅으로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핏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가 떨어진 모습만 보더라도 치명상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시금 나뭇잎들이 격하게 흔들리며 서낭신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통제라... 하필면 성스러운날 이런 사고가 일어났단 말인가...] 명신의 변고에 서낭신은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서 낭신은 주변의 생명체를 느끼며 명신을 도울만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때서야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어찌 이곳을 지키는 존재로서 너의 죽음을 보고 있겠느냐... 아무리 생각해 도 이대로 너를 두고 승천 할 수는 없겠구나.] 서낭신의 독백이 끝나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거대한 감나무는 희미한 오 색의 빛 무리에 쌓이기 시작했다. 나뭇잎 하나 하나가 오색의 영롱한 빛을 발했으며 잎의 수맥에선 물대신 빛이 흐르는 듯하였고, 곧 나뭇잎에서 발하던 은은한 오색의 빛은 다시 작은 크기로 뭉쳐들어 지금은 순 백색의 눈부신 빛 덩어리가 되었다. [소년아... 이것은 내 천년정화의 일부분이니라. 이것으로 너를 살린다면 나는 다시 삼백년을 기다려야 하겠으나 나에게 삼백년이 그리 긴 세월은 아닌터... 너를 살리는 것은 나의 뜻이되 나머지는 너의 운명이리라...] 작게 뭉쳐진 빛 덩어리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명신을 감싸자 뒷머리에서 흐르던 피는 멈추었고, 상처는 빠른 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현상의 끝 은 아닌 듯 처음보다 조금 흐려진 빛 덩어리가 명신의 모공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런. 천년지정을 흡수하고 있다니... 너무 많은 정기를 전해준 것인가? 허나 그러 면 또 어떠하리 그것 역시 너의 운명인 것을... 마침 저기 사람들이 오는구나, 그럼 건강하게 자라나거라. 또 다시 삼백년이라...] 감나무의 서낭신은 삼백년이라는 말을 씁쓸히 ㅇ조리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뚝 서있었다. 이때 마을로 이어진 길 끝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도련님! 명신 도련님 어디 계시옵니까!" "명신 도련님!" "저길 보게나! 서낭당 아래 누가 있는 것 같으이!" "어서 가보세!" 명신을 찾기 위해 온 마을을 뒤지고 다니던 집안 하인들은 옷에 흙탕물이 튀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서낭당으로 뛰어갔다. "여기 명신 도련님일세! 숨이 고른걸 봐서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나 보네! 돌쇠야 어 서 도련님을 들쳐 업거라!" "아..알겠습니다!" 돌쇠라고 불린 하인 중 한명은 명신을 업고서 서둘러 마을로 뛰어 갔고, 남은 하인들 은 이제야 한숨 돌리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도련님이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나저나 다행일세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찾았으니. " "그러게 말이야... 서낭신께서 돌보신 게지." "흠... 비가 왔는데도 이 감나무는 젖어있지 않군? 해괴할세..." "껄껄. 밑둥 부근이라서 비가 아래까지 흐르지 않은 게지. 이 나무가 좀 큰 나무인 가? 실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가세!" 동료 하인이 가자는 소리를 들은 그는 아직도 의심이 남는지 명신이 누워있던 곳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이보게 현수! 이거 핏자국 아닌가?" "맞네 그려! 그런데 도련님 몸에 상처라도 봤는가?" "못 본 것 같은데." "아무튼 빨리 돌아가세 대감마님께 이 일을 고해야겠네." 남아있던 하인들도 바삐 발걸음을 옮겨 마을로 향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날 때에는 구름이 물러갔는지 거대한 감나무 뒤로 노을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1. 한명신 한적하게 좁은 방의 크기를 몸으로 재며 뒹굴 거리는 소년이 있었다. 언제부터 방안 에서 뒹굴렀는지 정성스럽게 땋아놓은 듯한 댕기는 이미 넝마처럼 너저분했고, 고급 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은 색이 누렇게 변해 처음의 그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네이놈!! 명신이 거기 있느냐!" 방문 밖에서 들리는 호통 소리에 놀랐는지 소년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을 반이나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 내리며 명신이라 불린 소년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는데 지금까지의 행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지고있었 다. 반듯한 이마, 수려한 검미, 오똑한 콧날, 보기 좋은 턱선까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호감을 느끼게 할만한 외모였다. 하지만 옥에 티라고 한다면 소년의 눈빛이었 는데, 평범하기에도 약간 모자란 듯하게 탁한 눈빛이 그의 수려한 외모를 크게 깎아 먹고 있었다. "오늘은 또 뭐가 걸린거야? 어디 숨을 곳 없나!" 명신이 숨을 곳을 찾아 그 희끄무리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때, 이미 때가 늦었음을 대변해 주듯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있는 중년의 모 습이 명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녀석아! 네놈이 누구냐? 우리 한씨 가문 8대손 아니냐! 그런 네 녀석이 족보에 먹 물이 마르기도 전에 이런 집안 망신을 시키는구나!" 아버지의 질책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린 명신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작정 하고 배째라는 식의 고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버님도 참. 제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제가 이러는..." 하지만 그대로 듣고 있을 그의 아버지도 아니기에 명신은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 고 말허리를 잘릴 수밖에 없었다. "이...이 녀석! 뭘 잘했다고 말대꾸를 하려 하느냐! 불효 막심한 놈! 이제는 내 마지 막 방도를 취할 것이니 그런 줄 알거라!" 무엇 때문인지 크게 울화를 토한 명신의 아버지는 문을 부수어 버릴 듯 닫아 버리곤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사실 그의 아버지도 그럴만한 것이 한씨 가문은 대대 로 여타 가문을 압도하는 재지와 명석한 두뇌로 조선 팔도에 유명했었다. 호부 아래 견자가 없다고 했듯이 8대 손인 명신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4세에 천자문을 독파하여 수재로서 이름 높았다. 하지만 하늘이 한씨 가문을 시기했는지 십년 전에 일어난 일로 인해 한씨 가문은 골머리를 썩게 된 것이다. 바로 명신에게 일어난 변고 인데, 하늘이 어둡던 그날 감나무 아래에서 발견된 그는 머리를 다쳤는지 하루사이에 수재에서 백치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백치 또한 아니었다. 어렸을 적 배웠던 것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말하자면 6세에서 정신 적 성장이 멈추었다고 해야 옳다. 그 후로 명신은 무엇으로든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하 루를 넘기지 못하였고, 공부를 등안시 하여 매일 같이 마을의 동자들과 어울려 다니 며 장난만을 일삼았다. 처음에야 크면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 그의 부모님들도 그러려 니 했지만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름에도 나아질 기색이 보이지 않자 그의 부모님들 역시 고운 눈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부모들이 명신의 괴질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은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팔도에 난다 긴다하는 의원들은 모조리 불러 다 보여도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아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한양 8학군에 속하는 이 마을의 학구열은 유난히 높았는데, 옆집 개똥이는 네 살 때부터 명나라 말을 배운다 느니, 덕구는 다섯 살 때 천자문을 거꾸로 쓴다느니, 말이 많았기에 부화가 치민 명 신의 부모님들은 그가 빨던 엿으로 때려 가면서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 겠는가 이미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었으니... 소귀에 경 읽기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신은 자치 기, 제기차기, 비석차기 등으로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만을 일종의 자부심으로 가지 고 있을 뿐이었다. 예상외로 몇 마디의 언짢은 소리로 상황종료가 되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쉰 명신은 서탁에 올려진 제기를 들고 대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헤. 학업은 몰라도 제기차기는 날 따를 자가 없지!" 명신은 평소처럼 마을의 나이 어린 동자들과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학업에서는 언 제나 남들과 비교가 됐지만 이쪽의 세상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제기 가 명신의 발 위에서 춤을 출 때면 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게 제기 차 는 기술을 배우고자 온갖 아양을 떨어왔다. 최소한 이 좁은 거리에서는 그가 왕이었 던 것이다. "흠! 저 아이 인가?" 돌담에 숨어서 제기차기 하고있는 명신을 지켜보는 이 남네는 누구인가? 나이는 약 마흔 정도에 각진 얼굴을 하고있었다. 키는 약 6척(180cm)정도였고, 미간에 내천자 가 뚜렷하게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나 머리 굴리는 직업을 가진 듯 하다. 그의 평범 한 얼굴에서는 별다른 특색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그의 두 눈을 보라. 그야말로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혜지를 담고있는 눈빛이었다. 모든 모습을 종합해본 결과 마 치 공돌이의 기도와도 같았다. 훔쳐보기만 하던 사내는 제기차기에 여념 없는 명신에 게 다가갔다. "백만스물하나, 백만스물둘, 백만스물셋...." 이 엄청난 숫자가 제기를 차는 숫자인 듯 했는데, 일반인이 제기를 백만번 차려면 십 수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멀리서 있었기에 몰랐던 사내는 내심 놀라면서 명신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야 네가 한명신이라는 아이 맞느냐?" 명신은 제기를 계속차면서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자기에게 말 걸어온 사내에게 보내고 있었지만, 그 사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동공이 풀린 허무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쏘아보던 명신은 문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아씨! 어디까지 했지? 젠장... 처음부터... 하나. 둘. 셋...." '공든탑도 무너진다.' 라는 속담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명신은 별일 아니 란 듯이 계속해서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기를 백만번 차는 것이 별일 아니란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사내는 소매 주머니에 손을 넣었 고,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그 손에는 엽전 두냥이 들려있었다. "명신아 엿 좋아 하지 않느냐?" 이 사내는 심기 역시 대단했는데 한순간 명신의 심리와 반응을 꽤뚫은 것만 보더라도 과연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또, 이 사내도 사내지만 예상을 초월한 명신의 반응 역시 범상함과 거리가 멀었다. 몇 일 굶은 강아지가 따끈한 응가 발견하듯이 헥헥 거 리면서 뛰어 오는 것과 한치도 다른 모습이 아니었기에... "저 엿 정말 좋아해요!" "하하 그래. 얼마든지 사줄테니 아저씨와 잠깐 이야기좀 하자꾸나." "헤헤 좋아요. 좋아요!" 여기서 다시 한번 명신의 정신머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당 에 입당하기전 조선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모르는 사람 이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였지만, 명신의 반응은 그런 건 들어본적도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저씨... 그런데저..." "응 왜그러느냐?" "엿은 언제나 떡과 함께 먹어야 해요..." 머리를 다치면서 싸가지마저 상실했는지 한 수 더 뜨기 시작한다. 여기서 명신의 성 격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싸가지란 단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연 싸가 지란 무엇인가? '싸가지가 없다' 라는 말은 '사가지' 즉, 네 가지가 없다는 말로써 첫 번째 공경심, 두 번째 배려심, 세 번째 의젓함, 마지막으로 겁 대가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바라는 것도 많은 명신을 보며 어이 없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이곳은 팔도에 분점을 가지고 조선의 선남선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엿먹 어라 31'이다. 무려 31가지 다른 맛의 엿을 보유하고 있어서 누구나 자기의 입맛에 맞게 엿을 골라 먹을 수 있지만, 어른들은 엿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식으로 왜 비 싼 것을 먹느냐며 탐탁치않게 생각하기도 했다. 또 가끔 이와 함께 '단기인 떡집' 이 영업을 하는 분점도 있었다. 가게의 구석진 자리에 한 명의 남자와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명신과 정체 모를 사내였다. 엿을 정성껏 빨고 있는 명신을 보며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명신아 아저씨는 장영실이라고 한단다. 혹시 들어 봤느냐?" "아뇨" 명신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획득하자 더 이상 관심이 없는지 짧은 대답만을 하며 엿 을 빠는데만 모든 정렬을 쏟고 있었다. 스스로를 장영실이라 밝힌 이 남자. 조선시대 최고의 공학자로 유명한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세종대의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사 람이며 때때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 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임금이 사용할 가마를 제작하다가 실수로 파면되었 다는 것만 알려질 뿐이었다. 세종대왕도 인정한 조선이 낳은 천재 공학자 장영실과 천재로 잠시 살았으나 지금은 백치가 되어버린 명신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명신아 너는 혹, 공학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공학자요? 잘모르겠는데요?" 무성의한 대답이었지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장영실의 이야기는 계속되 었다. "아저씨는 그 공학자라는 사람인데 굉장히 재미있는 일을 한단다. 예를 들어 말이나 소가 없이도 마차가 움직이게 한다거나, 촛불이 없이도 방을 밝게 한다거나, 멀리 떨 어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다." "그게 정말이예요? 제가 바보가 됐다고 놀리는 건 아니시죠?" 공학자에 대한 설명이 명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조금은 적극적인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챈 장영실은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 지기 전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후훗 놀랍기도 하겠지. 네가 알고 있는 기술이라 봐야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거 중기정도 아니겠느냐? 하지만 그것은 백성들에게만 보편화된 것일 뿐, 지금의 조선의 진실 된 기술은 그 정도가 아니란다. 오죽하면 명나라에서도 우리 조선의 기술을 노 리고 있는 형편이지." "와! 명나라에서 도요? 옆집 개똥이두 명나라로 유학 간다고 명나라 말 배우는데 조 선이 더 발달했었다니 새로운 사실이네요. 그런데 그걸 왜 저에게 말하는 거죠?" 명신의 되물음에 살짝 웃어 보인 장영실은 또박또박 명신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오늘의 중심내용이 되겠구나. 사실 너희 아버님이신 한 대감께서 우리 공학원으로 부탁을 하셨단다. 바로 너의 괴질을 고쳐 달라는 것이었지. 지금까지 용 하다는 의원들도 마다한 너의 괴질을 우리 공학원의 비법으로 고칠 수 있을 듯 해서 말이다. 만약 성공만한다면 너의 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지식까지 이식 받게 되는 것이지." 장영실의 말에 큰 매력을 느꼈는지 빨던 엿을 내려놓았다. 그 동안 얼마나 백치라고 괄시를 받았던가?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학업을 이해 할 수 없었고, 사고만 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마당에 자신의 괴질을 고쳐 준고 엄청난 지식가지 가지 게 해준다고 하는데 귀가 솔깃 안 할 수 가 없었다. "그럼 절 똑똑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죠?" 명신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단다. 공학원에서는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내일 정오에 만나서 가꾸나. 나는 오늘 시간이 여유롭지 못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 것 같거든? 그 럼 돌아가서 아버님께 안부나 전해다오." "네! 살펴가세요!" 과연 공학원이라는 곳에서는 명신의 괴질을 어떻게 치료할지 두고 봐야 할 일 이었 다. 다음날 아침 자신의 괴질이 고쳐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밤잠을 못 이루던 명신은 밤 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지 해가 떠오른지 오래였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 다.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입맛을 다시며 몸을 굴리고 있었다. -뒹굴뒹굴. 쿠당! "쩝쩝...뭐지 이 맛과 냄새는..." 뭔가가 축축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묘한 냄새가 명신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러나 잠에 서 덜깬 명신이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만 했다. "으아악! 제길 요강 엎었다! 퉤퉤! 아침부터 재수가 없을려니 요강을 다 엎는구나!" 불길한 예감이 명신의 등줄기를 흐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기에 애 써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위해 생각을 바꿨다. "자고로 응가와 오줌(?)은 길한 징조라고 했으니... 신경쓰지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한 명신은 밖에서 마당을 쓸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마당쇠를 불렀다. "여봐라! 돌쇠 게 있느냐?" "네 도련님! 쇤네 여기 있습니다요!" 명신 집안의 고성능 마당쇠인 돌쇠였다. 어려서부터 명신의 뒤치닥거리를 해온 착실 한 일손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돌쇠는 기실 옆집의 개똥이 동생 쇠똥 이를 사모했는데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을 받아온 개똥이와 쇠똥이의 눈에 무식한 돌쇠 가 찰리는 없었기에 상사병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녀석이었다. 사실 무식함이야 명신도 만만치 않지만 그는 배경이라도 대단하지 않는가? "우선 좀 씻고 아버님께 문병인사나 올리도록 하자." "저...문안 인사 아닙니까?" "한끝차이 가지고 자꾸 이럴래? 니가 상전이냐 내가 상전이냐?" "도련님이 상전이시죠. 헤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사라진 돌쇠가 잠시 후 가지고 온 것은 세숫대야와 팥을개서 만든 비누, 그리고 새끼줄이었다. 새끼줄을 보고 의아해진 명신은 돌쇠에게 물었다. "돌쇠야 이 새끼줄은 뭐시냐?" "헤헤.. 도련님은 그것도 모르십니까? 새끼줄에 비누 묻혀서 박박 문지르면 아주 깨 끗하게 씻겨 집니다요!" "오오! 그렇단 말이지? 네 녀석도 이것을 써서 씻느냐?" "당연하구 말굽쇼! 이 뽀얀 살결을 보이시죠?" 당연한 것을 물어 본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을 하는 돌쇠였다. 이 대화만 들어 보더 라도 참으로 비범한 주인과 하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있었다. 명신의 괴질은 전염 병인 것일까? "그래 알았다. 넌 그만 가서 일보거라." "헤헤 깨끗이 씻으십쇼! 귀 뒤쪽도 잊지 마시고요!" 평소처럼 당부의 말을 잊지 않은 돌쇠는 빗자루를 들고 쪽문으로 사라졌다. 일다경 (15분)이 지나자 세면을 마친 명신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침 문안을 올리기 위해 발걸 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놈의 집은 참으로 컸다. 방이 99개를 넘어가면 역적으로 몰린 다 하니 그보다는 작겠지만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아버지가 있을 사랑방 앞에 도착했을때 한대감은 뭐가 그리 답답한지 곰방대를 손에서 놓질 않 고 뻑뻑 연기만 뿜어댈 뿐이었다. "헤헤 아버님 접니다!" 명신의 기척을 들은 한대감은 명신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명신이 왔느냐? 그건 그렇고 네 녀석의 얼굴이 왜 그런고?" "헤헤헤. 뽀샤시 합니까요? 아버님도 한번 해보시지요! 새끼줄에 비누를 묻혀서 얼굴 을 문지르면 이렇게 됩니다요!" 그의 말을 들은 한대감은 손에든 곰방대로 명신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네녀석의 낮짝은 놋쇠로 만들어 졌느냐? 새끼줄로 얼굴을 닦는 게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이냐 이놈아!" "아얏! 도..돌쇠가..." "닥쳐라! 허어! 과연 이런 녀석이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있을지... 정녕 옛날이 그립 구나. 옛날이!" 명신은 한대감의 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줄로 인하여 따끔거리는 얼굴만 만지고 있었다. 명신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의 손해라는 것을 십년동안 체험해온 한대 감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그 답답함을 대신했다. "그래, 어제 장공을 만났느냐?" "네 아버님!" "네가 들은바와 같이 너의 그 괴질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제발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 "헤헤헤. 걱정도 유분수시죠." "유...유분수...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네 어미에게는 잘 말해 놓으 마...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만..." 명신은 잠시 어머니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지 흠칫하는 모습이었다. "과연 올해 안으로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아무튼 잘 다녀오거라." 한대감은 부인 생각만 하면 불안한지 식은땀을 닦다가 사랑채로 들어가 버렸다. 명신 은 '엿먹어라 31'에 정확히 정오가 되어 도착 할 수 있었다. 장영실은 기다린지 꽤나 된 것처럼 가게 한쪽 구석에서 엿가락을 빨고 있었다. "저저... 저나이 먹어서 저러고 싶은가?" 하며 사돈 남말 하듯이 중얼 거려 본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괴질을 고쳐준다는 사람 에게 대놓고 쓴말을 할 수는 없었던 터라 생각을 숨기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저왔어요!" "명신이 왔구나. 오늘은 그다지 지체할 시간이 없단다. 연구실에서 사람들이 기다리 고 있거든? 서둘러 가자꾸나" 장영실의 재촉과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가자 점원이 끌고 오는 검은 말이 보였다. 대단 한 명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장영실과 명신이 타기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어 보이는 말 이었다.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탄 명신은 말을 타는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3)공학원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명신이 태어나서 말을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망아지는 등뼈에는 송곳이라도 박아 놨는지 명신의 꼬리뼈로 엄청난 고통이 엄습하고 있었다. 반 시진(한시간)정도 말의 등위에서 고초를 겪던 명신은 장영실과 엄청난 크기의 대문 앞에 서게 되었다. 대문은 붉었으며 옷 칠을 한 듯 윤이 나고 있었고, 그 견고함을 자랑하는지 우람한 두께를 보여 주고있었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무장포졸들이 경계를 서있는 것으로 봐 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무슨 문이 이렇게 커요? 여기가 궁궐이라도 되나?" 명신이 느끼는 대로 이 곳의 규모 역시 상상을 뛰어 넘었는데, 담을따라 담끝을 보려 면 거의 소실점이었다. 규모에 놀라워하고 있던 명신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장영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여기가 경복궁이다. 우선 호패로 너의 신분을 확인한 후 함께 들어가자꾸나." "와아! 역시 궁궐이었군요! 임금님이 사는 곳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우리 집보다 훨씬 크네요." 명신은 잠시 호패 확인을 한 후 장영실을 따라 경복궁 내로 들어갔다. 전각 몇 채를 지나 들어가니 현판에 '공학원'이라 쓰여져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보였다. 이곳이 명나라를 앞선다는 기술이 개발되는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지만 현판에 그리 쓰여져 있었으니 잘못 찾아 온 것은 아니었다. 그 규모에 실망한 표정을 짓는 명신을 보며 장영실이 입을 열었다. "훗! 겉만 보고 실망하느냐?" 자신의 생각을 들킨 명신은 중요한 비밀이라도 들켜버린 듯 깜짝 놀랬다. "헉! 공학자 때려치우고 점쟁이를 해보시는것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네 얼굴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없는 소리 하 지 말고 들어가자꾸나." 명신이 자신의 얼굴을 이상하다는 듯이 만져보고 있을 때 장영실은 전각앞에서서 누 군가를 불렀다. "이리오너라!" 허공에다가 대고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장영실이 명신의 눈에는 약간 실성한 사람처 럼 보였다. "헤헤... 아저씨가 저보다 더 심한 것 같네요. 누구 집 대문 앞도 아니고 전각 앞에 서 이렇게 부르면 누가 뛰어나와서 '뉘신지요' 라고 말할 것..." 전각의 반응 때문에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장영실공 음성 인식 완료. 인증 되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덜컹 기계적인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문이 자동으로 열린 것이었다. 그리고 열린 문 안쪽으로는 또 다른 철로된 문이 보였는데 보안을 위한 이중문 인 듯했다. 철문의 옆에는 빛나는 단추들이 붙어 있었다. "와! 정말 신기한 문이네. 말만하면 열리는 문이라니. 그리고 또 이 빛나는 단추들은 뭐예요?" "하하 녀석 잘 보거라. 이 단추를 이렇게 누르면..." 장영실이 단추을 누르자 갑자기 철로된 문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열렸고, 그 안쪽으 로 너댓명이 서있으면 좁을 만큼의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에? 이 작은 방은 뭐죠? 이렇게 좁은 방에서 뭘 한다는 말이예요?" "녀석 거참 궁금한 것이 정말 많은 녀석 이구나. 곧 알게 될테니 잔소리 말고 냉큼 들어오거라." "아..아네." 명신이 그 작은 방으로 들어오자 장영실은 안쪽 벽에 붙어있는 여러 빛나는 단추 중 하나를 눌렀다. 잠시후 '윙'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고 명신은 잠시 어지러움을 느 끼게 되었다. "지진 인가봐요! 땅이 꺼지는 듯 한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철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렸고, 명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경악할 만한 것이었으니... 앞으로 쭉 이어진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 옆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물체들을 들고서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모습들 이었 다. "으에엑! 천장의 눈부신 불빛들. 이것들이 다 뭐예요? 그리고 대체 여긴 어디죠? 문 이 닫혔다가 열리니 세상이 변해있다니! 내가 도깨비 소굴에라도?" 장영실은 명신의 반응을 즐기기에 여념 없었다. 천재들은 약간의 괴상한 성격을 가진 다고 했는데 장영실 역시 그런 부류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여기는 경복궁 지하란다. 경복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일급기밀이기에 아는 자 들은 여기에서 공학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이나 공학자들 뿐이지. 방금 네가 타고 내려 온 것은 '상하왕래거' 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곳까지 우리를 내려 주는 기기이지. 이 정도에 놀라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 명신이 놀라움에 빠져 입조차 못 다물고 허우적 거릴 때 그를 건져 올리는 장영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넋빼고 있지말고 빨리 따라오거라. 다들 준비하고 있으니..." "준비요?" 명신은 궁금했지만 그냥 잠자코 장영실을 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명신은 여러 가지 실험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명신의 짧은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를 못할 것들 뿐이었 다.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상자들. 금속의 실타래가 감겨서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들,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유리관들이며, 명신은 정신이 아찔하여 아무런 할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사방의 기물들을 구경하며 걸어가던 명신은 장영실의 등에 부딪치며 정신을 차렸다. "명신아 여기란다." 꽤나 큰 문 앞에 서게된 명신은 또 놀랄 것에 대한 대비인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에야 장영실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문안으로 들어가자 또 다른 작은 방이 보였 다. 그 방은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십여명의 사람들이 하얀 옷차림 으로 이곳저곳에서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각각 번쩍번쩍하는 도깨 비불이 들어 있는 상자가 있었는데 그 도깨비불들은 글을 이루기도 하고 형상을 이루 기도 하였다. 이때 왼쪽의 큰문이 열리며 중년의 대머리 아저씨가 걸어 나왔다. "오! 이 아이는 장공의 숨겨놓은 자식인가?" 중년의 말에 장영실은 머리에 핏줄을 새우며 또박또박한 말투로 그에게 톡 쏘듯이 말 했다. "원장님 이아이는 한.명.신 이라고합니다. 영의정어른의 자제 분이시죠." "허허... 이보게 뭘 그리 기분 나빠하는 겐가.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었네." 라고 변명을 한마디 늘어놓은 원장은 명신의 얼굴을 살펴보며, '아하! 바보가 됐다는 그녀석?' 이라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명신에게 들키기 전에 재 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장영실공. 아무튼 영의정 어른의 당부도 있고 하니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네. 여기서 실패를 한다면 영 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야." "제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잘 될 일이겠습니까. "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일세. 개발된 후 처음 시도해보는 '지식 이전술' 그 누가 결 과를 알겠나." 명신은 '지식 이전' 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식' 이라는 단어와 '이전'이라는 단어의 조합이라는 것 이상의 뜻을 알 수 없었던 명신의 입장에서는 답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럼 전 뭘 하는 거죠?" "명신아 지금부터 아저씨가 하는 이야기 잘 듣거라. 네가 이해를 할 수 있을지는 모 르겠으나 간단히 설명을 해주마. '지식 이전술' 이라는 것은 너의 머리 속으로 엄청 난 양의 지식들을 공학기술을 통하여 주입을 하는 것이란다. 한마디로 너는 익히지 않아도 엄청난 지식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지. 성공하게 된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널 더이상 바보라 업신여기지는 못할게다." "그렇다면 전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똑똑해 질 수 있다는 건가요?" "허허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구나."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똑똑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 명신은 지난 10년간의 서러움을 떨쳐 버릴 수 있음에 기뻐 어쩔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때 연구원의 옷차림 즉, 흰 색 명주옷에 머리를 두갈래로 댕기 땋은 여성이 방의 중앙에 위치한 투명한 방에서 나왔다. 계란형 얼굴에 반달의 눈썹 앵두같은 입술이 전형적인 조선의 미녀 상이었 다. 그렇지만 지적인 여성이라 그런지 차가운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원장님 모두 준비됐습니다. 지금 시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세상이든지 미녀들에게 약한 것이 중년이던가? 보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녀 에게 말하는 원장이었다. "오! 이낭자 였군. 이쪽은 준비가 다되었네. 장영실공? 서둘러 명신을 준비시키게. 이낭자는 나랑 차나 한잔 어떤가?" 관장의 생활이 언제나 저런지 그의 행동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장영실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자 명신아 준비하자. 저쪽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너 라." "전 명나라산 최고급 비단옷 아니면 안입는데요." "잔소리 말고 빨리 들어가거라.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줄 아느냐?" 한마디했다가 본전도 못 뽑은 명신은 더 이상 군소리 못하고 장영실이 가리킨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명신 은 마치 흥부네집의 넷째 아 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 단순한 흰색 두루마기에 목만 내민 듯한 형상 이었다. 그의 모습을 본 장영실은 감탄을 하고 있었다. "꽤나 잘어울리는구나. 마음에 드느냐?" 이를 보고 어울린다고 하는 장영실을 보아 하니 그의 미적 감각도 절대 적임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사람 놀립니까! 이게 뭐예요? 한벌짜리 흰색 포대를 옷이라 하다니... 그냥 보자기 가운데 구멍내서 입은 것 같구만!" "녀석 거참 말이 많구나. 다 입었으면 이 시전실 안으로 들어가서 침상에 누워 있거 라." "저방요? 저혼자 들어가는 겁니까?" "왜? 무서우냐?" "설마 대 한씨가문 8대손이 겨우 이런 것에 겁먹겠습니까?" 명신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당당하게 유리로 이루어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 약간 모자라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고 하는데 명신 역시 그러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또 한번 놀라야만 했는데 안쪽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거울인 것이었다. "오오. 이런 방이 있다니. 밖에서는 안이 보였는데 여기선 밖이 안보이잖아? 여기 이 침상이겠지?" -철컥철컥. 침상에 몸을 뉘이자 갑작스레 사방에서 철고리가 튀어나와 명신의 사지를 묶었고, 그 는 옴싹달싹 못한채로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었다. "장영실 아저씨! 침상이 절 결박했어요! 살려줘요!" 이때 방안 어디에선가 장영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명신아 조금만 참거라 시술중에 움직이면 안되어서 그렇단다. "어라? 사방에서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네? 그렇단 말이지?" 지금 명신이 결박당해 누워있는 시전실의 밖에는 어느새 차를 한잔하고 온 원장이 장 영실을 바라보며 아까와는 다른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보게 장영실공. 과연 이일이 성공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후우.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조선의 기술을 남기지 않 으면 안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다행스럽게 영의정 어른의 부탁이 때맞게 있으셨으니 영의정 어른이나 저희 공학원이나 양쪽이 모두 좋게 된 것이지요. 애초부 터 조선의 과학기술들을 타국의 이목으로부터 피하며 후세에 전하기는 불가능 한 것 이었습니다. 이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엔 말이죠." "그러게 말일세... 이제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부디 왜국이나 명나라가 이 일을 눈치채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만약 비 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명신이나 공학원이나 안전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극단 적으로 생각한다면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릴 수도..."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난 끝까지 지켜 볼 수 없을 것만 같네. 일이 끝나면 나에게 알려주게나. 건강하지 못한 중년이 이런 긴장감 흐르는 일을 지켜본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거든..." 어줍잖은 핑계를 대며 원장이 자리를 슬쩍 피할 때 주의를 집중시키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지식 이전 술 준비 완료 상태. 연구원 여러분과 공학자 여러분은 자신의 자리에 위 치해 주십시요.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연구원들과 공학자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들 자신의 자리에 위치했는지 여기저기에서 아무런 이상 이 없음을 뜻하는 소리가 들 려 오기 시작했다. 그와 때를 맞추어 명신이 누워있는 침상에서 수많은 기기 들이 나 오고 있었다. 머리가 놓여 있는 침상부분이 열리자 그곳으로 부터 하나의 투명한 관 이 밀려나와 명신의 백회혈에 흡착되었고, 목부위가 뜨끔함을 느끼며 무엇인가가 찔 러 들어옴을 느꼈다. "아야! 찌르기전에 말이라도 해주면 안되나!" 명신이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사방에서 지식 이전술의 진척 상황을 보 고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뇌용 연결관 흡착. "연결관 흡착상태 양호!" -백회혈 연결관 흡착. "백회혈 연결관도 흡착 상태 양호합니다!" -마취제 투입. "3할 희석 마취제 투입! 4할 희석으로 증가!" 마취관의 상태를 담당하던 연구원의 보고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신의 몸은 빠른속도 로 마취되고 있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 진다. 왜 이렇게 잠이오냐. 이게 마취라는건가? 아버님의 꿀단지 훔칠때 쓰면 되겠군.. 점점 의식이..." "이전 대상 완전 마취확인!" 명신이 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하자 '지식 이전술'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의 앞에 위치하고 있는 수많은 화면들은 명신의 신체 기능 변화를 한눈에 보 여 주고 있었고, 연구원들은 자판을 두들기며 명신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 었다. -3초후 백회혈 개방합니다. 모든 지식 이전준비를 완료해 주십시요. -셋 "백회혈 개방준비 완료!" -둘 "대뇌 영양소 공급준비 완료!" -하나 "이전 대상 신체 상태 이상무!" -백회혈 개방. -백회혈과 대뇌 연결통로 개방 연결 통로가 밝은 빛을 내며 개방되자 백회혈이 열림과 동시에 지식의 이전이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뇌에 걸리는 과부하를 막기 위해 대뇌 연 결관에서는 적당량의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었다. 인간이 사용 할 수 있다는 5푼의 뇌 사용률을 훨씬 뛰어 넘어 8할에 육박하는 뇌 사용률을 가능 하게 해주는 '지식 이전 술'이 최초로 경복궁의 지하 공학원에서 시전 되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백회혈로 지식 이전중. 종료 예상시간 1다경(15분)... -대뇌 영양소 공급유지. 이때 시전실 밖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장영실은 긴장감에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 고 있었다. "일단 출발은 좋군. 하지만 아직 위험 시점이 아니야. 종료 과정이 정말 중요한 고비 인데...과연 저 아이가 이걸 견뎌 줄 수 있을지." 시전실 안의 명신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죽은 듯 누워만 있었다. 또 이 계획 에 참여한 모든 공학자들과 연구원들의 긴장한 눈길들이 명신에게 맞추어진 채로 어 떤 이에게는 빠르게, 어떤이에게는 느리게 일다경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종료 3초전 2초전.... 종료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장영실은 아무런 변고가 없었음에 한숨을 내쉬 고 있었다. 허나 그의 방심을 비웃는 운명의 신이 있었는지 사방에서 경고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아니! 이게 무슨일인가? 모두 상황 보고 하도록!" 당황한 장영실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연구실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있어 연구원들과 공학자들로 부터 수많은 보고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식 이전종료 직전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심박수 증가와 함께 지식 이전 대상이 불안합니다!" 연구원들의 보고에 얼굴이 납빛이 된 장영실이었다. 그러나 절대 적으로 냉정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장영실이기에 다른 연구원들이나 공학자들과 같이 당황할 시간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 자기 위치 확보하고 상황 강제종료 명령 시행하라. 지식 이전 대상 상태 확인 할 것!" 굉장한 긴장감이 연구실을 휘감았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있는 명신을 보자 장영실은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옆에있 는 공학자에게 말했다. "상황 보고하라." "지식 이전 대상 상태 양호, 심박수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아직 혼수상태입 니다! 자세한 것은 정밀 검사를 해 봐야 하겠습니다." 장영실은 명신의 생명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서인지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알겠네... 지식 이전시 기현상에 대하여 보고하게." "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전 대상체로 부터 발출 된 엄청난 힘이 백회 혈 연결통로를 밀어냈습니다. 뇌공력과도 비슷한 힘이었지만 조금 그 형태를 달리하 는 힘이었습니다. 수치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륙에서 전해지는 내공과 거의 일치 하지 만 같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장영실에게 보고를 하는 공학자 역시 자신의 보고에 자신을 가지지 못했는지 불안한 기색이었다. "어찌 명신에게서 그런 힘이 방출 될 수 있단 말인가?" 장영실이 명신에게서 발현된 기현상에 대해 혼란스러워 할 때 한 꾸러미의 문서 더미 를 관제실에서 안고 나오던 공학자가 그에게 말했다. "여기 이전 대상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자네 여기 신참인가? 그것을 지금 다 읽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축약해서 보 고하게!" 장영실이 답답하다는 듯이 호통을 치자 움찔하던 그 공학자는 띄엄 거리며 보고를 하 기 시작했다. "대..대상의 건강은 양호합니다.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지식 이전 역시 성공적으로 완료한 상태입니다. 종료 직전에 기현상으로 인하여 중지가 되었지만 실 질적인 지식 이전은 완료 됐다고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천만 다행일세... 그렇다면 공학자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고 명신이 깨어날 때까지 주시하라고 하명하게나" 그후로 몇 시진동안 공학자들에게 모든 작업을 세밀하게 지시한 장영실은 손으로 이 마를 짚으며 공학원의 밖으로 걸어나갔다. 짧은 시간동안 정신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 았는지 그의 안색은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로부터 명신이 깨어난 것은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가 깨어났다는 보고 를 받은 장영실과 원장은 서둘러 명신이 몸조리를 하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장영 실이 방문을 열자 금침에 몸을 뉘인 체로 멀뚱이며 천장을 보고 있는 명신을 볼 수 있었다. "명신아 정신을 차렸느냐?" 장영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엄살을 피웠다. "에고 죽겠네요. 또 머리는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지식 이전술인가가 끝났는데도 뭐 달라진 것이 없는 걸요?" 명신의 말에 이 자리에 있던 공학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 답을 구하는 눈빛이었지만 모두 고개를 내 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영실이 침울한 목 소리로 정적이 흐르던 분위기를 깼다. "정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냐? 혹 뇌공력의 운용 방법이라든지, 아니면 화 공학 공식등이라도 말이다."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고 던진 질문에 명신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멍청 한 눈빛만을 보내고 있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장영실은 원장과 복잡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원장 역시 장영실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명신에게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전하고서 방을 나갔다. 원장이 나간 것을 확인한 장영실은 명신을 향해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명신아 아무래도 이번 지식 이전술은 실패로 돌아간듯 하구나... 내 더욱 노력을 해 서 널 꼭 정상으로 돌려주겠다고 약속할 테니 너무 실망치 말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명신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라고 위로를 하고 싶은 장영실이었지만 마땅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명신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배고픈데 밥 좀 주시면 안되나요?" (4)태극청심단 공학원에 다녀온지 일주일정도 지난 후. 모든 생활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명신이었 다. 몸도 정상이고, 머리야 원래 나빴고, 이제 뭘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 중이었 다. "일주일 동안 방에만 뒹굴 거리니 배꼽 아래에 곰팡이가 피는 듯 하군. 그나저나 지 식... 뭐였지? 그것마저 실패한 이상 이젠 어떻게 얼굴을 들고 이 집안에서 산단 말 인가. 아버지 볼 면목도 없고, 어머님도..." 명신의 어머님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제 짬을 내서 명신의 어머님에 대한 짧은 소개를 하겠다. 명신의 어머님이 집을 나가 신지 올해로 3년 되는 해이다. 3년 전 명신에게 소학을 가르치기 위해 열을 올리다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하여 그의 괴 질을 치료 할 만한 천고의 신물을 구하기위해 집을 나선 것이었다. 팔도를 떠돌아다 니며 고생을 할 정도의 애절한 모성이었는데 간혹 집으로 노자가 모자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 3년전 그날 이후로 명신도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웅성 웅성 집 밖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뭐야? 약장사라도 왔나? 흐흐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지" 집밖으로 나가자 십여명 가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놀라워하는 표정이 보였다. 자뭇 심각한 표정이었는데 명신이 다가가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저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지리산에서 10년, 계룡산에서 15년, 소백산에서 8년의 수련을 마치고 깨닳은 바가 있 어서 이 자리에 오게된 도사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 제가 만든약! 이약! ' 태극청심단'을 여러분께 소개 하기 위해서 입지요!" 저 말투를 들어보라. 돌팔이 약장수의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아무리 잘봐줘도 서른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사람이 산에서만 삼십년 넘게 보냈다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이약으로 말씀 드릴꺼 같으면, 한알만 복용하면 만병이 고쳐지고, 두알 복용하면 불 로불사! 세알만 복용하면 신선이 됩지요. 단! 보름날에 복용해야합니다! 아시겠습니 까?" 사기꾼의 기질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는데 보름이라 말함은 팔아먹고 도망갈 시간을 벌어보자는 속샘이었던 것이다. 그의 설명을 조금 들어보더니 사람들 또한 이런 약장 사에게 식상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이 이성 적인 판단력을 지닌 신 조선인들이었던 것이다. 약장사가 사람들의 따분한 듯한 표정에 난처해 하고 있을 때 구경을 하던 한 아주머니가 외쳤다. "만병이고 머고 필요 없고 그거 먹으면 우리 아저씨 기력도 돌아오우? 요즘 영 힘을 못써서 말야!"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우물쭈물 하는 약장사의 모습으로 봐서는 아주머가 원하는 그 대단한 기능이 없는 듯 했다. 아니면 아직도 숫총각이라서 아주머니의 찐한 농담 에 당황한 것일까? 이때 동네 영감 1번이 물어본다. "이보시게! 자네는 거 불 뿜고, 몽둥이로 몸 때리고, 솥뚜껑을 손으로 부러뜨리는 것 들은 안하나? 난 그런걸 보고 싶은데?" 영감 1번이 말을 마치자 돌연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 영감 2번 등장했다. "김영감. 쯔쯧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그런걸 하겠어? 요즘은거 머시냐 북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걸 한단 말이다! 세대차이나서 김영감이랑 못 다니겠구먼." 발끈한 동네 영감 1번인 김영감. 지팡이를 들고 영감 2번에게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 로 뛰어들었다. 이에 맞을쏘냐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팡이를 피해 김영감을 옆으로 흘 렸다. 김영감도 지팡이와 몸이 하나가된 신지합일의 경지로써 우습게 볼 실력은 아 니었지만 영감 2번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네이놈 박가야! 네놈이 내가하는 일에 매번 시비를 거는데 두 살차이가 세대차이란 말이냐? 오늘 네놈이랑 끝장을 보겠다!" 영감 1번이 분기충전 하여 몸을 다시 날렸다. 이번에는 영감 2번, 즉 박영감이 당황 했는지 완전한 방어를 하지 못했다. 지팡이가 어깨를 스친 것이다. 하지만 칼로 베인 듯한 이 상처는 왠 말인가? 검기? 지팡이로 했으니 지기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놀라 울 따름이었다. 조선에 저런 숨은 기인이... "큭! 김영감 제법이군. 그래 오늘 누가 죽나 해보자!" 이번엔 박영감이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면서 김영감에게 짓쳐 들어가고 있었다. 영 감 둘이서 이 뭐 하는 짓들인지는 몰라도 두 영감은 서로의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을 의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나 주변에 있던 모두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황 당한 표정이었다. 곧 약장사가 아무런 것도 보여줄 기미가 없자 사람들이 한둘씩 떠 나가기 시작했고, 약장수는 비통하게 가는 이들을 붙들고 있었다. "이봐요! 가지말고 내말 좀 들어봐요! 내참 미치겠네. 제길 내가 차력사냐? 딴따라 냐? 우리 조선백성들은 이런 틀에 박힌 생각을 고쳐야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력도 좀 배워두는건데." 결국은 명신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서 약장수의 신세한탄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명신 의 호기심을 누가 말리랴... "약장수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 말이 정말 이예요?" 약장수는 사람들이 사라진 곳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명신에게 눈을 돌렸다. 명신의 질문에 방금전의 비굴한 표정을 바꾸더니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야 네가 아무리 얼마 안 살았다고 하지만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나쁜 곳이 아 니란다. 어른 말은 믿어야 하는 거야 알겠느냐? 너 혹시 이거한번 먹어 보고 싶어서 그러는것 아니냐?" "네! 먹어 보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고 있는 약장수를 보니 기분이 나빴지만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고 싶은 것이니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얌전히 있었다. "너 그런데 돈 가진 것 좀 있느냐?" "아뇨 없는데요." 자신의 쌈지를 뒤적이던 명신의 손에는 먼지만 한가득 들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보고있던 약장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제길 개털이잖아. 번드르르 한 옷 좀 입고 있다고 굉장한 집안의 자손인줄 알았더니 만. 그래도 뭐 이게 뭐 제대로 된 약도 아니니 몇 개줘서 보내야겠다. 예전에 주웠 던 거나 줘버릴까?] 이렇게 생각한 약장수는 자신의 소매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세 개의 환단을 명신에게 건내주었다. "이 아저씨가 특별히 널 귀엽게 여겨 공짜로 주마. 넌 횡재한거야! 자 꼬맹아 여기 세알이다. 이걸 다먹으면 말야 신선이 되어 버린다구! 즉, 부모님과 헤어져서 평생 만날 수 없는곳으로 가버린다는 말이다. 천외도경이란 곳으로 말이지. 부모님이랑 오 래오래 살고 싶지? 그러니 세 알 다 먹지 말고, 한 알 만 복용 하고 나머지는 친구들 에게 주든지 하거라. 그럼 이 아저씨는 간다. 제길 오늘 장사도 망쳤구나." 약장수는 뻔뻔하게 선심 쓰는 척하며 공갈약 세 알을 주고선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명신은 자신이 받은 세알의 알약에만 정신이 팔려 약장수가 가는지 오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약의 이름이 거 머시냐. 태극청심환? 청심단이었던가? 아무튼 그것이란 말이지? 신선이라... 이 기회에 신선이나 확 되어버려? 아니지 그렇게 된다면 어머님, 아버님 이 얼마나 슬퍼 하실까? 그럴 수야 없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세 알의 환단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지 고심하던 명 신은 한참이 지나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는지 쌈지에 넣어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오후가 되자 따뜻한 햇살이 명신을 감싸주려 했 지만 안타깝게 먹구름이 잔뜩 끼는 바람에 먹구름만이 명신을 향해 인상을 쓰고 있었 다. "아 벌써 늦여름인가?" 한손으로 턱을 궤고 마루에 앉아 하늘과 눈싸움을 하던 명신은 문득 어제 만들어 놓 은 방패연이 생각났다. 아직 비는 오지 않고 바람이 적당하게 불었기에 연날리기에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헤헤. 오랜만에 연이나 날려볼까? 내가 또 왕년에 연날리기 일인자 아니었겠어?" 명신이 서탁위에 올려져 있는 기이한 문양의 연을 들고서 마당으로 걸어 나왔을 때 집안은 한바탕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가솔들이 방, 마당, 부엌 할 것 없이 이 잡듯 뒤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명신은 아궁이에 얼굴을 박고 뭔가를 열심히 찾고있는 돌쇠를 불렀다. "돌쇠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왜 이렇게 집안이 어수선하냐?" "저..그게 마님께서 집문서와 땅문서를 모아놓은 다발이 없어졌다고..." "엥? 설마하니 그 귀한 것을 누가 가지고 갔겠느냐? 곧 나올테니 나와 연이나 날리러 가자꾸나!" 명신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연을 앞뒤로 뒤집어 보이며 자랑하자 돌쇠가 크게 놀라 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럴 수가. 도련님 그연은!" "엥? 이 연이 왜? 어디가 잘못 만들기라도 했느냐?" "그..그게 아니라. 무..문서..." 돌쇠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 됐음을 느낀 명신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연을 바라 보 았다. 만들 때부터 종이의 재질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설마 이게 땅문서라는 것이냐? 설마 아니겠지. 아니라고 제발 말해다오!" 애써 자신이 저질러 놓은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던 명신은 돌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등뒤에서 분노로 인하여 가늘게 떨리고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명신이 네이놈! 네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아..아버님." 명신은 분노가 극에 달한 아버지에게 귀를 잡혀 끌려가며 이번에는 평소처럼 어영부 영하게 넘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랑채로 끌여와 거의 한 시진동안 매를 맞았건만 그의 아버지는 더욱 화가 치미는지 결국 해서는 안될 말 까 지 하고 말았다. "아무리 네 녀석이 매일 사고를 친다고 해도 감히 집문서와 땅문서로 연을 만들어? 에라이 고얀놈! 내 차라리 네놈과 의절하는 편이 나을 성싶다! 내 눈앞에서 당장 사 라지거라!" 아무리 철없는 명신이라도 의절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고 있었기에 평 소처럼 느긋한 자세로 웃어 넘길 수는 없었다. "아..아버님!" "돌쇠 뭣하느냐? 저놈을 당장 끌어내지 않고!" "아버님 너무하시옵니다! 소자 아무리 모자란다 하더라도 의절이라니요!" "더이상 듣기 싫다! 네발로 나가겠느냐? 아니면 끌려 나가겠느냐?" "흑흑... 정녕 아버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불초 아버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명신은 슬픔을 못이겨 대문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그러나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 던가. 뛰쳐 나가는 명신을 확인한 대감은 갑작스레 표정을 바 꾸며 뒤에 서있는 돌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 돌쇠야. 이정도면 녀석도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리겠지?" "아이구 그럼요. 대감 마님! 정말이지 생동감 넘치는 연기였습니다요!" "허허 부끄럽게 자꾸 나의 연기력을 띄워주느냐. 이게 다 네가 거짓문서를 워낙 잘 만들어서 속아 넘어 간 것이지." "헤헤 대강 만들어도 도련님이라면..." "아무튼 수고했다. 돌쇠야 고기반찬 먹은지 꽤됐지? 오늘 저녁은 거나하게 한번 먹어 보자꾸나. 저 녀석도 밤이 깊으면 돌아오겠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한대감의 계획아래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5) 낯선 천하로의 일보 서낭당은 언제나 처럼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을의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사 람들은 이곳을 애써 찾지도 않았고, 산으로 나무를 하기 위해 지나다니는 이가 아니 면 이곳을 찾을 필요 또한 없었다. 늦여름과 함께 마지막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먹구 름이낀 하늘은 어두웠다. 십년 전 그날처럼 말이다. 이제 비가 내리려는지 남동향으 로 부터 습기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서낭당의 감나무 역시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 했다. [...오늘이 상제께서 나에게 천상의 인을 내려 주시는 날이던가? 그 어린 소년 때문 에 승천은 하지 못했으나 상제께로부터 천상의 인을 받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아닌 가... 허허허 다늦게 여행이라니...] 명신을 살리기 위해 승천을 포기한 서낭신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있을 때 한 인영이 빠른 속도로 서낭당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다 미워! 아버님도!, 어머님도!, 돌쇠도!, 개똥이도!, 누렁이도!" 명신이 집에서 쫓겨난 슬픔에 무작정 달려온 곳이 바로 서낭당이었던 것이다. 아직 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가에 흐르는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내 오늘 신선이 되고 말리라. 이제 영영 아버님, 어머님을 보지 않을 거야! 어디다가 뒀더라." 안쪽 품에서 찾아낸 엄지 손톱 만한 태극청심단 세알이 명신의 손에서 이리저리 굴러 다니고 있었다. 어찌나 꼭꼭 숨겨 놓았는지 원래의 둥글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고 짚신으로 밟아 놓은 염소 똥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있었다. "이것만 먹으면 이제 난 신선이 되어서 이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리고 영원히 그 누 구의 눈치도 안보며 노닥거리면서 살수 있을 거야!" 단호한 결심을 내린 명신은 그다지 먹고싶지 않은 모양을 하고 있는 태극청심단을 입 안으로 훌쩍 털어 넣었다. 세알의 태극 청심단은 신기하게도 입안에 넣기가 무섭게 목구멍으로 넘어 갔는데 얼마 못 있어 뼈저린 후회를 해야만 했다. 그 맛이 가히 살 인적이었던 것이다. "으윽! 뭐가 이리 맛이 없는 것이 천하에 있냐! 제길 삼키기도 싫었는데 녹아서 흘러 목구멍을 넘어 가다니 엄청나게 찝찝하구나! 배에서 열도 나는 것 같고.. 이 망할 약 장수 상한 약을 준건지 배는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집나오기 전에 대변이라도 보고 나올 것을 배가 폭발할 것 같아!" 명신은 기분이 더럽고 죽을 만큼 배가 아픈 와중에도 오기로 할말 안 할말 끝까지 하 고있었다. "헉..헉....쓰읍...으윽..." 정말 아파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말도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을. 벌써 고통이 계속된지 두시진(4시간)...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 을 당하고 있던 명신의 기력은 이미 바닥났는지,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움찔거리고 만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날 죽여라! 빌어먹을 하늘아!" 어디서 욕할 힘은 남았는지 끝까지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였는데. 하긴 머리라도 나쁘면 끈기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쿠쾅!! 콰과과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늘이 명신의 욕지거리에 노발대발 했는지 명신의 머리위로 본적도 없으리만큼 엄청 난 벼락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뇌의 힘이 얼마나 거대했던지 공간 외곡 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잉 "이..이건 또 뭐야... 갑자기 이런 구멍이 생기다니. 혹시 이것이 신선이 사는 곳으 로 가는 문인가? 으윽...또 아직도 고통을 느낄 힘이 있는 건가. 저기로 들어가면 안 아플지도 모르겠다. 굴러가자!" -떼굴 떼굴 떼굴! 황당한 이론을 정립한 명신이 신비한 구멍으로 굴러 들어가 버리자 서낭당에서는 황 당함이 그득하게 차있는 서낭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이런! 어찌 저 소년은 나의 일을 이리도 방해한단 말인가! 십년 전에는 나 의 승천을 가로막더니 이제는 천상의 인까지 대신 사용해 버리다니...고얀!] 서낭신이 말하는 천상의 인이란 상제가 대신들에게 상으로 내리는 휴가증과 비슷한 것으로서 여러 차원의 신령들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켜 그곳을 경험하고 돌아 올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서낭신이 가야할 알 수 없는 차원으로 명신이 흘러들어가게 되었으니...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공간. 명신은 흘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공간에서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있었다. 지금 신기하게도 명신의 몸으로부터 꿈결 같이 오색 영롱한 오색의 빛이 발현되고 있었다. 바로 이 오 색의 빛은 서낭신이 전해 주었던 천년지정의 일부분이었는데 태극청심단이 명신의 단 전에 엄청난 자극을 주자 그로부터 명신의 단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잠잠하던 힘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애초 천년지정은 명신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 었다. 공학원에서의 이변 역시 외부로부터 자극이 밀려들어오자 천년지정이 명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기운을 일으키며 생긴 일이었던 것이다. 이제 발현이 막바지에 달했는지 그의 몸을 감싸던 오색기운이 모여 하얀 백색 빛의 작은 공이 형성됐고 아 랫배 쪽의 단전 부근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백색의 천년지정이 명신의 몸으 로 흡수되자 그의 체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극청심 단이 과연 약장수가 말한대로 천고의 기물이었는지 명신의 단전을 한순간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내력을 채워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일반인이 이런 경우였다면 오 장육부가 파괴되어 살아 남기 힘들겠으나 명신의 경우에는 태극청심단의 내력을 천년 지정이 완화해 주었기에 단전은 별무리 없이 그 엄청난 내력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으음...." [목이 탄다... 이런 목마름을 태어나서 느껴볼 수 있다니. 우물까지 가려면 꽤나가야 할텐데 에구 귀찮아. 그런데 단전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뭐지? 목이 좀 말라서 그 렇지 기분은 상쾌하군... 그런데 단전이라...단전이라니? 내가 이런 단어을 배운적이 있었나?] 눈을 힘들게 뜬 명신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태양의 느낌이 조금 이상한데? 평소보다 조금은 푸근한 느낌이야. 가을이 다 가 와서 그런건가? 그나저나 내 머리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이 생각들은 뭐냐... 에 구 찌뿌둥하다. 몸 일으키기도 힘들군." -부스스스..... 몸을 억지로 일으킨 명신의 눈에는 낯선 풍경이 가득 차 있었다. 거대한 감나무의 서 낭당은 온데간데 없고, 빽빽한 수풀 사이에 자신이 누워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나 무들은 조선에서 본적도 없는 기이한 모습이었는데 높이는 서낭당의 감나무에 버금 갔고,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헉. 내가 어제 정신을 잃었던 곳이 서낭당 아니었나? 그런데 이 보도 못한 나무들 과 여기는 어디란말이냐?"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난처해하고 있었다. 조 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지금까지의 일에 대하여 정리를 시작했다. "가만...가만...내가 약을 먹고 배가 아파서 뜅굴뜅굴 구르다가, 하늘에다 대고 욕을 하자 벼락을 맞았단 말야. 그런데 내 옆에 까만 구멍이 생겼고, 신선계로 들어가는 구멍이라 생각한 나는 굴러들어 간 것이지. 그리고 깨어보니 이곳이다 이거지? 맞나? 대강 맞군.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디냠 말이야. 이 보도 듣도 못한 나무들이 혹 탐라에 서만 서식한다는 나무들인가? 기온차로 인해서 육지에서는 자라지도 않는다는... 아 무튼 인가라도 찾아 봐야겠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 거리던 명신은 주변을 한번 더 둘러 본 후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 나마 깨닳을 수 있었다. "제길... 여긴 막막한 산중인데 이런 곳에 인가가 있을 리가 없잖아! 자... 한명신 침착하자! 머리를 굴려 보자고. 일단 물을 찾는 거다. 어느 곳에나 물가에는 사람이 살기 마련이지. 저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산길을 걸어가던 명신은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이 살던 조선과는 판이하게 달랐기에 점점 불안만 쌓여갔다. "이곳은 아무래도 조선이 아닌 것 같아. 조선이라 하기에는 나무의 품종이 너무 다르 단말야. 지금까지 보고된 바에 의하면 이런 품종은 존재하지도 않는군. 더 이상한 것 은... 내가 이런게 보고가 됐는지 않됐는지 어떻게 아냐는 건데... 그래도 뭐 조선보 다는 산길 찾아 다니기가 쉽군. 아! 저기 냇물이!" 명신이 물을 따라 걸어 내려오길 벌써 두시진 반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산이었고 주변의 경치는 나무의 수가 줄어들며 점점 돌산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결국 냇물의 끝까지 내려온 명신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냇물의 끝이 이런 절벽이라니! 빌어먹을. 상식을 깨는 곳이잖아. 어라. 그런 데 절벽속으로 물이 들어가다니... 이상한데?" 명신은 머리를 자라처럼 내밀어 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벽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 했다. "흠... 이 암산의 재질은 가공하기 좋은 사암이군. 가공하기 쉽다는 것은 즉 강도가 약하다는 말과 일치하고. 더욱 이상한건. 이런 사암으로 물이 흐르는데 사암이 물에 쉽게 깎이지 않는다는 거야... 물이 흘러 들어가는 곳의 암석 재질이 다른 곳과는 뭔 가 다른데? 아무래도 이건 인공의 흔적인 것 같아. 그렇다면 이 안쪽에 뭔가가 있다 는 것이 되겠군..."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놀랍도록 총명하게 결론을 내린 명신은 지체없이 암산의 벽 면을 따라 걸어가기 사작했다. 벽면을 따라서 오리 정도 걸어가자 역시나 예상대로 조그마한 동굴의 입구가 눈에 띄었다. 입구의 크기는 사람의 허리 정도의 높이였고, 벽을 따라 의식적으로 찾지 않는 한 그 입구는 눈에 띄지 않을 절묘한 위치에 숨겨 져 있었다. 즉, 시각의 사각지대. 사람의 위치와 보는 각도, 그리고 높이에 맞추어서 나무나 수풀 따위를 이동시켜 눈이 접할 수 있는 지점 차단시키는 위치였다. 명신 은 생각도 할 것 없다는 듯이 동굴의 입구로 발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이 넓어지는구나. 이제는 어른 세명이 나란하게 걸어도 될만 한 넓이인걸? 역시나 안쪽에서 빛이 세어 나오고 있군." 동굴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따라 발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하였다. 명신이 통로를 따라 이십여장(60여미터) 들어가자, 안쪽으로 꽤나 넓은 공간이 보였다. 그 천장은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한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넓으면서도 어찌 생각하면 아늑 하게도 보였다. 어두워서 쉽게 볼 수도 없었고, 물론 보인다고 해도 그런것에 신경을 쓸 명신이 아니었지만 벽면을 둘러싼 세심한 세공들, 그리고 넓은 공간을 메꾸고 있 는 석상들이 꽤나 실력 있는 공예가의 작품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있었다. "흠 이 정도 석굴이면 수십 명 등골이 빠졌겠군... 어 저기 뭔가가 있는데?" 입구의 반대쪽을 유심히 살펴보니 미미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나 그 인영을 주시해 보니 어른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짧았고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 지 않은가.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을 물리치고 있는 반가움이었으니... "이보세요 거기 누구 있나요?" -잠잠.... "여봐요!!! 사람이 부르면 대답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묵묵무답... "제길! 장독대 처럼 생긴 것이 사람을 개 무시해? 음... 여기있군..." 화가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명신의 눈에 띈 것은 어른 주먹만한 짱돌이었다. 그것을 한손에 집어 든후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정체모를 인영을 향해서 힘 껏 던졌다. 인정사정 없이... -빠각! 그 인영도 머리로 짱돌의 경도를 측정하자 거기에 까지 무심하지 못했는지 뒷통수를 감싸 안으며 점잖하게 말했다.. "어떤 후레 자식이냐!!!" 뒤를 돌아본 인영의 생김새는 역시나 정상적인 사람이라 보기에는 너무 상식적으로 동떨어 져있지 않은가. 짧은 다리, 짧은 팔, 덥수룩한 수염, 뽈록나온 똥배!! 그리고 자기 키만한 도끼....도끼?! 그렇다 도끼를 한손에 집어 들은 인영은 명신을 향해 걸어오며 음산하게 말했다. "네놈이 나에게 이 무지막지한 짱돌을 던진 녀석이냐?" 조선의 건아인 명신이 이쯤의 위협에 뜻을 굽히겠는가..하겠지만 눈치 밥만 먹고 살 아온 간사한 녀석이라. "헤헤 뭐 크다고 생각하면 크고, 또 다르게 작다고 생각하면 작은 돌 아니겠습니까?" -빌빌빌.... "흠 하긴... 이정도 돌맹이 가지고 날 어쩌진 못하지... 그건 그렇고. 너는 어디서 온 녀석이냐? 이 대륙에서 네놈이 입은 옷은 보지 못했다만...인간인가?" 명신은 의외로 쉽게 이 험악한 분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대륙? 그렇다면 여긴 명나라인가? 그럴리는 없어. 아무리 명나라라도 저런 눈색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 그럼 파사국?] "아! 초면에 실례가 많이 되었사옵니다. 소인은 명신이라는 사람으로써 조선에서 왔 습지요."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났기에 조선의 이미지를 구길 수 없기에 진득한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조선? 그건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아차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마당에 이러고 있으면 안돼!! 네 녀석 때문에 금 같은 시간이 한참이 나 지나갔다!" 언제 너같은 녀석이과 말을 했느냐는 듯이 이 난쟁이 똥자루 녀석은 자기가 있던 곳 으로 돌아가 뭔가에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뭐하는 중이길래... 역시나 호기 심이 발동한 명신이었다. (6) 드래곤의 비데 -사각..사각.. 똥자루의 옆으로 다가가니 혼자 중얼거리며 뭔가를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 다. "그녀석은 드래곤 주제에 무슨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나 같이 선량한 드워프를 협박 해 이런걸 시키는 거야. 하긴 나의 손재주가 좀 비상하긴 하고, 나의 예술적 감각이 남다르고, 솜씨가 능수능란 하다지만...쳇! 드래곤의 똥꼬를 다 닦아 내려면 얼마나 커야 하는지 아는거야, 모르는 거야?" 역시나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걸 그냥 보고 '아 바쁘신 양반이시 군, 그럼 댁은 수고하시고 난 내갈길 갈라오' 라고 말할 명신은 아니지 않는가. "이보시오 똥자..아니..짧고 굵은 양반..도대체 뭐 하는 게요?" -사각...사각.. [이녀석이 또..또 개무시를! 그래..누가 이기나해보자...]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명신은 주변을 둘러본후 석상을 향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 조잡한 석상들은 뭐야? 무늬도 촌시럽고... 에? 이쪽은 비례적인 요소가 꽝인걸 신라의 석굴암에 비하면 벼룩이 기린앞에서 장대 높이 뛰기 아니겠어? 에고 조잡해 라!!" 역시나 명신의 격장지계가 먹히는지 귀를 쫑끗새운 똥자루 였다. 그러나 이정도에 만 족할 명신이기에는 너무나 간악했다. 고로 그의 공격은 계속 되었는데. "에게에게 이건 또 뭐야. 벽에 뭔 낙서를 이렇게 많이 해 놨어? 꼬맹이가 못 들고 벽 에 장난 친 것 같잖아. 헤헤헤!!" 이때 똥자루의 눈은 혈관들이 터진 듯 빨간색으로 충혈 되기 시작했고, 이마에서는 혈관의 꽃이 아름답게 뽐내기 시작했다. "네 이 녀석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나의 예술품이 촌스럽고? 비례가 어쩌구, 꼬맹이 들 낙서? 그래 네놈 잘났다! 너 죽고 나죽자 이놈아!" [화가 머리 끝 까지 치밀어 울긋불긋 변하는 얼굴을 보니. 깨진 장독에서 고추장 새 는 모습이 떠오르는군... 나보다 더 단순하잖아?] 내심 생각과는 달리, 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기에 바로 자세를 낮추었다. "헤헤 소인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말에 어찌나 귀를 기울여 주지 않던지 말입 니다. 이해 가시죠? 그나저나 열중해서 뭐 만드시던데. 제가 좀 도울 건덕지가 있나 요?" "씩씩...씩..그..그래.. 그래서 그랬단 말이지? 내가 한번만 더 참지. 난 케르히트라 고 한다. 그냥 켈트라고 불러... 보다시피 드워프족이지. 네녀석 이름이 명신 이라고 했나?" "헤헤 그렇습죠. 기억력 한번 좋으시네." "이름이 참 어렵구나. 생김새도 보통 인간과 다르고 말이야. 그냥 나도 널 이름의 앞 머리만 따서 뮤스라고 부르마." 뮤스라는 낮설은 이름으로 불린 명신은 집을 나온이상 별달리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켈트의 말을 수용하기로 했다. "뮤스라구요? 흠...하긴 나도 이제 집에서 ㅉ겨났으니 굳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을 쓸 필요는 없겠군요. 좋습니다!" "아무튼 난 지금 아주 바쁘단 말이다. 내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야. 안 그래도 막막해 죽겠는데 네 녀석이 방해까지 하는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목숨까지 위태로운 거야?] "좋아요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면 안 괴롭힐께요! 혹시 알아요? 제가 도와 줄 수 있 는 일일지?" 귀찮은 꼬맹이 녀석의 손에 사탕 하나 쥐어서 보내는 심정으로 켈트가 입을 열었다. "좋아! 네 녀석이 뭘 도와 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만 이걸 듣고 난 후에는 날 괴롭 히지 않는 거다 알겠냐?" "헤헤 남아일언 중천에 떴는데 당연하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제의 일이었다. 여기서 300켈리(km)나 떨어진 곳 에 사는 크라이츠라는 드래곤이 나에게 뜬금 없이 나타나 이번주까지 비데를 만들라 고 하더군." "비데요? 비데가 뭔데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켈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서 온 녀석이길래 비데도 모르느냐... 어쨌든 설명해주지! 사람이 엉덩이로 토 한 후에 그냥 종이로 닦으면 똥꼬가 맵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개발해낸 물로 씻 어 내는 기계를 말하는 거지... 그런데 드래곤 주제에! 인간들이나 쓰는 비데를 만 들라고 하지 않겠냐. 인간들이 쓰는 작은 비데도 마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가격 이 엄청나단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내참... 그런데 만드는 것은 문제가 없다만... 드래곤의 똥꼬가 좀 크냐는 것이지... 그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어떻게 비데에서 나 오게 할 수 있을지가 문제야... 마법도 못쓰는 드워프 인데!" [오! 그런 기계도 있었구나. 흠 물이라...많은물...후훗.. 아주간단한 문제군...] "이봐요 켈트 아저씨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면 제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네?"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지는 않는다만 가능하다면 나야 더 좋지!" "그럼 약속했어요!" 득의양양한 명신, 뮤스의 모습이었다. 켈트의 눈에는 미덥지 못한 댕기머리 소년의 모습이 어딘가 불안했지만. 자기를 도와 줄 방법이 있다 했기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믿어서 손해날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아저씨 어디까지 만드신 거예요?" "흠 지금 거의 완성을 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압이 문제야...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기술로만 엄청난 수압을 만들어야 하니 난감할 뿐이지... 제길 드래곤녀석 마 법사라도 한 놈 끼워 줄 것이지..." "음 그럼 수압을 높일 기술만 있으면 되는 것이군요. 좋아요 아저씨는 제가 그려 드 리는 대로만 만드세요. 알겠죠? "흠 뭐 그런 거야 어려운 것이 아니다만... 아무튼 알겠다." 명신은 작은 돌을 하나 주워서 바닥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러 저러한 도형과 수많은 수치들이 기입되어 있는 그림이었다. 한 시진 정도 지나자 명신은 자신의 그림에 만 족한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아저씨 다됐어요! 이것만 보고 그대로 만들면 될 거예요." "그래 한번 보자..." 땅에 있는 그림은 명신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세밀했는데 장 치의 각도와 길이, 폭, 넓이가 세밀하게 기록되어 져서 누가 보더라도 그 모양을 한 번에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 가히 놀랄만했다. 어떻게 명신이 이런 능 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명신의 상황을 모르는 켈트마저도 그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너...정말 굉장한 재주를 지녔구나! 그런데 정말 이렇게만 만들면 그 엄청난 수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야?" "제가 설마 거짓부렁 하겠습니까?" "그런데 말이다. 여기 쓰여 져있는 그림들은 뭐냐? 글씨 같기도 한데 아직 이런 문 양은 처음 보는구나..." "헉! 아저씨 천자문도 못 배우 셨나요? 상놈이세요?" "상놈? 그게 뭐냐? 아무튼 난 이런 글은 본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 [내참 어이가 없네. 저 나이 될 때까지 숫자도 못 읽을 정도라니... 아무리 상놈 이 라지만 먹고살려면 숫자 정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아...아니지 여긴 조 선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조선어가 아니잖아! 그것도 못 느낄 정도로 내가 둔했나? 어쨌건 나중에 더 생각해 보고 아저씨 일이나 마무리하 자...] "아저씨 이렇게 딴짓 해도 될 만큼 목숨이 여러 개 인가부죠?" "아! 그렇지...네 녀석이 나타난 다음부터 정신머리가 없구나." "이 그림은 제가 설명해 드릴 테니 만들기나 하세요. 이 방법은 증기라는 것을 이용 한 방법이예요, 이 아랫부분에 불을 붙이게 되면 물이 끓어오르면서 수증기가 생기겠 죠? 그럼 이 밀폐되어 있는 공간에서 팽창 할 거구요. 물보다 수증기가 부피가 큰 건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그 수증기는 좁은 구멍을 타고 옆에 있는 물통으로 밀려 들어가고, 그 물통에 있는 물들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분출하게 되는 거죠. 이해 되요? 아! 이때 물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을 작게 만드세요 그래야 수압이 더 높아지 겠죠?" 뮤스의 말에 정신을 못 차리는 켈트였다.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지만 뭐라 마땅하게 할 말을 못찾는 얼굴이었다... "수증기라는게 그렇게 강한 녀석이란 말이냐? 내가 120여년 살아 왔다만. 그런 말은 처음이다. 마법으로 물을 밀어 내는 건 봤지만. 수증기라니...물이 물을 밀어낸단 말 이냐? 도저히 못 믿겠다." "참나 아저씨 안 믿어도 좋은데요.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나요? 있으면 그걸로 해요 거 똥배짱이시네!" 뮤스의 말대로 다른 방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켈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흠흠..그래 속는 샘 치고 한번 만들어보마..." "나 참 다 늙어서 의심도 많지. 어서 만들기나 해요. 여기는 이렇게 저기는 요렇게.. " 어느새 켈트의 상전처럼 구는 뮤스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양반의 기질이 나오는 것인가. -투닥 투닥.... 작업을 시작한지 어느덧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른 듯 싶었다. 동굴 안이었기에 날짜관 념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식사를 한 횟수를 계산해 본 결과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 다. 동굴의 한켠, 그들이 만들고 있는 비데의 아래쪽에서 뮤스는 켈트의 엉덩이에 깔 려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그 큰 엉덩이나 좀 치워 주세요!" "이 녀석아! 여길 손보려면 이런 자세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럼 빨리 끝내버려요! 뭐가 그리 꼼꼼해요? 생긴 거 답지 않게스리!" "그 녀석 말 한번 엄청 많네! 아직 모양을 꾸미지는 못했다만 이제 설치 작업은 끝났 다. 나도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군. 그런데 정말 이게 작동할까?" "에휴 아저씨 걱정도 팔자네요. 그러니까 그렇게 키도 안 자라고 살만 찌죠. 사람은 걱정이 많으면 안되요!" "야야..몸매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날 때부터 이런걸 어떻게 하겠냐... 그러니까 드워프라는거지..." "아참 아저씨 그럼 제가 다 도와 드렸으니 질문 몇 개만 할께요." "엥? 그렇게 하려무나." 뮤스는 정작 질문을 하려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 이곳은 어디죠?" "엥? 그럼 너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여기에 있다는 말이냐? 하늘에서라도 떨어 졌어?" "저도 아직 그것을 모르겠단 말이예요! 정신을 잃고서 깨보니까 여기였다니까요!" 켈트는 뮤스의 말을 완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생김새를 보아하니 과연 이 대륙의 사람들과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좋아. 그럼 말해주지. 이곳은 오이랍 대륙에 있는 도이첸 제국의 멜 산이란다. 나는 이십여년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는 드워프 이고." "네? 도이첸 제국요? 그럼 조선은 어디 있는 것이죠?"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냐. 조선이라는 곳은 듣도 보도 못했다고. 그건 그렇고 너 는 조선 이라는 곳에서 왔다면서 어떻게 이곳의 언어를 쓸 수 있지?" "글쎄요. 그냥 이곳의 언어가 나오는데 저도 잘 모르겠는 걸요?" 뮤스와 켈트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동굴 밖에서 거대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어 떤 동물의 포효 소리인지도 몰랐지만 뮤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전율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쿠워어어어어어어!!!! "으악! 이게 무슨소리야." 방금 전가지만 해도 걸걸하고 당차던 켈트가 고양이 앞의 쥐라도 된듯 안절부절 못하 기 시작했다. "뮤스 드디어 왔구나! 저놈의 드래곤 피어는 언제나 들어도 오싹 하군.... 약한 종족 으로 태어난게 죄지. 제길!!" "드래곤? 그럼 아저씨가 말한 용이라는 거예요? 정말 용이 있긴 있구나!!" 켈트는 큰일날 소리라는 듯이 식은땀을 흘려가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잔소리 말고 조용히 해라. 저 저능 드래곤 눈밖에 나면 너도 목숨이 위태로울거 야....머리나 숙이고 있으라고..." "저능 드래곤? 흠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용인데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 는 없죠! 나도 자존심이 있는 대장부인데!! 자고로 장부는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것 이 아닌 법!!!" 뮤스가 무슨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몰랐지만, 이때 동굴로 들어오는 복도로 부 터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드디어 오는군..." 켈트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동굴의 입구에 길다란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는데 뮤 스의 상상과 전혀 다른 사람의 그것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어라? 그런데 사람그림자잖아? 저게 정말 용의 그림자란 날이에요? 저 사람 이름이 '드래곤' 아니에요?" 켈트는 뮤스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없는지 이마에서 식은땀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그림자의 주인은 이미 동굴 안에 켈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허공을 향해 말했다. "호호호호! 켈트씨 내가 주문 한 것은 다 만들어졌겠지요?" "이 푼수 적인 목소리는 뭐예요?" 얼마 되지 않아 목소리의 주인공인 드래곤의 모습이 뮤스의 눈에 들어왔지만, 눈에 들어온 속도 보다 더욱 빠르게 눈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곤 자신의 뒤에 있는 벽을 보며 촐싹맞게 떠들고 있었다. "아이고 부처님, 공자님 저 요상한 옷차림이 뭡니까! 세상에나! 민망해 죽겠구나 어 머님, 아버님 불초소자 용서하소서!" 하지만 뮤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다른이가 그의 모습을 본다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이 거의 다 보일 만큼 아슬아슬하고, 허벅지의 작은 점이 보일 만큼 원 초적인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지에는 휘황찬란할 정도의 보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신발 역시 뒷 굽이 무척이나 높아 뮤스의 눈에는 참으로 신기했을 것이다. 외모는 어떠한가. 브론즈 색의 머리결과 하얀 피부, 심해의 바다를 보는 듯한 비취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를 남자가 봤다면 한눈에 반해 평생 구애를 하면서 따라 다니지 않을까?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켈트가 한쪽 구석에서 촐싹거리고 있는 뮤스를 향해 한숨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크라이츠님 오셨군요...." "호홋! 당연한 것 아닌가요 켈트씨? 켈트씨가 만든 비데를 쓰기 위해 그 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던 것 알아요?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는데요! 한시 빨리 보여 주시 겠어요?" 그녀의 반응에 한줄기 불길한 느낌이 켈트의 뇌리를 스쳤다. "저...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오호호호호! 켈트씨도 참 쑥스러움을 많이 타시는 군요? 그렇게 떨 것 없으신데. 물 어보세요." [너 같으면 내 입장에서 드래곤 앞에서 안 떨게 됐냐...가증스러운 녀석...]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드워프 중의 한명인 켈트는 내색을 할 수 없이 그저 속으로 똥줄만 타들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말입니다. 본체에서 비데를 사용 하실 것 아니셨습니까?" "어머나! 켈트씨 농담이 많이 느셨네요. 본체에서 비데가 무슨 필요가 있나요? 마나 만 흡수하고 사는 종족인 걸 아시면서!" 충격!!! 그렇다 충격이었다. 지난 사일간 뮤스와 고생해서 만든 것이 모두 헛것이 되 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일이 되었다면 그이상의 것. 즉,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 아닌가... 그러나 켈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있는 크라이츠였다. "호호호 자 켈트씨. 이제 제게 비데를 보여 주시죠? 저 애태워 죽일 일 있으신가요?" [제길 만년이상 산다는 드래곤이 이딴 일로 죽으면 정말정말!! 좋겠다!!! 이런 개 같은... 이제 내 120여년 인생을 마칠 땐가. 나야 그렇다 치지만 저기 있는 뮤스는 어쩌지?] "크라이츠님 외람되지만 그것이 본체일 때 쓰실 건 줄로만 알고...." "뭐라구욧!!! 그럼 지금 없다는 것이 되겠네요? 이런이런! 이러면 곤란합니다!" -빠득..... 크로이츠의 이빨 가는 소리가 동굴 속에 퍼졌다...어찌나 소리가 컷던지 메아리가 울 릴 정도였다고 하면 쉽게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에는 언제나 예상외의 변수가 있기 마련. 이때 옆에서 보기만 하다 끼어 든 존재가 있으니. 철없는 뮤스 였 다. "아줌마!! 아줌마가 용? 드래곤 맞아요? 이상하네 비늘도 없고, 꼬리도 없고, 뱀 머 리도 아니고. 거짓말 아니예요? 또 여의주도 없네!" 느닷없이 긴장감 흐르는 둘의 대화에 끼어 든 뮤스가 질문을 쏟아내자 넋을 잃어버린 두 사람. 아니..한 드래곤과 한 드워프 였다. "켈트씨 저 녀석은 누구죠? 보아하니 드워프는 아닌 것 같은데...." "네... 뮤스라는 녀석입니다. 이틀 전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 동굴에 들어 왔더군 요. 그러다 이런저런....." 켈트의 설명을 들은 크라이츠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명신을 바라보았는데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는 드래곤의 눈에도 명신의 댕기 묶은 검은 머리이며, 까만 눈동자며, 매듭 으로 묶여 있는 하얀 옷이 여간 신기 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의문이 가는 것 은 뮤스가 어떻게 자신 앞에서 저렇듯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드래곤 이 다른 종족에게 말을 할때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기 위해 은연중에 드래곤 피 어를 섞게 되는데, 평범한 인간인 경우에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감을 느끼게 된 다. 호기심이 느껴진 크라이츠는 다시 감정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호호 아이야. 네가 나의 비데 만드는 것을 도와줬다고?"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남의 말을 들을 뮤스가 아니었다. 쪼잔하게 이것저것 따지기 좋 아하는 뮤스였기에. "아줌마! 예의가 참 없으시네요. 제가 물어본 것부터 먼저 대답해 주셔야 하는게 예 의 아닌가요?" 부드러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뮤스가 건방지게 나오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왕 자신 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참자고 결심한바 이빨을 깨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구나. 나의 이 모습은 폴리모프를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하고 있는 것이란 다. 드래곤의 모습이면 너무 커서 행동의 제약을 많이 받을 것 아니냐? 그리고 난 사 람으로 사는게 좋거든? 아름답게 꾸미기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가 사람 이니까" "폴리모프? 그게 뭐죠? 그럼 아줌마 다시 용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거네요? 우왓! 보 여줘요! 보여줘요! 보여줘요! 네에?" 뮤스가 생때를 피우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는 켈트의 눈에는 의혹이 물씬 피어나고 있 었다. 지고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이 저 철없는 꼬마의 버릇없는 행동을 묵인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흠 둘 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종족들이야.....] "저... 크라이츠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 비데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좀 크게 만들었지만 다 만들긴 만들었다고 하셨죠? 이 아이가 어떻게 만들었는 지 한번 볼까요? 저기 저건가요?" 크라이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에는 큼지막한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대단히 특이 한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높이는 어른 키의 두 배 였고, 아래쪽은 아궁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 위쪽에는 물이 나오는 곳인 듯한 입구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주 전자의 주둥이와 흡사했다. "뮤스? 내게 사용법을 가르쳐 줄래? 뭐 비데야 작게 다시 만들면 되겠지만 사용법은 알아야 겠지? 아차차. 그리고 보니 제 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깜빡하고 그냥 가버린거 있죠? 그때 겁준다고 하는게 너무 분위기를 잡다보니... 호호호! 그런 데 어떻게 잘 만드셨네요? 역시 라이부크 드워프족 전대 족장다워요!" "헤휴..." 옆에서 허무만이 가득 담긴 한숨을 토해내는 켈트였다. 비데의 작동 방법 때문에 잠 도 못자고 고민했던 것이 저 드래곤의 건망증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어찌 안 허무하 랴... 이때 옆에서 '잘 만들었다' 라는 말에 기분이 들뜬 뮤스가 끼어 들었다. "아줌마! 아줌마! 저거 제 머리에서 나온 거 예요!!! 제가 저거 사용법 가르쳐 드리 면 용으로 변신하는 거 보여주세요! 네?" "호호 그렇게 하자꾸나. 아 그리고 그 '아줌마' 라는 소리 좀 안 하면 안되겠니? 본 체 일때는 나이가 많을지 몰라도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어디가 아줌마라는 거냐?" "아아..알았어요! 누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호호 누님? 그거 듣기 좋구나! 호호호호!" "그럼 시작해 볼 게요. 사용법은 간단 한데 여기 아궁이에다가 불만 붙이면 작동하 죠." 크라이츠는 뮤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비록 오래 산 드래곤이라 하지만 과학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또, 드래곤이란 과학에 대한 지식이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가진 마법이라면 그 이상의 것 도 가능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쉽게 이해를 할 수 없었던 크라이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 신기하구나 마나가 없어도 된다니 그럼 한번 불을 붙여보꾸나. '나 마나의 주인 인자. 영혼의 불을 나의 손에 모아 현상화하고자 하니....' 파이어볼!" -펑!!!! 크라이츠의 손에서 발현된 파이어 볼은 깜짝할 사이에 비데의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파이어 볼은 마법의 힘인 마나를 집중하여 불의 공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었다. 그것 의 화력이 너무나 강했는지 비데에 설치된 물탱크가 금방 끓으며 진동을 하기 시작했 다... -치지지지직. 그러자 잠시 후 분수 같은 엄청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동굴의 천장을 향해 쏟 아내고 있었다. "움화화화! 누님, 켈트 아저씨! 이제 눈으로 보니 믿겠죠? 역시 나의 이론은 틀릴 리 가 없지!" "그래. 정말 대단하구나...헌데...." -쿠르르르르르르.... [쿠르르르르? 이건 무슨소리야?] 천장에서 돌덩어리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암으로 이루어진 동굴에 엄청난 수압의 물이 닿으니 무너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동굴이 내려앉는 구나!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우선 피하자꾸나. 나도 사 람의 몸으로 저 돌덩어리를 맞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 "누나 지금 그런 것 일일이 설명할 때가 아니라 구요! 얼른 도망치자 구요!" 켈트도 동감하는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흐헷! 저도 동감입니다. 크라이츠님! 얼른 몸을 피하시는게.." "호호! 그럼 제 집으로 특별히 초대하도록 하죠." 순간 크라이츠의 손에서 희미한 빛의 도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어 크라이츠의 중 얼거림이 시작되었다. "나...이 마나의 주인인자. 태초에 나의 뜻에 따라 이동을 원하노니 그곳을 태고의 동굴이라 하노라... 워프!!!" 공간 이동의 마법 시동어를 외치자 크라이츠의 손에서만 희미하게 나타나던 도형과 함께 빛이 그 일행을 감싸며 순간 셋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동굴은 세 명을 매 장하려다 놓친것이 화가 나는지 더더욱 거세게 무너지고 있었다. -퓨츳~! 동굴이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했으나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봐서 그 크기가 상 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어두웠기에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영롱한 빛이 이는 물체들이 여기 저기에 깔려 있는 걸 봐서는 그것들이 평범한 돌맹 이는 아니었다. 이때 번쩍이는 빛 무리와 함께 동굴의 한쪽에서 공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공간으로부터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자 여기가 내 집이란다..호호 편히 쉬렴." 영롱한 목소리지만 어딘가 푼수 끼가 섞인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치 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아무 것도 안보여요!! 여긴 호롱불도 없나요? 불 좀 켜줘요!" 세 개의 인영 중 가장 뒤에 있던 작은 인영이 걱정된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이..이봐 뮤즈 아까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너 크라이츠님께 너무 말을 막 하는 거 아냐? 이건 널 위해서 해주는 말이라고." 켈트는 한동안 같이 지낸 사이라 뮤즈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드래곤의 분노를 사서 함께 지옥의 불구덩이를 경험할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봐. 나 마나의 주인인자. 태초의 빛을 원하노니... 라이트닝!" -팟!! 빛을 부르는 마법 시동어와 함께 주변은 엄청난 빛에 휩싸였다. 어두운 곳에 적응된 눈은 쉽게 뜰 수가 없었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익숙해 졌는지 동굴의 모 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을 가득 매우며 수많은 보석들이 쌓여있었는데 그 휘황찬 란함을 직시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동굴의 높이는 어른 키의 스무 배 정도나 될 정도 로 높았고, 그 넓이 역시 대단했는데 벽에서 벽까지의 거리가 30장(90m) 이상은 되어 보였다. 이 정도 규모의 동굴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드워프들의 노력이 필요했으리 라... 바로 이들은 크라이츠의 레어에 도착한 뮤스와 켈트였다. 둘은 드래곤의 레어 처음이라 그런지 눈이 휘둥그래져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뮤스는 수많은 보석 들에, 그리고 켈트는 예술품에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천성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인가 보다. 그들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크라이츠가 입을 열었다. "호호 이봐요 손님들. 쑥스럽게 그러고 놀라지만 말고 정신 좀 수습해요." 크라이츠의 말에 정신을 차린 켈트는 민망하다는 듯이 입가에서 흐르는 침을 닦아내 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크라이츠님. 제가 추태를..." "호호 아니예요. 뭐 낯선 곳에서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뮤스는 손에 한 주먹의 보석을 집어들고 환상 에 빠져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이정도의 보석만 있어도 엿이 32년 2개월 어치를 살 수 있고, 떡을 18년 6개월 어치를 먹을 수 있겠구나...] "저 누님. 이만큼만 가지면 안될까요?" "호호 뮤스도 보석에 관심이 많구나? 어린 녀석이 돈에 그렇게 눈이 멀면 안된 단다. 하지만 누나의 질문에 잘만 대답해주면 그것의 두 배를 주마." 돈과 먹을 것에 자존심 마저 팔아 버릴 뮤스가 애써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후한 조건에서 말이다. 영의정의 자재라는 녀석이 이렇게 돈과 먹을 것에 굼 주리는 모습은 정말 불가사의 할뿐이었다. "네이! 무엇이든 여쭈어만 주신다면 정성을 다해!" "좋아 뮤스 내가 보아하니 너는 이곳의 인간이 아닌 듯 하구나 네 몸에 흐르는 마나 의 느낌은 이곳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거든? 그 양 또한 네 나이의 아이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이상한 점 도 많고 말야." 크라이츠의 말을 듣던 뮤스는 자신 역시 그 점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크라이츠 의 말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벼락을 맞고 깨어보니 이곳이었거든요." "흠 벼락이라.... 그리곤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었니?" "글쎄요 잘모르겠어요. 이상한 구멍이 벼락을 맞을 때 생겨서 거기 빠진 기억 밖에 는..." 뮤스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벼락? 벼락이라... 그렇다면 혹시 천상의 인으로 인하여? 설마 그럴 일은 없을 텐 데. 천상의 인이라면 주신이 종에게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건만... 아무튼 내 예상이 맞다면 그로 인해 차원의 이동을 한 것 같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크라이츠는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뮤스를 바라 보기 시 작했다. "뮤스 혹시 네 몸좀 살펴 봐도 되겠니?" 화들짝 놀라는 뮤스였는데...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아무리 누님이라 하지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했는데 어찌 외간남자의 몸에 손을 대시려나요. 저는 아직 미성년이랍니다!" 뮤스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순진한 척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드래곤을 여자로 보다니 참으로 대단한 녀석이었다. -꽁! "녀석이 누가 네 몸을 만지작거린 다고 했느냐? 그냥 좀 살펴 보겠다는 것이지! 잠시 살펴보마..."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뮤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는 크라이츠였다. 흠 칫하던 뮤스도 아무런 반할을 하지 않았다. 크라이츠가 그다지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 았기 때문이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켈트 역시 호기심이 생기는지 크라이츠의 행동 만을 예의 주시하고만 있었다. [이런일이... 어렴풋이 이곳에 존재하는 보통 마나가 아니란 건 느꼈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속성의 마나를 가진 존재라니... 또, 마나가 속성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도 이런 엄청난 양을 말이야. 이 아이는 모르는 듯하지만 이 정도의 양 은 순수한 마나라 해도 이 대륙에 드물 것이다. 더더욱 인간중에서는. 이아이가 자신 의 능력을 각성만 한다면...] 태극청심단을 복용한 후 뮤스의 몸에는 엄청난 양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낭신이 전해준 천년지정의 일부분을 십할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치유하고 남 았던 정기가 모두 몸으로 흡수되었으니 그 잠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태극청심단을 복용했는데 아직 그 진실한 내력은 몰랐지만 뮤스에게 엄청난 양의 내력을 심어 준 것으로 봐서 비범한 기물인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약간의 시 간이 흐르자 뮤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크라이츠가 입을 열었다. "네 몸의 마나로 만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군. 아무리 우리 드래곤이라 해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거든? 네 머리 속 좀 들여다봐야겠구나.." 크라이츠의 말에 뮤스는 뒷 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헉! 누님 제 머리를 열어 보실 라구요? 명나라에서 원숭이의 머리를 열어서 골을 파 먹는다는 소린 들었어도 사람머릴 열다니!! 누님은 미계 용이야!" -삐질.... "누가 머릴 직접 열어 본다고 했니? 마법으로 알아본다는 거야 걱정 말고 이쪽으로 와!" 그제서야 그럼 그렇지 하는 모습으로 쑥스럽게 웃고 있는 뮤스 였다. "헤헤 역시 착한 누님이 제게 그럴 리는 없죠!! 전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죠?" "호호. 그래 자그럼 시작하마. 용언으로 명하노니... 브레인 스캔!!" 용언 마법이 시동되자 뮤스의 머리에 있는 크라이츠의 손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리곤 뮤스의 머리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빛은 밝 아 지기 시작했고, 크라이츠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뮤스의 뇌에 각인되 어있는 지식양이 드래곤인 그녀로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이...이럴수가...이..많은 지식들은 대체 뭐야... 대체 이 엄청난 지식들이 사람머 리에 들어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 그런데 여기서 희미하게 지식의 흐름을 막고있는 이 것은 뭐지? 이것이 이 아이의 완전한 각성을 막고 있는 듯 한데. 뮤스가 어떤 일을 격었는지 좀 봐야겠어....] 한시진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뮤스의 기억을 스캐닝하고 있던 크라이츠는 두 눈을 반 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는지 밝은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얘 뮤스야. 이제 긴장을 풀어도 된단다. 네 몸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설명해주 마... " 뮤스는 얼떨떨 하기만 했다.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뮤 스기에 크라이츠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제 몸요? 하하 저야 언제나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건강한 몸 아니겠습니까? 제가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 네?" 저런 녀석의 머리에 엄청난 지식이 과연 들어 있을까? 또는 과연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을까 의심을 하면서 크라이츠는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네 몸에는 엄청난 마나가 흐르고 있단다. 아니지 흐른다고 할 수는 없겠구나. 아직 마나의 흐름을 컨트롤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네 머리 속에 들어있는 엄 청난 양의 지식의 흐름을 막고있는 어떤 금제에 의해서 네 능력을 완전히 사용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크라이츠가 뮤스에게 모두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뮤스의 기억으로부터 읽은 내용 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명신이 서낭당에서 다쳤을때 얻은 어떠한 상처가 금제가 되 어 지식의 흐름을 대부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지식 이전을 받은 이후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가, 우연하게 복용한 태극청심단의 자극으로 그 금제가 조금이나마 해제 된 것이었다. 이제서야 뮤스는 크라이츠의 이야기가 장영실과의 만 남 그리고,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자신의 머리를 두 들기며 말했다. "아하! 그거요? 저도 조금 아쉬웠는데 어쩔 수 없다 더라구요. 그래서 포기했죠. 저 도 좀 똑똑해져 보고싶었는데." "너는 지금 제법 똑똑하다는 것을 못 느끼겠니? 나의 비데를 만든 것만 봐도 평범한 머리는 아닌 듯 한데?" "어라 정말 그렇네요. 내가 어떻게 이런걸 만들 수 있었지?" 뮤스의 반응에 살포시 웃어 보이던 크라이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내가 이 아이의 금제를 풀어준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는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군. 다른 차원의 엄청난 지식이 유입됨으로써 지금까지의 관념적 인 붕괴와, 신앙의 붕괴까지 이루어 질 수 있겠어. 그렇지만 이대로 살기에는 너무 덜떨어진 녀석이야. 어쩌다가 주신께서는 이런 실수를 하신 것인지...] 뮤스의 일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고민하던 크라이츠는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좋아 네 금제를 풀어 주마. 하지만 약속을 몇 가지 지켜야한단다. 네가 나의 말을 이해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이곳으로 넘어 온 것은 너의 개인적인 일이 라기 보다 네가 살고있던 세계와 이쪽 세계에 공통적인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나중에 주신께서 어떻게 해주시겠지." "헤헤 어떤 약속인지 말씀만 하신다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좋아! 우선 나와 함께 다녀야 한다는 거야! 난 지금부터 유희를 시작할 생각이거든?" "유희가 뭔데요?" "아. 유희는 드래곤이 너무나 오래 살다보니 지겨워서 시작한 일인데, 다른 종족으로 변해서 세상을 여행하는 거란다. 이해하니?" 자기를 무시하냐는 듯이 투덜대는 뮤스였다. "누님! 제가 그렇게 덜떨어져 보이나요? 걱정하지 마시고 계속 하세요!" 사실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 크라이츠였지만 잠시 후 각성만 한다면 상관없는 말이 되기에 그냥 넘겼다. "그래그래! 아 그리고 켈트 당신도 우리와 함께 여행을 해야해요. 아시겠죠?" 옆에서 크라이츠의 공예품을 소매로 넣던 켈트가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살피고있었다. 이 켈트라는 드워프도 평범한 드워프 일리는 없었다. 감히 드래곤의 물건을 훔치려 하 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드워프 이리라... "헤헤....크라이츠님의 명령인데 제가 어찌." 켈트의 소매로 눈을 옮기는 크라이츠가 중얼 거렸다. "에휴 세상이 어떻게 될려는지. 드워프가 드래곤의 물건이나 훔치고 말세야. 아이구 허리야 속도 매케한 것이 브레스나 한번 쏴볼까?" -쨍그랑! 켈트는 브레스라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소매에 넣던 공예품을 놓쳤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뻔뻔히 이야기를 계속하는 크라이츠... "그리고 또 하나 네가 차원이동 했다는 것을 밝혀서는 안 된다. 그런 사실이 이 세상에 나돌면 큰일이 나거든? 약속 할 수 있지?" 뮤스는 연신 방글방글 웃고만 있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그저 똑똑해 질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헤헤 약속할 게요. 빨리 고쳐줘요!" "알았다..하지만 이후의 변화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럼 시작하마." 크라이츠는 뮤스에게 다가가 손을 그의 백회혈에 가져갔다. 크라이츠의 손에서는 눈 에 보일듯 말듯한 아지랭이가 피어 올랐는데, 이때 뮤스는 백회혈로 무엇인가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매우 황홀한 듯한 느낌... 간질거리는 귀를 팔 때 느낄 수 있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불쾌하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느낌 정말 좋은데? 엄마가 귀를 파 줄 때도 이런 기분이었는데. 어지러워 지는걸? 어..어..어......] -털썩!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뮤스였다. 정신이 있었더라면 어지러움보다 쓰러져서 다 친것이 더 아프리라...옆에서 지켜보다 놀란 켈트가 뮤스에게 달려왔다. "이봐 뮤스!!! 정신차려!! 크라이츠님 어떻게 된건가요?" 크라이츠는 자신의 손바닥위를 유심히 보고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위에는 눈에 보일듯 말듯한 고름이 피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휴우...이제부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저역시 그냥 이론으로만 될 거라 짐작했 을 뿐이라서요. 일단 기다려보죠" 이 노망난 드래곤의 대책없음은 누가 보더라도 한숨 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확신도 없이 뮤스에게 이런 것을 했단 말입니까?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하나 의 생명을 이렇게 쉽게 생각해도 된단 말입니까?" 어느덧 크라이츠에게 언성을 높이는 켈트였다. 뮤스에게 이상한 매력이 있어서 그런 지 왠지 뮤스에게 정을 느꼈기에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분노로 인하여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 버릇 남 못 주듯이 드래곤 버릇 누구 주겠는가? "흠흠....켈트씨? 잠시 잊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요? 켈트씨는 드워프고 전 드래곤인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드워프인 켈트씨가 드래곤인 저에게 이렇듯 언성을 높이면 다른 드래곤이 비웃을까 두렵군요... 물론 저야 상관없겠지만 말이예요? 안그래요?" 흠칫한 켈트는 미친 강아지 몽둥이에 맞아 꼬리 감듯이 입만 뻥긋 거릴 뿐이었다... "아참 그런데 뮤스가 어떻게 이쪽의 언어를 쓸 수 있는 것이죠?" 분위기가 위태해 지자 능글 맞게 화제를 꾸고 있었다. "켈트씨는 꽤나 오래 사신 드워프 이시니 '천상의 인'에 대해 아실 거예요." "아 그 주신이 종들에게 이계를 둘러보게 하는 것 말입니까?" "역시 아시는 군요. 뮤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천상의 인'을 통해 이쪽으로 온 듯해 요. '천상의 인'을 통해 이계로 넘어온다면 자연스럽게 언어 습득 능력이 주입되니 이쪽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야겠죠." "이런... 그렇다면 주신께서 실수를 하신 것 입니까?" 주신의 이름까지 들먹이게 되는 사건이란 것을 알게 된 켈트는 묘한 표정으로 정신을 잃고??쓰러져 있는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7)조선에서는 이곳은 조선의 구중심처인 경복궁이었다. 태사청에는 수많은 대신들이 시립해 있었고 태사의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기도는 놀라울만 했는데 만인을 압도하 는 중압감과, 차분히 가라 앉은 눈빛. 곧은 의지를 보여주는 굳게 다문 입술이 가히 인중룡임을 보여 주고있었다. 만년이 지나도 열릴것 같지 않던 입술이 차분히 움직 였다. "한공...귀공의 자재가 사라졌다 하였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잠시 시립해 있는 대신들을 둘러본 그는 한명의 관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질문을 던졌다. "장영실공." "네! 전하." "지금까지 밝혀진 것을 소상히 말해 주시오." 주변의 여러 대신들을 살피던 장영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대신님들께는 황송하오나. 이 자리에서 거론된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약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주변은 한순간 술렁였다. 수많은 고위 대신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직위를 가지지 못한 장영실이 오만무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임금의 앞에서 그에 대해 머라 할 수는 없었기에 술렁임으로 그친 것이었다. "경들은 장공의 부탁을 수락해 주길 바라네. 장공 계속하시게." "네... 전하 저희 공학원에서 이번 영의정 나으리의 자재 실종에 대해서 포도청과의 협의 아래 조사한바 있습니다. 명신의 실종장소는 영의정 댁 뒷산의 서낭당으로 추정 되는데 그곳에서 기묘한 기의 흐름이 측정되었습니다." 이때 좌의정 김호서의 질의가 들려왔다. 김호서라는 인물은 명신 아버지의 절친한 벗 으로써 명신에게는 대부와 같은 존재였다. 이번 명신의 실종사건으로 인하여 명신의 아버지 못지 않게 걱정을 하고 있었기에 아주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보게 장공. 조금 더 알아듣기 좋게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자네 같은 공학도 들이 야 아무 문제없겠지만 우리처럼 글만 파고 있던 문관들이야 어디 알아들을 수가 있겠 는가..." "좌의정 나으리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점만 말씀 드리지요. 요는 명신이 다른 세계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 조선이 존재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빠졌다는 것이지요. 삼십여년 전에 저희 공학원에 장로로 계시던 공진 선사께서 이론으로만 증 명 하셨던 차원 이동이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절대적인 우연으로 말이지 요." 장내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나 다시금 임금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장내는 술렁 거림이 멈추었다. "그렇다면 말일세.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로 그 아이가 사라진 곳으로 갈 수도 있다 는 것인가?" 임금의 물음에 잠시 숙고한 장영실은 뭔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습으로 입술을 때었 다... "전하 이미 저와 저희 공학원에서는 차원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나이다. 현 조선의 기 술은 천하 제일이라 자부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수많은 공학자들이 이목을 속이고 활동하고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기반들이 조선의 기술 기반을 지지하고 있사 옵니다. 이모든 것을 사료하여보면, 신 장영실 가능하리라 사료되옵니다!" 임금은 버릇처럼 손으로 턱을 쓸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고, 잠시 후 턱에서 손을떼어 내며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공. 짐은 이번 일이 명신 그 아이나 영의정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일이라 생각진 않는다네. 그를 뛰어 넘어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 또 그로 인해 생기는 득 역시 상 당하리라 믿고 있네. 그렇지 아니한가?" 임금의 말에 시립해 있던 좌의정 김호서 역시 거들고 나섰다. "신 김호서 역시 전하의 의견이 타당하다 사료 되옵니다." 조선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영의정과 좌의정 그리고 임금이 옳다 여기고 있는 일을 반대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어 임금은 결단을 내렸는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신 들에게 말했다. "짐이 선포하노니 장영실 공에게 최대의 지원을 해줄 터. 이세계와의 통로를 확보하 도록 하라!" 당금의 임금은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빛나는 과학적 진보를 가지고온 세종이었다. "신 장영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이보게들 서둘라고 장영실공이 오시면 서둘러 채비를 해야한다네!" "알겠네! 염려 붙들어 매고 있게나." "김학자! 자네 앞에 있는 돌림 쇠(드라이버)좀 주워주겠나?" "이 사람 나도 바쁘다네 조심하게나!" 모두들 분주한 모습이었다. 수많은 공학자들은 공학원 제 3공학실 중심에 설치된 기 물 주변에서 자기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징. 자력문이 열리면서 장영실과 뒤에 따라들어 온 한명의 공학자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모습에서 희열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다들 열심히 하는군. 드디어 전하께서 윤허을 해주셨으니 삼십년 동안의 염원이었던 차원이동을 할 수 있겠구먼... 아참 그 동안 뭐 보고 들어온 것은 없는가?" 뒤에 있던 공학자가 손에든 서찰을 읽으며 말했다. 이 공학자의 이름은 신재효라는 젊은이로써 공학원 수석 입원자 이기도 했고 전파학에 유능한 촉망받는 공학자였다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학구파였는데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는지 상투를 틀지 않은 모 습이었지만 꽤나 예쁘장한 얼굴이 낭자 꽤나 울렸으리라... "아! 지난달 말미에 분실한 '청명뇌단' 기억하시는지요?" '청명뇌단'이란 말에 사뭇 태도를 바꾸고 반응하는 장영실이었다. "장마로 인하여 우송도중에 사라졌다는 '청명뇌단' 말이냐? 그것의 행방이 밝혀졌느 냐?" "그렇사옵니다. 허나... 모두 다섯알의 '청명뇌단'을 장백산에서 제조하여 우송하였 으나. 두알은 회수 되었고 나머지 세알은..." 뒷말이 궁금하다는 듯이 신재효의 눈을 바라보는 장영실이었다. "그것을 소지했던 자가 동네 아이에게 줘버렸다고 하옵니다." "허허! 이런 어이 없을 때가 있나. '청명뇌단'이 어떤 물건인가! 한알이면 우리 공학 원의 유능한 공학자 10명에게 막대한 뇌공력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양이 아닌가? 그런 데 자그마치 세 알을 동네 아이에게 줘버렸다니 통제로세...통제로세...." 장영실이 한탄하는 것이 마치 자기 때문인양 인상을 찌푸리는 신재효는 일말의 위로 라도 하려는 듯이 말했다. "나머지 회수된 두알을 총 20명의 공학도들에게 복용시켰습니다. 각각 반갑자의 뇌공 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들의 뇌공력으로 이번 차원 이동문을 전력 부족 없이 기동 시킬 수 있으리라 사료되옵니다." 허나 신재효의 말로도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한 장영실은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지난 일이니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 동네 아이가 청명뇌단을 먹는다 해도 몸이 그 내력을 못이길 터인데... 설사 괜찮다 해도 '공학뇌동심결'을 모르는 한 뇌공력을 쓸 수도 없을 테니... 어쨌건 빠른 시일 내에 차원 이동문을 준비시키게나." "네 알겠사옵니다!" 이튿날. 공학원은 모처럼 활기가 넘치고있었다. 수십년 간 이론으로만 치부되어 왔던 차원 이동 가능설을 이제 눈으로 목격할 순간이 불과 몇시진 앞으로 다가왔기에 두근 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공학자 들과 연구원들은 자신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수많은 공학자들이 구슬 땀을 흘리며 차원 이동문을 조이고, 지지고, 볶고 있는 와중에 제 3 공학실의 한쪽에서는 차원 이동에 투입될 대원들이 만반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움직이기 편한 검은 옷차림에, 왼쪽 팔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용 의 수가 새겨져 있었다. 이번 차원이동 원정에 참여하는 대원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조선에서 내노라 하는 무관 한명과 장영실을 포함한 두명의 공학자가 원정의 주인공 들이었다. 원정대 대장을 맡은 장영실은 허리춤에 언어해독기를 꽂으며 두명의 대원 들에게 조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귀공들과 내가 떠나는 원정은 천하 최초의 원정이 될 것이다. 본인은 이번 원정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해줄 수가 없다. 또, 성공 할 수 있다는 보장 역시 해줄 수 없다. 다만 모든것을 천운에 맡길 뿐이다. 서로의 얼굴을 잘 봐두도록 다시는 인 세에서 볼 수 없을 얼굴이 될지도 모른다. 허나 하나만 기억해주길 바란다. 이 모든 것이 대 조선과 한민족의 번영을 위한 것임을... 이번 일은 극비 사항으로 분류 될 것이며 이후 자네들의 신변사항은 조정에서 일관 할 것이다." 장영실의 말에 긴장을 하는 듯한 두 대원이었다. 허나 그들에게 목숨보다 더욱 중요 한 것. 공학자의 혼이 가슴속에 꿈틀거리기에 차원 이동자라는 자부심만으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이어 장영실의 말이 계속 되었다. "자! 잠시후면 모든 준비가 완료된다. 전하가 계신 곳을 향하여 대례를 올린후 떠나 도록 하세..." [천지 신명이시여 저희를 지켜 주소서....] 그 조차 염려가 되는지 하늘에 운을 비는 장영실이었다. 두 명의 대원들과 장영실은 동쪽을 향하여 삼배를 한 후 자신의 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이때 제 3 공 학원 전체에 때를 알리는 목소리가 울려 지기 시작했다. -장영실공. 모든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모든 전뇌공학자들은 차원이동문의 자신의 전뇌선 앞으로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원을 한번 살펴본 장영실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차원 이동문 앞으로 걸어갔고 나 머지 대원은 서로의 눈을 한번씩 마주친 후 장영실의 뒤를 따랐다. 제 3 공학실 차원 이동문 앞. 장영실과 두명의 대원들... 그리고 그들을지켜 보고 있는 수많은 눈 들.... [드디어 떠나는 것인가...? 이세계는 어떤 곳일까?] 자신의 상념에서 깨어나려는 듯이 장영실은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공학자, 그리고 연구원들 모두들 수고 많았네.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쏟아온 노력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차원 이동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바 이 이후의 일들을 소상히 기록해 주기 바라네. 앞으로 살아서 자네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 으나 그 동안 수고해줘서 정말 고마웠네. 이 이후의 일들은 신재효 공학자에게 위임 하겠네. 그럼 신공학자 시작하게나." "네 장영실공! 모든 공학자 및 연구원들 자신의 위치 확인하십시요." 신재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무명의 전뇌공학자들이 차원 이동문으로 이동하 였고, 연구원들은 자신이 담당한 곳에 위치해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전뇌관을 접지해 주십시요." 전뇌공학자들은 신재효의 말에 따라 차원 이동문과 연결된 전뇌관을 자신의 단전 부 위에 접지 하였는데, 그들도 긴장이 되는지 전뇌관을 접지하는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공학자님들께서는 뇌공력을 운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뇌관을 단전에 접지한 공학자들이 자신의 뇌공력을 운기하자 그들이 내뿜기 시작한 뇌공력은 전뇌관을 따라 이동하였고 서서히 차원이동문이 빛을 할하고 있었다.... "뇌전력 완충 에상시간 5초전" -삐! "서낭당에서 채취한 차원 좌표입력 개시!" -삐! -3....2....1..... "뇌전력 완충. 죄표 입력 완료! 차원문 개방됩니다!" 개방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둥근 원형의 차원문에서는 공간 외곡이 생기기 시작하였 다. 주변에선 놀라움의 신음 소리가 퍼졌고. 외곡은 점차 뚜렷해져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장영실공 지금입니다. 서둘러 드시지요." 신재효를 바라보며 씨익 웃은 장영실은 차원의 문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딪었다. 그의 발은 차원문 속으로 빨려 들듯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이어 몸 전체가 차원 이동문으 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뒤따라 나머지 두명의 대원도 조심조심 차원의 문 을 통하여 이세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자들은 아직까지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이세계에 안전하게 갔는지 확인을 하기 전 까진 말이다. 장영실들이 이세계를 향하여 떠났을때 즈음하여 한양의 성곽에는 수많은 방들이 나붙 었는데 그내용은 이러하였다. -궁중 공학자 장영실은 정명 정신에 위배하여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불량한 가 마를 제작하여 전하의 옥체를 상해했는바! 위의 연유에 의하여 귀향을 명하노라. (8) 공학 뇌동 심결 [어떻게 된거지?] 뮤스가 사방을 살펴 보니 어두운 공간이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오로지 느낌으로 밖에는 모를 깜깜한 공간. 뮤스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두려움이었 으리라. 그런 그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신아 네가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지식 이전술'이 성공한 게로구 나. 지금 내 목소리는 너의 머리 속에 저장되어 기초 능력을 닦아주기 위한 안배란 다.] 장영실의 목소리! 그러나 실제 장영실은 아닌 듯 딱딱히 일관된 목소리만 들려왔다. 대화도 할 수 없고 존재감도 느끼지 못할 목소리. 허나, 문득 그리움에 잠긴 뮤스였 다.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집을 떠나 이런 낯선 땅에서 지낸 그 몇 일간이 어린 뮤 스에게는 쉽게 여길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뮤스가 어떻게 느끼던지 상관없다 는 듯이 장영실의 딱딱한 목소리는 계속 되었다. [지금 네 머리 속에는 지난 한민족 사천년간의 공학 기술들과 타민족으로 부터 전해 진 과학 기술들이 집대성되어 있단다. 앞으로의 너의 자질에 따라 그 이상의 것들을 취할 수 있을 터. 그러기 위해서는 공학자로서의 기본이 되는 '공학뇌동심결'을 익혀 야 하느니라.] 계속 되는 장영실의 목소리에 잠시 그리움을 뇌리에서 지운 뮤스는 목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장영실의 목소리는 서책을 읽는 듯 지루하게 계속되었지만 뮤스로서는 그 목 소리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이 '공학뇌동심결'이 내가 너에게 전해줄 모든 것이리라 생각되는구나. 그이후의 능 력들은 네 머리 속에 이전되었기에 스스로 깨우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너는 '공학뇌 동심결'이란 말이 낯설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쉽게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구나. 사람의 몸에는 내공이라는 것이 쌓여 있단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양이고 이를 증진 시켜 대륙(명나라)에서는 무예를 익히고, 자신의 심신을 단련한단다. 허나 우리 한민 족은 무보다는 문을 중시하는 민족임을 알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예에 이러한 내력을 쓰기보다는 이를 변형 시켜 두뇌 회전을 빠르게 하고, 기억력을 증진시키는 것과 동 시에 뇌의 기운을 띈 내공 즉, '뇌공력' 으로 공학기술에 필요한 뇌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단다. ] 장영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뮤스였다. 크라이츠의 금제 제거가 효력이 있었는지 뮤스는 모든 이해 할 수 있는 것을 뛰어 넘어 그 이상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자 신의 머리에서 샘솟아 나는 생각들, 그리고 왠일인지 모르게 온몸에서 솟구치는 기이 한 느낌들... ['지식 이전술'로 인하여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되는 구나. 그 럼 내력을 '뇌공력'으로 만들 수 있는 '공학뇌동심결'을 익히도록 하거라. '공학뇌동 심결'은 대륙의 것과 같이 따로 구결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니라. 네 뇌리에 흐르는 음률을 따라 단전에 있는 내력들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니라. 그럼 마음의 준비는 다 된 것으로 여기고 시작하겠느니라.] 명신은 마음을 편히 하고 자신의 뇌리에서 흘러 움직이는 음률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음률은 어떠한 악기에서 나 올 수 있는 음이 아니었다. 마치 느낌을 음의 움직임 으로 표현 한 듯. 느긋 하려 하니 격동적이 되었고, 규칙을 느끼려 하니 불규칙적으 로 변하였다. 음률을 느끼며 정신으로 반응하자 단전부위 에서 뜨거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음률이 뇌리??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온 몸에서 느껴지는 음률을 타고 조금씩 단전의 기운들이 전신 사지백해로 흘러 나가기 시작하였다. [어라 엄청나게 흐름이 빨라지네! 게다가 내 몸에 언제 이렇게 내력이 쌓이게 된 거 지? 혹시 그 '태극청심단'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 약장사가 신분을 숨긴 기인 이었나 보군.] 아직 자신이 복용한 것이 '청명뇌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뮤스였다. 벌써 다섯시 진(10시간)째 내력이 음률과 함께 온몸을 돌고 있었다. 그러나 내력은 더더욱 강맹한 기세로 몸을 둘러 다녀 멈출 줄 몰랐고, 온몸을 돌고 있는 내력이 일정한 흐름과 방 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느끼게 되자 뮤스는 그 흐름과 방향을 몸으로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내력 흐름의 크기가 일정하게 고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저절로 음률에 따라 뇌공력이 움직이게 되네? 마치 버릇처럼 내력들이 온몸을 누비고 다니는 것. 이것이 바로 '공학뇌동심결'의 효용인가? 이제 많이 익숙해 진 것 같아. 이제 이 뇌공력들을 방출하는 방법만 익숙해지면 되겠는데 말야...] 이때 장영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제 다 된게로구나. 이제 내가 네게 해줄 일은 더 이상 없단다. 네 몸에는 미약하 게나마 뇌공력이 흐르고 있을 터이고, 네 머리로 이전된 지식들을 사용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여 진것이다. 허나 지식이라는 것이 뇌리에 인식이 되어 있다하여 십할 사 용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니라. 그러하기에 스스로 더욱 정진하여 모든 지식들을 자 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그럼 이제 깨어나거라.] 서서히 흐려져 가기만 하는 장영실의 목소리였다. [아저씨! 아저씨!]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뮤스였지만 한 가닥의 아쉬움으로 장영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지에 흐르기 시작한 감각으로 인하여 정신 을 차렸기에 그저 아쉬움으로 남길??밖에 없었다. "으음..." 뮤스가 깨어 난 것은 정신을 잃은 후 여섯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그래서인지 눈꺼풀 을 열기가 굉장히 힘들었는데 한참을 고생해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를 바라 보던 켈트와 크라이츠는 변화한 뮤스의 외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뮤스의 동공은 언제 흐렸냐는 듯이 검고 맑았으며 그로 인해 그의 외모가 완성되었는데, 화룡정점이 란 말이 이를 두고 생겨난 듯 했다. 주변을 둘려보자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켈트와 크라이츠의 놀란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잘 몰랐었는데 뮤스 꽤나 잘생겼구나? 내가 누군지 알겠어? 이게 몇 개야?" 손가락을 두개를 뮤스의 눈앞으로 내밀면서 물음을 던지자 크라이츠의 행동에 웃으면 서 대답했다. "헤헤 누님. 손가락으로 보면 두개, 손으로는 하나, 마디로 따지면 여섯 개 아니겠습 니까?" 뮤스의 대답에 두눈만 껌뻑이는 켈트와 크라이츠였다. "이봐! 이게 아까 그 모자라던 뮤스 맞나? 사람은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너 괜찮은 거야?" "헤헤 켈트 아저씨가 더 이상해 보이는데요? 피부가 많이 상했군요. 어디 아파요?" "이 녀석아! 이게 다 네 녀석 걱정하느라 생긴 것이 아니냐! 내 어찌 말년에 너 같은 녀석을 만나 이렇게 고생을 하는지 원. 쯔쯧..." 혀를 차는 켈트를와 티격거리는 뮤스에게 크라이츠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상한데는 없니? 아니면 뭔가 변한 것이라든지 말이다. 아무래도 각성 을 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텐데..." "머리에 이것저것 떠도는 기억들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네요. 몸도 날아 갈 것 같이 가벼워요! 그 중에 제일 신기한 건 이거예요." 궁금한 듯이 바라보고 있는 켈트와 크라이츠를 향해 뮤스는 오른쪽 손을 내밀어 손바 닥을 폈다. 그리고 숨을 한번 들이쉰 후 손바닥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듯 하자 놀랍게 도 그의 손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츠팟!! "헉 뮤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손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리다니!!! 너 혹시 마법까지 배우게 된거냐?" 켈트의 물음에 손을 허리에 얹고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헤헤 아저씨 이건 마법이 아니예요. 뇌공력이라는 거죠. 즉 전기라고 할 수 있겠네 요. 아저씨처럼 무식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니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어떻게 쓰는 것인지 보여드리죠." "누...누가 무식하다는 거냐! 감히 라이부크 드워프족의 전족장에게 무식하다고 하는 녀석은 대륙에서 너밖에 없을 것이다!" "거참 속 좁으시기는 장난한번 해본 건데... 120년이나 사셨다면서 16살짜리 말에 뭘 그렇게 열을 내시는지 원..." 각성을 했다지만 철부지의 기고만장함까지 고쳐지지는 않았는지 계속해서 켈트를 약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가 자신을 편안하게 생각하기에 이러는 것임을 아는 켈트 였기에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겉으로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보 였지만 말이다. 켈트와 드잡이질 하던 뮤스는 마침 생각 났다는 듯이 크라이츠에게 말했다. "아참! 누님 제가 살던 곳에서 '차원이동설'이라는 이론이 있었어요. 이론 일 뿐이지 아직까지 성공한 적은 없지만 지금 그곳에서 연구중이었네요. 혹시 장영실 아저씨가 이쪽으로 오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래뵈도 그쪽 세상에서는 꽤나 귀한집 자식이었거 든요!" 뮤스의 말에 크라이츠가 놀라며 물었다. "뭐라고? 차원이동을 인간의 힘으로 한다는 말이냐?" "네? 헤헤 그런 것이죠. 제 머리에 들어있는 것을 정리해 봐도 참으로 대단한 기술이 네요." 뮤스는 자신이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분이 좋은 듯 했지만 크라이츠 는 더욱 생각이 복잡해진 듯했다. [차원이동은 신들의 영역이거늘 어찌 감히 인간 주제에 신의 영역에 도전한단 말인 가. 주신께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기에... 어쨌든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으니 두 고보면 알겠지.] "뮤스가 말한대로 그 세계에서 이쪽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넘어 올지도 모르니 인간 들의 세상에 빨리 나가 있는 것이 좋겠구나. 그래야 정보도 쉽게 얻으니 말이다." "네! 좋아요!" "켈트 씨는 어때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켈트가 분위기 정화를 위해 끼어들었다. "흠. 크라이츠님 저도 좋습니다... 누구 때문에 제 동굴도 무너져서 갈곳도 없었는데 잘됐군요." 은근히 뮤스에게 눈치를 주며 뼈가 있는 말을 내뱉는 켈트였다. 그러자 뮤스도 자신 의 실수를 알긴 아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아저씨.. 뭐 그럴 수도 있는거죠! 쪼잔 하시게... 누님 그럼 언제 출발하죠?" "옛말에 '오크의 뿔도 당긴김에 빼라는 말도 있잖니? 당장 출발하자꾸나. 그리고 저 는 유희중인 것이니 제 생명이 위험할 때나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아니면 마법도 안쓸꺼예요. 아시겠죠 켈트씨?" 드래곤은 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기주의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는 켈트였다. "네엣! 알았어요 누님! 켈트 아저씨 빨리가요!" "허허...알았다 알았어. 출발 하자꾸나." "아차...그런데 이젠 어떻게 이동하죠? 크라이츠 누님은 마법도 안 쓰신다면서요?" "그렇구나... 어떻게 하지? 나 같은 어여쁜 레이디가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말야. 켈 트씨 저 좀 업고가 주시겠어요?"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크라이츠의 말에 켈트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차 마 드래곤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머리를 조금 굴려본 켈트가 온몸을 주무르며 말했다. "아이구 다리야, 허리야, 팔이야, 머리야, 살이야 보시다 시피 뼈다귀들이 아우성을 쳐서 말이죠. 크라이츠님을 업고가는 영광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서도... " "어멋! 농담이었어요. 제가 켈트씨에게 업히면 다리가 땅에 끌리지 않을까요?" 은근히 인신공격을 하고 있는 크라이츠였지만 켈트가 뭐라 말 할 수는 없었고, 업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이츠와 켈트가 뭔 짓을 하 던지 관심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인 가? 크라이츠의 보물들 사이를 둘러보던 뮤스는 한 손에 금속 물질인 듯한 두껍고 둥 근 원통을 들어올렸다. "헤헤! 역시 자력을 가진 물건 군. 누님 이것 좀 써 도 되요?" 켈트를 데리고 말장난하던 크라이츠는 뮤스의 손에 들려진 둥근 원통을 바라보며 고 개를 갸웃 거렸다. "그건 전에 드워프 마을에서 쇠찾을 때 쓰는 물건이었는데. 그게 왜 아직도 여기 있 지? 아차! 그때 도적으로 유희를 즐기던 때였구나. 뭐 마음대로 하렴 이제 나와는 상 관없는 물건이니." 놀림당하던 켈트도 그것이 뭔지 궁금하여 뮤스의 손에 들린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리 곤 방방 뛰며 전보다 더욱 화가 난 모습으로 식씩거렸다. "자력통이잖아! 내가 43살때 우리 마을에서 저게 없어져서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는 데!! 그사건의 주동자가 크라이츠 님이셨나요?" 화가 난 눈빛으로 째려 봤지만 역시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는 드래곤이었다. 뮤스는 켈트의 이야기쯤이야 아무렴 어떻냐는 듯이 빙글빙글 웃는 모습으로 켈트를 향해 소 리치기 시작했다. "켈트 아저씨! 제가 설명하는 것 좀 만들어 주실 수 있으 신가요? 아저씨 정도의 손 재주면 이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재료들도 이 동굴 안에 있 는 정도면 충분할 거 같고요. 누님 뒤에 있는 재료들 좀 쓸게요. 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애교 비슷한 표정에 아무렇지도 않았을지 몰라도 맑고 깊은 눈빛 을 되찾아 미소년이 되어 버린 뮤스의 애교는 꽤나 효과가 좋았다. "그런데 그 재료라는게 뭐니? 내 동굴에는 보물들밖에 없는걸?" 뮤스가 뭘 하려는 지 궁금해진 크라이츠가 되물었다. "헤헤...그 보물들이 바로 재료라는 거죠... 많이는 필요 없구요. 은만 조금 있으면 되거든요? 아주 조금만요." "은? 은 조금 이면 된다고? 그렇게 하려무나." "헤헤 고마워요 누님! 켈트 아저씨! 우선 나무로 여기 그려드리는 대로 좀 만들어 주 세요." 켈트 역시 궁금했기에 빨리 뭔지 알고 싶다는 듯 뮤스의 곁으로 와서 그가 바닥에 그 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뮤스의 손은 신들린 것처럼 바닥의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 는데 그의 눈빛이 점점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림의 모양이 점차 나타나고 있었 다. 정면과 측면 그리고 윗면에 정확한 치수가 기입된 그림이었는데, 약간의 설명과 함께라면 그림을 이해하는데 별로 어려워 보이진 않았고, 제작하기가 까다로워 보였 으나 무려 120년이나 뛰어난 손재주를 갈고 닦은 드워프 켈트에게는 어린애 사탕 빼 앗아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한참동안을 그리던 뮤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림을 한 번 살펴봤다. "아저씨 이제 됐어요! 이 정도는 손쉽게 만들 수 있겠죠?"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이 뮤스의 물음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리던 켈트는 뮤스를 향해 고개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 후 번개처럼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동안 어디서 연극을 많이 봤나보다. 옆에서 유심히 뮤스의 그림만 지켜보던 크라이츠 는 마치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미식가처럼 기대에 부풀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뮤스는 질문을 던졌다. "누님. 이 세계에서 쓰는 도량형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시간단위나 측량 단위 같은 것들요. 그리고 글도 배워야 할 것같은데... 아무래도 켈트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의사 소통을 하려면 힘들 것 같거든요." "아...그렇겠구나. 그래 뭐 간단한거만 가르쳐 줄께. 이곳은 하루를 24등분을 해서 시간의 단위로 나타 낸단다. 그리고 그 각시간들을 60등분하여 분이라 하고 또 그 분 들을 60으로 나누어 초라고 하지. 또 뭐가 있을까? 그래. 길이 단위로는 손을 옆으로 뻗어서 손끝부터 코까지의 거리를 1야덴 라고부른 단다. 그런데 거의 멜리 단위를 쓰 지... 1야덴보다 1/9가 긴 길이란다. 그리고 1000멜리는 1켈리가 되고 1멜리는 100셀 리가 된단다." 크라이츠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뮤스였다. "켈리..멜리...셀리....시...간...분.... 헤헤 조금 더 지나면 익숙해 지겠죠. 고마 워요." "아 그리고 글은 내가 익히게 해주마." "누님이 어떻게요? 지금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모자랄 텐데요." "물론 배우려면 그렇지. 하지만 나는 드래곤 아니니? 마법으로 해결 할 수 있단다." 말을 마치는 즉시 크라이츠는 뮤스의 머리에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려 언어 습득 마법 을 펼쳤다. "스프라케 이히 아우프 드라켄 뭬이크테 이히 스튜디렌!" 마법언어의 영창이 끝나자 그녀의 손에서는 붉은 빛이 쏘아져 나가 뮤스의 머리를 비 추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그 빛은 소멸 되었다. "호호 이제 다되었단다." "우와! 신기해요! 조선에서는 '지식 이전술'을 하려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데 누님 은 금방 하시네요?" 뮤스의 기억을 이미 읽어 본 크라이츠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새 알 수 있었 다. "아니란다. 나는 고작 너에게 언어 습득만을 가능하게 했지만. '지식 이전술'은 엄청 나게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만든 것이니 당연히 걸리는 시간이 차이가 나는 것이란 다." "그렇군요! 헤헤 아무튼 고마워요." "고맙긴 이게다 내가 편하자고 하는 일인데. 네게 글을 가르치려면 얼마나 힘들겠니? " "아 네.." 뮤스의 언어 습득을 도와준 크라이츠는 그에게 이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현시대의 왕이나 계급, 또는 국가의 대치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조선 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뮤스가 크라이츠의 이야기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무렵 동굴입구로 켈트가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뮤스! 완성다. 빨리 나와서 보라구!" 크라이츠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지만 정말 놀라운 속도였다. 뮤스 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은 족히 걸리라 생각한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간 것이었다. 켈 트의 능력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와 벌써요? 한번 나가보죠! 누나 같이 나가봐요!" "그래 그러자꾸나." 동굴밖에는 금방 만든 듯 나무냄새가 물씬 풍기는 수레가 있었다. 바퀴가 네 개 달린 이 수레의 모습은 평범한 그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퀴의 둘레는 나무껍질로 두 껍게 말려 있었고, 바퀴의 축 사이에는 서로 맞물려있는 수많은 톱니 바퀴들이 보였 다. 수레 윗부분에 달려있는 의자는 총 네개 였는데, 그중 앞쪽 의자 중 한곳에는 이 수레를 조작 할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켈트가 만든 수레를 본 뮤스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있었다. "우왓! 아저씨 완벽해요! 다시 봐야 겠는걸요? 그럼 이제 제일 중요한 것만 남았네 요. 저기 있군..." 나무로 된 수레 옆에 켈트가 따로 만들어둔 나무 부속을 집어든 뮤스 였다. "아저씨! 누나 동굴에 있는 은으로 얇은 은실을 만들어서 여기 감아 주시겠어요?" "은실? 뭐 그러지..." 뮤스의 부탁에 더욱 의구심만 쌓여 가는 켈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동굴안으로 들어갔 고 곧 은으로 된 물건들을 들고 나와 녹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은이 녹기 시작하자 한 올 씩 은실을 뽑아 내는 켈트의 모습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진지한 모습이었는데 과연 장인의 종족이라는 드워프 일족의 전대족장다운 면모였다. 은실을 나무 부속에 다 감은 켈트는 이제 자기가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완성 된 부속을 뮤스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거냐? 에고 허리야!" "헤헤 물론이죠. 이제 나머지는 제가할게요!! 우선 이걸 자력 통 안에 넣고, 남은 은 실을 연결 한 다음에... 여기다 장착하면..." 손수 부속을 조립한 뮤스는 수레위로 올라가 자신이 조립한 부속을 장착하기 시작했 다. 아직 어린 몸이라 힘이 드는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일을 끝낼 수가 있었다. 뮤스는 허리를 시원하게 한번 펴보고 옆에서 구경하고있는 켈트와 크라이츠를 불렀 다. "누나! 켈트 아저씨 다됐어요!" 뮤스가 부르자 켈트는 수레의 옆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수레가 어쨌다는 거냐?" "이 정도 보여 줬으면 대강이라도 짚히는게 있을 것 아닙니까?" "에? 그럼 이 수레가 혼자 움직이기라도 한단 말이냐?" "호오 왠일이실까? 켈트 아저씨가 그런걸 다 맞추고?" "그 무슨 뉘앙스냐?" "아무튼 두분다 올라 타세요. 제가 사는 곳에서는 이 수레를 전뇌거라고 불렀죠." 전뇌거에 올라탄 켈트와 크라이츠는 수레의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는 듯한 표정을 짓는 드래곤과 한 드워프였다. "전뇌거라구? 이 수레가 정말 말 없이도 움직인다는 거니?" "헤헤 누님도 못 믿는 눈치시네. 이거 섭섭한 걸요. 두고 보시면 아시게 될 일이지 만..." 운전석에 앉은 뮤스는 보란 듯이 바닥에 연결된 긴 선을 꺼냈고, 그 선을 두 다리에 묶었다. "이 선을 통해서 아까 말씀드린 뇌공력을 전뇌거로 주입하는 거죠. 잘 보세요!" 뮤스는 몸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뇌공력을 느끼며 그 흐름을 두 다리쪽으로 유도하 기 시작했다. 각성을 한 후 처음으로 사용하는 뇌공력이었기에 몸에 익숙하지 않아 어색했지만 많은 양의 뇌공력을 유도해 내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는 않았다. 몸밖으로 뇌공력이 방출되기 시작하는지 다리와 접지된 선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곧이어 윙 하는 소리와함께 약간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전뇌거의 진 동에 놀란 켈트가 소리쳤다. "이봐 뮤스 이거 무슨 소리야?" "글쎄 보기만 하라니까요! 아저씨는 다 좋은데 너무 질문이 많아요." 전뇌거가 생각대로 시동되자 기고만장 해진 뮤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그러자 전뇌거가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수가! 저..정말 움직인다!" "어머머! 정말이네!" 크라이츠와 켈트의 놀라움은 가히 하늘을 찔렀는데... "허허 120년 헛살았구먼. 그런데 이 정도 속도로 밖에 못움직이는거냐?" 켈트의 질문에 무슨 말이냔 듯이 웃었고, 자신 앞에 위치한 둥근 모양의 방향 조절대 를 꾸욱 잡으며 말했다. "헤헤... 단단히 잡으십쇼! 손님 출발합니다!" 더 많은양의 뇌공력을 전뇌선으로 흘려 보내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는데 점점 빨라져 시속 40켈리 정도의 속도로 전뇌거가 움직였다. 갑자기 빨라 진 속도에 떨어 질뻔한 켈트는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크라이츠는 예상외의 스릴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야호! 이거 날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구나!" 하지만 반듯하게 난 길이 아니라 좁은 산길이었기에 전뇌거의 기체는 심하게 흔들리 고 있었다. -덜커덩 덜커덩! "산길이라 조금 흔들릴 꺼예요! 조심해요!" "이게 조금이냐! 아악! 혀 깨물었다!" "호호호! 좋아좋아! 달려라 달려!" 이세계에서 온 뮤스와 털털한 드워프인 켈트, 푼수 드래곤 크라이츠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는데... (8)드워프마을의 운석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아늑한 동굴... 동굴의 크기는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습도와 온도가 적절해서 인지 아주 아늑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모닥불을 중심으 로 둘러앉은 드워프 들이 있었다. 모두 십여명 정도의 숫자였는데 한결 같이 얼굴에 는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장 중심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드워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라이부크 드워프족의 근 100여년 중에 가장 큰 사건이오. 더 이상 철을 채굴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할 것이오... 뭔가 좋은 방안들 없으 시오?" 주변에 둘러 앉은 드워프 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는 프란트 족장이었다. 허나 그 역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뾰족한 방법이 없는걸 알고 있어서 인지 대답을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장로들과 토론을 한다는 자체로 위안을 삶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족장도 아시다 시피 광산을 막고 있는 그 희귀한 광물 덩이를 치우기에는 우리의 힘 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지반이 약한지라 다시 입구를 만들 수도 없고...인 간들의 마법사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 어떠한지." 족장의 맞은 편에 앉은 킬트로 장로였다. 그는 족장과 어렸을 때 부터 막역한 사이였 지만 부족의 장래가 달린 중요한 회의 자리인 만큼 서로를 존중 해주고 있었다. "킬트로 장로...장로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어지간한 레벨 을 가진 마법사로는 어림도 없을 거요... 게다가 그들을 영접하는 대가 역시 만만치 않을 것 같소. 더어욱 곤란한 것은. 그런 마법사들이 굴러다니는 돌맹이 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 아니겠소? 마법사들이 얼마나 고고한지 아시지 않소? 그 고고함 때문에 점점 그들의 수가 줄고 있으니... 인과응보일 것이요. 이럴 때 케 르히트 전족장만 있었어도 뭔가 방안이 있었을 터인데..." 장로의 말에 수긍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장로들이었다. -털그덕 털그덕 끼익! 동굴밖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모두의 이목은 동굴의 입구쪽으로 집중이 되었 다. "여어 프란트 안에 있는가?!" 목소리의 주인공에 대하여 생각을 잠시 해보던 동굴안의 족장과 장로들은 한 명의 인 물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케르히트님의 목소리군!" 오우거도 제말 하면 나타난다던가? 켈트의 목소리에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족 장과 장로들은 동굴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들이 동굴 밖에 당도하자 켈트가 전뇌거 에서 내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내가 간만에 왔다고 그렇게 반갑던가? 이렇게 다들 뛰어 나오다니. 나의 인기 는 언제쯤 사그거 들지..." 능청스럽게 웃고만 있는 켈트의 뒤로 크라이츠와 뮤스가 전뇌거에서 내리고 있었다. "케르히트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무소리도 없이 잠적하신지 20년만에 나타나셔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짓다니요." "허허 그랬나? 벌써 20년이 지났단 말인가? 미안허이. 그런데 왜 이렇게 우르르르 나 왔는가? 남들이 보면 산적떼라도 몰려나온 것으로 알 것 아닌가?"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는 켈트였지만 자신의 농담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족장과 장 로들에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그런가? 무슨일 있었는가?" "켈르히트님이 실종되신 후 10년쯤 지나자 마을에 변괴가 생겼습니다. 별안간 운석이 철 광산으로 떨어져 입구가 막혀 버린겁니다. 그 동안은 저장 된 철로 어떻게든 버텼 지만 이제 그 저장량도 거의 바닥났기 때문에..." 족장의 말이 이해가 안된다는 켈트의 표정이었다. "그럼 그 운석을 깨버리면 되지 않는가? 그것도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그것이 이상한 성질을 띄고 있는 운석이라서 그 강도가 일반 적인 광물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드워프들을 동원해 광물을 해체하려 했으나 녹일 수 도 없고 깰 수도 없었지요... 게다가 그 무게도 엄청난지라..." 족장의 말을 들은 켈트는 근심스런 표정을 짓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의 머 리를 때리며 뒤에 있는 크라이츠와 뮤스를 족장과 장로들에게 소개를 시켰다. "내 정신 좀 보게. 이 쪽은 드..아니... 투트가르에서 오신 크라이츠님이시고 이쪽은 뮤스라네. 나와함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려고 마을에 잠시 들렸는데 이런 일이 생 기다니..." 그의 뒤에 있는 뮤스와 크라이츠를 바라보던 족장이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냈다. "케르히트님의 손님이시면 저희 부족 최고의 귀빈이십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라 이부크 드워프족의 족장을 맡고 있는 프란트라고 합니다. 거의 켈르히트님의 손에서 크다시피 했죠. 애써 이곳까지 오셨는데 들으셨다 시피 마을 분위기가 썩 좋진 않군 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프란트의 인사를 받은 크라이츠와 뮤스 역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켈트씨께서 이렇게 나이든 분을 키우셨다니 믿기지가 않는 걸요? 아무튼 만나서 반 가워요. 프란트씨." "헤헤 저도 반가워요! 뮤스라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다들 켈트 아저씨랑 비슷한 몸 매...아얏!" 드워프들의 몸매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했지만 켈트의 눈물나는 알밤 덕에 끝까지 이 어지지는 못했다. 인사가 끝나자 켈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걱정하면 뭐하겠는가? 밤도 늦었는데... 그건 그렇고 프란트 뭐 먹을 것 좀 없 을까?" 무책임한 켈트의 말에 프란트와 장로들은 한숨을 쉬었지만 멀리서 온 손님들을 접대 도 못하는 것이 도리는 아니라 여겼기에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후우... 좋습니다. 케르히트님이 오신 날이니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저녁이나 같이 드시죠." "멜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내일이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네! 자자 식당으로 가자고!" 드워프들의 크라이츠의 레어와는 달리 굉장히 구조가 복잡했다. 이곳을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게 길을 잃고 난처해하기 딱 알맞았는데, 프란트의 안내 덕분에 복잡하기 그지 없는 동굴을 쉽게 들어 갈 수 있었다. 식당의 내부는 아주 간소했는데 50개 가량의 의자들과 커다란 석탁이 전부였다. 마침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려 했 는지 이미 몇몇 드워프가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들은 켈트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깊히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하던일에 계속 열중했다. "하하하! 역시 집에서 먹는 식사만큼 즐거운게 없다네. 어서 먹자구! 언제까지 거기 서있을 참인가? 응?" 역시나 자신이 살아 온 곳이고 가장 연장자라는 인식이 확실한지 일 푼의 거리낌도 없이 식탁으로 달려가 스푼을 들고 앉은 켈트였다. 그의 거리낌없음에 익숙한지 주변 의 드워프들은 별다른 말없이 각자 자리에 앉기 시작했고 드워프들 답게 게걸스러운 식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평소의 식사시간이었다면 시끌벅적 함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마을의 중대사가 눈앞에 있는 만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치자 켈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제 난 잠 좀 자야겠네. 어느 분들 덕분에 몇 일 동안 잠다운 잠을 못 잤거든. 자 네들은 이해해주게나." 켈트가 은근한 말을 하자 크라이츠와 뮤스는 가는 눈을 뜨며 켈트를 바라보았다. 그 들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외면한 켈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흠... 크라이츠님과 뮤스에게 방 좀 안내해주게. 크라이츠님 저 먼저 실례하겠 습니다. 뮤스너도 좋은 밤 되거라!" 크라이츠는 유희를 시작하자 더 이상 드래곤으로써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하품 을 하며 식당에서 걸어 나가는 켈트를 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켈트가 사라지자 옆에 있던 족장이 혼잣말로 씁쓸히 중얼거렸다. "헤휴... 연세가 150세가 넘으셨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으시군. 예나 지금이나 저 낙 천적인 모습은 변한 것이 없어." 옆에서 족장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족장아저씨! 켈트 아저씨는 120살 아니신가요? 저한테 120년 살았다고 하시던데요?" "허허...케르히트님이 120세 되시던 해부터 언제나 청춘을 유지하겠다고 하시면서 여 러 해가 더 지나도 언제나 120살이라고 하신 다네. 그런지가 벌써 30년이나 지났구 먼... 엄청난 괴짜시지. 음 뮤스라고 했던가? 그리고 크라이츠님은 절 따라오시죠.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뮤스를 잠시 바라보던 크라이츠는 웃으며 프란트를 따라 나섰다. 뮤스와 크라이츠가 안내받은 방은 각각 침대 하나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안락한 의자가 있는 단란한 방 이었다. 하지만 가구들이 장인의 종족인 드워프들이 만든것임을 여실히 나타내듯이 정교한 문양이 세겨 져 있었다. 허나 드워프들의 크기에 맞췄는지 인간의 어른이 누 워 자기에는 약간 작은 것이 문제였다. "어머나! 뮤스 네 방의 침대도 작구나... 이를 어쩌지?" "그렇네요 정말! 여긴 객방도 없나. 다리긴 사람들이 와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그런 것쯤은 있어야 정상인데. 할 수 없이 저 의자나 붙여서 자면 되겠죠 뭐." "호호 그렇긴 하겠구나. 그럼 뮤스 잘자거라!" "누님도 잘자요!" 크라이츠가 문을 닫고 나가자 천장에서 돌 조각이 부스스스 떨어졌다. 막상 혼자 있 으려니 동굴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드워프의 실력을 믿는지라 금방 두려움은 잊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 지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 라던가... 지난 시간동안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녔다. 아버 님과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렇게 보기 싫던 잘난척하는 개똥이와 덕구 그리고 돌쇠까지 모두가 그리운 얼굴이 돠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거 잠이나 자자! 언젠가는 돌아 갈 수 있겠지!" 혼잣말을 하며 이불을 뒤 집어 쓰고 돌아누웠지만 이불이 짧아 발이 이불 밑으로 튀 어 나왔다. 뮤스가 잠에서 깼을 때는 동굴이라 아직 아침인지 아니면 늦잠을 자서 오 후인지 느낄 수도 없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메아리처럼 뮤스의 귀를 때렸 다. 아직 잠결이라 정신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가 졌기에 밖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또 드워프들이 모였나? 음..그러고 보니 그 일이 아주 중요한 일처럼 보였는데... 일단 나가보자.] 옷을 대강 입고 문을 열고 나간 뮤스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으며 동굴의 밖으로 나왔 다. 동굴의 입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드워프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고 그 중 에 켈트와 크라이츠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뮤스가 드워프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자 켈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거 참 뭐 이런 광물이 다 있지? 내 120년 인생동안 이런 광물은 처음이군. 이 무 게하며, 이 강도, 정말 우리 부족은 이사를 해야 하는가. 끌끌끌.." 혀를 차는 켈트는 여전히 120세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른 드워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뮤스는 코밑을 한번 쓸며 켈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저게 어제 들었던 그 운석인가요?" 자고있는 줄 알았던 뮤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켈트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뮤스 이제 일어났구나. 저게 어제 말한 그 문제의 운석이란다. 저런 물질은 처음이 야. 가공하는 기술만 있으면 엄청 유용할거 같은데 아직 치우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 으니... 말이 삼백필 정도는 있어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산중에서 말 삼백필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지." 옆에서 운석을 바라 보고있던 크라이츠 역시 동조하는 말투였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야... 나도 이런 물체는 처음이거든? 아무래도 이 곳의 물질은 아니구나. 이걸 치우려면 순수한 9클래스 정도의 마법사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방법 없겠니?" 내심 크라이츠가 본체로 돌아가 이 운석을 치워 줬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켈트였지만 부탁을 포기하고 뮤스에게 기대를 걸 뿐이었다. 크라이츠와 켈트가 뮤스에게 자문을 구하는 모습을 본 드워프들은 이해가 안갈 따름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잠시 운석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의 머리에 한 가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운석을 말 삼백필 정도면 끌어 낼 수가 있다고 하셨죠?" "그렇긴 하다만. 뭔가 방안이 있는 거야?" "한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했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제 계산이 맞다면 가능할거 같아 요!" "오 정말이냐? 그래 어떤 방법이길래?" 켈트의 물음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살던 조선이란 곳에서는 거중기라는 기계가 있었죠. 거중기는 작은 힘으로 큰 물체를 움직일 때 쓰던 기계인데 그 원리를 이용하면 될 것 같거든요?" 뮤스의 말이 멈추자 주변에서 서있던 족장과 마을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며 켈트가 말 했다. "허허 뭣 들하는가 뮤스가 시키는 대로 일할 생각은 안하고? 어서 모이게나! 자세한 설명좀 해보라구..." 켈트가 자신을 크게 신임하자 의기양양해져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하나씩 풀어 놓기 시작했다. "헤헤 이제는 절 완전히 믿는가 보네요? 우선 거중기라는 것은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 한 거예요. 여기서도 도르레를 이용하나요?" "도르레라면 우물에서 물을 퍼 담을 때 많이 쓴단다. 그런데 그 도르레가지고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도르레가 있음을 확인한 뮤스는 주변사람들을 향해 도르레에 대하여 설명했다. "도르레라는 것은 방향을 바꾸는 작용 말고도 여러 가지 작용을 할 수가 있죠. 지금 필요한 것은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복합도르레예요. 일단 복도르레라는 것 은 도르레 3개를 서로 결합하여 보통의 힘 10배를 낼 수가 있는 것이죠. 물론 크기만 맞다면요. 그런 복도르레를 2중, 3중으로 설치한다면 저 정도 크기의 운석은 여러분 들 정도의 힘이면 끌어 낼 수 있을 듯 한데요?" 주변에서 뮤스의 말을 듣던 드워프들은 믿기지도 않는 말에 머리만 긁적이며 서있었 다. 이때 주위를 집중 시키려는 듯이 켈트가 입을 열었다. "자자! 설명은 다들었겠지? 이해가 안가더라도 그냥 시키는 대로해보자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뮤스가 시키는 대로해서 손해본 건 없으니까 믿어도 좋을 거야! 내 동굴이 무너지긴 했지만... 뮤스야 설계도나 좀 그려다오." 은근히 자신이 무너진 것을 입에 올리며 뮤스에게 더욱 성심껏 해주기를 바라는 켈트 야 말로 만만히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고 그래요. 남자는 지나간 일을 빨리 잊어야 좋은 겁니다! 그건 그렇고, 우선 여분의 철은 있겠죠? 저 정도 무게를 지탱하려면 나무로는 씨도 안 먹힐거 같으니까요." "뭐 족장에게 말해서 있는 철을 다 모아야 겠구나. 저 광산만 입구만 확보되면 얼마 든지 철은 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럼 됐다는 듯이 이야기를 계속 하는 뮤스였다. "일단 철로 저 운석정도 되는 기둥을 세우고 제가 그려 드리는 대로 복합도르레를 여 러개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여기는 안쪽으로 쇠사슬을 걸고 여기는 쇠사슬 위에 도 르레를 걸치고..여기는......" 뮤스의 설계도를 확인한 드워프들은 자신이 맡은 일거리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뿔뿔히 흩어졌다. 수많은 드워프들이 마을 곳곳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 답게 능수능란하게 철 을 녹이고, 주물을 뜨고 있었지만, 역시 켈트는 연륜이 있는 지라 직접 일을 할 수는 없었기에 크라이츠와 함께 뮤스에게 복합도르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한참동 안 설명을 듣던 켈트는 머리가 번쩍 뜨이는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오호라 그런 것 이었구나! 허허 지금까지 수많은 도르레를 만들면서 이런 원리를 발 견 못했다니 참 한심스럽구먼." "헤헤 원래 발견이라는 것이 인연이 닿지 않으면 힘든 것이 잖아요. 한번 알면 엄청 편하지만요..." 켈트가 앎의 즐거움에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을 때 크라이츠는 옆에서 따분한지 연신 하품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희중이라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면 끼어 들기 싫어 하는 종족이 바로 드래곤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그녀와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흥미로운 일을 찾아보던 그녀의 눈에 애꿎은 전뇌거가 자리잡 게 되었으니... "호호 뮤스야! 혹시 저 전뇌거 나도 운전할 수 있을까?" 크라이츠의 목소리에 켈트와의 대화를 잠시 미룬 뮤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전뇌거와 크라이츠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우려했던 바가..." "응 뭐라고? 뭘 우려해?" "아..아니예요. 아! 그렇지! 전뇌거는 제 뇌공력으로 움적이는 것이라서 뇌공력이 없 으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녀의 성격을 뻔히 아는 뮤스는 그녀가 전뇌거를 몰아 보겠다는 말에 잔뜩 긴장한며 임기응변으로 말을 둘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라이츠가 자신의 말에 풀죽어 있는 모습을 하자 그의 눈에는 너무나 불쌍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철이 덜 들어 장난은 심했지만 그 만큼 마음이 여린 뮤스였기에 방법을 모색해 보기 시작 했다. "휴우 할수없지... 혹시 이곳에서 마나라고 했었나요?" 어떤 방도를 제시해줄 듯한 뮤스의 말에 기대에 찬 표정을 보내며 대답했다. "응 마나란 것은 사람의 몸이나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마력의 힘을 말하는 거야. 왜?" "그럼 제 몸에 들어있는 뇌공력과 비슷한 거죠? 그걸 저장하는 방법 있어요?" 뮤스의 말에 손벽을 치는 크라이츠였다. "아하! 너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마나를 저장해서 저 전뇌거에다가 설치하면 되겠구 나! 호호! 물론 저장하는 방법이 있지. 마나구라는 건데 수정에다가 마나를 저장 할 수 있단다!" 역시 수천년 살아온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이해가 빠른 크라이츠였다. 심심해서 읽은 책만 해도 수만권은 될 터이니 그녀가 지닌 지식들만 해도 난다 긴다하는 현자들이 울고 갈 정도 이리라. "그런데 누님은 마법을 안쓸거라면서요? 그럼 마나구라는 걸 어떻게 만들죠?" "호호호 말이야 바꾸라고 있는거고, 내가 애초말 했잖아. 내가 필요 할 때 아니면 마 법을 안쓴다고. 하지만 지금은 내가 필요 할때 아니나? 아잉! 이 누님의 소원도 못들 어줘?" 크라이츠의 어이없는 아양에 적응이 안된 뮤스는 멍청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조선에 있을 때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주작, 백호, 봉황과 함께 4대 영수중 하나인 용이라는 존재가 자신앞에서 아양을 떨고 있는 것을 말이다. 이일이 명나라에 알려 졌다면 뮤 스는 바로 황제로 등극했으리라... "아..알았어요! 도와 주면 될거 아니예요! 제발 그 울렁거리는 목소리는 그만둬요!" "호호호 고마워! 다음에 도시에 나가면 맛있는거 많이 사줄께!" 크라이츠가 전뇌거 운전을 배우는 사건. 뮤스는 훗날 단순한 연민으로 저지른 이 일 이 큰 골칫거리로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뮤스와의 대화를 끝 낸 크라이츠는 휘파람을 불며 마나구의 재료가 되는 수정을 찾기위해 사라졌고, 주변 을 둘러보자 드워프들의 작업이 마침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와우 정말 빠르네. 드워프들은 어떻게 짧은 다리로 저렇게 빨리 일을 할 수 있죠?" "네 녀석이야 말로 정말 눈치가 꽝이구나. 다리가 짧은 만큼 인간들 두발자국 걸을 때 여섯 발자국 걷지 않느냐. 그래서 드워프들은 다리긴 다른종족과 같이 다니기를 꺼려 하는것이지. 같이 다니려면 발바닥에 땀나게 걸어야 하니까 말야." 켈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했다. "이제 거의 끝나 가는 것 같아요. 아까 설계도에 그려진 것과 같이 기초 준비 좀 지 시해 주세요." "그러자꾸나 잠시만 기다려라." 뮤스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던 켈트는 마지막 준비를 위해서 드워프들이 모여있는 곳 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뮤스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뇌공력을 조용히 끌어 올렸다. -파직!! 뇌공력을 얻은 후 시간이 날 때 마다 전공력을 손과 발로 끌어올리는 연습을 하는 뮤 스였는데 이질 적인 뇌공력의 느낌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잠시 동안 이런 연습을 하던 뮤스의 귀에 켈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뮤스 준비 다됐어 빨리와봐!" "나참 뭐 좀 하려고 하면 불러대네. 네! 지금 가요!" 하던 일을 방해받아서 인지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곧 체념하고 궁시렁 거리며 마을의 드워프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드워프들이 모여있는 광산의 운석 앞에는 거대한 두개의 철기 둥이 세워져있었고, 뮤 스의 설계대로 수많은 복합도르레가 3중으로 철 기둥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 의 신경들 처럼 세밀히 연결된 수많은 쇠사슬들과 운석을 칭칭 감고있는 쇠사슬이 꽤 나 견고해 보였는데 이정도면 되었다고 느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켈트에게 말했 다. "준비는 잘 된것 같아요. 이제 마을 드워프들에게 모두 쇠사슬을 잡게 해주세요. 나 머지는 하늘의 뜻에 맏겨야죠 뭐. 이걸 떨어트린 것도 하늘이니..." "흠 그러자꾸나." 켈트가 족장을 바라보며 손으로 수신호를 하자 백여명 정도 되는 마을의 드워프들이 각각의 쇠사슬을 허리에 묶고서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준비들 됐는가? 준비!" 준비 소리와 함께 드워프들의 눈에 힘이 들어갔고, 켈트는 드워프들이 잘보이도록 힘 차게 들어 올린 손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와 동시에 준비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모 두 하나처럼 허리에 묶인 쇠사슬을 끌기 시작하였다. -영차! 영차! 영차! 수많은 드워프들의 이마에는 힘줄들이 솟아나며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까 지 운석은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초조해진 켈트는 자신의 힘이라도 보태 기 위해 비어있는 쇠사슬을 허리에 묶으며 맥주 마시던 힘까지 짜내기 시작했다. 전 대 족장이 거들자 다른 드워프들도 더욱 힘이 나는지 혼신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 다. 그러자 만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운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 직 힘이 많이 모자라는 듯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뮤스는 콧잔등을 살짝 닦아 내며 툴 툴 거렸다. "에휴 아무튼 내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라고 외치며 급하게 옆에 세워져 있던 전뇌거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전놔거를 몰고 남은 쇠사슬로 달려간 뮤스는 옆에서 구령을 맞추던 드워프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저기 남은 쇠사슬을 여기 묶어 주세요!" 워낙 급박하게 말하는 뮤스에게 뭐라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쇠사슬을 전뇌거에 묶 어 주는 드워프였다. 전뇌거에 쇠사슬이 단단히 묶인 것을 확인한 뮤스는 운전대를 다시 고쳐쥐었다. "자...이제 해보자고...이 정도면 될꺼야...." 서서히 뇌공력을 전뇌거로 흘려 보내자 전뇌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하지만 전뇌거의 바퀴가 헛돌기만 할 뿐 앞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기에 마 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바퀴의 마찰이 부족하잖아. 아! 그렇지 마찰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거워 야해!" 주변을 둘러보자 한쪽에서 응원을 하고 있는 드워프 아이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더 이상 머뭇 거릴시간이 없었기에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빨리 이쪽으로 올라타! 시간이 없어!" 뮤스가 재촉하자 응원을 하던 드워프족 아이들은 엉겁결에 전뇌거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다. "헤헤 이제 됐어. 자 다시 간다 운석녀석아! 누가이기나 해보자고!" 다시 전뇌거로 뇌공력을 흘려 보내자 무게를 늘린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전뇌거의 바 퀴가 심하게 헛돌지 않고 조금씩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고 느낀 뮤스는 전뇌 거로 흘리는 뇌공력의 양을 늘려 가기 시작했다. "좋아좋아. 이대로만 버텨라. 이제 완전 출력이다! 우아아아악!" 현재 이끌어 낼 수 있는 뇌공력을 모두 발휘 하자 전뇌거는 눈에 띄게 앞으로 움직이 는 것이었다. -구구궁.... 뒷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기적과 같이 고집스럽게 자리 잡고서 움 직일 것 같지 않던 운석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전뇌거에 타고서 응 원을 하던 어린 드워프들은 환호성 치기 시작하였고, 약 십여분쯤 끌어 내었을 때는 광산의 입구가 드러나게 되었다. -와아!!!!! 만세!!! 운석을 끌어내던 수많은 드워프 들이 기진 맥진하여 땅바닥에 주저 앉았지만 감출수 없는 기쁨으로 모두들 서로 끌어 안으며 환호 하고 있었다. 마을은 한순간에 축제 분 위기에 휩싸였고 허리에서 쇠사슬을 풀어낸 켈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뮤스쪽으로 뛰어왔다. "뮤스! 성공했어! 해냈다고! 크하하하하!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헤헤... 제가 대단한걸 이제 알았나요..." 힘없이 말을 하던 뮤스는 갑작스럽게 켈트의 품안으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아직 몸에 익숙해 지지도 않은 뇌공력을 무리해서 썼기 때문에 탈진을 해버린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켈트와 드워프들은 크게 당황해 했다. "뮤..뮤스! 정신 차리라고! 뮤스!" 드워프들과 켈트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어느새 돌아왔는지 드워프들을 밀치며 크라이츠가 들어왔다. 그녀는 뮤스의 이마에 잠시 손을 대어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알았네요. 이 녀석 탈진한 거예요. 아무래도 뇌공력 이라는 것을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으니 걱정 안하셔도 되요. 잠시 쉬면 깨어날 테 니..." 크라이츠의 진단에 안심한 드워프들은 다시금 축제 분위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가! 잔치 준비를 하지 않고! 근 100년만에 가장 즐겁구먼!" 켈트의 성화에 드워프 족장과 장로들도 웃으며 다른 드워프들에게 잔치 준비를 시켰 다. "케르히트님의 말씀이 맞네! 이 귀한 손님들을 그냥 보낼 텐가? 어서들 서두르자고! 하하하." "껄껄 족장은 내 마음을 너무 잘 안단 말이야! 내 오늘 맥주 한 드럼을 제자리에서 마시겠네!" "케르히트님 그 연세에 무리하시는것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날 송장 치우기는 싫으니 좀 참으시죠!" "날 무시하는겐가 자네?" 켈트는 다시 웃음을 찾은 족장과 말장난을 하며 즐거움을 나누었고, 크라이츠는 자신 의 손에 들려있는 수정과 정신 잃은 뮤스를 바라보며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9)여행의 시작 -북적 북적! 수많은 술잔들은 식당이 좁다하고 나돌아 다니고있었다. 고기의 뼈다귀들은 이곳저곳 에서 작은 산은 만들고 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원스런 웃음소리를 내는 드워 프들과 한쪽에서는 이미 시체쑈를 벌이고 있는 드워프들이 인상 적인 밤이었다. 뮤스 는 아직 기력되 회복하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리자 마자자 주인공이 빠져서는 안 된다 는 켈트의 말에 이끌려 이 정신없는 잔치에 휩쓸린 것이었다. "이봐! 뮤스 너도 한잔하라고! 오늘은 맘대로 놀고 마셔도 좋단 말이다. 하하! 이왕 이쪽 세계로 왔는데 이 정도는 즐겨야 하지 않겠어?" 켈트는 이미 거나하게 술을 했는지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이빨 사이에 낀 고기를 보 이며 떠들었다. "피곤해 죽겠는 사람 불러내는 것도 모자라서 술까지 마시라구요? 취했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저한테 취사예요?" 이미 켈트는 뮤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래 관심 없었다는 듯이 다른 드워프들에게 휘저휘적 걸어 가고 있었다. 말이야 당차게 했지만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켈트의 뒷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는 뮤스였다. 아무리 흥겨운 축제 같은 분위기 라 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집 잔치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뮤스는 시끌 벅적한 식당에서 살며시 빠져 나와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기분이 이상하군. 가을의 날씨라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지도 벌 써 닷세나 됐군. 이것 역시 나의 운명 중 하나겠지만 어머님 아버님이 그리워지는군. 아니, 조선에 있는 모든게 벌써 그리워 질 정도야. 헤휴! 명신아 이게 뭔 궁상이냐. 이왕 이렇게 된거 마음 굳게 먹자." 작은 방안에서 나름대로 멋있다고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똑똑! "뮤스야 좀 들어가도 되겠니?" 크라이츠의 목소리였다. 속으로 크라이츠가 또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누구와 이야기 또한 나누고 싶었던 명신이었기에 대답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네 들어와요. 누님." "호호! 혼자 있었구나 음? 얼굴을 보니 너무 안돼 보이는데? 혹시... 짝사랑하는 드 워프 아가씨라도 생긴 거냐?" "누..누님. 무슨 말을 그렇게 섬뜩하게 해요!" 벌써부터 괜히 크라이츠를 들어오게 했다는 후회가 뮤스의 얼굴에 물씬 풍겼다. "그렇다면 너 이쪽 세계에 아직 적응이 안돼서 그렇구나? 그것 보단 혼자라는 생각에 걱정 스러운거 같기도 한데? 그렇지 않니?" 왠일인지 크라이츠가 정상적으로 나오자 적응이 잘 안됐지만, 어쩌면 그녀와 이야기 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 솔직해 지기로 했다. "네. 사실 누님 말이 맞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매일 꾸중만 하시던 아 버님이셨는데 지금은 그리워서 눈물이 날 정도이니 말이죠. 저 아직 많이 어리죠?" "야! 9000살 먹은 내 앞에서 네가 어린건 당연한건 아니냐? 켈트씨도 내 앞에선 아직 애야!" 감상적이된 뮤스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크라이츠의 말이었다. 하지만 농담이었다는 듯이 손을 한번 내저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뮤스야. 내 이야기 좀 들어보지 않을래?" "네? 누님 이야기요? 어떤?" "음. 이런 질문이 어떻게 들릴 진 모르겠는데 네가 보기에는 내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하게만 사는 것처럼 느껴지니?" 크라이츠의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의아한 뮤스였지만 계속되는 이야기에 편안한 마 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은 그렇게 생각들 하더구나... 드래곤이라는 종족들은 최강의 종족이고, 지고해서 외로움도 모르며,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어느 종족들이 나 자신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단다. 인간들이 길어봐야 100년이라 는 짧은 시간동안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것이나, 드워프들이 일생동안 자신들의 공 예품에 목숨을 거는 것처럼 말이지. 드래곤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단다. 우리 드래곤 들은 세계에 있는 마나의 균형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족들이란다. 때문에 엄청난 양의 마나를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게 되지. 이런 점이 다른 종족들에게 부러움이 될 진 몰 라도 우리 드래곤들에게는 짊어져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기나긴 세월동안 죽지도 못하 고 많지도 않은 종족의 수로 쓸쓸히 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 외로움도 모르며, 이기적인 존재라고? 호호. 잘못된 이야기야. 오랜 시간을 혼자 살아가기에 쓸쓸함이 너무나 힘들어 아예 잊고 사는 것이지." 크라이츠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의 눈가에는 작은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은 부모의 품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는지 크라이츠의 이야기에 감정이 격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울지 말거라... 기껏해야 너도 100여년 밖에 못사는 인간 일진데 이렇게 지 난 일들에 젖어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 아니겠니?" "훌쩍...헤헤 네!" 드래곤이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나 종족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드래곤에게 진정 따뜻한 감정이 있었던 것일까? 남들 의 생각이야 어떻든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보듬어준 크라이츠가 너무나 고마운 뮤스 였다. 눈물을 옷소매로 재빨리 닦아 내고선 이제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누님! 누님이 용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아요! 마치 친 누님 같아요. 사실 친 누님은 없지만 만약 있었으면 누님 같았을 거예요 헤헤.." "호호! 그렇니? 아참! 내 정신 좀 봐... 그건 그렇고 뮤스." "네? 왜요 누님?" "아까 말하던 전뇌거 말이야. 내가 수정구를 구해 왔거든? 이거 지금 하면 안될까?" 역시 뮤스를 찾아온 이유는 이거였던가... 배신당한 듯한 느낌을 받은 그였지만 자신 의 눈앞에서 웃고있는 크라이츠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쩝...알았어요. 지금하죠! 전 어떻게 하면 되요?" "호호 고마워! 간단하단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있으면 되거든?" "그거면 되는 거예요?" 크라이츠의 제촉에 짧기만 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우울함이 풀어진 후 홀가 분한 마음으로 안락한 침대에 누워서 인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리워하면 안될 아버님, 어머님에 대한 마지막 추억이 서서히 뮤스의 머리속에서 희 미해 지고있었다. [그래! 이제 여기서의 인생에 열중하자. 장영실 아저씨가 오시면 돌아 갈 수도 있겠 지...] -뒤척 "으음? 음? 내가 언제 잠들었지? 크라이츠 누님은?" 잠에서 깨어난 뮤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빛이 없는 동굴에 촛불이 흐늘거리 며 켜져 있었다. 크라이츠가 눈에 안 띄는 것을 제외하면 잠들기 전의 방 모습과 한 점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어제와 같은 허전함은 온데간데없었고, 가뿐 한 마음이 그를 즐겁게 하였다. "마나구를 만드는 도중에 잠들어 버린 모양이네... 그나저나 뇌공력은 벌써 다 회복 이 되었나? 아니 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잖아?" 자신의 몸에 흘러다니는 뇌공력의 양을 느끼며 놀라던 뮤스는 언제나 처럼 양손으로 뇌공력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전날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더욱 강력 한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완전히 탈진할 정도로 뇌공력을 소비 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막대한 양의 뇌공력에 익숙해 졌기 때문에 더욱 많은 양의 뇌공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라라. 이거 다른 사람 감전시켜 죽이기 딱 좋겠구나. 완전히 조절 될 때까지 조심 해야겠어..." 뇌공력 측정을 끝낸 뮤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으로 나오니 이곳에 처 음 왔을 때 느낀 것처럼 이질적인 태양이 눈을 부시게 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다 가 옆을 바라보니 십여명의 드워프들이 턱이 빠진 듯하게 입을 벌리리고 있었고, 그 들의 눈은 넋을 잃은 듯이 한곳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뮤스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이곳 저곳을 누비며 다니는 물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캬악! 이거 어떻게 멈추는거야!" 바로 미친 망아지 날뛰듯이 전뇌거를 몰고 있는 크라이츠의 모습이 었다. 크라이츠가 전뇌거를 운전하는지 전뇌거가 크라이츠를 운전하는지 모를 정도였고,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살려 줘 뮤스!" "에휴...아무래도 용 아닌가벼." 골이 지끈지끈 쑤시는지 머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는 뮤스의 모습이 었다. 전뇌거가 크라이츠를 몰기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수백년 정도 살았을 만한 아름드리 나무에 전뇌거가 박살 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부서진 전뇌 거의 파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크라이츠의 모습은 마치 아궁이에 들어갔다 나온 고양이와 흡사했다. "에구구 허리야! 삐끗했나봐! 나이먹으면 허리 조심해야하는데!" 엄살떠는 크라이츠의 모습에 뭐라 할말이 없는 뮤스였다. "에휴... 누님 이거 다시 만들어야 겠네요." 요즘 몇일 사에 자신의 한숨이 부쩍 많이 졌다고 느끼며 왠지 자신이라도 철이 들어 야 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호호 뮤스야 미안해! 다음 번엔 꼭 너한테 배우고서 탈께. 응?" "헉!! 또 탈라구요?" 뮤스가 크라이츠의 말에 깜짝 놀라고 있을 때 숙취때문에 잠을 못자서 그런지 유난히 부시시한 모습을 한 켈트가 동굴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어라... 크라이츠님 이 모습은 왠겁니까? 이크! 전뇌거는 아주 떡이 됐네요?" 켈트의 말에 부끄러운 척 하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크라이츠... 켈트와 크라이츠의 사이에서 빠진 뮤스는 전뇌거의 조각들이 널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 뭔가를 열심히 찾 고 있었다. 한참을 뒤적거린 뮤스는 안도의 얼굴로 켈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휴우...이 자기통이 멀쩡해서 다행이네. 다음 또 이러시면 미아가 되는 한이 있더라 도 같이 안 다닐 거예요!" "그럴 수는 없을걸? 나랑 약속하지 않았니? 너의 금제를 풀어 주면 나와 함께 다니기 로 말이야! 드래곤 앞에서 감히 사기를 치는 건 아니겠지?" "이럴 때만 드래곤이면 다예욧!" 이때 둘을 중재하려는 듯이 켈트가 하품을 하며 나섰다. "하암! 걱정 말거라 이제는 철도 충분하겠다 이번 기회에 아예 철제로 튼튼히 만들자 꾸나." 켈트의 말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크라이츠 였는 데... 어느덧 해는 중천을 지나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 초가을인지 날씨가 그 리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덥다고 느껴지지도 않을 적당한 온도였다. 드워프들의 도움 으로 전뇌거를 완성한 뮤스는 마을 뒤쪽의 공터에서 크라이츠의 운전강습에 열을 올 리고 있었다. -끼익! "누님!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해요?!" 시대를 넘어서서 운전강습은 사람의 인내를 넘어선 일인 듯했다. 뮤스는 마치 마누라 운전강습을 시키듯이 언성을 높였고, 크라이츠는 잔소리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 었다. "알았어! 잘 하면 되잖아? 내가 이런걸 언제 해봤어야 알지? 확 다 부셔 버릴까보다! " "헉...아..알았어요.. 화 안 낼께요..." 눈앞의 존재가 아름다운 여성만이 아닌 드래곤임을 깨닫자 자신이 얼마나 흥분을 했 었는지 알았고, 다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출발해봐요. 이렇게 운전하다가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겠어요. 운전은 세밀한 기 술이 그 생명이라구요." "흥! 그럼 큰길로만 다니면 될거 아냐? 그럼 이렇게 조심조심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맞다! 뮤스야 우리 이 길로 출발하자! 응?" "지..지금요?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게다가 켈트 아저씨는 어제 숙취로 정신도 없단 말이예요!" "호호! 켈트씨야 내 말 한마디만 하면 지옥이라도 갈건데 뭐가 문제야? 아니지. 지옥 에 가기 싫어서 말을 들으려나? 아무튼 당장 지금 떠나자!" "그..그럼 켈트 아저씨랑 이야기해 보구요. 그래도 아저씨가 지금 갈라구 할까요? 20 년만에 돌아온 마을인데... 어쨌건 마을로 돌아가 보고 정하자구요. 자 이번엔 정말 잘해봐요." "호호 알았어 걱정마!" -끼기기기긱! 부웅! 성격 때문인지 급출발을 유난히 즐기는 크라이츠였다. 아슬아슬하게 마을의 중요 시 설들을 피해 동굴입구에 도착하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 켈트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짐이 그리도 많은지 작지만 탄탄한 그의 몸이 짐꾸러미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 을 정도였다. "아저씨 이것들은 다 뭐예요?" "딸꾹! 껄껄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안그래? 이왕 길을 떠날것이면 서두르는게 좋단 말야. 크크크..." "나참 또 술마셨어요?" "역쉬 숙취는 술로 해장하는게 최고라고! 에구에구! 그런데 또 취하는거 같다. 딸꾹! " "저희 조선에는 이런말이있죠 '해장술 마시고 취한놈은 지 애미 애비도 모른다.'라 는... 그리고 짐들은 왜 이렇게 많아요? 이사가요?" "푸헤헤 딸꾹! 이거 말이냐? 나의 도구들이 들어있는 짐이지. 아무래도 그 전뇌거 덕 분에 힘들이지 않고도 길을 떠날 수 있을거 같은데 내가 이것들을 두고 간다는게 말 이 되느냐?" 뒤에서 켈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신이나서 떠들고 나서는 크라이츠였다. "켈트씨가 뭘 아시네요. 자 뮤스 들었지? 네가 걱정하던 켈트씨도 나와 같은 생각이 니까 너도 짐을 싸거라. 아니지 너가 무슨 짐이 있었니? 필요한건 도시에 가서 사도 록 하고 일단 떠나자. 켈트씨! 짐이나 전뇌거에 올려요. 이번엔 제가 뮤스에게서 배 운 솜씨로 전뇌거를 몰아 볼테니까요! 호호호!" 크라이츠의 말에 술기운이 달아나는지 두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크..크라이츠님이 전뇌거를 운전하신다구요? 허허. 설마 농담이시겠죠?" 켈트는 아침에 크라이츠가 운전하던 전뇌거와 충돌하여 누워 편히 쉬고 있는 아름드 리 나무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에이! 속으로로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으면서! 아침보다 더 짜릿할 테니까 기대 듬뿍 하고 있으세요!" "누..누님!"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전뇌거에 올라타는 뮤스와 켈트였다. 켈트의 짐이 전뇌 거의 뒷부분에 실리는 것을 보고 있던 크라이츠가 잔뜩 부푼 표정으로 운전대를 꼬나 쥐고 있었다. "저... 켈트 아저씨 마을사람들에게 인사라도..." 조금이나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본 뮤스였지만 막 나가는 크라이츠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행동이었다. "잔소리 말고! 자아 출발합니다!" - 끼기기기긱! 부웅! 헛 바퀴 도는 소리가 나며 켈트의 불안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요란한 출발이 이루어졌다. 오전 중에 부서진 전뇌거보다 더욱 출력 좋은 동력원을 만든 것이 뮤스 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전뇌거는 자기의 성능을 자랑하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 를 시작했는데, 수많은 바위산들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일행의 옆을 지나쳤 고, 바람에 눈조차 뜨기 힘든 상황이었다. "우아아아악! 누님! 속도좀 줄여요!" "우....우웨에에엑!" 역시나 드워프들은 무엇을 타고 달리는 일에 약해서인지 켈트는 뱃속의 내용물들을 게워 내기에 바빴고, 차마 그런 모습을 보고도 어떠한 위로조차 해주지 못하는 뮤스 였다. "호호호! 이제 마을도 없으니 신나게 달릴 수 있겠구나!" 광기에 휩싸인 크라이츠의 모습에서 일행은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깊고깊은 산속이었다. 옹달샘으로 새벽에 토끼가 눈비비고 일어나 새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갈 그러한 깊은 산속 주변 풍경과는 전혀 이질적인 굉음과 함께 빠른 속도 로 지나치는 물체가 있었으니... -구구구구구구구궁. "오호호호호! 이 산내음 정말 좋지 않니?" 이미 진이 다 빠졌는지 크라이츠의 물음에 대답을 할 힘도 없는 일행이었다. 불과 세 시간만에 얼마나 많은 거리를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돌산이 마지막으로 눈에 띈 것 이 두 시간 전이었던 것 같았다. 라이부크의 유명한 돌산이었던 멜산은 높이는 그다 지 높지 않았지만 그 규모로 더욱 유명했다. 말을 타고 하루를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불과 한시간만에 주파하는 기록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수립한 뮤 스일행들 이었다. 떨어질까 염려되어 난간을 꼭 붙잡고 있던 뮤스가 두 눈에 광기를 흘리며 운전을 즐기고 있는 크라이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라이츠 누나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 거예요?" "뭐라고? 안들려!" "우리가 어디 가고 있는 거냐고요!" "가장 가까운 도시인 투트가르로 가고있어! 북쪽으로 달리고 있단다!" [투트가르? 굉장히 웃기는 이름을 가진 도시군. 이곳의 도시들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 금한걸?] -끼익! 크라이츠의 갑작스런 급정거에 상념에 빠져있던 뮤스는 깜짝 놀랐고, 켈트 역시 미리 준비를 못했는지 관성의 법칙을 몸소 실천해 주며 정면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으아악 드워프 살려!" -쿵. 약 10멜리정도 날아가서야 땅바닥에 처박히며 관성력을 없앤 켈트가 몸을 일으키자 뮤스는 안심을 하며 크라이츠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기 위해 입을 벌리려고 하는 사이에 크라이츠의 입에서는 먼저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쪽에 마차가 서있는걸? 저 마차도 우리들처럼 투트가르로 가는 모양이야... 그런 데 무슨 일이지?" 마차는 평민들이 타기에는 약간 호사스런 모습을 하고있었는데 꽤나 고급스런 원목으 로 만들어져 있었고, 외장은 빛나는 금속으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몇 명의 호위병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켰고, 마부처럼 보이는 자 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흠 무슨일이지?" 조금이나마 크라이츠가 운전하는 전뇌거에 있기 싫었던 뮤스는 이때다 싶었는지 전뇌 거에서 내려 멈춰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낯선 세계에서 누군가와의 만남이 처음은 아 니었으나 켈트, 그리고 크라이츠와 같이 이 종족과의 만남이 아닌 인간과의 만남이라 는 점에 또 다른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마차의 일행들 역시 뮤스의 다가옴을 느꼈 는지 약간의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헤헤 안녕하신지요! 지금 저희는 여행중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를 확인하던 이들은 아직 성년도 안된 소년임을 알고 안심했는지, 허리에 매달려 있는 칼의 손잡이에서 손을 때며 경계를 푸는 듯한 모습 이었다. 하지만 뮤스의 더러움에 약간 인상을 쓰는 듯 했다. 집에서 나온 후로 근 일 주일동안 옷을 갈아 입기는 커녕, 물에 손을 대본적도 없었던 뮤스였기에 그들의 반 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행의 인솔자 인듯한 중년의 검사가 뮤스에게 다가오며 뮤스 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 검사는 상당한 수련을 했는지 무장된 갑옷 사이로 얼 핏 보이는 근육들이 단단함을 자랑했지만 전투형의 무식한 몸매와는 다르게 사람 좋 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음? 여행자라고 했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중년의 검사는 뮤스의 뒤로 보이는 크라 이츠와 아직도 땅에 앉아서 궁시렁 거리고 있는 켈트를 훑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전뇌거에 눈이 닿은 그는 뭔가 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정색을 하 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자네 일행들도 투트가르로 가는 길인가?" "네! 저희도 투트가르로 가는길이거든요. 가는 도중에 마차가 서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요." "아..그렇군. 하긴 이길이 라이부크에서 투트가르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니까. 우리 역시 투트가르로 가는 도중이지만 앞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가는 길을 막고 있다네. 아무래도 저쪽 언덕이 붕괴되면서 굴러 떨어진거 같더군. 그런데 우리의 인원으론 어 림도 없어 보여서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을 참이었거든?" 중년의 검사가 손짓을 하며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과연 그의 추측이 옳은지, 누런 흙 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토사들이 길까지 이어졌다. "그렇군요." 중년의 검사와 이야기하는 틈에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켈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뮤스에게로 걸어왔다. "이런 제길! 도대체 크라이츠님을 어떻게 교육 시켰 길래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 냐구. 앙?" 켈트가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따지자 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크라이츠 누님이 제 말을 꼬박꼬박 들을 리가 만무하잖아요! 이건 제 잘못이 아니라 구요!" "헤휴.. 그렇지... 그건 그렇고 이쪽은 누구지?" 이제야 중년검사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한 켈트의 질문에 기사는 손에 착용된 건틀렛 을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투트가르의 수비 대장직을 맡고 있는 페릭스 알드린 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니 드워프이신 것 같군요." 자신을 페릭스 알드린이라 소개한 중년 검사의 손을 잡으며 켈트 역시 호탕한 목소리 로 말했다. "허허 그렇군. 투트가르의 수비대장이라면 꽤나 실력이 좋은 모양이군? 투트가르 정 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의 수비대장이라면... 나는 케르히트라고 한다네. 친구들은 그 냥 켈트라고 부르지. 이 아이는 뮤스 그리고 저기 이상한 수레에 타고 계신분은 크라 이츠님이시라네." 켈트가 크라이츠의 소개를 대신 했지만 전뇌거를 운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심술이 났는지 건성으로 인사를 할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분과는 별개로 페릭스 일행이 멈추어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는 뮤스와 켈트였다. "그건 그렇고. 수비대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마차를 인솔해 간다면 저 마차 안에 상당 히 중요한 인물이나 물건이 있겠구먼?" 켈트의 얼렁뚱땅하지만 뼈가 있는 말에 페릭스가 흠칫했지만. 그다지 큰 비밀은 아닌 지 애써 감추려는 자세는 아니었다. "그다지 비밀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마차에는 투트가르의 영주로 계시는 클래프 후작 님의 영애이신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타고 계십니다. 지금 아가씨를 모시고 투트가르 로 가는 중일 뿐입니다." "흠. 후작님의 영애라... 그렇다면 전혀 이상한게 아니지.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서 지체하고 있었는가?" "아까 뮤스군에게 말했듯이. 길을 큰 바위덩어리가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협조를 구해서 길을 확보하기 위해 잠시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데 왠일인지 이 길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평소보다 없지 뭡니까." 이들의 대화에 심심함을 느낀 뮤스는 마차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조선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화려하지 않았지만 자세하게 뜯어 본다면 정교한 문양들과 세밀하게 박혀있는 보석들을 볼 수 있었는데 평범한 마차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흠 귀한 집안의 자식이라도 타고 있나보군... 하긴 나 역시 조선에 있을 때는 이런 마차가 부럽지 않았지..." 혼자 중얼거리던 뮤스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 덩어리로 다가갔다. 바위덩어리의 크기는 어른키 보다 약간 컷고, 마차 두 대가 자유 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길을 꽉 채우고 있었다. 과연 여기 있는 사람의 힘만으로 는 꿈쩍도 안 할만했다. 뮤스는 바위를 만지작 거리며 살펴 보고 있었다. "흠... 화강암이군... 깨버리면 되겠는걸? 켈트 아저씨 이 바위 그냥 박살 내버리죠? " 뮤스가 말하는 것을 들은 켈트는 뮤스의 말에 어리둥절한 페릭스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 또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일세." "혹시 저 뒤에 크라이츠님께서 마법사이십니까? 바위를 깨기 위해서는 그 방법 뿐인 거 같은데요? 저희도 마법사가 있긴 있지만 저 정도의 바위를 깨기에는 무리가 있어 서..." "허허. 크라이츠님은...아..아닐세. 그건 그렇고 마법사보다 더 신기한 녀석이 저기 있지 않나?" "네? 뮤스라는 저 아이가요?" "두고보면 알게 될 걸세." 페릭스는 아리송한 말만 남겨둔 채 뮤스에게로 걸어가는 켈트를 보며 그의 말을 이해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켈트의 말대로 두고보기로 했는지 켈트의 뒤를 따라 뮤스 에게로 다가갔다. "켈트 아저씨 이 정도 크기면 깨버리면 될거 같아요. 그리고 여기 있는 인원이면 금 방 끝 날거 같은데요?" "우린 그럼 뭘 해야하지?" "페릭스 아저씨께 말씀드려서 이 바위를 가열 시켜 달라고 해요. 그리고 차가운 물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 구하죠?" 켈트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릭스가 나서며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물이라면 우리쪽의 마법사가 어떻게 해줄 수 있을 듯 한데?"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페릭스 아저씨 저기 있는 분들께 말씀 하셔서 이 바위 를 불로 달궈 주세요. 그리고 마법사에게도 미리 말 좀 해주시구요." "바위를 불에 달구란 말이지?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뭔가 궁금한게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 보려한 페릭스였지만 켈트가 그의 말을 간단히 잘라 버렸다. "말이 더 많아봤자 시간만 더 지체되는 거 아니겠나? 그냥 뮤스가 하라는 데로 한번 해보자구. 자 나도 거들겠네." "아..네.." 켈트의 말에 궁금증을 접고 일행에게로 돌아간 페릭스는 그의 수하들에게 바위를 달 구게 하였다. 벌써 해가 지려는지 하늘은 서서히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원래 산에 서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 것이리라. 한참을 분주히 움직인 켈트와 페릭스, 그리고 그 의 수하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바위가 한참을 달궈지자 옆에서 빈둥빈둥 일의 진 행을 지켜보고 있던 뮤스가 페릭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페릭스 아저씨 이제 다 달궈 진 것 같아요. 이제 마법사에게 물을 저위에 끼얹게 하 세요." "저 바위에다가 말이냐? 하라는 대로 해보마. 이봐! 레이멜! 이쪽으로 와서 저 바위 에 물을 끼얹어주게!" 페릭스가 바라본 방향에 갈색의 후드를 걸치고 있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앉아있었다. 마법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약간 장난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자였는데, 이해 못할 페릭스의 명령에 상관이 하라니 할 수밖에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페릭스님 애써 달궜더니 이제 와서 식히라니요. 장난이 너무 심하시네요." "레이멜... 이번 월급을 깍이고 싶은가? 시키는 대로만 해주게." "헉! 월급이라뇨 하라는 데로 합지요!" 돈 이야기가 나오자 민감해진 레이멜은 더 이상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손으로 이상 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것도 끝났는지 그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 들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스포케 이히! 뭬이크테 아인 바서... 워터 스크린!" 얼핏 듣기에도 크라이츠의 그것과 전혀 다른 듯한 마법의 시동이었다. 그 점을 이상 하게 생각한 뮤스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레이멜의 마 법 시동과 함께 자연스레 눈이 바위를 향했기 때문이다. 뜨겁게 달구어진 바위의 위 에 물의 막이 형성되더니 동시에 바위를 향해 물이 끼얹어졌다. -취이익! 달구어진 바위가 차가운 물에 닿게 되자 요란한 소리로 식어가며 신기하게도 단단하 게만 보이던 바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 균열이 커지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쩌적.... "이..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쩌쩍소리와 함께 갈라지기 시작하는 바위를 보며 주변 사람들의 입 또한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선 신음성이 새어나오고 있 었다.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 저 큰 바위가 깨져 버리다니..." 페릭스가 흘리는 감탄사에 켈트는 자신이 우쭐해 졌는지 효과음을 더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 놀라는가? 자네도 아직 세상을 덜 살았구먼." 켈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놀란 표정을 추스린 페릭스는 실태를 깨닳았는지 헛기침과 함께 주변의 수하들에게 걸어가 바위조각들을 치우도록 지시했다. 주변의 수하들 역 시 정신을 차린 후에야 페릭스의 말을 알아들었고, 그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뮤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켈트에게 걸어왔다. "헤헤 이 뮤스의 실력이 어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굉장하죠?" "녀석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우쭐하기는..." "아저씨 같았으면 생각해 낼 수 있었겠어요?" "내가 누구냐? 대 라이부크 드워프족의 족장인 케르히트님 아니냐! 안되면 이 도끼로 라도 때려 부셨을걸?" "그나저나 누님이 마법만 썼다면 이렇게 수고롭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네가 한번 설득해 보는 것이 어때? 네 말이라면 잘 들어 줄듯 싶은데. 그렇게만 된다면 저 전뇌거의 공 포를 다시 안 겪어도 되잖느냐." "과연 제 말이라고 들을까요. 누님 마음에 안 들면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잖아요." 벌써 부서진 바위조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페릭스는 장갑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며 뮤 스와 켈트에게 왔다. "켈트님, 그리고 뮤스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두분 아니었으면 큰 곤욕을 겪을 뻔했 군요."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는가. 우리야 별로 한일도 없구먼." 켈트가 접대용 멘트로 페릭스를 대하자 뮤스는 입을 뽀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아저씨가 한 건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뮤스에게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켈트였기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참 켈트님 저희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청하시는데요?" 페릭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뮤스와 크라이츠의 얼굴을 둘러봤다. 저 멀리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뇌거에 앉아있던 크라이츠는 별관심 없다는 듯 했고, 뮤스는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인사를 하신 다는데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후작님의 영애가 어떻게 생 기신 분인가 한번 볼까?" "네. 함께 마차로 가시죠." 페릭스를 따라 마차의 앞으로 걸어가자 마차는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시 간 적절하게 문이 열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안에는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진 여자 아이가 앉아있는데 굉장한 미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귀엽게 생겨 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 얼핏보기에 나이는 뮤스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기대에 차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쑥스러워 붉어진 볼만 보였다. 이런 분위기를 그냥 흘려보낼 켈트가 아니었기에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호오! 뮤스 왜그러느냐? 율리아나 아가씨께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느냐?" 켈트의 말에 더욱 얼굴이 빨갛게 변한 뮤스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누..누가 반했다고 그래요!" 한참 당황하고 있을때 율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켈트님 그리고 뮤스님이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서 계시지들 마시고 마차로 들 어오세요." "껄껄 귀여운 아가씨였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켈트의 넉살스런 말과 함께 마차에 올라탄 뮤스는 이런 마차는 처음이라 시골에서 상 경한 촌놈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구경하기에 여념 없었다. 그런 뮤스가 재미있 어 보였는지 율리아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율리아나의 웃음에 멀뚱히 그녀의 얼굴로 고개를 돌린 뮤스였는데 왜 웃는지 모르겠 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호 죄송해요. 뮤스님의 모습이 너무 남달라서...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뮤스님 은 현자수업을 하시는 분이신가 봐요? 페릭스 아저씨께 이야기를 들으니 현묘 한 지 혜로 저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깨트리셨다고요?" "겨..겨우 그정도 가지고 현묘 하다고 할 수도 없죠 뭐." 율리아나의 말에 겸손한 말을 하는 뮤스를 보곤 켈트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이거 정말 놀라운데? 이거 정말 내가 알고 있던 뮤스 맞냐? 툭하면 잘났다고 떠들어 대더니 이게 무슨 일이래?" "케..켈트 아저씨!" "현자수업이라...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겠죠. 어려서부터 혼자 산에서 공부를 해 오던 아이라서 옷차림이 제 멋대로 입니다. 조금 우습더라도 이해하시죠.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네." 뮤스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기에 켈트가 어설프게 둘러댔지만 켈트의 말을 전적으 로 믿는지 쉽게 수긍을 하는 율리아나였다. "아! 그렇군요." 뮤스에 대해 더 물어 보고싶었지만 여행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 긋남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였다. "투트가르로 가시는 길이라구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이 마차를 이용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저 역시 혼자 마차안에서 지내는 여행인지라 지루했었거든요." 마침 크라이츠의 운전 실력에 목숨이 위험함을 뼈저리게 느낀 켈트였기에 율리아나의 제의는 구세주의 손길과 같이 느껴졌다. "껄껄! 저야 대 찬성이지요! 뮤스야 넌 어떻게 할 것이냐? 전뇌거를 타고가는 것보다 이 쪽이 장수하는데 좋을 듯 하다만?" 켈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뮤스의 입이 아닌 마차의 문밖에서 들려왔다. "켈트씨.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제가 운전하는 전뇌거가 어떻다고요?" 어느새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는지 켈트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가 대답했던 것이 었다. 켈트는 자신의 말실수에 불안해했지만 별다른 응징이 내려지지는 않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뮤스는 혼자 살겠다는 듯이 상황 굳히기에 들어갔다. "전 누님이 운전하는 전뇌거가 더 좋습니다! 켈트 아저씨가 정녕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마차 타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헤헤헤." 라고 말하며 율리아나의 마차에서 서둘러 내려섰다. 혼자 남은 켈트는 뮤스의 배신에 뭐라 말도 못하고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웃음을 머 금은 크라이츠가 마차로 올라왔다. "율리아나 아가씨라고 하셨나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저는 크라이츠 드라 켄이라고 해요." "크라이츠님이시군요. 저는 율리아나 하이만 폰 투트가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예요." "호호! 참으로 예의바른 아가씨군요. 혹시 지루하시면 저희 마차로 함께 이동하시는 편이 어떨까요?" "저는 상관 없어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하죠." 율리아나가 흔쾌히 승락을 하자 모두는 마차에서 내려 전뇌거로 걸어갔고 켈트는 다 시 악몽같은 시간을 예감하며 크라이츠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크..크라이츠님 설마 율리아나 아가씨까지 저 세상으로 보낼 생각입니까?" 불안해하는 켈트의 말에 신경쓸것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며 율리아나와 대화를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호호 절 따라와요. 뮤스야 뭐하니? 레이디께서 가시는데 전뇌거 자리나 정리하렴." "아..네!" 뮤스는 전뇌거로 뛰어가 정리하기 시작했고, 율리아나는 페릭스에게 뮤스일행과 함께 이동하겠다는 의사를 전하며 전뇌거에 올라탔다. 허나 안심이 안 되는지 자신의 말을 끌고서 전뇌거 옆으로 다가오는 페릭스였다. "제가 옆에서 호위하겠습니다. 애초부터 궁금했는데 이 마차에 말은 어디 있죠?" 전뇌거에 타고있던 율리아나 역시 그 점이 궁금한 듯 켈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질문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낀 그는 죽음을 각오한 듯 힘없는 모습으로 대답해 주 었다. "이건 전뇌거라고 해서 말이 없이도 가는 마차죠. 말이 이끄는 마차보다 훨씬 더 빠 르게..." 불안한 뉘앙스가 한껏 풍기도록 말끝을 흐리자 크라이츠가 나름대로 다독거리기 시작 했다. "켈트 너무 걱정 말아요. 다른 동행도 있는데 아까 처럼 달리지도 못할 테니까." 진심으로 켈트를 위로하는 크라이츠였지만 그녀가 운전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 으로도 두려운 켈트였으니... "크라이츠님 정말 궁금하네요. 어떻게 움직이는지 빨리 보여주세요!" 율리아나 역시 호기심이 한참 많을 십대여서 인지 적극적으로 궁금함을 표시하고 있 었다. "페릭스씨 잘 따라 오세요. 저희먼저 출발 할 테니..." 크라이츠의 당부의 말과 함께 그녀의 발아래 있던 마나구가 자주빛의 빛을 발하기 시 작했고 전뇌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전뇌거가 움직이자 앞에서 출발할 준비를 하던 호위병들과 마부는 홀로 움직이는 이 기괴한 수레를 바라보며 또 한번 넋을 놓고 있었다. "이봐! 놀라고만 있지 말고 우리도 출발!!" 페릭스 자신 역시 놀랐지만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기에는 자신의 직책이 너무나 높았 는지 수하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들은 호위병들과 마부들은 말에 올라타 고서 뮤스 일행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투트가르를 향하여 출발한 뮤스 일행들은 얼마 가지 못하여 가던 길을 멈추어야만 했 다. 역시나 기울어져 가던 해가 상등성이로 완전히 모습을 숨기자 주변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길이라해도 숲속의 밤은 위험한지라 쉬어 가는수 밖에는 별 도리 가 없었다. -끼익! "와아!! 이거 철전뇌거라고 하셨나요? 정말 신기하고 편안하네요!! 마차는 덜컹 거려 서 속도 않좋고 그랬는데... 우리 성내에는 왜 이런것도 없지?" 철전뇌거를 타고 한시간 가량 온 율리아나의 시승 소감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몇마 디를 나누게 된 뮤스 일행과 율리아나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예상외로 율리아나의 성격이 까다롭지 않고 천진난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전뇌 거에 대해 감탄하자 켈트가 뮤스를 띄워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껄껄 이게다 뮤스가 만든것이지. 제작은 내가했지만 뮤스가 일러준대로 만든 것이니 까 뮤스가 만들었다고 해도 되겠지." "헤헤! 율리아나! 나 생각보다 괜찮은것 같이 않아?" "호호! 그래그래 대단하다. 이런걸 만들 생각을 하다니... 역시 현자 수업하는 사람 같아!" 뮤스와 율리아나는 만난지 한시간 밖에 되지 않는 사이였지만 아직 어렸기에 쉽게 친 해 질 수 있었고, 지금은 켈트나 크라이츠와 함께 서로 존칭도 쓰지 않고있었다. 이 때 따분하게 운전을 하던 크라이츠가 페릭스를 향해 외쳤다. "이정도에서 오늘은 야숙을 해야 겠는걸요? 이대로 가기에는 해가 너무 저물었어요!" 역시나 뮤스 일행에서는 대장(?)격인 크라이츠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뒤에서 따 라오던 페릭스의 일행들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잠시 멈춰섰고, 철전뇌거의 옆으로 말을 몰아오며 페릭스가 입을 열었다. "음 이곳주변에 물이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이 주변에는 물이 흐 르는 곳이 없습니다만..." 역시 투트가르성의 수비대장답게 여행에 능숙한 면을 보였다. 사실 야숙을 위해서 가 장 중요한 것이 물이었다. 야숙을 하기 시작하면 식사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물이 꼭필요 하기때문이다. 사냥을 하여 고기를 먹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냥을 하며 병력을 분산 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기에 사냥은 생각할 필요도없었다. 게다가 중 요인물을 수행하는 호위병이었으니... 물론 굶을 수도 있겠지만 여행자들은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야만 다음날의 여행에 무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때 뒤에서 듣고만 있 던 뮤스가 끼어들었다. "저 마법사 아저씨께 물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아까 바위 부술때 처럼요!" 뮤스의 말을 들은 페릭스는 뮤스의 천진 난만한 질문에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 다. "하하. 뮤스군 마법으로 만든 것은 마나가 사라지면 다시 사라져 버린단다. 마나를 사용해서 떠돌아 다니는 수분을 잠시 모은것 밖에 안되거든? 그렇다고 마법사가 음식 을 다 만들어 먹을때까지 마법을 지속 시킬 수도 없지 않느냐. 정령술사들이면 몰라 도 말이지..." "아! 그렇군요." 철전뇌거의 뒷자석에 앉아서 듣고만 있던 율리아나 말했다. "저기... 투트가르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거 같은데 밤이라지만 그냥 계속 가면 안될 까요?" "아가씨 그건 안됩니다. 아무리 호위병들이 있다지만 밤이 되면 숲속에 있는 몬스터 들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위험 천만해 지죠. 차라리 한끼를 굶는 게 더 낮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오늘 야숙을 하기로하죠." 켈트는 미리 페릭스가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을 예감했는지 이미 철전뇌거에서 짐을 내 리고 있었다. "뮤스야 나좀 도와 다오 우리도 잠잘자리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그렇다고 크 라이츠님이 도와줄리도 없으니..." "전 뭘할까요? 아저씨 정말 이것저것 많이도 가지고 오셨네 이게 다 뭐예요?" "헐헐. 나혼자 다닐때문 나무 밑에서 나뭇잎만 깔고 자면 된다만. 들고 다닐 고생도 없는데 이정도는 챙겨 와야 되지 않겠냐? 크라이츠님을 바닦에 재울순 없잖아?" 뭐냐고 물어 보는 뮤스의 질문에는 딱히 알맞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두고보면 알겠 지.' 하는 마음으로 더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켈트가 짐을 풀어 이것저것 세우고 끼우고 하더니 몇사람정도는 충분히 들어갈수 있음 직한 텐트가 완성되었다. 이런 야 영 장비를 처음본 뮤스는 신기해 하며 텐트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십여분의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일행들의 캠프준비도 끝나게 되었고, 캠프의 중심에 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호위병 몇명과 마법사인 레이멜, 자신의 검을 손질하고 있는 페릭스,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는 켈트, 그리고 주변의 일행들을 살펴보고 있는 뮤스가 있었다. 율리아나와 크라이츠는 피곤하다면서 둘만의 텐트에서 쉬고 있었는데 텐트를 함께 쓰고 있는 존재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안다면 편 안하게 쉬고만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 했으니... 나뭇가지 하나 를 들고 땅바닥에 뭔가를 끄적거리던 레이멜이 인상을 썼다. "배고파요!! 대장님 아무리 우리가 고용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식사정도는 해결해 주셔야 하는거 아닙니까?" 레이첼의 말에 검을 닦던 페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 다. "자네도 알다시피 물이 없지 않은가? 건육들은 이미 다 먹었고... 시간이 이렇게 지 체될줄 알았겠는가?" "에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고, 이게 뭐야!!" 스스로에게 화풀이라도 하는듯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며 괴성을 질렀고, 주변에 있던 호위 병들 역시 레이멜의 말에 동의를 하는지 자기들 끼리 수근덕 거리기 시작했는 데, 레이멜처럼 당당하게 말할 용기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 뮤스는 무슨 생각을 하 는지 혼자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레 켈트에게 물었다. "켈트 아저씨? 땅 잘파죠?" 뜬금 없는 뮤스의 말에 어정쩡한 표정으로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켈트였다. "졸다 잠꼬대 하냐? 갑자기 뭔 삽질하는 소리야?" 하지만 켈트의 대답은 들으나 마나라는듯이 이야기를 계속 했다. "제가 수맥을 찾을 테니까 아저씨는 삽질이나 하라구요. 이곳은 숲이니까 많이 파지 않아도 물이 나올꺼예요." "흠... 수맥을 말이냐? 땅위에서 수맥을 찾는다는게 쉬진 않을텐데?" "그건 걱정말구요! 아직도 절 못믿어요?" 켈트와 뮤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도 제발 뮤스가 수맥을 찾 아 주기만을 고대 하고 있었다. 점심까지 굶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저녁의 행방이 뮤스의 기술과 켈트의 삽질에 달리게 되었다. 일행들의 이목이 뮤스에게 주목 되었을 때 뮤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는데 일 다경쯤 지났을때 뭔가를 집 어 들었다. 뮤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Y자 모양의 나무 가지였다. "이건 저희 할아 버지께 배운 거예요. 이렇게 벌어진 끝을 잡고 손에 힘을 빼며 돌아 다니다 보면...." 뮤스는 말을 하며 이곳 저곳을 돌라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먼 거리는 아니었고 일행 의 눈에 띄일 만큼의 거리는 유지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뮤스의 손에 들려있던 나무가지가 보일듯 말듯 아래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헤헤 수맥이 흐르는 곳에서 이렇게 나무가지가 흔들리게 되죠. 켈트 아저씨! 여기좀 파주세요!" "헐헐..내참...." 이제는 적응이 됐는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준비해온 삽을 놀려 땅을 파기 시작했 다. 과연 드워프답게 순식간에 사람한명이 들어갈만큼 땅을 팠고 조금더 파들어가자 물이 조금씩 고이기시작했다. 물이 솟아나는 것을 지켜 보던 일행의 눈에는 놀라운 빛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참... 뮤스군... 자네의 스승이 누군지 정말 대단한 제자를 키운것 같구만. 그 건 그렇고 이 흙탕물을 어떻게 이용하지?" 페릭스의 물음에 켈트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 말게 증류를 시키면 될테니" "에휴 아저씨 이걸 언제 다 증류해요. 조금씩 모아서는 내일쯤 되어야 마실만큼 모일 걸요?" "엥?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이번 기회에 정수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죠." 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뮤스가 켈트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켈 트는 그것이 단순한 어린아이의 우쭐거림 이상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개 의치 않고 있었다. 뮤스의 정신연령은 10세 미만이었던 것이었다. 전뇌거로 걸어가 켈트의 짐을 뒤적이던 뮤스는 바가지만한 깔때기를 꺼내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 였다. 가끔 흙을 파기도 했고 돌을 줍기도 했는데 켈트와 일행들은 말없이 지켜보기 만 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자 뭔가 잔뜩 들어있는 깔때기를 들고 일행들 앞으로 돌 아왔다. "저기 있는 물을 여기 깔때기에 부어보세요!" "엥? 깔때기에 뭔 모래와 자갈들이 그렇게 들어있냐?" "빨리 부어 보세요. 그럼 저절로 알게 될것이니까." 더이상 물어봤자 고집스러운 뮤스가 대답을 해주지 않는 다는것을 아는 켈트였기에 더이상 물어보지 않고 웅덩이에 고여있는 물을 퍼다가 깔때기로 부었다. 부어진 물이 깔때기 윗부분에 고여있다가 조금씩 아래에 있는 자갈과 모래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볼 수있었고, 잠시후 깔때기 아래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처음 몇분 간은 황색의 흙탕물이 나왔지만 점차 물이 맑아지더니 나중에는 맑고 투명한 물이 흘 러나왔다. "우와!! 깨끗한 물이 나온다!" 깔때기에서 나온 맑은 물을 손으로 받아 들이켜본 켈트는 혀를 내두르며 놀랐다. "이것참. 정말 내가 살아온 120년, 아니 150년이 허무하구먼... 이건 어떻게 된것인 지 설명좀 해다오." "켈트 아저씨 제가 설명하면 그동안 굶어죽은 시체 몇구 치울듯 한데요? 이 아저씨들 얼굴좀 보라구요!" 과연 뮤스의 말대로 배고픔이 극에 달한 병사들의 눈은 쾡하니 들어갔는데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 같지는 않았다. "그..그렇겠군. 일단 저녁을 먹고 해결 보자구!" 이렇게 마련된 물로 음식을 마련한 뮤스와 일행들은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저녁을 배불리 먹은 일행들은 이제 이차적인 본능에 순응을 해야 할때인지 하나 둘 하품을 하고 있었으나 그중 재수없는 몇명은 불침번을 서야할 운명이었기에 페릭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서로 더 피곤한 척 하면서 말이다. 마침 페릭스 역시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긴장을 잔뜩 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말했다. "흠흠. 이제 불침번을 뽑을 때가 온거같다... 다들 알다시피 여행중의 피치 못할 사 건으로 인하여 미리 불침번을 뽑지 못한터, 어떤 방법이 좋을지 곰곰히 생각을 해봤 다. 일단 뮤스와 켈트님은 손님이시니 제외를 하고..." 이때 페릭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뮤스였다. "페릭스 아저씨! 그건 불공평 한거예요! 초대 받은 것도 아니고 같이 여행을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손님이라는 거죠? 우리도 똑같이 할꺼예요!" 옆에서 이빨을 쑤시며 뮤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무슨 봉창두들기는 소리냐는 듯이 억 지 기침을 해가며 뮤스의 말을 가로 막았다. "콜록! 콜록! 이봐 뮤스! 무슨 말이야! 난 이미 나이가 120살이나 됐다고! 이런 나이 에 잠을 자지 않으면 치명적이란 말이다!!"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으며 텐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켈트가 들어간 텐트와 뮤 스의 얼굴을 한번씩 바라본 페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던 말을 계속 했다. "음 그럼 뮤스 너역시 불침번 정하기에 동참하거라. 음 그럼 무슨 방법이 좋을까. 좋 아좋아 우리 제비 뽑기를 하자고! 그럼 다들 불만 없겠지?" 페릭스의 말에 모두 동의 하는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의 동의 를 확인하자 페릭스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일행의 수만큼 주워 들었다. 그 리곤 그중에 두장의 나뭇잎을 반을 자른후 나머지 반을 다른 나뭇잎들과 손아귀에 쥐 었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내밀었다. "자자! 하나씩 뽑으라구! 두명이 걸리는거야! 나는 마지막 남은걸로 하겠네! 그럼 평 등한 것이지? 누구부터 할텐가?" 페릭스의 물음에 마법사인 레이멜이 먼저 나섰다. "하하 저부터 뽑죠 대장. 음음...어떤게 좋을까...음..그래 이걸로..." -쓱 레이멜이 뽑은 나뭇잎은 완전한 하나였다. "휴우! 그럼 저부터 잡니다요. 다들 잘뽑으라구? 행운을 비네!!" 마치 놀리는 듯이 자신의 텐트를 찾아간 레이멜을 보고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일행 들이었다. 그에게 화를 내기에는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는 오늘밤 행복의 기로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이어 그의 옆에 칼을 보물 단지인듯 안고서 앉아 있던 병사가 나 뭇잎 하나를 뽑았다. 그역시 완전한 나뭇잎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이멜의 뒤를 따라갔다. 이렇게 모든 병사들이 하나씩 나뭇잎을 뽑아갔고 페릭스의 손에 남은 나뭇잎은 오직 두장이었다. 지금까지 당첨된 병사는 없었기에 페릭스의 표정은 약간 일그러 졌다. 뮤스는 식은 땀만 흘리며 페릭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이건 페릭스 아저씨의 농간 아니예요?!" "커억... 뮤스군 자네 같으면 스스로 불침번을 서고 싶어서 사랑스런 부하들에게 이 밤의 달콤함을 양보 하겠나?" "아뇨." "제길! 다들 들어가 자라고! 난 뮤스군과 함께 이 멋진 밤을 지세울 테니까 말야!" 속으로야 키득거리면서 좋아 날뛰고 싶은 병사들 이었지만 대장의 눈앞에서 그런짓을 할만큼 저능한 병사는 없었는지 다들 미안한듯한 접대용 표정을 지으며 텐트속으로 들어갔다. 페릭스는 뭔가 아쉬운듯한 눈빛을 뿌리며 이미 병사들이 다 들어간 텐트 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페릭스의 뒤에서 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예요. 그냥 잊는게 상책이라구요! 그런데 이곳에서 부터 얼마나 더 가야 투트가르라하는 곳에 도착하죠?" "흠 이곳에서라...이 숲에 들어온지 21켈리 정도 됐으니까 우리 일행들의 속도면 여 섯시간정도 더 가서 투트가르의 외각에 진입할수 있을걸세. 아참...그건 그렇고 자네 는 어디서 그런것들을 배웠는가?" 페릭스의 물음에 쓴 미소를 한번 지어 모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배웠다고 하면 배웠다 할수 있고 아니라 하면 아니라 할 수도 있어요. 자 세한것은 크라이츠 누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더이상 말해드리지는 못하거든요." "흠...그럼 어쩔수 없지..." 이렇게 둘의 짧은 대화가 오고간 이후로 한참동안이나 둘의 사이에 어색한 공기만 감 돌고 있었다. 문득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때 뇌공력을 사용하는데 익숙해 지자고 생 각한 뮤스는 페릭스가 화풀이 하듯이 구겨던진 반쪽짜리 나뭇잎을 주워 들었다. 그리 곤 나뭇잎이 들려있는 손으로 뇌공력을 집중 시키기 시작했다. -찌직!!! 화륵! 스파크와 함께 잘마른 나뭇잎은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흠...역시나 뇌공력을 높이면 온도가 높아 지는군. 이를 이용하여 발열 기구를 만들 어도 될꺼야. 아직 까지 내 몸에 흐르는 모든 뇌공력을 방출하기는 무리가 있겠구 나... 더욱 수련을 해야겠어.] 뮤스가 자신의 뇌공력에 대하여 숙고를 하고 있을때 이를 곁에서 지켜 보고 있던 페 릭스는 헛것을 본것 처럼 눈을 비비고 있었다. 마법사라 해도 마법을 시동하지 않으 면 뮤스와 같이 나뭇잎에 불을 붙이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페릭스 였기 때문이다. "뮤스군! 이건 어떻게 한건가? 마법은 아닌거 같은데..." "네... 마법은 아니에요. 제 몸속에 흐르는 기이한 기운을 발현한 것뿐이예요. 좀 특 이체질이거든요. 헤헤 밤이 정말 긴데 이러고 있기에는 너무 무료한것 같지 않나요?" 더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것 같은 기분에 얼렁뚱땅하게 화 제를 돌리는 뮤스였다. "얼굴에 '나 엄청 심심하다.' 라고 쓰여있는데 같이 해볼래요?" "놀이? 이나이에 무슨..." 하지만 페릭스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 소매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라 이츠의 던젼에서 주워온 듯한 금화가 손에 집혀 나왔다. 그리고는 옷소매를 주욱 찢 어 여러 갈래 내기시작했다. 옆에서 하지 않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무슨 놀이인지 궁 금했던 페릭스는 뮤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 보고있었다. 뮤스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여러 갈래의 천조각을 금화에 꼼꼼히 묶기 시작했고 묶기가 어느정도 끝나자 다 시 끝을 가늘게 찢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무언가를 만들던 뮤스는 자신의 손에든 물 체를 유심히 살펴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띄었다. "하하 이제 다됐어요. 아마 세상에서 제일 비싼 제기가 된것 같네요. 이건 제기라고 하는 거예요. 어른들이 애들의 놀이라고 무시하는데 하체를 단련하는데는 이만한 것 이 없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손에 든 제기를 던진후 발을 놀려 하나, 둘 차기 시작했다. 처음 몇번은 유치하게 생 각했으나 수십번이 넘도록 떨어트리지 않자 점차 신기함으로 변하는 페릭스였다. "뮤스군... 저.. 제기하고 했던가? 그거 나도한번 해봐도 되겠나? 정말 수련에 도움 이 될만할거 같군. 검술은 하체단련이가장 중요하거든?" 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수련을 들먹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헤헤 물론이죠. 여기있어요!" 뮤스에게서 제기를 건네받은 페릭스는 제기를 던져서 차려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 다. 역시나 갑옷을 입고서 제기를 차는 일이 쉽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불침번은 언제 나 적에대한 대비상황이기에 갑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제기와 씨름하던 페릭 스는 주저 앉아 버리고 말았다. "헥헥...에고 힘들다. 이거 정말 힘들군.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찰수 있는거지? 헥 헥..." "헤헤... 저야 어려서 부터 계속 해왔으니 잘 차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죠! 아저씨도 연습하면 점차 좋아 질거예요!" "그래도 꽤나 재미는 있군. 다리 단련에도 많이 도움이 될듯하고, 엄청난 집중력도 요하는 놀이니 훈련에 도움이 크게 되겠어. 이것을 우리 수비병들 훈련 메뉴로 추가 해야 겠군... 에구 힘들다!" 어느덧 밤이 물러 가려는 지 동쪽으로 짐작 되는 곳에서 빛무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비록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샜지만 공학뇌동심결의 덕분인지 피로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뮤스였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24 [2]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22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4 "다들 기상!" 페릭스의 목소리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행들은 야영지를 정리기시작 했는데 그들의 손놀림에 불필요한 동작이 없어서 정리하는 모습이 깔끔했다. 하룻밤을 꼬박 지샌 뮤 스 역시 피곤하지도 않은지 크라이츠, 켈트와 함께 짐을 챙기고 있었다. 해가 제모습 을 보일때 즈음해서 모든 일이 정리 되자 페릭스와 뮤스의 일행들은 서둘러 길을 출 발했다. 해가 머리위에 떠있을때는 이미 기나긴 숲을 빠져 나온 후였다. 사방에는 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조선만 해도 이러한 광경을 연출할 만한 곳이 거의 전 무했기에 낯선 광경에 넋을 빼았기고 있는 뮤스였다. "와아!! 이렇게 넓은 초원이 있다니 대단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율리아나가 말했다. "호호 뮤스 너는 어디서 현자 수업을 하셨길래 이런 평범한 광경에 놀라는 거야?" "아...저...그게..." 율리아나의 갑작 스런 물음에 운전을 하고 있는 크라이츠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역시나 뮤스의 난처함을 눈치 챘는지 느긋하게 말했다. "뮤스는 대단하신 스승을 모시고 산골 깡촌에서 수업을 받았단다. 다만 뮤스의 스승 님께서 자세한 것은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스승님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는 못하겠지 만 라이부크에서 어려서 살았다는 건 말해 줄수 있겠구나. 그러니 이런 초원은 처음 이지. 라이부크에는 너도 알다시피 돌산밖에 없으니까." "아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뮤스! 그 머리 있잖아... 남자가하기에는 이상하지 않니? " "댕기머리 말이야? 내머리가 어때서?" 율리아나의 말에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자신의 댕기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뮤스였 다. 하지만 율리아나의 시점에서는 이상하게 보이는게 지극히 당연하였다. "뮤스! 우리집에 가면 솜씨좋은 이발장이가 있거든? 그사람에게 부탁해서 깜끔하게 자르는게 어때?" 율리아나의 말에 대경실색하며 놀라는 뮤스였다. "안돼! 내 몸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보물인데 어떻게 함부로 잘라낼 수가 있냐? 차 라리 내 목을 잘라라!" "어머나! 왜그렇게 놀라는 거야? 겨우 머리좀 자르는거 가지고 뭘 그래?" 이들의 말에 끼어드는 켈트였다. "껄껄! 뮤스... 그래 율리아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런 머리는 여행하기에는 너무 불 편하거든. 이번기회에 율리아나한테 부탁해서 머리좀 짧게 자르는게 어떻냐?"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물려주신..소중한 신체의 일부분인데....어쩐다.. 그래 집에서 의절을 하고 나왔으니 이미 부모님과는 상관 없는 놈이 되었으니 상관없겠구 나.] 결심을 한 뮤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는 씁쓸한 눈빛을 다시 먼 초원의 지평 선으로 돌렸다. 이때 철전뇌거 옆에서 말을몰고 가던 페릭스의 목소리가 뮤스의 귀에 들렸다. "아 거의 다왔군요. 저곳이 투트가르의 가장 외곽에 있는 마을인 쟈넨이라는 마을입 니다. 저 마을부터 한시간만 더가면 투트가르 성이 나오지요." 페릭스의 말을 들은 뮤스는 길의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선의 마을과는 사뭇 다 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의 건물들이 동녁을 향하여 수평으로 늘어서 있다 고하면 이곳의 건물들은 대로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건물 의 모습역시 달랐지만 이미 이 세계로 건너온 이상 그정도는 에상하고 있었는지 그다 지 놀라워 하지는 않았다. 일행이 마을로 들어가자 길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잡 담을 하고 있는 마을의 아낙들, 그리고 낮부터 한잔 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어그적 어 그적 길을 걸어가는 아저씨까지 조선과는 그다지 달라보이진 않았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은 틀림없나보네! 왠지 정감이 드는걸?] 이때페릭스가 말했다. "여기서 때늦은 아침 식사나 하고 성으로 들어가시죠." 페릭스의 말을 들은 율리아나는 어젯밤 굶었던것이 타격이 컸는지 일행중에 가장 반 가운 표정을 지었다. 쟈넨마을은 불과 이십여가구의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큰규모 의 식당을 갖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일행을 둘로 나누어 식사를 하기로했는데 병 사들은 길건너편의 '이슬의 정' 이라는 식당에, 그리고 뮤스일행과 율리아나 그리고 페릭스는 가까이 있는 '누갈의 정'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끼익. 마침 점심때라서 그런지 몇몇 테이블은 이미 손님들로 차있었고 대부분은 여행자의 차림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기에 마을의 주민들은 각자 집에서 점심을 해결 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식당에 주민들이 있을리는 거의 없었다. "페릭스님 오셨군요!! 아이쿠. 이쪽은 율리아나 아가씨시네요! 방학이 시작되셨나 보군요?" 사람 좋아 보이는 반대머리에 노란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자가 걸레로 손을 닦 으며 카운터에서 나왔다. 이미 페릭스와는 구면인지 상당히 반가운 목소리로 반겼다. "하하 누갈씨 오랜만입니다. 요즘 장사는 잘되죠?" "저도 오랜만이에요 누갈 아저씨!" 페릭스, 율리아나와 인사를 나눈 누갈이라 불린 사내는 자뭇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 며 말했다. "언제 제가 이윤을 보며 장사하는거 봤습니까? 하하하! 여행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 세이니 수입도 나쁘진 않습니다. 율리아나님께서 돌아오셨으니 클래프님얼굴에 웃음 이 떠나질 않겠군요? 헌데..." 말끝을 살짝 흐리자 긍금한 표정으로 율리아나가 물었다. "누갈 아저씨 무슨일 있었나요? 무슨일인데요?" "흠 요즘 크리스티앙 도련님께서...." "오빠가요?" "허허..별일 아닐겁니다. 몸이 좀 안좋으시다더군요.." "그런일이 있었군요. 음..." 심각해진 율리아나의 표정을 본 페릭스는 분위기 전환이라도 하려는듯이 말했다. "율리아나님 별일 아니실겁니다. 일단 일행들 모두 시장할테니 점심식사나 하시죠. 조금있으면 성에 도착할테니 어찌된 일인지 알수 있겠죠." "아...죄송합니다. 뮤스, 크라이츠님, 켈트님. 저쪽에 마침 알맞은 테이블이 있네요. 저쪽으로 가시죠."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사과를 한 율리아나는 식당의 중간에 위치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스프가 정말 일품이랍니다. 모듬 생선요리도 대단하구요. 언제나 스윈제국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이 마을을 지나야 하거든요. 그때마다 매번 이 식당에 들려서 모 듬 생선요리와 스프를 즐기곤 하죠." 율리아나의 말에 침을 삼키고 있던 켈트가 말했다. "헐헐. 그렇다는 말이지? 그럼 율리아나가 추천하는 모듬 버섯요리로 난 정했어! 크 라이츠님은요?" "호호 저도 좋아요. 뮤스도 특별히 다른거 없으면 어떻니?" 크라이츠의 질문에 낮선 환경에 두리번 거림을 멈춘 뮤스가 대답했다. "아!..저도 좋아요! 율리아나가 추천한다고 하니 괜찮겠죠 뭐." "누갈 아저씨 여기 모듬 생선요리로 통일해주세요!" 누갈은 율리아나의 경쾌한 목소리에 안심했는지 웃으면서 주문서를 써내려 가기 시작 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휘적휘적 주방을 향해 걸어가는 누갈이었다. 그래도 역시 걱정은 되는지 페릭스를 향 하여 입을 여는 율리아나였다. "크리스티앙 오빠가 많이아픈걸까요?" "흠 아닐껍니다. 크리스티앙님은 어려서부터 질병에 잘 안걸리셨잖습니까. 기껏해봐 야 감기정도겠죠. 요즘은 환절기니 아마 그럴겁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5 이때 누갈이 주방에서 나오며 한쪽 테이블에 앉아 농을 주고받던 사람들을 향해 급하 게 말했다. "이봐! 어망이 찢어졌네! 그렇게들 있지말고 나좀 도와주게나!" "엥? 그럼 어망에 있던 고기들이 양어장으로 빠져나갔단 말인가?" "찢어 졌으니 별수 있겠는가?" "자네 장난하나? 그 넓은 양어장에서 고기 몇마리 잡기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럼 어떻게 하지? 다시 물을 뺄 수도 없고... 율리아나 아가씨 일행에게 대접을 해 야하는데..." 누갈과 사람들의 대화를 얼핏들은 페릭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갈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누갈은 올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기 난처해했다. "저..그게 오늘 조리용으로 미리 준비해놓은 생선들이 어망이 찢어 지는 바람에 양어 장으로 들어갔지 뭡니까. 어제는 물갈이를 위해 물을 다 빼놓고 잡았지만, 다시 물을 빼려면 시간이 여간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죠." "그럼 다른 생선들도 없습니까?" "이번에 다른 생선이 들어오기로 해서 남은 것은 그녀석들 밖에 없었죠. 쩝." 반년동안 기다리며 먹고자했던 생선모듬요리를 맛볼 수 없다고 하자 울상을 지으며 안타까워했다. "아.. 그럼 생선모듬 요리를 맛볼 수 없다는 건가요? 꼭 먹고 싶었는데..." 앉아서 듣기만 하던 뮤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쩝. 그냥 그거 없으면 다른거 먹으면 될걸 울먹거리기까지 하냐?" "네가 생선 모듬 요리를 못먹어 봐서 그래! 얼마나 먹고싶었는데..." 율리아나의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의자에서 일어나 누갈에게 걸어갔 다. "아저씨 고기만 잡으면 되는거죠?" "응? 그..그렇지." "까짓 제가 잡아드릴테니 안내좀 해주세요. 좀 탈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무슨수로 그 넓은 양어장에 있는 고기 몇마리를 잡는다는 말이냐?" "에휴... 이제 대답해 드리기가 귀찮네용 그냥 보기만 하세요." "그래 알았다. 이쪽으로 따라오거라." 누갈을 따라 건물의 뒷편으로 돌아가자 폭과 길이가 30멜리씩은 됨직한 꽤큰 양어장 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뒤로 다른 일행들도 뮤스가 무슨 수로 고기를 잡을지 궁금했 기에 봄소풍가는 병아리 마냥 따르고 있었다. "자 이곳이란다. 여기 느긋하게 수영하고 있는 생선들 보이지? 그것들만 잡으면 된단 다." "헤헤... 뭐 그정도야 간단하죠. 다들 뒤로 물러서세요! 잘못하면 크게 다칠지도 몰 라요." 뒤에서 구경하던 이들에게 주의를 준 뮤스는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물로 집 어 넣었다. 그 모양새를 본 켈트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이봐 뮤스! 이번엔 손을 늘려서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하느냐? 껄껄껄!" "보고만 계시라구요! 놀라 자빠지지나 마시고! 이야압 뇌공력 방출이다!" 기합소리와 함께 뮤스의 팔을 타고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으며 얼마 안있어 출 렁이는 수면 위로 생선들이 허연 배를 내밀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뮤스의 기행을 보 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던 크라이츠 마저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얼 마나 놀랐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빨리 건지세요... 힘좀 썼더니 배고파 죽겠네..." "아..알았다!" 뮤스가 투덜거리며 식당으로 다시 들어가자 다른 이들도 멍한눈을 하고선 다시 병아 리때 처럼 따라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일행들의 질문 공세를 받기 시작했으며 뮤스의 고쟁이 치수까지 알아 내려고 하는지 끈덕지게 계속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한것이지? 어제도 네가 말했지만 마법은 아닐테고!" "에...마법은 아니예요. 어제 말씀 드린대로 제가 특수 체질이라서 되는 것이라니까 요." "그럼 그 위력이 얼마나 날 수 있다는 것이냐?" "아저씨들! 배고픈데 그만 하면 안될까요? 정말이지 생선 몇마리 잡은 것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때마 침 누갈이 두손에 접시를 잔뜩 들고 나타났는데 크나큰 접시 다섯개를 두손에 올려 안정적인 모습으로 들고 오는 모습이 하루이틀 일한 솜씨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껄껄껄. 음식 나왔습니다요~ 하하 '누갈의 정' 특별 생선 모듬요립니다! 뮤스군을 위해 특별히 맛있게 만들었이니 마음껏 드세요!" 사람 좋은 웃음 소리를 흘린 누갈은 손에든 접시를 하나씩 내려 놓기 시작했다. 접시 에 가득 얹어져 있는 생선살들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군침을 충분히 흘릴만했다. 함께나온 스프역시 옥수수가 잔뜩 들어있어 구수한 냄새가 일행들의 코 를 자극했다. 율리아나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와! 바로 이거예요. 이게 얼마만이람?" 옆에서 앉아서 음식이 차려짐을 보던 뮤스는 포크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그동안 스푼으로만 음식을 먹었던 뮤스의 눈에 처음 선보인 포크였다. [이건 뭐하는거지? 찍어 먹을때 쓰는건가? 무기같기도 하고. 설마..이걸로 싸워서 이 긴사람만 식사를?] 꽤나 귀여운 상상을 하던 뮤스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크라이츠를 향해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이예요?" "호호. 포크라고 하는것이란다. 고기등을 찍어 먹을때 쓰는데 여긴 아직 작은 마을이 라서 두갈래로 나뉘어진 것을 사용하지만 성으로 가면 세갈래로 나뉘어진 것을 쓴단 다. 두갈래는 너무 위협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세갈래로 바꿔어가는 추세거든." "아하!" 뮤스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하는 대로 따라했다. 물론 사용방법이 간단 했 기때문에 쉽게 따라 할 수는 있었지만 어색한 것은 어색한 것이었다. 이때 율리아나 가 말했다. "음식 맛이 어떤가요? 달콤한 스프에 싱싱한 생선살들의 조화! 굉장하지 않나요?" 음식을 먹느라 열중한 켈트는 율리아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크만 이리 저리 휘 두르고 있었다. 일 순간 포크가 움직임을 멈췄다. 켈트의 목소리가흘러나왔다. "한접시더!!!" 켈트의 목소리에 어느새 들었는지 누갈은 준비된 접시를 하나 더가지고 나오며 웃었 다. "하하 난 잘먹는 손님들이 좋다니까!" 그러나 이때 뮤스는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매운맛이 하나 없이 느끼하기만 한 음식 이 통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에서의 조미료를 구할 길이 없는것을... 이를 보던 페릭스가 말했다. "뮤스군은 별론가 보군? 생선을 싫어 하나?" "아뇨 이런 생선 요리는 처음이라서요." 일행들 나름대로 점심 식사를 즐긴 후 누갈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뒤로한체 다시 투트 가르를 향하는 길을 재촉했다. 지나 다니던 사람들은 전뇌거의 기괴한 모습에 놀라워 하는 모습이었지만 일행은 반응을 예상했던 지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점차 투트 가르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건물들의 수가 많아 졌고, 눈에 띄는 사람들 또한 많아져 도시의 활력이 느껴졌다. "와... 이곳이 투트가르라는 도시인가요?" 뮤스의 말을 듣고 페릭스가 자랑 스럽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후훗. 이곳역시 내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투트가르의 시내란다. 중심지는 조금만 가면 되니까 거기 가서 놀라게나. 라이부크의 산속에서만 살았다고 하니 구경할 것들 도 많을 것이야." 자부심이 상당한듯한 목소리였다. 투트가르는 약간 구릉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도 시였는데 인구 약 30만 정도의 대형 도시였다. 일행은 투트가르의 중심지, 소위말하 는 투트가르시에 도착했다. 넓은 대로의 주변에는 일렬로 서있는 수많은 가로수들이 서있었고, 반듯한 돌들로 포장된 거리에서 마차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대로주변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은 상당히 고급스럽고 고풍스러웠는데. 평균적인 높이 가 삼사층은 되어 보였다. 수많은 건물들이 빼곡히 서있는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상당한 크기의 위용을 자랑하는 투트가르 성이 거만한듯 서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정취라도 느끼려는 듯이 큰 한숨을 들이쉬는 율리아나였다. "하! 이 도시의 냄새! 언제나 생각해도 정말 좋아요. 전뇌거를 타고 포장된 도로에서 달리니 정말 좋은데요?" 앞에서 운전을 하던 크라이츠역시 부드러운 주행감에 크게 만족을 하고 있는 중이었 다. "호호 정말 그런걸! 이곳을 원없이 쌩쌩 달려봤으면 좋겠어!" 크라이츠의 말에 간이 쪼그라 들고 있음을 느낀 뮤스와 켈트였다. 이때 켈트가 율리 아나에게 말했다. "음 이제 대강 투트가르까지 왔으니 헤어져야 겠는걸?" "어머나! 이대로 헤어지는건가요? 바쁘신 일이라도?" "허허 그런건 없단다. 그냥 여행중인걸. 원래 목적지가 투트가르였지 않니. 도착했으 니 이별을 하는게 당연한 것이지." 아쉬운듯한 표정이 역역한 율리아나였다. "그럼 이렇게 하죠? 오늘 저녁을 저희 집으로 초대를 할께요. 하루정도는 묵어 가셔 도 괜찮을듯 한데요? 그러는 편이 더 편하지 않을까요?" 앞에서 운전을 하던 크라이츠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어머나! 그래도 되겠어? 만난지 몇 일 되지도 않았는데 신세 지는게 아닌지...." "아닙..." "호호 그렇다면 정말 고맙지! 그럼 오늘은 율리아나의 집에서 신세를 지도록할께!" 율리아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상황을 종료 시킨 크라이츠가 그 뻔뻔함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크라이츠는 조용하고 현숙한 이미지로 율리아나에게 비춰졌었지만 한순간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의견의 일치를 본 두 일행은 투트가르의 성 문을 지나쳤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율리아나와 페릭스를 발견하고 가볍게 목례 를 했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여러채의 성채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심에 위치한 가 장 웅장하고 높은 성채의 큰 문앞에 일행들은 멈추었다. 페릭스가 뒤에있던 병사들에 게 외쳤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다들 숙소로 가서 편히 쉬도록. 오늘 저녁에 특별히 푸짐한 음 식을 지급하도록하지. 레이멜 자네도 수고 했네. 그럼 내일 보기로 하지. 이만 해산! " -네! 뒤에있던 병사들은 짧고 큰 대답을 한테 뿔뿔히 흩어져서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들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오랜만에 자신을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한가닥의 기쁨을 띄고 있었다. 이때 성채의 문이 열리면서 한명의 중년이 만면에 미 소를 머금으며 걸어나왔다. 온몸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보석들이 꽤나 지체가 높 은 사람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있었다. "율리아나 돌아왔구나!!!" 목소리를 들은 율리아나는 그 중년에게 뛰어들며 안겼다. "어버지!! 오랜 만이예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죠?" "허허 무슨 별일이 있겠냐. 어서 들어가자꾸나... 그건 그렇고 페릭스와 함께 계신분 들은?" "아! 오는 길에 저희를 도와 주신 분이세요. 제가 소개해드릴께요." 아버지의 꼭손을 붙잡고 뮤스일행들에게 걸어온 율리아나는 아버지에게 일행들을 소 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드워프이신 켈트님, 이쪽 레이디께서는 투트가르에서 오신 크라이츠님이시 고, 이쪽분은 저와 동감 내기인 뮤스예요." 율라아나의 소개를 받은 일행들은 가벼운 목례를 했다. "허허 여러분 반갑습니다. 전 여기 율리아나의 애비 되는 클래프 하이만 폰 투트가르 후작입니다. 반갑군요." 클래프의 인사를 들은 뮤스가 크라이츠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누님... 원래 이곳의 이름은 저렇게 긴거예요?" "호호 저사람은 귀족이라서 그렇단다. 클래프 하이만까지는 자신의 이름이고 '폰'은 어디어디에 라는 뜻으로 자신의 영지 이름을 그 뒤에 넣는단다. 그러니까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투트가르의 영주인 클래프 하이만'이 되는 거지." "아!"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뮤스였다. 클래프의 말이 이어졌다. "율리아나의 여행에 도움을 주셨다구요? 감사드립니다. 저희 성에서 편히 쉬시고 가 십시요. 자 이쪽 집사가 여러분의 숙소를 안내해드릴테니 여장을 푸시고 저녁식사나 함께하도록 하지요." "껄껄 감사합니다. 후작님." 언제나 처럼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는 켈트였다. 집사를 따라 성내부로 따라 들어간 뮤스는 또한번 놀라야만 했다. 내부의 엄청난 규모이며, 처음보는 건축양식이 뮤스의 눈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뮤스가 안내 받은 방은 삼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입구의 왼쪽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바닦에는 푹신한 카펫과 방의 오른쪽에는 커다랗고 푹신해보이는 침대, 그리고 고풍적인 가구들이 어우러져 절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 였다. "우와! 여기가 오늘 하루를 보내야 하는 방이군... 그런데 방안에 신발을 신고 들어 가다니 이곳 사람들은 꽤나 지저분하구?" 아직까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없는 뮤스였다. 거지가 형님으로 모실만큼 더러 워진 얼굴과, 원래는 흰색인듯 했지만 지금은 누가봐도 회색이라 할만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던 뮤스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쓰러트렸다. "이야! 굉장히 푹신한걸? 조선의 금침보다 훨씬 편한거같아!" -똑똑 쿠션에 감탄을 하며 침대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을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방문을 두들기는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뮤스는 멍하니 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응? 누가 문을 두들기는거지? 혹시 날 부르는건가?] "뉘...뉘신지요?" "잠시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노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란걸 확 신할 수 있었던 뮤스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소리와 함께 손에 뭔가를 든 중년의 여성이었다. "율리아나 아가씨께서 이 옷을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좀..." 뒷말까지 들을 새도 없이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시퍼런 칼을 꺼내는 하녀였다. "허헉! 제 머리말이신지?" "어서 이쪽의자에 앉으세요." 하녀가 꺼내든 칼의 서슬이 너무 시퍼래서 인지 본능적으로 하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 섭게 의자에 앉아버린 뮤스였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녀는 뮤스의 목에 흰색의 천을 두른후 서슴없이 댕기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6 투트가르성 중앙성채의 식당, 약 서른명의 인원이 동시에 식사 가능한 거대한 테이블 과 가죽으로 덧댄 고급의자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화려한 샹드리에가 휘황 스럽게 불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이미 테이블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는 데, 그 양은 이십여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식탁에는 율리아나 와 그의 아버지 클래프 후작, 크라이츠와 켈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들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씹던 음식을 목으로 넘기며 클래프 후작이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음 그러고 보니 뮤스군이 조금 늦는군요? 식사도 하지 않고 자는 건가요?"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에 놓여있는 와인을 한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아니예요.클래프 후작님. 워낙 더러워서 단장을 좀 시켰거든요. 곧 내려 올거에요." "흠 그랬었군요. 음식이 식기전에 왔으면 좋겠군요. 아무래도 음식이 식는건 참으로 안타까운일이죠. 다시 데워도 그만한 맛이 안나오니까요." 이때 켈트가 입안에 들어있는 음식물들을 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클래프 후작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음식은 제때 먹는게 최고죠. 정말 이곳의 요리 장의 실력은 대단한걸요 껄껄. 제 입맛에 딱 맛습니다!" "언제 켈트씨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있었나요?" 크라이츠게 켈트에게 심드렁한 말을 할때 큼직한 식당의 문이 열리며 한 미소년이 들 어왔다. 약간 달라붙는 팬츠에 고급스럽게 재단이 되어진 튜닉과, 고급스런 가죽으로 된 신발까지 완벽한 조화의 한벌이었다. 거기다가 깔금하게 다듬어진 검은 머리와 까 만 눈동자는 아주 뚜렸한 인상을 보는 이에게 새겨주었다 . 이곳에 도착하기 전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뮤스였다. "와우! 이게 아까 그 뮤스 맞냐? 아까 그 부시시한 모습이 완전 사라졌네? 역시 옷이 날개는 날갠가보군!" 호들갑 스런 켈트의 외침 이었지만 율리아나역시 뮤스의 변한 모습에 놀라는 표정이 었다. "뮤스님. 거보세요! 그렇게 하니까 아까보다 훨씬 좋잖아요!" 모두의 반응에 쑥쓰러워 얼굴이 붉어진 뮤스였지만 칭찬으로 들렸기에 그리 내심 들 뜨기 시작했다. "헤헤 이것 꽤나 불편하군요. 너무 몸에 붙어요.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호호 조금있으면 익숙해 지겠지...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크라이츠의 옆에있는 비워진 의자에 가서 앉은 후 테이블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 시 느끼한 종류의 음식만이 가득 있음을 확인하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스치듯이 눈에 들어온 포크는 크라이츠의 말대로 세갈래로 나뉘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클래프가 뮤스에게 말했다. "뮤스군도 차린건 별거 없지만 많이 들게나." "헤... 이정도면 진수성찬인걸요!" 별로 입맛을 끄는 음식은 없었지만 클래프에게 접대용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뭔가 이상하다는 억양으로 율리아나가 말했다. "아버님 그런데 크리스티앙 오빠는요? 저녁 생각 없데요? 이상하네..." 율리아나의 물음에 클래프 후작은 안색을 조금 어둡게 하며 대답했다. "음..그게 말이다. 네가 없는동안 난처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네? 무슨 일인데요?" 클래프 후작과 율리아나의 대화에 식사를 하며 귀를 기울이는 뮤스 일행들이었다. 물 론 켈트는 듣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아마도 아닌것에 가까우리라... "네 오빠가 라이델베르크의 영주인 하버만 후작의 딸에게 반해서 청혼을 하러 갔다가 거절을 당했단다. 그래서 상사병이 난게지. 알다시피 하버만 후작은 딸에게만은 끔찍 하지 않느냐. 아무리 내 친우라 하지만 어쩔도리가 없더구나." "페릴언니 말인가요? 오빠가 어디가 마음에 안든다고 한거예요?" 자신의 오빠가 거절을 당했다고 하자 마음이 상했는지 조금 흥분한 말투였다. "흠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이런 이야기는 실례란다." "아니에요. 클래프 후작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계속 이야기하시죠." 크라이츠가 괘찮다고 하자 고개를 끄떡이며 크리스티앙의 청혼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 했다. "그 아이가 크리스티앙에게 어이 없는것을 부탁을 한모양이더군... 그것을 이뤄주기 전엔 혼인할 수 없다면서..." "설마 엄청난 보물을 원한 건가요? 물론 페릴언니의 성격에 그것은 아닐텐데..." 이정도 이야기가 진전이 되자 궁금증 많은 뮤스와 흥미거리에 약한 크라이츠는 식사 하는 것도 잊은 체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켈트역시 그 부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다른점이 있다면 이미 식사를 끝낸 이후라는 것이었다. "허허 정말 어이가 없지... 하늘에 별을 따달라는 것이었단다." "어머나...그런 일을 어떻게 부탁을 하죠? 아니지...페릴언니라면 그럴만해요. 워낙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으니 크리스티앙이 저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는 것이지. 쯔 쯧... 제 어미만 있었어도 더 좋은 신부감을 얼마든지 찾아 줄건데..."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는 또 왜하세요..." "흠흠 미안하구나..." 눈시울을 잠시 붉힌 클래프 후작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뮤스 일행들과 눈이 마주치 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이런 추태를 보였군요. 손님들께... 들으신대로 이 아이의 어미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죠. 그래서 제가 어미노릇하랴 아버지 노릇하랴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반듯하게 커줬으니 더이상 바랄것이 없죠. 껄껄." 크라이츠가 말했다. "네 영애께서 정말 훌륭해 보이시네요. 밝아 보이기도 하고요." 켈트는 성으로 들어온 후 부터 거의 완벽한 레이디의 모습으로 돌변한 크라이츠가 정 말 존경 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당연한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과 한 일생을 함께 살면서 부인으로써, 엄마로써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의 연기력은 최고라 할만하다는 것...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켈트는 흡족한 표 정으로 배를 두들겼고, 크라이츠는 예의있는 레이디 처럼 조심스런 걸음을 떼며 방으 로 들어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뮤스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헤헤 이정도면 꽤나 잘생겼지? 그리고 보니 키도 꽤나 큰것같은데? 나의 뇌공력때문 에 그런가? 하긴... 뇌공력이 모든 신체적인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그나저 나 이 옷은 좀처럼 적응이 안되네! 으 답답해!" 자신의 다리에 달라붙어있는 팬츠를 당기며 투덜 거렸다. "아무래도 적응을 시키려면 많이 걸어다녀야겠다. 그럼 조금이라도 늘어나겠지?" 이렇게 마음먹은 뮤스는 성채의 밖으로 걸어 나와서 두리번 거렸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지? 뭐 주변 구경이나 하면 되겠지. 앞쪽은 들어오면서 봤으니 뒤쪽으로 가볼까?" 뮤스는 발걸음을 옮겨 성채의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한참을 걸어서야 성채 의 뒷뜰에 닿을 수 있을만큼 성은 거대했던 것이었다. 뒷뜰에 닿았다고 느끼기 시작 했들때 그의 눈에는 놀라운 관경이 들어왔다. 바로 엄청난 규모의 정원이 그곳에 있 었는데 높지않은 수많은 수목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서있었고, 누군가가 손질이라도 하는지 그 높이와 크기가 일정하게 반듯했다. "우와! 이 성채의 안보이는 곳에 이렇게 엄청난 정원이 있을줄이야... 역시 조선과는 전혀 다른 풍미인데? 흥미로운 곳이야... 클래프 후작이라는 사람은 우리 아버님보다 높은 분이신가? 우리집도 이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하긴 조선이야 땅덩어리가 워낙 작으니." 감탄을 하는건지 재산 비교를 하는건지 모를 말을 하며 정원을 거닐고 있던 뮤스의 발걸음은 어느새 정원의 중앙부에 닿아 있었다. 그곳에는 정원의 겉에서는 낮은 나무 들때문에 눈에 띄이지 않았지만 상당한 크기의 연못이 정원의 중심부분에 있는 것이 었다. "오... 역시 성이 크니까 이런것도 있구나! 하긴 경복궁에도 있었으니..." 뮤스가 연못을 들여다 보니 큰 관상용 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문득 어렸을때 동네 아이들과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생각이 떠오른 뮤스는 의밈모를 입맛을 다시 며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허나 이것을 방해하는지 연못의 반대쪽에서 인기척이 들 려왔다. "어라? 나말고 다른사람도 있나보네? 누구지?" 궁금함을 느낀 뮤스는 연못의 반대쪽으로 걸어갔고, 인기척이 나는 곳에 가까이 다가 가자 근심이 듬뿍담겨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나의 페릴...그대의 별같은 두눈은...별같은....별같은... 후우...." 별이라는 단어를 몇번 되씹다가 한숨을 쉬어 버리는 이십대의 청년. 머리는 율리아나 와 같은 금발이었고, 몸은 약간 유약해 보였지만 상당히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하지 만 무슨일인지 그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했다. 호기심이 생긴 뮤스는 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라? 처음 뵙는 분이시네요! 하긴 이 성이 워낙 크니... 왜 이시간에 여기서 그렇 게 한숨만 쉬고 있으세요? 뭔가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하지만 금발의 청년은 대꾸도 하지 않고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휴. 이곳의 사람들은 왜그런지 몰라.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꾸라도 해야지. 켈 트아저씨도 처음 만났을때 그러시더니 말이야... 아무튼 삭막한 세상이라니까." 불만인듯이 계속해서 궁시렁거리자 그제서야 금발의 청년은 고개를 돌려 뮤스를 바라 보았다. "누구시죠? 처음 보는 얼굴같은데..." "이것 참... 제 말조차 못들으 셨었다니 완전히 넋이 나가있으셨었군요. 저는 뮤스라 고 해요. 그쪽은 누구시죠?" "아아.. 율리아나와 함께오신 분이시군요... 전 크리스티앙이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식사시간에 들었던 것이 기억나는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하! 율리아나 낭자의 오라버님 되시는 분이시군요! 그나저나 초면에 실례지만 몰 골이 말이 아닌걸요?" "후훗. 그렇습니까? 저의 모습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겉이 번지르해봤자 마음은 황폐한걸요." 모든것을 체념한 듯한 그의 말이 조금 못마땅하게 생각한 뮤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대장부가 한낱 아낙때문에 이런 몰골로 있으면 됩니까?" "페릴양은 한낱 아낙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주 특별한 여인입니다!" 무심코 위로를 하기 위해 던진 뮤스의 말에 크리스티앙이 얼굴을 굳히며 싸늘하게 말 하자 크게 당황했다. "아..알았다구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제서야 크리스티앙은 화가 수그러 드는지 구겨진 얼굴을 폈다. "나참... 듣자하니 크리스티앙님이 사모하시는 분이 별을 가지고 싶다 하셨다면서요? " "아버님께 들은 모양이군요. 허나 그것은 사람힘으로 불가능한일. 설득을 하려해도 그녀의 결심이 결코 가볍지 않아서 말입니다..." 크리스티앙의 말을 들은 뮤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뭔가 떠오른 뮤스는 웃음을 지 으며 크리스티앙에게 말했다. "하하 제가 그일을 해결해 드릴수 있을것 같아요! 제가 도와 드려도 될까요?" "네? 뮤스님께서 절 도와 주신다고요? 신이 아닌다음에야 어떻게 저 하늘의 별을 딴 단 말입니까?" "설마 제가 별을 따겠습니까? 그건 절대 아니지만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이번일 이 잘 성사 될거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헤헤. 그럼 내일 오전에 뵙도록하지요. 저는 이만 준비좀 하러 가볼께요!" "아... 네!!" 뮤스가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몰랐지만 일말의 희망이 생긴 크리스티앙은 뮤스에게 모 든걸 걸어 볼수 밖에 없었다. 뮤스는 황급히 대답하는 크리스티앙에게 인사를 건네고 켈트의 방으로 갔다. "켈트 아저씨 자요?" 뮤스의 부름에 방안에서 켈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직 안잔단다. 들어오거라." -끼익. "헤헤 아저씨 부탁 좀 할께요." "흠...어렵지 않은거만 부탁 하거라. 오늘 밤에는 푹 자둘 생각이거든? 내일 부터 정 말 길을 떠나야 하니 마지막으로 잠을 즐길 생각이야." "나참... 밥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자요? 위속에 음식물이 많으면 체내의 힘이 소화작용에 들어가서..." "그만! 너 잘난거 알겠으니 그만하고! 부탁할 것만 이야기해라." "아참! 이것좀 제작해주시면 되겠는데..." "음... 어디 보자....." 뮤스는 언제 준비했는지 도면을 내보이며 켈트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27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25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7 "여기는 볼록해야 하고, 반대 쪽은 오목한거 예요. 그런데 수정을 어디서 구하죠?" "헐헐. 클래프 후작님께 말씀 드려보지... 설마 이만한 성에 수정 몇 조각 없을라구? 만약 없다고 그래도 구해주시겠지. 다른사람일도 아니고 아들의 혼사가 달린문제인 데. 안그래?" "하긴 그렇죠. 그럼 내일이나 되어야 완성 할 수 있겠네요?" "흠 별수 있는가? 지금 찾아 뵙는것도 실례이니..." "헤헤 그럼 저는 이제 필요없으니 아저씨가 수고해 주시면 되겠네요!" "네녀석은 매번 일만 떠넘기고 노닥 거리는구나!" "헤헤 저야 아저씨같이 훌! 륭! 한! 기술이 없잖아요." "흠흠... 하긴 나만한 기술을 가진 드워프도 드물지. 그럼 내일까지 완성 시켜놓으 마. 잘자거라!" 겨우 켈트를 달래고 나온 뮤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런 이쪽 세상으로 온다음부터 별게다 불편하단 말이야. 음식도 그렇고, 이제는 잠 자리까지? 드워프의 동굴에서는 피곤해서 그랬다 치지만... 지금은 영..." 역시 침대는 안정이 안되는지 카펫으로 내려와 엉덩이를 붙였다. 역시나 어디에 걸터 앉는다는 것보다는 주저 앉는게 훨씬 편안했다. "후우... 여행이라... 그런데 장영실 아저씨가 이쪽 세계로 왔다면 어떻게 만나지? 보아하니 조선보다 훨씬 큰나라인듯한데..." 장영실과의 조우를 위한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골똘이 생각에 잠긴 뮤스였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뮤스의 두눈에 초점이 생기면서 호들갑 스럽게 말했다. "그래! 내가 유명해지면 장영실 아저씨가 날 찾기 쉽겠구나! 헌데 무슨 방법으로 유 명해 진단 말인가. 내가 가진 능력이래봐야...내가가진 능력? 내 머리속에 들어있는 지식정도면 그런것은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아무래도 이곳은 조선보다는 기술력이 떨 어지는 듯하니... 크라이츠 누님께 말씀드려 장사나 해볼까? 비록 양반의 신분으로 장사치가 되는것이 좀 부끄러운데 뭐 이곳이 조선은 아니니 별 허물이 아니지. 그래! 이곳에서 공학원을 만드는 거야! 백성들에게 유용한 기구들을 제공하는 공학원! 물론 돈도 벌고!" 투트가르성 작은 방에서 가지게된 뮤스의 결심이 훗날 도이첸제국의 앞날을 이끌어가 는 뮤센공학원의 시초가 될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리라. "그럴려면 떠돌아 다니는 것보다 어느 한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좋을것 같은데... 켈트아저씨와 크라이츠 누님께 부탁을 드려볼까? 비록 처음에는 신세를 지겠지만 훗 날 값으면 되니까!" 이렇게 결심을 한 뮤스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그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이제 대강 진로가 잡혔으니 실행에만 옮기면 되겠구나... 그것은 그렇고 내가 사용 할 수 있는 뇌공력은 점차 늘어만 가는데 이를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내 몸에서만 돌고 있는것은 아까워... 공학원의 첫번째 제품으로 전뇌거를 대량으로 생 산해 볼까? 내가가진 뇌공력을 상당수 덜어 낸다 해도 금방 채워질듯하니 별 무리가 없겠는걸? 이 나라에 없지만 유용한 것을 만드는거야..." 기분이 좋아진 뮤스는 두눈을 감으며 숨을 고르자 언제나 처럼 뇌리를 스치는 음률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못느끼고 있다가 이렇게 혼자 조용히 있을때마다 온몸으로 흐르는 음율을 느꼈는데, 그럴때마다 몸이 가벼워지고 피로가 가시곤 했다. [음...뇌동심결은 참 대단한거같아... 이렇게 자연스럽게 뇌공력이 유도 되다니말이 야... 명사나라의 사람들은 이를 몸으로 흘려 무공을 쓴다지? 그럼 뇌공력을 근육으 로 흘린다면?] 눈을 갑자기 번쩍 뜬 뮤스는 자신의 생각대로 뇌공력을 팔근육에 응축시키기 시작했 다. 그러자 뮤스의 팔은 스파크를 튀며 노란 빛으로 둘러쌓여 버렸다. "이..이게 어떻게 된거지? 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자... 이런것에 대한 언급이 없을리 가 없어..." 아직 자신의 머리속으로 이식된 지식들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뮤스였다. 평소에 아무 런 생각이 없다가 옛일을 떠올리고자 마음을 먹고서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과 같다고 나 할까? "아! '뇌동체술법'이라는 것이 있군! 공학도들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위해 익히던 무예..." 점차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뇌동체술법'의 교본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교본은 십여가지의 움직임과 익히기 방법을 표시했는데 , 이 '뇌동체술법'의 기본은 택견의 그것과 동일했고 다른점이 있다면 뇌공력으로 사지를 감싼다는 것이었다. "음 처음은 품 밟기를... 이렇게 하는 것인가?" 뮤스는 제자리에 서서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빗밟기... 길게밟기...눌러밟기...제품밟기" 동작의 이름을 중얼 거리며 한참동안을 연습하던 뮤스는 별 어려움이 없는 모습이었 다. 처음 해보는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발놀림이었지만 오랬동안을 수련했던 사람인양 능숙하기만 했다. "이건 내가 어려서 부터 하던 비석차기 좀 할줄 알면 이정도야 누워서 떡먹기인데? 다음 동작이나 해봐야겠다. 뇌공력을 운용하랬지? " 뮤스는 새로운 마음으로 뇌공력을 사지로 흘렸다. 그러자 팽팽한 긴장감이 몸에 느 껴졌고 품 밟기와 함께 다음 동작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작들은 다리의 움직임이 그 주였는데 어려서부터 제기차기등으로 발재간을 연마한 뮤스로서는 그리 힘들지 않 았다. 그래서 인지 쉽게 진도가 나가자 신이나는 뮤스였다. 사실 '뇌동체술법'의 고 수가 봤다 하더라도 그 익숙한 발놀림에 혀를 내둘렀으리라. "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군. 가끔 몸을 단련할때 연습해야겠어. 혼자하니 조금 심심하 긴 하지만 이정도면 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연습을 하는 뮤스는 방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젠 그역시 무아 지경에 빠졌는지 자신의 발에 걸리는 족족 부서져 나가는 가구들을 인식 도 못하고 있었다. -빠직! 빠각!! 우지끈! 새벽이 되어서야 무아지경에서 돌아온 뮤스는 자신의 초토화된 방을 바라보며 할말을 잃고 있었다. "헉. 삼두 괴룡이라도 지나갔나? 아냐! 크라이츠 누님은 자기 방에 있을껀데... 그 렇다면 내가 이런짓을? 내가 실성했던 모양이야... 그나저나 이 일을 어떤다?" 고민에 빠진 뮤스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휴우..어쩔수 없지 오늘밤은 그냥 자고 내일 성주님께 비굴하게 빌 수 밖에... 내가 정말 실성을 했어..." 단순하게 생각하기로한 뮤스는 자신의 발에 맞아서 네개의 받침다리중 두개를 잃어 기울어진 침대에 몸을 실었다. 허나 성내부에 존재하는 가구의 대부분은 내구성을 위 해서 일반 목재와는 강도가 상대도 안되는 특수목재를 사용한다는 것을 모르는 뮤스 였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8 -똑똑... 똑똑... "뮤스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끼익. 뮤스의 방문앞에서 노크를 하고 있던 하녀는 인기척이 없자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안의 광경이 하녀의 눈에 들어고, 안색이 새파래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마디 뿐이었다. "꺄아!!!!!!" 성내의 응접실은 여느 방들과 같이 우와하게 꾸며져 있어 성의 얼굴이라 할만했다. 손님들이 성에 초청되어 왔을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이 응접실이기 때문에 응접 실의 분위기가 성의 첫인상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다 세심하게 꾸며 져 있었는데 선반과 가구들에는 먼지한올 앉아 있지 않았고, 바닥은 고급스런 대리석 으로 아름다운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하녀의 비명에 요란한 아침을 보 낼 수 밖에 없었던 뮤스의 일행들과 율리아나의 가족들, 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페릭 스등 모두가 모여 있었다. 방이 쑥대밭이 된 방에서 잠을 잘만잤던 뮤스가 대단하다 는 듯한 목소리로 켈트가 말했다. "도데체 어떻게 된게냐? 한밤에 드래곤이 짓밟고라도 간거야? 아..앗...." 자신의 생각없는말에 실책을 느끼고 크라이츠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허나 크라이 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켈트에 이어 묻기 시작했다. "뮤스 그일에 대해 설명좀 할수 있겠니? 휴작님과 가족들도 들어보고 싶어 하겠구나. " 역시나 레이디의 말투였다. 그녀의 말투야 어떻든 간에 주변의 모든이들이 자신을 바 라봄을 느낀 뮤스는 더욱 위축감을 느껴야만 했다. 어제밤까지만 해도 별일이 아닌걸 로 비춰졌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중 가 장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후작이었다. 만일 어떤 침입자가 있어서 뮤스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자신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흠 뮤스군 자세히좀 말해보게나. 우리성의 보안이 걸린 문제야... 내 아무리 성의 경비를 페릭스에게 전권하고 있다곤 하지만 이런일이 또 일어 난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걸세." 클래프 후작의 말에 자신의 잘못인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페릭스의 모습이 뮤스의 눈에 비춰줬다. 사실을 숨길만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뮤스는 사실을 그대로 주변 에 있는 이들이게 말했다. "사실... 제가 저지른 일인데요? 그 방의 가구가 비싸다면 제가 어떻게든 물어 드릴 께요." 뮤스의 말에 무슨말이냐는 듯이 더 궁금함을 느끼는 일행들이었다. 이때 페릭스가 끼 어들며 말했다. "뮤스군이 한 일이라고 했나? 저방의 가구들은 웬만한 해머로 내리쳐도 저렇게 부서 지지는 않을걸세. 오우거들쯤 되어야 맨손으로 부술수 있을껄? 만약 오우거들이래도 저정도는 아닐걸세. 성이라는 곳은 전쟁시 수많은 침입을 받기때문에 약한 재질의 목 재는 사용하지 않는다네." 페릭스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오히려 뮤스쪽이었다. 자신의 발 휘두름에 그런 위력 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그런가요? 그렇지만 정말인데..." 페릭스와의 대화를 듣고있던 클래프 후작이 손가락으로 턱을 괴면서 말을 했다. "흠..그럼 자네가한번더 보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일 은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 가도 좋을테니 말일세." "그것이라면 상관없어요!" 뮤스가 동의하자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페릭스 방의 가구들과 같은 목재로 좀 준비좀 해주겠나?" "예!알겠습니다." 잠시후 페릭스는 방의 가구들을 만드는 목재를 준비해왔다. 가구들의 색보다는 조금 더 진한 빛을 띄고있었는데 가구를 만들때는 목재를 특수처리하여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기 때문이었다. 페릭스는 그 목재를 벽돌 위에 올려놓았다. "뮤스군 준비는 다 되었으니 한번 해보게."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목재앞에 서서 뇌공력을 손으로 집중시 키기 시작했다. -파직!! 처음엔 스파크가 일더니 방출되는양이 많아지자 손에 농축되면서 어제밤과 같은 노란 광체가 일기 시작했고 동시에 주변에서는 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법이다! 스트렝스 마법인가?" 일정량이 되었다 싶었을때 뮤스는 손을 휘둘러 가볍게 그 목재를 내려 쳤다. -파각! 그러자 목제는 썩은 감나무마냥 힘없이 으스려져 깨져 버렸고, 뮤스의 손에 가격당한 부분은 새카맣게 타버린 흔적이 생겼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중 크라이츠를 제외한 모두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본것이 사실이냐 는 듯이 눈으로 되 물어보 고 있었다.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누가뭐래도 페릭스였으 리라. "뮤스군! 이 어찌된일인가? 내 무도의 길을 걸은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이런 일은 들 어 본적도 없네." 손에서 뇌공력을 풀던 뮤스는 페릭스의 물음에 뭐라 대답할 수 없어 우물 쭈물 거리 고만 있었다. 언제나 처럼 크라이츠가 일을 해결 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페릭스씨 보시다시피 뮤스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신비한 능 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직도 숨어있는 능력들이 많죠. 오늘에서야 이런 능력도 있다는 것을 알았네요. 앞으로 크게 될 녀석이거든요? 호호호!" 켈트는 아무런 꺼리낌 없이 거짓말을 하는 크라이츠가 존경 스럽기만 하였다. [역시 드래곤은 뭐가 달라도 달라. 거짓말 하나도 저렇게 진지 할 수 있다니...] 어영부영한 대답으로 끝맺음하려는 크라이츠의 아쉬운 대답이었지만 더이상 묻는 것 은 실례인줄 아는 후작이었기에 더이상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상 황이 정리 되었다는 것을 느낀 크리스티앙은 어제부터 마음 졸이고 있던 자신의 혼사 문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뮤스님. 어제 말씀 하신..제 일은..." 모두 아는 사실이라지만 역시나 쑥쓰러웠던지 조심스런 목소리 였다. "아. 크리스티앙님 어제는 재료가 없어서 끝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오늘이라도 금 방 제작할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클래프 후작님 수정을 좀 구하고 싶은데 투명할 수록 좋습니다." 클래프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크리스티앙이 안그래도 난리를 피우더군. 뮤스군이 혼사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했다고 말이지. 그런데 방금전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엇을 만들려고 하 는 것 같은데 혹시 마법의 물건이라도?" "헤헤 그런것이 아니라... 지금 설명 드려봐야 그다지 이해가 안갈 테니까 자세한 것 은 제작을 하면서 설명해 드릴께요." "성내에 수정으로 된것이라면 이아이들의 애미가 남긴 수정 접시 밖에 없네. 나와 혼 인을 할 때 장만을 한것인데... 아무래도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이 아이들의 애 미가 짐작 했나 보군. 그것을 쓰도록 하게나." "그리 소중한 것을 써도 되겠어요?" "허허 어차피 그냥 둬봤지 그냥 접시 아니겠는가? 주신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들의 엄 마도 그것을 원할게야." "음... 정 그러시다면 그 접시를 사용하도록 할께요." 하인을 불러 수정 접시를 가져 오도록 한 클래프 후작은 켈트와 뮤스가 하고 있는 작 업을 흥미롭게 지켜 보고있었다. 우선 켈트는 미리 준비 해둔 것은 두개의 나무 원 통을 정성 스럽게 세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혼에 사용할 물건인 만큼 그 겉모습 에도 신경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켈트의 손놀림이 점차 진행 되어감에 두개의 나 무 원통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세겨져 가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역시 켈 트의 손놀림에 매료된 듯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켈트의 세공을 감상하고 있었다. 얼마 의 시간이 흐르자 세공작업을 마쳤는지 켈트의 손움직임이 멈췄고 그제서야 주위 사 람들은 눈을 땔수가 있었다. "허허 드워프족들의 공예솜씨가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정도 일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잘모르겠으나 켈트님 정도면 드워프족에서는 상당한 솜씨인것 같습니다? " 비록 귀족이었지만 켈트에게 존대를 해주는 클래프 후작이었다. 사실 후작 정도 되는 귀족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서의 지위일뿐이지 다른 종족에게 까지 해 당되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켈트에게 존대를 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이었다. "껄껄 감사합니다. 뮤스? 이제 수정이나 세공해 보자고. 이정도면 충분할것 같군." 켈트의 말에 씨익 웃은 뮤스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수정 접시를 켈트에게 넘겨 주 며 말했다. "살펴 보니 두께도 이정도면 딱 좋아요. 우선 접시 하나는 볼록하게 세공해 주세요. 원통의 한쪽 크기에 맞게요. 그리고 반대쪽은 오목하게 해주세요. 이건 반대쪽 원통 의 크기에 맞게요." "흠 그러지." -사각사각... 켈트의 손에서 접시 모양이던 수정은 점차 그 모습이 변해 볼록하고 오목한 렌즈의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잡티 제거 과정이 끝나자 투명 무결한 두개의 둥근 렌즈가 완성되어 있었다. "헤...역시 켈트 아저씨의 솜씨는 천하 제일이예요! 이제 나무 원통에 하나씩 끼우 죠." 머리를 끄덕거리며 아름답게 세공되어 진 나무원통에 세공된 수정을 끼워 넣었고, 두 개의 원통을 조립하여 길이를 조절 할수 있는 하나의 나무 원통을 완성하였다. 완성 된 원통을 뮤스에게 넘겨준 켈트는 허리를 두들기며 바닥에서 일어났고 뮤스는 받은 원통을 눈에 대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지켜만 보고있던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저.. 뮤스님 그게 뭐죠? 그 물건으로 제 혼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까?" 크라이츠의 표정에서 불안함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표정 을 한번 지어보인 뮤스가 말했다. "하하 밤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거예요.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만들면서 설명을 해드리려 했지만 그것보다는 밤이 되어 직접 확인해 보시는게 더 극적지 않겠 습니까? 사모하시는 분을 찾아 가셔서 제가 일러드리는 대로만 해요." "하지만... 라이델 베르크 까지는 상당한 거리입니다. 마차로 하루를 달려야 하는 거 리인데..." 이때 크라이츠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호호 크리스티앙님 걱정 하지 마세요. 저희가 모셔다 드리죠. 전뇌거의 속도면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 듯하네요. 어차피 저희도 라이델베르크를 거쳐야 하니까요. 오늘 출발 해야 하거든요." "전뇌거요? 아... 여러분이 타고오셨다는 그 이상한 기물 말씀 이군요. 그 기물이 그 렇게 빠릅니까? 말보다도요? 저야 하루라도 빠른게 좋습니다." "호호호 그럼 잘됐군요. 그럼 잠시 후 함께 출발 하도록 하지요." "네 알겠습니다. 크라이츠님." 일행은 모든 짐을 챙겨 철전뇌거 앞에 모여 있었다. 올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뮤스 의 짐이 늘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율리아나의 성화에 옷 여러벌을 얻어가는 것이었다. 사양하려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고집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는지, 필요 한것이라 못이기는 척 받은것 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평소와는 다르게 화려한 옷으로 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설레임과 걱정 스런 마음이 교차되고 있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작과 율리아나는 크리스 티앙과 뮤스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서 나와 있었다. 크라이츠가 철전뇌거의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자 다들 타세요. 이제 출발해야지요?" 언제 부터인가 철전뇌거의 운전은 자연스럽게 크라이츠의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창조와 망치의 신인 말스에게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켈트 의 모습이 사뭇 신성해 보였다. 허나 그 말스도 켈트를 도와 주지못하는지 전뇌거에 올라탈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크리스티앙은 설레이는 마음에 서둘러 올라 탔고 뮤스는 이제 초탈했는지 크라이츠의 옆자리에 힘없이 올라탔다. 이때 혼사의 기 로에 선 아들을 바라보며 클래프 후작이 말했다. "크리스티앙. 잘될거게다 너무 심려 말거라..." "네 아버지... 율리아나 다녀오마.." "오빠 힘내!! 꼭 페릴 언니랑 결혼 할 수 있을꺼야!" "그래.. 고맙다." 가족들과의 인사가 끝났음을 확인하고는 뮤스일행은 클래프 후작과 율리아나에게 가 볍게 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라이델베르크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전뇌거를 몰았다. 남아 있는자들만 번개같이 소실점으로 사라져 가는 철전뇌거의 뒷모습을 보며 땀을 흘릴뿐이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29 이곳은 라이델베르크의 외곽지역... 투트가르와 달리 평지대인 이곳 역시 드넓은 초 원이 펼쳐져 있었고, 잘익은 홍시같은 붉은 일몰이 지평선 끝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곳, 그곳에서 뿌연 흙먼지가 머리꼭지만 남은 태양을 희 미하게 가리우고 있었다. "오호호호호! 역시 이렇게 달려야 화끈하지!!! 그동안 참고있는다고 혼났는걸?" 투트가르로 부터 전뇌거를 달려 라이델베르크 외곽까지 이른 뮤스 일행들이었다. 무 려 200여 켈리나 되는 거리를 불과 두시간 반만에 달려 온 크라이츠는 운전 솜씨를 뽐내듯이 일행의 뒤로는 뿌연 먼지를 흩날리고 있었다. 뒤에서 하얗게 질렸지만 먼지 때문에 누렇게 보이기만 하는 크리스티앙이 입만 뻥긋 거릴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체 의자에서 얼어있을뿐이었다. 후에 상당량의 흙을 입에서 퍼내야 할듯 싶었다. 크라이츠의 곁에서 뮤스가 말했다. "누..누님... 이제거의 다온듯한데 속도좀 줄이는게 어때요?" "그건 그렇구나. 그럼 천천히 가지뭐. 에휴... 인간으로 폴리모프 했을때는 좀 얌전 히 지낼려고 했는데, 전뇌거만 타면 본성이 나오니 이거 큰일인걸?" 크라이츠의 중얼거림이 그리 작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혼백이 이미 몸에서 떠난 크리 스티앙은 그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였다. 크리스티앙이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있 던 켈트가 말했다. "에고에고... 크라이츠님의 운전은 언제나 적응이 안되는군요. 그건 그렇고 이제 조 금만 더가면 라이델베르크 시내로 들어 가겠는걸요?" "네! 앞으로 삼십여분만 달리면 되니... 어둡기 전에 알맞게 도착하겠군요. 시내로 들어간다음에 숙소를 정하고 크리스티앙님의 일을 해결하도록 하죠?" "그게 좋겠군요. 아참 뮤스. 나무를 손으로 부순건 어떻게 된일이냐? 아까부터 물어 보고싶었지만 참느라고 혼났다. 크리스티앙이 제정신이 아니니 이야기해도 될꺼같은 데?" 뮤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 일요? 제가 방으로 돌아온 후 심심해서 뇌공력을 근육에 집중시켰더니 몸이 변화 하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호신무예가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어서 호기심으로 그 무예를 익히다 보니..그만." "흠... 그렇다면 이건 상당한 수확이야. 아무래도 여행을 할때 몸을 지킬 수 없다면 무리거든? 크라이츠님께선 마법을 쓰시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니 너와 나밖에 없는게 되니까 말이지. 그럼 영락없이 레이디를 수행하는 두명의 여행자가 되는건가? 이 런... 음유시인들의 영원한 레파토리군... 달갑지 않은걸?" "전 그리 뛰어난 실력이 아니라구요! 아시다시피 어제 밤에 처음 시작한 걸요." "후훗 차차 나아지겠지. 저기 건물들이 보이는군." 켈트의 말에 뮤스는 정면을 응시하니 차츰 눈에 건물들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라이델베르크는 린강의 지류로써 인구 약 14만의 관광의 도시이자 학문의 도시로써 유명했는데, 한도시에 두개의 대학이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래서 인지 라이델 베르크는 언제나 유학생들로 북적였고, 두개의 대학 주변에 군소의 아카데미들이 들 어서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국경과는 멀리떨어져 있는 위치적 특성으로 인 하여 시내의 치안유지를 위한 병력들 이외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라이델베르크의 시내로 진입한 뮤스일행은 철전뇌거 때문인지 뭇 사람들의 뜨거운 시 선의 환영을 받으며 시내를 달리고있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의관을 다시 정 비한 크리스티앙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 있었으나 눈빛은 아무런 일이 있 었을 때의 그것이었다. 이미 여러번 와본적이 있는 듯이 크라이츠는 유유자적하게 전 뇌거를 몰고 있었다. 이윽고 철전뇌거가 멈추었는데, 철전뇌거가 멈추어진 곳은 '쉐 퍼드의 정' 이라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여관의 앞이었다. 크라이츠가 운전석을 정리하 며 말했다. "자! 짐을 가지고 내리죠... 제가 가본곳 중에 라이델베르크에선 여기가 제일 괜찮았 어요." 뮤스가 말했다. "전뇌거는 이대로 두어도 될까요?" "너는 똑똑한건지 둔한건지 도무지 알 수 없구나. 누가 전뇌거를 가지고 가겠니? 겉 으로 봐선 말도 없는 마차인데. 안그래?" "헤헤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여관은 모두 4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식당과 카운터로 이용 되었고, 나머지 층은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관으로 들어가자 저녁식사 시간이어서 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도 여러가지 부류였는데, 신관들의 모습과, 떠돌이 용병의 모습, 아카데미의 학생들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일행은 내부를 정신없 이 구경하고 있는 뮤스를 지나쳐 카운터로 걸어갔고, 일행들이 스쳐 지나감을 느낀 후에야 뒤따라 걸어가는 뮤스였다. 카운터에서 일하는 친절해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 니가 뮤스일행에게 물었다. "어서 오세요. '쉐퍼드의 정' 입니다. 무엇을 원하시죠 손님?" 모든 제정을 담당하고 있는 크라이츠가 카운터의 아줌마에게 대답했다. "여기서 가장 큰방 두개만 주시겠어요? 설마 이미 차버린건 아니겠죠?" "호호 물론아니죠 손님. 제일 큰방두개면 하룻밤에 2겔피 되겠습니다. 식사는 식당에 서 하시면 되고, 식사 세끼는 숙박비에 포함됩니다. 401호와 402호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고맙습니다. 올라가서 짐이나 풀고와서 식사를 하든지 하죠. 올라가자꾸나 뮤스. " "아네..." 뮤스, 켈트, 크리스티앙 세명이 한방을 쓰기로 했고, 크라이츠는 레이디(?) 였기에 혼자 방을 쓰기로했다. 방은 가격의 가치를 보여주는 듯이 넓고 잘 꾸며져 있었는데 넓은 2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의 위에는 입가심용의 과일이 놓여있었다. 크 리스티앙은 저녁이후로는 라이델베르크 영주의 성에서 묶기때문에 2인용 침대밖에 없 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방에 짐을 풀어 놓은 뮤스와 켈트, 크리스티앙이 식당으 로 내려오자 먼저 내려와서 기다리는지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크라이츠가 보였다. "어서들 앉으세요. 많이 시장하군요?" 음식들이 서빙되자 일행들은 식사를 시작했지만 크리스티앙은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인지 먹는둥 마는둥하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티앙이 안스러워 보였는지 뮤스가 위로 의 말을 전했다. "크리스티앙님 잘될거예요! 심려 말고 식사나 맛있게 해요. 그래야 건강한 모습을 페릴낭자께 보이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뮤스님..." 뮤스의 말이 약간이나마 위로가 되었는지 조금씩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즐 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맛있게 식사를 마친 일행은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크리스티앙의 일에 대한 상의를 하고있었다. 말캉말캉한 푸딩이 마치 묵 과 같다고 느끼는 뮤스였지만 이미 세계의 큰 차이에 익숙해져서인지 그것에 생각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뮤스의 설명을 들은 크리스티앙은 기대반 걱정반으로 뮤스를 향 해 물었다. "과연 그녀가 이렇게해서 승락을 할까요? 이 '천체 만리경' 이 대단하고 신기한 물건 이기는 하지만 과연..." 허나 대답은 뮤스가 아닌 크라이츠의 입을 통해 나왔다. "만약 페릴이라는 아가씨가 뭘 아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어쨌든 우리 는 크리스티앙님께 모든 준비를 해드렸으니 나머지는 크리스티앙님이 얼마나 분위기 있고 멋진 말로 페릴아가씨를 설득하느냐죠." 크라이츠의 말에 수긍하는지 크리스티앙은 각오서린 눈빛만 빛낼 뿐이었다. ######################## 라이델베르크라는 지명에서 베르크는 언덕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래서인지 높은 언덕 에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일반 성만큼 거대한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이델베르크 의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최상의 자리에 세워진 이 아름답고, 거대한 저 택의 소유자는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저택의 한켠에 있는 화원.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작은 두개의 벤치가 산책로를 따라 놓여있었 다. 이때 화원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네명의 인영이 있었는데, 한번 거부 당한 청혼을 다시 한다는것이 부끄러워 몰래 저택으로 침입하게 된 뮤스일행과 크리 스티앙이었다. 꽃들 뒤에 숨어있는 뮤스가 고개를 살며시 내밀며 말했다. "여기를 지나는건 확실 하겠죠?" "네. 확실합니다. 그녀가 십세를 넘긴 이후로 하루라도 산책을 거른 날이 없죠." "그럼 천체만리경은요?" 뮤스의 질문에 자신의 가슴어림을 만져 보던 크리스티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뒤 에서 함께 몸을 숙이고 있던 크라이츠도 한마디 거들었다. "크리스티앙님 지금부터 저희는 도와 드릴 수 없겠네요. 잘하실거예요 힘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뒤에서 서있던 켈트역시 자신도 머라 한마디 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별달리 생각이 안나는지 그냥 멀뚱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키가 작은 드워프였기 때문에 허리를 굽 힐 필요가 없었던 켈트는 상대적 편안한 자세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파수를 보고 있었다. "아! 저기 누군가가 오는군요!" 켈트의 말과 동시에 일행들이 화단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여성의 모습이 보 였다. 진한 갈색의 머리에 하얀 얼굴, 그런 모습과 어울리는 간편한 드레스가 그녀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고있었다. 비록 경국지색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미녀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녀를 발견하자 뮤스일행은 크리스티앙의 등을 떠밀기 시작 했다. 물론 밀려서 나가는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 이지 않음을 느끼자 등을 떠미는 뮤스일행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결국 크리스티앙은 밝은 곳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의 모습이 페릴의 시야에 들어왔 는지 그녀는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혹시 크리스티앙님 아니신가요? 이시간에 어떻게 이곳에..." 갈색으로 빛나는 페릴의 눈을 바라보자 하늘이 노래지는 크리스티앙이었으나, 여기서 굽히면 평생 후회 속에서 살것이라는 굳은 심정으로 무겁게 굳어있는 입을 애써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레이디. 이런 늦은 밤에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용서하 세요." 크리스티앙의 예의바른 인사에 놀람이 덜어졌는지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띄웠다. "용서랄것이 있겠나요. 크리스티앙님. 이런 시간에 저를 찾아오신걸로 봐선 뭔가 하 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거같은데..." 잠시 머뭇거리며 뮤스 일행이 있는곳으로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뮤스와 크라이츠가 손짓을 하며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 더이상 물러 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닿고 두눈을 꾹감으며 말했다. "페릴양 저와 혼인해 주십시요! 말씀 드렸다시피 처음본 그순간 당신의 아름다운 자 태가 저의 미천한 가슴으로 들어와 떠나질 않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제 청혼을 받 아 주십시요!" 화단 뒤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켈트가 두 남녀를 보며 한마디했다. "헐..저친구 느끼한 말을 잘도 하는군. 우리가 도와줄 필요도 없었던거 아냐?" 뮤스역시 동감을 하는지 켈트의 말에 찬성표를 던졌다. "제가 살던 조선에서 장부가 아녀자에게 저런말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할일이죠. 기 침 두번만 하면 혼인을 하니..." "엥 정말 기침 두번만 하면 혼인을 한단 말이냐?" "말이 그렇다는거죠! 조용히 하고 계속 보기나 하죠." 그러나 둘의 궁시렁거림에 신경도 쓰지 않고 두 남녀의 로멘틱한 모습에 반한듯 눈을 때지 못하고 있는 크라이츠였다. 크라이츠의 귀에 페릴의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티앙님... 크리스티앙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세요. 모든 것이 완벽하지요. 하지만... 저는... 이미 말씀 드린대로 저하늘의 별을 사랑하는사람으로 부터 꼭 받 고 싶답니다. 물론 허황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의 결심이었답니 다. 만약 이렇게 혼자 늙어간다 하더라도... 전 저의 결심을 져버리고 싶진 않습니 다. 용서하세요." 이때다 싶었는지 크리스티앙이 눈을 빛냈다. "페릴양 만약 제가 저하늘의 별을 드린다면 저의 청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크리스티앙의 말을 들은 페릴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모습이 잠시 떠올 랐지만 일말의 기대 역시 함께 떠올랐다. "사실전 세상의 남자들을 믿지 못한답니다. 저희 아버님만 봐도 그렇지요. 언제나 일 에만 바쁘신 모습을 볼때마다 홀로 외로워 하시며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가 불쌍하게 느껴졌죠.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이고, 경쟁심 많고, 명예에만 한 평생 메달려 살죠. 제가바라는건 그런게 아니예요. 명예, 권력, 부귀 보다 제게 작은 사랑을 베풀수 있는 분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하늘의 별을 저에게 줄수 있을정도로 제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저는 기쁜마음으로 결혼하겠어요. 만약 그런분이 있 다면요..." "제가 저하늘의 별을 페릴양께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옆에두고 바라보실수 있도 록 말입니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페릴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품고 있 던 '천체만리경'을 꺼내어 그녀에거 건냈다. 이 정체모를 둥근 원통을 건네받은 페 릴은 의아한 표정으로 크리스티앙과 '천제 만리경'을 번갈아 바라 보았다. 크리스티 앙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준비 했던말을 읊기 시작했다. "그것은 '천체만리경' 이라는 것이죠. 제가 페릴양을 위해 준비한것은 오직 그것뿐입 니다. 그 작은 구멍을 통해서 저하늘의 별을 바라보십시요." 고개를 살짝 갸웃 거린 페릴은 크리스티앙의 설명에따라 '천체만리경'의 한쪽에 눈을 대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십개의 확대된 커다란 행성들이 그녀 의 눈앞에서 자테를 뽐내고있었다. 자신의 눈을 통해 보던 별들과는 사뭇다른 모습으 로 각진 모습도 아니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알록달록한 색의 구슬들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 아름다움에 눈을때지 못하던 페릴은 감탄성만 조금씩 내뱉을 뿐이었다. 그녀의 놀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이 조용히 말했다. "페릴양... 저는 저 하늘의 별들을 페릴양에게 가져다 드릴수는 없습니다. 제능력으 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페릴양이 들고계신 그 '천체만리경' 처럼 저를 통해 세상을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두 같아 보이는 별들이 사실상 모두 다른것 처럼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같지만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 최소한 저만은 다 르다는 사실을요..." 크리스티앙의 말이 끝나자 페릴은 황홀한 표정으로 '첸체만리경' 에서 천천히 눈을 떼며 이내 크리스티앙을 향해 웃음 지으며 말했다. "크리스티앙님... 크리스티앙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귀한 것까지 준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제서야 크리스티앙은 긴장이 풀렸는지 페릴의 앞에서 볼성 사납게 주저 앉았고, 페 릴은 놀라며 그를 부축하였다. "어머나 크리스티앙님 몸이 안좋으신가요?" 그녀의 놀람에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얼굴에서 나올수 있는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래절래흔들었다. "고맙습니다 페릴양. 평생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이제 일이 다 해결 됐다고 생각한 뮤스가 아직도 두 연인을 감상하고 있는 크라이츠 와 켈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우린 숙소로 돌아가죠. 저 두분 오붓한 시간 가지게 말이예요. 이렇게 두눈 시 퍼렇게 뜨고 지켜 보고있으면 크리스티앙님이 영 불편할껄요." 이렇게 까지 말했지만 크라이츠와 켈트는 눈을 때지 못하고 무엇을 기대하는지 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봐요! 두분다 그나이 먹어가지고 왜이래요? 16살 먹은 나만도 못하게 스리! 빨리 가자구요!" 소리를 빽하고 지른 뮤스는 크라이츠와 켈트의 뒷덜미를 잡고 전뇌거 쪽으로 끌기 시 작했다. 둘의 반발도 꽤나 거셌지만 어제 알게된 뇌공력을 운용하였기에 그리 어렵지 는 않았다. "나참 이 아까운 뇌공력을 이런데다가 쓰다니... 두분다 철좀 드시라구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함소리에 어리둥절해진 크리스티앙과 페릴이 뮤스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둥 거리는 크라이츠와 켈트, 그들을 끌고가는 뮤스가 눈에 들어왔다. 뮤스는 크리스티앙에게 한번 손을 흔들어준후 손에 들려있는 두명의 짐짝 들을 전뇌거에 태우고 빠르게 숙소를 향해 사라졌다. 한쌍의 청춘이 맺어져 도이첸제 국의 인구 증가에 기반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0 "룰루... 루루룰루..." 켈트의 입에서 흥겨운 흥얼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숙소에 돌아온 이후로부터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도끼를 손질하고 있었다. 침대에 서 팔베게를 하고 천정을 주시하고 있던 뮤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켈트 아저씨... 혹시 말이예요. 공학원을 열어보면 어떨까요?" 뜬금없는 뮤스의 말에 도끼를 닦던 천을 멈추며 뮤스를 바라보았다. "공학원이라니? 그게 뭐냐 대장간 같은건가?" 켈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을 나름대로 지어보이고 있었다. "켈트아저씨와 크라이츠누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거예요. 물론 두분 께 염치 없는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목표도 없이 여행만 하는 것보 다는 그쪽이 더 괜찮을 듯 한데요." 뮤스의 말이 끝나자 켈트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혼자 씰룩씰룩 웃기시작했다. "껄껄껄. 뮤스 이녀석 정말 변하긴 많이 변했군.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야... 철이 들었는지 아님 똑똑해 져서 이런건지... 하지만 좋은쪽으로 변하는것이니 나쁘 지는 않군. 나는 상관없다 어차피 갈곳도 없고 너와 함께 여행을 하면 재미있을것 같 아서 따라 나온거니까. 대신 어영부영한 일을 할려고 하거든 일찌감치 포기하거라. 알겠냐?" 켈트의 동의에 벌떡 일어나 켈트를 바라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켈트는 손에든 수건을 뮤스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웃지말고 크라이츠님께 말씀 드리러 가야하지 않겠냐?" "헤헤 네!" 얼굴에 걸쳐져있는 수건을 때어내며 켈트와 함께 크라이츠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네 누구세요?" "저 켈트와 뮤스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뮤스와 켈트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크라이츠는 침대에 앉아서 언제 챙겨왔는지 모 를 두꺼운 책을 보고 있었다. "아직 안주무셨네요? 안그래도 무료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켈트님 뮤스가 드릴말씀이 있다고 해서말입니다. 끌끌. 뮤스 어서 말씀 드리거라." "어머 뮤스가? 무슨? 설마 철전뇌거를 내가 운전하지 말란 말은 아니겠지? 그런거라 면 사양하겠어." 사뭇 진지하게 말을 던진 크라이츠는 뮤스가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모습 으로 바라보고있었다. 뮤스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 쭈물 하자 켈트가 옆구리를 쑤셨다. "저 크라이츠 누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공학원을 열고싶어요." "공학원? 그것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말해보렴." 뮤스가 무엇을 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자 궁금해진 크라이츠는 자세를 바로했고, 그모 습을 본 뮤스는 용기를 조금이나마 얻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갈 기일이 얼마나 걸릴줄도 모르니 여기서라도 공학자의 꿈을 이 루어 보고 싶거든요. 혹 제가 유명해 지기라도 한다면 조선에서 오는 분들과 만나기 도 수월 하지 않을까요?" "음... 그말을 하고 싶었구나? 나야 상관없단다. 어차피 유희를 하더라도 무작정 여 행보다는 그것도 좋을듯 싶구나. 공학원이라. 그럼 구체적으로 뭘하는 곳이지?" 크라이츠가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뮤스는 크게 희색을 띄었다. "예. 여러가지 기구들을 제공하여 좀더 실생활을 편하게 하는 곳예요. 새로운 물건들 을 개발 할 수도 있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술적인 의뢰를 받을 수도 있죠. 쉽게 말 해서 복잡한 대장간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뮤스의 말에 호기심이 가는지 여느때와는 다르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크라이 츠가 말했다. "음. 그럼 이윤이 있어야 운영을 할 수 있을건데 그점은 어떻게 할꺼지?" "그점도 생각해 놓은 바가 있어요. 전뇌거를 대량 생산해서 판매를 한다면?" "전뇌거?" 옆에있던 켈트가 놀라며 되물었다. 그러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이곳의 양반들에게 전뇌거를 대량 생산해서 파는 거예요. 전뇌거는 말을 돌볼 필요도 없고, 속도 역시 마차보다는 월등하기때문에 충분히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있 을것 같지 않아요?" 켈트가 크게 박수를 쳤다 "오호라! 그렇겠군. 그럼 돈은 엄청나게 벌겠어. 아니 번다는 말로는 부족하겠고 긁 어 모으겠군! 좋아좋아!" "그래. 그러면 되겠군. 수정의 가격이야 그리 비싼편이 아니니 마나구를 만드는데도 무리가 없겠어. 게다가 뮤스 너의 몸에 저장되어있는 마나의 양이면... 그리고 천체 만리경 역시 군사용으로 팔아도 되고. 앞으로 또 뭐가 만들어 질지도 모르니... 좋아 해보자꾸나 뮤스." 유희중이라 해도 재물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크라이츠 였다. 한번 드래곤은 영원한 드래곤이라는 말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것이야 어떻든 간에 공학원을 열수 있다는 점이 뮤스를 뛸듯이 기쁘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크라이츠 누님 그리고 켈트 아저씨!" "그건 그렇고 공학원은 어디에서 열지? 내 생각에는 이곳 라이델베르크도 좋을 듯 싶 구나. 대부분이 여행객들과 유학생들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유명해 진다면 여행객들을 통해서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갈거야." "그렇겠군요. 그게 좋겠어요. 이곳에서 좋은 곳을 빌려서 시작하죠." 크라이츠는 뮤스의 말에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손가락 하나를 펴고 좌우로 흔들었 다. "뮤스야 빌린다니.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 못하겠구나. 땅을 사서 새로 짓는게 어떻 겠니? 아무래도 대규모 작업을 하려면 어지간한 크기론 안될꺼야. 그러니 그건 나에 게 맡기거라"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뮤스는 흔쾌히 동의 했다. "네 누님 말씀대로 하죠. 그럼 누님이 재무 담당을 해주세요. 공학원의 모든 지출과 수입을 맡는 일이죠!" "호호 걱정말거라! 내가 수천년 살면서 해온게 돈에 관련한거 아니니? 호호호호! 운 좋으면 유희동안 던젼에 있는 보물을 능가하는 금을 모으겠구나." 크라이츠가 망상에 빠져있을때 뮤스는 켈트를 바라보며 나머지 할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켈트 아저씨는 제작을 담당해주세요. 아무래도 아저씨 혼자로는 힘들듯하니 아저씨 친구분들과 함께 하시는게 어때요? 주변에 취업난으로 고생하는 드워프들 없 어요? 이번기회에 취업을 시켜버리라구요!" "이녀석아 드워프에게 취업이 어디있냐? 그럼 내 친구들 몇명에게 연락을 해보지. 우 리 드워프 들에게 이런것쯤이야 일이 아니라 취미활동이니 친구들 모으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정말 재미있겠는걸? 다들 좋아할꺼야." "그럼 대충 된거 같군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뮤스의 물음에 크라이츠와 켈트는 마음이 맞았는지 동시에 대답했다. "내일 당장!" ############################## 도이첸 제국력 1224년 10월 2일의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건물들을 뒤덮고 있 던 어두움을 밀어내며 아침햇살이 그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고. 그와함께 '쉐퍼드의 정' 402호실의 창문으로 흘러 나오고 있는 불빛은 점차 자신의 존재가치를 잃어 가 고있었다. 밤새 공학원의 설립 준비로 인하여 눈을 붙이지못한 뮤스였지만 얼굴에는 피곤한 모습보다는 즐거운 모습이 더 큰 비중을 차지 하고있었다. 그의 앞에는 수많 은 수치들이 기입되어 있는 커다란 설계도와 거의 한 책한권 분량의 종이뭉치들이 놓 여있었다. 전날밤 크라이츠의 마법으로 제국의 문자를 읽고 쓸수 있게된 뮤스는 당장 공학원 준비에 필요한 작업을 시작했고, 하룻밤의 달콤한 잠과 바꾼 결과물이 바로 이 것들 이었다. 이제 어느정도 됐다고 느껴졌는지 누가 보기에도 시원스럽게 기지개 를 펴는 뮤스였다. "으아.... 시원하다. 이제 대강 준비 된거같아. 이런 벌써 날이 밝았군. 하긴 지금까 지 어영부영한 세월들을 따라 가려면 이정도는 해야겠지." 자신이 완성한 설계도를 다시한번 확인한 뮤스는 아침공기나 마셔볼겸 여관의 밖으로 나왔다. 이미 완연한 가을인지 공기는 나름대로 차가움을 뽐내고 있었고, 뮤스의 폐 부는 가을 공기에 맞장구라도 쳐주는지 상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켈트와 크라이츠가 깰때까지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뮤스는 발걸음이 가는 대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록 아침이었지만 상점들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문을 열고 있었고, 빵집에서 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을 유혹이라도 하려는지 구수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 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바로 학생들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업이 있는지 옆구리에는 두꺼운 책을 끼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오가고 있었다. [음... 서당 다닐때가 생각나는군. 매일 늦어서 훈장님께 혼줄이 나곤했었지...] 상념에 빠져서 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을때 뮤스는 등쪽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정신을 다시 챙겨야만 했다. "꺄악!" "억!" 라이델베르크의 어느 대학교나 아카데미 학생인듯한 남색 복장의 소녀였다. 길 한가 운데서 정신을 빼고서 딴생각을 하던 뮤스와 부딪친모양이었는데, 주저 앉은 자리에 서 아직 일어 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당황한 뮤스는 빨리 그 소녀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나..낭자 괜찮아요? 이런 제가 실례를 했네요. 헤헤... 어찌나 정신머리가 없던지." 적지 않게 당황하는 뮤스가 어찌할 줄 몰라할때 그 소녀는 빤히 뮤스의 얼굴을 바라 보며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아니예요. 너무 잘생... 내가 왜이러지? 제가 워낙 덤벙거리는 성격이라서요. 아참! 내정신좀봐... 수업시간에 늦었는데! 아악!" 얼굴을 붉히며 바삐 몸을 일으키려던 소녀는 발목을 다쳤는지 발목부위를 잡고서 아 픔을 호소했다. "이런! 발목을 다쳤나 보네요. 이를 어째?" "휴... 어쩔수 없죠. 오늘은 하루 지각할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동안 출석이 좋아서 다행이네요. 하루정도는 별 상관없을꺼예요." 뮤스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참 저는 카타리나라고해요. 햄브리겐 대학에 다니고 있죠. 그쪽은 여행객 이신가 요?" 자신을 카타리나라고 소개한 소녀의 물음에 이제서야 조금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적였 다. "저는 뮤스라고 해요. 어제까지는 여행객이었지만 오늘부터는 이곳에 살기로 했으니 이제 여행객이 아니네요." "그렇군요. 유학중이신가요?" 카타리나는 꽤나 활달한 성격인지 처음 보는 남자임에도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할 수록 이 세계에 대한 어색함을 숨기기가 힘들다는 것 을 깨닳은 뮤스는 화재를 돌렸다. "그보다 이대로 늦으면 곤란할 텐데... 제가 학교까지 바래다 드릴께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 아래에서 학교 마차를 타야하는데 이미 놓친듯 하네요. 혹시 마 차라도 있으세요?" "마차는 없지만 그보다 좋은 것은 있죠. 헤헤..." "더 좋은거요?"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1 라이델베르크의 북쪽에 위치한 햄브리겐 국립대학의 교문. 학생들에게 위엄이라도 내 세우려는지 한손은 두꺼운 책을들고, 또다른 한손에 깃펜을 쥐고서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올린 라이델베르크의 대문호 비센 라비디엔의 동상이 학생들을 외면한체 먼 산만 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동상의 그늘 아래로 수많은 학생들이 분주하 게 오가고 있었는데, 마차를 타고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 있는가하면 뛰어 가는 학생 도 있었고, 귀족인듯 고상하게 보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서민처럼 수수한 학생들 도 보였다. 라이델베르크는 학문의 도시답게 서민층부터 귀족층까지 평등한 학습의 기회를 부여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점이 제국의 각지에서 라이델베르크까지 유학을 오는 가장 큰 이유였다. 넓은 인제 등용 덕분인지 수많은 제국의 요인들이 이곳 햄브 리겐 대학의 졸업생이었고, 뛰어난 문학가들을 배출했기에 명실상부한 일류대학으로 인정 받고 있었다. 활력으로 넘치는 오전시간 활력을 주체할수 없는지 비센 라비디엔 의 동상으로 돌진해오는 물체가 있었으니... -부우우우우웅! "위험해요! 물러서세요!!" 학교에 지각할 위기에 처해있는 카타리나와 그녀를 배달하기 위해 전뇌거를 운전하고 있는 뮤스였다. 카타리나의 안내를 들으며 전뇌거를 몰고 학교 정문을 지나 빠른 속 도로 학교를 내달렸다. 대학의 캠퍼스는 상당한 크기였는데 수십개의 건물들이 즐비 해있는 것이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 역사가 오래된듯 가로수들의 크기는 상당했고, 건물의 벽에서 벽을 따뜻하게 뒤덮고 있는 덩쿨들 역시 매우 인상 적이었다. 건물 다섯동을 지나자 카타리나의 교실이 있는 건물앞에 도착 할 수 있었 다. 전뇌거가 지나온 거리는 넋이 나간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는데,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한듯 이 신기한 마차에 한눈이 팔려있었다. 뮤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카 타리나가 말했다. "휴우! 이거 대단하네요! 이런걸 어디서 장만하셨죠? 귀족들은 신기한것들을 많이 가 지고 있다지만 이런것까지 있으리라고는..." "헤헤. 저는 귀족이 아니예요. 이 철전뇌거는 저와 함께 계시는 아저씨가 만든거죠." "만든거라고요? 대단하신분 이신가봐요! 저희 페이슨교수님이 이걸 보신다면 대단히 놀라시겠네요." "교수님요?" "교수님이란 말을 모르세요? 선생님 말예요." "아...그렇군요. 제가 산속에서만 살아서 세상일에 좀 어둡거든요." 카타리나의 지적이 어색하게나마 변명을 하는 뮤스였다. "호호. 아무튼 뮤스님은 좀 신비하네요. 이런 신기한 물건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외 모도 제국의 분이 아니신것 같아요." "아...아네... 수업이 시작할 시간 아니예요?" "호호. 이렇게 빠르게 왔는데 어떻게 지각을 하겠어요? 오히려 먼저왔는걸요?" 뮤스는 질문을 다른곳으로 유도하려 했지만 보기좋게 좌절되어 버렸다. "그건 그렇고 뭐하시는 분이시죠? 학생은 아니라고 하셨고... 모험가? 아냐. 모험가 라 하기에는 우락부락하지도 않고..." 카타리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돌연 씨익 웃었다. "공학자예요." 공학자란 말이 생소한 카타리나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 다. "공학자가 뭐죠? 그런말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혹시 신종 직업인가요? 공학이라고 그 러면 기계에 관련된건가요? 아님 연금술? 어떤거죠?" "휴우 카타리나 낭자의 친구들은 정말 피곤하겠군요. 그냥 신종 직업이라고 해두죠. 카타리나양은 여기서 뭘 배워요?"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물었군요. 제 전공은 연금술이예요. 엄청 머 리아픈 전공이죠. 혹시 들어보셨어요? 연금술이라고?" "아..아뇨. 금시초문인데요." "금시초문은 뭐죠? 에코! 이해하세요 제가 쓸데 없는데 호기심이 많아서요. 연금술은 여러가지 화학물질을 다루는 학문이에요. 금속의 성분을 바꾼다거나 조합해서 다른 금속을 만드는 거죠." 뮤스는 카타리나의 말에 큰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흠...조선에서 말하는 화공학과 같은 것이겠군. 그렇다면 공학원에서 필요한 재료들 을 여기에서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카타리나 낭...아니 아가씨. 실례가 아니라면 수업에 함께 참여해도 되나요?" "어디보자... 상관없을 꺼예요. 학생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해도 아무도 모르거든요. 꽤나 인기가 좋은 과목이라서... 뮤스님도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보죠?" "헤헤. 굉장히 그런편이죠." 마침 생각 난듯 카타리나가 건물의 가낭 높은 곳에 붙어있는 마나 시계를 올려다 봤 다. "어마! 벌써 시간이 다됐군요. 함께 들어가요!" 뮤스와 카타리나가 건물로 들어가자 어디서 숨어있던 사람들인지 여기저기서 나타나 전뇌거를 이곳저곳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기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었으리라... 건물로 들어가자 벽에는 여러가지의 금속그림들과 설명이 덧붙여져 있는 벽자가 걸려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뮤스는 위에서 부터 자세히 읽어 내 려가기 시작했다. [음...이건 금광석의 그림인데? 이곳에선 다이아몬드라고 하는군. 옆에 있는건 금? 골드라... 흠 이 세계에서 공학자 노릇을 하려면 필히 외워둬야 할것들 이군.] 이렇게 생각한 뮤스는 신경써서 처음부터 읽어 보기시작했다. 벽자의 앞에서 정신을 빼앗긴 뮤스를 본 카타리나는 서둘러 불렀다. "뮤스님 어서오세요! 늦을지도 몰라요!" "아! 네!" 서둘러 읽긴 했지만 공학뇌동심결의 효용이었는지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할 수가 있었 는데, 기억하고자 했던것이 명칭뿐이었기에 더욱 수월하기도 했다. 카타리나의 제촉 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일층에 위치한 대형 강의실이었다. 약 300석정도의 원형 강의 실 좌석은 대부분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원형강의실의 중심에는 교수로 보이는 사 람이 강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아! 저쪽에 제 친구들이 있네요. 저쪽으로 가서 앉죠?" 카타리나가 손으로 가리킨곳에는 두명의 여학생과 한명의 남학생이 앉아있었다. 조용 하게 보이는 옅은 갈색머리의 여학생과 카타리나 만큼이나 발랄하게 보이는 붉은 머 리의 여학생 그리고, 시력이 나쁜지 인상을 쓰며 책을 보고있는 짧은 검정머리의 남 학생이었다. 카타리나가 다가가자 그녀의 다가옴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이었다. 그리곤 뒤에있는 뮤스를 발견하고는 사뭇 놀라 는 표정을 지었다. "아라! 카타리나! 뒤에 있는 미남은 혹시 오늘 아침 화제의 주인공 아니니? 그옆에 있던 여학생이 너였어?" "뭐라구? 무슨말이야? 화제의 주인공이라니?" 카타리나의 되물음에 이번엔 뒤에 있던 남학생이 말했다. "넌 모르고 있었구나. 아까부터 떠들썩했다고! 말없는 마차를 타고다니는 '마법사와 그의 애인' 이라고! 그런데 그 애인이 너였다니...쿠쿡.." "뭐라구? 어이가 없네." 친구들의 말에 뒤돌아 뮤스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자신과 카타리 나를 연인사이로 소문이 났다는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던 뮤스는 카타리나의 옆에 자 리를 잡고 앉았다. "친구들 소개 시켜 드릴께요. 여기 얼굴 하얀 수줍음쟁이는 세이즈 훈트밀, 이 개구 쟁이는 폴린 파이시언, 그리고 저쪽에 공부벌레는 히안 크라리엔 이라고하죠. 얘들 아! 인사하렴. 이쪽은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만난 뮤스님이셔." 카타리나의 소개에 뮤스와 친구들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아참 뮤스님 그건 그렇고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보아하니 19살은 되어 보이시네요. 폴린과 히안, 그리고 전 19살이고 이쪽 세이즈는 18살이죠. 한살차이가 나지만 그냥 친구로 지내요." "아... 저..저도 19살 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생각없이 대답하자 카타리나는 마침 잘됐다는 듯이 박수를 치 며 좋아했다. "호호호! 잘됐네요. 그럼 우리 말놔요. 그래도 되죠?" "저..저야 상관없는데요." "그래! 좋아! 지금부터 우리 친구하자! 응? 너희들도 좋지?" 옆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자 친구들 역시 동의하는지 뮤스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이때 공부벌레라고 소개되어진 히안이 정면을 보며 말 했다. "야...교수님이 수업 시작하신다." "흥. 누가 공부벌레 아니랄까봐. 공부한다고 조용히 하라는 거야?" 히안의 말에 뭐가 못마땅한지 폴린은 뚱한 목소리로 그의 말에 응하자 세이즈가 둘을 말리려는 둣이 중재를 하며 말했다. "히안의 말이 맞아 폴린. 수업시간이니까 조용히 해야지... 그만 싸우고 수업듣자." "세이즈까지 그렇게 말한다면야..." 수많은 학생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강의실의 중심에 서있던 교수는 책을 펴며 강의를 시작했다. 멀어서인지 말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이 조용했기 때문에 못 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은 14장 광물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연금술이 발달하게된 원인을 여러분 들은 다들 아시겠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대의 연금술 사들이 연금술에 매달린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누구도 금을 만들어 낼수는 없 었습니다. 아직까지 금을 이루는 성분의 조합이 무엇인지 알아 낸사람이 없기 때문이 라는 것 또한 다들 아실겁니다." 강의를 듣던 뮤스는 이 세계의 화공학 수준이 크게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 었는데, 사실 이 세계의 화공학 수준이 떨어잔더가 보다는 뮤스가 알고 있는 수준이 너무 앞선것이라 볼 수 있었다. [특정 금속을 성분의 조합으로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아직 원소의 발견이 이 루어 지지않았단 말야?] 뮤스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강의는 계속 되었다. "그 이후 연금술사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손을 대기 시작한 분야가 바로 보석 분야입니다. 자세한 것은 보석학 역사에 대한 페이지를 참고하시고... 오늘 다룰 내 용은 과연 보석또한 금속과같이 그 성분의 조합으로 특성을 바꿀수 있느냐에 대한 것 입니다. 당대의 이름 높은 연금술사들이 보석분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인공보석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이루어 지고있지요. 이 부분에 대 해서 토론을 해볼까합니다. 답이 있는것이 아니니 자신의 생각을 자유스럽게 발표 해 주세요. 발표에 따라 점수가 주어지겠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 강의실 곳곳에서 웅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와 그의 친구들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폴린이 비아냥 거리면서 히안에게 말했다. "이봐 히안. 넌 어떻게 생각해? 너가 보는 책에도 저런건 안나오냐?" "폴린. 너 수업시간에 뭐들었냐. 지금 연금술자들 사이에서 논의 되고있는거래 잖아. 그런게 책에 나올리가 있냐. 바보 아냐?" "뭐라고?" 둘의 대결 모드에 들어가는 양상이 벌어지자 또한번 세이즈가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달래는데 남 모를 재능을 가진듯했다. "또 싸우네... 이번에 발표를 해야 우리조의 점수가 올라간단 말야. 싸우지 말고 토 론이나 하자." "그래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까지도 티격태격 거리니? 우선 세이즈 너의 생각부터 말 해봐." 카타리나는 세이지의 중재를 도와주며 수업 회의로 화제를 돌렸다. "음 내생각에는 불가능 하다고 봐. 보석이래 봤자 돌덩이 아니겠어? 가열을 한다고 녹여서 혼합할 수 있는것도 아니잖아. 히안 네생각은 어때?" "나역시 동감이야. 깨서 가루로 만든 후에 다시 섞을 수도 없잖아?" "폴린 네 생각은?" 히안의 대답을 들은 세이즈는 폴린에게 물었지만 폴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자신이 당한것에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이 히안이 끼어들었다. "흥. 매일 남 놀려 먹을 생각만 하는 폴린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 그냥 불가능 하다 고 발표하는게 나을꺼야!" "이게!! 공부만 한다고 애인 한번 사겨 본적도 없는녀석이! 너 키스는 해봤냐?" 당하고 만은 있을수 없었는지 인신공격을 가하는 폴린이었다. 이때 옆에서 토론을 듣 고 있던 뮤스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저 내 생각에는 가능하다고 보는데?" 잠자코 듣기만 하던 뮤스가 끼어들자 주변이 정리되며 모두들 뮤스를 바라보았다. 히 안이 말했다. "그럼 광물들을 이용해서 다른 보석을 만들 수 있다는거야?" "으..응." "말도안돼!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히안의 물음에 다른 친구들도그와 같은 뜻이라는 듯이 뮤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뮤스는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32 [5]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30 [1]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2 "헤헤 산소, 수소염으로 원료 가루를 녹이는 방법이있거든. 녹이는 방법이 있다면 혼 합도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이 방법이라면 이곳에서 말하는 루비나 사파이어를 만 들 수 있지... 원료가 되는 가루들을 그릇에 넣고서 분당 100에서 200 회정도면 되겠 군... 그정도를 진동시켜 쳐내면 그 가루들은 산소에 의해서 운반되고 산소, 수소염 속을 통과하는 동안에 가열시키면 쌓이면서 녹았다 굳게 되지. 이렇게 해서 인공적인 보석을 만들수 있는거야." 뮤스가 교수들이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설명을 늘어 놓자 친구들은 머리가 아프기 시 작했다. "에! 말도안되! 내노라하는 연금술사들도 모르는걸 너가 어떻게 알고있겠냐? 농담은 그만 접어 두라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라 생각하는지 히안은 농담으 로 치부해 버렸다. "호호호! 뮤스! 히안말이 맞아! 보기와는 다르게 너무 농담을 진지하게 하는데? 잘못 들으면 정말인줄 알꺼야!" 어쩐일인지 히안의 의사에 처음으로 동감을 하는 폴린이었다. 둘의 말에 별로 할말이 없어진 뮤스는 안믿으면 어쩔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 정말인데... 안믿으면 어쩔수 없지뭐. 아차차!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지?" "수업이 8시에 시작했으니 지금은 8시 반쯤 됐을껀데?" 폴린의 옆에서 별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세이즈가 시간을 가르쳐 주었다. 뮤스는 세 이즈의 여유있는대답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는지 당황하며 말했다. "이..이런 큰일이군. 미안하지만 난 돌아가봐야 겠어. 지금쯤이면 일행들이 날 찾고 있을거 같거든? 카타리나 아쉽지만 이제 돌아가봐야 겠어. 다음에 또 볼수 있겠지." 가볍게 작별인사를 하고 뒤돌아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뮤스를 바라보던 카타리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어디서 또볼수 있지?" "공학원!" 카타리나는 자신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뮤스를 보며 기분이 좋은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련하게 배경소리 처럼 들려오는 교수의 목소리로 인하여 그녀의 기분은 한 순간에 무너졌으니... "거기 도망가는 학생!!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 없었나?!! 누군진 몰라도 출설 체크할 테다!" ################################# 쉐퍼드의 정으로 돌아온 뮤스는 크라이츠와 켈트를 볼 수는 없었다. 짐은 그대로 있 었지만 벌써 어디로 나갔는지 둘은 이미 방에 있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니 자신이 밤 을 새워 필기해둔 종이들은 테이블 위에서 사라져 있었고, 그것을 대신하여 한장의 메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메모를 집어들고 읽어 내려갔다. - 뮤스 보거라. 켈트씨는 동료들을 소집하러 나가셨고, 나는 네가 적어둔 것들을 가 지고 나머지 준비를 하러 나간다. 이것들이 네가 필요한 것들이겠지? 그런데 왜이렇 게 어려운 단어들이 많은건지... 켈트님은 저녁쯤이면 오실것 같고, 나는 몇일 걸릴 것 같구나. 그럼 그동안 잘지내거라. -크라이츠 드라켄- "두분다 나때문에 바쁘시게 생겼구나...헤헤 미안한걸? 이럴줄 알았으면 수업을 끝까 지 듣고 나오는건데 아쉽게 됐어... 그나저나 이제 뭘하면 좋지?" 뭘할까 생각중이던 뮤스는 입고있던 옷의 품에서 꺼내어 주머니에 넣어둔 금화 몇개 가 생각이 났다. 그의 기억이 맞았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통해 대여섯개 정도의 차 가운 금화가 느껴졌다. "이걸로 뭐라도 사러 나가볼까? 이제 내가 살곳인데 지리정도는 알아 둬야 하겠지!" 마음을 먹으면 금방이라도 실행에 옮기는 뮤스였기에 내친김에 여관에서 나와 거리를 거리를 다니기 시작했다. 전뇌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편하기는 했지만 번잡한 거리에 서 철전뇌거를 타고 다니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했기에 마차보관소에 맡겨둔 상태 였다. 관광으로도 유명한 도시여서인지 거리는 구경거리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많은 장사치들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위해 특이한 상품을 내걸고 있었고, 또 어떤 자들 은 우스꽝스러운 분장을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다. 한시간여를 걸었을 즈음해서 배가 출출해진 뮤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슈넬 레스 토랑' 이라는 간판이 걸린 이층으로 이루어진 음식점을 발견 할 수 있었는데 이층의 커다란 창문이 뮤스의 마음에 쏙들었왔다. "헤헤 특이한 이름이군. 빠른 음식점이라... 이층에서 저 창으로 구경을 하면서 식사 를 하면 좋겠는걸?" 꽤나 고급스럽게 꾸며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깔끔한 분위기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뮤스가 머물고 있는 쉐퍼드의 정역시 꽤나 깔끔한 식당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곳은 전문 음식점 이었는지 약간의 위압감마져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때 문앞 에서 대기하던 점원이 깍듯이 인사를하며 뮤스를 맞이하였다. "어서오십시요. 손님." "네." 뮤스는 자신의 아래위를 살펴 보는 점원의 눈빛을 느낄 수가 있었다. 뮤스의 차림새 가 그다지 지체 높아 보이거나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뮤스는 몰랐 지만 이 도시내에서 꽤나 고급음식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들어온 손님이니 막 대할 수도 없었기에 정중한 모습이었다. "혼자십니까?" "네 그런데요." "저를 따라 오십시요."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눈에 봐도 가격 꽤나 나가게 보이는 테이 블과 의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테이블의 위는 질좋은 면으로 덮여 있었다. 애써 둘러 보지 않았지만 가계의 중앙에 위치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뮤스의 눈에 띄 였다. "실례지만 이층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나요?" 뮤스의 질문에 점원은 약간 인상을 쓰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윗층은 특별한 분들만 모시는 곳입니다. 오늘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 안되겠습니다." "그럼 할 수 없죠 쳇." 점원의 말에 약간의 실망을 한 뮤스는 점원의 안내에 따라 아래층의 창가에 앉았다. 그리곤 점원이 두고간 메뉴판을 바라보며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이때 가게의 입 구 쪽에서 한쌍의 남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주문을 위해 별 신경쓰지 않 은 뮤스였지만 오히려 그쪽에서 뮤스를 부르는 것이었다. "혹시 뮤스님 아니신가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눈길을 메뉴에서 옮겨 남자에게 머물게 했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아! 크리스티앙님이시군요! 어떻게 이런곳에서 보네요. 일은 잘 성사 되셨어요?" 뮤스의 말에 자신의 옆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의 옆에는 뮤 스도 아는 얼굴인 페릴이 서있었다. "와아! 축하드려요. 아주 신수가 훤합니다요!" "다 뮤스님 덕분이죠. 페릴 인사해요. 그 천체만리경을 만들어 주신 뮤스님이세요."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페릴 슈베어 폰 라이델 입니다." 크리스티앙의 소개에 반가운듯 인사를 하는 페릴이었다. 그녀도 꽤나 행복한지 저택 의 정원에서 보다 훨씬 밝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크리스티앙이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곳에 혼자 계신것이죠?"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혼자 구경을 다니다가 출출해서 이곳에 들렸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이층에서 함께 식사나 하시지요?" 크리스티앙의 제의가 반갑기만한 뮤스였고, 뒤에서 자신의 경솔함에 가슴만 조여지는 점원이었다. 라이델베르크영주의 영애와 아는 사이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 었다. 더욱 친절해진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가자 역시나 뮤스의 생각대 로 시원하게 뚫린 창문이 환하게 밖의 전경을 비춰 주고있었다. 점원이 지정해준 자 리에 앉은 일행은 식사 주문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 그래서 혼자 계시게 된거군요. 공학원이라... 과연 뮤스님 정도면 그런일을 할 만하죠." "어머! 정말 흥미로운 일을 계획중이시군요. 저희 아버님도 관심이 많으 실것 같아 요. 유달리 기계쪽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죠. 마법은 이제 한물 갔다시면서요. 저희 아버님이 아무래도 전뇌거를 처음으로 사실듯 한데요?" 그 동안 자신들의 일에 도움을 준 뮤스가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크리스티앙과 페릴이 었기에 오붓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이어 점원은 음식을 서빙했는데 그수가 꽤나 많아 보였다. "아 맛있겠군요. 뮤스님 사양 마시고 많이 드십시요. 언제한번 대접해야 겠다고 생각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기회가 올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마친후 포근한 모습으로 서로 바라보며 웃는 페릴과 크리스티앙이었다. 사춘기 의 소년인 뮤스는 왠지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런 생각은 마음속에만 묻어 버렸다.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음식을 먹으려는 순간 밖에서 큰 굉음이 들려왔 다. -쿠과과광!!!!!!!! "어머나 이게 무슨소리죠?"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린 페릴이었다. 그순간 식당의 아래층이 소란스 러워지며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건물에 충돌했어!! 사람들이 건물의 잔해에 깔렸다!! 좀 도와줘!" 아랫층에서 들린 소리를 들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후 빠 르게 뛰어 내려갔다. 가게의 밖으로 나오자 길 건너편쪽에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그 잔해와함께 박혀있는 마차의 일부가 보였다. 말에 연결된 마구들이 무서져 나갔는지 말들은 저 멀리서 푸득 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함몰된 곳에서 사람을 구해 내려는 지 주변 가계의 사람들이 모두 몰려 나와 잔해를 들어내고 있었다. 뮤스역시 거들기 위해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사람이 모자라!! 저쪽으로 가서 다른 블록 사람들도 불러와!!!!" "밑에 사람이 깔려있어!! 이것들 먼저 들어내야 한다구!!!" "이런 제길! 이러다가 아래에 있는사람들 다죽는다고!!" 작업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초조해 하기 시작했다. 뮤스 역시 무너진 벽의 한쪽을 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뮤스의 머리에 한가닥의 생각이 지나 갔다. [뇌동체술법!] "여러분 잠시만 비켜 나세요!!!!" 주변의 사람들은 한 청년의 갑작스런 외침에 흠칫하며 하던 일을 멈추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궁금증을 느낄 시간을 주기에는 너무나 촉박했기에 한번더 외쳤다. "빨리요!!" 뭔가에 홀린듯 뮤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잔해들의 주변으로 물러나갔고 이를 확인 한 뮤스는 몸에서 흘러 다는 뇌공력을 사지로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은 노란색 의 빛으로 물들었고, 그 빛들은 점점 진해져 금광에 가까워져 갔다. 이어 그는 무너 진 벽의 잔해를 손으로 잡았다. 사람들은 뮤스의 변화에 놀라워 하며 지켜 보고만 있 었고, 뮤스의 손은 그 놀람에 쉴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이 십여명의 장정이 달라 붙어 서도 움직이지 못했던 벽의 잔해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3 -츠즈즈즈즉...... 거대한 돌벽이 뮤스에 의해 기적처럼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일이 언제나 사람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듯이 돌벽덩어리에서 균 열이 생기고 있었는데 뮤스가 잡은 부분 만으로는 돌벽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였기 때 문이었다. [이..이런 다시 무너지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위험해 질텐데...]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돌벽의 균열을 발견 할 수가 없었고, 또 설사 발견한다 했더 라도 손쓸 방법이 없었기에 쥐어진 손으로 땀만 흘릴 도리 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뮤스는 자신이 들어 올린 돌벽의 아랫쪽을 살펴 보았다. [저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구나. 이 벽을 부순다면 아래쪽이 다시 무너질수 있으 니 내가 저기로 들어는게 나을꺼야...] 단호한 결정이라도 내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돌벽의 밑으로 몸을 날렸다. 주변 인물들은 뮤스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랐고 또한편으로는 다시 무너져 버 린 돌벽에 넋을 잃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그 청년 미친거 아냐? 무너진 건물 속으로 몸을 날리다니!! 구해야 될 사람만 한명 더 늘었잖아?!" "역시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아!! 더 늦기 전에 재해대책반이나 불러와!!" 뒤늦게서야 밖으로 나온 크리스티앙과 페릴은 사라진 뮤스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뮤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서둘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과 처참하 게 내려 앉은 건물더미만 볼 수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어느새 마련했는 지 사람들의 하나씩의 철로된 장대를 들고 지랫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십여명의 사람들로써는 역부족이었기에 시간만 흐를뿐 아무런 진전을 보이고 있 지 못하였다. "이런 제길! 매달 비싼 세금내주는데 이럴때 관청은 뭐하고 있는거야!!" 30대 초반의 사내가 화가 치미는지 손에 들고 있던 철근을 던지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불만이 터짐과 거의 동시에 거리의 입구로부터 일관된 옷차림을 하고있는 사람 들이 몰려 오기시작했다. 그들은 라이델베르크의 재해대책반의 대원들이었는데 화재 에서부터 수재해까지 모든 민원적인 재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아무튼 이것들은 화를 낼려고 하면 나타난다니까..." 투덜거리며 재해대책반이 몰려 오고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내였다. 라이델베 르크의 시민들역시 평소 재해에 대한 훈련이 제법 잘되어 있었는지 재해대책반이 도 착하자 그들의 통제를 받기위해 일손을 잠시 멈추고 내려왔다. 사람들이 재해대책반 에게 상황을 설명하던중 현장 주변에서 지켜보던 한 아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들! 저기를 봐요! 뭔가 움직여요!" 아이가 손으로 가르키는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모아졌다. 아이의 말대로 붕괴된곳 의 커다란 돌덩이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요란한 굉음소리와 함께 쌓여있던 커다란 바위들이 폭발이라도 하듯이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그다 지 먼거리까지 파편이 날아가진 않았기에 그에 대한 피해는 없었지만 뿌연 먼지가 일 면서 사람들의 시야를 가렸다. 바람에 먼지가 흩어지자 무너진 벽이 막고있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고. 계단으로 부터 걸어 올라오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옷 과 얼굴에는 먼지에 뿌옇게 쌓였지만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표 정을 지으며 손으로 옷을 툴툴 털며 걸어 나올 뿐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보던 크리스티앙이 청년에게 달려갔다. "뮤스님!!! 괜찮으십니까?" "에고 크리스티앙님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많이 피곤하네요. 사람들에게 저 안쪽에있는 사람들좀 꺼내 드리라고 하세요. 안쪽에 꽤많은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창 고였나본데 다행스럽게 다친사람은 없는듯하네요." 자신에게 달려오는 크리스티앙을 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 만 돌벽을 부수기 위해서 써버린 뇌공력때문인지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는 뮤 스였다. 실상 그가 지닌 뇌공력의 양은 대단했지만 드워프마을에서 처럼 아직 그가 익숙할 수 있는 뇌공력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쉽게 지쳐 버린 것이었다. 뮤스의 말을 들은 크리스티앙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전에 재해대책반의 대원들은 지하로 통 하는 계단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속에 매몰됐던 사람들을 부축하여 나오 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뮤스는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헤휴. 이런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니 재해대비용 장비도 만들어야 겠구나..." "네? 뭐라고 하셨죠?" 뮤스의 중얼 거림을 얼핏들은 크리스티앙이 되물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냥 혼자 궁시렁 거린거였어요. 그나저나 페릴님은 어디에 남겨두 시고 혼자예요?" "아아. 그러고보니 페릴이 어디있지?" 그제서야 페릴이 없다는걸 느꼈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별 노력없이 페릴 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재해대책반 차림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과 대화를 나 누고있는 모습이었다. 그녀 역시 크리스티앙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뮤스님 같이가시죠? 아까는 정말 놀랐답니다. 어떻게 그 커다란 돌덩이를 박살 내셨 는지...휴." 빙긋 웃으면서 페릴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뮤스가 지나가자 주변사람들은 그를 보며 놀라는 표정으로 수근덕 거리고있었다. 페릴과 함께 있는 중년은 진갈색 의 짧은 머리에 고상하게 말려있는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약간 마른듯했지 만 그래서 더욱 냉철해 보이기도 했다. 곁에 있던 페릴이 말했다. "크리스티앙님 인사하세요. 이쪽은 저희 라이델베르크의 재해대책반 대장님이신 안루 헨님이세요." "반갑습니다. 크리스티앙 하이만 폰 투트가르라고 합니다." "아! 페릴 아가씨와 약혼하신 분이시군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안루헨 딜레인이라고 합니다. 벌써 페릴아가씨가 결혼을 하실 나이가 됐다니... 후훗" 페릴의 소개에 크리스티앙과 안루헨은 가볍게 인사를 끝내자 안루헨의 시선은 크리스 티앙의 뒤에 있는 뮤스에게 돌아갔다. "저 크리스티앙님. 뒤에계시는분은 어떤 사이시죠? 아까 대단했습니다. 그 거대한 돌 덩이를 박살 내고 나오신... 혹시 마법사가 아니신지?"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대단하다면 대단하신 분이죠. 인사 나누시죠 뮤스님 이십 니다." 뮤스 크리스티앙의 소개에 길게 읍을하며 안루헨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소생은 뮤스라고 해요." "안루헨 딜레인이라고 합니다. 방금전에는 사람들 모두 놀랐지요. 솔직히 지금도 놀 라있는 상태입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모습이 말이 아니시군요. 어디가서 옷이라도 갈아 입으시는 것이..." 안루헨의 말에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본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괜찮다고 하려 했지만 긁적이던 머리에서 돌조각이 떨어지자 도저히 그런 말을 할수는 없었다. 하지 만 신세를 지기도 싫었는지 뮤스가 말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정말 엉망이네요. 몸도 좀 피곤하구요. 전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볼께요." "저런저런. 식사도 아직 못마치셨는데 벌써 돌아가시는 겁니까?" "뭐 숙소에도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거기서 해결하도록하죠. 이런 모습으로 저 고급 스러운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도 무리가 있지않을까요? 아무래도 크리스티앙님의 대접 은 다음으로 미뤄야 겠네요." 안타까워하는 크리스티앙과 페릴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투벅투벅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상당히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과는 상관없이 활기차 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쓸쓸함을 느끼는 뮤스였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마냥 감상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곳으로 와서 처음으로 혼자 있게 되는구나. 크라이츠누님과 켈트 아저씨가 없으니 이리 허전하단 말인가.] "이런... 전뇌거라도 있으면 편했을 것을...헤휴" 한숨을 내쉬어 봤지만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숨이 빠져 나간자리를 눌러 오는 무거운 마음만 남을뿐이었다. 때론 감상적인 기분도 나쁘지만은 않은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은 쉐퍼드의 정에 도착해 있었다. 힘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언 제나 처럼 '어서오세요' 하며 개성 없는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맞이해주 었다. 아무런 기대하는 바 없이 1층의 식당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기분을 날려줄만한 반가운 얼굴이 식당의 한자리를 차지 하고있었다. "켈트아저씨!!!!" 뮤스의 외침에 다른 드워프와 함께 앉아있던 켈트가 눈길을 뮤스가 서있는 문쪽으로 돌렸다. "이녀석아! 시끄럽다! 죽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왔냐? 아침부터 사라져서 어디갔다 왔냐! 네녀석 찾는다고 아침이 엉망이었어! 그런데 몰골이 왠 거지꼴이냐?" "헤헤 오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화가 났다는 듯이 목청을 높이며 혼을 내는 켈트였지만 뮤스의 귀에는 그저 정답게만 들릴뿐이었다. 그런 뮤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켈트는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만했다. 하지만 금새 풀고선 언제나 처럼 장난스런 목소리로 켈트가 말했다. "쯔쯧 녀석. 나야 상관없지만 크라이츠님이 전뇌거 없다고 엄청나게 성화셨다. 각오 하는게 좋을꺼야. 그건 그렇고 네 앞에 있는 드워프들은 눈에도 안들어오는게냐? 그 동안 나에게 반하기라도 한거냐?" 켈트의 지적에 그제서야 그와 동석하고 있는 세명의 드워프가 뮤스의 눈에 들어왔다. 셋다 뚜렷한 개성을 가진 모습이었는데, 푸른색이 띄는 머리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을 가지고 있는 드워프, 붉은 머리와 단정하게 정리해서 멋진 수염을 가진 드워프, 마지막으로 연한 갈색의 머리에 배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을 가진 드워프였다. 수염이 없는 켈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젊어 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기르지 않는 켈트가 이상하다는 것을 뮤스가 알리는 없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4 "이 셋은 나의 사촌들이다. 나와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거든. 껄껄껄... 이 쪽 파란머리는 블뤼안, 빨간 머리는 레디에슨, 그리고 너의 앞에 앉아 있는 드워프는 브라이덴이지." 머리색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쉽게 뇌리에 걸쳐지는 이름들이었다. 드 워프들은 켈트만큼이나 걸걸한 성격을 가졌는지 덥석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냈다. "반갑네! 켈트형님께 말많이 들었어. 두뇌가 대단하다면서? 잘부탁해 블뤼안이야! 유 리를 특별히 잘다룬다네." "저두 처음 뵙겠어요.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블뤼안의 손을 맞잡은 뮤스는 블뤼안의 손바닥 느낌에 놀라야만했다. [마치 거북의 등껍질을 만지는 느낌이야. 이렇게 굳은 살들이... 켈트 아저씨도 이렇 겠지? 대단한 실력을 가지신 분들같군...] 뮤스가 놀라고 있을때 블뤼안의 옆에 앉아있던 브라이덴이 뮤스의 말을 받으며 손을 내밀었다. "허허 우리에게 고마울 것이 뭐가 있겠나? 우리야 평생 이런일만 해오는 종족들인데. 안그런가? 목재와 흙을 다루는게 특기인 브라이덴일세."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더욱 고맙구요." "우리도 이제 한식구인데 켈트형님에게 하는것 처럼 편하게 대하라구. 알겠나?" "네! 그렇게 할께요." 마지막으로 붉은머리를 가진 드워프가 말했다. "나는 켈트형님이 소개했듯이 레디에슨 이라고 한다네 그냥 레딘이라고 부르는게 편 할것 같구먼. 금속이 전문이지. 만나서 반갑네." 레딘은 다른 드워프와는 다르게 점잖한듯한 인상이었다. 길게 내려 기른 수염또한 그 런 인상에 한몫하는 듯이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위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뮤스였으니... 인사가 끝난것을 확인한 켈트가 말했다. "자 다들 모였으니 식사나 함께 하자구. 뮤스 식사는 했냐?" "말도 마세요! 아침부터 한기도 못먹었다구요. 하루종일 허기가 져서 회를 칠뻔했어 요." "그런데 넌 그 몰골로 식탁에 앉을 거냐? 눈치도 없는녀석. 그 더러운 손을 내밀었을 때 동생들의 표정을 못본건가? 아주 엘프와 악수를 하는 꼴이었다구. 껄껄껄!" "아차! 그렇네요. 얼른 씻고 올테니 먼저 주문하고 계세요. 전 아무거나 양많은걸로 부탁해요!" 뮤스가 서둘러 방으로 올라가자 네명의 드워프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켈트가 말했 다. "지식은 엄청나지만 겉으로는 좀 띨띨해 보이지? 그래서 그런지 불쌍해서 괜히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니까." 하지만 뮤스는 식사가 끝나도록 내려올줄 몰랐다. 낮의 일때문에 기력이 탈진했는지 방으로 올라가자 마자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한참후에야 드워프들은 방에 쓰러져 잠 든 그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수 없었던 드워프들은 서로 바라 보며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 여느날들과 같이 높은 하늘을 가진 가을의 날씨였다. 방에는 어찌된 일인지 한쪽만 달랑달랑 달려있는 창을통해 밖을 내다 보며 잠이 오는지 하품을 하고 있는 켈트와, 그의 뒤로는 몸이 근질 거리는지 손에 쥔 연장들로 침대를 분해 했다가 고쳤다 하고 있는 브라이덴, 달랑 한쪽만 남아 있는 창문에 대한 이유를 성명해 주려는 듯이 한손 에 창문의 유리를 들고 녹이려 하고 있는 블뤼엔이 있었다. 또, 켈트가 바라보고 있 는 창밖으로는 전뇌거 앞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레딘이보였다. 마지막 방안의 인물은 열의에 불타 오르는 세 드워프들 사이에서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뮤스였다. 문 득 창밖을 보던 켈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라이츠님이 가출하신지 삼일짼가? 이제 오실때쯤 된듯한데..." "그러게 말이예요. 하지만 크라이츠 누님이 맡은일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니까요 어디선가 수고하시겠죠. 끝났으면 전뇌거를 운전하고 싶어서라도 당장에 올껄요?" "하긴 그렇지. 하지만 내 사촌 동생들 하는짓이 여간 불안한것이 아냐. 저렇게 놔뒀 다간 언제 발광을 할지 모른다고..." "바..발광이라니요?" "철전뇌거를 녹이려고 안달 하는 레딘의 광기가 네눈엔 안보이냐? 그도 그지만 네 뒤 에 있는 녀석들역시 이대로 둔다면 어떻게 될지 몰라..." 세명의 드워프를 살펴보자 켈트의 말대로 뭐라 형용 할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가 그들 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피의 향기에 영혼을 빼앗긴 전사가 평화의 시대가 열리자 살기만 흘릴 수 밖에 없어 미쳐버니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뭐... 그런 성격때문인지 실력하나는 완벽하지."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자 방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던 드워프들의 눈은 한곳으로 몰렸다. 뮤스가 문을 열자 나이어린 소년이 문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뮤스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편지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아무래도 심부름 하는 소년일것이다. "저 어떤 누나가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어디한번보자." 켈트가 방에서 걸어나오며 소년에게 편지를 건네 받으려 하자 소년은 편지를 재빨리 등뒤에 숨겼다. 이어 기어들어가는 소년의 말이 들렸다. "저...그 누나가 심부름 값은 여기서 받으라고 했는데요?" "끄응... 암튼 짠순이 드래곤! 휴우... 여기있다!" 켈트가 주머니에 서 조그마한 은조각을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주자 소년은 입이 귀끝 에 걸리며 편지를 주고 사라졌다. 편지는 꽤나 고급으로 된 종이로된 것이었는데 이 곳의 재지기술의 수준을 본다면 상당히 고가의 것이었을 것이다. 소년이 전해준 편지 를 읽어 보던 켈트는 주위에 있던 일행들에게 말했다. "크라이츠님이 도착한 모양이야. 이곳으로 찾아 오라는데?" 켈트의 말에 귀가 번쩍뜨인 나며지 드워프들은 드디어 할일이 생긴다는 기쁜 마음으 로 주변에 흘리던 광기를 다시 몸속으로 접어 넣었다. 하지만 광기를 아직 정리를 덜 했는지 창으로 기어 올라오는 레디에슨이 보였다. "흘흘. 형님 이제 다 기다린거요? 정말 미쳐 버릴뻔했수." "저..저기.. 레딘 아저씨...여기 4층아니었나요? 설마 여길 기어 올라오신건 아니시 죠?" 뮤스의 말에 창문으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있던 레딘은 등뒤로 식은 땀을 흘리며 얼 어 버렸다. 뭔가 변명거리라도 찾으려는 듯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보이더 니, 이내 레딘은 입을 삐죽하며 올린 다리를 다시 내리고 기어 내려갔다. "원래 레딘 아저씨 저래요? 아니면 기다림이 너무 길었던가?" "흐흐흠... 그냥 등산좋아하는 드워프라고 생각하라고..." 뮤스의 어깨를 한손으로 두들기며 말을 피하는 듯이 밖으로 걸어 나가는 블뤼엔과 그 와 비슷하게 뮤스의 눈을 피하며 나갈 준비를 하는 두 드워프였다. ########################## 성실한 식당의 점원인 인스테인은 언제나 처럼 바쁜 점심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오 후 무렵이 되서야 일에서 잠시 해방될수 있었기에 식당 밖에 마련된 탁자에서 햇살을 맞으며 차한잔을 즐기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흠! 난 이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단 말야... 남부러울 것이없지. 차한잔의 향기와 신문하나만있으면 세상에 그 무엇이 부러우랴. 이번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나?" 일주일에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 신문이었지만 라이델베르크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애 독하고 있는 유일한 언론매체였다. 주로 관광객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한 관광정보와 라이델베르크내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쉽게 알수 있도록 모아놓은 것이 대부분의 내 용이었다. 차를 한모금 들이킨 인스테인은 가장 좋아하는 코너인 '라이델 베르크의 괴담'의 페이지를 기대에 눈빛으로 들여다 보고있었다. "어디보자... 이번주의 괴담은... 말없는 철마차와 검은 머리의 괴인? 호오... 요즘 라이델베르크의 시내에 말이 없는 철마차를 타고 출몰하는 괴인은 ...." 인스테인은 신문기사의 옆에 그려져 있는 삽화를 보았다. 신문의 기사대로 꽤나 괴기 스러운 내용이 아닐수 없었지만 선뜻 믿기에도 그는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판매 부수 올리려고 별이야기를 다 지어 내는군. 어차피 신문은 이것 밖에 없으니 팔릴수 밖에 없는데 쯔쯧. 언론이 이렇게 외곡 되면 쓰나."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인스테인은 아직 식지 않은 찻잔을 들며 입술에 기대고 있 을때였다. 부웅! 소리와 함께 자신의 눈앞으로 번개같이 지나가는 물체를 목격했다. 얼핏본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는데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자신이 보던 신문을 내려 보는 인스테인이었다. "여...역시 세상에 알수 없는일은 많아... 저..접시나 닦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인스테인은 가계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뮤스일행은 전뇌거를 타고 크라이츠가 연락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헌데 운전하는 인물은 뮤 스가 아닌 레딘이었다. "움하하하하!! 거보라고 내가 뭐랬나!! 아까부터 지켜 보면서 운전법을 배웠다니 까!!!" "이걸 운전이라고 그러는거냐!! 전뇌거에 끌려가는거지!!" 켈트가 레딘의 말에발끈하며 고함쳤지만 그정도의 소리침으로는 화가 덜풀렸는지 한 참이나 더 떠들었다. "제길!! 크라이츠님이 없으니까 네녀석이 난리군!! 내 그러길래 이녀석은 두고 오자 고 그랬잖아!!" "형님 저녀석을 두고 왔으면 형님은 집에 올때마다 철로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할거 요..." "끄응...." 이때 뮤스가 소리치며 달리던 철전뇌거에서 일어났다. "아저씨들 저기 저건물 같은데요? 지도가 맞다면요." 과연 뮤스의 말대로 크라이츠가 남긴 지도에 표시 되어있는 장소인듯했다... 헌데 지 도와 조금 다른것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표시의 크기였다. 지도에는 일반 건물들과 같은 크기로 이루어진 빗금무늬의 표시였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적어도 정원까지 포 함한 페릴의 저택보다는 두배이상은 큰 초대형 건물이었다. 이를 보고 켈트가 정신을 못차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흐으... 아무리 짠순이라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군... 저것 마련한다고 돈을 다 써서 심부름값이 없었나?" "움하하하. 온몸으로 전율이 느껴지는 걸? 지금까지 작업해온 코딱지 만한 곳과는 비 교가 안되는군! 역시 형님의 말을 들으면 손해는 안본다니까!" 켈트는 경황중에도 한마디 싸구려 농담은 잊지 않았고, 드워프 삼총사는 자신들의 선 택에 마냥 흐뭇해 했다. 전뇌거는 언제나 처럼 작은 중얼거림만을 흘리며 힘차게 그 들의 전쟁터로 달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Name : 리틴 Date : 23-01-2002 13:27 Line : 170 Read : 119 [35] <대공학자> #35 -------------------------------------------------------------------------------- --------------------------------------------------------------------------------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5 철전뇌거에서 내린 뮤스와 드워프들은 고개를 치켜들어 올려다본 건물의 규모에 넋을 놓고야 말았다. 멀리서 봤을땐 그저 크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도착한후 바 라본 건물의 규모는 그들의 눈대중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 다.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닌듯이 허름한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이었지만 튼튼하게 보 수를 했는지 무너질 정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 건물 곳곳에 붙어있는 창에 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꽤나 화려함을 자랑했는데 마치 신전의 그것과도 같 은 모습이었다. 뮤스가 눈길을 내려 자신의 앞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있는 사람키의 다섯배나 됨직한 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문의 옆구리에는 사람이 드나들만한 쪽문 이 붙어 있었고, 조금 열려진 틈새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뮤스는 아직까지 도 건물의 크기에 놀라고있는 드워프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냈 다. -툭탁! 툭탁! -쿵쾅! 쿵쾅! "호호호호! 빨리빨리 서둘러주세요! 일행들 오기전에 끝내야 한다구요!" 건물의 내부에서 사람들을 볶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특별히 생각해 보 지도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크라이츠라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 만 울릴뿐 이 엄청난 규모의 건물내부에서 그녀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뮤 스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누님! 어디 있어요?" 건물의 크기 때문에 작은 메아리까지 울리는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메아리를 느끼며 놀라기도전에 멀리서 부터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이쪽으로 와! 이제 거의다 됐어!" 그제서야 뮤스는 입구의 반대쪽에 어렴풋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인영을 알아 볼수 있 었다. 켈트와 드워프 일행들의 관심사는 뮤스와 사뭇 달랐는데 바로 건물의 한쪽에 쌓여있는 엄청난 양의 광석들과 목재, 완비되어 있는 용광로등의 작업 환경이 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뮤스가 걸어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잔뜩 쌓인 광석들과 목재 를 만지며 의미 모를 괴기스런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뮤스가 꽤나 걸어가자 크라이 츠의 모습이 완전히 눈에 들어왔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활동하기 편한 펑퍼짐한 바지 와 간편한 옷을 걸치고 있어서인지 그녀가 가진 이미지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뮤스는 감탄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 누님! 언제 이런건물을 마련했어요? 새로 지은 건물은 아닌듯한데..." "호호! 당연한거 아니겠니? 이런건물을 사일동안 만든다는건 무리가 있지. 그래서 예 전에 신전으로 쓰던 건물을 인수해서 개조한 거란다. 꽤나 큰 신전이었던것 같은데 덕분에 우리야 편하게 됐지뭐... 마음에 드니?" "헤헤헤 그럼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걸요?" "그런데 켈트씨는?" 크라이츠의 물음에 걸어온길을 돌아보니 멀리서 마냥 신난 아이들 처럼 광석으로 돌 싸움 하고 있는 네명의 드워프가 시야에 어렴풋이 잡혔고, 누군가 광석에 맞았는지 괴성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헤휴... 저기 세분이 켈트아저씨가 모시고 오신 분들이죠...제 생각엔 켈트 아저씨 가 세분 늘었다고 보시면 될듯하네요." 뮤스는 생각만 해도 골이 아픈지 머리를 감쌌다. "그렇구나. 이제 마지막 보수작업만 하면 된단다. 네가 남겨둔 종이에 써져 있는 재 로는 대부분 구해왔고, 나머지는 몇일 이내에 이쪽으로 운송 될꺼야." "누님 정말 수고하셨네요." "호호 뭘 그러니 다 본전 뽑을 꺼란다. 그리고 이건물 뒤에는 우리가 살 집을 마련했 놨거든. 이제 거의 끝난거 같으니 들어갈까?" "에휴 아무튼 누님은 그저 돈이라니까. 그런데 저분들은 어떻게 하죠?" 뮤스의 질문과 동시에 이번엔 켈트가 광석에 맞았는지 그의 걸걸한 괴성이 들려왔다. "뭐 신나서 저렇게 좋아들 하니 나중에 인사하지뭐. 우린 일단 들어가자꾸나." 크라이츠를 따라 건물의 뒷문으로 빠져 나가자 바로 앞에는 과거 신전의 외부인 숙소 로 쓰였던듯한 건물을 볼 수가 있었다. 작업장만큼 커다란 규모는 아니었지만 뮤스일 행이 살기에는 꽤나 큰 건물이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첫눈에 이층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보였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가구들과 큼직한 홀을 가지고 있는 내 부가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햇살을 바로 받아 들이는 홀 천장의 유리가 뮤스의 마 음을 끌었는데, 유리로된 창이 없는 조선에서 살아온 뮤스라서 그런지 유난히 넓은 유리창문을 좋아하는 그였다. 집의 내부에 정신을 팔고 있던 뮤스에게 크라이츠가 무 언가를 건넸다. "뮤스야 이거나 받거라." "음? 이게 뭐죠?" 크라이츠가 건낸 것은 두꺼운 책자와 옆으로 메고다닐 수 있는 가방이었다. 책자는 앞뒤로 두꺼운 겉장이 붙어 있었고 그위에는 '공학원 장부'라고 적혀 있었다. 크라이 츠가 나름대로 지을수 있는 가장 순진한 표정을 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호호. 보면 알다시피 공학원을 설립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이 들었단다. 뭐 내가 꼭 그걸 다 받아야 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절대! 그만큼을 달라는 말은 아니야! 알겠지? 그래도 그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아...네. 그...그래도 나중에 돌려 드려야죠. 이걸 다 채우려면 오늘 부터라도 일을 시작해야 겠는걸요?" "호호호! 꼭 그런 뜻은 아니었다니까! 정 네가 그렇다면 돌려 받을 수 밖에. 그런데 지금부터 해도 되겠니?" 지나가는 말로 흘리는 뮤스의 중얼거림에 크라이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 쳐버렸다. "그건 그렇고 이 봇짐은 뭐죠?" "레어에서 보물을 가져 나온다고 뒤적거리다 보니 그 가방이 있더구나. 오래전에 꽤 나 유명했단 도적이 쓰던건데 마법이 걸려있는 가방이란다. 아무리 큰 물건이나 무거 운 물건을 넣는다고 그래도 그 가방의 무게와 크기는 변하지 않거든? 네게 필요 할지 도 몰라서 말야." "와! 그말이 정말이라면 대단한 물건이네요! 고마워요. 제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넣어야 겠는걸요?" "호호호! 감사하는것도 좋은데 말야. 이제 작업장으로 돌아가 볼까? 네가 말했듯이 오늘부터라도 일해야 할듯한데?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네게 꼭 다 돌려 받으려는건 아 니야!" 크라이츠의 부축임에 공학원 장부를 꼬옥쥐고 울며 겨자먹기로 드워프 들이 놀고(?) 있는 작업장을 향해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밉거나 곱거나 그녀는 공학원의 실질 적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퉁탕퉁탕! 건장한 근육들이 요란스럽게 춤을 추고있고, 씰룩거리는 등에서 부터 팔까지 흐르던 땀방울들은 원심력을 견디지 못하여 밖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네명의 드워프들은 손질잘되어 있는 도끼를 바삐 휘두르고 있었고 한쪽에선 모눈이 그려져 있는 종이에 뭔가의 대형 설계도를 그리고 있는 뮤스였다. 크라이츠의 조용한 성화에 첫날부터 노 동력을 불살라야만 하는 처절한 노동자들이었다. 용광로의 불길과같이 빨간 피가 묻 은 붕대를 머리에 두른 켈트가 다른 드워프들을 대표라도 하듯이 투덜 거렸다. "에휴... 아무리 우리가 이런짓을 좋아한다지만 이럴수가 있냐? 첫날부터 이런 중노 동이라니!!" "아저씨가 참으셔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전뇌거 발표일까지만 수고해 주세요. 그 이 후에는 자동 생산기기들을 만들도록할테니 이렇게 힘든일은 없을 것 입니다. 어차피 한대씩 만들어 낼수는 없을 것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네가 그리고 있는것은 뭐지?"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어보는 켈트였다. "린강에 세울 발전소의 설계도예요. 자동 생산기기를 가동시킬려면 뇌전력을 생산해 야 하는데 제가 계속 뇌공력으로 돌릴수는 없으니까요. 마침 린강이 가까워서 뇌전력 공급이 손울것 같은데요?" "호오! 네가 가진 뇌공력이 아니더라도 뇌전력을 공급할 수 있단 말이냐?" "뭐 쉽게 말하면 그렇죠." 뮤스와 켈트의 대화를 듣던 레딘이 진지한 표정을 일렁이며 물었다. "흠! 그럼 그것도 우리가 만들어야 겠구나?" "당연하죠. 저나 누님이 만들수는 없으니까요." 뮤스의 대답에 자신의 예지 능력이 맞음을 확신했고 재빠르게 뮤스의 손에 들려있는 설계도를 뺏어들며 씩씩 거렸다. "찢어 버리겠다! " 이지를 상실한 레딘을 막기위해서 모든 드워프들과 뮤스는 생 달밤채조를 해야 했고, 밤이 깊어서야 레딘을 기절시키고 설계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6 10월 19일 라이델베르크의 제 24블럭 21번지에는 늦은 밤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는고, 공터에 빈틈없이 세워져 있는 마차들이 이곳에 모인 이들의 수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마차로부터 내리는 이들은 진귀한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상인들이나 고급스런 옷을 입은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이곳에 몰려 든 이유는 느닷없이 통보받은 전뇌거 발표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티앙과 페릴의 도움으로 수많은 귀족들에게 전단을 보낼 수 있었고 물질적인 면에서 누구에 게도 지기 싫어하는 제국 각지의 귀족들이 이렇게 몰려들었던 것이었다. 이미 안면이 있는 높은 신분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거만한 표정으로 잘난 척 떠들었고, 그에 비 해 조금 낮은 지위의 중소 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 발을 넓히기 위해 높은 신분의 귀 족들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공학원의 굳게 닫힌 대문 앞에 서있던 한 귀족이 자신 의 지팡이로 땅을 몇 번 두들기며 말했다. "허허. 손님들을 이렇게 초청해 놓고 아직 대문도 열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는 꽤 지체 높은 귀족이었는지 주변에 서있던 낮은 지위의 귀족들이 굽신거리며 장 단을 맞추었다. "백작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귀족 모두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우리 귀족들을 조금이라도 안전에 둔다면 이렇듯 건물 밖에 세워두지는 못 할 것입니다." 백작이라는 이는 그들의 저의를 알기라도 하는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쯔쯧... 누가 공학원을 비난하라고 했소? 난 그저 궁금했을 뿐이오!" 그가 혀를 차며 귀족들을 꾸짖고 있을 때 공학원의 대문 양쪽에 걸린 네모난 나무 상 자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저희 뮤센 공학원을 찾아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지금부 터 뮤센 공학원 주최 전뇌거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무상자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공학원의 대문 앞에 모여있던 귀족들은 탄 성을 내지르며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요란한 폭발음으로 인하여 모두들 시선을 하늘로 돌려야 했다. 땅으로부터 치솟은 커다란 불덩이가 붉은 선을 그으며 하늘로 올라갔고, 그 불덩이는 높은 곳에 이르러 다시 폭발하며 작은 불꽃들을 사방 으로 흩날렸다. -펑펑! 퍼펑! 하늘은 색색의 불꽃으로 화려하게 수 놓여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한 밤의 기적에 정신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수십 발의 축포가 터지고 나자 전뇌거 발표 회의 시작을 알리는 듯이 잘 치장된 공학원의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끼긱...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공학원의 내부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대문이 열 린 공학원의 내부는 횃불 하나 없이 어둡기만 했고, 사람들은 돌연한 분위기에 웅성 거리며 들어가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밝은 등불 하나가 천장에서 번쩍이며 켜졌고, 그 등은 공학원의 정 중앙을 비추었다. -팟! 고위 마법사가 만든 마나등 조차 따라가지 못할 이 밝은 등불에 사람들은 더욱 놀라 워했다. 그 불빛이 비추어진 곳에는 우아한 곡선의 차체를 가진 전뇌거 세 대가 자리 하고 있었다. 가장 왼쪽에 놓여 있는 것은 날렵하게 생긴 붉은 색의 2인승 전뇌거, 가운데 놓여있는 것은 우람한 크기의 중형 전뇌거였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약간 각 이진 모양과 검은색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뇌거였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이 모든 것 이 발표회를 꾸미기 위한 효과였다는 것을 알아채고 술렁거리며 공학원 안으로 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야! 나는 이 녀석이 마음에 드는걸? 날렵해 보이지 않아?" "이건 짐을 나르기에 적합해 보이는군. 괜찮겠어." "이건 왠지 중후한 멋이 나는군." 세 종류의 전뇌거가 눈앞에 보이자 사람들은 각자 취향에 따라 나뉘어져 자신이 마음 에 드는 전뇌거 앞으로 몰려가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들어오자 기다 렸다는 듯이 공학원의 벽에 붙은 등들이 켜지며 공학원 내부의 모든 모습들이 공개가 되었다. -징... 사람들은 휘황찬란해진 내부의 모습에 이리저리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적지 않게 당 황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실상 공학원의 내부모습은 몇 일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이었는데. 천장에는 뮤스가 블뤼안과 함께 만든 전구들이 수두룩하게 박혀있었고, 레 딘과 함께 만든 전뇌거 대량 생산설비들이 구석을 메우고 있었다. 또한 작업 공구들 이 빼곡히 꼽혀있는 벽들은 공학원이라는 곳을 감탄사로 가득 차게 만들고 있었다. 음침한 마법사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전뇌거가 만들어 질 것이라 상상한 사람들은 이 신기한 모습의 공학원을 구경하느라 여념 없었다. 공학원의 사방에서 뮤스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저희 공학원을 찾아 주신 여러분께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사방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는데 아무리 주변을 살펴 봐도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전뇌거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전뇌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당 해주실 크라이츠 드라켄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드래곤이란 존재는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대외적인 이목을 생각해 드라켄 이라는 성을 쓰기로 했는데, 이름만을 밝힌다는 것이 귀족들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드라켄이라니... 뮤스의 소개가 끝나자 천장으 로 부터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이 우아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마법을 써서인지 은은히 성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 손님들은 그녀의 미묘한 분위기에 점차 매료되기 시작했고, 여성손님들은 성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에 귀한 보석을 보듯 황홀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조작실에서 공학원 내부를 들 여다보던 뮤스가 자신의 뒤로 어색한 복장으로 앉아 있는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누님은 꼭 저럴 때 마법을 써야 하는 걸까요?" 브라이덴이 지친 듯이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세상에 저런 드래곤이 있다는 소린 처음이야... 다들 드래곤이 라니 믿을 수밖에... 그런데 저 매달려 내려오는 장치는 꼭 해야만 했나?" "누님이 해달라시는데 안 해줄 수 없잖아요. 저라고 하고 싶었는지 아나요?" "허긴 그렇기도 하군..." 다른 드워프들도 브라이덴과 뮤스의 말에 동의라도 하는지 고개만 끄덕거리며 피곤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들이 오늘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인데 근 삼일동안 노동력을 갈취 당한 그들은 서있 을 힘조차 없었기에 책상에 앉아 크라이츠의 작태를 지켜봐야만 했다. 계속해서 성스 러운(?) 크라이츠의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크라이츠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마법과 광체가 서리는 마법을 동시에 걸어놓은 크라이츠의 목소 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그것이라고 착각 할 정도였다. 이미 군중들은 혼백이 몸밖으로 나간 것 처럼 침이라도 흘릴 듯 입을 벌리고 크라이츠의 말을 듣고있었다. "오늘 저희 공학원에서 선보일 전뇌거는 세 가지 종류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릴 전뇌 거는 젊은 귀족층을 겨냥하여 정렬의 이인승 붉은 전뇌거, 로데오! 로데오는 열 다섯 마리의 말과 동등한 힘을 내는 기종입니다. 최고 마차의 네 배까지 속도를 낼 수 있 는 로데오는 레이디를 수행하는 젊은 귀족들에게 필수품이 될 것입니다!" 크라이츠의 말에 호응을 하는 것인지 아님 그녀의 모습에 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 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귀족들은 크라이츠가 추천 한 대로 로데오의 아름답고 매끈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라이츠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다음 전뇌거 앞으로 걸어갔다. "자 이곳의 정렬적인 중년의 귀족님들과 상인 여러분이시라면 이 전뇌거를 주목해 주 시길 바랍니다." 크라이츠의 설명에 스스로 정렬적인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귀족들과 상인들은 은근히 목의 단추를 풀어 보이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여기있는 전뇌거는 라이노라고 하는 기종입니다. 이기종의 장점은 어떠한 길이라도 무리없이 달린다는 점이지요. 물론 그에따라 특별 전동기를 사용하여 로데오의 두배 에 가까운 힘을 낼수가 있습니다. 와일드한 멋을 소중히 여기시는 귀족이나 포장되지 않은길을 오가시는 상인분들께 적극 권장하는 기종입니다." 라이노는 상인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꽤나 많은 양의 짐을 적재할 수 있었고, 좋 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점이 상인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어 이도 저도 아닌 지긋한 나이를 가진 귀족들은 마지막 전뇌거에 대한 기대를 가지며 크라이츠의 설명이 계속 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하나가 남았군요. 하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발표하는 것이 최고의 물건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겠죠? 물론 저희 공학원 역시 그런 관행을 깨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 최고급 전뇌거인 포센트를 소개해 드립니다!" 귀족들은 검은색으로 진중한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포센트라 소개된 전뇌거를 바라 보 았다. 이미 전부터 눈으로 찍어놓은기종이었지만 그녀의 소개가 시작되자 귀족들과 상인들은 더욱 큰 기대감에 휩쌓였다. "포센트는 최고급 목재로 내부 장식을 마무리하였고, 전동기역시 라이노와 동급 채용 으로 강력한 힘과 부드러운 주행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에 대비한 수많은 안 전장치들과, 운전석과 분리된 승용석을 채용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설명이 끝날때마다 연신 감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정도로 간단한 전뇌거 기종들에 대한 설명을 마치도록 하지요. 지금부터 샘플로 준비된 몇대의 전뇌거로 시승회가 있을 예정이니 준비된 음식들을 즐기시면서 즐거운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작별 인사에 남성들은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회장에서 걸어 나온 크라이츠는 뮤스와 일행들이 있는 조작실로 걸어 들어왔다. 불편한 몸을 의자에 앉혀 있는 드워프들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 이렇게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하죠? 나가서 손님들 접대라도 해야하지 않나요? 뮤스 너도 이러고 있으면 안되지 않니? 애써 연회복도 입혔는데 안그래?" "아..네.... 시승회를 시작해야죠..." 켈트가 말했다. "저 크라이츠님 그런데 사람들이 운전은 어떻게 하죠? 아직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 은 없는데요." "그거야 뮤스와 여러분이 사람들을 교육 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아나요? 아름 다운 레이디를 옆에 앉히고서 운전을 할 기회가 생길지? 그리고 끝나자 마자 운전사 교육장도 만들어야 겠군요." "아... 그렇습니까..." 뮤스는 이왕 이렇게 된거 끝이나 빨리 보자는 심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연회용 흰색 장갑을 꼈다. "자 우리도 이제 나가보죠..." 몇일동안 크라이츠에게 특별 운전 수업을 받은 드워프들이기에 이제 다소간의 속도에 대한 두려움은 줄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켈트는 전뇌거를 타는것이 여간 찝 찝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영향이었는지 사람들은 준비된 음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 고 전뇌거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뿐이었다. 조작실에서 뮤스와 드워프들이 나 오자 장내는 조용해 졌고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은 포센 트 두대, 라이노 두대, 그리고 로데오 한대를 각자 몰고 나왔는데 라이노는 켈트와 레딘이 운전을 하였고 포센트는 브라이덴과 블뤼렌이, 로데오는 가장 어린 뮤스가 운 전을 하게 되었다. 전뇌거가 준비되자 귀족들은 품위있게 순서를 기다리며 자신의 차 례를 기다렸고, 다섯명의 운전기사들은 시승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우고 서 공학원 내를 천천히 돌고있었다. 뮤스가 맏은 로데오는 한대뿐이어서인지 약 십 여명의 젊은 귀족들을 태우고 공학원을 돌았지만 남은 손님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무명째의 손님은 젊은 여성이었지만 이미 기운이 다빠진 뮤스는 아무 생각 없이 각본대로의 닭살 인사를 건낼 뿐이었다. "저희 공학원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호호 뮤스 이런 연회복도 꽤나 어울리는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모습의 여성이 눈에 들어 왔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7 "카타리나!? 이곳에 어쩐일이야?" 카타리나를 본 뮤스는 지금까지 느끼던 피곤함마저 날려버릴 정도로 놀라버렸다. 수 수한 분홍색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교복을 입은 모습과는 판이했는데, 부드 러운 머릿결을 늘어트린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카타리나를 태운 뮤스가 빨리 출발 하지 않자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젊은 귀족들은 인상을 쓰며 그들을 바 라보았다. 비록 그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어디까지 비위를 맞춰 줘야할 손님이었기 때문에 카타리나를 태우고 공학원을 돌기 시작하였다. "푸훗. 내가 여길 오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거니?" "아..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이인승의 전뇌거인 로데오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공학원의 내부를 돌고 있었 지만, 얼마전 햄브리겐 대학을 향하던 때와는 다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카타리나와 뮤 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뮤스는 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라도 자기가 먼저 말을 해 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여긴 어떻게 온거야?" "아. 아버님이랑 언니가 초대 받았다고 해서 함께 온거야. 어머니는 피곤하시다면서 안오셨어." "초대? 귀족들이나 대규모의 상인들이 아니면 초대장이 발송되지 않았을 텐데?" 뮤스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피식 웃었다. "그럼 네 친구여서 발송해 줬나보지!" 물론 초대장을 모두 뮤스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할 수는 없었 다. 하지만 대장부 체면에 계속 물어보기도 그랬는지 채념하고 말았다. 힐끗 카타리 나의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훔쳐보자 예전과는 다른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뮤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언제나 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너 대단한 애였구나? 이 공학원의 대표가 너라면서?" "말도 말아라. 보이지 않는 내면에 엄청난 노동의 고통이 있었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뮤스는 그녀의 칭찬에 알지 못할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 나이 어린 사람인줄은 아무도 모를 거야. 나 역시 초 대장을 보고 눈을 비볐거든?" "그런가? 하긴 그렇다고 해도 별 이상할건 없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 필요 없 으니 활동하기 편할 거야." 어느새 공학원을 한바퀴 돌았는지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 제 카타리나가 내려야 하다는 것에 뮤스는 허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카타리나가 말 했다. "너 혹시 발표회 끝나고 할일 많니?" "아...아니 없는데?" "호호호. 그럼 끝나고 공학원 구경이나 좀 시켜줘!" 잠시 굳어있던 뮤스의 얼굴이 카타리나의 말과 함께 활짝 펴졌다. 하지만 카타리나 앞에서 자신의 기분이 들키기라도 할까봐 애써 침착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어... 그거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 "그래 있다가 보자." 뮤스가 인사를 건네며 다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사라졌을 때, 카타리나는 멀리서 포센트의 시승회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를 볼 수있었다. "언니! 아버지!" 그녀가 부르자 포센트 시승회장에 서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흰머리의 중년신사와 하 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 하얀 드레스를 입 은 여성은 다름 아닌 크리스티앙의 약혼녀인 페릴이었다. "어머. 카타리나 어딜 다녀왔니? 아버님이 많이 찾았잖아..." "호호호. 여기서 아는 친구를 만나서 말야!" "학교 친구인가? 네 또래는 너밖에 보이질 않던데... 하긴 햄브리겐 대학에는 귀족의 자제도 많으니까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겠구나." 딸의 말에 호기심을 느낀 그의 아버지 하버만 슈베어 후작이었다. 집에서 통 친구나 학교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 막내딸의 친구라고 하니 유달리 궁금했던 것이었다. "히히. 아버지는 모르셔도 되요. 만약 제 친구들이 제가 영주의 딸인걸 안다면 이렇 게 편하게 생활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 참아 주세요. 네?" "허허허. 너는 언제나 이 애비를 불편한 짐으로 여기는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 지...흠" 이때 슈베어 후작의 마지막 남은 아쉬움 마저 뽑아 버리려는지 포센트의 운전을 담당 하는 블뤼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다음 분 탑승하시지요." 블뤼안의 말을 들은 하버만 후작은 뒤에 있는 두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 자 우리와 함께 타보자꾸나. 크리스티앙군이 그렇게 자랑하던 전뇌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기대가 되는걸?" 그의 말에 페릴은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어머 언니 또 빨개지네? 이렇게 수줍음이 많아서야 결혼식이라도 할 수 있겠어?" "어머 얘는..." 포센트에 올라탄 세 부녀는 블뤼안의 기능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저 그러려니 했지만 설명을 들은 후에는 세심하게 설치된 장치들에 놀 라야만 했다. 포센트의 천장에 달린 독서등과, 안쪽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는 검정 유리, 원하는 대로 등받이 각도를 조절하는 마주보는 의자 는 기본이었고, 전뇌거 내부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장치와 비오는 날을 대비한 창문 닦는 장치는 그 백미였다. 카타리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탄성을 내 뱉었다. "어머 이거 정말 대단한 걸요? 이런 기능들을 갖추고 있다니..." "허허 정말 그렇구나. 말이 없이도 움직인다는 것도 대단한데 이렇게 잘 꾸며 져있다 니..." 딸의 놀람에 슈베어 후작은 서슴 없이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안가죠?" 옆에서 내부를 구경하던 페릴이 창 밖을 바라보며 동생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이미 가고 있는걸? 다만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거야..." 카타리나는 페릴의 말에 놀라 창 밖을 보니 그녀의 말대로 주변 경관들은 뒤로 움직 이고 있었다. 자신들은 가만히 있고 배경만 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날 정 도였다. "정말이네?" 이미 전뇌거를 몇 번 타본 카타리나 였지만 수준이 다른 포센트의 성능에 혀를 내둘 러야만 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8 어느덧 밤은 깊어만 갔고 전뇌거 발표회가 끝나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공학원에 남은 사람은 몇 명이 되지 않았는데 이미 녹초가 되어 버린 뮤스 일행과 아직 돌아가지 않고 전뇌거에 매료되어 아쉬움을 남기는 사람들, 그리고 저편 에서 바닥의 돌을 차며 뮤스를 기다리는 카타리나 뿐이었다. 뮤스는 체질에 맞지 않 는 불편한 연회복의 목 단추를 풀며 카타리나에게 뛰어 갔다. "카타리나! 오래 기다렸지? 후우.. 미안해." "아니 나도 기다리는 동안 포센트도 타보고 재미있었어." 뮤스의 사과를 가볍게 받아넘긴 카타리나는 이어 포센트에 대한 감상을 널어 놓고있 었다. "그나저나 말야. 포센트라는 전뇌거 정말 대단하던데? 아버님이 뿅 하구 가버리셨어! 당장 계약해서 사신다고 하시던걸? 같은 전뇌거라도 어쩜 그렇게 다를 수 있니?" "하하. 포센트는 그럴 수 밖에 없어. 아참 이렇게 있지 말고 공학원이나 둘러보면서 이야기하자." "어머 혹시 어두컴컴한 곳으로 데리고 가려는거 아냐?" 카타리나의 말을 금새 알아듣지는 못하였으나 이내 알게된 뮤스는 얼굴을 붉히며 당 황하였다. "서..설마. 그럴리가 없잖아!"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당황하니? 장난 좀 친거가지구... 그래 공학원 내부나 둘 러보자." "으..응." 넓은 공학원의 시설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카타리나는 뮤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포센트는 드워프 아저씨들의 심혈이 들어가 있는 거야. 로데오나 라이노는 대량생산 이 가능하지만 포센트는 완전 수공으로 제작되지. 그래서 모든 포센트 마다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거든..." 뮤스의 말이 신기하다는 듯이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문득 화재를 바꿨다. "그런데 뮤스. 너는 학교에 다닐 생각 없니? 너 정도면 공과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 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학교? 글쎄..." 솔직한 뮤스의 생각으로는 이곳의 대학에서 그가 배울 것은 없다는 결론이었다. 하지 만 그런 그의 생각을 흔들어 놓을 만한 카타리나의 설득이 시작되었으니... "물론 이런 공학원의 대표정도 되는 너에게 대학의 공부가 필요 없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아직 어리지 않니? 우리들의 나이에는 일이나 공부도 중요하지만 친구도 필요한 거라고!" 카타리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부터 옆집의 개똥이와 덕구를 빼면 친구라곤 전무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 세계로 빠지면서 사춘기가 다가 왔는지 혼자 쓸쓸함을 느끼던 뮤스는 그녀의 말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짧은 시간에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 것 같아. 일단은 공학원도 초반이니 내 도움이 많이 필요 할 것 같고 말이지. 크라이츠 누님이나 켈트 아저씨와 상의를 해봐야 겠는 걸?" "호홋 그렇겠지. 아무튼 너와 함께 학교 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 아차. 오늘은 너 무 늦은 것 같다. 나 이만 가볼게 아버님과 언니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에 뮤스는 가슴 한켠이 허전해 졌다. 그 녀의 뒷모습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그녀가 남기고 간 말을 되 세기고 있 었다. ['너와 함께 학교 다니면 재미있을 것같아.'라고?] (16) 뮤스 학교가다. -호호호호호!! 전뇌거 발표일로 부터 두 달 후, 공학원에서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메아리 치 고있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하던 드워프들은 안구 보호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 리며 집무실 쪽을 바라 보았다. 아마도 크라이츠의 웃음 소리 이리라. 언젠가 부터 공학원의 한켠에는 크라이츠의 집무실이 마련되어 졌다. 꼭 집무실이 따로 필요 한 것은 아니었지만 크라이츠의 '사회적 시선 예찬론' 에 의해서 따로 만들 수밖에 없었 던 것이었다. 그녀의 집무실답게 언제 만들어 졌는지도 모를 골동품 가구들이 집무실 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고, 방의 한켠에는 커다란 금고가 놓여져 있었다. 책상에 앉은 크라이츠는 연신 즐거운 듯 자신의 앞에 쌓여있는 수많은 종이를 보며 싱글거리 고 있었다. 뮤스는 쇼파에 앉아서 '공학원 장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호호호 뮤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짭짤한걸? 벌써 예약이 이렇게 밀려버리다니." "아...네... 행복 하시겠네요. 크라이츠 누님." 조금의 씁쓸한 기분이 담겨져 있는 뮤스의 목소리였다. 뮤스는 전뇌거의 예약에 그다 지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저 작업실에서 주문된 예약 량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는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물론 로데오와 라이노는 자동 화 기기들의 완성으로 이것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다지만 포센트는 순수한 수작업 이 었기에 드워프 들이 앞으로 짧아야 한달간은 일에서 눈을 때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누님. 이정도의 판매량이면 몇 개월 안으로 순수 이익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아 요. 그때 부터는 연구에도 눈을 좀 돌려야 겠어요." "흠흠... 뮤스야." "네?" "그건 네가 아직 장사를 몰라서 하는 말이란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자뭇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크라이츠는 자신이 가진 자랑스런 상도에 대하여 널어놓 기 시작하였다. 물론 타인의 귀에는 크라이츠의 말이 대단하게 들리기 보다는, 오히 려 지독하게 들릴 뿐인 내용들이었다. "흠흠... 장사를 한다는 것은 애초 투자의 수배를 뽑아야 본전을 했다고 할 수가 있 는 거란다. 특히 우리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아닐 수 없지... 개발에 필요했던 고뇌와,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쏟아 부은 정렬! 장사를 준비하기 위 한 기나긴 여정! 시간의 투자! 등을 돈으로 환산을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거든. " 이후로도 크라이츠의 상도론이 계속 되자 뮤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부에 적혀 있 는 장부에 적혀있는 투자 비용들을 하나씩 지워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과 는 별개로 자신의 말에 심취하여 계속 떠들고 있는 크라이츠였다.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비싼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자식들을 대학 이라는 굴레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안달하겠니? 절대 아니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 그 대학이라는 존재가......" 장부 정리를 하던 뮤스의 귀에 대학이라는 말이 들리자. 뮤스는 장부에서 눈을 돌려 크라이츠를 바라보았다. "저... 크라이츠 누님." "어? 왜그러니? 내 이야기가 재미없니?"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고개를 갸우뚱하던 크라이츠는 뮤스에게 얼굴을 드리밀며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계속 들어봐! 음... 어디까지 했더라... 아 대학이야기 까지 했 군..."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지려고 하자 뮤스는 다급하게 말했다. "누님. 그 대학이란 곳 말이예요!" "어? 대학? 아 그리고 보니 뮤스는 대학이란 곳을 모르겠구나?" "아뇨. 얼마 전에 이곳에 있는 대학에 가본 적이 있어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라이츠는 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너... 대학에 가고 싶은 거 아니니? 하긴... 이 도시의 대부분 네 또래 아이들 이라면 대학이나 군소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지..." "아...아뇨. 꼭 다니고 싶다기보다는... 나중에라도 여유가 생긴다면...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아직 공학원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아는 뮤스는 대놓고 대학에 다 니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크라이츠가 한동안 고심하더니 말했다. "뮤스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나중에 여유가 언제 생길 줄 알고 대학에 간 다는 말이니?" "네... 그렇죠..." 크라이츠의 말에 아쉬움이 풀풀 날리는 얼굴을 하며 장부로 얼굴을 돌렸지만 그녀는 피식 웃었다. "지금이 가장 여유가 있을 때 같구나. 전뇌거도 발표했겠다... 다음 제품 발매까지는 물건 판매분야에서 네가 할 일이 없는 듯 한걸?" 그녀의 말을 듣은 뮤스는 정리하던 장부를 덮으며 크라이츠를 바라 보았다. 그녀는 기지게를 펴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계약서를 살펴보는 척 하며 말했다. "대신 대학교 학비도 장부에 포함시킬 거다." "헤헤 네!" 대학의 학비라고 해봤자 전뇌거 한대를 팔아서 남을 이윤정도였다. 애써 학비를 거들 먹거리며 돈만 밝히는 듯이 보이는 눈앞의 드래곤이 남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뮤스 에게는 이해심 많은 친누이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차차. 그런데 말이야. 입학을 하려면 그에 준 하는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말을 흐리는 크라이츠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자격이 필요 한 거죠?" "이곳에서는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에 씨니어 스쿨을 졸업해야 한단다. 물론 그곳을 졸업하지 않더라도 시험을 봐서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너는 공학을 빼면 시체지 않니? 이쪽의 역사나 문화, 정치, 사회등을 알리도 없고..." "그럼 공부를 해야겠네요?" "흠... 상식적으로는 그래야 하지..." "상식적으로라니요?" "대학을 가서는 필요 없는 과목이니 모르고 입학을 해도 크게 지장은 없을 것 같은 데... 맞다!" 문득 방법이 떠올랐는지 자신의 책상에 놓여있는 서류 뭉치를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자 계약서 한 장을 들어올리며 쾌재를 불렀다. "이거야! 호호호. 이거면 입학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 "게약서요?" 계약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느낀 뮤스였지만 곧 설명해 줄 것을 알 았기에 조용히 있었다. "호호호. 내 생각이 맞았어. 햄브리겐 대학의 총장도 우리 공학원에 포센트를 주문했 구나. 이대로 기다린다면 육 개월은 지나야 받을 수 있다고 통보 한 후에 네 입학을 조건으로 무료로 즉시 양도해 준다고 제의를 하면 군침이 돌겠지?" "그...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그깟 등록금으로는 포센트의 바퀴 네 개밖에 못살걸? 무료로 즉시 양도해 준다면 누 가마다 하겠니?" "아... 네..." 대학에 즉시 입학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쁘기는 했지만, 조선에서도 집안의 배경으 로 부정입당을 했던 그가 이곳의 세계에 와서 까지 부정 입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 니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럼 이것들은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다음은 공학원 확장건이야..." "공학원 확장이라니요?" 손에 들고 있는 계약서들을 책상에 털어 정리하며 말했다. "라이델베르크가 꽤나 큰 도시이긴 하지만 제국의 일부분 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제 국 전체에 공학원의 지점을 만들어 둔다면 곳곳에서 나는 재료들의 수급도 쉽고, 판 매망도 늘리는 것이 되니 좋을 듯 싶구나..." "그렇겠군요. 역시 돈버는 일로 누님을 따라갈 사람은 없을 거예요." "호홋. 당연히 사람 중에는 없겠지. 그럼 너역시 동의 하는 것으로 알고, 제국 전체 에 공학원 지점을 만들도록 추진할게. 또 다섯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사람들도 더 뽑아야 겠고..." 머리를 긁적이던 뮤스는 한숨을 나직히 내쉬며 말했다. "헤휴... 그런 것들은 그냥 누님께 모두 맡길게요. 그럼 부탁드려요." "하긴 장사는 내가하는 거지... 그럼 내가 알아서 하마..."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39 이른 아침 햄브리겐 대학교의 교문 앞을 질주하는 이인승의 빨간 전뇌거가 있었다. 공학원에서 주문 받기 시작한 이 로데오라는 기종의 전뇌거는 이미 젊은 층의 귀족들 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기에 수많은 학생들은 선망의 눈길로 질주하는 전뇌 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로데오의 주인인 뮤스는 그 눈길이 불편하기만 했다. 아침부터 물고 늘어지는 크라이츠의 고집만 아니었다면 전 도시 내에서 운행하 고 있는 학교 마차를 타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시각 예찬론' 의 신봉자인 크라이츠의 고집을 꺾기에 뮤스는 너무나 힘없는 존재였다. 정문을 들어서자 처음 이 곳을 왔을 때 한번 인사했던 히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길 한편으로 로데오를 세 우고서 그를 불렀다. "히안!" 공부벌레답게 등교 길에도 책을 읽던 히안은 어디선가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력이 여간 나쁜 것이 아닌 히안이 뮤스를 알아 보기에는 꽤나 시간 이 걸렸다. "어? 너는 뮤스 아냐? 카타리나 만나러 왔어?" "하하 아냐! 오늘부터는 나도 이곳의 학생이야!" "어? 이상한걸? 우리학교는 매년 초가 아니면 입학이 안돼는데?" "아...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히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뜨끔한 뮤스였지만 부정입학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둘러댈 만한 변명 거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돕는지 히안의 눈에 로데오가 보인 것이다. "와! 이거 로데오라는 전뇌거 아냐? 얼마전에 라이델베르크 신문에 나온 광고를 봤 어! 그런데 벌써 실물을 볼 줄이야! 뮤스 너 대단한걸? 엄청난 집안의 아들 아냐?" 히안의 말에 가슴을 쓸어 내린 뮤스는 그냥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히안 빨리 타라 이러다 지각하겠다. 난 첫날부터 지각하기는 싫거든?" "하하. 내가 전뇌거를 타보다니." 히안 역시 자신도 모르는사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수업이 있는 건물로 이동하 기 시작했다. 신문의 광고대로 마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전뇌거 가 신기한 듯 내부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을 때 히안을 향해 뮤스가 물었다. "다른 친구들은?" "아 이미 와있거나 곧 도착하겠지 뭐. 폴린이면 몰라도 세이즈나 카타리나는 지각을 거의 안하거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로데오는 이미 연금술학부의 건물앞으로 그들을 데려 다 주었다. 로데오에서 내린 뮤스는 두 번째 와보는 건물이었지만 감회가 새로운지 건물 앞에서 크게 한숨을 들이쉬어 보고 있었다. 뮤스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연 금술학부는 다섯 개의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학년 마다 250명의 신입생을 받지만 학생들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50명씩 반으로 나눈 것이다. 물론 카타리나와 나머 지 친구들은 같은 반이었고, 뮤스 역시 크라이츠의 도움으로 그들과 같은 반으로 배 정을 받을 수 있었다. 뮤스는 히안과 헤어져 수속을 하기 위해 반사무실을 찾아갔다. 반사무실은 일층에 있어 찾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노크를 한 후 반사무실로 들 어가자 젊은 여성 둘이 업무를 보고 있었고, 뮤스 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금발의 짧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뮤스가 들어옴을 느꼈는 지 책을 보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는 물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오늘 이곳에 배정 받은 뮤스 드라켄 이라고 하는데요?" "아! 미리 연락 받았습니다. 투트가르에서 이곳으로 편입하셨다고요?" "아..편입요? 네!" 편입이 뭔지는 몰랐지만 크라이츠의 안배라고 생각한 뮤스는 긍정의 표시를 하였다. "하하 반갑습니다. 전 반대표인 비레지안 이라고 합니다. 연금술학부 3학년이지요. 앞으로 계속 봐야 할텐데 그냥 빌이라고 부르세요." "네 고마워요." "마침 오늘 1학년 소집시간에 제가 전달사항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그때 저와 함 께 들어가도록 하죠." "네. 마음써주셔서 고마워요." 빌의 도움에 뮤스가 길게 읍을 하자 그의 인사 방식이 어색한지 몸을 어찌 해야할지 몰라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수업을 알리는 듯한 종소리가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자 뮤스는 빌과 함께 그가 배정 받은 반으로 걸었다. 그는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는지 읽던 책을 가슴팍에 안고 있었 다. 뮤스의 앞으로 걸어가던 빌이 발걸음을 멈추자 뮤스도 다 왔음을 느꼈는지 따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당을 마친 이후로 몇 년 동안 학교라는 곳에 다닌 적이 없는 뮤스는 세삼 스럽게 긴장이 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긴장되어 얼굴이 굳어 있 는 뮤스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후훗 뮤스군 꽤나 긴장이 되어 보이는데요? 꼭 산 송장 같군요?" "아..아네.. 하..하.." 나름대로 긴장 좀 풀라고 던진 어설프기 그지없는 농담에 뮤스 역시 어설프기 그지없 는 웃음을 지어 내고 있었다. 이어 빌은 반의 문을 열며 들어가라는 몸짓을 했고, 뮤 스는 자신이 배정 받은 반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교실은 뮤스의 생각보다는 넓었다. 의자와 책상이 붙어있는 일체형 걸상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불편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50명의 남녀 학생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카타리나와 그의 친 구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에 받아 본 뮤 스는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이 시집가는 새 색시 마냥 얼굴만 붉히고 있었 다. 정면을 차마 응시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뮤스는 귀넘어로 빌의 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 여러분 오늘도 모두 모이셨군요.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릴 새로운 친구가 있 습니다. 이 학생은 투트가르에서 우리 학교로 편입한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앞 으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뮤스군? 간단히 소개 좀 하실래요?" 빌의 부탁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뮤스는 더욱 얼굴만 붉혔다. 하지만 나름 대로 용기를 얻었는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처음이지만 앞으로 잘 지내고 싶습니 다." 버벅거리는 뮤스의 소개에 가장 뒤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장난스럽게 외쳤다. "하하 엄청난 부끄럼쟁이구나? 장가가는 날인 줄 아는 거야?" 어린애 장난 같은 그의 말에 더욱 얼굴을 붉히는 뮤스를 보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반의 학생들은 웃고 있었다. 빌이 수습을 하기 위해 주변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자자 처음온 친구에게 너무 장난치지 말고. 아 저 뒤에 빈자리가 있으니 들어가서 앉으세요." "네." 빌의 말대로 카타리나의 바로 옆자리에 빈 책상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빈자 리를 만들어 놓았으리라 생각한 뮤스는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를 보며 빙글빙글 웃으며 폴린이 말했다. "야. 이거 완전 다른 사람 같잖아? 원래 무대 공포증 같은거 있니?" "아냐. 그냥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처음부터 이게 무슨 망신이냐. 그것도 카타리나 앞에서... 설마 카타리나도 날 비웃 진 않겠지?] 세상 일은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카타리나가 웃으며 말했 다. "호호. 나도 뮤스가 이런 걸로 당황 할 줄은 몰랐는걸? 정말 표정 웃겼어! 그나저나 누님과 상의 해본다더니 벌써 입학을 했네?" [윽!] 걱정을 하고 있던 카타리나의 말에 가슴이 비수에 찔리는 듯 했지만 애써 숨기며 말 했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어." 이들이 열심히 떠드는 순간에 반대표인 빌이 전달사항을 말하고 있었다. "자 여러분 드디어 본격적인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하면 뭐가 생각나시죠?" 빌의 지나가는 질문에 뮤스를 당황하게 만든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이 반 의 분위기 메이커인 듯 쇼맨십이 강한 학생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을 축제 아니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기말 학력평가 시험 전에 매년 열리는 가을 축제입니다. 올해 역시 우 리의 라이벌 학교인 카이젠 대학교와 대항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세한 것은 동호회 회실로 전달 되니 그쪽에서 확인하세요." 어느덧 이야기를 접고 빌의 전달사항을 듣던 뮤스가 그의 옆에 있는 히안에게 물었 다. "히안. 축제라니? 뭘 하는 건데?" 히안은 첫 수업 준비를 하는지 가방을 싸며 말했다. "투트가르에서는 축제도 안 하냐? 아직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곳 라이 델베르크에 대학교가 두 곳인 것은 알고 있겠지?" "어. 물론 알고있지." "그래 그 중에 한곳이 카이젠 대학교야. 그곳은 여기 햄브리겐 대학교와는 다르게 귀 족층의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지. 그래서 무척이나 콧대가 높고 잘난 척을 많이 하거든. 물론 입학 자격은 별 다른 점 없지만 이상하게 귀족층의 아이들이 그쪽으로 많이 가더라고." 뮤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히안은 가방을 다 쌓는지 책상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반대로 평민 아이들이 많은 우리 학교와는 라이벌 관계 같은 사이가 된 것이 지. 아! 나머지는 카타리나에게 물어봐 난 첫 수업이 있어서 이만 가야 하거든?" "어.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친구들에게 급하게 인사를 하고 서 손을 흔들며 반을 빠져나가는 히안이었다. 그가 나간 후 폴린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은 언제나 저 모양이라니까 뭔 공부에 원수를 졌나. 무려 24학점이나 듣다 니..." 이미 이곳의 학점제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뮤스는 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히안의 말대로 옆에 있던 카타리나가 계속 해서 설명해 줬다. "우리는 너와 수업시간이 같으니 상관없어. 내가 계속 설명해 줄께. 게다가 카이젠 대학교와 우리학교는 설립연도까지 비슷해서 총장들도 서로의 자존심의 대결 무드인 것이지. 그래서 매년 이런 저런 시합으로 우열을 가린단다." "아! 이제야 이해되는군." 투덜거리던 폴린이 말했다. "아마 너에게는 재미있는 경험이 될거야. 너도 꽤나 운이 좋은걸? 입학하자마자 축제 를 경험하다니 말야. 뭐 그 재수 없는 카이젠 녀석들 얼굴짝 보는 것만 뺀다면 정말 유쾌 할건데 말야." 폴린은 유난히 카이젠의 학생들을 싫어하는 듯 했지만 아직 그쪽의 학생들을 만나보 지 못한 뮤스는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폴린이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아참! 그 재수 없는 바르키엘 녀석도 이번에 출전하겠군? 그 녀석 아직도 널 따라 다니니?" "글쎄 요즘은 좀 뜸하던걸?" "나 같으면 그 녀석 엉덩이를 걷어차 줬을 거야. 그 느끼한 얼굴에...웩!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 왜 너 같은 평민을 좋아하나 몰라? 물론 조금 예쁘긴 하지만 말야. " 폴린의 과장된 말에 푸훗하고 웃어 버리는 카타리나였다.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을 모 르는 친구들은 당연히 귀족의 자제가 그녀를 따라 다니는 것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뮤스는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 자 뮤스의 마음이라도 안다는 듯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세이즈가 뮤스에게 설명 해주었다. "바르키엘은 카이젠 대학에 다니는 아이인데 무려 이년동안이나 카타리나를 따라 다 니는 아이야. 뭐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잘난 척을 하는게 흠이지..." [카타리나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라고? 흠...] 세이즈의 말을 생각해보며 알지 못할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폴린이 세이즈를 향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그 녀석이 조금 잘난 척 한다고? 아무튼 천사표인 세이즈양의 마음에는 악이란 존재는 항상 없구나? 너 그렇게 살면 세상 힘들게 살거야! 가끔은 악인들도 등장해 줘야 한다고!" 폴린의 흥분에 뮤스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하는 세이즈였다. 뮤스가 기분 을 다른곳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자 이미 다른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 갔는지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후 뮤스 일행 역시 수업시간이 다 되어 왔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금술학부 건물 밖으로 함께 나온 뮤스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알다시피 난 그냥 카타리나 네 수업 시간에 다 맞춰서 자세히 몰라." [바보같이 무작정 카타리나 시간표에 맞춰 버리다니...] 스스로를 힐책하는 뮤스였지만 애초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카타리나였다는 것을 깨닫 게 되자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보자... 첫 수업은 운 좋게도 교양 과목인걸? 호신술 과목이야. 우리 연금술 학 부생들에게는 몇 안돼는 교양 중 하나지. 필수과목이 너무 많거든?" "아 그렇구나. 호신술이라..." [자신의 몸을 지키는 방법이라... 뇌동체술법 같은 건가?] 호신술이라는 과목에 대해 생각 좀 하던 뮤스에게 폴린이 말했다. "뭐하니? 빨리 가자 이래봬도 학교가 꽤나 넓어서 걸어가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단 말 이야." 전뇌거를 타고 가면 금새였지만 이인승인 로데오기종이었고 게다가 아직 발매되지도 않은 로데오를 타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뜨거울 것 같았기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카타리나와 캠퍼스를 걸어 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큰 대로를 따라 십분 여를 걸어가자 드넓은 연무장이 보였다. 카타 리나의 말로는 기사학부에서 쓰는 연무장이지만 오늘처럼 교양과목이 있는 날이면 일 반 학생들이 와서 수업을 받는다고 했다. 연금술학부만 알고 있던 뮤스는 그 이외에 도 기사학부, 상경학부, 외국어학부, 마법학부등 여러 가지 분야의 학부가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존재와 동시에 국력의 척도가 되는 기사학부와 마법학부는 대학마 다 둬야한다는 황제의 엄명에 따라 제국의 모든 대학에는 기사학부와 마법학부는 필 수적으로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40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38 [3]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0 세명의 친구들과 연무장에 도착한 뮤스는 이미 모여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여학생이었다. 남자들 보다 혹시라도 모를 괴한들에 대한 대비로 여학생들 이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오십 여명의 학생들 중 남자는 불과 열 명 남짓 할 뿐이었 다. 수업이 시작되려는지 연무장의 옆에 있는 건물에서 간편한 옷차림의 남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키는 거의 2멜리에 달했고 약간 붙는 듯한 셔츠에 근육이 그대로 드 러나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는 모여있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왔겠지? 우선 출석은 다 왔다고 믿고, 지난주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치한퇴치 방법에 대한 수업을 하겠다." 말을 마친 후 자신의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지만 남학생들은 그의 눈을 피하는 듯 보였 다. 교관이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까딱하며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 남학생은 걸렸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 를 축 늘어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학생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자 그의 말은 계속 되었다. "자. 이 남학생이 오늘 여러분들을 위하여 거리를 방황하는 고독한 깡패가 되어 줄 것이다. 우선은 내가 시범을 보여 줄 테니 여러분들은 잘 본 후 옆의 학생과 연습을 해보기 바란다." 수많은 여학생들 앞에서 잘 보이려는 듯이 가슴의 근육을 몇 번 튕겨 보인 교관은 나 와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남학생을 보며 말했다. "자네 동네의 깡패들은 언제나 그렇게 자신 없는 모습인가? 가슴을 펴보라구!" 교관의 말에 약간이나마 위축되어 있는 몸을 펴보았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움츠리 고 있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자! 첫 번째는 깡패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이다. 학생 날 뒤에서 끌어안아 보게."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에 뒤에서 끌어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학생이 교관을 끌어 안자 체격의 차이 때문인지 두 손이 서로 닿지도 않고 있었다. 고목 나무에 앉은 매 미랄까? 그런것에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교관은 학생들에게 계속 설명만 할뿐이었 다. "자 이럴 때는 발의 뒤꿈치로 상대의 발등을 밟는다. 그 다음 손목 관절의 이곳을 잡 고 힘을 준 후 뒤로 꺾어 버리는 것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설명대로 학생의 발등을 밟자 학생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가 발을 살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손목을 잡은 후 팔을 뒤로 꺾었다. 그것을 구 경하던 남학생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겁에 질려 있었고, 여학생들 역시 너무 하다 싶었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뮤스 역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너무 하는군. 아무리 시범이라지만 학생을 저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 학생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가슴을 펴며 씨익 웃고 있는 모습이 꽤나 느끼해 보였다. 교관에게 합법적 폭행을 당한 학생은 안타깝게 발을 잡 고 땅에서 뒹굴고 있었다. "자! 두 번 째는 손목을 잡고 놓지 않을 때이다. 학생 뭐 하는 건가? 다른 학생들이 기다리지 않나?" 땅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남학생을 재촉하자 남학생은 아픔을 꾹 참으며 다시 일어 났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는지 뮤스가 나섰다. "수업 도중에 실례합니다!" 그의 돌연한 등장에 교관은 시선을 돌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뮤스를 바라봤고, 세 친구들은 갑작스런 뮤스의 행동에 말릴 틈도 없이 당황하고 있었다. "자네는 처음 보는 듯한데?" "네! 오늘부터 이 수업을 듣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뭐 질문이라도 있는가?" "저. 교..웁!!!" 겨우 정신을 수습한 폴린이 뛰어 나오며 뮤스의 입을 막았다. "호호호 잘생긴 교관님 이 녀석이 화장실이 급하다는데요? 부끄러워서 말못하고 있다 가 도저히 못 참겠나 봐요!" "그런가? 그럼 잠시 다녀오도록!" 뮤스의 입을 막고서 겨우 친구들에게로 끌고 온 폴린은 큰일 날뻔 했다는 듯이 말했 다. "너 미쳤어?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만만한 녀석이면 다른 남학생들이 참고 있겠 니?" "그래도 저 죄 없는 남학생이 당하게 볼 수만은 없잖아!?" 카타리나 역시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 들며 말했다. "뮤스 너 정말 큰일 날뻔 한거야! 저 교관이라는 사람 왕년에 기사로 이름 꽤나 날리 던 사람이라고! 이곳에서 기사지망생도들을 가르치기도 한단 말야!" "게다가 학점이 구멍날 걸... 첫 수업부터 학점에 구멍 나고 싶진 않겠지?" 쐐기를 박는 세이즈의 말에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에 도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재수가 없을 뿐인 남학생의 관절은 이리 꺾이고 저리 꺾 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뮤스는 그저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근 한시간 정도 교관의 장난감이 되버린 남학생은 쉬는 시간이 되자 연무장의 돌 바 닥에 널부러져 있었으며 그의 친구들로 보이는 몇 명의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카타리나와 친구들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뮤스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저 미치광이 교관녀석은 사람이 이 모양인데 거들 떠도 안 보다니!!" "그러게 말이야!!" 어쩔 줄 몰라하는 여학생들의 목소리와 분노하는 남학생들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뮤스가 학생들을 헤치고 들어가서 누워 있는 남학생을 살펴보니 기절을 했는지 움직 이지도 않았고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뮤스가 끼어 들자 주변 학생들 중 귀 엽게 생긴 금발머리의 여학생이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제 동생 필로닌 좀 살려주세요! 네? 제발..." 마음이 급했는지 얼굴도 모르는 뮤스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도움을 구하는 여학생이었 다. 그 역시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곰곰히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다... 기절이라...] 방법을 강구하던 뮤스는 주변 여학생들의 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침 자신에게 도 움을 청했던 여학생의 블라우스의 가슴에 달려있는 브로치가 눈에 띄였다. [크라이츠 누님이 달고 다니는 걸 봐둔게 다행이군.] 그가 서슴없이 브로치를 얻기 위해 손을 여학생의 가슴으로 가져가자 그녀는 소스라 치듯이 놀라며 가슴을 가렸다. 사방의 학생들은 감히 대낮에 여성의 가슴을 노리는 이 대담한 변태(?)에게 시선을 모았고, 그제서야 급한 김에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짓이죠?" "아차. 죄송해요! 너무 다급해서... 가슴에 달린 장신구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브로치요? 브로치는 왜요?" "급하니 묻지 마시고 그냥 빌려주세요!" "아..알았어요." 뮤스의 급 한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고 브로치를 빼서 뮤스에게 건네주었다. 브 로치를 건네 받은 뮤스는 브로치를 들고 있는 손으로 뇌공력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브 로치에서 스파크가 일더니 잠시 후 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우선 높은 열로 소독을 해야겠지...] 주변에서 뮤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브로치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였지만 놀라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어 나는 것을 신기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잠시 뮤스는 브로치의 핀으로 필로닌이라 불린 학생의 열 손가락 끝을 빠르게 찌르기 시작했다. 그런 후 손가락을 짜내자 손가락의 끝에서는 검은 피가 몇 방울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뮤스의 행동에 놀라버린 여 학생이 뮤스를 밀치며 소리쳤다. "당신 미친 것 아니에요? 손가락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던 필로닌이 깨 어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어...어떻게...." "휴우..." 뮤스는 이제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땅바닥에 눌러 앉은 채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었다. 이때 화장실을 다녀 왔는지 저 쪽에서 카타리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뮤스! 무슨일이야?!" 카타리나를 보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이 부끄러운 듯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 다. "아...아냐. 자 금방 갈게 기다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자신에게 경이로운 눈빛으로 보내는 사람들을 헤치며 수업 받던 자리로 돌아오던 뮤스는 뭔가 잊은 것이 있는지 되돌아 자신의 동생을 안고서 눈물짓 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실례하지만 이것을 다시 돌려드리지 못했네요."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큰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뮤스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그가 건네는 브로치 만 받아 들뿐이었다. "그럼 동생 간호 잘 하세요. 전이만..." 뒤돌아 친구들에게 걸어가는 뮤스를 보며 여학생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뮤스가 돌아오는 것을 본 폴린이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혹시 저기 앉아 있는 여자 애 너의 씨니어 스쿨 동창인 가이엔 아니니? 그런 것 같 은데?" "아 맞다! 8학년때 같은 반이었어! 꽤나 착한 애였지. 귀족이었지만 언제나 수수했거 든. 집도 대단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학교 다녔었나?" 그녀들이 잡담을 할 때 머리를 긁적거리며 뮤스가 돌아왔다. 카타리나가 자신을 바라 보는 것으로 착각한 뮤스는 또 한번 얼굴을 붉혔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41 [2]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39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1 첫 수업을 아무런 소동 없이(?) 마친 뮤스 일행은 점심 식사를 위해 학생식당을 찾았 다. 학생식당은 공공시설답지 않게 꽤나 잘 꾸며져 있었고 깨끗했다. 가격도 쌌지만 무엇보다 식비를 한번 지불하면 얼마든지 더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학교 주변 의 식당보다 인기가 있는 비결이었다. 음식을 각자 먹을 만큼만 덜어서 자리 잡은 일 행들이었다. "카타리나. 매번 이 시간에 점심 식사를 하는 거야?" "응 보통 그렇지. 그런데 어떤 날은 수업시간이 안 맞아서 못 먹을 때도 가끔 있어." "아. 그렇구나... 그나저나 오늘은 언제 학교를 마치지?" "앞으로 수업이 두개 남아있어. 왜? 끝나고 해야할 일이라도 있니?" "아! 누님을 도와 드리러 가야하거든. 기게를 혼자 운영하시려면 힘드실 거야. 아저 씨들도 있지만 그래도 도와 드려야지." 공학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기 꺼려한 뮤스는 카타리나도 이해해주리라 믿었기에 공학원을 가게로 표현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호기심 많은 폴린이 이번에 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뮤스 너희 어떤 가게하니? 우리 집은 음식점을 하거든? 슈넬 레스토랑이라고 혹시 들어봤어? 이 부근에서는 꽤나 유명한 음식점이야! 전국적으로 걸쳐서 분점들도 가지 고 있거든. 투트가르에도 있을건데..." 세이즈도 궁금한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며 뮤스를 바라보았고, 슈넬 레스토랑이 얼 마 전 크리스티앙과 만났던 이층의 창문이 인상적인 음식점이라는 것을 기억해낸 뮤 스는 반갑게 그녀의 이야기를 받았다. "그랬구나! 나도 얼마 전에 한번 가본 적이 있어. 물론 음식은 못 먹고 나왔지만 말 야." "응? 음식점에 와서 음식을 못 먹다니?" "아 그럴 일이 있었거든." "다음에라도 온다면 내 친구라고 말하렴. 그럼 깍듯하게 맞아 줄 테니까! 그건 그렇 고 너희집은 어떤 가게를 하냐니까?!" "아... 대장간을 하고있어." 한순간에 대규모의 공학원이 대장간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뮤스의 말에 카타리나가 키킥거리며 웃었지만 그녀도 눈치는 빠른지 폴린의 다음 질문을 막아 주었다. "빨리 점심을 먹어야 다음 수업을 들어갈거 아냐? 빨리 먹자!" "아. 그렇지." 카타리나의 말에 일행들은 허겁지겁 식사를 끝낼 수 있었고 뮤스는 그녀에게 은연중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 수업은 뮤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카타리나와 들어본 적이 있던 필수과목으로서 히안은 이미 다른 과목들의 수업을 마쳤는지 다시 일행들과 합 류하게 되었다. 과목 이름은 연금술 개론이라는 과목이었는데 그때와 같은 교수가 들 어와 이런 저런 이론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도 꽤나 지루했는지 졸거나 딴 짓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뮤스 역시 잘못된 이야기들을 맞는 척 듣는 것도 고문 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세계의 화공학 수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따분했는지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자 신이 가지고 온 가방을 보았다. 학교에 오기 전 크라이츠와 켈트가 이것저것 넣는 것 을 보았는데, 학교 가는데 다른 것은 필요 없다며 그들을 만류했지만 아랑곳하지 않 고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가방에 아침부터 뭘 그렇게 넣으신 거지?] 궁금함을 느끼며 가방을 살포시 열어본 뮤스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잠잠히 있던 뮤스가 움찔 놀라자 옆에 앉아있던 카타리나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며 어색한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공구들은 왜 넣어 둔거야.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들은? 분명 실험도구들은 켈트 아저씨일거고... 보석은 크라이츠누님...] 크라이츠는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뮤스의 가방에 말도 안되는 양의 보석을 넣은 것이고, 켈트는 뮤스가 필요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갖 가지 실험 도구들을 넣어 놓은 것이었다. 사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공학원에 있는 모 든 종류의 광석들까지 포함시켰으리라... "뮤스 무슨 일이니?" "아... 집에서 안 가지고 온 것들이 있어서 말야. 깜짝 놀랐을 뿐이야..." "그렇구나." 이때 강의를 하던 교수가 그들이 떠드는 것을 발견했는지 호통을 쳤다. "뒤에 학생들! 내 수업을 듣는게 재미없으면 그냥 잠이나 자세요! 떠드는 것이 전 세 상에서 제일 싫습니다!" 교수에게 지적을 받은 카타리나와 뮤스는 고개를 푹 숙였고,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 뮤스는 카타리나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활달하기만 한 카타리나 는 고개를 숙인 채로 뮤스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키킥... 이 수업은 매일 이래." (17) 파티 저녁 식사를 할 때쯤 되자 하루의 모든 수업이 끝나게 되자 일행들은 각자 집에 들린 후 뮤스의 입학 축하파티를 위해 폴린의 음식점에 모이기로 의견을 맞추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카타리나는 뮤스와 같은 방향이었기에 함께 전뇌거 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저녁의 공기는 이미 싸늘해진지 오래여서 열 려진 전뇌거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춥다고 느낀 뮤스는 전뇌거의 창문을 닫았 다. 공학원에서의 만남 이후로 처음 카타리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 이어서 그런지 조 금 설레이는 기분도 들었지만 역시나 전뇌거안의 밀폐된 공간이었기에 둘의 사이에 어색한 공기만 감돌뿐이었다. 이때 카타리나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뮤스를 향해서 물었다 "뮤스 오늘 학교 어땠어?" 카타리나가 말을 걸어오자 내심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뮤스로서는 두 번 째 겪어 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감이었기에 더욱 적응하기 힘들었 기 때문이다. "어? 뭐가 어땠냐니?" "학교수업이나 친구들, 또는 분위기 같은 것들 말이야." "아! 처음 수업인 교양 호신술만 빼면 괜찮았어. 다른 수업도 지루하긴 했지만 견딜 만 했고." "후훗. 그럼 다행이다. 솔직히 걱정을 좀 했거든. 내가 널 학교로 끌어들인 것 같은 데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나해서." "별걱정을 다하는구나." "뮤스 저 코너에서 우회전을 해야해." "자. 우회전..." 카타리나가 설명하며 찾아가는 가는 거리에서 뮤스는 왠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느낌의 정체를 곧 알 수 있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언덕 위에 있던 페릴의 저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예전에 나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그런데 너희 집은 어디지? 이곳엔 저 건물 밖에 없는걸?" "호호호. 당연한거 아니니? 저곳이 우리집이니까." "너... 넌 평민이라면서?" 뮤스는 적지 않게 놀라며 카타리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헤헤. 부탁이 있는데, 나는 네가 공학원의 사람이라는 것을 숨겨줄 테니까 너도 내 가 귀족이란 것을 좀 숨겨 줘! 응? 어차피 서로 비밀을 하나씩 알고 있는 거니까 동 등한것 아니니? " "알았어. 그렇게 하자. 그렇다면 넌 내가 크리스티앙님, 그리고 페릴님과 아는 사이 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뮤스의 물음에 카타리나는 새침하게 웃으며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헤헤! 실은 알고 있었지잉!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초대장을 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 으니까. 너에게 숨기는게 미안해서 같이 오자고 그랬던 거야." 애교스럽게 말하는 그녀는 사실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오히려 아름다 운 모습이랄까. 하지만 그녀가 노력하는 애교 비슷한(?) 행동에 그저 웃어넘길 수밖 에 없었다. "그럼 페릴님도 내가 너와 친구인걸 알고 계신거야?" "아니!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야. 언니 귀에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러면 아마 널 만나 보자고 안달이셨을걸? 전뇌거 발표회 이후 로 공학원의 대표가 내 또래의 아이란 걸 알고 엄청나게 궁금해하시고 계시니까. " "하하 그렇구나." "뮤스 저쪽에 세워 줘! 만약 이걸 타고 들어온다는 걸 본다면 집에서 혼란이 생길거 야. 안그래도 남자친구 안만드냐고 아버님께 시달리는데 이 사실을 알면 아버님의 오 해로 괴롭힘에 잠을 못잘걸? 이렇게 말야!" 카타리나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짐짓 엄살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모 습이 정말 웃기게 보였는지 뮤스는 크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설마 그 정도 일려고. 그나저나 애들이랑 약속시간에 늦겠다. 나도 공학원 에 들렸다 와야하니까 이만 가볼게." "아 그렇겠구나. 그래 그럼 나중에 음식점에서 보자!" "응!" -타깍! 카타리나는 가볍게 전뇌거에서 내려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의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 겼고, 뮤스는 그녀가 정문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전뇌거를 돌렸다. 그녀가 옆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닫자 왠지 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잠시 후 다시 만난 다지만 어디까지나 허전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 하긴 조선에서 이런 느낌을 받아볼 시간이나 있었었나. 흠. 좋아하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난처하군. 아차차! 가방에 있는 것이나 돌아가서 따져야 겠어. 이왕이면 책이나 사서 넣어 주시지... 이 런 건 어디다 쓰라고..." 문득 가방 속의 어이없는 내용물들이 생각이 나자 전뇌거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였 다. ######################## 뮤스가 공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콧노래를 부르며 포센트의 마무리 공정 작업을 하고 있는 브라이덴을 볼 수있었다. 포센트 내부 장식은 고급 목제로 이루어 져있기 때문에 나무를 가장 잘 다루는 브라이덴이 마무리를 맡고 있는 것이었다. "브라이덴 아저씨 다녀왔습니다!" 대패로 내부장식용 목재를 밀던 브라이덴이 뮤스의 목소리에 하던일을 잠시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껄껄! 다녀 왔나? 그래. 학교는 어땠어?" "하하 그냥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왜 다른 분들은 안보이시죠?" "말도 말게나! 이제 포센트의 본체 제작은 끝나고 마무리 공정만 남았기 때문에 나만 이러고 있는 것이지. 하긴 그 동안 내가 놀고 있었으니 일을 분담하기로 한 이상 어 쩔 수 없지." "아. 그럼 나머지 분은 쉬고 계신가 보네요?" "켈트 형님과 나머지 사촌들은 한잔 걸치러 나갔다네. 크라이츠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보석을 주셨거든? 물론 보석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 은 마다하면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껄껄껄!" 역시 켈트의 사촌답게 넉살좋은 드워프였다. 요 몇 일간 밀린 포센트의 주문량이 무 려 백 여대가 넘었고, 비교적 중저가인 라이노와 로데오는 그 몇 배의 주문량이었다. 그런 연유로 드워프들만 불철주야로 근 한달째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쉬엄쉬 엄 하라고 만류를 해보기도 했지만 좋은 물건을 만들어 넘기는 것이 그들의 낙이라고 고집하자 더 이상 말릴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다시 대패를 잡으며 콧노래를 부르 며 말했다. "룰루... 크라이츠님은 저택에 계시니 들어가 보면 만날 수 있을 게야." "네! 그럼 수고하세요!" 저택으로 들어오자 언제 고용했는지 모를 하인이 뮤스를 맞아 주었다. 크라이츠의 철 두철미한 성격은 공학원의 전반을 완벽하게 관리를 했는데 공학원에 필요한 부대 설 비를 완비 부터 제국의 사업권 획득 등의 사회적 절차까지 완벽히 처리 해버렸다. 뮤 스는 드워프들과 크라이츠라는 존재가 한없이 든든하기만 하였다. "뮤스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집사로 오늘부터 일하게된 바이멀이라고 합니 다." "반가워요 아저씨. 크라이츠누님은 어디계시죠?"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 저녁 식사 준비할까요?" "아뇨. 선약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거든요. 그럼 실례할게요." "네 뮤스님."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 뮤스는 서류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크라이츠를 볼 수 있었 다. 하지만 마냥 즐거운지 계약서류 하나 하나를 검토할 때마다 키스를 퍼붓고 있었 다. "크라이츠 누님 다녀왔습니다." "어머 뮤스 다녀왔구나? 여자친구는 만들었니? 호호호! 누가 뭐래도 캠퍼스의 낭만은 커플이잖아?" 크라이츠의 말에 찔리는 바가 있어 얼굴을 살짝 붉히던 뮤스는 애써 손을 저으며 부 정했다. "여..여지친구는 무슨... 그..그런거 없어요!"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얼굴을 붉히면서 그러니? 그리고 여자 친구는 부끄러운게 아니란다. 아무래도 수상한걸?" "누..누님 저 약속이 있어서 이만 나가 볼게요!" 더이상 크라이츠의 질문공세를 받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뮤스는 급히 크라이츠에게 인사를 하며 서재의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크라이츠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만 했는데... 서재에 멍하니 남아 있는 크라이츠는 의미를 알수 없는 미소를 띄며 말했다. "호호호. 이번 유희는 여러면에서 재미있겠는걸? 대륙 최고의 사업부터 풋풋한 청춘 의 로맨스까지... 그나저나 저 녀석 굉장한 지식의 소유자라고 해봤자 아직은 애구 나. 물론 처음보다는 많이 점잖아지긴 했지만..."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2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뮤스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은 것을 깨닫자 바삐 길을 나 섰다. 폴린의 음식점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뇌거는 두고 가기로 했고, 가방만 바삐 매고 나가는 중이었다. 가을이라 해는 이미 져버렸고 어둠만이 내 려앉아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쓸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친구들이라는 존 재가 새로이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발걸음을 바삐 하자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폴린의 가게에 도착하게 되었다. 예전 그대로 이층의 대형 유리창이 제일먼저 뮤스의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전에 본적 있는 점원이 보였다. 그 역시 뮤스 를 기억하는지 이번엔 깍듯하게 맞이했다. "손님 또 오셨군요? 오늘도 이층으로 자리를 드릴까요?" "아..아뇨 오늘은 폴린의 초대로 왔는데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는 점원이었다. "아! 뮤스 도련님이신가 보군요?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다 른 분들은 이미 와 계시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 걱정 마시고 이곳에서 일 보시죠." 자신이 돈을 내는 손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뮤스는 미안했기 때문에 점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이층의 창가에 자리잡은 친구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테이블의 앞에 서서 처음 보는 교복의 남학생이 카타리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기묘한 분위기였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저 남학생 옷은 우리학교의 것은 아닌데?] 이때 반대쪽 테이블의 그와 같은 교복을 입은 네 명의 학생들이 보였는데 그중 한 여 학생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 바르키엘!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어서 오라구!" [바르키엘? 바르키엘? 아! 카타리나를 따라다닌다는?] 뮤스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세이즈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는지 희색을 띄며 손 을 흔들었다. 카타리나 앞에 서있는 바르키엘은 세이즈의 행동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 다. "이건 또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걸? 이번에도 평민 나부랭이인가?" 약간의 비아냥거리는 기미가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걸자 뮤스는 약간 기분이 언짢아 졌다. "평민이라니? 양반이다 이녀석아." 초면에 의외로 강경한 대답이 나오자 그런 뮤스가 약간 이상해 보였는지 세심하게 살 펴보기 시작했다. 특이할 정도로 순수한 검은 머리카락에 크지 않은 체구, 약간은 뭉 툭한 콧날. 일반 제국 사람들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바르키엘은 금새 그 런 생각을 지우며 비웃기 시작했다. "카타리나 네 주변에는 별 이상한 애들이 다 모이는구나. 네 취향이 이렇게 특이한 거냐? 공부벌레 평민 히안 녀석에, 벙어리인지 구분도 못할 세이즈, 그리고 남잔지 여잔지 모를 폴린. 하하하! 이번엔 이 괴상하게 생긴 녀석?" 바르키엘의 말에 화가 났는지 카타리나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너 따위가 상관 할 바가 아니잖아? 재수없는 귀족녀석 보다는 이쪽이 백배 나아! 그 리고 너보다 잘 생겼다는건 너도 인정할텐데?" 카타리나의 갑작스런 말에 바르키엘은 흠칫했다. 하지만 정작 바르키엘보다 더욱 놀 란 사람은 뮤스쪽 이었다. [카타리나도 화가 나면 저런말까지 서슴없이 하는구나...] 하지만 제눈에 콩깍지라고 했던가... 그것 마저 매력으로 느껴졌지만 그저 좋은 감정 이겠지 하며 넘기고 있었다. 바르키엘은 그녀의 말에 수치심을 느꼈는지 이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 카타리나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지만 귀족에게 그런 소릴 한다면 그리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진 않군. 오늘은 이대로 조용히 가기로 하지. 후훗 하지만 축제 때는 기대를 해야 할거야... 하하하!! 이상하게 생긴 녀석, 너도 다음에 보자고." 메케한 느낌이 나는 웃음을 자랑스러운 듯 던지며 뮤스를 한번 흘겨 본 바르키엘은 자신의 일행들에게 돌아 가버렸고, 그의 일행들 역시 같은 부류인지 뮤스 일행을 향 해 냉소를 피우며 일어나 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봐 뮤스 뭐해? 앉아!" 바르키엘에게 골이 난 것이 깊이 쌓였는지 폴린은 애꿎은 뮤스에게 언사를 높였다. 막상 방금전 까지 언사를 높이던 카타리나가 오히려 웃으면서 뮤스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저 녀석 말은 잊어버리고 앉아. 자. 우리 뭐 먹을까?" 이번만은 카타리나의 화제 돌림이 잘 통하지 않았는지 친구들은 아직도 불쾌한 듯 인 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들 왜 그래?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랜만에 들어서 적응이 잘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요즘 세상에도 저따위로 귀족 운운하는 녀석이 있다니. 정말 재수 없어! 이미 이름 만 남은 귀족일 뿐인 주제에." 폴린이 분통을 터트리자 옆에서 묵묵히 앉아있던 히안 역시 한마디 안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흥. 이번엔 폴린 네 말에 찬성이다. 평민에게 밀리는 귀족들도 허다한 이런 세상에 저런 녀석이라니. 치사해서 아버님께 말씀드려 귀족작위를 사든지 해야겠어!" 사실 도이첸 제국은 1029년부터 귀족작위의 매매가 가능하였다. 당시의 황제였던 크 로디엘 2세는 상업을 장려했고, 그에 따라 평민의 지위가 높아졌고 반면 몰락하기 시 작하는 귀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한 귀족들의 권력을 뛰어 넘는 평민 들이 나오자 제국에서는 그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귀족작위를 매매 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평민이었지만 그들이 제국의 경제적 지지기반 이었기 때문이었다. "얘들아 그 정도면 됐어... 계속 화내면... 뮤스의... 환영파티는... 언제하니? 응?" 세이즈가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 먹거리는 것을 알아 버린 친구들은 다들 당황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폴린이 억지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알았어 세이즈! 우리 화 풀었어! 그렇지 얘들아? 그러니까 제발 울지만 말아 라! 응?" "그..그래! 나도 화 풀었어! 봐 내 표정도 확 풀렸지?" 그 제서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세이즈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자 한숨을 내 쉬는 친구들이었다. 뮤스만 멀뚱히 친구들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 다. 분위기가 수습되자 폴린이 이곳을 가장 잘 알았기 때문에 모든 음식 주문은 폴린 에게 일관을 하고 뮤스와 친구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르키엘의 등장 때문이었는지 대화의 주제는 카이젠 대학교와의 축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폴린 이 뮤스를 위해 바르키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카이젠 대학교의 여가활동 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 하는 짓은 망나니 같아도 사실 저 녀석의 뒤 배경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냐. 귀족이면서 상계에까지 발 을 넓혀 엄청난 재력을 보유 하고있거든. 사실 귀족이라는 자체보다 그 재력 때문에 우리가 저 녀석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거야. 우리 모두 집안이 상인가문 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 녀석에게 밉보이면 타격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말 이야." 그 제서야 친구들과 바르키엘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 할 수 있는 뮤스였다. 이어 서 히안이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축제 이야기 로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건 그렇고 뮤스 너는 동호회 활동 어떻게 할거야?" "동호회? 어떤 것들이 있는데?" "음 우리들 역시 여가활동 동호회야 그래서 축제 때마다 저 녀석들과 맞붙는 것이지. 괜찮다면 너도 우리 동호회에 들어오는 것이 어때?" "그 여가활동 동호회는 뭘 하는 건데?" 카타리나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뮤스를 바라보았다. 모 두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카타리나가 말했다. "여가활동 동호회라는 것을 모른다고?" "알았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아직은 모르고 있지..." "정말 넌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아..." 이미 시간이 꽤나 흘렀기에 이런 상황에 적응을 할 수 있었던 뮤스는 처음 사람들과 의 만남 때와는 다르게 능숙하게 대처를 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산 속에서만 십 년 살아봐. 나처럼 될거야..." 다시 동호회에 대해 소개를 해주던 히안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럼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튼 여가활동이라는 것은 하나의 활동을 지칭하는 것 이 아니야. 남는 시간에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요트 타기라든지, 여러가지 운동들, 승마, 수영 등 이밖에도 많지. 하지만 저 녀석들 과 함께 하는 가을 축제 때는 저쪽의 잘난 척 때문에 언제나 고급 여가활동만 겨루거 든. 아마 이번에도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거야." "흠 그렇다면 동호회들의 경쟁이 대부분 인거야?" "왠일로 이번엔 똑똑하게 질문을 하는데? 네 말이 맞아. 학교 학생들은 꼭 한가지 동 호회 활동을 하게 되어 있거든. 이 축제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쪽 학교의 동 호회의 종류는 모두 똑같지. 그래서 같은 동호회끼리 이 축제 때 기량을 경쟁을 하게 되는 거야. 축제는 학교뿐만 아니라 라이델베르크 자체의 축제와 같아서 모든 시민들 이 함께 참여하지. 일주일동안 벌이는 축제기간에는 시의 전역이 축제의 공간이 되어 버리는 거야. 엄청난 규모라구!" "정말 재미있겠는걸? 너희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네 앞에 있는 카타리나 부회장님께 말씀 드리면 되지!" "아! 카타리나가 부회장이라고? 하하 그럼 나도 가입시켜 줘! 다른걸 해봐야 알지도 못할 건데 너희들과 함께 하는게 나에게는 좋지." 카타리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호호! 그럴 줄 알고 이미 가입신청서를 제출했지! 마침 잘됐다. 내일은 동호회 정규 모임이 있는 날이니까 함께 가보자." "그..그래? 고마워.." 화내는 모습과 이런 막무가내 성격... 하루동안 카타리나의 다양한 모습을 목격한 뮤 스는 약간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화려한 저녁 식사를 점원들이 가지고 왔다. 한참을 떠들어서 인지 일행은 모두 굼주려(?) 있었다. 폴린이 자신 있다는 듯한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호호. 우리 가계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음식들이야 사양 말고 마음껏 즐겨! 뮤스 입 학을 축하한다!" "그래 나도 축하해!"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아!" "모두들 고마워." 친구들의 축하인사를 받자 뮤스는 가슴이 뭉클해져 버렸다. 살던 곳에서도 아닌 이런 이 세계에 와서 이런 행복을 경험하리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였기에 그 감동은 더욱 크기만 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3 공학원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크라이츠는 콧수염을 보기 좋게 말아 올린 반 백발 장 년의 신사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에는 호기심이 그득하였다. 장년의 말이 계속 되는지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저의 축제 때 지원을 해주시면 어떨까 하는 바입니다. 그러는 편 이 공학원의 홍보 효과도 크리라 보는데요..." "흠... 정말 그렇겠군요." "햄브리겐의 총장과도 상의를 해봤지요. 아마도 이 축제 중 가장 멋진 경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저희에게도 상당한 이득이 될 것 같군요. 라이델베르크시의 가장 큰 축제 이니... 그렇다면 지원기종은 어떤?" 크라이츠의 긍정적인 반응에 희색을 띄며 자신이 준비해 왔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데오기종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해본 크라이츠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로데오급이라... 좋습니다 로데오 기종으로 열 여섯 대를 지원해 드리지요. 연습도 필요 할 듯 하니 학교마다 네 대씩 연습용으로 대여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대단히 고맙지요! 사실 전뇌거의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귀족 들의 자재들이라 하지만 무리가 있었답니다. 그런 점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헌데 이곳의 재무 담당이라고 하셨는데 원주님과 상의가 없어도 되는 지요?" "호호 원주님께서는 제게 모든 운영을 맡기고 계시기 때문에 그 점은 염려하시지 않 으셔도 좋을 거예요." 대화도중 문득 벽에 걸린 마나 시계를 본 장년신사는 자 뭇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 며 크라이츠에게 말했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늦었군요. 저는 더 이상 실례가 되기 전에 가보겠습니 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크라이츠님." "아니요 별말씀을... 그렇다면 연습용 전뇌거는 내일까지 각 학교로 운송해 드리죠." "네 감사합니다." "그럼 살펴 가세요." 인사를 건낸 장년의 신사가 나가자 크라이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의 뒷모습을 보 며 빙글빙글 웃고있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겠는걸? 뮤스가 다니는 햄브리겐과 라이벌인 카이젠의 전뇌거 경주라니... 호호호!! 정말 짜릿하겠어..." 크라이츠는 혼잣말로 신이 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뮤스는 친구들과 인 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에 빠져 있었으니... '슈넬 레스토랑'의 이층은 다섯 명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분위기가 들뜨고 있었다. 아 래층까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릴지는 몰랐지만 한참 들떠있는 분위기에서 아래층의 손님에게까지 배려할 생각은 가지지 못했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 지 않았다. 웃고 떠들던 히안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이봐 뮤스 네 이야기 좀 해봐! 우리가 아는 거라곤 네 이름 밖에 없단 말야." "음... 그것도 그렇다. 네 이야기 좀 들려줘." 세이즈도 궁금한 표정으로 말을 거들자 뮤스는 이번 질문을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크라이츠가 만들어 놓은 자신의 배경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뭐 너희들이 재미있을 만큼 대단한 내용은 없어. 그저 누님 한 분과 우리를 도와주 시는 드워프분들이 함께 살고 있거든. 너희들에게 말했다 시피 집은 대장간을 하고 있고, 지금 누님이 경영을 하고 계시지. 어렸을 때는 라이부크에서 스승님과 함께 살 았고 말야." 뮤스의 이야기를 듣던 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야야.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말고. 네 연애 이야기나 그런 것들 말이야. 설마 열 아홉 살 먹을 때까지 한번도 누굴 좋아해 본적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 "연애?" 폴린의 물음에 뮤스는 새삼 자신의 삶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실제 열 아홉 살은 아 니지만 열 여섯 살이라는 나이가 될 동안 누군가를 좋아 해 본적이 있었나 하고 말이 다. 하지만 뮤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부 지 정신연령의 소유자였던 뮤스가 이성을 생각해 볼 시간이 있을 리는 만무했던 것이 었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카타리나가 말했다. "뮤스 뭐하니? 멍한 얼굴로? 가끔 너 그렇게 멍청한 얼굴 지을 때가 많더라?" "그래? 흠...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좋아해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카타리나를 위시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거짓말!" "정말이야. 누굴 좋아해 본적이 없어." "쯔쯧. 뭐 그래도 걱정하지마 세상엔 다 제짝이 있다 잔아. 언젠가는 너도 누군가에 게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가 있겠지." 히안이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자 폴린은 조용히 넘어가면 입이 찌뿌둥 한지 또다 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히안 넌 그런 말 할 자격도 없다. 너나 뮤스나 뭐가 다르냐? 그래도 생긴건 너보다 뮤스가 훨씬 나으니 너 보다는 빨리 임자가 생길 것 같은데? 그건 너도 인정하겠지?" "뭐?! 내 얼굴이 어디가 어때서 뮤스 보다 못 하다는 거야?" "흥! 넌 거울도 안보니? 매일 시력이 나빠서 인상구기는 얼굴을 봐라! 코풀고 버린 손수건 같다!" "뭐?! 너 말 다했어?" 둘의 싸움에 만성이 되어버린 친구들은 남은 식사를 마저 하기 위해 스푼과 포크를 입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이층에 바르키엘 일행들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뮤스와 나머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한 여성 의 목소리로 인하여 그들의 혈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저... 실례지만 혹시 카타리나 아니니?"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긴 뮤스와 친구들은 단정하게 햄브리겐 대학의 교복을 입은 금발머리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사실 햄브리겐 대학은 교복 착용을 원칙으로 하 고 있지만 서민계층의 학생 중에는 교복을 마련할 여건이 못되는 이들도 많았기에 별 제재를 가하고 있지는 않았다.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카타리나는 아는 얼굴이었는지 반가워하며 그녀를 맞아 주었다. "어머 가이엔 아니니? 그러고 보니 오전 수업시간에 얼핏 봤는데 정말 너였구나?" "카타리나 맞구나? 아래층에서 식사를 하다가 네 목소리가 맞나해서 올라와 봤는데 정말 너였구나!" 가이엔이라고 하는 여학생은 카타리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뮤스를 보자 놀라는 표정 으로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워낙 경황 중이어서 낮에는 제대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드렸 어요. 제 동생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뮤스 역시 그녀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조금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하하. 아니에요.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요 뭐." "서로 아는 사이였어?" 멀뚱히 둘을 바라보던 카타리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지만 뮤스는 카타 리나가 오해를 할까 두려워 변명을 했다. "아..알긴! 그냥 오전 수업시간에 일이 있어서 안면이 있었던 거야. 괜찮다면 식사라 도 함께 하시죠?" "아...아니에요. 아래층에 일행들이 있어서요. 다음 번에 제가 꼭 대접해 드리겠어 요. 동생 일도 감사드릴 겸..." "그럼 그렇게 해요. 같은 학교에 다니니 만날 일도 많겠네요. 수업도 같은 것이 있으 니까요." "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카타리나 너도 다음에 보자." "그래 가이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쉽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응! 그래. 그럼이만..." 카타리나와 뮤스에게 인사를 건낸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뮤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 렸다. "흠... 몸이라도 안 좋은가? 좀 불편해 보이네..." 포크를 물고 뮤스의 얼굴을 보던 히안은 포크를 신경질 적인 태도로 내려놓으며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뮤스... 수업 첫날부터 한 명 물은 거냐? 저 여자의 의심스러운 반응은 도대체 뭐냐?" "그러게... 심상치 않은걸? 오전에 화장실 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히안과 비슷한 자세로 얇은 눈을 뜨며 물어오는 폴린이었다. 둘에게 공격당하던 뮤스 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폴린과 히안은 이해 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전에 네가 너의 처남을 살려냈다... 이것이로군." "누...누가 처남이라는 거야? 오늘 처음 본 사람이라구!" "호호호! 당황하는 걸로 봐서는 더욱 의심스러운걸? 너도 흑심을 품고 접근했던 것 아냐?" "말도 안돼!" 폴린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반발을 하던 뮤스는 슬쩍 카타리나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왜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카타 리나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빙글빙글 친구들의 하는 양을 보며 웃기만 할 따름이었고, 왠지 카타리나의 반응에 뮤스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폴린과 뮤 스사이에서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표정으로 히안이 말했다. "야야 그만 하자. 폴린! 너나 여기 있는 모두나 다 똑같은 처지 아니겠냐? 그냥 묵묵 히 뮤스의 결혼을 축하해 주자고. 축하해 뮤스! 잘살아라!" 전혀 상관없이 웃고만 있던 카타리나가 뭔가 생각났는지 뮤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애들은 일남 일녀가 제일 좋데. 그래야 키우기 편하다던데?" 그나마 믿고 있던 카타리나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뮤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흥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왜이래?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단 말이야!" 뮤스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자 정작 놀란 것은 친구들이었다.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정막감을 흘리며 뮤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닳은 뮤스는 친구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깨며 세이 즈가 입을 열었다. "뮤스야... 결국은 걸려들었구나... 그냥 실토 하는게 어떻겠니?" 조용조용한 세이즈의 말투였지만 왠지 폴린과 히안의 말보다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 다. "저...그게 아니고..." "아니고는 뭐가 아니고야. 딱 걸렸다 음흉한 녀석아. 혹시...." "혹시?" 폴린의 말에 긴장을 잔뜩한 뮤스는 침을 꼴깍 넘기며 그녀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날 좋아하는거 아냐? 호호호! 하긴 나 정도면 미모와 지성을 두루 겸비한 완벽의 여 성이지! 짜식. 너도 꽤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이...이봐 마음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폴린의 말이 아니꼬운지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히안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야. 너 아침에 먹은 토마토가 상한거 아냐? 뮤스도 눈은 있는 녀석이다. 나처럼 시 력이 나쁘지도 않고 말야. 제대로 된 시력이면 너 같은 애를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 냐?" "호호! 그럼 넌 시력이 안좋으니 날 좋아한단 말이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폴린은 화려한 언어유희를 뽐내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전혀 의외의 결과가 생기고 말았는데, 히안이 얼굴을 갑작스레 붉히며 말을 더 듬기 시작한 것이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4 "내...내가 어..언제 그렇게 말했냐?" 히안의 어이없는 반응으로 인하여 화제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폴린과 히안으로 넘어와 버렸다. 세이즈와 카타리나 역시 이런 돌발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지 둘의 얼굴 을 번갈아가며 살피고 있었다. 또 하나의 경악할 만한 반응은 폴린 역시 얼굴을 붉히 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테이블의 분위기가 기이하게 변하자 이미 식 사를 마저 할 상황은 이미 물건너가 버렸다. 누군가 이 정적을 깨야한다고 생각한 카 타리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얘..얘들아 그냥 서로 좋으면 그냥 사귀는게 어때?" 그녀의 말에 히안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누가 이런 애랑 사귄다고 그래? 흥! 십 만년 지난다고 그래도 어림없어! 미안하지만 나 먼저 가볼게. 그럼 내일 보자!" 히안이 황급히 옷을 챙겨 자리를 뜨자 폴린 역시 서둘러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며 자 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미안해. 나도 이만 가볼께. 내일 수업시간에 보자. 그럼...." 히안과 폴린이 사라져 버리자 더욱 벙쩌 있는 세 명이었다.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카타리나가 세이즈에게 말했다. "세이즈..." "응? 왜?" "혹시 너도 있는 거니?" "푸훗. 난 정말 없어!" "만약에 너도 생긴다면 이런 일없게 미리 말해라 응? 이런 일 두 번 있었다간 내 명 에 못 죽겠다." 그녀의 말에 세이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학원으로 돌아온 뮤스는 자신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온돌방의 뜨끈한 느낌이 그리 웠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허리가 약간 아픈 것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방에 혼자 누워 있는 시간을 즐겼다. 물론 조금이라도 시간이 빨리 가서 친구들을 다시 보고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시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오늘은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어. 폴린과 히안의 일이나, 가이엔양의 일까 지... 과연 내가 정말 카타리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 뮤스는 카타리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얀 피부에 또렷 한 눈망울, 그리 길지 않은 머릿결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이런 내가 왜 이러지? 뮤스야... 왜 그러느냐...장부가 이런 일로 끙끙 앓고 있 다니..." 자신을 힐책하던 뮤스는 다른 친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폴린은 붉은색의 곱슬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히안과 싸우던 폴린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했 다. 그에 비해 언제나 당하기만 하는 히안은 찡그리는 인상 때문인지 뭔가 불만스럽 게 보였다. "인상만 좀 펴진다면 그리 못생긴 얼굴도 아닐텐데... 눈이 나빠서 그런거니...가만! 눈?" 누워서 히안을 떠올리던 뮤스는 머리를 때리며 일어났다. "에휴 이런 멍청한!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오늘 할 일이 생겼군. 켈트 아저씨가 오셨을까?" 무엇을 떠올렸는지 뮤스는 성급히 방을 나섰다. (17) 여가활동 동호회 다음날 아침 뮤스는 시내의 경관을 스치며 상쾌한 기분으로 등교하고 있었다. 어정쩡 한 환영식의 마무리만 아니었어도 더욱 좋았겠지만 그대로라도 대단히 만족했는지 하 루의 일과가 기다려지기만 하는 그였다. 전뇌거로 불과 십 여분이면 도착 할 거리였 지만 그 짧은 시간마저 길게 느껴졌다. 눈을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잘 놓여있는 가방 을 보며 뭐가 좋은지 흐뭇한 웃음을 띄웠다. "후훗 히안녀석 좋아하겠지?" 전뇌거로 거리를 달리자 여느 때처럼 주변의 시선이 모아졌다. 앞으로 몇 일 후면 전 뇌거가 정식 출시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 에게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전뇌거의 앞 유리를 통하여 저 멀리 학교의 마차가 보 였다. 이 마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게 되어있고 꽤나 크게 만들어 졌기 때문에 동시 에 20여명의 학생들을 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학생의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불편 한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눈길을 좀 끌어서 그렇지 전뇌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좋긴 좋군." 등교전쟁을 치르는 학생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찰 때 뮤스의 눈에는 익숙한 얼굴이 들 어왔다. 언제나처럼 단정히 교복을 입은 가이엔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그녀의 금빛 생 머리가 더욱 돋보였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던 가이엔은 결국 마차를 타지 못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 마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안면 있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지 못한 뮤스는 급히 전뇌거를 마차 타는 곳까지 몰 았다. "가이엔양 아니예요?" 갑작스런 뮤스의 등장에 가이엔은 깜짝 놀랐으며 어제 식당에서처럼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안녕하세요?" "네. 또 만나는군요. 괜찮으면 같이 타고 가죠? 그 편이 더 좋을 듯 한데..." "저...그게..." 가이엔이 말을 더듬자 천하 최고의 둔감한 감성을 자랑하는 뮤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안할 것 없어요. 혼자 가나 같이 가나 손해날 것도 없는 걸요? 타세요!" 그의 말에 가이엔이 주변을 둘러보자 마차를 기다리던 학생들의 이목은 온통 둘에게 주목되어 있었다. 더욱 민망해진 가이엔은 더 이상 뭐라 말못하고 전뇌거에 탈 수 밖 에 없었다. 그녀를 태운 전뇌거는 다시 학교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옆 좌석에 앉아서 우물쭈물 하는 그녀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뮤스가 말을 건넸다. "카타리나의 친구분이라구요?" "네? 네." "그렇다면 서로 편하게 말하는게 어때요? 그래야 덜 불편할 것 같은데?" 친구들의 덕분인지 뮤스는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율리아나와 만났을 때 만 해도 여자 앞에서 말도 잘 못하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아 직 젊기 때문 이리라... "아..네... 그런데 저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어제 식당에서 물어 본다는 것이 그만..." 뭐가 그리 수줍은지 한마디 할 때 마다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 졌다. "아! 제 이름은 뮤스라고 해요." "네... 잘 부탁 드려요." "그런데... 언제까지 계속 말을 높일 거예요?" 뮤스의 지적에 다시 한번 당황한 그녀는 흘러 내려온 옆머리를 쓸어 올리며 기어 들 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미안." "후훗 그나저나 동생이 안보이네? 수업시간이 달라서 그런가?" "아..아냐 어제 일 때문에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오늘은 쉰다고 하던 걸?" "음... 어제 심하게 다쳤나 보군. 그 사람 너무 한 것 같더라니..." "그래도 덕분에 무사했어...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당황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손에서 뭔가가 번쩍 하던 걸?" 가이엔의 질문에 뜨금한 뮤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지기 시작했는데, 실상 지금까지 그에 대해 물어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미처 둘러댈 만한 말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막무가내로 둘러대기 시작했다. "하..하... 그때 바늘이 햇빛을 반사해서 그렇게 보였을 거야.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잖아?" "그런가? 하긴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의외로 쉽게 믿어주자 뮤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 때문인 지 벌써 전뇌거는 학교 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이엔도 이제 뮤스에게 적응이 되는 지 붉기만 하던 얼굴은 이제 본색을 찾았고, 여유 있게 학교 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가이엔 너는 어느 건물에서 수업 들어?" "아...나는 저기 두 번째 블럭의 왼쪽 건물이야. '고대언어학'을 전공하고 있거든."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건물은 연금술 학부건물의 바로 옆 건물이었다. 연금술 학부가 덩쿨로 쌓여있어 초록색을 띈다고 하면 고대 언어학부의 건물은 완전한 벽돌 색이었 다. 검붉은 벽돌들로 이루어져 근엄함을 뽐내듯이 버티고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꽤나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는 늙은이들의 석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옆 건물이구나? 자주 볼 수 있겠군. 자! 이제 다 왔다." "응. 오늘 태워줘서 고마워." 뮤스에게 인사를 하며 전뇌거에서 내린 가이엔은 밝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바래다준 뮤스는 전뇌거를 몰아 연금술 학부에 도착했다.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오늘도 역시 친구들은 모여 앉아 있었다. 내심 히안을 걱정하긴 했지만 마침 별다른 일없이 학교에 온 것을 확인하자 안도하는 뮤스였다. "다들 벌써 와있었네?" 뮤스가 던진 인사에 친구들은 뮤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세이즈와 카타리 나의 표정은 평소 같지 않게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뮤스의 질문에 높은 톤으로 웃으며 폴린이 대답했다. "호호호!!! 나의 허니가 부러워서 그런거지!!" 뜬금 없는 폴린의 말에 넋을 놓아버린 뮤스는 확인 차 들려오는 한마디의 말로써 복 구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으니... "하하. 자기야 그만해! 뮤스 까지 얼어 버리면 어떻게 할거야? 세이즈나 카타리나도 저 상태로 20분 째야!" 나름대로 냉철한 뮤스는 그제서야 세이즈와 카타리나의 반응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너희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호호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나의 허니가 우리 집 앞에서 멋지게 프로포즈하 더라고! 그래서 넘어가 줬지!" "그나저나 카타리나와 세이즈는 어떻게 하지? 완전 정신이나가 버린 것 같은데?" "그냥 놔둬. 저러다가 현실을 이해하게 되면 돌아 올 거야. 하긴 이만큼 충격적인 사 건도 쟤들에게는 없었을 테니..." 뮤스는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아직 현실 같지 않 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전만 해도 원수처럼 티격 거리던 둘이 하루만에 커플로 탄 생해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뮤스는 마침 뭔가 생각났는지 히안에 게 말했다. "아참 히안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왠 선물? 우리가 커플 된 기념선물이냐?" "흠. 커플이 연인이란 뜻이야? 그렇다고 해두자. 너같이 더러운 표정의 소유자와 폴 린이 다니면 얼마나 갑갑하겠냐..." 가볍게 말을 던지며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히안 역시 폴린과 사귀기 시작해서 인지 뮤스의 말에 별 신경 쓰지 않고 뮤스의 가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 여기 있군. 어제 우리 가게 아저씨와 함께 만든 거야." 그의 손에는 십 여 개의 둥근 유리와 쇠로 얇게 주물 되어 진 금속 물체가 들려있었 다. "이건 안경이라는 건데 이쪽으로 와봐." "에? 안경이라고? 그건 뭔데?" "하하 너의 시력을 복구해주실 물건이시다. 잔소리 말고 빨리 이쪽으로 와." 히안이 뮤스의 옆에 앉자 뮤스는 손에 들린 금속 물체를 히안의 귀에 걸어 씌웠다. 이것이 뭐 하는 짓인지 아직 알 수 없는 히안은 마냥 얼떨떨해 할뿐이었다. 그런 후 십 여 개의 둥근 유리를 히안의 두눈에 하나씩 대보는 것이었다. "히안 이렇게 하면 잘 보이냐?" 놀랍게도 히안이 두개의 둥근 유리를 통해 본 세상은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뚜렷한 모습이었다. 방금 전의 뿌연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인하여 그의 표정은 놀람 과 기쁨으로 물들었다. "우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엄청 잘 보인다고!" "야야... 아직 다가 아니야 네 눈에 맞는걸 찾아야해 어떤 것이 제일 잘 보이는 지나 말해." 히안이 감동 받을 여유조차 주지 않고 뮤스는 손에 들린 다른 둥근 유리를 바꿔가며 히안에게 맞추었다. 모든 유리를 다 맞춰보자 한 쌍의 가장 적합한 유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유리조각 두개를 히안의 얼굴에 걸려있는 금속에 맞춰 넣었다. "자! 히안 내 선물이다. 둘이 연인이 된 기념이라고 해두자고.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이제야 주는구나." 자신의 얼굴에 걸린 이상하게 생긴 금속 안경이 이상하긴 했지만 다시 뚜렷하게 세상 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히안이었다. "녀석 고맙다! 왜 이런걸 이제서야 주냐? 진작 줬으면 폴린 보다 더 예쁜애와 사귀었 을 건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지던 히안은 예상했던 바와 같이 폴린의 응징 을 받았다. 이제서야 세이즈와 카타리나가 정신이 돌아오는지 히안의 모습을 보고 이 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뮤스! 히안이 쓰고 있는 저건 뭐니?" 카타리나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후훗 안경이란 거야 저걸 쓰면 나쁜 시력을 보완 할 수 있거든." "그런 것도 있었니?" "그냥 어제 잠도 안와서 만든 거지 뭐. 그나저나 오늘 첫 수업은 어디야?" 뮤스의 질문은 못 들었는지 그녀는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임 ....ㅡㅡ;; 과학이 엄청 마니마니 발달됬구낭.. 2002/01/20 x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45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43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5 수업이 마칠 저녁 무렵이면 언제나 학교는 동호회 활동으로 술렁거린다. 씨니어 스쿨 에서 억압받으며 생활해온 학생들은 대학에 와서야 자신들의 취미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동호회 활성 이유였는데, 그래서 인지 동호회 활동에 대한 학교의 지 원 역시 대단한 수준이었다. 뮤스와 친구들 역시 다름없는 학생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동호회인 '여가활동 동호회' 회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히안은 하루종일 최 고의 날이라고 떠들며 다녔고 폴린은 히안이 좋아하면 마냥 좋아했다. 오히려 둘의 관계변화로 인하여 힘든 것은 나머지 친구들이었다. 카타리나가 둘의 모습에 참지 못 하고 한마디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지금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인양 원수처럼 지낸 건 뭐니? 말이 안 나온다." 폴린은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고 하지만 그녀의 화술이 건제 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 었다. "흥! 부러워서 그러는거 다 안다! 많이 부러우면 너도 남자친구 만들어! 그 바르키엘 녀석만 아니면 난 누구라도 환영할게!" "에휴! 말을 말자. 너랑 더 이상 말이 통하겠니..." "너도 그렇게 시샘할 생각하지 말고 뮤스 처럼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나 생각해봐!" 카타리나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학부건물의 뒤쪽으로 한참을 올라오자 점차 어두워지는 주변과는 대조적으로 환하게 불빛을 밝히는 건물이 보였다. 사층의 건물로 별다른 특징은 없는 건물이었지만 수많은 학생들이 건물의 정 문을 오가고 있었다. 건물의 내부는 학생들이 꾸며놓았는지 벽마다 특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를 것들이 건물의 이곳저곳에 널려있었다. 친구들을 따라 올라간 곳은 이층의 가장 끝에 붙어 있는 곳이었다. 앞장선 카타리나 가 작은 문을 밀었다. -끼익... 문을 열자 생각보다 꽤나 큼지막한 실내 공간이었는데 벽에 붙어있는 선반에는 특이 한 기구들이 잔뜩 올려져 있었고 먼저 와있는 학생들이 회실의 가운데 위치한 테이블 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본 카타리나는 인사를 하며 회실로 들어섰다. "선배 먼저 와계셨네요?" 카타리나의 인사를 받은 사람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있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학 생이었다. 남자였지만 진 갈색의 머리를 길게 늘어트렸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은 음침해 보이기도 했지만 눈빛이 맑아서인지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아이구! 부회장님 납시는군? 혹시 옆에 있는 학생이 네가 말한 뮤스군이야?" "네! 선배. 인사해 뮤스. 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3학년의 머글린 선배님이셔." 그녀의 말에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뮤스라고 합니다. 모자라는 점 많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아무튼 반가워. 카타리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자네도 그렇고 너희들도 다 앉아라. 지금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 머글린의 말에 의아해 하던 그들은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차지하며 앉았는데 히안과 폴린은 역시나 의자 두개가 필요 없을 만큼 떨어지지 않고 꼭 붙어 있었다. 이어 머 글린은 한장의 종이를 건네며 히안에게 말했다. "이봐 히안 너희 둘 그렇게 붙어 있어도 살인 안나겠냐? 폴린이 언제 네 배에 쇼트 소드를 꽂을지 모른다." 머글린의 말에 웃으면서 폴린이 대답했다. "어머 선배는 아직 모르셨어요? 이제 저희는 연인이라구요! 연인!" 폴린의 말에 머글린의 움직임은 멈췄고 손에 들려있던 종이 한 장만이 하늘하늘 땅으 로 떨어졌다. 그 역시 충격으로 인해 패닉상태에 빠졌으리라 예상한 뮤스는 떨어진 종이를 주워 읽어보았다. -공문 발신 : 햄브리겐 대학교 축제 담당 국 수신 : 여가활동 동호회 여가활동 동호회의 축제 경쟁 종목이 결정되었기에 이렇게 공문을 발송합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호회 회장님의 협조 부탁 드립니다. -아래- 종목 : 전뇌거 경주 장소 : 라이델 베르크 전역 지원물품 : 공학원 지원 연습용 로데오 2기, 시합용 로데오 8기 여가활동 동호회는 시합 전까지 경주 준비를 완료해주길 바람. 공문을 읽고 있는 뮤스에게 카타리나가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뮤스는 아무 말없이 공문을 넘겨줬다. 공문을 읽어보던 카타리나는 눈 이 휘둥그래져서 말했다. "뮤스. 너 이거 알고 있었어?" "아니 전혀. 아무래도 크라이츠 누님이 결정한 일인 가봐. 나도 몰랐어." "갑작스럽게 전뇌거 경주라니!" 그녀의 말에 뮤스도 어깨를 으쓱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타리나의 손에서 공문을 넘겨받은 폴린과 히안 또한 공문을 잠시 읽어보더니 놀라워했다. 공문을 다 읽어본 히안이 말했다. "뮤스가 전뇌거 경주를 알고 있다니 무슨 소리야?" 그의 질문에 실수를 깨달은 카타리나는 애써 잘못 나온 말이라고 우겼고 다행스럽게 아무 일 없이 넘어 갈 수 있었다. 히안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럼 우리 동호회가 경주 준비를 해야 된단 말이야? 불가능 한 일이라구!" "그렇지만 학교에서 그렇게 결정한 이상 우리에게는 어떻게 할 권한이 없잖아?" 그제서야 머글린은 정신을 수습하고선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 명의 회원들을 가 리키며 이야기했다. "방금 전에 이 녀석들과 나가봤더니 건물 뒤의 공터에 로데오 두 대가 도착해 있더군 정말 놀랐지. 신문에 나온 기사는 읽어봤지만 발매도 하기 전에 내가 만져 볼 줄은 몰랐거든? 카이젠 쪽에서는 공학원에서 운전 방법을 배운다고 하던데 우리 역시 공학 원으로 지원을 요청할까?" 머글린의 말에 다른 회원들을 바라본 뮤스는 그들이 회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소유하 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외골수 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카타리나가 말했다. "우린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전뇌거의 운전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지 않니 뮤스?" 카타리나의 말에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콧잔등을 한번 쓸었다. 그 역시 나름대로 복 잡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런. 왜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지? 누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뮤스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한쪽에 앉아 있던 세이즈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평소 에도 말이 거의 없는 그녀는 오늘따라 히안, 폴린 만행사건(?) 때문인지 유난히 심했 지만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만의 말이 뮤스를 당황하 게 만들었으니. "그런데 뮤스. 궁금한게 있어." "응? 뭔데 세이즈?" "너는 어떻게 출시도 되지 않은 로데오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이지?" 쿠궁... 하는 소리가 뮤스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미처 이런 일까지 생각지는 못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싫었기에 뮤스는 또 한번 친구들 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공학원에 아시는 분이 있어서 발매 전에 시험을 부탁 받았거든. 그래서 나야 공 짜로 편하게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럼 이해가 간다." 카타리나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 역시 수긍할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 는 계속 진행이 되었다. 뮤스의 첫 동호회 활동은 길어졌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 야 회의는 결론이 나기 시작했는데, 뮤스는 내일부터 일반 회원에게 전뇌거 운전을 가르치기로 했고, 뮤스의 전뇌거까지 세 대의 로데오로 번갈아 가면서 여덟 명의 선 수를 연습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축제까지 이 주일 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과연 그때가지 제대로 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18) 운전 연습 -벌컥! "크라이츠 누님!" 뮤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서재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크라이츠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왔니? 호호 모습을 보아하니 전뇌거 경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거구나?" "역시... 누님이 결정하신 일이군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크라이츠는 손에 들린 깃펜을 내려놓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호호 첫 번째 이유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야. 두 번째는 라이델베르크 전역에 전뇌거 를 선전 할 기회였고... 그렇게 생각 안하니? 나는 어디까지나 사업을 위해서 결정 한 것이란다." 빙글빙글 웃으며 뮤스를 놀리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마지막으로 듣자하니 네 학교도 연관이 되어있더구나? 그래서 다른 건 생각 할 것도 없이 결정을 해버렸지! 푸훗. 너도 당연히 출전을 하겠지? 네가 만든 전뇌거를 다른 사람 보다 운전 못한다면 그건 수치라구!" 그제서야 크라이츠의 의도를 알아차린 뮤스는 허무함을 풀풀 풍기는 한숨만 내쉬었 다. 애초부터 크라이츠에게 운영권을 위임한 이상 뮤스가 뭐라고 할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알겠다구요. 다음부터 큰 결정은 저에게 귀뜸이나 해주세요. 그나저나 켈트 아저씨 는요?" "그러고 보니 켈트씨가 돌아오면 방으로 와달라고 전해 달라던데?" "그래요? 네 그럼 누님 쉬세요. 전 올라가 보도록 하죠." "그래! 너도 전뇌거 운전연습 많이 해야한다!" "아...네..." 문을 닫고 서재를 나온 뮤스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공학원의 일을 시작한 이후 로 크라이츠의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냉철한 모습으로 변한 것에 대해 불안한 마음까지 들었던 뮤스는 그녀가 이런 사건을 터트리자 역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생각에 안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옆방에 위치한 켈트의 방을 찾아갔다. 엄밀히 말해서는 켈트와 사촌동생들의 방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각자 방 쓰는 것을 싫어한 드워프들은 결국 한 방을 같이 쓰기를 원했고, 그에 따라 방 구조까지 개조를 해야만 했다. 그들의 성격만큼이나 매일 시끌벅적한 방이었다. 오늘 역시 별다른 특색 없이 쾌활한 분위기로 뭔가를 하는 드워프들이 뮤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말이지 그때 내가 도끼를 확! 하고 던졌지... 어라! 뮤스 왔구나!" 사촌들에게 무용담을 떠들던 켈트는 뮤스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는데, 다른 드워 프들 역시 이미 한가족이나 다름없었기에 편안하게 맞아 주었다. "켈트 아저씨 저를 찾으셨다구요?" "껄껄 그래! 우리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있거든?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백만장 자가 되어 버렸다고 사촌들이 네게 선물을 해주기로 했단다." 켈트의 말에 세 명의 드워프들은 웃으면서 뮤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굉장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예사의 물건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하하 선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그게 뭐예요?" 켈트가 레딘에게 신호를 하자 레딘과 브라이덴은 일어나 침대 뒤로 걸어가 뭔가를 끙 끙 거리며 들고 나왔다.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뮤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 가 없었다. "자자 하나, 둘, 셋 하면서 포장을 벗기라고!" "하나... 둘...셋!"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함께 드워프들은 손에 잡고 있던 천을 벗겨냈다. 천이 벗겨지자 나무 상자에 깨끗하게 정리된 갖가지 연장들이 보였고 심지어는 대형 도끼까지 상자 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금방 만들어 졌는지 깨끗한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연장들의 금속부분은 기름칠이 잘되어 있어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연장을 본 뮤스는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이것들을 정말 제게 주시는 거예요? 고마워요 아저씨들! 그런데 제가 이것들을 다루 지를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죠?" 뮤스가 얼굴을 심각하게 굳히자 블뤼안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껄껄. 우리는 날 때부터 기술을 익혀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역시 선조들에게 배운 것들이지. 자네도 짬짬히 시간 날 때 마다 배우게나. 더 이상 복잡한 것이라면 우리들이라도 만들어 줄 자신이 없거든? 솔직히 전뇌거를 이해하는 데만 해도 꽤나 걸렸다는 것을 자네도 알걸세. 직접 만드는 것보다 나을 리는 없지." 드워프들의 배려에 감동을 받은 뮤스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들이 전해준 연장들은 종류가 다양했는데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것들도 수두룩했다. 사실 엄청난 무게 때문에 모두 휴대하여 다니기는 불가능했지만 크라이츠가 선물한 마법가방을 사 용한다면 손쉽게 휴대 할 수도 있었기에 더욱 든든한 마음이었다. 드워프들에게 인사 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뮤스는 그들이 전해준 연장들을 만지작거리며 흥분된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그들의 기술을 최선을 다해 제대로 배우리라 마음먹으며 밤은 깊어만 갔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6 다음날 저녁 무렵부터 동호회실에서는 전뇌거 운전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경 주에 참여할 인원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남성 회원이 얼마 없는 여가활동 동호회로 서는 대부분의 남성회원들이 참가를 해야만 했다. 뮤스와 히안을 제외한 여섯 명의 남자 회원들이 그들이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전뇌거를 운전 할 수 있다는 설레임에 들뜨며 뮤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마나구에서 나오는 전뇌의 힘을 기관으로 전달하여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일단 조작을 위한 손잡이는 네 개가 있습니다. 이것들의 용도만 확실히 기억해 둔다면 나 머지는 직접 운전하면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물론 익숙치는 않겠지만 차차 나아지리라 생각됩니다. 일단 첫 번째 손잡이는...." 뮤스의 설명에 모두들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 있었고, 직접 운전을 하지 않는 여성 회원들도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된 것을 확인하자 회원 들은 전뇌거가 세워져 있는 건물뒤의 공터로 나갔다. 그곳에는 뮤스의 전뇌거를 포함 한 세 대의 로데오가 멋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새삼스럽게 그 모습에 감탄하며 뮤스 는 회원들에게 말했다. "설명들은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떨리시더라도 조금 있으면 익숙해 질 것이니까 걱 정하지 마세요. 밤이 되어서 교내 도로가 한산하겠지만 조심하셔서 연습하시길 바랍 니다. 아직 절대 과속은 하지 마세요!" 뮤스의 말이 끝나자 두 명씩 짝을 이루어 로데오에 올라타기 시작했고 뮤스는 히안과 같은 전뇌거에 탑승했다. 처음 전뇌거를 운전해 보는 히안은 긴장이 되는지 손을 바 지에 문지르며 땀을 닦고 있었다. "이봐 히안 너무 긴장하지 마라... 그리 어려운 거는 아냐." 뮤스의 말에도 긴장이 없어지지 않는지 굳은 얼굴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이봐 뮤스. 내가 실수한다면 네가 처리해라. 알겠지?" "하하 걱정하지 마라 잘해낼 수 있을 거니까. 너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걱정인 데?" 뮤스가 창 밖으로 나머지 두 대의 로데오를 바라봤다. 그들 역시 히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인지 아직 출발조차 하지 못하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이론과 실전의 벽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이런. 이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겠군. 한 명씩 가르쳐야겠어." 라고 마음먹은 뮤스는 창 밖으로 다른 로데오에게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서둘러 히안의 개인 강습을 시작했다. 로데오 강습을 시작한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히안 은 자신감이 생기는지 싱글벙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야! 이렇게 재미있는걸 지금까지 너만 했단 말이냐? 이걸 타고서 폴린과 데이트하면 끝내 주겠는데?" 히안의 말에 뮤스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툭하면 폴린 이야기냐? 잔소리 말고 익숙해졌으면 너도 다른 사람이나 가르쳐라. 시 간이 별로 없어." "헤헤. 다음에 너의 로데오를 빌려준다고 약속하면 기꺼이 그렇게 하지!"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 꼭 딴사람일 같이 말하는군? 여긴 너의 동호회도 된 다는걸 잊은 거야? 알았으니 까 빨리 가서 다른 사람이나 도와줘!" "후훗 꼭 부탁한다 뮤스!" 득의의 미소를 만면에 떠올리며 로데오에서 내린 히안은 다른 곳에 세워진 로데오로 발걸음을 옮겼고. 기다리고 있던 다른 회원이 자신의 차례가 되자 뮤스의 전뇌거에 올라타며 개인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져서야 모든 강습이 끝나게 되었는데 뮤스와 히안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사실 운전 연습을 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정 신력과 인내심을 요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쳐 바닥에 주저 앉아버리자 카타리나와 친구들이 마실것을 들고 걸어왔다. 카타리나가 뮤스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너희 모습을 보니 엄청 힘들었나 보구나? 매일 이렇게 해야하는 거야?" 그녀가 건네준 물을 받아든 뮤스는 시원스럽게 한 모금 들이켰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목 아프고 힘들었는데 고마워. 내일부터는 이 정도 까진 아닐거야. 이제 손에 익숙해지는 것만 연습하면 되거든? 그리고 경주를 하려면 지형 을 아는게 유리 할 테니 내일부터 나는 시내 지형을 좀 조사해봐야겠다." 뮤스가 말하는 동안에도 폴린의 행태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어머머 히안 힘들었지? 아잉! 너가 힘들면 난 어떻게 하라구!" "아냐! 폴린! 난 네 얼굴만 봐도 기운이 펄펄 나는걸? 이것 봐!" 하며 히안이 팔을 걷어올리며 자신의 이두박근을 보여줬으나 시원찮아 보였다. 하지 만 폴린의 눈에는 무쇠와 같은 팔뚝으로 보일 뿐이었다. 언제나 처럼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세이즈는 혀를 차며 뮤스와 카타리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은 하지 않 았지만 차마 보고 있기는 힘들었으리라. 카타리나 역시 그들의 행동을 포기했는지 하 던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럼 그건 혼자 해도 되는 거야?" "응. 그냥 전뇌거를 타고 한번 둘러보면 되는 거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밤이 늦었 는데 돌아가 봐야지?" "아! 벌써 꽤 늦었구나. 얘들아 집에 가자!" 카타리나의 말에 친구들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안이 아쉬움이 남는 지 전뇌거를 보며 게슴츠레 한눈으로 말했다. "뮤스. 혹시 말야 이거 우리가 타고 갔다가 내일 가지고 오면 안될까?" "흠. 아무래도 회장선배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야야 어떠냐? 우리도 엄연한 회원이라고! 이 로데오는 우리의 연습을 위해서 지원 된 거고! 아무 사고 없이 잘 가져다 놓으면 상관없을 거야! 설령 문제가 생겨도 연습 을 했다는데 선배가 뭐라고 하겠어?" "그것도 그럴싸하군. 그럼 조심해서 운전해! 너 역시 아직 서툴잖아. 사고 나면 정말 위험하다고!" 뮤스의 말에 히안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 걱정 말라구! 이제 눈도 잘 보이겠다, 왠 만큼 익숙해 졌겠다 뭐가 문제겠냐? 그럼 내일 보자! 폴린 출발하자 어서 타! 너의 사랑 히안님이 멋지게 데려다 줄께!" "호호! 신나겠는걸?" 그의 말에 폴린은 마냥 기쁜지 재빨리 뒤따라 로데오에 올라탔고, 히안은 제법 능숙 한 솜씨로 운전하여 친구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로데오의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뮤스가 말했다. "아참 너희는 어떻게 하지? 로데오는 알다시피 2인승 인데?" 뮤스가 묻자 카타리나가 은근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저 뮤스 혹시 나도 전뇌거 운전하는거 가르쳐 주면 안될까? 나도 예전부터 정말 해 보고 싶었거든! 아까는 힘들어 보여서 말못했는데... 나랑 세이즈 좀 가르쳐 줘라 응? 친구 좋다는게 뭐니? 그렇지 세이즈?" 그녀가 동의를 구하자 세이즈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꽤나 피곤한 뮤스였지 만 차마 그녀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심야의 강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에서 돌아온 뮤스는 바로 드워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켈트와 드워프들은 옹기종기 모여 나무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포센트가 출시된 이후로도 예약된 수량이 꽤나 있었지만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생산분담 때문인지 처음처럼 바 쁘진 않았다. 덕분에 드워프들도 자신의 여가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드워프인 그들은 여가시간에도 지금처럼 뭔가를 주물럭 거리고 있는 것이 예사였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켈트가 인사를 건넸다. "껄껄 뮤스왔구나? 오늘부터 전뇌거 시합 준비를 한다더니 잘 하고 있냐?" 뮤스는 한숨을 내쉬며 "헤휴! 정말 힘들더군요. 크라이츠 누님 가르칠 때만큼이나 힘들었거든요. 그나저나 지금 뭘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그가 다가오며 물어보자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있던 브라이덴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 고 말했다. "뮤스군 자네도 그렇게 서있지 말고 우리가 선물한 연장을 들고 오게나. 오늘부터라 도 조금씩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브라이덴의 말에 웃어 보이며 자신이 메고 잇는 가방을 두들겼다. "하하 연장이라면 이 가방 속에 다 넣어 가지고 다니는 걸요? 뭐 지금이야 제대로 쓰 진 못한다고 해도 혹시나 해서요. 아저씨들의 손에 들고있는 것과 같은 걸 꺼내면 되 겠죠?" 브라이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연장의 종류가 많아서 인지 찾는 시간이 조금 더뎠지만 자신의 가방에 있는 물건도 못 찾을 바보가 아니었기에 금새 집어 낼 수는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브라이덴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기며 앉으라는 신호를 했고, 옆에 앉은 뮤스는 그가 건네준 나무도막 하나를 받 아 들고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오늘은 가장 다루기가 쉽지만 조심해야하는 나무를 가르쳐 주겠네. 우선 나무는 내 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이니 내가 가르치게 될 것이고, 나머지는 각자 자신 있는 사 촌들이 가르치게 될 것이야." 드워프들은 상의가 미리 되어있었는지 브라이덴의 설명에 나머지 드워프들이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의 말이 계속 되었다. "우선 자네 손에 들려있는 것은 나무를 다룰 때 쓰는 조각도중 하나 일세. 우선 조각 도의 모양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물론 자네에게 준 연장들에 모두 포함 되어있지. 자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각도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일세. 나무는 한번 파내거 나 잘라내면 다시 붙여서 사용 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스런 손놀림이 필요하다네. 우 선 나처럼 손을 조각도의 뒤쪽에 두고 조심스럽게 바깥쪽으로 파내는 걸세. 자 나처 럼 해보게나." 설명을 하며 능숙한 솜씨로 나뭇결 위를 유영하는 그의 조각도는 마치 살아있는 듯 보였는데, 그의 손이 지나간 곳이면 여지없이 매끈한 면이 생겨났다. 매일 보던 모습 이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단순한 손놀림 하나가 예사가 아니란 것을 느끼는 뮤스였 다. 몇 번을 반복하던 브라이덴이 뮤스에게 해보라고 하자 뮤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조각도가 지나간 자리는 거칠었고, 조각도의 날 역시 이리저리 움직여 나무도막을 볼성 사납게 만들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맺혀있 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후우! 이거 정말 힘들군요. 막상 해보니까 알겠어요." "노력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한다면 드워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아저씨들은 지금 뭘 만들고 계시는 거죠?" 뮤스의 질문에 약간 당황한 브라이덴은 켈트를 보며 해명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 냈다. 켈트는 사촌동생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껄껄껄. 놀면 뭐하겠냐. 돈이라는게 있으면 있을 수록 더 욕심이 아는 것이 아니겠 어? 그래서 너희 축제 때 팔려고 전뇌거 모형을 만들고 있단다. 한마디로 부업이란 뜻이지." 켈트의 말에 나머지 드워프들은 부끄러운 듯이 식은땀을 흘렸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당당하기만 했다. 왠지 켈트와 크라이츠가 닮아 간다고 생각한 뮤스는 쓴웃음 을 지어 보이며 자신의 손에 들린 조각도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 자 점차 능숙한 솜씨로 나무를 깎아 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드워프들의 손은 서서히 멈춰지고 있었다. 목공의 선생인 브라이덴 역시 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 예전에 나무를 다루어 본적이 있었나?" 하지만 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저 손에 빠르게 익혀지는 느낌이네요. 움직일 수록 자세가 편해지기도 하 구요." "아무래도 자네에겐 재능이란 것이 있나보군 허허. 참 축복 받은 존재일세 엄청난 지 혜에 손재주라니... 모든 사람들이 자네 같았더라면 우리는 이 짓거리 해먹기도 힘들 겠구먼? 껄껄!" 뮤스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하루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뮤스는 오늘의 고된 일과 때문인지 머리를 베개에 붙이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7 어두운 공간. 자신의 손조차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암흑이었고 주변을 둘러봐도 눈앞 으로 지나가는 영상들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곳이 자신이 잠들어 버린 방이 아니란 것에 불안감을 느끼던 뮤스는 등허리로 땀이 흐름을 느꼈다. 이때 어둠의 공간이 열리며 낯선 숲 속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 다. 밤 안개가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높이 뻗은 나무들 사이로는 희미한 달빛 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를 놀라게 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쿠워워워... [이...이게 무슨 소리지?]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보며 귀를 자극하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려 할 때... -푸드득! 퍽! 우거진 나무숲 한쪽이 터져 나가며 검은 물체가 튀어 나왔다. 스스로의 힘이라기 보 다는 강한 충격을 받고 튕겨져 나온 듯했는데 얼핏 봐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쓰러져 있는 검은 옷의 인영을 살펴보자 어디선가 많이 본 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복식.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고개를 들어 그가 튕겨져 나온 곳을 바라 봤지만 나무들과 주변의 광경들은 이미 연 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또 다시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피고 있을 때 그의 뒤로는 또 다른 광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몇몇의 인 영들이 거대한 무엇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어두움에 얼굴이 가려져 있 었기에 누구인지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 -탕! 한 인영의 손에서 불빛이 번쩍이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생명체는 비틀거렸 다. [저것은 지자총통...] 뮤스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다시 금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며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명신이냐? 암흑 속에서 뮤스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메마른 듯 했지만 어딘가 풋 풋한 목소리... 장영실의 목소리였다. 귀익은 목소리에 반가워하며 몸을 돌렸지만 허 무하게도 목소리만이 울릴 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영실 아저씨?! 어디에 계세요? 대답해 주세요!]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뮤스는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장영실의 모습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이때 누군가 자신을 흔드는 느 낌을 받았다. "뮤스! 이제좀 일어나렴! 이러다가 지각한다!" 크라이츠의 외침과 함께 뮤스가 눈을 떠보니 아침 햇살이 그의 이마를 찡그리게 만들 었다. "하아... 꿈이었구나..." 그제서야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말자... 내가 걱정을 해서 이런 꿈을 꾼 것일 테니...]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뮤스는 눈동자를 돌려 크라이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아침 과목이 휴강이라서 지각 걱정은 안 해도 되요." 크라이츠가 그의 이마를 쓸어 내리자 그녀의 손은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너 오늘 학교 끝나고 할일 있니?" "아..아뇨. 전뇌거 운전은 회원들에게 다 가르쳤고, 오늘은 경주를 할 도로를 돌아 볼 예정이었거든요. 그일 외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는 노곤한 몸을 일으키며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신발을 신었다. "그럼 잘됐구나. 오늘 학교 끝나는 데로 공학원으로 오렴 너와 갈 곳이 있으니까 말 야. 중요한 일이니까 곧장 와야한다." 의아한 뮤스는 크라이츠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그녀는 비밀이라며 대답해 주지 않 았다. 더 이상 해봐야 힘 낭비라고 생각한 뮤스는 느긋하게 학교 갈 준비하기 시작했 다. (19) 바르키엘. 학교는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인지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다음 주가 되려면 3일이 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축제를 준비하기에는 극히 짧은 시간이었기에 모두들 분주했 다. 어제부터는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 되어 버려서인지 더욱 붐비는 곳은 동호회건물 이었다. 건물 뒤의 넓은 공터는 각 동호회 회원들의 연습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빈자 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뮤스는 처음 겪어 보는 축제였지만 그것이 어떤 느낌을 사 람들에게 주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동호회실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히안만이 책 을 읽고 있었다. "여어! 뮤스 일찍 왔네?" 그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올리며 신이 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뭐 좋은 일 있냐? 그건 그렇고 폴린은 왠 일로 옆에 없어?" "하하 오늘은 늦잠 좀 자고 싶다고 해서 나 먼저 왔지. 조금 있으면 나올 거야! 그건 그렇고 로데오 정말 죽이던데! 흐흐흐. 밤거리를 달리는 느낌이란!" "쯔쯧. 사고 안 난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군. 다른 애들은 올 때 되지 않았어?" "사고는 무슨! 그건 그렇고 넌 축제 때 어떻게 할거야? 혼자 지내는 건 아니겠지?" "혼자라니? 너희들이 있잖아?" 히안은 답답하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누가 축제 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냐? 다들 파트너를 구해서 다닌다고! 아마 지금 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넌 혼자 다녀야 할걸? 그때 그... 뭐였지? 아! 가이엔! 걔는 어때? 그 정도면 스타일 좋고 얼굴 예쁘고 꽤 괜찮잖아? 그 아이도 널 마음에 들어하 는 눈치던데?" "행여나 그런 소리 마라! 그럴 리가 없잖아? 잔소리 말고 전뇌거 연습이나 잘해!" "이 형님을 도와준게 고마워서 보답 좀 하려고 했더니 고작 그런 반응이냐? 알았다! 쳇." 투덜거리며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계속 보기 시작했다. 막상 히안에게는 그렇게 말 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축제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처 음으로 경험하는 축제를 어눌하게 보내긴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카타리나 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럼 카타리나는 축제기간에 누구와 보낼까?] 이때 뮤스와 통한 것이라도 있는지 동호회실의 문이 열리며 카타리나가 들어왔다. 평 소처럼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히안과 뮤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얘들아 안녕!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니?" "그래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우리 동호회에 들어온 새로운 손님이 있단다!" 카타리나의 말에 둘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것도 잠시, 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선 그녀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가이엔! 너도 여가활동 동호회에 들기로 한 거야?" 놀랍다는 듯이 뮤스가 묻자 가이엔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히안은 히죽거리면서 조용히 뮤스의 귀에 중얼거렸다. "흘흘...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걸? 안 그래 뮤스?" 히안의 말에 당황했지만 소리를 높일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뭐가 심상치 않다는 거야!?" 둘의 행동에 카타리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히안 너는 폴린과 안 싸우니까 이제 심심함을 이길 길이 없어서 뮤스와 티 격거리는 거니? 새로운 손님도 오셨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히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여다. "이봐 카타리나 난 다 뮤스 이 녀석을 위해 그러는 거라구! 내가 뮤스를 얼마나 아끼 는데 안그러냐 뮤스?" "허... 대강 그렇다고 해두자. 이쪽으로 앉아 가이엔." 뮤스가 의자를 빼주며 가이엔의 자리를 만들어 주자 히안은 의미 심장한 표정을 지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뮤스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카타리나에게 말했 다. "전뇌거 운전은 좀 어땠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 "응 생각보다는 쉽던걸? 정말 재미있었어. 아버님께 부탁해서 나도 사고싶던걸? 과연 허락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후훗.,. 네가 산다면 싸게 해줄게!" 뮤스의 말에 놀란 카타리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가이엔과 히안의 표정을 조용히 살펴 보자 그녀의 예상대로 둘은 미심 적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싸게 해준다니?" 우려했던 질문을 히안이 던지자 뮤스는 당황하여 아무런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바보 같을 때가 있나...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타리나가 능숙하게 둘러대며 말을 받아주었다. "아 그거? 어제 내가 전뇌거를 가지고 싶다고 했더니 뮤스의 전뇌거를 나에게 판다고 했어, 공학원에서도 시험용이라서 싸게 판다고 했거든." "아하! 뮤스 그럼 내꺼도 어떻게 안되겠냐? 또 다른 시험용 전뇌거는 없는거야?" 순진하게 속은 히안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심 자신 때문에 거짓말을 하 는 카타리나에게 미안함을 느끼고있었다. 또, 언제까지 친구들에게 비밀로 할 수 있 을 지도 걱정이었다. 뮤스의 고민이 심각해 질 때쯤 히안의 반쪽인 폴린이 당당하게 회실로 들어왔다. "호호! 자기야 나왔어!" 사람 코의 신비한 능력을 절감 할 수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자리 를 메우고 있던 친구들은 의식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히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복이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으니... "어마? 이쪽은 가이엔 아니니?" "응 오늘부터 가이엔도 우리 동호회에서 활동할거야. 마침 아직까지 다른 동호회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구. 앞으로 잘 지내렴." 카타리나의 소개에 정식으로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한동안 잡담을 하며 즐거운 시 간을 보냈다. 조금 지나자 다른 회원들이 하나 둘씩 오기 시작했고, 전뇌거 경주에 참가할 회원들이 다 모이자 그들은 연습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당분간 전뇌거에 대 하여 아는 것이 전무한 회장 대신 뮤스가 연습을 담당했고, 연습하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연습을 보조를 하는 식이었다. 아직은 연습기간이 짧아서 인지 조금 은 어색한 점도 보였지만, 상대 학교의 선수들 역시 이들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기 에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8 늦은 오후 무렵 식사담당 회원들이 점심을 사오자 연습을 잠시 중단하고 식사를 시작 하였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같은 목표를 위해 활동한다는 것이 즐겁기만 한 뮤스 는 지도를 하느라 피곤한 와중에도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식사를 하고있던 그들을 향하여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 오고있었다. "헉헉. 에고 힘들다. 벌써 늙어가고 있는 건가? 아직 3학년 밖에 안됐는데." 엄살을 부리고 있는 머글린이었다. 회장의 직책에 조금은 안 어울리는 행동이었지만 언제나 자유분방한 여가활동 동호회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를 보던 폴린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홋! 선배 그러니까 평소에 운동 좀 하라구요! 매일같이 동호회실에 앉아서 샌님 처럼 책이나 읽으니까 그렇죠!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조용히 해라 폴린. 감히 선배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이 선배님은 힘들어 죽겠구 만..." 그의 말에 폴린은 혀를 삐죽 내밀었고, 머글린은 한번 더 허리를 폈다 굽히며 말했 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내가 카이젠을 염탐하기 위해 서 다녀오는 길인데 그 녀석들 장난이 아니더라구! 왠 여자가 그쪽 선수들을 가르치 고 있는데 정말 대단했어. 시범을 보인다면서 엄청난 속도로 연습장을 누비더라니까! " 머글린의 말을 들으며 가슴을 철렁인 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그 여자의 머리가 금발 아니던가요? 약간 어두운 금발... 거기다가 매서운 눈매를 하고, 카타리나보다는 조금 큰 키의?" "어라 너도 거기 다녀왔던 거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지? 대단해! 대단 해!" 설마하고 물었던 것이 사실로 다가오자 뮤스는 하늘이 노랗게 되는 것을 느꼈다. [크라이츠 누님. 어이해 저에게 이런 시련을.] 뮤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자 가이엔이 걱정이 되는지 물었다. "뮤스 괜찮은 거니? 안색이 안 좋은걸?" "괜찮아 가이엔. 약간 어지러웠을 뿐이야.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우린 이러고 있을 시 간이 없어. 이렇게 하다간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거야. 다들 밥 먹었으면 연습을 하자고 연습!" 느긋하게 가르치던 뮤스의 태도가 돌변하자 의아하기만 한 회원들과 친구들이었다. 연습장으로 회원들을 떠밀어낸 뮤스는 혼자 고민에 빠져있었다. [크라이츠 누님이 가르친다고 한다면 그 녀석들은 목숨을 걸고 배워야 할거야. 하지 만 그만큼 효과는 뛰어나지. 나보다 크라이츠 누님이 전뇌거를 몰아본 경험이 많으니 상대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그가 고민하는 이유를 눈치챈 카타리나가 뮤스에게 다가와서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말했다. "뮤스. 혹시 너희 누나가 그쪽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거니?" "응. 아주 최악의 상황이야. 카이젠 대학교가 공학원으로 지원 요청을 한다고 하길래 설마 했더니, 크라이츠 누님이 그런 일을 할 줄이야. 정말 요즘에 놀랄 일이 너무 많 은 것 같아. 이렇게 동생(?)을 괴롭히다니..." "그래 너희 누나도 참 대단하구나... 이제는 어떻게 할 샘이야? 보아하니 너희 누나 의 실력이 대단한가본데..." "응. 정말 대단하지 나보다 훨씬 실력이 좋단 말야. 오히려 전뇌거를 설계한 나보다 더..." 꽤나 심각한 상황이란 것을 인지한 카타리나도 함께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달리 좋은 방법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3일 남았을 뿐인데... 누님의 막무가네 성격이면 그들을 충분히 엄청난 실력으로 만들고도 남을걸... 내가 이쪽 편만 아니었다면 누님이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야..." "뮤스! 그런 말하지마. 설령 그렇다해도 네가 우리 학교에 다니게 한 것을 후회하지 는 않아. 기껏 시합하나 가지고 뭘 그러니? 아직 진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래. 네말이 맞아. 아직 진다는 보장도 없지!" 카타리나의 위로에 힘을 얻었는지 더욱 열심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 다. [내가 크라이츠 누님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 그렇지!] "카타리나! 방법을 찾아냈어!" 갑작스런 뮤스의 외침에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카타리나였다. "정말? 어떤 건데?" "하하 그건 내일 말해 줄께!" "그래 그러지 뭐... 서운하지만 참을게." "하하 고마워. 그건 그렇고 그 방법을 실행하려면 지금 공학원으로 가봐야겠는걸?" "벌써 가려구?" "응 그럼 다른 친구들에게도 인사 좀 전해 줘! 부탁한다. 내일 보자!" 카타리나에게 급히 인사를 건넨 뮤스는 서둘러 전뇌거를 타고 사라졌다. 멀리 교문을 벗어나는 전뇌거를 보며 카타리나가 싱긋이 웃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하던 가이엔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카타리나 왜 그렇게 혼자 웃고있어? 뭔가 좋은 일 있니?" "어머! 내가 그랬어? 아무 것도 아냐 난 그냥 웃으면 안돼는 것도 아니잖니. 호호" 그래도 가이엔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뮤스는? 안보이네?" "아! 시합 때문에 급히 가봐야 한다고 방금 집으로 갔어. 인사 전해 달라고 하더라 친구들에게..." "아... 그렇구나." 왠지 가이엔의 대답에는 아쉬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 드넓은 공터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두 대의 로데오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요란한 굉음이 나진 않았지만 박력 있는 주행 모습과 마차를 능가하는 빠른 속도의 매력은 사람들의 눈을 붙잡아 둘만 하였다. 공터의 외곽에서 전뇌거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브론즈머리의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크라이츠 였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로데오 두 대는 즉시 방향을 틀어 그녀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뭔가 불만이 잔뜩 쌓인 표정으로 아미를 찡그리며 매섭게 말했다. "이봐요! 첫 번째 로데오 운전하는 학생! 이름이..." "네! 바르키엘입니다!" 스스로 밝힌 것과 같이 카타리나의 앞에서 잘난척하던 카이젠 대학교의 바르키엘이었 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예전의 건방진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기합만이 잔뜩 들어간 말투로 대답하는 그였다. "아... 그랬었지. 기억력하곤... 바르키엘이라고 했었군요... 그런데... 운전하는 꼴 이 이게 뭐죠?" "꼬.. 꼴 이라니요?" 지금까지 남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어본 적 없는 바르키엘은 황당해하며 되물었지만 크라이츠는 코웃음 치며 그의 귀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었다. "하는 꼴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는 꼴이라구요! 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시겠습니까?" 그녀의 말 자체로는 나름대로 상대방을 높이는 말이었지만 특유의 삐딱한 억양이 가 세하자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제.. 제가 혹시 잘못이라도?" "호호호. 겨우 이따위로 운전해서 시합에 나갈 수나 있겠습니까? 좀 전 까지만 해도 큰소리 떵떵 치더니 지금 회원들 중에서 제일 못하는군요!" 크라이츠의 호통에 바르키엘은 고개를 숙이며 절절 기고있었다. 평소 바르키엘이 얼 마나 콧대높고, 건방진지를 아는 인물이라면 이 모습을 보고 두 눈을 비비며 의심했 으리라. 하지만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무런 말도 없자 크라이츠는 희죽 웃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호호홋. 어디 아까 처럼 한번 더 건방지게 굴어 보시죠?" "헤헤... 아.. 아닙니다요. 제가 잘못했는걸요.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르키엘은 비굴하게 웃으며 낮은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잘 생각했군요! 빨리 가서 더 분발하세요! 안 그러면 그쪽의 강적에게 이기는 건 불 가능 할겁니다. 앞으로 전속력으로 20바퀴 더 도는 겁니다!" "스..스무 바퀴요?" "왜요? 불만입니까? 30바퀴로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 당장 돌겠습니다!" 급하게 연습용 로데오로 달려간 바르키엘은 속으로 이빨을 갈며 화를 삭힐 뿐이었다. 그가 화를 내기에는 크라이츠라는 벽은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한시간 전만 해도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였건만... 한시간전, 카이젠 여가활동 동호회 회원들은 공학원에서 전뇌거 운전교습을 위해 파 견 나왔다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한금발의 머리에 늘씬한 몸매, 화려하진 않지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은 그녀의 스타일은 흔히 보기 드문 것이었다. 동호회 의 회장직에 앉아 있는 바르키엘은 씨익 웃으며 특유의 건방진 폼으로 건들거리며 말 했다. "흐흐. 아가씨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까?" 그의 건들거림에 별 신경을 안 쓰는지 그녀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호. 네 그렇습니다. 제가 시합전날까지 여러분들을 지도 할 사람입니다. 뭔가 질문이라도 있으신가요?" "다른게 아니라 아가씨 같은 미인께서 저희를 지도해 주신 다니 영광이라 느껴져서 말입니다. 연습이라도 끝난다면 보답으로 아가씨와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그의 말투는 동네의 삼류 건달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서서 하는 양을 지켜보던 회원들은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고, 바르키 엘은 뒤를 돌아보며 친구들의 환호에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의 하는 짓을 바라보던 크라이츠는 변함없이 미소를 띄우며 조용히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간 녀석아. 입다물고 시키는 대로 배워라. 계속 그렇게 입을 놀린다면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드래곤 피어를 섞어 말한 그녀의 목소리에 바르키엘의 얼굴은 겁에 질려 하얗게 변했 다. 하지만 자존심이 무척 강한 그였기에 자신의 몸에 있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며 말 했다. "이...이게 가..감히 누구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것이냐! 보아하니 평민 나부랭이 같 은데! 후회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사과 못하겠느냐!" 하지만 별 위엄 없는 그의 협박을 비웃으며 크라이츠는 싸늘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학생의 이름이 뭐죠? 그것이라도 알아야 사과를 하든지 뭘 하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 까?" 그녀의 당당한 반응에 바짝 긴장을 했지만, 그는 천하의 잘난 젊은이인 바르키엘이었 다. "알면 후회할걸? 바르키엘 호바인 폰 디바이어 님이시다!" 크라이츠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손뼉을 쳤다. "아! 그렇다면 학생의 아버님 존함이 쿠비렌 호바인 폰 디바이어 이신가요?" 그녀가 자신의 가문을 알아주자 바르키엘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며 자랑스럽게 말 했다. "어디서 들은 것이 있긴 있나보군. 알았다면 조용히 사과하시지?" 하지만 말을 마친 바르키엘의 눈에 비친 크라이츠의 모습은 처음과 전혀 다른바가 없 었다. 오히려 약간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 아버님께 크라이츠 드라켄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적 있으십니까? 얼마 전에 저 를 찾아 오셔서 사업자금을 빌려 달라고 애원을 하시던데... 자제 분께는 아무런 말 도 안 하셨나 보군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본 결과 몇 일 전 자신의 아버지인 쿠비렌이 새로운 사업자금확 보를 위해 공학원을 찾아갔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륙 전체를 통 털어 현재 가장 막강한 유용자금력을 지닌 곳이 다름 아닌 공학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총 자산이 대륙최고는 아니었지만 전뇌거 판매를 통해서 벌어들인 재화는 곧바로 사회에서 통용 가능한 자금 형태였기에 상업에 손을 대고 있는 가문들은 앞다투어 공학원을 찾는 실 정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싸늘한 미로를 띄우며 웃고있는 여성이 엄청난 거물이라 는 것을 알아버린 바르키엘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혹시. 댁이.. 아니, 레이디께서 공학원의 재무담당이신 크라이츠님 이십니까?" 그가 목소리를 떨며 물어보자,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는지 크라이츠가 거만한듯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호호 제가 공학원에서 나왔고, 이름이 크라이츠인 것이 틀림없으니... 아마 제가 그 사람이겠죠?" 그의 예상을 확인시켜주는 크라이츠의 말이 끝나자 바르키엘은 조금 전의 위세는 어 디 갔는지 꼬리를 내리며 회원들의 무리사이로 사라졌다. 그토록 위세 당당하던 회장 이 기가 죽어 몸을 숨기자 다른 회원들 역시 이유도 모른 채 고분고분 크라이츠의 말 을 듣기 시작했다. "호호호! 오늘부터 여러분은 햄브리겐 대학교를 이기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겐 대강이란 없다는 걸 말씀드리며 연습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기 초체력이 중요하니 운동장을 10바퀴 뛰는 걸로 연습을 시작하죠." 그때부터 카이젠 대학교의 여가활동 동호회는 창설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49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47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49 (20) 크리스티앙의 약혼식. 공학원으로 돌아온 뮤스는 전뇌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동력기 여덟 개를 가지고 제 작실로 들어간 후 눌러 앉았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뮤스가 제작실에 들어간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자 궁금해진 드워프들은 제작실의 문에 귀를 들이 댄 채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몰래 듣고있었다. 문의 가장 위에 귀를 대고 있던 켈트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쉿. 안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소형 동력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구 먼." 그의 바로 밑에서 켈트를 받치고 있던 블뤼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조금 더 조용히 말씀하시죠. 형님 말씀대로 전뇌공구를 쓰는 모양인데요?" 블뤼안이 말한 전뇌 공구란, 뮤스가 드워프들의 일을 돕기 위해 설계한 공구들로써 뇌공력을 주입하거나 마나구를 장착하여 움직이는 공구들이었다. 구멍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공구부터 시작하여 나무를 자르는 공구, 철판을 잘라내는 공구까지 그 용도 와 종류가 다양했고, 이들 전뇌공구 덕분에 전뇌거 생산이 더욱 손쉬워지고, 빨라졌 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것들이 드워프들에게 필수 적인 공구가 되기도 했 으니... 가장 밑에 깔려있던 레딘이 나이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형님. 이제 좀 비켜요. 이 아우는 깔려 죽겠습니다! 제길 뮤스군이 나오면 가르쳐 주겠죠!" 이때 제작실에서 들려오던 전뇌공구들의 소리가 멈추면서 뮤스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완성이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어! 크라이츠누님 두고 보시라구요!" 뮤스가 외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는 드워프들은 밀려오는 궁금함에 또다시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제작실의 문을 열고 나온 뮤스의 손에는 거대한 동력기가 여덟 개가 들려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 정도 무게의 물체를 맨손 으로 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뇌동체술법을 익힌 뮤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뇌공력의 운기는 이미 몸의 버릇이 되어 버 렸고, 그 것의 이용 역시 자연스러워 졌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뇌공력을 발현하기 싫어하는 뮤스로서는 공학원에서 작업을 할 때 이외에는 뇌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뮤스의 손에 들려져 나온 동력기는 보통의 그것과 별다른 점을 보이고 있지 않았는데 켈트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뮤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 뮤스! 제작실에 틀어박혀서 뭘 그렇게 만들고 있었던 거냐? 동력기를 봐도 별 다른 점이없는데?" 뮤스는 동력기를 한쪽에 내려놓은 후 손으로 코밑을 스윽 닦으며 말했다. "후훗. 이건 보통 동력기가 아니예요! 같은 양의 전뇌력으로 두 배의 힘과 속도를 낼 수 있는 동력기라구요! 즉 초 동력기라고 할까요? 후후훗. 크라이츠 누님께 이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엥? 초 동력기? 그럼 그것을 어디에 쓴다는 말이냐?" "물론 저희 동호회의 로데오에 장착하려는 것이죠! 운전 능력에서 저쪽의 상대가 안 된다면 직선주행에서라도 차이를 따라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켈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봐 뮤스. 그것은 정정당당하지 못한 일이야. 같은 상황을 가지고 서로의 운전실력 을 가름하는 시합인데 로데오를 개조한다니... 그럼 쓰나..." 물론 켈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뮤스였지만 크라이츠의 얼굴을 떠올린 그는 켈트의 말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뇨. 정정당당하지 못한 것은 저쪽일지도 모른다구요! 크라이츠누님이 저쪽 편에 서있는 판국에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정정당당한 것이라구 요." "크라이츠님이 저쪽 편에 서있다니 무슨 말인가?" 드워프들은 지금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 크라이츠 누님이 상대 학교의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니까요! 모르셨어요? 누 님의 실력과 성격을 알잖아요? 누님이라면 저 쪽 선수들을 엄청난 고수로 만들어 버 리고도 남을 것이라는 거..." 그제서야 드워프들은 이해가 가는지 뮤스의 행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너의 행동도 일리가 있구나. 우리가 뭘 도와줄 일은 없냐? 간접적으로라도 크라이츠님을 좀 눌러봐야겠다. 그 동안 돈을 많이 벌긴 했다만 얼마 나 시달렸는데! 껄껄껄" 드워프들의 도움을 구한 뮤스는 시합 때 제공되기 위해 준비된 로데오 여덟 대에 자 신이 개조한 동력기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물론 크라이츠가 이 일을 모르게 하기 위 하여 서두르는 기색이었고, 크라이츠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다는 기대감 하나로 즐겁 게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전뇌거 개조작업을 끝낸 드워프들과 뮤스는 공학원 작업장에서 남는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뮤스는 드워프들에게 기술을 배웠고, 드워프들은 전뇌거 모형을 깎아내고 있었다. 블뤼안과 브라이덴 그리고 켈트는 쉴새없이 나무를 깎았고, 레딘은 깎아낸 전뇌거에 채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을 거친 나무 전뇌거 모형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 듯 진짜와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나무를 깎던 블뤼안 이 뮤스에게 말했다. "뮤스군 이제 나무 깎는 것이 꽤나 숙달이 된 듯하구먼. 전혀 초보 같지 않을 정도 야. 손재주가 비상한 걸?" 다른 드워프들 역시 블뤼안의 말에 동의를 하는지 나무를 깎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붓을 들고 나무에 색칠을 하던 레딘이 말했다. "쿠흐흐. 정말 그런 것 같아. 아무래도 몇 달만 배우면 우리의 기술을 다 훔쳐갈지도 모르겠구어! 좀 쉬엄, 쉬엄 하라고! 우리도 밥 벌어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 드워프들이 띄워주자 뮤스는 기분이 좋아져 더욱 열심히 손을 놀렸다. 이때 공학원 밖에서 전뇌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드워프들과 뮤스는 그 전 뇌거의 주인이 크라이츠임을 예감했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털컹 "여러분 다녀왔습니다. 수고들 하시고 계시네요?" 그들의 생각대로 쪽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크라이츠였다. 먼지가 뿌옇게 묻어있는 옷을 털며 인사하는 그녀에게 켈트가 웃으며 말했다. "껄껄 먼지구덩이에서 구르다 오신 모습이신 걸요? 그리고 오늘까지 예약된 전뇌거 생산은 끝냈습니다. 이젠 우리도 당분간은 부업하면서 쉬어도 되겠지요?" "호호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그 동안 수고하셨어요. 그럼 다음주부터는 축제나 즐기 면 되겠군요." 크라이츠의 말에 드워프들은 술을 떠올리며 싱글거렸다. "그럼 전 좀 씻으러 들어가 볼게요. 켈트님과 다른 분들도 오늘 제가 낼 테니 나가셔 서 신나게 즐기도록 하세요. 그리고 뮤스는 나와함께 어디를 좀 가야하니까 옷 좀 단 정히 입고 기다리렴." 즐기라는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들이 돈이 궁한 것은 아니었지만, 술이나 밥은 남이 사줄 때가 두 배로 좋은 법이었기에 더욱 즐거웠던 것 이었다. 이미 왠만한 귀족들보다 부자가 되어버린 드워프들... 원래 있는 놈들이 더 하다고 했던가? 그녀의 말에 뮤스는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예? 옷을 단정히 입으라니요? 또 어려운 자리에 가는 거예요?" "음... 그렇게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해 줘야 할 것 같구나. 아무튼 빨리 준비하 렴." "아...네." 크라이츠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온 뮤스는 자신의 방에서 가볍게 씻고 있었다. 세수를 대강 마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뮤스도련님 옷을 준비해 왔습니다!" "아! 바이멀 아저씨군요. 들어오세요!" 집사인 바이멀은 언제나 딱딱한 차림을 하고있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는데, 크라이츠나 뮤스가 남다른 출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편한 생 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최소화 했고, 그런 연유로 인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들 을 빼면 직접 만나는 사람은 바이멀 뿐이었다. 그가 들고 온 옷은 척 보기에도 난 불 편하다고 쓰여있는 검은 정장이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사람의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디자인하며 마음까지 무겁게 누르는 듯한 색상. 모든 것이 뮤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는 것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준비 하십시요 뮤스 도련님." "휴우... 또 그런 옷을 입어야 하는군요. 전뇌거 발표회 때의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오늘은 더욱 심한 걸요?" "후훗. 그래도 뮤스 도련님께는 굉장히 잘 어울린답니다. 그러니 좋게 생각하시면서 입으십시요."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이멀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걸치기 시작했 다. 모든 준비를 끝낸 뮤스는 서재에서 크라이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준비가 조금 늦어지자 오랜만에 여유롭게 서재를 둘러보았다. 실상 약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의 집을 다 둘러보지 못한 뮤스였기에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 또 한 대부분이 낯선 것들이었다. 어디서 구해온 것들인지 책들은 꽤나 오래되어 보였 고, 여러가지 분야에 걸쳐 다양한 책들이 책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책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크라이츠가 들어왔다. 그녀는 순백의 연회복 차림이었는데 뮤 스의 옷과 맞추기라도 했는지 화려함보다는 단순하면서도 고아한 멋을 풍기는 드레스 였다. "와아! 누님 정말 잘 어울리는 걸요?" 드래곤이나 사람이나 칭찬 앞에서는 약한 것인지 크라이츠는 좋아라 웃었다. "호호! 너 역시 상당히 멋지구나. 그럼 출발할까?" "출발하기 전에 어디로 가는지는 말씀 좀 해주면 안될까요?" "호호 오늘 크리스티앙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란다. 켈트씨도 함께 가셨으면 좋으련만 사촌 동생을 두고 혼자만 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사양하더구나. 또 워낙에 딱딱한 자리를 싫어 하잖니." "드디어 두 분이 결혼을 하시는 군요?" 목적지를 알게된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라이츠를 따라 전뇌거가 세워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은 다시 복잡해 오고 있었으니... [페릴님의 집이라면... 카타리나의 집이잖아? 나 참...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나면 영 불편 할 것 같은걸? 설마 다른 친구들까지 와있진 않겠지? 아냐아냐.. 다 른 친구들에게 귀족이란 걸 숨기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지...아무렴...] 뮤스는 또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과 신분을 드러내야 한다는 불편함에 걱 정을 하기 시작했다. 공학원 앞에 세워진 크라이츠의 포센트에 올라탄 뮤스는 새삼스 럽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포센트는 일반 기종과 모습이 전혀 달랐는데, 보통 의 포센트 보다 일 멜리 정도나 더 길었고, 그녀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얇게 도 금까지 한 외관이었다. 마치 움직이는 금덩어리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내부 역시 겉모습 못지 않게 특별했는데, 한칸 더 달린 의자가 서로 마주보는 형식으로 되어있 었기에 세 명 정도가 더 탑승가능 하였고, 고급목재 대신 역시 금으로 치장이 되어있 었다. 운전석에 앉은 정장 차림의 운전기사는 아무 말 없이 포센트를 서서히 몰아 나 갔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0 화려한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언덕 위의 거대한 저택, 드넓은 정원부터 본관 건물까지 수많은 마법등들이 밝혀져 있어 밤으로 착각하고 밖으로 나온 야행성 동물 들을 놀라게 했다. 수많은 전뇌거들이 여기저기서 도로를 타고 속속들이 몰려들고 있 었는데 대부분은 포센트 기종들이었다. 이미 전뇌거가 귀족들에게는 권력을 나타내는 필수적인 항목이 되어 버렸고, 허영심 그득한 귀족들이 최고의 기종인 포센트를 선호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뇌거가 보급된 이후에 처음 열리는 큰 연회여서 인지 일부의 귀족들은 연회장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전뇌거 앞에서 다른 귀 족들과 대화를 나누기 여념 없었다. 꽤나 요란하게 치장된 포센트의 앞에서 느끼하다 고 생각될 정도의 뚱뚱한 몸매를 소유한 귀족이 침을 튀어가며 떠들고 있었다. "껄껄. 지덴 남작 내 포센트가 어때 보이는가? 이번에 공학원에서 주문하자마자 내 품위에 걸맞게 개조를 했다네. 라이돌프산 최고급 카펫을 바닥에 깔았지. 그뿐이던 가? 드워프들에게 수많은 돈을 주고 세공 한 보석들이 내부에서 찬란함을 더한다네. 포센트 내부를 꾸미고 있는 원목들과 아주 잘어울리지. 자자 이쪽 앞을 보게나. 이 마법등은 일반 마법등과는 달리 붉은 빛이 발한다네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이 불빛만 보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걸? 아마 오늘 연회의 주최자이신 하버만 후작님 의 포센트도 이보다는 못할 걸세!" 그 살찐 귀족의 말을 듣고 있던 귀족들 역시 그의 말에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잘 꾸며진 포센트를 향해 부러운 눈길을 보내고있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처 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크리스티앙 약혼식 이 거행될 슈베어가문의 저택이었다. 하버만 후작의 지위에 걸맞게 각지에서 축하 사 절들이 도착하고 있었고, 라이델베르크의 크고 작은 가문들의 귀족들 또한 더욱 잘 보이기 위해 바쁘게 참여하고 있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들이 자신들의 전뇌거를 주차하기 위하여 순서를 기다릴 때 슈베어가 저택의 거대한 정문으로 금빛 찬란한 포 센트가 느긋한 속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황금의 포센트가 들어오자 자신의 전뇌거 를 자랑하던 귀족들은 넋을 빼고 바라만 봐야만 했다. 그들의 눈빛은 부러움을 넘어 선 경이의 눈빛이었다. 황금의 포센트가 멈추자 검은 정장의 운전사가 뛰어나와 뒷자 리의 문을 서둘러 열었고, 뒷자리에 앉아있던 크라이츠가 특유의 고고한 품격을 유지 하며 포센트에서 걸어나왔다. 이때 그녀를 알아 본 자가 있었는지 군중들 사이에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저 레이디께서 공학원의 재무담당이신 레이디 크라이츠님 일세!" 그 외침소리에 주변은 술렁였고, 크라이츠는 자신의 유명세를 즐기려는지 미소를 지 으며 군중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예를 표했다. 이어 깔끔하고 단순했지만 고급스 러움이 드러나는 정장을 걸친 뮤스가 어색한 걸음으로 포센트에서 걸어나왔다. 군중 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그저 크 라이츠와 함께 있으니 평범한 이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크라이츠가 어정쩡하 게 서있는 뮤스에게 고아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을 건넸다. "뮤스야.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있지 말고 어깨를 펴는 것이 좋겠구나. 공학원의 원장 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되겠니?" 진담 반 장난 반의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뮤스는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먼저 걸어 가는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크라이츠가 걸어가자 군중들은 사람 한 명이 족히 걸 어 갈 정도의 길을 만들어 주었기에 크라이츠와 뮤스는 별 어려움 없이 연회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택의 내부는 뮤스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웅장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무려 여 섯 개나 달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내를 밝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벽을 둘러 가며 마법등이 걸려 있었고, 거대한 반원 모양의 계단이 홀의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 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온 백 여명의 귀족들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격식에 맞춰진 인사를 나누며 얼굴에 가식인지, 진심인지 모를 미소를 그려 내고 있었다. 이때 크라이츠는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하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버만후작님께 크라이츠 드라켄과 뮤스 드라켄이 도착했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이미 언질을 받은바가 있는지 하인은 더욱 공손하게 말했다. "아! 크라이츠님과 뮤스님이시군요? 저를 따라 오십시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그럼 부탁해요." 하인은 손에 들려 있는 쟁반을 다른 여성 하인에게 건네주고 크라이츠와 뮤스를 안내 했다. 홀을 걸쳐 올라가는 계단 말고도 다른 방을 통하여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크라이츠와 뮤스에게 불편함을 끼칠까 걱정하여 이쪽 길을 택한 것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환하게 밝혀져 있는 긴 복도가 있었고, 그 복도의 중간쯤 하여 문 이 반쯤 열려 있는 방이 눈에 띄였다. 하인은 그 방으로 둘을 안내했다. "이방입니다. 이곳에서 후작님과 페릴님, 크리스티앙님께서 연회 준비를 하고 계십니 다. 제가 먼저 후작님께 여쭙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요." "네 그러죠." 하인은 방에 노크를 하며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갔고, 크라이츠는 뮤스에게 웃으며 말 을 건넸다. "뮤스 너희 세계에서의 연회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곳과는 많이 다를 거야. 이런걸 경 험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구나. 그리고 듣기로는 약혼식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일이 거론 될 것 같은데..." 크라이츠의 말에 의아해진 뮤스가 되물었다. "약혼식 말고도 다른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글쎄...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연회 초대장이 발송 될 때 긴급 회의 사항까 지 첨부되어 있더구나. 차차 알게되겠지..." "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자 그 하인이 방에서 나오며 둘을 안내했다. 크라이츠와 뮤스 가 하인의 안내로 방안으로 들어가자 방안에는 하인의 말대로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 다. 남색의 세련된 예복을 아래위로 입은 크리스티앙이 반갑게 맞이했다. "뮤스님! 이제 오셨군요! 하하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햄브리겐 대학에 입학하 셨다고 하는데 정말이신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크리스티앙이 반갑게 맞아 주자 뮤스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을 받 았다. "하하. 지금 페릴님의 여동생이신 카타리나양과 함께 다니고 있죠." "예? 저희 카타리나와 함께 학교를 다닌 다구요? 카타리나에게는 그런 말을 못 들었 는데..." 뮤스의 말에 조금 놀라는 페릴이었다. 그녀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 고 있었는데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은은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드레 스였다. "카타리나가 말을 안 했나 보군요? 하하. 학교에서는 서로에 대해 숨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카타리나나 저나 사실이 알려지면 귀찮아지니까요." "하긴... 그 애가 집에서는 학교의 이야기를 통 안 하니..." 페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뮤스는 그들의 옆에서 온화한 인상의 백발 중년인을 보 게 되었고, 중년인의 얼굴에 멋스럽게 생긴 주름이 접히며 미소를 이루었다. "흠흠. 자네가 내 귀를 그렇게 괴롭히던 뮤스군이 맞나? 크리스티앙 때문에 아주 골 치 아팠다네 자네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 말이야. 난 하버만 슈베어라고 하지. 남들은 후작이라고 치켜세우길 좋아하지만 그렇게 불편해 하지 말게나." 하버만 후작의 따뜻한 맞음에 뮤스 역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직접 만나니 더욱 놀랍군. 젊은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놀라운 것은 변하지 않아. 뮤스군이라고 불러도 별 실례가 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공학원의 원 장님이신데 말이야." "물론입니다. 후작님." "흠.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군. 연회를 시작하도록 하세. 길튼!" 뮤스를 안내해준 하인의 이름이 길튼이었는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은 조심스 럽게 방으로 발걸음을 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후작이 말했다. "더이상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면 안되겠지. 그럼 연회를 시작할 준비를 해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후작님. 천천히 내려 오십시요. 시작 준비를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길튼은 서둘러 방을 나가 연회장을 향했고, 뮤스와 일행들은 대화를 나누 며 느긋하게 홀의 중앙에 연결된 계단으로 움직였다. 계단으로 하버만 후작을 위시한 일행들이 모습을 보이자 연회장의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잠시 진정되었고, 누군가의 시작으로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버만 후작은 웃으며 손을 조용히 들어 보였고. 그와 함께 다시 박수소리가 멎어갔다. 하버만 후작은 그리 크진 않지만 근엄 함이 한껏 들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제 딸의 약혼식에 이렇게 많은 발걸음을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는 바입 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아시다 시피 장차 저의 사위가 될 크리스티앙 하이만군을 소 개 해드리겠습니다." 하버만 후작이 연회복을 차려입은 크리스티앙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자 크리스티앙은 이런 자리에 익숙한지 별다른 긴장감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군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저와 페릴의 약혼식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저희 아버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아버님께서 먼 거리에 있으시기에 오늘 이 자리에는 참여 못 하셨지만 투트가르에서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하루 즐거운 시 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크리스티앙의 말대로 클래프 후작은 거리상의 문제 때문에 참여를 하지 못하였다. 타 인이 볼 때는 크리스티앙이 데릴사위가 됐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애초 클래프 후작 과 하버만 후작의 사이가 막역한지라 서로의 체면 따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하버만 후작의 말이 계속 되었다. "또 하나. 오늘 이곳에 귀하신 분이 자리해 주셨습니다. 요즘 가장 큰 화제로 떠오른 공학원의 원장님이십니다. 이쪽으로 나오게 뮤스군."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말에 군중들은 다들 두 눈을 부릅뜨고 한 걸음 내 딛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어 탄성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 저렇게 젊은 인물이..." 이 연회석에 자리하고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한번씩 내뱉은 말이었다. 대외적인 일 에는 언제나 크라이츠가 나섰기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새파란 젊은이가 공학원의 주인이라고 나타났으니 어찌 놀람이 크지 않겠는가. 군중들이야 어떻게 생 각하던 간에 뮤스는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연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학원의 대표인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제 옆에 계시는 크라 이츠 드라켄의 동생이지요.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 드리겠습니다." 뮤스의 인사말이 끝나자 연회석의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하버만 후작의 연회 시작 알림을 때하여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앞, 또는 옆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뮤스 일행들 역시 연회장으로 내려와 귀 족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단연 인기 있는 사람은 뮤스였는데, 엄청난 재산을 구 축하고 있는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지위는 당연 귀족들이 침을 흘릴만한 자리였기 때 문에 어떻게든 친분을 맺어 보려 애쓰고 있었다. 뮤스가 귀족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본 크라이츠는 그저 웃기만 할뿐 도와줄 마음은 없는 듯 했다. <대공학자> #51 -------------------------------------------------------------------------------- --------------------------------------------------------------------------------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1 뮤스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크라이츠에게 교육받은 예절을 지키랴,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랴 ... 사람들에게 난생처음 이렇게 시달려본 뮤스는 약 두 시간을 괴롭힘 당 한 끝에 겨우 속박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제서야 조금 여유가 생긴 뮤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라이츠와 연회의 주최자들은 아직도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 뮤스는 연회장 밖으로 나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물론 출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문에서 조금 걸어나와 왼편으로 발걸음을 하자 크리스티앙과 페릴을 엮어준 기억이 있는 아름다운 화원이 보였다. 그 때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새삼스런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는 크리스티앙의 일 때문에 유심히 보지 못한 꽃들을 지금에서야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었는데, 꽃들 하나 역시 조선과는 판이한 모습의 것들이었다. -저벅..저벅.. 화원의 한쪽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꽃을 구경하던 뮤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명의 여성인 듯 갸냘픈 몸매를 가진 인물 들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자 발걸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동시에 뮤스의 얼굴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표정이 떠올랐다. 반가움과... 당황... "호호호! 뮤스 너도 여기 있었구나? 너 역시 이런 연회를 안 좋아 할 줄 알았어!" 카타리나의 목소리였다. 털털하고 귀족적이지 못한(?) 성격을 지닌 그녀 역시 딱딱한 연회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 화원으로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녀와 함께 있는 여성에게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가이엔이었다. 이런 자리에 있으 리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뮤스는 자신의 신분이 또 한번 노출된다는 점에서 적지 않게 당황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뮤스 뿐만이 아닌지 가이엔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뮤스가 당황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뮤스를 진정 시켰다. "그렇게 당황하지 말라구. 가이엔은 알아도 상관없을 거야. 얘도 나와 비슷한 부류거 든? 그런데 가이엔 너는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졌어? 날이 추워서 그런거니?" 카타리나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가이엔은 고개를 바삐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를 했 다. "으..응! 날이 추워서 조금 열이 나는 것 같아!" "어머 그럼 우리 들어갈까? 환절기라서 감기 걸리기 쉬워! 뮤스 같이 들어갈래?" 카타리나의 말을 들은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난 조금 더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꽤나 심하게 시달 렸거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뮤스를 보며 카타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가이 엔과 함께 연회장으로 걸어가려 하자 가이엔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 했다. "아..아냐. 들어가 봤자 머리만 아플 건데 뭐. 그냥 이렇게 찬바람 쐬는게 더 나을 것 같아." "그래도 되겠니?" "응. 이것 봐 이제 얼굴도 정상이잖아. 맞지?" "음. 그렇긴 한데... 그래 그럼 뮤스랑 바람이나 더 쐬자." 화원을 한바퀴 거닐 동안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주로 축제에 대한 이야기 였는데 여가활동 동호회의 부회장인 카타리나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뮤스의 당황도, 가이엔의 어색함도 점점 없어져 갔고, 둘은 좀 더 친한 사이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 그럼 너희 둘은 시니어 스쿨에 다닐 때만 해도 굉장히 친한 사이였구나?" "응 그렇지. 카타리나가 귀족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한동안 연락이 뜸했거든. 처 음엔 조금 화도 났지만 카타리나가 원하는 것이었으니 참을 수밖에... 연회나 무도회 가 있을 때는 언제나 둘이 같이 지내거든. 오늘 처럼 말야." 가이엔의 말에 보충이라도 하듯이 카타리나가 말을 이었다. "호홋. 원래 사는게 그렇잖니. 조금만 소홀하면 어느 순간 그 사람에 대해서 너무 모 르게 되잖아. 그러다 보니 가이엔이 우리학교에 입학했다는 것도 몰랐어. 너무 미안 했지만 다른 친구들 앞에서 티도 못 내고 말야..." "아참. 카타리나 혹시 오늘 연회 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던데 혹시 그 점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 "다른 중요한 회의? 글쎄...아! 얼마전에 라이델베르크 북쪽 산에서 어떤 사고가 발 생했나봐.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어. 내가 어른들 하는 일에는 워낙 무관심하잖니." "아...시신... 뭐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 꽤나 시간이 흐른 듯 하니 다른 사람들이 찾기 전에 들어갈까?" 뮤스의 말에 또 한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던 가이엔은 어쩔 수 없었기에 뮤스의 뒤 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오자 이미 연회는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 다. 준비된 술과 음식들은 대부분 비워져 있었고, 귀족들 역시 지쳤는지 준비된 의자 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문득 음악이 멈추며 누군가가 홀보다는 조금 높은 단상 으로 올라가 군중들에게 알렸다. "여러분들께 발송된 초청장을 통해 예고했듯이 긴급한 회의 안건이 있습니다. 신사 여러분들께서는 이층의 대회실로 자리를 옮겨 주시길 부탁드리며 숙녀 여러분들은 남 은 시간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신사분들을 잠시 빌려가는 점에 대해서 숙녀 여러분들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딱딱해지기 쉬운 말을 재치 있게 넘긴 남성은 다시 단을 내려갔고, 음악은 계속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뮤스는 카타리나와 가이엔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도 가야겠는걸? 그럼 학교에서나 볼 수 있겠구나? 가이엔 너도 조심해서 돌아가도 록 하고." "응 그래. 그럼 뮤스 또 보자." 예전과는 달리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네는 가이엔을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고, 카타리 나와도 가벼운 작별인사를 했다. (21) 두 구의 시체 다른 귀족 남자들을 따라 이층의 대회장으로 들어가자 약 삼십여명의 귀족들이 모이 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크라이츠였는데, 남자밖에 없는 방에 유일한 여자였으니 말이다. 뮤스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예상외라는 듯 말했다. "누님이 어떻게 여기 있으시죠?" 크라이츠는 웃으며 귓속말을 전했다. "호호호 원래 드래곤은 양성체지 않니. 그러니 여기 있거나 아래 있거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단다." "에엑? 그럼 후작님도 누님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아신다는 거예요?" "놀라긴... 농담이야. 그냥 궁금해서 이곳에 있는 것 뿐이거든. 여자라고 올라오지 말라는 말은 안 했잖니. 아 저기 하버만 후작님이 들어오는구나." 그녀의 말대로 대회실 한켠에 있는 작은 문이 열리며 하버만 후작과 하인인 길튼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길튼의 뒤로는 두명의 하인이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는데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오늘 회의의 중심내용인 듯했다. 하버만 후작 이 대회장 안을 한번 둘러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같이 좋은날 이런 딱딱한 회의를 하게 되어서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오 늘의 회의는 몇 일 전 라이델베르크 북쪽의 보하일 산에서 발생한 사건 때문이오. 보 하일 산에서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아무래도 몬스터들에게 당한 듯하오. 물론 이 정도의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지만 시체들 주변에는 몬스터들 역시 기괴한 형상으로 죽어 있었고 두 구의 시신 역시 평범하지 않았소. 길튼 준비해주게나." 하버만 후작의 말을 들은 길튼은 상자를 들고 온 두 하인에게 신호를 했고,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처음으로 꺼낸 것은 검은색의 옷가지였고, 다음으로 꺼낸 것은 30셀리 가량 되는 속이 빈 금속 막대 였다. 그리곤 옥으로 된 메달 몇 개와 검은 가루, 금속 구슬 등이었다. 이 물건들을 본 뮤스의 눈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저것은!]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2 뮤스의 반응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귀족들은 하인들이 꺼내놓은 물건들을 신기 한 듯 살펴보고 있었다. 하버만 후작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 "이것들은 그 시신들에게서 나온 물건들이오. 오늘은 경사가 있는 날이기에 시신을 이 자리에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둘 다 하나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생 김새 역시 우리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소... 마치...마치..." 무엇인가에 비유를 하기 위해 생각을 하던 하버만 후작의 눈에 뮤스가 들어오자 뭔가 가 떠올랐는지 탄성을 조용히 내지르며 말했다. "허... 저기 있는 뮤스 드라켄군과 흡사했소..." 하버만 후작의 말에 대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뮤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만 주시하고 있었다. 뮤스의 옆에 자리 하고 있던 크라이츠는 뮤스의 안색이 안 좋다는 것을 느꼈는지 뮤스를 향해 걱정스러 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니 뮤스?" 크라이츠의 물음에 정신을 수습한 뮤스는 그녀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 이쪽으로 건너 왔나 봐요. 저 금속 대롱은 지자총통이라는 것으 로 조선의 살상 무기중의 하나죠."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뮤스였지만 속마음은 엄청난 격정이 휩쓸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고향의 물건을 본 것이 반갑지만 그것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시신으로만 남았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었다. [제발 장영실 아저씨가 아니시길...] 귀족들은 뮤스에게서 다시 하버만 후작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설명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물건들을 소지하고 있던 시체들은 세 마리의 오우거와 대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오우거라는 녀석은 중형급 몬스터 아니겠소? 순수한 힘만 으로 소 한 마리를 종이처럼 찢어발길 수 있소. 그런 오우거 세 마리를 이 두 구의 시체 또는 이외의 일행들이 해치웠다는 것이오..." 오우거라는 말을 들은 귀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형 몬스터들은 흔하게 출현하 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여행자들을 습격하지만 오우거라는 몬스터는 꽤나 보기 힘든 몬스터였다. 만약 목격한다해도 이들의 괴력 때문에 최상급의 전투 능력을 가진 전사나 마법사가 아니라면 살아 남기 힘들어 민간에 보고되는 것이 극히 적었다. 하 지만 이 두 구의 시체와 오우거들의 사체가 동시에 발견됐다고 하니 이 두 구의 시체 가 세 마리나 되는 오우거를 죽였다는 것이 결론이 나온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오우거들의 몸에는 검상이 조금도 없었소... 그렇다고 마법을 쓴 흔적도 없었다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은 오우거들의 몸에 난 작은 구멍들이 다인데, 겉은 작은 구멍이지만 안쪽은 사람 주먹만한 구멍이 나있었소. 마치 마법화살을 맞은 듯 했지만 마법화살과는 전혀 다른 성질이오. 이쪽 방면의 전문가들과 상의를 해봤으 나 결론은 매한가지... 모른다 였소. 그래서 여러분들께 이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었 기 때문에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혹시 질문이나 아는 바가 있으시오?" 하버만 후작의 물음에 진 갈색의 머리와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성이 손을 들며 나섰다. 그는 예전에 뮤스가 만난 적이 있는 재해대책반의 반장인 안루헨이었다. "친애하는 하버만 후작님, 그리고 이곳에 모이신 귀족님들께 저 안루헨이 한마디 여 쭙고 싶습니다. 사실 이 사건 외에도 저희 재해반에서 발견한 사건이 있습니다. 물론 오우거 만한 중급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다섯 마리의 고블린 사체를 발견 한 적이 있 었지요. 그 당시 사인이 불명확한지라 새로운 마법에 의한 살상이 아니었나 하고 넘 겼지만 후작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과 똑같은 사인이었습니다. 혹시나 그 사체들이 마족들이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하며 말이지요..." 안루헨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가 언성을 높히며 그에게 말했다. "안루헨님 그렇다면 우리 뮤스가 마족이라는 것인가요? 아니지... 저의 동생이니 저 까지도 마족이 되는 것이군요? 아닌가요?" 크라이츠의 말에 할말을 잃은 안루헨은 크게 당황하며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아..아닙니다. 뮤스군, 그리고 레이디 크라이츠... 전 그저 몬스터들의 사인이 워낙 기괴해서 해본 말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 다." 안루헨의 사과에 조금 화가 사그라 드는지 크라이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따지지 않 았다. 크라이츠와 안루헨의 대화를 듣던 뮤스는 완벽하리 만큼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 는 크라이츠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때 크라이츠가 한마디했다. "제 동생이 그 사인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마족이라느니 하는 의심 은 지워주시길 바랍니다. 뮤스 여기 계신 분들께 설명 좀 해드리렴." 갑작스런 크라이츠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이미 그녀가 말을 꺼낸 이상 번 복할 수도 없었기에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그 앞에 있는 금속관을 들어 보이 며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께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마족이나 마법에 의한 살상이 아 닙니다. 제 손에 들려 있는 이것은 지자총통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습니다. 우선 이 물건은 화약이라는 물질의 폭발로 여기 보이는 작은 구슬을 발사하는 도구입니다. 설 명을 쉽게 하기 위하여 직접 보여드리지요..." 뮤스는 그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의 주인인양 손쉽게 만지기 시작했는데 우선 금속 대 롱에 검은 가루를 밀어 넣고, 그 위에 구슬을 밀어 넣고 긴 대롱으로 눌렀다. 마지막 으로 심지를 금속 대롱에 난 구멍에 찔러 넣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발사할 대상이 있어야 하겠는데 괜찮으시다면 이 상자 를 향해 발사해도 되겠습니까?" 하버만 후작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허락을 했다. 그 상자는 상당 히 견고해 보였는데 여러 겹의 두꺼운 가죽에 기름을 입히고 군데군데 철판으로 보강 되어 있었기에 날카로운 칼이라도 한번에 이 상자를 뚫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상자가 준비가 되자 귀족들은 한켠으로 물러났고, 뮤스는 지자총통을 상자에 겨냥한 채 뇌공 력을 일으켜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들 상자에 신경을 곤두세웠기에 그가 어떤 방법 으로 불을 붙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치지지직! 타앙!!!!! 화약의 폭발음과 함께 총알이 발사되자 귀족들은 폭발음에 대경했고, 심지어는 그 자 리에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다. 다들 정신을 차리고 상자를 바라보니 그렇게 견고해 보였던 상자는 양면으로 뚫려 있었고, 상자 뒤의 벽에도 구멍이 나있었다. 하버만 백 작을 위시한 사람들은 그 위력에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이럴수가... 이 정도 위력이면 오거를 죽인다해도 이상할 점이 없지... 그렇다면 의 문점이 하나는 풀렸네만... 그럼 그들은 어디서 온 자들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뮤스 군 자네와 상관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 후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뮤스를 바라보았다. 뮤스가 뭐라 말을 하려 하자 크라이츠가 걸어나와 사람들의 앞에 섰다. "제가 설명을 드리죠. 우선 뮤스는 저와 이복 동생입니다. 뮤스의 어머니는 다른 대 륙의 분이셨습니다. 동쪽의 조이센이라는 대륙이 그곳이지요. 그곳의 사람들은 뮤스 나 그 시신들과같이 모두들 검은머리에 우리와는 다른 외모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무래도 그곳에서 온 자들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이러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오호... 만약 그 들이 우리 제국을 침공이라도 한다면..." 그의 근심하는 소리를 듣자 뮤스가 나서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이센 대륙의 사람들은 다른 대륙을 절대 침범하는 일이 없습니 다. 다른 대륙이 먼저 전쟁을 도발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또 한 그곳에서 지배지를 늘리려 한다해도 그 엄청난 물자를 충당하면서까지 멀리 떨어진 도이첸제국을 침공할 이유가 없죠. 오히려 그들에게는 실이 될 것입니다." "흠... 혹시 이 지자총통이라는 것을 뮤스군도 제작할 수 있나?" "네... 제작을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다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잘알겠네..." 둘의 대화가 끝나자 후작은 대회실에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도 뮤스군과의 대화를 다 들었으리라 보오. 레이디 크라이츠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바다 건너 이대륙에는 이런 가공할 무기가 존재한다고 하는구려. 실제 목격까지 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지 않겠소? 본 후작은 이일을 황제폐하께 보고드릴 작정이오. 어쩌면 다른 국가들 보다 먼저 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일 수도... 여러분들께 이곳에서 본 내용을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싶구려. 그럼 오늘 대회는 이것으로 마치고 남은 시간 아래층에서 기다리시는 숙녀 분들과 즐겁게 보내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꽤나 진중한 모습들을 하며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상자에서 꺼 내놓은 옥패와 여러 가지를 만져보며 감회에 젖어있던 뮤스는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 나간 것을 확인하자 하버만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 청이 한가지 있는데요." "뮤스군 오늘 고마웠네... 청이라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줘야겠 지?" "제가 시신들을 한번 봐도 될까요?" "흠 그거야 상관없지. 길튼! 뮤스군을 안내해주게. 난 아무래도 지금부터 바빠질 듯 하구먼... 황제께 올릴 보고문을 써야하니 말이야... 내용 보다 수식어가 더 긴 글말 일세. 허허 그럼 나먼저 실례하겠네." 하버만 후작이 한탄을 마치고 사라지자 남은 사람은 크라이츠와 뮤스 그리고 길튼이 었다. 뮤스와 크라이츠는 길튼을 따라 저택의 지하로 내려갔다. 길튼은 함께 따라 내려가겠 다는 크라이츠를 우려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여성이 아닌 이상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에 함께 내려가기로 한 것이었다. 지하실은 꽤나 깊이 까지 만들어졌는지 어림잡아 지하 4층 정도 내려간 듯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려 갈수록 습도가 높아졌고, 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횃불을 들고 앞장을 서던 길튼이 말했다. "이 저택이 지어질 때 포도주 창고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 졌지만 습도가 지나치게 높 아서 용도가 변경되었지요. 보시다 시피 이런 별로 좋지 않은 용도로도..." 지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던 길튼은 이런 곳에 내려오는 것이 그다지 탐탁치 않 은지 말끝을 흐렸다. 두어 층 정도 더 내려가자 이제 가장 밑층에 도착했는지 더 이 상 계단은 없었고, 횃불이 밝혀져 있는 복도가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자 넓직한 방 에 들어설 수 있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인지 크라이츠와 뮤스의 미간 이 찌푸려졌다. 길튼 역시 그들과 별 다름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3 "뮤스님 이곳입니다. 이미 부패가 시작되어서 형체를 알아보시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튼을 향해 물었다. "혹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른 물건들은 없었나요? 예를 들어 책자라든지..." "아! 두 권의 책자가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모양이었기에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라 서 그냥 뒀지요. 저쪽 테이블 위에 있는 보자기 안쪽에 있습니다. 그 안에 그것 말고 도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으니 천천히 보십시요." 그의 말이 끝나자 크라이츠가 눈에 이채를 띄우며 그가 말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 이블 위에는 검은 색의 보자기가 있었는데 크라이츠가 열어보자 그 안에서는 누런 색 의 책자 두 권과 접시라고 하기에는 무거운 검은 돌, 또 그와 같은 색의 네모난 작은 돌이 있었고, 그 외에도 나무로 된 네모난 상자가 보였다. "뮤스 이건 책이란 걸 알겠는데 이 네모난 돌은 뭐지? 그리고 또 이 나무 상자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돌을 보고며 뮤스는 싱긋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먹과 벼루라니... 잉크를 만들 때 쓰는 물건이라고 보시면 되 요. 물을 넣어서 작은 돌로 그 큰돌을 갈면 검은색 잉크가 생기게 되죠. 나무상자를 열어보시면 아마 붓이 나올 거예요. 책자를 제게 좀 주시겠어요?" "음 자 여기 있다." 크라이츠에게서 두 권의 책을 건네 받은 뮤스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겉 표지를 훑 어보았다. 한 권은 보고일지였고, 다른 한 권은 어떤 수치가 기입되어 있는 듯한 책 자였다. 그것을 본 뮤스는 희열이 섞인 표정으로 크라이츠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눈치를 주었기에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자신들 말고도 길튼이 함께 있다는 것을 뮤스가 깜빡했던 것이다. "흠 그럼 제가 시체를 좀 봐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십시요. 하지만 냄새가 지독할 테니 각오는 하시는 것이 좋으실 것입니 다." 뮤스에게 주의를 주며 관으로 다가간 길튼은 손에 들린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상태로 관의 뚜껑을 밀어냈다. 그러자 안에서 고여있던 냄새가 퍼지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 다. 뮤스 역시 상당히 역겨웠지만 혹시나 장영실이 있지나 않을 까하는 생각 때문에 꾹 참고 관으로 걸어갔다. 관 안을 들여다보자 이미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가 들어 앉아있었고, 살에서는 이미 구더기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뮤스는 더 이상 역함을 참기 힘들었는지 방구석으로 뛰어가 정신없이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우웩!! 컥!" 구토를 하는 뮤스를 본 크라이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좀 괜찮니?" "하악 하악...네..누님. 괜찮아요." "아니지. 당연한 것이란다. 저렇게 부패된 시체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란다." "후우... 그렇지만 다른 시체도 확인해 봐야 겠네요..." 자신의 뜻을 표한 뮤스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다른 관으로 걸어가 남은 시체를 살펴보았다. 다시 구토가 이는 것을 느꼈지만 다행스럽게 그 시체의 체격이 장영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뮤스는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 중에 장영실 아저씨는 안 계신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어딘가 계시다는 것인 데... 꼭 찾아내고야 말테다.] 속으로 마음을 궂게 먹은 뮤스는 힘없는 표정으로 크라이츠와 길튼을 보며 말했다. "후우 누님. 그리고 길튼씨 이제 확인할 것은 다했습니다. 올라가도록 하죠... 그리 고 이곳의 물건들은 제가 좀 가져가서 연구 해봐도 될까요?" "흠 후작님의 허락이 있어야 겠지만 직접 후작님께 말씀드리시면 될 것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나가죠 누님." "그래 그러자꾸나..." 크라이츠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곤 먼저 방을 나섰다. 공학원의 저택으로 돌아온 뮤스는 후작의 저택에서 들고 온 책자를 읽고 있었다. 크 라이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하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실상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하룻밤의 연회 때문에 피곤 할 리는 없었지만 뮤스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방에는 크라이츠의 배려를 수포로 돌 아가게 만드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켈트와 그의 일당(?)들이었다. "이봐 뮤스! 이것 정말 신기한걸? 돌에다가 돌을 가니 잉크가 나오다니! 크허허허!" 뮤스가 들고 온 먹과 벼루가 신기했는지 어린애들처럼 얼굴에 먹질을 하며 놀고 있는 드워프 들이었다. 한켠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먹을 갈고 있는 브라이덴이 심술난 목소 리로 말했다. "형님! 전 언제까지 이걸 갈고 있어야 합니까? 저도 그 붓이라는 걸로 휘두르며 놀고 싶단 말입니다!" "클클. 그러길래 누가 가위 바위보에서 지라고 그랬는가? 흠 하지만 아우가 고생하는 것을 그냥 못 본 척 할 케르히트가 아니지! 자네도 이쪽으로 오게나. 지금부터 문어 먹물 놀이나 하세!" 네 명의 드워프가 하는 짓을 보고만 있던 뮤스는 늙은이처럼 혀를 끌끌 차며 읽던 책 자를 계속하여 읽었다. -이계진입 첫 째날 정오경 이계의 알지 못할 산중에 진입. 수목들은 조선의 그것들과 판이한 모습을 하 고 있음. 평균 수목의 길이는 30척 이상이며 두께는 어른의 두 아름 정도 됨. 조선과 같은 온도와 날씨를 보이나 사계절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음. 흙의 질을 보면..... 중략.... 이계진입 둘 째날 인가를 발견함. 생김새는 파사국인들과 흡사하나 언어 자체는 판이함. 언어해독기를 사용하자 굉장히 놀란 반응을 보였음. 공학 기술이 뒤떨어진다고 사료. 이계진입 셋 째날 명신의 흔적을 찾아 북상 중. 자넨이라는 마을에서 명신의 흔적을 발견. 명신이 읽고 있던 책자는 간단한 일기였었던 모양인지 그다지 자세한 내용이 기입되 어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장영실이 그를 찾아 이계로 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자 절로 힘이 솟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장영실이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마음속 엔 여전히 걱정이 그득했다. 책장을 더 넘겨봐도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없었는데 뮤 스가 이곳에 왔을 때 느낀 것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덜썩. 첫 번째 책자를 다 읽자 다음 책자를 집어들었다. 표지 윗 부분은 찢어져 있었고, 나 머지 아랫부분에 '자료'라는 두 글자만 남아 있었다. 천천히 책자를 넘겨보던 뮤스의 눈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고, 반 정도 읽었을 때는 급기야 희열에 찬 비명을 질렀 다. "우왓!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이것만 있으면 돌아 갈 수 있단 말이에요!" 방 한쪽에서 온몸에 먹을 처바르며 문어 먹물놀이를 하던 드워프들은 놀라서 뮤스를 바라보았고, 입안에 먹을 가득 물고 있던 레딘은 그만 먹을 삼켜버렸는지 목을 부여 잡고 정신없이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뮤스군 도대체 무슨 일이 길래?" "하하하! 이 책자 안에 차원이동에 대한 모든 수치들이 들어있거든요! 이것만 있으면 제가 있던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거죠! 최소한 차원의 미아는 되는 일이 없을 테니 말이에요." 뮤스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만 갸웃 거렸다. 켈트가 얼굴에 잔뜩 묻은 먹을 닦아내며 뮤스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지?" "네!" "흠... 그렇다면 그게 언제쯤이면 가능한 것이지?" "글쎄요... 일단 장영실 아저씨를 찾아야 해요. 그 분이 계셔야 차원 이동문을 만들 수가 있으니까요. 제게 지식이 주입될 당시만 해도 불완전한 상태였거든요." "그럼 지금 당장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죠." 뮤스의 대답에 켈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훗 그럼 벌써부터 돌아갈 사람처럼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앞으로 얼마나 더 지 나야 되는지 모르니까!" "예!" 되돌아 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기에 기뻐하는 뮤스를 켈트는 아무도 모르게 안타까 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윗 글 <대공학자> #54 [2] 짜가신선 아랫글 <대공학자> #52 짜가신선 Copyright 1999-2001 Zeroboard / skin by HITE97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4 (22) 클럽 훼이리아. 다음날 라이델베르크시의 전역은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앙의 약혼식이 끝난 다음날 뮤스는 햄브리겐의 회원들이 사용할 전뇌거를 개조하기 위해 작업실에만 처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끔 실실거리는 의미 모를 웃음을 띄며 작 업실에서 나와 쉬는 뮤스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침 축제를 이틀 앞 둔 주말이었 기에 학교에 나가지 않고 느긋한 마지막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룰루..."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뮤스만을 위해 마련된 작업실이었다. 이제 뮤스에게 나름대로 익숙해진 공구들이 벽쪽으로 잘 진열되어 있었고, 작업실의 한 가운데는 온통 분해된 전뇌거가 뼈대를 앙상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후훗,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아무리 빠르더라도 모서리를 자연스럽게 돌 수 있는 굴곡기능... 속도가 줄더라도 동력기의 회전은 줄지 않는 기능. 일반 출시용 로데오 의 두 배에 가까운 출력! 이 정도면 이길 수 있을 거야! 크라이츠 누님 두고 봐요... 히히히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능을 점검하고 있을 때 작업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 다. "네 들어오세요." 노크에 대답을 하며 슬그머니 흰 천으로 작업하던 전뇌거를 덮었고, 그와 때맞게 문 이 열리며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뮤스야! 오늘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한다고 작업실 밖에서는 얼굴보기도 힘드니? 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하..하..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요. 그냥 제가 만들고 싶은게 있어서 손 좀 보고있는 건데요." "그건 그렇고 널 찾아온 손님이 계신다.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 "손님요? 네 그러세요." 뮤스가 승락을 하자 크라이츠는 문을 닫으며 나갔고 조금 후에 카타리나와 가이엔이 웃으며 작업실로 들어왔다.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휴일 날 보는 카타리나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고 느끼며 뮤스가 인사를 했다. "어라? 카타리나랑 가이엔 아냐? 난 또 누구라고..." "어머? 나랑 가이엔이라서 실망했니? 누구 다른 여자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그건 아니지만. 아참 어디 좀 앉을래?" 뮤스가 앉을 것을 권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그들이 앉을 만한 곳은 없었 다. 조금 민망해진 뮤스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작업실이라서 앉을 곳이 마땅치 않구나. 미안하네." 가이엔이 살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뮤스 괜찮아. 그냥 구경온 것뿐이니까. 다른 애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건데 카타 리나가 비밀이라고 해서 말야. 그건 그렇고 공학원이라는 곳이 대단하구나? 상상은 했지만 이 정도 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걸?" "대단은 무슨. 그냥 크기만 큰 거지 아직 다 사용하고 있지는 않아. 그건 그렇고 너 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 "뭔데?" "보여줄거?" 그녀들의 궁금하다는 듯한 되물음에 의기 양양해진 뮤스는 전뇌거를 덮고 있던 흰 천 을 벗겨 냈다. "하하 이거야! 이게 우리 여가활동 동호회 선수들이 사용할 전뇌거지!" "우와! 전뇌거가 이렇게 생긴 거란 말야?" "후훗. 응 처음 봤을 거야. 잘 살펴 봐!" 전뇌거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카타리나가 뭔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말야 뮤스..." "응? 왜?" "이렇게 껍질 벗겨 놓고 타면 멋이 없을 것 같은데? 껍질만 벗긴다고 더 좋아질까?" 순간 어이가 없어진 뮤스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허어... 설마 껍질만 벗긴 걸로 너희들에게 대단하다고 말하겠냐... 속의 구조를 다 바꿨단 말야. 이 정도면 상대방 전뇌거에 비해 두 배정도의 성능을 가진 것이지. 그 외에도 이것저것 추가기능을 많이 넣었어."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배고픈데 점심이나 먹으러 나가자. 이제 작업은 다 끝났으니 껍질만 입 히면 되거든." "그럼 너가 사는거야?" "너 영주님의 딸 맞냐? 그렇게 짜게 굴지 말라구..." "너야말로 제국에서 최고 부자가 됐으면서 그렇게 짜게 굴지 마라!" 이때 가이엔이 나서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점심을 살께. 알겠지?" "하하 좋지! 그럼 나가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셋은 전뇌거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로데오를 타고 나 가려 했지만 이인승이었기에 불가능했고, 켈트의 라이노를 빌렸는데 드워프들이 뭔가 이곳저곳 손을 봤는지 내부는 출시하는 라이노와 전혀 딴판이었다. 하지만 뮤스가 새 로 만든 동력기를 얻어 달아서 인지 성능하나는 대단했다. "가이엔 어디 잘 아는 음식점이라도 있어? 매번 폴린의 가게에 가서 먹기는 좀 그렇 잖아? 그것도 공짜로 말야." "음. 있긴 있어 시내에 있는 음식점인데 여기 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이야 카타리나는 알걸? 훼이리아말야." "아! 훼이리아! 그러고 보니 그곳에 간 것도 꽤나 오래 됐다. 씨니어 스쿨 고등부 이 후로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가도 될까?" "점심 천천히 먹고, 밤늦게 까지 춤추면서 놀면 안될까? 축제기간이라서 재미있을 거 야." "호오. 이거 가이엔 많이 변했는걸. 씨니어 스쿨 다닐 때만 해도 샌님이더니 말야. 타락했어...쯔쯧..." 카타리나의 혀차는 소리에 가이엔은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또, 뮤스의 눈치를 살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는데 뮤스는 기분이 좋은지 그저 웃고 있었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 거야? "조금 더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보일 거야." "왼쪽이라..." 뮤스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훼이리아라는 곳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떠있어서 사 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설명을 들은 뮤스였지만 다른 음식점보다는 입구가 분비고 있 었기에 그녀들의 말에 수긍을 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젊은이들이었다. "가이엔. 여기가 음식점 맞아?" "이런데 처음이구나? 걱정하지 말고 따라 들어오라니까!" "어? 알았어." 일행이 내려 간 지하는 꽤나 벅적거리며 소란스러웠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속을 울렸고, 음식점과 주점을 병행하는 곳인지 술 냄새와 음식의 냄새가 내부를 가득 메 우고 있었다. -따라라라라라란! 딴딴! 딴딴! 뮤스는 음악소리가 조금 요란해서 인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가이엔에게 말했다. "여기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 곳이야?" "뭐라구? 잘안들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해봐!" 뮤스의 목소리가 음악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자 가이엔은 목청 높여 소리를 쳤다. 하 지만 큰소리를 내며 물어보기도 뭣했는지 그냥 관두기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젊은이가 뮤스들에게 걸어왔는데 그 의 복장 또한 상당히 화려했다. "어서들 오십시요! 훼이리아의 블랙나이트라고 합니다! 몇 분이십니까?" 이 요란한 곳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똑똑하게 들렸는데 이 바닥에서 꽤나 굴러먹은 듯 한 인물이었다. 그의 질문에 카타리나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고. 일하는 젊은이 는 그들은 안내하여 홀을 중심으로 벽에 붙어있는 작은 방들 중 한곳으로 안내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놀랍게도 밖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에 쾌적한 분위 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5 "여긴 조용하네? 아무리 문을 닫았다지만..." 그의 의문은 카타리나가 풀어 주었다. "아 이방은 사일런트 마법이 걸려 있는 곳이라서 그래.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 할 수 있지. 대신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단다." "아... 그런 마법도 있구나! 그건 그렇고 여긴 뭘 하는 곳이 길래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가이엔은 뮤스의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카타리나에게 듣기로 네가 산골 출신이라 길래 이런 곳을 구경 시켜 주려고. 여기는 라이델베르크의 젊은이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식사나 술을 한잔하고 밖에서는 춤 을 출 수 있는 곳이야.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파트너를 정해서 춤을 출 수도 있고..." "뭐라구? 여기는 처음 보는 남녀가 춤을 추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이곳에 온지 두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뮤스의 가치관을 바꿀 만큼 오랜 시간은 아니었기에 좋다는 생각보다는 껄끄러운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가이엔 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아참 너 혹시 그거 아니? 여기가 호바인 가문의 소유래." "뭐라구? 그렇다면 바르키엘 녀석의 집안 소유라는 거야?" "응. 너도 몰랐구나?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카타리나의 물음에 수긍하자 그녀는 슬금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가이엔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는 바람에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앉아있어. 뮤스도 이런 곳은 처음이니 한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게 다가 여기 있는 다고 꼭 그 녀석을 만난 다는 보장도 없잖니?" "그렇겠지? 제발 그래야 해. 단 한순간도 그 녀석의 얼굴을 보기가 싫거든. 으..." 그녀가 벌레라도 몸에 올라간 듯 몸을 떨자 뮤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때 마침 일하 던 청년은 메뉴 판을 들고 들어왔다. "뮤스 뭐 먹을래? 부담 갖지 말고 골라 봐. 이건 내 동생을 구해준 보답이니까." "아... 그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어서 골라. 카타리나 너는 좀 싼걸 먹어라. 학생의 용돈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단다." "나참! 나도 서러워서 너의 동생을 살려야겠네. 칫." 가이엔과 카타리나는 애초 상당히 친한 사이였기에 뮤스를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 기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뮤스도 예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편해졌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주문한 일행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 지만 뮤스는 대개가 듣고 있는 편이었는데, 수다 떠는 여자 둘 사이에 남자가 끼어 들기는 정 말 힘든 일 이었기 때문이다. "아참 카타리나 너는 축제 때 누구와 다닐 거야? 주변에서 파트너 신청하는 남학생들이 많을 것 같은데?" "글쎄. 너야말로 누구랑 다닐 건데? 어제도 누가 너한테 편지 주고 가던데?" "아... 그 사람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호호호 너 눈이 상당히 높아 졌구나? 정말 예전의 가이엔이 아니야..." "애는! 내가 뭘? 너는 어때?" 이때 뮤스는 방안을 둘러보며 관심 없는 척 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녀들의 이야기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카타리나에 대한 알지 못할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이야기 를 유심히 들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자 만심이 그득 들어있는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남학생이 들어왔다. "하하하 이런! 이런! 카타리나양 아니신가? 정말 종업원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믿기지 않았는 데 정말 일 줄이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바르키엘이었다. 그의 등장에 카타리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 가이엔. 나쁜 짐작은 왜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지?" "그러게 말이야. 너 혹시 저주 받은 건 아닐까? 이번 기회에 신전이라도 찾아가 보는게 어때? 가이엔도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바르키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말은 귀에 전혀 들 리지 않는지 특유의 유들유들한 목소리를 피워 올렸다. "하하하. 이 바르키엘님의 파트너가 되어 주기 위해서 이곳을 직접 찾은 거야? 그렇다면 기꺼이 수락을 해주지!" "에휴 이제는 화도 안 나고 지긋지긋하다 마음대로 떠들라구... 그러면서 언제나 상처 받는 건 너 니까. 벌써 몇 년 째니?" "누가? 이 바르키엘님이 상처를 받는 다구? 착각하지 마라! 그 누구도 이 바르키엘님에게 상처를 주지는..." 잘난 듯이 말하던 그의 뇌리에는 갑작스럽게 크라이츠라는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일전 학교 친구들 앞에서 처참하게 꼬리를 내려야만 했던 수치스럽던 그 일과 함께... 그래서 인지 한풀 꺾 인 목소리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한명 있었지. 그나저나 그럼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어라? 저 녀석은 여기에도 같이 왔 네? 네가 카타리나의 종이라도 되냐? 왜 이런 곳에 와있지?"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만나자마자 대뜸 반말을 하는 바르키엘이 탐탁치 않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 도 옆에서 카타리나를 귀찮게 하는 말을 들으며 참고있던 뮤스가 이제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 을 하자 심기가 조금 꼬이기 시작했다. "이봐. 바르키엘이라 했던가? 카타리나가 싫다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지?" "호오. 이 녀석 좀 봐라. 보아하니 평민 같은데 감히 이 바르키엘님이 하시는 일이 곱지 않게 보인 다는 거냐?" "오. 제법 똑똑한데? 보기 보단 이해력이 빨라." "뭐..뭐라구? 이 녀석!" 자신을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뮤스의 말에 조금 화가난 바르키엘은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네 녀석이 어떤 집안의 자식인지는 몰라도 아마 큰 타격을 입을 게다!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가 얼 마나 큰지 체험하게 해주마..." "그 녀석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그게 네가 잘나서 그런 거냐? 네 배경 믿고 잘난 척 하는게 그렇 게 기분 좋으냐? 쯔쯧... 저런 녀석을 자식이라고 믿으시는 너희 부모님이 불쌍하군..." 뮤스가 그의 부모님을 들먹이자 바르키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주먹을 뮤스의 안면으로 날렸다. "이녀석!" 주변에서는 갑작스런 바르키엘의 행동에 놀라며 비명을 터트렸다. "꺄악!" 하지만 바르키엘이 날린 주먹은 뮤스의 얼굴에 적중하지 못하고 목표 지점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가이엔과 카타리나가 자세히 보자 그의 주먹이 뮤스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이었다. 뇌 동체술법을 시간 나는 대로 익힌 결과 였는데 아무 밑천 없이 자신의 배경만 믿고서 날뛰는 바르키엘 이 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뮤스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이봐 이런 주먹을 잘못 맞으면 크게 다치잖아. 조심해서 기지개를 펴라고. 에휴 큰일 날 뻔했구먼..." 뮤스에게 주먹을 잡힌 바르키엘은 아무런 말도 못했고, 그의 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이 정도 에서 그치기에는 뮤스의 숨겨졌던 성격이 간악했기에 아무도 모르게 뇌전력을 그의 손으로 흘리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왜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지? 내 얼굴이 만지고 싶은 거야?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군... 다른데 가서 알아 보라구." 뮤스가 손을 놓아주자 그때서야 몸이 풀리는지 이빨을 갈기 시작했다. "네...네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두고 봐라! 이 수치는 전뇌거 경주 때 꼭 갚아주마. 그때 도 그렇게 웃고 있을 수 있는지 두고보자!" 화를 내며 뒤돌아선 그는 방문을 나가려다 다리가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쿠다당! 뇌전력이 전신에 흘러 다녔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아무 것도 모르는 카타리나와 가이엔 의 눈에는 정말 바보같이 보였다. 연이어 추한 꼴을 보인 바르키엘의 눈에는 의외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너희들 다 미워! 흥! 잘먹고 잘살아라!" 거만하기만 하던 그의 입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가 흘러나오자 세 명의 친구들은 멀뚱거리는 눈으로 그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정적을 깨며 카타리나가 말했다. "저 녀석 예상외로 순진하네? 이 정도 일로 울먹일 줄이야.." 뮤스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너무 심하게 했나? 괜히 불쌍해 보이는걸? 혹시 철이 덜 나서 그런거 였을까?" "정말.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우리에게 해를 끼친 일은 없었으니..." 그때 방문이 다시 열리면서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두 손에 그득 접시를 들고 들 어오던 종업원은 세 명의 손님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내심 캥기는 것이 있어서 인지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헉! 내가 바르키엘 도련님께 보고한걸 들킨 건가? 이러면 팁도 없겠는걸. 설마 바르키엘 도련님이 그것을 말 했을 라구. 여기 종업원이 한둘이야? 내가 아니라고 잡아 때면 그만이지...] 혼자 머리를 굴리며 얼굴 색을 여러 번 바꾸던 종업원을 보며 이상하게 여긴 가이엔이 말했다. "이봐요? 왜 거기 그렇게 서있죠?" "아닙니다 손님! 지금 음식 나왔습니다. 헤헤..." 종업원이 웃음을 흘리며 들고 온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하자 뮤스 일행도 자리에 앉아 식사 를 할 준비를 했다. 테이블 정리가 다되었는지 웨이터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요! 바르키엘 도련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블랙나이트 였습니다! 필요 한 것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요!" 종업원이 더욱 의심스럽게 자신의 행각을 부정하며 인사를 하고 나가자 가이엔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예! 카타리나. 저 종업원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환각제라도 복용한 건가?" "하긴 이런 곳에서 팁이나 수당 받아서 그런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팁 은 주지 말아야 할 것 같아. 저 사람을 위해서라도."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종업원의 행위에 대한 심판은 이렇게 귀결되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6 식사를 하며 카타리나와 가이엔의 끝마치지 못한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아참 카타리나 너는 어떻게 할거니?" "별일 없으면 아버님과 같이 할거야. 그 동안 내가 신분을 속인다고 아버님께 너무 섭섭하게 해드 렸던 것 같아서 이번에 사과하는 의미로..." 카타리나의 대답을 들은 뮤스의 입에서는 답답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기회를 보다가 카타리나 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려던 그의 계획이 여지없이 깨져 버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나. 뮤스 너는 마땅한 파트너라도 찾았니?" 답답함에 목마름을 느끼는지 물을 한 모금 들이키던 뮤스는 가이엔이 자신에게 질문을 해오자 입 에 머금고있던 물을 내뿜고 말았다. "푸웃!!!" "너 괜찮니? 왜 그래?" 서둘러 자신의 앞에 뿜어져 흐르는 물을 냅킨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아... 아냐 아무 것도. 그냥 갑작스럽게 물어 보길래." "호호 미안해. 너는 축 제때 같이 다닐 파트너 없어?" "어.. 없어. 내가 너희들 말고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럼... 뮤스 너 나랑 파트너 할래? 나도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거든! 어때?" "어? 나말이야?" 갑작스런 가이엔의 제의에 뮤스는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하며 카타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 만 그녀는 평소와 같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호호. 그래 뮤스 너도 파트너 없으면 가이엔과 보내면 되겠구나. 둘 다 잘된 일이네!" 뮤스는 카타리나의 말에 이유 모를 서운함을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가이엔." 뮤스가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자 그녀는 기분이 들뜨는지 활짝 웃어 보였다. "어머머 정말이니? 고마워!" "아니 뭘." 가이엔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뮤스는 아무 소리 없이 자신 앞에 놓여있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 만 음식의 맛이 어떤지는 느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뮤스와 카타리나는 가이엔에 이끌려 많은 젊은이들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홀로 나왔다. 그 곳에서는 들어왔을 때와 같이 경쾌한 음악 소 리가 흐르고 있었고 원래 아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었지 만 대부분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었다. 뮤스가 다른 이들의 춤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가이엔이 말했다. "어차피 축제 무도회 때는 뮤스와 마음껏 춤을 출 테니까 오늘은 내가 카타리나에게 양보할게. 그 럼 둘이 파트너하고 나는 다른 파트너 찾아 보러가야겠네! 그럼 나중에 보자." "뭐라구? 가..가이엔!" 카타리나는 갑작스럽게 말을 하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를 부르려 했지만 이미 자신의 목소 리가 음악 소리에 묻혔음을 느끼고 체념했다. "할 수 없지 뭐. 뮤스 너 춤은 춰 봤니?" "응? 아..아니. 그런데 이곳의 춤은 남녀가 저렇게 가까이 붙어서 추는 것 밖에 없어?" "음... 뭐 대부분이 그렇지. 마음에 안드니? 나와 춤을 추는게?" 그녀가 뾰롱퉁한 모습으로 물어오자 뮤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이런 건 처음이라서." "호호호. 부끄러워 하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라구. 너도 축제 때 가이엔과 춤을 추 려면 배워야 할걸?" "그렇긴 한데..." 카타리나는 말끝을 흐리는 뮤스의 팔을 끌며 말했다. "풋. 남자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니? 오늘 내가 특별히 지도해줄게!" 어영부영 그녀의 이끌림대로 무대에 나온 뮤스는 어쩔 수 없이 춤 강습을 받아야만 했다. "자 우선 춤은 스텝이 가장 중요해 여러 가지 스텝이 있는데... 흠... 이러지 말고 직접 추면서 하 는게 더 나을 것 같아. 자 내 허리를 잡아." "허리를?! 어..어떻게 허리를 잡아?" "춤추는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괜찮아. 너 혹시 응큼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응큼한 건지 순진한 건 지 모르겠네..." "알았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카타리나의 잘록한 허리에 손을 올려놓은 뮤스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럴 수 록 카타리나가 불편해 함을 알았기에 참으며 시키는 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내 발걸음을 따라해 봐. 몇 가지만 간단히 해보면 나머지는 반복이니까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전문가도 아니니 무도회 때는 그 정도면 충분하거든." "응 알았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발 재간이 있었던 뮤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어 디까지나 카타리나의 몸에 걸쳐 있는 손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춤을 추는 것인지 아니면 끌려 다니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런 감정도 희미해 졌고, 몇 시간이 지나자 진심으로 즐거운 기분을 느끼며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이야. 뮤스 대단한데? 금방 능숙해 졌잖아? 혹시 무도가의 피가 너도 모르게 흐르는 것이 아닐까?" 카타리나의 말에 뮤스는 문득 자신의 아버지인 한 대감을 떠올렸는데, 과연 남다르게 음주가무를 즐겼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가? 그럼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야? 생각보다 재미있는걸." "거봐 내가 뭐랬어? 이런 건 처음 시작이 힘들지 해보면 재미있다니까." 자신의 말이 맞았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뮤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이제 힘든거야?" "아니. 그런게 아니라 사실 축제 때 네가 내 파트너였으면 좋다고 생각했었어..." 돌연 무슨 용기가 나서 인지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뮤스의 말에 카타리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우물주물하고 있었다. "그 말... 진심이니?"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던 카타리나가 한참만에 말을 하자 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심이야." "그럼 조금 더 빨리 말하지 그랬어... 이미 넌 가이엔과 파트너를 하기로 했잖아?" "응 그랬지..." 뮤스는 가이엔과 파트너가 되기로 한 것을 깨닫자 조금 더 빨리 용기를 갖지 못했음을 스스로 질 책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어리석은 놈!] "너 지금 후회하고 있구나? 하지만 가이엔과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난 아버님과 함께 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좀 더 빨리 말했어도 넌 거절당했을 거야!" 기죽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카타리나가 살풋이 웃으며 말했다. "풋!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잖아? 혹시 아니? 다음 번에 멋지게 파트너 신청해주면 승낙해 줄지?" 그제서야 뮤스는 기죽어있던 안색을 풀기 시작했다. "정말? 다음 번에는 파트너 신청을 받아 줄 거야?" "호호호. 너 하는 것 봐서! 대신 내 파트너가 되려면 보통 춤 실력으로는 안되니까 연습 많이 해야해." "하하 알았어! 이럴 시간이 없잖아? 빨리 조금 더 가르쳐 달라고!" 다시 신이 나서 스텝을 밟아 가는 뮤스의 눈에는 카타리나의 웃는 모습만이 가득 차 있었다. (23) 라이델베르크 축제 약간 늦은 오전, 요란스러운 소리가 창 밖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는 공학원 2층의 방안에는 아직 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뮤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서 그런지 거리 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수많은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와 축제가 열리는 각 대학교로 발걸음을 하고 있었고, 타지에서 유입된 인파들 역시 시내의 숙박업소로 나와 어디론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 었다. 뮤스는 더 이상 잠잘 분위기가 아니란 것을 알았는지 신경질 적으로 이불을 차내며 일어났다. "으악! 시끄러워! 축제라는게 이렇게 요란스러운 것이었나? 아침부터 잠도 안자고 이게 뭐하는 사람 들이래?" -똑! 똑! 마침 그를 깨우기 위해서 인지 방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면서 손에 세면 도구들을 들고 들어오는 집사인 바이멀이 보였다. 그 역시 축제에 들뜨 는지 평소보다 더욱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허허! 뮤스 도련님은 축제날인데 아직 까지 주무십니까? 아직 젊으신데 그러면 안됩니다." "에휴 말도 마세요. 어제 춤 연습한다고 늦게까지 무리하다보니 이러는 거예요. 그나저나 누님과 아저씨들은요?" "아가씨와 드워프님들은 아침부터 축제 구경갈 준비하신다고 분주하십니다. 도련님도 서두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바이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들고 들어온 세면 도구를 들고 욕실로 걸어갔다. "흠 누님과 아저씨들은 축제에 가서 뭐하신다고 그러시나..."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나들이 가시는 것이겠지요. 아! 크라이츠님께서 전뇌거 경주에 출전 하신다던데 잘 해낼 수 있으실지..." 뮤스는 바이멀의 말에 손에 들린 세면 도구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다급히 되물었다. "엥! 뭐라구요? 누님이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신다니요?" "도련님은 아직 모르셨습니까? 카이젠 대학교 대표 중 한 명으로 참가하신 다고 하시던 데요? 그 러기 위해서 축제 본부 쪽에 돈 꽤나 넣은 것 같던데..." "으악! 최악이야!" 서둘러 세면을 마치고 옷을 대강 걸친 뮤스는 빠른 걸음으로 크라이츠의 방으로 향하였지만 그 전 에 응접실에서 단장을 하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움직이기 편한 옷을 걸 치고 있던 크라이츠는 거울을 바라보는 채로 뮤스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잘잤니? 어제는 뭘 하다가 그렇게 늦게 온 거야? 오늘부터 축제인데 서두를 생각은 안하고." "누님! 누님이 왜 전뇌거 대회에 나오는 거예요! 그건 반칙이라구요!" "호호호 반칙이라는 건 심판이 판정하는 거란다. 심판이 아니라고 하면 반칙이 아닌 거지...." 뮤스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럼 불 보듯이 뻔한 경주가 되잖아요? 지금 이곳에 누님보다 전뇌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지 드래곤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풋! 억울하면 네가 이겨 보려무나. 나도 사실 나가기 싫었지만 그 바르키엘이라는 주장 녀석이 어 찌나 띨띨하든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가는 거란다. 내참 어떻게 그런 녀석이 주장이 됐는 지..." 뮤스는 크라이츠에게서 바르키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의외의 기분이었다. "누님이 보기에는 그녀석이 어떤데요?" "어라? 뮤스 너도 그 녀석을 알고 있니? 에휴 말도 마라. 어찌나 둔한지 속도를 올릴 때와 줄일 때 도 전혀 분간 못하고, 얼마나 운전대를 돌려야 하는지도 모르니... 아마 운동장이었기에 안 죽었지, 이쩌면 이번 경주 때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는걸?" "그럼 그런 녀석이 대회에 나오게 놔뒀단 말이에요?" "뭐 어떠냐. 내가 그런 녀석이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이니? 난 그저 내가 가르친 팀이 지는 것을 못 볼 뿐이다. 뮤스 너도 최선을 다해야 할거야." 그는 지난 시간동안 크라이츠에 대해서 꽤나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런 이야기가 오고갈 때 는 그녀가 무섭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넌 뭐하니? 전뇌거 경주는 몇 일 후이니 이틀정도는 시간이 있는데 즐겨야 할거 아냐?" "아 그렇죠. 저녁 때 파트너와 만나기로 했어요." "오호! 파트너라구? 누구니? 혹시 하버만 후작님의 딸이라던 카타리나니?" "아뇨. 가이엔이라는 친구예요. 그런거에 신경 쓰지 마시고 누님 치장이나 계속하세요. 저도 동호 회실에나 가봐야겠네요. 누님이 직접 출전한다는데 대책이나 세워야겠어요." "녀석. 얼렁뚱땅 넘기려하다니... 그래도 의외야. 카타리나가 아니라 다른 애였다니. 나도 이제 늙었나?" "에구! 누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크라이츠에게 신신 당부를 한 뮤스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이 다시 올라왔다. 바이멀이 준비해놓 은 자신의 옷을 하나씩 걸치며 그녀와의 대화를 곰곰히 생각해 봤다. "바르키엘이라는 녀석이 정말 위험하지 않을까? 꽤나 얄밉긴 했지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았는데 ... 에휴 모르겠다. 지금 상대편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어! 크라이츠 누님이 나오신다는데 어찌해 야하나...."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은 뮤스는 평소와 같이 마법가방을 옆으로 매고 자신의 전뇌거가 세워져 있는 차고로 걸어 나왔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7 차고의 한켠에는 가장 처음 켈트와 자신이 만든 철전뇌거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쓰이지 않는 그 모습이 딱하게 보였다. "후훗. 이제 너도 찬밥 신세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나중에 박물관이라도 세워줄 테 니까." 지금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는 투박한 철전뇌거에게 위로의 말을 한 뮤스는 현재 자신의 애마가 된 로데오에 올라타고 새롭게 고안된 안전띠를 묶었 다. "아무래도 경주에 사용될 로데오에 이 안전띠를 설치해야겠어..." 전뇌거를 몰아 학교로 향하던 뮤스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장면들을 여러 가 지 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의 사람들이 아니라 축제 때의 성수기를 위해 타 지 역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을 파는 자들도 있었고, 신기한 공연 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축제 가 낯설기는 했지만 조선의 명절과 비슷하다고 생 각하며 붐비는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때 거리의 한쪽에 사람이 유난히 많았는데 궁금해진 뮤스는 전뇌거를 세워 놓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을 밀치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키는 2멜리 정도에 달하고 덩치가 산만하여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도 없을 것 같은 인물과, 그의 옆에서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떠드는 키 작은 난쟁이를 볼 수 있었다. "자자! 제 옆에 있는 이 괴력의 사나이와 팔씨름을 하여 이기시는 영웅께는 처음 걸 었던 원금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도전하실 분 없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며 젊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권하자 한결 같이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그 때 구경꾼들이 갈라지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프하하하! 나 길틴이 도전하도록 하지! 아무리 축제라지만 어디서 굴러들어 온 지도 모를 돌들이 여기 박혀 있다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곧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놀랍게도 길틴이라는 자의 덩치는 사람 들에 둘러 쌓여 있던 자보다 10셀리정도는 큰 키였고, 덩치도 그와 비슷해 보였다. "좋아! 두 배라고 했으니 내가 10겔피를 걸겠다. 내가 이긴다면 20겔피를 받는 것이 틀림 없으렸다?" 길틴의 말에 난쟁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그렇긴 합니다요." "흐흐흐. 그렇다면 여기 10겔피를 내겠다! 어서 한판 붙어 보자!" 10겔피라는 단위는 금의 단위로서 1겔피면 금 한 돈의 가치였다. 그러니 10겔피라는 것은 금 열 돈에 해당함으로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길튼이 재촉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덩치 큰 인물을 바라보았다. "어서 안내하지 않고 뭐하는 거지?" 길틴의 계속 되는 재촉에 난쟁이는 덩치 큰 인물 앞의 자리를 치웠다. "이.. 이쪽으로 앉으십시요." "프흐흐 좋다. 자!" 길틴은 난쟁이가 지정한 좌석에 앉아 자신 앞의 덩치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들의 근 육은 벌써부터 힘이 들어가는지 힘줄이 불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준비... 시작!" 난쟁이가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놓으며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팔을 지 지하고 있던 탁자는 심하게 흔들리며 흙으로 다져진 땅으로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했 다. 괴력의 두사람을 보던 구경꾼들은 다들 입을 벌리며 먼지가 들어가는 지도 모르 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 큰 인물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했는데 길틴을 이기 기에는 역부족 인 듯 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길틴은 상대방의 손을 누르며 탁 자에 쓰러트렸고, 구경꾼들을 향해 두손을 뻗어 올리며 환호성을 쳤다. "우하하하하! 이거 직접 해보니 더욱 별것 아니군 그래! 크크크. 어서 20겔피를 내놓 거라!" 그가 의기 양양하게 손을 내밀자 난쟁이는 두 눈을 불끈 감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말 했다. "아이구 나으리 한번만 봐주십시요. 저희 형제는 10겔피라는 돈이 없습니다요. 그저 푼돈이나 좀 벌어 보자고 했던 것인데... 저희를 불쌍히 여겨 한번만... 이렇게 부탁 합니다." 그렇다면 밑천도 없이 이런 일을 했다는 말이었는데, 그의 말을 듣던 길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지불할 돈도 없이 이런 장사짓거리를 했다는 말인가! 어디 나한테 혼 좀 나보거라!" 화가 난 길틴은 난쟁이의 뒷덜미를 들어 올려 땅바닥에 내던지자, 그는 땅에 떨어지 고서도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몇 바퀴나 더 굴러 멈출 수가 있었다. 한번의 휘둘려 짐으로 얼굴은 땅바닥에 갈려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옷 역시 군데군데 찢어졌다. 그래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쓰러져있는 난쟁이에게 다가갔다. 그 장면을 보던 뮤스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난쟁이에게 걸어갔다. "이봐요!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 그만하시죠?" 길틴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일에 끼어들어 난쟁이의 상세를 살피고 있는 이 젊은 녀석 이 마음에 안드는지 큰 걸음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흥! 네 녀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난쟁이와 저 덩치만 큰 녀석은 우리에게 사기 를 쳤다. 이런 녀석들은 혼이 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난쟁이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요? 만약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그 돈을 드리죠." "흠... 네가 대신 지불한다면 나는 아무 소리하지 않겠다. 그런데 네가 그럴 만한 돈 이 있기는 한 것이냐?" 길틴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뮤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금화 두 개를 꺼내 그 에게 던져줬다. 금화를 받은 길틴은 그것을 이빨로 깨물어 보며 확인해봤고, 진짜 금 화임을 확인하자 득의 한 표정을 지었다. "흥 좋다. 약속대로 그만하도록 하지. 너희 난쟁이와 덩치는 운 좋은 줄 알거라! 나 길틴에게 사기를 치고도 이 정도에 그쳤으니!" 그렇게 길틴이 자리를 떠나자 주변 사람들도 술렁임을 멈추고 가던 길을 재촉하고 있 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 곳에 남은 인물들은 뮤스와 난쟁이, 그리고 그의 일행인 덩치 큰 인물 밖에 없었다. 난쟁이는 이제서야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는지 상 황을 깨닫게 되었고 불현듯 땅에 몸을 엎드리며 말했다. "나으리 정말 감사합니다! 저와 제 동생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 난쟁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난처했기에 급히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이러지 마세요. 겨우 금 몇 푼 가지고 사람 목숨을 구했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어 서 일어나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뮤스는 계속해서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는 난쟁이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 몸집이 큰 분은 왜 형이라는 사람이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거죠?" 그의 물음에 난쟁이는 동생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동생의 다리에는 테이블 천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철로 만들어진 보호대가 장착되어 있었고,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듯 두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요. 실상 저와 제 동생은 용병이었죠. 저는 암기를 잘 다뤘기 에 꽤나 유명 했었고, 제 동생은 천생의 신력 때문에 알아주는 용병이었는데..." 잠시 뒷말을 흐리며 미간을 찌푸리던 난쟁이는 하던 말을 계속 했다. "하지만 용병이란 직업을 가진 자들은 하나같이 언제나 위험에 노출이 되어있는 자들 이지요. 저희 역시 그 범주를 넘지 못하고 전투 중에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제 동 생 녀석은 하반신 근육이 마비가 되어 몸도 못 가누는 신세가 되었고, 그 충격으로 말도 못하는 신세가 됐지요. 저 역시 한쪽 눈을 잃어 더 이상 용병노릇을 못하게 됐 습니다요." 난쟁이의 말을 듣던 뮤스는 거구의 사내와 난쟁이를 살펴보자 과연 거구 사내는 도저 히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난쟁이의 한쪽 눈에는 이질적인 무엇인 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편한 몸의 동생에게 팔씨름을 하게 한 거죠?" "후우... 아무리 이런 몸이라지만 팔 힘만은 평범한 사람들 정도는 충분히 감당 할 수가 있습죠. 그런데 운도 없게 오늘은 저런 사람이 와서 행패를 부렸지 뭡니까. 이 제 이곳에서 장사는 텃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자신의 동생을 다시 부축해 자리에 앉히던 난쟁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쟁이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던 뮤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가실 곳이라도 있어요?" 그의 말을 들은 난쟁이는 동생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희 같은 떠돌이가 어디 갈곳이 있겠습니까. 겨우 동생 놈을 이곳까지 데리고 왔지 만 몇 푼 벌지도 못하고 떠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죠. 제가 좀 도와 드려도 될까요?" 뮤스가 도와준다는 말에 난쟁이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닙니다요! 저희를 대신해서 10겔피나 손해를 보셨는데 아무리 염치없는 저희 라고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도움을 받겠습니까! 그냥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요." "이것 참... 누가 돈을 드린다고 했나요? 그냥 저도 축제니까 한번 즐겨 보자는 것인 데 그렇게 부담을 가지다니... 걱정 말고 아까 하듯이 손님이나 끌어 모아봐요. 저도 몸 좀 풀어보게..." "설마 나으리께서 직접 팔씨름을 하신다는 것은 아니시겠죠?" 난쟁이의 불안함 담긴 목소리에 뮤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왜요? 전 팔씨름도 하면 안되나요?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으시면 손님이나 모으시 죠. 저도 빨리 끝내고 가봐야 할 곳이 있거든요." "네? 네네..." 뮤스가 재촉하자 난쟁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늘 하던 바와 같이 길거리 에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안했던 난쟁이는 상대적으로 허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서만 외쳤지만 팔씨름의 상대가 왜소한 소년이란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도전하려는 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이제 꽤나 많은 사 람들이 모여들자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 난쟁이는 뮤스에게 다가가 근심 어 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나으리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네?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이 건 장난이 아니라굽쇼!" "걱정도 참... 저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죠. 빨리 첫 번째 상대부터 자리 에 앉혀요." 끝까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 하자 난쟁이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 음 도전하기 위해 의자에 앉은 사내는 한눈에 보기에도 힘 좀 쓸 듯했는데, 뮤스의 사기를 떨어트리기라도 하려는지 윗통을 벗어 던졌고, 온몸의 근육이 굼틀거리고 있 었다. "흐흐... 꼬마야, 나는 아무리 상대가 어리다고 해도 봐주지는 않는단다. 난 2겔피를 걸었으니 4겔피는 준비 되어있겠지?" 입으로 말하는지 근육으로 말하는지 모를 사내를 보던 뮤스는 담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의심하고는... 쯔쯧. 시간 없으니 빨리 끝냅시다. 학교 늦겠어요!" 근육의 사내는 뮤스의 말에 심기가 상하는지 이빨을 갈며 신경질 적으로 뮤스의 손을 잡았는데, 내심 이 정도로 과감하게 나가면 겁이라도 조금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 내는 정작 뮤스에게서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자 무너지는 자존심에 더욱 분노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태연한지 보자... 거기 난쟁이녀석! 준비 됐으니 시작 신호 를 해라!" 근육의 사내가 난쟁이에게 소리치자 움찔 놀라던 난쟁이는 손에 묻은 땀을 바지춤에 닦으며 뮤스와 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긴장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시작!" 난쟁이의 신호가 떨어지자 근육의 사내는 요란한 기합 음과 함께 힘을 쓰기 시작했 다. "으라챠챠챠!" 하지만 어이없게도 말만 거창한 허풍쟁이였는지 뮤스의 손은 넘어갈 생각을 하고 있 지 않고, 하늘을 향한 그대로였으며, 주변 사람들은 이 근육의 사내가 꽤나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는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과는 다르게 사내는 계속 해서 진지 함을 유지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마주잡은 손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처 음과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뮤스는 웃으며 말했다. "헤헤 아저씨 혹시 근육 안에 풍선이라도 넣은 거 아니에요? 거참 힘 못쓰시네..." "뭐...뭐라..구..?" 사내는 핏발 솟은 눈으로 뮤스를 바라보았지만 모든 힘을 팔로만 쏟아 붇고 있어서 인지 더 이상 긴말을 하지는 못했다. "아까 말했듯이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끝내죠..."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하던 뮤스의 손은 천천히 사내의 손을 반대편으로 넘기기 시 작했는데 주변의 인물들은 아직까지 이 사내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지 상당히 심각한 사내의 표정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기에 여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사내의 손에 탁자 에 닫자 사내는 탈진을 했는지 대자로 뻗어 땅에 나뒹굴었고, 그의 일행 듯 한 사람 이 그를 부축해 나갔다. 첫 번째 시합의 승패가 가려지자 뮤스는 팔을 위로 뻗으며 말했다. "저렇게 허풍만 쎈분 말고 또 없습니까? 아무래도 재미가 없어서 나설 분들이 없으신 듯 하니 이긴다면 처음 낸 원금의 세배를 드리도록 하죠!" 과연 그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머뭇거리던 자들 역시 서둘러 줄을 서서 자신의 순 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팔씨름에 돌입하자 줄을 서는 사람의 수가 늘기 무섭게 한 명씩, 한 명씩 탁자의 주변에 탈진하여 눕기 시작했다. "이...인간도 아니다..."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것일 거야.... 헉! 또 넘겼다." 구경꾼들의 하나같은 반응들이었다. 팔씨름이 시작 된지 무려 1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뮤스가 다음 상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탁자의 주변에는 83명이라는 숫자의 장정들이 드러누워 있었고,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도전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실 남은 도전자들도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 괴물 같은 소년과 팔씨름 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미 낸 돈이 있기에 빼도 박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 말고도 더욱 놀라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난쟁이 형제들이었다. 난쟁 이는 이제 무의식 적으로 팔씨름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있었고, 거구의 동생도 눈빛 을 격렬하게 떨며 이 사태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라이델베르크의 팔 씨름 사태라 불릴 전설 적인 사건이었다. Ip address : 211.228.82.1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름 짜가신선 제 목 <대공학자> #58 뮤스가 마지막 도전자를 가볍게 눌러주고 손을 털며 일어나자 주변 모든 이들의 눈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뮤스는 그런 눈빛들이 조금 부담스러운지 어색하게 나마 웃으 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다들 가던 길을 가시죠!"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움직이려는 기색이 없자 머리를 긁적이던 뮤스는 난쟁 이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 갈 생각이 없나 보네요... 그럼 우리가 가죠." 난쟁이도 잠시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어영부영하다 손에 들려있는 금화 보따리를 들 어올리며 대답했다. "아..네!" "그런데 동생 분은 어떻게 가죠? 아무래도 혼자 부축하기는 무리가 있는 듯한데요... " 뮤스의 질문에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아차차... 내 정신이... 저쪽에 동생을 태우고 있는 수레가 있습니다. 제가 빨리 가 지고 오겠습니다!" 서둘러 뛰어간 난쟁이는 어디선가 사람 두 명정도는 충분히 태울 만한 크기의 손수레 를 끌고 나타났다. 지금까지 동생을 그 손수레로 데리고 다녔는지, 수레의 윗부분에 는 푹신한 담요가 깔려 있었고, 조금이나마 쉽게 끌고 다니기 위해서 손잡이를 별도 로 제작한 듯 싶었다. "동생을 이것에다 태우고 다닌답니다." "그래도 여간 무게가 아닐 텐데요. 힘드시지 않아요?" "후훗... 힘들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인걸요..." "우선 수레에 태우고 보죠.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아직도 힘이 남아 있으신가요? 무려 90여명의 사내들과 팔씨름을 하고도 말입 니까? 제 동생이 멀쩡하더라도 나으리께는 상대도 안됐을 겁니다." 난쟁이가 그를 향해 찬사를 보내고 있을 때 뮤스는 어느새 그의 동생을 수레에 태운 후 손을 털고 있었다. "아참 팔씨름해서 번 돈이 얼마나 되죠?" "아아 나으리 여기 있습니다. 대강 계산해보니 120겔피 정도 되는 듯 했습니다." "꽤나 많이 벌었는데요? 저는 돈이 그다지 필요 없으니 잘 챙겨 두도록 하세요." 뮤스의 말에 깜짝 놀란 난쟁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실상 120겔피 정도의 금화라면 작은 가게를 내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그런 막대한 돈을 자신에게 선뜻 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네..넷?! 저..정말 이 많은 돈을 다 주신다는 겁니까? 아...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는 없습..." 그가 애써 거부할 듯한 자세를 취하자 뮤스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좋아요! 이렇게 하죠. 팔씨름 장사를 하는 건 아저씨의 사업이니까 제가 하루 고용 이 되었다고 치면 되겠죠? 그럼 전 일한 대가로 10겔피를 받을게요. 그럼 된 거죠? 전 학교에 가야하니 이만 가볼게요! 벌써 늦었거든요." "저...나..나으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흑흑..." 그가 더 이상 거부하기 전에 떠나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한쪽에 벗어놓은 웃옷을 걸치며 전뇌거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잊은게 있는지 금화와 동생을 안고 눈물 흘리는 난쟁이를 향해 외쳤다. "아참 축제가 끝난 다음 주쯤 공학원으로 저를 찾아오세요. 제 이름은 뮤스라고 해 요. 그럼 그때 뵙죠." "뮤스? 뮤스님... 알겠습니다 뮤스님!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난쟁이와 그의 동생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전뇌거에 올라탄 뮤스는 서둘러 전뇌거 를 몰아 학교를 향했다. 겨울이 다가 오고 있어서인지 전뇌거의 유리 넘어로 흘러 들 어오는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엄청 힘들군. 뇌공력을 너무 많이 썼나?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벌써 쓰러졌을 텐데 많이 늘었구나 명신아. 후훗." 오랜만에 자신의 실명을 불러 본 뮤스는 흥이 나는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4) 밝혀진 정체.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정오가 지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해가 짧은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축제의 중심이 되는 카이젠 대학교와 햄브리겐 대학교에서는 갖가지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뮤스 가 전뇌거를 몰아 가는 도중 구경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경기에 대한 자세한 규칙 을 모르는 입장에서 봐도 잘 모른다고 판단한 그는 그 길로 동호회실을 향했다. 동호 회 건물은 축제의 주축인 만큼 분주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 지 모를 것들을 들고 자신들의 시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동호회실로 들어가자 이미 와있는 회원들을 볼 수 있었는데, 축제 마지막날 벌어질 전뇌거 경주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벌써들 와있었네?" 뮤스가 능청 스럽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자 한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폴린이 삐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뮤스 네가 너무 늦은 것 아냐? 이번 대회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녀석이 지금 오면 어떻게 하냐?" "아.. 미안, 미안 조금 늦잠을 자서 말이야." 카타리나는 그가 왜 늦었는지 아는 듯 빙긋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이길 승산은 있는 거니?" "아...그게말야... 카타리나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니?" "응? 무슨 일인데? 여기서는 안돼는 이야기야?" 고개를 끄덕이며 동호회 방으로 나가자 폴린과 히안이 소리쳤다. "어머나 쟤 카타리나를 꼬실려나봐! 듣기로는 가이엔과 파트너를 하기로 했다더니... " "그러게... 폴린 내 말이 맞지? 원래 안 그렇게 생긴 녀석들이 더한거야 후훗..." 카타리나는 한심 커플의 어이없는 억측에 대꾸도 하지 않고 뮤스를 따라 밖으로 나갔 다. "그런데 할말이라는게 뭐니?" "아... 이번에 조금 큰일이 난 것 같아... 누님이 직접 출전한다고 하시거든..." "뭐라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게 된 거야? 학생이 아니면 참가를 할 수 없게 되어있는 데..." 크라이츠가 물밑작업으로 성사 시켰다는 것을 말하려 했지만 그래도 같은 가족의 일 이었기에 설명은 접어 두고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말했다. "지금 나도 누님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게 더 큰일이지... 이번 경기 규칙은 어 떻게 되는 거야?" "아까 회장선배가 와서 설명해 주고 갔는데, 열 여섯 명의 선수들 중 5위 이내에 많 은 수의 인원이 포함된 쪽이 이기게 되는 거래." "그렇다면 조금은 괜찮겠군... 일단 누님을 포기한다 생각하면 나머지 네 명중에 세 명이 우리 쪽이어야 이기는 거구나... 과연..." 뮤스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자 카타리나는 살포시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 하지는 마. 네가 준비한 특별 전뇌거도 있겠다.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 좋 은 결과가 있겠지..." "그럴까?" "자 이제 들어가자 작전준비를 해야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 뮤스는 다시 동호회실로 들어갔는데 어떤 짐작을 하 고 있었는지 동호회 회원들은 휘파람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뮤스는 뜻밖의 상 황에 히안을 바라보니 그의 눈을 피하며 딴청이었다. 애써 부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 각한 뮤스는 회의 탁자의 가장 상석에 앉아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연습은 했겠죠? 우선 제가 휴일동안 시합이 벌어질 곳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중 가장 유의해야 할 곳에 서너 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한곳은 린강을 타고 도는 절벽길입니다. 일단 이 사진을 보며 이야기해보죠..." 잠시 말을 멈춘 뮤스는 자신의 가방에서 책장 크기 만한 종이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 려놓았는데, 그 종이의 위에는 손으로 그린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사실 같은 그림 이 그려져 있었다. 이 신기한 그림을 바라보던 회원들은 뮤스가 어떤 설명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는지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아... 이 사진이 신기한가 본데 이건 그곳의 정경을 담은 그림이죠. 그린 것은 아니 고 빛을 이용해서 그곳의 풍경을 이 종이 위에 투과시켰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 정들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설명을 하다보면 끝도 없기에 대강 접어두고 사진을 가리 키며 설명을 계속 하였다. "이곳은 보시다 시피 굉장히 급히 휘어있는 지형이죠. 그래서 자칫 속력을 줄이지 않 는다면 절벽으로 떨어져 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게다가 바닥에 모래가 많기 때문에 쉽게 미끌어 진다는 점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떨어진다면 정말 생명을 장담 할 수는 없습니다. 진입로에서 떨어진다면 정말 산산조각이고, 운 좋게 나가는 길에서 떨어진다면 린 강이 기다리고 있구요. 또 한가지, 승리에서 한 걸음 멀어 지 는 것이죠. 다음은..." 그의 말을 듣던 회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절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Ip address : 61.84.85.1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뮤스는 다시 가방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는데, 좁은 시장 길의 급커브가 나타나있었다. "이곳 역시 상당히 위험 한 곳이 되겠네요. 도로의 폭이 유난히 좁은 데다가 길이 급 하게 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벽과 충돌을 하게 됩니다. 자 이쪽을 보시면 내 리막길에서 진입을 하기 때문에 속도 조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곳에서의 무리한 주행보다는 이곳은 안전하게 빠져나간 후 직선 도로에서 승부를 내 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때 듣고만 있던 히안이 손을 들었다. "뮤스 질문있어!" "뭔데?" "직선 주로에서는 어떻게 승부를 내지? 저쪽과 우리가 똑같은 전뇌거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 안돼는 것 같아." 히안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고개를 끄덕이는 회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점 에 대한 대책을 기대하며 다들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건 그때 가보면 알게 될거다... 후훗..." "그게 다야?" "자자 아무튼 나만 믿어 보라구. 이제 다음 주의해야 할 곳은..." 작전계획은 그때부터 저녁 식사시간까지 계속 되어졌다. 공부벌레라 유명한 히안은 한마 디도 빠트리면 안 된다는 듯이 진지한 자세로 들었고,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회 원들은 꿈뻑꿈뻑 졸기도 했다. "제가 조사한 것은 대강 이 정도입니다. 시합하기 전까지 시합 도로를 한번 돌아보고 나 름대로의 계획도 세워 놓도록 하세요. 그럼 이걸로 마치죠." 끝났다는 소리를 듣자 졸고있던 회원들은 해방이라도 된 듯 환호성을 치며 일어났고, 카 타리나들은 하품을 하며 굳어진 몸을 풀고 있었다. 가이엔은 눈 커플이 반쯤 감긴 상태 로 말했다. "정말 따분했어. 물론 말하는 너도 힘들었겠지만..." "헤헤... 그래도 이건 엄청나게 중요한 거란 말이야.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구." 폴린은 회의가 끝나자 다시 히안의 옆에 붙어 앉으며 콧소리를 냈다. "호호홋! 수고했어. 너희들은 걱정하지마 나의 영웅 히안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줄테 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찝찝한 것을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녀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존재인 히안이 나섰다. "자 다들 출출한데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구! 밥은 먹어야 뭘 할 거 아냐? 축제 첫날부터 이렇게 재미없이 있을 거야?" 히안의 말에 동의한 친구들은 학교 밖으로 나와 식당을 찾아 나섰다. 밤이 되어 더욱 현 란해진 거리의 여기 저기에서는 취객들의 노래 소리가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 시켰 고, 쌀쌀해진 밤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와있는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한참을 찾아 다녔음에도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한 일행은 지쳤는지 길거리에 걸터앉았다. 이런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릴 듯한 투덜거리는 폴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칫! 남들이 보면 정말 웃을 일이다. 식당 집 딸이 밥 먹을 곳이 없어서 이렇게 돌아 다 녀야 한다니..." 언제나 그녀의 보모노릇을 하는 세이즈가 그녀를 달래 주었다. "축제 기간이잖니. 매년 이런걸 너도 알잖아. 어쩔 수 없으니 오늘도 폴린 너희 식당으로 갈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거봐. 진작 우리 식당으로 가자니까... 이제는 허기가 져서 걸을 힘도 없다. 히안 나 업어줘!" 아무리 사랑의 힘이 강해도 불가능 한 것이 있는지 히안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포..폴린... 설마 농담이겠지? 그러면 너의 낭군님 돌아가신다." "칫! 그냥 해본 말인데 반응이 그러니까 은근히 화가 나는걸!" "헤헤... 이해해 줘. 내가 원래 곱게 자라서 몸이 허약한거 알잖아." 짜증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카타리나가 앞장서며 폴린의 식당을 향해 발걸 음을 옮겼다. 그녀를 비롯한 모두들 말할 기운도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슈넬 레스토랑 2층 한켠의 테이블에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소비하고 있는 여섯 명의 인물 이 있었다. 이미 나온 음식들은 빈 접시로 식탁의 한쪽에 쌓여 있었고, 여러 명의 종업원 들이 계속해서 음식을 가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식사하기 바쁘던 뮤스 와 친구들은 어느 순간이 되자 배가 좀 든든해 졌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뮤스 가 배를 두들기며 탄성을 흘렸다. "후아! 정말 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역시 폴린 덕분에 잘먹었다." "호호 이게 다 친구 잘 만나서 그런 것 아니겠니? 하지만 밥값은 다 내고 가야하는거 알 지? 히안만 빼고!"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한 그녀의 씀씀이에 다른 친구들은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런게 어디 있어! 폴린 많이 변했구나. 언제는 히안보고 쫌생이 같다고 그러면서 놀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둘이 닮아 가는 거야?" "카타리나 말이 맞아. 정말 그렇게 변하면 못 쓰는거다." 세이즈와 카타리나가 항의를 하자 폴린의 얼굴에서는 전형적인 악덕상인의 표정이 떠올랐다. "호호호! 원래 연인은 닮아가기 마련이란다. 뮤스 오늘은 네가 한번 내는게 어때? 이곳에 와서 우리한테 한번도 뭐 사준 적이 없잖아? 이번 기회에 네 앞의 여성분들께 점수 좀 따 보라고." 뮤스는 폴린이 뜬금 없이 자신을 지목하자 다른 친구들의 표정을 살폈는데 친구들의 눈빛 역시 폴린의 그것과 같이 뭔가 갈구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대세를 따라 승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좋아. 오늘 쓰는 건 다 내가 내도록 하지. 대신 오늘 한번뿐이다." 농담으로 한번 던져본 말이 먹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진 폴린이 말했다. "어머나! 화끈하기도 하시네 뮤스군은? 이러고 있을 거야? 빨리 린강으로 나가자!" "린강? 거기는 왜?" 의아해진 뮤스가 질문을 던지자 폴린 대신 차분한 목소리의 세이즈가 대답해 주었는데 폴 린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고 마음이 이미 식당 밖으로 나가 있는지 분주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축제 때만 되면 강변으로 나가서 놀거든. 친구들끼리 그곳에 자리를 잡고서 술을 마시거나, 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하며 노는게 보통이야." "그렇구나. 그것도 괜찮겠는걸? 실내는 좀 답답하기도 하니까. 떠들 수도 없고." "응. 나갈 준비하자. 아참... 음식값 계산하는거 잊지 말고." 뮤스는 가끔 한마디씩 던지며 기분을 깨는 세이즈의 말에 허무함을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 일층의 카운터로 내려온 그는 계산을 위해 가방에 손을 넣어 크라이츠가 챙겨 준 금 덩어 리 하나를 꺼냈다. "위층에 먹은 것 좀 계산해주세요. 이 정도면 되려나?" 종업원에게 자신의 주먹만한 금덩이를 내밀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종업원은 크게 당황하 며 반색했다. "저..저..." "조금 모자라나요? 그럼 이거라도..." 가방에 다시 손을 넣어 비슷한 크기의 금덩이를 하나 더 꺼내자 종업원의 안색은 이제 창 백해지기 시작했다. "소..손님 그게 아니라. 저희 식당에서는 이 금을 거슬러 드릴 돈이 없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까?" 식당의 입구 쪽에서 뮤스가 오지 않자 궁금해하던 히안이 다가왔다. "여! 뮤스 왜 그래? 돈이 부족하다면 말해! 폴린에게 깎아 달라고 부탁해 볼게!" "그게 아니라 거슬러 줄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하지? 이 웃기지도 않는 말에 실소를 흘리던 히안은 뮤스의 손에 들려있는 금덩어리를 보고서야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화로 따지면 100겔피는 됨직한 양의 금 덩어리를 가지고 다닌 다는 것이 너무나 현실성이 없었기에 믿을 수 없었건만 직접 본 이상 믿거나 금 덩어리가 가짜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어..어떻게 그런 금 덩어리를 들고 다닐 수 있냐? 그거 가짜 아냐? 잠깐만 줘봐." 심하게 놀랐는지 과장된 몸짓까지 해 보이던 히안은 뮤스의 손에서 금 덩어리를 받아 이 빨로 깨물어 보았다. 그러자 금 덩어리에는 그의 의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나있었고, 그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진짜네... 너 어마어마한 부자였구나! 과연 카타리나에게 꼬리 칠만 하겠어..." "이..이봐 거기서 카타리나가 왜 나오냐..." 뮤스를 데리러 간 히안마저 오지 않자 다른 친구들도 카운터로 몰려왔다. 히안의 떨리는 모습을 보던 폴린이 말했다. "히안 왜 그래? 설마 뮤스가 네 돈을 빼앗기라도 했어? 나한테 말만해!" 넘겨짚기의 고수가 다되어 버린 폴린은 히안의 손에 올려져있는 금 덩어리를 보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네 손에 있는 금덩어리는 뭐야? 히안! 나와 사랑의 도피를 위해 집이라도 팔고 온 거야?" "그런게 아니라구! 글쎄 뮤스가 음식값을 지불한답시고 내놓은 거란 말야." "뭐라구? 아무리 큰 대장간을 한다지만... 뮤스 이거 어디서 훔친거니? 같이 자수 하러 가자..." 이야기들이 너무나 극단적으로 흘러가자 또 다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뮤스는 서둘러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 내 돈이 아니라 누님 심부름으로 대장간에 배달될 물건값을 지불할 금이거든..." "와! 너희 가계의 원료 지불비가 이 정도 된다면 엄청나게 큰 규모구나. 어디야? 다음에 한번 구경이나 가야겠다." "어? 그...그래."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지 친구들도 수긍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이엔과 카타리나 만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100겔피 가량이나 되는 금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닐 정도의 공학원 재정에 놀라야만 했다. 뮤스가 금으로 음식비를 지불 할 수 없게되 자 난감해 할 때 어쩔 수 없이 폴린이 나서야만 했다. "이거 원... 밥 한번 얻어먹기 힘들구나. 괜히 그 금 덩어리 썼다가 너희 누나에게 혼나 지 말고 다음에 네 돈이 있을 때 사렴." "하하 이거 미안한걸..." "야 미안한 표정을 좀 지으면서 미안하다고 그래라." "훗.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야." 식당에서 나온 뮤스와 친구들은 과자가게와 식료품점등을 들려 먹을 것들을 구입했고, 배 도 불렀기에 즐거운 기분으로 린 강의 강변으로 향하였다. 식당에서부터 린 강까지는 조 금 먼 거리였는데, 거리를 가득 메운 구경거리 덕에 따분하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미 강변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아 축제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는데, 뮤스와 친구들 역시 준비해온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간소한 입가심 거리가 대부분이었는데, 뮤스는 내심 이 낯선 디저 트들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조선에서도 군것질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그 였기에 조금 어른스러워진 지금에 와서도 그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준 비가 끝나자 여섯 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넓지막한 자리가 마련되었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신발을 벗고 자리에 올라앉았다. 히안이 오랜만에 기분이 나는지 자신 앞에 놓여있 는 술병의 마개를 따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신나게 놀아보자구. 이번에 우리 동호회 새로운 식구가 된 가이엔과 뮤스를 위해 건배하는게 어때?" "좋아 그렇게 하자." 다른 친구들이 동의하자 히안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술병을 기울여 친구들 앞에 놓여있 는 투명한 잔에 술을 채웠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며 잔을 들었다. "자! 뮤스와 가이엔의 입회를 축하하며 건배!" "건배!" 친구들 모두 히안을 따라 건배를 외치며 자신의 술을 마셨다. 하지만 뮤스는 아직 마시지 않고 잔을 들고만 있자 가이엔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머. 뮤스 너는 왜 안 마시니?" "나 술을 못 마셔 봤거든. 그런데 마셔도 될지 모르겠어." "풋! 겨우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단 말이야? 괜찮을 거야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술도 못 마셔 봤다니 너야말로 정말 샌님이구나?" 그녀의 말에 동의를 하듯이 카타리나가 끼어 들었다. "맞아! 이번 잔은 너와 가이엔을 위한 잔이었는데 네가 안 마시면 되겠니? 어서 쭉 들이켜!" "쩝... 에잇 모르겠다." 친구들이 부축이자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손에 들려있는 잔을 한번에 비웠다. 처음 마 셔본 술의 맛은 쓰기 그지없었는데,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화끈한 기분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옆에서 카타리나가 쿠키를 하나 집어 줬는데, 쿠키의 고소한 맛이 술의 느낌과 어 우러져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 과자도 맛있고... 좋아, 좋아!" 처음 마시는 술에 기분이 좋아진 뮤스는 이번에 자신이 술병을 들고 친구들의 잔을 채워주 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뇌거 경주를 위해서 건배를 하자구!" 술을 거리끼던 뮤스가 즐거운 듯 하자 히안 역시 덩달아 분위기를 맞추기 시작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자 다들 잔을 들라구. 이번엔 뮤스 네가 한마디해라." "훗. 이거 처음 하는 건데 흠흠... 햄브리겐 대학교 여가활동 동호회의 승리를 위하여 건배!" "건배!" 뮤스의 말과 함께 웃으며 건배를 한 친구들은 이번에도 단숨에 손에든 잔을 비웠다. 이렇게 친구들과 어우러져 시간을 보내던 뮤스는 처음 마시는 술에 무리를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들 역시 같이 취해 있는지라 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 았다. 문득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던 뮤스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카타리나가 물었다. "뮤스 너 뭐하는 거니?" "응? 헤헤...잠깐만 기다려봐... 어디 뒀더라... 아! 여기 있었군." 가방에서 둥근 통 몇 개를 꺼낸 뮤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불꽃놀이가 빠지면 안되지...아무렴..." 원통을 들고 비틀거리며 일행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던 뮤스는 그 원 통을 땅에 세우고 있었다. 그런 뮤스를 보며 눈동자가 희미해진 폴린이 손가락질을 했다. "헤헤헤.. 저저 벌써 취했군... 뮤스가 술이 너무 약한거아냐?" "풋... 뮤스만 취했는줄 아니? 폴린 너도 꽤나 취했어..." 가이엔이 자신을 취했다고 말하자 그녀의 자존심이 깨어나면서 몸을 일으켰다. "가이엔... 내가 어딜 봐서 취했다는 거야? 앙? 자 내가 걸어가는걸 보라고 이렇게..." 그녀가 비틀거리며 강변의 잔디밭으로 걸어 나가려하자 히안이 손을 잡아 당겼다. "폴린 너 안 취한거 아니까 그냥 앉아... 그나저나 뮤스 저 녀석은 저기서 뭘 하는 거야? 카타리나 저 녀석 좀 데리고 와라." "응? 그러게...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이때 원통 여러 개를 땅에 세우며 위치를 잡던 뮤스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다들 기대하라구! 이런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게 아냐! 헤헤헤..." 친구들이 뮤스를 주시하고 있을 때 뮤스는 손으로 뇌공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 서인지 그 양을 조절하기 힘들었지만 원통으로 이어진 심지에 불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없 었다. 뇌공력에 의해 일어난 불꽃이 땅에 세워놓은 원통의 심지에 불을 붙이자 뮤스는 귀 를 막고 친구들에게 뛰어왔다. "헤헤... 셋... 둘... 하나... 꽝!" -펑! 펑! 신호를 하자 그가 땅에 세워 놓은 원통은 폭발음을 일으키며 밝은 불빛을 하늘로 쏘아 올 렸다. 폭발음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친구들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고, 주변 에서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도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놀라며 하늘로 시선을 고정해 야만 했다. 하늘 높이 올라가던 불빛은 어느 지점에 이르더니 다시 한번 요란한 폭발음을 냈고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색의 불꽃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하늘에 화려한 수를 놓았 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는 감탄성이 터져 나왔고, 뮤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우와! 정말 멋지다!" "어머나... 아름다워." "헤헤헤 어때? 멋지지? 지금부터 시작이라구." 사람들의 놀람에 기분이 들뜬 뮤스는 친구들과 함께 린 강의 하늘을 수놓고 있는 불꽃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뮤스가 준비한 불꽃놀이는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불꽃이 하늘로 올라갈 때마다 그 모습은 가지각색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끝났는지 사방이 잠잠해지자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뮤스의 친구들도 불꽃놀이가 끝나자 뭔가 허전한지 입맛을 다셨다. 아직까지 여운이 남은 하늘을 보며 폴린이 말했다. "뮤스 너는 이걸 어디서 가지고 온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술기운이 모두 달아난 듯 했지만 뮤스는 아직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 고 있었기에 헤롱 거리고 있었다. "헤헤... 아 불꽃 말이야? 그거 공학원에서 전뇌거 발표회 때 쓰고 남은 것들을 가지고 다 니던 거야..." "엥? 공학원이라구?" 뮤스가 술김에 공학원 이야기를 하자 깜짝 놀란 카타리나가 뮤스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계속 되었다. "내가 말이야... 누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 줄 너희는 모르지? 누님이 공학원 재정담당 을 하면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시지... 이번 전뇌거 경주만 해도 그래. 누님 마음대로 대회를 결정하고 이제는 직접 대회에 출전 하신다니..." 카타리나와 가이엔을 제외한 친구들은 뮤스의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 히 큰 충격을 받았을 때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술기운이 강 건너 저편으로 건너가 버린 폴린이 말했다. "그렇다면 뮤스 너희 집이 공학원 이라는 거야?" 폴린의 되물음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뮤스는 이제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닿았는지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그의 모습에 할말을 잃은 폴린은 히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진작에 의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히안의 안경하며, 아까 금 덩어리 일만 해도 그 렇잖아..." 히안이 자신들의 둔함을 탓하고 있을 때 가이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가이엔, 그리고 카타리나... 자세히 보니 너희는 그렇게 놀란 표정이 아니었는데 혹시 알 고 있었던 거니?" 그녀가 정곡을 찌르자 가이엔과 카타리나는 서로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고, 폴린과 히안 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온 것임을 느낀 카타리나가 말했다. "사실은 가이엔과 나는 알고 있었어.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도 내가 제의 한 것이거든... 너희들을 속여서 정말 미안하다. 뮤스가 친구들이 알게 되면 많이 불편할까봐 숨기고 있었 던 거야. 나쁘게 생각지는 말았으면 해." 그녀가 사실대로 털어놓자 의외로 폴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호호홋! 뭐 어때 나는 좋기만 한걸? 엄청난 돈줄이 생긴거잖아. 안 그래 히안?" 히안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인지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흐흐흐... 당연하지. 이제 저 녀석이 엄청난 부자라는 것을 알았으니 등쳐먹어도 아무런 가책이 안 생기겠는걸?" 가이엔과 카타리나는 마지막으로 세이즈의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그녀 역시 별 신경쓰지 않 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름 놓은 가이엔이 말했다. "그나저나 뮤스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하지?" "뭐 조금 있으면 깨겠지. 아직 별로 늦은 시간도 아니니 잠 좀 자게 놔두자구... 이런 녀석 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실감이 안나는 걸?" 히안의 말에 폴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 뮤스를 꼬시는 건데. 아쉬워..." 장난스러운 그녀의 말투에 히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풋! 폴린, 뮤스가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가이엔과 카타리나라구! 내가 아니 면 누가 너한테 관심이나 있겠냐?" "하긴 그렇기도 하네. 호호... 정말 부러운걸 두 사람? 아주 둘 중에 한사람이 뮤스를 차 지 하는게 어때?" 폴린의 직선적인 말에 카타리나와 가이엔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머! 무..무슨 소리야? 뮤스와는 친구사이라구!" "맞아. 누굴 차지하라는 거야?" 그녀들의 강력한 부정에 세 친구들은 더욱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구 석에서 누워있던 뮤스가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벌떡 일으켰는데 그의 두 눈은 아직도 풀려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강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헤헤헤!! 고기를 잡으로 강으로 가자!" 갑작스러운 뮤스의 행동에 놀란 일행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른 채 바라만 보고 있 었다. 막 강물에 도착한 뮤스는 힘껏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런! 뮤스 저녀석 미친거 아냐?!" "히안 어떻게 해봐! 저러다가 빠져 죽겠어!" 다급해진 친구들이 뮤스가 빠진 강에 도착했을 때 뮤스의 주변에는 큼지막한 물고기들이 허 연 배를 내밀며 떠오르고 있었다. "우하하하! 뇌공력이다!" 뮤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양손에 들린 팔뚝한말 물고기를 들어올리며 웃고있었다. 그것도 잠시 손에 들린 물고기를 입으로 가져가 먹으려 하자 히안은 대경실색하며 친구들에게 말 했다. "사람들 좀 모아 줘 어서 끌어내야겠어!" "꺄악!! 뮤스가 저걸 먹으려고 그래!" "사람들을 불러올게!" 친구들은 주변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얼떨결에 강변으로 몰려온 사람 들은 뮤스의 취사를 제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분 정도가 지 난 후에야 뮤스를 강물 밖으로 끌어 낼 수 있었는데 다시 의식을 잃은 그의 손에는 머리 를 잃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들려있었다. 축제의 첫날은 이렇게 괴이 민망한 사건으로 막 을 내리게 되었다. (25) 결전전야 "으음.. 목말라." -또로록 "자 이거나 마시렴. 어떻게 된 녀석이 술 좀 마셨다고 이 모양이 되어서 들어 온 거 야? 그것도 친구들에게 업혀서 말이야. 쯔쯧.. 이 비린내는 또 뭐람?" 뮤스가 깨어난 것은 다음날 오후 늦어서였다. 그의 옆에는 불만이 가득 찬 모습으로 아미를 찡그리며 컵에 물을 채우는 크라이츠가 있었는데 일어나자마자 잔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물을 마신 뮤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며 고개를 흔들어 봤다. "골이 다 울리네요. 술이 원래 이런 건가?" "하긴 처음 마셔본 술이니 그렇겠지... 오늘은 학교에 안 가봐도 되니?" "네 특별 한 일은 없어요. 몸도 이지경인데 가지도 못할 것 같구요. 그런데 제가 언 제쯤 들어온 거죠? 이 비린내는 또 뭐지?" 정말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는지 어제밤 일을 궁금해하자 크라이츠는 어이가 없어했 다. "어제 11시쯤 되어서 네 친구들에게 업혀 왔더라. 강에서 헤엄이라도 쳤는지 물에 빠 진 쥐꼴을 하고서는 말이야... 그리고 손에든 물고기들은 또 뭐니? 죽어라고 놓지 안 길래 그거 버리느라고 고생 꽤나 했단다." "헉... 누님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내 표정을 보고도 농담처럼 보이니?" "헤헤 누님이야 언제나 그런 표정으로도 농담을 잘 하시니까요." 그의 말에 손을 저으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시늉을 했다. "아참 그런데 제가 어떤 친구에게 업혀 왔죠?" "히안이라던가?" "아... 히안. 고맙다고... 넷!? 히안이라구요? 그녀석이 그럼 제가 공학원 사람이라 는 것을 알았단 말이에요?" 놀라는 뮤스를 보며 크라이츠는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니? 히안이라는 친구 말고도 네 명이나 더 왔던데..." 그녀의 말을 들은 뮤스는 속으로 친구들의 수를 세어 보았다. 설마, 설마 했지만 자 신이 알고 있는 친구들의 수와 일치하자 천길 벼랑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다 들켰군..." 크라이츠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바이멀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저 뮤스 도련님. 친구분들이 찾아왔는데요? 들어오라고 전할까요?" 바이멀의 말을 들은 뮤스는 다시 머리가 울려오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으... 안돼..." 뮤스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방문을 열며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은 히안이었고, 다음으로 폴린, 세이즈, 가이엔, 카타리나였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시 된 이상 뮤스는 어제의 일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침대 에 앉아있던 뮤스는 얼빠진 모습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와..왔냐?" "녀석 처음으로 집에 놀러온 친구들한테 왔냐가 뭐냐? 이 아름다우신 분이 너희 누님 이신거야? 안녕하세요 전 히안이라고 합니다. 뮤스 녀석의 둘도 없는 친구죠. 헤헤." "어머 그래요? 만나서 반갑네요. 뮤스의 누나인 크라이츠라고 해요." 히안이 능청스럽게 굴자 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을 크라이츠에게 소개를 시켰 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자 크라이츠와 바이멀은 자리를 비켜 주며 방을 나갔고, 가이 엔과 카타리나를 제외한 친구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뀔 때 폴린이 뮤스에게 말했 다. "이봐 뮤스. 이렇게 엄청난 곳에서 살고 있으면서 둘도 없는 친구들을 속였단 말이 야?" "포.. 폴린... 둘도 없다니? 친구들은 무려 다섯이나 있잖아?" 뮤스가 이 위기를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해봤지만 오히려 역 효과만 날 뿐이었다. "뭘 잘했다고 변명이니? 지금부터 한달 동안 우리의 점심식사를 책임진다면 없었던 일로 해 줄게!" 폴린의 말에 옆에 서있던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뮤스는 아무래도 그들이 이곳에 찾아오기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있었던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약점을 잡힌 쪽은 뮤스이니 뭐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헤휴... 그래 알았어." "풋! 고마워 뮤스!" 그가 승복하자 처음과 같이 표정을 바꾼 폴린과 친구들은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세이즈가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물체를 보며 물었다. "뮤스 이건 뭐니?" 그녀가 들고 있는 물체를 본 뮤스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진기라는 거야. 얼마 전에 너희가 본 사진 기억나지? 작전회의 할 때..." "응 기억나. 그럼 이걸로 그 사진이라는 것을 그린다는 거야?" "뭐 그렇게 설명 할 수도 있겠지... 작은 유리가 있는 곳으로 들여다보면 찍고 싶은 게 보일 거야. 그리고 위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돼. 궁금하면 한번 해봐." 뮤스의 설명을 들은 세이즈는 카타리나와 가이엔을 향해 사진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 러자 사진기의 앞으로 작은 종이가 튀어 나왔는데 그 종이 위에는 카타리나와 가이엔 의 모습이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우와! 얘들아 이것 좀 봐! 너희들이 여기에 바로 그려졌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세이즈가 크게 놀라며 그녀들과 부산을 떨고 있을 때 히안역시 뭔가 발견했는지 손바닥만한 둥근 통 두개를 들고 물었다.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이야?" 세이즈와 대화를 하던 뮤스는 고개를 돌려 히안이 들고 있는 물건을 보자 의미 심장 한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게 이번 전뇌거 경주에 쓰일 '원거리대화기'라는 거야. 네가 들고 있는 건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고 나머지 하나를 줘봐." "버튼? 이거 말이야?" "응. 그거야." 히안이 버튼을 눌러보니 원거리대화기에서는 잡음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다른 손에 있 는 것을 건내자 그것을 받아 든 뮤스는 오른편에 있는 버튼을 누른 후 입에 대고 말 했다. "히안 들리냐?" -칙...히안 들리냐... 칙... 뮤스가 목소리가 히안의 손에 들려있는 원거리대화기에서 흘러나오자 그의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뮤스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을 폴린에게 넘겨주며 말했 다. "원거리대화기로 전뇌거 경주 때 의사 전달을 할거야. 그리고 끝나면 히안과 폴린에 게 하나씩 줄 테니 밤마다 심심할 때 이걸로 대화나 하라구." "정말 이거 우리 줄 거야? 고마워!" 폴린이 어린아이처럼 뛰며 좋아하고 있을 때 뮤스는 대강 옷을 챙겨 입었다. "이왕 들통난거 공학원이나 구경 시켜줄게. 뭐 카타리나와 가이엔도 대강은 봤겠지만 자세히는 못 봤으니..." 뮤스는 친구들을 이끌고 공학원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그곳의 중심부에는 전뇌거 생 산기기들이 위치해 있었고, 크라이츠가 고용한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있었다. 전뇌거 생산기기를 작동하는 일은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에 일반 사람들을 고 용했는데, 벌써 그 수가 약 백 여명에 달했다. 그 주변으로 각 분야별 작업을 할 수 있는 연구실이 큼지막한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크게 다섯 분야의 연구실로 나뉘어 져 있었는데 전뇌공학, 화공학, 기계공학, 섬유공학, 생물공학이 그것들이었고, 나머 지 세 개의 방은 각각 뮤스, 드워프들의 작업실과 크라이츠의 집무실이었다. 뮤스는 각 연구실을 구경 시켜주며 설명을 덧붙였는데 가이엔을 제외한 나머지는 공학계열 중 연금술을 전공하는 친구들인 만큼 이해를 시키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우선 중심생산 설비인 전뇌거 생산기기는 워낙 크기 때문에 공학원의 중심에 두었고 나머지 소형기기들은 각 연구실에서 연구, 생산하고 있어. 뭐 지금은 나 혼자 하는 거라서 모든 연구실을 내가 쓰지만, 시간이 좀 지난다면 공학자들을 양성할 계획이 야. 그리고 제국 곳곳에 이 정도 규모의 공학원 건물을 세울 예정인데, 누님께서 계 획중이시지." 그의 설명을 듣던 히안이 감동 받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의 연구원이 될 수도 있겠지? 알다시피 우리학부는 화공학이라 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몇 년 후부터 시험을 통과하면 들어 올 수 있을 거야. 히안 이쪽 으로 와봐." 다른 친구들이 공학원의 연구실들을 둘러보는 동안 뮤스는 히안을 데리고 자신의 작 업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드워프들이 내일 사용될 경주용 전뇌거를 마지막으로 검 사하고 있었는데 뮤스가 들어오자 하나같이 한심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딘이 조임쇠를 위로 던졌다 받았다하며 말했다. "헐헐. 뮤스 자네 어제 술 먹고 인사 불성이 되어 들어왔다면서? 남자가 그래서야 쓰 겠나?" "어제 처음 먹어 본 술이었다구요!" 레딘이 놀리자 인상을 쓰며 변명을 해봤지만 계속해서 브라이덴의 공격이 이어졌다. "자네도 우리와 같이 술을 좀 마셔야겠어! 술은 마실 수록 늘거든?" "맞아, 맞아! 내가 네 녀석 만했을 때는 맥주 한 드럼을 마시고도 멀쩡했지!" 이제는 켈트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가세했다. 켈트 한명을 감당하기도 힘겨웠건만 무 려 네 명이나 되는 드워프들에게 놀림을 당하자 이제는 도저히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좋아요. 제가 잘못 했어요. 그건 그렇고 저희 전뇌거 준비는 다됐어요?" 뮤스의 물음에 켈트가 기름 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다가왔다. "뭐 거의 다 끝났어. 안전띠만 장착하면 되거든. 그건 그렇고 이쪽 비실 비실한 사람 은 누구냐?" "하하 제 학교 친구인 히안이에요. 이번에 저와 함께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죠." "오 그런가? 영 힘 못쓰게 생겼구먼. 남자란 자고로 우리처럼 허리도 굵고, 다리도 굵고, 팔도 굵어야 제대로지!" 초면에 자신을 놀리는 켈트가 곱게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에게 직접적으로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키도 작고요..." 은근히 켈트의 콤플렉스를 자극한 히안은 득의의 표정을 지었고,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뮤스가 끼어 들었다. "그만들 해요. 켈트아저씨는 초면에 그렇게 놀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뮤스의 말에 옛날 생각을 하던 켈트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뮤스 네 녀석이야 말로 초면에 날 놀리지 않았느냐? 그 뿐인가? 커다란 짱돌까지 인 정사정 없이 던진 주제에 말이야 껄껄!" "옛날 이야기를 왜 꺼내고 그래요. 아무튼 저희 전뇌거 좀 보여주세요." "그래 저쪽에 있는 네 대란다. 도장까지 마치고 보니 꽤나 멋지던걸? 우린 조금 쉬었 다 와야 겠으니 한번 보거라." "네 수고들 하셨어요." 켈트가 가리킨 곳을 보자 경주용 전뇌거 네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깔끔 하게 햄브리겐 대학교의 문양이 도장되어진 상태였다. "이게 우리가 내일 사용할 전뇌거들이야." "왜? 뭐가 다르기라도 해?" "훗 사실 누님은 모르는 건데 우리가 사용할 전뇌거는 상대편의 전뇌거 보다 훨씬 높 은 출력을 가진 동력기를 사용하거든. 그래서 어제 직선주로에서 유리하다고 말한 거 지." 그제서야 뮤스가 어제 한말을 이해한 히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뇌거의 운전석에 앉 아 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뮤스의 방에서 본 원거리대화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우와 이 정도면 문제없겠는걸?" "훗. 이제 사고를 대비해서 특별 고안한 안전띠만 장치하면 완성이지... 그렇다고 방 심하면 안돼. 라이델베르크 시내는 직선도로보다 굴곡이 많은 도로가 많아서 어쩌면 출력이 좋다는 이점을 이용하지 못 할 수도 있다구." "그렇기도 하군... 아무튼 잘 될거야." 공학원의 구경을 마친 친구들은 저녁까지 얻어먹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 아간 후에 뮤스는 드워프와 함께 내일 사용될 양 팀의 전뇌거에 안전띠를 설치했고, 숙취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전뇌거 경주 당일, 카이젠 대학교의 교내 관람실에는 미술 동호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카이젠 대학교와 햄브리겐 대학교 미술 동호회 각각 일정한 수의 작품들을 출품하고 학생을 제외한 관람객의 심사를 받는 것이었다. 사람의 키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조각상 앞에 두 남녀가 감상을 하고 있었는데, 전뇌거 경주가 시작되기 전 남 은 시간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뮤스와 가이엔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 라 파트너가 된 후 둘만의 시간은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아직은 둘만 지내는 것이 아 직 편하지 않은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곳의 미술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뮤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조각상을 보며 오래간 만에 입을 열었다. "가이엔 그런데 이 조각의 팔은 누가 부러트렸을까?"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말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에 가이엔은 웃음을 터트렸다. "풋! 이 조각은 원래 팔이 없는 거라구! 넌 바이너스상도 모르는거야?" "응? 원래 팔이 없는 거라구? 만들려면 팔까지 만들던지... 돌을 너무 작은 것으로 샀나?" "프픗... 그.. 그만해." 뮤스가 무안해 할까봐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기에 애서 참으려 했었지만 그것이 잘 안 되는지 웃음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반응에 의아해진 뮤스는 내용이야 어떻 든 간에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참. 가이엔 오늘 몇 시부터 무도회지?" "전뇌거 경주가 끝나면 저녁쯤 되니까. 조금 쉬었다가 가면 될 거야. 춤 연습은 많이 했겠지? 그날 카타리나에게 맡기면서 까지 시켰는데 못하면 안돼!" "하하 걱정하지 말라구. 그날 새벽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으니까." "호호 그럼 다행이네. 우리 저쪽으로 가볼까?" 가이엔도 이제는 분위기에 익숙해 졌는지 뮤스의 팔짱을 끼고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 껴보는 이성과의 팔짱이 어색했지만 빼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이끌림에 대형 벽화의 앞에 서게 됐는데 어떤 전쟁을 그린 듯 했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처절한 전쟁에 대한 세밀한 표현이 뮤스의 눈길을 붙잡고 있었는 데 사지가 잘려 절규하는 병사들과 적의 몸에 무기를 꽂으며 득의의 미소를 짓는 병 사들, 주문을 외우며 공격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 그리고 공격마법의 폭발음에 놀라 울부짓는 말들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그림 앞에서 인상을 찡 그리는 뮤스를 보며 가이엔이 말했다. "이건 도이첸 제국 건국기의 한 장면을 그린 듯 하네... 무려 오십 여 년간 처절한 전쟁이 계속 되었데." "그렇구나..." 그림에 나타나있는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을 감상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가 들렸다. "훗. 뮤스라고 했던가? 전뇌거 경주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꽤나 여유롭군? 어라 이쪽은 가이엔 아냐?"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바르키엘과 그의 친구들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뭐 라 딱히 인사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던 뮤스는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때 넘어진 건 다 나았냐? 꽤나 추하게 넘어져서 무릎 좀 까졌을 건데..." 몇 일전의 생각하기 싫던 일들을 꺼내자 바르키엘의 안면 근육이 보일 듯 말듯 떨리 고 있었고, 그 상황을 모르던 친구들은 바르키엘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치...치사하게 그 이야기는 왜 또 꺼내냐." "헤헤... 미안하군. 딱히 인사말이 안 떠올라서 말이야." 능청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하는 뮤스의 모습에 바르키엘의 신경은 더욱 곤 두섰다. "그때 그 일은 빨리 잊는게 좋을 거야." "내가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냐? 너의 눈물 글썽이던 그 눈망울을... 꿈에도 나왔 었거든." 바르키엘은 눈물 이야기까지 나오자 친구들이 들었을까 걱정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았 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은 더욱 미심 적은 표정을 지으며 바르키엘을 응시하고 있 었다. "그...그때는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 것이다! 흥! 전뇌거 경주 때 두고봐라..." 싸늘히 냉소를 뱉는 바르키엘을 보며 뮤스는 귀를 파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듣자하니 전뇌거 운전 솜씨도 둔하다던데... 두고봐도 될지... 후훗." "누...누가 그러더냐?" "네 친구들에게 한번 물어보시지?" 뮤스가 턱을 밀며 그의 친구들을 가리켰다. 바르키엘은 다시 눈동자를 돌려 친구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뮤스의 말이 맞다는 듯이 의미 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그러자 벨링에서 뺨맞고 린 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대로 이번에는 친구들에 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누구편이야! 제길! 어서 가자!" 애꿎은 친구들에게 화풀이를 한 바르키엘은 뮤스의 아래위를 한번 흘겨보는 것을 잊 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관람실 밖으로 사라졌다. 뮤스의 옆에서 듣기만 하던 가이엔 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요즘 쟤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지?" "글쎄다... 저 녀석을 만날 때마다 내가 악역으로 보인다니까. 그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전뇌거 경주나 준비 하러 갈까? 시간도 거의 다 된 듯 한데." "벌써? 둘이 나온지 얼마나 됐다구? 흠 어쩔 수 없지...." 가이엔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별달리 핑계를 댈 만한 것이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대공학자> #61 -------------------------------------------------------------------------------- -------------------------------------------------------------------------------- Ip address : 211.228.82.1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대공학자> #61 뮤스와 가이엔은 전뇌거 경주가 준비되고있는 카이젠 대학교의 교문으로 걸어 나왔다. 그곳에는 이미 공학원에서 운반해둔 각학교의 전뇌거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축제를 즐 기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멋지게 도장되어진 전뇌거를 구경하기에 여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직접 관계된 동호회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번 경주는 양측의 합의 하에 카이젠 대학교에서 출발을, 그리고 라이델베르크 시내를 통과한 후 햄브리겐 대학 교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정해졌기에 모든 동호회 회원들은 출발지점에서 모이기로 약속 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 시합이 시작될 때까지 세시간 정도가 남았기에 햄브리 겐 측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카이젠 대학교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모교인 만큼 먼저 나와서 분주했다. 햄브리겐 측에서 사용할 전뇌거 옆에 멈춰선 뮤스가 말했다. "아직 아무도 안온 모양인데?" "우리가 너무 빨리 온 거 같아. 어쩐지 너무 이르다 했어... 칫. 조금 있으면 오겠지 뭐." 그녀가 심통이 난 듯한 말투로 대답을 하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래? 화난 거야? 우리 저거라도 먹으러 갈까?" "아냐 됐어..." 뮤스는 자신의 제의에 아직도 심통을 부리는 듯 하자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먹을 것을 파 는 가판으로 갔다. "가이엔 그러지 말구 같이 먹자. 응?" 그가 대뜸 자신의 손을 잡자 기분이 좋아진 가이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녕 알 수 없는 여심이었다. "응? 뭐 먹게?" "저 아저씨가 파는 거 말야. 저게 뭐야?" 뮤스와 가이엔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한 중년이 가판 뒤에서 동글동글한 무엇인가를 만 들고 있었다. "아 저건 봉봉이라는 거야. 설탕을 녹인 후 여러 가지 과일가루와 혼합해서 식히는 거지. 그러면 저렇게 단단한 봉봉이 되거든." "아. 엿 같은 것이구나." "엿? 그건 뭔데?" "뭐 설명하긴 힘들고 저런 거야. 어서 가서 먹어보자." 오랜만에 단맛이 나는 군것질 거리를 찾은 뮤스는 가판으로 달려가 봉봉을 한바구니 샀는 데, 어린아이들도 두 개 이상은 먹기 힘들 정도의 큼직한 봉봉을 한바구니 씩 이나 사버리 자 가이엔은 어이가 없었다. "너 이걸 다 먹으려고?" 어느새 한 알을 입에 넣었는지 입도 잘 못 움직이는 뮤스가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머 이여도아 보도이시. 어아! 아녀! 스읍!" "뭐라구? 못알아 듣겠어." "이여도야 보도이아오..." 뮤스가 그녀에게 이해를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그녀의 뒤로 누군가 걸어와 통역을 해주었다. "이 정도야 보통이라는데? 너희들 벌써 온 거야?" 가이엔이 뒤를 돌아보자 히안 커플이 다가오고 있었다. 폴린은 히안에게 받은 것인지 커 다란 꽃 한 다발과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안고 있었는데 히안이 꽤나 많은 돈을 투자한 듯 싶었다. "그런데 뮤스 쟤는 요즘 정말 사람을 웃기게 한다니까. 술 마시고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 기를 잡아먹지 않나, 이제는 저 나이에 봉봉을 한입에 물고 질식해 죽으려고 하지 않나. .. 쯔쯧... 침 흐른다 침이나 닦아 뮤스." 폴린의 입에서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자 아직도 그 일을 모르고 있던 뮤스는 말은 하지 못 하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휴 모르는게 약이지. 아 저기 하나둘 회원들이 오기 시작하는군." 그녀의 말에 교문 쪽을 바라보니 모여서 오는지 회장을 비롯한 십 여명의 회원들이 뮤스 와 친구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긴장감에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는지 눈 밑이 어 둡게 변한 것이 상당히 안스러워 보였다. 그들이 오는 것을 보며 히안이 뮤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카타리나와 세이즈는 왜 안오지?" 아무에게서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뮤스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입에 있는 봉봉 때문에 턱 을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야. 빨리 깨물어 먹던지, 혀를 돌려서 녹여먹던지 해라. 엄청 똑똑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조금 모자라잖아?" 히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뮤스는 어쩔 수 없이 입으로 뇌공력을 집중해 봉봉을 녹이기 시작했다. 몇 초가 지나 봉봉이 다 녹아 입이 자유로워진 뮤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헥헥... 죽을 뻔했네. 카타리나는 아버님과 구경 좀 하다가 세이즈와 만나서 온다고 했어. 헥헥." "너 혹시 그 주먹만한 봉봉을 삼킨 거냐? 무서운 녀석..." 히안을 비롯한 폴린, 가이엔은 그의 놀라운 봉봉 먹기 실력에 크게 놀라야만 했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나자 카타리나를 비롯한 모든 회원들이 그곳에 도착했고, 전뇌거를 운전할 여덟 명 의 햄브리겐 선수들은 탈의실로 들어가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옷은 크라이츠가 디자 인과 제작을 손수 한 것이었는데 상, 하의가 한 벌로 붙어있는 모양이었고, 겉으로는 전뇌거 와 같이 학교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탈의실에서 걸어 나오던 히안은 그 옷이 마음에 안드 는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이거 누가 만든 옷이야? 혹시 뮤스 네가 만든거 아냐?" "내가 만들면 이렇게 만들리 있겠냐? 누님께서 만드신 거야. 누님 성격이 별로 안좋으시니까 누님 앞에서는 투덜거리지 마라." 뮤스 자신도 이 옷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크라이츠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는 없었기에 신경질 적으로 주머니에 있는 봉봉을 꺼내 입안으로 넣었다. "쳇. 그러지 뭐."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그들을 보며 전뇌거를 살피던 회원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가장 심하 게 웃은 사람은 폴린이었는데, 입고있는 사람들의 기분은 전혀 괘념치 않은 채 기분대로 웃 고 있었다. "깔깔깔! 히안, 뮤스 너희들 정말 웃긴다! 어른용 유아복 같아! 깔깔깔." 카타리나 또한 그 모습이 웃겼는지 웃음을 참기 힘든지 볼을 푸들거리고 있었다. "푸풋...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정말 웃겨...픗!" "야. 그만해라 입고있는 우리라고 좋겠냐. 너희들은 정말 친구도 아니다. 쳇." 히안이 투덜 거릴 때 회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출전하지 않기를 잘했군. 그건 그렇고 저쪽 팀의 저 여자는 왜 나오는 거지? 반칙아 니야? 공학원에서 파견 나왔다는 사람이 출전하다니 말이야." 회장이 불만을 토로하자 카타리나가 회장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선배. 우리가 항의해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쪽에도 공학원 사람이 있다는 걸로 무마하려 할걸요." "엥? 우리쪽에 공학원 사람이 어디 있다는 거야?" 회장의 물음에 카타리나와 친구들은 뮤스를 바라보았고, 뮤스는 아무런 면목이 없는지 고 개를 숙였다. "뮤스가 어째서 공학원 사람이라는 거지?" "공학원을 만든 사람이니까 공학원 사람이겠죠. 자세한건 묻지 마세요. 시간이 없으니까." "고..공학원을 만든 사람?"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자 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준비하고 있는 회원 들을 불러모았다. "자 선수들은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이건 오늘에야 말해드리는 것이지만, 우리 쪽 전뇌거 는 제가 몰래 개조를 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직선 주로에서는 상대편 전뇌거보다 1.5배정도 빠릅니다. 그렇지만 직선 주로가 얼마 없기 때문에 기회는 많지 않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연습용 전뇌거보다 훨씬 잘나가기 때문에 감을 잡는데 무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 다. 그것은 점차 적응 할 수 있을 테니 출발할 때 전진발판을 너무 세게 밟지 마시길 바랍 니다. 그리고 사고를 대비해서 안전띠를 꼭 착용하시고, 안쪽에 달려있는 원거리대화기를 잘 활용해 주세요. 다들 이해 됐습니까?" 히안을 비롯한 나머지 회원들을 바라보자 모두들 결의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 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구호한번 외쳐야지?" 옆에 있던 회원들이 하나씩 그의 손위에 자신들의 손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뮤스의 손이 가장 위에 올려지자 히안이 구호를 이끌었다. " 하나! 둘! 셋!" -햄브리겐! 햄브리겐! 햄브리겐! 짝! 짝! 짝! 헙! 구호를 끝내자 모았던 손을 하늘 위로 힘차게 던졌다. 이런 구호를 한번도 보지 못했던 뮤스는 얼떨결에 따라했지만 알지 못하게 느껴지는 일체감이 그의 가슴을 뿌듯하게 해주 었다. 히안이 손을 털며 말했다. "우리학교 구호는 언제나 들어도 촌스러워 쩝." "에? 신나게 해놓고 촌스럽다니?" "언제나 그렇지 뭐. 들뜬 기분으로 해놓고 끝나면 남이 볼까봐 빨리 흩어지거든 헤헤." 과연 그의 말대로 구호를 외치던 곳에서는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비어있었고, 구호를 외치던 회원들은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양 딴 짓 하기 바빴다. "그...그렇구나." 히안은 뒤돌아 폴린에게 걸어갔고, 뮤스가 이 웃기지도 않는 회원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 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홋! 뮤스 옷이 꽤나 잘 어울리는데?"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등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이상하기 그지없던 경주복을 아주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입고있는 크라이츠 를 볼 수 있었는데, 오늘 경주가 기대되는지 상기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에휴 누님.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거예요."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란다. 고속으로 달리다 보면 옷 사이로 바람이 들게 되는데 그것도 방지하고, 먼지도 안 들어가고 좋지 않니?" "아무래도 누님을 기준으로 만든 옷이다 보니 누님께는 잘 어울리는군요." "어머 정말이니? 호홋 고마워 뮤스!" 비꼬는 듯한 뮤스의 칭찬이었지만 그녀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뮤스의 속을 긁기 위한 것인지 마냥 기뻐했다. 문득 뭔가 떠오른 뮤스가 물었다. "아참 바르키엘 녀석은 정말 저대로 출전시킬 생각이예요?" "물론이지. 저 녀석이 빠지면 우리 쪽에 선수가 모자라거든. 뭐 죽는다고 해도 시합 중에 죽은 거니까 아무도 말 못 할거야. 걱정하지 말거라. 호홋! 그럼 시합에서 보자꾸나 수고하렴." 등뒤로 뮤스에게 손을 흔들며 카이젠 대학교의 대회본부로 걸어가는 크라이츠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분인지..."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또 하나의 신경 긁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쌉니다 싸요! 전뇌거 모형 하나에 5셀피입니다!" "드워프들의 천재적인 손놀림으로 완성된 전뇌거 모형!"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니에요!" "흐헤헤 잘 팔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분주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드워프들이 예전에 부업 삼아 만들던 전뇌거 모형들을 팔고 있었다. 공학원에서 그들에게 지급 하는 돈만 보더라도 이미 재벌이라는 호칭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들! 여기에서 뭐하는 거예요?" 한켠에 앉아서 벌어들인 돈을 세고 있던 켈트가 손가락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껄껄! 뮤스왔구나? 보면 모르냐 부업중이지!" "에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쩝." 물건을 사러온 사람에게 전뇌거 모형을 하나 건네주던 블뤼안이 대답했다. "우리는 돈이 목적이 아니야. 이 모형을 자세히 보거라. 전뇌거의 내부를 그대로 표현해낸 세 밀함을... 이건 예술품이라구! 사람들이 우리의 예술품을 소장하는게 좋단다. 크흐흐흐!" 나무로 만든 전뇌거 모형은 그의 말대로 운전대, 발판, 안전띠 등 실제 전뇌거의 내부를 그대 로 표현하고 있었다. 켈트에게 벌어들인 돈을 전해주던 레딘이 물었다. "그런데 뮤스군. 전뇌거 경주는 언제 시작하나? 나도 나가보고 싶었건만. 쳇!" "아저씨라도 좀 참아주세요. 안 그래도 누님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요. 한 시간쯤 남았어요." "아무튼 힘내게나. 껄껄. 크라이츠님의 콧대를 눌러주라구!" "최선을 다해야죠 뭐. 그럼 많이 파세요." 뮤스가 인사를 하고 회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하자 켈트가 모형 전뇌거 몇 개를 쥐어주 었다. "이거라도 가지고가서 친구들에게 선물해라. 껄껄. 그럼 나중에 보자!" "훗. 고마워요 아저씨." 햄브리겐 대회본부로 돌아온 뮤스는 켈트에게서 받은 전뇌거 모형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는 데, 하나같이 그 세밀함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인원보다 전뇌거가 많이 모자라 받지 못한 회원들이 섭섭해하자 나머지는 축제가 끝나고 주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이제 시간이 얼 마 남지 않자 뮤스와 선수들은 경주용 전뇌거로 걸어갔고, 직접 출전하지 않는 회원들은 도착 을 기다리기 위해 햄브리겐 대학교로 자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뮤스! 히안! 힘내! 카이젠 녀석들을 꺾으라구!" "히안! 너 지면 나랑 헤어지는거야!" "도착 지점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친구들의 응원을 들으며 전뇌거로 걸어가는 뮤스는 웃었고, 히안은 폴린의 과격한 응원에 인 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뇌거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자 카이젠 측에서도 준비를 하기 위해 나오는지 바르키엘과 크라이츠가 모습을 보였고, 다른 선수들도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공학자> #62 -------------------------------------------------------------------------------- -------------------------------------------------------------------------------- Ip address : 211.228.82.1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11 70 1 6 Name 짜가신선 [짜가신선@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62 (26) 출발. 햄브리겐 대학교로 가는 도로 위에는 대형마차 이십 여대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마차로 부터 카이젠의 학생들과 햄브리겐 학생들의 열띤 응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마부의 귀에 귀마개까지 끼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 젊은이들의 열기가 달갑지만은 않은 듯 했다. 가장 앞에서 달리는 대형마차에 타고있던 뮤스의 친구들도 햄브리겐 측의 좌석에 앉아 있 었는데, 모두들 경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인 만큼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닌 듯 했다. 그 중 폴린 만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친구들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 "이것들 봐 걱정들 하지 말라구! 우리 히안이 햄브리겐을 승리로 이끌 거니까. 뭐 뮤스도 공학원 사람이니 잘해주겠지." 그래도 가이엔과 카타리나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세이즈에게 살며시 물었다. "세이즈. 얘들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니?" "글쎄. 아마도 뮤스 생각이겠지. 나는 너에 이어 또 한번 큰 배신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 데?" "나에 이어서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세이즈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자신의 얼굴을 폴린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몰라서 묻는 거니 폴린? 너희 커플 말이야." "아! 그걸 말하는 거였구나. 그런데 이번에는 왜? 가이엔과 카타리나가 뮤스를 좋아하기 라도 한다는 말이야?" 폴린의 말을 들은 세이즈는 창 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마 내 예감이 맞는다면 그럴 거야. 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아야 할텐데." "세이즈." 창밖을 바라보던 세이즈는 폴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가끔 세이즈 너를 보면 무서운 기분이 들어." "내가 왜?" "풋. 조용한 척하면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 꿰어 보잖아. 안 그래?" "그랬던가?" 폴린과 세이즈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에도 가이엔과 카타리나는 자신들의 손에 있는 전뇌거 모형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폴린과 세이즈의 대화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 카이젠 대학교의 여가활동 동호회의 선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를 이끌 고 있는 사람은 크라이츠였는데,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바르 키엘은 이빨을 바득바득 갈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저쪽에 뮤스는 내가 맡으마. 바르키엘 너는 히안을 맡고, 지스펠 너는..." "잠깐만요. 뮤스를 제가 맡을게요!" 그녀가 하던 말을 가로막은 바르키엘은 전뇌거 저편에 있는 뮤스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때 크라이츠가 그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야 이 녀석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뮤스녀석이 햄브리겐의 최고 실력자인데 반해 너는 우리편에서 제일 못하잖니?" "그래도 이번만은 양보 못해요! 지금까지는 모두 크라이츠님께 양보했지만 이번만은 안 됩니다!" 바르키엘이 의외로 확고하게 나오자 크라이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너도 회장이니 네 뜻대로 되는 것이 있긴 있어야겠지. 자 다들 들었지? 바르 키엘이 이기는 건 포기하고 너희들이라도 잘해야한다." "넷!" 그는 이제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크라이츠와 친구들을 보며 점차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끼고있었다. 이렇게 작전 회의가 끝나자 크라이츠를 선두로 모두 전뇌거에 탑승했고, 바르키엘은 뮤스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본 히안이 뮤스의 의 옆구 리를 찔렀다. "야 뮤스. 바르키엘이 널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카타리나를 포기하고 너에게 관 심이 생긴거 아냐?" 뮤스가 눈을 돌려 바르키엘을 바라보자 이상스럽게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아직은 이 사회에서 인정 해줄 수 없는 건데... 우리도 전뇌거에 타자." 열 여섯 대의 모든 전뇌거에 선수들이 탑승을 하게 되자 출발지점의 곳곳에서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마침 이 시간대에 있는 시합이 전뇌거 경주 하나 밖에 없었고, 최초로 열 리는 전뇌거 경주인 만큼 수많은 인파가 출발지점에 몰려있었다. 사실 라이델베르크 전 역이 전뇌거 경주의 무대가 되기 때문에 이들 말고도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갈 전뇌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많았다. 뮤스는 전뇌거에 부착되어있는 원거리대화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나 뮤스다. 확인 바람." -칙! 히안 확인했음. 칙! 실렌트 확인. 칙! 위버렌 확인. 칙! .... "다들 출발 신호 전까지 긴장을 풀기바람." -칙! 오케이. 뮤스는 자신 앞에 있는 운전대를 만져보았다. 고급 원목으로 매끄럽게 깎아 놓은 운전대 의 촉감이 차가웠지만 조금 쥐고 있으니 체온으로 따뜻해졌다. 안전띠를 착용해본 뮤스는 몸을 움직여 편안하게 했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목을 풀었다. 이때 시합 전에 공학원 에서 설치해둔 확성기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전뇌거 경주가 최초로 벌어지는 카이젠 대학교 입니다. 이 경주는 카이젠, 햄브리겐 대학교에서 주최하고 공학원에서 지원합니다. 이제 십분 후 전뇌가 이곳을 출발 라이델베르크 전역을 돌아 햄브리겐 대학교에 도착하게 됩니 다. 1위에서 5위 중 많은 수를 차지한 학교가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럼 잠시 후 뵙겠습 니다! -와!! 사회자의 목소리가 끝나자 구경꾼들은 환호성 쳤고, 뮤스의 눈에 저 멀리에서 자신의 이름 이 쓰여있는 깃발을 흔들며 북을 치고 있는 드워프들이 보였다. "뮤스 화이팅!" "크라이츠님을 물리쳐라!" "멋지다 뮤스!" 그들의 응원을 듣고 있던 뮤스는 걱정이 되어 크라이츠의 전뇌거를 살펴 보았다. 역시 그녀 의 입은 가늘게 떨리며 뭐라고 소근거렸는데, 그와 동시에 드워프들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 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크라이츠가 의사전달 마법으로 그들에게 으름장을 놨을 것이라고 생 각한 뮤스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 그를 보며 또 다시 기분 나빠하는 자가 있었으니... "뮤스 저자식 지금 분명히 날 비웃고 있는 거야. 제길!" 혼자만의 오해를 한 바르키엘은 애꿎은 전뇌거의 운전대를 머리로 박으며 화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의 박치기를 멈추게 하는 사회자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자! 이제 시간이 다되었군요. 제 1회 전뇌거 경주가 시작되겠습니다! 전뇌거 선수들은 정 신을 바짝 차리세요! 그럼 지금부터 출발 신호에 들어갈텐데, 마지막에 보이는 검은 기가 내려지면 출발하는 겁니다. 준비 되셨죠? 방송이 끝나자 가장 앞에 있던 초록색 기가 내려지자 선수들은 운전대를 잡으며 발판에 발 을 올려놓았다. 이어 두 번 째 있던 붉은 기가 내려졌고, 마지막으로 검은 기가 내려지며 모든 선수들은 가속 발판을 서서히 밟으며 사열로 네 대씩 서있던 전뇌거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 출발했습니다. 각 학교마다 작전들이 있겠죠? 여기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 깝습니다. 그럼 골인 지점에서 뵙겠습니다! 가장 앞줄에는 햄브리겐 대학교의 히안과 뮤스, 카이젠의 크라이츠와 바르키엘이 있었고, 그 뒤로도 이와 같이 각 학교마다 두 대씩의 전뇌거가 같은 선상으로 달려나갔다. "처음부터 속력을 내지마. 처음에는 우리가 뒤를 쫓는다 히안. 내가 크라이츠 누님을 맡을 테니 네가 바르키엘을 맡아." -칙! 그런데 앞을 봐 바르키엘이 너쪽으로 붙는데? "저녀석 정말 날 좋아하나 보군. 그럼 네가 크라이츠 누님을 맡아. 무리는 하지마라 아무 래도 너보다는 몇 수 위니까." -알았어 칙! 뮤스는 원거리대화기에서 흘러나오는 히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전뇌거를 바르키엘의 전뇌거의 옆으로 바짝 붙여 따라 가기 시작했다. "바르키엘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볼까?" 뮤스가 바르키엘을 향해 웃어 보이자 그는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피며 인상을 썼다. 그러나 딸리는 실력에 한 손을 놓은 것 때문인지 그의 전뇌거가 좌우로 흔들리다가 정상 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저 녀석 불안한걸..." 열 여섯 대의 전뇌거들이 출발하고 조금 지나자 도시의 외곽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직은 초반이었기에 양쪽 모두 서두르는 기색보다는 상대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주행을 보이고 있었지만 선수들의 팽팽한 신경전은 대단한 것이었다. 가장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크라이츠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히안의 전뇌거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뮤스녀석 그런대로 잘 가르쳤는데? 이제 실력들 좀 볼까? 따라와 보렴 히안." 혼잣말을 하며 미소를 띄운 크라이츠는 발판을 더 세게 밟기 시작했다. 전뇌거의 진동이 조금씩 심해지자 온몸을 돌아다니는 피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갑자기 크라이츠의 전뇌거 속력이 높아지자 오기가 생긴 히안도 지지 않기 위해 발판을 밟았다. 그의 뒤로는 바르키 엘과 뮤스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는데 히안의 전뇌거가 빨라짐을 느낀 뮤스가 말했다. "히안. 무리는 하지마라. 잘못하면 네가 다친다." -칙! 걱정마. 그 정도는 알고있으니까. 그래도 따라는 가줘야겠지. "그래 나는 바르키엘 녀석이나 상대해 주면서 느긋하게 따라갈게!" -치익! 좋아. 잠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바르키엘은 아무런 생각 없이 히안을 따라 가기 위해서 속력 을 내기 시작했다. "저 녀석 정말 생각이 있는 녀석인지... 누님은 뭘 하신 거야 작전도 안 짰나?" 자신이 맡기로 한 바르키엘의 전뇌거 속도가 높아지자 뮤스는 어쩔 수 없이 투덜거리며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는 전뇌거들 역시 그를 따라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모두 위험 할텐데..." 뮤스 역시 서서히 속력을 높여가기 시작했다. 라이델베르크의 전뇌거 경주 코스는 시내 와 시외를 여러 번 가로지르는 코스로서 시외에서는 고르지 않은 땅과 절벽 등이, 시내 에서는 좁은 길과 급격한 코너가 관건이었다. 처음 출발 때보다 조금 더 빨라진 속도의 전뇌거들이 시내로 들어오자, 자신의 집 창 밖으로 구경을 하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치며 종이가루를 뿌려댔다. 시내로 들어오면서부터 뮤스가 바르키엘의 뒤로 빠지며 일렬로 늘 어서게 되었고, 그저 뮤스의 앞에서 달린다는 것만으로도 바르키엘은 득의의 웃음을 짓 고 있었다. "헤헤. 뮤스 녀석을 드디어 제쳤군. 역시 네 녀석 따위가 나의 상대가 될 수는 없지. 아 무렴." 그의 뒤를 따라가던 뮤스는 코가 간질거림을 느꼈다. "에취! 어떤 녀석이 내 욕을 하나. 설마 바르키엘 녀석이 자기 실력으로 날 제쳤다고 생 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멍청한 녀석은 아닐 테니." 시내로 들어간 후 몇 번의 코너를 돌자 라이델베리크시의 중앙 도로가 나왔다. 마차가 동시에 여섯 대나 오갈 수 있는 폭을 가진 이 도로는 라이델벨르크의 모든 행사 중심이 되는 곳으로써 평소에는 광장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넓은 거리가 시야에 들어오자 뮤 스가 말했다. "히안 누님의 옆으로 움직이면서 속도를 높여 지금이 따라 잡을 시간이다. 다만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좁아지니까 조심해라." -알았어. 그럼 먼저 나가마 잘 따라와라. 치익. "녀석. 나중에 보자." 뮤스의 지시를 받은 히안은 전뇌거를 크라이츠이 왼쪽으로 붙였고, 전진발판을 조금씩 밟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뇌거 옆으로 간격을 줄이며 다가오는 것을 본 크라이츠는 새 파란 애송이에게 질 수는 없었기에 더욱 속력을 올렸다. 하지만 앞으로 뻗어 나가는 두 전뇌거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고, 크라이츠는 이 의외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했다.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뮤스가 전뇌거에 장난이라도?" 그녀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늦어 히안의 전뇌거가 앞으로 치고 나오며 그녀와 나란히 달렸고, 그녀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인 히안은 금새 그녀를 앞설 수 있었다. 화가 난 크라이츠는 운전대를 고쳐 잡으며 이를 갈았다. "흥! 고작 그 정도로 이 크라이츠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보잘것없는 인간주제에 ... 네 녀석쯤은 코스에서 상대해 주겠어." 여유롭던 마음이 사라지며 순간 마룡으로 변한 그녀의 눈은 자신의 앞에서 엉덩이를 흔 들며 달리고 있는 전뇌거를 향해 불태우고 있었다. 드래곤이 자신을 향해 이빨을 가는지 손톱을 다듬는지 알지 못하는 히안은 그녀를 따라잡았다는 도취감에 빠져있었다. "후훗. 이대로만 가면 전혀 문제없겠는걸? 폴린. 이 히안을 기다려라! 너의 낭군님이 멋 진 모습으로 나타나주마!" 이때 그들의 뒤를 따라 오는 전뇌거들도 모두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뮤스는 바르 키엘에게 손을 흔들며 그의 전뇌거를 추월해 간격을 벌리고 있는 중이었고, 남은 전뇌거 들 역시 직선주행에서 월등한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중앙 도로가 끝나가자 그 끝은 다시 좁은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햄브리겐의 선수들은 두 대의 전뇌거도 못 들어갈 정도로 협소한 도로를 누비고 있었다. 직선 주로에서의 주행 에 만족한 뮤스는 모든 전뇌거에 알렸다. "모든 전뇌거 수고했습니다. 이제 조금 더 나가면 본격적인 경주코스 입니다. 사고를 주의해 주세요." -칙... 접수했음. 그의 말대로 점점 거리는 넓어 졌는데, 전뇌거 경주에 가장 이상적인 폭이었다. 추월 이 가능한 동시에 급격한 코너로 인하여 기술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지형이었다.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히안은 급격한 코너 지형인 이곳에서 운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 데, 반면 운전에 능숙한 크라이츠는 히안과의 거리를 줄이고 있었다. "호호호홋! 그럼 그렇지. 네가 뛰어봐야 벼룩 아니겠어? 이제 뒤쳐질 각오나 하고 있으렴!" 뒤에서 주시하던 뮤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히안! 조금만 더 가면 주의해야 할 모퉁이야! 속도를 줄이라고! 이 녀석 승부에 몰입했어!" 크라이츠가 자신을 추격하자 마음이 다급해진 히안은 컨트롤이 흐트러짐을 느끼면서도 속력을 높이고 있었고, 심리적인 부담감이 크게 작용을 해서인지 뮤스의 지시도 귀에 들 리지 않았다. 그의 전뇌거가 달려가는 정면으로 급격한 코너와 함께 우람하게 버티고있 는 돌담이 있었는데, 이 대로 간다면 히안의 충돌은 불 보듯이 뻔한 사실인 듯 했다. 그 의 컨트롤이 불안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크라이츠가 능숙한 실력으로 코너의 안쪽으 로 붙으며 히안의 전뇌거를 앞지르기 시작했는데, 동력기의 회전을 전혀 줄이지 않고서 도 전뇌거의 속도를 늦추어 코너를 도는 그녀의 실력은 혀를 내두를 만 했다. 히안은 크라이츠가 자신을 앞지르고 나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며 속도를 급히 줄 였지만 아직도 속도가 너무 빠른지 그의 전뇌거 바퀴는 벽으로 충돌할 듯이 밀리고 있었다. "제길! 조금만 더 줄어다오!" -끼기기기긱! 히안이 발악을 하며 운전대를 오른편으로 돌리자 전뇌거의 왼쪽 면이 벽위로 살짝 긁히며 바퀴 밀림이 멈추었다. 다시 컨트롤을 찾아 크라이츠의 뒤쫓아가기 시작하는 히안의 등으 로 차갑게 식은땀이 흘렀고,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흐엑. 죽을 뻔했군." -칙! 히안 미쳤어? "뮤스 나도 실감하니까 한번만 봐줘라. 그런데, 시합 중에 전뇌거 고장나면 누가 물어 줘 야하는 거야?" -칙! 특별히 네 전뇌거만 너에게 받으마. 그러니까 조심해라! 치익! "치사하긴 녀석. 아무튼 너도 조심해라. 이번엔 네 차례다." -네 걱정이나 해라 이 정도는 누워서 봉봉 먹기지. 치익. 히안과 크라이츠가 방금 지나간 코너로 진입하고 있던 뮤스는 뒤를 따라오는 바르키엘의 전뇌거를 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 저 녀석이 벽과 충돌 할건데. 어떻게 하지? 에휴 내가 왜 저 녀석을 이렇게 신경써줘야 하는 건지..." 바르키엘의 실력을 뻔히 아는 뮤스로서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실력 보다 행동이 앞서는 바르키엘의 충동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보와는 말도 안 통한다던가? 바르키엘은 뮤스의 속내도 모르고 그를 추월하기 위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움화화화! 나에게 선두를 양보해줄 생각이구나! 기특한 녀석."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도 눈치 못 채는 바르키엘을 보며 뮤스는 혀를 찼다. "머리가 고강도 합금으로 되어있는 녀석인가. 어찌 저렇게 생각이 없을 수가 있지? 누님 이 출전한 이유를 알만하군." 바르키엘이 기고만장하게 뮤스를 앞지르려 하자 그는 바르키엘의 전뇌거를 가로막으며 속 도를 줄여나갔다. 뒤에서는 바르키엘의 화난 표정이 보였는데, 자신의 속도를 줄이는 뮤스 가 무척이나 불만인 듯 했다. 그가 코너를 안전하게 돌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가 떨어지자 뮤스는 다시 자신의 속도를 높이며 코너를 돌았고, 이미 안정 속도가 된 바르키엘은 아무 런 위험 없이 코너를 지날 수 있었다. "뮤스 이 녀석! 나를 떨어트리기 위해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쓰다니! 나를 시기하는구나! 궁시렁 궁시렁..." 바르키엘은 차라리 안 듣는 것이 나을 정도의 욕지거리를 뮤스에게 퍼부으며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르키엘 만큼 어리버리한 선수는 더 이상 없었는지 주의를 요했던 코너에서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뇌거들은 조금의 순위 변동만을 가진 채 시외의 코스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크라이츠, 그녀의 뒤로 다시 금 선두 탈환을 노리고 있는 히안, 실력 차가 너무 현격해 느긋하게 전뇌거를 몰고 있 는 뮤스가 선두 그룹이었다. 바르키엘은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선수들에게조차 추월을 당하고 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뒤쪽으로 멀리 햄브리겐 대학교의 문양이 도장되어진 전뇌거와 카이젠 대학교의 문양이 도장되어진 전뇌거가 각각 보였지만 바 르키엘의 그것은 아니었다. 이대로 달려 햄브리겐 대학교가 승리를 하면 좋겠지만 아 무래도 바르키엘이 걱정된 뮤스는 속도를 조금씩 줄였다. "히안 아무래도 바르키엘 녀석이 불안해 그 녀석 좀 기다렸다가 갈게." -칙... 바르키엘은 왜? 데이트라도 할려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아무튼 크라이츠 누님이나 잘 맡아. 그럼 나중에 보자." -알았어. 치익. 뮤스가 전뇌거의 속도를 줄이자 뒤따라오던 두 대의 전뇌거가 그를 지나쳤고, 그와 히 안의 대화를 들은 나머지 햄브리겐의 선수들도 그의 전뇌거를 피하며 달렸다. 다시 두 대의 전뇌거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는데, 한대는 뒤 처진 햄브리겐의 전뇌거였고, 나머 지 한대는 바르키엘의 전뇌거였다. "저 녀석은 나와 붙자더니 왜 엉뚱한 사람과 붙어 있는 거야?" 장난기가 조금 발동한 뮤스는 전뇌거에 부착된 원거리대화기를 조정해 바르키엘의 원 거리대화기에 맞췄다. "이봐! 바르키엘 왜 이렇게 기어오시나?" -치칙. 어라! 네 녀석 목소리가 왜 여기서 나오냐! "그런건 알거 없고 나의 상대인 네가 오지 않아서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다. 빨리 좀 올 수 없냐?" -칙. 이...이 녀석이. 기다려라 내 금방 가마! 뮤스의 놀림이 활력소가 되었는지 그는 뮤스와 간격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와 달리던 전뇌거는 뮤스와 그를 지나쳐 갔지만, 그의 눈에는 뮤스만 보이는지 나름대 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바르키엘 이러다가 나도 5위안에 못들겠는걸? 이왕 이렇게 된거 우리 같이 천천히 가자구!" -누...누가 네놈 따위와 같이 간다는 거냐! 치익! 순간 바르키엘이 분노하며 전뇌거의 발판을 힘껏 밟았고, 속도를 줄이고 가던 뮤스의 전뇌거를 추월했다. "오호 이 녀석 꽤나 화났나 보군. 하지만 조심하는게 오래 사는 비법일거다." 바르키엘의 전뇌거를 따라 속력을 내기 시작한 뮤스의 전뇌거 뒤로 뿌연 먼지가 피어 올랐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바르키엘과 뮤스의 앞쪽으로 먼저 달려가던 전뇌거의 꼬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르키엘은 한 대 두 대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바르키엘 의 뒤를 따르던 뮤스 역시 그에 맞춰 앞서 달리던 전뇌거들을 앞질러 나갔다. 모든 전뇌거들은 어느덧 도시의 외곽을 달리고 있었다. 도시 외곽의 도로는 모레가 많아 방향을 바꿀 때나, 속도를 조절할 때마다 쉽게 미끌어졌고, 노면의 굴곡 역시 뚜렸 해 전뇌거가 심하게 흔들렸다. 바르키엘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이 힘든지 전뇌거 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르키엘 녀석 골치 아프군. 조금만 더가면 린 강의 절벽인데..." <대공학자> #63 -------------------------------------------------------------------------------- -------------------------------------------------------------------------------- Ip address : 211.228.82.1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10 70 1 6 Name 짜가신선 [짜가신선@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63 (27) 사고. 햄브리겐 대학교의 정문, 수많은 사람들이 전뇌거가 들어 올 시간이 되자 그것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전뇌거 경주도 처음 보는 것이겠지만, 우승하는 학교 에 많은 가산 점이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있었다. 결 승지점에서 전뇌거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양 학교의 여가활동 동호회 회원 들이 전뇌거가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일 도로의 끝을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뮤스가 준 전뇌거 모형을 손에 꼭 쥐고있었다. "누가 제일 먼저 들어올까?" "호홋! 그야 당연히 히안 아니겠니? 히안이 뮤스의 누나에게 질 이유가 없잖아? 여자에게도 진다면 말이 안돼!" "그래도 뮤스의 누나가 뮤스보다 운전을 잘한다던데?" 카타리나가 이의를 제기하자 폴린은 콧방귀를 꼈다. "흥! 그럼 뮤스보다 우리 히안이 못하다는 거니? 그걸 이리 줘봐!" 카타리나의 손에서 모형 전뇌거를 빼앗아 들은 폴린은 자신의 손에 들고있는 전뇌 거 모형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했다. "잘봐 카타리나. 이게 히안의 전뇌거고, 이것이 뮤스의 누나 전뇌거라고 치면 이 정도의 거리차이가 나면서 히안이 이길 거야!" 테이블에 놓여진 두 대의 전뇌거 모형 사이는 폴린이 벌린 팔 길이 만큼 벌어져 있었다. 어린애 같은 그녀의 투정에 빙긋 웃은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풋. 그래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폴린이 히안을 두둔하는 것을 보자 카타리나는 불현듯 뮤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뮤스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호홋 당연히 이렇게 될 거야! 자 이거나 받아." 폴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손에 들려있던 카타리나의 전뇌거 모형을 그녀에게 던져 주 었지만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카타리나는 그 전뇌거 모형을 받지 못했다. 나무로 만들 어진 그것은 카타리나의 손을 맞고 땅으로 떨어져 몇 번을 굴렀다. -타닥. 카타리나의 전뇌거 모형이 땅에 떨어지자 폴린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어머. 미안해 카타리나. 나는 네가 받을 줄 알았는데..." 떨어진 전뇌거 모형을 주워들던 카타리나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지나쳤다. 하 지만 폴린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기에 애써 불길한 예감을 지우며 웃었다. "아냐 폴린 내가 정신을 다른데 팔고 있어서 그런거지 뭐. 괜찮아. 고장이 난 것도 아니잖니?" "어쩜 카타리나는 이렇게 마음도 넓니! 역시 날개만 없었지 천사라니까!" 카타리나가 화를 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폴린은 속으로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열 여섯 대의 전뇌거가 먼지를 뿜으며 라이델베르크의 외곽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가장 선두는 역시 크라이츠였고, 히안은 그녀의 뒤에서 이질적인 도로에 고생하고 있 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려니 당연히 속도가 줄었고, 노면마저 안 좋아 최악의 조 건이었다. 그에게는 속도를 별로 줄이지 않고서도 귀신처럼 길을 빠져나가는 크라이 츠가 더욱 큰 벽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 더 달리자 뮤스가 주의를 줬던 린강의 절벽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실수로 시내에서 사고가 날 뻔했던 히안 은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였고, 그의 앞에서 달리던 크라이츠 역시 속도를 줄이는 것 을 느꼈다. 크라이츠의 전뇌거가 린강의 절벽을 따라 돌 때 그녀의 전뇌거는 지금까 지 본적 없으리 만큼 크게 미끄러졌고, 속도를 더욱 줄인 후에야 안전하게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히안 역시 가슴이 철렁해 속도를 크게 줄여 절벽 코너에 진입했지만 엄청난 미끌어 짐을 느꼈다. "으엑! 여긴 빙판인가? 으으으으..." 거의 기어가듯이 속도를 줄인 히안은 바퀴가 안정된 것을 느끼고 천천히 절벽을 돌 아나갔다. 이곳에서 크라이츠에게 많이 뒤쳐졌지만 목숨을 구한 것이라고 생각한 히 안은 다시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모두들 들어! 린강의 절벽 땅이 정말 미끄러워. 속도를 최대한 줄인 후에 돌아!" -치익. 고마워 히안. -알겠다. 치익. 히안이 지나간 후에 여러대의 전뇌거가 그곳을 지나기 시작했는데, 카이젠 대학교 측 의 선수들 역시 그에 대한 언급을 미리 들었는지 최대한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세대 의 전뇌거가 지나간 후에야 바르키엘과 뮤스의 전뇌거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바르키엘은 뮤스에게 쫓기며 흥분한 상태였다. -치익! 이봐 바르키엘 속도를 줄이라고! 안 그러면 위험해! 원거리대화기에서 들려오는 뮤스의 목소리에 바르키엘은 비웃음을 흘렸다. "흥! 네 녀석이 그따위로 말한다고 해서 내가 겁을 낼 줄 아느냐? 나는 바르키엘님이 시란 말이다!" 바르키엘이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자 다급해진 뮤스는 전뇌거의 속도를 높 여 바르키엘의 전뇌거 옆으로 붙었다. 전뇌거의 창 밖으로 씩씩거리며 전뇌거를 운전 하고 있는 바르키엘의 얼굴이 보였다. "이 자식아 이대로 가다간 죽는단 말이야!" "뮤스! 조용히 해라! 네 녀석을 이기고 말 테니까." "바보자식!" 두 대의 전뇌거는 서로 붙은 채로 린강의 절벽 모퉁이에 접어들고 있었다. 두 전뇌거 의 바퀴는 빙판에서의 그것과 같이 절벽 쪽으로 미끄러졌고, 바르키엘은 미끄러짐이 생각보다 심하자 당황하며 그제서야 급히 속력을 줄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는지 절벽의 끝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그의 전뇌거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이런 전뇌거가 멈추지 않아!" 그와 함께 달리던 뮤스 역시 같은 상황이였다. "으으윽! 이러다가 둘 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겠어!" 두 대의 전뇌거가 멈출 기색 없이 엉켜 절벽의 모서리 쪽으로 미끄러지자 바르키엘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이렇게 죽기는 싫어! 사...살려줘!" 뮤스는 전뇌거의 창 밖 으로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는 바르키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암담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뮤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훗. 이렇게 된 이상 한 명이라도 살아야겠지? 전뇌거는 내가 만든 것이니까... 내 잘못일 수도 있어..." 뭔가 결심을 굳힌 뮤스는 급히 운전대를 바르키엘의 전뇌거 쪽으로 돌렸다. 그와 함께 뮤스의 전뇌거가 방향을 틀며 바르키엘의 전뇌거와 충돌했고, 그 힘으로 인 하여 바르키엘의 전뇌거는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알지 못할 충격을 받은 후 전 뇌거가 멈추고 있음을 느낀 바르키엘은 상황을 깨닫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 그곳에는 뮤스의 전뇌거가 절벽으로 미끌어져 나가고 있었다. 상황을 대충 이해 한 바르키엘이 넋 나간 사람처럼 뮤스의 전뇌거를 응시 하고 있을 때 원거리대화기 에서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칙... 이봐 바르키엘 심술 그만 피우고 열심히 살아라. 후훗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구. 뮤스의 말을 들은 바르키엘은 둔중한 물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입은 아교 칠 이라도 한 듯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뮤스... 나 때문에!! 뮤스!!" 바르키엘이 창문을 치며 뮤스를 불렀을 때 그의 전뇌거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린강의 절벽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고가 난 후 꽤나 많은 시간이 경과 되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구조작업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었다. 재해대 책반이 도착을 하기 전이었기에 사람들은 절벽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보이는 전뇌거 파편만을 보며 안타까워 했다. 전뇌거에서 내려 땅 바닦 에 주저 앉아있던 바르키엘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 거리고 있었다. "뮤스... 왜... 왜..." 이때 라이델베르크에서 뻗어나오는 길의 끝에서 재해대책반장인 안루헨을 필두로한 사람들이 큰 마차를 타고 몰려오고 있었다. 어께에는 저마다 굵직한 밧줄을 메고 있었고, 양손에는 구조장비들이 들려 있었다. 그들을 본 바르키엘이 재빨리 일어나 외쳤다. "왜 이제서야 오는거야! 제길! 굼뱅이들 같으니라구!" 재해대책반의 마차가 그의 앞에 도착하자 안루헨은 바르키엘을 향해 외쳤다. "아! 바르키엘이었군! 그나저나 어떻게 된건가? 전뇌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뮤스가 타고있었어요! 전뇌거와 함께 저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렸다구요!" 바르키엘의 말을 들은 안루헨은 나직히 탄식을 하며 뒤에있던 대원들에게 지시를 했다. "자 다들 저 아래로 내려 보내. 극히 조심해야하네... 높이가 무려 25멜리나 되니까 ... 아무래도 살았을 가능성은 없을 것 같군." "네! 알았습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대원들은 절벽 쪽으로 뛰어가 어께에 메고 있는 밧줄들을 풀어 하 나로 묶었고, 옷에 붙어있는 고리에 연결을 하여 절벽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 르키엘은 절벽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루헨의 오른팔을 쥐었다. "안루헨 아저씨... 제발 뮤스를 구해주세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자네 때문이라니?" "제가 고집을 피우지만 않았어도..." "일단 설명을 듣는것 보다 뮤스군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니 경과를 두고보도록 하지." 안루헨과 바르키엘이 절벽으로 걸어가 대원들이 투입되고있는 아래쪽을 내려다 봤지만 암석에 가려 전뇌거의 동체는 보이지는 않았다. -비켜요!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 소리에 바르키엘과 안루헨이 고개를 돌려보자 라이노를 타고 오 는 드워프들과 크라이츠가 보였다. 라이노는 천으로 뒤덮힌 물체를 끌고 있었는데, 덩 치는 라이노와 비슷했고, 높이는 어른키의 두배정도 되어보였다. 절벽 가까이에 라이노 를 세운 드워프들은 서둘러 뒤의 물체를 덮고 있는 천을 벚겨냈고, 켈트는 사촌들에게 소리쳤다. "브라이덴! 전뇌거중기를 고정시켜! 레딘은 쇠사슬을 준비하고, 블뤼안은 사람들 좀 정 리해줘!" 전뇌거중기라 불린 기계의 모습을 보자면, 본체의 위쪽에 장치된 길고 굵직한 철골은 상하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져 있었고, 그 철골의 끝으로 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레 딘이 그 고리에 쇠사슬을 연결하고 있었다. 라이노에서 내려 절벽 아래를 바라보던 켈 트가 나직히 말했다. "흠... 쉽지는 않겠군... 설마 인명구조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전뇌거중기에 가장 먼 저 끌어올려질 사람이 자신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그의 등뒤로 안루헨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지금 재해대책반에서 구조작업 중입니다!" 안루헨의 말에 켈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저뒤에 계신 크라이츠님과 이야기하시오. 우리는 바쁘니까." "크라이츠님이시라면 공학원의?" "거참 귀찮게 하시네 저뒤에 계시니까 말좀 시키지 마시오. 이봐들 준비는 다되었나?" 안루헨을 지나쳐 사촌들에게 뛰어간 켈트는 전뇌거중기에 연결된 쇠사슬에 자신의 허리 를 묶기 시작했다. 허리에 쇠사슬을 묶은 켈트는 절벽으로 걸어가 메달리며 레딘에게 외쳤다. "이봐 레딘 전뇌거중기를 내려 천천히! 예전처럼 떨어트리면 가만히 안둘거야!" 약간의 미심적은 표정을 짓고있는 켈트를 향헤 레딘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흘흘...알겠수! 설마 내가 형님을 죽이기야 하겠수?" 레딘이 전뇌거중기의 한켠에 있는 스위치를 내리자 쇠사슬이 풀리며 켈트를 절벽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켈트의 모습을 바라보던 안루헨은 전뇌거에서 내려 절벽 아래를 내려 다 보고며 투덜거리고 있는 크라이츠에게 다가갔다. "내참... 사고 때문에 전뇌거 경주가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쳇... 멍청하게 이런 곳에 서 떨어지다니..." "안녕하십니까. 크라이츠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돌려 안루헨을 바라본 크라이츠는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 슈베어 후작님 댁에서 뵌 안루헨님이시군요. 안녕하셨어요?" "그나 저나 저건 뭐하는 물건이죠?" "예전에 뮤스가 길가를 가다가 어떤 사고를 목격했었나봐요. 그러더니 시간이 나는대로 전뇌거중기를 만들더군요. 인명구조에 쓰일 거라면서... 정말 웃기죠? 그렇게 만들어 놓 은 것에 자신이 가장 먼저 구조가 된다는 것이." 안루헨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시내의 마차 충돌 사고가 떠오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다면 그 식당가의 사건이었군요. 저도 그때 뮤스군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안루헨이 그사건에 대해 침을 튀며 말하고 있을 때 절벽 아래서 들려오는 켈트의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려야 했다. -레딘 끌어 올려! 켈트의 신호를 들은 레딘이 스위치를 올렸고, 그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전뇌거중기 는 쇠사슬을 조금씩 감아 올렸다. 수십여명의 장정이 끌어올려도 버겁기만 할 전뇌거를 별 어 려움없이 끌어올리는 전뇌거중기의 괴력은 밧줄을 타고 힘들게 내려가고 있는 재해대책반의 얼을 빼기에 충분했다. 몇 분이 지나자 걸레처럼 뭉개진 전뇌거의 형체가 보였고 그 위에 올 라 타고 함께 올라온 켈트는 레딘을 향해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알았수 형님. 이쪽이던가?" 레딘이 옆에있는 스위치를 내리자 전뇌거를 끌어올리던 철골이 방향을 바꾸며 돌아갔다. 매 달려 있는 전뇌거가 길한켠에 위치하자 켈트는 손바닥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이제 천천히 아래로 내리라고! 실수하면 살아있던 뮤스라도 다시 죽어!" "걱정도 팔자유 형님." 전뇌거를 천천히 아래로 내려 땅에 닿자 블뤼안과 브라이덴은 거대한 칼처럼 생긴 무엇인가 를 들고 전뇌거에 달려 들었다. "자 시작해보자구 블뤼안." -위잉! 징징!! 그들의 손에든 거대한 칼은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전뇌거의 찌그러진 부위에 가져다 대자 철판으로 이루어진 전뇌거의 몸체가 두부 잘리듯 잘려나오고 있었다. "브라이덴 조심하게나. 잘못하다가 뮤스군 팔이라도 하나 잘려나가면 자네 월급도 없을 걸 세...끌끌..." 실없는 농담을 살벌하게 주고 받은 그들은 전뇌거를 다 난도질 했는지 손에있는 기계를 내 려 놓고, 손으로 뜯어 내기 시작했다. 크라이츠와 안루헨 역시 구조작업을 보기 위해 다가 갔고, 바르키엘은 두손을 모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특... 전뇌거의 문짝을 뜯어낸 블뤼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크라이츠를 바라보았다. "크라이츠님! 뮤스군이 없습니다!" "뭐라구요!?" 블뤼안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넝마가 된 전뇌거를 향해 뛰어갔다. 전뇌거의 안쪽을 둘러 보던 그녀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눈에 이채를 띄웠다. 전뇌거의 창문쪽에 손을 가져간 크라이츠는 문에서 천조각하나를 집어올렸는데 자세히 보니 햄브리겐 대학교의 옷 조각이었다. "아무래도 뮤스는 창밖으로 튕겨 나간것 같아요. 절벽 반대쪽은 어떻죠?"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안루헨이 나섰다. "절벽을 타고 모두 강물입니다. 전뇌거는 땅으로 충돌했지만, 뮤스군이 전뇌거 밖으로 튕겨 져 나갔다면 강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많겠군요." 한켠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브라이덴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강아래 쪽을 수색해 봐야겠군요!" "그것은 저희 재해대책반에서 맡겠습니다. 만에하나... 린강의 하류쪽으로 떠내려 간다면... 살아있더라도 살아 올수는 없을 겁니다." 안루엔의 말에 드워프들은 무엇인가를 떠올리는지 각자 나직한 목소리로 신음성을 흘렸다. "드베인 숲..." "어둠의 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켈트가 사촌들을 향해 빙긋웃으며 턱으로 크라이츠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드워프들고 회심의 미소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안루헨 만은 아직도 걱정스러움에 한숨 만 쉬고 있었다. <대공학자> #64 -------------------------------------------------------------------------------- -------------------------------------------------------------------------------- Ip address : 211.228.82.13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10 70 1 6 Name 짜가신선 [짜가신선@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64 (28) 드베인 숲 어두운 숲, 높이 뻗어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점점이 흘러 들어오는 빛을 제외한다면 완연한 어둠을 뿌리는 곳이었다. 약 100멜리는 됨직한 너른 강폭을 거의 뒤덮을 만큼 거대한 나무 들이 우거져 있었고, 햇살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강물의 색은 검으리만큼 어두웠다. 검 푸른 강물이 천천히 흐르는 주변으로 검고 고운 모래가 싸여있었다. 검은 모래 위 하나의 인영이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는데, 그의 몸은 암흑이 만연한 이 숲과는 이질 적으로 오색 의 영롱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단발의 검은 머리칼이 엉클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피부가 창백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흐르는 오색의 빛 이 밝아질수록 얼굴은 화색을 되찾았고,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팔의 상처가 조금씩 아 물고 있었다. 한시간 여가 흐르자 영롱하던 빛은 점차 사그라 들었고,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인영의 손끝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으음...." 머리를 조금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어 팔이 움직였고,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힘든지 신음성 을 흘리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헉... 헉... 죽지는 않았군. 뇌공력으로 몸을 감쌌던 것이 다행이야." 바로 절벽 아래로 전뇌거와 함께 추락해버린 뮤스였다. 물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 락을 쓸어넘긴 뮤스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진 곳 으로 자신의 운명에 혀를 찼다. "쯔쯧... 나는 어떻게 정신만 잃었다가 깨어나면 다른 곳이지?"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며 몸 상태를 보았지만 거짓말처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뇌공력은 정말 겪을 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나저나 이곳은 어디야? 분위기로 봐서는 좋은 곳은 아닌 듯 한데." 자신의 어깨부근을 만지자 가죽으로 된 끈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안도의 한숨을 쉰 뮤스는 강을 바라보았다. "휴우. 가방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군. 강을 떠내려 왔으니 돌아가려면 강을 따라 올라가야겠지? 그러려면 나침반이 있어야겠는데... 어디보자. 어라! 방수처리 까지 된 가방이었나?" 크라이츠가 전해준 가방을 뒤적거리던 뮤스는 가방 속으로 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았음을 느 끼며 감탄했고, 그 안에서 뾰족한 철 조각과 거무퇴퇴한 돌을 꺼내들어 둘을 마찰시키기 시 작했다. "자석으로 철조각을 문지르면... 멋진 나침반이 되지..." 자석으로 문지른 철 조각의 중심을 손끝에 올려놓자 그것은 빙글빙글 돌다가 서서히 멈추며 강이 흐르는 방향과 일치되었다. "음 해가 기울어 있는 곳이 북쪽일리는 없으니 저쪽이 남쪽이군... 그럼 강변을 타고 북상 하면 되는 건가? 시간을 얼마나 지났을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자 뮤스는 서슴없이 몸을 일으켜 강을 따라 걸어올라 갔다. 숲 속으로 들어간다면 너무나 어두웠기에 길을 잃기 십상이었고,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으 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었기에 그나마 빛이라도 들어오는 강변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강을 따라 걸어 가다보니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인지 점차 덤불이 우거져 험한 길로 변하였다. 거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날까지 저물어가자 뮤스는 난처해 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그렇다면 나침반 하나만 믿고 숲을 가로질러야 한단 말인가? 밤에 숲을 다닌다는 것 은 위험한 짓이라고 했으니 일단 쉴만한 곳을 찾아보자." 강을 따라 올라가기를 포기한 뮤스는 방향을 바꾸어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 과 같이 숲 속으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어두움은 점차 극성을 부리며 뮤스의 시야를 가 리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하루종일 밤과 같겠어. 아! 휴대전등이 있지... 정신머리하고는..." 가방에서 둥근 통 모양의 휴대전등을 꺼낸 뮤스는 뇌공력을 끌어올리며 휴대전등에 불을 밝혔다. 다른 이들이 쓰는 전뇌기기들은 마나구가 내장되어 있었기에 별도의 전원이 필요 없었지만 뮤스가 가지고 있는 것들만은 스스로 뇌공력을 주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는 편 이 전뇌기기들의 성능을 알맞게 조절 할 수 있기에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휴대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던 뮤스는 어디를 봐도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조금이라도 습기가 없는 곳을 찾기 위해 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울!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는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뮤스의 등줄기에는 땀이 맺게 했 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그가 홀로 이런 숲 속을 헤쳐 나간다는 것이 쉽다고 말한다면 분명 거짓일 것이다. 휴대전등을 들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밝혀 줄 수 있는 영역이 한정 적이었기에 그 이외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 또한 크게 느껴졌다. 가만히 땅의 흙과 나뭇잎 을 만져보던 뮤스는 젖어있지 않음을 느끼고 만족스러워 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불이나 피우자 추워질 것 같으니..." 주변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온 뮤스는 마른 나뭇잎을 아래에 깔고 나뭇가지들을 위로 쌓았다. 뇌공력으로 마른 나뭇잎에 불을 붙이자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고, 입으로 조금 바람을 불자 나뭇가지에 불이 옮겨 붙었다.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옷가지를 벗은 뮤스는 그것을 불 주변에 걸어놓았고, 속옷만을 입고 있었다. "후훗.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색다르기는 한걸? 이런 기분이 언제까지 계속 될 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에 이렇게 벗고 있다가 고뿔이나 걸리는게 아닐지 모르겠네." 손에 쥐고있던 불쏘시개로 잘 타고있는 모닥불을 쑤시며 한탄을 했다. "지금쯤 모두들 걱정하고 있겠지? 바르키엘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얼떨결에 목숨을 구해준 영웅이 되어 버린 건가? 아니면 건방떨었다고 날뛰고 있으려나." 중얼거릴 건더기가 없어지자 무료해 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차갑게 느낄 만 큼 시린 바람이 불었지만, 뇌공력을 이용하게 된 이후로는 추위를 거의 못 느꼈기에 이 날씨에 속옷 하나만 입고 있는데도 졸려옴을 느꼈다. "하암. 이렇게 불을 피워놓으면 짐승들이 못 다가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붙였지만 고개를 흔들며 다시 눈을 떴다. "아냐... 이곳은 워낙 이상한일이 많이 일어나니 아닐 수도 있어. 쩝 귀찮긴 하지만 덫 이라도 몇 개 설치해야겠군." 몸을 일으킨 뮤스는 가방을 허리에 매고서 나무사이를 누볐다. 그의 손에는 레딘이 만들 어준 얇은 유리실이 들려있었는데 이런 밤에 절대 눈에 띄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카로움 까지 갖췄기에 아무 것도 모르고 다가오는 맹수들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물 론 일반 숲에 설치를 한다면 극히 위험하겠지만, 이런 곳에 사람이 다닐리는 없다고 생 각했기에 뮤스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손을 한번 털어 본 뮤스는 다시 나뭇잎을 모아 푹신하게 만든 잠자리에 몸을 뉘이며 가 방 안에 이불을 넣어두지 않았음을 후회하고있었다. 사실 그의 가방은 움직이는 공학원 이라 할만큼 그가 만든 수많은 기계와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있었는데, 그럼에도 무게와 부피가 변하지 않아 그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 사이로 밤 안개가 서서히 드리워 지고있었다. 완연한 밤이 되자 숲은 점차 기이한 움직임으로 들끓기 시작했는데, 미묘한 곤충들의 움직임부터, 수풀의 움직임까지 그곳은 조금씩 약동하고 있었다.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한 뮤스가 나뭇 잎 위에서 뒤척이며 단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크허헝! "뭐...뭐지?" 가슴 한켠을 울리는 비명소리에 몸을 일으킨 뮤스는 재빨리 휴대전등을 비추며 사방을 살펴보자 그가 누워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의 수풀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는데, 방금 전의 비명은 자신이 설치해놓은 유리실에 의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긴장감이 흐 르는 가운데 뮤스는 손만을 움직이며 이미 꺼져버린 모닥불 주변에 널려있는 옷을 걸쳤 다. 아직 다 마르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달아날 판국에 속옷만 입을 수는 없었기 때 문에 달리 불평할 수는 없었다. 잔뜩 당겨진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어두운 수풀의 검은 그림자는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고, 그는 사방에서 무엇인가가 자신을 향해 조여오고 있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르르르... 섬뜩한 소리를 들은 뮤스는 다가오고 있는 것들이 인간이나 드워프같은 유사인종은 아니 라는 것을 직감했고, 맨손으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뮤스는 땅바닥에 나 뒹굴고 있는 굵직한 나무 몽둥이를 주워들었다. 그가 긴장감을 모공으로 느끼며 조심스 럽게 휴대전등을 수풀로 비추자 순간 시퍼런 두 눈동자가 번뜩였고, 그에 놀란 뮤스는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으악!!" 비명소리가 터지자 수풀 속에서 뮤스를 조여오던 생명체는 요란한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뮤스에게 달려들었다. -크엉! 무엇인가가 재빠르게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모습을 보고 더욱 기겁을 한 뮤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오른손에 들린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그의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아무 것 도 없었다. 하지만 곧 왼쪽 어깨가 뜨거워짐을 느끼며 휴대전등을 떨어트려야만 했다. -타닥! 정신을 차린 뮤스는 다시 눈을 떠 자신을 공격한 생명체를 바라보았지만 휴대전등을 떨 어트린 이상 달빛조차도 없는 이곳에서 자신을 공격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풀에 숨어있는 다른 것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 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이 난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짜내던 뮤스의 생각은 뇌동체 술법에 미쳤다. [그래... 뇌동체술법을 이용해야해... 그래야만 살 수 있어. 명신아 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뮤스는 손에 들린 몽둥이를 고쳐 잡고 전신의 근육으로 뇌 공력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금빛으로 물들며 어둠에 물든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 고, 그 빛이 점차 밝아지면서 뮤스를 공격했던 이름 모를 맹수의 모습을 드러나게 만들 었다. 그것의 몸집과 생김새는 호랑이와 비슷했지만 아무런 무늬도 없었으며, 이빨은 30셀리는 됨직 했고, 발톱이 유난히 길어 걸음을 옮길 때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맹수 는 뮤스의 몸에서 발현되는 빛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조금 위축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 것도 잠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아무래도 저 발톱에 당한 모양이군. 자 어디한번 덤벼봐라!" 뮤스가 호기롭게 외치자 맹수는 느린 발걸음으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는 기 선을 제압하려는지 시퍼런 눈으로 뮤스의 눈을 직시했고, 한편으로는 유심히 그의 움 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가 한참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자 맹수는 생각을 바꿨는지 조금씩 안쪽으로 돌며 그와의 간격을 좁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뮤스는 더 욱 긴장이 되는지 스스로의 정신을 일깨우며 몽둥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해.] 한번 도약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들자 맹수는 천천히 몸을 낮추었고, 동시에 뮤스의 목에서는 마른침이 넘어갔다. 얼마만큼 맹수의 몸이 낮추어 졌다 생각되자 용수철 처럼 뮤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크릉! 때를 기다리며 맹수를 주시하고 있던 뮤스는 그 맹수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 자 몸을 급히 왼쪽으로 돌리며 몽둥이로 머리를 후려쳤는데, 생각보다 맹수의 몸놀림 이 빨랐기에 머리 대신 허리를 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뇌공력을 쏟아 부은 휘두 름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맹수는 타격이 극심했는지 땅바닥에 내려서서 몇 발자국 걸 음을 옮기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이 맹수를 때려 눕혔음에 한숨을 내쉬며 안도를 하던 뮤스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시간도 없이 다시 몽둥이를 들어올려야만 했다. 주변에서 공격의 때를 기다리던 남은 맹수들이 처음의 맹수가 쓰러짐을 시작으로 그에 게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크르릉! -킁! 뮤스는 사방에서 빠른 속도로 몸을 날리며 달려드는 맹수들에 당황하여 아슬아슬하게 피하기 시작했다. 한 마리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는데, 동시에 대여섯 마리의 맹수들을 상대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맹수들은 작 전이라도 짠 듯 몸을 날리는 순서가 체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만큼 시기 적절한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몸 여러 곳에 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다른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그래! 감전 시켜 버리면 당분간 정신을 못차리겠지!] 방법을 강구해낸 뮤스는 차분하게 뇌동체술법상의 발놀림을 펼치며 그들의 공격을 피 했고, 손으로는 뇌전력을 발출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맹수들이 몇 번의 공격을 거듭 하자 그들의 움직임에 익숙해 질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세 마리의 맹수가 동시에 자 신을 향해 뛰어들자 이때다 싶었는지 뇌공력을 재빨리 손으로 이동 시켰다. "받아라 이 자식들!" -치지지직! 순간적으로 어두움으로 물들어 있던 숲을 눈부시게 밝히며 그의 손으로부터 엄청난 스 파크가 일어났고, 또 그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털썩! 털썩! 뮤스가 발출한 뇌공력에 감전되어 버린 맹수들은 하나같이 까맣게 타버린 모습으로 공 중에서 떨어졌는데,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었다. 뮤스 역시 그런 것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쓰러진 맹수들을 바라보았고,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그의 주 변을 맴돌고 있던 맹수들 중 남은 세 마리는 겁을 먹었는지 꼬리를 내리며 한발자국 물 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는 언제 그것들이 자신을 공격해 올지 몰랐기에 긴장을 풀 지 않고서 손으로 뇌공력을 모으고 있었다. 다시 긴장 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 멀리 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만해요!" 뮤스의 귀에 들린 목소리는 거칠기는 했지만 여성의 그것이었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맹수들의 태도였는데, 그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던 맹수들이 발톱을 감추 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공학자> #65 -------------------------------------------------------------------------------- -------------------------------------------------------------------------------- Ip address : 61.84.78.13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푸스슥! 한쪽의 수풀을 헤치며 빠르게 뛰쳐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 지 않을 법한 여성이었다. 뮤스는 그녀의 외침에 손에 모아둔 뇌공력을 거두어들이기 는 했지만 아직도 안심하지 못하고 긴장감 흐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맹 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는 까맣게 타버린 맹수들에게 다가가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휴우... 아직 죽지는 않았구나... 다행이야 정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맹수들을 마치 고양이 다루듯이 태연스럽게 만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뮤스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의 물음에 그녀는 쓰러진 맹수들을 살피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머 리카락을 가진 그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은 생명력이 꿈틀대는 듯 했고, 피부는 얼핏보 기에도 거칠어 도시 여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입고 있는 옷가지들 은 몸에 딱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는데, 일반적인 여성이 부드러 운 곡선이라고 한다면 이 여인은 전신 근육이 발달하여 딱딱한 각이 보였다. "그건 제가 물어봐야 할 말인데요? 보아하니 도시의 인간인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걸요?"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뮤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멍청한 표정을 짓자 고개 를 갸웃 거리며 이상한 사람인양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앞에 쓰러 져 있는 맹수들을 보고서는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이렇 게 만든 것까지는 용서할 테니 상처 입은 빅투스들 옮기는 거나 도와 줘요." 막상 죽을 뻔 한 것은 뮤스 자신이었는데,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맹수들만 살피는 그 녀의 냉담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데 공격받은 건 나라구요! 이 상처들이 보이지도 않 나요?" 자신의 어깨와 몸의 곳곳을 가리키며 그녀를 나무라자 그녀는 그의 몸을 살펴보며 피 식 웃었다. "몸이 어떻다는 거죠?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당신 눈은 해태 눈이라도...?" 말을 하다 말고 문득 자신의 왼팔 어림을 만져 봤지만 기이하게도 아무런 통증도 없 었다. 설마하는 생각으로 상처입은 다른 곳을 살펴보자 핏자국만 조금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하얀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깜짝 놀란 뮤스가 이 기이한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봐요! 거기 멍하니 서있지 말고 빅투스 옮기는 것 좀 도와 달라니까요!" "아..알았어요!" 뮤스는 그녀의 재촉이 계속 되자 뇌동체술법을 이용해 한 마리의 빅투스를 들었고, 그 모습을 본 여인은 할말을 잃은 듯 쓰러져 있는 빅투스의 두 앞다리를 들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떻게 100켈로닌이 넘는 빅투스를 그렇게..." 이런 곳에서까지 그런 질문을 받자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재촉하던걸 잊으셨나 보네요. 빨리 안 옮길 거예요?" "아... 그들을 여기 남은 빅투스들에게 태우고 저를 따라오세요." 뮤스는 쓰러져있는 두 마리의 빅투스를 다른 빅투스들의 등에 태운 후 짐을 챙겨 그 녀를 뒤따르기 시작했고, 빅투스들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금 걸어 나 가자 빅투스 한마리가 목이 잘린 채로 쓰러져 있었는데, 뮤스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 린 빅투스였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인은 뮤스를 한번 흘겼다. "이 실을 그대로 둔다면 정말 위험하겠어요! 걷어 가도록하죠." 비록 정당방위를 위한 일로써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그녀의 신경질 적인 반응에 괜한 미안함을 느꼈다. "알았어요." 여인은 그가 유리실을 챙기는 것을 보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어디서 온거예요?" 날카로운 유리실에 베이지 않기 위해 뇌공력을 손에 주입한 뮤스는 실을 감으며 그녀 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름은 뮤스. 라이델베르크에서 린강을 타고 이곳까지 떠내려 왔어요." 그의 말을 듣던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라는 모습이었다. "라이델베르크에서 여기까지 떠내려 왔다구요? 그런데도 아직 살아 있는걸 보니 정말 신기하군요?" 하지만 정작 의아한 것은 뮤스였다. "네? 그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이런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 잖아요?" 그말을 들은 그녀는 답답하다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군요? 린강의 하류에는 쉴드옥토퍼스가 살고 있단 말이예 요!" "쉴드옥토퍼스? 방패문어? 아무렴 어때요.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된거지. 그건 그렇고 당신 이름은 뭐죠?" "쉴드옥토퍼스라는 이름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당신뿐일 거예요. 제 이름은 윌드린. 유글렌 부족의 전사죠." "유글렌 부족? 그건 뭐죠?" "아마 들어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드베인 숲에서 나간 적이 없으니... 이곳에서 살고 있는 유일한 부족이기도 하죠. 일단 빅투스들을 치료해야하니 가면서 이야기해요."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뮤스 역시 유리실을 가방에 넣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아. 그렇게 하죠." 그녀를 뒤따라가던 뮤스는 이동하는 중에 이 숲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드베인 숲은 수많은 마물들이 살고있어 대륙의 3대 마역 중의 한 곳이라는 것과 유글 렌 부족은 오래 전 부터 빅투스라는 맹수들을 기르며 마물들로 부터 부족을 보호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빅투스들이 체계적으로 공격하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맹수를 길들이는 유글렌부족에 대한 궁금증 마저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몬스터로 착각하고 공격했던 거예요." "아... 그랬군요. 하긴 이 곳에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을 테니..." 하지만 뮤스의 말에 윌드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그녀의 입에 서 거친 말투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뇨! 사람이 있기는 있죠... 개 같은 레인져들..." "레인져?" "제국에서는 이곳의 몬스터들에게 현상금을 걸고있어요. 병사들을 풀어 이곳을 토벌 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레인져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레인져들이 이 곳으로 몰려들어 몬스터 들을 사냥하고 있거든요." 그녀의 분노가 섞인 말투를 듣고 있던 뮤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안 좋게 말하는 거죠?" "흥!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리의 빅투스들까지 사냥해 현상금을 받아먹고 있죠! 심지어 지금은..." 말이 끊어지며 끝을 흐려지자 궁금해진 뮤스가 되물었다. "심지어 지금은?" "아니예요. 뭐 자세한 이야기는 알 필요 없어요." 그녀가 말을 끊자 궁금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물어 볼 수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 며 계속해서 그녀를 뒤따랐다. 뮤스의 눈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거기가 거기 같은 숲 속이었지만 윌드린에게는 그렇지도 않은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나무사이를 누비며 걸 었다. 이십 여분 가량 걸었을 무렵, 저 멀리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보이자 윌드린은 뮤스를 향해 말했다. "다 왔군요. 저기가 마을이에요." "아... 그렇군요. 몇 명이나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죠?" "부족은 모두 이 백명 안팎이죠. 그리고 유입된 사람들은 십여명이구요." "유입된 사람들이라니요?" "당신처럼 길을 잃고 드베인 숲을 헤매던 사람들이었는데, 도저히 숲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자 저희 마을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죠. 사실 죽는 것보다야 이곳에서 사 는 것이 훨 신 나을 테니..."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저는 꼭 이곳에서 나가야 해 요!" 뮤스가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뜻을 밝히자 윌드린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깨세요. 이곳 숲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니까... 혹 당신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출몰하는 마물들을 다 이겨낸다면 몰라도..." 윌드린의 경고어린 말을 듣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마물들이 그렇게 많다면 왜 우리는 지금 까지 아무런 마물들도 만나지 않았죠?" "그건 당신이 운 좋게도 우리 부족의 생활구역 쪽으로 들어와서 그래요. 이 주변은 우리 부족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서 마물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금방 부족 사람 들이 달려오죠." "아... 그랬군요." 둘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뮤스는 마을 어귀에 들어 설 수 있었는데 십여 명의 사람들 이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윌드린과 같은 근육질이었 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여자들만 이 빅투스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두운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한 여자가 윌드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 윌드린 이제 돌아오는거야? 오늘도 아무 일 없지?" 그녀의 물음에 윌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빅투스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말을 걸던 여인은 새까맣게 타서 다른 빅투스들에게 업혀 들어오는 빅투스들을 발견 했는지 놀라기 시작했다. "빅투스들이 왜 그 모양이야? 무슨 일 있었어?" "이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의 빅투스들을 이렇게 만들어 주셨지..." "뭐라구! 어떤!" 그 여인은 적대적인 눈빛으로 뮤스를 바라봤지만 윌드린이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그만둬. 내가 이 사람을 몬스터로 착각했었으니까... 이 사람은 잘못 한 것 없어." 윌드린의 말에 그 여인은 대강 이해가 되는지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런데 이 허약해 보이는 남자가 빅투스를 세마리나 이꼴로 만들었다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살다 보니 별별일이 다있는거 있지? 아무튼 얘들 좀 치료해야 하니 까 들어가도 될까?" "풋. 물론이지 윌드린. 그만 들어가서 쉬어. 수고했어." "그래 고마워. 따라 들어와요 뮤스." 그녀들의 대화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 모르던 뮤스는 그녀를 뒤따라 마을로 들 어섰다. 이 마을은 숲속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모습만은 보통의 마을들과 크게 다르지 는 않았는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길게 뻗은 나무를 기둥 삼아 집이 지어져 있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지 집들의 지붕마다 뿔처럼 나있는 나무들이 뮤스의 눈에는 상당히 신기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마을을 보고 있을 때 윌드린이 말했다. "지금은 새벽이라서 대부분 자고 있을 거예요. 저 쪽에 아무도 쓰지 않는 집이 있으 니 거기서 오늘을 묵어요. 저는 빅투스들이나 치료해야 겠네요. 그럼 내일 봐요..." 그녀가 간단하게 말을 끝맺으며 빅투스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뮤스는 멍하니 그녀가 지정해준 집을 바라보고 섰다. <대공학자> #66 -------------------------------------------------------------------------------- -------------------------------------------------------------------------------- Ip address : 61.84.78.13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29) 유글렌 부족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조그마한 초가집이 있었는데, 이 마을의 다른집들과 같이 거대 한 나무가 지붕을 뚫고 올라온 모습이었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집 보다 상 당히 누추하다는 것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쾌쾌한 냄새가 뮤스 의 코를 자극했다.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참지 못할 정도의 악취는 아니었기에 안쪽 으로 발을 내딛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투덜거렸다. "이런... 아무리 내가 불청객이라지만 이런 방을 내주다니..." 불평을 하던 뮤스가 가방에서 휴대전등을 꺼내 주위를 밝히자 방안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있었고, 집의 겉모습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낡은 테이블과 침대가 그의 인 상을 한번 더 구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지 인상을 폈다. "하긴, 야숙에 비한다면 정도라도 과분하지." 좋게 생각하기로 한 그는 어깨에서 가방을 풀어 침대에 내려놓았고, 테이블에 놓여있 는 기름등에 뇌공력을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 -치직! "훗. 이렇게 등불에 비춰 보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걸?" 실소를 한번 내뱉으며 방을 한번 둘러보던 뮤스가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뉘이자, 먼 지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침략한 그를 향해 날리며 신경질 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개의치 않으며 거대한 나무가 뚫고 올라간 천장을 보며 혼잣말 을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상당히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여러 종족도 있고, 여러 부족도 있 고, 거기다가 마물들 이라니.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들을 보면 대단하군." 흥미롭다는 식으로 말하던 그는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 다. "마물! 이렇게 한가한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숲 속에는 수많은 마물들이 번식하고 있다는데 어떻게 공학원으로 돌아간다지... 몇 마리 정도야 손으로 때려잡 거나 뇌공력으로 감전시킨다 해도 강한 녀석이라도 출현한다면... 게다가 그것이 덩 치가 큰 녀석이라면?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군..." 오한이 느껴지는지 몸을 한번 세차게 떤 뮤스는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무기라도 만들어야 할텐데..." 뮤스는 자신의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방 안의 물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가 현재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 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생각을 하던 뮤스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지자총통이 있었지!" 가방을 들어올린 뮤스는 서둘러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많은 물건들이 가방 안에 쌓여있었는지 지자총통을 찾아냈을 때는 상당한 시 간이 흐른 후였다. "여차! 여기 있었군. 그런데 화약이 없는데 이를 어쩌지?" 지자총통을 찾아내긴 했지만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 뮤스는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 작했다. "후우 화약 만들어 놓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니... 만들 재료를 준비해놓지도 못했 는데... 결국은 또 다시 원점인가?" 초조해진 뮤스는 잠을 자는 것조차 잊고 있었지만 공학뇌동심결을 익힌 이후로 쉰다 거나 자는 것은 형식적인 일에 불과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뮤스는 침대의 구석에 쭈그려 앉아 버릇처럼 자신의 손으로 뇌공력을 모았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이는 뇌공력을 처음으로 운용했을 때부터 시작 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 는데, 초조해 지자 자신도 모르게 뇌공력을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치직! 칙! 기름등으로 이 방을 다 밝히기에는 역부족인지 뮤스가 누워있는 침대쪽은 아직도 어 두웠다. 이렇게 밥 한끼 먹을 시간동안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서 일어 나는 스파크는 일정한 시간차를 두며 계속해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뮤 스는 눈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확실히 말하자면 그의 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파크를 보고있었다. "뇌공력... 빛... 열... 고온..." 그는 들어도 알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융합... 압축... 발현." 몇 마디의 말을 더한 그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전뇌지자총통..." 뮤스의 눈은 뭔가에 홀린듯했는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 다. 그는 손을 움직여 가방을 자신 앞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그곳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하나씩 꺼냈는데, 사진기부터 시작하여 천제만리경, 원거리대화 기, 소형동력기등을 포함한 백여가지의 크고 작은 기계들이었다. 기계들을 꺼내던 그 의 손이 멈추자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성이 나옴직한 기계들을 하나씩 분해를 하기 시 작했고, 그의 손이 거친 기계들은 수많은 부품들로 분해되어 테이블의 한쪽에 가지런 히 놓여지고 있었다. 건물 전체에 불을 밝힌 공학원의 집무실에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이 모여 있었다. 드워 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못마땅한 것임에 반해 크라이츠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쿠키를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약간은 이질적인 이 분위기를 깨며 켈트가 말했다. "크라이츠님! 정말 이렇게 아무런 방도를 취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그의 화난 목소리에 크라이츠는 손에 묻은 쿠키가루를 털며 말했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죠?" 대수롭지 않은 듯한 말투에 듣고만 있던 레딘이 참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뮤스군이 떠내려 간 곳이 바로 드베인 숲이란 말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드베인 숲요!"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다는 말이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 곳은 대륙 3대 마역중에 한곳이란 말입니다! 그곳 으로 뮤스군이 사라졌는데 이렇게 태평이시라니..." 그의 말을 듣던 크라이츠는 벽난로 가까이로 다가가 손을 쬐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 다. 드래곤이 추위를 느낄리는 없겠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그녀가 추위를 느 끼는 듯 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뮤스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시는 듯 하군요. 혹시 지금 그 아이가 가진 지식과 능력이 다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말을 잠시 듣던 켈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뮤스가 아직?" "훗. 물론이죠.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여준 그 아이의 능력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 일 거예요. 물론 제 생각이 맞다면 말이죠. 제가 레어에서 그 아이의 능력을 직접 느 꼈다는 것은 켈트씨도 봐서 알거예요." "무..물론이죠." "과연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이 정도의 특이한 일로 놀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수 천 년을 살아온 제가 말입니다." 이 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푼수같이 생활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룡으로 서의 크라이츠라는 존재가 드워프들을 뇌리를 뒤덮기 시작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일이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해요. 능력이 모자라 죽는다면야 그것도 뮤 스의 운명이겠고,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깨닫는다면..." 드워프들은 그녀의 냉정한 말에 신음성을 토하고 있었다. -흠... "크라이츠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믿을 수 밖에요..." "그렇다면 가만히 보고만 계시면 됩니다. 그 녀석은 자기발로 걸어 이곳으로 올테니 까요." 그녀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벽난로의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 다. -끼꼭! 아직도 새벽안개가 유글렌부족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이른 아침,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이 밝아왔음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뮤스는 언제부터인지 마을의 공터에서 쭈그려 앉아 모이를 먹고있는 신기한 닭을 보고 있었다. 벼슬과 부리를 보면 닭임이 틀림없었지만 부지런히 걷고있는 다리를 보자면 세 개인 것이 닭은 아니었다. 또 울 음소리 역시 조선의 닭과는 사뭇 달랐다. "이것 참... 닭 한 마리조차도 멀쩡한 것이 없는 곳이군. 그래도 잡아먹을 때 다리가 하나 더있으니 좋긴 하겠어." 뮤스가 엉뚱한 생각을 하며 폴린의 식당에서 먹은 닭 요리에 나온 닭의 다리가 몇 개 였나 떠올려 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탈칵!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자 빅투스를 치료하기 위해 사라졌던 윌드린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하품을 하는 그녀가 못마땅한 지 뮤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뒤로 묶으 며 뮤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에 들어와서 늦잠이라도 잘 줄 알았는데 벌써 일어났네요?" "잠을 자지 않았으니 늦잠을 잘 수가 없죠 뭐." 뮤스가 어영부영 대답을 하고선 다시 발이 세 개 달린 닭에게 시선을 올리자 그녀 역 시 그의 대답에는 신경 쓰지 않고 손으로 눈꼽을 때며 물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뭘 그렇게 보고있죠?" "아. 이 세 발 달린 닭이 신기해서요." "닭이라니요?" "이 녀석 말이에요. 지금 모이를 먹고 있는..." 뮤스의 대답이 윌드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무래도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건 아닌가요? 이건 치쿤이예요! 치쿤!" "치쿤?" "나참 어이가 없네. 아무래도 당신이 잠을 덜 자서 정신이 없는 걸 거예요." 그녀의 말에 별달리 할 말이 없자 문득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그렇고 그 뭐냐... 빅투스들은 좀 괜찮나요?" 빅투스에 대해 물어오자 윌드린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신 조금 뻔뻔하군요? 우리 애들을 통구이로 만들어 놓고 괜찮냐니..." 그녀가 시비조의 말투로 나오자 뮤스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따지기 시작했다. "그게 왜 내 잘 못이라는 거죠? 그럼 그냥 목 내밀고 '날 잡수세요!' 라고 하란 말입 니까?" 그가 흥분하는 기색을 보이자 윌드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칫. 내 동생과 비슷한 또래 길래 장난 좀 쳤더니 예민하게 반응하네요? 그렇게 화를 내다니." "동생?" 윌드린의 입에서 동생이란 말이 나오자 뮤스의 뇌리에는 크라이츠의 얼굴이 떠올랐 다. [누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라이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던 뮤스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 었다. [과연... 신경이나 쓰실까?] 뮤스가 안색을 여러번 바꾸며 도리질 칠 때 윌드린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내참 별 웃기는 꼴 다보겠네요. 혼자 인상을 구겼다가 폈다가 고개까지 흔들고... 뭐하는거예요?" "아...아니예요."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뮤스는 민망함에 다시 치쿤들에게로 눈을 돌렸고, 그를 보며 피식 웃던 윌드린은 마을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거죠?" 그녀의 물음에 뮤스는 땅에서 주운 모이를 치툰들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야죠. 새벽 안개가 개면 출발 할 생각이예요." "푸하하하! 혼자 돌아갈 생각이예요?" 그녀가 웃자 의아해진 뮤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풋! 이렇게 웃어서 미안해요. 당신 정말 제 정신이 아닌가 보군요? 이곳이 어디인지 어제 말해주지 않았나요?" "물론 들었죠. 드베인 숲이라고..." "맞아요! 이곳은 대륙 3대 마역중의 한곳이라구요. 이 마을은 결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마물들의 침입을 받지 않지만 이 마을을 나가면 마물들이 들끓는다구요." "결계?" "아주 먼 옛날, 저희 선조들이 이 숲에 정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마물들과 혈투 를 벌이고 있을 때 클리츠라는 대마법사께서 이 주변을 결계로 막아 주셨죠. 그 이후 로 이 마을에는 마물들이 침입을 하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다른 이야기로 빠졌는데, 이곳에서 단신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한시 바삐 돌아가야 하는 걸요?" "글쎄 이 숲에서 혼자 빠져 나간다는건 불가능 하다니까요!" 뮤스와 윌드린이 서로 고집을 피우고 있을 때, 그들의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는데 장난기가 한껏 베어나는 목소리였다. "누나! 이번엔 아주 미친 사람을 데리고 왔군?" 그 말을 들은 뮤스는 두 눈에 쌍심지를 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한참이 나 올린 후에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는데 2멜리는 우습게 넘기는 키와, 검 붉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자였다. 그는 쌀쌀한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털로 만들어진 짧은 웃옷 사이로 구리 빛 건강한 근육들을 내 놓고 있었고, 얼굴을 조금 가리고 있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자 왼쪽 눈의 섬뜩한 상처를 볼 수 있었는데, 날 카로운 무엇인가에 베인 상처인 듯 했다. 그 모습에 압도당한 뮤스가 입을 뻥긋거리 고 있을 때 윌드린이 말했다. "벌쿤! 네가 웬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늘은 아침부터 신기한 일들만 일어나는 걸? 뮤스군 인사해요. 내 동생 벌쿤이예요." 벙찐 표정을 짓던 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그럼 이 사람이 제 또래라던 그 동생?" 그의 물음에 윌드린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벌쿤은 피식 웃었다. "누나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띨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벌쿤의 말을 들은 뮤스는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누가 띨띨하다는 거야?! 멍청하게 덩치만 큰 녀석이!" 하지만 벌쿤은 그의 말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빙글 웃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 던 벌쿤은 허리를 숙이며 뮤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도 성깔은 있는데? 만나서 반가워 벌쿤이라고 해. 올해로 열 여덟살이야!" 외모와는 다르게 치기어린 말투로 자신을 대하는 그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한 뮤스 는 그저 그의 성격이겠거니 생각하며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이름은 뮤스야. 나이는 열 아홉 이지." "어라? 그럼 형이네?" "에? 혀..형?" 실상 뮤스의 나이는 열 여섯 살로 벌쿤보다 어렸기에 그는 형소리를 듣기가 조금 난 처했지만 이미 열 아홉이라고 말한 이상 어쩔 수 없었기에 그대로 받아 들였다. 반면 벌쿤은 뮤스의 난처해하는 표정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잘도 형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 다. 벌쿤을 바라보던 윌드린은 주의를 모았다. "자 벌쿤은 일어났으니 빨래랑 밥을 해. 이 누님이 너무나 배가 고파. 아 그리고 뮤 스 나는 벌써 스물 다섯살 씩이나 먹었으니 말을 놔도 될까? 어머. 이런 벌써 놔버렸 구나." 윌드린의 자기 멋대로인 성격이 크라이츠와 비슷하다고 느낀 뮤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그렇게 하세요." 뮤스와는 대조적으로 벌쿤은 뭐가그리 신이 아는지 뮤스의 등을 치며 말했다. "형! 형도 나랑 같이 밥하러 가자!" "밥?!"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밥을 하는 건 여자들이 하는 일인데 네가 한다는 말이야? 하긴 우리 누님도 하지 않 는 것은 마찬가지 이지만..." 그의 물음에 더욱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것은 벌쿤이었다. "에? 그게 무슨 말이야. 빨래나 설겆이, 밥을 하는 것이야 말로 남자들이 해야 할 일 이라구! 집에서 남자들이 내조를 잘해줘야 마을이 두루 평안하지! 잔소리 말고 따라 와." 뮤스는 벌쿤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혼란 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럼 여자들은 뭘 하는데?" "형은 정말 머리를 크게 다쳤나? 남자들이 살림을 하면 여자들이야 빅투스들을 몰고 사냥이나 채집을 하러 나가는거지."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정말 자신이 머리를 크게 다치지 않았나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때 윌드린이 나서며 뮤스의 의심을 지워 주었다. "후훗. 이곳은 여성 중심 사회여서 그래. 도시 같은 곳이야 남자들이 힘이 세니까 남 성중심 사회지만, 이곳은 그렇지가 않거든. 빅투스를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잘 다루 기 때문에 사냥이나 채집 활동이 여자의 일이 된 거지. 남자들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맨손으로 마물들에게 이겨 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듣던 벌쿤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누나! 그럼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살림을 한단 말이야? 여자답지 않게? 푸하하하! 정 말 웃기겠군. 그곳의 여자들은 요리라도 할 줄 아나?" 윌드린의 말을 이해를 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어지러운 상황에 뮤스는 머리를 부여 잡으며 흔들었고, 그제서야 뮤스는 왜 여자들만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 다. "에휴 모르겠다. 이곳에 왔으니 이곳의 법을 따라야 겠지? 가자 벌쿤 아침이라도 얻 어먹으려면 일이라도 해야하니..." "그래 날 따라와." 벌쿤이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가자 뮤스는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대공학자> #67 -------------------------------------------------------------------------------- -------------------------------------------------------------------------------- Ip address : 211.227.14.8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마을의 뒤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연기가 나고 있는 집이 보였다. 벌쿤은 그곳을 가리 키며 마을 살림터라 했고, 마을의 남자들이 함께 모여 식사 준비와 빨래 등의 집안 가사를 한다고 했다. 과연 그곳에 들어가자 일찍 일어난 남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 르고 식사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벌쿤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는지 빨래를 하고 있던 갈색 머리의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이봐 벌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나서셨나? 장가갈 때가 되니 철이 든 건가? 후 훗." "어제 뭘 잘못 먹었는지 뒤가 급해서 일어났어요. 오늘 빨래는 얼마나 되요?" "말도 마! 아무튼 여자들이란 남자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던져 놓으면 다 라니까. 쳇!" 그는 앞에 쌓인 빨래 산을 보며 투덜거렸다. "여자들이 다 그렇죠 뭐." "그건 그렇고 옆에 그 사람은 누구야? 마을 사람은 아닌거 같은데?" "아. 이쪽은 뮤스형이예요. 어제 누나가 숲속에서 데리고 왔거든요." "아 그래?" 빨래를 하던 그는 물에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다가와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반갑군요. 큐블레인이라고 해요. 이제 함께 살게 됐으니 잘 지내봐요." "아네...네? 함께 살다니요?" 큐블레인의 손을 마주잡던 뮤스는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이 숲에 들어온 이상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죠. 뮤스씨는 어디서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죠?" "전 라이델베르크에서 왔어요." "이런 인연이 있나! 저 역시 라이델베르크에서 왔죠. 아니 온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 려보니 이곳이었지만." "이곳의 마물들이 정말 두려운 존재인가요? 평생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 먹게 할만큼? " 그의 물음에 큐블레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돌아 갈 수 있으면 진작 돌아갔겠죠. 하지만 이곳은 드베인 숲이니 살아서 들어오는 것도 힘들지만, 살아서 나가는 것도 힘들죠... 아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체 라도 나간다면 정말 다행이니까요." "도대체 마물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이기에..." "아마 뮤스씨도 엄청나게 운이 좋았을 겁니다. 이 숲에서는 열 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마물들의 습격을 받죠.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인간인 이상 체력의 한계가 있어 그 마물들을 모두 물리칠 수는 없거든요." 뮤스와 큐브레인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벌쿤이 심심하다는 듯이 둘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일은 언제 할거예요? 조금만 늦어도 여자들이 성화인데 큐블형이 책임 질거예요? 전 아침 준비나 도울게요." "하하. 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냐? 그럼 뮤스씨는 나와 함께 빨래나 하죠." 큐브레인은 대답을 하며 빨랫감을 들었고, 벌쿤은 십 여명의 남자들이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뮤스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빨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큐브레인이 하는 양을 지켜 보고있었다. "훗. 뮤스씨 눈에는 굉장히 이상해 보일 지도 몰라요. 저 역시 이곳에 왔을 때 엄청 난 혼란을 겪었으니... 하지만 조금 살다 보면 금방 익숙해지죠.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답니다. 일단 앞에 있는 빨랫감을 들어서 이렇게 때리세요. 힘있게 때려 야 때가 잘빠지거든요." 큐브레인은 보란 듯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빨랫감을 휘둘러 돌 바닥을 때리기 시작 했다. "이렇게 말이죠!" -착! 착! 착! 조선에서 방망이를 사용하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세탁 방법이었는데, 꽤나 재미있는 모습이라고 생각 한 뮤스 역시 쌓여있는 빨래더미에서 빨랫감 하나를 집어 물에 적신 후 큐브레인이 한 것과 같이 돌바닥을 힘차게 때렸다. -착! 착! 착! 그렇게 몇 번 하자 빨랫감이 땅을 때릴 때마다 느껴지는 손의 감촉이 시원스러웠는 데,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생긴 근심들이 하나씩 털려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후련한 느낌이라니! 가끔 고민이 있을 때 빨래라도 해야겠군...] 뮤스의 모습을 보던 큐브레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훗 뮤스씨는 처음인데도 상당히 잘 하는군요?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 없겠어요. 얼굴도 잘 생겼겠다,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오겠는걸요?"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어 보인 뮤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에 있는 빨 래감을 휘두를 뿐이었다. -착! 착! 착! 착! 착! 무아지경에 빠져 빨랫감들을 휘두르던 뮤스는 더 이상 손에 잡히는 빨랫감이 없어지 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남성 주부(?)들이 자신을 바라 봄을 느꼈고, 그 이유를 모르던 뮤스는 큐브레인을 힐끔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소 근댔다. "저 사람들은 왜 절 바라보는거죠?" 뮤스의 질문에 큐브레인은 그의 손을 거친 빨래를 하나 들어 올렸다. "이걸 봐요... 왜 저들이 뮤스씨를 바라보는지 알겠죠?" 그의 손에는 너덜너덜 해진 빨랫감이 들려있었다. 빨랫감의 원래 모습은 저렇지 않았 다는 것을 알고 있는 뮤스였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큐브레인과 빨래감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저... 그 빨랫감은 왜그리 넝마가 되어있죠?" "이것 뿐만 아니라 저기 쌓여있는 빨래감들도 확인해 보세요..." 그의 말에 몸을 돌려 자신 옆에 쌓여있는 빨랫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모두 그와 같은 모습이었고, 순간 현기증을 느낀 뮤스는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 했다. [이런! 무의식 적으로 뇌공력을 사용했구나... 이를 어쩌지?] "이..이걸 어떻게하면 좋죠?"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빨래가 이렇게 되다니... 정말 신기하군요." "하..하.. 옷들이 너무 낡아서 그런게 아닐까요." "이 옷들 모두 다 말이예요?" "그..글쎄요." 뮤스를 바라보던 남자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이제 이일을 어떻게 할거예요? 우리 부인이 내일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하면 난리 가 날텐데!" 또, 옆에 서있던 남자는 넝마가 된 빨랫감들을 뒤적이며 울상을 지었다. "이건 우리 애의 잠옷이고, 이건 아내의 바지인데... 이를 어째." 어처구니없이 죄를 지은 뮤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침 음식을 장만 하던 벌쿤이 빨래터가 소란스러움을 느끼며 걸어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죠?" 그의 물음에 뮤스에게 인상을 쓰던 남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 했다. "저 사람이 빨래거리를 걸레로 만들어 놨어!" "이것 좀 보라구! 이게 어디 빨래인가? 안 그래도 집 청소다 애들 뒤치닥거리다 바빠 죽겠는데..." 원망의 목소리를 들어보던 벌쿤이 인상을 굳히며 사람들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조용히 좀 하세요! 처음 이곳에 온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뮤스형 나가요." 벌쿤은 억척스러운 손으로 뮤스의 손을 잡아끌며 마을 식당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손 에 이끌려 나온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저기. 난 저렇게 될 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쿤은 순간 크게 웃으며 땅을 치기 시작했다. "프하하하하! 크큭... 어..어떻게. 프흣. 빨래를 걸레로..크큭. 만들어 놓을 수가.. 키키킥.."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한참을 웃은 후에야 조금 진정이 되 는지 벌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헥헥..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쿠쿡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형. 저 정도야 사람들이 몇 일 바느질을하면 만 들 수 있으니까. 그런데 형은 얼마나 힘이 좋길래 빨래를 때 려서 넝마를 만들 수 있어?" 벌쿤이 별일 아닌 듯 말을 하자 뮤스는 안심이 되는지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그 눈빛들이란... 아무튼 빨리 이 마을을 나서야겠는 걸." "형은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이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야?" "그래야겠지. 비록 이렇게 보여도 내 몸 하나 지킬 수는 있거든." "글쎄 전혀 믿겨지지는 않는데?" "난 너 같은 근육질이 빨래나 식사준비를 하는게 더 안믿겨진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야? 물먹은 빨랫감을 휘두르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데!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양의 스프솥을 들어 나른다고 생각해봐. 이 정도 근육 은 기본이라구!" 그의 설명을 듣던 뮤스는 이곳에서 더 말해봐야 자신만 이상해지는 것 같았기에 건성 으로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래 그래. 그런데 정말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 없을까?" "물론 마물들을 이겨낼 수 있다면 누가 막는 것도 아니니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그 렇지만 마물들을 모두 상대하고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 한거지.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 안해줘도 돼..." "흠 우리들 역시 결계가 아니라면 이곳에서 한달 이상 버틸 수는 없을 거야." 뮤스는 손으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하긴... 이 숲에 사는 자들은 이들과 레인져들 뿐이라고 했으니... 잠깐 레인져?] 갑자기 윌드린이 말하던 레인저가 생각난 뮤스는 급히 벌쿤에게 물었다. "벌쿤! 레인져들은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 현상금을 받는 것이지?" 그의 입에서 레인져라는 말이 나오자 벌쿤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들은 한 두 명이 아니야. 거의 이백명에 달하는 집단이지... 이 숲에서 혼자 살아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 정도의 숫자가 함께 움직인다면 불가능 한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그들에게 찾아간다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도 있겠구나?" "혼자 가는 것보다야 훨씬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그들도 매일 죽어 나가고 있어. 그들의 무리라고 언제나 안전 한 것은 아니거든?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고 있는 자들 이니."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혼자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조금 이나마 길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럼 그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지?" 벌쿤은 뮤스의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흥. 형은 그들이 얼마나 못된 녀석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누나들이 매일 같이 보초를 서는 것도 다 그들 때문이라구." "뭐? 마물들 때문이 아니라?" "형은 정말 바보 같다니까. 이 마을은 결계 때문에 마물들이 들어오지 못한단 말이 야."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벌쿤은 굵직한 목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요즘들어 레인져 녀석들이 우리 마을을 노리고 있어. 매일 같이 풀어놓은 빅투스들 이 그들의 화살과 칼에 맞아 죽고있거든. 이 곳이 숲의 유일한 안전지대이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려는 것이지. 못된 자식들!" "그래서 너희 누나가 레인져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분노한 것이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거든. 아마 형이 그들을 찾아 간다 고 해도 오히려 적으로 돌려버릴 만큼 나쁜 녀석들이지." "이런..." 하나밖에 없던 실마리가 조차 사라지자 뮤스는 다시 미궁에 빠져 버렸다. [그렇다면 전뇌지자총통 하나만 믿고 혼자 나서는 수밖에 없나?] 그는 눈을 돌려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뮤스는 벌쿤을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유글렌 부족은 함께 장만한 음식들을 나 누어 집으로 가서 식사를 했는데, 이미 식탁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던 윌드린 이 식탁을 두들기며 벌쿤을 재촉했다. "벌쿤! 나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아침 먹고 빨리 채집하러 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꾸물거려?" "미안해 누나. 오늘 아침에 일이 있어서." "일?" "글쎄 뮤스형이 빨래터에서 빨랫감들을 모두 넝마로 만들어 버렸거든." "푸훗! 그게 정말이야?" 그녀에게 역시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는지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뮤스는 별달리 할말 이 없었기에 조용히 손에 들려있는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벌쿤은 바구니에 잔뜩 들어있는 열매를 하나씩 내려놓았는데 이런 열매를 처음 보는 뮤스는 그들이 어떻게 먹는 지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벌쿤과 윌드린 역시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진 뮤스가 물었다. "왜 식사를 안하죠?" 그의 물음에 윌드린이 대답해 주었다. "원래 우리 부족은 손님이 먼저 음식을 먹은 후에 주인이 먹을 수가 있거든. 아무리 불청객이라지만 네가 먹어야 우리도 먹는 것이지." 그녀의 말에 뮤스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저... 그런데 이걸 어떻게 먹는 건지도 모르는 걸요?" "아! 하긴 이 부레열매는 이곳에 밖에 나지 않는 것이니까 어떻게 먹는지 잘 모르겠 군. 그럼 날 따라서 먹어봐." 윌드린은 주먹만한 부레열매를 하나 집어 중간을 칼로 갈랐다. 그러자 열매가 벌어지 며 새하얀 속이 보였고, 그 속으로 손을 넣더니 한 웅큼 뜯내는 것이었다. "자 이렇게 뜯어낸걸 스프에 찍어서 먹는거야." 그녀의 설명대로 뮤스 역시 칼로 부레열매를 반으로 갈랐고, 열매 속을 뜯어냈다. 그 것은 폭신폭신한 감촉이었는데, 스프에 찍어 입에 넣자 밀로 만든 빵과 거의 흡사한 맛이 느껴졌다. "와! 꼭 빵 같군요?" "역시 신기해하는군. 우리도 들자꾸나 벌쿤." 이 색다른 방법을 즐기며 식사를 할 때 벌쿤이 뮤스에게 말했다. "아참 뮤스형. 정말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야?" 벌쿤의 물음에 부레열매를 한 웅큼 입에 넣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보던 벌쿤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틀림없이 죽을건데? 이곳이 드베인 숲인 것을 알고도 나가 려고 애쓰는 사람은 형이 처음이야." 죽음이라는 말에 뮤스는 입에든 음식물을 삼키며 벌쿤을 바라보았다. "글쎄... 죽을지 살지는 닥쳐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 고..." "생각? 생각만 한다고 이 드베인 숲에서 살아 나갈 수는 없다구. 그러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함께 사는게 어때?" 벌쿤의 말에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안돼. 나가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 둘의 말을 듣던 윌드린이 짜증이 섞인 말투로 둘을 꾸짖었다. "무슨 남자들이 식탁에서 그렇게 말이 많아? 난 이만 나가 볼께. 이만 채집나갈 시간 이 다되었거든?" 그녀의 말에 잠시 기죽어 있던 벌쿤이 빈 접시를 치웠다. "응 누나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고, 뮤스 너도 오래 살고 싶으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곳에서 살림이나 배워."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정상적인 세상에서 살던 뮤스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인 말이 었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끼익! 털컥.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접시를 치우던 벌쿤이 투덜거렸다. "칫... 남자들도 여자들 못지 않게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니까... 형 다 먹었으면 접시 치우고 나가자. 오늘 큐브레인형 집에서 동네 남자들 모임이 있거든." "글쎄... 나는 좀 빠지고 싶은데? 빨래 일도 있고 해서 그곳에 가면 눈치만 보일 것 같고 말이야." "아...그렇겠는걸?" "그럼 나는 생각 좀 하고 있을 테니 다녀와." 벌쿤은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입었고, 기름등에 불을 붙인 그는 뮤스를 향해 손을 흔 들며 집을 나섰다. 이곳은 낮이라고 해도 빛이 거의 들지 않았기에 기름등에 의지하 고 있었던 것이었다. "형 그럼 갔다 올께. 혹시라도 심심하면 놀러와. 바로 건너편 집이니까." "알았어. 잘 다녀와라." -끼익 탈칵. 벌쿤이 나가자 집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고, 테이블에 올려진 등불이 흔들렸다. 뮤스 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정신없는 마을이군. 여자가 일을 하러 나간 후에 남자들은 모여 수다 를 떨다니..." 한심하다는 투로 그들에 대해 말하던 그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한번 떠올리며 드베인 숲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68 (30) 쉴드옥토퍼스 해가 뜬지 오래였지만 높은 나무들로 인하여 숲 속까지는 햇살이 미치지는 못하고 있 었다. 아무런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듯 무거운 적막감이 흐르는 이곳에 그 정적을 깨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헉헉... 모두들 당한건가? 제길!" 우거진 수풀을 몸을 던져 뚫고 나온 인영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는데, 등으로는 긴 활을 매고 있었고, 허리춤에 대 여섯 개의 단검이 달린 튼튼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 는 자였다.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으며,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낭패다... 하필면 산란기에 이곳으로 들어오다니!" 그가 굵직한 나무에 등을 기대어 거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소 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자신과 함께 술을 즐기던 동료이리라 생 각한 그 인영은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화풀이 하듯 주먹으로 나무를 때렸다. "이런 젠장 맞을! 또 누군가가 당했군! 이제 다음은 나일지도 몰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이 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금 다리를 움직여 숲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십 여분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자신이 이 숲에서 레인져로 활동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거리를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리의 마물 조차 만나지 않았던 것이었 다. 조금 생각을 하는 듯 하던 그는 딱딱하게 경직되어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후훗.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니군... 아무래도 유글렌부족의 활동범위 인 듯 한데? 후우 이제는 살았어..."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있을 때 그가 서있는 공터 주변의 땅으로 무엇인가가 꿈틀 거리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슥 하지만 그는 아무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는지 굵직한 나무에 등을 기대 앉으며 목을 조이고 있는 가죽갑옷의 버클을 풀었다. 그제서야 숨을 쉬기가 편한지 만족한 웃음을 짖고 있었다. "후훗. 이제야 정말 살 것 같군. 아무래도 레인져를 그만 둬야겠어. 하루에도 십여명 씩 죽어 나가는 이곳이 뭐가 좋다고 지원을 했었는지... 하긴 요즘도 대륙의 바보들 은 이런 것도 모르고 돈에 눈이 멀어 하루가 멀다하고 지원하니... 쯔쯧 불쌍한 녀석 들. 으음? 또 왜 이렇게 목이 조이지?" 갑옷의 버클을 풀었는데도 목이 조금씩 조이는 것을 느낀 그는 손을 올려 목 주위를 만져 보자 이질 적인 무엇인가가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이것은... 으읍!" 하지만 그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숨이 막히는지 목 주변을 부여잡고 버둥대기 시작 했지만 그의 목을 졸라오는 힘은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뮤스는 테이블을 밝히고 있는 기름등의 불빛 아래로 무엇인가를 만지고 있었다. 기본 모양은 길죽한 지자총통의 그것이었지만, 그 뒤쪽으로 수많은 장치들이 얽혀 있었기 에 지자총통의 원래 크기에 비하여 많이 길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예술품을 감상 하듯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역시 전뇌지자총통의 출력을 늘려야겠어. 마물들이라도 생명을 빼앗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는 가방에서 조임쇠와 인두를 꺼내 전뇌지자총통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십여 개의 나선형 못을 돌려 출력장치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안쪽으로는 알지 못 할 부속들이 서로 맞물려 출력장치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흠 외장을 다시 보강해서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야 겠는 걸? 자 어디보자... 이 단자 를 반대쪽의 단자로 연결을 하면 저항을 더 줄일 수 있고... 광선방출막의 거리를 가 까이 하면 방출 폭이 넓어지고..." 알지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던 뮤스는 자신이 손으로 짚었던 곳으로 인두를 가져다 대 며 납으로 고정되어있는 것들을 녹였다, 붙였다 하기시작 했다. 그러기를 한시간, 이 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쳐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휴우. 이제는 다 된 건가? 나무를 깎아서 외장이나 만들어야 겠군..."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몸을 풀어본 그는 몸을 일으켜 집밖으로 나섰다. 나무를 구 하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 봤지만 하늘이라도 찌를 듯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를 베기는 무리였기에 장작으로 쓰기 위해 구해놓음직한 땔감을 찾기 시작했다. 집의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그의 예상대로 장작들이 쌓여있었고, 더욱 좋은 것은 이곳의 나무 답게 단단하고 크다는 것이었다. "이거 한 도막이면 충분하겠는 걸?" 쌓여있는 장작 중 옹이가 없고 결이 마땅한 것을 고른 뮤스는 가방에서 연장들을 꺼 내 장작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굉장히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나무를 깎아내 고 있었는데, 그에게 목공기술을 가르친 브라이덴이 봤더라도 놀랄만한 솜씨였다. 하 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장작 은 점차 모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미리 만들어놓은 전뇌지자총통의 본체가 딱 들 어갈 만한 크기로 속을 파내었고, 겉은 손으로 잡기 좋게끔 유선형으로 깎아내고 있 었다. -후! 후! 이제 거의 완성됐는지 깎아낸 외장을 향해 입 바람을 불며 그것에 묻어있는 티끌을 날리고 있었다. "이제 조립을 해볼까?" 완성된 외장을 들고 집으로 들어온 뮤스는 테이블 위의 전뇌지자총통 본체를 외장의 한쪽에 끼워넣었고, 반대쪽 외장을 부착하며 완성 할 수 있었다. "후훗! 이 정도면 마물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충분 할거야!" 완성된 전뇌지자총통을 바라보며 득의의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것을 이리저리 겨누어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아참 시험을 해봐야 할텐데... 아! 장작을 향해 쏴보면 되겠구나!" 시험 방법을 생각해낸 뮤스는 거침없이 외장을 만들던 곳으로 나가 큼지막한 장작 하 나를 들어내 땅위에 내려놓았고, 열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선 그는 심호흡을 하며 장 작을 바라보았다. "우선 저압 발출부터 시험해 보자..." 손에들린 전뇌지자총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뮤스는 그것을 들어올려 땅에 내려놓은 큼지막한 장작을 겨냥하며 그것이 들려있는 손으로 뇌공력을 끌어올렸다. -치지지직... "뇌공력 삼성 발출." 그는 나직한 말과 함께 손에 모아둔 뇌공력을 전뇌지자총통으로 흘리자, 순간 눈부신 빛 한줄기가 전뇌지자총통으로부터 뻗어나와 땅위에 올려진 장작을 관통해 버렸다. -피융! 눈부심에 눈을 찌푸리던 뮤스는 장작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본 뮤스는 멍청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이럴 수가 아무렇지도 않다니." 과연 땅위에 올려진 장작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뮤스는 이 허무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듯 말도 안돼는 이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혹시 저 장작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그랬기 때문에 엄청난 강도를 지니고 있다는... 그런데 어떻게 내가 깎았을까?" 결국은 스스로도 헛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땅바닦에 주저앉아 허망한 표정을 짓고있던 그는 자신의 손에 쥐고있는 전뇌지자총통 을 바라보자 다시 화가 치미는지 힘껏 장작을 향해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 총에 맞은 장작은 마치 망령이라도 되는 듯 검은 재로 화해 바람에 흩날렸고, 그것을 본 뮤스는 두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이...이럴수가... 이렇게 엄청난 위력이었다니..." 이제서야 전뇌지자총통의 위력을 두눈으로 확인한 뮤스는 급히 재가 날리는 곳으로 달려가 전뇌지자총통을 주웠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야호! 만세! 이제 나는 돌아 갈 수 있다! 하하하하하!" 그가 미친 듯이 웃고 있을 때 마을 회의를 하던 사람들이 그의 웃음 소리를 들었는지 큐브레인의 집에서 하나 둘 나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벌쿤이었는데 뮤 스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뮤스 형! 무슨일이야!" 그를 바라보던 뮤스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벌쿤! 난 이제 돌아 갈 수 있어! 하하하!" 뮤스의 외침에 서로를 바라보던 마을 남자들은 고개 가로저으며 혀를 찼고, 그중 한 명이 벌쿤에게 말했다. "쯔쯧... 가끔 저렇게 미치기도 하지... 벌쿤 자네가 잘 좀 위로해주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슬픈표정을 지었다. "네... 가사일이 서툴러서 그렇지 좋은 형이었는데..." 막상 본인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지도 모르고 연신 만세를 부르는 중이었다. -툭탁! 툭탁! "에헤라!!!" 전뇌지자총통을 완성한 이후로 라이델베르크로 돌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 아진 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통이 가운데 매달려있었고 복잡한 나무 부속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는 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옆에서 뜨개질을 하던 벌쿤이 뜨 개바늘로 그가 만들고 있는 통을 찌르며 물었다. "형! 이건 뭐야? 이런걸 만들 시간 있으면 뜨개질이나 배워! 그래야 나중에 여자들 눈에 들지..."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콧잔등을 쓸며 씨익 웃었다. "후훗. 난 내일 이곳을 떠날 테니까 그런 것을 배울 필요가 없어. 그리고 이건 내가 이곳을 떠나는 기념 선물이야." 뜬금없는 뮤스의 말에 놀란 벌쿤은 그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 정말 미쳤군... 생각을 해본다더니 결국은 그런 생각을 했던거야?" 그가 놀라며 물을 때 뮤스는 나무를 깎던 손을 멈추며 가볍게 웃었다. "훗 이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괜찮다니까." "방법? 어떤?"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이거나 사용해봐." 뮤스가 말을 돌리자 벌쿤은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만든 이상한 나무통 을 바라 봐야 했다. "이 통은 뭔데?" 그는 나무통의 이곳 저곳을 살펴 보고있었지만 이 복잡하게 생긴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지 골똘히 생각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 던 뮤스는 나무통의 아래에 달린 두 개의 발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훗! 저 발판들을 번갈아 가면서 밟아봐." "응? 이렇게?" 뮤스의 설명대로 벌쿤은 나무통 앞에 서서 발판을 밟기 시작하자, 위쪽에 매달려있는 나무통은 규칙적인 방향으로 빠른 속도를 내며 움직였다. 발판을 밟으며 땀을 흘리던 벌쿤은 의아한 눈빛으로 뮤스를 바라봤고, 뮤스의 설명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 다. "그건 빨래기야. 그 나무통 안에 물과 빨랫감들을 넣고 그 발판을 밟으면 저절로 빨 래가 되는 것이지.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넝마로 만든 빨랫감들이 너무나 미안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의 설명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벌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야? 에이! 겨우 이런 것이 빨래를 해준단 말이야?" "훗 믿겨지지 않으면 시험해봐라." "그래? 한번 해보지 까짓 것."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집으로 들어가 한 뭉치의 빨랫감들을 가지고 나왔고,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빨랫감들과 함께 나무통속으로 넣은 그는 젖은 손을 털었다. "이제 다 된거야? 그럼 이 발판만 밟으면 된다 이거지?" 그의 물음에 뮤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벌쿤은 신나게 발판을 밟기시작했는데, 무거운 나무통을 움직이는 것에 비하여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팔짱을 끼고 구경을 하던 뮤스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됐을 것 같은데? 이제 안에 든 빨래들을 꺼내봐." "벌써 다됐단 말이야? 힘도 얼마 안썼는데?" "훗 세상 모든일이 힘이 든다고 다 잘되는건 아니거든." 그의 말에 동감하는지 벌쿤은 머리를 긁적이며 나무통안에 들어있는 빨래들을 꺼냈는 데, 깨끗하던 물들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벌쿤의 손에 이끌려 나온 빨래들은 언 제 더러웠냐는 듯이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이 신기한 현상에 놀란 그는 뮤스를 바라 보며 입을 다물 줄 모르고 있었다. "벌쿤 입에 먼지 들어간다. 확인했으니 됐지? 앞으로 잘 사용하라구!" "혀..형!" 울먹거리며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감동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매일 같 이 산처럼 쌓인 빨랫감들과 싸우는 것이 좀 힘들던 것이었던가? 그것을 이 신기한 나 무통이 해결해 줄 것이니 이러한 그의 반응도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 형!" 뮤스는 감동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연민의 표정을 지어줬고, 눈물을 훔치던 벌쿤은 맑게 웃으며 말했다. "형! 이 사실을 모든 주부들에게 알려야 겠어! 그럼 다녀올게!" "그...그래라." 벌쿤은 설레이는 마음으로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뮤스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자신이 하룻밤 묵었던 빈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공학자> #69 -츠츠측... 츠츠측... 일단의 무리가 숲을 헤쳐가고 있었다. 숲의 어두움 때문에 그들의 수는 확실치 않았 지만 대략 서른 명 정도였고, 그들을 둘러싼 모습으로 걷고 있는 짐승들은 잘 훈련이 라도 받은 듯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심술이 난 목소리로 말했 다. "쳇. 오늘 같은 날 채집을 하다니... 사냥이 재미있는데..." 높은 톤임을 미루어 봐서 여자의 것이라 짐작 할 수 있었고,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채집이 덜 위험하잖니. 차라리 따분한 채집이 나아." "윌드린 언니. 오늘 따라 마물들 소리가 안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녀의 물음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그녀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고, 오른 손 을 위로 들어 일행들을 멈추게 했다.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같아. 정말 이상한걸?" 고개를 돌려 숲속을 두루 살펴보던 그녀는 불길한 낌새를 느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마을로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윌드린과 대화를 하던 나이 어린 여성은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하지 못하는 표 정이었다. "에이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우린 유글렌부족이란 말이야. 드베인 숲의 유일한 부족! 겨우 이런일로 겁을 먹어서야 되겠어?" 이때 일행들의 전방에서 빅투스들이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르... 그 소리를 들은 윌드린은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일 행들은 그녀의 신호대로 제자리에 멈춘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행들의 행동을 확인한 윌드린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빅투스들이 으르렁 거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박... 사박... 땅에 쌓인 나뭇잎들을 밟으며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더 없이 조심스러웠는데, 빅투스 들에게 까지 다가가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주시했다. [나무에 뭔가가 기대어 있군...] 그녀는 손을들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일행들에게 대기신호를 보냈고, 세 마리의 빅투 스와 함께 그곳으로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빅투스들이 발견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인영이었다. 고개를 움 직이며 그것을 바라보던 윌드린은 빅투스들의 귓가에 무엇이라고 속삭이자, 빅투스 한 마리가 발자국 소리를 숨긴 채 그것을 향해 걸어들어 갔고, 지척에 달하자 빠른 속도로 다리부근을 물었다. 하지만 그 인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긴장 이 풀어진 윌드린은 손을 펴보이며 대기상태를 해지 했고, 등불에 불을 붙이며 그 인 영이 죽어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건장한 남성이 죽어있었는데, 가벼운 가죽 갑옷을 착용한 것이나, 등에 활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아 레인져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녀가 시신을 살피고 있을 때 일행들이 다가오며 물었다. "언니. 레인져의 시체같은데 왜 여기서 죽어있을 까요?"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은건가? 마물들에게 당했다면 온 몸이 난도질되어 있어야 될텐 데..." 그녀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시신을 살펴보던 윌드린은 시신의 혀가 입밖으로 빠 져 나와 있음에 주목했다. "혀가 나와있는 것을 보니 질식사를 한 것 같아... 목이 졸려죽은 거야." 과연 그녀의 말대로 목을 유심히 보니 살의 색깔이 변해 있는 것이 목이 졸린 자국이 었다. 그곳에 등불을 가져다 대자 피가 뭉친 듯 변해있는 살의 색깔 사이에 이열의 반점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윌드린의 입에서는 떨리 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쉬...쉴드옥토퍼스." 그녀의 입에서 쉴드옥토퍼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주변에서 자신들끼리 의견을 주고받 던 유글렌부족의 여성들은 윌드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짓기 시작했 다. "언니. 그렇다면 쉴드옥토퍼스가 이곳까지 왔다는 거예요? 그것은 물 속에 사는 마물 이잖아요!" 그녀들의 물음에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던 윌드린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다금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마을로 들어가야해! 빨리 서둘러!"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유글렌부족의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빅투스들을 방어대형 으로 위치시키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빠르게 발을 놀리던 윌드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입바람으로 불며 말했다. "지금은 쉴드옥토퍼스의 산란기야." "그렇다면 산란장소를 이곳으로 택했다는 말이야? 그것들이?" "재수가 없게 된 거지. 하필면 우리부족의 활동지역으로 들어오다니..."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지 질문을 하던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아까 죽어있는 시신은 이곳을 살피고있던 레인져 중 한 명일 거야. 다른 레인져들도 어쩌면 모두 그것들에게 당했을 수도..." "그럼 우리를 못살게 굴던 레인져들이 다 죽었으니 우리에게도 더 좋은거아냐?" 순진한 그녀의 말에 윌드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냐. 쉴드옥토퍼스의 적은 레인져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부 족 까지 해당된단 말이야. 그들은 알을 보호하기 위해 산란장소 주변의 모든 생명체 를 살려두지 않지... 아무리 마을이 결계로 보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비축식량이 없 는 마을로서는 정말 위험한 상태지... 채집이나 사냥도 못한 채로 무려 네 달을 나야 하니..."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며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 다. 채집을 나섰던 여성들이 돌아오자 마을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윌드린의 보고로 인하 여 마을의 원로원에서 부족회의를 소집했고, 그로 인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을 의 공터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공터의 가운데에는 나무로 만든 큼지막한 의자 다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있는 노인들은 모두 여자였고, 다시 한번 여성 중심 의 부족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웅성웅성... 윌드린이 가지고온 소식이 이미 부족 전체에 퍼졌는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가장 나이가 연로해 보 이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조용히 하세요. 다들 이곳에 모인 이유를 알것이라고 믿어요. 그렇지만 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들어보도록 하죠. 윌드린? 현 상황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게나..." 그녀의 부름을 받은 윌드린은 허리를 한번 굽힌 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 다. "저희는 마을로부터 5켈리 쯤 떨어진 곳에서 한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건장한 남성으로 복장으로 추정해보건데 레인져였습니다. 일단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목주변으로 몰린 핏자국들을 유심히 보니 빨판자국이 있었습니다." 윌드린이 단상에 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을 때, 뮤스와 함께 사람들 사 이에 서있던 벌쿤이 입을 열었다. "형... 형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수가 엄청 없군... 하필이 면 쉴드옥토퍼스가 출몰하다니..." 벌쿤의 말을 듣던 뮤스가 고개를 올리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희 누나에게 듣긴했는데 쉴드옥토퍼스가 그렇게 무서운 마물이야?" "형이 쉴드옥토퍼스를 몰라서 그래. 평균 다리의 길이는 30멜리이고 총신장이 60멜리 에 달한다고 해. 거기다가 약점인 머리는 그 위에 거대한 방패모양의 투구가 있어서 머리를 공격하려고 하면 방패가 내려와 닫혀버리지. 그 방패를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게다가 여덟 개의 다리는 엄청나게 질기고 힘이 좋아서 칼도 잘 안 들어가는데다가 빅투스 정도는 조금만 힘을 줘도 뼈와 함께 으스러져 버리 지..." 쉴드옥토퍼스에 대한 설명을 듣던 뮤스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도 윌드린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일단 마을의 비축 식량은 열흘치 정도 양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쉴드옥토퍼스 의 산란기를 계산해 볼 때 4개월을 이런 상태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을 듣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옆에 서있는 사람들과 웅성거리며 회의장을 혼란스 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굶어야 하는 건가?" "그러게 말야. 네 달 씩이나?" "그래도 어떻게해. 밖에는 쉴드옥토퍼스가 진을 치고있는걸..." 사람들의 술렁거림을 지켜보던 장로는 다시 한번 주변은 환기 시켰다. "다들 조용히 좀 하시오!" 그녀의 위엄이 깃든 목소리는 역시 효과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입을 다물며 그녀를 바 라보았다. "윌드린, 그렇다면 수는 몇 마리 정도 되는 것이지?" 장로의 물음에 그녀는 예의바른 자세로 대답했다. "장로님도 아시다 시피 그것들은 몰려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란기를 맞은 한 쌍의 쉴드옥토퍼스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물리칠 방법은 없는가?" 잠시 생각을 하던 윌드린은 고개를 저으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희가 가진 무기나 빅투스들을 가지고는 쉴드옥토퍼스의 가죽조차 잘라내지 못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흘러나오자 겁을 먹은 마을의 남자들은 또 다시 술렁이 기 시작했고, 반대로 여자들은 두 눈에 불을 키며 전의를 태우고 있었다. 이때 마을 의 입구 쪽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한 여인이 뛰어오고 있었다. "장로님! 긴급사항입니다!"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장로는 좌우에 앉아있는 원로들의 얼굴을 한번씩 둘러 보며 뛰어온 여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느냐? 쉴드옥토퍼스가 나타나기라도 했느냐?" "그것이 아니라, 레인져들이 마을 앞에 나타났습니다." 레인져라는 말을 들은 윌드린은 적대감을 나타내며 입을 열었다. "더러운 레인져녀석들이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는군요. 그들 역시 쉴드옥토퍼스들에게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우리 마을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그녀가 흥분을 하며 말하자 장로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멈추게 했고, 나지막한 목 소리로 말했다. "윌드린 침착하거라... 일단 그들의 말이나 들어보자꾸나..." "하...하지만." 장로의 말에 뭐라 반박을 하려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알았기에 장로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장로와 원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마을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 껴있던 벌쿤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뮤스에게 물었다. "형은 어떻게 될거같아?" 그 말을 들은 뮤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후훗.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라구." "그래도 형이 한 살이라도 더 먹었으니 알 거 아냐." 나이 이야기를 거들먹거리자 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쩝 내 생각에는 레인져들이 연합하자고 제의를 해올 것 같은데?" "연합? 레인져들이?" "어쩔 수 없잖아. 그들은 머리수도 모라자는 데다가 안전하지도 못하니, 너희 부족과 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숲속에서 살아 남을 자신도 없으니 남은 하나는 연 합밖에 없는 거지." 그제서야 뮤스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한 살 많은 사람은 다른걸?" "이정도는 조금만 생각 해보면 알 수 있다구." 그들의 대화는 마을 사람들의 걸음이 멈추면서 계속 될 수 없었는데, 멀리 내다 보자 스무명 정도의 남자들이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의 말대로 싸울 의 사는 없는지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유글렌 부족의 사람들이 몰려 나오는 것을 보자 그중의 우두머리 인 듯 한 자가 걸어 나왔는데, 외소한 키에 마른 듯한 몸 집이 뮤스가 상상하던 레인져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벌쿤 저렇게 작은 몸집으로 레인져가 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오히려 작은 몸집이 큰 것 보다 더욱 편하기도 할거야. 추적이나 감시를 하려면 발자국 소리가 작아야 할 테니..." "음 그렇군..."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말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기울여 장로와 레인져 우두머리와 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레인져의 우두머리가 장로에게 다가오자 유글렌부족의 보 초를 서던 여인둘이 빅투스들을 이끌고 그를 가로막았다. "무기는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죠!" 쌀쌀 맞은 그녀의 말에 뒤에 서있던 레인져들은 인상을 썼지만, 우두머리는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고, 오히려 웃으며 자신의 몸에 걸쳐진 단검들과 활등을 그 여 인들에게 넘겼다. "이제는 된것이오?" 우두머리의 질문에 그를 가로막고있던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빅투스들을 비켜 세우며 길을 터 주었다. 그녀들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인 우두머리 레인져는 장 로의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소개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십니까. 저는 레인져들의 대장인 커크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뵈서 영광입 니다." 그의 공손한 인사를 받은 장로는 인자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저는 유글렌부족의 대표장로인 글로레센이라고 합니다. 듣던 소문보다는 예의가 바 르시군요?" 장로의 말을 듣던 윌들니은 화가 난 표정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로님! 저들은 지금 장로님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더러운 레인져들이라구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것은 윌드린이었다. "윌드린! 손님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장로의 꾸지람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윌드린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자신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죄송하군요 커크대장님. 저 아이가 아직 버릇이 없어서..." "아닙니다 장로님. 서로간에 오해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이해를 해주신다니 감사하군요. 그건 그렇고 저의 마을에 찾아오신 용건은 무엇이 죠?"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깨달은 커크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꺼냈다. "장로님께서도 이 근방에 쉴드옥토퍼스가 자리 잡은 것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네... 저희 부족에서도 지금 그 일로 회의 중이었답니다." "아!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군요. 그렇다면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저희들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물론 저희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모두 오해 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한 켠에 물러나있던 윌드린은 다시금 발끈하며 나섰다. "오해는 무슨 오해라는 것이죠? 우리가 키우는 빅투스들을 사냥해서 마물로 속여 제 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 것을 모르는 줄 아시나요? 또 이제는 마을까지 먹으려는 속샘 아닌가요?" 그녀의 말을 듣던 커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후우...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 알 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드베인 숲으로 처음 들 어왔을 때는 아무런 인간들도 살지 않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빅투스들 과 마주 쳤으니 그들역시 마물인 줄 알았던 것이죠. 그 후로부터 오해를 풀기 위해 여러번 이곳을 찾아 올까 생각도 해봤지만, 더욱 오해가 깊어질까 염려되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윌드린은 언성을 높였다. "흥! 그런 얄팍한 속임수에 속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도저히 그녀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자 커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의 눈 에 불안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가 눈에 띄었는데,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에 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 여자입니다." 커크가 손을 흔들자 그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그가 지목한 여인을 바라 보았는데 그녀를 본 윌드린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핀이 뭘 어쨌다는 거죠?" "하하. 우리가 만약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더라면 저 아가씨가 지금 살아 있을 까요?" "그게 무슨?" "저 아가씨에게 직접 물어 보시죠." 커크의 말을 들은 윌드린은 핀이라 불린 여인에게 오라는 신호를 했고, 그녀는 고개 를 숙인채로 장로와 커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자 이제 말해 보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윌드린이 재촉을 하자 핀은 겁먹은 표정을 하며 우물거리고 있었다. "저...그게..." "솔직히 말해보렴 핀. 이 사람들에게 겁먹을 필요는 없단다." "그...그게 아니라... 예전에 빅투스들을 데리고 주변을 둘러보러 나갔을 때 레인져 들의 덫에 걸린적이있었어요." 그녀의 말을 듣던 윌드린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커크를 쏘아봤다. "흥! 당신들은 이렇게 우리 부족의 활동 지역이란 것을 알면서도 덫을 놓곤 했죠!" 윌드린의 말을 들은 커크는 당황하며 그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아...아닙니다! 그곳에서 고블린들의 흔적을 찾아냈기에 덫을 놨을 뿐입니다!" "흥! 거짓말 하지마세요!" 둘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잠자코 보고만 있던 핀이 나서며 말했다. "윌드린 언니... 그분 말이 맞아요. 그때 저 역시 고블린들의 발자국을 보고 그들을 잡기위해 갔다가 저분들의 덫에 걸린 거니까요. 그래서 제 빅투스들과 제가 상처를 입었는데, 자상하게 치료도 해주시고... 마을 앞까지 바래다주시기도 했어요." 핀의 해명을 듣던 윌드린과 커크의 표정은 서로 상반되었는데 커크는 다행이라는 듯 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윌드린은 아직도 못믿겠다는 듯이 핀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런 둘 사이의 어색함이라도 정리하려는지 장로가 입을 열었다. "윌드린 이제 우리가 오해를 풀어야 겠구나. 들어보니 거짓은 아닌 듯하니... 안그렇 니?" 이렇게 된이상 윌드린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홋. 그렇다면 저 밖은 위험하니 기다리고있는 레인져분들을 들어오라고 하시죠. 저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말에 커크는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로님!" "뭘요 서로 오해도 풀었으니 어려운 시기에 도와야죠." 커크는 장로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갑작스레 포옹을 했고, 그의 예상 치 못한 행동에 장로는 잠시 놀랐지만 곧 등을 토닥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커크 의 행동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레인져들은 일이 잘 해결 되었음을 알았는지 환호성 을 쳤고, 커크가 들어오라는 신호를 하자 모두들 기쁜 표정을 지으며 뛰어 들어와 마 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70 (31) 레인져 또 하루의 해가 저물었고, 드베인 숲은 짐승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고있었다. 어두움 에 파묻인다면 적막감이 흘러야 정상이겠지만 이곳 유글렌부족의 마을은 오랜만의 활 기에 들떠 있었다. 바로 레인져들이 합류함으로 마을이 시끌 시끌 했는데, 마을의 사 람들은 두려워하던 적을 아군으로 맞아들인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고, 레인져들은 자 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과 동시에 따뜻한 음식과 가족 같은 정겨움을 느낄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쉴드옥토퍼스로 인해 식량이 많이 부족할 것을 예견했기에 풍족한 잔치 상을 마련 할 수는 없었지만, 배를 달래줄 음식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의 곳곳에는 많은 모닥불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것들을 중 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식을 접시에 덜어 먹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 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술을 마시지는 않고 있었다. 벌쿤과 함께 모닥불의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뮤스는 눈을 돌려 레인져들을 바라보았는데 하나같이 굼주 렸는지, 접시에 있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 바빴다. 그들을 보던 뮤스는 자리를 털 고 일어나며 말했다. "벌쿤. 나는 레인져 대장을 만나보고 올게." 그의 옆에서 식사를 하던 벌쿤은 그 말을 듣고 접시를 옆으로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 켰다. "형! 나도 같이 갈래! 나도 그 대장이라는 사람과 이야기 해보고 싶어." "훗.. 그렇게 하자." 뮤스는 벌쿤과 함께 커크를 찾아 다녔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와서 인 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걸어 다니자 커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는 동네의 아이들에 둘러 쌓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동네의 아이들은 그의 입에서 흘 러나오는 무용담에 넋을 놓고 있었으며, 그런 아이들이 귀여운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들의 즐거움을 빼앗기 싫었던 뮤스는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 다리며 아이들 옆에 앉았고, 벌쿤 역시 커크의 이야기가 궁금한지 귀를 기울이며 듣 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이 아저씨가 이 등뒤에 있는 화살을 잡아 당겨 고블린을 조준하고 있었단 다. 그런데 이게 왠걸? 땅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엄청난 뱀이 내앞을 지나가더라구! 그래서 '와! 이 뱀한번 엄청나게 굵구나.' 라고 생각을 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 이 쉴드옥토퍼스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너희 같았으면 그게 쉴드옥토퍼스 라고 생각이나했겠지? 그 시간에 린강에서 수영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겠지?" 커크가 아이들의 수긍을 바라며 물어보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들은 눈 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침을 삼켰다. 그것은 뮤스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벌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덩치만 컸지 아직은 어렸던 것이었다. 커크의 이야 기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뱀이었다면 꾸불거리며 앞으로 나갈 것 아니냐? 그런데 이녀석은 웬걸... 아 무런 움직임도 없이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더라구! 그래서 슬며시 눈을 돌려 그 쉴드 옥토퍼스의 발을 따라 눈을 움직였지. 그렇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어... 내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면 내 몸통보다 굵은 다리로 내 몸을 으스러트릴 테니까 말이지."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지 아이들은 마른 침을 삼켰 고, 별 관심이 없던 뮤스까지도 그의 입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발의 끝에서 엄청나게 큼지막한 녀석의 머리를 볼 수 있었지. 과연 그 녀석의 머 리위에는 둥근모양을 하고 있는 방패 네 개가 사방으로 하나씩 달려 있었고, 그 아래 로 녀석의 빛나는 눈알이 보였어. 마치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 그때 얼마나 오금이 절였는지 오줌이 찔끔 찔끔 나오더라니까!" 이야기를 하던 커크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자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었고, 뮤스와 벌쿤 역시 미소를지었다. "후훗 녀석들. 이만 시간이 늦었는걸? 이제 너희들은 자야 하지 않니?" 커크가 이야기를 그만하려 하자 아이들은 아쉬운 듯 했다. "에이! 이야기는 다해 주셔야죠!" "맞아요. 오늘 같은날은 조금 늦게 자도 돼요!" "더 해주세요. 네?" 아이들의 칭얼거렸지만 커크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이 아저씨가 피곤해서 조금 쉬어야 겠구나. 내일 계속 해서 이야기를 해주 마. 알겠지?" 과연 그의 말이 통했는지, 아이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일어났다. "아저씨 내일 꼭 약속을 지키셔야 해요!" "하하 물론이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뵈요!" 아이들이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중에도 즐거운지 쉴드옥토퍼스의 흉내를 내며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음을 느낀 뮤스는 커 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커크씨라고 하셨나요?" 뮤스의 인사에 고개를든 커크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후훗. 제 이름이 커크인 것은 확실하죠. 그 쪽은?" "아 저는 뮤스라고 해요. 라이델베르크에 살고있죠. 그리고 이쪽은 벌쿤이라고 아까 대장님과 말다툼을 하던 분의 동생이죠." 소개를 뮤스가 대신해주자 벌쿤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커크는 그의 손을 잡 으며 그의 몸집에 감탄을 했다. "하하 반갑네. 난 또 자네가 전사라도 되는 줄 알았네. 몸이 굉장한 걸 그래?" "훗. 이정도야 뭐 보통이죠." "그건 그렇고 자네는 참 대단한 누나를 뒀구만. 부러운걸?" "성격이 걸걸해서 그렇지 착한 누나예요." "그런가? 그건 그렇고 뮤스군은 어떻게 라이델 베르크에서 여기까지... 아 내정신 좀 보게. 이곳에 좀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 커크가 자신의 옆자리에 있는 접시들을 치우자 뮤스와 벌쿤은 그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자 이제 이야기 해보게나." "하하 그러죠." 뮤스는 모닥불에 손을 쬐며 자신이 드베인 숲까지 오게된 경위를 설명 하기 시작했는 데, 전뇌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는 벌쿤과 커크는 침이 마르게 그것에 대해 물어 왔 고, 뮤스는 대강이나마 전뇌거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또, 린강으로 추락한 이야기 를 했을 때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그때부터 윌드린을 만나 이곳까지 온 이야기 가 계속 되었는데, 벌쿤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그의 이야기에서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있게 된거죠." 이야기가 끝나자 커크는 대단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든 고생을 했군." "뭐 그렇게 힘든 점은 없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 제국으로 나갈 때 저도 동행을 하 고 싶어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거죠." "하하 그것이야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하지만..." 웃으며 이야기하던 커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마을의 주변, 그리고 드베인 숲의 곳곳이 쉴드옥토퍼스들의 산 란기로 위험하기 그지없다네. 한 마리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스무 명... 아니 오십 명이라도 그것을 물리치기가 어렵기 그지없다네. 자네도 참으로 운이 없군... 절벽에 서 떨어져 살아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하필이면 그 때가 십 년만에 한번 씩 있는 쉴 드옥토퍼스의 산란기라니 그 녀석들이 가장 난폭할 때이지..." 그의 말을 듣던 뮤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그들의 방패를 뚫을 만한 무기가 있다면요?" 뮤스의 말을 듣던 벌쿤과 커크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웃어버렸다. "하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이지 그런 것이 있을리는 없지 않나?" "형! 커크아저씨 말이 맞아. 그런 것이 이세상에 있을리는 없다구!" 둘의 반응을 미리 예상 했기에 뮤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그런 가정을 한다면 어떻죠?" 그가 한번 더 질문을 해오자 커크는 또 한번 웃을 수는 없었는지 자뭇 진지한 표정으 로 대답을 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가? 그런 무기가 있다면 쉴드옥토퍼스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 지." 커크의 대답에 뮤스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그런 무기를 드릴 테니 저와 함께 이숲을 빠져나가 주세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돼는 뮤스의 말을 들은 커크와 벌쿤은 그가 미쳤다고 밖에는 생 각 할 수 없었다. "형.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야." "흠흠...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실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이 친구와 같은 생각이네. 자네 혹 뭘 잘못 먹기라도 한건가?" 이런 말을 들은 뮤스는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은 직접 보여 주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결 론을 내렸고, 가방에 손을 넣어 완성 된 전뇌지자총통을 꺼내어 커크에게 보여주었 다. "이게 그 쉴드옥토퍼스의 방패를 뚫어줄 무기예요." 뮤스가 보여준 전뇌지자총통을 바라본 커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 나무 조각이 그 녀석의 방패를 뚫어 준다는 말인가? 차라리 쉴드옥토퍼 스를 망치로 패죽인다고 말을 하는게 더 믿을만 하겠네!" 옆에서 듣고있던 벌쿤 역시 혀를 찼다. "쯔쯧... 형... 뜨개질하란 말 안 할 테니 제발 정상으로 돌아와 줘!" 여전히 변함없는 그들의 반응에 뮤스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직접 보여주면 믿으시겠죠?" 한마디 던진 그는 집의 뒤에 쌓여있는 커다란 땔감 중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것의 크기는 상당히 커서 웬만한 도끼질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는데, 도끼질을 할 때 나무 받침으로 쓸만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커크가 입을 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어쩔 생각인가?" "멀리 물러나셔서 보기만 하세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커크와 벌쿤은 뮤스의 뒤쪽으로 멀찌감치 물러섰고, 뮤스역시 나무 조각만을 놔둔 채 그들이 물러선 곳까지 걸어왔다. 걸음을 멈춘 그는 전뇌지자총통을 들어올려 나무 조각을 겨냥했다. "잘 보고 계세요. 뇌공력 일 할 주입." 나직한 그의 말과 함께 전뇌지자총통을 쥐고있는 손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발출!" 이어 그의 외침 소리와 함께 전뇌지자총통의 주둥이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맺혔고, 순간 그로부터 눈부시기 짝이없는 광선이 발사되어 땅에 놓여있던 나무조각을 관통해 버렸다. 식사를 하며 그 빛을 본 마을 사람들과 레인져들은 무슨 일인지 놀라 식기들 을 떨어트렸고, 벌쿤과 커크 역시 순간적으로 발현된 빛에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 고 있었다. "이...이것이 어떻게 된거지?" "형! 괜찮아?" 벌쿤의 물음에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나는 괜찮아. 벌쿤 저기 멀쩡하게 보이는 나무 조각좀 확인 해 줄래?" "어라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서 한번 만져봐." "그러지 뭐." 뮤스의 부탁을 받은 벌쿤은 나무 조각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무조각을 만졌는데, 나무의 거친 느낌이 전혀 없다 싶더니 손가락이 나무 조각의 속으로 들어가버렸고, 이어 검은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보던 커크와 벌쿤은 입을 벌린 채 다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이..." 커크가 놀라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뮤스는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전뇌지자총통의 위력이죠... 이정도면 어떨까요?" "저..정말 가공할 위력이군... 이것이 어디에서 났는가?" "훗... 제가 만들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하겠군..." "그러면 마음대로 생각 하시죠." 뮤스와 커크가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왔고, 앞장서 서 다가오던 윌드린이 물었다. "뮤스! 이게 무슨일이지? 커크씨가 너희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거니?" 그녀는 아직도 레인져에 대한 감정을 지우지 못했는지 여전히 의심이 가득찬 말투였 다. "아니예요. 쉴드옥토퍼스를 잡을만한 무기를 시험해 보고 있었어요." "쉴드옥토퍼스를 잡을 무기라고? 말도 안돼!" 뮤스의 이야기를 윌드린도 믿지 못하자 커크가 나섰다. "저 역시 뮤스군이 처음 말했을 때는 믿지 못했죠. 하지만 그 위력을 목격 한 이상 믿을 수밖에 없군요." 커크까지 동의하고 나오자 의아해진 윌드린은 벌쿤을 바라봤고, 벌쿤역시 그녀를 향 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떻게 그런 무기를 뮤스가 가지고 있을 수 있지?" "누님도 제가 만들었다고 하면 믿지 못하시겠죠?" "그야 물론이지." "그럼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누님도 그냥 커크아저씨 처럼 좋은 무기가 생겼구나 하 세요." "그...그래." "아무튼 우리에게 이제 쉴드옥토퍼스를 잡을만한 무기가 생겼는데 어떻게 하실거예 요?" 그의 말에 정신을 수습한 윌드린은 뮤스가 한 말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하 지만 워낙 부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금새 특별한 생각을 떠올리지는 못했는지, 커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장님은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저 역시 지금 이 무기를 봤는데 무슨 계획을 세웠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저와 함께 계획을 세우는게 어때요? 오늘 저희 집으로 초대를 하죠. " "하하.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그럼 절 따라 오시죠." 커크는 가장 찝찝한 사이로 남아있던 그녀가 집으로 초대하자 앓던 병이라도 사라진 듯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대공학자> #71 벽난로와 테이블 위의 기름등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데이블 위로는 지도가 놓여있었 고, 그 주변으로 네명의 남녀가 앉아있었는데 커크와 뮤스, 그리고 윌드린과 벌쿤이 었다. 이 네명은 커크가 가지고 온 지도를 바라보며 쉴드옥토퍼스와 싸울 작전을 세 우는 중이었다. 지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커크가 손가락으로 지도상의 여러곳을 짚 으며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이 쉴드 옥토퍼스들이 머물만한 장소입니다." 그의 설명을 듣던 윌드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 하시죠?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지는 못할 텐데요." 아직도 윌드린은 커크에게 남은 감정이 있었기에 딱딱한 말투로 일관하고 있었다. "음 레인져들이 훈련받을 때는 수많은 마수들의 습성과 특징을 배우게 되어있죠. 운 이 좋게도 쉴드옥토퍼스 역시 교육 받았습니다. 일단 옥토퍼스들은 육지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알은 습기가 많은 곳에서 부화를 시키죠. 그 후 새끼들을 머리에 흡착시킨 후 강으로 데리고 간답니다. 그러니 제가 짚은 곳은 이 주변에서 습기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비가 온 후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 마르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윌드린은 뭔가 꼬투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에도 틀린 점이 없었기에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뮤스가 가지고있는 무기로 제거해 버리면 간단한 것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커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쉴드옥토퍼스의 몸체길이 만도 60멜리에 달합니다. 운이 나빠서 큰 녀석이라면 100 멜리. 즉 다리 끝부터 머리까지의 거리가 30에서 50멜리는 된다는 것이죠. 윌드린씨 도 알다시피 쉴드옥토퍼스란녀석은 눈알 속에 뇌가 들어 있기 때문에 방패를 피해 눈 을 맞추지 않으면 계속 재생된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아뇨 몰랐는데요." 그녀의 대답에 믿겨지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녀석은 시력이 좋지 않아 소리를 듣고 적을 파악한다는 것은 아시겠죠?" "아뇨 그것도 몰랐는데요." "네?!" 커크는 우물 쭈물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것도 모르시고 저 녀석들과 싸우려 했단 말입니까?" 그의 말에 윌드린은 무안하기 짝이 없었던지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말조차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던 커크는 계속해서 뭐라 할 수도 없었기에 손을 내저 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에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이미 말했다 시피 쉴드옥토퍼스는 눈이 작 아서인지 시력이 아주 형편없죠, 그래서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적을 공격합니다. 저 역시 쉴드옥토퍼스와 마주쳤을 때 그 덕에 살 수 있었고요." "그렇다면 대장님의 고명한 의견을 한번 들어보죠." 심기가 꼬일 대로 꼬인 윌드린은 심통 난 말투였는데, 이런 것은 도시의 여인들과 전 혀 다를게 없는 모습이었다. "하하 뭐 고명하다고 할거까지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말속의 가시를 눈치채지 못하고 헤벌죽 웃는 커크였다. "그 말을 그대로 알아들으신 건가요? 이건 비꼬우는 말이라구요!" "아 그랬습니까? 전 또... 제 능력을 알아주시는구나 하고 좋아하기 바빴죠..."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하는 커크의 표정은 그의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해 보였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요." "뭐 그러죠.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것들이 이동 할 때에는 머리에 위치한 방패가 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본능인 것이죠.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눈인데도 형식상으로 눈을 뜨는거죠.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커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던 윌드 린, 뮤스, 벌쿤은 별 재미없는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별게 다 웃기다는 듯한 표정으로 커크를 응시하고 있을 뿐... 커크는 오늘 따라 민망해질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흠흠... 아무튼 발 빠른자가 쉴드옥토퍼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유인할 때 그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자는 쉴드옥토퍼스가 움직일 방향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방패가 열려 있을 때 뮤스군의 무기로 눈을 쏴버리는 것이죠. 어떻습니 까?"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되는 듯 기대에 찬 눈으로 주변사람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커크대장님. 제가 가지고 있는 전뇌지자총통은 한방으로 방패까지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네... 그것으로 50멜리 이상의 거리에서 20셀리 미만의 눈을 맞출 자신 있나? 그 것도 방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을 말이야..." 커크의 말을 들으며 그 크기를 짐작해 보던 뮤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 일이 생각만 큼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헤... 전 눈이 보이더라도 맞출 자신 없는데요." "그건 걱정 말게나 레인져들 중에 석궁의 명사수가 있으니..." 뮤스는 다시 한번 식은땀을 빼야만 했다. "저... 이런 말을 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는데... 저 무기는 저밖에 사용을 못하거든 요?" 그의 말에 커크는 허탈한 표정으로 이마를 테이블에 박았다. -쿵! 너무나 크게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서 인지, 아니면 도저히 그의 작전이 성공하기 불 가능함을 알았음인지는 알 수없었다.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박힌 고개를 든 커크는 거 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는데 레인져라는 직업답지 않게 꽤 감성적인 인물인 듯 했 다. "자네... 그걸 지금에서야 말하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에... 이런걸 말해야 하는 줄도 몰랐는걸요?" 손으러 얼굴을 한번 문지른 커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한가지 방법 밖에 없겠군..." 잠자코 듣고 있던 벌쿤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게 뭔데요?" "후훗... 뮤스군을 훈련시키는 것이지. 그것도 지옥 훈련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오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뮤스는 커크를 바라보며 뭐라 하고 싶었지만 윌드린과 커크가 너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입이 막히 고 말았다. 다음날, 뮤스는 온몸에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진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힘이 드는 것 보다 찝찝한 느낌이 더 괴로운지 얼굴로 튀는 흙탕물에 인상을 찌푸렸다. 손을 들 어 얼굴을 훔치려하자 등뒤에서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건가! 빨리 기어! 이 정도로 쉴드옥토퍼스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이 목소리는 그의 특별 훈련을 맡은 교관의 것이었는데, 마르고 키가 큰 것이 싱겁게 생긴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아주 독한 인물이었다. 심금을 흔들며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뮤스는 얼굴을 훔치던 손을 내려 다시 진흙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제길!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거야!] 속으로의 외침이었지만,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기 위해서 쉴드옥토퍼스를 꼭 쓰러트 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겉으로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진흙을 헤쳐가며 십멜리 가량 기어가자 또 다시 기합을 한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저 앞의 나무를 10초 이내에 타고 오른다! 실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이었지만 뮤스는 이미 몇번 당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 고,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몸에 진흙 칠을 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매 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속도는 매우 더뎠다. 속으로 욕을 두어 바가지 퍼붓고 있을 때 교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시간이 늦었다! 다시 출발점으로 복귀!"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채념의 한숨을 내쉬며 진흙 바닥이 시작되는 곳으로 뛰어갔 다. 처음에야 느긋한 생각으로 임했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장난이 아님을 알아채 고 왜 전뇌지자총통을 그들에게 알렸을까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자 다시 기어! 다섯 번안에 통과하지 못하면 식사는 없다!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굶 어라!" 안그래도 허기를 느끼던 뮤스는 식사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뇌공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물기가 있는 곳에서 뇌공력을 잘못 운용하면 그 위에 있는 사람 이 모두 감전사 될 것을 염려하여 참고 있었지만, 도저히 허기만은 견디지 못했는지 금광이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의 뇌공력을 근육으로 흘리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만으 로도 대단한 변화가 있었는데, 빌빌거리며 진흙에서 헤엄을 치던 뮤스의 몸은 두더지 의 그것과 같이 진흙사이를 누볐고, 진흙탕을 통과한 그는 나무에 손가락을 박으며 올랐는데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5초였다. 그의 모습을 보던 교관은 얼굴이 굳어져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교관에게 뛰어온 뮤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관님! 저 이제 안굶어도 되죠?"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 본래의 모습을 보이는 뮤스였다. 개 버릇은 남 못 준다던가? 마침 점심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마을 가득 울려퍼졌고, 교관의 얼굴을 보던 뮤스는 그가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조금 흘러야 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윌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벌쿤! 밥줘! 배고파 죽겠어!" 뮤스가 문을 열며 들어가자 벌쿤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두르고 스튜접시를 테이블에 놓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벌쿤은 뮤스 의 모습을 보며 기겁을 했다. "형! 그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들어올려는 거야? 빨리 가서 씻고 와!" 하지만 너무나 배가고팠기에 뮤스는 울상을 지었다. "벌쿤! 그러지 말고 한번만 봐주면 안돼냐?" "안돼! 절대 안돼!" "치사하게!" 아무리 사정을 해도 봐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뮤스는 투덜거리며 문을 닫았다. "쳇. 아무튼 이곳의 남자들은 너무 가다롭다니까." 몸을 씻고 돌아온 뮤스는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서 윌드린, 벌쿤과 함께 식사를 하 고 있었다. 오늘도 윌드린은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았는지 벌쿤에게 잔소리를 들 었고, 그녀는 뭐 어떻냐며 그 손으로 부레열매를 뜯고 있었다. "아참 뮤스 그건 그렇고 오늘 훈련은 받을 만 했어?" 하지만 뮤스는 그녀의 물음을 대답도 하지 않고 스튜를 덜어 놓은 접시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것을 다 마신 뮤스는 접시를 벌쿤에게 주며 말했다. "벌쿤! 한 접시 더 부탁해! 아 그리고 그 훈련은 도대체 왜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의 접시를 받아든 벌쿤은 궁시렁대며 냄비의 스튜를 접시에 퍼담았고, 윌드린은 손 에든 부레열매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커크대장님이 시킨거야. 나는 아무런 잘 못도 없다고. 아무튼 레인져들은 그렇게 야만 적인 방법으로 몸을 단련한다니까!" 오늘도 역시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그들에게 험한 말을 하던 예전보다는 많이 양호 해진 편이었다. "헤휴... 오후 훈련은 어떤건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아 고마워!" 벌쿤이 건넨 접시를 받아든 뮤스는 다시금 걸신이 들린 양 허겁지겁 먹어 치우기 시 작했다. 그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커크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저 커크입니다. 좀 들어가도 될까요?" 벌쿤은 또 한번의 식사방해에 인상을 쓰며 문을 열었는데, 문 밖에는 양손에 무엇인 가를 잔뜩 들고 온 커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진 윌드린 은 스푼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들어오시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죠?" 그녀의 질문을 받은 커크는 손에 든 것을 내밀며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아 이건 뮤스군의 가죽 갑옷이고, 이건 벌쿤군의 가죽 갑옷이죠. 가벼운 데다가 내 구성까지 괜찮아서 쓸만하죠. 아무래도 쉴드옥토퍼스들과 전투를 하려면 간단한 갑옷 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뮤스의 것은 이해가 가는데 벌쿤의 것은 왜?" 허나 오히려 질문의 의아함에 되묻는 것은 커크였다. "벌쿤군은 전투에 참여 안할 생각인가요?" "호홋! 대장님은 뭘 착각하시는 가 본데요. 이곳은 유글렌부족이라구요. 이곳에서는 여자들이나 전장에 나가지 남자들은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거죠." "하..하지만 저 엄청난 근력의 사내를 전투에서 뺀다는 것은 큰 전력 손실이라구요!" "게다가 이 아이는 한번도 그런 험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걸요?" "흠... 그럼 할 수없죠..." 이때 둘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벌쿤이 나서며 말했다. "커크대장님 저도 이번 전투에 참가 하겠어요." 돌연한 그의 말에 놀란 윌드린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네가 전투에 참가 하겠다니?" "누나... 남자들도 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어. 이번 한번만 허락해줘." 윌드린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남자가 자신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따르던 동생인지 의심을 해야만 했다. "나 정말 잘 해낼 자신있어 누나! 그리고 밀린 빨래도 뮤스형이 만들어준 빨래기 덕 분에 전혀 없고, 식사준비도 다른 남자들이 이해해 줄거야. 그러니 이번에 날 꼭 데 리고 가줘! 응?" 뮤스는 애걸하고 있는 벌쿤을 보며 그의 행동에 감동하기 보다는 속으로 실소를 터트 리고 있었다. [허... 아무튼 적응이 안 된다니까...] 그의 말을 듣던 윌드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너는 이 누나 뒤를 따라 다녀야 해! 알았지?" 윌드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벌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 고마워 누나! 뮤스형! 나도 이번에 같이 가는거야!" "그..그래 좋겠구나 벌쿤..." 윌드린 남매가 합의를 본 듯 하자 커크는 손에든 갑옷들을 뮤스와 벌쿤에게 전해 주 었다. "자 여기있네. 아 그러면 벌쿤군 자네도 전투의 경험이 없으니 뮤스군과 함께 훈련을 받도록하게. 그래도 전투에 나가는데 다룰줄 아는 무기가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 는가?" "네! 알았어요 커크대장님. 식사후 뮤스형과 함께 훈련에 참가 할께요!" "후훗.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윌드린씨. 뮤스군과 벌 쿤군은 나중에 훈련장에서 보자구." 커크가 인사를 하며 집을 나서자 윌드린과 뮤스는 남은 식사를 계속했고, 벌쿤은 뭐 가 그리 신나는지 커크가 전해준 갑옷을 옷소매로 닦으며 실실 웃고 있었다. <대공학자> #72 -------------------------------------------------------------------------------- -------------------------------------------------------------------------------- Ip address : 61.79.249.17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식사를 마친 뮤스와 벌쿤은 가죽갑옷을 착용하고 임시적으로 만든 훈련장으로 나왔는 데, 원래는 빅투스들을 훈련시기키 위한 장소였지만, 레인져들과 연합을 한 이후로는 빅투스들의 훈련 대신 레인져들과 마을의 여전사들의 훈련 장소로 바뀌어져 있었다. 뮤스와 벌쿤이 지나가는 이곳 저곳에서는 사람들이 기합소리를 요란하게 지르며 근력 강화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쉴드옥토퍼스를 교란시키기 위해 뛰어 다니려면 몸이 튼 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가로질러 들어가자 일단의 사람들이 석궁을 들고 과 녁을 향해 엎드려 있었고, 그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커크를 볼 수 있었다. 커크 역시 뮤스와 벌쿤이 걸어오는 것을 느꼈는지 손을 흔들며 맞아 주었다. "여! 식사는 맛있게 했는가?" 그의 질문에 잔뜩 기합이 들어간 벌쿤이 허리를 꽂꽂히 피며 대답했다. "넷! 맛있게 했습니다!" "허허 이 친구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던 커크가 격려차 벌쿤의 어깨를 두들겨 주기 위해 손을 올리 려 했지만, 벌쿤은 2멜리를 훌쩍 넘는 큰 키였고, 커크는 1멜리 60가량의 작은 키였 기에 아주 우스운 모습이 되었다. 순간 흠칫 한 커크는 벌쿤의 가슴을 털며 말했다. "무슨 먼지가 이렇게 묻었나?" 어떻게든 난처함을 만회해 보려는 커크의 노력이 가상했지만, 이미 그 둘은 알아채고 말았는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역했다. "풋... 대장님 훈련을 시작하죠? 어떤 것부터?" "흠흠! 일단 벌쿤군의 무기부터 골라줘야 할텐데... 석궁은 어떤가?" 커크는 말을 하며 자신의 허리에 달린 석궁을 떼어 벌쿤에게 건넸는데, 그것을 건네 받은 벌쿤은 감동한 표정으로 석궁의 이곳 저곳을 살펴 보기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커크는 헛기침을 몇번 했는데, 2멜 리가 넘는 그가 석궁을 들고 있 으니 어른이 이쑤시게를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흠흠.. 아무래도 석궁은 안될 것 같군..." "아니 왜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벌쿤을 향해 커크대신 뮤스가 설명을 해주었다. "네 몸 크기를 봐라... 석궁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거야?" 그의 말에 자신의 아래위를 바라보던 벌쿤은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듯 했다. "왜 안 어울리는데?" "하하... 네가 석궁을 들고 있으니까 꼭 바늘장난 하는 사람 같잖아." 이제서야 벌쿤도 이해를 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석궁을 커크에게 넘겨주었다. "그럼 전 어떤걸 쓰면 좋죠?" 잠시 고민을 하던 커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 박으며 말했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나... 그 활이 있었군!" 뭔가를 생각해낸 듯한 그는 레인져들이 묵고있는 숙소로 뛰어갔는데 그 모습을 보던 뮤스와 벌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잠시후, 벌쿤은 천에 쌓여있는 무엇인가를 낑낑거리며 들고 나왔는데 겨우 팔 길이 만한 그것의 무게가 대단하기라 도 한 듯이 그의 이마에는 힘줄이 한껏 솟아나 있었다. 벌쿤에게 다가온 커크는 힘에 부치는지 떨어트리듯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것을 한번 사용해 보게나 자네라면 사용 가능 할 지 모르겠군." "이게 뭐죠?" 벌쿤은 설레이는 모습으로 커크가 건네준 물건의 천을 벚겨냈다. 그러자 어른의 팔만 활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일반 활에 비해 유난히 짧은 반면 엄청나게 굵은 모습을 하 고있었다. "어라! 뭐 이런 활이 있지? 이 두꺼운 활이 휘기나 한단 말이예요" 벌쿤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어오자 커크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나도 잘 모르겠네. 얼마 전 수색을 하면서 발견 한 것인데, 나도 이런 활은 처음 보 거든? 무겁기는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 그래서 도시로 나가는 데로 팔아 치울 생각 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자네에게 줘본 것이지." "그랬었군요..." 활의 이곳 저곳을 ㅎ어 보던 벌쿤은 활의 중심을 잡고 어깨높이로 들었다. 그의 엄청 난 신력 덕분인지 그 무겁기만 하던 활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어올려졌고, 오른 손 을 활의 시위에 가져갔다. 심호흡을 한번 해본 벌쿤은 활의 시위를 당기려 했는데 커 크의 말대로 활의 시위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끄응!" 자존심이 상한 벌쿤이 더욱 힘을 주며 당기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끙끙대던 벌쿤은 결국 활을 신경질 적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쳇! 당기지도 못하는 활이 있다니. 이딴 것을 누가 만들었을까?"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뮤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활을 살펴보았는데 그의 날카 로운 눈빛이 활을 한번 ㅎ어 보자 그 신비라도 벗겨 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것은..." "형 뭐라도 알아냈어?" "혹시 떡방아가 아닐까? 이렇게 하는 거 말이야!" -쿵! 쿵! 실실거리며 활로 땅을 찢는 뮤스의 모습을 보며 벌쿤과 커크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 다. 옛 생각이라도 하는지 무엇인가에 심취해 땅을 떡방아 때리듯이 때리던 뮤스는 순간 손가락 끝이 그 활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라 이건 뭐지?" 이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던 뮤스는 움푹 들어간 곳을 더욱 힘을 주며 밀어 넣었고, 그러자 짧던 활의 양 옆쪽이 돋아져 나오면서 원래 모습의 세배나 되는 활의 모습으 로 변해있었다. "오호라! 접어서 사용하는 활이었군? 어디 보자... 안쪽은 세밀한 톱니로 이루어 져 있었고, 용수철 작용으로 파괴력을 가중 시켰군. 대단한걸? 돋아져 나온 부분의 재료 는 굉장한 탄성을 가진 것이고..." 뮤스는 아무래도 직업을 숨길 수는 없는지 그 신기한 화살의 구조에 대해 풀이를 하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전혀 관심 없이 활의 변화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 던 벌쿤과 커크는 뮤스가 들고있는 활을 아래위로 살펴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허... 이런 활이었다니..." "와! 역시 뮤스형은 대단해! 이런 것을 알아 내다니." 벌쿤이 놀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수습한 뮤스는 손에 들려 있는 활을 벌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후훗 아무튼 이걸 당겨봐. 네게 정말 딱 맞겠는데?" "응! 알았어." 뮤스에게서 활을 건네 받은 벌쿤은 활을 들어올리며 활의 시위에 손을 가져갔고, 다 시 한숨을 들이쉰 벌쿤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활의 양쪽이 조 금씩 휘면서 활의 시위가 당겨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오..." -끼기기긱.... 벌쿤은 활의 시위가 끝까지 당겨지자 손가락을 놨는데 엄청난 파공성을 내며 시위가 튕겨졌다. -피융! 시위가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활의 양끝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는데, 벌쿤의 악력 이 대단해서인지 그의 팔만큼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커크는 손뼉 을 쳤다. "이것 정말 대단하군! 활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당겨 낼 줄이야!" "하하 뭘요!" 커크의 칭찬에 쑥스러워진 벌쿤은 머리를 긁적였고, 뮤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 다. "하하 정말 대단했어. 이 정도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겠는걸? 아참 화살은 어떻게 하죠?" "글세... 일반 나무 화살이면 위력이 반감 할 테고... 어떻게 한다?" 커크가 고민을 하기 시작하자 뮤스가 벌쿤의 등을 치며 말했다. "이 형이 직접 만들어 주도록 하지. 기대 하라구!" "에? 형이 직접?" "그렇다니까. 아직도 이형을 못믿냐?" "아냐 형! 믿어!" 커크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대강 됐군. 이제 뮤스군이 훈련을 해야 할텐데..." "뭘 하면 되죠? "음 어디보자... 어이 리온! 이쪽으로 와보게나." 석궁 훈련장을 둘러보던 커크는 그곳에 엎드려 석궁을 손질하고 있는 사내를 불렀는 데, 20대 중반의 나이로 짧은 금발을 지닌 잘 생긴 남자였다. 사실 레인져들에게는 긴 머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짧은 머리였지만, 이 사내는 평균 보다 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상당히 차가운 느낌이 드는 자였다. 커크의 부름 에 석궁을 땅에 내려 놓은 그는 몸을 일으켰는데, 뮤스와 비슷한 정도의 보통키였다. 그가 다가오자 커크는 뮤스에게 인사를 시켰다. "뮤스군 인사하게 레인져 중 석궁 사격 솜씨가 가장 좋은 친구일세. 리온 자네도 인 사하게 뮤스군이지 작전 회의 시간에 들어서 알것일세." "안녕하세요 뮤스라고 해요. 잘 부탁 드립니다." 뮤스가 웃으면서 인사를 했지만 리온이라는 사내는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굽 힐 뿐이었다. "뮤스군 자네가 이해를 하게나. 이 친구가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나쁜 친구는 아니니 까." 커크의 이야기를 들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벌쿤군은 나와 함께 나무로 만든 화살로 활 연습이나 하러 가세. 그리고 리 온자네도 뮤스군을 잘 가르치게나..." "형! 그럼 수고해!" 벌쿤은 드디어 훈련이 시작되었음이 즐거운지 커크의 뒤를 재빠르게 따라갔고, 리온 과 함께 남은 뮤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리온은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했다. 조금 기 분이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의 특성상 그런 성격이 생길만 도 했기에 큰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고 있었다. 리온은 자신의 석궁이 놓여진 자리에 엎드렸고, 옆자리를 손으로 치며 그곳에 엎으리라는 표시를 했다. 말 한마디 없이 그 가 시키는 대로하던 뮤스는 답답함을 느꼈는지, 업드리며 물었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실 작정 이예요?" 그의 물음에 리온은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대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쉿... 저격수들은 첫 번째 조용해야한다. 숨도 조심스럽게 쉬어." 이제서야 입을 열자 뮤스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럼 그 무기를 꺼내봐..." 처음 보는 사이에 리온은 반말을 했지만,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기에 그것이 반말 인지 느낄 수도 없었다. 뮤스는 가방에 손을 넣어 전뇌지자총통을 꺼내자 리온은 손 을 내밀었는데,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챈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리온은 그 모습에 신기함을 느꼈는지 딱딱한 표정이 조금 변 했다. "반동은?" "네? 반동이라뇨?" 리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자 뮤스 역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쏠 때 반동이 얼마나 생기느냔 말이지." "아... 거의 없어요." "좋군." 살펴보는 것이 끝났는지 전뇌지자총통을 다시 뮤스에게 돌려준 리온은 멀리 세워진 둥근 과녁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고, 그것이 쏴보란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뇌공력을 손에 모은 채로 팔을 뻗어 과녁을 겨냥했 다. 숨을 한 차례 몰아쉰 뮤스는 모아둔 뇌공력을 흘려 전뇌지자총통을 발사했는데, 어두운 훈련장을 순간적으로 밝히며 발사된 광채는 과녁을 맞추기는커녕 과녁을 지나 그 옆에 있는 굵직한 나무를 맞춰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과녁 옆에 서있던 굵직한 나무는 마치 꺾인 갈대 마냥 쓰러져 버렸다. -쿠쿵! 뮤스는 과녁을 못 맞춘 부끄러움에 인상을 쓰며 리온을 바라보았는데, 리온은 눈동자 를 떨며 쓰러져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이럴수가... 설마 했는데 이 정도 일 줄이야." 그는 조용히 말을 하라던 자신의 말도 잊었는지, 일반 사람들과 같은 크기의 목소리 를 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저 리온씨 이제는 어떻게 하죠?" 리온은 아직도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지 두 눈을 비빈 후 다시 바라보았지만 별 달라 진 점이 없자, 이 일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잠시 나에게 줘봐." 뮤스가 전뇌지자총통을 리온에게 건네주자 그것으로 과녁을 겨냥해 보며 말했는데, 이제는 놀란 마음을 바로 잡았는지 처음과 같이 나직한 소리였다. "가눔쇠를 만들어야 겠어..." 혼잣말로 중얼거린 리안은 부츠부근에서 칼을 꺼내어 전뇌지자총통 총신의 윗 부분을 깎아내기 시작했는데 나무로 만든 부분이라서 그런지 어려운 점은 없어 보였다. 그는 깎아내고 겨누어 보고를 몇 번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뮤스에게 돌려주 며 말했다. "그 위에 깎아 놓은 것을 가눔쇠라고 하지. 뒤에 깎인 요철모양 사이에 앞쪽의 가눔 쇠를 위치하게 겨냥하고 그 위로 맞출 대상을 두는 것이지. 한번 해봐." 나름대로 이해를 한 뮤스는 리온이 설명을 해준 대로 과녁을 향해 겨누었다. 다시 한 번 손으로 뇌공력을 모은 그는 전뇌지자총통으로 그것을 흘렸고 전뇌지자총통은 밝은 빛을 내며 광채를 쏟아냈다. 이번에는 좌우의 겨냥은 맞았지만 과녁의 위쪽을 지나쳤 는데, 과녁의 뒤에 서있던 애꿎은 나무가 하나 더 넘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리 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눔쇠의 바로 위에 둬야 한다." "하지만 저 먼 거리에 있는 과녁이 잘 보이지가 않아요. 게다가 어둡기까지 하고." 뮤스가 불만을 털어놨지만 리온은 억양의 변화 조차 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과녁 까지의 거리는 겨우 40멜리... 네가 쉴드옥토퍼스에게서 안전한 거리는 50멜리 이상. 그리고 과녁의 지름 30셀리 쉴드옥토퍼스의 눈 20셀리... 지금 네 실력이면 딱 죽기 알맞지..."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기에 전뇌지자총통으로 과녁을 조준했다. 그 때 리온이 그의 전뇌지자총통을 잡았다.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그의 말에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을 내리며 그의 석궁을 바라보았다. 화살을 장전한 석 궁의 시위는 팽팽하게 당겨졌고, 리온의 두 눈은 어두움 속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쏘기 전에는 숨을 들이쉬며 참는다. 그래야 잔 떨림이 없어져." 뮤스에게 주의를 준 리안은 다시 입을 다물며 조심스럽게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고, 그와 함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석궁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과녁을 본 뮤스는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은 화살을 볼 수 있었는데, 약 2셀리 정도 되 는 중심의 동그라미를 화살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의 솜씨에 감탄한 뮤스는 박수 를 치며 탄성을 질렀다. "이야! 정말 대단해요. 그런데 석궁으로 그 녀석의 눈을 맞추면 안돼나요?" 뮤스의 질문에 리온은 석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석의 눈은 우리같은 점막이 아니지... 석궁을 가지고는 상처도 내지 못해." es의문이 풀린 뮤스는 고개를 돌려 과녁을 바라보았고, 또 다시 전뇌지자총통으로 그곳 을 겨냥했다. 한편 커크는 벌쿤과 함께 마을의 변두리로 걸어갔는데, 석궁은 초보자들도 일정 이상 의 명중률을 가지지만 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보다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 졌기 때문 이었다. 게다가 활이라는 것을 처음 만져본 벌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랐기 에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았던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커크는 이 정도면 됐 다 싶었는지 손에 들린 화살 중 한 대를 벌쿤에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연습하기 딱 알맞군. 지금은 연습이니 이 나무 화살들로 연습 하도록 하 지." 커크가 건네준 화살은 보통 화살 보다 두 배는 길었고, 꼬리 부분에 깃이 달리긴 했 지만 촉이 없는 것이었는데, 일단 철로 만들어지는 촉을 아끼기도 하고, 이러는 편이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네 누나가 활을 쏘는 것을 많이 봐왔을 테니 한 번 자세를 잡아 보게나." "그러죠 뭐." 그의 말을 들은 벌쿤은 왼쪽 손에 활을 든 후 팔을 쭉 뻗었는데, 장신인 만큼 팔의 길이도 길었다. 그 모습을 본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폼은 좋은데 다리는 앞, 뒤로 조금 더 벌려서 중심을 맞추고 얼굴은 조금 더 세우게 나.. 좋아.. 좋아.." 커크의 말대로 몸을 고치긴 했지만 자세가 영 어색한 듯 했다. "이거 엄청 불편한데요?" "아직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그렇지만 처음이니 자세를 교정하기는 쉬울 걸세. 그런 다음 화살대고 시위를 먹이게나. 당길 때는 숨을 들이쉬고, 쏘기 전에는 숨을 멈추는 거지. 그렇게 몸이 고정 됐다 싶으면 시위를 먹인 손가락을 뒤로 빼면서 놓는 거야. 한번 해보게나." "알았어요." 벌쿤은 커크의 말대로 화살을 시위에 먹이며 숨을 들이셨는데, 가슴의 기복이 심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그리곤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조준을 하며 숨을 멈췄고, 이 어 됐다 싶었는지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피융!! 시위를 떠난 화살은 순식간에 표적까지 도달했는데, 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화살 은 보기좋게 나무를 꿰뚫은 것이었다. "대...대단하군." 그의 옆에서 놀라는 커크 보다 더욱 놀란 것은 벌쿤 자신이었는데, 매일 빨래 설거지 만 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며 커 크가 어깨를 두들기려 했지만 아까의 일을 생각하며 등을 두들겼다. "자네 정말 자질이 대단한걸? 근력도 대단하고, 몸도 좋고, 집중력 역시... 비결이 도대체 뭔가?" 커크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비결을 생각해 보던 벌쿤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말 했다. "비결이라... 비결이라면... 빨래를 하면서 단련된 어깨와... 설거지를 하면서 쌓은 집중력. 사실 제 넓적한 손으로 설거지를 하려면 여간 힘든거 아니거든요. 툭하면 깨 져 버리니..." 벌쿤의 어이없는 비결을 듣던 커크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만 말해도 되네... 계속해서 연습이나 하자구." "네 그러죠 뭐." 커크에게서 화살을 한 대 더 받아든 벌쿤은 다시금 활시위를 먹이며 목표를 겨냥했 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커크는 그가 든든하기만 했다. <대공학자> #73 (32) 듀들란 제국. 이곳은 대륙의 양대 대국인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의 국경선, 드넓은 대지에 장 정의 허리춤까지나 올라올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양국간의 국경선인 만큼 그 누구의 접근조차 금해지고 있는 이곳에 검은 인영이 움직이고 있었다. -촤락 촤락... 그는 상당히 지쳐있는지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는데, 무성한 잡초조차 헤쳐 나가기 힘 겨워 보였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쓸어보았고,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자 허리를 숙이며 무성한 잡초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헉... 헉... 이런 제길!" 그런 인영은 가쁨 숨을 몰아쉬며 알지 못한 누군가를 향해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었 는데, 그것은 도이첸어도, 그렇다고 듀들란어도 아닌 생소한 것이었다. 초라하기 그 지없는 낡은 후드로 얼굴을 가렸기에 그의 생김새는 알 수 없었으나 키는 약 180셀리 가량이었고, 딱 벌어진 어깨가 단단해 보였다. 그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가로로 매고 있는 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며 중얼 거렸다. "후우... 더 북상해야 하는건가? 그들이 왜 나를 쫓는 것이지? 이곳이 와서는 안될 곳이라도 되는 건가? 후우... 통신도 두절 됐고, 일행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이 제 어떻게 한다..." 그 인영이 한숨을 쉬며 탄성을 내쉬고 있을 때, 그의 등뒤에서는 수풀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촤락 촤락...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검은 인영은 긴장된 모습을 하며 왼쪽 허리춤에 매달려 있 는 금속 대롱에 손을 가져갔다. "제기랄. 벌써 이곳까지 온 것인가?" 그 금속 대롱을 손에든 그는 어디선가 꺼낸 가루와 쇠 구슬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 고, 조금 긴 막대로 그 위를 눌러 다졌다. "아무래도 여러 명은 무리이다. 수가 몇 이나 될지..."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던 그는 왼쪽 허리춤에 달려있는 길다란 나무통을 들었는데, 천 체만리경과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눈을 대어 보는 곳은 나무통의 위쪽으로, 전혀 달 리 붙어있었다. 그것을 수직으로 세우고 안을 바라보자 신기하게도 그의 등뒤로 다가 오는 추격자들이 보이고 있었는데, 한 손에는 창을 또 다른 한 손에는 나무방패를 들 고 있는 모습을 보니 훈련을 제대로 받은 어떤 국가의 병사들이었다. "여섯 명이라... 아무리 봐도 훈련이 잘 되어있는 병사들이군. 말이라도 통한다면 항 복을 할 수도 있으련만... 언어해독기로 말을 하려 한다해도 저들이 그 시간동안 기 다려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들겨 볼 수밖에." 심호흡을 한 번한 그는 손에 들린 금속 대롱을 들고 재빨리 일어서 자신을 뒤쫓는 인 형들을 바라보고섰다. "앗! 저기다!" "저 녀석을 잡아라!" 듀들란어로 급하게 외치던 그들은 손에 든 창을 앞세우며 몸을 움직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인영은 손에든 금속 대롱으로 그 중 한 명을 겨냥했다. -땅! 손에 들린 금속 대롱에서 불꽃을 뿜으며 굉음이 터져 나갈 때, 그를 향해 달려오던 병사들 중 한 명이 공격 마법에라도 격중당한 듯 쓰러져 버렸고, 놀란 병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투 중에 동료가 죽는 것이 일상 이 되어버린 그들은 다시 정신을 회수하며 손에든 창을 더욱 강하게 꼬나 쥐었다. "다들 조심해! 저 녀석이 강한 마법을 쓴다!" 이미 동료를 한 명 잃은 그들은 생각을 달리했는지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었고, 인 영은 연기가 나는 대롱을 손에서 떨어트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뇌동체술법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뇌동체술법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옷 밖으 로 드러난 살에서 금빛의 빛줄기가 일렁인다 싶더니, 재빨리 몸을 움직여 자신을 쫓 던 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핫!"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그의 행동에 주춤하던 병사 둘은 창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저 지하려 했지만 빠른 속도로 질러오는 그의 주먹에 복부가 답답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퍽! 퍽! "헉!" "크큭!" 하지만 이들 역시 놀고만 있던 허수아비가 아니었기에 뒤쪽에 있던 자들은 굵은 나무 로 만들어진 방패를 가슴쪽으로 이끌어 당기며 인영의 재빠른 공격을 막아냈다. 자신 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헛 바람을 집어삼킨 그는 몸을 뒤로 빼며 병사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병사들 역시 공격후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는지, 비 어있는 옆구리를 향해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헉!" 창이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본 인영은 놀라며 몸을 비틀었고, 그로 인하여 치명상은 막을 수 있었지만, 오른팔에 기다란 상처가 나있었다. 가까스로 병 사들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난 그는 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상태를 살펴봤는데, 힘 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을 보아 출혈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헉... 겨우 두 놈을 때려눕히고 힘이 빠져 버리다니..." 그의 중얼거림을 듣던 병사들은 긴장감을 풀지 않은 채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봐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 것이지?" "나도 도이첸어는 못 알아들어." 둘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한 병사가 신음성을 흘렸다. "흠... 저건 도이첸어가 아니야." "아차! 자넨 이곳에 오기 전에 언어학에 능했다고 했었지?" 동료 병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서 서있는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대치상태가 지속되자 인영은 일말의 기대로 허리 뒤 춤에서 달랑거리는 물건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행동에 놀란 병사들은 그에게 창을 겨누며 위협했고, 놀란 그는 천천히 그 물건을 어 올리며 위험한 물건이 아님을 확인 시켰다. "제발 이들이 알아들어야 할텐데..." 그는 자신이 꺼내들은 물건의 위 부분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한문으로 된 문 자가 나타나 있었다. -이봐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 것이지. -나도 도이첸어는 못 알아 들어. -저건 도이첸어가 아니야. -자넨 이곳에 오기 전에 언어학에 능했다고 했었지. 그 글들을 읽어보던 인영은 그 물건을 향해 중얼거렸는데, 잠시 후 듀들란의 언어가 그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날 왜 뒤쫓는 것이오?" 이상한 상자에서 말이 흘러나오자 병사들이 놀라며 뒷걸음칠 치며 외쳤다. "다가오지 마라! 그 후드를 벗어서 정체를 드러내라!" 다시 손위의 물건에 나타난 문자를 읽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걷어냈고, 그 속에서 한 중년인이 모습을 나타났는데, 바로 장영실이었다. 상 당한 고초를 겪었는지 조선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초췌했고, 다듬지 못한 수염이 여 기저기로 엉클어져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던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도이첸 제국 사람이 아닌가?" 물음에 손에든 물건과 병사를 번갈아 바라보던 장영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손에 든 것은 언어해독기라고 하오. 나는 이 곳의 말을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거 쳐야만 대화를 나눌 수 있소. 그리고 나는 도이첸 제국인가 하는 곳과는 전혀 상관없 는 사람이오. 그러니 제발 날 그냥 두시오." 그의 말을 듣던 병사 중 한 명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우리의 동료를 헤쳐 놓고도 난 상관없으니 보내달라고? 내 손으로 동료의 원수를 갑 겠다!" 그가 흥분을 하며 창을 겨누자 그의 옆에 있던 동료는 창을 막아서며 무겁게 말했다. "일단 우리는 이자를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동료가 죽은 것은 언제나 각오하고 있는 일이다. 참아라." 이들의 대화를 언어해독기를 통해 듣고있던 장영실은 나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흠..." [굉장히 잘 키운 병사들이다. 이들만 보더라도 속해있는 국가가 얼마나 튼튼한 국가 인지 알 수 있겠군... 조선도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할 텐데...] 병사들은 결정을 내렸는지 장영실을 향해 조심히 다가오며 말했다. "몸에 있는 무기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 손에든 물건만을 소지하도록! 너는 우리와 함께 본부로 돌아간다."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몸에 지닌 물건을 남김없이 내려놓았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소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병사들은 소지품을 회수한 후 그를 묶어 자리를 뜨기 시작 했다. 며칠 후. -똑... 똑... 어두침침하고 습기 찬 공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 다. 어두운 내부를 밝혀 주는 것은 기름을 잔뜩 먹인 횃불 몇 개가 다였고, 굵직한 쇠창살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차가운 돌 벽에 등을 기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후우... 아직 명신이도 찾지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전하께 죄를 지었 구나..." 바로 병사들에게 붙잡혀온 장영실이었다. 이제 유일하게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손에 들려있는 언어해독기 밖에 없었기에 더욱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철컹! 바깥쪽의 쇠창살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곳 으로 다가옴을 느낀 장영실은 허공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쇠창살 밖을 바라보았고, 곧 수하들을 이끌고 두 명의 인물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은 고위직의 군인인지 제복인 듯 보이는 딱딱한 옷을 걸치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유약한 듯 한 모습임에도 사람을 이끄는 기운이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장영실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내 운명이 결정되어 지는 것인가? 후훗... 이국 땅에서 죽는 것도 서러운 데... 다른 세계라니..." 나직히 중얼거리던 그와는 무관하게 쇠창살이 열리며 그 두 사람이 들어왔고, 장영실 의 생김생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살펴보던 두 인물은 서로를 바 라보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고, 유약하게 보이는 인물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듀들란 제국의 재상각하를 보필하는 게하임이라고 하오. 재상께서 당신을 만나 보고 싶어하시오. 듣자하니 우리 제국의 언어를 못 하지만 그 손에 든 것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손에든 언어해독기를 바라보던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입을 열었고, 언어해 독기를 통해 듀들란어로 통역되어 졌다. "그렇소. 이 기계로 당신들과 대화를 할 수 있소. 나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그것은 재상각하를 만나보면 아시게 될 것이오. 대장! 줄을 풀어주게. 나와 함께 수 도로 간다." 그의 명령을 받은 대장은 뒤에서 대기하고있는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고, 병사 몇 명 이 들어와 장영실을 묶고있는 줄을 잘랐다. 몸을 움직여 상태를 살펴보던 장영실은 오른쪽 팔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고, 그곳은 이미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그것을 본 게하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이자를 치료해 주도록. 이런 모습으로 재상각하를 만나 뵌다면 안 좋을 테니..." "넷!" "자 이만 날 따라 오게나."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게하임의 뒤를 따라 나섰고, 자신이 갇혀있던 감옥의 구조를 둘러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밖으로 나온 장영실은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는데, 오 랜 시간을 어두운 감옥에서 지냈기에 햇살에 적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런 말없이 게하임의 뒤를 따라가던 장영실은 이제 빛에 적응했는지 사방의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 올 당시만 해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에 이곳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심 이세계에 와서 도시한번 보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생 각을 하니 우습기까지 했다. [음... 대단히 신기한 양식의 건물들이군.] 한참을 그렇게 걷던 장영실은 게하임이 발을 멈추는 것을 느꼇는데, 그가 멈춰선 곳 의 앞을 보자 지금까지 구경해 왔던 건물과는 상대도 안될 정도의 웅장한 건물이었 다. 그것에 정신이 빠져 자신도 모를 감탄성을 흘리고 있을 때 게하임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이곳에서 오늘은 묵고 내일 떠나야 하겠소. 재상각하께서 당신에게 특별 대우를 해 주시는 것이니 다른 생각을 갖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고개를 한번 끄덕인 장영실은 건물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자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웅장한 내부가 그를 기다렸는데,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독특한 양식의 벽화와, 바닥 을 수놓고 있는 색색의 광석들, 실내를 밝히는 수십 개의 샹들리에가 심혼을 뒤흔들 고 있었다. "굉장하군."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자 거대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님들을 기다리는 직원들이 보였는데, 게하임이 주머니에서 사자모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패를 내밀자 그것을 본 직원들은 급히 머리를 숙이며 쩔쩔 매기 시작했다. "이곳의 특실 두 개를 비워 주게." "넷! 재상대리!" 장영실을 향해 한번 웃어 보인 그는 장영실을 이끌고 안내를 받으며 층계로 올라갔 다. 3층에 당도하자 아름답게 꾸며진 홀이 있었고, 홀을 둘러싼 여섯 개의 큰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안내해온 사람이 문 하나를 열자,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이 장영실 의 눈에 들어왔다. "이방입니다. 재상대리님. 또 다른 손님 분은 방 안쪽의 문을 통해 옆방으로 들어가 시면 됩니다. 일행이시라면 그러는 편이 안전하지요." 비록 안전이라는 말로 미화를 시켰지만 장영실은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취한 조 취임을 알았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자 들어가지. 그리고 점심은 방으로 보내거라." "네! 재상대리!" 안내자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장영실은 가구들을 살펴보았고, 게하임은 술잔에 술을 채 우며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은 뭔가? 이름이라도 알아야 부를 것 아닌가?" 물음에 뒤돌아 본 장영실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공학자 장영실이라고 하오!" 장영실의 목소리는 언어해독기를 통해 흘러 나왔다고는 하지만 자부심이 한껏 품은 말투였다. "공학자? 그것은 또 뭔가?" "설명을 하자면 굉장히 길 것이오." 그의 말을 듣던 게하임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 길다면 하지 말게. 긴 이야기는 골치 아프거든. 그렇지 않아도 재상각하와 대 화를 너무 많이 해와서 죽을 지경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러기는 싫다네." 자신의 신세 한탄을 잠시 한 게하임은 손에 들린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재상각하께서 자네가 가지고 있던 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네... 물론 직접 만 나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시겠지만 귀뜸이라도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일세." 그제서야 재상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리 밝은 인상은 아니었다. "혹 그것을 자네가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아차... 잊은 것이 있는데, 자네는 이 국가 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한 자일세.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 이 없는 죄인이지. 잘 생각 해보고 대답하게나." 한마디로 말해 쓸모가 없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이었다. 공학자로서 살상무기를 만드는 것은 내키지 않으나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세종과 이 세계 어딘가에 있 을 명신의 얼굴을 떠올랐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호오! 그것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군." 활짝 웃어 보인 게하임은 남은 술을 들이키며 방의 끝에 달려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쪽에 자네 방일세. 안에 있는 음식들은 마음껏 즐기게나. 자네는 지금부터 국빈의 예우를 받을 테니." 한숨을 한번 쉬어 보인 장영실은 그가 가리킨 방문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머리 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74 -타닥!타닥!타닥! 드넓은 초원, 세대의 마차와 그들을 호위하는 듯한 병사들이 그곳을 가로지르고 있었 다. 비록 초원이긴 해도 그 사이로 난 길은 먼지투성이였기에 뿌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고, 그것들은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일단 의 무리 중 가운데 마차에는 너무나 상반된 표정의 두 인물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는 데, 바로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으로 가는 장영실과 게하임이었다. 장영실의 얼굴을 살펴보던 게하임은 얇게 뻗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어제 불편하기라도 했던가? 그래도 최고급 호텔중의 한곳이 었는데?" 그의 물음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던 장영실은 언어해독기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 다. 그가 부정을 하자 게하임은 또 다시 턱수염을 쓸며 곰곰히 생각을 하더니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 무기를 만드는 것이 탐탁치 않아서 이러는 것 아닌가?" 장영실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음이 긍정이란 것을 알고있는 게하임은 무릎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난 또 자네가 그런 걱정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 그의 돌연한 반응에 의아해진 장영실은 언어해독기를 입에 가져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는 것이오? 나는 생명을 해치는 물건 따위를 만들고 싶진 않소!" 진지하게 대답해오는 장영실을 보며 게하임이 웃음을 천천히 멈추며 입을 열었다. "하아... 자넨 조이센 대륙에서 온 자가 아닌가?" "조이센?" 장영실의 되물음에 게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분명 자네가 이곳의 언어를 못하는 것과 모습으로 봐서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네. 그 렇다면 이 대륙의 상황도 잘 모를 테니. 내가 조금 설명을 해주겠네." 이곳으로 와서 길을 잃고 떠돌아 다닌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 기 때문에 당연히 이 대륙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했고, 들어 둬서 손해날 것이 없 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좋아. 일단 이 대륙은 크게 여섯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네. 나머지 네 국 가는 군소 국가이지만, 우리 듀들란 제국과 이웃국가인 도이첸 제국은 강대국에 속해 있지, 그렇지만 서로를 침략할 생각은 전혀 없다네. 서로 전쟁을 일으켜 봐야 비슷한 국력으로 인해 양패구상이 뻔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서로 라이벌 의식 가지고 경쟁을 하고 있다네." 그의 말을 듣고있던 장영실은 미심적은 눈초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자총통을 제작 가능한지는 왜 물었소?" "하하. 그렇지! 그것의 이름이 지자총통이었지. 얼마전 도이첸 제국에서 두 구의 시 신과 함께 그 지자총통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네. 물론 우리측의 스 파이가 알아낸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말을 들은 장영실은 눈을 낮게 깔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게하임의 이 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이첸 제국에 그 지자총통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지." 장영실은 불현 눈을 크게 뜨며 게하임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크게 흥분해 있는 모습이었는데, 언어해독기를 통해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누구요! 지자총통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이런. 자네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물론 그 자도 자네처럼 제작하지 않겠다는 의사 를 표명한 것 같더군. 허나... 우리 듀들란 제국으로서는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인재 가 도이첸 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한 것이지. 안 그래도 전뇌거를 만들 어 내라며 성화인데..." "지금 전뇌거라고 했소!" "혹시 자네가 살던 조이센 대륙에서 전뇌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나? 도 에첸 제국에서 그것을 만든 자도 조이센 대륙의 혈통이라고 했었거든." 장영실은 희열에 넘치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 하고 있었다. "드디어 명신이..."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게하임은 턱을 쓸며 궁금한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흠흠. 아무튼 자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따라 응당한 대우를 해줄 테니 수고 좀 해주게나. 상부의 지시도 지시지만 도이첸 제국에 지는 것은 나도 못참겠거든?" 간절히 이야기하는 게하임의 말은 더 이상 장영실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명신과 만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사실 하나로 가슴이 벅차 오르고 있었다. (33) 장영실이 듀들란의 수도로 이동하고 있는 시간 뮤스는 진흙탕을 기어다니며 비지땀을 땅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제길! 아침마다 왜 이런 짓을 해야하는 거야!" 잠시 기어다는 것을 멈추며 뮤스가 투덜거리자 그의 옆구리로 누군가가 파고 들어옴 을 느꼈다. "형!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야만 하는 거야?" "벌쿤... 이 형이 더 답답하다." "형은 몸이 빈약하니까 해야 되겠지만 난 안 해도 된 다구! 이 정도는 정말 쉬워!" "너 나랑 팔씨름 한 번 해볼래!" "좋아!" 벌쿤과 뮤스가 티격거리고 있을 때, 둘은 머리위로 뭔가가 날아옴을 느꼈고, 동시에 번갯불이 튀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탁! 탁!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그들을 훈련시키는 레인져 교관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험악한 인상을 쓰고있었던 것이었다. 그의 입에선 평소와 같이 요란한 말투가 터져 나왔다. "제군들! 체력이 다가 아닙니다! 이런 진흙을 더러워하면 진흙에 살고있을 쉴드옥토 퍼스를 어떻게 잡겠습니까?"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그 두 명의 훈련생(?)들은 입 을 다물고 다시금 진흙땅을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벌쿤 활 쏘는건 잘 되가냐?" "하하하 커크 대장님이 빨래보다 활에 더 재능이 있다고 하시던걸?" "오! 그래?" "형은 어떤데?" "나는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잘 안되더라구. 뭔가 머리를 굴려봐야겠어." "형이 안되면 우리가 훈련하는 것들이 모두 허사가 되잖아?" "이봐... 나도 노력하고 있다니까. 잔소리 말고 빨리 기어. 난 점심을 굶기 싫어." 뮤스의 말을 듣던 벌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동안 윌드린과 커크의 사이가 나름대로 개선이 되었는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작전의 회의 때문에 참는다고 하지만, 커크에게 예전처럼 싸 늘하게 대하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그들의 옆에는 오전 훈련을 마치고 진흙이 묻은 손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두 명의 걸신이 보였는데 벌쿤과 뮤스였다. 윌드린은 말린 고기를 칼로 썰며 커크에게 물었다. "요 며칠 이 녀석들 훈련 성과는 어떤가요?" 커크는 그녀의 물음에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윌드린씨는 벌쿤군이 활 쏘는 것을 보신적 없으시죠? 정말 대단하답니다! 이런 청년 이 지금까지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정도예요." 그의 말에 벌쿤을 잠시 바라보던 윌드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눈길을 돌려 뮤스 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뮤스죠. 뮤스는 어떤가요?"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커크는 대답을 조금 꺼려했다. "흠... 뮤스군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리온의 말을 인용하자면... '뮤스가 가장 못 하는 것이 있으면 사격일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더 이상 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 살기 힘들 것이라고..." "그... 그럼 전혀 진전이 없다는?"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답답한 한숨을 내쉬던 윌드린은 뮤스를 바라보았고, 식사를 하던 뮤스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히 말했다. "저... 밥 좀 더 먹을게요..." 상황에 맞지 않는 뮤스의 말을 들은 윌드린은 어이가 없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커크는 황당함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윌드린씨 너무 낙담은 하지 마시죠. 리온이 잘 가르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낙담 안 하게 되었나요? 이제 삼일 후면 마을의 식량이 모두 바닥이 나 요! 그 전에 쉴드옥토퍼스를 잡아야 하는데..." 윌드린이 암울한 상황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뮤스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지 솥을 들고 와 스푼으로 퍼먹고 있었다. 아무리 똑똑해 졌다고 하더라도 몸에 익은 습 성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끼기기긱! 퓽! 한 대의 나무 화살이 파공성을 일으키며 공기를 갈랐고, 50멜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 의 과녁 정 중앙을 깨끗하게 관통했다. "후우..." 벌쿤은 활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활을 연습 시작한지 일 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이 정도 거리의 과녁 정 중앙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 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있어 뭔가 모자람을 느끼는 듯 했다. "이 정도 거리에서 과녁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많을 거야. 하지만 남들과 같아서는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해. 난 누나에게 꼭 인정을 받아 유글렌 부족 최초의 남성 전사 가 될 테다..." 모종의 결심을 한 벌쿤은 허리춤에 매달린 화살 통에서 화살 한 대를 더 빼내어 시위 를 먹이며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때,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쿤! 잠깐만!" 그의 부름에 타이밍을 잃은 벌쿤의 화살은 과녁과는 전혀 무관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 고, 그것을 본 벌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형 무슨 일이야?" 벌쿤을 향해 달려오는 뮤스의 손에는 검은색의 화살 스무 개 가량이 들려있었는데, 자신을 위해 뮤스가 만든 것임을 알아챈 벌쿤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형 이제 다 만든거야?" "후훗 녀석 많이 기다렸지? 이 화살로 말할 것 같으면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했기 때 문에 이할 정도 속도향상 시켰고, 깃 모양을 바꿔서 바람이 불더라도 안정적인..." 뮤스가 긴 설명을 시작하려 하자 벌쿤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형! 제발 그만해. 머리 아프단 말이야." "어? 그래?" 머리를 한번 긁적인 뮤스는 자신이 들고있던 화살을 벌쿤에게 넘겼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던 벌쿤은 몸을 휘청였다. "뭐... 뭐야..."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뮤스는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듯 자신의 머 리를 두들겼다. "아아... 이거 철제 화살이야." 철제 화살이라는 말에 놀란 벌쿤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화살을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무거운 화살을 어떻게 날린단 말이야?" "하하 물론 일반 적인 활로 저 화살들을 날리기는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활의 탄성을 계산해 보면 저 정도 화살쯤이야 가뿐 하다구. 한번 해보면 되잖아?" 벌쿤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발아래 내려놓은 검은 쇠화살 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걸. 화살의 무게도 장난이 아니야." "그만큼 날릴 수 있다면 파괴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지." 그의 말을 듣자 벌쿤은 번뜩하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이 화살을 자유자재로 쏠 수 있다면 굉장한 전사가 될 수 있어.] 고개를 한번 끄덕인 벌쿤은 화살 한 대를 짚어 올렸는데, 그 엄청난 무게에 다시 한 번 신음성을 흘렸다. "끄응... 이걸 정말 날릴 수는 있는 거야?" "녀석 의심한번 많군. 안 그래도 철을 다루는 기술이 딸려서 고생했는데..." "알았다구!" 벌쿤은 투덜거리는 뮤스를 향해 입을 내밀며 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활에 철제 화살이 더해지자 그 무게는 대단했는데, 아무리 근육질의 벌쿤이라 고 해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시위를 당기며 호흡을 멈추자 온몸의 근육들은 잔뜩 팽팽해져 옷 위로 불거져 나왔다. 화살을 날릴 표적을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여 그 옹이를 겨냥했다. 그리곤 손가락을 뒤로 빼며 화살을 날렸는데, 지금까지의 나무 화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요란한 파공성을 내며 옹이를 향해 날아갔다. -피슈슈슈슝! 퍼억! 나무에 박혀 들어가는 화살을 바라보며 벌쿤은 입을 벌렸다. 화살이 두부에 박히듯 나무에 들어가더니 꼬리만 남기고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으로 급히 달려간 벌쿤 은 자신의 두 아름은 됨직한 나무에 박혀서 꼬리만 내밀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뮤 스에게 해명을 바라고 있었다. 뮤스는 느긋하게 그곳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호오 생각보다 더 괜찮은걸?" 엄청난 파괴력을 목격한 벌쿤은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학자> #75 화살을 벌쿤에게 전해준 뮤스는 리온과 함께 바위 위에 걸터 앉아있었다. 평소 같았 으면 사격 연습을 하고 있을 시간에 이런 바위에 앉아 있는 것에 생각을 해보니 뮤스 는 참으로 의아했다. 한동안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하던 리온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 고, 뮤스에게 말했다. "뮤스..." "네?" "이번에 계획된 모든 작전이 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겠지?" "하하 물론이죠." 그의 대답을 듣던 리온은 이빨을 살며시 갈며 뮤스를 내려다 보았다. "헌데... 왜 이렇게 실력이 늘지를 않는 것이지?" 뮤스는 한심하다는 말투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온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흠... 노력은 열심히 하는데요... 늘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곰곰히 생각을 해봤지." "어떤?" "포기하자." 이 무뚝뚝한 사내가 어이없는 말을 내뱉자 뮤스는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동 안 말을 하지 못하던 뮤스는 리온의 다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헤헤... 농담이시죠?" 하지만 리온의 표정은 변할 줄 몰랐고, 지긋한 표정은 장난이 아님을 대변하고 있었 다. "그게 아니라면 방법이라도 있나? 난 솔직히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자신이 없어." "헉!" 뮤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가장 싫어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세계까지 와서 구제불능이라는 소리를 듣다니...] 리온의 말을 나름대로 확대 해석한 뮤스의 안색은 울그락 불그락 변해있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눈을 부릅뜨며 쏘아오는 뮤스의 말에 정작 놀란 것은 리온이었다. 사실 커크를 기다 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말을 흘렸던 것이었는데, 뮤스가 이렇게 흥분 할 지는 몰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뮤스는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기에 멍 청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리온을 향해 걸어오던 커 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보게 리온. 뮤스는 어디 갔나?"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갔습니다."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리온의 얼굴을 보며 커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오늘은 예비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소용없습니다." 딴 곳을 바라보며 말하는 리온을 향해 커크가 물었다. "소용없다니?" "예전에도 말했다 시피 뮤스는 전혀 재능이 없습니다. 재능을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 죠. 평균 수준도 안됩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 수준인가?" 커크의 되물음에 벌쿤은 고개를 끄덕임으로 일관했고, 커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뮤스는 사격 훈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가방에서 전뇌지자총통 을 꺼내든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과녁을 조준했고, 뇌공력을 손으로 모아 발사하기 시작했다. -징... 피융! 몇 번인가를 그렇게 쏴댄 뮤스는 과녁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그려진 과녁 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주변의 울타리들만이 재로 화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을 본 뮤스는 화가 났는지 힘껏 땅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제길! 내가 이런 것도 못할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졌단 말인가!" 땅에 화풀이를 한 뮤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뇌공력을 운용하지 않고 땅을 치 자 손이 너무나 아팠던 것이었다. "재수도 지지리 없지, 돌을 때렸어. 아야야.." 그의 눈앞에는 모양 좋은 돌맹이가 하나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뮤스는 피식 웃 으며 말했다. "후훗. 예전에 이 정도의 돌만 있었으면 비석차기 할 때 정말 좋았겠는걸? 그때가 그 리울 때도 다 있군... 그래! 비석차기!"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두 눈동자를 빛내며 전뇌지자총통을 다시 들어올렸다. "돌을 던져 십장 밖의 공깃돌을 맞추던 내가 이 따위를 못 할 리가 없어. 그럼 뭐가 잘못 된 것이지?" 전뇌지자총통을 돌려보던 뮤스는 세밀히 깎여있는 겨눔쇠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머리 를 때렸다. "그래. 내가 겨눔쇠를 너무 의식하고 있었구나.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지. 예전에 는..." 옛 생각을 하며 자신감을 얻은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의 겨눔쇠를 무시하고 돌을 던지 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일단 두 눈으로 물체를 확인한다. 내 어깨에서부터 목표까지의 직선거리를 눈대중으 로 잡고, 숨을 참는다. 심장 뛰는 것이 느껴지는군. 심장의 박동을 따라 셋을 세고,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뇌공력을 흘리는 것이지... 이렇게.] -징... 피융! 전뇌지자총통에서 발사된 밝은 빛줄기가 과녁을 관통하자 그 중심에 칠해진 붉은 표 시는 검은 색으로 변하며 바람에 흩날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있던 뮤스는 과녁에 구 멍이 난 것을 확인하곤 밝은 표정으로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호! 드디어 성공이다! 눈으로만 맞추려고 하니 무리가 있었던 것이야." 그 때부터 뮤스의 훈련은 계속 되었는데 몸에 비축된 뇌공력을 모두 소진시키고 서야 그 자리에서 잠이 들며 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뮤스가 드베인 숲으로 들어 온 지도 벌써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레인져들의 혹 독한 훈련 덕으로 그의 몸은 알게 모르게 단단해져 있었고, 전뇌지자총통역시 능숙하 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모든 유글렌부족의 사람들과 레인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출전의 시기를 정하는 자리였다. 유글렌 부족의 전사들 을 이끌고 있는 윌드린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훈련에 땀을 쏟아 준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아시다 시피 출전의 시기를 정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지금 여유분의 식량은 거의 바닥 난 상태 이고, 내일 오전의 식사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윌드린의 말에 때가 온 것임을 직감한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레인져 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져있는 만큼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던 유글렌 부족의 여전사 한 명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 식사를 하고 출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일단 어두운 드베인 숲이라도 싸우 기에는 그나마 낮이 나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커크가 몸을 일으켰다. "제 생각에는 오늘밤이 좋을 듯 합니다." 윌드린은 시선을 옮겨 커크를 봤는데 알게 모르게 레인져 대장으로써의 위용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커크대장님은 왜그렇게 생각하시죠?" "쉴드옥토퍼스의 습성상 빛에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드베인 숲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위쪽 밖에 없기 때문에 쉴드옥토퍼스의 이목이 모두 위쪽으로 몰리기 때 문이죠." "그렇다면 밤과 어떤 차이게 있게 되나요?" "쉽게 말해 뮤스군이 쉴드옥토퍼스에게 쉽게 노출이 된다는 말입니다. 쉴드옥토퍼스 의 눈을 저격하려면 높은 곳에 위치를 해야합니다. 사람의 키로는 쉴드옥토퍼스의 눈 을 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뮤스군에게 나무에 오르는 훈련을 병행해서 시켰던 것입니다." 커크의 말에 모두들 동감하는지 모인 사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서야 왜 진 흙을 바른 채 나무를 기어올라야 했는가를 깨달은 뮤스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새삼스 럽게 커크를 바라보았다. 윌드린은 다시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커크대장님의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방금전 의견을 내놓던 여성이 일어났다. "대장님의 의견을 들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커크대장님의 의견 을 따리기로 하죠?"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생각과 같았는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맞소! 오늘 저녁에 쉴드옥토퍼스를 잡고 내일 남은 식량으로 축제를 벌입시다!" "와아!!! 쉴드옥토퍼스를 몰아내자!" "몰아내자!!"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레인져들 둘러보던 커크는 아무도 모르게 안색을 굳히고 있 었다. [과연 성공 할 수 있을까?] 윌드린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는지 썩 즐거운 표정만은 아니었다. 모인 이들 이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커크가 손을 올리며 주위를 집중 시켰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밤으로 출전 시간을 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모두들 자정에 이곳으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때까지 피곤을 풀도록 하죠. 이상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힘찬 표정을 지으며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 고,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커크, 윌드린, 뮤스, 벌쿤 네 명 뿐 이었다. 사람들이 들 어가는 것을 확인한 윌드린은 커크를 향해 물었다. "과연 우리가 쉴드옥토퍼스에게 이길 수 있을 까요?" 하지만 커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뮤스와 벌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던 벌쿤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누나!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해? 이 동생이 그 녀석을 잡아 줄 테니 걱정하지마!" 그런 동생이 대견 스럽기라도 한지 윌드린은 피식 웃으며 얼굴을 바꿨다. "풋! 당연하지! 네가 누구동생인데!" 다행스럽게 분위기가 풀려가자 뮤스 역시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봐요. 쉴드옥토퍼스는 내가 잡는다구! 그런 화살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다들 형을 포기한 눈치인데 뭐! 아무리 노력해도 사격 솜씨가 늘지 않는다며?" "이 녀석아! 예전의 뮤스님이 아니시란 말이다!" "그래봐야 며칠사이에 얼마나 늘었겠어?" "너 이 녀석!" 뮤스가 요란 법석을 떨며 벌쿤을 잡으려 했지만, 벌쿤은 이미 빠르게 그의 손에서 빠 져 나와 놀리며 도망가고 있었다. "헤헤 날 잡아보셔! 나도 못 잡으면서 어떻게 쉴드옥토퍼스를 잡으려고?" "너! 거기서라!" "내가 활 맞았수? 서란다고 서게? 히히히" 그렇게 장난을 치며 어디론가 사라질 때 커크는 웃음 짓고 있었다. "후훗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아이들이군요." 윌드린 역시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철이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밝은 아이들이에요. 뮤스가 오기 전만 해 도 매일 투덜거리기만 하던 동생도 많이 변했고요." "후훗 아무튼 든든한 동생을 두셔서 참 부럽군요. 저런 가족이 있다니..." "그럼 대장님은 가족이 없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커크는 쑥스럽기만 한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하하 대장님이라는 소리 좀 빼주시면 안됩니까? 그냥 커크라고 부르시죠. 이렇게 보 여도 아직 서른도 안 됐는걸요?" "에? 정말요?" 커크와 윌드린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뮤스와 벌쿤은 통나무집 뒤에 숨어서 놀라고있 었다. 사실 교묘한 연출로 자리를 비켜준 그들이었는데, 윌드린도 시집 갈 나이가 됐 다고 생각한 벌쿤은 마침 커크가 마음에 들었기에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었다. 통나무집의 뒤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벌쿤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형... 들었어? 커크대장님이 서른이 안됐데." "으응... 나도 들었어 벌쿤. 세상에... 난 마흔 살 정도 인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 보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사실이라면 더 잘 됐는지도 모르겠어." "너 설마 너희 누나와 커크대장님을?" 뮤스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하... 그럼 커크대장님도 이곳에서 살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네 누나가 그런 것을 할 리는 없다고 보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둘이 알아서 할 일이니... 아무튼 더 지켜 보자구. 조용히 해 봐!" 뮤스와 벌쿤은 쑥덕거림을 멈추고 다시 두 남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Name : 용혼 Date : 06-02-2002 17:17 Line : 158 Read : 54 [77] <대공학자> #76 -------------------------------------------------------------------------------- -------------------------------------------------------------------------------- Ip address : 218.148.136.11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후우. 저도 한때는 가족이 있었죠.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동생과 함께 살았거든요. 하지만 벌쿤군 처럼 우락부락한 남동생이 아니라, 작고 깜찍한 여동생이 었어요." 커크의 말에 윌드린은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닮았으면 그리 깜찍할 것 같지는 않은 걸요?" "윽... 그럼 절 안 닮았다고 치죠. 어쨌든 예뻤으니까. 아무튼 우리는 블리엔 지방의 한 농가에서 컸어요. 봄이면 함께 들판으로 나가서 양을 쳤고, 가을이면 가을 축제를 즐겼고, 겨울이면 스노우 드래곤을 만들면서 놀았죠. 그리고 또 다시 봄..." "에? 여름에는 뭘 했나요?" "아... 블리엔 지방은 북쪽이라 여름이 없죠. 봄, 가을, 겨울 삼 계절뿐이거든요." "음... 이제 이해가 됐으니 계속 하세요." 커크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제가 스무 살이 되던 때... 아주 슬픈 일이 일어났답니다." "아..." "제 동생과 헤어져야만 했죠. 나에게 유일한 혈육인 그 아이를... 그 몹쓸 녀석이 빼 앗아 가버렸답니다. 그때의 아픔으로 저는 레인져에 지원해 이런 생활을 하며 매일 같이 동생을 떠올리곤 한답니다." "저런... 그렇다면 동생 분은 못된 영주가?" 윌드린의 물음에 커크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도적들에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내저었다. 윌드린은 궁금증이 물씬 이는 눈빛으로 커크 를 바라보며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럼 뭐예요?" 흥분해 있는 그녀를 본 커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을의 한 녀석과 눈이 맞아서 결혼했죠. 후훗." "에엑? 그게 뭐예요?" 윌드린이 어이없음에 비명을 지를 때 커크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을 했다. "저에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데요? 평생 남자를 모르고 살 줄 알았던 동생이 결혼 할 거라며 그 녀석을 집에 데리고 왔을 때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구요!" "푸하하하하! 그래서 지금 동생은 어때요?" "말도 마세요. 매번 갈 때마다 행복해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죠. 그래도 매부가 정말 착한 녀석이라 믿음직하답니다." 커크의 이야기에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느새 부드러워 졌고, 긴 이야기를 나누며 날 은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34) 출전 드베인 숲의 나무사이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빛이 완전히 사라져 밤이 되어 왔을 때, 유글렌부족의 모든 전사들과 빅투스들, 그리고 레인져들이 마을의 공터에 모여 자신의 무기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껴있던 뮤스와 벌쿤도 소지품들을 점 검하고 있었는데, 벌쿤이 흰 천으로 활의 손잡이를 닦으며 말했다. "형 떨리지 않아?" "내가 누구냐 천하의 뮤스인데, 당연히 떨리지. 말시키지 마라 심장이 멈출지도 몰 라." "푸하하! 형의 농담은 정말..." "농담이 아냐, 그러는 넌 어때?" 뮤스의 말에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벌쿤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언제나 멋지지." "누가 너 멋지냐고 물어봤냐? 아무래도 떨려서 제정신이 아니군." "응. 떨려죽겠어." 뮤스와 벌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단상에 올라가 있던 커크는 작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은 수색조, 유인조, 저격조로 나누게 됩니다. 수색조는 모두 레인져로 편 성되어 쉴드옥토퍼스의 위치를 찾아내게 됩니다. 그 다음 유인조는 수색조로부터 100 멜리 가량 떨어져 행동을 하는데 쉴드옥토퍼스의 이목을 끄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동 성이 좋은 유글렌부족의 빅투스 전사들이 맡고, 그 사이 저격조가 나무 위에서 위치 를 잡는 것입니다. 저격조는 레인저의 석궁사수들과 벌쿤, 그리고 뮤스가 맡게 되겠 습니다. 수색조의 조장은 제가, 유인조의 조장은 윌드린씨, 저격조의 조장은 리온입 니다. 각 조의 행동은 조장이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장들의 지시에 따라주기 바랍 니다. 이상." -와아!! 그의 설명이 끝나며 마을 사람들과 레인져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함성을 질렀고, 커 크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둘러보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전사들과 레인져 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조로 움직이자 벌쿤과 뮤스 역시 자신들이 속해있는 저격조의 조장인 리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뮤스가 저격조의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 사격 장에서 함께 훈련을 하던 레인져들이었는데, 평소의 넉살좋던 모습들은 사라진지 오 래고 눈빛에는 긴장감과 흥분감 만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온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과 눈빛이었기에,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인지 전투를 나가는 사람인지 모를 지경 이었다. "자 다들 들었겠지? 레인져의 석궁 사수들은 유인조를 지원하며 뮤스가 위험할 때 쉴 드옥토퍼스의 이목을 끈다. 뮤스 너는 우리 중 가장 앞쪽에 위치한다." "흐엑! 제가요?"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위험 할 때는 석궁으로 쉴드옥토퍼스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 테니 너는 천천히 조준해서 쏘기만 하면 된다." "아.. 알았어요." 리온이 뮤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 벌쿤이 나서며 물었다. "그럼 저는 뭘 하죠?" 고개를 돌려 벌쿤을 바라보던 리온은 잠시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 었다. "몰라." "에? 조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그런가?" 무표정, 무책임한 리온의 태도에 벌쿤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가가 아니라구요! 지금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고작 대답이 그거라 니!" "그럼 뮤스를 엄호해. 됐나?" 자신이 할 일을 말해주자 그제서야 화가 조금 풀리는지 뮤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 였지만, 아직도 화가 다 풀린 것은 아니었기에 뾰롱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뮤스가 말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내가 얼마나 힘들게 훈련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응." 벌쿤과 뮤스가 죽이 맞아 리온의 험담을 하고 있을 때, 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 조들 간의 신호는 피리로 한다. 피리소리가 길게 한번 울리면 쉴드옥토퍼스의 출 현, 짧게 한번, 길게 한번이면 유인조의 활동시작, 길게 두 번이면 저격조 위치, 길 게 세 번이면 쉴드옥토퍼스 사냥 성공, 반대로 짧게 세 번이면 실패다. 그 즉시 이곳 으로 귀환할 것. 알았으면 출발하지." -넷! 저격조 레인져들의 요란한 대답소리가 울려 퍼질 때를 같이 하여 수색조를 위시한 저 격조, 유인조가 유글렌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마을에 남은 남자들과 어린아 이, 노인들은 그들은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었다. 유글렌부족의 마을로부터 5켈리 가량 떨어진 습지대, 일단의 무리들이 조심스러운 발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레인져의 대장인 커크였다. 그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며 허리를 숙였다. -스슥... 커크가 손을 내밀어 흙을 만져 보고자 양옆의 흙들과는 다르게 끈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흙을 쓸고 간거리를 확인한 커크는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멈추라 는 수신호를 보냈다. [이쪽으로 이동했군.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 조금 후면 마주치겠어.] 다시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커크는 불길한 기운이 등골 사이로 흐르는 것을 느끼 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아무리 어둡더라도 녀석들의 크기를 예상해 볼 때 이 정도의 거리라 면 시야에 확보가 되어야 할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다시 신호를 하기 위해 몸을 돌릴 때 문득 다리가 무거워 짐 을 느꼈다. "헉!" 가슴이 철렁일 정도로 놀란 그는 천천히 눈동자를 깔아 아래를 바라보았는데, 다행스 럽게 쉴드옥토퍼스의 다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얇은 무엇인가가 그의 다리를 감고있 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커크는 몸을 숙여 풀어내려 했지만 그것의 정체를 깨닫자 다시 몸이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쉬...쉴드옥토퍼스의 새끼? 그렇다면 여긴!] 그가 이곳에 쉴드옥토퍼스들의 산란 장소임을 눈치챈 동시에 사방의 나무들을 통채로 부수며 조원들을 감아오는 엄청난 기둥을 볼 수 있었다. -퍼퍼퍼퍽! 그림자로 보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수색대들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몸을 날렸고, 그 덕에 간신히 세상을 하직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푸슥! 몸을 웅크리며 움직임을 숨기고 있던 커크는 손에 잡고있던 쉴드옥토퍼스 새끼의 눈 에 칼을 박아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녀석을 살려 둘 수는 없지." 그리곤 나직한 목소리로 숨어있는 조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피리를 불어 유인조에게 신호해라. 우리의 할 일이 끝났으니 이제 저 녀석을 피해서 퇴각한다." -삐이이이익!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숲속의 어딘가에서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고, 조원들은 몸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쉴드옥토퍼스 새끼의 피가 묻은 칼을 허리춤에 꽂은 커크 역 시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돌아온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때, 그의 등뒤로부터 굵직한 쉴드옥토퍼스의 다리가 또 다시 휘둘러지며 멀쩡하게 서있던 나무들을 무자비 하게 쓰러트렸다. -퍼퍼퍼퍽! 그 여파에 휩쓸린 커크와 조원들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야만 했는데, 둔중 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커크는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고, 조금 후에야 간 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가 풀렸기에 서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젠장할! 발길질 몇 번으로 이 꼴이 되어 버리다니! 정말 힘들군!" 그가 주변을 둘러보니 몇 명의 부하가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나?" 조원들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힘겹게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그의 양옆을 둘러 싸고 있던 수풀들이 거침없이 흔들리며, 엄청난 굵기를 가진 쉴드옥토퍼스의 다리가 튀어 나왔는데, 순식간에 비틀거리던 조원을 낚아채며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끄아아악! 쉴드옥토퍼스의 다리에 들어올려진 조원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 장 면을 보던 커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뿌두둑... 허공에는 조원들의 뼈 어긋나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들려왔지만, 이미 죽었 는지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만 시신들을 내던진 쉴드옥토퍼스의 다리 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크릉...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숲 속의 어디에선가 여인들의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오 고 있었다. "핀. 네 빅투스 좀 조용히 시켜." "네 언니." "벌써 쉴드옥토퍼스의 이목을 끈다면 우린 다 죽음 목숨이야." "죄송해요." 이들은 유인조를 맡고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유글렌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윌드린에게 꾸지람을 들은 핀은 고개를 숙이며 반성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 함 께 숨죽이고 있던 여 전사들은 핀의 등을 두들겨주며 괜찮다는 위로를 하고있었다. 그녀들의 위로를 받은 핀이 고마움을 느끼며 입을 열려는 순간, 허공의 침묵을 깨우 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익! 멀리서 피리소리가 들려옴을 느낀 윌드린은 긴장된 눈빛으로 유글렌의 전사들을 바라 보며 재빨리 행동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수색조와 쉴드옥토퍼스가 조우했다. 저격조에 유인 시작을 알리고, 다들 연습했던 것과 같이 유인 준비해!" -삑! 삐이이이익! 저격조에게 피리를 불어 유인개시 신호를 보낸 유인조의 조원들은 일사분란하게 빅투 스들의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고, 그녀들의 말을 알아들은 듯한 빅투스들은 하나 둘 포효하기 시작했다. -쿠워워엉!! 커흥! 빅투스들의 포효를 확인한 윌드린은 피리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한번 응시했다. 그리 고는 조원들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유인개시 신호를 하자 그녀들은 빅투스들의 등 에 올라탄 후 의식적으로 큰 움직임을 보이며 왔던 길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삑! 삐이이이익! 수색조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걸어가던 저격조는 유인조의 피리소리를 들으며 제자리 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주변 나무들의 높이와 위치를 확인한 리온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저격조원들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의 설명을 충분히 들었던 조원 들은 한치의 서슴없이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뮤스와 벌쿤도 끼어있었는데,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는지 능숙한 자세로 나무에 오르고 있었다. 같은 나무에 올라간 뮤스와 벌쿤은 레인져들의 위치를 확인하 기 위해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살펴보았는데, 모두들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푸스슥! 그 둘의 시선 역시 다른 저격조원들의 시선을 따라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 곳으로부터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다가 오는 것이 보였는데, 흐물 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쉴드옥토퍼스임을 짐작 할 수 있었 다. 뮤스의 옆가지에 몸을 숙이며 서있던 벌쿤이 흥분이 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저 녀석이야!" 벌쿤의 말에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뮤스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뇌지자 총통을 꺼내 조준했다. 하지만 아직 쉴드옥토퍼스의 눈은커녕 실체조차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어디까지나 준비자세일 뿐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점점 뮤스를 비롯 한 저격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쉴드옥토퍼스임을 알긴 했지만 한번도 보 지 못한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이 뮤스의 가슴을 짓눌러 무겁게 만들었다. [침착하자. 아직은 아니야...] 뮤스가 스스로에게 위로 말을 하며 침착을 유지하고 있을 때 벌쿤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를 돌려 그를 보니 어깨에 매고있던 활을 풀어 준비하는 모습이 었는데, 잔뜩 긴장한 탓인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긴 장하는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한 뮤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조금이나마 안정을 취 할 수 있었다. 이제 쉴드옥토퍼스의 형체가 드러날 정도로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70 멜리... 60멜리... 50멜리... 그것의 가장 긴 다리가 뮤스가 있는 나무아래를 통과할 때 50멜리 가량 떨어져 있는 몸통으로부터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것이 쉴드옥토퍼스의 눈임을 알아챈 뮤스는 숨을 죽이며 전뇌지자총통으로 그것을 겨 냥했다. 하지만 정지해있는 목표물로 훈련을 하던 때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목표물이 었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냐. 이 정도 움직임은 충분히 계산해 낼 수 있다. 일정한 속도니 별무리가 될 수 는 없지.] 뮤스는 눈조차 깜짝이지 않고서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것의 일 정한 움직임을 간파한 뮤스는 손으로 뇌공력을 모으기 시작하며 숨을 죽였다. [그래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하나... 둘... 셋... 이때다! 뇌공력 오성 발출!] 손에 집중시킨 뇌공력을 전뇌지자총통으로 흘리자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발사되었 고, 그로 인해 잠시나마 쉴드옥토퍼스의 전신이 드러났는데, 거대한 방패모양의 막을 머리에 왕관처럼 쓰고 있는 모습을 하고있었으며, 그 길이는 예상보다 더욱 길어 120 멜리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전뇌지자총통에서 발사된 빛이 사라지자 사방 은 다시 암흑으로 물들고 있었다. 결과를 숨죽이며 바라보던 저격조원들은 더 이상 쉴드옥토퍼스가 움직이지 않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벌 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쉴드옥토퍼스가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 한 그는 흥분한 얼굴 로 뮤스를 향해 외쳤다. "형 성공이야! 쉴드옥토퍼스를 잡았어!" 그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르던 뮤스는 순간 주변이 다시 조용해짐을 느꼈는데, 누군가의 비명소리로 인해 재 빨리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지 살펴야만 했다. -으아악! "무슨일이야?!" 대답은 방금 전 자신의 옆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벌쿤의 입에서 들어야만 했다. 그는 겁에 질렸는지 입술은 새파랗게 변해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녀.. 녀석이 다시 살아났어..." "뭐라고? 제길!" -파파파팟! 뮤스가 고개를 돌려보자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쉴드옥토퍼스의 다리들 사이로 또 다 른 다리들이 뻗어 나오며 나무 위에서 환호성 치던 조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황급 히 정신을 차린 조원들은 엉겁결에 석궁을 쏘면서 대항하고 있었지만 쉴드옥토퍼스에 게 상처를 입히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무기들이었기에 속수 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뮤스 역시 그들과 같이 공포에 질려있었다. 몸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 지 않았고, 전뇌지자총통을 들고있는 손은 힘이 빠져나가 금새라도 그것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리온의 외침으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뮤스! 저놈은 아까 그놈이 아냐! 두 마리가 동시에 돌진해오고 있었다! 빨리 눈을 찾아 쏴버려!"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서둘러 쉴드옥 토퍼스의 눈을 찾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찾던 벌쿤이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형! 여기야! 우리 나무 바로 아래!" 벌쿤이 가리킨 곳을 황급히 바라보자 그의 말대로 반짝이는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볼 수 있었고, 재빨리 전뇌지자총통을 겨누었다. 하지만 쉴드옥토퍼스 또한 뮤스의 위치 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거대한 다리를 휘둘러 그가 서있던 나뭇가지를 박살내는 동시 에 그의 몸을 날려버렸다. -퍼버버벅! 옆의 가지에서 뮤스가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벌쿤은 분노하며 화살의 시위를 먹였 다. "이 망할 자 식! 감히 뮤스형을! 죽어랏!" 그의 손에서 당겨진 시위가 놓여지며 묵직한 쇠화살이 파공성과 함께 허공을 갈랐고, 그것은 쉴드옥토퍼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 들어가 박혔다. 하지만 별다른 피해가 없는 지 쉴드옥토퍼스의 공격은 계속 되고 있었다. 한편 쉴드옥토퍼스의 다리에 맞아 나가 떨어진 뮤스는 고개를 한번 흔들어 보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휴우... 뇌동체술법으로 보호를 하지 않았으면 가루가 될 뻔했군." 몸에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뮤스는 자신이 걸려있는 나뭇가지에서 몸을 일으켜 전 황을 살폈는데, 사방에서 살아남은 저격조원들이 석궁을 날리고 있었으며, 벌쿤도 흥 분한 상태에서 쇠화살들을 쏘아대고 있었다. "벌쿤녀석 저렇게 흥분하다간 위험해!" 뇌공력을 사용해 몸을 날린 뮤스가 벌쿤을 껴안으며 다른 나무의 가지로 몸을 피했 고, 그가 서있던 가지는 산산조각이 나며 흩날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 벌 쿤은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하자 그것이 뮤스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형 아직 살아 있었네?" "난 장가도 못 가고 죽기는 싫다. 내가 처리 할 테니 넌 피해있어." 벌쿤에게 한 마디 한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을 들어 그들을 지나쳐간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자 이 녀석 이번에야말로... 엇!"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겨냥하던 뮤스가 갑자기 머리를 짚으며 휘청이자 벌쿤이 다급하 게 부축을 하며 물었다. "형! 왜 그래?" "큭! 저 녀석에게 발길질 당하면서 골이 흔들렸나봐.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만, 이 정 신으로는 저 눈을 맞출 수 없는데 큰일이군." 그의 상태를 살펴보던 벌쿤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 화살로 끝낼게!" 벌쿤의 말에 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화살이 아무리 쇠로 만들어진 화살이라지만 저 녀석의 눈을 뚫고 들어가기는 무 리가... 쇠?" 뮤스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히 말을 돌리며 벌쿤을 바라보았다. "벌쿤! 꿰뚫지는 못하더라도 저 녀석의 눈을 맞출 수는 있겠지?"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벌쿤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한다. 그 이후는 내가 맡을게." "알았어. 뭔가 방법이 있겠지." 심호흡을 한번 한 벌쿤은 쇠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먹였고, 호흡을 멈추며 쉴드옥 토퍼스의 눈을 겨냥했다. 그리곤 손에 잡고있던 시위를 놓자 쇠화살은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갈라, 보기 좋게 쉴드옥토퍼스의 눈에 박혔다. 하지만 쉴드옥토퍼스는 아무렇 지도 않은지 계속 해서 저격조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벌쿤이 낙담하는 표정을 지으 며 뮤스를 바라볼 때, 뮤스는 재빨리 전뇌지자총통으로 쉴드옥토퍼스의 눈을 겨냥하 며 말했다. "후훗. 넌 죽었다! 뇌공력 오성발출!" 그의 외침과 함께 전뇌지자총통으로 부터 또 한번의 눈부신 빛이 발사되었는데, 안타 깝게 목표물을 약간 빗나간 듯 보였다. 허나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바로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던 빛이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그것의 눈을 관통해 버렸던 것이었다. 벌쿤은 이 기적 같은 일에 입을 벌리며 뮤스를 바라봤고, 쉴드옥토퍼스의 다리들과 혈투를 벌이던 저격조원들 역시 그것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뮤스에게 눈을 돌렸다. "와아! 뮤스형이 녀석을 잡았어요!" 벌쿤이 요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싸우던 저격조원들은 상황을 정리 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저격조원들은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 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문득 기억해 냈는지, 숲 속으로는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벌쿤은 문득 소리를 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무 위에 걸터앉아 쉴드옥토퍼스 를 바라보고있는 뮤스에게 물었다. "형! 그런데 그 빛이 어떻게 방향을 바꿀 수 있었어?" 쉴드옥토퍼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벌쿤을 바라본 뮤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후훗! 다 네 덕이야. 전뇌지자총통은 번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네가 저 녀석 의 눈에 철침을 박아 줬기 때문에 그곳으로 빨려들어 간거야. 이해가 돼?" "아니." "후훗 그럼 번개치는 날 그 쇠화살들고 벌판에 서있으면 이해가 될거다. 아 저기 사 람들이 오는군." 뮤스의 말에 벌쿤이 고개를 들어보니 윌드린이 이끄는 유인조와, 커크가 이끄는 수색 조의 조원들이 손을 흔들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공학자> #79 유글렌 마을은 떠나는 레인져들을 환송하기 위해 모두들 나와있었다. 이미 장로들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한 레인져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고, 뒤늦게 서야 짐을 모두 꾸린 벌쿤은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매고 나타났다. 물론 배낭만의 객관적 크기가 커서 그렇지, 그의 몸집에 비한다면 딱 알 맞는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벌쿤의 짐의 양은 지금의 두 배는 되었지만 뮤스의 마법가방에 덜어 넣었기에 이 정 도에서 그친 것이었다. 그들이 집에서 걸어나오고 있을 때 커크는 살아남은 레인져 열두 명에게 여행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쉴드옥토퍼스의 산란기기 때문에 다른 몬스터들이 날뛰지 못 한 다. 지금부터 두 달 정도는 드베인 숲은 안전지대인 셈이지... 그래서 쉴드옥토퍼스 들의 산란 지역만 피해 나간다. 예상 소요기간은 열흘. 열흘 후 이 숲에서 빠져나가 게 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레인져 대원들의 대답을 들은 커크는 뮤스와 벌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벌쿤의 배낭에 머물러있었는데, 이미 그들과 친해졌고, 벌쿤의 매형이 되었기에 말투는 편안 해져 있었다. "벌쿤. 그 짐을 다 가지고 가려는 생각이야?" "네? 안되나요?" "후훗. 여기 대원들의 짐을 좀 보라고. 최소한의 생필품과, 음식, 무기가 아니면 소 지하지 않잖아. 급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 다 챙길 수 없거든?" "그렇지만 전 이곳을 완전히 떠나서 외부에 정착해야 하는 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하던 벌쿤은 야릇한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보았다. 뮤스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대신 옷가지만 내 가방에 넣어주겠어. 대신 두꺼운 옷은 가방 입이 좁아서 안 들어가니까 빼놓고 가도록해." "헤헤. 역시 형밖에 없다니까." 벌쿤의 짐을 해결 본 커크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중나온 윌드린을 바라보았다. 겨 우 며칠만에 결혼을 해버린 사이기에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녀를 아끼는 마음만은 각별했다. 윌드린이 다가오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고, 커크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 고 있었다. "커크... 돌아오면 내 밀린 빨래나 좀 해줘요. 그리고 잘 다녀와요." "그...그런" 두 남녀의 대화를 듣지 못한 벌쿤은 뮤스의 허리를 찌르며 말했다. "누나가 야한 이야기 했나봐. 커크대장님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하... 그런가? 내 생각에는 돌아와서 집안일 할 준비나 하라는 것 같은데?" 이때 커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다들 출발!" 커크의 말이 떨어지자 레인져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 작했고, 벌쿤은 윌드린과 포옹을 하며 작별인 사를 하고 있었다. "벌쿤. 나가서도 뮤스 말 잘 듣고, 몸조심하거라." "후훗. 누나 걱정마. 가끔 커크대장님과 연락이 되면 찾아 올게!" "그래... 또 보자꾸나." 그녀의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인 벌쿤은 등을 돌리며 뮤스를 따라갔고, 윌드 린은 눈가에는 아무도 모를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지잉! 철컥! 지잉... -딩동! 오늘의 업무를 마칠 시간입니다. 모든 공학원내의 직원들은 하던 작업을 마무 리해 주십시오. 하루의 일과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방송이 공학원 내부에 울려 퍼지자 안구보호경을 벗으며 직원들은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 보이첼! 오늘 저녁에 술 한잔 어때?" "아! 오늘은 안돼! 우리 마나님이 임신했잖아. 그래서 일찍 들어가야해!" "쳇! 자네는 장가간 후로 매일같이 착한 신랑이구먼!" "미안해! 다음에 시간한번 내자구!" 모든 공학원의 직원들은 자신이 일하던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고, 하나 둘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집무실에서 나온 켈트와 사촌 드워프들은 린강의 발전소로부터 공급되는 전뇌력을 차단하고 있었다. 전뇌력차단장치를 내리던 브라이덴이 투덜거렸 다. "뮤스군이 실종 된지도 벌써 보름이나 지났군. 아직도 크라이츠님은 손쓸 생각을 하 지 않으슈?" 그의 물음에 켈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셔. 어쩌면 뮤스가 누군지도 까먹었을 껄?" "끌끌... 농담이 지나치슈 형님." 그들의 대화에 레딘역시 끼어들며 말했다. "켈트형님의 말씀이 맞을 지도 몰라. 얼마 전에 블뤼엔이 술 마시고 이틀 앓아 누운 날 기억해?" "아무렴 기억나고 말고." "그 다음날 일하러 나왔는데, 누군지 몰라보시더군." "그.. 그런 일이 있었어?" 드워프들이 크라이츠에 대해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에서 나오는 크라이츠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서류들을 보고있었는데, 드워프들을 바라보지 도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켈트씨. 도이첸 기사단에 지급 할 천체만리경 500개와, 원거리대화기 500개를 제작 해 주세요. 그리고... 음. 전뇌거 경주가 끝나고 난 후에 로데오의 수량이 많이 모자 라니 생산라인을 완전가동 시켜주시구요. 뭐...이쯤이면 되겠네요." 말을 마친 크라이츠가 등을 돌려 집무실로 향하자 드워프들은 인상을 구기며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크라이츠는 잊은 말이 있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차! 깜빡했군요. 뮤스가 이쪽으로 이동 중이인데 일 주일 후면 도착 할 것 같군 요." 의외성을 띈 그녀의 말에 놀란 드워프들은 눈을 크게 떴다. 켈트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호홋. 그 녀석이 제가 준 마법가방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모르시나요? 드래곤의 물 건에는 무엇에나 추적 마법이 걸려있어요." "아차! 내가 왜 그걸 깜빡하고 있었지?"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힐책하는 켈트의 얼굴에는 그의 표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설 레임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네들 뭐하나 내일 작업 준비해야지!" 켈트와 함께 신이 난 드워프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료준비에 분주해하기 시작했 고, 그들을 보던 크라이츠는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뮤스 녀석이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아지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우편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 그녀의 눈길을 끄는 한 장의 편지가 있었는데, 뜻 밖의 인물에게 편지가 왔기 때문이 었다. "이 사람도 오랜만이군. 가비르... 아니 재상각하라고 해야하나? 호홋."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고 있던 크라이츠의 눈에는 이채가 서리고 있었는데, 흥 미진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 같은 표정이었다. 한편 뮤스 일행은 드베인 숲의 가장 외곽 지역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삼일 후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조금은 느긋해 있는 상태였다. 뮤스는 모닥불에 손을 쬐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 벌쿤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형이 쓸데 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려 이틀이나 늦어졌잖아." "하하.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짓이냐?" "그깟 슬라임이 녹아죽던 얼어죽던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도 덕분에 냉장고도 만들고 좋잖아? 나중에 라이델베르크에 도착하면 냉장고도 생산해야겠군..." 뮤스의 말을 듣던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형은 그곳에서 뭘하는데?" "음... 빨래기나, 전뇌지자총통이나, 냉장고나.... 뭐 그런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개 발하는 사람이지." "와! 그래서 능숙했었구나." "훗 너도 그곳에 도착하면 머리카락이 다 빠지도록 공부해야 할 테니 미리 각오나 해 둬라." "엥 공부?" 벌쿤이 말에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있을 때 커크는 야영준비를 끝냈는지 그들을 다가 오며 말했다. "후훗 자 이거나 먹어." "이게 뭐예요? "후훗 레인져들이 즐겨먹는 요리야. 뭐 어떤 짐승을 사냥했느냐에 따라 주 재료가 변 하긴 하지만 거의 맛은 비슷하지." 커크가 건네준 철 그릇 안에는 초록색의 스프가 들어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사냥한 사냥감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본 뮤스는 인상을 구겼다. "으엑! 이게 뱀 스프란 말이에요? 그것도 머리가 세 개나 달린? 이걸 어떻게 먹어요. 그렇지 벌쿤?" 뮤스가 벌쿤을 보며 동의를 구하고 있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는데, 벌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스푼을 놀려가며 잘도 먹고있었다. "형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데? 빨리 먹어봐." 정말 맛있는지 행복한 표정을 짓는 벌쿤을 보며 뮤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뱀 스프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들어왔고, 속이 울렁거림을 느 낌 뮤스는 철 그릇을 떠밀며 소리쳤다. "이거 정말 못 먹겠어요! 이게 무슨 냄새예요? 정말 토하고 싶어요." 뮤스가 불평을 하고있을 때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 니 모두들 인상을 잔뜩 쓰고있었는데, 뭐라 말을 하려하자 커크가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입을 열지마! 숨도 될 수 있는 한 쉬지 말고!" 다급히 말하며 자신의 입을 막는 그의 손에서 짠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앞으로 몇 일간은 못 움직이겠군." 뮤스는 자신의 입을 가로막고있는 손을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무슨 냄새예요? 그리고 또 뭐가 나타난거죠?" "이건 스콩키의 냄새야. 저 숲을 자세히 보거라. 빅투스 만한 짐승의 몸집이 보여?" 커크의 말을 듣던 뮤스는 안력을 돋구어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고, 어두움 수풀 건 너 미묘한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커크의 설명은 계속 되었 다. "저 스콩키는 전투력은 별로 없지만 지독한 냄새를 내뿜지. 그것의 위력이 엄청나서 한번 크게 들이쉰다면 최소한 삼일 동안은 식사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해." 커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독한 방귀 냄새를 들이셔도 머리가 아찔할 정도인데, 얼핏 맡은 냄새가 이 정도이니 본래 의 위력은 상상도 하기 싫어지는 뮤스 였다. 고개를 돌려 벌쿤을 바라보니 이미 그 냄새의 위력에 당했는지 눈이 풀리기 시작했고, 입 주변으로는 가느다란 침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큭. 벌쿤은 벌써 당한 모양인데요?" "저건 공격을 하면 더 심한 냄새를 방출해서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는 것을 눈치챈 뮤스는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 다. [냄새... 냄새...] 눈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뮤스의 시선은 다 타고 한쪽으로 치워진 숯을 향하고 있었다. "저거야! 모두들 숯을 하나씩 짚어서 코에 가져다 대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인져들은 커크가 신호를 하자 이내 고 개를 끄덕이며 그가 시킨 대로 숯을 하나씩 코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엄청난 악취가 섞여있던 공기 중에 악취는 온데간데없고, 맑은 공기만이 코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 "호오 정말이군." 숯의 효과를 본 레인져들은 몇 개의 숯을 더 코앞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뮤스는 자신 의 코에 숯을 댄 채 큰 숯 덩이 하나를 들고 벌쿤에게 다가가 그의 코앞에 가져갔지 만 이미 그 냄새를 맡은 후였기에 본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79 유글렌 마을은 떠나는 레인져들을 환송하기 위해 모두들 나와있었다. 이미 장로들을 비롯한 모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한 레인져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고, 뒤늦게 서야 짐을 모두 꾸린 벌쿤은 엄청난 크기의 배낭을 매고 나타났다. 물론 배낭만의 객관적 크기가 커서 그렇지, 그의 몸집에 비한다면 딱 알 맞는 크기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벌쿤의 짐의 양은 지금의 두 배는 되었지만 뮤스의 마법가방에 덜어 넣었기에 이 정 도에서 그친 것이었다. 그들이 집에서 걸어나오고 있을 때 커크는 살아남은 레인져 열두 명에게 여행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쉴드옥토퍼스의 산란기기 때문에 다른 몬스터들이 날뛰지 못 한 다. 지금부터 두 달 정도는 드베인 숲은 안전지대인 셈이지... 그래서 쉴드옥토퍼스 들의 산란 지역만 피해 나간다. 예상 소요기간은 열흘. 열흘 후 이 숲에서 빠져나가 게 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레인져 대원들의 대답을 들은 커크는 뮤스와 벌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벌쿤의 배낭에 머물러있었는데, 이미 그들과 친해졌고, 벌쿤의 매형이 되었기에 말투는 편안 해져 있었다. "벌쿤. 그 짐을 다 가지고 가려는 생각이야?" "네? 안되나요?" "후훗. 여기 대원들의 짐을 좀 보라고. 최소한의 생필품과, 음식, 무기가 아니면 소 지하지 않잖아. 급박한 상황이 생겼을 때 다 챙길 수 없거든?" "그렇지만 전 이곳을 완전히 떠나서 외부에 정착해야 하는 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하던 벌쿤은 야릇한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보았다. 뮤스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대신 옷가지만 내 가방에 넣어주겠어. 대신 두꺼운 옷은 가방 입이 좁아서 안 들어가니까 빼놓고 가도록해." "헤헤. 역시 형밖에 없다니까." 벌쿤의 짐을 해결 본 커크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중나온 윌드린을 바라보았다. 겨 우 며칠만에 결혼을 해버린 사이기에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녀를 아끼는 마음만은 각별했다. 윌드린이 다가오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고, 커크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 고 있었다. "커크... 돌아오면 내 밀린 빨래나 좀 해줘요. 그리고 잘 다녀와요." "그...그런" 두 남녀의 대화를 듣지 못한 벌쿤은 뮤스의 허리를 찌르며 말했다. "누나가 야한 이야기 했나봐. 커크대장님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하... 그런가? 내 생각에는 돌아와서 집안일 할 준비나 하라는 것 같은데?" 이때 커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 다들 출발!" 커크의 말이 떨어지자 레인져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 작했고, 벌쿤은 윌드린과 포옹을 하며 작별인 사를 하고 있었다. "벌쿤. 나가서도 뮤스 말 잘 듣고, 몸조심하거라." "후훗. 누나 걱정마. 가끔 커크대장님과 연락이 되면 찾아 올게!" "그래... 또 보자꾸나." 그녀의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보인 벌쿤은 등을 돌리며 뮤스를 따라갔고, 윌드 린은 눈가에는 아무도 모를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지잉! 철컥! 지잉... -딩동! 오늘의 업무를 마칠 시간입니다. 모든 공학원내의 직원들은 하던 작업을 마무 리해 주십시오. 하루의 일과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방송이 공학원 내부에 울려 퍼지자 안구보호경을 벗으며 직원들은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 보이첼! 오늘 저녁에 술 한잔 어때?" "아! 오늘은 안돼! 우리 마나님이 임신했잖아. 그래서 일찍 들어가야해!" "쳇! 자네는 장가간 후로 매일같이 착한 신랑이구먼!" "미안해! 다음에 시간한번 내자구!" 모든 공학원의 직원들은 자신이 일하던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고, 하나 둘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집무실에서 나온 켈트와 사촌 드워프들은 린강의 발전소로부터 공급되는 전뇌력을 차단하고 있었다. 전뇌력차단장치를 내리던 브라이덴이 투덜거렸 다. "뮤스군이 실종 된지도 벌써 보름이나 지났군. 아직도 크라이츠님은 손쓸 생각을 하 지 않으슈?" 그의 물음에 켈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셔. 어쩌면 뮤스가 누군지도 까먹었을 껄?" "끌끌... 농담이 지나치슈 형님." 그들의 대화에 레딘역시 끼어들며 말했다. "켈트형님의 말씀이 맞을 지도 몰라. 얼마 전에 블뤼엔이 술 마시고 이틀 앓아 누운 날 기억해?" "아무렴 기억나고 말고." "그 다음날 일하러 나왔는데, 누군지 몰라보시더군." "그.. 그런 일이 있었어?" 드워프들이 크라이츠에 대해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에서 나오는 크라이츠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서류들을 보고있었는데, 드워프들을 바라보지 도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켈트씨. 도이첸 기사단에 지급 할 천체만리경 500개와, 원거리대화기 500개를 제작 해 주세요. 그리고... 음. 전뇌거 경주가 끝나고 난 후에 로데오의 수량이 많이 모자 라니 생산라인을 완전가동 시켜주시구요. 뭐...이쯤이면 되겠네요." 말을 마친 크라이츠가 등을 돌려 집무실로 향하자 드워프들은 인상을 구기며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크라이츠는 잊은 말이 있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차! 깜빡했군요. 뮤스가 이쪽으로 이동 중이인데 일 주일 후면 도착 할 것 같군 요." 의외성을 띈 그녀의 말에 놀란 드워프들은 눈을 크게 떴다. 켈트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호홋. 그 녀석이 제가 준 마법가방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모르시나요? 드래곤의 물 건에는 무엇에나 추적 마법이 걸려있어요." "아차! 내가 왜 그걸 깜빡하고 있었지?"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힐책하는 켈트의 얼굴에는 그의 표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설 레임이 떠오르고 있었다. "자네들 뭐하나 내일 작업 준비해야지!" 켈트와 함께 신이 난 드워프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료준비에 분주해하기 시작했 고, 그들을 보던 크라이츠는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뮤스 녀석이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아지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우편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 그녀의 눈길을 끄는 한 장의 편지가 있었는데, 뜻 밖의 인물에게 편지가 왔기 때문이 었다. "이 사람도 오랜만이군. 가비르... 아니 재상각하라고 해야하나? 호홋."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고 있던 크라이츠의 눈에는 이채가 서리고 있었는데, 흥 미진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 같은 표정이었다. 한편 뮤스 일행은 드베인 숲의 가장 외곽 지역에서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삼일 후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조금은 느긋해 있는 상태였다. 뮤스는 모닥불에 손을 쬐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 벌쿤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형이 쓸데 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무려 이틀이나 늦어졌잖아." "하하.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짓이냐?" "그깟 슬라임이 녹아죽던 얼어죽던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도 덕분에 냉장고도 만들고 좋잖아? 나중에 라이델베르크에 도착하면 냉장고도 생산해야겠군..." 뮤스의 말을 듣던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형은 그곳에서 뭘하는데?" "음... 빨래기나, 전뇌지자총통이나, 냉장고나.... 뭐 그런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개 발하는 사람이지." "와! 그래서 능숙했었구나." "훗 너도 그곳에 도착하면 머리카락이 다 빠지도록 공부해야 할 테니 미리 각오나 해 둬라." "엥 공부?" 벌쿤이 말에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있을 때 커크는 야영준비를 끝냈는지 그들을 다가 오며 말했다. "후훗 자 이거나 먹어." "이게 뭐예요? "후훗 레인져들이 즐겨먹는 요리야. 뭐 어떤 짐승을 사냥했느냐에 따라 주 재료가 변 하긴 하지만 거의 맛은 비슷하지." 커크가 건네준 철 그릇 안에는 초록색의 스프가 들어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사냥한 사냥감에 대해 기억을 떠올려본 뮤스는 인상을 구겼다. "으엑! 이게 뱀 스프란 말이에요? 그것도 머리가 세 개나 달린? 이걸 어떻게 먹어요. 그렇지 벌쿤?" 뮤스가 벌쿤을 보며 동의를 구하고 있을 때, 심한 배신감을 느껴야만 했는데, 벌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스푼을 놀려가며 잘도 먹고있었다. "형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데? 빨리 먹어봐." 정말 맛있는지 행복한 표정을 짓는 벌쿤을 보며 뮤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뱀 스프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들어왔고, 속이 울렁거림을 느 낌 뮤스는 철 그릇을 떠밀며 소리쳤다. "이거 정말 못 먹겠어요! 이게 무슨 냄새예요? 정말 토하고 싶어요." 뮤스가 불평을 하고있을 때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 니 모두들 인상을 잔뜩 쓰고있었는데, 뭐라 말을 하려하자 커크가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입을 열지마! 숨도 될 수 있는 한 쉬지 말고!" 다급히 말하며 자신의 입을 막는 그의 손에서 짠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앞으로 몇 일간은 못 움직이겠군." 뮤스는 자신의 입을 가로막고있는 손을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무슨 냄새예요? 그리고 또 뭐가 나타난거죠?" "이건 스콩키의 냄새야. 저 숲을 자세히 보거라. 빅투스 만한 짐승의 몸집이 보여?" 커크의 말을 듣던 뮤스는 안력을 돋구어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고, 어두움 수풀 건 너 미묘한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커크의 설명은 계속 되었 다. "저 스콩키는 전투력은 별로 없지만 지독한 냄새를 내뿜지. 그것의 위력이 엄청나서 한번 크게 들이쉰다면 최소한 삼일 동안은 식사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해." 커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독한 방귀 냄새를 들이셔도 머리가 아찔할 정도인데, 얼핏 맡은 냄새가 이 정도이니 본래 의 위력은 상상도 하기 싫어지는 뮤스 였다. 고개를 돌려 벌쿤을 바라보니 이미 그 냄새의 위력에 당했는지 눈이 풀리기 시작했고, 입 주변으로는 가느다란 침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큭. 벌쿤은 벌써 당한 모양인데요?" "저건 공격을 하면 더 심한 냄새를 방출해서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어."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는 것을 눈치챈 뮤스는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 다. [냄새... 냄새...] 눈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던 뮤스의 시선은 다 타고 한쪽으로 치워진 숯을 향하고 있었다. "저거야! 모두들 숯을 하나씩 짚어서 코에 가져다 대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인져들은 커크가 신호를 하자 이내 고 개를 끄덕이며 그가 시킨 대로 숯을 하나씩 코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엄청난 악취가 섞여있던 공기 중에 악취는 온데간데없고, 맑은 공기만이 코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 "호오 정말이군." 숯의 효과를 본 레인져들은 몇 개의 숯을 더 코앞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뮤스는 자신 의 코에 숯을 댄 채 큰 숯 덩이 하나를 들고 벌쿤에게 다가가 그의 코앞에 가져갔지 만 이미 그 냄새를 맡은 후였기에 본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80 벌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후였다. 원체 건강한 몸이었기에 스 콩키의 향독을 몰아내는 것도 비교적 빨랐는데, 레인져들은 그 하루 동안 피로를 완 전히 풀 수 있었기에 크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급경사의 언덕을 오르던 벌쿤은 이 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신의 앞쪽에서 걸어가는 뮤스를 향해 말했다. "형! 난 아직 회복이 덜 됐단 말이야! 좀 천천히 가자구! 그리고 이 언덕은 아직도 안 끝난 거야? 듣기로는 라이델베르크의 지형은 낮다던데 왜 이렇게 올라가는지..." "나도 커크대장님을 따라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투덜거리지 말고 커크대장님께 말해봐. 그리고 너는 냄새만 못 맡을 뿐이지 몸은 괜찮잖아?" "흥... 궁시렁 궁시렁." "몸은 산만한 녀석이 궁시렁 거리기는..." 뮤스와 벌쿤이 늘 그래왔듯 티격태격 할 때, 가장 앞서 걸어가던 커크가 소리쳤다. "이봐 다 왔어!" 커크의 말을 들은 일행들은 조금 더 힘을 내 그가 서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곳에 올라간 일행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경관에 입을 벌려야만 했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밀림이 멀리까지 뻗어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맑은 호수들이 위 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찍이 린강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우거진 숲까지 도 달하지 않은 강의 줄기는 햇빛을 받아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와! 이게 뭐야! 드베인 숲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허허! 대장님 우리 혹시 유람이라도 나온 건가요?" 레인져 대원들이 경관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뮤스는 아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벌쿤은 이러한 경관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그의 등을 치며 말했 다. "형 왜 그렇게 입을 벌리고 있어? 침 흐른다!" "이런 풍경이라니... 잠깐만 기다려봐." 정신을 차린 뮤스는 서둘러 가방으로 손을 넣었고, 곧 사진기를 꺼내어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던 벌쿤은 사진기의 앞에 얼굴을 들이 밀며 물었다. "형! 이게 뭐야?" "자 너도 한 번!" -찰칵! "후훗 여기 있다." 뮤스가 찍은 사진을 건네받은 벌쿤은 호들갑을 떨며 커크에게 보여 주었다. "커크대장님! 이것 좀 봐요! 제가 여기 있어요!" 벌쿤의 얼굴이 찍혀있는 사진을 본 커크 역시 크게 놀랐는지 그의 사진을 뺐어들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이 놀라고 있을 때 절벽의 저편을 둘러보던 리온이 다 가오며 입을 열었다. "대장님 지금 그런 것으로 놀라고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 그렇지.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꺼야. 이 절벽 아래로 내려가야 하 니까." 커크의 말을 들은 뮤스와 벌쿤은 두 눈을 부릅뜨며 놀라고 있었다. "네?" "뭐라고요?! 여기를 내려 간다고요? 하하. 피곤해서 말이 헛 나온 것이겠죠?" 고개를 돌려 리온을 바라보니 이번에도 역시 장난이 아님을 대변하는 얼굴이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뮤스와 벌쿤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있었는데, 고개를 내밀어 절벽의 아래를 바라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까마득해 보였다. "휴... 떨어지면 정말 뼈도 못 추리겠군..." "벌쿤. 나 죽으면 공학원에 시신을 양도 해줘." "내가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니까 떨어지면 내가 더 아플 거야." "어쨌든 떨어지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번씩 중얼거린 뮤스와 벌쿤은 하늘을 보며 각자 누군가에게 행 운을 빌기 시작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살려주소서!" "숲의 영혼 포론님이여! 저에게 힘을!" 청승을 떨고 있는 그들을 보고있기 힘든지 커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들을 재촉하 기 시작했다. "기도는 지옥에 가서나 하고, 일단 여길 내려가야지?" 이때 뮤스는 또 한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는데, 드베인 숲으로 들어온 후로는 자신 이 가진 지식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이 밧줄을 준비하며 내려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뮤스는 마법가방을 급히 열어보며 벌쿤의 옷가지들을 꺼내고 있었다. 과연 그 종류와 양도 엄청 났는데, 재질을 확인하던 뮤스는 밝은 웃음을 지 어 보였다. [엄청나게 질기군. 하긴 숲 속을 다니려면 질긴 소재여야겠지.] "벌쿤! 이 옷 좀 쓸게!" 커크의 옆에서 매듭을 배우던 벌쿤은 뮤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내 옷은 왜... 추워서 입으려고?" "후훗... 너 혹시 여길 재미있게 내려가고 싶지 않아?" "엥? 재미있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뮤스를 바라보며 되물어 보던 벌쿤은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을 지 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벌쿤! 이 옷의 재질이 뭐야?" "그건 자빈 나무의 껍질로 만든 것이라서 웬만해서는 찢어지지 않지! 내가 직접 만든 천이라구!" "대단하군. 정말 질겨... 그건 그렇고 너 바느질은 잘해?" "하하! 바느질의 벌쿤이라고 불렸지! 그런데 바느질은 왜?" 그에게 확답을 들은 뮤스는 손에 들려있는 벌쿤의 옷을 찢어 내려했다. 하지만 천이 너무나 질겨 여의치 않았기에 뇌공력을 사용하고서야 겨우 찢어낼 수 있었다. 그 모 습을 본 벌쿤은 찢겨진 옷가지를 들쳐보며 괴성을 질렀다. "으에에엑! 내 옷은 왜 찢는 거야!" "라이델베르크에 가면 고급 천으로 된 옷들을 많이 사줄 테니 걱정 마라." "그..그래도. 어떻게 만든 옷들인데." 그렇게 마련한 천들이 무려 50장쯤 되었는데, 가방에서 굵직한 철로 만들어진 바늘을 벌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벌쿤 바느질을 해서 여기 있는 천들을 넓적하게 만들어 줘!" "에? 바늘이야 그렇다 쳐도 실은?" "남는 밧줄의 올을 풀면 될 거야.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단단히 꿰매야 해!" 엉겁결에 뮤스의 부탁을 받은 벌쿤은 밧줄의 올을 풀어 천 조각이 되어버린 자신의 옷을 하나로 꿰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커크와 일행들은 의아해 했지만, 해가 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매달려 있었다. 뮤스는 옆 에서 벌쿤의 바느질을 감독하고있었는데, 바느질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거긴 다시 한번 더 꿰매. 너무 약해." "여기?" "그렇지. 그리고 이젠 가로로 남은 천들을 꿰매고..." "알았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남은 천은 없어졌고, 지름이 30멜리는 됨직 천 한 조 각이 완성되었다. 그것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남은 밧줄들로 이 천의 주변을 묶는 거지... 힘의 분산이 균형적이어야 하니까 알맞은 위치에. 또 이 밧줄은 양끝의 이 부분에 묶어서 방향을 조절 할 수 있게 만들 고... 여기는 허리를 묶을 수 있게. 여차!" 뮤스가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을 때 벌쿤은 바늘에 찔린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빨고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어디다가 쓰는 건데?" 이제 완성이 되었는지 허리를 한번 펴본 뮤스는 그 천을 일정하게 접으며 말했다. "이걸 매고 절벽에서 뛰어 내릴 거야." "뭐라구! 미쳤어 형?" "후훗. 난 지극히 정상이야. 날 못 믿냐?" "다른 건 믿어도, 이번 거는 안되겠어. 차라리 커크대장님과 함께 절벽을 타고 말겠 어." 벌쿤의 소극적인 태도에 고개를 저은 뮤스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말했다. "후훗. 이건 너와 나의 몸무게를 계산해서 만든 거란 말이야. 둘 다 타지 않으면 안 돼!" "뭐 그런게 다 있어! 형은 아무래도 쉴드옥토퍼스에게 맞았을 때의 충격이 컸던 거 야. 잘 생각을 해보라고!" 그의 애절한 권유에도 뮤스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만 팔 뿐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때 레인져들도 내려갈 준비가 다 되었는지 커크가 걸어오며 말했다. "자 내가 먼저 내려가면... 어라 뮤스 손에 들려있는 그 옷 조각은 뭐냐?" "저희는 이걸 타고 내려갈게요." 그의 이야기를 들은 커크는 실소를 터트렸다. "푸핫! 바쁜데 장난은 그만해. 아무튼 내가 먼저 내려가면서 못을 박아 안전 고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너희는 다른 대원들에게 내려오는 방법을 배우면서 차례대로 내려 와. 그럼... 내려가서 보자. 너무 겁먹지는 말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뒤돌아 가버린 커크를 보며 뮤스는 야무진 표정을 지었 다. "훗! 어디 한번 누가 먼저 내려가나 보자고요! 벌쿤 뭐해!" "형 진심이야?" 뮤스는 벌쿤의 물음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그의 허리를 굵직한 밧줄로 묶었고, 자 신의 허리 역시 바로 옆에 연결된 밧줄에 단단히 묶었다. "자 이제 됐어." 손을 털며 매듭을 확인한 뮤스는 벌쿤을 이끌고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커크는 이미 내려가기 시작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리온만이 그들의 괴상한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여! 그렇게 몸을 똘똘 묶고서 뭘 하려는 거야?" "리온씨도 말릴게 분명하니 대답은 하지 않겠어요. 그냥 눈으로 확인하시죠." 태연한 뮤스의 말과는 상반되게 벌쿤은 바둥거리며 끌려가고 있었다. "리온씨! 저 좀 살려줘요! 뮤스형이 자살을 하려고 해요!" 하지만 리온은 꽤나 재미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럼 뮤스, 벌쿤!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다음에 와서 이야기해 줘!" 천을 접어 가슴에 안고있던 뮤스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후훗. 그럼 아래에서 보죠!"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절벽으로 뛰어 내렸는데, 그에게 끌려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려야만 했던 벌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 남아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으악! 살려 줘 줘 줘 줘...." 설마 했던 일이 눈앞에 일어나자 크게 놀란 레인져 일행들은 급히 절벽가로 몰려가 그 아래를 바라보았고, 먼저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커크도 뭔가가 자신을 지 나쳐 떨어짐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았다. 그는 얼핏 봤음에도 방금 자신 을 지나쳐 떨어진 것이 한 덩어리가 된 뮤스와 벌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쳤군!" 욕을 내뱉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커크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떠야 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저 녀석들이 만들던 것이... 민들레 씨앗?" 그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수십 가지 색상의 옷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민들레 씨앗 이었다. 물론 모양과 크기는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지만, 비유를 할 만한 것은 그것 밖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한편 벌쿤은 눈을 꾹 감고있었는데, 감긴 두 눈 사이에 서는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경치를 감상하던 뮤스는 그의 머 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겁쟁이씨! 눈이나 떠봐. 이건 낙하산이라서 죽지 않아! 이 장관을 이대로 놓칠 거 야?"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에 눈을 살며시 뜬 그는 사방을 살펴보며 탄성을 질렀 다. "우와! 내가 날고 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훗. 지금은 조용히 해. 그냥 경치나 즐기자고..."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벌쿤을 조용히 시킨 뮤스는 고개를 돌려 드베인 숲의 정경 을 감상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81 안녕하세요 짜가신선입니다 ^^ 이제 곧 설이네요. 내일 부터 설날 까지는 잠시 연재를 쉬겠습니당^^;; 이해해 주시길 바라고, 그 기간동안 못올리는 분량은 다녀온 후 연참 하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37) 도이첸제국 수비대. -퍽퍼퍼퍼퍽! 우지끈! 퍽! "형... 이건 어떻게 된거야?" "헤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서 그래." "으엑! 그럼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에 목숨을 걸었단 말이야?" "뭐 그런 기분 있잖아. 하면 될 것 같은..." "다음부터 형이 하자는 대로 하나 봐!" 어두운 숲 속, 두 젊은이의 말다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뮤스와 벌쿤이었는데 드베인 숲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의 나무를 살펴 보던 뮤스가 말했다. "뭐 그래도 나쁜건 아니잖아. 혹시 땅에 떨어져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어떻게 하냐. 일단 내려가서 일행들을 찾자. 훈련 때문에 나무는 잘 타게 되었으니 문제없잖아?" "흥! 일단 내려가서 보자고." 입을 삐죽 내민 벌쿤은 덩치에 맞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투덜거리며 자신의 몸을 감 고있는 밧줄을 잘라냈다. "여차! 여길 자르면 되나?" 그 모습을 본 뮤스는 다급히 입을 열어 말리고자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기에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푸드득 퍽!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벌쿤의 모습을 보던 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뭘 잡고서 잘라내야지... 쯔쯧... 벌쿤 괜찮냐?" 뮤스의 물음에 한참 아래에서 벌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어! 운좋게 옷이 걸려서 괜찮... 으악!" -우지끈! 뚜둑! 또 다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벌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튼튼한 몸으로는 크게 다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뮤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 를 가로 저었다. "정말 살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군." 그렇게 말한 뮤스는 자신 역시 그곳에서 내려가야 했기에 나뭇가지를 붙잡았고, 낙하 산의 밧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몸무게가 벌쿤보다 가벼운 그였기에, 나 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뮤스가 나무에서 내려오자 벌쿤은 낑낑 거리며 몸을 일으켜 투덜거리고 있었다. "끄응... 내가 형이랑 살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아..." 나뭇잎들을 머리에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을 본 뮤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되면 부적이라도 하나 써서 붙여라. 나랑 같이 다니면 이런 일이 아무래도 많을 듯 하니까." "말이라도 못하면... 이제 어떻게 하지?" 무엇인가를 가방에서 꺼낸 뮤스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단 절벽으로 가야겠지 다시 일행들과 만나야 하니까. 거기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것 같거든?" "설마 못 찾는 것은 아니겠지?" "후훗 그 점은 걱정 마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대장님의 배낭에 추적장치를 부착 해 놓았으니까." 그의 말에 머리를 한번 긁적인 벌쿤은 그게 무슨 말인지 물으려 했으나 뮤스의 입에 서 먼저 대답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건데 대장님의 몸에 장치를 부착해 놓아서 내 손에 들린 이 추적장치로 대장님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지." "정말이야? 그런데 이런걸 왜 만들었는데?" 그의 질문에 뮤스는 대답을 꺼려하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 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면 누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워낙 특이해서..." "윌드린 누나만큼?" "음...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걸? 아무튼 누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사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거야. 그런데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이야." "그럼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나도 좀 보여 줘." 뮤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바라보자 그것의 검은 화면에는 두 개의 점이 빛나고 있 었는데 가운데의 점은 자신들의 위치, 그리고 다른 한 점은 커크의 위치였다. 벌쿤에 게 대강이나마 설명을 해준 뮤스는 길을 앞장서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어. 이 쪽으로 300멜리 정도만 가면 되는군." "정말 형은 대단해." 그와 같은 시간, 커크와 일행들은 모두 절벽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방금 내려온 대 원을 마지막으로 밧줄을 회수 한 커크는 그것을 팔뚝으로 재어 감으며 입을 열었다. "뮤스와 벌쿤은 어디쯤 덜어진 거야? 벌써 해가 져가고 있는데..." 그의 옆에서 밧줄을 풀어주던 리온이 말했다. "여긴 나무가 없어서 하늘을 볼 수 있으니 야영하기는 좋을 듯 한데요? 또, 그 아이 들이 찾기 쉽기도 하니 이곳에 오늘은 묵어가죠?" 턱을 쓸며 곰곰히 생각해 본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도록 하지. 그리고 마실 물들은 충분한가?" 그의 질문에 배낭을 내려놓던 대원 한 명이 커크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 다. "너희 세 명은 잠자리를 마련하고, 거기 두 명은 식사준비를, 그리고 거기 세 명은 주변 정찰을 해. 그리고 나머지는 땔감을 주워온다." 커크가 작업 분담을 시키자 대원들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을 한차례 둘러본 커크는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내려온 절벽을 바라보았다. "후훗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군. 여기서 뛰어 내릴 생각을 했다니."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 저은 그는 마른 나뭇잎을 주워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부스럭! 식사를 하고있던 레인져들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리며 무기를 꺼 내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긴장을 비웃기라도 하는지 억울한 표정을 지은 벌쿤이 걸어 나왔는데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에엑! 대장님 너무 해요! 우리가 오기도 전에 식사를 하고있다니!" 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던 레인져들 사이에서 커크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니까 누가 뛰어 내리라고 했어? 느낌은 어땠어?" 커크의 질문에 대답을 미룬 벌쿤은 냄비에서 음식을 퍼내기 바빴다. "말도 마요. 저는 오줌 때문에 바지가 젖을 뻔 했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뮤스는 왜 안 오지?" 스푼으로 음식을 퍼내던 벌쿤은 손에 묻은 음식 조각을 떼먹으며 말했다. "아. 형은 요 앞 냇가에서 좀 씻고 온다고 그랬어요. 저 먼저 가있으라고 하던데요?" "요 앞이라면 어느 정도 앞이야?" "음... 100멜리 정도?" "위험하지나 않을까?" 커크가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벌쿤은 손에 들린 빵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걱정 마요. 전뇌지자뭔가 하는 것도 가지고 있는데 위험하겠어요?" "하긴 그렇기도 하지... 다들 식사나 계속 하자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 되자 뮤스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는데, 식사를 끝내고 한쪽 바위에 기대어 누워있던 벌쿤이 나뭇가지로 이빨을 쑤시며 말했다. "형! 왜 이렇게 늦었어? 음식이 남아있을 지 모르겠네." 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본 뮤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난 이 녀석들이나 구워먹지." 말을 하며 들어올리는 그의 손에는 사람의 팔뚝만한 민물고기 서너 마리가 나뭇가지 에 입이 꿰고있었는데, 그것을 본 벌쿤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헤헤... 내가 사실은 음식이 모자라서 배불리 못 먹었거든. 그거 다 먹지도 못할 건 데 나눠 먹자! 요리는 내가 할게!" 금새 태도를 바꾸는 그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다 먹지도 못 할 정도 로 많았기 때문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벌쿤. 아 그리고 대장님 이 일대가 좀 이상한데요?" 반대편에서 짐 정리를 하던 커크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뮤스왔군.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지?" "동물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 새들도 있을 법한데, 새 한 마리 조잘거 리지 않구요." 그의 말을 듣던 커크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말게 다 쉴드옥토퍼스의 산란기라서 그렇지. 그건 그렇고 손에든 그 물고기 맛 있겠군. 같이 먹어도 될까?" 별일 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뮤스는 손에 들려있는 물고기를 바라 보았다. "뭐 보시다시피 많은 걸요." "하하 그럼 벌쿤이 요리를 하면 되겠군." 커크의 말을 들은 벌쿤은 뮤스에게서 물고기를 건네 받았고, 후라이팬을 찾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구수한 냄새가 일행들의 코를 간지럽게 했는데, 관심 없이 쉬던 레인져들도 그 냄새에 이끌려 다가오고 있었다. 요리를 하던 벌쿤은 후라이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이렇게 되면 양이 턱없이 모자라는데? 어쩌지?" 자신의 양이 줄어들까 걱정한 벌쿤이 중얼거릴 때 멀리에서 등을 보이며 누워있던 리 온이 말했다. "이봐! 벌쿤 음식을 태우면 쓰나!" 그의 말에 놀란 벌쿤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후라이팬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맛 있게 익고있을 뿐 타지는 않고 있었다. 리온의 장난이라고 생각한 벌쿤은 소리를 빽 질렀다. "리온씨! 장난을 그런 장난을 치면 어떻게 해요!" 벌쿤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이 일어나 뒤돌아 본 리온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흠. 그럼 이 타는 냄새는 뭐지?" 냄새를 따라 몸을 움직이는 리온과 함께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냄새를 맡아보던 레인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뭐 타는 냄새가 나긴 나는군." "그러게... 어디서 불이라도 난 건가?" "불?" 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력을 돋구며 숲의 저편과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벌써 어두 워 진 후 여서 인지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흠. 대장님 저기 뭔가가 보이긴 하는데 잘 보이지 않는군요. 너무 멀어요." 이때 벌쿤의 옆에서 구운 물고기를 입에 물고있던 뮤스가 가방을 들치며 말했다. "이것으로 확인해 보세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천체만리경이었는데, 리온이 건네 받기는 했지만 쓰는 방법 을 몰랐기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리온의 모습을 보던 뮤스는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쪽! 그 작은 쪽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고 보고싶은 곳을 보세요." "응 이렇게?" 뮤스가 시킨 대로 천제만리경을 사용하자 그 둥근 몸체를 통하여 잘 보이지 않던 멀 리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호. 이런 것 하나 있으면 정말 좋겠군. 헌데 대장님 문제가 좀..." 천제만리경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리온에게 커크가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문제라도?" "넓직히 연기가 일어나고 있는데요?" "응?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는데 불이란 말이야?" "어어... 이제 불꽃이 보이는 걸요?" 어찌보면 장난처럼 들릴 그의 말이었지만,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을 정도의 불길이 이 치솟자 커크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옆으로 다가와 대화를 듣고있던 뮤스는 불길을 바라본 후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머리 높이 들었다. "상황이 안 좋은데요?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요. 바람의 세기랑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니 앞으로 몇 시간이면 여기까지 불길이 닿을 것 같은데요?" 뮤스가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설명해 주자 커크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말했 다. "이런! 뒤쪽은 절벽인데. 어떡한다..." 팔짱을 끼며 생각을 해보던 뮤스가 다시 말을 했다. "불이 나는 모양으로 봐서는 자연적인 발화가 아닌 걸요? 아무래도 저 반대쪽에 사람 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건 기본이라구요. 자연 발화는 한곳에서 일어나지 저렇게 줄을 지어서 일어나지 않아요." "생각해 보니 그렇군.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잖아?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텐데..." 언제나 냉정히 일을 처리하던 커크가 당황하는 것을 본 뮤스는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 다. "하하 대장님도 당황할 때가 다 있네요?" "아무리 레인져 대장이라지만 불은 내 특기가 아니라구!" 오랜만에 콧잔등을 한번 쓸어 보인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훗. 여기 있는 사람이면 저 불로부터 방어 할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할 일이 많 으니까 저를 따라와요." "아무리 신기한 점이 많다지만 저 불이 이곳까지 오면 엄청난 규모란 말이야!" "헤헤. 그래도 별 수는 없잖아요. 저라도 믿을 수밖에..." <대공학자> #82 뮤스의 말대로 별다른 대책을 가지지 못한 커크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기행을 성공시 킨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레인져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커크와 같은 생 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그래. 어디 네 생각이나 한번 들어보자." "좋아요. 일단 불이라는 것은 공기나, 발화온도 그리고 탈만한 재료가 없으면 붙지 않죠. 공기는 지금 상황으로 없애기는 불가능하고, 화재가 이미 발생했으니 발화온도 도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탈만한 것들을 미리 치우는 거예요. 다른 숲은 다 타더 라도 우리는 살아 남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의 말을 대강이나마 이해한 커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지?" "간단해요!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불과 우리가 머무는 지역 사이의 나무들을 다 베 어 넘기는 거죠." "으음. 맞불과 같은 원리로군?" "맞불은 아시는군요?" "그런 거야 기초 상식이지." "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맞불을 지르다가는 우리가 타죽기 딱 알맞 죠. 그러니까 직접 베어 넘길 수 밖에요." 뮤스의 말을 들은 벌쿤이 생선가시들을 입에서 빼내며 놀란 듯 말했다. "그럼 나무들을 다 베어내자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하하 물론 다 베어 넘길 필요는 없어. 나무와 나무사이에 옮겨 붙을 수 없을 정도만 베어내면 되거든." 면적이 좁혀 졌다고는 해도 커크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아무리 그렇다고 그래도 수십 그루의 나무를... 게다가 이렇게 굵직한 나무를 베 어 넘긴다는 것이 가능할지..." 염려스러운 목소리가 담긴 커크의 말을 들은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가방에서 전뇌지 자총통을 꺼내 들었다. "후훗 이 녀석만 있으면 다 쓰러트릴 수 있죠." "오호라!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커크는 전뇌지자총통의 위력을 알고있었기에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던 레인져들 역시 서로를 마주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이제 움직이죠. 여기서부터 100멜리 가량 내려가면 냇물이 나와요. 그곳을 사선 으로 생각하고, 둥글게 나무들을 쓰러트려야 해요!" "자! 다들 움직이자!" 커크의 명령을 들은 레인져들은 서둘러 뮤스를 따라 나섰고, 벌쿤 역시 먹던 물고기 들을 숲 속으로 집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뜩 먹었으니 힘 한번 써볼까!" 뮤스와 일행들이 도착한 곳에는 폭이 5멜리 정도 됨직한 냇물이 있었다. 그 건너편의 숲을 둘러본 뮤스는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냇물 건너편의 나무들을 쓰러트릴 거예요! 일단 냇물을 향한 반대쪽에 칼이나 도끼 자국을 깊숙하게 내서 나무 받침을 꼭 맞게 끼워 넣으세요! 그래야 넘어 가는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벌쿤은 나 좀 도와줘!" 그 이후로도 뮤스의 작업 설명은 계속 되었는데, 간단한 내용들이었기에 쉽게 이해한 레인져들은 손도끼를 들고 숲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들이 작업을 시작할 때 뮤스는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고 있었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온 물건들은 하나씩 쌓이며 산을 이뤘는데, 금은보화에서부터 시작하여 신기한 기계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을 본 벌쿤은 이것저것 만져보며 탄성을 지었다. "이야! 형 이것들은 다 어디에 쓰는 물건이래?" "응?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설명은 못해주고, 나중에 집에 도착하면 다 가르쳐 줄 게. 이 가방에 물이나 좀 담아!" "엥? 가방에 물은 왜?" "오랜만에 가방 좀 빨려고 그래. 그러니까 묻지 말고 물이나 채워 줘." "쳇. 또 안 가르쳐 주네. 알았어! 얼마나 채우면 돼?" "오랫동안 채워!" "네네! 분부대로 하죠!" 벌쿤이 마법가방을 들고 냇가로 발걸음을 옮기자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을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이미 여러 나무에 도끼자국이 나있었는데, 나무 받침 이 적당하게 끼워져 있었다. 상태를 확인 해 본 뮤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외 쳤다. "나무 넘어 갑니다! 피하세요! 뇌공력 팔성 발출!" 순간 주변이 환해지며 전뇌지자총통은 하얀빛을 뿜어냈고, 그 빛은 나무 받침의 반대 쪽 면을 꿰뚫으며 사라졌다. -우지끈! 쿠쿠쿠쿵! 그와 함께 거대한 나무는 받침을 끼워놓은 반대편으로 넘어갔는데, 쓰러지는 나무에 맞은 나무들도 덩달아 부러지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흐르고 있는 땀을 닦으며 그 모습을 본 커크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정말 다 쓰러트릴 수 있겠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레인져들도 그와 같이 나무 넘어가는 것을 보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봐. 통구이 정식이 되기 싫으면 정신 빼놓지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고!" 커크의 목소리에 정신을 수습한 레인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질을 계속 하기 시 작했다. 대략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대부분의 나무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는데, 마침내 주변 에서 연기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불길이 인근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타는 냄새를 맡은 뮤스는 작업 진행상황을 확인하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제 됐어요! 다들 냇물 건너로 자리를 옮겨요!" -부시럭! 뮤스가 신호하자 쓰러진 나무들을 헤치며 레인져들이 서둘러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땀으로 인해 흠뻑 젖어있었으며, 얼굴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가 그득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이루어 냈다는 기쁨에서인지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 두 냇물을 건너자 커크가 다가와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냇물을 따라 초토화된 숲이 있었는데, 자신들이 해 낸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해냈다니..." "그러게요." 흐뭇함이 묻어나는 커크의 말에 대답한 뮤스는 아직도 가방에 물을 채우고 있는 벌쿤 을 불렀다. "벌쿤 이제 됐어! 가방을 이쪽으로 가지고 와!" 두 시간 동안이나 물을 받던 벌쿤은 팔이 절이는지 경직된 모습으로 다가왔는데, 얼 굴 가득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차라리 도끼질이 훨씬 나아! 이게 뭐야!" "하하. 네가 나이가 제일 어리잖아." "쳇 서러워서라도 나이를 먹어야지!" "아무튼 이리 줘봐." 벌쿤에게서 건네 받은 가방은 여전히 똑같은 무게와 크기였는데, 새삼스럽게 놀랍다 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내용물이 들어가더라도 변화가 거의 없는 마법가방. 반대로 생각하면 겉의 조그마한 누름이 이 속에서는 엄청난 부피변화로 변한다. 내용물이 부피를 많이 차지 할수록 더욱 더...] 그 것을 손에 든 뮤스는 가방의 입구 크기를 끈으로 묶으며 줄였고, 손으로 가방의 아랫부분을 약하게 쥐어 봤다. 그러자 가방의 입구로부터 엄청난 수압의 물길이 하늘 로 치솟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다시 가방에서 손을 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벌쿤 멋지지?" 아무런 대답도 없음이 이상해 뒤를 돌아보자. 물에 흠뻑 젖은 레인져들과 벌쿤이 날 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으휴 추워!" 겨울에 찬물을 흠뻑 뒤집어썼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뮤스는 그들에 게 미안함이 듬뿍 담긴 미소를 보냈다. "하...하... 죄송해요. 그래도 조금 있으면 불의 열기 때문에 금방 마를 거예요." 어줍잖은 변명을 늘어놓은 뮤스는 그들의 눈빛을 피하며 쓰러져 있는 나무사이로 걸 어갔다. 그리곤 가방을 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쓰러진 나무위로 물줄기를 뿌리기 시작 했는데, 쓰러진 나무에 불이 옮겨 붙음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물을 퍼부은 뮤스는 가방 속의 물기를 털어 내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자 이제 다됐어요. 이곳에 있다가는 연기에 질식을 할 테니 빨리 올라가죠?" 뮤스의 말을 들은 커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훗 이제는 다 된건가? 자 이제 돌아가자!" 레인져들이 야영지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뮤스는 커크와 함께 꺼내놓은 물건들을 가방으로 수습한 뒤 그들을 뒤따랐다. 야영지로 돌아온 커크는 천체만리경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불길이 가까이 다가와 천체만리경이 없더라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엄청난 열기가 200멜리가량 떨어져 있는 야영지까지 미치고 있었다. 벌쿤이 옷을 만져보며 입을 열었다. "와... 벌써 다 말랐어. 정말 따뜻한데?" 불길을 주시하던 뮤스가 벌쿤에게 말했다. "저걸 막지 못했으면 우린 그 사라진 물기처럼 증발해 버렸을걸?" "그...그래?" 그의 말을 들은 벌쿤은 바짝 말라있는 옷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불길은 바 람을 타고 점차 냇물이 있는 곳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야영지에서 냇물 부근을 볼 수 없었지만, 두 시간의 작업으로 건너편의 숲을 초토화시켰기에, 푸른 숲 에 길이 난 듯 뚜렷하게 그곳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던 리온이 나직히 중얼 거렸다. "이제 다 왔군..." 그의 말대로 불길은 바람을 타고 번져 냇가까지 도달해있었는데, 뮤스의 예측대로 더 이상 태울 나무가 없어지자 안쪽으로 번지지 못하고, 이미 불이 붙어 있는 나무들만 태우고 있었다. "후훗. 역시 멈췄군요." 뮤스가 주먹을 쥐며 득의 한 표정을 지을 때, 일행들도 한숨을 내쉬며 마련해 놓은 잠자리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커크와 리온은 아직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음 편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을 본 뮤스가 물었다. "커크대장님 왜 그렇게 굳은 얼굴이죠?" 그의 질문에 리온이 대신해서 대답을 해주었다. "비록 불길이 멈췄다고는 해도, 아직 열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진을 못한 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지." 과연 리온의 말이 맞는지 커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겠군... 식량도 부족한데다가, 숲이 이 모 양이 됐으니 사냥은 꿈도 못 꾸는데 어떻게 한다..." 그들이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화재의 연기로 인해 해는 더욱 붉어 보였다. <대공학자> #83 걱정을 뒤로 한 채 일행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눈앞의 숲이 잿더미가 되어 버 린 지금에야 그들을 위협 할 존재도 없었고, 설혹 있다고 해도 저 열기 충만한 땅을 건너올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뮤스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군... 이제는 공학원을 집이라고 느끼는 건가? 어라?" 하늘에 떠가는 구름 덩어리를 바라보던 뮤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양떼구름이다!" 뮤스는 일행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하며 소리를 질렀다. "양떼구름이에요! 빨리 일어나서 짐 챙겨요!" 그의 안달에 할 수 없이 눈을 뜬 일행은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지 못하는 듯, 눈을 비비며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로 벌렁 뒤집어져 있는 벌쿤 또한 그들 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벌쿤이 눈조차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으음... 혀엉.. 또 왜 그러는데에... 음냐..." "빨리 일어나! 조금 있으면 비가 온단 말이야! 이제는 길을 다시 갈 수 있다고!" "몰라..." 여전한 벌쿤의 반응에 고개를 내저은 뮤스는 커크에게 다가갔다. "대장님 이제 출발 할 준비하죠!" 그나마 대장이란 신분에 걸맞게 똑바로 정신을 차린 커크는 뮤스가 가리키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곳에는 촘촘한 양떼구름이 줄지어 가는 것이 보였고, 유능한 레 인져 있기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렇군. 정말 양떼구름이군. 다들 기상!" 우렁찬 목소리에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레인져들은 머리를 긁적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꾼 커크는 그들 뒤에 있는 절벽을 보며 말했다. "조금 후면 비가 내려 절벽이 내려앉는다. 일어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돌무덤이 생겨 버릴 지도... 뭐 이곳에서 뼈를 묻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어." 그의 나직하면 서도 위협적인 말을 들은 레인져들은 두 눈을 번쩍 뜨며 날아가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벌쿤 역시 자신의 배낭을 껴안고서 주위를 살폈다. 그들의 모습 을 본 커크는 껄걸 웃으며 자신의 짐을 챙겼다. "진작 이렇게 일어 날 것이지. 이제는 누가 숲에 불을 질렀는지 만나 볼 수 있겠군. 내 손에 잡히기만 한다면 주먹을 한 대 갈겨 주지... 뮤스 천제만리경 좀 줘볼래?" "여기요. 저야 돌아가서 하나 더 만들면 되니까 대장님께 드리죠." "후훗. 정말 고맙군." 뮤스로부터 천제만리경을 건네 받은 커크는 눈앞에 펼쳐진 잿더미를 둘러보기 시작했 다. 그 엄청난 불길에도 타버린 곳은 숲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한 커크는 내심 그 방대함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물체들이 잡혔 다. 그들을 바라보던 커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수비대군. 구아드도 보이는걸?" 커크의 옆에서 멀리 내다보던 뮤스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 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죠?" "후훗. 우리편이니까 괜찮아. 그런데 숲에 불은 왜 지른 거지?" "글쎄... 알 수 없죠." "다들 빨리 내려갈 준비나 하자! 멀리 수비대가 보인다!" 수비대라는 말에 레인져들은 반가운 얼굴로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자신이 할 일 을 하기 시작했다. "엥? 그 녀석 들이 여긴 웬일이래?" "하하. 빈센트 녀석 잘 있을까?" "술을 그렇게 마셔 대는 걸로 봐서는 살아있기 힘들걸?" 이미 수비대들과 안면이 있는지 정겨운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뮤스가 커크에 게 물었다. "저들과 아는 사이인가요?" 천체만리경을 배낭에 끼워 넣던 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가 마물들을 사냥하면 저들에게서 현상금을 받으니 그럴 때마다 만나기 때문에 꽤나 친분을 유지하고 있지."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이해가 간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의 잿더미 숲을 바라보았다. (38) 현상수배? -쏴아아아악! 까맣게 탄 나무들 사이로 굵직한 빗줄기들이 쏟아지고 있는 숲 속, 십 여명의 인영들 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비대와 조우하기 위해 야영지를 떠난 뮤스와 일행들이었는데, 빗물에 질퍽해진 재를 온몸으로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유난히 위생에 신경 쓰는 전직 주부 벌쿤은 얼굴에 묻은 재를 소매로 닦아 내며 불만을 터트렸다. "제길! 왜 하필이면 비까지 와서 길을 이렇게 만들어? 망할 놈의 하늘!" 그의 투덜거림에 왠지 귀에 익다고 생각한 뮤스는 고개를 돌려 벌쿤에게 말했다. "벌쿤. 하늘에다가 욕은 하지 마라. 내 신세가 될 수도 있어." "응? 형이 어떤 신세인데? 설마 하늘을 욕해서 절벽에서 떨어진 거야?" "그건 아니고... 아무튼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뮤스가 말을 돌리며 옛일을 회상 할 때 벌쿤은 아직도 불만이 많은지 계속해서 중얼 거렸다. "배고파... 배고파... 형 뭐 먹을 거 없어?" "나라고 먹을게 있겠냐?" 그때, 앞장서던 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앞에 뭔가가 있다!" 그의 목소리에 일행은 숨을 죽였고, 동시에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얼핏 눈에 띈 물체를 살피기 위해 커크가 다가가는 것이 뮤스의 눈에 잡혔는데, 그는 곧 허리를 펴 며 괜찮다는 수신호를 했다. "쉴드옥토퍼스가 타 죽어 있군!" 커크의 말에 벌쿤과 뮤스는 쉴드옥토퍼스의 사체를 보기 위해 뛰어갔다. 그곳에는 길 이가 60멜리 가량 되는 비교적 작은 쉴드옥토퍼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것 을 살펴보던 벌쿤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우리가 이 엄청난 녀석을 잡았단 말이야?" 그가 새삼 쉴드옥토퍼스의 크기에 놀라고 있을 때, 뮤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 다. "이거 제사 상에 올라가 있는 문어 같군... 맛은 어떨까?" 나직히 흘리는 소리였지만 똑똑히 그의 말을 들은 벌쿤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설마 형 이걸 먹으려고?" "왜? 안돼?" "무...물론 안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먹어 본적이 없단 말이야." "후훗. 꼴에 아무리 방패가 달려도 문어는 문어겠지." 그렇게 말한 뮤스는 단검을 꺼내들어 쉴드옥토퍼스의 다리 부근을 적당량 잘라냈고, 나무의 재로 더럽혀진 부분까지 도려낸 그는 거리낌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으엑! 커크대장님! 뮤스형이 쉴드옥토퍼스를 먹었어요!" 벌쿤의 말을 들은 커크는 살펴보던 쉴드옥토퍼스의 다리를 내려놓고서 걸어왔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벌쿤으로부터 어떤 대답도 듣기 전에 뮤스를 바라보니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쉴 드옥토퍼스의 다리를 잘라먹고 있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커크는 뮤스를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너 괜찮냐!?" "우아! 마이어요!" 벌쿤과 커크는 입 가득히 물고 있는 음식물(?)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뮤 스를 아래위로 살펴보며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힘겹게 그것을 삼킨 뮤스는 또 다시 쉴드옥토퍼스의 다리를 잘라내며 말했다. "엄청나게 맛있는 걸요? 벌쿤 너도 먹어봐!" 뮤스와 커크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던 벌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마물은 먹을 수 없어... 난 사양할래." "어라? 웬일이냐? 네가 먹을 걸 다 거부하고." "물론 먹을 것들은 거부하지 않지만 형의 손에 들린 것은 먹을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건 마물이라고!" 그들이 음식물의 정의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뒤에서 분위기를 깨는 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맛이 굉장한데요?" 고개를 돌려 리온을 바라보니 그 역시 쉴드옥토퍼스에 올라탄 채로 그것을 잘라먹고 있었다. 또, 다른 레인져들 역시 배가고팠는지 그것을 먹고있었는데, 맛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이미 대세가 먹는 쪽으로 흘렀음을 인지한 커크는 어쩔 수 없이 쉴드옥 토퍼스의 맛을 봐야 했는데, 한입 맛을 본 커크는 그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칼을 놀려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야만 했다. 적극 믿고 있던 커크마저 쉴드옥토퍼스를 먹기 시작하자 인상을 찌푸린 벌쿤도 대새를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한입 베어먹었다. 그 순간 그의 입 속에서 터지는 쉴드옥토퍼스의 육즙 맛이 기가 막혔는데, 찌푸리던 인상은 온데 간데 없고, 정신없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쉴드옥토퍼스가 이렇게 맛있다니!" 이후 도이첸제국의 전역으로 이 기막힌 맛이 전해 졌고, 이런 사실은 미식가들의 구 미를 자극해 쉴드옥토퍼스의 사냥 붐을 일으키게 된다. 먼 훗날 쉴드옥토퍼스의 멸종 을 염려한 여러 단체들이 보호 운동을 벌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일행들은 배를 두들기며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입의 호사를 누린 일 행들은 아직도 그 맛이 꿈결 같은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는 남은 것들 을 먹고 내일 출발하자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였다. 커크 역시 그 맛이 푹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 하고 있었다. "후우... 내 배가 작다는게 이렇게 안타깝게 느껴지다니..." 그의 옆에 쓰러져 있던 벌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러게요. 싸가지고 가서 조리를 하면 더 기가 막힐 것 같은데..." "가기도 전에 상할걸?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아직 얼음이 얼지도 않는데..." 그들의 말을 듣던 뮤스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어요! 슬라임을 구해 줬던 냉장고가 있잖아요." "그렇지! 냉장고라면 문제없어!" "거봐 벌쿤 남을 도우면 복을 받는 다니까." 한번 웃어 보인 뮤스는 가방에서 사과 상자 만한 냉장고를 꺼냈는데, 그 문을 열자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실 이들의 이동이 며칠 늦어진 것은 슬라임 때문이었 다. 슬라임이란 젤과 같은 모양을 한 마물의 일종이었는데, 나무 위에서 일광욕을 즐 기던 슬라임이 잠깐 조는 바람에 몸이 녹으며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슬라 임을 구해 주기 위해 뮤스는 임시적으로 냉장고를 만들게 되었고, 덕분에 슬라임들과 의 전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 벌쿤 빨리 잘라서 여기에 넣어봐! 집으로 돌아가서 요리해 먹자고!" "헤헤. 알겠어 형!" 벌쿤은 덩치에 맞게 도끼를 들고 쉴드옥토퍼스의 사체에 다가가 다리를 잘라냈고, 가 뿐히 들고온 벌쿤은 그것을 냉장고에 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후훗. 가족이 충분히 먹을 수 있겠다." 의견을 맞춰가며 쉴드옥토퍼스 고기를 챙기는 그들을 보며 커크는 아쉬운 표정을 지 었다. 그때 멀리서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우리는 도이첸 제국 수비대다!" 그리 굵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듬직한 느낌을 풍기는 목소리였다. 그 목 소리를 들은 커크는 반가운 목소리로 받았다. "하하 나 커크다. 구아드!"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아드라 불린 사내 역시 커크를 알고있는지 긴장이 풀 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크 자네가 왜 여기에 있어?" 잠시 후 서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벼운 금속제 갑옷을 몸에 걸치고있는 그들의 모습이 제법 당당해 보였다. 가장 앞으로 우두머리인 듯 한 사람이 다가 오고 있었는데, 갸냘픈 몸매를 하고 있는 사내였다. 그를 본 커크가 웃 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네는 언제나 봐도 야리야리 하군!" "하하 그 조그마한 키 가지고 어디서 큰소리야!" "오랜만에 만나서 이러긴가?" 어느새 둘의 거리는 가까워져 서로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구아드는 고개를 돌려 벌 쿤과 뮤스를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건 그렇고 이들은 누구지? 내가 자네 밑의 레인져라면 다 알고 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인걸?" "드베인 숲에서 만난 친구들이지. 이쪽은 벌쿤. 이쪽은 뮤스." 커크의 소개에 구아드는 돌연 표정을 바꾸며 경계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뮤스라고!" 순간 적으로 돌변한 그의 태도에 커크는 당황하며 물었다. "자네 무슨 일이야?" "이 아이는 지금 남부지방으로 수배령이 내려져 있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생포 를 조건으로 엄청난 현상금까지 걸려있어." 가장 당황한 것은 뮤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었기에 더욱 답 답했다. "저는 아무런 잘못이." 뭐라고 변명을 해보려 했만 구아드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건 상부에 보고를 하면 알게 되겠지. 일단 우리의 임무는 너를 생포하는 것이다. 이 아이를 묶어라! 커크 자네에겐 미안하군." 그의 부하들이 움직여 뮤스를 잡으려 하자 커크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흠.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군. 이 아이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묶지는 말아 주게." 커크의 부탁으로 인해 구아드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역시 커크 의 신뢰를 져버리기도 싫었기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아무리 자네라도 이 아이가 도주를 한다면 자네가 그 책임을 물어야 할걸세." 상황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자신의 편을 들어준 커크에게 고마움을 느낀 뮤스가 나서 며 말했다. "절대 도망치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나와 커크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도망치지 안길 바란다." 급진적으로 변하는 상황에 얼떨떨해 하던 벌쿤이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형이 무슨 잘 못을 했다는 거야?" 뮤스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전뇌거를 만든 죄인가?] 그의 머리카락을 헤치며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그의 생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뮤스의 걱정을 잠시 미룬 커크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이 숲에 불을 붙인 것이 자네들 소행인가?" "그렇지. 요즘 쉴드옥토퍼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있었거든? 위에서도 이 숲을 달갑 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자네도 알지 않나. 그래서 불을 지를 수밖에... 자네는 저 절 벽 넘어 편에 있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끄덕인 커크는 피식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제는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사령부로 뮤스를 데리고 가야 돼." "흠 어쩔 수 없지..." 뮤스를 한번 바라보던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학자> #84 그로부터 삼일 후, 바이센 지방에 위치한 도이첸제국 남부 수비대 사령부는 엄청난 손님을 맞아야만 했는데, 소문으로만 떠들썩하던 공학원의 총 책임자가 직접 이곳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 지방의 귀족과 상인들은 너나할것 없이 바쁘게 마차를 몰아 그들을 영접하기 위해 나섰고, 소식통이 좋은 자들은 이미 그들이 도착할 곳에 일류 요리사들을 불러 실외 연회를 마련하고 있었다. 군사 훈련 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훈련장은 이미 화려한 연회장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고, 한쪽에 는 이미 이곳까지 보급된 전뇌거들이 마차와 함께 주차되어있었다. "그나저나 공학원에서 무슨 일로 이곳을..." "내 생각에는 공학원의 분원을 이곳에 세우지 않을까 생각되네. 그렇게만 된다면 바 이센지방의 경제가 살아나게 되지..." "허허 이 사람들 꿈꾸고 있구먼. 내가 듣기로는 어떤 자가 공학원에 죄를 짓고 도망 을 쳤는데, 수비대에게 잡힌 모양이야. 그래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다고 한다네." "과연 어떤 죄를 지었기에 직접?" "그걸 내가 알 턱이 있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며 떠들고 있을 때, 사령부의 입구로 다섯 대의 최고 급 전뇌거가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 가운데의 전뇌거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 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탄성을 지르며 멈출 줄 몰라 했다. "저 황금의 전뇌거를 봐. 과연..." 사령부 내부로 들어와 멈춰선 다섯대의 전뇌거 문이 열리자, 각 전뇌거 마다 드워프 들이 흥분한 모습으로 내리기 시작했고, 금빛의 전뇌거에서는 크라이츠가 자태를 뽐 내며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때 사람들을 헤치며 제복을 입은 중년이 나섰는데, 얼 굴에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기에 이 사람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하는지 쉽게 알 수 있 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학원 여러분. 저는 이곳의 대외 접대를 맡은 네스터 가이번이라고 합니다. 사령관님께서 안 계신 터라 제가 대신 맞음을 용서해 주시길..." 주변의 건물을 둘러보던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라이츠 드라켄이라고 해요. 이쪽은 켈트, 그리고 형제분들이시죠."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에게 다시 인사를 건넨 네스터는 입에서 침을 튀며 말했다. "먼길 오시느라 시장했을 텐데 마련된 연회장으로 가시죠.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습니 다." 그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먼저 뮤스를 만나보고 싶은데요?" "하하. 그런 죄인 따위야 나중에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네스터의 말에 발끈한 드워프들은 이마에 힘줄을 떠올렸다. 켈트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죄인 따위라는 건가? 이게 다 크라이츠님 때문 입니다." 켈트가 크라이츠에게 책임을 묻자 그녀는 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호홋. 그래도 현상수배 만큼 효과가 좋은 것이 없어요. 보라구요. 수배령을 내리니 까 금방 이렇게 잡아오잖아요?" "그렇지만 명색이 공학원의 원장인 녀석인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게 다 뮤스를 위한 일이라고요." "끄응..." 할말을 잃은 켈트가 입을 다물자 둘의 대화를 요약해 보던 네스터는 얼굴이 창백해지 며 말을 더듬었다. "그..그렇다면 뮤스라는 자가. 아니 뮤스님이... 공학원의?" 사색이 되어 버린 네스터와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표정을 짓던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뭐 그렇죠. 이제 안내 좀 해주실 까요?" "네..네 알겠습니다." 네스터가 안내한 곳은 몇 개의 횃불만이 사방을 밝히고 있는 지하 감옥이었다. 습기 를 먹은 공기들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네스터는 횃불을 부하에게 넘기며 손수 감옥의 문열 열었다. -끼이이익! "이..이 방입니다." 켈트는 아까부터 꼬인 심기에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쏘는 듯 말했다. "흠... 꽤나 좋은 방이군. 이런 곳을 방이라고 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둘의 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던 크라이츠는 직접 철창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넓었기에 안쪽은 아직도 어두움이 뒤덮여 있었다. 안력을 돋 구어 내부를 보던 크라이츠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잡혔는데, 한 명은 뮤스였고, 또 한 명은 벌쿤이었다. 실상 사령부에 도착하면서 뮤스의 신병에 대한 결정권은 상 부로 넘어갔기에 구아드 조차 더 이상 뮤스를 감싸 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병사 들이 뮤스를 잡아 가두었는데, 그때 벌쿤은 뮤스와 떨어 질 수 없다며 생때를 부리는 바람에 함께 갇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다가옴을 느낌 벌쿤은 몸을 일으키며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은 또 누구야! 뮤스형을 어떻게 하려고?" 벌쿤의 반응에 몸을 일으킨 뮤스는 크라이츠를 올려다 봤는데, 어두움에 익숙해진 그 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 본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누... 누님!?" "호홋! 뮤스 잘 있었니?" "누님 눈에는 이게 잘 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제가 수배가 된 거죠?" "호홋. 널 찾기 위해서 내가 힘을 좀 썼지. 이제 널 찾았으니 걱정하기 말거라. 그나 저나 이곳은 냄새가 심하구나 빨리 나오렴. 켈트씨와 친척동생 분들이 기다리고 계 셔." "에휴... 아무튼 누님은 변한게 없군. 벌쿤 나가자." 뮤스가 골치가 아파 옴에 고개를 내저을 때 혼란을 느낀 벌쿤은 얼이 빠진 모습으로 뮤스를 바라보았다. "형... 저분이 형의 누나야?" "내가 전에 대단한 누나기 있다고 그랬잖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지... " "그렇다고 동생에게 수배령을 내리다니..." "빨리나가자 늦으면 또 무슨 짓을 할 줄 모르거든."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건네며 뮤스는 일어났고, 벌쿤 역시 그의 말에서 수긍할 만한 점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왔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컬트를 비록한 드 워프들은 머리를 두들기며 반겨 주었고, 뮤스는 벌쿤을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드베인 숲에서 만난 벌쿤 이예요. 이제 함께 공학원에서 살거예요." 그의 몸을 살펴보던 켈트는 감탄을 하며 말했다. "호오 아주 훌륭한 몸이군. 잘 키우면 멋진 장인이 되겠어!" 블뤼엔과 브라이덴 역시 그의 말에 동감을 하는지 손으로 턱을 궤며 벌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무를 잘 깎을 것 같은데? 저 근육 좀 보라구! 내가 제자로 받아들여야 겠구먼." "흥 무슨 소리야? 손을 보라고, 세심한 것이 유리를 다루면 딱 알맞겠군!" 형제들의 말을 듣고있던 레딘 역시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말도 안돼는 소리... 이마에 금속이라고 써져 있구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들의 티격거리는 소리에 뮤스는 웃음 짓고 있었다. 이때 저 멀 리서 커크가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서둘러 왔는지 신발조차 신지 않은 모습이었는 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뮤스 어떻게 된 거야! 오해는 해결 된거야?" 다급한 커크의 물음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커크대장님 애초부터 오해조차 없었어요. 저희 누님께서 절 찾기 위해서 손을 쓰신 거래요." "응? 아무리 그래도 수배령을 내리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이상한점이 많았기에 고개를 갸웃 거리던 커크에게 뮤스는 크 라이츠를 소개시켰다. "인사하세요. 저희 누님이세요. 누님 이쪽은 레인져 대장이신 케크대장님 이세요." 소개를 받은 크라이츠는 커크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웃었다. "호홋. 안녕하세요 커크씨. 뮤스의 누나인 크라이츠 드라켄이라고 해요. 그런데 모습 이 좀..." "네?" 그녀의 지적에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는데, 엉겁결에 입은 옷하며 신발조차 신지 않은 발에 얼굴을 붉혔다. "시... 실례했습니다." 커크의 무안해 하는 모습을 본 벌쿤이 외쳤다. "커크대장님! 우리 누나 두고서 한눈 파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누나한테 이 를 거예요!" "누.. 누가 한눈을 팔았다는 거야?"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모습이 역역한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 다. 네스터에게 숙소를 제공받은 뮤스와 일행들은 모든 연회를 생략하고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커크도 끼어 있었는데, 벌쿤과 가족이 된 만큼 남 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뮤스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빛나 보였는데, 깔끔한 얼굴 덕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층 성숙해진 분위기가 그의 외모를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또 잘 차려입은 벌쿤 역시 봐줄 만 했 는데, 가벼운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근육들과 훤칠한 신장이 절묘한 조화를 이 루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무거운 분위기가 돌고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던 크라이츠가 와인을 한잔 들이키며 말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다들 모이니 정말 좋군요. 뮤스 너도 상당히 성숙해진 느낌인걸?"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며 살짝 웃은 뮤스는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 걸요?" 그녀에게 대답한 뮤스는 고개를 돌려 벌쿤을 바라봤다. 그는 조금 딱딱하고 무거운 듯한 이런 자리가 불편하기만 한지 칼과 포크를 들고 고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형. 이거 엄청 안 잘려. 손으로 들고 먹으면 안돼?" "하하. 상관없어. 다른 드워프 아저씨들도 집에서는 그렇게 먹거든! 오늘은 웬일이시 지?" 드워프들은 음식을 먹다가 말고 자신들을 들먹이는 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레 딘이 말했다. "흠... 네가 없는 사이 우리도 많이 변했다고! 말이라도 들어봤나? 교양 드워프라고. " "푸핫! 그냥 하던 대로해요! 무슨 교양 드워프!" 뮤스의 웃음과 함께 사방에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사실 드워프들은 뮤스의 전신 에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익숙지 못해 하고있었는데, 뮤스가 먼저 분위기 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자 웃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제서야 큼지막하게 고기를 썰 어 입으로 가져간 켈트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뮤스 너 정말 많이 변한 것 같군. 비록 얼마 된 시간은 아니지만 분위 기가 영 다른걸?" 레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이 맞아. 그렇게 입고 나타나니까 주눅이 다 들더라니까?"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를 느낀 벌쿤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포크로 큰 덩어리 의 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휴우. 이제야 좀 먹을 만 하겠네." 브라이덴이 입을 닦으며 뮤스에게 물었다. "뮤스 그 동안 있었던 일이나 좀 이야기 해주게! 드베인 숲이 어땠는지 정말 궁금한 걸?" "하하 그 이야기라면 커크대장님께 듣는게 더 좋을 걸요? 이분은 드베인 숲에서 마물 사냥을 하시는 분이 시니까요." "오호 그래? 그렇다면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해도 되겠나?" 브라이덴의 부탁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렇게 저녁 식사까지 초대해 주셨는데 그 정도야 쉽죠. 저는 알다시피 레인져 죠..." 그 때부터 커크는 특유의 입담으로 뮤스와 만났던 이야기부터 쉴드옥토퍼스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이곳까지 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중간, 중간 벌쿤이 끼어 들며 그의 이야기를 도와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함께 웃고, 긴장하고, 한숨지 으며 뮤스와 재회한 날의 밤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대공학자> #85 (39) 친구들. 다섯 대의 고급 전뇌거가 황혼을 가르며 라이델베르크의 외곽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각자 자신들의 대외용 전뇌거에 몸을 실었고, 뮤스, 벌쿤 그리고 크라이 츠는 함께 금빛의 전뇌거를 타고 있었다. 처음 전뇌거를 타는 벌쿤은 심하게 멀미를 하는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전뇌거의 신기함에 빠져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전뇌거라고 했어? 나도 이런 것 하나 있으면 좋겠다. 힘 좋은 녀석으로!" 그의 말을 들은 뮤스가 말했다. "공학원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하나 가지고 있어야지." "정말? 고마워!" "뭘... 누님 요즘 공학원은 어떻게 돌아가죠?" 신문을 읽고있던 크라이츠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누구니. 네가 없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돌아가고 있지. 게다가 얼마 전에 호바인가문과 손을 잡아 판매망을 늘렸단다." "호바인가문이라면 바르키엘의?" "그렇지 네가 그 덜떨어진 녀석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우리에게 보답을 하는 샘이지.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 돌아가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다만 새로운 제품들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조금 문제가 있지만, 네가 돌아왔으니 괜 찮고... 아! 얼마 전에 황실에서 연락이 왔더구나. 빠른 시일에 재상이 너를 만나보 고 싶어하더라..." 그녀의 말을 들은 뮤스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황궁에서 저를요? 무슨 일이 있나요?" "뭘 그렇게 놀라니?" 크라이츠의 물음에 뮤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누님께서 저를 수배범으로 몰아주신 덕분에 이제 누가 저를 찾는다고 하면 간이 철 렁거려요."?? "녀석, 환영하는 의미에서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소심하게. 음... 사람을 시켜서 알 아보니, 네 기술을 요하는 일이 생긴 모양이더구나. 하버만 후작 때문에 네 능력이 황실에서도 유명한 모양이야." 고개를 한번 끄덕인 뮤스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참. 장영실 아저씨 소식은 없었나요?" "아니. 아무런 소식이 없단다." "그렇군요." 아직도 깜깜한 장영실의 소식에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조금의 시 간이 지나자 뮤스는 전뇌거가 멈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탈칵! 운전사가 문을 열어 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그리워하던 공학원의 모습 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벌쿤은 공학원의 엄청난 규모에 입을 벌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형의 집이라는 말이야?" "저택은 이 건물의 뒤쪽에 있고 여기는 작업하는 곳이야." "이야! 대단해! 대단해! 우리 누나가 이걸 봤으면 놀라서 까무러쳤을 꺼야!" "그만 놀라고, 나가자." "응." 전뇌거에서 내린 일행은 공학원으로 들어갔는데,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에 뮤스의 기 분은 좋아지고 있었다. 켈트가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뮤스, 집에 돌아온걸 축하한다." "하하 고마워요 아저씨." 뮤스가 감회에 젖어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벌쿤 역시 조립공정을 덜 거친 미 완성의 전뇌거를 만져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역시 드베인 숲에서 나오길 잘했어! 살아 생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을 줄이야." 그를 바라보던 크라이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벌쿤 너는 마치 뮤스를 처음 봤을 때 같아..." "에? 크라이츠 누나는 뮤스형을 딴사람 말하듯이 말하네요? 처음 보다니..." "우리남매는 같이 자라지 않았었거든. 그래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단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뮤스형도 나랑 비슷했다고요?" 벌쿤이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켈트가 입을 열었다. "껄껄! 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로데오 생산라인을 쓸어보던 뮤스는 자신 이야기가 들리자 고개를 돌리며 애써 부정 하려했다. "내가 언제 저렇게 푼수 같았다고 그래요!" "호홋! 이런 여행 중에 머리를 크게 다친것 아니니? 네가 멍청했을 때가 얼마나 됐다 고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만들 해요! 내일부터 다시 학교가야 하니 오늘 일찍 자자고요!" "쯔쯧... 핑계는 제대로 대야지. 학교는 이미 방학이고, 너는 기말 고사를 못 봐서 낙제를 했단다." 그녀의 충격적인 말에 뮤스는 인상을 구기며 잠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음 학기부터 친구들과 따로 다녀야 하나요?" 오랜만에 보는 뮤스의 당황한 모습이 재미있는지 크라이츠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 다. "푸훗! 난 내 동생이 낙제해서 유급 하는 꼴은 못 본다. 그래서 손을 써놨지." "휴우... 찝찝하긴 하지만 다행이네요." 가슴을 쓸며 한숨을 내쉰 뮤스는 일행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으로 들어가 자 바이멀이 웃으며 반겨 주었는데, 그는 뮤스의 알지 못할 분위기에 압도되는지 한 참 동안을 감탄했다. 크라이츠가 바이멀을 보며 말했다. "바이멀, 여기는 벌쿤이예요. 앞으로 함께 지낼 테니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반갑습니다. 벌쿤 도련님." 바이멀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나이 많은 사람의 깍듯한 인사에 어색하기만 한 벌쿤은 고개를 숙이며 함께 인사를 했다. "아... 안녕 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불러주시죠.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죠?" 잠시 생각을 해본 크라이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다들 피곤 할 테니 방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하죠." 그녀의 말에 모두들 동의를 했고, 벌쿤은 바이멀의 안내를 받으며 자신이 쓸 방으로 올라갔다. 공학원은 오래간만에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업지시 를 하고 있었고, 크라이츠 역시 뮤스의 귀환이 내심 기쁜지 서류 정리하는 손놀림이 가벼웠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아직 침대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똑! 똑! 피곤함에 찌든 뮤스를 깨우는 노크소리가 미안하게 들려왔다. 살며시 눈을 뜬 뮤스는 그것이 바이멀의 노크라고 짐작하며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에 미소를 지 었다. -벌컥!!!! "뮤스 이자식! 왔으면 이 형님께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냐!" 오래간만에 느끼는 평온함을 한순간에 깨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 킨 뮤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고,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히안!" "푸하하하! 정말 살아 있었구나!" "그럼 내가 죽기라도 했는 줄 알았냐?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그럼 네가 잠옷 차림인데 들어오라고 할까? 같이 들어온다고 난리인걸 널 생각해서 내가 말려 줬다." "하하 고마워 해야하겠지? 그럼 잠깐만." 침대에서 내려온 뮤스는 서둘러 걸어놓은 옷을 걸쳤는데, 바이멀이 준비해준 고급천 의 옷이 오늘 따라 더욱 부드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됐어 히안." 뮤스가 옷을 다 입자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야 준비 다됐어. 들어와." 방문이 열리면서 카타리나를 비롯해, 세이즈, 폴린이 들어왔는데 뮤스를 본 친구들은 각자 다른 표정이었는데, 카타리나는 밝은, 폴린은 장난스러운, 그리고 세이즈는 울 먹거리고 있었다. 카타리나가 말했다. "너 괜찮아? 얼마나 걱정했다고!" 옆에서 괴상하게 웃고있던 폴린도 팔짱을 끼며 말했다. "호홋! 감히 밥을 사주기 싫어서 사고를 가장한 잠적을 해? 못된 녀석!" 뮤스는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환영인사에 쓴웃음을 지었다. "넌 오랜만에 보는데도 그런 말을 하고 싶냐?" "우리 히안이 얼마나 널 걱정 했는데! 감히 히안을 걱정시키다니!" 뮤스가 고개를 돌려 히안을 바라보니 아직 두 남녀의 관계에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음 을 보여 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애써 울음을 참던 세이즈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훌쩍... 괜찮니? 얼마나 걱정했다고..." "으..응.. 괜찮아. 그렇게 울 것 까지야 없잖아." 그녀가 울먹거리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폴린과 히안이었다. 자신의 환영파티 때도 이와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음을 깨달은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히안을 바라보자 그는 귓속말을 속삭였다. "세이즈가 울면 장난 아니라고. 완전 통곡이야..." "에? 전혀 안그럴 것 같은데?" "그럼 모르는 편이 좋아..." 애써 세이즈를 진정 시킨 친구들과 뮤스는 방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했다. 뮤스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가이엔은 같이 안 왔네?" 가이엔의 이야기가 나오자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뮤스는 아무것도 모 르니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웃기만 하는거야?" 궁금해하는 표정이 역역하자 웃음을 잠시 멈춘 카타리나가 설명을 해주었다. "가이엔은 나중에 바르키엘과 함께 올거야." "응? 바르키엘과?" 폴린과 손을 잡고 앉아있던 히안이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핫! 바르키엘 녀석 완전히 새사람이 됐지 뭐야. 그 녀석 우리 학교로 편입했어." "엥? 햄브리겐으로?"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네가 실종된 충격으로 가이엔이 슬퍼하고 있을 때, 바르키엘 이 가이엔을 많이 위로해 줬나봐. 나중에 안 일이지만 너와 가이엔이 연인인 줄 알았 다고 하더라. 축제 때 미술 동호회 전시회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말이야. 그래서 죄책감에 가이엔에게 잘 대해 주다가 서로 눈이 맞은 거지." 허공을 보며 상황 정리를 하던 뮤스는 대강 이해가 끝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 참. 그런 일도 있었구나. 오랜만에 오니까 적응이 안되는 걸?" "이 녀석! 너 혹시 바르키엘에게 가이엔을 빼앗겨서 서운한거 아냐?" "아침에 먹은 상추가 상했냐?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뮤스와 친구들이 그간의 회포를 풀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뮤스 형! 나 배고파!" 그들은 요랑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그 곳에는 벌쿤이 상체를 벗은 채 우 람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황한 카타리나와 세이즈는 다른 곳으로 재빨리 고개 를 돌렸고, 폴린과 히안은 벌쿤의 근육에 감탄성을 터트리며 감상을 하고 있었다. 뮤 스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벌쿤을 밀어냈다. "너 이런 꼴로 돌아 다니면 어떻게 해!"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벌쿤은 머리를 긁적였다. "멋있기만 하구만. 형 혹시 내 근육이 부러운거 아냐? 그리고 저 사람들은 누구야? 친구들?" "잔소리 말고 인사 하려면 옷이나 입고와. 빨리!" "쳇 알았다구! 역시 도시는 귀찮아. 우리 마을에서는 이렇게 돌아 다녀도 아무 상관 하지 않는데..." "앞으로는 계속 귀찮아 질거다." 투덜거린 벌쿤은 옆구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뮤스는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공학자> #86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히안이 탄성을 지르며 물었다. "이야! 그 덩치는 누구야?" "응. 지금부터 나와 함께 살 동생이야. 이름은 벌쿤이고..." "동생이라니? 나이가 몇이 길래?" "열 여덟" 뮤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벌쿤의 나이를 들은 친구들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고, 폴린은 가이엔에게 눈길을 돌리며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럼... 가이엔과 동갑이라는 말이야?" 그들을 충분히 이해함에 할 말이 없어진 뮤스는 고개만 끄덕이며 긍정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벌쿤이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우람한 체구를 바라보는 친구들은 또 한번 감탄을 해야만 했다. "여어! 나왔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가볍게 웃은 히안이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히안이고 뮤스와 동갑이지." "하하 그럼 형이네? 만나서 반가워 벌쿤이야." "그래. 반갑기는 한데 어째 형이라는 소리 듣기가 어색한데?" 모두들 그와 같은 생각인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어 폴 린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는데, 손을 맞잡은 폴린은 벌쿤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난 폴린이야. 어머머! 이 우람한 손 좀 봐! 멋지다 얘!" "저... 그게."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부끄러움을 느끼던 벌쿤이 조금 힘을 주며 손을 빼려하자 폴린이 우악스럽게 다시 그의 손을 잡아끌며 전직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기다려봐! 그런데 피부가 왜 이렇게 상했니?" 폴린의 요상스러운 행동에 히안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안색을 굳히며 언성을 높였다. "야! 폴린 뭐 하는 짓이야?" "칫! 알았다 알았어! 너 부러워서 그렇지?" "부럽긴 뭐가 부럽다고 그래!" 두 연인이 오랜만에 티격거리기 시작할 때 그들을 보며 피식 웃던 세이즈가 고개를 살포시 숙이며 인사를 건넸는데, 그녀의 외모에 걸맞는 상냥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세이즈야, 나이는 너와 동갑이지만, 얘들과 친구로 지내는 중이지. 잘 부탁해." 세이즈의 인사를 받던 벌쿤은 볼을 가늘게 떨며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뮤스가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벌쿤 왜 돌에 얻어 맞은 표정이야?" 뭐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있던 벌쿤은 눈을 여전히 세이즈에게 고정한 채 신음성과 같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형... 내 눈 앞에 천사가 있어... 아름다운 목소리... 풋풋한 얼굴..." "야... 다 기절하는 꼴 보고싶냐?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지금은 조용히 해..." 다행스럽게도 벌쿤의 목소리를 뮤스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별다른 혼란(?) 없이 넘어 갈 수 있었다. 뮤스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카타리 나를 직접 소개하며 인사를 끝마쳤고, 서둘러 친구들과 벌쿤을 이끌고 식당으로 내려 갔다. 마침 친구들이 온 것을 알았는지 식탁에는 충분한 아침식사가 마련 되어있었 다. 각자 자리에 앉자 히안이 놀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 아침 식사 맞아?" 식당의 한편에서 서있던 바이멀이 그의 놀람에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뮤스 도련님이 돌아온 것을 기념해서 특별히 마련한 음식들입니다. 많이 드시 죠." 히안의 옆에서 포크로 이것저것 찍어 보던 폴린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지 군침을 삼 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음식점집의 딸인 그녀의 반응을 보더라도 얼마나 대단한 것 인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맛있겠어! 자 다들 들자고!" 다들 음식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벌쿤만은 세이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고개를 들던 세이즈의 눈이 벌쿤과 마주쳤는데, 의아하게 느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벌쿤 왜 그래? 얼굴에 뭐라도 물었어?" 세이즈의 물음에 얼굴을 붉힌 벌쿤은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당황해 했고, 머리 속 으로는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분주했다. "아... 아니. 난 그저 이 음식들이 맛있나 해서. 솔직히 별론 것 같거든." "응? 난 맛있기만 한데?" "그... 그래?" 벌쿤이 얼떨결에 던진 변명에 안색을 싸늘히 바꾼 것은 다름 아닌 바이멀이었다. 사 실 뮤스를 위해 특별 요리장 까지 초청해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수준 이하의 평가를 받았으니 기분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벌쿤 도련님. 이 음식들은 라이델베르크 최고의 요리장을 초청해 준비한 것들입니 다. 그런데 맛이 없다니요?" 머리를 긁적거린 벌쿤은 그제서야 처음 포크를 들어 음식을 한입 먹어 보았는데, 과 연 바이멀의 말대로 굉장한 맛을 가진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미 뱉은 말 을 돌릴 수도 없었던 벌쿤은 또 다시 머리를 굴리다가 무릎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이것도 맛있지만 오늘 형들, 그리고 누나들을 위해 특별 요리를 해줄게. 바이 멀 아저씨 조리실 좀 써도 될까요?" 갑작스런 제의에 고개를 끄덕인 바이멀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았다. "벌쿤도련님도 이제 이곳의 가족이십니다. 물론 써도 되고 말고요." "하하 고마워요! 이제 제 요리실력을 보여드리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벌쿤은 뮤스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의 행동을 본 카타리나가 뮤스에게 물었다. "벌쿤은 어디가는거야?" 그녀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뮤스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하하. 다들 기가 막힌 음식을 먹게 될 테니 손에든 포크를 내려 둬. 나중에 배불러 서 못 먹는걸 안타까워하지 말고." "응? 벌쿤이 요리도 잘 한다는 말이야?" "하하 당연하지. 저 녀석은 어려서부터..." 뮤스는 그 때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유글렌 부족의 생활과 벌쿤의 신상에 대해 친구 들에게 설명했는데, 처음 듣는 신기한 세상의 이야기에 모두들 눈이 반짝이고 있었 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히안이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하! 그럼 저 근육들이 빨래를 해서 생긴 것이란 말이야?" "믿기지 않지? 나도 거기서 빨래나 하면서 평생 살 뻔했다니까." 폴린 역시 재미있는지 손에든 포크를 떨며 웃고 있었다. "쿠쿡. 히안 우리도 결혼하면 그렇게 살아 볼까?" "아아. 사양하겠어요 아가씨." 뮤스와 친구들이 벌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흰색 의 길다란 모자를 눌러쓴 벌쿤이 조리실로부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은 빛의 접시가 들려있었는데 그 위로 큼지막한 은빛 뚜껑이 덮여있었다. 벌쿤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후훗 다들 기대하시라! 내 최고의 작품이 될 테니까!" 테이블에 접시를 올려놓은 벌쿤이 뚜껑을 열자, 순식간에 음식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 하며 식당 안에 퍼졌고, 사람들의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들었다. "이야!" "이 굉장한 향기!" 평소 조용하던 세이즈 마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눈앞의 음식을 바라보았다. "어쩜! 정말 군침도는 냄새야!" 그녀의 칭찬에 벌쿤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이미 벌쿤이 준비한 음식의 향기에 도취된 친구들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 고, 마치 암기를 던지듯 포크를 날리며 음식을 찍어나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입에 넣었는데, 한결 같이 황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음식이 무척 뜨거웠기에 입안에 서 이리저리 굴리던 히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 "호오호오... 으... 뜨거!! 이거 무슨 고기 길래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헤헤 그건 쉴드..우웁!" 벌쿤이 거리낌 없이 대답하려 하자 뮤스가 다급히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하하. 그건 벌쿤의 마을에서만 키우는 가축인데 쉴퍼라고 하는 동물이야. 특별 사료 를 먹여서 고기맛이 기가 막히다구!" "아! 그렇구나. 그럼 이제 맛을 못 보겠군. 많이 먹어둬야지!" 고개를 끄덕인 히안은 음식이 없어질까 두려워 하며 바쁘게 포크를 휘둘렀고, 다른 친구들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뮤스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벌쿤에게 속삭였다. "이게 마물의 고기라고 그러면 누가 먹겠냐? 기껏 딴 점수를 다 잃고싶어?" "아! 그렇구나." "어쨌든 우리도 먹자. 배고프니까." "고마워 형! 역시 형 밖에 없어." 덩치에 맞지 않게 해맑은 표정을 지은 벌쿤은 그의 말대로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 기 시작했다. 십 여분이 지나자 벌쿤이 가지고온 접시에는 찌꺼기 한 조각 남은 것이 없었고, 바이 멀이 준비한 음식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차갑게 식어있었다. 하지만 바이멀도 불만스 러워 하지는 않았는데, 쉴드옥토퍼스 고기를 맛본 바이멀 또한 그 기가 막힌 맛에 반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히안과 벌쿤이 배를 두들기고, 여자들이 입가를 닦고 있을 때,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을 들어오는 두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가이엔 과 바르키엘이었는데, 둘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뮤스를 잠시 동안 응시하던 바르키엘은 아무말도 없이 그에게 다가와 포옹을 했다. "흑흑. 뮤스 살아 있었구나. 내가 고집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바르키엘 딴에는 상당히 멋진 장면이라 느끼고 있었겠지만, 폴린과 히안의 눈에는 전 혀 아닌지 혀를 차고 있었다. "쯔쯧... 내 저럴 줄 알았어. 바르키엘은 뮤스에게 관심이 있었다니까." "역시 자기는 눈치하나 끝내 준다니까. 그러면 가이엔은 버림받는 건가?" "흠. 글쎄... 두고봐야 알겠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은 중심 외의 인물이었기에 그들의 대화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 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때 뮤스는 바르키엘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하하. 뭐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된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구." "훌쩍. 그럼 날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랄게 뭐가 있냐. 그리고 가이엔 오랜만이야." 고개를 돌려 바르키엘의 뒤에 서있는 가이엔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 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전히 눈치 빵점인 뮤스는 그녀의 복잡한 표정에 어색한 웃 음만 흘릴 뿐이었다. "뮤스 다친 곳은 없니?" 여전히 부드러운 가이엔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허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음 살펴보니 다친 곳은 없는걸? 자 다들 앉자" 이제야 눈물을 멈춘 가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고, 그녀의 옆으로 바르키 엘이 앉았다. 순간 싸늘히 식은 분위기를 느낀 뮤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하리 만 치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가이엔과 바르키엘이 연인이 되었다면서? 정말 축하해!" 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한결 같이 이마를 짚었는데, 바로 옆에 앉아있던 카타리나 가 뮤스의 옆구리를 찌르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본 가이엔은 살며시 웃으며 친구 들을 둘러봤다. "얘들아 난 이제 괜찮아."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친구들은 뮤스와 가이엔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아직도 뮤스 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듯 했다. 조금 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가이엔은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훗. 사실 내가 뮤스를 좋아했잖아. 그런데 이제는 바르키엘이 더 좋아. 친절하고, 착하고... 이제는 많이 변했으니까." 자신을 좋아했다는 말에 뮤스는 충격을 받았는지 얼어있는 표정이었다. "네가 날 좋아했었다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발달하지 못한 뮤스의 눈치에 감탄을 한 히안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너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고 말해다오. 어떻게 눈치가 그리 없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 그의 반쪽인 폴린 역시 가이엔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가이엔. 이런 녀석보다 바르키엘 쪽이 훨씬 나은 선택이야. 내가 장담하지." 폴린의 말에 뮤스 만큼이나 눈치가 없는 바르키엘은 자신을 향한 칭찬인 줄만 알고 즐거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공학자] #87 늦어서 죄송합니당^^;; #############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던 뮤스와 친구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 고, 벌쿤은 기분이 좋은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음률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뮤스의 치 매 위에서 뒤척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를 본 뮤스는 셔츠의 단추를 풀 어내며 물었다. "벌쿤. 왜 그렇게 불안하리 만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냐?" 뮤스의 말을 들은 벌쿤은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위에 작은 원을 그리며 말했다. "저기. 형. 세이즈는 어떤 애야?" 부끄러운 듯한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풀어내던 단추가 미끌어 짐을 느꼈다. 헛 기침 을 하던 뮤스가 대답했다. "흠흠. 너 정말 세이즈가 마음에 드냐?" "헤헤... 이런 말 하기는 부끄럽지만. 그런 타입이 우리 부족에서는 인기가 좋거든." "그런 타입이라니? 얼굴 하얗고, 조용한 모습?" "아니... 가정적인 모습 말이야. 예전에는 듬직한 여자가 인기가 많았는데, 요즘은 가사 일이 많아지다 보니 여자들도 가사일을 도와주는 추세거든. 물론 우리 누나는 아니지만." 오랜 만에 떠오른 유글렌 부족의 전통에 뮤스는 머리를 치며 가볍게 웃었다. "하하! 뭐 의미야 다르지만 세이즈는 여기서도 꽤 괜찮은 타입이지." "아무튼 형! 나 세이즈와 결혼 하고 싶어!" 이번에는 셔츠의 단추가 뮤스의 손에서 미끌어 지는 느낌 정도가 아니라 몇 개의 단 추가 뜯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투툭. "결혼?! 무슨 오늘 처음 보고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야!" "우리 부족은 그래. 우리 누나 봤잖아? 문득 결혼하는거." "아서라. 여긴 마을이 아니라구! 쳇! 나도 벌써 몇 개월씩이나 마음만 졸이고 있구 만." "어라! 형은 누구를 좋아하는데!" 순간 자신의 말 실수를 깨닳은 뮤스는 입을 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그랬냐?" "응 몇 개월씩이나 마음만 졸이고 있다고." "그.. 그랬어?" "푸하하하! 형은 누구야? 설마 세이즈는 아닐 꺼고! 혹시 카타리나 누나야?" 둘러대 봐야 추해지기만 한다는 것을 안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옷으로 갈아 입었 고, 드디어 뮤스의 꼬투리를 잡은 벌쿤은 음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내가 카타리나 누나한테 말해줄까?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 "말하기는 누구한테 말한다는 거야! 그리고 알리도 없잖아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또 모르지, 방금 형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눈치를 채고도 남았겠는걸 뭐."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는 뮤스를 보며 팔짱을 낀 벌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형! 이제 서로 도우며 사랑의 목표점을 향해 함께 달려나가자!" "혼자 무슨 헛소리야. 너나 잘해." "확! 카타리나 누나한테 말해 버린다!" 등뒤로 싸늘히 식은 식은땀을 흘린 뮤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래. 함께 달려나가자!" 역시나 은연중에 비굴함이 남아있는 뮤스였다. (40) 오! 세이즈. 일상의 생활로 돌아온 뮤스는 한동안 공학원의 일에 매달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만 했다. 매일 같이 늘어만 가는 공학원의 규모였지만 뮤스가 실종되는 바람에 그 내 실이 흐트러지기도 했고, 새로운 기술의 수급이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정체 되어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뮤스는 수십 종의 기기들을 새로이 설계해야 했고, 그에 따 른 생산설비들을 준비해야만 했기에 차라리 드베인 숲의 생활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또, 이번 일로 인해 더욱 많은 기능들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매일 밤늦게까 지 드워프들에게 기능들을 전수 받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뮤스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족들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벌쿤이 앉아 있었는데, 어색 하기도 한 도시의 삶에 그는 잘 적응해 가고 있었고, 지금은 뮤스의 일을 도와주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게다가 유달리 잡일을 하는 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듬 직한 몸도 몸이었지만 시간 나는 틈틈히 요리를 가르쳐 주거나, 몸소 쌓은 생활 지식 (?)들을 그녀들에게 몸소 전수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가정적인 남성의 표본이었다. 차를 홀짝 홀짝 마시는 벌쿤의 맞은 편으로 드워프들이 앉아 있었는데, 크라이츠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분위기도, 긴장되는 분위 기도 아니었다. 차의 향기를 한껏 들이마신 크라이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에 꽤나 먼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을 들은 켈트는 잔에 남겨진 차를 마저 마시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죠?" "벨링에 있는 황궁입니다." "그럼 모두 함께 가는 겁니까?" 켈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라이츠는 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게 될 것 같군요. 이번에 대규모의 작업이 있을 예정인가 봐요. 하지만 무슨 문 제인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 같더군요." 그녀의 말에 켈트와 드워프들은 조금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말못할 고민 이라도 있는 모습인 듯 했다. 그들을 보던 뮤스가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들 이번 일이 마음에 안드시나요?" 걱정스러워 하는 뮤스의 말에 켈트는 한층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라이츠님..." "네. 어려워 말고 말씀하세요." "동생들이 출장비가 지급 되냐고 물어봐 달라는군요." 허탈해진 벌쿤과 뮤스는 쇼파의 등받이로 몸을 던지며 짜증을 냈다. "난 또! 무슨 큰일 인줄 알았어요!" "형! 정말 도시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 "저분들은 사람이 아냐. 드워프라고." "아무렴 어때." 둘의 짜증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드워프들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던졌다. "이 나이에 출장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 그래서 말년에 동굴에 들어 앉았더니 네 녀 석이 동굴을 말아 먹지 않았냐?" "형님 말이 맞수. 지금이야 전뇌거라도 있지, 예전 같았으면 이 짧은 다리로 벨링까 지 걸어 갔을 거 아냐?" "그러게. 세상 많이 좋아졌지." "게다가 고 기능의 인력은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크라이츠는 내심 돈 독오른 드워프들을 보며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호홋! 저는 이래서 드워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마음에 든다니까요! 고상한 척 하 면서 콧대 세우는 드워프들은 딱 밥맛이죠! 좋아요! 기분 내는 김에 이번 출장비를 팍팍 드리도록 하죠! 호호호홋!" "껄껄껄! 역시 크라이츠님 이십니다! 역시 배포가 크시다니까!" 죽이 잘 맞아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던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만이라도 정상 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어둑해질 무렵 라이델베르크의 거리에는 등불지기들이 분주하게 가로등의 불을 밝히 고 있었다. 오가는 마차와 전뇌거 사이로 두 명의 청년이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전 혀 다른 체급의 몸을 가진 벌쿤과 뮤스였다. 뮤스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고 있었고, 벌쿤은 흐뭇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벌쿤의 얼굴 을 힐끔힐끔 살피던 뮤스가 찌뿌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이건 집착이야. 이런 짓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형. 이건 나쁜 뜻이 아니야. 언제나 그녀를 느끼고 싶은 것뿐이라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확 카타리나 누나한테 말해버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약점을 잡힌 뮤스는 또다시 꼬리를 말수밖에 없었다. "저기가 세이즈의 집이다." "자 형. 이제 시킨대로 해줘. 부탁해요!" 큰 한숨을 내쉰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앞에 보이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부자동네인 만큼 각양각색의 저택이 즐비해 있었는데, 주인들의 취향에 따라 만 들어 진 듯 했다. 세이즈의 저택 역시 그런 것을 전제로 지어졌는지, 수수하지만 고 급스러운 벽재와 고풍 하면 알지?" 입을 나불거리는 시늉을 하는 벌쿤을 보며 울상을 지은 뮤스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들 겼다. -똑! 똑! 그제서야 안에서 문두들기는 소리를 들었는지, 하녀인 듯 한 여인이 문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죠?" "아 세이즈의 학교 친구인 뮤스라고 하는데, 세이즈 집에 있나요?" "아 막네 아가씨를 찾아 오셨군요. 들어오시죠."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모습을 보던 벌쿤은 환호성을 치며 기뻐했다. "이야호! 형 제발 성공해 줘!" 집안으로 들어가자 하녀는 뮤스를 거실로 안내해 주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 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뮤스는 가방에서 엄지손톱 만한 물건을 꺼내들며 회의가 묻어 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쩌다 벌쿤에게 약점을 잡혀서..." 한번 궁시렁 거린 뮤스는 그것을 거실의 테이블의 밑에 손에든 물체를 붙였는데, 손 을 한번 털어 본 그는 입맛을 다셨다. "쩝. 이제 다 된건가?" 할 일을 다 마친 뮤스가 응접실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등뒤로 가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누구시죠?" 피식 웃은 뮤스는 몸을 돌렸다. "하하 나야 가이엔. 이제는 친구의 목소..?!" 가이엔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여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 위에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청초한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가이엔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가이엔의 친구인 뮤스입니다." "호홋. 그렇군요. 가이엔의 언니인 아로인라고 해요." "그렇군요. 목소리가 너무나 비슷해서 실수를 했어요."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니 개의치 마세요." "그렇게 말해 주신다면 고맙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할 때, 아로인의 뒤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이즈의 모습이 보였는데, 아로인과 뮤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 뮤스? 그런데 언니는 웬일로 방에서 나왔어?" "호홋! 연구만 하다 보니까 좀 넓은 곳이 그립더구나. 아무튼 이야기 나누렴. 나는 산책 좀 다녀와야겠어." "응. 조심해서 다녀와 언니." "그럼 뮤스군도 다음에 또 보죠." 아로인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굽힌 뮤스는 웃으며 작별인사를 받았다. "어쩐 일로 우리 집을 다 찾아왔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의 가이엔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준비해 놨던 말을 꺼내려 했 는데, 어찌된 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당황한 뮤스는 머뭇거리기를 잠 시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아! 책 좀 빌리러 왔어! 내가 없는 사이에 방학을 해버려서 내년 공부를 준비하려 고." 뮤스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가이엔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온 거야? 우리 집이 친구들 중에 제일 멀잖아." "그... 그렇지. 그래도 성격상 네 필기를 제일 잘 해놨을 것 같아서." 말꼬투리가 잡힌 뮤스는 서둘러 변명을 했는데, 언제부터 말 돌리기에 이리도 능숙해 졌는지 씁씁한 표정을 지으며 자문 하고있었다. "아. 그렇구나. 호홋 칭찬해줘서 고마워." "고맙긴." "책은 내 방에 있으니까 따라와." "네 방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우리도 네 방에 막 들어가는데 내방이라고 못 들어오게 하면 불평등하잖아." "후훗.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한 뮤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대공학자> #88 그녀를 따라 올라간 2층은 아래층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층이 고 아하다고 하면 2층은 개방적이었는데, 흰색계통의 건물의 색과는 다르게 연한 분홍빛 으로 꾸며져 있어 밝아 보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세이즈가 방문을 열고 들어 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가 보니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서재라는 단어가 어울림직한 모 습이 눈에 들어 왔는데, 벽을 따라 수많은 책들이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꽂혀있었 다. 방안을 둘러본 뮤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놀라 입을 벌리 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책을 찾던 세이즈가 놀라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후훗. 책이 좀 많지?" "이건 좀 많은 것이 아니라 엄청 많은 거야. 우리 누님의 집무실에도 책이 많다고 생 각했는데... 이건..." 책장에서 책을 하나 빼보던 뮤스는 표지를 읽어보았다. "캄제국 성립과 쇠퇴? 이건 역사서인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다른 책들을 살펴봤지만 모두 다른 분야의 것들인지 제목에서 풍기는 느 낌들이 모두 달랐다. "이야... 너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구나?" 뮤스가 말을 할 때 세이즈는 책을 찾았는지 초록색 외피의 책을 흔들고 있었다. "찾았다! 이거야. 여러 분야?" "응.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읽어 본 거야?" "아니 안 읽어 봤어." 지나가는 물음에 세이즈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선 아니라고 대답하자 뮤스는 맥이 풀리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은 책을?" "이방은 외풍이 강해서 겨울에는 춥거든. 그래서 책장으로 막아 놓은 거야." "컥! 그래? 이 책들이 다 바람막이 용이라고?" "뭐 그렇지." 만물의 의외성을 직접 체험한 뮤스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세이즈를 바라보았다. "넌 참 알다가도 모를 애야."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아참 저녁 식사는 했어?" "응? 아직 식전이야." "그럼 잘 됐네. 같이 저녁이나 먹고 가." "후훗. 나야 고맙지." 벌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지 너무나도 쉽게 대답하 고 있는 뮤스였다. 잠시 후 세이즈를 따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곳에는 세이즈 의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일 상석에는 남색의 정장을 입고 있는 흰머 리의 신사와 짙은 갈색머리의 귀부인이 보였고, 그 맞은 편으로는 방금 전 만났던 아 로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들을 바라보며 세이즈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쪽은 학교 친구인 뮤스예요. 뮤스 이쪽은 우리 부모님이셔." 소개를 받은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허허 만나서 반갑네. 난 세이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일세." 세이즈의 아버지는 외모와 잘 어울리게 인자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중년이었는데, 몸짓 하나 하나가 절도 있어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 넸다. "호홋. 앞으로도 세이즈와 잘 지내세요." "하하 물론이죠." "자 그럼 자리에 앉아요." 뮤스는 몇 마디의 대화로 세이즈의 조용한 성격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기대를 하고 자리에 앉은 그가 식탁 위를 바라보자 하나같이 채소 일색이었는데, 여러 가지 조리 법을 사용했는지 채소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해 보였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세이즈는 친절히 요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뮤스 우리 집 사람들은 채식 주의자야. 물론 나는 아니지만... 이건 양배추를 절인 것이고, 이건 야채 셀러드야.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이지. 이건 옥수수를 구 운 것이고 이건 감자를 으깨서 여러 가지 향신료와 버무린거.. 또.. 이건..." 세이즈의 길고 긴 설명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요리를 덜어 맛을 봤는데, 약간 시큼한 것이 발효시킨 요리인 듯 했다. 내심 김치와 비슷한 향취 가 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세이즈의 아버지가 물었다. "음 자네 집안은 무엇을 하는가?"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집안에 대한 질문은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 메뉴였기에 별달 리 괘념치 않고 대답했다. "집안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누님과 함께 공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득 그의 질문에 대답 하다보니 천애고아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에 새삼 쓴웃음을 지었다. 뮤스의 정체를 안 사람이면 누구나 놀라듯이 세이즈의 부모님과 언니 역시 그 범주에 속하고 있었다. 유난히 아로인이 많이 놀랐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 다. "뮤스군의 집이 공학원 이라고?! 세이즈!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니?" 아로인은 분하다는 듯이 세이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 리던 세이즈의 아버지가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아로인. 식사 도중에 교양 없이 이 무슨 행동이니?" "아... 죄송해요 아버지..." 아로인의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을 때 세이즈가 뮤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는 독학으로 공부를 하고 있거든. 아까 내방의 책들도 다 언니 꺼야." "그런데 공학원은 왜?" 그 이후의 설명은 아로인이 직접 해주었기 때문에 세이즈는 식사를 계속 했다. "내가 지금 연금술을 공부하고 있는데, 혹시 공학원에서 일 할 수 없을 까요?" "저... 세이즈의 친구이니 말을 놓으시죠. 그리고 공학원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언제 나 직원을 뽑으니 아무 때나 신청하시면..." "그럼 말을 놓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평범한 노동이 아니라 연구를 하고 싶어. 아무래도 집에서 연구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거든." 그녀의 말 도중에 식사를 하던 세이즈가 끼어 들었다. "하긴 연금술계의 이단아로 손꼽히는 언니이니... 평범한 곳에서 연구를 하기는 힘들 겠지." 연금술계의 이단아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낀 뮤스는 자세를 바로 하며 아로인을 바라 보았다. "뭐 그렇게까지 나쁘게 이야기 할 건 뭐 있니? 그 녀석들은 내 이론을 인정하려 하지 를 않아!"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가자 입을 막은 그녀는 부모님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 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의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으면 이제 식사를 하자꾸나." 세이즈의 아버지 말에 뮤스가 웃으며 아로인에게 말했다. "다음에 시간이 있으시면 공학원으로 찾아오세요. 아로인씨의 생각에 흥미가 있으니 까요." "호홋. 징그럽게 아로인씨가 뭐니? 그냥 아로인 누나라고 불러." "네? 아... 그럴께요." 조금은 예의에 구속되어 딱딱한 듯 하지만 나름대로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들 사이에 서 식사시간을 가진 뮤스는 언제부터인가 세이즈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후식까지 먹고서야 세이즈의 집에서 나온 뮤스는 뭔가 허전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 다. "그런데 뭔가 빠진 듯 한데... 음..." 머리를 긁적이며 어두워진 거리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 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그 눈초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깨달은 뮤스는 어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잡힌 것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진 벌쿤이었는 데, 화가 많이 났는지 씩씩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하.. 내가 뭘 깜빡 했나 했더니 너였구나." 뮤스가 버벅거리며 벌쿤의 표정을 살피자 그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힘껏 내쉬며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은 도대체 지금 까지 뭘 하다가 나온 거야. 조잘조잘... 이 동생은 초겨울 날씨에 벌벌 떨면서 얼어죽을 뻔했는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야? 안하고 사는 사람이야? " 쉬지도 않고 조잘거리던 그는 이제 호흡을 모아 놓은 것이 다 떨어졌는지 잠시 멈췄 고, 또 한번 큰 숨을 들이쉬며 호흡을 충전했다. 귀가 따갑던 뮤스는 그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흐흡!" "제발 벌쿤! 이 형님이 잘못했다. 그러니 한번만 용서해 다오!" 뮤스의 손을 입에서 떼어낸 벌쿤은 입에서 짠 기운이 느껴지는지 맨 땅에 침을 뱉었 다. "퉤퉤! 으... 짜! 알았어. 그건 그렇고 내가 시킨 일은 성공한 거야?" "쩝. 성공을 하긴 했다." "흐흐흐흐... 드디어... 형 빨리 돌아가서 시험해 보자!" 음흉한 웃음에 손을 내저은 뮤스는 앞장서서 걸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이제 손 땔 테니." 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벌쿤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뮤스의 발을 잡았 다. "흠흠. 형도 이제 나와 한 배를 탄 운명이야.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는 없지." "그런게 어디 있어! 이것 만 하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잖아!" "하하핫! 남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거라구!" "야 그건 너희 마을에서나 하는 말이야. 여긴 여자가 갈대와 같다고..." "누구 집 개가 짖나?" 귀를 한번 후벼 판 벌쿤은 궁시렁 거리는 뮤스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어 자신의 라이노에 태웠다. "이 녀석! 형님 말이 말 같지 않냐?!" "그냥 동생의 애교로 봐주면 되잖아." 말싸움을 벌이며 공학원으로 돌아온 벌쿤은 한걸음에 뮤스의 방까지 올라왔고, 침대 에 엎드려 네모난 상자를 부둥켜안은 채 입맞춤을 퍼붓고 있었다. "웅! 나의 사랑스러운 도청장치야! 나에게 세이즈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 으련?" 속이 미식 거릴 수준의 미성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벌쿤은 도청장치의 버튼을 누르 며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도청장치로부터 약간의 잡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직.. 마를린! 이 옷 좀 빨아 주겠어? -네 거기 놔두세요. 알지 못할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한 벌쿤은 이제 막 방에 들어온 뮤 스에게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외쳤다. "역시 형은 천재야!" "이제 네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기분 이 좋지 않다." 벌쿤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서 인지 넋을 놓고 책상에 앉은 뮤스는 힘없이 고개를 돌 렸다. "웬만하면 네 방에 가서 듣지 그래?" "후훗. 조용히 좀 해봐." 검지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한 벌쿤은 다시 도청장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지직... 언제 약속인데? 그럼 내일 나가는 거야? -응. 그러니까 오늘 일찍 자. 지직... 도청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잠시 기울이던 뮤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로인인 임을 느끼며 세이즈의 가족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고개를 흔들더 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벌쿤에게 말했다. "야 벌쿤. 너 밥 먹을 때 말 많이 하냐?" "헤헤. 밥 먹을 때 말을 하지 않으면 소화가 잘 안 된다고." 그의 대답에 더욱 안색을 굳히던 뮤스는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 차는 마셔 봤냐?" "그거 그냥 마시면 되는 거 아냐? 그런 것들은 왜 물어. 지금 나 바빠." "세이즈에게 접근하기 전에 넌 그것부터 고쳐야겠다. 세이즈라 이름에 고개를 돌린 벌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 보았다. "내가 뭐 잘 못된 거라도 있어?" "그 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예절이 장난이 아니더군. 나도 그런 것들을 배운다고 꽤나 고생했지." 식사예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골치 아픈 걸 뭐 하러 배워?" "너 세이즈와 결혼하고 싶냐?" "응." "그럼 배워." "뭐 그러지." "이거...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까 장난이 아니군..." 의외로 쉽게 대답하는 벌쿤의 태도에 뮤스는 손으로 턱을 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 고 있었다. <대공학자> #89 그로부터 며칠간 벌쿤에게 시달림을 당해야 했는데, 밤마다 도청장치를 가져와 함께 들어야만 했고, 글을 모르는 벌쿤을 대신해 그녀의 신상명세를 작성해야만 했다. 그 쯤 되니 세이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진 뮤스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만 늘어가고 있었다. -징... 지지직... 철컥! "뮤스! 이쪽 전뇌출력을 조금 더 높여야겠어!" "알겠어요!" 전뇌빨래기의 생산설비 넘어로 브라이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비록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던 뮤스는 턱을 한번 쓸며 자신의 앞쪽 에 있는 전뇌 변압기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제 됐어요?!" "좋아 알맞게 가동되는군!" 그때 작업을 하던 켈트가 손에 든 장갑으로 작업복의 먼지를 털며 다가 왔다. "음 이제는 가동 준비가 다 되었군. 전뇌빨래기의 인기가 엄청나다던데?" "아저씨도 시연회에 참석 하셨어요?" "난 작업에 바빠서 못 가봤고, 블뤼안이 말해 주더군." "후훗. 크라이츠 누님만 신이 나시겠네요." 팔짱을 끼며 전뇌빨리기 생산설비를 바라보던 켈트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그나저나 벌쿤 그 녀석은 요즘 뭘 하는데 얼굴 보기가 힘드냐?"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인 뮤스는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훗. 뭔가 바쁜 일이 있겠죠. 그럼 다른 냉장고 생산설비 설치 할 곳에 한번 가볼까 요?" "뭐 그러도록 하지." 뮤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켈트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봐 브라이덴! 정리하고 냉장고 생산설비 파트로 이동해!" "네 형님!" 허공을 울려 들려오는 브라이덴의 목소리를 확인한 켈트는 뮤스를 뒤따르기 시작했 다. 뒷짐을 지고 걸으며 공학원의 내부를 둘러보던 켈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 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일손이 터무니없이 모자라니 어떻게든 충당해야 할 텐데..." "아저씨 말이 맞아요. 갑작스레 아저씨라도 덜컥 죽으면 큰일이죠." 뜬금 없이 걸어오는 뮤스의 시비로 인해 켈트는 오랜만에 핏발을 새우며 대꾸했다. "내가 왜 죽는 다는 말이냐!" "하하. 아저씨 나이면 지금 당장 죽는 다고 그래도 이상할 것이 없죠 뭐." "나는 드워프다 이 녀석아!" "하하 알았어요." 오랜만에 해보는 말장난에 웃어 보인 뮤스는 켈트의 말대로 모자라는 인력충당이 걱 정되기 시작했다. "흠... 그런데 의외로 이 세상에는 숨은 인재들이 많은 것 같아요." "너 할 말이 없으니까 말 돌리는 거냐?" "할말이 없긴 누가 없다고 그래요! 정말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고요." "음... 숨은 인재라니 무슨 이야기냐?" "어제 세이즈의 언니를 만났어요." "그 얼굴 하얀 친구 말이냐? 네 나이가 몇 살이라고 벌써 여자 집에 들락 거리냐!" "에휴... 아저씨도 혹시 폴린병에 걸린 거예요?" "아무튼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봐라." "확실히는 모르지만 이 세계라고 해서 월등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죠. 오늘 세이즈의 언니가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야기나 나눠 볼 생각이에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대학이란 곳에서도 많은 것들을 가르치니..." 켈트와 대화를 끝마칠 즈음 둘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곳에는 30멜리 정도 됨직한 길이의 이동벨트를 중심으로 복잡한 부속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는데, 한숨을 크게 들이쉰 뮤스는 가방에서 설계도면을 꺼냈다. 그것을 한쪽에 펼쳐 놓은 뒤 켈트 와 함께 살펴보기 시작했다. 부속 하나 하나를 유심히 비교해 보던 켈트는 고개를 끄 덕였다. "흠 부속은 모두 준비 됐군. 어느 쪽부터 조립을 시작하지?" "일단 이동벨트의 중심부터 고정시키고 왼쪽부터 조립하죠." "음 그럼 배선 문제는 브라이덴에게 맡기면 되겠고, 전뇌거중기를 사용할 만큼 무거 운 것도 없으니 간단하겠군." "그럼 시작해 볼까요?" "후훗... 나는 이때가 제일 설레이더라고..." 뮤스의 말에 간단히 대답한 켈트는 주머니에 꽂아둔 장갑을 손에 끼며 부속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이 곳에 있는 생산 설비들은 모두 비슷한 유형으로 제작되어있었는 데, 간단한 분해와 조립으로 전혀 다른 생산설비를 구축 할 수 있었다. 지금 조립하 고 있는 냉장고 생산설비 역시 이 전에 수요가 줄어든 천체만리경의 생산설비를 분해 한 것으로 재조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하던 일을 마치고 온 브라이덴이 일손 을 거들자, 그들의 작업은 한층 속력이 붙기 시작했는데, 냉장고 생산설비의 모양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뮤스가 굽혔던 허리를 펴보며 땀을 닦을 때 등 뒤로부터 요란한 괴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앙!!"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벌쿤의 느낌이 담겨있는 괴성이라고 느낀 뮤스는 고개 를 돌려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벌쿤." "혀엉! 세이즈가 결혼 한데!" "엥!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냐!"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을 하고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쿤은 눈가로 조금 흐른 눈물을 훔치며 차근히 말했다. "훌쩍! 방금 전에 도청장치로 듣고 있었는데, 세이즈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 결혼이야 기를 꺼냈어! 나 이제 어떻게 해!" "흠... 잘못 들은 건 아니고?" "내 귀는 멀쩡 하다고! 세이즈가 똑똑히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네 알겠어 요.' 라고!"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 결혼을 준비하시다니... 하긴 집안 분위기가 좀 엄 한 분위기였어." 손에낀 장갑을 벗은 뮤스는 벌쿤의 등을 토닥거리며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켈트 아저씨, 브라이덴 아저씨 저 먼저 들어가 볼께요." 그의 말에 소매로 땀을 닦던 켈트가 억울한 표정으로 궁시렁 거렸다. "십여 일이나 실종 되어있던 녀석이 또 땡땡이냐? 이 나이에 우리만 이렇게 고생하다 니!" "하하 아저씨는 드워프라서 괜찮다면서요!" 순간 말이 막힌 켈트는 헛기침을 하며 먼산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저씨 나중에 뵈요!" "알았다 이 녀석아!" 그들에게 손을 흔든 뮤스는 벌쿤의 등을 떠밀며 그의 방으로 올라왔다. 방안을 살펴 보자 벌쿤이 침대위에서 발광을 했었는지 시트가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하지만 살림을 하던 습성이 아직 남아있는지, 옷가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벌쿤은 들어오자 마자 도청장치의 전원을 키며 뮤스에게 넘겨줬다. -지직... 도청장치를 건네받은 뮤스는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지만 희미한 잡음만 들릴뿐 아무런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에 아무도 없나 본데? 세이즈 아버지가 한 말을 또박또박 말해봐." 허공을 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벌쿤은 정리가 다되었는지 침을 한번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무슨 이름 긴 남자랑 만난데! 무슨 남작이라던가... 뭔 이름 이 그렇게 긴지..." "그랬는데 세이즈가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어디서 만나기로 했데?" "슈넬 레스토랑인가 하는데라던데? 형 나 이제 어떻게 해!" 억지적인 성향이 강한 벌쿤의 행동이었지만 뮤스는 동생이라고 생각한 이상 그가 마 음 아파하는 것을 보고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한번 같이 가보자." "고마워 형!" 이번만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고마움인지 뮤스를 끌어안으며 번쩍 들어올렸다. 숨이 막힌 뮤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야 이러다간 거기 가기도 전에 죽겠다." "헤헤 그러면 안되지." 뮤스를 땅에 내려놓은 벌쿤은 실없는 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뮤스가 벌쿤을 위로해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을 때,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바이멀이 들어왔다. "뮤스 도련님 아로인이라는 아가씨가 찾아 오셨는데요?" "아 네 서재로 모시도록 해요. 금방 나가죠."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인사를 하고 나가는 바이멀에게서 고개를 돌린 뮤스는 벌쿤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 다. "벌쿤. 금방 돌아 올 테니까 멋진 옷을 입고 기다려. 그 이름긴 남작이라는 사람보다 잘 보여야 할거 아냐? 필요한 것 있으면 바이멀 아저씨한테 부탁하도록 하고." "응 알았어 형!" 영감하게 대답한 벌쿤은 서둘러 옷장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뮤스는 잠시 벌쿤을 바라 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남색의 깔끔한 옷을 입은 아로 인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로인 누나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뮤스 반가워! 그런데 기다리다니? 내가 올 줄 알았던 거야?" "아! 그냥 느낌이 그럴 것 같아서요. 조금 서두르는 성격 같아서... 하... 하..." "호홋! 뮤스는 눈치도 빠르군." 도청장치를 통해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뮤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둘러댔고, 아로인은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준비해 놓은 노트들과 도면들을 가방에서 꺼내고 있었다. "이것들이 그 동안 내가 연구해온 것들이야." 그것들을 건네 받은 뮤스는 한 장씩 넘겨보며 세심히 읽어보았는데, 비록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거의 다른 점이 없었기에 놀라야만 했다. 문 득 뮤스는 카타리나를 따라 수업 도강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흠 굉장하군요. 하나만 물어 볼게요. 누나는 보석들끼리의 성분 조합으로 새로운 보 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호홋 과연 공학원의 원장은 다른 걸? 우리 클럽에서 그 문제에 대해 연구 중이었거 든. 어떤 회원이 실험 중에 브로치에 달린 루비를 녹여 버린 적이 있어. 어떤 원리로 그것이 녹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보석이 녹은 것을 목격한 이상 혼합도 가능하다고 생 각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그 원리를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들고있는 노트에도 나와 있듯이 연금술은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생각하 거든. 금속은 수많은 알갱이들이 이루고 있는데 그것을 아무리 혼합하더라도 금 따위 의 특정 금속을 만들지는 못한다는게 나의 지론이야. 물론 그 때문에 연금술계의 이 단아로 불리고 있지만..." "하하 그렇기도 하겠네요. 그 사람들의 꿈을 깨버리는 발언이 되었을 테니까요." "혹시 너도 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이니? 나의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은 뮤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후훗 아뇨 저는 누나의 생각에 동의해요." "호호홋! 정말? 네가 한 말이니 만큼 다른 사람한테 듣는 것 보다 훨씬 힘이 나는걸? " "고마워요. 그럼 누나의 클럽 회원은 몇 명이나 되죠?" 턱을 쓸며 고민을 해보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며 대답했다. "일단 회원들은 모두 여덟 명이야. 몇 명은 햄브리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고, 나 머지는 나처럼 따로 연구를 하다가 가끔 만나서 새로운 사실을 발표하는 형식이지. 덕분에 모일만한 장소가 없어서 걱정이었거든. 학교에서도 허가가 나오질 않으니 말 야." 뮤스는 손에 들려있던 노트를 조심 스럽게 덮으며 말했다. "좋아요. 누나를 비롯해서 모든 회원들을 연구원으로 채용하도록 하죠. 공학원의 화 공학 연구실을 사용하도록 하세요. 그곳에 필요한 것을 대부분 준비해 두고 있지만 더 필요 한 것은 예산서를 작성해 크라이츠 누님께 올려주시구요. 공학원의 연구원이 되신 것을 축하 해요." "그럼 허락해 주는 거야 뮤스!? 아니지 원장님?" "원장님은 무슨... 그냥 이름 부르세요." "호홋 알았어! 고마워 정말..." 뛸 듯이 기뻐하면 만세를 부르던 아로인은 뭔가를 이룬 상쾌함에 행복해 하고 있었 다. <대공학자> #90 천진난만하게 좋아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웃은 뮤스는 노트들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번에 제가 황궁에 갈 일이 있어서 당장은 조금 무리인 듯 하고... 제가 돌아온 후 에 들어오시면 되겠네요." "호홋! 응 그렇게 할께!" 뮤스는 테이블에 남아있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참... 세이즈는 지금 뭘 하고 있죠?" "아... 세이즈는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지금쯤 집에서 나갔을걸?" 과연 벌쿤이 들은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이왕 오셨는데 대접도 못해 드리겠군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공학원의 원장님이신데 약속이 없으면 이상하겠지. 난 연구실 좀 둘러 봐도 될까?" "하하 그렇게 하세요. 앞으로 일할 곳이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나쁘진 않죠. 나가시 다 보면 드워프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예요. 장난이 심하신 분들이시니까 오래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응. 고마워 뮤스! 그럼 다음에 또 봐!" 가볍게 인사를 건넨 아로인은 한시라도 빨리 연구실을 보고싶었는지 일어나 서재 밖 으로 나섰고, 뮤스는 그녀를 뒤따라 나와 빠르게 벌쿤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벌쿤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뮤스는 배를 잡고 쓰러져야만 했다. "푸하하하! 벌쿤 그게 뭐냐!" "형... 이거 옷이 너무 작아." 거울에서 뒤돌아 본 벌쿤의 모습은 과연 보는 이로 하여금 쓰러지게 만들었다. 로프 타이는 팔뚝에 감아 우람한 근육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바지는 짧은지 발목까지 올라 가 있었다. 게다가 셔츠는 그의 근육을 못이기고 뜯어지려 했는데, 마치 어른이 아이 의 옷을 입은 듯 했다. "그거 내 예복이냐?" "응. 나도 한번 입어 보고싶어서... 그런데 좀 작네? 이 줄은 팔뚝에 감는거 맞아?" "그걸 좀 작다고 말 할 수 있냐? 괜한 예복 한 벌 버렸네. 안되겠어 나가면서 빨리 한 벌 맞추자!" "응? 그럼 난 뭘 입고 나가?" "그냥 아무거나 걸치고 나와." "응 알았어!" 벌쿤이 옷을 갈아입자 뮤스는 그의 손목을 이끌고 차고로 걸어나왔다.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전뇌거가 세워져 있었는데, 벌쿤의 라이벌이 남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고급 스러운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크라이츠의 전뇌거 문을 열었다. "자 빨리 타." "형 이거 큰 누님 전뇌거 잖아?" "괜찮아. 이해해 주실거야." 어느덧 벌쿤은 크라이츠와 친해져 큰 누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크라이츠 역시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벌쿤이 부를 때마다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벌쿤 을 태운 뮤스는 전뇌거를 몰아 시내를 향하기 시작했다. "벌쿤! 절대 만나더라도 흥분하지 말고, 말로 해결하는 거다. 남작정도의 인물을 건 들이면 피곤해져." "흥! 큰 누님이 모든 걸 해결해 줄거야!" "야. 약속 안 하면 돌아간다." "야..약속 하면 될 거 아냐." 벌쿤의 확답을 받은 뮤스는 시내의 고급 의상점 앞에 전뇌거를 멈췄는데, 의상점의 점원이 금빛전뇌거를 발견했는지 급히 뛰어 나오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전뇌거에서 내린 뮤스와 벌쿤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의상점에 들어갔다. 뮤스는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단도직입적으로 점원에게 말했다. "다른 것들은 필요 없고, 이 녀석에게 맞는 예복을 빨리 맞춰줘요. 앞으로 1시간 이 내에 맞출 수 있을 까요?" 뮤스의 주문에 점원은 땀을 흘리며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손님 지금 밀린 주문품이 많아서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돈은 세배로 쳐드리죠." "헤헤 30분만 기다려 주시죠." 태도를 바꾸며 사라지는 점원을 보며 뮤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말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군..." 잠시 후 점원이 서둘러 줄자를 들고 나와 벌쿤의 신체 사이즈를 재기 시작했는데, 그 의 몸에 감탄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몸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같은 남자지만 정말 멋집니다! 혹시 좋은 운동 있으면 하 나 추천해 주시죠!" "가사 일을 열심히 하세요..." "아? 가사일... 뭐... 그러죠." 속으로 궁시렁 거린 점원은 금새 몸 치수를 재어 사라졌고, 벌쿤과 뮤스는 의상실의 내부를 둘러보며 옷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그렇게 찾아가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하냐? 상황이 안 좋으면 고춧가루 팍 뿌려야지." "고춧가루라니? 그게 뭔데?" "그냥 둘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란 말이야." "응 알았어! 방해..." 둘이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때 벌써 벌쿤의 에복이 벌써 준비되었는지 점원이 걸어 나오며 그들에게 말을 했는데 꽤나 힘이 들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저 나으리 완성되었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이렇게 빨리 만들어 본 것은 처음이군 요." "아 수고 하셨어요. 벌쿤 가서 빨리 입어봐. 그리고 아저씨 이 녀석 옷 입는 것 좀 도와주시겠어요? 예복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아 그렇게 하지요. 저를 따라 들어오시죠." 뮤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벌쿤은 어색하기만 한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점원을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만족이 그득 담긴 얼굴을 한 점원이 걸어나오며 말했다. "나으리! 내 평생 이렇게 예복이 멋진 분은 처음이십니다." 칭찬을 아끼지 않은 점원은 뒤를 돌아보며 따라나오는 벌쿤을 바라보았다. 그는 순백 의 예복을 전신에 걸치고 있었는데, 깔끔하게 뒤로 묶은 긴 머리와 이목구비가 반듯 한 얼굴이 절묘하게 어울렸고, 딱 벌어진 어깨가 더욱 늠름하게 보였다. 자신을 바라 보는 뮤스의 눈이 부담스러운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 어때? 이상하지 않아?" "나도 몇 번 귀족들의 연회에 가봤지만, 너처럼 예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이 다." "그래? 고마워 형!" "그건 그렇고 시간 없으니 빨리 나가자! 계산은 이걸로 해주세요." 뮤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황금으로 된 작은 패였는데, 정교한 문양들이 새겨들어 가 있었고, 아랫부분에는 어렵게 흘린 글씨가 양각 되어있었다. 그것을 본 점원은 황 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것은 프라이겔트 아닙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점원이 놀라고 있는 프라이겔트란, 대륙 최고의 상가인 호바인가문에서 발행하는 일 종의 인장으로써, 청구서에 금액을 적은 후 인장을 찍는다면 그것이 바로 현금이 되 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효력에 걸맞게 확실한 신용이 없다면 지급되지 않는데, 이것 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이첸제국 안에서도 손에 꼽았다. 그 중에 한 명이 나타났으 니 점원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청구서에 인장을 찍은 뮤스는 서둘러 의상실에서 나와 전뇌거를 슈넬 레스토랑으로 몰아갔다. 분위기 있는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이 어우러져 있는 고급 식당안, 마침 저녁 식사시 간이었기에 고급의상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로 테이블이 가득 차 있었고, 여기저기에 서 점원들이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가장 모서리 부근 에 두 명의 청년이 애써 몸을 숨긴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몸을 숨긴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이 그들을 더욱 눈에 띄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그중 체구가 작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벌쿤... 저기 세이즈 맞지?" "응. 내 눈이 정확하다면 세이즈가 맞아."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이즈와 진청색의 예복을 입은 사내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내의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그 에 비해 세이즈가 너무나 어려 보이고 있었다. 벌쿤은 주먹을 쥐며 말했다. "형. 저건 도둑놈이야! 나이차이가 10살은 넘게 나는데..." "그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여기서 아무런 말소리도 안 들리잖아? 더 다가가보자." "야. 더 다가 가는건 '나 여기있소' 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아. 지금도 사람들이 우릴 바라보고 있는거 모르겠냐?" "그럼 어떻게 해?" 벌쿤의 물음에 피식 웃던 뮤스는 머리를 두들겨 보이며 말했다. "녀석 머리를 써야지." 그렇게 말한 뮤스는 테이블에 놓여있는 와인병을 들며 조용히 점원을 불렀다. "네 무슨 일이시죠?" "저쪽 테이블에 있는 커플분에게 이걸 좀 전해주겠어요? 그리고 내가 줬다는 말은 하 지 말고, 서비스라고 말해주세요. 아는 분들인데 방해하기는 싫어서 말이죠." 그리곤 주머니에서 작은 금화 하나를 팁으로 건네주자, 점원은 입이 귀에 걸리며 굽 신 거렸다. "정말 매너가 좋으신 분이십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뮤스에게서 와인병을 건네 받은 점원은 서둘러 세이즈와 사내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 을 하는 듯 했다. 그를 보던 벌쿤이 말했다. "저걸 왜 주는 거야? 둘이서 좋은 시간 가져 보라고?" "쯔쯧... 이런 머리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냐. 병의 밑바닥에 도청장치를 붙여놨어. 이걸로 들어봐." 한심하다는 말투로 벌쿤을 꾸짖던 뮤스는 가방에서 둥근 단추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자신의 귀에 꽂았고, 하나는 벌쿤의 귀에 꽂아 주었다. 그러자 세이즈와 사내의 목소 리가 귀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있었어?" "쉿... 듣기나 해." 다른 손님들의 대화들로 인해 잡음이 섞여 들리긴 했지만 그 사이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제가 날짜를 잡아 보내겠으니, 부모님께는 그렇게 말해 주시죠. -네 그렇게 하겠어요. 대략 언제쯤 될 것 같은가요?" -음... 빠르면 내년 봄쯤이 되지 않을 까 생각중입니다. 대화를 몰래 듣던 벌쿤의 이마에는 핏줄이 솟아나기 시작했는데, 극도의 흥분 상태인 듯 했다. 걱정이 된 뮤스는 벌쿤의 어깨를 두들겼다. "벌쿤 이렇게 흥분하면 안돼. 참아." "지.. 지금 내가 참게 됐어? 세이즈가 결혼을 한다는데? 기다려봐!" 감정이 격해진 그는 어깨에 올려진 뮤스의 손을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지만 뮤스의 말이 벌쿤의 귀에 들릴리도 없었기에,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벌쿤은 눈 을 부라리며 세이즈와 사내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벌쿤은 사 람들을 헤치며 둘앞에 서게 되었다. 그를 발견한 세이즈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벌쿤 아니니? 여긴 어쩐 일이야?" 세이즈가 아는 척을 하자 그녀의 앞에 앉아있던 사내는 미소를 손을 내밀었다. "세이즈양이 아시는 분이신가 보군요. 저는 파브리카 베르제 폰 루바드 남작이라고 합니다." 그가 내민 손과 세이즈를 번갈아 바라보던 벌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흥! 역시 이름한번 엄청 길군! 부실하게 생긴 주제에!" 무례한 벌쿤의 행동에 세이즈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벌쿤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이런 날도둑놈 같은 녀석에게 시집가니까 기분 좋아?" 큰소리가 나는 세이즈의 테이블을 보던 뮤스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제자리에 주 저앉고 말았다. [대공학자] #91 수정했심... 벌쿤은 몸을 떨었고, 파브리카남작과 세이즈는 너무나 갑작스런 행동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벌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즈! 난 너를 좋아해! 절대 이런 녀석에게 널 빼앗길 수는 없어! 비록 만난건 한 번뿐이지만... 영원히 널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이 끝나자 굉장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보통 큰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주 변에서 식사를 하던 모든 이들이 세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팽팽하던 긴장감 을 깨며 파브리카남작이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진지한 표정으로 세이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벌쿤은 그가 웃기 시작하자 더욱 화 가 나는지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늙은 아저씨!" 하지만 파브리카남작은 그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는지 여유롭게 웃으며 세이즈를 바라 보았다. "처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듬직하다니 기쁘군요?" 처제라는 말이 나오자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벌쿤은 세이즈를 바라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들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뮤스는 벌 쿤의 뒤로 걸어오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쿤...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겠다." "으..응 그런 것 같아 형..." 문제의 두 청년은 어설프기 그지없는 대화를 나누고서 쏜살같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아있던 파브리카남작은 빙글빙글 웃고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청년들이군... 그나저나 처제는 저 벌쿤이라는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 죠? 이야기를 듣자하니 처제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는 모양인데..."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고 있던 그녀는 파브리카남작의 질문에 더욱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자..잘 모르겠어요.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인 걸요?" "후훗. 그래도 씩씩해서 보기 좋은 청년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파브리카 남작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시간 뮤스와 벌쿤은 전뇌거에 올라타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벌쿤 은 신경질 적으로 로프타이를 당겼는데, 예복까지 차려입고 생난리를 피운 자신이 너 무나 부끄러운 듯 했다. "형...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아우야... 나에게 묻지 마라. 나도 지금 혼란스럽다." "난 분명히 세이즈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야! 혹시 우리를 속이기 위해 연기를 한 것 이 아닐까?" "헤휴... 그건 아닐 거야. 언니와 세이즈의 목소리가 거의 똑같거든. 그래서 우리가 착각한 거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해!" "이제 별 수 없지. 이왕 세이즈에게 네 마음을 말한 이상 죽자살자 따라다녀 볼 수밖 에. 그리고 그 도청장치는 내다 버려!" "응! 다신 도청장치를 믿나봐라!"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두 형제(?)는 힘없는 손길로 전뇌거를 몰아 공학원으로 돌 아가기 시작했는데, 흔들리는 가로등의 불빛들이 자신들을 비웃고 있는 듯 했다. 공 학원에 도착한 뮤스와 벌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 응접 실에는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이 새로 준비된 생산설비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크라이츠는 어수선한 예복차림의 벌쿤을 보며 말했다.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꼴이 그게 뭐니?"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벌쿤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윽! 큰 누님... 어찌 저에게 그런 말씀을..." "응? 설마 내 말이 맞기라도 한 거야? 이야기 좀 해줘!" 그녀의 극성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뮤스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누님. 지금 벌쿤은 큰 상처를 받은 상태니까 오늘은 그냥 내버려둬 주세요." 아쉬운 표정이 역역한 크라이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써 불쌍한 척을 해보는 크라이츠였지만 당할 만큼 당했고, 알만큼 알게된 뮤스가 이제와서 그녀의 태도에 속아 넘어 갈리는 없었다. 자신의 작전이 씨도 먹히지 않자 크라이츠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 머리 좀 굵어졌다고 눈도 깜짝 하지 않는구나. 그건 그렇고 모레 황궁으로 떠 나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렴." 그녀의 말에 대답할 힘도 없는지 뮤스와 벌쿤은 손을 한번 내저으며 계단을 계속 오 르기 시작했다. (41) 플란포르.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 뮤스와 벌쿤은 같은 침대에서 뒤척거리며 자고 있었다. 세이즈 사태 이후로 둘은 한 방을 쓰며 세이즈의 마음 사로잡기 계획을 짜고 있었다. 뮤스는 이왕 도와주기로 작정 한 이상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었지만, 자기 앞가림 도 못하는 주제였기에 별달리 도움이 되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끼익... 그들이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 리가 들리고 있었다. "흘흘... 이 녀석들..." 그들은 다름 아닌 드워프들이었는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침대로 발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침대 앞에 멈춰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켈트의 신 호와 함께 다짜고짜 손에든 무엇인가를 뮤스와 벌쿤을 향해 던졌다. "혼 좀 나봐라 이 녀석들아! 크크큭!" "여기도 있다!" -퍽! 퍽! 그것에 맞은 뮤스와 벌쿤은 천장에 머리가 닫도록 뛰어 올랐다. "으악! 차..차가워!" "윽! 이게 뭐야!" 불시의 기습에 성공한 드워프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우하하! 첫눈이 왔는데 젊은 녀석들이 이렇게 늦잠이나 자고 있을 거냐?" "요즘 젊은이들은 점점 게을러진다니까!" "쯔쯧... 젊은 사람들이 낭만을 모르는구먼!" "빨리 일어나서 벨링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나." 저마다 한마디씩 한 드워프들은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뮤스 는 머리에 묻어있는 눈을 털며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쿤. 방금 뭐가 지나갔냐?" "글세... 몸매와 남아있는 눈덩어리를 봐서는 틀림없이 움직이는 눈사람이었을 거야. " "그럼 드워프 아저씨들이겠군... 이제 일어날까?" "아저씨들이라... 몸매는 비슷한 것 같군." 뮤스와 벌쿤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또 다시 문이 벌컥 열리며 주먹만한 눈덩이 두개 가 날아왔는데, 놀라 입을 벌리던 뮤스와 벌쿤은 눈덩이를 입으로 받아야만 했다. 입 에 들어간 눈을 뱉어내며 문쪽을 보자 크라이츠가 신이 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손 을 흔들더니 또다시 쏜살 같이 사라져 버렸다. "역시 누님이 빠질 리가 없지..." "우리 누나보다 더해..." 자리에서 일어난 뮤스가 창 밖을 내다보자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새 삼 이국적인 정취에 감탄하고 있었다.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보니 크라이츠와 드 워프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일대 사라는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 이 밀리는 듯 했다. "쯔쯧... 저 나이에 저러고 싶은가?" 몸을 일으켜 엉그적 걸어오던 벌쿤 역시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큰 누님은 정말 사람 같지 않아... 저게 어떻게 사람의 체력이야?" 순간 흠칫한 뮤스는 벌쿤의 눈치를 살폈지만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말로 던진 듯 했기 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벌쿤 이제 짐을 싸야지? 오후에 떠날 듯 한데." "형. 나는 이번에 남아 있고 싶은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세이즈 일 때문에 심란하기도 하고, 가봐야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같아서." 턱을 쓸며 고민하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겠군. 누님께 내가 말해볼게." "응 고마워." 뮤스는 힘없이 말하는 벌쿤의 얼굴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모두 벨링으로 떠날 채비 때문에 공학원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그들 이 돌아 올 때까지 공학원은 임시 휴원을 하기로 했고, 그로 인해 직원들만 한동안의 휴가를 받아 좋아하고 있었다. 벌쿤은 결국 남기로 했기 때문에 뮤스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형 그럼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짐꾸러미를 전뇌거의 짐칸에 올리던 뮤스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글세 그건 잘 모르겠어. 한달 정도는 지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심심하면 친구들 불러다가 놀던지. 친구들에게 인사 못하고 떠난다고 미안하다고 전 해 줘. 다녀와서 한턱 낸다고." "응. 그렇게 할게." 뮤스와 벌쿤이 당분간의 헤어짐에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레딘이 뛰어오며 말했다. "뮤스군! 문제가 생겼어!" "무슨 일이죠?" "전뇌거가 눈에 미끄러져서 바퀴가 구르지를 않는구먼." "알았어요 곧 갈게요!" 레딘에게 대답한 뮤스는 가방에서 금을 한 덩이 꺼내어 건네줬다. "이건 네가 필요 한 곳에 쓰도록 해. 아무래도 연애를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 할 거 니까." "형 나도 큰 누님이 준게 있어." "그래도 받아둬라. 형의 성의니까." "응 고마워." 자신의 손에 들린 금덩이를 보던 벌쿤은 다시 한번 뮤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 고 있었다. 벌쿤과 함께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가자 그곳에는 눈에 미끄러 져 헛바퀴 돌고있는 전뇌거가 보이고 있었다. 뮤스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켈트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난처하게 됐는걸? 아무래도 바퀴가 너무 미끄러워." "흠 그렇군요. 어쩐다..." "바퀴에 못이라도 박아 볼까?" 그의 말에 브라이덴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바퀴의 재질이 나무라서 못을 박는다면 얼마 가지 못해 균열이 생길 겁니다." "흠 나무 전문가인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하지?" 또 다시 고민에 빠지고 있을 때 뮤스가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것 도시내의 다른 전뇌거들도 난감할 테니 제설전뇌거를 만들 도록 하죠." "제설전뇌거?" "네. 힘 좋은 라이노의 앞면부분에 두꺼운 철판을 설치하는 거예요. 바깥쪽으로 약간 휘게 만들어 눈을 길옆으로 쌓을 수 있게 말이죠." "흠. 그렇지만 눈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라서 힘이 좋은 라이노라도 버거울 걸? 또 그 라이노의 바퀴 역시 미끄러질 거고..." "그럼 라이노의 바퀴에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날카로운 쇠사슬을 감도록 하죠. 또, 전 뇌거 경주 때 쓰던 동력기를 라이노에 설치하면 충분할 거예요. 거기다가 제가 전뇌 력을 직접 충당한다면 충분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요." "그 뇌전력을 감당 할 수 있겠냐?" "뇌공력의 손실이 크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요." 켈트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느덧 드워프 들은 뮤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맹목적 으로 시키는 대로하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이었다. 가볍게 대답을 한 뮤 스는 금속 자재실로 자리를 옮겼고, 드워프들 역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은 잘 엮인 쇠사슬과, 3멜리 정도의 폭을 가진 두꺼운 금 속판이었는데, 금속판의 표면은 상당히 매끄러워 보였다. "이 정도면 휘어있으면 충분히 눈을 밀어내겠지?" "아마 그럴 거예요." 라이노에 다가온 켈트와 드워프들은 그 철판을 라이노에 부착하기 시작했고, 뮤스는 쇠사슬을 바퀴에 감기 시작했다. "형님! 그쪽을 조금 더 올려야 겠는걸요!" "이렇게? 말이야?" "조금만 아래로요. 좋아요!" -툭탁! 툭탁! 뇌공력으로 쇠사슬 용접을 끝낸 뮤스는 이마의 땀을 쓸며 허리를 폈다. 드워프들이 작업하던 라이노의 앞부분을 보자 철판 부착 작업도 끝났는지, 켈트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뮤스를 불렀다. "뮤스 다됐어. 이제 동력기만 설치하면 돼." "빨리도 끝났네요. 동력기는 제가 설치할게요" 기계실에서 동력기를 들고나온 뮤스는 라이노의 본체를 열어 그것을 설치하기 시작했 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작업을 끝냈는데, 지켜보던 드워프들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겠군." 윤활유가 묻은 장갑을 벗던 뮤스는 가볍게 웃었다. "하하 아직 멀었어요. 이제 다 됐으니 한번 가동해 볼게요." 드워프들의 말에 대답한 뮤스는 라이노에 올라타 전뇌선을 몸에 접지 시켜 시동을 걸 었다. 그러자 힘차게 돌아가는 동력기 소리가 들려왔는데, 제대로 설치 됐음을 느낀 뮤스는 전진 발판을 천천히 밟았다. -쿠쿠쿠쿵... 과연 바퀴에 감은 날카로운 쇠사슬이 눈 위로 박히며 전뇌거는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 다. 그와 함께 앞부분의 철판은 눈을 조금씩 밀어냈는데, 일정한 양이 쌓이자 지나간 길의 왼쪽 편으로 보기 좋게 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켈트는 벌 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준비 다됐군. 벌쿤, 들어가서 크라이츠님께 출발할 시간이라고 전해 줘." 별 감흥 없이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던 벌쿤은 힘없이 대답했다. "네 알았어요." 등을 돌리고 들어가는 벌쿤을 보던 켈트는 전뇌거에서 내리던 뮤스의 옆구리를 찔렀 다. "그나저나 저 녀석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처음의 씩씩함은 사라지고 예전의 너 같은 모 습만 남았냐?" "예전에 제가 어쨌다고 그래요!" "그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줘." "후훗. 좋아하는 애가 생겨서 그래요 더 이상은 복잡하니까 그냥 그런 줄 아세요." "호오... 역시 청춘이 좋긴 좋구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켈트는 진심으로 부러운지 왕년에 날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라이츠가 저택에서 나오자 드워프들과 뮤스 는 전뇌거에 올라탔다. 지금 공학원에서는 총 세대의 전뇌거가 벨링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는데, 선두에는 제설전뇌거로 변신한 라이노가 뮤스와 켈트를 싣고 달렸고, 중간 의 전뇌거에는 크라이츠가, 마지막 전뇌거에는 드워프 형제들이 타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뮤스 일행이 지나간 자리의 눈은 모두 그들의 왼쪽 편으로 쌓이고 있었는데, 제설전 뇌거의 효과가 좋았기에 뮤스와 켈트가 타고있는 전뇌거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반듯한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켈트는 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뇌공력을 운용 하는 중이었기에 편안하게 말을 할만큼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참을 만은 했는지 조심 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벨링까지 가려면 얼마 정도나 걸리죠?" "흠... 전뇌거로 나흘 정도는 잡아야 할거야. 도시처럼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면 모르 겠지만, 대부분 비포장이니 시간이 많이 걸릴 거고, 게다가 눈까지 왔으니..." "상당히 멀군요. 전뇌거로 나흘이라니..." "뭐 그렇지만 따분하지는 않을 거야. 플란포르와 헤놉이라는 대형 도시를 거치니까 볼 것도 많을 거라고." 더 이상 말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뮤스는 켈트로부터 지금 향하고있는 도시에 대한 설명을 듣기만 했다. 물론 설명은 길었지만 요약해 본다면 플란포르라는 도시는 마일 강을 따라 발달한 상업도시로 인구가 40만에 달하는 초대형 도시 중에 하나라는 것이 었다. 이곳은 상업도시인 만큼 자연스럽게 금융의 중심이었고, 한 달에 한번씩 벌어 지는 경매가 유명하다고 했다. 켈트에게서 플란포르에 대한 설명을 듣던 뮤스는 뇌공 력을 운용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또 다른 도시에 대한 호기심에 가슴이 설레이 고 있었다. [대공학자] #92 산 넘어로 해가 저물어 가며 붉은 노을이 은빛 눈으로 녹아들고 있을 즈음 세 대의 전뇌거가 조용한 눈길을 헤치며 북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눈이 내린 후 아무도 이곳을 지나지 않았는지 그들의 앞으로는 발자국 하나 없이 새하얀 벌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장 앞의 전뇌거에 타고 있던 켈트가 뮤스에게 물었다. "벌써 네 시간째인데 괜찮겠냐? 이 정도의 전뇌력이면 공학원의 설비들을 이틀은 돌 리겠군..." 컬트의 말에 뮤스는 이제 힘에 부치는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으음... 그럭저럭 참을 만 해요. 얼마나 더가야 하죠?" "조금만 더가면 플란포르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지. 오늘은 거기서 쉬어가야 겠어." 뮤스에게 대답을 한 켈트는 전뇌거에 설치된 원거리대화기를 이용해 다른 전뇌거에 의사를 전달했다. "크라이츠님, 슈바론 마을에서 쉬어가는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켈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크라이츠님?" -지직.. 어머... 깜빡 잠이 들었군요. 그녀의 말에 뮤스를 한번 쓸어본 켈트는 한숨을 쉬었다. "크라이츠님은 팔자도 좋으시군요. 누구는 운전하랴, 뇌전력 생산하랴 기운이 다 빠 지는데, 운전사까지 거느리고 주무시다니..." -호홋! 슈바론 마을이면 조금만 가면 되는군요. 그럼 켈트씨 말대로 쉬어 가도록 하 죠. 켈트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크라이츠의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우들도 잘 따라 오게." -네 형님. 지지직... 사실 가장 힘이 드는 사람은 켈트와 뮤스였다. 크라이츠야 운전사를 채용해서 대신 운전을 해주었고, 드워프 형제들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운전을 했기 때문에 큰 피로 가 거의 없었으나, 켈트는 네 시간 동안이나 앉은자리로 운전을 해야 했으니 그것의 피로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동력기를 가동하기 위해 진땀 빼고있는 뮤스를 보고 있으니 불평도 할 수도 없었다. 반시간 정도를 더 달린 뮤스 일행은 슈바론 마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불과 백 여명의 사람들이 살고있 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마을의 전경이 전원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 고 있었다. 전뇌거에서 내린 뮤스는 지친 표정이었지만 소박하고 마을의 향취에 눈을 떼지 못했는데, 짐을 내리던 켈트가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헐헐. 아름다운 마을 아니냐?" "네... 환상적이군요." "그래도 이 나이에 이 짐을 내가 다 옮기랴?" "아앗. 죄송해요 아저씨." "농담이었다 녀석아. 뇌공력을 운용한다고 기운을 다 뺀 것 같은데 너는 숙소에 올라 가 있거라." "하하 고마워요." 켈트의 선심에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등을 돌려 여관으로 들어갔다. "허... 그렇다고 정말 가다니. 아무튼 다 좋은데 눈치 없는게 문제야..." 자신이 한말을 후회하던 켈트는 전뇌거 옆으로 쌓인 짐을 힘겹게 나르기 시작했다. 뮤스가 문을 열고 여관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가 그를 맞아주고 있었다. 돌로 만 들어진 벽난로를 가진 식당 내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바닥과 장식이 목조로 되어있어 더욱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를 보던 한 중년의 여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희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을 원하시나요?" "아저... 저희 누님이 들어오시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전 의자에 좀 앉아 있어도 될 까요?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호홋. 그야 물론이죠. 저쪽에 편안한 흔들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쉬도록 하세요." "고맙습니다." 가볍게 감사의 표시를 한 뮤스는 벽난로 앞에 놓여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생전 처 음 앉아보는 흔들의자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몇 번 흔들다 보니 재미도 있었고, 편안 하기도 했기 때문에 몸을 늘어트리며 만족하고 있었다. 이때 입구로 크라이츠와 드워 프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던 뮤스는 어느새 잠이 들고 있었다. 그를 본 블뤼안이 입을 열었다. "크라이츠님 뮤스군이 저기서 잠이 든 것 같은데요?" "저런... 많이 지친 모양이니 저기서 좀 자도록 놔두세요. 아주머니, 나중에 제 동생 이 깨면 방으로 안내 좀 해주세요. 우리는 올라가도록 하죠." 크라이츠는 주인 아줌마에게 당부를 하며 드워프들과 함께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잠을 자던 뮤스는 손가락이 따끔하다고 느끼며 눈을 떴다. 아직 뿌옇게 보이는 눈에 조그마한 무엇인가가 잡혔는데, 조금 지나자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여덟 살 가량의 남자 아이였는데, 볼이 불그스름한 모습이 꽤나 귀여운 아 이였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더 내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타고있는 나무심지가 꽂혀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뮤스는 그제서야 뜨거움을 느꼈는지 소리를 질렀다. "앗뜨뜨뜨거!" "푸훗!" 그가 손을 부여잡으며 펄쩍 뛰자 아이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고, 혼 날 것을 걱정했는지 계단뒤에 숨어서 빼꼼히 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뮤스가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고 그만 두 기로 했다. "혼내지 않을게 이쪽으로 나와." 하지만 아직도 아이는 뮤스의 말을 믿지 않는지 계단 뒤에 숨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식웃은 뮤스는 가방에서 예전에 사두었던 봉봉을 한 주먹 꺼내 내밀었다. "자 이거 먹고 싶지 않아?" 역시 아이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있는 뮤스였다. 아이도 봉봉이 먹고싶은지 계단에 서 천천히 걸어 나왔는데, 여차하면 도망치려는 기색이 남아있었다. "녀석 겁도 많군. 내가 너만 할 때는 무조건 달려들고 봤다." "누가 겁이 많다고 그래요!" "하하. 그럼 지금 네 모습이 용감해 보이기라도 하냐?" 자신의 아래위를 바라보던 아이는 어색한 포즈로 앞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는 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건 제 버릇이란 말이예요." "훗. 그렇겠지. 빨리 이거 안 먹을 거면 다시 넣는다?" "먹을 거예요." 몇 마디의 대화로 두려움은 사라졌는지 뮤스에게 다가와 봉봉을 받아 입에 넣었다. 그를 본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소어 이어어" "뭐라고? 소어?" 봉봉을 입에 물고 있던 소년은 답답한지 손으로 빼내며 말했다. "숍! 제 이름은 숍이예요!" "하하. 재미있는 이름이구나. " "놀리지 말아요. 안 그래도 친구들이 놀려서 걱정이란 말이예요. 그러는 아저씨는 이 름이 뭐예요?" 아저씨라는 말에 발끈한 뮤스는 손가락을 숍의 머리에 튕기며 말했다. "이 녀석 아저씨라니! 이제 겨우 열 아홉 살인데!" "아야! 저보다 두 배나 살았으니 아저씨 맞네요. 칫!"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라. 내 이름은 뮤스다." "푸하하 아저씨 이름도 괴상해!" 기분이 상한 뮤스는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켈트에게 말할까도 생각했지만, 숍의 미래 가 걱정되어 그만 두기로 했다. 이때 주방쪽에서 주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손님 일어 나셨군요?" 뮤스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네... 그런데 제 일행들은 어디있죠?" "누님 되시는 분께서 일어나시면 올라오시라고 하시더군요. 이 층의 가장 왼쪽 끝의 방 세 개죠." "네 고마워요!" "뭘요 그럼 편히 쉬세요. 그런데 숍 너는 왜 거기있어?" 다시 입에 봉봉을 넣은 숍은 자리에서 일어나 뮤스에게 손을 흔들며 어디론가 사라졌 고,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뮤스는 이층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침이 되자 뮤스는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왔다. 드워프들은 평소와 같 이 엄청난 양을 주문하여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반면 크라이츠는 고상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공학원의 일을 하면서부터 고상한 여인으로 변신을 한 그녀였다. 스프를 떠먹던 뮤스가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오늘 언제쯤 출발하죠?" "음. 점심 식사를 하고 출발하자꾸나. 뭐 기한이 없어서 느긋하긴 하지만 눈 때문에 빨리 가고 싶구나." "후훗. 눈 왔다고 좋아하던 때가 언제라고 이런말을 하시다니..." "원래 쉽게 변하는게 여자의 마음이야." 일행이 다시 식사를 할 때 마을의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모자로 몸에 묻은 눈을 털며 들어오고 있었다. "헐헐헐. 이봐 모르쉬 장사는 잘되는가?" "그래도 우리마을에 여관은 여기 밖에 없으니 잘 되지 않겠나?" 주인 아줌마의 이름이 모르쉬였는지, 양손에 음식을 잔뜩 들고나오던 그녀는 능숙한 입담으로 말했다. "호호호. 억울하면 여관이나 해보시죠?" "에휴 당신의 요리 실력을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 관뒀어!" 식사를 하던 뮤스는 화기애애한 마을의 분위기가 좋았는지,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 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뮤스 일행이 식사 를 마칠 때쯤 되자 쉰 명 정도의 사람들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는데, 그들은 대화를 하고 있을 뿐 음식을 시키거나 먹는 일은 없었다. 크라이츠와 드워프들도 호 기심이 생기는지 그들을 둘러 보고있었다. 빈 그릇을 치우던 모르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뮤스 일행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한 달에 한번 있는 마을 회의 날이죠. 손님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물을 마시던 켈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하. 마을의 회의는 정말 중요하지. 마을의 앞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니 까." "호홋.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그릇을 다 치우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던 모르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농업을 주로하는 마을인데, 올해 예상치 못한 흉년으로 마을전체가 어렵답니 다. 그래서 뭔가 해결 방안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모인 것이죠." "흠... 그렇구먼. 이곳에 무슨 특산물 같은 것도 없나?" "이런 겨울에 무슨 특산물이 있겠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쌓인 눈밖에 없는데..." "막막하겠구먼." 켈트가 혀를 차고 있을 때, 식당의 가운데로 노인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걸어 나와 회의를 이끌기 시작했다. "쿨럭... 오늘 내 이렇게 여러분에게 모이라고 한 것은...쿨럭! 쿨럭!" 노임이 기침을 해대며 말을 하자 넉살스럽게 생긴 중년의 사나이가 웃으며 일어났다. "촌장님! 이유는 알고 있으니, 그 부분은 넘어가고 진행하시죠." 마을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여유마저 빼앗아 가지는 못했는 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쿨럭! 고맙네 바로엘. 아무튼 뭐가 의견이 있는 사람 없는가?" 하지만 촌장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엘이라는 사내가 앉은 후에는 잡담도, 잡음도 없이 적막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가 지날 때까지 시원 찮은 의견 몇 개가 나왔을 뿐, 대부분이 아무런 대책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지 전혀 이득 없는 회의가 계속 되고 있었다. 초반부를 조금 듣던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은 지 루하다며 방으로 올라갔지만, 뮤스는 뭔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며 자리를 지키 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식당 안의 정적을 깨며 어린아이들이 손에 나무판을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숍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 들이었기에 마을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마침 몸도 뻐근하던 뮤스는 아이 들을 따라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언덕으로 오르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고, 뮤스는 숍을 향해 외쳤다. "숍! 어디 가는거야?" 언덕을 열심히 오르던 숍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지금 썰매 타러 가요! 아저씨도 같이 갈래요? 어제 봉봉 주신 보답으로 한번 태워 줄께요!" "하하 그래 같이 가자!" 뮤스는 오랜만에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뒤따르 기 시작했다. [포션 한병] 패러디 서비스 입니다. 내가 투트가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신전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겔리짜리 포션한병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포션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신전 성직자의 입을 쳐다본다. 성직자 는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포션을 흔들어 보고 '좋소' 하고 내어준다. 그는 ' 좋소' 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포션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놓고 절을 몇 번이나 하 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신전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포션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축복을 받은 포션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신전의 성직자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포션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비싼 포션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깨지지도 안나요? 어서 도로 주 십시오." 거지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성직자는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 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포션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 는 것이다. 거치른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포션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 리고 앉아서 포션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비싼걸 선뜻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 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아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 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겔리짜리 포션를 줍니까? 펠리 한 닢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펠리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일펠리 일펠리 얻은 돈에서 몇 펠리씩을 모 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15펠리를 1폴리로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 여 겨우 이 귀한 포션 한병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포션 한병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포션을 샀단 말이오? 그 포션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포션, 한 병이 갖고 싶었습니다." ♣ 감상의 길라잡이 ? 이 작품은 '내가 투트가르에서 본 일이다.'로 시작하여 사건의 사실성과 흥미를 돋군 후, 바로 늙은 거지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한 편의 콩트를 연상케 하는 서사적 수필이다. 특히 포션한병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거지의 직접적 언어를 통하여 제시함으로써 그의 집착이 얼마나 절실하였는가와 얼마나 애를 썼는가 를 표현하였다. 보충 언어가 생략된 마지막 대사의 간결한 처리는 이 수필의 격조(格 調)를 높이면서 여운을 느끼게 한다. 포션 한병을 절대적 보배로 여기는 늙은 거지의 모습이 마지막 한 마디 말에 선명 하게 집약되면서 극도의 빈곤이 낳은 비애를 형상화해 보여 준다. 사람에게는 어리석 게 보일 정도로 어떤 소망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끈질긴 것 인가 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거지의 갈망을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스워드 세공하던 드워프] 패러디서비스 입니다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여행을 그만둔지 얼마 안 돼서 인란트에 내려가 살 때 다. 뉘른에 왔다가는 길에, 헤르젠 워프존 으로 가기 위해 팔렌성에서 일단 말을 내 려야 했다. 팔렌성의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스워드를 세공하여 파는 드워프가 있었다. 스워드를 하나 사 가지고 가려고 세공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 을 굉 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스워드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드워프였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세공이나 달라고 만 부 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세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하는 것 같 더니, 저물 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 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날을 갈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워프할 시 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 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날을 세우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구울 만큼 구워야 빵이 되지, 생밀이 재촉한다고 빵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날을 간다는 말이오? 이보게 드워프 외고집이시구먼, 워프할 시간이 없다니까요』 드워프는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워프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날을 세워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날을 세우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날을 세우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 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 다. 얼마 후에야 스워드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 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소드스워드이다. 워프시간를 놓치고 다음 워프시간으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드워프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드워프는 태연히 허리를 펴고 팔렌성 성벽 지붕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 게 드워프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드워 프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동료들에게 와서 스워드를 내놨더니, 동료들은 날카롭게 세공됐다고 야단이다. 가지고 있 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 러나 나는 마법사였기에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가 않았다. 그런데 동료의 설명을 들어 보니, 두께가 너무 두꺼우면 적을 찌르다 뼈에 걸리기를 잘하고 같은 무 게라도 힘이 들며, 두께가 너무 얇으면 적을 잘찌르지 못하고 헤먹기(꼭 맞지 않고 헐거움)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 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 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드워프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 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마법지팡이는 혹 마나를 담은 보석이 떨어지면 보석을 대고 물수 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화이어 볼로 지지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 다 . 그러나 요새 마법지팡이는 보석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마법지팡이에 보석을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 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 접 붙인다. 금방 붙 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포션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매직포션 을 사면 보통 것은 얼 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류한 것은 세 배 이 상 비싸다. 구증구류란 아홉번 증류한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 을 증류했는지 열 번을 증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 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증류 할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 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 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마법 장구들을 만들어 냈다. 이 스워드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드워프에 대해서 죄를 지 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드워프가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 에서, 어떻게 아름다 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드워프를 찾아가서 스테이크에 럼주라도 대접하며 진 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뉘른으로 가는 길로 그 드워프을 찾았다. 그러나 그 드워프가 앉았던 자리에 드워프는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드워프이 앉 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 할 길 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팔렌성 성벽 지붕을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지붕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드워프가 저 구름 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스워드를 세공하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 름을 바라 보던 드워프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동료가 육포을 뜯고 있었다. 전에 육포를 스워드로 잘라 먹던 생각이 난다. 스워드를 사용해 본 지도 참 오 래다. 요새는 대련을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 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스워드를 세공하던 드워프의 모습이 떠 오 른다. ? [대공학자] #93 만만하게 생각하고 언덕을 올라가던 뮤스는 어느새 이마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공학뇌동심결을 사용하게 된 후로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가는 지금, 썰매를 타기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 았다. 앞서가던 숍 역시 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곧 있을 스릴을 생각하고 있었기 에 자신의 발걸음이 즐겁기만 했다. 이윽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자 숍의 발걸음 이 멈췄다. 뮤스 역시 소매로 땀을 훔치며 걸어올라 온 언덕을 내려다보자, 마을은 이미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고 있었다. "휘유! 이 거리를 썰매를 타고 내려간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걸?" 숍은 소매로 코밑을 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요! 이 언덕은 여기 주변에서 얼마나 유명한데요? 도이첸제국에서도 이만한 길 이의 언덕을 보기는 힘들걸요?" "정말 그렇겠군."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숍 또래의 친구들이 소리치며 썰매를 타고 내려가기 시 작했다. "숍 빨리 내려 와, 먼저 출발한다!" "이야호! 출발!" 그들은 썰매를 들고 조금 뛰어가기 시작하더니, 곧 땅에 깔며 몸을 날렸다. -솨아아아악! 그 모습을 본 뮤스는 조선과는 조금 다른 썰매 타는 방식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아저씨! 우리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같이 타고 내려가요!" 숍의 말에 뮤스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곧 씨익 웃으며 말했다. "후훗. 내가 타고 갈 것은 직접 만들어야겠군. 기다려 봐." 뮤스는 숍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가방에서 넓적한 나무판을 꺼냈다. 숍은 그 모습 을 보고 입을 벌렸는데, 아무리 봐도 방석보다 조금 작은 가방에서 저 길쭉한 나무판 이 나온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어떻게 가방에서 이런게 나올 수가 있죠?" "후훗. 이건 신기한 가방이거든." "피... 그건 당연한 거죠!" 이어 가방 속에서는 여러 가지 연장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들을 때리고, 깎고, 밀 고, 달구고 하던 뮤스의 손에는 이제 거칠기 그지없던 나무판은 온데 간데 없고, 매 끈한 나무판 만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의 폭은 두 뼘 정도, 길이는 그의 어깨정도 됨 직한 판이 들려있는데, 긴 쪽의 면은 안쪽으로 잘록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숍은 그 나무판을 보며 물었다. "아저씨 솜씨 대단하네요! 그런데 앉아서 타기에는 너무 좁지 않아요?" 나무판의 잘록해진 선을 따라 철사를 때려 박은 뮤스는 그것을 숯 돌로 날카롭게 갈 며 말했다. "하하 누가 앉아서 탄다고 했냐? 이건 서서 타는 거야." "엥? 그게 무슨 썰매예요?" "누가 썰매를 만든다고 그랬어? 이건 설상주판이라고!" "으엑! 아저씨 이름처럼 이상한 이름이네!" 계속 나무판을 손질하던 뮤스는 혀를 삐죽 내밀며 말했다. "왜 또 내 이름을 들먹이냐? 설상주판이라는 것은 눈 위를 달리는 판때기라는 깊은 뜻을 담고있는 멋진 이름이야." "여하튼 괴상해..." 이제 설상주판이 다 완성 됐는지 뮤스는 연장을 가방 안으로 넣었고, 튼튼한 끈을 이 용하여 설상주판과 자신의 신발을 단단히 묶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뮤스는 아직도 뭔가 부족해 보였는지, 작은 나무판을 몇 개 꺼내어 신발주위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제서야 만족한 웃음을 띈 뮤스는 숍에게 말했다. "숍 너 먼저 내려 가봐! 내가 따라 잡을 테니까!" "아저씨 이러다가 죽는거 아니에요? 튼튼해 보이기는 하는데, 이런걸 과연 탈 수 있 을 지... 여기 생각보다 가파르 다구요." "녀석 걱정 말고 내려가 보라니까. 나중에 네 썰매가 느리다고 징징대지 말고!" "헤헷. 그럼 먼저 내려갑니다! 이야호!" 뮤스에게 윙크를 한 숍은 친구들처럼 썰매를 들고뛰다가 그것을 땅에 깔며 몸을 날렸 다. -솨아아악! 언제나 썰매를 탈 때 느끼는 것이었지만, 차가운 바람과 눈이 볼을 때리는 기분이 상 쾌했고, 눈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간지르는 느낌이 좋았다. 바람과 소리를 즐기며 달 리고 있을 때, 등뒤로부터 요란하게 눈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악! 빠른 속도로 달리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는 것이 위험하기는 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 한 숍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는 설상주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내 려오고 있는 뮤스의 모습이 보였는데, 엎드려 썰매를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 하게 생각되고 있었다. "우와!" 뮤스는 신이 났는지 손을 흔들며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었는데, 이것은 오목하게 들어간 옆면에 박힌 철사가 눈을 가르며 방향을 바꿔 주기 때문에 가능 하였다. "이야호! 숍 부럽지? 네 썰매 정도는 어린애 장난감이야!" 가슴 한구석을 긁어 내린느 그의 말에 숍은 콧방귀를 끼었다. "흥! 아저씨야말로 애들 장난감 타고서 뭘 하는 거예요!" "후훗 이래도 애들 장난감이냐?" 숍의 빈정거림에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 뮤스는 숍의 썰매를 옆으로 지나치며 둔턱 을 향해 미끌어져 갔고, 그 끝에 닫자 힘차게 뛰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뮤스의 몸은 그림같이 날고 있었다. 그 모습에 넋을 빼앗긴 숍은 자신의 앞에도 둔턱이 있다는 것 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의 몸도 떠오르는 것을 느꼈는데, 뮤스의 모 습과 같이 멋진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절감하고 있었다. -퍼버벅!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눈덤이에 처박힌 숍은 신경질 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아저씨! 나도 타고 싶어요!" 하지만 메아리만 울릴 뿐 뮤스의 뒷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뮤스가 설상주판을 타 고 마을 근처까지 내려오자 드워프들과 크라이츠는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이 난 그는 일행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아저씨! 누님! 저 멋지죠!" 어디선가 들려오는 뮤스의 목소리에 드워프들은 손으로 햇살을 막으며 쏜살 같이 달 려오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았는데, 그가 타고 있는 기이한 판때기를 보며 신기해했 다. "형님 저런 것 타본 적 있으슈?" "끌... 나도 본적도 없네. 저 녀석이 하는 걸 언제는 본적이 있었던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당연히 없었지..." 크라이츠 역시 하던 일을 멈추고 뮤스를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눈가에는 기이한 일렁 임이 일고 있었다. 뮤스가 도착을 하자 크라이츠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간단히 말했 다. "뮤스 잠시 줘봐." 뜬금 없이 날아드는 크라이츠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린 뮤스는 신발을 설상주판으 로부터 분리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자 기묘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호홋. 일정이 하루정도 늦춰지는 것은 상관없겠죠? 빨리 하나씩 만들어 따라오세요! " "헐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크라이츠님!" 드워프들 역시 그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후 뮤스에게 서 나무판을 하나씩 건네 받아 각자의 개성껏 만들기 시작했다. 역시 드워프들은 무 엇인가를 만든는 일에 능숙했는데, 잠시 본 것만으로도 원래의 설상주판과 똑같이 만 들어 내고 있었다. 다만 드워프들의 것은 그들의 키에 맞게 조금 짧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모닥불과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 그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모르쉬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는데, 할 일이 많지 않은 겨울에 그녀 의 손을 즐겁게 해주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녀가 실타래를 풀고 있을 때, 창 밖을 보 며 차를 마시던 바로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모르쉬... 혹시 저런 것을 본적이 있나?" "호홋.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그래요?" "장난이 아냐... 자세히 보니 이 여관에서 머물던 손님들 같은데?" 바로엘의 말에 뜨개바늘을 흔들의자에 내려놓고 일어난 모르쉬는 그의 옆으로 다가와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크라이츠를 앞세운 뮤스 일행들이 무엇인가 를 타고 빠른 속도로 활강하고 있는 모습이 잡혔는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즐거 움이 넘쳐 보였다. "어머나. 저건 뭐죠?" "나도 그걸 물었잖아." 그들의 기행을 잠시 바라보던 바로엘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말했다. "그나저나 꽤나 즐거운 표정인데 재미있나?"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무서워 보이기도 하네요. 저 여자는 신나는 듯이 타고 있지 만요..." "그렇지? 한번 같이 나가보자구." "뭐 그러죠." 외투를 걸친 두 남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니 다른 마을 사람들 역시 그들과 같이 신기함을 느꼈는지, 저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눈 이 마주친 몇몇의 마을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한 바로엘은 모르쉬와 함께 다 내려와서 뮤스와 드워프들을 기다리고 있는 크라이츠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 으며 뮤스에게 외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요! 빨리 내려와요!" 약간의 광기마져 흘리는 그녀에게 쉽사리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지만 용기를 낸 바로 엘이 입을 열었다. "저 손님. 실례지만 지금 타고 계시는게 뭐죠?" 그가 묻고 있을 때 뮤스는 제설전뇌거로 만들어 놓은 둔턱을 뛰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우와! 그의 모습을 다 본 크라이츠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아 이거 말인가요? 호홋. 제 동생이 만든 것인데 설상주판이라고 하던걸요? 발음이 좀 어렵지만 정말 재미있죠." 머리를 한번 긁적인 바로엘은 쑥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 그거 타기 어려운가요?" "뭐 타는 법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중심만 잘 잡고 내려오면 되죠. 그나저나 언덕을 더렇게 만들어서 어떻게 하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언덕을 바라 보았는데, 언덕의 듬성듬성 인공적으로 만들이 진 둔턱이 혹처럼 보이고 있었다. 사실 크라이츠가 설상주판을 타고 내려오다 우연찮 게 둔턱을 통과했는데, 그로 인해 몸이 공중으로 뜨게 되자, 그 짜릿한 느낌을 잊지 못한 그녀는 뮤스와 드워프들을 시켜 인공 둔턱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었다. 뜬금 없 는 그녀의 명령을 받은 뮤스와 드워프들은 한 시간에 걸쳐 제설전뇌거를 몰고 눈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형을 바꾼 것이 아니라 눈이 쌓인 위치만을 바꾼 것이 었기에 크게 잘 못 된 것은 아니었다. 살펴보던 바로엘이 말했다. "그 점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다만..." 눈치 빠른 크라이츠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호홋! 이것을 타보고 싶군요? 하지만 제 것은 안돼요! 드워프분들 것도 짧아서 안될 테니, 제 동생 것을 타보시죠." 그렇게 말한 크라이츠는 일분 일초라도 아까운지 서둘러 언덕을 올라갔고, 바로엘은 이미 지나간 그녀의 등에 대고 인사를 하고있었다. 잠시 후 뮤스가 내려오자, 사정을 이야기한 바로엘은 그에게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설상주판을 건네 받을 수 있었다. 모처럼 만에 흥분한 마음으로 서둘러 언덕 중간까지 올라간 바로엘은 천천히 미끌어 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럭저럭 넘어지지 않고 내 려 오고 있었다. "우하하하 이거 정말 신나는군!" 환호성을 치며 내려오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뮤스에게 허락을 받으며 줄을 서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겨울 걸을 수 있는 노인들까 지 끼어있었다. "노약자나 임산부는 안됩니다! 위험한 거라구요!" 뮤스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떼를 쓰는 몇몇 노인들이 있었으나, 마을의 청년들이 나서 서 말릴 수 있었다. 노약자들을 빼더라도 수요가 너무나 많아, 그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뮤스는 열 개의 설상주판을 더 만들며 저녁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대공학자] #94 -툭탁툭탁! 새벽의 어두움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잠 을 자던 뮤스는 귀를 때려오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한 뮤스 는 이불을 옆으로 걷어내며 둥글게 나있는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암. 새벽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니 온 마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 데, 저마다 거친 나무판을 대패로 깎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은 뮤스는 옷을 챙겨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오자 모르쉬는 아침 식사 준비 를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뮤스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손님! 손님 덕에 마을에 활력이 생겼어요!" 그녀의 말이 아직 이해가 가지 않은 뮤스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마을에 활력이 생기다니요?" 행주로 쟁반을 닦던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호홋. 어제 손님께서 만든 그 설상주판이던가? 그것 때문에 급히 마을 회의를 열었 거든요." "저희가 무슨 잘 못이라도?" "아뇨! 잘못이라뇨... 그것을 몇 번이나 타본 사람들이 모두 재미있다고 하자 그것으 로 관광사업을 하면 어떨까 의논을 했답니다." "아! 결국 의견을 모았군요. 그래서 아침부터 저렇게 분주한 건가요?" "네. 마을의 목수들과 대장장이들이 손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만 들고 있답니다." "하하 그럼 저도 조금 도와야 겠군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뮤스는 빙그레 웃으며 여관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터 까지 걸어 나와보니 마을 사람들은 나무판의 기본 손질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중심 에는 능숙한 솜씨로 나무를 세공하고 있는 목수가 보이고 있었다. 손놀림을 보아하니 드워프들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동안 그 일을 해왔는지 상당히 능숙한 솜씨였 다. 나무판을 불며 톱밥을 털어내던 목수는 뮤스를 발견하고 외쳤다. "안녕하시오 손님!" "하하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를 하며 목수에게 다가가는 뮤스에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인사를 건네기 시작 했는데, 고마움이 한껏 깃 든 표정이었다. 그 목수는 자신이 세공하던 나무판을 내밀 며 말했다. "이게 처음 만든 설상주판이랍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하하 잠시 살펴보죠." 뮤스는 그에게서 건네 받은 설상주판을 작업판 위로 올려놓으며 면의 상태와 휨 정 도, 그리고 방향을 바꿀 때 필요한 쇠가 박힌 모서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곤 만족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실력이시군요. 이 정도면 충분 하겠어요. 그리고 시간이 되시면 바닥 면 에 초 칠을 하시면 더욱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죠." 그의 칭친에 기분이 좋아진 목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는지 더욱 열심히 나무판을 다듬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던 뮤스는 가방에서 설계용지를 꺼내 뭔 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흠... 이왕 하는 김에 언덕까지 쉽게 올라가면 좋겠지? 언덕의 끝과 마을에 고성은 동력기를 설치하고, 중간 중간에 연결 도르래를... 흠 이 정도면 되겠지?"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설계를 끝냈는지 도면을 손으로 털며 훑어 봤 다. 이곳 저곳을 계산 해보던 뮤스는 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드워프들의 방으로 뛰어올라와 방문을 두들겼다. -쾅쾅! "아저씨들 일어나요!" 그의 외침에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레딘이 얼굴을 내밀었는데, 머리에 수면용 모자를 쓴 모습이 재미있었다. "으암... 뮤스군이군.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 있나?"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다른 아저씨들 좀 깨워 주세요." 잠시 고개를 돌려 형제들을 살펴보던 레딘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 나 죽는 꼴을 보고싶은가? 형제들 성격 알잖아?" "후훗 그럼 제가하죠." 곤란해하고 있는 레딘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온 뮤스는 의미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 며 말했다. "흠... 공학원에는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돈에만 독이 오른 네 명의 드워프가 있답 니다." 뮤스의 말이 끝나자 마자 침대는 부서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공이 풀린 모습으 로 몸을 일으킨 드워프들은 뭔가에 홀린 듯 뮤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순간 방안 에는 살기가 감돌고 있었는데,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뮤스는 소리를 질렀다. "자! 식사 할 시간입니다!" 과연 그의 외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풀려있던 드워프들의 동공은 제자리를 찾았고, 이상한 포즈로 서있던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켈트 가 붉은색 수면용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허허. 뭔가 악몽을 꾼 듯 한데. 왜 이렇게 서있는거지?" 그의 옆에서 자신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브라이덴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누군가 우리 욕을 한 듯도 하고..." 모든 사실을 목격하던 레딘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을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뮤스가 모두 깨어난 것을 확인 하고서 그들의 등을 떠밀 기 시작했다. "아저씨들 아침부터 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짐은 어제 다 싸놨으니까 좀 도와줘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등을 떠밀려 나가는 드워프들은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어느덧 해가 떠올라 언덕 위로 얼굴을 내밀 고 있었다. 언덕의 시작점에서 햇빛을 받 으며 얼어있는 땅위로 말뚝을 때려 박고있던 블뤼안이 옆에 있던 레딘에게 허무함이 풀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철로 만들어진 도르레를 들고 오던 레딘 역시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는지 블뤼안의 말 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린 벨링으로 여행 중 아니었던가?" 레딘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고 있었다. "쩝. 뮤스군의 착한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왜 우리가 고생을 해야하는지... 라는 말이지?" "잘 아는군..." 대화를 하던 레딘은 손에 들고있던 도르레를 말뚝에 튼튼히 끼워 넣으며 기름 묻은 손을 작업복에 닦아냈다. 이때 언덕 위로부터 뮤스가 두꺼운 로프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30멜리 마다 박혀있는 도르레에 로프를 엮는 중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레딘과 블뤼안이 있는 곳까지 내려와 로프를 엮었고, 일을 마치자 손을 털며 말했 다. "하하 이제 다 됐네요. 수고하셨어요." 뮤스의 공치사에 손을 내저은 블뤼안은 궁금한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나 알았으면 좋겠구먼." 레딘 역시 뒷짐을 지며 말했다. "맞아. 나 역시 그것이 궁금하네." 남은 로프를 접어 어깨에 짊어지던 뮤스는 그들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설명해 드릴게요." 언제나 이런 식의 대답이었기에 별다른 불만을 표명하지 않은 블뤼안과 레딘은 고개 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기는 뮤스를 뒤따랐다. 그들의 뒤로 보이는 공터에는 수십 개의 완성된 설상주판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켈트는 그것들을 살펴보며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까다로운 그의 검사에도 불구하고 불합격 한 것은 몇 개 되지 않 는지, 대부분 그대로 놓여졌다. 한편, 불합격 한 설상주판들은 한 곳에 모아져 불태 워 지거나 다시 손을 보고 있었다. 로프를 내려놓은 뮤스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희들이 작은 선물을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두 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었는데, 드워프들은 작은 선물이 아니라고 투덜 거렸고, 마을 사람들은 궁금함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궁금하신 점이 많으시리라 생각되니,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숍! 준비 됐 어?" 뮤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숍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뮤스가 신 호를 하자 숍은 자신의 앞에 설치된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고, 그와 동시에 아침부터 드워프들과 함께 설치한 로프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뮤스는 생 각대로 되는 것을 확인 하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왕복로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상주판을 들고 언덕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 상당히 힘들기에 만든 것인데, 올라가는 로프를 잡고서 설상주판을 탄다면 손쉽게 정 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왕복로프를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감탄의 눈빛으로 뮤스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끼어있던 촌장이 걸어나와 뮤스에게로 다가와 눈물을 머금 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손님... 정말 고맙소..." 그의 태도에 문득 쑥스러운 기분이 든 뮤스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뭘 이런걸 가지고... 앞으로 잘 되길 바랄게요." "고마우이..." 뮤스와 촌장이 따뜻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을 때에도 드워프들은 혼자 다한 듯 폼을 재고 있는 뮤스에게 입이 아프도록 투덜거리고 있었다. 슈바론 마을의 여관 앞은 오후가 되자 시끌벅적 해졌다. 아직 설상주판 사업을 시작 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감으로 부풀어올랐기에 더욱 활기찬 모 습이었는데, 그들의 가슴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은인들이 떠날 시간이었기 때문이 었다. 뮤스와 일행들이 여관에서 걸어 나오자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맞아 주고 있었 다. 그들을 얼떨떨한 모습으로 바라보던 뮤스와 드워프들은 가슴이 뿌듯 해 짐을 느 끼기 시작했는데, 오직 크라이츠만은 시끄러운 마을 분위기에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 했는지 전뇌거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 틈새로 숍이 뛰어나오며 뮤스에게 말 했다. "뮤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하하. 고맙긴 너와 함께 썰매를 타러 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완전 무결한 접대용 멘트를 내뱉는 그의 모습을 보던 드워프들은 견디지 못했는지 자 신들의 목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숍은 드워프들에게 도 웃으며 말했다. "뮤스 아저씨도 그렇지만, 아저씨들은 더 멋있었어요. 짧은 시간에 왕복로프 같은 것 을 만들어 내시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의 말에 목을 부여잡으며 추한 몰골을 보이고 있던 드워프들은 정색을 했고, 대표 격인 켈트가 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후훗. 너 같은 아이들이 이제 이 마을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오늘 처럼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 헤쳐 나가거라." 그 역시 뮤스의 접대용 멘트와 비슷한 수준의 말을 했는데, 이번에는 뮤스 역시 다른 드워프들과 함께 자신의 목을 조르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의 반응을 충분히 예측했기에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켈트는 서둘러 전뇌거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 른 드워프들 역시 그를 따랐다. 자리에 남은 뮤스는 숍에게 눈 높이를 맞추며 말했 다. "그래 켈트 아저씨의 말처럼 씩씩하게 커라. 남들이 뭐라고 그런다고 기죽지 말고 하 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거야." "네! 아저씨!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 까요?" "후훗. 먼 훗날에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으로 찾아오면 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럼 나는 이만 간다." "공학원... 네! 알았어요. 뮤스 아저씨!"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리던 뮤스는 뭔가 잊은 것이 있는지 숍을 바라보며 말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라는 말은 좀 안하면 안돼냐? 이왕이면 뮤스형이라던가." "헤헤! 알았어요 뮤스형!" "고맙군." 가볍게 윙크를 한 뮤스는 서둘러 전뇌거에 올라탔다.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세대의 전뇌거는 다시금 길을 떠나자, 마을의 사람들은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 질 때까지 손 을 흔들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대공학자] #95 (42. 듀들란 변화의 물결)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과 예술 혼의 도시 쟈트란', 바로 듀들란제국의 제 1 수 도인 도시의 이름이었다. 인구 100만에 달하는 이 거대 도시는 약 2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 중에 고도였다. 그만큼 도시의 곳곳은 역사의 기품을 뿜어내는 듯한 건물 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또,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좋아하는 듀들란의 국민성에 걸맞게 수도인 이곳에는 32개의 대형 미술관과, 100여 곳의 크고 작은 극장들을 보유 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수많은 문호와 화가, 음악가들이 살아 숨쉬며 그 역사를 만들 어 가는 곳이었다. -땡! 땡! 땡!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 고,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은 그에 전혀 개의치 않는지 자신이 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도시의 명물 중의 한곳은 바로 이 넓은 거리였다. 눈이 내려 온통 세상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지만, 이곳 '무설의 거리' 만은 맨 땅을 드러낸 채 오연히 버티고 있었다. 무설의 거리란 일년 내내 눈이 쌓이지 않는 거리였기에 생긴 이름으 로, 듀들란 제국의 황궁으로 이어지는 쟈트란 중심의 대로인 만큼 눈이 쌓이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길을 자발 적으로 치우는 쟈트란의 시민들에게는 그 것이 그들의 자부심이었고, 자랑이었다. 황궁의 방을 밝히던 불들이 하나 둘씩 꺼지 고 있었다. 매일 산더미처럼 쌓여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국가 업무들을 마치고 하루 를 정리해야 하는 시간인 만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유독 한 집무실만은 아 직도 불을 밝힌 채 자정이라는 시간을 무시하고 있었다. -스스스슥... 펜이 종이 위를 흘러 다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곳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는데, 놀 랍게도 게하임과 수도로 향하던 장영실이었다. 작성된 서류를 훑어보던 장영실은 한 숨을 쉬며 의자로 등을 기대었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더 이상 조선의 언어가 아닌 듀들란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것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았던가..." 나직히 중얼거리던 그는 서랍을 열어 밀봉되어있는 봉투를 꺼냈다. 하얀 종이 위로는 유려한 듀들란어로 '직위 서약서' 라고 적혀 있었고, 그것을 얼핏 보던 장영실은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훗. 5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건가? 그렇지만 무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돌아갈 방도를 찾을 수도... 부디 명신이가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그의 독백에서 알 수 있듯이 게하임과 함께 황궁에 입성한 그는 재상을 만나 5년이라 는 기간의 직위 서약을 해야만 했는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 한 그는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봉투를 서랍에 넣은 그는 다시 깃펜을 들었는데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마법이라는 것은 신기하군. 언어 습득에 글까지..."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부터 노인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똑똑... "장영실경 안에 있는가?" 목소리를 들은 장영실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잠시 반가운 표정을 짓던 그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루스티까님..." 그의 말에 한 노인이 방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는데, 얼굴에는 수많은 주름살들이 있 어 나이를 짐작 할 수 없게 했고, 몸에 두른 후드가 아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는 주름으로 미소를 만들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 루스티커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루스티커라는 이름은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다. 듀들란제국 왕궁 수석 마법사의 이름이었는데, 노인의 태도로 보아 본인임 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장난기 섞인 꾸짖음에 장영실은 무안한 듯 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하하... 덕분에 언어는 터득할 수 있었지만 발음은 아직 조금 서툴군요." "장난이었네. 이 사람..." "그런데 이 밤중에 어인일로..." 피식 웃은 루스티커는 볼을 살짝 긁었다. "후훗. 그 이상한 말투는 여전하군 그래. 아참. 내가 찾아 온 것은 이런 물질을 만들 수 있나 해서 왔네..." 루스티커는 말과 함께 뭔가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아랫 부분이 이상한 형태로 구부러진 것으로 봐서 불에 그슬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실험 도중에 피치못할 봉변을 당했음이라 생각한 장영실은 그가 내민 종이를 읽어보 더니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형상기억 합금을 말씀하시는 군요?" 그가 알고 있는 듯 한 말투로 대답을 하자 루스티커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 다. "이런 기능을 가진 물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뭐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 질문에 골치가 아픈 듯 고개를 내젓던 루스티커는 머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망할 놈의 기사녀석들이 대 마법 방어용 갑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만들면 뭐하 겠나. 마법에 얻어맞기도 전에 지들끼리 치고 박다가 다 찌그러져 버리는 걸..." "하하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제작 방법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고마운 표정을 떠올린 루스티커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그렇지 않아도 국가사업 때문에 자네가 바쁜걸 뻔히 아는 데..." "글 몇 자 적는다고 해서 시간이 늦어지지는 않으니 괘념치 마십시오." "허허 내 이래서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든다네... 황궁의 누구도 자네만큼 다른 이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다오." 종이에 글을 적던 장영실은 다 되었는지 그것을 루스티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궁내에서 루스티커 수석 마법사님의 부탁을 거절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가?" "후훗. 이왕 오셨는데 차나 한잔하시지요." 받아든 종이에 써진 내용을 읽어보던 루스티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자네는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친구야... 허허 뭐 준다면 사양치는 않겠네." "그럼 잠시 앉아 계시지요." 사실 장영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아는 인물은 게하임을 제외하면 전혀 없 었다. 그러던 중, 장영실에게 언어습득 마법을 걸어 주기 위해 한 마법사가 찾아 왔 는데, 그가 바로 루스티커였던 것이었다. 우연히 언어습득 마법을 시험해 보기 위해 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서로 마음이 잘 맞음을 깨달았고, 학문적으로도 이야깃거 리가 많았기에 장영실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트고 지내는 인물이 되었다. 루스 티커의 잔에 차를 따룬 영실은 자신의 잔을 채우고선 한 모금 마셨는데, 조선의 차와 는 색다른 맛이었지만 따듯한 느낌이 마음을 안정 시켜 줬기에 이곳에 온 이후로 자 주 애용하는 편이었다. 찻잔을 들던 루스티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훗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곳에서의 서약 기간이 끝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곧 평정을 유지하며 대답했 다. "흠 저는 한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여기에 발이 묶이게 되었지만, 서약 기간이 끝난다면 다시 그 아이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흠... 그 후에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기던 장영실은 나직히 말했다. "돌아가야지요." "조이센 대륙으로 말인가?" "그곳은 아니지만... 제가 왔던 곳으로 말입니다." "흠 안타깝구먼, 자네와 함께 연구를 해보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그가 뭔가 숨기려 한다는 것을 못 알아 챌 만큼 눈치가 없는 늙은이는 아니었는지 손 을 내저었다. "허허... 이야기하기 싫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누구나 비밀은 있는 것이 아닌 가?" "뭐 비밀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지금은 말씀들이기 곤란하군요." 하지만 서운한 것은 사실인지 루스티커는 쓴웃음을 지었다. "흠 그건 그렇고 내일 황제를 알현해 국가사업 설명을 한다고 하던데, 준비는 잘 되 어 가는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황제께서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자네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야. 그럼 이 늙은이는 돌아가 봐야겠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하이." 자리를 털며 일어나는 루스티커를 보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 다. "별말씀을... 시간이 나면 제가 언제 찾아 뵙겠습니다." "허허. 언제든지 환영하겠네. 그런 좋은 밤을 보내게나." "네 루스티커님 역시..." 장영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루스티커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섰고, 방에 남은 장영 실은 다시 책상머리에 앉아 하던 일에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듀들란제국 황실의 최고 의사장이었다. 무려 300명의 인원을 수용 가능 한 이 곳은 제국의 건국과 함께 의사장으로 쓰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장소로 이용되어지고 있었다. 바닥으로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얼굴이 비 칠 정도로 윤택이 나는 대리석이 깔려있었는데, 음영이 절묘하게 교차되며 듀들란제 국의 휘장인 '용맹의 매'가 수놓아져 있었다. -웅성웅성... 장내에는 수많은 궁중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기립해 있는데, 예술의 도시로 이름 높 은 쟈트란인 만큼 개성 넘치는 의상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이때, 군중 들을 양쪽으로 가르며 문으로부터 걸어 들어오는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중 한 명 은 양 겨드랑이에는 잘 말아둔 종이를 끼고 있었는데, 색색의 화려한 군중들 사이에 서 흰색으로 일관되어 있는 의상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는 두 명의 인물이 함께 걷고 있었다. 한 명은 재상대리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게하임이 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나는 와이번도 떨어트린다는 듀들란제국의 재상인 투르코스 드레스덴 공작이었다. 그는 현 황제의 숙부인 사람으로 선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스스로 재상이 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그에 대한 평은 좋은 편이고, 무엇보다도 황제의 정신적 지 주라는 점이 그의 입지를 돈독히 만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의사장의 단상 앞까지 서슴없이 걸어간 세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군중들을 마주보고 섰다. 그들의 행동에 군중들은 술렁임을 멈추며 단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장 안을 한번 둘러보던 재상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 후 황제 폐하가 들어오시면 국가사업 설명회를 시작하겠소.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 주축이 될 장영실경으로 남작의 지위가 주어졌소." -짝짝짝짝! 그의 소개와 함께 의사장은 박수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재상이 손을 들어올리자 박수소리는 서서히 멈춰졌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왼쪽으로 뻗으며 외쳤 다. "듀들란제국 황제폐하 들어오십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는 웅중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단상 위에 위치한 황금으로 꾸며진 거대한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운데로 황금의 관을 쓰고있는 15세 가량의 소년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 소년이 현 듀들란제 국의 황제인 크로시드 3세였다. 그가 들어서자 군중들은 저마다 허리를 굽히며 경의 를 표했고, 아직 이곳의 예절에 익숙하지 않은 장영실도 그들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이어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가는 목소리가 의사장 안으로 울려 퍼졌다. "모두들 고개를 드시오." -황공합니다. 황제폐하! 나이답지 않게 근엄함이 베인 목소리에 군중들은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몸을 일으 켰고, 그들을 둘러본 황제는 화려하게 꾸며진 의자에 앉았다. 이어 군중들 역시 자리 에 앉자 재상은 장영실을 황제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폐하. 이자가 말씀 드렸었던 장영실남작입니다." 재상이 황제에게 자신의 소개를 하자 장영실은 이런 분위기의 자리가 처음은 아니었 기에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만나 뵙게되어 영광이옵니다. 폐하." 인사를 받던 어린 황제는 인사보다는 그의 특이한 외모에 더욱 관심이 끌리는지 고개 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장영실경, 외모가 정말 특이하군. 경은 어디의 출신인가?" 황제의 물음에 자신의 출신을 말하기가 곤란해지자, 재상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이내 생각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저는 조이센대륙의 출신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이 대륙의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가지 고 있사옵니다." "아... 그렇군." 이 정도면 인사가 충분하다고 생각한 재상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부터 제가 추진하려하는 국가사업 설명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어린 나이인 만큼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의 욕구보다 는 대외적인 행사에 초점을 맞춰야 했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작하시오 재상." "네 폐하." 가볍게 대답한 재상은 군중들을 향해 돌아서며 외쳤다. "지금부터 국가사업 설명회를 시작하겠소. 장영실경 부탁하오." 재상의 부름에 기립해있던 장영실은 군중들을 향해 한발자국 내딛었고, 장내의 모든 이들은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2002-02-24 / 61.253.6.58] <대공학자> #96 41. 플란포르의 경매장.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연일 따뜻해진 날씨로 눈이 녹아 도시의 거리는 지 저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발에 묻은 진흙에 눈살을 찌 푸렸고, 마차에서 튀는 흙탕물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뒤쪽으로 높은 건물이 웅장하게 서있었다. 무려 10층이나 되는 이 건물은 도이첸 제 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상인들의 편의를 위해 지어진 공립호텔로서, 시공비의 반은 플 란포르시에서, 또 반은 상업을 적극 장려하고있는 도이첸 제국의 황실에서 지원을 했 다. 그만큼 수준 급의 시설들을 갖추고있었는데, 친분을 쌓기 위한 연회장을 기본으 로 여러 종류의 위락 시설들과, 상인들간의 거래에 필요한 장소들을 제공하고 있었 다. 건물로 들어가는 웅장한 문 앞에는 수많은 고급 마차들이 멈춰 있었고,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건물의 8층 바깥세상을 창문을 통해 바라 보고 있는 다섯 쌍의 눈이 있었는데, 바로 플란포르에 도착해 묵어갈 거처를 잡은 뮤 스 일행이었다.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들겨 보던 크라이츠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이곳은 정말 구경할 것들이 많은데, 땅이 이러니 나가지도 못하겠군요." 켈트 역시 그녀의 말에 동감을 하는지 진흙에 더러워져 방의 한쪽 편에 벗어 놓아둔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곳에 올 때면 매번 재료를 구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곤 했는데, 오늘은 나가기가 딱 싫군요." 한 숨을 저마다 내쉰 일행들은 몸을 돌려 소파로 자리를 옮겼고,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던 뮤스는 천장을 바라보며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유! 다들 생각이 그렇다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방안에서 쉬는 수밖에 없네요." 그의 힘없는 목소리에 크라이츠가 등을 소파에 기대며 위로를 했다. "호홋. 너무 낙담하지 마. 나중에 돌아올 때 구경을 하면 되지 뭐." "네. 어쩔 수 없죠 뭐." 뮤스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룸서비스입니다! 주문하신 와인과 안주를 가져왔습니다." 직원의 목소리를 들은 드워프들은 입가에 흐르기 시작하는 침을 닦았고, 그 중 가장 동작이 재빠른 레딘이 뛰어가 방문을 열었다. "흘흘. 어서 가지고 들어오게나!" 레딘이 반갑게 맞이하자 응접실로 손수레를 밀고 들어 온 직원은 화려하게 꾸며진 과 일안주들과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테이블 준비 를 모두 마친 점원은 가져나갈 손수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손수레 위를 자세히 보던 크라이츠가 점원을 향해 물었다. "그 손수레 위에 있는 것은 뭐죠?" 바삐 손을 움직이던 점원은 그녀의 물음에 내려다 보고있던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손수레 위에 놓여있는 종이들 말이에요." "아! 이것은 저희 플란포르 호텔에서 제공하는 행사 스케줄 표입니다. 손님께서 필요 하시면 한 장 드리겠습니다." "그럼 한 장 줘보세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은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레 위의 종이를 한 장 내밀었고, 그것을 건네 받은 크라이츠는 종이위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수레 정리를 다한 직원 이 나가자 드워프들과 뮤스는 푸짐한 과일로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는데, 모두들 나가 지 못하는 아쉬움을 먹는 것으로 대신 하려는 듯 입과 접시로 오가는 손길이 분주했 다. 그러던 와중에도 뮤스는 크라이츠의 생각을 해주는지 과일조각 하나를 입에 넣으 며 물었다. "누님은 안 드세요? 겨울인데도 과일들이 싱싱한 걸요?" 손에 들린 종이를 읽던 크라이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관심 없는 듯 대답했다. "나는 별로 생각이 없구나. 그건 그렇고 이걸 한번 볼래?" "네? 어느 부분요?" "여기 제일 아랫부분 말이야." 먹던 과일을 접시 위에 내려놓은 뮤스는 그녀가 건네준 종이를 받아 들고서 읽어 내 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라. 올해 마지막 경매 임박.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저희 플란 포르 호텔의 경매가 열립니다. 날짜는..." 한참을 쭉 읽어 내려가던 뮤스는 크라이츠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도 켈트아저씨가 경매라는 말을 했는데 경매가 뭐죠?" "호홋.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구나? 경매라는 것은 물건을 한가지 내놓고 거기에 대 해 가격으로 경쟁을 하는 것이지,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보통은 가장 많은 가격 을 제시하는 사람이 낙찰을 받는 것이지." "아! 그렇군요! 그럼 날짜는 오늘인데요?" "그래 오늘이야. 경매를 하는 곳은 호텔의 연회장이니, 여기라면 놀러갈 만 하지 않 을까? 어떤 것들이 경매에 나와있는지 보고, 필요하다고 싶으면 입찰도 하고 말야." "아 그거 재미 있겠네요. 아저씨들은 어때요?" 그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뮤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야만 했는데, 술과 안주에 심취해 있는 드워프들에게 말을 시켜봤자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못 말릴 분들이라니까. 그럼 누님 저랑 둘이 가보죠." "호홋 그러자꾸나. 이번에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하렴 이 누님이 오랜만에 선물 을 하나 해주고싶구나." "하하 고마워요! 그럼 어서 가보죠."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뮤스와 크라이츠는 외투를 걸치기 시작했다. 비록 호텔 내에 서 벌어지는 행사라고는 하지만, 높은 수준의 경매는 그에 걸맞게 고위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었다. 호텔의 입구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모두들 이 곳에서 벌어질 경매에 참여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경매를 통 해 갖고싶은 것을 구입한다고 하기보다는 구입한 물건들을 더 비싼 가격으로 판매를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또, 플란포르시 내에서 행해지는 경매들의 성격이 모두 그랬기에 이제는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연회장의 제일 앞은 경매에 나온 물건들이 진열될 고급테이블과, 경매 지기가 위치할 단상이 놓여있었고, 그 앞 으로는 200석 정도의 의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실내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소 란스러웠다. 사실 거래에 있어서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그만 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화의 내용 역시 장사에 대한 이야기 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하하. 이번에는 2만 겔피의 이윤을 잡았다네. 마침 소금이 비쌀 때였거든! 그전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매입해 놓았던 소금을 이번에 풀었던 것이지!" "그래도 조금 아쉽군.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1000겔피 정도는 더 남길 수 있었을 텐 데." "후훗. 그래도 그건 모험이지 않은가? 오히려 그 이후에 가격이 떨어 졌을 수도 있고 말이야." "그래도 장사한번 잘했군."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대화를 하고 있을 무렵 두 명의 사람이 연회장의 입구 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는데, 경매를 구경나온 크라이츠와 뮤스였다. 장내를 한번 둘 러보던 크라이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경매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쳐서 마음에 든다니까. 정말 오랜만에 경매장에 오는군." "언제 와보시고 마지막인데요?"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크라이츠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글세. 30년 전이었던가?" "아... 그렇군요." 아무리 많이 봐줘도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크라이츠가 30년 전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녀가 드래곤임을 알고있는 뮤스였음에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적응이 안되네... 누님 저쪽에 자리가 있는데 가서 앉아도 되죠?" "푸훗. 아직은 안 된단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접수를 하고, 번호 배정을 받는 거야. 그런 다음에야 경매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지." "아 그렇군요!" 뮤스에게 경매참여 접수 방식을 설명해준 크라이츠는 그를 이끌고 접수석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줄을 서있었고, 뮤스 와 크라이츠 역시 가장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누님 이곳의 경매품으로 나오는 물건들은 얼마정도에서 낙찰을 받을 수 있 죠?" "뭐 보통 한도액은 없지만 적게는 20겔피 정도에서 많게는 몇 만겔피 까지도 올라갈 수 있단다." 크라이츠의 말에 뮤스는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와 몇 만겔피요? 만겔피면 포센트를 한 대 살 돈인데..." "그렇지. 게다가 오늘 같이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경매는 특히 규모가 크단다." "그럼 우리가 운이 좋은 것이군요?" "호홋, 어쩌면 운이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지. 좋은 걸 봤다고 그러면 무조건 사고싶 어 할 것이니 여행경비나 축낼 지도 모르지." "하하하 누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재미있는 걸요?" 대화를 하던 도중 그들의 뒤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줄을 서게 되었고, 입은 옷으 로 봐서 상당히 돈이 많은 상인이나 귀족인 듯 했다. 그중 기름지게 살이 찐 남자가 있었는데 거만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흘흘흘. 자네들 오늘 마지막에 나올 '여신의 눈물'에 대해 들었나? 아무래도 시작 가격이 15만겔피 일거야. 이번에 내가 그것을 손에 넣을 생각이지." 그의 반대쪽에 서있던 남성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운 것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었다. "역시 자네답군. 나도 어서 돈을 벌어야 겠구먼..." "후훗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다음에 자네가 돈을 많이 번다면야 보관료 정도만 더 붙이고 내가 넘기겠네." 어느새 크라이츠와 뮤스는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뮤스는 여신의 눈 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님 도대체 여신의 눈물이라는 것이 뭐죠?" 하지만 크라이츠 역시 그에 대해 잘 모르는 표정이었다.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 걸? 값이 나가는 물건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안다고 자부하지 만, 그런 이름은 들어 본적이 없는걸? 네가 직접 한번 물어보지 그러니?" "하하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뮤스는 몸을 돌려 등뒤에 서있는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실례지만 그 여신의 눈물이라는 것이 뭐죠?" 뮤스의 물음에 상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중 살찐 남자가 팔짱을 끼며 아까와 같이 거만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크큭. 너 같은 꼬마는 몰라도 된다. 네 녀석도 보아하니 경매에 입찰을 하려는 모양 인데, 이곳의 수준은 상당히 높아! 너 같은 꼬마는 동네 경매장이나 가보거라."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한 뮤스였지만 화를 삭히고 있었는데,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이 이제 완연한 어른이 된 모습이었다. "그냥 뭔지 이야기만 해주세요. 그것을 알 자격도 안 되는 것은 아닐 텐데요." "후훗. 어린 녀석이니 알고 싶은 것이 많겠지. 여신의 눈물이란 50캐럿의 다이아몬드 란다. 대륙전체에서 모르긴 몰라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다이아몬드일걸? " "굉장한 크기의 다이아몬드군요." "후훗 너 같은 꼬마는 그런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인줄 알 거라." 거만한 말투에 어깨를 한번 으쓱인 뮤스는 다시 몸을 돌려 크라이츠를 바라보았다. "누님 들으셨죠? 다이아몬드라는군요." "그것보다는 네가 저 녀석들의 비아냥거림을 참고 있었다는 것이 더 놀랍구나. 예전 같았으면 절대 지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이제 저 녀석들에게 널 우습게 본 복수를 해야지?" "복수라뇨? 어떻게?" "방법이랄 것까지도 없고, 경매접수만 하게 된다면 알게 될 거야." "그게 복수라고요?" "호홋. 이 바닥에선 이름이 훌륭한 칼이 되지. 자 우리 순서구나." 그녀의 말대로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참여 접수을 끝마쳤는지 아무도 없었고, 접 수석에 중년의 남자가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음 분 접수하시죠." 그의 말에 정신을 바로 차린 뮤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접수석 앞에 앉았다. 뮤스 의 모습을 한 차례 훑어보던 중년은 조금은 얕잡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쪽에 출신과, 소속을 적어 주시고 가장 아래에는 이름과 서명을 해주시죠." 접수서류를 한번 살펴본 뮤스는 펜을 들어 빈칸을 채우기 시작했고, 곧 다 마쳤는지 위에서부터 한번 더 읽어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요. 이제 다 된 것인가요?" "아 네 됐습니다. 그럼 확인하겠습니다.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에서 오신 뮤스 드라 켄님 맞습?!" 순간 접수서류를 읽으며 확인하던 중년은 굉장히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어...어서 오십시오! 뮤스님!" 돌연한 반응에 더욱 놀란 것은 뮤스였고, 그의 뒤에 서있던 크라이츠는 이미 알았다 는 듯이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뒤에서 거만한 모습으로 서있던 상 인들 역시 기가 막힌 듯 멍청한 표정으로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학자] #97 한 동안 뮤스가 기이하게 변한 상황에 적응을 하지 못하자 크라이츠가 나섰다. "계속 이렇게 새워 두실 건가요? 번호표를 배정해 주시죠?" 그녀의 재촉을 받은 중년은 큰 잘못이라도 한 듯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번호 배정 표 에 서둘러 두 가지의 내용을 적었는데, 한 가지는 등급번호 또 다른 한가지는 배정 번호였다. 사실 이 중년이 하는 일은 접수하는 사람들의 출신과 소속, 그리고 이름을 보고 등급과 번호를 나누는 것이었기에 대륙 최고의 갑부 대열에 오른 그들의 명성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배정표가 완성되었는지 떨리는 손으로 뮤스에게 건네 고 있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뮤스님." 그것을 받아든 뮤스는 신기한 듯 앞뒤로 돌려 봤다. 등급번호는 1로 적혀 있었고, 배 정 번호 역시 1이었는데, 이 숫자 두 개가 모여져 11번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10번 대 의 번호를 가진 사람은 최고 등급의 손님이었던 것이다. "아 고마워요. 누님 이제 가죠 11번이네요." 크라이츠에게 말을 하고 몸을 돌리자 방금 거만한 자세로 있던 세 명의 상인이 천박 한 웃음을 띄우며 허리를 약간 굽히고 있었다. 그 중 살이 찐 남자가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뭐라고 말을 하려하자 크라이츠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여신의 눈물이라고 하셨나요? 꽤나 마음에 드는군요. 뮤스 어서 자리에 앉자." 단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뮤스와 크라이츠가 자리를 옮기자 상인들의 표정은 울상으 로 변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살이 찐 남자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후우. 자네 운이 없군. 이제 여신의 눈물을 살 가망이 없겠구먼..." "내...내가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쯔쯧..."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뜰 생각을 못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고 있는 뮤스와 크라이츠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 단상 위의 테이블에 눈을 맞추고 있었는데, 그곳 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고대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침이 튀게 설명하던 경매지기가 장내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네 이상 설명과 같은 진품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물건이기 때문에 8천겔피 부터이고 단위는 백겔피씩 올라갑니다. 입찰해 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있던 사람들은 한 명씩 손을 들며 외쳤다. "8천 백!" "8천 2백!" "8천 3백!" 또다시 물건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심이 달아오르고 있을 때 크라이츠는 심드렁한 표 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고, 그녀의 옆에 있던 뮤스 역시 몇 차례의 경매가 끝나자 이제 별로 신기한 것도 없는지 비슷한 모습이었다. 문득 뮤스는 크라이츠를 보며 물 었다. "누님. 누님도 골동품을 모으지 않나요?" "응? 물론 모은단다. 골동품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높아지니까." "그런데 왜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이시죠? 설명을 들어보니 굉장한 작품 같은데..." 뮤스의 질문에 크라이츠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호홋. 내가 취급하는 골동품들은 저런 근대의 것이 아니란다. 물론 사람들의 역사로 는 고대겠지만 말이야. 예전에 켈트씨가 나의 레어에서 예술품들을 보면서 침을 흘리 던 것을 기억하니?" "네 물론 기억나죠. 저는 금덩이를 들고침을 흘리고 있었죠." 새삼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뮤스였다. "켈트씨야 예술품을 보는 눈이 색다르기 때문에 나의 골동품들을 보고 놀란 것이지. 그중 하나라도 이 자리에 나왔으면, 굉장한 소요가 일어났을걸?" "하하하. 이제 이해하겠어요. 저 정도의 연대를 가진 것도 누님께는 골동품이 아니라 는 것이군요?" "그렇지. 게다가 오래되기만 했지, 예술성은 거의 없어 보이는구나.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까 말하던 여신의 눈물인가 하는 것이야. 정말 그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 드라면 내 눈을 끌만 하지..." 보통 사람이 들었으면 까무러칠 만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경매 지기가 군중들을 향해 낙찰 사실을 알리기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네! 26번 손님께 만 3천겔피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그의 말에 26번 경매 참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웃음을 보였고, 주변의 인물 들은 그의 낙찰을 축하하기 위해 몇 번의 박수를 보냈다. 장내가 조금 정리되자 경매 지기의 말이 계속 되었다. "자... 이제 오늘의 마지막 물건이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사이에서 이 물건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돌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려 50캐럿 상당의 다이아몬드인 여신 의 눈물을 소개 드립니다." 경매 지기가 말을 마치자 어디선가 하얀 장갑을 낀 여성이 조심스럽게 가죽으로 된 상자를 들고 나왔다. 그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여성은 곧 상자를 열어 내용물 을 꺼냈는데, 바로 주먹에 쥐여질 만큼 큰 여신의 눈물이라는 다이아몬드였다. 그녀 가 여신의 눈물을 들어 이리저리 돌리며 사람들에게 선보이자 시선을 빼앗긴 그들은 침을 삼키며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 엄청난 다이아몬드군..." "과연 여신의 눈물이라는 이름에 걸맞아..." 뮤스 역시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에 넋을 놓고 있었다. 비록 보석에 크게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눈으로 봤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누님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한 크기의 다이아몬드인걸요? "흠? 이상하군. 냄새가 안나..." 뜬금 없는 그녀의 말에 크라이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댄 채 여신의 눈물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냄새가 안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크라이츠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뮤스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 다. "다이아몬드의 냄새가 나지 않아. 저건 가짜야." "하지만, 저들도 충분히 감정을 해보지 않았을 까요? 게다가 다이아몬드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도 말이 안돼요!" 믿지 못하겠다는 뮤스의 말투에 크라이츠는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누님을 못 믿겠다는 말이니?" "뭐 못 믿는다고 하기보다는..." "나는 장담 해. 드래곤들은 느낌으로 알 수 있거든. 그걸 그냥 냄새라고 표현하는 거 야." "그럼 그것을 밝혀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기 전에." "글세,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겉보기로는 다이아몬드와 거의 똑같아. 거의 차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분명 다이아몬드가 아닌 것은 확실해." 크라이츠가 이토록 확신을 하자 뮤스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여신의 눈물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말해봤자 증명을 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을 것 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뮤스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도 경매 지기에 의해 경매가 진 행되고 있었다. "자 예상 하셨다 시피 15만겔피를 시작가로 천겔피 단위로 올라가겠습니다. 입찰을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입찰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거만한 모습의 살찐 남자였는데, 지푸라기라 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입찰을 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15만 겔피 내겠소." 그의 입찰을 시작으로 한 명, 두 명 손을 들기 시작했다. 금액이 엄청난 만큼 지금까 지의 경매와 같이 열띤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긴장감 하나는 상대 조차 안돼는 것이었 다. "15만 2천겔피!" "15만 3천겔피!" "흥! 15만 5천겔피!"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금액이 점점 올라갔고, 그에 따라 능력이 되지 못한 사람은 자 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결국 남은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17만 천겔피!" 아직 포기하지 않고 남아있던 살찐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 가지의 표 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는데, 크라이츠와 뮤스가 입찰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아 함과, 여신의 눈물이 거의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다는 흥분이었다. 경매 지기가 주변 을 돌아보자 그 이상의 입찰자는 없는지 조용한 분위기였다. "자 지금부터 셋까지 세겠습니다. 그 때까지 입찰자가 없으시면 여신의 눈물은 29번 손님께 넘어가겠습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하나... 둘... 셋... 이것으로 여신의 눈물 주인은 29번 손님께 17만 천겔피로 낙찰 되었습니다." 경매 지기의 선언과 함께 살찐 남자는 크게 환호를 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부러 운 눈빛으로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하하하! 드디어 여신의 눈물이 내 손에 들어왔구나!" "축하하네! 저것이 자네 수중으로 들어오다니! " "정말 대단하군! 운이 좋았어 공학원의 주인도 있었는데..." 그들의 앞쪽에 앉아있던 크라이츠는 그들이 세상을 모두 가진 듯 좋아하는 모습을 보 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로채 복수를 하 려 했지만, 지금에야 돈 한푼들이지 않고 더욱 멋진 복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 때, 그녀의 옆자리에서는 뮤스 또한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누님 증명할 방법을 찾았어요." 살찐 남자자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던 크라이츠가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응? 다이아몬드가 아닌걸 증명 할 방법?" "네! 빨리 이의를 제기해 주세요." 하지만 크라이츠는 별로 그것을 원하지 않는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별로 증명하고 싶지 않은걸? 내 동생을 우습게 본 대가를 받아 내야겠어!" "누님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 한번 크게 당하 면 다음부터 정신을 차릴걸요?" "흠 그런가? 녀석 마음이 너무 좋아 졌구나." "하하 저야 언제나 마음이 좋았죠! 빨리요!" "호홋. 알았으니 잠시 기다려 보렴." 뮤스의 재촉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 크라이츠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 으켰다. "이번 경매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모두들 살찐 남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크라이츠의 앙칼진 목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를 향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선을 즐기며 앉아 있던 살찐 남자 역시 득의의 표정을 짓다 말고 가슴이 철렁임을 느껴야만 했다. 마침, 낙찰자들에게 낙찰 받은 물건의 권리이전에 대한 설명을 하려 하던 경매 지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11번 손님 무슨 일 이시죠?" 물음을 들은 크라이츠는 경매지기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고 수준의 경매를 자랑하는 곳에서 가짜 다이아몬드를 내놓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잠시 그녀의 말을 생각해 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돌연한 말이 여신의 눈물을 두고 하 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네 들었나? 여신의 눈물이 가짜 다이아몬드라는군." "저 여자 머리가 약간 이상한 것 아닌가? 광택이나, 색을 봐도 완전한 다이아몬드인 데 말이야." "이 사람 말조심하게! 누군인지는 모르지만 경매번호 표를 봐!" "이럴 수가 11번이라니! 이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10번 대의 번호표군! 대체 저 여자 가 누구 길래?" 경매장 안이 그녀의 말로 인해 시끄러워지자 깜짝 놀란 경매 지기는 장내를 진정시 키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손님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니 진정해 주십시오!" 허나 한번 일어난 소요는 그의 목소리까지 집어삼키며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당황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검은 정장을 입은 노인이 앞쪽의 문 을 통해 장내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불편한 몸인 듯 한쪽 발을 쩔뚝거리며 지팡 이를 짚고 있었다. 노인은 경매 지기에게 다가와 손을 내저으며 나직히 말했다. "스쿠트 수고했네. 아무래도 내가 이야기를 해봐야 겠구먼." "아니! 루퍼스 어르신 어찌 이런 곳까지!" "너무 당황하지 말게나. 진실은 밝혀 질 것이고 저 여성손님의 말이 맞다면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할 것이네." "죄송합니다. 어르신!" "자네가 미안할 거야 있겠는가? 우리의 잘못이지." 경매 지기와 루퍼스라는 노인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장내의 사람들 역시 루퍼스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조금씩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조용한 목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허... 경매계의 거물인 루퍼스 어르신까지 나오셨군. 하긴. 이정도의 경매건이면 직 접 나서셔야지..." [대공학자] #98 루퍼스 돌리아드라는 이름은 이곳 플란포르에서 뿐만 아니라 경매가 성행되는 모든 도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제국의 전역에 걸쳐 십여 군데의 경매장을 가진 그는 젊었을 시절 수백 건의 고가 경매를 성공시키며 경매계 전설적인 인물의 대열에 올랐 고,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는 신용도 높은 경매장을 직접 경영하며 뛰어난 사업 수완 을 자랑하고 있었다. 경매지기와 자리를 바꾼 그는 단상에 올라서며 크라이츠를 향해 가래 끓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제 이름은 루퍼스 돌리아드라고 합니다. 레이디의 소개를 먼저 해주시면 고맙 겠소."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저는 라이델베르크에서 온 크라이츠 드라켄 입니다." 당당한 크라이츠의 소개에 장내는 또 한번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네 지금 들었나? 드라켄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어!" "혹시 공학원의 가문을 말하는 겐가?" "그럼 이 대륙에 드라켄의 성을 쓰는 가문이 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질문을 하던 루퍼스 역시 놀라움에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만 보더라도 유능한 경매 지기임을 간접 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혹, 공학원의 분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공학원의 모든 재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 공학원에 대한 위명은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 인 사람들 역시 그럴 것인데, 이렇게 젊은 레이디께서 공학원의 재무를 담당하신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헌데, 레이디께서 이 여신의 눈물이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이유 가 있으십니까?" 주변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자신의 유명세를 실감하자 기분이 좋아 졌는지, 굳혔던 표정을 풀며 가볍게 웃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옆에 있는 제 동생이 증명을 해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눈을 돌려 뮤스를 보던 루퍼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젊은 청년 같은데..." "비록 어린 나이지만 공학원의 원장인 만큼 우습게 보시는 일이 없으셨으면 하는군 요. 저희 공학원에서 판매되는 모든 제품들을 직접 설계했답니다." 유심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뮤스의 정체를 알게되자 자신의 눈을 비 비며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그가 공 학원의 원장이라 말한다면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넘겼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놀라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들었는가? 저 젊은이가 공학원의 모든 제품들을 설계를 했다는군." "흠... 지나가는 소문에 굉장히 젊은 사람이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소리를 듣긴 들었 지만,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생각보다 더욱 어리군."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움에 한 마디씩하고 있었지만, 루퍼드는 그들의 놀라운 심정을 십분 이해했고, 또, 계속 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곧 조용해 질 것을 알았기에 자신 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뮤스 드라켄이라는 분이 바로 이 청년이란 말씀이십니까?"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의자에 앉아 있던 뮤스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 했다. "네. 제가 뮤스 드라켄입니다." "호오... 이거 정말 놀랍군요. 이런 엄청난 손님들이 저희 경매장을 찾아 주셨다 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먼저 그 여신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나오셔서 설명을 해 주시죠"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뮤스는 서슴없이 단상으로 걸어 나왔고, 그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상으로 걸어나와 사람들을 마주 보고있는 뮤스의 몸에서는 기이한 기운이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고 설명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타인을 압도하는 동시에 신뢰감을 심어주는 모 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내의 사람들은 아주 작은 잡음조차 내지 않은 채 뮤스에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 뮤스는 조심 스럽게 손을 모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길에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일 그냥 넘어 갈 수 없어서 이렇게 단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사말을 마친 뮤스는 자신의 가방에 무엇인가를 꺼내 그것을 사람들을 향 해 보여주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입니다. 이것을 한번 감정해 주시겠습니까?" 그에게서 조그마한 다이아몬드를 건네받은 루시퍼는 그것을 등 아래 비춰 보며 색을 살피기도 하고, 반짝이는 정도를 관찰하기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럼 그것을 불에 직접 태워 주시죠. 부탁드립니다." 뮤스의 말을 들은 루시퍼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야만 했다. "네? 이런 보석을 태워 봤자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아무튼 해 보시면 알게 됩니다." 루퍼스는 그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일하는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촛불과 집게를 준비해 나오자 집게로 다이아몬드를 잡은 루퍼스는 뮤스의 얼굴을 한번 더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의 변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침을 한번 삼킨 그는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으로 다이아몬 드를 촛불의 불꽃에 가져다 댔다. -치지지지직! 그러자 밝은 불꽃이 튀기며 나며 다이아몬드가 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누구도 다이아몬드를 불에 태운다면 이런 결과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고, 다른 한편으 로는 불꽃과 함께 사라진 다이아몬드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타들 어 가던 다이아몬드가 형체를 잃으며 사라져 버리자 집게만을 들고 있던 루퍼스는 뮤 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가볍게 웃 은 뮤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여신의 눈물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이아몬드란 탄소라는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에 닿는다면 즉시 타버리죠. 만약 제 손에 들려있는 여신의 눈물이 진짜라면 모두 타버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멀쩡하겠죠?"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에 빠져들었는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그 중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여신의 눈물 낙찰자인 살찐 남성이었 는데, 그만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기라도 했 는지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후훗 만약 이것이 진짜 다이아몬드여서 타버린다면 그에 대한 배상은 저희 공학원에 서 해 드리겠습니다." 시선을 내려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있는 크라이츠를 바라보니 그녀는 자신감 있 는 표정으로 뮤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어 생각을 굳힌 뮤스가 손에 들려있 던 여신의 눈물을 루퍼스에게 건네주자,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만약 여신의 눈물이 진짜 다이아몬드라서 타버린다면, 자신의 손에서 17만겔피에 달 하는 보석이 날아 가버리는 것이었고, 반대로 만약 가짜라는 판명이 난다고 해도 자 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가 되었기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 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안 할 수도 없는 법,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여신의 눈물을 밝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러나 시간이 흘러도 눈을 감은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궁금함에 조용히 눈을 떠보니 촛불 위에서 태연하게 버티고 있는 여신의 눈물이 보였는데, 이 로써 그것이 가짜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럴 수가. 정녕 이것이 가짜일 줄이야! 스쿠트! 이것을 경매에 내놓은 자를 당장 찾아내 도시 치안청에 넘기게나! 아니면 신고라도 하게!" 대강 보더라도 굉장히 분노한 모습이었는데, 여신의 눈물 진위여부를 함께 확인하던 사람들 역시 감쪽같이 속은 느낌에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살다보니 별일이 다있네 나름대로 보석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저 공학원의 원주가 더 대단하군. 한번 보더니 그 진위여부를 알아내다니... " "후훗. 우리 같은 일개 상인과 다른 점이 있으니까 저렇듯 유명한 것 아닌가!" 그들 중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가짜 다이아몬드인 여신의 눈물을 무려 17만겔피에 구입하려던 살찐 남자였는데,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행스러 워 하고 있었다. 뮤스는 이제 할 일을 끝마쳤다고 생각했는지 제일 앞 의자에 앉아서 웃고있는 크라이츠에게 다가갔다. "후훗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누님." "그래도 정말 대단했단다. 다이아몬드에 불을 붙이면 타버리다니..." 뮤스와 크라이츠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음을 다소 진정시킬 수 있었 던 루퍼스가 그를 향해 말했다. "뮤스님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실수를 만회 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이츠에게서 잠시 시선을 옮긴 뮤스는 그의 감사에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아무래도 감사에 대한 보답 정도는 해 드려야겠습니다. 그럼 경매는 마쳐야 하니 잠 시..." 말과 함께 양해를 구한 루퍼스는 뮤스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단상으로 올라갔고, 곧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분들께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말을 한다해도 변명으로 들리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사죄 드리면서 오늘 낙찰되신 분들은 낙찰가의 반만을 지불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오늘 경매를 마치겠습니다." 경매 종료를 알리는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변하며 자리를 뜨 기 시작했는데, 귀금속에 안목이 밝은 그들의 눈에도 진짜 다이아몬드로 비춰졌던 여 신의 눈물에 속아 실수 한 것은 결코 루퍼스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고, 게 다가 낙찰 받은 물건까지 반값으로 사게 되었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을 때 뮤스를 비웃던 살찐 남자가 다가와 불현듯 허 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어찌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깍듯한 사과에 놀란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그런 것 가지고 이러시다니... 어차피 거짓은 밝혀져야 합니다. 빨리 몸을 일으키시 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감동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미리 예견 된 듯한 그의 태도에 크라이츠는 식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는 롤드 로슈머라고하는 상인으로 제국의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광석 매매를 하고 있습니다. 혹여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로슈머 상가를 찾아 주시죠." 그의 소개를 듣던 크라이츠는 식상한 표정을 접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철의 롤드씨?" "네 맞습니다. 저를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마침 잘 되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 공학원에서 철 공급 계약을 맺고자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대화의 내용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자 따분해진 뮤스는 그들의 사이에서 빠지기로 했고, 크라이츠는 롤드와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 다. 결국 장내에는 뮤스와 루퍼스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장내의 정리가 끝났다고 생 각한 루퍼스는 단상에서 내려와 뮤스를 바라보았다. "흠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보답이라뇨. 어차피 밝혀야할 사실이었을 뿐입니다." 뮤스의 대답에 루퍼스는 손을 내저으며 어림 없다는 듯 말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죠! 아! 혹시 검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검? 칼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침 저희에게 경매에서 유찰 된 멋진 검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것을 소장하고 있던 집안의 형편이 안 좋아져 어쩔 수 없이 내놓았다가 유찰이 되자 저희가 사들이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평화의 시기인 지금에야 누가 검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게다가 예식용 검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것이 있으니 살 이유도 없고 말 입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하. 저라고 무슨 검이 필요하겠습니까. 검술을 익힌 적도 없고, 익힐 생각도 없습 니다." 루퍼스 역시 그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설득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식용 검은 가문에 하나씩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공학원이 신흥 가문인 듯 한데, 앞으로 대를 이어 내려줄 예식용 검 하나 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퍼스의 말을 듣던 뮤스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사실 이곳에서 가문까지 만들어가며 살 생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영실을 만난다면 이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해줄 수도 없었기에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 다. "그렇게 까지 말하신다면 받을 수밖에 없겠군요." "허허허! 잘 생각하셨습니다." 뮤스가 루퍼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자 루퍼스는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 져 오라 일렀고, 그의 안내와 함께 경매장 내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2002-03-03 / 61.253.6.6] [대공학자] #99 (42) 카인슈나이드. 방의 이곳, 저곳에는 빈 병들이 굴러다녔고, 넘어진 탁자의 옆으로 과일 조각들이 널어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네 명의 드워프들이 만취의 상태로 술 주정을 하고 있었는데, 짧은 다리를 서로의 배에 힘겹게 올려놓고 허덕거리는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뱃가죽을 긁던 켈트가 레딘의 발을 귀찮은 듯 치우며 중얼거렸다. "음냐... 레딘. 내 배에는 멋진 각선미의 다리만 올려놓을 수 있다고... 자네 다리는 자격미달이야... 무거워서 숨도 못 쉬겠네. 딸꾹!" 그의 말에 피식 웃은 레딘은 자신의 짧은 다리를 덮고있던 바지를 보란 듯이 걷어올리며 말했다. "클클... 형님. 이 정도 각선미면 드워프족에서는 보기 드문 수준이요. 딸꾹! 요 꼬부랑하게 자라난 털 좀 보시오. 형이상학적인 모습이 예술이지 않소? 딸꾹!" "푸하하하! 그것도 각선미면, 내 다리는 야들야들한 엘프다리다! 헐헐헐헉! 콜록콜록!" "크큭! 그럼 나는 크라이츠님의 다리를 하지! 푸하하학케엑! 콜록콜록!"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브라이덴과 블뤼안이 켈트와 레딘을 비웃으며 바닥을 구르다가 너무나 심하게 웃던 나머지 결국 사래가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드워프들이 이런 추태를 보이고 있을 때, 요란하게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쾅쾅쾅! "아저씨들 문열어요! 아저씨!" 뮤스의 목소리를 들은 레딘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더니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되는지 발가락을 날카롭게 하나로 뭉치며, 겨우 기침을 멈추고 있던 블뤼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봐 블뤼안 자네가 가장 못 마셨으니까 문 열어 줘..." 하지만 블뤼안 역시 그대로 당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쌨는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콜록크윽... 이제 겨우 살겠네. 흥! 어떻게 해서 내가 제일 못 마셨다는 거야? 다시 한번 붙어 볼까?" "끌끌... 자네가 다시 한번 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건가? 어림없지!" "좋아! 어디한번 붙어 보자고! 대결에서 지는 드워프가 문을 열어 주기야!" 두 드워프가 알량한 자존심을 걸고 다투고 있을 때, 뮤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스로 문을 열었는지,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나 참! 이런 것도 꼭 제가 직접 열어야겠어요?" 문을 닫고서 잠시 방안을 훑어보자 난장판이 되어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 모습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답답함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내가 못살아! 아무튼 술만 드시면 이렇다니까! 방 모양이 대체 이게 뭐예요?! 게다가 카펫은 어쩌고저쩌고..." 뮤스의 악에 바친 잔소리가 한동안 계속 되었지만 방바닥을 헤엄치던 드워프들은 그의 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귀를 후비며 딴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 이상 말을 해봐야 그들이 듣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뮤스는 체념을 하며 손에 들려있던 긴 막대기를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그 막대기는 흰 천에 싸여있었기에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길이는 약 120셀리 가량 되었고, 가벼운 재질로 되어있었는지 침대의 매트가 거의 눌려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켈트가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뭐냐? 경매에서 산 거냐?" 옷을 갈아입던 뮤스는 침대 위를 한번 바라보더니 나직한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아무튼 호기심하나는 대단하다니까. 경매장에서 일이 있었는데 그걸 해결해 줬더니 선물로 주더군요. 예식용 검이라던가?" "검? 호오! 한번 구경해도 될까?" 누가 드워프 아니랄까봐 눈이 번쩍 뜨이는 모습이었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하나같이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들의 장인 근성에 또 한번 혀를 내둘러야 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게 하..?" "호오! 이거 굉장하군! 미스릴로 만든 검이라니!" "그러게 말이요 형님. 게다가 세공 스타일을 보니 드워프들의 실력인 것 같은데?" "그것도 상당히 오래 전에 사용하던 방법을 썼군. 하긴 옛 방법보다 좋은 것은 없지."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가격도 엄청 날 것인데..." 뮤스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벌써 흰 천을 벗겨 냈는지 어느새 감탄성을 내뱉는 드워프 들이었다. 여전히 멋대로 행동하는 드워프들을 향해 또 한번 잔소리를 하려 했던 뮤스는 그들의 감탄의 목소리를 듣자 잠시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그 검이 대단한 건가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물어오는 뮤스를 본 켈트는 답답한 듯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허허! 이런 명품도 몰라보다니. 이것은 미스릴로 만든 검으로써 정말 높은 수준의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켈드의 설명에 허공을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스릴이라니요? 그런 금속도 있나요?" 뮤스의 되물음에 더욱 의아해진 것은 켈트였는데,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줄로만 알고 있던 뮤스가 미스릴을 모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넌 그럼 미스릴에 대해 모르냐?" 그의 물음에 긍정을 표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뮤스를 바라보던 켈트는 수긍이 가는 점이 있는지 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어쩌면 네가 살던 세계에 없던 금속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지. 이 검이 바로 미스릴이라는 금속으로 제작된 것인데, 한번 살펴보거라. 강도와 무게가 철과는 비교도 안 된단다. 게다가 그 가격 역시 같은 무게를 지닌 금의 두 배에 달하기 때문에 아무나 이런 검을 가질 수는 없어." 검을 받아든 뮤스는 켈트의 설명에 따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루퍼스에게 그것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저 장식용 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형이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 속내를 알게 되자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의 브레이드(칼날)와 가드(코등이) 그리고 그립(손잡이)이 모두 순백색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순백색의 브레이드를 이리저리 돌려보자 무지게 빛의 문양이 보였다 말았다 했는데, 특이한 세공 방법을 거친 듯 했다. 무게 역시 일반 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뇌공력을 쓰지 않고 이리저리 휘둘러 봐도 손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이야!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이런 금속이 있었다니..." 모르고 있던 검의 실체를 깨달으며 놀라고 있을 때, 그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레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평범한 예식용 검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이죠?"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 오자 레딘은 테이블천의 귀퉁이를 찢어내어 그것을 뮤스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을 날 위에서 떨어트려 보게." "날 위에다가 그냥 떨어트리라고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해보게나" "뭐 그러죠."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손에 들린 천을 검의 날 위로 들어 올렸고, 곧 손가락을 놓으며 그것을 떨어뜨렸다. -사각 그러자 그 천은 검의 날에 닿자마자 두 개의 조각으로 분리되었는데, 검을 들고 있던 뮤스는 그 날카로움에 놀라 절로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을 어떻게 세공 했기에..." "후훗 이것이 바로 우리 드워프들의 실력일세! 어쨌건 간에 과연 예식용 검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세공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것이 무기로 쓰였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 놀라며 물어오는 뮤스의 말에 손을 턱에 가져간 레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형님 생각은 어떻수?" "흠 그럴 수도 있지. 미스릴로 검을 만든다면 예식용 검의 크기만으로도 충분한 강도를 지닐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지." 켈트 역시 그의 추측에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검의 날을 응시하던 뮤스는 켈트의 말을 듣고 뭔가 마음을 먹었는지 켈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뭉툭하게 만들어 줘요." "엥?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날을 망가트리라는 것은 아니겠지?" 뜬금 없이 내뱉은 그의 말에 켈트와 드워프들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놀라는 모습이었는데, 뮤스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남을 상하게 할 검은 갖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예식용 검은 있어야 한다고 하니, 별 수 없잖아요?" 뮤스의 말을 다 들은 드워프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는데, 주인을 잘못 만나 그 가치를 잃게 되는 검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뮤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한참 동안 고민을 해보던 켈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좋은 무기가 이렇게 어이없이 망가져야 하다니..." "후훗. 아무리 가치가 있는 무기라도 생명의 가치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게다가 생명을 해하기 위한 가치란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고요..." 여전히 아쉬움을 흘리는 켈트의 목소리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는 모습으로 봐서, 뮤스는 자신의 결정에 후회를 하지 않는 듯 했다. -똑똑! 차를 마시며 앞으로 지나갈 곳을 위치를 짚으며 지도를 보고있던 뮤스는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문이나 좀 빨리 열어! 누님이시다." 크라이츠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보던 지도를 접으며 문 앞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으로 수많은 상자들을 들고 서있는 크라이츠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상자들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뭘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빨리 이것들 좀 받을 생각은 안하고!" "아... 네. 이리 주세요." 서둘러 대답한 뮤스는 그녀를 가리고 있던 상자들을 하나씩 받아 들었는데, 그 무게보다는 부피가 너무나 컸기에 상당히 불편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제야 뮤스에게 짐을 넘기고 두 손이 자유롭게 된 크라이츠는 손과 옷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에휴! 그 녀석 작작 좀 할 것이지 이게 다 뭐냐."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었기에 뮤스의 목소리가 상자에 가려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에고고고... 이게 도대체 다 뭐예요?" "어디 구석에다가 내려 놔. 롤드 녀석이 죽어도 빈손으로는 못 보낸 다고 하면서 사준 거야. 물론 선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정도 것 해야지." 뮤스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겨우 상자의 중심을 흐트리며 방의 한 구석에 쏟아 놓을 수 있었고, 크라이츠는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의 주둥이를 입에 가져가며 물을 마셨다. "헤휴. 이제야 살겠네. 확 본체로 돌아가서 브레스를 쏠 수도 없고 말이야. 호호호홋! 그래도 엄청난 헐값에 철 공급 계약을 맺었으니 훨씬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겠어." 뮤스는 어떻게 입을 열어도 결국 돈 이야기로 돌아가는 크라이츠의 얼굴을 보며 오랜만에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속이 좀 풀렸는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던 크라이츠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켈트씨와 드워프들은 다 어디 갔지?" 그녀의 목소리에 존경의 눈빛을 거둔 뮤스는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방에서 검을 손보고 있어요." "검이라니?" 크라이츠가 의아해 하는 얼굴로 되물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드워프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상당히 힘들었는지 이마를 타고 볼까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옷으로 부채질을 하며 나오던 켈트는 손에 들린 검을 뮤스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오랜만에 다뤄보는 미스릴이라 힘들군. 웬만한 온도에서는 녹지도 않으니... 레딘이 없었으면 아직까지 헤매고 있었을 꺼야." "하하 고마워요." 웃으면서 대답한 뮤스는 검을 받아들고서 그 날을 살펴보았는데, 과연 날은 이미 뭉툭해져 손을 가져가 대보아도 손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이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정말 예식용 검 같겠죠?" "안타깝게도 그렇겠지..." 아쉬움이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켈트가 대답을 하고 있을 때, 크라이츠가 뮤스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봤는지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뮤스 잠깐만 그 검을 줘 볼래?" "뭐 그러죠. 여기 있어요." "고맙구나 뮤스. 어디한번 볼까?" 그에게서 검을 건네 받은 크라이츠는 세심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0 그녀의 손길은 이미 무뎌진 검의 브레이드를 훑은 후, 단순하지만 고아한 느낌을 주 는 그립까지 천천히 이어졌다. 그중 눈길을 오래 끌고 있었던 것은 브레이드에서 번 쩍이는 무지개 빛의 문양이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오... 이것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순백의 검이라 혹시나 했는데." "이 검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어요?" 검에서 고개를 돌려 뮤스를 본 크라이츠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알 수밖에 없지. 오래 전에 나의 동료였던 인간의 검이었으니까. 그 때가 600년 전 쯤이었나?" "흐엑... 그렇다면 이 검이 어떻게 이런 곳에 있는 거죠?" "글세 그건 잘 모르겠는걸? 그 역시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을 텐데... 혹시 켈트씨는 마크 도나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켈트는 무릎을 치며 외쳤다. "섬광의 전사 마크 도나엘! 설마 이것이 그 사람의 검이었단 말입니까?" "역시 아시는군요." 다른 드워프들 역시 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됨을 느꼈는지 크라이츠의 얼굴에 눈을 맞추며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켈트의 추측에 긍정을 하던 크라이츠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그 때가 도이첸 제국 3차 반란 때였을 거예요. 저는 그 당시 엘프의 모습으로 유희 를 하던 중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 인상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죠. 그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슈나이드를 처음 보게 되었죠."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슈나이드가 이 검의 이름인가요?" "그렇단다. 정말 특이한 이름이 아니니? 칼날이라는 뜻을 가진 슈나이드가 이름이라 니 말이야. 게다가 이제는 이 검의 날을 없앴으니 이제 이름 값도 못하는 검이 되어 버린 건가?" "그... 그렇군요. 결국 저는 전설적인 검 하나를 금속몽둥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 고..." 크라이츠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뮤스의 등을 토닥거렸다. "너무 상심하지는 안아도 된단다. 그 정도의 검은 미스릴만 있다면 여기 있는 켈트씨 도 만들 수 있는 수준이니 별 상관은 없거든? 어쨌건 간에 마크는 일개의 용병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전공을 세워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지금 그의 애검이던 슈나이드가 이런 데에 떠돌고 있는 것을 보니 그의 가문도 쓰러졌나 보구나..." 뮤스는 루퍼스에게 들은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루퍼스님께서 어떤 가문이 망해서 이 검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했거든요. " "역시 그렇게 되었군... 호홋. 정말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가르쳐 줄까?" "예? 그게 뭔데요?" 말을 하던 크라이츠는 문득 재미있는 옛 과거라도 떠오르는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 으며 입을 열었다. "푸훗! 그 마크라는 사람은 영웅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게 정말 3류 검사였단다." "에? 그런데 일가를 이뤘다고요?" 그녀의 말에 더욱 놀란 것은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이었다. 그들이 전해들은 이야기 들만 늘어놓는다 해도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던 영웅이 3류의 검술 실력을 가진 사람 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레딘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는 순식간에 십여 명의 인물들을 베어 넘길 수 있었던 영웅이지 않습니까?" "호홋 좀 부풀려 지긴 했지만, 순식간에 다섯 명을 베어 넘긴 적은 있었죠." 레딘은 자신의 말이 맞음을 확인했기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런데도 겨우 3류의 검술을 가졌다고요?" 그가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로 되묻자 크라이츠는 슈나이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좋아요. 재미있는 것을 하나 보여주도록 하죠." 말을 마친 그녀는 가볍게 슈나이드를 이리저리 휘두르더니 중단자세(검을 몸의 중심 에 두는 자세)를 취했다. -휭! 휭! 그와 동시에 슈나이드의 브레이드를 중심으로 무지개 빛의 광망을 내 뿜기 시작했는 데,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있던 일행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대응을 못했는지 부신 눈을 손으로 가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광망이 걷히며 보통 검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방안에는 크라이츠만이 태연한 모습이었다. "호홋. 이제 보셨나요? 이 슈나이더는 마나를 주입하면 엄청난 빛을 발산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앞이 안보이게 되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야 시력을 회복한 뮤스는 아직도 그 여력이 남아 있는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럼 이런 식으로 앞을 못 보게 한 후에 적을 베어 버린 것이군요." "그렇단다. 게다가 날까지 엄청나게 날카로웠으니 당해낼 자가 없었지... 아무튼 이 제 이 검의 이름은 슈나이드가 아니라 카인슈나이드가 되었으니까 알아서 잘 보관하 렴. 나중에 필요할 때가 생기겠지 뭐. 물론 예식용 검으로 사용해야하고." "뭐 그렇게 하죠." 뮤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되씹고 있었다. "카인슈나이드... 칼날이 없는 이라... 마음에 드는군." 그로부터 며칠간은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눈이 녹은 땅은 차갑게 얼어붙어 더 이상 질퍽거리진 않았지만, 거친 모습으로 얼었기에 그 위를 달리는 전뇌거는 자 갈밭이라도 달리는 듯 덜컹거리고 있었다. 또 뮤스가 타고 있던 전뇌거는 이제 제설 전뇌거의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미 눈이 녹은 지역에 접어들면서 제설용 철판을 모두 분해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운전하던 뮤스는 옆 좌석에 편한 자세로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는 켈트에게 말했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지 헤놉에 도착해요? 벌써 플란포르를 출발한 지도 삼일이나 지 났잖아요." 그의 물음에 잠시 노래 소리를 멈춘 켈트는 배 위에 올려놓고 있던 지도를 들쳐 보며 대답했다. "흠 지도상으로 따지면 반나절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아." 켈트의 말을 들은 뮤스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나절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체 지도가 어떻게 생겨먹었 길래 이따위인지!" 하지만 그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후훗. 조금 늦어지면 어떻고, 빨리 가면 어떻냐? 이렇게 경치 구경이나 하면서 가는 것이 여행이지. 저기 좀 봐라!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정경이 보이지 않느냐? 애들도 뛰어 놀고. 이런 것들이 다 아름다운 경치인거야." "쳇! 지금까지 수도 없이 봐왔던 모습이잖아요. 게다가 제가 살던 세계의 사람들은 무조건 빨리 끝내는 성격이란 말이에요!" 창 밖에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의자에 몸을 뉘인 켈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 다. "역시 네가 그래서 성격이 더러웠었군? 그래도 지금은 우리와 함께 살면서 많이 나아 졌으니 다행이야." "아저씨와 누님을 만난 후로 제 성격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일상처럼 하는 켈트와의 말싸움이었지만, 그 때 마다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껴야만 했 다. 그런 마음에 가슴을 두들기며 한탄을 해본 뮤스는 이내 포기한 듯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에휴... 내가 참아야지. 아무렴. 한 살이라도 어린 내가 참아야지." "헐헐! 네가 참지 않는다고 별 수가 생기겠냐? 이 120년씩이나 살아온 케르힉!" -끼이이익!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뮤스의 말을 받던 켈트는 몸이 급히 앞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 꼈는데, 무엇을 잡아 멈추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은 전뇌거의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히고야 말았다. -쿵! 그 충격으로 상당한 고통을 느꼈는지, 이마를 비비며 몸을 일으킨 켈트는 뮤스를 향 해 소리를 질렀다. "뮤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허나 뮤스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켈트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 년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죽은 듯이 땅위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이런! 애가 치였군! 뭐 해? 빨리 조치를 취해야지!" 깜짝 놀란 켈트가 서둘러 전뇌거 밖으로 뛰어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뮤스는 고 개를 세차게 흔들며 자신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지?! 내가 대체 무슨..."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서둘러 켈트를 따라 전뇌거에서 내렸 다. 그가 전뇌거의 앞쪽으로 뛰어가자 켈트가 소년의 상세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켈트에게는 무리가 있었기에 좋은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뮤스가 긴장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길옆 의 땅에서 일을 하던 한 아낙이 손에든 농기구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뛰어오고 있었 다. "라델! 우리 아가!" 한눈에 보기에도 사고를 당한 소년의 엄마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뮤스 는 둔중한 흉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켈트의 옆으로 뛰어와 소년을 살피던 그녀는 켈트의 멱살을 잡으며 대단히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내 아들을 어떻게 한 거야! 빨리 살려내란 말이야!" 멱살이 잡힌 켈트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차분한 말투로 그녀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부인! 지금 이렇게 화를 내기보다는 이 소년을 빨리 치료해야 하니 좀 침착 좀 해주 시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서둘러 의사에게 보여야 하오!" 과연 켈트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었는데, 잡았던 멱살 을 놓은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알겠어요.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우리를 의사가 있는 곳까지 안내를 해주시오." 이 때, 앞의 전뇌거가 갑자기 멈춤을 본 다른 일행들의 전뇌거 역시 그 뒤로 멈춰서 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블뤼안이 대표로 확인 차 내렸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 르는 그는 기지개까지 펴보이며 느긋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님 또 무슨 일이유? 마나구의 전뇌력이라도 바닥났수?" 하지만 느긋한 모습도 잠시, 이 급박한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게 된 그 역시 덩달아 급박한 모습으로 변해야만 했다. "어라! 애가 전뇌거에 치인 것인가! 어쩌다 이런 일이!" 켈트는 블뤼안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급히 말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의사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자고!" "그렇다면 빨리 전뇌거에 태워야하니 빨리 그 아이를 안으슈!" 순간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뮤스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를 안아 들려고 하는 켈트의 손을 만류했다. "자..잠깐만요! 그냥 안아들면 더욱 위험해요." "어째서 그렇지?" "전뇌거에 치인 정도면 몸 전체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테니, 목과 척추에 이상이 생겼을 지도 몰라요. 그러니 일단 머리와 척추를 고정시키게 널판을 대고 묶어 주세 요." 그의 말을 들어보던 켈트는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긴 그렇겠군. 그럼 너는 이 아이를 살펴보고 있거라. 블뤼안 자네는 이 부인 과 함께 헤놉으로 먼저 가서 의사가 있는 곳을 알아보게나. 연락은 원거리대화기로 하겠네." "알겠소 형님." 짧게 대답한 블뤼안은 바쁜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고, 부인은 자식과 떨어지기가 싫은 모습이었지만, 결국은 켈트의 뜻대로 블뤼안을 따라 갔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것을 확인한 켈트는 전뇌거에 실려 있던 널판을 몇 개 내리며 뮤스에게 다가 왔는데, 그는 이제는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는지 그런대로 냉정함을 되찾고 있었다. 켈트가 널판을 들고 오는 기척을 느낀 뮤스는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아저씨 제가 널판의 위치를 잡을 테니 잘 묶어 주세요." "알았으니까 걱정 말거라." 켈트의 대답을 들은 뮤스는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정신을 잃은 아이의 목 부위와 허리 부위에 널판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0 42장을 수정 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군요 ^^;; 몇몇 분이 너무 진행이 느리다고 항의하시는 바 람에 미리 올렸던 진행을 지워 버리고 이렇게 42장을 마무리 합니당^^;; 내일 부터 새벽 1시 정도에 글을 올라 오겠습니당. ################# 같은 시간,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방안을 흔들리는 촛불 몇 개가 힘겹게 밝히고 있었 다. 방안의 중앙으로 둥근 원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 중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장영실이었다. 그밖에도 여러 모습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루스티커와 같이 나이 많은 자가 있는가 싶 으면 젊은 청년도 있었고, 남자들 사이에서 여성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에게 하나같은 공통점을 찾는다고 하면 이 듀들란 제국에서 내노라 하는 두뇌와 능 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손에 들린 종이를 한번 읽어보던 장영실이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께서는 각 분야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계신 분들입니 다. 그만큼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제가 이번 일의 책임을 맡기로 한만큼 제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조금은 거슬리게도 들릴 법 한 장영실의 말투였지만, 이곳에 모이기 전 재상에게 부 탁을 받은 바가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이 계속 되었 다. "황제 폐하 앞에서 제가 설명한 내용들을 대강이나마 기억을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 다. 하지만 이 일에 전적으로 참여를 하시는 분들이신 만큼 자세한 세부사항을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받으시지요." 그가 원탁 앞에 놓여있는 두꺼운 종이 뭉치들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자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천천히 넘기며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 받은 것은 앞으로 5년간에 걸쳐 이루어질 제국 개발사업입니다. 이 모든 일에 5년이라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다면 불가능 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장영실이 말을 할 때에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건네준 종이 뭉치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다들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 장영실과 가장 친분이 깊던 루 스티커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그때는 막연히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계획이었나?" 물음에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래서 이곳에 모인 분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 한 것입니다. 일단 한가 지씩 설명을 해 드리지요." 자신의 앞에 남겨진 종이 뭉치 하나를 짚어든 장영실은 첫 번째 페이지를 펼치며 입 을 열었다. "일단 이곳에 모이신 분들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이첸 제국에서 생산해내고 있는 전뇌거를 이곳 듀들란 제국에서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도이첸 제국에서 이곳 으로 건너온 전뇌거를 살펴보니 대단히 정밀했고, 설계 역시 거의 완벽에 가까웠습니 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진 기계인 만큼 모자라는 부분이 여러 곳 발견되었습니다. 우 리는 그것을 완전히 개선한 전뇌거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여기 적힌 것 들을 한번씩 읽어보시고, 그 이상의 것은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그는 목이 타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다음은 제국내의 거대 도시 연결입니다. 비록 전뇌거라고 하더라도 도로의 한계로 인하여 거대 도시들을 왕복하는 것은 며칠이 걸릴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이것을 극 복하기 위해서 기관차라는 것으로 도시를 연결 할 것입니다. 이것의 동력원은..." 이 때부터 장영실의 설명이 계속 되었는데, 그것을 정리하자면 크게 두 가지였다. 하 나는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서 생산해낸 물건들에 필적하는 것들을 제작해 내는 것 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능가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대도시를 연결하여 제국의 발전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모든 산업의 발전은 효율 적인 운송수단이 기반이 되어야 했지만, 지금의 낙후된 운송수단으로는 큰 발전을 꾀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장영실의 이야기는 점점 세분화되기 시작 했고, 그의 말을 듣던 청중들 역시 더욱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자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몇몇을 제외한다면, 필요한 인력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 입니다. 그나마 화공학 분야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아직 미비한 단계이군요."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루스티커는 원탁 위로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 다. "흠 자네 말이 맞네!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지만, 그럴 듯 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지! 쓸데없는 것들이나 만들어 내서 헛된 자원만 낭비한단 말이야... 내 생각에는 기본이 잘못 된 것 같아." 루스티커의 말이 끝나자 그의 옆에 앉아있던 여성이 조금 격앙된 모습으로 그의 얼굴 을 주시했다. "루스티커님. 말이 너무 지나치시지 않으십니까? 저희 연금술사들이 불필요한 존재라 는 말인가요?" "흠... 말이 그렇게 되는 건가? 뭐 그런 의도의 말은 아니었네만,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말투에서 묻어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루스티커는 상당히 괴팍한 성격을 가 지고 있었는데, 못마땅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수석마법사라 는 권력 중심의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궁내의 인물들은 그를 대하기 꺼려했다. 상황이 감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주시하던 장영실은 원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주위를 환기 시켰다. "루스티커님, 그리고 소냑님 두분 모두 참으시지요. 일단 이곳의 연금술은 조금 부족 한 면은 있지만 조금만 연구 방법을 달리한다면 충분한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 연구에 루스티커님의 도움이 필요하니 두 분의 사이가 원만하셨으면 합니다. 아무 래도 두 분께서 함께 일을 해야 할 듯 하니까요." 장영실의 말을 들은 루스티커와 소냑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이번 일의 책임자 는 누가 뭐라 해도 장영실이었고, 국가의 중대사가 달린 일인만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진정을 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자신의 왼쪽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남성에게 말했다. "포스텀 후작님께서는 듀들란 최고의 토목업자라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 어깨에 힘이 들어 간 포스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 다. "일단 이곳 역시 공학원을 건립해야 하니 적당한 지역을 선택해 건물을 만들어 주시 기 바랍니다. 자세한 것은 그곳에 모두 쓰여 있으니 다른 것은 후작님께 맡기겠습니 다." 말을 마친 장영실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에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이네트 경께서는 각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연금술에 일가견 있는 인재들을 선별해서 공학원으로 보내 주십시오. 또, 손재주가 좋은 대장장이들을 가능한 대로 모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설명이 끝났는지, 손에든 종이 뭉치를 원탁 위에 내려놓으며 의 자의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하지만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 모두가 그의 치밀한 계획에 감복해 있는 상태였기에 아무런 질문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띈 장영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착수하겠습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대공학자] #101 (43) 벨링궁 벨링의 시가지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쿠빈테른은 언제나 목이 아프다. 이 시끄러운 도시에서 자신의 목청을 다른 이들에게 전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 문이었다. 그중 가장 바쁜 무렵인 늦은 오후, 이곳을 지나는 주부들은 그날의 저녁거 리를 구하기 위해 갈등하고 있었고, 그들의 선택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오늘도 이 렇게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손님을 많이 끄는 것이 자신의 주머니상 태를 위해서도 좋음은 두말 할 필요 조차 없었다. "자자! 쌉니다 싸요! 소금에 절인 생선이 단돈 10실피! 이런 물건은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없습니다!"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다들 귀가 먹었는지, 아니면 단체로 생선을 먹지 말자고 약속을 했는지 아무런 반응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봐요. 아름다운 아주머니! 이번에 들어온 생선이 기가 막힙니다! 아주머니!" 아부까지 떨어가며 몇 번을 더 외쳐 보던 쿠빈테른은 얼마 못 있어 포기했는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쥐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제기랄! 오늘은 왜 이렇게 장사가 안 되는 거야!" "이보게 쿠빈테른! 이 녀석으로 서른 마리 싸주게!" 그가 낙담하고 있던 때에 귀익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황실 중앙 호텔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훈트밀이 다급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마침 장사가 안되고 있 었는데 생선 스무 마리씩이나 사간다고 하니 늘어져 있던 기분이 살아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언제나 낙천 적인 그가 다급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의아하기도 했기에 웃으며 물었다. "허허. 훈트밀 아닌가! 뭐 생선이야 많으니 침착하게. 그런데 자네가 그런 표정을 짓 고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하지만 훈트밀은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빨리 싸기나 하게! 이상한 손님들이 들이 닥쳐서 호텔의 주방이 난리도 아니라네!" "아... 알겠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나참! 내 살다, 살다 그렇게 엄청난 식욕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이네! 저녁 무렵 다 섯 명의 손님이 식당으로 내려와 생선요리를 주문했는데, 무려 열 접시를 시키고도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우고, 또 이만큼을 더 주문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쿠빈테른은 생선을 거의 다 담았는지 그것을 종이 봉투에 넣으며 물었다. "재료가 없어서 안 된다고 하면 되지 않아?" "자네 같으면 금을 50겔피나 내놓았는데 싫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거래표에 적어 놔 두게." 급히 대답을 한 훈트밀은 쿠빈테른의 손에 들린 생선봉투를 낙아 채듯이 빼앗아 들고 선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쿠빈테른은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고작 200셀피가 50겔피로 변하다니 별일이 다 있군 그래..." 실내의 벽으로는 고급 목재들을 깎아서 만든 벽면이 부분적인 도금으로 인해 더욱 유 려한 멋을 뽐내고 있었고, 조금은 어두운 듯한 조명이 어울려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 었다. 또, 실내를 가득 채운 테이블들은 무려 500석 이상이나 되어 보였는데, 테이블 수가 많은 와중에도 결코 흐트러지거나 손질에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손님들 역시 그에 걸 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최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들 역시 평범한 가격에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때, 그들의 모든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는 수십 년에 걸쳐 이루어온 식당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무너트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벨링에 도착한 뮤스의 일행들이었다. 입으로부터 생선의 가시 들만 묘기처럼 빼내던 켈트는 그것을 내려놓으며 손에 묻은 기름기를 빨았다. "시장을 하다 보니 엄청나게 먹히는군. 왜 이렇게 음식이 안 나오는 거야?" 그의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드워프들 역시 각자 앞에 놓여있는 접시들을 거의 빨 다시피 마무리하며 한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벌서 만 하루째 굶었으니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유!" "그러게 말이야! 다른 드워프들이 우리가 굶은 것을 안다면 땅을 치고 통곡을 했을 거야." "허허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야. 드워프가 굶다니... 절대 이번 이야기는 입밖으로 꺼 내지 말아야지!" 드워프 특유의 걸걸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식당 안을 메우자 그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 던 사람들은 무례함에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는 일행인 뮤스와 크라이츠 마저 달가 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에 비해 너무나 조용하고 교양있게 식사를 하던 뮤스가 천 으로 입을 닦아 내며 말했다. "아저씨들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사람들의 눈도 좀 생각해 주세요." 그의 말을 들은 켈트는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매너일 뿐이다. 드워프인 우리들에게 인간들의 매너를 강요하는 것 은 한참 잘못된 것이야!" 물을 마시며 입을 씻어내던 블뤼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말이 지당하지! 드워프들은 이렇게 떠들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매너라고! 그 렇지 않은 경우는 요리가 엄청 맛이 없을 때뿐이거든!" 블뤼안의 합세로 뮤스가 밀리는 듯 하자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크라이츠가 조용히 입 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은 인간들의 세상이니 이곳의 매너를 따라 주세요." 그러자 드워프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는지 기가 죽은 모습으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뮤스는 조금 불쌍해 보이는 면도 없지는 않았지 만, 덕분에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끌지 않아도 된다는 만족감이 더 우선하고 있었다. 이곳 황실 중앙 호텔은 황궁으로 입궐하기 위한 수속을 밟는 목적으로 건립된 곳으로 서 수속절차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물게 되는 것이었다. 뮤스일행 역시 수속 신청을 해놓은 상태로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재 상의 정식 초대였기에 당일의 수속 처리가 가능했고, 승인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 다. 크라이츠는 이제 배가 부른지 조금의 음식을 남겼고, 손에든 식기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비르 재상은 아직도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군요." 인간의 매너를 지키며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켈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가비르라면 우리를 초청한 재상의 이름 아닙니까? 그 자를 만나본 적이 있었습니까? " "호홋. 뭐 재상이 된 후에 만나 본적은 없었지만, 그가 젊었을 적에는 몇 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죠. 그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었겠지만." "좋지 않은 기억요?" 크라이츠의 말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 켈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띄우며 되물 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기 직접 행차를 했군요. 하긴 내 이름을 듣고 호기심을 느꼈을 테니..." 켈트가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니 그곳이 술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식 사를 하던 사람들은 급히 장내로 들어온 한 중년의 남성에게 머리를 가볍게 숙이며 예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들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허겁지겁 장내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도 잠시, 크라이츠와 그의 시선이 마주치자 복잡한 표 정이 얼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본 크라이츠는 그의 눈길을 피해 켈트를 바라 보며 살풋 인상을 썼다. "역시 절 알아 봤군요."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일행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 남성과 크라이츠를 번 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본 뮤스는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그럼 저 사람이 그 가비르 재상이라는 사람이예요?" "뭐 소문으로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하구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크라이츠였지만, 뮤스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어떤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누님 저 사람 누님께 나쁜 감정이 있나요?" 잠시 생각을 해보던 크라이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세... 나쁜 감정이 저 사람에게는 더 편하지 않을까?" "네?" 뮤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식탁의 옆으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옴 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을 해볼 필요도 없이 가비르 제상의 인기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살며시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50가까이 되어보였 지만, 아직도 눈빛은 생생히 살아 있었고, 보통키에 깔끔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진한 갈색의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그는 미묘한 표정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레이디 께서는 역시..."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크라이츠는 살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시군요 가비르 경." 크라이츠의 무덤덤한 말투에 서운한 기분이 들었는지 조금은 원망스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크라이츠님의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군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를 듯 하자 손을 내저은 크라이츠는 식탁에 놓여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이봐요 가비르경. 아니지, 재상각하! 우리를 이곳에 초청한 것은 각하와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일인 듯 한데요?" "아! 죄...죄송합니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잠시 깜빡 했군요." 재상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당황한 모습을 보여준 가비르 재상은 식당의 문쪽을 바라보며 자신을 따라온 보좌관에게 신호를 했고, 다시 뮤스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크라이츠님 이쪽으로 따라 오시죠." 짧게 말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가비르 재상을 본 크라이츠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몸 을 일으켰고, 다른 일행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비르를 따라 자 리를 옮기기 시작한 뮤스는 아무런 말없이 걷고만 있는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보통 이럴 때는 서로 소개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저 분은 소개를 할 생각도 못하는 듯 한데요? 마치 나선형 못하나가 머리에 서 빠진 듯한 모습으로..." 뮤스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크라이츠는 그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거의 30년만에 약혼녀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너 같으면 멀쩡 할 수 있겠니? 난 충분히 이해한단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행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추며 어이없는 얼굴 로 크라이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은땀을 소매로 한번 훔친 뮤스는 더듬거리는 말투 로 물었다. "하...하... 설마 결혼을 하기 위한 약속을 말하는 약혼은 아니겠죠?" "약혼이라는 또 다른 사전적 의미가 있니? 물론 네가 말하는 약혼이란 뜻이야." 설마라는 단어의 불신임성을 여러 번에 걸쳐 몸소 느낀 뮤스는 이제 놀라기보다는 허 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누님의 머리는 어떤 생각으로 차있는지 알고 싶어요." "감히 인간이 드래곤의 생각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흠... 혹시 너라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한번 10년 정도에 걸쳐서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 "전 귀중한 인생의 10할을 그런데 쏟고 싶진 않아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는 뮤스였다. [대공학자] #102 호텔 건물의 정문 앞에는 보통의 것들보다 1멜리 가량 더 길어 보이는 전뇌거가 그들 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전뇌거는 특별 주문을 받아 공학원에서 황실로 납품한 것이 었기에 뮤스 일행들 역시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뇌거의 양옆으로는 백마가 질주하는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말의 근육들은 불빛을 받아 만들어진 명 암으로 더욱 생동감이 흐르고 있었고, 금빛의 곡선이 동체를 화려하게 휘감으며 우아 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가비르 재상은 손수 전뇌거의 문을 열며 말했다. "레이디 크라이츠, 이것을 타고 궁내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었다. "호홋! 도이첸 제국의 재상께서 손수 전뇌거의 문을 열어 주시다니 정말 영광인 걸 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건넨 크라이츠는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전뇌거에 올라 탔고, 가비르는 그녀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 었다. 이 때 크라이츠를 따르던 일행들은 그녀와 가비르 재상의 과거에 가려져 찬밥 신세가 된 자신들을 발견하고 있었다. 가비르 재상을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올라타 자 전뇌거의 문이 닫혔고, 아주 미약한 진동과 함께 전뇌거는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 다. 애초 포센트 기종은 6인용으로 설계가 되어 있었지만, 이 전뇌거는 크라이츠의 것과 같은 뼈대로 제작을 하여 8명까지 수용 가능했기에 가비르 재상을 비롯한 뮤스 일행이 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드워프들이 자신들이 만든 전뇌거를 감상하며 흐뭇함에 빠져들고 있을 때 뮤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크라이츠와 가비르 재상을 살피 고 있었다. 전뇌거에 오를 때부터 가비르의 눈은 크라이츠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 르고 있었지만, 크라이츠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양 창 밖을 바라보며 무심한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도 이러한 분위기가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자, 가비르 재상을 불쌍히 여긴 뮤스가 손을 모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저 재상각하 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크라이츠 드라켄의 동생이죠." 뮤스의 목소리에 잠시 크라이츠의 얼굴에서 눈을 뗀 가비르 재상은 그의 손을 마주잡 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헛. 그렇다면 뮤스군 역시 드래곤이십니까?" "네? 저..." 잠시 할말을 잃은 뮤스는 멍청한 얼굴로 크라이츠를 바라보았고, 드워프들 역시 그녀 의 얼굴과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잠시 그의 말을 정리하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재상각하께서는 크라이츠 누님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후훗... 사랑하는 여인의 정체조차 모를 정도로 이 가비르가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재상이 되려면 눈치도 상당히 빨라야 하죠." 가볍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뭔가 허전한 사람 마냥 낮게 가 라 앉아있었다. "누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데도 누님을 사랑하셨다고요?" 그의 감정이 이해 못한다는 듯이 뮤스가 묻자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라이츠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누님의 매력이 대단하잖니. 그 동안 재상각하 말고도 나에게 빠진 사람들이 한둘 이 아니야." "누님... 그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은가요?" "호홋 뭐 어떠니? 이런 것도 다 나의 매력이야." 뮤스는 그녀의 말릴 수 없는 성격에 고개를 내저었지만, 놀랍게도 가비르 재상은 그 녀의 말을 인정하는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이 크라이츠님의 매력이었지요. 저 또한 그런 모습에 푹 빠졌었으니까요." 과거의 향수에 젖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와 드워프들은 속이 울렁거림을 느 끼며 인상을 잔뜩 구겨야만 했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야." "혹시 크라이츠님이 순진한 청년이었던 재상에게 마법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돈으로 매수를 했을 지도 모르지." 드워프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둘사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크라 이츠의 손이 복잡한 도형을 그리며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내 몸을 감싼 마나를 환원하노니..." 수근덕 거리는 드워프들의 입은 크라이츠의 나직한 중얼거림으로 인해 다물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켈트가 급히 허리를 숙이며 빌기 시작했다. "아이구! 크라이츠님 여기서 폴리모프를 풀면 다 죽습니다!" 켈트의 행동을 바라던 형제들 역시 뭔가 잘못된 것임을 눈치챘는지 하나같이 몸을 던 지며 빌기 시작했다. "이번 한번만!" "다시는 이런 일이..." 떨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힐끗 바라본 크라이츠는 발현한 마나를 회수하며 쌀쌀한 목 소리를 내뱉었다. "흥. 알아서 처신들 잘 하세요. 대체 무슨 배짱으로 살아들 가는지..." 그럭저럭 화가 풀린 크라이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비르에게 물었다. "그냥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가비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재상이란 국가의 대소사를 직접 맡아 행하는 신분으로서 황제 역시 그에 합당한 대우 를 해줄 정도의 위치였다. 또, 그만큼 스스로도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 기에 누군가가 업신여기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가비르는 오히려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라이츠님께서 너무나 깍듯한 존대를 하셔서 정말 불편했습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부르시죠." "호홋. 고마워요 가비르. 그건 그렇고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뭔지 좀 들어 봐 도 될까요?" 크라이츠가 질문을 해오자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던 가비르는 크라이츠의 눈빛을 피하 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 그것은 이곳에서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황실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 에..."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지 못하는 것이 죽을죄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을 전혀 생각해 줄리 없는 크라이츠가 눈을 내려 깔며 말했다. "어머! 우리 사이에 이러기예요? 나에 대한 애정이 벌써 식어 버린 건가?" "저... 그게..."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하긴 인간들이란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금방 옛일 따위는 잊 어버리곤 한다니까..." "아 아닙니다. 레이디 크라이츠!" 이제서야 가비르 재상이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그녀는 팔짱을 끼며 느긋한 모습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호홋, 그럼 말해 봐요. 어차피 알게 될 일이잖아요?" 조금 우물거리던 가비르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면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이죠. 드래곤의 입은 무겁답니다. 또 드워프들의 입 역시 무겁..." 말끝을 흐린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드워프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 다. 레딘의 철없어 보이는 표정, 블뤼엔의 느글느글한 얼굴, 브라이덴의 기름기 흐르 는 눈빛, 마지막으로 켈트의 가식적인 진지함.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이었다. 한번 헛기침을 한 크라이츠는 애써 그들의 눈빛을 외면한 채 가비르 재상을 바라보았다. "흠흠... 어쨌든 믿을 만 하니 말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크라이츠님께서는 황위 대관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시겠지요?" 잠시 손을 들어 턱을 쓸던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페어링 마법이 걸린 상자와 책으로 확인하는 것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황위 대관식은 '황혈의 상자', 또 그것과 페어링 되어있는 '황인의 서 '로 대관식의 인정을 받습니다." 크라이츠와 가비르 재상의 대화를 듣던 뮤스는 전혀 알지 못할 그들의 이야기에 질문 을 던졌다. "저 페어링이 뭐죠? 또, 상자나 책 이야기는 뭐예요?"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키기 싫었던 켈트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한 목소리 로 그에게 간단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대신 설명을 해주마. 도이첸 제국의 황위 대관식에는 두 가지의 물건들 이 쓰인단다. 그 중 하나는 황혈의 상자라 불리는 작은 상자인데, 그 위에 황제의 혈 통을 이어 받은 자의 피를 떨어트리면 상자의 문이 열리게 되지." "신기하군요. 유전자 정보를 인식하는 건가? 그럼 그 황인의 서라는 것은 무엇이죠?" "그것은 내용이 없는 책이란다. 나도 대관식을 직접 본적이 없으니 자세히는 모르지 만, 황혈의 상자에 들어 있는 내용물의 모습이 책을 여는 순간 그림으로 그려진다고 하더구나..." 켈트의 이야기가 잠시 끊어지자 뮤스의 귀로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요?" 크라이츠의 말대로 그 내면에 뭔가 일이 있었는지 가비르 재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 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전뇌거의 내부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재상의 입이 열 리기 전 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될 듯 했다. 전뇌거에 타고 있는 인물들을 한번 쓸어본 가비르 재상은 조심스럽게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앞으로 여러분께서 비밀로 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가비르 재상이 잔뜩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크라이츠가 그를 안심시키기 고자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와 드워프들 역시 진지한 눈빛이었다. 한번 숨을 가다듬은 가 비르 재상은 손가락을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현 황제폐하께서는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의 태자전하께서는 황실의 혈통이 아니란 것이죠..." 이야기를 듣던 켈트는 나직한 탄성을 내질렀다. "흠... 그렇다면 대관식에서 황혈의 상자를 여는 것이 불가능하겠군..."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던 가비르 재상은 문득 켈트와 드워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워 하 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드워프 분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소개조차 못했군요." 새삼스럽게 이제서야 그것을 깨닫고 있는 가비르 재상을 보며 켈트는 실소를 터트렸 다. "허허! 그 상황이란 것이 국가의 중대사 때문인지, 아니면 크라이츠님을 다시 만난 충격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려. 내 이름은 케르히트, 그리고 이쪽은 사촌 동생들 인 레딘, 브라이덴, 블뤼안이오." 켈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주름진 얼굴을 붉힌 가비르 재상은 안색을 되찾으려 애쓰 고 있었다. "마..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도이첸 제국의 재상자리를 맡고 있는 가비르라 고 합니다." 각자와의 인사가 끝나자 켈트는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뭐 어쨌든 소개를 했으니 됐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 좋겠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 드린 대로, 태자전하께서 황실의 피를 이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대관식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 다. 하지만 누구보다 총명하고, 마음이 깊으시기 때문에 황제폐하께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분을 황제의 위에 올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마침 여러분들의 위명을 들었기에 방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초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대외적인 초청 이유는 '실크로스 교' 시공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방도를 생각 해 보던 뮤스가 물었다. "저 그렇다면 황제폐하의 피를 몰래 숨겨서 상자에 뿌리면 되지 않을 까요?" "후훗 뮤스군. 선조들은 그렇게 아둔하지 않았답니다. 한번 뿌려진 피로는 다시 열리 지 않죠." "흠... 그렇다면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황제 폐하께서 미리 귀뜸 해 주시면 되지 않나 요?" 이번 역시 가비르 재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의 모양은 매년 변한답니다. 황제폐하께 듣기로는 그것이 슬라임과 같은 말랑한 제질로 되어있고, 매년 다른 모양을 형성한다고 하셨습니다." "흠 정말 난처하군요..." 간단한 잔머리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뮤스의 머리에는 그 괴이한 상자 에 대한 호기심이 진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3 (44) 벨링궁. 골치 아픈 생각들을 잠시 접은 뮤스 일행들과 가비르 재상은 켈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한껏 깃든 목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드워프들 역시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기대감에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엄청난 공사 규모 때문에 무려 삼 천명 가량의 드워프들이 그 공사에 투입되었지. 그 당시 제국 각지의 드워프들은 소금이 필요했기에 인간들의 요청을 받아 들였고, 그 외에도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들을 지불 받았으니 손해 날 것도 없었어.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후세에 남길 걸작을 남긴다는 자부심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벨링궁이었단다. 이제 도착하면 알겠지만, 궁의 곳곳에 위치한 선조들의 에술품들은 하나 하나가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이거 정말 가슴 설레이는 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드워프들 역시 기대가 되는지 상기된 표 정이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군. 선조들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곳을 가게 되다니." "누가 아니래? 이게 다 뮤스군을 잘 만나서 그렇지."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블뤼안의 말을 들은 가비르 재상은 전뇌거의 창 밖을 내다보며 대답해 주었다. "이제 십분 정도만 있으면 궁의 내부에 들어서게 됩니다. 켈트님의 말씀대로 정말 아 름다운 궁전이죠. 하지만 켈트님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매일 그곳을 들락거리던 저 역시 다르게 보일 듯 하군요." 켈트는 털털한 웃음을 띄우며 팔짱을 꼈다. "원래 일반인들에게 예술 작품이란 그런 것이죠.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게 보통이니까요." "맞습니다. 막상 꾸며 놓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들을 유심히 즐기는 사람이 벨 링궁 안에 얼마나 있을 지." "후훗. 정말 씁쓸한 일이죠..."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지자 전뇌거의 진동이 더욱 잦아들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포장된 도로에 올라섰다는 신호였는데, 이제 거의 도착을 했음을 알게된 뮤스는 전뇌거의 창을 아래로 내리며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카락 이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그것을 한쪽으로 치우자 뮤스의 눈으로 벨링궁의 일부분이 들어오고 있었다. 과연 도이첸 제국의 황궁답게 그 규모는 작은 도시라고 불러도 과 언이 아닐 만큼 굉장했고, 대강 보더라도 경복궁의 수배는 됨직 해 보였다. "우와! 거의 도시 속의 작은 도시라고 할만한 규모 군요!" 크게 놀란 목소리로 떠들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크라이츠가 그의 옷깃을 당기며 창 문에서 머리를 빼내었다. "뮤스. 조금 점잖게 행동하렴. 이제 황궁으로 접어들게 되니 그곳의 콧대 높은 녀석 들에게 약점을 잡히면 안된 단다." "네... 알겠어요." 그녀의 말에 기가 죽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전뇌거 가 잠시 멈추자 가비르 재상은 자신이 앉은 쪽의 창문을 내렸다. 창 밖으로 근위병인 듯 한 인물이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보자 황급히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재상각하!" 그가 경직된 태도를 취해 오자 재상 역시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무적인 표정으로 얼굴 을 바꾸며 대답했다. "쉬어도 좋네. 지금 중요한 분들을 모시고 들어가는 중이니, 서둘러 처리해 주게나." "알겠습니다! 재상각하!" 근위병이 인사를 하고 급히 사라지자 가비르 재상은 전뇌거의 창문을 다시 닫았다. 곧 전뇌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않더라도 궁전 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자, 뮤스는 자리에 앉은 채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구경 하기 바빴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잘 손질된 잔디밭이었는데, 겨 울이었기에 초록의 싱그러움은 없었으나 금빛으로 빛나고 있어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잔디밭 너머로 수많은 건물들이 일정한 위치를 고수하며 서있었다. 그것 을 보던 뮤스의 눈빛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봤을 때에는 각각 개별 적인 건물인줄 알고 있었으나, 모든 건물이 중심의 건물을 모체로 하여 하나로 연결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로의 중심에 위치한 대규모의 분수를 지나치고 있을 때, 켈트가 입을 열었다. "후훗 다들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일단 들어가면 외부로 나올 일이 별로 없을 것일세..." 이곳에서 기거하고 있는 가비르 역시 그의 말에 수긍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 역시 재상을 지낸 지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죠. 후훗" 그의 말에 미소를 지은 켈트는 손으로 거미줄 모양을 허공에 그리며 말했다. "그것은 부끄러울 일이 아닙니다. 황궁은 이런 식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데, 우 리의 선조들이 이곳을 설계 할 때 드워프들의 동굴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다 들 알다시피 드워프들의 동굴은 복잡하기 그지없고, 그만큼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중 요 인물들을 보호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의 설계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죠. " "그랬었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투덜거리기나 했습니다." 잠깐 몸이 앞으로 쏠림을 느낀 가비르 재상은 웃음을 멈추며 뮤스 일행들에게 말했 다. "이제 도착한 모양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신 이유가 대외적으로는 실크로스 교 를 시공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 주시죠. 하인들에게 미리 지시해 두었으니, 숙소를 안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내리실 까요?" 그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전뇌거의 문이 열렸고, 그들을 마중 나온 궁녀들과 하인들 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은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실내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요하기만 한 황궁 안에서는 유일하게 활력 적인 곳이었기에 궁내의 사람들은 떠들 썩한 이곳을 좋아했다. 이곳, 황궁의 중앙 복도는 시내의 대로를 연상시킬 만큼 넓었 고, 많은 사람들이 복도의 한편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일행들이 있었으니, 뮤스와 드워프들이었다. 재상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짐을 푼 그 들은 크라이츠의 만류를 겨우 뿌리치며 황궁 구경을 나선 것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눈치에 구속받지 않는 특유의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레딘이 복도 가에 놓여있는 조각을 유심히 뜯어보더니 과장된 몸짓을 하며 탄성을 질 었다. "이야! 켈트형님 이것 정말 굉장하지 않수? 이렇게 정밀한 세공이라니..." 그의 옆으로 다가온 켈트 역시 손끝으로 조각의 표면을 만져 보며 말했다. "물론 가능하긴 하겠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 우리도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해." "형님 말이 맞소!" 계속해서 그 조각상의 주변을 맴돌던 켈트는 뭔가를 발견 한 듯이 턱을 쓸었다. "흠... 그런데 이 부분이 마무리가 덜 된 것 같군. 이런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 지. 레딘 망치와 정을 좀 주게!" "여기 있소 형님." 허리에 차고 있는 공구벨트에서 망치와 정을 꺼낸 레딘은 그것들을 켈트에게 건네주 었고, 양손에 침을 한번 씩 뱉은 켈트는 조각상에 정을 대고 그 뒷부분을 망치로 때 리며 깎아 내기 시작했다. -따앙! 따앙! 비록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시끄럽긴 했지만, 귀청을 울리는 정의 소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들조차도 시선을 돌리며 당황한 얼굴 을 하기 시작했다. "저..저.. 저들이 뭐 하는 것인가?" "빨리 근위병들을 부르게!" 과연 이곳이 한 국가의 황궁임이 틀림없었는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십 여명 의 근위병들이 호각을 불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삐익! 삐익! "저 놈들을 잡아라!" 장내가 소란스러워 지자 선조들의 실수를 보안하는 성스러운 행위를 하던 켈트가 의 아한 표정으로 레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인간들은 왜 저렇게 오크 똥 씹은 표정이지?" 레딘 역시 켈트와 같이 상황 정리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글세 나도 잘 모르겠수." 이 때, 나름대로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드워프인 브라이덴이 그들의 옆구리를 찌 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형님, 그리고 형제들. 아무래도 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도망부터 치고 봐야 겠는 걸? 잘못 하다간 감옥이라도 갈 분위기야..." "흠... 자네 말이 맞는 듯 하군." 그의 말에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 드워프들은 급히 연장을 챙겼고, 짧은 다리를 놀려 어디론가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뒤 늦게서야 그곳에 도착한 근위병들은 허리 춤에서 원거리대화기를 꺼내들었다. "드워프 세 명이 도주 중! 제 21 황실 근위병들은 주변을 봉쇄하라!" -치익!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원거리대화기를 다시 허리에 꽂은 근위병은 자신이 이끌고 온 부하들을 향해 행동지 시를 하기 시작했다. 드워프들과 근위병들의 술래잡기가 시작되는 모습을 본 뮤스는 이마에서 뺨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야만 했다. "쯔쯧... 어디서든 저런 말썽만 피우신다니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 뮤스는 그들에게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에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황궁에 오면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군... 벌써부터 따분한데 어쩌지?" 몇 마디의 혼잣말을 중얼거린 뮤스는 매끄럽게 깎인 대리석 바닥을 느끼며 발걸음이 가는 대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는데, 허리 옆에 차고있는 카인슈나이드가 그의 허벅 지를 일정한 박자로 때려 주어 따분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었다. 뮤스가 어떤 생각에 빠져 한 시간 정도를 걷다보니 지나치는 사람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해 이제는 아무도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야 아무런 생각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낮선 곳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라... 언제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지?" 혹시나 하고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봤지만 그의 눈이 미치는 곳에는 여러 갈래의 복도가 나있었기에, 어느 방향으로부터 걸어왔는지 기억해 내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길을 잃은 것이 확실해 지자 뮤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 참 큰일이군.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 추적장치라도 달아두고 나오는 건데... 휴우..." 한 숨을 내쉬어 보이긴 했지만, 천성적으로 이런 상황을 크게 걱정할 뮤스도 아니었 기에 어느새 그의 표정은 풀어져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건물이 다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니까 누군가 만나서 물어보 면 되겠지." 긍정인 생각으로 마음을 가볍게 한 그는 다시금 가던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 만 그것도 잠시, 복도의 왼쪽에 위치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우렁찬 기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었다. -하압! 합!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누가 수련이라도 하는 건가?" 아무 일 없이 지나치기에는 호기심이 너무나 왕성한 뮤스였기에 조금 열려있는 문틈 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2002-03-23 / 61.253.6.43] [대공학자] #104 그의 시선이 머문 곳, 한 중년의 사내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록 목검이긴 했 지만,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기는 진검을 방불케 했으며, 중년의 표정 역시 진지 하기 이를데 없었다. 뮤스가 호기심에 이끌려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을 때였다. 중년의 발걸음이 바뀌는가 싶더니, 눈을 깜짝할 사이 뮤스가 서있는 곳까지 이르고 있었다. "하앗!" "으윽!" 대경한 뮤스는 부지간에 뒷걸음질 쳤지만, 등을 막고 있는 딱딱한 문에 의해 그의 행 동은 제지 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던 뮤스는 눈동자를 조심 스럽게 내려 자신의 목젖에 닿아 있는 목검의 끝을 바라보았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중년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는 누군가?" 하지만 뮤스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선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 이것 미안하군... 수련을 할 때면 종종 정신을 못 차릴 때가 있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중년인이 그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목검을 치웠고, 이제서야 목이 자유로워짐을 느낀 뮤스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뮤스의 엄살을 보며 웃어보인 중년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수련을 몰래 훔쳐보는 것 역시 좋은 버릇은 아니지." "그 점은 죄송해요. 너무나 위압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후훗. 그렇게 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으니 괜찮네. 그건 그렇고 황궁에서 못 보던 얼 굴인데?" "네.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 왔으니까요." 뮤스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년은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 다. "하긴 하루에도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이상한 것이 아니지." 이제서야 분위기에 여유가 생긴 뮤스는 중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 볼 수 있었다. 중 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잘 발달된 근육이 땀에 젖은 튜닉위로 비쳤고, 키는 190셀 리 정도 되어 보통보다는 훨씬 큰 키였다. 이마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 기던 중년은 문득 뮤스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카인슈나이드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 다. "자네 그 검... 이상하군. 예식용 검에서 피 냄새가 맡아 지다니." 그의 눈길을 따라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본 뮤스는 코를 킁킁거리며 의아한 듯 물었 다. "네? 냄새라고요? 전 아무런 냄새도 못 맡겠는데요?" "허허! 느낌을 말하는 걸세. 매번 검을 닦을 것인데 설마 피 냄새가 정말 날 리가 없 지. 혹시 검의 이름이라도 있나?" "아... 저는 또... 이 검의 원래 이름은 슈나이드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카인슈나이 드로 바뀌었지만..." 별 의미 없이 던진 뮤스의 설명이었지만 막상 그것을 듣고 있던 중년은 크게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검이 섬광의 전사 도나엘의 검이란 말인가?" "알고 계시는 군요?" "정말 대단하군... 슈나이드라. 그런데 이제 카인슈나이드, '칼날이 없다' 라니?" 중년의 물음에 머리를 한번 긁적여 보인 뮤스는 손가락으로 카인슈나이드를 가볍게 두들기며 대답했다. "처음 이 검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날카로운 검 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뭉뚝하게 갈아 버렸죠." 그의 말을 듣던 중년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는지 턱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뮤스를 응시 했다. "하... 그..그것이 사실인가? 나에게 보여 줄 수 있겠나?" "뭐 그러죠." 흔쾌히 승낙을 한 뮤스는 카인슈나이드를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는데, 비록 날이 없다 고 해도, 무기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어요." 그에게서 카인슈나이드를 건네 받아 살펴보던 중년은 그것의 날을 직접 손가락으로 쓸어 내려 날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었고, 곧 나직한 탄성을 내뱉으며 안타까운 표정 을 짓기 시작했다. "흠... 희대의 명검 하나가 빛을 잃었구나... 그건 그렇고, 이 명검을 이빨을 갈아버 린 대단한 인물의 이름이나 들어볼까?" 가시가 담겨 있는 그의 은근한 말에 머쓱한 기분을 느낀 뮤스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뮤..뮤스 드라켄입니다. 라이델베르크에서 왔죠." "흠... 뮤스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뭐 어쨌건 나는 황실 근위대 대장을 맡고 있는 프라이어 할로먼이라고 하네." "와! 근위대 대장이면 굉장히 높으신 분이군요?" 어떻게 보면 순진하다고 할수도 있을 그의 행동에 피식 웃은 프라이어는 손에 들려있 던 카인슈나이드를 되돌려 주었다. "훗! 이곳에는 워낙 높으신 분들이 많으니 그리 높은 지위는 아니지... 자네는 이곳 에 어쩐 일로 왔는가?"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가비르 재상이 미리 일러준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음... 실크로스 교인가를 시공하기 위해서 이곳에 초청을 받았어요. 아직까지 자세 항 사항은 알지 못하지 만요." 그의 말을 듣던 프라이어는 뭔가가 떠오른 듯 손으로 이마를 두들기며 말했다. "아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젊은 원장. 뮤스 드라켄! 그게 자네였군!" "저를 알고 계시다니 놀랍군요." "후훗 자네의 명성은 정말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지. 세상 소식에 별로 밝은 것은 아 닌 나에게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더군." 프라이어의 계속 되는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하던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프라이어님 이제 그만 하시죠.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젊은 사람이 겸손할 줄도 아는군. 그나저나 실크로스 교를 시공한다면 골치 깨나 아 프겠구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냥 교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나 이것 참. 일반 교각이라면 굳이 공학원에까지 도움을 얻고자 했겠나?" "그렇다면 어떤?" 뮤스의 되물음에 소매로 흐르는 땀을 닦은 프라이어는 뮤스에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자 여기에 좀 앉게나." "아 감사합니다." 프라이어가 권한 의자는 여러 명이 간단하게 앉아서 쉴 수 있어 보였는데, 그 한 쪽 으로 물주전자와 컵, 수건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에 편안한 자세로 걸터앉은 뮤 스는 하던 말을 이었다. "실크로스 교에 대한 설명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뭐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테니 설명해 주도록 하지. 애초 실크로스 교는 제국 북쪽으 로 접하고 있는 쥬론 공국과의 왕래를 위해 만들 계획이었고, 강의 폭만 150멜리에 달하는 젠타카 강을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공사였네." "흠...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죠?" 고개를 한차례 끄덕인 프라이어는 의자에 올려진 수건으로 이마와 목에 남은 땀을 마 저 닦아 냈다. "물론 제국의 토목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가능 한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바로 강물 아래의 땅이었지. 바로 지진이 발생하는 횟수가 많다 는 것이야." 이제서야 대강 이해가 된 뮤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겠군요. 무려 150멜리나 되는 교각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지진에 의해 붕괴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흠..." "만약 이러한 부탁을 받더라도 해낼 자신이 있는가?"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글쎄요. 연구를 해봐야겠죠. 지금은 뾰족한 수가 없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아요." "후훗. 기대가 되는군." "기대는요 무슨... 그저 막연한 느낌일 뿐인걸요." 머리를 긁어 가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뮤스는 문득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짚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의 옆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이던 프라이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뭐 방법이 생기겠죠. 그럼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허헛. 그렇게 하게나.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뮤스는 가벼운 걸음으로 방밖으로 나갔고, 그 자리 에 남은 프라이어는 입에서 떼어낸 물 컵을 의자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 다. "후훗 재미있는 젊은이군. '검이 날카로워서 갈아버렸다' 라..." 그 때였다. 방금 전 방에서 나간 뮤스가 쑥스러운 표정의 얼굴을 문틈으로 들이밀었 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의아해 하는 프라이어에게 물었다. "저... 황궁 중앙 복도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죠?" 어처구니없는 그의 물음에 넋 나간 표정을 해야만 했던 프라이어는 겨우 원래의 안색 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왼쪽 복도를 따라서 무조건 가장 왼쪽 모서리로 돌면 된다네..." "헤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뮤스가 다시 한번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 곳을 응시하고 있던 프라이어는 실소를 터 트리고 말았다. "푸훗. 정말 재미있는 젊은이야..." [대공학자] #105 뮤스는 이후에도 몇 번의 실행 착오를 겪어야만 했고, 한 시간 정도나 헤매고 나서야 자신의 숙소 앞에 서게된 그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는 중이었다. "헤휴... 정말 남들 앞에서 고개도 못들 뻔했군. 명색이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녀석이 길이나 잃고 헤매다니 말이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기 위해 손을 움직일 때, 맞은편에 위치한 드워프들의 방 으로부터 화가 난 듯 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켈 트의 목소리였는데 그의 심정이라도 대변해 주는 듯이 격한 목소리였다. "흥! 아무튼 인간들이란 언제나 이런 식이지!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듯 떠들 기 좋아하고, 남들의 눈을 가리면 모든 것이 진실이 되는양 행동하는 꼴이라니!" "형님 말에 동감이하우... 선조들께서 공들여 세우신 이 황궁을 보고 있자니 서글픈 생각 마저 들고 있수!" 켈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블뤼안의 목소리 였는데, 그의 목소리 역시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드워프들의 대화를 잠시 엿듣던 뮤스는 그들의 방으로 들어가 무슨 일인 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인간들을 욕하고 있는 중에 들어가 봐야 별 좋은 소리 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생각을 바꾸며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다음날, 뮤스 일행의 아침식사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드워프들은 평소답지 않게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고, 그들의 굳어 있는 표정 역시 실내의 공기를 더욱 낮게 가라앉도록 만들고 있었다. 포크를 몇 번 움직여 보던 뮤스는 이 적응 못할 분 위기에 결국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들 분위기가 아침부터 왜 그렇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의 물음에 켈트는 마침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손에 들고있던 식기를 내 려놓으며 간단하고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공학원으로 돌아간다." 갑작스런 켈트의 말에 놀란 뮤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돌아간다뇨?" "들은 그대로야. 우리는 잠시라도 이곳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선조들의 손길이 느껴진다면서 좋아하시더니요!" 잠시 말이 없던 켈트는 크라이츠와 뮤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 다. "그랬었지. 하지만 이곳 인간들의 어이없는 행동들 때문에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졌다." 더욱 답답해진 뮤스는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는데, 켈트의 태도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 는 모습이었다. "답답하네! 좀 자세하게 설명 좀 해주세요." 고개를 내저은 켈트는 뮤스의 눈을 피하며 브라이덴을 바라보았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구먼. 자네가 대신 설명 좀 해주게." 켈트의 부탁을 받은 브라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형님. 어제 자네와 우리가 헤어졌을 때 기억 나는가?" "네 기억나고 말고요. 그 때 근위병들에게 잡히기라도 했나요? 그래서 기분이 상하신 건가요?" "아닐세. 우리 같이 노련한 드워프들이 그런 굼벵이들에게 쉽게 잡힐 리가 없잖나. 재빠르게 줄행랑을..." 말을 하던 브라이덴은 순간 자신의 얼굴 찔러오는 눈총에 입을 멈췄고, 켈트와 다른 드워프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 "뭐... 도망이라기 보다는 잠시 상황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고나 할까." 대충 좋은 쪽으로 말을 돌린 브라이덴은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흠! 흠! 어쨌든... 그 때 우리가 자리를 옮긴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었지. 일단은 어딘 줄 모르더라도 빨리 몸을 숨겨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 내부를 둘러보 던 우리는 정말 경악을 해야만 했다네." "음... 그곳에 뭐가 있었는데요?" "바로 그 안에는 부서진 골동품들이었지. 쉽게 말하자면 우리 선조들께서 피땀 흘려 만드신 유산들이 마치 쓰레기 마냥 바닦에 나뒹굴고 있었다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 어,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이 황궁에 닿았을 것이고, 아무리 우리 선조들이 만든 견고한 건물이라 하더라도 부서지기 마련이지... 그것까지는 우 리도 이해 할 수 있었다네. 하지만 그에 대한 인간들의 대처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 었어. 엉터리 같은 실력으로 대강 땜질 해버린 것은 기본이고, 부서진 석상들 대신 어디선가 조잡하기 이를데 없는 돌덩이를 가져다 세워 놓고, 우리 선조들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다네. '이것이 고대 드워프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지.' 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강이나마 상황 파악이 된 뮤스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저씨들의 기분은 이해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이곳을 떠나겠다니, 그게 말 이나 되나요? 안그래요 누님?" 크라이츠의 도움을 받고자한 뮤스는 그녀의 얼굴을 받으며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크 라이츠의 표정은 전혀 자신이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별 동요가 없었다. "뭐 나는 켈트씨와 형제 분들의 태도에 공감한단다. 인간들의 그런 습성은 나도 알고 있었고, 다른 종족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비난을 받고 있지." "하지만 누님! 아저씨들께서 돌아 가신다면 이곳의 일들은 어떻게 하죠?" 울상을 지은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크라이츠는 잠시 생각 하는 시늉을 하더니 어깨 를 으쓱거렸다. "만약 이곳에 계속 남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마음이 떠나 있는데 제대로 일할 생각이 있을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의 물음에 침묵하고 있던 켈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크라이츠는 다 시 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도록 하죠. 켈트씨와 형제 분들이 직접 이곳의 인간을 위해 일할 필요는 없지만 이곳을 떠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저 뮤스가 하는 일에 대해 조언 해주시는 것은 불만 없으시겠죠?" "흠...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곰곰히 생각을 해보던 드워프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제의에 수긍을 했고, 뮤스 역시 그들이 떠나지 않기로 했다는 것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자 드워프들은 애써 참고있던 식욕이 조금씩 기지개를 펴는지 다시 식기를 들었고, 순식 간에 분위기가 바뀌며 평소 같은 분위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빵 조각 하나를 입에 넣던 켈트는 아직까지 웃지 않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제길... 다른 것 못해도 요리 하나는 인간들이 잘한다니까... 이것만 아니더라도 당 장 여길 떠났을 거야." 조금씩 켈트의 화가 풀리는 듯 하자 안심한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곳의 요리장들에게 감사를 해야겠군요. 후훗." "그야 물론이지! 우리가 직접 도와주지 않는 것이 네게는 조금 미안하다만 우리를 이 해해 다오. 이 것도 많이 양보를 한 것이니까." "물론이죠. 남아 주셔서 감사해요." "그만큼 네가 더욱 많이 노력을 해야 하니 수고하거라. 우리는 괘씸한 이곳의 인간들 에게 복수를 하고 있을 테니!" 켈트의 말에 다시 한번 긴장한 뮤스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 라보는 불안한 눈빛을 느낀 켈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 걱정 말거라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휴우! 그럼 다행이고요. 그럼 어떻게 복수를 한다는 말이죠?" 뮤스의 물음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던 드워프들은 약속이라 도 한 듯 입을 모아 말했다. "이곳의 식량을 축낸다!" 그들이 농담 따먹기와 별반 다를바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혼자 편안하게 식사 를 하던 크라이츠가 입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부터 일이 바쁘니까 뮤스 너는 준비하고 있거라. 황제도 알현해야 할 것이 고, 지원 내역과, 대외적인 초청 목적에 따라 실크로스 교의 현장에도 나가봐야 할 테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곳의 귀족들에게 비웃음을 살 행동은 하지 말거라. 예를 들어 길을 잃는 다거나 하는..." "윽... 알겠어요." 가슴이 뜨끔거림을 느꼈기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뮤스였다. [대공학자] #106 (45) 황태자. 창 넘어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어두운 색상의 가구들은 밝 은 빛과 함께 어우러지며 이질적인 멋을 더했고, 방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물 들 역시 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햇살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방안의 인물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곳에 자리한 뮤스와 크라이츠, 그리고 이들을 직접 안 내해온 가비르 재상, 마지막으로 노년의 남성이었는데, 온몸에는 화려한 장신구들을 걸치고 있었고, 심성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듯 단단해 보이는 턱과 뒤로 잘 빗어 넘긴 백발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있던 분위기에서 그 노년의 남 성은 목이 타는지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흐음... 짐이 여러분들을 이곳에 초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가비르 재상에게 들었을 것이네. 솔직한 심정으로 여러분들이라고 해도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굳 건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야... 다만 조금의 기대나마 걸어 보고자 한 것일 뿐이지." '도이첸 제국 황제 카로이트 3세', 만인이 이 노년을 칭하는 이름이었다.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평화로운 시대를 만난 것이 복이었는지 아 무런 어려움 없이 도이첸 제국을 이끌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위업이 없는 황제 중의 한 명으로 역사서의 끝자락에 남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제의 말을 듣던 뮤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넘겨보며 재상에게 물었다. "재상각하. 여기에 쓰여있는 대로라면 황태자께서 황혈의 상자를 여는 곳과 하객들이 황인의 서를 보는 곳이 서로 다르군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가비르 재상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도면 위를 손으로 짚었다. "그렇습니다. 하객들은 객석에 위치해 황인의 서를 확인하게 되고, 황태자께서는 밀 실에서 황혈의 상자를 열게 되는 것이죠. 일반인들이 황실 혈통의 피를 보는 것이 예 로부터 금기시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턱을 한번 긁적인 뮤스는 재상의 손길이 지나간 도면을 한번 쓸어 보았다. "흠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겠군요. 일이 쉬워 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뭔가 방법이라도 있겠습니까?" "글쎄요... 아직 일 주일 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두고 봐야겠죠." 이렇다할 확신 없는 뮤스의 말을 듣던 가비르 재상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국가의 중대사임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기만 한 그의 태도가 황제와 재상에 게 알지 못할 믿음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어 뮤스의 말이 계속 되었다. "이 일도 중요하지만, 실크로스 교에 대한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만... 듣자하니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에 실크로스 교를 시공해야 한다던데..." 뮤스의 물음을 들은 가비르 재상은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흠... 그것은 어디서 들으셨죠?" "우연찮게 근위대 대장님을 만나나 대화를 하던 중 듣게 되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그 일 역시 쉽지 않음을 알고 계시겠군요. 실크로스 교 시공은 공국과 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서 계획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배를 사용해서 교류를 해왔지 만, 교류 양이 많아지다 보니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계속된 설명은 프라이어에게 들은 것에 비해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 만, 보다 세밀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예전에 비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동 안을 설명하던 가비르 재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허나 뮤스군은 실크로스 교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이들이야 진척없는 실크로스 교 시공에 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욱 중요 한 것이 태자전하의 대관식 아니겠습니까. 폐하와 제가 주변 인물들은 무마시키겠습 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아닙니다. 어차피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실크로스 교의 일도 제가 해보겠습니 다." "그렇지만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지..." 걱정스러운 듯한 가비르의 말에도 불구하고 뮤스는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는 듯 했 다. "대관식이 끝난 후에 실크로스 교 시공에 매달린다고 하더라도 별 무리가 없을 듯 합 니다. 그러니 제게 맡겨 주시죠." 뮤스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있던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둘 사이에 끼어 들었 다. "껄껄걸! 가비르 재상. 나는 뮤스 원장이 하겠다는데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구려. 그 렇지 않더라도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지 않소? 실크로스 교의 일까지 원장에게 맡겨 봅시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실크로스 교의 일 또한 뮤스군에게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황제까지 뮤스의 생각에 동의하고 나오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가비르 재상이었다. 흐뭇한 듯 미소를 짓던 황제는 뮤스를 응시하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 다. "뮤스 원장. 내 비록 오늘 자네를 처음 만났지만 자네의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든 다네." 그의 칭찬을 들은 뮤스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닐세. 자네 나이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도 없을 것일세. 그래서 말인데 우리 태자와 친분을 가져보면 어떻겠나? 나이 또한 자네와 비슷할 듯한데..." "제가 어찌 감히 태자전하와..." 어쩔 줄 몰라하는 뮤스의 모습을 본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허허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제국 최고의 유명인사 아닌가? 내일 있을 연회 에서 자네와 태자의 만남을 주선해 줄 테니 대화라도 한번 나눠 보게나." 제국의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까지 나오자 더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어진 뮤스는 크 라이츠의 얼굴을 한번 응시했고, 그녀 역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허허허! 좋네! 아주 좋아!" 넓은 방안으로 황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크라이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벽난로가 붙어있는 방안에 비해 복도는 상당히 싸늘했기에 그녀의 입에서는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 "으휴!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그 황제 녀석은 무슨 무게를 그렇게 잡고 난리야." 막무가내로 말하는 그녀를 본 뮤스는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도 없음을 확 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한다면 바로 처형 감이에요!" 뮤스의 말에 피식 웃은 크라이츠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훗. 누가 감히 이 크라이츠님을 처형 할 수 있단 말이니? 그건 그렇고 너 아까 이상 하더구나? 황제 앞에서 왜 그렇게 고분고분 한 거야?" "네? 당연히 황제니까 고분고분 해야죠!" "이 녀석아! 그럼 황제가 이 누님보다 더 대단하단 말이니?" "하긴 누님보다 대단할 수는 없죠...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습관 때문인가 봐요." "습관이라니?" 크라이츠의 되물음에 뮤스는 발걸음을 옮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후훗 제가 살던 조선에서는 군신의 관계가 철저하죠. 게다가 아버님께서 고위 관리 였으니 백치였던 제 몸에도 자연스럽게 베어 있는 건가봐요. 아참! 저도 물어 볼게 하나 있어요. 가비르 재상님은 제게 왜 존대를 하시죠?" "호호호호홋!" 자신의 물음에 크라이츠가 갑작스러운 웃음을 터트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호홋... 미안하구나 뮤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옛날 생각이라니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단다..." 크라이츠는 잠시 옛날의 회상에라도 빠진 듯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하더니 곧 입을 열 어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음... 36년 전이었지, 그 때 가비르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열혈 청년이었단다. 당시만 해도 대륙 최고의 명문인 스윈 제국의 대학을 우수 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두려울 것이 없을 때였으니까... 헌데, 그에게 숙명적인 라이 벌이 한 명 있단다. 투르코스 드레스덴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같은 대학교를 비슷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지금은 듀들란 제국의 재상으로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구나... 뭐 투르코스가 가비르를 따라 재상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근거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들이 나와 만난 때가 졸업을 하고 각자의 모국으로 돌아가던 때였는데, 너도 알다 시피 가비르는 나의 미모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지." 점점 자아도취 증세가 심해지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뮤스는 입을 삐죽 내밀었 다. "칫... 다 마법 덕분에 유지하는 미모면서..." "뭐라고! 이야기 듣기 싫다 이거냐?" "아... 아뇨!" "잔소리 말고 계속 들어보렴! 그런데 투르코스 역시 나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단 말씀 이야. 그렇지 않아도 라이벌인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 듦으로써 더욱 치열해 졌던 것이지. 이쯤 되다보니 서로의 능력도 비슷하고, 지위도 비슷했던 까닭에 우열을 가 리기가 힘들었던 거야. 결국 서로 의견을 맞춰 세 번의 내기를 하기로 했는데, 그 내 기의 결과물이 가비르 재상의 태도란다." 고개를 갸웃거린 뮤스는 팔짱을 끼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뭐 간단히 말하자면 내기에 질 때마다 자신의 개성을 하나씩 포기하기로 했는데, 거 만한 가비르는 내기에서 져버리자 누구에게나 존대를 하게 되었고, 항상 밝게 웃던 투르코스는 내기에서 짐으로써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지." "네?! 고작 그런 내기로 아직까지 저러고 산다는 말이예요?" 비록 오래 살았다고 말 할 수 없는 뮤스였지만,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도 없었기에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보통 인간들이면 절대 그런 짓을 못 하겠지만 둘 다 평범한 인물들은 아니지."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 크라이츠는 너무나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 녀의 말을 믿기로 한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세 번째 내기는 뭐였어요?" "뭐 이긴 자가 나를 차지하는 것이었지." "아! 그럼 가비르 재상님이 내기에서이기고 누님과 약혼을 한 것이군요!" "바로 정답이야." 간단히 대답한 크라이츠는 계속해서 가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대충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던 뮤스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공학자] #107 유리로 이루어진 반구형 천장 밖으로 맑은 하늘과 떠가는 구름이 보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와 화초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한 겨울에 무슨 꽃이 겠냐 하겠지만 이곳은 겨울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실내 정원이었기에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름드리 나무의 우거진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곳의 벤치에 앉아있던 뮤스는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넓은 종이가 올려진 나무판이 있었고, 설계도를 꾸미기 위한 용구들이 여기저 기 널려 있었다. 그 종류도 상당히 다양했기에 그중 한가지를 찾아내기가 힘들어 보 였지만 뮤스는 아무렇게나 어질러져있는 용구들의 위치를 다 외우고 있기라도 한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어 짚어내고 있었다. 끝이 뾰족한 흑연으로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적던 뮤스는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찡그렸 다. "흠...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외장이 철제라고 했으니 철의 성분상 흡수되는 일정한 양이 있을 테고...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흡수하는 양이 더 많거나 적은 물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뮤스는 그 뒷부분이 막히기라도 않는지 손으로 머리를 두들기며 흑연을 살며시 입에 물었다. "흠... 만에 하나 철과 같은 흡수량을 가지고 있다면? 쳇. 막혀 버렸군. 에라 모르겠 다... 조금 쉬었다가 하자!" 혀를 한번 찬 뮤스가 손에든 흑연을 등뒤로 던지며 웅크려있던 몸을 활짝 펴자 관절 사이에서 미미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신이 홀가분해진 그는 실내 정원을 한번 살펴보았는데, 따분하기 그지없는 궁내였기 때문에 몇몇의 사람만이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을 뿐, 이 곳에서 쉬고 있는 사람은 뮤스 뿐이었다. "정말 이곳은 따분해 죽겠군. 드워프 아저씨들은 방에서 배만 채우고 있고, 크라이츠 누님은 가비르 재상님과 놀러만 다니고, 결국 일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잖아? 하 긴... 크라이츠 누님과 드워프 아저씨들은 사람도 아니니..." 일단 일거리에서 손을 한번 놓자 다시 잡기 힘들어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던가? 뮤스 역시 그에 속했기에 몸은 자연스럽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 각의 비중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아... 조선에 있을 때는 어떻게 혼자서도 그렇게 잘 놀았는지 모르겠군. 저런 막대 기 하나만 있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 수 있었는데 말이야."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약 15셀리 정도의 작은 막대가 있었다. 그것을 본 뮤스는 빙그레 웃었다. "하핫. 오랜만에 자치기나 해볼까? 여러 명이 하면 재미있겠지만 혼자니 어쩔 수 없 지 뭐." 드디어 할 것을 찾아낸 뮤스는 그 막대를 주워들며 또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 했다. "흠 긴 막대가 필요한데 어디 없나?" 한참을 둘러보던 뮤스는 마땅한 긴 막대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쩝 이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군.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고 했나?" 체념한 뮤스가 발걸음을 옮겨 벤치로 가려고 할 때, 그의 종아리를 때리는 물체가 느 껴졌는데 눈을 돌려보니 다름 아닌 카인슈나이드였다. 그것을 본 뮤스는 무슨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지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서둘러 카인슈나이드를 칼집에서 빼내 었다. "하하핫! 이 정도면 충분하겠는걸? 조금 길긴 하지만 가벼우니 큰 무리는 없겠어." 또 한번 수난을 당할 조짐이 보이는 카인슈나이드였다. 프라이어 대장의 일과는 주로 검과 함께 한다. 아침에 기상하는 즉시 검을 손질하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대원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거나 훈련을 시킨다. 또, 오후가 되면 세 시간 정도의 개인 수련 시간을 가지는데, 지금이 바로 하루중 개인 수련 시간이 끝나는 때였다.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손위에 소중하게 들려있는 반 토막의 검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네 번째 꺾였는가? 그럭저럭 쓸만하다고 생각하던 녀석이었는데, 오늘 또 이렇 게 보내게 되다니..." 씁쓸한 목소리를 내뱉은 그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실내 정원으 로 발을 내 딛었다. -까강! 그 때 정원의 한 쪽으로부터 금속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음이 맑기 이를 데 없었기에 프라이어 대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 다. 아름드리 나무 뒤, 한 청년이 진지한 얼굴을 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햇빛에 검의 날이 번쩍이는 순간 그것의 광채가 현란하게 일어나며 주변을 뒤덮었고, 어느새 격 중 된 나무막대는 잘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프라이어의 생각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는데, 이 청년이 바로 자치기를 하고 있던 뮤스였 다. 그의 모습을 본 프라이어 대장은 가슴 끝에서 치미는 이유 모를 분노에 몸을 떨 어야만 했다. "으... 저 청년은 명검을 금속 막대기로 만들어 버린..." 아무래도 자신의 애검이 부러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뮤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예 전의 온화하던 그의 성격은 온데간데없고, 이글거리는 불꽃이 검은 눈동자 속에서 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느끼지 못 한 뮤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쳇. 정말 예전만 못 하군. 동시에 6개의 나무막대를 쳐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저 하나를 제대로 못 보낸다니 말이야..." 불만을 토로한 그는 나무막대가 날아간 곳으로 달려가 그것을 주워 들며 다시 해볼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해내야 될 텐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 뮤스가 바라보고 서있는 벽에는 동전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있 었다. 잠시 정신을 집중한 그는 카인슈나이드를 휘둘러 나무 막대를 때려냈다. 그러 자 막대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벽의 구멍을 향해 날아갔고, 막대와 구멍의 거리 가 짧아질수록 지켜보던 프라이어의 눈은 커져만 갔다. 정녕 한순간이라고 말할 정도 의 짧은 시간이 지나자 벽의 구멍에는 나무막대가 보기 좋게 박혀있었고, 뮤스는 쾌 재를 부르며 정원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야호! 뮤스의 실력이 죽지는 않았구나!" 이 놀라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프라이어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비록 그 것이 그저 막대기를 쳐내는 단순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뮤스가 해낸 일은 단순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던 프라이어는 나 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타격 점을 정확히 노리는 집중력과 타격을 위한 힘의 조절, 물체의 반응까지 예측해내는 감각... 대단한 청년이군." 그가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이곳 저곳을 뛰어 다니던 뮤스는 프라이어를 발견했기에 민망한 얼굴을 하며 뛰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헛! 프..프라이어 대장님. 잘 지내셨나요?" 미소를 지어 보인 프라이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헛. 나야 별일이 있겠는가? 얼마전 정체 모를 드워프들이 난동을 피워서 골치가 조금 아팠지만, 이제 잠잠해 져서 괜찮아 졌다네." 드워프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등허리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뮤스는 어색한 웃 음을 띄웠다. "하... 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자네는 여기서 뭘 하던 중인가?" "오늘부터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서 잠시 쉬고 있던 중 이었어요." "아 실크로스 교 말이군. 그래, 그것이 가능하겠나?" "뭐 해봐야 알겠지만, 불가능 할 것 같지는 않아요." "후훗, 이곳의 사람들을 자네의 실력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어 보게나!" 뮤스의 대답에 가볍게 웃어 보이던 프라이어 대장은 뮤스의 손에 들려있는 카인슈나 이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전 자네가 한 것이 무엇이었나? 실력이 굉장하던데, 검술이라도 익히는 것인가?" 자신의 손에 들린 카인슈나이드와 프라이어 대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뮤스는 고개 를 저었다. "하하. 이건 그냥 놀이에요. 긴 막대로 작은 막대를 때려서 멀리 보내는 것이죠. 헌 데 이곳에는 저 혼자 뿐이니 이렇게 놀 수 밖에요. 겨우 하루를 이곳에서 보냈지만 여간 심심한 것이 아니거든요." "허허...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검 슈나이드가 긴 막대 취급을 받다니..."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말을 내뱉던 그는 문득 어떤 생각이 났는지 말을 이었 다. "아! 그렇지... 자네 심심하다면 나에게 검술을 한번 배워볼 의향이 없나?" "예? 검술요?" "뭘 그렇게 놀라는가?"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살상을 위한 무기는 다루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의 말에 고개를 내저은 프라이어 대장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후훗. 자네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네. 검술이란 살상무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자신의 몸을 지키고,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로 마음이 없어요. 지금도 제 몸을 지킬 만큼의 능력은 되니까 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뮤스를 바라보던 프라이어 대장은 의외인 듯한 표정을 띄우며 되물었다. "자네는 그럼 다른 격투기를 배우기라도 했나?" "그냥 혼자 익힌 것이 있어요. 하지만 남과 싸울 일이 없어서 실전에서 활용을 해보 지는 못했고요." "호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어떤?" "나와 맨손으로 대련을 해서 내가 이긴다면 자네가 나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이고 그 반대라면 강요하지 않도록 하지!" [대공학자] #108 조금은 억지성이 있는 제의였지만, 뮤스 역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 고, 그러한 제의를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피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장님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할게요. 그럼 어디서 하면 좋을까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프라이어 대장은 손에 들려있던 반 토막의 검을 땅위에 내려놓 으며 말했다. "이곳이 어떻겠나? 땅도 흙이라 괜찮고, 사람들도 없는 듯하니..." 그의 눈길을 따라 함께 주변을 살펴보던 뮤스 역시 괜찮다 생각했는지 카인슈나이드 와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몸에서 풀어냈다. "괜찮군요. 그럼 규칙은 어떻게 하죠?" 뮤스의 물음에 팔짱을 낀 프라이어 대장은 생각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것으로 하지. 물론 먼저 쓰러진 다는 것이 정 신을 잃게 만든다는 것은 아니네. 실수로 발이 엉켜 넘어 지더라도 지게 되는 것이 야. 이것은 내기이지 상대방을 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나?" 마음에 드는 그의 제의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동의해요!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좋아 시작하세." 한마디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대련을 준비하기 위해 일정한 간격만큼 떨어졌고, 서 로를 마주보며 가벼운 목례를 했다. 뮤스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소매를 접으며 상대방 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을 받고 있는 프라이어 대장의 표정은 이것이 남의 일이라도 되는 듯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뮤스는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라 여기기로 한 뮤스는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프라이어 대장 역시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의 손 은 뒷짐을 지고 있어 전혀 대련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네가 먼저 공격을 하게나." 프라이어 대장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또 한번 찝찝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런 생각을 머 리에서 지워버린 뮤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이내 긴장 감이 극에 달하자 기합과 함께 재빠른 발놀림으로 프라이어 대장의 바로 앞까지 뛰어 들었고, 약간 몸을 숙이는 듯 하더니 주먹을 위로 뻗으며 그의 턱을 노렸다. "하앗!" 하지만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프라이어 대장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그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주먹이 허공을 때린 것을 느낀 뮤스는 들어올린 손 을 아래로 내려치며 공격방향을 바꾸었는데, 이번 역시 프라이어 대장은 옆으로 물러 나며 공격을 피해 냈다. "후훗. 너무 뻔한 공격이군. 이렇게 해서야 내 몸을 건들기라도 하겠는가?" "두고 보시라고요!" 건들거리는 말을 들은 뮤스는 은근히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단순한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생각을 바꾼 뮤스는 뇌동체술법 특유의 밟기를 해보이며 프라 이어 대장과의 간격을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뮤스의 모습을 보던 프라이어 대장은 처음보는 그의 동장에 호기심이 일렁이는 눈빛을 보냈는데, 큰 동작으로 손을 휘젖는 것과, 발의 불규칙한 움직임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의 동작을 분석해본 프라이어 대장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라질 공격을 예측했는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며 왼손으로는 턱을 가렸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며 들어올렸다. 뮤스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한 프라이어 대장은 호기롭게 외쳤다. "후훗.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들어와 보게!" "지금 공격합니다! 각오 단단히 하시죠." 기합이 잔뜩 들어간 그의 경고를 들은 프라이어 대장은 긴장을 하기는커녕 대뜸 취하 고 있던 자세를 풀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완전 초보군. 공격해올 것을 미리 말하면 어떻게 하나? 적이 대비를 하기 전 에 공격을 해야 성공 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네..네? 저... 그게." 프라이어 대장의 지적이 가슴에 와 닫는 뮤스였다. 허나, 지금의 상황은 그의 지적에 감사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집중력을 잃게된 그의 발이 엉키는 듯 했기 때 문이었다. "으윽!" 이러한 상황은 발 동작이 큰 뇌동체술법을 펼칠 때 집중이 흩어지게 되면 자주 생기 는 일로써, 뇌동체술법을 완전하게 몸에 익지 않은 상태의 뮤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프라이어 대장이 허점을 놓칠 리는 없었기에 재빨리 몸을 낮 추며 그가 땅을 딛고있던 다리를 후려 찼다. -퍼퍽! 비록 중년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청년 못지 않은 힘이 실려있었는데, 정확히 허점을 격타 당한 뮤스는 힘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쓰러진 몸을 재빨리 뒤집은 뮤스는 마치 뭐라도 씹은 양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으윽! 이런게 어디 있어요? 방심한 사이에 다리를 걸다니!" 불만을 토로한 뮤스는 옷이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제부터는 절대 당하지 않을 테니 각오하세요!" 그의 외침을 듣고만 있던 프라이어 대장은 예의 느긋한 모습으로 혀를 차며 대꾸했 다. "쯔쯧...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기억력이 나쁜가? 먼저 쓰러진 사람이 지는 것이었 으니, 벌써 자네가 진 것이야." "그런 것이 어디...!" 뭐라고 변명을 하려 했지만, 과연 그의 말대로 약속을 했던 것이 떠올랐기에 패배를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제가 졌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하하! 그럼, 그럼! 사나이라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지! 그럼 저녁 식사가 끝나면 처음 우리가 만났던 장소로 오게. 카인슈나이드를 가지고 오는 것은 잊지 말게나."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그렇게 하죠." "그럼 나중에 보세!" 짧은 인사말을 남긴 프라이어 대장은 땅에 내려놓은 반토막의 검을 주워들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뮤스는 뭔가 속았 다는 기분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군.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에휴... 결국 검술을 배워야 하 는 건가?" 그의 옆에 내려놓았던 카인슈나이드는 유난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살짝 깔리기 시작할 무렵,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뮤스는 간편한 옷차림 으로 방을 나섰다. 그의 허리춤에는 카인슈나이드가 매달려 있었는데, 자체의 무게보 다 검 집의 무게가 더 나갔기에 카인슈나이드만 들고 다녔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궁중에서 검만을 들고 다닌 다면 큰 소요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나 지금이나 여전히 복잡하게 느껴지는 복도들을 지나던 뮤스는 눈에 익은 주변의 모습에 거의 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뮤스는 닫혀 져있는 문 앞에 서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음? 아직 안 오셨나, 문이 닫혀있네?" 몇 마디의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닫혀진 문안으로부터 기합소리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하얏! 핫! 핫! 그 소리를 들은 뮤스는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는데, 프라이어 대장의 목소리라고 하기 에는 너무나 앳띈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궁금함에 문을 살짝 열어 방안을 둘러보던 뮤스는 나이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아 보이는 청년이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상당히 유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목검을 휘두르기 에도 벅차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검술에 대해 문외한인 뮤스가 보더라도 능숙하 지 못한 검술 실력이 한눈에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비웃을 처지도 아니었기에 그 저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청년이 검술 수련에 몰입하기를 이 십여 분, 돌연 움직임 을 멈춘 그는 힘겨운 듯 손에 들려있던 목검으로 땅을 짚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후우... 이렇게 허약한 나의 몸이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진검도 아닌 목검 조차 몇 번 휘두르지 못하는 몸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이마로 흐르는 땀을 훔쳐낸 청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조금만 나에게 힘이 있었더라면..." 청년의 탄식을 듣고있던 뮤스는 분위기가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감을 느낄 수 있었는 데, 본의 아니게 청년의 고민을 듣게 되자 뮤스 역시 그의 분위기에 이끌려 가게 된 것이었다. 뮤스가 애처로운 눈빛을 하며 감상적인 기분에 빠지기 시작할 때였다. 등 뒤로부터 누군가가 다가옴을 느꼈는데,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던 뮤스는 갑작스럽게 허리를 찔러오는 상대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 소리에 수련실에서 고민에 빠져있던 청년이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뮤스의 등뒤 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영, 즉 프라이어 대장 역시 조금 놀랐는지 엉거주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헛! 거 참! 젊은 사람이 이렇게 놀라다니.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뭘 하고있던 것 인가?" 무안해진 뮤스는 얼굴을 붉혔다. "지..지금 막 와서 대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죠! 왜..왜 이렇게 늦으신 거예요?" 당황한 모습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뮤스의 행동에 가볍게 웃은 프라이어는 가볍게 그 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당황하는 겐가? 먼저 왔으면 태자전하와 인사라도 나누고 있을 것이지..." 태자전하라는 말에 깜짝놀란 뮤스는 눈을 크게 뜨며 수련실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을 응시했다. "태...태자전화라고요? 저 청년... 아니지 저 분께서요?" "자네 오늘 자주 당황하는군. 평소에도 많이 놀라는 편인가? 그럼 몸에 안 좋을 텐 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걱정의 말을 전한 프라이어는 뮤스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자 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고, 뮤스 역시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 다. "태자전하 오늘도 일찍 나오셨군요?" 그의 인사에 놀라고 있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운 태자는 이내 미소를 띄우며 프라이어 대장의 인사를 받았다. "네. 배우는 입장에서 먼저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옆에 있는 분 은?" 잠시 자신의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뮤스를 바라본 프라이어 대장은 빙그 레 웃으며 대답했다. "태자전하께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공학원이라는..."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뭇 놀란 목소리의 물음이었다. [대공학자] #109 뮤스와 태자가 서로의 소개를 하며 인사를 마치자 프라이어 대장은 미리 준비해온 수 건을 한 장 뮤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나중에 쓸 일이 있으니 허리춤에 걸어 두고, 검을 한번 꺼내 보게." 뮤스에게 간단한 지시를 한 후, 고개를 돌려 태자의 얼굴을 바라 본 그는 공손한 말 투로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몸이 약하신 만큼 무리를 하시면 안되시니, 잠시 쉬도록 하시지요. " 그의 말을 듣던 태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프라이어 대장님. 저 역시 방금 전에 왔기 때문에 아직 무리라고 말할 때 가 아닙니다. 그러니 뮤스군과 함께 수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프라이어 대장이 무엇이라 말을 하려 했지만, 태자의 굳은 눈빛을 봤기에 더 이상 만 류할 수 없었다. "흠... 좋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무리가 가신다고 느끼신다면 수련을 중단해 주시 죠." "하하! 물론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표정이 밝아진 태자는 바닥을 짚고 있던 목검을 들어올리며 힘차게 대답하고 있었다. 태자와 이야기를 마친 프라이어 대장은 눈을 깜빡이며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뮤 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 "네 그렇게 하죠."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을 잘 듣게나. 약간의 억지로 검술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렇다 고 대충 배울 생각을 말게." "그 점은 걱정 마세요. 어차피 하게 된 것이니 열심히 해야죠." "아주 좋은 자세야. 일단 검술의 기본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네, 첫 번 째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체력이라 할 수 있겠고, 두 번 째는 스텝. 즉, 발의 움직임이지. 자네 역 시 특유한 스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검술에는 맞지 않으니 나에게 새로 배우도 록 하게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의 효율적인 움직임일세. 세상에는 수많은 검술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검을 움직여 상 대를 공격하거나 방어를 하느냐 하는 것이네. 여기 까지 이해가 가는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내용을 정리해본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네! 다른 것들은 차차 나에게 배우면 될 것이니, 우선 자네의 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니 근력 시험을 해보도록 하지." 잠시 말을 멈춘 프라이어 대장은 벽에 기대어져 있는 굵직한 강목을 주워 들었다. 그 것은 전체적으로 어른 팔뚝 정도의 굵기였는데, 밝은 갈색을 띄고 있었고, 다른 부분 보다 얇기에 손잡이 임을 알 수 있던 아랫부분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서 인지 더욱 진한 갈색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손에든 강목의 손잡이 부분을 뮤스에게 내민 프라이 어는 수련실의 중앙을 가리켰다. "자 이 수련봉을 들고 저 곳에 서보게." 수련봉을 건네받고서 수련실의 중앙으로 걸어간 뮤스는 손에 들고 있는 수련봉을 이 리저리 돌려보았다. 눈으로 볼 때와는 다르게 묵직한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프라이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인가요?" "그렇지! 그런 다음 그것을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부터 큰 반원을 그리며 내려치는 것이야. 약 200회 정도에서 300회 정도면 괜찮은 정도이고, 400회 이상을 해낸다면 최상의 체력을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시작해 보게나." 고개를 끄덕인 후 손에 침을 뱉은 뮤스는 수련봉의 손잡이를 문질러 미끌어지지 않도 록 잡았다. 이어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뮤스는 아래로 힘차게 휘둘렀는데, 수련 봉을 내려치는 힘과 그것의 무게가 합쳐졌기에 팔로 전해오는 무게가 만만한 것이 아 니었다. "으윽!" 아래로 떨어지는 수련봉을 멈추기 위해 상당한 힘을 써야만 했던 뮤스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이거 200회가 쉬운 일이 아니겠는걸?" 이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본격적인 체력시험에 앞서 조심스럽 게 어깨를 풀었고, 수련봉을 고쳐 잡으며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두꺼운 수련봉이 허공 사이로 선을 그을 때마다 공기 가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빠르기와 움직임을 보아 기운은 충분한 듯 싶었고, 뮤스의 표정 역시 아직 여유가 있 어 보였다. 이런 그의 모습을 프라이어 대장 외에도 주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체력에 대해 부러움이 가득 찬 시선을 보내고 있는 태자였다. -붕! 붕! 어느 덧 십 여 분이 흘러, 백 회를 넘어서게 되자 그의 목소리와 숨소리는 점차 거칠 어지기 시작했다. "구십 여덟, 구십 아홉, 백!, 백 하나...헉! 헉!" 흔들리기 시작하는 뮤스의 모습을 팔짱을 끼고서 바라보던 프라이어 대장은 이제 잠 시 후면 끝날 것이라 예감했는지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곧, 뮤스가 체력 시험을 하 던 곳으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이제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한 프라이어는 눈조차 뜨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후훗, 이제 자네가 가장 먼저 해야할 훈련이 무엇인 줄 알았겠지?" 허나, 자신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의아해진 프라이어는 살며시 눈 을 떠보았다. 그와 동시에 크게 놀라야만 했는데, 얇게 떠진 눈 커플 사이로 엄청난 속도로 수련봉을 휘두르고 있는 뮤스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빨랐던지 움직이는 수련봉이 하나의 면으로 보일 정도였다. -붕! 붕! 붕! 절로 입이 벌어진 프라이어 대장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인간의 몸으로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옆에서 수련을 하던 태자 역시 크게 놀랐는지 프라이어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모 습이었다. "저... 저 사람이 정녕 뮤스군 인가요?" 태자가 두 눈을 비비며 믿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태연한 기색을 떠올리며 동 작을 멈춘 뮤스는 손에든 수련봉을 프라이어 대장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후우! 500회 했으니 체력은 통과 한 것인가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프라이어는 아직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련봉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그럴리는 없었지만 자신의 손에 들린 수련봉이 수수깡으로 만든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련봉은 틀림없이 나무로 만들어 진 진짜였다. 문득 그것의 손잡이를 만져보던 프라이어 대장은 이상함을 느꼈는데, 손바닥을 펴보자 검은 재가 묻어나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프라이어 대장이 물 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설명 좀 해주게!" 격앙된 그의 말에 흠칫한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헤... 처음 보셔서 조금 놀라셨을 수도 있지만, 원리를 알게 된다면 별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제 몸에 존재하고 있는 마나를 근육으로 흘려 근육을 강화시키는 작 용을 한 것이니까요." "마나를 근육으로 흘린다고?! 그렇다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말하는 것인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이 뭐죠?" "흠... 소드마스터라고 함은 자네처럼 마나를 검에 주입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것 이지. 하지만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은 극히 어렵기에 자네가 가지고 있는 카인슈나이 드의 전 주인을 비롯해 극히 일부분의 인물들만이 그러한 경지에 올랐었다네. 게다가 평화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자 무도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점차 줄기 시작했고, 지 금에 와서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지."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는 대장님께서 말씀하신 소드마스터인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특수한 체질 때문에 물리적인 힘만 강하게 할 수 있죠." 뮤스의 설명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프라이어 대장의 표정이 가라앉고 있었다. "흠... 그렇다면 힘을 얼마나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을 정도이죠. 이것은 검술이나 여타의 물리 적인 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힘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되는 마나의 양이 대부분이죠.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을 지속 할 수도 없는데, 길어 봐야 한시간 정도가 고작이에요. 그 이상이 된다면 기진맥진해져 버리거든요." 그들의 대화를 한 편에서 듣고있던 태자는 뮤스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 데, 마나를 사용하여 부족한 힘을 보충 할 수 있다는 점이 몸이 허약한 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뮤스군! 그렇다면 마나를 사용해서 힘을 보충한다는 것이 누구나 가능한 일인가요?" "흠...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운 좋게 남달리 많은 양의 마나를 몸에 지니게 되었 고, 특수 한 경험에 의해 마나를 물리적인 힘으로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만, 태자전하와 같이 일반적인 신체로는 불가능 한 일이죠." "아... 그렇군요." 부정적인 뮤스의 말에 얼굴이 어두워진 태자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대공학자] #110 태자의 얼굴을 살피던 프라이어는 주의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 대로라면 자네는 기초 체력훈련을 받아야 하겠구먼, 계속 해서 마나를 사 용 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한시간 정도라면 무리가 있다네." 태자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요즘 같은 평화시기에 태자 전하께서 직 접 전장에 나갈 일은 없을 테니, 그저 정신 수련으로 생각하셔도 무방 할 것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계속 해서 수련을 할 테니 뮤스군에게 지도를 하시죠. " 아쉬움이 많이 남는 표정을 지은 태자는 몸을 돌렸고, 그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듯 고개를 가로 저은 프라이어는 뮤스를 바라보았다. "자. 저쪽으로 함께 가보세." 프라이어가 가리킨 곳은 방의 건너편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의 기구들이 자리하 고 있었는데, 주로 철제였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 기구들은 뭘 하는데 쓰는 것이죠?" "보통의 움직임으로는 근육들을 균형적으로 발달시킬 수 없는데, 그래서 전신의 근육 들을 고루 발달시키기 위해 내가 고안해 낸 것들이지." 말을 마친 그는 그 중 하나로 다가가 등 받침에 몸을 뉘이며 말을 이었다. "대개는 이런 식으로 도르래의 반대편에 매달려 있는 무게 추들을 반복적으로 끌어올 리며 운동을 하게 된다네. 이것은 가슴 근육을 발달 시켜 주는 기구인데 이렇게 하는 것일 세."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고정시킨 프라이어는 자신의 가슴 위에 매달려있는 가로 막 대를 양손으로 미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는 큰 숨을 들이쉬며 잡아 당겼는데, 근육들이 요란하게 떨리며 굵직한 금속 무게 추들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 다. "후우... 하나... 둘... 셋..." 그렇게 십여 회 반복하던 프라이어는 천천히 손잡이를 놓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런 식으로 하루에 10번 씩 3회 반복하면 된다네. 보름만 한다면 전신에 근육이 붙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야."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프라이어가 시범을 보인 기구 주변에 위치한 다른 기구들을 하나씩 뜯어보았고, 그것만으로도 대강 쓰임새를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프라이어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것들은 시간이 나는 대로하면 되고, 오늘은 첫날이니 간단한 스텝을 배워보도록 하지." 손잡이에 묻은 땀을 닦아내고 자리를 정리한 프라이어는 태자가 수련을 하고 있는 곳 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어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목검을 하자 주워들며 뮤스를 향했 다. "일단 검술이라는 것이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자네가 언제까지나 궁 에 머물 사람이 아니니 기초적인 것들과 중요한 것들을 빠른 시일 내에 가르쳐 주도 록 하겠네. 자네는 앞으로 삼일 동안 이 스텝만 연습하도록 하게. 비록 어려운 것은 없겠지만, 어떤 자세로 이동을 하더라도 발의 움직임이 엉키지 않을 정도로 연습을 해야하니 꾸준히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을 것이야. 자 나를 보고 따라 해보게나." 목검의 양끝을 잡은 그는 등뒤로 돌려 허리에 대었다. 이는 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 도록 함과 동시에 상체를 고정시켜 바른 자세를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어 천 천히 한쪽 발로 다른 한쪽의 발을 밀며 움직이는 시범을 보였는데, 앞쪽에 위치한 발 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아 고요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은 하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네. 몸이 많이 움직일수록 상대에게 많은 약점을 허용하게 되고, 몸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불안정한 위치가 되 어 버리는 것이야. 자네도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따라해 보게나." "그렇게 하는 것이 다인가요? 별로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데..." 무료하게 보일 정도의 이 단순한 움직임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뮤스는 프라이어 가 한 것과 같이 목검을 하나 주워들어 허리를 고정시켰다. 그러한 자세가 어색하기 라도 한지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의 모습을 둘러본 그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 다. 뒤쪽에 있는 발을 서서히 밀어 앞쪽에 위치한 발을 이동시켰으며, 다시 발을 바 꾸어 뒤쪽의 발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하기를 십 여분 허리를 고정시킨 목검 과 등 사이에서 땀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무료해 보이는 겉보기와는 달리 전신 을 경직시킨 채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뮤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프라이어는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체가 너무 많이 움직이는군! 조금 더 부드럽게 할 수 없겠나? 다리가 너무 뻗뻗 해!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해봐! 조금 더! 조금 더!" 프라이어의 지시대로 조금씩 고쳐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몸의 움직임은 점점 더 불편 해졌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30분도 채 우지 못한 뮤스는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허리를 고정시키고 있던 목검을 풀며 짜 증을 냈다. "대체 감이 안 잡히네요! 어떻게 하는게 잘 되는 거예요?" "후훗 자네 지금하고 있는 스텝이 편한가?" "아뇨! 절대 안 편해요!" "그렇다면 그 자세가 편해지면 잘 되는 것이지. 계속하게나 아직 30분도 못했는데 벌 써 쉬면 쓰겠나?" "쳇! 대장님께 속아 넘어 가는게 아니었어!" 한번 투덜거린 뮤스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지루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수련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46) 카인슈나이드의 최후 침대에 몸을 뉘인 뮤스는 손을 높이 뻗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젖어있는 수건이 쥐여있었는데, 물을 짜내듯 잡고서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고작 이런 것이 검술 수련에 도움을 준다는 거야?" 투덜거린 뮤스는 검술 수련을 마칠 때 즈음 프라이어가 해준 말을 회상하기 시작했 다. '이제 방으로 돌아간다면, 자네에게 먼저 줬었던 수건을 물에 적신 후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물을 짜내게. 처음에는 부드럽게, 마지막에는 짧게 힘을 주는 식으로 말이 야... 이것은 타격 점을 느끼는데 꼭 필요한 수련이지. 사람의 뼈는 생각보다 단단하 기 때문에 웬만한 힘으로는 한번에 베어내기 힘들다네. 굉장한 괴력의 소유자라면 모 를까, 보통의 신체를 가진 자가 적을 벤다면 살은 벨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뼈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는 힘들어지지. 그렇기에 검을 익히는 사 람들은 이런 수련을 하는데, 부드럽게 휘두르다가 적의 몸에 닿는 순간 짧게 힘을 주 어 최대의 힘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네...' 잠시 프라이어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던 뮤스는 문득 자신이 왜 남을 베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 대로라면 자신은 정신 수양을 위해 검술을 배우는 것이었 기에 결코 남을 상해하거나 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까지 생각 이 닿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젖은 수건을 방의 한구석으로 던졌다. "이제 대관식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물수건이나 짜고 있을 시간이 없지!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뮤스는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놓여있는 도면을 펼쳤다. -촤아아악! 기분 좋은 종이소리가 귀를 간지럽히자 가볍게 웃은 그는 의자를 빼내며 자리에 앉았 고, 끝이 잘 손질된 흑연을 손위에서 한바퀴 돌리며 도면을 응시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짤막한 한마디 말을 신호로 그의 손은 도면 위에서 우아한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 했다. "방출량의 조절을 한다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고, 흡수량이 같지 않기를 믿는 수밖 에... 흡수량이 같은 물질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까." 몇 마디의 중얼거림과 함께 흑연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기이한 도형들이 그려져 나가 기 시작했고, 그 도형들의 양옆으로는 복잡한 수식들이 하나, 둘 자리 매김 했다. 점 차 자아를 망각한 듯 건조한 표정으로 변해가는 뮤스는 그만큼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본래의 표정이 돌아오며 손은 천천히 멈추고 있었는데, 등뒤로부터 기이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의 존재감을 느끼며 눈을 살짝 옆으로 돌린 뮤스는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 다. "으악!" "녀석 뭘 그렇게 놀라냐? " 뮤스가 놀란 가슴을 부둥켜안고 있을 때 굵직하고 털털한 목소리가 태연히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바로 켈트의 목소리였다. 토끼눈을 하고서 그의 얼굴을 확인한 뮤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셨으면 인기척이라도 냈어야 할거 아니에요! 갑자기 뒤에서 다가오니까 놀랄 수밖 에 없죠!" "허! 이 녀석 보게나. 벌써 아침식사 하라고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없길래 들어 와 봤더니 완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작업을 하고 있더구나!" "네? 아침이라고요?" 뮤스는 믿기지 않는 그의 말에 창을 바라보았는데, 과연 커튼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켈트의 말을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고있었다. "아무튼 일만하면 시간가는줄 모른다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정신차리고 식사 나 하러 내려가자꾸나." "아... 알았어요." 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켈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직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 뮤스였다. <대공학자> #111 식당으로 내려가자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은 먼저 내려와 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크라이츠는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밝은 표정이었다. "어서 오렴 뮤스! 그런데 얼굴이 왜그렇게 피곤해 보이니?" 의자를 뒤로 빼낸 뮤스는 힘없이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말도 마세요. 어제 저녁 내내 검술수련을 받은 데다가 밤새서 작업을 했더니 힘이 좀 없네요. 공학뇌동심결을 조금 운용하면 괜찮아 질거에요." 검술 수련이라는 말에 드워프들은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장인의 종 족이기도 했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용맹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호승 심이 강한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켈트가 목을 앞으로 빼며 물었다. "검술 수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설명해주기가 귀찮긴 했지만, 그들이 호기심이 시작된 이상 얼렁뚱땅 넘어갈 수가 없 음을 알고있는 뮤스였기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 기해 주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계속 되는 내내 드워프들의 비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 었고,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켈트가 웃음을 참으려는지 헛기침을 해댔다. "흠흠! 그러니까, 그 웃기지도 않는 내기 때문에 프라이어라는 자에게 검술을 배우기 로 했단 말이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막상 배우기 시작하니까 걱정이에요. 체질에 맞지 도 않는 듯하고, 이런 평화의 시대에 누구와 싸울 일도 없을 텐데..." 뮤스가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고 블뤼안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자네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아무리 평화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일이고 마물들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말이지. 자 네 역시 쉴드옥토퍼스 같은 마물들을 만나서 알지 않나?" "그렇지만 엄청난 위력의 전뇌지자총통이 있잖아요." "물론 우리 역시 전뇌지자총통의 위력에 놀랐지만, 크게 모자라는 점이 있다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 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모자라는 점이라니요?" "흠. 발사하는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라네. 자네가 전뇌지자총통을 한번 발 사하는데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생각해보게나..." "뇌공력을 끌어올리고, 전뇌지자총통으로 전뇌력을 흘리면 그곳에 전뇌력이 잠시 충 전된 후 발사가 되죠."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전뇌지자총통의 발사과정에 대해 생각을 하던 뮤스는 뭔가 깨달은바가 있는지 무릎을 치며 외쳤다. "아! 정말 그렇겠군요!" 그의 행위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블뤼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에서 빠르기란 정말 중요한 것이지. 자네가 전뇌지자총통을 한번 발사하기도 전 에 본능으로 움직이는 마물들은 이미 자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도 있거 든..." "후우... 그렇군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기에 자신의 몸을 한번씩 훑어 보고있었다. 하 지만 검술을 계속 해서 배우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마음에 안 들었기에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검술은 배우기 싫은데..." "정 싫다면 애써 권하지는 않도록 하지! 자네에겐 뇌동체술법이라는 것도 있으니 자 신의 몸정도는 지킬 수 있을 테니... 그럼 그 프라이어라는 자에게서 빠져 나올 방법 이나 생각해 두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 성깔도 만만치 않을 듯 한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고, 드워프들과 크라이츠 는 하인들이 가져 나온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까앙! 까앙! 찢어지는 듯한 쇠망치의 굉음이 실내의 공기를 어지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팔짱을 끼고 느긋한 자세로 서있는 켈트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서 늘한 이곳에서 쇠망치를 들고 비지땀을 흘리는 뮤스였다. 볼을 긁적이며 뮤스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켈트는 한참동안의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 다. "흠... 대체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이 다 뭐야?" 그의 질문을 들은 뮤스는 몇 번의 두들김을 더하고 난 후에서야 팔 부위로 흘리던 뇌 공력을 거두며 손을 멈추었다. "뭘 하긴요? 검술수련을 관둘 핑계거리를 만드는 거죠!" "엥? 검술 수련을 관두는 것과 지금 하는 일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천진난만한 웃음을 만면에 떠올린 뮤스는 소매로 코밑을 쓸며 대답했다. "헤헷. 제가 어쩌다가 검술수련을 하게 되었는지 오전 내내 곰곰히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결론은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바로 카인슈나이드!" "카인슈나이드?" "네! 저 검을 가지고 있으니 프라이어 대장님께서 검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을 테 니, 카인슈나이드를 없애 버리면 되겠죠?" "뭐... 뭐라고?!" 뮤스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할말 마저 잃어버린 켈트는 뒷말을 잊지 못하고 입만 뻥 긋거릴 뿐이었다. 그가 다시 쇠망치를 들고 하던 일을 계속 하려 하자, 켈트는 재빨 리 그의 어깨를 굳게 잡으며 말했다. "뮤스! 아무리 네가 검술을 배우기 싫다고 하더라도 이런 보물을 없애 버리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나에게 주는 것이 어떻겠냐? 다시 날을 살려 멋지게 써줄 수도 있는데..." 켈트의 말에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의 손을 살며시 치웠다. "헤헷... 분명 이 검은 제 소유니까 어떻게 하든 제 마음이? 그렇죠?" "그... 그거야 그렇다만." "그럼 이야기는 끝이네요! 아무튼 이 검은 다른 곳에 쓸데가 있어서 아저씨께 드릴 수는 없어요. 죄송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으마." 할말이 없어진 켈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 던 켈트는 한숨을 내쉬며 뭘 만드는 지나 알아야겠다는 듯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설계 도를 집어들었는데, 기분이 상해서 인지 손놀림이 거칠었다. -촤악! 의자에 주저앉아 까칠까칠한 설계도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확인하기 시작하던 그의 표 정은 점차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눈동자의 움직임은 빨라져 어느새 여섯 장 정 도나 되는 설계도를 모두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내 설계도를 꼼꼼히 확인한 그는 슬 픔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뮤스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대체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뭐냐? 설계도를 봐도 모르겠군..." 마침 십여개의 정교한 부품들을 완성한 뮤스는 그것들의 공정상태를 확인하는 듯 불 빛에 비춰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쉽게 말하자면 '강화체갑'이라고 할까요?" "강화체갑? 그것은 또 어디에 쓰는 것이냐?" 자신이 만든 부품에 만족 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조심스럽게 부품 통에 내려놓았다. 손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낸 그는 목이 뻐근한지 자신의 목 어림을 주무르며 말했다. "으... 역시 세밀 작업은 힘들군. 음... 그러니까 강화체갑은 착용자의 근력을 수배 증가 시켜 주는 장신구예요. 착용자의 근육에 특수한 전뇌력으로 자극을 줘서 그 근 육들을 강화시키는 것이죠. 뭐 그만큼 근육에 무리가 가기도 하지만, 뇌파의 움직임 을 자동으로 감지하기 때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근력을 끌어내 주죠. 이해되죠?" "아니~ 안되는데?" 태연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켈트의 대답에 허무한 느낌을 받은 뮤스였다. "에휴! 말장난은 사양하겠어요. 지금은 조금 바쁘거든요." "껄걸! 그럼 말장난이라고 해두지 뭐. 그럼 열심히 해라. 난 형제들과 황궁 식량 축 내기나 하러 가야겠다." "네! 그럼 저녁에 뵈요!" "헐헐헐. 그럼 너도 무리는 하지 말거라. 크라이츠님께서 나름대로 걱정하신다." -철컥!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방을 빠져 나온 켈트는 닫혀진 문에 등을 기대어 섰다. 날이 갈 수록 뮤스와의 기술적 격차가 심해진다고 느낀 그는 착찹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는 데, 지금에 이르러 이론과 동시에 기술력까지 거의 완벽해진 뮤스를 보며 자신의 위 치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한번 새차게 털어낸 켈트는 다시 금 다리에 힘을 주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112 차갑게 얼어버린 대리석들이 빈틈없이 맞물려 평평한 바닥을 이루었고, 그 위로는 추운 날씨를 잊은 듯 땀을 흘리는 사내들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있는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는데, 고급스런 차림새로 보아 모두 일반 사병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챙! 귀를 자극하는 금속성이 허공으로 퍼지자 자신의 수련에 열을 올리던 젊은이들은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 그곳에는 수려한 외모를 가진 한 젊은이가 자신의 앞에 주저 앉아있는 젊은이에게 연습용 검을 겨누고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린 젊은이는 절도있는 모습으로 연습용 검을 거둬 들이며 입을 열었다. "후훗. 태자전하께서는 점점 실력이 줄어가는 듯 합니다. 대관식 준비에 바쁘셔서 그동안 검술수련을 소홀히 하셨나 보군요." 과연 그의 말에서 알수 있듯이 주저 앉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있는 젊은이는 태자였다. 노골적인 그의 모욕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태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흠... 제가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가테스 공작께서 실력이 느신 것이겠지요." 말을 마친 그는 몸위에 걸쳐진 금속의 보호장구를 힘겹게 벚었다. 그런 태자의 모습을 보자 몇명의 젊은이들이 태자의 주변으로 달려왔다. "괜찮으 십니까 전하?!" 그들 중 단정한 금빛 단발을 지닌 애띤 청년이 가테스를 향해 외쳤다. "가테스 공작각하! 태자전하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대답을 한 자는 가테스가 아니라 가테스의 주변으로 몰려든 젊은이들 중 한명 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측근인듯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루피스! 자네야 말로 공작각하께 언성을 높이다니 제정신인가! 비록 태자전하께서 황위계승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대관식 전까지는 공작각하와 동등한 신분임을 잊지 말게!" 그의 말에 말대꾸를 하려한 루피스였지만, 등뒤로 들려오는 태자의 목소리에 의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루피스경. 그의 말이 맞다. 나는 아직 황위를 계승하기 전이고, 가테스 공작과의 지위는 대등하다. 공작께 사과를 하게." 태자의 말에 공작의 얼굴을 감정적으로 바라본 루피스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공작각하.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시죠..." 표정을 보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임이 뻔하게 드러나고 있었지만, 오히려 가테스는 전해 개의치 않았다는 듯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후훗. 태자전하께 충성을 다하다 보면 이런일도 있기 마련인데, 내 어찌 자내를 탓하겠는가... 태자전하께서는 이런 충성스런 신하들을 주위에 두시니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하하핫!" 이어 루피스와 다시 시선을 맞춘 그는 방금전의 온화한 목소리였다고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바꾸며 나직히 말했다. "하지만 실수는 되풀이 될 수 없는법... 다시한번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하극상으로 내 친히 네 목을 치겠다." 루피스는 그의 말과 함께 마른침이 힘겹게 넘어감을 느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을 어루 만지고 있었다. 이제 할말을 모두 마친 가테스는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태자전하 저는 처리해야할 일들이 많아서 검술수련은 여기서 접어야 겠군요. 그럼 이만..." 말을 마친 가테스와 그의 측근들은 태자에게 등을 보이며 연무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먹을 쥐며 화를 삭히고있는 루스피를 바라보던 태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훗... 루스피경이 참게. 원래 가테스공작의 성격을 알지 않는가? 차가워 보이기는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닐세. 게다가 내 몸이 약한 탓이니 가테스공작이 잘못 말한것도 아니고..." 태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루피스에게 언제나 동생과 같이 대해 줬기에 말을 높이지 않았는데, 루피스 역시 친동생 처럼 대해주는 태자에게 이끌려 남다른 친분을 쌓고 있었다. 태자의 위로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루피스는 가테스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한동안 눈을 때지 않았다. 이내 시선을 돌린 그는 더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태자를 향해 말했다. "전하. 요즘 대관식을 앞두고 황궁내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눈빛을 반짝인 태자는 의아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좋지 않은 분위기?" "전하께서도 아시다 시피 가테스공작각하께서는 전하께서 황좌에 오르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신는 분들중에 한분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언제나 태자전하와 비교가 되었기에 시기심이..." "그만하게! 나에게는 형님과 같으신 분이시네." 그의 말을 듣고있던 태자가 재지하며 나서자 루피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루피스의 얼굴을 한번 살펴본 태자는 몸을 일으키며 나직히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네... 황실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야." 잠시 많을 끊은 그는 루피스와 그 주변의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될수 있는한 많은 사람들이 내편이라고 믿고 싶다네. 자네들 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서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굳어져있자 태자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애써 밝게 웃었다. "하하핫! 뭘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짓고들 있는가? 늙어서 인상 잔뜩 찌푸린 늙은이들이 되기 싫다면 밝게 웃게나! " 비록 농담에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태자의 노력을 못본 첫 할수 없었기에 가볍게 나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색한 분위기가 그들의 사이에서 감돌고 있을 때, 궁의 본관건물에서 연무장을 이어주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태자전하! 이곳에 계셨군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금전 까지만해도 땀흘리며 작업을 하던 뮤스였고, 언제나 처럼 마법가방을 허리춤에 차고있는 모습이었다. 뮤스의 등장에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던 루피스는 한발자국 나서며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황궁내의 인물중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슴없이 말을 낮추고 있었는데, 과연 명문가 출신 답게 당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뮤스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태자가 반가운 목소리로 뮤스를 맞아 주었다. "하핫! 뮤스군이시군요." "네! 프라이어 대장님께 여쭈어 이곳에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정말 검술 수련에 정성이 대단하시군요?" 뮤스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 젖는 태자였다. "훗... 하지만 어제 보셨다 시피 몸이 약한지라 별다른 진전이 보이지 않는군요. 아차! 서로 인사들 나누시죠. 이쪽은 저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도이첸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죠. 자네들도 인사하게 이쪽은 도이첸 제국에 위명을 떨치고 있는 공학원의 젊은 원장일세." 누구나 뮤스의 소개를 들으면 똑같은 반응을 보이듯 루피스를 포함한 젊은이들 역시 크게 놀라고 있었다. 서로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을 본 태자는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이제 괜찮다는 뜻을 전했고, 그들은 안심을 하며 수련을 계속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태자와 뮤스만이 그 자리에 남게 되자 이유없는 편안함을 느낀 태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저녁 수련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죠?" 그러나 뮤스는 대답대신 무엇인가를 가방에서 꺼내어 태자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금속으로된 네개의 물체였는데, 차갑고 맑은 색깔이 보통의 금속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 거린 태자는 의아한듯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손등으로 코밑을 한번 쓸어본 뮤스는 그것들 중의 하나를 분해하여 내밀었다. "이것은 태자 전하를 위해 특별히 고안한 강화체갑이라는 것입니다." "강화체갑 이라니요?" "어제 태자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만든 것인데, 특수한 장치를 하여 착용자의 근력을 수배 증가 시켜 주는 것이지요." 강화체갑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나직한 탄성을 짓던 태자는 어쩐 일인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스트렝스마법이 걸린 마법용구들을 많이 받아 봤지만, 힘을 내기 이전에 그 무개조차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물건에 의지하고 살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법. 그냥 이대로가 좋습니다." 태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의 태도를 이해한 뮤스는 여전히 느긋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보통 이럴 경우에는 아쉬워하거나 한번 더 생각해 보기를 권유하는 것이 일반 적인 반응이었는데, 이렇듯 느긋하기만한 뮤스를 본 태자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강화체갑을 내밀고 있는 자세로 서있던 뮤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에 들려있던 강화체갑을 태자를 향해 가볍게 던졌는데, 무심결에 그것을 받은 태자는 크게 놀라야만 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가볍다니!" 어깨를 한번 으슥거린 뮤스는 나머지 세개의 강화체갑을 손가락에 끼워 돌리며 말했다. "하핫! 이것은 미스릴 재질이기 때문에 가벼울 수 밖에 없죠." "미스릴이라고요?! 그 귀한 것을 어떻게?" 손을 한번 내저은 뮤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후훗 그런것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이 강화체갑은 근력을 강화하는 것 외에도 근육에 일정한 자극을 주어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년 정도만 꾸준히 착용 하신다면 지치는 일이 없이도 상당한 체력을 보유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니!" 뮤스의 설명이 끝나자 태자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과 강화체갑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떨린다고 생각 될때, 뮤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뮤스군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위해서 이런 것까지..." 사실, 검술을 더 이상 배우지 않기 위한 계획때문에 강화체갑을 만든 뮤스로서는 조금 찔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있었다. "뭐..뭘 이런것을 가지고..." 하지만 태자는 상당한 감동을 받았는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를 하고 싶습니다! 꼭 제 초청에 응해 주시길..." "하...하...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뮤스는 찝찝한 양심을 뒤로한 채 태자의 부탁을 수락하였는데, 이것은 앞으로 복잡하게 엉키게 될 미래라는 이름을 가진 실타래의 시작이었다. <대공학자> #113 "아니 뭐라고!" 격앙된 목소리가 프라이어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는지, 그저 멍한 얼굴로 뮤스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프라이어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느 낀 뮤스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눈 둘 곳을 찾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중이었다. "음음... 저.. 저는 장담컨데 검술을 익히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예요. 그저 미스 릴을 구할 곳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카인슈나이드를 녹인 거라고요." 멍해있던 눈동자에 힘을 주어 초점을 맞춘 프라이어는 의심의 눈초리를 뮤스에게 보 내기 시작했다. "흠... 내가 물어 본것도 아닌데 그렇게 대답을 하다니... 뭔가 캥기는 것이라도 있 나? 설마 정말 검술을 익히기 싫어서 이런 일을 벌인것은 아니겠지?" "콜록! 캐...캥기는 것이라니요! 그런것이 있을리가 없죠!" "하긴... 자네가 남자라면 한번한 약속을 미루는 일은 없겠지..." 가시가 한껏 담긴 그의 말에 뮤스는 적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애써 안색 을 되찾은 뮤스는 프라이어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태자에게 말 했다. "헤..헷. 제가 검술을 익히는 것 보다는 태자 전하의 건강한 옥체가 더 중요하지 않 겠습니까? 태자 전하 이곳에서 한번 강화체갑을 시험해 보시죠." "네? 네." 대화의 중심이 갑작스레 자신으로 변하자 아무생각 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태 자는 엉겁결에 대답을 했고, 덕분에 뮤스는 프라이어의 추궁을 더 이상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뮤스의 말을 들은 태자는 미리 준비해 놓은 강화체갑 중에 하나 집어 들었는데, 그 모양으로 보아 팔에 착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 느꼈던 바와 같이 굉장한 경량이었고, 안쪽으로는 가죽재질과 금속재질이 어우러져 있었다. 가죽끈을 조이며 한쪽 팔에 착용한 태자는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는데, 착용하는 기구인만큼 인체공학적인 설계를 지향 했는지 특별한 불편함은 없었다. 나머지 강화 체갑을 모두 착용한 후 자신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펴본 태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느끼며 뮤스에게 물었다. "이제 다 된것입니까? 별다른 변화가 없는 듯 한데..." 태자에게 다가가 착용 상태를 확인한 뮤스는 그의 팔에 착용된 강화체갑의 연결 부위 중 한곳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태자 전하 여기 스위치가 보이십니까? 이것을 위로 올리면 작동이 시작 됩니다. 처 음에는 이상한 느낌이 들겠지만, 점차 적응이 되실테니 며칠동안 참아 주셔야 할 것 입니다. 한번 해보시죠."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태자는 팔에 착용된 강화체갑을 한번 둘러본 후 뮤스가 가리킨 스위치를 위쪽으로 올렸다. 그러자 아무런 소리도 없이 찌릿 한 기운이 전신 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수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전신의 근육들은 점차 긴 장되어 지고 있었다. 신기한 듯 자신의 손을 내려보고 있는 태자의 표정은 무엇인가 가 벅차 오르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라니! 괴...굉장하군요!" 태자의 반응을에 강화체갑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뮤스는 재차 작동상태를 살펴보며 말했다. "강화체갑은 평상시, 원래의 두배 정도 되는 근력을 보충해 주게 됩니다. 하지만 전 하의 뇌파와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하실 때는 최고 다섯배의 근력을 보충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배 이상의 근력을 보충 받을 때는 그만큼 쉽게 지치게 되니 처음에는 무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태자는 빨리 강화체갑을 시험해보고 싶은지 자신이 힘겹게 휘두 르던 연습용검을 찾아 쥐었다. 그리곤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들어올렸는데, 평상시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던 연습용검이 마치 목검마냥 쉽게 들어 올려지자 기쁨을 참지 못했하며 쾌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하하핫!" 태자의 기쁨에 찬 모습을 보던 프라이어는 떫떠름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저렇게 좋아하시다니... 더 이상 뮤스군 자네를 탓하지 못하겠군." 아쉬움이 담긴 한마디를 남긴 프라이어는 곧바로 뒤돌아 자리를 떠났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한명의 검사로써 꿈에도 바라던 명검이 이제 그 모습을 잃었기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고, 더 이상 추궁한다는 것은 태자에 대한 불충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한시름 놓은 뮤스는 편안한 표정으로 태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47) 야욕. 살아있는 검날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비록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아 님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 예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어둠을 가 르며 파르스름하게 살아있는 검의 예기를 하얀 천으로 쓰다듬으며 진정시키고 있는 두툼한 사내의 손은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사내는 검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끼이익. 방문이 열리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몸이 가벼워서 인 지 그 소리가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방문이 닫히며 복도와 방이 완전히 분리가 되자 방안으로 들어온 사네는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매번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가테스 공작각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특유의 미소를 지은 가테스는 자신의 앞에서 불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조금만 참게. 자네의 노고를 충분히 보상하겠네... 그날이 온다면..." "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어떤 일이있었나?" 가테스의 물음에 소매단 속으로 손을 넣은 사내는 꼼꼼하게 말려있는 두루마리를 그 에게 건냈다. "이것을 읽어 보시죠. 아무래도 뮤스라는 자가 태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할 듯 합니다." "뮤스?" "네!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자입니다. 자세한 것은 보고서에 기입해 두었으니 읽어 보 시죠." 고개를 끄덕인 가테스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하나하나 두루마리의 내용을 눈여겨 살펴보던 공작은 손으로 턱을 쓸며 말했다. "흐음... 실크로스교라... 뭔가 냄새가 나는듯 하군. 대관식과 같은 국가 중대사가 목전에 있을 때에는 다른 국가 사업은 미뤄지거나 하던 것도 중단하는 것이 보통인데 실크로스교 공사를 위해 초청했다고?" "역시 예리 하십니다. 공작각하. 아무래도 그 늙은이가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크크큭... 하지만 다 쓸모 없는 짓이지. 태자가 대관식에 나타나지않는다면 모든게 끝일 테니... 자네는 오늘 밤에 있을 연회에 만반의 준비를 해주게." "옛! 공작각하! 그럼 이만."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사내는 진득한 그림자 만을 남기며 들어왔던 방문의 반대쪽 문 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가테스는 손에 들려있던 두루마리를 촛불에 태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따. "태자... 그대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것이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십여 년 동안이나 태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되찾아야 될 때가 아니겠소. 후후훗..."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있던 두루마리는 검은 재가 되어 형체를 잃어 버리고 있었다. <대공학자> #114 화려한 연회가 벌어지는 이곳은 황궁의 제 2 연회실이었다. 황궁내의 연회실은 총 5 군데 였는데, 일반 귀족은 제 3연회실 까지 사용이 가능하였고 왕족은 제 2 연회실, 황제가 참여하는 연회는 제 1 연회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태자가 태자의 신 분으로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연회였기에 친분이있는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참 여를 했고, 황제가 직접 참여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편히 즐기는 자리였던 것이다. 또 한, 공적인 자리에서 껄끄럽던 관계의 귀족들 조차 오늘같이 정권이 바뀌기 전의 마 지막 연회에서는 다음 번의 정치적 대립을 위해 친우 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것이 관 례였다. 뮤스 일행중 이 연회에 참석한 인물은 크라이츠와 뮤스 뿐이었는데, 드워프들은 아직 까지도 이곳의 인간들에 대한 반발심이 남아있는지 한사코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이 마련되어있는 거대한 테이블의 앞쪽에는 태자와 뮤스가 먹을 만큼의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고 있었다. 감자로 만들어 진듯한 샐러드를 접시에 한스푼 옮겨담음 태자는 연회에 참석한 인물들을 둘러보며 뮤스에게 말했다. "뮤스군 어떤가요? 라이델베르크에서만 생활을 해왔다면 이런 규모의 연회는 처음 이 실텐데..." 태자의 질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을 지은 뮤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헤휴... 라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연회도 불편하기 그지 없었는데, 이곳의 연회는 더욱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연회 체질이 아닌듯 하군요." 불평이 섞여있는 뮤스의 대답에 난처해진 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제게 강화체갑을 만들어 주신것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이렇게 연회에 초청했 는데, 오히려 불편하시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 생각만 했군요." 태자가 진심으로 사과를 해오자 오히려 난처해 진것은 뮤스였다. 한 국가의 태자라는 신분의 인물이 일개 범부에게 사과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둘러 손을 내저은 뮤스 는 애써 표정을 밝게펴 보였다. "하...핫! 노..농담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런 연회를 아주 즐기지요! 이렇게 훌륭하 신 분들도 많고, 찬양해 마지 않을 분들도 많으신데 어찌 제가 싫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아무리 봐도 어색하기 짝이없는 변명이었지만, 순진한 태자는 정말 그의 말을 믿기라 도 하는지 금새 해맑은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붐비고 있던 사람들을 헤치며 한 청년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는 두 손에 든 와인잔이 쏟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는 모습이었는데, 몇번이고 사람들의 몸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와인을 쏟지는 않고 있었 다. 태자와 뮤스의 앞까지 도착한 그는 숨이 차는 목소리로 말했다. "헉헉... 태자 전하 찾아 다녔습니다." 등뒤에서 들리는 부름에 몸을 돌린 태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음? 루피스경은 무엇이 그렇게 바빠서 숨이 차도록 서두르는 것인가?" "아! 아무래도 오늘 같은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제가 태자 전하를 지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핫. 자네도 알다시피 오늘 만은 정적들도 친하게 지내는 것이 관례인데, 누가 오 늘 같은날 나를 노린다는 말인가? 나의 즉위를 노리는 것 역시 정치적인 일 아닌가?" 태자의 말에 답답한 듯 가슴을 친 루피스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말이 무례인줄은 알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현실을 너무나 모르십니다. 지금 태 자 전하를 노리는 자들은 관례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을 자들이 아닙니다!"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은 태자는 루피스가 들고있던 와인잔을 뺏어들며 가볍게 웃었다. "후훗. 자네야 말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이곳에는 눈이 너무 많고, 나 역시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무슨?"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태자는 그저 미소만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상대방의 검을 받아내기에도 벅차던 태자가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 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면서 태자에게 인사를 청하는 인물들이 하나, 둘 다가 왔기에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초록색 의 연회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귀족이 다른 귀족들을 이끌며 태자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태자전하. 이제 삼일 밖에 남지 않았군요." "하핫. 마르틴 경 도 안녕하십니까. 삼일 밖에 남지 않았기에 더욱 걱정입니다. 능력 이 모자라는 제가 제국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겸손한 자세로 응수한 태자는 자신의 옆에 서있던 뮤스를 다른 귀족들에게 소개를 해 주기 시작했고, 뮤스가 가장 귀찮아하는 '일대 다수의 인사 주고받기 시간'이 시작되 고 있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태자는 귀족들과 여러가지 대화를 주고 받기 시작 했는데, 경제나 정치 적인 면에서 굉장한 학식을 보유 하고 있었기에 대화를 쉽게 이 끌어 갈 수 있었고, 뮤스 역시 여러 귀족들에게 둘러 쌓여 많은 질문을 받기 시작했 다. 그렇지만 태자와는 달리 개인 적인 질문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귀족들의 눈에는 부담스러운 기대감이 듬뿍 담겨있었다. "뮤스 원장, 올해로 나이가 몇 살인가?" "아. 올해로 19살이 됩니다." 대답에 감탄성을 터트린 귀족들은 고개를 보일 듯 말듯 끄덕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하핫. 우리 집안에 아주 얌전한 막네 딸이 있다네. 괜찮다면 한번 만나보지 않겠나? "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던 질문이기도 했고, 조선에서 역시 충분히 있음 직한 질 문이었기에 당황을 하지는 않았지만, 뭐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난감할 뿐이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좋은 핑계거리를 떠올리고는 쑥스럽게 말했다. "하핫! 관심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꺼내던 귀족들은 노골적인 아쉬움을 보이고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들은 태 자는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하다말고 뮤스에게 물었다. "아니! 뮤스군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는 여인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비슷한 나이 또래였기에 태자의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었고, 젊은 나이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우물 쭈물 하던 뮤스는 조심 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라이델베르크에서 만난 여인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햄브리겐 대학교를 다니는 친구인데, 아직 까지는 저 혼자 가슴 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죠." 눈에 이채를 띄운 태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일인 듯 가슴을 두근 거리며 뮤스를 바 라봤다. "호오! 정말 멋지군요. 그 여인이 어떤 분인지 정말 만나 보고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이어린 이들의 시시껄렁한 연애 이야기로 흘러가기 시작하자, 소기의 욕심을 가지고 뮤스에게 접근했던 귀족들은 하나, 둘 작별 인사를 건네며 사라졌고, 태자와 뮤스만이 남게 되었다. 사실 뮤스 역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 했지만, 태자의 집요한 질문에 이러지도, 저리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자 신의 입을 크게 탓하고 있었다. 태자의 물음은 계속 되었다. "나이는 동갑인가요? 집안은?" "아... 그게... 나이는 동갑입니다. 그리고 또..." 몇 마디의 대답이 끝나지 않아서 태자와 뮤스의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차갑운 목소리 로 그들의 주의를 끌며 다가 오고 있었다. "흥... 태자 전하. 전하의 나이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나이지만, 이런 자리에서 꼭 그런 천박한 이야기를 하셔야 하겠습니까?" 깜짝 놀라며 뒤돌아 본 태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 가테스 공작!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니면 되었습니다. 이쪽 옆의 청년을 좀 소개 시켜 주시겠습니까? 못보던 얼굴인 데..." 짤막한 한 마디로 태자의 말을 자른 가테스는 뮤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옆 에 서서 주변을 살피고 있던 루피스는 가테스의 무례를 참지 못하고 나서려했지만, 낮에있었던 가테스의 으름장을 떠올렸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테스와 눈이 마주친 뮤스는 고개를 자연스럽게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혹시 공학원에서 오셨다는 분이신가?" "네 그렇습니다. 라이델베르크에서 변변치 않은 일을 하고 있지요." 뮤스가 자신의 소개를 하자 가테스는 입술이 말려올라가도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하핫. 제국 전체에 위명이 자자한 공학원을 변변치 않다고 하다니 너무 겸손한 것이 아닌가?" "과찬 이십니다." "후훗. 지금은 태자 전하도 있고하니 대화를 길게 할 상황이 아니군. 뮤스 원장은 다 음에 개인 적으로 한번 자리를 갖도록 하세." 뮤스는 일방적인 말을 끝내고 몸을 돌리는 가테스의 등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태 자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 오며 입을 열었다. "뮤스군은 공작의 태도를 유념치 마시죠." "아...아닙니다." 대답을 했지만, 아직도 가테스의 미소가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졌는지 쉽사리 그의 모 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15 그렇게 가테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있는 뮤스의 표정을 살피던 태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뮤스군? 왜 그런 얼굴로 가테스 공작을 바라보시죠?" 그의 목소리에 서둘러 시선을 회수한 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이상한 기분이라니요?" 태자의 되물음에 어색한 웃음을 띄운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핫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보니 신경이 많이 쓰여서 그 럴 것입니다." 대답에 잠시 손으로 턱을 쓰다듬던 태자는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 다. "아! 그렇다면 잠시만이라도 바깥 바람을 쐴까요? 아직 가보시지 못했겠지만 연회실 뒤편으로 있는 '사철의 정원'은 정말 멋이 있죠." "저 때문에 애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뮤스가 사양하고 나서자 태자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손을 내저었다. "하핫! 괜찮습니다. 사실 저도 연회가 무르익을 쯤 되면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곳에 서 바람을 쐬는 버릇이 있죠. 뭐 시간이야 평소보다 조금 이르지만 아무렴 어떻습니 까?" 태자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연회실 곳곳을 살피던 루피스가 놀란 듯 입에서 와인을 입에서 뿜었다. -푸웃! 그리고는 뿜은 와인을 닦을 생각조차 못했는지 입 주변은 붉은 와인으로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태..태자 전하! 지금 산책을 나가시려는 것입니까?" 유난스럽게 놀라고 있는 루피스를 본 태자는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루피스경 뭘 그렇게 놀라는가? 내가 산책을 나가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그..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관식을 며칠 남긴 상태에서 태자 전하를 노리는 이들도 많은데, 그런 한적한 곳으로 나가신다면..." "자네는 너무 고지식한 것이 탈이야... 설사 누군가가 황궁내에서 나를 노린다고 하 더라도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는 한 그리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못할 테니, 우리가 함께 있는 다면 그리 위험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걱정은 거기 까지만 하고 이만 나가세." 더 이상 말해봐야 태자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 루피스는 미묘한 눈빛을 던졌고, 인상을 살풋 찌푸리며 태자와 뮤스를 뒤따랐다. 연회실의 입구에 이르자 태자와 루피스는 자신이 맡겨 놓은 검을 되찾았는데, 연회실 내부에서는 무기를 소지 할 수 없었기에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서 검을 맡겨 놓거나, 애초 소지를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뮤스는 자신의 검인 카인슈나이드는 이미 태자의 강화체갑으로 변했기에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왠지 카인슈나 이드가 없는 허리춤이 허전한 기분이었다. 가벼운 동작으로 자신의 검을 돌려 받은 태자는 뮤스와 루피스의 등을 떠밀며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들이 잔디밭 위의 덜 녹은 눈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하얀 빛을 뿌렸고, 그 빛들을 받으며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는 사철나무들이 자신과 꼭 닮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사철나무들 사이로 눈이 깨끗이 치워진 정원의 보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로 볼을 얼릴 듯 차가워진 겨울 밤 바람을 즐기듯 세 명의 인 영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바로 바람을 쐬기 위해 연회실 을 빠져 나온 태자, 뮤스 그리고 루피스였다. 싸늘한 공기가 머리칼 사이를 헤치며 와 닿자 기분이 상쾌해진 뮤스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모습이었고, 태자 역시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걷는 것으로 보아 밖으로 나 온 것에 만족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루피스만은 무엇인가가 불안한지 계속해서 주변을 살비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던 태자는 발걸음을 멈추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보게 루피스경 자네의 행동이 아까부터 정말 이상하 군.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태자의 질문 때문인지, 아니면 부지간에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난히 크게 놀라고 있는 루피스였다. "흐읍! 깜짝 놀랐습니다. 태자 전하!" 이때 뮤스는 가테스를 만났을 때와 같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 있었는데, 뇌공력을 모아 귀를 기울여 보니 사방에서 작은 발자국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 는 것이었다. -사박, 사박 그것에 귀를 기울이던 뮤스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태자와 루피스를 향해 최대한 성량을 억제하며 말했다. "태자 전하, 루피스 경 몸을 낮추시고 자리를 이동하시죠!" 뮤스의 갑잡스러운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태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 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상당수의 무리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길." 짤막한 말을 마친 뮤스가 몸을 숙이며 자리를 피하자 태자 역시 얼떨결에 뮤스를 따 랐고, 루피스 역시 그 둘을 뒤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몸을 숨긴 곳은 사철나 무 여러 그루가 우거져 있는 덤불이었는데, 사철나무의 뾰족한 잎이 따끔하게 살을 찔렀지만 충분히 참을만 했기에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서 자신들이 서있던 자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뮤스가 어둠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밖을 살피고 있을 때 태자가 조 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뮤스군 역시 누군가가 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자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뮤스였다. "그저 지나가고 있는 경비병 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잠시 시선을 돌려 태자를 바라본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경비병이라면 애써 발자국 소리를 줄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 어보아 상당한 수련을 한 자들이고, 이런 곳에서 남들의 이목을 속이고자 하는 이들 이라면 좋은 의도를 가진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래도 태자 전하께서 연회 때마 다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신다고 하셨으니, 그들 역시 그것을 노렸을 수도 있겠지요." 뮤스의 추론을 들은 태자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 을 하지 않은 채 덤불사이로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스슥! -촤라라락! 잠시 후, 사철나무의 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며 검은색의 옷을 입은 십 여명 의 사내들이 재빠르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할 태 자가 없음에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는데, 목소리가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엇인 가 말을 주고받는 듯 했다. 뮤스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 음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텐데..." 잠시 그 십 여명의 사내들이 하는 행동을 주시하던 뮤스는 태자를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보아하니 저들은 철저한 계획을 새워 놓은 듯한데, 이쯤 되면 보이지 않는 동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 니다. 그것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자가..." "그렇다면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까?" "흠... 잘 생각해 보시지요. 태자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면 가장 좋아 할 사람이 누구 인지..." 잠시 턱을 궤며 생각에 잠겼던 태자는 나직한 신음성을 삼켰다. "설마 가테스 공작? 바로 가테스 공작입니다. 황실의 직계인 저를 제외하면 가장 혈 통에 근접한 핏줄을 가지고 있지요. 만일 제가 대관식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황권이 이어지게 되어있죠." "그렇다면 그 자가 태자 전하를 노리고 있을 확률이 많겠군요. 아직 정확한 것은 아 니지만..." 태자와 뮤스가 대화를 하며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의 등 바로 뒤에서 귀 를 자극하는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리고 있었다. -삐익! 소스라치게 놀란 태자와 뮤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그 곳에는 의미 심장한 미소 를 띄우고 있는 루피스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사내들 역시 그의 휘파람 소 리를 놓칠 리가 없었기에 순식간에 그들이 숨어있던 사철나무 덤불을 둘러싸고 있었 다. 당황한 모습으로 자신과 뮤스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던 태자는 분노한 듯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루피스를 바라보고 외쳤다. "루피스경! 이것이 무슨 짓인가!" 태자의 외침에 가볍게 웃은 루피스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후훗. 무슨 짓이라니? 보면 모르겠소? 보기 보다 머리가 안 굴러가는 군." "네 이놈... 네가 어떻게..." 태자는 믿고 있던 자의 배반에 대한 충격이 컸는지 쉽사리 뒷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 고 있었다. "그나저나 전하의 돌출 행동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당황했는 줄 아시오? 매일 같이 시간을 지키던 분께서 이렇게 갑작스레 행동을 바꾸다니... 저들의 식은 땀 흘리는 얼굴을 한번 보오." 잠시 서슬이 시퍼런 칼을 든 사내들을 둘러보던 태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닥쳐라! 주변의 경비병들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네 녀석들이 무사하지는 못할 텐 데?" 하지만 그의 으름장에 별 동요를 보이지 않던 루피스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우리가 이런 큰 일을 저지르는데 그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오? 후훗. 이 주변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을 조금 조절했지." 잠시 말을 끊은 루피스는 시선을 뮤스에게 옮기며 말했다. "아참... 뮤스군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 가테스 공작각하를 보필하 여 앞으로 도이첸 제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거나, 아니면 태자와 함께..." 루피스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뮤스의 대답은 정해 진 듯 했는데, 전신으로 뇌공력 을 흘리기 시작했기에 몸으로 금빛의 광휘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뮤스와 태 자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은 크게 놀란 듯 토끼 눈을 뜨고 있었고, 루피스 역시 기 이한 광경에 말을 더듬었다. "마..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 줄은 몰랐군!" 그들의 행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뮤스는 태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곁눈질로 주변 의 인물들을 살폈다. "태자 전하 아무래도 힘으로 뚫어야 할 것 같습니다. 칼을 뽑아 응전 태세를 갖추십 시오. 제가 막아 보는데 까지 막아 보겠습니다!" 드베인 숲에서 겪은 일들 때문인지 상당히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뮤스였다. 그 의 말을 들은 태자는 서둘러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두고 수련해 온 검술이었지만 실전은 처음인 듯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 뮤스와 태자는 서 로 등을 마주하며 사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사내들과 루피스 역시 당황 했었던 기색을 수습했는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칼을 고쳐 잡았다. 자신의 옆으로 든든 하게 버티고 서있는 수하들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던 루피스는 얼굴을 굳히며 날카 롭게 외쳤다. "저들을 사로잡아!" "차앗!" 그의 외침과 함께 십 여명의 사내들은 짤막한 기합 소리를 지르며 뮤스와 태자를 향 해 뛰어 들었고, 그들 역시 처음의 공격을 피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16 한편, 연회실의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거의 무도회장을 보는 듯 했다. 많은 남녀 귀족들은 서로의 파트너를 정해 자신의 춤 솜씨를 뽐내고 있었는데, 그중 단연 눈에 띄고 있는 것은 크라이츠와 가비르였다. 크라이츠의 우아한 몸짓은 여성만의 아름다 움을 표현하는 듯 했고, 가비르의 절도 있는 스텝은 남성의 기백을 표현하는 듯 했 다. 어느새 함께 춤을 추고있던 귀족들은 자신들의 스텝을 멈추며 두 남녀의 춤을 감 상하기 시작했으며, 하나같이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오오... 정말 눈부신 한 쌍이구려." "호호홋. 저도 젊었을 때는 저 아가씨만큼이나 매력 적이었죠." "허헛! 아무튼 멋지군. 가비르 재상이 저런 춤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건 그렇고 저 아가씨는 누구신가?" "어머나! 당신은 아직도 몰랐단 말이예요? 레이디 크라이츠가 바로 저 아가씨라고요. 사교계에서는 이미 유명해 졌죠." "공학원의?" 저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음악이 경쾌한 박자와 함께 끝을 맺었고, 가 비르와 크라이츠 역시 인상적인 자세로 춤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짝짝짝!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답한 크라이츠는 가비르의 손을 잡고 테 이블로 걸어 나왔다. 가비르는 와인잔을 건네며 웃었다. "하핫. 크라이츠님의 실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 하시군요?" 와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인 크라이츠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어머나! 저는 20년 만에 처음이라고요. 그러는 가비르 재상각하야 말로 상당한 실력 인 걸요? 대체 얼마나 많은 분들과 손을 맞잡으셨길래?" 그녀의 짖궂은 말투에 당황한 가비르는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크라이 츠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연회실을 둘러보던 그녀는 뮤스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음... 이상하군요." "무엇이 이상하신 지요?" "분명 뮤스도 이 곳에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는군요?" 크라이츠를 따라 연회장을 함께 살펴보던 가비르 역시 뮤스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 었다. "흠... 이상하군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태자전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는데..." 두 남녀가 뮤스를 찾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짝...짝... "하핫. 정말 멋진 춤이었습니다. 가비르 재상각하, 그리고 레이디 크라이츠." 고개를 돌려 다가온 자의 얼굴을 바라본 가비르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가테스 공작각하시군요. 오늘 연회는 어떠신지?" "글쎄요. 재상각하 만큼 아름다운 파트너가 없어서 인지 그다지 즐겁지는 않군요. 다 만... 태자전하의 마지막 연회이니 만큼 참석을 해야지요. 마지막 연회..." 가비르는 가테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둘 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있던 크라이츠는 가비 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가테스를 향해 말했다. "호홋. 귀하께서 그 소문이 자자한 가테스 공작각하셨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 다." 크라이츠의 말에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떠올린 가테스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 다. "저를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레이디 크라이츠. 그런데 동생 분이신 뮤스 원장은 보이 지 않는군요?" "글쎄요. 저희도 지금 찾고 있었지만 통 보이지 않는군요." 잠시 생각해 보는 시늉을 하던 가테스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태자전하와 함께 산책을 나가신 것이 아닐까요? 후훗. 원래 태자전하께서는 이 시간 쯤이면 언제나 사철의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시니까요. 별일 없을 것입니다." "호호.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후후훗. 그럼 다음 연회에는 제게도 파트너가 될 영광을 주시길 바라며 이만 가보도 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연회 되시길... 가비르 재상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죠." 크라이츠와 가비르에게 인사를 남긴 가테스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자 크라이츠는 안 색을 바꾸며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테이블 위의 물잔에 그것을 적시며 말했 다. "저 인간은 왠지 기분이 나쁘군요. 으윽! 감히 내 손에 입을 맞추다니." 투덜거린 그녀는 손수건으로 더러운 것이라도 손에 묻은 듯 닦아 내기 시작했고, 그 런 모습을 보던 가비르는 웃음을 힘들게 참고 있었다. "후훗. 역시 크라이츠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군요." "저자의 말대로 과연 태자전하와 뮤스가 산책을 나간 것일까요? 왠지 걱정이 되는군 요." "태자전하께서 연회 때마다 도중에 산책을 나가는 버릇이 있는 것은 확실하죠. 아마 도 그의 말대로 산책중 일 것입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인지 출출하군요. 간단 한 요기라도 할 까요?" "그러죠. 산책을 나갔다면 금방 돌아 올테니..." 표정을 밝게 한 크라이츠는 가비르의 팔짱을 끼며 음식이 마련된 테이블로 자리를 옮 기고 있었다. -차앗! -으아악! -챙챙챙!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어두운 허공에서 어우러지고 있었고, 사람들 의 입에서는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이 녹아 질퍽이던 흙이 얼어 사나 운 모양을 하고 있는 땅위로 네 명의 사내가 칼을 떨어트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 들은 모두 뮤스의 주먹과 발길질에 격타 당한 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금속으로 이루 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싸우던 이들이 잠시 숨을 가다듬기 위해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하자, 먼발치에서 구경 만 하고 있던 루피스는 굳게 쥔 주먹으로 땀이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들! 열 다섯 명이 겨우 두 명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뮤스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본 루피스 역시 내심 그 를 인정하고 있었다. 루피스의 질타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사내들은 다시 뮤스와 태자 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고, 다급해진 태자는 서둘러 검을 다시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챙! 챙! 처음에야 실전 경험이 없었기에 상대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으나 위험 할 때 마다 뮤스가 도움을 줬고,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과 강화체갑의 덕으로 점차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반면 뮤스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 지기만 했는데, 상대방이 날 카로운 검을 휘두르는 반면, 비록 뇌공력을 운용하기는 하지만 맨손이었기 때문이었 다. 쏜살 같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몸을 낮추며 피한 뮤스는 자신을 공 격해온 사내의 복부 쪽으로 주먹을 꽂았지만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결정적인 충격은 주지 못한 듯 했다. 자신의 주먹에 맞아 뒤로 날아간 사내가 칼을 짚고 일어 나는 것을 본 뮤스는 점점 입이 말라 감을 느꼈다. '이런 제길. 금속 갑옷을 입은 녀석들이야 운 좋게 격타하면서 전뇌력으로 감전을 시 킬 수 있었지만, 가죽 갑옷을 입은 녀석들은 어쩔 수 없으니 어떡하지? 사내들의 실 력도 만만히 볼 수 있는 실력이 아니고, 뇌동체술법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하는 데...' -아악! 뮤스의 상념은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깨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사내들 중 한명이 태자의 검에 맞은 듯 했는데, 팔꿈치 밑으로 떨어져 나간 상처부위를 잡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다. "내...내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내의 떨어져 나간 팔이 아니라 태자의 상태였다. 떨어 져 나간 팔에서부터 튀긴 사내의 피가 태자의 얼굴에 잔뜩 묻어 있었다. 남을 처음으 로 해한 충격이 태자에게는 너무나 크게 다가왔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태자전하!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뮤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자신의 칼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뮤스는 자신을 찔러오는 검을 뒤로 피하며 태자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 덕에 팔과 다리에 검상을 입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서 태자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이제 야 뭔가가 풀려 가는 것을 느낀 루피스는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 "이보시오 뮤스군. 아무래도 태자는 너무나 곱게 자라서 고작 이런 일에도 큰 충격을 받은 듯 하군. 당신 혼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을 텐데? " 태자의 상태를 다시 한번 살핀 뮤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물었다. "흠...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자네나 태자의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관식에만 나타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게다가 당신은 귀족도 아니니 태자를 지켜야 할 의무 가 없지 않나? 그러니 이만 포기하는 것이 어때?" 루피스의 제의에 뮤스는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열 명의 사내들을 이겨 낼 수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 게다가 태자전 하까지 보호해야 한다면 그 가능석이 더더욱 줄어들고... 그렇다면 전뇌지자총통은? 음... 이것 역시 연속해서 발사가 안되니... 결국은 차후에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 인가?' 생각을 할수록 점점 암담해져 가는 상황에 별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은 뮤스는 손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좋소. 태자와 나의 목숨을 보장한다면 항복하겠소." "하하핫! 정말 잘 생각한 것이야!" 한차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루피스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당장 태자의 검을 빼앗고, 둘을 단단히 묶어라! 그곳으로 간다!" 그의 명령과 동시에 사내들은 준비해왔던 로프로 태자와 뮤스를 묶었고, 소리를 지르 지 못하도록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다시 한번 매듭을 확인한 사내들은 그들을 끌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겼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팔이 떨어져 나간 사내의 상처에서 뿜어진 핏물만이 흥건했다. <대공학자> #117 태자와 뮤스를 끌고 가는 사내들과 루피스는 빠져나가는 길을 미리 모색해 두었는지 상당한 거리를 걸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인영 조차 눈에 띄지 않고 있었 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루피스는 주변을 둘러봤는데, 거의 폐허에 가깝게 허물어진 건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제 안전한 곳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지 비교적 편안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군. 지금부터 이 곳에서 공작각하를 기다린다. 잠시 휴식! 부상자를 치료하라!" 수하들에게 명령을 한 루피스는 자신을 증오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태자의 앞으 로 다가갔다. 그리곤 가벼운 웃음을 던지며 태자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빼내었는 데,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것 같은 눈빛과는 다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태자였다. 태자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있었던 루피스는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태자전하 답게 참을성이 대단하군요. 왜 제가 이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시겠 죠?" 태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루피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애써 이유를 말하자면... 태자전하께서 제 수하 의 피 따위에 넋이 나가는 것이라고 할까요?" 잠시 말을 끊은 루피스는 태자에게 등을 보이며 외면했다. "솔직히 태자전하께서는 제게 형님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허나... 저는 개인 적인 감 정은 버리고 오직 도이첸 제국을 생각하는 신하로써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것 을 반대할 뿐입니다. 그러니 대관식이 끝날 때까지만 힘드시더라도 참아주시길..." 루피스의 말을 듣던 태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였고, 평소 또 렷하기 그지없던 눈빛은 온데 간데 없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따각, 따각, 따각. 태자의 얼굴을 살피던 뮤슨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 에는 아직 연회복을 갈아입지 않은 가테스가 검은색의 말을 타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루피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몸을 일으키며 말의 고삐를 잡아끌 었다. "공작각하! 모든 것이 계획대로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루피스경. 이제 남들의 이목을 속일 이유가 없으니 편해지겠군."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 가테스는 태자의 얼굴을 지나 뮤스를 바라보았는데, 뮤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멈춘 그는 루피스를 향해 외쳤다. "누가 뮤스 원장까지 잡으라고 했는가!" 가테스는 이 의외의 상황에 화가 난 듯 했고, 루피스 역시 생각지도 못한 불호령이 떨어지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저... 그것이..." 루피스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냉정한 성격을 가진 가테스는 안색을 수습하며 잘라 말 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함께 그곳에 가두고, 경비를 철저히 하라! 난 숙소로 돌아 가 있을 테니 당초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넷! 공작각하!" 확답을 들은 가테스는 다시 한번 뮤스와 태자에게 시선을 주며 말에 올라탔다. 그리 곤 말 등에 올라앉은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태자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태자 이틀만 참으시오. 후훗. 비록 지금과 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은 하지 못하겠지만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것이 어디겠소? 으럇!"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을 몇 마디 던진 가테스는 말의 고삐를 힘차게 당기며 어둠 속 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곳이 다시 어둠으로 물들자 그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루 피스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 무엇들 하느냐! 어서 서두르지 않고! 굼벵이들 같으니라고!" 엉뚱한 곳에 화를 내듯 목에 힘줄을 세우며 언성을 높이자 사내들은 비위라도 맞추듯 신속하게 태자와 뮤스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루피스는 폐허가 된 건물 중 한 곳으로 걸어가 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석재의 마찰음이 들 리며 벽이 양옆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구구구궁... 깜깜한 내부를 들여다 본 루피스는 눈앞에서 떠돌고 있는 먼지를 손으로 내저으며 수 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그의 신호에 수하들 중 한 명은 입구의 한쪽에 비치되어있던 횟불에 불을 당기며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다. (48) 대관식. 이글이글 타오르며 기름방울을 떨어트리고 있는 횃불이 그다지 넓지 않은 복도로 빛 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어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내부로 울리기 시작하자 천 장에서 겨우 버티고 있던 작은 돌 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천장부위가 어떠한 충격으로 인하여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는데 여러 사내들과 루피스, 그리고 뮤스와 태자였다. 루피스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오랜 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 순 간도 쉬지 않고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공작각하께서 발견한 곳이오.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듯 한데, 들 어오면서 봤다시피 입구에 마법이 걸려 있소. 게다가 이곳은 마법으로조차 감지가 안 되니 궁중 마법사 늙은이를 겁낼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지..."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 곳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던 뮤스는 루피스의 말 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것을 느끼며 태자의 표정을 살폈는데, 처음과 같이 넋이 나간 표정은 아니었지만,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 지고 있었다. 앞장서 나가던 사내가 멈추자 그 앞에는 대강 보더라도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버티고 서있었고, 철로 만들어진 견고한 빗장을 들어내어 문을 열었다. -끼기기긱! 귀를 자극하는 금속의 마찰음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은 뮤스는 횃불에 의해 내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음침한 밀실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정확하 리 만큼 네 면의 길이가 비슷한 정 사각의 방이었는데, 벽으로 알지 못할 문자가 빼 곡히 새겨져 있었다. "자 뮤스군 어서 들어가시오. 태자전하 역시!" 루피스의 말과 함께 등이 떠밀림을 느낀 뮤스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어둡기만 한 밀실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손이 자유로워 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 다. 입에 물려진 재갈을 빼어낸 뮤스는 고인 침을 뱉으며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떠밀 려 들어온 태자에게 가까이 갔다. "태자전하 괜찮으십니까?" 뮤스의 물음에 태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어 대답하지는 않았다. -철컹! 끼릭! 다시 한번 쇳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밀실은 한치 앞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 두워 졌고, 밖으로부터 루피스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뮤스군, 그리고 태자. 이틀만 참으시오. 그 때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꺼내 드릴 테니... 비록 세상은 변해 있겠지만. 하하하하핫!" 이렇게 루피스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점의 불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밀실에 남게된 뮤스는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태자를 찾고 있었다. "전하 어디십니까?" 그의 물음에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던 태자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뮤스군 여기입니다." 대답과 함께 뮤스는 자신의 손과 마주치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손을 따라 바닥에 주저앉은 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어둡군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머리를 몇대 쥐어박은 뮤스는 서둘러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자 익숙한 가죽의 감촉이 전해지며 한 가닥의 밝은 미소가 얼굴에 서리고 있었는데, 겉보기로는 평범한 가방이 었기에 루피스 역시 별 신경을 쓰지 않은 듯 했다. "하핫! 가방까지 빼앗아 가지는 않았군!" 마법가방이 아직 자신에게 있음에 안도한 뮤스는 가방에 손을 넣어 부스럭거리며 휴 대전등을 찾았다. -치직! 팟! 그리곤 전원을 넣자 눈부신 빛이 휴대전등으로부터 흘러나오며 미간이 좁혀 졌고, 태 자 역시 갑작스러운 빛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을 한 손에 바꿔든 뮤스는 가방 안에 서 또 무엇인가를 찾아내며 혼잣말을 하였다. "휴대용 마나구가 어디있더라... 아! 여기있군!" 뮤스의 손에 의해 집혀 나온 것은 엄지손톱 만한 수정구였다. 이것은 뮤스가 만든 수 많은 전뇌물품에 전원역할을 하는 물건으로써 크라이츠 마법으로 압축된 뇌공력을 주 입해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휴대전등에 연결한 뮤스는 바닥의 편편한 곳에 내려놓으 며 태자를 향해 미소지었다. "후훗.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뮤스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태자의 눈에는 잠시 놀라움의 빛이 일렁였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놀라워할 겨를은 없어 보였다. <대공학자> #118 잠시 시선을 뮤스의 얼굴에 고정시킨 태자는 의아한 듯 물었다. "뮤스군은 이런 곳에 붙잡히게 되었는데 불안하지도 않습니까?" 그의 물음에 머슥한 듯 손등으로 코밑을 쓸어본 뮤스는 평소와 같은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하핫. 물론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겪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 라고 말씀 드리고 싶군요. 어쩌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 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는 좀 괜찮으십니까? 얼굴에 아직..." 손가락으로 태자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톱 사이로 파 고드는 거친 느낌이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 태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사이에는 검붉은 부스러기들이 잔뜩 묻어있었는데, 자신의 얼굴에 튄 피가 굳은 것임 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져 버렸는지 별다른 방응 을 보이지 않으며 얼굴의 핏자국을 대충 옷소매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소매 를 떼어낸 태자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후훗...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자신이 가장 믿던 수하에게 배신을 당해 이런 몰골 로 앉아 있는 모습이 말입니다. 뮤스군은 아바마마께 제 출생의 비밀을 들으셨겠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태자 역시 자신의 임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긍정 의 고개를 끄덕이는 뮤스였다. 허공의 어딘가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태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저는 루피스 경의 말대로 황제로써의 그릇을 지니지 못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의 눈을 속이고 황제의 위에 오른다는 것이 애초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호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가테스 공작 역시 저의 정체를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비록 이런 일을 저 지르긴 했지만, 그는 규율을 중시하는 인물이죠. 그랬기에, 그 규율을 파괴하려한 저 를 내몰려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비밀리에 이런 일을 꾸민 것이 저에 게 배려를 한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요." 자괴감이 깃 들어 있는 태자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는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일국의 태자가 말하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보란 듯이 하고 있었다. 상식과 동떨어진 행동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자는 그의 눈과 마주치며 정신을 차렸고, 뮤스의 눈가에는 하품으로 인한 눈물이 짧게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 으로 눈꼬리에 걸린 눈물을 살짝 닦아낸 뮤스는 태자가 기대어있는 쪽의 벽으로 등을 붙이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암... 그렇다면 태자전하께서는 이미 지위를 포기하신 듯 하니 이제 저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솔직히 태자라는 자리가 골치 아프지 않습니까? 수하들의 모략에 놀아나기나 하고, 황궁에 틀어박혀 답답하고... 제가 공학원에 자리를 마련해 드릴테니 속 시원하게 저와 함께 라이델베르크로 가시지요?" "그..그것은..." 태자의 입에서 확실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뮤슨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 다. "음? 아직 확실한 대답을 못하시는 것을 보니 아직도 미련은 있으신가 보군요?" 은근한 뮤스의 말에 태자는 아무런 할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말았고, 뮤스의 말은 계속 되었다. "후훗.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자전하께서는 황제가 되기 위해 필 요한 요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태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배운 바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빛으로 인도 할 현명함, 산이라도 움직일 결단력, 드래곤의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용기, 만인을 굽어보는 위압감, 백성들을 사 랑하는 아량이라고 하더군요." 구구절절 흘러나오던 태자의 말이 끝나자 뮤스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 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그런 틀에 박힌 지식은 잠시 접어 두십시오. 이것은 역사나 정치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그저 태자전하의 머리와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황제의 상에 대하여 물 어 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황제의 상이라..." 중얼거리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태자는 한참동안을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뮤스 역 시 그 모습 그대로 태자를 응시하고있었다. 그들 둘의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흐 르고 있을 때, 태자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제가 생각한 바람직한 황제의 상은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머뭇거리며 뮤스의 눈치를 살피자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후훗. 계속 말씀해 보시죠." 뮤스의 말에 조금의 자신감이 생긴 태자는 편해진 목소리로 말을 계속하였다. "제가 황실의 혈통을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5살 이 되던 해였습니 다. 그 때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시죠.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지위를 가진 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의 심정을... 하지만 그때는 아바마마께서 저를 크게 신임하셨기에 다음의 황제로 마음을 정해 두신 후였죠. 그래서 저는 노력 했습니다. 그 위대한 황실의 혈통에 먹칠을 하지 않는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 또, 저를 아껴주는 수많은 분들의 기대를 위해서 말입니다." 뮤스를 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한 태자는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강화체갑 을 드러내 보였다. "후훗. 게다가 운이 좋게도 천형이었던 신체의 약점 역시 뮤스군에 의해 벗어나게 되 었습니다." 말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태자를 보며 쑥스러워진 뮤스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 다. "그런 식으로 살아오며 느끼게 된 것이 바로 노력만큼 위대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 니다. 물론 타고난 용기, 위압감, 아량, 견단력 역시 황제가 갖추어야 할 요소임에는 틀림없으나, 노력이 바탕이 되지 않은 황제란, 또는 인간이란, 그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라는 울타리안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양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태자의 말이 끝나자 뮤스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을 내밀어 태자를 일으켜 세웠다. "태자전하. 저는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든, 아니면 공작각하가 황위에 오르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태자전하이시기 전에 하나의 사람으로써 이런 말 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살던 고향에는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그릇이 완성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을 가진 말이죠. 여기서 큰그릇은 태자전하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즉, 태자전하께서는 아직 미완의 그릇입니 다. 그렇기에 모자라는 점도 있고, 앞으로 보완해야할 점도 있습니만 그것은 어디까 지나 완성된 큰그릇이 되기 위한 여러 과정의 하나일 뿐, 완성의 단계가 아니라는 것 이죠."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느끼는 바가 컸던 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뮤스는 태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자전하께서는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믿고 계셨던 신념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비록 태자전하와 함께 한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 만, 태자전하 만큼 노력하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 니 태자전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신념을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국 을 바로 이 두 어깨에 올려놓고 말입니다." 태자는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뮤스의 손을 감싸쥐며 말했다.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습다만, 왠지 뮤스군의 말이 맞다고 느끼는 것 역시 부정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비록 지금까지 지녀왔던 저의 신념을 직접 이 두 어깨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처럼 만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얼굴의 태자였다. 그의 옆에서 뮤스는 조금 착찹 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막상 태자를 설득하고 보니 너무나 간단하게 마음을 바꾸 는 태자가 조금 불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상념을 지운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믿기로 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태자는 뮤스의 소매를 끌었다. "자 뮤스군! 황궁으로 돌아가죠! 이제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 하지만 꿈쩍도 않고 서있던 뮤스는 손가락으로 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기분이 들떠 있으신 것은 충분히 이해 하지만... 현 상황까지 잊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요?" 뮤스의 지적에 주변을 살펴보던 태자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뮤스군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도를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엥? 왜 그런 생각을?" "그러니까... 옛 전설이나 이야기를 보면, 현자들이 군주를 일깨우기 위해 일부러 자 신의 능력을 숨기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뮤스군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알면 서 숨기고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만..." 어처구니없는 태자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자신의 불안감을 애써 부정하기 시작했 지만,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듯 했다. "헛... 설마 진담은 아니시겠죠? 저는 전설의 현자도 아니고, 무슨 능력을 숨기고 있 지도 않습니다. 그저 일개 공학도일 뿐이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요. 여기서 빠져나가야 뭘 하든지 할 텐데... 혹시 뮤스군이 가지고있으신 힘이라면 이곳을 부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태자전하께서는 학문이외의 것들에 대해 관심을 더 가져야 할 것 같습니 다. 저 두꺼운 철문을 부수고 나가기는 무리이고, 힘으로 천장을 부수게 된다면 구조 도 모르는 이런 지하에서는 매장되기 딱 알맞습니다. 그것도 산채로..." 그의 이야기에 태자는 무슨 상상을 떠올렸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난감하군요... 어떡한다." 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뮤스는 힘껏 뛰어올라 천장 부근을 만져보 았다. 그러자 힘없이 붙어있던 흙 조각들이 부스스 떨어지며 뮤스와 태자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콜록! 콜록!" "콜록! 이런 정말 매장되기 딱 좋군." 주변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손으로 내저으며 투덜거리는 뮤스였다. 먼지들의 기승이 잦아들자 다시 한번 자신이 건들었던 천장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어렴풋이 무엇 인가가 있는 듯 했기에 휴대전등을 들어올린 뮤스는 그것을 비추며 유심히 살펴보았 다. 등뒤로 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앗... 이것은 고대어 군요?" 고개를 돌려 태자를 바라본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대어라니요? 이 지렁이 같은 것이 글자란 말입니까?" "네... 지금은 잊혀져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현자들은 상당한 관심을 가 지고서 연구를 하고있죠." "흠... 읽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군요?" "후훗. 다행스럽게도 그 거의 없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접니다." "이거 정말 다행이군요!" "그럼 한번 해석을 해보도록 하죠." 자신에 찬 목소리의 말을 들은 뮤스는 조금이나마 태자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줄 수 있었다. 태자는 뮤스와 자리를 바꾸며 휴대전등을 건네 받았고, 올려다보며 천장 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대어가 새겨져 있는 곳은 약한 흙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며 보이게된 금속의 재질인 듯 했는데, 푸른빛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청동으로 만들어 진 것 같았다. 태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원형으로 새겨져 있는 고대어를 한 자, 한자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19 "대기의 마나가 충만 할 시기, 광휘의 여신이 현신 하니,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제 2의 여신과 마주 볼지어다." 이 수수께끼 같은 고대어를 읽던 태자는 자신이 해석한 부분이 의심이 가는지 몇 차 례 더 살펴봤지만, 잘못된 부분은 없는 듯 하였다. "제가 잘못 해석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대어를 해석하고있던 태자에 반해 뮤스는 그 주변에 새겨져 있는 12개의 도형을 살 피는 중이었는데, 도형마다 중심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다. 그것들에서 알아낸 것이 전무했던 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어디든 옛날 사람들은 이야기를 돌려 말하기를 좋아하는군요. 아무래도 뭔 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듯 한데... 대기의 마나가 충만 할 시기가 언제일까?" "그야 자정이죠." 아무런 기대 없이 던진 뮤스의 질문에 태자는 서슴없이 대답하고 있는 태자였다. 놀 란 눈으로 태자를 바라보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정도는 마법의 기초수준의 지식이니,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는 마시죠." "후훗. 점점 긍정적으로 변해 가시는군요." "네? 그것이 무슨 말이신지?" "아... 하핫 아닙니다! 그럼 다른 것들도 한번 해석해 보죠. 광휘의 여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뮤스의 물음에 잠시 턱을 궤고 생각하던 태자는 몇 가지 집히는 점을 늘어놓기 시작 했다. "보통 광휘라고 하는 것은 빛이니까... 태양? 아니면 달?" "그렇다면 달이겠군요. 정오에 태양이 떠오를 리는 없고, 일반 적으로 달은 여성에 비유가 되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앞부분의 문장은 달빛이 이곳으로 새어 들어온다는 것이 겠죠?" 태자의 추론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다음 문장을 풀기 위해 생각을 최대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제 2의 여신은 또 다른 달을 말하는 것인데, 아하! 달의 빛이 머무는 자리 를 뜻하겠군요?"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리며 밀실의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문득 무릎을 꿇어 앉아 바닥의 흙을 이리저리 치우는 것이었다. -스슥... 휴대전등의 불빛 사이로 희뿌연 먼지가 일어나며 바닥에는 지름 1멜리 정도 되는 음 각의 둥근 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뮤스는 천장의 고대어가 적혀있는 원과 수직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다른 고대어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아무래도 제 2의 여신인가 보군요. 여기는 뭐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까?" 들고 있는 휴대전등을 내리며 아래쪽의 원에 적힌 고대어를 읽은 태자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는지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랬었군! 이곳은 고대의 마법사가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머물던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제 2의 여신이라는 원 안에서 자정의 달빛을 받으며 더욱 순수 한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죠." 태자가 고대어의 뜻을 완전히 풀어내자 뮤스는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는데, 태자의 물음에 움직임을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뮤스군은 뭘 찾고 계신 것이죠?" "하핫. 태자전하께서 풀어내신 것이 맞다면 어디선가 빛이 들어와야 하지 않겠습니 까? 아무래도 틀린 추측은 아닐 듯 하니 그 빛이 들어오는 통로를 찾고 있죠. 아니면 마법사가 머물고 있었던 곳이니 천장이 열릴 지도..." 잠시 말을 멈추며 자신이 한 말을 되씹은 뮤스는 나직한 탄성을 뱉으며 말했다. "천장이 열려? 그래! 루피스경이 이곳의 입구를 열 때에도 어떤 마법에 의해 열린 듯 했죠? 아마 이 곳에도 그 비슷한 장치가 있을 법하군요!" 말을 마친 뮤스는 서둘러 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태자 역시 뮤스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따라 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제 풀에 지친 둘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우... 태자 전하 아무래도 저의 추측이 틀린 듯 하군요. 어쩌면 너무나 오랜 시간 이 지나서 원래 있던 빛의 통로가 막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글쎄요.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무작정 찾다보니 못 찾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흠 어쩌면 표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던 곳도 아니었 던 것 같으니 비밀스럽게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것 같으니까요. 표식이라면..." 말꼬리를 흐리며 뮤스가 바라본 곳은 자신이 살피던 고대어의 주변에 있던 12개의 도 형들이었다. 그리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도형을 순서대로 세어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열 하나, 열둘... 혹시? 태자전하 죄송하지만 제가 천장에 닿 을 수 있도록 올려 주시겠습니까?" 영문도 모른 채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몸을 들어올 렸다. "여차!" 사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몸을 들어올리기는커녕 업는 것도 버거웠을 것이었으나 강 화체갑의 덕으로 가뿐하기 그지없었다. 뮤스는 몸이 들어올려지자 자신이 눈으로 찍 어 두었던 도형을 매만졌다. 그리고 도형의 중심에 나있는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었 는데, 순간 천장이 진동을 하며 고대어가 적혀있던 둥근 판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이었다. -구구구궁! 놀란 태자는 들어 올리고있던 뮤스를 놓치며 넘어졌고, 뮤스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 다.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짐을 느낀 뮤스와 태자는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입을 막 으며 변화가 일어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주먹만한 통로가 생 기며 순백의 월광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이 넘어져있는 곳은 신비하리 만치 밝은 빛 무리에 휩싸여 있었다. 멍하니 눈부신 빛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태자는 뮤스를 향해 물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죠?" 그의 물음에 빙긋이 웃은 뮤스는 몸의 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저 위의 도형은 일년의 열 두 달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각 달마다 달의 위치가 조 금씩 변하게 되니 저렇게 달마다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의 각도가 달라야 했으니까요. 즉, 1월에는 첫 번째 구멍에, 2월에는 두 번째 구멍에 손을 넣어 빛의 통로를 여는 것이죠." "정말 대단하군요. 고대인들은 어떤 능력을 가졌길래..." "흠... 아무튼 고대어의 비밀은 풀었지만, 우리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겠는걸요? 저런 작은 구멍으로 나갈 수 있을 리도 없고..." 뮤스의 말에 태자의 안색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은 없을 까요?"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태자의 목소리였지만 뮤스 역시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침묵할 뿐이었고, 상황과는 너무나 이질 적인 따뜻한 빛만이 그들을 구속하고있는 밀 실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날, 평온하기만 하던 황궁은 전체가 크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였는데, 다음 날 있을 대관식 준비가 그중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갑작스러운 황 태자의 실종이었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모두들 태자와 뮤스가 그저 다른 곳에 있 으려니 생각을 했었지만, 대관식 준비를 위해 가비르와 크라이츠가 그들을 찾아 숙소 로 왔을 때도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었고, 사람들을 시켜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별 다른 소득이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자신들의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 단한 가비르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되어 황궁 전체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었다. 황궁은 아침부터 태자를 부르는 소리로 가득 채워졌으며, 황궁의 모든 건물과 정원, 그리고 숲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뒤지는 중이었다. 그 중 수색의 중심이 되는 곳은 사 철의 정원이었는데, 태자가 연회 때마다 산책을 하는 곳이었게 때문이었다. "태자전하! 어디계시옵니까!" "전하!" 그런 목소리들 중 몇몇은 뮤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뮤스를 찾아 나 선 드워프들과 크라이츠였다. "뮤스! 어디있냐!" "뮤스군!" "뮤스!"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뮤스의 이름을 외쳐본 켈트는 추운 날씨에 살짝 얼은 코를 매만지며 크라이츠를 향해 말했다. "날씨는 정말 춥군. 크라이츠님 뮤스의 가방에 걸어놓은 추적마법은 안 쓰십니까?" 그의 말에 다른 곳을 보고있던 크라이츠는 등을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쓰긴요? 저도 시도는 해 봤지만, 가방의 흔적이 나타나지가 않아요. 아무래도 제 가 낮은 수준의 추적마법을 걸어 놔서인지 방해를 받는 듯 한 걸요? 저도 당혹스러워 요." "그렇다면 정말 난감하군요. 대체 이 녀석은 어디 가서 처박혀 있는 거야..."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정원의 한쪽을 뒤지 던 레딘이 소리쳤다. "형님! 이쪽으로 와 보구려!" 레딘의 부름에 크라이츠와 다른 드워프들은 그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왜 그래? 뭐라도 발견했나?" 너무나 궁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얼굴을 살피던 레딘은 고개를 끄덕 이며 땅의 한 부분을 가리켰고, 켈트는 색이 변해있는 흙을 손에 묻혀 혀에 가져다 댔다. 그의 행동에 크라이츠는 살짝 인상을 썼지만, 드워프 형제들은 그의 행위보다 결과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입을 몇 번 우물거린 켈트는 크라이츠를 올려다보며 말했 다. "이것은 피입니다. 퍼져있는 넓이로 봐서는 상당한 양의 출혈 같은데... 아무래도 누 군가가 여기서 치열한 격투를 한 모양입니다. 얼어서 확실히 모양은 나지 않지만, 발 자국이 혼잡하게 찍혀있군요." 켈트의 말에 평소 감정의 기복을 별로 드러내지 않던 크라이츠도 이빨을 드러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크라이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변에서 태자를 찾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겁에질린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잠시 이성을 잃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드 래곤 피어를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대공학자> #120 순간적인 크라이츠의 반응에 깜짝 놀란 드워프들은 자신들도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츠의 입을 급히 막았다. 그리곤 자신들로 쏠린 시선을 능청스럽게 무마하며 어 색한 미소로 답했다. "허허허... 갑자기 저희 레이디께서 피를 보고 질겁을 하셨네요!" "자자 다들 하던 일들 보세요!" "허헛! 레이디 뭘 그런 것을 보고 그렇게 놀라십니까? 자 이만 가시죠." 어물정한 표정을 지은 드워프들은 서둘러 현장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둥근 원탁을 축으로 하여 황제와 크라이츠 일행을 포함한 십 여명의 중요 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테이블 앞에는 의례적으로 놓아두는 입가심 거리들과 포도주가 잘 올려져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침묵에 휩싸여있던 분위기 중에 크라이츠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녀의 옆에 앉은 드워프들은 또 그녀가 어떤 실수를 할지 두려워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폐하께서도 느끼셨을지 모르겠지만, 우연한 실종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허술한 방법으로 사라진 태자와 저희 동생을 찾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되는군요." 이것은 효율적이지 못한 그들의 대처 방법에 대한 질타였기에, 그녀의 도발적인 말투 를 듣던 귀족들은 불쾌한 듯 얼굴을 붉혔다. "레이디 크라이츠. 지금 황제폐하 앞에서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니오?" 하지만 화가 날대로 나버린 크라이츠의 행동을 비난한 그 귀족은 서둘러 눈을 피해야 했는데, 크라이츠의 날카롭게 치켜뜬 눈매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 귀족의 체면을 생각한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몬티오 백작 그녀를 이해해 주게나, 하나뿐인 동생이 사라졌으니 짐과 다르지 않은 심정일 걸세." 잠시 냉기가 감돌던 장내의 분위기가 황제의 의해 정리된 듯 하자 가비르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역시 크라이츠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이번 일이 대관식의 바로 전에 일어났다는 점과, 사철의 정원에서 발견되었다는 혈흔이 무엇인가가 일어 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보고있습니다." 가비르가 그녀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나서자 황제의 눈빛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고 있 었다. "짐 역시 자네의 말대로 뭔가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네. 내 유일한 핏줄이 한 순간에 실종되었다고 하니 온갖 좋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구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황제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던 가비르의 마음 역시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폐하 때가 때인 만큼 대관식을 연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대로 대관식을 진행 한다면 어떤 일이..." 가비르의 말에 고개를 치켜든 황제는 지금까지의 초조해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기운 을 뿜어내기 시작했는데, 주변 인물을 한순간에 압도하는 위엄이 전신을 타고서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재상!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가! 비록 태자가 실종되어 마음이 아프고 무겁긴 하나, 이런 일로 수십 대를 전해 내려온 황실의 전통을 흔들 수는 없는 일이네! 설사 이보 다 더한 일이 있더라도 말일세!" 예상치 못한 황제의 격노에 놀란 사람들은 황제와 가비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가비르의 제안이 현실에 적합 한 것임을 알았기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 히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의 깊으신 뜻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비르 재상님의 말씀 도 다시 한번 숙고해 주십시오. 만약 정말 이번 일에 음모가 숨어 있다면 그것은 황 권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이대로 대관식을 진행한다는 것은 제국 전체를 위험으로 몰아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 역시 가비르 재상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대관식을 그대로 거행했을 경우 태 자전하께서 나타나시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줄은 폐하께서 더욱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이들은 제국을 다스리는 황실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올라있는 자들로써 황제와 태 자의 측근이었기에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 히는 것을 잠자코 보고만 있던 황제는 그들이 무엇이라 말을 하던지 간에 뜻을 굳힌 듯 아무런 기색의 변화가 없었으며, 오히려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짐이 가진 이 황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경들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것 은 바로 선대의 황제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선대로부터 혈통으로 이어져온 하나의 전통에 불과하다는 것이오. 만약 이 것을 지키기 위해 다 른 전통을 깨어 버린다면, 황권이라는 이름의 전통이 깨어지는 것과 무슨 다른 점이 있겠소."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황제의 말에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런 할말을 찾지 못했고, 황제조차 자신의 그러한 점을 인정하고 있는지 안타까움이 나직한 한숨사이 에 섞여있었다. "후우... 짐은 지난 20년간 도이첸 제국을 통치하며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살아왔소. 그것이 바로 짐의 통치 방법이었고, 선대의 황제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이 제국을 통 치해왔던 것이오. 이제 내일이면 짐의 모든 권력이 사라지겠지만, 오늘까지 만큼은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짐의 방식으로 처리할 것이니 경들도 모두 짐의 뜻을 따라주 기 바라오." 황제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한 공기가 장내에 감돌고 있었다. 가비르를 비롯하여 황 제를 설득하려 했던 귀족들도 황제의 마지막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 중 중심 인물이었던 가테스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견 해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원탁 위에 올려놓으며 나직한 한 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흐음... 폐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지금 너무 확대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비르 재상님의 말씀대로 태자 전하께서 황위를 물려받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자들이 그러한 일을 꾸몄을 수도 것이나, 목숨과 지위를 내놓고 그런 대담한 일을 벌일 자들이 과연 있을까요? 여러서 부터 주입되어온 황실의 지고한 혈통에 대항하려는 자가..." 가테스가 황실의 핏줄을 들먹이자, 황제와 가비르는 보일 듯 말 듯한 동요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가테스는 내심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혹, 태자전하께서 스스로 황위를 원치 않으셔서 잠적을 하신 것이 아닐지도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제 옆에 있는 루피스경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죠. 충분 히 납득이 가실 테니..." 말끝을 흐린 가테스는 자신의 옆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있는 루피스를 바라보았다. 루 피스의 표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에 그 누구도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했는데, 태자의 옆에서 오랜 시일 동안 본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모 두가 속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슬픔에 잠긴 눈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테스 공작각하의 말씀이 사실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태자전하께서는 예전부 터 저에게 걱정스럽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유일한 존 재이셨고, 게다가 허약하신 몸으로 황위를 물려받음에 있어 큰 부담이 되셨던 것이었 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번 대관식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루피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자연스럽게 가테스가 받아 이어갔 다. "폐하. 루피스경은 태자전하와 가장 친분이 깊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니 충분히 믿 을 만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대로 그 동안 태자전하께서 상당한 고민 에 시달리셨다면 이번 일에 대한 충분한 동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 까?" 그의 물음에 잠시 숙고하던 황제는 갈등하고 있는 듯 했는데, 태자가 황위를 물러 받 는 것을 거부하여 자취를 감추었을 가능성이 가테스에 의해 제기되자 참담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힘없는 눈빛으로 근위대 대장인 프라이어를 바라본 황제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모르겠소... 짐은 정녕 모르겠소. 프라이어경은 모든 근위대를 이끌고 태자를 찾으 시오! 지금 당장!" "네! 폐하!" 프라이어가 깍듯한 인사와 함께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황제는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 가 밖을 내다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들 짐의 말을 잘 들으시오. 대관식은 예정대로 내일 거행될 것이고, 태자의 문 제는 아무런 확증이 없는 이상, 궁내의 모든 이들을 동원해서라도 대관식 이전까지 찾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오. 그럼 내 뜻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이만들 나가서 태자 를 찾으시오!" 황제의 말에 잠시 술렁이는 듯 했지만, 그의 뜻에 따라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 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심정이 복잡해진 황제는 초점이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크라이츠는 아무런 말없이 복도를 걸었으며, 드워프들 역시 서둘 러 그녀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켈 트는 크라이츠의 옆으로 따라 걸으며 물었다. "크라이츠님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희들이 보기에도 뮤스는 누군가가 꾸민 정치적 다툼에 끼어든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이곳이 마음에 안 들더니..." 켈트의 물음에도 크라이츠는 걷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의 뒤로 가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이츠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크라이츠의 앞으로 뛰어와 가로막으며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게 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뮤스군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하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가는 인물들이 있으니 제 심복들을 시켜 알아보게 한다면 금세..." 가비르의 말에 날카롭게 눈매를 치켜올린 크라이츠는 냉소를 터트리며 그의 말을 단 숨에잘랐다. "흥! 가비르 재상. 나는 당신의 제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어요. 설령 이번 일로 하여금 제국이 붕괴가 되더라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뮤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저도 참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할거예요. 황제를 비롯한 당신들이나, 아니면 음모를 꾸민 자들 양쪽 모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루어야 할겁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가비르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고, 이렇게 된 이상 음모 를 꾸민 자를 찾아 응징하는 것 보다 그를 찾아 뮤스의 안전을 확보해 두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제국의 권력이 누구의 손에 넘어 가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제 국 존재의 유무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고 있을 때 크라이츠는 특유의 향기를 남기며 그의 옆을 지나쳐 드워프들과 사라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121 (48)장의 제목을 '실종'으로 바꾸고 (49)장을 '대관식'으로 합니다^^;; ############# (49) 대관식. -휘잉... 차갑게 불던 바람이 좁은 통로를 진동시켜 신비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람의 꼬리가 닫는 곳에 뮤스와 태자가 잠이 들어 있었는데, 뮤스는 뇌공력 덕분으로 별 추 위를 못느끼고 있었지만 태자는 그렇지 않은 듯 몸을 움츠리며 떨고 있었다. "으음..." 신음 소리를 내며 감싸 앉은 부위를 비벼본 태자가 몸을 돌려 눕자 눈꺼풀에 직접적 으로 닿은 눈부신 햇살에 의해 인상이 찡그려 졌다.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린 태자는 뻣뻣한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으로부터 스며드는 햇살로 보아 낮인 듯했고, 그것을 제외 한다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였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서 너무나도 편안하게 자고있는 뮤스를 바라본 태자는 알게 모르게 혀를 내둘렀 다. "정말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군. 이런 추위에서도 마치 안방처럼 자고 있다니..." 한숨을 나직하게 내쉰 태자는 뮤스를 깨우기 위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뮤스군 이제 일어나요. 아침입니다." "으음... 아..아침요?" 입이 메마름을 느낀 뮤스는 침을 모아 삼키며 말했다. 감겨있던 눈을 힘겹게 뜬 뮤스 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바라보았고, 이내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 다. "잘 주무셨습니까?" "후훗. 저보다는 뮤스군께서 정말 잘 주무신 듯 하군요.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렇게 편하게 주무실 수 있으시죠?" 부시시해진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고개를 털며 대답했다. "오히려 태자께서 너무나 편한 생활을 하셔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뭐 이정도면 바람 도 막아주고, 천장도 있으니 꽤나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비록 뮤스는 아무런 생각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무엇인가 느낀 점이 있었던 태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지금 시간이 어느 정도 되었을 까요?" 태자의 물음에 햇살이 들어오는 통로를 바라본 뮤스는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 를 눈으로 재어보며 대답했다. "이 정도면 오후 3시쯤 되었겠군요. 아무래도 생각보다 늦게 잠을 잔 듯한 걸요?" "정말 뮤스군의 지혜는 대단합니다. 햇살을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으시다니..." 태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듣던 뮤스의 입에서는 천천히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고, 이내 참지 못했는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둥근 물 체를 내밀어 흔들었는데, 다름 아닌 시계였던 것이었다. "푸하하핫! 그건 그냥 시늉만 했던 겁니다. 그 전에 궁금해서 몰래 시계를 봤을 뿐이 죠." 생각지도 못한 뮤스의 장난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던 태자는 입만 뻥긋거리 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겨우 웃음을 참은 뮤스는 시계를 가슴 안쪽에 넣으 며 말했다. "쿠쿡... 태자전하께서 어제부터 너무 굳어있는 것 같으셔서 장난 좀 쳐봤습니다. 그 러니 그 보기 민망한 표정은 좀 푸시는게 어떨까요?" 그제야 뮤스의 의도를 알게된 태자는 괴상하게 변해버린 얼굴을 힘들게 수습할 수 있 었다. "후우... 뮤스군의 배려는 고맙지만, 그런 식의 장난은 좀 삼가 주시길... 정말 바보 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태자의 한숨에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뮤스였다. "네. 앞으로는 좀더 상황을 살피고서 이런 장난을 하도록 하죠. 하하핫!" "하하! 앞으로 또 이런 장난을 하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 유념해야 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지금쯤이면 황궁이 난리가 났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왠지 가테스 공작과 루피스 경이 나의 실종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 고있을지가 너무나 궁금합니다." 이전보다는 조금 더 여유 있는 태자의 말투였는데, 아무래도 뮤스의 장난이 효과가 있은 듯 했고, 그의 태도에 만족한 뮤스는 짐을 한가지 덜어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였을 뿐이었고, 이제 다시 이곳을 빠져나갈 고민을 해야 했다. "이제 전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신 듯 하니 빠져나갈 생각을 해볼까요? 마음이 촉박하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기 마련이거든요?" "그 말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합니다. 안정이 되니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 감이 생기니 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씩 살펴보죠, 일단 이곳은 지하이기 때문에 벽은 부술 수 없습니다. 뭐 부숴질 것 같지도 않지만... 그리고 천장을 부순다면 바 로 생매장될 것이 확실하고... 그래! 전뇌지자총통!" 잠시 뮤스의 말을 듣고 있던 태자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뇌지자총통이라니요?" 대답도 하기 전에 가방을 먼저 뒤진 뮤스는 오랜만에 전뇌지자총통을 꺼내들었다. 이 리 저리 총신을 만져보며 옛날 생각을 잠깐 떠올린 그는 태자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전뇌지자총통인데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녀석이죠. 이 정도의 파괴력이면 저 철문정도야 우습게 부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무기로 때려서 철문이 부서진다는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군요." 그의 순진한 물음에 등으로 식은땀을 흘린 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으로 때려서 부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전뇌지자총통은 제 몸에서 나오는 마 나를 잠시동안 축적한 후 응축된 마나로 변화시켜 발사하는 것이죠. 물론 일반적인 마나는 아니지만, 그 때 발생하는 파괴력이면 충분히 저 문을 부수고도 남습니다." 비록 태자는 뮤스가 한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그를 믿고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다면 왜 루피스 경의 수하들과 싸울 때는 쓰지 않았죠?" 태자의 질문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발출하려면 5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동안 적들이 기다릴 리는 없죠. 그리고 제가 사람을 죽 이는 일만큼은 절대하기 싫다는 것도 큰 작용을 했고요." "흠 그렇군요. 그럼 어서 저 철문을 부수고 나가죠!"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으로 코밑을 쓸어본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으로 철문을 조준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뇌공력 3성발출!" 그러자 그의 손은 눈부신 금광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눈이 부신 태자의 미간은 점차 좁아지고 있었다. 몇 초 후 전뇌력이 전뇌지자총통에 밝게 맺히자 뮤스는 입가에 미 소를 띄웠다. "발사!" -지잉! 퓨웅!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뇌지자총통에서는 흰색의 빛 줄기가 발출 되며 눈 깜짝 할 새에 철문을 꿰뚫어 버렸다. 전뇌지자총통이 완전히 발사된 것을 확인한 뮤스는 금광 으로 물들어있던 팔의 뇌공력을 거두며 본래대로 돌아갔고, 이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 태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이럴 수가. 대..대단합니다! 그런데, 왜 철문은 아무런 변화도 없죠?" "후훗. 이 철문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너무나 빠른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형상 이 사라지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죠. 발로 차보시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뮤스의 말이었지만, 너무나도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기에 차마 의심을 할 수가 없었던 태자는 그의 말대로 철문을 힘차게 찼다. -꽝!! 헌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그렇게 확신하던 뮤스의 믿음을 저버린 철문은 아무런 일 도 없다는 듯이 굳건하게 서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뮤스의 말을 믿고 힘껏 철문을 찬 태자는 자신의 발을 부여잡고 땅위를 뒹굴었고, 뮤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도저히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는데, 믿고있던 전뇌지자총통까지 무위로 돌아 가자 혼란스러웠던 것이었다. 발을 감싸 안고 쩔쩔 매던 태자는 눈물과 함께 원망이 담긴 눈으로 뮤스를 보며 물었다. "으윽! 뮤스군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말 아프군요. 게다가 강화체갑의 힘까지 실려있었으니. 크윽!" 하지만 뮤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몇 번 더 전뇌지자총통을 쏴대기 시작했 다. -지잉! 퓨웅!, 지잉! 퓨웅! 점차 주입하는 뇌공력의 양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철문이 아무런 변화가 없자 화가 난 뮤스는 뇌공력을 풀지 않은 상태라는 것조차 잊고 전뇌지자총통을 땅으로 패대기 쳤다. "이런 제길! 대체 이 방은 뭐란 말이야!" 한바탕 거친 말을 내뱉은 뮤스는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전뇌지자총통의 조각을 발로 밟았고, 그 모습을 본 태자는 위화감을 느꼈는지 발이 아픈 것조차 잊고 뮤스의 몸을 잡으며 말리기 시작했다. "뮤스군, 그만 하시죠!" 하지만 뮤스의 힘을 버텨내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기에 오히려 매달려서 휘둘리고 있었 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태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강화체갑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기 시작했는데, 팔의 조임과 다리의 버티는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 가 뮤스 역시 너무나 많은 뇌공력을 방출했기 때문에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뮤스의 움직임이 점차 늦어지자 태자는 그를 구속하고있던 팔을 풀며 주저앉았고, 뮤스 역시 거의 탈진 직전이었기에 태자의 옆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헉! 헉! 정말 이해가 안되는군..." 그의 옆에서 함께 거친 숨을 내쉬던 태자가 말했다. "헉... 헉... 후훗... 뮤스군을 잡는데 처음 강화체갑을 사용하다니 정말 우습군요. 게다가 과다하게 쓰니 체력 소모가 엄청난 걸요?" 가쁜 숨을 몰아쉬던 뮤스는 민망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후우...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그렇게 화를 내실 것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방은 마나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마법이론에 대해 공부를 할 때 들은 것인데,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 신의 방에 마나의 충격을 흡수 할 수 있는 마법을 부여하여 방안에서도 여러 가지 마 법을 시험했다고 하니까요. 물론 시간이 흐르며 유실되어 버렸지만, 바로 이곳이 그 런 곳들 중 한곳인 듯 하군요. 그러니 추적마법 등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죠."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정말 신비로운 곳이야..." 태자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남아있던 분노조차 완전히 풀려버렸고, 그 덕에 몸이 녹초가 되어 골아 떨어져 버렸다. 그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태자 역시 강화체갑에 의해 너무 많은 체력을 소비했기에 똑같은 모습으로 잠이 들 수밖에 없었 다. <대공학자> #122 짧았던 겨울의 해가 또 한번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 불꽃을 더욱 빛내기 위해 새빨간 불꽃을 지평선 너머로 뿌리고 있을 때,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은 그들에게 할애 된 숙소의 정원에 나와있었다. 저녁조차 먹지 않은 크라이츠 때문에 함께 굶어 야 했던 드워프들은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분위기가 아니 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던 크라이츠를 향해 켈 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라이츠님 이곳에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의 물음에 팔을 양쪽으로 뻗으며 해가 진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린 크라이츠는 불어 오는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억양으로 대답했다. "내일 이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할 것 같으니, 마나를 보충해 놓으려는 거예요. 아무래도 저 멍청한 인간들의 힘으로는 뮤스를 제대로 찾을 리가 만무한 것 같으니..." 그녀의 진지한 눈을 보며 장난이 아니라 느낀 켈트는 마른침을 삼키며 형제들을 바라 보았다. 그들 역시 크라이츠의 발언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기에 자신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크라이츠님! 하지만 뮤스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것이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 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 듯 합니다." 켈트의 말에 눈을 내려 깔며 그를 바라본 크라이츠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호홋! 감히 드워프가 드래곤에게 충고를 하다니 정말 대단한 발전이군요. 미물들에 게 틈을 주면 머리 위로 올라서려 한다더니..." "그..그렇지만..." 그녀의 말대로 너무나 편안한 분위기에 길들여져 있던 켈트는 자신을 향해 살의를 일 으키고 있는 크라이츠라는 존재에게서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크라이츠는 켈트에게 한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뮤스가 여기서 죽는다면 제가 이곳에서 유희를 즐길 이유 따위는 전혀 없어요. 그러 니 본체로 현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죠. 부디 그 때 제 발 에 밟혀 목숨을 잃지 않기를 바래요. 켈트씨..." 켈트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그의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 였다. 사실 크 라이츠와 켈트의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존재가 바로 뮤스였는데, 그가 죽었을 지도 모를 지금에는 둘 사이를 중재시켜줄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지금 크라이츠의 태도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을 향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곤 두 팔을 양옆으로 펼치며 월광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희미한 빛 무리에 휩싸인 그녀는 성스러운 천사인 것 같기 도 했고, 기도를 하는 성직자 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켈트와 형제들의 눈에는 세상 을 파괴하기 위해 내려온 사신의 모습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켈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브라이덴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님, 비록 목숨이 아깝긴 하지만 크라이츠님께서 이곳을 파괴하려 마음을 먹은 이 상 우리 역시 죽는 것은 각오를 해야 할거요." 그의 말에 뒤에 있던 블뤼안 역시 켈트의 옆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목을 늘이고 죽느냐, 아니면 최대한 노력을 해보느냐 인데..." 말의 마지막은 레딘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 죽는 것은 못마땅해." 형제들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켈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 크라이츠님을 대항 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 는 거야?" 켈트의 되물음에 브라이덴은 형제들에게 모이라는 시늉을 했고, 의아해진 드워프들은 기대반, 의심 반의 마음으로 그의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크라이츠를 흘끔 본 브라이덴은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자신이 세운 계획을 형제들 이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브라이덴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드워프들의 표정은 전과다르게 밝아져 있 었는데, 브라이덴의 말대로 한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켈트 는 자신의 동생이 기특하기 그지없었는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브라이덴의 머리를 어린아이 칭찬하듯 쓰다듬어 주었고, 크라이츠가 들을까봐 목소리를 한층 줄인 켈트 는 웃는 얼굴로 형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묘안이야. 그 방법이면 뮤스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 할 때까지는 크라이츠님도 파괴행위를 할 수 없겠지." 다른 형제 드워프들도 그의 말에 동감했기에 눈빛으로 의견을 맞추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고!" -따각. 휴대전등에 전원을 넣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찾아든 밀실은 밝아졌다. 손등으로 눈 부위를 가린 태자와 뮤스는 빛을 피하듯 얼굴을 뒤쪽으로 빼긴 했지만, 칠흑같은 어 둠보다는 몇 곱절 났다고 생각했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낸 뮤스는 등가죽과 달라 붙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배를 움켜잡으며 불만이 쌓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간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굶어 죽겠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연회에서 잔 뜩 먹고 나올 것을." -꼬로록 꼬로록거리고 있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본 태자 역시 뮤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듯 했다. "이것 참.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흐음... 이런 상황에 체면이 어디 있겠습니까. 굶어 죽게 생긴 것도 모르고 그 난리 를 피웠으니, 제 책임이 크군요." 그의 말에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태자는 너무나 우스운 생각에 피식 웃었다. "풋! 그래도 그 덕분에 정신을 잃고 잠이라도 잤으니 시간을 잘 갔군요." "하하핫!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들은 다시금 밀려오는 허기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렇게 둘의 사이에 침묵이 흐르자 태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뮤스가 물었다. "그나저나 제 생각이 맞다면 내일 정오가 대관식인 듯 한데, 이렇게 된 이상 연기가 되겠죠?" 뮤스가 대관식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던 태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한차례 저은 그는 체념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우... 아닙니다. 제가 알고있는 아바마마께서는 이런 일로 대관식 같이 국가중대 사를 연기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아마도 계획대로 진행을 하시겠죠." "네?! 다음 황위를 이을 태자전하께서 실종되셨는데 대관식을 진행한다니요! 설마 그 런 일이..." "뮤스군은 대관식의 유례를 모르시겠군요?" 태자의 말에 뮤스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몇 번 숨을 들이쉴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둔 태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제국이 건국되는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약 1200년 전 저희의 선조께서는 일곱 개로 찢어져 있던 오이랍 대륙의 서부를 통일시켰는데, 그것이 도이첸 제국의 시초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중점을 두고 공신들과 함께 제국의 기반을 다지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으셨습니 다. 하지만 그분과 공신들은 병법과 전술에만 능했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귀족들이 꺼리는 사실 중에 하 나인데, 그런 상황에서 생각해 낸 것이 비슷한 시기에 대륙의 동부를 통일한 듀들란 제국의 정치기반을 그대로 따오는 것이었던 것이죠. 후훗... 물론 이 사실을 주장하 는 듀들란 제국의 역사학자들에게 도이첸 제국의 역사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들 하지만 그들도 은연중에 인정하는 부분이죠." 역사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던 태자는 손이 허전한지 주변의 고 운 모레들을 쓸어모으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결국은 그렇게 도이첸 제국의 정치기반을 잡았던 것이죠. 그런 연유로 도이첸 제국 과 듀들란 제국의 정치는 거의 같은 체계를 이루게 되었고, 그 정체성을 따짐에 있어 대립적인 위치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경제, 학문, 군사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까 지 걸쳐 숙적관계를 맺고 있죠" 태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관식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 이제 막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당시 듀들란의 정치 체제를 들여 와 도이첸 제국에 접목시키고, 시험하여 문제점을 바로잡는데 20년이란 시간이 걸렸 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완전한 제국으로써 성립되었다는 것을 다른 국가에 알리기 위 해 황실출범식이 거행되었던 날이 바로 12월 28일인 내일입니다. 그 때부터 몇 번의 다른 일들을 거쳐 대관식은 자연스럽게 20년의 주기를 두게되었고, 날짜는 황실이 출 범한 날인 12월 28일날 거행되어 지는 것이죠." "대단하군요! 무려 1200년씩이나 하나의 혈통이 이어지다니... 그렇다면 20년의 기간 이 채워지기 전에 황제의 신병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좋은 질문이군요. 만일 다음 대관식이 거행되기 전에 황제가 주신의 품으로 간다면, 남은 기간동안 재상이 전권을 위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상을 견제하는 귀족 의 원로원들이 있으니 함부로 권력을 남용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죠." 태자의 상세한 설명에 뮤스는 대충이나마 황실의 계승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색이 처음 보다 더욱 어두워진 태자는 손에 주워든 고운 모래들을 천천히 바닥으로 쏟았다. "그만큼 도이첸 제국에 있어서의 대관식은 쉽게 연기가 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죠. " "만약 태자전하께서 대관식에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뮤스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미룬 태자는 가테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흠... 바로 대관식 당일의 해가 지기 전에 황제와 황실의 주축이 되는 귀족들이 모 여 가장 가까운 황실의 혈통을 찾게되고, 다음 황위는 그 때 결정된 인물에게 넘어가 게 되는 것입니다. 대관식에 나타나지 태자가 스스로 나타나지 않음은 그 지위를 포 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답니다. 물론 지금까지 태자가 스스로 지위를 포기한 경 우도 상당 수 있었죠."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했던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한발자국 다가서게 되자 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뮤스는 일이 생각보다 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수가... 황궁에서도 태자전하의 돌연한 실종을 누군가의 의도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다지 확률이 높지 않을 것입니다. 가테스 공작이 일을 계획하면서 철저히 꾸며놨을 테니까요." 뮤스는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비록 누가 국가의 권력을 쥐던 간에 상관은 없는 위 치였지만, 기왕 돕게 된 것인데 좋은 쪽으로 흘렀으면 하는 바램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정말 난감하게 돼버렸군요. 그 정도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 한 것 같군요. 누군가에게 알릴 방도조 차 없으니..." 태자의 나직한 말을 들은 뮤스는 천장에 난 통로로 새어들어 오고 있는 평온한 달빛 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이 지금 이 밀실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통하는 부분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래... 우리가 못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들면 되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뮤스는 혼자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태자 를 향해 대답을 들으려는지 아니면 그냥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전쟁시 멀리 있는 아군에게 신호를 보낼 때 어떤 방법을 썼죠?" 뜬금 없는 그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인 태자는 자신이 읽은 여러 가지 책을 머리 속으 로 뒤적였다. 그리곤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었기에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먼 거리는 주로 마법으로 의사소통을 했죠. 당시에는 마법사들이 많았으니까요." "그것조차 여의치 않은 일반 사병들은요?" "흠... 그거야 당연히 불빛을 이용했죠.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빛을... 비록 자세 한 내용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적군의 침입이나 승전, 패전 등의 간단한 내용은 손쉽 게 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태자의 대답에 이마를 때린 뮤스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핫! 바로 그거예요! 왜 진작 그 간단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저 달빛이 들 어오는 통로로 빛을 뿜어서 외부로 신호를 하는 거예요. 그럼 태자전하를 찾기 위해 동원된 병사들이 이곳을 의심하게 되겠죠. 이 방이 빛까지 차단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호라! 그것 정말 좋은 방법이군요. 역시 열쇠는 가장 보기 쉬운 곳에 있다더니... " "그것은 이곳의 속담인가요?" 뮤스의 되물음에 태자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 유명한 속담을 모르십니까? 그러고 보니 도이첸 제국 건국기도 전혀 모르는 표정 으로 들으시던데..." 태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흠칫한 뮤스는 오랜만에 겪는 일이라 당황한 기색을 표하고 있었다. "저... 사실은..." 자신의 물음에 뮤스가 생각 이상으로 당황하자 태자는 경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핫! 공학에 대한 공부 말고는 전혀 거들떠보지 않으셨군요? 후훗. 그러니 시간 나 실 때마다 여러 가지 학문을 병행하는게 좋겠군요. 하지만, 다른 학문이라도 뮤스군 보다 제가 낳은 점이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걸요?" 혼자 이야기를 꺼내고 혼자 이야기를 끝마치자 뮤스의 얼굴은 돌에 맞은 사람같이 변 했지만,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빨리 빛을 만들어 낼 만한 도구를 만들어야겠군요. 이 좁은 통로 지름의 두 께로 그만한 빛의 양을 만들어 낼만한 재료가 있을지..." 다시 안색을 되찾은 뮤스는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태자는 그리 크지도 않 은 가방에서 튀어나오는 엄청난 양의 부속들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대공학자> #123 -땡그랑! 한참동안의 시간을 가방과 씨름하며 보낸 뮤스는 손바닥만한 금속의 부속하나를 땅에 떨어트리며 허탈한 얼굴을 했다. "크윽! 도저히 불가능해..." 그의 옆으로는 밀실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쌓여있는 수많은 부품들과 재료들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들을 수도 없이 뒤적여 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 았다. 뮤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태자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맥빠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이 많은 부품 중에 고밀도증폭렌즈가 없다니..." "고...고밀도증? 아무튼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후우... 빛을 만들어 내더라도 그것이 없으면 충분한 빛의 양을 얻는 것은 불가능합 니다. 게다가 고밀도증폭렌즈는 만드는 것 역시 상당한 과정이 필요해 이곳에서 제작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전뇌지자총통을 부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외침은 거의 절규와 같은 것이었고, 다시금 뮤스가 발작 할 조짐이 보이자 잔뜩 긴장한 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강화체갑의 출력을 높이고 있었다. "참아요 뮤스군!" "후우... 이것 마저도 안되다니..." 다행스럽게도 뮤스의 행동은 거기에서 멈추었기에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화 체갑의 출력을 원상복귀 시켰는데,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금 새 숨이 거칠어졌다. "헉..헉.. 체력이 회복 될 때까지만 이라도 벗어 두어야겠군." 태자는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힘겹게 강화체갑을 벗었고, 그것을 본 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태자전하 지금 벗으신다면 강화체갑에 적응을... 강화체갑?! 카인슈나이드!!" 말을 하다말고 빛나는 눈빛을 되찾은 뮤스는 태자가 벗어놓은 강화체갑을 들어올리며 쾌재를 질렀다. "그래! 카인슈나이드가 있었지! 태자전하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시겠습니 까?" 태자는 얼떨결에 뮤스가 시키는 대로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뮤스는 기대감에 부 푼 얼굴로 강화체갑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뇌공력을 운용하여 손으로 유도했는데, 금 광의 뇌공력이 강화체갑에 닿는 순간 엄청난 빛무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쿠하하하핫! 이거야! 이거!" 뇌공력을 거둔 뮤스는 주먹을 부릅쥐며 강화체갑에 입술을 퍼붓고 있었다. "역시 크라이츠 누님의 말씀이 맞았구나!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태자전하!" 흥분에 휩싸인 뮤스는 희망찬 표정으로 태자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강화체갑에서 뻗 어 나오는 광채를 실수로 응시해 버렸는지 순간 적으로 시력을 잃은 눈을 비비며 괴 로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뮤스군! 앞이 안 보이는군요!" 강화체갑을 던져놓고 태자에게 다가온 뮤스는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런... 눈이 빛에 노출된 모양이군요.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테니, 큰 걱정은 하 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다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니까요." 눈을 감고있던 태자는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럼 다행이군요. 그건 그렇고 그 광채는 무엇입니까?" "아! 이것이 바로 섬광의 전사라 불리운 마크 도나엘의 비밀이죠."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바로 강화체갑을 만들 때 쓴 저의 검 카인슈나이드가 바로 마크 도나엘의 검이었는 데,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마나를 주입할 경우 엄청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방금 전에 강화체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죠." "오호라!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놀람을 표한 태자는 고개를 털어 내듯이 흔들며 눈을 힘겹게 떴지만, 아직 물체가 또 렷하게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태자의 상태가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게된 뮤스는 한시 바삐 외부를 향해 신호를 해야 했기 행동을 서둘렀다. "태자전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실명을 하실 수도..." 태자 역시 이미 당해 본 것이 있었기에 그 빛의 강렬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이번에는 눈을 감은 위에 손까지 사용하여 그 위를 덮었다. 이제 태자가 준비를 마친 듯 하자 뮤스는 전뇌지자총통을 통해 방출 한 후 얼마 남지 않은 뇌공력 을 모조리 강화체갑으로 쏟아 넣기 시작했다. "이야아아앗! 뇌공력 방출!" -번쩍! 그의 외침과 동시에 뇌공력을 한껏 머금은 강화체갑이 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빛을 사방으로 뿌려 대기 시작했고, 뮤스와 태자의 전신은 빛 무리 속으로 자취를 감 추고 있었다. 같은 시간, 드워프들은 걱정이 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어눌 한 자세로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아무리 힘든 일 을 겪고 있는 이들이 보더라도 동정심을 유발시킬 만치 충분히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달빛을 받으며 마나를 증폭시키고 있는 크라이츠를 향해 곁눈질을 해본 블뤼안 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님... 이제 우리는 죽는 것이우?" 말을 마치며 블뤼안이 어떠한 의미가 담긴 눈짓을 하자 켈트는 조금 템포를 놓친 듯 당황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 그래도 우리는 오래 살지 않았나? 이제 와서 죽더라도 백년도 채 못살고있는 인간들이 더 아쉬울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보자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켈트의 뒤를 이으며 브라이덴이 특유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형님의 말도 틀리지는 않은 것 같수. 이런 곳에서 죽는 것이 아깝긴 하지만, 죽는 드워프 수보다 인간들의 수가 많으니 생의 강을 건너는 길이 적적하지는 않을 것 아니우?" 그들의 발치에서 마나를 증폭시키고 있던 크라이츠의 귀에는 이상하게도 드워프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꼬여있는 판국에 그들의 어색 한 청승은 더욱 성질을 돋우고 있었다. 그 때, 레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죽기 전에 궁금한 것이나 알고 죽읍시다. 대체 크라이츠님이 이곳에 브레스를 뿌리면 얼마나 날아가게 되는 것이유?" 그의 질문을 듣고있던 형제들은 모두 켈트에게 이목을 모았고, 켈트 역시 확신은 가 지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글세... 잘은 모르겠지만, 크라이츠님 정도 되는 고룡이면 하루에 브레스를 네 번 정도 뿜을 수 있다고 쳤을 때, 음... 아무리 못해도, 하루에 하나의 시가지는 날아가 지 않겠나? 게다가 지금 마나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을 쓰실 듯 한 데... 그렇다면 단 하루면 이곳 벨링은 복구하기 힘들 상황에 놓이게 될 걸? 말 그대 로 그것은 재앙이야." 켈트의 대답을 듣고있던 크라이츠는 그의 말이 맞기라도 하다는 듯 제법이라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레딘은 고개를 떨구며 짜여진 각본대로 울먹이는 소리 를 내기 시작했다. "흑흑... 그럼 뮤스군까지 같이 죽겠구나... 우리야 미리 죽을 것을 알고나 있으니 마음의 준비라도 해 놓겠지만, 어딘가에 갖혀 있는 뮤스군은 영문도 모른채 누님이라 는 분께 죽으니 얼마나 슬픈 일이오! 흑흑흑!" 레딘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는 시늉을 하던 드워프들 역시 그와 별 다를 바 없이 울 상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자네 말이 맞네! 뮤스는 어딘가에 갇힌 채로 그냥 브레스에 녹겠구나! 아이 고!" "그 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하필이면 누님의 힘에 목숨을 잃다니 운도 참 없구나! 희대의 천재 한 명이 골로 가는구나! 흑흑흑흑!" "천재는 역시 명이 짧다는 옛말이 맞았어! 흑흑! 이왕 이렇게 된 것 주신의 품에서라 도 모든 능력을 발휘해 보게나! 뮤스군! 흑..." 드워프들이 온갖 말을 다 동원하며 가식의 눈물바다를 만들고 있자, 그들의 말을 곰 곰히 생각해 보던 크라이츠는 양옆으로 길게 뻗고있던 두 팔을 내렸다. 비록 연기라 는 것이 뻔히 드러나는 드워프들의 대화였지만, 그들의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뮤스와 태자가 어딘가에 잡혀 있다고 해도 시간상 황궁이나 그 주변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확률이 많았고,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을 브레스로 쓸어버리는 데 에 있어서 뮤스 또한 인간들과 함께 자신의 브레스에 녹아버릴 확률이 높았던 것이 었다. 생각이 이쯤 되니 너무나 화가 난 통에 큰 실수를 할 뻔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몸으로 응축되어있던 마나를 다시 대기 중으로 흩어 뿌렸다. 그리 곤 드워프들이 아직도 오열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와 짜증을 내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들 해요! 나 참! 그런 속보이는 연기력에 누가 속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과 함께 드워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슥 한 웃음을 지었다.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난 드워프들은 서둘러 크라이츠의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살 이 따가울 정도로 뿜어대는 살기는 거의 사라졌고, 예전과 같이 도도하지만 친근한 모습으로 돌아온 듯 했다. 그제야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어설픈 연극이 효과가 있었음 을 확인하며 뛸 듯이 기뻐하기 시작했다. "허허헛! 크라이츠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요! 설마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뮤스군이 쉽게 위험에 빠지겠습니까?" "휴우! 정말이지 한시름 놓았군..." "후훗. 나는 이제 정말로 눈물이 나는구먼." 드워프들의 반응에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내저은 크라이츠는 착찹 한 마음으로 아직 여물지 못한 달을 바라보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잠시 이성을 잃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켈트씨를 비롯해 형제 분들게 사과를 하도록 하죠. 하지만 뮤스에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전제하에서 참는 것이니 너무 안심하지는 마세요." 크라이츠의 말이 끝날 때였다! 한 줄기의 얇은 빛이 어디선가 솟구치며 크라이츠가 바라보고 있던 달을 관통하는 듯 했는데, 마치 검은 천에 흰색의 명주실이 걸쳐진 듯 또렷한 빛 줄기였다. 그 모습을 보던 크라이츠가 외쳤다. "앗! 저것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래! 슈나이드의 빛이군요!" 그녀의 말을 들을 때까지 그 빛을 보지 못하고서 목숨이 연장되었다는 것에 감동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서둘러 크라이츠가 시선을 주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것이 슈나이드의 빛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켈트의 물음에 크라이츠는 밝은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예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마크 도나엘의 슈나이드는 마나를 주입하면 엄청난 빛을 뿜어 낸다고요! 저 빛의 느낌은 슈나이드가 뿜어내는 것이 틀림없어요!"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려 하늘에 닿아있는 빛 줄기를 확인한 켈트는 더 이상 생각할 것 도 없다는 듯 몸을 움직이며 외쳤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뮤스와 태자가 저곳에 있겠군요! 그렇다면 꾸물거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자네들은 혹시 모르니 무기를 챙기게!" "네! 형님! 그런데 근위대 쪽에는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흥! 그 멍청한 인간들에게 알려 봐야 도움이나 되겠는가?"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가죠!" 대충 이야기를 마친 드워프들은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여 가며 빛 줄기가 뿜어져 나 오는 곳을 향해 출발을 했고, 며칠만에 처음으로 얼굴에 기쁜 기색을 떠올린 크라이 츠 역시 예전의 '레이디' 모습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24 달이 구름의 반대편으로 숨어들며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궁으 로 부터 1 켈리 가량 떨어진 폐허지역은 대낮과 같이 밝았기에 주변의 동물들은 이리 저리 날뛰며 갑작스러운 이변에 놀라고 있었다. 이 부근은 주로 황제의 사냥터로 사 용되던 지역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을 해체하여 또 다른 별궁으로 꾸미려 했으나, 언 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를 폐허들에 곳곳에 걸려있는 마법 트랩으로 인해 공사가 불가 능하였기에 주변의 경관이라도 즐기고자 사냥터로 변한 곳이었다. 하지만 대관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사냥을 나올 귀족들은 없었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사냥감들은 느긋한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던 것이 다. -철컥! 철컥! 부스럭... 야심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찾아든 낮선 손님들 때문에 사냥터에 사는 동물들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에서 몸을 숨긴 채 평범한 대리석 바닥으 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을 응시하고 있는 다섯 쌍의 눈이 있었는데, 빛 줄기를 따라 이곳까지 찾아온 드워프들과 크라이츠였다. 자신의 전투도끼를 아래로 늘어트려 땅을 짚은 켈트는 무너진 폐허더미를 살펴보며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 작은 구멍인 듯 하군. 주변에 감시를 하는 자들도 아무도 없다니 이건 좀 이상한 걸?" 켈트의 말을 듣고있던 크라이츠는 반짝이는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손을 천천히 흔들 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대리하는 마나의 힘이여 장막에 가려진 마나의 흔적을 찾노라니... 마나파인 더!" 그녀의 말이 끝남과 함께 손의 주변에서 발하던 빛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듯 손을 떠나 어디론가 날아갔고, 폐허의 한 부분을 맴돌던 그 빛은 어떠한 부근에 멈추며 그 곳 주변을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던 크라이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쪽에 어떠한 마나의 흔적이 있는 듯한데, 아무래도 저의 추적마법이 힘을 발휘되 지 못하는 것을 보니 이 근처가 평범한 곳이 아님은 틀림이 없는 것 같군요."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은 크라이츠는 몸을 숨기던 수풀을 헤치며 폐허가 있는 곳으로 걸어나갔고, 드워프들 역시 무기를 손에 꼬나쥔 채로 주변을 경계하며 그녀를 뒤따랐 다. 마나의 흔적이 발견된 곳에 발걸음을 멈춘 크라이츠는 무너져 가는 건물의 벽앞 에 서게 되었다. 그곳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손을 들어 이곳 저곳을 쓰다듬었고, 어느 지점에서 손이 멈추는가 싶더니 벽을 이루고 있던 벽돌들이 마찰음을 내면서 열 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약간의 먼지가 날림에 얼굴을 찌푸린 크라이츠는 드워프들 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했다. 그러자 켈트와 브라이덴이 앞장서며 입구의 옆에 있던 횃불자루에 불을 붙였다. 크라이츠와 드워프 일행은 계단을 통해 한참을 내려온 후에도 여러 번 굽어지는 통로 를 따라 걸어나가고 있었다. 통로는 사람 두 명이 편안하게 다닐 정도의 폭이었는데, 벽면으로 횃불을 꽂는 받침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타다 남은 횃불자루에 먼지만 잔뜩 쌓여있었다. 크라이츠는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은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인간들의 고대 유적이군요. 못되어도 3500년 이상은 된 듯 한 걸 요?" 크라이츠의 말에 그녀의 바로 앞을 걷고있던 레딘이 놀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말하는 마법기의 유적이란 말씀이십니까?" "제 생각이 맞다면 틀림없을 것 같아요. 그 때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기 때문에 저 역시 선대 고룡들에게 들은 것 밖에 없지만, 인간들의 능력이 거의 신에 도전할 수준 이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능력이 신에게 도전할 수준이었다고요?!" 크라이츠의 말에 크게 놀라고있는 드워프들이었지만, 말을 하는 이가 크라이츠인 만 큼 신빙성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고, 그녀의 말은 계속되어졌 다. "네... 하지만 신에 근접한 그들의 능력 때문에 멸망을 하고 말았죠."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켈트였지만, 그녀가 지금 하고있는 말에 대해서 전혀 알 지 못했던 그는 드워프족 특유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신에 근접한 능력 때문에 멸망을 했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괜찮으시다면 더 자 세히 좀 말씀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켈트의 부탁에 고개를 내저은 크라이츠는 입을 막았던 손수건의 먼지를 한번 털어 내 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말씀을 못 드릴 듯 하군요. 이것은 하나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규율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 알게 된다는 것은 여러분의 존재 자체 를 위협하는 일이니까요." 크라이츠의 말에 드워프들은 더욱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킬 방도가 없었기에 아쉬움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 때, 가 장 앞에서 걷고있던 브라이덴이 통로의 모서리 부근에서 손을 치켜들며 일행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했다. 브라이덴의 갑작스러운 신호에 놀란 드워프 형제들이 발걸음 을 멈추며 그의 얼굴을 살피자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드워프 형제 들은 브라이덴의 행동에 따라 숨소리까지 죽이며 귀를 기울였는데, 어딘가에 여러 사 람이 모여있는 듯 대화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크큭... 이번 일만 잘 된다면 우리는 국가 공신에 맞먹는 지위를 가지게 되지 않겠 나?" "하..하지만 이번 일이 만약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이런 겁쟁이 녀석! 어쩌면 이것도 우리에게 떨어진 행운일 수도 있는 거야! 너나 우 리나 일반 근위병 노릇을 한다면 기껏 해봐야 근위대 분대장까지 밖에 더 오를 수 있 겠나? 흥.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란 말이야." "그의 말이 맞아. 손의 가죽이 다 찢어지도록 검술을 연마하면 뭘 하는가? 전쟁이 종 식 된지는 벌써 수 백년 전이고, 이제 우리 같은 자들에게는 신분 향상의 꿈은 이런 반역 외에는 없는거야..." 대화를 숨죽이며 듣던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은 적어도 십 여명정도의 훈련 잘 된 전사 들이 그곳에 버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뒤를 돌아 형제들과 눈빛을 마주 친 켈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통로에서는 목소리가 크게 울리기 마련인데, 들리는 목소리의 크기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을 보니 앞쪽에는 그럭저럭 넓은 곳인가 보군? 전투를 벌이는 장소가 넓다 면 숫자가 많은 쪽이 우세할 텐데 어떡한다?" 늙은 드워프인 만큼 조심스러운 켈트의 말에 형제들 중 가장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동시에 가장 철이 덜든 레딘이 막무가내로 팔뚝을 걷어올리며 철퇴를 흔들었다. "헐헐. 까짓! 그냥 쳐들어갑시다! 놈들이 덤벼봐야 이 녀석으로 머리통을 날려 버리 면 되니!" 그는 자신의 철퇴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 가슴이 설레이는 모양 이었다. 그것은 켈트를 제외한 다른 드워프들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 했는데, 블뤼안 은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전투망치를 어깨에 걸치며 전의를 불태웠고, 브라이덴은 사 람주먹의 두 배는 됨직한 크기의 쇠 구슬 두 개를 양손에 나눠 쥐고 이리저리 돌리는 중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켈트는 십 여명이나 되는 적의 수가 부담이 되긴 했 지만 형제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장 신이 난 레딘은 허공에 대고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다른 드 워프들 역시 흥분한 표정으로 괴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재빠르게 쫓았다. -우워어어어어! 지하의 좁은 통로는 드워프들의 괴성으로 가득 찼다. 뮤스와 태자를 지키고 있던 사내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혼비백산해야만 했 는데, 이곳에 누군가가 침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에 전투채비는커녕 몸 을 조이는 갑옷까지 벚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당하고있기에 는 훈련이 잘된 자들이었기에 갑옷을 걸치지 않은 채로 서둘러 병장기를 뽑아들며 이 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렷! 황실근위대라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죽음이다!" 그들 중 책임자 인 듯 한 자가 소리를 지르자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던 그들은 귓가 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통로의 끝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빠 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는데, 흔들리는 불빛이 그것을 제대로 비춰주지 못했기 에 그저 검은 그림자로만 보이고 있었다. -휘이이익! 퍽! 모든 것이 한순간이었다. 잠깐 눈을 깜짝이는 순간 그 물체는 사내들의 귓볼을 스치 며 뒤쪽에 서있던 그들의 동료 얼굴을 강타했고, 그의 머리는 단 한방에 너덜하게 터 진 채 사방으로 뇌수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곤 동료의 얼굴을 뭉갠 물체는 이제야 힘 을 잃은 듯 땅으로 떨어졌다. -터걱! 붉은 피를 한껏 머금은 그것은 사람의 주먹 두 개만한 쇠 구슬이었는데, 붉은 피가 어우러지며 횃불의 불빛을 반사하는 쇠 구슬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였다. 하 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네 개의 작은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사 내들을 향해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특유의 무기를 휘두르며 공격해오는 드워프들이었고, 방금 전 날아온 쇠 구슬은 브라이덴이 한 명이라도 적의 수를 줄이 기 위해 던진 것이었다. 이제서야 적의 정체를 확인한 사내들은 방어자세를 취하며 빠른 속도로 덤벼들고 있는 드워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까강! 챙!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면서 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불꽃이 튀기 시작했는데, 바로 드워프들과 이곳을 지키고 있는 사내들간의 첫 번째 격돌이 시작된 것이었다. 드워프들 중 가장 전투능력이 좋은 것은 바로 레딘이었다. 그는 머리 위와 몸 주위로 능수능란하게 철퇴를 돌리며 자신을 찔러오는 검들을 모조리 쳐내고 있었는데, 장검 이 철퇴에 얻어맞자 마치 바위라도 때린 듯 엄청난 진동이 손으로 전해졌고, 손아귀 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사내들은 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레딘의 철퇴는 피 하는 그들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둥근 원을 그리며 돌던 철퇴는 앞으로 뻗어나가 며 그 중 한 명의 어깨를 강타했고, 그 원심력을 이용한 레딘은 철퇴를 낮추며 자신 의 뒤쪽에 있던 사내의 복부를 후려쳤다. "으아아아악! 내 어깨!" "커컥!" 몸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사내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레딘 은 다른 쪽에서 싸우고 있는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허헛! 다들 실력은 여전하군 그래!" 과연 그의 말대로 다른 드워프들 역시 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블뤼안의 전투망치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적을 내려 쳤치고 있었는데, 검을 들어 그의 망치를 막았 음에도 불구하고 검이 두 동강이 나는 동시에 머리를 격타했고, 그것에 얻어맞은 사 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끄아아아악!" 얼굴로 튀기는 피를 소매로 닦아낸 블뤼안이 다음 상대를 정하기 위해 시선을 움직이 고 있을 때, 그의 옆에서 싸우던 브라이덴 역시 손에 들린 쇠 구슬로 적의 턱을 강타 하며 또 한 명을 쓰러트렸다. 상대적으로 접근전을 펼쳐야 하는 브라이덴이었지만, 드워프답지 않은 날렵한 움직임을 보였고, 두꺼운 팔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더해진 그의 쇠구슬의 위력은 절대 형제들에 비해 못하지 않았기에 손쉽게 상대를 제 압하고 있었다. 맏형인 켈트 역시 동생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전투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의 도끼가 휘둘러 질 때마다 상대의 피가 허공으로 뿜어졌고, 살점이 뜯 겨져 땅위로 나뒹굴었다. 가공할 위력의 도끼에 겁먹은 사내들은 공격은 뒤로한 채 막아내기에 급급했지만, 켈트는 드워프 특유의 근력을 이용하여 검과 같은 변화를 도 끼의 움직임에 불어넣었기에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순식간에 여섯 명의 동료가 나가떨어지자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던 사내들은 넋이 나간 상태였 다. "이..이럴 수가 우리의 검술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야!" "사람이 아니라 악마들이다! 도망쳐라!" 비록 수적으로 우세하다고는 하지만, 길어봐야 십여 년 검술을 갈고 닦은 이들이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자신의 무기들과 함께 해온 드워프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인간보다 어두운 환경에 잘 적응한 눈을 가진 드워프들에게는 횃불 이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어두운 이곳이 마치 안방과 같은 환경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 더라도 드워프들이 전투에서 이길수 밖에 없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거의 혼 백이 달아난 사내들은 손에든 무기를 버리고서 유일한 출구인 통로를 향해 도망을 치 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드워프들 보다도 더욱 두려운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크라이츠라는 존재였다. 사실 그녀는 유희 동안만큼은 공격마법을 쓰지 않으려 마음 을 먹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을 며칠동안 잠조차 못 자도록 걱정을 하게 만든 이들의 얼굴을 보자 한순간 자제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었다. 눈동자에 초점조차 잃은 사내들 이 정신없이 뛰어나오는 것을 바라보던 크라이츠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치며 그들을 가리켰고, 손가락의 끝으로 마나를 집중시킨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마나의 주인인자. 존재하는 모든 날카로움의 으뜸인 너로 하여금 만물을 꿰뚫고 자 하니... 핑거애로우!" 말을 마침과 함께 다섯 개의 얇고 붉은 빛 줄기가 크라이츠의 각 손가락으로부터 흘 러나왔고, 그것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다섯 명의 사내의 이마로 스며들 듯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못 느낀 듯 계속해서 달리던 그들은 어느 순간 몸의 움 직임을 멈추며 흘러내리듯 무릎을 꿇었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정적이 통로 안을 메우기 시작할 때, 그들의 이마에서는 한줄기의 핏줄기가 이목구비를 타고 흘러 땅으 로 떨어졌고, 그 모습을 보던 드워프들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 었다. -철썩! 이미 숨을 거둔 사내들의 상체마저 쓰러지며 먼지가 쌓인 땅에 얼굴을 파묻자 크라이 츠는 만족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호홋. 이제 조금 속이 풀리는 군요. 왜 그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죠? 어서 뮤스를 찾아야 할 것 아니예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드워프들은 아무소리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고, 마지막으로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한번 더 둘러보며 등을 돌렸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25 -지지지직! 지직! 뮤스의 손을 타고 방출되고 있는 뇌공력은 이제 거의 바닥이 났는지 그 흐름이 자주 끊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강화체갑에서 내뿜어지고 있는 빛 역시 이제는 심하 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뮤스는 이제 강화체갑을 받 치고 있을 힘조차 없었기에 두 팔을 축 늘어트리며 손에 들고있던 강화체갑을 땅으로 떨어 트렸다. 그리곤 벽에 등을 기댄 그는 다리가 풀리며 미끄러지듯이 땅으로 주저 앉아 버렸다. -털썩!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뮤스는 아직도 구석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태자를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태자전하... 후우...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습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 는걸 보니, 이 방법 역시 틀린 듯 하군요." 뮤스의 목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눈을 가린 손을 내린 태자는 쓰러져 있는 뮤스를 발견하며 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이런! 뮤스군 괜찮으신가요? 아무래도 크게 무리하신 듯 한데..." 고개를 힘없이 저은 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력은 금방 보충이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마 지막 방법이었는데, 이것 마저 무위로 돌아가다니..." 뮤스의 말을 들으며 그를 편안한 자세로 뉘인 태자는 자신 역시 그 옆에 몸을 뉘이며 팔베개를 했는데, 오히려 전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후훗... 이제는 너무 마음쓰지 마시죠. 이만큼 노력해도 되지 않으니, 아무래도 주 신께서도 저를 돕지 않으신 듯 하군요." 왠지 슬퍼 보이는 태자의 말을 들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뮤스의 가슴속에는 할말 이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삼키고 있었는데,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자신 이 태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지 않은 이상 말뿐인 위안이 될 것 같았기 때 문이었다. -끄아아악! 둘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다. 굳게 닫혀있는 철문 밖으로 처절한 비 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태자와 뮤스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동시에 철문에 귀를 가져다 대며 밖의 상황에 귀 를 기울였다. 태자가 철문에 귀를 댄 채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죠? 혹시 프라이어 경과 근위병들이 우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닐까 요?" 태자의 물음에 철문의 아래쪽에서 귀를 기울이던 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밖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저 들 의 적이라면 우리와 같은 편이라는 말인데..."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처절한 비명소리는 계속 되었는데, 어느 쪽의 비명인 지를 알 수 없었던 뮤스와 태자는 더욱 답답할 뿐이었다.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 간이 지나자 알지 못할 누군가의 비명 소리를 마지막으로 철문 밖은 쥐죽은듯이 조용 해 졌고, 뮤스와 태자 역시 조용히 숨을 죽이며 공통적인 의문을 던졌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 까요?" 하지만 그들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퍼컥! 철컹! 누군가가 밖에서 철문을 힘껏 차는 바람에 그 뒤에서 귀를 대고 있던 뮤스와 태자는 안쪽으로 세차게 열리는 철문에 얻어맞으며 방의 반대편으로 나가떨어졌고, 구석에 처박힌 그들은 충격이 엄청났는지 골의 깊은 곳까지 울리고있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상황 정리조차 되지 않을 때 뮤스의 귀에는 익숙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거기 뮤스 있냐? 말 좀 해보라고! 뮤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켈트였는데, 횃불이 닿지 않는 구석에 누군가가 있는 듯 하자 큰소리로 외치며 묻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덜 차린 뮤스 는 대답에 앞서 철문에 부딪힌 코를 감싸며 고통을 호소했다. "크윽!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아..." 비록 유쾌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뮤스의 것임을 확 인한 켈트는 지체할 것 없이 밀실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그의 뒤를 따라 다른 드 워프들과 크라이츠 역시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 횃불이 뮤스가 있는 곳까지 밝혀주자 그의 모습을 본 크라이츠는 크게 놀라며 뮤스에게 달려가 이곳 저곳을 살펴보기 시작 했는데, 뇌공력을 모두 소진하여 초췌해진 몰골과 코에서 흐르는 코피로 인해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뮤스! 누가 감히 널 이렇게 만들었니?! 이 코피 좀 봐... 내 이 녀석들이 잡 히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크라이츠의 분노에 어벙한 표정을 짓던 뮤스는 의미 심장한 눈빛으로 켈트를 바라보 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크라이츠와 함께 분노를 표하 고 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뮤스는 자신과 함께 철문에 후려 맞은 태자를 떠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누..누님 저는 괜찮으니 태자전하를..." 뮤스의 말에 신색을 회복한 크라이츠는 뮤스의 바로 옆을 바라보았는데, 뮤스보다 더 욱 불쌍한 몰골로 구석에 처박혀있는 태자가 정신을 잃은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켈트는 어이없게도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하는 것 이었다. "이런! 혹시 고문이라도 당한 건가? 완전 정신을 잃은 것을 보니 지독하게 당한 것이 틀림 없군!" 그가 이 정도까지 나오자 켈트의 만행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뮤스는 피곤함 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켈트아저씨. 저는 뇌공력을 모두 소진해서 걸을 힘도 없으니, 태자전하와 저를 좀 옮겨주세요. 그리고 자세한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마시고 요... 후훗... 너무 힘들군요. 전 좀 쉬어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뮤스는 한꺼번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대로 정신 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드워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자와 뮤스를 어깨에 둘러매 고선 서둘러 밀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아얏! 살살 좀 해요! 이러다가 정말로 기절하겠네!" "이 녀석아 사내 녀석이 겨우 이 정도로 이렇게 엄살이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그냥 살짝 문을 열고 들어오면 될 것을 왜 있는 힘껏 차 고 그래요?" "그럼 적이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노크까지 하고 들어가랴?" 모두들 잠을 잘 새벽임에도 요란한 목소리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이들은 뮤스와 켈트 였다. 뮤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자 켈트는 뮤스의 코에 생긴 상처를 치 료하기 시작했는데, 우악스러운 그의 손에 의해 고통만 더욱 가중 될 뿐이었다. 물론 크라이츠가 치유마법이라도 써줬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뮤스가 돌아옴으로써 다시 평 범한 레이디의 모습을 되찾아야만 했고 또, 태자와 함께 다쳤음에도 뮤스만 멀쩡하다 면 이상한 시선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뮤스와 켈트가 앉아있는 옆의 침 대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있는 태자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는데, 철문에 부 딪힌 눈 주위는 퍼런 멍과 함께 퉁퉁 부었기에 섬세했던 그의 외모를 볼성사납게 만 들고 있었다. 그런 태자와 뮤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켈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그래도 태자만큼이 아닌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태자는 정말 크게 망가졌는걸? " "뭐 태자전하께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정말 못 봐주겠군요." 태자에 비해 한층 양호한 상처에 안도하는 뮤스였다.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방의 한쪽에 놓인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걸치고 있던 크라이츠가 입을 열었는데, 이 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한층 여유를 가진 모습이었다. "뮤스 네가 말한 대로라면 가테스 공작이 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건데... 너는 어떻 게 할 생각이니?" 켈트가 건네준 붕대로 코의 상처부위를 몇 번 누른 뮤스는 크라이츠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일단 돕는데 까지는 돕고 싶어요. 뭐 일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의뢰를 받은 것이 태 자전하의 황위계승을 돕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는데, 하나는 적아의 구분이 힘들다는 거예요. 태자전하와 절친하던 루피스 경이 배신을 한 이 시점에서 그 누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대관식 전까지 태자전 하께서 돌아온 것이 알려진다면, 가테스의 측근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자를 제거 하려 할 텐데, 이번에는 정말 태자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죠." "흐음... 또 한가지는?" 크라이츠의 물음에 인상을 가볍게 구긴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 제가 황혈 인증에 쓰일 물건을 만들지 못했다는 거죠. 이제 겨우 대관식까지는 8시간 남짓 남았는데, 그 동안 그것을 만들기는 정말 빠듯할 것 같거든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손으로 턱을 궤고 있던 크라이츠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구나? 둘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황위계 승식은 허사로 돌아가니 말이야... 나는 날이 밝는 대로 비밀리에 가비르 제상을 만 나 볼테니, 너는 지금부터라도 그 물건이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하렴." 말을 마친 크라이츠는 고개를 돌려 무기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고 있는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켈트씨와 드워프분들은 저와 함께 할 일이 있으니 저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그녀의 말에 드워프들은 의아한 눈빛을 했지만, 아직까지 다섯 명의 사내들의 목숨을 한순간에 빼앗은 크라이츠에 대한 공포심이 남아있었기에 아무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26 조금은 애처로운 모습으로 크라이츠와 함께 방을 나가는 드워프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뮤스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책상에 앉으며 켈트가 수습해 준, 마법가방 을 열었다. 그곳에서 작업 중이던 도면을 찾아 펼친 뮤스는 위쪽에서부터 찬찬히 눈 으로 훑으며 내려왔고, 책상에 놓인 펜꽂이에 꽂혀있는 끝이 뾰족 한 흑연을 하나 꺼 내 쥐었다. "후우... 이렇게 된 이상 이 것으로 가능하다고 믿을 수밖에..." 혼잣말을 중얼거려본 뮤스는 서둘러 무엇인가를 찾는 듯 가방을 뒤적였다. "진공상태의 유리용기에 전극을 봉입 하고 고전압을 걸어야 하니... 흠... 유리용기 는 다시 제작해야하고, 유리용기에서 배기를 하려면 진공펌프가 필요한데... 어디 있 더라..." 대충 말을 마친, 뮤스는 자신이 한 설명들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며 필요한 기구들과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 이상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알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부스럭... 뮤스가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태자는 몸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한 것과 같이 전신의 뼈들은 아우성을 쳤고, 근 육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강화체갑을 무리하게 사용한 결과 물이었다. 한동안 몸을 뒤적거려 봤지만 결국 편안한 자세를 찾지 못했던 태자는 짜 증을 내듯 베개로 얼굴을 덮었다. "아아앗!" 그와 동시에 얼굴로부터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태자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덮었던 베개를 먼발치로 던져 버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태자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붓기가 빠지지 않은 눈 주위의 살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야야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한껏 부풀어 오른 눈두덩이를 어루만지던 태자는 힘겹게 눈을 뜨며 주변을 살폈는데, 이 익숙한 실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황궁의 내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 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태자는 방의 한쪽에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뮤스를 확인하고서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뮤스군! 우리가 탈출하는데 성공을 한 것이군요! 하하하핫!" 그러나, 뮤스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하던 일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이것을 의아 하게 생각한 태자는 쑤시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뮤스 가까이로 다가갔다. "뮤스군? 지금 뭘 하시는 중이죠?" 재차 물었음에도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자 태자는 뮤스의 얼굴을 살폈다. 태자가 본 뮤스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아무런 표정이 없는 모습이었는데, 약간 장난스럽던 뮤스 는 사라진지 오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만이 그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또, 그의 신비하게 빛나고 있는 눈을 바라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하... 이것이 뮤스군의 본 모습이군. 꼭, 내 곁에 두고 말리라..." 태자가 의미심장한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에도, 뮤스는 그의 뜻을 모르는 듯, 바쁘게 손과 몸을 움직이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창문 밖으로는 어느새 대관식 날임을 알리는 태양이 건물들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다. 52. 대관식. 황궁 복도의 한쪽 면으로 나열되어있는 수많은 창문을 타고, 아침의 햇살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햇살을 달갑지 않게 받으며 어디론가 급하게 걷고있는 다섯 명이 있 었는데,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크라이츠와 드워프 형제들이었다. 비록 크 라이츠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부드러웠으나, 그녀의 뒤를 따르고있는 드워프들의 얼 굴은 약간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수시로 곁눈질을 하며 크라이츠의 표정을 살피는 중 이었다. 그러던 중, 크라이츠가 큰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드워프들은 아무 것 도 모른 채 따라온 곳이 가비르 재상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라이츠의 노크소리가 이어졌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부터 갈라진 가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피로가 깊게 쌓인 듯 했다. "네! 들어오시죠!" 그 목소리를 들은 크라이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고서 방안으로 들어 가자 드워프들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거의 연회실을 방불케 하는 넓이를 가진 가 비르 재상의 집무실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고, 벽난로는 이 미 꺼진지 오래인 듯 까맣게 타버린 재만 남아있었다. 집무실 책상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 이마에 손을 얹고서 눈을 감고있던 가비르 재상은 뻑뻑한 눈 사이를 매만지 며 눈을 떴다. 그제야 지금 들어온 사람이 크라이츠라는 것을 알게된 그는 놀라며 자 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크라이츠님이셨군요? 안녕히 주무셨는지..." 놀란 모습으로 아침 인사를 건네던 가비르 제상은 여기저기 널려있는 외투를 재빨리 치우며 크라이츠의 표정을 살폈다. "어제 일은 화가 좀 풀리셨는지?" 지난밤을 꼬박 지새웠는지 충혈 된 눈으로 물어오는 가비르 재상을 본 크라이츠는 가 벼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뮤스를 되찾았으니 화가 풀릴 수밖에 없겠죠?"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놀란 가비르 재상은 눈을 크게 뜨며 다급히 물었다. "크라이츠님 뮤스군을 찾으셨다니요? 그렇다면 태자전하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머나? 너무하시는 군요. 앉으라고 권하기도 전에 그런 사무적인 이야기를 물으시 다니. 역시 이래서 인간들은..." 크라이츠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꾸짖은 가비르 재상은 소파로 크라이 츠와 드워프를 안내했다. "죄..죄송합니다. 크라이츠님. 그리고 드워프 분들도 함께 이쪽으로 앉으시죠."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이 소파에 앉는 것을 지켜보던 가비르 재상 역시 그들의 맞은 편 에 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태자전하께서도 무사하십니까?"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가비르 재상의 목소리를 듣던 크라이츠가 홀가분하게 대답 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태자는 제 방에서 잠들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안전 한 곳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비르 재상의 이야기를 듣던 크라이츠는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푸훗. 가비르 당신은 이 황궁 내에 존재하고 있는 태자의 적이 누군지 확실히 알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그것은..." 대답을 흐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가비르 재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크라이 츠는 한숨을 시작으로 뮤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를 듣던 가비르 재상은 화를 애써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특히 루피스의 배신 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간이 철렁이는 것을 느꼈는데, 크라이츠의 이야기대로 적아가 구분이 안 되는 상태였기에 움직이는데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되 뇌이고 있었다. 크라이츠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주먹을 굳게 쥔 가비르 재상이 걱정 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뮤스군이 황혈 인증에 쓰일 물건을 제 시간 안에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일 텐데 어떻게 하죠? 이제 겨우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 데..." 가비르 재상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팔짱을 낀 크라이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호홋! 가비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대관식을 연기시킬 방법을 미리 생각해 왔으니..." 그녀의 말에 희색을 띄우는 가비르 재상이었다. "정말 입니까 크라이츠님?" 가비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자신의 옆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드워프들에게 손짓을 하며 모이라는 신호을 했다. "켈트씨와 형제분들도 이쪽으로 귀를 모으세요. 여러분이 이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하니 잘 들어야 해요."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드워프들은 전혀 무관한 자신들을 부르자 하나같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이 고개를 빼며 모이는 것을 확인한 크라이츠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으엑! 크라이츠님 저희 보고 그런 짓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크라이츠가 자신의 계획에 대한 설명을 끝내자 켈트의 비명을 시작으로 드워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저희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헉... 바로 잡혔다간 교수형이란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방법을 쓰더라도 태자가 황위에 오른다는 보장도 없는데!" 드워프들의 불평이 담긴 외침을 듣던 크라이츠는 그들의 의견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는데, 어차피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이들만 모인 자리였기에 드래곤의 본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중이었다. "뭐 정 하기 싫다면 두 가지의 선택권만이 남았군요." 그녀가 제시한 선택권에 귀가 솔깃한 드워프들이 궁금한 표정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 다리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린 크라이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브레스의 온도를 몸소 측정해 보거나, 핑거애로우와 드워프들이 자랑하는 두꺼운 피 부를 놓고서 어느 쪽이 우세한지 시험해 보는 거죠."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선택이었다. 브레스야 세 살 먹은 아이조차 그 위력을 알고 있 으니 그렇다 쳐도, 핑거애로우의 위력을 직접 목도한 이상 생각만으로도 드워프들의 간담은 서늘해 졌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켈트는 더 이상 생각도 할 것 없이 고개 를 크게 끄덕였다. "하..하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켈트의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한 크라이츠는 이제 모든 준비가 다된 듯 손을 털며 일 어났다. "호홋!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저는 옷이나 갈아 입으로 가야겠군요. 그럼 켈 트씨와 형제분들은 나중에 뵙도록 하죠.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룰루~"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사라지는 크라이츠를 바라보던 드워프들 은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동정의 눈빛을 보내던 가 비르 재상은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이 잘 끝난다면, 태자전하께서 오히려 상을 내리시지 않 으시겠습니까? 제가 태자전하께 여러분들의 노고를 잘 말씀 드릴테니, 이번 한 번만 수고해 주십시오." 가비르 재상의 말을 듣던 레딘이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상이고 뭐고 간에 만약 잘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소?" 다른 형제들 역시 레딘과 같은 물음을 눈으로 던졌지만, 가비르 재상은 차마 그에 대 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드워프들의 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 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27 뮤스는 계속되던 작업을 잠시 멈추며 손바닥만한 검은색 금속상자를 이리 저리 살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금속상자의 모서리부분이 열린 상태로 전선이 흘러나온 것으로 보아 완성된 상태는 아닌 듯 했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 왔기에 중요 부분의 제작이 끝났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뮤스는 만족한 미소를 띄우며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았고, 책상 위에 끌러놓은 가방에서 손톱크 기의 소형 마나구를 두 개 꺼내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제 이 마나구들만 연결하면 일단 본체 제작은 끝나는데... '형광판'을 만들 시간이 충분할까?" 걱정스러움이 담긴 말을 마친 뮤스는 시간을 알고자 벽에 걸려있는 시계 쪽으로 시선 을 돌렸는데, 그 길목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태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쪽 눈 을 퍼렇게 멍들어 있는 채로 잠에 취해있는 태자의 모습을 보며 우스운 듯 실소를 지 은 뮤스는 손에 들린 금속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태자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웠 다. "태자전하! 태자전하! 일어나시죠!" "으음?! 뮤스군?" 그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힘든 일을 겪게되어 피로가 많이 축적 된 상태였는데, 뮤 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던 태자는 눈으로부터 밀려오는 고통에 다시 한번 비 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아얏! 크윽... 대체 이 눈은 어디에 부딪힌 건지 알 수가 없군!" 태자의 불평을 들은 뮤스는 잠시 잊었던 코의 통증을 느끼며 지난밤에 생긴 일을 회 상했다. "후훗... 차라리 모르시는 편이 더 좋을 듯 하군요. 저쪽에 타박상에 좋은 약이 있으 니 바르시죠.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자는 작업할 때의 얼굴을 떠올리며 신기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제가 정신을 차린 때는 한참 전이랍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집중력이시더군요. 그렇게 불러도 기척을 못 느끼시다니..."?????? 태자의 말에 뮤스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에? 저를 부르셨었나요? 이런... 그렇다면 죄송하게 되었군요." "하핫 아닙니다. 그나저나 새벽부터 무엇을 그렇게 만들고 계셨습니까?" 머리를 한번 긁적인 뮤스는 책상 위에 올려진 금속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책상 위에 올려진 검은 금속상자가 바로 태자전하의 황혈 인증을 가능하게 할 물건입니다. 황제폐하께 부탁 받은 물건이 바로 저것이지요. 이제 '형광판'이라는 것 만 만들면 끝납니다. 지금 시간이..." 말끝을 흐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 뮤스는 시간을 확인하고서 크게 놀라는 모습 이었는데, 금속상자를 만들기 위해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던 것이었다. "이럴 수가! 벌서 11시라니! 그렇다면 이제 겨우 한 시간 남았다는 말인데... 형광판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야!" 놀라 외치는 뮤스의 모습을 보며 잠시 시간을 따져보던 태자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닙니까?" "사실 7시간만에 본체를 완성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부속까지 직접 제작했 으니까요." 뮤스의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태자가 말을 이었다. "대관식이 늦어도 1시전까지 대관식 장에 들어서지 않는다면, 황위 계승의 권리 자체 가 사라져 버리는데 이일을 어떻게 하지요? 그 형광판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오래 걸 리나요?" 대답할 시간마저도 아까운 시점이었기에 뮤스는 바삐 가방을 뒤지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형광물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혼합해야 하는데, 그리 어려 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죠. 나중에는 설명할 시간도 없을 테니 태자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을 잘 들어 놓으십시오."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말을 하던 뮤스는 형광판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며 설 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이첸 제국 황궁에 존재하는 중심 복도들은 모두 한곳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황궁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계승의 광장'이라는 이름의 드넓은 광장이 었다. 그 유례는 도이첸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 서부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마지막 전쟁에서 상대국 왕의 목을 베어낸 자리에 제국의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정복의 광 장'을 세우게 된 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훗날 드워프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황궁을 세울 때에도 그 자리에는 제국 통일의 위대한 역사를 남기려는 의도로 정복의 광장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름의 위화감에 대한 비판이 역사학도들 사이에서 거론되기 시작했고, 점차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쩔 수 없 이 이름을 바꿔야만 했던 황실 측은,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임을 염두에 두어 계승의 광장이라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계승의 광장은 20년만에 처음으로 멋진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있었는데, 붉은 색의 융단이 대관식이 진행 될 광장의 중심부를 뒤덮었고, 그 위에는 금으로 도금된 십여 개의 의자가 반원을 그리며 둥글게 놓여있었다. 그 중 중간에 놓여있는 의자 하 나가 가장 크고 화려했는데, 바로 황제가 앉아 대관식을 주관할 자리였다. 그리고 반 원 모양으로 의자가 놓여있는 곳의 앞쪽에는 어른 허리정도의 높이를 가진 작은 테이 블이 놓여있었고, 칼과 방패가 서로 엇갈린 문양이 중간에 수놓아진 고급스런 천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광장을 둘러싼 벽면에는 광장으로 통하는 스물 한 개의 입구들이 존재했고, 크기가 가장 큰 하나의 문을 제외한 나머지 스무 개의 문들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곳으로 밀 려들어오는 인파는 거의 2000명에 달했다. 이곳을 통해 입장한 이들은 한계선을 나타 내는 붉은 색의 띠가 쳐진 곳까지 들어서며 새롭게 황위를 이어받을 인물을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지만 기대감의 이면에는 태자의 실종소식에 대한 걱정도 존재하고 있었다. 대관식을 구경하기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던 한 청년이 함께 온 동료를 향해 물었다. "자네 태자전하에 대해 새로운 소식을 들은 것 있나?" 그의 동료 역시 태자의 소식에 대해 별 다를 바가 없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혀 없다네... 어제 하루 동안 황궁안을 쥐잡듯이 뒤졌지만, 태자전하는커녕 그림 자도 못 봤다고 하더구만." "허허... 이런 상황에서도 대관식을 진행하시다니 폐하께서도 고집이 대단하시지..." "지금까지 나는 폐하의 그 우직함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일은 너무한 것 같군. 만 약 태자전하께서 나타나지 않으시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 동료의 말을 듣던 청년은 그다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그렇게 된다면 가테스 공작에게 황위가 넘어가는 것이지 뭐. 솔직히 황궁내에 서 이번 태자의 실종이 그가 꾸민 일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다만 증거가 없기에 추궁하지 못하는 것이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것이 참 사람 환장할 노릇 이지." 말을 듣던 동료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최대한 줄인 성량으로 말했다. "자네 큰일 나려고 그러나? 이 중에 누가 가테스 공작의 측근인 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흥! 들으라면 들으라고 하라지! 도이첸 제국은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이 되어있 다는 것을 자네는 모르나?" "그렇지만..." -뿌우! 뿌우! 뿌우우우! 두 청년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계승의 광장 곳곳에서는 굵직한 뿔 나팔 소리 가 여러번 울려 퍼지기 시작했는데, 정오가 되어 대관식이 거행되기 시작한다는 신호 라는 것을 알고있던 청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열려있던 스무 개의 입구가 동시에 닫히기 시작했고, 광장에 모여 든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 나팔 소리가 멈추 며 북소리가 광장의 공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는 마치 바로 귀의 옆에서 울리는 듯 했는데, 광장을 설계 할 때 소리의 증폭 기능까지 고려를 했기 때문에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잠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광장 안으로 울려 퍼지는 동시에 북소리가 멈추었다. "개회! 황제폐하를 맞으시오!" -구구구궁.... 그의 목소리를 신호로 굳게 닫혀있던 가장 큰 입구가 개방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호화스러운 복장을 한 십 여명의 인물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와 그를 보필했었던 귀족들이었는데, 가비르 재상과 가테스 공작 역시 일행들 사 이에 끼어있었다. 황제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내리거나, 고개를 숙 이며 예의를 표했고, 황제는 가볍게 손을 치켜들며 그들의 예의에 회답했다. 붉은 융단이 깔린 광장의 중심부에 이른 황제와 귀족들은 각자 배정된 자리 앞에 섰 고, 황제가 앉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는 밝지 못한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 자리한 가비르 재상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대화 내용을 대충이나마 짐작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사이에서 섞여 황제와 귀족들의 입장을 지켜보던 크라이츠는 초조한 모습으 로 마나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미 시계바늘은 정오를 넘어섰지만, 태자와 뮤스에 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자, 비록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연관을 맺고 있었기에 괜히 답답해진 것이었다. "흠... 아직도 완성을 못한 건가? 어쩔 수 없이 드워프들의 발에 의지해야겠군..." 크라이츠가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도 대관식은 진행되고있었고, 언제 나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이야기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황제의 틀에 박힌 이야기는 이제 그 끝이 보이고 있었고, 황제의 양 옆으로 앉은 귀족들은 세삼 지난 20년을 떠올리며 회상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중 가비르 재상과 가테스 공작의 표정은 전혀 상반되고 있었는데, 가비르 재상이 광장으 로 들어오는 입구를 주시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초조해 하는 반면, 가테스 재상은 느긋한 자세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가비르 재상의 귀로 막바지에 이른 황제의 폐위사가 이어고 있었다. "짐은 도이첸 제국의 제 61대 황제로써 지난 20년 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지위을 오늘 부로 벗어 놓고자 하니, 황혈 인증을 통해 도이첸 제국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자 하노 라..." 잠시 말에 뜸을 들인 황제는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애써 불안함 을 숨긴 채 믿음이 담긴 눈빛으로 황제의 시선에 응답하고 있었다. 가비르 재상의 행 동을 믿기로 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고, 가비르 재상은 슬 쩍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응시했다. "황인의 서를 개봉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양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례관 두 명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광장의 중심에 놓여있는 탁자로 다가갔고, 검과 방패가 엇갈린 문양이 수놓아진 천의 양쪽을 잡으며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28~129 그러던 중, 무슨 일인지 걷어내던 천의 안쪽을 바라보던 의례관들은 크게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의 다른 의례관들에게 급 히 신호를 했는데, 그들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주변의 의례관들이 탁자 의 주위로 급히 다가가자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었 다. 더 이상 대관식이 진행되지 않자 느긋하게 앉아 황인의 서 개봉을 지켜보던 가 테스 공작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황인의 서를 개봉하지 않는가?" 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의례관들은 꾸물거리고 있을 뿐 대답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 다. 그들의 태도를 보고있던 가테스 공작은 옆에 서있던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양 해를 구하며 빠른 걸음으로 황인의 서가 놓여있을 탁자로 걸어갔는데, 그 앞에 발걸 음을 멈춘 가테스 공작은 탁자 위를 확인하며 흥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럴수가! 황인의 서가 사라졌다!" 그의 외침으로 인해 계승의 광장은 순식간에 2000여 군중들이 수근덕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고, 가테스 공작은 인상을 일그러트린 채 주변의 경비병들을 찾고 있 었다. "근위병들은 무엇을 하는가! 당장 황인의 서의 행방을 조사하라! 어서!" 하지만 이곳의 근위병들은 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 데, 황실의 근위병인 이상 가비르 재상이라면 모를까, 황실내에서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가테스 공작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이런!" 근위병들이 움직이지 않자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던 가테스 공작은 황제의 옆에 앉아 딴청을 하는 가비르 재상을 바라보며 이빨을 갈고 있었다. 사실 황혈 인증을 할 태자 가 등장하기도 전에 황인의 서가 사라진다면, 그것을 되찾을 때까지 황혈 인증이 연 기가 되는 것이 당연했기에 이제 가테스 공작이 오히려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 되었 고, 그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빠드득... 가비르 재상! 국가 보물인 황인의 서가 사라졌는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오! 당장 근위병들을 시켜 황인의 서를 찾도록 하시오!" 그의 성화에 가비르 재상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고, 건성으로 주변의 근위병들 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근위병들을 지금부터 황인의 서를 훔쳐간 자를 찾아낸다! 범인이 멀리 도망가기 전 에 어서 행동을 개시하라!" 가비르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가테스 공작을 비웃 듯 근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 했는데, 다시 제자리에 앉은 그는 당황해 하고 있는 가테스 공작을 보며 입가에 미소 를 띄우고 있었다. 한편, 드워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동안 이렇게 뛰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힘 겹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 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뒤에는 40여명의 근위병 들을 달고서 뛰고 있었는데, 바로 황인의 서를 탈취한 주인공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황인의 서를 탈취했기에 자신들이 범인임을 알지 못할 것이고, 뮤스가 나타날 즈음 태자의 권력을 업고서 당당하게 나타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상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되는 것이었는가? 어찌된 일인지 황인의 서가 사라졌다는 것이 알려지고서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드워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갈래 길을 통해 각자 흩어지고 있었 는데, 이렇게 복잡한 황궁에서 자연스럽게 도망 다니는 드워프들을 보며 근위병들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갈라진다! 넷으로 나누어라!" 근위병들 중 책임자 인 듯 한 인물들이 명령을 하자 근위병들은 일사분란하게 나뉘어 지며 다시 각자 드워프들을 쫓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에서 근위병들에게 쫓기고 있던 켈트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흘낏 뒤를 돌아본 켈트는 더 이상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근위병들과의 사이를 보 며 애태웠고, 조금씩 호흡까지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헉헉! 저 녀석들은 갑옷까지 입고 뛰는데 힘들지도 않나! 적어도 한 시간은 버텨야 해! 형제들이여 힘을 내라!!!" 그의 뒤를 쫓던 근위병은 더욱 죽을 지경이었다. 갑옷만 해도 그 무게가 상당했는데, 그것을 모두 몸에 걸친 데다가 앞에서 뛰고있는 드워프는 짧은 다리로 엄청난 속도를 내며 황궁의 복도를 자신의 안방인양 헤집고 다니니, 무작정 뒤쫓기만 하는 이들은 더욱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헉헉헉... 대체 어디서 저런 드워프들이 나타난거야! 혹시 예전에 소동을 피웠던 그 들인가!" "그런 것 같아! 이번에 잡히기만 하면 내가 가만 두지 않겠어! 헉헉... 그 레이디께 서 도난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으면 미궁에 빠질 뻔했어!" 아무리 도망가는 도중이었지만, 드워프족은 유난히 귀가 밝은 종족이었기에 켈트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목격한 레이디면 한 명밖에 없지! 크라이츠니임!!" 근위병들의 말대로 드워프들을 밀고(?)한 자는 바로 크라이츠였다. 그녀는 드워프들 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 의심은 가비르 재상을 포함해 태자 를 옹호하는 측으로 돌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인간이 이런 류의 범죄 를 저질렀을 때는 반역죄가 성립되었지만, 인간 이외의 종족이 그 주체였을 때는 일 반 범죄로 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이라 는 이유와, 이미 근위병들에게서 한번 도망쳤었던 적이 있다는 전력 때문에 이런 고 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연한 사건으로 인해 황혈 인증이 미뤄진 후로 점점 시간이 흘러가자 황제와 귀족들 은 불안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군중들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 지 알 수 없었기에 저 마다 답답한 얼굴들이었다. 장내를 한번 둘러보던 황제는 생각 이 복잡한 듯 머리를 짚으며 가비르 재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재상... 아무래도 나는 덕이 없는 황제였던 것 같소. 다음 대를 이을 태자가 실종이 되질 않나, 황인의 서가 도난 당하지를 않나..." 황제의 근심 어린 얼굴을 응시하던 가비르 재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전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번 황위 계승이 다른 대에 비해 절차가 조 금 복잡할 뿐입니다." 말을 하고있는 가비르 재상은 황제에게 태자가 돌아온 것과, 이 모든 것이 계획아래 일어난 것임을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게 된다면 황제의 태도를 보며 가테스 공작이 눈치를 챌 수 있었기에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 때, 광장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로 갑옷을 입은 근위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온몸을 밧줄로 감은 드워프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 형제들은 하나같이 진이 빠진 모습으로 초췌했고,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었다. 켈트가 힘없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후우... 뮤스는 아직인가..." 그의 바로 뒤를 따르던 형제들 역시 광장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들이 끌려들어오는 것을 본 가비르 재상은 그들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맞추며 몸을 일으켜 보고를 기다리는 시늉을 했는데, 아직 뮤스와 태자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그들이 붙잡히게 되자 크게 동요하는 듯 했다. 황제와 귀족의 앞까지 당도한 근위병 들은 앞장서 걷던 드워프들을 멈춰 세우며 그 양옆으로 도열했고, 그 중 한 명이 나 와 재상의 앞에 섰다. "재상 각하! 황인의 서를 탈취한 범인들을 모두 잡아 들였습니다!" 말을 마친 근위병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검은 천에 쌓인 물건을 가비르 재상에게 내 밀었다. "탈취 당했던 황인의 서입니다!" 상황 보고를 들으며 그것을 받아든 가비르 재상은 볼 것도 없었지만 의례상 검은 천 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척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외 쳤다. "황인의 서가 확실하다! 범인들을 모두 임시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이번 일에 대한 추궁은 대관식이 끝난 이후 다음 황제께서 직접 하신다!" "넷!" 짤막하게 대답한 근위병은 도열해 있는 다른 근위병들 사이로 들어가며 드워프들을 이끌고 퇴장하기 시작했다. 힘없이 끌려가는 드워프들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표정 을 짓던 가비르 재상은 신색을 회복하며 들고있던 황인의 서를 의례관들에게 넘겼다. 그리곤 황제의 옆자리로 돌아왔는데, 황제는 드워프들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크 게 의아해 하며 가비르 재상에게 물었다. "재상! 저들은 뮤스 원장과 함께 왔었던 드워프들이 아니오? 그런데 이런 일을 저지 르다니!" 그의 말을 듣던 재상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대관식이 끝날 때쯤 되면 폐하께서도 저들의 노고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 직도 태자께서 당도하시지 못하시다니..." 재상을 크게 신임하던 황제는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말을 믿 기로 했고,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재상은 황인의 서가 놓인 탁자를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황인의 서가 제 자리를 찾자 대관식은 예정 된 순서에 따라 진행되기 시작했다. -다다다닥! 아무도 없는 텅빈 복도에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인 영이 복도를 통과하며 어디론가 급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황궁내에 기거하는 대부 분의 사람들이 대관식을 구경하기 위해 이 자리에 없었기 망정이지 만일 이들을 본다 면 이들의 예의 없는 행동에 인상을 찌푸릴 일이었다. 이제는 달리는 것만으로도 만 족하지 못했는지, 큰소리로 외치기까지 하고있었다. "태자전하! 제가 말씀 드린 것을 잊지 않으셨겠죠!" "물론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사용방법 정도는!" 이들은 바로 이제야 겨우 작업을 마치고서 대관식 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뮤스와 태자 였는데, 대관식이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크라이츠의 수완을 믿었기에 서둘러 계승의 광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십여개의 모퉁이를 돌고, 긴 복도를 지나는 뽁잡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지만, 다행 스럽게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태자였기 에 길을 잃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뮤스가 앞서 달리고 있는 태자 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평소 같다면 건물 두 개만 더 통과하면 계승의 광장에 도착하지만, 지금쯤 열려있는 입구는 한 곳 밖에 없습니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건물을 빙 둘러야 하죠!" "그나저나 모습이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대관식인데..." 과연 뮤스의 앞에서 달리고 있는 태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는데, 시퍼렇게 멍든 눈 에 퉁퉁 부은 볼이 차마 못 봐줄 지경이었고, 옷도 입고있던 그대로 였기에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달리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태자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핫! 이런 모습이어야 가테스 공작이 저지른 죄가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후훗! 그 말슴도 일리가 있군요!" 비록 시간은 다급했지만 태자의 마음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여유가 넘치고 있었는 데, 어려운 시기를 넘김으로 인해 태자의 그릇이 한층 커진 듯 했다. 이제 예전의 자 신감 없던 모습을 벗어 던진 태자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뮤스였 다. -채챙! 돌연 어디선가 병장기를 뽑는 소리가 뮤스와 태자의 귀에 들려왔다. 이에 놀란 그들 은 저 멀리 복도의 끝을 바라보았는데, 복도를 가로막으며 무기를 들고 서있는 다섯 명의 사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쪽에 서있던 자는 뮤스와 태자에게 익 숙한 얼굴로써 다름 아닌 루피스였던 것이었다. 루피스의 얼굴을 확인한 태자는 쌓인 것이 많았는지 거친 말투로 외쳤다. "루피스! 네놈이 이곳에 있었다니!" 태자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비릿한 웃음을 지음 루피스는 자신의 검을 쓰다듬으며 입 을 열었다. "후훗 태자전하.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 나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잘 지내셨 습니까? 지금 어디를 그리 바쁘게 가시는 중이 신지 모르겠군요?" 그들의 앞에 이르며 발걸음을 멈춘 태자는 루피스와 사내들을 둘러보며 싸늘하게 외 쳤다. "지금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이냐!" "후훗. 그렇지 않다면 이곳에 서있지도 않겠지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태자전하를 대관식 장으로 못 가도록 막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루피스의 말에 태자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등뒤로 뮤스 의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자전하 이곳에서 저들과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비록 그의 말이 맞긴 했지만, 싸우지 않고 이들에게서 빠져나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 던 태자는 난감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뮤스에게 의향을 물어오자 가볍게 웃은 그는 루피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태자의 강 화체갑을 두들겼고, 그제야 뮤스의 뜻을 깨달은 태자는 급히 강화체갑을 벗어 그에게 던져주며 눈을 가렸고, 강화체갑을 받아낸 뮤스는 자신의 눈을 가리며 루피스와 그의 수하들을 향해 내밀었다. -파팟! 그와 동시에 엄청난 빛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는데, 갑작스러운 빛에 미 처 대응하지 못한 루피스와 수하들은 눈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신음했다. "크윽! 이게 무엇인가! 앞이 안보여!" "내눈!!!" 마나를 거두며 눈을 가렸던 손을 뗀 뮤스는 앞을 보지 못하며 비틀거리는 루피스와 수하들에게 싸늘한 미소를 던졌고, 아직도 눈을 가리고 있는 태자의 손을 이끌며 이 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태자전하 어서 서두르시죠!" 계승의 광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관식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태자의 황혈 인증만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곳에 모은 모든 사람들은 입구에 시선을 맞추며 태자의 등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비르 재상과 황제는 두 손을 모으며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가테스 공작은 내일이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황궁을 둘러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의례의 순서를 진행하는 의례관이 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태자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뿌우! 뿌우! 뿌우! 하지만 의례관의 외침과 입장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렸음에도 입구에는 아무런 인적조차 없이 조용했고, 가비르 재상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두 눈을 질끈 감 았다. "아아... 그렇게 노력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것은 황제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현기증을 느낀 듯 팔걸이를 붙잡으며 겨우 몸 을 세우고 있었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고 있는 입구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 장내가 떠들썩해지자 의례관은 다시 한번 외쳤다. "태자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역시 태자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 기울어진 상황 에 미소를 짓던 가테스 공작은 황제에게 다가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폐하... 태자전하께서는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태자전하의 황위 포 기를 선언하셔야 할 듯 합니다만..." 가테스 공작의 말에 화가 치민 가비르 재상은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가테스 공작! 아직은..." 그가 따끔한 목소리로 무엇이라 하려했지만 황제의 제지에 의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 었다. 잠시 고뇌에 찬 표정을 하던 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소 가테스 공작. 이렇게 된 이상 귀족회의를 거칠 수밖에... 의례관에게 신호하여 태자의 자격 박탈을 알리시오." 힘들게 말을 마친 황제는 무겁게 입을 다물며 슬픈 얼굴을 했고, 그의 결정에 특유의 미소를 지은 가테스 공작은 대관식을 진행하는 의례관에게 신호를 했는데, 믿기지 않 는 가테스 공작의 신호를 다시 한번 확인한 의례관은 침중한 표정으로 장내의 군중들 을 향해 외쳤다. "태자전하께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기에, 이번 대관식은..." 그때였다! "잠깐!!" 의례관의 말을 끊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광장의 입구로 눈길을 돌려야 만 했고, 그곳에는 뻗어 나오는 빛을 등진 채 계승의 광장으로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 다. 동시에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대관식 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태..태자전하시다!" "태자전하께서 오셨다!" -와아!! 사람들의 외침에 눈을 크게 뜬 황제와 가비르 재상은 이 기적 같은 등장에 자신의 눈 을 의심하며 광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비록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볼이 부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태자 본인임을 알 수 있었다. 황제를 바라본 가비르 재상은 진심 어린 기쁨으로 외쳤다. "폐하! 태자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지..짐도 지금 보고 있소.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의 주름 접힌 노안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눈물이 고이고 있었고, 이제야 자신이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 그의 굳건하던 어깨는 순식간에 좁아지는 듯했다. 어느새 태자 는 황제의 앞까지 도착해 예를 표했다. "아바마마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내저은 황제는 태자가 대견하기만 한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아니다. 아니야. 이렇게 대관식에 와준 것만으로도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구나." 황제에게 인사를 마친 태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제의 왼쪽에 앉아있는 가테스 공 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의외의 상황에 크게 놀라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보루가 있었기에 아직 단념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가테스 공작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어쨌건 대관식이 끝난 다음에 둘 사이의 일을 해결 짓도록 하시죠." 태자의 말을 들은 가테스 공작은 애써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흥... 그런 말은 황혈 인증이나 끝나고 나신다음에 하시죠." "후훗 그럴까요? 그럼 전 황혈 인증을 위해 잠시..." 말을 마치며 뒤돌아 서서 의례관에게 준비가 됐다는 신호로 손을 가볍게 치켜들자 의 례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황혈의 상자를 열겠습니다!" -구구구궁...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놀랍게도 바닥의 일부분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높이가 2멜리 정도 되고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석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제 대관식에서 가장 중요한 황혈 인증이 시작되었음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석실의 움직임이 멈추자 태자는 그것의 주변으로 다가갔고, 옆에서 대 기하고 있던 의례관은 은색으로 반짝이는 날카로운 단검을 태자에게 내밀었다. 이것 은 태자의 피부에 상처를 낼 때 필요한 단검으로써 재질이 은으로 이루어 졌기에 나 쁜 기운이 상처를 타고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는다고 믿고 있었다. 단검을 건네 받 은 태자는 주변의 인물들을 둘러봤는데, 그들 사이에서 뮤스를 발견한 태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석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태자가 석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 던 황제가 나직히 말했다. "황인의 서를 열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탁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의례관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황인의 서 를 열었는데, 그것이 열리자 금색을 띄는 신비로운 빛이 주변으로 일렁이기 시작했 고,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종이 위로 어떤 문양이 생겨나고 있었다. 금광의 일 렁임을 본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 황인의 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지만, 군중들이 서있는 자리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방도가 없었기에 저마다 답답한 얼굴들이었다. 황 제와 귀족들이 탁자의 주변을 둘러싸고서 황인의 서에 생겨난 문양을 확인하자 황제 는 두 손으로 황인의 서를 덮었고, 그것의 주변을 감싸던 금광이 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태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철컥!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이목을 받으며 석실로부 터 태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탁자의 주변에서 태자를 보던 귀족들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는데, 태자 보다 황제가 더욱 긴장을 한 듯 했다. "태자. 이제 황혈의 상자 속에서 본 것을 우리에게 말해다오..." 황제의 말에 차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태자가 입을 열었다. "네 아바마마. 저는 황혈의 상자에서 두 마리의 드래곤이 서로 엉키는 문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드래곤들은 발톱을 세우지도, 브레스를 내뿜지도 않았는데, 싸운다고 하기보다는 어떠한 경쟁을 뜻하는 듯 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태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도이첸 제국이 다른 국가와의 경쟁을 뜻하는 듯 하며, 제국의 유일한 라이벌인 듀들란 제국이 그 상대라고 생각 됩니다." 태자의 말이 끝난 듯 하자 황제와 귀족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고, 군중들은 과연 태 자가 말한 것이 황인의 서와 일치할 것인지에 대해 강한 궁금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의견을 맞추자 황제는 귀족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짐은 제 61대 도이첸 제국의 황제로써 카로이트 4세를 제 62대 도이첸 제국의 황제 로 명하노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뒤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있던 가테스 공작은 그 자 리에 주저앉고 말았고, 군중들은 미리 준비 해둔 색색의 꽃가루를 새로운 황제를 환 영하기 시작했다. "카로이트 4세께 영광을!" "도이첸 제국에 영광을!" 이제야 겨우 대관식이 무사히 끝났다고 느낀 태자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굵은 눈물을 흘리는 황제와 기쁨의 포옹을 했다. 그리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태자가 손을 높이 치켜올리자 환호성은 더욱 커져 황궁의 전역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렇게 하여 듀들란 제국과의 한판 승부를 벌일 도이첸 제국의 제 62대 황위는 카로이 트 4세에게 계승이 되었다. 같은 시간, 황궁의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힌 드워프들은 눈을 멀뚱거리며 멀리서 전 해오는 환호성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던 켈트는 별 감흥 없는지 콧구멍을 파며 말했다. "어차피 저렇게 될 것 아니었나?" 철 창살을 붙잡고서 밖을 내다보던 레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우리만 채면 버리고 난리 피운 것 같수. 어차피 크라이츠님이 마음먹은 이상 안될 턱이 없어. 그 태자만 운 좋게 된 거지 뭐." 말을 잠시 끊은 레딘은 반대편 감옥에 갇혀있는 블뤼안과 브라이덴을 향해 외쳤다. "자네들은 왜 아무런 말도 없어?" 레딘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미루던 블뤼안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놈의 쥐새끼 또 놓쳤네! 어제부터 굶어서 죽을 것 같아! 이 녀석이라도 잡 아먹어야 겠어!" "블뤼안! 뭐해! 자네 쪽으로 쥐가 도망갔어!" 한 수 거드는 브라이덴이었는데, 카로이트 4세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 가장 애쓴 이들 은 환영은 고사하고 냄새나는 지하 감옥에서 쥐나 잡고 있으니 참으로 웃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0 불운의 전조. 대관식이 끝난지 하루가 지났고, 황궁은 가테스 공작의 음모가 밝혀지며 엄청난 소요 가 일어 났다. 황위를 이어받은 카로이트 4세는 엄청난 피로에도 불구하고 대관식 당 일부터 반 황실 적인 음모에 가담한 인물들을 색출하는데 온 힘을 쏟기 시작했고, 가 비르 재상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심 축에 위치했던 가테스 공작은 반역죄가 성립되었지만, 그 동안 제국 을 위해 일한 가문의 공로가 인정되어 목숨만은 부지했고, 공작 작위의 박탈과 재산 몰수, 추가로 그가 다스리고 있던 쥬론공국의 황실 흡수로 이번 음모에 대한 죄값을 치르게 되었다. 또 한, 그에게 가담한 루피스 외 이십여명의 고위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급히 황궁 밖으로의 탈출을 기도했으나, 곧 근위대의 출동으로 대부분 을 사로잡았고, 그중 몇명은 무력 시위 중 처형 되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시작부터 피로 얼룩진 황조의 시작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 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카이로스 4세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 한다면 가테스의 음모 에 가담한 반역자로 보일 것을 내심 걱정했기에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고, 그 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만 언성을 높일 뿐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뮤스는 눈을 떴다. 답답한 마음에 커튼이라도 걷어 볼까 마음 먹었지만 손과 발은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았고, 등뒤로 축축히 젖어오는 물기가 꿉꿉 하게 느껴졌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고 싶다고 생각할 때였다. [허허헛 뮤스, 아니 명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가?] 허공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언젠지 알 수 없었으나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 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짜증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확실히 그것이 짜증 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모호한 목소리였다. [네 녀석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 줄 아느냐? 대체 나와 어떤 악연으로 묶여 있길래 이런 고난을 내게 주는것인지 정녕 모르겠구나.] 그 알지 못할 목소리에 놀란 뮤스는 고개를 돌려 살펴 보려 기를 썼다. 하지만 전신 이 마비가 된듯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고, 설 상 몸을 움직인다 해도 허공 전체에서 울리는 목소리 인듯 했기에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목소리는 계속 되고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동안 많은 일을 한 것 같구나, 어지러울 정도로... 하지만 나의 위치 가 위치인 지라 더이상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부디 나 를 만날 때 까지만이라도 조 용히 지내도록 하거라. 안배는 내가 해줄 터이니... 그럼 난 이만 해야할 일이 많아 서 가봐야 겠구나. 그럼 그 때까지만이라도 살아있거라...] 당부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말을 끝낸 목소리는 점점 뮤스의 귓가에 서 멀어져 갔고,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몸은 의지를 대변하지 못했기에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으음.. 당신은... 대체 당신은 누구요!" -화락! 눈을 뜬 뮤스가 몸을 일으켜 보니 주변은 눈에 익숙한 자신의 방이었다. 지금까지 작 업해 오던 책상도 그대로 였고, 자기 전에 침대 머리에 올려둔 물잔도 어제 그대로 였기에 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이마로 흐르는 땀을 이제야 속 시원히 닦아낼 수 있 었던 뮤스는 나직한 한 숨을 터트렸다. "후우 가위에 눌린 건가? 그래서 그런지 잠을 잤는데도 몸은 더 뻐근한걸?"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본 뮤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태자전하... 아니지 이제 황제폐하인가? 조금 어색하기는 하군... 가테스 공작의 일을 잘 처리 하셨나 모르겠군..." 나직한 말을 한 뮤스는 방안에 설치된 세면대로 다가가 세수를 하기위해 물을 받았 다. 처음에야 이곳에 수도시설이 꽤나 과학적으로 발달되어있다고 감탄을 했던 기억 이 있었지만, 그저 수위를 이용한 단순한 방법임을 알게된 지금에 와서는 별다른 감 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눈의 위치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며 눈을 매만지던 뮤스는 물이 거의 다 받아졌음을 느끼며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잠을 자느라 굳어있던 몸이었기에 허리가 잘 굽혀지지 는 않았는데, 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오늘은 더욱 심한 듯 했다. "으아... 아직 20살도 안 되었는데 허리가 이렇게 결리다니..." 허리 부위를 두들기며 비명 같지도 않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였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피곤한 표정으로 문을 한번 바라본 뮤스는 정상적인 세 수는 포기하기로 하고 손에 물을 묻혀 대충 얼굴을 닦아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을 하며 손의 물기를 몇 번 털어 낸 뮤스는 그 옆에 미리 준비된 수건으로 손과 얼 굴을 닦아내며 문을 열었다. -끼릭... 그러자 문 앞에는 분홍색의 드레스를 걸쳐 입은 여인이 서있었는데,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수건을 떨어트리며 비명을 질렀다. "카타리나!!!" 그의 외침대로 지금 눈앞에 서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카타리나였다. 너무나 놀라 얼이 빠진 뮤스는 자신이 아직 잠옷 바람이라는 것을 인지 못한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 는 것이었다. 그런 뮤스를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린 카타리나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 보 였다. "푸후훗! 오랜만에 친구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것 아니니? 하긴 그런 멍청한 표정 을 지어야 뮤스 답지." 그녀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뮤스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여긴 어쩐 일이야? 갑작스럽게 나타나니까 안놀라게 생겼냐?" "호홋! 명색이 우리 아버지도 후작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계신데 대관식에 참여 안한 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잠시 카타리나의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던 뮤스는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구나! 내가 황실에 없어서 너를 미처 보지 못 했군..." 뮤스의 말에 가볍게 미소지은 카타리나는 방 안쪽을 훔쳐보며 말했다. "어머 들어오란 말도 안 하네? 너무 한 것 아니야? 황궁에 왔으면 예의를 좀 배워라! " "하핫! 그래 어서 들어와." 뮤스를 지나쳐 그의 방으로 들어온 카타리나는 방안을 둘러 봤고, 아직 정돈이 되지 않은 침대며, 작업을 끝내고 치우지 않은 책상 위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게다가 뮤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비수를 꽂았다. "쯔쯧... 아무튼 넌 볼 때마다 거의 잠옷 바람이구나? 난 여자도 아닌가?" 카타리나의 말에 화들짝 놀란 뮤스는 금새 얼굴이 빨개지며 탈의실로 뛰어들어갔다. "헉! 잠깐만 기다려 카타리나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 허겁지겁 탈의실로 사라지는 뮤스의 뒷모습을 보던 카타리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 을 뿐이었다. 길게 이어진 황실의 창문마다 몇 사람씩 매달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새해 가 되기 전에 황궁 전체의 유리창을 닦아 놓음으로써 카로이트 4세가 새로이 이끌어 나갈 황실을 축복해줄 성스러운 새해의 빛을 받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 사이로 방에서 나온 뮤스와 카타리나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뮤스의 얼굴은 라이델베르크를 떠나온 이후로 가장 밝아 보였는데, 카타리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만큼 즐거운 것이리라... 물이 잔뜩 묻어 미끄러워진 대리석 위를 조심스럽게 걷고있던 카타리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참 혹시 벌쿤 이야기 못들었지?" 웃으면서 대화를 하던 뮤스는 카타리나의 입에서 벌쿤의 이름이 거론되자 반가운 표 정을 지었다. "맞아! 벌쿤 그녀석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잘 지내는거야?"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하려고 했어. 벌쿤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던걸?" 말을 마친 카타리나는 걸음을 멈추며 팔에 끼고 있던 손가방을 열었다. "자 여기 있어. 호홋 아마 편지 내용을 보면 크게 놀랄걸?" 손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그에게 건네준 카타리나는 앞으로 변할 뮤스의 표정을 관찰 이라도 하려는 듯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응? 벌쿤 그녀석이 편지를? 이름을 제외하면 글도 잘 모를텐데..." 아직도 카타리나의 말이 미심 적은 듯 그녀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뮤스는 곧, 손에든 편지봉투의 모서리를 찢었고, 내용물을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뮤스 형에게. 안녕? 나 벌쿤이야. 설마 그 동안 나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드워프 아저씨들은 벌써 나를 잊었을 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세이즈와의 진전된 관계를 형에게 어서 알리고 싶어서 야. 그래서 세이즈한테 부탁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어. 나도 빨리 글을 배워야 겠어. 자세한 것은 카타리나 누나에게 듣고 우리 세이즈가 힘들 것 같으니 이만 줄일 게. 그럼 큰 누님께 안부 전해주고 잘지내. 형을 사랑하는 동생 벌쿤이. 편지치고는 상당히 짧은 내용이었지만, 뮤스를 충분히 놀래 키고도 남을 내용들이었 다. 힘없이 편지를 들고 있던 손을 떨어트린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세이즈와의 진전된 관계'라는 것이?" 그의 표정과 행동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카타리나가 웃으면서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호홋... 거기 적힌 그대로야. 세이즈와 벌쿤이 사귀기로 했다는 것이지 뭐..." "으엑! 카타리나 제발 농담이라고 해줘! 그런 실수를 했는데 왜 이렇게 쉽게 사귀게 된 거냐고!" "뭐라고? 실수라니?" 카타리나가 되물었지만 부끄러움에 차마 있는 그대로 말 할 수 없었던 뮤스는 은근슬 쩍 대답을 회피하며 말을 이었다. "자세하게 이야기 좀 해줘. 내가 떠난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뮤스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카타리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 를 하며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는데 네가 세이즈한테 책을 빌려 갔다면서?" "그랬었지. 드베인 숲에 있을 때 수업에 들어가질 않아서 필기를 좀 하려고..." "아마 네가 떠난 다음에 세이즈가 그 책을 찾으러 공학원에 들렸던 모양이야. 하지만 이미 너는 벨링으로 떠나고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세이즈는 벌쿤에게 부탁을 했데. 자기 책 좀 찾아서 돌려 달라고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듣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여기서부터 문제의 발단이겠군..." "아무튼 책을 찾기위해 들어간 벌쿤이 무슨 일인지 1시간이 넘도록 나오지를 않았다 는 거야. 그래서 궁금함에 들어가 봤더니, 벌쿤이 서재를 다 뒤적이면서 그 책을 찾 고 있었데. 알고 봤더니 벌쿤이 글을 몰라서 못 찾는 거였다고 하더라고." "그렇다면 세이즈의 성격상..." "풋! 아마 네 예상이 맞을 거야. 세이즈 성격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사람들한테 정 을 많이 주잖아. 그래서 그날부터 당장 벌쿤한테 글을 가르치기 시작 한거야. 그러다 가 서로 정이 쌓이기 시작했던 거지..." 머리를 벅벅 긁은 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 아무튼 잘 되긴 했군. 그렇게 잠도 못 자고 좋아하더니만..." 뮤스의 반응을 살피던 카타리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혹시 너 부러워서 그러는거지?" 그녀의 정곡을 찌른는 말에 화들짝 놀란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부..부럽긴 누가 부러워한다는 거야! 내가 부러워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푸훗! 없을 이유도 없지 뭐. 가이엔·바르키엘 커플, 세이즈·벌쿤 커플, 폴린·히 안 커플. 주변 사람들 다 커플들인데 부럽지 않을 수가 없지." "흥! 뭐 나만 혼잔가? 카타리나 너도 혼자잖아. 그럼 너도 걔들이 부러운 거야?" "..."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던진 말에 예상 밖으로 카타리나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뮤스 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 솔직히 조금 부러운 건 사실이야." "어... 그래?" 머쓱해진 분위기가 연출되기 시작하자 뮤스는 어찌할 줄 모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대공학자> #131 이 때, 뮤스의 등뒤로 귀익은 목소리가 들리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하! 뮤스군 잘 주무셨습니까?" 마침 적절한 상황에 나타난 새로운 황제 카로이트 4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반갑게 느껴진 뮤스는 과장되게 웃으며 그를 맞아 주었다. "하핫! 황제폐하께서도 즉위하신 첫날을 잘 보내셨습니까? 어제부터 황궁내가 상당히 시끄럽던데요?" 이제 뮤스와 카타리나 앞에 다다른 젊은 황제는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하루만에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 위엄이 더해져 있었고, 전에는 찾아 볼 수 없던 미묘한 분위기가 전신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뮤스군께 황제폐하라는 칭호를 들으니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군요." "그래도 이제 황위에 오르셨는데, 익숙해 지셔야죠." "어제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던 차에 가테스 공작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습니다. 다행스럽게 가비르 재상이 도와주어서 쉽게 해결 되었지만요. 그런데 옆에 계신 레이디께서는?" 카타리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은근한 표정으로 묻고있는 황제였다. 그의 물음에 잠시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쪽은 라이델베르크에서 온 카타리나라고 합니다. 저와는 학교친구사이죠." 뮤스의 소개에 뭔가를 위해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던 태자는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탄성을 질렀다. "아! 혹시 그때 말씀하셨던 그분이십니까?" 아무래도 연회 때 뮤스가 꺼낸 말을 기억해 낸 듯 했는데, 순간 흠칫한 뮤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닙니다! 폐하." "하핫! 그분이 아니셨군요. 상당히 아름다운 분이시라 그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황제와 뮤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대관식에서 그의 모습을 봤었고, 둘간의 대화를 듣기도 했기 때문에 눈앞에 서있는 젊은이의 정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카타리나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하. 저는 라이델베르크에서 온 카타리나 슈베어라고 합니다." 그녀의 소개를 듣던 황제는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저도 반갑습니다 카타리나양. 혹시 하버만 슈베어 후작의 따님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분께서 저의 아버님 되시죠." 황제는 성을 듣고서 그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는데, 후작이상의 지위를 가진 인물이 많아봐야 20명 안팎이었기에 충분히 외울 수 있는 숫자였던 것이었다. 이렇게 소개 인사가 끝나자 황제는 뮤스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었는지 앞서 이야기를 꺼냈다. "아참 뮤스군은 오늘 저녁에 식사 약속이 있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뭐 평소 같이 저희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만, 다른 특별한 약속은 아직 없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마침 잘 되었군요. 오늘 저녁에 귀족분들과 식사 약속이 있는데, 꼭 뮤스군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발표할 일도 있고 해서요."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뮤스가 흔쾌히 초청에 응하자 기븐 표정을 지은 황제는 카타리나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카타리나양께서도 뮤스군과 함께 동행하도록 하시죠. 친구분이라면 못 보신지 오래 되셨을 텐데 같이 저녁식사라도..." 황제의 권유에 뮤스와는 다르게 고심하는 카타리나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부담스러운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국가 최고지위를 가진 인물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 선뜻 참여한다는 것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고심하는 모습을 본 뮤스가 그녀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카타리나 같이 가자. 그렇지 않아도 같이 저녁식사나 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뮤스의 부축임까지 받자 카타리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지요 폐하." 이제 흡족한 표정을 만면에 띄운 황제는 주머니에서 마나시계를 꺼내 확인하며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저는 다시 오후 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 겠습니다. 이거 황위에 오르자 마자 정신이 없군요. 그럼 카타리나양도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작별인사에 가볍게 답한 뮤스와 카타리나는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그를 응시했다. 일이야 어찌되었건 당황스러운 상황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음에 만족한 뮤스는 계속해서 걷던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뭐 다른 충격 적인 사건들은 없어? 라이델베르크를 떠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뮤스가 실제로 느끼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듯 했기에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카타리나가 말했다. "아참 그리고 세이즈의 언니가 언제쯤 돌아 오냐고 하던걸?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고 말이야." "아로인 누나 말이구나! 글쎄 일이 좀 길어져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한데..." "그것 말고는 큰 일은 없었어. 폴린과 히안은 예나 지금이나 닭살 스럽고 바르키엘은 이제 정말 정신 차렸는지 자기일 잘하고... 뭐 그렇지.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니?" 그녀의 물음에 아무생각이 없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세? 그냥 무작정 나온건데... 음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누님과 아저씨들 만나볼래? 쿠쿡 드워프 아저씨들은 감옥에서 나오셨는지 모르겠군." 뮤스가 꺼낸 말에 카타리나는 마침 대관식 때의 일이 생각났기에 의아한 듯 물었다. "아참 그런데 어제 대관식 때는 어떻게 된 거야? 켈트 아저씨와 형제분들이 모두 끌려가던데?" "푸하핫! 그건 말이지..."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은 뮤스는 대관식 전의 상황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고, 카타리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듣고 있었다. 물론 황혈 인증의 내막을 비밀로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실내, 고작 촛불 몇 개로 밝기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불빛이 닫는 곳에는 켈트와 그의 형제들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진중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켈트가 손에 들고 있던 금속 상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황혈 인증을 가능하게 했던 물건이라고 하더군. 자세한 것은 뮤스가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듣지 못했어..." 켈트의 말을 듣던 레딘은 그의 손에서 금속 상자를 빼앗아 들며 말했다. "일단 뜯고 봅시다. 이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그 황혈의 상자인가 뭔가에 들어있는 물건의 모양을 맞춘단 말이오? 혹시 우리 몰래 크라이츠님이 같은 종류의 페어링 마법을 걸어 주신 것이 아닐까?" 레딘의 추론에 브라이덴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머리하고는... 말을 생각 해봐 괜히 페어링인지! 두 개가 짝을 이루니 페어링 아니겠어? 그런데 여기에 같은 마법을 걸어 봤자 홀수가 되지 않겠나?" 그의 그럴싸한 말에 모든 드워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잠자코 있던 블뤼안이 말했다. "열어 봤자 괜히 고장만 내지 않겠수? 결국은 뮤스가 깨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데..." -똑! 똑! 블뤼안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방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것이 어떻게 쓰이는 물건인지 알아내지 못해 답답함을 표하던 블뤼안은 신경질 적인 억양으로 외쳤다. "누구요!" "아저씨들 들어가도 되요?" "뮤스군인가? 어서 들어오게! 빨리!" 문밖에서 들려오는 뮤스의 목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만면에 띄운 블뤼안은 서둘러 답했고, 다른 드워프 형제들 역시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철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실내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대낮부터 검은 커튼을 치고 방안에 들어 앉아있는 드워프들을 향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 지금 뭐하시는 중이셨어요? 이렇게 방을 어둡게 하고서 촛불만 켜놓다니..." 뮤스의 물음에 가볍게 웃은 켈트가 그의 의문점을 털어 주었다. "허헛! 드워프들은 원래 고민이 있으면 이런 곳에서 하지. 아무래도 어두운 동굴에서 살던 습성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이 어두워야지만 집중이 잘 된다고나 할까?" 켈트의 설명에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아저씨! 라이델베르크에서 카타리나가 왔어요. 카타리나는 아직까지 기억하시고 계시죠?" "카타리나? 어디 보자... 아하! 벌쿤이 따라 다닌다는 그 아가씨 말이냐?" 설마 했지만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켈트를 보를 향해 외쳤다. "아니예요! 아무튼 못 말린 다니까. 걔는 세이즈고 얘가 카타리나예요." 뮤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켈트는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아! 이제 생각이 난다! 전뇌거 발표 회 때 너랑 눈 맞은 아가씨였구나!" "무슨 눈이 맞았다고 그러세요!" 가볍게 던진 켈트의 말이었지만 크게 당황한 뮤스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켈트는 더욱 미심적은 눈초리를 보냈는데... "흠 아니면 아니지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냐? 정말 카타리나양을 좋아하는가 본데?" "아니예요! 우린 그냥 친구란 말이예요!" 필사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뮤스의 옆모습을 보며 카타리나는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와 켈트의 말은 블뤼안의 목소리에 의에 끊어졌는데, 둘 사이를 바라보다 참지 못한 그가 외쳤던 것이었다. "형님! 그만 좀 하시구려!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뮤스가 누굴 좋아하느냐가 아니잖수? 난 이 상자가 궁금해 미치겠단 말이우!" 블뤼안의 말을 듣던 켈트는 잠시 깜빡하고 있던 금속 상자를 떠올렸다. "아참 그렇지! 뮤스 이쪽으로 와서 이것 좀 설명해 줘! 이것 때문에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잠도 못 자고 이러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뮤스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더욱 답답해진 블뤼안은 켈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형님 때문에 뮤스군이 삐진 모양인데 이를 어떻게 할거요? 빨리 책임 지슈!" "내가 뭐 틀린 말했나? 음..." 자신의 고집을 꺽기 싫어하는 켈트였지만 황혈 인증에 대한 설명을 못들어 봤자 드워프들만 손해였기에 은근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흠흠... 내가 한말은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삐질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빨리 이거나 좀 설명해 줘." 비록 사과를 하는 태도 같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켈트에게 바랄 수도 없었기에 뮤스는 표정을 풀며 드워프들에게 다가왔다. "뭐 그렇게 까지 사과하시는데 더 이상화를 낼 수는 없죠." 그리곤 드워프들이 둘러앉아 있는 원탁주위에 놓여있는 의자 앉으며 카타리나에게 손짓을 했고, 그것을 본 그녀 역시 뮤스의 옆에 따라 앉았다. 이어 가방에 손을 넣어 가로, 세로 20 멜리 정도의 판을 꺼낸 그는 탁자위에 놓인 금속 상자를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2 "사실 이 금속 상자의 내부는 상당히 단순해요. 잠시 열어 보도록 하죠." 말을 잠시 멈춘 뮤스는 가방에서 돌림쇠를 꺼내들고 금속상자의 판을 고정시키고 있는 나선형 못을 돌렸 빼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체를 분해 할 수 있었는데, 내부는 상당히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투명한 유리구였다. 그 안으로는 두 개의 금속 심지가 마주보고 있었는데, 그것의 반대편 끝은 서로 이어져 전뇌력을 공급하는 마나구가 연결 되어있었다. 유리구를 손가락 끝으로 두들겨 본 뮤스는 그것을 바라보고있는 드워프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것이 '투시기'의 가장 중심 부분이에요. 일단 이 유리구는 진공상태를 이루고 있고, 이 진공의 유리안쪽으로는 두 개의 극이 있는데, 전뇌가 흐르는 음극과 양극의 전극을 봉입 한 것이죠. 전극에는 고전압의 마나구를 연결해 전력을 공급받게 되요. 지금부터 잘 들으셔야 할 거예요."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드워프들은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뮤스와 함께 했었던 시간 동안 웬만한 공학의 기초 지식들은 충분히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뮤스는 손가락으로 진공 유리구의 왼쪽 편에 붙은 음극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계속 하였다. "일단 마나구에서 전뇌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음극에서부터 양극을 향해 고속의 전자가 튀어나오게 되죠. 그것이 양극 끝에 달린 금속 표적에 닿게 된다면 그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일어나거든요. 그 파장은 수 멜리의 거리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물질을 잘 투과하는 성질이 있죠. 하지만, 밀도가 높은 물질일수록 이 파장은 잘 통과하지 못하는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도 해요."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뮤스는 능숙한 솜씨로 다시 금속 상자를 조립하며, 탁자 위에 꺼내놓은 판을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켈트를 향해 내밀었다. "이제 어려운 설명은 이쯤에서 하고, 직접 보여드리도록 할께요. 켈트 아저씨 이 형광판 위에 손을 올려놓아 줘요." 뮤스의 설명을 이해하기 힘든 지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켈트는 그의 부탁대로 판 위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냐?" "그렇게 하고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말을 마친 뮤스는 금속상자를 켈트의 손위로 올리고서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평범하던 나무판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켈트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 싶었는지 급히 손을 치우며 소리쳤다. "이..이게 뭐냐!" 하지만 손을 치운 켈트는 눈을 더욱 부릅떠야만 했다. "이건 내 손자국 아니냐?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줄기는 뭐지? 혹시 내 뼈?!" 켈트의 말대로 뿌연 빛을 내뿜고 있는 판의 중심부위에는 그의 손이 가리고 있던 부위의 크기만큼 조금 어두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또, 그 안으로는 거의 빛이 나지 않는 부위가 있었는데, 켈트와 그의 형제들 역시 잘 알고 있는 손의 뼈 모양이었던 것이었다. 드워프들과 카타리나가 놀라고 있는 모습을 본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걸며 여린 빛을 뿜고있는 판을 들어 올렸다. "네. 생각보다 상당히 굵지만 이것이 아저씨 손의 뼈예요. 지금 빛을 내고 있는 이 판은 형광판이라는 것인데, 아까 설명 드린 그 파장의 특성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죠. 형광물질을 반응하게 한다는 것! 즉, 투시기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파장은 켈트아저씨의 손을 투과해서 반대편에 있는 형광판까지 닿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은 뼈에서는 극히 적은 양의 파장만이 통과했고, 그보다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살과 근육은 그보다는 많은 양의 파장이 통과한 것이에요. 그러니 파장을 아무 여과 없이 받은 형광판은 가장 밝게 빛나고, 살을 통과한 부위는 조금 흐리게, 뼈를 통과한 부위는 거의 빛나지 않는 것이죠." 이제야 대충이나마 투시기의 원리를 이해 할 수 있었던 켈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황혈의..." 여기까지 말을 하던 켈트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며 카타리나의 얼굴을 살폈지만 다행스럽게도 형광판에 시선을 뺏기고 있었기에 켈트가 하는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형제들과 뮤스의 눈치를 한눈에 받은 켈트는 헛기침을 몇 번하며 그들을 살폈다. "흠! 흠! 어쨌건 이거 상당히 재미있는 물건인걸? 이 형광판이라는 건 계속 쓸 수 있는 거야?" "형광물질이 안정되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으니까 그 때 다시 사용하시면 되요. 그런데 크라이츠 누님은 어디계세요?" 뮤스의 물음에 잠시 형광판에서 시선을 거둔 켈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오전에 가비르 재상이 급한 일로 만나자고 했으니 지금쯤 점심 같이 식사를 하고 계시지 않을까?" 크라이츠가 있는 곳을 알아낸 뮤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카타리나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고마워요 아저씨. 그럼 저희는 누님을 좀 만나러 갈게요. 그럼 다른 아저씨들도 나중에 봐요!" "그럼 저도 나중에 뵐게요." 인사를 마치며 뮤스와 카타리나가 방을 빠져나가자 자리에 남은 드워프들은 동시에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두고 나간 투시기를 잡았다. 각자 조금씩 힘을 줘봤지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가장 연장자인 켈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 아우들... 이 형님께 양보하는 것이 어때? 맥주도 위아래가 있는 거야." 이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했다. 오히려 그의 말에 미소를 지은 블뤼안이 은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흘흘... 그러는 형님은 언제 맥주를 윗사람에게 양보한 적이 있수? 80년 전에 형님께서 백부님의 맥주에 먼저 손을 댔다가 크게 혼난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구먼..." 블뤼안의 말을 듣던 다른 형제들도 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허헛! 나도 그 기억이 난다! 그때 아마 백부님이 맥주 통에 형님을 가둬놓고 굴렸었지 아마?" "크큭! 그 드워프가 켈트 형님이었나? 그런 기억이 있긴 있었는데, 누군지 모르고 있었는데!" 아우들이 아픈 과거의 기억을 꺼내자 켈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맥주 이야기가 아니잖아?! 괜히 말을 다른 데로 돌리지마!" 하지만 그의 역정에 겁먹을 만큼 호락호락한 아우들도 아니었다. "흠흠... 먼저 이야기 꺼내놓고 찔리니까 화를 내는군..." "술 못마시는 드워프가 밥 적게 먹는 드워프 나무란다더니..." "형님도 철 좀 드슈. 나이가 들었으면 양보하는 미덕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그들의 말을 듣던 켈트는 더 이상 아무말 하지 못하고서 불만이 가득 쌓인 표정으로 투시기에서 손을 떼어냈고, 형제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각자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입심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결국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협의 하에 함께 사용해 보기로 결정 내렸다고 한다. 가비르 재상의 집무실에는 유난히 많은 종이 다발들이 널려 있었다. 새로운 황제에 따른 국가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황제가 정식 업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 모든 준비가 가비르 재상의 손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는 크라이츠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에 앉은 가비르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공학원 덕분에 대관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뮤스군과 드워프 분들게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가비르 재상의 말에 밝게 웃은 크라이츠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호홋. 그렇게 말한다면 기억해 두도록 하죠. 나중에 도움 받을 일이 있을 때 말해 주도록 하겠어요." "네?..." 예의 상 건넨 말에 직접적으로 응하자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 가비르 재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태도 역시 크라이츠의 성격임을 너무나 잘 아는 그였기에 금새 평상심을 유지 할 수 있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제국의 법적 제한에 위반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황제폐하와 협의 하에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답에 만족한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비르 재상은 안색을 조금 딱딱히 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크라이츠님을 청한 것입니다." "말할 것이라는 것이 뭐죠?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데요. 저는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거든요?" 크라이츠의 말에 고개를 내저은 가비르 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훗. 저 역시 과거의 일에 집착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이미 늙어 예전의 열정은 찾기도 힘든 걸요? 제가 말씀 드릴 것은 뮤스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뮤스에 관한 이야기라니요?" 그녀의 되물음에 가비르 재상은 어제 있었던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관식 후 가테스 공작에 대한 처벌을 의논하기 위해 폐하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라이츠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흠... 제국에는 총 3개의 공작 가문이 있습니다. 그 중 가테스 공작의 가문은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이제 2개의 가문만이 남게 된 것이죠. 한데... 폐하께서 뮤스군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리시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네?! 뮤스에게 공작의 지위라고요?" 크라이츠는 가비르 재상의 말에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는데, 공작의 작위라는 것이 그리 쉽게 내려지고, 받을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크라이츠였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원래 공작이라는 작위가 국가 1등 공신에게만 내려지는 작위이기 때문에 폐하께서 언급하신 내용을 따진다면 충분히 뮤스군을 공작으로 임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제국의 귀족들이 엄청난 소요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크라이츠님이 더 잘 알것입니다. "당연히 엄청난 소요를 일으키게 되겠죠. 생전 보도 못한 자에게 그런 엄청난 권력이 옮겨간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가비르 재상은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의 작위만이라면 귀족들의 소요가 일어난다고 해도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주 불가능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쥬론 공국이죠." "쥬론 공국이라면 가테스 공작이 다스리던 곳이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이번 공작 작위가 뮤스군에게 내려진다면 가테스 전공작의 지위를 물려 받게 되는 것임으로 쥬론 공국의 영지까지 뮤스군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쥬론 공국은 그 크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전체가 기름진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제국의 가장 큰 금광산 중 세곳을 가지고 있는 땅입니다. 거의 경제력으로는 하나의 독립 된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그러니 뮤스군이 공작의 작위를 받게 된다면 귀족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이 일을 저지하려 들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듣던 크라이츠는 단호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그것은 절대 안돼요! 아직 어린 황제가 권력 다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한데... 뮤스를 사지로 이끌려 하다니... 어리석은." "저도 말리려 애썼지만 너무나 완고하셔서... 그래서 크라이츠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근심 어린 말과 함께 가비르 재상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133 둘의 사이에서 진지한 이야기들이 한동안 오고가고 있을때 문으로부터 노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잠시 하던 이야기를 멈춘 가비르 재상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뮤스가 얼굴을 드리 밀었다. 그리곤 방안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가비르 재상님 저희 누님과 함께 계시나요?" 물음과 동시에 가비르 재상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크라이츠를 발견한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몸을 집무실로 들였다. "누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아 다녔다고요." 뮤스의 목소리를 듣고서 몸을 돌린 크라이츠는 자신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고 있는 당사자가 나타나자 떫떠름 한 표정을 지었다. "에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마침 잘 왔다. 이쪽으로 들어와서 앉아 보렴." "그것보다 카타리나가 여기에 왔어요. 그래서 인사드린다고 이렇게 찾아 다녔다고요." 말을 마친 뮤스는 자신의 뒤에 서있는 카타리나를 잡아끌었는데, 그에게 이끌려 집무실로 들어선 카타리나는 가볍게 웃으며 크라이츠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을 따라 왔다가 인사라도 할겸해서 왔어요." 그녀의 인사를 받은 크라이츠 역시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어머! 카타리나 정말 오래간 만이구나! 그 동안 더 예뻐진 것 같은걸?" "별말씀을요. 저보다 오히려 언니께서 더 아름다워 지신 것 같은 걸요?" 카타리나의 칭찬에 뮤스의 일을 잠시 잊어버린 크라이츠는 입을 가리며 크게 웃었다. "호호호홋! 어머나 그렇게 생각했니?! 나도 요즘 피부가 좋아 진 것을 조금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었나 보네? 요즘에 쓰는 화장품을 바꿨거든. 어렵게 구한 것이라서 그런지..." 카타리나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크라이츠를 보며 뮤스는 할말을 잃었고, 카타리나 역시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비르 재상만은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후 크라이츠가 안정을 취하자 가비르 재상은 뮤스와 카타리나를 바라보며 자리를 권했다. "두분 다 이쪽으로 와서 함께 차라도 드시죠? 그렇지 않아도 중요한 일 때문에 뮤스군을 부를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요." 그의 말에 카타리나와 눈으로 의사를 교환한 뮤스는 빈 소파로 다가와 앉았고, 카타리나 역시 뮤스의 옆자리에 자리했다. 마침 집무실에는 빈 잔이 두개 더 있었기에 그것에 차를 따른 가비르는 카타리나의 앞으로 잔을 놓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하버만 후작님의 둘 째 따님이시죠? 저는 가비르라고 합니다." 가비르 재상이 건넨 찻잔을 황송한 듯 받은 카타리나는 그의 깍듯한 접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버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대접을 받으니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저...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가비르 재상님. 하지만 저는 나이도 어리고 하니 말씀을 낮추시는 것이..." 카타리나의 말에 뮤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는데, 표정이 굳은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보고서야 힘들게 자재 할 수 있었다. "아..아닙니다 카타리나양. 제 행동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안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네... 가비르 재상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존대에 얽힌 아픔을 모르는 카타리나로서는 크게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부탁까지 하니 더 이상 그에 대해 말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찻잔을 뮤스의 앞에 내려놓던 가비르 재상은 본래의 신색을 되찾으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뮤스군은 작위를 받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그가 건네준 찻잔들 들어 향기를 맡던 뮤스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작위? 귀족의 작위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 공작의 작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비록 가비르 재상이 꺼낸 이야기의 진의를 알진 못했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공작의 작위 정도면 엄청 높은 위치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골치 아픈 위치가 아닐까요?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고, 그에 따른 일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태자전하께서..." 뮤스의 간단한 대답을 들은 가비르 재상은 크게 안도하는 모습으로 크라이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뮤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듣고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중이었다. "네?! 제게 공작의 작위라고요? 그건 말도 안돼요! 만난지 일 주일도 안된 사람에게 공작의 작위를 쉽게 내리려 하다니 정말 큰일 날 일이군요!" 뮤스의 반응에 고개를 내저은 가비르 재상은 찻잔에 남은 차를 비우며 말했다. "사실 뮤스군은 공작의 작위를 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데, 황궁 또는 제국 전역의 귀족들이 뮤스군이 갖게될 권력을 두려워하여 크게 반발하게 될 것입니다. 심할 경우에는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러니 뮤스군 자신과 제국의 평온을 위해 공작의 작위를 거부해 주셨으면 합니다." 크라이츠 역시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었다. "내 생각도 가비르 재상과 같구나. 네가 공작의 작위를 받는다면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란다. 그것은 공학원에도 엄청난 타격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거야." 뮤스도 공작이라는 위치에 별 관심이 없는 데다가 가비르 재상과 크라이츠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재상님과 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제가 아마 거절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서슴없는 뮤스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비르 재상은 웃으며 말했다. "휘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마침 황제와의 대화가 생각난 뮤스는 가비르 재상에게 물었다. "아참. 그런데 오늘저녁 말씀하실 것이 있으시다고 하시며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셨는데...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공작 작위에 관한 이야기를 귀족들 앞에서 발표할 듯 하군요. 근시일 내에 발표를 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두르시다니..." "그렇지만 제가 거절을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뮤스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가비르 재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군의 말대로 간단하게 해결 된 다면 좋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흐른다면... 글쎄요." "네? 제가 거부를 하더라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건가요?" "흠 예를 들어서 내 집의 정원에 독사가 한 마리가 있다고 가정을 해보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독사에게 물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뮤스군은 언제 나를 물지 모를 독사를 그냥 정원에 놔 둘 수 있겠습니까?" 가비르 재상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뮤스는 자신이 생각한 만큼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귀족들이 저의 존재 자체에 위협을 느끼고서 견제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군요." "흠...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카타리나는 기분이 언짢아 지고 있었는데, 어찌 본다면 뮤스와 가비르 재상이 말하는 귀족 중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하버만 후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녀가 느끼는 불쾌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자 뮤스는 잠시 잊고 있던 카타리나를 의식했다. "아차! 미안해 카타리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나 들려주게 되다니..." 하지만 카타리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뮤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조금 이상한 그녀의 태도를 본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타리나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거야?" 그제야 뮤스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너무 심심했나 보네... 어쩌지?"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뮤스를 바라본 가비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후훗! 지금은 고민해 봤자 나아질 것이 없으니 카타리나양과 함께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동안 황궁에만 계시느라 답답하셨을 텐데..." "하지만 제가 이곳의 지리를 잘 알지도 못하고 어디가 좋은 지도 잘 모르는 걸요? 게다가 걸어 다닐 수는 없는 일인데..." "그러시다면 제가 한 곳을 추천해 드리죠. 황궁에서 전뇌거로 20분쯤 나가면 젠타카 강이 있습니다. 비록 춥기는 하지만 겨울이기에 더욱 멋있는 곳이죠. 그곳에 가면 요른 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맛좋은 음식점들이 많죠.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식사 전이라면 그곳에 가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또, 그곳은 실크로스교가 세워질 곳이니 미리 가서 시찰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뮤스가 교통수단에 대해 말을 하려 하자 그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지 크라이츠가 입을 열었다. "전뇌거라면 황궁 마차고에 있을 거야. 괜찮다면 내 것을 쓰도록 하렴. 카타리나처럼 어여쁜 아가씨를 모시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이번에야말로 카타리나를 잘 꼬셔 보라고! 호호홋!"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힌 뮤스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크라이츠를 이길 확률도 없었고, 더욱 의심을 살만한 노릇이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긴 뮤스는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농담도 원... 그럼 카타리나 괜찮겠어? 마침 나도 답답하던 참인데 잘 됐네." "응? 나야 상관없어. 아버지께 말씀 드리고 왔으니까." 카타리나가 승낙하자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뮤스는 자리에서 몸을을 일으켰다. "좋아. 그럼 누님 다녀올께요. 그리고 가비르 재상님도 나중에 뵙겠습니다." "호홋! 그럼 뮤스 응원해주마!" 크라이츠의 주책을 아예 외면한 뮤스는 카타리나를 이끌며 서둘러 자리를 떴고, 크라이츠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죠? 뮤스 녀석이 조금만 더 숙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직접 나설 수도 없고." 뮤스의 속내를 모두 다 알고 있는 듯 한 크라이츠의 말투였다. 그녀의 질문을 듣고 있던 가비르 재상 역시 부러운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더군요. 부러울 정도로... 허헛! 젊었을 적이 그립군요." "호홋. 열정은 사라 지셨어도 아쉬움은 남는가 보군요. 우리도 오래간 만에 데이트나 할까요?" 그녀의 제의에 빙그레 웃은 가비르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위해 시간을 내 주신다면 영광이죠. 후훗!" 왠지 예전보다 편안한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는 가비르 재상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크라이츠는 앞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신 제가 만족 할 만한 곳으로 가셔야 할 거예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으며 몸을 일으킨 가비르 재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레이디 크라이츠. 멋진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호호호홋! 좋아요. 기대해 보겠어요." 눈앞에 서있는 예의바른 신사의 태도에 기분 좋게 몸을 일으키는 크라이츠였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4 벨링이라는 도시는 도이첸 제국의 수도로서 유명하기도 했지만, 북부지방 특유의 개성을 가진 도시로도 유명했다. 특히 구 시가의 건축양식과 도시형태는 다른 도시들과 전혀 판이했는데, 바람이 많은 북부지방의 도시인만큼 건물들 사이의 틈이 거의 없었고, 난방의 이점을 위해 창이 작고 천장이 낮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외관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했기에 물받이나, 연통 또는 지붕의 모양이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건물들 사이로 나있는 도로를 타고 마차들 사이에 섞여 달리고 있는 황금빛의 전뇌거가 있었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전뇌거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전뇌거에 대해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황금의 전뇌거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이 없었기에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뇌거의 안에는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뮤스가 직접 전뇌거를 운전하는 중이었다. 도로는 반듯한 석판들이 맞물리며 포장되어 있었기에 전뇌거로 전해지는 진동도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운전을 하며 벨링의 시내를 구경하던 뮤스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야! 라이델베르크와는 또 다른 모습이군. 카타리나 너는 여기에 와본 적 있어?" 그의 물음에 가볍게 웃은 카타리나는 창 밖을 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렸을 때 여러 번 와 봤는걸? 그리고 벨링이라는 도시는 도이첸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도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그 이후에 형성 된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고, 북부지방 특유의 기후환경 때문에 건물들의 모습이 조금 특이하지. 공부 좀 해야겠는걸? 뮤스군!" 카타리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뮤스는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카타리나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제대로 가긴 가는 거야? 나도 젠타카강은 가보질 않아서 모르는데..." 그녀의 걱정스러운 말에 뮤스는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죠. 레이디! 관리하는 분께 물어보고 왔으니까." "글세... 모르지 뭐. 혹시 네가 방향치 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순간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던 뮤스는 황궁에서 길을 잃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한번 의심해 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카타리나의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그래도 잘 찾아오긴 왔구나. 저쪽을 봐!"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뮤스는 길옆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젠타카강 방향. 이제야 극단적인 방향치는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기에 한시름 놓은 뮤스는 허기가 짐을 느끼며 속도를 조금 더 내어 전뇌거를 몰기 시작했다. -끼익! 잠시 후 그들은 젠타카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변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음식점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각 음식점들의 앞쪽으로는 상당히 많은 수의 마차들과 전뇌거들이 세워져있었다. 그중 어느 곳을 택해야 할지 생각하던 뮤스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어디가 좋을까? 경치는 거의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역시 뮤스와 주변 음식점들을 살펴보던 카타리나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음식점을 가리켰다. "뭐 괜찮으면 저기가 어떨까? 어차피 이런 곳에 자리를 마련했을 정도면 음식솜씨는 비슷 할거고, 모양도 저기가 마음에 드는걸?" 그녀가 가리킨 곳에 서있는 음식점은 2층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주로 갈색을 이루는 다른 음식점들 사이에서 유달리 흰색 판자로 외벽을 하여 눈에 띄는 모습이었는데, 지붕에 걸려있는 덜 녹은 눈들과 어울려 운치가 있어 보였기에 뮤스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점 앞에 전뇌거를 새워놓은 뮤스와 카타리나는 유리를 통해 안이 들여다보이는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 역시 온통 흰색을 띄고 있었고 식탁, 의자 할 것 없이 모두 흰색이었다. 강쪽으로 커다란 창이 붙어있어 채광이 용이했기에 하얀 실내는 더욱 밝아 보였다. 문 앞쪽에 서있던 점원이 다가오며 물었는데, 뮤스와 카타리나가 입고있는 고급스러운 옷과 창 넘으로 전뇌거를 봤는지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잠시 실내를 둘러보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점원은 밝은 미소를 띄우며 재차 물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차를 하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뮤스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식사를 좀 했으면 하는 걸요? 지금 상당히 허기가 진 상태거든요." "그럼 2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외투는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점원에게 외투를 맡긴 뮤스와 카타리나는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그들 말고도 여러 명의 남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애정행위에만 전념할 뿐 새로운 손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뮤스가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카타리나가 불렀다. "뮤스! 왜 앉지 않고 그러고 있는 거야?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응? 아.. 아니야!" 황급히 대답하며 자신의 맞은 편에 앉은 뮤스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흠... 저쪽에 마음에 드는 아가씨라도 있는 거니?" "말도 안돼! 배고프니까 어서 주문이나 하자." 카타리나의 주의를 돌린 뮤스는 서둘러 식탁 위에 놓인 메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하하핫! 정말 당신을 만나길 잘 한 것 같아. 매일 봐도 이렇게 사랑스럽다니." "호홋. 정말요? 저를 얼마만큼 사랑하나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 젠타카강의 강물만큼의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어." "어머나! 행복해라!" 뮤스의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들이 사방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따라 유별나게 질긴 스테이크에 신경질 적인 나이프질을 해대며 투덜거렸다. "흥! 폴린, 히안 커플이 이상한게 아니었군. 다들 제 정신이 아니야." 맞은 편에서 뮤스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들은 카타리나는 그와 대조적으로 손쉽게 스테이크를 잘라내며 말했다.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라고 하잖니. 우리한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리라도 저 사람들한테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보다 달콤하게 드릴걸?" "어쨌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야! 입맛이 싹 달아 나셨어." 뮤스의 말에 미소를 지은 카타리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벌쿤이 세이즈와 사귀게 되니까 배아파서 그러는거 아니니?" "배가 아프긴 누가 배가 아프다는 거야? 벌쿤 녀석이 세이즈와 사귀게 된건 아무 상관없어!" 정곡을 찌른 카타리나의 말에 언성을 높이는 뮤스였는데, 불리한 상황에서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남자의 본성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카타리나의 말에 이성을 찾은 뮤스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미안. 화를 내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뮤스의 사과를 시작으로 둘 사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고, 둘 중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듯 했다. 뮤스의 외침에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은 커플들은 뮤스와 카타리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동안 카타리나의 눈을 피한 채 식탁 위를 내려다보던 뮤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화난 거야?"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식탁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면 미안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 한동안 뮤스의 말을 듣고있던 카타리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네 행동이 이상해. 오전에 황제폐하께서 물어 보시던 '그분' 이 누구니?" 뮤스가 오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는데, 금새 황제와의 대화 중에 당황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그건 네가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명확치 않은 그의 대답에 서운한 표정을 짖고있는 카타리나였다. "하긴... 네가 사모하는 사람을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친구사이에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의 속도 모르고 답답한 말을 하고 있는 카타리나를 보며 뮤스는 답답함을 느끼는 동시에 알지 못할 분노를 느꼈다. 예전 학교 입학 축하파티에서 느껴 본적 있었던 무아의 느낌이 되풀이 된 것이었다. 그리곤 마음의 한 구석에 숨어있던 욕망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며 저절로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란 말이야! 남의 속도 모르냐! 그래. 네 말대로 벌쿤 녀석이 부러워 죽겠어! 나는 몇 달이나 혼자 속을 태우고도 이 모양인데, 그 녀석은 불과 몇 주만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붙어서 히히덕 거리는 걸 생각하니까 배아파 죽겠다고!" 외침과 동시에 그의 눈에는 카타리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하얀색의 일색이던 배경 사이로 사라 졌으며, 유일하게 남은 존재인 카타리나는 떨리는 눈으로 뮤스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만이 그의 고막을 두들겼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두려웠다. 과연 카타리나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뮤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의 여신은 끝내 그를 외면하는지 전신으로 엄청난 진동을 느끼며 눈 밖으로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와 버렸다. -쿠구구궁! 구구구구궁! 귓전에서 들리던 심장소리도 굉음에 파 묻혀버렸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었다. -쨍그랑! 챙! "꺄아악! 지진이다!" "다들 식탁 밑으로 몸을 숨기세요!" -푸드득...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먼지 부스러기가 머리위로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뮤스는 급히 카타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식탁의 양 겁에 질린 얼굴로 식탁의 양모서리를 잡고서 몸을 고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했다. 그녀의 옆으로 몸을 움직인 뮤스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식탁의 밑으로 기어 들어갔고, 땅으로 떨어지며 튀기는 식기의 파편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킨 뮤스는 냉정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식탁 아래로 몸을 피한 상태였는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크게 당황한 표정들은 아니었다. 곧 진동이 잦아들자 조금 안도한 뮤스는 점원의 행동을 잘 살폈다. 처음 와본 곳인 이상 이곳에서 생활을 하는 점원의 판단이 가장 정확했기 때문인데, 그 역시 이제 지진이 멎었다고 판단했는지 식탁 밑에서 빠져 나오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을 따라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손님들을 향해 말했다. "여진이 있을 지도 모르니 안전을 위해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오늘은 영업을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자신의 짐을 챙긴 사람들은 연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카타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뮤스는 그녀의 어깨위로 올라간 손을 황급히 치우며 얼굴을 붉혔다. "우.. 우리도 이만 나가자. 여진 때문에 건물이 무너질 지도 모르니까." 그의 말에 뮤스만큼이나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쥔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카타리나를 이끌고 식탁의 밑에서 빠져나온 뮤스는 아무도 없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음식물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식기들이 깨져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기울어진 액자를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뮤스는 앞장서 계단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뒤를 따르던 카타리나는 뮤스의 소매를 살며시 잡고 있었다. 뮤스와 카타리나가 밖으로 나와 보니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차에 오르며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보통 이상의 부유층인 듯 마부를 따로 두고 있었고, 몇 명은 손수 전뇌거를 몰았다. 그리고 음식점 건물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점원들과 요리사들, 그리고 호리호리한 키에 마른 몸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 중년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점원들에게 말했다. "요즘들어 한 달이 멀다하고 지진이 일어나니 큰일이군... 자네들도 여진이 있을 지 모르니 어서 집으로 돌아들 가게나. 내일은 내부를 청소해야하니 좀 일찍 나와 주게." 이와 같은 상황은 이 음식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고, 주변의 모든 음식점 앞에는 분주히 돌아가는 손님들과 뒤처리를 하려는 점원들이 섞여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5 중년인에게 인사를 건넨 뮤스와 카타리나는 세워놓은 전뇌거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강한 지진은 아니었기에 도로까지 파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아직까지도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손수 전뇌거의 문을 열어주는 뮤스를 향해 물었다.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는 거니?" "미안하지만 실크로스교 좀 둘러보려고. 황실에서 포기한 실크로스교의 공사를 내가 해야하거든? 그래서 가비르 재상님도 여기를 추천 하셨고 말이야." "으..응 그렇구나." 아직도 지진의 두려움이 남아있는 카타리나로서는 지금이라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뮤스가 해야할 일을 방해하기는 더욱 싫었기에 겉으로 내색치는 않았다. 뮤스가 운전석에 앉으며 전뇌거를 몰아 나가자 둘 사이에서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지진문제가 일단락 된 지금, 다시 뮤스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애정고백에 대한 카타리나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뮤스의 눈에 비친 그녀는 마치 그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창 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뮤스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속만 태우고 있었다. '후... 왜 카타리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지진 때문에 너무 놀라서 잊고 있는 건가.' 그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흘러가기에는 기회가 너무 아쉬웠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용기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애를 태우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실크로스교에 거의 다 왔는지 구조물의 일부분이 강둑 넘어로 보이기 시작했다. 강둑으로부터 시작된 구조물은 강의 한 귀퉁이를 가로질렀다. 비록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그나마 버티고 있는 교대(다리가 시작되는 부분) 부분마저도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지만, 그것만 보더라도 엄청난 규모의 교량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속으로 애만 태울 뿐 끝내 카타리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뮤스는 전뇌거를 먼발치에 세워둔 채 강의 건너편까지 응시해보며 입을 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규모의 교량이군. 지진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에서 이 정도 규모의 교량을 세운다는 것이 쉽지는 안겠는걸? 게다가 이렇게 석조로 만든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야." 그의 말을 듣던 카타리나 역시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실크로스교의 교대를 보며 말했다. "저게 그 실크로스교라는 거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걸?" "후우... 새롭게 공사를 시작하려면 어차피 제거해야 하니까 이번 기회에 남은 부분까지 무너지는 것도 괜찮겠지." 뮤스의 말에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의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끊어지자 또 한번의 정적이 둘의 사이에 찾아왔다. -두근, 두근...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하며 서로의 숨소리는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 가깝게 느껴졌고, 전뇌거 내부의 공기가 희박해진 듯 뮤스는 숨을 편히 쉴 수 없었다. 또, 자꾸만 옆으로 돌아가는 눈동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뮤스는 연신 애를 쓰고 있었다. 더 이상은 지진이나 실크로스교 따위의 생각은 뮤스의 머리에 없었고, 지금은 오로지 카타리나의 생각만 가득 찼다. "무슨 생각하니?" 한 마디의 말이 목말라 있던 뮤스에게 시원한 냉수와도 같이 들려왔다. 바짝 말라있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매만진 뮤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이런 저런..." "음..." 뮤스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카타리나 역시 뮤스만큼이나 긴장한 듯 손가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기... 아까 네가 했던 이야기 말이야..."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귀를 타고 뇌로 전달되는 이 순간 뮤스는 속으로 쾌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 나를..." '그래! 드디어 말을 꺼내는구나!' 뮤스의 기대에 찬 눈은 카타리나의 붉은 입술에 고정되었고, 뇌세포들이 움직이며 '그래 난 널 좋아해!' 라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열리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벌쿤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지난 몇 개월간 가슴앓이 한 것에 대한 모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가 싶었다. 하지만 하늘의 누군가가 그의 절망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봐주려 하지 않았는데, 음식점에서의 지진 못지 않은 진동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쿠구구구궁!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진동과 굉음사이로 카타리나의 맑은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뮤스의 안색은 죽은 시체 마냥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아악! 안돼!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뇌거의 창을 통해 본 바깥 세상은 뿌연 먼지로 뒤덮이며 온통 황토색 일색이었다. 이것은 흐르는 강물 위로 자리하고 있던 아치모양의 거대한 교대가 지진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채로 무너져 내리며 일으키는 소리였는데, 교대를 지탱하고 있던 교각이 힘없이 내려앉으며 집채만한 바위 조각들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것들을 받아낸 강물은 거친 물결을 일으키며 강변으로 밀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은 뮤스는 카타리나의 상태를 살폈다. "카..카타리나? 괜찮아?" 그렇지 않아도 지진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그녀는 굉음에 크게 놀랐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리곤 새파랗게 질리며 떨리고 있는 입술을 움직였다. "뮤..뮤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제발..." "가야지... 가야지..." 울먹임이 섞인 그녀의 말에 허탈한 듯 넋이 나간 얼굴을 한 뮤스는 무엇에게 홀린 것처럼 전뇌거를 몰기 시작했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전뇌거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태양이 기울어지며 하루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있는 붉은 빛을 땅위로 뿌렸고, 여러 갈래의 창살에 가로막혀 닫지 못한 햇살의 빈자리를 그림자가 채우며 어두운 색의 문양을 석벽 위로 그려 넣고 있었다. 오늘따라 뮤스가 느끼는 복도의 상아색 석벽은 유난히 차가웠다. 힘 빠진 어깨를 반쯤 벽에 기댄 뮤스는 무거운 발을 끌었고, 눈 밑은 검게 변한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어두워져있었다. "결국은... 오늘도..." 길게 이어나가지 못할 말을 하며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그는 카타리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그녀와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꽝! 힘차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유리창까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투시기 확보 경쟁에서 떨어진 켈트가 동생들이 하는 양을 보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방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제길 아직도 싸우고 있다니. 나이 값도 못하는 것들... 쯔쯧..." 혼잣말을 하며 몸을 돌리던 켈트는 벽에 기댄 채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뮤스를 볼 수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간 켈트는 몸을 낮추며 숙여져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엥? 히히덕 거리면서 애인이랑 나가더니 안색이 왜 그러냐?" "누가 애인이라는 거예요!" 시커멓게 죽어있던 얼굴에 붉은 색이 돌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켈트의 몸은 엉거주춤 뒤로 젖혀졌고, 뮤스는 계속해서 켈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저도 정말 애인이 되고 싶다고요! 누가 애인이 되기 싫어서 안되고 있는 줄 알아요? 제길 뭐가 이렇게 힘이 드는 거야!" 머리카락을 쥐며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던 켈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의 머리를 우악스런 두 손으로 잡았다. "정신차려라 이 녀석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제야 조금 이성을 되찾은 뮤스는 눈앞으로 흘러내려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소리질러서 죄송해요 아저씨. 그냥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껄껄걸! 보아하니 연애문제 같은데 그런 것이라면 이 켈트님께 상의를 해야지!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나 하자꾸나." 뮤스의 손을 잡은 켈트는 드워프들의 숙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뮤스의 방으로 이끌었고,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눈빛으로 켈트를 바라보고 있는 뮤스였다. 방에 들어와 뮤스를 소파에 앉힌 켈트는 제일먼저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쌓아놓은 장작에 불이 옮겨 붙으며 불꽃이 솟아오르자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털어 낸 그는 벽난로 위에 있던 쟁반을 내렸는데,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해 놓은 다기들과 나무통에 들어있는 찻잎이 잘 올려져 있었다. 무엇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본 켈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뮤스에게 다가와 말했다. "혹시 휴대용 가열로 가지고 있냐? 물을 끓일 만한 것이 없군."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며 물었다. "설마 휴대용 가열로로 물을 끓이려는 것은 아니겠죠?" "허헛... 왜 아니겠냐? 어서 주기나 해라." 더 이상 열을 낼 힘도 없었던 뮤스는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가방에서 휴대용 가열로를 꺼냈고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든 켈트는 자기주전자를 가열시키기 시작했다. 가열로의 높은 온도 덕분에 금새 물을 끓일 수 있었던 켈트는 두 개의 찻잔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자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면 훨씬 좋을 게다. 마침 보라오 찻잎인데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작용도 하니까 더욱 좋지. 어서 마셔보거라." 뮤스는 그다지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차가워진 손을 데우는 것도 좋을 듯 싶었기에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짚어 들었다. 잔을 두 손으로 쥐며 향기를 맡은 그는 가볍게 한 모금 마셨고, 몸 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더 들이켰다. 뮤스가 차를 마시는 것을 보며 싱긋이 웃은 켈트도 자신의 차를 들며 입을 열었다. "흠 역시 겨울에 따끈한 차는 좋군. 왜? 그 아가씨랑 잘 안되냐?" 켈트의 물음에 뮤스는 대답을 꺼리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타인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부끄럽기도 했고, 상황자체도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답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뮤스의 기분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켈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 네 나이 때면 다들 한번씩 혼란을 겪을 때가 있지. 뭐 그것이 이성간의 문제 건, 아니면 다른 문제 건 말이야." 켈트가 평소와 다르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자 의외라고 생각한 뮤스는 은연중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후훗. 네게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나도 젊었을 때는 좋아하는 드워프가 있었단다. 내가 족장을 맡기 전 족장의 손녀였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친오빠처럼 따랐단다. 헌데..." 그때부터 한참동안이나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은 켈트의 말을 요약하자면, 동생으로 지내던 한 예쁜(?)드워프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오빠로서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그녀에게 차마 고백을 할 수 없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영원히 껄끄러운 사이로 지내게 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끝내 켈트는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고, 몇 년 후 그녀는 다른 부족의 드워프와 결혼을 해서 마을을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지..." 세상에 떠돌고있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였고, 과연 사실일지도 의심스러운 이 이야기에 감정이 격해져 있는 뮤스는 가슴 찡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뮤스의 얼굴을 살피던 켈트는 이유 모를 회심의 미소를 지었는데, 그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두려운지 금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흠흠...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라는 말이다." 뮤스는 그의 충고에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평소에 진지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던 켈트가 자기를 위해 이런 이야기까지 해주니 너무나 고마웠던 것이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그런 아픔이 있으셨다니... 저도 최선을 다해 볼께요." "허헛! 나야 뭐 이미 지난 일이니 괜찮단다. 아무튼 힘내고 나는 나가보도록 하마. 아직 아우들이 투시기를 놓고 싸우고 있을 테니 내가 몰래 훔쳐내야겠거든?" 장난기 서린 미소를 뮤스에게 지어 보인 켈트는 조금 식은 차를 마저 마시며 몸을 일으켰고, 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방문을 향해 걸었다. "네. 그럼 나중에 뵐게요." 뮤스의 인사에 손을 저으며 응한 켈트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방안에 혼자 남은 뮤스의 머리에는 켈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라고? 후회하기 전에?" 그 후로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뮤스는 창 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면서 저녁 식사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먼지가 잔뜩 묻은 옷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뮤스는 소매부위를 털었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군. 이런 모습으로 카타리나를 다시 만날 순 없지!" 전에 비해 기분이 많이 전환된 뮤스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고, 황제의 식사초대에 대한 준비를 위해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으며 여분의 옷가지들을 정리해 놓은 탈의실로 들어갔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6 귀족회의 낮이 짧은 겨울이었기에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궁에는 어둠이 내려 앉아있었다. 황궁의 복도의 벽을 따라 걸려있는 마나등들은 날이 어두워졌음을 감지하며 자동으로 불을 밝혔고,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한 하녀들은 자신이 담당한 귀빈을 위해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뮤스 일행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인 페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손수레를 밀며 복도를 걷는 중이었는데, 손수레에 올려져있는 음식 양은 다른 동료들이 나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비록 직접 들고 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준비하는 과정이 몇 배나 귀찮았기에 식사시간마다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료들 중 한 명이 그녀의 손수레 위를 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페나. 네가 맡은 손님들 대단하다면서? 처음 네가 식사 준비하는 걸 봤을 때는 스무 명 정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겨우 여섯 명이라면서?" 그녀의 말에 큰 한숨을 내쉰 페나는 음식을 덮고있는 흰색 천을 들쳐 보여주며 대답했다. "헤유... 그것도 처음에야 그랬지! 요즘에는 더 늘어서 25인분 정도를 준비한다니까? 뮤스님은 별로 나무랄데 없고, 크라이츠님은 좀 까다로워서 신경을 써야하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한데, 드워프 세분은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식사를 할 때 보면 무슨 악에 찬 모습이라니까? 이러다간 황실 재정이 바닥나는거 아닌가 몰라." "푸훗! 웬일이니? 깐깐하기로 소문난 페나가 나무랄데 없을 정도의 뮤스님이라니 놀라운 일인걸? 뮤스님 어떠니? 나이는 조금 어린 것 같지만 이국적인 느낌이 나서 마음에 들던데. 우리들에게까지 꼬박꼬박 높임말 쓰는 것도 귀엽지 않아?" 동료의 말에 손을 내저은 페나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돼!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린걸. 또, 설사 관심이 있으면 뭐하니?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야. 괜히 문제 일으켜서 나까지 일자리를 잃으면 우리 가족은 정말 큰일 난다고!" "호호호! 뮤스님은 제국에서 손꼽는 부자인데 설마 네 가족 하나 못 먹여 살릴까봐 그러는 거야?" 웃으며 농담조로 던진 말에 페나가 인상을 찡그리자 동료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인상 좀 풀어. 아무튼 이제 우리는 다 왔으니 일 끝나고 숙소에서 보자. 수고해!" 주변을 둘러보며 이제 동료들과 헤어져야 하는 갈래 복도에 도착했음을 알게 되자 고개를 끄덕인 페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고, 생각할 때마다 한숨만 나오는 드워프들의 술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기 키의 두 배는 됨직한 흰색의 방문 앞에 서게된 페나는 손수레를 세워놓은 채 노크를 했다. -똑똑! 평소 같으면 노크와 동시에 방문이 열리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오늘은 별다른 기척이 없자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네. 아무도 없나?" -똑똑! 다시 한번 노크를 해봤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힘들게 준비해온 손수레를 되밀어 돌아가려 했다. -꽈과과광! "아이고 허리야! 아우들에게 맞아 죽는구나!"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요란한 격타 음에 놀란 페나는 발걸음을 멈추며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거칠게 열린 방문 앞에서 나뒹굴고 있는 켈트를 볼 수 있었는데, 방안에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형제들이 분노한 기색으로 서있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앞쪽에 서있던 레딘은 팔짱을 끼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형님 너무하우! 아우들 보다 수십 년은 더 살았으면서 아우들이 싸우는 것을 말리지는 못할 망정 그틈을 타서 투시기를 훔치려 하시우?" 블뤼안 역시 화가 났는지 안색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반성이 좀 필요한 것 같수! 내일까지 이 방으로 들어올 생각은 버리구려!" 마지막 남은 브라이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행동으로 심정을 대변하는 듯 제멋대로 젖혀져 있는 방문을 수습하며 닫았다. -꽝! 이러한 아우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켈트는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는지 오히려 자신의 어정쩡한 행동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길!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녀석들 그 동안 많은 성장이 있었군." 아쉬움의 한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킨 켈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털었다. 그리곤 굳게 닫혀 버린 방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예상대로 잠겨 있었다. "흐으...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잔다?" 켈트가 태평스럽게 잠자리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멍하니 드워프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페나가 입을 열었다. "켈트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페나의 목소리에 등을 돌린 켈트는 음식이 한가득 담겨있는 손수레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허헛!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페나양이잖아? 벌써 저녁식사 시간인가?" 그의 목소리에서 상당히 친근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식사시간마다 착실하게 챙겨준 페나에게 남다른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었고, 방안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기에 오늘따라 더욱 친근한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서 그냥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마침 잘 됐군.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이렇게 말한 켈트는 힘껏 방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꽝꽝꽝! 꽝꽝꽝! "아우들! 저녁시간이네! 문을 열지 않으면 오늘 저녁은 없는줄 알라고! 배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다 먹어 치우고 말테니!" 페나를 향해 익살스럽게 웃으며 윙크를 하자 그녀 역시 다른 드워프들의 반응이 궁금했기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브라이덴이 닫았던 속도 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문이 열렸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켈트에게 화를 내던 상황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계획이 딱 들어맞자 의기양양해진 켈트는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옆에 있던 손수레를 직접 밀며 당당하게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드워프들에게 저녁 식사를 전해준 페나는 가벼워진 손수레를 끌고서 바로 옆에 붙은 뮤스의 방을 향했다. 큰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여유가 그녀의 얼굴위로 그려지고 있었다. 뮤스의 방 앞에 서서 곱슬한 머리를 정리한 페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방문을 두들겼다. "뮤스님 식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에 방안으로부터 기척과 함께 뮤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문은 열려있으니 들어오세요!" 문고리를 잡아당긴 페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손수레를 끌었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거울을 보며 셔츠의 소매 버튼을 잠그고있는 뮤스를 볼 수 있었는데, 보라색의 바탕에 금빛 문양이 어울려 있는 정장을 아래위로 입고 있었으며, 어느새 어깨에 닿을 정도로 자라버린 머리칼은 금방 씻고 나온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윗도리의 아랫단을 한번 잡아 당겨 봄으로써 치장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 페나양이군요. 무슨 일이죠?"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제자리에 서서 자신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페나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이러한 반응에 대한 이유가 평소와는 다르게 입은 의상에 있음을 깨달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좀 안 어울리나요? 이런 옷은 워낙 안 입을 버릇을 해서..." 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페나는 자신의 실태를 깨달으며 고개를 숙여 뮤스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 아뇨 너무 잘 어울리시는 걸요?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다니시는 것이 훨씬 좋겠는 걸요?" "하핫 그런가요?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잘 됐네요." 그녀의 칭찬에 밝게 웃은 뮤스는 음식이 올려져 있는 손수레를 보며 말했다. "아참 그런데 어떻게 하죠?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 식사를 못할 것 같은데... 괜히 번거롭게 만들었군요." 잠시 해야할 일을 깜빡하고 있던 페나는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아뇨 번거럽기는요. 그런데 오늘 좋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평소에 입지 않으시는 예복까지 입으시고..." "하하하! 오늘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할까요?" "혹시 사모하시는 분이세요? 어머! 죄송해요 사적인 질문을 드려서..." 당황하고 있는 페나를 보며 가볍게 웃은 뮤스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하핫. 그렇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페나양 말씀대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거예요. 기회가 되면 고백이라도 할 생각이고요. 이러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죠?" 뮤스가 설레임이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를 짓자 그것이 페나에게까지 옮겨가기라도 한 듯 페나 역시 소녀시절의 설레임을 떠올릴 수 있었고 순간, 순간 뮤스가 잘 모셔야 할 귀빈이라는 느낌보다 첫사랑을 앞둔 채 긴장하고있는 동생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뮤스의 주변을 돌며 아래위를 살펴보던 페나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말했다. "음... 괜찮긴 한데 뭔가 빠진 듯 한 걸요? 잠깐 이쪽으로 와보세요." 갑자기 페나가 뮤스의 소매를 잡아끌어 거울앞에 앉히자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고, 페나는 윤기 나는 뮤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보며 싱긋이 웃었다. "제가 조금만 손봐 드릴게요! 그럼 훨씬 나아 지실테니..."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뮤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페나는 마치 자신이 고백을 하러 가는 사람인양 들뜬 모습이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7 겨울이라 해가 짧은 탓도 있었지만, 밤이 되면 외부로부터의 요인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커튼을 쳤기에 실내는 깊은 밤처럼 어두웠고, 수많은 마나등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뻗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복도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황제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늦지 않을 시간에 맞춰 속속들이 대형 식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는데, 남성들은 보석으로 가공된 버튼 등의 비교적 단순한 장신구로 멋을 냈으며, 여성들 역시 무도회 때와는 다르게 편안한 옷과 몇 가지의 간단한 보석들이 다였다. 이들 중에는 하버만 후작과 그의 차녀인 카타리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간단한 흰색의 드레스에 모피의 외투를 걸쳤고, 머리는 단정하게 땋아 말아 올리고 있어 그녀의 미모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알고 지내던 귀족을 우연찮게 만난 하버만 후작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 피셔 백작 이게 얼마 만인가! 전 황제폐하의 생신 축하 만찬 때 만나고 처음이지 아마?" 그와 인사를 나누는 남성은 4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귀족이었는데, 곱슬 거리는 머리에 오크나무로 멋스럽게 깎은 지팡이를 지닌 자였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살집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고, 키가 큰 축에 속하는 하버만 후작과 함께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비슷한 몸집으로 보이고 있었다. "아!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버만 후작님. 그리고 영애분의 약혼식을 들었지만 일이 생겨 찾아 뵙지는 못했습니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허헛! 고맙군 그래. 아참 예전에 본 적이 있지? 내 둘째 딸인 카타리나네. 집사람과 첫째는 결혼식준비 때문에 할 일이 많아서 우리 둘만 왔지." 하버만 후작의 말에 카타리나를 본 피셔 백작은 옛 기억을 떠올리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런! 예전에 그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가 벌써 이렇게 컷 다니... 만나서 반갑구나!" 카타리나 역시 피셔 백작을 기억하고 있는 듯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몸을 숙였다. "피셔 백작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아직 결혼을 안 하셔서 그런지 모습이 예전 그대로이신 걸요?" "하핫! 고맙군.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지?" "물론이죠." "헌데, 아가씨가 참석할 만한 만찬은 아닌데 어떻게?" "호홋! 폐하께서 직접 초대를 해 주셨어요." "그렇지만 정치이야기가 오가는 지루한 만찬일테니 각오는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후훗." 피셔 백작은 도이첸 제국 북동부에 영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백작의 신분인 만큼 그리 큰 영지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산악지대의 영지이다 보니 몇 개의 광산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중 대규모의 은 광산 덕분에 대륙에서 손꼽히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귀족의 권위가 갈수록 유명무실해져 가는 시점에서 재산의 양은 실질적인 권력을 대변하는 척도였기에 아무도 이 인물을 쉽게 여기지 못하고 있었다. 피셔 백작은 식당으로 손짓을 하며 하버만 후작과 카타리나를 안내했다. "그럼 함께 드시죠. 그런데 친우이신 클래프 후작님께서는 대관식에 참가하시지 않으셨나보군요?" 그의 물음에 하버만 후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헛. 자네도 알다시피 그 친구는 정사에 전혀 관심이 없지 않나? 그저 영지를 관리하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하긴... 클래프 후작님은 너무나 욕심이 없는 것이 탈이죠. 그러고 보니 호바인 가의 쿤테스백작님도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네. 쿤테스 백작은 나와 함께 왔는데... 아직 못 만났나 보군?" "네. 애석하게도..." "뭐 쿤테스 백작도 어차피 이곳으로 올 테니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지." 식당으로 들어서자 향기로운 음식들의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벽면을 따라 서른명 정도는 앉을 만한 거대한 식탁이 마련되어 졌고, 자리마다 깨끗한 식기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그중 괜찮아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도 피셔 백작과 하버만 후작은 대화를 계속해서 나누었다. 반면 카타리나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누구를 기다리는 듯 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뮤스는 왜 아직 안 오지? 아까 일로 화가 난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뮤스는 커녕 뮤스와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틀림없는 뮤스의 목소리라는 것을 안 카타리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고개를 들며 뮤스를 올려다보게 되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어깨까지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깔끔히 뒤로 묶은 상태였다. 그 덕에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고, 조심스러워 보이던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훨씬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또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랜 동안 황궁에서 귀족들의 모습을 봐온 페나의 눈이었기에 조금 어수룩하던 뮤스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바로잡아 줌으로써 다른 어떤 귀족과 견주어도 딸릴 것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꽂히자 미소를 만들어 내고있던 입술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너.. 뮤스 맞니?" 뮤스 역시 카타리나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페나가 꾸며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놀란 터인데, 하물며 카타리나야 오죽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댕기머리를 땋고 다니던 기억이 있었기에 머리를 묶는 편이 한결 편하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든 상태였다. "괜찮아 보여? 머리카락이 흘러 내리는게 불편해서 묶었는데..." "응! 훨씬 밝아 보이고 좋은걸?" "하핫! 고마워." "오! 뮤스군이었군! 그 동안 잘 지냈나?" 카타리나에게만 정신이 쏠려있던 도중 굵직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뮤스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하버만 후작을 발견했고, 뒤 늦게서야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하버만 후작님 안녕하셨습니까? 먼저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허헛! 아닐세. 그나저나 대관식에 얽힌 이야기는 잘 들었네. 정말 장한 일을 했더군!"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리고 이쪽은 피셔 백작이라네. 굉장한 자산가이니 알아두면 공학원을 운영하는데도 득이 될 거야." 하버만 후작의 소개를 받은 피셔 백작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뮤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 참. 어떻게 호칭을 해야 할지 난감하군요. 아무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그의 손을 마주잡은 뮤스는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나이가 어리니 그냥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주니 정말 고맙군. 자리에 앉게나." 피셔 백작의 말에 따라 카타리나의 옆자리에 앉은 뮤스는 식탁 위에 얹어져 있던 냅킨을 무릎위로 깔며 식사할 준비를 했고, 피셔 백작은 뮤스와의 만남이 반가운 듯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큼 카타리나와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기에 그와의 대화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잠시 후 입구의 반대쪽으로부터 사람들의 술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곳에는 가비르 재상의 모습이 얼핏 보이고 있었는데, 진 갈색의 예복을 입고선 그는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 나오십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그 소리에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귀족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른 문을 통해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는 황제에게 경의를 표했고,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정 중앙에 마련된 자리에서 멈춰선 황제는 이곳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만찬에 응해준 경들에게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중대 발표와 함께 앞으로 제국을 위해 수고해 주실 경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니 사양치 마시고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말버릇이란 쉽게 버리기 힘든 것이었기에 아직 경칭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앞으로 고쳐야할 과제였다. 말을 마친 황제는 신호를 보내듯 손뼉을 쳤고, 동시에 준비라도 하고 있은 듯 요리들이 날라져 나오고 있었다. 소규모의 식사에는 지위가 높은 인물부터 식사를 하기 시작한 후부터 초대받은 인물들이 식사를 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먼저 나온 순서대로 식사를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자신 앞에 놓여진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의 식사방법에 익숙해진 뮤스는 가장자리에 놓인 스푼을 자연스럽게 들어 식욕을 돋구기 위해 나오는 스프를 떠마시고 있었다. 물론 이때도 조심스러운 눈치로 카타리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뭘 하든 예쁘게만 보이는 카타리나의 모습에 스프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스프를 몇 스푼 뜨던 카타리나는 뮤스를 향해 물었다. "이 스프 정말 괜찮지 않니? 시구스라는 향료를 첨가해서 구수하면서 매콤한 맛이 나는 거야."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뮤스는 급히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으..응? 스프가 다 식었다고?" "풋! 그게 무슨 말이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는 거야?" "미..미안해!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스푼을 내려놓은 카타리나는 스프접시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미안할 건 뭐 있니? 다만 식사를 할 때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지가 않아." 뮤스는 이런 말을 속으로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겉으로는 미안한 척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고, 카타리나는 마침 궁금한 것이 생겼는지 분위기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는 공작 작위를 받을 생각이 없는 거니?" 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허공을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세... 작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어. 하지만 크라이츠 누님이나 가비르 재상님의 말씀대로 엉뚱한 일에 빠지는 것이 싫기도 하니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거야. 그런데 혹시..."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이는 뮤스를 보며 되물었다. "혹시 뭐?" "내가 작위를 받아서 귀족이 됐으면 어떨 것 같아?"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들기며 생각하는 시늉을 하던 카타리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세... 어린 나이에 공작이라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대단한 것 같지만, 왠지 네가 공작이 되는 건 안 어울릴 것 같아. 그냥 지금처럼 평범한게 더 편하고 좋은걸? 하긴 지금도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예상하던 대답에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고, 한층 용기를 얻고 있었다. "하핫. 그럼 공학원도 그만 둘까?" "그것까지는 그만두지 않아도 돼!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멋있어 보이니까.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명예직과는 다른 거야. 그러니 학교에서 내 신분을 속이는 거라고." "공학원은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군. 음?"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기에 카타리나의 맞장구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의 얼굴을 살폈는데, 볼을 약간 붉힌 채로 물어오는 것이었다. "저기... 내가 그만 두라면 그만 둘 수 있니?" 잠시 그녀가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 보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후훗!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그만 두라고 말하진 않을 거야." "풋! 그렇겠지." 뮤스와 카타리나가 서로의 마음을 떠보고 있을 때쯤 하인들이 스프 그릇을 걷어가며 메인 음식들이 나오고 있었다. 여러 마리의 자르지 않은 거대한 칠면조 고기가 그것이었는데, 몇 명의 하인들이 그것을 들고 식당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잘라주는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던 뮤스는 칠면조의 다리부위와 달콤한 소스를 조금을 받아 앞쪽에 내려놓았고, 아직 식지 않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나이프로 자르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Total 16 articles, 2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8 한 사람, 두 사람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접시 위의 음식들이 거의 없어져 가며 식사시간이 끝나가자 식당 안은 대화 소리로 매워져 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젊은 황제는 따분한 모습이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이어 그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식사가 종료 됐음을 알렸는데,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 속도를 황제를 중심으로 맞추었기에 먹는 도중에 그만 두거나 하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서 접시 위에 내려놓자 시간에 맞춰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은 할당받은 식탁 위의 접시들을 서둘러 치웠다. 그들의 손놀림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마찰음이 있었지만, 엄격히 받아온 교육 덕에 귀에 거슬릴 정도의 접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후식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손수레 위로 노란 치즈 조각과 포도주 병이 올려져 있었다. 적은 양의 치즈를 먹으면 포만감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과식을 방지하기에 후식에 자주 등장하는 메뉴였고, 기름기가 남아있는 입을 씻어 내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하인들이 각자의 잔과 접시에 포도주와 치즈를 옮겨 담아주자 사람들은 작은 스푼으로 치즈의 맛을 보며 포도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제 부담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기 시작하자 황제의 옆에서 포도주를 맛보고 있던 가비르 재상이 황제와 귓속말로 의사를 주고받았고, 몸을 일으키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흠흠! 이 자리에 모이신 귀족 여러분 만족하실만한 식사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식사를 마쳤으니 본 행사에 들어가야겠군요.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들께서 모이신 이유는 물론 함께 식사를 하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새로운 황제폐하를 보좌하여 제국을 이끌어 나갈 귀족들의 작위 수여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알고 계셨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곳에 초대받으신 분들은 작위의 고하를 떠나 한 표씩의 의결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가비르 재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보았다. "어머... 보통 저녁만찬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중요한 자리였니?" 하지만 뮤스역시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듯 했다. "나도 몰랐는걸? 그저 내 이야기만 잠깐 꺼낼 줄 알고 있었거든. 아버님께 아무런 말도 못들은 거야?" "응... 방에서 나오는 길에 만나서 동행했거든." "후훗. 딱딱한 자리를 싫어하는 카타리나양께서 오늘 제대로 걸렸는걸? 도이첸 제국 내에서 이 정도로 딱딱한 자리는 없을 테니..." "할 수 없지 뭐. 조용히 하고 이야기나 들어보자." 카타리나의 말을 마지막으로 가비르 재상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그들 중 전 황제폐하를 보좌하여 제국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귀족 32명이 명단에 올랐으며 작위 수여를 위해 여러분들의 동의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가 말을 하는 중에 몇 명의 하인들은 두툼한 서류를 귀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금박을 이용하여 문양을 새겨 넣은 표지를 가진 이 서류 뭉치는 작위를 수여하는 귀족들에 대한 세부 사항을 기록한 것이었는데, 가비르 재상과 그의 보좌관들이 논의 하에 적합한 인물들을 골라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서류에 오른 인물들은 귀족들의 협의를 거친 후 황제에게서 인증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이권이 개입된 만큼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부정들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모든 귀족들에 대해서 중립적인 성향을 가진 가비르가 재상의 직위에 오름으로써 대부분의 부정은 사라진 상태였다. 손에 들린 서류의 첫 장을 넘긴 가비르 재상은 첫 번째 항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류의 첫째 장을 봐주시죠. 가장 먼저 백작의 작위를 수여할 예정인 4인의 남작에 대한 사항입니다. 이들이 황실에 대해 힘써온 일들을 기초로 하여 세부사항을 정리해 두었으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하인들에게 건네 받은 서류를 살펴보던 귀족들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귀족들과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가비르 재상은 서류의 앞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츄러드 남작은 뛰어난 용병술을 앞세워 빌스하펜에서 출몰한 일단의 마물들을 잡아냄으로써 서부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확보했으며, 그 후로..." 서류를 뒤쪽까지 살펴보던 귀족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보며 밝은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소 좋지 않은 관계인 인물이 올라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젖는 이도 있었다. 작위를 수여할 첫 번째 인물에 대해 읽은 가비르 재상은 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츄러드 남작에 대한 백작 작위수여를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시길 바랍니다. " 그의 말과 함께 장내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귀족들은 천천히 손을 올려 찬성의 의사를 표시하거나 반대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로 반대의사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찬성자의 수를 세어 보던 가비르 재상은 찬성이 과반수가 넘는 다는 것을 확인하며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또박, 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츄러드 남작의 백작 작위수여에 대한 찬성이 과반수를 넘겼습니다. 인증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말을 듣던 황제는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급 종이에 큼지막한 직인을 찍어 넣고 있었다. 애초 이러한 작위 수여는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권이 바뀌면서 소홀해 지기 쉬운 지방의 귀족들에게 충성을 맹세 받기 위한 의례적인 절차였을 뿐이었고, 누가 어떠한 작위를 받든지 간에 개인적인 영광일 뿐 정치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후작 이상의 작위를 수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정치적 영향력이 큰 공작이나 후작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 후로 일일이 세기도 귀찮을 만큼의 직인을 종이 위에 찍어 넣었다. 이렇게 해서 귀족들은 꿈에서라도 바라마지 않는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고, 누군가에 의해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귀족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성대한 만찬을 열게되는 상황은 보지 않더라도 쉽사리 짐작 할 수 있었다. 명단에 오른 32명의 귀족에 대한 작위 수여가 끝나자 귀족들은 이제 할 일을 다 마친 듯 포도주를 서로 권하며 술자리라도 벌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을 바라보며 젊은 황제는 입가로 얇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회의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남의 일은 듯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음을 상기해 볼 때 이상한 일이었다. 귀족들이 포도주를 마시며 가비르 재상의 폐회선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가비르 재상이 손에든 서류를 내려놓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뮤스군에 대한 사안만 남았습니다." 가비르 재상이 귀뜸을 하며 자리에 앉자 황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장내의 모든 시선은 중앙 석에 홀로 서있는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경들은 모두 저의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이 자리에서 중대 발표를 하는 동시에 경들에게 동의를 받고자 합니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 황제의 말에 귀족들은 조금씩 긴장하는 눈치였다. 아직까지 이들은 눈앞에 서있는 젊은 황제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젊은 만큼 피가 뜨겁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꼈기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회의장으로 변한 식당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 황제는 잠시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는 같은 나이 또래의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아는 것에 자만하지 않으며 주변의 인물에게 따뜻함을 베풀 줄 알고, 쓰지만 약이 되는 말을 서슴없이 함으로 상대의 우둔함을 깨우쳐 주는 청년이었죠. 그리고 저는 그의 덕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고,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용기를 얻게되었습니다." 국가의 황제가 한 인물에 대한 절대적인 칭찬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는 최고의 의결권을 가진 황제가 그 인물을 절대적으로 신임함으로써 일부 권력이 그에게 흘러가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귀족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여러분들은 그 청년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족들의 시선은 이제 황제로부터 뮤스에게 옮겨지게 되었다. 그를 이미 알고 있는 귀족들도 있었고, 알지 못하던 귀족들도 다른 이들을 따라 그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곤 귓가로 경악스러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도이첸 제국의 황제로서 뮤스군에게 가테스 공작의 자리를 이은 공작의 작위를 내렸으면 합니다!" 그의 말은 귀족들의 귀에 청천벽력과 같이 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공작의 작위도 아닌 가테스 공작의 자리를 이은 공작의 작위라면 그의 영지가 내려진다는 것이었는데, 가테스 공작이 공작의 작위를 박탈당한 지금 주인이 없는 쥬론 공국의 영지를 하사 받기를 내심 기대하던 귀족들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우는 일이었다. 곧 이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폐하! 황공하오나 불가합니다!" "저 젊은이에게 공작의 작위라니요!" "공을 세운 것은 인정하지만 공작의 작위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귀족들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처음 당해보는 귀족들의 반발에 황제는 당황하고 있었다. "조.. 조용히 해주십시오!" 황제의 외침이 들리자 내뱉던 말을 삼켜야만 했던 귀족들은 진정을 하며 자리를 바로 했고, 토론이 불가피 할 것으로 생각한 가비르 재상은 귀족들과 황제간의 중재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모두들 주목해 주십시오. 한 분씩 손을 들고 말씀해 주시죠. 뮤스군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하는데 이견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가비르 재상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노년인이 손을 들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연장자임을 할 수 있었는데, 비스듬히 굽은 등이 그의 연륜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매쉬라스 후작님 말씀해 주십시오." 가비르 재상이 마침 잘 되었다는 얼굴로 매쉬라스 후작을 지명하자 그는 몇 번의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폐하... 신 매쉬라스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폐하의 선견지명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오나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크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째, 공작 작위의 변동은 정치적 여파가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제국이 세워질 당시에는 전쟁에 공헌한 정도를 따져 공작의 작위를 수여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확고히 정립된 시점에서 절대 권력에 가까운 공작의 작위가 수여되는 것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 할 수 도 있습니다. 둘 째, 뮤스군의 정치경험입니다. 공작 작위는 후작 등의 여타 작위들과는 원천적으로 다릅니다. 최소한 후작은 정치 관여를 포기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지만, 공작의 위치에서는 그러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렇다보니 영지를 다스리는 일 이외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정치적 경험이 전무한 뮤스군에게는 부담이 가는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쥬론 공국의 영지 문제입니다. 쥬론 공국은 전대의 황제들께서 각 공작가에 귀속시키신 공국들 중에서뿐만 아니라 제국을 통 털어서라도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척박한 제국 북부의 식량난을 덜고 있으며, 황실의 경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쥬론 공국을 다스리고 있던 가테스 공작은 이러한 배경을 이용하여 야심을 가지게 되었고, 폐하를 해하려는 계획까지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만약 쥬론 공국이 또다시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제 2의 가테스 공작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이유 하에 뮤스군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부디 다시 한번 숙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말을 마친 매쉬라스 후작은 북해출신으로 두 개의 항구가 그의 영지에 속해 있었다. 그 항구는 제국 전체 수, 출입 물량의 3분의 1가량을 담당하는 경제적 요지로서 항구를 이용하는 상인들과 선주들로부터 관련된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자산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황궁에 머물며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정치에 관여를 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따르는 인물들도 많았고, 그 세력 역시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니었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매쉬라스의 조리 있는 발언을 통해 간접적인 만족을 느낀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를 했고, 한편으로는 황제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전혀 위축된 느낌이 없었는데, 이미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매쉬라스 후작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물론 후작께서 언급하신 세 가지의 이유가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시점으로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언급하셨던 공작 작위 수여에 대한 정치적 여파는 오히려 제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저는 뮤스군에게 공작의 지위를 줌으로써 그의 신선한 발상을 받아 들여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 언급하셨던 정치적 능력이라는 것 역시 전혀 걱정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도 아시다 시피 뮤스군은 공학원을 설립했으며, 불과 몇 개월만에 제국 최대의 유효자산을 보유하게 되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또, 제가 함께 지내면서 경험하게 된 뮤스군의 재지는 정녕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고로 뮤스군 정도의 재지라면 충분히 공작의 작위를 수여할 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에 대한 저의 답변은... 제가 뮤스군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황제의 답변이 끝나자 논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는데, 귀족들은 앞뒤를 다투며 또 다른 이견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황제는 뛰어난 언변으로 그들의 이견을 무마시켰다. 좀처럼 황제는 전혀 의사를 굽힐 뜻이 없어 보였고, 귀족들 역시 황제의 의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39 이렇게 양측의 신경이 얽히고 있을 때 엉겁결에 둘 사이에 끼게된 뮤스는 몸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 황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명할 줄도 몰랐고, 귀족들의 이견도 생각보다 거세 지며 분위기가 험악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주변에 앉아있던 하버만 후작이나 피셔 백작은 뮤스를 바라보며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난감한 웃음을 짓던 하버만 후작은 뮤스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헛... 뮤스군 자네가 공작의 물망에 오르다니 정말 놀랄 일일세. 아니, 놀람 정도로 표현 하기에는 모자라다고나 할까? 아무튼 자네 생각은 어떤가? 폐하가 귀족들에게 뜻을 관철시킨다고 하더라도 자네 생각이 가장 중요할 텐데..." 뮤스는 생각도 할 것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는 비단 공작의 작위뿐만 아니라 어떠한 작위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페하께서 저를 과대 평가 하시는 것 같군요."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가 생각해도 자네는 능력이 있다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네가 공작의 작위를 받는다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누님과 가비르 재상님께 충분히 귀뜸을 받았거든요." "흠... 이번 일을 알고 있었다면 생각해둔 바가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아참! 오해는 하지 말아주게. 나는 자네가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허헛!" "하핫! 오해라니요." 하버만 후작의 장난기 섞인 말을 들은 카타리나는 가볍게 웃고 있었는데, 사적인 이득을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귀족들과 자신의 아버지를 비교하자니 절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하던 중 하버만 후작의 등뒤로부터 피셔 백작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버만 후작님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좋지 않은 분위기가 될 것 같군요. 뮤스군 자네가 직접 나서서야 겠는걸?" 피셔 백작의 말을 듣고 상황을 살펴보던 후작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허헛... 한참 전부터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 뮤스군 부탁하네." "네... 그 방법 외에는 없는 듯 하니..." 이제 남은 것은 뮤스가 이 공작의 작위를 거부함으로써 논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작위를 내리려는 황제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개인 적인 감정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감이 작용했기에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고백(?) -또박! 또박! 또박! 신경질 적인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과 그를 급히 뒤따르는 인물이 있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뒤를 따라는 인물은 애가 타는 듯 했다. "페..폐하... 화가 많이 나셨습니까?" 쩔쩔 매고 있는 뮤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회의가 끝나는 대로 황제의 뒤를 따라 나선 것이었는데, 공작의 작위를 사양하고 나서자 크게 실망을 하는 황제의 얼굴을 봤기 때문에 카타리나에게 고백하는 것조차 미룬 상황이었다. 앞서가는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억양이기에 뮤스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욱..." -터벅... 뮤스가 말을 하던 차에 어느 방 앞에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황제는 뒤를 돌아 뮤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뮤스의 어깨를 짚으며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후우... 혹시 뮤스군 술 마실 줄 아십니까?" 황제가 부지간에 술 이야기를 꺼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가 돌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는데, 한번 크게 술에 대인 기억이 있는 뮤스로서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네!? 가..갑자기 술은 왜... 저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변명을 하려던 뮤스였지만 이미 발을 빼기는 늦었다는 듯 황제는 이미 그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설마 이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이미 약점 잡힌 것이 있는 뮤스에게 마지막 한마디는 쐬기와 같은 것이었다. "하..하... 제가 감히 어떻게..." 이렇게 해서 뮤스는 황제와 함께 접견실로 들어서게 되었다. 접견실의 분위기는 일반 가정의 응접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고급스러운 조각들이 진열 되어있는 진열장과 일부러 모으기라도 한 듯 빼곡이 들어차 있는 각양각색의 술병들, 그리고 벽으로 붙은 책장에 꽂혀있는 여러 종류의 책들... 또, 벽난로에는 미리 지시를 해 놓은 듯 불이 붙어 실내의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들어서자 마자 힘없이 외투를 벗어 안락의자 위에 던져 놓은 황제는 술병이 들어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말했다. "뭐 특별히 좋아하는 술이 있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 술을 마셔본 적이 한번 밖에..." "그럼 칼리아를 추천해 드리죠. 달콤한 맛이기 때문에 술에 익숙하지 않으시더라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 그런가요?" 황제가 진열장에서 꺼낸 술병은 긴 주둥이를 가진 초록색의 병이었다. 그것은 주둥이의 길이에 비해 넣을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아 보였는데, 양이 적은 병의 술일수록 독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모르는 뮤스로 서는 남몰래 안도할 뿐이었다. 한 손에는 병을, 그리고 반대쪽 손에 두 개의 잔을 나눠든 황제는 부드러운 모피가 유혹하는 안락의자를 외면한 채 푹신한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에 주저앉아 병을 땄다. -퐁! 공기가 흘러드는 경쾌한 소리를 즐기듯이 만족한 표정을 지은 그는 두 잔에 적당량의 술을 부으며 뮤스에게 손짓했다. "계속 그곳에 서 있을 생각입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기왕 이렇게 된 것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던 뮤스는 황제의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는데, 오랜만에 해보는 양반다리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선 한잔 마시죠." 젊은 황제는 술이 담긴 잔을 하나 뮤스에게 건네주었고,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쏟아 부어 버리듯 입안으로 흘렸다. 잠시 손에 들린 술잔을 내려다보던 뮤스는 냄새를 맡아보자 과연 황제의 말대로 달콤한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럭저럭 향기가 마음에 든 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러자 첫 맛은 달콤하면서 끝 맛은 불같았는데, 목을 타고 올라오는 뜨끈한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오고 있었다. "크으..." 빈 술잔에 다시금 술을 따르던 황제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셨죠?" 그가 묻는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던 뮤스는 남아있는 술을 입으로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저를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공작의 작위를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뮤스의 대답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크ㅋ... 또 그 이야기군요." 술잔에 부어둔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는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다음 이야기도 한번 맞춰 볼까요? 후훗! 공학도 이기 때문에 공학의 길을 걷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뮤스군 보다 유능하신 분들이 많다는 것도 그 이유 아닙니까?" 황제의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에 뮤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뮤스의 빈 잔을 보던 황제는 그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후우... 솔직히 말해서 뮤스군이 공작의 작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설사 안다해도 행동으로 보일 용기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생각이들 때마다 제가 만나본 최고의 인재인 뮤스군을 꼭 붙잡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원래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는 법이니까요. 헌데 이렇듯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해 버렸군요." 황제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뮤스는 그가 채워준 잔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곤 소매로 입가를 한번 쓸어내며 말했다. "큭... 술이 달콤하긴 한데 이상하리 만치 쓰게 느껴지는군요. 폐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정하는 것이야 개인에게 달려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더 없을 만큼이나 소중한 길이지요. 하지만 자신이 걸어야 할 길에서 타인의 의지로 인해 이탈을 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황위에 오르신 이유가 그 길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셨습니까? 후훗! 농담이긴 했지만 제가 권한 공학자의 길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기억이 나시는지..." "후훗. 어찌 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는 정말 크게 혼이 난 기분이었으니까요."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폐하는 이제 막 길을 떠나기 위해 길의 어귀에 들어선 여행자입니다. 여행자는 앞으로 다가올 모험에 대해 기대를 품는 동시에 멀기 만한 여정 대해 두려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일단 여행을 시작한 여행자들은 힘이 드는 와중에도 경치를 즐기고, 사람들을 만나며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여행자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니까요." "하하핫! 정말 멋진 말인 걸요?" 대화가 잠시 끊어지자 둘은 그들의 인생과도 같이 같은 자리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며 나는 소리가 조용해진 방을 간간이 깨워 주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후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겠죠?" 뮤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임으로 그의 말에 긍정했다. 그를 보며 가볍게 웃은 황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후우...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어쩔 수 없죠. 이상하게 기분이 섭섭하면서도 시원하군요." 말을 마친 황제가 세 번째 잔을 마시려 하자 뮤스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잔을 들어 그의 잔에 부딪혔다. 서로 눈을 마주친 뮤스와 황제는 닮은꼴의 미소를 동시에 지어 보이며 각자의 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대공학자> #140 새벽의 서리가 황궁의 지붕위로 내려앉아 달빛을 반사하고 있을 때 지붕 아래는 때아닌 몸살을 겪고 있었다. 복도에는 주인 모를 발자국 소리가 울리며 메아리 쳤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 듯한 웃음소리가 가득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덕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사람들은 잠이 덜 깬 상태로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우하하하! 여기도 아무도 없군요! 크큭... 복도에서 뛰어보는 것이 옛날부터 소원이었답니다!" 소리치를 지르는 이는 놀랍게도 젊은 황제였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괴상한 모습으로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이미 만취한 상태였는지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어스름한 그림자 속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조금씩 어깨를 들썩거리던 그는 갑자기 기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웨엑~! 우웨에에엑!" -철푸덕... 이물질들이 그의 바지부터 시작하여 복도의 벽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튀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발로 비벼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흐... 흙으로 묻어 버리면 감쪽같겠지? 딸꾹!" 아무래도 그는 이곳이 실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멀리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있는 황제를 향해 씰룩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크큭... 그러다가 넘어집니다 황(?)형!"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대답도 들려왔다. "뮤스 동생! 자네도 이쪽으로 와서 뛰어보게! 정말 자유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크크크!" 그의 말대로 라면 이 그림자 속의 인물이 뮤스라는 것이었는데,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마나등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형님이나 실컷 하시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실컷 뛰어 놀았으니!" 황제는 뮤스의 대답에는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복도를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나저나 겨우 몇 잔 마셨다고 이렇게 어지럽다니..." 그의 말대로 황제와 뮤스가 술에 취한 것은 금방이었다. 칼리아라는 술은 달콤한 맛에 비해 도수가 굉장히 높은 술이었는데, 술에 자신 있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한 병을 마셨다간 인사불성이 되어 버리고 말 정도였다. 헌데, 술이 약하디 약한 뮤스와 평소 포도주 정도에 익숙해져 있던 황제가 멋도 모르고 마셔댔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뮤스가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의 문이 열리며 맹렬하게 뮤스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피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결국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고, 이마에 강한 충격을 받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누군가가 시끄러운 소란에 잠을 깨며 홧김에 문을 열어 젖힌 것이었던 것이었다. 잠옷 바람에 외투를 하나 걸친 그는 둔탁한 느낌이 문을 통해 전해오는 것을 느꼈지만 잠결이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채로 복도를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어떤 녀석이 잠도 안자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아직 덜 떠진 그의 눈에 한 명의 인물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것이 잡혔다. 새벽에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인물의 얼굴이라도 확인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눈에 힘을 주며 초점을 맞췄는데, 눈가의 잔상이 사라지며 이렇게 미친 짓을 벌이는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자 그의 눈은 두 배로 커지게 되었다. "화..황제폐하! 이게 어떻게 되신 일입니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말에 복도를 오가며 뛰고있던 황제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 보았다. "으음... 뮤스?" 황제는 자신과 함께 하던 뮤스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낯이 익은 한 인물이 그가 서있을 자리에 서있었다. "어... 뮤스군은 어디 가고 당신이 있죠? 잠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뮤스라니요! 저 슈페니어 백작입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술을 드셨기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친 슈페니어 백작은 서둘러 비틀거리고 있는 황제에게 다가가 어깨를 부축했다. 하지만 황제는 계속해서 뮤스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슈페니어 백작은 힘을 들여 황제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고, 그에게 이끌려 가는 도중에도 혀가 꼬인 목소리로 외쳤다. "뮤스군! 어디있나! 뮤스!" 하지만 황제와 슈페니어 백작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뮤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활짝 열려있는 문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던 뮤스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한 상태였기에 고통은 없었지만 더욱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댄 그는 부딪힌 머리부근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는데,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이미 취기로 인해 풀린 상태였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타리나. 널 좋아해... 널 좋아해..." 술에서 취해서 일까? 평소에 그렇게 꺼내기 힘들던 말조차 쉽사리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땅을 보며 어렵사리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깨끗한 흰색의 시트가 깔려있는 침대 위 카타리나가 누워있었다. 편안하게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달빛을 받고있는 그녀는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던 중에 오후에 있었던 뮤스와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속상해... 겨우 원하던 말을 들었는데 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혼잣말을 몇 마디 한 카타리나는 몸과 마음이 불편한 듯 뒤척였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어도... 뮤스가 다시 말해 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래도 힘들겠지? 혹시 내가 싫어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을 할수록 나쁜 쪽으로 생각이 돌아가자 울고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쾅쾅쾅! 쾅쾅쾅! 고요하기만 한 밤중에 누군가가 갑자기 방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에 깜짝 놀란 카타리나는 이불을 몸 쪽으로 잡아당기며 몸을 일으키곤 방문 쪽을 바라보자 또 한번 문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꽝꽝꽝! 우연으로 두들겨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카타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누구세요?!" 비록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문밖에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는지 대답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야... 카타리나... 문 좀 열어 줘."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가운을 급히 걸치며 문 쪽으로 뛰어가 문고리를 돌려는데, 문이 열리자 그 앞에는 산발을 한 뮤스가 술 냄새를 풍기며 서있었던 것이다. 카타리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모습으로 뮤스의 상태를 살폈다. "뮤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행색이 말이 아니잖아?" 하지만 뮤스는 카타리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고, 천천히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타리나... 널 좋아해... 예전부터... 나와... 사귀어 줄래?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 널 처음 봤을 때부터... " 그의 말에 카타리나는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록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지만 이미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다시 한번 고백을 해준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은 충분히 행복했던 것이었기에 그녀는 기꺼이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응... 고마워... 날 좋아해 줘서..."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이 뮤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이 순간 뮤스의 귀에는 카타리나의 목소리만이 가득 차고 있었고, 제발 꿈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 상태였기에 마치 꿈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느낌, 코끝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향기... 이것은 절대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가..." 뮤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품에 안겨있던 카타리나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빠른 박자에 맞추어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 소리는 그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 아름다웠고, 그 어떤 새의 노래 소리보다 정겨웠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귀족 집안에서 자란 만큼 절제 할 수 있는 이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쯤에서 그를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뮤스 이젠 됐으니 힘들어하지마... 그러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자. 응?" 그녀의 말에 뮤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카타리나는 자신보다 머리하나는 더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우습게도 서서 정신을 잃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카타리나가 그의 눈앞으로 손을 몇 번 휘저어 보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풋! 좀 잘 나가는가 싶더니 결국은 이렇게 됐네..." 어쩔 도리가 없었던 카타리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침대위로 옮겼다. 상당히 진땀 빼는 일이었지만 이제 어엿한 자신의 애인으로 인정한 그였기에 그리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십 여분이 지나서야 겨우 침대에 뉘이고 이불을 덮을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이마에 송글, 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며 그의 옆에 앉았다. 죽은 듯이 자고있는 뮤스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카타리나는 행복한 미소를 띄웠고, 곧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럼 잘 자렴..." 혼자만의 인사를 마친 카타리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고, 뮤스는 좋은 꿈을 꾸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대공학자> #141 "크윽... 머리야... 어제 어떻게 내 방에 온거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뮤스는 이마 부근을 지압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금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의 구조나 가구는 자신의 방과 거의 비슷했지만 분위기나 향기를 비롯해 무엇인가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라. 여긴 내방이 아닌것 같은데? 그래! 여긴 카타리나의 방이였어! 대체 어떻게 된거야!" 간신히 이 방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된 뮤스는 크게 혼란스워 하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기도 하고, 머리채를 쥐어 뜯기도 했다. 그렇게 하던 도중 어젯 밤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자 뮤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래! 내가 카타리나에게 고백을 했었지! 그리고 결과는..." 말끝을 흐리고 있는 뮤스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지고 있었다. "카타리나와 사귀는거야! 하하하핫!" 아직 숙취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급히 이불을 옆으로 걷어낸 그는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며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그럭 저럭 된 듯 하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누구에게라도 이 기쁜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타다다닥! 빠르게 그의 옆을 지나가며 눈에 비춰지고 있는 세상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우유빛을 띄고 있었고, 햇살은 유난히 따스했다. 평소 몸을 움츠리게 하던 차디찬 겨울 공기도 봄의 훈풍인양 기세를 죽이며 그를 감싸고 돌았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에게 모든 것이 완벽했으리라... 한참을 신나게 달려 숙소까지 오자 드워프들이 기지개를 펴며 자신들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밤잠을 설친 듯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룰루~ 그녀는 볼 수 없고 미련만 남아~~ 오~ 라제이아~ 라제이아~" 그들을 본 뮤스는 크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안녕히들 주무셨어요!" 아침부터 요란하게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달려오는 뮤스를 볼 수 있었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고뇌에 휩쌓여있던 것을 알고 있던 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왜그러지? 밤에 뭘 잘못 먹기라도 한건가?" 그의 옆에서 함께 뮤스를 바라보던 드워프들 역시 저렇게 까지 즐거워하는 뮤스를 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드워프들 앞에 도착한 뮤스는 즐거움 덕분인지 뇌공력을 쓰지 않은 상태로 꽤나 먼 거리를 달렸음에도 전혀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아저씨들께 축하 받을 일이 있어요! 뭔지 한번 맞춰 보세요!" 뜬금없는 그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리던 켈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하는 모양을 보아하니 카타리나와 사귀게 된 모양이지 별거 있겠냐?"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쯔쯧... 생각이 있으면 누구나 그정도는 알 수 있겠다! 허헛. 그나저나 축하한다." 켈트가 너무나 쉽게 맞춰 버리자 김이샌 뮤스였지만, 칭찬에 기분 만큼은 좋아졌다. "하핫 고마워요! 그런데 방금 부르시던 노래는 뭐예요? 꽤나 흥겨워 보이던데?" "응? 갑자기 노래는 왜?" "뭐... 기분이 좋은데 흘얼거릴 노래가 없다보니 조금 허전해서요. 혹시 어렵지 않으면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그의 부탁에 블뤼안이 나서며 자신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허헛! 노래라면 우리 형제들 중에서 내가 최고지! 내가 가르쳐 줄까?" "저야 상관없죠." 헌데 갑자기 켈트가 블뤼안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흠흠... 산책 안나갈 거야? 우린 산책 나가던 길이잖아?"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던 블뤼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되물었다. "뭐 산책이야 언제든지 해도 되는 것 아니우?" 블뤼안이 생각을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자 켈트는 천천히 자리를 피했다. "그럼 나 먼저 산책을 하고 오지뭐. 그럼 열심히 배우거라... 룰루~" 어디론가 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뮤스와 그의 형제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레딘이 말했다. "형님이 왜저러시지? 저런 행동을 보일 때는 뭔가 걸리는 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인데..." 브라이덴 역시 레딘과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야. 자리는 피하고 보자는 식의 도피법이지. 아지면 밤새 산책을 하고 싶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지. 어쨌든 우리도 같이 도와주도록 하지. 들어가자고!" 드워프들의 숙소로 들어가자 대화를 나누던 탁자위는 한껏 어질러져 있었다. 여러가지 금속들과 물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뮤스가 레딘에게 물었다. "이것들은 다 뭐예요? 밤새 뭘 만들기라도 한 거예요?" 잠시 탁자쪽을 응시하던 레딘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별것 아니야. 혹시 투시기가 모든 금속을 투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었단다. 아직까지 투과할 수 없는 금속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몇몇 금속은 투과량이 극히 적더군. 그렇다면 투과할 수 없는 금속도 있다는 것 아니겠어?" 레딘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탐구심에 감탄을 하고 있었는데, 모든 공학의 기초가 이러한 탐구심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뮤스였기 때문이었다. "후훗. 그렇겠죠. 조금만 더 찾아 보시면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금속마다 가지는 고유한 투과량을 정리해 보는것도 꽤 괜찮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빨리 노래나 좀 가르쳐 주세요." "그렇게 하지. 자리에 앉게나." 뮤스를 중심으로 세 명의 드워프가 탁자에 둘러앉았다. 주로 가르치는 것은 블뤼안이었고, 레딘과 브라이덴은 함께 노래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었다. 블뤼안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래란 것은 말이지 부르는 것도 좋지만 그 내용을 잘 이해해야 맛이 살아나는 거야. 이 노래는 여러가지 표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 즐거울때는 템포를 빨리해서 흥겁게 부르고 처량할 때는 템포를 늦춰서 서글프게도 부르지." 말을 듣다보니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뜻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살던 곳의 민요에도 그런 것이 있었죠." "그래? 그것도 다음에 한번 배워보고 싶군. 아무튼 이 노래는 참 슬픈 배경을 가지고 있지. 한 처녀 드워프와 총각 드워프가 살고 있었지. 그들은 어려서 부터 남매처럼 살게 되었던 거야... 헌데, 어느 순간 총각드워프는 처녀 드워프를 사모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네..." 여기까지 듣던 뮤스는 어디선가 많이 들은 내용인 것을 느꼈다. "혹시 뒤는 이런 내용 아닌가요? 그 총각 드워프는 처녀 드워프에게 고백을 하려했지만 멀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처녀 드워프는 이웃마을의 드워프에게 시집을 가버린다는..." "자네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알고 있지?" 블뤼안의 대답에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 확신한 뮤스는 허망한 기분을 느꼈고, 켈트가 서둘러 사라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속았어! 속았어! 켈트 아저씨가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지!" "그게 무슨 말인가? 켈트형님이 뭘 어떻게 했길래?" 뮤스는 어제 켈트와의 대화에 대해 드워프들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하자 듣는 도중에도 그들은 배를 잡고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는데, 켈트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그의 형제였음에도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한 듯 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겨우 이성을 찾은 블뤼안이 땡기는 배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크크크큭... 아이고 죽겠다. 그래서 형님이 그렇게 사라지신 것이군? 켈트 형님은 벌써 결혼을 했다네!" "네? 켈트 아저씨가 결혼을 했다고요? 그러면 왜 혼자 사시는데요?" "쿠쿡. 그야 형님이 밖으로만 나도니 형수님이 좋아하시겠나? 결국은 형수님이 마을을 떠나고 말았지! 형수님 앞에서 벌벌 떨던 형님을 생가각하면 정말..." 말끝을 흐리며 옛일을 회상하는 듯 했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자 켈트의 부인에 대해 궁금해진 뮤스가 다른 드워프들을 바라보자 브라이덴이 황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우리 부족 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에게까지 유명했으니. 술도 잘 마셨고, 망치질도 엄청나게 잘 하셨었는데... 게다가 도끼질 솜씨와 요리는 신의 경지였다니까!" "대체 드워프들의 미의 기준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드워프들은 아무도 없었고, 물어보긴 했지만 차마 대답을 들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여 뮤스와 카타리나에 얽힌 갈등은 일단락 짓게 되었다. 실크로스교 어느덧 몇 개월이나 흘러 봄이 돌아왔다. 황궁의 뜰에는 따스한 햇살을 받고자 겨울내 땅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새싹들이 기지개를 폈고, 새들은 정원위를 총총뛰며 먹이를 찾았다. 노랗고 붉은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는 그간 황궁에서만 생활하던 사람들이 나들이를 나와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에 활력적인 모습이었다. 이제 막 솟아오르고 있는 잔듸위로 깨끗한 천을 깔고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는데, 카타리나의 부탁으로 나들이를 나온 뮤스 커플이었다. 긴 빵을 작은 조각으로 잘라 과일 잼을 바른 카타리나는 뮤스에게 건네주며 웃었다. "풋 여기있어요. 뮤스군." 그녀의 말에 한 손에 두터운 책을 들고서 읽고있던 뮤스는 씨익 웃으며 그녀가 건네주는 빵을 받아 들었다. "응 고마워. 그나저나 정말 미안한걸? 오랜만에 나들이까지 나왔는데 같이 놀아 주지도 못하고..." 카타리나를 생각해주는 뮤스의 말을 듣던 카타리나는 손바구니에서 우유를 꺼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실크로스 교 공사준비가 바쁜데... 이렇게 같이 있을 시간이 있는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아." "하핫. 역시 누구 여자친구인지 마음한번 넓다니까!" 카타리나를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지 밝게 웃으며 빵을 입으로 가져가는 뮤스였다. "음... 사과잼이 일품인걸?" "그래? 이거 페나언니와 같이 만든거야. 때 마침 작년 가을에 남은 사과가 썩지 않고 저장고에 보관되어 있었거든." "훗. 카타리나는 요리도 잘하는구나?" 뮤스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들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멀리서 부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뮤스! 카타리나! 뭐하고 있니?"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크라이츠와 가비르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2 크라이츠는 흰색 바탕에 분홍 꽃무늬가 들어간 드레스를 입었고, 흰색의 장갑을 낀 손에는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들고 있었는데, 어디를 보나 양가집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뮤스는 손을 흔들며 반겼다. "누님! 가비르 재상님 이쪽으로 오셔서 이것 좀 드세요!" "호호홋! 녀석 요즘 매일 같이 카타리나와 붙어서 사는구나?" "그러는 누님이야말로 가비르 재상님과 붙어 다니시면서..." 장난기 섞인 뮤스의 말에 가비르 재상은 나이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는데, 오히려 크라이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글, 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가비르 재상은 모자를 벗으며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저희가 두분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죠? 좀 앉아도 될까요?" 뮤스에게서 항상 높임말을 쓰는 가비르 재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가비르 재상님. 두분 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허헛. 고맙습니다." 크라이츠와 함께 자리에 앉은 가비르 재상은 뮤스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으신가요? 폐하께서 바쁘신 와중에도 항상 실크로스 교에 대해서 물어 보시곤 한답니다."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손에 들린 책의 한 페이지를 피며 가비르 재상에게 보였다. "드워프 아저씨들이 도와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걱정을 했지만 유능하신 분들을 소개 시켜 주셔서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헌데 지질을 조사해보니 조금 위험한 일이 있어서 말이죠..." "네 그것이 무슨 말씀 이신지?" "이 지도를 보시면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에 지진계를 설치했습니다. 지진계라는 것은 지진의 크기를 잴 수 있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죠." 설명을 하던 뮤스는 지도에 찍어 놓은 세 개의 점에서 각각 원을 하나씩 그리며 말을 이었다. "또한 이 세 곳의 지진계에 나타나는 지진의 정도를 따져보면 지진이 발생하는 진앙의 거리를 계산해 낼 수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지진계 주변으로 원을 그려 넣은 후 세 원이 하나로 겹치는 부분이 진앙이 되는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실크로스 교가 세워질 강의 바로 아래쪽이 진앙이라는 것이죠. 극히 일부분에 걸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니 판의 경계는 아닌 듯하고, 화산 활동의 기미가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화산 활동의 진척상황을 미리 예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지금도 그 부근은 화산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가비르 재상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럼 화산 폭발이 언젠가는 강 아래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능력으로 확실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하지만 강의 아래쪽인 만큼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지진이 조금 느껴 질 뿐 인근의 주민들에게는 큰 위험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화산 활동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진도 일어날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그 정도의 지진을 견딜 수 있는 교량을 설계중입니다.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설계도가 완성이 되니..." 둘의 대화가 오가고 있을 때 짜증이 묻어나는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레이디들과 나들이까지 나왔는데 일 이야기라니! 뮤스 너도 그만 책을 접으렴! 카타리나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젊은 녀석이 왜 그런지..." 어쩔 수 없이 힘없는 뮤스와 가비르 재상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뮤스가 책을 덮지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한 크라이츠는 뮤스와 가비르 재상의 팔을 끌며 말했다. "우리 황궁에만 있어서 답답한데 오랜만에 나가는게 어때요? 뮤스 너도 그 동안 일한다고 카타리나와 제대로 된 데이트도 잘 못했지 않니? 이제 곧 카타리나는 개학을 하니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야 할 테고 말이야..." 크라이츠의 말에 뮤스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되면 카타리나는 라이델베르크로 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 개강이 언제지?"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타리나는 손을 꼽아보며 말했다. "음 보름정도 남았는걸? 그렇지만 준비도 해야하니 일주일 정도 후에 떠날 생각이야."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답답한 듯 머리를 두들긴 뮤스는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작 말 좀 하지 그랬어. 당분간은 함께 놀러나 다니자 어서 일어나!" 그의 손에 의해 몸을 일으킨 카타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괜히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너는 학교를 어떻게 해야 되는 거니? 휴학을 해야 하는 건가?" 그녀의 물음에는 가비르 재상이 대신 답을 했다. "뮤스군은 성적인증제를 받을 것입니다. 대신 수업 일수는 이곳에서 채워야겠죠. 만일 일과 학업이 동시에 힘들다면 약간의 부정을 이용할 수도 있고..." 가비르 재상이 말하는 성적인증제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수업을 받지 못할 경우에 그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고, 인증서를 제출하면 학교를 직접 다닌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였다. 이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여러 지방으로 움직일 일이 많았기에 그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생긴 제도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학교간의 학생 교환을 위해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 공사는 언제쯤 끝나게 되죠?" "글쎄요. 지금 동원 가능한 최대의 인원으로 가정했을 때 규모 상으로는 1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요? 게다가 중간보고를 받은 바에 따르면 새로운 공법과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숙련 상 더 오래 걸릴 지도..." 가비르 재상의 설명을 듣고 있던 카타리나의 표정은 어두워 졌고,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뮤스도 가비르의 생각과 같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년이 넘게 이곳에 있어야 된다는 말이야?" 카타리나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없이 인정을 해야만 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될 것 같아." "하지만..." 뮤스와 카타리나의 사이에 그리 좋은 분위기가 흐르지 않자 크라이츠는 둘의 등을 치며 말했다. "너희들 평생 헤어지는 사람처럼 왜 그러니? 겨우 1년 가지고! 수십 년 기다린 사람도 옆에 있는데!" 크라이츠의 말에 뮤스와 카타리나는 멀뚱히 서있는 가비르 재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할말이 없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분위기가 정리된 듯 하자 크라이츠는 가비르의 팔짱을 끼며 외쳤다. "자 벨링 시내로 나가서 오늘은 신나게 기분 내다가 오는 거야!" 뮤스는 언제나 못 말릴 행동만 하는 크라이츠를 보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고, 카타리나는 기대가 되는 표정으로 뮤스의 옆으로 붙었다. 마지막으로 크라이츠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가비르 재상은 특유의 멋 적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서서히 밤이 다가오는지 서쪽 하늘 끝으로 붉은 구름만 보일 뿐 해는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의 상점들은 저녁 장사를 위해 불을 밝혔고, 수많은 사람들은 겨울 동안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지고 봄기운을 느끼며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어린이부터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 그리고 서로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는 어린이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길거리의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 중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는 곳이 있었었는데, '파오로아 빵집'이라는 곳으로 6대에 걸쳐 내려오는 전통과 맛으로 유난히 많은 당골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파오로아 빵집의 점원들은 더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양한 주문에 맞춰 빵을 구워내는가 하면, 여기저기로 움직이며 물건값을 계산해줘야 했고, 음식점 같이 많은 양의 빵을 사가는 고객인 경우에는 배달까지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발 디딜 틈도 없는 가게의 문 옆에 지저분한 천하나 만을 바닥에 깔고서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는 흰색의 천인 듯 했지만 회색에 가까워진 천을 온몸에 둘둘 말고 있는 30대 중반의 사내였는데, 얼굴에는 때 국물이 줄줄 흘렀고, 머리는 몇 년이나 감지 않은 듯 서로 엉겨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거지였다. 그 거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다니는 사람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때,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있던 사람들을 헤치며 인상 좋아 보이는 한 중년인이 가게로부터 걸어나왔다. 초록색의 셔츠와 양손에 든 빵 주머니를 보니 한눈에 보더라도 파오로아 빵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룰루루루룰루! 배달입니다! 조금만 비켜 주세요!" 근는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지 콧노래를 입에 달고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미소를 지을 만큼 행복해 보였다. 그는 가게의 문 앞에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으로 앉아있는 거지를 발견하며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그 거지의 몰골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누군가? 이 주변에서 못 보던 사람인데..." 중년인의 물음에 물끄러미 올려다본 거지는 누런 이를 드러낸 채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헤... 떠돌이 점쟁이요. 뭐든지 알고 싶은 미래를 가르쳐 줄 테니 혹시 나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줄 생각 없소?" 그의 입에서 풍겨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린 중년인은 혀를 찼다. "쯔쯧! 나는 운명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자기 일에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 운명이지! 점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 이거나 받게나!" 마음씨 착한 중년인이 점도 보지 않고서 손에 들고 있던 빵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빵을 두개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이게 왠 빵이냐 싶었던 거지는 입을 헤벌쭉 벌리며 급히 빵을 가로챘다. "헤헤헷! 복 받으실거유 아저씨! 점을 보지 않더라도 딱하니 알겠소! 근 100년이래 최고의 운명을 가진 사람이야!" "나 참, 겨우 빵 두 조각에 최고의 운명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다니 자네도 대단하군. 보아하니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살지 말고 할 일이라도 찾아보게나!" 말을 마친 중년인은 해야할 일을 떠올리며 다시금 길을 재촉했다. 그 중년인이 사라지자 거지는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따끈한 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빵을 줘서 고맙긴 하지만, 댁은 평생 힘들게 살 운명이야. 돈이 있으면 뭐하나... 집안이 엉망인데." 그야 어떻든 남의 사정이고 일단 허기진 배를 달래야 했기에 손에 들린 빵을 한입 물었다. "이야! 정말 파오로마 빵집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었군! 이렇게 맛이 있으니 유명해 질만도 한걸?" 그가 게걸스럽게 빵을 먹어 치우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3 두 쌍의 남녀였는데, 한쪽의 커플은 나이 또래가 맞아 보였지만, 다른 쪽의 커플은 나이차이가 상당해 보였기에 연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부녀지간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 했다. "저기야 저기!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한번 와봤는데 정말 맛이 기가 막힌다니까!" "애써 여기까지 찾아올 만큼 맛이 대단한 거야?" 이들은 크라이츠의 의견에 따라 시내로 나온 뮤스 일행이었다. 전뇌거를 세워둔 채로 시내의 곳곳을 구경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는 중이었는데, 카타리나가 맛있는 빵을 사겠다며 모두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뮤스와 카타리나의 대화에 끼어든 크라이츠 역시 이곳의 빵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카타리나의 말을 돕고 있었다. "호홋. 나도 예전에 이곳의 빵을 먹어본 적이 있단다. 그때가 아마 3대째였던가? 아무튼 오랜만에 맛을 보게 되는구나." 크라이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가비르는 일행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허헛... 파오로아 빵집을 말하는 것이었군요? 마침 저곳의 주인이 저와 잘 아는 친구랍니다. 제가 가면 공짜로 주기도 하죠." "어머나! 제국의 재상이라는 사람이 친구에게 빵을 공짜로 받다니... 그것도 뇌물의 일종 아닌가요?" "그렇게 되는 건가요? 후훗..."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가게 앞에 도착하자 줄지어서 서있는 손님들을 본 카타리나는 울상을 지었다. "한참동안 기다려야 되겠네... 이를 어쩌지?"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던 가비르 재상은 윙크를 살짝 하며 가게 옆으로 나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걱정 마시죠. 친구 좋다는게 다 뭡니까? 이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친구를 만날 수 있죠." "정말요? 그런데 저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도 되나요?" "그런 것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친구 저 아니었으면 이 가게를 닫았어야 했을 걸요? 오히려 제가 부탁만 하면 당장이라도 손님을 내쫓고 문을 닫을 수도 있을 정도니... 그러니 걱정 말고 이쪽으로 오시죠. 크라이츠님도 같이 가실 건가요?" 가비르의 물음에 잠시 골목 쪽을 들여다보던 크라이츠는 좁고 지저분한 건물의 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차림을 하고서 그곳으로 들어가기는 싫군요." "그럼 뮤스군은?" "저도 같이 들어가죠 뭐." 이렇게 해서 들어갈 사람들이 결정되자 가비르 재상이 앞장서서 골목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카타리나와 뮤스가 뒤따랐다. 혼자 남은 크라이츠는 팔짱을 끼며 서있었는데, 혼자 남기가 조금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드레스가 벽에 쓸려 지저분해 지는 것은 더욱 싫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빵을 우적우적 씹던 거지는 빵 가게 앞을 서성이는 크라이츠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척 보더라도 귀티가 나는 옷차림에 아름다운 얼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괜찮은 집의 여성이라는 것이 확실했고, 그런 여인일 수록 점성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있는 거지로서는 운이 좋다면 또 한끼를 해결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먹던 빵을 숨기며 크라이츠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오! 그곳에 서있으신 아름다운 아가씨 나를 좀 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짜증이 나고 있는 상태의 크라이츠였기에 그의 부름에 고운 대답이 갈리는 만무했다. "뭐냐!" 몸을 얼려 버릴 듯 싸늘한 그녀의 눈빛이 거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그는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든 처지인 이상 이렇게 좋은 기회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누..누구를 기다리시는 듯 한데 그 동안만이라도 혹시 점을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맞출 수 있소!" 험한 소리를 각오하고서 던진 말이었지만 의외로 크라이츠의 태도는 종전과 전혀 달랐는데, 빵을 사기 위해 빵집에 들어간 뮤스 일행을 기다릴 때까지 시간을 보낼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점이라... 제대로 볼 줄은 아는 건가요?" 일이 술술 풀린다고 느낀 거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모습이 이렇지만 점보는 것 하나 만큼은 끝내 준답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물질에 대한 사심에 얽매이다 보면 하늘의 계시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게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아아 됐으니 사설은 그만 접어 두고 빨리 점이나 봐줘요." "헤헷. 뭐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궁금하시죠?" "음... 뭐 특별히 궁금할 것은 없고, 봄이니까 올 한해의 운에 대해서 나 봐줘요." "흐흣. 그렇게 하죠." 웃으면서 대답을 한 거지는 빤히 크라이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이자 의아한 생각이 든 크라이츠가 물었다. "그런데 왜 점을 안보죠?" "헤헤헷! 원래 세상은 모든 것이 정해진 상태에서 생성하게 됐으며,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원인이 있어야 하며..."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을 헛소리에 짜증이 나버린 크라이츠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해요!" "쉽게 말하자면! 즉, 선금이란 뜻이죠. 헤헤... 제가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이라서요." 원래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하는 짓이란 대부분 비슷했기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한 크라이츠는 손가방에서 은화 하나는 던져주었다. "이 정도면 되겠죠?" 생각지도 못한 은화에 눈이 휘둥그래진 거지는 연신 고개를 조리며 설설 기고 있었다. "물론 입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다시 뺏기라도 할까 무서운지 재빨리 은화를 숨긴 거지는 가슴에 품고있던 보퉁이를 끌렀다. 그리곤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는데, 손때가 반질반질 묻어있는 오래된 카드였다. "저는 이 카드점이 특기 입죠. 이 위에 손을 올리셔서 잠시 집중을 해 주시겠습니까?" 거지의 요청에 크라이츠는 인상을 찡그렸는데, 지저분하기 둘 째 가라면 서러울 듯한 물건에 손을 올리라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해요."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거지는 이내 헤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네! 뭐 집중을 하면 좋겠지만 안 하더라도 큰 상관은 없죠! 자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거지는 손에든 카드를 잘 섞은 채 왼손 위에 올려놓으며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그는 앞쪽에 카드를 내려놓으며 오른손을 이용해 하나씩 들췄고, 가장 윗 부분부터 5장씩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25장의 카드를 널어놓고 정 사각의 모양을 만든 거지는 제 멋대로 널려있는 카드를 이리저리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양을 보던 크라이츠는 따분했는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거지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널려있는 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은 헤프레 웃고만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정녕 이상한 일이군... 부엉이 카드는 것은 숨겨진 비밀을 뜻하는데, 이것 이상은 도무지 볼 수가 없군요. 평생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도 이제 그만 둘 때가 된 건가?" 거지가 씁쓸한 목소리로 자책 어린 말을 하고 있을 때 크라이츠는 내심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흠 제법이긴 하군. 어렴풋하게나마 나의 정체를 밝혀낸 듯 하니... 하지만 인간의 점성술로 드래곤의 운명을 점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거지는 어느새 그녀에게 받았던 은화를 내밀고 있었다. "헤헷... 아가씨 이 은화는 받을 수 없겠군요. 비록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제가하는 일에 대한 신념은 확실하답니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거지가 점을 본 것에 대한 충분한 대가는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럴 것 없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시 받으시죠!" "아니 글쎄. 당신의 품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그 동전도 지저분해 졌을 테니 그다지 돌려 받기는 싫다니까요!"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크라이츠의 등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뭐 하는 거예요?" 크라이츠에게 다가온 뮤스와 일행들은 그녀의 앞에 널려있는 카드들과 거지를 번갈아 보며 살폈는데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잠시 뮤스의 질문에 대답을 미룬 크라이츠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좋아요. 그럼 저는 됐으니 제 동생의 점을 한번 봐 주는게 어때요?" 그녀의 제안을 들은 거지는 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헷!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좋습니다! 이쪽으로 앉아 보시죠 도련님." 얼떨결에 거지의 앞에 앉은 뮤스는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그가 시키는 대로해야만 했고, 그 모습을 보던 카타리나는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언니, 지금 뮤스가 뭘 하는 거죠?" "호홋. 지금 점을 보고 있는 것이란다." "점요? 갑자기 점은 왜?" "왜는 뭐가 왜니? 그냥 심심하니까 보는 거지... 가비르도 볼래요?" 그녀의 말에 빵을 한아름이나 가슴에 안고 있던 가비르는 고개를 저었다. "허헛. 그다지 보고싶은 생각이 없군요. 별로 점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그럼 말고요." 대화를 하던 일행들은 다시금 거지의 행동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크라이츠에게 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행동했는데, 이내 카드를 한 장 씩 뒤집으며 바닥에 널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뮤스는 난생 처음 해보는 카드가 신기한 듯 그림을 살피고 있었다. 거지는 카드를 한 장 씩 뒤집으며 나뉘어진 그림을 하나씩 맞추어 나갔는데, 언젠가부터 그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이럴 수가. 오늘 이게 무슨 일이지?" "왜 그러시죠? 좋지 않은 운세라도?" 뮤스의 물음에 잠시 넋을 놓고 카드를 바라보고 있던 거지는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듯한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좋지 않게 나와도 상관없으니 말해보세요." 한번 고개를 끄덕여 보인 거지는 카드의 그림을 하나씩 짚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낫이라는 것은 극히 좋지 않은 운을 말하고 있고, 이 뱀은 숨어서 노리는 적을 뜻하는 것이죠. 게다가 칼이 뒤집어져 있는 형상역시 뱀과 비슷한 뜻으로 숨어있는 위험을 뜻하는 겁니다. 또, 이것을 보시죠 도련님. 이 말의 그림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좋지 않다는 말인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거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최악이란 말이죠! 평생 살다 이렇게 안 좋은 것은 본적이 없을 정도니 더 이상은 말 안 해도 알겠죠?" 이렇게 말을 마친 거지는 서둘러짐을 꾸렸다. 짐이래 봤자 바닥에 깔고 앉은 천과 카드가 다였지만,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킨 거지는 손에든 은화를 뮤스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이건 도련님이 가지시죠. 곧 닥쳐올 불행에 대한 나의 정성이라 생각하시고... 난 이만 가보겠습니다. 쯔쯧..." 거지가 건네준 은화를 살피고 있을 때 그 거지는 휘적휘적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과연 저 사람의 말이 맞을 까?" 조금은 불안함이 섞여 있는 말을 하는 뮤스에게 다가간 카타리나는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원래 이런 건 믿는 사람 마음인 거야. 자꾸 믿는다고 생각하면 마치 정말 그렇게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거든. 그러니 신경 쓰지마." 가비르 재상 역시 빵 사이에 가려있던 손을 힘겹게 내밀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타리나양의 말이 맞습니다. 점이란 것은 원래 믿는 사람 마음에 달린 것이죠. 이만 다른 곳으로 갈까요?" 잠시 불길한 생각을 가지던 뮤스는 그들의 위로에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훗. 그렇겠죠?" "이제 저녁은 제가 살 테니 식사나 하러 가시죠." 앞장을 선 가비르 재상의 안내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뮤스는 다시 여유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뒤를 따르는 크라이츠만은 그렇지 않은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냥 기분이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던 크라이츠는 자신의 예감을 일행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곧 기색을 지웠고, 평소처럼 일행들 사이에 섞여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4 -탈칵! 육중한 여행용 가방의 문을 닫으며 뮤스는 손을 털었다. 그는 지금 카타리나가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는 중이었는데, 개학을 위해 라이델베르크로 떠나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뮤스에게 지난 일주일은 꿈결과도 같이 흘렀다. 일 때문에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했던 뮤스를 위해 가비르 재상은 특별히 휴가를 내주었고, 그 동안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서로에 대해 한층 더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뮤스는 카타리나가 떠나는 것이 아쉽기는 했으나, 편하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뮤스가 할 일을 끝내자 침대에 앉아서 옷을 정리하고 있는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이제 다 된 건가? 다른 건 할 것 없어?" 듬직한 애인으로써 힘든 일을 도와주는 뮤스를 보며 카타리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풋. 이제 거의 다 됐어. 이 옷만 정리하면 되는걸?" "응 그렇구나. 이제... 우리 한 동안은 못 보겠지?" 뮤스의 물음에 옷을 정리하던 카타리나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응.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올 때 까지 즐겁게 기다릴게. 보고 싶어도 꾹 참으면서." "후훗 그래! 나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도록 할 테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줘. 아참! 잠깐만!" 뮤스는 말을 하다말고 깜빡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냈지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타리나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가죽 가방을 보며 웃었다. "그 가방은 정말 한시라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구나? 조금 샘이 나는걸? 나는 이제 멀리 떠나야 하는데 그 녀석은 네 곁에 찰싹 붙어있으니..." 마침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낸 뮤스는 그것을 흔들며 말했다. "하핫! 그래서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각자 한 장 씩 나눠서 가지는 거야. 보고 싶을 때 그나마 사진이라도 보고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음! 정말 멋진 생각이야." "그럼 내가 먼저 찍어 줄 테니까 머리 좀 다듬어봐. 옷도 좀 정리하고..." 말을 하다가 멈춘 뮤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그대로가 딱 좋을 것 같아. 오히려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좋을 것 같아." "풋. 알았어." 카타리나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준비를 하자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뮤스는 사진기를 들어 올렸고, 가볍게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사진기의 앞쪽으로 사진이 나왔는데, 천천히 카타리나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뮤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와! 실물보다 예쁘게 나왔는걸?" "그래? 어디 나도 한번 보여줘." "자 여기." 뮤스가 건네준 사진을 받아든 카타리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피! 실물이 훨씬 나은걸 뭐!" "그런가? 잠깐만 이렇게 서있어 봐 비교해 보게." 사진을 들어 카타리나의 얼굴 옆에 가져다 대자 그녀는 조금 더 예쁘게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어때? 실물이 훨씬 예쁘지? 응? 왜 대답이 없어?"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머금은 뮤스는 따뜻한 눈빛을 카타리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연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뮤... 읍!?" 이성이 뮤스의 행동을 제지하려 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은 저절로 움직여 깜찍하게 종알거리고 있는 카타리나의 입술을 덮었다. 가슴까지 전해오는 따뜻함과 살짝 물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들... 그리곤 잠시 후, 큰 아쉬움을 남긴 채 입술을 떼어내며 그녀의 가녀린 몸을 안아주었다. "응... 실물이 훨씬 예뻐. 카타리나 사랑해..." 앙증맞게 두 눈을 감고 있던 카타리나 역시 뮤스의 너른 등을 감싸 안았다. "나도 사랑해. 너무나..."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마치 한 폭의 그림인양 그렇게 서있었다. -휘이익! 한데, 좋은 분위기에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방 문쪽으로부터 분위기를 깨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뮤스와 카타리나는 급히 서로에게서 떨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머머! 젊디젊은 한 쌍의 남녀가 이 무슨 위험한 짓이니? 응?!" 말투는 그들을 꾸짖는 것이었지만 왠지 좋은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신이 난 듯한 크라이츠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뮤스는 난처해진 모습으로 변명을 하려했다. "저 누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호호홋! 그런 것이 아니라 키스를 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니? 많이 성장했구나 뮤스 크라이츠?" 도저히 말로 상대가 안됨을 느낀 뮤스는 크라이츠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묵묵히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럴 때는 속이 깊은 누나의 모습이었다. "풋. 이제 전뇌거가 준비되었으니 얼굴 그만 붉히고 내려가자꾸나 카타리나." "네..네!" 뮤스와 카타리나가 이 정도로 끝난 것에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을 때, 크라이츠는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아쉬운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덫붙였다. "그런데 너희 기분 충분히 이해하지만 문 정도는 닫아놓아도 되지 않을까? 혹시라도 모르니까 말이야. 호호홋!" 역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본성까지 버릴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뮤스, 카타리나 그리고 크라이츠는 황궁의 입구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방으로부터 나오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에 무거운 카타리나의 짐을 대신해서 들고 나오는 뮤스는 뇌공력까지 사용해야 했는데 반해 두 여인은 빈 몸으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움직였다. 황궁의 입구 앞에 세워진 여러 대의 전뇌거 중 한대에 카타리나의 짐을 모두 실은 뮤스는 어깨를 풀며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짐은 다 실었어. 가는 도중에 위험한 일은 없겠지?" "응. 드워프 아저씨들도 계시고 그쪽으로 움직이는 분들이 많아서 호위병들까지 같이 움직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의 말대로 켈트의 형제들은 라이델베르크로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이곳에 모두 머물게 된다면 공학원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벌써 세 달이나 손을 보지 않은 채 방치된 설비에 이상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켈트와 크라이츠 그리고 뮤스는 이곳에 남게되고 나머지 드워프들은 공학원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대관식에 얽힌 사건 때 드워프들의 무위를 직접 목격한 뮤스로서는 한결 안심이 되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도착하자마자 꼭 편지하도록 해. 아참..." 말을 잠시 끊은 뮤스는 가방으로부터 편지 몇 개와 책 한 권을 꺼내며 카타리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내가 친구들한테 쓴 편지거든. 봉투에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전해 줘. 그리고 아로인 누나에게 전하는 편지와 책이야. 이 책은 내가 시간 있는 틈틈히 화공학에 대해 정리해 놓은 것이니까 누나가 연구를 시작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전해 줘. 그리고 자세한 것은 같이 출발하는 드워프 아저씨들께 부탁해 뒀으니까 그분들께 부탁하라는 말도." 꽤나 길어지는 당부를 듣던 카타리나는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이 안에 다 써있지 않을까?" "응? 그..그렇긴 하지." "그러니 이제 그만 설명해 줘도 괜찮아." "난 그냥... 너무 보고 싶을 거야." 카타리나 역시 뮤스와 당분간 헤어진다는 것이 서운했지만,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써 참고 있었다. 그리곤 손가방에 들어있던 사진을 꺼내며 흔들었는데, 방에서 나오기 직전에 크라이츠에게 부탁해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자 봐! 우린 이렇게 함께 있잖아. 그러니까 하는 일 열심히 하고 빨리 돌아와! 알겠지?" "후훗. 그래 알았어." 그들이 아쉬워하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앞쪽 전뇌거에 타고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드워프들이 외쳤다. "이봐 뮤스! 우리한테는 작별 인사도 안하는 건가?" "너무 하는 군! 그렇게 애인만 챙기다간 미움 받지!" "헐헐. 가는 길에 카타리나양을 괴롭힐 꺼야!" 드워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을 향해 손을 한번 크게 흔든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을 잡고서 앞쪽의 전뇌거들이 서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그곳에는 아우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켈트가 있었는데, 입으로야 아쉬움을 표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오히려 속이 시원한 모습이었다. "금방 일 끝내고 갈 테니 가서 일 잘하고 있으라고! 괜히 술만 퍼마시지 말고!" "걱정마슈 우리가 성실과 근면 하나로 먹고사는 드워프들 아니우!" "입만 살았군 그래." 뮤스는 드워프들이 작별인사 같지도 않은 작별인사를 하고있는 사이에 끼어 들며 문을 열었다. "아저씨들 카타리나 잘 부탁해요!" 가장 앞에 앉아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주던 레딘은 뮤스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혀를 찼다. "쯔쯧... 고작 작별인사가 그건가?" "그래도 제일 믿는 분들이니까 카타리나를 부탁하는 거예요. 자 카타리나 어서타." 그의 말을 들은 카타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레딘이 비켜준 자리로 올라탔다. 자리를 잡은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탁! 마지막으로 전뇌거의 문을 닫자 뮤스는 이제 한동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리창을 몇 번 두들긴 뮤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가! 알았지?" 몇 번이고 작별인사를 했지만 성에 한번이라도 더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역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창밖에 서있는 뮤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이들의 애정행각에 짜증을 느낀 브라이덴은 둘의 사이를 한시라도 떼어놓고 싶은지 전뇌거를 몰기 시작했다. 총 여섯 대의 전뇌거가 황궁 중앙로를 따라 줄을 지어 움직이자 그들을 환송 나온 사람들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었고, 이제 일행을 떠나보내고 남게된 뮤스와 켈트 그리고 크라이츠 역시 그 사이에 끼어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5 실크로스교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야외산책로로 쓰이던 뒤뜰에 엄청난 크기의 임시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철골에 강화 합판을 두른 이 건물은 높이는 무려 30멜리에 달했고, 실내 면적만도 5000평방 멜리에 달했기에 건물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비록 임시건물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 들어가는 예산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곳이 바로 쥬론 공국과 벨링을 이어줄 실크로스 교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장이었기에 황실은 충붕 한 예산을 지원해 주었고, 마땅한 곳을 찾던 차에 넒이나 위치 면에서 유리한 이곳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작업장은 그 설계도 특이했다. 작업 시에 일어나는 먼지를 효과적으로 배출하기 위해 황궁 건물의 반대편으로 수십 개의 배기통이 있었고, 황궁의 내부터인 만큼 소음에 민감해야 했기 때문에 소음을 흡수하는 방음판을 건물의 내벽에 장치한 상태였다. 그 덕에 내부의 모습은 한층 딱딱해 보였지만, 지금은 효율이 우선 이었기에 그쯤이야 어찌 되었던 좋았던 것이었다. 작업장의 한켠, 뮤스를 비롯해 십 여명의 사람들이 통나무로 깎아 만든 탁자의 주변에 둘러 서있었고, 그 탁자의 위에는 상당한 크기의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다. 뮤스를 바라보고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은 제국의 각지에서 능력이 있다고 소문난 토목가들 이었는데, 그들의 실력을 높이사 이곳까지 초청을 한 것이었다. 처음에야 나이 어린 뮤스에게 지휘권이 있다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설계도가 완성되자 토목가들은 그를 인정 할 수밖에 없어졌던 것이다. 뮤스는 한 손에 회색의 덩어리를 쥐고서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건축이나 토목시 바위들간의 접착을 위해 쓰던 석회, 석고 혼합물인 양회(시멘트)를 응고시킨 것입니다." 갑자기 뮤스가 손에 힘을 주며 움켜쥐자 그것은 먼지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은 너무나 무르기 때문에 접착용 외에는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또 다른 재료를 만들어 내게 되었는데, 지난 한달 동안 실험을 통해 기존의 양회보다 빨리 굳고, 화학반응에 강한 동시에 강도도 높은 재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별다른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을 위해 실크로스 양회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실크로스 양회는 기존의 양회에 알루미나질의 원료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용융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그 견본입니다." 설명을 하던 뮤스는 또 다른 덩어리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였고, 바로 옆에 서서 설명을 듣던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한번씩 만져보시길 바랍니다." 토목가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돌아온 실크로스 양회 덩어리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준비된 망치로 때려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모두들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결국은 실크로스 양회의 강도에 대한 놀라움으로 귀결되었다. 그들 중 뮤스의 반대편에 서있는 한 노년인이 실크로스 양회를 힘껏 두들겨 보며 입을 열었는데, 그는 라이부크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건축가였다. 그의 이름은 시몬,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그 만큼 뛰어난 토목기술로 정평이 나있었기에 제국의 여러 곳에서 일거리 섭외가 끊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럴 수가! 마치 한 덩어리의 바위 같군. 양회가 이런 강도를 지닐 수 있다니... 혹시 돌아갈 때 이 실크로스 양회를 만드는 법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뮤스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물론이에요 시몬 할아버지. 가시기 전에 꼭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허헛 고맙군. 내 다음에 거나하게 한잔 사겠네!" 술에 대해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동시에 가진 뮤스로서는 그의 호의를 받아 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이제 실크로스 양회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이제는 설계도 위로 시선을 옮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물론 실크로스 양회가 강도가 좋긴 하지만 두 가지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실크로스 양회만으로는 강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실크로스 교의 공사에 들어갈 만큼 많은 양의 양회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몇몇 분들과 함께 실험용 견본을 만들어 보게 되었는데, 바로 저 뒤로 보이는 것입니다." 뮤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대충 다섯 아름은 되는 두께와 10멜리 정도 되는 높이를 가진 기둥이었다. "저것은 실크로스 양회에 모래, 자갈, 물을 섞어서 만든 재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엄청난 하중을 견딜 수 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더군요. 그것은 하중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측면에서 오는 충격에는 크게 약하다는 것입니다. 즉, 교량에 부딪혀오는 강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부러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을 척척 진행되어 갔고 토목가들 역시 전혀 새로운 이론을 접하면서 흥분한 모습이었다. "고민 끝에 측면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교각의 내부에 철근을 넣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또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었는데, 철과 양회 간의 열팽창계수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을 받을 때 많은 팽창하는 철근과 양회의 열팽창계수가 같지 않다면 여름에 열을 받는다면 함께 부서져 버릴 것입니다. 이것을 맞추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쏟았죠. 그 결과 상당히 만족하는 수준의 강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토목가들의 수장 격인 시몬은 그의 철두철미한 설명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개념부터가 다른 공법이군. 쌓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드는 것이라니...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이 새로운 공법을 익히시고, 공사 전반에 걸친 감독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야 기술력을 지원해 드리지만, 토목일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일이기에 여러분들이 아니면 일꾼들을 통솔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허헛! 역시 젊은 친구가 제대로 알고 있군!" "그럼 자세한 것은 이 설계도에 기입해 두었으니 천천히 설명을 해드리기로 하죠." 그때부터 토목가들에게 세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공법을 제안한 것은 뮤스 자신이었지만, 이 분야에 대해 평생의 노하우를 지닌 토목가들에 비해 모르는 것도 많았기에 거의 회의와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만큼 빠른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뮤스는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서 머리를 말리며 샤워실을 걸어나왔다. 카타리나가 이곳을 떠난 이후로 한동안은 적적했지만, 일거리가 너무나 많았기에 금새 현실에 적응을 해야만 했고, 가끔씩 보내주는 그녀의 편지 또한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기에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벌쿤과 다른 친구들에게도 편지가 왔기에 그곳의 소식을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아로인이 공학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공학원의 소식을 전해왔는데, 모든 일이 예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걱정스럽던 일이 잘 되고 있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진 뮤스는 지금 하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샤워실에서 나오자 교량의 모형을 가지고 끙끙 앓고 있는 켈트가 눈에 보였다. 그는 지금 설계도에 있는 교량을 그대로 축소한 모형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설계도의 세밀한 부분까지 그대로 재현하려니 손이 많이 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잘 되어 가요? 이제 자재확보는 끝났고, 다음 주부터 기초 공사에 들어가니까 그 전에 완성하셔야 해요!" 여지없는 고용인의 말투에 모습이었다. 잠시 조각도를 내려놓은 켈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냐? 분명 인간의 일을 돕지 않겠다고 했는데!" "하핫! 그걸 만드는 건 인간의 일이 아니라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부탁 드려요!" "나원 참. 그런데 이런 위험한 구조가 정말 가능한 것이냐? 물론 모형이야 힘을 크게 받지 않으니까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분리교판'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뎌낼 강도가 될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여러 번 털어 낸 뮤스는 그것을 소파위로 던지며 켈트에게 다가가 분리교판이라 불리우는 곳의 연결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세 겹으로 할 생각이에요. 계산상으로는 한 겹이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지만, 지진의 강도가 언제 얼마만큼 변할 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흠 세 겹이라. 철근이 들어간 실크로스 양회라면 충분하겠군... 그런데 지진의 진척상황은 어때?" 켈트의 물음에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사람인 이상 그것을 알 수는 없죠. 하지만 지진계의 수치상으로 큰 변동을 보이지 않는 것을 봐서는 공사에는 별 무리가 없을 듯 해요." 신이란 말을 들은 켈트는 잠시 만들고 있던 실크로스교의 모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견뎌 줄 수 있겠지?" "하하! 지금 보다 더한 지진에 대해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도록 설계를 했으니 괜찮아요. 공사 중에 지진이 일어난 다면 일이 어렵게 되겠지만, 지진계를 곳곳에 설치해서 관찰하고 있으니, 미리 대비할 수 있어요." "허헛. 녀석 날이 갈수록 철저해 지는군." "원래 조금의 실수가 큰 화를 부르는 거잖아요. 저도 이제 도울 테니 함께 하도록 하죠." 코밑을 한번 쓸어본 뮤스가 조각도를 들고 다가오자 켈트는 쌍수를 들며 반가워했다. "오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군! 설마 이걸 전부 나에게 떠맡기는 줄 알았거든?"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흠... 또 모르지..." "에이... 어서 일이나 하자고요." 뮤스는 조각도를 실크로스교 모형에 가져다 대며 파내기 시작했고, 켈트 역시 하던 일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둘의 손놀림은 리듬을 탄 듯 부드럽기도 했고, 때로는 거칠 것 없이 강하기도 했다. 이렇게 또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새벽의 안개와 같이 희뿌연 연기가 뮤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길을 잃은 듯 이리저리 방황하던 뮤스는 이상한 기분에 발 아래를 내려다보자 발목까지 차는 물이었다. "여긴 어디지?" 도무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던 뮤스는 불안한 기운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멀리까지 안개만 퍼져 있을 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발끝으로 체이는 물에 기운이 빠졌지만 어디로든 가야만 했다. -촤악! 촤악! 얼마나 지났을 까? 눈앞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웅장한 구조물이 드러나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안개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 지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그 크기만큼은 정녕 대단한 것이었다. 궁금함에 다가가려 해도 그 것과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뛰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지쳐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소리에 버금가는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쿠구구궁! 쿠쿵!! 그와 동시에 눈앞에 서있던 구조물은 신기루였던 양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는데, 그 곳으로부터 튄 바윗덩어리들은 뮤스가 있는 곳까지 날아와 주변에 떨어지며 그를 위협했다. 또 하나의 집채만한 바위덩어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주변이 아닌 정면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다른 곳으로 피하려 했지만 발목까지 차있는 물이 아교라도 되는 듯 움직일 수 없었고, 오직 자유로운 곳은 머리와 팔 뿐이었다. 바윗덩어리는 점차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6 "으아아악! 살려 줘! 헉! 헉!" 뮤스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고, 입으로는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익숙한 목조 천장을 보고서야 그 끔찍했던 일이 꿈이란 것을 깨달은 뮤스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후우...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군. 내가 너무 실크로스교의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가?"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아직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새벽이었다. 목이 마르다고 생각한 그는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는데 웬일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이게..." 이것이 꿈의 연장일 지라도 모른다는 생각에 깜짝 놀란 뮤스는 급히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그의 다리아래에서 켈트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양 뮤스의 다리를 꽉 안고 있는 상태였다. "나 참! 분명히 잘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자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러고 있는 거야." 힘겹게 켈트를 다리에서 뜯어(?)낸 뮤스는 탁자 위에 올려진 물병을 들고 목을 축였다. 그리곤 방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작업 때문에 어질러져 정신이 없는 방이 친숙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던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 전뇌력으로 가동되는 소형 조명을 켰다. 이렇게 기분이 뒤숭숭할 때에는 일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정리해 놓던 노트를 펴고, 잉크를 준비했다. 하지만 책상 위에서 깃펜이 보이지 않자 이리저리 찾아보던 뮤스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역시 생각대로 그곳에는 흰색 깃으로 만들어진 펜이 몇 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고르려던 중, 그의 눈에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손을 넣었더니 얼마전 점을 쳐주던 거지에게서 받은 은화임을 알게 되었다. "후훗.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끔찍한 일을 목격하게 된다고? 후훗! 말도 안돼. 누가 날 노리는 것도 아니고, 실크로스 교의 일도 잘못 될 리가 없어. 내 계산은 완벽하단 말이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중에 거지가 점친 내용을 머리에 담아 두고 있었음을 느꼈는데, 스스로에게 용기를 심어줄 위로를 한 뮤스는 그 은화를 손아귀에 쥐고서 뇌공력을 흘렸다. 그리곤 잠시 후 손을 펴자 은화는 이미 뇌공력에 의해 발생한 열에 녹아 액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액체를 방바닥에 흘려버린 뮤스는 발로 그것을 짓밟으며 말했다. "그래... 절대 그런 일은 없어."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목소리와 함께 창 밖의 건물 지붕으로 또 다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동이 터 오고 있었다. 5월의 중순, 계절에 어울리게 젠타카 강의 맑은 물위로 푸른 하늘과 구름이 비춰지고 있었고, 강변에 돋아난 풀 사이에 피어있는 들꽃들은 풋풋한 아름다움을 풍기며 잔잔한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년 같았으면 낮잠을 자며 느긋한 봄의 한때를 보낼 수 있었던 들꽃들은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에 몸살을 겪어야만 했다. "그 방향이 아니야! 전뇌거중기를 옆으로 돌려! "철근을 단단히 박아 넣어! 그리고 철사로 단단히 엮으라고!" "그곳은 탑형 거중기가 들어갈 곳이야! 자재를 다른 곳으로 옮겨!" 이런 일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불과 두달 전만 해도 따분할 정도로 조용하던 이곳에 어느날 부터인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 후로 이 일대는 매일 같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고함 소리와 작업 중에 발생하는 소음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었다. 이곳이 바로 실크로스 교의 대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젠타카 강의 강둑 위에서부터 시작된 실크로스 교의 교대 높이는 20멜리 정도였고, 폭은 12멜리 정도였다. 아직 교량의 위 부분이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기에 일반적인 교량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젠타카 강의 중간, 중간 30멜리 마다 세워진 교각을 보아 심상치 않은 공사규모임을 쉽게 알 수 있었는데, 폭이 100멜리 정도만 되더라도 교량 세우기를 포기하고서 배를 이용하는 토목기술에 비추어 볼때 전장이 150멜리 가량의 교량이란 말 그대로 엄청난 것이었다. 일꾼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공사지역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실크로스 교의 공사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나온 젊은 황제와 가비르 재상, 그리고 직접, 간접적으로 이 일에 관련된 귀족들이었는데, 뮤스의 설명을 들으며 공사의 개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뮤스는 켈트와 함께 만든 실크로스 교 모형의 앞에 서서 현재 진행중인 상황과 함께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교각이 시작하는 곳과 끝나는 부분인 양쪽 교대와 교체(마차 따위가 지나다닐 수 있는 교량의 위부분)를 지지할 세 개의 교각이 완성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공사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지진계에 의해 측정된 바로는 수일 이내에 지진이 한번 일어날 확률이 많기 때문입니다." 뮤스의 설명을 듣고 있는 태도도 여러 가지였다. 황제나 가비르 재상과 같이 주의 깊게 듣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뮤스의 행동을 살피는 사람도 있었고, 이야기보다는 공사를 하고 있는 현장에 관심이 많은 자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신물나게 겪어온 일이었기에 뮤스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듣던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뮤스군 궁금한 것이 하나 있군요." "네 말씀하시죠 폐하." "지금 공사중인 교량의 모습이나, 뮤스군의 뒤에 있는 모형을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교량인 것은 알겠는데, 지진에 대해 어떻게 효과가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뮤스의 말이라면 몰라도 황제의 말이라면 말 한마디라도 빠트려 듣지 않는 귀족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관심사를 잠시 접으며 황제의 말에 아부성 동의하고 있었다. "폐하. 그것은 저도 궁금했던 참입니다." "아주 훌륭하신 질문이시군요!" 그들의 사심이 섞인 말을 듣던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는데, 자신에게 잘보이려는 그들의 속 샘이 훤히 보이는 이상 달갑게 들릴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들은 조용히 좀 하시오! 짐은 경들의 아부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뮤스군의 대답을 듣고 싶소!" 황제가 따끔하게 꾸짖자 당황한 표정을 지은 두 명의 귀족은 급히 입을 다물었는데, 오히려 뮤스에게 달갑지 않은 눈총이 꽂히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일은 지금껏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뮤스를 유난히 총애하는 황제는 그와 있을 때면 다른 귀족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기에 간간히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번번히 애꿎은 뮤스가 그들의 시기를 사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뮤스와 황제는 친숙하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뮤스는 모형 실크로스교의 교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비밀은 실크로스 교의 교체에 있습니다." "교체라면 마차나 사람들이 지나다니게 되는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보통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가장 쉽게 내려앉는 곳이 바로 그 부분인데, 보통의 경우 교각의 높이가 조금만 변동하게 되면 하나로 연결된 교체는 자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교각이 내려간 부위부터 부서져 버리는 것입니다." 뮤스가 손짓을 해가며 시범을 보이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은 이해가 되는군요. 그렇다면 실크로스 교의 교체는 어떻게 되어 있길래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게 된 것이죠?" 황제가 물어올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뮤스는 실크로스 교 모형의 교체 부위를 잡아 올렸다. 그러자 교체는 애초 접착을 시키지 않은 듯 손쉽게 분리가 되는 것이었다. 손에 들린 교체의 일부분을 황제에게 보여준 뮤스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비밀은 이것입니다. 교체를 처음부터 부러트려 놓는 것이죠." 그의 말에 황제와 가비르 재상 그리고 귀족들까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교체란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뮤스의 말은 놀람을 넘은 경악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미 부러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황제와 뮤스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잠자코 있던 가비르 재상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며 물었다. "그것이 무슨 황당한 말씀이십니까? 교체를 부러트린 다는 것이!" 가비르 재상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한 뮤스는 손에 들린 모형 교체를 다시금 실크로스 교 모형에 끼워 넣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입니다. 교체를 미리 부러트려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하자는 것이죠. 이런 반응이 있으실 줄 미리 알았기에 이 모형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 모형은 실크로스 교의 실제 설계대로 똑같이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받침까지 젠타카 강의 지각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제가 방금 보여 드린 대로 이 모형 실크로스 교의 모든 교체는 접합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얹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자 한번 보시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친 뮤스는 모형의 모서리에 붙어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드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모형 실크로스 교가 올려진 판이 크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지진에 대한 결과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모형 실크로스 교가 받고 있는 진동은 실제 실크로스 교가 받는 지진의 강도보다 세 배나 높은 강도입니다. 물론 수치상 조금의 오차는 있겠지만, 실제 생각하고 있는 상황 보다 강력한 지진임은 틀림 없습니다." 그렇게 수분의 시간이 흐르자 뮤스는 모형 받침의 스위치를 끄며 진동을 멈추게 하였는데, 뮤스의 설명대로 모형 실크로스교의 교체는 원래의 모양대로 잘 올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대단하군요! 과연 뮤스군의 능력은 한이 없는 듯 합니다!" 가비르 재상 역시 손뼉을 치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정말 볼 때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특기인 것 같군요." 갑자기 뮤스를 칭찬하는 분위기가 되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쳐야만 했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한마디 씩 해야만 했다. "흠흠... 이름 값을 하는군요." "역시 공학원의 원장다운 걸요." 역시 마음에 없는 칭찬인 이상 제대로 된 것일 수는 없었다. 그들이야 어쨌건 간에 설명할 내용을 끝낸 뮤스는 황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상이 실크로스 교 공사에 대한 개요입니다. 앞으로도 공사의 진척상황에 대해서는 수시로 보고 드리도록 하고 이쯤에서 설명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뮤스의 설명을 모두 들은 황제는 크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수고했습니다. 뮤스군. 괜찮다면 오늘 식사라도 함께 할까요?" 그의 말에 미안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죄송하지만 이곳에 지진이 언제쯤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한동안은 눈을 못 땔 상황입니다. 다음 번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핫 미안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모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할 일은 커녕 남의 눈치만 보기에 급급한데 이 얼마나 보기 좋은 일입니까? 하핫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 테니 뮤스군은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주시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뮤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황제는 몸을 돌리며 타고 왔던 전뇌거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귀족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가비르 재상은 웃으며 뮤스에게 다가왔다. "허헛. 정말 수고했습니다. 할 일도 많아서 바쁘실 텐데 이런 설명까지 해주시고..." "별말씀을요. 이런 설명도 제 일에 속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크라이츠님과 함께 보도록 하죠." "그럼 가는 길 조심하시길..." 가비르 마저 자리를 떠나자 뮤스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밤을 꼬박 지새운 상태였는데, 뇌공력의 효용으로 견딜 정도는 되었지만 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뮤스는 언덕의 풀밭이 걸터앉았다. 힘이 들수록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이 사람이었기에 그리 밝지 않은 기색을 한 뮤스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세 달만 무사히 지나가면 되는데..." 말을 마친 뮤스는 그대로 몸을 풀밭에 뉘이며 눈을 감았다. 침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피로해 있던 뮤스에게 지금 이 풀밭은 세상의 어느 침대보다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7 -사사삭... 구름이 끼어 달조차 뜨지 않은 어두운 밤, 검은 후드를 걸친 서너 명의 무리들이 풀을 밟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줄기 빛도 없는 어둠과 후드에 가려 그들의 외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나마 확실한 사실은 모두들 사람들이 이목을 철저하게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자 주변을 살피며 타인의 이목을 경계하고 있을 때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하 무덤의 입구였는데, 입구의 반은 허물어 진 상태였고, 이제는 사람들이 찾지 않은 폐 무덤인지 여기저기 걸려있는 거미줄이 음산함을 더했다. 무리들 중 가장 앞에 서있던 인물이 말했다. "이곳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말을 마친 그는 미리 준비해 온 횃불에 불을 당겼다. 기름이 묻어 검은 연기를 피워내고 있는 횃불을 지하 무덤의 입구로 내민 그는 길을 안내하며 그곳으로 들었다. -또각, 또각! 그들이 움직이자 적막하던 지하 무덤의 내부에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가득 찼다. 야심한 밤에 지하 무덤 안이라는 꺼림 직한 장소에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 치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고개를 숙여야 들어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철문이 버티고 서있었다. 앞장을 선 인물은 철문을 두들 겼다. -텅텅! 두들김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철문 안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인영들은 누군가가 안에 있음을 확신 한 듯 계속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철문의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호를 대시오." 그 목소리에 앞장을 서고 있던 인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강을 건너는 철새를 제거하라." -철컹! 목소리가 끝나자 마자 철문은 먼지를 일으키며 열리고 있었다. 이를 확인 한 무리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안으로 들었고, 가장 마지막에 서있던 인물은 목격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인지 그들이 지나온 길을 한번 둘러 본 후에서야 안으로 들었다. -철컹! 철문이 완전히 닫히자 안으로 든 사람들은 머리에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오늘 낮 뮤스의 설명회에 참석한 두 명의 귀족을 포함하여 황궁 수뇌부를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의 얼굴들이었다. 물론 지방의 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기에 모두 빠진 상태였고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황궁에서 기거하며 황궁 일을 맡아보는 이들이 중심이었다. 그들이 후드를 정리하고 있을 때 등뒤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늦었군 파스테넨 백작." 그의 말에 금방 들어온 귀족들 중 한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매쉬라스 후작님! 오는 도중 근위병들이 시찰을 도는 바람에 잠시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횃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내미는 노인은 매쉬라스 후작이었는데, 오늘 일을 주관 한 듯 준비된 탁자의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았으니 모두들 어서 앉게나." 매쉬라스 후작이 그들을 재촉하자 접은 후드를 한쪽에 내려놓은 귀족들은 알맞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그들의 모습을 본 매쉬라스 후작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번 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실 분 있으시오?" 그의 질문이 떨어지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누구를 지목해야 할 지 모를 상황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내 왼쪽부터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 파스테넨 백작부터 이야기 해 보시오." 그의 말을 들은 파스테넨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들 아시다 시피 저는 가비르 재상님을 보좌하여 재정에 대한 일을 맡고 있습니다. 헌데 이번 주의 지출 내역을 확인하는 도중 8할에 달하는 예산이 실크로스 교 공사에 대해 편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크로스 교의 공사가 현재 황실에서 벌이고 있는 중심 사업이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고 하더라도 비정상 적일 정도로 편중된 수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재료 실험에 들어간 지출이라는 것입니다." 파스테넨 백작의 이야기가 끝나자 귀족들의 대부분은 격분한 표정이었지만 매쉬라스 후작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스테넨의 옆자리로 고개를 돌린 매쉬라스 후작이 말했다. "다음은 콜로라드 후작님께서 말씀해 보시죠." "요즘 폐하께서 시간이 나는 대로 공학원 원장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도 그런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실크로스 교의 공사가 진척이 될수록 더욱 편애가 심해지고 있더군요. 심지어는 주변의 귀족들에게 쓸 관심을 모두 그에게 돌리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고 있습니다." 콜로라드 후작이 말을 하던 도중 낮에 뮤스의 설명회에 참석을 했던 두 명의 귀족이 흥분을 하며 말 사이에 끼어 들었다. "저희들도 오늘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저희의 말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그 뮤스라는 애송이의 말만 들으셨는데, 이것은 대놓고 저희를 무시하는 처사셨습니다." "게다가 평소 귀족들과의 식사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으시려던 폐하께서 그에게 먼저 식사초대를 하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더군요." 이런 식으로 뮤스를 비하하는 이야기가 계속 되어갔다. 사실 매쉬라스 후작은 자신이 이런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몇을 제외 하면 무능하기 그지 없는 귀족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험담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이대로 둔다면 위험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큰 뮤스라는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서는 무능한 이들의 지지라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묵묵히 비슷한 내용이 돌고 도는 그들의 말을 듣던 매쉬라스 후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난 3개월 간 공학원 원장의 행적을 조사해 왔소. 하지만 하다같이 공통된 의견은 그가 우리의 앞길에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오. 이쯤 해서 싹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하지만 지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는데, 그만한 배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스테넨 백작이 분위기를 살피며 말했다. "만일 이번에 일을 벌이기 위해 움직이다가 폐하나 재상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뮤스가 폐하의 총에를 받고 있는 이상 우리도 가테스 공작과 같은..." 입만 살아 있을 뿐 소심하기만 한 그의 태도에 매쉬라스 후작은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닥치시오! 파스테텐 백작! 가테스 공작은 잘난 가문 덕에 이름만 공작이었지 잘난 척을 하는 애송이었을 뿐이오. 결국은 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서 그런 실수를 했으니 벌을 받아도 마땅한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일은 그와는 전혀 다르오! 우리는 그저 뮤스라는 자에게 현혹되어 정사에 소홀히 하는 황제폐하의 눈과 귀를 열어 들이기 위해 그를 제거하려는 것일 뿐이오! 내 말이 틀렸소?" 나이가 무색하도록 강력한 열변을 토하는 매쉬라스 후작의 말에 귀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매쉬라스 후작의 의견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콜로라드 후작이 물었다. "매쉬라스 후작님 그렇다면 뮤스라는 자를 어떻게 할 참이십니까? 타인의 눈이 있어 무력을 동원해 살해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성격을 보니 협박을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허헛. 그 점이라면 염려 마시오 다 계획해 놓은 바가 있으니.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 거리게 될 것이오. 여러분들은 황제 폐하 앞에서 나의 의견에 동의만 해주면 되는 것이오. 물론 적절한 의견도 들어가야 겠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쉬라스 후작의 눈가에 전에 없던 살기가 감돌고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귀족들 역시 나름대로 마음을 굳히는 모습이었다. 그와 같은 시간 뮤스는 피곤에 절은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당기기조차도 귀찮을 정도로 피로가 쌓인 상태였는데, 며칠만에 들어온 자신의 방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켈트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켈트의 모습이 보였다. 드워프 형제들이 이곳을 떠난 후부터 뮤스와 함께 방을 쓰기로 한 켈트였는데, 뮤스는 켈트의 잠버릇이 나쁜 것을 제외한다면 일에 대해 의논을 하기도 쉽고, 카타리나가 떠난 이후에 심심하기도 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켈트는 뮤스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이런! 이게 며칠만에 보는 얼굴이냐. 완전히 송장이 따로 없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켈트의 걱정하는 모습임을 잘 알고있던 뮤스는 힘없는 미소를 띄우며 소파에 앉았다. "후우! 정확히 삼일 만이죠. 그 동안 잠도 한숨 못 잤다고요. 토목가 분들께 교육을 해드렸다고 해도 직접 봐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럴 때 아저씨라도 좀 도와 주셨으면 좋잖아요." "껄걸!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만 아우들과 함께 약속을 한 것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구나. 이해해라. 그래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렇긴 하죠. 그런데 지금은 뭘 하고 있었어요?" 물음과 함께 켈트가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나무로 깍은 모형 실크로스 교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켈트는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뮤스에게 그것을 들고 와 에게 자세하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네가 설계 한 것을 약간 변형해서 만들어 본 거야. 이런 모양이라면 좌우로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했지." 그것을 살펴보던 뮤스는 머리 속으로 실크로스 교의 설계도를 떠올리며 대조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겠군요. 안정된 상태에서 분리교판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어느 방향에서 오는 충격이더라도 견딜 수 있을 테니... 좋은 생각인 걸요? 아직 분리교판을 얹기 전이니까 설계도를 조금 수정해야 겠네요." "허허헛! 어떠냐 이래봬도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냐?" "훗. 그렇네요. 그렇지만 이 부분의 면적이 좁아지면 질량 계산을 다시 해야 겠어요." "하긴 힘을 받을 수 있는 면적이 좁아진다면 위험해 질 수도 있을 테니..."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있을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두들기는 기척에 반응을 하긴 했지만 켈트와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기에 방으로 들어오는 이에 대해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뮤스였는데, 순간 적으로 눈앞이 번쩍이는 충격을 받으며 뒤를 돌아봤다. "아얏! 도대체 누구... 누님?" 어느 샌가 들어온 크라이츠가 팔짱을 끼고선 그의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너는 누님이 들어 왔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있니? 갈수록 버릇이 없어 지는 것 같구나." "그렇다고 이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크라이츠는 대뜸 투덜대고 있는 뮤스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피부 퍼석한 것좀 봐! 몸좀 사려 가면서 일을 하면 안되겠니? 삼일 동안 한번 찾아오지도 않고! 가비르에게 들었더니 며칠 동안 공사현장에서만 살았다고 하더구나!" 줄줄 이어지는 그녀의 잔소리에 뮤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 귀를 막았다. "아..알았어요. 제가 다 잘못 했으니 이제 그만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단 말이에요." "흠 그래? 아무래도 내가 치료 좀 해줄 테니까 힘을 쭉 빼고 눈을 감아봐." "치료라니요? 제가 무슨 환자인가요." 뮤스의 되물음에 크라이츠는 잡아먹을 듯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는데, 결국 그녀의 눈빛을 받은 뮤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뮤스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자 크라이츠는 왼손을 그의 머리위로 올리며 말했다. "나 마나의 주인인자... 그 힘으로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니. 스테미너 챠저!" 마법어가 시동이 되자 크라이츠의 손에서 발현된 분홍의 빛 줄기는 뮤스의 전신은 감싸며 움직였고, 곳 한줄기씩 뮤스의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다. 뮤스의 머리 위에서 손을 땐 크라이츠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깨우며 말했다. "이제 다됐단다. 어때?" 눈을 뜬 뮤스는 몸의 이곳 저곳을 움직여 보며 놀람을 표했다. "이야! 효과 좋은데요?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졌어요. 평소에도 좀 해주시지..." "호홋! 이번에는 좋은 일이 있어서 특별히 해주는 것이란다!" 크라이츠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켈트와 뮤스는 미심적인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마음이라도 통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는데... "누님 오늘 공사비 지급 받았죠?" "크라이츠님 혹시 공사비 받으셨습니까?" 그들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놀라는 모습의 크라이츠였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8 "어머나! 어떻게 알았지?" "뭐 누님이 좋아하실 일이라면 셋 중에 하나죠. 돈이 들어오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거나,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인데, 그 중 날짜를 따져 보니 첫 번째가 가장 유력할 것 같더라고요." "뭐 그래도. 네가 나에게 빌린 돈이 있으니 이것은 내가 가지도록 하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의 말은 틀린 점이 많았다. 공학원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 금액은 전뇌거의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생긴 이윤으로 다 갚은 지 오래였고,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벌어 드린 것이었다. 하지만 뮤스는 프라이겔트를 가지고 있고,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호호홋! 역시 마음씨 좋은 내 동생이구나. 그런데 공사는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 거니?" "음 앞으로 3개월 정도만 하면 완공이 될 것 같아요." "얼마 남지 않았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네게 조언해 줘야 할 말이 있어서..." 크라이츠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자 의아한 기분이 든 뮤스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무슨 일이 있나요?" "흠... 지금 황궁의 귀족들이 널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더구나. 그건 황제가 너에게 공작 작위를 수여 할 때부터 있어온 일이지만, 갈수록 황제가 너를 감싸고돌게 되니 그들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달해있단다. 그러니 그들에게 약점 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랬군요. 저는 일한다고 정신이 없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말을 듣던 뮤스의 안색이 덩달아 어두워지자 피식 웃은 크라이츠는 그의 볼을 한번 더 잡아당기며 말했다. "호홋! 하지만 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나설 테니까 큰 걱정은 하지 말거라! 확 브레스 한방이면 이따위 황궁쯤이야!" 크라이츠의 으름장에 어색한 웃음을 지은 뮤스는 그녀를 말리 듯 손을 내저었다. "아아 참아요 누님! 제발 그 사람들이 제게 아무 짓도 안 해 줬으면 하네요. 이런 멋진 궁전이 날아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뮤스의 진심 어린 말에 켈트 역시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크라이츠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샤워를 마친 뮤스는 피로가 회복 됐기에 계속해서 일을 해야만 했다. 평소 소규모의 일만을 해왔던 뮤스로 서는 장기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이번일이 피곤하긴 했지만, 무엇인가를 해냄으로써 얻는 기쁨이 더욱 클 것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뮤스에게 붙잡힌 켈트는 함께 침대에 엎드린 채로 그의 계획을 들으며 조금씩의 조언을 해주는 중이었다. "이제 이번 지진만 넘긴 후부터 분리교판은 얹을 거예요. 이번 공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인 동시에 가장 신경을 써야할 일인데, 길이가 35멜리에 달하는 교판을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완성이 될 때까지는 불안정한 상태예요." 침대에 펼쳐놓은 설계도를 짚어보던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흠 그렇다면 만들어 올리지는 못할 테니, 철골을 올린 후에 실크로스 양회를 씌워야겠군." "네 맞아요. 그러나 양회가 다 굳기 전에 지진이 발생하면 그대로 내려앉게 되죠. 제가 지금까지 측정을 해본 결과 거의 한 달에 한번 정도씩 일어나고 있는데, 이번 분리교판작업 역시 다음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끝내야만 해요." "만약에 이변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켈트의 불길한 질문에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강경하게 말했다. "절대 그럴리가 없어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머리를 굴려가면서 계산을 했단 말이에요." 왠지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는 뮤스가 조금 불안해 보였던 켈트는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뮤스 내 말을 잘 듣거라. 네 능력을 인정은 하지만, 세상일에 완벽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은 너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끊은 뮤스는 잠시 후 고개를 떨어트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두려워요. 뭔가 불안한 기분이 계속 엄습하기도 하고, 매일 악몽에까지 시달리기 때문에 잠도 잘 못이루고 있어요. 이렇게 힘들 때 믿을 것이라곤 제 머리밖에 없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고 있어요." 지금 뮤스의 모습은 평소 자신감에 차서 생활을 하던 뮤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어린 나이에 이런 대규모의 일을 책임 져야 하기 때문에 큰 중압감을 받고 있었지만 차마 남들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었고, 게다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마저 곁에 없으니 그가 받고 있는 압박감은 스스로 이겨내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평소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내던 그가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자 켈트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너무나 뛰어난 능력 때문에 그의 나이를 간과해 버리고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뮤스라고 해도 고작 십대의 나이였던 것이었다. 암운의 드리움. 젠타카 강의 양쪽 면에 버티고 있는 교대와 강의 중간에 박힌 세 개의 육중한 교각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도록 만들고 있을 때, 일손을 잠시 멈춘 수백 명의 사람들은 다음 공사 지시를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었고, 그들을 감독하는 토목가들은 임시 본부에 모여 있었다. 한 차례의 지진이 지나가고 난 상황이었기에 다음 지진이 오기 전에 분리교판 1차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인데, 뮤스를 중심으로 공사 방향에 대해 설명 중이었다. "이제 분리교판 공사라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명을 해드린 대로 고정되어 있는 교체가 아닌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지진이 오기 전까지 끝내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정확히 한달!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첫 번 째 교판 설치가 그때까지 끝나야 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는 토목가들 사이에 섞여 있던 시몬이 손을 들며 질문을 던졌다. "뮤스군. 만약 그 전에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드디어 뮤스가 걱정하던 질문이 들어왔다. 한 동안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던 뮤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헤치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뮤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켈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헛! 토목가들이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지진이 일어나서 무너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걱정하면 어떻게 일을 해?!" 갑작스러운 켈트의 등장에 놀란 뮤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켈트 아저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왜? 내가 와서는 안 되는 곳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런게 아니라 일을 안하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쯔쯧. 네 녀석이 징징거리는 꼴을 보니 도저히 그냥 못 있겠더구나. 그래서 조금 일손 좀 거들려고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뻐근했는데 잘 되었지 뭐." 뮤스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에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 녀석아 이제 세부 계획을 말해야지 그렇게 넋을 놓고 서있으면 뭐하냐?" 말을 하며 잠시 뒤를 돌아본 켈트는 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토목가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보시다 시피 드워프요. 이름은 케르히트 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일을 잠시 돕기 위해서 이렇게 왔소. 내가 끼는 것에 불만이 있는 사람 있소?" 넉살 좋은 켈트의 말에 토목가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저 드워프가 케르히트라고 한 것 확실한가?" "나도 들었네! 케르히트 라고 하는 것을..." "그렇다면 그 유명한 '무염의 드워프' 라는 말인가?" 그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던 시몬은 떨리는 목소리로 켈트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께서 무염의 드워프로 불렸던 분이십니까?" 시몬의 질문을 들은 켈트는 잠시 턱 부근을 만져 보며 대답했다. "흠... 수염이 없는 것을 보니 무염의 드워프가 맞긴 맞군. 아무튼 수염이 있는 드워프면 어떻고 없는 드워프면 어떤가? 그냥 일만 하면 되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인정하는 대목의 말이었는데, 그의 말을 들은 시몬은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오... 역시! 함께 일을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특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함께 작업을 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뮤스를 보며 말했다. 내 머리 속에도 이번 공사에 대한 내용이 모두 들어있으니 내가 직접 설명하마. 너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다음 일 준비나 하고 있거라." "아저씨 고마워요." "녀석 오랜만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군." 가볍게 웃음을 던진 켈트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한번 외쳤다. "다들 뭘 멍하게 기다리고 있는가? 토목은 눈으로 하는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걸세. 다들 날 따라 오라고!" 켈트의 말을 들은 토목가들은 절대적인 신임을 그에게 주며 최면에라도 걸린 듯 따라 나섰다. 이제 그 자리에는 뮤스 혼자만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압박감을 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정녕 오랜만에 느껴보는 홀가분함이었다. 뮤스는 오랜만에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난 상태로 강둑에 앉아있었다. 작업은 켈트가 맡음으로써 훨씬 능률이 오르고 있었는데, 뮤스가 직접 작업지시를 할 때보다 비슷한 계열에 종사하는 켈트인 만큼 의사소통이 능률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장인 정신은 철저함을 추구했는데, 일을 할 때면 평소 때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던 뮤스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카타리나의 사진 이었는데,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후훗. 오늘은 켈트 아저씨가 도와 주셔서 마음이 편해... 지금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겠지?" 사진 속의 카타리나를 바라보던 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49 4, 5층의 건물이 평균인 도심의 한 가운데 유난히 높은 건물이 위엄을 뿜어내며 서있었다. 대충 보더라도 10층 이상은 되어 보이는 이 건물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 외벽으로 덩쿨이 무성했으며, 유리창마다 두터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기에 내부를 보기란 불가능 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 건물을 '기적의 샘' 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부르고 있었다. 바로 대륙 전체에 몇 곳 없는 마법사 길드 건물 중 한곳이었는데,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는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평소 그 누구의 발걸음도 없는 이곳에 두 명의 인물들이 찾아와 허름하고도 거대한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오랜 기간 동안 이곳에 왕래한 사람이 없었는 듯 문 위로 뽀얗게 쌓인 먼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입과 코로 들어가는 먼지를 손으로 막은 한 사내는 동료를 향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콜록! 이런 젠장 할. 완전히 폐허가 따로 없군.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는 있는 건가?" "흠! 설마 매쉬라스 후작님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에 우리를 보냈겠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입을 막고 있던 사내는 더욱 세차게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하필면 이런 음산한 곳에 와야 한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 일을 감쪽같이 해낼 능력이 있는 자들이 이곳에 있으니." 두 사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대문의 한쪽에 달려있는 쪽문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문의 경첨이 녹이 슬어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모두 열리자 안으로부터 음산하게 생긴 중년인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검은 색의 후드를 걸친 그는 앙상하게 마른 모습이었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그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데 이곳을 찾아 왔는가. 외부인은 이곳에 올 수 없다." 냉냉한 말투로 말하는 모습에 두 사내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황궁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마법사 길드에 의뢰 할 것이 있어서 찾아 왔소." 중년인은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황궁에서 나왔다고? 뭘로 증명을 할 수 있겠나?" 그의 물음에 사내들은 미리 준비해온 인증장을 건네주었는데, 그곳에는 매쉬라스 후작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것을 한번 살펴보던 검은 후드의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좋아. 하지만 건물에 들어선 후로는 아무 것도 만지지 말게, 실수라도 한다면 지옥의 유황불을 몸소 경험해야 할 테니..." 음산한 목소리의 경고를 들은 두 사내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으로 느끼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건물 안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벽으로 꽂힌 소형의 마나등이 이곳을 밝히는 빛의 전부였는데, 발을 디딜 곳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두움이었다. 두 사내는 검은 후드의 중년인을 따라 몇 층의 계단을 올랐다. 원형으로 굽어진 모양이었기에 불과 몇 개의 층을 올랐음일 뿐인데도 숨이 가쁨을 느꼈다. 숨이 목까지 차버렸다고 느낄쯤 검은 후드를 입은 중년인은 다 썩어가는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를 했다. "이방으로 들어오게나. 여기는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서 마땅한 접대실도 없지." 방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는 괜찮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에 비해 몇 배나 밝았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두꺼운 책들과 여러 가지 가재도구들이 사람이 사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슴없이 책상의 의자로 걸어가 앉은 중년인은 방안을 둘러보며 서있는 사내들에게 물었다. "나는 6써클의 마법사인 망디슈라고 하네. 이곳을 책임지고 있지. 그래 이곳을 찾아온 용건은 뭐지?" 마음을 꿰뚫고 있기라도 한 듯한 눈빛을 보내며 물어오는 망디슈의 질문에 한 사내가 편지 하나를 건넸다. "이것은 매쉬라스 후작님께서 보내시는 편지요. 잘 읽어보시길 바라오." 편지를 건네 받은 망디슈는 펜 꽂이에 꽂혀있는 편지 칼을 사용하여 편지를 꺼내었다. 그리곤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긴 내용인지 한참동안 편지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편지를 다 읽기를 기다리던 사내 중 한 명은 조금 지루함을 느끼며 방안을 둘러보았는데, 책상 위의 파란색의 광채를 뿌리는 수정이 그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 수정 색깔이 참 특이하군... 한번 만져봐도 되겠소?" 사내가 수정의 모양에 이끌려 손을 가져가려 할 때 쇳소리에 가까운 망디슈의 고함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손대지 마!" 깜짝 놀란 사내는 움직이던 손을 제자리에 멈췄고, 망디슈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수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싶나? 이것은 불안정한 마나가 담긴 수정 구슬이네. 잘못 충격을 주다간 이 건물 전체가 날아가 버려!" 망디슈의 설명을 듣던 사내들은 겁을 먹은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말을 마치며 손에 들려있던 편지지를 촛불에 태운 망디슈는 조용한 목소리로 사내들에게 물었다. "이 일만 처리해 준다면 약속을 보장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그렇소. 재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매쉬라스 후작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오." "좋아... 좋아... 그렇다면 매쉬라스 후작님께 거래가 성사되었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전해 줄 것이 하나더 남은 것 같은데?" 그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 보던 사내는 함께 들고 온 서류 뭉지를 건네주었다. "깜빡 했소. 바로 이 서류가 그것이오." "흠... 이젠 가봐도 좋네. 그럼 조심해서 가게나." 방금전의 일 때문에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던 두 사내는 그의 말을 환영하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방에 남은 망디슈는 그들이 주고 간 서류를 한 장 넘겨보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실크로스 교의 설계도였다. 시선을 옮겨 파란색 광채를 뿜는 수정구를 바라본 망디슈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크크크큭... 너를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차에 정말 잘 되었군. 때 마침 너를 사용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말이야... 세상을 놀라게 해보자꾸나." 파란 광채의 수정구는 망디슈의 목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하듯이 더욱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라이델베르크의 햄브리겐 대학교.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 캠퍼스는 젊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봄바람에 떠밀려 가슴으로 들어온 설레임은 젊은이들의 표정을 밝게 만들었고, 새로 입학한 학생들은 처음 경험하는 대학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런 좋은 날에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운 학생들은 푸른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덩쿨이 뻗어 올라간 벽의 사이로 붉은 벽돌이 보이는 건물. 즉, 연금술 학부가 속해있는 건물 앞의 잔디밭에 일곱명의 남녀가 어울어져 있었다. 이들은 바로 카타리나와 그녀의 친구들이었는데,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여학생도 한 명 끼어있었다. 히안의 무릎을 베개삼아 누워있던 폴린은 반대쪽에서 가이엔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바르키엘에게 물었다. "바르키엘. 너는 저번 학기에 성적이 어땠니?"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 바르키엘은 전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하하! 내가 우리 학부 전체에서 5등했어. 그 정도면 대충 점수를 짐작 할 수 있겠지?" "뭐?! 너 공부를 그렇게 잘했었냐?" "이봐 이 바르키엘님은 못하는 것이 어디 있냐?" 예전 같았으면 그의 잘난 척에 욕을 했었겠지만, 어차피 친구가 되었고 그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했기에 험한 말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키엘의 잘난 척을 그냥 듣고 있을 폴린도 아니었기에 베고 있는 히안의 무릎을 두들기며 말했다. "잘난 척 하지마! 우리 자기는 2등 했다고! 2등!" "야! 왜 히안의 점수 가지고 네가 생색을 내냐?" "연인은 한 몸과 같다는 것 몰라? 억울하면 가이엔을 공부 시켜서 1등 만들어라!" 그들 둘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가이엔이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바르키엘의 옆구리를 찔렀다. "바르키엘... 폴린..." 순간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 챈 폴린 역시 카타리나를 바라보았다. "미.. 미안 카타리나. 우리끼리 히히덕 거려서 미안해." 하지만 카타리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폴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타리나? 무슨 생각하고 있어?" 그제야 폴린의 목소리를 들은 듯 했는데, 자신에게 모아진 시선을 의아해 했다. "왜? 나한테 무슨 말 했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러고 있는 거야? 너 뮤스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폴린이 짖굿은 말투로 카타리나에게 장난을 칠 때였다. 그들의 행동을 재미있게 관찰하고 있던 여학생이 놀라운 것을 발견 한 양 물었다. "어머나! 카타리나 선배도 애인이 있었어요?"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여학생은 헤밀튼, 바로 연금술 학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었다. 그녀는 남자 같은 이름에 어울리게 성격이 유별났는데, 뮤스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 2의 폴린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헤밀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타리나에게 묻자 직속 선배인 폴린이 근녀를 대신해서 대답해주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우리 후배야! 너는 이 카타리나 선배가 애인이 있는 것도 몰랐단 말이니?" "전혀 몰랐는 걸요? 그럼 카타리나 선배 애인도 우리학교 선배인가요? 나이는요? 어떤 사람이죠?" 숨이 모자라지도 않는지 끊어짐 없이 묻고 있는 헤밀튼이었다. "호홋! 이 선배님께서 좋은 것을 보여주지." 의기 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한 폴린은 가방에서 얇은 두께의 책을 한권 꺼냈는데, 책장 사이에 뭔가가 끼워져 있는 듯 볼록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카타리나의 애인이란다." 책장을 벌리자 몇 장의 사진이 사이에 끼워져 있었는데, 뮤스가 드베인 숲에서 나온 직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것을 주워든 헤밀튼은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와! 이게 무슨 그림이에요?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해요!" "녀석... 촌스럽긴. 이건 사진이라는 거야." 몇 장의 사진을 넘겨보던 헤밀튼은 사진 안에서 웃고있는 뮤스를 짚었다. "이 사람이 혹시 카타리나 선배의 애인? 그런데 왜 이렇게 옷을 못 입어요?" 헤밀튼의 솔직한 감상에 폴린과 친구들은 크게 웃고 있었다. "푸하핫! 정말 예리한 지적이군. 옷을 못 입는 다니!" "하긴 일밖에 모르던 애가 옷에 신경을 쓸리 없지." "풋! 그래도 너무하지 않니? 명색이 선배인데 조금은 좋게 봐주지..." 하지만 카타리나 만큼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는데, 오히려 뮤스에 대해 험담을 한 점에 기분이 상한 듯 한 모습이었다. "여기 뮤스가 없다고 해도 그렇게 놀리면 어떻게 하니? 그리고 지금은 그때 보다 훨씬 멋있어 졌다고!" 카타리나의 말에 친구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는데, 그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한 폴린이 그녀에게 다가며 말했다. "카타리나 화난 거야? 응? 우리는 그냥 뮤스 생각을 하니까 너무 웃겨서... 솔직히 헤밀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니..." 말을 하고 있는 폴린의 앞으로 카타리나가 보란 듯이 손을 내밀었다. Total 29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50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사진이 들려있었는데,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자세를 바꾼 폴린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 뮤스니?! 설마 다른 사람 만나고 온거아니야?" 놀라움을 표하는 폴린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친구들은 그녀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사진 안에서는 단정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카타리나가 따뜻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그녀의 옆으로 머리를 뒤로 묶은 뮤스가 다정하게 서있었는데, 깔끔하게 입은 하얀 셔츠 하나만으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완전 다른 사람이잖아! 누가 이 사람보고 뮤스라고 하는 거야?" "뮤스가 언제 이렇게 머리가 길었니?" "이 녀석이 이렇게 괜찮게 생겼었나..." 폴린과 친구들이 감탄성을 지르고 있을 때 선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사진을 볼 수 없었던 헤밀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도 보여줘요! 저도 보고 싶단 말이에요!" 하지만 사진에 정신을 빼앗겨 대답이 없자 그녀는 선배들의 몸 사이를 힙겹게 비집고 들어갔다. 원래 틈이란 것은 조금만 있더라도 밀어 넣으면 넓어지기 마련이었는데, 지금도 역시 헤밀튼에 의해 비좁게 붙어있던 그들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녀린 몸으로 애를 쓸려니 금방 힘이 빠지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집착이 강하면 길이 보인다는 말이 통하기라도 한 듯 선배들이 땅을 짚고 있는 팔들 사이로 누군가가 들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그것은 손을 뻗치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다. 이에 마지막 힘을 짜낸 헤밀튼은 팔을 쭈욱 뻗었고, 결국은 그 사진의 일부분을 잡을 수 있었다. "야호! 이제 잡았다!" 큰 소리로 환성을 지른 헤밀튼은 재빨리 잡아챘는데, 손끝으로 둔탁한 느낌이 나며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곧 히안의 외침에 의해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진이 찢어 졌어!" 선배들 사이에서 팔을 꺼낸 헤밀튼은 손에 들려있는 사진 조각을 보았다. "카..카타리나 선배... 죄.. 죄송해요! 저는 너무나 보고싶어서." 아무런 말없이 헤밀튼에게 다가 온 카타리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 조각을 보았다. 그 안에는 반쪽의 뮤스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듯 했다.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카타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 나 먼저 가 볼께... 내일 봐..." 인사를 하며 급히 잔디밭에 있던 가방을 챙긴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남은 그녀의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사건의 원인이 된 헤밀튼은 폴린을 보며 울먹였다. "폴린 선배... 저 어떻게 해요..." "괘..괜찮아 그냥 사진이 실수로 찢어 졌을 뿐인데 뭐. 그러니까 울지마." 말은 그렇게 해주었지만 헤밀튼의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를 하던 폴린 역시 전신이 떨릴 정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물어 가고있는 노을은 젠타카강의 강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분리상판 공사가 시작 된지 보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7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교대로부터 첫번째 교각까지 얹어진 분리상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완성이 된 것이 아니었기에, 철골 사이에 빈틈이 보이기도 했지만, 버티고 있는 철골은 충분히 버틸 힘이 있어 보였다. 저녁이 되어가면서 한참 움직이던 설비들은 작동을 멈추었고, 사람들 역시 오늘 작업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던 뮤스는 켈트에게 물었다. "지금 철골을 덮고있는 실크로스 양회는 어느 정도 경화(양회가 강도를 가지게 되는 작용)가 됐죠?" "비록 경화가 빠른 실크로스 양회라 해도 일주일 정도는 더 있어야 안정적인 수준까지 경화가 되지." "그래도 생각보다는 조금 빠른 진전이에요. 이 대로 간다면 충분히 다음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1차 분리교판을 완성할 수 있겠네요." 말을 하던 뮤스는 켈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일꾼들 사이에서 영웅대접 받으니까 재미있어요? 나 참 아저씨가 전설적인 토목가였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뮤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이 녀석아 내가 전부터 수도 없이 말했는데, 네 녀석이 귀 밖으로 흘렸잖아! 내가 공학 쪽이라면 몰라도, 토목 쪽은 거의 움직이는 전설에 가깝다고!" "그래요. 저는 움직이는 전설이랑 이야기해서 영광입니다. 하핫! 아무튼 오늘 작업은 여기서 마쳐야 하니 사람들에게 철수 지시 좀 내려 주세요. 저는 내일 분량의 자재를 요청해야 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라. 나중에 방에서 보자고!" "수고하세요 아저씨!" 손을 흔들면서 전뇌거를 향해 달려가는 뮤스의 뒷모습을 보며 켈트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불쌍한 녀석... 빨리 이일이 끝나야 저 녀석도 편안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움에 고개를 내 저은 켈트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상하군... 누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다니..."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고, 있는 생명체라곤 잔디밭 위에서 벌레를 찾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뿐이었다. "흠... 신경과민인가? 그건 그렇고 저 까마귀는 살이 좀 붙었군..." 금새 이상한 기분 따위는 잊은 켈트는 눈앞의 까마귀를 보며 침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가 모종의 흑심을 품고 다가가자 까마귀는 그의 의도를 알기라도 하는 듯 뒷걸음질 쳤고, 이내 날개 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까마귀를 놓친 켈트는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에잇! 날아가 버리다니 젠장! 아무래도 오늘은 닭고기가 먹고싶군. 페나에게 닭고기를 해달라고 해야겠어..." 아쉬움을 접은 켈트가 특유의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까마귀는 먼발치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까마귀의 몸이 은은한 빛을 내며 큰 빛 덩이로 변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체가 완전히 드러났는데, 까마귀 털이 달린 망토를 어깨에 걸친 채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망디슈의 모습이었다. 그는 켈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쇳소리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클... 조금만 늦었으면 저 녀석의 뱃속으로 들어갈 뻔 했군. 게다가 느낌만으로 나의 존재를 눈치채다니 늙다리 드워프 다운 걸. 하지만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대가는 받아내야 겠어. 흐흐흣 기대하시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하던 그는 망토를 끌어당기며 다시 까마귀로 변해 날개 짓을 했는데, 실크로스 교의 공사장을 한 바퀴 맴돌던 그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문득 아래에서 그 까마귀를 보던 켈트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공사장의 밤만큼 한적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루의 피로에 절은 일꾼들은 세상 모르게 잠에 들었고, 접근하는 이들 마저 없었기에 강가의 개구리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공사장 부근의 숙소에서 잠을 자던 쿤도는 덜 깬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러서부터 힘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는 여러 종류의 일터를 전전긍긍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번 실크로스 교의 공사 소식을 듣고 벨링으로 부터 1000켈리 이상 떨어져 있는 립츠히라는 곳에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의 힘을 보며 용병 일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안전하고 한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이 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제길... 어제 많이 먹고 자는게 아니었는데. 아... 속이 안 좋은걸?" 쿤도는 자기 전에 급하게 먹은 고기가 화근이 되었는지 배가 아파 옴을 느끼며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상당히 급했기에 한시라도 빨리 일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바지춤을 들치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쿤도는 마땅한 곳을 살폈다. 물론 숙소 근처에서 일을 볼 수도 있었지만,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밟을 가능성도 있었고, 냄새 또한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기에 의외로 일을 볼 수 있는 곳이 한정 적임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는 숙소로부터 50멜리가량 떨어진 강가를 바라보았다. "흐흣! 일을 보고 대충 강으로 밀어 넣으면 되겠지 뭐." 이제야 마땅한 장소를 정한 그는 서둘러 강가로 움직였다. 강가에 도착한 쿤도는 급히 바지를 내렸다. 거의 동시에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속을 뒤집고 있던 원인 물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배설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쿤도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쿤도는 배설물을 나무 도막으로 밀어 강물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마무리를 지었고, 손을 강물에 몇 번 행군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침대에 대한 그리움에 발걸음을 재촉하던 쿤도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다른 일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눈으로 확인해야지 만 상황을 믿는 사람의 심리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었다. 실크로스 교의 바로 아래까지 온 쿤도는 눈을 얇게 뜨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기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흠.. 분명히 소리가 났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슬쩍 고개를 돌리던 쿤도는 교대의 앞에 눈에 익숙지 않은 구덩이가 나있음을 발견했다. "저런 것이 있었나? 분명히 내가 숙소로 돌아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의아한 생각에 그곳으로 다가간 쿤도는 구덩이의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깊이는 상당히 깊어서 3 멜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군. 교대 공사는 다 끝나서 이곳을 팔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보고를 해야겠는걸?" 흙이 뭍은 무릎을 털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고개를 들던 쿤도는 뒷덜미가 화끈해 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눈 앞은 그 충격으로 노랗게 보이고 있었다. 남은 힘을 다해 몸을 돌린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강타한 인물을 볼 수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지 못했다. -털썩!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쿤도의 주변에는 세 명의 인물이 서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마법사 길드의 망디슈였고, 나머지 둘은 그를 찾아와 매쉬라스 후작의 편지를 전하던 인물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쓰러져 있는 쿤도를 응시하더니 그의 몸뚱이를 발로 차 웅덩이에 밀어 넣었다. "제길 이 녀석도 운이 정말 없군. 그냥 잠이나 자고 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훗! 그래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놀라서 말이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망디슈는 아무런 말없이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손이 망토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은은한 푸른빛이 그들의 얼굴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황홀한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던 망디슈는 숨이라도 그것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준비한 상자를 열어서 가지고 오게..." 그의 말을 들은 사내 중 한 명은 교대의 벽 아래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흰색의 상자를 꺼냈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내는 천천히 열며 망디슈의 앞으로 내밀었는데, 상자의 안쪽에는 폭신한 솜이 가득 깔려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망디슈는 상자 안으로 푸른빛이 도는 수정을 끼워 넣으며 뚜껑을 덮었다. "크큭. 잘 자거라 아가야..."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마친 그는 상자를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렸고,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들에게 고개 짓을 했다. "어서 대충 흙을 덮게나...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을 거야. 크크크큭!" 말을 마치던 망디슈의 몸이 빛을 뿜으며 급격히 작아졌고, 결국에는 까마귀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변했다. 날개 짓을 몇 차례하던 까마귀는 사내들에게 눈길을 한 번 주며 높이 날아올라 어두운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망디슈가 사라지는 것을 보던 사내들은 흙을 한 삽 퍼서 구덩이로 던지며 말했다. "힘든 일은 다 시켜 먹고 가버리는 군. 아무튼 마법사란 녀석들은..." "흐흣... 그래도 걱정 말게. 저 녀석도 이번 일이 끝나면 저렇게 날아다니는 것도 마지막 일 테니." 사내들의 삽은 점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51 재판. 실크로스교의 사고 현장에는 야간 작업용 전뇌등이 불을 밝혔고, 즉시 동원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뒤처리 작업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실크로스교로부터 일꾼들의 숙소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인명피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는데 실종 1명이라는 수치로 인명 피해에 대한보고는 전부였다. 아직 밤이었기에 사고 현장을 한 눈에 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야간 작업용 전뇌등에 비친 실크로스교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는데, 굳건히 서있던 교대가 반 이상 무너져 내려 철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분리교판에 들어간 두꺼운 철골들이 이리저리 휘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켈트를 비롯한 토목가들과 함께 실크로스교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뮤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켈트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죠?" "흠... 어떻게 하긴! 다시 올려야지! 우리가 고작 이런 일에 포기를 할 것 같으냐?" 다른 토목가들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와 여러 토목가들의 행동이 위안이 되긴 했지만, 이미 자신감을 상실 한 뮤스의 어둡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 날리 없었는데... 숙소로 돌아오기 전 지진계도 틀림없이 확인 해 봤어요..." 뮤스는 이번 일을 인정하기가 힘든 모습이었는데, 그럴 수록 켈트는 착찹 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뮤스... 자연의 움직임은 우리들의 힘으로 예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빨리 잊어버리도록 해. 사람이 살면서 실패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니..." 켈트의 말을 듣고 있는 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토목가들이 일꾼들에게 뒤처리 작업 지시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후, 켈트와 뮤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들의 작업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였다. 그들의 등뒤로부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뮤스군... 이곳에 있었군."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프라이어 대장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서있는 것이었다. "프라이어 대장님이셨군요. 그런데 이곳에는 어떻게..." 뮤스가 물어오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프라이어 대장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우리는 자네의 연행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네. 죄명은... 직무과실이네." 연행이라는 말을 듣던 켈트는 크게 분노한 모습으로 뮤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체 누가 뮤스를 연행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인가! 게다가 직무과실이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 아닌가! 말을 좀 해보게!" 하지만 프라이어 대장은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켈트님. 저희도 위에서부터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몸인지라..." "자네는 황실 직속이니 그 잘난 황제가 뮤스를 연행하라고 명했는가! 아니면 가비르 재상이?!" 켈트의 말에 프라이어 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황실 직속이긴 하지만, 사법권에 의해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번 일은 사고의 경위를 보고 받은 매쉬라스 후작님께서 명령한 것입니다." 켈트는 더 이상 할말을 잃은 듯 허무한 표정이었다. "허헛... 몸도 안 사리면서 일을 했더니 이런 일로 연행이라니..." 프라이어 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억울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켈트를 지나 뮤스에 다가갔고, 가볍게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해 주게나." 뮤스는 그를 원망할 마음이 없었고, 이미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 마저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쾅!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공사중인 실크로스교가 무너지고 뮤스군이 지금 연행되어 감금을 당했다니요!"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을 하던 황제가 가비르 재상에게 뮤스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크게 화가난 물기가 묻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새벽 무렵에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 공사중인 분리교판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매쉬라스 후작은 자신이 가진 사법권을 이용하여 직무과실이라는 죄명으로 책임자인 뮤스군을 연행했다고 합니다. 저도 크게 놀라 매쉬라스 후작을 찾아가 보았지만,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해야했을 일을 했다고 하면서 물러설 뜻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곧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이더군요." "말도 안돼는 소립니다! 당장 내가 명했다고 전하여 뮤스군을 풀어주라고 전하시오!" 분노하고 있는 황제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폐하께서도 아시다 시피 제국의 사법권은 황권과 독립 되어있기에 폐하께서 그렇게 명을 하신다 하더라도 큰 영향력을 행사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 더욱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가비르 재상의 설명에 더욱 답답해진 황제는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 머리 속에 욕망만 가득 찬 귀족들에게 뮤스군의 일을 맡겨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 그렇지! 재판의 심원을 맡은 귀족들을 매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돈에 미친 작자들이 아닙니까!" 답답한 마음에 황제의 격에 맞지 않는 거친 말까지 내뱉어 봤지만 가비르 재상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그것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폐하께서 뮤스군을 총애하신다는 것을 알고있는 귀족들은 예전부터 뮤스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들이 폐하의 뜻에 따라 움직여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그만! 그만 됐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말허리를 자른 황제는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후우...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가비르 재상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뮤스군을 빼낼 방도를 강구해 보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황제에게 예를 올린 가비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한 황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무능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가비르 재상은 책상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뮤스의 누나인 크라이츠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뮤스가 처벌이라도 받게 되면 그녀의 분노를 살 것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할 뿐이었다. -벌컥! 박차고 들어오는 문소리를 들은 가비르 재상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다. 차마 얼굴을 들고 볼 수 없었던 가비르 재상은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크라이츠님..." 인사를 마친 가비르 재상은 소리지를 그녀의 반응을 대비라도 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그의 예상대로 귀청을 떨어트릴 만큼 큰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따위 말이 입에서 나오나요. 가비르!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이나 해봐요!" 갑자기 찾아온 편두통을 느낀 가비르 재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크라이츠를 소파로 안내했다. "조금만 침착하시고 잠시 앉으시죠." "다른 말은 몰라도 지금 나에게 침착 하라는 말은 통하지 않으니 기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러니 좀 앉으시죠."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한번 쏘아본 크라이츠는 그의 부탁대로 소파에 앉았고, 가비르 역시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크라이츠님께서 흥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저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몇 마디의 말을 듣던 크라이츠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설은 다 빼고 말하세요. 그런 말을 듣다가 언제 내가 폭발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지 모르니까요." 크라이츠의 말에 목이 타옴을 느낀 가비르 재상은 그녀의 말대로 사설을 빼고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지금 뮤스군은 직무과실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 주최는 사법권을 지니고 있는 매쉬라스 후작이라는 귀족입니다. 지금 뮤스군을 빼내는 방법은 단 두 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매쉬라스 후작에게서 사법권을 뺏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주로 잡혀 있는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입니다." 가비르 재상의 설명을 잠시 생각해보던 크라이츠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매쉬라스라는 작자의 사법권을 빼앗는 편이 직효겠군요."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제가 크라이츠님께 귀뜸을 해드렸던 것과 같이 귀족들은 뮤스군에 대해 그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법권의 이동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데, 황제폐하와 저를 비롯한 후작 이상의 귀족 10명이 투표를 해서 사법권의 이동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만 귀족들은 거의 한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황궁의 모든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는 판국인 것입니다." "그럼 만약 재판에서 유죄판정을 받았을 때는 어느 정도의 형벌이 예상되죠? 유능하기로 소문난 가비르 재상의 머리라면 지금쯤 충분히 예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녀의 말에 잠시동안 대답을 못하고 있던 가비르 재상은 한참만에 입 주변을 손으로 쓸며 힘겹게 대답했다. "만약... 재판에서 유죄 판정이 난다면 보통의 경우는 교수형입니다만 황제폐하의 입김이 작용 할 테니... 무기한 유배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크라이츠는 분노를 견디지 못한 듯 높은 톤의 목소리로 크게 웃고 있었다. "호호호호홋! 무기한 유배라... 굉장한 아량이군요!" 순간 적으로 웃음을 멈춘 크라이츠는 눈가로 살기를 뿜으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판결이 나는 순간, 이 벨링이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 두세요. 그 누구도 내 동생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해요..." 잠시 그녀의 말을 생각을 해보던 가비르 재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크라이츠님... 그 말은 드래곤으로서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뮤스군의 누나로 유희중인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가비르의 물음에 그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양쪽 모두예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죠. 크라이츠님은 드래곤이십니다. 드래곤은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끼어 드는 것이 금지 되어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저와 마찬가지로 뮤스군 역시 인간입니다. 위대한 드래곤이신 크라이츠님께서 고작 인간의 일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크라이츠는 가비르 재상의 냉철한 지적에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유희중에 만난 인간쯤이야 어떻게 되든 알 바가 아니었고, 운이 그 인간이 죽게 된다면 유희를 깨고서 드래곤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드래곤의 시점으로 봐서는 그것이 정상이었고, 당연한 것이었다. 크라이츠는 한참 동안이나 뮤스에 대한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는데,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 낸 그녀는 오만한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며 말을 던졌다. "난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할 뿐이에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예상외의 그녀의 대답에 가비르 재상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고, 대답을 마친 크라이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뮤스와 면회 정도는 할 수 있겠죠?" 그나마 크라이츠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가비르 재상은 긴장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대답했다. "그것정도라면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죠." 가비르는 짧은 말을 남기고 나가는 크라이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때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사랑하던 여인이었지만,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포기를 해야만 했던 그녀... 하지만 지금 만큼은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고 있었다. Total 29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52 매쉬라스 후작은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서 열린 창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쾌한 봄의 밤바람은 향기롭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골치를 썩던 뮤스에 대한 일이 잘 진전되어져 가자 몇 년은 더 젊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와인 잔을 떨어뜨린 그는 오장육부를 모두 토해버릴 것만 같은 탁한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크윽..." 입을 가리고있던 매쉬라스 후작이 손을 펴보자 손아귀에는 붉은 포도주만큼이나 검붉은 피가 고여있었다. 그것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쯔쯧... 벌써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는 것인가? 아직 이루어야 할 것이 많은데...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아! 내 생명이 모두 타버리는 그날까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욕망을 충족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니까..." 피가 끓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창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똑똑! 수건으로 손에 묻은 각혈을 닦아내던 매쉬라스 후작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외쳤다. "흠흠... 들어오게!' 문이 열리면서 실크로스교를 붕괴시켰던 사내 중 한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은 매쉬라스 후작은 새로운 와인 잔에 와인을 부으며 물었다. "망디슈는 잘 처리했나? 애를 좀 먹었을 텐데..." 그의 물음에 사내는 자랑을 하듯이 대답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매쉬라스 후작님의 심복 아닙니까. 녀석이 까마귀로 변해 달아나려 해서 잡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물론 증거가 될 만한 것들 역시 모두 없앴습니다 매쉬라스 후작님."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매쉬라스 후작은 허전한 사내의 옆자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저희라면 콜린도 포함된 말일 것인데... 콜린은 어디 가고 혼자만 왔나?" 사내는 말하기가 껄끄러운 듯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매쉬라스 후작이 재차 묻자 그제야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코..콜린은 망디슈의 마법에 맞아 타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후작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미안 할 것이 뭔가? 콜린은 능력이 없어 죽은 것이고 자네는 그만한 능력이 있기에 이자리에 있는 것이야. 그러니 콜린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자네에게 얹어 주도록 하지." 그의 말 대로라면 자신에게 오는 수당이 두 배가되었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슬픔마저도 머리에서 지운 듯 했다. "감사합니다 매쉬라스 후작각하!" "고맙긴... 아무튼 수고했네. 그럼 이만 나가서 푹 쉬게나."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허리를 굽히 숙이며 깍듯한 인사를 한 사내는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매쉬라스 후작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책상머리에 앉은 매쉬라스 후작은 와인 잔에 남은 와인을 모두 들이키며 말했다. " 능력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야. 동료가 죽더라도 내가 살아남아 인정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능력이지..." 말을 마치며 와인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매쉬라스 후작은 죄수들을 정리해 놓은 서류를 펼쳐 보았다. 가장 앞장에 뮤스 드라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기만 해도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흠 공학원의 원장이라. 이렇게 써놓고 보니 상당한 거물인걸? 크크큭! 젊은 데다가 머리도 좋고, 재력도 굉장하고... 내 측근으로 만들면 좋겠지만, 너무나 고지식한 것이 탈이야. 이런 부류의 인간은 작은 미끼만 던져 주면 스스로 자멸을 하고 말지. 그럼 어디한번 골치 좀 썩어 보게나 뮤스원장."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매쉬라스 후작은 서류를 덮으며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이 춤을 춘다. 바람이 한 점 없는 지하였지만, 붉은 껍질에 노란 알맹이를 가진 횃불은 어지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옆으로 차가워 보이는 쇠창살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쇠창살의 안으로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있는 사람들이 자아와의 대화를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직 이것만이 지하감옥의 모든 것이었다. 지하 감옥의 복도는 양어깨가 벽에 닿을 정도로 좁았다. 이것은 죄수들의 대규모 탈출을 막기 위해 이런 모습인 듯 했는데, 복도의 안쪽에는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갇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횃불의 불빛 마저 제대로 닿지 않는 깊은 감옥에 뮤스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모습이었는데, 머리는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에는 더러운 오물이 튀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시선도 옮기지 않은 채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챙! 챙!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죄수들의 목소리를 들어 봤을 때 식사 시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뮤스가 갇혀있는 감옥의 앞에도 간수 두명이 도착했는데, 한 명은 음식물이 담긴 통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식기에 음식을 퍼주는 일을 했다. 작은 그릇에 음식을 반쯤 담은 간수는 조금 넓은 쇠창살의 사이로 그릇을 밀어 넣어 주며 히득거렸다. "크크큭! 고상하신 분의 입에 이런 음식이 맞을 지는 모르겠군. 싫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다른 죄수들을 줄 수도 있으니!"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어 온 이야기였기에 별다른 감응도 없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들이 매일 같이 한마디도 바꾸지 않고 똑 같은 말을 한다는데 있었는데,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질리지 않거나, 어제 했던 말을 기억 못하는 듯 했다. 물론 뇌공력을 사용한다면 이 정도의 쇠창살쯤이야 맨손으로 뜯고 나가 그들을 신나게 두들겨 줄 수도 있었지만, 뮤스는 마음은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올 만큼 여유롭지는 못했다. 평소 같으면 음식을 나눠주고 돌아가 도박이나 즐길 간수들이 오늘은 웬일인지 뮤스의 감옥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 실크로스교 소식 들었나?" "벨링에 실크로스교가 무너진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아무래도 뮤스의 심정을 자극하려는 생각인 듯 했고, 자신을 조롱하던 말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뮤스 역시 괴로운 듯 귀를 막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 뮤스를 곁눈질로 살피던 간수는 입가로 미소를 그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누가 그걸 말했나? 무너진 실크로스교의 잔해를 치우다가 시신이 한 구 발견되었다고 하더군." 그의 이야기에 또 다른 간수는 짐짓 놀란 척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이 정말인가?" "말도 말게... 잔해에 짓이겨진 시신이 얼마나 처참하던지 발견할 당시 그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구토를 했다고 하더군! 근육은 다 찢어지고, 뼈는 가루가 되었다지 아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귀를 막고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할 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뮤스의 귀를 파고들며 그를 괴롭혔다.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을 쫓아내려 할 때마다 그의 눈앞에는 붕괴된 실크로스교의 영상이 떠올랐고,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듯 했다. 간수들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닌 듯 했다. "그럼 그 시체의 신분이 밝혀지긴 했나?" "음... 이름이 뭐였더라. 쿤도라고 했던가? 이상한 이름이지?" "괴상하군. 아무래도 남부의 이름 같아." 쿤도라는 이름을 들은 뮤스는 한 순박했던 청년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23살의 젊은이인 그는 고향에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할머니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털털한 성격에 고기로 만든 음식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언제나 젊은 나이에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한다며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던 청년이었다. 그렇게 밝고 낙천적인 쿤도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양회 덩어리에 깔려 산산히 짖이겨 졌다고 하니 뮤스가 받은 충격은 말로 설 명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쿠..쿤도가... 쿤도가... 다.. 나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야! 으아아아악!" 뮤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보던 간수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간수들이 감옥의 바깥쪽에 있는 감시실로 나오자 매쉬라스 후작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잘 했나?" 그의 물음에 간수 중 한 명이 징그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히 누구의 분부이신데 저희가 실수를 저지르겠습니까. 저희 이야기를 듣던 그 녀석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더군요." "크큭. 아주 잘했네. 이것으로 맥주나 한잔 시원하게 마시게." 득의의 웃음을 지은 매쉬라스 후작은 간수들의 등을 두들기며 소매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던져 주었다. 들어보기만 해도 묵직했기에 상당한 금액이 들어있음을 깨달은 간수들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아양을 떨었다. "헤헤헷. 이 정도 일에 이렇게 많은 보수를 주시다니 역시 배포한번 크십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하지만 매쉬라스 후작은 그들과는 반대로 표정을 딱딱히 굳히며 말했다. "그것은 그리 비싼 대가가 아니라네... 이일을 발설 할 경우 목숨으로 그 대가를 돌려받을 테니 잘 처신해야 할걸세." 매쉬라스 후작의 으름장에 짓눌린 간수들은 고개만 쉴새없이 끄덕였고, 뒤처리를 잘 했다고 판단 한 매쉬라스 후작은 바람을 일으키듯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수정분량 (1) 저물어 가고있는 노을은 젠타카강의 강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분리상판 공사가 시작 된지 보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7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교대로부터 첫 번째 교각까지 얹어진 분리상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완성이 된 것이 아니었기에, 철골 사이에 빈틈이 보이기도 했지만, 버티고 있는 철골은 충분히 버틸 힘이 있어 보였다. 저녁이 되어가면서 한참 움직이던 설비들은 작동을 멈추었고, 사람들 역시 오늘 작업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던 뮤스는 켈트에게 물었다. "지금 철골을 덮고있는 실크로스 양회는 어느 정도 경화(양회가 강도를 가지게 되는 작용)가 됐죠?" "비록 경화가 빠른 실크로스 양회라 해도 일주일 정도는 더 있어야 안정적인 수준까지 경화가 되지." "그래도 생각보다는 조금 빠른 진전이에요. 이 대로 간다면 충분히 다음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1차 분리교판을 완성할 수 있겠네요." 말을 하던 뮤스는 켈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일꾼들 사이에서 영웅대접 받으니까 재미있어요? 나 참 아저씨가 전설적인 토목가였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뮤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이 녀석아 내가 전부터 수도 없이 말했는데, 네 녀석이 귀 밖으로 흘렸잖아! 내가 공학 쪽이라면 몰라도, 토목 쪽은 거의 움직이는 전설에 가깝다고!" "그래요. 저는 움직이는 전설이랑 이야기해서 영광입니다. 하핫! 아무튼 오늘 작업은 여기서 마쳐야 하니 사람들에게 철수 지시 좀 내려 주세요. 저는 내일 분량의 자재를 요청해야 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라. 나중에 방에서 보자고!" "수고하세요 아저씨!" 손을 흔들면서 전뇌거를 향해 달려가는 뮤스의 뒷모습을 보며 켈트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불쌍한 녀석... 빨리 이일이 끝나야 저 녀석도 편안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움에 고개를 내 저은 켈트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상하군... 누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다니..."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고, 있는 생명체라곤 잔디밭 위에서 벌레를 찾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뿐이었다. "흠... 신경과민인가? 그건 그렇고 저 까마귀는 살이 좀 붙었군..." 금새 이상한 기분 따위는 잊은 켈트는 눈앞의 까마귀를 보며 침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가 모종의 흑심을 품고 다가가자 까마귀는 그의 의도를 알기라도 하는 듯 뒷걸음질 쳤고, 이내 날개 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까마귀를 놓친 켈트는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에잇! 날아가 버리다니 젠장! 아무래도 오늘은 닭고기가 먹고싶군. 페나에게 닭고기를 해달라고 해야겠어..." 아쉬움을 접은 켈트가 특유의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지자 까마귀는 먼발치에 내려앉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까마귀의 몸이 은은한 빛을 내며 큰 빛 덩이로 변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체가 완전히 드러났는데, 까마귀 털이 달린 망토를 어깨에 걸친 채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망디슈의 모습이었다. 그는 켈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쇳소리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클... 조금만 늦었으면 저 녀석의 뱃속으로 들어갈 뻔 했군. 게다가 느낌만으로 나의 존재를 눈치채다니 늙다리 드워프 다운 걸. 하지만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대가는 받아내야 겠어. 흐흐흣 기대하시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하던 그는 망토를 끌어당기며 다시 까마귀로 변해 날개 짓을 했는데, 실크로스 교의 공사장을 한 바퀴 맴돌던 그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문득 아래에서 그 까마귀를 보던 켈트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공사장의 밤만큼 한적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루의 피로에 절은 일꾼들은 세상 모르게 잠에 들었고, 접근하는 이들 마저 없었기에 강가의 개구리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공사장 부근의 숙소에서 잠을 자던 쿤도는 덜 깬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러서부터 힘 하나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는 여러 종류의 일터를 전전긍긍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이번 실크로스 교의 공사 소식을 듣고 벨링으로 부터 1000켈리 이상 떨어져 있는 립츠히라는 곳에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주변의 동료들은 그의 힘을 보며 용병 일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안전하고 한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이 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제길... 어제 많이 먹고 자는게 아니었는데. 아... 속이 안 좋은걸?" 쿤도는 자기 전에 급하게 먹은 고기가 화근이 되었는지 배가 아파 옴을 느끼며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상당히 급했기에 한시라도 빨리 일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바지춤을 들치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쿤도는 마땅한 곳을 살폈다. 물론 숙소 근처에서 일을 볼 수도 있었지만,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밟을 가능성도 있었고, 냄새 또한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었기에 의외로 일을 볼 수 있는 곳이 한정 적임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는 숙소로부터 50멜리가량 떨어진 강가를 바라보았다. "흐흣! 일을 보고 대충 강으로 밀어 넣으면 되겠지 뭐." 이제야 마땅한 장소를 정한 그는 서둘러 강가로 움직였다. 강가에 도착한 쿤도는 급히 바지를 내렸다. 거의 동시에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속을 뒤집고 있던 원인 물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배설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쿤도는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쿤도는 배설물을 나무 도막으로 밀어 강물 쪽으로 밀어 넣으며 마무리를 지었고, 손을 강물에 몇 번 행군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침대에 대한 그리움에 발걸음을 재촉하던 쿤도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다른 일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눈으로 확인해야지 만 상황을 믿는 사람의 심리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었다. 실크로스 교의 바로 아래까지 온 쿤도는 눈을 얇게 뜨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기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흠.. 분명히 소리가 났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슬쩍 고개를 돌리던 쿤도는 교대의 앞에 눈에 익숙지 않은 구덩이가 나있음을 발견했다. "저런 것이 있었나? 분명히 내가 숙소로 돌아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의아한 생각에 그곳으로 다가간 쿤도는 구덩이의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는데 깊이는 상당히 깊어서 3 멜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군. 교대 공사는 다 끝나서 이곳을 팔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보고를 해야겠는걸?" 흙이 뭍은 무릎을 털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고개를 들던 쿤도는 뒷덜미가 화끈해 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눈앞은 그 충격으로 노랗게 보이고 있었다. 남은 힘을 다해 몸을 돌린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강타한 인물을 볼 수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지 못했다. -털썩!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쿤도의 주변에는 세 명의 인물이 서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마법사 길드의 망디슈였고, 나머지 둘은 그를 찾아와 매쉬라스 후작의 편지를 전하던 인물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쓰러져 있는 쿤도를 응시하더니 그의 몸뚱이를 발로 차 웅덩이에 밀어 넣었다. "제길 이 녀석도 운이 정말 없군. 그냥 잠이나 지고 있을 것을..." "훗! 어차피 이곳에서 죽으나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깔려죽으나 그게 그것 아닌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망디슈는 아무런 말없이 망토 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손이 망토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은은한 푸른빛이 그들의 얼굴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황홀한 표정으로 한동안 바라보던 망디슈는 숨이라도 그것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준비한 상자를 열어서 가지고 오게..." 그의 말을 들은 사내 중 한 명은 교대의 벽 아래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흰색의 상자를 꺼냈다. 그것을 가지고 온 사내는 천천히 열며 망디슈의 앞으로 내밀었는데, 상자의 안쪽에는 폭신한 솜이 가득 깔려있었다. 그것을 받아든 망디슈는 상자 안으로 푸른빛이 도는 수정을 끼워 넣으며 뚜껑을 덮었다. "크큭. 잘 자거라 아가야..."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마친 그는 상자를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렸고,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사내들에게 고개 짓을 했다. "어서 대충 흙을 덮게나...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을 거야." 사내 중 한 명이 흙을 한 삽 퍼담으며 물었다. "매쉬라스 후작님께서 이것이 다른 마법사에게 발각될 일은 없냐고 물으시더군. 왜 그런 것 있잖소? 마법사들이 마나를 탐지하거나 그런 것 말이야!" 그의 말을 듣던 망디슈는 나직한 탄성을 지으며 말했다. "호오! 제법 치밀하신 후작님이시군 그래. 하지만 나 망디슈를 너무나 우습게 봤군. 저 수정구는 예전에 말했다 시피 불안정한 마나를 담고 있지. 그러니 터진다 하더라도, 불안정한 마나는 빠른 속도로 흩어지며 힘을 방출하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마나의 흔적도 남지 않아! 바로 대기 중으로 흡수되어 버리거든. 내가 괜히 저 녀석을 좋아하는 줄 아나?" 마법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사내가 그의 말을 이해할 리는 없었지만, 걱정을 말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저 일들 하게. 나는 이만 가볼 테니..." 말을 마치던 망디슈의 몸이 빛을 뿜으며 급격히 작아졌고, 결국에는 까마귀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변했다. 날개 짓을 몇 차례 하던 까마귀는 사내들에게 눈길을 한 번 주며 높이 날아올라 어두운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망디슈가 사라지는 것을 보던 사내들은 흙을 한 삽 퍼서 구덩이로 던지며 말했다. "힘든 일은 다 시켜 먹고 가버리는 군. 아무튼 마법사란 녀석들은..." "흐흣... 그래도 걱정 말게. 저 녀석도 이번 일이 끝나면 저렇게 날아다니는 것도 마지막 일 테니." 사내들의 삽은 점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뮤스는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서있었다. 오히려 언덕이라도 있었으면 좋았다. 언덕이라는 것은 그 넘어의 세상을 기대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하지만 그 조차도 없었다. 지평선까지 보이는 넓은 벌판에 있는 것이라곤 그가 밟고 서있는 땅의 모래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보이기에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곳에 그는 서있었다. 두려움? 차라리 두려움이라도 좋았다. 그저 한 순간 떨면 되는 것이니 이 보다는 좋았다. 절망? 차라리 절망이라도 좋았다. 다시 용기 내어 이겨내면 되는 것이니 이 보다는 좋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기에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소리를 질러 보아도 돌아오는 것도 없었고, 달려보아도 변한 것이 없었다. 생의 마지막이 이런 것이었을 까... 그는 지금 이것이 평소의 악몽이라면 하늘에라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잠을 자던 켈트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한번 잠을 자면 누가 업어가더라도 모르는 자신의 잠버릇을 잘 알고 있던 켈트는 잠자는 중간에 깼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흠... 이것이 무슨 일이지? 아직 새벽인 것 같은데..." 잠에 대한 아쉬움에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지금 막 깨어 난 것 같지 않게 정신이 맑았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켈트는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며 머리맡에 올려져 있는 소형 전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팟! 소형 전등에 불이 들어오며 눈이 부심을 느꼈다. 손을 펼쳐 눈 주변을 가린 켈트는 베개를 세우며 몸을 기대었다. 오늘 따라 옆자리에서 잠을 자고있는 뮤스도 악몽을 꾸지 않는 듯 조용했다. 이상한 우연으로 인한 뮤스와의 만남을 한번 회상해 보기 시작하던 켈트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동안 잊지 못할 즐거움을 경험한 것은 틀림이 없었다. "끌끌...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야."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켈트는 문득 뮤스의 얼굴을 살폈다. 한데, 무슨 일인지 뮤스의 감긴 눈가로 눈물 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켈트는 뮤스의 몸을 흔들었다. "뮤스! 일어나 봐!" 처음에는 일어 날 줄 모르는 채로 눈물을 흘리던 뮤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켈트 아저씨?" 뮤스의 동공에 켈트의 모습이 잡히자 그는 불현듯 몸을 일으키며 켈트에게 와락 안겼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자신의 품에 안긴 채 흐느끼고 있는 뮤스를 떼어낼 수는 없었기에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뮤스의 흐느낌이 조금씩 안정되어가자 켈트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오늘도 악몽을 꾼 거냐?" 그의 물음에 뮤스는 잠시 꿈에 대해 생각해 보는 듯 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뭘 해야 할 지도 몰랐어요." 켈트로 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쾅! 쾅! 쾅! "뮤스군, 케르히트님 안에 있습니까?!" 뮤스의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복도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시몬의 목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켈트의 품에서 몸을 일으킨 뮤스는 눈가로 흐른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외쳤다. "네! 들어오세요!" 동시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시몬을 비롯한 토목가 몇 명이 방으로 들어왔는데, 황급한 표정이었다. "큰일 났네! 갑자기 새벽에 강진이 발생해 제 1 분리교판이 무너져 내렸고, 교대가 크게 함몰 됐어!" 시몬이 가지고온 충격적인 소식은 뮤스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 중 교대가 무너졌다는 말을 들은 뮤스는 실크로스교 주변의 정경을 더듬어 봤고, 가장 먼저 일꾼들의 숙소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숙소의 일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뮤스의 물음에 시몬은 대답을 꺼리고 있었다. "그것이... 교대가 무너지면서 그 잔해들이 숙소를 덮쳐 일꾼들이 모두 그곳에 파묻힌 상태라네..." 시몬의 말을 듣던 뮤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머리는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새파랗게 변한 그의 입술은 조금씩 움직이려 애를 쓰는 듯 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뮤스가 너무나 큰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켈트는 그 상태를 살피며 시몬에게 외쳤다. "이런 젠장 할! 지금 당장 실크로스교로 갈 준비를 해주게! 뮤스가 정신을 차리는 대로 그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아..알겠습니다 케르히트님!" 켈트를 향해 대답한 시몬은 자신의 뒤에 서있던 토목가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렸다. "자네들은 사상자들에 대한 구조 요청을 하게! 나는 그쪽으로 갈 채비를 하도록 할 테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몬과 토목가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 방에서 급히 나갔고, 방안에는 공허한 기운만 감돌고 있었다. 켈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뮤스를 향해 물었다. "뮤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물음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던 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제가 가봐야죠. 제가 그들을 책임지는 책임자인데..."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뮤스의 모습에 켈트는 마음이 착찹해 짐을 느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켈트의 거친 손은 뮤스를 일으켰다. "그럼 어서 가자꾸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래야죠..." 대답을 하며 나갈 채비를 하던 뮤스의 눈에는 꿈속의 장면들이 아른거리며 맺히고 있었다. 처벌 시몬으로부터 사고 보고를 받은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뮤스와 켈트는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잔해로부터 나온 먼지가 아직도 가시지 않아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고, 이곳 저곳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사고 현장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주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부터 시작하여 황궁에서 달려온 근위병, 그리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일꾼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다급한 기색으로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해 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잔해에 깔리지 않은 전뇌거중기를 사용하여 잔해를 들어올리고 있었지만, 전뇌거중기의 숫자가 너무나 적었고, 움직이는 속도 역시 늦어 제대로 된 효율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뮤스는 아무런 지체 없이 사고 현장으로 뛰었다. 그의 머리에는 그저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고, 귓가에 울리는 비명 소리는 그의 초조함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내 다리!" 뮤스가 밟고 지나간 거대한 양회 덩어리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움직이는 것을 멈춘 뮤스는 양회덩어리를 잠시 살폈고, 잡을 만한곳을 잡은 그는 손을 넣으며 뇌공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육중한 양회는 그를 비웃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길! 움직이란 말이야!" 뇌공력을 더욱 끌어올려 봤지만 무심한 양회 덩어리는 아주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그가 양회덩어리를 올리려 애쓰고 있을 때, 뒤따라 온 켈트와 시몬이 두꺼운 철근을 가지고 와 틈에 끼워 그를 거들자, 그제야 양회 덩어리는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양회덩어리를 조금 움직여 옆으로 치우자 그 아래로 처참한 모습의 일꾼이 한 명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는 잠결이 이런 봉변을 당했는지, 등의 밑으로는 먼지가 가득 낀 이불이 널려있었으며, 조각난 침대 파편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기에 뮤스와 켈트 그리고 시몬은 또 다른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급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구조작업을 벌인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구조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탈진을 한 모습이었지만,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신념 하에 무겁기 그지없는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뇌공력이 거의 바닥나 버리자 몸은 물먹은 솜덩이마냥 늘어졌고, 여기저기 상처가 난 손은 들어 올리기 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에 결코 주저 앉을 수 없었다. 그의 옆에서 구조작업을 돕던 켈트 역시 지렛대를 이용해 보려했지만, 손아귀의 힘은 이미 풀린지 오래였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그들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강의 뚝 위로 말을 탄 백여 명의 병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벨링시의 외곽 수비를 위해 주둔중인 기마대였는데, 이곳의 사고 소식을 듣고 뒤늦게나마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이 말에서 내려 사고 현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하자 그것을 보던 뮤스는 다시 한번 힘을 내며 이미 바닥에 가까운 뇌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동이 터 오기 시작하며 구조작업의 손놀림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잔해의 위쪽에 깔린 사람들은 대부분 구해내긴 했으나, 안쪽에 깔린 사람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데다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두껍게 쌓인 잔해를 치울 방도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에 어쩔 수 없었던 기마대의 병사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지금껏 구해낸 사람들이라도 치료를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뮤스와 켈트는 넋이 나간 사람 마냥 무너진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뮤스는 무려 백여 명에 가까운 일꾼들을 한 순간에 먹어 삼킨 잔해를 보며 몸서리치고 있었는데, 근육이 풀린 그의 어깨가 떨러기 시작하자 켈트는 그의 어깨를 굳게 잡아 주고 있었다. 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아..아저씨... 이제 어떻게 해야하죠? 절대 지진이 일어 날리가 없었어요!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지진계도 틀림없이 확인 해 봤다고요!" 뮤스는 눈앞에 보이는 이 처참한 모습을 인정하기가 힘든 모습이었는데, 그럴 수록 켈트는 착찹 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뮤스... 자연은 우리들의 힘으로 예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란다. 이것은 네 잘못이라고 할 수 없어." 켈트의 위로를 듣고 있는 뮤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있는 그들의 주변으로 시몬을 위시한 토목가들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뮤스나 켈트와 마찬가지로 밤새 계속된 구조작업에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육체의 피곤함보다는 동료들을 한순간에 모두 잃은 충격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는 듯 했는데, 이 방면에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그들도 이렇게 참혹한 일은 생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켈트와 뮤스의 얼굴을 한번씩 살피던 시몬이 켈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켈트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자연스럽게 켈트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뮤스보다 켈트가 더욱 믿음직하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고 현장을 한번 둘러본 켈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답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네. 일단 황궁에 보고를 하고 기다릴 수밖에... 그 동안 기마대의 병사들과 함께 부상자들 치료나 좀 도와주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시몬이 토목가들을 이끌고 물러가자 켈트는 뮤스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내고 있었는데, 사상자들도 사상자들이었지만, 이번 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을 뮤스가 크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수정분량 (2) 아침잠을 덜 깬 귀족들이 비상 연락을 받고서 제 4공식 회의 실로 모여들고 있었다. 30여명은 족히 마주 앉을 만한 크기의 테이블이 회의실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가장 상석에는 표정 없는 석고상 마냥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있는 황제가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는 가비르 재상이 앉아 연락을 보낸 귀족들이 모두 모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연락을 보낸 지 한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귀족들이 모두 모일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매쉬라스 후작과 그를 따르는 여러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황제와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귀족들을 둘러본 가비르 재상은 황제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을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모이시게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실크로스교에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지진에 의해 공사 중이던 분리교판이 내려앉고, 교대가 크게 무너져 내리는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있던 귀족들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은 가비르 재상은 더욱 참담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교대 근처의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일꾼들 100여명이 숙소와 함께 무너져버린 교대의 잔해에 덮였으며, 인근의 주민들과 황궁의 근위병, 그리고 벨링 근교에서 훈련을 하던 수도 경비대대의 기마대가 출동하여 구조작업을 펼쳤지만, 단 21명만이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있을 뿐, 나머지는 아직도 잔해의 아래에 묻혀있는 상태입니다." 전쟁이 종식된 이후 이렇게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온 사건이 없었는데, 이것은 사고라 말하기 보다 재앙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매쉬라스 후작이 짐짓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당장 책임자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사상자가 100명이라니요! 제가 살아오면서 이 정도의 참담한 참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귀족들 역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니! 지진에 견디기 위한 교량을 짓는 것이 그 뮤스인가 하는 작자의 일이었는데, 지진 때문에 무너지다니요! 어헛... 말이 안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분리교판이다 뭐다 해서 이상한 행동을 할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교체를 만들어 놨으니 지진에 무너지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귀족들의 원성은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어 보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뮤스에 대해 감정이 쌓인 귀족들이 거슬릴 것 없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황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손으로 탁자를 치며 외쳤다. -꽝!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지금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 보다 사고의 뒷수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책임자에 대한 책임 추궁은 그 이후에 할 테니 그렇게들 아시고 계세요!" 하지만 매쉬라스 후작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을 표명했다. "폐하! 하지만 뮤스라는 작자가 언제 책임을 회피하여 도주 할 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를 잡아들이고 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뮤스군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회피할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하오!" 황제가 강경하게 밀고 나오는 것을 본 매쉬라스는 생각을 조금 바꾸며 이번에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을 했는데, 그들의 동의를 얻는 다면 황제라 하더라도 그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셔야 합니다! 뮤스군이 폐하의 목숨을 구해 준 것과, 대관식에 큰공을 세운 것은 인정합니다만, 실크로스교의 사고는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일입니다!" 말을 마치자 매쉬라스와 눈이 마주친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듯 집요하게 파고들자 어찌 할 줄 몰랐던 황제는 가비르 재상을 바라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가비르 재상이 보더라도 이번 일은 쉽게 넘어 갈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라는 뜻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비르 재상마저 그렇게 나오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매쉬라스 후작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좋소... 뮤스군을 연행하도록 하시오." 황제가 허가를 내어주자 매쉬라스 후작은 남몰래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뮤스는 켈트와 함께 젠타카 강가에 앉아있었다.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없었고, 그저 사고현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황궁에 보고한 채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 뮤스는 이미 혼백이 반쯤이나 나간 상태였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공사기간 중 걱정에 시달리던 뮤스에게 이런 엄청난 사고가 실제로 일어나 버리자 그에게 미친 정신적 충격 엄청난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던 켈트는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마땅한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암담한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있을 때, 등뒤로부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뮤스군... 이곳에 있었군." 켈트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프라이어 대장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서있는 것이었다. "자네는 프라이어 대장이 아닌가? 이런 곳에는 왜?"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켈트가 물어오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프라이어 대장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저희는 뮤스의 연행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죄명은... 특수 직무과실입니다.." 연행이라는 말을 들은 켈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실 뮤스의 책임하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난 이상 그에 대한 추궁 받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고 있자 납득하기 힘들었다. "벌써부터 뮤스에 대한 연행 명령이 내려졌나? 아직 사고의 뒷수습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이건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인 이상 뮤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지금 뮤스는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상태란 말일세!" 하지만 프라이어 대장은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일어난 일인 점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천재지변으로 인해 물질적 손해만 발생했다면 이러한 처사가 내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인명피해의 예상 규모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서..." "결국은..." 켈트 역시 그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무엇이라 부정을 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길을 비켜줘야만 했다. 프라이어 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켈트를 지나 뮤스에 다가갔고, 가볍게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해 주게나." 하지만 뮤스는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무너져 내린 실크로스교의 잔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가비르 재상은 책상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뮤스의 누나인 크라이츠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뮤스가 처벌을 받게 되면 엄청난 힘을 행사 할 수 있는 드래곤인 그녀가 어떻게 대응을 할지 몰랐기에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는 중이었다. -벌컥! 박차고 들어오는 문소리를 들은 가비르 재상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다. 차마 얼굴을 들고 볼 수 없었던 가비르 재상은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크라이츠님..." 인사를 마친 가비르 재상은 소리지를 그녀의 반응을 대비라도 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그의 예상대로 귀청을 떨어트릴 만큼 큰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따위 말이 입에서 나오나요. 가비르! 왜 뮤스가 연행이 되어야만 했는지 해명이나 해봐요!" 갑자기 찾아온 편두통을 느낀 가비르 재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크라이츠를 소파로 안내했다. "조금만 침착하고 제 이야기 좀 들어봐 주시죠." "다른 말은 몰라도 지금 나에게 침착 하라는 말은 통하지 않으니 기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잠시 좀 앉으시죠." 가비르 재상의 얼굴을 한번 쏘아본 크라이츠는 그의 부탁대로 소파에 앉았고, 가비르 역시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크라이츠님께서 흥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저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몇 마디의 말을 듣던 크라이츠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설은 다 빼고 말하세요. 그런 말을 듣다가 언제 내가 폭발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지 모르니까요." 크라이츠의 말에 목이 타옴을 느낀 가비르 재상은 그녀의 말대로 사설을 빼고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새벽 무렵 갑자기 찾아온 지진에 의해 실크로스교가 내려앉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손실뿐이라면 큰 상관이 없겠습니다만, 무려 100명이 넘는 일꾼들이 그 잔해 밑에 깔려버리게 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런 공사에서 인명피해가 일어나면 크던 작던 간에 일단 그 책임을 책임자에게 묻는 것이 보통인데, 지금과 같이 엄청난 사상자를 낸 사고에 대해서는 귀족들이 연행을 요청한다해도 뭐라고 할 말이..." 그의 말을 듣던 크라이츠는 문득 말꼬리를 자르며 따지듯이 물었다. "아무도 예측 못한 지진이 발생해서 생긴 책임을 왜 우리 뮤스가 물어야 하는 거죠?" 가비르 재상은 그녀의 물음에 소파테이블 아래에 깔려있는 실크로스교 공사현장의 지도를 짚으며 대답했다. "이것을 한번 봐주시죠. 이곳이 교대 부근이고, 이것이 교각입니다. 헌데, 일꾼들의 숙소는 교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이죠?" "후우... 이번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바로 숙소의 위치 문제가 제기되어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숙소는 유난히 교대의 위치와 가깝게 붙어있는데, 뮤스군과 함께 일하던 토목가들에게 물어본 결과, 우천시 강물이 늘어날 것을 예상해 뮤스군이 직접 이곳에 숙소를 잡았다고 하는데, 상당히 적당하다고 생각 될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교대가 숙소 쪽으로 이렇게 완전히 넘어갈 것이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사고가 일어난 일의 전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흠...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그럼 인간의 법 상으로는 뮤스에게 이 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이 합당한 이야기인가요?" 대답대신 가비르 재상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잠시 살피던 가비르 재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라이츠님은 이제 뮤스군의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잠시 생각을 해보던 크라이츠는 평소의 안색을 유지하며 말했다. "드래곤은 균형을 위한 존재예요. 이만한 일로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간섭을 할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왜 묻죠? 뮤스가 인간인 이상...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인간의 법대로 처벌을 받아야 겠죠... 저는 오직 그의 누나로서의 도움 정도만 줄 생각입니다." 가비르는 중립적인 크라이츠의 태도에 내심 안도를 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크라이츠에 대해 섬뜩한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방금 전만 하더라도 뮤스의 일에 대해 앞 뒤 따지지 않고 행동하던 그녀가 인간과 드래곤이라는 경계의 사이에서 이렇게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자신도 그 인간과 드래곤이라는 경계사이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는 생각하며 가슴이 착찹해 짐을 느꼈다. 매쉬라스 후작은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서 열린 창을 통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쾌한 봄의 밤바람은 향기롭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골치를 썩던 뮤스에 대한 일이 잘 진전되어져 가자 몇 년은 더 젊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와인 잔을 떨어뜨린 그는 오장육부를 모두 토해버릴 것만 같은 탁한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크윽..." 입을 가리고있던 매쉬라스 후작이 손을 펴보자 손아귀에는 붉은 포도주만큼이나 검붉은 피가 고여있었다. 그것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쯔쯧... 벌써부터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는 것인가? 아직 이루어야 할 것이 많은데...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아! 내 생명이 모두 타버리는 그날까지 난 내가 할 수 있는 욕망을 충족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니까..." 피가 끓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창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똑똑! 수건으로 손에 묻은 각혈을 닦아내던 매쉬라스 후작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외쳤다. "흠흠... 들어오게!' 문이 열리면서 실크로스교를 붕괴시켰던 사내 중 한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은 매쉬라스 후작은 새로운 와인 잔에 와인을 부으며 물었다. "망디슈는 잘 처리했나? 애를 좀 먹었을 텐데..." 그의 물음에 사내는 자랑을 하듯이 대답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매쉬라스 후작님의 심복 아닙니까. 녀석이 까마귀로 변해 달아나려 해서 잡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물론 증거가 될 만한 것들 역시 모두 없앴습니다 매쉬라스 후작님."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매쉬라스 후작은 허전한 사내의 옆자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흠 저희라면 콜린도 포함된 말일 것인데... 콜린은 어디 가고 혼자만 왔나?" 사내는 말하기가 껄끄러운 듯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매쉬라스 후작이 재차 묻자 그제야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코..콜린은 망디슈의 마법에 맞아 타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후작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미안 할 것이 뭔가? 콜린은 능력이 없어 죽은 것이고 자네는 그만한 능력이 있기에 이자리에 있는 것이야. 그러니 콜린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자네에게 얹어 주도록 하지." 그의 말 대로라면 자신에게 오는 수당이 두 배가되었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동료의 죽음에 대한 슬픔마저도 머리에서 지운 듯 했다. "감사합니다 매쉬라스 후작각하!" "고맙긴... 아무튼 수고했네. 그럼 이만 나가서 푹 쉬게나."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허리를 굽히 숙이며 깍듯한 인사를 한 사내는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매쉬라스 후작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책상머리에 앉은 매쉬라스 후작은 와인 잔에 남은 와인을 모두 들이키며 말했다. " 능력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야. 동료가 죽더라도 내가 살아남아 인정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능력이지..." 말을 마치며 와인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은 매쉬라스 후작은 귀족회의 안건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열었다. 가장 앞장에 뮤스 드라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기만 해도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흠 공학원의 원장이라. 이렇게 써놓고 보니 상당한 거물인걸? 크크큭! 젊은 데다가 머리도 좋고, 재력도 굉장하고... 내 측근으로 만들면 좋겠지만, 너무나 고지식한 것이 탈이야." 즐거움이 가득 찬 미소를 지은 매쉬라스 후작은 서류를 덮으며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크라이츠와 가비르 재상, 그리고 켈트는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을 걸어 가고있었다. 그들은 산책을 위해 이곳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정원이 뮤스가 갇혀있는 감옥까지 가기 위해 거처야 할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밝은 성격을 자랑하던 크라이츠는 어색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켈트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가비르 재상은 크라이츠와 켈트에게 뮤스가 처한 현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실크로스교의 수습이 끝나는 대로 뮤스군의 처벌에 대한 귀족회의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총 25명의 황궁 주요 귀족들이 모인 자리인데, 이 일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호출하여 총책임을 맡은 뮤스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결국은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처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함께 걸으며 가비르 재상의 설명을 듣던 크라이츠는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뮤스에게 처벌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이야기란 말인가요."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은 뮤스군이 받을 형벌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가 관건일 뿐이죠." "흠... 뮤스의 형량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아마도 귀족 측의 분위기를 보니 평소 감정이 많던 뮤스군에게 편을 들어 줄 리는 만무한 듯합니다. 그러니 저와 황제폐하가 뮤스군 쪽으로 의견을 몰아 가야겠죠." 잠시 생각을 해보던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재상과 황제의 권한 정도면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겠군요..."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먼발치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크라이츠님 저 곳입니다. 정말 끔찍한 곳이었는데, 그런 곳에 보름씩이나 뮤스가 갇혀있다니..." 켈트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이는지 말끝을 흐렸는데, 대관식 때의 소란으로 인해 하루 동안 갇혀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물이 고여서 썩고 있는 지독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안쪽에는 무장을 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사방으로는 하나씩 버티고 서있는 철문을 지키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가비르 재상을 발견하자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가비르 재상각하!" 그들의 인사를 받은 가비르 재상은 품에 들어있는 면회 허가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경비병들은 서로에게 확인의 눈길을 보냈고,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북쪽의 철문으로 다가가 쇠사슬을 풀었다.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주자 그들에게 수고를 치하한 가비르 재상은 크라이츠와 켈트를 안내했다. 감옥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크라이츠의 찌푸려진 눈살은 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습도 높은 공기와 질퍽한 땅, 마치 무엇인가가 묻어 나기라도 할 듯 지저분한 벽까지 모든 것이 불쾌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뮤스가 갇혀있다니... 바이센의 감옥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군요." 그녀의 말에 가비르 재상 역시 그녀의 말에 대해 수긍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중요한 곳일 수록 바깥 세상과의 단절이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감옥의 환경은 더욱 열악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그들은 간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감시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듯 느끼한 웃음을 짓는 두 명의 간수들이 있었는데, 가비르 재상의 모습을 보자 헤프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가비르 재상각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우린 이곳에 수감중인 뮤스 드라켄을 만나기 위해 왔네. 안내 해주게." "아하!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간수는 또 하나의 철문의 자물쇠를 열며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던 켈트가 쇠창살 안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크윽! 우리가 갇혀있던 곳은 여기에 비하면 천국이었군. 어찌 이런 곳에 가둘 수가 있지? 흉악 범죄자도 아니고!" 안을 둘러보던 크라이츠 역시 못마땅해 하기는 켈트와 마찬가지 였는데, 뮤스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이곳을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이런 곳에 뮤스가 있다니..." 복도의 끝이 보이자 간수는 실실 웃으며 가비르 재상을 향해 말했다. "바로 저 끝 방입니다. 원칙상 저는 면회시간 동안 이곳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만..." 그의 말을 들으며 의도를 파악한 가비르 재상은 주머니에서 은화를 하나 꺼내주었다. "이곳을 지킨다고 수고했을 테니 나중에 목이나 축이게." "헤헤헷! 이러면 안되지만, 가비르 재상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다면야... 그럼 편히 이야기들 나누십시오!" 입이 귀 끝까지 벌어진 간수는 손에 들린 은화를 이빨로 깨물어 보며 사라지고 있었다. "크라이츠님, 켈트님 저곳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는 듯 고개를 입술을 살짝 깨문 크라이츠는 천천히 뮤스가 갇혀있다는 감방으로 걸음을 옮겼고, 켈트 역시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뮤스가 갇혀있는 감옥 앞에서 발을 멈춘 크라이츠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는 뮤스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횃불의 불빛은 감옥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이의 발끝밖에 비춰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뮤스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뮤스 맞니?" 그녀의 부름에 감옥의 깊은 쪽에 앉아있던 이는 조금씩 움직여 불빛이 있는 곳까지 나왔는데,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행색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입술은 다 메말라 가뭄의 땅처럼 갈라져있었으며, 피부는 햇빛을 받은 지 오래기에 백짓장 보다 창백했다. 게다가 습기 찬 곳에 오래 방치되어 있었기에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의 일부분은 진물까지 흐르는 상태였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누님? 크라이츠 누님이세요?"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그가 뮤스임을 확인한 크라이츠는 그의 몰골을 다시 한번 살폈는데, 아무리 중립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드래곤이 아닌 누나로서의 그녀도 뮤스의 이런 모습을 참고 볼 수는 없었는지 불같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려죽일 놈들! 아직 형벌이 정해지지도 않은 아이를 이렇게 방치해 두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가비르!" 애꿎은 가비르 재상은 그녀의 추궁에 비지땀을 흘렸는데, 사실 그도 뮤스가 이런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그 역시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이건 정말이지... 생각보다 훨씬 심하군요!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는 귀족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압력을 가해 보도록 하죠!" 그 때 가비르 재상을 말리는 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비르 재상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죄를 지어서 벌을 받기 위해 이곳에 갇힌 죄인이에요. 저의 실수로 인해 죽어간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사죄를 해야하니 오히려 이런 곳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해요." 크라이츠는 뮤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가비르 재상에게 말했다. "당장 뮤스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세요. 최고한 형벌이 정해지기 전에는 이런 죄인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누님 하지만..." "너는 조용히 해! 잘 듣거라 뮤스. 네가 아무리 죄책감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네 스스로를 포기하면 안 되는 거야! 네가 평생 죄책감에 빠져 산다고 해도 죽은 그들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단지 너는 네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나쁘게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뿐이야. 그러니 충격이 있긴 했을 테지만 죄책감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자신을 걱정하는 크라이츠의 진심을 마음으로 느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비르 재상을 향해 물었다. "저는 그럼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죠?" 잠시 대답을 꺼리던 가비르 재상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 "후우... 아직 뮤스군이 처벌을 받을지, 아닐지 정해 진 것은 아니지만,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다음 주 쯤으로 계획된 회의에서 뮤스군의 처벌에 대한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뮤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능성이라는 말을 써 봤지만 뮤스는 이미 자신이 처벌받을 것을 알고 있는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누님..." 가비르와의 대화를 듣던 크라이츠는 뮤스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니?" "저... 누님은 제가 어떠한 처벌을 받더라도 나서지 말아 주세요. 최소한 저는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처벌을 받고 싶어요." 크라이츠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뮤스의 말에 그가 대견스럽게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나도 원하지 않는 단다. 네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내가 도와줘야 할 성격의 일이 아니구나. 너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가비르와 황제가 너를 옹호하고 나서는 이상 그 정도는 막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번 일에 관여를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단다." 그녀의 말에 뮤스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누님." 그들이 대화를 마쳐가자 잠시 아무말 하지 않던 켈트가 크라이츠와 가비르에게 말했다. "뮤스에게 해줄 말이 있는데,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해야 할 이야기는 이미 다한 크라이츠 였기에 가비르를 이끌었다. "가비르 우리는 이만 나가죠. 뮤스 너는 아까도 말했듯이 너무 몸을 혹사시키지는 말거라." 켈트의 부탁을 들은 크라이츠와 가비르 재상은 발걸음 소리만을 남기며 자리에서 떠났다. 이제 이곳에는 켈트와 뮤스만이 남았는데, 켈트는 뮤스의 눈 높이에 맞추며 쇠창살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제는 충격에서 조금 벗어나긴 한거냐? 나는 네가 정신이 나갔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서 며칠째 잠도 설치고 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솔직히 요즘 매일같이 잠을 설쳐요. 밤이면 낯익은 일꾼들이 저를 원망하듯 눈가를 어른거리고, 귓가에는 그때의 비명성들이 아직도..." 고개를 떨군 채 말끝을 흐리는 뮤스를 바라보던 켈트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옛날을 회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단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거든...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 여행을 떠나 새로운 동료를 한 명 만난 적이 있었었는데 그는 시인이었던 데다가 성격까지 좋아 나와는 아주 잘 맞는 친구였지. 하지만 어느 날 숲을 지나가다가 마물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전혀 전투를 할 줄 모르는 친구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단다. 하지만 수적으로 훨씬 불리했던 상황이었기에 결국 그 친구는 마물의 손톱에 뜯겨 죽고 말았지... 나는 그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며칠이나 잠을 못 이뤘었단다. 여행 중에 만난 동료 한 명을 지키지 못한 심정이 그러했는데, 네가 책임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했으니 오죽했겠어?" 잠시 말을 끊은 켈트는 쇠창살 사이로 그의 거친 손을 잡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하지만 너는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본질을 알아야 한단다. 내가 그 친구를 지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껴 한참을 앓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그 상황에서 더욱 노력을 했더라도 그 친구는 죽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 마디로 나에게 그 친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는 것은 죄책감의 원인이 되지만,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를 한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야! 이해하겠니?" 이것이 사실일지, 아니면 그가 꾸며낸 거짓일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뮤스에게 큰 영향을 주고있는 이야기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뮤스는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충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켈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뮤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털어 버리기에는 무리겠지만, 네 경우에 대한 본질을 한번 차근히 생각해 보거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단다. 하루의 일과가 끝날 때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켈리나 떨어져 잇는 지진계를 검사하여 지진에 대한 대비를 했고, 숙소가 잔해에 깔려 많은 인명피해를 내긴 했지만, 너도 나름대로 수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란다. 네 생각에 소홀했던 것이라도 있느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너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란다. 그것의 너의 능력 밖의 문제였던 것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진짜 네가 해야할 일이란다." "고마워요 아저씨.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 주셔서..." "녀석... 내가 고마운 것을 이제 알았단 말이냐? 이제 괜찮아진 것을 보니 안심이군. 더 할말 있냐?" "아뇨...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는..." 아직까지 힘이 없는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얼굴만큼은 한층 밝아진 표정이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수정분량 (3) 이별 그리고, 진실 어느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예정되었던 뮤스의 처벌을 위한 귀족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 동안 대략적으로나마 무너져 내린 실크로스교의 잔해를 처리했고, 그 곳에서 시신들을 수습했는데, 총 73구의 시신을 찾아냈으며 9명이 실종된 상태였다. 이번 일로써 실크로스교의 공사는 완전히 백지 화 되었으며, 쥬론 공국과의 무역은 다시금 선박에 의존하게 되었다. 회의실로 귀족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아직 회의가 시작이 되려면 한시간 정도가 남았지만, 각자 뮤스의 처벌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정리해온 자료를 다듬거나, 적당한 형량을 의논하기 위해 미리 몰려드는 것이었다. 대화의 중심에는 매쉬라스 후작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중간에서 조절하는 중이었다. "여러분들은 오늘 뮤스 드라켄의 처벌에 대해 어느 정도의 형량을 제안할 생각들인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귀족들 중 매쉬라스 후작의 심복인 파스테넨 백작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황제폐하께서 뮤스 드라켄을 감싸고 돌 듯하니 교수형까지는 무리인 듯하고, 10년 정도의 투옥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던 콜로라드 후작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건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뮤스 드라켄이 황궁의 주변에 존재한다면 그곳이 감옥이라고 하더라도 황제폐하의 입김이 닿게 되지 않겠소?" 매쉬라스 후작은 콜로라드 후작에게 동의 표를 던졌다. "내 생각도 마찬 가지오. 그렇다면 어디론가 보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데..." 다른 귀족들도 매쉬라스 후작의 말을 이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권력이 닿지 않는 동시에, 누가 보더라도 공감할 만한 형벌을 정하기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의 시작시간은 거의 다 다가왔다.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리로 찾아가 앉았고, 준비된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입을 적셨다. 매쉬라스 후작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마나시계를 보니 시계는 거의 2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거의 동시에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황제폐하 나오십니다. 회의사관의 목소리에 귀족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황제를 향해 예를 표했다. 황제는 공식적인 회의자리인 만큼 금빛이 나는 관을 쓰고 있었으며, 한쪽 손에는 슬을 들었고, 흰색의 모피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 뒤로 가비르 재상이 금지막한 서류를 들고 들어왔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자리 앞에 서게된 황제는 보좌관에게 망토를 풀어 맡기며 자리에 앉았다. "경들도 앉으십시오." 착석을 허락하자 귀족들은 옷을 잘 정리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그간 고심이 많았던 듯 피부가 거칠어 진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는데, 뮤스의 처벌 문제에 대한 걱정때문에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옆자리에 앉은 가비르 재상은 준비해온 서류중 하나를 꺼내어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황제는 서류를 펼쳐 첫째 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경들이 이 자리에 모이신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우선 이번 실크로스교의 손해에 대한 정리를 해보고, 이에 관계된 이들에 대한 처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선을 가비르 재상에게 돌린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비르 재상 보고를 부탁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말에 간단한 대답을 한 가비르 재상은 두꺼운 서류를 펼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 덩어리를 귀족들에게 넘겼는데, 그들 역시 자신이 가질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옆사람에게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서류를 모두 나눠 가지자 가비르 재상은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께 나눠드린 서류는 이번 실크로스교의 공사에 투입된 총 자재비와 인건비, 그리고 사상자들의 가족에 대한 배상금액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첫 번째 장에는 총 자재 비에 대한사항입니다. 자재 비는 32만 6천 겔피가 투입되었는데, 아래를 보시면 세부사항을 보시면 지출된 내역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다음 페이지는 인건비로서 제국 각지의 토목가들을 끌어오면서..." 가비르 재상의 보고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일이었다. 눈이야 서류 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세밀하게 읽어 볼 사람도 없었고, 황궁의 재정이야 어떻게 되든 그들의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비르 재상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일 중 하나였기에 꼼꼼히 챙겨 놓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려 이러한 보고만 두 시간 여에 걸쳐 계속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머리에는 그저 많은 돈을 그냥 버렸구나 하는 막연한 느낌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가비르 재상이 마지막으로 서류를 덮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상이 있는지 서류를 살펴보시고 질문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그래왔듯 대부분의 귀족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시간에 졸리움을 느끼는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꼼꼼히 그의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바로 매쉬라스 후작이었다. 가비르 재상이 본 바로는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윗사람 앞에서는 최대한 이미지 관리를 하여 돈독한 신임을 유지했고, 수하들에게는 능력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 충성을 약속 받았다. 즉, 자기관리가 철저한 인물이었는데, 그만큼 적으로 삼으면 힘들어지는 사람이라는 말과도 통했다. 한동안 서류를 살피는데 신경을 쏟던 매쉬라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헛... 역시 가비르 재상은 한치 착오도 없이 꼼꼼하군요. 보통이라면 하나쯤의 실수는 하게 마련인데, 이렇게 완벽한 보고서라니..."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긴 했지만, 매쉬라스 후작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표를 낼 수는 없었기에 가볍게 예를 갖추었다. "별말씀을요. 철두철미하기로 유명한 매쉬라스 후작님께 칭찬을 받으니 영광입니다."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오." 매쉬라스 후작 이후로는 아무도 서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이제 보고는 다 마쳤습니다. 이제 실크로스교 공사의 책임을 맡은 뮤스 드라켄에 대한 처벌심사만 남았습니다." 가비르 재상의 보고를 모두들은 황제는 등받이에 기댔던 등을 일으키며 자리를 바로 했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며 그 위로 손을 모았다. "그럼 이제 책임자였던 뮤스 드라켄에 대한 처벌 심사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의 말에 가비르 재상은 또 다른 서류뭉치 하나를 열었다. 그리곤 딱딱한 말투로 손에 들린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실크로스교 공사의 책임자인 뮤스 드라켄은 올 1월 23일 부터 본 공사를 시작하여 사고 시일까지 공사를 지휘하였고,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로 인해 공사중인 실크로스교가 붕괴. 73명이 사망, 21명이 부상, 9명이 실종되는 등의 사상자를 냈으며, 조사 결과 인명 사상에 대한 그의 과실이 드러나기에 특수 직무과실로 처벌 심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딱딱한 목소리로 서류를 읽고는 가비르 재상이었지만, 그의 한 줄씩 읽을 때마다 그의 마음은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었다. "이에 도이첸 제국의 황제, 재상을 비롯한 25인의 중요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한 처벌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서류를 덮은 가비르 재상은 자리에 앉았고,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본 심사를 이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그 동안 뮤스 드라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출석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의 의견을 준비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청년의 일생이 걸린 일인 이상 여러분들은 신중히 의견을 말하고, 수렴해 주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의견을 듣도록 하죠." 황제의 말에 풍채 좋은 한 귀족이 손을 살짝 들었다. 그는 선선한 날씨에도 더움을 느끼는지 연신 땀을 흘리는 인물이었다. "하인토 백작. 의견을 말씀 해 보십시오."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준 황제에게 목례를 올린 그는 주변의 귀족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무리한 공사를 진행시켰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만으로도 가벼운 처벌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서 처벌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 지난 처벌 심의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 가지 종합해 본 결과, 30만 겔피에 이르는 손해를 낸 것에 대해 8년, 그리고 그의 책임 하에서 1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것에 7년의 비중을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도합 15년의 투옥을 제안합니다." 그의 말을 듣던 황제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인토 백작의 의견에 이견이나 동의 있으십니까?" 물음에 하인토 백작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귀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하인토 백작이 내건 투옥기간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물질적인 손해에 대해서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일어있기에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사상자에 대한 책임으로 7년의 투옥을 제안합니다." 계속해서 또 다른 의견이 제안되었다.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30만 겔피에 대한 손해 배상은 재산으로 받아내고, 사상자들에 대한 책임으로 7년의 투옥을 하는 것입니다!" 귀족들의 손이 올라가고, 입이 열릴 때마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는데, 하나의 줄기를 타지 못하고 저마다 난립하는 의견들이었다. 그나마 황제나 가비르 재상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귀족들 중에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몇 명 보인다는 것이었다. 난립하는 의견들을 듣고 있던 가비르 재상이 손을 들며 황제에게 의사권을 받았다. "이번에는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제안하는 처벌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조건 뮤스 드라켄에 대한 나쁜 점만을 늘어놓고 있는데, 그가 이루어 놓을 것 역시 봐야 합니다. 그는 이번 공사기간 동안 토목기술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실크로스 양회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도이첸 제국의 토목과 건축기술을 100년 정도나 앞당긴 일이라고 토목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21명 살아 남은 인명 중 9명이 그가 구해낸 생명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끝까지 노력한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을 목격한 인물들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가비르 재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입니다. 게다가 뮤스 드라켄과 같이 젊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시간이란 말이죠. 비록 이런 참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우리는 그 젊은이의 나쁜 점만을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뮤스군에게 1년간의 투옥을 제안합니다. 그 정도면 스스로의 잘 못을 뉘우칠 수도 있는 충분한 기간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주변은 조용해 졌고, 몇몇 귀족들은 그의 의견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보고 있을 매쉬라스 후작이 아니었다. "폐하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매쉬라스경." 황제에게 의사권을 받은 매쉬라스 후작은 가비르 재상과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뮤스 드라켄에 대한 심사에 앞서 그에 대한 형 집행이 얼마나 확실히 이루어 질 지 의문입니다." 그의 말에 황제는 순간 안색이 바뀌는 듯 했다. "지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매쉬라스 경." "이곳에 모인 모든 귀족들은 뮤스 드라켄이 황제폐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가 어떤 말을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조금 껄끄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가비르 재상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오?" "폐하께서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저희 귀족들은 가끔 마련되는 회의석에서나 조금의 힘을 발휘할 뿐입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해 볼때, 뮤스 드라켄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어 지고, 투옥이 된다 하더라도 황제 폐하의 권력이면 충분히 그를 빼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내가 뮤스군을 투옥 도중에 빼내어 주기라도 할 것이란 말이오!" 흥분하며 되묻는 황제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매쉬라스 후작은 느긋할 뿐이었다. "저는 황제폐하께서 그런 일을 하시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처벌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의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대로 놔둔다면 분명 귀가 얇은 귀족들에 의해 길어봐야 3년 투옥 이상의 결정이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했기에 또 다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매쉬라스 경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황제가 되묻자 매쉬라스는 그의 측근 귀족들의 얼굴을 향해 몰래 눈짓을 하며 대답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을 황제폐하의 권한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일정기간 추방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가비르 재상은 매쉬라스 후작의 의견에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방이라니요! 그렇다면 뮤스군을 미개척지로 내몰겠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오랜 정치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을 보이며 가비르 재상에게 말했다. "가비르 재상. 이곳은 회의실입니다. 황제폐하께 의사권을 받아야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잊으셨나보구요?" 순간 아차 한 가비르 재상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 앉았고, 매쉬라스 후작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점을 잘 아셔야 합니다. 추방은 투옥에 비해 몸이 자유롭습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이 젊은 나이에 투옥되어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자신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치는 시간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추방을 제안한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미리 때를 기다리고 있던 매쉬라스 후작의 추종자들이 손을 들며 황제에게 동의 의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매쉬라스 후작님의 의견이 괜찮을 듯 하군요. 일단 추방은 몸이 자유로운 만큼 투옥에 비해 부담이 덜 가는 동시에, 뮤스군에 대한 처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외적 명분이 바로서게 됩니다." "저 역시 후작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추방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림으로써 황궁의 너그러운 아량을 평민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매쉬라스 후작을 포함한 귀족들은 지금 추방이라는 말의 뜻을 의도적으로 축소해서 설명하고 있었지만. 사실 추방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말과 같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한다면, 도이첸 제국의 영토 내에 발을 들일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 영향이 도이첸 제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에까지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오이랍 대륙의 모든 국가들이 안정을 위해 평화 협정을 맺은 이상,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가 도이첸 제국과의 동맹상태이기 때문에 최소한 대륙 안에서는 어느 나라든 발을 붙이고 살 곳이 없다는 것과 일맥 상통이었다. 가비르 재상이나 황제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매쉬라스 후작의 말에 동의한 귀족은 과반수가 넘고 있었으며, 매쉬라스 후작의 뜻대로 뮤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어 지고 있었는데, 마치 잘 짜여진 각본과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버리자 당황한 모습으로 가바르 재상을 바라보았는데, 가비르 재상은 귀족들의 치밀한 계획아래 놀아났음을 깨닫는 얼굴이었다. 매쉬라스 후작은 이제 과반수가 넘었기에 황제라도 결코 결론을 번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름이 잡힌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과반수를 넘었으니, 뮤스 드라켄을 추방하기로 결정이 난 듯 하군요." 매쉬라스 후작의 말과 함께 희희낙락하고 있는 귀족들의 표정을 분노한 얼굴로 바라보던 황제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꽝! "뮤스군과 나를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는 그대들의 내가 속을 모를 줄 아시오! 정녕 당신네들을 믿고 내가 제국을 꾸려 나갈 수 있을 지가 궁금하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뮤스군 같은 인재를 제국에서 추방하려 하다니! 이 일로 인해 다른 국가들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고, 제국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 될 것이오! 어디 두고보시오! 그대들의 욕심이 얼마나 되는지 내 직접 캐내어 확인하도록 할 테니! 그날이 바로 당신들의 작위가 종이조각이 되는 날일 것이오!" 귀족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가슴 섬뜩한 말을 뱉은 황제는 몸을 돌리며 회의장을 나가고 있었고, 귀족들의 눈에는 어느새 자신들을 향해 경칭을 쓰지 않고 폭언을 퍼붓는 황제의 존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보였다. 한편 가비르는 지금껏 여리게만 보이던 황제가 이렇게 강력한 발언을 하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귀족들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훗... 그럼 또 보지요. 아마 아랫사람들 입 단속을 잘 해야할 겁니다."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그의 말에 매쉬라스 후작은 뭔가가 잘 못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도이첸 제국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밝은 마나등이 켜져 실내를 밝히고 있는 이 방은 보통의 방과 모습은 같았지만 몇 가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창문마다 창살이 쳐져있다는 것과, 방문이 두터운 통나무로 되어있다는 것 등이었다. 이 방은 추방을 당하기 전까지라도 편하게 지내도록 황제가 배려한 것이었는데, 끝내 추방을 당해야만 하는 뮤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기도 했다. 방에는 뮤스를 면회하기 위해 온 크라이츠, 켈트 그리고 가비르 재상이 있었다. 지금 크라이츠와 켈트는 오히려 처벌 심사의 결과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는데, 켈트가 오랜만에 기분을 내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껄걸! 추방이라니 정말 잘 됐군! 어차피 함께 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니 전혀 상관할 바가 없잖아?" 크라이츠도 켈트의 생각과 같은지 그 동안 굳어있던 표정을 한껏 풀며 미소를 지었다. "하긴 더러운 인간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이런 곳에는 있을 필요가 없지... 어서 다른 나라로 가자꾸나." 둘의 대화가 계속 될수록 가비르 재상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뮤스라는 걸출한 인재를 추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데다가 제국에 대해 험담까지 하니 즐거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가비르 재상은 켈트와 크라이츠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크라이츠님이나 켈트님이 생각하는 만큼 추방이란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추방 명령이 내려지게 되면 도이첸 제국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는데, 최소한 오이랍 대륙 내에서는 모두 평화 협정을 체결한 상태이니, 마물들이 날뛰는 미개척 지역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풋! 켈트는 그의 말이 너무나 의외였는지 마시던 맥주를 뿜어냈다. 코를 통해 맥주 한 방울이 흘러나오는 것을 어렵사리 닦아낸 그는 믿겨지지 않는지 다시금 되물었다. "아니! 추방이 그런 뜻이란 말인가? 그럼 듀들란 제국도 못 들어가고, 그 외의 군소 국가들에도 거주를 못한다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인 가비르는 거기에 덧붙여 말했다. "최소한 앞으로 3년간은 말이죠... 추방을 당하는 즉시 그 명단은 대륙 전역으로 전달되게 되는데, 혹시라도 추방자가 나라안에서 발견되게 되면 바로 사형입니다." "이런 제길! 뭐 그런 것이 다 있나!" 켈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침대에 걸터 앉아있던 뮤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그리고 크라이츠 누님은 공학원으로 돌아가세요." 가비르 재상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린 켈트는 놀란 듯 되물었다. "뭐라고? 그렇다면 혼자 가겠다는 말이냐?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수많은 마물들이 널려는데 그곳을 혼자 다니겠다고?" 뮤스는 그의 말에 긍정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비록 이곳에서 오래 지내지는 않았지만, 공학원이 있는 라이델베르크가 고향같이 느껴져요.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 있고, 벌쿤도 있고, 카타리나 역시... 만약 이대로 함께 떠난 다면 저는 고향을 잃어버린 기분이 될 거예요." 잠시 창가를 바라본 뮤스는 가벼운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잠시 떠나는 거예요.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당분간 혼자 생각도 좀 하고 싶고요. 그러니 아저씨와 누님은 공학원에 남으셔서 제가 돌아올 곳을 지켜 주셨으면 해요. 그 때는 정말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올게요." 켈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크라이츠는 그를 막아서며 뮤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듯 말했다. "뮤스의 생각도 괜찮긴 해요. 3년 정도 혼자 떠돌다 오는 것도 괜찮겠지. 마음이 복잡할 때는 그것이 최고란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누님. 아 그리고 제 편지 좀 카타리나에게 전해주세요." 뮤스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편지 하나를 꺼냈는데, 가비르 재상에게 부탁해서 구한 듯 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크라이츠는 그것을 손가방 안으로 넣었다. 켈트는 아직도 뮤스의 상태가 의심스러웠기에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설마 유서 같은 건 아니겠지? 어디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죽는거 아니냐?" 피식 웃은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훗... 얼마 전만 해도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저씨 덕분에 이제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이 얼굴을 다시 보여 드릴 테니..." 그렇게 잠시동안의 이별을 약속하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황궁의 북문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끌 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뮤스가 추방을 위해 북쪽 국경까지 후송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온 황궁의 귀족들로서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몰려있었다. 뮤스는 마차 위에 앉아있었는데, 문은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주변으로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을 헤치며 세 명의 사람이 뮤스가 갇힌 마차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뮤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을 한번씩 불러보았다. "누님, 켈트아저씨, 가비르 재상님." 마차에 갇혀있는 뮤스를 발견한 켈트는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이제 마차의 앞까지 다가온 켈트는 뮤스가 탄 마차안을 살펴보며 평소 그의 말투와 다름없이 말했다. "이런! 꽤 좋은 마차에 타고 있을 걸? 전뇌거 보타 승차감이 좋으냐?" 그의 어이없는 인사에 추방당하는 처지인 뮤스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풋! 그게 지금 추방되기 위해 떠나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요?" "이봐! 네 꼬락서니를 봐라 어디 추방을 당하는 사람인가... 주변에는 널 지키기 위해 파견해준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고, 도적들이 너의 목숨을 못 노리도록 이런 쇠사슬까지 묶어주지 않았냐? 세상에 이렇게 안전한 여행이 어디 있겠어?" 자신의 모습을 한번 내려다본 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요. 여행이 이런 거라면 누가 가려 하겠어요?" 자신의 농담을 여유 있게 받아내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던 켈트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있는 뮤스를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 지금까지 남의 속을 다 끓여 놓고 이제는 꽤나 마음이 편안한가 보군." 켈트의 말에 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끊은 켈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쇠사슬을 한번 만져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카타리나를 다른 사람한테 시집보내 버릴 거야. 하긴 드베인 숲에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고작 미개척지에서 위험을 당하진 않겠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래 그렇게 자신 있게 말을 해줘야 나도 카타리나에게 해 줄 말이 있지 않겠냐." 뮤스의 능력을 알지만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고, 3년 동안 못볼 생각을 하니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전환이라도 시키려는 듯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켈트씨 지금 뭐하는 거예요. 3년 동안 죽도록 고생할 녀석에게 이런 분위기를 보여 줘서야 되겠어요?" 그녀의 따끔한 목소리에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켈트는 다시 밝은 표정을 했다. "허헛! 힘든 곳으로 가는 마당에 늙어서 주책을 다 떨었군. 아차! 이것이나 받아라." 스스로 질책하며 들어올린 켈트의 손에는 가죽으로 된 마법가방이 들려있었다. 지금까지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던 뮤스는 유난히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이건 연행될 때 압수된 것인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손에 들린 가방을 한번 흔들어 보인 켈트는 그것을 철창이 박힌 마차의 창문 사이로 밀어 넣었다. "네가 이것 없이 여행을 가는 것은 전쟁터에 스워드 빼놓고 가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 그래서 빼돌렸지! 안에 입을 만한 옷가지와 망토 등을 넣었으니 잘 쓰거라..." 그것을 받아든 뮤스는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고,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고마워요 켈트 아저씨..." 대충 둘의 대화가 정리되자 켈트는 뒤로 빠지며 가비르 재상이 마차의 문에 붙어 섰다. 그는 지난 며칠 사이에 더욱 늙은 듯 보이지 않던 주름이 눈가에 잡혀있었다. "가비르 재상님 그 동안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마무리가 좀 안 좋긴 했지만 그 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아쉽군요. 그 빌어먹을 귀족들만 아니었어도... 그리고 폐하께서는 지금 당장은 뮤스군을 볼 자신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훗날 황궁을 완전히 정리하는 날 꼭 다시 오셔서 당당한 황제로서의 모습을 봐달라고 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드리세요. 그럼 다음에 볼 때 까지 안녕히..." 인사말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가비르 재상을 보냈고, 이제 마지막 남은 크라이츠를 바라보았다. "누님..." 복잡한 감정이 깃든 뮤스의 목소리였지만, 크라이츠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했다. "그렇게 부르니까 너무 징그럽구나. 겨우 3년 어디 간다고 이렇게 감상적으로 울상을 짓고 있다니 아직 멀었어..." 사실 어찌 보면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한 번의 수면으로 수십 년을 보내는 드래곤의 기준으로 생각을 해보면 3년이란 기간은 정말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할 말은 없고... 돌아 올 때는 꼭 지금보다 성장해 있거라... 알겠니? 그 때가 되면 조금은 허망한 소식을 하나 전해 주도록 하마." "네...? 그것이 무슨 소리죠?" "지금은 알 것 없단다.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녀가 말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뮤스는 금새 궁금함을 접었다. "알겠어요. 잘 다녀 올 테니 누님도 그 동안 잘 지내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한 크라이츠는 마차 창문의 창살사이로 손을 넣어 그의 볼을 매만지며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는지 마차 위에 올라탄 근위병 한 명이 외쳤다. "자 출발시간이다! 근위병들 제자리에!" 출발준비 소리에 마차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크라이츠는 믿음이 가득 담긴 눈빛을 그에게 주었고, 켈트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이럇! 마부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갇혀서 이동하는 모습이 처량하긴 했지만, 쓴웃음 한번으로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귓가로 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뮤스! 몸조심해라! 라이델베르크에서 기다리마!" 켈트의 염원을 담은 목소리에 뮤스의 머리는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지고 있었다. 뮤스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 가자 마차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크라이츠가 켈트를 향해 말했다. "이제 우리도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도록 하죠.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켈트에게 던진 말을 옆에서 들은 가비르 재상은 그녀가 이대로 떠나려하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크라이츠님 오늘 바로 떠나실 예정입니까? 조금만 더 계시다가..." 가비르 재상의 말에 크라이츠는 몸을 돌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추악한 인간들의 냄새가 나는 이런 곳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군요." 뮤스가 떠나자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가비르 재상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집무실로 가봐요. 그곳에 손님이 한 명 앉아 있을 테니... 물론 좀 추한 모습이겠지만... 켈트씨 우리는 어서 짐이나 챙기러 가죠." 크라이츠의 말을 듣고 있던 켈트 역시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듯 했는데, 나중에라도 물어 봐야겠다는 생각하며 서둘러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가비르 재상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켈트와 함께 걸어가는 크라이츠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크라이츠의 말에 따라 집무실로 돌아온 가비르 재상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바로 집무실의 책상 위로 한 건장한 남성이 반나체인 채로 꽁꽁 묶여 있었는데,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신음성만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배 위에 편지가 한 장 놓여있었는데, 그것을 발견한 가비르 재상은 내용을 읽어내려 갈 수록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매쉬라스 후작이!" 급히 편지를 움켜쥔 가비르 재상은 매쉬라스 후작의 이름을 부르며 급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켈트는 크라이츠의 짐을 챙기기 위해 그녀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무슨 짐을 그리도 많이 가지고 왔는지 하나씩 장롱과 서랍 등에서 들추어내고 보니 짐이 산더미같이 쌓이고 말았는데, 켈트는 그녀의 몸종이라도 된 양 하나씩 정리하며 가방에 넣고 있었다. 하지만 손재주가 상당히 좋은 켈트는 쉽사리 가방하나씩을 끝내고 있었는데, 그녀의 구두를 닦으며 가방에 넣던 켈트가 마침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아참. 아까 가비르 재상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은 뭐고, 집무실의 손님이란 건 뭐죠?" 그의 물음에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크라이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뭐 매쉬라스 후작이 실크로스교를 무너트린 걸 가르쳐 줬을 뿐이예요." "아... 매쉬라스 후작이 실크로스교를 무너트렸군요. 에?! 뭐.. 뭐라구요!" 순간 적으로 놀라 일거리를 손에서 놓친 켈트는 확인이라도 하듯이 되물었다. "매쉬라스 후작이 실크로스교를 무너트렸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침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크라이츠는 등 쪽의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그 작자가 뮤스를 황궁에서 매장시키기 위해서 지진을 일으켰다고요." 근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할수록 더욱 가슴이 타 들어가는 켈트는 가슴을 치며 외쳤다. "자세하게 좀 이야기해 주시죠! 답답해 죽겠습니다!" 그제야 크라이츠는 자세하게 이야기 해줄 마음이 생긴 듯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흠 닷 세 전쯤인가? 밤에 잠이 안 와서 창 밖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황궁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 이상해서 그 기운을 따라 갔죠." 말을 잠시 멈춘 크라이츠는 켈트가 싸놓은 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이 가방에 들어 가는게 아니라니까요! 나참..." 혼자 짜증을 낸 크라이츠는 구두를 다른 가방에 옮겨 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한 음침한 마법사와 두 사내가 싸우고 있더군요. 그래서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구경을 하게 됐죠. 십분 정도 지났을 까? 두 사내 중에 한 명은 파이어 볼을 얼굴에 맞고 그대로 즉사를 했는데, 또 한 사내가 그 틈을 타서 마법사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더군요. 오랜만에 싸움 같은 구경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다 죽은 마법사의 시체 앞에서 멋이라도 부리려는지 뭐 비밀 때문에 죽인다나 어쩐다나... 라고 떠들고 있더라고요. 호기심 많은 제가 참을 수 있었겠나요? 결국 그 사내의 뒤를 밟다가 매쉬라흐 후작과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나중에는 개인 적인 면담(?)을 해서 모든 것을 캐내게 되었죠 뭐. 그게 다예요."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뮤스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여기까지 생각을 해보던 켈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뮤스가 감옥에 갇혔을 때부터 알고 있으셨을 텐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켈트의 시끄러운 소리에 괴로운 듯 귀를 막은 크라이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뮤스가 너무 약해 빠진 것 같아서 좀 당해 보라고 가만히 놔둔 거였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벌로 어쩌고 라고 꽤나 멋진 말을 하신 것은 그럼?" "물론 연기였죠."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고 있는 크라이츠가 새삼스럽게 대단해 보이고 있는 켈트였다.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뮤스는 크라이츠의 철저한 계략 하에 외롭고도, 긴 여정을 떠난 것이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60 앞부분을 완전히 뜯어 고친 결과 약 책한권의 1/4이라는 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부분의 몇회까지 지워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수정부분을 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뮤스의 이야기 다음에 나올 장영실의 이야기 부터 올리겠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자세한 것은 출판본으로 확인하셔야 할 듯한데, 여러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여러가지 포함시키고, 대부분을 빼냈습니다. 그렇게 된 결과 뮤스는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이제는 그럭저럭 자신있습니다^^ 솔직히 틀린부분 수정해서 또보여 드린다는 것이 부끄러워서리...) 케티에론 황녀 초여름의 기운이 도이첸 제국을 넘어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까지 닿아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라 찬사를 받고 있는 듀들란 제국의 황궁은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었다. 궁의 정원에 우거진 푸른 수목들은 화려했던 봄꽃의 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었고, 시원하게 흐르는 인공 시내가 보는 가슴을 식혀주고 있었다. 인공 시내의 옆으로 두 명의 여인들인 다정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온화한 얼굴에 밝은 금빛의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의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붉은 머리와 약간은 날카로운 듯한 눈매를 가진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둘 다 상당한 지위를 가진 듯 했는데, 몸짓이나 말투에서부터 고아함이 흐르고 있었다. 젊은 여성의 손에는 흰색의 장미가 하나 들려있었다. 이미 거의 시들어 제 모습을 잃고있었지만, 그것이 뭔가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는 듯 소중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를 하던 중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놀랄 일이군요. 케티에론 황녀님." 중년 부인의 동그랗게 뜬눈을 보며 황녀라 불린 여성은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평소 그녀의 도도하고 오만한 성격을 아는 이라면 모두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것이었다. "혹시라도 누구에게 발설을 하시면 안돼요! 저는 숙모님을 믿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드리는 거예요. 물론 루스티커 할아버지께서도 아시긴 하지만..." 그녀가 숙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국에 단 한 사람 뿐이었는데, 바로 숙부인 쿠르코스 재상의 부인이었던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재상부인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호홋! 드디어 황녀님도 배필을 찾으셨나 보네요. 제가 평소에도 조금 알고 지내는 사이니 그에게 말을 해보도록 하죠." 케티에론 황녀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재상부인을 바라보았고, 이내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했다. 쟈트란 시내, 따듯한 기운이 돌자 추운 겨울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왔는데, 도시 사이사이로 잘 꾸며진 산책로 위에는 어린아이들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산책로의 한켠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벤치가 하나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발로 밟고 지나다녀서인지 조그마한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지만,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앉아 버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손으로 작은 책을 들고 있었다. 표지에는 '마법 기초 이론' 이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과 같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마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쓰여진 일종의 교양서였다. 마법사들이 줄고, 마법이란 것이 거의 학문에 가깝게 변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많이 나온 것이었다. 멀리서부터 한 소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이 남자를 향해 뛰어오는 듯 했고, 매우 반가운 듯 밝게 웃고 있었다. "쟝 아저씨! 오늘도 나왔네요!" 소녀의 목소리에 읽던 책을 덮은 그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바로 듀들란에서 제국 개발사업을 진행중인 장영실이었다. 그는 이곳의 생활이 만족 할만 한지 예전에 비해 많이 여유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달려오는 소녀를 한번에 안아든 장영실은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헛! 이런 밍! 꼬마 아가씨였구나! 오늘은 혼자 나온 건가?" 그의 물음에 밍이라 불린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달려온 산책로를 가리켰다. "아뇨! 어머니와 함께 나왔어요!" 그곳을 보자 한 중년의 부인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쿠르코스 재상 부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장영실은 언제나 그랬듯 예의바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재상 부인." 재상 부인은 자신의 딸을 안고있는 장영실을 보며 중년 부인의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장영실 경." "네 그렇군요. 그렇지만 초여름이라 그런지 조금은 덥군요. 따님과 함께 산책을 나오셨나 보군요?" "호홋. 미뉴엔느가 어찌나 장영실 경을 보고 싶다고 하던지..." 그녀의 말에 안고 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본 장영실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 아가씨가 나를 보고 싶어했다고?" "응! 나는 쟝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후훗! 그러면 투르코스 재상님은 어쩌란 말이냐? 그럼 이 아저씨가 밍을 입양이라도 할까? 깜찍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해보던 소녀는 고개를 도리질 치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지도 쟝 아저씨만큼이나 좋아요! 좀 안웃어서 탈이긴 하지만..." 장영실이 부르는 밍과 미뉴엔느가 부르는 쟝은 서로간의 애칭임을 알 수 있었는데, 서로 무척 친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핫! 나도 밍이 아주 좋단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매일 같이 아저씨를 보러 가자고 조르면 안된 단다." 그의 말에 미뉴엔느는 입을 빼 쭘 내밀며 말했다. "피! 그래도 보고 싶을 때는 올거야!" "후훗. 저런 고집 불통 아가씨."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미뉴엔느를 바라보는 장영실이었다. 사실 이곳에 온 후 작위와 함께 저택을 하사 받긴 했지만, 제국 개발사업의 일 때문에 조금 멀리 떨어진 집에 거의 들어갈 일이 없이 바쁘게 되자 그것을 안쓰럽게 여긴 투르코스 재상은 그를 자택으로 몇 번 초대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조금씩 그의 가족들과 친해지기 시작해서 이제 미뉴엔느에게는 거의 삼촌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었다. 장영실과 미뉴엔느가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던 재상 부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영실 경은 이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시면서 결혼을 왜 아직 안 하셨죠?" 미뉴엔느에게서 잠시 시선을 뗀 장영실은 재상부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많아서 결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상당히 괜찮은 아가씨를 알고 있는데, 의향이 없으신가요?" 장영실은 난처한 얼굴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런... 제발 재상 부인만이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따분한 사교 모임에 가면 여러 부인들이 중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프답니다." 그의 표정이 재미있는 듯 재상 부인은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는데, 눈빛은 조금 아쉬운 듯했다. "호호호! 그런 것도 모르고 죄송하군요. 저도 다른 부인들처럼 중매나 한번 서볼까 했더니... 안 되겠군요?" "제발 다른 분께서 중매를 서겠다고 하시더라도 부인께서 말려주십시오." 장영실과 대화를 나누던 재상부인은 뭔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듯 했지만, 그가 이렇듯 질색을 하며 나오자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나저나 오늘도 이곳에서 루스티커님을 만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루스티커님과 함께 공학원으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잠시 미뉴엔느를 바라본 재상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우리 미뉴엔느. 쟝 아저씨가 바쁘시니 얼마 놀지도 못하고 집에 가야 겠는 걸?" "싫어! 나도 쟝 아저씨랑 같이 갈거야!" 미뉴엔느가 장영실의 목에 더욱 달라붙자 장영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이 때 멀리서 굵직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허헛! 장영실 경이 먼저 와있었군! 그리고 재상 부인도 계셨었군요." 루스티커를 바라본 장영실은 고개를 살짝 굽히며 읍을 했고, 재상 부인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루스티커님 오랜만이시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녁 식사 초대를 한번 해야 할 텐데..." 그녀의 말을 듣던 루스티커는 손을 내저었다. "말도 말게. 어디 투르코스 재상 얼굴 보면 식사가 제대로 되겠나? 이 나이에 잘못 체하면 약도 없지!" 장영실은 루스티커가 투르코스 재상의 웃음 없는 얼굴을 빗대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실소를 터트렸다. "하핫! 그건 맞는 말씀이신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이제 공학원으로 가봐야 하지 않겠나? 나 때문에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는데..." 장영실은 잠시 미뉴엔느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밍도 아저씨와 함께 갈테냐? 나중에 일이 끝나면 데려다 주마." 하지만 미뉴엔느는 루스티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요! 루스티커 할아버지 무서워!" 이렇게 외친 미뉴엔느는 급히 장영실의 팔에서 내려와 재상부인에게 달려갔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리를 들은 루스티커는 주름잡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녀석은 옛날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지... 옛날에 인형을 하나 홀랑 태워먹은 적이 있거든. 허헛! 이만 가세나." 몸을 돌리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루스티커를 보며 피식 웃은 장영실은 미뉴엔느와 재상 부인에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있거라 밍. 또 보자꾸나! 그럼 부인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시죠." 그의 인사를 받은 미뉴엔느 역시 손을 흔들었고, 재상 부인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각! 따각! 따각! 따각! 마차가 박자를 맞추며 거리를 달리고 있었는데, 안에는 장영실과 루스티커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개발 사업을 해온 지난 반년 동안 그들은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며 일에 대한 의논을 나누었는데, 그랬기에 서로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고, 개인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친분이 쌓여있었다. 장영실은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들 예술의 도시인 쟈트란시의 시민들답게 하나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멋을 위해서는 초여름의 더위나 부끄러움이라도 사양하지 않는 모습도 간간히 보이고 있었다. 문득 장영실의 옆에서 '제국 개발사업 개요서'를 읽어보던 루스티커가 물었다. "흠... 이제 쟈트란식의 전뇌거가 완성되었는데, 언제까지 이런 마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건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둔 장영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원료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소식통을 통해 듣자하니 도이첸 제국은 소규모의 수력발전소를 사용해서 얻은 전뇌력으로 마나구를 충전한다고 하더군요." 그에 대해서는 루스티커도 알고 있었기에 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의 마나구는 대체 어떤 마법사가 제작했기에 그런 대규모의 전뇌력 저장량을 가지고 있는가?" 어깨를 으쓱한 장영실은 오히려 루스티커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것을 왜 저한테 물으시는지요. 후훗. 분명 방금 루스티커님께서 그건 마법사가 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저 보다는 오히려 마법사들에 대해 잘 아는 루스티커님께서 더 잘 아시겠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루스티커님보다 더 훌륭한 마법사이지 않을까요?" 장영실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대들었다. "누가 감히 나보다 훌륭한 마법사란 말인가! 아주 옛날 같으면 모를까 마법사들의 씨가 마른 지금에 와서는 내가 최고란 말일세!" 장영실은 새삼스럽게 그의 높은 자존심에 놀라고 있었다. 시끄러워진 그의 입을 막기도 할 겸 장영실은 계속 해서 말을 했다. "하지만 우리만이 가진 장점이 있죠. 우리는 화학물질로 만든 축전지를 쓰기 때문에 마나구를 원료를 쓰는 것 보다 경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특별히 제작한 '전뇌순환동력기'를 장착했으니 더욱 전뇌력의 손실이 적어집니다. 아마 포스텀 후작님께서 이번에 대규모 수력 발전소만 완성시키게 된다면 곧바로 도시의 곳곳에 충전소가 들어서고, 무료에 가까운 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소리를 지르던 루스티커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흠... 하긴 값비싼 마나구가 장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전뇌거 가격이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 보다 싸긴 하지." "후훗 그 외에도 우리는 분할된 부품을 따로 팔기 때문에 사고로 인해 파손이 된다고 해도 금새 부품을 사서 끼워 넣으면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대단한 경쟁력이죠." 대화를 나누던 도중 루스티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창으로는 도저히 전체를 볼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고, 루스티커는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벌써 다 왔군. 차라리 걸어 올 것을 그랬나?" "후훗. 연세도 적지 않은데 무리하시면 좋지 않습니다." 루스티커는 나이 때문인지 힘겨운 발놀림으로 마차에서 내렸고, 장영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공학원 앞에 서서 잠시 가장 아래부터 지붕까지 올려다보던 장영실은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전에도 여러 번 보아왔던 루스티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가끔 이 앞에서 그런 흐뭇한 웃음을 짓는데, 대체 이유가 뭔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한 얼굴로 물어오는 루스티커를 한번 바라본 장영실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후훗... 제가온 곳은 공학원이 이렇게 땅위에 올라와 있으면 큰일 나는 곳이었답니다." "아니 그런 일이... 국가에서 법으로 공학을 금하기라도 했나?" 고개를 저은 장영실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는 대로 설명을 해 드리지요. 지금은 해야할 일이 있으니..." "뭐 그렇게 하세." 루스티커의 대답을 흘려들으며 공학원의 한쪽에 붙어있는 문 앞에 다가선 장영실은 뭔가 꺼리는 듯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끼리리오로록... 구르르링..." 이 우스운 말을 중얼거리자 조그마한 마찰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장영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루스티커가 이상한 취향으로 마법을 걸어 놓은 자물쇠였다. 문이 열리긴 했지만 얼굴을 붉힌 장영실은 루스티커에게 불만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할 때마다 적응이 안돼는군요. 이것 좀 제발 바꾸면 안되겠습니까?" 하지만 루스티커는 좋기만 한지 웃으며 답했다. "허헛! 얼마나 귀여운가? 외우기도 쉽지 않으니 다른 이들에게 암호가 유출될 가능성도 적고. 어서 들어가세."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던 장영실은 루스티커에게 떠밀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하나의 복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장영실과 루스티커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이는 일을 하다가 말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장영실 경. 루스티커 님." "좋은 오후네 기스터 학자. 열심히 하게나." "헐헐 자넨 언제나 열심히군! 수고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은 계속해서 공학원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의 풍기는 분위기는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과는 판이한 것이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의 공학원이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과는 다른 생산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의 경우를 공학원 건물 내부에서 연구와 생산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하는 일괄 방식이라고 하면, 이곳의 경우에는 공학원 내부에서는 연구와 정밀 부속만을 만들고, 대량 생산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분리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 공학원의 내부가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과는 다르게 여러개의 소규모 작업실을 가진 공학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기체 제작실' 이라는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루스티커는 마치 이 순간을 오랜 동안 기다려 온 듯 설레이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기관열차의 순환동력기를 볼 수 있겠군."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에 보여 드릴 것을 그랬군요." "그러니까 내가 말하기 전에 좀 자네가 챙겨서 보여주게..." 대화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천장의 높이는 약 20멜리, 그리고 폭이 50멜리 가량 되는 공간이었는데, 이곳이 이 공학원에서 가장대규모의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50여명의 사람들이 흰색 옷을 걸치고 작업 중이었다.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는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놓여있었다. 아직 완전한 형태를 지닌 것은 아니었기에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마치 거대한 전뇌거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아래쪽으로는 바퀴가 장착되는 듯 한쪽에 네 개의 바퀴 홈이 있었지만, 아직 바퀴는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루스티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쟈트란 1호 기관열차가 되겠군. 웅장해! 하지만 나중에 도장은 조금 화려하게 해주게. 그래야 듀들란 제국의 국민들이 좋아 할거야." 하지만 장영실은 그다지 자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기관열차의 본체 앞에서 서류 하나를 들고 무엇을 열심히 적던 젊은이가 장영실와 루스티커를 발견하며 달려왔다. "장영실 경 나오셨군요! 루스티커님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직은 루스티커님께서 작업하실 때가 아닌데 어떻게..." "오늘도 열심히군 라이에트 경. 루스티커님은 오늘 기관열차의 진척상황에 대해 구경오신 것 뿐이시네." "아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그의 말에 루스티커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나야 자네 같은 젊은이가 안내를 해준다면 고맙지. 솔직히 적정 혼기를 놓친 사람과 같이 다니는 것은 그리 좋게 보이지 안거든..." 루스티커가 장난을 걸어오자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렸다. "푸하! 그건 제가 드려야 할 말 같은데요? 루스티커님도 그 연세에 아직도 총각이시지 않습니까?" "에잉... 내가졌네. 아무튼 황녀님이나 울리지 말게! 이 눈치 없는 양반아!" 손을 내저으며 말한 루스티커는 할말이 없는지 라이에트를 이끌며 기체 제작실의 구경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루스티커의 입에서 황녀라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하기 시작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61 5월 봄. 자연의 섭리가 그렇듯 궁정에는 봄의 기운을 타고서 양분을 얻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고, 황궁에 머물고 있는 귀족들은 하녀들과 함께 봄의 기운을 즐기며 궁정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꽃에 비할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고, 입고 있는 의상마저도 꽃의 화려함에 버금가고 있었다. 헌데 화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 황궁의 정원 한쪽. 이제 완연한 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중충한 색깔의 겨울옷을 입고서 무엇인가에 열중 하고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다리를 대리석이 깔린 길바닥에 앉아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그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타인의 시선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의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유난히 화려함을 좋아하는 쟈트란의 사람들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고, 심지어는 '회색의 괴인' 이라는 별명까지 붙여 줬을 정도였다. 쉬는 틈을 타서 이곳으로 산책을 나온 두 명의 하녀가 있었다. 하녀 복은 검은 색과 흰색의 섞인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곳 쟈트란에서는 그것도 예외였는지 전체적으로는 밝은 핑크 색에 소매나 옷자락의 끝으로는 약간의 레이스까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효율성 면에서는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듯 했으나, 이곳이 쟈트란인 이상에야 효율보다는 아름다움이 먼저였다. 두 하녀 중 한 명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 장영실을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머! 오늘도 저 사람은 이곳에 있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분위기를 다 망칠게 뭐람..." 하지만 동료 하녀는 큰일날 소리라도 한다는 듯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얘 조용히 말 좀 해! 저분이 저렇게 보여도 남작이야!" "저런 몰골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남작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하녀는 그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는 듯 동료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요즘 귀족들 중 가장 잘 나간다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야! 사실 황제폐하께서 백작의 작위를 내리려고 했는데,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더라고!" "아니 왜?" "뭐 저분은 5년 동안만 이곳에서 일을 하시고 떠나신다나? 그렇다보니 그렇게 높은 작위는 필요 없다고 했나봐." "흠... 배포가 상당한데?" "자세히 봐! 자꾸 볼수록 괜찮은 생김새 아니니? 뭐랄까 딱 꼬집어서 잘생긴 건 아닌데, 보면 볼수록 포근하게 보인다고 할까?" 말을 하고 있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하녀는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쯔쯧... 네가 남자 구경을 한동안 못하더니 완전히 이상해진 거야! 세상에 어디 남자가 없어서 저런 남자를..." 두 하녀가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정원의 한 쪽으로부터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궁금함에 고개를 돌리던 하녀는 정원의 입구에 서있는 한 명의 여인을 보고선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케티에론 황녀님이시다! 빨리 인사나 하러가자!" "늦었다간 불똥이 떨어 질 거야..." 정원의 입구에 서있는 한 여인. 타오르듯이 붉은 드레스와 도도하게 다물어진 입술, 매서운 듯한 눈매 그리고 붉으면서 곱슬 한 머리가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를 대충 짐작케 하고 있었다. 이 여인 케티에론 황녀는 현 듀들란 제국의 어린 황제인 크로시드 3세의 친누나라는 엄청난 신분에 걸맞게 상당히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나이는 27살로 듀들란 제국의 적정 혼기가 23살인 것으로 보면 결혼이 늦은 축이었다. 하지만 이유 없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는 법이었는데, 높은 콧대와 남자를 우습게 보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케티에론 황녀는 귀족의 여인들과 하녀들에게 인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턱을 치켜세운 모습이 마치 하계를 내려다보지 않으려는 거만한 여신과 같이 보였다.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인 여인들은 저마다 준비라도 해온 듯 그녀의 기분에 맞추는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문안인사 드립니다. 케티에론 황녀님. 이곳에 왕림해 주시니 정원이 더욱 화사해 지는군요." "오늘은 더욱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황녀님! 저희가 황녀님의 아름다움을 반이라도 쫓아 갈 수 있었으면..." "피부가 좋아 보이는 군요. 마치 개미라도 한 마리 살결에 올라간다면, 비단으로 착각하고 잠을 청할 정도입니다." 케티에론 황녀는 마치 그녀들의 인사가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는 듯, 처음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을 경우에 황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날 때마다 마치 극의 대사와 같은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이어 케티에론 황녀는 귀족의 여인들을 이끌고 정원을 한바퀴 돌기 시작했는데, 유난히 장미를 좋아하는지 장미가 만발해 있는 곳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한 참을 보던 그녀는 장미 한 송이를 치켜세우며 약간의 높은 톤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이 나의 미모에 눌려 고개를 숙이고 있다니... 햇빛을 조금이라도 잘 받아야 조금이나마 아름다워 질텐데..." 그녀의 뒤를 따르던 귀족 여인들과 하녀들은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숙인 고개를 방패삼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각 종류의 꽃 앞에만 멈춰 설 때면 그것과 자신의 미모를 비교하며 자아도취에 빠져들곤 했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은 장영실의 앞에 닿아있었다. 그 때까지도 장영실은 흰 종이를 여기저기에 늘어놓은 채로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케티에론 황녀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기 이전에 자신을 보고도 이렇듯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듯 특유의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본 황녀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역시 집중하고 있던 장영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황녀는 화가 났지만, 자신의 신분과 품위에 흠집이 날까 두려웠기에 애써 참으며 조금은 거칠어진 말투로 재차 물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본 황녀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가?" 그녀의 물음이 끝나자 장영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가, 어두운 색의 외투는 더욱 그를 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낭자께서 해를 가려 어둡습니다. 잠시만 비켜주시겠습니까?" "뭐..뭐라고!" 장영실의 한마디에 말을 잇지 못하던 케티에론 황녀는 품위에 걸맞지 않게 뒷덜미를 부여잡고 쓰러졌으며, 황실은 한바탕 큰 소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한시간 정도나 지나서야 실신 상태에서 깨어난 케티에론 황녀는 그를 처벌하라며 동생인 크로시드 3세를 붙들고 소란을 피웠지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국가 중대 사업을 맡고 있는 장영실을 처벌하기도 우스운 일이었기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케티에론 황녀의 천적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장영실이 회상에 빠져 있을 때 루스티커는 라이에트의 설명과 함께 기체 제작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특히 그는 지금 제작중인 기관열차의 대형 설계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는데, 그가 관심을 보이자 라이에트는 설계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장영실 경께서 직접 제작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죠." "후훗 장영실 경이 대단한 것은 애초 알고 있었으니 설명이나 계속 해주게." 루스티카의 말에 가볍게 웃은 라이에트는 기관열차의 동력기 부분을 짚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 부분이 얼마 전에 완성된 순환동력기의 모습입니다. 이것 역시 전뇌거와 같은 순환동력기의 일종임으로 작동을 하는 동시에 전뇌력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필요한 전뇌력을 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번의 전뇌력 충전에 의해 동력기를 두 배의 힘으로 더욱 긴 시간을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스티카는 그의 설명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애초 열악한 연료환경에서 최소한의 전뇌력 효율로 최대한의 효과를 높이는 것이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나온 것이 바로 이 전뇌순환동력기였던 것이었다. 그의 말에 갑자기 나타난 장영실이 얼굴을 들이밀며 농담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루스티커님께서 마법으로 기관열차의 무게만 살짝 줄여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루스티커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말도 안되네! 이 거대한 기관열차에 마법을 걸어 달라니... 검 한자루에 마법을 거는 것도 힘든 판국에!" "하핫! 장난이었습니다 루스티커님. 루스티커님께서 해주실 것은 따로 있습니다." "흠 천만 다행이군. 그 말이 진짜였으면, 아마 황궁 마법사 자리를 포기하고 떠났을 걸세." 루스티커가 나이답지 않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자 장영실은 한숨을 내쉬는 척 했다. "저야 말로 천만 다행이군요. 루스티커님께서 떠나시면 저보고 이것들을 언제 다 하라고요? 이젠 루스티커님께서 보고싶어 하시던 기관열차용 순환동력기를 보러 가셔야겠죠?" 잠시 잊고 있었던 루스티커는 이마를 치며 외쳤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늙으면 항상 이렇다니까. 잘못 했으면 여기까지 와서 완성된 순환동력기도 못보고 갈 뻔했군. 어서 안내하게나." 루스티커의 비명 같지 않은 비명은 장영실과 라이에트의 얼굴을 미소 짓게 만들고 있었다. 장영실과 루스티커 그리고 라이에트가 서있는 곳은 기체 제작실의 바로 옆 연구실에 마련된 '순환동력기 실험실' 이었다. 이 곳은 기관열차의 순환동력기 이외에도 전뇌거등의 순환동력기를 제작, 실험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주로 기관열차의 순환 동력기에 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 실험실의 중심부에는 튼튼한 금속의 받침위로, 보기만 해도 복잡한 기계가 보이고 있었고, 굵은 전뇌선들이 그곳으로부터 뻗어 나와 방안을 어지럽혔다. 이곳에서 일하던 두 명의 사내들이 있었는데, 라이에트가 눈치를 주자 장영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라이에트는 그들이 나간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순환동력기죠. 대부분 장영실 경께서 직접 제작하셨지만, 저도 조금 도왔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지라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밝히는 모습이었는데, 루스티커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 수고했군. 장영실 경에게 공학을 배우면서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루스티커가 칭찬을 해주자 라이에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 했다. "솔직히 힘이 들긴 하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연금술을 배우는 것 보다 이쪽이 훨씬 도움이 되요. 공부를 하면서 막히는 것은 장영실 경께서 도와주시기도 하니까요. 정말이지 모르는 것이 없다니까요!" "후훗... 그래도 장영실 경은 여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네. 그 점에서는 라이에트 경이 훨씬 나아!" 한참 전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는 루스티커를 보며 장영실은 이해가 안 되는 듯 했다. "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십니까? 재상부인께서는 맞선을 보라고 하시지 않나, 루스티커님은 이렇게 이상한 말씀만 하시다니..." "흠흠... 내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지 않나? 라이에트 경 순환동력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지 않겠나?" 더 이상 말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루스티커는 은근히 말을 돌렸다. 그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라이에트는 복잡한 배선이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그럼 임시 전뇌력을 넣겠습니다." 그가 선반 위에 있는 여러 개의 손잡이 중 몇 개를 아래로 내리자 순환동력기를 받치고 있던 금속받침이 조금씩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 진동을 타고 이제는 바닥까지 떨려오기 시작했는데, 발바닥으로 진동을 느끼자 루스티커는 손을 저으며 라이에트에게 신호를 했다. "이제 그만 멈추어도 좋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걸? 전뇌거용 순환동력기를 봤을 때도 놀랐는데, 그것을 이런 대형으로 만들다니..." 라이에트는 자기 혼자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제작하는데 일부분을 담당했었기에 기분이 우쭐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형의 순환동력기인 이상 엄청난 열이 발생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방안이 벌써 후끈해 졌다는 느끼는 루스티커였다. "그렇군. 하지만 예전에 자네가 정밀기계는 열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잘 기억하고 계시는 군요. 그래서 루스티커님이 그 문제를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수염을 쓰다듬은 루스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나보고 마법을 사용해 달라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냉각기를 달 생각도 해봤지만, 이 열을 식히려면 냉각기를 돌리는 데도 상당한 전뇌력이 들기 때문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지금은 안되겠고, 연구실에서 온도를 고정시킬 마법을 한번 찾아 보도록 하겠네." "하핫. 도와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장영실의 술수에 의해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 루스티커였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62 백의 화원 공학원에서 돌아온 장영실은 한쪽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지도를 보고 있었다. 과연 이곳의 지도제작 기술상 그것이 얼마나 정확할 지는 몰랐지만, 거대한 줄기만을 잡으면 되는 기관열차의 철도 사업이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쓰고 있는 것이었다. 지도 위에는 듀들란제국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쟈트란시로부터 붉은 색으로 거대 도시까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고, 간혹 파란선이 그어져 있기도 했다. 이것은 현재의 철도 공사의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아직까지는 미완성을 뜻하는 붉은 색의 선이 대부분이었다. 그 것을 한참동안 보며 각 붉은 선마다 옆쪽에 파란선을 1셀리 정도씩 더 그은 장영실은 전체적인 지도의 모습을 한번 더 보며 입을 열었다. "1개월에 3켈리라... 생각보다는 진척이 빠르군. 앞으로 3년 이내에 철도는 완성이 되는 것인가?"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저 코르핀 입니다." 장영실은 그의 이름을 들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코르핀은 장영실의 잡일을 돕기 위한 보좌관이었는데, 자신의 손을 꼼꼼히 거쳐야만 만족을 하는 이상 모든 잡일을 직접 했다. 그랬기에 코르핀에게 명신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거의 한달 만에 그가 장영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오! 어서 들어오시오!" 그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아주 작은 키에 머리리 숫까지 얼마 없었기에 잘나지 못한 외모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눈매만은 예리하게 살아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장영실 남작님." "그 동안 어디를 다녀온 것이오?" 코르핀의 안부를 물은 장영실은 그를 소파로 안내해 자리를 청했다. 그가 청한 자리에 앉은 코르핀은 품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장영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을 한번 보십시오." 두루마리를 받은 장영실은 능숙한 모습으로 펼쳤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장영실을 향해 코르핀이 설명을 덫 붙였다. "그것은 도이첸 제국에서 각 동맹국으로 돌린 추방자 명단입니다. 헌데, 황궁에 소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던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원장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더군요." 장영실은 답답한 마음에 두루마리를 손으로 구기며 말했다. "이런! 대체 추방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잠시 말을 꺼리며 장영실의 표정을 살피던 코르핀은 추방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고, 그것을 들을 때마다 장영실의 얼굴을 일그러지고 있었다. 추방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장영실은 다시금 물었다. "3년 이내에는 어느 국가에서도 기거할 수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정말 찾아내기 힘들겠구려." 코르핀의 생각도 그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도 뮤스원장에 대한 추적이 현제로서는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런... 겨우 그 아이의 소재를 알아냈더니... 이제는 추방이라니. 그것도 그 끔찍하던 미개척지로..." 장영실은 자신이 이곳에 온 후 고생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추악한 마물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는데, 겨우 혼자만 살아 돌아온 그 끔찍한 상황은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헌데, 그런 곳에서 무려 3년이란 기간동안을 혼자 지게 된 뮤스를 생각하니 걱정스럽게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코르핀은 그를 위로라도 하듯이 말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뮤스 원장은 3대 마역에 속하는 드베인 숲에서도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미개척지 정도에서는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위로가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 듯 장영실은 인상을 조금 폈다. "제발 그러기를 빌어야 겠지... 아무튼 수고해 줘서 고맙소." "후훗 제가 뭘 한 일이 있어야죠. 봉급도 받고 여행도 공짜로 하니 오히려 이곳에서 잡일을 하는 것보다는 좋군요." "그럼 다행이구려. 앞으로도 신경을 많이 써주시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코르핀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그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어디론가 가버렸구나... 하지만 그 동안 돌아갈 준비를 모두 해 놓을 테니, 부디 만나게 되는 그날까지 몸조심하길..." 나직한 혼잣말을 중얼거린 장영실은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낮이 긴 여름이어서 인지 저녁 식사 때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둠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가볍게 마친 장영실은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궁중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그랬듯 책이 한 권 들려있었는데, 어제 그 책은 벌써 다 봤는지, 이번에는 제법 두꺼운 책이었다. 걸음을 걸으며 책을 읽던 장영실은 문득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책에 빠져 누가 있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부딪혔겠지만, 아직 책에 몰입한 단계가 아니어서 인지, 정확한 거리를 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에 익숙한 한 여인이 그 앞에 서있었다.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나 사교모임에서 만난 여인들에게는 무관심했지만 붉은색 곱슬머리가 특이했기 때문에 이 여인에 대한 기억은 제법 뚜렷한 편이었다. 오직 붉은색의 곱슬머리라는 특이한 머리 때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 장영실은 가볍게 읍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인은 케티에론 황녀, 현 황제의 누나였다. 남작이란 지위와 비교 한다면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는 위치였지만 장영실은 그저 옆집에 살고 있는 여인의 앞이라도 되는 양 편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익숙해 졌는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케티에론 황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장영실 경. 오늘은 어디를 가시죠?" 그녀가 얼마나 오만한 여인인지 알고 있는 다른 이가 들었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궁정 도서관에 가는 길입니다. 혹시 다른 하명하실 일이라도 또 있습니까? 이곳은 정원이 아니니 제가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녀도 되 듯한데..." "아..아뇨, 저는 그냥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인사를..." 장영실의 물음에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는데, 금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며 장영실을 지나쳤다. 그리고 그녀는 복도의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복도에는 아직도 그녀의 향이 남아있는 듯 했다. 그 향기를 느낀 장영실은 자신의 손을 펴보며 예전에 경험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장영실은 버릇처럼 궁정에 나와있었다. 그가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채광이 잘 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을 하면 눈이 그만큼 덜 피로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는데, 오랜 동안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눈뿐만 아니라 모든 신경에 피로를 주는 일이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은 귀족여인들이나 그녀들을 뒤따르는 하녀들이 몇 없었는데, 그새 봄의 설렘이 모두 가신 듯 어느새 이곳의 인기는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장영실에게는 신경을 쓸 일이 그만큼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여서 예전보다 훨씬 쾌적한 작업환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장영실은 한 편에 책을 한참이나 쌓아 놓고 뒤적이고 있었다. 그가 조선으로부터 가지고 온 책은 아니었지만, 궁정 도서관에서 가지고 나온 책들로서 이곳의 주요 광물 채광 장소 등의 유익한 정보들이 담겨있었기에, 자주 도서관을 들락거렸고, 책을 읽는 데에도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책을 찾아보고 있는 와중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워 졌다. 처음에는 책에 신경이 쏠려있었기에 그저 태양이 지나가는 구름에 가렸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선가 경험해본 말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흥! 당신은 반성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톡 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괴롭히자, 잠시 책을 덮은 장영실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케티에론 황녀가 서있었는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곤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자리 좀 비켜 달라고 하면 큰 죄가 되는군요. 제가 이곳은 처음인지라 잘 몰랐습니다." 말을 놓고 봐서는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내고 있는 그녀의 태도를 비아냥거리는 것이라고 들을 수도 있었지만, 장영실의 표정이나 말투를 들어보면 정말 그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지 모르는 듯 했다. 답답해진 황녀는 더 이상 품위 따위는 접어 버리며 외쳤다. "당신은 어디 다른 세상에서라도 왔어요!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장영실은 혼자 말을 하고 혼자 열을 내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벌이기에는 너무나 일거리가 많았기에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실례지만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만약 계속 화를 내시고 싶으시다면 조금만 옆으로 물러서서 해주시지요. 글이 잘 안보여서..." 그는 나름대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부탁을 했지만, 케티에론 황녀에게는 이보다 속을 긁는 소리가 없었다. 혼자 씩씩거리던 황녀는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요! 꼴 도 보기 싫으니까! 이것은 이 나라의 황녀로서 하는 명령이예요!" 부지간에 축객령이 떨어지자 어안이 벙벙해진 장영실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 굳은 의지를 담고 있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이 깊기만 했다. 순간 케티에론 황녀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근위병들을 부르겠어요." "제가 왜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죠. 만약 제가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제 발로 걸어나가겠습니다." "그것은..." 그녀는 잠시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곤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데, 곧 뭔가 좋은 핑계거리가 떠오른 듯 했다.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 하시죠?" "이곳이야 정원이 아닙니까." "그래요 이곳은 정원이에요. 정원은 언제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화사해야하고, 특히 봄에는 사람들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자주 찾으니 더욱 그렇죠!" "그런데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양 되묻자 케티에론 황녀는 짜증을 내며 뒷말을 계속 이었다. "뭐가 그래서 예요! 당신이 그런 어두침침한 옷으로 이곳의 분위기를 다 망치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가라는 것이죠! 게다가 이곳은 당신이 일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잠시 곰곰히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흰옷을 입으면 되겠군요. 그럼 함께 밝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그건.." 순간 말이 막히자 케티에론 황녀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인식 못한 채 고함을 빽 질렀다. "아무튼 당신이 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있으니까 꽃들이 다 어두 침침해졌잖아요! 그러니 썩 나가요!" 동시에 그녀는 화를 못이기고 품위에 맞지 않는 터벅 걸음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장영실은 절로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나원 참... 원래 꽃이 이맘때면 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을... 나 때문에 시들고 있다는 말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장영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보던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케티에론 황녀는 가슴속에서 뭉개 뭉개 피어나는 짜증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밤에는 잠까지 설쳐 피부는 퍼석해 보였고, 머리는 유난히 정리가 안되었다. 게다가 오늘 따라 화장도 잘 안 되는 것 같아 더욱 심란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옷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입고자 옷장을 열어 젖혔다. 수많은 옷들이 걸려있고, 쟈트란의 그 누가 보더라도 감탄성을 뱉을 만큼 멋진 옷들이 수북했지만, 오늘 따라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이 모두 그 장영실 남작인가 하는 인물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주변에 있던 남성들 중 누가 장영실만큼 자신을 모독을 하고 우습게 봤겠는가. 게다가 옷차림은 거지 보다 조금 낳은 수준이었고, 얼굴도 이상하게 생겼다. 이런 생각을 하며 케티에론 황녀는 그를 점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야만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유! 분해 죽겠어! 오크같이 생긴 녀석!" 그녀는 평소 하녀들에게 욕이라도 한마디 배워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기껏 해봐야 마물의 이름을 한번 외쳐 봤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분한 마음을 표출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녀석은 아마 날 비웃고 있을 거야! 감히 황녀인 나를... 어제 그런 어수룩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뼈에 사무친 듯 어제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케티에론 황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들은 케티에론 황녀는 그것이 자신의 시녀의 것임을 알고서 신경질 적으로 외쳤다. "귀찮다! 나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다오!"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면 최대한 화를 억제하고 대답을 했겠지만, 이미 자신의 성격을 알대로 다 알고 있는 시녀였기에 애써 화를 감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녀는 급한 일인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장영실 남작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장영실이라는 이름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케티에론 황녀는 직접 문으로 달려가 열어 젖히며 말했다. "그 작자가 뭐가 어떻게 했다는 거야!" "그것이... 말로는 뭐라고 표현을..." 말을 하는 시녀의 모습은 다급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황홀해 보이기도 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케티에론 황녀는 그녀를 밀치며 직접 매일 그가 작업을 하는 정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원의 입구 쪽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정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로 안을 구경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장영실이라는 작자가 무슨 일을 벌여 놓은 듯 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사람들이 확인하자 모두들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황녀님 오늘 따라 유난히 아름다우십니다." "햇살보다 더욱 눈이 부시는 군요." 지금 이곳에 장영실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로 왔다면 그들의 인사를 음미해보며 속으로 즐겼을 테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사람들을 손으로 헤쳐 정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이게 대체..." 그녀가 정원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커졌고,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이제야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는데,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는 정원은 순백색의 꽃으로만 가득 차있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붉던 장미가 오늘은 흰색으로 변해 있었고, 파란색의 네모필라 또한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니, 말 그대로 모든 정원의 꽃들은 모두 흰색이었다. 한동안 입을 다물 줄 모르던 그녀는 서둘러 장영실을 찾았다. 말 그대로 백의 화원이 되어버린 그곳에 장영실이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앉아서 일을 하던 그곳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같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평소와 다르게 전신으로 흰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 화를 내는 것 마저 깜빡한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물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의 기색은 없었고, 순수한 호기심만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보던 책을 접고 펜을 거둔 장영실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황녀님께서 분명히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곳의 분위기가 어두워지기에 저를 내보내야겠다고... 그래서 번거롭긴 했지만, 가장 밝은 색으로 꾸며 보았습니다. 옷도 바꿔 입고요. 사실 오랜 동안 이곳에서 일을 했더니, 이곳이 아니면 일손이 잡히지가 않더군요. 사람의 성향이라는 것이 뭔지..." 자신이 한번 스치며 말한 것에 정원 전체의 색을 바꾼 눈앞의 장영실을 보던 케티에론은 어쩌면 이 사람이 보기보다는 괜찮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살펴보던 장영실은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게 소리를 지르지 않자 그럭저럭 일이 잘 된 것으로 간주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다른 이유가 없으면 이곳에서 일을 계속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흠... 잘되었군요." 말을 마친 장영실은 읽던 책을 다시 펼치며 펜을 들었다. 그리곤 수많은 도형이 그려진 책 위로 무엇인가를 덫 붙여 나가고 있었는데,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황녀는 뭔가에 홀린 듯 넋이 나간 모양으로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오늘은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Total 37 articles, 4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짜가신선 (jjagagod@nownuri.net) Subject <대공학자> #163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채 일어나지도 않았을 이른 시간부터 정원에서는 난데없이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꺄아악! 이게 다 뭐야!" 정원에 서있는 케티에론 황녀는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오랜만에 설레게 만들었던 백의 정원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상쾌한 기분으로 이곳을 다시 찾아온 것이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어제만 해도 눈부시게 피어있던 하얀 꽃의 꽃잎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너무나 분노하자 따라나온 시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황녀님! 고정하십시오!" 하지만 황녀는 시녀의 손을 뿌리치며 이빨을 갈았다. "설마 장영실 이 작자가..." 순간 장영실의 이름을 내뱉던 그녀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시녀는 천천히 케티에론 황녀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눈앞으로 손을 휘저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케티에론 황녀가 분노를 못 이기며 서서 실신한 것을 깨달은 시녀는 경악을 하며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황녀님이 실신하셨습니다!" 그녀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케티에론 황녀는 무사 할 수 있었는데, 이것으로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에 의한 두 번째 실신이었다. 같은 시간,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함께 도서관에서 작업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책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루스티커는 마침 황궁에 소문이 자자하게 난 정원에 대해 떠올리며 물었다. "아참 장영실 경. 낮에 소문을 듣자하니 자네가 정원을 하얀색으로 탈바꿈 시켰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 잠시 그의 물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네... 그런 일이 있었죠." 루스티커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오... 자네가 마법을 쓴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일을 할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군. 그것도 공학의 일부분인가?" "공학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화공학의 원리를 이용한 장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난 그 덕에 황궁에 새로운 명소가 한 곳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책장을 넘기고 있던 장영실은 그의 말에 손을 멈추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소라니요. 무슨 말씀이 신지 모르겠는걸요?" "생각을 해보게 어디 세상에 여러 종류의 꽃이 모조리 흰색으로 만발한 정원이 이 대륙에 있는지..." 그제야 루스티커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깨달은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리며 웃었다. "하하핫! 죄송하지만, 지금쯤이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루스티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 떨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사실은 어제 제가 정원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부터 장영실은 황녀의 일부터 자신이 정원에 장난을 친일에 대해 성명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내려 말도 안돼는 억지를 피워오자 더 이상 할말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 정원의 꽃을 모두 탈색시켰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탈색 과정에서 이산화황을 이용했다는 것과 그 냄새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정의 꽃들은 이상화황에 의해 탈색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색과 함께 생명까지 날아가 버린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뭐 그렇게 된 것이죠. 그러니 황녀님은 다 죽은 꽃을 보고서 깜빡 속았다고 나 할까요? 어차피 날이 더워서 실내에서 작업을 하려던 차에 마지막으로 콧대 높으신 황녀님께 장난을 좀 쳐봤죠." 그의 말을 듣던 루스티커는 고개를 가로 저었는데, 왠지 이번에는 케티에론 황녀가 적을 잘못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건 이렇게 해서 케티에론 황녀와 장영실의 2차 전이 끝나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생기는 회상에서 빠져 나온 장영실이 창 밖을 바라보자, 그새 해가 저물어 어두워져 있었다. 잠시 후, 복도의 천장에는 실내를 밝히는 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나등이 아니라 장영실이 만든 전뇌등으로서 제국의 도시로 보급하기 전에 황궁에서 직접 사용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현 단계에서는 모든 계층에 전뇌등을 보급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고가의 마나등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했기에 알맞은 보급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자신이 도서관으로 가던 중이었음을 깨달은 그는 손에 들린 책을 다시 읽으며 가던 발걸음을 옮겼는데, 거의 다 와서 케티에론 황녀를 만난 상황이었기에 금방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먼저 와있던 루스티커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두께가 거의 한 뼘은 될 듯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저것을 정말 다 읽을 의문이었다. "루스티커님 언제 오셨습니까?" 루스티커는 오랜 동안 책을 읽어서인지 눈이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부비며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음? 자네 이제 왔군. 저녁을 먹고서 혼자 심심하던 차에 먼저 와서 기다렸다네. 그러고 보니 아까 코르핀이 황궁에 와있던데 자네가 찾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해서 어떤 소식이라도 있었나?" 그의 물음에 장영실은 안색을 어둡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이 있긴 있었지만, 조금 좋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더군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이첸 제국에서 그 아이를 추방시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황궁에서 기거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에 추방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던 루스티커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아니! 추방이라니! 그 아이가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원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인재를 추방하다니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큰 죄를 지을 만한 녀석이 아닌데..." "허허...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군.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바뀌었다고 하더니 인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제 망할 때가 다 되어 가는가? 자네를 능가하는 지식을 가진 아이라면 그야 말로 대단할 터인데..." 입맛을 다시며 안타까워하는 루스티커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후훗! 명신이도 듀들란 제국으로 끌어들이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의 정곡를 찌르는 말에 루스티커는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허헛! 어찌 그리 이 늙은이의 마음을 그리 잘 아는가? 솔직히 나도 꼭 만나 보고싶네. 자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야만 하는 그 아이를..." 말끝을 흐린 루스티커는 장영실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 정말 5년의 서약이 끝나면 제국에서 보장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아이를 찾아 떠날 것인가?" 그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던 장영실은 한동안의 생각 끝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이곳에서 저에게 지원해주는 주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개인적으로 몹시 안타깝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을 모두 해 주니 정녕 공학도로서 포기하기 힘든 조건이죠. 하지만 그 이상의 신념이 있기 때문에 저는 꼭 떠나야 합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신념이 있기에..." 루스티커는 자신의 때아닌 질문에 분위기가 딱딱해 지자 환기라도 시키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장영실을 바라보았다. "허허헛! 자네가 훌쩍 가버리고 나면 나는 그럼 누구와 대화를 나눠야 하나? 가기전에 친구라도 한명 소개 시켜 주고 가게나!" "하핫! 아직도 4년 이상이나 남아있는 걸요. 그 동안 지겹게 저와 함께 생활하셔야 할 것입니다." "나야 자네 같은 사람과는 평생 함께 해도 좋을 것만 같네. 솔직히 내 평생 살면서 자네처럼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못 만나 봤으니..." "그러니 그 괴팍한 성격 좀 고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면 또 다시 혼자가 되실 텐데 지루하셔서 견딜 수 있을 까요?"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부드러워 지자 이야기를 멈추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미소를 지었는데, 많은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십 년을 붙어 지낸 지기와 같은 모습인 듯 했다. 쟈트란시의 도심으로부터 5켈리 가량 떨어져 있는 한적한 숲 속으로 3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이 한 채 보였다. 붉은 색의 지붕을 가진 이 저택은 지어진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기분 좋은 나무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집 앞의 정원에는 잘 손질 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매일 같이 청소를 하는 듯 떨어져있는 나뭇잎 하나 없이 깨끗해서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마침, 한 인물이 저택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큰 키에 듬직한 어깨를 가진 사내, 장영실이었다. 이곳이 바로 그가 하사 받은 저택이었는데, 아주 간혹 들리기에 그가 걷고 있는 오솔길은 마치 처음인양 낯설었다. 그가 집의 문 앞까지 도착하자 흰색의 도료가 칠해져 있는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안으로부터 노년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지금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장영실임을 알고있는 듯 한 목소리였다. "남작님 이십니까?" -탈칵! 문이 열리면서 반가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노년의 부인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남작님! 이번에도 거의 일주일만에 오시는 군요." 그녀의 말에 멋 적은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는데, 지위 상 남작인 장영실이 하인에 속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조선에서의 예절이 남아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고, 그녀도 그것에 익숙한 듯 했다.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아주머니? 아저씨는 어디 나가셨나 보군요?" "마침 집에 마땅한 낫이 없는 바람에 마을로 낫을 좀 사러 나갔습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나... 시장하시죠? 금방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하죠." 장영실도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메닐드 부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이 집에는 장영실을 포함해 세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이 방금 전 식당으로 들어간 노년의 부인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인 메닐드 였다. 처음에는 이들 부부 외에도 여럿의 하인들이 있었지만, 사람이 집에 많은 것은 불편했기에, 그 중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던 메닐드 부부만이 남은 것이었다. 소파에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자 어느새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지 메닐드 부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작님 식사하세요! 오늘은 남작님께서 좋아하시는 훈제 바비큐랍니다!" 그녀의 소리와 함께 식당으로부터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듯 했는데, 더욱 허기가 짐을 느끼며 금새 몸을 일으켜 식당을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메닐드 부인은 그녀와 잘 어울리는 갈색의 앞치마를 입고서 커다란 접시 하나를 식탁으로 나르고 있었는데, 접시 위로 노릇하게 잘 구워진 바베큐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어서 앉으세요!" 그녀의 말대로 자리에 앉은 장영실은 이곳에서 배운 식사 예절대로 식탁 위의 냅킨을 다리 위에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매콤한 음식을 먹는군요." 애초 그가 이곳에 와서 가장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처음에야 굶주려 있던 탓에 주는 대로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느끼함에 음식을 입에 대기도 싫을 지경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메닐드 부인에 의해 해결이 되었는데, 장영실이 먹는 모든 음식에 매콤한 향료를 사용해 주었기에 그의 입맛에 맞았던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반은 먹는 것이니, 장영실에게 그녀는 일종의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앞에 놓여진 접시를 본 장영실이 나이프를 들어 바베큐를 자르자 구수하면서도 매콤한 향이 나고 있었는데, 그 향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장영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가장 그리운 것이 이 냄새 더군요." "저도 매번 맛있게 먹어 주는 남작님을 보니 절로 요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요."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느낀 장영실은 그녀의 말에 보답이라도 하듯 크게 자른 고기 조각을 한 입에 넣었고, 그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맛있는 표정을 얼굴 전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장영실이 맛있게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메닐드 부인은 마치 자신의 친자식이 식사하는 것을 보는 양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장영실도 이런 느낌이 좋았기에 집에서의 식사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장영실은 간단히 씻은 후 1층의 서재로 갔다. 그곳에는 보통의 서재와 같이 책장으로 여러 분야에 대한 책이 가득 꽂혀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집을 지은 건축가가 구색을 맞추기 위해 꽂아 놓은 책이었기에 먼지만 수북히 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궁정 도서관에서 빌려나온 책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 있었었고, 수많은 도면들 역시 두꺼운 책만큼이나 많이 쌓여있었다. 그것들을 한번씩 뒤적여 보자 저번 주에 작업을 하던 내용임을 알고서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이런저런 잡일을 하던 그는 서재의 벽 앞에 서게 되었다. 그 벽에는 두꺼운 커튼이 걸려있었으며,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었는데, 거실과 서재를 나누는 벽이라는 것을 봐서는 가리고 있는 것이 창문은 아님이 확실했다. 이내 장영실은 그 커튼을 양쪽으로 활짝 펼쳤는데, 그 안으로 벽을 가득 채우는 크기의 도면이 한 장 걸려 있었다. 그 도면의 위에는 마치 화장대 거울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복잡한 기계가 그려져 있었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져 있는 모든 수치는 이곳 듀들란의 글이 아닌 한자로 되어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나직하게 말했다. "차원이동문... 설계도는 겨우 완성했지만... 아직 제작에 착수도 하지 못한 상태이고, 조선의 차원 수치도 모르는 상태이니 정말 막막하군..." 답답함의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젖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 도면은 그가 일을 하며 틈틈히 그린 차원이동문의 설계도였다. 하지만 설계도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기에 차원이동문을 제작을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결국 훗날로 제작을 미뤄놓은 상태였다. 차원 이동문의 설계도를 꼼꼼히 살펴보며 잘못 된 점을 찾아내고 있을 때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작님 안에 계십니까?" 목소리를 들은 장영실은 그것이 메닐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기에 문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메닐드 아저씨" 문이 열리면서 얼굴주변에 주름이 약간 있는 노년의 남성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메닐드였다. 그는 집안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답게 나이에 맞지 않게 건장했는데, 평소 낙천적으로 살아서 인지 더욱 젊어 보였다. 그는 술을 한잔 마신 듯 했는지 상당히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남작님 오랜 만에 오셨군요. 허헛 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으 신가요?" 그의 물음에 장영실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늘 바쁘지요. 헌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보군요? 평소 안 드시던 술까지 드시고..." "뭐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만난 친구가 좋은 술을 한 병 주더군요. 그래서 조금 마셨습니다. 혹시 남작님께서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메닐드의 제안에 잠시 생각해 보던 장영실은 지난 며칠 동안 명신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로 조금 복잡해진 심정을 털어 버릴 필요도 있었기에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이거 귀한 술을 제가 축내도 될 지 모르겠군요." 메닐드는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 저었다. "껄걸! 이거 서운합니다. 축을 낸다니요! 원래 좋은 술은 여러 사람이 나눌수록 더욱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나오시죠." 어서 나오라는 손짓을 하며 뒤돌아 서재에서 나가는 메닐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어찌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닐 수 있는 술 한 병에 행복을 느끼는 메닐드가 진심으로 부럽다고 느끼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64 초여름의 더위를 품은 햇살이 궁전의 두터운 기둥에 부딪히며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기둥은 어른의 팔로 세 아름은 족히 되었고, 천장과 접해있는 부분으로는 날아 갈듯 노니는 처녀들의 모습이 조각되어있었다. 그 기둥의 사이로는 내부로 스며드는 빛을 막기위한 차렴이 하늘거리며 처져있었는데, 그 안쪽에는 흰색의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저곳에 불규칙 적으로 나열 되어있는 안락의자 중 한 곳에 15세 정도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는 시녀들의 손의 움직임은 금이간 도자기라도 다루는 듯 세심했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듯한 미소가 그녀들의 입가로 흐르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극진한 대접을 받는 소년, 이 소년이 바로 듀들란 제국의 황제 크로시드 3세였다. 크로시드 황제의 얼굴에서는 15세의 소년 다운 치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매는 깊은 상념을 담고 있는 듯 무겁게 깔려 있었으며, 오똑한 코는 그의 절대에 가까운 권력만큼이나 높아 있었고, 입술은 그의 말 한마디에 담긴 위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주 듯 굳게 다물려 있었다. 문득 그의 낮게 깔려있는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의 귀를 통해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그 원인이었다. -저벅, 저벅 "투르코스 재상각하 드십니다." 밖에서 알려오는 시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를 깨달은 크로시드 황제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곤 안락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투르코스 재상이 걸어오고 있는 곳을 바라보며 기쁘게 미소지었다. "숙부님 오셨습니까!" 하지만 반갑게 던진 그의 인사에 돌아오는 것은 투르코스 재상의 딱딱하고도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지금은 재상으로써 폐하를 만나뵈러 온 것입니다. 그러니 숙부라는 말은 삼가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나마 기가 죽은 듯한 표정을 지은 크로시드 황제는 고개를 눈을 조용히 내려 깔며 처음의 신색을 회복했고,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재상." 그제야 황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투르코스 재상은 팔사이에 끼워져 있는 몇장의 서류를 공손히 내밀며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보고 드릴 일이 있어서 폐하의 휴식시간 임에도 불구하고 찾아 뵈었습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크로시드 황제는 그것을 받아 들며 투르코스 재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위급한 상황이라도 생긴것이오? 재상이 직접 보고서를 들고 찾아 오다니..." 그의 질문에 주변을 살피던 투르코스 재상은 시녀들에게 눈길을 멈추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잠시 시녀들을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황제는 투르코스 재상의 태도에서 어떠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었고, 하녀들에게 손짓을 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끝났으니 이만 물러나거라."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듯 말이 끝나자 마자 하녀들은 자신이 들고 있던 바구니들을 급히 챙겼고,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실내를 빠져 나갔다. 그녀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황제는 재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재상이 이렇게 급히 찾아 온 것을 봐서는 보통의 일은 아닐 텐데? 대체 어떤 일이 생긴것이오?" 황제의 물음에 투르코스 재상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황제 폐하께서도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을 아실 것입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공학원이라는 말에 눈빛을 빛낸 황제는 턱을 매만지며 나이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당연히 모를리가 없잖소. 지금이야 장영실경 때문에 한숨을 돌리고 있지만 그 때문에 듀들란 제국 황궁 전체에 긴장이 감돌고 있었는데 짐이 모를리가 있겠소?"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황제의 대답을 들은 투르코스 재상역시 수긍의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듀들란 제국에 공학원이 생기기 전에는 큰 고민거리였으니... 헌데, 루스티커 수석마법사님께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그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자가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투르코스 재상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던 황제는 이해가 안되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그런일이... 도이첸 제국에서 그를 추방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오? 대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조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럴수도 있는일?" "도이첸 제국은 얼마전 상황의 임기가 끝나며 또 한 번의 대관식을 치루었습니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그 20년의 대관식을 말입니다. 그럴때 마다 권력을 잡고 있던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위험 요소를 없애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것 입니다. 이것은 도이첸 제국 뿐만 아니라 우리 듀들란 제국에서도 대관식이 있은 이후에 여러번 일어 났었던 일이고, 인간의 정치에서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일이죠. 아무래도 공학원의 원장 역시 그 요소 중의 한 명으로 낙인 찍힌 듯 합니다. 또, 그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춘 자이니..." "그렇다면 재상의 생각은 무엇이오?" 황제의 되물음에 투르코스 재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추방된 공학원의 원장을 우리 듀들란 제국 쪽으로 끌어 들였으면 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도이첸 제국과 동맹을 맺은 입장에서 추방자를 받아 들이는 것은 동맹에 위배 되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과의 정치적 마찰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장영실경이 있으니 꼭 그 자의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소?" 고개를 내저은 투르코스 재상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대답했다. "폐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재는 많이 거느리면 많이 거느릴 수록 군주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고, 장영실경이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와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공학원 원장의 나이는 이제 고작 20세,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 만큼 놓치기는 정말 아까운 자입니다. 게다가 도이첸 제국의 수뇌부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려 그를 추방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새로운 황제를 중심으로 근 시일 이내에 권력의 축이 재편성 될 것이고, 더욱 견고해진 정치적 기반하에 도이첸 제국은 발전을 꾀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도이첸 제국의 황실이 공학원의 원장을 다시금 등용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숨을 한번 몰아쉰 투르코스 재상은 강렬한 눈빛으로 황제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수백년간 대륙의 모든 국가는 정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법의 몰락과정을 겪으면서도 이렇다 할 변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와중에 우리의 눈앞으로 공학이라고 하는 커다란 변혁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발견이며, 마법에만 눈이 멀어 신이 이땅의 모든 생명체에게 전해준 세상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우둔함을 일깨워준 일입니다. 이제 공학은 곧 대륙의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고, 앞으로 듀들란 제국이 대륙의 유일한 강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이 공학이라는 변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투르코스 재상의 말을 듣고 있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듯이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학원의 원장이 꼭 영입해야 한다는 말이겠구려. 우리의 발전은 둘째 치고서라도 타국으로 그가 흘러들어가는 것도 막자는... " 황제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를 확실하게 이해를 하자 투르코스 재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그를 필히 영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우리 듀들란 제국으로 끌어 드릴 방법이라도 있소? 그가 우리의 영입의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인데... 게다가 추방을 당했다면 미개척지의 어딘가에 있을 테니, 찾는 것 조차 만만치 않을 것이오." 기대와 함께 근심이 맞물린 목소리로 황제가 묻자 투르코스 재상은 자신이 건네준 서류를 가리치며 대답했다. "그점에 세밀한 계획에 대해서는 폐하께서 들고계신 서류를 보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흠... 재상이 직접 만들었다면 볼 것도 없을 것이오. 짐은 천천히 서류를 살펴볼 테니 재상이 계획했던 대로 추진하시오. 일의 성격상 하루라도 빨리 착수 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공학원 원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둘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황제는 투르코스 재상의 눈치를 살폈고, 투르코스 재상은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곤 당당하게 서있던 투르코스 재상은 따뜻한 목소리로 둘사이의 침묵을 깼다. "시너스. 아직도 너의 자리가 많이 부담 스러운 것이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시너스라는 이름은 어린 황제의 이름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크로시드라는 성을 따서 부르기에 별로 쓰일 일이 없었지만, 황제는 친지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 했기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시너스라는 이름이 쓰이는 것이었다. 이제 투르코스 재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공적인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숙부님께서 딱딱하게 보고를 하실때만 아니면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걸요! 저의 아버지와 같으신 분께서 저에게 말을 높이시고, 제가 하대를 해야 하니 그점이 불편할 뿐이죠." "황제라는 것은 만인을 내려다보는 자리인 만큼 그 위엄이 아주 중요하니 너를 이렇게 대할 수 밖에 없구나. 그래도 네가 이렇듯 당당한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니 나도 마음이 놓인단다." "저도 숙부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견딜 수 밖에요." 대화 중에도 투르코스 재상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련 변화가 없었다. 처음 그를 본 사람이라면 황제에게 어떠한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려서 부터 그를 봐왔던 황제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욱 든든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황제의 말이 계속 되었다. "아참! 미뉴엔느는 잘 있죠? 그러고보니 못본지도 오래된것 같네요. 예전에 그렇게 내가 보고싶다고 떼를 쓰곤 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사촌 동생인 미뉴엔느에 대한 소식을 물어오자 투르코스 재상은 골치가 아픈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말거라. 너의 위치를 생각해서 못만나게 하고, 나 역시 녀석과 놀아 주지 않자 이제는 장영실 경에게 붙어서 못살게 구는 중이란다. 어찌나 장영실 경을 좋아하는지..." 황제는 강한 인상을 가진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호감을 심어 줄 수 있는 모습이었고, 알면 알 수록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지식까지 가지고 있는 사내, 장영실이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던 황제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장영실 경이라면 미뉴엔느의 마음에 꼭 들만하죠. 뭐랄까...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중년의 남성이라고 할까..." 투르코스 재상은 무슨 일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흐음. 장영실 경이 그 말을 듣는다면 기분 나빠 하겠군.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데 중년의 남성이라니..." "옛!? 30대 중반이라니요? 그렇다면 누님과도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단 말씀인가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틀림없는 30대란다. 그러니 장영실 경의 앞에서는 조금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아무리 네가 황제지만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 잠시 생각을 해보던 황제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는지 수긍했다. "하긴... 평생동안 엄청난 지식을 쌓으려면 고생을 했을 테니... 마법사들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가 보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이쯤 해서 장영실 경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하고 저녁이나 함께 하도록 하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투르코스 재상의 제안에 따라 장영실의 나이에 대한 생각을 털며 대답했다. "하긴 타인의 신체적인 약점(?)을 뒤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죠." 둘의 대화로 인해 장영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애석하게도 신체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렸다. 대화가 마무리 되자 황제와 투르코스 재상은 느긋한 걸음 걸이로 자리를 옮겼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무더운 여름의 공기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65 흰 색의 거친 벽을 가진 상당한 규모의 건물, 듀들란 제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귀족들의 집무실이 모여있는 건물이었다. 흰색의 외벽을 따라 똑같은 모양의 난간들이 줄지어 있었고, 몇몇의 귀족들은 더위를 씻으려는 듯 난간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투르코스 재상 역시 뒷짐을 진 채로 자신의 집무실과 연결되어있는 난간앞에 서있었다. 비록 여름이었지만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하자, 머리속이 맑아 지는 듯 했고, 습하지도 않았기에 땀이 베어나 불쾌감을 주던 옷들도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지 않은 하늘을 응시하던 투르코스 재상은 문득 주머니에 있는 시계를 꺼내들었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시계가 들려있었다. 일반 시계와 겉 모습은 비슷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을 표시하는 바늘이 두개라는 것이었다. 일반 마나시계의 경우에는 정확도가 떨어지기에 시간단위 이하의 시각을 나타내기가 불가능했던 반면, 장영실이 투르코스 재상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이 시계는 시간 단위 뿐만 아니라 분 단위까지 알 수 있는 정밀한 시계였던 것이었다. 잠시 시간을 확인하던 투르코스 재상은 집무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찾아 올 사람은 그가 기다리고 있는 단 한사람이었기에 서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게 카밀턴 대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명의 건장한 사내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180셀리 정도의 키였지만, 다부진 몸때문에 그보다 훨씬 크게 보였고, 험난한 직책을 맡고 있는 듯, 얼굴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무수히 자리잡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한 무거운 눈동자를 움직여 난간으로 부터 걸어 들어오고 있는 투르코스 재상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곤 굵직한 주먹을 가슴으로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황실소속 특무대 대장 카밀턴! 재상 각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자신 만큼이나 미소가 없고 딱딱해 보이는 카밀턴의 모습을 보던 재상은 조금은 거북한 기분을 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이곳은 그냥 나의 집무실 일뿐, 전쟁터가 아니니 그렇게 소리를 지를 것은 없네. 조용한 밤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 아닌가?" 하지만 재상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동안 몸에 익은 버릇을 어쩔 수 없는 듯 다시금 우렁찬 목소리가 집무실을 떨어 울렸다. "주의 하겠습니다! 재상각하!" 눈앞의 이 우직한 사내에게 더 이상 주의의 말을 해봤자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느낀 투르코스 재상은 다른 방편을 떠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국가 최고 기밀에 속하네. 그런데 자네의 그 우렁찬 목소리로 인해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투르코스 재상의 절도 있으면서도 위압감 풍기는 말을 들은 카밀턴은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 했고, 이내 자신의 행동이 그름을 깨달은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재상각하." 카밀턴의 행동을 보며 만족한 투르코스 재상이었지만 아무런 내색 없이 책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되니 개의치 말게.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명한 것은 다 처리했나?" 아직도 투르코스 재상의 은근한 질책에 뻣뻣한 모습으로 서있던 카밀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빈틈없이 처리했습니다. 명령 받은 대로 훈련이 잘되어있는 특무대 대원들로만 이루어진 교섭대를 편성하였고, 전문 교섭인 역시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교섭인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체력훈련을 병행한 기초적인 전투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좋아. 특무대 대장지위에 걸맞게 일처리가 매끄럽군." 간단하게 대답한 투르코스 재상은 길죽한 통에 들어있던 큼직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는데, 제법 고급으로 보이는 종이에 기름까지 먹여 물에 젖는 것을 방지 하려는 듯 했다. 투르코스 재상은 그것을 펼쳐 책상위에 올려 놓고 말을 이었다. "대륙전도를 보도록 하지. 북부 미개척 지는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을 감싸고 있으니 표적이 동쪽으로 움직일지 서쪽으로 움직일지는 미지수라네. 하지만 교섭대는 어쭐 수 없이 동쪽으로 움직여야 하니 표적과 엊갈리게 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네. 그점을 대비하여 이미 몇 명의 정보원들을 모험가들이 자주 모여드는 미개척지의 마을에 파견해 두었으니 그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게." 잠시 말을 끊은 투르코스 재상은 손의 뼘을 이용하여 거리를 짐작해 보는 듯 했다. "표적이 도이첸 제국으로 부터 추방당한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최소한 100켈리 이상은 움직였을 것일세. 하지만 그 역시 미개척지에서 혼자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테니 모험자들의 마을이나 마물들이 자주 출몰하지 않는 곳을 통과 할 것은 자명한 일, 그러니 교섭대는 그 점을 최대한 활용 하도록 하게." 투르코스 재상의 설명은 일의 성격이나 그 어려움에 비해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카밀턴이 속한 특무대는 이러한 일에 노련한 인물들로만 이루어진 단체였기에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했고, 세밀한 부분은 카밀턴이 판단해야 할 부분들이었다. "그 점에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계획을 세워 놓았으니 재상각하께서는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믿음직 스러운 그의 대답에 짚고 있던 지도에서 손을 뗀 투르코스 재상은 허리를 세웠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번 일은 대륙 전체를 그 범위로 잡기에 극히 어려울 것일 세. 게다가 타국의 이목역시 주의해야 하니 황궁을 떠나는 이후 부터는 어떠한 지원조차 본국으로 부터 받을 수도 없을 것은 물론, 사고가 생겼을 경우 역시 자네가 이끄는 교섭대가 듀들란 제국 소속이라는 것은 황실이 부정하게 되네." 카밀턴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사실 그가 속한 특무대는 극히 위험하거나 비밀리에 이루어 져야 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고, 그런 조직을 책임 지는 인물인 만큼 위험에 대한 각오는 그의 뇌리에서 지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저희가 특무대에 소속될 때 부터 전제되어 온 사실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어쨌건 이번 일은 각별히 신중을 기해 주길 바라네. 듀들란 제국은 이번 일을 계기로 또다른 전기를 맞이 하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을 마친 투르코스 재상은 책상서랍에서 밀봉이 되어있는 봉투를 하나 꺼내어 카밀턴에게 밀었다. "이것은 교섭인에게 전해 주게나 목표를 만났을 때 꼭 알려야 할 내용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지. 그리고 속에는 붉은색의 작은 봉투가 하나 더 있네. 그것은 교섭이 결렬 되었을 때 자네가 열어본 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게.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질문이 있나?" 투르코스 재상의 말에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하던 카밀턴이 물었다. "목표에 대해 강제적인 입장을 취해도 되는 것입니까?" 잠시 턱을 쓰다듬던 투르코스 재상은 팔짱을 끼며 답했다. "자네가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이지만, 될 수 있는 한 존중해주게. 긍정적으로 교섭이 끝난다면 듀들란의 귀빈이 될 자이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나가보게나. 수고하게." 카밀턴은 들어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오른 주먹을 가슴으로 올리며 예를 취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그가 자리를 떠나자 집무실에 남은 투르코스 재상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파이프를 들며 바짝 말라있는 담배잎을 파이프에 담았고, 문득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부싯돌이 또 없어 졌군."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투르코스 재상의 모습은 평소 그를 알던 사람들이라면 이상해 하리 만큼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닦에 떨어져 있는 부싯돌을 발견하며 마치 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양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허헛! 여기있었군!" 많은이들이 알고 있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더 이상 냉랭한 목소리도 아니었고, 굳어있는 표정도 아니었다. 지금 만큼은 부드럽게 듣기 좋은 목소리에 인자한 중년인의 얼굴이었다. 부싯돌의 마찰음이 나면서 파이프로부터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머금은 투르코스 재상은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듯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고, 한껏 맛을 음미한 연기를 숨과 함께 내쉬었다. "후우... 빌어먹을 가비르."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과 함께 짜증이 밀려옴을 느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이름은 자신이 하는 일마다 걸리적 거리던 대학 동창생의 이름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할 때 마다 떠오르는 이름이었으며 평생 남앞에서 미소한번 짓지 않는 신세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였다. 투르코스 재상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못본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군. 젊을 때는 그렇게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조금 그립기도 하군. 하지만 이렇게 늙었다고 해서 자네에게 모든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아니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자네에게만은 절대 지기 싫거든." 한 동안 옛생각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던 투르코스 재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다지 좋은 기억들이 없자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담배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는데, 그저 쓴 옛 기억은 담배 연기와 날려 버리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같은 시간, 장영실은 손에 찻잔을 든 채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루스티커가 여느때와 다름 없는 모습으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행동과는 별개로 시선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장영실의 표정을 살피는 중이었다. 장영실의 몸이 얼어 붙은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루스티커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찻잔에 벌레라도 떨어진 겐가? 어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하도록 하지." 루스티커의 말을 시작으로 장영실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렇다면 명신을 듀들란 제국으로 데리고 오기위해 사람들을 파견했다는 것입니까?" 그의 되물음에 약간 머슥한 감을 느낀 루스티커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를 테면 그런 말이지. 하지만 듀들란 제국뿐만 아니라 자네가 그 아이를 더욱 손쉽게 찾게되니 더욱 좋은 일 아닌가?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지는 말아 주게나." 장영실은 잠시 복잡한 심정이 들고 있었다. 루스티커의 말대로 그들이 명신을 듀들란 제국으로 데리고 온다면 계약이 끝난 이후에 애써 그를 찾아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것은 물론이고, 설혹 그가 응하지 않거나 일이 잘못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명신에게 알릴 기회였지만, 장영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었기에 이런 처지에 명신을 끌어 들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변의 모든 이들이 호의를 보인다고 하지만, 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에 대한 이해가 깊은 장영실은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에 더더욱 불안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절감하고 있었다. "후우... 어차피 저에게 통보를 해주시는 이상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제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군요. 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루스티커님." 깊은 한숨이 담긴 말을 남긴 장영실은 어두운 안색으로 루스티커의 연구실을 떠났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연구를 하던 자료를 하나도 남김없이 챙겨 숙소로 갈 장영실이었지만, 오늘은 그러한 것들에 신경쓸 여력이 없는든 빈손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응시하던 루스티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흐흠... 괜히 저 친구의 심기만 어지럽 혔군. 그 아이의 능력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을 뿐, 딴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좋겠는데..." 평생 친우로 인정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한명이 자신의 조그마한 욕심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 듯 하자 루스티커 역시 기분이 침울해 짐을 느꼈다. 그러나 마법 연구에 평생을 바친 마법사로써 호기심에 대한 욕구는 그 무엇보다 큰것이었기에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었다. 장영실이 떠나자 루스티커 홀로 적막감이 흐르고 있는 연구실에 남게 되었고, 눈에 익숙한 연구실을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혼자 남은 것도 참 오래간 만이군..." 혼잣 말을 하던 그 역시 더 이상 책이 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자, 무겁게 처진 어깨를 일으키며 장영실과 자신이 자료들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2-09-07] 짜가신선 <대공학자> #166 여행자들의 마을, 파숄 진녹색의 잎을 가진 나무들이 싱그러움을 뽐내며 서슴없이 하늘로 뻗었고, 그 아래 깔려 있는 나뭇잎과 풀들위로 이슬이 내려 앉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숲의 어딘가에서 약동하고 있을 생명체들은 아침을 맞아 부산하게 움직였다. 방향 조차 잡기 힘들 만치 수많은 나무들 사이로 좁다란 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의 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좁았기에 동물들이 이동하는 길임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푸드드득! 고요한 아침을 준비하는 숲의 땅으로 부터 야생조가 한마리 비상했다. 그것은 무엇인가에 크게 놀랐는지 깃털이 흩날릴 정도로 바쁜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을 날아 오르던 야생조는 이제 안전하다 싶었는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뭇가지에 내려 앉았다. 그리곤 자신을 놀라게 한 존재를 확인하 듯 자신의 발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부스럭.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숲의 길을 걸으며 나타났다. 보통의 키에 조금 유약한 듯한 몸매, 그리고 어깨까지 늘어트린 검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깨에서 부터 무릎까지 늘어트린 망토의 틈새를 가르며 질긴 천으로 만들어진 바지가 장단을 맞추며 드러났고, 그 아래로 여러겹의 가죽으로 밑창을 댄 튼튼한 부츠가 보였다. 또, 팔 아래로 작은 가방이 움직일 때 마다 간혹 보였는데, 그 작은 가방만이 그의 유일한 짐인 듯 했다. 청년의 여유로운 발걸음은 한참이나 계속 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눈은 떨어진 동전이라도 찾는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중, 어깨의 한쪽으로 흘러내린 망토를 팔위로 걷은 청년은 허리를 숙여 땅을 살폈는데,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돌물 발자국 들이 찍혀 있었으며 하나같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흠. 이 길 역시 동물들이 오가면서 만들어졌나 보군. 도이첸 제국의 국경을 넘은 이후로 한 달 동안이나 사람을 못만났으니... 하긴 그러니 미개척지라고 불리우겠지." 흙을 매만져보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흙이 묻은 손을 털었다. "음?!" 찰나, 그는 빠른 몸짓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떤 기척이라도 느낀 것일까? 짧은 시간동안 석상이라도 된듯 움직이지 않고 있던 그는 갑자기 어떠한 확신이라도 생긴 듯 어디론가 급히 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타다다닥! 그는 지금껏 걷던 속도의 수배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는데, 땅이 좋지 않은 숲속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평지를 뛰는 것에 필적할 속도였다. 당당히 버티고 서있던 나무들이 그의 시야 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며 상당한 거리를 달렸고, 동물들이 만든 좁은 길은 등뒤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약 200멜리 가량을 달렸때 쯤 그의 발소리에 가려져 희미하던 말발굽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저쪽이군!" 다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방향을 잡은 청년은 더욱 힘을 내어 달렸다. 그리곤 너무나 급한 나머지 길이라고 짐작이 가는 구릉을 향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날렸다. "여차!" 단발의 기합소리와 함께 뛰어오른 청년의 다리는 금새 구릉의 내리막에 닿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서 몸의 중심을 조금 잃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땅마저 고르지 않아 제대로 된 착지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청년은 볼성 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게 되었고, 평지에 닿고 나서야 겨우 몸을 멈출 수 있었다. 나뒹굴던 어지러움 때문인지 청년이 몸을 쉽사리 일으키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맞은 편에서는 요란한 말 울음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길로 뛰어든 청년의 모습에 말들이 놀란듯 했다. -히이이잉! 히이잉! 푸득! 말의 울음 소리를 듣고서야 말을 타고 이동하던 이들을 제대로 가로막았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은 자신의 행색을 제대로 추스릴 생각도 없이 그들에게 반가움의 시선을 돌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년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네 쌍의 눈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의 손에는 서슬이 시퍼런 병장기들이 살기를 뿜으며 들려있었다. 그 중 가장 앞의 말에 타고있던 사내가 갑자기 자신들의 길로 뛰어든 이 불청객의 신색을 살피며 싸늘하게 외쳤다. "웬놈이냐!" 고함을 지른 사내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갈색의 짧은 머리에 입주변을 뒤덮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세명의 인물들이 더 있었는데, 눈초리가 날카로워 성격이 사나워 보이는 젊은 여성과 그녀와 놀랍게도 닮아있는 사내, 그리고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깊이 후드를 덮어 쓴 인물이 말을 타고 있었다. 사내의 일행을 살펴보던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사람을 만난 지 오래 되어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뛰어 들게 되었습니다.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생각 외로 이 청년의 태도가 예의 바르자 적대감이 조금 풀리는 듯 했지만 미개척지에서 상대를 한번 보고 믿는 다는 것은 우둔한 짓이었기에 긴창을 늦출 수는 없었다. "누가 그런 것을 듣고 싶다고 했나! 신분을 밝혀라!" 사내가 다그치듯 묻자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뮤스 드라켄. 도이첸 제국에서 왔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 청년이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한 뮤스였다. 그는 지난 한달 동안 발이 닿는대로 움직여 어딘지도 알지 못할 이곳까지 온것이었다. 뮤스가 자신의 이름과 출신을 밝히자 사내의 뒤에 서있던 여인이 그를 향해 무시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흥! 꼴을 보아하니 당신도 추방자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 용하군 그래?" 뮤스가 추방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무런 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개척지를 떠도는 여행자라면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병장기를 몸에 지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어디서나 야영을 하거나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는 짐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뮤스는 아무리 살펴 보아도 빈몸이었고, 다른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경우는 추방자 외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여인과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사내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누님의 말대로 추방자 인듯 하군요. 저런 추방자 따위에게는 동정을 배풀 필요도 없습니다. 어떠한 더러운 짓을 했을 지도 모르는데..." 대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동료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듯 했다. 하지만 아직 까지도 어떠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추방자들의 대부분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어 추방을 당하기에 구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했지만, 지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뮤스라는 청년에게서 보통의 추방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방자가 틀림 없나?"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뮤스는 추방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추방을 당한지는 얼마나 되었지?" "약 한달정도 되었습니다." "한달?! 그렇다면 미개척지에서 한달이나 혼자 지냈다는 말인가!? 보아하니 미개척지의 길을 전혀 모르는 듯 한데... 그간 함께 움직이던 동료들이라도 있었나?" 뮤스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또 한번 날카로운 눈매의 여인이 끼어들었다. "대장. 이 녀석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웬만한 경험이나 능력을 가진 여행자들도 한달 동안이나 미개척지를 여행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잖아요? 게다가 길도 모른다면 숲을 이용했을 텐데..." 여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뮤스를 향해 말했다. "잘 들었겠지? 네가 한 말을 우리는 전혀 믿을 수 없어. 설마 미개척지에 우글대던 마물들 사이를 운 좋게 피해 왔다는 것은 말이 안되잖아? 그건 행운의 여신을 모시는 신관들도 불가능 하단 말이지. 레이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내는 후드를 깊이 덮어쓴 인물을 향해 몸까지 돌리며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또 주무시고 있군. 아무튼 마법사라고 같이 다녀봐야 잠만 자고 있으니... 마법사가 필요하기도 하니 자를 수도 없고." 사내가 한탄이 섞인 불평을 하고 있을 때, 얼굴을 덮은 후드 사이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대장, 난 그저 명상을 하는 것 뿐이라고. 아무튼 가는 곳 마다 잔소리가 많군. 쳇."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뮤스는 레이멜이라 하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게다가 빈정 거리는 듯한 그의 말투는 그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드를 덮어쓰고 있던 레이멜은 기지개를 펴듯 팔을 들어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과연 뮤스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기에 반갑게 소리 쳤다. "당신은 율리아나 일행과 함께 있던 마법사 맞죠?" 레이멜 역시 자신을 보고 아는 척을 하는 뮤스를 향해 그의 얼굴이 기억나는 듯 외쳤다. "아니 이게 누구야! 라이부크에서 만났던 그 신기한 청년이잖아!? 이런 곳에는 어떻게 있는거야?" 갑자기 자다 깨어난 레이멜이 뮤스를 향해 반가운 듯 외치자 그의 동료들과 대장으로 불리우는 사내는 얼떨한 기분이 되었다. "뭐야 레이멜? 아는 사이인가?" "뭐 안다면 아는 사이지. 예전에 우리 일행이 한번 신세를 진 적이 있었거든." 잠시 생각을 해보던 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렇다면 일단 신분은 확인 된 것이군." 그가 무기를 회수하자 다른 동료들은 조금 주춤하는 듯 했지만, 대장인 그를 따르는 것이 당연했기에 자신들의 병장기들을 회수했다. 최소한 뮤스가 적이 아님을 확인한 대장은 턱짓을 하며 말했다. "나는 이 파티를 책임지고 있는 아드리안이라고 하지. 그리고 내 뒤에 서있는 성격나쁜 여자는 세실프, 옆에 있는 남자는 쌍둥이 동생인 유겐이네." 아드리안이 간단한 소개를 하자 세실프는 발끈하며 외쳤다. "누가 성격 나쁜 여자라는거예요!" 하지만 늘상 이러는지 그녀의 말을 귓가로 흘린 아드리안은 뮤스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퍄숄이라고 불리는 모험자들의 마을로 가는 길인데." 레이멜이 말고삐를 당기며 뮤스쪽으로 말을 몰았다. "무슨 일로 추방자 신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숄까지만이라도 함께 가도록 하지. 지금까지 아무일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운좋게 만난 레이멜 덕분에 원하던 쪽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가자 뮤스는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레이멜씨." "뭐 고마울것 까지야. 내 뒤에 올라타라고." 그가 말안장의 앞쪽으로 당겨 앉자 뒤에는 뮤스가 올라탈 만큼의 충분한 공간이 생겼다. 조선에서 말을 한번 타본 이후로 처음이었지만, 별다른 무리없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 올랐다.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아드리안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는데, 자신들이 타고 있는 남부지방의 말은 그 몸집이 북부지방의 말에 비해 크기 때문에 발받침이 없이 오르는 것은 극히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은 아드리안은 말고삐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어서 서두르자고. 아침도 먹지 못해서 벌써 배가 고프니... 이럇!" 아드리안의 말이 먼저 뛰쳐나가자 그 뒤를 세실프와 유겐이 따랐다. 그런 와중에도 세실프는 뮤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날카로운 눈초리로 흘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동료들이 달리는 뒷모습을 본 레이멜은 뮤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 꽉 잡으라고. 알다시피 난 마법사라서 기마술에는 약하니까 말이야." 뮤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능청스러운 레이멜의 성격에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를 꽉 잡았고, 레이멜은 힘껏 말의 배를 차며 고삐를 흔들었다. "이럇!" 과연 힘이 좋은 남부의 말 답게 장정을 둘이나 태웠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없었다. 그리곤 얼마 있지 않아 다른 동료들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속도를 맞추었다. [2002-09-07] 짜가신선 <대공학자> #167 -타가닥! 타가닥! 네마리의 준마가 숲을 가르며 나있는 좁은 길을 달리고 있었다. 비록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 아니었기에 가로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행로를 방해하긴 했지만, 말을 타고 달리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고, 땅은 이슬에 촉촉히 젖어있었기에 먼지도 나지 않아 그럭저럭 괜찮았다.그 중 말 한마리에 함께 올라 탄 두명이 달리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바로 뮤스와 레이멜이었다. "이봐! 그나저나 어쩌다가 추방당하게 된거야? 종신 추방인가?" 레이멜의 물음을 들은 뮤스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이야기를 하지면 길어요. 다행스럽게 종신은 아니고 3년 기한이에요." "어쨌건 3년 동안은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되겠군. 그때 함께 다니던 일행들은 도이첸 제국에 있는건가?" "네. 라이델베르크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그나저나 레이멜씨는 아주 투트가르를 떠난 건가요?" 어깨를 으쓱거린 레이멜은 피식웃으며 답했다. "뭐 나야 어디나 갈 수있는 용병이니 떠났다고 할 수는 없지. 그저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고용됐을 뿐이야. 이쪽이 조금더 보수가 좋으니 나에게는 당연한 선택이었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뭘하는 사람들이죠? 그냥 여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닌 듯 한데..." "당연히 위험천만한 미개척지를 재미삼아 유람 다니는 사람이 있을리는 없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주기 난처한걸? 그저 아드리안은 스윈제국에서 제법 잘나가는 집안의 아들이고, 쌍둥이 남매들은 스윈제국에서 꽤나 알아주는 용병들 이라는 것은 말해 줄 수 있지. 나야 알다시피 떠돌이 마법사고."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들에게도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뮤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보다 앞서 달리던 아드리안이 무엇을 발견 한 듯 자신을 뒤따르는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파숄의 외벽에 다왔다! 속도를 줄여!" 아드리안의 말을 들은 쌍둥이 남매와 레이멜이 말의 고삐를 늦추자 말은 달리던 속도를 줄였고, 그들의 앞으로 굵직한 통나무로 만든 높은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멜은 이곳을 잘 모르는 뮤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곳이 파숄이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야. 처음에는 모험자그룹 몇개가 모여 쉬어 갈만한 통나무 집을 만든데서 시작했지만, 그 이후로 다른 모험자들이 그 통나무집을 보수하고, 또 장소가 모자라면 새로운 통나무집을 만들면서 마을로 변하게 되어 버렸지. 그러니 이 마을에 있는 집은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모험자들이 모두 주인인 것이지. 이곳 이외에도 미개척지를 모험하는 자들을 위한 마을들이 여러곳에 존재하고 있어서 필요한 물건들을 다른 모험자들과 교환하거나 쉼터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야. 하지만 추방자에 대해서는 민감하니까 웬만하면 추방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아." 뮤스는 레이멜의 설명을 들으며 가까워지고 있는 통나무 벽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곳으로 다가갈 수록 통나무 벽위에서 조그만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볼수 있었다. 레이멜의 설명이 계속 되었다. "벽위에서 보초를 서고있는 사람들 역시 모험자들인데 장기체류를 하는 모험자들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고 있는거야. 언제 마물들이 습격해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레이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중에 일행은 파숄의 벽앞에 서게 되었다. 멀리서보았을 때도 상당히 높아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와 보니 더욱 높아 보였다. 벽 위에서 일행들을 내려다 보던 한 사내가 외쳤다. "책임자의 이름을 밝히시오!" 그의 물음에 아드리안은 허리에 꽂은 칼을 뽑아 거꾸로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스윈제국에서 온 아드리안이오!" "일행중에 추방자가 있는가?!" 추방자에 대해서 물어오자 세실프와 유겐은 동시에 뮤스에게 시선을 맞추었지만, 아드리안은 뮤스를 감싸 주려 하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모험자들이오. 일행중에 추방자는 없소!" 잠시동안 아드리안을 위시한 그의 일행을 살펴보던 사내는 멀리떨어진 동료에게 손짓을 했다. 얼마 후 벽을 가로막고있던 문이 기음을 내며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하자 넓어지는 문의 틈으로 마을안의 전경이 펼쳐졌다. 통나무로 이루어진 높은 장벽으로 둘러쌓인 넓은 터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듯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는 집들이 십여 채 들어서 있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규모였지만, 인간이 적은 미개척지에서는 이 정도 만으로도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라 할 수 있었다. 마을에 대한 상념을 떠올리고 있던 뮤스는 말이 움직이는 흔들림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타가닥... 타가닥... 마을로 들어가자 분주히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마을이 아닌만큼 분위기 역시 보통의 마을과는 달랐는데, 대부분이 아침부터 두터운 갑옷을 생활복 마냥 입고 있거나, 병장기를 몸의 일부나 다름없이 항상 휴대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간혹 보이는 여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의 중심부 쪽으로 말을 몰아간 일행들은 각자의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곳에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던 모험자들은 자연스럽게 뮤스 일행들을 바라보았는데, 그저 반사적인 행동인 양 아무런 의도도 실리지 않은 눈빛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모험자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말좀 묻지. 지금 비어있는 집이 어디인지 아나?" 그의 물음에 배낭의 주둥이를 끈으로 묶던 사내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며 대답했다. "글쎄... 우리가 묵던 집에 자리가 있을 걸세. 마을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는 집이지. 지금 그곳에서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이 아는 것이 많으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사내가 가리킨 집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그럼 몸 조심히 여행하게." "자네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손을 들어 올리며 도움을 준 사내에게 작별인사를 한 아드리안은 자신의 말에서 짐을 내리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었겠지? 일단은 저 집에 짐을 풀도록 한다. 뮤스 자네도 우리와 함께 지낼텐가?" 문득 일행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어떻게 말을 해야할 지 모르고 있었다. 아드리안과 레이멜이야 상관없다 치더라도 자신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주는 쌍둥이 남매가 조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뮤스의 난처함을 알기라도 하는 듯 레이멜이 끼어들며 그의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당연하잖아 대장! 뮤스는 나의 손님이니 나와 함께 지내야지! 어떻게 생각해 유겐, 세실프?" 능글맞은 얼굴로 남매를 보며 물어오자 조금 당황한 그들은 레이멜의 얼굴을 외면하며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쳇. 나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른 모험자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나도 누나랑 같은 생각이예요. 별로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행중에 흔히 겪는 일이니 신경을 안쓰면 되니까." 토라져 있는 둘을 보며 피식 웃은 레이멜은 뮤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됐지? 뮤스 너는 짐이 없는 것 같으니까 내 짐을 나르는 것좀 도와줘." "네? 네!" 레이멜의 몇마디로 일이 해결되자 뮤스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 졌고, 이런 곳에서 운좋게 레이멜을 만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장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듯 투박하게 만들어진 실내였지만, 비나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은 톡톡히 했기에 몸과 마음이 고단한 모험자들에게는 더 없이 훌륭한 공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그 공간에서는 모험자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행색을 한 두 명의 인물이 간이 침대에 기대어 피곤을 풀고 있었는데, 백발에 백염을 길게 기른 노인과 흰색의 수도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문득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던 여인은 몸을 일으키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모험자들이 들어 오나보군요. 모두 다섯 명이고 그 중에 두 명은 마법사 인듯 한걸요?" 그녀의 말에 백발의 노인역시 살며시 실눈을 뜨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 요즘 같은 세상에 마법사가 둘이나 속한 파티라니. 드문 일인데..." 여인은 무엇인가를 느끼는 듯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곤 뭔가 이해가되지 않는 듯 아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둘 중 한명이 풍기는 마나의 기운은 엄청나요. 도저히 저로서도 추정을 할 수 없을 정도에요." 노인은 그녀의 말이 전혀 의외라는 듯 몸을 일으켰다. "음?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이 아니겠군..." 둘의 대화 도중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드리안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잡혔다. 그의 뒤를 따라 일행들 역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모두들 짐을 양손에 잔뜩 든채였고, 옷에 베여든 얼룩이 먼 거리를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자신들 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노인과 여인을 발견하고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집을 알려준 사내의 말을 듣고선 노련한 모험가들로만 상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을 해보니 아무런 힘도 없어보이는 노인과 젊은 여사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스윈제국에서 온 모험자들입니다." 아드리안의 인사에 노인은 손을 살짝 들어주며 그들을 반겼다. "반갑네. 나 역시 그저 떠돌이 모험자이고 목적없이 여행을 하는 중이지. 그냥 그라프 영감이라고 부르게나, 이 옆은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있는 쥬라스 신관일세." 그라프라는 이름을 지닌 노인이 소개를 하자 그의 옆에있던 여사제 역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행운과 여행의 여신 로슈아드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행운을 빌어주는 여사제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지은 아드리안은 짐을 내려놓기 시작한 동료들과 뮤스를 가리키며 한 명씩 소개를 했다. "저는 아드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옆의 닮은 얼굴은 세실프와 유겐, 쌍둥이 남매고, 그 뒤는 레이멜이라하는 젊은 마법사지요. 그리고 제일 뒤는 뮤스라는 청년인데, 이곳까지 오는 길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소개를 듣던 그라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흠... 마법사는 레이멜이라는 저 젊은이 한명인가?" "네? 그렇습니다. 젊은 나이에 4클래스까지 마스터한 실력자죠." "그렇군..." 또 다른 마법사가 있다는 쥬라스의 말이 빗나가자 의아한 감이 들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것을 캐묻는 다는 것은 좋은일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쨌건 피곤할 테니 짐부터 풀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라프와 아드리안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쥬라스의 시선은 짐을 풀고있는 뮤스의 옆얼굴에 고정되어있었다. '분명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데...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착각일까?' 혼자 뮤스에게서 풍기는 마나의 기운에 대해 고심을 하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민감해 있었던 것 같아. 폴리모프를 한 드래곤이 아닌 이상에야 그런 엄청난 마나의 존재감을 가질리는 없어. 만일 드래곤이라면 내가 모를리가 없지...' 결국 자신의 착각으로 인정한 쥬라스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다시금 눈을 붙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68 모험자들의 마을인 파숄의 중심부는 넓은 공터였다. 그곳은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는 곳이었는데, 보통은 모험자들이 굳은 몸을 풀기위해 운동을 하거나 다른 모험자들과 겨루기를 하는데 쓰여졌고, 식사시간이면 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지금은 아침 식사를 할 시간이었기에 여러 모험자들이 자신의 동료들과 둘러앉아 준비해온 건량등을 나누어 먹거나, 식사를 직접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모험자들 중 레이멜을 포함한 아드리안의 동료들과 뮤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따뜻한 아침식사를 원했기에 직접 요리를 하는 중이었는데, 식사 담당은 파티의 홍일점인 세실프인 듯 했다. 하지만 뭔가 마음대로 안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레이멜은 그녀를 탓하듯 혀를 찼다. "쯔쯧! 이봐 감자 스튜 하나 제대로 못 만들서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어?" 그의 말에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 세실프는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눈을 더욱 얇게뜨며 레이멜을 흘겼다. "흥! 그럼 직접해봐요! 매일 음식투정하는 남자는 정말 꼴불견이라니까!" "하핫! 걱정말라고. 나는 요리 잘하는 부인을 얻어서 음식투정을 하고싶어도 못하게 될테니. 그나 저나 이 안익은 감자는 어떻게 할거야? 계속 익히다가는 소스가 타버릴 테고, 소스만 먹자니 감자를 못먹고..." 계속 되는 레이멜의 투정에 결국 참지 못한 세실프는 손에든 국자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제길! 차라리 나가서 마물들과 싸운는 편이 더 마음 편하겠어요! 식사때 마다 이런 불평을 들어야 하니!" 그들의 말다툼을 보다 못한 아드리안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봐 그만들 하라고. 둘 중 한명만 참으면 되잖아? 레이멜 자네는 세실프가 요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그리고 소스는 그럭저럭 괜찮잖아?" 하지만 아드리안의 입을 다물게하는 유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지만 이제 사실을 밝혀야 겠어. 소스가 맛있으면 뭐해 어차피 감자 스튜는 감자를 먹어서 배를 채우는 거라고. 그런데 감자를 못먹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어." 평소 자신의 편만 들어주던 쌍둥이 동생마저 이런 소리를 하자 세실프는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저 먼저 들어가서 쉴께요." 기가 죽은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들어가 버리자 좋지 않은 분위기가 일행들 사이로 감돌았고, 그들의 책임자인 아드리안은 골치가 아파왔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기에 잠자고 보고만 있던 뮤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도 먼저 들어가 있을께요. 그럼..." 일행들은 그에게 대답해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뮤스가 숙소로 들어서자 그라프와 쥬라스는 바람을 쐬기 위해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세실프는 자신의 간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고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뮤스는 세실프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 세실프씨." 뮤스의 목소리를 들은 세실프는 몸을 돌려 누우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까지 나를 비웃을 참이야? 더러운 추방자 주제에..." "그런게 아니라 세실프 씨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뮤스를 등지고 누운 세실프는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평소 혐오해 마지 않던 추방자의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이 허락하지 않았다. "네까짓게 나를 돕겠다니 전직 요리사라도 되었던거야? 아니라면 제발 조용히좀 하고 있어. 너와는 말도 하기 싫으니..."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완강하자 어깨를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말하기 싫으시면 듣고만 있으세요. 저는 벽에 대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할테니..." 이렇게 말한 뮤스 역시 세실프의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침대에 팔을 베며 누웠다. "물은 산소라는 것을 상당량 포함하고 있죠. 이 산소라는 것은 어떠한 물체를 물에 넣고 끓일때 열이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데, 그 때문에 감자가 효율적으로 익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이 산소는 물을 한번 끓이면 대부분이 물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한번 끓였던 물로 감자를 삶으면 아주 효율적으로 익게 되죠. 아주 간단하죠?" 세실프는 자신도 모르느 사이에 뮤스의 말을 되뇌이는 중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실프는 자신도 모르게 수긍한 것을 들킬까 걱정이 되는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걸 가르쳐 줬다고 우쭐 대지마! 그렇다고 네가 마음에 들어진건 아니니까." 곁눈질로 그녀의 행동을 살피던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뭐 상관 없어요. 저는 피곤해서 조금 자야겠으니 나중이 보죠." 뮤스가 이불을 덮으며 뒤돌아 눕자 실내는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벽을 보고 누워있던 세실프는 이불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뮤스를 살폈는데, 잠이 들었는지 규칙적인 숨소리만 날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안심한 세실프는 천천히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상한 죽음. 붉게 달아오른 냄비속에서 노르스름한 색깔의 스튜가 끓고 있었고, 소스의 사이에는 굵직하게 썰어넣은 감자가 맛깔스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소스가 냄비의 벽에 눌어 붙을 즈음해서 나무로 만든 국자가 스튜를 한번 휘젖자 떠있던 감자는 이리저리 휩쓸려다녔다. 침울한 표정으로 숙소로 들어간 세실프가 갑자기 나오더니 다시 요리를 해본다고 나섰고, 지금 이렇게 감자스튜를 다시 만드는 중이었다. 세실피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행동을 말릴 수 없었던 동료들은 재료만 축낼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레이멜은 영 보고만 있기가 힘든지 여전히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이제 요리를 안할 것 처럼 들어가서 다시 나온거지? 알 수 없는 일이군." 평소 같았더라면 그의 말을 험하게 되받아 칠 세실프였지만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가볍게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요. 이제거의 다 됐으니." 스튜를 젖던 국자를 내려 놓은 그녀는 손을 한번 비비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기대에 찬 눈으로 스튜속에서 떠다니고 있는 감자를 살짝 찔러 보았는데, 그녀의 기대에 호응이라도 하듯 거침없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머나! 됐어! 호호호홋!" 비록 모험자이긴 했으나 기뻐하는 모습은 의심할바 없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동료들이 뭐라고 물어 보려 했으나, 감자 스튜가 가득 담긴 그릇을 받으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손을 허리에 얹은 세실프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다들 한번씩 맛을 봐요!" 오히려 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모습이 불안했던 동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수 없이 스푼을 들었지만, 누구하나 선듯 먹어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답답한 듯 가슴을 친 세실프는 발로 땅을 구르며 외쳤다. "나참! 한번만 믿어 보라니까요. 아까처럼 생감자는 아니니까!" 세실프가 강력하게 독촉을 해오자 더 이상 뺄 수 없었던 아드리안은 대장이라는 위치인 만큼 솔선 수범을 하기로 했는지 스푼으로 감자 한 덩어리를 퍼올려 입안으로 넣었다. 그리곤 몇번 씹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번에는 감자가 완전히 익었는걸? 자네들도 먹어 보라고." 그다지 믿겨지지가 않는 사실이었지만 아드리안이 일부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기에 유겐과 레이멜도 스튜에 들어있던 감자조각을 입에 넣어 씹어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일이야? 정말 감자가 다 익었잖아?" "누나 드디어 해냈구나! 소스가 감자에 잘 스며들어서 맛이 정말 좋은걸?" 동료들이 자신의 요리를 인정해 주자 기분이 좋아진 세실프는 팔짱을 끼며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호호홋! 뭐가 어떻게 된 일이겠어요. 이 세실프님이 요리사로서의 각성을 한 것이지. 이번 기회에 용병 때려치우고 요리의 세계로 진출해 볼까나?" 레이멜은 감자스튜 하나에 우쭐거리는 세실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 고작 감자스튜가지고 너무 거만해 진거 아냐? 어서 식사나 같이 하나고." "원래 시작이 반인거예요! 쳇 동료에게 힘이되는 소리는 못할 망정 침을 뱉지는 말아야지. 아무튼 정이 안간다니까."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냄비에서 스튜를 한그릇 가득 퍼 동료들에게 더 나눠주고 있었다. -터벅! 츠즈즉... 터벅! 츠즈즉... 작렬하는 태양의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며 걷고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아니, 걷고있다고 하기보다는 몸을 끌고 있다는 표현이 더 올바를 듯 했다. 그의 몸은 옷은 이미 걸레나 다름 없었고, 갑옷으로 보이는 금속 조각은 이미 그 효용성을 잃은 채 옷위로 매달려 있었다. 군데군데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 나온 피들은 이미 응고되어 검은 덩어리가 되어있었는데,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의 늘어트린 양손은 무엇인가를 끌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가죽푸대 처럼 보였는데, 코가 썩을 듯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주변으로는 벌레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아른거리는 시야에 갈색의 거대한 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매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이...이봐 친구. 이제..겨우 파숄로 돌아왔군..." 인영이 겨우 말을 마치자 눈앞이 까마득해지며 그를 지탱하던 모든힘이 몸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됐어..." 안도하는 마지막 말과 함께 그의 머리는 땅으로 곤두박질쳐졌다. 파숄의 외벽은 30셀리 이상되는 통나무만을 3중으로 엮어 만든 벽이었다. 그만큼 그 강도는 엄청났는데, 오우거등의 대형 마물조차 부술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파숄에서 머무는 이들은 이 외벽을 믿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이었다. 외벽의 뒤에는 세개의 초소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은 파숄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과, 마물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을 하는데, 이 주변은 마물들의 서식처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기에 후자쪽의 일은 거의 드물었다. 오늘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은 큐리컬드의 파티였다. 보통 고대의 숨겨진 보물들을 사냥하는 이들은 미개척지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파숄을 거점으로 움직이는 이들이었다. 이 모험자들 이끌고 있는 큐리컬드라는 인물은 원래 도적이었지만, 도적의 일로는 위험을 즐기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데 한계를 느꼈기에 동료들을 모아 보물사냥을 시작한 것이었다. 큐리컬드는 이글거리는 해가 걸려있는 하늘을 보며 허리에 빼곡히 꽂혀있는 단검들을 버릇처럼 쓰다듬었다. 그는 장검이나 다른 병장기를 쓰는 것보다 휴대가 편리한 단검을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가 도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문득 무료함을 느낀 큐리컬드는 단검하나를 뽑아 초소의 난간에 무엇인가를 세기기 시작했다. -무흔의 단검 큐리컬드 "후훗 아무리 생각해도 멋있는 별명이라니까." 그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 주변을 기형적인 문양으로 꾸며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멋들어진 문양이 생겨나자 입바람을 불어 나무티끌을 날려 마감하고 있었다. 나무티끌이 그의 입바람을 타고 파숄의 외벽 밖으로 날리는 것을 유심히 보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응? 저건 뭐지?" 분명 방금 전만해도 없었던 무엇인가가 길에 늘어져 있자 이상함을 느낀 큐리컬드는 안력을 돋구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기에 그의 반응은 금방 나타났다. "외벽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 문을 열어!" 동료들은 급박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문을 담당하는 동료에게 긴밀하게 신호를 보냈고, 둔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69 -쿠구구궁...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만큼의 틈이 생기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험자들이 큐리컬드가 가리킨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무슨일인지 잘 모르는 다른 모험자들 역시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웅성거렸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행복하게 먹고있던 아드리안의 일행 역시 그에 속해 있었다. 스푼을 입에 문채 우물거리던 레이멜은 음식물을 삼키며 말했다. "뭐야? 마물들이 습격이라도 한건가?" 레이멜의 말에 음식을 그릇으로 더 퍼담던 유겐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마물들이 습격을 하면 비상종이 울렸을 겁니다. 조용한걸 봐서는 그냥 사고가 난듯 한데요?" "그래 너 잘났다. 쳇!" 어떤 일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아드리안은 이미 비운 그릇을 땅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식사나 계속하고 있어.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올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식사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레이멜은 한 스푼의 감자스튜를 입으로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가죽장갑으로 털어낸 아드리안은 벨트에 장갑을 끼워 넣으며 마을의 입구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이미 모여든 모험자들의 무리가 입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못볼것을 봤다는 양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정말 끔찍하군..." "대체 어떤일을 당했길래 저렇게 된 것이지? 죽은 영혼도 괴로워 할것 같은걸." "제길! 금방 식사를 했는데 다시 개워낼 것 같아."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씩을 내뱉고 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헤치며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보고있던 참상을 그 역시 목격할 수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덥썩 막힘을 느꼈다. 그가 본 것은 두구의 시체. 그 중 하나는 전투중에 목숨을 잃은 보통의 시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숨이 끊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무런 부패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뼈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살가죽은 뼈에 달라붙어 있었는 데다가 휑하게 패인 눈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살가죽과 뼈의 사이에 존재해야할 근육들은 다 어디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패가 시작된 시체에게서 나는 악취에 코를 쥔 아드리안은 입안이 찝찝함을 느끼며 한쪽으로 침을 뱉었다. "퉤! 최악의 모습이군." 시체의 처참함에 모두들 다가가기를 꺼려하고 있을 때, 아드리안은 허리에 끼워 넣었던 장갑을 손에 끼며 시체가까이로 다가갔다. 시체의 옆에는 그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큐리컬드가 시체를 살피고 있었는데, 상당한 경험을 가진 큐리컬드는 처참한 몰골의 시체들 앞에서도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멈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드리안. 스윈제국에서 왔네. 자네가 알고있던 자들인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드리안을 올려다 본 큐리컬드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닷세전에 이곳을 떠난 모험자들이지. 다른 일행도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들만 돌아온 것이군. 비록 이 세상의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자주 신세를 지고 있는 큐리컬드라고 한다네." "시체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조금 이상한데 짐작가는 사인이라도 있나?" 큐리컬드는 포기한 듯 두 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리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대조 시켜봐도 도무지 모르겠더군. 시체의 등쪽을 한번 살펴 보게나 더욱 끔찍하지." 아드리안은 큐리컬드가 비켜준 자리로 다가가 뼈와 가죽만 남은 시체의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가죽 장갑을 낀 상태였지만, 이질적인 뼈의 느낌이 손으로 전해졌고, 조금 힘을 가하니 손쉽게 시체를 돌려 눕일수 있었다. -드드득... 하지만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는데, 근육이 없는 상태여서인지 묵직한 골반뼈를 시작으로 하체는 그대로 있었고, 상체만이 이질적으로 뒤집어 졌던 것이었다. "이런... 이해해주게 친구. 별다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야." 시체에게 측은한 눈빛으로 농담 반, 진담 반의 사과의 말을 던진 아드리안은 시선을 옮겨 시체등에 나있는 상처를 주시했다. 시체의 등에는 큐리컬드가 말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처가 남아있었다. 마치 굵은 대롱을 꽂았다 빼기라도 한 듯한 시커먼 구멍이 여러군데에 있었는데, 만약 창이나 여타의 병장기에 의한 상흔이라면 그것들이 상처에서 빠져나간후 살이 다시 수축되어 흔적만 남기 마련이었지만, 이 시체가 가진 상처는 말 그대로 검은 구멍이라 할만큼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근육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안 역시 이러한 시체를 본적도 없었고, 들어 본적도 없었기에 고개를 내저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이상한 상흔이군. 하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무기에 당한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어." "대장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드리안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세실프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성공적인 아침준비에 기분이 금새 좋아진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꺄악! 이 시체들은 도대체 뭐예요!" 높은 톤의 비명성이 터지자 아드리안은 한쪽눈살을 찡그리며 말했다. "세실프! 소리좀 지르지 않으면 안될까? 명색이 용병이면서 이런 것에 비명까지 지르다니. 쯔쯧..." 입을 삐죽 내민 세실프는 볼을 부풀리며 변명을 해댔다. "용병이랑 징그러운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저도 여자인데." "오히려 너의 그 날카로운 눈매를 보면 이 시체들이 더 놀랄거다." 세실프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의 한 마디에 주변의 모험자들은 시체들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뭐라고욧?!" 세실프는 이에 큰 수치심을 느낀 듯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고, 그녀의 손은 천천히 허리춤에 있는 기형도의 손잡이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 쯤 되니 더욱 당황한 것은 아무런 생각 없이 농담을 던진 아드리안이었는데, 안색을 크게 바꾸며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세.. 세실프! 그건그저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설마 이런일에 '샤디올'을 빼들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세실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고,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등으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있는 모험자들은 둘의 행동이 이해가 안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득, 아드리안의 눈을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마주보던 세실프가 입을 열었다. "대장 물어볼게 있어요." "뭐..뭔데?" 아드리안이 말을 더듬으며 되물어오자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세실프가 갑자기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호호홋! 대장 겁먹었죠?! 그죠?" 이제야 세실프의 농간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은 아드리안은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누가 겁을 먹었다는거야?! 이런 진지한 분위기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흥! 먼저 장난을 친게 누군데 그래요." "아무튼 죽어도 남한테 지지는 않으려고 드는군." 말은 이렇게 하고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이 농담으로 그친것에 대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드리안이었다. 그들을 행동을 지켜보던 유겐과 레이멜은 약속이라도 한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쯔쯧... 어쩌면 저렇게 나이값을 못하는지 모르겠군요." "쯔쯧...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면서도 저렇게 잘 노는걸 보면 둘 사이에 세대 차이가 전혀 없나보군." 유겐의 말을 거들던 레이멜은 뒤늦게서야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턱을 쓸던 그는 세실프와의 다툼을 끝내고 다시 시신을 살피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물었다. "정말 처참하게도 죽었군. 사인이 뭔지 알겠나?"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쓰는 무기에 당한것은 아니야. 자네가 한번 살펴 보겠나?" "뭐 그렇게 하지. 좀 본다고 해서 눈이 닳는 것도 아니니." 시시껄렁한 우스갯소리를 한마디 한 레이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나섰다. 그리곤 뻣뻣한 자세로 시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시장으로 구경나온 사람 이상의 성의는 아니었다. 레이멜이 하는 양을 보던 큐리컬드는 저런 미덥지 못한 사내에게 부탁을 한 아드리안이 이해가 안간다는 듯 물었다. "뭔가 제대로 알기는 아는 친군가? 저렇게 대충 살펴 보는 것으로 사인을 어떻게 조사한다는 거지?" "하는 짓은 좀 건들거려서 미덥지 못해 보여도 상당히 능력있는 친구지. 30을 갓넘긴 나이에 4클래스 마법사가 되는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잖나?" "4클래스?" 마법이 몰락의 길에 들어선 요즘 세상에 4클래스의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는 큐리컬드는 또 다른 눈으로 레이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런 친구가 4클래스의 마법사라니..." 큐리컬드의 눈에 비친 레이멜은 가죽만 남은 시체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지나쳐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소매를 조금 걷어 시체의 상처 부위를 조금씩 만지더니 불현 듯 검은 피가 엉겨붙은 상처 안으로 손을 푹 찔러 넣는 것이었다. 한 동안 시체의 뱃속을 주물럭 거리던 그는 뭔가 찾아낸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 참 속이 야들야들한걸?" 레이멜의 상상을 초월한 행동과 그가 뱉은 말은 절묘하게 어울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상을 최대한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 였는데, 그를 조금 알고있다고 생각하던 동료들 조차 맨손을 시체의 몸으로 쑤셔 넣을 것이라고는 생가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큐리컬드는 미심적은 눈초리로 아드리안을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저런 미친 녀석이 정말 4클래스의 마법사란 말인가?" 머리를 긁적이던 아드리안 역시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저 친구에게 저렇게 과격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원래 마법사들은 엉뚱한데가 있다고 하지 않나. 저 친구도 마법사인데 그런 성격이 없진 않겠지." 아드리안은 될 수 있으면 좋게 생각하기로 했는지 다른이 처럼 찌푸린 인상은 아니었다. 그는 시체의 옆에서 손에 묻은 핏물을 주물럭 거리고 있는 레이멜에게 다가갔다. "이봐 계속 장난만 칠건가?" 하지만 레이멜의 표정은 장난을 치던 그의 표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누가 이런 시체의 몸에 손을 넣고 싶어서 넣었는 줄 알아? 자내도 이걸 한번 만져 보고 말하라고!" 레이멜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질척한 고깃덩어리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죽은 시체의 내장이라는 생각에 그다지 만져 보고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거절을 하는 것 역시 찝찝했기에 장갑을 벗어 그 일부분을 만져보았다. "뭐야! 도데체 무슨 장기길래 그렇게 물컹한거야?" 그의 되물음에 레이멜은 손에 든 핏덩이를 털어내며 말했다. "이건 내장이 아니야. 이 시체의 복근이지." 분명 아드리안이 느끼기에 그가 건넨 핏덩이는 물컹물컹한 내장의 감촉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꺼낸 당사자가 그것이 근육의 일부분이라고 하니 이상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시체의 근육이라면 당연히 단단해 져야 하는것 아닌가?" "그렇지 자네의 말대로 사람이 죽게되면 그 근육은 천천히 경직 되는 것이 정상이지.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 시체는 근육이 점점 녹아 내리고 있어." 그리고 그는 가죽만 남은 시체쪽으로 시선을 한번 던지며 말을 이었다. "먼저 죽은 시체는 어쩐 일인지 시신에 근육이 아예없는 상태이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축인데, 어떠한 마물의 독소에 몸속이 모두 녹아 내린 것 같군. 그것이 어떠한 마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멜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다들 동요를 하기 시작했다. [2002-09-10] 짜가신선 <대공학자> #170 그들의 뒤로 부터 답을 말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락스. 그 마물의 이름일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뒤를 바라보며 양 옆으로 갈라지자 그곳으로 부터 긴 챙을 가진 모자를 눌러쓴 그라프와 쥬라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머리까지 올라오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라프의 말을 들은 레이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일락스... 그럴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시체의 옆까지 걸어온 그라프는 침중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이름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을 걸세. 카일락스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니 말이야." 그라프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아드리안은 자신의 옆에서 어떠한 생각에 빠져있는 레이멜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자네는 그 마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가?" 레이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이 아드리안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법사 수업을 할 때, 스승님 아래서 고대의 마물에 대해서 공부를 한 적이 있었는데, 고대에 존재하던 마물에 대해 정리해 놓은 서적에서 한번 스쳐 지나가듯 본 이름이야." "과연 천재 마법사 다운걸? 한번 스쳐서 본것을 기억하고 있다니." 쓴웃음을 지은 레이멜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야." "그렇다면?" "책에 적힌 내용을 읽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도 카일락스에 대해서는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거든." 아드리안이 아는 한, 마물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은 단 두 가지의 경우 중 하나였다. 그 중 좋은쪽으로 따지자면 스스로의 능력으로 상대를 할 수 있는 마물에 대해 느끼는 자신감이었고, 나쁜 쪽으로 따지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마물의 공포에 대한 인상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드리안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쪽인가? 아니면 나쁜 쪽인가?" 그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은 레이멜은 그 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라프가 서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그라프님께서 설명을 해주실 듯 하니 자네가 직접 듣고 판단해 보라고. 어쩌면 우리의 '일'을 포기해야 할 만큼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흐음..." 대답을 그라프에게 떠넘기려는 레이멜의 생각에 호응이라도 해주듯, 아드리안의 귀로 사람들을 향한 그라프의 낮은 음성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카일락스라는 것은 숲속에 살면서 주로 사람이나 동물의 체액을 빨아 먹고 사는 저주받을 곤충의 이름이라네. 이것은 고대의 한 미치광이 마법사가 사람의 피를 빠는 모기의 형태와 습성을 본따서 마법을 이용하여 만든데서 탄생했다고 전해지는데, 모기의 행태를 그대로 딴 만큼 야행성이기 때문에 낮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먹이를 찾기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네. 또, 먹이 사냥시에는 주로 입의 역할을 하는 날카로운 대롱침을 목표한 먹이에 찔러 넣게 되는데, 동시에 그곳에서 방출되는 독물은 먹이의 내부를 모두 액체로 녹버릴 만큼 독성이 강한 것이야. 한 마디로 한번 찔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오장육부가 녹아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지. 시체들의 상흔이나 죽어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아마도 카일락스의 짓이 틀림 없을 것일세." 그라프의 설명이 대충 끝나자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드리안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는 듯한 말투로 레이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는 마물이 아닌가? 다른 마물들 역시 그 정도의 위협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 보통이니까." 하지만 레이멜은 그라프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임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드리안을 향해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낙천적이던 레이멜이 카일락스의 위협을 걱정하고 잇는 진정한 이유를 그라프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일락스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일세." 거의 동시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놀람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인 유겐, 세실프로 부터 시작하여 큐리컬드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모험자들에게 해당되었다. 아드리안은 급히 레이멜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역시 예상했던 일이었던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게 대체 무슨 말이지?" 레이멜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거야. 카일락스에 당한 피해자들은 자신이 무엇에 죽었는 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고대에는 암살용으로 사용되어졌었어." 잠시 그의 말을 생각해 보던 아드리안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카일락스를 기르고 있다는 말인가?" 과연 경험이 풍부한 모험자 다운 예리한 질문이었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레이멜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고대에 있었던 일일 뿐이야. 그 이후로는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어떻게 번식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 이 때, 둘의 대화에 끼어드는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레이멜 씨는 카일락스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자신들과 함께 숙소를 쓰는 여사제인 쥬라스 였다. 그라프의 설명을 사람들 사이에서 듣고있던 그녀는 아드리안과 레이멜의 대화를 듣게 되었고, 카일락스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는 레이멜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온 것이었다. 레이멜은 코를 쓸며 말했다. "그냥 대충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 뿐이죠. 저보다 오히려 그라프님이나 쥬라스 사제님께서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 것이 더욱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의 말에 잠시 주변을 살피던 쥬라스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우선 이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숙소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이니 이해해 주시길..." 쥬라스의 제의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드리안과 레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동의를 하자 쥬라스는 사람들 앞에서 카일락스에 대해 설명을 해주던 그라프에게 눈짓을 하며 숙소쪽으로 걸었고, 아드리안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있던 세실프 남매에게 숙소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하며 레이멜과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현자 라듀아보 나무향이 진하게 베어나오는 숙소, 오후가 되면서 해가 창의 반대편으로 넘어가면서 시원한 그늘이 져 있었다. 숙소의 한 가운데, 아드리안의 일행과 여사제인 쥬라드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를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던 세실프는 아드리안을 보며 물었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는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자신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아드리안은 쥬라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 쥬라드 사제님께서 하실 이야기가 있으시다는군." 자연스럽게 세실프의 시선은 쥬라드에게 옮겨졌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쥬라드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라프님께서 들어오신 후에 직접 하시겠지만, 대충이라도 말해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네요. 약 두달 전 쯤, 그라프님은 곤경에 빠진 친구분께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고, 그 친구분께 가는 도중 이곳에서 며칠 동안 묶게 되었습니다. 함께 동행해줄 파티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지금까지 마땅한 모험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이렇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아드리안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그 대상에 올랐다는 것입니까?" "간단히 말씀 드리면 그렇습니다. 그라프님과 제가 처리해야 할 일에 여러분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씀 드리는 것이죠." "하지만 저희도 다른 목적이 있어 여행을 하는 중이기 때문에 도와드리기가 조금 곤란할 듯 합니다만..."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대화에 끼어드는 그라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점은 염려하지 말게나. 우리도 어차피 '엘프의 숲'으로 가는 중이니 특별히 방해가 되지는 않을거야. 다만 가는 길까지만 조금 도와 달라는 것일 뿐이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아드리안과 일행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팡이를 한쪽에 기대어 놓으며 모자를 벗고 있는 그라프가 있었는데, 조금 피곤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모두 모아진 것을 느낀 그라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늙은이가 주책스럽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야기에 끼어든 듯 하군. 내 사과하도록 하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저희가 엘프의 숲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고 계십니까?" "아드리안 지그너스, 스윈제국의 유일한 공작가인 지그너스 가의 장남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마지막 시련'을 위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 잠시 말을 끊으며 탁자쪽으로 다가온 그라프는 길게 늘어진 옷을 뒤로 젖히며 남아있는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 시련을 위한 여행을 할만한 가장 가까운 곳이 3대 마역중 한 곳인 엘프의 숲일 테니, 자네 일행이 그곳으로 간다는 계산 쯤이야 간단하게 나온다네." 아드리안은 그라프의 정확한 추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말로야 간단하겠지만, 이름과 행색만을 가지고 생전 처음 보는 이의 배경을 알아 낸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꿈도꾸지 못할 일이었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아드리안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애써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데, 그렇게 쉽게 알아 내셨다니... 또, 그라프님께서는 저에 대해 잘 아시지만 저는 그라프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모르니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투정과도 같은 그의 불평에 너털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턱의 수염을 쓸었다. "허헛! 자네의 정체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냈고, 자네는 자네의 힘으로 나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절대 불공평 한것이 아닐세." 장난스럽게 들리는 그라프의 반박이었지만, 그의 말도 틀린 것이 없었기에 아드리안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쥬라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드리안을 향해 말했다. "그라프님께서 장난기가 조금 있으시니 이해해 주세요.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거예요. '현자 라듀아보'라는 이름을... 그라프님께서 그 본인이시죠." "그..그렇다면 대현자 그라프 라듀아보?!" 쥬라드가 말한 라듀아보라는 이름은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에 대마법사 루스티커가 있다면, 도이첸 제국에는 대현자 라듀아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약 100년전, 20대 초반의 나이로 홀연히 도이첸 제국에 나타난 라듀아보라는 청년은 각 대학교를 돌며 그곳의 현자들과 각 분야에 걸쳐 지혜를 겨루기 시작했고, 그와 대면한 모든 현자들에게 자신들의 학식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닿게 만들어 주었다. 또, 시간이 흘러 30대의 나이가 되자,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의 혜지를 가진 현자라 인정 받아 대현자의 칭호를 받게 되었고, 40대에는 도이첸 제국 황제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 15년간 황실의 고문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62세가 되는 해 인간의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크게 놀라 직접 그의 거처까지 찾아와 말렸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미 40여년 전에 사라진 그를 이런 외진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아드리안 일행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2002-09-12] 짜가신선 <대공학자> #171 그 중 레이멜의 감흥이 특히 남다른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마법사 수업 중, 대현자님께서 남기신 저서를 토대로 마법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만물에 대한 귀감' 과 '무형의 원론' 은 현재에도 모든 마법사들에게 필독서로 통하고 있죠."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손을 내저었다. "허허. 대현자라는 말은 듣기가 좀 거북하군. 그렇지 않아도 은거한 이후에 여러 곳에서 날 찾아서 골치가 아팠다네." "아..알겠습니다. 그라프님." 아드리안은 문득 자신의 옆에서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레이멜을 보며 낯설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봐온 레이멜의 모습중 지금 같이 긴장하고 있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일이 이쯤 되니 그라프와 쥬라드의 부탁을 모른척 할 수는 없어졌다고 생각한 아드리안은 그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라프님과 쥬라드 사제님께서 여행하시는 목적지가 엘프의 숲이라고 하셨는데, 대체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탁자위로 손을 모아쥔 그라프는 아드리안과 동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네들 역시 목적지로 하는 곳인 만큼 3대 마역 중의 한곳인 엘프의 숲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의 물음에 순한 양 처럼 바른자세로 앉아있던 레이멜이 깍듯이 대답했다. "대륙 서쪽의 미개척지에 위치치한 신비의 숲으로서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3대 마역중 한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마역이라고 하기보다는 엘프들이 살고 있기에 들어갈 수 없는 금역이라는 말이 더 옳겠지만, 편의 상 드베인 숲, 마룡의 호수와 함께 3대 마역으로 일컬어 지고 있죠." 엘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숲을 성스럽게 생각했기에 인간이나 여타의 종족들이 접근하는 것을 극히 싫어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엘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둘러싸는 거대한 결계를 쳐놓고서 인간이나 그 외의 종족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아왔던 것이었다.그라프는 레이멜의 정확한 대답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알고 있군. 지금부터는 자네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야기들 일세. 사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친구는 다름아닌 엘프의 숲에서 살고 있는 엘프라네. 도이첸 제국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도중 우연한 기회에 만난 친구인데, 난처한 상황에 빠진 그를 도와주면서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몇번인가 금지로 알려진 엘프의 숲으로 초대를 받아 가본적도 있었다네. 또, 헤어진 후에는 일년에 한번 정도 짧은 시간이나마 이 옆에 있는 쥬라드 사제의 신성력을 빌려 소식을 나누곤 했지. 그러던 중 얼마전 급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온 것이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일락스가 엘프의 숲에서 들끓고 있다는 소식이었지. 그래서 나는 급히 짐을 챙겨 길을 나섰고, 쥬라드 사제 또한 나를 돕기 위해서 동행한 것이라네." 그의 말을 듣고있던 레이멜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역시 돕겠습니다! 어차피 저희 역시 엘프의 숲으로 가는 중이었으니 저희의 일도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나 아드리안?" 레이멜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그래야지. 그런데 자네 너무 열을 내는것 아닌가?" "무슨 소리야! 대현자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시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아드리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우리의 일은 완전히 머리속에서 사라진 것 같군."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라프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헛. 만약 자네들이 우리를 도와 주어 일이 잘 해결된다면 더욱 쉽게 엘프들로 부터 원하는 것을 얻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영원의 열매'이라든지..." 그라프가 말한 영원의 열매이라는 것은 엘프들이 주로 먹는 나무 열매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을 주식으로 먹는 엘프들의 평균 수명이 인간에 비해 몇배나 길었기에, 엘프들의 생명력이 영원의 열매에서 나온다고 믿은 인간들이 지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인간들 중 엘프의 숲에서만 난다는 영원의 열매를 먹어본 자가 없었기에 그 열매가 정말 그러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그것을 어떻게?" 되물음을 던진 아드리안을 보며 어느새 그라프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어버린 듯한 레이멜이 혀를 찼다. "쯔쯧. 대현자님이신 그라프님께서 겨우 우리가 하려는 일을 모르시겠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라프님?" 레이멜이 조금 부담스러운 눈빛을 던지며 물어오자 그의 눈빛을 차마 받아주지 못한 그라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아드리안의 질문에 답했다. "자네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에서 가문으로 부터 자네의 능력과 용기를 인정 받으려면 3대 마역을 탐험했다는 증표가 있어야 할 테고, 엘프의 숲을 목적지로 선택한 만큼 영원의 열매만큼 확실히 증명해 줄 수 있는 것도없지." 아드리안과 일행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동안 잠시 말을 끊은 그라프는 다시금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튼 이것은 계약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일세. 자네들이 우리를 도와주면 영원의 열매를 구할 수 있도록 해주지." 잠시 생각을 해보던 아드리안은 그의 말대로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라프에게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목적지가 엘프의 숲인 만큼 필연적으로 카일락스의 위협을 받을 것이고 또, 엘프들의 방해를 받으며 영원의 열매를 찾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는데, 그럴바에는 그라프와 함께 쉽게 일을 해결하는 편이 훨씬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저희 일행이 그라프님의 일을 돕기로 하죠. 그렇다면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지..." 긍정적인 결론에 그라프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야 할것 같네. 아무래도 그 시체를 보아하니 카일락스가 엘프의 숲을 빠져나온 듯 하니, 더 이상 그들이 번식하기전에 막아야 할 것일세." "그렇다면 내일 오전에 출발을 하도록 하죠. 그리고 저희 일행 4명은 모두 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라프님과 쥬라드 님께서는?" "아! 우리 역시 말을 가지고 있으니 그점은 걱정말게. 가만... 그런데 지금 4명이라고 했나? 분명 5명이 아닌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오는 그라프를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아드리안은 그가 묻는 바를 깨닳은 듯 침대에서 자고있는 뮤스를 가리켰다. "아! 뮤스를 말하시는 군요. 그는 저희 일행이 아니라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나 함께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터 함께 움직이지는 않을 듯 합니다만." 아드리안의 말에 문득 허탈한 표정을 지은 그라프는 쥬라드를 바라보며 대답을 구했다. "허헛... 이것 참 난처하게 되었군. 한 명의 마법사로는 힘들텐데..." 쥬라드 역시 그의 말에 동의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드리안과 레이멜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침대에 바른 자세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뮤스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에게는 도이첸 제국의 국경을 넘은 이후로 이렇게 마음 편히 잠을 자본 기억이 없었고, 또 언제 다시 이런 시간이 올지 몰랐기에 이 기회를 이용해 최대한 즐기려는 듯 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은 원하는 대로만 될 수 없는 법. 세실프의 높은 음성이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있던 뮤스를 깨우고야 말았다. "뭐라구요?! 저렇게 어벙해 보이는 녀석이 대단한 마법사라고요?" 무슨 이야기인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단잠을 방해한 목소리에 짜증을 느낀 뮤스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레이멜의 목소리 마저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핫! 쥬라드 사제님께서도 농담이 심하시군요. 뮤스군이 마법사라니요? 그는 그저 현자 수업을 하고 있는 청년일 뿐입니다." 인상을 찌푸리며 휴식을 방해하는 그들을 원망하던 중, 문득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 되는 것을 들은 뮤스는 더 이상 무심하지 못했다. 애써 정신을 차린 뮤스는 귀를 세워 그들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쥬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뮤스군에게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은 보통의 그것이 아니예요. 처음에는 제가 잘못알았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다른 곳에 있어도 그의 몸에서 흐르는 마나의 기운이 저에게 전해 오더군요. 정 의심이 가시면 레이멜씨가 직접 알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마나 탐지 마법을 쓰면 금새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뮤스는 자신의 등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의 대화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뇌공력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뇌공력의 존재를 알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뮤스의 가슴을 찌르는 쥬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뮤스군, 이미 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대화에 함께 참여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자신이 깨있었던 것을 쥬라드가 눈치채자 놀람에 눈을 한번 질끈 감은 뮤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 방금전에 일어 났을 뿐입니다." 뮤스가 어색한 말투로 변명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 대로 모든 일행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세실프와 유겐은 팔짱을 낀체 여전히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고, 아드리안과 레이멜은 설마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뒤로 보이는 그라프는 뮤스를 향해 조용한 미소를 건네며 물었다. "이미 우리의 대화를 들은 듯 하니 괜찮다면 자네의 정체에 대해서 대답해 주는 것이 어떻겠나? 자네는 정말 마법사가 아닌가?" 아드리안과 동료들을 둘러보며 표정을 살피던 뮤스는 마침 잘 물었다는 듯 서슴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음... 저는 그라프님과 쥬라드 님께서 말씀하시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그저 공학원 이라는 곳을 책임지고 있던 일개 공학도이고, 제 몸에 흐르고 있는 기운은 마나의 그것과는 성질이 조금다른 뇌공력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잠깐... 지금 공학원이라고 했나?" 뮤스는 자신의 말을 끊으며 재차 확인하는 그라프를 향해 긍정의 표시를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그의 말을 들은 그라프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그의 주변에 서서 뮤스를 바라보던 일행들은 웃음소리에 놀라며 시선을 그라프에게로 옮겼다. "껄껄껄! 그렇다면 자네가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공학원의 원장이었단 말인가?"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에 얼떨떨해진 뮤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알고 계셨나요?"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언젠가는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이야! 시간이 날 때 마다 자네가 만들어 놓은 전뇌거나 다른 물건들을 모두 모아 놓고 뜯어 보고, 연구해봤지만 대현자라 불리우는 나도 막히는 부분이 많더군. 이제야 속시원하게 이해가 될 수 있을 테니 정말 기쁘기 짝이 없어!" 소탈한 표정으로 웃고있는 그라프를 보던 뮤스는 대충의 상황을 이해했고,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또,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들은 공학원의 존재를 잘 몰랐기에 그라프가 뮤스에 대해 상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도 당연한 것이 대륙전체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현자라 불리는 라듀아보가 추방자 한명을 만난 것에 대해 이렇게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그라프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네도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네는 일행이 아니라고 하더군. 그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침대에 앉아있던 뮤스는 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목적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발길이 닿는 곳으로 다닐 뿐이죠." "그렇다면 혹시 우리들과 함께 엘프의 숲으로 갈 생각은 없나? 물론 위험한 일이겠지만, 혼자서 미개척지를 여행하는 것보다는 괜찮을 듯 한데... 게다가 신비에 쌓인 엘프의 숲을 구경하는 것도 젊은 나이에 아주 좋은 경험 아니겠는가?" "글쎄요. 생각을 좀 해봐야 겠습니다." 한편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있던 세실프는 대현자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뮤스를 높이 평가하는 지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참지 못한 세실프는 둘의 대화를 자르며 그라프를 향해 물었다. "왜 이런 추방자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죠? 저는 이자를 아직 믿을 수가 없어요." "허헛 자네들은 스윈 제국에서 왔으니 공학원과 뮤스군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군. 작년 가을, 도이첸 제국에 얼핏 듣기에도 낯설은 공학원이라는 곳이 생겼지..." 이렇게 해서 공학원과 뮤스에 대한 그라프의 설명이 계속 되었고, 아드리안과 레이멜 역시 잘 모르는 이야기들이었기에 그의 말을 유심히 듣기 시작했는데, 뮤스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알고 있었기에 당사자인 뮤스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2002-09-14] 짜가신선 <대공학자> #172 그라프의 이야기는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럴 수록 아드리안과 일행들이 뮤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고 있었는데, 만약 다른 이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했다면 쉽게 믿을 수 없었겠지만,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가 다른 이도 아닌 그라프였기에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후, 도이첸 제국의 상인들을 통해 뮤스군이 황실로 갔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는데, 그 후 얼마 안있어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했다고 하더군. 이런 젊은이를 내쫓은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지만, 이미 인간세상에서 떠나온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네. 헌데 뮤스군을 이런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인연이라고 하지 않겠나?" 말을 마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들을 둘러본 그라프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흠.. 그러니 이렇게 능력있는 사람이 우리의 일행에 끼어 있는 것도 상당한 전력이 되리라고 생각하는데 다들 어떤가?" 그라프의 말대로라면 뮤스가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이 확실했고, 최소한 그들이 하려는 일에 방해는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흠... 뮤스군이 괜찮다면 저희들도 좋습니다. 든든한 아군은 많을 수록 좋죠." 처음 부터 뮤스에게 호의 적이었고, 그라프의 추종자이기도 한 레이멜 역시 아드리안의 말에 크게 동의하고 나섰다. "하핫! 뮤스가 똑똑한 젊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라프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일행으로 맞이해도 손해 날 것은 없겠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세실프?" 지금 세실프는 자존심이 크게 상해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그라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깔보던 뮤스가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뮤스를 한번 흘긴 세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다른 파티를 맞아 들이는 것은 대장이 해야 할 일이니 대장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죠. 저는 피곤해서 잠을 좀 자야 겠어요." 간단한 말을 남기며 뒤돌아선 세실프는 성큼걸음으로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 이불을 덮어 쓰며 누웠다. 그녀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거린 레이멜은 유겐을 바라보며 물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유겐 네 생각은 어때?" 다행 스럽게도 유겐은 그의 누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듯 했는데, 처음에는 추방자라는 이름때문에 뮤스를 깔보기도 했지만, 그라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능력을 가진데다가 나쁜 짓을 저지를 만한 인품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저보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니 함께 움직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하핫 역시 유겐은 생각이 깊은걸? 괜한 자존심때문에 침대에 누워 자는 척 하는 사람 보다는 백배 나아!" 문득 세실프가 누워있는 침대가 움찔 하는 듯 했으나, 이내 잠잠해 졌다. 이제 모든 이들의 시선은 뮤스에게 모아졌고, 그들의 시선을 받은 뮤스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할 수 도 없는 일이었기에 이내 마음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보잘것 없는 능력이지만 짐이 되지는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뮤스의 결정과 함께 파티에 합류하게 되자 그라프는 아주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헛. 이제 뮤스군도 함께 움직이기로 했으니 내일 떠나는 일만 남았군.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드리안 대장." 그라프에게 대장이라고 불린 아드리안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대장이라는 말은 감당하기 힘드니 그냥 아드리안이라고 불러 주시죠." "으음. 그럴 수는 없는 법이지. 쥬라드 사제와 내가 자네의 파티에 신세를 지는 샘이 되었으니 대장이라고 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야. 그렇지 않나 쥬라드 사제?" 쥬라드 역시 그의 말에 동의 하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아드리안 대장님." "이것 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저희 역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라프님, 쥬라드 사제님." 아드리안에게 대장이라고 칭한 그라프의 행동은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보통 하나의 모험자 파티에서 두개의 우두머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조직이 분열 될 가능성을 내포하는데, 긴박한 상황에 두개의 의견이 생겨 대립하게 된다면 그만큼 위험한 것이 없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그라프였기에 자연스럽게 아드리안이 파티의 우두머리임을 인정한 것이고, 아드리안 역시 그의 뜻을 고맙게 생각하며 받아 들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들은 새로운 동료들을 맞이 하게 되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여름 밤의 스산한 바람이 들어왔다. 비록 창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이는 투박한 나무 창이었지만, 숯칠을 해 놓은 듯 까맣게 물든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달과 별을 볼 수 있었기에 팔베게를 베고 누워있는 뮤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창문이었다. 뮤스는 낮에 충분히 잠을 자서인지 잠자리에 들고 얼마 있지 않아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내일 또 다시 힘든 길을 떠나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뇌공력의 신묘함 덕분에 이미 피곤함을 모르는 그에게 있어서 잠이란 그저 정신적인 만족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단전에서 부터 전해지는 음률의 움직임을 느끼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뮤스는 다른 동료들의 침대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흠...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났군.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장영실 아저씨를 빨리 만나서 조선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는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점점 꼬여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니... 흠 어찌 해야할 지 모르겠군." 여행을 하기 시작한 이후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 질 수밖에 없었던 뮤스였다. 그것이 여행이 주는 좋은 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나쁜 점이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지금 뮤스에게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볼 중요한 시기였으며, 어쩌면 이것이 크라이츠가 의도 했던 바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연 내가 이곳을 버리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누님, 아저씨들, 그리고 카타리나와 친구들을 서슴없이 버리고 조선으로?"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몇번이나 던졌는지 셀수도 없었지만, 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었던 적 또한 한번도 없었다. 머리를 한번 도리질 친 뮤스는 가슴으로 시작되는 답답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뮤스는 큰 숨을 한번 들이키며 마을을 둘러 보았다. 밤이 늦어서 인지 그리 넓지않은 마을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는데, 마을의 외벽 위에서 망을 보고 있는 모험자들의 일정한 발자국 소리만이 마을의 정적을 가끔씩 일깨우고 있었다. -또각, 또각... 뮤스는 서늘한 밤공기가 피부위로 스치는 것을 느끼며 멍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았다. 이럴 때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올려진 작은 종이한장, 그 안에는 카타리나가 뮤스를 향해 밝게 웃고 있었다. 조금은 슬픈 미소를 지은 그는 사진 속의 카타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는 잘 지내고 있겠지? 나 때문에 걱정을 하지는 않아야 할텐데..." 뮤스가 카타리나의 사진을 보며 정신을 팔고 있을 때, 그의 얼굴 옆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불쑥 드리밀어 졌고, 능청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 이런 야밤에 청승 맞게 뭐하는 거야?" 그 목소리에 혼비 백산하며 놀란 뮤스는 급히 몸을 옆으로 젖히며 외쳤다. "으악! 누..누구? 레이멜씨?" 뮤스의 말대로 달빛에 비친 얼굴은 분명 레이멜이었는데, 언제부터 그의 뒤에 앉아있었는지, 팔짱을 낀채 느긋한 자세로 놀라있는 뮤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레이멜은 혈르 차며 말했다. "쯔쯧... 정신을 어디다가 팔고 있었길래 뒤에 누가 오는것도 못느낀거야?" 그의 목소리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휴우... 간떨어질 뻔 했다고요." "그건 그렇고 그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야? 상당한 미인이던데 혹시 여자친구야?" 깊은 한숨을 내쉰 뮤스는 사진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흠... 라이델베르크에 있는 여자친구예요. 이미 못본지가 두달이나 되어가죠." "하핫! 그래도 생각보다 능력이 좋은걸? 어떤 눈매 무서운 여자처럼 싸움만 배우다가 좋은 시절 다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군." 이 때, 세실프가 자고 있던 침대가 다시한번 움찔 거리고 있었다. 레이멜의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던 뮤스가 되물었다. "그런데 레이멜 씨는 아직까지 안주무셨나요?" "흠 오늘 처럼 달빛이 좋은 날은 마나를 모으기가 아주 좋지. 그래서 저 뒤의 공터에서 마법수련을 하다가 들어오는 길에 네가 있길래 뭘하나 지켜보고 있었던거야." "아! 그러고 보니 마법사들이 달빛을 받으면서 수련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이 있어요." "후훗! 그건 마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다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라고..." 조금 머슥해진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고, 볼 수록 순진하게만 느껴지는 뮤스를 향해 피식 웃은 레이멜이 말했다. "그런데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군." "네? 뭐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다른것이 아니고 말이야. 아무리봐도 미개척지의 길 조차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혼자서 한 달 동안이나 아무일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동안 마물들을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 뮤스는 레이멜이 궁금해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는데, 파티를 이룬 모험자들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곳에서 한 달 동안이나 혼자서 생존했으니 이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볍게 미소를 지은 뮤스는 허리쪽에 매달려 있는 가방에서 금속으로 된 건틀렛(손에 끼는 갑옷)을 한쌍을 꺼내며 말했다. "그건 이것 덕분이에요." "에? 이 건틀렛이 뭐가 어떻길래?" "아... 이런 것을 건틀렛이라고 하는군요." 뮤스는 손에 들린 건틀렛을 새삼스럽게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막상 추방을 당해 미개척지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제가 검이나 다른 병장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법사도 아니니 몸을 보호할 방법이 마땅하지가 않더군요. 그저 맨손으로 하는 격투술을 약간익혔을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맨손으로 흉폭한 마물들과 싸우는 것은 말이 안되더군요. 그래서 만든 것이 이 건틀렛이죠." 레이멜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뮤스가 들고 있던 건틀렛 한짝을 주워들며 살펴보았다. "과연 굉장히 정교하게 만든 건틀렛임은 확실해. 금속이 맞물리는 부분도 부드럽고, 광택으로 봐서는 놀라운 기술로 금속을 제련한 듯하고... 이 정도면 드워프들이 만든 최상급에 버금갈 정도야. 하지만 이런 건틀렛이 어떻다는 거지?" 그의 말을 들으며 의미있는 웃음을 지은 뮤스는 건틀렛을 손수 레이멜의 손에 끼워주며 말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 것 보다 낳다라고 했으니 이 건틀렛으로 힘껏 난간을 격타해 보세요." "뭔가가 있는거야?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마법용구는 아닐텐데..." "그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죠."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는 뮤스를 향해 고개를 한번 갸웃 거린 레이멜은 속는 셈 치고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레이멜은 건틀렛을 낀 손을 풀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대로 때리면 되는거야? 설마 내 손의 뼈들이 다 부스러 지는 건 아니겠지?" "그건 염려 마세요. 그리고 부스러 져도 회복 마법을 쓰면 되잖아요." 할말을 잃은 레이멜은 숨을 한번 쉬며 두꺼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난간을 바라보곤 주먹을 말아 쥐었다. "후우... 좋아 한번 때려보지 뭐. 하앗!" 그리곤 짤막한 기합소리와 함께 난간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렇지만 레이멜의 자신없는 모습은 여전했는데, 평소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체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하긴 했지만, 그의 전문 분야는 마법이었지 주먹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다음에 이어진 격타음과 상황은 그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는데... -퍽! 빠직! 놀랍게도 건틀렛이 끼어진 주먹에 격타당한 나무 난간은 마치 거대한 망치에 두들겨 맞은 듯 산산히 부서지며 비산해 버렸고, 그곳에는 멀쩡한 레이멜의 손만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눈앞의 일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마을의 외벽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모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거기 무슨 일이야!" "누군가가 싸우기라도 한건가!"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이멜은 그들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발이 걸려 넘어 졌어! 계속 수고들 하라고!" 레이멜의 말을 들은 모험자들은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살펴 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레이멜은 자신의 손과 뮤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뮤스는 이러한 레이멜의 반응을 미리 알기라도 했는지, 자신의 손에 들린 다른 한짝의 건틀렛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보통 주먹이 어떠한 물체를 격타할 때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일어나죠. 즉, 주먹이 물체를 때리는 만큼 격타당한 물체가 주먹을 미는 힘이 발생한다는 뜻이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되나요?" "흠... 그렇기 때문에 주먹으로 돌을 때리면, 돌이 내 주먹을 때리는 것과 똑같다는 것인가?" "하하! 아주 적절한 비유네요. 그런데 이 건틀렛은 가격한 물체로 부터 반발력을 받으면 그 반발력 만큼을 다시 가격한 물체로 되돌려 주는 역할을 하죠. 그러니 건틀렛과 물체 사이에 수십번의 반발력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더해질 수록 더욱 큰 파괴력이 가격한 물체쪽으로 전해지는거예요." "호오! 그렇다면 내힘보다 수십, 수백배에 달하는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것이군!" "바로 그거에요. 이 건틀렛 덕분에 마물들과 몇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죠." 자신이 끼고 있던 건틀렛을 벗어 뮤스에게 건네준 레이멜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뮤스 너, 정말 멋진 무기를 가지고 있었군." "제가 생각해도 이 건틀렛은 정말 저에게 딱 알맞는 무기인 것 같아요." "아니. 건틀렛 말고, 너의 그 머리말이야. 그라프님께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거든. 왠지 네 덕분에 이번 일은 잘 해결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여전히 칭찬에 익숙하지 못한 뮤스는 얼굴을 붉혔고, 그 모습을 보며 친근한 미소를 지은 레이멜은 뮤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내일 일찍 일어나 출발해야 하니까 우리도 들어가서 잠 좀 자자고. 아참! 내일 누가 이 난간을 부쉈냐고 물으면 절대 모른다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고쳐주고 떠나야 한단 말이야." "하핫! 알겠어요." 시원하게 대답한 뮤스는 웃으며 앞장서 가는 레이멜을 따라 숙소로 들어갔고, 애꿎게 부서져 버린 난간의 조각들 만이 그자리에 남아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듯 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73 새벽일찍 일어난 아드리안과 일행들은 바삐 각자의 짐을 다시 꾸리고 있었다. 아직 해조차도 뜨기 전일 만큼 이른 시간이었기에 그들과 마을의 보초를 서는 모험자들 외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이 짐을 챙기고 있을 때, 뮤스는 그라프와 침을 튀겨가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허리춤에 매고 있는 가방이 짐의 전부인 만큼 다른 동료들에 비해 해야할 일이 적었지만, 눈을 뜨자 마자 이것 저것 물어오는 그라프 덕분에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뮤스 역시 그라프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서 대화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 그렇다면 그 전뇌거 아랫부분에 붙은 마나구에서 나오는 기이한 마나의 힘이 자네가 말하는 전뇌라는 것이 되겠구먼. 그렇다면 마나구를 만들때 쓰인 마나는 모두 자네의 몸에서 나온것인가? 그부분이 크게 걸리는구먼. 아무리 자네가 가진 마나의 양이 많다고 해도 지금까지 출시된 모든 제품에 사용되는 마나구를 만들기에는 무리일텐데..." "음... 마나구에 들어있는 것은 전뇌력이라는 것으로 마나와는 또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마나 역시 전뇌라는 성질의 힘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전뇌 그자체는 아니예요. 우선 전뇌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그 기본 작용인 대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음전하를 가진 물체와 양전하를 가진 원자핵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보통때에는 음전하와 양전하의 양이 같이서 전뇌적으로 중성인 상태를 유지하죠. 그렇지만, 물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음전하 또는, 양전하의 양이 우세해지면, 우세한 쪽의 전뇌적 성질을 띄게 되는데, 이를 대전이라 하고, 여기에서 전뇌가 시작하니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대전이라는 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비록 생소한 설명 방법이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그라프 역시 대륙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현자였기에 이해를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전뇌의 기본 원리라고 하는 대전은 어찌보면 마나의 기본원리와 비슷하군. 마나에도 두가지의 속성을 가진 '마나원'이 있다네. 그중 하나는 하늘의 기운을 가진 것이고, 다른 하는 땅의 기운을 가진 것이지. 이 두개의 마나원을 통털어 우리는 마나라고 부르는데, 이 마나원들을 여러방법으로 조합하여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고, 그러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바로 마법사라고 일컷는것이지. 어쩌면 자네가 말하는 양전하라는 것과 음전하라는 것이 이 마나원과 비슷한것 같네만...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잠시 그라프의 설명을 차근차근 이해해 나가던 뮤스는 그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마법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은 없었지만, 그라프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상당히 유사한 원리군요. 저의 몸에 있는 뇌공력의 움직임 역시 그러한 원리를 사용하는 듯 하는데, 몸속으로 흐르는 두 가지의 상반된 뇌공력이 일정한 움직임으로 합쳐지면서 전뇌력을 만들어 내니까요." 뮤스과 그라프 사이에 진지하기 그지없는 대화들이 오가고 있을 때, 그라프의 등뒤로 쥬라드가 다가오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모두 아침부터 너무 열을 올리시는 것이 아닌가요? 여행을 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러실 것 까지는 없는 듯한데요?" 그녀의 말에 그라프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수염을 쓸었다. "허헛! 내가 너무 흥분했나보군. 그나저나 모두들 짐은 다 꾸렸나?" "그라프님의 짐만 말위에 실으시면 일행들의 짐은 모두 챙긴 것이랍니다." 쥬라드의 조용한 목소리 속에 숨은 꾸짖음을 느낀 그라프는 머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네. 알겠어. 내 어서 짐을 챙기도록 하겠네." 그라프가 휘적거리며 자신의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이번에는 뮤스를 향해 물었다. "뮤스군은 다른 짐이 없으신가요? 어제 숙소에 오실때 보니 큰 짐을 지고 들어오시던데..." 그라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뮤스는 그녀의 물음에 작은 가방을 보였다. "어제 그 짐은 레이멜 씨의 짐이었죠. 저의 짐은 이 작은 가방 밖에 없습니다." 뮤스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작은 가방을 바라본 쥬라드는 조금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것이 평범한 가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것 같은 모습이었다. "대단하군요. 느껴지는 마나의 힘이 보통이 아닌걸봐서는 상당히 귀한 물건인데 이런 물건을 어디에서 얻으셨는지..." 뮤스는 한 눈에 마법가방의 정체를 알아본 쥬라드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 것이 마법가방이라는 것을 아시는군요? 어제는 제 몸에 흐르는 뇌공력도 느끼셨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뮤스의 되물음을 받은 쥬라드는 오히려 뮤스의 질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당연히 제가 주신을 모시는 신관이니 신성력을 통해 물질의 본질에 대해서 알 수 있답니다. 그것이 사제가 이용할 수 있는 신성력 중의 하나죠. 설마 그것을 모르셨나요?"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사제님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신성력도 가지고 계시나요?" 쥬라드는 눈앞의 청년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최소한 이 대륙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신관의 신성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뮤스가 거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려는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신관에 대해 상세히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상처입을 자를 치유하거나 행운을 내려주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요. 때로는 모시는 신의 권능에 따라 또 다른 신성력을 발휘할 수도 있답니다. 이번에 그라프님과 함께 온 이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카일락스의 위치를 저만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뮤스는 새삼스럽게 이곳이 조선과는 다른 세상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저 무당들이 굿을 하는 모습 뿐이었고, 그것 마저 효과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풍습쯤으로 치부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 이곳에서는 실제 신의 능력을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흠... 그렇다면 정말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 건가..." 잠시 혼잣말을 하고 있던 뮤스는 쥬라드의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죄송합니다 쥬라드 사제님. 제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있어서..." 막상 뮤스의 사과를 받은 쥬라드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호홋.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라프님과 대화를 할 때에도 자주 이런 일이 있다보니 저도 모르게 익숙해 져있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 가방은 저희 누님께 선물 받은 것이죠, 출처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가방에 걸려있는 마법 덕분에 굉장히 유용히 쓰고 있답니다." "음... 누님께서도 대단하시군요. 이렇게 귀한 물건을 구할 수 있으셨다니..." 문득 크라이츠의 얼굴을 떠올린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후훗.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죠. 그 점은 저도 인정하고 있어요." 뮤스와 대화를 나누던 쥬라드는 문득 깜빡하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는지 서둘러 일행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차! 출발 준비가 다되었다고 뮤스군과 그라프님께 알리기 위해 왔는데,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군요." 그녀의 말에 일행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모두들 자신의 말에 올라타있었고, 레이멜이 뮤스에게 어서 오라는 듯 자신의 뒷자리를 툭툭 치고 있었다. 다시한번 쥬라드와 얼굴을 마주본 뮤스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말했다. "출발 부터 미움 받기 싫으니 어서 가도록 하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대화를 마친 뮤스와 쥬라드는 빠른 걸음으로 일행들에게 다가가 각자 탈 말에 올라탔는데, 뮤스는 자신의 말이 없었기에 레이멜의 뒷자리에 타게 되었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은 상당히 튼튼해 보였고, 뮤스의 몸무게 역시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었기에 별 무리는 없어 보였다. 레이멜이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앉은 뮤스를 보며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침 부터 그라프님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었던거야? 내가 바쁜 틈을 타서 둘만 이야기를 나누다니 너무하는군." "레이멜씨야 짐을 싸느라 바빴으니 어쩔 수 없었잖아요. 다음번에 기회가 많을 테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흠... 하긴 그렇군. 다음번에는 꼭 나를 부르도록 해." 대충 레이멜의 섭섭함을 달래주고 있을 때, 가장 앞에선 아드리안이 일행들을 한번씩 돌아보며 말했다. "자 준비가 다되었으면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 신호를 한 아드리안이 먼저 출발하자 레이멜과 뮤스를 포함한 일행들 역시 그를 따라 마을의 입구 쪽으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고, 외벽의 위에서 아드리안과 일행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본 보초들은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듯 손을 흔들며 외벽의 대문을 열어 주었다. 엘프의 숲 여름의 대지를 달구며 이글거리던 태양이 천천히 지평선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하면서 숲을 이루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불꽃들이 튀어 들듯 붉은 태양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렇게 밤의 세계가 시작되려는 낌새가 나타나자 새끼를 가진 짐승들은 어둠 속에서 다가올 위험으로 부터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피할 곳을 찾았고, 어둠을 즐기는 짐승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파스르르륵. 미미한 소리와 함께 나무의 잔가지들이 떨렸다. 하지만 금새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 무성한 나뭇가지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다. 다른 짐승들과 같이 밤을 맞이하고 있는 날짐승들의 움직임이었을까? 그러나,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비치는 사람형태의 그림자들은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개의 그림자들 중 하나가 가벼운 몸짓으로 나뭇가지에서 뛰어 내렸다. 상당한 높이의 나뭇가지 였기에 땅으로 내려서는 발자국 소리 정도는 날법 했지만, 마치 솜뭉치가 떨어지기라도 한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 보던 그림자는 아직도 나무 위에 서있는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루시아스님. 카일락스들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늦었다가는 로드께서 걱정하십니다." 루시아스라 불린 나무위의 그림자 역시 그의 옆으로 뛰어내렸는데, 마찬가지로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자는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숲의 먼 발치를 바라보던 루시아스의 입에서 걱정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그 친구가 오지 않았군. 이곳 까지 오는데 아무일도 없어야 할텐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루시아스님께서도 그라프님의 능력을 아시기에 도움을 청한것 아닙니까?" "물론 그의 능력이 대단한 것을 알고 있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둘 사이에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푸르고 작은 빛의 덩어리가 나무사이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루시아스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그 빛의 덩어리는 순종하듯 그의 손위로 날아와 앉았다. 그 빛으로 인해 그림자에 숨겨진 이들의 외모가 드러났는데, 유난히 하얀 살결과 갸녀린 몸매, 그리고 길게 흘러내린 은발의 머리칼 사이로 나와있는 뾰족한 귀가 그들이 엘프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손위의 작은 빛을 응시하던 루시아스는 옆에 서있던 엘프를 향해 말했다. "바슈. 카일락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지." "네. 루시아스님." 말을 마친 루시아스는 손 위의 빛을 다시 허공으로 날리며 가볍게 숲속을 향해 뛰어들었고, 바슈라 불린 엘프 청년 또한 오른손을 허리에 찬 얇은 검의 손잡에 올리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2002-09-18] 짜가신선 <대공학자> #174 -히이이잉! 거친 말의 울음소리가 숨을 죽이며 밤을 기다리는 숲속을 떨어 울렸고, 적막이 깨지며 놀란 동물들은 잠시 부산을 떨었다. 어둠이 찾아 들어 불과 몇 발자국 앞도 분간하기 어려워진 숲속에 한 무리의 인영들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이끌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청년이 땅을 차며 화풀이를 하는 듯 불만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제기랄. 겨우 이 정도 밖에 못와서 벌써 지쳐 버리다니 허우대만 멀쩡한 말이었군! 그 얄삽맞게 생긴 말장수 녀석이 어째 못 미더워 보이더라니!" 그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 중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철없는 손자의 어리광을 달래는 그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허헛! 이보게 레이멜. 이 말도 꽤나 튼튼한 말이지만 하루종일 두 명의 장정을 태우고 달리느라 이만큼 지친 것이네. 그리고 어차피 밤이 어두워 지고 있으니 이 말이 힘이 남더라도 더 갈 수는 없었을 게야." 과연 그의 달램이 효과가 있었는지 더 이상 말에 대해서 화풀이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헤유... 그라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군요. 그나저나 벌써 이렇게 어두워 진건가?" 문득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던 그는 오른 손을 들어올리며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 거렸다. "마나를 소유한 자의 이름으로 너의 밝음을 원하노라. 라이팅!" 마법 사동어와 함께 그의 오른 손에서 구모양의 밝은 빛덩어리가 떠오르며 주변을 밝혔는데, 레이멜을 중심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일행들이 서있었고, 그의 뒤에 서있던 뮤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말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들어낸 그는 칭찬을 듣기는 커녕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라프에게 호통을 들어야만 했다. "이런! 자네 이 주변에 있는 카일락스를 몽땅 끌어들이고 싶은가! 당장에 빛을 거두어 들이게나!" 레이멜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닿기도 전에 오른손으로 모아진 마나를 흐트렸다. 이로 인해 다시금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자 그라프는 쥬라드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쥬라드 사제, 주변의 움직임을 살펴 주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쥬라드는 눈을 감으며 양손을 올렸고, 일행들은 영문을 알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주신께서는 전능하시고, 만물의 주인이시니 그 분의 앞에서 거짓될 것은 없을 지어다." 짤막한 기도문과 동시에 들어올려져 있던 쥬라드의 손으로 부터 오색 영롱한 오오라가 발산되기 시작했는데, 사물을 밝히는 빛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오오라의 느낌을 어디선가 경험해 본적이 있었던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느낌은 너무나도 희미했던 것이었기에 금새 잊을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쥬라드의 두 손에서 발산되던 오오라는 사라졌고, 손을 내리며 눈을 뜬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라프를 향해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500멜리 이내 영역에서는 카일락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동능력이 뛰어나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녀의 말을 듣고 안도한 그라프는 멀뚱히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카일락스는 모기와 같은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행성인 동시에 빛을 따라 움직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네. 그러니 안전해질 때까지 불을 피우지 못하게 될게야. 이보게 아드리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은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아... 어차피 이런 숲에서의 야간 이동은 불가능 하니 이 주변에서 짐을 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침 조리하지 않아도 되는 건량들이 있으니 그것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면 될 듯 하군요" "흠... 그래, 그러는 것이 좋겠군." 해야할 일이 결정 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기에 세실프와 유겐을 바라본 아드리안은 턱짓을 하며 말했다. "세실프와 유겐은 이 근처에 야영을 할 만한 곳을 찾아 봐. 위험하니 멀리가지도 말고, 서로 떨어지지도 말라고." 아드리안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 세실프는 잡고있던 말의 고삐를 아드리안에게 넘기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걱정 되면 왜 우리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거예요?" 그녀에게 고삐를 건네받은 아드리안은 그녀를 상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후훗. 그야 이 중에서 너희 남매가 가장 강하니까 그런거지." 그의 말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보던 세실프는 자부심을 느끼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희 남매만큼 전투에 능한 용병은 없죠. 그럼 다녀올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아드리안의 칭찬에 그럭저럭 기분이 좋아진 세실프는 유겐의 팔을 잡아 이끌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뮤스는 쉽게 이해가 안가는지 레이멜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실프씨와 유겐씨가 정말 그렇게 강한가요?" 레이멜 역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흠... 저 둘은 용병계에서 꽤나 유명한 남매라고 들었는데, 실력을 직접 본적은 없으니 뭐라고 말해 줄 수가 없군. 하지만 조금 있으면 실력을 직접 볼 수 있겠지."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는사이에 등뒤로 발자국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함에 뮤스와 레이멜이 뒤를 돌아보니 발자국의 주인공은 쥬라드였는데,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그들의 말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이 말을 놔둔다면 내일 움직이는 데에도 지장이 생기겠군요." 그녀의 말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던 레이멜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 할 뿐이었다. 측은한 눈빛으로 말을 바라보던 그녀는 말의 볼을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만물의 생명은 주신께 속한 것이고, 그들의 존재이유 또한 주신을 위한 것이니... 이 가여운 존재에게 한 줄기의 빛을 내려 주시길..." 짧은 기도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둠으로 가득차있던 숲속에 말의 울음소리가 또 한번 울려 퍼졌다. -히이이잉! 푸드득! 같은 말의 울음 소리였지만, 전에 비해 그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거칠고 지친듯 한 울음소리가 아닌, 맑고 경쾌한 울음소리였던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말의 몸에서 손을 뗀 쥬라드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기운이 나는 모양이구나." 그녀의 신성력 덕분에 눈에 생기가 돌기시작한 말은 쥬라드의 도움에 대해 감사의 표현이라도 하듯이 볼을 부비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을 처음 부터 지켜보던 뮤스 역시 다시금 익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기억을 할 수 없었지만, 조선의 서낭당에서 그에게 전해진 서낭신의 정기 역시 엄밀히 따지면 신성력에 속했기에 쥬라드가 발산하는 오오라에서 익숙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신성력이라는 것인가?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수풀이 들썩이는 소리로 인해 그렇게 끝날 수 밖에 없었다. -파사사삭! 파삭! 뮤스는 생각을 접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다른 일행들 역시 숨을 죽이며 수풀이 움직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기에 긴장 상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는데, 세실프의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대장. 조금 떨어진 곳에 공터는 아니지만 땅이 고른 곳이 있어요. 습기가 많지도 않은 듯하니 야영하기에 괜찮을 듯 한걸요?" 수풀사에를 헤쳐나온 세실프와 유겐은 어깨에 묻은 나뭇잎들과 먼지들을 털어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고, 칭찬을 한 마디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 보라고, 우리중에 누가 너희들 만큼 빠르게 그런 일을 하겠어? 아무튼 수고했어." 다시 고삐를 고쳐 쥔 아드리안은 일행들을 향해 가벼운 손짓으로 출발 신호를 보냈고, 세실프와 유겐은 자신들의 말고삐를 다시 쥐며 찾아낸 야영지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굵직한 나무들이 곳곳에 자리잡고있었고, 바닦에는 푹신한 나뭇잎들이 깔려있었다. 만일 습기가 많은 곳이었다면 바닦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썩으며 독을 뿜기 때문에 위험했겠지만, 세실프와 유겐 역시 젊은 나이임에도 인정받는 능숙한 용병들이었기에 그 정도는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뮤스와 일행들은 그곳에서 각자 야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말은 그들의 중요한 이동수단이었기에 가장 중심의 나무에 묶어 놓은 상태였고, 다른 나무에 자리를 선택한 일행들은 나무의 밑둥 쪽에 앉아서 수분이 올라오지 않도록 나뭇잎을 깔은 후, 그 위에 두터운 모포를 덮음으로써 잠자리를 마련했다. 자신의 잠자리 준비를 끝낸 레이멜이 손을 털며 뒤를 돌아 보니 그곳에는 아직도 잠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뮤스가 팔베개를 한 채 나무 밑둥에 기대어 있었다. "뮤스 잠자리를 안만들거야? 혹시 잠자리 만드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유유자적한 태도로 쉬고있던 뮤스는 레이멜의 목소리를 듣고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준비는 다했는데요?" "응? 다했다고?" 뮤스의 말을 확인하듯 되물은 그는 시력을 돋구어 뮤스가 앉아있는 바닦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얇은 천 한 장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워낙 어두운데다가 천이 얇아 미처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깔고 있었군. 그런데 그런 천으로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습기가 없는 곳이라도 밤이 되면 땅에서 습기가 올라온다고. 그 상태에서 땅이 식으면 감기걸리기 쉽상이야. 최소한 천 아래에 나뭇잎 정도는 두둑히 깔아 놓는게 좋을 것 같은데.." 레이멜의 말을 듣던 뮤스는 자신이 깔고 있는 천의 아랫면을 뒤집어 보이며 말했다. "후훗. 이건 임시적으로 천과 천사이에 극히얇은 금속막을 넣어 방수처리한거에요. 게다가 추운 곳에서도 사용 할 수 있도록 열선을 넣어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었죠." 문득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레이멜 감탄을 하며말했다. "호오... 정말 편리하겠군. 부피도 굉장히 작으니 여행을 하는데 정말 유용하겠는걸? 나중에 나도 하나 만들어 주면 안될까?" "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 여행 도중 시간이 나면 만들어 드릴게요." "하하핫! 정말 고마워!" 대화가 오가는 도중 뮤스와 레이멜의 등뒤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그라프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두들 이쪽으로 와보게나. 자네들이 도와 줘야 할 일이 있다네." 그들이 뒤를 돌아 보니 그라프가 자신의 말에서 꽤나 큰 짐하나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아드리안이 도와주고 있었는데, 짐은 크기에 비해 그다지 무겁지 않은 듯 했다. 아드리안이 짐을 내려 놓자 그라프는 그것을 풀며 일행들에게 설명 하기 시작했다. "일단 밤을 틈다 카일락스들이 습격할 수가 있으니 대비를 해야하네." 말을 끊으며 짐속으로 손을 넣은 그라프는 이것 저것 뒤적이며 뭔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뭔가가 그의 손에 잡혀 나왔는데, 유리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병하나와 실뭉치였다. 그것들을 한 손으로 옮겨쥔 그라프는 짐을 대충 추스리며 말을 이었다. "카일락스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상당히 고심을 해야만 했다네. 고대의 서적에서도 카일락스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 했을 뿐 그것들을 퇴치하는 방법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말을 하다 말고 레이멜과 눈이 마주친 그라프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레이멜 자네는 곤충이 가장 위협을 느끼는 존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그라프의 질문에 그는 조금 당황하는 듯 했지만, 존경해 마지 않는 대현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강했기에 금새 그의 물음에 대해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천적이겠죠. 어떠한 곤충이든지 천적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라프는 그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허헛. 아주 제대로 짚었군. 하긴 그 나이에 4클래스를 마스터 하려면 보통의 머리로는 안될테니까..." 레이멜은 그의 칭찬에 어깨가 우쭐 해졌다. 이번에는 그의 옆에 앉아있던 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뮤스군. 그렇다면 카일락스의 모태인 모기의 천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잠시 턱을 매만지던 뮤스는 손을 꼽아 보며 대답했다. "보통 송사리나 미꾸라지등의 민물 고기부터 시작해서 잠자리나 거미 역시 천적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라프의 예상대로 만족할 만한 답변이 나오자 신이 난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잘 알고 있구먼. 그래서 나는 천적들에 대해서 생각하던 도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모기를 사냥하는 거미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었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내손에 들려있는 인공 거미줄일세."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있던 뮤스는 그라프가 의도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주변을 둘러쌀 인공 거미줄을 칠것이라는 것이군요. 비록 카일락스를 잡아먹을 거미가 없더라도 거미줄에 한번 엉키게 되면 카일락스는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최소한 방어는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허헛!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단 이것을 설치 해야하니 좀 도와 주겠나?" 그라프가 도움을 요청하자 뮤스와 레이멜, 그리고 그의 설명을 함께 듣고 있던 아드리안과 유겐 역시 돕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원래 이런 류의 일은 남자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세실프와 쥬라드는 잠자코 앉아 그들이 하는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행들이 다가 오는 것을 본 그라프는 손에 들고 있던 실뭉치의 한쪽 끝을 아드리안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것을 쥔 아드리안은 나직한 감탄성을 터트렸는데, 자세히 보니 촘촘히 짜여진 그물의 뭉치라는 것을 알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얼핏 봤을 때는 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굉장히 촘촘한 그물이었군요. 헌데 이렇게 얇은 실로 카일락스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을 까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물의 반대편을 잡고 있던 유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장 이건 그냥 평범한 실이 아니에요. 나노아드잠사라고 하는 특수한 실인데, 이 정도의 두께라면 사람 두 명의 몸무게 정도는 우습게 버틸 수 있죠." 유겐의 대답을 듣고 있던 그라프는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흠 이 젊은이도 아는 것이 꽤나 많군. 자네는 어떻게 나노아드잠사를 알고 있나?" 유겐은 그라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아드리안과 레이멜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최대한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 "보통 나노아드잠사는 얇은 데다가 그 질김이 대단하기 때문에 가끔 살인 도구로 쓰는 용병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드는 방법이 극히 어렵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흔하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이런 엄청난 양의 나노아드잠사를 가지고 있으셨다니..." "허헛! 이것을 마련하느라 꽤나 고생을 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안할 수도 없었지."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주변에 자라나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몇 개 가리키며 말했다. "아드리안과 유겐은 저쪽 나무들로 가서 나노아드잠사 그물을 튼튼히 걸고, 우리가 머물 장소를 모두 덮게나. 그물의 크기는 충분 할 테니 최대한 높이 덮는 것이 좋을 것일세." 지시를 받은 둘은 그가 가리킨 나무를 향해 걸었고, 이제 뮤스와 레이멜을 바라본 그라프는 손에든 유리병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이것은 자부지방에서 나는 특수 아교인데, 물과 닿는 순간 엄청난 첩착력을 발휘하지. 이것으로 저 그물 망에 뿌려 거미줄로 만들 생각일세. 자네들은 저들이 그물을 치고 난 후에 이 아교를 뿌려주게나."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 있던 뮤스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는데, 이 세계에 있는 물질들의 성질에 대해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적당한 용도에 쓸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뮤스를 감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75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리 넓지 않던 공간을 나노이드잠사로 만들어진 그물망이 감싸게 되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기에 아드리안과 유겐이 진땀을 빼고 있긴 했지만, 조금씩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면서 익숙해 질 수 있었고, 마지막 고리를 나뭇가지에 단단히 고정함으로써 그들의 일은 끝나게 되었다. 잠시 머리 위에 걸린 그물망을 바라보던 그라프는 나무들 사이를 살펴보며 고정된 상태를 점검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아무리 카일락스들이라 해도 나노이드잠사를 뚫고 들어올 재간은 없지." 할 일을 마치고 손을 털며 다가오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라프님께서 가지고 계신 특수 아교를 이 그물망에 뿌린다고 하셨는데,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안전 할텐데 애써 그것까지 뿌려야 할 이유가 있을 까요?" 질문을 받은 그라프는 손에든 아교를 레이멜에게 넘겨주며 대답했다. "카일락스가 비록 야행성이라고 하지만, 숲은 그들이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의 그늘을 가지고 있다네. 물론 자네 말대로 그물망 만으로도 방어는 할 수 있을 테지만, 우리가 그물을 걷어내고 이동을 할 때는 그 때가 낯이라도 주변에 잠복하고 쉬던 카일락스가 우리의 움직임을 느끼고 공격해 올 것일세. 한 마디로, 우리가 안전하려면 주변으로 접근한 카일락스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것이야."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와 레이멜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뮤스는 자신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한참동안 가방 안을 뒤적이고 있자 아직 그의 가방이 마법 가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레이멜이 답답하다는 투로 물었다.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야? 차라리 다 뒤집어 놓고 찾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바른 말이었지만, 뮤스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의 양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든 그를 비웃었을 것이었다. 이제 뮤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가방에서 손을 빼내었는데, 주먹 두 개만한 통이 달려있는 대롱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에휴 겨우 찾았다. 가방 정리를 좀 하던지 해야지." 레이멜은 아직도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뮤스의 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봐 뮤스. 너의 건틀렛도 그 가방 안에서 꺼냈지?" 뮤스는 손에들린 대롱을 살피며 대답했다. "네. 그 때 보셨잖아요." "그럼 네가 깔아놓은 모포는?" "물론 가방 안에서 꺼냈죠." "흠... 그리고 네 손에 들려있는 그것도 네 가방에서 꺼냈으렸다?"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레이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뮤스가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어떠한 결론에 닿은 레이멜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암만 봐도 작은 가방인데다가 보기에도 빈 가방처럼 생겼잖아!" 고개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느낀 뮤스는 애써 몸을 고정시키며 대답했다. "에고! 이건 마법 가방이라고요. 얼마든지 넣어도 무게나 부피가 변하지 않아요!" 문득 뮤스의 어깨를 흔들던 손을 멈춘 레이멜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이러한 광경을 수도 없이 봐온 뮤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의외의 상황이 한, 두 번 생기기 마련, 가방의 정체를 알게된 후로 눈이 뒤집힌 레이멜은 몇 번이나 그 가방을 자신에게 팔라고 고집을 피우게 되었고, 뮤스 또한 그럴 수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을 하게 되었는데, 한심한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그라프가 호통을 치고 나서야 겨우 레이멜과 마법가방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 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둘은 다시금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레이멜이 마법가방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이성을 되찾은 레이멜이 뮤스의 손에 들린 대롱을 보며 말했다. "그 이상하게 생긴 물건은 뭐지?" 대롱으로 부터 통을 분리한 뮤스는 그것을 레이멜에게 건넸다. "그냥 단순히 앨체를 골고루 분사해 주는 거예요. 공학원에서 쓰던 건데 마침 아교를 뿌려 줄 때 써보려고요. 그 통에 아교를 부어 주실래요?" "응? 그러지 뭐." 통을 건네 받은 레이멜은 손에 들린 아교를 통의 입구로 흘려 넣었는데, 아교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어떠한 접착성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아교가 들어있던 유리병이 텅빈 것을 확인한 레이멜은 그것을 다시 건네며 물었다. "자 여기 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할 참이지?" 레이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물 망을 바라본 뮤스는 손으로 그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레이멜씨가 해주셔야 할 부분이에요. 저와 처음 만났을 때 쓰셨던 마법을 기억하고 계세요?" 턱을 매만지며 옛 기억을 떠올리던 레이멜은 뭔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아! 워터 스크린 말이냐?" "네, 그 마법을 사용해서 물을 그물망을 향해서 물을 뿌려 주세요." 뮤스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뼉을 친 레이멜은 그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웃으며 물었다. "하핫! 내가 워터 스크린을 써서 그물망을 적셔 놓으면 젖은 그물망을 향해 그 아교를 뿌리려는 것이었군!" "맞았어요. 그 방법이 가장 쉬울 것 같더군요." 자신이 뮤스의 생각을 한 번에 알아 맞췄음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레이멜은 뜬금 없이 뮤스의 앞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훗! 내가 맞췄으니 그 마법가방을 나에게 넘기는 것이 어때?" "음... 지렁이가 세 마리 기어가는군요." 얼렁뚱땅 기회를 틈타 다시 한번 마법가방에 대한 욕심을 부려봤지만, 뮤스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딴청 하는 것을 보자 씨도 먹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쳇! 쪼잔하게 가방하나 가지고..." "훗! 레이멜씨야 말로 쪼잔하게 남의 가방에 눈독들이지 말고 하실 일이나 하세요. 지금까지 여러 사람한테 이 가방을 보여 줘 봤지만 레이멜씨 같은 반응은 처음이에요." "쩝... 정말 아쉽군." 아쉬움을 남기며 손을 휘휘 내 저은 레이멜은 더벅 걸음으로 야영지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아무런 생각 없이 허공을 향해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일행들은 무슨 일인지 허겁지겁 그의 행동을 말리려 했고,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라프와 쥬라스는 서둘러 나무의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자..잠깐 레이멜!" "기다려요 레이멜!" 하지만 미처 일행들을 보지 못한 레이멜의 입에선 언제나 처럼 마법의 시동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히 뭬이크테 아인 바서... 워터 스크린!" 그와 거의 동시에 일행들의 눈은 질끈 감아졌고, 레이멜이 그려놓은 도형에서는 거대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에 메달린 그물망을 향해 치달렸다. -촤아아악! 시원한 물소리를 들은 레이멜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자신의 능력이 참 대단하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머리에서 부터 발끝까지 싸늘해 졌다고 느끼는 순간 주변은 소리 한점 없이 조용해 졌고,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레이멜은 고개를 내려 일행들을 살펴봄으로써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마주칠 때 마다 숨이 덥썩 막히는 것을 느낀 레이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다..다들 옷 입은 채로 목욕이라도 한 거야? 왜 그렇게들 젖어있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날아오는 아드리안, 세실프 그리고 유겐의 손길을 몸소 체험하기 시작했고, 다행스럽게 물세례를 피할 수 있었던 그라프와 쥬라스는 아드리안 일행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방관만 할뿐이었다. 차를 한잔 다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엉망이 된 몰골로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레이멜을 향해 아드리안이 말했다. "자네 일부러 그런 거지?" 쓰라린 볼을 문지르던 레이멜은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우씨! 자네 같으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겠나?" "그래도 여름이라 다행이지 겨울이었으면, 세실프가 자네를 싸늘한 땅에 묻었을 지도 몰라." 흠칫한 레이멜이 세실프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눈으로 잡아 먹을 듯 부라리고 있었는데,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 레이멜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불쌍하게 앉아 있는 레이멜에게 다가온 뮤스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도 수고하셨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노력을 했음에도 욕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제가 그 기분을 이해해요." 뮤스의 위로(?)를 듣던 레이멜은 멀뚱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어림 잡더라도 열살 이상 어린 뮤스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나니 머리가 멍해 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해주고 싶던 이야기를 끝마친 뮤스는 분사기를 들고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밤이 되어버린 숲은 그 자체가 위험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나운 맹수나 마물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연이 이루어내는 함정은 더더욱 위험천만한 것이었는데, 날이 저물고 나면 우거진 나무에 가려져 달빛조차도 들지 않아 능숙한 모험자라도 길을 잃기 쉽상이었고, 도처에 즐비한 늪지대는 침묵을 지키며 자신에게 빠져들 희생자들을 기다렸다. 헌데, 이러한 숲 속을 마치 대낯의 대로인양 서슴없이 달리고 있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는데, 바로 이 숲에서 살고있는 엘프인 루시아스와 바슈였다. 그들은 바닥이 평탄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활이 쏘아져 나가듯 재빨랐으며 나무 사이를 가로막고있는 수풀의 위치를 손바닥 보듯이 피해가고 있었다. 이것은 수 없는 반복을 통해 몸에 익은 본능에 가까운 몸놀림이라 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을 달리던 그들은 정면을 가로막고있는 거대한 수풀의 벽 앞에 멈춰 섰고, 거의 동시에 빽빽하게 얽혀있는 수풀의 벽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풀의 벽에 구멍이 생기며 점점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스스스슥... 그렇게 갈라진 수풀의 벽 사이로는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드러났다. 수풀의 장벽이 둘러싸고 있는 그 곳, 어림잡아 수 천년은 묶었을 듯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 있었다. 그 나무들 위로는 건축방법 조차 추측할 수 없는 형태의 집들이 굵직한 가지마다 자리잡고 있었는데, 못 따위를 써서 나무에 고정한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집을 이루는 벽과 지붕에서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자라고 있었기에 나무 스스로 이러한 집들을 만들어 놓은 듯 했다. 또, 허공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빛 덩이들이 일렁이며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녔기에 더욱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물 속을 유영하는 푸른색의 열대어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루시아스와 바슈가 그곳으로 들어서자 열려있던 수풀의 벽은 어느새 다시 닫혔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가자 허공을 날아다니던 푸른 빛 덩이 중 하나가 그들에게 날아와 반기듯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것 본 루시아스는 어루만지듯이 부드럽게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프. 로드께 우리가 왔다고 전해드리렴." 그의 말이 끝나자 푸른 빛 덩이는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루시아스의 주변을 한바퀴 돌고 난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루시아스와 바슈 역시 이제 마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시아스와 바슈의 발길이 멈춘 곳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나무의 앞이었다. 다른 나무들은 여러 채의 집을 가지에 얹고 있었지만, 이 나무만은 오직 하나의 집만을 가지에 얹고 있었는데, 그 크기는 보통 집의 다섯 배 정도나 되었다. 나무의 중간쯤에 위치하고있는 집을 올려다 본 루시아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의 손과 발을 도와주는 나무여, 잠시 너의 몸을 빌리고자 하니, 우리를 로드의 집까지만 올려주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의 몸을 감고있던 굵직한 넝쿨이 스스로 움직이며 루시아스와 바슈의 몸을 조심스럽게 휘감았고, 천천히 그들을 끌어올려 집의 앞에서 내려놓았다. 넝쿨을 한 번 쓰다듬어준 루시아스와 바슈는 영롱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어 넓게 느껴지는 실내에는 십 여명의 엘프들이 양옆으로 앉아있었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2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비슷한 나이의 또래처럼 보였고, 모두들 루시아스나 바슈와 같은 은발이었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친 루시아스와 바슈는 눈인사를 건네며 입구의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입구의 반대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넝쿨들이 자연스럽게 엮이며 흘러내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자세히 본다면 거대한 안락 의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인공으로 가공한 그 어떠한 의자보다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은백색의 수염을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트린 엘프가 침중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루시아스와 바슈는 머리를 조아리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루시아스, 엘프 로드를 뵙습니다." "바슈, 엘프 로드를 뵙습니다." 엘프들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엘프 로드라고 불리운 노년의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하게 그들을 맞아 주었다. "무사히 돌아 왔구나 루시아스, 바슈. 오늘도 늦었기에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나 걱정을 했단다." 이미 자신의 실수를 알고 있었던 루시아스는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심려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로드." 그의 뉘우침에 신비한 미소를 지은 엘프 로드는 루시아스의 뉘우치는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너희가 무사히 돌아 왔으니 다행이구나. 오늘도 그는 오지 않았느냐?" 엘프 로드의 질문에 이곳에 모여있던 모든 엘프들도 귀를 기울여 루시아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그래왔던 것과 같이 기대했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아직 그라프의 소식은 없습니다 로드. 하지만 그 친구는 꼭 와 줄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있던 엘프 중 한 명이 답답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드. 이대로 더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숲은 더 이상 회복 불가능 할 지경에 빠질 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엘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숲에서 서식하는 수많은 동물들이 카일락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피해가 클지라도 정령들을 이끌고 나가 카일락스와 맞서야 합니다." 실내에 모인 다른 엘프들의 생각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엘프 로드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에 엘프들을 천천히 둘러본 엘프 로드의 입으로부터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 로드 역시 그러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오. 하지만 숲의 결계를 풀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였고, 그로부터 또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은 더더욱..." 엘프 로드의 말끝이 흐려짐과 동시에 이곳에 있는 모든 엘프들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엘프 로드 역시 별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지만,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어 봤자 다른 엘프들의 사기만 떨어진다고 생각한 로드는 화재를 돌렸다.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니 다들 마음을 편하게들 가지게나. 그리고 그라프가 온 후에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니 될 수 있는 한 힘을 비축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엘프 로드의 말 한 마디가 가지는 영향력은 엘프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었기에 더 이상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결국 엘프 로드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시 루시아스를 바라본 엘프 로드는 천천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루시아스. 너는 이브리엘에게 가보거라. 혼자서는 견디기 힘들 테니 너라도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좋겠구나." 이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들은 루시아스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로드." "그래... 오늘도 수고 했으니 물러가서 쉬도록 하거라." "그럼 로드께서도 평안한 밤이 되시길..." 인사를 올린 루시아스와 바슈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한번 조아리며 몇 번의 뒷걸음을 쳤고, 이내 몸을 돌려 엘프 로드의 집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브리엘 그 아이가 이번 일로 상처를 받지는 않아야 할 텐데..." 루시아스와 바슈가 나간 문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나직이 말하는 엘프 로드였다. [2002-09-24] 짜가신선 <대공학자> #176~177 작은 탁자 하나와 주변의 의자,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침대가 전부인 좁다란 방안, 한 명의 여자 엘프가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은 채 누워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왠지 서글퍼 보였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기에 그녀의 심정이 복잡함을 알 수 있었다. 천정을 응시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탁자 위에 올려져있는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 앞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았다. 물을 마셨음에도 갈증이 씻기지 않는 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모두 나 때문이야. 그것만 가지고 오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수심에 가득 찬 말을 던진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조금씩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브리엘. 안에 있니?" 그 목소리를 들은 엘프, 이브리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쓸며 대답했다. "네 루시아스 오빠. 들어오세요." 이브리엘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서 그녀가 흐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던 루시아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문을 열었다. "이브리엘, 또 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자신을 걱정하는 루시아스의 말에 애써 웃음을 지은 이브리엘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내며 말했다. "아..아니에요. 여기 앉으세요 루시아스 오빠."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 루시아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내어 탁자에 기대어 놓은 루시아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일부러 한 일도 아니니 이렇게 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 부족에서 누구도 널 원망하지 않아." 루시아스의 말을 듣고 있던 이브리엘은 다시금 감정이 격해진 듯 눈가에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저때문에..." "그만 하거라. 더 이상 그에 대해서 듣기는 싫구나." 루시아스가 말꼬리를 자르자 이브리엘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카일락스가 어떻게 이 숲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인 것이지..." 말을 하며 물끄러미 이브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스는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모두들 이번 일로 네가 잘못 되지나 않을 지 걱정하고 있고, 나 역시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는 싫단다. 어떻게든 이번 일을 해결 할 테니, 이브리엘 너는 마음 편안하게 있으렴." 루시아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이브리엘은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루시아스 오빠." "후훗. 내게 고마워 할 것이 뭐가 있어? 나중에 해결 방법을 찾아올 그라프에게나...?!" 웃으며 말을 하던 루시아스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는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리엘이 갑작스레 자신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당황한 기색을 하던 루시아스는 안색을 되찾으며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고, 그의 품에서 안겨 있던 이브리엘은 왠지 마음이 평온해 짐을 느꼈다. 카일락스 같은 시간, 뮤스와 일행들은 잠자리 준비를 다시 하고 있었다. 레이멜 덕분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잠자리가 모두 물에 의해 흩어졌기 때문이었는데, 마나의 기운이 사라지면서 수분의 대부분이 공기 중으로 되돌아 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시 쓸어모은 나뭇잎 위로 모포를 덮던 아드리안이 동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흠 오늘 불침번을 서고싶은 사람이 있나? 새벽에 교대를 해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나무를 하나 사이에 두고서 누워있던 레이멜은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리며 손을 저었다. "그렇게 물으면 누가 하고싶다고 손을 들겠어? 차라리 자네가 지목해서 시키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고." "하긴 그렇겠군. 그렇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던 세실프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전 별로 잠이 오지 않으니까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도록 하겠어요. 자다가 일어나는 것 보다 늦게 자는 편이 훨씬 편하니..." 세실프 덕분에 따로 불침번을 정하지 않아도 된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잠자리에 누웠다. "고마워. 그럼 세실프가 먼저 불침번을 서도록 하고, 내가 교대를 해주도록 하지. 대신 다음번에 빼주도록 하지." 하던 일을 마치고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쥬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자리에 누워있던 그라프를 향해 물었다. "이렇게 나노이드잠사로 된 그물 망까지 쳐두었는데 꼭 불침번을 서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녀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덮고있던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허헛. 원래가 이런 여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 설사 저 나노이드잠사가 카일락스들에 대한 방어가 된다고 해도, 이곳에는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마물들이 들끓으니 저것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 이야... 어쨌든 내일부터는 우리도 불침번을 서야 할테니 오늘 푹 자두게나." "네, 알겠어요. 그라프님." 짧게 대답한 쥬라스 역시 담요를 끌어올리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누운 뮤스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록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 덕분에 빛나는 별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저 하늘을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도 기분은 충족이 되고 있었다. 뮤스가 아무런 기척 없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레이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뮤스는 입만을 움직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냥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게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이러고 있는 거예요. 잠도 잘 안오고..." 뮤스가 바라보고 있는 곳과 같은 지점을 향해 시선을 맞추던 레이멜은 이해 못하겠다는 말투로 말했다. "여기서 어떻게 하늘이 보인다는거야? 나뭇가지에 가려서 하나도 안 보이는 구만.... 차라리 잠이 안 오면 세실프와 같이 불침번이나 서라고. 아직 세실프와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한데,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문득 위쪽으로 향한 시선을 거둔 뮤스가 레이멜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흠... 대체 왜 세실프씨나 유겐씨가 저를 싫어 할까요?" 이번에는 레이멜이 위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내가 볼 때는 이미 세실프나 유겐은 너에 대해서 그리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세실프가 자존심 때문에 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유겐은 누나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지. 생각을 해봐. 추방자라고 해서 눈 밑에 두고 무시하던 사람이 뜬금 없이 '나 대단한 사람이오' 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었군. 존경하겠어요.' 라고 말 할 사람은 없잖아? 물론 지금 같은 분위기라도 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동안 함께 여행을 해야하니 둘 사이가 조금 더 부드러웠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말을 마친 레이멜은 쌀쌀해진 기운을 느끼며 입고있던 후드의 옷깃을 여미었다. "아무튼 나는 좀 자야 겠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마친 레이멜은 정말 잠을 자기 시작했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던 뮤스는 입맛을 다시며 바로 누었다. "쩝...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레이멜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뮤스 역시 세실프 남매와 가장 나이가 비슷했기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서먹한 사이에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이상했고 설사 말을 건다고 해도 그들이 받아 준다는 확신도 없었기에 어찌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에휴... 에라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던 뮤스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부스럭이는 소리가 나자 그의 옆에서 자는 척을 하던 레이멜이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뮤스가 주변을 둘러보니 세실프와 유겐이 같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모포를 덮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숲의 밤은 쌀쌀했고, 이슬을 맞는 것은 몸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자다말고 일어나서 두리번거리는 뮤스를 발견 했는지 세실프는 특유의 톡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일어 난거야? 적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그녀의 말을 들은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 저도 잠이 별로 안와서 불침번서는 것을 도와 드릴까 해서요." 뮤스의 아래위를 한 번 훑어본 세실프는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흥! 마음대로 해. 하지만 좀 멀리 떨어져 앉으라고! 추방자와는 그다지 가까이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차피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했던 터였기에 신경 쓰지 않은 뮤스는 세실프와 유겐이 앉아있는 나무쪽으로 걸어와 땅에 주저앉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서먹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세실프와 유겐 역시 주변을 살필 뿐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고, 뮤스 또한 그들 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뮤스의 귀로 정적을 깨는 유겐의 하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아암. 주변이 조용하니 잠이 오는데..." 눈동자를 굴리며 귀를 세우고 있던 세실프가 말했다. "내가 불침번을 서고 있을 테니까 넌 잠 좀 자두렴." 자신의 중얼거림이 의외로 컸다는 것을 깨달은 유겐은 스스로 질책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냐. 그럼 누나 혼자 불침번을 서야 할거 아냐. 조금만 참아 보지 뭐." 하지만 자신의 동생이 잠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세실프였기에 그가 힘들게 졸음과 싸우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뮤스의 얼굴을 바라본 세실프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마.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 저 녀석이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잠시 뮤스와 세실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유겐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누나 나 먼저 잘 테니까 나중에 대장 깨울 때 같이 깨워 줘. 하룻밤 불침번 서기로 했는데, 그냥 자버리면 미안하니까..." "알았으니까 푹자 둬." "고마워 누나. 나중에 봐." 유겐은 짤막 밤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잠자리에 몸을 뉘였고, 세실프는 유겐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지어 주었는데, 세실프를 바라보고 있던 뮤스의 눈에는 문득 크라이츠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이 겹쳐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빤히 세실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는 문득 눈 앞으로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고, 금새 자신을 향해 들이민 세실프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거야?! 동생 재우는 누나 처음 봐?"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와 있는 그녀의 얼굴에 크게 놀란 뮤스는 상념을 떨치며 몸을 급히 뒤로 젖혔다. 덕분에 균형을 잃은 그는 등으로 찹찹한 땅 바닥의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었는데, 허리를 일으켜 세운 세실프가 뮤스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쯔쯧... 아무튼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군. 사내 녀석이 왜 그렇게 소심한 거야? 아니면 생각이 많은 건가?" 세실프의 놀림에 무안해진 뮤스는 어설픈 자세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 생각이 많은 건데요." 뮤스의 대답에 세실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뮤스와 시선의 높이를 맞춘 그녀는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걸 물어 본게 아니잖아! 나는 너 같은 녀석들이 가장 마음에 안 들어! 자기 주관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좀 차갑게 굴었다고 슬슬 눈치만 보고 말이야. 사내자식이 이래가지고 나중에 큰일 할 수 있겠어?" 귀가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빠른 세실프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뮤스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살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속으로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냥 잠이나 자는 편이 훨씬 좋았을 거야.' 몇 마디의 후회가 끝나기도 전에 세실프의 목소리는 끝나있었다. 생각 보다 금방 끝났다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쉰 뮤스는 세실프의 기색을 살폈는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에? 무슨..." 뮤스의 질문은 세실프의 손에 감싸쥐어지며 미처 다 나올 수 없었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본 세실프는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소리를 들어보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던 뮤스가 의아함을 느끼며 귀에 온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멀리서부터 공기가 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우웅.... 긴장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바꾼 세실프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아드리안이 누워있는 곳으로 움직여 그를 천천히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아드리안 역시 이렇게 깨울 때에는 조용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급히 움직이기 이전에 눈을 떠 세실프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실프가 어딘가를 향해 눈짓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장, 소리를 들어봐요." -우우웅... 귀를 기울여 보니 틀림없이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조심스럽게 모포를 걷어낸 그는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줄이며 그라프와 쥬라스가 잠을 자고 있는 곳으로 갔고, 세실프는 동생과 레이멜을 깨우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이 다가가 보니 이미 그라프와 쥬라스가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기이한 소리를 들은 듯 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라프는 다가오는 아드리안을 향해 손짓했다. "카일락스들의 날개 짓 소리일세. 최대한 그물망에서 멀리 떨어져."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드리안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수신호를 하며 야영지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일행들은 말이 묶여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중심으로 둘러 서 있었는데, 레이멜은 아직 잠이 덜 깬듯 눈을 부볐고, 유겐은 잠이 들기 전에 다시 일어난 상황이었기에 짜증이 치민 표정이었다. 그들과 함께 그물망을 살피고 있던 그라프가 쥬라스에게 말했다. "쥬라스 사제. 주변을 한번 살펴주게나." 고개를 끄덕인 쥬라스는 눈을 감으며 기도문을 읊었고, 전신으로 부터는 오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신께서는 전능하시고, 만물의 주인이시니 그 분의 앞에서 거짓될 것은 없을 지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신성력을 발휘하고 있던 쥬라스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결과를 기다리던 그라프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카일락스들의 수가 생각 보다 많은가?" 쥬라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고 있었다. "대략... 백마리 가량이 약 350멜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런데..." 침음성을 흘리고 있던 그라프는 쥬라스가 뒷말을 흐리자 의아하게 느끼며 물었다. "또 다른 문제라도 있나?" "카일락스들의 움직임이 우리 쪽을 향하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수염을 쓸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라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우리 말고도 누가 이 숲에 있다는 것인가?" 그라프의 얼굴을 바라보던 쥬라스의 입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큰 갈등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인간의 무리들이 쫓기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 주변에 다른 모험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거리가 조금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일락스들에게 잡힐 듯해요." 쥬라스는 사제의 신분인 만큼 위험에 처해있는 이들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줄 마땅한 방법을 그녀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어찌 해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어지는 그라프의 말 역시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허어... 지금 이 상태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전무한 상태일세. 우리 역시 겨우 이 그물망을 벗어난다면 무슨 일을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라프가 고개를 저으며 답답함의 탄성을 지르고 있을 때, 침착한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카일락스라고 하는 마물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뮤스의 물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던 그라프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물론 있지! 어제 말을 했듯이 카일락스들은 빛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네. 만약 강력한 빛이 어디선가 비추어 진다면 카일락스들은 하던 추적을 멈추고 빛을 향해 모여들 것이야. 그것은 그들의 본능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무엇인가를 떠올린 뮤스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멜을 바라다 보았다. "레이멜씨! 어제 사용했던 라이팅이라는 마법을 쓰면 안될까요?" 하지만 레이멜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라프가 먼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라이팅 정도로는 부족하다네. 350멜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그저 촛불 정도의 밝기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말을 듣던 레이멜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클레스의 마법에서는 그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마법이 없어. 최소 6클래스 정도는 되어야 '라이팅 범'이라는 마법을 쓸 수 있거든." 이러한 이유로 마법을 사용 할 수 없게 되자 뮤스는 잠시 고민을 하던 뮤스는 자신의 가방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빛은 제가 어떻게 해보겠어요..." 뮤스가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작업 공간을 마련하는 사이 아드리안이 그라프를 향해 물었다. "그라프님 그렇다면 카일락스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 것인데, 아무리 나노이드잠사로 만든 그물 망이라곤 하지만, 백 마리나 되는 카일락스들을 버텨 낼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한 번 생각을 해보게. 자네의 힘으로는 아무리 튼튼한 털실이라도 간단하게 끊을 수 있을 것일세. 하지만 그 털실로 뜬 옷까지 손쉽게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짜여진 이상 나노이드잠사가 아닐세. 게다가 카일락스는 날아서 이동하는 마물이니, 육지에서 행동하는 마물들에 비해 힘은 극히 미약하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다행이지." "후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안심할 수 있겠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드리안의 뒤로 뮤스가 무엇인가를 만들며 부스럭 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세실프, 유겐, 그리고 레이멜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뮤스가 무엇인가를 만드는 장면을 처음 보는 이들이었기에 그 신기함은 더했다. "저 녀석이 갑자기 뭘하는 거지?" "글쎄... 뭔가를 만드는 것 같은데?" "역시 마법가방이구나! 별 이상한 것들이 다나오고 있잖아! 이봐 뮤스 제발 나에게 가방을 팔란 말이야." 하지만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뮤스에게 그들의 이야기가 들릴리는 없었다. 가방에서 꺼낸 십여 개의 부품을 이리저리 연결하고, 마지막으로 몇 개의 부품을 맞춰 끼우며 조립해 나가자 길죽 한 원통이 완성이 되었는데, 콧등에 맺힌 땀을 소매로 걷어 낸 뮤스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전뇌등의 조립이 끝났어요. 공학원의 조명으로 쓰던 전뇌등을 여러 개 조립한 것인데, 이런일에 쓰일 줄은 몰랐네요." 뮤스의 손에 들린 전뇌등을 한번 훑어 본 그라프가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호오! 굉장하군.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정밀한 물건을 만들어 내다니. 이것 역시 전뇌력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그라프의 물음에 뮤스는 가볍게 코밑을 쓸며 대답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완성품들을 조금 다르게 조립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래쪽에 장치 된 마나구에서 전뇌등으로 전뇌력을 공급하게 되죠." 그라프는 더욱 자세한 것들을 알고 싶어하는 모습이었으나, 상황이 시급했기에 뮤스는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며 기둥의 아래 부분을 살펴보며 손을 가져갔다. "시간이 없어요. 다들 강한 빛에 눈이 부실 테니까 대비를 하고 있으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뮤스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가 들고 있던 원통으로 부터 눈부신 광채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파팟! 이를 보고 있던 일행들은 인상을 크게 찡그리며 급히 시선을 돌렸는데, 비록 눈부심에 미리 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강렬한 빛에 대한 대비는 바라보지 않는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빛을 바라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리 이에 대비하고 눈을 감고있던 뮤스가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전뇌등을 공중으로 힘차게 던졌다. 그러자 그의 손을 떠난 전뇌등이 빛의 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아 올랐는데, 정점에 도달하자 놀랍게도 허공의 중간에 멈추며 사방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이에 만족한 웃음을 지은 뮤스는 손으로 눈의 위를 가리며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일행들 역시 이제는 전뇌등이 높은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손쉽게 차단 할 수 있었다. 레이멜은 아찔한 느낌이 계속 남아있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며 물었다. "음... 거의 라이팅 범과 맞먹는 정도의 빛이군. 그런데 무슨 조작을 했기에 저렇게 공중에 떠있는거야?" 레이멜은 질문에 대한 답을 그라프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허허헛! 과연 재치가 있군. 허공에 걸려있던 그물망 아교의 접착력을 이용해 전뇌등을 고정시켜 놓다니..." 하지만 지금은 전뇌등에 대해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라프의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들의 입은 다물어 지고 있었는데, 이제 전뇌등의 빛을 발견한 카일락스들이 이곳으로 몰려 들것이고, 그물망 안에서야 별일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일어날 불상사에 대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촤자자작! 촤작! 촤자작! 거칠게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어두운 숲 속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달리는 와중에도 크게 초조 한 듯 가끔 씩 뒤를 돌아 보았지만, 돌아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초조함을 느꼈다. -우우웅... 계속 해서 그들을 쫓던 공포 스러운 소리가 떨어질 기미도 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에는 뒤에서 들려오기에 앞만 보고 달렸건만, 이제는 이 숲 전체가 그들을 향해 웅성 거리는 듯 했기에 어디로 달려야 할지도 난감한 상태였다. "으아아악! 사...살려줘!" 귀청을 찢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숲의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이미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그 비명 소리가 자신을 앞질러간 동료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동료의 것인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리고 또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다리만을 믿고서 달리는 일 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대장! 끄아아악!" 또 하나의 비명 소리가 숲의 공기를 타고 처절하게 전해 왔고, 그 소리를 들은 한 인영이 문득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몇 발자국을 더 내딛었을 때는 그의 몸이 이미 숲의 한가운데 서버린 상태였다. -터벅, 터벅... 숲에 홀로 서게된 그는 심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말아쥐었다. 굳게 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따끈한 피가 흐름을 느꼈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에 비하면 그 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장이라..." 혼잣 말을 중얼 거리고 있는 그의 눈으로 천천히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은 그는 지금껏 도망쳐 달려왔던 길을 향해 뒤돌아 서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부하들을 잃을 수 없다.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내 부하들만은 살리겠어.." 비장한 표정을 지은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벨트로 손을 가져 갔고, 그곳에서 지난 십년간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던 작은 단검들이 오늘 따라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우우웅... 지금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 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의 공포는 그의 가슴에 남아있을 틈이 없었고, 처참하게 죽어 갔을 부하들의 얼굴만이 그의 가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손에 잡힌 단검을 양 손에 뽑아 든 그는 눈을 감았다.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적의 정수리만을 노리던 자신의 감각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후훗... 최소한 네 녀석들이 죽인 나의 부하들의 머릿 수 만큼은 함께 데리고 가겠다." 오히려 침착하고 나니 지금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듯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위협을 하고있던 적의 날개짓 소리가 그의 머리에서 형상화 되기 시작했고, 나뭇잎을 스치며 다가오는 소리 마저도 이미 그의 감각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목표의 위치를 파악한 그는 더 이상 머뭇 거릴 것이 없었기에 재빠르고도 능숙한 동작으로 손에 들려있던 단검을 어두운 허공을 향해 던졌다. -솨아아악! 털썩...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미미한 소리에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부터 시작이다. 망할 놈들..." 그리곤 다시 눈을 감으며 다음 목표를 찾았고, 그럴 때 마다 어김없이 그의 단검은 모습 조차 보이지 않는 마물들에게 적중해 땅으로 떨어트렸다. 그렇게 십여 번을 반복 했을 때, 다음 목표를 노리기 위해 단검을 꺼내들던 그의 손은 이미 빈손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열두 자루의 단검을 모두 써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해서 들려오는 마물의 날개짓 소리에 허탈한 웃음을 지은 그는 풀린 동공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두 팔을 펼쳤다. "크큭... 이제 끝인가? 그래도 손해 볼것은 없군. 열 두 마리나 잡았으니까... 자! 이제 나를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피를 빨던지! 뜯어 먹던지!" 이미 자포자기한 듯 소리를 친 그는 눈을 질끈 감고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2002-09-24] 짜가신선 <대공학자> #178 마나등의 빛을 받아 은빛을 띄고 있는 나노이드잠사의 그물 안으로 뮤스를 포함한 일행들이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의 귀로 카일락스들의 날개 짓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하자 카일락스들을 유인하는데는 일단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일락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세실프가 허리춤에 꽂혀있는 기형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길 어려서부터 모기라면 질색이었는데... 하필이면 이 따위 괴물 모기와 싸워야 한다니..." 그녀의 투덜거림을 들은 레이멜이 피식 웃으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오호... 우리 세실프 양도 무서워하는 것이 다 있었나?" "그냥 싫을 뿐이지 무서운 건 아니에요." "흠... 그랬군." 평소라면 한바탕 말다툼이 일어날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간단한 몇 마디로 대화가 끝난 것으로 보아 레이멜과 세실프 역시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정면 쪽에 쳐져있던 그물망이 마찰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안쪽을 향해 파고드는 것이었다. -촤아악! 그렇게 파고든 그물 망은 뮤스 일행들을 불과 한 걸음 정도 남겨 놓은 곳까지 지쳐들었는데, 뒤 늦게서야 코앞까지 카일락스가 접근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그들은 가슴이 철렁해 짐을 느꼈다. -치칙! 치지지직!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그물의 탄력에 다시 뒤로 밀려난 카일락스는 그물의 아교에 붙어 버렸는지 늘어났던 그물 부분이 점차 엉켜가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아드리안과 세실프 그리고 유겐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레이멜과 뮤스는 눈앞의 생전 처음 보는 마물을 관찰하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카일락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물이 스스로 움직여 엉키는 듯 했다. 잠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그라프가 외쳤다. "이제 카일락스들이 하나씩 몰려들기 시작하는군! 다들 그물에서 눈을 떼지 말고 최대한 중심 쪽에 서있게!" 그라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의 대여섯 곳의 그물들이 그들을 향해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일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까지 닿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그물의 움직임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점차 많은 수의 카일락스가 몰려드는 것이었다. -치치칙! 치칙! "정말 그물이 버틸 수 있는 것입니까? 카일락스의 힘이 생각보다 거세자 불안해진 아드리안이 물었다. 하지만 그라프 역시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카일락스의 무게가 꽤나 나가는 듯 하군. 이 정도까지 힘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네." "그럼 버티지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물론 그렇다 해도 나노이드 잠사는 견디겠지만... 정작 큰 문제는 저것일세." 그라프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일행들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물을 걸어 놓았던 나뭇가지가 보였는데, 카일락스가 한 마리 씩 부딪혀 올 때마다 조금씩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흐음... 이대로 가다간 그물이 먼저 내려앉고 말 거야." 침음성을 흘리는 그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레이멜이 그물이 내려앉은 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저 그물이 내려앉는다면, 오히려 우리가 그물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라프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언의 인정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라프는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레이멜에게 물었다. "자네가 걸 수 있는 경량화 마법의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나?" 깜짝 놀란 레이멜은 달갑지 않은 말투로 되물었다. "설마 지금 매달려있는 카일락스 들에게 경량화 마법을 걸라는 말은 아니시겠죠? 이런 면적에 경량화 마법을 거는 것은 장난이 아니라고요!" "물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목숨 역시 장난이 아니지 않나? 여기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으니 어찌 하겠나?" 레이멜이 마법의 사용을 꺼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통의 경량화 마법이라는 것은 작은 크기의 물체에 대해 그 무게를 줄여주는 마법의 통칭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마나의 소모가 가장 큰 마법 중에 하나였다. 헌데, 그라프가 원하는 것은 자신들을 둘러싼 넓은 면적에 대한 경량화 마법이었으니 그가 꺼릴 만 한 것이었다. 게다가 몸 속의 마나가 고갈 되게 된다면 육체적인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닌 고통을 받게 되었고, 회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마법사들은 웬만해서는 마나가 고갈될 정도까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라프의 말대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훗날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임을 알았기에 레이멜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에휴... 한번 해보도록 하죠. 대신 마나가 고갈되고 나면 쥬라스 사제님께서 신성력으로 회복 시켜 주시겠죠?" "허헛! 그야 이를 말이겠는가? 자네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경량화 마법을 걸게!" 그라프에게 확답을 받고서야 마음이 놓인 레이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고, 이 때에도 그물망을 뚫기 위한 카일락스들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레이멜의 손은 허공에 수많은 도형들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마법을 걸던 모습을 몇 번 봐왔던 일행들이 보기에도 지금까지 중 가장 복잡한 도형들이었는데, 도형 하나, 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 레이멜의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있던 그라프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멜에게 조금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군. 생각 보다 훨씬 훌륭한 마법사인걸..." 그라프의 중얼거림을 귀담아 듣고 있던 뮤스가 물었다. "저런 손 모양으로도 마법사의 역량을 알 수 있나요? 저는 마법에 대해 전혀 몰라서..." "내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마법사들은 두 가지의 성질을 가진 마나를 조합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마법사의 능력은 그것을 얼마나 효율 적으로 조합하느냐에 따른 것이지. 저 손 모양은 마법에 사용 할 마나를 계산하여 필요한 마나를 적정량 분배하는 행동이라네. 그러니 훌륭한 마법사일수록 그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지."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 있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그라프님께서도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라프의 입장에서 본다면 순진한 질문일 수 있는 뮤스의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물론 나 역시 마나 분배에 대한 계산을 할수 있지.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는가? 정작 중요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걸..." "아...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고 해서 예술품을 그만큼 잘 만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군요." "흠... 대충 그런 셈이지." 대충 궁금증을 해결한 뮤스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레이멜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이미 멈춘 상태였고,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이히 볼렌 아이네 크라프트... 게벤 미어 아이네 크라프트 피어 줌 라이히트... 디크리즈 웨이트!" 마법 시동과 동시에 레이멜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이어 그가 허공에 그려 놓았던 도형들이 빛을 발하면서 조합되었고, 빠른 속도로 카일락스들이 엉키고 있는 그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얇은 빛 무리가 그물 망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 레이멜은 힘이 드는 듯 숨을 몰아 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결과를 묻고 있었다. "하악! 하악! 성공입니까?"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레이멜의 나직한 물음에 그물 망이 걸려있던 나뭇가지를 바라고 있던 그라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허헛! 대단하군.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던 나뭇가지들이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 왔다네. 최소한 마법이 지속 되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겠구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레이멜은 쓴웃음을 지었다. "크윽... 이젠 제 몸이 물먹은 솜이 되어버렸군요. 빨리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자신의 머리를 두들긴 그라프는 쥬라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깜빡 했군. 쥬라스 사제가 수고 좀 해주게." "네 그라프님." 그라프의 부탁을 받은 쥬라스는 급히 레이멜의 곁으로 다가와 신성력을 사용해 치유해 주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비록 마나까지 회복을 하지는 못했지만, 고통만은 사라진 듯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쥬라스 사제님 감사합니다." "일행들의 목숨을 모두 살리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영웅이 된 기분을 누릴 사이도 없이 그의 기분을 깨는 그라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수 십 마리의 카일락스들이 덤벼들고 있으니 안전해 진 것은 아닐세. 정신을 똑 바로 차리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라프의 목소리를 덮으며 카일락스들의 날개 짓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멀뚱히 눈을 떴다. 주변을 가득 울리며 다가오던 마물들의 날개 짓 소리들도 무슨 일인지 점점 멀어져 갔고, 이미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자신의 몸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던 것이었다. 이 어이 없는 상황에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살아 있나?" "정말이지 지독한 놈들이었어. 아침 해를 다시는 못보는 줄 알았다니까." 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의 동료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땀과 흙에 뒤범벅이 된 모습이었지만,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기쁜 모습이었다. 동료들을 향해 반갑게 웃은 사내는 그들과 포옹을 하며 등을 두들겼다. "자네들 살아 있었군!" "당연하지! 내가 그랬었잖아. 최소한 대장 보다는 오래살 거라고." 몸을 떼어낸 사내는 동료들의 옆자리를 둘러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케니와 브릿트는?" 그의 물음에 동료들의 안색은 금새 어두워 졌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케니와 브릿트는 녀석들에게 당했어." "도망치던 도중에 케니가 넘어 졌는데, 녀석을 도와주다가 브릿트 까지..." 사내는 쫓기던 도중에 자신의 귀를 자극했던 비명 소리를 기억해 내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많은 파티에서 동료들을 사귀었고, 그만큼 많은 동료들을 잃은 기억이 있는 사내에겐 흔히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케니와 브릿트녀석이었군..." 하지만 사내는 경험많은 모험자였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 매달려 있을 시간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애도는 잠시 미루어 뒀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일이지? 카일락스라는 녀석들이 우리를 쫓다가 말고 돌아가 버렸어." 동료 중 한 명이 먼 곳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정신없이 도망 치다 보니 갑자기 카일락스들의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하더군. 그래서 뒤를 돌아 보았는데, 저 쪽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이 뿜어지고 있었어. 아무래도 카일락스들이 그 빛을 따라 간 것 같아." 동료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아직도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엇는데, 그 빛은 이곳 까지 선명히 닿아 어둠에 묻혀있던 이들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그리고 대장이라 불리운 사내의 얼굴 역시 선명하게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큐리컬드였다. "그런데 저 빛의 정체는 대체 뭐지? 혹시 저곳이 카일락스들의 본거지 인가?" 잠자코 있던 다른 동료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보통 마물들은 본거지를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 그렇지 않으면 적들에게 공격 받기 쉬울 테니까." "그렇다면 저곳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는 그라프님의 일행들이 있을 지도..."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큐리컬드는 모종의 결심을 내린 듯 주먹을 불끈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 곳으로 갈 수밖에... 어차피 우리는 그라프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잖아?"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의 동료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사실 두렵긴 하지만, 녀석들에게 죽은 동료들의 복수는 해줘야지. 그라프님이라면 녀석들에게 복수 할 방법을 아시고 계실 걸세." "그렇다면 어서 저 쪽으로 움직이도록 하지!" 이렇게 의견의 일치를 본 그들은 지체할 것 없이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속을 일직선으로 가르지는 것은 생각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저기 자라난 수풀 덕분에 길이 험난했고, 만에 하나 가시덤불이라도 나있는 경우에는 길을 둘러가야 했다. 게다가 큐리컬드 일행은 이미 오랜 시간을 카일락스들에게 쫓겼기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동속도는 생각보다 늦어졌는데, 불과 300멜리 남짓한 거리를 무려 한 시간나 걸려서야 도착 할 수 있었다. "이제 다온 것 같군! 그런데 이상하게 카일락스들의 소리는 안나는 군." 앞장서서 걷고있던 큐리컬드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뒤를 따르던 동료가 말했다. "글쎄. 혹시 어딘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많던 카일락스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가 없잖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동료 한 명이 그들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엄청 나군요. 조금만 늦었어도 나뭇가지가 못 버티고 내려 앉았을 겁니다. 다음 부터는 조금 더 튼튼하게 설치를 해야겠네요" 이어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헛. 그래도 좋은 경험 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본거지 겪인 엘프의 숲으로 들어 갔다면 큰 봉변을 당했을 거야." 여기까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큐리컬드 일행은 방금전의 목소리가 그라프의 것임을 확인하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뮤스와 일행들은 쥬라스의 신성력으로 더 이상의 카일락스들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카일락스들이 줄줄이 매달려있는 나노이드잠사 그물을 끌어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제의 신분인 쥬라스를 제외한 일행들은 그물에 엉켜있는 카일락스들을 향해 칼을 박아 넣으며 생명을 끊고 있었는데, 칼이 들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노란색의 액체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뮤스 역시 아드리안이 건네준 짧은 검으로 이상하게 엉켜있는 나노이드 잠사 사이를 찔렀다. 그러자 뭔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허공에서 노란 액체가 흘러나왔는데, 카일락스의 체액인 듯 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는 시선을 빼앗긴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음... 대체 어떤 원리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카일락스를 발끝으로 건들여 숨이 끊어 진것을 확인 하고선 그 앞에 꿇어앉아 카일락스의 몸을 손으로 만져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 끝으로 까칠까칠한 느낌이 전해졌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의 호기심이 더욱 강렬 했기에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한 동안 카일락스의 생김새를 손으로 만져보며 살피던 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에 들린 검을 사용해 그가 만지고 있던 부위를 도려냈다. -스각. 이질 적인 소리와 함께 얇은 표피가 잘려 나왔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형체도 없던 표피가 동체로 부터 분리 되자 미세한 털이 나있는 갈색의 모습으로 변했고, 잘려진 부분으로는 체액이 흐르며 카일락스의 내장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정말 신기하군. 내장이 형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표피의 어떠한 작용 때문이라는 것인데..." 중얼 거림과 함께 뮤스는 빠른 손놀림으로 카일락스의 다른 부분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지나치는 곳마다 카일락스의 체액이 흘러나왔고, 그의 손은 점차 노랗게 물들어갔다. 그런 뮤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멜이 하던 일을 멈추며 말했다. "뮤스는 갑자기 뭘하는 거지? 카일락스를 해부하기라도 하는 건가?" "허헛! 뮤스군이 아니었다면 내가 저러고 있을 것일세. 원래 뮤스군이나 나같은 인종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거든. 나도 일이 끝나면 표피좀 채취해야 겠구먼. 자네도 좀 챙겨 갈텐가? 마법 연구 할때 쓰면 좋을 텐데." 뒤를 돌아보니 그라프가 허리를 두들기며 뮤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이멜은 혀를 빼물며 인상을 찡그렸다. "으엑... 저는 그런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허헛 참! 그런 것을 마다하다니 자네도 참 이상한 마법사 일세." 이상한 마법사라는 소리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왔기에 레이멜은 그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충 일이 끝난 듯 하자 허기를 느낀 그는 세실프를 향해 외쳤다. "이봐 세실프! 남은 건량 좀 줘. 하도 안달을 했더니 배가 고파 죽겠군." 레이멜이 바라본 세실프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레이멜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그렇다고 무기까지 빼들건 또 뭐야? 귀찮다면 내가 가져다 먹지 뭐..." 하지만 세실프의 신경은 이미 다른 곳에 있는 듯 했고 그녀의 옆에 서있던 유겐 역시 검을 뽑아든 상태였는데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두 남매는 빠른 발놀림으로 수풀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주시하던 일행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기에 그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사라진 수풀 넘어로 부터 날카로운 병장기 부딛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로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그만 하라고! 우리 파숄에서 본 적이 있잖아? 확인도 하지 않고 칼을 휘두르다니 정말 위험한 아가씨군!"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병장기가 부딛히는 소리는 멈췄는데, 다시 한번 수풀이 뒤적이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고, 그 뒤를 세실프 남매가 뒤따랐다. 그 중 가장 앞에선 자의 얼굴을 확인 하던 아드리안이 놀라며 외쳤다. "아니! 자네는 큐리컬드아닌가? 어떻게 이런 곳에 있는 것이지?" 아드리안의 물음에 편치 않은 표정을 하며 걸어나오던 큐리컬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자네들을 따라 나선 것이지." 대충 말을 하던 카리큘드는 그의 뒤에 서있던 그라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정색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라듀아보 대현자님." 오히려 그의 인사를 받던 그라프가 더 놀랄 일이었는데, 파숄에서 스쳐 본 일개 모험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 보자 의외였던 것이었다. "나를 어떻게 알아본 것인가?" 그라프가 물어 볼 것을 이미 알았던 큐리컬드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핫! 사실 저는 보물사냥꾼이되기 전에는 도적이었습니다. 암시장에서는 그라프님께서 활동하실 때 저술하신 서적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기 때문에 도적들 사이에서 침을 흘리는 물건 중 하나죠." 그의 말을 듣던 중 너털 웃음을 지은 그라프가 은근한 투의 목소리로 물었다. "허헛! 그렇다면 자네도 내가 쓴 책을 훔친 적이 있나?" "안타깝지만 그런 영광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도적이었는데도 돈에는 관심이 없어 그라프님의 저서를 훔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고개를 갸웃 거린 그라프는 한쪽에 서있는 레이멜과 큐리컬드를 번갈아보았다. "거참... 돈에 관심이 없는 이상한 도적에 다가 연구에 관심 없는 이상한 마법사까지 나타나다니... 아무튼 세상을 등진 이후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군." 그라프와의 대화가 대충 끝나자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먼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사실 어제 밤 늦게서야 그라프님께서 대현자 라듀아보의 본인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확인 하려고 아침에 일어나 찾아보니 그라프님과 자네 일행들이 엘프의 숲쪽으로 길을 떠났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러니까... 그래! 혹시 카일락스 때문에 이쪽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서둘러 동료들과 뒤를 따르게 되었던 거야. 우리 역시 그 전설의 마물인가 하는 녀석과 한번 붙어보고 싶었거든." 말을하던 큐리컬드는 무엇인가 숨기는 듯 말을 더듬거렸고, 눈동자를 움직이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지만, 아드리안과 그의 일행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럼 카일락스들에게 쫓기고 있던 사람들이 자네들인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설명하면 길어지니 일단 자리 정리좀 하고 피곤이나 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잠은 자야 할 것 아닌가?" 잠시 대답을 미룬 아드리안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서둘러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고, 녹초가 된 큐리컬드 일행들은 짐을 모두 잃은 상태였기에 모포 등 몇 가지 짐들을 빌리게 되었는데, 무엇 보다 일행들이 놀란 것이 있다면, 이런 와중에도 뮤스는 하고 있던 일에 정신을 빼앗겨 큐리컬드가 합류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2-09-27] 짜가신선 <대공학자> #179~180 자아의 재발견 카일락스들과 첫 대면을 한 후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뮤스의 일행들은 카일락스들이 번식하는 것을 우려하여 가는 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큐리컬드 역시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말은 카일락스들에게 희생 당한 후였기에 큐리컬드의 일행이 모두 동행을 할 수 없었고, 결국 큐리컬드를 제외한 두 명의 동료는 다시 파숄로 돌아간 후였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 거칠기만 한 여름의 태양이었지만 우거진 숲의 나무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다. 레이멜의 말 뒷자리에 탄 뮤스는 카일락스의 표피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지난 이틀간 밥먹는 시간이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표피와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일행들은 그의 집중력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사정은 있는 법, 평소 따분한 이동을 할 때마다 말벗이 되어주던 뮤스가 손바닥 만한 표피하나에 정신을 빼앗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심심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던 레이멜은 불만 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봐 뮤스! 제발 그런건 좀 치워두라고. 나이도 어린 녀석이 뭐가 이렇게 재미없어?" 뮤스는 지난 며칠 동안을 그래왔듯이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눈으로 사물을 구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빛 속에 포함된 가시광선에 의한 것이다. 어떠한 물체가 자신이 받아 들인 가시광선을 그대로 반대편으로 방출 할 수 있다면..." 잠시 귀를 기울여 뮤스의 중얼 거림을 듣고 있던 레이멜은 자신의 말에 대한 대꾸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고,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쳇!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사는 녀석이군." 투덜거리는 레이멜의 바로 앞에서 아드리안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배경에 걸맞게 어려서 부터 기마술을 배워왔는데, 그 만큼 이 중 누구보다 능숙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레이멜과 함께 달리던 그라프가 속도를 내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이보게 아드리안! 조금만 가면 엘프 숲의 결계석에 도착하니 속도를 좀 줄이게!" "네! 알겠습니다 그라프님!" 그라프와 아드리안이 말을 주고 받자 왠일인지 카일락스의 표피에 정신을 빼고 있던 뮤스가 시선을 떼며 물었다. "레이멜씨 결계석이라는 것이뭐죠?" 뮤스의 질문을 받은 레이멜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방금전 자신이 한 말에는 한 마디 대꾸도 안하던 그가 다른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에 응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일부러 무시한 거냐? 아니면 네 귀는 너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 들을 수 있는거냐?" 레이멜이 신경질 적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뮤스는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표정이었다. "네? 무슨말 하셨나요?" 곁눈질로 뮤스의 표정을 살피던 레이멜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 엘프의 숲 주변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있단다. 그것은 외부인들이 숲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거나 나이어린 엘프들이 함부로 나올 수 없도록 막는데 쓰이는데, 결계에 대해 알고있는 엘프 이외의 외부인들이 침입하게 되면 며칠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메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단다. 그러한 결계가 작동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위가 바로 결계석인 것이지. 알겠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뭔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다시 금 물었다. "그런데... 엘프가 뭐죠?" 순간적으로 레이멜은 달리던 말에서 떨어질 뻔 할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으며 몸이 휘정였는데, 어렵사리 균형을 잡은 레이멜은 말등으로 기어오르며 입을 열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세상에 엘프를 모르는 녀석이 있다니! 장난 이라면 이쯤에서 그만 하라고!" 하지만 뮤스의 표정은 장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는데, 그의 표정이 연기였다면 대륙 최고의 희극배우라고 칭해줄 용의도 레이멜에게는 있었다. "너 그럼 유사 인종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알고 있냐?" 레이멜의 되물음에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공학원의 드워프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인간은 아닌 종족 아닌가요? 예를 들자면 드워프라든지..." "그래도 드워프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엘프들 역시 그런 유사 인종 중 하나인데, 이름 그대로 요정들이지. 예전에는 대륙 각자의 숲에서 살고 있었지만, 몇 백년 전 부터는 그 수도 많이 줄어 엘프의 숲에 모여 살고 있단다." "그럼 엘프들도 드워프들 처럼 키가 작고 뚱뚱한가요?" 뮤스가 말대로 엘프의 모습을 머리속에서 그려보던 레이멜은 실소를 터트렸다. "풋! 엘프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종족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종족이야. 드워프들과는 외모로 비교 할 바가 아니지. 아마 엘프들 앞에서 드워프와 외모를 비교 한다면 그 자리에서 널 죽이려 들걸? 인간과 다른 점은 머리칼이 은발이고 귀가 뾰족 하다는 것과 엄청나게 오래 산다는거야." 한동안 엘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뮤스는 나름대로 엘프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일행들은 개울 하나를 넘은 것을 기점으로 속도를 줄여 나갔다. 어느 새 그라프가 일행들의 가장 앞쪽에서 달리리며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는데, 나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고, 나뭇가지들은 더욱 멋대로 자라나 가는 길을 방해했다. 그렇게 반시간을 달렸을 즈음해서,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돌기둥이 서있었다. 매끈한 질감을 가진 돌기둥의 높이는 약 5멜리쯤 되었고 표면에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무슨 글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결계석 앞에 말을 세운 그라프는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고, 그의 뒤를 따르던 일행들도 말을 멈추며 말에서 내렸는데, 역시 뮤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인지 못했는지 혼자 말등에 앉아 생각에 빠져있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레이멜은 뮤스의 다리를 잡아 당겼다. "뮤스 다왔으니까 이제 내려!" "벌써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뮤스는 카일락스의 표피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으며 말에서 내렸고, 그라프가 만지고 있는 결계석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결계석이라는 건가?" 결계석의 옆있던 그라프는 몸을 돌리며 일행들에게 외쳤다. "흠... 결계석이 해지 되어 있군. 아무래도 엘프들에게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친구가 마중 나오기로 했으니 기다려 보세." 일행들은 자신들이 타고온 말들을 나뭇가지에 묶어놓았고, 장시간 말을 타고 오면서 뭉친 근육들을 풀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 지기 시작하면서 석양이 붉은 색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결계석 앞에서 엘프를 기다리던 일행들은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라프 만은 앉지도 않은 채 자신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 수록 불안이 쌓여 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며 시간을 가늠하던 그는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는 쥬라스의 옆에 다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흠... 엘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쥬라스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라프님 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계시는 군요. 평소 같았더라면 충분히 느끼실 수 있으셨을 텐데... 눈을 감고 이 숲을 한번 느껴 보세요." "그렇지... 숲의 느낌." 그라프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숨을 천천히 들이쉬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통해 상쾌한 숲의 향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몸속을 한 바퀴 돌며 탁한 공기를 씻어 준 숲의 공기는 날숨과 함께 다시 몸밖으로 빠져 나갔다. 숲의 기운을 몸소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뜬 그라프는 평소와 같이 차분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초조함 때문에 내가 깜빡 하고 있었군. 엘프들과 숲은 영혼으로 묶여있다는 것을... 하지만 예전 보다는 숲의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어." 그와 함께 눈을 감고 있던 쥬라스 역시 착찹한 목소리로 동의하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깨트리며 탄생한 카일락스가 이 숲을 조금씩 죽이고 있는 것이죠. 카일락스를 막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숲은 황폐해 질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숲의 기운을 느끼며 그라프가 걱정을 떨쳐내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그라프님 이 조그마한 빛덩이는 뭐죠?" 빛덩이라는 소릴 들은 그라프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급히 시선을 돌리자 그의 생각대로 푸른 색의 빛덩어리 하나가 뮤스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뮤스가 만져 보고싶은 생각에 손을 뻗치면 푸른 빛덩이는 멀치감치 떨어졌고, 다시 손을 거두어 들이면 뮤스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라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것은 엘프들이 부리는 실프라는 정령일세. 그냥 단순한 빛으로 보이지만 조금의 지능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이지. 이제 곧 엘프들이 이곳으로 올 것 같구먼."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세실프와 유겐 역시 정령의 존재는 처음 보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뮤스와 장난을 치고 있는 실프를 바라보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드리안과 큐리컬드 역시 별 다를 바 없었다. 그 중 레이멜만이 마법사 답게 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실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뮤스와 장난을 치던 실프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 모습을 보던 뮤스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런... 벌써 사라져 버리다니." 그의 옆으로 다가온 그라프는 실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실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리기 위해 간 것이지. 조금만 있으면 주인과 함께 다시 나타날 것이야." 그라프가 말한 조금이라는 시간은 뮤스의 생각보다 더욱 짧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뭇가지로 부터 사람 모양을 한 인영이 뛰어 내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핫! 그라프 이 친구! 내가 속이 타서 죽는 모습을 봐야만 속이 시원하겠나?" 반갑에 웃으며 다가온 인영은 그라프의 주름진 손을 덥썩 잡았고,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인영이 자신의 오랜 지기인 루시아스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라프 역시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허헛! 내가 자네처럼 언제나 청춘인 엘프인 줄 아나? 늙은 몸을 이끌고 지금에라도 나타난 것이 다행인 줄 알게!" 루시아스는 눈가에 주름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있는 노안의 친구를 살폈다. "그래 이곳까지 오는 중에 아무 일도 없었나? 자네가 늦길래 걱정을 많이 했다네." "카일락스들도 이 늙은이가 맛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나 보더군. 잠깐 저쪽을 보게나." 가벼운 농담을 건넨 그라프는 어느새 그들의 주변으로 모여든 일행들을 가리키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쥬라스 사제와 집을 떠나왔는데, 도중에 운이 좋게도 꽤나 능력이 있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 함께 오게 되었다네. 인간들이 너무 많다고 쫓아 내지는 않겠지?" 일행들을 보며 빙그레 웃은 루시아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설마 그럴리가 있겠나? 우리를 돕기 위해 이곳까지 와주신 분들인데... 저는 엘프족의 장로 중 한 사람인 루시아스라고 합니다. 아시다 시피 그라프와 제법 오래 알고 지낸 친구죠." 루시아스의 소개를 시작으로 일행들도 각자 자신의 소개를 했는데, 루시아스는 한 명, 한 명의 소개를 귀담아 들으며 그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엘프 마을에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 이곳으로 와준 그라프와 그의 일행들을 위해 조용한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프 로드와의 인사를 끝낸 일행들은 세 명이 쓰는 숙소를 하나씩 배정 받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기 시작했다. 뮤스와 함께 방을 쓰기로 한 사람은 레이멜과 유겐이었는데, 그라프가 뮤스와 함께 방을 쓰고 싶어 했으나, 레이멜의 부탁드로 유겐에게 양보한 상태였다. 레이멜이 짐을 풀고 있을 때, 뮤스는 나무옹이 모양으로 나있는 창을 통해 엘프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짐을 정리한 레이멜이 뮤스의 곁으로 다가와 밖을 내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멋진 광경이지? 세상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군." 뮤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여전하다고 생각한 레이멜은 뮤스의 어께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 뮤스! 요즘 내 말을 너무 무시하는거 아니냐 앙?!" 고요히 창 밖을 바라보던 뮤스는 갑자기 레이멜이 자신의 몸을 흔들기 시작하자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으으윽... 무시하는게 아니라 말 없이 긍정을 한거라고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그제야 마음이 풀린 레이멜은 창틀에 턱을 받치며 앉았다. 허공을 자유롭게 떠돌고 있는 수 많은 실프들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른는 것이 없다고 무의식 중에 자만하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으로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이었나를 깨닫고 있어요. 카일락스와 만난 이후부터 쭉 그 생각이었거든요." 피식 웃은 레이멜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네가 공학원인가 뭔가 하는 곳의 원장이라고 할 만큼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그건 세상일의 극히 일부분이야. 네가 신이라도 되는 줄알았냐?" "신이라..." 뮤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튕기며 그의 머리를 두들긴 레이멜은 창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하는거야.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그 점은 뮤스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기에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 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겐이 짐을 모두 정리하자 뮤스와 레이멜은 함께 숙소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의 숙소는 나무의 아랫쪽에 위치한 집들 중 하나였다. 이것은 나무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엘프들의 세심한 배려였다. 집 밖으로 나오자 아름드리 나무와 나무의 사이에 형성 되어있던 공터에 긴 식탁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채식을 하는 엘프들 답게 탐스럽게 익은 과일들과, 싱싱한 야채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무엇인가를 발견한 레이멜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럴 수가! 저것들이 다 영원의 열매 아냐?" 이곳으로 오는 도중 뮤스 역시 그 간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기에 영원의 열매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저 노란색의 과일이 영원의 열매라고요? 하지만... 저렇게 많으니 왠지 귀해 보이지는 않는 걸요?" "나도 그래서 놀라는 중이야. 설마 우리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던게 이렇게 굴러다니는 열매였다니." 그들의 옆에 서서함께 영원의 열매를 바라보던 유겐 역시 그러한 기분이 드는 듯 했다. "정말 허무하군요. 대장은 우리보다 더 할 것 같은데요?" 말을 하던 유겐이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숙소에서 나오다 말고 멍한 얼굴로 서있는 아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는데, 먼 거리였기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라프가 그의 어께를 두들겨 주며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집에 있던 엘프들이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장로급의 엘프들도 한 명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뮤스가 잠시 망설이면서 물었다. "저.. 레이멜씨 이것도 이상한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엘프들은 나이를 어떻게 알아보죠? 루시아스님이 장로라고 하셨는데, 다른 엘프들과 도저히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없어서..." 당연히 레이멜의 답답함의 한숨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뮤스는 예상이 깨어지자 의아한 표정으로 레이멜을 바라보았는데, 그 역시 거기까지는 알 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글쎄. 엘프들이 인간보다 청년기가 수십배나 길다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그럼 누구한테 물어보지?" 어깨를 으쓱한 레이멜은 그라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루시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루시아스님께 직접 물어 보는 것이 가장 빠르지 않을까?" 뮤스는 주저하며 되물었다. "루시아스님과는 아직 개인적으로 이야기도 못해봐서 선뜻 묻기가 껄끄러운걸요." 동시에 레이멜이 내리는 질책의 알밤이 뮤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아무튼 볼 수록 답답한 녀석이군. 언제까지 상대방이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거야? 그러니까 세실프나 유겐과 친해 지기 힘들어 지는거 아냐." 아무 생각 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겐은 불현듯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레이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은 레이멜은 이번 기회에 뮤스의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을 바로 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몰아 붙여 나갔다. "모험을 하다가 보면 언제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지모르니 믿을만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가 믿을 만한 친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지. 그렇게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대화인데, 너는 대화를 꺼리니 어떻게 모험을 할 수 있겠어? 운이 나빠서 우리 일행이 아니고, 꿍꿍이를 가진녀석들을 만났다면 아마 큰일을 당했을 지도 모르는일이지." 뮤스는 마치 웃어른에게 꾸지람을 듣는 아이 마냥 얼굴을 숙인 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성격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카타리나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고생하던 기억 부터 크라이츠의 장난에 대응 한 번 해보지 못한 일들이 머리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유독 드워프들에게는 자신감이 넘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레이멜은 자신이 잡아 놓은 분위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되물었다. "이상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냐?" 하지만 뮤스는 그의 되물음에 엉뚱한 말을 던지며 일었났다. "레이멜씨 정말 고마워요. 저는 잠시 숙소로 들어가서 생각해볼 것이 생겼으니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생각? 그..그러지 뭐." 그의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이멜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으로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만찬과 함께 준비된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색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아름다운 바람 소리와 새의 지저귐 소리가 절묘하게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내기라도 한 듯 인공의 음색이 아닌 말 그대로 자연의 음색이었다. 만찬을 마다하고 숙소로 들어온 뮤스는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고민의 덩어리가 머리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레이멜이 한 말을 되세기며 이 세계에 오기전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훗! 정말 내가 생각해도 무모 할 정도로 당당했었지. 실수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꽤 즐거웠으니..." 비록 그것이 철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고는 하나, 누구의 앞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해내고야 마는 적극적인 성격 하나로 살아온 그였던 것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던 뮤스는 안색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뮤스에게는 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찾아 낼 수 없었는데, 언제나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함께 생활을 하던 켈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변한 것이 아니다. 내가 만약 변한 것이라면 켈트 아저씨의 앞에서도 자신감 없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두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자문자답을 하던 뮤스는 묵직한 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것인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결국 답을 구하지 못한 뮤스는 눈을 감으며 자신의 어렸을 적의 기억을 거슬어 올라갔다. 기억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되뇌이며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효과가 될 지는 몰랐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을 남긴 채 이대로 포기 한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시간은 바람을 탄 듯 빠르게 흘러갔고, 창밖에서 들어오던 음악소리도 어느샌가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시끌 벅적한 말소리들이 오고가고 있었는데, 일행들과 엘프들 모두 지금 만큼은 카일락스에 대한 생각을 접고 즐기는 듯 했다. 뮤스는 그 자세 그대로 몇 시간째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고, 눈이 감긴 그의 얼굴은 한 점의 변화도 없이 고요했다. 그렇게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자 가슴만을 조금씩 움직이며 코를 통해 미미한 숨을 내쉬던 뮤스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는데, 그의 안색은 한결 좋아져 있었다. "그래... 그것은 한명신과 뮤스의 차이에서 나오는 잘못 된 일이었다. 한명신이 낯선 세상에 주눅이든 뮤스로의 삶을 살아가려 안달을 했으니, 본래의 색을 잃을 수 밖에..." 말끝을 흐린 그는 창 밖을 내다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함께 온 일행들이 기분 좋게 취해 만찬을 즐기고 있었으며, 엘프들 역시 지난 며칠간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비록 아직 명확한 방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낯선 세상의 위압감에 주눅이든 뮤스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의 실패로 스스로를 좌절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그런 나약한 존재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훗날 뮤스에게 큰 변화를 줄 깨달음은 여행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깜빡 잠이 든 뮤스는 눈을 떴다. 어느새 해는 떠올라 방안을 밝히며 눈을 부시게 만들었고, 싱그러운 풀내음이 흘러들어 코를 간질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빈 뮤스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레이멜과 유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밤새 술을 마시다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잠이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숙소의 문을 열고 나온 뮤스는 고개를 내저을 수 밖에 없었는데, 엘프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은 반면에 쥬라스 사제를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정신을 잃은 듯 탁자에 얼굴을 묻고서 잠이 들거나, 풀이 무성한 바닥을 침대 삼아 누워 자고 있는 상태였다. 그 중 큐리컬드와 레이멜이 서로 술대작을 벌인 듯 했는데, 기이한 형태로 널부러져 잠을 자고 있는 그들의 주변에는 술을 담은 듯한 나무 주전자가 몇 개씩이나 비워져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뮤스는 레이멜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레이멜씨! 어서 일어나요!" "으음... 뭐..뭐야..."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레이멜은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널부러졌다. 그의 모습을 보며 다른 일행들 역시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 뮤스는 일행들을 깨우는 것을 관두고서 잔뜩 어질러져 있는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과일들이 굴러다녔고, 잘게 썰린 야채들과 소스들이 엉겨 붙어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는 인상하나 쓰지 않고 무엇을 하려는지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금새 식탁하나가 깨끗해 지자 손에 묻은 찌꺼기를 털어낸 그는 물이 담긴 그릇에 손을 씻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가방을 그 옆에 올려 놓고 여러가지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그의 손놀림은 그 어느때 보다 가벼워 보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죽은 듯이 잔디에 얼굴을 파묻고 잠을 자고 있던 레이멜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돌아 가더니 이내 듣기에도 탁한 소리와 함께 입으로 부터 이물질들이 뿜여져 나왔다. "울럭... 웨에에엑! 우웨엑!" 하지만 아직 몸이 땅에 누워 있는 상태였기에 힘겹게 게워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가지 못하고서 그의 얼굴 앞에서 점차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이내 이물질들이 레이멜의 얼굴쪽으로 흘러와 한 쪽 뺨을 시원하게 적시자 그제서야 눈을 뜬 레이멜은 다급히 뺨에 묻은 이물질들을 손으로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빌어먹을! 다 젖었잖아?" 대충 얼굴을 닦아낸 레이멜은 아직도 덜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일행들 역시 이제야 잠이 조금씩 깨는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이 토하는 것을 못본 듯 하자 그는 서둘러 흙을 덮어 토사물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 때 가장 우려하고 있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크큭! 이보게 레이멜 그렇게 숨긴다고 해결 되겠나? 그냥 패배를 받아 들이시지?"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레이멜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곳에는 예상대로 안색이 그리 좋지 않은 큐리컬드가 바위에 몸을 기대어 앉아있었고, 동시에 지난날 자존심을 걸고서 술대작을 하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패배를 순순히 인정할 레이멜은 절대 아니었다. "이봐 누가 졌다는거야? 난 그저 자다가 침을 흘렸을 뿐이라고!" "푸핫!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침을 그렇게 거창하게 흘리면 장가가서 큰일 나겠군! 크크크큭!" 말도 안되는 변명에 배를 부여잡으며 웃던 큐리컬드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며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입을 막고있던 손사이로 걸죽한 액체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으윽.. 우웨에엑! 우웨에엑!" 결국 레이멜을 비웃던 큐리컬드 역시 토사물을 개워내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결은 무승부로 돌아가게 되었다. 식탁의 한 쪽 끝에 앉아잠을 자고 있던 세실프는 머리를 부여 잡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숙취가 심한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는 옆의 탁자에서 뭔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뮤스를 볼 수 있었다. 괜히 뮤스만 보면 심통이 나는 그녀는 그냥 지나 칠수 없었기에 한 마디 던졌다. "아침 부터 궁상 맞게 뭐하는 거야? 쳇 널 보니까 아침 부터 머리가 다 아프군." 말을 마친 그녀는 뮤스의 얼굴을 살폈는데, 자신의 윽박지름으로 기가 죽은 뮤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였다. 하지만 뮤스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전혀 벗어난 것이었다. "아! 세실프 누님 일어났군요. 술을 많이 마신것 같던데 몸은 좀 괜찮나요?"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뮤스를 보며 세실프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누..누가 네 누님이라는 거야!" 여전히 뮤스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부르든 그건 제 마음이죠. 숙취가 심할 테니까 이거라도 드세요." 말을 마친 뮤스는 가방에서 숙취약을 꺼내 세실프에게 내밀었는데, 원래 술이 약한 뮤스가 술을 마신후 숙취에 시달렸기에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할 말이 없어진 세실프는 자신도 모르게 숙취약을 받아 들었고, 뮤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던일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세실프는 벙찐 얼굴로 손에 쥐고있는 숙취약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이상하네... 이 녀석 밤새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숙소로 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뮤스에게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뮤스는 이렇게 자신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조금씩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본래의 상태를 되찾은 일행들은 공터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엘프족 중에는 루시아스만이 함께 앉아있었다. 이번 카일락스의 일에 대한 모든 일을 그가 전담했는데, 엘프 로드는 머리 수가 많을 수록 의견 수렴에 지장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루시아스 이외의 엘프들은 그들이 활동 할 때 필요한 지원을 해줄 뿐이었다. 현제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는 루시아스였다. 그는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카일락스가 숲에 나타난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얼마 전 부족의 한 엘프가 인간 세상으로 여행을 나갔었습니다. 그 아이는 인간세상을 유람하다가 한 모험자 집단에 합류하게 되어 고대 유적을 탐험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카일락스의 알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죠." 루시아스가 말을 하는 도중에 뮤스가 서슴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분께서는 그것이 카일락스의 알인 줄 몰랐던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카일락스의 알은 우유빛의 아름다운 돌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아이는 그저 귀한 보물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죠." 뮤스는 그가 대답한 내용을 준비해있던 책자에 적어 나갔는데, 카일락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뮤스의 모습을 눈에 이채를 띄우며 지켜보던 레이멜은 하룻밤 사이에 기질이 변해 있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루시아스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 세상을 모험하고 숲으로 귀환 할 때에는 허락 없이 외부의 물건을 들여오지 못하는 것이 부족의 규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카일락스의 알을 가지고 싶은 마음에 숲에 들어서자 마자 '로아드 연못'에 표식을 해두고서 묻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꺼내올 생각을 했던 것이죠." 잠자코 듣고 있던 그라프는 그제야 일의 전말을 깨달으며 탄식을 했다. "허헛! 하필면 알을 숨기는 곳이 연못이었다니... 그 것이 큰 실수였구먼. 그 엘프는 지금 어디 있는가?" "후에서야 그것이 카일락스의 알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어 지금은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혼자 속을 태우고 있다네." 그라프는 마치 자신의 동생이라도 되는 듯 안타까워 했다. "쯔쯧... 혹시 자네가 말하는 그 아이가 이브리엘인가? 어제 만찬 때도 이브리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데." 루시아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네의 안색이 어둡다 했더니..." 그가 이브리엘을 아는 것은 먼저번 이곳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성격을 가진 다른 엘프들과는 다르게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붙임성이 좋아 그라프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었다. 게다가 루시아스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라프 였기에 걱정을 각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브리엘도 이번 일에 동참 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루시아스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것이 무슨 소린가? 이브리엘을 동참시키자니..." "생각을 해보게나. 설사 우리가 카일락스를 제거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던진 그라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일이 좋게 해결 된다고 해도, 그 아이는 평생 이번 일을 마음에 담고 살아 갈것일세. 그러니 그것을 털어 버릴 수 있도록 이브리엘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이야." 충분히 수긍이 갈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브리엘을 잘 알고 있는 루시아스로서는 선듯 받아 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브리엘을 위험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네. 그야 말로 그아이는 보통의 엘프란 말일세. 혹시라도 이브리엘이 위험에 빠진다면 나는..." 차마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듣고만 있는 일행들 사이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있던 뮤스가 루시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분 한 명이라면 카일락스로 부터 확실하게 보호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갑자기 끼어든 뮤스를 향해 시선을 모았고, 루시아스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며 되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죠?" 모든 이들의 질문을 루시아스가 대신 해준 듯 했고, 다른 이들은 뮤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을 받은 뮤스는 거리낌 없이 가방에서 주먹만한 검은 물체를 꺼내들었다. "아침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만든 것인데 일종의 '음향발생기'입니다. 안타깝게도 부품이 모자라 한 개 밖에 만들지 못했어요." 뮤스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던 세실프는 식탁에 앉아서 그가 만들고 있던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겨우 그런 물건이 어떻게 카일락스의 공격을 방어한다는 거야?" 선듯 믿지 못하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은 뮤스는 음향발생기에 붙은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음향발생기로 부터 카일락스의 날개 짓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우웅....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있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다시 버튼을 눌러 작동을 멈추게한 뮤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음향발생기를 만든 것은 모기의 습성에서 착안한 거예요. 원래 교미를 끝내고 산란중에 있는 암모기는 숫모기가 접근하는 것을 극히 싫어 한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숫모기의 날개 짓 소리를 들으면 숫모기가 접근 하는것으로 착각하고 접근하지 않게 되죠. 이것은 모기에서 파생된 카일락스에게도 역시 해당될 것입니다. 그래서 숫 카일락스의 날개짓 소리를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에요. 하지만 원거리통신기의 부품을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출력이 작아서 보호할 수 있는 범위가 한 사람 정도에 국한 되어있죠." 신기하기만 한 뮤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루시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암카일락스만 쫓아 낸다는 것인데, 수컷의 공격은 어떻게 회피 할 수 있습니까?" 루시아스의 옆에서 무릎을 치며 감탄하던 그라프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허헛! 그런 것에서까지 착안을 얻다니 대단하군! 원래 사람의 체액을 빨아먹는 것은 암카일락스들이지. 수컷들은 나무에 붙어 나무액을 빨아 먹고 살거든. 그러니 암컷만 막으면 되는 것일세." 그라프의 설명을 모두 듣고서야 이해가 완전히 된 루시아스는 눈 앞의 인간 청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가볍게 미소지은 뮤스가 손에든 음향발생기를 루시아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이브리엘님께 전해 드리시고, 내일 꼭 몸에 지니라고 말을 전해 주세요." 그것을 받아든 루시아스는 손에들린 음향발생기와 뮤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뮤스군이라고 했던가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군요." 루시아스 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 역시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세실프와 유겐도 끼어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세살프가 잘난 척을 한다며 또 한바탕 비아냥 거렸을 테지만, 아침의 일부터 해서 뮤스의 태도가 변하자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81~182 유겐의 첫 사랑. 한 시간이 넘도록 회의는 계속 되고 있었다. 결국 뮤스가 만든 카일락스 퇴치기구로 인해 이브리엘이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카일락스의 서식지로 이동하는 방법등에 대해서 의논이 오가고 있었다. 여러가지의 의견이 나왔지만 결국은 그라프가 준비해온 나노이드잠사 그물을 이용하기로 했는데, 그 편이 카일락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격 받을 때 마다 그물을 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해 있었다. 그라프의 설명이 계속 되고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그물을 친다고 해도 5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네. 그에 비해 쥬라스나 루시아스가 카일락스의 움직임을 탐지할 수 있는 거리는 500멜리 남짓하니, 카일락스가 우리를 발견하고 날아 올 때 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는다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카일락스가 공격해 오는 것을 알아채고서 그물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카일락스들은 우리의 머리위를 날아 다닐 것이란 것이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큐리컬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각자 하나씩의 틀을 만들어 그 위에 나노이드잠사 그물을 씌우는 것은 어떨까요? 넓은 면적에 그물을 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각자 가지고 있는 틀을 덮어 쓰는 것은 금방일 테니까요." 큐리컬드의 의견을 들은 일행들은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레이멜의 반론이 제기 되었는데, 술대작을 한 이후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심이 생겨나 있는 상태였다. "내가 알기로 카일락스의 대롱침의 길이는 대략 30셀리 이상이고, 녀석들이 전력으로 날아든다면 신축성을 가진 나노이드잠사 역시 30셀리 이상 늘어날 거야. 이것만으로도 자네가 말한 그물의 틀이 몸으로 부터 60셀리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몸의 부피를 포함해 계산한다면 틀의 지름이 170멜리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군. 그것은 개인이 들고 이동 할 수 있는 부피가 아니야. 게다가 틀이 카일락스의 힘을 견딜 만큼 견고해야 하니 어지간한 재료로는 어림도 없고,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다면 무게 또한 만만치 않겠지." 큐리컬드와 일행들 역시 그의 말에 수긍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멜은 그저 그의 입을 막았다는 것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뮤스만이 생각을 달리 하는 듯 했다. "제가 보기에는 큐리컬드씨의 제안이 아주 좋은 방법이 될 듯합니다." 뮤스의 목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짓던 레이멜의 얼굴이 굳었는데, 당연히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고 있을 뮤스에게 어이없는 배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그 큰 그물틀을 각자 들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거야?"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틀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죠. 물론 보통의 방법으로 만든다면 레이멜씨의 말대로 불가능 하겠지만, 탄성이 있는 가벼운 금속으로 그 틀을 만든다면 큐리컬드씨가 말씀하신 그물틀을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무게도 적게 나갈 뿐 아니라, 접어서 부피까지 줄일 수 있으니 휴대를 하는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순간 레이멜과 큐리컬드의 전세가 역전이 되어 버렸는데, 큐리컬드는 어께를 우쭐하며 고개를 뻣뻣이 들었고, 레이멜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뮤스가 기발한 생각을 말할 때 마다 혀를 내두르던 그라프는 또 한번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이것 참! 그렇다면 자네가 그것을 제작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라프님.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겠죠." 뮤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런 말투가 거만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일행들 역시 뮤스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를 거만하다고 보는 이는 없었다. 뮤스 덕분에 또 하나의 문제점이 해결 되자 마지막으로 카일락스의 번식을 막을 방법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그라프가 미리 준비해온 생각이 있다고 했기에 별다른 의논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라프는 품에 손을 넣어 노란 액체가 들어있는 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손을 들어보이며 일행들에게 보여준 그라프가 농담을 던지며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허헛! 뮤스군 덕분에 대현자라는 이름이 무색해 졌군. 내 손에 들려있는 노란 액체는 카일락스의 번식을 억제하기 위해 내가 직접 만든 것일세. 이 액체는 카일락스의 성장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는데,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탈피하는 과정에서 탈피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게 만들어 번식을 할 수 없게 만든다네. 다른 독소를 사용하여 유충들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숲에도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한 것이지."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 있던 뮤스 역시 일행들과 함께 감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그라프가 만든 것은 '발육억제제'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웬만한 생물공학의 지식으로는 만들기는 커녕 이해하기도 힘든 개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새삼 그라프가 대현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카일락스에 대한 의논이 끝나게 되자 내일 카일락스의 서식지로 떠나기로 결정이 되었고, 그 준비를 위해 일행들은 각자 자리를 털고 일어 났다. 공터에는 뮤스를 비롯해 아드리안, 레이멜, 유겐, 큐리컬드가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휘어지는 얇은 금속 막대를 들고 있었는데, 뮤스가 만드는 것을 보며 따라 만들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금속 막대의 끝을 잡고 나노이드 잠사로 고정 시킨 뮤스는 다른 금속 하나를 엊갈려 끼우며 말했다. "일단 형태를 만들어야 하니 나노이드 잠사로 금속 막대의 양쪽 끝을 고정 시켜 주세요. 그리고 또 다른 금속 막대를 엊갈려 끼운 후, 엊갈리는 부분을 굵은 철사로 고정 시켜주면 기본은 된거에요. 이런 식으로 총 네개의 금속 막대를 쓰면 카일락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수 없는 튼튼한 금속 틀이 만들어지게 되죠. 간단하죠?"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뮤스가 하는 만큼 쉬워보이지 않았는데, 탄력이 좋은 금속 막대였기에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만치 날아가 있었고, 심지어는 턱을 강타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럭저럭 모양새를 만들 수 있었는데, 그들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겨우 자신의 틀을 완성 시킨 아드리안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휴우... 직접 해보니 뮤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알겠군. 그 때 숲에서 널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난감했겠는걸." 레이멜 역시 자신이 만든 엉성한 틀을 뮤스가 만든 것과 비교하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러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니까. 내가 뮤스를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 아냐. 그렇지 않아 유겐?" 잠시 쉬고 있던 유겐은 또 다시 자신을 거들먹 거리는 레이멜을 향해 투덜거렸다. "왜 툭하면 제 이름을 부르고 그래요? 그 때야 추방자라는 신분 때문에 꺼려했지만, 지금은 나도 이제 뮤스군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그만하라고요." "진작에 그럴 것이지 왜 누나를 따라서 냉소적인 척 한거야? 응?" "파숄에서 뮤스군 이야기를 들은 다음 부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겨우 틀을 철사로 마무리 할 수 있었던 큐리컬드가 뮤스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어?" 손으로 연결 부위를 만져 보며 상태를 확인하던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이 중에서 가장 튼튼한것 같아요." "하핫! 그런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높이 평가를 받자 큐리컬드는 진심으로 기쁘게 웃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틀에 묻은 먼지를 털던 큐리컬드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추방자였나?" 뮤스는 자신이 추방자라는 것을 숨길 필요를 못느꼈기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네, 한달 전에 도이첸 제국에서 추방을 당했었죠. 그래서 미개척지를 떠돌다가 운좋게 레이멜씨를 만나게 되어 합류하게 되었어요. 무슨 문제라도?" 멋적게 웃은 큐리컬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후훗! 아무것도 아닐세. 그저 다음에 갈 곳이 없다면 파숄에 들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우리야 언제나 파숄에서 지내니 추방자라는 자네의 신분 정도는 감싸 줄수있으니까." "고맙습니다 큐리컬드씨." 큐리컬드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지 못한 듯 허둥지둥 이미 다 만들어진 틀을 매만졌다. 마지막 작업으로 그들은 튼튼하게 만들어진 틀에 나노이드잠사 그물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틀을 만드는 것 보다는 쉬웠지만 틀에 고정하는 부분을 모두 나노이드잠사로 꿰매야 했기에 인내심 없는 남자들이 하기에는 무리가 많아 보였다. 그 중 아드리안이 가장 심해 보였는데, 귀한 집에서 자라난 그였기에 바느질 작업은 정말 생소한 일이었던 것이었다. "제길 어떻게 이걸 하라는거야..." 반면 인내심이 크게 미달인 것으로 보이던 레이멜은 아주 능숙한 솜씨로 틀과 그물을 꿰매고 있었는데,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아주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서 같은 시간에 시작했지만 레이멜의 반도 끝내지 못한 유겐이 신기한 듯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능숙하게 바느질을 할 수 있죠? 세실프 누나 보다 훨씬 잘 하는 것 같은데." 세실프와 비교를 하자 기분이 나빠진 레이멜은 불던 휘파람을 멈추며 외쳤다. "어디다가 나의 바느질 솜씨를 비교하는거야? 나는 말야 스승님 밑에서 마법공부를 할 때, 그 어두운 동굴에서도 손수 후드를 만들던 사람이라고! 지금까지 내 손을 거쳐간 후드만 해도 천장은 엄을 껄? 여자가 되다가 만 세실프에 내 실력을 비교하는 것은 실례란 말이야!" "호오... 그럼 설마 레이멜씨가 입고다니는 후드들이 다 직접 만들었다는 거에요?" 아픈곳을 찔렀린 듯 슬픈 표정을 지은 레이멜은 손등으로 코를 훔치며 대답했다. "흑흑... 견습마법사가 무슨 돈이 있었겠냐. 그래도 마법사 폼은 재고 싶었으니 직접 만들어 입는 수밖에." 바느질에 담긴 슬픈(?) 과거를 밝히던 레이멜은 문득 자신의 뒤로 살벌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있었다. 하지만 돌아 보지 않더라도 그 살벌한 기운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에 급히 몸을 피하며 땅으로 나뒹굴었는데,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이 바느질을 하며 앉아있던 자리에는 날카로운 기형도가 박혀있었다. 등으로 싸늘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레이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 기형도를 날린 주인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핫! 세실프. 그냥 농담 좀 한 것 가지고 뭘 그래." 과연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세실프가 있었다. "누가 여자가 되다가 말았다는 거예욧! 정말 혼이 나봐야 겠군!" 그녀가 화를 거둘 생각을 하지 않자 당황한 레이멜은 아드리안을 향해 도움을 청했다. "대장! 세실프 좀 어떻게 해보라고! 이러다간 카일락스와 싸우기도 전에 엉뚱한 칼에 맞아 죽겠군!" 레이멜의 비명아닌 비명에 바늘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춘 아드리안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쳇 이럴 때만 대장이군. 내가 세실프를 말려주면 내 바느질을 대실 해 줄텐가?" "좋다고, 좋아! 내가 다 해주도록 하지!" 둘 사이의 협력 조약이 성립되려 할 때, 세실프가 아드리안의 바늘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대장! 제가 대신 뜨게질을 해줄테니까 대신 절 말리지 마요! 오늘은 레이멜씨와 담판을 지어야 겠으니까." 이렇게 말을 한 세실프는 그 자리에 앉아서 아드리안이 하다만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를 잃어버린 레이멜은 마른침을 삼키며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세실프와 레이멜의 사이에 껴버린 아드리안만 끔찍하던 바느질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기뻐하고 있었다. 저녁이 시간이 되어서야 공터에서 작업을 하던 이들은 각자 두 개씩의 그물틀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만든 사람에 따라 그 질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뮤스가 직접 상태를 확인했고, 마무리 작업을 해주었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제 모든 작업이 끝나자 아드리안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고, 뮤스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시간이 갈 수록 뮤스가 대단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었는데, 무려 여섯 시간을 쉬지 않고 작업을 했음에도 지친 기색조차 없었고, 오히려 그의 두 눈빛은 시간이 갈 수록 맑아지는 듯 했다. 그들과 함께 앉아 쉬고있던 세실프 또한 뮤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인간 같지도 않군. 대체 뭘 먹고 자랐길래 저렇게 힘이 남아 돌지?" 그녀의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유겐이 문득 세실프의 마음을 떠보 듯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힘이 좋으면 머리라도 나빠야 하는 것 아닌가? 누나... 이 정도면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잖아?" 동생이 질문한 의도를 알고 있던 세실프 였지만 그녀 또한 은연중에 뮤스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부정 할 필요는 없었다. "좀 이상한 녀석이긴 하지만, 능력 만큼은 인정 할 수 밖에... 하지만 녀석이 좋은 건 아니야. 그저 나쁘지는 않을 뿐이지." 무뚝뚝하게 말을 한 세실프는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세실프를 보던 유겐은 그녀가 감정 표현에 서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 뮤스와의 관계가 원만해 지리라는 것을 예감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흐뭇한 생각을 하고 있던 유겐의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희를 돕기 위해 오신 모험자 분들이시죠?" 그 목소리는 최소한 유겐의 기억중에는 없는 것이었는데, 마음의 한 구석을 떨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유겐은 무엇인게 홀리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그렇습니다만..." 그런 마음을 진정 시키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유겐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덥썩 멈추는 느낌을 받게 되었는데, 눈 앞에 서있는 엘프의 미모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는 수줍은 모습으로 서있었는데, 방금 병상에서 일어난 듯 창백한 피부와 눈이 부신 은발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청초한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엘프였다. 그녀는 유겐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일행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는데, 모두들 그녀의 미모에 정신 넋을 잃었기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 듣지 못하는 듯 했다. "저는 이브리엘이라고 해요. 내일 함께 동행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도와 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 이렇게 나왔어요.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을지..." 이곳에 있는 남자들 중 유일하게 그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던 뮤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루시아스님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이곳에 세워 놓은 틀의 그물망에 허술한 것이 없는지 살펴 읍! 으으읍!" 말을 하던 뮤스의 입은 자신의 할일을 마치기도 전에 땀에 흠뻑 젖은 레이멜의 손 안에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어 레이멜의 다급한 귓속말이 들려왔다. "이런 멍청한 녀석! 그런 걸 꼭 저분이 해야하는 건 아니잖아? 나중에 내가 할 테니 지금은 좀 조용히 하라고!" 뮤스에게 의사를 전달한 한 레이멜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정색을 하며 이브리엘을 향해 말했다. "하핫! 이 녀석의 말은 신경쓰지 마시죠. 지금 막 준비를 마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저는 마법사인 레이멜..." 능글맞은 목소리로 이브리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던 유겐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레이멜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브리엘님." 레이멜은 먹이를 빼앗긴 야수마냥 잡아 먹을 듯 눈을 부라렸고, 유겐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브리엘은 눈이 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늦게 나온 모양이군요." 유겐은 제법 점잔은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별로 도울 일도 없었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쯤에서 남 잘되는 모습을 봐줄 수 없었던 레이멜의 방해 공작이 이루어 졌다. "웃기는 녀석일세! 도울 일이 없었다니! 그럼 물집이 잔뜩 잡힌 그 손은 대체 뭐냐?" 하지만 곧 레이멜은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해야만 했는데, 레이멜의 말을 들은 이브리엘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더니 불현듯 유겐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저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일을 하셨다니... 제가 치료를 해드릴 테니 절 따라오세요." 전혀 생각치 못했던 이브리엘의 행동에 얼굴을 붉힌 유겐은 이지를 상실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브리엘의 손에 잡혀 그녀가 이끄는 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겐과 이브리엘이 어디론가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서있던 레이멜은 물집이 빽빽하게 생겨있는 손을 매만지며 허탈한 듯 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이럴 수가. 일은 내가 더 많이 했는데..." 먼 발치에서 이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을 방관하던 아드리안과 큐리컬드는 이미 정상이 아닌 레이멜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내주고 있었다. 카일락스의 서식지로 떠나기로 한 날이 밝아왔다. 아침 일찍부터 엘프들의 마을 전체가 부산스러웠고, 뮤스와 일행들 역시 필요한 물건들을 각자의 숙소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뮤스는 가방에서 한 쌍의 건틀렛을 꺼내어 양손에 착용했는데, 일행들을 만난 이후로 착용해 볼 기회가 없었기에 어색한 느낌이 마저 들고 있었다. 착용 상태를 알아 보기 위해 주먹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뮤스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던 레이멜은 아침 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지 떫은 표정으로 멍하니 않아있는 유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젯밤 멍한 얼굴로 돌아온 이후 부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는 행동이라곤 수도 없이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것 뿐이었다. 그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 레이멜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이 녀석 아무래도 이브리엘님께 반한 것 같군." 초점 없는 눈으로 손을 감은 붕대를 바라보던 유겐은 레이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듣자 마자 반응하고 있었다. "네. 이브리엘님이 어떻게 되셨다고요?" 그의 행동에 어깨를 으쓱여 보인 레이멜은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몸을 일으켰다. "불쌍한 녀석. 원래 첫 사랑은 쓴 법인데..." 의미 심장한 말을 남긴 레이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고, 몸을 풀며 유겐의 행동을 지켜보던 뮤스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측은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출발 할 시간이 되자 공터에는 뮤스의 일행들과 엘프들이 나와 있었다. 엘프들은 카일락스들을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쓴 뮤스 일행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건투를 빌었고, 뮤스 일행들 역시 엘프들의 격려에 답하는 중이었다. 인사가 끝나자 서로 섞여 있던 무리들은 카일락스의 서식지로 출발할 파티들과 마을에 남을 주민들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주민들의 앞에는 엘프 로드가 서서 그들의 출전을 몸소 지켜보고 있었다. 출전 준비를 모두 마친 뮤스 일행들은 어제 만들어 놓은 그물틀을 가운데 놓고 뮤스의 설명을 들을 태도를 취했는데, 대부분의 일행들이 이 큰 그물틀을 어떻게 들고 움직일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손꼽아 기다린 순간이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물틀 옆에 서있던 뮤스는 가볍게 그것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설명을 드렸듯이 이 그물틀은 손쉽게 접었다 펼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힘을 주어 이렇게 다리를 네개씩 나눠 잡은 후 시계 방향으로 빨래를 짜듯이 틀어 주면 이렇게 접히게 되는 것이죠." 뮤스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놀랍게도 지름만 150셀리나 되던 그물틀이 50셀리 남직한 원형으로 변해 버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레이멜이 가장 먼저 자신의 그물틀을 잡으며 따라해 보기 시작했다. "어제는 아무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그런게 가능했단 말이야?" 그를 필두로 다른 일행들 역시 앞에 놓여있던 그물틀들을 하나씩 잡아 뮤스가 하던 대로 따라했는데, 제대로 접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기에 뮤스가 간단한 개인 교습을 해줘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모두들 능숙한 솜씨로 그물틀을 접을 수 있게 되었고, 카일락스의 위협에 대해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게된 일행들이었다. "껄껄! 갈수록 자네의 능력이 탐나는구먼... 얼핏 보기에는 아주 단순해 보여도 금속 막대의 탄성 방향을 치밀하게 계산해야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야." 한 쪽에서 들러오는 감탄어린 그라프의 목소리였지만, 계속 되는 칭찬을 부담스럽게 느끼던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공을 돌렸다. "그저 운이 좋아서 그 금속 막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다지 한 일도 없는걸요." "겸손하긴... 운도 능력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아무든 이제 출발 하세나." 기분 좋게 웃은 그라프는 그물틀을 접어 들며 루시아스에게 걸어갔고, 뮤스는 일행들의 손에 들린 그물틀들을 보며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을에서 나온 뮤스와 일행들은 말을 사용 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도보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엘프의 숲까지 오는 동안의 책임자는 아드리안이었지만 이미 그가 할 일은 마친 상태였고, 이번 카일락스에 관한 일은 그라프와 루시아스가 이끌기로 정해졌기에 가장 앞에는 카일락스의 서식지를 알고 있는 루시아스가 일행들을 인도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의 뒤를 아드리안와 그라프가 바싹 붙어 따르고있었다. 또, 가장 중심에는 전투력이 거의 전무한 이브리엘이 자리하게 되었는데, 그녀를 감싸는 모양으로 나머지 일행들이 뒤따랐다. 뮤스는 여유로운 자세로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처음이 아닌 이유도 있겠지만, 일행들의 능력과 손에 들려있는 그물틀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 여유였다. 반면 레이멜은 항상 여유롭던 모습은 이미 씻긴 듯 없어졌는데, 긴장감이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세실프와 유겐이 나란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실프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유겐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는데,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이브리엘의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을 주시하던 뮤스는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유겐을 믿었기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뮤스의 뒤에는 큐리컬드와 쥬라스가 걸었다. 원래의 계획 대로였다면 쥬라스 역시 이브리엘과 함께 중심에 위치해야 겠지만, 그녀는 뒤에서 다가올지도 모를 카일락스의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이었기에 가장 뒤에 서있는 것이었고, 맨 앞에 선 루시아스 역시 실프를 이용해 앞쪽에서 다가올 카일락스를 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행들이 마을을 떠난지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들은 키가 작은 나무 지대를 벗어나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나무지대에 접어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보다는 조금 삭막하게 느껴지는 숲이었다. 아침 바람에 나뭇잎들이 쓸리는 소리가 잔뜩 긴장해 있는 귀를 자극했다. 그리고 나뭇잎에 부딛히며 갈길을 잃은 바람들은 아래로 떨어지며 일행들의 몸을 식혀 주었다. 아직 이슬조차 마르지 않은 수풀을 간단하게 헤치며 나가던 루시아스가 눈에 익숙한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며 목적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 간다면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쯤 되어 카일락스들의 알이 부화한 로아드 연못에 도착 할 수 있답니다. 평소 엘프들의 달리는 속도로 따진다면 반나절이면 왕복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걸어 갈 수 밖에 없으니, 훨씬 멀어 보이는군요." 루시아스의 설명이 끝나자 다시 일행들 사이에는 긴장과 함께 정적이 흘렀는데, 소리라고는 떨어진 나뭇잎을 밟는 발자국 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비교적 상황에 동요 없이 걷고 있던 그라프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나 조용하지 않은가? 아직 오전이라지만 카일락스 몇 마리쯤은 출몰 할 때도 되었는데..." 그라프의 말을 들은 일행들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기에 귀를 기울여 카일락스의 날개 짓 소리를 들으려 해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다고 여긴 그라프는 루시아스와 쥬라스를 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모르는 일이니 한번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해 보는 것이 좋겠군." "음 그렇게 하세." 그의 말에 동의한 루시아스는 손을 휘저으며 자신이 부리는 실프를 소환해냈고, 루시아스의 행동을 보던 쥬라스 또한 오오라를 발산하며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라프는 뒷짐을 지며 높이 뻗은 나무들 사이로 시선을 옮겼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신성력을 발휘고 있던 중 나직한 탄성을 뱉은 쥬라스는 급히 오오라를 거두어 들였고, 루시아스의 실프 역시 주변을 돌아 보고 돌아온 상태였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높은 나뭇가지들을 살피기 시작하던 루시아스와 쥬라스는 긴장한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움직이지 말게..." "나무에서 천천히 떨어지세요." 갑자기 돌변한 그들의 태도에 일행들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무에 가까이 있는 이들은 조심해서 발걸음을 떼었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이들은 그 자리에 발을 멈추어 섰다. 식은 땀을 흘리며 루시아스와 눈짓을 주고 받던 쥬라스가 입을 열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수백 마리의 카일락스들이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카일락스들의 날개 짓 소리에만 신경을 쓰고 왔다니..." 그녀의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은 일행들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얼어 붙어 버렸다. 일행 중 가장 경험이 없던 이브리엘은 거의 울상이 되어 두려움에 떨기까지 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카일락스들을 깨운다면 모두가 위험에 빠질 텐데 이제 어떻게 하죠?" "그렇게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준 것은 다름아닌 뮤스였는데, 일행들의 시선은 모두 카일락스가 두렵지도 않은듯 여유롭게 걸어다니고 있는 뮤스를 향해 집중되었다. 걸음을 멈춘 뮤스는 손을 펼쳐 보이며 미소지었다. "카일락스는 아직 흡혈을 할 능력이 없어요. 왜냐하면 흡혈하기에는 이곳의 밝기가 너무나 밝기 때문이죠." 그의 말을 들은 그라프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물었다. "분명 카일락스가 야행성이긴 하지만, 지금이 낮이라고 해서 카일락스가 흡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그의 질문을 받은 뮤스는 단 한 마디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만약 카일락스들에게 흡혈을 할 힘이 있었다면, 우리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을 까요?" 명쾌한 뮤스의 증명을 들으며 생각을 해보니 이곳은 엄청난 숫자가 몰려있는 곳이었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그 중심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백마리의 카일락스를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뮤스의 말을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허무한 듯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린 그라프는 탄식을 했다. "허헛. 아무튼 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는 것 같군. 그런 간단한 이치도 생각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으니." 그라프의 탄식을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 본 뮤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태도를 부정했다. "아닙니다. 만약 이곳에서 카일락스의 날개 짓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하고 지나쳤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꼼짝 없이 잠에서 깨어난 카일락스들에게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카일락스의 흔적이 전혀 없는 이런 곳에서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해 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야 말로 그라프님만이 가지신 능력인 것이죠." 뮤스의 말을 듣던 그라프는 자신의 체면을 지켜기 위해 좋은말을 해주고 있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허헛! 이 늙은이를 너무 띄워 주는군. 그럼 자네의 말대로 카일락스들이 깨어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도록 하세." 그의 말을 신호로 루시아스는 다시 안심하며 앞장서 걸음을 옮겼고, 아드리안을 비롯한 일행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잔뜩 붙어있을 카일락스들을 상상하며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제법 해는 어느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카일락스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 일행들은 더 이상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이동속도를 높였는데, 그 덕에 일행들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카일락스들이 모여 쉬고 있던 곳을 벗어 날 수 있었고, 이제는 미리 위험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수시로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하며 이동하는 중이었다. 가장 중간에 서서 비교적 안전하게 이동하고 있던 이브리엘은 언젠가 부터 자신의 뒤에서 걷고있는 뮤스를 힐끔거리며 훔쳐보고 있었다. 하지만 둔감하기로 유명한 뮤스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카일락스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이브리엘의 얼굴만 지켜보고 있던 유겐만이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고,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겐의 두 눈에는 질투라는 이름의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이브리엘이 뮤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유겐은 발걸음을 빨리해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말을 걸었다. "오랫동안 걸으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겐의 목소리를 듣고서 미소를 지은 이브리엘은 오히려 유겐의 손을 내려다 보며 안부를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유겐씨의 손은 좀 괜찮아 지셨나요?" 그녀의 한 마디에 유겐의 입은 귓가에 걸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도 된 듯 했는데, 지금 그의 눈에 이브리엘은 이미 살아있는 천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어지는 말은 그를 바로 지옥으로 떨어트려 주었다. "그런데, 아까도 봤듯이 뮤스군은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신기해요. 나이가 어린데도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으니..." 뮤스에 대해 말을 하는 이브리엘의 눈은 반짝거리며 빛났고, 뮤스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유겐과의 일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있었다. 이에 기가 죽은 유겐은 아무말도 못하며 다시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고, 어께가 축쳐진 그의 모습을 본 레이멜이 물었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군. 그새 누구한테 이브리엘님을 빼앗기기라도 한거야?" "뮤스..." 농담 으로 던진 말에 유겐이 서슴없이 뮤스의 이름을 들먹이자 레이멜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일행들은 지금까지 함께 움직였고,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뮤스와 이브리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난다는 것은 불가능 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야? 설마 이동하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것은 아니겠지?" 그의 물음에 기운 없는 얼굴을 한 유겐은 고개를 힘겹게 들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브리엘님이 뮤스에게 관심이 있어요." "엥? 그럴리가..." 유겐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레이멜의 눈은 저절로 이브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기를 잠시, 유겐의 말대로 이브리엘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뮤스를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유겐의 말을 인정 할 수 있었던 레이멜은 주먹을 불끈 지며 말했다. "이럴 수가... 뮤스는 여자친구가 있단 말이야! 남자 한 명에 두 여자가 붙는 꼴은 이 레이멜님이 봐줄 수 없지. 그러니 나는 유겐 네 편이다.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부탁하라고!" 레이멜의 말을 들은 유겐은 어이없게도 감동을 잔뜩 받은 얼굴이었는데, 어려울 시기에 자신의 편이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였다. 앞서가던 루시아스가 발걸음을 멈추며 뾰족한 귀를 쫑긋 거리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 말고 실프를 소환한 그는 급히 실프를 어디론가 날려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카일락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군요." 루시아스의 말을 확인시켜주듯 뒤쪽에서도 쥬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 20마리 정도가 빠른 속도로 이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요! 어서 그물틀 속으로 몸을 숨기세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가 무섭게 일행들은 등에 매고 있던 그물틀을 펼치며 그 안으로 숨으며 몸을 최대한 굽혔다. 그렇게 카일락스의 공격에 대비를 하고 있는 사이, 한 가운데에는 혼자남은 이브리엘 만이 겁먹은 얼굴로 떨고 있었다. 그물틀을 펼치다 말고 그녀를 본 뮤스는 재빠른 몸짓으로 그녀의 허리에 붙어있는 음향발생기의 버튼을 눌렀다. 음향발생기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 하고서야 뮤스는 자신의 그물틀을 펼치며 몸을 숨겼다. 그리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이브리엘을 향해 외쳤다. "우리를 공격해 오는 카일락스에게 다칠 수 있으니 일행들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떨어지세요! 카일락스가 절대 접근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뮤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브리엘은 두려움이 극에 달한듯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모습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뮤스가 시키는 대로 일행들이 없는 곳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유겐은 그녀보다 더욱 불안한 듯 했는데, 위험한 카일락스들이 날아다니게 될 곳에 맨 몸으로 떨며 서있는 이브리엘을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브리엘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뮤스 너를 가만 두지 않겠어!" 그러는 사이 카일락스의 공격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우웅... 특유의 날개 짓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리고 있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어디서 부터 공격을 해오는지 감을 잡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곧 스스로 격렬하게 안쪽으로 밀리는 그물틀의 모습을 통해 카일락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카일락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뮤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격려히 흔들리는 그물틀 사이로 이브리엘을 살폈는데, 과연 그가 만든 음향발생기의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먼 발치에서 일행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뮤스는 손에 낀 건틀렛을 서로 부딛혀 보더니 일행들에게 외쳤다. "이제 각자 달려들고 있는 카일락스들을 처리하세요!" 말을 마친 뮤스는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 그물이 흔들리고 있는 곳을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건틀렛을 낀 주먹을 통해 카일릭스의 존재를 느낌과 동시에 허공에서 노란 액체가 터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아드리안은 검을 든 손을 내려다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나는 무기라곤 검 밖에 없는데 어떻게 밖에 있는 카일락스를 공격하라는 거야! 안에서 휘둘렀다간 그물이 다 찢어질 거라고!" 그의 목소리를 들은 그라프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허헛! 그런 걱정은 말고 나 처럼 찌르게나! 나노이드잠사는 마음 먹고 자르지 않는 한 신축성 때문에 잘리지 않는다네! 나노이드잠사가 괜히 대단하다고 하는 줄 아나?" 과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니 그라프와 루시아스가 서슴없이 그물망을 향해 검을 찔러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검만이 그물의 틈 사이로 들락거릴 뿐 그물망은 잘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럼 진작 말씀해 주시죠!" 이제서야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 아드리안은 절도있는 자세로 흔들리는 그물망들을 찌르며 공격하기 시작했고, 칼이 움직일 때 마다 어김 없이 카일락스들의 노란색 액체들이 뿜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세실프와 유겐 역시 마찬 가지였다. 두 남매는 그물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모습을 뒤로 하며 똑 닮은 모습의 기형도를 꺼내들며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아드리안과 같이 절도가 있거나 화려한 동작은 아니었지만, 가장 효율적인 거리의 이동로로 기형도를 움직이며 카일락스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가 쉽게 카일락스들을 쉽게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인 레이멜은 별다른 무기가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마법을 쓸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또, 큐리컬드 역시 동료들이 돌아가기 전 건네준 단검들이 있었지만, 카일락스의 대롱침보다 짧은 단검으로 그것들을 찔러 죽이기도 힘들었고, 장소도 좁은 탓에 단검을 던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하고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서로를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쯔쯧. 어이 큐리컬드! 그 자랑하던 단검은 다 어디다가 두고 멍하니 앉아있나?" "그러는 자네야 말로 그 무적이라는 마법은 어디다 두고 모기 녀석들이 설치는 꼴을 보고만 있는거야?" 잠시 후, 자신이 맡고있던 카일락스들을 모두 해치운 일행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험담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는데, 결국 그들이 스스로 카일락스들을 처리 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이 되자 그들을 공격하던 카일락스들을 다른 일행들이 유인하여 대신 해치우게 되었다. 루시아스와 쥬라스를 통해 카일락스가 이제 없음을 확인한 일행들은 그물틀을 다시 접으며 모여들었는데, 밖에서 일행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있던 이브리엘은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렇게 뮤스의 앞까지 걸어온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워낙 겁이나는 바람에 음향발생기의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물틀을 접어 다시 등에 매고 있던 뮤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했을 일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때, 그 모습을 보던 유겐의 눈에는 둘 사이가 그렇게 화기애애해 보일 수가 없었는데, 다시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좌절했고, 그의 옆에 서있던 레이멜은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기에 등을 두들기며 위로를 해줄 뿐이었다. [2002-09-27] 짜가신선 <대공학자> #183~184 로아드 연못. 카일락스들의 첫 공격을 받은 이후로 카일락스들이 활동을 하기시작 했는지, 공격을 받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불과 100멜리도 이동하지 못하고서 뮤스 일행들은 그물틀을 펼쳐 공격을 저지해야만 했는데, 그럴수록 이동속도는 늦어졌고, 일행들의 체력은 고갈되고 있었다. 카일락스들의 공격을 또 한 번 막아낸 일행들은 이제 손버릇 만큼이나 익숙하게 그물틀을 걷어내고 있었다. 큐리컬드는 카일락스의 체액으로 노랗게 물든 그물틀을 보며 인상을 썼다. "대체 몇 마리의 카일락스가 이곳에 살고 있는거야?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원..." 그의 투덜 거림을 들은 레이멜은 팔짱을 끼며 비아냥 거렸다. "자네가 죽인게 몇 마리나 된다고 그래? 다른 일행들이 다 죽였는데 말이야." 레이멜의 말을 듣던 큐리컬드 역시 그의 자세를 따라하며 비아냥 거렸다. "호오! 그래? 정작 카일락스 한 마리 못 잡은 사람은 누군데 어디서 큰소리 실까?" "나야 무기가 없으니 당연한 것 아냐!" "그럼 누구는 마땅한 무기가 있었나?"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서스럼 없는 사이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말싸움을 듣고있던 세실프는 자신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레이멜을 보며 혀를 찼다. "쯔쯧... 이제 나한테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엉뚱한 사람을 잡았군. 그렇지 않아 유겐?" 동생의 의사를 묻고자 했던 세실프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이브리엘과 대화를 하고 있는 유겐이 보였는데, 카일락스와 전투를 벌이고 난 다음에는 항상 이브리엘에게 다가가 안부를 살피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던 동생이 왠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 한켠이 허전해 졌다. "세실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천으로 검에 묻은 카일락스의 체액을 닦아내고 있는 아드리안의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음...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거야? 아. 혹시 샤디올을 닦지 않았으면 나한테 달라고, 어차피 닦는 김이었으니 내가 닦아 주도록 하지." 아드리안의 제의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니 막 전투를 마치고 엉망이 된 샤디올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내저은 세실프는 허공에 대충 카일락스의 체액을 털어내며 칼집에 꽂아 넣었다. "말은 고맙지만 샤디올은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깜빡 했나보죠? 나중에 돌아가서 제가 닦도록 하죠." "아차차! 그랬었지! 내가 깜빡 했군."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라프와 의견을 나누고있던 루시아스가 일행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500멜리 정도만 더 올라가면 카일락스가 서식하는 로아드 연못입니다. 지금 부터는 카일락스의 수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많으니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 하다간 수만 마리의 카일락스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의 말을 듣던 레이멜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그물을 쳐놓고 내일 해가 밝을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요?"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때야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상관이 없었지만, 이곳은 카일락스들이 수만 마리가 우글 거리는 곳일세. 그것들이 우리의 존재를 느끼고 이곳으로 한꺼번에 달려 든다면 아무리 나노이드잠사로 만든 그물이라고 하더라도 견뎌내기 힘들 거야..." 깜짝 놀란 레이멜은 자신의 그물틀을 내려다 보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그물틀로도 안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의 물음에 그라프는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게나. 카일락스 백 마리만 한꺼번에 날아든다고 해도 이 그물틀은 그 힘을 못이기고 튕겨나갈 것일세. 하물며 만마리가 넘는 카일락스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이 그물틀은 이동중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임시 방편일 뿐이야." "이럴 수가! 그럼 저 곳으로 들어갔다간 살아 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잖아요!" 레이멜의 비명과 동시에 일행들의 표정은 모두 침중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던 중 뮤스가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그라프에게 물었다. "그라프님. 카일락스의 유인원(목표를 감지할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라프가 입을 열었다. "음 어디보자... 그렇지 원래 곤충류들은 시각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니 유인원을 반드시 가지고 있지. 모기라면 보통 사람의 숨결을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카일락스들 역시 사람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제대로 짚은 듯 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기들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먹이감은 체취로 감지하게 되고, 간격이 좁아지면 날숨에 들어있는 이산화탄소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 모기는 20멜리 정도 떨어진 이산화탄소를 파악하는 것이 고작인데, 카일락스의 이동거리를 볼 때 일반 모기보다 수십배에 달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숨을 내쉬지 않으면 카일락스들은 우리의 위치를 감지 할 수없다는 것이 되는 것이죠." "정말 그렇군... 하지만 숨을 한번도 쉬지 않고 500멜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잠시 뜸을 들이던 뮤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죠. 저의 말은 이산화탄소에 민감한 녀석들의 습성을 역이용 하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멀리 떨어진 곳에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면, 서식지에 모여있던 카일락스들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있는 곳으로 몰려갈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날숨을 감지하는 카일락스도 있겠지만,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에 가려지게 되니 우리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 진한 이산화탄소에 반응을 하게 되어있죠.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이산화탄소가 그곳에 발생하는 동안에는 카일락스들이 서식지로 돌아오지 않을테니, 그 시간 만큼은 서식지에 카일락스들이 남아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뮤스의 설명을 가장 빨리 이해한 사람은 도적이었던 큐리컬드였다. "하핫!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주인을 밖으로 빼돌려 놓고 빈집 털이를 하자는 것이군!" 미소를 지은 뮤스는 가방에서 초록색의 금속통을 꺼내들며 말했다. "적절한 비유군요. 제게 이산화탄소를 모아놓은 통이 있으니 이것을 이용한다면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뮤스의 말을 듣고있던 그라프의 얼굴은 왠지 생기가 돌기 시작했는데, 뮤스를 통해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백여년 동안 끊임없는 앎을 추구해온 자신이었고, 그 덕에 대륙 최고의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대현자의 칭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에 스스로 만족한 그라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모른는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나머지 여생을 마치고자 잠적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 뮤스라고 하는 나이어린 한 공학도가 발휘하고 있는 놀라운 능력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생의 내리막 길에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열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열이었던 것이었다. "허허... 아직도 나에게 이런 열정이 남아있었다니..." 그라프가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있을 때, 뮤스는 루시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루시아스님. 우회해서 연못으로 갈 수 있는 길이있나요?" "엘프들에게 길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원하는 대로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군요. 저는 이곳에 이산화탄소통을 개방해 놓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카일락스들이 이산화탄소를 느끼고 직선거리로 날아올것이고, 우리는 카일락스를 피해 우회로를 이용해 카일락스의 서식지까지 움직이는 것이죠." 누가 보더라도 기발한 생각이었기에 일행들은 모두 존경스러운 얼굴로 뮤스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유겐만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는데, 갈수록 뮤스를 바라보는 이브리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뮤스를 바라보고있던 이브리엘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혼잣말로 유겐의 마음에 다시 한 번 비수를 꽂았다. "어쩜 저렇게 기발한 생각을 해낼까? 정말 볼 수록 멋져." 이번에는 그녀의 말을 직접들은 레이멜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유겐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심상치 않은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유겐 너도 공부 좀 해두지 그랬냐."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레이멜의 신경을 거슬리는 목소리에 소리를 빽 질렀다. "저런게 공부한다고 해서 되는 거예요! 이 세상 어느 책에 저런게 나와요?" 토라진 유겐은 애꿎은 풀더미를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뮤스는 이산화탄소통 설치를 끈내며 손을 털었다. "이제 루시아스님 먼저 길을 안내해 주시죠. 출발하시면 제가 이산화탄소를 개방한 후 따라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스가 일행들에게 손짓을 하며 우회로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뮤스에게서 눈을 뗀 일행들은 그의 뒤를 따랐고, 그 자리에는 뮤스만이 남아 일행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 할 때까지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 한 뮤스는 이산화탄소가 든 통의 입구를 돌리며 개방했다. "잘 부탁한다. 딱 한 시간만 버텨다오." -취이이익... 이산화탄소가 세어나오는 소리를 귀로 확인한 뮤스는 방출되는 양을 대충 계산하여 조절했고, 적당하다 싶을 정도가 되자 일행들이 사라진 곳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떠난 일행들은 조금 거친 길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다니지 않던 우회로였기에 수풀이 다른 곳 보다 무성했지만, 앞장을 선 루시아스가 능숙하게 치워줬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걷던 중 그라프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뮤스군은 합류하지 않았나?" 그의 말에 가장 뒤 쪽에 위치한 쥬라스가 대답했다. "네 아직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라프는 앞서서 길을 트고있는 루시아스를 향해 말했다. "뮤스군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렸다 가는 것이 어떤가? 혹시 길을 잃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 "흠 그렇다면 내가 실프를 보내 뮤스군을 안내하도록 하지. 실프!" 말이 끝나자 마자 손가락을 움직여 실프를 소환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푸른 실프가 나왔고, 루시아스가 무엇이라고 속삭이자 실프는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뮤스군을 찾아서 데리고 올것일세." 실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라프는 가벼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의 실프는 언제나 봐도 부럽군. 실프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매번하고 있더네." "하핫. 뭐 익숙해 지다보면 특별히 편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네. 이런 것이 있는 자의 여유라는 것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 사이로 아드리안이 끼어들며 말했다. "루시아스님, 그라프님 소리를 한 번 들어 보시죠!" 그의 말과 함께 일행들은 숨을 죽였다. 그러자 숲 전체가 울릴 정도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엄청난 숫자의 카일락스가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라프는 급히 쥬라스에게 눈짓을 했고,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있엇던 그녀는 눈을 감으며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군의 유인이 성공한 것 같아요. 지금 엄청난 숫자의 카일락스들이 몰려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귀를 기울여 일행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때, 그들이 지나온 길에서 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군요. 그렇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 어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는 루시아스가 보낸 실프와 함께 수풀을 헤치며 걸어오는 중이었는데, 혼자 숲을 헤매게 되었는지 옷과 머리에 잔뜩 나뭇잎들이 붙어있었다. 그를 보던 레이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핫. 아무래도 모습을 보아하니 길을 잃은 것 같군. 너도 못하는 것이 있다니 이거 놀라운걸?" "저라고 다 잘하는 줄 아세요? 원래 사람마다 전문 분야가 있는 거라고요." "흠... 그렇다면 불공평하게도 네 전문 분야가 너무 좋군. 내 전문 분야가 놀고 먹는 것인데 비한다면 말이야." 그의 우스갯 소리에 일행들은 잠시나마 여유롭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제 뮤스까지 합류하자 루시아스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카일락스들이 이 일대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자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일행들이었다. 로아드 연못에 다가감에 따라 주변은 자욱한 물안개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야를 크게 방해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갈 수록 안개가 짙어져 갔기에 이동 속도는 점점 늦어졌고, 조금 더 전진하자 땅 또한 점차 질퍽해져 더욱 움직임을 방해했다. -처벅, 처벅... 발이 진득하게 달라 붙는 느낌이 좋지 않자 레이멜은 신경질 적으로 발을 들며 루시아스에게 물었다. "이런 진흙바닥이 있는 것을 보니 거의 다 온것 같은데 아직 멀었나요?" 그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걸음을 멈춘 루시아스는 물안개가 자욱한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로아드 연못입니다." 일행들은 안력을 돋구어 루시아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안개로 인해 가려져 진흙바닥이 계속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그 곳에서 찰랑거리는 물결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안개때문에 그 규모는 짐작 할 수 없었고, 다만 생각하던 연못의 크기보다는 상당히 커서 오히려 호수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못의 전경을 훑어 보던 그라프는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그리곤 그것을 이브리엘에게 건네주었는데, 막상 이브리엘 본인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 줄 모르는 눈치였다. "이게 무엇이죠?" 그녀의 반응에 빙그레 웃은 그라프는 연못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약은 카일락스의 번식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저 연못에 이 병에 든 약을 뿌려주기만 하면되니 네가 직접 하거라." "제..제가요?" "네가 뿌린 씨앗은 네가 거두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느냐?" 잠시 생각을 하던 이브리엘은 손에들린 약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라프님." 손을 내저은 그라프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못 까지 가는데 길이 좋지 않으니 누가 이브리엘과 같이 가주게나." 그라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유겐이 손을 들고 나섰다. "제..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레이멜은 그의 가상한 용기와 집념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걸. 역시 유겐은 용기의 사나이야!" 이제 모든 준비가 되자 그라프와 루시아스는 양 옆으로 비켜주며 연못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고, 유겐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발디딜 곳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약병을 든 이브리엘이 뒤따르기 시작했는데, 약 20멜리 쯤 떨어져있는 연못으로 향하는 그들을 일행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유겐은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이브리엘이 자신의 등 뒤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뿌듯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물안개를 헤치며 걸어가던 유겐은 이제 연못의 물가에 닿았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앞에 서게 된 유겐은 엄청난 광경에 입을 쩍 벌려야만 했는데, 약 20셀리 정도 되는 길죽한 물체들이 연못의 둘레로 빽빽하게 차있는 것이었다. 유겐은 그것이 카일락스의 유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이브리엘이 놀랄 것을 대비해 몸을 돌린 유겐이 말했다. "지금 수면 위로 엄청난 수의 유충들이 떠있습니다. 그러니 미리 마음의 각오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섬세한 그의 배려에 이브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네 고마워요 유겐씨." 한숨을 가볍게 내쉰 이브리엘은 마음의 준비를 한 듯 유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와 함께 그녀는 유겐이 말하던 카일락스들의 유충들을 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충격이 컸는지 고운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음... 징그럽군요." 하지만 유겐의 눈에는 찡그린 그녀의 얼굴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 보이고 있었다. 유겐이 넋을 빼고 있을 때, 이브리엘은 큰 마음을 먹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손에 든 약병의 뚜껑을 연 그녀는 천천히 병을 기울이며 노란색의 액체를 물속으로 쏟아 부었다. 그와 동시에 노란 액체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고, 멀리 퍼질 수록 색은 옅어져 처음 그랬던 것 처럼 투명 함을 회복했다. 이제 카일락스에 대한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가까이 있던 카일락스의 유충 한마리가 껍질을 깨며 부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목격한 이브리엘은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다. "꺄아악!" 급히 몸을 뒤로 빼내려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발을 잘못 딪게 되었고, 균형을 잃으며 연못 쪽으로 넘어지게 되었다. -첨벙! 넋을 놓고 있던 유겐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급히 정신을 차려보니 이브리엘이 무릎까지 오는 곳에 빠져있는 것이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놀란 유겐은 물 속으로 뛰어 들었고, 흠뻑 젖어있는 그녀를 재빨리 안아들고서 그곳을 빠져 나왔다. 옷이 물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솜털 처럼 가볍다고 생각하는 유겐이었다. 물안개 넘어로 이 이브리엘이 갑작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크게 놀란 듯 했는데, 금새 유겐이 그녀를 안고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라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유겐! 대체 무슨 일인가?" 그의 물음에 이브리엘을 안고 나온 유겐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 놓으며 말했다. "카일락스의 유충이 부화하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그라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브리엘에게 말했다. "허어... 그래 약은 모두 연못에 풀었느냐?" 비록 물에 젖어 모양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간 자신의 고민이 해결 되었음에 기뻐하며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네. 그라프님 덕분에 일이 해결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뭘 한것이 있다고... 여기 일행들에게 고마워 하거라." 이제야 희색을 찾은 그녀를 보며 그라프와 루시아스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일행들 역시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뮤스만은 딱딱한 표정으로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제 이산화탄소가 거의 떨어질 때가 되었어요. 카일락스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급한지 잘 알고 있던 루시아스가 말했다. "지금까지 온 길을 포기하고 그 곳에서 1켈리 떨어진 우회로를 이용할 테니 될 수 있는 한 빨리 저를 따라오시죠. 그럼 서두릅시다." 더 이상 지체 할 시간이 없었던 일행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시아스의 뒤를 따라서 왔던 길의 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자자작! 촤자작! 할 일을 마치며 마을로 돌아가는 뮤스 일행들은 거리낄 것 없는 몸짓으로 숲속을 달리고 있었다. 일행들 모두 숨이 조금씩 가빠오긴 시작했지만, 이제 곧 그들의 뒤를 쫓을 카일락스와의 거리를 최대한 넓히기 위해 힘을 짜내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던 큐리컬드와 레이멜은 이렇게 달리는 와중에도 쉴세없이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헉헉! 레이멜! 생각보다 잘 달리는군. 헉헉! 지금까지 마법한번 쓰는 걸 못봤는데, 이번 기회에 전사로 전향해 보는게 어때?" "하아! 하아! 자네야 말로 정말 잘달리는 군! 도둑질 할 때 얼마나 도망을 잘 다녔는 지 보지 않아도눈에 선하군! 아이고 죽겠다!" 그들이 앞서가는 사이 아드리안과 유겐은 일행들의 가장 뒤를 맡고 있었는데, 체력적으로 남자에 비해 딸리는 여자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지켜보기 위한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명문가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만큼 기사도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지만, 유겐은 그 여인들 사이에 이브리엘이 속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 하고 있는 중이었다. 쥬라스의 뒤를 돌보며 달리고 있던 아드리안이 물었다. "쥬라스 사제님. 달리면서도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이미 숨이 턱아래까지 찬 쥬라스는 호흡조절을 하고 나서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달리는 중에는 무리예요. 카일락스들의 낌세가 있나요?" "제 귀가 잘못 됐는지 옆쪽에서 카일락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옆에서요?" 아드리안이 던진 한 마디 말에 일행들은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아드리안의 말대로 달리고 있던 왼쪽으로 부터 카일락스의 날개 짓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어 그라프는 자신의 그물틀을 꺼내며 일행들에게 외쳤다. "모두들 몸을 숨기게! 그리고 쥬라스 사제는 확실한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해 주게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일행들은 일사천리로 카일락스의 공격을 방어할 채비를 했고, 신성력을 발하던 쥬라스는 카일락스의 위치를 파악하며 참담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알렸다. "이런... 아무래도 그곳에 모여있던 카일락스들이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수가 엄청나서 파악이 불가능 할 정도예요!" "이런 제길... 기껏 일을 다 끝냈다고 생각했더니..." 일행들이 자신들의 그물틀을 펼쳐 안으로 몸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지 멀리 피해있던 이브리엘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는데, 지금 까지 몇번의 카일락스의 습격을 경험했었지만,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물틀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유겐이 외쳤다. "이브리엘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허리 춤을 매만지던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향생성기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요! 어떻게 하죠?" 역시 그물틀 안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는 둔중한 무엇인가로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런! 물에 빠졌을 때 고장이 난것이군! 이 일을 어떻게 하지?"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생각할 시간이 넉넉치 않았기에 일단 어떻게든 행동을 취하고 봐야만 했다. 이브리엘을 향해 급히 손짓을 한 뮤스는 자신의 그물틀을 들어올리며 밖으로 몸을 날렸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던 일행들은 크게 놀라며 뮤스의 행동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브리엘이 뛰어오는 것을 보며 외쳤다. "이브리엘님 제 그물틀 안으로 어서 피하세요!" 그의 말을 들은 이브리엘은 급한 마음에 서둘러 뮤스의 그물틀 안으로 몸을 피했고, 결국은 뮤스만이 카일락스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일행들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뮤스! 무슨 짓을 하는거야!" "어서 그물틀 안으로 들어오란 말이야!"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조금 있으면 카일락스들이 몰려든단 말이야!" 그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으쓱 거린 뮤스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잖아요. 어차피 그물틀 하나에 두 명이 들어가는 것은 무립니다. 그리고 제가 이브리엘님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했으니 책임을 질 수 밖에요." 뮤스는 왠지 지금의 상황이 전뇌거 경주 때의 상황과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쳇... 꼭 몸으로 때우는 건 왜 내가 해야 하는 건지..." 무방비로 카일락스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중 세실프가 가장 큰 충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녀가 우습게 생각하며 깔보던 뮤스의 모습은 지금 위험의 앞에서 당당히 서있는 그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세실프는 주먹을 쥐며 외쳤다. "바보같은 녀석아! 목숨이 그렇게 우습냐! 혼자 잘난 척 하고 말이야!" 세실프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세실프 누님께는 끝까지 좋은 소리는 못듣는 군요. 그리고 누가 죽으로 나왔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어차피 이정도 숫자의 카일락스를 그물틀로만 막아 낼 수 없다는 것 아시잖아요! 제가 카일락스를 유인하면 모두들 최대한 빨리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알았죠?" 레이멜은 더듬 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너 혼자 죽으려는 거 아냐!" 하지만 뮤스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가방에서 또 하나의 이산화탄소가 든 통을 꺼내들며 뚜껑을 돌려 그것을 개방했다. -쉬이이이익! 이산화탄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 한 뮤스는 일행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들 몸조심 하세요! 남은 카일락스들은 여러분들 이라면 충분히 처리 할 수 있을 거에요!" 말을 마친 뮤스는 숨을 한번 몰아쉬며 빠르게 일행이 움직이는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고,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일행들은 울컥한 마음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이브리엘은 자신 때문에 뮤스가 위험을 무릅쓴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카일락스일 때문에 생긴 죄책감을 벗자 마자 또 다른 죄책감을 다시 가슴에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저 때문에... 뮤스군이." 그라프는 그녀의 어께를 두들기며 위로했다. "네가가진 음향발생기가 고장나지 않았더라고 해도, 뮤스군은 그물틀 만으로 그 많은 카일락스들 막기 역부족인 것을 알았기에 지금 처럼 뛰쳐 나갔을 것이란다." 눈물을 손등으로 살짝 닦아낸 이브리엘은 그라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정말 그랬을 까요?" "물론이지. 자 우리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은 그라프는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고, 서둘러 다른 일행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뮤스군은 아무일도 없을 것일세! 지금까지 그의 능력을 봐왔지 않는가? 그러니 서둘러 우리도 이곳을 떠야 할 것이야." 그는 긍정적으로 말을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뮤스라고 해도 만마리에 육박하는 카일락스를 피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워 하는 중이었고, 슬픈 눈으로 뮤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아드리안도 그라프의 말에 냉정심을 되찾으며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그라프님의 말씀이 맞네. 뮤스가 우리를 위해 위험을 떠 맡았는데 이렇게 멍하니 있는 것도 할 짓이 아니지. 먼저 돌아가서 뮤스를 맞아 주도록 하자고!" 겉으로는 그의 말에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위로를 해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라프와 아드리안의 말대로 이곳에 계속 머물게 된다는 것은 뮤스의 헌신을 의미 없이 한다고 생각하며 슬픔을 뒤로 접은 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숲속의 생명체들이 달콤한 잠을 자고있을 깊은 밤이었지만, 때 아닌 소란에 몸살을 겪고 있었다. 뮤스와 헤어진 일행들은 그물틀을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접으며 빠른 이동을 위해 그들을 쫓고있는 카일락스들과 직접 싸우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로 인해 숲속에는 고함소리와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투력이 없는 일행들을 가운데 두고서 바깥쪽을 보며 둥글게 서있었는데, 중심에 있는 쥬라스와 루시아스가 카일락스의 대략적인 위치를 바깥쪽의 동료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숙련된 자신의 감각만으로 카일락스들과 싸우는 중이었지만 재빠른 카일락스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겨우 방어만 하고있는 실정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느라 곤욕을 치루고 있던 아드리안은 욕지거리를 하며 검을 휘두르고있었다. "제길! 눈으로 볼수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텐데! 레이멜 어떻게 좀 해보라고!" 아드리안이 소리를 치자 레이멜은 짜증이 나는 말투로 대답했다. "대체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나도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레이멜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큐리컬드는 단검을 하나 던지며 말했다. "이 사이비 마법사야! 나는 벌써 열 두마리 째라고! 자네도 뭘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 이상한 마법사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지만 사이비 마법사라는 말은 처음 이었기에 화를 삭히지 못했던 레이멜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라고! 카일락스가 보이질 않으니 자네가 열 두 마리를 잡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제기랄 사이비 마법사라니!"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큐리컬드의 말을 반박하고 있을 때 그의 등 넘어로 그라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레이멜! 이럴 때 페럴라이즈(적을 마비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마법)를 쓰면 될 것 아닌가!" 씩씩거리던 레이멜은 그라프의 말을 듣고서야 스스로의 머리를 두들기며 탄식을 했다. "아! 페럴라이즈! 왜 그 생각을 못했을 까! 역시 대현자님 다우시군요." 다시 단검을 던져 카일락스를 떨어트린 큐리컬드는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마법사을 쓰면 뭐하나? 경험을 쌓아서 필요한 곳에 마법을 쓸 수 있어야 진정한 마법사지! 뭔가를 알아 냈으면 어서 이 녀석들 좀 해결 하라고! 이렇게 죽이다간 끝도 없겠어!" "자네가 입만 좀 다물면 훨씬 빨리 마법을 걸 수 있을 걸?" 끝까지 큐리컬드의 말을 되받아 친 레이멜은 손으로 재 빨리 도형을 그리며 마나를 분배를 하기 시작했다. "가이스트, 리브 운트 라이브스크라프트 홀텐! 페럴라이즈!" 그리고 마법 시동어를 외치며 보란듯이 큐리컬드가 악전분투하고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손 끝에서 빛이 감도는 도형이 생기며 푸른 섬광이 쏘아져 나갔는데, 동시에 무엇인가가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기고만장 해진 레이멜은 거만하게 손을 허리춤에 올린채 대소했다. "하하핫! 큐리컬드 어떤가? 이 레이멜님의 실력이?" 하지만 큐리컬드의 대답소리는 들려오지 않자 이상한 기분에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단검을 휘두르던 모습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큐리컬드까지 자신이 건 마법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재빨리 그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줘야만 했고, 레이멜은 제법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큐리컬드에게 욕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실프와 유겐 남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비록 재빠른 몸놀림에 뛰어난 감각이었지만, 그것 만으로 보이지 않는 카일락스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상황은 시간이 지날 수록 일행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뮤스가 큰 무리의 카일락스를 유인해 갔음에도 상당 수의 카일락스들이 그들을 쫓아왔고,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던 카일락스들이 합세하면서 조금씩 늘어 이제는 백 마리에 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아드리안의 비명성이 숲을 흔들었다. "아악! 크윽! 제기랄 당했군!" 거칠게 뱉은 신음성과 함께 검을 휘두르고 있던 아드리안은 왼 팔을 부여 잡으며 일행들이 몸을 피해있는 안쪽으로 들어왔고, 그가 맡고있던 자리를 세실프가 메꾸어 주었다. 아드리안에게 급히 다가간 쥬라스는 그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왼쪽 팔꿈치 아래로 손톱만한 구멍이 뚫려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쥬라스는 손으로 오오라를 끌어 모으며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만물의 생명은 주신께 속한 것이고, 그들의 존재이유 또한 주신을 위한 것이니... 이 가여운 존재에게 한 줄기의 빛을 내려 주시길..." 그녀는 오오라를 발출하고 있는 손으로 아드리안의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것이 반복 될 수록 고통은 줄어들고, 피가 멈추었으며, 상처에서는 새 살이 조금씩 돋아 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아드리안의 상처는 감쪽 같이 사라졌고, 쥬라스의 안색은 지쳐버린 듯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하아.. 이제 상처와 카일락스의 독소는 모두 치유했지만, 아직 힘을 쓸 수는 없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쥬라스 사제님." 쥬라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아드리안은 딱딱한 표정으로 힘겹게 카일락스에게 대항하고 있는 세실프와 유겐에게 말했다. "세실프! 유겐! 이대로는 우리가 당하고 말겠어! 어쩔 수 없이 너희들이 샤디올의 힘을 사용하거라!" 전투중에 아드리안의 말을 들은 세실프와 유겐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결심을 굳힌 듯 했다. "좋아요! 모두들 멀찌감치 피해 있으세요! 유겐 시작하자!" 세실프는 말을 끝맺으며 손에 들고 있던 기형도의 손잡이를 잡아당겼고, 그녀의 신호를 들은 유겐 역시 같은 모습으로 기형도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기형도는 붉은 빛을 사방으로 뿜으면서 신기하게도 그 모양이 변했는데, 더 이상은 기형도가 아니었고, 곧게 뻗은 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그라프는 그것의 정체를 눈치 챈 듯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생명을 빨아먹고 산다는 마의 쌍검 샤디올이었다니... 어떻게 저 남매가 저 저주받을 물건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라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샤디올이라는 이름을 고대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들었다면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을 쏟아 부을 이름이었다. 애초 샤디올은 한 쌍의 검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그것의 탄생은 아주 먼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의 능력을 인정 받던 장인 형제가 서로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똑같은 모양의 검을 만들기 시작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들 장인 형제는 자신들의 명예가 걸린 만큼 모든 실력을 쏟아 부으며 반 평생에 걸쳐 샤디올을 완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성 된 두 개의 샤디올은 모든 면을 비교해 보아도 어느 하나 뒤처지는 것이 없었기에 자존심이 상한 형제는 결국 서로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화가 머리 끝까지 나버린 장인 형제는 이지를 상실하고서 각자의 손에 들린 샤디올을 사용해 서로를 찌르게 되었고, 그렇게 형제의 피맛을 본 샤디올은 스스로 살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후, 세상에 흘러든 샤디올은 그것을 지닌 주인의 생명력과 이지를 빼앗아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이를 본 고위마법사가 마법으로 샤디올을 봉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물건이 뜻하지 않게 이런 곳에 나타 났으니 그라프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라프의 경악성을 듣던 아드리안은 세실프 남매를 바라보며 착찹한 표정을 지었다. "저 남매들 역시 샤디올의 봉인을 열게 되면 생명이 줄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사용을 자제 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안쓰러운 그들의 눈빛을 뒤로 하고, 세실프와 유겐은 붉은 광망을 뿜으며 샤디올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남매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숲 조차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없는 빠른 몸놀림으로 허공을 베어가는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로 검무를 추는 듯 했고, 공기를 가르는 바람소리가 날 때 마다 샤디올의 움직임을 미쳐 인지하지도 못한 카일락스들은 체액을 뿌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촤아아악! 푸드드득!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초록색의 풀로 덮여있던 땅은 이제 노란색의 액체로 뒤덮여있었고, 반토막이 된 카일락스들은 내장을 쏟으며 나뒹굴며 처참한 모습이었는데, 잠깐의 검무가 백여마리에 이르는 카일락스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제 목표를 잃은 샤디올은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먹이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피냄새를 발견하고 일행들을 향해 세실프와 유겐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던 아드리안은 품속에서 초록색의 가루를 꺼내어 그들에게 뿌렸다.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가루를 들이킨 세실프와 유겐의 몸은 힘을 잃은 듯 그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그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하고서야 아드리안은 안심했다. "휴우... 결국 카일락스들을 깨끗이 처리했군요. 큐리컬드, 레이멜 저들을 옮기는 것좀 도와 주겠나?" 그의 말에 넋을 잃고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큐리컬드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털며 말했다. "이럴 수가...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어찌 사람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레이멜 역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휘유! 역시 괜히 공작가에서 고용한 것은 아니었군. 대충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것이라고는..." 잠시 놀란 가슴을 가라 앉힌 그들은 각자 세실프와 유겐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그들이 떨어트린 샤디올을 주워 들려고 할 때 아드리안이 급히 말렸다. "만지지 말게! 주인 외의 인물이 만졌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의 말에 섬뜩한 기분을 느낀 레이멜과 큐리컬드는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 때, 쥬라스가 샤디올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며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제가 이것을 좀 봐도 될까요?" "하지만 주인이 아닌자가 만지면 위험하다고..." 걱정이 담긴 그의 말을 들은 쥬라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신성력을 가진 사제예요. 그러니 마력으로 저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죠." 대충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쥬라스는 천천히 땅에 떨어져 있는 샤디올을 주워 들었는데, 과연 샤디올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해서 겨우 위기를 마친 일행들은 너무 이곳에서 지체를 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세실프와 유겐을 업은 두 남자는 그것이 불만 인듯 쉬지도 않고 투덜 거리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85~186 생자(生子)의 무덤. -쉬이이익! 귀를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쉼 없이 숲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는 듯 했지만,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 조차 없는지 수시로 방향을 전환하기도 했다. 그의 뒤를 웅장한 소리가 뒤쫓고 있었다. 아무런 형체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듣고 있는 사람의 심장을 바짝 타게 만들 법 했다. -파바박! 파박! 인영의 발 놀림은 참으로 경쾌했고, 지친 기색도 없었다. 마치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야생마를 보는 듯 했는데, 어찌 보면 그만큼 자유스러워 보이기 까지했다. 그가 조금 더 달려 나가자 나즈막한 개울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몸을 날렸을 때, 인영의 얼굴은 달빛에 비춰졌고, 검은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뮤스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었다. 뮤스는 벌써 30분째 카일락스들에게 쫓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속으로 지금까지 달린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최소한 15켈리 쯤은 달렸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엇다. 하지만 카일락스의 추적을 효율 적으로 피하기 위해 방향을 수시로 바꿨기에 직선거리는 얼마인지 추측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 쯤이면 카일락스를 유인하는데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한 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이산화탄소통을 멀리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카일락스는 없는 듯 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벌써 나를 눈으로 쫓고 있었군!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 서늘한 느낌이 등으로 부터 전해졌고, 거의 본능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러자 무엇인가가 그의 귓볼을 스치는 느낌이 전해졌는데, 그것이 카일락스의 날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제기랄!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뻘써 따라 잡혔군!" 카일락스와의 거리가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들을 동원해 이 위기에서 빠져 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인가가 떠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는 혼잣 말로 스스로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침착해라 뮤스야... 침착..." 이렇게 말을 할 때 마다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던 카일락스의 날개 짓 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고, 눈동자에 스치는 사물들은 점차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가방 안에 넣어둔 물건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하나만 있으면 되는거야. 그런데 그것이 무엇일까." 도무지 생각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뮤스는 무작정 가방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의 손에는 드워프들이 준 연장 부터 갖가지의 옷들, 그리고 그가 만든 소형의 전뇌기기들이 잡혔고, 언제나 잠자리를 따뜻하게 해주던 방수모포도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손이 방수처리를 한 모포에 닿는 순간 무엇인가가 번뜩이며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 임시로 이걸 사용하면 되겠군!" 득의의 미소를 지은 뮤스는 거침 없는 손놀림으로 모포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의 끝을 조금 찢었는데, 얇은 천의 사이로 은색의 금속 막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뮤스는 천의 사이에 있던 금속막을 꺼내기 위해 천을 양쪽으로 뜯어내었다. 바람에 휘날려 뛰는데 방해를 하던 천을 던져버린 뮤스는 금속 막을 뒤집어 쓰며 말했다. "빌어먹을 카일락스들 멋지게 구워 주도록 하지! 뇌공력 5성 발출이다!" 외침과 함께 그의 손을 타고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고 있엇는데, 엄청난 양의 전뇌가 금속 막을 타고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빠지지직! 빠직! 그리고 그를 공격하기 위해 날아들던 카일락스들은 고압의 전뇌가 흐르고 있는 금속막에 닿자 마자 불꽃을 튀기며 노린내를 풍겼다. 카일락스는 금속막에서 흘러나오는 열과 전뇌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속도를 조금 늦추며 뮤스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적게잡아도 몇 천마리나 되는 카일락스들을 상대 할 수는 없었는데, 달리는데 이용하는 뇌공력의 손실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언제 뇌공력이 고갈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금속막으로 카일락스와의 거리를 넓히는데 성공한 뮤스는 한숨을 돌리며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다시하기 시작했다. 바슈는 마을 앞의 나무 위에 앉아서 어두운 숲속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카일락스의 서식지로 떠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들이 떠난 후 따라나와 아직까지도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안오실까. 설마 일이 잘못 된건 아니겠지? 무슨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자책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기다림에도 끝이 없었고, 아무런 소식도 없자 점차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지울 수 없었다. 그 때, 빛이 거의 없던 숲에서 푸른 색 불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기다림에 지쳐 헛것이 보이는 것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눈을 몇 번 꿈뻑 거린 후 다시 바라봤지만 그가 처음 본 대로 확실히 실프가 내뿜는 빛이었다. 이에 뛸 듯이 기뻐한 바슈는 공중회전을 하며 나무에서 뛰어내렸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급히 자신의 실프를 소환한 후 마을로 보냈다. "역시 성공 하셨나 보군!" 기쁜 마음에 실프의 불빛이 있는 쪽으로 뛰어간 바슈는 곧 초췌 한 몰골의 루시아스와 일행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외쳤다. "루시아스님! 돌아오셨군요!"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바슈를 발견 할 수 있었고,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나와있었나? 설마 다른 엘프들도 지금껏 우리를 기다린건 아니겠지?" 그의 물음에 무슨 말이냐는 듯이 말했다. "설마라니 그게 무슨 말슴이십니까? 당연히 루시아스님과 일행분들께서 사지에 나가 계시는데 마을의 엘프들이 어떻게편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나저나 일은 성공셨습니까?" 바슈는 대답을 기다리며 루시아스와 일행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또래인 이브리엘에게 눈치를 주며 대답을 기다려 봐도 그녀 역시 대답을 꺼려했다. "설마... 실패 하신 건가요?" 무거운 한숨을 내쉰 루시아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군." 대답을 미루는 루시아스의 말에 바슈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카일락스의 서식지에서 돌아온 일행들은 엘프 로드의 집에 모두 모여 있었다. 루시아스와 일행들이 카일락스의 서식지에 다녀 온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는데,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온 상태였기에 행색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그 중 유겐과 세실프의 몸에서는 특히 악취가 심했는데, 카일락스의 체액이 질퍽한 땅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중에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시아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뮤스 생각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까지도 그들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모르는 엘프들은 카일락스의 서식지에 간 일이 잘못 된 것으로 알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조용히 내려 앉아있던 실내의 침묵이 깨어졌다. "저희들은 카일락스의 서식처로 가는 도중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딛혔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함께 갔던 뮤스군의 도움으로 극복 할 수 있었고, 결국 카일락스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엘프들은 긴장하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환호했고, 로드 엘프 역시 임무를 확실히 이행한 그들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헛! 모두들 수고 했구려. 헌데, 피곤해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좋지가 않은 것 같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로드 엘프의 물음에 고개를 한번 가볍게 숙여 보인 루시아스가 일의 자초지정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카일락스에게 쫓기던 일을 시작으로, 이브리엘의 예기치 못한 사고, 그리고 뮤스가 위험을 무릅쓰며 일행들을 위해 카일락스를 유인하는 이야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뮤스의 희생을 이야기 듣던 엘프들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처럼 슬퍼했고, 심지어는 눈물까지 머금은 엘프도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추모의 분위기로 흘러가자 눈물을 참고 있던 이브리엘이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렸고, 언제나 넉살 좋던 레이멜과 큐리컬드 역시 눈물이 팽도는 것을 느꼈다. 아드리안과 세실프 남매는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지만, 뮤스의 밝게 웃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리고 있었다. 감탄 섞인 표정으로 루시아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프 로드는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 시기기 위해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뮤스라는 청년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했었구려... 그런 인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하늘도 슬퍼할 일이오. 비록 그 시신은 못 찾겠지만, 엘프의 뜰에 뮤스군의 가묘를 만들 도록 허락 하겠네." "감사합니다 로드." 루시아스는 엘프 로드의 말에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 엘프는 보통 죽고 나면 자연으로 돌아 간다는 의미로 화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엘프족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한 영웅에 대해서는 그 영혼이 이곳에 남아 새로 태어날 엘프에게 깃들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니 뮤스의 가묘를 엘프의 뜰에 만든다는 것은 그를 엘프족의 영웅으로 인정하는 뜻이었으니 대단한 것이었다. 엘프 로드와의 면담을 끝낸 일행들은 기운 없는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나왔다. 레이멜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덜, 터덜 걸었고, 그의 뒤로 큐리컬드가 따랐다. 힐끔 뒤를 바라본 레이멜이 말했다. "이봐 도둑. 오늘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 할까?" "후훗. 사이비마법사께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제안을 하시는군." 큐리컬드 역시 술이 생각이 절실히 나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 였고, 그들은 술을 얻기 위해 엘프의 식당으로 걸어갔다. 세실프는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짜증 스럽게 느껴지는 듯 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옷에서 냄새도 나고, 머리도 엉망이고, 신발도 다 젖었잖아! 제길! 이놈의 풀은 왜이렇게 길죽하게 자라난 거야? 이 돌맹이도 생긴게 너무 모나 있어서 마음에 안들어!" 누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유겐은 그녀가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을 키워준 할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도, 슬픔을 참기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것을 봤었기 때문이었다. 유겐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이 순간 만은 이브리엘에 대한 생각 보다는 뮤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는데, 언제나 쑥스럽게 웃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이 그리워진 것이었다. "바보같은 녀석. 혼자 영웅이 되고 멋지게 사라져 버리다니." 오늘은 왠지 밤하늘을 보며 무성한 풀위에서 자고 싶다고 느끼는 유겐이었다. 그라프와 루시아스는 착찹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아스는 뒷짐을 지며 앞서 걸어가고 있는 그라프를 보며 말했다. "내일 이라도 당장 엘프의 뜰에 가묘를 만들어야 겠네. 그의 영혼이 쉴수 있는 곳을 빨리 만들어 주고싶군." 그의 말에 그라프는 한 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허어... 이미 세상을 뜬 몸인데, 그런 가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 가지 않겠나?" "하긴... 목숨을 잃은 이곳에 정이 있지는 않을 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라프는 혼자 바위에 앉아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이브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브리엘 저 아이가 문제군. 카일락스의 일 때문에 마음 고생 하더니, 이제 자기 때문에 뮤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라프와 함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시아스 티하나 없이 하얀 이마를 찡그렸다. "나도 그것이 걸린다네.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가 저렇게 변하다니." "자네도 어서 이브리엘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 어떻겠나? 자네의 나이도 이제 장로축에 끼어있던데." "카일락스의 일이 끝나고 이브리엘의 마음이 좀 안정이 되면 가정을 꾸리려 했는데, 다시 뮤스군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조금 더 미뤄야 할 것 같아." 그라프와 루시아스는 유겐이 들었다면 기절을 할 만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숙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엘프 마을의 모든 이들은 마을의 뒤쪽 언덕에 위치한 엘프의 뜰에 모여있었다. 엘프의 뜰에는 십 여개의 무덤이 있었는데,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 같은 붉은 꽃들이 그 위에 놓여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 하고 있었다. 엘프 마을에서 이곳에 관을 안장하는 것은 5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곳에 엘프 영웅들의 시신을 뭍을 때 마다 그랬던 것 처럼 마을의 엘프들은 진심으로 죽음을 애도 했고, 다시 훌륭한 엘프로 환생하길 바랬는데, 과연 인간인 뮤스가 엘프로 환생(?) 할 지는 미지수 였다. 뮤스의 장례식(?)은 엘프 로드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 한 손으로 잡기에도 역부족일 만큼 두꺼운 책을 엘프 로드가 읽어 나가는 것으로 장례식이 진행 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가끔 책을 읽다 말고 엘프 로드의 사견까지 곁들인 다면 말 그대로 죽어 관에 누워있는 자 보다 살아 있는 자들이 더욱 고통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엘프 로드의 의식이 끝나자 이곳에 모인 이들은 묘의 흙을 손으로 한 번씩 두들기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두들기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의 손에는 잔디의 씨앗이 들려 있어 모든 이의 정성으로 묘에 잔디를 입히는 과정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엘프들의 장례 풍습에는 그라프를 포함한 일행들 역시 끼어 있었다. 레이멜과 큐리컬드는 밤새 술을 마셨는지 행색이 말이 아니었는데, 함께 이곳에 뭍힌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뮤스의 가묘가 만들어 지게 되었고, 장례식을 마친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엘프들이 돌아간 엘프의 뜰로 뜨거운 햇살이 내려 쬐고 있었다. 곱게 깔린 잔디 속에는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개미들이 줄을 지어 오가고 있었고, 거미줄을 치지 않고 사냥을 하는 게거미가 눈독을 들여 놓았던 개미 한마리를 잡아 시식을 하기 위해 어디론가 부지런히 끌고 갔다. 하지만 이 운이 나쁜 거미는 개미의 맛을 보기도 전에 사마귀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사마귀는 개미와 거미를 한꺼번에 잡았기에 자신이 운이 좋은 사마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사마귀가 사냥감들을 물고 자신의 집으로 가려는 순간 사방이 어두워 지며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결국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순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은 듯 했다. 사마귀를 밟고 있는 가죽신발이 있었는데, 사마귀를 밟은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계속 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몇 발자국을 더 옮기다가 걸음을 멈춘 그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욕지거리를 하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제길! 무슨 숲이 이렇게 복잡 한 거야! 새벽 부터 돌아 다녀도 마을은 코빼기도 안보이니! 아이고 배고파. 마을을 찾기도 전에 굶어 죽겠군." 지금 피곤에 쩔어 투덜거리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밤새 카일락스에게 쫓겨 다니던 뮤스였다. 그의 옷은 거지가 형님으로 모실 만큼 초라하기 그지 없었는데, 옷의 곳곳이 찢어져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여기저기 진흙의 얼룩들이 형이상학적인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짜증을 거두며 이성 적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는 십여개의 무덤을 발견 할 수 있었는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금방 만들어진 듯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흙이 덮여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뮤스는 희색을 띄우며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보이지 않음에 힘없이 비석을 짚으며 주저앉았다. "여기는 무덤 앞에 먹을 것도 안올려 놓나. 죽은 사람도 배가 불러야 상쾌한 마음으로 저승에 갈거 아냐!" 비석을 짚고서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뮤스는 누구의 무덤인 지도 모른 채 무의식 적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들을 읽었다. "에휴... '동료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세상을 떠난 뮤스 드라켄을 추모하며' 라... 꽤나 장렬하게 죽은 녀석 일세." 혼잣 말을 하던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비석을 내려다 보았지만, 역시 그의 눈이 잘못 된 것은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겨우 살아서 돌아 왔더니 내 묘까지 만들어 놓은 건가? 아무튼 동작 하나는 정말 재빠르군." 자신의 무덤을 바라보고 서있자 문득 기분이 나빠진 뮤스는 그렇게 끌어 모아도 없던 힘이 어디서 생겨 났는지 엘프의 마을을 찾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며칠간 엘프의 마을에서 피로를 풀고 떠나기로 한 그라프와 일행들은 햇살을 맞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일행들은 그들이 원래 목적하던 영원의 열매를 들고 가지도 버거울 만큼 얻어 놓은 상태였기에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고, 그라프와 쥬라스 역시 카일락스의 일을 해결 함으로 써 해야 할 일을 다 이룬 상태였다. 하지만 큐리컬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있는지 허전한 표정으로 그라프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 것이었다. 그런 큐리컬드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할 그라프도 아니었기에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보게 큐리컬드 잠시 이야기좀 하세." 머리 속에 잔뜩 그라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란 큐리컬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라프가 부른 것이 정말 자기인지 확인해 보았다. "저..저말인가요?" "허헛! 이곳에 큐리컬드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도 있나?" "아..아닙니다." 머리를 긁적인 큐리컬드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라프에게 다가왔다. 문득 미소를 지은 그라프는 그의 마음을 다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것이 뭔가?" 순간 큐리컬드의 숨이 멈추는 듯 싶었다. 그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그라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어떻게..." "허헛! 나를 바보로 알고 있는 것인가? 보물 사냥을 하느라 바쁜 사람이 고작 마물따위와 싸우고 싶다고 쫓아올 리가 없지 않나? 그러니 분명 누군가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테고, 보아하니 나를 찾아온 듯 했으니 당연히 나에게 원하는 바가 있겠지." 자신의 마음을 모두 들킨 큐리컬드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어차피 말을 꺼내기 힘들었기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그라프님께서 직접 쓰신 책을 좀 얻고 싶어서 이렇게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그라프는 전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자네가 말하기론 돈에는 관심이 없어 나의 책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이 거짓이었나?" 그라프의 되물음에 그는 손을 흔들며 크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돈에 관심이 없어서 훔칠 생각도 하지 않았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시다 시피 보물 사냥꾼 입니다. 직업을 바꾼 이후로 부터 골동품들을 모으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꼭 모으고 싶은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대현자님께서 쓰신 책이었죠. 그래서 동료들과 부랴부랴 뒤쫓아온 것입니다." 사정을 모두 들은 그라프는 시원 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껄! 그런 목적이 있었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지. 나중에 날 찾아오게. 내가 가지고 있던 책 중 쓰지 않는 것을 주도록 하지." "저..정말이십니까? 하하핫! 감사합니다!" 그라프의 허락이 떨어지자 큐리컬드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는데, 마치 세상을 모두 가진 자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큐리컬드가 뮤스를 잃은 슬픔을 잠시 접고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자 먼 발치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레이멜이 궁시렁 거렸다. "아무튼 좀 마음에 들려고 하면 정이 떨어지는 짓만 한다니까. 일행 중 한 명이 우리를 위해 죽었는데, 저렇게 좋아하고 있다니..." 말끝을 흐린 레이멜은 술병을 기울여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투명한 붉은 색의 술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던 레이멜은 슬픔을 삼키듯 단번에 입으로 들이켰다. 술을 삼키고서 빈 술잔을 빤히 바라보던 레이멜은 여전히 불만 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쳇! 맛이 좋긴 한데 너무 달군. 이럴 때는 쓰디쓴 술이 제격인데 말이야." 하지만 술이 필요했기에 투덜 거리면서도 다시금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문득 술을 따르고 있는 레이멜의 눈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더럽기 짝이 없는 신발이 보였다. 순간 술맛이 딱 가시는 것을 느낀 레이멜은 고개를 들며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그 신발의 주인을 본 순간 그는 말을 더듬 거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귀..귀신이다! 뮤.. 뮤스 귀신이다!" 레이멜의 외침 대로 그의 앞에는 몰골이 말이 아닌 뮤스가 서있었는데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귀신은 누가 귀신이라는 거예요! 분명히 제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사라졌는데 무덤까지 멋지게 만들어 놓다니... 혹시 내가 정말 죽기를 바랬던 것 아니예요?" 말을 하다가 멈춘 뮤스는 고개를 들어 레이멜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뮤스가 돌아온 것을 발견한 일행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무섭게 그런 눈으로 절 바라보시죠? 오면 안되는 곳에라도 온것 같은데요?" 그의 말을 시작으로 기쁜 표정을 지은 일행들은 모두들 그를 향해 달려왔고, 바로 앞에 앉아있던 레이멜도 그가 살아온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지 눈에 거슬리도록 지저분한 신발과 함께 그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하하핫! 이 녀석 정말 뮤스가 맞구나! 살아있었다니!" 가장 먼저 다가온 그라프 역시 고개를 저으며 뮤스의 몸을 살폈다. "허헛! 정말 기적이군! 그런 상황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니! 자네는 정말 특별한 인물이야!" 그리고 그의 뒤로 세실프와 유겐이 뛰어오고 있었는데, 마치 기적을 본듯이 가슴이 벅차오른 모습이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제 하려는 듯 평소의 말투를 고수하고 있었다. "못 된 녀석! 그렇게 걱정을 시키더니 이렇게 뻔뻔하게 돌아온거야?! 그래도 멋있었다 이 녀석아!" 세실프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뮤스는 미소로 회답했고, 유겐과도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었는데, 그것 만으로도 반기는 마음을 충분히 전달 할 수 있었다. 비록 죽기 전에 자신의 묘를 보긴 했지만 자신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반겨주는 일행들을 보고 있으니 그 어느때 보다 기분이 좋은 뮤스였다. 마을이 위기에서 벗어났음에도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엘프 마을은 뮤스가 돌아오고 난 후에야 진정한 축제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공터의 이곳 저곳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엘프들과 이곳을 찾은 인간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번 카일락스의 일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같은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뮤스가 밤새 겪었던 일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듣고 있었다. 특히 그의 바로 옆에는 이브리엘이 달라붙어 앉아있었는데, 뮤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겨우 거리를 벌릴 수 있었죠. 그렇지만 힘도 거의 빠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를 할 수는 없었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니 떠오르는 것도 하나 없더라구요. 그렇게 30분 정도 달렸을 때 눈 앞에 커다란 연못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뛰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빠져나온 로아드 연못이더라고요. 다시 녀석들의 소굴로 뛰어 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난감하던지..." 당시에는 정말 큰일이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이야기였기에 모두들 가볍게 웃으며 들을 수 있었다. 뮤스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죠. 연못 밖에서 그 간떨리는 날개 짓 소리를 내는 카일락스들이 수만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깊이 잠수를 했지만 숨이 막혀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죠." 뮤스가 잠시 말을 끊자 이미 이야기에 몰두한 그라프가 답답해하며 재촉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나? 다시 물 밖으로 나왔나?" 고개를 저은 뮤스는 가방에서 금속으로 된 길쭉한 통을 꺼내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뇨, 호흡이 막힌 저는 문득 가방안에 들어있던 이 산소통이 생각나더군요. 휴대용가열로라는 것을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건데 때 마침 얼마 사용하지 않아 거의 차있는 상태였죠. 물론 산소중독을 일으킬 염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물 속에서 산소통을 이용해 호흡을 하며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연못 아래에서 어두운 동굴을 발견했죠. 물들이 그 쪽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물이 흐르는 것으로 봐서 다른 곳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물결에 몸을 맡겼죠." 여기까지 듣던 일행들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모든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에게 감탄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흘러내려갔게 되었는데, 물의 통로가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혹시 지하로 연결 된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죠. 그때 다행 스럽게도 지하 동굴을 지나치며 미미하게 흘러들어오는 빛을 보게 되었고 죽자 사자 헤엄쳐 빠져 나왔어요. 그렇게 카일락스를 따돌린 거죠." 그의 말을 모두 들은 레이멜은 기분 좋게 술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하핫! 우리는 그때 죽지도 않은 네 묘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었다니, 참 세상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야." 다른 이들 역시 어젯밤 뮤스의 죽음을 슬퍼하던 자신들의 행동을 떠올리며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뮤스의 이야기가 끝나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다른 이의 이야기가 계속 되고 있었다. 뮤스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움을 망끽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 앉아있던 이브리엘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걸었다. "저... 뮤스군. 저와 단 둘이 이야기좀 해 주시겠어요?" 그녀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뮤스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런데 어디서?" "제가 안내 할께요!" 이브리엘은 밝은 목소리로 말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아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뮤스 역시 그녀의 이끌림을 따라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유겐과 그의 후원자(?)인 레이멜이었다. 레이멜은 뮤스의 손을 이끌고 가는 이브리엘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제 이브리엘님이 엄청 적극적으로 공략을 하는데? 저렇게 놔둬도 되겠어 유겐?" 레이멜의 물음에 유겐은 괴로운 듯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한 레이멜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왜 그래? 그 사이에 이브리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이 가라 앉기라도 한거야?" 유겐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게 아니에요." "그럼 뭐야? 어제만 해도 뮤스가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이제 저렇게 위험한 상태인데 왜 가만히 있는거야?" 유겐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축처진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뮤스라면 제가 양보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능력도 뛰어나고, 용기도 대단하고, 무엇 보다 녀석이 우리 모두를 살렸잖아요. 뮤스가 아니었다면 우린 여기서 이렇게 술잔을 기울일 수도 없었을 거라고요." 그의 말을 듣던 레이멜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사랑은 그런 것으로 말할 수 있는게 아냐! 사랑이 무슨 물건이냐? 남에게 빗진 것이 있다고 줘버리는 그런게 아니란 말이야!" 따뤄놓은 술잔을 다시 입으로 털어 넣은 유겐은 빈 잔을 한 쪽으로 던져 놓으며 말했다. "레이멜씨의 말대로 그런걸 모두 젖혀 놓고서라도 이브리엘님이 뮤스를 마음에 두고 있잖아요. 그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없어요." 답답함에 더 이상 유겐의 말을 들어 줄 수 없었던 레이멜은 그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하고 어디론가 걸어갔고, 유겐은 귀찮긴 했지만 무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나게 되었다. 유겐이 따라가보니 레이멜은 나무뒤에 숨어서 무엇인가를 훔쳐 보고 있었다. 그런 레이멜을 향해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의 손이 먼저 유겐을 잡아끌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서게 되었고, 레이멜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뮤스와 이브리엘이 환한 달빛을 받으며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거리가 멀었기에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브리엘은 무슨 이유에선가 크게 기뻐하고 있었고 뮤스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들을 관찰하고 있던 레이멜이 조용히 말했다. "흠... 이런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저렇게 희희덕 거리면서 좋아하잖아?" 유겐 역시 그 모습에 크게 동요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쯤은 각오 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레이멜의 물음에 부정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뮤스에게 양보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상관 없어요." "흠 그럼 저건 어때? 이브리엘님이 뮤스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데? 정말 참을 수 있냐?" 그 말에 급히 고개를 내밀어 확인한 유겐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지만, 이 쯤에서 어렵게 한 결심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충분히 부정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런 것 쯤이야. 그저 팔이 닿아 있는건데 뭐가 어때요. 상관 없어요." 존경 스러운 눈빛으로 유겐을 한 번 바라본 레이멜은 단호한 인상으로 말했다. "지금 이브리엘님께서 뮤스의 이마에 입맞춤 하고 있는데 설마 저것도 '그저 입술이 닿아있는 건데 뭐가 어때요?'라고 말 할 거냐? 엥? 유겐?" 레이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겐은 이미 이성을 잃고서 뮤스와 이브리엘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뮤스! 이 녀석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레이멜은 혀를 차며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쯔쯧...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는게 쉬운 줄 알았냐." 어느새 유겐은 씩씩거리며 뮤스와 이브리엘의 앞에 도착해 있었고, 갑작스러운 유겐의 출현에 뮤스와 이브리엘은 조금 놀라는 표정이었다. 뮤스를 잡아 먹을 듯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던 유겐은 그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감히 이브리엘님께 지금 뭐하는 짓인 거야! 네가 일부러 강요한 짓이지!" 어디선가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외치고 있는 유겐을 본 뮤스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유겐형. 대체 왜 그러는거죠? 제가 뭘 어쨌다고?" 그의 되물음에 콧방귀를 낀 유겐은 자신의 뒤를 따라온 레이멜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서 발뺌을 하려는 거야! 레이멜씨도 분명 너의 그 무분별한 행동을 목격 했으니 있는 그대로 실토 하라고! 분명히 이브리엘님께 입맞춤을 받아내고, 팔짱을 끼게 만들었잖아! 어디 한번 아니라고 말해 보시지!" 역시 그의 후원자 였던 레이멜이 그를 거들었다. "이봐 뮤스. 네가 능력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이미 애인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되지! 고향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애인이 알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러니 이브리엘님을 포기하고 유겐의 첫 사랑을 찾게 만들어 주는데 동참하는 것이 어때?" 레이멜과 유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사태를 정리해 보던 뮤스는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브리엘 역시 대충 감을 잡았는지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있었다. "푸하하하! 두분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예요? 크크큭!" 돌연한 그의 반응을 보던 레이멜이 말했다. "뭘 잘 못 알고 있다는 거야? 분명 우리가 이브리엘님과 너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두 지켜 보고 있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던 뮤스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 얼마 후에 이브리엘님께서 루시아스님과 결혼을 하신다는 군요. 지금까지 카일락스의 일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있었는데, 그것이 해결 되었으니 결혼을 서두르시는 거죠. 그런데, 이브리엘님께서는 평소 결혼식에 참석할 가족이 없어 고민을 하시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혼식날 만큼은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에게 그날 만이라도 동생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순간 망치로 얻어 맞은 듯 정신이 멍해진 유겐과 레이멜은 그 진위를 가리기 위해 이브리엘을 바라보았고, 그들과 눈이 마주친 이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라프님으로 부터 뮤스군에 대한 칭찬을 듣고 난 후부터 호기심이 생겼는데, 실제 겪어 보니 훨신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죠. 그래서 이런 든든한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그..그랬었군요. 하하! 저희가 잘못 알고 끼어 든 것 같군요." 이쯤 해서 발을 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레이멜은 유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그럼 대화 계속 나누세요. 유겐 우린 어서가자!" 이브리엘의 결혼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유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레이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는데, 귓가로 레이멜의 중얼 거림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원래 첫사랑은 쓴 상처를 남기는 거야. 이제 네가 포기한다고 해도 아무말 하지 않도록 하지. 애초 부터 불가능 했을 뿐이지 너는 최선을 다했잖아?" 애초 불가능 했던 유겐의 첫사랑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 후로 며칠동안 식음은 전폐한 채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엘프 마을은 아침 부터 떠나는 손님들을 배웅 하기 위해 들썩 거렸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아드리안 일행과 큐리컬드가 목적을 달성하고서 돌아 가려는 참이었는데, 뮤스와 그라프 그리고 쥬라스는 이브리엘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기에 엘프들과 함께 짐을 꾸리고 있는 그들을 바라바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안장을 올린 아드리안은 안장의 걸쇠에 엘프들에게 받은 한 보따리나 되는 영원의 열매를 걸었고, 반대편으로 다른 짐을 걸어 균형을 맞추었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뮤스에게 다가온 아드리안은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그 동안 짧았지만 즐거웠다. 뮤스. 나중에 추방기간이 끝나면 스윈제국에 한번 들리도록 하라고! 이건 절대 접대용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그의 손을 마주잡은 뮤스는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 동안 잘 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드리안씨." "후훗. 자 그럼 다른 사람들과도 작별 인사를 해야지?" 아드리안이 자리를 비켜 주자 레이멜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들과 일행이 된 것도 모두 레이멜의 덕분이었는데, 그 동안 많이 친해진 그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레이멜씨 여행 중에 몸조심하세요." 그의 머리를 매만진 레이멜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건 어른이 해줘야 할 말이야. 너야 말로 몸조심해서 여행하라고. 괜히 전 처럼 혼자 잘난 것 처럼 뛰어 다니지 말고." 피식 웃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물론이지! 다음에 애인이랑 결혼할 때나 초청장 보내라. 그 때 예쁜 아가씨들 소개 시켜 주는 것도 잊지 말고." "하하!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농담이었어. 그럼 정말 몸조심 하거라. 다음에 또 보자고." 손을 들어 보이며 레이멜이 다른 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러 가자 세실프와 유겐의 모습이 보였다. 세실프야 평소처럼 좋아 보였지만, 유겐은 첫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뒤여서인지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뮤스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세실프 누님, 그리고 유겐 형. 그 동안 고마웠어요." 뮤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세실프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매일 무시만 했는데 고맙다고 말해다니 아무리 봐도 이상한 녀석이야. 어쨌거나 우리도 네 덕에 무사 할 수 있었으니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그렇다고 네가 좋아진건 아니야." 여전한 세실프의 말투에 익숙해 진 뮤스는 그것이 그녀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어 유겐을 본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겐 형도 이제 금새 좋은 여자친구 생길 거예요. 혹시 다음에 라이델베르크로 찾아 오시면 학교 친구라도 소개 시켜드릴께요." 뮤스의 말에 손을 내저은 유겐은 가볍게 웃었다. "훗! 말이라도 고마워. 그리고 그 동안 잘 해주지 못한건 정말 미안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잘 지내 보자고." "네. 그렇게 하죠."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이들과 인사를 마친 큐리컬드가 다가오며 말했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작별 인사쯤은 해야지?" 고개를 돌려 큐리컬드를 본 뮤스는 미소로 대했다. "물론이죠. 파숄로 찾아가면 반겨 주신다고 말한거 잊지 않았으니 그때가서 딴청하지 마세요. 후훗!" "다른건 몰라도 내가 한 말은 꼭 지키지.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고." 큐리컬드는 손을 흔들며 자신의 말에 올라탔고, 서로 인사를 마친 아드리안 일행들 또한 각자의 말에 올라탔다. 말등에 오른 그들은 며칠 동안 편히 묶었던 엘프 마을을 둘러 보았다. 이제 다시 결계가 쳐지면 인간들의 금역으로 변할 곳이었지만, 마음 속에는 친구들의 마을같은 느낌이 남을 듯 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엘프들과 이곳에 남을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들은 말고삐를 당기며 마을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길 수록 아쉬움이 커져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남은 이들과 떠나는 이들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87~188 뮤스를 찾는 이들. 여름의 푸름을 간직하고 있던 세상은 점차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그것을 버리고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있는 그 어떤 것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 없었는데, 추운 겨울을 위해 낙엽을 떨구는 나무 부터 식량을 비축하는 다람쥐들, 그리고 겨울 잠을 자는 곰에 이르기까지 종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 범주에 인간들 역시 속해 있는 것을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미개척지의 모험자 마을 중 하나인 파숄 역시 겨울의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가을 부터 일손이 분주해 지고 있었다. 이곳을 묶고가는 모험자들이라면 의례적으로 작은 일손이라도 하나씩 거들었고, 이곳을 집 처럼 여기고 사는 모험자들은 그 일선에서 계획을 주도해나갔다. 엘프의 숲에서 돌아온 큐리컬드는 이곳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모험자들 중에 한 명인 동시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종종 이곳을 들렸다 가는 모험자들은 흡사 큐리컬드 개인의 집에 묶었다 가는 느낌마져 든다고 했는데, 그만큼 이곳의 터줏대감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었다. 큐리컬드는 웃통을 훌렁 벗은 채 통나무로 만들어진 나무의 지붕에 올라 못질을 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겨울마다 폭설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눈의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지붕을 보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누구에게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큐리컬드와 그의 동료들은 이런일에 언제나 열심히였는데, 가족도, 집도 가지지 않은 그들에게 이곳이야 말로 고향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손에 들린 마지막 나무판을 지붕에 대고 못을 친 큐리컬드는 건너편 집의 지붕에 올라가 있는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보게! 대충 다 됐으면 점심이나 먹고 계속 하도록 하자고!" 그쪽의 동료 역시 배가 출출했던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내가 먼저 내려가 식사 준비 하겠네! 조금 쉬었다가 내려 오라고!" "맛있게 만들어 줘!" 큐리컬드의 부탁에 웃으며 손을 내저은 동료는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보던 큐리컬드는 지붕에 앉아 먼 숲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남부 지방의 산악 지방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계절 마다 뚜렷한 개성을 풍기는 이 숲을 그는 좋아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마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모험자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인물들에게 눈이 끌리고 있었다. 문의 앞에는 다섯 명의 인물들이 건장한 말을 타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차림세나 무기들을 봐서는 모험자들이 틀림 없었지만, 이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겪어온 큐리컬드의 직감은 그들이 모험자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 중 얼굴에 수많은 상처를 가진 사내에게서는 진한 규율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모험자들과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러던 중 한 모험자가 지붕위에 앉아 그들을 내려보고 있는 큐리컬드를 가리키며 말을 주고 받았는데, 얼굴에 수많은 상처를 가진 사내는 큐리컬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그는 성큼 걸음으로 큐리컬드가 올라가 있는 집으로 다가와 외쳤다. "당신이 큐리컬드요?!" 아무런 생각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던 큐리컬드는 얼굴이 익지도 않은 자들이 갑자기 자기를 찾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큐리컬드요!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소?" "잠시 물어 볼 것이 있어서 그러니 내려오지 않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어차피 조금 후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가야 할 참이었기에 그의 부탁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서 아래로 내려온 큐리컬드는 손의 먼지를 털며 악수를 청했다. "큐리컬드요. 무슨 일이오?" 사내는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나는 카밀턴이라고 하오. 우리 일행은 지금 미개척지를 돌며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인데, 당신이 이곳에서 가장 정보가 빠르다고 해서 물어 보려는 것이오." 큐리컬드는 자신을 카밀턴이라고 소개한 인물을 찬찬히 살펴 보고 있었는데, 확실 한 것은 최소한 그가 모험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인물 중에 좋은 뜻을 가진 자가 별로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큐리컬드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호오... 아주 힘드시겠구려. 그런데 뭘 물어 보려는 것인지? 알다시피 모험자들은 돈이 없어서 대가가 없으면 몸을 움직이기 극히 싫어 한다오." 하지만 카밀턴은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품속에서 한 장의 그림을 꺼내며 입을 열었는데, 그림 속의 인물은 검은 머리카락에 조금은 이국적인 외형을 가진 청년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찾고 있소. 혹시 이곳에서 지냈거나 그를 어디서 본 기억 없소?" 그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던 큐리컬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본 것도 같고... 못본 것도 같고... 하루에도 워낙 많은 모험자들이 들락거리니 그들을 일일이 다 외울 수 없지 않겠소?" 큐리컬드의 태도를 보아 대답해 줄 용의가 없다는 것을 눈치챈 카밀턴은 다시 그림을 말아 품으로 넣었다. "좋소. 협조해 줘서 고맙소." 의무적인 인사를 건넨 카밀턴은 바로 뒤를 돌아 일행들에게 돌아갔는데, 큐리컬드는 은연중에 그들의 일행을 살피며 한심한 그들의 하는 양에 혀를 찼다. "쯔쯧... 옷만 모험자면 뭐하나. 행동은 딱 기관의 소속인데. 저러고도 특수요원이라고 어깨에 힘께나 잡고 다니겠지? 그런데 분명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은 뮤스군이었는데... 왜 저런 녀석들이 그를 찾는 것이지?" 잠시 생각을 해보던 큐리컬드는 아무리 혼자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떠올리며 출출한 배를 달래주기 위해 동료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완연한 가을이 되기전 이어서 인지 숲의 가장 깊은 곳은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을 듯한 태초의 아름다움을 가진 이 곳, 중심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작은 크기도 아니었지만 크다고 말할 수도 없었는데, 주변의 모습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였던 것이었다. 오직 숲의 동물들 만이 들릴 듯한 이 연못의 한쪽으로 두 노소가 앉아 연못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분위기에 취한 듯 눈을 감고 있었는데, 낚시에는 이미 흥미가 없는 듯 했다. 그러기를 한 참, 노인이 먼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이런 것은 어떻나? 척박한 세상에서 잠시 떠나 자연과 만나는 시간 말일세."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뜬 청년은 손으로 낚시대를 점검해보며 대답했다. "나름대로 좋긴 하지만 왠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느낌이 드는군요.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일까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내저은 노인은 주변의 경관을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걸세. 나이가 어리더라도 이런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도 속세의 생활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으니... 허헛. 내가 자네를 이런 곳에 대리고 왔다고 해서 깊이 생각하지는 말게나. 자네는 너무나 생각이 많아서 탈인 사람이니 이 곳에서 잠시 머리를 식혀 주려고 한 것이니까 말이야." "후훗.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 졌습니다. 그라프님" 이곳에서 여유롭게 낚시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노소는 그라프와 뮤스였다. 이들은 루시아스와 이브리엘의 결혼식 후 엘프의 숲을 떠나왔는데, 서로 앎을 갈구하는 사람들인 만큼 통하는 것이 많았고, 서로에 대해 배울 점도 많았기에 의견을 맞춰 함께 여행을 하기로 의견을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파숄에서 며칠간 묶고 있는 중이었다. 쥬라스가 신전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라프와 뮤스가 파숄까지 동행을 한 것이었는데, 그녀를 신전으로 돌려보낸 이들은 며칠 더 묶을 생각을 하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득 대화를 하던 그라프는 뮤스의 고기 바구니를 들여다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많이 잡았나? 나는 왜 그런지 낚시대를 잡는 것은 좋아하지만 고기를 잡는 데는 영 소질이 없어놔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 거린 뮤스는 자신의 고기 바구니를 뒤집어 털어 보였다. "저 역시 그라프님과 눈을 감고 있었으니 고기를 잡을 수 있을리 없죠. 그럼 지금 부터라도 물고기를 잡을 까요?" 하지만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었다. "허헛!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는데, 또 무엇을 시킨다면 말이 안되지. 그리고 이런 곳에서 어렵게 살 고 있는 물고기들을 잡아서 무엇을 하겠나."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뮤스군 자네는 물론 아는 것도 많고 손재주도 놀랍지만, 너무나 여유가 없어 보여.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무작정 매달리는 것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 가는 행위이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뮤스가 그라프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자아를 다시 되찾고자 내심 발버둥을 치던 뮤스는 그라프와 대화를 나눌 때 마다 그의 인생철학의 깊이에 감동 하게 되었는데, 뮤스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점을 조금씩 고쳐나가고자 했고,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만족을 하는 중이었다. 그라프 또한 뮤스의 놀라운 공학 지식들을 조금씩 배워 가면서 앎의 욕심을 채울 수 있었기에 뮤스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라프가 낚시대를 거두어 들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또 내가 던진 말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그런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칠 정도로 하진 말게." 고개를 내저은 뮤스는 그의 말대로 잠시 여유를 가지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그 방법을 찾고있었다. "조금더 쉬운 방법은 없을까요? 도무지 저로서는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생각을 버리라는 것인데..." 뮤스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며 웃은 그라프는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허헛!원래 개인의 마음에 달린 일은 스스로 답을 찾아 낼 때 진정한 도움이 되는 것이지 남들이 깨달은 답을 듣는 것은 한 순간에는 감동을 느끼겠지만 금새 머리에서 잊혀지게 되어 나의 답이 영원히 될 수 없네. 언젠가는 자네도 알게 되겠지." 이 때, 그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문득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촤작... 촤자작...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인간이 발길이 없는 이곳에서 기척이 나자 마물 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전투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라프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수신호를 한 뮤스는 가방에서 건틀렛을 꺼내 손에 착용 하며 조심 스러운 발걸음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접근해 나무에 몸을 숨기며 그 무엇인가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촤자작.. 촤작. 그리고 소리는 계속 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 오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가장 앞쪽의 수풀을 헤치며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 나무뒤에 숨어서 접근을 기다리던 뮤스는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주먹을 날렸다. "하앗!" 하지만 이내 뮤스는 그것의 얼굴을 가격하려던 주먹을 힘들게 멈춰야만 했는데, 그의 주먹 앞에는 큐리컬드의 얼굴이 떫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뮤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확인 해야 되지 않나? 하긴 아직 저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뭐..."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한번도 와보신 적이 없으시면서." 손을 거두어 들인 뮤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 그래서 이렇게 멀쩡한 길 놔두고 엄한 길로 잘못 들어 삥둘러 왔잖나. 아 그라프님 오늘 처음 뵙는 군요." 연못가에 앉아 상황을 주시하던 그라프를 발견한 큐리컬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그라프 역시 손을 들어 답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뮤스의 얼굴을 바라본 큐리컬드가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건 다른게 아니라 어떤 녀석들이 자의 초상화를 들고서 행적을 찾고 있더군. 자네가 파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온것 같지는 않은 듯 한데, 분위기로 봐서는 정체를 숨긴 기관의 인물들이었어."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를 찾을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글쎄요. 그렇게까지 저를 찾을 만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귀족들 몰래 보낸 것인가? 아니면 귀족들이 나를 해하기 위해 보낸 것일까?" "어떻게 할텐가? 자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떠날 때까지 다른 곳에 있으면 되니까 상관없어. 다른 동료들에게도 입조심을 시켜놓고 왔지." 무엇이라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뮤스는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을 그라프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그라프에게 이미 자신이 추방당한 배경을 말해주었고, 이런 일에 대한 판단은 자신보다 그라프가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라프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라프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자네를 해치기 위해 온 것은 아닌 것 같네. 원래 모험자들 사이는 소문이 빠르기 때문에 해칠 생각으로 자네를 찾고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그림을 들이 밀며 자네에 대해 묻고 다니진 않겠지. 개중에 지금의 큐리컬드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대답을 해주지 않은 채 당사자에게 그 소식을 전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흠... 그럼 한 번 만나보기로 하죠. 지금 그들이 파숄에 있나요?" 걱정이 되는 듯 뮤스를 바라본 큐리컬드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게 생긴 녀석들이라 하는 말이야."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누구에게 원수를 진 일도 없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같이 돌아가세." 결정을 내린 뮤스는 자신의 낚시대를 챙겼고, 큐리컬드는 그라프에게 다가가 그가 도구 정리 하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말 두 마리가 몰고 있는 달구지 한 대가 세 명의 사람을 태우고 파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처음 본 모험자들이라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테지만, 파숄에 묶고 있는 모험자라면 누구나 그것이 큐리컬드가 애용하는 교통수단 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큐리컬드는 마을로 들어오자 외벽 근처에 달구지를 세웠다. 그리고 그라프의 짐을 대신 들어 내리며 뮤스를 향해 말했다. "그들은 자네가 쓰는 왼쪽 집을 쓰고 있다네. 나도 함께 따라가 줄까?" 뮤스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의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사양을 했다. "하하! 저 혼자라도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식사 할 때 뵙도록 하죠."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비명을 지르라고! 동료들을 이끌고 당장에 달려갈테니." "네 그렇게 할께요." 그리고 달구지에서 내리는 그라프를 향해 말했다. "그라프님 오늘은 화공학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 테니, 어제 설명드렸던 것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계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모조리 다 외우라는 말은 하지말게. 늙으면 외우는 일 자체가 곤욕이니까." "하하! 하지만 언젠가는 다 외우셔야 할 거예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큐리컬드가 가르쳐 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뒷 모습을 보던 큐리컬드는 아직도 뮤스가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찝찝한 듯 했다. "괜찮을 가요?" "허헛! 만마리의 카일락스들 한테서도 아무일 없었던 사람일세. 쓸데 없는 걱정을 하는구먼." "왜 또 그이야기를 꺼내십니까. 이제야 악몽에서 겨우 헤어 나왔는데..." 큐리컬드는 불과 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는데, 돌아온 이후로 큐리컬드는 은연중에 받은 압박감 때문인지 밤마다 카일락스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뮤스는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집의 안쪽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 마을은 집은 정해져있는 주인이 없었기에 어느 집이든 자신의 집과 같이 드나들 수 있었는데, 집은 그저 비, 바람,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공터라고 하는 개념이 이곳 사람들의 머리에 깔려있었다. 하지만 지금 어두침침한 집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은 듯 했는데, 갑작 스럽게 문이 열리자 곧 바로 병장기를 뽑는 소리가 나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누군데 아무 기척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그들이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머쓱해진 것은 뮤스였는데, 원래 바보들의 마을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뮤스였다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들어갔겠지만, 이미 뮤스는 상당히 변해 있는 상태였다. "원래 이곳의 집들은 주인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이 집안으로 들어오더라도 그 누구의 허락이 필요 한 것이 아니죠." 뮤스의 말을 듣던 이들은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고, 그의 말을 잘 이해했는지 뽑아든 병장기를 다시 회수했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카밀턴이 사과를 했는데, 상대의 목소리가 젊다고 느꼈기에 자연스럽게 경어를 쓰지는 않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 우리는 이곳에 처음 온 처지라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 이해해 주게나." 그들의 태도로 보아 뮤스가 태양을 등진 상태였기에 그의 얼굴을 아직 확인 하지 못한 듯 했다. 이를 눈치챈 뮤스는 그들을 떠 보고자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디를 여행하는 모험자 들입니까?" "우리는 미개척지를 떠돌면서 한 젊은이를 찾고있는 중인데, 실마리 조차 잡지 못하고 무작정 이렇게 떠도는 중이라네. 그건 그렇고 자네도 이 집을 함께 쓰나?" 그들의 서슴없는 대답에 최소한 자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뮤스는 집의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저를 찾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전혀 뜻 밖의 상황에 다섯 명의 일행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는데, 지난 몇 달간 고생을 하며 찾아도 소식 한줄기 듣지 못했던 그가 자신의 발로 찾아 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침착하기 그지 없던 카밀턴 역시 흥분 한듯 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공학원의 원장인 뮤스 드라켄 맞나?" "맞습니다. 제가 그 뮤스 드라켄이죠. 헌데 대체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죠? 이런 곳에서 저를 찾을 사람이 제 기억에는 없군요." 금새 마음을 가라 앉힌 카밀턴은 본래의 기색을 회복하며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었다. "그것은 곧 아시게 될것이네. 우선 이쪽으로 앉아 주겠나?"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전혀 위축되는 느낌 없이 발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갔고, 이미 앉아있던 이들은 그의 얼굴을 보며 진위여부를 살폈는데, 머리가 길게 자란 것만 뺀다면 지난 몇 달간 지겹도록 봐왔기에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게된 초상화의 인물과 일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뮤스가 자리에 앉자 일행들과 함께 그의 얼굴을 보던 카밀턴이 반대편에 앉은 일행을 한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장을 찾은 이유는 이제 저 친구가 설명을 해줄것이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사정이 있으니 이제 곧 알게될 우리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으면 하네."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이렇게까지 정색을 해오자 동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이제 무슨 일인지 들어도 될까요?" 뮤스의 시선은 카밀턴이 소개한 일행의 얼굴에 멈추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학자 풍의 모습이었는데, 근육질의 몸도 아니었고, 오히려 보통 사람에 비해 몸이 약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말이 시작 되면서 뮤스의 상념은 지워졌다. "저는 니카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저희는 비밀리에 듀들란 제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뮤스 원장님을 찾기 위해 미개척지를 뒤지며 돌아다녔었죠." 뮤스는 듀들란 제국이라는 이름을 크라이츠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도이첸 제국과 함께 제국에서 가장 큰 국가이고, 대륙에서 유일하게 다른 언어를 쓴다는 정도였다.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더더욱 의아한 생각이 들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에서는 왜 저를 찾고 있는 것이 것이죠?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만..." 이야기를 시작한 후로 계속해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니카도는 그의 반응을 예상 했기에 미리 준비해 둔 대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 듀들란 제국에 뮤스님께서 개인 적으로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분께서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장영실을 만나 본 적도 없었고, 장영실 또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번 일에 대해 알게 되었기에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뮤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연 관계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니카도는 교섭인답게 적절한 거짓을 섞여가며 상대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뮤스는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듀들란 제국에 있다고 하자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려 봤다. 하지만 결국 찾아 내지 못한 뮤스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리가 없는데.. 대체 그 사람이 누구죠?" 뮤스의 되물음에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니카도는 자신의 말을 뇌리에 선명히 기억 시키려는 듯 한자씩 또박하게 말했다. "바로 듀들란 제국의 남작으로 계시는 장영실 경이시죠." "장영실 아저씨!" 그의 입에서 장영실의 이름이 나오자 뮤스는 눈을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부릅뜨고 있었는데, 한 동안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뮤스의 반응이 생각보다 확실하자 니카도는 이번 교섭의 시작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영실 경께서 뮤스 원장님의 추방 소식을 전해듣자 마자 황제폐하의 동의를 얻어 저희를 이곳으로 파견한 것이죠." 말을 마친 니카도는 뮤스가 마음을 진정시키 도록 기다렸는데, 이것이 능숙한 교섭인의 여유였다. 역시 그의 생각 대로 뮤스가 신색을 되찾자 궁금한 것이 많은 듯 했는데, 수많은 질문들을 머리에서 정리하며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장영실 아저씨가 듀들란 제국에서 머물고 계시는 것이 정말입니까?" "물론 입니다. 장영실 경께서는 남작의 작위를 하사 받으시고 국가중대사업의 지휘봉을 잡고 계십니다." 뮤스에게는 그의 대답이 정말 의외였는데, 장영실이 지난날 동안 겪은 일들을 알수 없었던 뮤스로서는 자신을 찾기 위해 이 세계로 온 장영실이 한 국가의 벼슬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안됐기 때문이었다. 뮤스의 질문이 계속 되었다. "장영실 아저씨가 어떻게 해서 듀들란 제국에서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예상치 못한 뮤스의 질문에 니카도는 잠시 당황을 하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장영실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장영실의 계약에 대해 알고있는 인물은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몇명을 제외하면 전무했었고, 또 뮤스가 이런 질문을 그가 던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듀들란 제국 최고의 교섭인인 만큼 표정관리에 능숙했다. 결국 어찌 대답을 해야할지 생각을 해보던 니카도는 귀족 작위가 하사되는 정형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흠... 작년 이맘때 쯤, 장영실 경께서 듀들란 제국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평범하지 않은 기개를 가지고 계셨는데,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으실 정도셨죠. 그리고 그분은 황제 폐하께 자신이 만드신 국가사업의 계획안을 제출 하시며 간택을 기다리셨고 그것을 보며 감탄해 마지 않으신 폐하께서는 장영실 경께 남작의 작위를 하사 하시고, 국가사업을 일임하셨습니다." 니카도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여러가지의 수식을 가져다 붙였고, 이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자아내게 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말을 마친 그는 뮤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니카도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유명세를 이용해 장영실을 찾기위해 공학원을 만들었듯이,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합리화 시켰고,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까지 보냈다는 사실에 더욱 들떠 있었다. 니카도는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장영실의 근황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는데, 그가 하고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 동안 그의 이야길를 듣고 있던 뮤스는 장영실이 안전하게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소식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인정 받으며 지내고 있다고 하니 그 기분은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대충 분위기가 잡혔다고 생각한 니카도는 이 교섭을 위해 준비된 마지막 열쇠를 내밀었다. "...게다가 이것은 장영실 경께서 뮤스 원장님께 전해 달라고 하신 편지입니다." 떨리는 손으로 장영실의 편지라고 소개한 편지 봉투를 받아든 뮤스는 인장이 아직 뜯기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물었다. "장영실 아저씨가 직접 쓰신 건가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장영실 경께 직접 받아서 오는 길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조심 스럽게 편지 봉투를 뜯었고, 편지를 펼쳤다. 하지만 뮤스는 그 글들을 읽을 수 없었는데, 도이첸 제국어가 아닌 듀들란 제국어로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난감하게 된 뮤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글씨도 있습니까? 저는 이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만..." 니카도는 뮤스가 듀들란 제국어를 모른다는 것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보통의 학자들이나 대학의 학생들의 경우 국적을 막론하고 도이첸 제국어와 듀를란 제국어를 배우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공학원의 원장의 위치를 가진 뮤스가 듀들란 언어를 읽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물어 보는 것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기에 내색치 않으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읽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이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는 다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뮤스는 어서 그 편지의 내용을 알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헛기침을 한번한 니카도는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뮤스는 한자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친애하는 뮤스에게... 너와 헤어진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구나. 조이센 대륙에서 이곳으로 건너와 지난 많은 날들을 너를 찾아 헤매었지만, 너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니카도가 읽고 있는 장영실의 편지는 장영실이 루스티커에게 해준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꾸며진 편지였는데, 주된 내용은 개인 편지라는 성격 답게 뮤스의 안부와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었고, 부수적인 내용으로는 듀들란 제국으로 와서 자신의 일을 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세장 정도의 분량이 되는 편지를 다 읽자 니카도는 그것을 다시 뮤스에게 건네주며 마지막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상이 장영실 경께서 뮤스군께 전하는 내용입니다. 저희 듀들란 제국에서는 타국의 이목을 속이고 뮤스 원장님을 듀들란 제국으로 모실 계획입니다. 물론 도이첸 제국의 우방 국가로써 추방령에 대한 규칙을 지켜야겠지만, 그 보다 뮤스 원장님을 듀들란 제국으로 모시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죠. 만약 뮤스 원장님께서 저희와 함께 장영실 경이 계시는 듀들란 제국으로 가신다면, 전례가 없는 대우를 받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끝낸 니카도는 오늘 교섭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임기응변도 완벽에 가까웠고, 뮤스의 반응도 좋아 보였기 때문에 이제 곧 동의의 의사가 떨어 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카도가 생각하는 것 보다 뮤스의 머릿속은 훨씬 복잡한 상태였기에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워낙 부지간에 일어난 일들이었기에 그가 듀들란 제국으로 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니카도는 조금 애매한 대답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여러가지 생각해 볼 것이 많아서..." 예상 못한 대답에 듀들란 제국 최고의 교섭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충격을 받은 니카도는 그의 마음을 확정 짓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물론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이런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장영실 경을 만날 수 있는 동시에 출세까지 보장되는 상황이란 말이죠." 하지만 뮤스의 생각은 변함 없었는데, 확실한 상황의 정리 없이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뮤스 성격에 대한 니카도의 이해가 부족해 발생한 일이었다.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에는 저의 개인 적인 사정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며칠의 시간적 여유를 주셨으면 합니다." 뮤스가 이렇게 나오자 기다림도 교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니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지난 몇 달간 뮤스 원장님을 찾아 헤맨 것에 비하면 며칠 기다리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니죠. 그럼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교섭대와 첫 만남을 끈낸 뮤스는 장영실의 편지를 손에 들고서 방을 나섰고, 모든 대화를 교섭인에게 맡겨 놓은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카밀턴이 니카도를 보며 물었다. "어떤가? 교섭이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가?" 하지만 니카도는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글쎄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상태로 교섭을 했으니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 그저 위에서 내려온 정보를 최대한 이용했을 뿐입니다." "흠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을 하던 카밀턴은 품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는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교섭이 결렬 되었을 때 열어 보라며 전해 준 붉은 색의 봉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뮤스가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자 그라프는 휴대용전뇌등의 불빛에 의존해 책을 읽고 있었다. 뮤스가 들어오는 낌새를 느낀 그라프는 잠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자들이 왜 자네를 찾아 왔는지 알게 됐나?" 하지만 뮤스는 무슨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있는지 그라프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 익숙해진 그라프는 책을 덮으며 뮤스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생각을 또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는 건가? 그들이 좋지 않은 말이라도 한거야?" 그때서야 그라프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손에 들린 장영실의 편지를 뒤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저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대충 이야기를 둘러대는 뮤스였지만, 그라프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리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캐묻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투로 뼈가 담긴 말을 던졌다. "흠... 그 사람의 지위가 상당한가 보군. 다섯 명의 훈련받은 기관원을 시켜 이 넓은 미개척지에서 자네 한 명을 찾게 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정곡을 찌른 그라프의 말을 들은 뮤스가 얼떨결에 대답하게 되었다. "아.. 남작의 지위를 가지신 분이시죠."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라프는 남작이라는 말에 눈빛이 변했는데 오히려 태도를 바꾸며 더욱 진지하게 "그들이 그러던가? 자신들을 파견한 사람이 남작이라고?" "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며 수염을 쓸어 내리던 그라프는 뭔가 탐탁치 않은 부분이 있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흠... 아무래도 배경에 뭔가가 있는 것 같군. 고작 남작의 지위를 가진 자가 국가 비밀 기관원을 움직일 수 있을리가 없지 않나?"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생소한 말에 조금 놀라며 되물었다. "그들이 비밀기관원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시죠?" "자네가 알 지는 모르겠지만, 각국가 마다 비밀기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네. 대체적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안되는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고문으로 있던 도이첸 제국만 해도 세개의 비밀기관이 있다네. 하지만 그 존재를 알 정 도의 위치면 최소한 재상과 맞먹는 위치에 있는 자 여야하지. 뭐 내가 다른 국가의 실정에 대해서 밝은 것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작의 지위로는 그들을 움직이기는 커녕, 그들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것이란 말일세." 그라프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게 된 것이고, 니카도에게 들은 내용 중에서도 어디까지가 믿을 수 있는 정보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꼭 그 기관원인지라고 확신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피식 웃은 그라프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저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쯤은 손쉽게 알 수 있다네. 뭐 자신들이야 완벽한 변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만, 겸험이 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는 어렵지." 그라프의 말이 지금까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는 데다가, 그가 이렇게 까지 확신을 하고 나오자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기관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뮤스가 고민을 하기 시작하자 그라프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나에게 말을 해주면 안되겠나? 보아하니 그들이 비밀을 지켜 달라는 약속을 한 것 같은데, 그들이 진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러한 약속을 지킬이유가 있겠나?" 역시 그라프는 대현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뮤스의 표정과 행동만을 가지고 날카롭게 상황을 파악 하고 있었다. 결국 설득력 높은 그의 말을 듣던 뮤스는 혼자 고민을 하더라도 해결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그라프의 조언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고, 결심을 굳이며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함께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부분적으로나마 그라프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장영실이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믿고 싶은 뮤스였다. [2002-09-27] 짜가신선 <대공학자> #189 듀들란 제국 특무대. 밤이 늦어 잠이 들어가는 숲을 일깨우는 차가운 늦가을 서리가 내려 앉았고, 모험자의 마을 파숄에 늘어서 있는 숙소의 지붕 역시 서리가 내려 앉아 마치 눈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지붕 아래, 여덟 개 정도의 침대가 전혀 무리 없이 들어서 있을 만큼 넓은 방이었지만, 이 방안에 있는 이는 뮤스와 그라프 뿐이었다. 겨울이 되면 추위와 날씨로 인해 모험을 하는데 지장을 받게 되고, 그런 이유로 늦가을 부터 모험자의 수가 줄어든 것이었다. 덕분에 뮤스와 그라프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뇌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으며 뮤스의 얼굴에는 진한 음영이 생겨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라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라프는 뮤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찾아온 정체 모를 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중이었고, 여러가지의 일이 미심적었기에 뮤스가 그들을 따라 듀들란 제국으로 가는 것을 말리려는 입장이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 장영실인가 하는 사람이 어리석기는 커녕 자네에 못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네가 알아 보지도 못하는 글로 편지를 썼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군. 자네와 그의 고향이라는 조이센 대륙의 언어로 편지를 보냈더라면 자신의 친필임을 확인 시킬 수있는 좋은 방법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귓가로 흘러가는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뮤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실 니카도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장영실의 소식이라는 사실하나만으로 감정이 격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말을 의심을 할 수 없었지만, 제 삼자의 입장인 그라프의 냉정한 상황판단을 듣고 있다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의심이 가는 부분은 그라프의 지적과 같이 장영실의 친필로 쓰여졌다는 편지였는데, 뮤스가 확인한 대로 편지가 밀봉된 상태였다는 것은 내용에 대한 검열이 없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고, 그렇다면 그라프의 말대로 듀들란어 보다 한자를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는 편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으로 부터 내용을 숨기기에도 편리한 것은 물론, 장영실과 뮤스 이외에는 한자를 쓸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뮤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장영실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또, 편지의 내용에서 '명신'이 아닌 '뮤스'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을 들 수 있었는데, 호칭이라는 것은 버릇과 같아서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애써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 하려는 의도가 없는 개인 적인 편지에서 뮤스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점이었다. 여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뮤스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경험은 전혀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수염을 쓰다듬던 그라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허헛! 자네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것을 탐내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틀림 없이 듀들란 제국의 비밀기관 소속의 인물들일 것이고, 듀들란 제국에서 자네를 영입하기 위해 파견한 자들일 것일세. 또, 자네가 찾고 있던 장영실이라는 사람은 분명 듀들란 제국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말대로 중요한 요직을 맡고 있을 것이야." "그렇다면 장영실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라는 말이십니까?" 그라프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단정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요직의 인물에 대한 소식은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기 힘들지. 하지만 내가 걸리는 부분은 왜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직접 자네를 초빙한것인 마냥 거짓말을 했냐는 것일세." 추론일 뿐이었지만 말을 하는 이가 다른 이가 아닌 그라프였기에 충분히 믿을 만 했고, 장영실이 안전하다고 하니 다른이의 말이더라도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간 얼굴이 밝아지는 뮤스를 보던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여러가지의 측면을 볼 때 그들은 분명 자네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데, 혹시 그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자네가 듀들란 제국으로 오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그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뮤스는 머리속이 복잡해 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내젖고 있었다. "물론 그라프님의 말씀도 맞지만, 혹시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이렇다할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의심은 할 수록 확신에 가까워지지만, 그것 자체가 사실이 되지는 못하니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 또한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그들의 속내를 알수만 있다면..." "흠... 그들의 속내라..." "..." 끝을 흐린 뮤스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그라프가 뮤스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어떠한 해결 책을 찾아 낸 듯 말을 꺼내자 뮤스는 기대의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라프는 자신이 생각해 놓은 바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일단 내일 날이 밝는대로 그들을 만나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겠노라고 말을 하게.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 보는 것이지." 고개를 갸웃 거린 뮤스는 그라프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본래의 모습이 나오는 법일세... 그러니 옛말에도 도박에서 밑천을 잃었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와 같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서 반응을 살펴 보자는 말이야. 만약 듀들란 제국에서 자네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 접근을 했다면 분명 자네와 같은 인물이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일세." 그라프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뮤스는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들이 저를 헤치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듀들란 제국이라는 곳에 잘못한 일도 없는데..." "허허! 답답한 소리를 하는구먼. 원래 한 국가의 득과 실이 걸린 문제에서 자네의 자잘못은 중요치 않네. 오로지 이득이 되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제거를 하는 것이지. 그것은 평화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요즘이라도 예외는 아니야. 자네가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 추방자 신세가 된 것 아니겠나?" "그것이 무슨..." 그라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뮤스를 바라보더니 이내 턱을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뭐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다음에 이야기 하세나." 잠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긴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내 말대로 한번 해보게나. 그들이 정말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보낸 자들이라면,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헤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니, 그 연후에 그들을 따라 가도 될 걸세." 그의 의견을 듣고 있던 뮤스는 입주변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라프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군요." 결국 그라프의 의견을 받아 들인 뮤스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여러가지 언질을 들어야만 했는데, 둘러댈 핑계부터 말을 할 때의 태도, 그리고 그 이후에 해야할일까지 꼼꼼하게 미리 준비 해 둔 그라프였다. 뮤스가 가지고 있는 공학에 대한 지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상의 것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같은 나이 또래의 평범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 부족함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그의 머리에 주입되어 있는 어떠한 서적에서도 배울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지식과 지혜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식은 풍부하되 지혜가 모자라는 뮤스, 그가 대륙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 받고 있는 그라프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개인 적으로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뮤스는 날이 밝는 대로 카밀턴 일행이 묶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들겼다. -쿵! 쿵! "누구시오!" 문안쪽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흠흠. 저 뮤스 드라켄 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안 쪽에서 카밀턴이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내부로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있는 니카도를 포함한 일행들을 볼 수 있었는데, 몸에 베인 습관 대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 난 듯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무장을 장비하고 있었다. 카밀턴은 평생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로 뮤스를 맞이 했다. "어서오게 뮤스 원장,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네." "오히려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한 뮤스는 카밀턴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중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뮤스에게 자리를 내주자 그는 사양치 않고 앉았고, 카밀턴 역시 그의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뮤스의 하얀 얼굴에 집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긴 머리에 가려 햇빛에 타지 않은 얼굴이 찬 바람을 맞아서 인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친 듯 피곤해 보이는 뮤스를 향해 니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말씀 드린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입주변을 쓰다듬은 뮤스는 그라프의 조언대로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일 때문에 어제 늦게까지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특히 장영실 아저씨가 저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뛸듯이 기뻤습니다." "하핫! 장영실경께서도 뮤스 원장님을 보고싶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다." 말의 중간에 끼어든 니카도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뮤스는 눈을 내려 깔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밤새 고민해본 결과 여러분들을 따라 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잘 되어 가는 상황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상황에서 뮤스가 갑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니카도와 카밀턴,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적잖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뮤스 원장님께서는 장영실경이 보고싶지도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실수라도 저지른 것입니까?" 뜻밖의 상황에 놀란 니카도가 되묻자 뮤스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런것은 없습니다. 물론 저도 장영실 아저씨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요. 하지만 지금 저의 처지가 쉽게 듀들란 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도 도이첸 제국에서 제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니카도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뮤스의 말이 계속 되었다. "만약 여러분들의 말대로 장영실 아저씨가 듀들란 제국에 잘 계신다면 훗날이라도 제가 쉽게 찾아 뵐 수 있겠죠. 아쉽지만, 그 날을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돌아 가시면 제가 훗날 꼭 찾아 가겠노라고 전해 주십시요." 이렇게 그라프가 귀뜸 해준 대로 이야기를 모두 늘어놓은 뮤스였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변인물들의 안색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는데, 그 중 니카도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이런! 뮤스 원장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도이첸 제국의 얼간이들이 어디가 좋다는 것입니까! 지금쯤 능력을 인정 받아 호의호식 해야 할 분이 이 따위 미개척지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것이 분하지도 않습니까?" 듀들란 제국 최고의 교섭인으로 자존심이 높았던 니카도였기에 이번 교섭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듯 했고, 흥분해서 떠드는 그의 말투에는 미묘하게 듀들란어의 억양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카밀턴이 나서며 니카도를 만류했다. "그만하게 니카도." 시선을 뮤스에게 돌린 카밀턴은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 한번 정한 마음을 돌리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번더 물어 보도록 하겠네. 정말 자네는 우리와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겠는가?" 뮤스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 였기에 대답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보며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 갔다고 단정지은 카밀턴은 평소의 냉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네의 생각을 충분히 알겠네. 돌아가면 장영실경에게 자네의말을 그대로 전하도록하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답답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니카도의 시선을 외면한 카밀턴은 팔짱을 끼며 의례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남은 기간동안 몸조심 하게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신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부터 주변의 공기가 좋지 않아진 것을 알 수 있었던 뮤스는 오래 있어 봐야 좋을것이 없다고 느끼며 금새 자리를 털며 일어났고,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털컹!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뮤스의 모습이 사라진 후, 카밀턴 일행들 사이에는 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난 한달 동안 험난한 미개척지를 돌아 다니며 고생을 했던 것이 무위로 돌아 간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그러던 중, 니카도가 카밀턴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카밀턴 대장.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분명 재상각하께서 타국의 비난을 감수 하면서 까지 특무대를 파견 하신것을 보면 보통의 일이 아닐텐데 부끄럽게도 교섭 실패라니..." 그의 물음에 대답을 미루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밀턴은 조심스럽게 품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품에서 빠져 나온 그의 손에는 붉은 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바로 투르코스가 교섭이 실패 했을 때를 대비해 전해준 명령전달서 였다. 오랜 시간 동안 특무대에서 작전을 수행한 카밀턴의 수하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교섭인에 불과한 니카도는 어떤 분위기 인지 잘 모르는 듯 했다. "대체 그 봉투는 뭡니까? 인장을 보니 재상각하께서 전해 주신 것 같은데..." "흠... 이 봉투 안에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지. 작전 마다 그 내용도 가지 각색이라네. 심지어는 비밀을위해서 자살명령까지 내려지기도 하지." 긴장한 니카도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옆사람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들렸다. "설마 저도 그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저는 그저 교섭인일 뿐입니다!" "자네가 특무대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함께 작전에 투입된 이상 자네 역시 특무대에 소속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 그런..." 지레 겁을 먹은 니카도의 모습을 보며 카밀턴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게나. 자살명령은 그리 쉽게 내려 지는 것이 아니니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 아니라면 절대 내려지는 일이 없지." 그제야 겨우 안심을 한 니카도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카밀턴은 단단히 밀봉된 봉투의 모서리를 거칠게 찢어 내렸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손바닥의 반만한 크기의 얇기 그지 없는 노란색의 종이였다. 바람이 조금만 불더라도 금방 찢어 질 듯한 노란색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카밀턴은 그 내용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아무런 동요 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카도를 제외한 대원들은 오늘 자정을 위해 푹 쉬어라. 명령서의 내용은 그 때 전달한다." "옛!" 짤막하게 대답을 한 대원들은 착용하고 있는 무장을 움직이기 편리하도록 정리하며 일어나서 각자의 침상으로 자리를 옮겼고, 카밀턴은 늘 그래왔던 것과 같이 명령서를 작게 구겨 입으로 털어 넣었는데, 침과 닿으며 천천히 녹아 내리는 기묘한 맛에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지 보일 듯 말 듯 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2002-10-27] 짜가신선 <대공학자> #190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어서 인지 그라프는 아직 가을임에도 겨울 마냥 차갑게 몸이 식는 것을 느꼈다. 남들 보다 빠르게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은 그라프는 탁자에 앉아 버릇처럼 수염을 쓸어 내리고 있었는데, 그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 듯 혼잣말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흠... 그럭 저럭 잘 끝났군. 카밀턴이라는 자, 생각보다 냉철한 인물이군. 뒷 일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은 다 했다는 것인가? 그에 비해 교섭인이라고 하는 자는 아직도 많이 모자르는 편이라고 할 수 밖에... 척 보아도 지금까지 쉬운 일만 도맡아서 자신감만 넘쳐나는 풋내기라고 할까? 하긴 상부에서 저런 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서류상의 자료일 뿐일 테니 종종 사람을 고르는데 실수가 있을 수 있지." 그라프는 뮤스와 카밀턴 일행의 대화를 직접듣기라도 한 듯 상세히 파악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라프는 지금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뮤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두꺼운 외투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한 몸을 애써 돌리며 입을 열었다. "여차. 이제 오는군. 생각 보다 자네의 연기력은 뛰어나더구먼."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겉에 입고 있던 옷의 소매 단추를 뜯어 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후훗 그래도 속으로는 떨리던걸요. 혹시라도 연기를 하는 것이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요. 그나저나 수신성능은 어떤던가요?" 뮤스의 되물음을 들은 그라프는 귀에서 검은 물체를 빼내며 미소지었다. "바로 옆에서 듣는 것 처럼 목소리가 깨끗하게 들리더군. 정말 마법같은 물건이야." 그라프가 뮤스와 카밀턴 일행의 대화에 대해 잘 알수 있었던 것은 도청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는데, 벌쿤이 세이즈의 집을 도청했을 때 쓰인 것을 다른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뮤스는 목을 죄고 있는 목의 단추를 풀어 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도청 장치를 그곳에 설치를 하고 올 것을 그랬군요.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을 거것일세. 비록 노련한 모험가들의 눈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험가들의 통찰력이 대단할 뿐이지 결코 그들이 어수룩 한 것은 아니야. 만일 도청장치를 어딘가에 부착하려 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눈치를 챘을 것이 틀림 없네." "흠 그렇군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죠?" 손에 들고 있던 수신기를 뮤스에게 넘겨준 그라프는 외투의 매무새를 다시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미리 커리큘드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아직 시간이 있네. 이곳에는 눈이 많으니 밤까지 서툰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조용히 그라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뮤스의 입에서 의미 깊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발 서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 되도록..." 아직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뮤스를 지켜보던 그라프 역시 그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는지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해 주었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굳게 박힌 손이 나무로 만든 투박한 창문을 살짝 열었다. 하지만 기름을 친지 오래된 나무창문은 여지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끼기기기긱! 그 손의 주인인 카밀턴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이곳의 창문에도 유리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미개척지의 숲에 유리로 된 창문이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 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쓴웃음으로 잡념을 마무리지으며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오늘밤은 웬일인지 움직이는 모험자들이 없군. 모험자의 수가 줄어서 그런가?" 답을 듣기 위한 질문도 아니었고,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질문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무장을 정리하던 카밀턴의 수하중 한명이 대답했다. "밤의 날씨가 차가워 져서 그럴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은 이상하지만, 어차피 그만큼 이목이 없으니 우리가 해야할 일이 한결 손쉬워 진 것이 사실 아닙니까?" 카밀턴 역시 수하의 말에 수긍을 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었다. "흠... 그도 그렇지. 하지만 뭔가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지울 수 없군. 챠퍼. 그들의 숙소에 별다른 움직임은 없겠지?" 그의 물음에 챠퍼라는 이름을 가진 수하 한 명이 하던 일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수시로 그들의 숙소를 살펴봤지만 숙소로 들어간 이후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내뿜고 있는 창을 닫은 카밀턴은 내부에서 작전 준비를 하는 수하들을 둘러 보았는데, 그 중 니카도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양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두 손을 굳게 모은 채로 작은 경련을 일으키던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척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고 말하는 듀들란 제국의 방책이라는 말입니까..."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카밀턴은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이것은 실내가 조용한 이유도 있었지만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니카도의 약한 모습에서 짜증이 일어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딱딱하던 표정이 더욱 화석처럼 굳어지며 몸의 주변으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니카도 자네가 우리의 일을 어떻게 이해하겠나! 나와 아무런 원한이 없더라도 국가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한다네! 그것이 듀들란 제국에서 수많은 돈을 퍼부어 가면서도 우리 특무대를 유지시키는 이유이지. 자네같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일세.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그..그것은..." 카밀턴은 자신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여는 니카도의 말꼬리를 날카롭게 자르며 치고 들었다. 그의 진 갈색의 두 눈동자는 어떠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네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인도적으로 재상각하의 지령을 무시하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그런 것은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그저 상부의 지시에만 따르는 특무대의 대원일 뿐이지. 아무리 그 명령이 더럽고 못마땅해도 우리는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특무대일세!" 니카도는 위압적인 카밀턴의 기세에 질렸는지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니카도가 잠잠해 지자 흥분을 가라앉히며 마음을 가다듬은 카밀턴은 탁자에 기대어 있는 장검을 들어올리며 등을 돌렸다. "나와 챠퍼 그리고 죠슈드가 움직인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짐을 꾸려라. 일이 끝나는 대로 다른 모험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이곳을 떠난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문을 열고 나가자 챠퍼와 죠슈드가 니카도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털컥... 숙소의 문이 닫힘과 함께 카밀턴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니카도는 심장을 묶고 있던 올가미가 풀린 듯 힘이 잔뜩 들어간 몸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후우..." "흐음... 니카도 자네가 실수 한 것 같군. 우리에게였다면 모를까 카밀턴 대장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어." 니카도는 등뒤로부터 들려오는 동료의 목소리에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인가? 그저 나는 이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말했던 것일 뿐일세!" 하지만 그에게 말을 건넨 동료는 답답한 듯이 짧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우리의 입장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것이야. 사실 우리 역시 각자의 부대에서 발탁되어 특무대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정말 믿을 수 없었지. 전란이 종식 된 평화의 시기에도 특무대 같은 특수기관이 존재해야만 하는지 이해 할 수도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결국은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듀들란 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역시 특무대에 버금가는 조직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어차피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가 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뿐, 우리 역시 자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네." "그렇다면 왜 카밀턴 대장은 그렇게 무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자네처럼 말을 해줘도 될 것을..." "그것은... 사실 특무대의 대장 직위를 가진 카밀턴 대장은 우리 같은 일반 대원들과 그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지." "다르다니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잠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동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음... 보통 특무대, 그리고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는 여타 조직의 대장들은 생각보다 큰 권한을 가지고 있고, 직무완 연계되어 타국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될 일급의 기밀사항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만약 그런 사람이 타국으로 흘러들어 갈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국에서는 금제를 가하는 것이 보통이야." "금제라니? 설마 카밀턴 대장의 몸에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기왕 이야기가 깊이 들어왔고, 니카도가 작전에 참가한 이상 그 역시 특무대의 일원이 되었기에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거리낌은 없었다. 이번에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짐을 꾸리던 다른 동료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무대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데 몸에 금제를 가하는 것은 말이 안되지. 금제의 대상은 바로... 카밀턴 대장의 가족들이야. 나이가 많으신 어머니와 시집간 누이가 있는데, 그들의 주변에 감시자들이 몰래 따라 다녀. 그러다가 만약 카밀턴 대장이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잠시 머뭇거린 동료는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그 가족들에게 죄를 대신 묻는 것이지." 자신이 가지고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니카도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믿고 의지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모국의 어두운 면을 알게된 충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가족들을 담보로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깝지만 모두 돈 때문이지. 최소한 특무대 대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을 때만큼은 본인과 가족들에게 상당한 보수가 지급되니까 말이야. 그러니 당장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들 정도로 힘들게 가정을 꾸려 나가던 카밀턴 대장은 생계를 유지할 방법으로 특무대를 선택한 것이고 가족들의 안위가 관계된 일인만큼 명령에 대해서는 도덕적 관념을 떠나서 카밀턴 대장의 신념이 되어 버린 것이야." "으음... 그런 것이었군."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서야 니카도는 카밀턴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의 한 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국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지며 생긴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난간 아래쪽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세 개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그림자가 겹쳐진 곳으로 이동을 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세 쌍의 눈동자는 주변을 살피기에 바빠 보였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밝은 곳으로 내밀었다. 검은 색의 복면을 쓴 그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난간 위쪽의 상황을 살핀 후,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시선을 바깥 쪽에 고정 시킨채 입을 열었다. "난간 위쪽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도 없는 것을 보니 이미 잠이 든 듯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들은 다름 아닌 뮤스의 척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특무대의 대원들 이었는데, 오늘 따라 신경을 써야 할 눈이 없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뒤에서 보고를 듣고 있던 복면의 인영 중 한명인 카밀턴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어차피 우리는 자객이 아니니 그가 잠을 자던 아니던 상관 없다. 소요가 일어 난다고 하더라도 남의 일에 신경 쓰기를 싫어하는 모험자들이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아침 일찍 시신이 발견 되기전에 사라진다면 모험자들은 사사로운 원한 관계라 생각하고 금새 조용해 질테지. 아무리 공학원의 원장이라 해도 평범한 청년일 뿐이니 목숨을 거두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야." 말을 마친 그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장검 가만둔채 어깨춤에 차고있던 단검을 빼들고 있었다. 그 때 뒤를 따르던 인영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 늙은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검의 날을 확인하던 카밀턴은 수하의 눈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명령 이외의 살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텐데? 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제압을 해두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몸 상태를 살핀 카밀턴은 수하들을 둘러보며 지시했다. "챠퍼는 단검을 꺼내고, 먼저 진입해서 시야를 확보한다. 죠슈드는 이곳에 남아 상황을 살펴라. 그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겠다." 대답 대신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 명의 인영 중 챠퍼가 먼저 난간의 계단을 밟으며 가볍게 올랐고, 죠슈드는 사라지듯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챠퍼의 뒤를 따라 대장인 카밀턴이 발걸음을 옮겼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1 제대로 된 문고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나무 문의 양쪽에 선 카밀턴과 챠퍼는 서로 눈빛을 교환 했다. 그리고 카밀턴이 손가락을 간단하게 움직이자 챠퍼는 단검을 고쳐쥐며 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역시 창문과 마찬가지로 뻑뻑하긴 했지만, 그나마 자주 사용되었기에 삐걱이는 소리가 없었다. 챠퍼가 고개를 드리밀며 뮤스의 숙소로 들어가자 카밀턴 역시 밖을 한번 더 확인하며 뒤따랐다. 숙소의 내부는 아주 어두웠다. 겨울이 한발짝 다가옴에 따라 밤에 창이 열려있을리도 없는 데다가 그들이 들어온 문은 달이 뜬 맞은 편이었기에 달빛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시야 확보가 불가능해지자 챠퍼는 나직한 목소리로 카밀턴을 향해 물었다. "이래서는 시야 확보가 안되겠습니다. 불이라도 밝히는 것이..." 카밀턴 역시 챠퍼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허리의 뒤쪽에 차고 있던 작은 배낭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20셀리 가량 되는 막대를 꺼내들며 능숙하게 막대의 아래쪽에 있는 끈을 입으로 물어 당기려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동작은 멈춰질 수 밖에 없었다. "후훗! 그런 비싼 물건을 애써 낭비 할 필요는 없네. 기관원들이 쓴다는 발광막대 보다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대신 불을 밝혀 줄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횃불이 타오르며 숙소의 내부를 밝히기 시작했고 눈이 부신 카밀턴과 챠퍼는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검은 복면 뒤로 가려진 얼굴을 찡그린 카밀턴이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런... 이런... 모험자들의 마을에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모험자들일세." 겨우 시야를 확보 할 수 있었던 카밀턴과 챠퍼는 팔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제서야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파악 할 수 있었는데, 약 10여명의 모험자들이 자신들의 병장기를 꼬나쥔 채 카밀턴과 챠퍼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의 가운데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사내는 한번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던 커리큘드라는 자임을 알 수 있었다. 낮은 신음성을 흘린 카밀턴은 싸늘한 눈초리로 커리큘드의 아래위를 흘기며 물었다. "뮤스원장은 자네들이 빼돌린 것인가? 그는 어디에 있지?!" 살기가 섞인 그의 물음을 들은 커리큘드는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능청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으흠... 혹시 자네들 저녁을 잘못 먹은 것 아닌가? 이런 모험자 마을에 원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오랜만에 베게 싸움 하려고 모였더니 이렇게 처들어 와서 헛소리나 하다니..." 커리큘드의 아무런 설득력 없는 핑계를 듣다 참지 못한 챠퍼가 나서며 외쳤다. "네가 뮤스원장과 친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그런 억지로 발뺌을 하는 것이냐! 헛소리 말고 뮤스원장의 소재를 말해라!" "어허! 글쎄 나는 모른다니까 그러네. 아하! 간혹가다 마물에 홀리면 헛것이 보인다는 소리가 있다고 하던데 몹쓸것들에게 당한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신전으로 가서 치료나 받으시지?" "뭐..뭐라고!" 챠퍼는 특무대에 들어간 후부터 훈련을 받으며 거칠기만하던 군인의 성격을 누를 수는 있었지만, 커리큘드의 노골적인 도발을 그냥 참고 있을 만큼의 수도를 한 것은 아니었기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서 장검을 빼어 들었다. -챠앙!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투명한 장검의 날카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커리큘드는 무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 상황파악을 못하는군, 자네들이 아무리 특수기관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는 계산 같구먼. 우리 역시 베짱만으로 이런 미개척지를 살아 가는 것은 아니니 말이야." "그..그런..." 자신이 빼든 장검을 보며 왠지 우습게 됐다는 생각을 한 챠퍼는 어쩔 줄 몰라하며 카밀턴의 얼굴을 살폈지만, 역시 복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 조차 여의치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수하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은 가밀턴은 특무대의 대장 답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챠퍼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서라. 이들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 "알겠습니다. 대장."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물러서는 챠퍼를 바라보던 카밀턴은 얼굴의 복면을 거칠게 벗으며 커리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좋다. 어차피 싸워봤자 양쪽에 피해만 클 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 난다는 것도 우리의 자존심이 용서치 못하니 그만한 보상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커리큘드였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나는 평화가 좋다니까. 그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쪽으로 떠났네. 지금쯤 상당한 거리를 갔을 거야." "남쪽이라... 고맙군. 돌아가자 챠퍼!" 먼저 몸을 돌려 나가는 카밀턴을 본 챠퍼는 커리큘드와 그의 동료들을 향해 이빨을 한번 갈아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카밀턴과 챠퍼가 밖으로 나가자 커리큘드는 창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다. 밖으로 나간 카밀턴은 망을 보던 죠슈드를 이끌고 서둘러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는데, 수하들을 시켜 말을 준비하게 하는 것으로 봐서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은 커리큘드는 창문과 문을 단속했고, 바닥을 발로 구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그라프님." 그의 말대로라면 뮤스와 그라프는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문득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들썩거리기 시작하자 곧 뚜껑이 열리듯 나무 바닥의 한 부분이 열리며 그라프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허헛 아래에서 들어 보니 감쪽같이 속은 것 같더군. 자네의 그 능청스러움은 놀라울 정도야." 그라프의 칭찬에 커리큘드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는데, 카밀턴 앞에서의 뻔뻔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라프가 밖으로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고, 뒤이어 뮤스가 올라왔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뮤스의 얼굴을 본 그라프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위로했다. "어차피 자네나 나나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닌가?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네... 저는 괜찮아요." 그라프의 위로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것이 억지의 미소라는 것을 모를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 지자 커리큘드가 나서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들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고생을 하게 될테니 이곳에서 계속 지내셔도 될 듯합니다만..." 뮤스에게서 시선을 뗀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분위기에 휩쓸려 이곳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곧 이상함을 느끼고 이곳으로 돌아 올것일세. 그러니 우리는 날이 밝기전에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일세." 북쪽이라는 말에 큐리컬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부..북쪽이라니요! 북쪽으로 갈 수록 마물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국경이 있는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닐세. 물론 북쪽의 미개척지가 위험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네. 우리가 움직이기 힘든 만큼 그들 역시 마물들 때문에 우리를 추적하기 쉽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자네가 걱정을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힘없는 이 늙은이가 아무런 대비 없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세. 마물들의 공격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한 바가 있으니 심려하지 않아도 될것이야." "음... 그라프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다면..."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커리큘드는 그라프의 말을 충분히 수긍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같은 시간 밖에서는 길을 재촉하는 카밀턴 일행의 말 발굽소리가 파숄의 밤을 흔들고 있었다. 추적 대지를 데워야 할 태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옷 소매로 파고드는 바람은 잔인하다고 말할만큼 매서웠고, 살을 벨듯이 스치는 바람은 귀끝의 감각을 무디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주인이야 어떻든간 상관없다는 듯이 검은 말들은 쉴세 없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듣는이의 가슴마저 떨어울릴 정도의 박력적인 말발굽 소리가 숲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말의 수는 대 여섯 마리, 하나 같이 오랜 시간을 달렸음에도 지칠줄 모르는 준마들이었고, 말을 모는 사내들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기마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리큘드의 말에 속아 파숄을 빠져나와 뮤스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한 특무대의 대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자정이 조금넘어 파숄에서 출발하여 꽤나 오랜 시간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지만 아직 아무런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주변이 어두웠기에 추적하기에 애로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쯤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의 추적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들이었기에 시간이 갈 수록 답답해져 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앞장을 서서 달리던 카밀턴이 한쪽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하며 고삐를 잡아 당겼다. "워! 워워!" 카밀턴의 말이 속도를 줄이며 멈춰서자 그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 역시 비슷하게 멈춰서게 되었다. 달리다 말고 멈춰선 카밀턴과 주변을 살펴보던 챠퍼가 물었다. "대장 무슨 뭐라도 발견 한 것입니까?" 그러나 카밀턴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말에서 뛰어 내려 지나온 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수하들은 카밀턴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덩달아 말에서 내리며 그가 움직이는 쪽으로 따라나섰다. 대략 스물 발자국 정도 움직였을까? 문득 카밀턴은 몸을 낮추며 말발자국이 선명하게 파여있는 땅을 만지는 것이었다. "역시 서리맞은 땅은 딱딱하지 않아 말발자국이 쉽게 남지... 챠퍼! 앞쪽으로 가서 말 발자국이 있는지 살펴봐!" 갑작스러운 명령에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파숄을 떠나 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 그에게 되물어 봐야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챠퍼는 카밀턴의 말을 지나 길의 앞쪽으로 걸었다. 몇 발자국 걷던 챠퍼는 안력을 돋구어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자 다시 카밀턴에게 되돌아가며 말했다. "흠... 앞쪽은 깨끗합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흩어진 흔적이 없는 것을 보니 한동안 아무도 이곳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땅의 흙을 불끈 움켜진 카밀턴은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죠슈드! 오늘 파숄에서 말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거나 말 발굽 소리를 들은 적 있나?!" 질문을 받은 죠슈드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는데, 하루종일 뮤스의 행적을 관찰하던 그였기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일행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없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대장님도 알다시피 요즘같은 계절에는 모험자들이 크게 줄어 별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물론 말발굽 소리나 그 비슷한 소리도 못들었습니다." 카밀턴은 이제야 뭔가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외쳤다. "제기랄! 우리가 그 커리큘드라는 자에게 농락을 당했군! 마음이 조급해지는 바람에 냉정하지 못했어... 서둘러라 지금 바로 파숄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틀림없이 아직도 파숄에 머물고 있을 것이야." 분한 마음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카밀턴은 공기를 가르며 몸을 돌렸고 대충 어찌된 일인지 눈치를 챌 수 있었던 수하들 역시 다시 말에 올라타며 말 머리를 돌렸다. 같은 시간, 두 마리의 말이 절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루며 파숄을 빠져나와 북쪽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뮤스와 그라프는 긴 여행을 대비하여 몇 시간 동안 잠을 잔 후에 커리큘드와 작별을 하고서 떠나는 길이었다. 파숄에서 지내는 동안 커리큘드에게 기마술을 배운 뮤스는 제법 안정된 자세로 말을 몰았고, 그라프는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뛰어난 기마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가닥! 타가닥! 타가닥! 푸드득! 바람을 정면으로 받은 뮤스는 눈을 찌르는 듯한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반면 그의 옆에서 달리던 그라프는 모자의 챙을 적절하게 내리며 바람을 막고있었는데, 지금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었지만 모자의 챙이 내려간 모습을 보니 원래 바람을 막을 용도로 제작된 듯 했다. 그런 모습이 조금 부럽다고 생각을 한 뮤스는 대용품을 찾기위해 가방으로 손을 넣었고, 곧 공학원에서 금속재련시 자주 쓰던 안구보안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충 한 손으로 그것을 착용한 뮤스는 그럭저럭 만족 할 수 있었고 이제야 여유가 생긴 뮤스는 그라프에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었다. "그라프님.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커리큘드씨게 말씀하셨던 마물에 대한 방비책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솔직히 이제 그라프님과 저 둘만 남게되니 마물들을 만나는 것이 조금 걱정되는 군요." 요란한 말발굽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법도 했지만, 그라프는 뮤스의 말소리를 놓치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허헛! 우리가 지금까지 미개척지를 돌아 다니면서 카일락스를 제외한 마물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전투능력이 거의 전무한 쥬라드 사제와 내가 단 둘이 미개척지까지 온 것도 충분히 의심해 볼만 했을 텐데?" "생각해보니 그랬군요. 하지만 그점에 대해서는 별달리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는 뮤스를 보며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바로 나의 품안에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지." 드래곤의 낭소라는 말을 들은 뮤스의 인상은 눈에 띄게 일그러졌는데,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크라이츠의 얼굴이 떠오르며 연관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낭소라니요? 설마 생식작용을 하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뮤스의 모습을 보던 그라프는 자세한 사연까지는 몰랐지만,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반응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이 진짜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은 아닐세.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드래곤의 낭소를 구한다는 것이 어디 가능하기나 하겠나? 내가 가지고있는 것은 그저 드래곤의 낭소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냄새를 인공적으로 발산하게 해주는 작은 주머니일 뿐이야."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서야 뮤스는 미간의 주름을 펼수 있었고,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맡아 보려 했지만 그의 코에서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숲의 향기일 뿐이었다. "흠흠... 저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겠는데요? 그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자네도 알겠지만 드래곤은 최강의 존재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레어 주변에는 어떠한 마물도 마음껏 활동을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럴려면 어디가 드래곤의 레어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 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낭소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일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뭇가지 하나를 고개를 슬쩍 숙이며 피한 그라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 이것을 만들 당시만 해도 그저 고대의 서적에서 영감을 얻은 이론일 뿐인데다가, 그 드래곤의 낭소에서 나온다는 냄새가 사람의 감각을 벗어나는 영역이었기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지. 하지만 여러번 여행을 통해서 시험해본 결과 나의 이론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네. 그 후로는 여행을 할 때면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지." 그라프의 설명을 들으며 말을 달리던 뮤스는 그라프의 실험 정신에 대하여 감탄해 마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드래곤의 낭소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보아하니 카일락스와 같이 지능이 없이 본능만으로 활동을 하는 마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용이 없는 듯 합니다만 그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날카로운 뮤스의 지적에 그라프는 마치 그런 지적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말했다. "역시 뮤스원장 답군.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범주에 속하는 마물의 종은 그리 다양하지 않을 뿐더러 그 수 또한 극히 적기 때문에 직접 찾아 나선다해도 만나기가 힘들 정도일세. 자네가 예를 들었던 카일락스 역시 지난 수백년간 잊혀지다 시피 한 존재 아닌가." "그렇다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언제 들어도 설득력있는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뮤스는 자연스레 수긍하고 있었다. 이제야 뮤스의 궁금증이 해소 된 듯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자 그라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히 혼잣말을 했다. "설령 그런 마물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자네 처럼 든든한 젊은이와 함께 있으니 그리 두렵지만은 안네그려..." 뮤스는 그런 그라프의 독백을 듣지 못한 듯 말을 달리는데 정신을 쏟았고, 그가 탄 백마는 새하얀 입김을 불어내며 새벽의 숲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2 뮤스와 그라프를 보내고서 서운함에 잠이 잘 오지 않았던 큐리컬드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파숄의 외벽에 올라 앉아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피부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금새 식으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또 다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시작해 콧망울을 타고서 땅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느끼며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큐리컬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먼 발치를 내다보았다. "흠 새로 들어오는 모험자들인가?" 혼잣말을 내뱉은 큐리컬드는 잠시 쉴겸 팔을 늘어트린채 마을로 접근하는 일행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외벽의 100멜리까지 접근 했는데, 그때는 이미 큐리컬드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차렸을 때였다. "호오... 벌써 돌아오고 있다니 생각보다 빨리 눈치가 빠른걸? 카밀턴이라는 자는 꽤나 쓸만한 능력을 가진 것 같군. 그나저나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대지?"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로 중얼 거리던 큐리컬드는 자신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팔짱을 끼며 외벽까지 거의 다다른 카밀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말을 달리던 카밀턴의 눈에도 외벽에 걸터 앉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큐리컬드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지난 밤동안 그의 말에 속아 어두운 숲속을 헤맸다는 분한 생각에 어금니를 질끈 깨문 카밀턴은 말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활을 꺼내 잡았다. 그리고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어 시위를 먹이며 큐리컬드를 겨냥했는데, 반복된 훈련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재빠른 행동이었다. 화살 촉의 끝으로 큐리컬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그는 카밀턴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이봐! 아침 인사치고는 너무 과격한 것 아닌가?!" 떠듬거리는 큐리컬드의 목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밀턴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있는 시위를 가볍게 놨고, 촉부터 깃까지 검은색인 한 대의 흑전은 화살은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자신을 향해 무심하게 날아오고 있는 화살을 확인한 큐리컬드는 마른침 한번 삼킬 시간없이 외벽을 방패삼아 몸을 날렸다. -텅! 아슬아슬한 차이로 화살을 피했을 때, 마치 큼직한 못이 벽에 박히는 듯한 소리가 외벽으로 부터 들려왔고, 안전하게 피했다는 생각에 큐리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했다. 하지만 화살을 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생각없이 몸을 날린 곳이 발판 하나 없는 곳임을 알아 차렸을 때는 더욱 다급한 한숨을 들이마셔야 했고, 결국은 화려한 몸짓으로 허우적 거리며 맨땅을 맞이해야만 했다. -털썩! 밀가루 포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큐리컬드는 충격이 꽤나 컸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한채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벽중에도 낮은 곳이었기에 크게 다지치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만약 가장 높은 외벽에서 떨어졌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상황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미친 녀석... 대뜸 보자마자 활을 쏴대다니..." 투덜거리는 말과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킨 큐리컬드는 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팔이 약간 뻐근한 감이 있긴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을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마을로 들어온 카밀턴 일행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큐리컬드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성큼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큐리컬드는 만에하나 그들이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벨트에 매달려있는 단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곳은 자신의 본거지 겪인 곳이었기에 그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특유의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이렇게 과격하게 행동하면 쓰나... 덕분에 머리가 산산히 깨질 뻔 했다고." 큐리컬드의 말을 듣고있는 카밀턴은 이제 그의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심리전에 휘말리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 참 유감이군. 조금만 빨랐으면 그 얄미운 입에 화살을 처박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어허...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비록 카밀턴의 말투가 거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 병장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직감한 큐리컬드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큐리컬드의 코앞까지 바짝다가온 카밀턴은 눈을 얇게 뜨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괜한 충돌을 이르켜 봐야 우리의 일에도 도움이 될 이유가 없으니 다른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들이 어디있는지 말하게." 오히려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함을 지는 것 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기가죽을 큐리컬드도 아니었기에 얼굴을 뒤로빼며 대답했다. "이봐... 물론 자네를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네. 하지만 하나만은 내 이름을 걸고 맹새 할 수 있어. 그들은 자네들이 이곳을 떠난 후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카밀턴은 아무런 말없이 큐리컬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또 다시 그가 거짓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고, 이후로도 둘 사이에는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카밀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입장 역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만큼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하고있는 행동은 나의 신념을 짓밟으려는 것이고, 나 또한 더 이상은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일세. 이번에도 자네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내가 이끄는 단체의 모든 힘을 들여서라도 그 대가를 치루게 할테니 그쯤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말을 마친 카밀턴은 더 이상 대화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보이며 뒤돌아 섰고, 멀뚱히 남은 큐리컬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대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유모를 신음성을 흘렸다. "흐음... 젠기랄. 아침부터 화살까지 쏴댄 주제에 뭐가 원망을 안했다는거야." 그의 투덜거림이 끝나있을 때 카밀턴은 이미 일행과 함께 자신들의 말까지 걸어가 있었기에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큐리컬드의 본능 또한 그가 듣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밀턴의 그 당당함과 위압감, 또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는 모습이 큐리컬드가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의 그것보다 대단했기에 대립하는 입장이었음에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그를 인정을 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쯤 뮤스와 그라프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렸기에 아무리 힘 좋은 말이라도 지치기 마련이었고, 더우기 언덕을 하나 막 넘어오던 참이었기에 그들의 말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각, 따각... 말을 이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라프가 문득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쯤이면 우리가 뒤늦게 떠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군..." 그의 독백을 들은 뮤스 역시 고삐잡은 손을 늘어트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물었다. "벌써 그들이 눈치를 챘을 까요? 어쩌면 이대로 실마리를 놓쳐 추적하을 포기 할지도 모를 것 같은데..." "허헛! 자네 그들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구먼. 나는 그런 부류의 인물들을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네... 늦더라도 내일 저녁 쯤이면 우리의 속도를 따라 잡게 될 것이야." 그라프의 이야기를 토대로 카밀턴의 능력을 짐작해 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그의 말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제가 미개척지를 한동안 떠돌아 봤지만, 이렇게 길도 확실치 않은 곳에서 사람 한명을 찾는 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마물들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 우리와 이동 속도가 같을 수도 없다는 것이죠." "허헛! 자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 같은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세. 듀들란 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이첸 제국의 특전사단 같은 경우에는 모든 훈련을 미개척지에서 진행하고 있지. 즉, 그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살아 남는 훈련과 동시에 추적, 암살등의 훈련을 병행한다네. 지금까지 자네는 그들의 깍듯한 태도만을 봤기 때문에 실감을 할수 없을 테지만, 지금과 같이 약이 오른 상태에서는 그들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일세. 우리는 아주 멋진 구경을 하게 될거야..." 결국 자신들에게는 극히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여유를 부릴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라프는 여전히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허허허... 지금은 말도 너무 지쳐있고 또, 무작정 도망만 가는 것은 너무 볼썽 사납지 않겠나?" "그렇지만 이대로 당할것을 뻔히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말을 마치며 주변 환경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흠... 이곳 어디 쯤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내 기억력도 옛만 못해졌군." 벌써 수십년 동안이나 되풀이 했던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불평을 오늘 역시 빼놓지 않은 그라프는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듯이 숲속을 꼼꼼히 따지며 걸어갔고, 뮤스는 영문도 모른채 그의 시선을 따라 숲을 살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찾아 돌아 다닌지 벌써 두어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뮤스는 천천히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을 애써 눌렀는데, 예전의 그였다면 벌써 폭발을 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까지 한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던 그라프가 문득 자리에 멈추며 턱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으로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헛! 바로 이곳이야! 그래도 아주 몹쓸 머리가 된건 아닌가보군 그래..." 자찬을 하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나지막한 나뭇가지에 걸어었다. 하지만 뮤스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까지 지나온 장소들과 별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 다녔다는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옆으로 치워놓던 그라프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혹시 사냥을 위해서 트랩을 설치해본 적이 있나?" 자신의 물음과 상당히 동떨어진 질문이었지만, 그라프가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트랩이라면 덫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토끼를 잡기 위해 덫을 놔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덫에 대한 생각에 잠을 못이루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서 덫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었죠." "호오... 꽤나 좋은 추억이군. 우리가 북쪽으로 올라온 것도 바로 그 덫을 놓기 위해서 일세." 이제야 대충 그라프가 노리고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던 이 장소에 대해 감탄사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는데, 나무들과 수풀의 배치가 마치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것인 양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몇시간이나 헤메면서 찾아올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군요. 사방을 나무와 수풀이 가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들어온 곳을 포함해 고작 세 군데 밖에..." 그라프는 이 장소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뮤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입구의 폭이 좁기 때문에 트랩을 설치하기에는 더 없이 좋지. 이제 의문이 좀 가셨나?" 뮤스는 이곳이 덫을 설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장소임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며 되물었다. "과연 단순한 트랩만으로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가 있을 까요? 그라프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그들이 극한의 훈련을 거쳤다면, 적이 설치한 트랩에 대해서 대비하는 방법 정도는 충분히 교육 받았을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자네에겐 하나도 빼놓고 말할 수 없겠구먼... 허헛!" 기분좋은 탄식의 소리를 내뱉은 그라프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지금 두가지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목표물이 사람이니 만큼 그들의 심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개척지의 북부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이지.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해 줄테니, 우선 자네의 말도 어디에 묶어두게나.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오늘 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으니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알다시피 힘쓰는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거든." "흠... 그럼 오늘은 밤은 이곳에서 묵어야 겠군요." 결국 힘쓰는 일은 모두 뮤스가 도맡아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경로사상이 기본인 조선에서 살아온 만큼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는 않고 있었다. 가방 하나가 짐의 전부인 뮤스는 따로 정리할 짐이 없었기에 그라프가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고, 으슬으슬한 몸을 녹이기 위해 마른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웠다. 대충 짐정리를 끝낸 그라프와 뮤스는 타닥소리를 내며 타고있는 모닥불 주변에 앉아 손을 쬐었는데 불쏘시개로 타고있는 장작을 한번 뒤적인 그라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트랩은 상대의 심리를 완전히 간파하는 것에서 시작하네. 물론 표적이 드랩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지금과 같이 트랩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라면 그의 능력 보다 더욱 복잡한 트랩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지. 한 마디로 덫 위의 덫을 씌운다고나 할까?" 그의 설명을 듣던 뮤스는 불을 쬐던 손을 부비며 말했다. "흠 하나의 트랩을 피하더라도 또 다른 트랩에 걸려들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하게 짚었네." "하지만 사람의 행동에는 수 많은 요인이 작용합니다. 아무리 행동의 영역을 계산을 하더라도 계산 밖의 행동이 나올 수 있기에 그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상하고서 두번 째 트랩을 설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 되는군요." "그 말도 틀린 점이 없네." "그럼 아무런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고 봐도 무방한 것입니까?" "음... 그말은 틀렸네. 아무런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애써 자네에게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물어 볼 수록 수렁에 빠지는 듯한 그라프의 대답에 뮤스의 머리속은 점점 복잡해 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고 있는 뮤스를 보며 그라프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껄껄껄! 자네의 머리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구먼. 사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미리 짐작 할 수 있다네." "어떻게 그런?" "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지." 손을 뻗어 짐을 끌어당긴 그라프는 그 속에서 낡은 책을 한권 꺼내어 뮤스에게 건네 주었다. 그것은 만들어 진지 상당히 오래된 듯 가죽 표지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고, 속지는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책을 받아든 뮤스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굉장히 오래된 책인 것 같은데 그라프님께서 직접 쓰신 건가요?" "내가 젊은 시절 도이첸 제국의 재상 자리에 있을 때 집필한 책일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트랩들과 그것들을 가장 효율 적으로 파해하는 방법을 수백번의 반복 실험을 통해 집대성해 놓은 책이라네. 처음에는 도이첸 제국의 특수기관 대원들을 훈련시키는데 쓰기 위해 집필했지만, 타국으로 넘어가면서 거의 모든 군대의 정식 훈련서로 채택되었고, 듀들란 제국 역시 그런 국가들 중 한 곳일세. 아무리 특수기관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의 내용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테지." 그러나 뮤스는 아직도 부정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말씀대로라면 좋을 테지만 그라프님께서 젊었을 적이라면 벌써 반백년이나 더 된 이야기일텐데 그간 변화가 있지 않았을 까요? 또, 꼭 교육을 받은 대로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네가 군대라는 사회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네. 군대라는 것은 시대와 국가적 개성을 막론하고 가장 정체된 사회일세. 그리고 그곳에 소속되어있는 군인들 역시 교육 받은 그대로 움직이는 자가 가장 인정을 받게되는 것이 보통이고, 개인의 생각 따위는 억압받는 곳이지. 군인은 생각이 많으면 많을 수록 다루기가 힘들어지니까." 이야기가 길어져서인지 입안이 마른 그라프는 물통을 꺼내 목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를 쫓고 있는 특별기관의 인물들은 그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들인 만큼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몸에 익었을 테고, 그 만큼 우리는 그들의 행동영역을 예상하기 쉽다는 말과 같지. 게다가..." "...?" "후훗! 대현자라고 불리우는 나의 이름이 표지에 떡하니 찍혀있으니 내용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을 것일세. 내가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나보다 대단한 현자가 나왔다는 소리는 못들었다네. 껄껄!"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자랑스럽게 웃고있는 그라프를 본 뮤스는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무리 잘 보려해도 자랑인 것 같군요." "흠흠.. 아니래도. 어쨌건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세나." 그 이후로 뮤스는 그라프의 설명을 계속들어야만 했는데, 자신의 말에 꼬투리를 달았다는 것에 대한 응징인 듯 그 내용은 점점 지루해져 갔고, 엉뚱한 곳으로 까지 빠져들어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2002-11-03] 짜가신선 <대공학자> #192 (수정) 뮤스와 그라프를 보내고서 서운함에 잠이 잘 오지 않았던 큐리컬드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파숄의 외벽에 올라 앉아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피부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금새 식으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또 다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시작해 콧망울을 타고서 땅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느끼며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큐리컬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먼 발치를 내다보았다. "흠 새로 들어오는 모험자들인가?" 혼잣말을 내뱉은 큐리컬드는 잠시 쉴겸 팔을 늘어트린채 마을로 접근하는 일행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말을 탄 일행들은 외벽의 100멜리까지 접근 했는데, 그때는 이미 큐리컬드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차렸을 때였다. "호오... 벌써 돌아오고 있다니 생각보다 빨리 눈치가 빠른걸? 카밀턴이라는 자는 꽤나 쓸만한 능력을 가진 것 같군. 그나저나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대지?"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로 중얼 거리던 큐리컬드는 자신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양 팔짱을 끼며 외벽까지 거의 다다른 카밀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같은시간에 말을 달리던 카밀턴의 눈에도 외벽에 걸터 앉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큐리컬드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지난 밤동안 그의 말에 속아 어두운 숲속을 헤맸다는 분한 생각에 어금니를 질끈 깨문 카밀턴은 말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활을 꺼내 잡았다. 그리고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어 시위를 먹이며 큐리컬드를 겨냥했는데, 수천번의 반복된 훈련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재빠른 행동이었다. 화살 촉의 끝으로 큐리컬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큐리컬드는 카밀턴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이봐! 아침 인사치고는 너무 과격한 것 아닌가?!" 떠듬거리는 큐리컬드의 목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밀턴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있는 시위를 가볍게 놨고, 촉부터 깃까지 검은색 일색인 한 대의 흑전은 화살은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자신을 향해 무심하게 날아오고 있는 화살을 확인한 큐리컬드는 마른침 한번 삼킬 시간없이 외벽을 방패삼아 몸을 날렸다. -텅! 아슬아슬한 차이로 화살을 피했을 때, 마치 큼직한 못이 벽에 박히는 듯한 소리가 외벽으로 부터 들려왔고, 안전하게 피했다는 생각에 큐리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했다. 하지만 화살을 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생각없이 몸을 날린 곳이 발판 하나 없는 곳임을 알아 차렸을 때는 더욱 다급한 한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결국은 화려한 몸짓으로 허우적 거린 큐리컬드는 전신으로 맨땅을 맞이해야만 했다. -털썩! 밀가루 포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큐리컬드는 충격이 꽤나 컸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한채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벽중에도 낮은 곳이었기에 크게 다지치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만약 가장 높은 외벽에서 떨어졌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상황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미친 녀석... 아무리 약이 올랐어도 그렀지 대뜸 보자마자 활을 쏴대다니..." 투덜거리는 말과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킨 큐리컬드는 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팔이 약간 뻐근한 감이 있긴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을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마을로 들어온 카밀턴 일행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땅을 밟자마자 큐리컬드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성큼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큐리컬드는 만에하나 그들이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벨트에 매달려있는 단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곳은 자신의 본거지 겪인 곳인만큼 그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특유의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이렇게 과격하게 행동하면 쓰나... 덕분에 머리가 산산히 깨질 뻔 했다고." 큐리컬드의 말을 듣고있는 카밀턴은 이제 그의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심리전에 휘말리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 참 유감이군. 조금만 빨랐으면 그 얄미운 입에 화살을 처박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어허...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비록 카밀턴의 말투가 거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 병장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직감한 큐리컬드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큐리컬드의 코앞까지 바짝다가온 카밀턴은 눈을 얇게 뜨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괜한 충돌을 이르켜 봐야 우리의 일에도 도움이 될 이유가 없으니 다른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들이 어디있는지 말하게." 오히려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함을 지는 것 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기가죽을 큐리컬드도 아니었기에 얼굴을 뒤로빼며 대답했다. "이봐... 물론 자네를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네. 하지만 이번만은 내 이름을 걸고 맹새 할 수 있어. 그들은 자네들이 이곳을 떠난 후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카밀턴은 아무런 말없이 큐리컬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또 다시 그가 거짓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고, 이후로도 둘 사이에는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카밀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입장 역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만큼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하고있는 행동은 나의 신념을 짓밟으려는 것이고, 나 또한 더 이상은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일세. 만약 이번에도 자네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내가 이끄는 단체의 모든 힘을 들여서라도 그 대가를 치루게 할테니 그쯤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말을 마친 카밀턴은 더 이상 대화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보이며 뒤돌아 섰고, 멀뚱히 남은 큐리컬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대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유모를 신음성을 흘렸다. "흐음... 젠기랄. 아침부터 화살까지 쏴댄 주제에 뭐가 원망을 안했다는거야." 그의 투덜거림이 끝나있을 때 카밀턴은 이미 일행과 함께 자신들의 말까지 걸어가 있었기에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큐리컬드의 본능 또한 그가 듣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밀턴의 그 당당함과 위압감, 또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는 모습이 큐리컬드가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의 그것보다 대단했기에 대립하는 입장이었음에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그를 인정을 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쯤 뮤스와 그라프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렸기에 아무리 힘 좋은 말이라도 지치기 마련이었고, 더우기 언덕을 하나 막 넘어오던 참이었기에 그들의 말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각, 따각... 말을 이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라프가 문득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쯤이면 우리가 뒤늦게 떠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군..." 그의 독백을 들은 뮤스 역시 고삐잡은 손을 늘어트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물었다. "벌써 그들이 눈치를 챘을 까요? 어쩌면 이대로 실마리를 놓쳐 추적하을 포기 할지도 모를 것 같은데..." "허헛! 자네 그들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구먼. 나는 그런 부류의 인물들을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네... 늦더라도 내일 저녁 쯤이면 우리의 속도를 따라 잡게 될 것이야." 그라프의 이야기를 토대로 카밀턴의 능력을 짐작해 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그의 말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제가 미개척지를 한동안 떠돌아 봤지만, 이렇게 길도 확실치 않은 곳에서 사람 한명을 찾는 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마물들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 우리와 이동 속도가 같을 수도 없다는 것이죠." "허헛! 자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 같은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세. 듀들란 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이첸 제국의 특전사단 같은 경우에는 모든 훈련을 미개척지에서 진행하고 있지. 즉, 그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살아 남는 훈련과 동시에 추적, 암살등의 훈련을 병행한다네. 지금까지 자네는 그들의 깍듯한 태도만을 봤기 때문에 실감을 할수 없을 테지만, 지금과 같이 약이 오른 상태에서는 그들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일세. 우리는 아주 멋진 구경을 하게 될거야..." 결국 자신들에게는 극히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여유를 부릴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라프는 여전히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허허허... 지금은 말도 너무 지쳐있고 또, 무작정 도망만 가는 것은 너무 볼썽 사납지 않겠나?" "그렇지만 그들이 추적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말을 마치며 주변 환경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흠... 이곳 어디 쯤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내 기억력도 옛만 못해졌군." 벌써 수십년 동안이나 되풀이 했던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불평을 오늘 역시 빼놓지 않은 그라프는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듯이 숲속을 꼼꼼히 따지며 걸어갔고, 뮤스는 영문도 모른채 그의 시선을 따라 숲을 살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찾아 돌아 다닌지 벌써 두어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뮤스는 천천히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을 애써 눌렀는데, 예전의 그였다면 벌써 폭발을 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까지 한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던 그라프가 문득 자리에 멈추며 턱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으로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헛! 바로 이곳이야! 그래도 아주 몹쓸 머리가 된건 아닌가보군 그래..." 자찬을 하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나즈막한 나뭇가지에 걸어었다. 하지만 뮤스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까지 지나온 장소들과 별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 다녔다는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옆으로 치워놓던 그라프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혹시 사냥을 위해서 트랩을 설치해본 적이 있나?" 자신의 물음과 상당히 동떨어진 질문이었지만, 그라프가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트랩이라면 덫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토끼를 잡기 위해 덫을 놔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덫에 대한 생각에 잠을 못이루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서 덫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었죠." "호오... 꽤나 좋은 추억이군. 우리가 북쪽으로 올라온 것도 바로 그 트랩을 놓기 위해서 일세. 그 다섯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만한 덫을..." 그제야 그라프가 노리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어른들에게 배웠던 덮놓는 방법을 떠올리며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던 이 장소에 대해 감탄사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는데, 나무들과 수풀의 배치가 마치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것인 양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나무들의 위치... 지나온 길의 모습... 사방을 나무와 수풀이 적절하게 가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들어온 길 한 곳 밖에 없군요. 과연 몇시간이나 헤메면서 찾아올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라프는 이 장소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뮤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하나의 길도 폭이 좁기 때문에 트랩을 설치하기에는 더 없이 좋지. 그다지 사간이 많지 않으니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차근 차근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자네의 말도 어디에 묶어 두게나. 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편도 좋을 것이야. 미안하지만 힘쓰는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거든."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만큼 제가 해야하는 일입니다." 뮤스는 오히려 자신 때문에 함께 고초를 겪고 있는 그라프에게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말고삐를 당겨 끌었다. 대충 여장을 풀어 놓은 뮤스와 그라프는 나무를 하나씩 만져가며 숲속을 걷고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우물거리며 씹고 있었는데 이론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해먹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에 파숄에서 준비해온 건량을 씹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입속에 넣었을 때 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건량을 삼킨 그라프는 비교적 크기가 작은 나무의 밑둥을 손으로 두들겨 보며 뮤스를 불렀다. "이보게! 이 정도쯤이면 쓸만하겠군. 이 나무 좀 잘라 주겠나?" "아... 적당한 나무를 찾으셨나 보군요." 먼 발치에서 그라프의 부름을 듣고 걸어온 뮤스는 가방에서 작은 크기의 전뇌톱을 꺼내들었다. 이것 역시 공학원의 작업을 위해 그가 만든 전뇌공구 중 하나였고, 전뇌거경주에서 사고가 났을 당시 전뇌거 해체에 쓰였던적이 있었던 물건이었다. 가볍게 뇌공력을 끌어올리며 작동 시키자 전뇌톱으로 부터 진동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라프님 잠시만 옆으로 물러나 주시죠." 그라프에게 주의를 준 뮤스가 전뇌톱을 나무에 가져다 대자 별 힘을 가하지 않고서도 나무의 밑둥으로 손쉽게 밀어 넣을 수 있었는데, 빠르게 움직이는 톱날을 타고 잘려진 톱밥이 어지럽게 튀기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위이잉! 톱날이 조금 들어가자 나무토막을 하나 주워든 뮤스는 그것을 잘려진 나무 틈으로 끼워 넣었고, 톱날이 더 들어갈때 마다 나무토막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이것은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을 임의로 조정하는 방법으로써 드워프들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이제 잘려지지 않은 부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 뮤스는 전뇌톱을 빼냈다. 그리고 나무토막이 끼워진 반대 방향으로 나무를 밀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뻗어있던 나무가 기울어 지기 시작했다. -우지끈! 촤아아아악! 우거져있는 나뭇가지들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땅으로 곤두박질 치자 살짝 비켜선 뮤스는 허공을 뒤덮기 시작한 먼지를 손으로 쫓아내며 그라프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뮤스의 깔끔한 일처리에 감탄을 하고있던 그라프는 쓰러진 나무로 다가와 이곳 저곳을 살폈다. "호오... 정말 눈깜짝 할 사이에 쓰러트렸구먼. 그 톱을 사용한다면 금방일 것 같으니 내가 말해 주는대로 나무를 잘라주게. 여기 부터 여기 까지는 두터운 부분이니 가로로 잘라서 통나무의 형태로 놔두고, 나무의 위부분은 발사장치로 만들어야 하니 얇은 판 모양으로 잘라주게나." 전뇌톱을 팔에 낀체 그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잠시 생각을 해보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발사 장치라면 탄성과 함께 상당한 강도 필요할테니 나이테와 수평이 되도록 얇게 자른 후 서로 엊갈리게 붙여야 하겠군요." "그렇게 해준다면 탄력을 못이기고 부러질 일은 없겠지. 그리고 다음은..." 이런식으로 뮤스와 그라프는 자신의 생각을 의견 교환하며 일을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라프가 가지고 있는 트랩에 대한 지식과 뮤스의 기술이 하나로 묶이며 눈부신 속도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3 니카도는 지난 몇 달간을 자신의 인생의 암흑기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대륙 최고의 대학인 스윈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졸업때는 스윈대학 10인의 최우수학생에 선정되기까지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도 듀들란 제국 황실교섭단에 최우선 발탁되어 외교관들과 함께 수많은 교섭을 성공으로 이끌었기에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창천일로를 걸어가던 그였다. 허나, 사람의 일이란 예측할 수 없다고 했던가... 단 하루만에 그의 모든 꿈들이 허물어져 버렸는데, 그 시작이 특무대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단체에서 파견 되면서 부터였다. 그는 처음 카밀턴 일행들을 만났을 때 부터 불안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옷에 재단용 바늘이라도 꽂힌 듯 뻣뻣한 움직임과 숨이 막힐 것 같이 무거운 눈빛들, 그리고 일생을 아무런 재미없이 살고있는 것으로 보이는 카밀턴이라는 사내. 이것은 학창시절 때에도 흔히 말하는 샌님으로 불리던 니카도가 결코 소화해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팔자에 없는 체력강화 훈련 덕에 수도 없이 까무러쳐야만 했고,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수십번도 더 길을 잃고 헤메야만 했다. 덕분에 몸에 근육이 조금 붙고 날렵해 졌다는 것은 인정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니카도는 그나마 육체의 고통은 하나의 추억으로 생각하며 그럭저럭 참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경험한 교섭 실패의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바로 뮤스라는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감히 교섭의 수재라고 불리던 자신의 설득을 뿌리쳤던 것이었다. 물론 이번 일이 자신의 능력 미달로 인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체력훈련으로 인해 상대에 대해서 조사 할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은 데다가 특무대의 일인 만큼 보안을 요했기에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교섭대상인 뮤스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내려온 빈약한 자료들에만 의존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즉, 그 어떤 교섭인이 이 일을 맡더라도 이 이상의 결과는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이 맡은 일이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채챙! 창! 창! 퍼퍽! 복잡한 심정으로 상념에 빠져있던 니카도는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울리는 금속음을 들으며 동공에 힘을 주어 일행들을 살폈다. 그들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초록색의 피를 뒤집어쓴 채 무감하게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술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신은 여지없이 추악하게 생긴 마물들의 목에 틀어 박혔고, 목이 잘려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던 마물들은 몸을 부들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장면이었지만 이미 여러번 경험한 일이었고 이제는 니카도 자신도 조금씩 무감해 지고 있었다. 마물들과의 전투가 시작된지 불과 이십분 만에 차가운 땅에서 뒹굴며 체온이 식어가는 마물의 수는 스물을 넘겼고, 남아있는 마물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마물의 가슴에 박아 넣은 장검을 비틀어 빼낸 카밀턴이 볼에 묻은 마물의 혈액을 닦아내며 외쳤다. "갈길이 바쁘다! 나머지를 서둘러 처리해!" 귀에 박히듯이 들려오는 카밀턴의 목소리에 대원들의 몸에는 한층 더 힘이 들어갔고, 마물들의 수는 더욱 빠르게 줄어가고 있었다. 십여분이 지나자 더 이상 땅위에 서있는 마물들이 없게되었고, 카밀턴은 초록색으로 얼룩진 천을 꺼내어 검신을 잘 닦아내기 시작했다. 비록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혈액와 같이 공기와 닿으면 응고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혈액을 닦아내지 않은 상태로 검집에 넣었다가는 긴급상황시 검을 뽑는데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역시 북으로 올라갈 수록 마물들의 수가 많아지는군. 이 따위 고블린떼들을 잡는 것이야 장난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전투 때문에 뮤스원장의 이동 흔적이 없어지면 곤란한데..." 그의 옆에서 함께 검신에 묻은 혈액과 마물들의 살점을 닦아내던 챠퍼가 물었다. "하필면 왜 뮤스원장이 북쪽을 택했을까요? 전투능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마물 때문에 오히려 다른 곳 보다 이동하기에 수월치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그가 전문적인 전투훈련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검의 손질을 끝낸 카밀턴은 검집에 그것을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글쎄...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우리는 그저 그들이 도망 가는 곳으로 따라갈 뿐이지. 이번에 그를 놓친다면 엄청난 시간을 또 다시 이 빌어먹을 미개척지에서 헤매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카밀턴의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말을 이끌고 앞쪽으로 나간 죠슈드가 돌아오고 있었다. "대장! 앞쪽에서 다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말발자국이 깊이 나있지 않은 걸로 봐서 그들의 말이 이쯤에서 지치기 시작한 듯 합니다." 잠시 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카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터 속도가 많이 줄었을 테니, 우리가 조금 무리해서 움직인다면 오늘 저녁쯤이면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 다시 출발!" 카밀턴을 선두로 일행들은 모두 말에 올라탔다. 그들의 말들 역시 지친 듯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긴 했지만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무리없이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말의 배를 차며 길을 재촉했다. 니카도는 심신이 모두 지쳐 혼자만이라도 듀들란 제국으로 돌아고 싶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미개척지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 했기에 어쩔 도리 없이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카밀턴일행이 다시 말에서 내린 것은 해가 거의 저물어갈 쯤이었다. 그들의 추적 단서가 되는 말발자국이 극히 흐려졌기에 말 위에서는 확인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추적 속도가 늦어졌다고 해도 상대의 이동 속도 역시 늦춰 줬다는 말과 같았기에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일행들 중 가장 앞서 단서를 찾고있던 죠슈드가 카밀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 부터는 말이 달린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뭇잎들이 흩어진 모습을 보니 말에서 내려 걸어 간 듯 하군요." 죠슈드의 보고를 받은 카밀턴은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쓸었다. "흠... 아무래도 이상해. 보통 이렇게 나뭇잎이 높이 쌓인 곳에서는 사람의 이동 흔적을 찾기가 아주 힘들지. 추적자들에게 일부러 이동경로를 가르쳐 주려 마음을 먹지않은이상... 하지만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흔적이 남아있단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밀턴은 챠퍼를 향해 물었다. "쇼메트! 이런 설정하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읊어보게." 말갈퀴를 만져주며 지친말을 달래주던 쇼메트는 손을 멈추고 책이라도 읽듯이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이런 경우 총 세가지의 상황이 특무대 지침서에 나와있습니다. 트랩의 설치를 토대로 한 유인, 전투에 능하지 못한 목표의 실책, 제 3자의 전투에 의한 지형오염이 그것이죠. 하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뮤스원장의 실책으로 만들어진 흔적이라면 이렇게 규칙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고, 전투에 의한 지형오염이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흠... 그렇다면 뮤스원장이 우리를 맞이 하기위해 트랩을 설치하고 기다린다는 결론인가?" "다른 상황을 간과 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써는 확률상 가장 유력합니다." "허헛! 우리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것인가? 트랩이라..." 웃음을 터트리며 말끝을 흐린 카밀턴은 죠슈드를 향해 외쳤다. "죠슈드 앞장서라! 계속 흔적을 따라 추적한다!" "넷!" 짧게 대답을 하며 몸을 돌린 죠슈드는 이미 예상했던 카밀턴의 행동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밀턴과 함께 5년이 넘는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죠슈드였기에 그에 대해서라면 성격을 비롯해 작은 버릇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데, 길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전진하는 대범함이 바로 카밀턴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은 숲속, 뮤스와 그라프는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붉고 노란 빛을 발하는 모닥불이 타닥이는 소리와 함께 타올랐고, 추위를 느낀 그라프는 모포로 몸을 감은채 손을 내밀여 불을 쬐고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카락과 목둘레의 옷들은 땀에 젖어있었다. 몸을 녹이던 그라프는 숨을 한번 들이쉬며 부러운 눈빛으로 반대편의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헛. 정말 자네의 그 젊음이 부럽군 그래.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는데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다니..." 담담한 눈빛으로 그라프와 시선을 맞춘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별말씀 다하십니다. 저는 그저 몸 안의 내공력 덕으로 쉽게 지치지 않을 뿐이지 체력적으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내공력이라는 것 역시 자네의 일부 아닌가? 껄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의 부러움에 찬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뮤스는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군요. 땅의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지나 봅니다.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한 것도 아닌데 파숄에서 볼 수 없었던 안개가 생기는 것을 보니 이곳이 북부는 북부인가 보군요." 뮤스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던 그라프는 안개를 만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자네의 지식은 정말 알 수 없는 지경이군. 이 안개 역시 공학의 이론으로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자연의 위대함 모두를 공학을 통해 설명 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현상에 대해서는 설명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안개가 생성 되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대지의 온도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공기속의 수증기가 냉각되면서 생기게 되는데..." 뮤스의 설명이 길어질 듯 하자 그라프는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고, 손을 내저으며 더 듣기를 마다했다. "아니네... 어차피 전혀다른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자네에게 그런 설명을 들어 봤자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 뻔하지. 게다가 나는 지금 너무 지쳐있다네." 애초 그라프는 뮤스의 설명을 듣는데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뮤스의 설명을 알아듣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용어적 문제가 가장 크다는 점이었는데,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수 많은 질문을 덧붙여야 했기에 몸이 한껏 피곤해져 있는 그라프로써는 지금 상태로 집중해서 설명을 듣는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었다. 땀을 식히며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린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기왕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북쪽으로 이동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안개 때문일세." 그라프의 말투를 보아 이 시기에 이곳에서 안개가 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단순하게 안개의 생성 원리를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점을 잘알고 있는 뮤스는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어..어떻게 그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무려 파숄로 부터 200켈리나 떨어진 곳의 상황을..." 수염을 한번 매만진 그라프는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에게 안개의 생성 원리를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나에겐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일세. 어찌 본다면 대현자라 불리울 정도의 사람이 자연의 조화의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지."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뮤스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는 듯 무릎을 치며 물었다. "아! 그렇다면 대현자란 마치 신선과 같은 존재로군요. 물론 신비한 능력을 가지신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달통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선이라...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라프의 되물음을 받은 뮤스는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말 실수를 자책하며 대충이나마 상황에 맞게 꾸며댔다. "그..그건 저희 조이센 대륙에서 신비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죠. 뭐랄까... 마치 현자와 같이 세상사에 모르는 것이 없으면서 마법사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랍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한 사람이 현자와 마법사 노릇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머리를 한차례 긁적인 뮤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지 신선이라는 존재를 실제 목격한 사람은 없죠.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이니까요." "하긴... 어디나 그런 전설은 있는 법이니까." 그제야 그라프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뮤스는 안심 할 수 있었다.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도록 하지. 나는 이맘 때 쯤이면 미개척지의 북부 지방에 심한 안개가 생긴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대로 트랩을 설치하기에 이곳은 더 없이 좋은 장소가 되는 것이었고, 잠시 후면 더욱 안개가 심해질테니 아무리 트랩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안개라면 트랩을 해체하는데 상당한 고초를 겪을 것일세." "음... 그렇다면 안개 때문에 시야가 한정적인 숲 속에서 우리가 설치한 트랩을 찾아 내기란 정말 힘들테니 추적자들이 트랩에 걸려들고난 후에 유유히 빠져 나간다는 말씀이시군요." 뮤스의 말을 듣고 있던 그라프는 어쩐일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저 정도의 트랩은 그들에게 곤란함을 줄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다네. 결국 그들은 우리가 설치한 트랩을 모두 해체 하고서 이곳까지 들어 올 것이 틀림 없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란 뮤스는 토끼눈을 뜨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 트랩들로는 그들을 막지 못한다는 말씀이신데, 무슨 이유로 흔적까지 남기면서 그들을 유인한 것이죠? 만약 이곳에서 트랩이 그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망갈 수도, 맞서 싸울 여력도 없습니다." 뮤스의 말에는 틀린점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뇌동체술법을 익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전문적으로 살상기술을 익힌자들 이었고, 도이첸 제국의 황실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들을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그라프에게는 어떤 입장으로 나올지도 알 수 없었기에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일일세. 그들은 자네가 어디까지 가든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미리 설치해 놓은 트랩에 걸려들어 우리의 종적을 놓친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우리를 추적 할 것일세." 말이 길어지면서 폐부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느낀 그라프는 코를 한번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흠... 자네가 앞으로 미개척지에서 지내야 할 남은 시간은 2년 반, 그 오랜 시간을 그들에게 쫓기며 지낼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답답함이 깃든 뮤스의 질문을 받은 그라프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대답했다. "그 방법은 바로... 진심으로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일세. 더 이상은 추적을 하더라도 자네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강렬한 인상을 그들의 뇌리에 새겨 넣는 것이지. 그것도 자네의 능력으로 직접..." "하..하지만, 저에게는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고있던 그라프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말을 가로 막으며 품으로 부터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혹시 폴리크개구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잠시 머뭇 거리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글쎄요. 그런 개구리의 종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만..." "그렇다면 내 설명을 잘 들어 보게나. 폴리크개구리는 대륙 남부의 습지에 서식하는 개구리의 일종일세. 이 개구리는 몸집도 다른 개구리에 비해 유난히 작은데다가 몸의 색 또한 울긋불긋 요란해서 적의 눈에 발견되기 쉽다는 불리함까지 가지고 있다네. 하지만 이러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폴리크개구리가 수천년 동안 멸종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들의 몸에서 분비되는 독기 때문인데 그것을 흡입한 적들은 금새 생명을 잃고 말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라프는 손에든 유리병을 한번 흔들어 보이며 말을 어있다. "이 병에 든 것이 그 폴리크개구리의 독기를 모아놓은 것일세. 비록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독기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작용을 하게 된다네." "특이한 작용이라면 어떤?" 폴리크개구리의 설명에 호기심이 발동한 뮤스가 허리까지 세워가면서 물어오자 그라프는 뭔가 재미있는 상상이라도 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2002-11-10] 짜가신선 <대공학자> #194 트랩속의 트랩 해가저물기 시작한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않았서 숲속에는 밤이 찾아왔다. 낮에 비해 급껴히 떨어진 기온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뮤스를 추적하고 있던 카밀턴 일행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아직 달이 밝지 않아 시야 확보가 힘들었지만, 추적자의 입장에서 횟불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움직임 속도를 더욱 제한하는 것은 어느순간 부터 점점 진하게 허공을 감싸기 시작한 안개였다. 불과 반시간 전만해도 입김에과 구분이 안될 정도의 옅은 안개였지만, 지금은 3~4 멜리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안개가 겹쳐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추적은 커녕 길을 잃기 쉽상이었기에 걸음을 멈춘 카밀턴이 말했다. "안개가 너무 심하군. 죠슈드 아직도 뮤스원장의 흔적을 볼 수있나?" 무릎을 굽히며 앞으로 나있는 길의 표면을 보던 죠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의 확실한 흔적이라면 안개가 아무리 진하게 끼더라도 추작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흠. 추적이야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는 트랩이지. 아무리 트랩 해체에 능숙하더라도 이 정도의 안개에서 트랩을 발견해내기는 까다로울텐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안개가 걷힐 때 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죠슈드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밀턴은 이내 어떤 생각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강행하는 것은 위험하겠지만 시간을 지체 할 수는 없지. 대원들은 팔 하나의 간격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트랩 해체 대형을 이루도록. 니카도는 대원들이 트랩의 유무를 확인 한 곳으로만 따라오게." 카밀턴의 명령이 떨어지자 죠슈드의 옆에서 날씨를 살피던 챠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카밀턴에게 다가왔다. "대장님.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만약 그가 트랩을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면 트랩에 대한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고, 아무리 우리 특무대라도 이런 안개 속에서 완벽하게 트랩제거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명령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던 챠퍼에게 시선을 돌린 카밀턴은 조용하면서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챠퍼.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졌나? 대원들은 대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사실을 잊었나?" 카밀턴의 묵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챠퍼는 딱딱한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카밀턴 대장님!" "뮤스원장이 아무리 대단해 봤자 일반인이다. 특수 군사훈련을 받은 우리와 비교를 할수는 없는 것이지. 위치로 가게." 단호한 결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카밀턴은 찬바람을 뿌리며 몸을 돌렸고, 제자리에 남은 챠퍼는 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죠슈드는 챠퍼의 등을 두들겨주며 입을 위로의 말을 건넸다. "대장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서 그럴 테니까 자네가 이해하게. 그리고 저렇게 강행 하는 것을 보면 대장도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거야. 비록 지금은 특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동료의 위로가 고맙긴 했지만 카밀턴에 대해 조금 섭섭한 기분이 남아있던 챠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카밀턴을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카밀턴과 그의 수하들은 허리를 최대한 숙인 채 점차 짙어지는 안개를 헤쳐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나뭇잎 하나를 밟는 대도 조심스러웠고, 손짓은 안개를 스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가장 앞쪽에는 챠퍼와 죠슈드, 그리고 카밀턴이 안개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는데, 사실 길이 좁았기에 더 이상 떨어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뒤따르는 쇼메트와 니카도의 긴장은 비교적 덜해 보였지만, 누군가가 대형트랩이라도 잘못 건들게 된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특무대 대원들이 안전할 수 없었기에 느긋 할 수만은 없었다. 문득 가장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카밀턴은 무엇이라도 발견한 듯 오른 손을 들어 수하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곤 엄지와 검지를 넓게 펼치며 길의 양옆으로 비키라는 수신호를 하자, 수년간 함께 해온 수하들은 직접 귀로 명령을 듣기라도 한 듯 서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안전한 곳으로 움직였다는 판단이 선 카밀턴은 트랩제거용 소형절단기를 하나 꺼내어 천천히 땅에 업드렸다.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약간의 물기를 머금어 빛을 내고 있는 어두운 색의 철사가 나뭇잎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한숨이라도 내쉬듯이 입을 모으며 철사를 향해 입바람을 불자 그 위를 덮고 있던 나뭇잎이 뒹굴며 사라졌고, 길을 가로지르며 팽팽하게 걸려있는 철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철사를 살피며 그 끝으로 걸어간 카밀턴은 수하들을 향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고, 마지막 새끼 손가락을 꼽음과 동시에 그의 절단기는 철사를 잘랐다. -촤아아아아악!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약 10멜리에 걸쳐 길을 덮고 쌓여있던 나뭇잎들이 파도타기라도 하듯이 들썩거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나뭇잎이 날카로운 것에라도 잘린 듯 두 조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본 카밀턴은 꽉쥐어진 주먹 속에서 땀이 베어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고강도 유리사라니... 이것을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우리의 발목은 모두 종아리에서 분리되었을 것이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혼잣말을 하던 카밀턴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수하들을 돌아 보았다. 그들 역시 수많은 전장을 찾아 다녔기에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을 간담의 소유자들 이었지만, 이번에는 충격이 만만치 않았던 듯 잠시 동안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인 카밀턴은 그들의 마음이 진정도 되기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겨우 첫번째 트랩을 해체했다. 겨우 이정도로 넋이 나가 있다니... 어차피 우리는 특무대에 들어오면서 목숨을 버렸지 않나... 계속 전진한다." 카밀턴의 위압적인 외침소리를 들은 대원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식 특무대의 대원이 아닌 니카도에게 만은 카밀턴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미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그때 제의를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돌아가기만 해봐라! 이 따위 파견서나 들고와서 떵떵거리던 사무관 녀석의 잘난 목을 비틀어 버릴테니!"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사실을 니카도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비겁한 짓이 아닙니까?!" 뮤스는 그라프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얼굴까지 상기된 그는 그라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쳤는데, 너무나 꽉 막힌 뮤스의 사고방식에 그라프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헛...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정석으로 살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전문적으로 전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자네같이 평범한 청년 한 명을 뒤 쫓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은 명령이라는 말로 대신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비겁한 짓이란 말일세. 게다가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살상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중독 되더라도 하루만 쉰다면 금방 해독이 되는데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 고개를 숙인채 갈등에 쌓여있는 뮤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그라프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볼 때 자네는 너무나 순수해.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엉켜 살아가는 곳에서 나약하다는 말과 같지. 세상은 순수한 사람이 대체로 피해를 보는 법이거든."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드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때에 그런 감상에 빠져있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거든. 어떻게 하겠나?"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뮤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 그라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목숨하나 책임지지 못하면서 다른이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인것 같군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대답을 잠시 미룬 그라프는 고개를 돌려 트랩들을 설치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곤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했다. "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그들이 이곳까지 오겠군. 그들이 20멜리 이내로 접근한다면 내가 직접 폴리크개구리 독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깨트리겠네. 그 독이 공기중으로 퍼질때 희뿌연 독무가 생기지만 지금같이 짙은 안개가 생겨있는 상태라면 눈으로 분간하기 힘들테고, 수많은 트랩들을 거쳐온 직후였기에 긴장감이 크게 풀릴테니 절대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일세. 다만 피곤함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할테지..." "그렇다면 저렇게 트랩을 설치했던 것도... 그들을 완벽하게 중독시키기 위해서 였다고 봐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런것 까지 예상을 하실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군요." 수분을 먹어 더욱 신비하게 빛나는 은발을 쓰다듬은 그라프는 주름진 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활동하던 시절에 집필했던 병법서만 해도 십 여권에 달한다네. 병법에는 적의 심리, 지형의 이용은 기본이라고 말 할 수 있으니 최소한 병법서의 저자로써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날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한 그라프의 능력을 경험하며 감복한 뮤스는 두 손을 들수 밖에 없었고, 대현자의 칭호를 얻은 것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파바박! 수십대의 화살들이 두터운 나무껍질을 파고들었다. 나무로 만든 촉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금속촉에 위력을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의 피부 정도는 쉽게 꿰뚫을 수 있었기에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극심한 안개 속에서 겨우 트랩을 발견 할 수는 있었으나 곳곳에 산재해있는 발사 장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던 특무대 대원들은 코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눈먼 화살 한대가 니카도의 허벅지에 박히게 되었는데, 태어난 이후로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그는 머리를 하얗게 비우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끄..끄끅..." 더욱 심해지는 고통에 입술을 떨고있는 니카도를 본 카밀턴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쇼메트에게 눈짓을 했다. "응급처치를 해주게." 보통의 대원이었더라면 이 정도의 부상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훈련만을 겨우 통과한 니카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살 맞은 짐승 마냥 앓고있는 니카도를 측은하게 바라본 쇼메트는 그에게 가까이 가자마자 화살을 서슴없이 잡아 뺐다. "아아악!" 요란한 비명소리가 숲 속을 울리며 메아리 쳐지자 쇼메트는 급히 그의 입을 틀어 막으며 말했다. "그나마 나무촉인걸 고맙게 생각하게나. 철제 화살촉이었다면 살을 찢어내기 전에는 빼내지 못했을 테니까..." 입이 막혀 신음 소리만 내던 니카도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며 맺혀있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하자 쇼메트는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꺼내어 그의 상처를 압박해 피를 멈추게했다. "촉이 나무이고 날씨도 싸늘하니 상처가 곪거나 하지는 않을 것일세. 조금 고통이 있겠지만 움직일만 할거야." "크윽... 고맙네 쇼메트." 상처부위를 만지며 고마워하는 니카도의 어께를 가볍게 두들겨준 쇼메트는 몸을 일으키며 카밀턴에게 응급처치가 끝났다는 신호를 했고, 그것을 본 카밀턴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더 가야 할 길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벌써 해체한 트랩만 해도 십여개... 얼마나 남은 것이지? 후우... 그가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간과했었던 것 같군." 말을 하다말고 누군가가 어깨를 두들김을 느낀 카밀턴은 고개를 돌렸고, 챠퍼가 그의 등 뒤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대장님.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의 말대로 귀를 기울이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옴을 느꼈는데, 소리가 너무작았기에 내용까지는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의 목소리임은 확실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밀턴은 수하들에게 고개짓을 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린다면 저들 역시 니카도가 질렀던 비명을 들었을 것이니 도주하기 전에 재빨리 진입한다. 챠퍼와 죠슈드는 왼쪽으로, 쇼메트는 나와 함께 오른쪽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한 대원들은 금속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장검을 빼내들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만큼 더 이상의 트랩은 없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표정들이었다. 먼저 땅을 박차고 나가는 카밀턴을 신호로 챠퍼와 죠슈드가 위치를 맞추어 빠른 속도로 뒤따랐다. 쇼메트는 니카도에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신호하며 카밀턴이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붙었다. 혼자 남은 니카도는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강행군을 한 피곤함 때문에 더 이상은 움직일 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차라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 일 수 없는 지금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30멜리 가량을 한걸음에 달려온 카밀턴은 우거진 나무들과 안개 사이로 희미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뮤스가 있다고 확신한 카밀턴은 대원들에게 최대한 떨어지라는 수신호를 했다. 혹시라도 있을 예상 외의 트랩에 모든 대원들이 한꺼번에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처컥! 빠른 속도로 전진하던 대원들의 귀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트랩의 안전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달려나가던 방향으로 부터 한 아름 정도나 되는 통나무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고 소스라치게 놀란 카밀턴과 대원들은 있는 힘을 다해 통나무 위로 몸을 날리거나 최대한으로 몸을 낮추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부우웅! 머리 위, 혹은 발 아래로 반뼘의 공간조차 없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통나무를 본 그들은 한 순간의 방심으로 곤죽이 되어 버릴뻔했다는 생각에 등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카밀턴과 대원들은 돌아오는 통나무의 유효거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한번 몸을 날려야만 했다. -촤아악! 엉겁결에 수풀 사이로 몸을 날린 그들은 볼을 스치는 따가운 나뭇가지들을 느끼며 얼굴을 깊숙히 숙였고, 도약한 힘에 내 맡겨진 그들의 몸은 앞으로 나가는 관성의 힘으로 수풀을 관통할 수 있었다. 어깨로 평평한 땅을 느낄 수 있었던 카밀턴과 대원들은 몇 바퀴를 구르며 자세를 잡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들은 문득,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노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정신이 어수선한 자신들과는 대조적으로 안정감있는 목소리였다. "허헛! 그 험난한 트랩들을 모두 해체하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젊은이 들이군."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카밀턴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한 명의 노인과 젊은이가 태연 자약하게 서있었는데, 다름아닌 그라프와 뮤스였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카밀턴은 두 노소를 번갈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볼썽 사납게 여기저기 붙어있는 나뭇잎을 털어낸 그는 장검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였었다. "뮤스원장 자네는 우리를 꽤나 고생시키는군. 이제 할 수 있을 만큼은 다한건가?" 카밀턴의 말을 듣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대답했다. "음... 제가 믿고있던 트랩까지 모두 해체되었으니 이제 어찌 할 방도가 없겠군요." "그렇다면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나? 사실 개인적인 감정 없이 누군가의 피를 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이거든." "굳이 저의 목숨을 가지고 가야 하겠습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는 듯이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령이니 어쩔 수 없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어 보이니 스스로 목숨을 끊게나. 더 이상은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도 없는 것 같군." 눈을 낮게 깔은 뮤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역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살기위해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 겠죠." 결국은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뮤스는 긴 후드 속에 숨겨져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두 손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흘러내리며 은빛 번뜩이는 건틀렛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카일락스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처음 빛을 본 건틀렛이었다. 모닥불의 붉은 빛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건틀렛을 바라본 카밀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내가 직접 자네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 참 씁쓸한 일이군."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누구도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지는 못하는 일이니까요." 카밀턴은 배짱좋게 말하는 뮤스를 향해 피식웃었다. "풋! 물론 자네의 말대로 절대적인 결과는 알 수 없겠지만, 확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내가 비록 어두운 곳에서 활동을해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듀들란 제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라는 점만은 알아 주었으면 좋겠네." 말을 끊은 카밀턴은 장검을 들어올리며 천천히 뮤스를 향해 걸어갔고, 뮤스 역시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카밀턴을 향해 다가갔다. [2002-11-10] 짜가신선 <대공학자> #195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라프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둘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평범한 인물이 아닐 줄은 짐작했지만, 듀들란 십대 검사 중의 하나였다니... 하지만 오늘은 자네가 너무나 운이 나빴네. 쯔쯧...' 마치 대결 결과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나직하게 혀를 찬 그라프는 살짝 손가락을 움직여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들어있는 병을 열었다. 그런 후, 살짝 흔들며 병을 뒤집자 보일 듯 말듯한 연기가 세어나오기 시작했는데, 금새 안개에 섞였을 뿐만 아니라 이목이 뮤스와 카밀턴 쪽에 쏠려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런 현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뮤스를 아래위로 살펴보던 카밀턴은 건틀렛이 끼워져있는 두 주먹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자네의 무기가 그 건틀렛인가본데 공격유효범위로 보더라도 검에 대항하기에 너무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보인 뮤스는 단전으로 부터 뇌공력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노리는 것이 제 목숨입니다. 그런 점까지 신경써주시는 것은 부담스럽군요. 저는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다른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잠시 내 위치를 잊은 듯 하군. 자... 이제 시작해 볼까?" 고개를 끄덕인 카밀턴은 말을 멈추며 칼을 오른쪽으로 치켜 들었다. 이는 상대방에 비해 실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공격만을 염두에 두고 취하는 자세였다. 그에 대비해 뇌공력을 끌어올리던 뮤스는 심상치 않은 상대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뇌동체술법상의 방어 자세를 떠올리며 손과 발을 내저었다. 막 공격을 취하려던 카밀턴은 처음 보는 형태의 몸놀림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둘을 지켜보고 있던 특무대의 대원들 역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뮤스의 발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던 챠퍼가 감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상당히 불규칙적인 스텝이지만, 상대가 밟고 들어 올 수 있는 공격 방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형태로군. 정말 의외지만 저것을 보더라도 뮤스원장은 전투능력이 없는 인물이 절대 아니야." 옆에서 지켜보던 챠퍼가 뮤스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을 때, 그 점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밀턴은 잠시동안 뮤스를 업신여기던 생각을 접었고,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최소한의 동작 범위를 유지하며 찌르기 공격에 들어갔다. "하아압!" 뮤스의 움직임이 방어로 치우쳐지고 있는 데다가, 무기를 쓰는 쪽 보다 주먹을 휘두르는 편이 공격의 대처에 빨랐기에 공격 이후에 생기는 무방비 상태를 염두에둔 카밀턴은 동작이 큰 공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기를 띄고서 목을 노리며 날아오는 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한 뮤스는 건틀렛을 될 수 있는한 목으로 가까이 붙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건틀렛을 스친 검신은 불꽃을 튀기며 뮤스의 뒤로 빠지게 되었고, 이에 주춤하던 카밀턴의 옆구리를 본 뮤스는 힘껏 왼쪽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바람소리를 낼 정도로 무겁게 뻗은 주먹이 카밀턴의 옆구리에 닿게 됐을 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그는 금속 갑옷으로 직접 뮤스를 밀어내려는 듯 대담하게 앞쪽으로 전진했다. 자신의 몸을 향해 다가오는 갑옷의 날카로운 돌기를 피하지 못했다가는 살가죽이 찢어질 것임을 알았기에 뮤스는 주먹을 급히 회수하며 몸을 옆으로 빼낼 수 밖에 없었는데, 몸을 빼내는 뮤스의 움직임이 재빠르긴 했지만 카밀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뮤스가 움직일 경로를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유연하게 몸을 돌렸고,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뮤스의 허리를 베어갔다. "자! 그럼 잘 가게나!" "헛?!" 허리 깊숙한 곳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검신을 조금 늦게 발견한 뮤스는 다급한 나머지 주먹을 휘둘러 검신을 내려쳤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방향이 바뀐 검신은 뮤스의 옷을 살짝 스치게 되었는데, 검날이 직접 살에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어진 옷사이로 진붉은 핏물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뮤스의 상처와 손에 들고있는 장검을 번갈아 보던 카밀턴은 뜻 밖의 상황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뮤스의 당당함이 죽기를 각오한 발악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격돌에서 그가 보여준 몸놀림과 반사신경은 절대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뮤스가 주먹으로 장검을 내려쳤을 때는 마치 바위를 내려친 느낌이었는데, 순간적으로 장검을 놓칠뻔했다는 사실이 그의 놀라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흠... 놀라워... 자네가 그만큼 여유를 보이는데는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것일세." 장검을 고쳐쥐는 카밀턴을 주시하던 뮤스는 잔뜩 긴장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공격은 운이 좋았기에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런식의 공격을 몇번 더 겪는다면 뮤스로서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만 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뒤에는 그라프가 있다는 생각에 건틀렛을 부딪혀 보이며 힘을 돋구었다. "저도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하아압!" 이번에는 뮤스가 먼저 뛰어들며 선제공격이 이루어 졌다. 어찌 보면 검을 가진 상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가는 그가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공격유효거리가 짧은 그로서는 최대한 근접전을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접근하는 것을 본 카밀턴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신을 옆으로 뉘였다. 검신의 넓은 면은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격타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간단한 손목의 움직임만으로도 몸 전체의 방어가 가능했기에 검술에서는 방어를 위해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었다. 뮤스는 검날에 베이지 않는 건틀렛을 믿었는지 몸을 낮추며 서슴없이 카밀턴의 복부로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자신의 복부로 들어오는 주먹을 검의 면으로 간단하게 막은 카밀턴은 힘을 주어 밀어냈고 손잡이의 아랫부분으로 뮤스의 정수리를 노리며 내리쳤다. -캉! 당연히 머리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야 할 때에 금속음이 울려퍼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것을 내려다 보던 카밀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는데, 머리를 강타하기 직전 뮤스가 다른 손을 머리로 들어올려 내려치는 검의 손잡이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이런!" "이 정도에 당할만큼 만만하지는 않죠. 핫!" 득의의 미소를 날린 뮤스는 검에 가로막혔었던 주먹으로 뇌공력을 급히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카밀턴의 복부에 꽂아 넣었고, 검이 뮤스에게 잡혀버린 카밀턴은 그에 대처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특무대 대원들은 뮤스의 주먹이 카밀턴의 복부로 들어가자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가 입고있던 갑옷의 복부 부위는 전투시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금속이 아닌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충격으로 부터의 방어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부위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사란 검만 잘쓴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카밀턴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수 많은 전장을 누벼온 사내였기에 그만큼 실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냉정을 되찾은 카밀턴이 몸을 급히 낮추자 복부를 향하던 주먹은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의 금속보호대를 강타할 수 밖에 없었다. -카카캉! 또 한번의 생각지 못한 금속음에 실눈을 살짝떠 뮤스와 카밀턴의 모습을 살펴보던 쇼메트는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대장이다! 그 짧은 시간에 몸을 낮추어 가슴의 금속판으로 건틀렛을 받아 내다니! 하지만... 어찌 이런 일이..." 말끝을 흐리고있는 쇼메트의 시야에 뮤스로 부터 4멜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카밀턴의 모습이 잡혔는데, 가슴보호대는 거대한 망치로 얻어 맞은 듯 움푹패여 있었고, 흙바닥에는 밀려난 발자국이 길게 그려졌던 것이었다. 장검을 땅으로 길게 늘어트린 카밀턴은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그 모양이 완전히 변형되어버린 가슴 보호대를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의 파괴력을! 자네가 이런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경악에 찬 신음성을 내뱉던 카밀턴은 뼈까지 절여오는 고통을 뒤로하고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한 현기증이 발생하며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어서야 겨우 몸을 고정시킨 카밀턴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이번 한방으로 내 다리가 풀려 버린 것인가? 아무리 큰 타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럴리가 없는데... 혹시?" 카밀턴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그가 무릎을 꿇는 장면을 목격한 대원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인 카밀턴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자식! 감히 카밀턴 대장님을!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 주도록하겠다!" 분노한 챠퍼가 소리를 지르며 뮤스를 향해 공격해 들어 갈려고 할 때, 카밀턴의 긴급한 고함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바보같은 자식들! 자신의 몸 상태나 어서 확인해 봐!" 돌연한 카밀턴의 말에 멈칫한 챠퍼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고 이것은 다른 대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제대로 설 수가..." 당황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쉰 카밀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크윽... 인정하기는 분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뮤스원장에게 패배했다. 그는 처음 부터 계획적으로 우리를 도발하면서 이곳까지 유인한 것이었어... 수 많은 트랩을 설치하여 우리의 체력을 고갈 시킨 것이지. 지금까지 체력이 바닥남을 느끼지 못한것이 우리의 큰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런 몸상태로는 절대 그를 이기지 못한다." 고개를 돌려 힘겹게 뮤스를 바라본 카밀턴은 몸을 휘청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듀들란 제국에서 엄청난 손실을 감안하면서까지 자네를 끌어 들이려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군. 자네는 충분히 강하고, 몸이 이렇게 된이상 우리는 자네와 맞서 싸울 힘이 없네."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는 대원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 카밀턴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나의 명령을 들은 것인만큼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네. 그러니 다른 대원들에게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수 있었던 죠슈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으로 무릎을 잡아 고정시키며 외쳤다. "그런 약한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체력이 고갈 되었다 하더라도 저자 쯤은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쇼메트 역시 죠슈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단호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듀들란 제국의 특무대 입니다! 목숨이 끊어 질 때까지는 작전 실패를 인정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신의 맡은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부하들의 당당함에 흐뭇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감상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억지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을 질책했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나의 갑옷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잘 봐라! 지금의 몸상태로 이만한 파괴력을 뿜어내는 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쩌면 나의 몸이 정상이더라도 뮤스원장을 쓰러 트릴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했을 카밀턴의 말은 대원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졌다는 중대한 사실 조차 알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은 완벽한 패배이고, 진정한 군인이라면 자신의 패배쯤은 인정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카밀턴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의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는데,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정신과 육체가 함께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질끈 눈을 감은 카밀턴은 지금쯤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네들에게는 이번 작전의 실패를 상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허튼 생각하지 말게." 대장과 대원들 사이에 누구도 깨트리지 못할 듯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발치에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던 그라프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쯔쯧... 아무튼 한참이나 젊은 사람들이 생명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면 쓰겠나? 뮤스군은 자네들 중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일세. 그렇지 않나?" 너무나 극단적인 카밀턴의 발언을 들으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뮤스는 그라프의 물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프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어떠한 대가도 받아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 걸요. 그저 저를 더이상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있다면 어찌되건 상관 없습니다."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은 그라프는 카밀턴의 옆으로 걸어가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들었는가? 뮤스군은 전혀 자네들을 원망하지 않으니 목숨으로 대신하겠다는 말은 삼가하게. 그는 국가간의 권력 다툼으로 목숨을 잃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청년이야. 그것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이제 뮤스군의 뒤를 쫓기 말게나."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저희가 있을 곳은 없습니다. 작전에 실패했다는 것은 저희 단체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졌다는 것이나 다름 없기에 돌아가 봐야 죽음보다 더한 불명예가 기다릴 뿐입니다."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고있는 카밀턴의 이야기를 들으며 몸을 일으켜 뒷짐을 진 그라프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조직을 관리하는 직속 상관이 누군가? 듀들란 제국의 어린 황제가 특수기관을 관리 할 리가 없을 테니, 그의 숙부인 투르코스 재상이겠구먼. 그렇지 않나?" "그... 그것을 어떻게?" 카밀턴의 떨리는 눈빛을 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아 떨어졌음을 느낀 그라프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돌아가서 투르코스 재상이 작전실패에 대해 추궁을 한다면 뮤스원장이 그라프 라듀아보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전하게. 그렇게 한다면 그도 자네에게 실패를 추궁하지는 못할 것일세." "그..그라프 라듀아보!" "대현자! 라듀아보!" 그라프의 본명을 들은 카밀턴과 그의 수하들은 눈을 부릅뜨며 라듀아보라는 이름을 중얼 거렸다. 비록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가 이룩해 놓은 업적에 대해서라면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기에 모를리 없었고, 한 국가의 황제라도 그의 이름 앞에서는 한 수 접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특무대의 대원들이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크기만 했던 것이었다. 아직도 그런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카밀턴이 되물었다. "정말 대현자 라듀아보 본인이십니까?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셨다던 대현자님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허헛! 그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미개척지를 지나는 길에 우연찮게 뮤스군과 만나게 되었지. 서로 뜻이 맞아 동행을 하던 차에 이번 일을 겪었던 것일세." "후우... 그렇다면 혹시 이번일을 계획하신 것도 그라프님께서?" 카밀턴의 질문에 가벼게 웃은 그라프는 손을 내저었다. "이제와서 그것을 따지면 뭣하겠는가. 허헛! 어쨌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이만 떠나야겠군. 이후의 일들은 자네들의 판단에 맡기겠네. 아! 그리고 특무대라는 단체와 이번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도록 하지. 그럼 몸조심들 하게나" 자신이 하고자하던 할 말만을 간단하게 마친 그라프는 몸을 돌리며 뮤스에게로 걸어갔고, 뮤스와 그라프를 지켜보는 카밀턴과 대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뮤스와 그라프는 그 자리에 오래 있어 봐야 그리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길로 바로 짐을 싸들고 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말들 역시 하루정도 푹 쉰상태였고 충분히 기력을 회복하게 되었기에 길을 떠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을 타고서 느긋하게 길을 가고있던 뮤스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뒤돌아 보며 그라프에게 물었다. "이제 이 귀마개는 빼도 되나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더군요. 칼을 휘두르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서 허리가 두동강 날뻔도 했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 자세로 말을 몰던 그라프는 자신의 귀를 들이밀며 웃었다. "허헛! 아직도 끼고있었나? 나는 이미 뺐네그려... 어차피 폴리크개구리의 독소는 20멜리 이상 미치지 못하니 오랫동안 끼고 있을 필요가 없지." "이런... 진작 말씀 좀 해주시지." 투덜거리던 뮤스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흰색의 귀마개를 빼냈다. "그나저나 정말 새로운 개념의 독이군요. 귀안에 있는 반고리관에 자극을 주는 독이라니..." 뮤스의 말에 문득 말을 멈춘 그라프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자..잠깐. 그새 독의 작용까지 알아 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머리속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귀를 통해 중독된다고 말씀 하셨을 때 부터 대충 눈치채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중독의 현상으로 현기증을 느끼면서 제대로 설 수 없게 된다면 평형감각에 큰 영향을 주는 반고리관과 관계가 있을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고, 결국 폴리크개구리의 독은 평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털을 마비시키는 작용은 한다고 결론 내렸죠." 두 손을 들어올리며 탄성을 터트린 그라프는 다시금 말을 몰며 물었다. "이거야 원... 정말 못당해 내겠군. 자네가 모르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라프의 물음에 피식 웃은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하핫! 농담은 그만하시죠 그라프님.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해야할 사람은 바로 접니다. 그라프님이야 말로 어떻게 이런 지능적인 함정을 파실수가 있으시죠? 독에 중독된 사람에게 스스로 체력이 고갈되었다고 느끼게 만들다니...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우기더라도 믿지 않을 걸요? 여러면에서 볼때 그라프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헛기침을 한번한 그라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허리를 두들겼다. "아이고 허리야... 내일 당장 죽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늙은이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나. 나는 죽지 못해서 살고있는 뼈다귀일 뿐이라네." "후훗! 정말 못말리겠군요." 뮤스는 그라프의 엄살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고, 오랜만에 유쾌한 분위기가 된 그라프 역시 함께 미소짓고 있었다. -부시럭... 그러던 중, 길 한쪽의 어둠진 곳에서 수풀 스치는 소리가 틀려왔다. 아직도 개지 않은 짙은 안개덕에 그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 할 방도는 없었지만, 만에 하나 있을 일에 대비해 뮤스는 재빨리 건틀렛을 꺼내어 착용했고, 그라프는 말을 조금 뒤로 빼며 외쳤다. "왠놈이냐! 썩 모습을 드러내라!" 상대는 그라프의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다급성을 터트리며 수풀 사이를 헤치며 뛰쳐나왔다. "흐엑! 자..잘못했습니다 뮤스원장님! 저... 니카도입니다. 니카도!" 그는 다리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놀라서인지 거의 기다시피한 모습으로 쩔쩔 매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대의 정체를 알게된 뮤스는 팔에 들어간 뇌공력을 풀었다. "니카도씨였군요? 그러고보니 일행들과 함께 보이지 않던데 왜 이곳에 혼자있죠?" 그의 물음에 두리번 거리며 주변를 살피던 니카도는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뒷 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이렇게 멀쩡하신걸 보면 카..카밀턴 대장이 실패했군요! 그..그럼 그들은 모두 죽었나요?" 뮤스가 공포에 휩쌓인 니카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려 할 때, 무슨 일인지 카밀턴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멈추게 했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깜빡이며 대신 입을 열었다. "그들은 뮤스군을 헤치려 하다가 그의 손에 모두 목숨을 잃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고 있었던 차였는데 때마침 잘 만났군! 감히 뮤스군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라프의 목소리에 안색이 하얗게 변한 니카도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 졌다고 느끼기라도 한 듯 급히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저는 그저 평범한 교섭인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저는 상부의 명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그..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애원을 하는 니카도를 보며 몰래 미소를 지은 그라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그 말이 사실인가?" "네..네! 그렇고 말고요! 제가 뮤스원장님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헤치려 들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뮤스원장님을 헤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틀림없이 그들을 도왔네. 그 사실만은 변함이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지금 반성하는 중이니 한번만 용서를..."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그라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자네같은 인재가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그렇다면 내가 제안을 한가지 하겠네. 나의 질문에 대답만 해주면 자네의 목숨을 보장해 주도록 하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태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을 얻은 니카도는 쉴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뭐든지 말씀만 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조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간단하네. 자네들이 왜 뮤스군을 끌어들이려 하고, 장영실 남작이라는 사람의 근황을 사실대로 말해보게나. 그것만 말해준다면 약속처럼 자네의 목숨은 보장 받는 것일세" 용서를 해준다는 말에 고개를 번뜩 들어올린 니카도는 감동에 찬 얼굴로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모조리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비밀 임무를 맡기신 분은 투르코스 재상각하이십니다. 그분께서 뮤스원장님의 능력을 크게 평가하셨기에 타국의 이목을 속이면서까지 듀들란 제국으로 모셔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장영실 남작님께서는 뮤스원장님이 듀들란 제국으로 오시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고, 결국 장영실 남작님께는 비밀로 이번 일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뮤스원장님께 전해드렸었던 편지와 나머지 이야기들은 모두 조작된 사실들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니카도의 입을 통해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들을 수 있었는데, 주로 그의 근황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라프가 추론하던 사실과 거의 일치했고, 뮤스는 장영실의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니카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그라프는 평소의 목소리를 되찾으며 말했다. "허헛!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군 그래. 헌데... 자네의 동료들는 모두 살아있다네. 우리가 온 길을 따라가면 그들과 만날 수 있을 테니 찾아가보게나." 아직도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니카도는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동료들이 살아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방금전의 이야기는..."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일의 배경이 궁금해서 장난좀 쳐본 것일세. 후훗! 그럼 듀들란 제국까지 잘 돌아가시게나. 출발하도록 하지 뮤스군." 말고삐를 잡아 당기며 말을 몰아 나가는 그라프의 뒷모습을 보던 뮤스 역시 니카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좋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니카도씨. 그럼 상처치료 잘 하시고 남은 여정동안 몸 조심하시길..." 어떻게 들어보면 상대방의 가슴을 긁는 듯한 감사의 말을 건넨 뮤스는 손을 흔들어주며 말을 몰아 그라프의 뒤를 따랐고, 멋지게 속아 넘어간 니카도는 헛웃음만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허... 나참... 얼떨결에 일급비밀을 다 불어 버린 꼴이 되어버렸군. 그런데 대체 저 노인은 누구지?" 숲속에 혼자남게된 니카도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기에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 조차 잠시 잊고 있는 중이었다. 그라프는 뒤를 따라오는 뮤스를 기다리기 위해 달리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고, 뮤스와 어께가 나란해 지자 속도를 맞추며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이 한결 밝아진 뮤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제 예전의 얼굴을 되찾은 걸 보니 장영실이란 자의 신상에 대해 안심이 되는 모양이군."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속내가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모두 그라프님 덕분입니다. 미개척지로 나온 이후에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일은 없었던 것 같군요." "내가 뭐 한일이 있다고 그러나...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하지? 예상보다 파숄에서 빨리 나온 샘이 되어 버렸는데." "저는 어차피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라프님께서 목적지를 정하신다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뮤스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헛! 나도 별달리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금전에 꽤나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네. 그럼 나를 따라오도록 하게나!" "훗! 그렇게 하도록 하죠." 짧은 뮤스의 대답과 동시에 두 마리의 말은 새하얀 안개를 뒤로하며 공기를 갈랐고, 그 자리에는 점차 멀어져가는 말 발굽 소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렇게해서 뮤스는 특무대의 추적을 따돌리게 되었으며 그라프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로 부터 뮤스의 추방 기간이 끝나는 3년 후까지, 그들을 보거나 소식을 들었다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6 회상. 첫 눈이 내리는 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축복을 조금이라도 빨리 맞이하고 싶었던 어린 아이들은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도 않은채 집에서 뛰쳐 나왔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들고 따라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젊은이들 역시 이런날은 집에 있을 수 없었기에 연인과 함께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걷곤한다. 그때 만큼은 이 세상이 부러울 것도 없고, 고민도 없으며, 어떠한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연인의 머리에 쌓인 눈을 손수 털어주며 한번 웃을 수 있는 그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즐거워 하는 날에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며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갈곳이 없는 길거리의 부랑자들이나, 가족으로 부터 소외 받은 사람들, 또는 이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장영실 역시 지금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듀들란 제국에서의 생활에 다소 익숙해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어색하기만한 환경들이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함이 많은데다가 결국 이곳도 타향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즐기는 연회라면 그 사이에서 쉽게 어울릴 수 없었던 그는 더욱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따라라라란... 딴따다다다단... 연회장에는 최근 유행한다는 경음악이 흘러나오며 사람들의 흥을 돋구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매 계절, 또는 매 달마다 유행하는 음악이 다르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봤지만 난간에 기대어 술 한잔을 걸치고있는 장영실에게는 모든 음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릴 뿐이었기에 별다른 흥을 느낄 수 없었다. 괜히 울쩍해지는 기분을 잊기 위해 오랜만에 술을 마시던 장영실은 얼굴이 더워짐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실내를 난방하기 위해서 연회장 벽의 중간 중간에 위치한 벽난로를 사용해야 됐지만, 장영실이 고안한 '열선벽지'로 실내의 벽을 도배한 이후 부터는 훨씬 효율적이고 손쉬운 난방이 가능해 졌다. 이 일에 쌍수를 들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귀족 여성들이었는데, 겨울에는 추위로인해 입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노출이 심한 연회복을 계절에 구속받지 않으며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장영실로서는 그런 것은 전혀 염두에 있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의외의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 있던 장영실에게 말을 걸어오는 여인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어머... 실례지만 장영실 남작님 아니신가요?" 약간 희미해진 눈길로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을 바라본 장영실은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아... 존슈튼 양이셨군요.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장영실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자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호홋!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나저나 회색의 괴인이라고 불리던 분이 이렇게 차려입으니 정말 몰라보겠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함께 보내주실래요? 동행했던 파트너가 어디로 사라져 버려서 조금 외롭거든요."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유혹의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장영실은 이런 일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둔감성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흠 파트너분께서 화장실에 가신 것이 아닐까요? 그 쪽으로 찾아 보시는 것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대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다. "아..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오늘 하루 그녀의 운이 그리 좋지 못한 듯 했는데, 등 뒤로 부터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로 인해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껄껄! 이게 누구야. 죤슈튼 양이 아닌가? 황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요부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영광이구만!" 독설을 퍼붓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루스티커였다. 그의 신랄하고 거침없는 말에 어쩔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힌 여인은 덥기라도 한듯 급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그게 무슨 소리시죠 루스티커님? 요부라니요?" "정말 몰라서 묻는 다면 내가 아는 대로 말해주도록 하지. 음... 롤란드 남작이야기 부터 할까? 아니면 스콰이드 자작 이야기부터 할까?" 두 귀족의 이름이 나오자 이제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린 그녀는 억지 웃음을 띄우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가..갑자기 머리가 아프군요. 먼저 실례를 하겠어요." 그녀는 이야기가 더 진전되기 전에 이 자리를 빠져나고 싶은지 장영실과 루스티커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숨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루스티커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저런 여자들은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군. 밥먹고 얼마나 할짓이 없으면 저럴까... 쯔쯧... 아무튼 마음에 드는 귀족들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군." 루스티커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던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리며 미소지었다. "하핫! 루스티커님께서 그러시니 귀족들이 다들 꺼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매번 친우가 없다고 투덜 거리시는데 그런 독설만 퍼부으시니 친우가 생길리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쪽눈을 얇게뜬 루스티커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흥! 썩어빠진 귀족이라면 얼마를 데려다 주더라도 친우로 사귈 생각이 없네! 그렇지않아도 기분이 나쁜 판에 저런 것들이나 보고 있으려니 정말 참을 수가 없군. 에잉!" 평소에도 귀족들에 대해 이와 비슷한 태도의 루스티커였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심하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기분 나쁘신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자네에게는 좋은 소식이겠구먼 그래! 얼마전에 뮤스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견한 교섭대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하필면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죽지도 않고 그런곳에 있었다니..." 한동안 잠잠하다고 생각하던 루스티커의 괴팍한 성격을 되살아나게 만들고 있는 '영감탱이'와 뮤스의 일에 대해 궁금증을 느낀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뮤스와 교섭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에잉...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줄테니 따라나오게. 이렇게 화기애애한 곳에서 말할 기분이 아니구먼." "그렇게 하죠. 마침 저도 이런 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참이었는데." "역시 나와 마음이 맞는건 자네밖에 없다니까. 대신 포도주나 한병 챙겨서 따라오게나. 오붓하게 한잔 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루스티커는 감정이라도 있는 듯 춤을 추고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거칠게 헤치며 가로질렀고, 왠지 어린아이의 투정같은 그의 행동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장영실은 그의 부탁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포도주병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루스티커와 장영실은 연회장을 빠져나온 즉시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서관은 제 2의 집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만의 사교장이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황궁에서 책을 읽을 사람은 그들을 빼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더 없이 조용하다는 것도 이곳을 즐겨찾는 큰 이유중에 하나였다. 이 시간에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까지 난방을 할 수는 없었기에 도서관 내부는 손끝이 시릴 정도로 싸늘했다. 양 손을 주무르며 냉기를 쫓던 장영실은 창 밖을 한번 내다 보며 중얼 거렸다. "벌써 첫눈이 오는 것을 보니 이곳으로 온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군요.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장영실의 말에도 루스티커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져온 포도주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캬아... 좋구먼... 그런 쓸데 없는 감상은 그만두고 이쪽으로 와서 술이나 한잔 하게나." 어쩔 수 없었던 장영실은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의 커튼을 닫으며 루스티커가 있는 책상의 앞쪽에 자리를 잡으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명신이의 이야기좀 해주시겠습니까? 분명 아까 교섭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고개를 끄덕인 루스티커는 장영실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우며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랬어... 후훗. 그는 우리가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거절했다고 하더군. 이번 추방 기간이 끝나면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그의 이야기에는 특무대가 뮤스의 목숨을 노렸던 이야기는 빠져있었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독단적인 계획이었기에 루스티커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잔 속에 반쯤 남은 포도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은 루스티커는 잔을 채우기 위해 술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수가 없네. 그렇게까지 타박을 주었던 국가가 뭐가 좋다고 돌아가려고 하는지 말이야. 에잉... 아무튼 똑똑한 사람들의 생각은 이해를 할 수 없다니까. 그 똑똑한 사람들에는 자네도 포함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애꿎은 자신에게 비난의 눈초리가 돌아온는 것을 본 장영실은 웃으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후훗. 저는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지금 명신에게 있어서 도이첸 제국은 고향이나 다름 없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어쩌면 저희가 떠나온 곳 보다 이곳에서 더욱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붉디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던 장영실은 눈을 내려깔며 말했다. "고향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타박하고 버리더라도 언젠가는 꼭 되돌아가고 싶은 곳..." 그의 말을 들으며 입가를 매만지던 루스티커역시 그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흠... 그래서 자네도 듀들란 제국에 남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유래없는 파격적인 대우를 뿌리치고 조이센 대륙으로 건너가겠다는 것이 그런이유 일수도 있겠구먼..." "면목없군요..." "허헛! 아닐세. 나도 자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 할수도 있겠구먼. 나도 가끔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내가 태어난 곳으로 싶다는 생각을 하니까." 허공을 응시하며 회상에 빠지고있는 루스티커를 바라보던 장영실 역시 포도주를 한잔 걸치며 옛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태사청에는 수많은 고위 대신들이 좌우로 양립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는 듯 했다. 양립해있는 대신들의 가운데에서 단상의 차렴을 향해 오체복지하고 있던 장영실은 격앙된 목소리로 간청하고 있었다. "전하! 어찌하여 조선의 공학기술을 아무런 대가 없이 명으로 넘기려 하옵니까? 저희 공학원의 공학자들은 오로지 조선의 발전을 위해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지, 결코 명을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장영실의 말을 듣고있던 대신 중 한 명이 그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전하! 신이 한마디 올리겠사옵니다. 지금 대호군의 말에는 크게 잘못된 점이 있사옵니다. 명은 태조때 부터 형의 나라로 모셔왔다는 것은 전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아우의 나라인 우리 조선에서 형의 나라인 명을 위해 그깟 천한 기술을 조금 넘겨 주는 것이 뭐가 그리 아까운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것을 버리고 명의 인정을 받게 되니 얼마나 좋은일입니까. 아무래도 신임 대호군이 초임이기에 큰 뜻을 모르는 듯 하옵니다." 장영실은 자신의 평생을 바쳐온 공학에 대해 무시하는 언사를 내뱉는 대신들에 대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공학을 등안시하는 문관들을 하루이틀 봐온 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조선의 현실이었기에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학은 절대 천한 기술이 절대 아니옵니다. 만일 공학이 천한 것이라 평가한다면 명이 우리에게 가하는 압력은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런 압력을 행사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반박하던 대신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장영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들은 이미 공학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공학기술력을 가진 우리 조선에게 공학기술의 기술이전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훗날 큰 위협이될 조선을 미리 견제하기 위해서 학문 이외의 것은 모두 잡기로 치부하는 쓸데없는 사상을 심어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발언은 장안을 술렁이게 할 만큼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은 현 조선의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유교사상 자체를 비난하는 발언이었는데, 그 유교사상의 중심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관 대신들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장영실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맺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감히 부탁드리건데, 대신들께서는 그렇게 본받기를 원하는 명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지금의 조선과 같이 유교사상을 정치기반으로 채택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있사옵니까? 지금까지 반평생 동안 유교사상을 공부하신 문관나으리들 께서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시고 계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명나라는 유교의 사상을 하나의 학문과 생활 규범으로 받아 들였을 뿐이지 절대 국가의 정책으로는 받아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시 앞뒤 꽉 막혀 변화에 유동적이지 못한 유교사상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날카로운 비수 한자루가 가슴에 꽂히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대호군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것에 대해 분노한 대신들은 임금의 앞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대호군! 감히 이곳이 어디인줄 알고 그런 망발을!" "자네는 정녕 이자리에 모인 대신들 뿐만 아니라 전하까지 능멸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일세!" "허허! 조정의 규율이 이렇게나 무너져 있었다니! 이번 일을 이대로 넘어간다면 조정의 위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장내가 비난의 목소리로 가득차고 있을 때, 탁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차렴안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탁탁탁! 그 소리에 이성을 잃고 흥분해 소리치던 대신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같은 자세로 오체복지하고있던 장영실은 이미 자신의 발언에 대한 처벌을 각오하고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차렴에 가려져 그 표정을 가늠 할수 없는 임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신들은 모두 진정들 하시오. 짐이 대호군과 직접 이야기를 하겠소." "예 전하..." 대신들이 길게 읍을 하며 대답하자 임금은 고개를 숙이고있는 장영실을 향해 물었다. "대호군은 짐의 물음에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대답해 주기 바라오. 짐은 지금까지 대호군의 이야기를 의미 깊게 들었고, 짐 또한 대호군의 주장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는 중이오." 임금이 장영실을 옹호하고 나서자 태사청에 모인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지만, 임금의 이야기가 끝난 상태가 아니었기에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임금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다면 대호군은 조선의 공학기술을 이용하여 명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장영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불가능 하옵니다. 이미 명으로 흘러들어간 중요 공학기술력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고, 조선은 명에 비해 자원이 부족하여 공학기술을 충분히 활용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흠... 그렇다면 대호군은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오?"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당장 조선의 힘으로 명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옵니다. 하지만 훗날의 후손들까지 명의 그늘아래에서 농락당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옵니다. 고로 신 장영실은 현 조선의 공학기술을 집대성하고, 더욱 발전시켜 후대에게 넘겨 줌으로써 한민족 발전의 기반을 마련해야할 때라고 생각하옵니다!" 일단 하고자 했던 말을 마친 장영실은 임금의 반응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주변의 대신들은 변함 없이 그의 의견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 동안 술렁임이 계속 되고 있을 때, 임금의 목소리가 다시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굉장히 극단적인 의견이군." 낮게 깔린 임금의 음성에 좋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장영실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대조적으로 대신들은 어차피 뻔한 결과라고 믿고 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장영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임금의 이야기는 대신들의 표정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허나... 극단적인 만큼 대호군의 의견이 짐에게 있어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네. 후대에게까지 좋지 못한 구습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그대의 발언이 특히 마음에 들더군." 갑작럽게 임금의 태도가 변하자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었던 대신들은 저 마다 임금을 부르며 나섰다. "전하! 어찌 저런 무도한 자의 경망스러운 말을 귀담아 들으시옵니까!" "학문을 깊이 배우지 못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자에게 무엇을 얻으시려는 지요!" "전하! 명을 거스리는 일은 조선의 존망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대신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오히려 임금의 역정을 끌어낼 뿐이었다. "무엄하도다! 감히 짐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게요!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하겠소!" 공간을 나누고있는 차렴을 넘어 임금의 위엄이 그대로 새어나오고 있었고, 불똥같은 호령에 놀란 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짐은 매년 백성들이 피땀 흘리며 수확한 작물들을 명나라에 조공으로 받치는 일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소. 뿐만아니라 조선의 공학자들이 밤낮없이 고생하여 개발해낸 공학기술들을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채 가지고가는 명나라의 사신들을 보며 목으로 피가 치미는 기분을 한 두번 느낀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짐 역시 경망스러운 것이고, 깊이 배우지 못한 자란 말이오!" "그...그것은.." 따끔한 질책에 차마 대답을 하지못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대신들을 둘러본 임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대호군이 비록 지위가 낮다해도 그를 업신 여기지 마시오. 짐이 보기에는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보다 충신이요, 조선을 위하는 사람이오." 이렇게 장영실의 발언권에 대해 쐬기를 박은 임금은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리는지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호군, 고개를 들게나. 이제 이 자리에서 만큼은 자네의 발언을 두고 비난할 사람은 없네. 그러니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이 자리에서 늘어 놓아 보게나. 내 최대한 그대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겠네." 장영실 조차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되자 적지 않게 당황한 그는 고개를 크게 조아리며 대답했다. "화..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수 있었던 장영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지럽기 까지 했지만,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미천한 일개 공학자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은혜, 평생을 가더라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비록 짧은 생각이나마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성심을 다해 아뢰겠사옵니다. 현 조선은 무작정 명나라의 압력에 대항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익히아시고 계실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소신이 아뢰었던 극단적인 방법을 지금 당장 시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한 가지의 복안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사온데, 바로 두 개의 공학원을 공존시키는 것이옵니다." "지금 두개의 공학원이라고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 중 한 곳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공학원으로써 지금과 같이 백성들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거나, 명나라에 비교적 질이 떨어지는 공학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공학원은 비밀리에 조선 공학을 축적하여 후대로 전하거나 보다 수준 높은 공학기술을 개발하는 곳으로 육성하는 것이옵니다. 이런 방법을 쓴다면 명나라의 이목을 속이는 동시에 조선의 공학을 지킬수 있게 되는 것이옵니다!" "올커니! 과연 가능성이 있을 법한 의견이로군... 어디 한번 자세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게나." 임금으로 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장영실은 자신감을 얻으면서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한 그의 제안은 그 자리에 모인 이들로 하여금 더 이상 비난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대신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조선의 공학원이 경복궁의 지하에 위치하게된 배경이었다. 물론 새로운 공학원이 설립되기 까지 수 많은 문관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현명한 임금은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공학원과의 합의점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새롭게 등극한 좌의정과 우의정이 공학을 옹호하고 나서게 됨으로써 조선은 최고의 공학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7 회상에서 깨어난 장영실은 문득 자신의 잔이 비워져 있다는 것을 느꼈고 루스티커가 들고 있던 포도주병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약간 풀린 눈으로 장영실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허헛! 자네 술잔까지 탐해서 미안하구먼. 그런데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말이야. 무슨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흐뭇하고 웃고 있었나?"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을 하던 루스티커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네라도 생각하고 있었나?" 루스티커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장영실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연세도 지긋하신분이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아니, 그 말이 어때서 그런가? 나이가 많은 사내가 여인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일인데. 그리고 내 나이는 왜 들먹거리나? 이 정도면 어디에 내 놓더라도 쓸만한 얼굴에 쓸만한 몸이란 말일세." "저는 여인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루스티커님의 나이에 관한 문제라면 잘 닦인 거울을 들여다 보시면 제가 한 말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글쎄... 매일 거울을 봐도 잘 모르겠던걸... 내가 그렇게 늙었나?" 술기운이 올라서 얼굴이 붉게 변한 루스티커의 노안을 보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말하신 그 늙은이는 누구를 말씀 하셨던 것입니까? 보아하니 루스티커님과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아닌 듯 한데..." 장영실의 물음에 루스티커의 얼굴은 있는대로 구겨졌다. "크으... 이제야 겨우 술기운으로 나쁜 기억을 지웠더니 자네가 다시 끌어내는군. 에잉 몹쓸 친구 같으니..." "괜한 이야기를 꺼낸것 같군요. 말씀 하시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무서운 눈을 뜨며 장영실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톡 쏘듯이 외쳤다. "이제와서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니 자네 지금 누구 놀리는 건가?" "말씀해 주신다면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한번 흘긴 루스티커는 빈 포도주 병을 아쉽다는 듯이 흔들어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 영감탱이를 알게되었을 때는 내가 젊었을 때이니 거의 100년 정도 지난 일이군. 그 녀석의 이름은 그라프 라듀아보,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에 도이첸 제국에서 머리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듣고있었지. 산속에서 마법사 수행을 하던 내 귀에까지 그 녀석의 이름이 들리곤 했으니 얼마나 유명했는지 알 수 있을 게야." 잠시 그의 말을 정리해보던 장영실은 손으로 턱을 쓸며 대답했다. "음... 간단한 내용이군요. 당시에 루스티커님 보다 훨씬 유명했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쩌면 지금도 루스티커님 보다 유명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별 생각없이 던진 그의 말에 루스티커는 정곡이 찔렸는지 안면을 푸들푸들 떨기 시작했다. "누가 그라프 보다 덜 유명하다는 것인가! 서로의 길이 다르니 비교 할 수가 없는 것일세! 나는 마법사이고, 그 녀석은 현자이니까!" 버럭 화를 내는 루스티커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 장영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루스티커님이야 말로 은근히 그 그라프라는 분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장영실의 말에 문득 조용해진 그들을 끝도 없이 일렬로 늘어선 책장에 빼곡히 박혀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지. 자네 혹시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두 둘러 본 적이 있나?" "이 넓은 곳을 어떻게 다 둘러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이번일에 필요한 관련 서적만 찾아서 참고 할 뿐이죠." 머리를 끄덕인 그라프는 왠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 가장 중요도가 높은 만권의 책이 꽂혀 있는 곳은 둘러봤나?" "물론이죠. 도서관의 가장 안쪽에 황금 책장으로 꾸며져 있는 곳이 아닙니까? 저 역시 그곳에 있는 서적들로 부터 많은 자료들을 얻곤하는데, 반출이 불가능 한것이 아쉽더군요." "잘 아는군. 만약 그 만권의 책들 중 반 수 이상이 그라프 라듀아보가 저술한 책이라면 자네는 어떤 표정을 짓겠나?"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장영실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는데 어찌보면 시시한 농담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 했다. "하핫.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놀라서 기절이라도 해 있겠죠." "자네를 기절 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말은 사실일세. 정 의심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책장으로 가서 책 표지에 적혀있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해 보면 될것이야." "이럴 수가..." 불가능이라 여기고 있었던 일이 사실이라 밝혀지자 가슴이 덥썩 막힌 장영실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여의치 않아짐을 느꼈고, 제 멋대로 날뛰는 가슴을 힘겹게 진정시긴 후에야 되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신 이야기가 사실이란 말입니까? 제가 본 바로는 그곳에 있는 서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권 분량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한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수천권의 책이라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구먼 그래." "흠... 그런 분이 명신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 영감탱이가 이번 일에 간섭을 한것 같단 말이야. 지금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던 자가..." "헌데, 루스티커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라프라는 분을 탐탁치 않게 여기십니까? 혹시 두 분 사이에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장영실의 물음에 피식 웃은 루스티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사실 나와 그라프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사이일세. 어쩌면 그는 나에 대해서 모를 수도 있다네... 그렇다면 내가 왜 그에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자문을 던진 루스티커는 잔에 남아있는 몇 방울의 포도주를 아쉽다는 듯이 입으로 털어 넣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아마도 그라프가 내 인생의 목표였었기 때문일꺼야. 마법사가 사사로운 유명세를 중요시 여겨서는 안되는 일이겠지만, 우습게도 마법사의 특유의 괴팍함 때문에 나는 그의 유명세를 시기했었다네. 그래서 나는 더욱 마법에 심취 할 수 있었고, 그 보다 한 층 높은 유명세를 얻길 갈망했었지. 어쩌면 그 덕에 지금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으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후훗... 루스티커님께서 대마법사 된 이유가 그저 유명세 때문이라니..." "자네가 비웃어도 좋네... 마법사에게 있어서 유명세란 물질적인 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니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던 내가 유명세에 집착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작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네. 시간이 지나자 나도 상당한 명예를 얻게 되고 마법사로서 거의 그라프에 비등할 정도의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 하필면 그럴때 돌연 그가 세상을 등져 버리고 잠적을 해버린 것일세.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명예와 부를 버리고 세상을 등진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주더군. 게다가 그라프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아직도 대륙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나? 에잉..."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라프를 떠올리며 불만의 목소리를 덧붙였다. "어찌됐건 그리 됨으로써 나는 결국 그라프의 유명세를 뛰어 넘지 못하고 말았고, 그와 같이 멋지게 은퇴를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현자들이야 은퇴를 하더라도 어디서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면 되겠지만, 마법사야 어디 그럴 수가 있나? 당장 수석 마법사 자리를 내놓는다면 연구에 필요한 재료비도 충당 할 수 없을 텐데 말일세. 그래서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고약한 늙은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이러고 있는 것일세. 끌끌..." 문득 열변을 토하다 말고 허망한 웃음을 터트리고있는 루스티커를 보며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장영실은 빈 술병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술이 조금 더 필요 할 것 같군요. 이런 때에는 술만큼 좋은 것이 없죠." 장영실이 술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몸을 돌릴 때, 루스티커가 소매를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는데, 지금 그는 조금 전 우울한 표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훗.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사실 지금 나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거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훗!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자네와 대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일세. 그라프의 생각이 떠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 저기에 마법을 난사 하면서 난동을 부렸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자네와 같이 제국 개발 사업을 해오면서 어쩌면 그라프 그 친구를 눌러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이번 일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것이라네. 어쩌면 그를 앞질러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지도 모를 테니 말이야." 굳은 의지를 보이는 루스티커의 노안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털털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더욱 술을 한잔 해야겠군요. 원래 술은 기분 좋을 때 마시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장영실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던 루스티커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의미라면야 내 얼마든지 마셔 줄 수 있지! 허헛! 분명 자네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으니 나중에 후회 하지는 말게나."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서 서두르세나. 자칫 늦는다면 연회장의 술이 다 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던 루스티커는 무릎을 덮고있던 외투를 걷어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히려 장영실 보다 앞서 도서관의 문을 열고 나섰다. 그를 따라 나서던 장영실은 명신의 소식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 눈이 쌓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올 해의 첫눈 역시 그 범주를 넘지 않고 있었는데, 땅을 겨우 적실 정도로 내린 눈은 매말라있던 땅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동시에 땅 위의 오물들을 이끌고 땅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러한 첫 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한켠에서는 볼성 사납게 구토를 하는 사내가 있었다. 짧달막한 키에 그리 많지 않은 머리숱을 가진 그는 아침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도중에 상관의 호출을 받고 가는 중이었는데, 거의 두달 동안이나 호출이 없었기에 여유롭게 생활을 즐기던 그로써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웨엑!! 아이구 죽겠다! 갑자기 장영실 남작님이 찾으실 줄이야. 아직 술도 덜 깼는데 이대로 남작님을 찾아 뵈어도 될지 모르겠군." 대충 옷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그는 구토물을 대충 발로 정리한 후에 정원에서 빠져나왔다. 그 때, 날카로운 피리 소리와 함께 붉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발견한 사내는 황급히 달아나려했다. "이런 젠장! 황실 관리병들이군. 잡히면 벌칙금이다!" -삐익! 삐익! "거기 서랏! 감히 황궁의 정원에서 구토를 하다니!" "제기랄 벌칙금이 한 두푼이냐! 나는 절대 잡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몸은 생각만큼 움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짤막한 다리로 여러번 움직여 봐야 뒤를 쫓고있는 청년들의 추적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몇 분간의 추격전(?) 끝에 덜미를 잡히고 만 사내는 어정쩡한 미소로 황실 관리병들을 보며 말했다. "저... 내 이름은 코르핀이라고 하네만. 지금 즉시 장영실 남작님의 호출로 가봐야만 한다네. 그러니 이번 한번만 어떻게 해주면 안되겠나? 너무 급해서 화장실을 찾을 시간이 없었단 말일세." 애절한 눈빛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코르핀을 내려다 보던 황실 관리병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남작님의 부르심이라 하더라도 이곳이 환제폐하께서 기거하는 황궁인 만큼 기본적인 규율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설령 남작님 본인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아무일 없이 빠져나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코르핀은 체념 할 수 밖에 없었다. "에휴... 그래 벌칙금은 얼마인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황실 관리병은 뒷 주머니에 넣고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들며 말했다. "정원 침입 10폴트, 이물질 투척 20폴트, 합이 30폴트 입니다. 벌금은 이번주 내로 황실 관리국에 납부해...?" 문득 코르핀의 벌칙금 내역에 대해 말해주던 황실 관리병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은 코르핀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정원수의 뒤쪽에서 또 누군가의 현장감 있는 구토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우웨엑! 우웩! "아무튼 연회 다음 날만 되면..."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인상을 구긴 황실 관리병은 코르핀의 손목을 잡은 채 구토 소리가 들려오는 정원수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는데, 정원수의 뒤로 돌아가 그 주인공들을 확인하게된 황실 관리병과 코르핀은 제 각각 다른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이..이런! 루스티커 수석 마법사님!" "장영실 남작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서로 어깨 동무를 하며 다정하게(?) 구토를 하던 그들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채 닦아 내지 못하여 입가 붙어있던 걸죽한 구토물들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황실 경비병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할 말을 잃었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초췌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온 장영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고, 그와 함께 들어온 코르핀 역시 장영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입에 가져가 물을 들이킨 장영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군. 아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자네를 호출한 기억이 나서 바삐 오던 길이었네만, 운이 나쁘게도 추한 꼴만 보여줬구만." 고개를 내저은 코르핀은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하핫! 하지만 장영실 남작님과 루스티커님 덕분이 벌칙금을 물지 않아도 되어서 천만 다행입니다." 그의 말대로 장영실과 코르핀은 벌칙금을 물지 않아도 되었는데, 루스티커의 괴팍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황실 관리병은 차마 그의 성격을 건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코르핀에게 보여줬던 당당함을 즉시 거두어 들이며 줄행랑을 쳤던 것이었다. 그 후 루스티커는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고, 장영실과 코르핀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남작님께서 오랜만에 저를 부르신 것을 보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군요. 이번에도 뮤스원장님에 관한 일입니까?" 코르핀의 물음을 듣던 장영실은 흰색의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치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자네가 다시 한번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으로 가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부른 것일세." "이번에는 어떤 일입니까? 아직 뮤스원장의 추방기간이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간단한 일일세. 자네는 그저 내가 전해주는 편지만 그 아이의 누이에게 전해 주면 되는 것이지.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나. 혹시 갈증이 난다면 아무거나 꺼내 마시게." "천천히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남작님." 말을 마친 장영실은 깃팬을 들어 편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깃팬으로 한자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이 조금 어색 했고, 한자 특유의 유려한 모습도 나타낼 수 없었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명신이 자신의 편지를 알아 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충분 했기에... 짜가신선 <대공학자> #198 시작하는 이들 올 해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 앞에 선보이는 작은 눈송이 하나는 이리저리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며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백조의 깃털 만큼이나 가벼워 보이는 눈송이들은 긴 여행을 끝마치며 차가운 땅에 맺히며 사라졌다. 눈송이가 하나씩, 하나씩 녹아 들어가고 있을 시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 저택의 고풍스러운 지붕 아래로 젊은 남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알록달록하게 포장되어있는 선물 상자가 하나씩 들려 있었고, 저 마다 첫눈이 내려오고 있는 하늘을 한번씩 올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저택의 문앞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경쾌하게 손잡이를 두들겼다. -똑똑똑! 그와 동시에 저택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그들을 맞이 하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아래위로 검은색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공학원 저택의 집사 바이멀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는 문 밖에 서있는 젊은이들의 이름을 한명씩 부르며 맞아 주었는데, 크라이츠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은 뮤스의 친구들이었다. "허헛! 벌써 오셨군요. 카타리나 아가씨, 폴린 아가씨, 세이즈 아가씨, 히안 도련님. 그런데 가장 뒤에 아가씨는 처음 뵙는 분이시군요." 바이멀의 말과 함께 일행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그곳에는 일행들보다 조금 어리게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서있었는데,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그녀는 허리를 재빨리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뮤스선배의 후배인 헤밀턴이라고 합니다. 뭐... 뮤스 선배를 직접 본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후배는 후배인걸요. 들어가도 괜찮겠죠?" 그녀의 행동에 머리를 짚은 폴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바이멀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바이멀 아저씨. 이 녀석이 어찌나 따라오고 싶어 하던지... 아무튼 못말릴 녀석이야." 폴린의 말을 듣고있던 히안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 못말릴 녀석도 누구만은 못하지 아마..." "히안! 오랜만에 나의 성질을 돋구는 구나! 요즘 남자친구라고 봐줬더니 슬슬 기어 오르는군." 폴린이 히안의 옆구리를 꼬집으려 들자 히안은 몸을 크게 틀며 소리쳤다. "흐엑! 나는 폴린이라고 말 한 적이 없는데 왜그래!" 히안과 폴린이 말다툼 태세에 돌입하려 하자 급히 손을 내저은 바이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분다 진정하시죠. 어차피 뮤스 도련님의 후배시라면 크라이츠님도 반가워 하실 겁니다. 날씨가 꽤나 쌀쌀하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제서야 폴린과 바르키엘은 입을 다물었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웃은 헤밀턴은 친절하게 맞아 주는 바이멀을 향해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좋은 연말 보내세요!" "허헛! 정말 힘이 넘치는 아가씨군요. 감사는 나중에 크라이츠님께 하시면 됩니다." 손님들이 모두 저택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은 바이멀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크라이츠님과 드워프님들께서는 준비중이시니 금방 내려오실 것입니다. 벌쿤 도련님은 지금 주방에서 음식 장만을 하고 계시고요.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바이멀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에 몸을 던진 폴린이 세이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이즈는 좋겠구나. 나중에 결혼하면 요리사 따로 구할 일이 없겠군. 벌쿤을 나중에 우리식당으로 스카웃해올까나?" 그녀의 말에 조용히 웃던 세이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히안을 지금 부터 교육 시키는건 어때? 히안정도면 머리도 좋겠다. 금새 요리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이즈의 칭찬을 들은 히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려 할때 폴린은 코웃음을 쳤다. "호홋! 요리는 예술이란 말이야. 히안이 머리는 좋지만, 그런 감각은 빵점이거든. 차라리 지금 처럼 공부해서 공학원으로 들어오는 편이 훨씬 좋을걸?"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건장한 청년인 벌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음식 준비를 하다 말고 달려왔는지 밀가루가 여기저기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기이하게 생긴 금속제 기구를 들고 있었다. "하하핫! 다들 왔군! 세이즈도 왔고, 카타리나 누나, 폴린 누나, 히안형! 어라? 헤밀턴도 함께 왔네?" 반갑게 맞아주는 벌쿤의 아래위를 살펴 보며 인상을 찌푸린 폴린은 뭔가 마음에 안드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벌쿤. 우리한테 가까이 올 생각은 하지마. 애써 손질해둔 옷에 밀가루 칠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으니까." "훗! 솔직히 나도 폴린 누나 옆으로는 가기 싫은걸... 우리 세이즈라면 몰라도. 그렇지, 세이즈?" 벌쿤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이즈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온몸에 밀가루를 칠하고있는 벌쿤이 다가와도 세이즈는 싫은 기색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쯔쯧... 그때가 좋을 때다. 우리 세이즈... 우리 세이즈... 지금 실컷 해놔. 조금만 지나면 그것도 없어 질테니까." 벌쿤의 시늉을 하며 투덜거리는 폴린의 모습에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이엔 누나랑, 바르키엘 형은 안보이네? 오늘 못온데?" 그의 물음에 웃음을 거두던 카타리나가 대답했다. "응 걔들은 지금 부모님들과 함께 여행중이거든. 얼마전에 편지로 소식을 받았는데 참석 못한다고 아쉬워 하던걸."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아마 내가 준비한 만찬에 참석하지 못한걸 땅을 치면서 후회할거야."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장담을 하는 벌쿤을 보며 가볍게 웃은 카타리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금속제 기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건 뭐니? 공학원 제품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건 틀별한 이름은 없지만 밀가루 반죽을 해주는 기계야. 혼자 기계공학 쪽 공부하면서 만들어 본건데, 꽤나 쓸만하길래 자주 사용하고 있지." 말을 마친 벌쿤이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손잡이에 있는 스위치를 올리자 반죽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소리도 없이 기이한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본 벌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우쭐 거렸다. "어때? 이걸 대량으로 생산해서 빵집에 판매하면 엄청난 인기를 얻을 거야. 원래 빵을 만들때는 반죽이 가장 힘들거든." 그러나 벌쿤의 말에 동의를 해주는 사람은 세이즈 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은 생각 같다. 나도 어머니를 도와서 빵을 만들어 봤는데 정말 힘든 것 같았어. 벌쿤이 이걸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한걸?" 남들이야 어쨌건 세이즈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한 벌쿤은 반죽기의 작동을 멈추며 말했다. "그럼 나는 마무리를 하러 가야하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오늘 만찬을 기대하고 있으라고! 세이즈도 잠시 후에봐!" 주먹을 불끈쥐어 보이며 응접실 밖으로 나가는 벌쿤을 바라보던 히안은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듯 했다. "아무리 이상한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그렇지... 정말 저 덩치가 아깝다." 히안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폴린은 팔짱을 끼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튼 세상 남자들은 다 벌쿤을 본받아야 한다니까. 저런 괜찮은 녀석을 덥썩 물다니 세이즈는 운도 좋지." "또 나랑 사귀게 된게 억울하냐!" "아이고... 속좁긴. 농담좀 한거가지고 화내는 것 좀 봐..." 더 이상 폴린과 말다툼을 해봐야 제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된 히안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헤밀턴은 나이 답지 않게 팔짱을 낀채로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두분 모두 지금 너무 하시네요. 지금 카타리나 선배는 뮤스 선배를 먼 객지로 보내고 가슴아파 하시는데 두분은 볼 때 마다 사랑싸움이라니... 철좀 드세요!" 헤밀턴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린 폴린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으름장을 놨다. "이..이봐 헤밀턴. 네게만은 그소리를 듣고 싶진 않은데? 그리고 카타리나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뮤스녀석의 어벙한 면상을 보고싶은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왜 괜히 쓸데 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거야!" 결국 헤밀턴은 폴린식 공포의 목소르기를 당해야만 했고, 뮤스 이야기로 인해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때 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폴린 만큼이나 톤이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홋! 모두들 일찍와 있었군요. 그런데 모두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에 시선을 응접실 입구쪽으로 옮긴 뮤스의 친구들은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크라이츠의 모습을 발견했고, 애써 어둡던 안색을 숨기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를 보며 아무런 눈치도 못챌 크라이츠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뮤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카타리나 양 제 말이 맞죠?"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자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네... 크라이츠님." 고개를 푹 숙이며 금새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카타리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준 크라이츠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런... 뮤스녀석이 카타리나양을 크게 걱정 시키고 있군요. 돌아오면 내가 꼭 크게 혼줄을 내주도록 하죠." "뮤스는... 뮤스는 괜찮을 까요? 아버님으로 부터 미개척지는 굉장히 무서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수많은 마물들이 날뛰고 있는 곳이라고..." 걱정스러움이 가득찬 눈빛을 하고있는 카타리나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크라이츠는 그녀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당연한것 아닌가요? 그 녀석은 드베인 숲에서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죠. 이번에도 꼭 무사히 되돌아 올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카타리나는 크라이츠의 위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밝은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네, 저도 크라이츠님과 같은 생각이예요. 이렇게 만찬에 초대까지 해주셨는데, 괜히 제가 주책을 부렸나 봐요." "별말을 다하네요... 그럼 괜찮아진 듯하니 벌쿤이 준비한 만찬을 즐기러가 볼까요?" 그녀의 말을들은 헤밀턴은 목을 조르고 있는 폴린의 팔을 풀어내며 기뻐했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부터 굶고 있었는데, 드디어 만찬이 시작되다니!" 헤밀턴과 안면이 없던 크라이츠는 해답이라도 구하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일행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폴린이 다시 헤밀턴의 목을 부여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이번에 저희 학부에 새로 들어온 후배녀석인데, 만찬 초대 소식을 듣고 꼭 공학원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요. 괜찮을까요?" 폴린과 헤밀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크라이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홋! 어차피 음식은 벌쿤이 충분히 준비해 놨을 테니 상관없답니다. 그럼 식당으로 가도록 하죠." 크라이츠가 몸을 돌리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나직한 한숨을 내쉰 폴린은 헤밀턴의 머리에 꿀밤을 한방 먹였고,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헤밀턴은 혀를 빼물며 기뻐하고 있었다. 따뜻한 느낌의 조명들이 빛을 발하는 식당 내부, 약 50석에 달하는 기다란 식탁 위에는 빈 자리를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아름다운 식기에 올려져 줄을 지어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장식을 위한 촛대가 여러개 놓여 있었고, 겨울이었음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싱그러운 꽃바구니들 역시 고급스러운 접시들과 함께 놓여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작은 소란이 식당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켈트와 벌쿤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드워프 형제들은 당연히 켈트를 응원 하고 있었다. "형님! 벌쿤에게 진다면 알아서 하슈! 힘내슈!" "으허헛. 형님의 손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다우!" "벌쿤따위의 헛 근육에게 지면 드워프족의 수치요!" 드워프들의 응원을 듣고 있던 벌쿤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거예요! 또 크라이츠 큰누님이 오시기 전에 음식에 손댔다가 혼나시려고 그래요?" 벌쿤의 말에 함께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켈트는 의미심작하게 말했다. "이런 음식을 놔두고 기다리라고? 나중에 가서 혼나더라도 지금은 먹고 봐야겠다! 이 많은 음식들 중에 좀 먹는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이만 포기하시지 벌쿤!" "아무튼 아저씨들은 뇌까지 위로 되어 있을거예요!" 드워프들은 음식에 손을 대기 위해, 벌쿤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아웅 다웅 하고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크라이츠가 나타났고, 기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챈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죠? 켈트씨... 그리고 형제분들?" 크라이츠의 등장에 켈트와 마주잡은 손을 뿌리친 벌쿤은 일의 진상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의 입을 틀어 막았기에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짤막한 몸으로 벌쿤의 등에 매달려 그의 입을 막은 켈트는 손을 흔들며 크라이츠의 물음에 대답했다. "허헛! 아닙니다. 요즘 벌쿤이 운동을 안하는 것 같아서 잠시 힘겨루기를 했을 뿐이죠. 그렇지 않나 아우들?" 켈트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 드워프들은 먼 산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흠 그러고 보니 벌쿤의 힘이 예전만 못해졌어..." "요즘 공학 공부에만 너무 매달려서 그래.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과연 옛말이 맞는 것 같군." "켈트 형님과 비슷한 힘이라니... 이곳에 올때만 해도 훨씬 나았는데." 넉살 좋게 이야기를 대충 꾸며댄 드워프들은 급히 흩어지며 식탁으로 달려가 자리를 차지하며 앉았고, 대충 어찌 돌아가던 내용이었는지 알고 있었던 크라이츠 역시 손님들 앞에서 껄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자 다들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벌쿤이 어제부터 준비해놓은 것이랍니다." 그녀를 따라 들어오고 있던 뮤스의 친구들은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선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뮤스가 있을 때도 몇번 식사에 초대 받은 적이 있었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였던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기뻐하고 있는 것은 헤밀턴이었는데, 30멜리는 족히 됨직한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돌아다니며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씩 살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와! 저 태어나서 이런 만찬은 처음이예요! 저희 학부 사람들이 다 와서 먹어도 모자랄 것 같은걸요?" 예상 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헤밀턴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두통을 느끼는지 고개를 내저었고, 그녀를 처음 보는 드워프들은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헛! 저 아가씨 마음에 드는구먼! 맛있는 음식 앞에서 점잔 빼고 있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걸?" 켈트의 칭찬에 기분 좋아진 헤밀턴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헤밀턴이라고 합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뒤에 서있던 폴린은 귓속말을 전했다. "헤밀턴. 드워프 아저씨들의 말씀을 칭찬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좀 나쁘게 말하자면 '인간 만큼의 교양이 없다.' 라는 뜻이란다. " 폴린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한 헤밀턴은 드워프들에게 급히 뛰어가 말했다. "와! 아저씨들이 드워프라니! 저 드워프 족은 처음 봤어요!" 그리곤 켈트와 브라이덴의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정말 책에서 보던 것 보다 더 짧네요! 키도 나보다 훨씬 작고... 배도 뽈록 나온게 너무 귀여워!" 이쯤 되면서 사색으로 변해버린 폴린은 급히 헤밀턴을 끌어내며 드워프들에게 사과를 했다. "이..이 녀석이 워낙에 철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 아저씨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어서인지 드워프들은 상황 파악 조차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허허... 방금전에 무슨 일이었지?" "글쎄... 저 아가씨가 우리를 보고 뭐라고 그런 듯 한데..." "허헛! 당사자 앞에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우리가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헛 것을 들었던 모양이야." 일이야 어째되었건 아무런 탈 없이 넘어가자 폴린을 비롯한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헤밀턴을 데리고 온것에 대해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었다. 크라이츠를 중심으로 식탁의 양쪽으로 나누어 앉은 일행들은 다시한번 음식들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 손뼉을 한번 쳐서 주위의 이목을 모은 크라이츠는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씩 둘러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모인 것이 연말 만찬을 함께 하기 위해서이니 먼저 식사부터 하는 것이 좋겠죠?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 음식들을 모두 벌쿤이 준비한 것이랍니다. 벌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도록 하죠." 크라이츠의 말에 머쓱함을 느낀 벌쿤은 머리를 긁적였고, 벌쿤의 옆에 앉은 세이즈는 미소를 한번 지어 줌으로써 그의 노고를 풀어주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199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자 길게 늘어서있는 식탁의 왼쪽편과 오른쪽편은 서로 상반 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식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왼쪽편에는 드워프들 뿐이었지만, 어느새 헤밀턴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드워프들 못지 않은 모습으로 개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으며, 식탁의 오른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뮤스의 친구들은 맞은편을 바라보며 식욕을 떨구고 있었다. 오크나무의 연기에 훈제를 한 닭다리를 손에 들고서 입으로 한번 뜯은 헤밀턴은 입에있는 음식물을 그대로 보인채 켈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호홋! 켈트 아저씨 이것도 좀 드셔 보세요! 다리가 하나밖에 안남았어요. 선배들 따라 오길 정말 잘했지!" 그녀의 말을 들은 켈트는 먹고있던 양고기를 다 먹기도 전에 다시 닭다리를 하나 뜯어왔다. "껄껄! 고맙군 헤밀턴양. 이렇게 신나게 먹어 보는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이 단편적인 모습만 보더라도 드워프들과 헤밀턴이 상당히 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헤밀턴의 성격은 오히려 드워프들로 부터 큰 호감을 얻었던 것이었다. 이마를 찌푸리며 그들을 외면한 크라이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말을 꺼냈다. "일단 대충 식사를 끝낸 듯 하군요. 벌쿤, 후식좀 준비해 줄래?" 그녀의 말에 의자를 밀고 일어난 벌쿤은 요리실로 걸어들어갔고, 드워프들과 헤밀턴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 역시 식사를 끝냈다는 신호로 무릎에 얹고 있던 냅킨을 접시위에 올려 놓았다. 벌쿤이 후식을 준비해 오는 동안 크라이츠는 할말이 있는지 뮤스의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찬에 초대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답니다." 크라이츠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를 향해 모아졌고,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던 크라이츠는 손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여러분들께 하나의 제안을 하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크라이츠는 가장 가까이에 앉아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물었다. "카타리나양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할것이죠? 계속해서 공부를 할 예정인가요?" 그녀가 의도하는 바를 확실히 알수는 없었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타리나는 물을 한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으로서는 졸업하고도 계속해서 연금술에 대한 공부를 할 생각이예요. 이쪽이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역시 생각대로군요. 그리고 다른 친구분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크라이츠가와 시선을 마주친 일행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고, 폴린만이 두리번 거리면서 친구들의 행동을 살피며 대답했다. "저... 저도 연금술이 재미있기는 한데,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이 너무 딱딱해서 적성에 맞지가 않아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거든요." 폴린의 솔직한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은 크라이츠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쨌건 계속해서 같은 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이군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제안하는데, 졸업과 동시에 공학원의 공학자로 들어와 주시겠어요? 보수나 대우는 충분히 해드리도록 하죠." 이자리에 있는 그 누구 보다 크라이츠의 제안에 놀라워 하는 것은 히안이었다. "그..그게 정말이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졸업후에 뮤스에게 부탁해서 공학원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히안군은 저의 제안을 받아 들이겠다는 것이군요. 그럼 다른 친구들은 어떻죠?" 하지만 히안을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들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한가지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세이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이츠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히안을 제외한 저희들은 그리 성적이 우수한 편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저희가 공학원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지 모르겠는걸요." 세이즈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켈트였다. 그는 살을 발라낸 뼈다귀 하나를 입에 꺼내는 중이었는데, 아직도 식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짭짭...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게야. 어차피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모두 머리에 넣어서 공학원에 들어 온다고 하더라도 화공학에 대한 기본 지식외에는 별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대신 공학원에 들어온 이후에 얼마나 열심히 실력을 발전시키고, 연구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일세." 오랜만에 바른말을 하는 켈트의 뒤를 이어 크라이츠가 말을 덧붙였다. "켈트씨의 말대로 우리 공학원은 지금까지 쌓은 지식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답니다. 지금 공학원은 인재들이 크게 부족한 상태죠... 얼마전 세이즈 양의 언니인 아로인 양이 그 동료들과 함께 공학원으로 들어와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수가 많이 부족한 상태거든요. 특히 듀들란 제국에서도 우리 공학원에 대응하기 위해서 전뇌거 개발에 뛰어드는 등의 국가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듀들란 제국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게 될것이고, 뮤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에 대비할 충분한 기반을 닦아 놔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힘이 더욱 필요한 것이고, 여러분들 외에도 도이첸 제국의 전역에 공고를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집할 예정이예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카타리나와 그녀의 친구들을 바라본 크라이츠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재촉을 하지는 않았다. 드워프들이 식사하는 소리만이 조금씩 들리고 있을 때, 후식 준비를 끝낸 벌쿤이 주방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과 함께 후식을 옮겨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잠잠해진 식당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 연회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크라이츠의 제안에 고민 하고있는 친구들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크라이츠의 제안에 동의 할 것을 굳게 믿고 있던 벌쿤은 파이접시 하나를 크라이츠의 앞에 내려 놓으며 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다들 후식이나 먹고서 고민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벌쿤 특제의 퀴쉐파이가 다 식어 버린단 말이야."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들의 시선을 집중 시킨 벌쿤은 손에든 파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런 파이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게 아니야. 늦었다가는 하나도 못먹을 지 모른다고." 그제서야 한껏 진지해져 엉켜있는 표정을 풀어낼 수 있었던 친구들은 벌쿤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에게 파이를 한 조각씩 건네받은 친구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한 입 베어먹었다. 그 중 아무런 생각 없이 벌쿤의 파이를 받아먹던 히안은 눈을 꿈뻑거리며 자신이 먹고있는 파이를 내려다 보고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음식도 맛있었지만 이건 정말 맛있잖아! 도대체 이 열매는 뭐야?" 이런 반응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이 나오고 있었는데, 벌쿤의 여자친구인 세이즈 역시 이 파이는 처음 먹어보는 듯 했다. "어머! 벌쿤, 이 지금까지 이런 걸 숨기고 있었던거니? 이 빨간 열매는 뭐야?" 그들의 반응을 흐뭇하게 바라보고있던 벌쿤은 어깨를 우쭐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핫! 바로 벌쿤 특제 파이라니까. 그 열매는 퀴쉐라는 열매인데 덥고 습한 곳에서 자라나지. 그래서 건조한 라이델베르크에서는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얼마 전에 잘 아는 과일 가게 아저씨께 부탁해서 구할 수 있었어. 상큼한 맛이 느끼한 파이의 뒷맛을 깨끗이 없애주거든. 워낙 열매 양이 얼마되지 않아서 많이 못만들었으니까 빨리 먹는게 좋을거야." "뭐야! 모자란다고?" 자칫 늦으면 맛도 보지 못한다는 말에 위기감을 느낀 드워프들은 먹고있던 접시들을 뒤로한채 벌쿤에게 달려와 파이를 낚아 채려했다. 하지만 벌쿤과 50셀리 이상의 신장차이가 났던 드워프들은 허공에 헛 손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최대한 높이 파이 접시를 들어 올린 벌쿤은 자신의 어깨 아래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드시던 것들이나 먼저 드시고 오세요! 안그러면 퀴쉐파이의 진정한 맛을 못느낀다니까요! 제 요리를 무시하는 행위를 하도록 놔둘 수는 없어요!" 도움닫기와 함께 다시 한번 손으로 허공을 휘저은 켈트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런게 어디있어! 그냥 대충 맛만 보고 배만 채우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만 장난치고 좀 주기나 하라고!" "아 글쎄 안된다니까요!" 또 다시 아웅다웅 거리고 있는 드워프들과 벌쿤을 바라보고있던 친구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웃긴 나머지 입에 있는 음식물을 튀길 정도로 크게 웃었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배를 잡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있던 카타리나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물을 닦아내며 크라이츠를 불렀다. "저... 크라이츠님." 함께 웃고 있던 크라이츠는 카타리나의 부름에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네, 카타리나양.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만약 훗날 공학이 발달해 누구나 전뇌거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제국 어디든지 손쉽게 갈 수 있다면 저런 희귀하고 맛있는 열매들을 도이첸 제국의 서민들도 손쉽게 먹을 수 있게 되겠죠?" "물론이죠. 열매나 과일 같은 물건들은 운송기간이 큰문제이기 때문에 산지가 아니라면 가격이 크게 높아지는 것이니까요. 그 뿐만 아니라 공학이 지금보다 훨씬 폭 넓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좁게는 도이첸 제국의 모든 국민들, 나아가서는 대륙의 모든 국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 틀림없어요." 잠시 자신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본 카타리나는 굳은 결심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친구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크라이츠님이 제안 하신대로 공학원에 들어와 일을 하고싶어요.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열심히 배워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뮤스의 옆에서 작은 것이라도 하나 돕고 싶으니까요." 카타리나의 생각을 듣고 있던 세이즈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인지 벌쿤과 눈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카타리나와 같은 생각이에요. 모르는 것이 많더라도 아로인 언니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우면 늘겠죠. 폴린 너는 어때?" 폴린은 아직도 생각이 교차 하는지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폴린은 두 손을 들며 대답했다. "저는 카타리나나 세이즈 처럼 뭔가에 열중해서 익히는 체질이 아니에요. 하지만 친구들이 다 공학원에 들어온다는데 혼자 떨어 질 수는 없죠. 혹시 연구직 말고 다른 자리는 필요하지 않나요? 회계나 금전 관리같은 것은 자신있거든요. 어려서 부터 집에서 해오던 것이다 보니..." 그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린 크라이츠는 마침 잘되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공학원을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 버거웠는데 폴린 양이 저를 좀 도와 주시면 되겠군요. 성격도 활달하니까 제 비서일을 해주면 딱 어울릴 것 같은걸요." "호홋! 멋져요! 공학원의 비서라... 왠지 폼이 나는걸요? 그런데, 바르키엘은 어떻게하죠? 여행중이라 오늘 참석하지 못했는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바르키엘도 꽤나 똑똑한 녀석이죠." 그녀의 물음에 빙그레 웃어보인 크라이츠는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키엘 군에게는 이미 동의를 받아 놨답니다. 하지만 가이엔 양은 인문학 계열이라 조금 거리가 있더군요. 그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도록 하죠." "자까안오!" 이야기를 끝내려 할 때, 불현 듯 식탁의 가장 끝자리로부터 어정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이츠가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입에 한가득 음식물을 물고 있는 헤밀턴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는데, 가슴을 두들기며 겨우 물고있던 음식물을 삼킨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헤헥... 저도 공학원에 들어오고 싶어요! 저도 이곳에서 일하면 안될까요? 선배들이랑 떨어지기 싫거든요." 또 다시 분위기 파악 못하고 끼어들고있는 그녀를 폴린이 나서며 말리려 했다. "헤밀턴, 그건 말도 안돼! 연구는 전혀 네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내 입으로 이런말 하는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리처럼 덤벙대는 성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폴린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헤밀턴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선배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저 이래뵈도 햄브리겐 대학교 올해 최우수 입학생이에요! 게다가 연금술 과목은 실기까지 합해서 만점을 얻었다고요! 이런 인재를 그냥 놔두면 안되죠!"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듣고서 모두들 놀라운 표정을 지을 때, 비교적 담담하던 세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믿기지 않을테지만 헤밀턴의 말은 모두 사실이야. 얘가 올해 전 학부를 통 털어 수석으로 입학했어. 내가 입학식때 똑똑히 봤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지." "호호홋! 역시 세이즈 선배는 다르군요! 어때요? 이래도 제가 공학원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건가요?" 기고만장해진 헤밀턴의 태도에 폴린을 포함한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식사를 마친 켈트는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빨며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헤밀턴 양을 받아 들여도 별 괜찮을 것 같군요. 연금술 실기 과목에 만점이라면 손재주도 상당한 것 같고, 성격도 마음에 드니 저희들이 맡아서 가르치도록 하죠." "호홋! 고마워요 드워프 아저씨!" 어쨌건 헤밀턴의 일이 해결된 듯 하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크라이츠는 새롭게 맞아 들일 식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양, 폴린 양, 세이즈 양, 폴린 군 마지막으로 헤밀턴 양. 여러분들이 저희 공학원의 식구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앞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공학원에 와서 드워프분들과 아로인 양을 도우며 열심히 실력들을 쌓으시길 부탁드릴께요. 공학원에서는 여러분들에 대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지금까지 자신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라고 여기던 공학원의 새 식구가 된 현실이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쁨과 알지 못하던 세상에 뛰어든다는 설레임으로 인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들이었다. 이튿날 부터 도이첸 제국에 존재하는 전 대학교와 사설 연구단체의 게시판에는 공학원의 이름으로 모집공고가 붙기 시작했고, 이는 대상지역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부터 큰 관심을 끄는 사건이 되었다. -끼익... 방문을 닫은 카타리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문앞에 기대어 섰다. 왠지 무거워 보이는 그녀의 어깨가 아래로 처지면서 어깨에 걸려있던 작은 가방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조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오는 그녀의 붉은 입술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후...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없는거니." 조금의 시간이 흐를 동안 그렇게 서있던 카타리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침대로 걸어갔다. 대충 외투를 벗어 침대의 한쪽에 놓아둔 그녀는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다. 까칠한 종이의 질감을 손 끝으로 느낀 그녀는 천천히 그것을 끌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질이 그리 좋지 못한 한 장의 종이였고, 수도 없이 손을 탄 듯 모서리 부분은 조금씩 헤져 있었다. 카타리나는 여느 때와 마찬 가지로 오늘도 빠지지 않고 그 종이를 펼쳐 읽어내려 갔다. -카타리나에게. 네가 이 글을 읽을 때 쯤이면 누님을 통해서 나의 소식을 들은 후겠구나. 그리고 그때 쯤이면 나는 알지 못할 어딘가에서 혼자 남아있겠지? 하지만, 난 나에게 내려진 형벌이 억울하지는 않단다. 어디까지나 나로인해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나의 잘못에 대해 뉘울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할 지경이지. 요즘 눈을 감으면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내가 없는 동안에 너는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나하지 않을지, 공학원은 어떻게 되어갈지, 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라이델베르크로 뒤따라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네게 너무나 미안할 뿐이야. 부디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래.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테니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지내길... 뮤스의 짤막한 편지를 다 읽은 카타리나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몸건강하게 잘 지내겠지?" 옆에 없는 뮤스에게 질문을 던지던 그녀의 눈가에는 맑은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문 카타리나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아냐! 내가 울고 있으면 뮤스도 좋아하지 않을거야." 뮤스가 미개척지로 추방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 수십번도 넘게 해왔던 혼자만의 각오였지만 그의 생각이 날때면 언제나 눈물이 맺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들었다. 비록 헤밀턴에 의해서 찢어져 뮤스와의 사이가 갈라졌던 사진이었지만, 지금은 정성스럽게 이어붙여 처음과 같이 다정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뮤스의 얼굴을 보며 코 끝이 아리는 것을 느낀 그녀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미소지었다. "풋... 이제는 울지 않고 잘 기다리고 있을께. 아참, 나와 친구들도 이제 공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돕기로 했어. 다음에 네가 돌아와 다시 공학원 일을 할때 많이 도와줄 수 있도록 노력할께. 그 때는 꼭 같이 지내는거야. 알겠지?" 하루의 일과를 아쉬운 대로 사진 속의 뮤스에게 말해준 그녀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200 가슴에 겨울을 묻은 여인. 첫 눈이 내리던 설레임도 오래가지 못했고, 보는이의 가슴까지 시리도록 만드는 겨울 비가 세상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바닥에 깔려있던 회색의 포장석들은 차가운 빗물에 질린 듯 진회색으로 변해있었다. 세 명의 시녀들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길을 덮고 있는 포장석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이디론가를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녀들은 그녀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물방울이 튀지 않도록 조심한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힘이 없어보이는 시녀들의 주인은 빛방울이 튀는 것 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가장 앞쪽에서 레이스로 치장 된 우산을 받치고 있던 젊은 시녀가 다소곳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티에론 황녀님 조금만 더 가면 사교장입니다. 바닦에 포장석이 깔리지 않아 땅이 좋지 않을테니 드레스를 조심하시죠." 드레스의 여인은 케티에론 황녀였다. 그녀는 큰 근심이라도 있는 듯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 사교 모임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으나 이미 한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기에 그곳으로 걸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심하라는 시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케티에론 황녀는 흙바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았다. 평소 아끼는 드레스에 물한방울 튀는 것을 참지 못하고서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있던 시녀들은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과 바닦에 끌린 드레스를 보며 기겁을 했다. "화..황녀님! 드레스와 신발에 온통 흙이 묻었습니다! 이일을 어찌하면 좋죠?!" 너무나 당황한 말까지 더듬거리는 시녀들에게 시선을 준 케티에론 황녀는 오히려 그녀들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겨우 흙이 조금 묻은것 가지고 왜그렇게 호들갑이지? 어차피 나중에 씻으면 되는 것 아니니. 약속 시간에 늦기 전에 어서 가자꾸나..." 예상치 못한 케티에론 황녀의 반응에 얼떨떨해진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비를 맞으며 시녀들보다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녀들은 급히 우산을 받치며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움푹, 움푹 파고드는 자신의 신발을 보며 걷던 케티에론 황녀는 지난 봄을 회상하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풍성한 여름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단비가 때를 맞춰 뿌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년 중 가장 싱그러운 모습을 하고 있던 초목들은 봄비로 인해 더욱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서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고, 케티에론 황녀도 그런 부류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아침 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노란색을 띄고 있는 커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왜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안그래도 그 장영실인가 하는 작자 때문에 기분도 망쳤는데, 비까지 내리고 말이야! 이래 가지고선 사교장에 나가는 것도 마땅치 않겠어. 머리도 망가질테고 드레스도 젖을 테니까." 케티에론 황녀의 성격때문에 진땀께나 빼던 시녀는 그녀가 벗어던진 드레스들을 한아름 안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사교 약속을 취소하도록 할까요?" "아냐! 아냐! 듀들란 제국의 황녀인 내가 고작 비 때문에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지! 그건 나의 고아한 품격에 흠집을 내는 행동일 테니까." 언제나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태도가 새로울 것도 없었던 시녀는 드레스를 하나씩 정리하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옷이 조금 더러워 지더라도 케티에론 황녀님의 타고난 미모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죠." "호호홋! 그건 바른 말인 것 같구나. 그래도 머리카락 끝이 젖어서 축축한 것은 질색이니까 머리는 말아 올리도록 하고, 드레스는 최대한 밝은 색으로 해줘. 진한 색은 비에 젖으면 금방 눈에 띄거든. 오늘도 나의 미모를 유감없이 발산해야 겠군!" 몇 마디의 아부로 이미 비에 대한 불만을 잊어버린 케티에론 황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듬는 중이었고, 시녀는 그녀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드레스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로 부터 1시간 여가 지난 후에야 단장을 끝마칠 수 있었던 케티에론 황녀와 시녀는 거처에서 빠져나와 사교장을 향하고 있었다. 핑크빛의 우산을 산뜻하게 든 케티에론 황녀의 발걸음은 물이라도 튀길까 조심스러웠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는 드레스를 땅에 끌리지 않도록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그렇게 사교장으로 이동하는 중, 케티에론 황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드레스에만 신경을 빼앗기고 있던 시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케티에론 황녀의 시선은 먼 발치에 고정되어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는 생전 처음보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사내가 비를 맞으며 맨발로 진흙밭의 중심에 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기이한 형태로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것이었다. 빗속을 가로지른 그의 손은 매끈한 곡선을 그려나갔고, 마치 물속을 유영을 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또, 그의 발은 제비가 물 위를 스치며 지나가 듯 가볍게 땅을 차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단순한 발차기로 인해 생긴 바람은 고여있는 물을 날카롭게 갈라내는 것이었다. 조금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사내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우아하고도 신비한 몸짓에 감탄을 했음이 틀림 없었겠지만 오늘은 그의 운이 썩 좋지 않았는지 안 듣느니만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저..저 작자 장영실이잖아! 오늘은 또 빗속에서 무슨 미칫짓이람!" 그녀의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는 꽤나 컷기에 장영실의 귀에까지 들어가는데 큰 모자람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케티에론 황녀가 서있는 곳으로 몸을 돌린 장영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흠... 미친짓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황녀님 처럼 옷을 사람보다 귀중하게 모시고 있는 것 보다는 이러는 편이 더욱 편하지요. 황녀님도 한번 몸으로 자연을 느껴 보시죠. 그리고 이 향기를 맡아 보시면 제가 왜 이 미친짓을 하는지 아실겝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장영실을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케티에론 황녀는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쯔쯧... 내가 저런 미친 작자의 행동에 화를 내고 있었다니. 어찌 보면 참으로 딱한 사람이군! 흥!" 목에 다시 힘을 주며 콧방귀를 낀 케티에론 황녀는 보란 듯이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그녀의 첫발이 닿는 곳에는 얄밉게도 포장석의 모서리가 하나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던 케티에론 황녀는 발목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는데, 시녀도 장영실의 기이한 몰골에 정신을 팔고 있었기에 그녀를 구해 줄 수는 없었다. -철퍽! 예상치 못한 불길한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시녀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쓰러진채 망연자실 앉아있는 케티에론 황녀를 발견하고선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화..황녀님! 괜찮으신가요! 주..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눈앞이 깜깜해진 시녀가 어쩔줄 몰라하며 케티에론 황녀를 부축하려 할 때 장영실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황녀님께서도 말은 거칠게 하셨어도 제 행동을 부럽게 여기셨던 게로군요. 하지만 저를 따라 하시기에는 옷이 너무 비싸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일어나시죠." 장영실은 케티에론 황녀의 팔을 부축하며 그녀를 일으켰고, 동시에 시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자네도 그렇게 당황할 것 없네. 어차피 황녀님께서 원하셨던 일이셨으니 자네가 잘못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게다가 설령 자네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이런 일에 화를 낼 옹졸한 분이 아니시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까 황녀님?" 사실 시녀를 향해 화풀이를 할 생각으로 온갓 험한 말을 준비하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장영실의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는데, 장영실이 그런 식으로 말한 이상 시녀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의 모습만 더 웃기게 될 뿐이었고, 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최소한 장영실 앞에서 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었다. "당연한것 아닌가요? 이런 작은 실수 때문에 아랫것들에게 직접 화를 낼만큼 옹졸하지는 않죠. 그러니 너도 그렇게 떨고 있을 것 없단다!" 그제서야 아무일 없이 넘어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시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고, 자신을 감싸준 장영실에 대해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 장영실을 본 케티에론 황녀는 팔을 거칠게 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건 그렇고,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이게 무슨 짓이죠!" 또 다시 자신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케티에론 황녀의 사나운 목소리를 듣던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하지만 저 흙탕물 속에서 앉아 계신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흥! 나도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요!" "그럼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것이군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도록 하지요." 결국 장영실의 사과를 받아내며 말을마친 케티에론 황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거처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주홍빛의 화사한 드레스였지만,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은 차마 드레스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이고 있었다. 작은 주먹을 꼬옥 쥐며 화를 참아낸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을 올려다보며 특유의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야 어찌되었든, 저는 드레스가 망가져서 사교 모임에 가지 못했고, 이는 장영실 경이 제 앞에서 헤괴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만큼 이 드레스에 대한 배상을 해줬으면 해요! 제 말에 틀린점이 있나요?" 이번에도 역시 그냥 넘어가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자 실소를 금치 못한 장영실은 말을 끌어봐야 골치만 아파진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렇게 따지신다면 제 잘 못이 틀림이 없군요. 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옷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다 된것입니까?" 의외로 장영실이 쉽게 수긍을 하자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에게 이겼다고 생각하는 듯 턱을 치켜들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대기하고있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황녀님 그렇다면 사교 모임에는 출석하지 못하신다고 전할까요?" 그녀의 물음에 눈을 치켜 뜬 케티에론 황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는데, 장영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를 한다고는 말을 했지만 아직도 시녀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 모양을 하고서 사교 모임에 참석하라는 것이냐? 당장 사교장으로 가서 오늘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하거라!" "네! 황녀님." 짤막하게 대답한 시녀는 서둘러 길을 재촉했고,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못 마땅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산을 다시 들어올린 케티에론 황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흠..흠.. 그나저나 아까 당신이 하고 있었던 그 이상한 행동은 뭐죠? 춤을 추는 것이라고 보기에도 이상하던데..." 그녀의 물음에 손을 가볍게 들어올린 장영실은 아까와 동일한 형태로 손을 움직여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뇌동체술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체조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것 같군요. 다만 몸속에 흐르고 있는 신비한 힘을 사용해서 그 위력을 증가 시킬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몸을 좀 풀어 보고 있었던 것이죠." 장영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의 옷과 머리는 이미 다 젖어있었기에 우산을 쓸 필요도 없어 보였지만 꿋꿋하게 우산을 든 채로 그의 설명을 머리에 되세겼다. "신비한 힘이라는 것이 혹시 마나라는 것인가요? 저도 루스티커님께 들은 기억이 있죠.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마나와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른 면도 있죠. 루스티커님의 설명에 따르면 마나는 마법 시동어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그 신비한 힘은 뇌공력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마법시동어가 업더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답니다." 자신의 말이 정답이 아니라는 대답에 기분이 언짢아진 케티에론 황녀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저는 뇌공력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어요! 혹시 저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라면 그 힘을 한번 보여줘요!" 또 다시 억지를 부리고 나서는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골치가 지끈거림을 느낀 장영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황녀님께서는 꼭 포장석 위에 올라가 계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또 다시 저 때문에 기절을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이... 그때 생각만 하면 정말!" 더 이상 케티에론 황녀의 불만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몸을 돌린 장영실은 그녀로 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살펴본 그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단전으로 부터 뇌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몇 가지만 보여 드리도록 하죠." 비록 뮤스와 같이 전신에서 금빛이 일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몸으로 부터 방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케티에론 황녀도 느낄 정도였는데, 신기한 것을 보는 아이마냥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앗!" 짤막한 기합성을 내지른 장영실은 힘있게 다리를 구르며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발이 닿은 땅의 진흙은 사방으로 비산하며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고, 손에서 뻗어나온 권풍은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을 날려버릴 정도였다.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장영실은 어느 순간이 되자 먼저 케티에론 황녀가 봤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가 지나가는 곳의 빗방울들은 마치 태풍이라도 만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한번 씩 휘둘러 질때 마다 권풍이 몰아쳤고, 다리를 한번씩 구를때 마다 땅이 진동했다. 이렇듯 유연하면서도 재빠른 몸놀림에도 불구하고 상상치 못할 힘이 그의 몸을 통해 뿜어지고 있었는데, 뇌동체술법의 진면목이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장영실의 움직임이 멈추자 세상은 고요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주변의 땅은 처참이라고 할 만큼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그의 발이 닿았던 곳마다 진흙이 사방으로 뿌려져 있었고, 큼직한 웅덩이가 깊이 패여있었던 것이었다. 숨을 고르며 뇌공력의 흐름을 살피던 장영실은 상당한 양의 뇌공력을 사용했음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고, 당연히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케티에론 황녀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오히려 놀란 것은 장영실이었는데, 근 몇달간 이렇게 놀라기는 처음인 듯 했다. 당연히 케티에론 황녀가 서있어야 할 곳에는 지금 한 무더기의 진흙이 쌓여있었는데, 위로 빼꼼 나온 얼굴을 보고 서야 그것이 케티에론 황녀임을 알수 있었다. "이..이런! 괜찮으십니까 황녀님!"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장영실을 바라보며 거의 울상을 지은 케티에론 황녀는 입술에 묻은 진흙을 뱉어내며 외쳤다. "이..이거 일부러 그런거죠! 나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러신 거죠?!" 그녀답지 않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외치고있는 모습을 내려다본 장영실은 순간 측은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정말이지 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황녀님. 제가 거처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하죠." "거짓말! 다 고의로 그런거예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케티에론 황녀의 입은 아직도 그를 탓하고 있었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장영실의 손을 뿌리칠 힘도 없었기에 그저 하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201 "케티에론 황녀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한참 옛일을 생각하던 케티에론 황녀는 시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잠깐 둘러본 후에야 자신이 길을 가다말고 멍하니 서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가자꾸나." "네 황녀님."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 그녀들은 얼마가지 않아 사교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수의 귀족들이 그곳에 모여있었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즐겁게 떠들며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교장이 시끄럽다고 느낀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쪽으로 들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귀족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그녀에게 예를 표하기 시작했는데, 상류층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자리였기에 과다한 아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한 케티에론 황녀는 사교장의 방을 가르는 두꺼운 커튼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중년인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케티에론 황녀의 숙모인 동시에 투르코스 재상의 부인이었고, 케티에론 황녀와 약속이 되어있었던 상대였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재상부인은 몸을 일으키며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황녀의 손을 마주잡은 재상부인은 그녀에게 급히 알릴 것이라도 있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황녀님 제가 오늘 이곳에 청한 이유를 모르시고 계셨죠?" 겉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시녀에게 넘겨준 케티에론 황녀는 잠시 쉴 여유도 없이 질문을 던져오는 재상부인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저 숙모님께서 저를 보고 싶어하시는 줄 알았는걸요." "호홋! 실은 황녀님을 청한 이유는 다른것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셨답니다." "좋은 자리라니요?" "바로 그분과 조용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죠. 아마 지금쯤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재상부인의 말을 들은 케티에론 황녀는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분이라면 혹시 장영실 경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럼 제가 황녀님 앞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겠나요? 바로 장영실 경을 말씀드리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런..." 잔뜩 긴장한 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손을 포근하게 감싸준 재상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이죠? 하지만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케티에론 황녀님에게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랍니다. 그렇다보면 그 익숙치 않은 경험의 당황스러움 때문에 큰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고민만 하다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갈 뿐이죠. 시간이 흐른다고해서 황녀님께서 장영실 경에게 직접 자신의 감정을 말할 용기가 생길까요?" 재상부인의 질문을 받은 케티에론 황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녀님은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허영과 교만을 보이고 계시지만, 누구 보다 순수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답니다. 오히려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신다는 것도요.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지금 마음을 열고자 하는 분을 찾으셨어요. 제가 보더라도 장영실 경은 참으로 훌륭한분이죠. 생각도 깊으신데다가 예의도 바르고 능력도있고... 그렇기에 저는 황녀님의 보호자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랍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 분을 영원히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케티에론 황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재상부인의 배려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용기가 안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분을 만난다고 해도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긴장해서 굳어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재상부인은 사교장의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소파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재상부인은 케티에론 황녀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어려울 것이 없답니다. 그저 황녀님의 마음 속에 담고있던 그 분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만 말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황녀님은 그분의 어떤점이 마음에 들었죠?" 잠시 그녀의 물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뭐라고 딱 꼬집어 말을 할수가 없을 것 같아요. 처음 그분과 만났을 알지못할 당당함을 느꼈어요. 저 뿐만 아니라 그 어떤존재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을 당당함을...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그분의 자상함을 느꼈죠. 말도 안되는 부탁이라도 거절을 하지 못하는 자상함을요. 또, 세번째 만났을 때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느꼈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가능으로 만들어가는 그 열정을...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황녀님께서 모든 면을 좋아하고 계시는 그 분께서 오실 것이랍니다. 지금 느끼시는 그대로를 전하시면 되는 것이죠. 그분은 황녀님의 진실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재상부인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심어주었고, 케티에론 황녀는 처음으로 장영실에 대한 편견을 버렸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장영실에게 진흙세례를 받은 다음날 부터 케티에론 황녀는 며칠간이나 자신의 숙소에서 두문불출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황궁 어디선가 그녀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여러번 들리고 있었을 오전 시간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봐도 지겹지 않은 봄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을 통해 어디론가 급히 가고있는 장영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항상 즐겨입던 회색의 정장을 벗어던지고서 남색으로 아래, 위를 통일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였고, 손에는 굉장히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들려있었다. 걷는 도중에도 여러번 손에들린 상자를 내려보던 장영실은 그때 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신세에 대해 한탄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지원... 쩝. 그래도 내 실수로 큰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설마 몸도 좋지 않은분이 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건네보았지만 장영실은 그래도 뭔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장영실의 발이 멈춘 곳은 황궁전체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꺼린다는 케티에론 황녀의 거처 앞이었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을 진정시켜본 장영실은 노크를 하기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끼이익! 그의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얼마전 케티에론 황녀와 함께 있던 시녀임을 알수 있었다. 장영실을 발견한 시녀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고, 잠시 뒤를 돌아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장영실 남작님." "뭐 감사까지야... 신경쓸거 없네. 그나저나 황녀님께서는 안에 계신가?" "어제도 밤새 잠을 못이루시다가 지금에야 막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뵙지 못할 듯 합니다만..."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장영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에든 상자를 시녀에게 전해주며 입을 열었다. "흠...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 뵙도록 하지. 이것이나 황녀님께 전해 주겠나?" 상자를 얼떨결에 받아든 시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될까요?" "별것 아닐세. 예전에 내가 망쳐 놓았다고 우기시던 드레스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할겸 마련한 것이니까." 그의 말을 듣고있던 시녀는 그것을 다시 건네주었다. "이것은 남작님께서 직접 전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한걸요. 아무래도 사과의 의미인 만큼 직접 전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말도 틀린바가 없었기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허헛. 내가 그런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그럼 내가 직접 만나뵙고서 전해주도록 하겟네." "저는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고마웠네." 어수룩한 장영실을 보며 미소 지은 시녀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케티에론 황녀의 거처앞에 혼자남게 된 장영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방문 앞에 자리를 털고 앉았다. "다시 시간을 내서 오는 것도 힘들테니 기다리는 수 밖에..." 결국 기다리는 방법을 택한 장영실은 들고있던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품에 가지고 있던 작은 책을 꺼내들며 조금씩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는데, 책의 제목은 '아름다운 드레스 100선' 이었다. 흰색의 보드라운 면으로 이루어졌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침구들이 넓은 침대위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이불을 목까지 덮은 케티에론 황녀가 잠에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악몽을 꾸기라도 하는 듯 연신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아..안돼... 나쁜 사람... 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그녀는 반쯤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두운 자신의 방안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꿈을 꿨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다시 베게에 머리를 뉘이며 중얼 거렸다. "벌써 사흘째 같은 꿈이라니... 그 자 때문에... 후우." 누군가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허공을 향해 던지던 케티에론 황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늘 그래왔던 것 처럼 시녀의 이름을 신경질 적으로 불렀다. "제니아! 제니아! 물좀 가져다 줘!"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방문이 열리며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어 테이블 쪽에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로록... 누운 자세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케티에론 황녀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녀의 손에는 시녀가 건네줬을 물잔이 들려있었는데, 베게에 등을 받치며 일어난 케티에론 황녀는 미지근한 물을 목으로 넘겨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팔을 뻗어 빈잔을 다시 시녀에게 넘겨준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그 작자 꿈을 꿨어. 역시나 진흙을 내 얼굴에 뿌리더군... 이제는 화를 낼 기력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심술을 피워도 그 작자는 내 머리위에 있는 것 같은걸. 승산도 없는 일에 화를 내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이기 까지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실내는 조용해 졌다. 보통 때 같으면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줬을 시녀가 오늘 따라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짜증이 치민 케티에론 황녀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말했다. "왜 오늘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거야? 너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니?" 그러나 그녀의 말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흠..흠... 아무래도 제가 그날 황녀님께 너무나 큰 실수를 했었던 것 같군요. 고의 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남성의 목소리에 혼백이 빠지도록 놀란 황녀는 이불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며 급히 몸을 일으켰고, 전뇌등의 스위치를 눌러 방을 밝혔다. 그러자 케티에론 황녀의 눈 앞에는 장영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멀뚱히 물잔을 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 헛것이 보이는건가? 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거에요! 제니아는 어디있죠?!" "아.. 시녀는 황녀님을 재우고 일을 하러 갔습니다. 저는 황녀님을 찾아왔다가 주무신다는 말을 듣고서 일어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녀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고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 모습으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것이죠? 또 이번에는 어떤 수모를 주시려고요." 그녀가 오해를 하는 듯 하자 장영실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황녀님께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 왔습니다. 그 때 워낙 정신이 없으셔서 사과를 제대로 못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때의 일로 아직도 화가풀리지 않았는지 장영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케티에론 황녀는 팔짱을 낀채 그를 아래위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손에서 눈이 멈춘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도끼눈을 하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뭐죠?"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기억해낸 장영슬은 어수룩한 자세로 그것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아... 이것은 예전에 망가진 황녀님의 드레스를 대신하기 위해 가지고 온것입니다." "그럼 이리 줘봐요!" 상자를 빼앗듯이 건네받은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그것을 열어 봤는데, 그 안쪽에는 속지로 잘 덮여있는 검은 색의 드레스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보며 기쁜 마음에 표정 관리를 잘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입을 벌리며 웃고 말았고, 장영실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한시름 놓았다. "그래도 마음에 드시는 듯 하니 다행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던 황녀는 다시 원래의 냉랭한 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흥!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에요. 원래 드레스는 입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황녀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드레스의 원단을 만져 보았는데, 천의 감촉이 조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실크도 아닌것 같고 면은 더더욱 아닌 것 같군요. 이런 원단은 처음 보는데 대체 뭐죠?" 그녀의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직접 만든 원단이라 특별한 이름은 아직 없습니다. 황녀님께 유용할 듯 해서 만들어 보았죠." "제게 유용할 것 같다니 그것은 무슨 말씀이시죠?" "말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이해하기 좋으실것 같군요. 잠시 드레스 상자를 좀 건네주시겠습니까?" 케티에론 황녀는 뜻밖에도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상자를 장영실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장영실은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갑자기 손에 들고있던 물잔을 기울여 남은 물을 드레스 위로 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행동을 본 케티에론 황녀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이죠! 기껏 선물이라고 가지고 오더니 또 나를 놀리는 것인가요!" 그녀의 고함소리에 인상을 잠깐 찌푸렸던 장영실은 상자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소리치시기 전에 내용물 먼저 확인해 보시죠.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황녀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몰아 쉰 케티에론 황녀는 상자를 돌려받아 그것을 내려다 봤는데, 놀랍게도 드레스에 부어진 물이 스며들지 않고서 그대로 맺혀있는 것이었다. 이에 눈썹을 상큼하게 치켜뜬 케티에론 황녀는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어찌된 것이죠? 물이 스며들지 않다니..." "보아하니 케티에론 황녀님께서 극히 깨끗한 것을 좋아하시는 듯 하길래 특수 원단을 직접 제작했습니다. 보다시피 외부에서는 안쪽으로 이물질이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물을 이 묻거나 하더라도 수건으로 닦아내면 쉽게 얼룩을 제거 할 수 있습니다. 또, 내부면은 땀을 흡수하여 밖으로 배출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감촉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구김방지 처리를 해놨기 때문에 마음대로 활동 하시더라도 드레스에 구김이 가지 않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통풍은 기본이겠죠." 장영실의 긴 설명을 들은 황녀는 눈으로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듯이 드레스 위에 맺혀있는 방울들을 침대 밖으로 털어내 보았는데, 그의 설명대로 드레스에 남은 물기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정말 신기하군요. 정말 물이 스며들지 않네..." 처음으로 그녀에게 험한 소리를 듣지않은 장영실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드레스의 천을 만져보며 신기해하던 케티에론 황녀는 이제 드레스의 모양을 보기위해 드레스를 활짝 펼쳐 보았다. -촤락! 그리고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드레스의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장영실에게 물었다. "그런데 원단은 그렇다 치고, 이 드레스는 누가 만든 거죠?" "뭔가 마음에 안드시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실 드레스를 어디에서 그할 수 있는지 몰라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보고 직접 만들어 본것입니다." 눈을 크게뜬 케티에론 황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장영실과 드레스를 번갈아가며 말했다. "네? 그렇다고 이것을 직접 만드셨다는 거에요? 예전 부터 느꼈지만 정말 정상은 아니군요. 나중에 그 책을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가장 뒷 페이지에 출판 년도를 한번 살펴보길 바래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장영실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책을 꺼냈다. 그리곤 재빨리 가장 뒷페이지를 넘겨 읽었다. "듀들란 제국력 1253년? 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그럼 올해는 몇년이죠?" "1312년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장영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갑작스럽게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던 장영실은 턱을 쓸며 그녀가 웃고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장영실의 감각으로 그 이유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했기에 직접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웃으시는것입니까?" "풋! 아이 배아파... 쉽게 말해서 지금 장영실경께서 만들어오신 드레스의 모양은 60년 전의 것이란 말이죠. 이런 것은 아주 나이많은 노인들이나 입는다는 말이에요! 호호홋!" 그제야 케티에론 황녀가 웃는 이유를 알아챈 장영실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보며 씁쓰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종이가 너무 낡았다 했습니다. 그럼 이건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나 드려야 겠군요. 그분께서는 좋아하시겠죠?" 웃느라 정신 못차리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의 말에 호흡을 가다듬어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선물이라고 가지고 오신 것이니 받아 놓도록 하죠. 풋!" 비록 자신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케티에론 황녀가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을 보며 장영실은 나름대로 성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제 사과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그 때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던 케티에론 황녀는 너무나 웃어서 아픈 배를 부여 잡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후우... 좋아요. 장영실 경의 사과를 받아 들이도록 하죠. 대신 다음에도 저를 무시하는 언사를 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참지 않을 거예요!" 인의 적으로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동안 황녀님께 결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노력하지요." 처음으로 장영실의 깍듯한 태도를 보게된 케테에론 황녀는 어쩌면 지금까지 그에 대해 큰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순진하게 웃고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모습을 본 장영실 역시 그녀가 생각만큼 나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2002-11-20] 짜가신선 <대공학자> #202~203 겨울을 가슴에 묻은 여인 바닥에는 란젤론국에서 들여왔다는 자주색의 두터운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벽에는 그저 값이 비쌀 뿐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하고 있는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벽의 주변에 놓여있는 흔하디 흔한 의자 하나도 장인의 손을 거쳤다는 명목으로 수백 폴트에 육박하는 가격이었다. 품위유지라는 미명하에 온갖 사치를 합리화하는 귀족들이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온갖 장신구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돈, 연애, 출세 였다. 붉은 빛이 발하는 루비반지를 끼고있던 한 귀족 여성이 금으로 도금이 된 잔을 들어올리며 대화를 이끌고 있었고, 주변의 귀족 여성들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요즘 황녀님께서 놀랍게 변하셨더군요. 혹시 아까 들어오실 때 모습 보셨나요? 매번 행차하실 때 마다 값비싼 장신구들을 들고 나타나 우리들에게 뽐내시더니 오늘은 정말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내실로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아름다우시더군요. 역시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가..." 맞은 편에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한 귀족 여성 역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저도 요즘 황녀님께서 이상해 지셨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도도하시던 황녀님께서 요즘은 완전 다른 사람처럼 상냥해지셨다는 소문이 황궁에 돌고 있더군요." "그건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죠. 아마도 황녀님이 진흙을 잔뜩 뒤집어 쓰는 사건이 난 이후 부터였으니까요. 뭐 어찌되었건 황녀님의 성격이 변하셨으니 아랫사람들이 편해지겠군요." 화려한 장신구로 머리를 한껏 틀어올린 부인의 이야기였다. -딸랑...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 여성들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다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다. 입구에서는 두꺼운 책을 한권 팔사이에 끼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장영실이 들어서고 있었다. 실내로 들기 전에 신발에 묻은 흙을 바닥에 털어낸 장영실은 눈에 보이는 귀족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귀족 여성들은 다시 화제를 옮겨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황녀님께 매번 무례를 저질렀다는 장영실 남작이 맞죠?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요." 그녀의 옆에 있는 여성이 어떠한 비밀이라도 말을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장영실 남작이 황제폐하와 재상각하를 등에 엎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아도 몇번인가 황녀님께서 그의 작위를 박탈해 달라며 폐하께 간청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어머머! 장영실 남작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란 말인가요?" "부인께서는 요즘 듀들란 제국의 분위기를 잘 모르셨나보군요. 요즘 귀족들 중에서 장영실 남작 만큼 폐하의 인정을 받는 인물도 없다니까요. 심지어는 후작의 작위를 가지신 분도 그의 아래에서 일을 한다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 동안 그녀들의 대화는 장영실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또 다른 주제로 대화의 중심이 옮겨지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일이아니라면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폭신한 카펫을 밟으며 내실로 걸어들어간 장영실은 그곳에서 뜻 밖의 인물을 봐서인지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애초 재상부인으로 부터 함께 차나 한잔 하자는 제의를 받고서 일을 하는 도중 옷을 갈아입고 이렇게 사교장으로 오게되었던 것이었는데, 미리 귀뜸 조차 없었던 케티에론 황녀의 등장을 보고서 또 어떠한 트집이나 잡지 않을지에 대해 약간의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평소와 같은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황녀님, 그리고 재상부인." 인사를 건네고있는 장영실을 바라본 재상부인은 몸을 일으켰고 장영실의 팔을 잡으며 인도했다. "마침 잘 왔군요 장영실 경. 혹시라도 황녀님께서 이자리에 계신다고 해서 불편한 것은 아니겠죠?" "저는 괜찮습니다 재상부인. 오히려 황녀님께서 저 때문에 불편해 하시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군요." 아직까지도 케티에론 황녀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있던 장영실은 그녀가 자신을 그리 좋게보지는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었지만, 장영실을 말을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했다. "저 역시 괜찮답니다 장영실경. 자리에 앉으시죠." 오히려 그녀가 너무 부드럽게 나오자 더욱 이상해진 장영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황녀님. 함께 자리에 앉으시죠 재상부인." 그녀의 태도야 어찌되었건 서있을 수만은 없었던 장영실은 재상부인에게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사교장의 잡일을 맡아서 하는 시녀가 차를 준비해 들어왔고, 재상 부인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돕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차가 준비되자 재상 부인은 손수 각자의 잔에 일정량의 차를 따라주었고, 그 동시에 진한 차의 향기가 그들의 후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차맛이 어떨 지는 모르겠군요." 재상부인의 말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김이 차분히 피어오르고있는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재상부인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시는군요. 제가 이곳에 와서 셀 수 없을 만큼 차를 마셔봤지만, 부인께서 준비해주신 차가 가장 향기롭더군요. 그 향이 너무나 그리워서 이렇게 하던 일을 접고서 달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군요." 이번에는 케티에론 황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숙모님, 장영실 경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에요. 저도 역시 숙모님이 준비해주시는 차가 가장 좋답니다." 그들의 차시간은 이렇게 가벼운 웃음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고, 찻잔을 들고서 그 따뜻함을 느끼던 재상 부인은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의 표정을 살피며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할 지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양해지만 크게 나누자면 두 부류였다. 하나는 바쁜 일상 중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함께 차를 마시는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세사람은 그 양쪽 어느것에도 속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여유롭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가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따각... 먼저 차를 다 마신 재상 부인은 잔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양 편에서 아무런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이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두 남녀를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분 이런 자리를 가지신 것이 처음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사교장에서 두분을 봐도 서로 다른 곳에서 계시던 것 같아서 말이죠." 그녀의 말에 차를 모두 마신 장영실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런 자리는 처음입니다. 사실 사교장에도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닌지라 황녀님을 만나뵐 수 있는 날도 얼마 없었죠." "그러니 이렇게 서먹한 것이군요. 두분 모두 제가 좋아하는 분들인데 서로에 대해 너무 신경을 써드리지 못한것이 죄송스럽네요. 심지어는 황녀님과 장영실 경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하게 돌고 있으니까요." 뻔히 속 내용을 알고 있는 재상부인이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로 부터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꺼내고 있는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그때는 너무나 화가나서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모습을 본 장영실은 재상부인이 그녀와 연관되었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임을 깨달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난 일들은 오히려 제 잘못이 컸었으니 화를 내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황녀님께서 왜 화를 내시는지 잘 모르고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더군요. 제가 살던 곳에서 해오던 것처럼 행동을 하다보니..." 장영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상부인은 문득 눈에 이채를 띄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장영실 경의 고향에 대해서 한번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군요. 대충 재상님께 들은 바로는 조이센 대륙 출신이라고 하셨는데요." "왜 이곳 사람들이 조이센 대륙이라고 부르는 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조선이라는 곳이 제가 온 곳입니다." 조선이라는 말을 들은 재상부인과 케티에론 황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한번 따라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조이센과 조선이라는 말의 차이를 못느끼는 듯 했다. "조이센... 조이센... 서로 다른점이 있나요?" "저도 별 다른 것을 못느끼겠군요. 조이센..." 그녀들의 행동을 보며 발음상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장영실은 자신이 루스티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훗... 아무래도 듀들란어를 쓰시는 분들에게는 발음하기가 힘든 모양이군요. 그럼 그냥 조이센이라고 하죠."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선을 발음 해보려고 노력하던 재상부인은 얼마 안있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재상부인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가늠해봤고,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제 재상님을 만나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재상부인의 말에 차를 마시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화들짝 놀라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버..벌써 가시려고요? 이야기라도 더..." 그녀의 말에 눈웃음을 지은 재상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만 만나뵙고 바로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이곳에서 재상님의 집무실까지는 상당히 멀어서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답니다." "하지만..." 케티에론 황녀는 재상부인이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려고 자리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아직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그녀는 재상 부인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재상부인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럼 황녀님과 장영실 경은 남아서 이야기들 나누도록 하세요." 장영실 역시 케티에론 황녀와 단 둘이 남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 껄끄러워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재상부인을 만류할만한 방법도 없었기에 그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차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인." "별말씀을요.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녀님도 다음에 제가 찾아 뵙도록 하지요." 작별인사를 마친 재상부인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비켜 줘야한다고 생각했는지 금새 내실의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고,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배웅하던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는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상부인이 떠난 자리에는 냉기만 떠돌고 있었다. 부지간에 멀뚱히 남은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서로 무슨 이야기 부터 꺼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케티에론 황녀가 용기를 가졌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그 조이센 대륙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오이랍 대륙 말고도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군요." 케티에런 황녀가 먼저 이야기를 끄내자 의외라는 얼굴을 한 장영실은 이런 불편한 분위기보다는 그런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기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별 특별할 것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비슷한 것이니까요. 어디보자...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 지 모르겠군요. 워낙 말주변이 없는터라..." "음...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나, 풍경... 뭐 그런 것을 이야기 해주시면 된답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워진 그녀의 말투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이라는 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과 같이 드넓은 초원이나 숲은 없지만 수려한 산과 계곡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건물들은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건물들이 모여있죠. 또한 사람들은 주로 화려한 색보다는 생활하기에 편한 단색의 옷을 즐겨입는데, 저도 역시 그러한 버릇 때문에 지금도 단색의 옷을 주로 입습니다. 또, 검소한 백성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알며, 인심 또한 따뜻해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도 지나가는 객에게 식사한끼를 대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영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해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 소박한 건물들, 착한 사람들... 생각만 하더라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겠군요?" 하지만 장영실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순진한 백성들은 부폐한 관료들의 횡포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니까요." "아... 그곳에도 그런 일이 있군요. 이곳 듀들란 제국도 불과 100년 전만해도 그런 일이 많았지만, 황권이 강화되고 계급제도가 이름만 남은 뒤로 부터는 그런일이 거의 사라졌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둘 사이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케티에론 황녀는 이제 궁금한 것들이 하나씩 생기는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장영실 경은 그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셨죠? 그 뛰어난 능력으로 봐서는 당연히 귀족작위를 받으셨을 것 같고, 상당한 지위에 있으셨을 것 같은데..." 신분 이야기가 나오자 장영실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장영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관료이긴 했지만 귀족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 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귀족의 혈통을 타고나야만 가능한 것이었으니까요. 또, 관료직에 있었다 해도 이곳의 남작보다 훨씬 못한 위치에 있었죠. 그곳에서는 저와 같이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회였답니다." 잠시 그의 말을 정리해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죠?" "글을 잘 읽고 잘 쓰는 일이 조선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외의 일들은 사회 통념적으로 부수적인 일쯤으로 치부해 버렸죠.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황녀님께서는 잘 이해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과 듀들란 제국은 사람들의 관념 자체가 다른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이유로 조이센을 떠나오신 것인가요? 그런 박대가 싫어서?" 아직 자신의 일에대해 알지 못하는 케티에론 황녀의 물음에 피식 웃은 장영실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훗.. 아닙니다. 저는 조선으로 부터 파견되어 왔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듀들란 제국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하죠." 지금까지의 좋은 분위기에 밝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장영실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안색이 급변하고 있었다. "네? 그럼 황궁에 계속 머무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인가요?" "아직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제국 개발 사업이 끝나면 저는 듀들란 제국과의 계약이 끝나게 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건 안돼요!"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킨 케티에론 황녀의 행동에 놀란 장영실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고, 사교장의 외실에있던 귀족들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내실의 입구 넘어로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하자 케티에론 황녀는 원래의 성격을 드러내며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보는 것이죠! 남의 일에 신경쓰시지 말고 다른 사람 험담이나 계속하세요!" 그녀의 외침에 움찔거린 귀족들은 다들 내실의 입구로 부터 멀어지며 모습을 숨겼다. 귀족들의 모습이 보이지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케티에론 황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장영실 경은 꼭 조이센으로 돌아가야 하는건가요? 듀들란 제국에 남는다면 얼마든지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을 텐데요." "루스티커님이나 다른 주변 분들께도 그런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저는 꼭 돌아가야 합니다." "왜죠? 그 이유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캐묻는 케티에론 황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의아한 생각을 하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그 보다 황녀님께서 무슨 이유로 제 일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루스티커님께서 저의 마음을 돌리라는 부탁을 황녀님께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투르코스 재상님께서?" 케티에론 황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장영실이 야박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 용기도 나지 않았기에 잠시 흥분해 있던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그..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장영실 경께서 떠나신다면 듀들란 제국은 인재 한분을 잃는 것과 같으니 크게 아쉬웠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장영실 경의 주변에서 장영실 경을 아껴주시고 정을 주신분들이 슬퍼하실 것 같아서요." 잠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영실은 눈앞으로 자신의 주변에 머물며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려 보는 중이었다. "황녀님께서 그런 것 까지 신경써 주신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서 인연을 맺게 된 분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크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조선전체의 앞 날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제 개인적인 감정에 비할 수도 없이 고귀한 일이지요." 잠시 말을 끊은 장영실은 고개를 들어 케티에론 황녀를 응시했고,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기분만 우울해 진다고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인생사에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가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 삼아야겠죠. 후... 아무래도 제가 분위기를 다 망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럼 끝 마쳐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사과의 말을 건네며 몸을 돌리는 장영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그의 등을 향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누군가가 장영실 경을 사모하게 되었다고 말하더라도 지금의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 누군가가 장영실 경 때문에 아무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애절함이 흐르고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옮기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장영실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조선의 공학자가 되면서부터 조선과 공학에 제 모든 것을 바쳤으니, 애정에 할애할 여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분이 있으시다면 그 분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찌감치 마음을 접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전해드리고 싶군요. 그럼 이만..." 은연중에 단호함이 실려있는 그의 말을 들은 케티에론 황녀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기대 누웠고, 장영실은 성큼걸음으로 사교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처음 부터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케티에론 황녀의 눈에는 천장의 벽지에 그려져있는 어지러운 문양이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갈 수록 그 벽지의 문양들은 어지럽게 춤을 추며 뿌옇게 변해가더니 결국은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슥슥... 슥슥... 매끄럽게 가공된 질 좋은 종이 위에서 흑연이 움직이며 기묘한 마찰음을 내고있었다. 흑연을 쥔 손은 거침없이 종이 위를 누볐으며,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움직이던 흑연은 어느순간 점을 찍으며 멈추었다. -탈칵... 책상 한쪽으로 들고있던 흑연을 던져놓은 장영실은 흑연가루가 잔뜩 묻은 손을 털지도 않은채 거의 완성된 도면 위를 짚었다. 위에서 자세히 내려다 본 도면은 일치의 착오도 없이 완벽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뿌듯하거나, 만족의 기분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찝찝한 기분이 케티에론 황녀와 헤어지고난 후 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마땅히 짚히는 것이없었기에 더욱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 때,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루스티커가 들이닥쳤다. 그는 몹시 기분이 나빠보였는데, 이마의 주름이 미미하게 떨릴 정도였다. "자네! 대체 케티에론 황녀에게 무슨 소리를 했기에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놨단 말인가!" 들어오자마자 버럭 화부터 내는 루스티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황녀님과는 그저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헌데, 황녀님이 어떻게 되시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잔말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보게." 손짓을 하며 장영실을 부른 루스티커는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고, 장영실은 대충 책상위를 정리한 후에 루스티커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대충 자리잡고 앉은 장영실은 아직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차근차근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는군요." 소파 탁자에 놓여있는 물로 목을 축인 루스티커가 말했다. "내 단도진입적으로 말하겠네. 케티에론 황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녀를 여자로써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일세!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황녀님을 여자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왜 물으시는 것입니까?" "자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황녀가 지난 반년간 자네에게 정을 품고 있었단 말일세!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온 이후부터 방문을 걸어 잠근채 나오지를 않는다네! 대체 무슨 말을 그녀에게 한 것인가!" "황녀님께서 제게 정을 품으셨단 말씀이십니까?" 되묻고있는 장영실은 루스티커의 말이 믿기지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루스티커의 얼굴로 봐서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웃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다만... 일이 끝나는 대로 조선으로 돌아 가겠노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를 사모하는 사람이 말리더라도 가야겠냐고 물으시기에 그렇다고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고 있는 장영실을 보며 어지러움을 느낀 루스티커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사모한다는 사람이 바로 케티에론 황녀란 말일세. 헌데,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황녀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그제서야 일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를 깨달은 장영실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황녀님께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것이로군요. 나 이것 참..." 고개를 저으며 사교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장영실을 향해 루스티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녕 케티에론 황녀의 마음을 받아 들이지 않겠다는 말인가? 이런 말을 하는것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일국의 황녀란 말일세. 만약 그녀와 혼인이라도 하는 날이면 자네는 그날로 부마가 되는 것인데 그런 기회를 버린다는 말인가! 남들이라면 평생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는 행운이라는 말일세!" 루스티커의 말을 듣고있던장영실은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입니다. 게다가 케티에론 황녀님이 제게 정을 주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녀가 일국의 황녀이기 때문에 저는 더더욱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나라의 부마가 된다면 저는 결국 듀들란 제국에 발이 묶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결국은 황녀의 마음을 받아 들일수는 없다는 말이군..." "죄송합니다 루스티커님..." 루스티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케티에론 황녀가 자네에게 정을 준 것은 운이 나빴던 것 같군... 나는 황녀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써 그녀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랬는데, 결국은 이렇게 상처를 받게 되는군..." "면목 없습니다." "허헛! 아닐세. 그저 두 사람이 인연이 아니었던 것 뿐이지 자네가 잘못했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일세. 그저 앞으로 황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이 걱정이구먼."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끝마친 루스티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찾아온 것을 이해하게나, 그녀는 내 친 손녀나 마찬가지인 아이라서 그렇다네. 작업하는 것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그럼 또 보세." 어깨에 힘이 없어보이는 루스티커는 천천히 집무실 밖으로 걸어나갔고, 장영실은 그의 뒤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씁쓸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가지에 걸려있는 나뭇잎 하나가 시린 겨울 바람 사이에서 외롭게 떨고 있었다.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사람들은 요즘들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이 벨링에 있는 동안에 공학원은 가동을 멈춘 상태였고, 그 사이 엄청난 양의 주문서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연유로 공학원의 모든 설비들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공학원에 고용된 사람들은 보통의 두배나 되는 야간 수당을 받으며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낯처럼 훤히 불을 밝히고있는 공학원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고, 공학원으로 부터 나오는 불빛이 그의 머리에 반사되고 있는 것으로보아 머리숫도 많은 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바삐 눈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듯 불만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이렇게 모여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그 크라이츠라는 여자는 코빼기도 안보이는거지? 꼭 직접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이보게 자네는 여기서 누구를 찾고 있는건가?" 일도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귀찮게 말을 걸어오자 공학원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짜증을 냈다. "상관 마슈! 나는 지금 아주 중요한 임무를 띄고 이곳에 왔으니까." 하지만 말을 시키던 자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그 중요한 임무가 대체 뭐길래 그러나? 자네 공학원 찾아온것 아닌가?"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하자 화가치민 사내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방해꾼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글쎄 당신은 가던 길이나 가라니까 그러네!...요." 말끝을 살짝 바꾸는 재치로 전체적인 말을 경어로 바꾼 사내는 자신의 눈앞의 인물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최대한 반가운 척을 하기 위해 상대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하하핫! 누구신가 했더니 켈트님이셨군요?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는 눈앞의 사내를 아래위로 훑어본 켈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네는 누군가? 내가 늙어서 그런지 자네를 알고 지낸 기억은 없는데..." "하핫! 저는 코르핀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기억에 없으시겠죠. 저는 그저 먼 발치에서 켈트님을 봤을 뿐인걸요. 지금은 저희 남작님의 심부름으로 크라이츠님을 만나뵈러 온것입니다." "남작이라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묻고 있는 켈트의 눈은 적의를 담고 있었는데, 이번 뮤스의 일로 귀족들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바꾼 켈트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래 이곳에는 또 무슨 일로 왔나? 이번에는 뮤스하나로 모자라서 공학원 기둥까지 뽑아 내려는 겐가?!" 돌연 켈트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두려움을 느낀 코르핀은 침을 꼴깍 삼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저는 기둥은 커녕 문짝 하나도 뜯어낼 힘이 없습니다만..." "나참... 지금 그것을 농담이락고 하는 겐가? 뮤스 녀석 보다 더 한 농담실력을 가지고 있군." 말을 하는 모양새나 그의 행동으로 봐서 그리 똑똑한 자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켈트는 별 위험이 되지는 않겠다 싶었기에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있었다. "크라이츠 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켈트님." "그럼 나를 따라오게나." 코르핀을 향해 손가락을 몇번 까딱거린 켈트는 그가 따라오던지 말든지 신경도 안쓰는 듯 앞만 보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벌쿤의 책상에는 수십권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는 동시에 세, 네권의 책을 펴놓고서 뭔가를 하고있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글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진 듯 했다. 책을 들여다보며 펜끝을 입으로 물은 벌쿤은 하는 일이 막혔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어쩐지 동력기의 성능에 비해서 힘이 형편 없다 했더니, 기어의 배치가 잘못된 것이었네. 아무튼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선 각속도비를 계산해보면..." 머리를 두들기며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던 벌쿤은 다시 입에서 펜을 빼내며 빈종이에 뭔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철컥...장...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학원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문은 자동문으로 제작했는데, 무거운 재료를 들고 다니다 보면 손이 모자라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동문으로 교체한 것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펜을 놀리던 손을 잠시 멈춘 벌쿤은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곳에는 켈트와 함께 처음 보는 코르핀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고, 그들을 발견한 벌쿤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 벌쿤 오늘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나저나 안에 크라이츠님 계시냐?" 하지만 벌쿤은 켈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그의 뒤에 있는 코르핀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벌쿤의 인사에 멀뚱한 표정을 지은 켈트는 뒤를 따르고 있던 코르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야... 벌쿤 너는 이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냐?" "하핫! 당연하죠. 딱 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겠는데요 뭐. 그런데 이분은 어느 드워프 부족에서 오신 분이시죠? 역시 멜산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벌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돌연 코르핀의 옆으로 다가가 눈대중으로 키를 맞춰 보았고, 그의 팔을 잡아 당겨 팔의 길이도 맞춰 보았다. 그리고 허리의 높이를 재어보더니 코르핀을 끌어 안으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내가 드워프족을 못 알아 봤구먼, 동족이여! 드워프 냄새가 나지 않아서 자네를 몰라 봤구먼. 향수라도 뿌리고 다니는 겐가? 하긴 인간 세상에서 살다보면 인간의 습관을 닮아가긴 하는 것이니까." 순간에 드워프라는 오해를 받은 코르핀은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인간입니다! 제가 키가 작은데 보테준 것 있습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코르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인간이라 외쳤지만, 벌쿤과 켈트는 여전히 미심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에이... 아무리 봐도 켈트 아저씨와 다른 것이 없는데요. 농담은 그만하시죠." "인간의 밑에서 일하는 수치스러운 기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족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과의 대화에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답답해진 코르핀은 자신의 턱을 내밀었다. "자 보십시오. 턱에 수염이 난 자국이 있나! 저는 수염이 나지 않는 체질이라서 이렇게 수염도 없을 뿐더러 면도를 한 자국도 없습니다. 드워프라면 당연히 수염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을 듣고있던 벌쿤은 켈트의 얼굴과 비교를 해보았다. "켈트 아저씨도 수염이 없긴 하지만, 면도 자국은 있군요. 그럼 아저씨도 인간이란 말이에요?" 켈트도 수염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듯 했지만, 드워프와 닮은꼴인 그의 모습에 대한 놀라움은 여전했다. "흠... 수염이 없는 것 보니 드워프는 확실히 아닌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우리 드워프 족과 닮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탄성을 지르며 코르핀의 얼굴을 살피고 있을 때, 안쪽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톤이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바쁜 시간에 이렇게 어수선한 것이죠?"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이들은 그것이 크라이츠의 목소리임을 알고서 그녀가 나오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코르핀은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크라이츠님. 저는 코르핀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은 크라이츠는 처음 보는 코르핀의 얼굴을 뜯어 보더니 켈트를 향해 말을 던졌다. "켈트씨. 새로운 드워프가 올 것이라는 소리는 못들은 것 같은데요? 뭐 일손이 모자라니 오히려 잘된 일이긴 하지만요." 결국 크라이츠에게 까지 드워프 취급을 받은 코르핀은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듯 했지만, 자신은 그저 심부름을 온 사람일 뿐이었기에 참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속으로나마 욕을 한바가지 해댄 코르핀은 자신의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는 듀들란 제국의 장영실 남작님의 심부름으로 찾아온 '사람'입니다. 이 편지를 크라이츠님께 전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죠. 훗날 뮤스원장님께서 돌아오시면 보여주라는 말과 함께요" 코르핀은 은연중에 자신이 드워프가 아닌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장영실이라는 이름을들은 켈트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장영실이라는 자가 뮤스가 지금껏 찾고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르핀으로 부터 편지를 건네받고있는 크라이츠를 향해 켈트가 입을 열었다. "장영실이라면 뮤스가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가 듀들란 제국의 남작이라니..." 켈트의 표정과는 다르게 크라이츠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결국은 그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군요." "크라이츠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켈트의 물음에 가볍게 웃은 크라이츠는 편지를 품속에 넣으며 대답했다. "듀들란 제국에서 제국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부터 대충 감을 잡고 있었죠. 이 대륙 내에서는 전뇌거를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요." 말을 잠시 멈추며 코르핀에게 고개를 돌린 크라이츠는 품에서 작은 금조각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다. "이 편지는 나중에 뮤스에게 전해주도록 하겠어요. 먼 듀들란 제국에서 이곳 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으니, 이것으로 작게나마 성의 표시를 하고 싶군요. 가실때 어디서 요기라도 하세요." 그것을 보며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 코르핀은 전혀 거절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것을 날렵하게 받아 챙겼다.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하지만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군요. 드워프 분들의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끝까지 코르핀을 드워프라 여긴 크라이츠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고, 벌쿤과 켈트는 울그락 불그락 해진 코르핀의 얼굴을 훔쳐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크라이츠는 폼에 넣어 두었던 장영실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왼손을 올리며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세컨드사이트!"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바닥 위로, 일렁이는 무형의 창이 하나 열렸다. 그 창의 안으로는 기이한 형태의 글자들이 나타나있었는데, 바로 편지에 적힌 내용들이 창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었다. 크라이츠는 편지의 내용을 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것이 꼬불꼬불한 그림이 그 조이센이라는 곳의 글자인가?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군..." 체념하는 목소리와 함께 마나를 거두어 들인 크라이츠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금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용언 마법을 발현했다. "리딩마인드!" 그러자 이번에는 푸른색이 감도는 빛이 그녀의 손을 감싸기 시작했다. 바로 편지를 쓴 당사자의 생각이 그대로 크라이츠의 뇌리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한 동안 눈을 감고서 장영실이 편지를 통해 뮤스에게 전하려 했던 내용들을 알아가던 크라이츠는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문자에 고유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군. 생각보다 훨씬 원시적인 언어의 형태인걸? 어쨌건 장영실이라는 자가 5년간은 듀들란 제국에서 발을 빼지는 못한다고 하니 꽤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제국 개발 계획을 통해 뮤스의 경쟁심을 부축일 생각인 거야. 그것도 뮤스의 능력을 한층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 호홋! 오랜만에 꽤나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는걸?" 크라이츠는 어떤 상상을 하는지 사춘기의 소녀마냥 설레이는 미소를 지었고, 잠시 후 장영실의 편지는 그녀의 금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몇년 후 주인의 손에 들어갈 그날 까지... 짜가신선 <대공학자> #204 뮤스의 등장. 도이첸 제국 남부의 국경부근. 여름의 더위로 좁다랗게 나있는 맨흙땅은 아지랑이를 숨결마냥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를 뛰며 먹이를 구하던 들쥐들은 서둘러 그늘을 찾아 초원을 향해 달음질 쳤다. -부르르릉... 드넓은 초원 사이로 좁다랗게 나있는 길을 따라 전뇌거 한대가 달리는 중이었다. 이 전뇌거는 주인의 필요에 맞게 개조 된 듯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부분은 모두 터놓은 모습이었고, 그곳에는 짐이 한 가득 쌓여있었다. 운전석에는 살집이 두둑히 잡힌 중년인이 운전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어린 아들을 향해 신바람이 난 듯 떠들고 있었다. "하하핫! 이 번에 이 물건들만 도이첸 제국으로 가지고 가면 큰 돈을 벌 수가 있단다. 그곳에서는 스윈국의 비단이 비싼 가격으로 팔리거든. 나중에 돌아갈 때 네 엄마에게 줄 주방용품들과 네 신발이나 사가지고 가자꾸나. 물론 돌아가기 전에 네 엄마 몰래 '그것'도 구경하고 말이야." "와! 올해는 정말 볼 수 있는 거죠? 작년에는 너무멀다고 해서 엄마가 못가게 했었는데..." "하핫! 네가 작년에 하도 울어대길래 올해는 너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냐? 대신 네 엄마 한테는 절대 말하기 없기다!" "당연하죠!" 아버지의 말에 한껏 들뜬 얼굴로 힘차게 대답한 소년은 창에 매달려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년은 먼 발치에서 무엇인가를 발견 한 듯 아버지의 옷자락을 끌어 당기며 불렀다. "아빠! 저기 길 앞에 누가 있어요! 우리한테 손을 흔드는 것 같은데요?" "응? 이런 외딴 곳에 누가 있단 말이냐?" 아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안력을 돋구어 본 중년인은 길 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도둑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던 중년인은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본척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전뇌거의 패달을 밝고 있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로페드로, 훗날 네가 어른이 된다면 언제나 사람을 조심해야 한단다. 야수나 마물들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나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대문에 대비를 할 수 있지만, 사람은 모습만으로 그것을 분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지. 언제 너를 속이고 네게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이란다." 비록 조리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세상사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쳐준 중년인은 자신의 말에 대한 시범이라도 보이듯,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중년인의 아들은 창밖으로 목을 빼 점차 멀어져가는 청년을 돌아보았고 이내 고개를 들여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먼저 남을 믿어야 좋은 세상이 된다면서요." "그..그건 말이지...음..." 순간적으로 할말이 없어진 중년인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들을 내려다 보곤 잠시 갈등 하더니 결국에는 전뇌거의 멈춤패달을 밟으며 말했다. "로페드로, 물론 선생님 말씀이 맞단다. 다만 이 아빠의 이야기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이지. 흠... 그 사람한테 손이나 흔들어 주렴. 조금 멀긴하지만 타고 싶으면 뛰어오겠지." 아버지의 말에 밝은 미소를 지은 소년은 창밖으로 몸을 모두 빼내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청년 역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봤는지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뛰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중년인의 전뇌거 까지 뛰어온 청년은 전뇌거의 창가로 다가와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 보기 시작했는데, 어깨 아래까지 길어있는 그의 검은 머리는 지금이 여름인 만큼 더워 보였고, 여행을 한지 오래된 듯 검은색의 옷에는 뿌연먼지가 잔뜩 내려 앉아있었다. 여러모로 보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여행자의 차림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에 안도한 중년인은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길버트라고 하네. 지금 우리는 도이첸 제국의 루이센으로 가는 길이지. 방향이 맞을지 모르겠군." 먼저 인사를 해오는 중년인과 그 옆에 앉아있는 소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은 청년은 중년인의 손을 마주잡으며 대답했다. "하핫! 잘되었군요. 저도 마침 도이첸 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이름은 뮤스라고 하죠." 난생 처음 보는 청년의 이름을 들은 길버트는 그의 이름이 귀에 익다고 느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흠.. 뮤스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혹시 예전에 어디선가 날 만난 기억이 있나?" 하지만 그의 고개는 서슴없이 가로저어졌다. "하핫 제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군요." "그런데 왜이렇게 귀에 익는지 모르겠군."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는지 생각을 해보던 길버트는 도무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에잉... 모르겠어. 그나저나 지금 보다시피 앞쪽에는 자리가 없구먼, 자리라곤 짐을 실은 화물칸 밖에 없는데 괜찮다면 타게나." "태워 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자리를 투정 할 수는 없죠. 그럼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감사의 인사를 한 뮤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전뇌거의 짐칸에 올라탔는데, 의외로 푹신했기에 만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뮤스, 그는 3년 동안의 추방기간을 끝마치고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도 보름정도나 더 가야할 만큼 멀리떨어진 곳인데다가 걸어서 국경을 넘어 오느라 피로도 많이 쌓였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가벼웠고, 운좋게 전뇌거까지 얻어 탔으니 더 이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푹신한 짐더미 위에 모처럼 만에 편안하게 몸을 뉘인 뮤스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깊은 주름을 가지고 있던 그라프의 얼굴이었다. -'허헛! 왜 굳이 이 늙은이까지 데리고 가려고 하는가. 자네에게 이미 말했다 시피 나는 세상을 등진 사람이고, 다시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봐야 세상사람들은 나를 비웃을 것일세. 나는 존경받는 사람으로써 세상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구먼... 게다가 지난 3년간 자네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것을 가지고 가버렸네. 나는 자네의 지식을 별로 얻지 못했는데 말일세 허헛! 그래서 느낀 것인데, 나는 더 이상 자네와 함께 있어 봤자 괜한 열등감에만 사로 잡힐 것 같더구먼. 원래 사람은 늙으면 심술이 고약해 지는 법이니까... 그럼 슬퍼지기 전에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지. 자네와의 함께 할 수 있었던 지난 날들을 주신께 감사하겠네.' 벌써 그와 헤어진지 한 달 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고였는데, 3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준 그라프를 진정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뇌거는 다시 흔들리며 도이첸 제국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뮤스는 여전히 달리는 전뇌거의 짐더미 위에 앉아있다. 가볍게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대지를 붉게 만들고 있는 노을을 향하고 있었는데, 길버트의 도움으로 하루 이상의 여정이 줄어 들었다고 생각했기에 노을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여유까지 부리고있는 것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뮤스는 전뇌거가 달리고 있는 길을 따라 멀리 떨어진 곳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는 수 많은 작은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빛들의 수를 보아 중급이상의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뮤스는 조금만더 기다리면 오랜만에 도시의 거리를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된 모습이었다. -덜컹! 덜컹! 뮤스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길을 잘 가고 있던 전뇌거가 멈추어 서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뮤스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길버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운전석에서 내려 전뇌거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뇌거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멈춰선 전뇌거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땀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뮤스는 짐더미에서 뛰어 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힘겹게 전뇌거의 아랫쪽을 내려다 보다말고 몸을 일으킨 길버트는 좋지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무슨 일인지 전뇌거가 갑자기 서버렸네.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것 같구먼... 아직 루이센의 중심지 까지는 20켈리도 더 남았는데 말일세." "그럼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이 전뇌거는 무슨 기종이죠?" 길버트는 뮤스의 제안에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살펴 본다고 해서 더 나빠 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제작년에 생산된 '라니아'라는 기종인데, 첫번째 기종인 라이노를 상인들의 기호에 맞게 개량한 것이지. 어차피 전뇌거가 고장 난 것이라면 이곳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해서 루이센의 공학원으로 연락을 하는 방법 밖에는 없으니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네." 전뇌거의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뮤스는 루이센의 공학원이라는 말에 몸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지금 분명 루이센이라는 곳에도 공학원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물론 루이센에도 공학원이 있다네." 뮤스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길버트는 그가 오랜 여행 때문에 세상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고 있다고 단정지었으며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기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네가 여행을 오랫동안 해서 잘 모르나 본데, 공학원은 이제 도이첸 제국의 웬만한 도시라면 하나씩은 꼭 있다네. 라이델베르크에있는 공학원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전뇌거를 포함한 각종 제품들을 판매하거나 수리를 해주기도 하고, 본원에서 필요한 부속품들을 생산한다고 하더군." 길버트의 이야기를 듣던 뮤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공학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뮤스는 멈춰서버린 전뇌거를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전뇌거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 전뇌거 앞부분의 기관실의 뚜껑을 열었는데, 해가 지고 있는 중이었기에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뮤스는 가방에서 휴대전뇌등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전뇌거의 내부가 밝아아지자 뮤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것 저것을 만져보기 시작했다. 길버트의 말대로 기관실의 모양은 자신이 설계를 했던 라이노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기에 한눈에 고장난 곳을 알아 볼 수 있었던 뮤스는 가방에서 몇 가지의 기구를 꺼내들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있던 길버트가 다가와 함께 전뇌거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전뇌거는 빠르고 편리해서 좋은데 고장이 나면 혼자 힘으로 고칠 수 없는게 가장 큰 문제란 말이야." 투덜거리고있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은 뮤스는 작업용 장갑을 꼈고, 고장난 전뇌거를 고치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연장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전뇌거는 마나구에서 나오는 전뇌의 힘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전뇌의 방출량으로 전뇌거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랍니다. 그렇지만 동력기가 수용가능한 한계치 이상의 전뇌력이 흐르게된다면 동력기가 망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전뇌조절장치가 달려있죠. 지금 길버트씨의 전뇌거는 그 전뇌조절장치가 고장난 것입니다. 아주 예민한 부분인데 먼지가 너무 많이 들어갔군요. 마침 제가 여분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교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뇌거를 수리하는 동시에 설명을 겸하고있는 뮤스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인 길버트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건 자네가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허전한 손을 달래기 위해 팔짱을 낀 길버트는 잠자코 뮤스가 전뇌거를 고치는 모습을 보고있었다. -찌지직! 잠시 후, 전뇌거의 기관실로 부터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나면서 뮤스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검은 기름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으며 이마의 땀을 닦은 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길버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전뇌조절장치를 교체 했으니 문제 없이 작동 하겠지만, 앞으로 내부는 청결하게 유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죠." "그래? 해보도록 하지." 짧게 대답한 길버트는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전뇌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전진패달을 살며시 밟아 보니, 그의 전뇌거는 언제 고장이 났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신이 난 길버트는 뮤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핫! 정말 마법처럼 고쳐졌군. 어서 타게나!" 제대로 고쳐졌다는 것을 확인한 뮤스가 연장들을 챙겨 넣으며 짐칸에 올라타자 길버트가 창밖으로 목을 빼며 외쳤다. "이쪽으로 내려와서 앉게나. 아들 녀석이 잠들었으니, 안고 타면 될거야." 뮤스는 짐칸도 상관 없었기에 사양하려 했지만, 서두르라는 손짓을 보자 그의 배려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뮤스가 자신의 아들을 안고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길버트는 전진패달을 밟으며 전뇌거를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전뇌거를 몰고있는 길버트는 나이답지 않게 들뜬 표정이었는데, 고장난 전뇌거를 뚝딱 고친 뮤스가 몹시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자네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이번에 공학원에서 사람들을 뽑는 다던데 거기 한번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요즘 아무런 능력도 없이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젊은이들도 많은데, 자네정도의 능력이면 될지도 모르지 않나?" "풋! 저 보고 공학원에 지원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길버트의 말을 들은 뮤스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자 뮤스의 신분을 모르는 길버트는 그의 반응에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닐세. 만약 공학원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엄청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렇게 된다면 지금 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정처없어 떠돌아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자신을 위해서 말해주는 길버트에게는 미안했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뮤스는 창문쪽으로 얼굴을 숨기며 화제를 돌렸다. "흠... 말씀은 고맙지만 별다른 관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공학원에서는 언제부터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죠?" "어디보자... 내가 이 라니아를 구입하기 바로 한해 전이었으니, 3년 전 겨울 쯤이었군. 그 때부터 1년에 두 번씩 인재들을 뽑고 있는데, 매년 여름과 겨울이 되면 수 많은 젊은이들이 각 지역의 공학원으로 찾아가 면접과 시험을 보거나, 특별모집을 노린다네. 하지만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아도 정작 공학원에 들어가는 수는 극히 적어서 100명 정도가 지원을 한다고 해도 겨우 1명 정도 밖에 시험에 통과를 하지 못하지. 그만큼 어려운 일일세."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본 뮤스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고, 특별모집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느끼기도 했기에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며 물었다. "시험은 대충 이해가 가는데 방금 말씀하셨던 특별모집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쯔쯧... 자네는 너무 세상 소식에 어둡구먼. 도이첸 제국의 명물을 모르다니 말이야. 공학원의 특별모집이라는 것은 바로 전뇌거 경주를 말하는 것일세."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은 뮤스가 되물었다. "전뇌거 경주라니요? 자세하게 좀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자네 정말 처음 들어보는 것 같군. 전뇌거 경주는 말 그대로 전뇌거를 타고서 시합을 하는 것일세. 라이델베르크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기존의 전뇌거를 가지고 경주를 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출전자 마다 팀을 이루어 시합에서 사용할 전뇌거를 개조한다네. 그리고 그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팀원들 모두에게는 공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설명이 길어지자 입안이 말라왔던 길버트는 운전대 옆에 꽂혀있던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전뇌거 경주라는 것이 워낙 특이 한데다가 공학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관심 때문에 첫번째 시합부터 굉장한 인파가 몰려들었고, 지금은 그 매력에 푹 빠져서 해 마다 경주 기간이 되면 일을 접어놓고 경주가 벌어지는 도시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많다네. 하핫! 사실 이번에 아들 녀석과 루이센으로 가는 이유도 장사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 전뇌거 경주를 구경하기 위해서라네." 한참동안 길버트의 설명을 듣던 뮤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는데, 축제에서 벌어진 학교간의 조그마한 시합이 확대되어 제국 전체가 들썩거리는 큰 대회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느낀 것인데, 길버트씨는 공학원의 일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시고 계시는군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린 길버트는 뮤스의 어깨에 기댄채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뇌거를 처음 본 우리 아들 녀석이 커서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다고하길래 이렇게 장사를 다닐 때 마다 공학원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귀담아 듣는다네. 하핫! 이 녀석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지." 길버트의 말에 가볍게 미소지은 뮤스는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좋은 아버지가 계시니 꼭 공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뮤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길버트는 어느새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을 태운 전뇌거도 뿌연 먼지만을 자리에 남기며 빠른 속도로 루이센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2002-11-20] 짜가신선 <대공학자> #205 인구 10만 정도의 중소도시인 루이센은 거대한 겔브 호수를 둘러싼 도시였다. 비록 습하기는 했지만 호수의 경관은 그런 것쯤은 금방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수려했는데, 노을이 질때면 호수의 색깔이 눈부신 금빛으로 변하기에 겔브 호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낮이면 작렬하는 태양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분볐고, 밤이 되면 바람을 쐬거나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사람들로 분볐다. 게다가 올해는 1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공학원 주최의 전뇌거 경주가 벌어지는 도시였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겔브 호숫가를 서성이는 듯했다. 겔브 호숫가로 마차 두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도로가 나있었는데, 그 곳을 길버트의 전뇌거가 상쾌한 호숫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은 뮤스는 루이센의 모습을 감상하기 여념 없었고, 길버트는 오늘 묵어갈 숙소를 잡기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중이었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겔브 호수를 구경하고 있던 뮤스는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야경에 도취된 듯 했다. "와... 정말 아름다운 도시군요. 얼마만에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는지 모르겠네요." 여전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숙소를 찾고 있던 길버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을 한지 꽤나 오래 된 듯 한데, 얼마동안이나 떠돌아 다닌건가?" "이번 달로 3년이 조금 넘은 것 같군요. 훗! 정말 정신 없이 떠돌아 다녔죠." "그럼 집이나 가족들은 없는 것인가? 3년 씩이나 여행을 다닌것을 보면 아무래도 가족들은 없는 것 같은데..." 뮤스는 길버트에게 자신이 추방자 신세였다는 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추방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실을 밝혀봤자 불안감만 생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라이델베르크에 저희 누님과 아저씨들이 함께 살고 있죠. 그래서 라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랍니다." 라이델베르크라는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지은 길버트는 주변을 살피다 말고 뮤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핫! 그랬었군. 라이델베르크는 숙박비가 비싸다고 하던데, 먼 훗날에 우리 아들 녀석이 공학원에 들어가게 된다면 좀 신세를 지게 하면 안될까? 뭐 평생 맡아 달라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말일세." 그 때까지 이 세계에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선듯 약속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대답을 잠시 꺼렸다. "글쎄요. 저희가 그 때까지 라이델베르크에서 살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흠... 하긴 10년이나 훗날의 이야기니까."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한 길버트는 계속해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 쯤 루이센 시내를 돌아다녔을 무렵 전뇌거는 길의 한모퉁이에 세워졌고 길버트는 전뇌거의 시동을 끄지도 않은 채 길의 옆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로 뛰어들어갔는데, 이제는 뮤스에 대한 믿음이 제법 생것 같았다. 잠시 후, 길버트는 실망감이 가득찬 표정을 지으며 건물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번 왔을 때 묵었던 곳인데, 오늘은 남은 방이 없다고 하는군. 가격도 싸고 방도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그럼 다른 곳을 한번 알아 보도록 하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전뇌거에 올라탄 길버트는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다시 전뇌거를 몰아 나갔다. 운전석에 앉아 창밖으로 발을 걸친 길버트는 이제 지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다섯군대를 돌아 다녀봐도 모든 곳이 만원이었기에 그는 방을 잡을 수 없었고, 결국은 이렇게 겔브 호수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이 피곤하게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길버트는 나직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오늘 숙소를 잡지 못하면 전뇌거 경주가 끝나는 날까지 숙소를 잡을 수 없을 텐데... 나야 괜찮지만 아들 녀석이 걱정이군." 그의 말을 들으며 함께 숙소를 찾고 있던 뮤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곧 찾을 수 있겠죠." "세상을 그렇게 마음 먹은대로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네... 흠..." 그들이 타고 있는 전뇌거는 화려한 조명으로 외벽을 치장하고있는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곳에 시선을 멈춘 뮤스는 궁금증을 느끼며 길버트를 향해 물었다. "이 건물들은 뭔데 저렇게 휘황찬란한 것이죠? 앞에 고급 전뇌거들도 많이 세워져 있고..." 뮤스의 시선이 닿은 곳을 함께 바라보던 길버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헛! 세상의 잘난사람들이 묵어가는 고급 호텔 건물이라네. 우리같은 사람이 한달을 꼬빡 모아야 저런 곳의 하루 숙박비를 감당 할 수 있을 걸? 게다가 팁이나 식사비까지 합하면 정말 우리같은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가격이지. 괜히 딴 생각 말고 우리가 묵을 곳이나 찾아 보자고." "그래 봤자 사람들이 묵어가는 곳이겠죠." 길버트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가락으로 그 중 가장 화려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버트씨 저쪽 건물로 들어가 주세요. 저곳이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길버트는 농담쯤으로 치부하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풋! 젊은 친구가 장난도 심하군. 자네가 말하는 곳은 여기에있는 호텔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비싼 곳이라네. 도이첸 제국의 상가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호바인 가문에서 직영하는 호텔이거든." 길버트의 입에서 호바인 가문이라는 말이나오자 뮤스는 또 한번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어디를 가든지 자신과 관계된 것들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후훗. 일단은 제 말대로 들어가 주세요. 뒷 일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요." "엥? 아무래도 자네가 뭔가를 잘못 먹은 것 같군. 아니면 여행기간이 너무 길어서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말이야." "하핫!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상관 없지만 사랑스러운 아드님을 길거리에서 재우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그..그거야..." 정곡을 찔리자 할 말이 없어진 길버트는 뮤스가 가리킨 호텔로 운전대를 돌렸고, 전뇌거는 잘 포장이 된 길을 따라 호텔건물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길버트의 전뇌거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붉은 제복의 청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본 전뇌거들 중 가장 허름한 모습의 전뇌거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청년은 결국 길버트의 전뇌거를 물품 납품용 전뇌거라 치부했는지 손을 흔들며 외쳤다. "물품은 뒷쪽 창고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앞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돌리면 바로 창고가 보이실 겁니다!" 전뇌거 안에서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뮤스는 길버트의 아들을 안고서 전뇌거에서 내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묵으러 왔습니다. 전뇌거는 빼내기 좋은데 주차시켜 주셨으면 좋겠군요." 호텔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청년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거지의 먼 친척뻘로 보이는 젊은이가 도이첸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고급호텔에 묵으러 왔다는 것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텔의 이미지도 있었기에 험한 말은 할 수 없었고, 최대한 예우를 해주려 노력했다. "나참... 저는 지금 바쁜 몸이기 때문에 장난칠 시간이 없다네. 그러니 어서 저 전뇌거를 빼줬으면 고맙겟네." 하지만 뮤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제복의 청년과 뮤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게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길버트 였는데, 뮤스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전뇌거에서 내리며 뮤스를 말리기 위해 어깨를 잡아 끌었다. "자네 대체 왜 그러나? 이렇게 억지를 쓴다고 해서 우리를 묵게 해주는 곳이 아니란 말일세.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어서 다른 곳이나 찾아 보자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길버트를 안심시킨 뮤스는 다시 제복의 청년을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아주 웃기는 곳이군요. 우리같이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은 들어 갈 수도 없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기에는 도이첸 제국의 1212년 '만인 평등선언'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작위의 고하와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디서나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헌데, 당신은 단지 우리의 행색을 보고서 차별 대우를 하고있으니 도이첸 제국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 한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지난 3년 동안 뮤스는 그라프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대륙의 전반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이 흐르듯이 술술 흘러나오는 뮤스의 말에 제복의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까 드렸던 부탁대로 전뇌거를 주차하는 것이 당신의 일인 듯 하니 전뇌거를 맡기기로 하죠." 딱 부러지게 말을 마친 뮤스는 복잡한 역사 이야기를 듣고서 아직도 넋이 빠져있는 제복의 청년을 지나쳐 호텔 내부로 걸음을 옮겼고, 길버트 역시 그 청년의 표정을 흘끔 살피며 뮤스의 뒤를 따랐다. 뮤스와 길버트는 내부로 들어가는 즉시 이곳이 왜 최고급 호텔이라 불리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작게는 로비의 구석에 놓여있는 화분에서 부터 크게는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최고급 대리석까지 그 화려함에 눈이 부시는 것이었다. 특히 드워프들에 의해서 건축 재료의 질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된 뮤스의 놀라움은 길버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장식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뮤스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에서 대기 하고 있던 중년의 점원 역시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뮤스 일행을 초라한 행색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서 일하는 녀석들은 뭐하고 있길래 저런 몰골을 하고 있는 녀석들 까지 들여 보내는거야." 잔뜩 불만섞인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던 점원은 뮤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금새 입을 다물며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점원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실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휘파람을 한번 불며 말했다. "휘유... 정말 눈이 부시군요. 당연히 호텔에 왔다면 방을 잡으러 왔겠죠. 크기는 상관 없으니 빈 방이 있습니까?" "음.. 빈방 말씀이십니까?" 뮤스의 말을 들으며 세상 물정을 잘 몰르는 청년이라 생각한 점원은 그들을 내쫓기 위해 방이 없다고 말을 하려했다. 하지만 금방 생각을 바꾸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호텔 숙박비를 듣고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잠시 책자를 하나 꺼내 살펴보던 점원은 여전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지금 남아있는 방은 가장 넓은 방 밖에 없는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하룻밤의 숙박비가 엄청나답니다. 이 방은 아무래도 무리시겠죠?" "그 방은 하룻밤에 얼마나 되죠?" 역시 뮤스가 물어 올것이라 예측을 했던 점원은 눈썹을 힐끔거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룻밤 묵어 가시는데 다른 서비스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방값만 40겔피입니다. 그리고 서비스 비용을 포함한다면 45겔피가량이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친 점원은 뮤스의 놀라는 표정을 기대하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뮤스보다는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길버트가 입에 거품을 물지경이었다. "하룻밤에 45겔피라니! 내가 가지고 온 비단들을 다 팔더라도 그 이윤이 20겔피가 안된다네!" 길버트의 반응을 바라보던 점원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뮤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놀라기는 커녕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방으로 하도록 하죠." 뮤스의 말을 들은 점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봐야만 했는데, 손님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단 두가지였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천치거나,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 점원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헤휴... 내가 모자라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니... 영업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게나.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내쫓겠네." 점원의 축객령을 듣던 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하더니 먼지가 잔뜩 뭍은 도장을 하나 꺼내어 카운터 테이블에 떨어트렸 놓았다. -딱! "이것이면 되나요? 호바인 가문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면 당연히 이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별 신경쓰지 않는 표정으로 그 도장을 살펴보던 점원은 순간적으로 두 눈이 경직되고 볼이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것은... 프라이 겔트.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방을 준비해 드리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재빨리 대답을 한 점원은 부산을 떨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기이하게 변해버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길버트는 뮤스의 옷자락을 끌며 물었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그러는 것인가? 보아하니 우리를 여기에서 재워 주겠다는 것 같은데 대체 자네가 보여 준 것이 뭔데 그러나?"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저 제 친구가 배가 고프거나 잘곳이 없으면 아무데나 가서 보여주라고 준 것인데. 그 녀석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군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 좋은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으면 된것이죠." "하긴... 자네의 말이 맞긴 하군. 저것 참 신기한 물건이로구먼... 허헛! 내가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은걸." 결국 일이 좋은 쪽으로 해결되자 길버트는 의문점을 금새 접어 버리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뮤스는 부산하게 옷을 챙겨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이기에 하루쯤은 늘어지게 잘 수 있을 법도 했지만, 지난 3년간 일찍 일어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점원에게 부탁해서 얻은 깔끔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뮤스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워낙 넓은 숙소를 잡았기에 방이 세개나 됐는데, 뮤스가 그 중 하나를 쓰고, 길버트 부자가 다른 방을 쓰게 된것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에는 길버트가 식사를 하는 중이었고, 어쩐 일인지 한 숨도 못잔 듯 피곤해 보였다. 의아한 생각이 든 뮤스는 소매의 단추를 잠그며 물었다. "좋은 아침이군요. 좀 피곤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스푼으로 맛깔스러워 보이는 케익을 한입 떠먹은 길버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말도 말게. 잠자리가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까 오히려 잠이 다 안오더구만. 누에는 뽕나무를 먹고 살아야 하듯이 사람도 살던데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만 신나게 잘 자고 있지." "하핫! 차차 익숙해 지시겠죠." 식사를 하며 뮤스의 말을 듣던 길버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차차라니? 하룻밤에 45겔피나 되는 방에서 더 머무르겠다는 말인가?"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화려하게 차려져 있는 식탁에 앉아 마실것과 빵을 챙겨 자신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봐야 숙소를 구하지도 못할 것 같더군요. 이 부근의 숙소는 모두 자리가 찬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곳은 너무 부담스럽다네. 그리고 자네의 덕을 보는 것도 미안하고 말이지."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어제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돈을 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를 이곳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그 정도의 보답은 해드려야죠. 지금 제게 하루라는 시간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니까요." 대답을 하며 빵에 잼을 그득 바른 뮤스는 그것을 한입 베어물며 맛을 음미했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잼맛이 기가막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뮤스의 모습을 바라보고있던 길버트는 아직도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정말 고맙구먼. 그나저나 자네는 어딘가 나가는 모양이군." "저는 또 라이델베르크로 떠나야 합니다.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가야하는 상황이죠." "아니!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떠난다는 말인가? 전뇌거 경주도 보지않고..."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마친 뮤스는 입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쉽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듯 하군요. 그리고 이곳의 숙박비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길버트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쩝... 자네와 조금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인 뮤스는 먼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 말했다. "나중에라도 인연이 된다면 어디서든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저는 이만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도 몸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뮤스군." 뮤스를 따라 몸을 일으킨 길버트는 문밖까지 걸어나와 그를 배웅했고,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오랜 지기를 보내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뮤스가 숙소에서 걸어나오자 어제 그의 얼굴을 눈에 익혀 놓은 점원들은 서둘러 뛰어나와 배웅을 하기 시작했고, 호텔의 현관 앞에는 포센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돈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며 쓴웃음을 지은 뮤스는 검은색의 전뇌거에 올라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루이센의 공학원으로 가죠." 그의 말을 들은 운전기사는 천천히 전뇌거를 몰아나가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타보는 포센트는 카펫위를 달리기라도 하듯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여름치고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호수로부터 풀어오는 바람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기에 더운 날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쉬웠지만, 오늘만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기에 모자람이 없어보였다. 루이센 시내를 달리고있던 고급 전뇌거 한대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있는 멋드러진 4층의 건물 앞에 멈춰섰다. 좌우로 늘어선 건물들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건물만은 특별해 보였는데, 1층은 벽대신 대형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내부에 전시되어진 전뇌거를 밖에서도 볼수 있었고, 그 위층 부터는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외장을 하여 깔끔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멈춰선 전뇌거로 부터 뮤스가 내리자 할일을 마친 운전기사는 전뇌거를 몰아 다시 호텔로 되돌아 갔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던 뮤스는 건물을 올려다 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이곳이 루이센의 공학원인가 보군. 이런 건물이 제국 전역에 걸쳐서 생겼다니 아무튼 누님의 수완은 알아줘야한다니까." 감탄의 말을 한번 던진 뮤스는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공학원의 건물로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간 뮤스는 또 한번의 감탄성을 터트려야만 했는데, 바로 옆에 위치해있던 건물들과의 벽을 터서 공학원과 내부적으로 연결을 해놨던 것이었다. 즉, 밖에서 보던 공학원의 건물보다 최소한 네배 정도는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흠!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상당히 넓은 곳이군." 그렇게 공학원의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뮤스에게 진한 남색의 정장을 입은 노년인이 미소를 띄우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뮤스원장님 아니십니까?" 노년인의 갑작스러운 부름소리를 듣게된 뮤스는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네? 아니 어떻게 제가 원장이라는 것을 알수 있으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그쪽을 처음 뵙는데요." 뮤스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노년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제 눈이 틀리지 않았나 보군요. 며칠 전에 라이델베르크 본원의 총무님으로 부터 오늘이나 내일쯤 뮤스 원장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실 것이라는 언질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외모를 가지신 것을 보고서 한눈에 뮤스 원장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죠." 자신을 알아본 경위에 대해 들은 뮤스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는데, 크라이츠가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크라이츠 누님이 제가 이곳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뮤스의 시선은 머리를 스치는 짧은 생각과 동시에 허리춤에 걸려있는 가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내 가방에 추적 마법을 걸어 놓으셨지... 그러니 내가 소문을 듣고 이곳에 들릴 것을 예측하신 걸거야." 혼잣말을 하고 있는 뮤스를 보며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노년인은 안쪽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비나드 지점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서있을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드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뮤스는 로비나드의 안내를 따라 루이센 공학원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4층으로 올라가자 십여명의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공학기술에 관련된 사람이라기 보다는 공학원 운영에 도움을 주는 일반 사무원인 듯 했고, 로비나드가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며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은 로비나드가 뮤스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 가자 조용하기만 하던 사무실의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이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원장이 온다더니, 지점장님과 함께 들어간 젊은이가 우리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사람인가봐! 이것 참... 생각보다 너무 젊잖아?" "나도 원장의 소문을 많이 듣긴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럼 이제 추방기간을 끝내고 돌아온건가? 아무튼 놀랍다고 밖에 설명 할 수가 없는것 같아." 사무원들의 잡담을 뒤로 하고 집무실로 들어간 로비나드는 예의 바르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원장님께서는 지금 미개척지로 부터 곧 바로 오시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곳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무 탈 없이 지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파에 앉아 집무실을 둘러보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죠. 그나저나 제가 이곳을 떠나있는 동안 공학원이 엄청나게 변한 것 같더군요. 괜찮으시다면 그간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해드리다 마다요. 원장님이시니 당연히 아셔야 하실 내용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로비나드는 자신의 책상으로가 큰 지도를 하나 가지고 뮤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것을 소파 사이의 탁자 위에 펼치자 도이첸 제국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일반 지도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라이델베르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에 용의 인장이 하나씩 찍혀있다는 것이었다. 로비나드는 그 용의 인장을 하나씩 짚으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뮤스원장님께서 추방령을 받으신 이후 부터 공학원은 크라이츠님의 계획에 따라 급속하게 지점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총 17군데의 중요 도시에 공학원의 지점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러한 지점에서는 주로 전뇌거와 그 밖의 제품들을 판매하거나 고장을 수리해주고, 그 지역에서 수급 가능한 자원들이나 부품들을 라이델베르크로 보내는 일을 하지요. 그 중 한곳이 바로 이곳 루이센 공학원입니다. 또, 라이델베르크의 본원 역시 그 규모를 크게 확충하여 세 곳의 전뇌거 조립공장과 다섯 곳의 부품 생산공장을 설립, 가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로비나드로 부터 현 공학원에 대해 설명을 듣던 뮤스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선 것이었는데, 이 많은 일들을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이룩해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군요. 그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니..." "상당한 수의 자본가들과 황궁이 공학원에 집중 투자를 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등에 업고서 대륙의 역사에 유래없는 물자와 인력이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학원의 운영에 필요한 인력부족 또한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 어떻게 충족시킨 것이죠?" 뮤스의 질문을 받은 로비나드는 지도 아래의 숫자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가장 수가 많은 단순직의 직원들은 공학원이 위치한 곳의 주민들로 충족하고, 공학기술에 관련된 직원들은 대학생들이나 기존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 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수가 120명 가량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모집된 사람들은 라이델베르크의 본원에서 1년 정도의 교육을 거친 후, 연구원의 신분으로 각 지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구원들이 자신이 속한 지점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능력을 인정 받게 된다면 공학자의 호칭이 주어짐과 동시에 라이델베르크 본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로비나드 지점장님도 그런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 역시 대학의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그만 두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죠." 잠시 이야기를 정리해본 뮤스는 대충 공학원의 체계를 이해 할 수 있었고, 그간 궁금해하고 있던 사항들이 해소 되자 한결 기분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설명을 모두 마친 로비나드는 뮤스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라도 필요하신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라이델베르크로 떠날 생각이라서 그러는데, 전뇌거를 한대 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의 부탁을 듣고선 뭔가 떠오른 듯 품을 뒤적인 로비나드는 작은 종이를 하나꺼내어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그 부탁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것을 한번 읽어 주시죠. 크라이츠님께서 전해 달라시던 편지입니다." "누님께서요?" 크라이츠의 편지라는 말에 반가움을 느낀 뮤스는 편지를 재빨리 펼치며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시선이 아래로 내려 갈 수록 그의 반가움의 표정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206~207 팀 라벤. 해가기울어져가는 저녁 겔브 호숫가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힘없는 발걸음을 터벅거리며 걸음을 옮기고있던 뮤스도 있었는데, 크라이츠의 편지를 읽은 후 기분이 착찹해진 그는 로비나드가 마련해 준 전뇌거와 숙소를 마다하고 공학원을 나와 발길 닿는대로 걸었고, 결국 발이 멈춘 곳이 바로 겔브 호숫가였던 것이다. 그 역시 겔브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금 겔브 호수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로 변해있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드넓은 겔브 호수 전체가 마치 빛을 내뿜기라도 하듯이 눈부신 황금 빛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멍하니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던 뮤스는 조금더 가까이 걸어가 호숫가 풀밭에 앉았다. 그리고 뭔가 허전하기라도 한듯이 손에 잡히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아무튼 누님은 일에 관련된것 만큼은 언제나 철저하시군. 비록 친동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3년만에 돌아온 동생인데 이런 일을 시키다니 하루 빨리 내가 보고싶지도 않으시단 말인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구겨진 편지를 펴보았다. 그 안에는 눈에 익숙한 크라이츠의 필체로 짧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뮤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쯤이면, 루이센에 도착해 있겠구나. 마침 내가 직접 루이센에서 열리는 전뇌거 경주에 참관 해야했는데, 이곳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일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곳까지 갈 여력이 없단다. 그러니 이번에는 공학원의 원장 신분으로 네가 직접참관해서 우승자에게 수상을 해주었으면 한단다. 그럼 자세한 것들은 지점장과 상의해서 잘 처리하도록 하고, 이만 편지를 줄이마. 간단한 안부의 말 한마디 없는 편지를 보며 입맛을 다신 뮤스는 다시 편지를 구겨 겔브 호수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리고 물결에 쓸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편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쩝. 이렇게 투정부릴 나이는 아니지만, 섭섭한 것만은 사실이군." 허전함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뮤스는 그 후로도 겔브 호숫가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며 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시간가는 줄도 모른채 호숫가에 앉아있던 뮤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부르르르릉... 어디선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요란한 전뇌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데, 보통 전뇌거의 동력기 돌아가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것이었다. "응 이소리는 뭐지? 고장난 전뇌거라도 있나?" 이에 의아함을 느낀 뮤스는 착찹해져있던 기분을 접으며 몸을 일으켰고,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략 100멜리 쯤 떨어진 호수 부근의 공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전뇌거를 가운데 두고서 뭔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버렸기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전뇌거로 부터 들어낸 부속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으로 봐서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려는 젊은이들 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차피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뮤스는 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젊은이들에게 가까워지자 그들의 대화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뭔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언성이 한껏 언성이 높아져 말다툼을 하는 중이었다. 그 중 여자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는데, 그녀는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 이상태에서 전뇌력의 출력을 과다하게 늘린다면, 그나마 가지고있는 전뇌거의 동력기도 날려버린다고! 우리 능력으로는 동력기를 만질 수도 없고, 새로 살 수도 없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동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듯 했다. "그렇지만 동력기도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가 되어있을 거란 말이야! 출력을 약간 높인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라니까!" "나도 라벤의 말에 동의해. 다른 팀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은 뭐가있어? 간단하게 전뇌조절장치만 조금 손봐주면 된다니까." 반대의사를 표하고 있던 여자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바보같은 녀석들! 다른 팀이 가지고 있는 전뇌거는 모두 금방 출고된 것들인데 우리 전뇌거와 비교 하는 것은 말도 안돼! 혹시라도 잘못되면 라벤 네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말이야! 아무리 이번 경주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그런 재수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아무튼 소심한 여자랑은 일을 할수가 없다니까!" 동료의 말을 들은 그녀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는지 입을 다물며 몸을 돌렸고, 그제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동료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미안해 클라렌.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들의 사이에 어두운 공기가 내려 앉고 있을 때 뮤스는 그들의 전뇌거를 살펴보고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가했지만, 로데오 기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차체의 하단에 새겨져있는 표식을 확인하며 중얼 거렸다. "이거...놀라운걸. 첫번째 전뇌거 경주에 쓰였던 로데오 중 한대잖아?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거지?" 뮤스는 반가운 마음에 전뇌거의 이곳 저곳을 만지며 그 감촉을 느껴보고 있었다. 역시 몇년이나 지난 일이었기에 처음 만들어 졌을 때의 매끈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량생산 되기 이전의 기종인 만큼 자신의 손을 직접 거친 전뇌거라는 점에서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었다. "후훗... 이녀석을 만들때만 해도 직접 손으로 만든다고 고생 꽤나 했었는데... 이제는 대량생산체계라니." 혼자서 피식피식 웃으며 전뇌거를 만지고 있던 중 자신의 등에 누군가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낀 뮤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뒤돌아 봤다. 그러자 과연 말다툼을 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수상한 행동(?)을 하고있는 뮤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 파란색의 작업복을 입은 금발의 청년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지금 우리 전뇌거앞에서 실실 웃으면서 뭐하고 있는 거지? 혹시 다른 팀에서 정찰하러 온 것 아니야?" 그들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뮤스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는데, 클라렌이라 불린 여자 동료가 나서며 말했다. "라벤, 네 말대로 다른 팀에서 우리를 경계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번 경주에 참가하는 15개 팀 중에 가장 약체로 평가 받고있다고. 그런데 누가 우리를 정찰하러 오겠어?" 그녀의 말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라벤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애써 짓고있던 무서운 표정 마저 풀수 밖에 없었다. "이봐 클라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남의 이야기 하듯이 말하는거 아니냐..." "어차피 우리가 실력이 부족해서 약체로 평가 받는건 아니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해. 그저 돈이 없을 뿐이잖아?" "하긴 그렇지..." 클라렌과 대화를 하다말고 고개를 갸웃거린 라벤이라는 청년은 다시 뮤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는 여기서 뭐하는 거지?" 라벤의 물음에 대충 분위기 파악을 한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핫! 그냥 지나가다가 전뇌거 소리를 듣고 온거야. 잘은 모르지만 조금 불안정한 소리가 나길래..." 뮤스의 말을 듣고 피식웃은 라벤은 전뇌거를 두들겨 보며 말했다. "그랬었군. 사실 동력기 시험을 하고 있었거든. 이 로데오에 장착되어있는 것은 워낙 오래된 동력기라서 시원찮은 데다가 전뇌력 출력을 높였으니 굉음이 날 수 밖에 없었지.아!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잘 모르겠구나."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자책을 한 라벤은 뮤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나저나 전뇌거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전뇌거 경주를 구경하러 온것 같은데 어디서 왔지?" "지금까지는 그냥 떠돌아 다니는 중이었어. 지금은 라이델베르크로 가는 중에 잠시 들린것이지. 그나저나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는 팀인가보군." 어깨를 으쓱하며 전뇌거와 친구들을 가리킨 라벤은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보면 알다시피 열악한 팀이야. 나는 라벤이고, 뒤에는 클라렌과 팔러라고 하지. 너는?" 라벤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본명을 말하면 자신을 알아 볼 것 같았기에 대충 이름을 하나 떠올렸다. "어... 나는 케르히트, 부르기 쉽게 켈트라고 부르면되." 결국은 켈트의 이름을 대신 가르쳐준 뮤스는 속으로 우습기도 했지만 애써 참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들은 라벤 일행은 신기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하핫! 켈트라고? 공학원의 켈트님과 똑같은 이름이잖아? 물론 그분은 드워프족이긴 하지만..." 내심 본명을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뮤스는 대충 공학원에 대한 인식을 떠보기라도 할겸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보군?" 이번에는 라벤 대신 클라렌이 대답해 주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일종의 경외감까지 일렁이고 있었다. "그분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공학원의 설립때 부터 기술 고문을 맡고 계신 분이시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지. 아마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지적이고 멋지신 분이실거야."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클라렌을 보며 켈트에 대한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던 뮤스는 그만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쿠쿡... 지적이고 멋지신분이라." 뮤스가 웃는 것을 본 클라렌은 무서운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우스운거지?" "아..아냐. 그냥 멋진 분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어. 그나저나 아까 대화하는 것을 잠시 들어보니 전뇌거에 문제가 있는 것같던데 이야기 좀 해줄 수 없을까? 나도 사실 전뇌거에 관심이 많거든."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뮤스의 질문에 뚱뚱한 몸집을 가진 팔러가 책자를 하나 건네주며 대답했다. "이걸 읽어 보는 편이 훨씬 이해가 쉬울거야. 내가 접어 놓은 곳을 한번 읽어 보라고." "이건 무슨 책이지?" "그건 공학원에서 매달 발행하는 책자야. 전뇌거나 그 밖의 제품들에 대한 설명들이 주로 언급되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수록하는데, 공학원 지망생들에게는 교과서와 같은 책이지. 특히 우리처럼 대학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야." "아! 그럼 전뇌거에 대한 지식도 이 책자를 통해서 얻은 것이군?" "뭐 대충은 그렇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대부분은 직접 해보면서 배운 것들이야. 말 그대로 책자에서 언급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자료 밖에 안되니 그 이상의 지식들은 재주껏 쌓아가는 수밖에 없거든." 책자의 표지를 한번 바라본 뮤스는 일반의 사람들에게 공학에 대한 기본지식을 심어주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팔러가 접어 놓은 곳을 펼쳤다. 그곳에는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 신청을 한 팀들에 대한 분석이 다뤄지고 있었는데, 라벤의 팀에 대한 평가 역시 책자의 한쪽 귀퉁이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이것인가 보군? '팀 라벤. 참가 팀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는 팀으로서 팀원의 열의는 강하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2년 연속 대회 최하위 팀.' 이라는 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팔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 읽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 판국에 그 평가를 또 들어야 하다니..." 팔러의 투덜거림을 뒤로하며 라벤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평가에서 봤다시피 우리는 후원자가 없어서 개인의 돈을 털어서 이 전뇌거를 중고로 겨우 마련할 수 있었지. 하지만 역시 싸게 구입한 만큼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서 최대한 손을 봤는데도 별달리 나아지는 것이 없어. 동력기를 새걸로 교체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지만, 낮에 틈틈히 일해서 번 돈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거든." 잠시 동료들을 바라보던 라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런 환경으로는 우리가 경주에서 우승하는 것은 꿈이나 마찬가지야. 벌써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해볼 만큼 했으니 올해에도 안되면 깨끗하게 포기 할 생각이야.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야 할 나이니, 가능성이 희박한 꿈만 보고 살아 갈 수는 없거든." 문득 말을 멈춘 라벤은 머슥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뮤를 바라봤다. "미안하군 켈트... 처음 보는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주절거린 것 같군. 그럼 너는 전뇌거 경주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는 거야?" 아직 켈트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뮤스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는지 몰랐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열정을 쏟는 라벤 일행에게 잔잔한 감동을 받고서 그들을 도울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뮤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라벤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이봐 켈트. 지금 무슨 생각중이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뮤스는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젓던 뮤스는 잠시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나도 예전 부터 전뇌거 경주에 한번 참가해 보고 싶었는데, 혹시 너희들 팀에 끼워 주면 안될까?" 그러나 뮤스의 말이 그들의 귀에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은 듯 했고, 클라렌은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켈트! 말이 너무 심한것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약체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재미로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팀원으로 끼워 줄수는 없어! 비록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라벤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뇌거 경주에 참가했었다고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건 우리에게있어서 단순한 장난이나 재미가 아니야."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도 재미로 끼어들겠다는 것이 아니야. 너희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너희 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우리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럼 네가 엄청난 자산가이기라도 해서 우리를 후원 하겠다는 말이야?" 아직도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어오는 라벤의 말을 듣고선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전뇌거에 관심이 있어서 공부를 꽤나 많이 했었거든. 내가 보기엔 이 로데오의 동력기도 조금만 손을 보면 새것처럼 사용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 말이 정말이야?" 대충 말을 둘러대던 뮤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벤 일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들통날 거짓말을 내가 왜 하겠어? 그러니 그런 미심적은 눈으로 바라보지는 말라고." 턱을 쓸며 곰곰히 생각해 보던 라벤은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며 서로의 의사를 물었고,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라벤은 동료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너를 우리 팀원으로 넣어 주는 것은 문제가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저축해 놨던 돈을 모두 털어서 전뇌거를 구입했는데, 네가 아무런 지원을 하지않고서 뒤늦게 팀원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말이 안돼거든. 하지만... 만약 네가 로데오의 동력기를 고쳐준다면 동력기를 새로 구입한샘 치고 팀원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지. 어때?" "하핫! 나는 얼마든지 준비가 되어있으니 상관없어." 이렇게 해서 뮤스와 라벤 일행은 하나의 팀이 되었다. 사실 뮤스가 직접 그들의 후원자가 되어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순수한 열정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편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뮤스와 라벤 일행들은 전뇌거를 타고서 그들의 작업장이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로데오는 2인승 전뇌거였기에 앉을 자리가 없었는데, 그 덕에 뮤스와 덩치가 큰 팔러는 좁다란 빈공간에 거의 몸을 끼워 넣다 시피한 상태였다. 이동하는 동안 뮤스는 대화를 통해서 라벤은 목재소에서, 팔러는 정육점, 클라렌은 제과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외에도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를 사실을 알수 있었다. 팀 라벤은 제 2차 전뇌거 경주가 벌어지기 불과 두달 전, 전뇌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 사람이 함께 뭉치게 됨으로써 만들어 지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경주에서는 라벤이 전뇌거 운전에도 익숙치 못했기에 그저 완주를 하는 데에 만족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듬해의 경주를 노려 봤지만, 성능이 훨씬 개량된 신형의 전뇌거들이 대거 출전하는 바람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올해에는 더욱 쟁쟁한 팀들이 늘었기에 그들이 가진 구식의 로데오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던 그들은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뇌거가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서자 앞쪽에 타고 있던 클라렌이 재빨리 내렸다. 그런 후에야 뮤스와 팔러가 전뇌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는데, 둘다 숨을 쉬기 조차 힘들었는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후우.. 정말 매번 탈때마다 죽기 일보 직전이야. 기왕 개조하려면 4인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어때?" 팔로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라벤은 로데오의 차체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 녀석을 4인승으로 개조하면 정말 끝장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성능도 엉망인데다가 멋도 없어지잖아." "하긴 그렇지... 우리가 나름대로 연구해 본다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놨으니 멀쩡한건 외장 밖에 없지."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클라렌은 허름한 건물의 문의 자물쇠를 따고 있었다. 건물의 형태로 보아 버려진 창고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었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겨울이 된다면 여기저기 깨진 창문으로 칼바람이 몰아쳐 들어올 것이기에 애로사항이 많아 보였다. 클라렌이 자물쇠를 따고 있는 힘껏 문을 옆으로 밀자 마찰음이 나면서 전뇌거 한대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넓게 문이 열렸고, 라벤은 다시 건물 안으로 로데오를 몰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뮤스와 팔러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가고 있을 때, 어두운 내부로 들어간 클라렌이 전뇌등의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빛이 들어오면서 작업장의 내부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내부에 비해 고작 두개의 전뇌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는데, 로데오에서 내리던 라벤은 그것이 매우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핫! 놀랐지? 이번달에 우리가 번 돈으로 전뇌등을 설치했지. 가격이 비싸지만 밤에 작업을 해야하니 어쩔 수가 없더라고." 막 작업장으로 드러서며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위해 놀란 표정을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전뇌등이 설치되어 있다니 대단한걸? 그런데 전뇌력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지? 설마 이곳에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것은 아닐텐데." 뮤스의 물음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라벤은 손가락으로 건물의 뒤쪽을 가리켰다. "이야! 수력발전소까지 아는 것을 보니 괜한 말을 했던것은 아닌가보군. 돈이 많이 깨졌지만 소형 발전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지. 루이센은 호수로 들어가는 물의 양이 상당하기 때문에 소형발전기를 설치하기에 알맞거든." "음... 소형발전기라..." 이런 곳에 전뇌력이 들어올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전뇌거 부속품들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록 손질이 덜 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것들이 상당히 모여있었고, 연장들은 매일 사용하는 듯 잘 닦여있었다. "꽤나 많은 것들을 모아 놨는데? 이 정도면 부속은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아.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 뮤스가 의욕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가볍게 웃은 클라렌은 길게 내려온 갈색의 머리를 뒤로 묶으며 말했다. "풋. 지금 당장 시작하더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에겐 그리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좋아. 한번 상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고... 어디보자." 짧게 대답 하며 손을 한번 털어낸 뮤스는 로데오의 앞쪽에위치한 기관실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복잡한 기관들이 엉켜있었는데, 전뇌선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가장 아래쪽에 나타난 동력기의 상태를 확인하던 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 참... 생각보다 훨씬 엉망인걸? 아무래도 동력기를 차체로 부터 뜯어내서 분해를 해야 겠어." 그의 말을 듣고있던 팔러가 뒤뚱거리며 다가와 놀라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동력기를 분해한다고? 말도 안돼! 공학원에서 제공하는 전뇌거 설계도에도 그 중요성 때문에 동력기의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은 제외하는 판국인데 어떻게 분해를 한다는거야? 공학원의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팔러 이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력기를 분해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고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부수적인 장치들을 제외한다면 동력기자체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어. 고성능의 자력통과 금속 뭉치가 주된 구조인데, 지금은 이 동력기는 내부의 금속뭉치에 이물질이 스며들어 마나구에서 방출하는 전뇌력을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즉 내부의 금속뭉치를 다시 재작해서 교체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일까지만 작업하면 동력기를 출고 직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 라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지만, 그 작업을 정말 네가 할 수 있다는거야? 내가 알기론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팀 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도 없어. 모두들 자신들의 전뇌거를 개조하긴 하지만, 공학원에서 제공하는 설계도를 참고해서 조금씩 변화시키거나, 타 기종의 완성된 동력기를 그대로 옮겨서 설치 하는 수준이지, 동력기 내부에까지 손을 대지는 않는다고." 불안에 찬 라벤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있던 뮤스는 가방에서 작업용 장갑을 꺼내 끼고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있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자신이 없으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번 믿어보는게 어때? 너희들도 상대 팀들에 못지 않은 동력기를 가지고 정정 당당하게 경주를 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잖아."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뮤스의 달콤한 유혹을 들으며 한 동안 고심을 해보던 라벤은 결국 그의 말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어차피 이대로 출전한다고 하더라도 가망이 없는 것은 사실이잖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부탁한다 켈트." 진지하게 이야기하고있는 라벤의 입에서 켈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어색함을 느꼈지만 별 신경을 쓰지않기로 한 뮤스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너희들도 동력기를 뜯어내는 것쯤은 할 수있을 테니까 좀 부탁을 할께. 나는 필요한 것들을 찾아보고 부속을 준비해야하니까." "알았어. 그런 것은 맡겨 두라고. 시작하자 팔러, 클라렌." 라벤의 말을 시작으로 그의 동료들은 기중기와 필요한 연장들을 가져오며 동력기를 떼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뮤스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쪽에서 동력기를 고치는데 필요한 부속들을 가방으로 부터 하나씩 꺼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팀 라벤의 고물 로데오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 동이 밝아올 무렵에는 로데오 개조작업에 열을 올리던 뮤스와 동료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작업하다가 잠이들어버린 그들은 밤샘 작업을 위해 가져다 놓았던 간이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아 로데오의 내부에 들어있어야할 부속들이 흉하게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창넘어로 들어오는 눈부신 태양 빛이 잠을 자고던 클라렌의 얼굴에 와닿자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벽에 걸린 원추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큰 일이라도 난 듯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꺄악! 다들 일어나라고! 일하러 갈 시간이야!" 귀를 아프도록 자극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동료들 역시 시간을 확인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피곤해서 늦잠을 자버렸군!" "주인 아저씨가 또 시급을 깎으면 큰일이라고!" 그들은 작업장의 한쪽 구석에있는 세면대쪽으로 달려가 서둘러 세면을 하거나, 면도를 했고, 옷장앞에서 기름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갈아 입었다. 이렇게 출근 준비를 마친 그들은 작업장에서 뛰어 나왔는데, 순간 빠트려 먹은 것이 있는 듯 몸을 멈추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곳에서는 아직도 뮤스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벤과 동료들은 오랜만에 신이나게 작업을 했었던 어제의 일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고는 다시금 일터로 걸음을 옮겼다. 뮤스가 깨어난 것은 그로 부터 두어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잠에서 덜깬 그가 힘겹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새벽까지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잠이 달아남을 느낀 뮤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한번 둘러봐도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다들 어디간거지? 분명히 어제 작업을 같이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이킨 뮤스는 동료들이 잠을 자던 간이 침대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금방 벗어 놓은 듯한 작업복이 어질러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세면대는 사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물기가 고여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하러 나간 것 같군. 이제 그럼 나 혼자 남은 건가?" 가려운 머리를 긁으며 전뇌거로 걸어간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하암! 눈치를 보지 않고 했더라면 벌써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군." 앞으로 동료들의 속도에 맞춰 작업을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함이 앞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뮤스는 모종의 결심이라도 한 듯 땅에 떨어져있는 연장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동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그들이 오기 전에 일을 끝마쳐도 괜찮을거야. 다른 팀에 못지 않은 동력기를 선물해 주도록 하지." 이렇게 말한 뮤스는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결리는 몸을 시원한 기지게로 풀어보며 수십개의 부속품으로 분해되어 땅바닥에 얼려있는 동력기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품들을 하나씩 끼워 맞춰가면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팀 동료가 된 라벤 일행이 기뻐할 모습을 상상해 보니 더욱 손놀림이 바빠지고 있었다. 라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작업장으로 가는 동안 수도 없는 한숨이 나왔지만 오늘만은 다르게 저절로 휘파람이 나오고 있었다. 이는 모두 어제 자신들의 예비 동료가 된 켈트라는 친구 때문이었는데, 그가 팀원으로 넣어달라고 제의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큰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함께 로데오 개조작업을 했던 짧은 시간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기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팀원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의 로데오가 강력한 심장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핫! 오늘도 열심히 해보는 거야!"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힘차게 허공으로 손을 내뻗어 본 라벤은 히죽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렌은 종이 봉투에 팔다 남은 빵들을 가득 담아 넣었다. 이것이 오늘 밤샘 작업의 밑거름이 될 든든한 식량이었다. 오늘은 평소 때 보다 더욱 두둑히 담아 놓았다. 그 이유는 또 하나의 입이 늘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자신이 존경하는 공학원의 켈트님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처음 볼때만 하더라도 치렁하게 머리를 늘어트리고있는 그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밤새 지켜본 결과 그의 실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올해의 경주에서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녀는 나무로 된 제과점의 문을 열고 나섰다. 정육점에서 일을 하고 있던 팔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시계를 보는 일 대신 일을 했겠지만, 오늘따라 시간이 유난히 안가는 것 같았기에 그의 눈은 십분이 멀다하고 시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런 아직도 삼십분이나 남았잖아? 쳇..." 우직한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그려넣은 그는 계속해서 고기를 다듬기 위해 칼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또 다시 시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일과를 마친 팀 라벤의 동료들은 시간이라도 맞추기라도 한듯, 작업장의 문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작업을 하기 위해 각자의 일터에서 뛰어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문 앞에 멈춰서서 클라렌과 팔러를 바라본 라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부리나케 뛰어온 것 같군. 작업하는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그렇게 서둘러 오고그래?" 제과점에서 부터 먼거리를 뛰어와서 인지 가쁜 숨을 헐떡여야 했던 클라렌은 라벤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헤... 정말 웃기는걸. 우리 셋 중에서 일터가 제일 멀리 있는 사람이 바로 너 잖아? 그런데도 제일 먼저 왔으면..." "그랬었나? 하핫! 그래도 팔러만큼은 아니지. 가깝지만, 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데 이렇게 비슷하게 왔잖아?" 그의 말에 손을 내저은 팔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에 고인 침을 내뱉었다. "퉤! 말도 말아. 정말 10년 만에 처음 뛰어 보는 것 같다고. 오늘따라 왜그렇게 시간이 안가던지..." "하긴 나도 그렇더라고. 전뇌거 생각에 일이 손에 잡혀야지 말이야." 클라렌 역시 빠질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나는 오늘 전뇌거 생각한다고 빵을 다 태워 먹었다니까. 주인 아주머니께 얼마나 혼이 났는데. 아주머니 눈빛만 생각해도 정말 아찔하다니까."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지은 라벤은 기다리던 작업장의 문을 열어 젖혔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라벤과 동료들은 그 자리에 입을 벌리고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작업장의 내부가 아침에 나갈때와는 천양지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동력기의 부속으로 너저분하던 바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내장을 다 드러내놓고 있던 로데오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조립되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라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팔러는 그의 볼을 꼬집어 보았는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전혀 아픈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욱 꿈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넋을 빼고 로데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작업장의 구석에서 뮤스가 천으로 손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뜨거운 눈길을 주며 대답을 구하고 있었고,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는 말라고. 그냥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대충 조립을 해놨을 뿐이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로데오로 다가와 살펴보는 동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그 중 클라렌이 기관실의 뚜껑을 열어보며 말했다. "이게 심심해서 대충 조립한거라고? 어제 분해 작업하는데만 하더라도 네 명이서 꼬빡 밤을 샜는데..." 그녀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이 고개를 내저은 팔러 역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뚱뚱한 그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눈을 뜨며 물었다. "어떻게 이 복잡한 작업을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이봐 켈트... 이제 네 정체를 밝히시지!" 자신의 정체를 알아 채기라도 한는 듯이 외친 팔러의 말에 뮤스는 순간적으로 크게 놀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뭐..뭐... 내 정체라니?" 뮤스의 되물음에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던 팔러는 손가락으로 뮤스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것 같아. 어서 너의 숨겨놓은 나머지 팔들을 보여 주시지! 적어도 팔이 여섯개는 될거야!" 그제서야 팔러의 농담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고,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후훗! 무슨 쓸데 없는 소리야. 내 팔은 두개 뿐이라고."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팔러는 진심으로 뮤스를 의심하는 듯 그의 엽구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팔러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 먹고 있을 때, 라벤이 탄성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군! 내부가 완전히 새것처럼 정리됐잖아? 그럼 우리 로데오의 동력기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는건가?" 기관실을 살펴보고 있는 클라렌의 옆으로 다가간 뮤스는 동력기 부분과 그 주변을 짚으며 말했다. "작업을 하다 살펴보니, 이 전뇌거가 초기생산 제품이라서 수공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지. 그래서 이 로데오의 동력기는 대량생산된 일반 로데오의 동력기보다 훨씬 좋은 부속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전뇌력의 방출력을 높여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더군.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즘나오는 신형 전뇌거 동력기와 비슷한 수준은 될거야." "그럼 일반 로데오의 동력기 보다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다는 말이잖아!" 라벤은 진심으로 기쁜지 재빨리 달려와 뮤스를 힘껏 끌어 안으며 외쳤다. "켈트 너는 정말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야! 사랑한다 켈트!" "이..이봐 나는 이미 라이델베르크에 여자친구가 있는 몸이라고! 게다가 남자 녀석이 이러면 더욱 곤란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뮤스를 풀어준 라벤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핫! 네 여자친구가 이것을 봤으면 큰일 날뻔 했군. 그나저나 대단해. 동력기를 한번 시험해 봐도 될까?" "쯔쯧... 그걸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팀 라벤의 팀장이 너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 하군."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라벤은 설레이는 표정으로 전뇌거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손을 한번 비벼보며 운전대를 잡은 그는 전뇌거 시동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력기의 소리가 부드러웠는데, 차체의 진동도 훨씬 줄어 든 듯 했다. -부르르릉! 부릉! 전뇌거의 상태를 확인하며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라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환상적이야! 이거 정말 우리 로데오 맞는거야?" 그의 물음에 팔짱을 끼며 동료들에게 다가간 뮤스는 코밑을 쓸며 말했다. "내가 이 팀에서 할 수 있는건 이제 다했어.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서야 다른 팀과 비슷한 경주용 전뇌거를 얻게 된 것일 뿐이지 그들보다 우월한것은 아니야. 지금 부터는 너희들이 이 로데오의 성능을 어떻게 개선 하느냐에 경주의 결과가 달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남은 시간 동안 수고해 보라고. 이제는 전뇌거의 성능이 못따라줘서 졌다는 말은 못하게 되었으니까 너희들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줘." 뮤스의 말에 코끝이 찡해진 클라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만면에 미소를 띄운 팔러는 뮤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고맙다 켈트. 이렇게까지 도와준 네게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도 노력해볼께." 팔러에 이어 전뇌거에서 내린 라벤이 입을 열며 다가왔다. "네 말대로 이제 전뇌거가 구식이라서 졌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됐군. 지금부터 너는 지켜만 보고 있으라고. 우리가 지난 시간동안 준비해 놓은 것을 보여줄테니까." 뮤스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가득찬 라벤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후훗! 그럼 얼마나 잘하는지 기대해 보기로 할게.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힘들게 일을 했더니 피곤한데 나는 이만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 "이 자리에 누구도 그걸 막지는 않을걸? 오늘 정말 수고했고 푹 쉬어." 라벤의 말에 미소로 답한 뮤스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작업장의 문으로 걸어갔다. 그 때 문득 라벤이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켈트! 깜빡 했는데, 이제 너는 팀 라벤의 정식 팀원이야!" 그의 말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이제서야 내가 팀원이 된건가? 나는 어제 부터 팀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섭섭하군. 후훗!" "하하핫! 그랬다면 정말 미안한걸!" "그럼 다들 밤새 수고해!" 라벤에게 농담을 던진 뮤스는 다시한번 인사를 건네며 작업장 밖으로 걸어나갔고, 라벤과 그의 동료들은 뮤스가 사라진 곳에서 부터 비춰드러오는 금빛의 저녁노을이 오늘따라 눈이 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2002-11-20] 짜가신선 <대공학자> #208~209 진정한 승리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쾌청한 날씨의 여름날 루이센은 유례없는 인파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루이센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뇌거 경주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며칠 전부터 이곳에 머물렀기에 그 동안은 조금 분비는 정도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지만, 전뇌거 경주의 당일이 되어버리자 루이센에서 가까운 도시들로 부터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탓에 경주에 사용 될 도로를 제외한 곳은 모두 사람들이 들어차있었고, 심지어는 도로변에 위치한 건물들의 창문에도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정도였다. 전뇌거 경주의 출발점이 되는 루이센 시청앞 역시 다른 곳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구경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임시적으로 만들어 놓은 낮은 철책밖에는 전뇌거들이 출발하는 모습과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총 15대의 전뇌거가 일렬로 늘어서서 팀원들의 최종 점검을 받는 중이었다. 전뇌거들 가운데에는 3번의 번호를 붙인 팀 라벤의 개조된 로데오도 섞여있었는데, 이곳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전뇌거는 대부분 로데오의 후속기종인 '루펜트' 를 기본으로 조금씩 개조한 모습이었기에 팀 라벤의 로데오는 유독 눈에 띄고 있었다. 로데오의 주변에서 초록색의 팀복을 입은 동료들은 전뇌거의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고, 뮤스는 동료들 사이에서 개조된 부분을 하나씩 살펴 보는 중이었다. "음... 아주 좋은 걸? 겔브 호수 도로 주변에는 굴곡이 많으니, 차체의 중량을 줄인것이 큰 도움이 될거야. 게다가 바퀴의 폭을 넓혔으니 코너를 돌기 쉬울거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상판 부분을 더욱 유선형으로 제작했군. 이건 라벤이 한건가?" 그의 물음에 바퀴의 조립상태를 확인하던 라벤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목공소에서 일하면서 배운건 매끈하게 나무를 깎아내는 방법이지. 그냥 타고 다니기에는 모양새가 영 이상하지만, 무게도 줄일겸 상판을 뜯어내고서 목재로 갈아 치웠지. 덕분에 바람의 저항은 현저히 줄어 들거야. 괜찮아 보여?" "후훗! 길거리에서 타고 다니기에는 좀 부끄럽겟지만, 오늘은 경주를 하는거니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몸 상태는 어때?" "그다지 좋지는 않아. 어제 너무 떨려서 그런지 잠이 통 오지 않더라고. 그래서 얼마 자지 못했어." 피식 웃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개조설계도를 접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니까 신경쓰지마. 그리고 달리면 네가 달리는 길만 바라봐. 괜히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지 말고." "마치 전뇌거 경주에 나가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거야." 자신이 최초의 전뇌거 경주에 출전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라벤을 보며 미소를 지은 뮤스는 로데오의 운전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어쨌건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오라고." 뮤스의 말을 들으며 전뇌거에 탄 라벤은 의자에 설치된 안전장치를 몸에 채우며 말했다. "켈트... 다시한번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다." "몇 번만 더 하면 열번이다. 어차피 우리는 한 팀이야. 팀의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건 당연한 거잖아?" "아무튼 너를 그곳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뮤스와 라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점검을 모두 마친 클라렌과 팔러가 다가왔다. 그리고 라벤의 머리를 한대씩 쥐어 박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면 알아서해! 오늘 그 지겨운 제과점을 때려 치울 각오로 왔단말이야!" "또 꼴찌를 하면 우리는 변명거리도 없다고! 그 점은 더 이상 말안해도 네가 더 잘알겠지? 행운을 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응원을 해주는 동료들을 향해 라벤은 엄지손가락을 펼쳤다. "죽자사자 달릴테니까 걱정하지마. 이번만은 정말 우승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라벤이 투지넘치는 모습으로 동료들을 안심시키고 있을 때, 장내를 울리는 방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운전자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은 출발선 밖으로 철수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팀원들은 출발선 밖으로 철수해 주십시오. 방송을 들은 뮤스와 동료들은 지금부터는 혼자서 싸워야 하는 라벤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며 출발선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여전히 걱정만은 떨칠 수 없는 듯 그들의 로데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출발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료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침을 삼키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뇌거 운전자 여러분들은 동력기 시동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15대의 전뇌거는 웅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들은 창넘어로 다른 운전자들을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로데오에 타고있던 라벤은 예전보다 훨씬 긴장이 됨을 느꼈는데, 아무런 기대없이 출전했었던 과거의 대회와는 달리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자... 우리의 로데오는 최고다. 정신만 차리면 되는거야. 호흡을 가다듬고 하나씩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신호가 울리면 전진패달을 천천히 밟고... 변속기를 한번 당겨주고..." 과연 그의 행동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자 그의 귀에는 출발신호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광중들의 시끄럽던 외침소리가 점차 잠잠해지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합에 집중을 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출발 준비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출발 5초전입니다. 4초... 3초... 2초... 1초... 출발! 지금 라벤의 눈앞에는 곧게 나있는 도로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달리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전진패달을 밟았다. 로데오가 빠르게 앞으로 나가며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젖혀진 라벤은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전뇌거가 출발선으로 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이곳에 모인 관중들은 시청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15대나 되는 전뇌거들이 출발하는 멋진 광경과 지금까지는 상상치도 못할 속도를 내고있는 전뇌거들이 그들을 영광케 하는 것이었다. 관중들의 환호에 파묻혀 로데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팀 라벤의 동료들은 이제 자신들의 로데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더욱 초조함을 느꼈다. 클라렌은 두 손을 굳게 모아쥐며 물었다. "라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어떻게 하지?" 누구를 향해 묻는 지도 모를 그녀의 말을 들고 있던 팔러 역시 로데오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지난 대회 이후로 엄청나게 연습했잖아. 게다가 겔브 호수의 도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출발도 저 정도면 꽤 빨리 한것 같고." 뮤스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출발 속도는 거의 1, 2윌를 다투더군. 그 정도면 지금쯤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잡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동료들의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정된 표정을 지은 클라렌은 로데오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동료들이 조금 진정하자 뮤스는 팀복을 벗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의 말을 듣고있던 동료들은 로데오에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뮤스는 다시한번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을 받으며 푸른 빛을 반짝이고 있는 겔브 호숫가의 도로에는 다섯대의 전뇌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시청에서 출발한 전뇌거들은 어느새 겔브호수를 반이나 돌고 있었는데, 이 다섯대가 그 중 선두 그룹이었다. 네대의 루펜트들 앞으로 3번이라는 번호가 선명히 찍힌 로데오가 달리고 있었다. 급격한 코너가 이어지는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석이라도 붙인 듯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 수록 뒤를 쫓는 루펜트들과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도 라벤의 눈에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 길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달리는 것에 도취되기라도 한듯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오직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속패달을 밟다가 코너가 보이면 변속기를 동시에 두칸 내려준다. 비록 변속기에 무리가 가긴 하겠지만 동력기의 회전을 줄이지 않고서도 로데오의 속도를 줄일 수 있지." 라벤을 태운 로데오는 그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이 빠른 속도로 멋지게 코너를 돌고 있었다. 마치 로데오와 그의 몸이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수 천명이 넘는 관중이 밀집되어있는 시청의 중앙광장에서 뮤스는 빈틈없이 서있는 사람들을 힘겹게 헤치며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 수 있도록 조금만 비켜 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비켜줄 공간이 없었고, 오히려 이런 곳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려는 뮤스가 눈총을 받고 있었다. 어렵게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여 그의 발걸음이 멈추게된 곳은 거대한 임시 단상의 위쪽에 만들어져있는 전뇌거 경주 진행본부였다. 그 앞에서 진땀을 닦아낸 뮤스는 자신이 헤쳐온 길을 되돌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겨우 도착했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거야." 다시 고개를 돌린 뮤스가 전뇌거 경주 진행본부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어가자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던 건장한 몸집의 사내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입니다." 그들의 말에 주변을 살펴본 뮤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는 것을 꺼리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공학원의 원장이니 저곳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 같군요."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은 어이없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는데,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핫! 웃기는 농담 그만하고 다른 곳으로 가보게. 공학원의 원장이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잖아?" "제 말은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로비나드 점장님을 직접 불러주시죠." "그분은 지금 바쁘시니 자네같은 젊은이는 만나줄 시간이 없으시네. 보아하니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부탁을 하려는 모양인데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돌아가게나." 사내들이 강경하게 나오자 어쩔 수 없다고 여긴 뮤스는 임시 단상의 위쪽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로비나드 지점장님! 로비나드 지점장님!"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기에 그의 목소리가 단상위까지 닿는지 알 수 없었고, 그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사내들은 급히 그의 팔을 끌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젊은이가 미쳤나! 갑자기 지점장님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뮤스가 사내들의 팔에 정신없이 끌려 가고 있을 때, 단상 위에서 한 중년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 대체 원장님께 뭘 하는 짓인가!" 그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로비나드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사내들은 아직도 못믿겠다는 듯이 자신의 팔에 매달려있는 뮤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비나드의 표정으로 보아 장난이 아님을 깨달은 사내들은 급히 그의 팔을 놔주며 큰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죄..죄송합니다 원장님!" 그 덕에 더욱 당황한 것은 뮤스였는데, 무슨 일인지 주변의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과는 그 정도면 됐으니까 그만하고 하던일 하세요!" 짤막한 말을 남기며 단상으로 올라가는 뮤스의 뒷모습을 보며 한 숨을 내쉰 사내들은 입술이 바짝 마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저 청년이 정말 뮤스원장이었다니. 그렇다면 올해는 우승자 수상을 원장이 직접하는 건가?" "작년까지만 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원장이 직접 오다니. 이것 참 사건이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들을 뒤로하며 단상위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단순하게 보더라도 이번 경주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탁자의 한곳에 원거리통신기가 설치되어있어 대회의 진행상황을 보고받는 듯 했다. 먼저 앞장서서 올라온 로비나드가 진행본부의 중심에 놓여있는 의자를 권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오셨더라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자리에 앉아 시청을 둘러보던 뮤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어떤 사정으로 전뇌거 경주 팀의 팀원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다고 온다고 좀 늦었던 것입니다." "하핫! 전뇌거 경주 팀의 팀원이라고요? 제가 팀원들의 명단을 살펴 봤지만 뮤스 원장님의 이름은 못본 듯 합니다만... 어떤 팀이죠?"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2회 연속 꼴찌를 했던 팀 라벤입니다. 그곳에서 켈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로비나드는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는데, 뮤스의 말을 듣고서야 어떠한 의문이 풀리기라도 한듯 속시원해 하고 있었다. "아하! 그 팀에 바로 뮤스 원장님께서 계셨었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꼴찌를 달리던 팀이 지금 선두로 달리고 있어서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지금 팀 라벤이 선두로 달리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도 2위와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죠." "이런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군..." 뮤스는 이마를 짚으며 골치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전뇌거 경주가 끝나면 시상식을 거행해야 했고, 그곳에 뮤스가 공학원의 원장으로써 나선다면 팀의 동료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팀 라벤이 우승을 하더라도 동료들은 그것이 스스로의 실력이라 생각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로비나드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로비나드 지점장님 제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저의 부탁을 좀 들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이번 경주에서 제 대신 우승자에게 상을 수여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꼭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뮤스의 부탁에 얼떨떨해 하던 로비나드는 손을 내저으며 완고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번 전뇌거 경주에서 시상을 한다면 그것은 이 행사자체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제가 시상을 하는 것은 이곳에 출전한 젊은이들에게 모독적인 행위입니다. 그들은 공학원을 대표할 만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지 저와 같은 일개 지점장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크라이츠님과 켈트님께서도 경주때 마다 바쁘신 일정을 접으시고 찾아 오셔서 직접 시상을 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꼭 계셔야 합니다. 제가 뮤스원장님의 아랬사람이긴 하지만, 원장님께서 고집하신다면 막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로비나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모습이 아니었는데, 결국 빼도 박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버린 뮤스였다. 해가 약간 기울며 한낮의 기세를 조금 꺽을 무렵 루이센 시청까지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일대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로 시청건물에서 먼곳으로 부터 엄청난 환호성이 일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그 환호성은 전염이라도 되는 듯 빠른 속도로 시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뮤스가 앉아있던 진행본부에까지 그 여파가 닿고있었다. 주변은 바로 옆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환호성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들의 반응을 본 뮤스는 드디어 선두의 전뇌거가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손을 만지작 거리며 시상식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던 뮤스는 환호성이 가까워 지는 만큼 그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었다. -부르르릉... 색색으로 일렁이는 관중의 파도를 가르며 드디어 선두의 전뇌거가 뮤스가 앉아있는 진행본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을 만큼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로 달려오는 전뇌거에는 3번이라는 숫자가 찍혀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뮤스는 기쁜 마음과 고민스러움이 기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은 우승을 하고 마는구나..." 시선을 돌린 뮤스는 단상의 먼 발치에 있는 팀원들의 모습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로데오를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클라렌은 입을 막으며 어쩔 줄 몰라했고, 팔러는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팀 라벤의 로데오는 점점 커지는 환호성을 받으며 골인 지점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팀의 동료들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골인 지점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로데오를 운전하고 있는 라벤이었다.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으로 달리는 차량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관중들의 행동은 과거 자신이 골인 지점으로 향할 때와는 사뭇다른 것을 느꼈고, 그런 연후에야 자신의 앞에 어떠한 전뇌거도 지나가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승인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 라벤의 시야는 주책맞게 찾아온 눈물로 조금씩 가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골인지점으로 들어간다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을 만날 것이라 생각한 라벤은 눈물을 보이기는 싫다고 느끼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지난 시간동안 격었던 서러운 일들이 지금 이 순간 모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에게 전뇌거 경주는 공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보다는 그의 열정을 모두 담았던 큰 꿈이었고, 지금이 바로 그 꿈이 이루어질 순간인 만큼 진정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골인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라벤은 그나마 참고 있던 눈물을 모두 쏟아 버리기 시작하며 외쳤다. "내가 우승이야!" 결국 팀 라벤의 로데오는 누가 보더라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어쩌면 전뇌거들의 각축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를 관중들은 조용한 우승을 아쉬워 할 수도 있었겠으나, 로데오가 골인지점으로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에게는 그 여유로운 모습 마저도 긴장한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고, 골인 지점을 통과하고나자 너무나 떨었던 나머지 어깨까지 아파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정신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관중 보다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터트려야 할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우승을 했어!" "하하핫! 작년까지 꼴찌를 하던 우리가 우승을 했다고!" 자신들의 로데오가 멈춰선것을 확인한 팀의 동료들은 그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기쁜 모습으로 로데오를 향해 뛰어갔고, 라벤과의 감동의 포옹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로데오까지 달려온 클라렌과 팔러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라벤을 향해 축하의 한 마디를 던지려 할 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도저히 못봐줄 지경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놀렸을 테지만,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온 이유로 라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던 클라렌과 팔러도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전뇌거들의 한가운데서 우승팀이 통곡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렁이고 있었다. 관중들의 목소리를 들은 라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실태를 깨달으며 눈물과 콧물을 대충 닦아 내며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우승을 했는데도 울고 있으면 어떡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하겠어! 빨리 콧물이나 좀 닦으라고!" 밝은 표정으로 외치고 있는 라벤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말고 크게 웃은 클라렌은 그의 볼을 가리키며 외쳤다. "호홋! 네 볼에 길게 묻은 콧물이나 제대로 닦으시지? 네가 징징 짜면서 들어오니까 우리도 울었다! 사내녀석이 혼자 울고 있으면 꼴불견이잖아!" 팔러역시 통통한 볼살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쓸며 미소를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라벤을 끌어안으며 기쁨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녀석! 라벤! 네가 언젠간 해낼 줄 알았다니까!" "하핫! 나도 결혼을 해야하는데 네가 이렇게 껴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고!" "너도 켈트녀석 흉내를 내는거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팔러와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주변을 급히 둘러본 라벤은 클라렌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켈트는 어디있어? 함께 있었던 것 아니야?" 라벤의 말을 듣고서야 뮤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클라렌은 한참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깜빡 하고 있엇는데, 켈트는 어디 좀 다녀온다고 그러고서 사라지더니 아직 안왔어." "승리의 주역이 어디간거지, 이 중요한 때에..."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 질 수 없었는데, 그들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한 수 많은 관중들이 몰려들더니 팀 라벤을 뜻하는 초록색의 옷을 입은 팀원들을 번쩍 들어올려 시청광장의 중심부에 있는 시상대를 향해 나르기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그들은 적잖케 당황하긴 했지만, 매년 우승자에게 해주던 축하의 행동임을 알 수 있었던 그들은 다시 한번 이것이 꿈이 아닌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같은 시간, 뮤스와 로비나드는 행사 요원들에 휩쌓여 시상대의 뒤쪽으로 와있었다. 뮤스의 손에는 순금으로 만든 트로피와 한 장의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연구원 임명증이 들려있었다. 이것들이 바로 우승자의 손에 쥐여줄 모든 것이었고, 이곳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이 두 가지를 받기위해 모든 정렬을 쏟아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뮤스가 손들고 있는 물건들을 내려다 보며 인간이 물질에 부여하는 가치에 대한 짧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비나드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뮤스원장님 께서는 제가 부른 후에 올라 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부탁을 들어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뮤스는 이제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다만 동료들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잘 풀리겠죠. 그럼 저 부터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뮤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로비나드는 뒤쪽에 설치되어있던 계단을 걸어올라가 시상대로 사라졌고, 혼자 남은 뮤스는 보이지도 않는 시상대 쪽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시청광장에는 로비나드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차분하던 목소리에 조금의 흥겨움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이곳에 모인 광중들의 호흥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인 듯 했다. -오늘 제 4회 전뇌거 경주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매년 그래왔던 것과 같이 새로운 우승팀이 나왔습니다. 그 팀은 여러분들이 보신대로 팀 라벤입니다. 여러분들께 팀 라벤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팀 라벤의 이름이 로비나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또 다시 시청광장은 끓어 오르고 있었는데, 관중들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던 팀을 연호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팀 라벤! 팀 라벤! 그리고 주변을 진정시킨 로비나드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또, 오늘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특별한 날입니다. 이 곳에 우승 팀을 시상하기 위해 대단한 분이 와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뮤스 드라켄, 저희 공학원의 설립자이며 현 원장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팀 라벤을 소개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과 경외심이 동시에 섞인 미묘한 분위기였는데, 시상대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뮤스는 드디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시상대와 연결되어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선 뮤스는 가장 먼저 시상대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라벤과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그 뒤로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는데, 그 만큼 동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뮤스가 우승자에게 시상을 할 트로피와 연구원 임명증을 들고 시상대에 올라서자 관중들은 먼 발치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뒤돌아 서있던 동료들도 역시 천천히 몸을 돌리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공학원의 원장이 나오는 곳을 향했다. 뮤스의 생각대로 동료들의 시선이 뮤스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었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신의 눈을 부비기도 했다. 잠시 뮤스의 얼굴을 보며 서있던 라벤이 더듬거리믄 목소리로 물었다. "케..켈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동료들의 반응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그들의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잘 몰랐던 로비나드가 끼어들며 서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뮤스 원장님 이쪽은 잘 아시다 시피 올해의 우승팀인 팀 라벤입니다. 그리고 팀 라벤 여러분 이 분께서 공학원의 원장이신 뮤스 드라켄 이십니다." 로비나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팀 동료였던 켈트가 공학원의 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팀 라벤의 동료들은 지금 이순간 지난 일들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기 시작했는데 불과 반나절 만에 전뇌거를 모두 조립하고,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 동력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개량한 사실들을 떠올려본 팀의 동료들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벤은 잠시 주변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뮤스를 향해 말했다. "켈트... 아니 이제 뮤스 원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껄끄럽기만한 라벤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들을 이해 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 말좀 들어봐 라벤, 내가 너희들을 도와 준것은 동정 따위가 아니었어 그때..." "그런 변명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이건 우리들의 우승이 아니라 너의 우승이다." 뮤스의 말을 허리를 자르고서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라벤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들을 향해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큰 결정이라도 하듯 숨을 들이쉬었다. 시상대에 준비되어있던 확성기를 잡은 라벤을 잠시 동료들의 표정을 살핀 후에 엄청난 수의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팀 라벤의 리더인 라벤입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는 관중들은 변함없이 열렬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라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미안한 말이지만, 저희는 팀 라벤은 이번 우승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벤의 갑작스러운 우승포기 발표는 관중들로 하여금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관중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어떠한 해명을 바라고 있었지만 라벤은 자신을 향해 모아지고있던 시선들을 외면한 채 동료들이 서있는 곳으로 걸어와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잠시나마 우승의 기분을 맛보게 해줘서 정말 고맙군. 그리고 우리는 네게 화가난 것도 아니고, 어쩌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우승을 포기한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우리가 원하던 것이 아니야. 비록 꼴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경주에 참여하고 싶었지 이런 방식으로까지 우승을 하고 싶던것은 아니었어." 어깨를 으쓱거리며 동료들을 바라본 라벤은 뮤스를 향해 가쁜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후훗! 비록 우승은 포기했지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공학원의 원장과 한동안 같은 팀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만족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우승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내려갈께." 레벤과 그의 동료들은 축처진 뒷모습을 뮤스에게 보이며 시상대에서 쓸쓸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쓰린 마음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이대로 그들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시상대의 앞쪽으로 걸어나가 확성기를 잡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무슨 일인가하는 생각에 뮤스의 얼굴로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고, 뮤스는 팀 라벤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팀 라벤의 우승포기에 의아해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갑자기 뮤스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시청광장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시상대에서 내려가고 있던 동료들은 몸을 돌려 뮤스를 바라보았고, 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제가 대신해서 일의 경위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제 신분을 속인 채 팀 라벤의 동료가 되어 그들의 전뇌거를 개조해 주었습니다. 지금 뮤스의 이야기는 그리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데, 뮤스가 직접 팀 라벤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주최측에서 자신들의 부정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뒤로한 채 뮤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선 여러분들은 제 이야기를 듣기 전에 팀 라벤에 대서 들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들은 15개의 참가 팀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는 팀이었고, 가장 약체로 평가되었던 팀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밤에는 잠을 쪼개가며 전뇌거 경주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뮤스의 말을 듣고 있던 관중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는지 측은한 눈길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팀 라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그들과 생활을 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동력기 하나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열정과 도전정신 만으로 경주에 참여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큰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팀 라벤에게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팀 라벤의 동료가 되었고, 이번에 쓰인 로데오 기종의 동력기만을 수리해 준것입니다. 물론 그 동력기의 성능 역시 여타 참가팀의 동력기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맹세컨데 그 외의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지난날 팀 라벤에서 있었던 뒷이야기 듣고있던 관중들은 뮤스의 행위에 대해서 수긍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제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인도적인 행동으로 인식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고자 했던 말을 대충 끝마칠 수있었던 뮤스는 아직도 얼떨떨해 하고 있는 팀 라벤의 동료들을 가리키며 관중들을 향해 호소했다. -말하자면 팀 라벤은 기본의 조건을 겨우 충족시킨 로데오를 자신들의 실력으로 개조하여 당당하게 우승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팀 라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우승의 이유를 제게 돌리며 우승포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이 우승자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뮤스의 질문이 던져진 순간 환호성으로 뒤덮여있던 시청광장은 거짓말 처럼 조용해 져있었다. 팀 라벤의 동료들은 돌연한 분위기에 관중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확성기를 잡고 있던 뮤스도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짓말 같이 시청광장을 가득 매우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팀 라벤! 팀 라벤! 팀 라베! 이 자리에 모인 관중들은 결국 팀 라벤에게 우승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라벤과 팔러, 클라렌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관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는건가?" "아무래도 우리가 우승 받아 들여도 된다는 뜻 같은데..." "하..하... 분명 이건 꿈이겠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던 라벤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것을 느끼며 고갤를 돌렸다. 그곳에는 뮤스가 턱짓을 하며 시상대로 오르라는 신호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의 얼굴을 살핀 팀 라벤의 동료들은 시상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시상대에 당당히 서서 관중들을 바라보자 시청광장을 가득매운 관중들은 모두 그들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펴보였다. 이제 안도할 수 있었던 뮤스는 원래 라벤에게 건네주려했던 트로피와 연구원 임명증을 던지듯 안겨주며 말했다. "빨리 받으라고. 꼴찌 했을 때는 전뇌거 탓을 하더니 우승을 하고 나니까 내 탓을 하는거야? 이번 경주는 틀림없이 너희들의 실력으로 우승한 것이고 관중들도 너희들의 우승을 인정했으니까 더 이상은 딴소리 하지 말라고!" 팀 라벤의 동료들은 더 이상 뮤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를 두들긴 뮤스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연구원 임명증을 받았으니 너희들도 공학원 식구가 된거군. 이젠 너희들이 나의 팀에 들어온것이나 마찬가지니 이번에도 잘 해보자고. 팀 라벤이 해냈던 것 처럼 말이야!" 그의 말을 들고있던 라벤은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한마디했다. "훗! 그래도 너한테 높임말을 쓸수는 없으니까 알아서해." 레벤의 옆에서 훌쩍이고 있던 클라렌 역시 뮤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공학원에 가면 꼭 켈트님과 인사시켜 주는거 잊지말고." 마지막으로 일이야 어찌 되었건 결국 우승을 해서 기분이 좋았던 팔러는 눈물이나 훌쩍이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거구를 날리며 외쳤다. "하하핫! 다들 이 무슨 추한 짓들이야! 지금은 우승을 축하해야 할 때인데 그런 소리나 하고 있다니!" "어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그의 육체 공격에 당해야만 동료들은 결국 균형을 잃으며 볼성사납게 넘어졌고, 그들에게 환호를 보내던 관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상대에 엉켜 넘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시원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팀 라벤의 동료들이 우승을 기뻐하고 있을 때, 먼 발치에서 시상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 천체만리경을 통해시상대의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하게 보고있는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라이델베르크에 있어야 할, 크라이츠와 켈트, 그리고 카타리나였다. 천체만리경을 눈에서 떼언낸 크라이츠는 팔짱을끼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홋! 뮤스 녀석 오랜만에 보니 제법 씩씩해 진것 같군요." 그녀의 옆에서서 천체만리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켈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껄껄! 여전히 힘은 남아 도는 것 같군요. 저 녀석을 보니 괜히 눈물이 팽도는군. 쩝... 카타리나는 어때?" 켈트의 물음을 들은 카타리나는 어떤 대답 대신 촉촉한 눈물을 머금으며 환한 미소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는데, 지난 3년간 가슴에 지녀왔던 아픔과 걱정을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있는 듯 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 비화 전뇌거 경주는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기대에 비해 짧은 시간에 끝이 났지만, 그들의 흥분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전뇌거 경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이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실 것이고, 구수한 버터 삼아 식사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펑! 펑! 펑! 푸른 하늘에는 축포가 터지며 색색의 연기를 피워냈는데, 이는 우승자에 대한 축하의 의미인 동시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루이센 시내의 술집과 음식점에는 이제 곧 밀려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저장고에 쌓아 놓았던 술통과 음식재료들을 주방으로 나르기 시작했고, 시청의 광장과 길거리를 가득 매웠던 사람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점을 선택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고민을 해야만 했다. 또, 혼잡한 시내를 정돈해야 할 의무를 가진 공직자들 역시 축제에 들뜬 기분과 자신이 맡은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최소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나 신분을 떠나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축제의 밤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라벤과 동료들은 단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축하인사에 응해주고 있었다. "자네들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뮤스 원장이 손을 봐줬다지만, 저런 고물 전뇌거로 우승을 하다니 다시 봐야겠어!" "이건 기적일세! 이번 경주에서도 자네들이 마지막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돈을 걸긴 했지만, 멋진 경주였으니 돈을 잃어도 나는 만족한다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외의 선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팀 라벤의 일원들 역시 오늘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에서 내미는 손을 정신 없이 마주잡아 주고 있던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개의 손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뮤스 역시 팀 라벤의 일원으로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팀 라벤의 일원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공학원의 원장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자 갈망했고, 자연스럽게 밀고 밀리는 혼잡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축하를 해주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울상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애써 미소로 대해주고 있었다. "뮤스 원장님 악수 한번만 해주세요!" "이렇게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손 한번 잡아보면 안될까요?" 사람들은 부탁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뮤스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서로 그의 손을 잡아끌기 바빴는데, 조금 과격한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도 않았기에 뮤스는 난감해 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과도 인사를 해야하니 제 손 좀 놔주시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한다고 해서 그의 처지를 이해해줄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힘으로 손을 빼내며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손을 끌어 당겼고, 뮤스는 또 다시 악순환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한 뮤스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검게 그을리지 않은 하얀 손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부드러운 그 느낌이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올린 뮤스는 여름의 아지랑이 같은 여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녀의 모습을... "카..카타리나?" 뮤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있는 지금도 스스로를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카타리나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훗! 아무래도 내가 무리를 했었던 모양이군. 헛것이 다 보이고 말야." 그러나 자신을 향해 외치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 사이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뮤스. 건강해 보이니 정말 다행이야..." "너... 정말 카타리나 너 맞는 거야?"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 멍한 표정은 여전하구나? 그럼 내가 카타리나가 아니면 누구겠니?" 웃으며 말을 던진 카타리나는 눈앞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함을 느꼈다. 뮤스의 앞에 서기 훨씬 전부터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다짐했었지만, 웃음 속에 눈물이 섞이는 것은 어쩔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얼굴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 위해 소매를 들어올릴 때에는 이미 뮤스의 손이 먼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정말 카타리나구나..." 카타리나 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뮤스의 눈은 수많은 말을 담고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그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그녀의 몸을 끌어 당겨 품에 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말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던 이유에서였다. 포옹을 하고 있는 뮤스와 카타리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내막을 알지 못한채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모의 여성과 공학원 원장의 포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자신들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흐트릴 때가 아니라는것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 카타리나의 어깨 넘어로 눈에 익은 인물들이 뮤스의 시야에 잡혔다. 늘씬한 몸매에 붉은 드레스가 유난히 잘어울리는 여인과 그녀의 허리를 간신히 넘기는 키작은 드워프, 바로 크라이츠와 켈트의 모습이었다. 뮤스를 향해 3년전 헤어지던 날처럼 짖굿게 미소지어 보인 켈트는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휘유~! 이녀석 꽤나 대담해 졌는걸?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껴안아버리다니 카타리나는 이제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긴 틀렸군!" 뮤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역시 켈트의 말을 들었는지 얼굴을 붉힌 그녀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뮤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카타리나에게서 시선을 뗀 뮤스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밝게 웃으며 크라이츠와 켈트 가까이로 다가갔다. "켈트 아저씨! 정말 변한게 하나도 없군요!" "껄껄!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가 얼마나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냐?" 손을 내저으며 너털 웃음을 터트린 켈트는 팔을 넓게펴 뮤스를 안아주었다. "아무튼 잘 돌아왔다. 제법 씩씩해 져보이는게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었군!" 뮤스의 가슴아래 까지 밖에 닿지 않는 켈트였기에 오히려 뮤스가 그를 끌어안은 모양이 되었지만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뮤스의 눈길이 닿은 곳은 크라이츠의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그저 담담한 미소만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잠시동안 외출을 하고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뮤스의 거칠어진 손을 살며시 잡은 크라이츠는 이상스러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돌아왔구나. 그래 힘들지는 않았니?" 과거를 회상해 보기라도 하듯이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네 누님. 비록 힘들긴 했지만 이 세상에 제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닿게해준 중요한 시간들이었죠." "잘됐구나. 그럼 그걸로 충분한 것이지."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크라이츠는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여기는 긴 이야기를 하기에 그리 적당한 곳이 아는것 같은데 이만 자리를 옮길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아직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없에 헤매고 있는 팀 라벤의 동료들을 돌아 보았다. 뮤스는 그들을 향해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동료들에게 말좀 하고 뒤따라 가도록 하죠." "흠... 그들도 이제 공학원의 식구가 될것인데 함께 자리를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어떻겠니?" 어깨를 으슥거린 뮤스는 동료들이 뛸듯이 기뻐할 모습이 눈앞에 선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후훗! 녀석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그럼 우리는 공학원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동료들과 함께 오도록 하거라. 그리고 서로 할 말이 많을테니 카타리나도 뮤스와 함께오도록 하렴. 그 동안 카타리나를 보기가 얼마나 안스러웠었는지..." 말끝을 흐린 크라이츠는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돌렸고 켈트는 뮤스를 향해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인 후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크라이츠와 켈트의 모습이 인파에 묻히게 되자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을 끌며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그들과의 거리는 상당했고, 그 사이를 가득 메우고있는 사람들로 인해 걸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카타리나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했기에 최대한 그녀에게 붙어 움직이는 중이었다.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자 갖가지 색깔을 지닌 사람들의 머리 넘어로 라벤과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만히 있더라도 땀으로 옷이 젖을만큼 더운 날씨에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모두 지친기색이 역력했고, 특히 팔러는 더위를 많이 타는지 뒷덜미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축축히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쳐내린 팔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라벤을 향해 외쳤다. "이봐 라벤! 이렇게 더있다가는 공학원에 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힘겹게 몸을 돌린 라벤 역시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있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근처에있던 클라렌의 팔을 끌어 당기며 물었다. "클라렌 이제 그만하고 빠져 나가자! 그리고 켈트! 아...아니지... 뮤스는 어디에 있는거야?"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수습하고있던 클라렌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뮤스를 찾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카타리나와 함께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가오고 있는 뮤스를 가리켰다. "저기야 저기! 아무래도 뮤스가 있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그제야 뮤스를 포착한 라벤은 손을 내저으며 나가란 신호를 했고, 팔러와 클라렌의 옷을 움켜잡고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루이센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라벤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유난히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그는 루이센시의 골목지도를 모두 머리에 담고 있었는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을 하나씩 따돌리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피곤을 잔뜩 머금은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던 팔러는 좁다란 골목의 모서리를 돌아서며 무릎을 짚고 주저 앉았다. "헥헥! 이제 그만 뛰어도 될것 같은데? 따라 오는 사람도 없다고!" 그의 앞에서 달리던 라벤과 클라렌, 그리고 뮤스와 카타리나도 뒤를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벌떼 처럼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 없음을 확인한 라벤은 셔츠의 목단추를 풀러내며 가쁜숨을 내쉬었다. "휘유... 오히려 전뇌거경주는 우승한 다음에 살아 남는게 더 중요한것 같군. 정말이지 두번은 못할 짓 같아." 클라렌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하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풋! 우리가 우승할 준비가 안된 상태여서 그럴지도 모르지 뭐. 미리 알았더라면 손흔드는 연습이라도 밤새 했을 텐데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를 터트렸고, 이제야 자신들이 우승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여유가 생긴듯 했다. 동료들의 웃고있는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던 라벤은 문득 카타리나의 얼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멈추었다. "어라? 그런데 이 아가씨는 누구지? 어째 낯이 익는데?" 라벤은 대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 정말 빨리도 물어 보는군. 이쪽은 라이델베르크에서 온 카타리나라고해." 순간 카타리나라는 이름을 들은 팀 라벤의 동료들은 자신의 눈을 부비며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고,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동시에 외쳤다. "전뇌거 연구부 수석공학자!" 그들의 반응에 뮤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고, 카타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라벤과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었네요. 공학원의 카타리나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더욱 들뜬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대한 영문을 모르던 뮤스는 라벤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왜 그렇게들 놀라는거야?" 라벤은 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카타리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양은 공학원 지망생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지. 나이 22세, 라이델베르크 램브리겐 대학교 연금술학과 차석졸업. 전뇌거 연구부의 수석공학자, 로데오의 후속기종인 루펜트의 설계 담당." 그의 말을 팔러가 이었다. "특히 빼어난 미모와 착한 심성을 가진데다가, 애인이 없다는 소식이 퍼지자 상당한 수의 남성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란 말이지."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고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타리나의 얼굴을 살폈고, 뮤스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는 어떨지 몰라도 제일 마지막의 이야기는 확실히 사실과 다르군요. 저도 엄연히 뮤스 드라켄이라는 이름의 애인이 있으니까요." "네에?!" 카타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짤막한 비명성을 지른 라벤과 팔러는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라벤은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뮤스에게 물었다. "지금 카타리나 양이 농담하는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팔러의 반응 또한 가관이었다. "뮤스 너! 아무래도 밤길을 조심해야 할거야. 이 사실이 밝혀 졌다간 카타리나 양의 추종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한껏 시무룩해진 라벤과 팔러의 뒤에 서있던 클라렌이 그들의 뒷덜미를 잡으며 말했다. "쯔쯧... 이 한심한 사내들아 현실을 받아 들이라고. 이렇게 아쉬워 한다고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잖아? 얼굴도 못알아본 주제에..." 클라렌의 말에도 얼굴이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자 화제를 돌려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아! 잠시 잊었는데, 오늘 공학원에서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시더군." 역시 먹을 것에 민감한 팔러가 먼저 반응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누가?" "너희들도 아마 알고 있을거야. 크라이츠 누님과 켈트 아저씨." 뮤스의 말이 떨어지자 라벤과 팔러의 얼굴에서 한순간 모든 실망이 사라졌고, 그에 합세해 클라렌까지 이성을 잃고서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럼 켈트님께서도 이곳에 계신다는 말이니? 어머 이게 웬일이야!" "크라이츠님과 켈트님이라면 이제 우리의 상관이 될테니 잘보여야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야겠군!" "몇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 뮤스는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하... 아마 6시까지 공학원으로 오면..." "6시라... 그럼 나중에 보자고! 얘들아 가자!" 뭐가 그렇게 바쁜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팀라벤의 동료들은 손을 흔들며 골목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는데, 방금전만 해도 금새 쓰러질 것 같이 지쳐있던 모습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뮤스의 옆에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타리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푸훗! 정말 엉뚱한 사람들인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뮤스가 내려다 보자 카타리나는 그의 흐트러진 옷깃을 여며주며 설명했다. "생각해보렴. 공학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뮤스인데, 정작 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다가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휘둥그레 지잖아. 저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이 없는가봐." 카타리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팀 라벤의 동료들이 사라진 곳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도 좋잖아? 딱딱한 상하 관계보다는 바로 옆에서 허울없이 지내는 것이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는데 더욱 효과적이니까. 그럼 우리도 공학원으로 돌아갈까?" 뮤스의 말에 미소로 답한 카타리나는 그의 팔에 매달리듯이 팔짱을 꼈고, 두 남녀는 지난 날동안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내며 공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이 되자 붉은 햇빛이 전뇌거안으로 스며들었다. 운이 나쁘게도 해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크라이츠는 부채를 펼쳐 부신 눈을 가렸지만, 레이스로 만들어진 부채는 효율적으로 햇빛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부채를 통과한 햇빛이 크라이츠의 얼굴에 그림자의 문양을 만들어내자 나직한 한숨을 내쉰 크라이츠는 부채를 접고서 고개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크라이츠의 맞은편에 앉아 거리의 풍경을 보고있던 켈트는 눈을 엷게 뜨며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보고있었는데, 원래 축제를 좋아하는 드워프족으로서 전뇌거에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있는것이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뮤스의 귀환을 환영하는 날인만큼 자신의 기분을 억누를 수 밖에없었고,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뛰쳐나가고자 하는 욕구를 힘겹게 뿌리친 켈트는 창에서 고개를 돌리며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저 크라이츠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를 들은 크라이츠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대답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 "흠. 대답해 주시기에 곤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뮤스가 누명으로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줄 것인가 하는것이죠." 그제야 창으로 부터 고개를 돌린 크라이츠는 의미깊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홋! 제가 굳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뮤스는 이미 자신이 누명을 썼었다는 사실쯤은 눈치를 챘을거에요. 이제와서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뮤스를 애써 추방시킨 보람이 없겠죠. 그 일때문에 내가 얼마나 바빴었는데..." 크라이츠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뮤스가 이미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미심적은 켈트의 말을 듣고있던 크라이츠는 부채질을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럼 이렇게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죠. 인간들이 스스로 지혜를 쌓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게 된답니다. 이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종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과 그 밖의 유사인종은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명의 차이죠. 켈트씨는 언제 처음 드워프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게 되었나요?" 돌연한 질문에 볼을 긁적이며 생각을 해보던 켈트는 확실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대략 50살 전후였던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켈트씨의 말대로 유사인종인 드워프나 엘프등은 대게 50세가 넘어서야 살아가는데 충분한 지혜를 갖추게 되고, 혼자서 살아 갈 수 있는 성인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반면 인간의 나이로 50세라 함은 삶의 지혜는 갖추었으나 인생의 종반부에 해당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젊은 인간들은 타 유사종족에 비해 대체적으로 우둔하게 보이는 것이죠." 잠시 말을 끊었던 크라이츠는 켈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서도 유사인종 중 가장 번영을 누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바로 유사인종 중 유일하게 스승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죠. 인간들은 이 스승을 통해 짧은 기간동안 충분한 지혜를 습득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타 유사인종이 5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한 세대의 성인층을 키워내는 동안 인간들은 같은 시간에 두 세대의 성인층을 키워 내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인간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켈트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 지고 있었다. "과연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뮤스에게 혹시 스승이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입니까?" 이제야 켈트에게 대충 의사 전달이 되었다고 생각한 크라이츠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그라프 라듀아보, 인간들 사이에서는 대현자라 불리우는 인물이랍니다. 그를 미개척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느라 화석속에서 잠들어있던 카일락스까지 부화시켜야 했지만 보기 드물게 아는것이 많은 인간이니 뮤스의 스승으로써는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죠." "대현자 라듀아보..." 켈트 역시 익히알고있는 이름이었다.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인물이었고,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을 모를만큼 소식에 어둡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렴풋이나마 그간 있었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던 켈트는 나직한 탄성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흠... 그렇다면 뮤스는 추방을 당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크라이츠님의 계획 아래에서 움직였던 것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부채로 입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뮤스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도록 하죠. 어차피 알아 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이츠님." 켈트의 확답을 들은 크라이츠는 눈을 감으며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었고, 복잡한 심정이 바탕에 깔린 켈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지혜의 극이라 불리우는 대현자를 마음대로 조정한 크라이츠가 두려움의 대상을 넘어선 경외의 대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2 같은시간, 뮤스와 카타리나는 겔브호수 주변으로 만들어져있는 좁다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고운 모래 위에 둥근 자갈을 깔아 만든 이 산책로에는 대부분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자갈이 전해주는 시원한 느낌을 즐기는 듯 했다. 조잘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인 카타리나는 뮤스를 놓치기라도 할까 무서운지 그의 팔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고, 뮤스는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 카타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중 대부분은 뮤스가 떠나있는 동안 공학원에 있었던 일들이었는데, 카타리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뮤스가 공학원에 적응을 하기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켈트 아저씨는 매일 같이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니까. 헤밀턴이 켈트 아저씨의 수비범위를 넘어서 버렸으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상상을 해보던 뮤스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는걸? 폴린보다 더 난폭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학교생활을 할때에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는데, 역시 공학원에서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지내다 보니 폴린도 손을 들어버릴 정도라는 걸 알게 됐지. 덕분에 히안은 더욱 폴린이 좋아졌나봐. 요즘은 걔들은 티격거리지도 않아."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 뮤스는 피식 웃었다. "하핫! 헤밀턴 덕분에 상대적으로 폴린이 유순해 보이는 것이겠구나?" "풋...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헤밀턴과 함께 있다보면 밝은 성격에 동화되서 어느새 어두운 기분들이 사라지곤 했어.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 가볍게 이야기를 이끌고있는 카타리나와 눈빛이 마주친 뮤스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미안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일로인해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 할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자네! 여기있었군!" 뮤스와 카타리나는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배가 제법 나온 중년인과 그의 목에 올라탄 소년이 있었는데, 한눈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본 뮤스는 반가운 표정과 난감한 표정을 동시에 짖고있었다. "아! 길버트씨였군요?" 자신을 알아보자 길버트는 털털한 웃음을 터트렸고, 그의 아들은 뮤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허헛! 자네 아직도 떠나지 않았단 말인가?" 길버트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아직 뮤스의 신분을 모르는 듯 했고, 자신이 신분을 속인 것에 대해 섭섭해 할지도 몰랐기에 뮤스 역시 신분을 애써 밝힐 생각은 없었다. "훗!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이곳에서 할 일이 생겼거든요." "하하! 그렇게 변명할 거리는 아니지 않나? 자네도 전뇌거경주를 구경하고 싶었을 테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말을 하다말고 카타리나에게 시선이 멈춘 길버트는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저 아가씨는 누군가? 혹시 오늘 건진 아가씨? 하긴 자네 나이때는 여러 여자를 경험해 보는것도 좋지!" 길버트는 스스로 귓속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지만, 사실 카타리나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만큼의 목소리였기에 뮤스는 적지않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쪽은..." 그러나 길버트는 이미 다 안다는 투로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흐흣! 거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렇게 나오자 뮤스는 그에게 설명을 해봐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손을 내저으며 단념했다. 길버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 전뇌거경주는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비록 멀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젊은이까지 나타나다니 이번 경주를 보러오지 않았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일세! 게다가 팀 라벤의 승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구!" 무등을 타고있는 아들의 손을 높이 치켜든 길버트는 자신이 더욱 신이난 얼굴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을 멈춘 길버트는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자네도 알고있듯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들 녀석의 뒷바라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 하지만 오늘 팀 라벤의 우승을 보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지! 언젠간 로페드로 이 녀석도 열심히 해서 팀 라벤의 팀원들 처럼 당당하게 공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나와 약속을 했다네!" 부자의 밝은 얼굴을 보며 뮤스는 미소지었다. "잘되었군요. 집에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뮤스의 물음에 호탕하게 떠들던 길버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흠 사실 이곳에서 축제 분위기를 더 즐기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지만, 우리는 오늘 밤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네. 집사람을 혼자 두고 와서 사실 걱정이 되거든." "아... 그러시군요.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길버트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네. 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거든. 아가씨와 둘이서 좋은 시간을 가지게나. 허헛! 그럼 자네에게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겠네." "네. 길버트씨도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뮤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길버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고, 그의 아들인 로페드로 역시 손을 흔들어 뮤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뮤스와 점점 멀어지자 길버트는 무등을 타고있는 아들의 다리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로페드로 뮤스 형의 얼굴을 잘 기억했지?" 길버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로페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런데 왜요?" "후훗! 뮤스 형이 바로 공학원의 원장님이란다. 네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공학원을 만든 사람이지." "네?! 정말요?" 로페드로는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뮤스가 잇는 곳을 바라보았고, 귓가로 길버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도 꼭 저 뮤스형 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따뜻한 사람으로..." 로페드로는 뮤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센 공학원으로 돌아온 뮤스는 연회복으로 갈아입으라는 크라이츠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위에 놓여진 상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뮤스의 귀환을 축하하고, 전뇌거 경주를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곧 열리기 때문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뮤스는 그리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이도 아닌 크라이츠의 말이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크라이츠의 존재는 뮤스에게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었다. 진한 밤색의 목재 상자 안에는 한 벌의 연회복과 그에 어울리는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라이츠가 뮤스의 취향을 잘 알 고 있었기에 크게 화려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목을 조여올 것같은 흰색의 셔츠를 꺼내든 뮤스는 작은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복잡하기만한 연회복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저것 대충 끼워입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뮤스는 옷매무새를 하나씩 정리해 보면서 마무리를 했다. "이렇게 하면 된건가? 재단선 하나까지 맞춰야 하다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훨씬 좋을뻔 했군." 쓴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하던 뮤스의 눈은 치렁한 머리에 닿아있었다. 손으로 몇번 쓰다듬어 보아도 정리가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둘러본 뮤스는 상자를 포장했었던 끈을 주워들어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마친 그는 가방을 어께에 매며 방을 나섰다. 공학원의 전시관은 연회장으로 변해있었다. 전시품들을 올려놓았던 선반들은 어느새 연회장의 테이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고, 전시품들을 비춰주던 천정의 조명들은 음식들을 비추며 맛깔스러운 색깔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는 크라이츠와 카타리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음식이 마련되어있는 테이블 주변에서는 켈트가 자신의 식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그다지 배가 고픔을 느끼지 못했던 뮤스는 대화를 나누고있는 크라이츠에게 다가갔다. 마침 뮤스를 발견한 크라이츠는 잠시 양해를 구하며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고, 뮤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원장님께서 나오시는군요. 여러분들께 공학원의 원장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크라이츠가 말을 마치자 마자 그녀를 둘러싸고있던 사람들은 한쪽을 터주며 뮤스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차피 연회란 사람들 간의 사교를 위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뮤스는 싫은 기색을 감춘채 가볍게 자기 소개를 했다.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희 공학원에 큰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가졌으면 합니다." 바른 자세와 상대를 함께 존중하는 그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초대 되어온 사람들은 호감어린 표정을 지으며 각자 자신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루이센의 시장인 바르커드 폰 아빌란 이라고 합니다. 추방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구드라엔 폰 뷰라티어 남작이라고 합니다. 오늘 전뇌거경주를 감명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행사가 되었으면 하는군요." 한명, 한명의 소개를 들을 때 마다 뮤스는 그라프에게서 들었던 제국의 신분계층에 대해 떠올렸고, 덕분에 그가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또 무엇을 하는 인물인지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 뮤스를 바라보고있던 크라이츠는 능숙하게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처하는 뮤스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날렸고, 다시 한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만족해 하고 있었다. 뮤스는 루이센시의 귀족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귀족의 가치는 이름만 남았을 뿐이지만, 능력적으로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정을 받는 이들이었기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뮤스의 폭넓은 지식에 감탄을 해야만 했는데 예술, 종교, 역사에서 부터 경제나 정치까지 그 한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글쎄요... 그 당시 대륙 전체를 통일했었던 바르카두 제국은 식민지 개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바르카두 제국이라 생각했을 뿐만아니라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대륙에서 생산되는 자원들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대부분의 오이랍대륙 국가들이 봉건제도에서 자치제도로 옮겨감으로 인해 국민들의 인권향상, 인구증가, 생활수준 향상 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에 따라 각 국가는 필요한 자원들이 늘어만 갔고, 오이랍 대륙에서의 생산되는 물량으로는 한계를 느끼게 된것이죠. 그렇기에 대륙의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음으로서 본토의 안정을 꾀하고, 밖으로는 식민지 개척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뮤스가 자신의 말을 정리하려 할 때, 입구에서는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는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세명의 남녀가 고용인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라벤과 동료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초청장 문제라는 것을 알게된 뮤스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옮겼다. 동료들에게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초청장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아니! 글쎄 안된다니까요! 댁들이 팀 라벤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초청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 들여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뮤스를 불러 달란 말입니다! 우리를 여기로 초청한 사람이 바로 뮤스니까요!" "원장님은 지금 귀빈 분들 접대에 바쁘십니다!" 고집스럽게 들여보내주지 않는 안내원의 행동에 짜증을 느낀 클라렌은 팔을 걷어올리며 연회장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뮤스!!! 뮤스 나와라!!!" 그녀의 외침 덕분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은 입구쪽으로 돌아갔고, 한발 늦게 도착한 뮤스는 안내원을 붙들며 말했다. "이들은 내가 초청한 것이 맞으니 들여 보내도 좋네." 원장인 그가 직접 나와 사실을 밝히자 안내원은 적지않게 당황한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을 뿐이죠. 이 친구들은 제가 안내할테니, 하던 일을 계속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짤막하게 대답한 안내원은 라벤 일행에게 가볍게 사과의 인사를 하며 다시 입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랑이를 하느라 구겨진 옷을 매만진 라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한거냐? 까짓 초청장이 뭐라고..." 팔러가 그의 말을 도왔다. "우리 동네에서 파티를 열면 초청장이 없어도 얼마든지 들러서 즐기고 갈 수 있다구!" 동료들의 추궁에 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정말 미안해. 이것도 사업에 관련된 행사인 만큼 나는 전혀 상관을 하지 않거든." 그들이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대충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뮤스는 안으로 안내를 했다. 안으로 들어온 라벤과 동료들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는지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농 속에 잘 간직해 놓았던 구식의 연회용 슈트를 꺼내 입을 때만해도 신이 났었던 기분은 어느새 연회장의 분위기에 짖눌려 버린 것이었다. "우... 이런게 바로 상류 사회라는 것인가? 이 가구들만 해도 북부의 고급 목제에 일류 장인들이 만든것들이군..." "저기있는 고기들도 보통이 아니야. 지방질과 연한 살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입에 들어가면 기가막힌 육질을 느끼게 되지." "게다가 빵들은 모두 듀들란 식이군. 통밀을 그대로 갈아서 빵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실력이 없는 사람이 만들면 도저히 먹지도 못하게 된는데, 저 빵들은 정말 군침돌게 생겼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직업대로 관찰의 초점을 맞추었고,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던 뮤스는 동료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그렇게 주눅들건 없다구. 저것들이 아무리 고급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을 만족하도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오히려 길거리싸구려 보다 못한것이나 다름없어." 뮤스의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조금 긴장을 풀어낸 동료들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에 초청된 상류의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갖가지의 요리를 즐기며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도이첸 제국 유사이래 최고라 할만큼 활기차게 변해있었고, 그 중심에는 잔뜩 취한 라벤과 동료들이 있었다. 취기가 오르자 기분이 무르익은 클라렌이 테이블 위로 올라 노래를 뽑기 시작한것이 시발점이 되었는데, 축제의 날인 만큼 독한 술을 준비되어 있었고, 이를 마시고 쉽게 취한 귀족들과 상류층의 인사들 역시 체면에 아랑곳 하지 않은채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었다. 카타리나와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즐기던 뮤스는 연회장에서의 버릇인지 답답함을 느꼈고, 카타리나와 함께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발코니에 기댄 뮤스와 카타리나는 화려하게 불이 밝혀진 거리를 둘러보았다. 연회장 뿐만 아니라 거리역시 비슷한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는데,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뮤스와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을 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며 독백 처럼 입을 열었다. "후아! 이제야 돌아온게 실감이 나는군. 그 동안 사람들의 떠들석한 모습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또, 밤을 밝히는 가로등도 그리웠었고, 먼 지평선을 가리며 서있는 건물들도 그리웠지. 후훗!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웠었어."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카타리나는 그간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는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지난 이야기일 뿐이야. 이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헤어지지 않을거야.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테니까."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리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이제는 헤어지지 말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둘의 사이에 때아닌 무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하자 뮤스는 분위기라도 바꿀겸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전뇌거경주가 있었던 것도 4년전이었군. 후훗! 그때만 해도 다들 처음 운전해보는 전뇌거에 굉장히 신기해 했었는데, 지금은 직접 전뇌거를 제작하고 있다니, 정말 세월 빠른걸?" 카타리나 역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지 밝은 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풋! 정말 네가 나타나기 전만해도 모두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지. 만약에 네가 우리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각자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을 거야." "후훗 그런가?" "그럼! 우리 모두 많이 변했지. 그런데 변하지 않은건 너 밖에 없어! 예나 지금이나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그 때도 전뇌거 사고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드베인 숲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절 하는 줄 알았다고!" 말을하고있는 그녀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듯 얼굴이 천천히 상기되고 있었다. 뮤스는 얼굴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주며 말했다. "그래서 약속하는거야. 이제 다시는 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사랑해 카타리나." "그 약속 꼭 지켜주길..." 말끝을 흐린 카타리나는 뮤스의 품속으로 뛰어들었고, 뮤스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감흥이 사라지기도 전에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역시 젊은 남녀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구나."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뮤스와 카타리나는 큰 잘못을 저지르다가 탄로난 아이마냥 깜짝 놀라며 멀찌감치 떨어졌다. 순진한 행동에 피식 웃은 크라이츠는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쯔쯧... 젊은 녀석들이 고작 포옹하다가 들킨걸 가지고 그렇게 수줍어 하긴. 아무튼 너희들은 너무 순진한게 큰 탈이라니까. 뮤스 너도 조금더 사내 다워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신색을 바로 잡은 뮤스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흠... 사내다운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어머나! 왜 상관이 없니? 진정한 사내라면 좋아하는 감정 정도는 누구 앞에서든 당당하게 드러내야 하는거란다! 호호홋!" 예전의 뮤스였다면 이쯤에서 한숨을 내쉬며 더이상 대화 하기를 포기했겠지만, 지난 3년은 그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실천하기에 앞서 타인에 대한 예의에 대해서는..." 뮤스의 이야기가 길어질듯 하자 더이상 듣기 귀찮아진 크라이츠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뮤스를 향해 던졌다. "녀석. 이제는 머리가 제법 굵어졌다고 이 누님께 말대답을 하는구나. 잔소리 말고 그거나 읽어 보렴. 추방 기간동안 네 앞으로 도착한 편지란다. 그 편지를 남기고간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 같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말을 하다말고 편지를 재빠르게 잡아챈 뮤스는 짚이는 것이 있었기에 안색을 굳히며 되물었다. "지금 듀들란 제국이라고 했습니까?" 그새 카타리나의 옆으로 다가온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니?"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있는 크라이츠는 뮤스의 반응을 살폈고, 곧 카타리나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 "카타리나양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죠. 뮤스의 표정을 보니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할 것 같군요." "네. 알겠습니다."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크라이츠와 뮤스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았기에 순순히 크라이츠를 따라 나섰다. 혼자 남게된 뮤스는 떨리는 눈으로 편지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익은 듀들란 제국의 인장이 진하게 찍힌 편지 봉투는 제법 두툼했기에 꽤나 긴 내용의 편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후우..." 나직한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뮤스는 밀랍으로 된 인장을 뜯어내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어 펼쳐보았는데, 오른쪽에서 부터 반듯하게 세로쓰기가 되어있는 편지의 앞부분을 간단하게 읽어낸 뮤스는 가슴으로 부터 전해오는 격정을 애써 누르며 입을 열었다. "며..명신..." 자신의 실명을 나직하게 내뱉은 뮤스는 살아 꿈틀 대는듯 유려한 모양의 한자로 쓰여진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명신 전. 먼저 네가 신변이 가장 궁금하구나. 어렵게 너의 행적을 알게 되었건만 나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체하는 사이 네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버리다니 정녕 답답하기만 하단다. 부디 네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이 글을 읽어 주길 천지신명께 빌고 있단다. 나는 지금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듀들란제국이라는 곳에 귀속되어 일정기간동안 이들을 돕고 있는 중이란다. 이들은 너의 추방 소식을 듣고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모양이다만, 나는 네가 그들의 귀계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한단다. 짧은 편지 상으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다만, 이들은 약속기한을 넘긴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내 몸 하나는 어찌 할 수 있겠지만, 너마저 듀들란 제국에 귀속된다면 더욱 빠져나가기는 힘들어 진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그러니 네가 속해있는 도이첸 제국이란 곳에서 내가 찾아갈때까지 기다려다오. ..중략.. 나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마음 편하진 않지만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단다. 조선에서 이론으로만 설명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내 손으로 이루어 내고 있으니 이 보다 좋은 실험의 장은 없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너 역시 남은 시간 동안 그곳에서 너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보도록 하거라. 이것이 언젠가는 새로운 조선 건설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단다. ..중략.. 너는 두 어께에 조선의 미래라는 막중한 짐을 짊어지고 있단다. 단군에서 시작된 반만년 한민족의 번영이 네 손에 달린 것이지. 부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이 사실만은 네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많다만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한 듯 하니 이만 줄이도록 하마. 다시 만날때까지 몸 보중 하거라. 장영실의 긴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지만, 뮤스의 기쁨과 갈등이 섞인 눈은 아직도 편지 위를 서성이는 중이었는데, 오랬동안 기다렸던 장영실의 소식을 듣게된 기쁨과 이별이라는 막연한 갈등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3 명의 움직임 진농의 먹을 뿌려 놓은 듯 어둑한 공간에는 나직한 호흡의 떨림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었기에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고, 이곳에 모인 몇몇의 사람들은 옆사람의 작은 기척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허공을 향해있었다. 눈으로 볼수도 없었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확실한 존재감으로 그들을 짖누르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로부터 한 노년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그들의 귓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태위... 이제 말해 보시구려! 대체 무슨 큰변이 일어났기에 이리 야심한 밤에 짐에게 자리를 청한 것이오? 북의 오랑케가 국경을 넘어 내려오기라도 했단 말이오!" 역정을 내며 물음을 던지고있는 노년인은 심기가 상한 듯 말끝이 야릇하게 말려올라갔고, 질책을 받은 자는 노년인의 이러한 반응에 크게 두려움을 느꼈는지 재빨리 고개를 굽신거리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황제폐하, 늦은밤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려 황공하오나, 조선으로 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되어 늦은밤 염치불구하고 만나뵙기를 청하였사옵니다." 태위라는 직위를 가진 인물은 어둠속의 노년인을 향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노년인이 바로 당대 천하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대명제국의 황제였던 것이었다. 급박해 보이는 태위의 목소리에 화를 조금 수그러트린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흠... 대체 조선이 어쨌다는 말이오?"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어 들이자 내심 한숨을 내쉰 태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도 조선이 수 대에 걸쳐 조공의 명목으로 수백종의 공학기술을 본 명제국에 이전해준 사실을 익히 알고계실 것이옵니다." "흐음... 그것은 짐도 알고 있소. 선대의 황제들께서 대륙의 동쪽 끝에있는 오랑케인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인정해주니 이에 보답하기 위해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오? 그런 보잘것 없는 작은 나라에서 본국보다 높은 기술을 보유하고있는 것이 천하의 중심인 본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일이오만, 그래도 형의 나라라 떠들며 받들고 있으니 대인의 풍모로서 감싸 주었던 것이었소." 황제가 말 한마디 내뱉을 때 마다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취하던 태위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사실 조선으로 부터 비단이나 가축, 특산물 등 수 많은 물품들이 조공의 명목으로 들어오고 있사오나, 이 모든 것을 합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공학기술의 유용함에 비할바가 아니었습지요." "그러한 사실 쯤은 짐도 잘알고 있는 바이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황제의 성격이 불같음을 뻔히알고있던 태위는 황가 다시금 역정을 내려 하자 긴장을 느키며 말을 이어갔다. "헌데... 몇 해 전 부터 대홍로를 포함한 조공 담당관리들은 조선에서 본국으로 이전되는 공학기술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처음에야 그들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았지만, 해가 지날 수록 이런 현상이 심해지게 되자 대홍로는 조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소신에게 사태를 알려오게 되었던것이옵니다. 그날로 소신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명인들을 통해 밀정을 섭외하기에 이르렀고, 여러 경로를 통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사옵니다." "놀라운 사실?" 황제의 되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태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밀정에 의하면 몇해 전 조선의 공학원은 조선왕의 명으로 두개로 나뉘어 졌다고 하옵니다. 그 중 하나는 본명제국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한 곳이라 했고, 주요 공학기술을 가진 또 하나의 공학원은 경복궁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사옵니다. 그 이후 비밀 공학원에서는 그간 축적된 모든 공학기술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효율적인 체계를 구축하여 공학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위의 성명을 귀기울여 듣고있던 황제는 의문이 생겼는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허... 그들의 행동이 본국을 능멸항 행위라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이 밤중에 짐을 불러낼 만큼의 큰일이라 생각되진 않는구려... 조선처럼 작은 나라의 일개 기관의 움직임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황제와 태위의 대화를 듣고있던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신이 한 마디 올리겠사옵니다. 조선의 공학기술은 그리 만만히 볼 것이 아니옵니다. 선왕들께서는 조선 공학의 저력을 익히 알고계셨기에 그 발전을 막기위해 유교사상까지 전파하는 수고를 보이셨사옵니다. 즉, 공학기술을 잡다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그 발전을 저해한 것이지요. 또, 그런 이유로 말 잘듣는 양때로 변한 조선은 자신의 쓸게를 빼주 듯 가진 공학기술들을 본국으로 순순히 넘겨주었던 것이옵니다. 허나, 당대의 조선왕은 이미 유교의 폐해를 이미 인지하고, 공학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공학기술 개발을 장려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공학기술이 무기제조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고, 밀정의 말에 따르면 공학원에서 이미 십 여종의 가공할만한 신무기들이 개발, 시험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비록 지금은 조선이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이 가진 공학기술의 역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게 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옵니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나직하게 숨을 가다듬어 본 태위는 힘을 얻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들으셨다시피 공학기술을 등에 업게된 조선은 머지않아 명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떠오를 것이 불보듯 하옵니다! 위험한 독초는 잎이 더 자라나기 전에 뿌리를 잘라내야 하듯이 조선을 이대로 두어서는 결코 아니되옵니다! 부디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태위의 상소를 마지막으로 장내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기운만이 어두운 공간에 감돌기 시작했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잠시 동안 태위의 가슴을 태우고 있을 때,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명제국에 위협이 된다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허나, 공들도 본국의 조정역시 당쟁으로 어지러워 조선과의 전쟁을 치룰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게다가 이렇다할 대의명분 또한 없으니 이번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 비밀리에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공학원의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은 태위에게 위임할터이니 짐을 실망시키지 마시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어둠이 가득찬 허공을 바라보던 인물들은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오체복지 하기 시작했고, 황제는 나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휘이이잉! 듣는이의 가슴을 베기라도 할듯 매서운 바람소리가 모든 변화의 전부인 이곳, 날카로운 산의 봉오리들은 수천년간 회색의 하늘에 닿고싶어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었고, 차가운 바람의 매서움에 경직된 듯 얼어버린 눈더미는 산중턱의 기암괴석을 덮고 있었다. 산줄기가 겹겹으로 맞물린 모양으로 자연의 병풍을 이루며 험한 산세를 자랑하고있는 이곳은 오래전 부터 사람의 발걸음을 거부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외진 곳에 인공의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천길의 낭떨어지를 바라보는 절벽의 면으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다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다리라는 이름조차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여 단단한 나무토막을 밧줄로 엮어 사람이 밟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었지만, 이런 험한 벼랑끝에서는 그마저도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삐걱... 삐걱... 바람이 불어올때 마다 격렬히 흔들리는 나무토막을 밟고 움직이는 세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추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얼굴을 완전히 뒤덮는 방한용 복면을 쓰고 있었고, 솜을 넣어 여러겹으로 누빈 옷을 껴입고 있었다. 이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나무토막을 묶은 밧줄들이 삐꺽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간담도 보통이 아닌지 아무런 동요 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기에 발아래의 천길 낭떨어지가 한탄할 지경이었다. 잠시후, 이들은 절벽의 중심에 나있는 동굴의 입구에 당도 할 수 있었고,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뒤로하며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은 상당히 넓었기에 장정 세명 정도는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벽으로는 누군가가 밝혀 놓은 듯한 횃불이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며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동굴 내부로 들어갈 수록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자 답답함을 느낀 인물들은 각자 덮어쓰고 있는 방한용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횃불에 비춰지며 얼굴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귀품이 흐르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 먼저 보였고, 거칠고 검붉어진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장한들이 그 뒤를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바깥을 되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천외지옥이라 불리울 만한 곳이군. 그가 이런 곳에서 생을 보내고 있단 말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시립해있는 두 명의 장한들을 향해 말했다. "허헛...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자네들이 이곳에서 일한 몇해 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군. 내 황궁으로 돌아가면 자네들의 자리를 선처해 주겠네..." 그의 말에 뒤에 서있던 방한들은 크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저희들의 임무일 뿐입니다. 보잘것 없는 임무에 대해 태위나으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백발의 노인이 바로 명제국의 중요 직책인 삼공 중 한명인 태위로서 명제국의 모든 공사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하얀 입김을 내쉰 태위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자. 이제 나를 별부사마... 흠... 아니지... 이제 그저 일개 죄인일 뿐이니... 종려진에게 안내해주게." 태위의 명령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장한들은 앞장을 서며 동굴 속으로 밞걸음을 옮겼고, 태위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간동안 이어지는 길을 걷고,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계단을 몇 번 지난 태위는 벽을 따라 끝도없이 나열되어있는 철문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록 철문에 가로막혀 그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에서 가래끓소리와 기침소리만 듣고서도 내부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만 했고, 코를 마비시킬 것만 같은 악취는 자연스레 태위의 이마를 찌푸리게 만들었다. 소매를 들어올려 코와 입을 가린 태위는 자신을 다라 멈춰서있는 장한들을 향해 계속가라는 신호를 했다. 녹이 잔뜩 슬어있어 삭막해 보이는 수십개의 철문을 지나자 유난히 작은 철문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다른 문들에 비해 절반의 높이밖에 안되는 문이었기에 태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장한들이 등에 매고있던 손삽을 이용하여 문아래의 흙을 파내기 시작하자 점차 땅에 묻혀있었던 철문의 나머지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흙을 모두 파낸 장한들은 열쇠꾸러미에서 세개의 열쇠를 찾아내 철문의 자물통을 하나씩 열었고, 그제야 모든 일을 끝낸 중년인은 벽에걸린 횃불을 하나 들며 말했다. "바로 이 곳이 종려진을 수감되어있는 방입니다. 태위 나으리. 함께 드시지요." 하지만 태위는 고개를 내저었고,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아니네. 그와 단 둘이 해야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에게 횃불을 주게나. 혼자 들어가겠네." 태위의 행동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장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횃불을 건네주었다. "수감자들은 모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상태이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후훗! 내 조심하도록 하겠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태위는 두 장한들 사이를 지나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으로 들어간 태위는 횃불을 비춰보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불빛이 닿는 곳마다 이름조차 모를 곤충들이 기어다니고 있었고, 어디선가 새어나와 군데군데 고인 물웅덩이는 인간의 분비물과 섞이며 악취를 풍겨냈다. "정녕 사람이 지낼 곳이 아니로군..." 이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 태위는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곳을 보기 위해 안력을 돋구며 고개를 움직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태위는 방의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여름에도 입지 못할 만큼 얇은 수의를 입고 있었으며, 산발한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은지 오래였다. 또, 사지에 묶여있는 손가락 굵기만한 쇠사슬은 최소한의 활동 영역만을 남겨놓은체 그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보며 괴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 태위는 몸을 굽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진정 종려진 맞는가?" 태위의 목소리에 가슴팍까지 숙여져있던 괴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려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괴인은 말라붙어버린 듯한 입술을 힘겹게 떼며 목소리를 흘렸다. "누...누구시오? 크르륵..." 괴인의 상태를 살피던 태위는 그가 자신이 찾던자 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가래끓는 목소리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혀를 찼다. "쯔쯧... 철석만큼이나 강한 자네의 고집이 자네를 이렇게 옭아 매고 있구먼. 대명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화려한 과거는 어디가고 이 꼴이 다 무언가?" "콜록! 태..태위셨군요... 올해로 5년 만입니까. 크큭... 이런곳에 있다보니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줄 알길이 없어서..." 태위는 종려진이 자신을 알아보자 그나마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날세 이 사람아. 올해로 6년째일세. 내 정녕 자네 아버지와의 깊은 친분을 생각해 자네를 보호해주고 싶었으나 알다시피 나의 힘을 벗어난 일이었네. 그에 대해서는 자네도 충분히 날 이해해 줄것이라 생각하네." 종려진은 태위의 말을 들으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큭... 태위께서 저를 감싸 주셨다 하더라도 저는 마다했을 것입니다. 그 더럽고 썩어버린 천하를 보고 사느니, 이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요. 후훗! 누추해 보이지만 그럭저럭 살만하답니다." 체념이 어린 그의 말을 듣던 태위는 탄식을 터트렸다. "허... 그간의 세월도 자네의 고집을 어찌 할수 없었나 보군." 고개를 들고있던것이 힘이들었는지 다시금 고개를 떨어트린 종려진은 말을 계속 하기도 힘이드는지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다. "크으... 그나저아 태위께서 이런 곳에 어쩐일이십니까. 황제의 허가가 없다면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힘이들어 억양이 확실치도 않은 물음을 들은 태위는 종려진의 까칠한 수염으로 뒤덮인 볼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의 귀에는 어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고 온것일세. 비록 자네가 황명을 어겨 황제폐하의 심기를 상하게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과거의 일이고, 자네만큼 명에 대한 충정을 가진 인물이 없다고 여겨 황제폐하께서 다시 한번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지. 물론 황제폐하를 설득하기 위해 적지 않은 수고를 해야만 했다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보이는 얼굴을 하고있던 종려진은 더욱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곧 그의 입으로부터 매말랐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큭! 그렇다면 태위께서 괜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제가 비록 명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대의 황제라는 자에게 고개를 굽힐 생각은 없습니다! 어찌 힘들어하는 백성들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자를 황제로 받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태위는 이미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반응 또한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네는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그러나 이번 일은 황제를 위한 일이라기 보다 명제국, 우리 한족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 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이만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자네는 지금 너무나 쇠약해져 있어..." 말끝을 흐린 태위는 종려진의 의사와는 상관없다는 듯 옥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곤 문 옆에서서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두명의 장한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종려진을 이송할 테니 준비를 해주게. 중요한 인물이니 더 이상은 거칠게 다루지 말게나." "예! 태위 나으리!" 태위의 명령에 짧게 대답한 장한들은 태위의 횃불을 받아들며 종려진이 수감되어있는 옥으로 움직였고,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태위는 눈이 쌓인 듯한 백발을 쓸어넘기며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4 밤새 찾아온 차가운 기운이 작은 연못에 살얼음을 만들어 냈다. 그 주변으로 서리맞은 초록의 식물들은 잎을 늘어트렸고, 다양한 겨울 꽃들이 여름내 숨죽이며 기다리던 날씨를 반기며 활짝펴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 떠오른 태양이 연못의 얼음을 빛내고있을 아침 무렵 종려진은 눈을 떴다. 짙은 남색으로 칠해진 천장을 침상에 누워 올려다본 종려진은 그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고, 손은 부드러운 금침을 매만지며 그 감촉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일상이 그에게 주는 감회란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새 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건만..." 혼잣말을 중얼거린 종려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터운 금침이 흘러내리며 그의 상체가 드러났는데, 여기저기 짖무르고 곪은 상처에 갈색의 약이 발라져있었지만, 고루발달되어있는 탄탄한 근육이 그의 몸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실내를 둘러보니 오랜만에 보는 가구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위에 그를 위해 마련한 것 같은 옷가지들이 놓여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몸에 걸친 종려진은 흐트러져있던 머리를 묶으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종려진은 결코 흔치 않은 8척 장신의 몸이었으며, 황소에 버금갈 정도의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모습이었다. 게다가 너른 이마는 그의 호방함을 말해주는 듯 했고, 짙은 눈썹은 그의 굳은 심지를 나타내는 듯 했다. 그가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문 밖으로 부터 기척이 들려왔다. "별부사마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그 소리가 여종의 목소리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던 종려진은 옷 매듭을 마저 매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덜어지자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초록색의 복장을 한 여종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들고있던 세숫물과 수건을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예의바르게 말했다. "초진이라 하옵니다. 오늘 부터 별부사마 나으리의 시중을 들게 되었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소녀에게 하명해 주시지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종려진은 눈을 얇게 뜨며 물었다. "나는 별부사마의 직을 박탈 당한지 오래인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별부사마라 부르느냐?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지?" 물음을 받은 초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미천한지라 잘은 모르겠사오나, 태위 어르신께서 나으리를 그리 칭하라 이르셨습니다. 또, 이곳은 태위 어르신의 별가이옵니다." "지금 태위께서도 이곳에 머물고 계신다는 말이냐?" "태위 어르신은 지금 처소에 계시옵니다." "그렇다면 태위께 지금 당장 달려가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여쭙거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종려진의 기세에 눌린 듯 얼굴이 하얗게 변한 초진은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그렇지 않아도 채비가 되는대로 태위 어르신께서 별부사마 나으리를 만나뵙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제야 공포에 떠는 초진의 모습을 발견 한 종려진은 즉시 무형의 기세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잠시 초진의 안색을 살피던 종려진 아무런 말 없이 그녀가 가지고 온 세숫 물에 손을 담그며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채비를 모두 마친 종려진은 시녀인 초진과 함께 방을 나섰다. 진남색의 기와가 얹어진 화려한 전각과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을 둘러보던 그는 낯익은 풍경에 새로운 감회를 느꼈고, 곧 초진의 안내를 받으며 태위의 거처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초진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비슷하게 생긴 몇 채의 전각을 지나고,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다리를 건넌 후였다. 지금까지 봐온 전각들에 비해 작은 규모의 건물의 문 앞에 선 그녀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태위 어르신. 별부사마 나으리를 모시고 왔사옵니다." 그러자 문 안에서 태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안으로 들게하고, 너는 물러가거라." "네, 어르신." 태위의 목소리에 짧게 대답한 초진은 문고리를 잡아 당기며 옆으로 물러나 섰고, 종려진은 성큼 걸음으로 안으로 들었다. 그가 들어선 방안은 고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벽으로는 각종의 서화가 걸려있었고, 초록의 분재들이 겨울의 한파를 피하고 있었는데,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의 직책과는 조금 이질인 면모였다.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온 종려진은 마음이 급했는지 내부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태위의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대체 태위께서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현 황제를 받들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실분께서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태위는 종려진의 항의를 들으며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탁자위의 난을 손질하고 있었다. 난의 입을 짤막하게 잘라내는 것으로 하던일을 마무리한 태위는 단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허헛... 자네 말대로 자네를 누구보다 잘알기 때문에 자네를 그곳에서 데리고 온 것일세. 명에 대한 충정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잠시 말을 머뭇거린 종려진은 태위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물론 명에 대한 충정을 맹세한 것이 사실이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 할 수는 없습니다." 종려진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던 태위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께서 자네 부친의 참수를 명했기 때문인가?" 태위의 말에 종려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의 단단해 보이던 턱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태위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와 자네 부친은 너무나도 닮았네. 그 곧은 성품이나, 그른 것에 타협하지 않는 신념까지... 나 역시 자네 부친의 그런 점이 너무나 좋았다네. 내가 가지지 못한점을 자네 부친을 통해서 볼 수 있었으니말일세. 하지만, 결국 자네 부친은 그러한 성격 때문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변을 당한 것일세." 잠시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옛일을 회상하던 태위는 찻잔에 차를 따루며 말했다. "나는 자네만이라도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했기에 이번 일을통해 천외지옥에서 자네를 데리고 나왔던 것이지. 또,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자네가 맡아 주어야 할 일은 황제를 위한 일이라기 보다 명제국과 한족을 위한 일이니 한번 들어보게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입안을 데운 태위는 얇은 서책 한권을 꺼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조선과 관련된 일일세. 자네 역시 관직에 몸담았던 만큼 조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이 책은 조선의 공학원이라는 기관에 대한 보고서이니 참조하길 바라네." "..." 아무런 소리없이 서있던 종려진은 태위가 내민 책을 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던 태위는 탁자의 한쪽에 있는 나무상자를 종려진의 앞쪽으로 드리밀었다. "상자안에 있는 물건을 한번 보도록 하게. 별부사마를 지냈던 자네라면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을 터이니..." 서책을 잠시 접은 종려진이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자 붉은 천위에 올려져있는 금속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던 종려진은 자신이 알고 있던 물건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략 10년 전이었던가요? 제가 막 별부사마직을 맡았을 무렵 조선으로 부터 들여왔다는 무기와 비슷하게 생겼군요. 아마도 그 이름이 지자총통이라 했지요. 하지만, 몇 가지의 문제점으로 인해 저의 군에서는 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위는 입을 축이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상자속의 물건을 꺼내었다. "자네가 봤던 것은 이미 조선에서 50여년 전에 개발 되었던 초기의 지자총통이었다네. 그 당시 본국으로 건너왔던 조선의 지자총통은 도검에 비해 그 유효거리가 멀고 파괴력 또한 높은 것으로 평가받긴 했지만 연사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에 실제 전투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일세. 허나 자네가 지금 보고있는 이 방산형지자총통은 초기 지자총통의 단점을 크게 개선한 무기이지. 지자총통처럼 심지에 불을 붙여 발화시킬 필요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단순한 동작으로도 탄환을 쏘아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약과 탄환을 자체에 내장하고 있어 연사기능을 극대화 했다네. 게다가 방산형지자총통의 탄환은 총구를 지나는 순간 여러개로 분리되어 발사되기 때문에 동시에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하지." 잠시 말을 멈추며 숨을 들이쉰 태위는 방산형지자총통을 종려진에게 건네주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우리가 입수한 것은 방산형지자총통 뿐이지만, 조선의 공학원에서는 그 외에도 8종의 중, 대형 화기를 개발 하고 있다고 하네. 훗날 이러한 신무기로 무장한 조선의 군대는 그 수가 적다 하더라도 충분히 본국의 대군을 상대할 세력을 가지게 될것일세. 이런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게되었던 나는 조정의 몇몇 대신들과 뜻을 모아 조선이 위협을 가해오기전에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치열한 당쟁에 휘말려 무마되기 일수였다네." 방산형지자총통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간의 상황을 듣고있던 종려진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 수 있었기에 침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당쟁이 제아무리 심하다 한들 황제의 입김을 무시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종려진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태위는 손질을 해놓은 난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내 비록 황제폐하를 보필하는 신분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폐하는 이미 노쇠해 젊었을 적의 호전적인 기상은 온데간데 없으신 상태라네. 이번 일도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처리하라고 명하시더군..." 말끝을 흐린 태위는 종려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조선의 거센 침략을 받는다면 대명제국은 무너질 것이고, 힘없는 백성들은 전란에 휘말려 더욱 고통을 받을 것일세. 부디 명제국과 백성을 생각해서라도 자네가 이번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세."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된 내막을 모두들은 종려진은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한 태위는 다시금 반이상 잘린 난잎을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해를 입은 초란을 다시금 살리기 위해서는 그 소중한 잎을 짧게 잘라줘야 한다네. 물론 잎을 잘라낼 때는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추위가 지나고 봄이 오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 자네는 세상을 짧은 안목으로 보지 말게나. 황제의 위는 세월이 흐름과 함께 변하는것이니 그 때가 되면 자네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일세." 잠잠히 있던 종려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종려진의 긍정적인 반응에 미소를 지은 태위는 그의 어께를 두들겨 주었다. "역시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먼..." "명제국과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계획해 놓은 바를 말해주도록 하겠네..." 태위는 흡족한 모습으로 종려진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그 중요성 만큼이나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전령. 뮤스가 라이델베르크로 돌아온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뮤스와 오래간만에 재회한 친구들은 마치 가족이라도 돌아온 듯 진정으로 반겨주었고, 다시금 원장을 맞이한 공학원은 더욱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또, 뮤스를 만나보기 위한 발걸음 역시 끊이지 않았기에 그가 이곳을 떠나있는 사이 유명세가 얼마나 부풀려 졌는지 쉽게 알수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일 뿐이었다. 무더운 여름의 어느날, 뮤스의 친구들은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나무의 그늘 아래 모여있었다. 하나같이 백색의 실험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공학원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듯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지난 몇년간 이곳을 집으로 삼은 채 연구를 거듭해온 것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유쾌한 농담이 오가고 있을 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무거운 근심이 기색이 떠올라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자세로 턱을 매만지고 있던 히안은 안경을 들쳐 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저 녀석 무슨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데, 혹시 네가 다른 남자랑 눈이 맞기라도 한거야?" 그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낀 폴린이 그의 허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히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런말은 3년이나 눈물 콧물 짜면서 기다린 카타리나한테 모욕이라고!" 히안은 폴린의 응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는지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아얏!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꼬집을 것 까지는 없잖아?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고! 그리고 너는 총무보좌면서 왜 실험복을 입고 난리냐?" "호홋! 공학원에서는 실험복을 입는게 더 훨씬 멋지잖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즐겁게 웃고 있는 폴린을 보며 히안은 혼잣말로 궁시렁거렸다. "그래봤자. 공학원 사람들은 네가 공학자가 아닌걸 다 알고 있다고..." "뭐얏!" "아...아무것도 아니야! 폴린. 실험복이 멋지구나!" 폴린이 눈에 불을 켜자 금새 그녀의 보복이 두려웠던 히안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가리며 말을 돌리고 있었다. 폴린과 히안의 옆에서 둘의 행동에 손을 내저은 벌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네. 이 두 사람은 빼고 이야기하자고. 뮤스형이 누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랬었어?" 벌쿤의 물음에 친구들의 눈길은 모두 카타리나에게 집중이 되었고, 카타리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뮤스를 처음 만났을 때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어. 웃음도 많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도 잘했고..." "그럼 언제부터 저렇게 된거야?" "글쎄... 내 생각에는 전뇌거경주기념 연회장에서 부터였던 것 같아. 그때, 크라이츠님께서 뮤스에게 어떤 편지를 전해주고 난 다음부터 이상해 졌으니까..." 카타리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이즈가 되물었다. "편지? 누구한테서 온 편지인데?" "그것 까지는 잘 모르겠어. 얼핏 듣기로는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라고 하던걸?" 듀들란이라는 말이 카타리나의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친구들은 경악을 하며 입을 모아 외쳤다. "뭐어! 듀들란 제국이라고?!" 특히 바르키엘은 그 이름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는 듯 흥분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뮤스가 듀들란 제국으로 부터 제의를 받은게 아닐까?! 도이첸 제국을 버리고 자국으로 오라고 말이야! 그래서 뮤스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사실 뮤스는 다른 대륙에서 왔으니 어느 국가에 속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 그의 행동을 보고있던 세이즈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럴리는 없을 거야. 이곳에 크라이츠님과 드워프 아저씨들도 계신걸? 설마 그분들을 외면하고 듀드란 제국으로 갈까?" "물론 네 말이 맞긴하지만, 그러니 뮤스가 더욱 고민하고 있는거라고! 공학원 식구를 버리자니 듀들란의 대접이 너무나 좋고, 듀들란으로 가자니 공학원 식구들이 걱정되고... 뭐 이런거지." 잠시 잠자코있던 벌쿤은 어깨를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뮤스형은 그렇게 의리 없는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제의가 들어왔다면 단번에 거절했을걸?" "글쎄... 원래가 사람속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의견을 나누던 분위기가 서서히 말다툼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 이를 보고만있던 헤밀턴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쯔쯧! 선배들도 괜히 똑똑한 척만 했지 생각이 정말 짧군요?" 그 덕에 말다툼을 하던 뮤스의 친구들은 입을 다물며 헤밀턴을 바라보았고, 벌쿤은 겨우 자신의 허리높이 보다 조금 큰 헤밀턴에게 얼굴을 드리밀었다. "이봐 헤밀턴 네 선배들이 전하고 싶어하는 말을 내가 대신 해주도록 하지. 너 요즘들어서 선배들을 너무 막대하는 것 아니냐?" 모두들 켈트에게 잘했다는 긋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헤밀턴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했는지 여전히 당당한 얼굴이었다. "나참... 그러니까 이 후배가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행동을 해보시라니까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매일 다투는걸 보고있는 후배가 뭘 배우겠어요?" 허리에 손을 얹고 쏘듯이 말하고있는 헤밀턴을 내려다본 벌쿤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거냐?" 그의 물음에 헤밀턴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야 간단하죠! 그 문제의 편지를 훔쳐 보면 뮤스선배가 왜그러는지 알거 아니예요!" 헤밀턴의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에 벌쿤은 무릎을 쳤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을 때, 카타리나가 친구들을 말리듯 끼어들었다. "하지만... 남의 편지를 보는건 예의가 아니잖아. 우리 뮤스가 직접 이야기 할때까지 기다려 보는건 어떻겠니?" "안돼!" 카타리나의 의견에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외쳤고, 폴린이 나서며 카타리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생각을 해보렴 카타리나! 우리는 뮤스에게 피해를 입히자는게 아니라 뮤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러는것 아니겠니? 만약 어느날 뮤스가 네게 듀들란 제국으로 간다고 말을 해봐! 네가 기절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헤밀턴의 생각대로 하자. 응?" "그...그건..." 카타리나가 망설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그녀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을 봤는지 뮤스의 방을 향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고, 카타리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간, 켈트는 자신의 주먹만한 크기의 금속원석을 들고서 연구실 밀집구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짧은 실험복을 입고 있었기에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켈트 역시 실험복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안전에 대비하여 특수 원단으로 제작된것이기에 입지 안을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흰색의 도료로 칠해진 복도에 들어서자 소규모의 연구실이 죽 늘어서있었다. 각 문마다 그 연구실을 쓰는 공학자의 이름이 걸려 있었지만, 아직 주인이 없는 이유로 아무런 이름도 걸려있지 않은 연구실이 상당수였는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준비해놓은 장소였다. 켈트의 발걸음은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연구실의 앞에서 멈춰졌다. 명패에는 '뮤스 드라켄'이라 적혀있었는데, 공학원의 원장이지만, 다른 공학자들과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이곳에 자신의 연구실을 잡은 것이었다. 잠시 노크를 하려 손을 올렸던 켈트는 생각을 접으며 그냥 문을 열었다. "뮤스있냐?" 좁게 열린 문큼으로 고개를 드리밀어보자 흰색의 실험복을 입은 뮤스의 등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켈트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듯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켈트는 이런 상황을 여러번 겪어 봤기에 개의치 않고 연구실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금속의 원석을 한쪽 실험대에 올려놓은 켈트는 뮤스의 등을 두들겼다. "이 녀석아 좀 쉬었다 하거라! 연구도 좋지만 이렇게 강행하다가는 몸이 먼저 축나겠다!" 그제서야 켈트가 왔음을 눈치첸 뮤스는 안구보호경을 벗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푸석한 얼굴을 보아 며칠째 잠을 자지 않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켈트 아저씨 오셨군요." "쯔쯧... 어제도 밤을 샌모양이군. 요즘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네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는거냐?" 쓴웃음을 지은 뮤스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흠...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요즘 복잡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연구에라도 매달리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겠더군요. 최소한 이곳에서 연구를 할때만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그의 말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인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크라이츠님께 들었다. 장영실이라는 자를 이제 찾게되었으니, 네가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가? 세월한번 정말 빠르군. 그를 찾기위해서 이 공학원을 세운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년이나 지나버렸다니..." 뮤스역시 켈트의 말을 들으며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게 되자 답답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후우. 네... 지금 머리속이 혼돈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장영실 아저씨를 찾기 위해 이렇게 고생해온 것이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니 차마 조선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특히 카타리나는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알지 못하니 더욱 걱정입니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허헛! 언제나 그 정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고, 세상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차근히 생각하는 편이 주변 사람들이나 너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군." 켈트의 위로에 애써 미소를 지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 아저씨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다르니 힘이 들 수 밖에 없군요." "쩝...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하군. 솔직히 나 역시 너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슬픈게 사실이야." 금새 시무룩해진 켈트의 표정을 바라본 뮤스는 분위기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에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제 연구실까지는 어쩐 일이시죠?" 뮤스의 물음을 듣고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린 켈트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아! 내 정신좀 보게... 이 것을 네게 보여주려고 가지고 왔어." 켈트는 손을 뻗어 실험대에 올려놓았던 금속의 원석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기억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바로 드워프 마을에 떨어졌던 운석의 조각이야. 얼마전 금속의 강도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을에 돌아가 원석의 일부를 가지고 왔지." 그것을 받아든 뮤스는 광물을 가늠해보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죠. 당시만 해도 운석을 부술 방법이 없어서 끌어냈었으니까요." "그렇지. 그 당시만 해도 엄청난 경도 때문에 운석을 분해할 방법이 없었는데, 역시 광자절단기를 사용하니 역시 절단되더군." "그럼요. 광자절단기의 초고온을 견딜 물체는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래서 말인데, 이 운석을 새로운 금속 재료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아무래도 철판은 너무 무겁고, 가볍다 싶으면 너무나 무르니, 이 단점들을 보완한 새로운 금속이 필요한 참이야." 대충 운석을 돌려가며 살펴보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훗. 말씀하시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이시군요?" "허헛! 그야 당연하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은 네가 더 잘알텐데?"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금속원석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고 지금 당장 시작하려는 듯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여러가지 기구들을 가까운 곳으로 당겼다. "그럼 며칠정도 기다리셔야 할것 같은 걸요? 저도 처음 보는 금속이니 만큼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고맙군. 흠... 그런데 지금 당장 시작할 생각이냐?" 실험대 쪽으로 반쯤 몸을 돌리고 있던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굳은 표정으로 뮤스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펴보던 켈트는 그의 팔을 억척스럽게 잡아 끌며 말했다. "문제? 물론 문제가 있고 말고! 그 금속의 원소해명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일단은 네 방으로 가서 좀 쉬거라. 이 상태로 더 있다간 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먼저 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켈트에게 붙잡힌 뮤스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저는 괜찮다니까요." "내가 보기엔 절대 괜찮지 않다. 그러니 내 말을 듣도록해!" 결국 억샌 켈트의 손에 잡힌 뮤스는 어쩔 수 없이 연구실 밖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3일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5 -탈칵! 끼이익... 간단한 가구 몇 점만이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방, 누군가가 잠겨있던 문고리를 따고 있는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내 진한 밤색의 두터운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잠시 후 그 틈사이로 눈동자가 한쌍씩 들어차기 시작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벌쿤... 안에 누구 있어?" "아니 없는 것 같아... 형이 방에 안들어온지 벌써 3일째야. 매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있는데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왜 이렇게 도둑고양이 마냥 있는거야?! 그냥 들어가자!" "아차! 그렇군. 그냥 몰래 들어간다는데에 긴장을 해서 그만..." 어수룩한 벌쿤의 대답소리와 함께 문의 틈이 벌어졌고, 문 앞에서 서성이던 뮤스의 친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가장 앞서있던 벌쿤은 뮤스의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형의 물건은 대부분 책상 서랍에 있을 거야. 아니면 침대 밑의 상자나." 친구들이 그가 가리킨 곳을 뒤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뒤에 서있던 히안은 벌쿤의 어께에 손을 걸치며 말했다. "너 같으면 그렇게 비밀스러운 편지를 아무데나 던져 놓겠냐? 분명 어딘가에 숨겨놨을 거야... 잘 생각해봐." 벌쿤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뮤스형이 뭔가 숨기는 걸 본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숨기는걸 보여주면 그게 숨기는 거냐?" 히안이 벌쿤을 나무랄 때, 책상서랍을 뒤지고 있던 폴린이 말했다. "뮤스가 너같은 줄 아니? 비상금 숨기기 따위는 너나 하는 짓이라고! 그것도 어정쩡하게 숨겨서 맨날 어머니께 들키기나 하고..." 하지만 이번에는 히안도 할말이 있는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쿠쿡! 그러는 너는 비상금 안숨기냐? 불과 두달전만 해도 어디다 숨겼는지 잊어 버렸다고 울상이었으면서!" 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폴린은 입을 다물고 말았고, 히안은 오랜만의 승리에 득의해 하고 있었다. 그 때, 침대 밑의 상자를 뒤적이고 있던 가이엔이 편지봉투를 하나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혹시 이거 아니니? 꽤나 두툼한걸?"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확인한 카타리나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편지였어." 카타리나의 감정(?)이 끝나자 친구들은 가이엔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가장 궁금증이 많았던 헤밀턴이 나서며 말했다. "분명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라면 듀들란 어로 적혀 있을 것인데, 선배들 중에서 듀들란 어를 아시는 분 있나요?" 헤밀턴의 물음을 받은 뮤스의 친구들은 서로의 모습만 살피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가자 미소를 지은 헤밀턴은 가이엔의 손에서 편지를 잡아당겼다. "그럼 제가 읽을 수 밖에 없군요. 저는 어렸을 때 부터 듀들란 어를 공부했으니, 편지하나 읽는 건 문제도 아니에요." 또 다시 발견한 헤밀턴의 새로운 모습에 뮤스의 친구들은 캄탄사를 터트렸다. "오... 정말 볼수록 대단한걸?" "그러게 말이야. 함브리겐 대학에 수석으로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그런 재주도 있었던거니?" "그럼 어서 읽어봐. 어떤 내용인지?" "그래그래! 어서 읽어 보라고. 궁금해 죽겠어."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힘을 잔뜩 준 헤밀턴은 당당하게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재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다시한번 감탄사를 내뱉은 히안이 얼굴을 드리밀며 물었다. "벌써 다 읽었어? 뭐라는 말이야? 정말 듀들란 제국에서 뮤스를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이야?" 하지만 그토록 당당하던 헤밀턴은 히안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없었고, 오히려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리곤 편지를 잘 접은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선배들... 이 편지 못읽겠어요. 이런 듀들란 어가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더 공부하고 올께요." 이렇게 말을 마친 헤밀턴은 그 충격이 너무나 컸는지 편지를 히안에게 넘기며 방을 뛰쳐 나갔고, 그녀의 모습을 보던 뮤스의 친구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 녀석 어떻게 된거지? 그렇게 자신있게 펼치더니..." 헤밀턴이 나가고 나자 편지를 들고 있던 히안이 그것을 펼쳐보았다. 그 역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고, 교양시간에 듀들란 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있는 구불구불한 글자는 처음 보는 글자들이었기에 적지 않게 당황해야만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낯설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거 듀들란의 고대언어 아니야? 난 이런 글자를 처음 보는데?" 그와 함께 편지를 보고 있던 바르키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사 고대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런걸 써서 편지를 보내겠어? 뮤스도 못읽을 텐데... 혹시 듀들란 제국의 사람들만 쓰는 필기체가 아닐까?" 이렇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고 있을 때, 친구들의 등뒤로 부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건 듀들란 어가 아니라 조이센 대륙이라는 곳의 글자이지. 그러니 당연히 못알아 볼 수 밖에..." 그 말에 곰곰히 생각을 해보던 히안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아! 그랬었던 것이군! 그러니 헤밀턴도 못알아 볼 수 밖에. 하핫! 그런데 너는 이게 조이센 대륙의 글자라는 것을 알 수... 흐엑! 뮤스!" 히안의 말에 깜짝 놀란 친구들이 급히 뒤를 돌아보니 물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있는 뮤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곤 서로를 찌르며 어찌 해야 할지 눈치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뮤스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훗. 뭘 그렇게 뻣뻣하게 서있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뮤스를 보니 더욱 미안해짐을 느낀 카타리나가 친구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뮤..뮤스 미안해. 사실 몰래 편지를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더듬거리며 사과를 하고 있는 카타리나의 앞까지 걸어온 뮤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고, 궁금증이 가득담겨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후훗. 다들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하고 있다고 켈트 아저씨께 들었어. 그 동안 너희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하다. 잠시 혼란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잠시 잊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되." 일이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로 흐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벌쿤이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형은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기로 한거야?" 그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뮤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듀들란 제국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카타리나 누나에게 들었어.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를 받은 다음부터 형이 갑자기 어두워 졌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편지를 확인 하고 싶어서 이렇게 몰려 온거지." "하하! 내가 듀들란 제국으로 왜가겠어? 이곳에 공학원과 가족들, 그리고 너희들이 있는데." 뮤스의 확답을 듣자 히안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휴우... 그럼 그렇지. 뮤스가 이곳을 두고 어딜 가겠냐? 앞으로 공학원을 이끌어 나갈 사람인데. 애초 부터 말도 안되는 의심이었다고! 그렇지 뮤스?" 히안의 물음에 뮤스는 잠시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그럼...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이제 막 돌아오는 참인데..." 친구들은 이제 모든 의심을 풀은 듯 시원하게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고 뮤스 역시 오랜만에 그들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친구들과 달리 알지못할 불안함을 느끼며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뮤스는 평소대로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라프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수 많은 지식들을 하나씩 해명 하고자 했고, 켈트가 부탁했었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노크소리가 나면서 실험복을 차려입은 히안이 들어왔다. "이봐 뮤스! 손님이 찾아왔는데?" 히안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뮤스는 손에들고 있던 기구들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응? 또 손님이야?" 뮤스가 공학원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사람들의 방문이 유난히 잦았기에 수시로 연구 도중에 불려나가게 되었는데, 이를 귀찮게 여기긴 했지만 그들과 만나는 것도 공학원 원장으로서의 일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뮤스였다. "휴우... 정말 사람들은 바쁠때만 찾아오는 것 같군. 하긴... 그 사람들에게는 이곳에 찾아오는 것이 급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뮤스의 불만을 듣고 있던 히안은 뭔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뮤스는 의아한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그래? 또, 폴린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입을 삐죽내민 히안은 단단히 토라진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몰라! 네게 찾아온 손님한테 폴린이 완전히 넋이 나가 있다고! 아무튼 폴린과 사귀고 난 뒤 부터 싸우지 않는 날이 없다니까." 히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뮤스는 피식 웃었다. "풋! 사귀기 전부터 너희 둘은 항상 싸웠잖아? 원래 미운정이 더 무서운 거라고들 하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히안에게 간단한 충고를 하며 실험복을 벗은 뮤스는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럼 나가 보자고. 폴린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손님이 누구인지 볼까?"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있던 히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서 연구실을 빠져나갔고, 뮤스가 미소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연구실을 나온 뮤스와 히안은 간단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공학원 본관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미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은 그 규모가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기에 여러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건물들을 축조하기 위해 백여명의 드워프들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벨링의 황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공학원은 건물간의 이동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본관건물의 응접실 앞에 다다른 뮤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히안이 발을 멈추며 말했다. "후우... 나는 도저히 폴린을 못봐주겠다. 그 매끈하게 생긴 녀석 앞에서 콧소리 흘리는 모습을 어떻게 보겠냐? 혼자 들어가." 하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개를 내저은 뮤스는 히안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누가 뭐래도 너는 폴린의 남자친구고, 폴린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못하게 할 권리가 네게도 있잖아?" 히안이 뮤스의 충고에도 우물쭈물하자 답답한 듯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은 완전히 애들 같잖아. 사실 서로 좋아하면서도 항상 싸우기만 하지.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내가 옆에서 살펴 보기엔 네가 하도 폴린에게 무관심 한 척하니까 오히려 관심을 끌기 위해 저러는 거라고. 사랑은 솔직한 표현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히안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럴까?" "이래뵈도 대현자 라듀아보님에게 여성심리를 배운 사람이다. 한번 믿어 보라고." 다시금 뮤스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지만 히안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왜 그래?" "그럼 너는 카타리나에게 왜그렇게 표현을 못하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뮤스는 애써 외면하며 대답했다. "원래 이론과 실제는 다른거라고..." 말을 얼버무림으로서 상황 수습을 할 수 있었던 뮤스는 히안의 손을 잡아끌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폴린과 한 청년, 그리고 중년인이 있었는데, 히안이 말하던 청년의 얼굴은 폴린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었다. 뮤스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폴린은 가식적인 미소로 반기고 있었는데, 주로 입던 실험은 어딘가 벗어던졌는지 지금은 깔끔한 여성용 정장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 원장님 오셨군요. 손님들께서 오랬동안 기다리셨어요. 호호호홋!" 생각했던 대로 콧소리를 내며 뮤스를 반기던 폴린은 옆에 서있는 히안을 발견하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히안은 여기 어쩐 일이지? 네 손님도 아닐텐데?" 냉랭하게 말하고 뒤돌아선 그녀는 소개를 하기위해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쪽 분은 저희 공학원의 원장님이신 뮤스 드라켄이시고, 그 옆에 허름한 청년은 별볼일 없는 공학자인 히안 크라리엔이라고 한답니다." 너무나 노골적인 소개에 히안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 사이에낀 뮤스가 폭발 일보직전인 히안을 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뮤스를 찾아온 손님 중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모두의 이목은 그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뮤스군,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보니 정말 안심이군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인지 직감 할 수 있었고, 미소를 지으며 폴린을 지나치며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전 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황제폐하..." 황제폐하라는 말에 눈을 크게뜬 폴린과 히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하핫! 농담은 그만 두라고 뮤스." "하긴 황제폐하께서 왜 이런곳에 몸소 찾아오시겠어. 그렇지 히안?" "그럼! 그럼! 그것도 이렇게 단촐하게 말이야." 그러나 뮤스의 대답은 농담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분위기였다. "너희들도 다시 예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분께서 바로 도이첸 제국의 황제이신 카로이트 4세이시지."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실제라는 것을 깨달은 폴린과 히안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폐하를 몰라뵈었습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폴린 파이시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히안 크라리엔입니다." 폴린과 히안의 깍듯한 인사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황제 쪽이었다. 급히 손을 내저은 황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마시죠. 이런 격식을 원했다면 이런 모습으로 공학원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저 뮤스군께 은혜를 입은 지인으로서 찾아온 것이니까요." 황제의 반응에 분위기를 살피던 폴린과 히안은 어찌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했는데, 뮤스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황제폐하의 말씀이 대로 하는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러는 편이 황제폐하도 편하실테니까."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폴린과 히안은 뮤스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허리를 폈다. "그..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황제폐하이신데..." "이것 참... 내 평생 황제폐하를 이렇게 알현할 수 있다니 믿겨지지가 않는군요." 잠시 어색해진 응접실의 분위기를 파악하던 폴린은 갑자기 떠올랐는지 하고있던 찻잔 정리를 마쳤다. 그리곤 히안의 옷자락을 잡으며 황제와 뮤스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세요. 저희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폴린은 불이라도 난 듯 급히 히안을 끌고 응접실을 빠져나왔고, 히안 역시 그런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참이었기에 순순히 그녀에게 이끌려 나왔다. 응접실에서 나온 폴린과 히안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는데, 특히 폴린은 십년을 감수한 듯한 표정이었다. "휴우... 정말 기절할 뻔 했어. 설마 저 사람이 도이첸 제국의 황제폐하인줄 누가 알았겠니..." 그녀의 말에 킥킥대며 웃은 히안은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쿠쿡... 네 표정 정말 가관이더라. 완전히 하옇게 질렸던걸? 천하의 폴린도 황제폐하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히안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폴린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치! 너는 안그랬는 줄 알아? 뻣뻣하게 굳어가지고 서있는 모양은 정말 웃겼다고." 더 이상 말을 해봐야 말다툼으로 번지리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히안은 손을 내저었다. "이러다가 또 싸우겠군. 갑자기 긴장했다가 풀리니 배가 고픈데 그만하고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프다. 사실 이 치마가 작아서 졸라매느라 힘들었거든. 이게 다 너때문이야..." "내가 뭘 어쨌는데?" 히안의 되물음에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맛만 다신 폴린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게 있네요! 나 비싼거 먹을 테니까 돈은 네가 내라. 알겠지?" "훗! 뭐 까짓... 기분이다. 아무거나 골라보라고!" "어라 왠일이야? 토 한번 달지 않고 선듯 허락하다니?" 대답을 미룬 히안은 오랜만에 기분좋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에 매달린 폴린을 이끌었고, 뮤스의 짧은 충고를 속으로 되세기고 있었다. '사랑은 솔직한 표현이라고? 한번 노력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짜가신선 <대공학자> #8-6 투명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에 가져간 뮤스는 구수한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있는 황제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옆의 중년인은 낯이 설었기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폐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동석을 하신 것을 보아하니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군요." 차를 마시고 있던 황제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곤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 맛이 아주 좋군요. 그렇지 않아도 소개시켜드리려고 하던 참입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새로운 외교대신을 맡게되신 고듀트 루그시드경이십니다. 애초 계획은 저 혼자 올 생각이었지만, 뮤스군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소개가 끝나자 고듀트는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황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뮤스원장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꼭 만나뵙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만나ㅂ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군요." 이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일국의 외교대신이라는 높은 직책에 있으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허헛! 황제폐하 앞에서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가벼운 소개를 통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뮤스가 먼저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폐하, 그 동안 소문을 듣자하니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셨더군요.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답니다. 그에 대해 조금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뮤스의 말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황제는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뮤스군이 떠날 때 제가 가비르 재상을 통해 약속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때 뮤스군이 돌아올 때까지 황실을 개혁할 것이라고 약속드렸습니다. 그것은 뮤스군의 누명에 대한 사죄의 뜻이기도 했고, 이 제국이 오랜 역사에 걸처 가졌었던 병폐이기도 했었죠. 저는 그것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황제가 겸손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고듀트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헛. 황제폐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사실 황실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은 역대의 어느 황제께서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뮤스를 바라본 고듀트는 그가 없는 동안 황제가 단행했던 일들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대단한 일은 누가 뭐라하더라도 황실 귀족들의 체계 권한을 정리하고 제한한 것이었지요.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황실에 머물며 모자라는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정사에 참여를 해왔었습니다. 그러한 귀족들로부터 황실 비리가 시작되어 왔던 것이죠. 물론, 뮤스원장님께서도 피해자중 한 명이시니 더 이상의 설명이 없더라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 말을 하던 고듀트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지 걱정하여 뮤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는 추방에 대한 감정을 애초부터 가지고있지 않은 듯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흠... 어찌되었건 매쉬라스 후작의 음모가 드러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황제폐하는 가비르 재상님과 함께 그와 연관된 귀족들을 밝혀냈고, 그들의 권한을 박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황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각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뽑아 황실의 요직에 앉히게 됨으로서 보다 원활한 정책결정 체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제를 개혁함으로서 국민들의 소득을 증진시키고, 지방 관료들의 비리를 원천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고듀트는 마치 자신이 한 일이기라도 한 듯 침이 마르게 이야기를 이어갔고, 뮤스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황실의 개혁 내용을 듣고 있었는데, 그라프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정치와 경제에 대한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황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게 되었다. 황제는 뮤스와 고듀트의 대화를 들으며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훗... 이번에 온 것은 뮤스군과 개인적으로 대화나 할까하고 온 것인데, 결국은 황실의 이야기로 흐르는군요. 사실 뮤스군 앞에서 황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답니다." 이에 미소로 대답한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훗... 지난 일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간에 저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추방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사실 저를 원망하고 계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이곳에 오는 며칠동안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답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하는 황제를 보며 찻잔을 비운 뮤스는 황제와 고듀트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후훗. 이제 고듀트경께서 저를 만나고자 하시는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황제폐하께서도 그 이유를 대충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고듀트경께 직접 듣는 것이 더욱 좋겠군요." 뮤스의 말에 황제와 고듀트는 생각을 들킨 듯 깜짝 놀라고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고듀트가 황제를 따라 나선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고듀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군요. 사실 제가 황제폐하를 따라 나선 것은 듀들란 제국의 일 때문입니다." 고듀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말을 받았다. "이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이 공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군요?" "어찌 그러한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듀들란 제국에 공학원이 세워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쯤 그 결실이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 중이었죠. 게다가 때 마침 외교대신께서도 오셨으니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의 표정을 지은 고듀트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 역시 원장님은 제가 생각하던 이상이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드릴 것은 원장님의 말씀대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 때문입니다. 듀들란 제국은 4년 전부터 공학원을 중심으로 제국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벌써 상당한 진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내년 초, 제국개발 사업의 성과에 대한 발표회를 개최한다더군요. 그에 대한 초청장은 벌써 각국의 황실에 전달된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 사이의 라이벌 의식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듀트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으로서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겠군요. 황제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질문을 받은 황제는 머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 역시 황제이기 이전에 도이첸 제국의 핏줄입니다. 그러니 듀들란 제국에게 밀린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뮤스의 표정을 살피던 황제는 손톱을 매만지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었다. "저의 부탁 때문에 고초를 겪은 뮤스군께 또 다시 어떠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 무리일 줄은 알지만, 염치없게도 다시 한번 이번 일을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황제의 부탁에 뮤스는 조금 갈등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쉽게 결정할만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흠... 솔직히 국가 수준의 지원을 받는 일이라면, 저 혼자 결정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서 누님이나 드워프분들과 상의를 해봐야 하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일을 맡고 싶습니다." 그럭저럭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황제와 고듀트의 얼굴은 밝아지기 시작했고, 황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뮤스군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정말이지 기쁘군요.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뮤스군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대 제국의 황제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한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오히려 제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신 분이 몸소 찾아오셔서 부탁을 하시니 어찌 제가 거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핫! 저를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해주신 분이 바로 뮤스군입니다. 그런 분께 힘을 휘두른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죠." 이로서 공적인 일에 대한 대화를 마치게 되자, 고듀트는 두 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뮤스와 황제는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대화가 오가는 사이 뮤스는 황제의 당당하고 사려 깊어진 모습에 내심 감탄을 하게되었고, 황제는 과거에 비해 한층 지혜로워진 뮤스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공학원 저택의 서재 내부는 작은 촛불 몇 개에 의지하고 있었다. 물론 전뇌력 공급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전뇌등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드워프들과 함께 의논을 할 때에는 정신집중이 안 된다는 성화에 따라 항상 촛불만을 켜놓곤 했던 것이었다. 흔들리는 촛불에 크라이츠, 드워프 형제들 그리고 뮤스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모두들 손으로 턱을 궤며 골돌히 생각 중이었지만 뮤스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을 살펴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염을 한번 쓸어 내린 레딘이 가볍게 손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나저나 뮤스군에게 질문이 하나있네. 자네는 왜 도이첸 제국을 도우려고 하는가? 그 젊은 황제 때문에 그 험한 고생을 했지 않나? 실크로스교인가 뭔가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런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레딘의 질문을 받은 뮤스는 이곳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물론 실크로스교에 관련된 일이 물론 황실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꼭 황제폐하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매쉬라스 후작의 간계를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당한 것도 저의 모자람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게다가 황제폐하는 제게 사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황실의 개혁을 과감히 단행했고, 매쉬라스 후작 역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니, 남아있는 감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있었으니 어찌 보면 제가 감사해야하겠죠." 그것이 그라프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던 켈트는 그 뒷 배경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있었기에 찝찝함을 느꼈고, 눈은 자연스럽게 크라이츠를 향해 돌아갔다. 마침 크라이츠 역시 뮤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음... 황제를 원망하는 감정을 가지고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꼭 그를 도와 주야할 이유도 없는 것 같구나. 엄밀히 말해 너는 도이첸 제국의 국민이 아니니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도 무관한 것이고, 황제 역시 네가 이번 일을 거절한다해도 그의 곧은 성품으로 봐서 네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뮤스는 크라이츠의 말에 충분히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도 이미 생각해 두었는지 입을 여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물론 누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제가 꼭 황제를 도와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제 능력이 닿는 모든 일을 이곳에서 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더욱 발전된 사회를 위해 연구를 하는 것이 공학도가 걸어야 할 길이니까요. 그것은 장영실 아저씨께서 제게 부탁한 일이기도 하고, 저도 역시 해보고 싶었던 일입니다." 이번에는 뮤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있던 블뤼안이 뮤스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듀들란 제국이 제국개발사업을 시작한지 4년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과연 지금부터 시작 한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듀들란 제국의 발표회까지는 겨우 다섯 달 밖에 남지 않았잖아?" "물론 듀들란 제국이 황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하고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공학원을 설립한 것이나, 전뇌거나 그 외의 제품들을 양산하고 판매한 것은 우리측이 훨씬 먼저였습니다. 그 만큼 먼저 소비시장을 확보했다는 뜻이 되고, 듀들란 제국에서 지금 당장 시제품을 양상하고 판매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가 확보한 소비시장이 있기에 그만큼 소비시장진입이 더뎌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듀들란 제국 내의 시장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블뤼안의 되물음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우리가 먼저 소비시장을 장악했다해도 결코 유리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이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거참... 말이 점점 복잡해지는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지는 이점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만든 제품들의 단점을 그들은 유연하게 보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전뇌거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죠. 그 동안 공학원에서 발매된 전뇌거는 뛰어난 성능을 인정받긴 했지만, 애초 구매자의 입장에서 설계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마나구나 자력통 등의 값비싼 부속을 쓸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가격이 비싸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은 처음 설계시점에서 부터 이 점을 계산에 넣어 가격을 대폭 낮출 뿐만 아니라 효율 역시 높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저가형 전뇌거를 찾는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한마디로, 그 어느 쪽도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의 물음에 뮤스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딱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결국 어느 쪽이 더욱 나은 물건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뮤스의 대답을 들으며 형제들의 표정을 살피던 블뤼안은 자신을 배를 한번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나는 찬성일세. 왠지 경쟁한다는 느낌이나를 설레게 만드는걸?" 그의 뒤를 이어 켈트 역시 찬성하고 나섰다. "나도 블뤼안과 비슷한 생각이야. 비록 우리 드워프들이 인간국가간의 세력싸움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런 일이라면 또 다르지... 나도 찬성이야." 그리고 브라이덴과 레딘 역시 찬성하고 나서게 됨으로서 드워프들은 모두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이제 뮤스와 드워프들은 마지막 남은 크라이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비밀 장부를 꺼내어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더니, 이내 장부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장사는 모험이지. 게다가 그에 대한 지원은 모두 황실에서 해줄 테니,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은 없을 테고, 오히려 일정 수준의 소득이 우리에게 돌아오니,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단다. 호홋! 내가 일을 해야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되건 무슨 상관이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물질만능주의의 전형인 크라이츠의 성격이 또 한번 드러나게 되자 드워프들과 뮤스는 어이없음에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은 도이첸 제국의 국가 사업을 맡기로 의견이 모아지자, 그 다음날부터 국가 사업계획을 작성하는 등의 기초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고, 뮤스는 다시금 눈코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8-7 다음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황제와 고듀트는 공학원에서 그들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기뻐했으며, 한 달 후 공학원에서 사업설명회를 개최하기로 약속을 잡은 뒤 공학원의 지원 예산을 짜기 위해 황궁으로 급히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전해들은 공학원의 식구들은 정신없는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는데, 각자 맡은 분야의 현황보고서를 며칠 후까지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공학원의 공학자들은 하던 일을 잠시 접고 보고서 작성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연구원들은 그들을 보조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뮤스의 친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만큼 잘 아는 관계였기에 더욱 분발해야만 했는데, 최소한 친구들 앞에서 창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무렵이 되자 연구실을 다섯 개 쯤 합해 놓은 크기의 회의실 안으로 뮤스의 친구들이 한 명씩 들어오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안고있었다. 그것들은 각 도시의 공학원에서 부터 올라 온 부품 수급현황이나 자원 수급현황, 개발비 내역, 인건비 내역등 수십 종에 이르는 서류 뭉치가가 섞여있는 것이었는데, 평소 서류의 중요성을 못 느낀 나머지 정리조차 하지 않던 차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자 눈에 보이는 모든 서류들을 모두 쓸어모아 온 것이었다. 손에든 서류더미를 힘겹게 내려놓은 바르키엘은 손을 털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지금까지 한번도 안 했던 현황보고서를 모레까지 제출하라니, 뮤스도 너무 하는거 아냐?"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이 고개를 끄덕인 가이엔 역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게... 서류들을 이럴 때 쓸 거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이 정도까지 쌓이기 전에 정리를 했을 텐데. 이 많은걸 언제 다 정리하지?" 이번 일에는 착실하기로 이름난 세이즈 역시 어쩔도리가 없었는지 난색을 표하고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작업을 해야할 것 같아. 그런데 벌쿤과 히안은 아직 안왔니?" 회의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자신의 서류를 몇 개로 분리하던 카타리나가 대답했다. "히안은 아까 연구실에서 나오는걸 봤으니 금방 올 거야. 그리고 벌쿤은 잘 모르겠는걸?" 카타리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들! 나 좀 도와 줘!" 이에 친구들이 시선을 돌려보니 문 앞에서 비틀거리며 머리 위까지 쌓인 서류뭉치들을 안고있는 히안을 볼 수 있었는데, 바싹 마른 체구에 다른 친구들 보다 두 배 정도나 많아 보이는 서류뭉치를 싸들고 오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고 있었다. "쯔쯧! 내가 좀 도와줄게." 짧게 혀를 찬 바르키엘은 그가 안고있는 서류의 반을 덜어줬고, 그제야 서류에 가려져 있던 히안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었다. 더운 날씨까지 더해져 땀을 비오듯이 흘리던 그는 신경질 적으로 서류를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뮤스 이 녀석 나타나기만 해봐. 내가 가만히 안놔둘 테니까!" 히안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밀치며 벌쿤이 들어왔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는 대조적으로 고작 몇 뭉치의 서류들만 가지고 오는 중이었는데, 오히려 표정은 더욱 울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진 세이즈가 물었다. "벌쿤. 너는 정리할게 겨우 그것 밖에 없어?" 카타리나 역시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게! 벌쿤이 가사 일을 잘하는 만큼 정리도 잘 하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무슨 일인지 벌쿤은 고개를 저었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무겁디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 동안 내 앞으로 도착한 보고서는 전부다 연습장으로 쓰던지, 연구실이 비좁아 보여서 폐기처분을 했더니 남은건 이거 밖에 없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분명 보고서를 모두 폐기처분 한 사실을 형이 알면 엄청나게 화를 낼텐데..." 울상을 짓고있는 벌쿤을 바라보던 친구들은 자신들은 그나마 일할 거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안도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고, 남자친구의 불행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세이즈는 어깨를 두들겨주며 자신이 맡은 서류의 반 정도를 나눠주며 말했다. "벌쿤, 이거라도 열심히 정리해봐. 그럼 뮤스가 정상 참작 정도는 해줄지도 모르니까." 위로를 하는 것인지 화를 부축이는 것인지 모를 그녀의 말을 들은 벌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며 그녀의 서류를 받아들었다. 회의실의 창을 통해 붉은 저녁의 햇살이 스며들어 올 무렵이 되자 회의실을 가득 어지럽히고 있던 서류뭉치들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는데, 각자 바닥에 주저앉아 서류를 찾아 분류하던 뮤스의 친구들은 그만큼 많이 지친 표정이었다. 이마의 땀을 한번 훔친 카타리나는 정리해놓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휴우... 정리는 대충 되어 가는데, 이걸 언제 검토하고 보고서를 만든담..." 그녀의 말에 은근하게 웃은 가이엔은 서류의 모서리를 맞추며 말했다. "풋. 그렇게 힘들면 뮤스이게 일 좀 빼달라고 부탁해보렴. 설마 여자친구 부탁하나 못 들어주겠니?" 이에 심퉁해진 카타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뮤스가 그렇게 융통성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니? 뮤스가 좀 꽉 막힌 면이 있어서 내가 부탁해도 안 될거야. 그리고 너희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나 혼자 얌체같이 빠져나가는 것도 말도 안되고." -똑똑! 카타리나의 이야기는 노크소리에 멈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뮤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하루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피곤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구나?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사실 공학뇌동심결의 효용으로 인하여 며칠 동안 수면을 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그였지만, 밤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신적 피로가 쌓였던 것이었다. 그 모습에 불만조차 잊은 히안은 안타까움에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대체 뭘 했기에 하루 사이에 이렇게 늙었냐?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지 그래?" 카타리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뮤스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래 히안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녀의 따뜻한 말에 고마움을 느낀 뮤스는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훗! 나는 괜찮아. 오히려 너희들이 하루 종일 고생인 것 같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춘 바르키엘은 보란 듯이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충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을 맡았다는 소리는 켈트아저씨를 통해서 들었는데, 이 서류들 하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 바르키엘의 질문을 받은 뮤스는 회의탁자의 의자를 빼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해주기 위해서 찾아 온거야. 잠시만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으로 모여봐." 가볍게 말을 던진 뮤스는 자신이 가지고 온 문서들을 하나씩 나눠주었고, 친구들은 그것을 받아들며 각자의 자리에 앉고 있었다. "너희들도 듀들란 제국에서 공학개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맡게된 일도 그에 관계가 된 것인데..." 뮤스는 친구들의 눈을 한번씩 마주치며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어제 황제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하여 자신의 생각, 그리고 크라이츠와 드워프들 사이에 있었던 회의 내용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이번 일은 공학원에서 진행하고있는 모든 분야에 걸친 대규모의 일인만큼 공학원의 형황에 대한 서류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부탁했던 거야. 사실 내가 공학원에 없는 동안 너무 많이 변해서 아직도 공학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소하거든. 원장으로써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지... 후훗!" 뮤스의 엄살 섞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하루종일 자신들이 해왔던 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듀들란 제국과의 라이벌의식에 의해 없었던 의욕마저 두눈에 흐르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흥분하고있던 벌쿤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듀들란 제국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질 수는 없지!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께!" 벌쿤이 당당하게 자신의 결심을 표하자 그에게 시선을 돌린 친구들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는데, 히안이 자신의 서류더미를 두들기며 피식 웃었다. "풋! 벌쿤, 그런 말은 네가 맡은 서류들을 찾아온 후에 하는 것이 어떨까? 그 중요한 서류들을 모두 폐기처분해버렸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그..그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벌쿤을 보며 친구들은 동정의 한숨을 내쉬었고, 영원한 자신의 편이라 믿고있던 세이즈마저 그를 외면하자 결국 벌쿤은 모든 의욕을 한 순간에 상실 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뮤스는 벌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주며 위로했다. "후훗. 너무 기죽지 않아도 되니까 얼굴 펴라 벌쿤. 사람이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실수를 하게되었다면 그에 실망하기보다는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하는 거야. 알겠어?" "응 형." 자신의 위로에 벌쿤의 얼굴이 밝아지자 이번에는 시선을 친구들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공학원의 가장 대표적인 제품은 바로 전뇌거이고,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은 틀림없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더욱 발전된 전뇌거를 발표하게 될거야. 그것이 어떠한 성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가 생산한 전뇌거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란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는 전뇌거의 개량 부분을 맡고 있는 너희들도 남다른 각오로 임해야 할거야.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친구로서, 공학원의 원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주기를 부탁한다." 뮤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대답대신 굳은 의지가 담긴 얼굴을 하고있었는데, 뮤스는 이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책상을 한번 두들기며 마무리를 했다. "그럼 남은 작업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대한 공학자 설명회가 있을 테니 꼭 참석하도록 해. 그럼 나는 다른 공학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러 갈 테니 나중에 보자." 뮤스가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자 짧은 시간을 통해 큰 의무감을 새롭게 가지게된 친구들은 스스로 의욕을 부축이며 얼마 남지 않은 서류정리를 마무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8 난제 태양이 가장 기승을 부릴 늦여름이 되자 살갓을 파고들듯 따가운 햇살이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 시내를 내려 쬐고 있었다. 이에 여성들은 드레스가 치렁하게 달린 양산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고, 남성들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느긋한 발걸음 옮기고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정도의 햇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건강한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대륙의 내륙에 위치한 쟈트란은 듀들란 제국의 도시들 중에서도 습도가 낮은 축에 드는 도시였기에 사람들은 더위를 크게느끼지 못했고, 그늘진 곳에서는 바람이 불어 약간의 땀 마저 식혀주었기에 비교적 쾌적한 여름을 지낼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었다. 뜨거운 햇살로인해 듀들란 제국 황궁의 건물들이 달아오르자 시녀들과 하인들은 황궁에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귀족들은 그늘진 곳에 모여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한 인물들 중에는 회색의 옷을 입고있는 장영실과 마법사의 망토를 어께에 걸치고있는 루스티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는데, 계절에 상관없이 매 한 가지의 옷을 걸치고 있는 둘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띄고 있었다. 장영실은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한 관계로 수염이 덮수룩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를 해나가고 있다는 성취감에 빛이 나는 듯 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장영실은 작은 탁자 위의 음료수로 입을 적시며 말했다. "음...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도 모르겠군요. 오히려 낮에 해를 본 적도 오래된 것 같고..." 그의 옆에 함께 앉아있던 루스티커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손에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셨다. "허헛! 그러게 말일세. 일에 시달리다 보니 공학원에서 보름만에 나온 것이군. 그나저나 재상이 벌써 각국에 발표회 초청장을 발송했다고 하던데 시일을 맞출 수 있겠나?" 루스티커의 말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미 기관열차의 시범구역 운행이 어제로 끝난 상태이고, 듀들란식의 전뇌거도 모두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로서 최소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지는 않는 상황이죠." 루스티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모자라지는 않는다니? 어투를 보아하니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우리측의 전뇌거제작 기술이 경제적인 면이나 효율적인 면에서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정교함이나, 객관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많습니다. 특히 도이첸 제국 전뇌거의 주동력원인 마나구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어서 전뇌력을 충전해 쓰는 우리쪽의 전뇌거보다 월등하지요. 그렇기에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에게는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가 더욱 구미에 당길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기관열차는 어떤가? 아직 도이첸 제국에서는 기관열차라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랑스럽다는 듯한 루스티커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머금으며 대답했다. "후훗! 도이첸 제국에서 못만든 것이 아니라 아직 만들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측은 국가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것인만큼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그에 따라 기관열차를 우선적으로 제작했던 것입니다. 반면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은 개인적인 성향을 띄기 때문에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기관열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만일 도이첸 제국의 황실 역시 우리측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껴 공학원에 본격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쫓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장영실의 설명에 이마를 찌푸린 루스티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잉...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면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뻔 했군. 오히려 기분만 더 불편해져버렸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던지는 루스티커를 바라보고있던 장영실은 위로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음?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루스티커는 호기심이 이는지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고, 이번에는 장영실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우리측이 현시점에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그 문제의 마나구를 만들 수 없기에 전뇌력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력발전소는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공급의 한계가 있는 것이죠." "흠... 그야 그렇지. 나 역시 마나구를 만들어 보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네. 여러면에서 살펴본 결과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볼수가 없겠더구먼.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니 말일세." 마법사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루스티커가 고개를 내젓자 피식 웃은 장영실은 그제서야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지난 기간동안 전뇌력 공급 문제에 대해 여러방면으로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만, 그러던 중에도 계속해서 마나의 존재가 저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더군요. 제 몸에서 흐르고있는 뇌공력이나, 무공에 사용하는 내공의 힘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데다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중에는 항상 그 기운이 충만해있다는 점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물이나 공기처럼 특정한 물체에 저장이 된다는 사실은 더더욱 매력 적인 요소였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루스티커는 씁쓸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마나는 대기중에 항상 충만한 것이지만, 그것을 쓸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네. 그리고 몇 세대를 넘기지 않아 우리같은 마법사는 종적을 감춰 버리겠지... 그런만큼 마나를 가지고 전뇌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일세..." 씁쓸해 보이는 루스티커의 표정을 한번 살핀 장영실은 한 쪽에 놓여있던 책을 펼쳐들며 물었다. "하지만 이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도서관의 서적들을 섭렵하던 동안 흥미로운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라듀아보라는 분께서 저술하신 책인데... 음, 이 부분이군요." 장영실이 건네준 책을 받아든 루스티커는 눈에 힘을주며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내려갔다. "어디보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축복은 마나라 할 수 있다. 마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모든 만물들은 마나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의 한 예로 마법사가 아닌 이상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마나가 충만한 장소의 인간들은 항상 기운이 충만하여 자신의 일에 적극으로 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렇지 않은 장소의 인간들은 무기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정신이 나태해져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마나가 지역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마나는 항상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오늘 마나가 충만하다고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나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군..."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있는 루스티커를 바라본 장영실은 그 다음 구절을 짚으며 말했다. "이 부분 부터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구절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들어있으니까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루스티커는 대충 눈으로 그 내용을 훑어보며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말인가? 흠... 주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그들이 살아갈 터전인 땅과 하늘과 바다를 만들어내셨다. 주신의 한 조각 살점은 흙이 되었고, 한 올의 머리카락은 하늘이 되었으며, 한 방울의 땀은 바다를 이루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터전이 마련되자 주신께서는 한 모금의 숨결을 세상에 불어넣어 주셨고, 그 숨결이 닿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생명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주신의 숨결이 바로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마나인 것이다. ...중략... 주신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도 만물들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러나 그분의 숨결은 미물들이 직접 받아내기에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기에 이를 중화하기 위한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된 존재가 드래곤이다. 이후, 주신께서는 드래곤들의 몸에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으셨고, 드래곤들은 이를 중화시켜 세상으로 흘리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이 드래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마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라 설명될 수 있는것이다. ...중략... 드래곤이 발산하는 마나는 그들의 심장으로 부터 공급된다. 심장이 인간이나 동물들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작용을 하듯이 드래곤들의 심장은 마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로 드래곤의 심장은 엄청난 마나의 저장고라 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죽은 이후에도 일부의 마나가 드래곤의 심장에 남게 된다. 물론 일부라 해도 상상치도 못할 만큼의 마나이기에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연사한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되었던 적도 있었다." 다음 단락까지 모두 읽어내려간 루스티커는 뭔가 떠올랐기에 설마하는 생각을 가지며 물었다. "혹시! 자네 드래곤의 심장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아 버렸고,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 역시 간단하게 따진다면 마나구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니 전뇌기기들의 동력원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드래곤의 심장으로 전뇌력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후훗...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이 책의 설명대로 그 드래곤의 심장이 엄청난 양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장영실의 말에 루스티커는 턱을 쓸며 대답했다. "아마도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일 것일세. 마나의 양을 수치로 표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애써 표현하자면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채용된 마나구의 적게는 수십 만배, 많게는 수백만 배에 이르는 양으로 추정되고 있다네." 루스티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짚은 것이군요. 바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그 드래곤의 심장이 꼭 필요합니다!" 장영실이 흥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루스티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소를 터트렸다. "헛! 세상 일 이 말처럼 쉽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네. 그만큼 자네는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일세. 이 책에서 나와있듯이 과거 수 많은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손에 넣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나섰네. 하지만 어떠한 탐지 마법으로도 그 흔적을 찾아 낼 수 없었기에 별 성과가 없이 세월만 흘러가게 되었고, 마법사들 조차 드래곤의 심장을 찾는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지. 결국 드래곤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되었다네." 루스티커의 부정적인 견해에 인상을 찌푸린 장영실은 루스티커가 들고있던 책을 짚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라듀아보라는 대현자께서 쓰신 이 책의 내용이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저은 루스티커는 먼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흠... 완전히 사실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일일세. 말 그대로 과거의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가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니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장영실은 진지한 표정으로 루스티커의 의자 가까이로 몸을 움직였다. "허면, 루스티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스티커님 역시 드래곤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불가능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속되는 장영실의 질문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은 루스티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드래곤의 심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있는 몇 안되는 마법사 중의 한명일세. 게다가 그것이 어디있는 지도 대충 짐작을 하고있지.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의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생각지도 못했던 루스티커의 대답에 장영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측이라도 좋으니 그 이야기라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일을 떠나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너무나 강렬합니다. 직업탓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반짝이고 있는 장영실의 눈빛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우려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 그렇다면 다른 생각말고 듣기만 하게나. 만에 하나, 나의 추측이 틀리기라도 한다면 인간이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되는 곳이니 말일세..."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장영실이 숨을 죽이며 루스티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루스티커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자신이 추측하게 된 경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약 2000년 전, 아직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 그 외의 국가들이 성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네. 대륙에는 한 마리의 드래곤이 오랜 수면기에서 깨어나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지. 그 드래곤의 이름은 헬보네츠라고 전해오고 있지만, 그저 떠도는 소문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확실한 이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어쨌든 그 드래곤은 검은 비늘을 가지고있는 블랙 드래곤이었고, 모든 종류의 드래곤을 통털어 보더라도 몇 되지 않는 고룡 중의 한 마리였다네."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듣고있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루스티커의 말을 잠시 중단시켰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듣자하니 드래곤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져 있는 듯 합니다만, 그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장영실의 질문을 받은 루스티커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드래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총 다섯 종류의 드래곤이 있다네. 지금 이야기에 나오는 드래곤을 블랙드래곤이라 부르는 것 처럼 그 비늘의 색깔에 따라 드래곤의 종류를 나누게 되는데, 블랙드래곤을 포함하여 레드드래곤, 블루드래곤, 화이트드래곤, 그린드래곤... 이 다섯 종류일세. 또, 고대의 문서를 보면 골드드래곤과 실버드래곤이 존재 했다고도 하지만 목격 된 적은 없었지." "흠... 상당히 많은 종류의 드래곤이 있었군요." 장영실이 어느정도 이해한 듯 하자 루스티커는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드래곤은 그 종류에 따라 성향 역시 제각각이었는데, 그 중 블랙드래곤은 여러 드래곤들 중에서도 흉폭하기로 소문이 높았다네. 그러한 드래곤이 본체의 모습으로 인간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대륙의 전역은 공포에 휩쌓이게 되었고, 당시 존재하던 국가의 왕들이 모두 모이는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회까지 열리게 되었지."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가 지금껏 생각하던 드래곤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곳에서는 용이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온 곳에서는 용이 성스러운 동물이라 하여 행운을 가지고 온다 믿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드래곤들이 흉폭한 것은 아닐세. 그중에서도 그린드래곤은 아주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없지." "그린드래곤이라면 청룡... 그랬던 것이군요." 그제서야 장영실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루스티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게 각 국의 왕들이 모이게 되자 이를 알아챈 블랙드래곤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드래곤의 브래스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 이를 보다못한 왕들은 블랙드래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마침내 블랙드래곤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각국의 왕들에게 전달하게 되었지." "그 요구사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자신이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었고, 이 대륙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겠으니 마땅한 장소와 황금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네. 그 블랙드래곤은 다른 대륙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잃고서 이 오이랍대륙으로 오게 된것으로 추정되고 있지. 그리하여 각국의 왕들은 알맞은 자리를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찾게 된 장소가 바로 구바닌 산맥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호수였다네. 워낙 험했기에 각국의 왕들역시 전혀 관심없는 땅이었고, 가장가까운 도시가 200켈리 이상 떨어져 있었으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던 것이지." 제국개발 사업을 통해 장영실 역시 이곳의 지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구바닌 산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구바닌 산맥이라면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을 나누고 있는 산맥이 군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호수라면, 혹시 현재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우는 곳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물론 드래곤 역시 왕들의 속샘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흑룡의 호수가 워낙 아름다웠기에 만족했고, 그 곳에 레어를 틀게되었다네.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름답다는 곳을 드래곤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네. 쩝... 어쨌든 그 이후로 흑룡의 호수는 대륙의 마역중 한 곳으로 불리게 되었고, 인간이나 그외의 어떠한 종족도 그 주변에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되었다네." 그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며 까칠한 턱의 수염을 매만지던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렇다면 드래곤의 심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드래곤이 사는 곳이군요." 장영실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티커는 난간에 기대어 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드래곤의 심장은 드래곤이 죽은 자리에 있는 법... 블랙드래곤은 아마 지금쯤 생명력을 잃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네. 아무리 오래 사는 드래곤이라도 그 생명력은 끝이 있는 법이니까." 장영실은 루스티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블랙드래곤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확신은 없지만 드래곤의 습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네." "습성이라니요?"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욕심이 굉장하다네. 그렇기에 자신의 영역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침범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하지. 헌데, 몇 백년 전 흑룡의 호수로 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틀림없이 붉은 비늘을 가진 레드드래곤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다면 블랙드래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 틀림다는 것일세. 만일 블랙드래곤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 레드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에서 움직이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일세." "결국 문제는 하나군요. 그 레드드래곤을 봤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보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린 루스티커는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 목격자를 찾이 진위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거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네. 그런 이유로 결국은 추측머물게 될 수 밖에 없었지." 그렇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 장영실은 루스티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루스티커님께서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주십시오. 재상 각하께 말씀 드리면 의외로 쉽게 알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훗... 이제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게 되었으니 자네의 말대로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재상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하니 또 그놈의 복잡한 서류를 꾸며야 겠구먼." "그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러다간 제 명에 죽지도 못할 게야... 에잉...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루스티커는 엄살스러운 말을 뱉으며 몸을 돌렸고, 장영실 역시 잠시간의 휴식을 접으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8 (수정판) 난제 태양이 가장 기승을 부릴 늦여름이 되자 살갓을 파고들듯 따가운 햇살이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 시내를 내려 쬐고 있었다. 이에 여성들은 드레스가 치렁하게 달린 양산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고, 남성들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느긋한 발걸음 옮기고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정도의 햇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건강한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대륙의 내륙에 위치한 쟈트란은 듀들란 제국의 도시들 중에서도 습도가 낮은 축에 드는 도시였기에 사람들은 더위를 크게느끼지 못했고, 그늘진 곳에서는 바람이 불어 약간의 땀 마저 식혀주었기에 비교적 쾌적한 여름을 지낼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었다. 뜨거운 햇살로인해 듀들란 제국 황궁의 건물들이 달아오르자 시녀들과 하인들은 황궁에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귀족들은 그늘진 곳에 모여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한 인물들 중에는 회색의 옷을 입고있는 장영실과 마법사의 망토를 어께에 걸치고있는 루스티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는데, 계절에 상관없이 매 한 가지의 옷을 걸치고 있는 둘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띄고 있었다. 장영실은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한 관계로 수염이 덮수룩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를 해나가고 있다는 성취감에 빛이 나는 듯 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장영실은 작은 탁자 위의 음료수로 입을 적시며 말했다. "음...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도 모르겠군요. 오히려 낮에 해를 본 적도 오래된 것 같고..." 그의 옆에 함께 앉아있던 루스티커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손에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셨다. "허헛! 그러게 말일세. 일에 시달리다 보니 공학원에서 보름만에 나온 것이군. 그나저나 재상이 벌써 각국에 발표회 초청장을 발송했다고 하던데 시일을 맞출 수 있겠나?" 루스티커의 말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미 기관열차의 시범구역 운행이 어제로 끝난 상태이고, 듀들란식의 전뇌거도 모두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로서 최소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지는 않는 상황이죠." 루스티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모자라지는 않는다니? 어투를 보아하니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우리측의 전뇌거제작 기술이 경제적인 면이나 효율적인 면에서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정교함이나, 객관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많습니다. 특히 도이첸 제국 전뇌거의 주동력원인 마나구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어서 전뇌력을 충전해 쓰는 우리쪽의 전뇌거보다 월등하지요. 그렇기에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에게는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가 더욱 구미에 당길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기관열차는 어떤가? 아직 도이첸 제국에서는 기관열차라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랑스럽다는 듯한 루스티커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머금으며 대답했다. "후훗! 도이첸 제국에서 못만든 것이 아니라 아직 만들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측은 국가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것인만큼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그에 따라 기관열차를 우선적으로 제작했던 것입니다. 반면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은 개인적인 성향을 띄기 때문에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기관열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만일 도이첸 제국의 황실 역시 우리측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껴 공학원에 본격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쫓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장영실의 설명에 이마를 찌푸린 루스티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잉...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면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뻔 했군. 오히려 기분만 더 불편해져버렸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던지는 루스티커를 바라보고있던 장영실은 위로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음?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루스티커는 호기심이 이는지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고, 이번에는 장영실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우리측이 현시점에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그 문제의 마나구를 만들 수 없기에 전뇌력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력발전소는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공급의 한계가 있는 것이죠." "흠... 그야 그렇지. 나 역시 마나구를 만들어 보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네. 여러면에서 살펴본 결과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볼수가 없겠더구먼.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니 말일세." 마법사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루스티커가 고개를 내젓자 피식 웃은 장영실은 그제서야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지난 기간동안 전뇌력 공급 문제에 대해 여러방면으로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만, 그러던 중에도 계속해서 마나의 존재가 저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더군요. 제 몸에서 흐르고있는 뇌공력이나, 무공에 사용하는 내공의 힘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데다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중에는 항상 그 기운이 충만해있다는 점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물이나 공기처럼 특정한 물체에 저장이 된다는 사실은 더더욱 매력 적인 요소였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루스티커는 씁쓸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마나는 대기중에 항상 충만한 것이지만, 그것을 쓸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네. 그리고 몇 세대를 넘기지 않아 우리같은 마법사는 종적을 감춰 버리겠지... 그런만큼 마나를 가지고 전뇌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일세..." 씁쓸해 보이는 루스티커의 표정을 한번 살핀 장영실은 한 쪽에 놓여있던 책을 펼쳐들며 물었다. "하지만 이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도서관의 서적들을 섭렵하던 동안 흥미로운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라듀아보라는 분께서 저술하신 책인데... 음, 이 부분이군요." 장영실이 건네준 책을 받아든 루스티커는 눈에 힘을주며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내려갔다. "어디보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축복은 마나라 할 수 있다. 마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모든 만물들은 마나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의 한 예로 마법사가 아닌 이상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마나가 충만한 장소의 인간들은 항상 기운이 충만하여 자신의 일에 적극으로 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렇지 않은 장소의 인간들은 무기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정신이 나태해져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마나가 지역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마나는 항상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오늘 마나가 충만하다고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나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군..."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있는 루스티커를 바라본 장영실은 그 다음 구절을 짚으며 말했다. "이 부분 부터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구절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들어있으니까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루스티커는 대충 눈으로 그 내용을 훑어보며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말인가? 흠... 주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그들이 살아갈 터전인 땅과 하늘과 바다를 만들어내셨다. 주신의 한 조각 살점은 흙이 되었고, 한 올의 머리카락은 하늘이 되었으며, 한 방울의 땀은 바다를 이루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터전이 마련되자 주신께서는 한 모금의 숨결을 세상에 불어넣어 주셨고, 그 숨결이 닿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생명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주신의 숨결이 바로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마나인 것이다. ...중략... 주신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도 만물들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러나 그분의 숨결은 미물들이 직접 받아내기에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기에 이를 중화하기 위한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된 존재가 드래곤이다. 이후, 주신께서는 드래곤들의 몸에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으셨고, 드래곤들은 이를 중화시켜 세상으로 흘리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이 드래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마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라 설명될 수 있는것이다. ...중략... 드래곤이 발산하는 마나는 그들의 심장으로 부터 공급된다. 심장이 인간이나 동물들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작용을 하듯이 드래곤들의 심장은 마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로 드래곤의 심장은 엄청난 마나의 저장고라 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죽은 이후에도 일부의 마나가 드래곤의 심장에 남게 된다. 물론 일부라 해도 상상치도 못할 만큼의 마나이기에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연사한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되었던 적도 있었다." 다음 단락까지 모두 읽어내려간 루스티커는 뭔가 떠올랐기에 설마하는 생각을 가지며 물었다. "혹시! 자네 드래곤의 심장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아 버렸고,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 역시 간단하게 따진다면 마나구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니 전뇌기기들의 동력원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드래곤의 심장으로 전뇌력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후훗...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이 책의 설명대로 그 드래곤의 심장이 엄청난 양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장영실의 말에 루스티커는 턱을 쓸며 대답했다. "아마도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일 것일세. 마나의 양을 수치로 표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애써 표현하자면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채용된 마나구의 적게는 수십 만배, 많게는 수백만 배에 이르는 양으로 추정되고 있다네." 루스티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짚은 것이군요. 바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그 드래곤의 심장이 꼭 필요합니다!" 장영실이 흥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루스티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소를 터트렸다. "헛! 세상 일 이 말처럼 쉽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네. 그만큼 자네는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일세. 이 책에서 나와있듯이 과거 수 많은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손에 넣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나섰네. 하지만 어떠한 탐지 마법으로도 그 흔적을 찾아 낼 수 없었기에 별 성과가 없이 세월만 흘러가게 되었고, 마법사들 조차 드래곤의 심장을 찾는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지. 결국 드래곤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되었다네." 루스티커의 부정적인 견해에 인상을 찌푸린 장영실은 루스티커가 들고있던 책을 짚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라듀아보라는 대현자께서 쓰신 이 책의 내용이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저은 루스티커는 먼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흠... 완전히 사실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일일세. 말 그대로 과거의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가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니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장영실은 진지한 표정으로 루스티커의 의자 가까이로 몸을 움직였다. "허면, 루스티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스티커님 역시 드래곤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불가능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속되는 장영실의 질문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은 루스티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드래곤의 심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있는 몇 안되는 마법사 중의 한명일세. 게다가 그것이 어디있는 지도 대충 짐작을 하고있지.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의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생각지도 못했던 루스티커의 대답에 장영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측이라도 좋으니 그 이야기라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일을 떠나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너무나 강렬합니다. 직업탓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반짝이고 있는 장영실의 눈빛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우려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 그렇다면 다른 생각말고 듣기만 하게나. 만에 하나, 나의 추측이 틀리기라도 한다면 인간이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되는 곳이니 말일세..."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장영실이 숨을 죽이며 루스티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루스티커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자신이 추측하게 된 경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약 2000년 전, 아직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 그 외의 국가들이 성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네. 대륙에는 한 마리의 드래곤이 오랜 수면기에서 깨어나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지. 그 드래곤의 이름은 헬보네츠라고 전해오고 있지만, 그저 떠도는 소문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확실한 이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어쨌든 그 드래곤은 검은 비늘을 가지고있는 블랙 드래곤이었고, 모든 종류의 드래곤을 통털어 보더라도 몇 되지 않는 고룡 중의 한 마리였다네."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듣고있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루스티커의 말을 잠시 중단시켰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듣자하니 드래곤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져 있는 듯 합니다만, 그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장영실의 질문을 받은 루스티커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드래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총 다섯 종류의 드래곤이 있다네. 지금 이야기에 나오는 드래곤을 블랙드래곤이라 부르는 것 처럼 그 비늘의 색깔에 따라 드래곤의 종류를 나누게 되는데, 블랙드래곤을 포함하여 레드드래곤, 블루드래곤, 화이트드래곤, 그린드래곤... 이 다섯 종류일세. 또, 고대의 문서를 보면 골드드래곤과 실버드래곤이 존재 했다고도 하지만 목격 된 적은 없었지." "흠... 상당히 많은 종류의 드래곤이 있었군요." 장영실이 어느정도 이해한 듯 하자 루스티커는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드래곤은 그 종류에 따라 성향 역시 제각각이었는데, 그 중 블랙드래곤은 여러 드래곤들 중에서도 흉폭하고, 독단적이었기에 다른 드래곤과 교류를 하지 않는 유일한 드래곤이라네. 그러한 드래곤이 본체의 모습으로 인간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대륙의 전역은 공포에 휩쌓이게 되었고, 당시 존재하던 국가의 왕들이 모두 모이는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회까지 열리게 되었지."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가 지금껏 생각하던 드래곤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곳에서는 용이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온 곳에서는 용이 성스러운 동물이라 하여 행운을 가지고 온다 믿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드래곤들이 흉폭한 것은 아닐세. 그중에서도 그린드래곤은 아주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없지." "그린드래곤이라면 청룡... 그랬던 것이군요." 그제서야 장영실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루스티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게 각 국의 왕들이 모이게 되자 이를 알아챈 블랙드래곤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드래곤의 브래스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 이를 보다못한 왕들은 블랙드래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마침내 블랙드래곤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각국의 왕들에게 전달하게 되었지." "그 요구사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자신이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었고, 이 대륙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겠으니 마땅한 장소와 황금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네. 그 블랙드래곤은 다른 대륙에서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 오이랍대륙으로 오게 된것으로 추정되고 있지. 그리하여 각국의 왕들은 알맞은 자리를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찾게 된 장소가 바로 구바닌 산맥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호수였다네. 워낙 험했기에 각국의 왕들역시 전혀 관심없는 땅이었고, 가장가까운 도시가 200켈리 이상 떨어져 있었으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던 것이지." 제국개발 사업을 통해 장영실 역시 이곳의 지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구바닌 산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구바닌 산맥이라면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을 나누고 있는 산맥이 군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호수라면, 혹시 현재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우는 곳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물론 드래곤 역시 왕들의 속샘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흑룡의 호수가 워낙 아름다웠기에 만족했고, 그 곳에 레어를 틀게되었다네.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름답다는 곳을 드래곤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네. 쩝... 어쨌든 그 이후로 흑룡의 호수는 대륙의 마역중 한 곳으로 불리게 되었고, 인간이나 그외의 어떠한 종족도 그 주변에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되었다네." 그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며 까칠한 턱의 수염을 매만지던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렇다면 드래곤의 심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드래곤이 사는 곳이군요." 장영실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티커는 난간에 기대어 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의 심장은 드래곤이 죽은 자리에 있는 법... 자연사한 드래곤의 모든 신체부위는 공기중으로 흩어져 사라지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주먹만한 구형으로 그 자리에 남게 된다네." "루스티커님의 말씀은... 그 블랙드래곤이 죽었다는 것입니까?" "먼저 말했듯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쯤 생명력을 잃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네. 아무리 오래 사는 드래곤이라도 그 생명력은 끝이 있는 법이니까." 장영실은 루스티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블랙드래곤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블랙 드래곤의 습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네." "습성이라니요?" "블랙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그 종이 다르더라도 가끔 교류를 한다네. 하지만 블랙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욕심이 굉장한데, 심지어는 같은 드래곤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침범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헌데, 몇 백년 전 흑룡의 호수로 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틀림없이 붉은 비늘을 가진 레드드래곤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다면 블랙드래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 틀림다는 것일세. 만일 블랙드래곤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 레드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에서 움직이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일세." "결국 문제는 하나군요. 그 레드드래곤을 봤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보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린 루스티커는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 목격자를 찾이 진위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거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네. 그런 이유로 결국은 추측머물게 될 수 밖에 없었지." 그렇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 장영실은 루스티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루스티커님께서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주십시오. 재상 각하께 말씀 드리면 의외로 쉽게 알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훗... 이제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게 되었으니 자네의 말대로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재상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하니 또 그놈의 복잡한 서류를 꾸며야 겠구먼." "그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러다간 제 명에 죽지도 못할 게야... 에잉...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루스티커는 엄살스러운 말을 뱉으며 몸을 돌렸고, 장영실 역시 잠시간의 휴식을 접으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2003-01-19] 짜가신선 <대공학자> #8-9 -며칠 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넓은 실내에는 백 여명의 사람들이 단상 위에 서서 조리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뮤스를 주시한 채 앉아있었다. 오늘이 바로 뮤스가 공학원의 원장으로서 처음으로 공학자 설명회의 날이었던 것이었다. 단상을 제외한 곳은 전뇌등을 꺼둔 상태였기에 어두웠고, 뮤스가 서있는 단상 부근에만 전뇌등이 켜져있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집중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상위에서 걸음을 옮기며 청중들을 향해 설명을 하던 뮤스는 손에들린 요약서를 한장 넘기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또, 이번 이번 국가사업을 맡는데 있어 듀들란 제국에 비해 유리한 조건은 앞서 설명 드렸던 시장선점의 측면이나 다수의 제품군을 가졌다는 측면 외에도 공학원 형태의 유리함도 들 수 있습니다.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우리측의 공학원은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있습니다. 그 덕에 폭넓은 시장을 구축 할 수 있었고, 현지로부터 값싸고 질좋은 자재를 직접 조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까지 계산한 부품조립공정시설을 제국의 전역에 구축하고 있기에 제품의 대량생산에 가장 이상적인 모형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이곳에 모이기 이전부터 미리 나눠준 설명문을 읽어 보았던 청중들은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감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술렁임이 그치고 실내가 조용해지자 장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요약서를 말아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학원의 형태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각 도시의 공학원들이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있기에 공학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며칠전 보고서 작성때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 공학원에서 부터 모여든 정보들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현제의 업무에는 거의 활용을 못하는 실정이 되어 버린 것이죠. 게다가 이곳 본원으로 부터 발송된 지시사항이 각 공학원에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짧아도 3일... 앞으로 급박하게 돌아갈 상황들을 생각한다면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청중들은 뮤스의 의견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었는데, 지난 며칠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그 방식의 한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잠시 말을 멈추었던 뮤스는 단상의 한쪽에 서있던 켈트와 드워프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고, 그들은 흰색 천이 뒤덮여있는 탁자를 단상의 한 가운데로 들어날라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낀 뮤스는 손을 모아쥐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물건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워프분들과 함께 제작한 것입니다." 뮤스는 말과 함께 탁자를 덮고있던 흰색의 천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탁자 위에는 각기다른 모양을 가진 세개의 기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부터 첫번 째 자리에 놓인 것은 수 많은 전뇌선이 복잡하게 꽂혀있는 가로, 세로 50셀리 크기의 검은색 기기였고, 두번째 자리에 놓인 것 역시 그와 비슷한 크기에 몇개의 버튼이 빛을 내고있는 기기였다. 마지막 기기는 금속으로 된 관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그 끝이 뾰족했으며, 길이는 20셀리 안팎이었다. 손끝으로 세 종류의 기기들을 쓰다듬듯이 만지던 뮤스는 그 왼쪽에 서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 옆에있는 기기들은 장거리 통신을 위해 고안된 것들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원거리통신기를 장거리 통신과, 다 방향 통신에 알맞도록 개량한 것으로서 '광역통신기'라고 불리게 됩니다. 기기를 하나씩 설명해 드리자면, 가장 왼쪽의 기기는 '송수신설정장치'로서 송수신 할 대상을 선택하는 역할을 하게되며, 그 옆의 기기는 '단말장치'로서 소리를 파장으로 변환해 주고, 또 반대로 전달되어오는 파장을 소리로 변환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략 적인 설명을 하던 뮤스는 가장 오른쪽에 올려져있던 금속 막대를 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금속 막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공식적인 명칭은 '가변형전파축'이지만, 이를 줄여 전파축이라 하겠습니다. 전파축은 광역통신기의 핵심기술로서 단말장치에서 송출하는 전파의 한계도달거리를 연장시켜주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 전파축들은 땅속에 박아 넣는 간단한 작업만으로 설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10일 이내에 모든 설치가 완료될 것이며, 30켈리 간격으로 공학원과 공학원의 사이를 이어주게 됩니다. 광역통신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개별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뮤스는 청중들이 놀라움을 모두 표시하기도 전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만 했다. 전달 사항은 많았고, 오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뮤스는 수 많은 중요사항을 직접 세밀히 제시하며 그에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야만 했는데, 아직까지 이곳에서 일하는 공학자들에게 직접 일을 맡기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네시간에 걸친 공학자 설명회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회의실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좋아서 공학자로 지원한 만큼 앎의 기쁨을 느끼는 듯 했는데, 회의중에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실내에는 뮤스가 몇몇 공학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뮤스에게 모여든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을 물어보는 중이었고, 뮤스 역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고 있었다. "원장님. 광역통신기에서 송출하는 전파는 원거리통신기에서 송출하는 전파와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전파의 출력 자체를 높이기도 했고, 전파축이 땅속에 설치되는 특성을 살려 지각을 타고도 전파가 송출이 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것은 보안을 염두에 둔것으로서 평소에는 안정적이고 속도가 빠른 공중의 전파를 이용하게 되고, 만에 하나 송수신설정장치가 지정한 장소 이외의 곳으로 전파가 빠져나가게 된다면 곧바로 공중의 전파는 송출을 멈추게 되고 그 때부터 지각을 통해 전파가 송출되기 시작합니다. 지각을 통해 전해지는 전파는 비록 속도와 안정성은 공중의 전파보다 떨어지지만, 전파축의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는 한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죠." "흠...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군요." 설명을 듣고있던 공학자들이 고개를 내젖자 미소를 띄운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광역통신기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 서류들을 배포할 테니, 그것을 참조하도록 하시죠." "아! 그럼 그때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바쁘실텐데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이만 연구실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공학자들이 뮤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그의 지식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깍듯이 대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첫번째 전체회의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뮤스는 오랜 시간에 걸친 연설로 말라버린 목을 매만졌다. "흠... 정말 힘들군." 뮤스가 뻐근해진 목을 두들기고 있을 때, 설명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친구들이 다가왔고, 머리를 부여잡고있던 벌쿤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윽. 형! 지금까지 들은것들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어께를 으쓱거렸다. "글쎄... 더 공부를 하는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마. 표정들을 보아하니 다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니까 말이야." 뮤스의 말을 들은 벌쿤이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벌쿤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는데, 뮤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차피 너희들이 오늘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들은 전파공학 쪽으로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으니까. 아! 그리고 너희들과 따로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까 크라이츠 누님의 집무실로 함께 가도록 하자." 히안이 머슥한 기색을 지우며 되물었다. "응? 우리와 함께 따로 할 이야기란게 뭔데?"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거야." 각각 궁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살피며 뮤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유리잔의 투명한 떨림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조용한 방안을 흐르고 있었다. 정결하게 손질된 손톱이 석류 만큼이나 붉은 액체가 반쯤 담겨있는 잔을 튕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 손은 천천히 잔을 들어 그 보다 더욱 붉게 보이는 입술로 가져가고 있었다. 입술을 타고 액체가 살짝 넘어가자 충분한 만족을 느낀 손은 다시금 잔을 내려 놓았고, 혀는 입술에 남아있는 액체를 감아당겼다. "음... 이제 대충 때가 된 듯도 한데, 생각보다 더뎌지는군... 과연 뮤스는 어떻게..." 진한 향기를 품은 듯 고혹스러우면서도, 그 어떤 여성도 감히 따르지 못할 품위가 흐르는 목소리였다. 혼자만의 말을 나직히 흘리고선 잠시 입술을 멈추었을 때, 그녀가 머물러있는 방의 문밖으로 부터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크라이츠 누님, 들어가도 될까요?" 그 목소리는 크라이츠를 누님이라 부르는 유일한 인간인 뮤스의 것이었고, 고혹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크라이츠였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크라이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바꾸며 대답했다. "호홋! 어서 들어오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던 참이란다." 그녀의 허락과 동시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뮤스를 시작으로 그의 친구들이 집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들어오자 집무실은 자연스럽게 가득차게 되었는데, 원래 크라이츠의 집무실이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벽으로 책장들이 들어차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었기에 비좁아 보이는 것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들을 맞기위해 몸을 일으킨 크라이츠는 소파로 다가가며 말했다. "조금 비좁겠지만, 충분히 앉을만 할거에요. 이런 분위기도 단란하고 좋은 것 같으니 모두들 앉도록 하죠." 그녀가 소파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리를 지정하자 뮤스와 친구들은 각자 소파에 앉게되었고, 크라이츠 역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을 한번 훑어본 크라이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드워프분들은 아직 안오셨니? 그 분들도 참석한다고 하셨는데..." 크라이츠의 말에 들고들어온 서류를 정리하던 뮤스가 대답했다. "아... 드워프 아저씨들은 준비할 것이 있어서 작업실로 가셨어요. 어차피 오늘 이야기할 내용을 다 알고 계신데다가 작업할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거든요." "흠... 그렇구나. 그나저나 오늘 할 이야기는 어떤 것이니? 국가사업을 돕기로 결정한 이후 부터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통 모르겠더구나." 그녀의 말에 뮤스는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워낙 정신 없이 일을 준비하느라 미처 누님께 말씀 드릴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모여달라고 한 것이죠." 미소로서 크라이츠에게 양해를 구한 뮤스는 이 자리에 모인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달라고 한 것은 내가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나와 드워프 아저씨들이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 친구들은 의아한 얼굴로 뮤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 중 카타리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몸을 바짝 끌어당기며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결정이라니? 설마...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 그녀의 물음에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뮤스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음... 꼭 황당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야. 듣기에 따라서는 말이지." 시원찮게 대답하고있는 뮤스의 태도를 본 카타리나는 도끼눈을 치켜뜨며 따지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왜그렇게 내 얼굴을 보지도 못하는 거니? 설마 나한테 뭔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카..카타리나. 속이긴... 있는 그대로 말할거야." 카타리나가 강경하게 나오기 시작하면서 뮤스가 쩔쩔 매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본 히안은 어이가 없어하며 혼잣말을 했다. "모양을 보아하니 결국 뮤스 녀석도 카타리나 한테 잡혀 살고 있군. 내가 저런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하나?" 그 이후로도 히안과는 상관 없이 뮤스와 카타리나 사이의 기묘한 상황은 계속 되고 있었는데, 그들 둘을 보다 못한 세이즈가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카타리나, 일단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에 반대해도 되잖니? 그러니 조금만 참고 뮤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렴." 그제야 뮤스를 닥달하던 카타리나는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후우... 그래, 그럼 한번 이야기 해봐."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불편한 모습을 하고있던 뮤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드워프 아저씨들과 나는 흑룡의 호수에 다녀올 생각이야." 흑룡의 호수라는 말이 나오자 친구들의 눈은 자연스래 부릅떠지게 되었고, 카타리나는 기가막힌 기분에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뮤스의 입에서 나온 흑룡의 호수가 어떤곳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쿤만은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드베인 숲에서만 살았던 그로서는 흑룡의 호수가 어떤 곳인지 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왜그래? 흑룡의 호수가 굉장한 곳이기라도 한거야?"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벌쿤을 향해 바르키엘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흑룡의 호수는 드베인 숲, 엘프의 숲과 함께 대륙 삼대 마역이라 불리우며 오래전 부터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어있는데,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대 마역중 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곳에 가기를 두려워 하고 있지." 바르키엘의 설명을 듣자 더욱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뭐? 드베인 숲도 그 삼대마역이라는 데 속한다는 말이야? 하하핫! 그렇다면 걱정 할 것 없잖아. 드베이 숲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 그저 마물들이 수시로 출현해서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는 점만 빼면 살만한 곳이라고. 뭐... 늪지대가 도처에 있어서 가끔 마을 사람들이 빠져 죽긴 했지만, 큰 문제점은 되지 않지. 아! 또 하나더, 쉴드옥토퍼스 산란기에만 조금 조심하면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지." 벌쿤의 이야기가 하나씩 나올 때 마다 얼굴색이 점차 하얗게 변하는 카타리나를 바라본 히안은 급히 벌쿤의 입을 막았다. "이런 눈치없는 녀석! 그 정도면 충분히 위험한 거라고! 그냥 조용히 있기나 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히안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입은 히안의 손에 가로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뮤스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대체 흑룡의 호수가 어떤 곳인지 알고 그러는 거니?" 잔뜩 흥분해 있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자뭇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 역시 흑룡의 호수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야.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공학원이 앞으로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큰 문제점 이라니?" "지난 며칠간 공학자들이 제출해준 보고서를 살펴보니 앞으로 몇 개월 이내에 공학원의 전뇌력 수급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친구들은 아직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고, 히안이 벌쿤을 놓아주며 물었다. "지금까지 수력발전소에서 충분한 전뇌력을 공급받고 있는데다가 마나구의 보유량도 상당하잖아. 그런데 더 이상의 전뇌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물론 마나구의 보유량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의 수준에서는 린강의 수력발전소만으로도 전뇌력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야. 이제 도이첸 제국은 황실의 주도로 큰 개혁이 일어나게 될거야. 대충 예를 들자면, 제국내의 모든 집에서는 촛불대신 마나등으로 불을 밝히게 될 것이고, 광역통신기와 같은 통신수단도 급속하게 발달되어 보급 될 것이지. 게다가 전뇌거 역시 그 동력원을 마나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교체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까지 생각해본다면 마나구로 모든 전뇌력을 충당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게다가 현재 전뇌력 수급의 주축이 되는 수력발전소는 강이 없는 곳에는 세울 수 없다는 지형적인 한계점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에 화력이나 풍력을 이용한 발전소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원료로 쓰일 자원이 필요하거나 효율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을 가지지.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전혀 다른 형태의 전뇌력 공급 장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어. 바로... '마나융합발전소'." "마나융합발전소라..." 히안이 나직히 되세기고 있을 때 뮤스의 말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온 마나구는 보통의 마나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그저 수정구에 마나를 저장하는 원리를 빌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뇌력을 압축하여 수정구에 저장해왔던 것이지. 그러나 마나융합발전소는 말 그대로 마나자체를 전뇌력으로 바꾸어 주는 곳이야. 마나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제어하여 전뇌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고, 이렇게 생성된 전뇌력은 전뇌선을 타고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는 것이지. 한 마디로 제국 어디든 전뇌선이 설치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전뇌력을 사용할 수 있어." 그의 설명을 듣던 친구들은 이번일의 중요성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카타리나만은 딱딱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없이 뮤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타리나는 기분을 억누르며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흑룡의 호수는 마나융합발전소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거니?"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뮤스는 갈등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흑룡의 호수에 마나융합발전소에서 쓰일 마나를 공급해줄 물체가 있어. 그저 그것을 드워프 아저씨들과 함께 가지고 오려는 것이니 아주 간단한 일이지." 뮤스는 카타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세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 역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미심적인 눈초리로 뮤스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내 생각만큼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거니?" "응. 그저 잠깐 다녀오는 일일 뿐이야. 게다가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지." 뮤스가 자신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어떠한 결심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위험하지 않다면, 나도 따라가겠어! 그래도 상관 없겠지?" "으응? 네가 우리를 따라 가겠다고?" "응. 말 그대로야!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와 떨어져있기가 싫고, 네가 확신 하는대로 흑룡의 호수가 위험하지 않다면, 조금 힘이 들더라도 너를 따라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지!" 생각지도 못한 카타리나의 말에 뮤스가 당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카타리나는 쐬기를 박듯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렇게 결정 난걸로 알고 있으면 되지? 나도 짐을 좀 챙겨야 하니 먼저 일어날게. 너희들은 한 동안 뮤스와 못 볼테니 이야기나 더 나누도록 하렴." 이렇게 말을 한 그녀는 경직된 분위기에 한줄기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고,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뮤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크라이츠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뮤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카타리나양에게 멋지게 한방 먹은 듯 하구나.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저렇게까지 네가 그곳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뮤스의 친구들 역시 대답이 궁금한지 뮤스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뮤스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대답했다. "후우... 카타리나가 반대할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따라가겠다고 말을 할 줄은 몰랐군요. 비록 카타리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함께 갈수는 없어요. 아무래도 새벽에 몰래 떠나거나 해야겠죠." "글쎄... 아무래도 카타리나양이 이번만큼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 갈 것 같지는 않구나." "흠... 나중에 카타리나를 달래보던지 해야죠 뭐." 크라이츠의 말대로 뮤스는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쨌든 하던 이야기는 마무리 해야 했기에 잠시 생각을 접으며 흑룡의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저 이동 경로나 걸리는 시일 정도만 언급했을 뿐, 친구들 마저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흑룡의 호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0 동행 비좁게만 보이던 서재는 어느새 원래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뮤스와 함께 찾아온 친구들이 모두 서재를 나섰기 때문이었고, 뮤스는 크라이츠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남아있는 상태였다.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있던 크라이츠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뮤스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뮤스, 너는 그 곳이 왜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내막을 충분히 알고 있겠지?" 한번 떠보려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훗. 바로 블랙드래곤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는 것이죠. 그 블랙 드래곤의 이름은 헬보네츠... 약 2000년 전 모습을 감춘 뒤 지금까지 목격한 사람이 없죠."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헬보네츠는 성격이 아주 나쁜 드래곤이란다. 다른 드래곤들은 레어 주변에 마물들을 키워 귀찮은 존재들이 근접하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헬보네츠는 그 마저도 불쾌히 여겨 자신의 영역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지. 심지어는 같은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흑룡의 호수로 가겠다는 것이니?" 크라이츠의 물음에 은근한 미소를 지은 뮤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누님의 말씀 대로 블랙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여타 생명체가 접근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죠. 하지만 그것도 블랙 드래곤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아닙니다." 크라이츠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네 말투를 들어보니 그 블랙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었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어떤 근거로 그렇게 자신 할 수 있지?" "그건 바로... 누님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근거가 되는 것이죠. 흑룡의 호수는 누님의 레어로 부터 겨우 200켈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그 헬보네츠라는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 누님의 영역과 그 블랙드래곤의 영역이 겹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리가 없겠죠." 그의 대답을 듣자 크라이츠는 돌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고,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오호호홋! 설마설마 했지만, 네가 우리 드래곤의 습성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니 정말 흐뭇하구나..." "그저 추측이었을 뿐이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누님께 여쭈어 보고 싶었던 것이죠." "사실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은건 그 녀석이 흑룡의 호수에 정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란다. 녀석은 다른 블랙 드래곤과 영역 싸움을 하게되었는데, 결국 패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고, 이곳으로 도주해 온것이지. 그런 이유로 레어조차 만들 힘이 없었던 헬보네츠는 자신의 상처를 숨긴 채 인간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레어를 준비하도록 만들게 했던 것이란다." 당시의 상황을 크라이츠를 통해 자세하게 듣고있던 뮤스는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당시 누님은 헬보내츠의 출현을 모르고 계셨었나요?" "호홋! 물론 나의 영역을 침범한 드래곤의 존재를 모를리가 없었지. 게다가 사이가 좋지 않은 블랙 드래곤이어서 내 영역에서 내쫓을 생각으로 지금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는 곳으로 찾아갔단다. 그런데 막상 그곳으로 찾아가보니 헬보네츠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채였고,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그의 황금들만이 주변에서 나뒹굴고 있더구나." 크라이츠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황홀경에 빠지고 있는 듯 했는데, 뮤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때 좋은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걸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아이들 마냥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있잖니... 헬보네츠는 그 더러운 성격을 앞세워 엄청난 황금을 긁어 모았단다. 다른 드래곤들과 비교도 안될만큼의 집착이었지. 그런데 그렇게 죽고나니 황금들은 가엾게도 주인을 잃었고, 내가 어쩔 수 없이 모든 황금들을 쓸어오게 되었단다. 호호홋! 한마디로 횡재 한 것이지..." "하... 그랬던 것이었군요." 허공을 응시하며 옛생각에 잠겨있던 크라이츠는 문득 시선을 거두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 물건이 혹시 헬보네츠의 심장이니?" "아... 그것은..." 뮤스는 대답하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헬보네츠의 심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같은 종족인 크라이츠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족의 장기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뮤스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난처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드래곤의 심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장기의 종류가 아니거든. 인간들 중에서는 드래곤의 심장을 본 자가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을 장기의 모습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드래곤의 심장이란 드래곤의 체내에 존재하는 작은 구슬을 말하는 것이란다." 뮤스는 전혀 새로운 사실에 입을 벌리며 되물었다. "에? 장기의 일종이 아니라 구슬이라고요? 그런데 왜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이름을..." "드래곤의 체내에는 인간의 심장과 같이 실제로 피를 만들고 온몸으로 보내는 심장이 존재한단다. 하지만 네가 찾고있는 드래곤의 심장은 그러한 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가 응축되어있는 체내의 작은 구슬을 말하는 것은데,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는다면 육체는 모두 자연으로 흩어지고 마나를 간직한 구슬만이 남게 되니, 훗날 그 구슬을 발견한 인간들은 그것이 드래곤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물건이라 생각하여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란다." "정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누님께서 과거에 헬보네츠의 심장이 남아있는 것을 보셨던 건가요?" 어깨를 으쓱인 크라이츠는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이지. 나 역시 그것을 보고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고개를 갸웃거린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그 당시 녀석의 행동이 너무나 괘씸한 나머지 분풀이를 한다고 그 심장을 어디론가 던져버린 기억이 있는데... 어딘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이에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차피 그곳에 접근한 인간들은 없을 테니, 그 주변 어딘가에 있겠죠. 정 안된다면 마나 탐지기라도 만들면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일이야 어찌되었건 크라이츠와의 대화에서 큰 수확을 얻었던 뮤스는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던 뮤스는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떠날 준비를 하러 가볼께요. 아무튼 오늘 이야기 고마웠어요. 누님." 크라이츠는 미소로 대답을 했고, 뮤스는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뮤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며 크라이츠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누님.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 카타리나와 함께 가더라도 괜찮겠죠?" 그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던 크라이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흠...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지형이 험난해서 여자의 체력으로 힘이 들긴 하겠지만, 너와 드워프분들이 있으니 별 무리가 안될테고, 이번 기회에 카타리나의 근심을 좀 덜어주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카타리나가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는걸요? 그나저나 카타리나는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을려나..." 뮤스의 혼잣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드워프 분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보렴 그곳에 카타리나 양이 있을 테니..." "네? 그곳에요?" 그의 되물음에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이 크라이츠는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츳!! 야심한 밤, 제 2공학관에 위치한 '실험체 조립실'에서는 안구보호경을 낀 드워프들은 각자 앞에 놓여있는 설계도를 따라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설계도의 가장 윗부분에는 '소형잠수정'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날렵하게 생긴 유선형의 기체는 1멜리 내외의 길이로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드워프들이 들고있는 용접기가 닿을 때 마다 붉은색의 불똥이 튀면서 두개의 금속판은 천천히 접합되어가고 있었는데, 조금의 틈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드워프들의 손놀림이 꼼꼼해 보였다. 오랜 시간동안 용접을 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잠시 쉬기라도 하려는 듯이 안구보호경을 머리위로 올리며 땀을 닦았고, 만들고 있던 기체에 기대어 앉은 채 한쪽에 내려놓았던 물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병에서 입을 뗀 블뤼안은 가죽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기체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는 않을 것 같수. 게다가 멜리늄 합금의 강도가 엄청나서 웬만한 충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을거유." 멜라늄 합금은 드워프들의 마을에 떨어진 운석과 알루미늄을 혼합하여 만든 금속으로서 그들의 마을이 있는 멜산과 알루미늄이라는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운석의 엄청난 강도와 알루미늄의 가벼움이 합해져 아주 유용한 합금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석의 양이 그리많지 않다는 이유로 널리 보급할 수는 없었고, 한정적으로 나마 공학원에서 필요한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하게 되었다. 멜라닌 합금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인생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야. 그놈의 운석이 마을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재앙이라 생각했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 재앙이 복으로 바꼈으니 말이야."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레딘은 자신의 뒤로부터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닿은 곳에 카타리나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우물쭈물 하는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이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레딘은 몸을 일으키며 카타리나를 향해 물었다. "어라! 카타리나 아니야? 그런데 이 밤중에 여기는 무슨 일이지?" 레딘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 역시 시선을 돌렸고, 그들 역시 의아한 듯 했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행동을 살펴보던 켈트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지금 쯤 뮤스에게 내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것 아니냐?" "저... 켈트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심상치 않은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켈트는 문득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혹시... 내가 뮤스보다 좋아진거냐? 허헛! 하지만 우리는 나이차이가 너무 많은것 같구나." 전혀 상황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켈트의 장난에 한참이나 예민해져 있던 카타리나는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누가 아저씨를 좋아한데요! 드릴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거란 말이에요!" 카타리나가 자신의 가벼운 장난에 생각지도 않게 소리를 버럭 지르자 켈트는 급히 귀를 틀어막았고, 기체에 기대어 앉아있던 드워프들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지경이었다. 곁눈질로 카타리나의 표정을 살핀 켈트는 이제 그녀가 진정했음을 느끼며 귀를 막은 손을 떼어냈다. "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군." "소리질러서 죄송해요, 아저씨. 사실은..." 켈트에게 사과를 한 카타리나는 서재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는데, 드워프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새로움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걱정스러움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카타리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켈트는 매끈하게 면도되어있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흠...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온것이구나. 그렇지?"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켈트는 아우들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도와 줬으면 좋겠냐? 뮤스를 흑룡의 호수로 가지못하도록 말려주기라도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가 마음먹은 이상 아무리 말리더라도 소용없을 거에요. 게다가 공학원에 아주 중요한 일이니 말릴 수도 없고요. 그러니 저를 뮤스 몰래 함께 데려가 주세요! 제가 뮤스에게 함께 따라 간다고 아무리 고집을 피우더라도 뮤스는 틀림 없이 저를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제 뮤스와 절대 떨어져 있기 싫어요! 그러니..." 드워프들은 그녀의 부탁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브라이덴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해 줄수가 없겠구나. 네가 아무리 따라가고 싶어하더라도 흑룡의 호수로 가는 길은 굉장히 험난한 곳에 있단다. 구바닌 산맥에 도착을 하면 전뇌거를 타고 이동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걸어야 하는데, 여자의 체력으로는 구바닌 산맥을 넘기가 힘들거든." 하지만 카타리나는 포기하기는 커녕 더욱 애원하고 있었다. "절대 아저씨들께 짐이 되지는 않을게요! 이번에 함께가지 못하면 뮤스가 돌아올때 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할 거에요." 그러나 카타리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안된다고 마음을 굳혔는지 그녀를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켈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흠... 네가 아무리 부탁을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단다. 이번 일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우리도 가능하다면 너를 함께 데려가고 싶지만..." 켈트의 말을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불쑥 무엇인가를 켈트의 앞으로 내밀었고 그의 말꼬리를 자르며 말했다. "저! 제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이 것을 드리겠어요! 저희 집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120년 산 포루코타에요! 지금 이 정도의 포루코타를 구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는 오히려 드워프 아저씨들이 더 잘 아시겠죠?"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카타리나의 손에들린 술병에 시선을 빼앗긴 켈트는 입가로 흐르는 침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120년사~안! 포루코타! 신의 과실주라고 불리우는 그..." 물론 켈트 뿐만 아니라 다른 드워프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그들의 다리는 저절로 움직여 카타리나에게로 다가왔고, 그들의 오감은 저절로 반응하여 모든 신경이 카타리나의 손에 들린 술병에 집중되어있었다. "형님... 120년산 포루코타라면 지금 아무리 백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구할 수 없는 술이유!" "저런 술 한 방울이라도 맛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구먼!" "나보고 카타리나를 업고 가라고 해도 아무말 하지 않을 테니, 당장 카타리나의 제안을 받아 들이슈!" 동생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살피던 켈트는 헛기침을 몇번 하며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흠흠! 우리도 가능하다면 너를 함께 데려가고 싶지만... 생각해 보니 가능할 성 싶어서 데려가도 될 것 같구나. 흠흠! 절대 그 포루코타에 눈이 멀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결국 드워프들의 승락을 받아낸 카타리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손에든 술병을 켈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호홋! 그럼요! 저는 처음부터 아저씨들이 허락해 주실 줄 알았는 걸요! 이 포루코타는 제 성의이니 맛있게 나눠 마시도록 하세요!" 술병을 품에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있던 켈트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껄걸! 아무런 걱정말고 오늘 푹 쉬거라! 내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니, 새벽에 우리 숙소로 찾아 오도록 하라고! 그 때 전뇌거에 숨겨주도록 할테니까!" "네! 고마워요!" 활기차게 대답한 카타리나는 드워프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실험체 조립실을 떠났고, 드워프들은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도 되는 양 술병을 한번씩 품에 안아보며 행복감을 망끽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는데, 바로 서재를 나와 이곳으로 온 뮤스였다. "정말 대단하군... 술 한병에 생각을 바꾼 아저씨들도 그렇지만, 아저씨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카타리나도 보통이 아니야. 후훗! 그래도 어차피 함께 가려고 했으니 나쁠 것은 없겠지." 나직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문 뮤스는 내일을 위해 숙소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1 다음 날 아침, 해가 긴 여름이어서 인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산등성이 넘어로 햇살이 뿜어지고 있었다.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공학원으로 분주하게 모여들고 있을 시간, 한 쪽에서는 공학원을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고, 뮤스는 타고갈 전뇌거를 정비했으며, 벌쿤은 지난 새벽 뮤스를 찾아와 함께 가기를 청했기에 일행에 합류해 있었다. 그리고 크라이츠와 친구들은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공학원 본관의 문앞까지 나와있는 상태였는데, 갑작스럽게 따라나선다는 벌쿤의 이야기를 듣고선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상체만한 짐을 손쉽게 들어올리며 전뇌거의 짐칸으로 올리는 벌쿤의 옆에 선 세이즈는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벌쿤! 꼭 따라가야만 하는거니? 그곳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고 하는데..." 세이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벌쿤은 힘을 과시하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가뿐하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하핫!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세이즈! 누가 감히 이 벌쿤님을 어떻게 하겠어? 설마 마물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드워프 아저씨들께 전투도끼 쓰는 법을 충분히 배웠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게다가 뮤스형을 내가 보호해 줘야하니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어." 짐을 모두 싣고 손의 먼지를 털며 그들의 옆을 지나던 켈트는 혀를 차고있었다. "쯔쯧... 이제 벌쿤녀석의 도끼질도 제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게다 세이즈. 그러니 벌쿤 대신 내 걱정을 좀 해주면 안되겠냐? 이거야 원... 젊은 녀석들은 죄다 쌍쌍이 놀고 있으니 우리같은 늙은이들이 서운해 지는구먼." 켈트가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전뇌거 점검을 마친 뮤스가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아저씨들! 전뇌거 점검은 끝났어요! 어서 각자 전뇌거에 타세요. 그리고 벌쿤 너도 세이즈와 그만 떨어지고 출발할 준비나 하라고!" 그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두 대의 전뇌거에 각자 나누어 탔고, 벌쿤은 세이즈를 내려 놓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께 세이즈. 그 동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세이즈는 처음으로 벌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슬펐는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녀를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인 벌쿤은 손을 흔들어 주며 뮤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형, 카타리나 누나는 안보이네? 혹시 어제 일로 화가나서 배웅도 안해주는 것 아니야?" "후훗... 아마 그럴거야." 짧게 대답한 뮤스의 시선은 전뇌거의 짐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방수천을 덮어놓은 그곳은 어색하게 불룩해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피식웃은 뮤스는 모른척 하면서 전뇌거에 올라탔고, 벌쿤과 켈트가 좌석에 앉는 것을 확인하며 전뇌거에 시동을 걸었다. 창을 열어 친구들과 크라이츠를 바라본 벌쿤은 손을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는데, 소풍가는 소년마냥 들뜬 듯 했다. "그럼 다녀올때까지 잘지내세요 큰 누님! 그리고 모두들 다녀와서 보자고!" 뮤스 역시 벌쿤만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마중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가벼운 눈인사를 친구들에게 건네며 천천히 전뇌거를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전뇌거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켈트는 피곤한 모습으로 하품을 하며 등받이에 깊숙히 몸을 기대었다. 그리곤 팔베게를 하며 노래를 흥얼 거리기 시작했는데, 밤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켈트를 유심히 살펴보던 벌쿤은 턱을 궤며 물었다. "흠... 켈트 아저씨 어젯 밤에 무슨 좋은술이라도 드셨어요?" 그의 물음에 누구에게든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던 켈트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허헛! 우리가 말이다. 어제 그러니까... 아! 그렇지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그 녀석이 무려 120년이나 묵은 포르코타를 선물로 주더구나! 그래서 기분 좋게 형제들끼리 한잔 했는데, 과연 귀한 것이라서 그런지 별 숙취도 없고, 맛도 그만이더군!" "포르코타라니요? 그것도 술이름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벌쿨이 물어오자 켈트가 대답하기도 전에 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포르코타란 남쪽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의 일종인데, 그 중에서 포도의 품질이 최고인 스윈제국산이 고급에 속하지. 그리고 오래 숙성시킬 수록 향이 진해지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오래된 포르코타일 수록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게 되는데, 120년 정도 숙성된 포르코타라면 대륙 전체를 통털어도 100병 이내일거야." 벌쿤은 요리를 잘하는 만큼 술에 대한 관심도 많았기에 그 가치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우와! 엄청난 보물을 드셨군요. 그런 굉장한 것을 구하셨으면 저도 좀 불러주시지... 섭섭합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있는 벌쿤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은근한 말투로 켈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저씨들은 어제 하루종일 공학원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그 친구 분을 만나셨죠? 그리고 그 친구분도 120년 정도 되는 포르코타를 소지하고 다니실 정도라면 엄청난 위치에 있는 분이시겠군요? 최소한 후작 정도는 되어야..." 뮤스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음을 느낀 켈트는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그게... 허헛! 당연히 그 친구가 공학원으로 찾아온 것이지! 그리고 선물로 가지고온 포르코타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꼬치꼬치 캐묻는건 예의가 아잖아?" 켈트가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자 뮤스는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핫! 혹시 그 친구라는 사람이 제 또래의 여자는 아니겠죠? 어제 어떤 여자가 그 병을 들고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요." 이에 얼굴을 붉힌 켈트는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네가 잘못 본것이야! 이 나이에 젊은 여자를 알턱이 있나..." 말끝을 흐리며 켈트가 시선을 피하자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띄운 뮤스는 거울을 통해 전뇌거 뒤의 짐칸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거참 이상하네. 대충 필요한 짐은 다 확인하고 실었는데 저 방수천 아래에 들어있는 짐은 뭐지? 켈트 아저씨의 짐이야 드워프 아저씨들 전뇌거에 있을 거고, 그럼 벌쿤 네거야?" 그의 물음에 몸을 돌려 짐칸을 바라본 벌쿤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건 방수천 안에 넣지 않았는걸? 어차피 방수처리된 짐이라서 그 위에 실었어." "음... 그럼 필요 없는 짐이군. 어차피 갈길이 먼데 필요없는 짐은 버리는 편이 좋을것 같군. 벌쿤 짐칸으로가서 방수천 아래있는 짐은 밖으로 던져 버려." 고개 갸웃거린 벌쿤은 조금 이상한 상황을 느끼며 되물었다. "에? 정말 저걸 꺼내서 내버리란 말이야?" 벌쿤의 되물음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이럴 때 너의 그 대단한 힘을 사용하는거라고! 저 정도 짐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버릴 수 있지?" 띄워주는 뮤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벌쿤은 자신에 넘지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당연하지! 저정도 쯤은 한 손으로도 던져 버릴 수 있다고!" 그리고 대답과 함께 짐칸으로 넘어간 벌쿤은 방수천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 때, 그들의 행동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켈트는 득의에 찬 뮤스의 옆 얼굴을 보며 외쳤다. "뮤스 이 녀석! 저 뒤에 카타리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우리가 카타리나에게 포르코타를 얻어 마셨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뮤스는 능청을 떨며 자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럼 저 방수천 아래에 있는게 카타리나라는 말씀이세요? 에이 설마..." 켈트의 인상은 휴지조각 처럼 구겨지고 있었는데, 뮤스가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잡아떼며 자신을 놀리고 있으니 기분이 영 찝찝했던 것이었다. "에잉! 이 녀석 나를 데리고 놀려고 하다니... 벌쿤 너는 거기서 카타리나나 꺼내주라고!" "네? 카타리나 누나를 여기서 꺼내라니요?" 뮤스와 켈트의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있던 벌쿤은 켈트가 시키는 대로 방수천을 열었다. 그러자 머리가 헝클어진 카타리나가 쪼그려 누운채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며 놀라고있는 벌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안녕 벌쿤? 뮤스에게 들켰니?" "들키건 뭐건 간에 카타리나 누나가 어떻게 여기 들어있는거야? 어서 나오라고!" 벌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카타리나의 팔을 끌며 짐칸에서 일으켰고, 거울을 통해 뒤의 상황을 살피며 운전을 하던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했다. "하핫! 그 답답한 곳에 숨어있는다고 수고했어 카타리나. 하지만 짐칸 보다는 좌석이 훨씬 잘 어울리니까 어서 들어와서 앉아." 뮤스의 말을 들으며 민망함을 느낀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혔고,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뮤스... 언제부터 내가 저기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니?" 부끄러운 듯이 물어오는 카타리나가 유독 귀엽다고 느낀 뮤스는 곰곰히 생각하는 척 하며 대답했다. "글쎄... 어제 저녁때였나? 아무래도 너를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을 네게 전하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드워프 아저씨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는 것을 봤지 뭐. 그래서 그냥 모른척 했어. 후훗!" 그의 대답에 기가막혔던 카타리나는 오늘따라 뮤스의 미소가 얄밉게 느껴지고 있었다. "뭐얏! 그럼 처음 부터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고생한 것을 보고만 있었던 거니? 저 안이 얼마나 답답했는 줄 알아? 기분 나빠서 나 다시 돌아갈래!" 뮤스의 장난에 뾰롱퉁해진 카타리나를 보며 뮤스는 실소를 터트려야만 했고, 공학원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한 동안 고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팜구드. 듀들란 황궁의 재상 집무실은 오늘 따라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담배 파이프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는 허공에서 아스라히 부서져 갔고, 투르코스 재상의 한 숨에도 담배 연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손에들고있던 구겨진 서류 몇장을 책상위에 던져놓은 투르코스 재상은 머리카락을 헝클어 트리며 담배를 한모금 더 빨았다. "후우... 정말 끝도 없군. 정말이지 국가규모의 사업은 만만한게 아니야..." 그의 굵직한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을 드둘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똑똑! "이보게 투르코스 재상. 잠시 들어가도 되겠는가?" 목소리를 확인한 투르코스 재상은 늘어트린 몸을 일으키며 담배 파이프의 불을 털어 꺼트렸다. "들어오십시오. 루스티커님." 그의 말이 끝나자 초록색의 로브를 입은 루스티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집무실의 광경을 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혀를차며 말했다. "쯔쯧... 자네의 업무가 힘든 것은 알겠지만, 몸을 생각해서라도 담배는 좀 줄이도록 하게나. 제국을 잘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부터 지킬줄 알아야 하는것이야." 투르코스 재상은 여전히 뻣뻣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루스티커는 그가 앉아있는 책상앞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나 하려고 찾아왔다네." 그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한 투르코스 재상은 손을 모으며 되물었다. "흠... 또 골치 아픈 부탁이시겠죠? 지난 몇 년간 루스티커님과 장영실 경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느라 머리가 깨질 지경입니다." 자뭇 진지하게 고통스러워하는 투르코스 재상을 바라보던 루스티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차피 자네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장영실 경을 이곳으로 데리고와 제국 개발사업을 맡긴 것도 자네였으며, 나를 끌어들인 것도 자네였네. 게다가 제국 개발사업의 총괄 담당을 하는 것도 자네의 일이니 그런 엄살은 피우지 말게나. 자네같은 일 벌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나?" 하나씩 따져봐도 틀린 점이 없는 루스티커의 말에 손을 내저은 투르코스는 다시금 파이프에 담배잎을 두들겨 넣었다. "아무튼 루스티커님의 말재간을 당해낼 수가 없군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다행 스럽게도 이번에는 그리 골치아픈 부탁이 아니라네. 그저 제국 내에서 레드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조사해주면 되는 일이거든." 순간적으로 레드 드래곤이라는 말을 들은 투르코스 재상은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파이프로 밀어넣었던 담배 잎은 허공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콜록! 콜록! 레..레드 드래곤이라니요?" 평소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투르코스의 반응이 의외였던 루스티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놀라는가? 내 부탁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루스티커의 물음에 투르코스 재상은 입에 물고있던 파이프를 책상위에 내려 놓으며 되물었다. "레드 드래곤의 목격자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것이죠?" "사실 며칠 전 장영실 경과 전뇌력 수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바가 있다네. 그런데..." 루스티커는 투르코스 재상의 반응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잠시 접으며 장영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대충 설명해 주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투르코스 재상의 표정은 아주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니 레드 드래곤이 이 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그 블랙 드래곤의 생명력이 다했다는 말과 같으니 흑룡의 호수가 더 이상 마역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것이 판명된다면 바로 장영실 경과 내가 직접 흑룡의 호수로 떠날 것일세." 루스티커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투르코스는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는데, 오랜 시간동안 잊고 있었던 좋지않은 기억들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다. 가비르 재상과 크라이츠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무거운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따로 조사를 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그 레드 드래곤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란 루스티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말이 사실인가? 자네가 어떻게 레드 드래곤을 목격했다는 것인가?" "물론 사실입니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은..." 물음에 뭐라 대답하려던 투르코스 재상은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죄송하지만, 그저 개인 적인 일이니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왠지 슬픔이 묻어있는 그의 얼굴을 살피던 루스티커는 자세하게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정 그렇다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겠네. 아무튼 자네가 레드 드래곤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하니, 블랙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은 것이 확실시 되는구먼. 며칠 이내로 일행을 몇명 뽑아 흑룡의 호수로 출발하도록 할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나." 투르코스 재상과는 별개로 손쉽게 궁금증이 풀려버린 루스티커는 앞으로의 행보를 간단히 말하며 재상의 집무실을 나섰고, 혼자남은 투르코스 재상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담배잎에 불을 붙인 투르코스 재상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며 입을 열었다. "흠...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런 식으로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군. 크라이츠 님." 크라이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본 투르코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고, 한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2 -두두두두... 전뇌거의 바퀴가 포장이 되지 않은 초원의 길을 지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뇌거의 내부까지 큰 진동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었는데, 효과적인 충격흡수 장치가 진동을 크게 줄여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뮤스 일행들은 콧 노래가 나올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카타리나는 뮤스와 함께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즐거운 듯 손수 만들어온 음식들을 뮤스의 입에 넣어주며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토라졌었던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호호홋! 어때? 맛있어?" 입에 한 가득 음식물을 머금은 뮤스는 힘겹게 턱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괴야이 마이어. 그어네 조으마 느어주므 아네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뮤스의 말이었지만 카타리나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조금씩만 넣어줄게." 어느새 카타리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뒷좌석으로 밀려난 켈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카타리나가 드워프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온 대형 도시락 이었지만, 가득차있던 음식들이 빠른 속도록 비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쩝쩝! 카타리나의 음식 솜씨도 굉장히 좋은걸? 거의 벌쿤과 비슷한 수준이야. 마치 요리사가 직접 만든것만 같군." 칭찬의 뜻으로 아무런 생각없이 던진 켈트의 말에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행 중에는 아무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시락을 비운 벌쿤은 만족한 모습으로 든든해진 배를두들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낯선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켈트 아저씨 여기는 어디죠? 라이델베르크를 벗어난건가요?" 그의 물음에 입에 물고있던 음식물을 삼킨 켈트는 잠시 두리번 거리며 대답했다. "이곳이 아마 바쉬스 평원일게다. 조금만 더 간다면 팜구드라는 곳이 나오는데 도이첸 제국 최대규모의 밀 생산지이지. 나도 오래전에 와본 이후로 온 적이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정말 대단 했었지. 밀밭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물결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단다. 아마 벌쿤 너는 드베인 숲과 라이델베르크를 떠나본 적이 없었으니 아마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지게 될게다. 오늘 저녁쯤이면 팜구드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기대하고 있거라." "이야... 정말 기대가 되는걸요? 지평선까지 펼쳐진 밀밭이라." 기대가 되는 것은 벌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또한 그러한 듯 했는데, 그녀 역시 이곳은 초행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지리학 수업에 배운 적이 있었지만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쥬론 공국과 함께 도이첸 제국의 젖줄로 불리운다죠?" 뮤스 역시 팜구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기에 그녀의 이야기에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팜구드의 밀밭에서 생산되는 밀의 양은 도이첸 제국 전체 인구의 반을 먹여 살릴 만큼이나 엄청나지. 또, 소비하고 남은 밀은 매년 황실에서 사들여 국고에 저장시켜 놓는데, 혹시 모를 흉년이 있을 경우에 부족한 밀의 양을 국고 저장시켜놓은 밀로 충당하게 되는것이지." 팜구드 밀밭의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감탄성을 터트리며 물었다. "아! 그럼 팜구드의 밀밭이 잘못되면 제국 전체가 식량 문제에 빠지겠구나?" "네 말대로 누군가가 팜구드의 밀밭을 독점하기라도 한다면, 제국 전체가 엄청난 혼돈에 휩쌓이게 되겠지. 그러니 황실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토지 보유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고, 토지의 매매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야." 이후로도 그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전뇌거는 묵묵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뮤스일행을 태운 전뇌거는 늦은 오후무렵이 되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초원의 끝을 보게 되었다. 나트막한 언덕을 경계선으로 제법 키 높은 나무들 길가에 드러서있었는데, 나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숲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전뇌거 안에서 무료한 기분을 혼자서 달래고 있던 켈트는 점차 변하고 있는 주변경관을 유심히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오호! 팜구드에 거의 다 온 모양이군. 이 언덕을 시작으로 그리 크지 않은 언덕을 몇개 넘으면 바쉬스 평원이 끝나는 것이지.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팜구드의 마을에서 쉬었다가 가자고." 카타리나 역시 켈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는데, 전뇌거에 오랬동안 앉아있다 보니 다리를 펴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피로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정말 쉬지 않고 왔더니 몸이 너무 뻐근하네요." 그들 중 가장 불편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벌쿤이었는데, 워낙 튼 덩치로 인해 전뇌거가 비좁았던 그는 출발할 때의 들뜬 기분은 온데간데 없어 보였고, 뒤척거리며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 노력할 뿐이었다. 일행들을 바라보던 뮤스는 뒤를 따라오는 드워프들의 전뇌거를 한번 확인하며 말했다. "어차피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켈트 아저씨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얼마나 더가면 마을이 나올까요?" "이 언덕들만 모두 넘으면 팜구드의 밀밭을 볼 수 있을게야. 하지만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시간 정도를 더 들어가야 마을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대충 한 시간 반쯤 걸릴 것 같군." "그럼 속도를 더 내는 편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한 뮤스는 전진 패달을 조금더 밟으면서 전뇌거의 속력을 높여갔고, 뒤를 따르던 드워프들의 전뇌거 역시 그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 않은 푸른 언덕 위로 석양이 비춰지고 있었다. 언덕의 허리부근은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 지고 있었고, 초목들은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하룻동안 쌓였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 초목들을 놀래키며 언덕 위로 두 대의 전뇌거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힘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한번 쯤은 쉬어넘을 성 싶은 언덕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속도를 맞추어 언덕을 달리던 두 대의 전뇌거는 마지막 언덕 위에서 멈춰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뇌거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 타고 있던 뮤스와 일행들이 밖으로 나왔는데, 그들은 놀라운 것이라도 본 듯 눈앞의 광경에 넋을 빼앗겨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펼쳐진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노랗게 익어 황금빛을 띄고있는 밀밭은 켈트에 어김 없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고, 바람이 땅을 스칠때 마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밀은 생명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벌쿤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으며 팔을 넓게 뻗었다. "이야아! 정말 대단한걸! 절벽 위에서 드베인 숲의 전경을 봤던 것도 이 보다는 못한 것 같아." 카타리나 역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고정시키며 뮤스의 팔짱을 꼈다. "정말 멋지다! 아마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장관을 못봤을 거야."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아무런 말 없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한 동안 드넓은 밀밭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둔 켈트는 문득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 그의 말을 듣고 가까이로 다가온 레딘이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유 형님. 멋지기만 하구만..." 레딘의 물음에 켈트는 손가락으로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밀밭을 가리키며 대답했는데, 다른 곳과 비교하여 조금 다른 색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저곳들을 한번 보게나. 다른 곳은 밀농사가 아주 잘되어 황금빛을 띄고 있는데, 유독 저곳의 밀은 매말라 훨씬 옅은 색을 띄고 있군. 내가 알기론 이곳의 토질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농가에서든 균일한 품질의 밀을 수확한다던데..." 그의 말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블뤼안은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껄걸! 별 대수롭지 않은데 신경을 쓰고 있군.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저 곳의 밀이 매말랐는지 아니면 베어냈는지 어떻게 알겠수? 그렇게 따진다면 밀은 초 여름에 수확하는 것이 정석인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이곳 전체가 이상한 것 아니유?" 드워프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뮤스는 켈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곳은 초여름에 밀을 수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팜구드는 다른 밀 수확지 보다 여름이 늦게 찾아 오기때문에 추수는 늦여름 쯤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켈트 아저씨의 말대로 저곳은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군요." 뮤스가 턱을 매만지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벌쿤이 별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조금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배도 고픈데 어서 마을로 들어가자고! 게다가 몸도 여기저기 쑤셔서 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벌쿤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도 동의하고 있었기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에서 우리끼리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지. 그럼 해가 지기전에 출발하죠." 뮤스의 말을 신호로 일행들은 전뇌거에 올라탔고, 곧 동력기의 소리와 함께 전뇌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뮤스 일행들은 해가 거의 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팜구드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자체는 약 50여 가구 정도로 그리 큰 규모는 않았지만, 부촌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도로 주변으로 늘어선 집집 마다 일정한 크기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전뇌거들도 고급기종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또,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잘 포장되어있는 거리하며,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이나 깔끔하게 지어져 있는 건물들로 보아 마을 미화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뇌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던 뮤스 일행은 상당한 규모의 음식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음식점과 숙박업을 겸업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뮤스 일행의 눈에 띈 음식점 역시 그러한 듯 했다. 마땅한 곳에 전뇌거를 세워놓은 뮤스와 일행들은 필요한 물건들만을 간단히 챙겨 전뇌거에서 내렸고, 뮤스는 카타리나의 짐과 자신의 짐을 양손에 나눠진 채 그녀와 함께 먼저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딸랑! 음식점의 문에 달린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뮤스와 카타리나가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있던 여자 종업원이 밝은 미소와 함께 그들을 반겨주었다. "팜구드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식사와 숙박을 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한눈에 외부인임을 알아보자 카타리나는 잠시 의아해 했고, 그것을 눈치챈 종업원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님. 저희 팜구드 마을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모든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답니다." "아! 그랬었군요. 저희는 하룻밤 이곳에서 묵어가려고 싶어요. 방이 세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빈 방이 있나요?" 카타리나의 물음에 여종업원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곧 밀을 수확할 시기라 외부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답니다. 그래서 지금 남는 방이 두개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죠?" 여종업원의 물음에 뮤스와 카타리나가 고민하고 있을 때,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이 뒤이어 들어왔게 되었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던 켈트가 끼어들며 말했다. "고민할게 뭐가 있어? 우리 형제들과 벌쿤이 한 방을 쓰고, 너희 둘이 같은 방을 쓰면 될 거 아니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뱉은 켈트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며 여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그 방 두개를 사용하도록 하겠네! 아... 그리고 우리는 아주 시장한 참이니까 식사 준비도 좀 해줬으면 고맙겠군." 켈트의 요청에 빙그레 웃은 여종업원은 뒤쪽에 걸려있는 열쇠 두 개를 꺼내주며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셔서 복도의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식사는 식당으로 내려 오셔서 주문하시면 금새 준비가 된답다. 그럼 편안하게 쉬십시오." 일사천리로 숙박 문제가 해결 되자 켈트는 여종업원이 준 열쇠 중 하나를 챙겼고, 나머지 하나는 뮤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을 게냐?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갈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마친 켈트는 다시 짐을 들어 계단을 통해 숙소로 올라갔고, 다른 드워프 형제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짐을 하나 어께에 매고 있던 벌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투덜거렸다. "하필면 왜 내가 드워프 아저씨들과 함께 자야 하는거야? 저 아저씨들 코고는 소리는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그러자 이미 다음층으로 올라간 줄로만 알았던 켈트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들려왔다. "이봐 벌쿤! 눈치없이 투덜대지 말고 어서 올라오기나 하라고! 빨리 짐 정리를 해야 식사를 하지!" "나참... 무슨 눈치를 말하는거야?" 켈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벌쿤은 여전히 불만 담긴 얼굴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뮤스와 카타리나의 사이에는 때 아닌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는데, 카타리나의 얼굴은 저물어가는 태양 마냥 붉어져 있었다. "뮤스... 어떻게 할 거야?"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가벼운 한숨을 내쉰 뮤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열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떻게하긴... 일단 올라가서 짐이나 내려놓고 나중에 아저씨들 방에 가서 잠을 자던지 해야지. 일단은 우리도 올라가자." "응..." 뮤스는 성큼걸음으로 윗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카타리나는 알지못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며 뮤스의 뒤를 따랐다. 숙소에 대충 짐을 정리해 놓은 뮤스와 카타리나는 식당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을 통해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내부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의 음식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게 꾸며져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각 식탁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들 역시 평범한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호사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식당을 둘러보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일행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있는 곳에 일행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늘 그래왔듯 엄청난 양의 음식을 시켜놓고 분주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공공장소에서 드워프들과 벌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본 카타리나는 슬그머니 뮤스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우리 다른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면 안될까? 아무래도 저 식탁에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뮤스가 그녀의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른 자리를 찾아보며 동의했다. "뭐 그렇게 하자. 그런 저쪽 식탁은 어떨까?" 뮤스의 말에 드워프들과 같은 식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한 카타리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뮤스가 가리켰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뮤스와 카타리나가 자리에 앉자 곧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왔고, 적당히 먹을 음식들을 주문한 그들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늘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의 여행 일정이 내용의 주가 되고 있었다. -쾅! "내가 벌써 몇번이나 말했지 않나!" 대화를 나누고 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바로 옆 자리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런 소리에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과 벌쿤만은 예외라는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뻔한 사실이었다. 뮤스와 카타리나의 옆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고, 둥근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 중 식탁을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인물은 젊은 여성의 오른쪽에 자리하고있던 중년인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의 얼굴은 벌겆게 달아올라 있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내쉬던 중년인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명의 인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네들이 아무리 내게 압력을 가하더라도 나는 절대 자네들의 일에 가담 할 수 없네! 자네들도 지금에야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농사꾼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야!" 그 중년인이 불같이 화를 내자 옆에 앉아있던 갈색머리의 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년인의 몸을 부축하며 말했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이러다간 아버님이 쓰러지시겠어요. 그리고 아저씨들도 아버지의 친구분들이신데 너무하시는군요. 이쯤 하셨으면 저희 아버지의 결심을 아셨을 테니 그만 하세요!" 그녀의 말에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던 중년인들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케니언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 너는 잠자코 있거라. 네 말대로 네 아버지와 친구이니 이 정도라도 대우를 해주는 것이란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케니언이라고 불린 여성의 아버지를 향해 냉소를 피우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보게 마고드...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주도록 하지. 자네가 이곳에서 농사를 계속 짓고 싶다면 선택을 잘해야 할 걸세. 물론 자네가 이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대환영이야! 하하핫!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할테니 다음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만났으면 좋겠군."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마친 중년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일행들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마고드라는 중년의 남성과 그의 딸인 케니언 뿐이었는데, 마고드는 힘이 풀리는 듯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 앉았다. 그리곤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차라리 옛날이 더 좋았지. 저 친구들도 그 때는 순박한 농사꾼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놈의 돈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다니." 아버지의 혼잣말에 안스러움을 느낀 케니언은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모두다 옛날 이야기에요.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저 아저씨들과 손을 잡았다구요. 더 이상 아버지 혼자 이렇게 고집 피우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딸의 이야기에 마고드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허헛... 모두 저들의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란다. 내일 부터 그 사람들을 설득해 보도록 하자꾸나." 한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은 마고드는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케니언 역시 그의 팔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부녀가 식당 밖으로 사라지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 식탁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쯔쯧... 마고드도 그냥 고집을 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지않나." "그렇다고 해서 마고드가 이곳을 떠나겠나? 몇 대째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집안인데." "그럼! 그럼! 솔직히 나는 마고드의 편이라네. 이대로 마고드가 팜구드를 떠나는 것은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니 그럴 리가 없네." 식당안에서 감돌고있는 이야기를 한 동안 듣고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는데,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듣고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탁에 놓인 찬물을 한모금 마신 뮤스는 카타리나를 향해 말했다. "흠 아무래도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카타리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아까 그 부녀가 무슨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겠지? 저쪽 사람들에게 물어보는게 어때?" 뮤스는 카타리나의 말을 따라 두 부녀에 대해 한마디씩 하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식사와 함께 술을 한잔씩 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는데, 금새 부녀에 대한 일은 잊어린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 있었다. 그들을 잠시 보던 뮤스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드르륵... "저,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얼굴의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이곳의 청년은 아닌것 같은데, 물어 보고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되물음에 뮤스는 부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전 저쪽에 앉아있던 부녀의 대화를 잠깐 듣게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이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뮤스의 물음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얼굴색을 바꾸었다. 그리곤 그 중 한명이 뮤스의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며 대답했다. "그것은 외부의 사람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네. 괜히 쓸데 없는 곳에 신경쓰지 말고 쉬었다가게나." 냉랭하게 대답한 그는 목에 걸고있던 냅킨을 식탁위로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식사도 다했으니 우리도 이만 일어 나세나." 그의 말에 일행들은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뮤스에게 심상치 않은 눈빛을 던지며 밖으로 나갔다. 결국 뮤스는 아무런 소득 없이 카타리나가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너도 들었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을 보니 보통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을 것 같은걸?" 카타리나는 먼저 나와있는 야채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우리의 일도 빨리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곳의 일에 신경쓸 여유가 있는거니?" 카타리나의 맞은편에 다시 앉은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훗. 우리야 어차피 한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그리 촉박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이대로 이곳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찝찝할 것 같거든." "하긴... 예전부터 너는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잖니. 드워프 아저씨들과 의논해서 좋을 대로하렴." 그녀의 대답과 때를 맞춰 종업원은 주문했던 음식들이 하나씩 날라왔고, 뮤스와 카타리나 역시 드워프들이나 벌쿤 못지않게 허기진 상태였기에 대화를 잠시 미루고 식사를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3 등불이 걸려 분위기를 한껏 내고있는 숙소의 3층 복도는 지금 때 아닌 소란으로 몸살을 앓고있었다. 드워프들과 뮤스가 실랑이 하는 소리가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를 떨어 울렸고, 덜커덕 거리는 문소리가 벽을 부술 듯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쾅! "안된다! 안돼! 이 녀석아, 누가 우리 좋자고 이러는 것이냐? 다 너 좋으라고 우리가 고생해 준다는데 뭐가 불만인거야!" 식사를 마치고 온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군 상태였다. 뮤스는 문 밖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도저히 카타리나와 같은 방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 뮤스가 드워프들의 방으로 건너오자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넘긴 뮤스는 방문을 다시 두들겨보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시고 문 좀 열어 줘요!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방을 쓴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에서는 동시에 드워프들의 콧방귀소리가 들려왔고, 켈트의 오히려 방문을 두들기며 외쳤다. -쿵쿵쿵! "흥! 이 녀석아 순진한 척 하지 마라! 우리가 도와 줄테니 이번 기회에 카타리나를 완전히 네 여자로 만드는 거야! 어차피 너희들도 이제 성인이고 서로 좋아하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오히려 자연 스러운 거라고! 껄껄껄!" "정말 안 열어 주실 거에요?" "벌써 수십번도 더 대답했을 게다! 우리는 절대 열어 줄 수 없으니까 당장 돌아가도록 해!" "이것 참... 큰일이군." 도무지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드워프들의 반응에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던 뮤스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타리나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복도로 부터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자 뮤스가 떠났다는 것을 알아챈 드워프들은 걸어잠궜던 문을 열며 복도를 살폈고, 잠시 복도를 두리번 거리던 켈트는 나름대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방안에 있던 아우들을 향해 손짓 했다. "나와도 괜찮아! 이제 뮤스가 방으로 돌아간 것같군. 흐흐흣...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좀 하러 가볼까?" 켈트의 신호에 드워프들은 새끼로 엮어 놓은 듯 줄줄이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저 마다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헌데,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나온 벌쿤은 아직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있었다. "이 야심한 밤에 대체 뭘 보러 간다는 거에요? 오늘 그냥 잠이나자고 내일 낮에 가면 안되요?" 벌쿤의 말에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긴 레딘은 주변을 살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거냐?"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어디를 가는건데요?" 대답하는 벌쿤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 모른다고 결론을 내린 레딘은 귀를 달라는 손짓을 했고, 벌쿤은 허리를 숙여 레딘의 키높이에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뮤스와 카타리나의 방으로 가는것이란다. 그리고 녀석들을 몰래 훔쳐보는것이지. 이제 무슨 소리인지 알겠냐?"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이번에는 둘의 대화를 듣다 못한 블뤼안이 레딘을 밀치며 끼어들었다. "한번 잘 생각해보라구! 만약 너와 세이즈가 야심한 밤에 한 방에 있다라고 가정해보자. 너 같으면 뭘 하겠냐?" 블뤼안의 물음에 벌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희야... 음... 같이 있으면 카드게임을 하죠! 얼마전에 세이즈에게 카드게임을 배웠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시간만 나면 카드게임을 하는걸요?" 벌쿤의 대답에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쉰 블뤼안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어색했고, 벌쿤이 스스로 깨우칠 확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포기하는 생각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쯔쯧... 그냥 따라오기나 해라! 대체 성교육도 제대로 못받은 녀석이라니... 어차피 직접 보면 알테니 그냥 가기나 합시다 켈트 형님." 이렇게 하여 드워프들은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뮤스의 방으로 나서게 되었고, 벌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뒤를 따를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뮤스와 카타리나는 반듯한 자세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평소 둘만의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고, 그 때 마다 별다른 어색함이 없었지만, 오늘만은 드워프들의 행동 때문인지 첫 만남 때 보다 더욱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뮤스의 뇌는 쉴세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그라프에게 배운 상황대처법을 찾아보느라 분주했던 것이었다. 이내 나름대로 적당한 말을 떠올린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곤한데 그만 자자." 말을 던지고 나니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 뮤스는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기에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대답도 그에 만만치 않았다. "그래, 그만 자자." 이렇게 어영 부영 함께 자는 분위기로 흘러가버리자 뮤스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옴을 느끼며 그라프와의 만남을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그라프와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남녀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한 그였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덕에 오히려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었다. 같은 시간, 드워프들은 방안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방문에 빈틈없이 달라 붙어있었고, 벌쿤은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멀찌감치 떨어져 복도의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드워프들 중 가장 아래쪽에서 방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켈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뮤스 녀석, 순진한 척 하더니 전혀 거리낌 없이 카타리나를 침대로 유도 하는군. 너도 이제 완전한 어른이 되는구나! 장하다!" 켈트의 말을 받으며 브라이덴도 한마디 거들었다. "뮤스도 뮤스지만 카타리나 역시 보통이 아닌걸? 생각보다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군 그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벌쿤은 잠이 오는 듯 하품을 하며 투덜 거렸다. "하암! 그냥 가서 잠이나 자면 안되요? 어차피 내일도 하루종일 전뇌거를 타고 움직여야 할텐데..." 벌쿤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레딘은 키가 닿지않았기에 힘껏 뛰어올라 그의 입을 가로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 좀 줄여라 이 녀석아! 자고싶으면 너 혼자 가서 자면 될거 아니냐? 그리고 이 아저씨들이 좋은 교육을 시켜 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고마워 할 줄은 모르고 투덜거리기만 하다니... 에잉!" 벌쿤의 불만을 한마디로 일축해버린 레딘은 계속해서 하던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방으로 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던 카타리나는 아무런 말없이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뮤스는 아직도 안절부절 못하며 침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 이불 정리를 마친 카타리나는 먼저 이불사이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서 올라와 뮤스. 오늘 전뇌거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일찍 자야지." "으...응." 더듬거리며 대답한 뮤스는 불편한 자세로 천천히 침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처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불쑥 카타리나의 몸이 뮤스에게 안겨 왔는데, 당황한 뮤스는 엉겁결에 그녀의 몸을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카..카타리나!" 카타리나는 그윽한 눈빛으로 뮤스를 올려다보았고, 뮤스는 침넘어가는 소리를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뮤스의 귓가로 다가와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 나 하루종일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픈데 허리좀 주물러 줄래?" 예상과 전혀 빗나간 그녀의 말에 헛기침을 내뱉은 뮤스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간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민망해 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엎드려 누워봐." 뮤스가 흔쾌히 대답하자 한번 웃어보인 카타리나는 시키는 대로 침대에 엎드렸고, 뮤스는 갸냘픈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어찌되었건 이 일로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방안은 이미 어색한 분위기가 끝나있었지만, 방문 밖은 드디어 뜨거운 분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방문에 귀를 대고있던 드워프들은 눈에 핏줄을 곤두세운 채로 연신 입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문틈으로 뮤스와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 마다 드워프들의 오감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거기가 아니야 뮤스." "그럼 여기?" "아아아! 거기가 맞긴 한데... 너무 아파. 살살해." 자지러지는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침을 한번 꿀꺽 삼킨 켈트는 만족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흐흘... 역시 우리가 자리를 피해준 보람이 있군. 이제 녀석들은 결혼식 날짜만 잡으면 되는건가?" 평소 드워프들 중에서도 젊잖은 축에 속했던 브라이덴 역시 지금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껄걸! 처음에는 그렇게 아닌척 하더니 결국 뮤스도 어쩔 수 없나보군. 역시 녀석도 사내였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딘은 신경절 적인 모습으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하라는 시늉을 했다. "나참! 이제 막 재미있어 지려고 그러는데 왜그렇게 떠들고 있으슈?" 짧게 말한 레딘은 다시 방문에 귀를 기대었고, 레딘과 브라이덴 역시 문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하아... 너무 좋아 뮤스. 그런데 힘들지 않아?" "뭐 이정도 가지고. 계속 해줄테니까 편안하게 누워있어." "응." 시간이 갈 수록 드워프들의 흥분지수는 높아져 가기만 했고,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드워프들은 머리로 문을 뚫고 들어가기라도 할 듯 드리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벌쿤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드워프들이 붙어있는 문쪽으로 걸어왔다. "나참! 그렇게 방안이 궁금하면 들어가서 보면 될 걸 이렇게 힘들게 듣고있어요?" 그렇게 말한 벌쿤은 서슴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는데, 드워프들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방문은 열렸고, 몸을 문에 기대고 있던 드워프들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쿠당탕탕! "으아아악!" "벌쿤 이 녀석! 뭐하는 게냐?" "거기서 갑자기 문을 열어 버리면 어떻게해!" 산통을 깨버린 벌쿤에게 저 마다 한 마디씩 던지며 화를 내던 드워프들은 순간적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뮤스와 카타리나가 있을 침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뮤스가 도끼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거기서 뭘 하고 계셨던 거에요?!"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인 드워프들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가장 연장자인 켈트를 앞쪽으로 밀어냈고, 아우들에 의해 떠밀려 나온 켈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핫! 우..우연찮게 이 앞을 지나다가 말이지.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그...그냥 무슨 일인지 살펴 본것이란다. 그런데..." 변명을 하다 말고 침대위에 앉아있는 뮤스와 카타리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켈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상상과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뭘하고 있었던 게냐?" 켈트의 물음에 깔린 저의를 눈치챈 뮤스는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뭘하긴요! 카타리나가 전뇌거에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가 아프다길래 허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죠. 혹시 이상한 상상하고 계셨나요?" "흠흠! 그..그게 아니라..." 얼굴을 붉힌 켈트가 헛기침을 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벌쿤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게뭐야! 아저씨들도 뮤스형에게 허리 마사지를 받고 싶었던 거에요? 그럼 진작 저한테 말해 주셨으면 제가 해드렸을 것 아니에요!" 벌쿤의 말에 눈을 번뜩인 켈트는 재빨리 벌쿤의 소매를 잡아끌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껄걸!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허리가 아프던 참이었는데... 이렇게들 서있지 말고 어서 벌쿤에게 마사지나 받으러 가자구!"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가 생기자 다른 드워프들 역시 어영부영 뒷걸음질 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그러게! 요즘 나이드니 허리가 예전만 못하다니까." "얼마전에 벌쿤이 마사지를 해줬는데 기가 막히더군!" "너희들도 피곤할 텐데 어서 자거라." 결국 방문 밖으로 드워프들이 모두 나온 것을 확인한 켈트는 정다운 표정으로 뮤스와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도 마사지나 받으러 갈테니 내일 아침에 보자고! 잘 자거라." 켈트의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방문이 닫히게 되었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멀뚱히 남게된 뮤스와 카타리나는 못말릴 드워프들을 향해 실소를 날려주고 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4~15 숨겨진 이야기. 팜구드 마을의 하루는 어둑한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농사일을 주로하는 마을이었기에 주민들이 대체적으로 부지런한 편이었는데, 그러한 습성은 일손을 사서 쓸정도로 부촌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는 듯 했다. 창으로 부터 시끌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뮤스는 눈을 부비며 뒤척였다. 그리곤 힘겹게 눈을 뜬 뮤스는 얇은 커튼이 쳐져있는 창으로 눈을 돌렸는데,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이른 시간임을 깨닫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벌써 사람들이 일과를 시작하는 가보군." 눈을 몇 번 깜빡거려본 뮤스는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허리가 뻐근함을 느꼈는데, 지난밤 카타리나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뮤스는 여분의 이불을 들고 바닥으로 내려와 잠을 청했던 것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뮤스는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푹신한 침대보다 바닥이 더욱 편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하룻밤 바닥에서 잔것으로 허리가 뻐근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며 새삼스러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도 이곳 사람이 다되었군... 후훗!" 말을 마친 뮤스는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아직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카타리나를 바라보았는데,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뮤스는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양쪽으로 열었다. 그러자 아직 어둑한 기운이 역력한 팜구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반듯하게 열을 맞추어 지어진 목조 건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창을 통해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어찌 본다면 초저녁인지 이른 새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광경이었다.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 보던 뮤스는 일행들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제법 있다고 생각했고, 몸도 풀겸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대충 옷을 걸치며 카타리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온 뮤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여름이었지만 새벽의 공기는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그 덕에 몸속의 온갖 탁한 기운이 씻겨져 나가는 듯했다. "후우! 정말 개운한걸." 그리곤 좌우를 돌려보며 갈 곳을 정한 뮤스는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이 깔려있는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전뇌력이 공급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일찍 문을 연 가게들은 등불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구수한 빵굽는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싱싱한 야채들과 훈제 처리한 고기들이 가게의 진열장에 오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씩 가게 앞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전원적인 분위기의 마을을 둘러보던 뮤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허기가 짐을 느낀 뮤스는 가장 먼저 눈에 띈 빵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가방에 손을 넣어 동전 몇 개를 꺼낸 뮤스는 막 구워진 빵을 내놓고있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아주머니. 이 빵은 얼마죠?" 뮷스의 말을 들으며 그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피던 아주머니는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처음 보는 젊은이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 오셨나보죠?" "네, 라이델베르크에서 왔습니다." "이런... 호호! 내 여 동생이 라이델베르크로 시집을 갔죠. 요 전에도 잘 지낸다고 연락이 왔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아참! 그런데 빵은 얼마나 필요하죠?" 아주머니의 물음에 잠시 빵을 살펴보던 뮤스는 어차피 간단한 요기만 할 것이기에 그 중 검은 색의 크림이 엊어진 작은 빵을 하나 짚으며 대답했다. "이것 하나면 되겠는데요?" 그의 말에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건 쇼코브로트라는 빵이라고 하죠. 우리 가게 최고의 인기상품인데, 그냥 하나 드릴테니 맛이나 보세요. 내가 원래 잘생긴 총각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말이야." 따뜻한 인심이 스며있는 아주머니의 말에 잠시 갈등을 하던 뮤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짚어들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게 먹겠습니다." 손에든 빵을 한입 물자 아직 식지않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또, 위에 얹어진 검은색의 크림은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들어 맛을 더하고 있었는데, 처음 먹어 본 빵의 기가막힌 맛에 매료된 뮤스는 어린아이 마냥 조금씩 아껴먹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것 참... 정말 맛있군요!" "호홋! 원래 우리집 빵이 팜구드에서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있죠. 벌써 30년이나 빵을 만들고 있는데, 그 실력이 어디 가겠수?" 빵집의 아주머니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고 있을 때, 한 여인이 가게로 다가와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블룬 아주머니?" 그녀의 등장에 시선을 돌린 빵집의 아주머니는 따뜻한 웃음으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머, 케니언이구나. 오늘도 빵사러 왔니?" 케니언이라는 이름에 귀가 솔깃해진 뮤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진한 갈색의 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젯밤 식당의 옆 자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열되어있는 빵을 몇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호밀빵 두개랑 쇼코브로트 다섯개만 주세요." "역시 오늘도 쇼코브로트는 빼놓지 않고 사는구나. 아버지 드리려는 거지? 그래 아버지는 좀 괜찮으시니?" 아주머니의 물음에 눈웃음을 지은 케니언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 그럭저럭 괜찮으세요. 사실 아버지 몸을 생각하면 쇼코브로트도 못드시게 해야 하는데 워낙 좋아하시니 어쩔 수가 없죠. 젊었을 적 부터 드시던 것이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빵을 포장하던 아주머니는 종이로만들어진 봉투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단다. 5실피만 주렴." "네, 여기 5실피 받으세요. 그럼 내일 또 뵐께요." 동전 몇닢을 건네주며 빵봉투를 전해 받은 케니언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이내 몸을 돌리려 했는데, 어제의 일을 떠올린 뮤스는 대충 입을 닦아내며 그녀를 불렀다. "저... 실례합니다." 뮤스의 부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케니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신 것인가요?" 그녀의 되물음에 뮤스는 머슥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습니다. 케니언 양이라고 하셨나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자 케니언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만, 저는 그 쪽을 모르는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뮤스는 충분히 그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금 전 아주머니께서 부르신 이름도 들었고, 어제 식당에서 아가씨의 옆 자리에 앉아있다 우연찮게 이름을 듣게 되었답니다." 잠시 생각을 되살려보던 케니언은 뮤스의 아래 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뮤스에 대한 경계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어제 식당이라면...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를 보며 뮤스는 그녀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양 손을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어제 식당에서 오고가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 마을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어제 오가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죠. 물론 괜한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뮤스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말을 하자 경계를 하던 케니언의 표정도 조금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곧 어두워 졌는데, 어제의 일 때문인 듯 했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팜구드의 일인 만큼 타지에서 오신 분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일이에요. 또, 설령 내막을 아시게 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힘으로 도와 주실 수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간략히 밝힌 케니언은 뮤스에게 뭐라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 남게된 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흠... 자존심이 강한 아가씨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뮤스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빵집 아주머니는 케니언의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며 뮤스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케니언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젊은이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의외의 대답을 해준 아주머니를 향해 시선을 돌린 뮤스는 얼굴을 들이 밀며 물었다. "아주머니도 그 일에 대해서 아시고 있으시는 것인가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볼을 긁적거린 아주머니는 주변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다면 어제 젊은이가 들었다는 이야기가 그 것에 관련된 이야기일 거에요." "그 것에 관련된 이야기라니요?" "음...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두 쉬쉬 하고 있는데, 공공연하게 거론 되는 이야기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외부로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니 젊은이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 것 같군요." "그렇다면 아주머니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뮤스의 부탁에 빵집의 아주머니는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이런... 나 역시 이 마을의 사람이라우. 솔직한 심정에서야 젊은이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앞으로도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 어쩔 수가 없어요." 더 이상 묻는 것도 아주머니에게 실례라고 생각한 뮤스는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고, 곧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빵 맛있게 얻어먹고 갑니다. 많이 파세요." "흠, 젊은이 잠깐만 기다려 봐요." 빵집의 아주머니는 막 돌아서려는 뮤스의 발걸음을 잡았고,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왼쪽의 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끝에 붉은 지붕을 가진 큰 집이 나타날 거요. 그곳이 케니언의 집인데, 케니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직접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말에 아쉬운 기색을 날려버린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고, 잠시 진열장에 시선을 멈춘 뮤스는 자신이 먹던 쇼코브로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의 집을 방문하는데 맨 손으로 갈 수는 없죠. 그분께서 이 빵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으니 이것 좀 적당히 싸주시겠습니까?" "좋은 젊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주 예의 바른 젊은이군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막 구운 빵으로 싸드릴테니..." 따뜻하게 미소를 지은 아주머니는 빵을 꺼내오기 위해서 가게 안으로 몸을 돌렸고, 뮤스는 그녀가 가리켜준 방향을 바라보며 찾아갈 집을 머리 속에 되새기고 있었다. 빵집의 아주머니에게 들은대로 길을 따라간 뮤스는 상당한 규모의 저택 앞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설명대로 붉은 색의 지붕이었고, 길의 끝에 서있는 저택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뮤스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택의 문앞에 서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집이군. 이런 큰 집에 사는 아가씨가 이른 아침 부터 빵을 사러 나온다니... 그래도 이집 외에는 붉은지붕을 가진 곳이 없으니..." 혼잣말을 중얼 거린 뮤스는 나직하게 숨을 들이쉬며 저택의 나즈막한 대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아담하게 꾸며져있는 정원을 통과한 뮤스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린 문앞에 서게 되었다. 밀이삭의 모양을 한 특이한 종을 바라본 그는 그 아래쪽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금속으로 만들어져있는 금속의 밀이삭들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하며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띠리리링... 띠리링... 뮤스가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종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을 때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수수한 면셔츠 위에 오래된 듯 거무튀튀한 색의 가죽 조끼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종이로 만든 빵봉투를 들고있는 뮤스를 아래위로 살피며 물었다. "젊은이는 누구신가? 이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중년인의 얼굴이 낯익음을 느낀 뮤스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라이델 베르크에서 온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밥갑습니다. 마고드씨 되시죠?" "흠... 내 이름이 마고드임은 틀림없네만, 나는 자네를 잘 모르겠군."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떠올리던 마고드는 뮤스가 들고있던 빵봉투에 시선을 멈추며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혹시, 자네가 아침에 빵집에서 우리 딸애를 만났다는 젊은이인가?" 마고드가 직접적으로 물어오자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기가 쉬워졌다고 생각한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고드씨께 여쭈어 보고싶은 것이 있어서 빵집 아주머니께 물어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흠... 일단은 이렇게 찾아왔으니 들어오게나." 뮤스에게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한 마고드는 몸을 돌렸고, 뮤스 역시 집안을 살펴보며 안으로 들었갔다. 저택의 내부는 바깥에서 본 것 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물론 실제 넓기도 했지만,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나마 몇 가지 있는 가구들도 상당한 세월을 겪은 듯 색이 바라거나 칠이 벗겨진 곳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었다. 소파를 지나쳐 방문 하나를 열어보인 마고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이르니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겠군? 기왕 우리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식사 대접은 해야겠지?" "그건..." 뮤스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마고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들만큼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식사도 아니니 그렇게 부담 가질 것은 없다네. 그저 아침 식사는 빵 몇조각과 따뜻한 차 한잔이 다일세."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뮤스는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마고드의 직선적이지만 인정 많은 성격을 느낄 수 있었고, 흔쾌히 그의 접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앞치마를 두른 케니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빵집에서 사온 빵을 작은 바구니에 담아 정리하고 있었고, 불 위에서는 찻물이 끓고 있었다. 그녀는 마고드의 기척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아침부터 누가 찾아온..." 질문을 던지는 도중에 뮤스의 얼굴에 시선이 닿은 그녀는 놀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은 아까 만났던... 분명 상관 하실일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 저희 집까지 찾아오시다니 무례하군요." 달갑지 않은 그녀의 말에 뭐라 대꾸하려고 하자 마고드가 나서며 대신 입을 열었다. "후훗... 너의 말을 들었겠지만, 이 애비의 말은 듣지 못한 것이겠지. 이 젊은이는 내 손님인 듯 하니 너는 잠자코 있거라. 그리고 준비하는 김에 이 젊은이의 아침도 좀 준비해 주렴." 마고드가 뮤스를 옹호하고 나서자 할 말이 없었던 그녀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는 마고드의 안내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잠시 후, 케니언은 세 개의 접시와 잔을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각각의 접시에는 적당하게 잘려진 통밀빵이 놓여있었고, 쇼코브로트가 두개 씩 놓여있었는데, 유독 한 접시에는 한개만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마를 찌푸린 마고드는 불만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째 그 접시에는 쇼코브로트가 한개 밖에 없느냐?" 그의 물음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찻잔에 차를 따르던 케니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미처 손님이 오실 줄 모르고 쇼코브로트를 다섯개 밖에 사오지 못했어요. 그래도 제가 하나만 먹으면 되니 괜찮아요." "그러게 내가 평소에 많이 사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니. 어차피 쇼코브로트는 시간이 흘러도 맛이 변하지 않으니 상관없지 않냐?" 케니언은 아이의 투정마냥 투덜거리고 있는 아버지를 바람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적당히 사다놓지 않으면 아버지가 시도때도 없이 다 드실것이니까 그렇죠." "흠... 쇼코브로트를 마음대로 먹을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나직한 한숨을 내쉰 케니언은 따뜻한 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물론 아버지의 재산은 팜구드를 통털어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많죠. 하지만 이건 돈을 떠나 아버지의 건강문제란 말이에요. 몸이 약해지셔서 쇼콜라가 들어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위험하다고요."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안다.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못먹어가면서 까지 두 부녀의 티격거리는 대화를 듣고있던 뮤스는 옆 자리에 내려놓은 빵봉투를 그들을 향해 내밀며 끼어들었다. "저 두 분다 그만 하시죠. 작은 성의지만 제가 쇼코브로트를 사왔으니 이것을 나눠 드시면 될 것입니다." 뮤스의 목소리에 다투고 있던 부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고정이 되었고 각각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데, 케니언은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마고드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아버지의 몸 때문에 받을 수가 없겠군요. 가실때 가지고..." 케니언이 뮤스의 선물을 사양하려 하자 마고드는 냉큼 빵봉투를 잡아채며 말을 가로막았다. "손님의 성의를 거절하면 되겠니? 이것 참. 깐깐한 딸 덕분에 좋아하는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나의 갈증을 풀어주는군." 이로서 부녀사이의 말다툼이 일단락 되자, 조금 딱딱해 보이는 부녀 사이에 끼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던 뮤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쇼코브로트를 작은 조각으로 뜯어 입에 넣은 마고드는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살짝 눈을 감았고, 나직한 탄성을 지었다. "으음! 과연... 먹을 때 마다 탄성이 나오는 맛이라니까. 이 맛있는 것을 못먹게 하다니 케니언 네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야 할게다." 하지만 케니언은 이러한 대화가 종종 일어나는지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뮤스를 바라본 마고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우리마을의 일에 대해서 알고싶어 한다고 딸애에게 들었다네. 맞는가?" 뮤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 해주도록 하지." 잠자코 식사를 하고 있던 케니언은 통밀빵 조각을 씹다 말고 마고드를 바라보며 말리려 했다. "아버지! 외지의 사람이 그 일을 알게되었다는 것이 갈리트 아저씨 형제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에요. 입을 막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말끝을 흐리는 딸을 바라본 마고드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젊은이는 네게 거절을 당하고도 우리집을 찾아오면서까지 그 일에 대해서 알고싶어하지 않느냐? 성격을 보아하니 어차피 우리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그 일에 대해 알아낼 듯 한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마고드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듯 빵조각을 잘게 뜯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도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팜고드 마을은 도이첸 제국에서 손에 꼽는 밀 생산지라네. 제국 전체에서 소비되는 밀 중 절반 정도가 이곳 팜고드에서 재배된 것이지. 그러니 규모 만큼이나 밀을 판매하여 얻는 수익이 상상을 초월 하고, 주요 밀 생산지인 만큼 안정적인 밀수급을 위해 황실에서도 세금을 적게 받으니 이곳 팜고드 마을은 자연스럽게 부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세. 물론 마을 사람들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인력을 끌어오는데 상당한 돈이 들긴 하지만, 그것도 수입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 여기까지는 뮤스도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을의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들어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땅을 가진 지주들의 수입과 재산은 가히 제국에서 내노라하는 재벌들에게 비교해 보더라도 별 손색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는 겨우 여섯명의 사람들이 전체 경작지를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조금 놀란 얼굴하며 되물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경작지를 겨우 여섯 명이 나누어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경작지를 여섯 등분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개인의 재산으로 소유 할 수 있는 면적이 아닙니다. 황실에서도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면적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뮤스의 물음에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은 마고드는 식탁을 두들기며 말했다.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이미 도이첸 제국은 20여년 전 부터 황실에서 개입하던 개인토지소유 규제가 풀렸다네. 황실에서도 대규모 자본을 이용한 일률적인 대량재배가 훨씬 능률적이라고 보게 된 것이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곳 팜구드 마을일세. 즉, 소수의 지주들은 자신의 경작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일정한 품질의 밀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지. 게다가 이곳의 지주들은 수대에 걸쳐 밀 농사를 전문적으로 해온 집안이기에 그 효율성을 황실에서도 인정하여 모든 권리를 지주들에게 일임한 것이라네." 뮤스는 대화를 통해 한동안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닿게 되었다. 바로 그라프에게 얻은 지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가 은퇴를 한 이후에도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지식도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깨닿지 못하고 있던 것을 자책하고 있을 때, 근심어린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던 케니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역시 그 여섯 명의 지주 중 한분이시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뮤스는 케니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놀라며 되물었다. "네? 마고드씨가 이곳의 지주중 한 분이시라고요?" "사실이에요. 비록 아버지가 쓸데 없는 곳에 돈쓰기를 싫어하셔서 조금 볼품은 없지만, 이곳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소유하고 계신답니다. 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고 계시지만요." "마음 고생이라... 그렇다면 어제 그 일과 연관이 된 듯 합니다만?" 뮤스가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자 이마를 짚은 마고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물질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네. 물질에 대한 사람의 욕구는 그 끝이 없고,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일 수록 그 욕구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 어제 우리와 함께 자리를 하고있던 갈리트 형제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네." "아... 그 중년의 아저씨들을 말씀하는 것이군요. 대체 그 사람들이 마고드씨께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뭐 쉽게 말하지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주길 바라는 것이지. 바로 수익을 늘리기 위해 팜구드 마을에서 생산되는 밀의 가격을 올리려고 하는 것일세." "밀의 가격을 말입니까?" 되물어오는 뮤스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과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 수대에 걸쳐 갈리트 집안과 우리 집안은 팜고드의 밀 재배인으로서 절친한 사이였다네.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간의 상의를 통해 일을 해결하기도 하고, 농번기 때에는 인력을 서로 몰아 주어 농사 일을 돕기도 했지. 물론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갈리트 집안의 세 형제들과 나도 절친한 사이였다네. 하지만 그 놈의 돈은 사람을 타락시켰지. 그들의 부모가 돌아가시게 되자 세 형제들은 재산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누어 가진 재산이 형제들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게야. 그 이후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늘리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형제들이 이곳 밀경작지의 반을 소유하게 되었다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두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것이지." 대략적인 마을의 뒷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이 밀의 가격을 올려서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다른 지주분들도 모두 갈리트 형제들과 같은 생각인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다네. 나머지 지주들도 나와 같이 밀값을 인상하는 것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갈리트 형제들의 협박에 생각을 굽힐 수 밖에 없었지." "협박이라면 이 마을의 치안을 맡고 있는 공직자들에게 말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고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쯔쯧... 갈리트 형제들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네. 그들이 행사하는 것은 완력이 아니라 바로 물일세." "물이라니요?" 뮤스의 되물음에 케니언을 바라본 마고드는 깨끗이 비운 접시를 건네주며 말했다. "케니언 식탁 정리 좀 간단히 하고, 마을 지도를 가져 오거라."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케니언은 각자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과 접시를 모으며 식탁에서 일어났고 그것들을 물에 담궈 놓은 후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지도를 가지고 오는 동안 마고드는 몇 마디의 이야기를 덫붙였다. "물이 농사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대한 지는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일세. 애초 이곳 팜구드 마을은 가뭄이 심한 곳이기 때문에 농작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네. 하지만 그 당시 정착할 곳을 찾고계셨던 선조들께서는 이 넓은 땅이 황무지로 버려지는 것을 아까워 하셨기에 북쪽의 류하크 강에서 부터 경작지까지 이르는 수로를 십 여년에 걸쳐 건설하셨고, 그 덕에 지금의 비옥한 토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일세."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케니언은 가죽으로 된 지도를 가져와 마고드에게 건네 주었고, 그는 접혀있던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지도를 잘 보게나. 방금 설명을 했듯이 수로는 북쪽으로 부터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네. 그리고 색깔별로 경작지가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의 빨강, 주황, 노란색의 경작지가 갈리트 형제의 땅이고, 그 바로 아래 보라, 파랑, 초록색이 경작지가 나머지 세 명의 경작지일세. 가장 오른쪽의 초록색 경작지가 바로 내 땅이지." 마고드의 설명대로 지도를 살펴보던 뮤스는 어제 팜구드 마을에 들어서며 켈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유독 밀이 매말라 보이는 그곳이 바로 마고드의 경작지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갈리트 형제의 경작지를 통과하고 있는 수로에서 시선을 멈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던 것이었군요. 수로가 갈리트 형제의 경작디를 통과해서 나머지 지주들의 경작지로 들어오고 있으니 만약 갈리트 형제들이 이 수로를 막는다면, 아랫 쪽에 있는 경작지들은..." "메말라 버리는 것이지." 잠시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수로를 막는다고 해도 도이첸 제국의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이런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로가 아니니 수로가 자신의 땅에 속해있는 만큼 그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법은 그것을 제재할 수 없으니까요. 교묘하게 법의 구멍을 이용해 이런 짓을 하고 있군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마고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보기보다는 아는 것이 상당하구먼. 게다가 갈리트 형제들은 마을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해서 외부인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도록 감시를 하는데다가 몇몇 고관들에게까지 뇌물을 주고 입을 막고 있는 상태이지. 또, 설령 외부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황실에서 법을 수정하기까지는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족히 몇 년은 걸린다고 하니 법이 수정 될때까지 농사를 포기하고 지낼 수도 없는 일일세. 한마디로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는 것이지. 나머지 지주들을 최대한 설득하는 수 밖에..."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지주들이 마고드씨의 설득을 들어줄 확률도 희박하겠군요. 자신들의 경작지로 통하는 수로를 막아 버린다면 그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요." "자네의 말대로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기는 힘들겠지만 아무런 손도 써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동의 할 수는 없네. 팜구드에서 출하되는 밀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면 타 지역에서 출하되는 밀의 가격도 따라서 오르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고, 그렇게 된다면 넉넉하지 못한 제국 전역의 서민층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일세. 황실에서 밀 가격 인상에 대해서 조사를 나오긴 하겠지만, 서류를 조작해 농사에 드는 비용이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면 아무런 뒷탈도 없는 것이지. 자고로 농부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세.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잊고, 사리사욕에 눈이멀어 이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니 정녕 부끄러울 따름일세." 뮤스는 마고드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서도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쉴세 없이 지형을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지도의 여러 곳을 손으로 찍어보던 뮤스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 곳은 일년에 비가 몇 차례나 옵니까?" 돌연한 물음에 마고드는 손을 꼽아 세어보며 대답했다. "대략 적으로 10회 내외 정도 일세. 다른 지역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라는 수치이지. 게다가 비는 내리는 족족 땅으로 스며 들기 때문에 반나절을 못가서 비가 내린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네." "반나절이라고 하셨습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마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세. 그런 이유로 마고드 마을의 땅을 자우겐엘데라고 부른다네. 흡수하는 땅이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식수는 어떻게 공급받는 것이죠? 우물을 파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죠?" 마고드와 뮤스의 대화를 듣고있던 케니언은 그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지금까지 뭘 들었나요? 이곳에서 지하수맥이 발견되었다면 우리가 농업용수 걱정을 할리가 있을까요? 10멜리까지 파보았지만 우물은 커녕 물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죠. 그래서 경작지로 흘러가는 수로의 물의 일부분을 마을에서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에요. 갈리트 아저씨들도 마을에서 살고 있으니 식수까지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죠." 마고드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뮤스는 식탁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지도 위를 두들기며 말했다. "세상의 존재하는 그 어떠한 물질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즉,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수맥이 없다는 것은 아직 그 빗물들이 지하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뮤스의 말에 마고드는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10멜리씩이나 파내려 갔지만, 우리는 수맥을 발견할 수 없었다네. 그런데 그 빗물들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바로 지층 아래겠죠." "지층?" 마고드의 되물음에 뭐라고 대답을 하려던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지금은 말로 설명해 드린다 하더라도 이해하시기 힘드실 테니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제가 오후쯤 동료들과 함께 찾아오도록 할테니 마고드씨의 경작지까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네만 무엇을 할 작정인가?" "제 생각이 맞다면 몇년 동안은 충분히 사용할 농업 용수를 확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오후에 뵙도록 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벼운 대답과 함께 몸을 돌린 뮤스는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두 부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6 탄성파 탐사. 다행스럽게 마고드의 집이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뮤스는 금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라이델베르크였다면 이제 막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기에 카타리나는 아직도 잠을 자고있었고, 드워프들과 벌쿤 역시 일어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카타리나와 일행들을 깨워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커튼과 창을 활짝 열어 햇빛이 잘 들게 만들었고, 눈이 부셔진 카타리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중얼 거렸다. "으음... 뮤스 벌써 아침이야?" 그녀의 물음에 침대의 한쪽으로 다가가 걸터 앉은 뮤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주며 대답했다. "후훗. 어제 먼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네? 어차피 하루더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잘래?"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카타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하지만 조금 더 자야겠는걸?"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나는 드워프 아저씨들이랑 벌쿤을 깨우러 갈게." "우웅... 나중에 봐 뮤스... 하암..." 잠에 겨워하며 하품을 하고 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미소를 한번 지어준 뮤스는 빠른 걸음으로 드워프들의 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의 방에 도착한 뮤스는 문이 잠겨 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문이 열리자 뮤스 시야에 두개의 침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벌쿤이 독차지 한 채 늘어져 자는 중이었고, 네 명의 드워프들은 나머지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듯 했는데, 키가 워낙 작았기에 침대를 가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이상해 보이는 방안의 풍경을 뒤로한 뮤스는 그들을 깨우기 위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보를 잡아 힘차게 당겼다. "여차!" 그와 동시에 드워프들과 벌쿤의 아래 깔려있던 침대보가 끌려나오면서 그들의 몸을 핑그르르 돌렸고, 순식간에 모두를 침대 밖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다. -꾸다탕탕! "으아아악! 뭐...뭐야!" "지진이라도 난 거유? 갑자기 땅이 뒤집혀 버리다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허우적 거리고 있는 드워프들과 벌쿤을 내려다 보고있던 뮤스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자자! 급히 해야할 일이 생겼으니까 모두들 일어나세요! 어서 식사하고 일하러 가야한다고요!" 드워프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엉거주춤 일어나기 시작하자 뮤스는 한명씩 팔을 부축해 주며 일으켜 나갔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있던 켈트는 눈을 부비며 물었다. "으... 졸려 죽겠는데 아침 부터 대체 무슨 일인게냐? 조금만 더 자면 안되겠냐?" 하지만 드워프들과는 달리 벌쿤은 아침 잠이 많은편은 아니었기에 금새 정신을 차리며 기지개를 폈다. "으아! 잘잤다! 그런데 아침 부터 무슨 할일이 있다는거야. 설마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식당에서 이야기 해줄테니 대충 씻기나 하라고.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어서와! 아저씨들도 서두르세요!" "알았다고... 알았어." 방문을 나서고 있는 뮤스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은 벌쿤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세면대로 걸어갔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비틀 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마을사람들은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기에 식당내부에는 뮤스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양의 빵을 쌓아 놓고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드워프들의 식욕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듯 했다. "흠... 그런일이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면 간단하게 넘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할 참이냐? 설사 수로를 다시 뚫으려고 하더라도 최고한 몇 년을 걸릴터인데..." 뮤스를 통해 마고드와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모두 들은 켈트는 빵조각을 하나 입에 넣으며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다른 드워프들과 벌쿤 역시 턱을 괜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 편에 앉아 금속 막대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던 뮤스는 그것들 중 하나를 내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것을 이용해서 이곳 경작지의 지층을 조사해 볼 생각이에요." 그의 말에 벌쿤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건 광역통신기에 사용하는 전파축 이잖아. 그것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또 다시 완성된 전파축 하나를 옆으로 내려놓은 뮤스는 계속해서 전파축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이 전파축은 조금 개조가 된것이지. 즉, 주변의 진동을 흡수하여 일정한 신호로 나타내 주는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지층의 형태를 알아볼 참이야." "지층이라면 땅속을 말하는 것 같은데, 파보지도 않고 땅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고?"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주도록 할게. 아참! 그리고 아저씨들은 시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준비 할 수 있겠어요?"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을 해보던 브라이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뭐 전뇌거를 용도변경하면 임시적으로 '금광석시추'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리 깊이 파고들어갈 수는 없을 게다. 기껏해봐야 20멜리 정도 될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서둘러 식사를 하도록 하세요." 뮤스의 말에 어께를 들썩인 브라이덴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헤휴... 최소한 식사를 할 시간 정도는 넉넉히 달라고. 시추작업이 여간내기가 아닐텐데 든든히 배는 채워야 할 것 아니냐?" 불만섞인 목소리에 피식 웃은 뮤스는 옆에 쌓아놓았던 전파축들을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라도 하게 해드린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들이 일어나자 마자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고요. 그리고 벌쿤은 나랑 같이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 전뇌거를 타도록 해. 알겠지?" "으응..." 입안가득 빵을 머금고 있던 벌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고, 뮤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뮤스는 식당앞의 길에 세워져있는 전뇌거로 다가갔다. 그리곤 손에든 전파축을 대충 짐칸에 실은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 손을 넣으며 중얼 거렸다. "화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던가?" 가방속을 뒤적이던 뮤스는 이내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었다. 수분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름을 먹인 종이봉투의 안을 살펴보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전뇌거의 짐칸에 실려있는 다른 장비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마고드는 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해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가늠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마땅치 않아 마나시계를 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농사일을 주로하는 이런 마을에서는 정확한 시간을 따질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근검한 마고드가 마나시계를 구입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었다. 창에서 시선을 뗀 마고드는 나무로 조잡하게 깍아 만든 옷걸이에서 오래된 갈색의 외투를 짚어들었다. "흠... 지금쯤 그 젊은이가 올 때가 된 것 같군." 마고드가 외투를 걸치고 있을 때, 소파에 앉아 뜨게질을 하고있던 케니언은 잠시 손을 멈추며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그 뮤스라는 사람을 믿고 계신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 사람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요. 경작지로 이어진 수로가 끊어진 마당에 어디서 그 많은 양의 농업용수를 가지고 온다는 것인지... 아버지도 너무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거에요. 기대를 해봤자 결국 상처를 받는 것은 아버지일테니까요." 외투를 모두 걸친 마고드는 딸의 맞은편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 "후훗... 설령 그 젊은이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아무렴 어떻겠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일말의 희망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란다. 나중에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희망을 쉽게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야." 마고드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어두운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네의 인생에만 신경을 쓰거라. 갈리트 형제들과 불미스러운일을 겪어온 지난 몇 년 동안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나의 고집때문에 너까지 마음 고생을 하게된 것이었단다. 정말 네가 걱정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건만... 누누히 말했지만 이 일은 애비의 일이니 너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의 말에 뜨게질 바늘을 내려놓은 케니언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일이 바로 제 일이에요! 그런 것이 가족이 아닌가요? 설마 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시겠죠?" 상기되어있는 케니언의 얼굴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던 마고드는 고개를 내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럴리가 있겠느냐.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너는 내 딸이란다. 유일한 나의 가족이지... 내가 곧 죽더라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일게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앞으로도 몇 십년은 더 사실 것이라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케니언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소매로 눈물을 재빨리 훔친 그녀는 원래의 딱딱한 표정을 되찾으며 말을 이었다. "몸에 해로우니 햇빛을 너무 많이 받지 마세요. 그리고 너무 늦지도 마시고요." 비록 잔정은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딸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마고드는 가슴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강한 척 하고 있는 딸을 위해 평소와 같이 털털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녀석! 이 애비가 서너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갈 때 마다 그 소리를 하는구나. 이제는 네 목소리가 귀에 박혔는지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리더군!" 마고드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케니언에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집 밖으로 부터 전뇌거의 소리와 함께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고드씨! 준비 다되셨으면 나오십시오!" 그 소리에 고개를 잠시 창쪽으로 돌렸던 마고드는 시선을 떼며 딸의 어깨를 두들여 주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마. 저녁이나 맛있게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마친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고, 케니언은 문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주신이시여... 오늘도 부디 아버지께 아무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몰래 기도를 드리는 케니언의 두 손은 그녀의 간절함을 대신 보여주기라도 하듯 굳게 쥐어져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마고드는 길가에 서있는 두 대의 전뇌거를 볼 수 있었다. 전뇌거에 시선을 고정시킨 마고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뮤스가 타고있는 전뇌거는 보통의 전뇌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을 한것이었지만, 뒤 쪽의 전뇌거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고드 씨! 이 쪽으로 타세요!" "아..알겠네!" 뮤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마고드는 뮤스의 전뇌거 쪽으로 다가가 전뇌거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실내를 한번 살펴보던 마고드는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나도 일할 때 쓰는 라이노가 있지만, 내부가 완전히 다르군 그래. 겉 모습이 비슷하길래 같은 기종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이 신형인가보지?" 마고드의 물음에 뮤스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벌쿤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고드씨. 벌쿤이라고 부르세요. 이 전뇌거는 신형이 아니라 공학원에서 특별 제작된 전뇌거랍니다. 쓰임새에 따라 용도변경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동력기를 비롯한 모든 부품과 탑재되어있는 장비가 찰탁식이기 때문에 부품과 장비의 재조립을 통해 필요한 용도로 변환하여 쓸 수가 있죠. 한 마디로 움직이는 거대한 공구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비록 마고드는 벌쿤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이 전뇌거가 대단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곧 드워프들이 타고있는 기이한 모양의 전뇌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 뒤에있는 전뇌거도 이것과 같은 전뇌거란 말인가?" "하핫! 이해가 빠르시군요. 원래는 저 뒤에 있는 전뇌거 역시 이것과 같은 모양이었죠. 하지만 곧 시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형태로 재조립한 것입니다." "허허... 이런 전뇌거 한대 있으면 농사일도 훨씬 쉬워질 것같군. 땅을 갈거나 씨를 뿌리도록 그 용도변경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마고드의 상상력에 가볍게 웃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훗! 물론 그것도 가능할 것 같군요. 다목적 농기구라..." 마고드가 신기한 듯 전뇌거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동력기의 진동이 전해져 왔고, 뮤스는 전뇌거를 천천히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7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황금빛으로 익은 밀 이삭들이 흥겨운 모습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평선까지 이어진 듯 끝 조차 보이지 않는 밀밭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탄성을 내뱉게 만들 정도로 광활했고, 일정한 크기로 반듯하게 정리되어있는 밀밭은 마치 자를 대고 금을 그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름의 태양이 하늘의 한 가운데에서 내려 쬐고 있을 무렵 밀밭 사이로 나있는 반듯한 길로 두 대의 전뇌거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 달리고 있는 전뇌거는 보통의 전뇌거와 그 모습이 다를바가 없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전뇌거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차체가 짧아 졌을 뿐만 아니라 전뇌거의 중심부에는 굵직한 금속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이들은 바로 팜구드 마을을 떠나 마고드의 경작지를 향하는 뮤스 일행들이었는데, 뮤스와 벌쿤은 멀리서 보던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주고 있는 밀밭에 시선을 빼앗긴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뇌거를 운전하며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밀밭을 구경하던 뮤스는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장관이라고 밖에 설명을 할 수가 없겠군요.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면적이었을 줄이야..." 벌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정말 끝이 없는걸요? 금방 수확한 햇밀로 빵을 만들면 정말 맛있겠어요!"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말도 하지않은 마고드는 그저 어두운 안색으로 창밖에 비친 밀밭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밖을 바라보던 그는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곳 까지는 다른 지주들의 경작지이고, 저 둑에서 부터는 나의 경작지라네."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그가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록의 풀로 덮여있는 둑이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상당한 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뻗어있는 길의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던 뮤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2켈리 정도는 더 가야겠군요. 마고드 씨의 경작지까지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있습니까?" "물론일세. 팜구드의 경작지는 관리에 수월하도록 체스판 모양을 하고 있다네. 그러니 모든 길은 직선으로 나있는 것이지." 마고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천천히 전뇌거를 세웠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던 드워프들의 전뇌거 역시 따라 멈추었고, 뒷 자리에 앉아있는 벌쿤을 돌아본 뮤스는 짐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고드씨와 나는 먼저 가있을 테니 벌쿤 너는 지금부터 드워프 아저씨들의 전뇌거를 함께타고 100멜리 간격으로 전파축을 땅에 심으면서 따라와 줘. 깊이는 30셀리씩 일정하게 심어야 해." 아무런 생각없이 밀밭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던 벌쿤은 뮤스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 100멜리 마다내려서 전파축을 심으라고? 2켈리라면 20개씩이나 심어야 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벌쿤의 칭얼거림에 마음이 약해질 뮤스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경작지에도 최소한 5켈리 쯤 더 심어야 하니 총 70개를 심어야겠군. 후훗! 부탁한다 벌쿤!" "뭐 70개라고?! 너무하잖아! 드워프 아저씨들도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잔소리 말고 어서 내리기나 해! 드워프 아저씨들이야 나중에 포르코타 한 병 구해다 준다고 하면 잠잠해 질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파축은 짐칸에 있으니 내려서 꺼내어 가도록 하라고!" "하지만 이건..." 아직도 벌쿤이 불만을 감추지 못하자 뮤스는 급히 몸을 움직이며 전뇌거의 뒷문을 열었고, 벌쿤을 힘껏 전뇌거 밖으로 밀어냈는데, 방심하고 있던 벌쿤은 산만한 덩치가 무색하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전뇌거 밖으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떨어진다!" -쿵! 결국 볼썽 사납게 전뇌거 밖으로 떨어진 벌쿤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한껏 볼을 부풀린 그는 어쩔 수 없이 짐칸에 쌓여있는 전파축을 꺼내들며 투덜 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마고드씨 때문에 참는데, 나중에 두고 보자고! 드워프 아저씨들도 그깟 술 한명에 잠자코 있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뮤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벌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수고해라! 잠시 후에 보자고!" 짧게 말을 마친 뮤스는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재빨리 전뇌거를 몰아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뿌연 먼지와 벌쿤만이 남게 되었다. 멀리 달아나고 있는 전뇌거의 꽁무니를 바라본 벌쿤은 콧방귀를 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쳇! 따라온다는 걸 순순히 받아 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니까. 다음 부터 어디가는데 따라 가나 봐라!" 벌쿤이 이번 여행에 동참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부터 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쿤! 대체 무슨 일인게냐? 갑자기 전뇌거에서 떨어져 버리다니!" 그의 물음에 어께를 으쓱거린 벌쿤은 전파축을 한번 수습하며 몸을 돌렸다. "형이 이걸 100멜리 마다 하나씩 심으면서 따라오래요!" 그리고 드워프들의 전뇌거 가까이로 다가간 벌쿤은 전파축 하나를 꺼내들며 신경질 적으로 땅에 박아넣었고 그 후, 허리춤에 걸린 망치를 하나 꺼내 그 위를 두들겨 주었다. 그렇게 하여 전파축의 깊이를 적당히 맞춘 벌쿤은 허리를 펴며 전뇌거의 뒷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어젖혔다. "보셨죠? 이런 식으로 70개나 심어야 한다고요!" 마침 뒷 좌석에 타고있던 레딘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한 두개도 아니고 70개 씩이나 심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성격이 불같은 레딘이 벌쿤의 예상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만족해 하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요! 부탁한다고 말만 남기고서 무책임하기 짝이없는 뮤스 형은 도망쳐 버렸다구요!" 전뇌거의 운전석에서 몸을 돌린 자세로 벌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흠... 이번 일은 뮤스가 너무 한 것 같군. 그런 일이라면 전뇌거가 두대 인만큼 거리를 나누어서 반씩 하는 편이 좋을 텐데, 우리에게 일임을 하다니... 아무래도 나중에 한 마디 해줘야 겠는걸?" 켈트의 말에 옆좌석에 앉아 팔짱을 끼며 기분상한 표정을 짓고있던 브라이덴까지 거들고 나섰다. "공학원의 일이라면 아무말 하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일은 뮤스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시작한 일인데, 우리에게 이런 잔일까지 시키려 하는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인 것 같수! 형님이 뭐라고 한 마디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우." 이제 든든한 후원자들 까지 등에 엎게 되어 기고만장해진 벌쿤은 내친김에 그들의 마음을 확실히 얻고자 한 마디 더 던졌다. "그것 뿐인줄 아세요? 제가 아저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랬더니 글쎄... 나중에 포르코타 한병만 주면 아무일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저씨들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겨우 그런 술 한병으로 아저씨들을 어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 말이 벌쿤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어버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포르코타란 말에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블뤼안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정말 뮤스가 나중에 포르코타를 준다고 그랬단 말이냐?" "네! 정말이라니까요!" 아직 블뤼안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벌쿤은 그의 되물음에 자신의 가슴을 치며 확신했고, 형제들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블뤼안은 헛기침을 몇번 하며 형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흠! 흠! 뭐 70개 정도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 걸? 걸어서 7켈리를 가는 것도 아니고, 전뇌거를 타고가면서 심는 것인데 뭐가 그리 어렵겠수." 생각지도 않게 블뤼안이 배신을 해버리자 황당함을 느낀 벌쿤은 그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설마 포르코타 한 병에 넘어가신건 아니시겠죠? 아무리 그 술이 좋다지만 아저씨들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니에요!" 블뤼안은 대답하기 껄끄러웠는지 애써 벌쿤의 시선을 피했고, 이번에는 브라이덴이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그렇게 생각해보니 블뤼안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군. 또, 우리가 뮤스 덕에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 부탁도 못들어 주어서야 되겠나?" 이어 가장 먼저 화를 내던 레딘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게다가 어차피 벌쿤이 내려서 전파축을 심을 테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는 것 같은걸? 허헛! 물론 절대 포르코타에 눈이 멀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다른 드워프들은 레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추어 외쳤다. "그야 물론이지! 우리가 설마 포르코타 한 병에 눈이 멀었겠어?" 벌쿤은 믿고있던 드워프들에게 배신을 당하자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마지막 남은 희망인 켈트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켈트 역시 드워프인 이상 형제들과 다를바 없었는데,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재빨리 닦으며 외쳤다. "흐흘... 자네들의 생각도 내 생각과 다를 바가 없군 그래! 그럼 어서 출발 하자고!" 켈트의 반응에 넋이 나간 벌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기대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있던 레딘이 그의 팔을 잡아 당겨 전뇌거로 끌어올리자 드워프들과 벌쿤을 태운 전뇌거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뇌거의 뒷 좌석에 앉아있던 마고드는 창을 통해 멀어지고 있는 벌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허탈한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마고드는 몸을 바로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뮤스를 향해 물었다. "일행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 것인가? 저 벌쿤이라는 청년 기분이 상당히 나쁠 것 같구먼." 마고드의 말에 거울을 통해 벌쿤의 모습을 바라본 뮤스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후훗! 그런 걱정이시라면 안하셔도 될것입니다. 벌쿤은 제 동생인걸요. 원래 형제들 사이에서는 작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하긴...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형제들은 작은 의견 차이로 곧잘 다투기도 하는 것이니까." 사실 뮤스가 벌쿤과 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벌쿤에게 그런 잡다한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벌쿤 역시 뮤스를 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예의 때문에서라도 아무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벌쿤를 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벌쿤 역시 뮤스를 친형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거리낌없이 동생으로서의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경작지 사이로 난 작은 길인 만큼 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2켈리란 거리는 전뇌거를 타고선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뮤스와 마고드는 금새 경작지를 나누는 둑에 다 다르고 있었다. 점차 둑의 모습이 크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높이는 1멜리 가량으로 그리 높지는 않았고, 길이 이어지는 곳에는 왕래를 위해 길 정도의 폭을 가진 통로가 뚫려 있었다. 둑에 가까워 질 수록 마고드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애초 다른 사람의 경작지를 가득채운 잘 익은 밀이삭들을 보고 있을 때부터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이 보더라도 금새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거울을 통해 마고드의 얼굴을 살피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하지만 마고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뇌거는 어느새 둑을 통과하여 마고드의 경작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린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탐스러운 황금색으로 빛나던 세상이 희뿌연 회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는데, 이맘때 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할 밀이삭이 생기를 잃은 모습으로 땅을 향해 있었고, 잎사귀들은 매말라 군데군데 회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뮤스는 이 참담한 광경을 훑어보며 침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완전히 매말라 버렸군요." 그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지나쳐가는 자신의 경작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밀밭에 마지막으로 물을 댄것이 3개월 전일세. 그 때가 밀 재배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치 할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라네. 그나마 밀이라는 것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 이나마도 견디고 있는 것이지 다른 품종이었다면 벌써부터 포기했을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으셨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한 평생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밀은 자식들이나 다름 없는 것일세. 내 손으로 키우는 동안 나에게 고뇌를 주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도 했다네. 결국은 나를 뿌듯하게 하며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지. 그야 말로 내 자식이 아닌가? 그런 자식들이 지금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곳을 둘러보러 오지만, 그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네." 그리곤 주먹을 굳게 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갈리트 형제들에게 의지를 꺽일 수는 없는 일일세. 지금이야 나 한 사람의 마음만 아픈 것으로 전부이지만, 그들의 뜻대로 밀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형편이 어려운 수 많은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게 될 것일세. 그것 만은 막자는 것이 내 마지막 욕심이라네." 마고드의 이야기를 듣던 뮤스는 그의 생각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쳐주고 있었고, 전뇌거는 계속해서 황량하게 변해가고 있는 밀밭사이를 지나며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뮤스와 마고드를 태운 전뇌거는 십여분을 더 달려 5켈리 가량 떨어진 곳에 멈추어섰다. 그리고 전뇌거에서 내린 뮤스는 짐칸에 실려있던 검은 색의 기기를 꺼내었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탄성파 탐사를 하면 되겠군요." 그의 곁으로 다가온 마고드는 처음 보는 기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탄성파 탐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마고드가 물어오자 몸을 낮춘 뮤스는 기기를 분해하기 시작하며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탄성파 탐사란 인공적으로 발생한 탄성파를 사용해서 지하의 구조를 추정하는 방법이죠. 굴절파와 반사파 그리고 표면파 등의 다양한 파동을 이용해서 지반의 탄성파 속도 구조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기기의 내부에서 복잡한 모양을 하고있는 얇은 판을 꺼내보인 뮤스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원래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라는 것인데, 이 전뇌기판을 조금 손보면 탄성파 해석기로 쓸수가 있답니다." 잠시 설명을 이어나가던 뮤스는 잠잠한 마고드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었는데, 분명 뮤스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 했음이 확실해 보였다. 쑥스러운 얼굴을 한 마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간단하게 설명을 할 수는 없겠나? 평생 농사만 짓고 살던 무식쟁이라서 그런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구먼." "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군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니 개의치 마세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기기를 이용해서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땅 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 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던 마고드는 무릎을 쳤고, 자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니! 땅을 파보지도 않고 땅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는 겐가?" "후훗 그렇답니다. 저는 잠시 광역통신기를 손볼테니 마고드 씨는 전뇌거에 있는 삽으로 땅을 조금만 파주시겠습니까? 드워프 아저씨들과 벌쿤이 도착할 때 쯤이면 단말기를 개조하는 것도 완료 될 것 같군요." "땅파는 일이라면 평생 해온 일인데, 그쯤 못해주겠는가? 얼마나 파야 하지?" "대충 50셀리 정도만 파주시면 됩니다." "50셀리라. 그 정도야 금방 팔 수있으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한 마고드는 전뇌거의 짐칸으로 걸어가 손에 맞는 삽을 골라 들었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과연 능숙하게 삽을 놀리는 모습이 한, 두해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8 시간이 조금 흐르자 멀리서부터 전뇌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드워프들과 벌쿤이 타고있는 전뇌거임을 알수 있었던 뮤스는 때 마침 작업을 마칠 수 있었기에 기기를 조립하며 몸을 일으켰고 마고드 역시 땅파는 일을 모두 끝냈는지 삽으로 땅을 짚으며 뮤스에게 다가왔다. "땅은 충분히 팠다네. 이제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벌쿤이 전파축을 하나씩 심으며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던 뮤스는 마고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마고드씨께서 하실 일은 없는 것 같군요. 지금 부터는 그저 지켜만 보시면 되죠. 전파축이 다 심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겠군요. 후훗! 벌쿤 녀석이 힘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는걸요." "그러고 보니 벌쿤이라는 청년의 몸이 참으로 좋군. 근육이 고루 발달 한 것 같은데, 험한 일을 많이 한 것 같아." 마고드의 말에 뮤스는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지만, 가사일로 단련된 몸이라고 말해주기는 꺼림직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땅땅땅! 그로부터 다섯개의 전파축을 더 심은 벌쿤은 시위라도 하듯이 뮤스의 발앞에 마지막 전파축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매번 그랬듯이 망치로 알맞은 깊이로 박아 넣은 그는 보란 듯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이제 내가 할 만큼은 모두 했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할 거라고! 에고 허리야!" 벌쿤의 엄살에 뮤스는 어깨를 두들겨 주며 대답했다. "후훗! 더 이상 네가 할 일도 없으니 걱정마라. 아무튼 힘든 일 한다고 수고했어." 벌쿤에 이어 재빨리 전뇌거에서 내린 드워프들은 뮤스의 앞으로 달려오며 기대가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고, 켈트가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허헛! 벌쿤에게 듣자하니 네가 우리에게 포르코타를 준다고 했다던데 사실이냐? 껄껄! 뭐 겨우 이런일로 그런 귀한것을 준다고하니 받기가 미안하긴 하지만, 애써 사양하지는 않도록 하지!" 그의 형제들도 켈트의 생각과 같은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는 자신의 예상과 한치 어긋남도 없는 드워프들의 반응을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물론 사실이에요. 하지만 포르코타는 돌아가서 드리도록 할테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도록 하자고요." 벌쿤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한 켈트와 드워프들은 잔뜩 기합들어간 모습이었다. "자자!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 뭐든 말만 하거라. 땅 끝까지라도 뚫어 줄테니까!" 드워프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미리 준비해놓은 화약을 꺼내며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들은 나중에 시추 작업만 하시면 되니 그렇게 몸에 힘을 넣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은 두꺼운 철판 하나를 저쪽에 파놓은 땅의 바닥에 깔아주시겠어요?" 그의 부탁에 자신들의 전뇌거로 걸어간 레딘은 짐칸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두께가 3셀리 가량되는 철판을 하나 꺼내어들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냐?" "네! 바닥에 최대한 접하도록 반듯하게 깔아야해요." 레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고드가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들었는데, 50셀리 밖에 되지 않는 깊이였지만, 워낙에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었기에 상체만이 땅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철판을 바닥에 내려놓은 레딘은 그 위에서 발을 몇번 구르며 고정시켰고, 더 이상 철판이 움직이지 않자 바둥거리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레딘을 바라보던 켈트는 볼을 굵적이며 뮤스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이제는 설명을 해줄 때가 된 것이 아니냐?" 그 사이 화약을 점화할때 사용할 심지를 만드는 중이었던 뮤스는 잠시 손을 멈추었고, 일렬로 심어져 있는 전파축을 가리키며 드워프들과 벌쿤을 위해 미루어 왔던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탄성파 탐사라는 방법으로 지층 구조를 알아볼 생각이에요. 마고드씨에게는 간단하게 설명을 했지만, 보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죠. 탄성파 탐사는 인공적으로 탄성파를 일으켜 그에 의해 생성된 굴절파나, 반사파, 표면파 등의 다양한 파동을 이용하여 지반의 탄성파 속도 구조를 해석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에요. 보통 암석의 일부분에서 갑작스러운 교란 또는 변위를 일으키면 이 변위는 원점으로 부터 바깥쪽으로 구면의 형태로 전파되는데, 이것이 상당히 먼 거리까지도 전달된다는 원리를 이용한것이죠. 그렇게 생성된 파동을 감지하는데 바로 벌쿤이 심어놓은 전파축이 이용되는 것이에요. 원래의 전파축은 공중의 전파와 지층을 타고 흐르는 전파를 잡아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약간의 개조를 했기때문에 지층을 타고 흐르는 탄성파에 의해 생성된 파동들을 감지하게 되죠." 잠시 말을 멈춘 뮤스는 자신의 발아래 놓여있는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 후, 전파축들은 자신들이 감지한 파동들의 수치를 공중파를 통해 여기있는 광역통신기의 단말장치로 보내주게 되는데, 이 단말장치는 그 파동들의 수치를 일정한 관계식에 따라 계산하여 지하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해준 답니다." 길어진 뮤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벌쿤은 머리를 부여 잡으며 휘청 거렸고,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 역시 벙찐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켈트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몇 번 파며 물었다. "지금까지 네가 한 말이 도이첸 제국어가 맞는 것이냐? 이해하기는 커녕 알아들은 말이 오히려 더 적은 듯 하걸?" 마고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일행들의 반응을 살피던 뮤스는 아직 그들이 탄성파 탐사의 모든 원리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보군요. 그렇다면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 직접 해보도록 하죠.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 보다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허헛! 맞는 말이야.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켈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 뮤스는 심지를 마저 말았고, 손에 들린 화약종이에 꽂아 넣으며 마고드가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 내렸다. 잠시 철판의 고정 상태를 직접 확인해본 뮤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 위에 화약봉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심지를 풀어내며 구덩이 밖으로 걸어나온 그는 옆에 쌓여있는 흙더미를 직접 밀어 넣으며 말했다. "지금 넣어놓은 화약이 폭발하게 되면 아래쪽에 깔린 철판에 큰 충격을 주게 되는데 일종의 인공적인 지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곳으로 부터 탄성파가 발생하게 되어 지반을 타고 멀리 퍼지게 되는 것이죠." 대충 흙을 밀어넣은 뮤스는 그 위를 대충 밟아주었고, 상태를 한번 확인한 뮤스는 심지를 길게 늘어트려 내려놓았다. 그리고 뇌공력을 끌어올려 손으로 불꽃을 튀기도록 만든 그는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귀를 꽉 막고 전뇌거 뒤로 몸을 피하도록 하세요!" 그의 외침에 잠시 우물쭈물 하던 일행들과 마고드는 서둘러 전뇌거 뒤로 몸을 숨겼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뮤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행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생각한 뮤스는 손으로 심지를 점화시키는 동시에 전뇌거 쪽으로 달려왔고, 귀를 막으며 전뇌거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열을 세기도 전에 화약을 묻어 놓았던 곳의 흙이 솟아오르며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콰과쾅!! 생전 처음 듣는 폭발음에 크게 놀란 드워프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음츠렸고, 벌쿤과 마고드 역시 겁먹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푸드드득... 흙뭉치가 바닥과 전뇌거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폭발이 끝났고, 매케한 화약냄새와 함께 먼지가 밀려들자 뮤스는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며 눈앞으로 날리는 먼지를 밀어내었고,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고밀도 화약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폭발력이 크군." 그리고 아직도 긴장한 모습으로 귀를 막고있는 일행들을 발견한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한 명씩 몸을 일으켜 주었다. "이제 폭발은 다 끝났으니 안전해요." 하지만 그들은 뮤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고집스럽게 귀를 막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귀를 막고 있었으니 뮤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뮤스가 직접 그들의 귀에서 손을 빼내고 나서야 폭발이 끝났음을 알게되었고, 벌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후우... 정말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고! 공학원에서 화약 실험을 몇번 해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거야?" "고밀도 화약이라서 그래. 일반 화약의 여섯배나되는 폭발력을 내는 화약이지. 그럼 이제 확인해볼까?" 간단하게 대답해준 뮤스는 벌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먼지가 잔뜩 쌓인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로 걸어갔고, 드워프들과 마고드 역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불안한 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단말기앞에 앉은 뮤스는 가방에서 깨끗한 종이와 뾰족하게 끝이 깍여있는 흑연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다들 화약이 폭발했을 때 진동을 느끼셨죠? 바로 전파축들은 그 때 생긴 파동을 감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거에요. 그리고 그 파동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 단말기에서 요구할 때 송신해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파축에서 보내는 모든 파동을 수집한 단말기는 몸체의 작은 등을 점멸시켜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일정한 약속대로 표시하게 되는데 그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설명을 마친 뮤스는 단말기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바깥쪽에 부착되어진 십 여개의 작은 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는데, 점멸하는 등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뮤스는 마치 그 신호들을 읽어 내기라도 하듯이 빠른 속도로 준비된 종이에 기록해 나갔다. 벌쿤과 드워프들은 점멸등만 보고서 신호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뮤스를 귀신 바라보듯이 했고, 마고드는 무슨 일인지도 잘 몰랐기에 눈만 꿈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벌쿤은 뮤스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적고있는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등의 깜빡임 만으로 내용을 알수 있는거야?" "이 열개의 작은 등은 신호의 내용에 따라 점멸하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 속도를 계산해서 수치로 나타내는 것 뿐이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뮤스를 보며 벌쿤은 혀를 내둘렀다.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열개의 점멸등을 동시에 보고서 해석 하는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냔 말이야!" 벌쿤이 놀라움이 섞인 비명성을 지르기 시작할 때 뮤스의 손은 멈춰졌고 그 사이 뮤스가 들고있던 종이는 알지못할 수치로 빼곡히 차있었다. 일행들을 향해 그 종이를 흔들어 보인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제 이 수치들을 참조해서 표를 이런 식으로 그리면 땅 속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말을 마친 뮤스는 종이에 적힌 수치를 꼼꼼히 살피며 바닥에 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고, 몇 겹의 물결무늬를 가진 표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고있던 마고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마치 여러겹으로 만들어진 케익을 보는 것 같군." "사실 땅은 여러겹으로 지층으로 이루어 진 것이니 마고드씨의 말씀대로 케익 모양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겠군요. 층마다 다른 성분과 밀도를 가지고 있는 점도 케익과 유사하니까요." 여러가지 빗금으로 나뉘어진 구역을 보기 좋게 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 뮤스는 손을 털며 웃었다. "이제 완성이 됐어요! 표를 설명해 드릴테니 모두 모여 보세요." 뮤스의 말에 호기심어린 얼굴을 한 일행들은 땅 위에 넓게 그려놓은 표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았고, 뮤스는 설명을 해주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드워프들, 벌쿤 그리고 마고드의 얼굴을 한 번씩 살핀 뮤스는 자신이 그려놓은 표의 군데, 군데를 짚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표는 탄성파 탐사를 통해서 얻은 수치로 지하의 구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각각 빗금이 다른 부분은 성분이 다른 지층임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리고 이곳! 세겹으로 덮여있는 지층의 아래쪽. 즉, 지하 18멜리 가량이 되는 지점에 아무런 빗금도 쳐지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은 비어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뮤스의 설명에 눈을 둥글게 뜬 켈트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둘러보며 되물었다. "뭐라고? 이 땅의 속이 비어있다는 말이냐? 설마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후훗!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에요. 사람이 뛰거나 걸어다니는 행동을 땅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팔 위로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보다 훨씬 미약한 것일 테니까요." 그의 말을 들은 켈트는 괜한 걱정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뮤스와 켈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마고드가 끼어들며 물어왔다. "헌데, 이 표가 물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몸을 일으킨 뮤스는 마고드의 경작지를 넓게 둘러보며 말했다. "이 표를 보면 팜구드의 지하는 상당 부분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어있는 면적은 마고드씨의 경작지 면적의 수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만약 그 지하의 비어있는 공간에 물이 가득 차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무..물이 가득 차있다고?" 마고드의 되물음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부근에서 땅으로 스며든 빗물은 모두 지하의 비어있는 공간으로 흘러들게 되는데, 완전 밀폐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중으로 증발되거나 외부로 유출되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스며든 모든 빗물들이 그 공간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충 짐작해 보더라도 저장되어있는 물의 양은 엄청날 것 같군요. 적어도 수백 년간 모은 빗물들이니까요." "그..그럴수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마고드의 얼굴을 살피며 미소를 지은 뮤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잠시 땅에 그려져있는 표를 살피더니 이내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아저씨들이 해주셔야 할 일이에요. 여기서 부터 5켈리 떨어진 곳이라... 둑의 근처군요. 둑 주변의 지층이 가장 얇으니 그곳에서 시추 작업을 해주세요. 전체적으로 지반이 약한 곳이라 시추작업을 하기에는 한층 수월할 거에요." 켈트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전뇌거에 올라타며 형제들을 향해 외쳤다. "자 들었지? 이제 우리가 솜씨를 보여야 할 시간일세! 다들 가자고! 최소한 포르코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포르코타라는 말에 기운이 불끈 솟은 드워프들은 앞다투어 전뇌거에 올랐는데, 운전석에 앉은 켈트는 형제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며 전뇌거를 몰았고, 그들의 전뇌거는 왔던 길을 되돌아 둑을 향하기 시작했다. 유유히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드워프들의 전뇌거를 바라보던 벌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아저씨들의 관심사는 포르코타였어... 나도 카타리나 누나에게 부탁해서 한 병 구해 놓던지 해야지 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뮤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봐 벌쿤! 우리도 아저씨들을 따라가야지! 전뇌거에 빨리 타라고!" 고개를 돌려보니 뮤스와 마고드가 전뇌거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벌쿤은 몸을 돌리며 전뇌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19 갈리트 형제. 해가 중천으로 부터 조금 기울어져 있을 무렵 팜구드의 밀밭 한 곳에서 시추작업을 위해 용도변경된 전뇌거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금속의 원통이 회전하며 기이한 음향을 흘리고 있었는데, 회전을 거듭 할 수록 금속의 원통은 천천히 짧아지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금속 원통이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자 드워프들은 다시 한번 바빠지기 시작했다. 땅에 늘어놓은 2멜리 정도 길이의 금속 원통을 들어 나르며 전뇌거 위에 올라가있는 켈트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는데, 금속 원통은 그 무게가 상당했는지 힘 좋기로 소문난 드워프들도 다리를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일에 대한 고집만큼은 대단한 그들이었기에 이빨을 악다물며 금속 원통을 날랐고, 벌쿤 역시 거들고 나섰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는 중이었다. 전뇌거 위에 서서 형제들이 날라준 금속 원통을 받아든 켈트는 조금씩 땅속으로 들어가며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금속 원통의 끝에 새로운 금속 원통을 조립하여 그 길이를 연장하기 시작했다. 뮤스와 마고드는 먼 발치에서 드워프들의 시추작업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뮤스는 간간히 마고드를 위해 시추작업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었는데, 탄성파 탐사 만큼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마고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저 금속 원통의 끝 부분에는 금광석을 박아 넣은 단단한 날이 부착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전뇌거의 동력기를 이용해 금속 원통을 회전시키게 되면 금광성이 부착된 날은 조금씩 지층을 깍아내며 깊숙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드워프 아저씨들은 금속 원통을 이어주어 더욱 깊은 곳까지 날이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중인데, 이제 일곱 개의 금속 원통이 들어갔으니 14멜리 가량을 뚫은 것 같습니다."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고드는 남아있는 금속 원통의 갯수를 새며 물었다. "지금 남아있는 금속 원통이 세개 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으로 충분하겠는가?" "물론입니다. 물이 저장되어있는 곳까지의 깊이는 18멜리. 그러니 마지막 금속 원통 하나만 더 연결하면 그곳까지 닿게 됩니다. 십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확신감이 서려있는 뮤스의 이야기를 듣던중에 문득 그의 옆 얼굴을 바라본 마고드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괜찮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마고드씨." "대체 자네는 뭘 하는 사람인가? 내 비록 세상 소식에 어두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자네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구먼." 마고드의 질문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뮤스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하...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다들 나름대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저 역시 이런 일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네말이 맞구먼.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없다라..." 뮤스의 대답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마고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는데, 뮤스가 한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켈트는 마지막 금속 원통을 연결하고 있었다. 공구를 이용해서 금속 원통의 접합부분을 단단히 조인 그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기에 작업용 장갑을 벗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전뇌거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몸이 뻐근 한 듯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형제들과 벌쿤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제 대충 끝난 것 같군. 이제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는건가?" 켈트가 다가오자 상의를 벗고 누은 채 땀을 말리고 있던 벌쿤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도 도와드렸으니 나중에 포르코타인가 하는 술 좀 나눠 주서야 해요! 대체 무슨 맛이길래..." 하지만 벌쿤의 말에 드러누워있던 드워프 형제들은 몸을 일으키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흥! 누가 도와 달라고 그랬냐? 우리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네가 자진해서 나선것이 아니냐? 그런데 포르코타를 달라니 말도 안된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끼리 마시는 것도 모자란데 네게 줄게 있다고 생각하냐?" "흠흠... 술아 아깝다기 보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술이 몸에 나쁘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드워프들이야 몸의 구조가 인간과 다르니 별 상관 없지만, 인간에게 술은 정말이지 나쁜 것이란다. 그러니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게야." 포르코타에 대한 드워프들의 애착은 벌쿤의 생각 이상이었는데, 그의 작은 부탁 마저도 거부해 버리자 분노한 벌쿤은 씩씩거리며 아직 시추 작업을 하고 있는 전뇌거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 손을 거친 원통은 다 뽑아 버리겠어요! 기껏 도와 드렸더니 그깟 술 한 모금 못주겠다니!" 그러나 드워프들에게는 시추작업보다 포르코타 한 모금이 더 중요한지 벌쿤의 행동을 보고도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이었다. 헌데, 벌쿤이 전뇌거에 오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그리고 땅을 울리며 들려오는 소리가 듣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두리번 거리며 땅을 살펴보던 레딘이 벌쿤을 향해 소리쳤다. "대체 뭘 했길래 땅이 흔들리는 것이냐?!" 하지만 벌쿤 역시 그 영문을 모르는 것은 레딘이나 마찬가지 였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고요!" "그럼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인게야!" "글쎄 모른다니까요!" 레딘과 벌쿤이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뮤스가 급히 달려오며 전뇌거 위에 서있던 벌쿤을 향해 외쳤다. "벌쿤! 금속 원통을 분리하고 전뇌거에서 내려와! 당장!" 갑작스러운 뮤스의 외침에 잠시 멍하게 서있기만 하던 벌쿤은 곧 그의 말을 이해 하고는 시키는 대로 금속 원통을 분리하기 시작했는데, 동력기를 분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기에 금새 끝마칠 수 있었다. 금속의 원통이 동력기에서 분리되자 빈 병에 빨대가 빠지 듯이 시추 작업을 했던 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진동이 멈출 기미는 커녕 오히려 강해지자 당황한 벌쿤은 뮤스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런! 진동이 더 심해졌잖아! 이게 어떻게 된거야?" 그의 물음에 답해 줄 시간조차 없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전뇌거로 달려온 뮤스는 급히 운전석에 올라타며 시동을 걸었다. 그리곤 전진패달을 힘껏 밟으며 급출발을 시켰는데, 덕분에 그 위에 서있던 벌쿤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려야만 했다. "으아악! 나 또 떨어진다!" -부우웅! 그때 였다. 뮤스가 전뇌거를 몰고 작업을 하던 곳에서 떠나자 마자 시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구멍으로부터 엄청난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 오르기 시작했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물기둥에 밀려 전뇌거가 뒤집힐 뻔 했던 아슬아슬 한 순간이었던 것이었다. -촤아아악! 그렇게 솟아오른 물기둥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무지개까지 만들어 내는 중이었고, 드워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을 삼키며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는 물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뇌거야 어떻든 간에 땅의 한 가운데서 물 기둥이 솟아 오르는 모습이 그들의 넋을 빼놓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발치에서 물기둥을 목격한 마고드는 쉽게 믿겨지지가 않는 듯 두 눈을 부비며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나직히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허사였던 것이다. "이럴수가... 정말 물이 솟아 오르고 있다니... 이 메마른 땅에서 물이 솟아 오르다니..." 잠시 후, 하늘로 치솟았던 물기둥은 흡사 비처럼 변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옷이 젓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마고드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젖은 흙을 어루 만지고 있었다. 그런 마고드의 모습을 본 드워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었고,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뇌거에 타고 있던 뮤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뇌거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츰 잦아들어가고 있는 물기둥을 올려다본 뮤스는 벌쿤을 떠올리며 전뇌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짐칸에 추한 몰골로 처박혀있던 벌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미안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냐 벌쿤? 안다쳤어? 너무 급해서 미처 말해주지도 못했군."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매만지며 전뇌거에서 내린 벌쿤은 짜증이 듬북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저주에 걸렸나. 오늘은 왜이렇게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거야." 그런 벌쿤의 등을 두들겨준 뮤스는 턱짓으로 마고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마고드씨의 밝아진 얼굴을 한번 봐. 이렇게 좋은 일을 하면 나중에 백배로 돌려 받을 일이 있을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런데 대체 왜 저렇게 물기둥이 솟아 오르는거야?" "너도 압력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을 텐데? 액체나 기체는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지하에서 압력을 받고있던 물이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상으로 움직이면서 솟구치게 되는거야. 양쪽의 압력이 같아 질때까지 계속 되는데 처음보다 많이 잦아든 걸 보니 곧 멈추겠군." 뮤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그래도 일이 잘 되어서 다행이군. 혹시 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쩔지 걱정했거든." 벌쿤을 향해 피식 웃어준 뮤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녀석, 아직도 이 형을 못믿는 게냐?" 그의 말에 벌쿤은 고개를 내저었고, 뮤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대답했다. "나참. 형을 못믿었으면 애초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괜히 투덜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다했는 줄 알아?" "녀석... 어서 마무리나 하러가자." 둘은 몇 마디의 대화를 주고 받으며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이후로도 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지하의 물을 퍼올리는데 쓰일 기기를 제작해야만 했다. 뮤스일행이 묵고있는 숙소의 식당, 잔뜩 토라진 모습의 카타리나가 탁자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이렇듯 혼자 식사를 한 기억이 거의 없었던 카타리나는 시간이 갈 수록 서러운 생각이 들었고, 뮤스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다. "대체 뮤스와 아저씨들은 어디로 간거야. 조금 더 자라고 하더니 지금까지 돌아오지도 않고!" 볼을 잔뜩 부풀린 카타리나는 화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빵을 신경질적으로 뜯었다. 그러한 그녀를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수근덕 거리고 있었는데, 평소라면 잘 들릴 것 같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와닿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는 혼자 여행을 하는건가?" "이 사람아 그렇지 않으면 혼자 식사를 하겠나? 세상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 만큼 서러운 것도 없는데 말이야. 불쌍하군." "허헛! 그렇게 불쌍해 보이면 자네가 같이 식사라도 해주게. 그럼 될것 아닌가?" "누가 그렇다는 말인가 어디..." 그들의 대화를 등넘어로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쳇! 나도 일행이 있단 말이에요. 정말 다들 어디간거냐고! 뮤스..." 나직하게 뮤스의 이름을 불러보는 카타리나의 애절함에 하늘에 감동하기라도 했는지 때를 맞춰 식당 문으로 부터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휴우 피곤해 죽겠군요. 그래도 이제 몇 년 동안은 문제 없이 밀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어 켈트의 목소리도 이어졌기에 일행들이 모두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그 포르코타는 언제쯤 줄 생각이냐?" 여전히 포르코타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켈트와 드워프들을 바라본 뮤스는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건 카타리나에게 부탁을 해서... 앗! 그러고 보니 카타리나가!" 그제서야 숙소에 혼자 두고온 카타리나를 떠올린 뮤스는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뒷머리가 간질거린다고 생각한 그는 슬며시 뒤돌아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타리나가 성큼걸음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단단히 화가난 목소리로 외쳤다. "뮤스 이 바보야! 대체 아무말도 없이 어디를 다녀온거야! 잠깐 더 자라면서 사라졌다가 해가 져서야 들어오다니 대체 내 걱정을 하긴 하는거야?!" "카..카타리나 자..잘 있었어?" "내가 잘 있었을 것 같아? 갑자기 없어져서 하루종일 얼마나 걱정했는 줄 모를거야!"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드워프들과 벌쿤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옆으로 피하기 시작했고, 옆으로 다가온 카타리나는 서슴없이 뮤스의 귀를 잡아 당겼다. "이제 내 생각이 났던거지? 맞지? 아무튼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아앗! 그..그게 아니라..." 카타리나에게 단단히 귀를 잡힌 뮤스는 난처해하며 드워프들과 벌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애써 뮤스의 안타까운 눈빛을 외면 한 채 옆 걸음으로 걸어가 식탁앞에 앉았고, 평소대로 식사를 주문하며 어색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흠흠... 여기 주문좀 받으시구려! 허헛! 오늘 날씨가 상당히 맑았지?" "그..그러게 말이유 아참! 아..아까 50셀리는 족히 됨직한 지렁이를 봤지 않겠수? 그 지렁이가 쥐를 잡아 먹습디다." "그..그럼 그건 뱀인 것 같군. 벌쿤 네 생각은 어떻냐?" "제 생각으로는 그건 지렁이가 맞는데, 잡혀 먹힌 것이 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흠... 새로운 입장의 표명이군."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료들에게 뮤스가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자 그의 귀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카타리나가 화를 억누르며 조용하게 말했다. "자... 우리는 이제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니?" 비록 어투는 의문형이었지만, 뮤스에게 주어진 결정권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별다른 반항을 할 수 없었던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뮤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불쌍한 소마냥 식당에서 사라지자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벌쿤은 다시 한번 그들이 서있던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휴우! 지금 그 사람이 그렇게 상냥하고 착하기만 하던 카타리나 누나 맞아요? 나참... 또 저런 모습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네." 그의 물음에 켈트 역시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카타리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구나. 역시 여자들이 한을 품으면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옛 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구나." 둘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레딘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모두 뮤스의 명복을 빌며 식사나 합시다. 뮤스도 뮤스지만, 점심부터 쭉 굶었더니 눈앞이 노랗게 변할 지경이유." 레딘의 말에 드워프들과 벌쿤은 대 찬성의 표를 던지며 뮤스를 동정해주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그러 들자 그 짧은 순간에 뮤스의 존재는 그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 구수하게 구워진 빵과 입맛을 자극하는 향기를 풍기는 소스가 뿌려진 돼지 고기 그리고 잘 익힌 생선과 훈제를 한 닭고기, 그 외에도 수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식탁에 놓이고 있었고, 그것을 날라오고 있는 식당의 종업원은 내심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바로 메뉴에 적힌 것을 모두 가져오라는 드워프들의 주문 때문이었는데, 그는 식당 개업 때부터 이곳에서 일을 해왔지만, 이런 식으로 음식을 주문한 이들은 처음이었던 것이었다. 식탁에 작은 빈틈조자 없을 정도로 음식들이 가득 차자 환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드워프들과 벌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날렸고, 개걸 스럽게 음식들을 먹어나가기 시작했다. "최고군! 최고야! 역시 열심히 일한 후의 만찬은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맞아요. 게다가 이 식당 음식 솜씨가 썩 괜찮은것 같은 걸요? 요리장이 제법 능력 있는 사람인가봐요." 입안에 있는 음식물들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던져 주었고, 그런 행동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는 듯 했다. 한창 드워프들과 벌쿤이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였다. 문득 바쁘게 오고가던 그들의 포크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는데, 식당의 입구로부터 누군가의 걸걸한 외침이 터지고 나서였다. "여기에 뮤스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나?!" 그 목소리에 가게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꺼리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감히 가게의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과 벌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구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곳에는 세 명의 중년인과 그들이 이끌고 들어 온듯 한 장한 십 여명이 그 뒤에 서있었다. 식당의 내부를 잠시 둘러보던 중년인들 중, 가운데 서있던 인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켈트를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후훗! 당신은 드워프 족인가? 하지만 면도를 하는 드워프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인데 머리를 크게 다친 드워프인 것 같군. 하하하핫!" 그의 말에 함께 따라 들어온 장한들이 크게 웃기 시작하자 드워프들과 벌쿤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는데, 식욕조차 잊을 정도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형제들과 벌쿤을 바라본 켈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오랜만에 뜨거운 심장을 불살라 봐야겠군. 각자 몇 명씩 맡을 겐가?" 그의 물음에 볼을 긁적거리며 생각을 해보던 레딘은 그것 마저도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나설 것도 없수. 그낭 혼자 처리하고 올테니 식사나 마저 하시구려." 하지만 블뤼안과 브라이덴이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봐 레딘! 혼자서 재미를 다 볼 생각인겐가? 우리도 좀 생각을 해달라고." "그렇지! 형님이 수치를 당했는데, 형제들이 나누어 값아줘야 하지 않겠나. 혼자서 독차지 하려는 것은 욕심이 과한 것인 것 같군." 드워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있던 벌쿤은 직접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앉아 계세요. 저런 예의 없는 사람들은 제가 혼줄을 내줄 테니까요." 그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드워프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켈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훗! 그냥 다 같이 혼줄을 내주도록 하자고! 그래야 음식들이 식기전에 끝낼 수 있지 않겠나?" 너무나도 여유 자적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인들의 안색은 울그락 불그락 변하고 있었다. 그리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중년인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마져 잊은 채 뒤에 서있던 장한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저 녀석들을 당장 혼내주지 않고! 내가 쓸데 없이 네 녀석들에게 돈을 주고 있는 줄 아느냐!" 그의 닥달에 눈치를 살피던 장한들은 재빨리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지자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하나 둘 씩 눈치를 보며 뼈져나가고 있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식당은 한 순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격투장의 분위기로 돌변한 모습이었다. [2003-02-07] 짜가신선 <대공학자> #8-20 같은 시간, 뮤스는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방에 들어온 이후로 아무런 말도 없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오히려 뮤스는 그녀가 화를 낼때 보다 더욱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이게 카타리나를 달래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카타리나 정말 화가 많이 난거야?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뮤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린 카타리나는 가까이 다가오며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지금까지 뭘 하고 왔는지 이야기 해봐.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면 화를 풀도록 할게."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에 희색을 띄운 뮤스는 아침 부터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제 우리 옆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기억나? 왜 중년의 아저씨들과 우리 또래 쯤 되는 아가씨가 있던 식탁 말이야." 뮤스의 물음에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타리나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는지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어제의 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히 기억나지. 뭔가 심각한 일이 있어 보였었잖아." 카타리나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듯 하자 이야기가 쉽게 풀릴 것임을 확신한 뮤스는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멋진 무용담을 듣기라도 하는 듯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갈리트 형제의 암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분노를 표했고, 탄성파 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또, 시추작업 끝에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는 대목에서는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었구나. 그럼 이제 마고드 씨의 일은 완전히 해결이 된거니?" "일단 농업용수일은 해결을 했으니, 이제 다른 지주들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는 일만 남았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황제폐하를 만나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할 생각이야. 아무래도 임시적으로 갈리트 형제들의 계획을 막긴 했지만, 또 무슨 방법으로 다른 지주들을 억압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오늘 하루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뮤스는 카타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이미 화를 풀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남자친구 더욱 믿음직 스럽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더 이상 화를 내면 안되겠지? 하지만 다음 번에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은 해주고 나가야 해! 알겠니?" "후훗! 알겠어." 믿음직 스럽게 대답한 뮤스는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는 카타리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고,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타리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진전 되기도 전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아랫층에서 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콰당! 그 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뮤스는 아랫층에 드워프들과 벌쿤이 있음을 깨달으며 몸을 일으켰다. "카타리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문을 잠그고 방에서 나오지 말도록 해. 알겠지?" 카타리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응... 별일 아니겠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드워프 아저씨들이나 벌쿤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카타리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고,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식당으로 내려간 뮤스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무려 십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엉켜 싸우며 식당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는데, 그 중 덩치가 큰 벌쿤의 모습이 유달리 눈에 띄고 있었다. "우하하! 감히 우리를 얕잡아 보다니 혼이 좀 나 봐야 해! 이런 식으로 약자들을 괴롭히는 것 같군!" 기분 좋게 광소를 터트리며 양쪽 손에 장정들을 한명 씩 나누어든 그는 이리저리 흔들어 정신을 쏙 빼낸 후 한 쪽으로 던졌는데, 이미 세명 정도가 그곳에 정신을 잃고 드러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두 명이 더해져 다섯이 채워지자 손을 털어보인 벌쿤은 다음 주인공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장정들은 이미 그의 괴력에 쓴맛을 본 후였기에 아무도 그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그럭저럭 벌쿤을 걱정에서 덜어 놓은 뮤스는 드워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덩치 큰 장정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쓰러트릴 때 마다 모습이 보였는데, 식탁의 다리를 부러트려 만든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 드워프들이 전투에 능한 종족이라고는 했지만, 이런 식의 난투전에는 취약한 면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방에 비해 현저히 짧은 다리와 팔은 드워프의 공격범위를 제한했고, 그들의 작은 키로는 급소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얼굴을 가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드워프들은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를 들고 싸워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식탁의 다리였던 것이었다. 켈트는 여기 저기서 날아오는 주먹질과 발차기를 기가 막히게 피하며 상대의 정강이를 가격했는데, 신체에서 가장 약한 부위 중 하곳 이었기에 상대는 정강이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레딘과 블뤼안은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정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뒷쪽이 안전해지게 되자 그들은 막무가내로 몽둥이를 휘두며 다니는 중이었는데, 워낙 힘이 좋은 드워프들이었기에 장정들이 무엇인가로 막아보려 해도 몽둥이에 닿는 것은 뭐든 산산 조각이나 원래의 형체를 잃게되었고, 결국 장정들은 몸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라이덴은 가장 느긋하게 장정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접시를 쌓아놓은 곳으로 뛰어들어 장정들을 향해 접시나 그릇 등의 식기들을 하나씩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놀이라도 즐기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장정들은 크게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가 멀었기에 반격이 힘들 뿐만 아니라 강맹하게 날아오는 접시에 제대로 맞았다간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한 뮤스는 느긋한 자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식당의 입구 쪽에서 그의 시선이 멈추었는데,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흠... 저들은 갈리트 형제들이군. 하긴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졌으니 가만히 있지 못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뮤스는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을 살펴보며 드워프들과 벌쿤을 향해 외쳤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드워프들은 휘두르던 몽둥이를 멈추었고, 벌쿤은 손에 들고 흔들던 장정 두명을 가까운 곳에 던져 놓았다. 그로써 식당의 난투극은 끝이 났는데, 부서진 탁자와 의자 사이에 누워있는 이들은 모두 갈리트 형제들이 데리고 온 장정들이었고, 서있는 이들은 오직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 뿐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만족한 켈트는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장정을 발로 툭툭 치며 갈리트 형제를 향해 다가갔다. "자네들은 아주 운이 없었던 게야. 하필면 우리를 건들다니 말이야." 켈트가 다가갈 수록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을 한 갈리트 형제들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참담한 결과는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벽에 등이 닿으며 더 이상 갈곳이 없어지자 마른 침을 삼킨 갈리트 형제들 중 가운데에 서있던 맡형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너희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나 이러는 것이냐!"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켈트는 오히려 심기가 상한 듯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허... 우리가 처음 보는 자네들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나? 그저 집안 교육 잘못 받은 망나니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군." 켈트의 담담한 반응에 갈리트 형제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외쪽 편에 서있던 둘째가 나서며 외쳤다. "당신들! 이곳에 처음이라 우리를 모르는 모양인데..." 그가 자신들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뮤스가 말을 자르고 나서며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혹시 갈리트 형제분들 아니십니까?" 뮤스가 공손한 말투로 자신들을 알아보자 조금 기가 살아나게 된 형제들은 원래의 거만한 얼굴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주며 뮤스 일행들을 향해 냉소와 함께 한마디씩 던졌다. "그렇다! 우리가 그 유명하신 갈리트가의 형제들이다. 감히 우리를 몰라보고 이런 짓을 하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흐흣 너희들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야. 갈리트가를 건들이다니." "너희들 모두 무사하길 바라지는 말거라." 그 때, 떫은 표정으로 갈리트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벌쿤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장정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집어 던지며 외쳤다. "뮤스 형이 말을 곱게 하니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보군! 정신좀 차려라!" -쿠당탕탕! "으아아앗!" 불시에 날아오는 장정을 미처 피하지 못한 갈리트 형제들이 장정을 가슴으로 받으며 그자리에 쓰러지게 되자 그제야 기분이 풀린 벌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드워프 형제들 역시 눈 앞의 중년인들이 이야기로만 듣던 갈리트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들을 향해 다갔고, 켈트는 아이들을 다루 듯 갈리트 형제들의 볼을 차례로 꼬집으며 혀를 찼고 있었는데, 장정에게 깔린 그들은 옴싹달싹 하지도 못한 채 켈트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쯔쯧... 뮤스를 찾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자네들이 바로 갈리트 형제들이셨구만. 자네들의 뜻을 이루지 못해서 우리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것인가?" 켈트의 말에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을 깨닫게된 갈리트 형제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식당의 한쪽에서 켈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갈리트 형제를 보며 웃고 있던 뮤스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곤 식당에 누워있는 장정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잠깐... 그렇다면 마고드씨는..." 마고드에게 까지 생각이 닿은 뮤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갈리트 형제들에게 향해 다가갔고, 거칠게 그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외쳤다. "당신들 설마 마고드씨와 케니언 양에게 까지 손을 댄건 아니겠지!?" 뮤스의 물음에 갈리트 형제 중 맡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후훗... 왜 아니겠나. 이곳에 오기 전에 마고드를 이미 손봐주었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야. 하하하핫!" 유쾌하다는 듯 웃고있는 그를 바라본 뮤스는 이빨을 갈았고, 멱살이 잡혀 있는 갈리트 형제들을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들은 벌쿤과 이 사람들을 지키고 있으세요! 저는 마고드씨의 댁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올게요!" "알겠다! 이들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서둘러 가보거라! 켈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급히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뮤스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켈트는 괘씸 하기 짝이 없는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하는 짓들을 보니 도무지 말로는 용서가 되지 않을 자들이군. 뮤스도 나갔으니 이제 우리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자네들에게도 여기 쓰러져있는 자들에 못지 않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도록 하지." 나직하게 흘러나오며 으름장을 놓는 켈트의 목소리에 갈리트 형제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역력했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켈트를 돕기 위해 그들의 주변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마고드의 집앞에 도착한 뮤스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집의 대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창의 유리는 대부분이 깨져 있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뮤스는 부서진 문조각을 밟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집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가구들은 이미 부서져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고, 화분들과 진열되어있던 식기들이 모두 깨져 그 조각들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뮤스는 모든 방문을 열어보며 마고드와 케니언 부녀를 찾기 시작했다. 일층을 대충 둘러봐도 부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뮤스는 윗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안쪽으로 부터 여성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케니언의 것임을 눈치챈 뮤스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반쯤 열린 문으로 부터 케니언의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흑! 아버지! 제발 돌아가지 마세요! 제발!" "쿨럭! 쿨럭!" 그리고 마고드의 거북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뮤스는 마고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시 기침소리가 멈추자 가래가 끓는 듯한 마고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케니언. 어차피 이 애비는 몹쓸 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몸이 아니었더냐. 그저 그 날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거라." 뮤스는 마고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중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마고드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누워있었고, 케니언은 그의 손을 굳게 잡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아시겠죠?" 케니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마고드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허헛... 나는 이미 늦었단다. 이제 와서 그 누구를 불러오더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게야. 그러니 이대로 내가 눈감을 때까지 옆을 지켜 주었으면 좋겠구나." 마고드의 말에 굵은 눈물을 떨군 케니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흑흑! 꼭 옆에 있어 드릴게요. 아버지..." "후훗... 역시 내 딸은 착하구나..." 따뜻하게 웃으며 말을 하던 마고드는 기침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잠시 말을 끊었고,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헉... 헉..." 그리고 기침이 잦아들게 되자 마고드는 부드러운 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후우... 내가 죽으면 내 모든 재산을 네게 주도록 하마. 누누히 말했지만, 네가 꼭 이곳에서 밀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단다. 그저 네가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란다. 후훗... 그저 죽기 전에 갈리트 형제들의 악행을 막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야..." 그 때, 마고드와 케니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던 뮤스는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고드씨." 마고드와 케니언은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뮤스의 모습을 발견한 마고드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 자네가 무사한 것을 보니 천만 다행일세. 괜한 일에 끼어들이 자네마저 해를 당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네. 갈리트 형제 일당들이 자네에게 찾아가지 않았던가?" 침대 옆으로 다가온 뮤스는 마고드의 상태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찾아왔지만 저희 일행들이 그들을 모두 혼을 내주었습니다. 지금쯤 드워프 아저씨들에게 응당한 죄의 대가를 치루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고드의 표정은 밝지 못했는데, 이후의 일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허어... 걱정되는군. 나중에 그들에게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쩔려고 그러나?" 진심으로 걱정어린 마고드의 말에 가볍운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며 대답했다. "저희 스스로의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갈리트 형제들과 팜구드 마을에 얽힌 일은 제가 직접 황제폐하께 말씀드려 조치를 취하도록 할테니, 그 점이 아직 마음에 걸리신다면 이제 마음을 푹 놓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마고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자네가 황제폐하께 직접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긴... 남들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믿지 못했겠지만, 자네의 말이니 믿도록 하겠네. 후훗... 이제 팜구드 마을이 평온해 지겠군... 쿨럭!" 뮤스의 말을 전해들은 마고드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에 몸이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곤 이제 힘이 빠지는 지 나직한 목소리로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우... 죽기전에 하나만 말해주겠나?" 뮤스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마고드가 조용히 물었다. "대체 자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뮤스는 보기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제 이름은 뮤스 드라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원장입니다." 마고드는 공학원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허헛... 소문이 떠들썩 하던 공학원의 원장이 자네였었군... 그랬었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그렇게 흘러나오던 마고드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뮤스는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슬픔을 참기위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고, 케니언의 통곡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짜가신선 <대공학자> #8-21~22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는 이들.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의 열기가 바닥에 빼곡히 박혀있는 포장석들을 달구고 있었다. 비록 군데군데 깨진 모양의 포장석들의 모습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긴 세월을 그 자리에 고집스럽게 남아있을 듯 했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리며 군데, 군데 이가 빠져 무뎌진 검의 날이 포장석을 때렸다. 그리고 곧 방향을 바꾼 검은 다시한번 목표를 노려 봤지만, 이번 역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검에게 가로막혀야만 했다. -깡! 투박해보이는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몸을 맞물린 채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쥐고 있는 두명의 사내들 역시 시선을 맞물린 채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얼굴에 무수한 상처를 가진 중년인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한동안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대방을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고, 대 여섯 발자국을 물러서고 나서야 몸을 세울 수있었다. 그렇게 긴장상태가 다소 수그러 들자 문득 검의 날을 손으로 매만지기 시작한 중년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쇼메트. 어느새 자네도 상당히 늘었군. 이제는 나와 검을 같이 겨룰 수 있게 되다니 말이야." 중년인의 말에 잔뜩 경직되어있던 청년은 굳은 표정을 풀어냈는데, 다리마저 풀려버린 듯 검으로 땅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말 하지 마십시오 카밀턴 대장님. 정말 대장님의 살기에 짓눌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카밀턴과 쇼메트. 듀들란 제국 소속의 특수기관인 특무대의 대원들이었다. 비록 뮤스의 회유에 실패하고 돌아온 그들이었지만, 그라프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인지 투르코스 재상으로부터 별다른 추궁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평소대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잠시 쇼메트의 말을 되세겨보던 카밀턴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흠... 내가 자네에게 살기를 흘렸다는 말인가?" 카밀턴의 되물음을 받은 쇼메트는 땅을 짚고있던 검을 힘겹게들어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나참. 대장님은 못느끼고 계셨던 것입니까? 정말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단 말입니다. 한눈 이라도 잠깐 팔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니까요." 피식 웃어보인 카밀턴은 몸을 돌렸다. "후훗! 대련 때 한 눈을 팔면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일세. 싱거운 소리 하지 말고 잠시 쉬게나. 오늘도 하루종일 검술 수련을 할 예정이니." 청천벽력같은 카밀턴의 말에 쇼메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 또 하루종일 검술 수련이라니... 저는 이제 검을 들어올릴 힘도 없단 말입니다. 벌써 사흘째나 이러고 있으니 몸이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요. 지금 어께에 검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안보이십니까? 차라리 이럴 바에는 챠퍼나 죠슈드와 함께 작전에 지원하는 편이 훨씬 편할 것 같습니다." 연무장에서 내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쇼메트의 행동에 아랑곳 하지 않은 카밀턴은 바닥에 주저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고, 병에들어있는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자네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힘이 많이 남은 것 같군. 앞으로 보름은 더 강행해도 무리가 없을 게야." 카밀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메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은 카밀턴은 터덜걸음으로 연무장에서 내려오고 있는 쇼메트에게 물병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쇼메트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라도 하려는지 아무런 잘못 없는 물을 거칠게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긴 쇼메트는 카밀턴의 옆자리에 주저 앉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뮤스 원장의 일을 실패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군요. 혹시 그에게 원한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카밀턴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훗... 원한? 그런 것 따위는 없다네. 그저 그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일 뿐일세. 맨 주먹으로 나의 검과 대등하게 겨룬 뮤스 원장이 큰 충격이었거든. 언젠가 한번 만날 날이 있다면 서로의 위치를 떠나 무인으로서 겨뤄보고 싶다네. 물론 그는 무인이 아니라 공학도이니 다시 만난다 해도 상대를 해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후훗!" 카밀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회상을 하던 쇼메트 역시 뮤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뮤스 원장...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죠. 사실 공학도라고 하길래 공부 밖에 모르는 허약한 연금술사 정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의 예측을 허무하게 깨어 버리더군요. 정말이지 대장님과 겨루는 모습을 봤을 때는 기절 할 정도였다니까요." "후훗... 나 조차 기분나쁜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자네들이야 오죽했겠는가?" "하하핫! 대장님이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왠지 믿기지가 않는 걸요?" "나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일세." 과거를 회상하며 카밀턴과 쇼메트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철문이 열리며 한 명의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철의 가면이라도 쓴 듯 무표정한 얼굴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카밀턴과 쇼메트는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굳게 쥔 주먹을 절도있는 자세로 가슴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투르코스 재상각하를 뵙습니다!"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보이며 대답을 한 투르코스 재상은 카밀턴과 쇼메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카밀턴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카밀턴 대장. 조금 수척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겐가?"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카밀턴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린 투르코스 재상은 조금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흠... 내 귀를 아프게 하는 자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무일 없는 것같군."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서류뭉치를 하나 꺼낸 투르코스 재상은 그것을 카밀턴에게 건네주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장영실 경과 인연이 많은 것 같군. 이번에 장영실 경과 루스티커님께서 흑룡의 호수로 가시게 되었다네. 그 호위를 특무대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괜찮겠나?" 투르코스 재상의 되물음에 뒷꿈치를 붙이며 몸을 세운 카밀턴은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령이시라면 저희는 묵묵히 그에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카밀턴과 달리 쇼메트는 조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가야 하는 곳이 흑룡의 호수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표정을 통해 쇼메트의 마음을 읽은 투르코스는 카밀턴이 들고있는 서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흑룡의 호수라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일세.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네가 들고있는 서류에 들어있으니 참조하게나. 그리고 명령서는 가장 마지막 장에 첨부해 놓았으니 출발하기 전에 확실히 인지하도록. 한번의 실패는 눈감아 주었지만, 또 한번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으니 실수하지 말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재상각하!" 카밀턴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한 투르코스 재상이 금방 몸을 돌려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걷기시작하자 곧은 자세로 서있던 카밀턴과 쇼메트는 처음과 같이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예를 갖추었다. 투르코스 재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쇼메트는 불만섞인 말투로 중얼 거렸다. "쳇! '또 한번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으니 실수하지 말게나.' 아무튼 뻣뻣하기는... 정말이지 재미없는 분이라니까." 쇼메트가 투르코스 재상의 말투를 흉내며 비아냥거리고 있을 때, 카밀턴은 서류의 가장 마지막 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눈에 익숙한 붉은색의 작은 봉투가 붙어있었다. 입맛을 한번 다신 카밀턴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내어 내용물을 확인 하기 시작했고, 찬찬히 명령서를 읽어 내려가던 카밀턴은 바로 옆에있는 쇼메트 조차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입을 달싹거렸다. "이제는 장영실 경을 감시하라니...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치밀하신 분..."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생각에 앞서 명령을 최우선으로 받들어야 하는 위치였기에 머리속에 명령서의 내용을 한번 더 되새겼고 이내 작게 말아 입안으로 털어 넣어 삼켰다. 심각해져있는 카밀턴의 모습을 지켜보며 잠자코 앉아있던 쇼메트는 막 뭔가가 떠오른 듯 카밀턴을 부르며 물었다. "아참! 혹시 대장님은 투르코스 재상각하의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쇼메트의 뜬금없는 물음에 명령서에 대한 일을 미뤄놓은 카밀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대략 40대 후반 쯤?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 쯤으로 보이는군." 그의 대답에 쇼메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땡! 틀렸습니다. 듣자하니 겉모습은 저렇 듯 젊게 보여도 실제 나이는 50대 후반이라고 하더군요." "흠... 정말 의외로군. 그 정도까지는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는데." 카밀턴의 반응에 미소를 지은 쇼메트는 손가락을 하나 펼쳐보이며 말을 이었다. "자! 여기서 문제를 하나 더 드리죠. 그렇다면 투르코스 재상이 젊어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군."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답을 생각해보고 있던 카밀턴을 향해 쇼메트가 피식 웃으며 그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평생 웃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얼굴에 주름이 생길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 5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주름이 없을 수 밖에요." 어처구니 없는 쇼메트의 말에 농담이라는 것을 깨달은 카밀턴은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허헛! 나참. 자네의 쓸데없는 농담은 변하지를 않는군.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농담이었네. 그럼 이제 쉴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해야겠지?" "에?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벌써 시작한단 말입니까? "실제 전투에서는 이 정도의 휴식도 가질 수 없는 법일세. 그러니 잔소리 말고 연무장으로 올라오게나!" "대장님도 재상각하 만큼이나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여전히 고지식한 카밀턴의 말에 두 손을 든 쇼메트는 쑤시는 팔과 다리를 이끌며 다시금 연무장으로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 공학원 제 1전뇌거 보관 창고, 기밀을 위해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밀폐형으로 설계된 장소였다. 내부를 밝히고 있는 전뇌등의 불빛에 출하를 앞둔 전뇌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수는 어림잡더라도 수 백대에 이르고 있었다. 열을 맞추어 세워져 있는 전뇌거 사이를 산책로라도 되는 듯 걷고있는 두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애초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이곳을 찾을 만한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맞추기란 아주 쉬웠는데, 바로 공학원을 책임지고 있는 장영실과 황궁 수석마법사인 루스티커였다.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흑룡의 호수로 출발하기 전 그들이 타고갈 전뇌거를 가지러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자신들의 노고가 그대로 스며있는 전뇌거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전뇌거의 본체를 매만지던 장영실은 흐뭇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얼마 안있어 이 녀석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겠군요." 그의 말에 가볍게 웃은 루스티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자네의 감회가 정말 색다르겠군. 지난 4년간 자네의 모든 정렬을 쏟아 부어 만든 녀석들일세. 한 마디로 자네의 자식들이지." "후훗! 자식이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지만 비슷한 기분일 것 같군요." 장영실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루스티커가 물었다. "전뇌거의 공정은 이제 다 끝났는데, 기관열차의 공정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 장영실은 루스티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기본적인 철로 공사는 지난 달로 모두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기관열차의 공정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유로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대한 서두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에서 선보일 기관열차는 이미 완성된 상태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은 시간이 문제인가..." "후훗! 그렇습니다. 항상 그 놈의 시간이 문제인 것이죠." 웃으며 대답해주는 장영실의 옆모습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와 황실과의 계약기간은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네. 그간 어떠한 심경의 변화도 없었는가?" 루스티커의 물음에 미안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생각은 처음과 전혀 변한 바가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마음이 답답해진 루스티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부해줄 말이 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감사히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뒷짐을 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흑룡의 호수 행에 특무대의 대원들이 우리를 수행하기로 되었다네." 장영실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 거렸고, 그의 생각을 눈치 챌 수 있었던 루스티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특무대는 황실 직속의 특수기관의 한곳일세. 그 존재는 재상을 비록하여 몇몇 고위 관료들만이 알고 있는데, 바로 자네가 찾고있는 명신을 회유하기 위해 보냈었던 자들이지." 그제야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던 장영실은 팔짱을 끼며 이어지는 루스티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명목상이야 자네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의 목적은 자네를 감시하는 일일 것일세." 그의 말을 듣던 장영실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해가 됩니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타국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듀들란 제국으로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일테니까요." "자네의 말대로라네. 지금 자네의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지만 듀들란 제국의 역사를 통털어 보더라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그 만큼 제국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말이고 동시에 자네를 위험요소로 안고있는 것이지. 그러니 만에하나 자네가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황실에서는 아무런 주저없이 자네를 제거하려고 할 것일세." "듀들란 제국에서 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나직한 한숨을 내쉰 루스티커는 장영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황실측의 사람이 아닌 자네의 지기로서 말하는 것이네만 만에 하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더라 하더라도 1년만 참게나. 나는 진정으로 자네를 잃고 싶지 않다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듀들란 제국을 빠져나가 명신에게 가고 싶지만, 저는 듀들란 제국과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후훗! 제가 한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일세. 그럼 이만 나가세나. 흑룡의 호수로 떠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훗.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대화를 마친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빼곡히 세워져있는 전뇌거들 사이를 걸으며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슬을 머금어 한층 싱그러운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잘게 쏟아지고 있었고,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지저귀며 듣는이의 기분을 경쾌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야 말로 평소와 다름 없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난 장영실은 옷가지들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가죽 주머니 네개를 챙겨 튼튼한 가죽 포대에 넣으며 다시 한번 방안을 살펴 보았다.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작은 것 하나라도 빼먹는 다면 곤욕스러운 일이 생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을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빠진 것이 없는 듯 하자 장영실은 두터운 외투를 챙기며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내려오자 아침 청소를 하고 있던 메닐드 부인이 따뜻한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는데, 손에 들린 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남작님? 그런데 짐을 챙겨 나가시는 것을 보니 또 한 동안 못오시나 보군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메닐드 부인. 이번에는 조금 먼 곳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한 보름 정도는 집을 비워야 할 것 같군요." 장영실의 말에 섭섭한 표정을 지은 메닐드 부인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벽을 쳤고,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벽에 새워두며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작님. 마침 빵을 구워 놓은 것이 있는데, 가면서 드시도록 하세요. 제법 잘 구워 졌답니다." "하핫!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나가서 조금 배가 고프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호홋! 아침식사를 거르면 하루종일 힘이 없는 법이죠." 밝게 웃은 메닐드 부인은 급히 부엌으로 들어갔고, 곧 노릇하게 구워진 빵이 가득 담긴 종이 봉투를 들고 나오며 건네주었다. "식기전에 드시도록 하세요. 기왕 먹는것이라면 맛있게 먹는 것이 좋죠." 장영실은 항상 자식처럼 꼼꼼히 챙겨주는 메닐드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빵봉투를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메닐드 부인.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호홋. 별것도 아닌 일로 매번 고맙다고 하시는군요. 아무튼 몸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장영실이 집을 나서자 메닐드 부인 역시 집 앞까지 나와 그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집을 나선 장영실은 집앞에 새워둔 전뇌거에 올라탔다. 그가 탄 전뇌거는 듀들란 제국에서 출시할 전뇌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개조를 거친 전뇌거였기 때문이었다. 험한 길을 자유롭게 다니기 위해서 동력기의 출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차체의 높이를 높였고, 바퀴의 크기 역시 보통의 전뇌거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력원은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서 분해한 마나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먼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전뇌력을 수시로 충전할 수 없었고, 전뇌력의 출력 또한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짐을 옆 좌석에 내려 놓으며 전뇌거의 상태를 간단하게 점검한 장영실은 이번 여행에 동행을 하게 된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인 쟈트란 공학원으로 전뇌거를 몰아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저택으로 부터 전뇌거로 삽십분 정도를 달린 장영실은 쟈트란 공학원 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이 자리에는 전뇌거와 기관열차의 개발을 담당하는 본관 건물 하나 뿐이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십여개의 건물이 모여있는 대규모의 단지로 변해 있었는데, 자재보관, 제품생산, 완성품 보관의 역할을 하는 건물들이 본래의 공학원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공학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장영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고, 그들의 인사를 가벼운 고개짓으로 받아준 장영실은 전뇌거의 속도를 줄이며 약속 장소인 본관건물로 향했다. 공학원의 본관에 도착하여 전뇌거에서 내린 장영실은 루스티커 외에 초면인 두 명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얼굴에 무수한 상처를 가진 30대의 인물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깔끔해 보이는 외모를 지는 20대의 청년이었다. 장영실이 다가가자 루스티커가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여행하기에 딱 좋은 아침이구먼! 어잿밤 잘 쉬었는가?" "오랜만에 집에서 쉬니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다 풀리더군요." "아무렴. 누가 뭐래도 집이 최고지. 그리고 이 사람들과 인사를 하게나. 이 둘은 우리를 수행할 사람들인데, 상당한 실력자들이라네. 카밀턴 대장과 그의 수하인 쇼메트라네. 그리고 자네들도 인사를 하게나 이쪽이 황실에서 소문이 자자한 장영실 남작일세." 루스티커는 그들이 특무대의 대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있었는데, 어제 장영실에게 귀뜸을 해주긴 했지만, 원칙적으로 그들의 정체가 기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루스티커의 소개를 받은 카밀턴과 쇼메트는 처음 보는 장영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영실 남작님.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만나뵙게되니 영광입니다." "저 역시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들의 인사에 부담감을 느낀 장영실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힘든 여행을 함께 해야하니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작님." 하지만 장영실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밀턴과 쇼메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장영실이 그들의 직속상관이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직속상관을 편히 대하는 군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 만큼 장영실과 특무대의 대원들 사이에서 서먹한 기운이 흐르자 루스티커가 그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로 노려보면서 오늘 하루를 보낼 생각인가? 보름이나 함께 지내야 하는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들 말라고. 사이에 낀 사람만 더 고통스러운 법이니까." 루스티커의 농담섞인 말에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후훗! 하긴 맞선보는 자리에서도 당사자들 보다 중매쟁이가 더 골치아픈 법이니까요. 자 그럼 출발 하도록 하죠. 밤이 되기 전까지 다음 도시에 도착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을 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그러도록 하세나. 어차피 성대한 환송식도 없는 것 같은데 이곳에 더 있어봐야 뭘 하겠나." 장영실과 루스티커의 말을 들은 카밀턴과 쇼메트는 자신들의 짐을 챙겨 전뇌거의 짐칸에 실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전뇌거의 뒷좌석에 올라탔는데, 자신의 임무 외에는 어떠한 일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카밀턴 역시 처음 타보는 전뇌거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쇼메트 역시 카밀턴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앞자리에 앉아 그들의 행동을 보던 루스티커는 손자뻘도 넘어보이는 카밀턴과 쇼메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쯔쯧... 젊은 사람들이 촌스럽기는... 그리고 자네들 여행하는 동안 군인처럼 행동하지 말게나. 우리 둘다 딱딱한 격식은 딱 질색인 사람들이니까. 알겠나?"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난섞인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특무대 대원들을 향해 루스티커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카밀턴과 쇼메트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 황실 수석마법사인 루스티커는 감히 바라볼 수 조차 없는 직책의 인물로 인식되어 왔고 어찌보면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투르코스 재상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잔뜩 얼어있는 동안 장영실은 전뇌거의 전진패달을 밟았고, 전뇌거는 천천히 움직이며 공학원 단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뒷좌석에서 딱딱한 자세로 앉아있던 카밀턴과 쇼메트의 눈에는 신기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렇게 또 다른 일행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목적으로 흑룡의 호수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밀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들판사이로 두대의 전뇌거가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바로 팜구드 마을을 출발해 흑룡의 호수가 있는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고 있는 뮤스 일행의 전뇌거들이었는데, 마고드가 세상을 떠난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마고드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면서 유일한 가족이었던 케니언만이 남게 되자, 그녀 혼자 장례식을 치루게 할 수는 없다고 의견을 모은 뮤스와 일행들은 직접 나서서 마고드의 장례식을 도와주게 된 것이었다. 또, 갈리트 형제들은 당분간 마을 사람들의 손에 맡겨 두었는데, 그들은 마을 주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친히 내릴 벌을 기다려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케니언의 결정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고드의 뒤를 이어 밀농사를 계속 짓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농사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씩 배워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짧은 시간동안 가지게 되었던 근심들을 모두 털어버린 뮤스 일행의 기분은 더할나위 없이 좋기만 했던 것이었다. 거칠 것 없이 달리고 있는 전뇌거 안, 카타리나에게 앞자리를 양보해준 켈트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편안한 자세로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 "룰루루루루!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팜구드에서 우리가 한 일은 정말 뿌듯한 것 같군. 그렇지 않냐 뮤스?" 그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걸요. 마고드 씨가 돌아가셔서 안타깝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죠."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입을 삐쭉 내민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점을 의아하게 생각한 뮤스가 물었다. "카타리나. 뭐 기분 안좋은 일이 있어? 표정이 별로 밝지 않은데?" 카타리나는 그렇게 물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다들 가슴이 뿌듯했다는 둥, 보람을 느낀다는 둥 그런말을 하는데, 정작 나는 숙소에만 있느라 아무것도 못했잖아. 그러니 소외되는 기분이야!" "하핫! 물론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들었잖아. 오히려 그 편이 훨씬 좋을 지도 몰라. 직접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웅... 그런가?" "후훗 물론이지." 카타리나를 향해 웃어주며 대답을 해준 뮤스는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 마다 마고드의 얼굴이 가끔 씩 떠오르곤 했는데, 그 때마다 가슴 한곳이 아리는 느낌이었다. 한 동안 그런 기분이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마고드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은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득 심심해진 켈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지도를 보며 끙끙대고 있는 벌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쯔쯧... 아직도 지도를 모르겠냐? 아무튼 못난 동생 때문에 뮤스가 고생을 하는군. 네가 지도만 제대로 읽을 수 있었으면 뮤스가 좀 쉴 수 있었을 것 아니냐. 지도도 못 읽으면서 전뇌거를 운전하려고 했다니..." 그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벌쿤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무래도 방향치인 것 같아요. 지도를 아무리 봐도 도무지 방향을 모르겠으니... 그래서 드베인 숲에서도 자주 길을 잃었었나?"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음 너희 동네겪인 드베인 숲에서도 길을 잃었다면 아무래도 방향치임이 확실 한 것 같군. 나중에 구바닌 산맥에 도착하거든 절대 우리와 떨어지지 말거라. 그곳에서 길을 잃게 되면 그대로 죽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말이야." 켈트의 말에 눈을 반짝인 벌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켈트 아저씨! 혹시 구바닌 산맥에도 가보신 거에요?" 그의 물음에 켈트는 어깨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걸! 내가 대륙에서 가보지 못한 곳이 어디있겠냐? 물론 구바닌 산맥도 가본 적이 있지. 흑룡의 호수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말이야." 켈트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낸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가본 곳이 없다면 삼대 마역에도 모두 가보셨단 말이에요? 에이! 삼대 마역은 못가보셨죠?" 정곡을 찌른 벌쿤의 말에 헛기침을 삼킨 켈트는 급히 머리를 굴렸고 이내 입을 열었다. "흠흠! 삼대 마역은 못 간것이 아니라 안간 것이란다. 우선 드워프들은 습기찬 곳을 싫어하니 드베인 숲은 가기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고, 엘프와의 사이도 좋지 않으니 엘프의 숲에도 가지 않지. 게다가 흑룡의 호수는 지금 가고 있으니 제외를 시켜야 하는 것이란다. 이제 내 말에 수긍을 하겠냐?" 얼럴뚱땅 둘러대는 켈트의 변명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던 벌쿤은 쉽게 수긍을 하고 있었다. "맞는 말인 것 같군요. 그럼 구바닌 산맥에 대해서 이야기좀 해보세요. 듣자하니 굉장히 험한 곳이라고 하던데..." "음 원한다면야 해주도록 하지." 잠시 옛기억을 회상을 하기라도 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던 켈트는 자신이 경험했었던 구바닌 산맥의 모습을 떠올리며 구바닌 산맥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구바닌 산맥은 대륙을 두개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험난한 산맥이란다. 그 서쪽에는 우리가 있는 도이첸 제국이 위치하고 있고, 그 동쪽에는 듀들란 제국이 위치하고 있지. 사실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 구바닌 산맥 이란다. 이 산맥으로 인해서 서로의 교류가 자유롭지 않게 되자 점차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이지. 그런 이유로 언어 또한 서로 다르단다." 켈트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벌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구바닌 산맥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던 뮤스 역시 직접 가본 적은 없었기에 조금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자 켈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켈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40년 쯤 전의 일이겠구나. 그 당시 나는 몇 명의 모험가들과 파티를 이루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단다. 우리는 구바닌 산맥의 어떤 동굴에 진귀한 약초가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 나선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상당히 쟁쟁한 사람들이었단다. 그 중에는 꽤나 인정을 받은 검사도 있었고, 5클레스의 마법사도 끼어있었지. 또, 페듀크라는 마을의 도적길드 장을 맡고있는 솜씨좋은 도적도 있었는데, 정말 재빠른 녀석이었지. 당시에는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우리 드워프 족은 말을 타는데 잼병이라서 나는 무척이나 고생을 했지. 그렇게 닷세 밤낮을 달려 우리는 구바닌 산맥의 산자락에 도착할수 있었던 게야.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일행들은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는데,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허술한 지도 하나만을 보고 찾아왔더니 생각보다 백배는 더 험준한 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더구나." 익살스러운 켈트의 몸짓이 이어지자 카타리나와 벌쿤은 웃음을 터트렸고, 켈트는 더욱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 험난하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산맥의 십분지 일도 올라가기 전에 말을 타고는 오르지 못할 정도의 경사가 시작되었고, 일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은 사람들의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지. 게다가 뾰족하게 솟아난 암석들은 굉장히 날카로워서 살짝만 잘못 긁히면 피를 보기 일수였단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는 켈트를 바라본 벌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정말 그런 곳을 올라가셨다는 말이에요?" "아무렴! 내가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정 못믿겠으면 뮤스에게 한번 물어보거라. 뮤스도 구바닌 산맥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을 테니." 켈트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켈트 아저씨의 말이 모두 사실일 거야. 구바닌 산맥은 높기도 높은 데다가 가파르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오르기는 힘들지." 뮤스를 통해 진실임을 확인한 벌쿤은 켈트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어요?" "녀석, 모두 이야기를 해줄테니 보채지 말거라... 쩝, 물론 혀를 내두를 만큼 험한 곳이었지만, 당시 보물에 눈이 먼 우리들은 거칠 것이 없었지. 하루에 고작 200멜리 조차 오를 수 없는 속도임이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 할줄 모르고서 산을 올랐고, 오르다가 좁다란 평지라도 눈에 띄면 그곳에서 두꺼운 모포를 다섯겹이나 덮고 잠을 청했단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밤이되어 밀려오는 엄청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보름 가량을 올랐을 때, 우리는 지도에 그려져 있던 동굴을 발견할수 있었단다. 정말이지 그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 할수 없는 것이었지. 그리고 기쁜 마음에 몸이 피곤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동굴 속으로 뛰어 들었단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켈트가 문득 입을 다물자 한창 이야기에 빠져들어있던 카타리나가 애를 태우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결국 그 진귀한 약초를 찾아낸 것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직한 한숨을 내뱉은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 지도도 가짜가 아니었고, 지도에 나온 대로 그 동굴 속에는 약초가 존재하고 있었지." 잔뜩 흥분한 벌쿤은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켈트를 흔들며 외쳤다. "이야! 그럼 그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었겠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내저었는데, 그 때의 생각만 해도 억울하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찌푸렸고, 입맛을 다시며 말을이었다. "쩝...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모두들 헛물만 들이키고 말았단다." "엥? 그 진귀한 약초를 찾아냈다면서요. 그런데 왜 헛물만 들이켜요?" "사실 문제는 그 지도에 있었단다. 그 지도가 제작된 것이 약 800년 전이었는데, 그 당시 어느 유명한 약사가 불치의 병에 걸린 딸의 살리기 위해 어떤 약재를 찾아나서게 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가 찾는 약재는 제국 전역을 돌아다녀봐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은 그의 발걸음은 구바닌 산맥에까지 닿게 되었던게야. 비록 위험하긴 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접을 수 없었던 그 약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구바닌 산맥에 올랐고, 하늘의 뜻인지 그가찾고 있던 약재가 자라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는군.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던 약초를 구할 수 있었던 그 약사는 그곳을 잊어 버리지 않게 지도를 만들었고, 그 약초를 이용해서 딸의 목숨까지 구했단다. 그런데 그 약초라는 것이 알고봤더니 '큔의 날개'라는 것이더군. 그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기절 할 뻔 했단다. 겨우 큔의 날개였다니..." "푸하하핫! 정말 황당할 만 했겠군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만도 해요. 풋!" 켈트의 이야기가 끝나자 뮤스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는데, 벌쿤과 카타리나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카타리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뮤스에게 물었다. "대체 왜그렇게 웃는거니?" 그녀의 말에 힘겹게 웃음을 참은 뮤스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큔의 날개라는 것은 오래전에 엄청나게 귀한 약재로 쓰였었지. 왜냐하면 아주까다로운 조건이 아니고서는 자라나지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세상도 변하듯이 재배기술이 발달하게 되자 큔의 날개를 일반인들도 쉽게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헐값에 팔리는 약초가 된 것이지." "호홋! 정말 헛수고만 한것군요!" 그제서야 이야기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된 카타리나와 벌쿤 배를 부여잡고 웃었으며, 켈트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듯 표정이 어두워져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던 카타리나와 벌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고, 겨우 안정을 취하게 된 벌쿤은 켈트를 향해 물었다. "이야기가 웃겨서 좋긴 했는데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응? 궁금한 것이라니?" "아저씨가 구바닌 산맥에 오르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했다고 하셨는데, 설마 우리도 그렇게 올라야 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야 괜찮지만 카타리나 누나가 걱정이네요." 그의 물음에 대해 뮤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전체적으로 구바닌 산맥의 산세가 험하긴 하지만, 흑룡의 호수가 있는 곳은 예외이지. 비록 전뇌거를 타고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다른 곳과 같이 극단적으로 험난하지는 않거든. 카타리나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 뮤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옆에앉아있는 켈트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사실 드워프 아저씨가 그랬던 것 처럼 보름이나 산을 오르기는 싫거든. 후훗! 아무런 보람도 없이 그 고생을 했으니 아저씨도 얼마나 억울 했겠어요." "이 녀석! 가만히 두지 않겠다!" 40년 동안 가슴에 담고있던 아픈 곳을 벌쿤이 찌르자 발끈한 켈트는 벌쿤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 덕에 전뇌거의 뒷좌석은 때 아닌 씨름판으로 변해 버렸다. 늘상 일어나는 이런 일에 이제 익숙해진 카타리나는 느긋한 자세로 그들이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고, 뮤스는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켈트와 벌쿤의 몸부림 때문인지 아니면 거친 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뮤스 일행을 태운 전뇌거는 경쾌하게 들썩거리며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89 듀들란 제국 특무대. 밤이 늦어 잠이 들어가는 숲을 일깨우는 차가운 늦가을 서리가 내려 앉았고, 모험자의 마을 파숄에 늘어서 있는 숙소의 지붕 역시 서리가 내려 앉아 마치 눈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지붕 아래, 여덟 개 정도의 침대가 전혀 무리 없이 들어서 있을 만큼 넓은 방이었지만, 이 방안에 있는 이는 뮤스와 그라프 뿐이었다. 겨울이 되면 추위와 날씨로 인해 모험을 하는데 지장을 받게 되고, 그런 이유로 늦가을 부터 모험자의 수가 줄어든 것이었다. 덕분에 뮤스와 그라프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뇌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으며 뮤스의 얼굴에는 진한 음영이 생겨 있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라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라프는 뮤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를 찾아온 정체 모를 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중이었고, 여러가지의 일이 미심적었기에 뮤스가 그들을 따라 듀들란 제국으로 가는 것을 말리려는 입장이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 장영실인가 하는 사람이 어리석기는 커녕 자네에 못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네가 알아 보지도 못하는 글로 편지를 썼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군. 자네와 그의 고향이라는 조이센 대륙의 언어로 편지를 보냈더라면 자신의 친필임을 확인 시킬 수있는 좋은 방법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귓가로 흘러가는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뮤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사실 니카도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장영실의 소식이라는 사실하나만으로 감정이 격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말을 의심을 할 수 없었지만, 제 삼자의 입장인 그라프의 냉정한 상황판단을 듣고 있다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씩 보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의심이 가는 부분은 그라프의 지적과 같이 장영실의 친필로 쓰여졌다는 편지였는데, 뮤스가 확인한 대로 편지가 밀봉된 상태였다는 것은 내용에 대한 검열이 없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고, 그렇다면 그라프의 말대로 듀들란어 보다 한자를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는 편이 다른 사람들의 이목으로 부터 내용을 숨기기에도 편리한 것은 물론, 장영실과 뮤스 이외에는 한자를 쓸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뮤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장영실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또, 편지의 내용에서 '명신'이 아닌 '뮤스'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을 들 수 있었는데, 호칭이라는 것은 버릇과 같아서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애써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 하려는 의도가 없는 개인 적인 편지에서 뮤스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점이었다. 여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뮤스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경험은 전혀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수염을 쓰다듬던 그라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허헛! 자네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것을 탐내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틀림 없이 듀들란 제국의 비밀기관 소속의 인물들일 것이고, 듀들란 제국에서 자네를 영입하기 위해 파견한 자들일 것일세. 또, 자네가 찾고 있던 장영실이라는 사람은 분명 듀들란 제국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말대로 중요한 요직을 맡고 있을 것이야." "그렇다면 장영실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라는 말이십니까?" 그라프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단정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요직의 인물에 대한 소식은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기 힘들지. 하지만 내가 걸리는 부분은 왜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직접 자네를 초빙한것인 마냥 거짓말을 했냐는 것일세." 추론일 뿐이었지만 말을 하는 이가 다른 이가 아닌 그라프였기에 충분히 믿을 만 했고, 장영실이 안전하다고 하니 다른이의 말이더라도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간 얼굴이 밝아지는 뮤스를 보던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여러가지의 측면을 볼 때 그들은 분명 자네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는데, 혹시 그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자네가 듀들란 제국으로 오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야 그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뮤스는 머리속이 복잡해 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내젖고 있었다. "물론 그라프님의 말씀도 맞지만, 혹시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이렇다할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의심은 할 수록 확신에 가까워지지만, 그것 자체가 사실이 되지는 못하니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 또한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그들의 속내를 알수만 있다면..." "흠... 그들의 속내라..." "..." 끝을 흐린 뮤스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그라프가 뮤스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어떠한 해결 책을 찾아 낸 듯 말을 꺼내자 뮤스는 기대의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라프는 자신이 생각해 놓은 바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일단 내일 날이 밝는대로 그들을 만나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겠노라고 말을 하게.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 보는 것이지." 고개를 갸웃 거린 뮤스는 그라프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본래의 모습이 나오는 법일세... 그러니 옛말에도 도박에서 밑천을 잃었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와 같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서 반응을 살펴 보자는 말이야. 만약 듀들란 제국에서 자네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 접근을 했다면 분명 자네와 같은 인물이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일세." 그라프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뮤스는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들이 저를 헤치기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듀들란 제국이라는 곳에 잘못한 일도 없는데..." "허허! 답답한 소리를 하는구먼. 원래 한 국가의 득과 실이 걸린 문제에서 자네의 자잘못은 중요치 않네. 오로지 이득이 되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제거를 하는 것이지. 그것은 평화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요즘이라도 예외는 아니야. 자네가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잘 모르니 지금 추방자 신세가 된 것 아니겠나?" "그것이 무슨..." 그라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뮤스를 바라보더니 이내 턱을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뭐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 다음에 이야기 하세나." 잠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긴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내 말대로 한번 해보게나. 그들이 정말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보낸 자들이라면,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헤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니, 그 연후에 그들을 따라 가도 될 걸세." 그의 의견을 듣고 있던 뮤스는 입주변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땅히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라프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군요." 결국 그라프의 의견을 받아 들인 뮤스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여러가지 언질을 들어야만 했는데, 둘러댈 핑계부터 말을 할 때의 태도, 그리고 그 이후에 해야할일까지 꼼꼼하게 미리 준비 해 둔 그라프였다. 뮤스가 가지고 있는 공학에 대한 지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상의 것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같은 나이 또래의 평범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 부족함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그의 머리에 주입되어 있는 어떠한 서적에서도 배울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지식과 지혜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식은 풍부하되 지혜가 모자라는 뮤스, 그가 대륙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 받고 있는 그라프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개인 적으로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뮤스는 날이 밝는 대로 카밀턴 일행이 묶고 있는 집의 문을 두들겼다. -쿵! 쿵! "누구시오!" 문안쪽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흠흠. 저 뮤스 드라켄 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안 쪽에서 카밀턴이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내부로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있는 니카도를 포함한 일행들을 볼 수 있었는데, 몸에 베인 습관 대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 난 듯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무장을 장비하고 있었다. 카밀턴은 평생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무적인 말투로 뮤스를 맞이 했다. "어서오게 뮤스 원장,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네." "오히려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한 뮤스는 카밀턴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중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뮤스에게 자리를 내주자 그는 사양치 않고 앉았고, 카밀턴 역시 그의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뮤스의 하얀 얼굴에 집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긴 머리에 가려 햇빛에 타지 않은 얼굴이 찬 바람을 맞아서 인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친 듯 피곤해 보이는 뮤스를 향해 니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말씀 드린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입주변을 쓰다듬은 뮤스는 그라프의 조언대로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일 때문에 어제 늦게까지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특히 장영실 아저씨가 저를 찾고 있다는 소식에 뛸듯이 기뻤습니다." "하핫! 장영실경께서도 뮤스 원장님을 보고싶은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다." 말의 중간에 끼어든 니카도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뮤스는 눈을 내려 깔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밤새 고민해본 결과 여러분들을 따라 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잘 되어 가는 상황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상황에서 뮤스가 갑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니카도와 카밀턴, 그리고 그들의 일행은 적잖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뮤스 원장님께서는 장영실경이 보고싶지도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실수라도 저지른 것입니까?" 뜻밖의 상황에 놀란 니카도가 되묻자 뮤스는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런것은 없습니다. 물론 저도 장영실 아저씨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요. 하지만 지금 저의 처지가 쉽게 듀들란 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도 도이첸 제국에서 제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니카도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뮤스의 말이 계속 되었다. "만약 여러분들의 말대로 장영실 아저씨가 듀들란 제국에 잘 계신다면 훗날이라도 제가 쉽게 찾아 뵐 수 있겠죠. 아쉽지만, 그 날을 조금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돌아 가시면 제가 훗날 꼭 찾아 가겠노라고 전해 주십시요." 이렇게 그라프가 귀뜸 해준 대로 이야기를 모두 늘어놓은 뮤스였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변인물들의 안색은 수시로 변하고 있었는데, 그 중 니카도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이런! 뮤스 원장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도이첸 제국의 얼간이들이 어디가 좋다는 것입니까! 지금쯤 능력을 인정 받아 호의호식 해야 할 분이 이 따위 미개척지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것이 분하지도 않습니까?" 듀들란 제국 최고의 교섭인으로 자존심이 높았던 니카도였기에 이번 교섭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듯 했고, 흥분해서 떠드는 그의 말투에는 미묘하게 듀들란어의 억양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카밀턴이 나서며 니카도를 만류했다. "그만하게 니카도." 시선을 뮤스에게 돌린 카밀턴은 특유의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 한번 정한 마음을 돌리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번더 물어 보도록 하겠네. 정말 자네는 우리와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겠는가?" 뮤스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 였기에 대답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보며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 갔다고 단정지은 카밀턴은 평소의 냉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네의 생각을 충분히 알겠네. 돌아가면 장영실경에게 자네의말을 그대로 전하도록하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답답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니카도의 시선을 외면한 카밀턴은 팔짱을 끼며 의례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남은 기간동안 몸조심 하게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신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부터 주변의 공기가 좋지 않아진 것을 알 수 있었던 뮤스는 오래 있어 봐야 좋을것이 없다고 느끼며 금새 자리를 털며 일어났고,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털컹!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뮤스의 모습이 사라진 후, 카밀턴 일행들 사이에는 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난 한달 동안 험난한 미개척지를 돌아 다니며 고생을 했던 것이 무위로 돌아 간 것에 대한 허탈감이었다. 그러던 중, 니카도가 카밀턴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카밀턴 대장. 이제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분명 재상각하께서 타국의 비난을 감수 하면서 까지 특무대를 파견 하신것을 보면 보통의 일이 아닐텐데 부끄럽게도 교섭 실패라니..." 그의 물음에 대답을 미루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밀턴은 조심스럽게 품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품에서 빠져 나온 그의 손에는 붉은 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는데, 바로 투르코스가 교섭이 실패 했을 때를 대비해 전해준 명령전달서 였다. 오랜 시간 동안 특무대에서 작전을 수행한 카밀턴의 수하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교섭인에 불과한 니카도는 어떤 분위기 인지 잘 모르는 듯 했다. "대체 그 봉투는 뭡니까? 인장을 보니 재상각하께서 전해 주신 것 같은데..." "흠... 이 봉투 안에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지. 작전 마다 그 내용도 가지 각색이라네. 심지어는 비밀을위해서 자살명령까지 내려지기도 하지." 긴장한 니카도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옆사람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들렸다. "설마 저도 그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저는 그저 교섭인일 뿐입니다!" "자네가 특무대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함께 작전에 투입된 이상 자네 역시 특무대에 소속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 그런..." 지레 겁을 먹은 니카도의 모습을 보며 카밀턴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게나. 자살명령은 그리 쉽게 내려 지는 것이 아니니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 아니라면 절대 내려지는 일이 없지." 그제야 겨우 안심을 한 니카도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카밀턴은 단단히 밀봉된 봉투의 모서리를 거칠게 찢어 내렸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손바닥의 반만한 크기의 얇기 그지 없는 노란색의 종이였다. 바람이 조금만 불더라도 금방 찢어 질 듯한 노란색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카밀턴은 그 내용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아무런 동요 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카도를 제외한 대원들은 오늘 자정을 위해 푹 쉬어라. 명령서의 내용은 그 때 전달한다." "옛!" 짤막하게 대답을 한 대원들은 착용하고 있는 무장을 움직이기 편리하도록 정리하며 일어나서 각자의 침상으로 자리를 옮겼고, 카밀턴은 늘 그래왔던 것과 같이 명령서를 작게 구겨 입으로 털어 넣었는데, 침과 닿으며 천천히 녹아 내리는 기묘한 맛에는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지 보일 듯 말 듯 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공학자> #190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어서 인지 그라프는 아직 가을임에도 겨울 마냥 차갑게 몸이 식는 것을 느꼈다. 남들 보다 빠르게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은 그라프는 탁자에 앉아 버릇처럼 수염을 쓸어 내리고 있었는데, 그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 듯 혼잣말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흠... 그럭 저럭 잘 끝났군. 카밀턴이라는 자, 생각보다 냉철한 인물이군. 뒷 일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은 다 했다는 것인가? 그에 비해 교섭인이라고 하는 자는 아직도 많이 모자르는 편이라고 할 수 밖에... 척 보아도 지금까지 쉬운 일만 도맡아서 자신감만 넘쳐나는 풋내기라고 할까? 하긴 상부에서 저런 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서류상의 자료일 뿐일 테니 종종 사람을 고르는데 실수가 있을 수 있지." 그라프는 뮤스와 카밀턴 일행의 대화를 직접듣기라도 한 듯 상세히 파악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라프는 지금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뮤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두꺼운 외투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한 몸을 애써 돌리며 입을 열었다. "여차. 이제 오는군. 생각 보다 자네의 연기력은 뛰어나더구먼." 그의 말을 들은 뮤스는 겉에 입고 있던 옷의 소매 단추를 뜯어 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후훗 그래도 속으로는 떨리던걸요. 혹시라도 연기를 하는 것이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요. 그나저나 수신성능은 어떤던가요?" 뮤스의 되물음을 들은 그라프는 귀에서 검은 물체를 빼내며 미소지었다. "바로 옆에서 듣는 것 처럼 목소리가 깨끗하게 들리더군. 정말 마법같은 물건이야." 그라프가 뮤스와 카밀턴 일행의 대화에 대해 잘 알수 있었던 것은 도청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는데, 벌쿤이 세이즈의 집을 도청했을 때 쓰인 것을 다른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뮤스는 목을 죄고 있는 목의 단추를 풀어 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도청 장치를 그곳에 설치를 하고 올 것을 그랬군요.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을 거것일세. 비록 노련한 모험가들의 눈을 속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험가들의 통찰력이 대단할 뿐이지 결코 그들이 어수룩 한 것은 아니야. 만일 도청장치를 어딘가에 부착하려 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눈치를 챘을 것이 틀림 없네." "흠 그렇군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죠?" 손에 들고 있던 수신기를 뮤스에게 넘겨준 그라프는 외투의 매무새를 다시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미리 커리큘드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아직 시간이 있네. 이곳에는 눈이 많으니 밤까지 서툰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조용히 그라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뮤스의 입에서 의미 깊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발 서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 되도록..." 아직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뮤스를 지켜보던 그라프 역시 그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는지 어깨를 두들기며 위로해 주었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굳게 박힌 손이 나무로 만든 투박한 창문을 살짝 열었다. 하지만 기름을 친지 오래된 나무창문은 여지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끼기기기긱! 그 손의 주인인 카밀턴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이곳의 창문에도 유리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미개척지의 숲에 유리로 된 창문이 어울리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 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쓴웃음으로 잡념을 마무리지으며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오늘밤은 웬일인지 움직이는 모험자들이 없군. 모험자의 수가 줄어서 그런가?" 답을 듣기 위한 질문도 아니었고,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질문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무장을 정리하던 카밀턴의 수하중 한명이 대답했다. "밤의 날씨가 차가워 져서 그럴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것은 이상하지만, 어차피 그만큼 이목이 없으니 우리가 해야할 일이 한결 손쉬워 진 것이 사실 아닙니까?" 카밀턴 역시 수하의 말에 수긍을 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쓸었다. "흠... 그도 그렇지. 하지만 뭔가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지울 수 없군. 챠퍼. 그들의 숙소에 별다른 움직임은 없겠지?" 그의 물음에 챠퍼라는 이름을 가진 수하 한 명이 하던 일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수시로 그들의 숙소를 살펴봤지만 숙소로 들어간 이후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내뿜고 있는 창을 닫은 카밀턴은 내부에서 작전 준비를 하는 수하들을 둘러 보았는데, 그 중 니카도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양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었다. 두 손을 굳게 모은 채로 작은 경련을 일으키던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척살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고 말하는 듀들란 제국의 방책이라는 말입니까..."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카밀턴은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이것은 실내가 조용한 이유도 있었지만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니카도의 약한 모습에서 짜증이 일어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딱딱하던 표정이 더욱 화석처럼 굳어지며 몸의 주변으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니카도 자네가 우리의 일을 어떻게 이해하겠나! 나와 아무런 원한이 없더라도 국가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한다네! 그것이 듀들란 제국에서 수많은 돈을 퍼부어 가면서도 우리 특무대를 유지시키는 이유이지. 자네같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일세.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그..그것은..." 카밀턴은 자신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여는 니카도의 말꼬리를 날카롭게 자르며 치고 들었다. 그의 진 갈색의 두 눈동자는 어떠한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네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사람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인도적으로 재상각하의 지령을 무시하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그런 것은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그저 상부의 지시에만 따르는 특무대의 대원일 뿐이지. 아무리 그 명령이 더럽고 못마땅해도 우리는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특무대일세!" 니카도는 위압적인 카밀턴의 기세에 질렸는지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니카도가 잠잠해 지자 흥분을 가라앉히며 마음을 가다듬은 카밀턴은 탁자에 기대어 있는 장검을 들어올리며 등을 돌렸다. "나와 챠퍼 그리고 죠슈드가 움직인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짐을 꾸려라. 일이 끝나는 대로 다른 모험자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이곳을 떠난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문을 열고 나가자 챠퍼와 죠슈드가 니카도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털컥... 숙소의 문이 닫힘과 함께 카밀턴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니카도는 심장을 묶고 있던 올가미가 풀린 듯 힘이 잔뜩 들어간 몸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후우..." "흐음... 니카도 자네가 실수 한 것 같군. 우리에게였다면 모를까 카밀턴 대장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어." 니카도는 등뒤로부터 들려오는 동료의 목소리에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인가? 그저 나는 이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말했던 것일 뿐일세!" 하지만 그에게 말을 건넨 동료는 답답한 듯이 짧은 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우리의 입장을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것이야. 사실 우리 역시 각자의 부대에서 발탁되어 특무대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정말 믿을 수 없었지. 전란이 종식 된 평화의 시기에도 특무대 같은 특수기관이 존재해야만 하는지 이해 할 수도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결국은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듀들란 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역시 특무대에 버금가는 조직들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어차피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가 하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을 뿐, 우리 역시 자네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네." "그렇다면 왜 카밀턴 대장은 그렇게 무섭게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자네처럼 말을 해줘도 될 것을..." "그것은... 사실 특무대의 대장 직위를 가진 카밀턴 대장은 우리 같은 일반 대원들과 그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지." "다르다니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잠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동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음... 보통 특무대, 그리고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는 여타 조직의 대장들은 생각보다 큰 권한을 가지고 있고, 직무완 연계되어 타국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될 일급의 기밀사항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만약 그런 사람이 타국으로 흘러들어 갈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국에서는 금제를 가하는 것이 보통이야." "금제라니? 설마 카밀턴 대장의 몸에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기왕 이야기가 깊이 들어왔고, 니카도가 작전에 참가한 이상 그 역시 특무대의 일원이 되었기에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거리낌은 없었다. 이번에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짐을 꾸리던 다른 동료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무대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데 몸에 금제를 가하는 것은 말이 안되지. 금제의 대상은 바로... 카밀턴 대장의 가족들이야. 나이가 많으신 어머니와 시집간 누이가 있는데, 그들의 주변에 감시자들이 몰래 따라 다녀. 그러다가 만약 카밀턴 대장이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잠시 머뭇거린 동료는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그 가족들에게 죄를 대신 묻는 것이지." 자신이 가지고있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니카도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껏 믿고 의지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모국의 어두운 면을 알게된 충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가족들을 담보로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깝지만 모두 돈 때문이지. 최소한 특무대 대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을 때만큼은 본인과 가족들에게 상당한 보수가 지급되니까 말이야. 그러니 당장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들 정도로 힘들게 가정을 꾸려 나가던 카밀턴 대장은 생계를 유지할 방법으로 특무대를 선택한 것이고 가족들의 안위가 관계된 일인만큼 명령에 대해서는 도덕적 관념을 떠나서 카밀턴 대장의 신념이 되어 버린 것이야." "으음... 그런 것이었군."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서야 니카도는 카밀턴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의 한 곳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국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지며 생긴 공허함이 그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난간 아래쪽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세 개의 인영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그림자가 겹쳐진 곳으로 이동을 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었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세 쌍의 눈동자는 주변을 살피기에 바빠 보였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밝은 곳으로 내밀었다. 검은 색의 복면을 쓴 그는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난간 위쪽의 상황을 살핀 후,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시선을 바깥 쪽에 고정 시킨채 입을 열었다. "난간 위쪽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도 없는 것을 보니 이미 잠이 든 듯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들은 다름 아닌 뮤스의 척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특무대의 대원들 이었는데, 오늘 따라 신경을 써야 할 눈이 없었기에 아무런 무리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뒤에서 보고를 듣고 있던 복면의 인영 중 한명인 카밀턴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어차피 우리는 자객이 아니니 그가 잠을 자던 아니던 상관 없다. 소요가 일어 난다고 하더라도 남의 일에 신경 쓰기를 싫어하는 모험자들이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아침 일찍 시신이 발견 되기전에 사라진다면 모험자들은 사사로운 원한 관계라 생각하고 금새 조용해 질테지. 아무리 공학원의 원장이라 해도 평범한 청년일 뿐이니 목숨을 거두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야." 말을 마친 그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장검 가만둔채 어깨춤에 차고있던 단검을 빼들고 있었다. 그 때 뒤를 따르던 인영이 물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지내고 있는 늙은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단검의 날을 확인하던 카밀턴은 수하의 눈을 직시하며 대답했다. "명령 이외의 살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텐데? 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제압을 해두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몸 상태를 살핀 카밀턴은 수하들을 둘러보며 지시했다. "챠퍼는 단검을 꺼내고, 먼저 진입해서 시야를 확보한다. 죠슈드는 이곳에 남아 상황을 살펴라. 그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겠다." 대답 대신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 명의 인영 중 챠퍼가 먼저 난간의 계단을 밟으며 가볍게 올랐고, 죠슈드는 사라지듯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챠퍼의 뒤를 따라 대장인 카밀턴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공학자> #191 제대로 된 문고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나무 문의 양쪽에 선 카밀턴과 챠퍼는 서로 눈빛을 교환 했다. 그리고 카밀턴이 손가락을 간단하게 움직이자 챠퍼는 단검을 고쳐쥐며 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역시 창문과 마찬가지로 뻑뻑하긴 했지만, 그나마 자주 사용되었기에 삐걱이는 소리가 없었다. 챠퍼가 고개를 드리밀며 뮤스의 숙소로 들어가자 카밀턴 역시 밖을 한번 더 확인하며 뒤따랐다. 숙소의 내부는 아주 어두웠다. 겨울이 한발짝 다가옴에 따라 밤에 창이 열려있을리도 없는 데다가 그들이 들어온 문은 달이 뜬 맞은 편이었기에 달빛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시야 확보가 불가능해지자 챠퍼는 나직한 목소리로 카밀턴을 향해 물었다. "이래서는 시야 확보가 안되겠습니다. 불이라도 밝히는 것이..." 카밀턴 역시 챠퍼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허리의 뒤쪽에 차고 있던 작은 배낭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20셀리 가량 되는 막대를 꺼내들며 능숙하게 막대의 아래쪽에 있는 끈을 입으로 물어 당기려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그의 동작은 멈춰질 수 밖에 없었다. "후훗! 그런 비싼 물건을 애써 낭비 할 필요는 없네. 기관원들이 쓴다는 발광막대 보다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대신 불을 밝혀 줄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횃불이 타오르며 숙소의 내부를 밝히기 시작했고 눈이 부신 카밀턴과 챠퍼는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검은 복면 뒤로 가려진 얼굴을 찡그린 카밀턴이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런... 이런... 모험자들의 마을에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모험자들일세." 겨우 시야를 확보 할 수 있었던 카밀턴과 챠퍼는 팔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제서야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파악 할 수 있었는데, 약 10여명의 모험자들이 자신들의 병장기를 꼬나쥔 채 카밀턴과 챠퍼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의 가운데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사내는 한번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던 커리큘드라는 자임을 알 수 있었다. 낮은 신음성을 흘린 카밀턴은 싸늘한 눈초리로 커리큘드의 아래위를 흘기며 물었다. "뮤스원장은 자네들이 빼돌린 것인가? 그는 어디에 있지?!" 살기가 섞인 그의 물음을 들은 커리큘드는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능청스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으흠... 혹시 자네들 저녁을 잘못 먹은 것 아닌가? 이런 모험자 마을에 원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오랜만에 베게 싸움 하려고 모였더니 이렇게 처들어 와서 헛소리나 하다니..." 커리큘드의 아무런 설득력 없는 핑계를 듣다 참지 못한 챠퍼가 나서며 외쳤다. "네가 뮤스원장과 친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그런 억지로 발뺌을 하는 것이냐! 헛소리 말고 뮤스원장의 소재를 말해라!" "어허! 글쎄 나는 모른다니까 그러네. 아하! 간혹가다 마물에 홀리면 헛것이 보인다는 소리가 있다고 하던데 몹쓸것들에게 당한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신전으로 가서 치료나 받으시지?" "뭐..뭐라고!" 챠퍼는 특무대에 들어간 후부터 훈련을 받으며 거칠기만하던 군인의 성격을 누를 수는 있었지만, 커리큘드의 노골적인 도발을 그냥 참고 있을 만큼의 수도를 한 것은 아니었기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서 장검을 빼어 들었다. -챠앙! 금속의 마찰음과 함께 투명한 장검의 날카로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커리큘드는 무시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 상황파악을 못하는군, 자네들이 아무리 특수기관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는 계산 같구먼. 우리 역시 베짱만으로 이런 미개척지를 살아 가는 것은 아니니 말이야." "그..그런..." 자신이 빼든 장검을 보며 왠지 우습게 됐다는 생각을 한 챠퍼는 어쩔 줄 몰라하며 카밀턴의 얼굴을 살폈지만, 역시 복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 조차 여의치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수하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은 가밀턴은 특무대의 대장 답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챠퍼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서라. 이들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 "알겠습니다. 대장."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물러서는 챠퍼를 바라보던 카밀턴은 얼굴의 복면을 거칠게 벗으며 커리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좋다. 어차피 싸워봤자 양쪽에 피해만 클 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 난다는 것도 우리의 자존심이 용서치 못하니 그만한 보상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커리큘드였기에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나는 평화가 좋다니까. 그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쪽으로 떠났네. 지금쯤 상당한 거리를 갔을 거야." "남쪽이라... 고맙군. 돌아가자 챠퍼!" 먼저 몸을 돌려 나가는 카밀턴을 본 챠퍼는 커리큘드와 그의 동료들을 향해 이빨을 한번 갈아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카밀턴과 챠퍼가 밖으로 나가자 커리큘드는 창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다. 밖으로 나간 카밀턴은 망을 보던 죠슈드를 이끌고 서둘러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는데, 수하들을 시켜 말을 준비하게 하는 것으로 봐서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은 커리큘드는 창문과 문을 단속했고, 바닥을 발로 구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그라프님." 그의 말대로라면 뮤스와 그라프는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문득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들썩거리기 시작하자 곧 뚜껑이 열리듯 나무 바닥의 한 부분이 열리며 그라프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다. "허헛 아래에서 들어 보니 감쪽같이 속은 것 같더군. 자네의 그 능청스러움은 놀라울 정도야." 그라프의 칭찬에 커리큘드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는데, 카밀턴 앞에서의 뻔뻔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라프가 밖으로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고, 뒤이어 뮤스가 올라왔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뮤스의 얼굴을 본 그라프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위로했다. "어차피 자네나 나나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닌가?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네... 저는 괜찮아요." 그라프의 위로에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것이 억지의 미소라는 것을 모를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 지자 커리큘드가 나서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들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 고생을 하게 될테니 이곳에서 계속 지내셔도 될 듯합니다만..." 뮤스에게서 시선을 뗀 그라프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분위기에 휩쓸려 이곳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곧 이상함을 느끼고 이곳으로 돌아 올것일세. 그러니 우리는 날이 밝기전에 북쪽으로 올라갈 생각일세." 북쪽이라는 말에 큐리컬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부..북쪽이라니요! 북쪽으로 갈 수록 마물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국경이 있는 동쪽으로 가는 것이..." "아닐세. 물론 북쪽의 미개척지가 위험하긴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네. 우리가 움직이기 힘든 만큼 그들 역시 마물들 때문에 우리를 추적하기 쉽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자네가 걱정을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힘없는 이 늙은이가 아무런 대비 없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세. 마물들의 공격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한 바가 있으니 심려하지 않아도 될것이야." "음... 그라프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다면..."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커리큘드는 그라프의 말을 충분히 수긍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같은 시간 밖에서는 길을 재촉하는 카밀턴 일행의 말 발굽소리가 파숄의 밤을 흔들고 있었다. 추적 대지를 데워야 할 태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옷 소매로 파고드는 바람은 잔인하다고 말할만큼 매서웠고, 살을 벨듯이 스치는 바람은 귀끝의 감각을 무디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주인이야 어떻든간 상관없다는 듯이 검은 말들은 쉴세 없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듣는이의 가슴마저 떨어울릴 정도의 박력적인 말발굽 소리가 숲속에서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말의 수는 대 여섯 마리, 하나 같이 오랜 시간을 달렸음에도 지칠줄 모르는 준마들이었고, 말을 모는 사내들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기마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리큘드의 말에 속아 파숄을 빠져나와 뮤스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한 특무대의 대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자정이 조금넘어 파숄에서 출발하여 꽤나 오랜 시간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지만 아직 아무런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주변이 어두웠기에 추적하기에 애로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쯤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의 추적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들이었기에 시간이 갈 수록 답답해져 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앞장을 서서 달리던 카밀턴이 한쪽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하며 고삐를 잡아 당겼다. "워! 워워!" 카밀턴의 말이 속도를 줄이며 멈춰서자 그의 뒤를 따르던 수하들 역시 비슷하게 멈춰서게 되었다. 달리다 말고 멈춰선 카밀턴과 주변을 살펴보던 챠퍼가 물었다. "대장 무슨 뭐라도 발견 한 것입니까?" 그러나 카밀턴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말에서 뛰어 내려 지나온 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수하들은 카밀턴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덩달아 말에서 내리며 그가 움직이는 쪽으로 따라나섰다. 대략 스물 발자국 정도 움직였을까? 문득 카밀턴은 몸을 낮추며 말발자국이 선명하게 파여있는 땅을 만지는 것이었다. "역시 서리맞은 땅은 딱딱하지 않아 말발자국이 쉽게 남지... 챠퍼! 앞쪽으로 가서 말 발자국이 있는지 살펴봐!" 갑작스러운 명령에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파숄을 떠나 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 그에게 되물어 봐야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챠퍼는 카밀턴의 말을 지나 길의 앞쪽으로 걸었다. 몇 발자국 걷던 챠퍼는 안력을 돋구어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자 다시 카밀턴에게 되돌아가며 말했다. "흠... 앞쪽은 깨끗합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흩어진 흔적이 없는 것을 보니 한동안 아무도 이곳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땅의 흙을 불끈 움켜진 카밀턴은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죠슈드! 오늘 파숄에서 말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거나 말 발굽 소리를 들은 적 있나?!" 질문을 받은 죠슈드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았는데, 하루종일 뮤스의 행적을 관찰하던 그였기에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일행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없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대장님도 알다시피 요즘같은 계절에는 모험자들이 크게 줄어 별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물론 말발굽 소리나 그 비슷한 소리도 못들었습니다." 카밀턴은 이제야 뭔가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외쳤다. "제기랄! 우리가 그 커리큘드라는 자에게 농락을 당했군! 마음이 조급해지는 바람에 냉정하지 못했어... 서둘러라 지금 바로 파숄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틀림없이 아직도 파숄에 머물고 있을 것이야." 분한 마음을 추스릴 시간도 없이 카밀턴은 공기를 가르며 몸을 돌렸고 대충 어찌된 일인지 눈치를 챌 수 있었던 수하들 역시 다시 말에 올라타며 말 머리를 돌렸다. 같은 시간, 두 마리의 말이 절묘한 흑백의 조화를 이루며 파숄을 빠져나와 북쪽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뮤스와 그라프는 긴 여행을 대비하여 몇 시간 동안 잠을 잔 후에 커리큘드와 작별을 하고서 떠나는 길이었다. 파숄에서 지내는 동안 커리큘드에게 기마술을 배운 뮤스는 제법 안정된 자세로 말을 몰았고, 그라프는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뛰어난 기마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가닥! 타가닥! 타가닥! 푸드득! 바람을 정면으로 받은 뮤스는 눈을 찌르는 듯한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반면 그의 옆에서 달리던 그라프는 모자의 챙을 적절하게 내리며 바람을 막고있었는데, 지금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었지만 모자의 챙이 내려간 모습을 보니 원래 바람을 막을 용도로 제작된 듯 했다. 그런 모습이 조금 부럽다고 생각을 한 뮤스는 대용품을 찾기위해 가방으로 손을 넣었고, 곧 공학원에서 금속재련시 자주 쓰던 안구보안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충 한 손으로 그것을 착용한 뮤스는 그럭저럭 만족 할 수 있었고 이제야 여유가 생긴 뮤스는 그라프에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었다. "그라프님.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커리큘드씨게 말씀하셨던 마물에 대한 방비책이라는 것이 무엇이죠? 솔직히 이제 그라프님과 저 둘만 남게되니 마물들을 만나는 것이 조금 걱정되는 군요." 요란한 말발굽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을 법도 했지만, 그라프는 뮤스의 말소리를 놓치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허헛! 우리가 지금까지 미개척지를 돌아 다니면서 카일락스를 제외한 마물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전투능력이 거의 전무한 쥬라드 사제와 내가 단 둘이 미개척지까지 온 것도 충분히 의심해 볼만 했을 텐데?" "생각해보니 그랬군요. 하지만 그점에 대해서는 별달리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는 뮤스를 보며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바로 나의 품안에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지." 드래곤의 낭소라는 말을 들은 뮤스의 인상은 눈에 띄게 일그러졌는데,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크라이츠의 얼굴이 떠오르며 연관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낭소라니요? 설마 생식작용을 하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뮤스의 모습을 보던 그라프는 자세한 사연까지는 몰랐지만,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반응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이 진짜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은 아닐세.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드래곤의 낭소를 구한다는 것이 어디 가능하기나 하겠나? 내가 가지고있는 것은 그저 드래곤의 낭소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냄새를 인공적으로 발산하게 해주는 작은 주머니일 뿐이야." 그라프의 설명을 듣고서야 뮤스는 미간의 주름을 펼수 있었고,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맡아 보려 했지만 그의 코에서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숲의 향기일 뿐이었다. "흠흠... 저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겠는데요? 그 드래곤의 낭소라는 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자네도 알겠지만 드래곤은 최강의 존재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레어 주변에는 어떠한 마물도 마음껏 활동을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럴려면 어디가 드래곤의 레어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 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낭소에서 나오는 특유의 냄새일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뭇가지 하나를 고개를 슬쩍 숙이며 피한 그라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처음 이것을 만들 당시만 해도 그저 고대의 서적에서 영감을 얻은 이론일 뿐인데다가, 그 드래곤의 낭소에서 나온다는 냄새가 사람의 감각을 벗어나는 영역이었기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지. 하지만 여러번 여행을 통해서 시험해본 결과 나의 이론이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네. 그 후로는 여행을 할 때면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지." 그라프의 설명을 들으며 말을 달리던 뮤스는 그라프의 실험 정신에 대하여 감탄해 마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드래곤의 낭소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보아하니 카일락스와 같이 지능이 없이 본능만으로 활동을 하는 마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용이 없는 듯 합니다만 그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날카로운 뮤스의 지적에 그라프는 마치 그런 지적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말했다. "역시 뮤스원장 답군.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범주에 속하는 마물의 종은 그리 다양하지 않을 뿐더러 그 수 또한 극히 적기 때문에 직접 찾아 나선다해도 만나기가 힘들 정도일세. 자네가 예를 들었던 카일락스 역시 지난 수백년간 잊혀지다 시피 한 존재 아닌가." "그렇다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언제 들어도 설득력있는 그라프의 말을 들으며 뮤스는 자연스레 수긍하고 있었다. 이제야 뮤스의 궁금증이 해소 된 듯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자 그라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히 혼잣말을 했다. "설령 그런 마물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자네 처럼 든든한 젊은이와 함께 있으니 그리 두렵지만은 안네그려..." 뮤스는 그런 그라프의 독백을 듣지 못한 듯 말을 달리는데 정신을 쏟았고, 그가 탄 백마는 새하얀 입김을 불어내며 새벽의 숲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대공학자> #192 (수정) 뮤스와 그라프를 보내고서 서운함에 잠이 잘 오지 않았던 큐리컬드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동료들과 함께 파숄의 외벽에 올라 앉아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피부 위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금새 식으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또 다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시작해 콧망울을 타고서 땅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느끼며 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큐리컬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먼 발치를 내다보았다. "흠 새로 들어오는 모험자들인가?" 혼잣말을 내뱉은 큐리컬드는 잠시 쉴겸 팔을 늘어트린채 마을로 접근하는 일행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말을 탄 일행들은 외벽의 100멜리까지 접근 했는데, 그때는 이미 큐리컬드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차렸을 때였다. "호오... 벌써 돌아오고 있다니 생각보다 빨리 눈치가 빠른걸? 카밀턴이라는 자는 꽤나 쓸만한 능력을 가진 것 같군. 그나저나 이번에는 뭐라고 둘러대지?" 여전히 여유로운 말투로 중얼 거리던 큐리컬드는 자신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양 팔짱을 끼며 외벽까지 거의 다다른 카밀턴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같은시간에 말을 달리던 카밀턴의 눈에도 외벽에 걸터 앉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큐리컬드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지난 밤동안 그의 말에 속아 어두운 숲속을 헤맸다는 분한 생각에 어금니를 질끈 깨문 카밀턴은 말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활을 꺼내 잡았다. 그리고 전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어 시위를 먹이며 큐리컬드를 겨냥했는데, 수천번의 반복된 훈련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재빠른 행동이었다. 화살 촉의 끝으로 큐리컬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큐리컬드는 카밀턴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이봐! 아침 인사치고는 너무 과격한 것 아닌가?!" 떠듬거리는 큐리컬드의 목소리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밀턴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있는 시위를 가볍게 놨고, 촉부터 깃까지 검은색 일색인 한 대의 흑전은 화살은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자신을 향해 무심하게 날아오고 있는 화살을 확인한 큐리컬드는 마른침 한번 삼킬 시간없이 외벽을 방패삼아 몸을 날렸다. -텅! 아슬아슬한 차이로 화살을 피했을 때, 마치 큼직한 못이 벽에 박히는 듯한 소리가 외벽으로 부터 들려왔고, 안전하게 피했다는 생각에 큐리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했다. 하지만 화살을 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생각없이 몸을 날린 곳이 발판 하나 없는 곳임을 알아 차렸을 때는 더욱 다급한 한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결국은 화려한 몸짓으로 허우적 거린 큐리컬드는 전신으로 맨땅을 맞이해야만 했다. -털썩! 밀가루 포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 큐리컬드는 충격이 꽤나 컸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한채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벽중에도 낮은 곳이었기에 크게 다지치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만약 가장 높은 외벽에서 떨어졌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상황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미친 녀석... 아무리 약이 올랐어도 그렀지 대뜸 보자마자 활을 쏴대다니..." 투덜거리는 말과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킨 큐리컬드는 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팔이 약간 뻐근한 감이 있긴 했지만 큰 부상은 없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을의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마을로 들어온 카밀턴 일행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는데, 땅을 밟자마자 큐리컬드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성큼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큐리컬드는 만에하나 그들이 공격할 것을 대비하여 벨트에 매달려있는 단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곳은 자신의 본거지 겪인 곳인만큼 그들이 허튼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특유의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이렇게 과격하게 행동하면 쓰나... 덕분에 머리가 산산히 깨질 뻔 했다고." 큐리컬드의 말을 듣고있는 카밀턴은 이제 그의 성격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심리전에 휘말리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 참 유감이군. 조금만 빨랐으면 그 얄미운 입에 화살을 처박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어허... 말이 좀 심한 것 아닌가?" 비록 카밀턴의 말투가 거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 병장기를 꺼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직감한 큐리컬드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큐리컬드의 코앞까지 바짝다가온 카밀턴은 눈을 얇게 뜨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괜한 충돌을 이르켜 봐야 우리의 일에도 도움이 될 이유가 없으니 다른 소리는 하지 않겠네. 그들이 어디있는지 말하게." 오히려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고함을 지는 것 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기가죽을 큐리컬드도 아니었기에 얼굴을 뒤로빼며 대답했다. "이봐... 물론 자네를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나에게도 의리라는 것이 있다네. 하지만 이번만은 내 이름을 걸고 맹새 할 수 있어. 그들은 자네들이 이곳을 떠난 후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카밀턴은 아무런 말없이 큐리컬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또 다시 그가 거짓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고, 이후로도 둘 사이에는 지루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카밀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의 입장 역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만큼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하고있는 행동은 나의 신념을 짓밟으려는 것이고, 나 또한 더 이상은 묵과할 수는 없을 것일세. 만약 이번에도 자네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내가 이끄는 단체의 모든 힘을 들여서라도 그 대가를 치루게 할테니 그쯤은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말을 마친 카밀턴은 더 이상 대화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등을 보이며 뒤돌아 섰고, 멀뚱히 남은 큐리컬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대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유모를 신음성을 흘렸다. "흐음... 젠기랄. 아침부터 화살까지 쏴댄 주제에 뭐가 원망을 안했다는거야." 그의 투덜거림이 끝나있을 때 카밀턴은 이미 일행과 함께 자신들의 말까지 걸어가 있었기에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큐리컬드의 본능 또한 그가 듣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밀턴의 그 당당함과 위압감, 또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는 모습이 큐리컬드가 지금까지 봐온 그 누구의 그것보다 대단했기에 대립하는 입장이었음에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그를 인정을 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쯤 뮤스와 그라프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렸기에 아무리 힘 좋은 말이라도 지치기 마련이었고, 더우기 언덕을 하나 막 넘어오던 참이었기에 그들의 말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각, 따각... 말을 이끌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라프가 문득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쯤이면 우리가 뒤늦게 떠났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군..." 그의 독백을 들은 뮤스 역시 고삐잡은 손을 늘어트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물었다. "벌써 그들이 눈치를 챘을 까요? 어쩌면 이대로 실마리를 놓쳐 추적하을 포기 할지도 모를 것 같은데..." "허헛! 자네 그들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구먼. 나는 그런 부류의 인물들을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네... 늦더라도 내일 저녁 쯤이면 우리의 속도를 따라 잡게 될 것이야." 그라프의 이야기를 토대로 카밀턴의 능력을 짐작해 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그의 말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제가 미개척지를 한동안 떠돌아 봤지만, 이렇게 길도 확실치 않은 곳에서 사람 한명을 찾는 것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마물들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 우리와 이동 속도가 같을 수도 없다는 것이죠." "허헛! 자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 같은데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세. 듀들란 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이첸 제국의 특전사단 같은 경우에는 모든 훈련을 미개척지에서 진행하고 있지. 즉, 그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살아 남는 훈련과 동시에 추적, 암살등의 훈련을 병행한다네. 지금까지 자네는 그들의 깍듯한 태도만을 봤기 때문에 실감을 할수 없을 테지만, 지금과 같이 약이 오른 상태에서는 그들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일세. 우리는 아주 멋진 구경을 하게 될거야..." 결국 자신들에게는 극히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여유를 부릴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라프는 여전히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허허허... 지금은 말도 너무 지쳐있고 또, 무작정 도망만 가는 것은 너무 볼썽 사납지 않겠나?" "그렇지만 그들이 추적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말을 마치며 주변 환경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끌어당기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흠... 이곳 어디 쯤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아무튼 내 기억력도 옛만 못해졌군." 벌써 수십년 동안이나 되풀이 했던 자신의 기억력에 대한 불평을 오늘 역시 빼놓지 않은 그라프는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듯이 숲속을 꼼꼼히 따지며 걸어갔고, 뮤스는 영문도 모른채 그의 시선을 따라 숲을 살피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찾아 돌아 다닌지 벌써 두어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뮤스는 천천히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을 애써 눌렀는데, 예전의 그였다면 벌써 폭발을 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까지 한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던 그라프가 문득 자리에 멈추며 턱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만족한 표정으로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헛! 바로 이곳이야! 그래도 아주 몹쓸 머리가 된건 아닌가보군 그래..." 자찬을 하던 그라프는 말의 고삐를 나즈막한 나뭇가지에 걸어었다. 하지만 뮤스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까지 지나온 장소들과 별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 다녔다는 말씀이십니까? 도무지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옆으로 치워놓던 그라프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혹시 사냥을 위해서 트랩을 설치해본 적이 있나?" 자신의 물음과 상당히 동떨어진 질문이었지만, 그라프가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지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트랩이라면 덫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토끼를 잡기 위해 덫을 놔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날은 집에 돌아와서도 덫에 대한 생각에 잠을 못이루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서 덫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었죠." "호오... 꽤나 좋은 추억이군. 우리가 북쪽으로 올라온 것도 바로 그 트랩을 놓기 위해서 일세. 그 다섯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만한 덫을..." 그제야 그라프가 노리는 것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어른들에게 배웠던 덮놓는 방법을 떠올리며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던 이 장소에 대해 감탄사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는데, 나무들과 수풀의 배치가 마치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것인 양 적재적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나무들의 위치... 지나온 길의 모습... 사방을 나무와 수풀이 적절하게 가리고 있으니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들어온 길 한 곳 밖에 없군요. 과연 몇시간이나 헤메면서 찾아올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라프는 이 장소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뮤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하나의 길도 폭이 좁기 때문에 트랩을 설치하기에는 더 없이 좋지. 그다지 사간이 많지 않으니 자세한 것에 대해서는 차근 차근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자네의 말도 어디에 묶어 두게나. 해야 할 일이 많은 만큼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편도 좋을 것이야. 미안하지만 힘쓰는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었거든."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만큼 제가 해야하는 일입니다." 뮤스는 오히려 자신 때문에 함께 고초를 겪고 있는 그라프에게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말고삐를 당겨 끌었다. 대충 여장을 풀어 놓은 뮤스와 그라프는 나무를 하나씩 만져가며 숲속을 걷고있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우물거리며 씹고 있었는데 이론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해먹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에 파숄에서 준비해온 건량을 씹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입속에 넣었을 때 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건량을 삼킨 그라프는 비교적 크기가 작은 나무의 밑둥을 손으로 두들겨 보며 뮤스를 불렀다. "이보게! 이 정도쯤이면 쓸만하겠군. 이 나무 좀 잘라 주겠나?" "아... 적당한 나무를 찾으셨나 보군요." 먼 발치에서 그라프의 부름을 듣고 걸어온 뮤스는 가방에서 작은 크기의 전뇌톱을 꺼내들었다. 이것 역시 공학원의 작업을 위해 그가 만든 전뇌공구 중 하나였고, 전뇌거경주에서 사고가 났을 당시 전뇌거 해체에 쓰였던적이 있었던 물건이었다. 가볍게 뇌공력을 끌어올리며 작동 시키자 전뇌톱으로 부터 진동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라프님 잠시만 옆으로 물러나 주시죠." 그라프에게 주의를 준 뮤스가 전뇌톱을 나무에 가져다 대자 별 힘을 가하지 않고서도 나무의 밑둥으로 손쉽게 밀어 넣을 수 있었는데, 빠르게 움직이는 톱날을 타고 잘려진 톱밥이 어지럽게 튀기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위이잉! 톱날이 조금 들어가자 나무토막을 하나 주워든 뮤스는 그것을 잘려진 나무 틈으로 끼워 넣었고, 톱날이 더 들어갈때 마다 나무토막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이것은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을 임의로 조정하는 방법으로써 드워프들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이제 잘려지지 않은 부분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 뮤스는 전뇌톱을 빼냈다. 그리고 나무토막이 끼워진 반대 방향으로 나무를 밀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뻗어있던 나무가 기울어 지기 시작했다. -우지끈! 촤아아아악! 우거져있는 나뭇가지들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땅으로 곤두박질 치자 살짝 비켜선 뮤스는 허공을 뒤덮기 시작한 먼지를 손으로 쫓아내며 그라프를 향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뮤스의 깔끔한 일처리에 감탄을 하고있던 그라프는 쓰러진 나무로 다가와 이곳 저곳을 살폈다. "호오... 정말 눈깜짝 할 사이에 쓰러트렸구먼. 그 톱을 사용한다면 금방일 것 같으니 내가 말해 주는대로 나무를 잘라주게. 여기 부터 여기 까지는 두터운 부분이니 가로로 잘라서 통나무의 형태로 놔두고, 나무의 위부분은 발사장치로 만들어야 하니 얇은 판 모양으로 잘라주게나." 전뇌톱을 팔에 낀체 그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뮤스는 잠시 생각을 해보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발사 장치라면 탄성과 함께 상당한 강도 필요할테니 나이테와 수평이 되도록 얇게 자른 후 서로 엊갈리게 붙여야 하겠군요." "그렇게 해준다면 탄력을 못이기고 부러질 일은 없겠지. 그리고 다음은..." 이런식으로 뮤스와 그라프는 자신의 생각을 의견 교환하며 일을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라프가 가지고 있는 트랩에 대한 지식과 뮤스의 기술이 하나로 묶이며 눈부신 속도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공학자> #193 니카도는 지난 몇 달간을 자신의 인생의 암흑기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대륙 최고의 대학인 스윈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졸업때는 스윈대학 10인의 최우수학생에 선정되기까지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도 듀들란 제국 황실교섭단에 최우선 발탁되어 외교관들과 함께 수많은 교섭을 성공으로 이끌었기에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창천일로를 걸어가던 그였다. 허나, 사람의 일이란 예측할 수 없다고 했던가... 단 하루만에 그의 모든 꿈들이 허물어져 버렸는데, 그 시작이 특무대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단체에서 파견 되면서 부터였다. 그는 처음 카밀턴 일행들을 만났을 때 부터 불안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옷에 재단용 바늘이라도 꽂힌 듯 뻣뻣한 움직임과 숨이 막힐 것 같이 무거운 눈빛들, 그리고 일생을 아무런 재미없이 살고있는 것으로 보이는 카밀턴이라는 사내. 이것은 학창시절 때에도 흔히 말하는 샌님으로 불리던 니카도가 결코 소화해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팔자에 없는 체력강화 훈련 덕에 수도 없이 까무러쳐야만 했고,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수십번도 더 길을 잃고 헤메야만 했다. 덕분에 몸에 근육이 조금 붙고 날렵해 졌다는 것은 인정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니카도는 그나마 육체의 고통은 하나의 추억으로 생각하며 그럭저럭 참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경험한 교섭 실패의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바로 뮤스라는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감히 교섭의 수재라고 불리던 자신의 설득을 뿌리쳤던 것이었다. 물론 이번 일이 자신의 능력 미달로 인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체력훈련으로 인해 상대에 대해서 조사 할 시간도 별로 주어지지 않은 데다가 특무대의 일인 만큼 보안을 요했기에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교섭대상인 뮤스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내려온 빈약한 자료들에만 의존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즉, 그 어떤 교섭인이 이 일을 맡더라도 이 이상의 결과는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이 맡은 일이었고 결과는 실패였다. -채챙! 창! 창! 퍼퍽! 복잡한 심정으로 상념에 빠져있던 니카도는 고막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울리는 금속음을 들으며 동공에 힘을 주어 일행들을 살폈다. 그들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초록색의 피를 뒤집어쓴 채 무감하게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술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신은 여지없이 추악하게 생긴 마물들의 목에 틀어 박혔고, 목이 잘려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던 마물들은 몸을 부들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장면이었지만 이미 여러번 경험한 일이었고 이제는 니카도 자신도 조금씩 무감해 지고 있었다. 마물들과의 전투가 시작된지 불과 이십분 만에 차가운 땅에서 뒹굴며 체온이 식어가는 마물의 수는 스물을 넘겼고, 남아있는 마물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마물의 가슴에 박아 넣은 장검을 비틀어 빼낸 카밀턴이 볼에 묻은 마물의 혈액을 닦아내며 외쳤다. "갈길이 바쁘다! 나머지를 서둘러 처리해!" 귀에 박히듯이 들려오는 카밀턴의 목소리에 대원들의 몸에는 한층 더 힘이 들어갔고, 마물들의 수는 더욱 빠르게 줄어가고 있었다. 십여분이 지나자 더 이상 땅위에 서있는 마물들이 없게되었고, 카밀턴은 초록색으로 얼룩진 천을 꺼내어 검신을 잘 닦아내기 시작했다. 비록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혈액와 같이 공기와 닿으면 응고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혈액을 닦아내지 않은 상태로 검집에 넣었다가는 긴급상황시 검을 뽑는데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역시 북으로 올라갈 수록 마물들의 수가 많아지는군. 이 따위 고블린떼들을 잡는 것이야 장난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전투 때문에 뮤스원장의 이동 흔적이 없어지면 곤란한데..." 그의 옆에서 함께 검신에 묻은 혈액과 마물들의 살점을 닦아내던 챠퍼가 물었다. "하필면 왜 뮤스원장이 북쪽을 택했을까요? 전투능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마물 때문에 오히려 다른 곳 보다 이동하기에 수월치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그가 전문적인 전투훈련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검의 손질을 끝낸 카밀턴은 검집에 그것을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글쎄...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우리는 그저 그들이 도망 가는 곳으로 따라갈 뿐이지. 이번에 그를 놓친다면 엄청난 시간을 또 다시 이 빌어먹을 미개척지에서 헤매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카밀턴의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말을 이끌고 앞쪽으로 나간 죠슈드가 돌아오고 있었다. "대장! 앞쪽에서 다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말발자국이 깊이 나있지 않은 걸로 봐서 그들의 말이 이쯤에서 지치기 시작한 듯 합니다." 잠시 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카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터 속도가 많이 줄었을 테니, 우리가 조금 무리해서 움직인다면 오늘 저녁쯤이면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 다시 출발!" 카밀턴을 선두로 일행들은 모두 말에 올라탔다. 그들의 말들 역시 지친 듯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긴 했지만 앞으로 몇 시간 정도는 무리없이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말의 배를 차며 길을 재촉했다. 니카도는 심신이 모두 지쳐 혼자만이라도 듀들란 제국으로 돌아고 싶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미개척지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 했기에 어쩔 도리 없이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카밀턴일행이 다시 말에서 내린 것은 해가 거의 저물어갈 쯤이었다. 그들의 추적 단서가 되는 말발자국이 극히 흐려졌기에 말 위에서는 확인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추적 속도가 늦어졌다고 해도 상대의 이동 속도 역시 늦춰 줬다는 말과 같았기에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일행들 중 가장 앞서 단서를 찾고있던 죠슈드가 카밀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 부터는 말이 달린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뭇잎들이 흩어진 모습을 보니 말에서 내려 걸어 간 듯 하군요." 죠슈드의 보고를 받은 카밀턴은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쓸었다. "흠... 아무래도 이상해. 보통 이렇게 나뭇잎이 높이 쌓인 곳에서는 사람의 이동 흔적을 찾기가 아주 힘들지. 추적자들에게 일부러 이동경로를 가르쳐 주려 마음을 먹지않은이상... 하지만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흔적이 남아있단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밀턴은 챠퍼를 향해 물었다. "쇼메트! 이런 설정하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읊어보게." 말갈퀴를 만져주며 지친말을 달래주던 쇼메트는 손을 멈추고 책이라도 읽듯이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이런 경우 총 세가지의 상황이 특무대 지침서에 나와있습니다. 트랩의 설치를 토대로 한 유인, 전투에 능하지 못한 목표의 실책, 제 3자의 전투에 의한 지형오염이 그것이죠. 하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뮤스원장의 실책으로 만들어진 흔적이라면 이렇게 규칙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고, 전투에 의한 지형오염이었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흠... 그렇다면 뮤스원장이 우리를 맞이 하기위해 트랩을 설치하고 기다린다는 결론인가?" "다른 상황을 간과 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써는 확률상 가장 유력합니다." "허헛! 우리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것인가? 트랩이라..." 웃음을 터트리며 말끝을 흐린 카밀턴은 죠슈드를 향해 외쳤다. "죠슈드 앞장서라! 계속 흔적을 따라 추적한다!" "넷!" 짧게 대답을 하며 몸을 돌린 죠슈드는 이미 예상했던 카밀턴의 행동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밀턴과 함께 5년이 넘는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죠슈드였기에 그에 대해서라면 성격을 비롯해 작은 버릇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데, 길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전진하는 대범함이 바로 카밀턴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은 숲속, 뮤스와 그라프는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붉고 노란 빛을 발하는 모닥불이 타닥이는 소리와 함께 타올랐고, 추위를 느낀 그라프는 모포로 몸을 감은채 손을 내밀여 불을 쬐고 있었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카락과 목둘레의 옷들은 땀에 젖어있었다. 몸을 녹이던 그라프는 숨을 한번 들이쉬며 부러운 눈빛으로 반대편의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헛. 정말 자네의 그 젊음이 부럽군 그래.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는데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다니..." 담담한 눈빛으로 그라프와 시선을 맞춘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별말씀 다하십니다. 저는 그저 몸 안의 내공력 덕으로 쉽게 지치지 않을 뿐이지 체력적으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내공력이라는 것 역시 자네의 일부 아닌가? 껄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의 부러움에 찬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뮤스는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군요. 땅의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지나 봅니다.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한 것도 아닌데 파숄에서 볼 수 없었던 안개가 생기는 것을 보니 이곳이 북부는 북부인가 보군요." 뮤스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던 그라프는 안개를 만지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자네의 지식은 정말 알 수 없는 지경이군. 이 안개 역시 공학의 이론으로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자연의 위대함 모두를 공학을 통해 설명 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현상에 대해서는 설명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안개가 생성 되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대지의 온도가 급속히 떨어지면서 공기속의 수증기가 냉각되면서 생기게 되는데..." 뮤스의 설명이 길어질 듯 하자 그라프는 자신의 질문을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고, 손을 내저으며 더 듣기를 마다했다. "아니네... 어차피 전혀다른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자네에게 그런 설명을 들어 봤자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 뻔하지. 게다가 나는 지금 너무 지쳐있다네." 애초 그라프는 뮤스의 설명을 듣는데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뮤스의 설명을 알아듣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용어적 문제가 가장 크다는 점이었는데,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수 많은 질문을 덧붙여야 했기에 몸이 한껏 피곤해져 있는 그라프로써는 지금 상태로 집중해서 설명을 듣는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었다. 땀을 식히며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린 그라프가 말을 이었다. "기왕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 말하는 것인데, 우리가 북쪽으로 이동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안개 때문일세." 그라프의 말투를 보아 이 시기에 이곳에서 안개가 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단순하게 안개의 생성 원리를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점을 잘알고 있는 뮤스는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어..어떻게 그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무려 파숄로 부터 200켈리나 떨어진 곳의 상황을..." 수염을 한번 매만진 그라프는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에게 안개의 생성 원리를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나에겐 이러한 자연의 조화를 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일세. 어찌 본다면 대현자라 불리울 정도의 사람이 자연의 조화의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지." 아직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뮤스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는 듯 무릎을 치며 물었다. "아! 그렇다면 대현자란 마치 신선과 같은 존재로군요. 물론 신비한 능력을 가지신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달통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선이라...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라프의 되물음을 받은 뮤스는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말 실수를 자책하며 대충이나마 상황에 맞게 꾸며댔다. "그..그건 저희 조이센 대륙에서 신비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죠. 뭐랄까... 마치 현자와 같이 세상사에 모르는 것이 없으면서 마법사와 같이 놀라운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랍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한 사람이 현자와 마법사 노릇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머리를 한차례 긁적인 뮤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지 신선이라는 존재를 실제 목격한 사람은 없죠.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이니까요." "하긴... 어디나 그런 전설은 있는 법이니까." 그제야 그라프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뮤스는 안심 할 수 있었다.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도록 하지. 나는 이맘 때 쯤이면 미개척지의 북부 지방에 심한 안개가 생긴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대로 트랩을 설치하기에 이곳은 더 없이 좋은 장소가 되는 것이었고, 잠시 후면 더욱 안개가 심해질테니 아무리 트랩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안개라면 트랩을 해체하는데 상당한 고초를 겪을 것일세." "음... 그렇다면 안개 때문에 시야가 한정적인 숲 속에서 우리가 설치한 트랩을 찾아 내기란 정말 힘들테니 추적자들이 트랩에 걸려들고난 후에 유유히 빠져 나간다는 말씀이시군요." 뮤스의 말을 듣고 있던 그라프는 어쩐일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저 정도의 트랩은 그들에게 곤란함을 줄수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다네. 결국 그들은 우리가 설치한 트랩을 모두 해체 하고서 이곳까지 들어 올 것이 틀림 없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란 뮤스는 토끼눈을 뜨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 트랩들로는 그들을 막지 못한다는 말씀이신데, 무슨 이유로 흔적까지 남기면서 그들을 유인한 것이죠? 만약 이곳에서 트랩이 그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망갈 수도, 맞서 싸울 여력도 없습니다." 뮤스의 말에는 틀린점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뇌동체술법을 익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전문적으로 살상기술을 익힌자들 이었고, 도이첸 제국의 황실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들을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그라프에게는 어떤 입장으로 나올지도 알 수 없었기에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일일세. 그들은 자네가 어디까지 가든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추적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미리 설치해 놓은 트랩에 걸려들어 우리의 종적을 놓친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우리를 추적 할 것일세." 말이 길어지면서 폐부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느낀 그라프는 코를 한번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흠... 자네가 앞으로 미개척지에서 지내야 할 남은 시간은 2년 반, 그 오랜 시간을 그들에게 쫓기며 지낼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떼어 놓을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답답함이 깃든 뮤스의 질문을 받은 그라프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대답했다. "그 방법은 바로... 진심으로 그들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일세. 더 이상은 추적을 하더라도 자네를 어찌 할 수 없다는 강렬한 인상을 그들의 뇌리에 새겨 넣는 것이지. 그것도 자네의 능력으로 직접..." "하..하지만, 저에게는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뮤스를 바라보고있던 그라프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말을 가로 막으며 품으로 부터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혹시 폴리크개구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잠시 머뭇 거리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글쎄요. 그런 개구리의 종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만..." "그렇다면 내 설명을 잘 들어 보게나. 폴리크개구리는 대륙 남부의 습지에 서식하는 개구리의 일종일세. 이 개구리는 몸집도 다른 개구리에 비해 유난히 작은데다가 몸의 색 또한 울긋불긋 요란해서 적의 눈에 발견되기 쉽다는 불리함까지 가지고 있다네. 하지만 이러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폴리크개구리가 수천년 동안 멸종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들의 몸에서 분비되는 독기 때문인데 그것을 흡입한 적들은 금새 생명을 잃고 말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라프는 손에든 유리병을 한번 흔들어 보이며 말을 어있다. "이 병에 든 것이 그 폴리크개구리의 독기를 모아놓은 것일세. 비록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독기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작용을 하게 된다네." "특이한 작용이라면 어떤?" 폴리크개구리의 설명에 호기심이 발동한 뮤스가 허리까지 세워가면서 물어오자 그라프는 뭔가 재미있는 상상이라도 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공학자> #194 트랩속의 트랩 해가저물기 시작한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않았서 숲속에는 밤이 찾아왔다. 낮에 비해 급껴히 떨어진 기온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뮤스를 추적하고 있던 카밀턴 일행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아직 달이 밝지 않아 시야 확보가 힘들었지만, 추적자의 입장에서 횟불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움직임 속도를 더욱 제한하는 것은 어느순간 부터 점점 진하게 허공을 감싸기 시작한 안개였다. 불과 반시간 전만해도 입김에과 구분이 안될 정도의 옅은 안개였지만, 지금은 3~4 멜리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안개가 겹쳐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추적은 커녕 길을 잃기 쉽상이었기에 걸음을 멈춘 카밀턴이 말했다. "안개가 너무 심하군. 죠슈드 아직도 뮤스원장의 흔적을 볼 수있나?" 무릎을 굽히며 앞으로 나있는 길의 표면을 보던 죠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의 확실한 흔적이라면 안개가 아무리 진하게 끼더라도 추작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흠. 추적이야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는 트랩이지. 아무리 트랩 해체에 능숙하더라도 이 정도의 안개에서 트랩을 발견해내기는 까다로울텐데..." "그렇다면 이곳에서 안개가 걷힐 때 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죠슈드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밀턴은 이내 어떤 생각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강행하는 것은 위험하겠지만 시간을 지체 할 수는 없지. 대원들은 팔 하나의 간격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트랩 해체 대형을 이루도록. 니카도는 대원들이 트랩의 유무를 확인 한 곳으로만 따라오게." 카밀턴의 명령이 떨어지자 죠슈드의 옆에서 날씨를 살피던 챠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카밀턴에게 다가왔다. "대장님.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만약 그가 트랩을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면 트랩에 대한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고, 아무리 우리 특무대라도 이런 안개 속에서 완벽하게 트랩제거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명령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던 챠퍼에게 시선을 돌린 카밀턴은 조용하면서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챠퍼.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졌나? 대원들은 대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사실을 잊었나?" 카밀턴의 묵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챠퍼는 딱딱한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카밀턴 대장님!" "뮤스원장이 아무리 대단해 봤자 일반인이다. 특수 군사훈련을 받은 우리와 비교를 할수는 없는 것이지. 위치로 가게." 단호한 결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카밀턴은 찬바람을 뿌리며 몸을 돌렸고, 제자리에 남은 챠퍼는 그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죠슈드는 챠퍼의 등을 두들겨주며 입을 위로의 말을 건넸다. "대장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서 그럴 테니까 자네가 이해하게. 그리고 저렇게 강행 하는 것을 보면 대장도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거야. 비록 지금은 특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동료의 위로가 고맙긴 했지만 카밀턴에 대해 조금 섭섭한 기분이 남아있던 챠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카밀턴을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카밀턴과 그의 수하들은 허리를 최대한 숙인 채 점차 짙어지는 안개를 헤쳐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나뭇잎 하나를 밟는 대도 조심스러웠고, 손짓은 안개를 스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가장 앞쪽에는 챠퍼와 죠슈드, 그리고 카밀턴이 안개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는데, 사실 길이 좁았기에 더 이상 떨어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뒤따르는 쇼메트와 니카도의 긴장은 비교적 덜해 보였지만, 누군가가 대형트랩이라도 잘못 건들게 된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특무대 대원들이 안전할 수 없었기에 느긋 할 수만은 없었다. 문득 가장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카밀턴은 무엇이라도 발견한 듯 오른 손을 들어 수하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곤 엄지와 검지를 넓게 펼치며 길의 양옆으로 비키라는 수신호를 하자, 수년간 함께 해온 수하들은 직접 귀로 명령을 듣기라도 한 듯 서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안전한 곳으로 움직였다는 판단이 선 카밀턴은 트랩제거용 소형절단기를 하나 꺼내어 천천히 땅에 업드렸다. 그의 눈이 멈춘 곳에는 약간의 물기를 머금어 빛을 내고 있는 어두운 색의 철사가 나뭇잎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한숨이라도 내쉬듯이 입을 모으며 철사를 향해 입바람을 불자 그 위를 덮고 있던 나뭇잎이 뒹굴며 사라졌고, 길을 가로지르며 팽팽하게 걸려있는 철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철사를 살피며 그 끝으로 걸어간 카밀턴은 수하들을 향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고, 마지막 새끼 손가락을 꼽음과 동시에 그의 절단기는 철사를 잘랐다. -촤아아아아악!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약 10멜리에 걸쳐 길을 덮고 쌓여있던 나뭇잎들이 파도타기라도 하듯이 들썩거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나뭇잎이 날카로운 것에라도 잘린 듯 두 조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본 카밀턴은 꽉쥐어진 주먹 속에서 땀이 베어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고강도 유리사라니... 이것을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우리의 발목은 모두 종아리에서 분리되었을 것이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혼잣말을 하던 카밀턴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수하들을 돌아 보았다. 그들 역시 수많은 전장을 찾아 다녔기에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 하지 않을 간담의 소유자들 이었지만, 이번에는 충격이 만만치 않았던 듯 잠시 동안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인 카밀턴은 그들의 마음이 진정도 되기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겨우 첫번째 트랩을 해체했다. 겨우 이정도로 넋이 나가 있다니... 어차피 우리는 특무대에 들어오면서 목숨을 버렸지 않나... 계속 전진한다." 카밀턴의 위압적인 외침소리를 들은 대원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식 특무대의 대원이 아닌 니카도에게 만은 카밀턴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미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그때 제의를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돌아가기만 해봐라! 이 따위 파견서나 들고와서 떵떵거리던 사무관 녀석의 잘난 목을 비틀어 버릴테니!"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사실을 니카도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비겁한 짓이 아닙니까?!" 뮤스는 그라프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얼굴까지 상기된 그는 그라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쳤는데, 너무나 꽉 막힌 뮤스의 사고방식에 그라프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헛...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정석으로 살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전문적으로 전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자네같이 평범한 청년 한 명을 뒤 쫓는 것은 비겁한 짓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은 명령이라는 말로 대신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비겁한 짓이란 말일세. 게다가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살상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중독 되더라도 하루만 쉰다면 금방 해독이 되는데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 고개를 숙인채 갈등에 쌓여있는 뮤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그라프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볼 때 자네는 너무나 순수해.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엉켜 살아가는 곳에서 나약하다는 말과 같지. 세상은 순수한 사람이 대체로 피해를 보는 법이거든."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드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때에 그런 감상에 빠져있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거든. 어떻게 하겠나?"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뮤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 그라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목숨하나 책임지지 못하면서 다른이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인것 같군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대답을 잠시 미룬 그라프는 고개를 돌려 트랩들을 설치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곤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했다. "음...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그들이 이곳까지 오겠군. 그들이 20멜리 이내로 접근한다면 내가 직접 폴리크개구리 독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깨트리겠네. 그 독이 공기중으로 퍼질때 희뿌연 독무가 생기지만 지금같이 짙은 안개가 생겨있는 상태라면 눈으로 분간하기 힘들테고, 수많은 트랩들을 거쳐온 직후였기에 긴장감이 크게 풀릴테니 절대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일세. 다만 피곤함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을 할테지..." "그렇다면 저렇게 트랩을 설치했던 것도... 그들을 완벽하게 중독시키기 위해서 였다고 봐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런것 까지 예상을 하실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군요." 수분을 먹어 더욱 신비하게 빛나는 은발을 쓰다듬은 그라프는 주름진 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활동하던 시절에 집필했던 병법서만 해도 십 여권에 달한다네. 병법에는 적의 심리, 지형의 이용은 기본이라고 말 할 수 있으니 최소한 병법서의 저자로써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날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한 그라프의 능력을 경험하며 감복한 뮤스는 두 손을 들수 밖에 없었고, 대현자의 칭호를 얻은 것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파바박! 수십대의 화살들이 두터운 나무껍질을 파고들었다. 나무로 만든 촉이었기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금속촉에 위력을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의 피부 정도는 쉽게 꿰뚫을 수 있었기에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극심한 안개 속에서 겨우 트랩을 발견 할 수는 있었으나 곳곳에 산재해있는 발사 장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던 특무대 대원들은 코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눈먼 화살 한대가 니카도의 허벅지에 박히게 되었는데, 태어난 이후로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그는 머리를 하얗게 비우는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끄..끄끅..." 더욱 심해지는 고통에 입술을 떨고있는 니카도를 본 카밀턴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쇼메트에게 눈짓을 했다. "응급처치를 해주게." 보통의 대원이었더라면 이 정도의 부상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훈련만을 겨우 통과한 니카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살 맞은 짐승 마냥 앓고있는 니카도를 측은하게 바라본 쇼메트는 그에게 가까이 가자마자 화살을 서슴없이 잡아 뺐다. "아아악!" 요란한 비명소리가 숲 속을 울리며 메아리 쳐지자 쇼메트는 급히 그의 입을 틀어 막으며 말했다. "그나마 나무촉인걸 고맙게 생각하게나. 철제 화살촉이었다면 살을 찢어내기 전에는 빼내지 못했을 테니까..." 입이 막혀 신음 소리만 내던 니카도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이며 맺혀있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하자 쇼메트는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꺼내어 그의 상처를 압박해 피를 멈추게했다. "촉이 나무이고 날씨도 싸늘하니 상처가 곪거나 하지는 않을 것일세. 조금 고통이 있겠지만 움직일만 할거야." "크윽... 고맙네 쇼메트." 상처부위를 만지며 고마워하는 니카도의 어께를 가볍게 두들겨준 쇼메트는 몸을 일으키며 카밀턴에게 응급처치가 끝났다는 신호를 했고, 그것을 본 카밀턴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 더 가야 할 길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벌써 해체한 트랩만 해도 십여개... 얼마나 남은 것이지? 후우... 그가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간과했었던 것 같군." 말을 하다말고 누군가가 어깨를 두들김을 느낀 카밀턴은 고개를 돌렸고, 챠퍼가 그의 등 뒤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대장님.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의 말대로 귀를 기울이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옴을 느꼈는데, 소리가 너무작았기에 내용까지는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의 목소리임은 확실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밀턴은 수하들에게 고개짓을 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들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린다면 저들 역시 니카도가 질렀던 비명을 들었을 것이니 도주하기 전에 재빨리 진입한다. 챠퍼와 죠슈드는 왼쪽으로, 쇼메트는 나와 함께 오른쪽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한 대원들은 금속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장검을 빼내들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만큼 더 이상의 트랩은 없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표정들이었다. 먼저 땅을 박차고 나가는 카밀턴을 신호로 챠퍼와 죠슈드가 위치를 맞추어 빠른 속도로 뒤따랐다. 쇼메트는 니카도에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신호하며 카밀턴이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붙었다. 혼자 남은 니카도는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우며 강행군을 한 피곤함 때문에 더 이상은 움직일 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차라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 일 수 없는 지금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30멜리 가량을 한걸음에 달려온 카밀턴은 우거진 나무들과 안개 사이로 희미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 뮤스가 있다고 확신한 카밀턴은 대원들에게 최대한 떨어지라는 수신호를 했다. 혹시라도 있을 예상 외의 트랩에 모든 대원들이 한꺼번에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처컥! 빠른 속도로 전진하던 대원들의 귀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트랩의 안전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달려나가던 방향으로 부터 한 아름 정도나 되는 통나무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고 소스라치게 놀란 카밀턴과 대원들은 있는 힘을 다해 통나무 위로 몸을 날리거나 최대한으로 몸을 낮추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 동물적인 본능이었다. -부우웅! 머리 위, 혹은 발 아래로 반뼘의 공간조차 없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통나무를 본 그들은 한 순간의 방심으로 곤죽이 되어 버릴뻔했다는 생각에 등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사라지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카밀턴과 대원들은 돌아오는 통나무의 유효거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한번 몸을 날려야만 했다. -촤아악! 엉겁결에 수풀 사이로 몸을 날린 그들은 볼을 스치는 따가운 나뭇가지들을 느끼며 얼굴을 깊숙히 숙였고, 도약한 힘에 내 맡겨진 그들의 몸은 앞으로 나가는 관성의 힘으로 수풀을 관통할 수 있었다. 어깨로 평평한 땅을 느낄 수 있었던 카밀턴과 대원들은 몇 바퀴를 구르며 자세를 잡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들은 문득,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노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정신이 어수선한 자신들과는 대조적으로 안정감있는 목소리였다. "허헛! 그 험난한 트랩들을 모두 해체하고 이곳까지 온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젊은이 들이군."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카밀턴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놓고 한 명의 노인과 젊은이가 태연 자약하게 서있었는데, 다름아닌 그라프와 뮤스였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카밀턴은 두 노소를 번갈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볼썽 사납게 여기저기 붙어있는 나뭇잎을 털어낸 그는 장검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였었다. "뮤스원장 자네는 우리를 꽤나 고생시키는군. 이제 할 수 있을 만큼은 다한건가?" 카밀턴의 말을 듣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대답했다. "음... 제가 믿고있던 트랩까지 모두 해체되었으니 이제 어찌 할 방도가 없겠군요." "그렇다면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나? 사실 개인적인 감정 없이 누군가의 피를 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이거든." "굳이 저의 목숨을 가지고 가야 하겠습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는 듯이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령이니 어쩔 수 없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어 보이니 스스로 목숨을 끊게나. 더 이상은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도 없는 것 같군." 눈을 낮게 깔은 뮤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역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살기위해 최대한 노력은 해봐야 겠죠." 결국은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뮤스는 긴 후드 속에 숨겨져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두 손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흘러내리며 은빛 번뜩이는 건틀렛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카일락스의 일이 있었던 이후로 처음 빛을 본 건틀렛이었다. 모닥불의 붉은 빛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건틀렛을 바라본 카밀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내가 직접 자네의 목숨을 거둬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 참 씁쓸한 일이군." "장담하기는 아직 이르지 않습니까? 누구도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지는 못하는 일이니까요." 카밀턴은 배짱좋게 말하는 뮤스를 향해 피식웃었다. "풋! 물론 자네의 말대로 절대적인 결과는 알 수 없겠지만, 확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지. 내가 비록 어두운 곳에서 활동을해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듀들란 제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라는 점만은 알아 주었으면 좋겠네." 말을 끊은 카밀턴은 장검을 들어올리며 천천히 뮤스를 향해 걸어갔고, 뮤스 역시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카밀턴을 향해 다가갔다. <대공학자> #195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라프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둘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평범한 인물이 아닐 줄은 짐작했지만, 듀들란 십대 검사 중의 하나였다니... 하지만 오늘은 자네가 너무나 운이 나빴네. 쯔쯧...' 마치 대결 결과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나직하게 혀를 찬 그라프는 살짝 손가락을 움직여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들어있는 병을 열었다. 그런 후, 살짝 흔들며 병을 뒤집자 보일 듯 말듯한 연기가 세어나오기 시작했는데, 금새 안개에 섞였을 뿐만 아니라 이목이 뮤스와 카밀턴 쪽에 쏠려있었기에 그 누구도 이런 현상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뮤스를 아래위로 살펴보던 카밀턴은 건틀렛이 끼워져있는 두 주먹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자네의 무기가 그 건틀렛인가본데 공격유효범위로 보더라도 검에 대항하기에 너무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담담하게 미소를 지어보인 뮤스는 단전으로 부터 뇌공력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노리는 것이 제 목숨입니다. 그런 점까지 신경써주시는 것은 부담스럽군요. 저는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다른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잠시 내 위치를 잊은 듯 하군. 자... 이제 시작해 볼까?" 고개를 끄덕인 카밀턴은 말을 멈추며 칼을 오른쪽으로 치켜 들었다. 이는 상대방에 비해 실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공격만을 염두에 두고 취하는 자세였다. 그에 대비해 뇌공력을 끌어올리던 뮤스는 심상치 않은 상대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뇌동체술법상의 방어 자세를 떠올리며 손과 발을 내저었다. 막 공격을 취하려던 카밀턴은 처음 보는 형태의 몸놀림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둘을 지켜보고 있던 특무대의 대원들 역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뮤스의 발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던 챠퍼가 감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상당히 불규칙적인 스텝이지만, 상대가 밟고 들어 올 수 있는 공격 방위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형태로군. 정말 의외지만 저것을 보더라도 뮤스원장은 전투능력이 없는 인물이 절대 아니야." 옆에서 지켜보던 챠퍼가 뮤스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을 때, 그 점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밀턴은 잠시동안 뮤스를 업신여기던 생각을 접었고,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최소한의 동작 범위를 유지하며 찌르기 공격에 들어갔다. "하아압!" 뮤스의 움직임이 방어로 치우쳐지고 있는 데다가, 무기를 쓰는 쪽 보다 주먹을 휘두르는 편이 공격의 대처에 빨랐기에 공격 이후에 생기는 무방비 상태를 염두에둔 카밀턴은 동작이 큰 공격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살기를 띄고서 목을 노리며 날아오는 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한 뮤스는 건틀렛을 될 수 있는한 목으로 가까이 붙이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건틀렛을 스친 검신은 불꽃을 튀기며 뮤스의 뒤로 빠지게 되었고, 이에 주춤하던 카밀턴의 옆구리를 본 뮤스는 힘껏 왼쪽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바람소리를 낼 정도로 무겁게 뻗은 주먹이 카밀턴의 옆구리에 닿게 됐을 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그는 금속 갑옷으로 직접 뮤스를 밀어내려는 듯 대담하게 앞쪽으로 전진했다. 자신의 몸을 향해 다가오는 갑옷의 날카로운 돌기를 피하지 못했다가는 살가죽이 찢어질 것임을 알았기에 뮤스는 주먹을 급히 회수하며 몸을 옆으로 빼낼 수 밖에 없었는데, 몸을 빼내는 뮤스의 움직임이 재빠르긴 했지만 카밀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뮤스가 움직일 경로를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유연하게 몸을 돌렸고,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뮤스의 허리를 베어갔다. "자! 그럼 잘 가게나!" "헛?!" 허리 깊숙한 곳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검신을 조금 늦게 발견한 뮤스는 다급한 나머지 주먹을 휘둘러 검신을 내려쳤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방향이 바뀐 검신은 뮤스의 옷을 살짝 스치게 되었는데, 검날이 직접 살에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어진 옷사이로 진붉은 핏물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뮤스의 상처와 손에 들고있는 장검을 번갈아 보던 카밀턴은 뜻 밖의 상황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뮤스의 당당함이 죽기를 각오한 발악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격돌에서 그가 보여준 몸놀림과 반사신경은 절대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뮤스가 주먹으로 장검을 내려쳤을 때는 마치 바위를 내려친 느낌이었는데, 순간적으로 장검을 놓칠뻔했다는 사실이 그의 놀라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흠... 놀라워... 자네가 그만큼 여유를 보이는데는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것일세." 장검을 고쳐쥐는 카밀턴을 주시하던 뮤스는 잔뜩 긴장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공격은 운이 좋았기에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런식의 공격을 몇번 더 겪는다면 뮤스로서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만 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뒤에는 그라프가 있다는 생각에 건틀렛을 부딪혀 보이며 힘을 돋구었다. "저도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하아압!" 이번에는 뮤스가 먼저 뛰어들며 선제공격이 이루어 졌다. 어찌 보면 검을 가진 상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가는 그가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공격유효거리가 짧은 그로서는 최대한 근접전을 벌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접근하는 것을 본 카밀턴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신을 옆으로 뉘였다. 검신의 넓은 면은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격타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간단한 손목의 움직임만으로도 몸 전체의 방어가 가능했기에 검술에서는 방어를 위해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었다. 뮤스는 검날에 베이지 않는 건틀렛을 믿었는지 몸을 낮추며 서슴없이 카밀턴의 복부로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자신의 복부로 들어오는 주먹을 검의 면으로 간단하게 막은 카밀턴은 힘을 주어 밀어냈고 손잡이의 아랫부분으로 뮤스의 정수리를 노리며 내리쳤다. -캉! 당연히 머리 깨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야 할 때에 금속음이 울려퍼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것을 내려다 보던 카밀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는데, 머리를 강타하기 직전 뮤스가 다른 손을 머리로 들어올려 내려치는 검의 손잡이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이런!" "이 정도에 당할만큼 만만하지는 않죠. 핫!" 득의의 미소를 날린 뮤스는 검에 가로막혔었던 주먹으로 뇌공력을 급히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카밀턴의 복부에 꽂아 넣었고, 검이 뮤스에게 잡혀버린 카밀턴은 그에 대처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특무대 대원들은 뮤스의 주먹이 카밀턴의 복부로 들어가자 눈을 질끈 감았는데, 그가 입고있던 갑옷의 복부 부위는 전투시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금속이 아닌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충격으로 부터의 방어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부위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사란 검만 잘쓴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카밀턴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수 많은 전장을 누벼온 사내였기에 그만큼 실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냉정을 되찾은 카밀턴이 몸을 급히 낮추자 복부를 향하던 주먹은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의 금속보호대를 강타할 수 밖에 없었다. -카카캉! 또 한번의 생각지 못한 금속음에 실눈을 살짝떠 뮤스와 카밀턴의 모습을 살펴보던 쇼메트는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대장이다! 그 짧은 시간에 몸을 낮추어 가슴의 금속판으로 건틀렛을 받아 내다니! 하지만... 어찌 이런 일이..." 말끝을 흐리고있는 쇼메트의 시야에 뮤스로 부터 4멜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카밀턴의 모습이 잡혔는데, 가슴보호대는 거대한 망치로 얻어 맞은 듯 움푹패여 있었고, 흙바닥에는 밀려난 발자국이 길게 그려졌던 것이었다. 장검을 땅으로 길게 늘어트린 카밀턴은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그 모양이 완전히 변형되어버린 가슴 보호대를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의 파괴력을! 자네가 이런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경악에 찬 신음성을 내뱉던 카밀턴은 뼈까지 절여오는 고통을 뒤로하고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심한 현기증이 발생하며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어서야 겨우 몸을 고정시킨 카밀턴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이번 한방으로 내 다리가 풀려 버린 것인가? 아무리 큰 타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럴리가 없는데... 혹시?" 카밀턴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그가 무릎을 꿇는 장면을 목격한 대원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인 카밀턴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겨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자식! 감히 카밀턴 대장님을!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 주도록하겠다!" 분노한 챠퍼가 소리를 지르며 뮤스를 향해 공격해 들어 갈려고 할 때, 카밀턴의 긴급한 고함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바보같은 자식들! 자신의 몸 상태나 어서 확인해 봐!" 돌연한 카밀턴의 말에 멈칫한 챠퍼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고 이것은 다른 대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제대로 설 수가..." 당황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쉰 카밀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크윽... 인정하기는 분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뮤스원장에게 패배했다. 그는 처음 부터 계획적으로 우리를 도발하면서 이곳까지 유인한 것이었어... 수 많은 트랩을 설치하여 우리의 체력을 고갈 시킨 것이지. 지금까지 체력이 바닥남을 느끼지 못한것이 우리의 큰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런 몸상태로는 절대 그를 이기지 못한다." 고개를 돌려 힘겹게 뮤스를 바라본 카밀턴은 몸을 휘청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듀들란 제국에서 엄청난 손실을 감안하면서까지 자네를 끌어 들이려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군. 자네는 충분히 강하고, 몸이 이렇게 된이상 우리는 자네와 맞서 싸울 힘이 없네." 몸의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는 대원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 카밀턴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대원들은 나의 명령을 들은 것인만큼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네. 그러니 다른 대원들에게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수 있었던 죠슈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으로 무릎을 잡아 고정시키며 외쳤다. "그런 약한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체력이 고갈 되었다 하더라도 저자 쯤은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쇼메트 역시 죠슈드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단호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듀들란 제국의 특무대 입니다! 목숨이 끊어 질 때까지는 작전 실패를 인정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신의 맡은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부하들의 당당함에 흐뭇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감상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억지 표정을 지으며 부하들을 질책했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나의 갑옷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잘 봐라! 지금의 몸상태로 이만한 파괴력을 뿜어내는 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쩌면 나의 몸이 정상이더라도 뮤스원장을 쓰러 트릴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했을 카밀턴의 말은 대원들의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졌다는 중대한 사실 조차 알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은 완벽한 패배이고, 진정한 군인이라면 자신의 패배쯤은 인정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카밀턴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의 무릎을 꺾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는데, 부정하고 싶었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정신과 육체가 함께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질끈 눈을 감은 카밀턴은 지금쯤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네들에게는 이번 작전의 실패를 상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허튼 생각하지 말게." 대장과 대원들 사이에 누구도 깨트리지 못할 듯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발치에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던 그라프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쯔쯧... 아무튼 한참이나 젊은 사람들이 생명을 그렇게 하찮게 여기면 쓰겠나? 뮤스군은 자네들 중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일세. 그렇지 않나?" 너무나 극단적인 카밀턴의 발언을 들으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뮤스는 그라프의 물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프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어떠한 대가도 받아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 걸요. 그저 저를 더이상 노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있다면 어찌되건 상관 없습니다."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은 그라프는 카밀턴의 옆으로 걸어가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들었는가? 뮤스군은 전혀 자네들을 원망하지 않으니 목숨으로 대신하겠다는 말은 삼가하게. 그는 국가간의 권력 다툼으로 목숨을 잃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청년이야. 그것을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이제 뮤스군의 뒤를 쫓기 말게나."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저희가 있을 곳은 없습니다. 작전에 실패했다는 것은 저희 단체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졌다는 것이나 다름 없기에 돌아가 봐야 죽음보다 더한 불명예가 기다릴 뿐입니다." 아직도 수긍하지 못하고있는 카밀턴의 이야기를 들으며 몸을 일으켜 뒷짐을 진 그라프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조직을 관리하는 직속 상관이 누군가? 듀들란 제국의 어린 황제가 특수기관을 관리 할 리가 없을 테니, 그의 숙부인 투르코스 재상이겠구먼. 그렇지 않나?" "그... 그것을 어떻게?" 카밀턴의 떨리는 눈빛을 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아 떨어졌음을 느낀 그라프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돌아가서 투르코스 재상이 작전실패에 대해 추궁을 한다면 뮤스원장이 그라프 라듀아보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전하게. 그렇게 한다면 그도 자네에게 실패를 추궁하지는 못할 것일세." "그..그라프 라듀아보!" "대현자! 라듀아보!" 그라프의 본명을 들은 카밀턴과 그의 수하들은 눈을 부릅뜨며 라듀아보라는 이름을 중얼 거렸다. 비록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가 이룩해 놓은 업적에 대해서라면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기에 모를리 없었고, 한 국가의 황제라도 그의 이름 앞에서는 한 수 접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특무대의 대원들이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크기만 했던 것이었다. 아직도 그런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카밀턴이 되물었다. "정말 대현자 라듀아보 본인이십니까?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셨다던 대현자님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허헛! 그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미개척지를 지나는 길에 우연찮게 뮤스군과 만나게 되었지. 서로 뜻이 맞아 동행을 하던 차에 이번 일을 겪었던 것일세." "후우... 그렇다면 혹시 이번일을 계획하신 것도 그라프님께서?" 카밀턴의 질문에 가벼게 웃은 그라프는 손을 내저었다. "이제와서 그것을 따지면 뭣하겠는가. 허헛! 어쨌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으니 이만 떠나야겠군. 이후의 일들은 자네들의 판단에 맡기겠네. 아! 그리고 특무대라는 단체와 이번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도록 하지. 그럼 몸조심들 하게나" 자신이 하고자하던 할 말만을 간단하게 마친 그라프는 몸을 돌리며 뮤스에게로 걸어갔고, 뮤스와 그라프를 지켜보는 카밀턴과 대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뮤스와 그라프는 그 자리에 오래 있어 봐야 그리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길로 바로 짐을 싸들고 길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말들 역시 하루정도 푹 쉰상태였고 충분히 기력을 회복하게 되었기에 길을 떠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을 타고서 느긋하게 길을 가고있던 뮤스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뒤돌아 보며 그라프에게 물었다. "이제 이 귀마개는 빼도 되나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더군요. 칼을 휘두르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서 허리가 두동강 날뻔도 했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 자세로 말을 몰던 그라프는 자신의 귀를 들이밀며 웃었다. "허헛! 아직도 끼고있었나? 나는 이미 뺐네그려... 어차피 폴리크개구리의 독소는 20멜리 이상 미치지 못하니 오랫동안 끼고 있을 필요가 없지." "이런... 진작 말씀 좀 해주시지." 투덜거리던 뮤스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흰색의 귀마개를 빼냈다. "그나저나 정말 새로운 개념의 독이군요. 귀안에 있는 반고리관에 자극을 주는 독이라니..." 뮤스의 말에 문득 말을 멈춘 그라프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자..잠깐. 그새 독의 작용까지 알아 냈다는 말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머리속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폴리크개구리의 독이 귀를 통해 중독된다고 말씀 하셨을 때 부터 대충 눈치채고 있었는걸요. 게다가 중독의 현상으로 현기증을 느끼면서 제대로 설 수 없게 된다면 평형감각에 큰 영향을 주는 반고리관과 관계가 있을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고, 결국 폴리크개구리의 독은 평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감각털을 마비시키는 작용은 한다고 결론 내렸죠." 두 손을 들어올리며 탄성을 터트린 그라프는 다시금 말을 몰며 물었다. "이거야 원... 정말 못당해 내겠군. 자네가 모르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라프의 물음에 피식 웃은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하핫! 농담은 그만하시죠 그라프님.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해야할 사람은 바로 접니다. 그라프님이야 말로 어떻게 이런 지능적인 함정을 파실수가 있으시죠? 독에 중독된 사람에게 스스로 체력이 고갈되었다고 느끼게 만들다니... 직접 겪지 않고서는 아무리 사실이라고 우기더라도 믿지 않을 걸요? 여러면에서 볼때 그라프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헛기침을 한번한 그라프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허리를 두들겼다. "아이고 허리야... 내일 당장 죽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늙은이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나. 나는 죽지 못해서 살고있는 뼈다귀일 뿐이라네." "후훗! 정말 못말리겠군요." 뮤스는 그라프의 엄살에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고, 오랜만에 유쾌한 분위기가 된 그라프 역시 함께 미소짓고 있었다. -부시럭... 그러던 중, 길 한쪽의 어둠진 곳에서 수풀 스치는 소리가 틀려왔다. 아직도 개지 않은 짙은 안개덕에 그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 할 방도는 없었지만, 만에 하나 있을 일에 대비해 뮤스는 재빨리 건틀렛을 꺼내어 착용했고, 그라프는 말을 조금 뒤로 빼며 외쳤다. "왠놈이냐! 썩 모습을 드러내라!" 상대는 그라프의 고함소리에 놀랐는지 다급성을 터트리며 수풀 사이를 헤치며 뛰쳐나왔다. "흐엑! 자..잘못했습니다 뮤스원장님! 저... 니카도입니다. 니카도!" 그는 다리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놀라서인지 거의 기다시피한 모습으로 쩔쩔 매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대의 정체를 알게된 뮤스는 팔에 들어간 뇌공력을 풀었다. "니카도씨였군요? 그러고보니 일행들과 함께 보이지 않던데 왜 이곳에 혼자있죠?" 그의 물음에 두리번 거리며 주변를 살피던 니카도는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뒷 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이렇게 멀쩡하신걸 보면 카..카밀턴 대장이 실패했군요! 그..그럼 그들은 모두 죽었나요?" 뮤스가 공포에 휩쌓인 니카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려 할 때, 무슨 일인지 카밀턴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을 멈추게 했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깜빡이며 대신 입을 열었다. "그들은 뮤스군을 헤치려 하다가 그의 손에 모두 목숨을 잃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고 있었던 차였는데 때마침 잘 만났군! 감히 뮤스군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라프의 목소리에 안색이 하얗게 변한 니카도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 졌다고 느끼기라도 한 듯 급히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저는 그저 평범한 교섭인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저는 상부의 명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죠! 그..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애원을 하는 니카도를 보며 몰래 미소를 지은 그라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그 말이 사실인가?" "네..네! 그렇고 말고요! 제가 뮤스원장님과 무슨 원한이 있다고 헤치려 들겠습니까! 저는 절대로 뮤스원장님을 헤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틀림없이 그들을 도왔네. 그 사실만은 변함이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죽을 죄를 졌습니다! 지금 반성하는 중이니 한번만 용서를..."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그라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자네같은 인재가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그렇다면 내가 제안을 한가지 하겠네. 나의 질문에 대답만 해주면 자네의 목숨을 보장해 주도록 하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태에서 한줄기 구원의 빛을 얻은 니카도는 쉴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뭐든지 말씀만 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조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간단하네. 자네들이 왜 뮤스군을 끌어들이려 하고, 장영실 남작이라는 사람의 근황을 사실대로 말해보게나. 그것만 말해준다면 약속처럼 자네의 목숨은 보장 받는 것일세" 용서를 해준다는 말에 고개를 번뜩 들어올린 니카도는 감동에 찬 얼굴로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모조리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비밀 임무를 맡기신 분은 투르코스 재상각하이십니다. 그분께서 뮤스원장님의 능력을 크게 평가하셨기에 타국의 이목을 속이면서까지 듀들란 제국으로 모셔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장영실 남작님께서는 뮤스원장님이 듀들란 제국으로 오시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라 예상했고, 결국 장영실 남작님께는 비밀로 이번 일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뮤스원장님께 전해드렸었던 편지와 나머지 이야기들은 모두 조작된 사실들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니카도의 입을 통해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들을 수 있었는데, 주로 그의 근황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그라프가 추론하던 사실과 거의 일치했고, 뮤스는 장영실의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니카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그라프는 평소의 목소리를 되찾으며 말했다. "허헛!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군 그래. 헌데... 자네의 동료들는 모두 살아있다네. 우리가 온 길을 따라가면 그들과 만날 수 있을 테니 찾아가보게나." 아직도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니카도는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동료들이 살아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방금전의 이야기는..."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일의 배경이 궁금해서 장난좀 쳐본 것일세. 후훗! 그럼 듀들란 제국까지 잘 돌아가시게나. 출발하도록 하지 뮤스군." 말고삐를 잡아 당기며 말을 몰아 나가는 그라프의 뒷모습을 보던 뮤스 역시 니카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좋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니카도씨. 그럼 상처치료 잘 하시고 남은 여정동안 몸 조심하시길..." 어떻게 들어보면 상대방의 가슴을 긁는 듯한 감사의 말을 건넨 뮤스는 손을 흔들어주며 말을 몰아 그라프의 뒤를 따랐고, 멋지게 속아 넘어간 니카도는 헛웃음만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허... 나참... 얼떨결에 일급비밀을 다 불어 버린 꼴이 되어버렸군. 그런데 대체 저 노인은 누구지?" 숲속에 혼자남게된 니카도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기에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 조차 잠시 잊고 있는 중이었다. 그라프는 뒤를 따라오는 뮤스를 기다리기 위해 달리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고, 뮤스와 어께가 나란해 지자 속도를 맞추며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이 한결 밝아진 뮤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제 예전의 얼굴을 되찾은 걸 보니 장영실이란 자의 신상에 대해 안심이 되는 모양이군." 머리를 긁적인 뮤스는 속내가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모두 그라프님 덕분입니다. 미개척지로 나온 이후에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일은 없었던 것 같군요." "내가 뭐 한일이 있다고 그러나...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하지? 예상보다 파숄에서 빨리 나온 샘이 되어 버렸는데." "저는 어차피 목적지를 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라프님께서 목적지를 정하신다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뮤스의 말에 너털웃음을 지은 그라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헛! 나도 별달리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금전에 꽤나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네. 그럼 나를 따라오도록 하게나!" "훗! 그렇게 하도록 하죠." 짧은 뮤스의 대답과 동시에 두 마리의 말은 새하얀 안개를 뒤로하며 공기를 갈랐고, 그 자리에는 점차 멀어져가는 말 발굽 소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렇게해서 뮤스는 특무대의 추적을 따돌리게 되었으며 그라프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로 부터 뮤스의 추방 기간이 끝나는 3년 후까지, 그들을 보거나 소식을 들었다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공학자> #196 회상. 첫 눈이 내리는 날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축복을 조금이라도 빨리 맞이하고 싶었던 어린 아이들은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도 않은채 집에서 뛰쳐 나왔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들고 따라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젊은이들 역시 이런날은 집에 있을 수 없었기에 연인과 함께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걷곤한다. 그때 만큼은 이 세상이 부러울 것도 없고, 고민도 없으며, 어떠한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연인의 머리에 쌓인 눈을 손수 털어주며 한번 웃을 수 있는 그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즐거워 하는 날에 더욱 외로움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며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갈곳이 없는 길거리의 부랑자들이나, 가족으로 부터 소외 받은 사람들, 또는 이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위 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류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장영실 역시 지금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듀들란 제국에서의 생활에 다소 익숙해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어색하기만한 환경들이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함이 많은데다가 결국 이곳도 타향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즐기는 연회라면 그 사이에서 쉽게 어울릴 수 없었던 그는 더욱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따라라라란... 딴따다다다단... 연회장에는 최근 유행한다는 경음악이 흘러나오며 사람들의 흥을 돋구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파트너를 바꿔가며 춤을 추고 있었다. 매 계절, 또는 매 달마다 유행하는 음악이 다르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봤지만 난간에 기대어 술 한잔을 걸치고있는 장영실에게는 모든 음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릴 뿐이었기에 별다른 흥을 느낄 수 없었다. 괜히 울쩍해지는 기분을 잊기 위해 오랜만에 술을 마시던 장영실은 얼굴이 더워짐을 느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실내를 난방하기 위해서 연회장 벽의 중간 중간에 위치한 벽난로를 사용해야 됐지만, 장영실이 고안한 '열선벽지'로 실내의 벽을 도배한 이후 부터는 훨씬 효율적이고 손쉬운 난방이 가능해 졌다. 이 일에 쌍수를 들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귀족 여성들이었는데, 겨울에는 추위로인해 입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노출이 심한 연회복을 계절에 구속받지 않으며 입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장영실로서는 그런 것은 전혀 염두에 있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의외의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고 있던 장영실에게 말을 걸어오는 여인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어머... 실례지만 장영실 남작님 아니신가요?" 약간 희미해진 눈길로 자신에게 말을 건 여성을 바라본 장영실은 언젠가 한번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아... 존슈튼 양이셨군요.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장영실이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자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호홋!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나저나 회색의 괴인이라고 불리던 분이 이렇게 차려입으니 정말 몰라보겠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함께 보내주실래요? 동행했던 파트너가 어디로 사라져 버려서 조금 외롭거든요."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유혹의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장영실은 이런 일에 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둔감성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흠 파트너분께서 화장실에 가신 것이 아닐까요? 그 쪽으로 찾아 보시는 것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대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다. "아..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오늘 하루 그녀의 운이 그리 좋지 못한 듯 했는데, 등 뒤로 부터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로 인해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껄껄! 이게 누구야. 죤슈튼 양이 아닌가? 황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요부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영광이구만!" 독설을 퍼붓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루스티커였다. 그의 신랄하고 거침없는 말에 어쩔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힌 여인은 덥기라도 한듯 급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그게 무슨 소리시죠 루스티커님? 요부라니요?" "정말 몰라서 묻는 다면 내가 아는 대로 말해주도록 하지. 음... 롤란드 남작이야기 부터 할까? 아니면 스콰이드 자작 이야기부터 할까?" 두 귀족의 이름이 나오자 이제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린 그녀는 억지 웃음을 띄우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가..갑자기 머리가 아프군요. 먼저 실례를 하겠어요." 그녀는 이야기가 더 진전되기 전에 이 자리를 빠져나고 싶은지 장영실과 루스티커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숨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루스티커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저런 여자들은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군. 밥먹고 얼마나 할짓이 없으면 저럴까... 쯔쯧... 아무튼 마음에 드는 귀족들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군." 루스티커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던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리며 미소지었다. "하핫! 루스티커님께서 그러시니 귀족들이 다들 꺼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매번 친우가 없다고 투덜 거리시는데 그런 독설만 퍼부으시니 친우가 생길리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쪽눈을 얇게뜬 루스티커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흥! 썩어빠진 귀족이라면 얼마를 데려다 주더라도 친우로 사귈 생각이 없네! 그렇지않아도 기분이 나쁜 판에 저런 것들이나 보고 있으려니 정말 참을 수가 없군. 에잉!" 평소에도 귀족들에 대해 이와 비슷한 태도의 루스티커였지만 오늘 따라 유난히 심하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기분 나쁘신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자네에게는 좋은 소식이겠구먼 그래! 얼마전에 뮤스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견한 교섭대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하더군! 하필면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죽지도 않고 그런곳에 있었다니..." 한동안 잠잠하다고 생각하던 루스티커의 괴팍한 성격을 되살아나게 만들고 있는 '영감탱이'와 뮤스의 일에 대해 궁금증을 느낀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뮤스와 교섭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에잉...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줄테니 따라나오게. 이렇게 화기애애한 곳에서 말할 기분이 아니구먼." "그렇게 하죠. 마침 저도 이런 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참이었는데." "역시 나와 마음이 맞는건 자네밖에 없다니까. 대신 포도주나 한병 챙겨서 따라오게나. 오붓하게 한잔 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루스티커는 감정이라도 있는 듯 춤을 추고있는 사람들의 사이를 거칠게 헤치며 가로질렀고, 왠지 어린아이의 투정같은 그의 행동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장영실은 그의 부탁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포도주병을 챙겨 자리를 옮겼다. 루스티커와 장영실은 연회장을 빠져나온 즉시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서관은 제 2의 집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만의 사교장이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황궁에서 책을 읽을 사람은 그들을 빼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더 없이 조용하다는 것도 이곳을 즐겨찾는 큰 이유중에 하나였다. 이 시간에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까지 난방을 할 수는 없었기에 도서관 내부는 손끝이 시릴 정도로 싸늘했다. 양 손을 주무르며 냉기를 쫓던 장영실은 창 밖을 한번 내다 보며 중얼 거렸다. "벌써 첫눈이 오는 것을 보니 이곳으로 온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군요.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장영실의 말에도 루스티커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져온 포도주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캬아... 좋구먼... 그런 쓸데 없는 감상은 그만두고 이쪽으로 와서 술이나 한잔 하게나." 어쩔 수 없었던 장영실은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의 커튼을 닫으며 루스티커가 있는 책상의 앞쪽에 자리를 잡으며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명신이의 이야기좀 해주시겠습니까? 분명 아까 교섭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는데..." 고개를 끄덕인 루스티커는 장영실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우며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랬어... 후훗. 그는 우리가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거절했다고 하더군. 이번 추방 기간이 끝나면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그의 이야기에는 특무대가 뮤스의 목숨을 노렸던 이야기는 빠져있었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독단적인 계획이었기에 루스티커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잔 속에 반쯤 남은 포도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은 루스티커는 잔을 채우기 위해 술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수가 없네. 그렇게까지 타박을 주었던 국가가 뭐가 좋다고 돌아가려고 하는지 말이야. 에잉... 아무튼 똑똑한 사람들의 생각은 이해를 할 수 없다니까. 그 똑똑한 사람들에는 자네도 포함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애꿎은 자신에게 비난의 눈초리가 돌아온는 것을 본 장영실은 웃으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후훗. 저는 그 아이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지금 명신에게 있어서 도이첸 제국은 고향이나 다름 없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어쩌면 저희가 떠나온 곳 보다 이곳에서 더욱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붉디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던 장영실은 눈을 내려깔며 말했다. "고향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타박하고 버리더라도 언젠가는 꼭 되돌아가고 싶은 곳..." 그의 말을 들으며 입가를 매만지던 루스티커역시 그의 말이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흠... 그래서 자네도 듀들란 제국에 남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유래없는 파격적인 대우를 뿌리치고 조이센 대륙으로 건너가겠다는 것이 그런이유 일수도 있겠구먼..." "면목없군요..." "허헛! 아닐세. 나도 자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 할수도 있겠구먼. 나도 가끔 이곳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내가 태어난 곳으로 싶다는 생각을 하니까." 허공을 응시하며 회상에 빠지고있는 루스티커를 바라보던 장영실 역시 포도주를 한잔 걸치며 옛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태사청에는 수많은 고위 대신들이 좌우로 양립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는 듯 했다. 양립해있는 대신들의 가운데에서 단상의 차렴을 향해 오체복지하고 있던 장영실은 격앙된 목소리로 간청하고 있었다. "전하! 어찌하여 조선의 공학기술을 아무런 대가 없이 명으로 넘기려 하옵니까? 저희 공학원의 공학자들은 오로지 조선의 발전을 위해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지, 결코 명을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장영실의 말을 듣고있던 대신 중 한 명이 그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전하! 신이 한마디 올리겠사옵니다. 지금 대호군의 말에는 크게 잘못된 점이 있사옵니다. 명은 태조때 부터 형의 나라로 모셔왔다는 것은 전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아우의 나라인 우리 조선에서 형의 나라인 명을 위해 그깟 천한 기술을 조금 넘겨 주는 것이 뭐가 그리 아까운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것을 버리고 명의 인정을 받게 되니 얼마나 좋은일입니까. 아무래도 신임 대호군이 초임이기에 큰 뜻을 모르는 듯 하옵니다." 장영실은 자신의 평생을 바쳐온 공학에 대해 무시하는 언사를 내뱉는 대신들에 대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공학을 등안시하는 문관들을 하루이틀 봐온 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조선의 현실이었기에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공학은 절대 천한 기술이 절대 아니옵니다. 만일 공학이 천한 것이라 평가한다면 명이 우리에게 가하는 압력은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런 압력을 행사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반박하던 대신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장영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들은 이미 공학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공학기술력을 가진 우리 조선에게 공학기술의 기술이전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훗날 큰 위협이될 조선을 미리 견제하기 위해서 학문 이외의 것은 모두 잡기로 치부하는 쓸데없는 사상을 심어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발언은 장안을 술렁이게 할 만큼의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은 현 조선의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유교사상 자체를 비난하는 발언이었는데, 그 유교사상의 중심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관 대신들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장영실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맺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감히 부탁드리건데, 대신들께서는 그렇게 본받기를 원하는 명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과연 지금의 조선과 같이 유교사상을 정치기반으로 채택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있사옵니까? 지금까지 반평생 동안 유교사상을 공부하신 문관나으리들 께서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시고 계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명나라는 유교의 사상을 하나의 학문과 생활 규범으로 받아 들였을 뿐이지 절대 국가의 정책으로는 받아 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시 앞뒤 꽉 막혀 변화에 유동적이지 못한 유교사상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대신들은 날카로운 비수 한자루가 가슴에 꽂히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대호군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것에 대해 분노한 대신들은 임금의 앞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대호군! 감히 이곳이 어디인줄 알고 그런 망발을!" "자네는 정녕 이자리에 모인 대신들 뿐만 아니라 전하까지 능멸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일세!" "허허! 조정의 규율이 이렇게나 무너져 있었다니! 이번 일을 이대로 넘어간다면 조정의 위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장내가 비난의 목소리로 가득차고 있을 때, 탁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차렴안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탁탁탁! 그 소리에 이성을 잃고 흥분해 소리치던 대신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같은 자세로 오체복지하고있던 장영실은 이미 자신의 발언에 대한 처벌을 각오하고있었기에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차렴에 가려져 그 표정을 가늠 할수 없는 임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신들은 모두 진정들 하시오. 짐이 대호군과 직접 이야기를 하겠소." "예 전하..." 대신들이 길게 읍을 하며 대답하자 임금은 고개를 숙이고있는 장영실을 향해 물었다. "대호군은 짐의 물음에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대답해 주기 바라오. 짐은 지금까지 대호군의 이야기를 의미 깊게 들었고, 짐 또한 대호군의 주장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는 중이오." 임금이 장영실을 옹호하고 나서자 태사청에 모인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지만, 임금의 이야기가 끝난 상태가 아니었기에 답답한 심정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임금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다면 대호군은 조선의 공학기술을 이용하여 명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장영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것이 불가능 하옵니다. 이미 명으로 흘러들어간 중요 공학기술력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고, 조선은 명에 비해 자원이 부족하여 공학기술을 충분히 활용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흠... 그렇다면 대호군은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오?" "먼저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당장 조선의 힘으로 명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옵니다. 하지만 훗날의 후손들까지 명의 그늘아래에서 농락당하도록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옵니다. 고로 신 장영실은 현 조선의 공학기술을 집대성하고, 더욱 발전시켜 후대에게 넘겨 줌으로써 한민족 발전의 기반을 마련해야할 때라고 생각하옵니다!" 일단 하고자 했던 말을 마친 장영실은 임금의 반응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주변의 대신들은 변함 없이 그의 의견을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 동안 술렁임이 계속 되고 있을 때, 임금의 목소리가 다시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굉장히 극단적인 의견이군." 낮게 깔린 임금의 음성에 좋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장영실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대조적으로 대신들은 어차피 뻔한 결과라고 믿고 있었기에 코웃음을 치며 장영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임금의 이야기는 대신들의 표정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허나... 극단적인 만큼 대호군의 의견이 짐에게 있어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네. 후대에게까지 좋지 못한 구습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그대의 발언이 특히 마음에 들더군." 갑작럽게 임금의 태도가 변하자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었던 대신들은 저 마다 임금을 부르며 나섰다. "전하! 어찌 저런 무도한 자의 경망스러운 말을 귀담아 들으시옵니까!" "학문을 깊이 배우지 못해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자에게 무엇을 얻으시려는 지요!" "전하! 명을 거스리는 일은 조선의 존망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대신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오히려 임금의 역정을 끌어낼 뿐이었다. "무엄하도다! 감히 짐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게요!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하겠소!" 공간을 나누고있는 차렴을 넘어 임금의 위엄이 그대로 새어나오고 있었고, 불똥같은 호령에 놀란 대신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짐은 매년 백성들이 피땀 흘리며 수확한 작물들을 명나라에 조공으로 받치는 일에 대해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소. 뿐만아니라 조선의 공학자들이 밤낮없이 고생하여 개발해낸 공학기술들을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채 가지고가는 명나라의 사신들을 보며 목으로 피가 치미는 기분을 한 두번 느낀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짐 역시 경망스러운 것이고, 깊이 배우지 못한 자란 말이오!" "그...그것은.." 따끔한 질책에 차마 대답을 하지못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대신들을 둘러본 임금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대호군이 비록 지위가 낮다해도 그를 업신 여기지 마시오. 짐이 보기에는 이 자리에 모인 그 누구보다 충신이요, 조선을 위하는 사람이오." 이렇게 장영실의 발언권에 대해 쐬기를 박은 임금은 그제야 속이 조금 풀리는지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대호군, 고개를 들게나. 이제 이 자리에서 만큼은 자네의 발언을 두고 비난할 사람은 없네. 그러니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이 자리에서 늘어 놓아 보게나. 내 최대한 그대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겠네." 장영실 조차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게 되자 적지 않게 당황한 그는 고개를 크게 조아리며 대답했다. "화..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수 있었던 장영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지럽기 까지 했지만,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미천한 일개 공학자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은혜, 평생을 가더라도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비록 짧은 생각이나마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성심을 다해 아뢰겠사옵니다. 현 조선은 무작정 명나라의 압력에 대항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익히아시고 계실것이옵니다. 그렇기에 소신이 아뢰었던 극단적인 방법을 지금 당장 시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한 가지의 복안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사온데, 바로 두 개의 공학원을 공존시키는 것이옵니다." "지금 두개의 공학원이라고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 중 한 곳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공학원으로써 지금과 같이 백성들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거나, 명나라에 비교적 질이 떨어지는 공학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공학원은 비밀리에 조선 공학을 축적하여 후대로 전하거나 보다 수준 높은 공학기술을 개발하는 곳으로 육성하는 것이옵니다. 이런 방법을 쓴다면 명나라의 이목을 속이는 동시에 조선의 공학을 지킬수 있게 되는 것이옵니다!" "올커니! 과연 가능성이 있을 법한 의견이로군... 어디 한번 자세한 이야기를 계속 해보게나." 임금으로 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장영실은 자신감을 얻으면서 보다 상세한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한 그의 제안은 그 자리에 모인 이들로 하여금 더 이상 비난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대신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조선의 공학원이 경복궁의 지하에 위치하게된 배경이었다. 물론 새로운 공학원이 설립되기 까지 수 많은 문관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현명한 임금은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공학원과의 합의점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새롭게 등극한 좌의정과 우의정이 공학을 옹호하고 나서게 됨으로써 조선은 최고의 공학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대공학자> #197 회상에서 깨어난 장영실은 문득 자신의 잔이 비워져 있다는 것을 느꼈고 루스티커가 들고 있던 포도주병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약간 풀린 눈으로 장영실을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허헛! 자네 술잔까지 탐해서 미안하구먼. 그런데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말이야. 무슨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흐뭇하고 웃고 있었나?"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을 하던 루스티커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네라도 생각하고 있었나?" 루스티커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장영실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연세도 지긋하신분이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아니, 그 말이 어때서 그런가? 나이가 많은 사내가 여인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일인데. 그리고 내 나이는 왜 들먹거리나? 이 정도면 어디에 내 놓더라도 쓸만한 얼굴에 쓸만한 몸이란 말일세." "저는 여인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루스티커님의 나이에 관한 문제라면 잘 닦인 거울을 들여다 보시면 제가 한 말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글쎄... 매일 거울을 봐도 잘 모르겠던걸... 내가 그렇게 늙었나?" 술기운이 올라서 얼굴이 붉게 변한 루스티커의 노안을 보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말하신 그 늙은이는 누구를 말씀 하셨던 것입니까? 보아하니 루스티커님과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은 아닌 듯 한데..." 장영실의 물음에 루스티커의 얼굴은 있는대로 구겨졌다. "크으... 이제야 겨우 술기운으로 나쁜 기억을 지웠더니 자네가 다시 끌어내는군. 에잉 몹쓸 친구 같으니..." "괜한 이야기를 꺼낸것 같군요. 말씀 하시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무서운 눈을 뜨며 장영실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톡 쏘듯이 외쳤다. "이제와서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니 자네 지금 누구 놀리는 건가?" "말씀해 주신다면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한번 흘긴 루스티커는 빈 포도주 병을 아쉽다는 듯이 흔들어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 영감탱이를 알게되었을 때는 내가 젊었을 때이니 거의 100년 정도 지난 일이군. 그 녀석의 이름은 그라프 라듀아보,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에 도이첸 제국에서 머리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듣고있었지. 산속에서 마법사 수행을 하던 내 귀에까지 그 녀석의 이름이 들리곤 했으니 얼마나 유명했는지 알 수 있을 게야." 잠시 그의 말을 정리해보던 장영실은 손으로 턱을 쓸며 대답했다. "음... 간단한 내용이군요. 당시에 루스티커님 보다 훨씬 유명했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쩌면 지금도 루스티커님 보다 유명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별 생각없이 던진 그의 말에 루스티커는 정곡이 찔렸는지 안면을 푸들푸들 떨기 시작했다. "누가 그라프 보다 덜 유명하다는 것인가! 서로의 길이 다르니 비교 할 수가 없는 것일세! 나는 마법사이고, 그 녀석은 현자이니까!" 버럭 화를 내는 루스티커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 장영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루스티커님이야 말로 은근히 그 그라프라는 분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장영실의 말에 문득 조용해진 그들을 끝도 없이 일렬로 늘어선 책장에 빼곡히 박혀있는 책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지. 자네 혹시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모두 둘러 본 적이 있나?" "이 넓은 곳을 어떻게 다 둘러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이번일에 필요한 관련 서적만 찾아서 참고 할 뿐이죠." 머리를 끄덕인 그라프는 왠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이 도서관에 있는 책들 중 가장 중요도가 높은 만권의 책이 꽂혀 있는 곳은 둘러봤나?" "물론이죠. 도서관의 가장 안쪽에 황금 책장으로 꾸며져 있는 곳이 아닙니까? 저 역시 그곳에 있는 서적들로 부터 많은 자료들을 얻곤하는데, 반출이 불가능 한것이 아쉽더군요." "잘 아는군. 만약 그 만권의 책들 중 반 수 이상이 그라프 라듀아보가 저술한 책이라면 자네는 어떤 표정을 짓겠나?"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장영실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는데 어찌보면 시시한 농담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 했다. "하핫.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놀라서 기절이라도 해 있겠죠." "자네를 기절 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말은 사실일세. 정 의심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책장으로 가서 책 표지에 적혀있는 저자의 이름을 확인해 보면 될것이야." "이럴 수가..." 불가능이라 여기고 있었던 일이 사실이라 밝혀지자 가슴이 덥썩 막힌 장영실은 순간적으로 호흡이 여의치 않아짐을 느꼈고, 제 멋대로 날뛰는 가슴을 힘겹게 진정시긴 후에야 되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신 이야기가 사실이란 말입니까? 제가 본 바로는 그곳에 있는 서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권 분량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한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수천권의 책이라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구먼 그래." "흠... 그런 분이 명신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그 영감탱이가 이번 일에 간섭을 한것 같단 말이야. 지금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던 자가..." "헌데, 루스티커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라프라는 분을 탐탁치 않게 여기십니까? 혹시 두 분 사이에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장영실의 물음에 피식 웃은 루스티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사실 나와 그라프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사이일세. 어쩌면 그는 나에 대해서 모를 수도 있다네... 그렇다면 내가 왜 그에게 집착을 하는 것일까." 자문을 던진 루스티커는 잔에 남아있는 몇 방울의 포도주를 아쉽다는 듯이 입으로 털어 넣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아마도 그라프가 내 인생의 목표였었기 때문일꺼야. 마법사가 사사로운 유명세를 중요시 여겨서는 안되는 일이겠지만, 우습게도 마법사의 특유의 괴팍함 때문에 나는 그의 유명세를 시기했었다네. 그래서 나는 더욱 마법에 심취 할 수 있었고, 그 보다 한 층 높은 유명세를 얻길 갈망했었지. 어쩌면 그 덕에 지금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받으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후훗... 루스티커님께서 대마법사 된 이유가 그저 유명세 때문이라니..." "자네가 비웃어도 좋네... 마법사에게 있어서 유명세란 물질적인 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니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던 내가 유명세에 집착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작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네. 시간이 지나자 나도 상당한 명예를 얻게 되고 마법사로서 거의 그라프에 비등할 정도의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 하필면 그럴때 돌연 그가 세상을 등져 버리고 잠적을 해버린 것일세. 세상 사람들은 수많은 명예와 부를 버리고 세상을 등진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주더군. 게다가 그라프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아직도 대륙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나? 에잉..."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라프를 떠올리며 불만의 목소리를 덧붙였다. "어찌됐건 그리 됨으로써 나는 결국 그라프의 유명세를 뛰어 넘지 못하고 말았고, 그와 같이 멋지게 은퇴를 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현자들이야 은퇴를 하더라도 어디서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면 되겠지만, 마법사야 어디 그럴 수가 있나? 당장 수석 마법사 자리를 내놓는다면 연구에 필요한 재료비도 충당 할 수 없을 텐데 말일세. 그래서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고약한 늙은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이러고 있는 것일세. 끌끌..." 문득 열변을 토하다 말고 허망한 웃음을 터트리고있는 루스티커를 보며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장영실은 빈 술병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술이 조금 더 필요 할 것 같군요. 이런 때에는 술만큼 좋은 것이 없죠." 장영실이 술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몸을 돌릴 때, 루스티커가 소매를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는데, 지금 그는 조금 전 우울한 표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훗.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사실 지금 나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거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훗!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자네와 대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일세. 그라프의 생각이 떠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 저기에 마법을 난사 하면서 난동을 부렸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자네와 같이 제국 개발 사업을 해오면서 어쩌면 그라프 그 친구를 눌러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이번 일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것이라네. 어쩌면 그를 앞질러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지도 모를 테니 말이야." 굳은 의지를 보이는 루스티커의 노안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털털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더욱 술을 한잔 해야겠군요. 원래 술은 기분 좋을 때 마시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장영실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던 루스티커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 의미라면야 내 얼마든지 마셔 줄 수 있지! 허헛! 분명 자네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으니 나중에 후회 하지는 말게나."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서 서두르세나. 자칫 늦는다면 연회장의 술이 다 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던 루스티커는 무릎을 덮고있던 외투를 걷어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히려 장영실 보다 앞서 도서관의 문을 열고 나섰다. 그를 따라 나서던 장영실은 명신의 소식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첫 눈이 쌓이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올 해의 첫눈 역시 그 범주를 넘지 않고 있었는데, 땅을 겨우 적실 정도로 내린 눈은 매말라있던 땅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동시에 땅 위의 오물들을 이끌고 땅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러한 첫 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한켠에서는 볼성 사납게 구토를 하는 사내가 있었다. 짧달막한 키에 그리 많지 않은 머리숱을 가진 그는 아침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도중에 상관의 호출을 받고 가는 중이었는데, 거의 두달 동안이나 호출이 없었기에 여유롭게 생활을 즐기던 그로써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웨엑!! 아이구 죽겠다! 갑자기 장영실 남작님이 찾으실 줄이야. 아직 술도 덜 깼는데 이대로 남작님을 찾아 뵈어도 될지 모르겠군." 대충 옷 소매로 입가를 닦아낸 그는 구토물을 대충 발로 정리한 후에 정원에서 빠져나왔다. 그 때, 날카로운 피리 소리와 함께 붉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발견한 사내는 황급히 달아나려했다. "이런 젠장! 황실 관리병들이군. 잡히면 벌칙금이다!" -삐익! 삐익! "거기 서랏! 감히 황궁의 정원에서 구토를 하다니!" "제기랄 벌칙금이 한 두푼이냐! 나는 절대 잡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몸은 생각만큼 움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짤막한 다리로 여러번 움직여 봐야 뒤를 쫓고있는 청년들의 추적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몇 분간의 추격전(?) 끝에 덜미를 잡히고 만 사내는 어정쩡한 미소로 황실 관리병들을 보며 말했다. "저... 내 이름은 코르핀이라고 하네만. 지금 즉시 장영실 남작님의 호출로 가봐야만 한다네. 그러니 이번 한번만 어떻게 해주면 안되겠나? 너무 급해서 화장실을 찾을 시간이 없었단 말일세." 애절한 눈빛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는 코르핀을 내려다 보던 황실 관리병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남작님의 부르심이라 하더라도 이곳이 환제폐하께서 기거하는 황궁인 만큼 기본적인 규율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설령 남작님 본인이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아무일 없이 빠져나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코르핀은 체념 할 수 밖에 없었다. "에휴... 그래 벌칙금은 얼마인가?"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황실 관리병은 뒷 주머니에 넣고 있던 종이 뭉치를 꺼내들며 말했다. "정원 침입 10폴트, 이물질 투척 20폴트, 합이 30폴트 입니다. 벌금은 이번주 내로 황실 관리국에 납부해...?" 문득 코르핀의 벌칙금 내역에 대해 말해주던 황실 관리병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은 코르핀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정원수의 뒤쪽에서 또 누군가의 현장감 있는 구토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우웨엑! 우웩! "아무튼 연회 다음 날만 되면..."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인상을 구긴 황실 관리병은 코르핀의 손목을 잡은 채 구토 소리가 들려오는 정원수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는데, 정원수의 뒤로 돌아가 그 주인공들을 확인하게된 황실 관리병과 코르핀은 제 각각 다른 말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이..이런! 루스티커 수석 마법사님!" "장영실 남작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서로 어깨 동무를 하며 다정하게(?) 구토를 하던 그들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채 닦아 내지 못하여 입가 붙어있던 걸죽한 구토물들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황실 경비병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할 말을 잃었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초췌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온 장영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고, 그와 함께 들어온 코르핀 역시 장영실과 별반 다를바 없는 모습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입에 가져가 물을 들이킨 장영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군. 아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자네를 호출한 기억이 나서 바삐 오던 길이었네만, 운이 나쁘게도 추한 꼴만 보여줬구만." 고개를 내저은 코르핀은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하핫! 하지만 장영실 남작님과 루스티커님 덕분이 벌칙금을 물지 않아도 되어서 천만 다행입니다." 그의 말대로 장영실과 코르핀은 벌칙금을 물지 않아도 되었는데, 루스티커의 괴팍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황실 관리병은 차마 그의 성격을 건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코르핀에게 보여줬던 당당함을 즉시 거두어 들이며 줄행랑을 쳤던 것이었다. 그 후 루스티커는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고, 장영실과 코르핀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나저나 남작님께서 오랜만에 저를 부르신 것을 보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군요. 이번에도 뮤스원장님에 관한 일입니까?" 코르핀의 물음을 듣던 장영실은 흰색의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치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자네가 다시 한번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으로 가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부른 것일세." "이번에는 어떤 일입니까? 아직 뮤스원장의 추방기간이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간단한 일일세. 자네는 그저 내가 전해주는 편지만 그 아이의 누이에게 전해 주면 되는 것이지.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나. 혹시 갈증이 난다면 아무거나 꺼내 마시게." "천천히 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남작님." 말을 마친 장영실은 깃팬을 들어 편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깃팬으로 한자를 적어 내려간다는 것이 조금 어색 했고, 한자 특유의 유려한 모습도 나타낼 수 없었지만 그런 것 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명신이 자신의 편지를 알아 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충분 했기에... <대공학자> #198 시작하는 이들 올 해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 앞에 선보이는 작은 눈송이 하나는 이리저리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며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백조의 깃털 만큼이나 가벼워 보이는 눈송이들은 긴 여행을 끝마치며 차가운 땅에 맺히며 사라졌다. 눈송이가 하나씩, 하나씩 녹아 들어가고 있을 시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 저택의 고풍스러운 지붕 아래로 젊은 남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알록달록하게 포장되어있는 선물 상자가 하나씩 들려 있었고, 저 마다 첫눈이 내려오고 있는 하늘을 한번씩 올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저택의 문앞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경쾌하게 손잡이를 두들겼다. -똑똑똑! 그와 동시에 저택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그들을 맞이 하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아래위로 검은색의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공학원 저택의 집사 바이멀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는 문 밖에 서있는 젊은이들의 이름을 한명씩 부르며 맞아 주었는데, 크라이츠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은 뮤스의 친구들이었다. "허헛! 벌써 오셨군요. 카타리나 아가씨, 폴린 아가씨, 세이즈 아가씨, 히안 도련님. 그런데 가장 뒤에 아가씨는 처음 뵙는 분이시군요." 바이멀의 말과 함께 일행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그곳에는 일행들보다 조금 어리게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서있었는데,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그녀는 허리를 재빨리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뮤스선배의 후배인 헤밀턴이라고 합니다. 뭐... 뮤스 선배를 직접 본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후배는 후배인걸요. 들어가도 괜찮겠죠?" 그녀의 행동에 머리를 짚은 폴린은 고개를 내저으며 바이멀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바이멀 아저씨. 이 녀석이 어찌나 따라오고 싶어 하던지... 아무튼 못말릴 녀석이야." 폴린의 말을 듣고있던 히안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 못말릴 녀석도 누구만은 못하지 아마..." "히안! 오랜만에 나의 성질을 돋구는 구나! 요즘 남자친구라고 봐줬더니 슬슬 기어 오르는군." 폴린이 히안의 옆구리를 꼬집으려 들자 히안은 몸을 크게 틀며 소리쳤다. "흐엑! 나는 폴린이라고 말 한 적이 없는데 왜그래!" 히안과 폴린이 말다툼 태세에 돌입하려 하자 급히 손을 내저은 바이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분다 진정하시죠. 어차피 뮤스 도련님의 후배시라면 크라이츠님도 반가워 하실 겁니다. 날씨가 꽤나 쌀쌀하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제서야 폴린과 바르키엘은 입을 다물었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웃은 헤밀턴은 친절하게 맞아 주는 바이멀을 향해 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좋은 연말 보내세요!" "허헛! 정말 힘이 넘치는 아가씨군요. 감사는 나중에 크라이츠님께 하시면 됩니다." 손님들이 모두 저택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은 바이멀은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아직 크라이츠님과 드워프님들께서는 준비중이시니 금방 내려오실 것입니다. 벌쿤 도련님은 지금 주방에서 음식 장만을 하고 계시고요.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바이멀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에 몸을 던진 폴린이 세이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세이즈는 좋겠구나. 나중에 결혼하면 요리사 따로 구할 일이 없겠군. 벌쿤을 나중에 우리식당으로 스카웃해올까나?" 그녀의 말에 조용히 웃던 세이즈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히안을 지금 부터 교육 시키는건 어때? 히안정도면 머리도 좋겠다. 금새 요리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이즈의 칭찬을 들은 히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려 할때 폴린은 코웃음을 쳤다. "호홋! 요리는 예술이란 말이야. 히안이 머리는 좋지만, 그런 감각은 빵점이거든. 차라리 지금 처럼 공부해서 공학원으로 들어오는 편이 훨씬 좋을걸?"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건장한 청년인 벌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음식 준비를 하다 말고 달려왔는지 밀가루가 여기저기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기이하게 생긴 금속제 기구를 들고 있었다. "하하핫! 다들 왔군! 세이즈도 왔고, 카타리나 누나, 폴린 누나, 히안형! 어라? 헤밀턴도 함께 왔네?" 반갑게 맞아주는 벌쿤의 아래위를 살펴 보며 인상을 찌푸린 폴린은 뭔가 마음에 안드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벌쿤. 우리한테 가까이 올 생각은 하지마. 애써 손질해둔 옷에 밀가루 칠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으니까." "훗! 솔직히 나도 폴린 누나 옆으로는 가기 싫은걸... 우리 세이즈라면 몰라도. 그렇지, 세이즈?" 벌쿤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이즈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온몸에 밀가루를 칠하고있는 벌쿤이 다가와도 세이즈는 싫은 기색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쯔쯧... 그때가 좋을 때다. 우리 세이즈... 우리 세이즈... 지금 실컷 해놔. 조금만 지나면 그것도 없어 질테니까." 벌쿤의 시늉을 하며 투덜거리는 폴린의 모습에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이엔 누나랑, 바르키엘 형은 안보이네? 오늘 못온데?" 그의 물음에 웃음을 거두던 카타리나가 대답했다. "응 걔들은 지금 부모님들과 함께 여행중이거든. 얼마전에 편지로 소식을 받았는데 참석 못한다고 아쉬워 하던걸."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아마 내가 준비한 만찬에 참석하지 못한걸 땅을 치면서 후회할거야."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장담을 하는 벌쿤을 보며 가볍게 웃은 카타리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금속제 기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건 뭐니? 공학원 제품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건 틀별한 이름은 없지만 밀가루 반죽을 해주는 기계야. 혼자 기계공학 쪽 공부하면서 만들어 본건데, 꽤나 쓸만하길래 자주 사용하고 있지." 말을 마친 벌쿤이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손잡이에 있는 스위치를 올리자 반죽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소리도 없이 기이한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본 벌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우쭐 거렸다. "어때? 이걸 대량으로 생산해서 빵집에 판매하면 엄청난 인기를 얻을 거야. 원래 빵을 만들때는 반죽이 가장 힘들거든." 그러나 벌쿤의 말에 동의를 해주는 사람은 세이즈 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은 생각 같다. 나도 어머니를 도와서 빵을 만들어 봤는데 정말 힘든 것 같았어. 벌쿤이 이걸 만들었다니 정말 대단한걸?" 남들이야 어쨌건 세이즈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에 만족한 벌쿤은 반죽기의 작동을 멈추며 말했다. "그럼 나는 마무리를 하러 가야하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오늘 만찬을 기대하고 있으라고! 세이즈도 잠시 후에봐!" 주먹을 불끈쥐어 보이며 응접실 밖으로 나가는 벌쿤을 바라보던 히안은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듯 했다. "아무리 이상한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그렇지... 정말 저 덩치가 아깝다." 히안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폴린은 팔짱을 끼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튼 세상 남자들은 다 벌쿤을 본받아야 한다니까. 저런 괜찮은 녀석을 덥썩 물다니 세이즈는 운도 좋지." "또 나랑 사귀게 된게 억울하냐!" "아이고... 속좁긴. 농담좀 한거가지고 화내는 것 좀 봐..." 더 이상 폴린과 말다툼을 해봐야 제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된 히안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헤밀턴은 나이 답지 않게 팔짱을 낀채로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두분 모두 지금 너무 하시네요. 지금 카타리나 선배는 뮤스 선배를 먼 객지로 보내고 가슴아파 하시는데 두분은 볼 때 마다 사랑싸움이라니... 철좀 드세요!" 헤밀턴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린 폴린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으름장을 놨다. "이..이봐 헤밀턴. 네게만은 그소리를 듣고 싶진 않은데? 그리고 카타리나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뮤스녀석의 어벙한 면상을 보고싶은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왜 괜히 쓸데 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거야!" 결국 헤밀턴은 폴린식 공포의 목소르기를 당해야만 했고, 뮤스 이야기로 인해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때 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폴린 만큼이나 톤이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홋! 모두들 일찍와 있었군요. 그런데 모두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에 시선을 응접실 입구쪽으로 옮긴 뮤스의 친구들은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크라이츠의 모습을 발견했고, 애써 어둡던 안색을 숨기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를 보며 아무런 눈치도 못챌 크라이츠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뮤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카타리나 양 제 말이 맞죠?"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자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네... 크라이츠님." 고개를 푹 숙이며 금새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카타리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준 크라이츠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런... 뮤스녀석이 카타리나양을 크게 걱정 시키고 있군요. 돌아오면 내가 꼭 크게 혼줄을 내주도록 하죠." "뮤스는... 뮤스는 괜찮을 까요? 아버님으로 부터 미개척지는 굉장히 무서운 곳이라고 들었어요. 수많은 마물들이 날뛰고 있는 곳이라고..." 걱정스러움이 가득찬 눈빛을 하고있는 카타리나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크라이츠는 그녀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당연한것 아닌가요? 그 녀석은 드베인 숲에서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죠. 이번에도 꼭 무사히 되돌아 올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카타리나는 크라이츠의 위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밝은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네, 저도 크라이츠님과 같은 생각이예요. 이렇게 만찬에 초대까지 해주셨는데, 괜히 제가 주책을 부렸나 봐요." "별말을 다하네요... 그럼 괜찮아진 듯하니 벌쿤이 준비한 만찬을 즐기러가 볼까요?" 그녀의 말을들은 헤밀턴은 목을 조르고 있는 폴린의 팔을 풀어내며 기뻐했다.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부터 굶고 있었는데, 드디어 만찬이 시작되다니!" 헤밀턴과 안면이 없던 크라이츠는 해답이라도 구하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일행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폴린이 다시 헤밀턴의 목을 부여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이번에 저희 학부에 새로 들어온 후배녀석인데, 만찬 초대 소식을 듣고 꼭 공학원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요. 괜찮을까요?" 폴린과 헤밀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크라이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홋! 어차피 음식은 벌쿤이 충분히 준비해 놨을 테니 상관없답니다. 그럼 식당으로 가도록 하죠." 크라이츠가 몸을 돌리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나직한 한숨을 내쉰 폴린은 헤밀턴의 머리에 꿀밤을 한방 먹였고, 그래도 기분이 좋았던 헤밀턴은 혀를 빼물며 기뻐하고 있었다. 따뜻한 느낌의 조명들이 빛을 발하는 식당 내부, 약 50석에 달하는 기다란 식탁 위에는 빈 자리를 찾아 볼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아름다운 식기에 올려져 줄을 지어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장식을 위한 촛대가 여러개 놓여 있었고, 겨울이었음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싱그러운 꽃바구니들 역시 고급스러운 접시들과 함께 놓여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작은 소란이 식당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켈트와 벌쿤이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드워프 형제들은 당연히 켈트를 응원 하고 있었다. "형님! 벌쿤에게 진다면 알아서 하슈! 힘내슈!" "으허헛. 형님의 손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다우!" "벌쿤따위의 헛 근육에게 지면 드워프족의 수치요!" 드워프들의 응원을 듣고 있던 벌쿤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거예요! 또 크라이츠 큰누님이 오시기 전에 음식에 손댔다가 혼나시려고 그래요?" 벌쿤의 말에 함께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켈트는 의미심작하게 말했다. "이런 음식을 놔두고 기다리라고? 나중에 가서 혼나더라도 지금은 먹고 봐야겠다! 이 많은 음식들 중에 좀 먹는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이만 포기하시지 벌쿤!" "아무튼 아저씨들은 뇌까지 위로 되어 있을거예요!" 드워프들은 음식에 손을 대기 위해, 벌쿤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아웅 다웅 하고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크라이츠가 나타났고, 기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챈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거죠? 켈트씨... 그리고 형제분들?" 크라이츠의 등장에 켈트와 마주잡은 손을 뿌리친 벌쿤은 일의 진상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의 입을 틀어 막았기에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짤막한 몸으로 벌쿤의 등에 매달려 그의 입을 막은 켈트는 손을 흔들며 크라이츠의 물음에 대답했다. "허헛! 아닙니다. 요즘 벌쿤이 운동을 안하는 것 같아서 잠시 힘겨루기를 했을 뿐이죠. 그렇지 않나 아우들?" 켈트의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 드워프들은 먼 산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흠 그러고 보니 벌쿤의 힘이 예전만 못해졌어..." "요즘 공학 공부에만 너무 매달려서 그래.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과연 옛말이 맞는 것 같군." "켈트 형님과 비슷한 힘이라니... 이곳에 올때만 해도 훨씬 나았는데." 넉살 좋게 이야기를 대충 꾸며댄 드워프들은 급히 흩어지며 식탁으로 달려가 자리를 차지하며 앉았고, 대충 어찌 돌아가던 내용이었는지 알고 있었던 크라이츠 역시 손님들 앞에서 껄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자 다들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벌쿤이 어제부터 준비해놓은 것이랍니다." 그녀를 따라 들어오고 있던 뮤스의 친구들은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선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뮤스가 있을 때도 몇번 식사에 초대 받은 적이 있었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였던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기뻐하고 있는 것은 헤밀턴이었는데, 30멜리는 족히 됨직한 식탁의 끝에서 끝까지 돌아다니며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씩 살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와! 저 태어나서 이런 만찬은 처음이예요! 저희 학부 사람들이 다 와서 먹어도 모자랄 것 같은걸요?" 예상 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헤밀턴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두통을 느끼는지 고개를 내저었고, 그녀를 처음 보는 드워프들은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헛! 저 아가씨 마음에 드는구먼! 맛있는 음식 앞에서 점잔 빼고 있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걸?" 켈트의 칭찬에 기분 좋아진 헤밀턴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헤밀턴이라고 합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뒤에 서있던 폴린은 귓속말을 전했다. "헤밀턴. 드워프 아저씨들의 말씀을 칭찬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좀 나쁘게 말하자면 '인간 만큼의 교양이 없다.' 라는 뜻이란다. " 폴린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한 헤밀턴은 드워프들에게 급히 뛰어가 말했다. "와! 아저씨들이 드워프라니! 저 드워프 족은 처음 봤어요!" 그리곤 켈트와 브라이덴의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정말 책에서 보던 것 보다 더 짧네요! 키도 나보다 훨씬 작고... 배도 뽈록 나온게 너무 귀여워!" 이쯤 되면서 사색으로 변해버린 폴린은 급히 헤밀턴을 끌어내며 드워프들에게 사과를 했다. "이..이 녀석이 워낙에 철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 아저씨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어서인지 드워프들은 상황 파악 조차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허허... 방금전에 무슨 일이었지?" "글쎄... 저 아가씨가 우리를 보고 뭐라고 그런 듯 한데..." "허헛! 당사자 앞에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우리가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헛 것을 들었던 모양이야." 일이야 어째되었건 아무런 탈 없이 넘어가자 폴린을 비롯한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헤밀턴을 데리고 온것에 대해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었다. 크라이츠를 중심으로 식탁의 양쪽으로 나누어 앉은 일행들은 다시한번 음식들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 손뼉을 한번 쳐서 주위의 이목을 모은 크라이츠는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씩 둘러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모인 것이 연말 만찬을 함께 하기 위해서이니 먼저 식사부터 하는 것이 좋겠죠?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 음식들을 모두 벌쿤이 준비한 것이랍니다. 벌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도록 하죠." 크라이츠의 말에 머쓱함을 느낀 벌쿤은 머리를 긁적였고, 벌쿤의 옆에 앉은 세이즈는 미소를 한번 지어 줌으로써 그의 노고를 풀어주고 있었다. <대공학자> #199 식사를 시작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자 길게 늘어서있는 식탁의 왼쪽편과 오른쪽편은 서로 상반 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식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왼쪽편에는 드워프들 뿐이었지만, 어느새 헤밀턴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드워프들 못지 않은 모습으로 개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으며, 식탁의 오른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뮤스의 친구들은 맞은편을 바라보며 식욕을 떨구고 있었다. 오크나무의 연기에 훈제를 한 닭다리를 손에 들고서 입으로 한번 뜯은 헤밀턴은 입에있는 음식물을 그대로 보인채 켈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호홋! 켈트 아저씨 이것도 좀 드셔 보세요! 다리가 하나밖에 안남았어요. 선배들 따라 오길 정말 잘했지!" 그녀의 말을 들은 켈트는 먹고있던 양고기를 다 먹기도 전에 다시 닭다리를 하나 뜯어왔다. "껄껄! 고맙군 헤밀턴양. 이렇게 신나게 먹어 보는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이 단편적인 모습만 보더라도 드워프들과 헤밀턴이 상당히 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헤밀턴의 성격은 오히려 드워프들로 부터 큰 호감을 얻었던 것이었다. 이마를 찌푸리며 그들을 외면한 크라이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말을 꺼냈다. "일단 대충 식사를 끝낸 듯 하군요. 벌쿤, 후식좀 준비해 줄래?" 그녀의 말에 의자를 밀고 일어난 벌쿤은 요리실로 걸어들어갔고, 드워프들과 헤밀턴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 역시 식사를 끝냈다는 신호로 무릎에 얹고 있던 냅킨을 접시위에 올려 놓았다. 벌쿤이 후식을 준비해 오는 동안 크라이츠는 할말이 있는지 뮤스의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찬에 초대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답니다." 크라이츠의 말에 일행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를 향해 모아졌고,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던 크라이츠는 손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요. 다만 여러분들께 하나의 제안을 하고자 하는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크라이츠는 가장 가까이에 앉아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물었다. "카타리나양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할것이죠? 계속해서 공부를 할 예정인가요?" 그녀가 의도하는 바를 확실히 알수는 없었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타리나는 물을 한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으로서는 졸업하고도 계속해서 연금술에 대한 공부를 할 생각이예요. 이쪽이 굉장히 흥미롭거든요." "역시 생각대로군요. 그리고 다른 친구분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크라이츠가와 시선을 마주친 일행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고, 폴린만이 두리번 거리면서 친구들의 행동을 살피며 대답했다. "저... 저도 연금술이 재미있기는 한데,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용이 너무 딱딱해서 적성에 맞지가 않아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거든요." 폴린의 솔직한 말에 가벼운 미소를 지은 크라이츠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쨌건 계속해서 같은 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이군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제안하는데, 졸업과 동시에 공학원의 공학자로 들어와 주시겠어요? 보수나 대우는 충분히 해드리도록 하죠." 이자리에 있는 그 누구 보다 크라이츠의 제안에 놀라워 하는 것은 히안이었다. "그..그게 정말이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졸업후에 뮤스에게 부탁해서 공학원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히안군은 저의 제안을 받아 들이겠다는 것이군요. 그럼 다른 친구들은 어떻죠?" 하지만 히안을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들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한가지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세이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라이츠님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히안을 제외한 저희들은 그리 성적이 우수한 편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저희가 공학원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지 모르겠는걸요." 세이즈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켈트였다. 그는 살을 발라낸 뼈다귀 하나를 입에 꺼내는 중이었는데, 아직도 식사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짭짭...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게야. 어차피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모두 머리에 넣어서 공학원에 들어 온다고 하더라도 화공학에 대한 기본 지식외에는 별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대신 공학원에 들어온 이후에 얼마나 열심히 실력을 발전시키고, 연구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일세." 오랜만에 바른말을 하는 켈트의 뒤를 이어 크라이츠가 말을 덧붙였다. "켈트씨의 말대로 우리 공학원은 지금까지 쌓은 지식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이 필요하답니다. 지금 공학원은 인재들이 크게 부족한 상태죠... 얼마전 세이즈 양의 언니인 아로인 양이 그 동료들과 함께 공학원으로 들어와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수가 많이 부족한 상태거든요. 특히 듀들란 제국에서도 우리 공학원에 대응하기 위해서 전뇌거 개발에 뛰어드는 등의 국가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듀들란 제국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게 될것이고, 뮤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에 대비할 충분한 기반을 닦아 놔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힘이 더욱 필요한 것이고, 여러분들 외에도 도이첸 제국의 전역에 공고를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집할 예정이예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카타리나와 그녀의 친구들을 바라본 크라이츠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재촉을 하지는 않았다. 드워프들이 식사하는 소리만이 조금씩 들리고 있을 때, 후식 준비를 끝낸 벌쿤이 주방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과 함께 후식을 옮겨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잠잠해진 식당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늘 연회의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크라이츠의 제안에 고민 하고있는 친구들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크라이츠의 제안에 동의 할 것을 굳게 믿고 있던 벌쿤은 파이접시 하나를 크라이츠의 앞에 내려 놓으며 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다들 후식이나 먹고서 고민을 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벌쿤 특제의 퀴쉐파이가 다 식어 버린단 말이야."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들의 시선을 집중 시킨 벌쿤은 손에든 파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런 파이는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게 아니야. 늦었다가는 하나도 못먹을 지 모른다고." 그제서야 한껏 진지해져 엉켜있는 표정을 풀어낼 수 있었던 친구들은 벌쿤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에게 파이를 한 조각씩 건네받은 친구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한 입 베어먹었다. 그 중 아무런 생각 없이 벌쿤의 파이를 받아먹던 히안은 눈을 꿈뻑거리며 자신이 먹고있는 파이를 내려다 보고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음식도 맛있었지만 이건 정말 맛있잖아! 도대체 이 열매는 뭐야?" 이런 반응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이 나오고 있었는데, 벌쿤의 여자친구인 세이즈 역시 이 파이는 처음 먹어보는 듯 했다. "어머! 벌쿤, 이 지금까지 이런 걸 숨기고 있었던거니? 이 빨간 열매는 뭐야?" 그들의 반응을 흐뭇하게 바라보고있던 벌쿤은 어깨를 우쭐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핫! 바로 벌쿤 특제 파이라니까. 그 열매는 퀴쉐라는 열매인데 덥고 습한 곳에서 자라나지. 그래서 건조한 라이델베르크에서는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얼마 전에 잘 아는 과일 가게 아저씨께 부탁해서 구할 수 있었어. 상큼한 맛이 느끼한 파이의 뒷맛을 깨끗이 없애주거든. 워낙 열매 양이 얼마되지 않아서 많이 못만들었으니까 빨리 먹는게 좋을거야." "뭐야! 모자란다고?" 자칫 늦으면 맛도 보지 못한다는 말에 위기감을 느낀 드워프들은 먹고있던 접시들을 뒤로한채 벌쿤에게 달려와 파이를 낚아 채려했다. 하지만 벌쿤과 50셀리 이상의 신장차이가 났던 드워프들은 허공에 헛 손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최대한 높이 파이 접시를 들어 올린 벌쿤은 자신의 어깨 아래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드시던 것들이나 먼저 드시고 오세요! 안그러면 퀴쉐파이의 진정한 맛을 못느낀다니까요! 제 요리를 무시하는 행위를 하도록 놔둘 수는 없어요!" 도움닫기와 함께 다시 한번 손으로 허공을 휘저은 켈트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런게 어디있어! 그냥 대충 맛만 보고 배만 채우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만 장난치고 좀 주기나 하라고!" "아 글쎄 안된다니까요!" 또 다시 아웅다웅 거리고 있는 드워프들과 벌쿤을 바라보고있던 친구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웃긴 나머지 입에 있는 음식물을 튀길 정도로 크게 웃었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배를 잡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있던 카타리나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물을 닦아내며 크라이츠를 불렀다. "저... 크라이츠님." 함께 웃고 있던 크라이츠는 카타리나의 부름에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네, 카타리나양.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만약 훗날 공학이 발달해 누구나 전뇌거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제국 어디든지 손쉽게 갈 수 있다면 저런 희귀하고 맛있는 열매들을 도이첸 제국의 서민들도 손쉽게 먹을 수 있게 되겠죠?" "물론이죠. 열매나 과일 같은 물건들은 운송기간이 큰문제이기 때문에 산지가 아니라면 가격이 크게 높아지는 것이니까요. 그 뿐만 아니라 공학이 지금보다 훨씬 폭 넓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좁게는 도이첸 제국의 모든 국민들, 나아가서는 대륙의 모든 국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 틀림없어요." 잠시 자신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본 카타리나는 굳은 결심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친구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크라이츠님이 제안 하신대로 공학원에 들어와 일을 하고싶어요.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열심히 배워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뮤스의 옆에서 작은 것이라도 하나 돕고 싶으니까요." 카타리나의 생각을 듣고 있던 세이즈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인지 벌쿤과 눈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카타리나와 같은 생각이에요. 모르는 것이 많더라도 아로인 언니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우면 늘겠죠. 폴린 너는 어때?" 폴린은 아직도 생각이 교차 하는지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폴린은 두 손을 들며 대답했다. "저는 카타리나나 세이즈 처럼 뭔가에 열중해서 익히는 체질이 아니에요. 하지만 친구들이 다 공학원에 들어온다는데 혼자 떨어 질 수는 없죠. 혹시 연구직 말고 다른 자리는 필요하지 않나요? 회계나 금전 관리같은 것은 자신있거든요. 어려서 부터 집에서 해오던 것이다 보니..." 그녀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린 크라이츠는 마침 잘되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 공학원을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 버거웠는데 폴린 양이 저를 좀 도와 주시면 되겠군요. 성격도 활달하니까 제 비서일을 해주면 딱 어울릴 것 같은걸요." "호홋! 멋져요! 공학원의 비서라... 왠지 폼이 나는걸요? 그런데, 바르키엘은 어떻게하죠? 여행중이라 오늘 참석하지 못했는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바르키엘도 꽤나 똑똑한 녀석이죠." 그녀의 물음에 빙그레 웃어보인 크라이츠는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키엘 군에게는 이미 동의를 받아 놨답니다. 하지만 가이엔 양은 인문학 계열이라 조금 거리가 있더군요. 그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다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도록 하죠." "자까안오!" 이야기를 끝내려 할 때, 불현 듯 식탁의 가장 끝자리로부터 어정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이츠가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입에 한가득 음식물을 물고 있는 헤밀턴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는데, 가슴을 두들기며 겨우 물고있던 음식물을 삼킨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헤헥... 저도 공학원에 들어오고 싶어요! 저도 이곳에서 일하면 안될까요? 선배들이랑 떨어지기 싫거든요." 또 다시 분위기 파악 못하고 끼어들고있는 그녀를 폴린이 나서며 말리려 했다. "헤밀턴, 그건 말도 안돼! 연구는 전혀 네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내 입으로 이런말 하는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리처럼 덤벙대는 성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폴린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뜬 헤밀턴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선배가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저 이래뵈도 햄브리겐 대학교 올해 최우수 입학생이에요! 게다가 연금술 과목은 실기까지 합해서 만점을 얻었다고요! 이런 인재를 그냥 놔두면 안되죠!"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듣고서 모두들 놀라운 표정을 지을 때, 비교적 담담하던 세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믿기지 않을테지만 헤밀턴의 말은 모두 사실이야. 얘가 올해 전 학부를 통 털어 수석으로 입학했어. 내가 입학식때 똑똑히 봤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지." "호호홋! 역시 세이즈 선배는 다르군요! 어때요? 이래도 제가 공학원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건가요?" 기고만장해진 헤밀턴의 태도에 폴린을 포함한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식사를 마친 켈트는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빨며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헤밀턴 양을 받아 들여도 별 괜찮을 것 같군요. 연금술 실기 과목에 만점이라면 손재주도 상당한 것 같고, 성격도 마음에 드니 저희들이 맡아서 가르치도록 하죠." "호홋! 고마워요 드워프 아저씨!" 어쨌건 헤밀턴의 일이 해결된 듯 하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크라이츠는 새롭게 맞아 들일 식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양, 폴린 양, 세이즈 양, 폴린 군 마지막으로 헤밀턴 양. 여러분들이 저희 공학원의 식구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앞으로 시간이 날 때 마다 공학원에 와서 드워프분들과 아로인 양을 도우며 열심히 실력들을 쌓으시길 부탁드릴께요. 공학원에서는 여러분들에 대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지금까지 자신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라고 여기던 공학원의 새 식구가 된 현실이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쁨과 알지 못하던 세상에 뛰어든다는 설레임으로 인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들이었다. 이튿날 부터 도이첸 제국에 존재하는 전 대학교와 사설 연구단체의 게시판에는 공학원의 이름으로 모집공고가 붙기 시작했고, 이는 대상지역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부터 큰 관심을 끄는 사건이 되었다. -끼익... 방문을 닫은 카타리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문앞에 기대어 섰다. 왠지 무거워 보이는 그녀의 어깨가 아래로 처지면서 어깨에 걸려있던 작은 가방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조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오는 그녀의 붉은 입술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후...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없는거니." 조금의 시간이 흐를 동안 그렇게 서있던 카타리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침대로 걸어갔다. 대충 외투를 벗어 침대의 한쪽에 놓아둔 그녀는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다. 까칠한 종이의 질감을 손 끝으로 느낀 그녀는 천천히 그것을 끌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질이 그리 좋지 못한 한 장의 종이였고, 수도 없이 손을 탄 듯 모서리 부분은 조금씩 헤져 있었다. 카타리나는 여느 때와 마찬 가지로 오늘도 빠지지 않고 그 종이를 펼쳐 읽어내려 갔다. -카타리나에게. 네가 이 글을 읽을 때 쯤이면 누님을 통해서 나의 소식을 들은 후겠구나. 그리고 그때 쯤이면 나는 알지 못할 어딘가에서 혼자 남아있겠지? 하지만, 난 나에게 내려진 형벌이 억울하지는 않단다. 어디까지나 나로인해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나의 잘못에 대해 뉘울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를 해야할 지경이지. 요즘 눈을 감으면 여러가지 생각이 난다. 내가 없는 동안에 너는 어떻게 지낼지, 걱정이나하지 않을지, 공학원은 어떻게 되어갈지, 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라이델베르크로 뒤따라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네게 너무나 미안할 뿐이야. 부디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래.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테니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지내길... 뮤스의 짤막한 편지를 다 읽은 카타리나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지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몸건강하게 잘 지내겠지?" 옆에 없는 뮤스에게 질문을 던지던 그녀의 눈가에는 맑은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문 카타리나는 고개를 도리질치며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아냐! 내가 울고 있으면 뮤스도 좋아하지 않을거야." 뮤스가 미개척지로 추방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로 수십번도 넘게 해왔던 혼자만의 각오였지만 그의 생각이 날때면 언제나 눈물이 맺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품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들었다. 비록 헤밀턴에 의해서 찢어져 뮤스와의 사이가 갈라졌던 사진이었지만, 지금은 정성스럽게 이어붙여 처음과 같이 다정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뮤스의 얼굴을 보며 코 끝이 아리는 것을 느낀 그녀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미소지었다. "풋... 이제는 울지 않고 잘 기다리고 있을께. 아참, 나와 친구들도 이제 공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돕기로 했어. 다음에 네가 돌아와 다시 공학원 일을 할때 많이 도와줄 수 있도록 노력할께. 그 때는 꼭 같이 지내는거야. 알겠지?" 하루의 일과를 아쉬운 대로 사진 속의 뮤스에게 말해준 그녀는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대공학자> #200 가슴에 겨울을 묻은 여인. 첫 눈이 내리던 설레임도 오래가지 못했고, 보는이의 가슴까지 시리도록 만드는 겨울 비가 세상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바닥에 깔려있던 회색의 포장석들은 차가운 빗물에 질린 듯 진회색으로 변해있었다. 세 명의 시녀들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길을 덮고 있는 포장석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이디론가를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녀들은 그녀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물방울이 튀지 않도록 조심한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힘이 없어보이는 시녀들의 주인은 빛방울이 튀는 것 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가장 앞쪽에서 레이스로 치장 된 우산을 받치고 있던 젊은 시녀가 다소곳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티에론 황녀님 조금만 더 가면 사교장입니다. 바닦에 포장석이 깔리지 않아 땅이 좋지 않을테니 드레스를 조심하시죠." 드레스의 여인은 케티에론 황녀였다. 그녀는 큰 근심이라도 있는 듯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 사교 모임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으나 이미 한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었기에 그곳으로 걸음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심하라는 시녀의 말에도 불구하고 케티에론 황녀는 흙바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았다. 평소 아끼는 드레스에 물한방울 튀는 것을 참지 못하고서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있던 시녀들은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과 바닦에 끌린 드레스를 보며 기겁을 했다. "화..황녀님! 드레스와 신발에 온통 흙이 묻었습니다! 이일을 어찌하면 좋죠?!" 너무나 당황한 말까지 더듬거리는 시녀들에게 시선을 준 케티에론 황녀는 오히려 그녀들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겨우 흙이 조금 묻은것 가지고 왜그렇게 호들갑이지? 어차피 나중에 씻으면 되는 것 아니니. 약속 시간에 늦기 전에 어서 가자꾸나..." 예상치 못한 케티에론 황녀의 반응에 얼떨떨해진 시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비를 맞으며 시녀들보다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시녀들은 급히 우산을 받치며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움푹, 움푹 파고드는 자신의 신발을 보며 걷던 케티에론 황녀는 지난 봄을 회상하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풍성한 여름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했던 단비가 때를 맞춰 뿌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일년 중 가장 싱그러운 모습을 하고 있던 초목들은 봄비로 인해 더욱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서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고, 케티에론 황녀도 그런 부류들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아침 부터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노란색을 띄고 있는 커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왜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안그래도 그 장영실인가 하는 작자 때문에 기분도 망쳤는데, 비까지 내리고 말이야! 이래 가지고선 사교장에 나가는 것도 마땅치 않겠어. 머리도 망가질테고 드레스도 젖을 테니까." 케티에론 황녀의 성격때문에 진땀께나 빼던 시녀는 그녀가 벗어던진 드레스들을 한아름 안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사교 약속을 취소하도록 할까요?" "아냐! 아냐! 듀들란 제국의 황녀인 내가 고작 비 때문에 약속을 취소할 수는 없지! 그건 나의 고아한 품격에 흠집을 내는 행동일 테니까." 언제나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태도가 새로울 것도 없었던 시녀는 드레스를 하나씩 정리하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옷이 조금 더러워 지더라도 케티에론 황녀님의 타고난 미모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죠." "호호홋! 그건 바른 말인 것 같구나. 그래도 머리카락 끝이 젖어서 축축한 것은 질색이니까 머리는 말아 올리도록 하고, 드레스는 최대한 밝은 색으로 해줘. 진한 색은 비에 젖으면 금방 눈에 띄거든. 오늘도 나의 미모를 유감없이 발산해야 겠군!" 몇 마디의 아부로 이미 비에 대한 불만을 잊어버린 케티에론 황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듬는 중이었고, 시녀는 그녀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드레스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로 부터 1시간 여가 지난 후에야 단장을 끝마칠 수 있었던 케티에론 황녀와 시녀는 거처에서 빠져나와 사교장을 향하고 있었다. 핑크빛의 우산을 산뜻하게 든 케티에론 황녀의 발걸음은 물이라도 튀길까 조심스러웠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는 드레스를 땅에 끌리지 않도록 살짝 치켜들고 있었다. 그렇게 사교장으로 이동하는 중, 케티에론 황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드레스에만 신경을 빼앗기고 있던 시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케티에론 황녀의 시선은 먼 발치에 고정되어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서는 생전 처음보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사내가 비를 맞으며 맨발로 진흙밭의 중심에 었다. 그것 뿐만 아니라 기이한 형태로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것이었다. 빗속을 가로지른 그의 손은 매끈한 곡선을 그려나갔고, 마치 물속을 유영을 하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또, 그의 발은 제비가 물 위를 스치며 지나가 듯 가볍게 땅을 차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단순한 발차기로 인해 생긴 바람은 고여있는 물을 날카롭게 갈라내는 것이었다. 조금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사내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우아하고도 신비한 몸짓에 감탄을 했음이 틀림 없었겠지만 오늘은 그의 운이 썩 좋지 않았는지 안 듣느니만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저..저 작자 장영실이잖아! 오늘은 또 빗속에서 무슨 미칫짓이람!" 그녀의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는 꽤나 컷기에 장영실의 귀에까지 들어가는데 큰 모자람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케티에론 황녀가 서있는 곳으로 몸을 돌린 장영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흠... 미친짓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황녀님 처럼 옷을 사람보다 귀중하게 모시고 있는 것 보다는 이러는 편이 더욱 편하지요. 황녀님도 한번 몸으로 자연을 느껴 보시죠. 그리고 이 향기를 맡아 보시면 제가 왜 이 미친짓을 하는지 아실겝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장영실을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케티에론 황녀는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쯔쯧... 내가 저런 미친 작자의 행동에 화를 내고 있었다니. 어찌 보면 참으로 딱한 사람이군! 흥!" 목에 다시 힘을 주며 콧방귀를 낀 케티에론 황녀는 보란 듯이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헌데, 그녀의 첫발이 닿는 곳에는 얄밉게도 포장석의 모서리가 하나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던 케티에론 황녀는 발목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는데, 시녀도 장영실의 기이한 몰골에 정신을 팔고 있었기에 그녀를 구해 줄 수는 없었다. -철퍽! 예상치 못한 불길한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시녀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쓰러진채 망연자실 앉아있는 케티에론 황녀를 발견하고선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화..황녀님! 괜찮으신가요! 주..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눈앞이 깜깜해진 시녀가 어쩔줄 몰라하며 케티에론 황녀를 부축하려 할 때 장영실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황녀님께서도 말은 거칠게 하셨어도 제 행동을 부럽게 여기셨던 게로군요. 하지만 저를 따라 하시기에는 옷이 너무 비싸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일어나시죠." 장영실은 케티에론 황녀의 팔을 부축하며 그녀를 일으켰고, 동시에 시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자네도 그렇게 당황할 것 없네. 어차피 황녀님께서 원하셨던 일이셨으니 자네가 잘못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게다가 설령 자네가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이런 일에 화를 낼 옹졸한 분이 아니시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까 황녀님?" 사실 시녀를 향해 화풀이를 할 생각으로 온갓 험한 말을 준비하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장영실의 말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는데, 장영실이 그런 식으로 말한 이상 시녀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의 모습만 더 웃기게 될 뿐이었고, 자존심 강한 그녀로서는 최소한 장영실 앞에서 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었다. "당연한것 아닌가요? 이런 작은 실수 때문에 아랫것들에게 직접 화를 낼만큼 옹졸하지는 않죠. 그러니 너도 그렇게 떨고 있을 것 없단다!" 그제서야 아무일 없이 넘어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시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고, 자신을 감싸준 장영실에 대해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팔을 부축하고 있는 장영실을 본 케티에론 황녀는 팔을 거칠게 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건 그렇고,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대다니 이게 무슨 짓이죠!" 또 다시 자신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케티에론 황녀의 사나운 목소리를 듣던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하지만 저 흙탕물 속에서 앉아 계신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흥! 나도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요!" "그럼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것이군요. 다시 한번 사과드리도록 하지요." 결국 장영실의 사과를 받아내며 말을마친 케티에론 황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았다. 거처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주홍빛의 화사한 드레스였지만,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은 차마 드레스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이고 있었다. 작은 주먹을 꼬옥 쥐며 화를 참아낸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을 올려다보며 특유의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야 어찌되었든, 저는 드레스가 망가져서 사교 모임에 가지 못했고, 이는 장영실 경이 제 앞에서 헤괴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만큼 이 드레스에 대한 배상을 해줬으면 해요! 제 말에 틀린점이 있나요?" 이번에도 역시 그냥 넘어가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자 실소를 금치 못한 장영실은 말을 끌어봐야 골치만 아파진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렇게 따지신다면 제 잘 못이 틀림이 없군요. 빠른 시일내에 새로운 옷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다 된것입니까?" 의외로 장영실이 쉽게 수긍을 하자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에게 이겼다고 생각하는 듯 턱을 치켜들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대기하고있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황녀님 그렇다면 사교 모임에는 출석하지 못하신다고 전할까요?" 그녀의 물음에 눈을 치켜 뜬 케티에론 황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는데, 장영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를 한다고는 말을 했지만 아직도 시녀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 모양을 하고서 사교 모임에 참석하라는 것이냐? 당장 사교장으로 가서 오늘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하거라!" "네! 황녀님." 짤막하게 대답한 시녀는 서둘러 길을 재촉했고,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못 마땅한 듯한 표정이었다. 우산을 다시 들어올린 케티에론 황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흠..흠.. 그나저나 아까 당신이 하고 있었던 그 이상한 행동은 뭐죠? 춤을 추는 것이라고 보기에도 이상하던데..." 그녀의 물음에 손을 가볍게 들어올린 장영실은 아까와 동일한 형태로 손을 움직여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뇌동체술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체조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것 같군요. 다만 몸속에 흐르고 있는 신비한 힘을 사용해서 그 위력을 증가 시킬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몸을 좀 풀어 보고 있었던 것이죠." 장영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의 옷과 머리는 이미 다 젖어있었기에 우산을 쓸 필요도 없어 보였지만 꿋꿋하게 우산을 든 채로 그의 설명을 머리에 되세겼다. "신비한 힘이라는 것이 혹시 마나라는 것인가요? 저도 루스티커님께 들은 기억이 있죠.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마나와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른 면도 있죠. 루스티커님의 설명에 따르면 마나는 마법 시동어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그 신비한 힘은 뇌공력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마법시동어가 업더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답니다." 자신의 말이 정답이 아니라는 대답에 기분이 언짢아진 케티에론 황녀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흥! 저는 뇌공력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봤어요! 혹시 저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 아니라면 그 힘을 한번 보여줘요!" 또 다시 억지를 부리고 나서는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골치가 지끈거림을 느낀 장영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황녀님께서는 꼭 포장석 위에 올라가 계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또 다시 저 때문에 기절을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이... 그때 생각만 하면 정말!" 더 이상 케티에론 황녀의 불만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몸을 돌린 장영실은 그녀로 부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살펴본 그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단전으로 부터 뇌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몇 가지만 보여 드리도록 하죠." 비록 뮤스와 같이 전신에서 금빛이 일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몸으로 부터 방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케티에론 황녀도 느낄 정도였는데, 신기한 것을 보는 아이마냥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차앗!" 짤막한 기합성을 내지른 장영실은 힘있게 다리를 구르며 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발이 닿은 땅의 진흙은 사방으로 비산하며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고, 손에서 뻗어나온 권풍은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을 날려버릴 정도였다. 잠시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장영실은 어느 순간이 되자 먼저 케티에론 황녀가 봤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가 지나가는 곳의 빗방울들은 마치 태풍이라도 만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부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한번 씩 휘둘러 질때 마다 권풍이 몰아쳤고, 다리를 한번씩 구를때 마다 땅이 진동했다. 이렇듯 유연하면서도 재빠른 몸놀림에도 불구하고 상상치 못할 힘이 그의 몸을 통해 뿜어지고 있었는데, 뇌동체술법의 진면목이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장영실의 움직임이 멈추자 세상은 고요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주변의 땅은 처참이라고 할 만큼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그의 발이 닿았던 곳마다 진흙이 사방으로 뿌려져 있었고, 큼직한 웅덩이가 깊이 패여있었던 것이었다. 숨을 고르며 뇌공력의 흐름을 살피던 장영실은 상당한 양의 뇌공력을 사용했음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고, 당연히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케티에론 황녀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오히려 놀란 것은 장영실이었는데, 근 몇달간 이렇게 놀라기는 처음인 듯 했다. 당연히 케티에론 황녀가 서있어야 할 곳에는 지금 한 무더기의 진흙이 쌓여있었는데, 위로 빼꼼 나온 얼굴을 보고 서야 그것이 케티에론 황녀임을 알수 있었다. "이..이런! 괜찮으십니까 황녀님!"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장영실을 바라보며 거의 울상을 지은 케티에론 황녀는 입술에 묻은 진흙을 뱉어내며 외쳤다. "이..이거 일부러 그런거죠! 나한테 감정이 있어서 그러신 거죠?!" 그녀답지 않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외치고있는 모습을 내려다본 장영실은 순간 측은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정말이지 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황녀님. 제가 거처까지 모셔다 드리도록 하죠." "거짓말! 다 고의로 그런거예요!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케티에론 황녀의 입은 아직도 그를 탓하고 있었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장영실의 손을 뿌리칠 힘도 없었기에 그저 하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대공학자> #201 "케티에론 황녀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한참 옛일을 생각하던 케티에론 황녀는 시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을 잠깐 둘러본 후에야 자신이 길을 가다말고 멍하니 서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가자꾸나." "네 황녀님."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 그녀들은 얼마가지 않아 사교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수의 귀족들이 그곳에 모여있었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즐겁게 떠들며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교장이 시끄럽다고 느낀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안쪽으로 들었다. 케티에론 황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귀족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그녀에게 예를 표하기 시작했는데, 상류층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자리였기에 과다한 아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한 케티에론 황녀는 사교장의 방을 가르는 두꺼운 커튼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중년인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케티에론 황녀의 숙모인 동시에 투르코스 재상의 부인이었고, 케티에론 황녀와 약속이 되어있었던 상대였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재상부인은 몸을 일으키며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황녀의 손을 마주잡은 재상부인은 그녀에게 급히 알릴 것이라도 있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황녀님 제가 오늘 이곳에 청한 이유를 모르시고 계셨죠?" 겉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시녀에게 넘겨준 케티에론 황녀는 잠시 쉴 여유도 없이 질문을 던져오는 재상부인을 향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저 숙모님께서 저를 보고 싶어하시는 줄 알았는걸요." "호홋! 실은 황녀님을 청한 이유는 다른것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셨답니다." "좋은 자리라니요?" "바로 그분과 조용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죠. 아마 지금쯤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예요." 재상부인의 말을 들은 케티에론 황녀는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분이라면 혹시 장영실 경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럼 제가 황녀님 앞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겠나요? 바로 장영실 경을 말씀드리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런..." 잔뜩 긴장한 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손을 포근하게 감싸준 재상부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이죠? 하지만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케티에론 황녀님에게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랍니다. 그렇다보면 그 익숙치 않은 경험의 당황스러움 때문에 큰고민에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고민만 하다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갈 뿐이죠. 시간이 흐른다고해서 황녀님께서 장영실 경에게 직접 자신의 감정을 말할 용기가 생길까요?" 재상부인의 질문을 받은 케티에론 황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녀님은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허영과 교만을 보이고 계시지만, 누구 보다 순수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답니다. 오히려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신다는 것도요. 하지만 황녀님께서는 지금 마음을 열고자 하는 분을 찾으셨어요. 제가 보더라도 장영실 경은 참으로 훌륭한분이죠. 생각도 깊으신데다가 예의도 바르고 능력도있고... 그렇기에 저는 황녀님의 보호자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랍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 분을 영원히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케티에론 황녀는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재상부인의 배려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용기가 안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분을 만난다고 해도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긴장해서 굳어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재상부인은 사교장의 한쪽에 마련되어있는 소파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재상부인은 케티에론 황녀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어려울 것이 없답니다. 그저 황녀님의 마음 속에 담고있던 그 분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만 말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황녀님은 그분의 어떤점이 마음에 들었죠?" 잠시 그녀의 물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뭐라고 딱 꼬집어 말을 할수가 없을 것 같아요. 처음 그분과 만났을 알지못할 당당함을 느꼈어요. 저 뿐만 아니라 그 어떤존재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을 당당함을...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그분의 자상함을 느꼈죠. 말도 안되는 부탁이라도 거절을 하지 못하는 자상함을요. 또, 세번째 만났을 때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느꼈답니다.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일들을 하나씩 가능으로 만들어가는 그 열정을...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황녀님께서 모든 면을 좋아하고 계시는 그 분께서 오실 것이랍니다. 지금 느끼시는 그대로를 전하시면 되는 것이죠. 그분은 황녀님의 진실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재상부인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을 심어주었고, 케티에론 황녀는 처음으로 장영실에 대한 편견을 버렸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장영실에게 진흙세례를 받은 다음날 부터 케티에론 황녀는 며칠간이나 자신의 숙소에서 두문불출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황궁 어디선가 그녀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여러번 들리고 있었을 오전 시간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봐도 지겹지 않은 봄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을 통해 어디론가 급히 가고있는 장영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항상 즐겨입던 회색의 정장을 벗어던지고서 남색으로 아래, 위를 통일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상태였고, 손에는 굉장히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들려있었다. 걷는 도중에도 여러번 손에들린 상자를 내려보던 장영실은 그때 마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신세에 대해 한탄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지원... 쩝. 그래도 내 실수로 큰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설마 몸도 좋지 않은분이 또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건네보았지만 장영실은 그래도 뭔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장영실의 발이 멈춘 곳은 황궁전체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꺼린다는 케티에론 황녀의 거처 앞이었다. 걱정이 앞서는 마음을 진정시켜본 장영실은 노크를 하기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끼이익! 그의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얼마전 케티에론 황녀와 함께 있던 시녀임을 알수 있었다. 장영실을 발견한 시녀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고, 잠시 뒤를 돌아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장영실 남작님." "뭐 감사까지야... 신경쓸거 없네. 그나저나 황녀님께서는 안에 계신가?" "어제도 밤새 잠을 못이루시다가 지금에야 막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뵙지 못할 듯 합니다만..."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장영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에든 상자를 시녀에게 전해주며 입을 열었다. "흠...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 뵙도록 하지. 이것이나 황녀님께 전해 주겠나?" 상자를 얼떨결에 받아든 시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될까요?" "별것 아닐세. 예전에 내가 망쳐 놓았다고 우기시던 드레스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할겸 마련한 것이니까." 그의 말을 듣고있던 시녀는 그것을 다시 건네주었다. "이것은 남작님께서 직접 전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한걸요. 아무래도 사과의 의미인 만큼 직접 전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말도 틀린바가 없었기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허헛. 내가 그런 것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 그럼 내가 직접 만나뵙고서 전해주도록 하겟네." "저는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고마웠네." 어수룩한 장영실을 보며 미소 지은 시녀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케티에론 황녀의 거처앞에 혼자남게 된 장영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방문 앞에 자리를 털고 앉았다. "다시 시간을 내서 오는 것도 힘들테니 기다리는 수 밖에..." 결국 기다리는 방법을 택한 장영실은 들고있던 상자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품에 가지고 있던 작은 책을 꺼내들며 조금씩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는데, 책의 제목은 '아름다운 드레스 100선' 이었다. 흰색의 보드라운 면으로 이루어졌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침구들이 넓은 침대위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이불을 목까지 덮은 케티에론 황녀가 잠에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악몽을 꾸기라도 하는 듯 연신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아..안돼... 나쁜 사람... 꺄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그녀는 반쯤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두운 자신의 방안임을 확인하고 나서야 꿈을 꿨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다시 베게에 머리를 뉘이며 중얼 거렸다. "벌써 사흘째 같은 꿈이라니... 그 자 때문에... 후우." 누군가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허공을 향해 던지던 케티에론 황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늘 그래왔던 것 처럼 시녀의 이름을 신경질 적으로 불렀다. "제니아! 제니아! 물좀 가져다 줘!"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방문이 열리며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어 테이블 쪽에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로록... 누운 자세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케티에론 황녀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녀의 손에는 시녀가 건네줬을 물잔이 들려있었는데, 베게에 등을 받치며 일어난 케티에론 황녀는 미지근한 물을 목으로 넘겨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팔을 뻗어 빈잔을 다시 시녀에게 넘겨준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오늘도 그 작자 꿈을 꿨어. 역시나 진흙을 내 얼굴에 뿌리더군... 이제는 화를 낼 기력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심술을 피워도 그 작자는 내 머리위에 있는 것 같은걸. 승산도 없는 일에 화를 내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이기 까지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실내는 조용해 졌다. 보통 때 같으면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줬을 시녀가 오늘 따라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짜증이 치민 케티에론 황녀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말했다. "왜 오늘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거야? 너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니?" 그러나 그녀의 말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흠..흠... 아무래도 제가 그날 황녀님께 너무나 큰 실수를 했었던 것 같군요. 고의 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남성의 목소리에 혼백이 빠지도록 놀란 황녀는 이불을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며 급히 몸을 일으켰고, 전뇌등의 스위치를 눌러 방을 밝혔다. 그러자 케티에론 황녀의 눈 앞에는 장영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멀뚱히 물잔을 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 헛것이 보이는건가? 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거에요! 제니아는 어디있죠?!" "아.. 시녀는 황녀님을 재우고 일을 하러 갔습니다. 저는 황녀님을 찾아왔다가 주무신다는 말을 듣고서 일어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녀를 부르시는 목소리를 듣고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 모습으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것이죠? 또 이번에는 어떤 수모를 주시려고요." 그녀가 오해를 하는 듯 하자 장영실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황녀님께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 왔습니다. 그 때 워낙 정신이 없으셔서 사과를 제대로 못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때의 일로 아직도 화가풀리지 않았는지 장영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케티에론 황녀는 팔짱을 낀채 그를 아래위로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손에서 눈이 멈춘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도끼눈을 하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손에 들고 있던 것은 뭐죠?"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기억해낸 장영슬은 어수룩한 자세로 그것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아... 이것은 예전에 망가진 황녀님의 드레스를 대신하기 위해 가지고 온것입니다." "그럼 이리 줘봐요!" 상자를 빼앗듯이 건네받은 케티에론 황녀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그것을 열어 봤는데, 그 안쪽에는 속지로 잘 덮여있는 검은 색의 드레스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보며 기쁜 마음에 표정 관리를 잘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입을 벌리며 웃고 말았고, 장영실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한시름 놓았다. "그래도 마음에 드시는 듯 하니 다행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던 황녀는 다시 원래의 냉랭한 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흥!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에요. 원래 드레스는 입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황녀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드레스의 원단을 만져 보았는데, 천의 감촉이 조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실크도 아닌것 같고 면은 더더욱 아닌 것 같군요. 이런 원단은 처음 보는데 대체 뭐죠?" 그녀의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직접 만든 원단이라 특별한 이름은 아직 없습니다. 황녀님께 유용할 듯 해서 만들어 보았죠." "제게 유용할 것 같다니 그것은 무슨 말씀이시죠?" "말보다는 직접 보여드리는 것이 이해하기 좋으실것 같군요. 잠시 드레스 상자를 좀 건네주시겠습니까?" 케티에론 황녀는 뜻밖에도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상자를 장영실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장영실은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갑자기 손에 들고있던 물잔을 기울여 남은 물을 드레스 위로 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행동을 본 케티에론 황녀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이죠! 기껏 선물이라고 가지고 오더니 또 나를 놀리는 것인가요!" 그녀의 고함소리에 인상을 잠깐 찌푸렸던 장영실은 상자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그렇게 소리치시기 전에 내용물 먼저 확인해 보시죠.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황녀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몰아 쉰 케티에론 황녀는 상자를 돌려받아 그것을 내려다 봤는데, 놀랍게도 드레스에 부어진 물이 스며들지 않고서 그대로 맺혀있는 것이었다. 이에 눈썹을 상큼하게 치켜뜬 케티에론 황녀는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어찌된 것이죠? 물이 스며들지 않다니..." "보아하니 케티에론 황녀님께서 극히 깨끗한 것을 좋아하시는 듯 하길래 특수 원단을 직접 제작했습니다. 보다시피 외부에서는 안쪽으로 이물질이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식물을 이 묻거나 하더라도 수건으로 닦아내면 쉽게 얼룩을 제거 할 수 있습니다. 또, 내부면은 땀을 흡수하여 밖으로 배출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좋은 감촉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구김방지 처리를 해놨기 때문에 마음대로 활동 하시더라도 드레스에 구김이 가지 않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통풍은 기본이겠죠." 장영실의 긴 설명을 들은 황녀는 눈으로 확인이라도 해보려는 듯이 드레스 위에 맺혀있는 방울들을 침대 밖으로 털어내 보았는데, 그의 설명대로 드레스에 남은 물기는 전혀 없었다. "이런... 정말 신기하군요. 정말 물이 스며들지 않네..." 처음으로 그녀에게 험한 소리를 듣지않은 장영실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드레스의 천을 만져보며 신기해하던 케티에론 황녀는 이제 드레스의 모양을 보기위해 드레스를 활짝 펼쳐 보았다. -촤락! 그리고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드레스의 구석구석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나직한 목소리로 장영실에게 물었다. "그런데 원단은 그렇다 치고, 이 드레스는 누가 만든 거죠?" "뭔가 마음에 안드시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사실 드레스를 어디에서 그할 수 있는지 몰라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보고 직접 만들어 본것입니다." 눈을 크게뜬 케티에론 황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장영실과 드레스를 번갈아가며 말했다. "네? 그렇다고 이것을 직접 만드셨다는 거에요? 예전 부터 느꼈지만 정말 정상은 아니군요. 나중에 그 책을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가장 뒷 페이지에 출판 년도를 한번 살펴보길 바래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장영실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책을 꺼냈다. 그리곤 재빨리 가장 뒷페이지를 넘겨 읽었다. "듀들란 제국력 1253년? 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그럼 올해는 몇년이죠?" "1312년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장영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갑작스럽게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녀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던 장영실은 턱을 쓸며 그녀가 웃고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장영실의 감각으로 그 이유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했기에 직접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 웃으시는것입니까?" "풋! 아이 배아파... 쉽게 말해서 지금 장영실경께서 만들어오신 드레스의 모양은 60년 전의 것이란 말이죠. 이런 것은 아주 나이많은 노인들이나 입는다는 말이에요! 호호홋!" 그제야 케티에론 황녀가 웃는 이유를 알아챈 장영실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보며 씁쓰름하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종이가 너무 낡았다 했습니다. 그럼 이건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나 드려야 겠군요. 그분께서는 좋아하시겠죠?" 웃느라 정신 못차리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장영실의 말에 호흡을 가다듬어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선물이라고 가지고 오신 것이니 받아 놓도록 하죠. 풋!" 비록 자신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케티에론 황녀가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것을 보며 장영실은 나름대로 성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제 사과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까? 그 때의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던 케티에론 황녀는 너무나 웃어서 아픈 배를 부여 잡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후우... 좋아요. 장영실 경의 사과를 받아 들이도록 하죠. 대신 다음에도 저를 무시하는 언사를 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참지 않을 거예요!" 인의 적으로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는 케티에론 황녀를 보며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동안 황녀님께 결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노력하지요." 처음으로 장영실의 깍듯한 태도를 보게된 케테에론 황녀는 어쩌면 지금까지 그에 대해 큰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순진하게 웃고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모습을 본 장영실 역시 그녀가 생각만큼 나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대공학자> #202~203 겨울을 가슴에 묻은 여인 바닥에는 란젤론국에서 들여왔다는 자주색의 두터운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벽에는 그저 값이 비쌀 뿐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하고 있는 그림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벽의 주변에 놓여있는 흔하디 흔한 의자 하나도 장인의 손을 거쳤다는 명목으로 수백 폴트에 육박하는 가격이었다. 품위유지라는 미명하에 온갖 사치를 합리화하는 귀족들이 이 자리에 모여있었다. 온갖 장신구를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언제나 돈, 연애, 출세 였다. 붉은 빛이 발하는 루비반지를 끼고있던 한 귀족 여성이 금으로 도금이 된 잔을 들어올리며 대화를 이끌고 있었고, 주변의 귀족 여성들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요즘 황녀님께서 놀랍게 변하셨더군요. 혹시 아까 들어오실 때 모습 보셨나요? 매번 행차하실 때 마다 값비싼 장신구들을 들고 나타나 우리들에게 뽐내시더니 오늘은 정말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내실로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아름다우시더군요. 역시 젊으신 분이라서 그런가..." 맞은 편에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한 귀족 여성 역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저도 요즘 황녀님께서 이상해 지셨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도도하시던 황녀님께서 요즘은 완전 다른 사람처럼 상냥해지셨다는 소문이 황궁에 돌고 있더군요." "그건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죠. 아마도 황녀님이 진흙을 잔뜩 뒤집어 쓰는 사건이 난 이후 부터였으니까요. 뭐 어찌되었건 황녀님의 성격이 변하셨으니 아랫사람들이 편해지겠군요." 화려한 장신구로 머리를 한껏 틀어올린 부인의 이야기였다. -딸랑...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 여성들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다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다. 입구에서는 두꺼운 책을 한권 팔사이에 끼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장영실이 들어서고 있었다. 실내로 들기 전에 신발에 묻은 흙을 바닥에 털어낸 장영실은 눈에 보이는 귀족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귀족 여성들은 다시 화제를 옮겨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황녀님께 매번 무례를 저질렀다는 장영실 남작이 맞죠?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요." 그녀의 옆에 있는 여성이 어떠한 비밀이라도 말을 하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장영실 남작이 황제폐하와 재상각하를 등에 엎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아도 몇번인가 황녀님께서 그의 작위를 박탈해 달라며 폐하께 간청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어머머! 장영실 남작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란 말인가요?" "부인께서는 요즘 듀들란 제국의 분위기를 잘 모르셨나보군요. 요즘 귀족들 중에서 장영실 남작 만큼 폐하의 인정을 받는 인물도 없다니까요. 심지어는 후작의 작위를 가지신 분도 그의 아래에서 일을 한다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 동안 그녀들의 대화는 장영실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또 다른 주제로 대화의 중심이 옮겨지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일이아니라면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폭신한 카펫을 밟으며 내실로 걸어들어간 장영실은 그곳에서 뜻 밖의 인물을 봐서인지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애초 재상부인으로 부터 함께 차나 한잔 하자는 제의를 받고서 일을 하는 도중 옷을 갈아입고 이렇게 사교장으로 오게되었던 것이었는데, 미리 귀뜸 조차 없었던 케티에론 황녀의 등장을 보고서 또 어떠한 트집이나 잡지 않을지에 대해 약간의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평소와 같은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황녀님, 그리고 재상부인." 인사를 건네고있는 장영실을 바라본 재상부인은 몸을 일으켰고 장영실의 팔을 잡으며 인도했다. "마침 잘 왔군요 장영실 경. 혹시라도 황녀님께서 이자리에 계신다고 해서 불편한 것은 아니겠죠?" "저는 괜찮습니다 재상부인. 오히려 황녀님께서 저 때문에 불편해 하시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군요." 아직까지도 케티에론 황녀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있던 장영실은 그녀가 자신을 그리 좋게보지는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었지만, 장영실을 말을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가벼운 미소로 대답했다. "저 역시 괜찮답니다 장영실경. 자리에 앉으시죠." 오히려 그녀가 너무 부드럽게 나오자 더욱 이상해진 장영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황녀님. 함께 자리에 앉으시죠 재상부인." 그녀의 태도야 어찌되었건 서있을 수만은 없었던 장영실은 재상부인에게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사교장의 잡일을 맡아서 하는 시녀가 차를 준비해 들어왔고, 재상 부인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돕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차가 준비되자 재상 부인은 손수 각자의 잔에 일정량의 차를 따라주었고, 그 동시에 진한 차의 향기가 그들의 후각을 사로잡고 있었다. "차맛이 어떨 지는 모르겠군요." 재상부인의 말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김이 차분히 피어오르고있는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재상부인께서는 별말씀을 다하시는군요. 제가 이곳에 와서 셀 수 없을 만큼 차를 마셔봤지만, 부인께서 준비해주신 차가 가장 향기롭더군요. 그 향이 너무나 그리워서 이렇게 하던 일을 접고서 달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군요." 이번에는 케티에론 황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숙모님, 장영실 경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에요. 저도 역시 숙모님이 준비해주시는 차가 가장 좋답니다." 그들의 차시간은 이렇게 가벼운 웃음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고, 찻잔을 들고서 그 따뜻함을 느끼던 재상 부인은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의 표정을 살피며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할 지에 대해 생각중이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양해지만 크게 나누자면 두 부류였다. 하나는 바쁜 일상 중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함께 차를 마시는 사람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세사람은 그 양쪽 어느것에도 속하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여유롭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가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따각... 먼저 차를 다 마신 재상 부인은 잔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양 편에서 아무런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이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두 남녀를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분 이런 자리를 가지신 것이 처음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사교장에서 두분을 봐도 서로 다른 곳에서 계시던 것 같아서 말이죠." 그녀의 말에 차를 모두 마신 장영실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이런 자리는 처음입니다. 사실 사교장에도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닌지라 황녀님을 만나뵐 수 있는 날도 얼마 없었죠." "그러니 이렇게 서먹한 것이군요. 두분 모두 제가 좋아하는 분들인데 서로에 대해 너무 신경을 써드리지 못한것이 죄송스럽네요. 심지어는 황녀님과 장영실 경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하게 돌고 있으니까요." 뻔히 속 내용을 알고 있는 재상부인이었지만, 어색한 분위기로 부터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지난 일들을 꺼내고 있는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그때는 너무나 화가나서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는 케티에론 황녀의 모습을 본 장영실은 재상부인이 그녀와 연관되었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임을 깨달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난 일들은 오히려 제 잘못이 컸었으니 화를 내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황녀님께서 왜 화를 내시는지 잘 모르고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더군요. 제가 살던 곳에서 해오던 것처럼 행동을 하다보니..." 장영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상부인은 문득 눈에 이채를 띄우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장영실 경의 고향에 대해서 한번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군요. 대충 재상님께 들은 바로는 조이센 대륙 출신이라고 하셨는데요." "왜 이곳 사람들이 조이센 대륙이라고 부르는 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조선이라는 곳이 제가 온 곳입니다." 조선이라는 말을 들은 재상부인과 케티에론 황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한번 따라해 보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조이센과 조선이라는 말의 차이를 못느끼는 듯 했다. "조이센... 조이센... 서로 다른점이 있나요?" "저도 별 다른 것을 못느끼겠군요. 조이센..." 그녀들의 행동을 보며 발음상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장영실은 자신이 루스티커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훗... 아무래도 듀들란어를 쓰시는 분들에게는 발음하기가 힘든 모양이군요. 그럼 그냥 조이센이라고 하죠."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선을 발음 해보려고 노력하던 재상부인은 얼마 안있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재상부인은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가늠해봤고,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제 재상님을 만나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재상부인의 말에 차를 마시고 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화들짝 놀라며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버..벌써 가시려고요? 이야기라도 더..." 그녀의 말에 눈웃음을 지은 재상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만 만나뵙고 바로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이곳에서 재상님의 집무실까지는 상당히 멀어서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답니다." "하지만..." 케티에론 황녀는 재상부인이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려고 자리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아직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그녀는 재상 부인을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재상부인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럼 황녀님과 장영실 경은 남아서 이야기들 나누도록 하세요." 장영실 역시 케티에론 황녀와 단 둘이 남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 껄끄러워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재상부인을 만류할만한 방법도 없었기에 그녀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차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부인." "별말씀을요.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녀님도 다음에 제가 찾아 뵙도록 하지요." 작별인사를 마친 재상부인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비켜 줘야한다고 생각했는지 금새 내실의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버렸고,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배웅하던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는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상부인이 떠난 자리에는 냉기만 떠돌고 있었다. 부지간에 멀뚱히 남은 장영실과 케티에론 황녀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서로 무슨 이야기 부터 꺼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케티에론 황녀가 용기를 가졌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그 조이센 대륙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오이랍 대륙 말고도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군요." 케티에런 황녀가 먼저 이야기를 끄내자 의외라는 얼굴을 한 장영실은 이런 불편한 분위기보다는 그런 이야기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기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별 특별할 것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비슷한 것이니까요. 어디보자...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하면 좋을 지 모르겠군요. 워낙 말주변이 없는터라..." "음...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나, 풍경... 뭐 그런 것을 이야기 해주시면 된답니다." 예전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워진 그녀의 말투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이라는 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곳과 같이 드넓은 초원이나 숲은 없지만 수려한 산과 계곡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건물들은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건물들이 모여있죠. 또한 사람들은 주로 화려한 색보다는 생활하기에 편한 단색의 옷을 즐겨입는데, 저도 역시 그러한 버릇 때문에 지금도 단색의 옷을 주로 입습니다. 또, 검소한 백성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일에 만족할 줄 알며, 인심 또한 따뜻해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도 지나가는 객에게 식사한끼를 대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영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케티에론 황녀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해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 소박한 건물들, 착한 사람들... 생각만 하더라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정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겠군요?" 하지만 장영실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순진한 백성들은 부폐한 관료들의 횡포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니까요." "아... 그곳에도 그런 일이 있군요. 이곳 듀들란 제국도 불과 100년 전만해도 그런 일이 많았지만, 황권이 강화되고 계급제도가 이름만 남은 뒤로 부터는 그런일이 거의 사라졌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둘 사이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케티에론 황녀는 이제 궁금한 것들이 하나씩 생기는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장영실 경은 그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셨죠? 그 뛰어난 능력으로 봐서는 당연히 귀족작위를 받으셨을 것 같고, 상당한 지위에 있으셨을 것 같은데..." 신분 이야기가 나오자 장영실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을 눈치채지 못한 케티에론 황녀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장영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관료이긴 했지만 귀족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 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귀족의 혈통을 타고나야만 가능한 것이었으니까요. 또, 관료직에 있었다 해도 이곳의 남작보다 훨씬 못한 위치에 있었죠. 그곳에서는 저와 같이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회였답니다." 잠시 그의 말을 정리해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죠?" "글을 잘 읽고 잘 쓰는 일이 조선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외의 일들은 사회 통념적으로 부수적인 일쯤으로 치부해 버렸죠.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황녀님께서는 잘 이해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과 듀들란 제국은 사람들의 관념 자체가 다른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런 이유로 조이센을 떠나오신 것인가요? 그런 박대가 싫어서?" 아직 자신의 일에대해 알지 못하는 케티에론 황녀의 물음에 피식 웃은 장영실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훗.. 아닙니다. 저는 조선으로 부터 파견되어 왔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듀들란 제국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하죠." 지금까지의 좋은 분위기에 밝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장영실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안색이 급변하고 있었다. "네? 그럼 황궁에 계속 머무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인가요?" "아직 모르고 계셨나보군요. 제국 개발 사업이 끝나면 저는 듀들란 제국과의 계약이 끝나게 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건 안돼요!"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킨 케티에론 황녀의 행동에 놀란 장영실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고, 사교장의 외실에있던 귀족들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내실의 입구 넘어로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하자 케티에론 황녀는 원래의 성격을 드러내며 소리를 빽 질렀다. "뭘 보는 것이죠! 남의 일에 신경쓰시지 말고 다른 사람 험담이나 계속하세요!" 그녀의 외침에 움찔거린 귀족들은 다들 내실의 입구로 부터 멀어지며 모습을 숨겼다. 귀족들의 모습이 보이지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케티에론 황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장영실 경은 꼭 조이센으로 돌아가야 하는건가요? 듀들란 제국에 남는다면 얼마든지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을 텐데요." "루스티커님이나 다른 주변 분들께도 그런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저는 꼭 돌아가야 합니다." "왜죠? 그 이유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캐묻는 케티에론 황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의아한 생각을 하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그 보다 황녀님께서 무슨 이유로 제 일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혹시 루스티커님께서 저의 마음을 돌리라는 부탁을 황녀님께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투르코스 재상님께서?" 케티에론 황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장영실이 야박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 용기도 나지 않았기에 잠시 흥분해 있던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그..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장영실 경께서 떠나신다면 듀들란 제국은 인재 한분을 잃는 것과 같으니 크게 아쉬웠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장영실 경의 주변에서 장영실 경을 아껴주시고 정을 주신분들이 슬퍼하실 것 같아서요." 잠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영실은 눈앞으로 자신의 주변에 머물며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려 보는 중이었다. "황녀님께서 그런 것 까지 신경써 주신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에서 인연을 맺게 된 분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크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조선전체의 앞 날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고, 제 개인적인 감정에 비할 수도 없이 고귀한 일이지요." 잠시 말을 끊은 장영실은 고개를 들어 케티에론 황녀를 응시했고,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기분만 우울해 진다고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인생사에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때가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 삼아야겠죠. 후... 아무래도 제가 분위기를 다 망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럼 끝 마쳐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사과의 말을 건네며 몸을 돌리는 장영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티에론 황녀는 그의 등을 향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누군가가 장영실 경을 사모하게 되었다고 말하더라도 지금의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 누군가가 장영실 경 때문에 아무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애절함이 흐르고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옮기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 장영실은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는 조선의 공학자가 되면서부터 조선과 공학에 제 모든 것을 바쳤으니, 애정에 할애할 여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분이 있으시다면 그 분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찌감치 마음을 접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전해드리고 싶군요. 그럼 이만..." 은연중에 단호함이 실려있는 그의 말을 들은 케티에론 황녀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기대 누웠고, 장영실은 성큼걸음으로 사교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처음 부터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케티에론 황녀의 눈에는 천장의 벽지에 그려져있는 어지러운 문양이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갈 수록 그 벽지의 문양들은 어지럽게 춤을 추며 뿌옇게 변해가더니 결국은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슥슥... 슥슥... 매끄럽게 가공된 질 좋은 종이 위에서 흑연이 움직이며 기묘한 마찰음을 내고있었다. 흑연을 쥔 손은 거침없이 종이 위를 누볐으며,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무엇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움직이던 흑연은 어느순간 점을 찍으며 멈추었다. -탈칵... 책상 한쪽으로 들고있던 흑연을 던져놓은 장영실은 흑연가루가 잔뜩 묻은 손을 털지도 않은채 거의 완성된 도면 위를 짚었다. 위에서 자세히 내려다 본 도면은 일치의 착오도 없이 완벽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뿌듯하거나, 만족의 기분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찝찝한 기분이 케티에론 황녀와 헤어지고난 후 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장영실은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마땅히 짚히는 것이없었기에 더욱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 때,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루스티커가 들이닥쳤다. 그는 몹시 기분이 나빠보였는데, 이마의 주름이 미미하게 떨릴 정도였다. "자네! 대체 케티에론 황녀에게 무슨 소리를 했기에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놨단 말인가!" 들어오자마자 버럭 화부터 내는 루스티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황녀님과는 그저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헌데, 황녀님이 어떻게 되시기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잔말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보게." 손짓을 하며 장영실을 부른 루스티커는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고, 장영실은 대충 책상위를 정리한 후에 루스티커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대충 자리잡고 앉은 장영실은 아직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차근차근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는군요." 소파 탁자에 놓여있는 물로 목을 축인 루스티커가 말했다. "내 단도진입적으로 말하겠네. 케티에론 황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녀를 여자로써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일세!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해보던 장영실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황녀님을 여자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왜 물으시는 것입니까?" "자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황녀가 지난 반년간 자네에게 정을 품고 있었단 말일세!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온 이후부터 방문을 걸어 잠근채 나오지를 않는다네! 대체 무슨 말을 그녀에게 한 것인가!" "황녀님께서 제게 정을 품으셨단 말씀이십니까?" 되묻고있는 장영실은 루스티커의 말이 믿기지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루스티커의 얼굴로 봐서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웃을 수는 없었다. "저는 다만... 일이 끝나는 대로 조선으로 돌아 가겠노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를 사모하는 사람이 말리더라도 가야겠냐고 물으시기에 그렇다고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고 있는 장영실을 보며 어지러움을 느낀 루스티커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사모한다는 사람이 바로 케티에론 황녀란 말일세. 헌데,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했으니 황녀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그제서야 일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를 깨달은 장영실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황녀님께서 그런 말씀을 꺼내신 것이로군요. 나 이것 참..." 고개를 저으며 사교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장영실을 향해 루스티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정녕 케티에론 황녀의 마음을 받아 들이지 않겠다는 말인가? 이런 말을 하는것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일국의 황녀란 말일세. 만약 그녀와 혼인이라도 하는 날이면 자네는 그날로 부마가 되는 것인데 그런 기회를 버린다는 말인가! 남들이라면 평생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는 행운이라는 말일세!" 루스티커의 말을 듣고있던장영실은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저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처지입니다. 게다가 케티에론 황녀님이 제게 정을 주고 계신다 하더라도 그녀가 일국의 황녀이기 때문에 저는 더더욱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나라의 부마가 된다면 저는 결국 듀들란 제국에 발이 묶일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결국은 황녀의 마음을 받아 들일수는 없다는 말이군..." "죄송합니다 루스티커님..." 루스티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케티에론 황녀가 자네에게 정을 준 것은 운이 나빴던 것 같군... 나는 황녀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써 그녀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랬는데, 결국은 이렇게 상처를 받게 되는군..." "면목 없습니다." "허헛! 아닐세. 그저 두 사람이 인연이 아니었던 것 뿐이지 자네가 잘못했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일세. 그저 앞으로 황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이 걱정이구먼." 어두운 안색으로 말을 끝마친 루스티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늙은이가 주책맞게 찾아온 것을 이해하게나, 그녀는 내 친 손녀나 마찬가지인 아이라서 그렇다네. 작업하는 것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그럼 또 보세." 어깨에 힘이 없어보이는 루스티커는 천천히 집무실 밖으로 걸어나갔고, 장영실은 그의 뒤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씁쓸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가지에 걸려있는 나뭇잎 하나가 시린 겨울 바람 사이에서 외롭게 떨고 있었다.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사람들은 요즘들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이 벨링에 있는 동안에 공학원은 가동을 멈춘 상태였고, 그 사이 엄청난 양의 주문서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연유로 공학원의 모든 설비들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공학원에 고용된 사람들은 보통의 두배나 되는 야간 수당을 받으며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낯처럼 훤히 불을 밝히고있는 공학원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고, 공학원으로 부터 나오는 불빛이 그의 머리에 반사되고 있는 것으로보아 머리숫도 많은 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바삐 눈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은 듯 불만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이렇게 모여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왜 그 크라이츠라는 여자는 코빼기도 안보이는거지? 꼭 직접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이보게 자네는 여기서 누구를 찾고 있는건가?" 일도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귀찮게 말을 걸어오자 공학원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짜증을 냈다. "상관 마슈! 나는 지금 아주 중요한 임무를 띄고 이곳에 왔으니까." 하지만 말을 시키던 자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그 중요한 임무가 대체 뭐길래 그러나? 자네 공학원 찾아온것 아닌가?" 상대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하자 화가치민 사내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방해꾼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글쎄 당신은 가던 길이나 가라니까 그러네!...요." 말끝을 살짝 바꾸는 재치로 전체적인 말을 경어로 바꾼 사내는 자신의 눈앞의 인물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최대한 반가운 척을 하기 위해 상대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하하핫! 누구신가 했더니 켈트님이셨군요?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는 눈앞의 사내를 아래위로 훑어본 켈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네는 누군가? 내가 늙어서 그런지 자네를 알고 지낸 기억은 없는데..." "하핫! 저는 코르핀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기억에 없으시겠죠. 저는 그저 먼 발치에서 켈트님을 봤을 뿐인걸요. 지금은 저희 남작님의 심부름으로 크라이츠님을 만나뵈러 온것입니다." "남작이라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묻고 있는 켈트의 눈은 적의를 담고 있었는데, 이번 뮤스의 일로 귀족들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바꾼 켈트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래 이곳에는 또 무슨 일로 왔나? 이번에는 뮤스하나로 모자라서 공학원 기둥까지 뽑아 내려는 겐가?!" 돌연 켈트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두려움을 느낀 코르핀은 침을 꼴깍 삼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저는 기둥은 커녕 문짝 하나도 뜯어낼 힘이 없습니다만..." "나참... 지금 그것을 농담이락고 하는 겐가? 뮤스 녀석 보다 더 한 농담실력을 가지고 있군." 말을 하는 모양새나 그의 행동으로 봐서 그리 똑똑한 자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켈트는 별 위험이 되지는 않겠다 싶었기에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있었다. "크라이츠 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켈트님." "그럼 나를 따라오게나." 코르핀을 향해 손가락을 몇번 까딱거린 켈트는 그가 따라오던지 말든지 신경도 안쓰는 듯 앞만 보며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벌쿤의 책상에는 수십권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는 동시에 세, 네권의 책을 펴놓고서 뭔가를 하고있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글읽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진 듯 했다. 책을 들여다보며 펜끝을 입으로 물은 벌쿤은 하는 일이 막혔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어쩐지 동력기의 성능에 비해서 힘이 형편 없다 했더니, 기어의 배치가 잘못된 것이었네. 아무튼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선 각속도비를 계산해보면..." 머리를 두들기며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던 벌쿤은 다시 입에서 펜을 빼내며 빈종이에 뭔가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철컥...장...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학원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문은 자동문으로 제작했는데, 무거운 재료를 들고 다니다 보면 손이 모자라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그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동문으로 교체한 것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펜을 놀리던 손을 잠시 멈춘 벌쿤은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곳에는 켈트와 함께 처음 보는 코르핀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고, 그들을 발견한 벌쿤은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 벌쿤 오늘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나저나 안에 크라이츠님 계시냐?" 하지만 벌쿤은 켈트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그의 뒤에 있는 코르핀을 바라보며 반가운 듯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벌쿤의 인사에 멀뚱한 표정을 지은 켈트는 뒤를 따르고 있던 코르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야... 벌쿤 너는 이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냐?" "하핫! 당연하죠. 딱 보면 누구라도 쉽게 알겠는데요 뭐. 그런데 이분은 어느 드워프 부족에서 오신 분이시죠? 역시 멜산에서 오신 분이신가요?" 벌쿤의 말을 들은 켈트는 돌연 코르핀의 옆으로 다가가 눈대중으로 키를 맞춰 보았고, 그의 팔을 잡아 당겨 팔의 길이도 맞춰 보았다. 그리고 허리의 높이를 재어보더니 코르핀을 끌어 안으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내가 드워프족을 못 알아 봤구먼, 동족이여! 드워프 냄새가 나지 않아서 자네를 몰라 봤구먼. 향수라도 뿌리고 다니는 겐가? 하긴 인간 세상에서 살다보면 인간의 습관을 닮아가긴 하는 것이니까." 순간에 드워프라는 오해를 받은 코르핀은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인간입니다! 제가 키가 작은데 보테준 것 있습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코르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인간이라 외쳤지만, 벌쿤과 켈트는 여전히 미심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에이... 아무리 봐도 켈트 아저씨와 다른 것이 없는데요. 농담은 그만하시죠." "인간의 밑에서 일하는 수치스러운 기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족을 부정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과의 대화에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답답해진 코르핀은 자신의 턱을 내밀었다. "자 보십시오. 턱에 수염이 난 자국이 있나! 저는 수염이 나지 않는 체질이라서 이렇게 수염도 없을 뿐더러 면도를 한 자국도 없습니다. 드워프라면 당연히 수염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을 듣고있던 벌쿤은 켈트의 얼굴과 비교를 해보았다. "켈트 아저씨도 수염이 없긴 하지만, 면도 자국은 있군요. 그럼 아저씨도 인간이란 말이에요?" 켈트도 수염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듯 했지만, 드워프와 닮은꼴인 그의 모습에 대한 놀라움은 여전했다. "흠... 수염이 없는 것 보니 드워프는 확실히 아닌 것 같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우리 드워프 족과 닮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탄성을 지르며 코르핀의 얼굴을 살피고 있을 때, 안쪽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톤이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바쁜 시간에 이렇게 어수선한 것이죠?"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이들은 그것이 크라이츠의 목소리임을 알고서 그녀가 나오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코르핀은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크라이츠님. 저는 코르핀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은 크라이츠는 처음 보는 코르핀의 얼굴을 뜯어 보더니 켈트를 향해 말을 던졌다. "켈트씨. 새로운 드워프가 올 것이라는 소리는 못들은 것 같은데요? 뭐 일손이 모자라니 오히려 잘된 일이긴 하지만요." 결국 크라이츠에게 까지 드워프 취급을 받은 코르핀은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듯 했지만, 자신은 그저 심부름을 온 사람일 뿐이었기에 참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속으로나마 욕을 한바가지 해댄 코르핀은 자신의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는 듀들란 제국의 장영실 남작님의 심부름으로 찾아온 '사람'입니다. 이 편지를 크라이츠님께 전하라는 분부가 있으셨죠. 훗날 뮤스원장님께서 돌아오시면 보여주라는 말과 함께요" 코르핀은 은연중에 자신이 드워프가 아닌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장영실이라는 이름을들은 켈트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장영실이라는 자가 뮤스가 지금껏 찾고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르핀으로 부터 편지를 건네받고있는 크라이츠를 향해 켈트가 입을 열었다. "장영실이라면 뮤스가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가 듀들란 제국의 남작이라니..." 켈트의 표정과는 다르게 크라이츠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결국은 그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군요." "크라이츠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켈트의 물음에 가볍게 웃은 크라이츠는 편지를 품속에 넣으며 대답했다. "듀들란 제국에서 제국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부터 대충 감을 잡고 있었죠. 이 대륙 내에서는 전뇌거를 만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요." 말을 잠시 멈추며 코르핀에게 고개를 돌린 크라이츠는 품에서 작은 금조각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다. "이 편지는 나중에 뮤스에게 전해주도록 하겠어요. 먼 듀들란 제국에서 이곳 까지 오신다고 수고하셨으니, 이것으로 작게나마 성의 표시를 하고 싶군요. 가실때 어디서 요기라도 하세요." 그것을 보며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 코르핀은 전혀 거절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것을 날렵하게 받아 챙겼다.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하지만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군요. 드워프 분들의 식욕이 얼마나 왕성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끝까지 코르핀을 드워프라 여긴 크라이츠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고, 벌쿤과 켈트는 울그락 불그락 해진 코르핀의 얼굴을 훔쳐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크라이츠는 폼에 넣어 두었던 장영실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왼손을 올리며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세컨드사이트!" 그와 동시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그녀의 손바닥 위로, 일렁이는 무형의 창이 하나 열렸다. 그 창의 안으로는 기이한 형태의 글자들이 나타나있었는데, 바로 편지에 적힌 내용들이 창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었다. 크라이츠는 편지의 내용을 보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것이 꼬불꼬불한 그림이 그 조이센이라는 곳의 글자인가?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군..." 체념하는 목소리와 함께 마나를 거두어 들인 크라이츠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다시금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용언 마법을 발현했다. "리딩마인드!" 그러자 이번에는 푸른색이 감도는 빛이 그녀의 손을 감싸기 시작했다. 바로 편지를 쓴 당사자의 생각이 그대로 크라이츠의 뇌리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한 동안 눈을 감고서 장영실이 편지를 통해 뮤스에게 전하려 했던 내용들을 알아가던 크라이츠는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떴다. "문자에 고유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군. 생각보다 훨씬 원시적인 언어의 형태인걸? 어쨌건 장영실이라는 자가 5년간은 듀들란 제국에서 발을 빼지는 못한다고 하니 꽤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제국 개발 계획을 통해 뮤스의 경쟁심을 부축일 생각인 거야. 그것도 뮤스의 능력을 한층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 호홋! 오랜만에 꽤나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는걸?" 크라이츠는 어떤 상상을 하는지 사춘기의 소녀마냥 설레이는 미소를 지었고, 잠시 후 장영실의 편지는 그녀의 금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몇년 후 주인의 손에 들어갈 그날 까지... <대공학자> #204 뮤스의 등장. 도이첸 제국 남부의 국경부근. 여름의 더위로 좁다랗게 나있는 맨흙땅은 아지랑이를 숨결마냥 뿜어내고 있었고, 그 위를 뛰며 먹이를 구하던 들쥐들은 서둘러 그늘을 찾아 초원을 향해 달음질 쳤다. -부르르릉... 드넓은 초원 사이로 좁다랗게 나있는 길을 따라 전뇌거 한대가 달리는 중이었다. 이 전뇌거는 주인의 필요에 맞게 개조 된 듯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부분은 모두 터놓은 모습이었고, 그곳에는 짐이 한 가득 쌓여있었다. 운전석에는 살집이 두둑히 잡힌 중년인이 운전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어린 아들을 향해 신바람이 난 듯 떠들고 있었다. "하하핫! 이 번에 이 물건들만 도이첸 제국으로 가지고 가면 큰 돈을 벌 수가 있단다. 그곳에서는 스윈국의 비단이 비싼 가격으로 팔리거든. 나중에 돌아갈 때 네 엄마에게 줄 주방용품들과 네 신발이나 사가지고 가자꾸나. 물론 돌아가기 전에 네 엄마 몰래 '그것'도 구경하고 말이야." "와! 올해는 정말 볼 수 있는 거죠? 작년에는 너무멀다고 해서 엄마가 못가게 했었는데..." "하핫! 네가 작년에 하도 울어대길래 올해는 너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냐? 대신 네 엄마 한테는 절대 말하기 없기다!" "당연하죠!" 아버지의 말에 한껏 들뜬 얼굴로 힘차게 대답한 소년은 창에 매달려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년은 먼 발치에서 무엇인가를 발견 한 듯 아버지의 옷자락을 끌어 당기며 불렀다. "아빠! 저기 길 앞에 누가 있어요! 우리한테 손을 흔드는 것 같은데요?" "응? 이런 외딴 곳에 누가 있단 말이냐?" 아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안력을 돋구어 본 중년인은 길 앞에서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도둑들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던 중년인은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본척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전뇌거의 패달을 밝고 있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로페드로, 훗날 네가 어른이 된다면 언제나 사람을 조심해야 한단다. 야수나 마물들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나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대문에 대비를 할 수 있지만, 사람은 모습만으로 그것을 분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지. 언제 너를 속이고 네게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이란다." 비록 조리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세상사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쳐준 중년인은 자신의 말에 대한 시범이라도 보이듯, 손을 흔들고 있는 청년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중년인의 아들은 창밖으로 목을 빼 점차 멀어져가는 청년을 돌아보았고 이내 고개를 들여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먼저 남을 믿어야 좋은 세상이 된다면서요." "그..그건 말이지...음..." 순간적으로 할말이 없어진 중년인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들을 내려다 보곤 잠시 갈등 하더니 결국에는 전뇌거의 멈춤패달을 밟으며 말했다. "로페드로, 물론 선생님 말씀이 맞단다. 다만 이 아빠의 이야기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이지. 흠... 그 사람한테 손이나 흔들어 주렴. 조금 멀긴하지만 타고 싶으면 뛰어오겠지." 아버지의 말에 밝은 미소를 지은 소년은 창밖으로 몸을 모두 빼내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던 청년 역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봤는지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뛰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중년인의 전뇌거 까지 뛰어온 청년은 전뇌거의 창가로 다가와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 보기 시작했는데, 어깨 아래까지 길어있는 그의 검은 머리는 지금이 여름인 만큼 더워 보였고, 여행을 한지 오래된 듯 검은색의 옷에는 뿌연먼지가 잔뜩 내려 앉아있었다. 여러모로 보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여행자의 차림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무기를 지니지 않았음에 안도한 중년인은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길버트라고 하네. 지금 우리는 도이첸 제국의 루이센으로 가는 길이지. 방향이 맞을지 모르겠군." 먼저 인사를 해오는 중년인과 그 옆에 앉아있는 소년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은 청년은 중년인의 손을 마주잡으며 대답했다. "하핫! 잘되었군요. 저도 마침 도이첸 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 이름은 뮤스라고 하죠." 난생 처음 보는 청년의 이름을 들은 길버트는 그의 이름이 귀에 익다고 느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흠.. 뮤스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혹시 예전에 어디선가 날 만난 기억이 있나?" 하지만 그의 고개는 서슴없이 가로저어졌다. "하핫 제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군요." "그런데 왜이렇게 귀에 익는지 모르겠군."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는지 생각을 해보던 길버트는 도무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고 말았다. "에잉... 모르겠어. 그나저나 지금 보다시피 앞쪽에는 자리가 없구먼, 자리라곤 짐을 실은 화물칸 밖에 없는데 괜찮다면 타게나." "태워 주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자리를 투정 할 수는 없죠. 그럼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감사의 인사를 한 뮤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전뇌거의 짐칸에 올라탔는데, 의외로 푹신했기에 만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뮤스, 그는 3년 동안의 추방기간을 끝마치고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도 보름정도나 더 가야할 만큼 멀리떨어진 곳인데다가 걸어서 국경을 넘어 오느라 피로도 많이 쌓였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가벼웠고, 운좋게 전뇌거까지 얻어 탔으니 더 이상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푹신한 짐더미 위에 모처럼 만에 편안하게 몸을 뉘인 뮤스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깊은 주름을 가지고 있던 그라프의 얼굴이었다. -'허헛! 왜 굳이 이 늙은이까지 데리고 가려고 하는가. 자네에게 이미 말했다 시피 나는 세상을 등진 사람이고, 다시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봐야 세상사람들은 나를 비웃을 것일세. 나는 존경받는 사람으로써 세상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구먼... 게다가 지난 3년간 자네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 것을 가지고 가버렸네. 나는 자네의 지식을 별로 얻지 못했는데 말일세 허헛! 그래서 느낀 것인데, 나는 더 이상 자네와 함께 있어 봤자 괜한 열등감에만 사로 잡힐 것 같더구먼. 원래 사람은 늙으면 심술이 고약해 지는 법이니까... 그럼 슬퍼지기 전에 이쯤에서 헤어지도록 하지. 자네와의 함께 할 수 있었던 지난 날들을 주신께 감사하겠네.' 벌써 그와 헤어진지 한 달 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고였는데, 3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준 그라프를 진정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뇌거는 다시 흔들리며 도이첸 제국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뮤스는 여전히 달리는 전뇌거의 짐더미 위에 앉아있다. 가볍게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대지를 붉게 만들고 있는 노을을 향하고 있었는데, 길버트의 도움으로 하루 이상의 여정이 줄어 들었다고 생각했기에 노을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여유까지 부리고있는 것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뮤스는 전뇌거가 달리고 있는 길을 따라 멀리 떨어진 곳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는 수 많은 작은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불빛들의 수를 보아 중급이상의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뮤스는 조금만더 기다리면 오랜만에 도시의 거리를 밟을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된 모습이었다. -덜컹! 덜컹! 뮤스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길을 잘 가고 있던 전뇌거가 멈추어 서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뮤스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길버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운전석에서 내려 전뇌거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전뇌거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멈춰선 전뇌거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땀까지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뮤스는 짐더미에서 뛰어 내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힘겹게 전뇌거의 아랫쪽을 내려다 보다말고 몸을 일으킨 길버트는 좋지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 무슨 일인지 전뇌거가 갑자기 서버렸네.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것 같구먼... 아직 루이센의 중심지 까지는 20켈리도 더 남았는데 말일세." "그럼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이 전뇌거는 무슨 기종이죠?" 길버트는 뮤스의 제안에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살펴 본다고 해서 더 나빠 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해 주었다. "제작년에 생산된 '라니아'라는 기종인데, 첫번째 기종인 라이노를 상인들의 기호에 맞게 개량한 것이지. 어차피 전뇌거가 고장 난 것이라면 이곳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해서 루이센의 공학원으로 연락을 하는 방법 밖에는 없으니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네." 전뇌거의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뮤스는 루이센의 공학원이라는 말에 몸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지금 분명 루이센이라는 곳에도 공학원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물론 루이센에도 공학원이 있다네." 뮤스의 태도를 의아하게 생각하던 길버트는 그가 오랜 여행 때문에 세상돌아가는 소식을 모르고 있다고 단정지었으며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기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네가 여행을 오랫동안 해서 잘 모르나 본데, 공학원은 이제 도이첸 제국의 웬만한 도시라면 하나씩은 꼭 있다네. 라이델베르크에있는 공학원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전뇌거를 포함한 각종 제품들을 판매하거나 수리를 해주기도 하고, 본원에서 필요한 부속품들을 생산한다고 하더군." 길버트의 이야기를 듣던 뮤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공학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뮤스는 멈춰서버린 전뇌거를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전뇌거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 전뇌거 앞부분의 기관실의 뚜껑을 열었는데, 해가 지고 있는 중이었기에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뮤스는 가방에서 휴대전뇌등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전뇌거의 내부가 밝아아지자 뮤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것 저것을 만져보기 시작했다. 길버트의 말대로 기관실의 모양은 자신이 설계를 했던 라이노와 다른 점이 전혀 없었기에 한눈에 고장난 곳을 알아 볼 수 있었던 뮤스는 가방에서 몇 가지의 기구를 꺼내들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있던 길버트가 다가와 함께 전뇌거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나? 전뇌거는 빠르고 편리해서 좋은데 고장이 나면 혼자 힘으로 고칠 수 없는게 가장 큰 문제란 말이야." 투덜거리고있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은 뮤스는 작업용 장갑을 꼈고, 고장난 전뇌거를 고치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연장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전뇌거는 마나구에서 나오는 전뇌의 힘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전뇌의 방출량으로 전뇌거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랍니다. 그렇지만 동력기가 수용가능한 한계치 이상의 전뇌력이 흐르게된다면 동력기가 망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전뇌조절장치가 달려있죠. 지금 길버트씨의 전뇌거는 그 전뇌조절장치가 고장난 것입니다. 아주 예민한 부분인데 먼지가 너무 많이 들어갔군요. 마침 제가 여분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교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뇌거를 수리하는 동시에 설명을 겸하고있는 뮤스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인 길버트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건 자네가 고칠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허전한 손을 달래기 위해 팔짱을 낀 길버트는 잠자코 뮤스가 전뇌거를 고치는 모습을 보고있었다. -찌지직! 잠시 후, 전뇌거의 기관실로 부터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나면서 뮤스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검은 기름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으며 이마의 땀을 닦은 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길버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전뇌조절장치를 교체 했으니 문제 없이 작동 하겠지만, 앞으로 내부는 청결하게 유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죠." "그래? 해보도록 하지." 짧게 대답한 길버트는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며 전뇌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전진패달을 살며시 밟아 보니, 그의 전뇌거는 언제 고장이 났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신이 난 길버트는 뮤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핫! 정말 마법처럼 고쳐졌군. 어서 타게나!" 제대로 고쳐졌다는 것을 확인한 뮤스가 연장들을 챙겨 넣으며 짐칸에 올라타자 길버트가 창밖으로 목을 빼며 외쳤다. "이쪽으로 내려와서 앉게나. 아들 녀석이 잠들었으니, 안고 타면 될거야." 뮤스는 짐칸도 상관 없었기에 사양하려 했지만, 서두르라는 손짓을 보자 그의 배려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뮤스가 자신의 아들을 안고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길버트는 전진패달을 밟으며 전뇌거를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전뇌거를 몰고있는 길버트는 나이답지 않게 들뜬 표정이었는데, 고장난 전뇌거를 뚝딱 고친 뮤스가 몹시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자네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군! 이번에 공학원에서 사람들을 뽑는 다던데 거기 한번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요즘 아무런 능력도 없이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젊은이들도 많은데, 자네정도의 능력이면 될지도 모르지 않나?" "풋! 저 보고 공학원에 지원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길버트의 말을 들은 뮤스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자 뮤스의 신분을 모르는 길버트는 그의 반응에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닐세. 만약 공학원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엄청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그렇게 된다면 지금 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정처없어 떠돌아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자신을 위해서 말해주는 길버트에게는 미안했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뮤스는 창문쪽으로 얼굴을 숨기며 화제를 돌렸다. "흠... 말씀은 고맙지만 별다른 관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공학원에서는 언제부터 사람들을 뽑기 시작했죠?" "어디보자... 내가 이 라니아를 구입하기 바로 한해 전이었으니, 3년 전 겨울 쯤이었군. 그 때부터 1년에 두 번씩 인재들을 뽑고 있는데, 매년 여름과 겨울이 되면 수 많은 젊은이들이 각 지역의 공학원으로 찾아가 면접과 시험을 보거나, 특별모집을 노린다네. 하지만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많아도 정작 공학원에 들어가는 수는 극히 적어서 100명 정도가 지원을 한다고 해도 겨우 1명 정도 밖에 시험에 통과를 하지 못하지. 그만큼 어려운 일일세."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본 뮤스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고, 특별모집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느끼기도 했기에 평소의 모습을 유지하며 물었다. "시험은 대충 이해가 가는데 방금 말씀하셨던 특별모집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쯔쯧... 자네는 너무 세상 소식에 어둡구먼. 도이첸 제국의 명물을 모르다니 말이야. 공학원의 특별모집이라는 것은 바로 전뇌거 경주를 말하는 것일세."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은 뮤스가 되물었다. "전뇌거 경주라니요? 자세하게 좀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자네 정말 처음 들어보는 것 같군. 전뇌거 경주는 말 그대로 전뇌거를 타고서 시합을 하는 것일세. 라이델베르크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기존의 전뇌거를 가지고 경주를 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출전자 마다 팀을 이루어 시합에서 사용할 전뇌거를 개조한다네. 그리고 그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팀원들 모두에게는 공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설명이 길어지자 입안이 말라왔던 길버트는 운전대 옆에 꽂혀있던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전뇌거 경주라는 것이 워낙 특이 한데다가 공학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관심 때문에 첫번째 시합부터 굉장한 인파가 몰려들었고, 지금은 그 매력에 푹 빠져서 해 마다 경주 기간이 되면 일을 접어놓고 경주가 벌어지는 도시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많다네. 하핫! 사실 이번에 아들 녀석과 루이센으로 가는 이유도 장사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 전뇌거 경주를 구경하기 위해서라네." 한참동안 길버트의 설명을 듣던 뮤스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는데, 축제에서 벌어진 학교간의 조그마한 시합이 확대되어 제국 전체가 들썩거리는 큰 대회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느낀 것인데, 길버트씨는 공학원의 일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시고 계시는군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린 길버트는 뮤스의 어깨에 기댄채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뇌거를 처음 본 우리 아들 녀석이 커서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다고하길래 이렇게 장사를 다닐 때 마다 공학원에 관련된 소식이라면 귀담아 듣는다네. 하핫! 이 녀석 뒷바라지를 해주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지." 길버트의 말에 가볍게 미소지은 뮤스는 자신의 품에서 자고 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좋은 아버지가 계시니 꼭 공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군요." 뮤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길버트는 어느새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을 태운 전뇌거도 뿌연 먼지만을 자리에 남기며 빠른 속도로 루이센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대공학자> #205 인구 10만 정도의 중소도시인 루이센은 거대한 겔브 호수를 둘러싼 도시였다. 비록 습하기는 했지만 호수의 경관은 그런 것쯤은 금방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수려했는데, 노을이 질때면 호수의 색깔이 눈부신 금빛으로 변하기에 겔브 호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낮이면 작렬하는 태양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분볐고, 밤이 되면 바람을 쐬거나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사람들로 분볐다. 게다가 올해는 1년에 한번씩 벌어지는 공학원 주최의 전뇌거 경주가 벌어지는 도시였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겔브 호숫가를 서성이는 듯했다. 겔브 호숫가로 마차 두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도로가 나있었는데, 그 곳을 길버트의 전뇌거가 상쾌한 호숫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은 뮤스는 루이센의 모습을 감상하기 여념 없었고, 길버트는 오늘 묵어갈 숙소를 잡기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중이었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겔브 호수를 구경하고 있던 뮤스는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야경에 도취된 듯 했다. "와... 정말 아름다운 도시군요. 얼마만에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는지 모르겠네요." 여전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숙소를 찾고 있던 길버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행을 한지 꽤나 오래 된 듯 한데, 얼마동안이나 떠돌아 다닌건가?" "이번 달로 3년이 조금 넘은 것 같군요. 훗! 정말 정신 없이 떠돌아 다녔죠." "그럼 집이나 가족들은 없는 것인가? 3년 씩이나 여행을 다닌것을 보면 아무래도 가족들은 없는 것 같은데..." 뮤스는 길버트에게 자신이 추방자 신세였다는 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추방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실을 밝혀봤자 불안감만 생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라이델베르크에 저희 누님과 아저씨들이 함께 살고 있죠. 그래서 라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랍니다." 라이델베르크라는 말에 반가운 표정을 지은 길버트는 주변을 살피다 말고 뮤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핫! 그랬었군. 라이델베르크는 숙박비가 비싸다고 하던데, 먼 훗날에 우리 아들 녀석이 공학원에 들어가게 된다면 좀 신세를 지게 하면 안될까? 뭐 평생 맡아 달라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말일세." 그 때까지 이 세계에 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선듯 약속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대답을 잠시 꺼렸다. "글쎄요. 저희가 그 때까지 라이델베르크에서 살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흠... 하긴 10년이나 훗날의 이야기니까."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한 길버트는 계속해서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 쯤 루이센 시내를 돌아다녔을 무렵 전뇌거는 길의 한모퉁이에 세워졌고 길버트는 전뇌거의 시동을 끄지도 않은 채 길의 옆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로 뛰어들어갔는데, 이제는 뮤스에 대한 믿음이 제법 생것 같았다. 잠시 후, 길버트는 실망감이 가득찬 표정을 지으며 건물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이런! 내가 지난번 왔을 때 묵었던 곳인데, 오늘은 남은 방이 없다고 하는군. 가격도 싸고 방도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야. 그럼 다른 곳을 한번 알아 보도록 하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전뇌거에 올라탄 길버트는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다시 전뇌거를 몰아 나갔다. 운전석에 앉아 창밖으로 발을 걸친 길버트는 이제 지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다섯군대를 돌아 다녀봐도 모든 곳이 만원이었기에 그는 방을 잡을 수 없었고, 결국은 이렇게 겔브 호수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이 피곤하게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길버트는 나직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오늘 숙소를 잡지 못하면 전뇌거 경주가 끝나는 날까지 숙소를 잡을 수 없을 텐데... 나야 괜찮지만 아들 녀석이 걱정이군." 그의 말을 들으며 함께 숙소를 찾고 있던 뮤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곧 찾을 수 있겠죠." "세상을 그렇게 마음 먹은대로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네... 흠..." 그들이 타고 있는 전뇌거는 화려한 조명으로 외벽을 치장하고있는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곳에 시선을 멈춘 뮤스는 궁금증을 느끼며 길버트를 향해 물었다. "이 건물들은 뭔데 저렇게 휘황찬란한 것이죠? 앞에 고급 전뇌거들도 많이 세워져 있고..." 뮤스의 시선이 닿은 곳을 함께 바라보던 길버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허헛! 세상의 잘난사람들이 묵어가는 고급 호텔 건물이라네. 우리같은 사람이 한달을 꼬빡 모아야 저런 곳의 하루 숙박비를 감당 할 수 있을 걸? 게다가 팁이나 식사비까지 합하면 정말 우리같은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할 가격이지. 괜히 딴 생각 말고 우리가 묵을 곳이나 찾아 보자고." "그래 봤자 사람들이 묵어가는 곳이겠죠." 길버트의 말을 듣고있던 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가락으로 그 중 가장 화려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버트씨 저쪽 건물로 들어가 주세요. 저곳이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길버트는 농담쯤으로 치부하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풋! 젊은 친구가 장난도 심하군. 자네가 말하는 곳은 여기에있는 호텔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비싼 곳이라네. 도이첸 제국의 상가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호바인 가문에서 직영하는 호텔이거든." 길버트의 입에서 호바인 가문이라는 말이나오자 뮤스는 또 한번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어디를 가든지 자신과 관계된 것들이 하나씩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후훗. 일단은 제 말대로 들어가 주세요. 뒷 일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요." "엥? 아무래도 자네가 뭔가를 잘못 먹은 것 같군. 아니면 여행기간이 너무 길어서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말이야." "하핫!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상관 없지만 사랑스러운 아드님을 길거리에서 재우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그..그거야..." 정곡을 찔리자 할 말이 없어진 길버트는 뮤스가 가리킨 호텔로 운전대를 돌렸고, 전뇌거는 잘 포장이 된 길을 따라 호텔건물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길버트의 전뇌거가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붉은 제복의 청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본 전뇌거들 중 가장 허름한 모습의 전뇌거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던 청년은 결국 길버트의 전뇌거를 물품 납품용 전뇌거라 치부했는지 손을 흔들며 외쳤다. "물품은 뒷쪽 창고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앞쪽으로 가셔서 왼쪽으로 돌리면 바로 창고가 보이실 겁니다!" 전뇌거 안에서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뮤스는 길버트의 아들을 안고서 전뇌거에서 내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묵으러 왔습니다. 전뇌거는 빼내기 좋은데 주차시켜 주셨으면 좋겠군요." 호텔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청년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거지의 먼 친척뻘로 보이는 젊은이가 도이첸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고급호텔에 묵으러 왔다는 것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텔의 이미지도 있었기에 험한 말은 할 수 없었고, 최대한 예우를 해주려 노력했다. "나참... 저는 지금 바쁜 몸이기 때문에 장난칠 시간이 없다네. 그러니 어서 저 전뇌거를 빼줬으면 고맙겟네." 하지만 뮤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제복의 청년과 뮤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게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길버트 였는데, 뮤스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전뇌거에서 내리며 뮤스를 말리기 위해 어깨를 잡아 끌었다. "자네 대체 왜 그러나? 이렇게 억지를 쓴다고 해서 우리를 묵게 해주는 곳이 아니란 말일세.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어서 다른 곳이나 찾아 보자고!"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길버트를 안심시킨 뮤스는 다시 제복의 청년을 향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아주 웃기는 곳이군요. 우리같이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은 들어 갈 수도 없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기에는 도이첸 제국의 1212년 '만인 평등선언'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은 작위의 고하와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디서나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헌데, 당신은 단지 우리의 행색을 보고서 차별 대우를 하고있으니 도이첸 제국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 한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지난 3년 동안 뮤스는 그라프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대륙의 전반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이 흐르듯이 술술 흘러나오는 뮤스의 말에 제복의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까 드렸던 부탁대로 전뇌거를 주차하는 것이 당신의 일인 듯 하니 전뇌거를 맡기기로 하죠." 딱 부러지게 말을 마친 뮤스는 복잡한 역사 이야기를 듣고서 아직도 넋이 빠져있는 제복의 청년을 지나쳐 호텔 내부로 걸음을 옮겼고, 길버트 역시 그 청년의 표정을 흘끔 살피며 뮤스의 뒤를 따랐다. 뮤스와 길버트는 내부로 들어가는 즉시 이곳이 왜 최고급 호텔이라 불리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작게는 로비의 구석에 놓여있는 화분에서 부터 크게는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최고급 대리석까지 그 화려함에 눈이 부시는 것이었다. 특히 드워프들에 의해서 건축 재료의 질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된 뮤스의 놀라움은 길버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장식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뮤스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에서 대기 하고 있던 중년의 점원 역시 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뮤스 일행을 초라한 행색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서 일하는 녀석들은 뭐하고 있길래 저런 몰골을 하고 있는 녀석들 까지 들여 보내는거야." 잔뜩 불만섞인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던 점원은 뮤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금새 입을 다물며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어서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점원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실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휘파람을 한번 불며 말했다. "휘유... 정말 눈이 부시군요. 당연히 호텔에 왔다면 방을 잡으러 왔겠죠. 크기는 상관 없으니 빈 방이 있습니까?" "음.. 빈방 말씀이십니까?" 뮤스의 말을 들으며 세상 물정을 잘 몰르는 청년이라 생각한 점원은 그들을 내쫓기 위해 방이 없다고 말을 하려했다. 하지만 금방 생각을 바꾸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호텔 숙박비를 듣고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잠시 책자를 하나 꺼내 살펴보던 점원은 여전히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지금 남아있는 방은 가장 넓은 방 밖에 없는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하룻밤의 숙박비가 엄청나답니다. 이 방은 아무래도 무리시겠죠?" "그 방은 하룻밤에 얼마나 되죠?" 역시 뮤스가 물어 올것이라 예측을 했던 점원은 눈썹을 힐끔거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룻밤 묵어 가시는데 다른 서비스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방값만 40겔피입니다. 그리고 서비스 비용을 포함한다면 45겔피가량이 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친 점원은 뮤스의 놀라는 표정을 기대하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뮤스보다는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길버트가 입에 거품을 물지경이었다. "하룻밤에 45겔피라니! 내가 가지고 온 비단들을 다 팔더라도 그 이윤이 20겔피가 안된다네!" 길버트의 반응을 바라보던 점원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일인지 뮤스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놀라기는 커녕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방으로 하도록 하죠." 뮤스의 말을 들은 점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봐야만 했는데, 손님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단 두가지였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천치거나, 엄청난 재력을 가진 부자. 그러나 눈을 씻고 봐도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 점원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헤휴... 내가 모자라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니... 영업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게나. 그렇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내쫓겠네." 점원의 축객령을 듣던 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하더니 먼지가 잔뜩 뭍은 도장을 하나 꺼내어 카운터 테이블에 떨어트렸 놓았다. -딱! "이것이면 되나요? 호바인 가문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면 당연히 이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별 신경쓰지 않는 표정으로 그 도장을 살펴보던 점원은 순간적으로 두 눈이 경직되고 볼이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이..이것은... 프라이 겔트.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방을 준비해 드리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재빨리 대답을 한 점원은 부산을 떨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기이하게 변해버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길버트는 뮤스의 옷자락을 끌며 물었다. "저 사람이 갑자기 왜그러는 것인가? 보아하니 우리를 여기에서 재워 주겠다는 것 같은데 대체 자네가 보여 준 것이 뭔데 그러나?"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저 제 친구가 배가 고프거나 잘곳이 없으면 아무데나 가서 보여주라고 준 것인데. 그 녀석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군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 좋은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으면 된것이죠." "하긴... 자네의 말이 맞긴 하군. 저것 참 신기한 물건이로구먼... 허헛! 내가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 있다니 꿈만 같은걸." 결국 일이 좋은 쪽으로 해결되자 길버트는 의문점을 금새 접어 버리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뮤스는 부산하게 옷을 챙겨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이기에 하루쯤은 늘어지게 잘 수 있을 법도 했지만, 지난 3년간 일찍 일어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점원에게 부탁해서 얻은 깔끔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뮤스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워낙 넓은 숙소를 잡았기에 방이 세개나 됐는데, 뮤스가 그 중 하나를 쓰고, 길버트 부자가 다른 방을 쓰게 된것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에는 길버트가 식사를 하는 중이었고, 어쩐 일인지 한 숨도 못잔 듯 피곤해 보였다. 의아한 생각이 든 뮤스는 소매의 단추를 잠그며 물었다. "좋은 아침이군요. 좀 피곤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스푼으로 맛깔스러워 보이는 케익을 한입 떠먹은 길버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말도 말게. 잠자리가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까 오히려 잠이 다 안오더구만. 누에는 뽕나무를 먹고 살아야 하듯이 사람도 살던데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만 신나게 잘 자고 있지." "하핫! 차차 익숙해 지시겠죠." 식사를 하며 뮤스의 말을 듣던 길버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차차라니? 하룻밤에 45겔피나 되는 방에서 더 머무르겠다는 말인가?"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화려하게 차려져 있는 식탁에 앉아 마실것과 빵을 챙겨 자신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봐야 숙소를 구하지도 못할 것 같더군요. 이 부근의 숙소는 모두 자리가 찬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곳은 너무 부담스럽다네. 그리고 자네의 덕을 보는 것도 미안하고 말이지."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어제 말씀 드렸다시피 제가 돈을 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를 이곳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그 정도의 보답은 해드려야죠. 지금 제게 하루라는 시간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니까요." 대답을 하며 빵에 잼을 그득 바른 뮤스는 그것을 한입 베어물며 맛을 음미했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잼맛이 기가막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뮤스의 모습을 바라보고있던 길버트는 아직도 뭔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정말 고맙구먼. 그나저나 자네는 어딘가 나가는 모양이군." "저는 또 라이델베르크로 떠나야 합니다.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가야하는 상황이죠." "아니!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떠난다는 말인가? 전뇌거 경주도 보지않고..."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마친 뮤스는 입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쉽지만 그럴 수 밖에 없을 듯 하군요. 그리고 이곳의 숙박비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길버트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쩝... 자네와 조금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인 뮤스는 먼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나 말했다. "나중에라도 인연이 된다면 어디서든지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저는 이만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도 몸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뮤스군." 뮤스를 따라 몸을 일으킨 길버트는 문밖까지 걸어나와 그를 배웅했고,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오랜 지기를 보내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뮤스가 숙소에서 걸어나오자 어제 그의 얼굴을 눈에 익혀 놓은 점원들은 서둘러 뛰어나와 배웅을 하기 시작했고, 호텔의 현관 앞에는 포센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돈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며 쓴웃음을 지은 뮤스는 검은색의 전뇌거에 올라타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루이센의 공학원으로 가죠." 그의 말을 들은 운전기사는 천천히 전뇌거를 몰아나가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타보는 포센트는 카펫위를 달리기라도 하듯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여름치고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호수로부터 풀어오는 바람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기에 더운 날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쉬웠지만, 오늘만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기에 모자람이 없어보였다. 루이센 시내를 달리고있던 고급 전뇌거 한대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있는 멋드러진 4층의 건물 앞에 멈춰섰다. 좌우로 늘어선 건물들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건물만은 특별해 보였는데, 1층은 벽대신 대형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내부에 전시되어진 전뇌거를 밖에서도 볼수 있었고, 그 위층 부터는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외장을 하여 깔끔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멈춰선 전뇌거로 부터 뮤스가 내리자 할일을 마친 운전기사는 전뇌거를 몰아 다시 호텔로 되돌아 갔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던 뮤스는 건물을 올려다 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이곳이 루이센의 공학원인가 보군. 이런 건물이 제국 전역에 걸쳐서 생겼다니 아무튼 누님의 수완은 알아줘야한다니까." 감탄의 말을 한번 던진 뮤스는 드나들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공학원의 건물로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간 뮤스는 또 한번의 감탄성을 터트려야만 했는데, 바로 옆에 위치해있던 건물들과의 벽을 터서 공학원과 내부적으로 연결을 해놨던 것이었다. 즉, 밖에서 보던 공학원의 건물보다 최소한 네배 정도는 넓은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흠!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상당히 넓은 곳이군." 그렇게 공학원의 내부를 둘러보고 있던 뮤스에게 진한 남색의 정장을 입은 노년인이 미소를 띄우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뮤스원장님 아니십니까?" 노년인의 갑작스러운 부름소리를 듣게된 뮤스는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네? 아니 어떻게 제가 원장이라는 것을 알수 있으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그쪽을 처음 뵙는데요." 뮤스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노년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제 눈이 틀리지 않았나 보군요. 며칠 전에 라이델베르크 본원의 총무님으로 부터 오늘이나 내일쯤 뮤스 원장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실 것이라는 언질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외모를 가지신 것을 보고서 한눈에 뮤스 원장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죠." 자신을 알아본 경위에 대해 들은 뮤스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는데, 크라이츠가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크라이츠 누님이 제가 이곳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뮤스의 시선은 머리를 스치는 짧은 생각과 동시에 허리춤에 걸려있는 가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내 가방에 추적 마법을 걸어 놓으셨지... 그러니 내가 소문을 듣고 이곳에 들릴 것을 예측하신 걸거야." 혼잣말을 하고 있는 뮤스를 보며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노년인은 안쪽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비나드 지점장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서있을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드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뮤스는 로비나드의 안내를 따라 루이센 공학원의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4층으로 올라가자 십여명의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공학기술에 관련된 사람이라기 보다는 공학원 운영에 도움을 주는 일반 사무원인 듯 했고, 로비나드가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며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은 로비나드가 뮤스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 가자 조용하기만 하던 사무실의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이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원장이 온다더니, 지점장님과 함께 들어간 젊은이가 우리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사람인가봐! 이것 참... 생각보다 너무 젊잖아?" "나도 원장의 소문을 많이 듣긴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럼 이제 추방기간을 끝내고 돌아온건가? 아무튼 놀랍다고 밖에 설명 할 수가 없는것 같아." 사무원들의 잡담을 뒤로 하고 집무실로 들어간 로비나드는 예의 바르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원장님께서는 지금 미개척지로 부터 곧 바로 오시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곳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무 탈 없이 지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소파에 앉아 집무실을 둘러보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었죠. 그나저나 제가 이곳을 떠나있는 동안 공학원이 엄청나게 변한 것 같더군요. 괜찮으시다면 그간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해드리다 마다요. 원장님이시니 당연히 아셔야 하실 내용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로비나드는 자신의 책상으로가 큰 지도를 하나 가지고 뮤스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것을 소파 사이의 탁자 위에 펼치자 도이첸 제국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일반 지도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라이델베르크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에 용의 인장이 하나씩 찍혀있다는 것이었다. 로비나드는 그 용의 인장을 하나씩 짚으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뮤스원장님께서 추방령을 받으신 이후 부터 공학원은 크라이츠님의 계획에 따라 급속하게 지점을 늘려나갔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총 17군데의 중요 도시에 공학원의 지점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러한 지점에서는 주로 전뇌거와 그 밖의 제품들을 판매하거나 고장을 수리해주고, 그 지역에서 수급 가능한 자원들이나 부품들을 라이델베르크로 보내는 일을 하지요. 그 중 한곳이 바로 이곳 루이센 공학원입니다. 또, 라이델베르크의 본원 역시 그 규모를 크게 확충하여 세 곳의 전뇌거 조립공장과 다섯 곳의 부품 생산공장을 설립, 가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로비나드로 부터 현 공학원에 대해 설명을 듣던 뮤스의 표정은 놀라움을 넘어선 것이었는데, 이 많은 일들을 3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이룩해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놀라울 따름이군요. 그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니..." "상당한 수의 자본가들과 황궁이 공학원에 집중 투자를 하기 시작하자 그것을 등에 업고서 대륙의 역사에 유래없는 물자와 인력이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학원의 운영에 필요한 인력부족 또한 중요한 문제였을 텐데 어떻게 충족시킨 것이죠?" 뮤스의 질문을 받은 로비나드는 지도 아래의 숫자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가장 수가 많은 단순직의 직원들은 공학원이 위치한 곳의 주민들로 충족하고, 공학기술에 관련된 직원들은 대학생들이나 기존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 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수가 120명 가량 되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모집된 사람들은 라이델베르크의 본원에서 1년 정도의 교육을 거친 후, 연구원의 신분으로 각 지점으로 파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구원들이 자신이 속한 지점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능력을 인정 받게 된다면 공학자의 호칭이 주어짐과 동시에 라이델베르크 본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로비나드 지점장님도 그런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 역시 대학의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그만 두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죠." 잠시 이야기를 정리해본 뮤스는 대충 공학원의 체계를 이해 할 수 있었고, 그간 궁금해하고 있던 사항들이 해소 되자 한결 기분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설명을 모두 마친 로비나드는 뮤스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라도 필요하신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라이델베르크로 떠날 생각이라서 그러는데, 전뇌거를 한대 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그 일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의 부탁을 듣고선 뭔가 떠오른 듯 품을 뒤적인 로비나드는 작은 종이를 하나꺼내어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그 부탁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것을 한번 읽어 주시죠. 크라이츠님께서 전해 달라시던 편지입니다." "누님께서요?" 크라이츠의 편지라는 말에 반가움을 느낀 뮤스는 편지를 재빨리 펼치며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시선이 아래로 내려 갈 수록 그의 반가움의 표정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대공학자> #206~207 팀 라벤. 해가기울어져가는 저녁 겔브 호숫가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힘없는 발걸음을 터벅거리며 걸음을 옮기고있던 뮤스도 있었는데, 크라이츠의 편지를 읽은 후 기분이 착찹해진 그는 로비나드가 마련해 준 전뇌거와 숙소를 마다하고 공학원을 나와 발길 닿는대로 걸었고, 결국 발이 멈춘 곳이 바로 겔브 호숫가였던 것이다. 그 역시 겔브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금 겔브 호수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로 변해있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드넓은 겔브 호수 전체가 마치 빛을 내뿜기라도 하듯이 눈부신 황금 빛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멍하니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던 뮤스는 조금더 가까이 걸어가 호숫가 풀밭에 앉았다. 그리고 뭔가 허전하기라도 한듯이 손에 잡히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아무튼 누님은 일에 관련된것 만큼은 언제나 철저하시군. 비록 친동생은 아니지만 그래도 3년만에 돌아온 동생인데 이런 일을 시키다니 하루 빨리 내가 보고싶지도 않으시단 말인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구겨진 편지를 펴보았다. 그 안에는 눈에 익숙한 크라이츠의 필체로 짧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뮤스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쯤이면, 루이센에 도착해 있겠구나. 마침 내가 직접 루이센에서 열리는 전뇌거 경주에 참관 해야했는데, 이곳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일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곳까지 갈 여력이 없단다. 그러니 이번에는 공학원의 원장 신분으로 네가 직접참관해서 우승자에게 수상을 해주었으면 한단다. 그럼 자세한 것들은 지점장과 상의해서 잘 처리하도록 하고, 이만 편지를 줄이마. 간단한 안부의 말 한마디 없는 편지를 보며 입맛을 다신 뮤스는 다시 편지를 구겨 겔브 호수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리고 물결에 쓸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편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쩝. 이렇게 투정부릴 나이는 아니지만, 섭섭한 것만은 사실이군." 허전함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뮤스는 그 후로도 겔브 호숫가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며 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시간가는 줄도 모른채 호숫가에 앉아있던 뮤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부르르르릉... 어디선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요란한 전뇌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데, 보통 전뇌거의 동력기 돌아가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것이었다. "응 이소리는 뭐지? 고장난 전뇌거라도 있나?" 이에 의아함을 느낀 뮤스는 착찹해져있던 기분을 접으며 몸을 일으켰고,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략 100멜리 쯤 떨어진 호수 부근의 공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전뇌거를 가운데 두고서 뭔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저녁을 지나 밤이 되어버렸기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전뇌거로 부터 들어낸 부속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으로 봐서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려는 젊은이들 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차피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뮤스는 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젊은이들에게 가까워지자 그들의 대화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뭔가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언성이 한껏 언성이 높아져 말다툼을 하는 중이었다. 그 중 여자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는데, 그녀는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 이상태에서 전뇌력의 출력을 과다하게 늘린다면, 그나마 가지고있는 전뇌거의 동력기도 날려버린다고! 우리 능력으로는 동력기를 만질 수도 없고, 새로 살 수도 없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있던 동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듯 했다. "그렇지만 동력기도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가 되어있을 거란 말이야! 출력을 약간 높인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라니까!" "나도 라벤의 말에 동의해. 다른 팀들도 다들 그렇게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은 뭐가있어? 간단하게 전뇌조절장치만 조금 손봐주면 된다니까." 반대의사를 표하고 있던 여자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바보같은 녀석들! 다른 팀이 가지고 있는 전뇌거는 모두 금방 출고된 것들인데 우리 전뇌거와 비교 하는 것은 말도 안돼! 혹시라도 잘못되면 라벤 네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말이야! 아무리 이번 경주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 "그런 재수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아무튼 소심한 여자랑은 일을 할수가 없다니까!" 동료의 말을 들은 그녀는 순간적으로 울컥했는지 입을 다물며 몸을 돌렸고, 그제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동료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미안해 클라렌.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들의 사이에 어두운 공기가 내려 앉고 있을 때 뮤스는 그들의 전뇌거를 살펴보고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가했지만, 로데오 기종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차체의 하단에 새겨져있는 표식을 확인하며 중얼 거렸다. "이거...놀라운걸. 첫번째 전뇌거 경주에 쓰였던 로데오 중 한대잖아?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거지?" 뮤스는 반가운 마음에 전뇌거의 이곳 저곳을 만지며 그 감촉을 느껴보고 있었다. 역시 몇년이나 지난 일이었기에 처음 만들어 졌을 때의 매끈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대량생산 되기 이전의 기종인 만큼 자신의 손을 직접 거친 전뇌거라는 점에서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었다. "후훗... 이녀석을 만들때만 해도 직접 손으로 만든다고 고생 꽤나 했었는데... 이제는 대량생산체계라니." 혼자서 피식피식 웃으며 전뇌거를 만지고 있던 중 자신의 등에 누군가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낀 뮤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뒤돌아 봤다. 그러자 과연 말다툼을 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수상한 행동(?)을 하고있는 뮤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 파란색의 작업복을 입은 금발의 청년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지금 우리 전뇌거앞에서 실실 웃으면서 뭐하고 있는 거지? 혹시 다른 팀에서 정찰하러 온 것 아니야?" 그들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뮤스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는데, 클라렌이라 불린 여자 동료가 나서며 말했다. "라벤, 네 말대로 다른 팀에서 우리를 경계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번 경주에 참가하는 15개 팀 중에 가장 약체로 평가 받고있다고. 그런데 누가 우리를 정찰하러 오겠어?" 그녀의 말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라벤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며 애써 짓고있던 무서운 표정 마저 풀수 밖에 없었다. "이봐 클라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남의 이야기 하듯이 말하는거 아니냐..." "어차피 우리가 실력이 부족해서 약체로 평가 받는건 아니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해. 그저 돈이 없을 뿐이잖아?" "하긴 그렇지..." 클라렌과 대화를 하다말고 고개를 갸웃거린 라벤이라는 청년은 다시 뮤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는 여기서 뭐하는 거지?" 라벤의 물음에 대충 분위기 파악을 한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핫! 그냥 지나가다가 전뇌거 소리를 듣고 온거야. 잘은 모르지만 조금 불안정한 소리가 나길래..." 뮤스의 말을 듣고 피식웃은 라벤은 전뇌거를 두들겨 보며 말했다. "그랬었군. 사실 동력기 시험을 하고 있었거든. 이 로데오에 장착되어있는 것은 워낙 오래된 동력기라서 시원찮은 데다가 전뇌력 출력을 높였으니 굉음이 날 수 밖에 없었지.아!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잘 모르겠구나."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자책을 한 라벤은 뮤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나저나 전뇌거를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번 전뇌거 경주를 구경하러 온것 같은데 어디서 왔지?" "지금까지는 그냥 떠돌아 다니는 중이었어. 지금은 라이델베르크로 가는 중에 잠시 들린것이지. 그나저나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하는 팀인가보군." 어깨를 으쓱하며 전뇌거와 친구들을 가리킨 라벤은 쑥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보면 알다시피 열악한 팀이야. 나는 라벤이고, 뒤에는 클라렌과 팔러라고 하지. 너는?" 라벤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뮤스는 본명을 말하면 자신을 알아 볼 것 같았기에 대충 이름을 하나 떠올렸다. "어... 나는 케르히트, 부르기 쉽게 켈트라고 부르면되." 결국은 켈트의 이름을 대신 가르쳐준 뮤스는 속으로 우습기도 했지만 애써 참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들은 라벤 일행은 신기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하핫! 켈트라고? 공학원의 켈트님과 똑같은 이름이잖아? 물론 그분은 드워프족이긴 하지만..." 내심 본명을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뮤스는 대충 공학원에 대한 인식을 떠보기라도 할겸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보군?" 이번에는 라벤 대신 클라렌이 대답해 주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는 일종의 경외감까지 일렁이고 있었다. "그분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공학원의 설립때 부터 기술 고문을 맡고 계신 분이시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지. 아마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지적이고 멋지신 분이실거야."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클라렌을 보며 켈트에 대한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던 뮤스는 그만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쿠쿡... 지적이고 멋지신분이라." 뮤스가 웃는 것을 본 클라렌은 무서운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우스운거지?" "아..아냐. 그냥 멋진 분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어. 그나저나 아까 대화하는 것을 잠시 들어보니 전뇌거에 문제가 있는 것같던데 이야기 좀 해줄 수 없을까? 나도 사실 전뇌거에 관심이 많거든."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뮤스의 질문에 뚱뚱한 몸집을 가진 팔러가 책자를 하나 건네주며 대답했다. "이걸 읽어 보는 편이 훨씬 이해가 쉬울거야. 내가 접어 놓은 곳을 한번 읽어 보라고." "이건 무슨 책이지?" "그건 공학원에서 매달 발행하는 책자야. 전뇌거나 그 밖의 제품들에 대한 설명들이 주로 언급되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수록하는데, 공학원 지망생들에게는 교과서와 같은 책이지. 특히 우리처럼 대학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야." "아! 그럼 전뇌거에 대한 지식도 이 책자를 통해서 얻은 것이군?" "뭐 대충은 그렇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대부분은 직접 해보면서 배운 것들이야. 말 그대로 책자에서 언급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자료 밖에 안되니 그 이상의 지식들은 재주껏 쌓아가는 수밖에 없거든." 책자의 표지를 한번 바라본 뮤스는 일반의 사람들에게 공학에 대한 기본지식을 심어주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팔러가 접어 놓은 곳을 펼쳤다. 그곳에는 이번 전뇌거 경주에 참가 신청을 한 팀들에 대한 분석이 다뤄지고 있었는데, 라벤의 팀에 대한 평가 역시 책자의 한쪽 귀퉁이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이것인가 보군? '팀 라벤. 참가 팀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는 팀으로서 팀원의 열의는 강하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2년 연속 대회 최하위 팀.' 이라는 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팔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직접 읽어 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 판국에 그 평가를 또 들어야 하다니..." 팔러의 투덜거림을 뒤로하며 라벤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평가에서 봤다시피 우리는 후원자가 없어서 개인의 돈을 털어서 이 전뇌거를 중고로 겨우 마련할 수 있었지. 하지만 역시 싸게 구입한 만큼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서 최대한 손을 봤는데도 별달리 나아지는 것이 없어. 동력기를 새걸로 교체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지만, 낮에 틈틈히 일해서 번 돈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거든." 잠시 동료들을 바라보던 라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런 환경으로는 우리가 경주에서 우승하는 것은 꿈이나 마찬가지야. 벌써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해볼 만큼 했으니 올해에도 안되면 깨끗하게 포기 할 생각이야. 이제는 우리도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야 할 나이니, 가능성이 희박한 꿈만 보고 살아 갈 수는 없거든." 문득 말을 멈춘 라벤은 머슥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뮤를 바라봤다. "미안하군 켈트... 처음 보는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주절거린 것 같군. 그럼 너는 전뇌거 경주가 끝나면 이곳을 떠나는 거야?" 아직 켈트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뮤스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는지 몰랐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열정을 쏟는 라벤 일행에게 잔잔한 감동을 받고서 그들을 도울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뮤스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라벤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물었다. "이봐 켈트. 지금 무슨 생각중이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뮤스는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젓던 뮤스는 잠시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나도 예전 부터 전뇌거 경주에 한번 참가해 보고 싶었는데, 혹시 너희들 팀에 끼워 주면 안될까?" 그러나 뮤스의 말이 그들의 귀에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은 듯 했고, 클라렌은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켈트! 말이 너무 심한것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약체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재미로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팀원으로 끼워 줄수는 없어! 비록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라벤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뇌거 경주에 참가했었다고 자랑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건 우리에게있어서 단순한 장난이나 재미가 아니야."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인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도 재미로 끼어들겠다는 것이 아니야. 너희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너희 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우리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럼 네가 엄청난 자산가이기라도 해서 우리를 후원 하겠다는 말이야?" 아직도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어오는 라벤의 말을 듣고선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도 전뇌거에 관심이 있어서 공부를 꽤나 많이 했었거든. 내가 보기엔 이 로데오의 동력기도 조금만 손을 보면 새것처럼 사용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 말이 정말이야?" 대충 말을 둘러대던 뮤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벤 일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들통날 거짓말을 내가 왜 하겠어? 그러니 그런 미심적은 눈으로 바라보지는 말라고." 턱을 쓸며 곰곰히 생각해 보던 라벤은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며 서로의 의사를 물었고,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라벤은 동료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너를 우리 팀원으로 넣어 주는 것은 문제가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저축해 놨던 돈을 모두 털어서 전뇌거를 구입했는데, 네가 아무런 지원을 하지않고서 뒤늦게 팀원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말이 안돼거든. 하지만... 만약 네가 로데오의 동력기를 고쳐준다면 동력기를 새로 구입한샘 치고 팀원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지. 어때?" "하핫! 나는 얼마든지 준비가 되어있으니 상관없어." 이렇게 해서 뮤스와 라벤 일행은 하나의 팀이 되었다. 사실 뮤스가 직접 그들의 후원자가 되어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순수한 열정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편이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뮤스와 라벤 일행들은 전뇌거를 타고서 그들의 작업장이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로데오는 2인승 전뇌거였기에 앉을 자리가 없었는데, 그 덕에 뮤스와 덩치가 큰 팔러는 좁다란 빈공간에 거의 몸을 끼워 넣다 시피한 상태였다. 이동하는 동안 뮤스는 대화를 통해서 라벤은 목재소에서, 팔러는 정육점, 클라렌은 제과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외에도 그들에 대한 여러가지를 사실을 알수 있었다. 팀 라벤은 제 2차 전뇌거 경주가 벌어지기 불과 두달 전, 전뇌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 사람이 함께 뭉치게 됨으로써 만들어 지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경주에서는 라벤이 전뇌거 운전에도 익숙치 못했기에 그저 완주를 하는 데에 만족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듬해의 경주를 노려 봤지만, 성능이 훨씬 개량된 신형의 전뇌거들이 대거 출전하는 바람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올해에는 더욱 쟁쟁한 팀들이 늘었기에 그들이 가진 구식의 로데오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던 그들은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뇌거가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서자 앞쪽에 타고 있던 클라렌이 재빨리 내렸다. 그런 후에야 뮤스와 팔러가 전뇌거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는데, 둘다 숨을 쉬기 조차 힘들었는지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후우.. 정말 매번 탈때마다 죽기 일보 직전이야. 기왕 개조하려면 4인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어때?" 팔로의 말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라벤은 로데오의 차체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 녀석을 4인승으로 개조하면 정말 끝장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성능도 엉망인데다가 멋도 없어지잖아." "하긴 그렇지... 우리가 나름대로 연구해 본다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놨으니 멀쩡한건 외장 밖에 없지."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클라렌은 허름한 건물의 문의 자물쇠를 따고 있었다. 건물의 형태로 보아 버려진 창고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었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겨울이 된다면 여기저기 깨진 창문으로 칼바람이 몰아쳐 들어올 것이기에 애로사항이 많아 보였다. 클라렌이 자물쇠를 따고 있는 힘껏 문을 옆으로 밀자 마찰음이 나면서 전뇌거 한대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넓게 문이 열렸고, 라벤은 다시 건물 안으로 로데오를 몰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뮤스와 팔러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가고 있을 때, 어두운 내부로 들어간 클라렌이 전뇌등의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빛이 들어오면서 작업장의 내부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내부에 비해 고작 두개의 전뇌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는데, 로데오에서 내리던 라벤은 그것이 매우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핫! 놀랐지? 이번달에 우리가 번 돈으로 전뇌등을 설치했지. 가격이 비싸지만 밤에 작업을 해야하니 어쩔 수가 없더라고." 막 작업장으로 드러서며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위해 놀란 표정을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전뇌등이 설치되어 있다니 대단한걸? 그런데 전뇌력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지? 설마 이곳에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것은 아닐텐데." 뮤스의 물음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라벤은 손가락으로 건물의 뒤쪽을 가리켰다. "이야! 수력발전소까지 아는 것을 보니 괜한 말을 했던것은 아닌가보군. 돈이 많이 깨졌지만 소형 발전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지. 루이센은 호수로 들어가는 물의 양이 상당하기 때문에 소형발전기를 설치하기에 알맞거든." "음... 소형발전기라..." 이런 곳에 전뇌력이 들어올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전뇌거 부속품들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록 손질이 덜 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것들이 상당히 모여있었고, 연장들은 매일 사용하는 듯 잘 닦여있었다. "꽤나 많은 것들을 모아 놨는데? 이 정도면 부속은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아.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 뮤스가 의욕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가볍게 웃은 클라렌은 길게 내려온 갈색의 머리를 뒤로 묶으며 말했다. "풋. 지금 당장 시작하더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에겐 그리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좋아. 한번 상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고... 어디보자." 짧게 대답 하며 손을 한번 털어낸 뮤스는 로데오의 앞쪽에위치한 기관실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는 복잡한 기관들이 엉켜있었는데, 전뇌선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가장 아래쪽에 나타난 동력기의 상태를 확인하던 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 참... 생각보다 훨씬 엉망인걸? 아무래도 동력기를 차체로 부터 뜯어내서 분해를 해야 겠어." 그의 말을 듣고있던 팔러가 뒤뚱거리며 다가와 놀라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동력기를 분해한다고? 말도 안돼! 공학원에서 제공하는 전뇌거 설계도에도 그 중요성 때문에 동력기의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은 제외하는 판국인데 어떻게 분해를 한다는거야? 공학원의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팔러 이외의 동료들 역시 그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동력기를 분해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고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부수적인 장치들을 제외한다면 동력기자체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어. 고성능의 자력통과 금속 뭉치가 주된 구조인데, 지금은 이 동력기는 내부의 금속뭉치에 이물질이 스며들어 마나구에서 방출하는 전뇌력을 효율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즉 내부의 금속뭉치를 다시 재작해서 교체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일까지만 작업하면 동력기를 출고 직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 라벤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지만, 그 작업을 정말 네가 할 수 있다는거야? 내가 알기론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팀 뿐만 아니라 다른 팀에도 없어. 모두들 자신들의 전뇌거를 개조하긴 하지만, 공학원에서 제공하는 설계도를 참고해서 조금씩 변화시키거나, 타 기종의 완성된 동력기를 그대로 옮겨서 설치 하는 수준이지, 동력기 내부에까지 손을 대지는 않는다고." 불안에 찬 라벤의 얼굴과는 정반대로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있던 뮤스는 가방에서 작업용 장갑을 꺼내 끼고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있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자신이 없으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번 믿어보는게 어때? 너희들도 상대 팀들에 못지 않은 동력기를 가지고 정정 당당하게 경주를 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잖아."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뮤스의 달콤한 유혹을 들으며 한 동안 고심을 해보던 라벤은 결국 그의 말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어차피 이대로 출전한다고 하더라도 가망이 없는 것은 사실이잖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부탁한다 켈트." 진지하게 이야기하고있는 라벤의 입에서 켈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어색함을 느꼈지만 별 신경을 쓰지않기로 한 뮤스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너희들도 동력기를 뜯어내는 것쯤은 할 수있을 테니까 좀 부탁을 할께. 나는 필요한 것들을 찾아보고 부속을 준비해야하니까." "알았어. 그런 것은 맡겨 두라고. 시작하자 팔러, 클라렌." 라벤의 말을 시작으로 그의 동료들은 기중기와 필요한 연장들을 가져오며 동력기를 떼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뮤스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쪽에서 동력기를 고치는데 필요한 부속들을 가방으로 부터 하나씩 꺼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팀 라벤의 고물 로데오 개조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 동이 밝아올 무렵에는 로데오 개조작업에 열을 올리던 뮤스와 동료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작업하다가 잠이들어버린 그들은 밤샘 작업을 위해 가져다 놓았던 간이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아직 작업이 끝나지 않아 로데오의 내부에 들어있어야할 부속들이 흉하게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창넘어로 들어오는 눈부신 태양 빛이 잠을 자고던 클라렌의 얼굴에 와닿자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벽에 걸린 원추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큰 일이라도 난 듯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꺄악! 다들 일어나라고! 일하러 갈 시간이야!" 귀를 아프도록 자극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 동료들 역시 시간을 확인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이런! 피곤해서 늦잠을 자버렸군!" "주인 아저씨가 또 시급을 깎으면 큰일이라고!" 그들은 작업장의 한쪽 구석에있는 세면대쪽으로 달려가 서둘러 세면을 하거나, 면도를 했고, 옷장앞에서 기름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갈아 입었다. 이렇게 출근 준비를 마친 그들은 작업장에서 뛰어 나왔는데, 순간 빠트려 먹은 것이 있는 듯 몸을 멈추며 뒤를 돌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곳에서는 아직도 뮤스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조용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라벤과 동료들은 오랜만에 신이나게 작업을 했었던 어제의 일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고는 다시금 일터로 걸음을 옮겼다. 뮤스가 깨어난 것은 그로 부터 두어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잠에서 덜깬 그가 힘겹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새벽까지 작업을 하던 동료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잠이 달아남을 느낀 뮤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한번 둘러봐도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다들 어디간거지? 분명히 어제 작업을 같이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이킨 뮤스는 동료들이 잠을 자던 간이 침대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금방 벗어 놓은 듯한 작업복이 어질러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세면대는 사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물기가 고여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하러 나간 것 같군. 이제 그럼 나 혼자 남은 건가?" 가려운 머리를 긁으며 전뇌거로 걸어간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하암! 눈치를 보지 않고 했더라면 벌써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군." 앞으로 동료들의 속도에 맞춰 작업을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함이 앞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뮤스는 모종의 결심이라도 한 듯 땅에 떨어져있는 연장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동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그들이 오기 전에 일을 끝마쳐도 괜찮을거야. 다른 팀에 못지 않은 동력기를 선물해 주도록 하지." 이렇게 말한 뮤스는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결리는 몸을 시원한 기지게로 풀어보며 수십개의 부속품으로 분해되어 땅바닥에 얼려있는 동력기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품들을 하나씩 끼워 맞춰가면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팀 동료가 된 라벤 일행이 기뻐할 모습을 상상해 보니 더욱 손놀림이 바빠지고 있었다. 라벤은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작업장으로 가는 동안 수도 없는 한숨이 나왔지만 오늘만은 다르게 저절로 휘파람이 나오고 있었다. 이는 모두 어제 자신들의 예비 동료가 된 켈트라는 친구 때문이었는데, 그가 팀원으로 넣어달라고 제의를 했을 때만 하더라도 큰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함께 로데오 개조작업을 했던 짧은 시간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기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팀원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들의 로데오가 강력한 심장을 가지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하핫! 오늘도 열심히 해보는 거야!"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힘차게 허공으로 손을 내뻗어 본 라벤은 히죽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렌은 종이 봉투에 팔다 남은 빵들을 가득 담아 넣었다. 이것이 오늘 밤샘 작업의 밑거름이 될 든든한 식량이었다. 오늘은 평소 때 보다 더욱 두둑히 담아 놓았다. 그 이유는 또 하나의 입이 늘었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자신이 존경하는 공학원의 켈트님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였다. 처음 볼때만 하더라도 치렁하게 머리를 늘어트리고있는 그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밤새 지켜본 결과 그의 실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올해의 경주에서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녀는 나무로 된 제과점의 문을 열고 나섰다. 정육점에서 일을 하고 있던 팔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귀찮아서라도 시계를 보는 일 대신 일을 했겠지만, 오늘따라 시간이 유난히 안가는 것 같았기에 그의 눈은 십분이 멀다하고 시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런 아직도 삼십분이나 남았잖아? 쳇..." 우직한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그려넣은 그는 계속해서 고기를 다듬기 위해 칼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또 다시 시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일과를 마친 팀 라벤의 동료들은 시간이라도 맞추기라도 한듯, 작업장의 문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작업을 하기 위해 각자의 일터에서 뛰어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문 앞에 멈춰서서 클라렌과 팔러를 바라본 라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부리나케 뛰어온 것 같군. 작업하는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그렇게 서둘러 오고그래?" 제과점에서 부터 먼거리를 뛰어와서 인지 가쁜 숨을 헐떡여야 했던 클라렌은 라벤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헤... 정말 웃기는걸. 우리 셋 중에서 일터가 제일 멀리 있는 사람이 바로 너 잖아? 그런데도 제일 먼저 왔으면..." "그랬었나? 하핫! 그래도 팔러만큼은 아니지. 가깝지만, 뛰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데 이렇게 비슷하게 왔잖아?" 그의 말에 손을 내저은 팔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에 고인 침을 내뱉었다. "퉤! 말도 말아. 정말 10년 만에 처음 뛰어 보는 것 같다고. 오늘따라 왜그렇게 시간이 안가던지..." "하긴 나도 그렇더라고. 전뇌거 생각에 일이 손에 잡혀야지 말이야." 클라렌 역시 빠질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나는 오늘 전뇌거 생각한다고 빵을 다 태워 먹었다니까. 주인 아주머니께 얼마나 혼이 났는데. 아주머니 눈빛만 생각해도 정말 아찔하다니까."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지은 라벤은 기다리던 작업장의 문을 열어 젖혔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선 라벤과 동료들은 그 자리에 입을 벌리고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작업장의 내부가 아침에 나갈때와는 천양지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동력기의 부속으로 너저분하던 바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내장을 다 드러내놓고 있던 로데오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조립되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라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팔러는 그의 볼을 꼬집어 보았는데, 기분이 좋아서인지 전혀 아픈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욱 꿈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넋을 빼고 로데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작업장의 구석에서 뮤스가 천으로 손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뜨거운 눈길을 주며 대답을 구하고 있었고,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는 말라고. 그냥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대충 조립을 해놨을 뿐이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로데오로 다가와 살펴보는 동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그 중 클라렌이 기관실의 뚜껑을 열어보며 말했다. "이게 심심해서 대충 조립한거라고? 어제 분해 작업하는데만 하더라도 네 명이서 꼬빡 밤을 샜는데..." 그녀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이 고개를 내저은 팔러 역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뚱뚱한 그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눈을 뜨며 물었다. "어떻게 이 복잡한 작업을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것도 혼자서 말이야. 이봐 켈트... 이제 네 정체를 밝히시지!" 자신의 정체를 알아 채기라도 한는 듯이 외친 팔러의 말에 뮤스는 순간적으로 크게 놀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뭐..뭐... 내 정체라니?" 뮤스의 되물음에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던 팔러는 손가락으로 뮤스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것 같아. 어서 너의 숨겨놓은 나머지 팔들을 보여 주시지! 적어도 팔이 여섯개는 될거야!" 그제서야 팔러의 농담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뮤스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고,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후훗! 무슨 쓸데 없는 소리야. 내 팔은 두개 뿐이라고."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팔러는 진심으로 뮤스를 의심하는 듯 그의 엽구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팔러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 먹고 있을 때, 라벤이 탄성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군! 내부가 완전히 새것처럼 정리됐잖아? 그럼 우리 로데오의 동력기는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는건가?" 기관실을 살펴보고 있는 클라렌의 옆으로 다가간 뮤스는 동력기 부분과 그 주변을 짚으며 말했다. "작업을 하다 살펴보니, 이 전뇌거가 초기생산 제품이라서 수공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지. 그래서 이 로데오의 동력기는 대량생산된 일반 로데오의 동력기보다 훨씬 좋은 부속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전뇌력의 방출력을 높여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더군. 확실하지는 않지만, 요즘나오는 신형 전뇌거 동력기와 비슷한 수준은 될거야." "그럼 일반 로데오의 동력기 보다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다는 말이잖아!" 라벤은 진심으로 기쁜지 재빨리 달려와 뮤스를 힘껏 끌어 안으며 외쳤다. "켈트 너는 정말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야! 사랑한다 켈트!" "이..이봐 나는 이미 라이델베르크에 여자친구가 있는 몸이라고! 게다가 남자 녀석이 이러면 더욱 곤란하지!" 그 말을 듣고서야 뮤스를 풀어준 라벤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핫! 네 여자친구가 이것을 봤으면 큰일 날뻔 했군. 그나저나 대단해. 동력기를 한번 시험해 봐도 될까?" "쯔쯧... 그걸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팀 라벤의 팀장이 너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 하군."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라벤은 설레이는 표정으로 전뇌거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손을 한번 비벼보며 운전대를 잡은 그는 전뇌거 시동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력기의 소리가 부드러웠는데, 차체의 진동도 훨씬 줄어 든 듯 했다. -부르르릉! 부릉! 전뇌거의 상태를 확인하며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라벤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외쳤다. "환상적이야! 이거 정말 우리 로데오 맞는거야?" 그의 물음에 팔짱을 끼며 동료들에게 다가간 뮤스는 코밑을 쓸며 말했다. "내가 이 팀에서 할 수 있는건 이제 다했어.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서야 다른 팀과 비슷한 경주용 전뇌거를 얻게 된 것일 뿐이지 그들보다 우월한것은 아니야. 지금 부터는 너희들이 이 로데오의 성능을 어떻게 개선 하느냐에 경주의 결과가 달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남은 시간 동안 수고해 보라고. 이제는 전뇌거의 성능이 못따라줘서 졌다는 말은 못하게 되었으니까 너희들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줘." 뮤스의 말에 코끝이 찡해진 클라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만면에 미소를 띄운 팔러는 뮤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고맙다 켈트. 이렇게까지 도와준 네게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도 노력해볼께." 팔러에 이어 전뇌거에서 내린 라벤이 입을 열며 다가왔다. "네 말대로 이제 전뇌거가 구식이라서 졌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됐군. 지금부터 너는 지켜만 보고 있으라고. 우리가 지난 시간동안 준비해 놓은 것을 보여줄테니까." 뮤스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가득찬 라벤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후훗! 그럼 얼마나 잘하는지 기대해 보기로 할게.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힘들게 일을 했더니 피곤한데 나는 이만 들어가서 쉬어도 될까?" "이 자리에 누구도 그걸 막지는 않을걸? 오늘 정말 수고했고 푹 쉬어." 라벤의 말에 미소로 답한 뮤스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작업장의 문으로 걸어갔다. 그 때 문득 라벤이 그를 불러세웠다. "이봐 켈트! 깜빡 했는데, 이제 너는 팀 라벤의 정식 팀원이야!" 그의 말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이제서야 내가 팀원이 된건가? 나는 어제 부터 팀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섭섭하군. 후훗!" "하하핫! 그랬다면 정말 미안한걸!" "그럼 다들 밤새 수고해!" 라벤에게 농담을 던진 뮤스는 다시한번 인사를 건네며 작업장 밖으로 걸어나갔고, 라벤과 그의 동료들은 뮤스가 사라진 곳에서 부터 비춰드러오는 금빛의 저녁노을이 오늘따라 눈이 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대공학자> #208~209 진정한 승리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쾌청한 날씨의 여름날 루이센은 유례없는 인파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루이센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뇌거 경주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며칠 전부터 이곳에 머물렀기에 그 동안은 조금 분비는 정도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지만, 전뇌거 경주의 당일이 되어버리자 루이센에서 가까운 도시들로 부터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탓에 경주에 사용 될 도로를 제외한 곳은 모두 사람들이 들어차있었고, 심지어는 도로변에 위치한 건물들의 창문에도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정도였다. 전뇌거 경주의 출발점이 되는 루이센 시청앞 역시 다른 곳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구경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임시적으로 만들어 놓은 낮은 철책밖에는 전뇌거들이 출발하는 모습과 들어오는 모습을 보기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총 15대의 전뇌거가 일렬로 늘어서서 팀원들의 최종 점검을 받는 중이었다. 전뇌거들 가운데에는 3번의 번호를 붙인 팀 라벤의 개조된 로데오도 섞여있었는데, 이곳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전뇌거는 대부분 로데오의 후속기종인 '루펜트' 를 기본으로 조금씩 개조한 모습이었기에 팀 라벤의 로데오는 유독 눈에 띄고 있었다. 로데오의 주변에서 초록색의 팀복을 입은 동료들은 전뇌거의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고, 뮤스는 동료들 사이에서 개조된 부분을 하나씩 살펴 보는 중이었다. "음... 아주 좋은 걸? 겔브 호수 도로 주변에는 굴곡이 많으니, 차체의 중량을 줄인것이 큰 도움이 될거야. 게다가 바퀴의 폭을 넓혔으니 코너를 돌기 쉬울거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상판 부분을 더욱 유선형으로 제작했군. 이건 라벤이 한건가?" 그의 물음에 바퀴의 조립상태를 확인하던 라벤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내가 목공소에서 일하면서 배운건 매끈하게 나무를 깎아내는 방법이지. 그냥 타고 다니기에는 모양새가 영 이상하지만, 무게도 줄일겸 상판을 뜯어내고서 목재로 갈아 치웠지. 덕분에 바람의 저항은 현저히 줄어 들거야. 괜찮아 보여?" "후훗! 길거리에서 타고 다니기에는 좀 부끄럽겟지만, 오늘은 경주를 하는거니 그럭저럭 봐줄만 하군. 몸 상태는 어때?" "그다지 좋지는 않아. 어제 너무 떨려서 그런지 잠이 통 오지 않더라고. 그래서 얼마 자지 못했어." 피식 웃은 뮤스는 손에 들고있던 개조설계도를 접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니까 신경쓰지마. 그리고 달리면 네가 달리는 길만 바라봐. 괜히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지 말고." "마치 전뇌거 경주에 나가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거야." 자신이 최초의 전뇌거 경주에 출전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라벤을 보며 미소를 지은 뮤스는 로데오의 운전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어쨌건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오라고." 뮤스의 말을 들으며 전뇌거에 탄 라벤은 의자에 설치된 안전장치를 몸에 채우며 말했다. "켈트... 다시한번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다." "몇 번만 더 하면 열번이다. 어차피 우리는 한 팀이야. 팀의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건 당연한 거잖아?" "아무튼 너를 그곳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뮤스와 라벤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점검을 모두 마친 클라렌과 팔러가 다가왔다. 그리고 라벤의 머리를 한대씩 쥐어 박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면 알아서해! 오늘 그 지겨운 제과점을 때려 치울 각오로 왔단말이야!" "또 꼴찌를 하면 우리는 변명거리도 없다고! 그 점은 더 이상 말안해도 네가 더 잘알겠지? 행운을 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응원을 해주는 동료들을 향해 라벤은 엄지손가락을 펼쳤다. "죽자사자 달릴테니까 걱정하지마. 이번만은 정말 우승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라벤이 투지넘치는 모습으로 동료들을 안심시키고 있을 때, 장내를 울리는 방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운전자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은 출발선 밖으로 철수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팀원들은 출발선 밖으로 철수해 주십시오. 방송을 들은 뮤스와 동료들은 지금부터는 혼자서 싸워야 하는 라벤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며 출발선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여전히 걱정만은 떨칠 수 없는 듯 그들의 로데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출발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료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침을 삼키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뇌거 운전자 여러분들은 동력기 시동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15대의 전뇌거는 웅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들은 창넘어로 다른 운전자들을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로데오에 타고있던 라벤은 예전보다 훨씬 긴장이 됨을 느꼈는데, 아무런 기대없이 출전했었던 과거의 대회와는 달리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압박감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자... 우리의 로데오는 최고다. 정신만 차리면 되는거야. 호흡을 가다듬고 하나씩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신호가 울리면 전진패달을 천천히 밟고... 변속기를 한번 당겨주고..." 과연 그의 행동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호흡을 반복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자 그의 귀에는 출발신호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광중들의 시끄럽던 외침소리가 점차 잠잠해지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합에 집중을 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출발 준비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출발 5초전입니다. 4초... 3초... 2초... 1초... 출발! 지금 라벤의 눈앞에는 곧게 나있는 도로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달리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전진패달을 밟았다. 로데오가 빠르게 앞으로 나가며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젖혀진 라벤은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전뇌거가 출발선으로 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이곳에 모인 관중들은 시청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15대나 되는 전뇌거들이 출발하는 멋진 광경과 지금까지는 상상치도 못할 속도를 내고있는 전뇌거들이 그들을 영광케 하는 것이었다. 관중들의 환호에 파묻혀 로데오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팀 라벤의 동료들은 이제 자신들의 로데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더욱 초조함을 느꼈다. 클라렌은 두 손을 굳게 모아쥐며 물었다. "라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어떻게 하지?" 누구를 향해 묻는 지도 모를 그녀의 말을 들고 있던 팔러 역시 로데오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저 녀석 지난 대회 이후로 엄청나게 연습했잖아. 게다가 겔브 호수의 도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출발도 저 정도면 꽤 빨리 한것 같고." 뮤스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출발 속도는 거의 1, 2윌를 다투더군. 그 정도면 지금쯤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잡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동료들의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정된 표정을 지은 클라렌은 로데오가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동료들이 조금 진정하자 뮤스는 팀복을 벗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의 말을 듣고있던 동료들은 로데오에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뮤스는 다시한번 동료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을 받으며 푸른 빛을 반짝이고 있는 겔브 호숫가의 도로에는 다섯대의 전뇌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시청에서 출발한 전뇌거들은 어느새 겔브호수를 반이나 돌고 있었는데, 이 다섯대가 그 중 선두 그룹이었다. 네대의 루펜트들 앞으로 3번이라는 번호가 선명히 찍힌 로데오가 달리고 있었다. 급격한 코너가 이어지는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석이라도 붙인 듯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 수록 뒤를 쫓는 루펜트들과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도 라벤의 눈에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 길만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달리는 것에 도취되기라도 한듯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오직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속패달을 밟다가 코너가 보이면 변속기를 동시에 두칸 내려준다. 비록 변속기에 무리가 가긴 하겠지만 동력기의 회전을 줄이지 않고서도 로데오의 속도를 줄일 수 있지." 라벤을 태운 로데오는 그의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이 빠른 속도로 멋지게 코너를 돌고 있었다. 마치 로데오와 그의 몸이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수 천명이 넘는 관중이 밀집되어있는 시청의 중앙광장에서 뮤스는 빈틈없이 서있는 사람들을 힘겹게 헤치며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나갈 수 있도록 조금만 비켜 주십시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비켜줄 공간이 없었고, 오히려 이런 곳에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려는 뮤스가 눈총을 받고 있었다. 어렵게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여 그의 발걸음이 멈추게된 곳은 거대한 임시 단상의 위쪽에 만들어져있는 전뇌거 경주 진행본부였다. 그 앞에서 진땀을 닦아낸 뮤스는 자신이 헤쳐온 길을 되돌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겨우 도착했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거야." 다시 고개를 돌린 뮤스가 전뇌거 경주 진행본부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어가자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던 건장한 몸집의 사내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입니다." 그들의 말에 주변을 살펴본 뮤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는 것을 꺼리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공학원의 원장이니 저곳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 같군요."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사내들은 어이없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는데,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핫! 웃기는 농담 그만하고 다른 곳으로 가보게. 공학원의 원장이 이런 곳에 있을리가 없잖아?" "제 말은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로비나드 점장님을 직접 불러주시죠." "그분은 지금 바쁘시니 자네같은 젊은이는 만나줄 시간이 없으시네. 보아하니 공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부탁을 하려는 모양인데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돌아가게나." 사내들이 강경하게 나오자 어쩔 수 없다고 여긴 뮤스는 임시 단상의 위쪽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로비나드 지점장님! 로비나드 지점장님!"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기에 그의 목소리가 단상위까지 닿는지 알 수 없었고, 그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사내들은 급히 그의 팔을 끌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젊은이가 미쳤나! 갑자기 지점장님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뮤스가 사내들의 팔에 정신없이 끌려 가고 있을 때, 단상 위에서 한 중년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 대체 원장님께 뭘 하는 짓인가!" 그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로비나드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사내들은 아직도 못믿겠다는 듯이 자신의 팔에 매달려있는 뮤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로비나드의 표정으로 보아 장난이 아님을 깨달은 사내들은 급히 그의 팔을 놔주며 큰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죄..죄송합니다 원장님!" 그 덕에 더욱 당황한 것은 뮤스였는데, 무슨 일인지 주변의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과는 그 정도면 됐으니까 그만하고 하던일 하세요!" 짤막한 말을 남기며 단상으로 올라가는 뮤스의 뒷모습을 보며 한 숨을 내쉰 사내들은 입술이 바짝 마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저 청년이 정말 뮤스원장이었다니. 그렇다면 올해는 우승자 수상을 원장이 직접하는 건가?" "작년까지만 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원장이 직접 오다니. 이것 참 사건이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들을 뒤로하며 단상위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단순하게 보더라도 이번 경주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탁자의 한곳에 원거리통신기가 설치되어있어 대회의 진행상황을 보고받는 듯 했다. 먼저 앞장서서 올라온 로비나드가 진행본부의 중심에 놓여있는 의자를 권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오셨더라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으셨을텐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자리에 앉아 시청을 둘러보던 뮤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사실은 제가 어떤 사정으로 전뇌거 경주 팀의 팀원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다고 온다고 좀 늦었던 것입니다." "하핫! 전뇌거 경주 팀의 팀원이라고요? 제가 팀원들의 명단을 살펴 봤지만 뮤스 원장님의 이름은 못본 듯 합니다만... 어떤 팀이죠?" "아실지 모르시겠지만, 2회 연속 꼴찌를 했던 팀 라벤입니다. 그곳에서 켈트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로비나드는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는데, 뮤스의 말을 듣고서야 어떠한 의문이 풀리기라도 한듯 속시원해 하고 있었다. "아하! 그 팀에 바로 뮤스 원장님께서 계셨었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꼴찌를 달리던 팀이 지금 선두로 달리고 있어서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니..." 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지금 팀 라벤이 선두로 달리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도 2위와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죠." "이런 그렇다면 더욱 큰일이군..." 뮤스는 이마를 짚으며 골치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전뇌거 경주가 끝나면 시상식을 거행해야 했고, 그곳에 뮤스가 공학원의 원장으로써 나선다면 팀의 동료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팀 라벤이 우승을 하더라도 동료들은 그것이 스스로의 실력이라 생각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로비나드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로비나드 지점장님 제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저의 부탁을 좀 들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이번 경주에서 제 대신 우승자에게 상을 수여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꼭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뮤스의 부탁에 얼떨떨해 하던 로비나드는 손을 내저으며 완고하게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번 전뇌거 경주에서 시상을 한다면 그것은 이 행사자체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제가 시상을 하는 것은 이곳에 출전한 젊은이들에게 모독적인 행위입니다. 그들은 공학원을 대표할 만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지 저와 같은 일개 지점장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크라이츠님과 켈트님께서도 경주때 마다 바쁘신 일정을 접으시고 찾아 오셔서 직접 시상을 해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꼭 계셔야 합니다. 제가 뮤스원장님의 아랬사람이긴 하지만, 원장님께서 고집하신다면 막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로비나드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 모습이 아니었는데, 결국 빼도 박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져버린 뮤스였다. 해가 약간 기울며 한낮의 기세를 조금 꺽을 무렵 루이센 시청까지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일대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로 시청건물에서 먼곳으로 부터 엄청난 환호성이 일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그 환호성은 전염이라도 되는 듯 빠른 속도로 시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뮤스가 앉아있던 진행본부에까지 그 여파가 닿고있었다. 주변은 바로 옆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환호성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들의 반응을 본 뮤스는 드디어 선두의 전뇌거가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손을 만지작 거리며 시상식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있던 뮤스는 환호성이 가까워 지는 만큼 그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었다. -부르르릉... 색색으로 일렁이는 관중의 파도를 가르며 드디어 선두의 전뇌거가 뮤스가 앉아있는 진행본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을 만큼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로 달려오는 전뇌거에는 3번이라는 숫자가 찍혀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뮤스는 기쁜 마음과 고민스러움이 기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은 우승을 하고 마는구나..." 시선을 돌린 뮤스는 단상의 먼 발치에 있는 팀원들의 모습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로데오를 발견하기라도 했는지 클라렌은 입을 막으며 어쩔 줄 몰라했고, 팔러는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팀 라벤의 로데오는 점점 커지는 환호성을 받으며 골인 지점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팀의 동료들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골인 지점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로데오를 운전하고 있는 라벤이었다.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으로 달리는 차량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관중들의 행동은 과거 자신이 골인 지점으로 향할 때와는 사뭇다른 것을 느꼈고, 그런 연후에야 자신의 앞에 어떠한 전뇌거도 지나가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승인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 라벤의 시야는 주책맞게 찾아온 눈물로 조금씩 가려지고 있었다. 이대로 골인지점으로 들어간다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료들을 만날 것이라 생각한 라벤은 눈물을 보이기는 싫다고 느끼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지난 시간동안 격었던 서러운 일들이 지금 이 순간 모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에게 전뇌거 경주는 공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보다는 그의 열정을 모두 담았던 큰 꿈이었고, 지금이 바로 그 꿈이 이루어질 순간인 만큼 진정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골인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라벤은 그나마 참고 있던 눈물을 모두 쏟아 버리기 시작하며 외쳤다. "내가 우승이야!" 결국 팀 라벤의 로데오는 누가 보더라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어쩌면 전뇌거들의 각축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를 관중들은 조용한 우승을 아쉬워 할 수도 있었겠으나, 로데오가 골인지점으로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에게는 그 여유로운 모습 마저도 긴장한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고, 골인 지점을 통과하고나자 너무나 떨었던 나머지 어깨까지 아파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어깨를 주무르고 있을 정신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관중 보다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터트려야 할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우승을 했어!" "하하핫! 작년까지 꼴찌를 하던 우리가 우승을 했다고!" 자신들의 로데오가 멈춰선것을 확인한 팀의 동료들은 그들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기쁜 모습으로 로데오를 향해 뛰어갔고, 라벤과의 감동의 포옹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로데오까지 달려온 클라렌과 팔러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라벤을 향해 축하의 한 마디를 던지려 할 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도저히 못봐줄 지경이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손가락질을 하면서 놀렸을 테지만,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온 이유로 라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던 클라렌과 팔러도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오는 전뇌거들의 한가운데서 우승팀이 통곡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렁이고 있었다. 관중들의 목소리를 들은 라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실태를 깨달으며 눈물과 콧물을 대충 닦아 내며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우승을 했는데도 울고 있으면 어떡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하겠어! 빨리 콧물이나 좀 닦으라고!" 밝은 표정으로 외치고 있는 라벤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말고 크게 웃은 클라렌은 그의 볼을 가리키며 외쳤다. "호홋! 네 볼에 길게 묻은 콧물이나 제대로 닦으시지? 네가 징징 짜면서 들어오니까 우리도 울었다! 사내녀석이 혼자 울고 있으면 꼴불견이잖아!" 팔러역시 통통한 볼살로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대충 쓸며 미소를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라벤을 끌어안으며 기쁨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녀석! 라벤! 네가 언젠간 해낼 줄 알았다니까!" "하핫! 나도 결혼을 해야하는데 네가 이렇게 껴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고!" "너도 켈트녀석 흉내를 내는거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팔러와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주변을 급히 둘러본 라벤은 클라렌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켈트는 어디있어? 함께 있었던 것 아니야?" 라벤의 말을 듣고서야 뮤스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클라렌은 한참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깜빡 하고 있엇는데, 켈트는 어디 좀 다녀온다고 그러고서 사라지더니 아직 안왔어." "승리의 주역이 어디간거지, 이 중요한 때에..."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 질 수 없었는데, 그들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한 수 많은 관중들이 몰려들더니 팀 라벤을 뜻하는 초록색의 옷을 입은 팀원들을 번쩍 들어올려 시청광장의 중심부에 있는 시상대를 향해 나르기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던 그들은 적잖케 당황하긴 했지만, 매년 우승자에게 해주던 축하의 행동임을 알 수 있었던 그들은 다시 한번 이것이 꿈이 아닌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같은 시간, 뮤스와 로비나드는 행사 요원들에 휩쌓여 시상대의 뒤쪽으로 와있었다. 뮤스의 손에는 순금으로 만든 트로피와 한 장의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연구원 임명증이 들려있었다. 이것들이 바로 우승자의 손에 쥐여줄 모든 것이었고, 이곳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이 두 가지를 받기위해 모든 정렬을 쏟아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뮤스가 손들고 있는 물건들을 내려다 보며 인간이 물질에 부여하는 가치에 대한 짧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로비나드의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뮤스원장님 께서는 제가 부른 후에 올라 오시면 되는 것입니다. 부탁을 들어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뮤스는 이제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다만 동료들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잘 풀리겠죠. 그럼 저 부터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뮤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인 로비나드는 뒤쪽에 설치되어있던 계단을 걸어올라가 시상대로 사라졌고, 혼자 남은 뮤스는 보이지도 않는 시상대 쪽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시청광장에는 로비나드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차분하던 목소리에 조금의 흥겨움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이곳에 모인 광중들의 호흥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인 듯 했다. -오늘 제 4회 전뇌거 경주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매년 그래왔던 것과 같이 새로운 우승팀이 나왔습니다. 그 팀은 여러분들이 보신대로 팀 라벤입니다. 여러분들께 팀 라벤을 소개시켜 드립니다!" 팀 라벤의 이름이 로비나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또 다시 시청광장은 끓어 오르고 있었는데, 관중들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관심도 가져주지 않던 팀을 연호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팀 라벤! 팀 라벤! 그리고 주변을 진정시킨 로비나드는 잠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또, 오늘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특별한 날입니다. 이 곳에 우승 팀을 시상하기 위해 대단한 분이 와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뮤스 드라켄, 저희 공학원의 설립자이며 현 원장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팀 라벤을 소개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술렁임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과 경외심이 동시에 섞인 미묘한 분위기였는데, 시상대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뮤스는 드디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시상대와 연결되어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선 뮤스는 가장 먼저 시상대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는 라벤과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그 뒤로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는데, 그 만큼 동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뮤스가 우승자에게 시상을 할 트로피와 연구원 임명증을 들고 시상대에 올라서자 관중들은 먼 발치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뒤돌아 서있던 동료들도 역시 천천히 몸을 돌리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공학원의 원장이 나오는 곳을 향했다. 뮤스의 생각대로 동료들의 시선이 뮤스의 얼굴에 닿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었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신의 눈을 부비기도 했다. 잠시 뮤스의 얼굴을 보며 서있던 라벤이 더듬거리믄 목소리로 물었다. "케..켈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동료들의 반응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뮤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그들의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잘 몰랐던 로비나드가 끼어들며 서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뮤스 원장님 이쪽은 잘 아시다 시피 올해의 우승팀인 팀 라벤입니다. 그리고 팀 라벤 여러분 이 분께서 공학원의 원장이신 뮤스 드라켄 이십니다." 로비나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팀 동료였던 켈트가 공학원의 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팀 라벤의 동료들은 지금 이순간 지난 일들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기 시작했는데 불과 반나절 만에 전뇌거를 모두 조립하고,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 동력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개량한 사실들을 떠올려본 팀의 동료들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벤은 잠시 주변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뮤스를 향해 말했다. "켈트... 아니 이제 뮤스 원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껄끄럽기만한 라벤의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들을 이해 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 말좀 들어봐 라벤, 내가 너희들을 도와 준것은 동정 따위가 아니었어 그때..." "그런 변명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이건 우리들의 우승이 아니라 너의 우승이다." 뮤스의 말을 허리를 자르고서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라벤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들을 향해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큰 결정이라도 하듯 숨을 들이쉬었다. 시상대에 준비되어있던 확성기를 잡은 라벤을 잠시 동료들의 표정을 살핀 후에 엄청난 수의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팀 라벤의 리더인 라벤입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도 모르는 관중들은 변함없이 열렬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라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의 성원에 미안한 말이지만, 저희는 팀 라벤은 이번 우승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벤의 갑작스러운 우승포기 발표는 관중들로 하여금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관중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어떠한 해명을 바라고 있었지만 라벤은 자신을 향해 모아지고있던 시선들을 외면한 채 동료들이 서있는 곳으로 걸어와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잠시나마 우승의 기분을 맛보게 해줘서 정말 고맙군. 그리고 우리는 네게 화가난 것도 아니고, 어쩌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우승을 포기한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우리가 원하던 것이 아니야. 비록 꼴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경주에 참여하고 싶었지 이런 방식으로까지 우승을 하고 싶던것은 아니었어." 어깨를 으쓱거리며 동료들을 바라본 라벤은 뮤스를 향해 가쁜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후훗! 비록 우승은 포기했지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공학원의 원장과 한동안 같은 팀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만족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우승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내려갈께." 레벤과 그의 동료들은 축처진 뒷모습을 뮤스에게 보이며 시상대에서 쓸쓸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쓰린 마음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이대로 그들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시상대의 앞쪽으로 걸어나가 확성기를 잡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무슨 일인가하는 생각에 뮤스의 얼굴로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고, 뮤스는 팀 라벤의 동료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팀 라벤의 우승포기에 의아해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갑자기 뮤스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시청광장에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시상대에서 내려가고 있던 동료들은 몸을 돌려 뮤스를 바라보았고, 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제가 대신해서 일의 경위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실 제 신분을 속인 채 팀 라벤의 동료가 되어 그들의 전뇌거를 개조해 주었습니다. 지금 뮤스의 이야기는 그리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데, 뮤스가 직접 팀 라벤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주최측에서 자신들의 부정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뒤로한 채 뮤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선 여러분들은 제 이야기를 듣기 전에 팀 라벤에 대서 들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들은 15개의 참가 팀중 유일하게 후원자가 없는 팀이었고, 가장 약체로 평가되었던 팀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밤에는 잠을 쪼개가며 전뇌거 경주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뮤스의 말을 듣고 있던 관중들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는지 측은한 눈길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팀 라벤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간 그들과 생활을 하며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동력기 하나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열정과 도전정신 만으로 경주에 참여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큰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팀 라벤에게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 팀 라벤의 동료가 되었고, 이번에 쓰인 로데오 기종의 동력기만을 수리해 준것입니다. 물론 그 동력기의 성능 역시 여타 참가팀의 동력기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맹세컨데 그 외의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지난날 팀 라벤에서 있었던 뒷이야기 듣고있던 관중들은 뮤스의 행위에 대해서 수긍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제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인도적인 행동으로 인식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고자 했던 말을 대충 끝마칠 수있었던 뮤스는 아직도 얼떨떨해 하고 있는 팀 라벤의 동료들을 가리키며 관중들을 향해 호소했다. -말하자면 팀 라벤은 기본의 조건을 겨우 충족시킨 로데오를 자신들의 실력으로 개조하여 당당하게 우승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팀 라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우승의 이유를 제게 돌리며 우승포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이 우승자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뮤스의 질문이 던져진 순간 환호성으로 뒤덮여있던 시청광장은 거짓말 처럼 조용해 져있었다. 팀 라벤의 동료들은 돌연한 분위기에 관중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확성기를 잡고 있던 뮤스도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짓말 같이 시청광장을 가득 매우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팀 라벤! 팀 라벤! 팀 라베! 이 자리에 모인 관중들은 결국 팀 라벤에게 우승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라벤과 팔러, 클라렌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관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는건가?" "아무래도 우리가 우승 받아 들여도 된다는 뜻 같은데..." "하..하... 분명 이건 꿈이겠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던 라벤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것을 느끼며 고갤를 돌렸다. 그곳에는 뮤스가 턱짓을 하며 시상대로 오르라는 신호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의 얼굴을 살핀 팀 라벤의 동료들은 시상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시상대에 당당히 서서 관중들을 바라보자 시청광장을 가득매운 관중들은 모두 그들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펴보였다. 이제 안도할 수 있었던 뮤스는 원래 라벤에게 건네주려했던 트로피와 연구원 임명증을 던지듯 안겨주며 말했다. "빨리 받으라고. 꼴찌 했을 때는 전뇌거 탓을 하더니 우승을 하고 나니까 내 탓을 하는거야? 이번 경주는 틀림없이 너희들의 실력으로 우승한 것이고 관중들도 너희들의 우승을 인정했으니까 더 이상은 딴소리 하지 말라고!" 팀 라벤의 동료들은 더 이상 뮤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어깨를 두들긴 뮤스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연구원 임명증을 받았으니 너희들도 공학원 식구가 된거군. 이젠 너희들이 나의 팀에 들어온것이나 마찬가지니 이번에도 잘 해보자고. 팀 라벤이 해냈던 것 처럼 말이야!" 그의 말을 들고있던 라벤은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한마디했다. "훗! 그래도 너한테 높임말을 쓸수는 없으니까 알아서해." 레벤의 옆에서 훌쩍이고 있던 클라렌 역시 뮤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공학원에 가면 꼭 켈트님과 인사시켜 주는거 잊지말고." 마지막으로 일이야 어찌 되었건 결국 우승을 해서 기분이 좋았던 팔러는 눈물이나 훌쩍이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거구를 날리며 외쳤다. "하하핫! 다들 이 무슨 추한 짓들이야! 지금은 우승을 축하해야 할 때인데 그런 소리나 하고 있다니!" "어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그의 육체 공격에 당해야만 동료들은 결국 균형을 잃으며 볼성사납게 넘어졌고, 그들에게 환호를 보내던 관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상대에 엉켜 넘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시원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팀 라벤의 동료들이 우승을 기뻐하고 있을 때, 먼 발치에서 시상대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 천체만리경을 통해시상대의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하게 보고있는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라이델베르크에 있어야 할, 크라이츠와 켈트, 그리고 카타리나였다. 천체만리경을 눈에서 떼언낸 크라이츠는 팔짱을끼며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홋! 뮤스 녀석 오랜만에 보니 제법 씩씩해 진것 같군요." 그녀의 옆에서서 천체만리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켈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껄껄! 여전히 힘은 남아 도는 것 같군요. 저 녀석을 보니 괜히 눈물이 팽도는군. 쩝... 카타리나는 어때?" 켈트의 물음을 들은 카타리나는 어떤 대답 대신 촉촉한 눈물을 머금으며 환한 미소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는데, 지난 3년간 가슴에 지녀왔던 아픔과 걱정을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있는 듯 했다. 비화 전뇌거 경주는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기대에 비해 짧은 시간에 끝이 났지만, 그들의 흥분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전뇌거 경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이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실 것이고, 구수한 버터 삼아 식사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펑! 펑! 펑! 푸른 하늘에는 축포가 터지며 색색의 연기를 피워냈는데, 이는 우승자에 대한 축하의 의미인 동시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루이센 시내의 술집과 음식점에는 이제 곧 밀려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저장고에 쌓아 놓았던 술통과 음식재료들을 주방으로 나르기 시작했고, 시청의 광장과 길거리를 가득 매웠던 사람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음식점을 선택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고민을 해야만 했다. 또, 혼잡한 시내를 정돈해야 할 의무를 가진 공직자들 역시 축제에 들뜬 기분과 자신이 맡은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최소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나 신분을 떠나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제 나름대로 축제의 밤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라벤과 동료들은 단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축하인사에 응해주고 있었다. "자네들 정말 대단하군! 아무리 뮤스 원장이 손을 봐줬다지만, 저런 고물 전뇌거로 우승을 하다니 다시 봐야겠어!" "이건 기적일세! 이번 경주에서도 자네들이 마지막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돈을 걸긴 했지만, 멋진 경주였으니 돈을 잃어도 나는 만족한다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외의 선전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팀 라벤의 일원들 역시 오늘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거부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여기저기에서 내미는 손을 정신 없이 마주잡아 주고 있던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 개의 손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뮤스 역시 팀 라벤의 일원으로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팀 라벤의 일원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공학원의 원장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자 갈망했고, 자연스럽게 밀고 밀리는 혼잡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축하를 해주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울상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애써 미소로 대해주고 있었다. "뮤스 원장님 악수 한번만 해주세요!" "이렇게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손 한번 잡아보면 안될까요?" 사람들은 부탁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행동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뮤스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서로 그의 손을 잡아끌기 바빴는데, 조금 과격한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도 않았기에 뮤스는 난감해 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과도 인사를 해야하니 제 손 좀 놔주시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을한다고 해서 그의 처지를 이해해줄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힘으로 손을 빼내며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손을 끌어 당겼고, 뮤스는 또 다시 악순환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무슨 일인지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한 뮤스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검게 그을리지 않은 하얀 손에 붙들려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부드러운 그 느낌이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올린 뮤스는 여름의 아지랑이 같은 여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모를 그녀의 모습을... "카..카타리나?" 뮤스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있는 지금도 스스로를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카타리나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훗! 아무래도 내가 무리를 했었던 모양이군. 헛것이 다 보이고 말야." 그러나 자신을 향해 외치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들 사이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뮤스. 건강해 보이니 정말 다행이야..." "너... 정말 카타리나 너 맞는 거야?"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 멍한 표정은 여전하구나? 그럼 내가 카타리나가 아니면 누구겠니?" 웃으며 말을 던진 카타리나는 눈앞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함을 느꼈다. 뮤스의 앞에 서기 훨씬 전부터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몇번이나 다짐했었지만, 웃음 속에 눈물이 섞이는 것은 어쩔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얼굴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 위해 소매를 들어올릴 때에는 이미 뮤스의 손이 먼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정말 카타리나구나..." 카타리나 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뮤스의 눈은 수많은 말을 담고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그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단지 그녀의 몸을 끌어 당겨 품에 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말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던 이유에서였다. 포옹을 하고 있는 뮤스와 카타리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내막을 알지 못한채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모의 여성과 공학원 원장의 포옹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자신들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흐트릴 때가 아니라는것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 카타리나의 어깨 넘어로 눈에 익은 인물들이 뮤스의 시야에 잡혔다. 늘씬한 몸매에 붉은 드레스가 유난히 잘어울리는 여인과 그녀의 허리를 간신히 넘기는 키작은 드워프, 바로 크라이츠와 켈트의 모습이었다. 뮤스를 향해 3년전 헤어지던 날처럼 짖굿게 미소지어 보인 켈트는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휘유~! 이녀석 꽤나 대담해 졌는걸?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껴안아버리다니 카타리나는 이제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긴 틀렸군!" 뮤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역시 켈트의 말을 들었는지 얼굴을 붉힌 그녀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뮤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카타리나에게서 시선을 뗀 뮤스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밝게 웃으며 크라이츠와 켈트 가까이로 다가갔다. "켈트 아저씨! 정말 변한게 하나도 없군요!" "껄껄!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가 얼마나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냐?" 손을 내저으며 너털 웃음을 터트린 켈트는 팔을 넓게펴 뮤스를 안아주었다. "아무튼 잘 돌아왔다. 제법 씩씩해 져보이는게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었군!" 뮤스의 가슴아래 까지 밖에 닿지 않는 켈트였기에 오히려 뮤스가 그를 끌어안은 모양이 되었지만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뮤스의 눈길이 닿은 곳은 크라이츠의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그저 담담한 미소만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잠시동안 외출을 하고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뮤스의 거칠어진 손을 살며시 잡은 크라이츠는 이상스러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돌아왔구나. 그래 힘들지는 않았니?" 과거를 회상해 보기라도 하듯이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네 누님. 비록 힘들긴 했지만 이 세상에 제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닿게해준 중요한 시간들이었죠." "잘됐구나. 그럼 그걸로 충분한 것이지."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크라이츠는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여기는 긴 이야기를 하기에 그리 적당한 곳이 아는것 같은데 이만 자리를 옮길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아직까지도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없에 헤매고 있는 팀 라벤의 동료들을 돌아 보았다. 뮤스는 그들을 향해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동료들에게 말좀 하고 뒤따라 가도록 하죠." "흠... 그들도 이제 공학원의 식구가 될것인데 함께 자리를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어떻겠니?" 어깨를 으슥거린 뮤스는 동료들이 뛸듯이 기뻐할 모습이 눈앞에 선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후훗! 녀석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그럼 우리는 공학원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동료들과 함께 오도록 하거라. 그리고 서로 할 말이 많을테니 카타리나도 뮤스와 함께오도록 하렴. 그 동안 카타리나를 보기가 얼마나 안스러웠었는지..." 말끝을 흐린 크라이츠는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돌렸고 켈트는 뮤스를 향해 손을 휘휘 흔들어 보인 후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크라이츠와 켈트의 모습이 인파에 묻히게 되자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을 끌며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그들과의 거리는 상당했고, 그 사이를 가득 메우고있는 사람들로 인해 걸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카타리나가 다치지 않을까 염려했기에 최대한 그녀에게 붙어 움직이는 중이었다.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자 갖가지 색깔을 지닌 사람들의 머리 넘어로 라벤과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만히 있더라도 땀으로 옷이 젖을만큼 더운 날씨에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모두 지친기색이 역력했고, 특히 팔러는 더위를 많이 타는지 뒷덜미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축축히 젖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쳐내린 팔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라벤을 향해 외쳤다. "이봐 라벤! 이렇게 더있다가는 공학원에 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 어떻게 좀 해보라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힘겹게 몸을 돌린 라벤 역시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있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며 근처에있던 클라렌의 팔을 끌어 당기며 물었다. "클라렌 이제 그만하고 빠져 나가자! 그리고 켈트! 아...아니지... 뮤스는 어디에 있는거야?"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수습하고있던 클라렌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뮤스를 찾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카타리나와 함께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다가오고 있는 뮤스를 가리켰다. "저기야 저기! 아무래도 뮤스가 있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그제야 뮤스를 포착한 라벤은 손을 내저으며 나가란 신호를 했고, 팔러와 클라렌의 옷을 움켜잡고서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루이센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라벤은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유난히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그는 루이센시의 골목지도를 모두 머리에 담고 있었는데, 이를 적절히 이용해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을 하나씩 따돌리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피곤을 잔뜩 머금은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던 팔러는 좁다란 골목의 모서리를 돌아서며 무릎을 짚고 주저 앉았다. "헥헥! 이제 그만 뛰어도 될것 같은데? 따라 오는 사람도 없다고!" 그의 앞에서 달리던 라벤과 클라렌, 그리고 뮤스와 카타리나도 뒤를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벌떼 처럼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 없음을 확인한 라벤은 셔츠의 목단추를 풀러내며 가쁜숨을 내쉬었다. "휘유... 오히려 전뇌거경주는 우승한 다음에 살아 남는게 더 중요한것 같군. 정말이지 두번은 못할 짓 같아." 클라렌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하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풋! 우리가 우승할 준비가 안된 상태여서 그럴지도 모르지 뭐. 미리 알았더라면 손흔드는 연습이라도 밤새 했을 텐데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들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를 터트렸고, 이제야 자신들이 우승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여유가 생긴듯 했다. 동료들의 웃고있는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던 라벤은 문득 카타리나의 얼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멈추었다. "어라? 그런데 이 아가씨는 누구지? 어째 낯이 익는데?" 라벤은 대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하... 정말 빨리도 물어 보는군. 이쪽은 라이델베르크에서 온 카타리나라고해." 순간 카타리나라는 이름을 들은 팀 라벤의 동료들은 자신의 눈을 부비며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고,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동시에 외쳤다. "전뇌거 연구부 수석공학자!" 그들의 반응에 뮤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고, 카타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라벤과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늦었네요. 공학원의 카타리나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더욱 들뜬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대한 영문을 모르던 뮤스는 라벤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왜 그렇게들 놀라는거야?" 라벤은 초롱하게 빛나는 눈으로 카타리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양은 공학원 지망생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지. 나이 22세, 라이델베르크 램브리겐 대학교 연금술학과 차석졸업. 전뇌거 연구부의 수석공학자, 로데오의 후속기종인 루펜트의 설계 담당." 그의 말을 팔러가 이었다. "특히 빼어난 미모와 착한 심성을 가진데다가, 애인이 없다는 소식이 퍼지자 상당한 수의 남성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란 말이지."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하고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타리나의 얼굴을 살폈고, 뮤스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는 어떨지 몰라도 제일 마지막의 이야기는 확실히 사실과 다르군요. 저도 엄연히 뮤스 드라켄이라는 이름의 애인이 있으니까요." "네에?!" 카타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짤막한 비명성을 지른 라벤과 팔러는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라벤은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뮤스에게 물었다. "지금 카타리나 양이 농담하는거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팔러의 반응 또한 가관이었다. "뮤스 너! 아무래도 밤길을 조심해야 할거야. 이 사실이 밝혀 졌다간 카타리나 양의 추종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 한껏 시무룩해진 라벤과 팔러의 뒤에 서있던 클라렌이 그들의 뒷덜미를 잡으며 말했다. "쯔쯧... 이 한심한 사내들아 현실을 받아 들이라고. 이렇게 아쉬워 한다고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잖아? 얼굴도 못알아본 주제에..." 클라렌의 말에도 얼굴이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자 화제를 돌려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아! 잠시 잊었는데, 오늘 공학원에서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시더군." 역시 먹을 것에 민감한 팔러가 먼저 반응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누가?" "너희들도 아마 알고 있을거야. 크라이츠 누님과 켈트 아저씨." 뮤스의 말이 떨어지자 라벤과 팔러의 얼굴에서 한순간 모든 실망이 사라졌고, 그에 합세해 클라렌까지 이성을 잃고서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럼 켈트님께서도 이곳에 계신다는 말이니? 어머 이게 웬일이야!" "크라이츠님과 켈트님이라면 이제 우리의 상관이 될테니 잘보여야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와야겠군!" "몇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 뮤스는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하... 아마 6시까지 공학원으로 오면..." "6시라... 그럼 나중에 보자고! 얘들아 가자!" 뭐가 그렇게 바쁜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팀라벤의 동료들은 손을 흔들며 골목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는데, 방금전만 해도 금새 쓰러질 것 같이 지쳐있던 모습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뮤스의 옆에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타리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푸훗! 정말 엉뚱한 사람들인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뮤스가 내려다 보자 카타리나는 그의 흐트러진 옷깃을 여며주며 설명했다. "생각해보렴. 공학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뮤스인데, 정작 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다가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휘둥그레 지잖아. 저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이 없는가봐." 카타리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팀 라벤의 동료들이 사라진 곳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도 좋잖아? 딱딱한 상하 관계보다는 바로 옆에서 허울없이 지내는 것이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는데 더욱 효과적이니까. 그럼 우리도 공학원으로 돌아갈까?" 뮤스의 말에 미소로 답한 카타리나는 그의 팔에 매달리듯이 팔짱을 꼈고, 두 남녀는 지난 날동안 마음속에 쌓아 놓았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내며 공학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질 무렵이 되자 붉은 햇빛이 전뇌거안으로 스며들었다. 운이 나쁘게도 해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크라이츠는 부채를 펼쳐 부신 눈을 가렸지만, 레이스로 만들어진 부채는 효율적으로 햇빛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었다. 부채를 통과한 햇빛이 크라이츠의 얼굴에 그림자의 문양을 만들어내자 나직한 한숨을 내쉰 크라이츠는 부채를 접고서 고개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크라이츠의 맞은편에 앉아 거리의 풍경을 보고있던 켈트는 눈을 엷게 뜨며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보고있었는데, 원래 축제를 좋아하는 드워프족으로서 전뇌거에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있는것이 성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뮤스의 귀환을 환영하는 날인만큼 자신의 기분을 억누를 수 밖에없었고,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뛰쳐나가고자 하는 욕구를 힘겹게 뿌리친 켈트는 창에서 고개를 돌리며 크라이츠에게 물었다. "저 크라이츠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를 들은 크라이츠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대답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 "흠. 대답해 주시기에 곤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뮤스가 누명으로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줄 것인가 하는것이죠." 그제야 창으로 부터 고개를 돌린 크라이츠는 의미깊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홋! 제가 굳이 말해주지 않더라도 뮤스는 이미 자신이 누명을 썼었다는 사실쯤은 눈치를 챘을거에요. 이제와서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뮤스를 애써 추방시킨 보람이 없겠죠. 그 일때문에 내가 얼마나 바빴었는데..." 크라이츠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뮤스가 이미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미심적은 켈트의 말을 듣고있던 크라이츠는 부채질을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럼 이렇게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죠. 인간들이 스스로 지혜를 쌓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게 된답니다. 이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종족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죠. 하지만 인간과 그 밖의 유사인종은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명의 차이죠. 켈트씨는 언제 처음 드워프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게 되었나요?" 돌연한 질문에 볼을 긁적이며 생각을 해보던 켈트는 확실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대략 50살 전후였던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켈트씨의 말대로 유사인종인 드워프나 엘프등은 대게 50세가 넘어서야 살아가는데 충분한 지혜를 갖추게 되고, 혼자서 살아 갈 수 있는 성인임을 인정받게 됩니다. 반면 인간의 나이로 50세라 함은 삶의 지혜는 갖추었으나 인생의 종반부에 해당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젊은 인간들은 타 유사종족에 비해 대체적으로 우둔하게 보이는 것이죠." 잠시 말을 끊었던 크라이츠는 켈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서도 유사인종 중 가장 번영을 누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바로 유사인종 중 유일하게 스승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죠. 인간들은 이 스승을 통해 짧은 기간동안 충분한 지혜를 습득하게 되었는데, 그런 이유로 타 유사인종이 5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한 세대의 성인층을 키워내는 동안 인간들은 같은 시간에 두 세대의 성인층을 키워 내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인간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켈트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 지고 있었다. "과연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뮤스에게 혹시 스승이라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입니까?" 이제야 켈트에게 대충 의사 전달이 되었다고 생각한 크라이츠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그라프 라듀아보, 인간들 사이에서는 대현자라 불리우는 인물이랍니다. 그를 미개척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느라 화석속에서 잠들어있던 카일락스까지 부화시켜야 했지만 보기 드물게 아는것이 많은 인간이니 뮤스의 스승으로써는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었죠." "대현자 라듀아보..." 켈트 역시 익히알고있는 이름이었다.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인물이었고,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을 모를만큼 소식에 어둡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렴풋이나마 그간 있었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던 켈트는 나직한 탄성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흠... 그렇다면 뮤스는 추방을 당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크라이츠님의 계획 아래에서 움직였던 것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부채로 입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뮤스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도록 하죠. 어차피 알아 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이츠님." 켈트의 확답을 들은 크라이츠는 눈을 감으며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었고, 복잡한 심정이 바탕에 깔린 켈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지혜의 극이라 불리우는 대현자를 마음대로 조정한 크라이츠가 두려움의 대상을 넘어선 경외의 대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같은시간, 뮤스와 카타리나는 겔브호수 주변으로 만들어져있는 좁다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고운 모래 위에 둥근 자갈을 깔아 만든 이 산책로에는 대부분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자갈이 전해주는 시원한 느낌을 즐기는 듯 했다. 조잘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인 카타리나는 뮤스를 놓치기라도 할까 무서운지 그의 팔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고, 뮤스는 그녀의 손을 감싸쥐며 카타리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중 대부분은 뮤스가 떠나있는 동안 공학원에 있었던 일들이었는데, 카타리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뮤스가 공학원에 적응을 하기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켈트 아저씨는 매일 같이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니까. 헤밀턴이 켈트 아저씨의 수비범위를 넘어서 버렸으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상상을 해보던 뮤스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전혀 감이 잡히지가 않는걸? 폴린보다 더 난폭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학교생활을 할때에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는데, 역시 공학원에서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지내다 보니 폴린도 손을 들어버릴 정도라는 걸 알게 됐지. 덕분에 히안은 더욱 폴린이 좋아졌나봐. 요즘은 걔들은 티격거리지도 않아."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 뮤스는 피식 웃었다. "하핫! 헤밀턴 덕분에 상대적으로 폴린이 유순해 보이는 것이겠구나?" "풋...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헤밀턴과 함께 있다보면 밝은 성격에 동화되서 어느새 어두운 기분들이 사라지곤 했어.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걸?" 가볍게 이야기를 이끌고있는 카타리나와 눈빛이 마주친 뮤스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미안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일로인해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 할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자네! 여기있었군!" 뮤스와 카타리나는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배가 제법 나온 중년인과 그의 목에 올라탄 소년이 있었는데, 한눈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본 뮤스는 반가운 표정과 난감한 표정을 동시에 짖고있었다. "아! 길버트씨였군요?" 자신을 알아보자 길버트는 털털한 웃음을 터트렸고, 그의 아들은 뮤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허헛! 자네 아직도 떠나지 않았단 말인가?" 길버트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아직 뮤스의 신분을 모르는 듯 했고, 자신이 신분을 속인 것에 대해 섭섭해 할지도 몰랐기에 뮤스 역시 신분을 애써 밝힐 생각은 없었다. "훗!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이곳에서 할 일이 생겼거든요." "하하! 그렇게 변명할 거리는 아니지 않나? 자네도 전뇌거경주를 구경하고 싶었을 테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말을 하다말고 카타리나에게 시선이 멈춘 길버트는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저 아가씨는 누군가? 혹시 오늘 건진 아가씨? 하긴 자네 나이때는 여러 여자를 경험해 보는것도 좋지!" 길버트는 스스로 귓속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지만, 사실 카타리나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만큼의 목소리였기에 뮤스는 적지않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쪽은..." 그러나 길버트는 이미 다 안다는 투로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흐흣! 거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렇게 나오자 뮤스는 그에게 설명을 해봐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손을 내저으며 단념했다. 길버트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 전뇌거경주는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비록 멀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젊은이까지 나타나다니 이번 경주를 보러오지 않았다면 평생 후회했을 것일세! 게다가 팀 라벤의 승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구!" 무등을 타고있는 아들의 손을 높이 치켜든 길버트는 자신이 더욱 신이난 얼굴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을 멈춘 길버트는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자네도 알고있듯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들 녀석의 뒷바라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 하지만 오늘 팀 라벤의 우승을 보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지! 언젠간 로페드로 이 녀석도 열심히 해서 팀 라벤의 팀원들 처럼 당당하게 공학원에 들어갈 것이라고 나와 약속을 했다네!" 부자의 밝은 얼굴을 보며 뮤스는 미소지었다. "잘되었군요. 집에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뮤스의 물음에 호탕하게 떠들던 길버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흠 사실 이곳에서 축제 분위기를 더 즐기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지만, 우리는 오늘 밤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네. 집사람을 혼자 두고 와서 사실 걱정이 되거든." "아... 그러시군요.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길버트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네. 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거든. 아가씨와 둘이서 좋은 시간을 가지게나. 허헛! 그럼 자네에게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겠네." "네. 길버트씨도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뮤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길버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고, 그의 아들인 로페드로 역시 손을 흔들어 뮤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뮤스와 점점 멀어지자 길버트는 무등을 타고있는 아들의 다리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로페드로 뮤스 형의 얼굴을 잘 기억했지?" 길버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던 로페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런데 왜요?" "후훗! 뮤스 형이 바로 공학원의 원장님이란다. 네가 들어가고 싶어하는 공학원을 만든 사람이지." "네?! 정말요?" 로페드로는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돌려 뮤스가 잇는 곳을 바라보았고, 귓가로 길버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도 꼭 저 뮤스형 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높은 위치에 있더라도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따뜻한 사람으로..." 로페드로는 뮤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센 공학원으로 돌아온 뮤스는 연회복으로 갈아입으라는 크라이츠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위에 놓여진 상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뮤스의 귀환을 축하하고, 전뇌거 경주를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곧 열리기 때문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던 뮤스는 그리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이도 아닌 크라이츠의 말이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크라이츠의 존재는 뮤스에게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었다. 진한 밤색의 목재 상자 안에는 한 벌의 연회복과 그에 어울리는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라이츠가 뮤스의 취향을 잘 알 고 있었기에 크게 화려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목을 조여올 것같은 흰색의 셔츠를 꺼내든 뮤스는 작은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복잡하기만한 연회복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저것 대충 끼워입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뮤스는 옷매무새를 하나씩 정리해 보면서 마무리를 했다. "이렇게 하면 된건가? 재단선 하나까지 맞춰야 하다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훨씬 좋을뻔 했군." 쓴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하던 뮤스의 눈은 치렁한 머리에 닿아있었다. 손으로 몇번 쓰다듬어 보아도 정리가 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둘러본 뮤스는 상자를 포장했었던 끈을 주워들어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마친 그는 가방을 어께에 매며 방을 나섰다. 공학원의 전시관은 연회장으로 변해있었다. 전시품들을 올려놓았던 선반들은 어느새 연회장의 테이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고, 전시품들을 비춰주던 천정의 조명들은 음식들을 비추며 맛깔스러운 색깔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는 크라이츠와 카타리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음식이 마련되어있는 테이블 주변에서는 켈트가 자신의 식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그다지 배가 고픔을 느끼지 못했던 뮤스는 대화를 나누고있는 크라이츠에게 다가갔다. 마침 뮤스를 발견한 크라이츠는 잠시 양해를 구하며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고, 뮤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원장님께서 나오시는군요. 여러분들께 공학원의 원장님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크라이츠가 말을 마치자 마자 그녀를 둘러싸고있던 사람들은 한쪽을 터주며 뮤스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차피 연회란 사람들 간의 사교를 위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뮤스는 싫은 기색을 감춘채 가볍게 자기 소개를 했다.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희 공학원에 큰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가졌으면 합니다." 바른 자세와 상대를 함께 존중하는 그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초대 되어온 사람들은 호감어린 표정을 지으며 각자 자신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루이센의 시장인 바르커드 폰 아빌란 이라고 합니다. 추방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구드라엔 폰 뷰라티어 남작이라고 합니다. 오늘 전뇌거경주를 감명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행사가 되었으면 하는군요." 한명, 한명의 소개를 들을 때 마다 뮤스는 그라프에게서 들었던 제국의 신분계층에 대해 떠올렸고, 덕분에 그가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또 무엇을 하는 인물인지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 뮤스를 바라보고있던 크라이츠는 능숙하게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처하는 뮤스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날렸고, 다시 한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만족해 하고 있었다. 뮤스는 루이센시의 귀족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귀족의 가치는 이름만 남았을 뿐이지만, 능력적으로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정을 받는 이들이었기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뮤스의 폭넓은 지식에 감탄을 해야만 했는데 예술, 종교, 역사에서 부터 경제나 정치까지 그 한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글쎄요... 그 당시 대륙 전체를 통일했었던 바르카두 제국은 식민지 개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바르카두 제국이라 생각했을 뿐만아니라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대륙에서 생산되는 자원들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대부분의 오이랍대륙 국가들이 봉건제도에서 자치제도로 옮겨감으로 인해 국민들의 인권향상, 인구증가, 생활수준 향상 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에 따라 각 국가는 필요한 자원들이 늘어만 갔고, 오이랍 대륙에서의 생산되는 물량으로는 한계를 느끼게 된것이죠. 그렇기에 대륙의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음으로서 본토의 안정을 꾀하고, 밖으로는 식민지 개척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뮤스가 자신의 말을 정리하려 할 때, 입구에서는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는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세명의 남녀가 고용인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라벤과 동료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초청장 문제라는 것을 알게된 뮤스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옮겼다. 동료들에게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초청장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아니! 글쎄 안된다니까요! 댁들이 팀 라벤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초청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안으로 들여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뮤스를 불러 달란 말입니다! 우리를 여기로 초청한 사람이 바로 뮤스니까요!" "원장님은 지금 귀빈 분들 접대에 바쁘십니다!" 고집스럽게 들여보내주지 않는 안내원의 행동에 짜증을 느낀 클라렌은 팔을 걷어올리며 연회장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뮤스!!! 뮤스 나와라!!!" 그녀의 외침 덕분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은 입구쪽으로 돌아갔고, 한발 늦게 도착한 뮤스는 안내원을 붙들며 말했다. "이들은 내가 초청한 것이 맞으니 들여 보내도 좋네." 원장인 그가 직접 나와 사실을 밝히자 안내원은 적지않게 당황한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을 뿐이죠. 이 친구들은 제가 안내할테니, 하던 일을 계속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짤막하게 대답한 안내원은 라벤 일행에게 가볍게 사과의 인사를 하며 다시 입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랑이를 하느라 구겨진 옷을 매만진 라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이렇게 빡빡한거냐? 까짓 초청장이 뭐라고..." 팔러가 그의 말을 도왔다. "우리 동네에서 파티를 열면 초청장이 없어도 얼마든지 들러서 즐기고 갈 수 있다구!" 동료들의 추궁에 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정말 미안해. 이것도 사업에 관련된 행사인 만큼 나는 전혀 상관을 하지 않거든." 그들이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대충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뮤스는 안으로 안내를 했다. 안으로 들어온 라벤과 동료들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분위기에 적응이 안되는지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농 속에 잘 간직해 놓았던 구식의 연회용 슈트를 꺼내 입을 때만해도 신이 났었던 기분은 어느새 연회장의 분위기에 짖눌려 버린 것이었다. "우... 이런게 바로 상류 사회라는 것인가? 이 가구들만 해도 북부의 고급 목제에 일류 장인들이 만든것들이군..." "저기있는 고기들도 보통이 아니야. 지방질과 연한 살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입에 들어가면 기가막힌 육질을 느끼게 되지." "게다가 빵들은 모두 듀들란 식이군. 통밀을 그대로 갈아서 빵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실력이 없는 사람이 만들면 도저히 먹지도 못하게 된는데, 저 빵들은 정말 군침돌게 생겼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직업대로 관찰의 초점을 맞추었고,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던 뮤스는 동료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그렇게 주눅들건 없다구. 저것들이 아무리 고급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을 만족하도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오히려 길거리싸구려 보다 못한것이나 다름없어." 뮤스의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조금 긴장을 풀어낸 동료들은 그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에 초청된 상류의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갖가지의 요리를 즐기며 그럭저럭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도이첸 제국 유사이래 최고라 할만큼 활기차게 변해있었고, 그 중심에는 잔뜩 취한 라벤과 동료들이 있었다. 취기가 오르자 기분이 무르익은 클라렌이 테이블 위로 올라 노래를 뽑기 시작한것이 시발점이 되었는데, 축제의 날인 만큼 독한 술을 준비되어 있었고, 이를 마시고 쉽게 취한 귀족들과 상류층의 인사들 역시 체면에 아랑곳 하지 않은채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었다. 카타리나와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즐기던 뮤스는 연회장에서의 버릇인지 답답함을 느꼈고, 카타리나와 함께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발코니에 기댄 뮤스와 카타리나는 화려하게 불이 밝혀진 거리를 둘러보았다. 연회장 뿐만 아니라 거리역시 비슷한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는데,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뮤스와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을 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며 독백 처럼 입을 열었다. "후아! 이제야 돌아온게 실감이 나는군. 그 동안 사람들의 떠들석한 모습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또, 밤을 밝히는 가로등도 그리웠었고, 먼 지평선을 가리며 서있는 건물들도 그리웠지. 후훗!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웠었어."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카타리나는 그간의 일들이 다시 떠오르는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지난 이야기일 뿐이야. 이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헤어지지 않을거야.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테니까."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리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이제는 헤어지지 말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둘의 사이에 때아닌 무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하자 뮤스는 분위기라도 바꿀겸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전뇌거경주가 있었던 것도 4년전이었군. 후훗! 그때만 해도 다들 처음 운전해보는 전뇌거에 굉장히 신기해 했었는데, 지금은 직접 전뇌거를 제작하고 있다니, 정말 세월 빠른걸?" 카타리나 역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지 밝은 표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풋! 정말 네가 나타나기 전만해도 모두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지. 만약에 네가 우리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각자 흩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을 거야." "후훗 그런가?" "그럼! 우리 모두 많이 변했지. 그런데 변하지 않은건 너 밖에 없어! 예나 지금이나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그 때도 전뇌거 사고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드베인 숲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절 하는 줄 알았다고!" 말을하고있는 그녀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듯 얼굴이 천천히 상기되고 있었다. 뮤스는 얼굴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주며 말했다. "그래서 약속하는거야. 이제 다시는 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사랑해 카타리나." "그 약속 꼭 지켜주길..." 말끝을 흐린 카타리나는 뮤스의 품속으로 뛰어들었고, 뮤스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감흥이 사라지기도 전에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역시 젊은 남녀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구나."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뮤스와 카타리나는 큰 잘못을 저지르다가 탄로난 아이마냥 깜짝 놀라며 멀찌감치 떨어졌다. 순진한 행동에 피식 웃은 크라이츠는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쯔쯧... 젊은 녀석들이 고작 포옹하다가 들킨걸 가지고 그렇게 수줍어 하긴. 아무튼 너희들은 너무 순진한게 큰 탈이라니까. 뮤스 너도 조금더 사내 다워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신색을 바로 잡은 뮤스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흠... 사내다운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어머나! 왜 상관이 없니? 진정한 사내라면 좋아하는 감정 정도는 누구 앞에서든 당당하게 드러내야 하는거란다! 호호홋!" 예전의 뮤스였다면 이쯤에서 한숨을 내쉬며 더이상 대화 하기를 포기했겠지만, 지난 3년은 그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실천하기에 앞서 타인에 대한 예의에 대해서는..." 뮤스의 이야기가 길어질듯 하자 더이상 듣기 귀찮아진 크라이츠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뮤스를 향해 던졌다. "녀석. 이제는 머리가 제법 굵어졌다고 이 누님께 말대답을 하는구나. 잔소리 말고 그거나 읽어 보렴. 추방 기간동안 네 앞으로 도착한 편지란다. 그 편지를 남기고간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 같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말을 하다말고 편지를 재빠르게 잡아챈 뮤스는 짚이는 것이 있었기에 안색을 굳히며 되물었다. "지금 듀들란 제국이라고 했습니까?" 그새 카타리나의 옆으로 다가온 크라이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단다.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니?"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있는 크라이츠는 뮤스의 반응을 살폈고, 곧 카타리나의 팔을 이끌며 말했다. "카타리나양 우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도록 하죠. 뮤스의 표정을 보니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할 것 같군요." "네. 알겠습니다."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크라이츠와 뮤스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았기에 순순히 크라이츠를 따라 나섰다. 혼자 남게된 뮤스는 떨리는 눈으로 편지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익은 듀들란 제국의 인장이 진하게 찍힌 편지 봉투는 제법 두툼했기에 꽤나 긴 내용의 편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후우..." 나직한 한숨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뮤스는 밀랍으로 된 인장을 뜯어내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내어 펼쳐보았는데, 오른쪽에서 부터 반듯하게 세로쓰기가 되어있는 편지의 앞부분을 간단하게 읽어낸 뮤스는 가슴으로 부터 전해오는 격정을 애써 누르며 입을 열었다. "며..명신..." 자신의 실명을 나직하게 내뱉은 뮤스는 살아 꿈틀 대는듯 유려한 모양의 한자로 쓰여진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명신 전. 먼저 네가 신변이 가장 궁금하구나. 어렵게 너의 행적을 알게 되었건만 나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체하는 사이 네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버리다니 정녕 답답하기만 하단다. 부디 네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이 글을 읽어 주길 천지신명께 빌고 있단다. 나는 지금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듀들란제국이라는 곳에 귀속되어 일정기간동안 이들을 돕고 있는 중이란다. 이들은 너의 추방 소식을 듣고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모양이다만, 나는 네가 그들의 귀계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한단다. 짧은 편지 상으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는 힘들다만, 이들은 약속기한을 넘긴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내 몸 하나는 어찌 할 수 있겠지만, 너마저 듀들란 제국에 귀속된다면 더욱 빠져나가기는 힘들어 진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그러니 네가 속해있는 도이첸 제국이란 곳에서 내가 찾아갈때까지 기다려다오. ..중략.. 나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마음 편하진 않지만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단다. 조선에서 이론으로만 설명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내 손으로 이루어 내고 있으니 이 보다 좋은 실험의 장은 없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너 역시 남은 시간 동안 그곳에서 너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보도록 하거라. 이것이 언젠가는 새로운 조선 건설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단다. ..중략.. 너는 두 어께에 조선의 미래라는 막중한 짐을 짊어지고 있단다. 단군에서 시작된 반만년 한민족의 번영이 네 손에 달린 것이지. 부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이 사실만은 네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많다만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한 듯 하니 이만 줄이도록 하마. 다시 만날때까지 몸 보중 하거라. 장영실의 긴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었지만, 뮤스의 기쁨과 갈등이 섞인 눈은 아직도 편지 위를 서성이는 중이었는데, 오랬동안 기다렸던 장영실의 소식을 듣게된 기쁨과 이별이라는 막연한 갈등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곳에서 보냈던 것이었다. 명의 움직임 진농의 먹을 뿌려 놓은 듯 어둑한 공간에는 나직한 호흡의 떨림만이 느껴지고 있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었기에 공기가 유난히 무거웠고, 이곳에 모인 몇몇의 사람들은 옆사람의 작은 기척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그들의 눈과 귀는 허공을 향해있었다. 눈으로 볼수도 없었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확실한 존재감으로 그들을 짖누르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로부터 한 노년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그들의 귓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태위... 이제 말해 보시구려! 대체 무슨 큰변이 일어났기에 이리 야심한 밤에 짐에게 자리를 청한 것이오? 북의 오랑케가 국경을 넘어 내려오기라도 했단 말이오!" 역정을 내며 물음을 던지고있는 노년인은 심기가 상한 듯 말끝이 야릇하게 말려올라갔고, 질책을 받은 자는 노년인의 이러한 반응에 크게 두려움을 느꼈는지 재빨리 고개를 굽신거리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황제폐하, 늦은밤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려 황공하오나, 조선으로 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되어 늦은밤 염치불구하고 만나뵙기를 청하였사옵니다." 태위라는 직위를 가진 인물은 어둠속의 노년인을 향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노년인이 바로 당대 천하의 주인이라 불리우는 대명제국의 황제였던 것이었다. 급박해 보이는 태위의 목소리에 화를 조금 수그러트린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흠... 대체 조선이 어쨌다는 말이오?"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어 들이자 내심 한숨을 내쉰 태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도 조선이 수 대에 걸쳐 조공의 명목으로 수백종의 공학기술을 본 명제국에 이전해준 사실을 익히 알고계실 것이옵니다." "흐음... 그것은 짐도 알고 있소. 선대의 황제들께서 대륙의 동쪽 끝에있는 오랑케인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인정해주니 이에 보답하기 위해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오? 그런 보잘것 없는 작은 나라에서 본국보다 높은 기술을 보유하고있는 것이 천하의 중심인 본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일이오만, 그래도 형의 나라라 떠들며 받들고 있으니 대인의 풍모로서 감싸 주었던 것이었소." 황제가 말 한마디 내뱉을 때 마다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취하던 태위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사실 조선으로 부터 비단이나 가축, 특산물 등 수 많은 물품들이 조공의 명목으로 들어오고 있사오나, 이 모든 것을 합한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공학기술의 유용함에 비할바가 아니었습지요." "그러한 사실 쯤은 짐도 잘알고 있는 바이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황제의 성격이 불같음을 뻔히알고있던 태위는 황가 다시금 역정을 내려 하자 긴장을 느키며 말을 이어갔다. "헌데... 몇 해 전 부터 대홍로를 포함한 조공 담당관리들은 조선에서 본국으로 이전되는 공학기술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처음에야 그들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았지만, 해가 지날 수록 이런 현상이 심해지게 되자 대홍로는 조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소신에게 사태를 알려오게 되었던것이옵니다. 그날로 소신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명인들을 통해 밀정을 섭외하기에 이르렀고, 여러 경로를 통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사옵니다." "놀라운 사실?" 황제의 되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태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밀정에 의하면 몇해 전 조선의 공학원은 조선왕의 명으로 두개로 나뉘어 졌다고 하옵니다. 그 중 하나는 본명제국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한 곳이라 했고, 주요 공학기술을 가진 또 하나의 공학원은 경복궁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사옵니다. 그 이후 비밀 공학원에서는 그간 축적된 모든 공학기술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효율적인 체계를 구축하여 공학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태위의 성명을 귀기울여 듣고있던 황제는 의문이 생겼는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허... 그들의 행동이 본국을 능멸항 행위라 볼 수 있으나 그것이 이 밤중에 짐을 불러낼 만큼의 큰일이라 생각되진 않는구려... 조선처럼 작은 나라의 일개 기관의 움직임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황제와 태위의 대화를 듣고있던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신이 한 마디 올리겠사옵니다. 조선의 공학기술은 그리 만만히 볼 것이 아니옵니다. 선왕들께서는 조선 공학의 저력을 익히 알고계셨기에 그 발전을 막기위해 유교사상까지 전파하는 수고를 보이셨사옵니다. 즉, 공학기술을 잡다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그 발전을 저해한 것이지요. 또, 그런 이유로 말 잘듣는 양때로 변한 조선은 자신의 쓸게를 빼주 듯 가진 공학기술들을 본국으로 순순히 넘겨주었던 것이옵니다. 허나, 당대의 조선왕은 이미 유교의 폐해를 이미 인지하고, 공학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공학기술 개발을 장려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공학기술이 무기제조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고, 밀정의 말에 따르면 공학원에서 이미 십 여종의 가공할만한 신무기들이 개발, 시험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비록 지금은 조선이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한 이유로 그들이 가진 공학기술의 역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게 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옵니다." 중년인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나직하게 숨을 가다듬어 본 태위는 힘을 얻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들으셨다시피 공학기술을 등에 업게된 조선은 머지않아 명제국의 존망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떠오를 것이 불보듯 하옵니다! 위험한 독초는 잎이 더 자라나기 전에 뿌리를 잘라내야 하듯이 조선을 이대로 두어서는 결코 아니되옵니다! 부디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태위의 상소를 마지막으로 장내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게 되었고, 심상치 않은 기운만이 어두운 공간에 감돌기 시작했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잠시 동안 태위의 가슴을 태우고 있을 때,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명제국에 위협이 된다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허나, 공들도 본국의 조정역시 당쟁으로 어지러워 조선과의 전쟁을 치룰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게다가 이렇다할 대의명분 또한 없으니 이번 일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 비밀리에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공학원의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은 태위에게 위임할터이니 짐을 실망시키지 마시오."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어둠이 가득찬 허공을 바라보던 인물들은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하여 오체복지 하기 시작했고, 황제는 나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휘이이잉! 듣는이의 가슴을 베기라도 할듯 매서운 바람소리가 모든 변화의 전부인 이곳, 날카로운 산의 봉오리들은 수천년간 회색의 하늘에 닿고싶어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었고, 차가운 바람의 매서움에 경직된 듯 얼어버린 눈더미는 산중턱의 기암괴석을 덮고 있었다. 산줄기가 겹겹으로 맞물린 모양으로 자연의 병풍을 이루며 험한 산세를 자랑하고있는 이곳은 오래전 부터 사람의 발걸음을 거부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외진 곳에 인공의 흔적이 보이고 있었다. 천길의 낭떨어지를 바라보는 절벽의 면으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다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다리라는 이름조차 무색할 정도로 열악하여 단단한 나무토막을 밧줄로 엮어 사람이 밟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었지만, 이런 험한 벼랑끝에서는 그마저도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삐걱... 삐걱... 바람이 불어올때 마다 격렬히 흔들리는 나무토막을 밟고 움직이는 세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추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 얼굴을 완전히 뒤덮는 방한용 복면을 쓰고 있었고, 솜을 넣어 여러겹으로 누빈 옷을 껴입고 있었다. 이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나무토막을 묶은 밧줄들이 삐꺽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간담도 보통이 아닌지 아무런 동요 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기에 발아래의 천길 낭떨어지가 한탄할 지경이었다. 잠시후, 이들은 절벽의 중심에 나있는 동굴의 입구에 당도 할 수 있었고,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뒤로하며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은 상당히 넓었기에 장정 세명 정도는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벽으로는 누군가가 밝혀 놓은 듯한 횃불이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며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동굴 내부로 들어갈 수록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자 답답함을 느낀 인물들은 각자 덮어쓰고 있는 방한용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횃불에 비춰지며 얼굴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귀품이 흐르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 먼저 보였고, 거칠고 검붉어진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장한들이 그 뒤를이었다. 백발의 노인은 바깥을 되돌아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천외지옥이라 불리울 만한 곳이군. 그가 이런 곳에서 생을 보내고 있단 말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시립해있는 두 명의 장한들을 향해 말했다. "허헛... 이런 곳에서 일을 하는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 자네들이 이곳에서 일한 몇해 동안 많은 고생을 했겠군. 내 황궁으로 돌아가면 자네들의 자리를 선처해 주겠네..." 그의 말에 뒤에 서있던 방한들은 크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저희들의 임무일 뿐입니다. 보잘것 없는 임무에 대해 태위나으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백발의 노인이 바로 명제국의 중요 직책인 삼공 중 한명인 태위로서 명제국의 모든 공사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하얀 입김을 내쉰 태위는 뒷짐을 지며 말했다. "자. 이제 나를 별부사마... 흠... 아니지... 이제 그저 일개 죄인일 뿐이니... 종려진에게 안내해주게." 태위의 명령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장한들은 앞장을 서며 동굴 속으로 밞걸음을 옮겼고, 태위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간동안 이어지는 길을 걷고,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계단을 몇 번 지난 태위는 벽을 따라 끝도없이 나열되어있는 철문들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록 철문에 가로막혀 그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에서 가래끓소리와 기침소리만 듣고서도 내부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만 했고, 코를 마비시킬 것만 같은 악취는 자연스레 태위의 이마를 찌푸리게 만들었다. 소매를 들어올려 코와 입을 가린 태위는 자신을 다라 멈춰서있는 장한들을 향해 계속가라는 신호를 했다. 녹이 잔뜩 슬어있어 삭막해 보이는 수십개의 철문을 지나자 유난히 작은 철문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다른 문들에 비해 절반의 높이밖에 안되는 문이었기에 태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문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장한들이 등에 매고있던 손삽을 이용하여 문아래의 흙을 파내기 시작하자 점차 땅에 묻혀있었던 철문의 나머지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흙을 모두 파낸 장한들은 열쇠꾸러미에서 세개의 열쇠를 찾아내 철문의 자물통을 하나씩 열었고, 그제야 모든 일을 끝낸 중년인은 벽에걸린 횃불을 하나 들며 말했다. "바로 이 곳이 종려진을 수감되어있는 방입니다. 태위 나으리. 함께 드시지요." 하지만 태위는 고개를 내저었고,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아니네. 그와 단 둘이 해야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에게 횃불을 주게나. 혼자 들어가겠네." 태위의 행동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장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횃불을 건네주었다. "수감자들은 모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상태이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후훗! 내 조심하도록 하겠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태위는 두 장한들 사이를 지나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으로 들어간 태위는 횃불을 비춰보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불빛이 닿는 곳마다 이름조차 모를 곤충들이 기어다니고 있었고, 어디선가 새어나와 군데군데 고인 물웅덩이는 인간의 분비물과 섞이며 악취를 풍겨냈다. "정녕 사람이 지낼 곳이 아니로군..." 이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 태위는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곳을 보기 위해 안력을 돋구며 고개를 움직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태위는 방의 한 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괴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여름에도 입지 못할 만큼 얇은 수의를 입고 있었으며, 산발한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은지 오래였다. 또, 사지에 묶여있는 손가락 굵기만한 쇠사슬은 최소한의 활동 영역만을 남겨놓은체 그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보며 괴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 태위는 몸을 굽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진정 종려진 맞는가?" 태위의 목소리에 가슴팍까지 숙여져있던 괴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종려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괴인은 말라붙어버린 듯한 입술을 힘겹게 떼며 목소리를 흘렸다. "누...누구시오? 크르륵..." 괴인의 상태를 살피던 태위는 그가 자신이 찾던자 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가래끓는 목소리와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혀를 찼다. "쯔쯧... 철석만큼이나 강한 자네의 고집이 자네를 이렇게 옭아 매고 있구먼. 대명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화려한 과거는 어디가고 이 꼴이 다 무언가?" "콜록! 태..태위셨군요... 올해로 5년 만입니까. 크큭... 이런곳에 있다보니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줄 알길이 없어서..." 태위는 종려진이 자신을 알아보자 그나마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날세 이 사람아. 올해로 6년째일세. 내 정녕 자네 아버지와의 깊은 친분을 생각해 자네를 보호해주고 싶었으나 알다시피 나의 힘을 벗어난 일이었네. 그에 대해서는 자네도 충분히 날 이해해 줄것이라 생각하네." 종려진은 태위의 말을 들으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크큭... 태위께서 저를 감싸 주셨다 하더라도 저는 마다했을 것입니다. 그 더럽고 썩어버린 천하를 보고 사느니, 이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편이 훨씬 나을테니까요. 후훗! 누추해 보이지만 그럭저럭 살만하답니다." 체념이 어린 그의 말을 듣던 태위는 탄식을 터트렸다. "허... 그간의 세월도 자네의 고집을 어찌 할수 없었나 보군." 고개를 들고있던것이 힘이들었는지 다시금 고개를 떨어트린 종려진은 말을 계속 하기도 힘이드는지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다. "크으... 그나저아 태위께서 이런 곳에 어쩐일이십니까. 황제의 허가가 없다면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힘이들어 억양이 확실치도 않은 물음을 들은 태위는 종려진의 까칠한 수염으로 뒤덮인 볼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의 귀에는 어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고 온것일세. 비록 자네가 황명을 어겨 황제폐하의 심기를 상하게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과거의 일이고, 자네만큼 명에 대한 충정을 가진 인물이 없다고 여겨 황제폐하께서 다시 한번 자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이지. 물론 황제폐하를 설득하기 위해 적지 않은 수고를 해야만 했다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보이는 얼굴을 하고있던 종려진은 더욱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곧 그의 입으로부터 매말랐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큭! 그렇다면 태위께서 괜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제가 비록 명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대의 황제라는 자에게 고개를 굽힐 생각은 없습니다! 어찌 힘들어하는 백성들의 피눈물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자를 황제로 받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태위는 이미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반응 또한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네는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 그러나 이번 일은 황제를 위한 일이라기 보다 명제국, 우리 한족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네가 내 제안을 받아 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이만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자네는 지금 너무나 쇠약해져 있어..." 말끝을 흐린 태위는 종려진의 의사와는 상관없다는 듯 옥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곤 문 옆에서서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두명의 장한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종려진을 이송할 테니 준비를 해주게. 중요한 인물이니 더 이상은 거칠게 다루지 말게나." "예! 태위 나으리!" 태위의 명령에 짧게 대답한 장한들은 태위의 횃불을 받아들며 종려진이 수감되어있는 옥으로 움직였고,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태위는 눈이 쌓인 듯한 백발을 쓸어넘기며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밤새 찾아온 차가운 기운이 작은 연못에 살얼음을 만들어 냈다. 그 주변으로 서리맞은 초록의 식물들은 잎을 늘어트렸고, 다양한 겨울 꽃들이 여름내 숨죽이며 기다리던 날씨를 반기며 활짝펴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 떠오른 태양이 연못의 얼음을 빛내고있을 아침 무렵 종려진은 눈을 떴다. 짙은 남색으로 칠해진 천장을 침상에 누워 올려다본 종려진은 그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고, 손은 부드러운 금침을 매만지며 그 감촉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일상이 그에게 주는 감회란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새 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건만..." 혼잣말을 중얼거린 종려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터운 금침이 흘러내리며 그의 상체가 드러났는데, 여기저기 짖무르고 곪은 상처에 갈색의 약이 발라져있었지만, 고루발달되어있는 탄탄한 근육이 그의 몸상태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실내를 둘러보니 오랜만에 보는 가구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탁자위에 그를 위해 마련한 것 같은 옷가지들이 놓여있었다. 그것들을 대충 몸에 걸친 종려진은 흐트러져있던 머리를 묶으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았다. 종려진은 결코 흔치 않은 8척 장신의 몸이었으며, 황소에 버금갈 정도의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모습이었다. 게다가 너른 이마는 그의 호방함을 말해주는 듯 했고, 짙은 눈썹은 그의 굳은 심지를 나타내는 듯 했다. 그가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문 밖으로 부터 기척이 들려왔다. "별부사마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그 소리가 여종의 목소리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던 종려진은 옷 매듭을 마저 매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덜어지자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초록색의 복장을 한 여종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들고있던 세숫물과 수건을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예의바르게 말했다. "초진이라 하옵니다. 오늘 부터 별부사마 나으리의 시중을 들게 되었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소녀에게 하명해 주시지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종려진은 눈을 얇게 뜨며 물었다. "나는 별부사마의 직을 박탈 당한지 오래인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별부사마라 부르느냐?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지?" 물음을 받은 초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가 미천한지라 잘은 모르겠사오나, 태위 어르신께서 나으리를 그리 칭하라 이르셨습니다. 또, 이곳은 태위 어르신의 별가이옵니다." "지금 태위께서도 이곳에 머물고 계신다는 말이냐?" "태위 어르신은 지금 처소에 계시옵니다." "그렇다면 태위께 지금 당장 달려가 내가 뵙기를 청한다고 여쭙거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어오는 종려진의 기세에 눌린 듯 얼굴이 하얗게 변한 초진은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그렇지 않아도 채비가 되는대로 태위 어르신께서 별부사마 나으리를 만나뵙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제야 공포에 떠는 초진의 모습을 발견 한 종려진은 즉시 무형의 기세를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잠시 초진의 안색을 살피던 종려진 아무런 말 없이 그녀가 가지고 온 세숫 물에 손을 담그며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채비를 모두 마친 종려진은 시녀인 초진과 함께 방을 나섰다. 진남색의 기와가 얹어진 화려한 전각과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을 둘러보던 그는 낯익은 풍경에 새로운 감회를 느꼈고, 곧 초진의 안내를 받으며 태위의 거처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초진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비슷하게 생긴 몇 채의 전각을 지나고,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다리를 건넌 후였다. 지금까지 봐온 전각들에 비해 작은 규모의 건물의 문 앞에 선 그녀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태위 어르신. 별부사마 나으리를 모시고 왔사옵니다." 그러자 문 안에서 태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안으로 들게하고, 너는 물러가거라." "네, 어르신." 태위의 목소리에 짧게 대답한 초진은 문고리를 잡아 당기며 옆으로 물러나 섰고, 종려진은 성큼 걸음으로 안으로 들었다. 그가 들어선 방안은 고아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벽으로는 각종의 서화가 걸려있었고, 초록의 분재들이 겨울의 한파를 피하고 있었는데, 군사를 담당하는 태위의 직책과는 조금 이질인 면모였다.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온 종려진은 마음이 급했는지 내부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태위의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대체 태위께서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현 황제를 받들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실분께서 어찌 이러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태위는 종려진의 항의를 들으며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탁자위의 난을 손질하고 있었다. 난의 입을 짤막하게 잘라내는 것으로 하던일을 마무리한 태위는 단도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허헛... 자네 말대로 자네를 누구보다 잘알기 때문에 자네를 그곳에서 데리고 온 것일세. 명에 대한 충정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잠시 말을 머뭇거린 종려진은 태위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물론 명에 대한 충정을 맹세한 것이 사실이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 할 수는 없습니다." 종려진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던 태위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께서 자네 부친의 참수를 명했기 때문인가?" 태위의 말에 종려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의 단단해 보이던 턱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태위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와 자네 부친은 너무나도 닮았네. 그 곧은 성품이나, 그른 것에 타협하지 않는 신념까지... 나 역시 자네 부친의 그런 점이 너무나 좋았다네. 내가 가지지 못한점을 자네 부친을 통해서 볼 수 있었으니말일세. 하지만, 결국 자네 부친은 그러한 성격 때문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변을 당한 것일세." 잠시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옛일을 회상하던 태위는 찻잔에 차를 따루며 말했다. "나는 자네만이라도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했기에 이번 일을통해 천외지옥에서 자네를 데리고 나왔던 것이지. 또,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자네가 맡아 주어야 할 일은 황제를 위한 일이라기 보다 명제국과 한족을 위한 일이니 한번 들어보게나."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입안을 데운 태위는 얇은 서책 한권을 꺼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조선과 관련된 일일세. 자네 역시 관직에 몸담았던 만큼 조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이 책은 조선의 공학원이라는 기관에 대한 보고서이니 참조하길 바라네." "..." 아무런 소리없이 서있던 종려진은 태위가 내민 책을 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잠시 지켜보던 태위는 탁자의 한쪽에 있는 나무상자를 종려진의 앞쪽으로 드리밀었다. "상자안에 있는 물건을 한번 보도록 하게. 별부사마를 지냈던 자네라면 충분히 알아 볼 수 있을 터이니..." 서책을 잠시 접은 종려진이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자 붉은 천위에 올려져있는 금속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던 종려진은 자신이 알고 있던 물건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략 10년 전이었던가요? 제가 막 별부사마직을 맡았을 무렵 조선으로 부터 들여왔다는 무기와 비슷하게 생겼군요. 아마도 그 이름이 지자총통이라 했지요. 하지만, 몇 가지의 문제점으로 인해 저의 군에서는 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위는 입을 축이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상자속의 물건을 꺼내었다. "자네가 봤던 것은 이미 조선에서 50여년 전에 개발 되었던 초기의 지자총통이었다네. 그 당시 본국으로 건너왔던 조선의 지자총통은 도검에 비해 그 유효거리가 멀고 파괴력 또한 높은 것으로 평가받긴 했지만 연사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에 실제 전투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일세. 허나 자네가 지금 보고있는 이 방산형지자총통은 초기 지자총통의 단점을 크게 개선한 무기이지. 지자총통처럼 심지에 불을 붙여 발화시킬 필요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단순한 동작으로도 탄환을 쏘아낼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약과 탄환을 자체에 내장하고 있어 연사기능을 극대화 했다네. 게다가 방산형지자총통의 탄환은 총구를 지나는 순간 여러개로 분리되어 발사되기 때문에 동시에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하지." 잠시 말을 멈추며 숨을 들이쉰 태위는 방산형지자총통을 종려진에게 건네주며 몸을 일으켰다. "비록 우리가 입수한 것은 방산형지자총통 뿐이지만, 조선의 공학원에서는 그 외에도 8종의 중, 대형 화기를 개발 하고 있다고 하네. 훗날 이러한 신무기로 무장한 조선의 군대는 그 수가 적다 하더라도 충분히 본국의 대군을 상대할 세력을 가지게 될것일세. 이런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게되었던 나는 조정의 몇몇 대신들과 뜻을 모아 조선이 위협을 가해오기전에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치열한 당쟁에 휘말려 무마되기 일수였다네." 방산형지자총통을 자세히 살펴보며 그간의 상황을 듣고있던 종려진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 수 있었기에 침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당쟁이 제아무리 심하다 한들 황제의 입김을 무시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종려진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태위는 손질을 해놓은 난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내 비록 황제폐하를 보필하는 신분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폐하는 이미 노쇠해 젊었을 적의 호전적인 기상은 온데간데 없으신 상태라네. 이번 일도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처리하라고 명하시더군..." 말끝을 흐린 태위는 종려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조선의 거센 침략을 받는다면 대명제국은 무너질 것이고, 힘없는 백성들은 전란에 휘말려 더욱 고통을 받을 것일세. 부디 명제국과 백성을 생각해서라도 자네가 이번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일세."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된 내막을 모두들은 종려진은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한 태위는 다시금 반이상 잘린 난잎을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해를 입은 초란을 다시금 살리기 위해서는 그 소중한 잎을 짧게 잘라줘야 한다네. 물론 잎을 잘라낼 때는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추위가 지나고 봄이 오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 자네는 세상을 짧은 안목으로 보지 말게나. 황제의 위는 세월이 흐름과 함께 변하는것이니 그 때가 되면 자네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일세." 잠잠히 있던 종려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종려진의 긍정적인 반응에 미소를 지은 태위는 그의 어께를 두들겨 주었다. "역시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먼..." "명제국과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계획해 놓은 바를 말해주도록 하겠네..." 태위는 흡족한 모습으로 종려진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그 중요성 만큼이나 길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황제의 전령. 뮤스가 라이델베르크로 돌아온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뮤스와 오래간만에 재회한 친구들은 마치 가족이라도 돌아온 듯 진정으로 반겨주었고, 다시금 원장을 맞이한 공학원은 더욱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또, 뮤스를 만나보기 위한 발걸음 역시 끊이지 않았기에 그가 이곳을 떠나있는 사이 유명세가 얼마나 부풀려 졌는지 쉽게 알수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일 뿐이었다. 무더운 여름의 어느날, 뮤스의 친구들은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나무의 그늘 아래 모여있었다. 하나같이 백색의 실험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공학원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듯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지난 몇년간 이곳을 집으로 삼은 채 연구를 거듭해온 것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유쾌한 농담이 오가고 있을 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무거운 근심이 기색이 떠올라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댄 자세로 턱을 매만지고 있던 히안은 안경을 들쳐 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타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저 녀석 무슨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데, 혹시 네가 다른 남자랑 눈이 맞기라도 한거야?" 그의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낀 폴린이 그의 허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히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런말은 3년이나 눈물 콧물 짜면서 기다린 카타리나한테 모욕이라고!" 히안은 폴린의 응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는지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아얏!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꼬집을 것 까지는 없잖아?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고! 그리고 너는 총무보좌면서 왜 실험복을 입고 난리냐?" "호홋! 공학원에서는 실험복을 입는게 더 훨씬 멋지잖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즐겁게 웃고 있는 폴린을 보며 히안은 혼잣말로 궁시렁거렸다. "그래봤자. 공학원 사람들은 네가 공학자가 아닌걸 다 알고 있다고..." "뭐얏!" "아...아무것도 아니야! 폴린. 실험복이 멋지구나!" 폴린이 눈에 불을 켜자 금새 그녀의 보복이 두려웠던 히안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가리며 말을 돌리고 있었다. 폴린과 히안의 옆에서 둘의 행동에 손을 내저은 벌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네. 이 두 사람은 빼고 이야기하자고. 뮤스형이 누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랬었어?" 벌쿤의 물음에 친구들의 눈길은 모두 카타리나에게 집중이 되었고, 카타리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뮤스를 처음 만났을 때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어. 웃음도 많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도 잘했고..." "그럼 언제부터 저렇게 된거야?" "글쎄... 내 생각에는 전뇌거경주기념 연회장에서 부터였던 것 같아. 그때, 크라이츠님께서 뮤스에게 어떤 편지를 전해주고 난 다음부터 이상해 졌으니까..." 카타리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이즈가 되물었다. "편지? 누구한테서 온 편지인데?" "그것 까지는 잘 모르겠어. 얼핏 듣기로는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라고 하던걸?" 듀들란이라는 말이 카타리나의 입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친구들은 경악을 하며 입을 모아 외쳤다. "뭐어! 듀들란 제국이라고?!" 특히 바르키엘은 그 이름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는 듯 흥분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뮤스가 듀들란 제국으로 부터 제의를 받은게 아닐까?! 도이첸 제국을 버리고 자국으로 오라고 말이야! 그래서 뮤스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사실 뮤스는 다른 대륙에서 왔으니 어느 국가에 속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 그의 행동을 보고있던 세이즈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럴리는 없을 거야. 이곳에 크라이츠님과 드워프 아저씨들도 계신걸? 설마 그분들을 외면하고 듀드란 제국으로 갈까?" "물론 네 말이 맞긴하지만, 그러니 뮤스가 더욱 고민하고 있는거라고! 공학원 식구를 버리자니 듀들란의 대접이 너무나 좋고, 듀들란으로 가자니 공학원 식구들이 걱정되고... 뭐 이런거지." 잠시 잠자코있던 벌쿤은 어깨를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뮤스형은 그렇게 의리 없는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제의가 들어왔다면 단번에 거절했을걸?" "글쎄... 원래가 사람속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의견을 나누던 분위기가 서서히 말다툼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 이를 보고만있던 헤밀턴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섰다. "쯔쯧! 선배들도 괜히 똑똑한 척만 했지 생각이 정말 짧군요?" 그 덕에 말다툼을 하던 뮤스의 친구들은 입을 다물며 헤밀턴을 바라보았고, 벌쿤은 겨우 자신의 허리높이 보다 조금 큰 헤밀턴에게 얼굴을 드리밀었다. "이봐 헤밀턴 네 선배들이 전하고 싶어하는 말을 내가 대신 해주도록 하지. 너 요즘들어서 선배들을 너무 막대하는 것 아니냐?" 모두들 켈트에게 잘했다는 긋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헤밀턴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했는지 여전히 당당한 얼굴이었다. "나참... 그러니까 이 후배가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행동을 해보시라니까요.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매일 다투는걸 보고있는 후배가 뭘 배우겠어요?" 허리에 손을 얹고 쏘듯이 말하고있는 헤밀턴을 내려다본 벌쿤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거냐?" 그의 물음에 헤밀턴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야 간단하죠! 그 문제의 편지를 훔쳐 보면 뮤스선배가 왜그러는지 알거 아니예요!" 헤밀턴의 간단하고 확실한 해결책에 벌쿤은 무릎을 쳤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을 때, 카타리나가 친구들을 말리듯 끼어들었다. "하지만... 남의 편지를 보는건 예의가 아니잖아. 우리 뮤스가 직접 이야기 할때까지 기다려 보는건 어떻겠니?" "안돼!" 카타리나의 의견에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외쳤고, 폴린이 나서며 카타리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생각을 해보렴 카타리나! 우리는 뮤스에게 피해를 입히자는게 아니라 뮤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이러는것 아니겠니? 만약 어느날 뮤스가 네게 듀들란 제국으로 간다고 말을 해봐! 네가 기절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헤밀턴의 생각대로 하자. 응?" "그...그건..." 카타리나가 망설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그녀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을 봤는지 뮤스의 방을 향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고, 카타리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간, 켈트는 자신의 주먹만한 크기의 금속원석을 들고서 연구실 밀집구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훨씬 짧은 실험복을 입고 있었기에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켈트 역시 실험복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안전에 대비하여 특수 원단으로 제작된것이기에 입지 안을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흰색의 도료로 칠해진 복도에 들어서자 소규모의 연구실이 죽 늘어서있었다. 각 문마다 그 연구실을 쓰는 공학자의 이름이 걸려 있었지만, 아직 주인이 없는 이유로 아무런 이름도 걸려있지 않은 연구실이 상당수였는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준비해놓은 장소였다. 켈트의 발걸음은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연구실의 앞에서 멈춰졌다. 명패에는 '뮤스 드라켄'이라 적혀있었는데, 공학원의 원장이지만, 다른 공학자들과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이곳에 자신의 연구실을 잡은 것이었다. 잠시 노크를 하려 손을 올렸던 켈트는 생각을 접으며 그냥 문을 열었다. "뮤스있냐?" 좁게 열린 문큼으로 고개를 드리밀어보자 흰색의 실험복을 입은 뮤스의 등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켈트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듯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켈트는 이런 상황을 여러번 겪어 봤기에 개의치 않고 연구실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금속의 원석을 한쪽 실험대에 올려놓은 켈트는 뮤스의 등을 두들겼다. "이 녀석아 좀 쉬었다 하거라! 연구도 좋지만 이렇게 강행하다가는 몸이 먼저 축나겠다!" 그제서야 켈트가 왔음을 눈치첸 뮤스는 안구보호경을 벗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푸석한 얼굴을 보아 며칠째 잠을 자지 않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켈트 아저씨 오셨군요." "쯔쯧... 어제도 밤을 샌모양이군. 요즘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나오질 않으니, 네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하는거냐?" 쓴웃음을 지은 뮤스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흠...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요즘 복잡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연구에라도 매달리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겠더군요. 최소한 이곳에서 연구를 할때만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그의 말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인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크라이츠님께 들었다. 장영실이라는 자를 이제 찾게되었으니, 네가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가? 세월한번 정말 빠르군. 그를 찾기위해서 이 공학원을 세운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년이나 지나버렸다니..." 뮤스역시 켈트의 말을 들으며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게 되자 답답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후우. 네... 지금 머리속이 혼돈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장영실 아저씨를 찾기 위해 이렇게 고생해온 것이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올 것을 생각하니 차마 조선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특히 카타리나는 제가 처해있는 상황을 알지 못하니 더욱 걱정입니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허헛! 언제나 그 정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고, 세상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차근히 생각하는 편이 주변 사람들이나 너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군." 켈트의 위로에 애써 미소를 지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트 아저씨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다르니 힘이 들 수 밖에 없군요." "쩝...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하군. 솔직히 나 역시 너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슬픈게 사실이야." 금새 시무룩해진 켈트의 표정을 바라본 뮤스는 분위기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에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제 연구실까지는 어쩐 일이시죠?" 뮤스의 물음을 듣고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린 켈트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며 대답했다 "아! 내 정신좀 보게... 이 것을 네게 보여주려고 가지고 왔어." 켈트는 손을 뻗어 실험대에 올려놓았던 금속의 원석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기억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바로 드워프 마을에 떨어졌던 운석의 조각이야. 얼마전 금속의 강도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을에 돌아가 원석의 일부를 가지고 왔지." 그것을 받아든 뮤스는 광물을 가늠해보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죠. 당시만 해도 운석을 부술 방법이 없어서 끌어냈었으니까요." "그렇지. 그 당시만 해도 엄청난 경도 때문에 운석을 분해할 방법이 없었는데, 역시 광자절단기를 사용하니 역시 절단되더군." "그럼요. 광자절단기의 초고온을 견딜 물체는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래서 말인데, 이 운석을 새로운 금속 재료로 사용해보면 어떨까? 아무래도 철판은 너무 무겁고, 가볍다 싶으면 너무나 무르니, 이 단점들을 보완한 새로운 금속이 필요한 참이야." 대충 운석을 돌려가며 살펴보던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훗. 말씀하시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이시군요?" "허헛! 그야 당연하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은 네가 더 잘알텐데?"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금속원석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고 지금 당장 시작하려는 듯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여러가지 기구들을 가까운 곳으로 당겼다. "그럼 며칠정도 기다리셔야 할것 같은 걸요? 저도 처음 보는 금속이니 만큼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고맙군. 흠... 그런데 지금 당장 시작할 생각이냐?" 실험대 쪽으로 반쯤 몸을 돌리고 있던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굳은 표정으로 뮤스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펴보던 켈트는 그의 팔을 억척스럽게 잡아 끌며 말했다. "문제? 물론 문제가 있고 말고! 그 금속의 원소해명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일단은 네 방으로 가서 좀 쉬거라. 이 상태로 더 있다간 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먼저 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켈트에게 붙잡힌 뮤스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저는 괜찮다니까요." "내가 보기엔 절대 괜찮지 않다. 그러니 내 말을 듣도록해!" 결국 억샌 켈트의 손에 잡힌 뮤스는 어쩔 수 없이 연구실 밖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3일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탈칵! 끼이익... 간단한 가구 몇 점만이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방, 누군가가 잠겨있던 문고리를 따고 있는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내 진한 밤색의 두터운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잠시 후 그 틈사이로 눈동자가 한쌍씩 들어차기 시작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벌쿤... 안에 누구 있어?" "아니 없는 것 같아... 형이 방에 안들어온지 벌써 3일째야. 매일 연구실에만 틀어박혀있는데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왜 이렇게 도둑고양이 마냥 있는거야?! 그냥 들어가자!" "아차! 그렇군. 그냥 몰래 들어간다는데에 긴장을 해서 그만..." 어수룩한 벌쿤의 대답소리와 함께 문의 틈이 벌어졌고, 문 앞에서 서성이던 뮤스의 친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가장 앞서있던 벌쿤은 뮤스의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형의 물건은 대부분 책상 서랍에 있을 거야. 아니면 침대 밑의 상자나." 친구들이 그가 가리킨 곳을 뒤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뒤에 서있던 히안은 벌쿤의 어께에 손을 걸치며 말했다. "너 같으면 그렇게 비밀스러운 편지를 아무데나 던져 놓겠냐? 분명 어딘가에 숨겨놨을 거야... 잘 생각해봐." 벌쿤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뮤스형이 뭔가 숨기는 걸 본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숨기는걸 보여주면 그게 숨기는 거냐?" 히안이 벌쿤을 나무랄 때, 책상서랍을 뒤지고 있던 폴린이 말했다. "뮤스가 너같은 줄 아니? 비상금 숨기기 따위는 너나 하는 짓이라고! 그것도 어정쩡하게 숨겨서 맨날 어머니께 들키기나 하고..." 하지만 이번에는 히안도 할말이 있는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쿠쿡! 그러는 너는 비상금 안숨기냐? 불과 두달전만 해도 어디다 숨겼는지 잊어 버렸다고 울상이었으면서!" 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폴린은 입을 다물고 말았고, 히안은 오랜만의 승리에 득의해 하고 있었다. 그 때, 침대 밑의 상자를 뒤적이고 있던 가이엔이 편지봉투를 하나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혹시 이거 아니니? 꽤나 두툼한걸?"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확인한 카타리나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편지였어." 카타리나의 감정(?)이 끝나자 친구들은 가이엔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가장 궁금증이 많았던 헤밀턴이 나서며 말했다. "분명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라면 듀들란 어로 적혀 있을 것인데, 선배들 중에서 듀들란 어를 아시는 분 있나요?" 헤밀턴의 물음을 받은 뮤스의 친구들은 서로의 모습만 살피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돌아가자 미소를 지은 헤밀턴은 가이엔의 손에서 편지를 잡아당겼다. "그럼 제가 읽을 수 밖에 없군요. 저는 어렸을 때 부터 듀들란 어를 공부했으니, 편지하나 읽는 건 문제도 아니에요." 또 다시 발견한 헤밀턴의 새로운 모습에 뮤스의 친구들은 캄탄사를 터트렸다. "오... 정말 볼수록 대단한걸?" "그러게 말이야. 함브리겐 대학에 수석으로 들어온 것도 놀라운데, 그런 재주도 있었던거니?" "그럼 어서 읽어봐. 어떤 내용인지?" "그래그래! 어서 읽어 보라고. 궁금해 죽겠어."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힘을 잔뜩 준 헤밀턴은 당당하게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재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다시한번 감탄사를 내뱉은 히안이 얼굴을 드리밀며 물었다. "벌써 다 읽었어? 뭐라는 말이야? 정말 듀들란 제국에서 뮤스를 영입하고 싶다는 내용이야?" 하지만 그토록 당당하던 헤밀턴은 히안의 물음에 아무런 말도 없었고, 오히려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리곤 편지를 잘 접은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선배들... 이 편지 못읽겠어요. 이런 듀들란 어가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더 공부하고 올께요." 이렇게 말을 마친 헤밀턴은 그 충격이 너무나 컸는지 편지를 히안에게 넘기며 방을 뛰쳐 나갔고, 그녀의 모습을 보던 뮤스의 친구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 녀석 어떻게 된거지? 그렇게 자신있게 펼치더니..." 헤밀턴이 나가고 나자 편지를 들고 있던 히안이 그것을 펼쳐보았다. 그 역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고, 교양시간에 듀들란 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에 적혀있는 구불구불한 글자는 처음 보는 글자들이었기에 적지 않게 당황해야만 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낯설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거 듀들란의 고대언어 아니야? 난 이런 글자를 처음 보는데?" 그와 함께 편지를 보고 있던 바르키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사 고대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런걸 써서 편지를 보내겠어? 뮤스도 못읽을 텐데... 혹시 듀들란 제국의 사람들만 쓰는 필기체가 아닐까?" 이렇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고 있을 때, 친구들의 등뒤로 부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건 듀들란 어가 아니라 조이센 대륙이라는 곳의 글자이지. 그러니 당연히 못알아 볼 수 밖에..." 그 말에 곰곰히 생각을 해보던 히안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아! 그랬었던 것이군! 그러니 헤밀턴도 못알아 볼 수 밖에. 하핫! 그런데 너는 이게 조이센 대륙의 글자라는 것을 알 수... 흐엑! 뮤스!" 히안의 말에 깜짝 놀란 친구들이 급히 뒤를 돌아보니 물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있는 뮤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곤 서로를 찌르며 어찌 해야 할지 눈치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뮤스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훗. 뭘 그렇게 뻣뻣하게 서있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뮤스를 보니 더욱 미안해짐을 느낀 카타리나가 친구들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뮤..뮤스 미안해. 사실 몰래 편지를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더듬거리며 사과를 하고 있는 카타리나의 앞까지 걸어온 뮤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고, 궁금증이 가득담겨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후훗. 다들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하고 있다고 켈트 아저씨께 들었어. 그 동안 너희들을 걱정스럽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하다. 잠시 혼란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잠시 잊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되." 일이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로 흐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벌쿤이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형은 듀들란 제국으로 가지 않기로 한거야?" 그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뮤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듀들란 제국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카타리나 누나에게 들었어. 듀들란 제국에서 온 편지를 받은 다음부터 형이 갑자기 어두워 졌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편지를 확인 하고 싶어서 이렇게 몰려 온거지." "하하! 내가 듀들란 제국으로 왜가겠어? 이곳에 공학원과 가족들, 그리고 너희들이 있는데." 뮤스의 확답을 듣자 히안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휴우... 그럼 그렇지. 뮤스가 이곳을 두고 어딜 가겠냐? 앞으로 공학원을 이끌어 나갈 사람인데. 애초 부터 말도 안되는 의심이었다고! 그렇지 뮤스?" 히안의 물음에 뮤스는 잠시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그럼...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이제 막 돌아오는 참인데..." 친구들은 이제 모든 의심을 풀은 듯 시원하게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고 뮤스 역시 오랜만에 그들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친구들과 달리 알지못할 불안함을 느끼며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뮤스는 평소대로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라프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수 많은 지식들을 하나씩 해명 하고자 했고, 켈트가 부탁했었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노크소리가 나면서 실험복을 차려입은 히안이 들어왔다. "이봐 뮤스! 손님이 찾아왔는데?" 히안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뮤스는 손에들고 있던 기구들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응? 또 손님이야?" 뮤스가 공학원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사람들의 방문이 유난히 잦았기에 수시로 연구 도중에 불려나가게 되었는데, 이를 귀찮게 여기긴 했지만 그들과 만나는 것도 공학원 원장으로서의 일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뮤스였다. "휴우... 정말 사람들은 바쁠때만 찾아오는 것 같군. 하긴... 그 사람들에게는 이곳에 찾아오는 것이 급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뮤스의 불만을 듣고 있던 히안은 뭔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뮤스는 의아한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그래? 또, 폴린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입을 삐죽내민 히안은 단단히 토라진 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몰라! 네게 찾아온 손님한테 폴린이 완전히 넋이 나가 있다고! 아무튼 폴린과 사귀고 난 뒤 부터 싸우지 않는 날이 없다니까." 히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뮤스는 피식 웃었다. "풋! 사귀기 전부터 너희 둘은 항상 싸웠잖아? 원래 미운정이 더 무서운 거라고들 하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히안에게 간단한 충고를 하며 실험복을 벗은 뮤스는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럼 나가 보자고. 폴린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손님이 누구인지 볼까?"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있던 히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서 연구실을 빠져나갔고, 뮤스가 미소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연구실을 나온 뮤스와 히안은 간단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공학원 본관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미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은 그 규모가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기에 여러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건물들을 축조하기 위해 백여명의 드워프들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벨링의 황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공학원은 건물간의 이동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본관건물의 응접실 앞에 다다른 뮤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히안이 발을 멈추며 말했다. "후우... 나는 도저히 폴린을 못봐주겠다. 그 매끈하게 생긴 녀석 앞에서 콧소리 흘리는 모습을 어떻게 보겠냐? 혼자 들어가." 하지만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고개를 내저은 뮤스는 히안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누가 뭐래도 너는 폴린의 남자친구고, 폴린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못하게 할 권리가 네게도 있잖아?" 히안이 뮤스의 충고에도 우물쭈물하자 답답한 듯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 둘은 완전히 애들 같잖아. 사실 서로 좋아하면서도 항상 싸우기만 하지.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내가 옆에서 살펴 보기엔 네가 하도 폴린에게 무관심 한 척하니까 오히려 관심을 끌기 위해 저러는 거라고. 사랑은 솔직한 표현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히안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럴까?" "이래뵈도 대현자 라듀아보님에게 여성심리를 배운 사람이다. 한번 믿어 보라고." 다시금 뮤스가 그의 팔을 끌어당겼지만 히안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왜 그래?" "그럼 너는 카타리나에게 왜그렇게 표현을 못하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뮤스는 애써 외면하며 대답했다. "원래 이론과 실제는 다른거라고..." 말을 얼버무림으로서 상황 수습을 할 수 있었던 뮤스는 히안의 손을 잡아끌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폴린과 한 청년, 그리고 중년인이 있었는데, 히안이 말하던 청년의 얼굴은 폴린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있었다. 뮤스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폴린은 가식적인 미소로 반기고 있었는데, 주로 입던 실험은 어딘가 벗어던졌는지 지금은 깔끔한 여성용 정장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어머! 원장님 오셨군요. 손님들께서 오랬동안 기다리셨어요. 호호호홋!" 생각했던 대로 콧소리를 내며 뮤스를 반기던 폴린은 옆에 서있는 히안을 발견하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히안은 여기 어쩐 일이지? 네 손님도 아닐텐데?" 냉랭하게 말하고 뒤돌아선 그녀는 소개를 하기위해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쪽 분은 저희 공학원의 원장님이신 뮤스 드라켄이시고, 그 옆에 허름한 청년은 별볼일 없는 공학자인 히안 크라리엔이라고 한답니다." 너무나 노골적인 소개에 히안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그 사이에낀 뮤스가 폭발 일보직전인 히안을 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뮤스를 찾아온 손님 중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모두의 이목은 그에게 모아지게 되었다. "뮤스군,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보니 정말 안심이군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인지 직감 할 수 있었고, 미소를 지으며 폴린을 지나치며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전 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황제폐하..." 황제폐하라는 말에 눈을 크게뜬 폴린과 히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하핫! 농담은 그만 두라고 뮤스." "하긴 황제폐하께서 왜 이런곳에 몸소 찾아오시겠어. 그렇지 히안?" "그럼! 그럼! 그것도 이렇게 단촐하게 말이야." 그러나 뮤스의 대답은 농담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분위기였다. "너희들도 다시 예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분께서 바로 도이첸 제국의 황제이신 카로이트 4세이시지."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실제라는 것을 깨달은 폴린과 히안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폐하를 몰라뵈었습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폴린 파이시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히안 크라리엔입니다." 폴린과 히안의 깍듯한 인사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황제 쪽이었다. 급히 손을 내저은 황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마시죠. 이런 격식을 원했다면 이런 모습으로 공학원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저 뮤스군께 은혜를 입은 지인으로서 찾아온 것이니까요." 황제의 반응에 분위기를 살피던 폴린과 히안은 어찌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했는데, 뮤스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황제폐하의 말씀이 대로 하는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러는 편이 황제폐하도 편하실테니까."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폴린과 히안은 뮤스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허리를 폈다. "그..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황제폐하이신데..." "이것 참... 내 평생 황제폐하를 이렇게 알현할 수 있다니 믿겨지지가 않는군요." 잠시 어색해진 응접실의 분위기를 파악하던 폴린은 갑자기 떠올랐는지 하고있던 찻잔 정리를 마쳤다. 그리곤 히안의 옷자락을 잡으며 황제와 뮤스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세요. 저희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폴린은 불이라도 난 듯 급히 히안을 끌고 응접실을 빠져나왔고, 히안 역시 그런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참이었기에 순순히 그녀에게 이끌려 나왔다. 응접실에서 나온 폴린과 히안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는데, 특히 폴린은 십년을 감수한 듯한 표정이었다. "휴우... 정말 기절할 뻔 했어. 설마 저 사람이 도이첸 제국의 황제폐하인줄 누가 알았겠니..." 그녀의 말에 킥킥대며 웃은 히안은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쿠쿡... 네 표정 정말 가관이더라. 완전히 하옇게 질렸던걸? 천하의 폴린도 황제폐하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히안의 말에 입을 삐죽 내민 폴린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치! 너는 안그랬는 줄 알아? 뻣뻣하게 굳어가지고 서있는 모양은 정말 웃겼다고." 더 이상 말을 해봐야 말다툼으로 번지리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히안은 손을 내저었다. "이러다가 또 싸우겠군. 갑자기 긴장했다가 풀리니 배가 고픈데 그만하고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프다. 사실 이 치마가 작아서 졸라매느라 힘들었거든. 이게 다 너때문이야..." "내가 뭘 어쨌는데?" 히안의 되물음에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맛만 다신 폴린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게 있네요! 나 비싼거 먹을 테니까 돈은 네가 내라. 알겠지?" "훗! 뭐 까짓... 기분이다. 아무거나 골라보라고!" "어라 왠일이야? 토 한번 달지 않고 선듯 허락하다니?" 대답을 미룬 히안은 오랜만에 기분좋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팔에 매달린 폴린을 이끌었고, 뮤스의 짧은 충고를 속으로 되세기고 있었다. '사랑은 솔직한 표현이라고? 한번 노력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투명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에 가져간 뮤스는 구수한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넘겼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있는 황제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옆의 중년인은 낯이 설었기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폐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동석을 하신 것을 보아하니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군요." 차를 마시고 있던 황제 역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곤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 맛이 아주 좋군요. 그렇지 않아도 소개시켜드리려고 하던 참입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새로운 외교대신을 맡게되신 고듀트 루그시드경이십니다. 애초 계획은 저 혼자 올 생각이었지만, 뮤스군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소개가 끝나자 고듀트는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황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뮤스원장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꼭 만나뵙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만나ㅂ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군요." 이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일국의 외교대신이라는 높은 직책에 있으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허헛! 황제폐하 앞에서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제가 더 부끄럽습니다." 가벼운 소개를 통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뮤스가 먼저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폐하, 그 동안 소문을 듣자하니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셨더군요.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답니다. 그에 대해 조금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뮤스의 말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황제는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뮤스군이 떠날 때 제가 가비르 재상을 통해 약속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때 뮤스군이 돌아올 때까지 황실을 개혁할 것이라고 약속드렸습니다. 그것은 뮤스군의 누명에 대한 사죄의 뜻이기도 했고, 이 제국이 오랜 역사에 걸처 가졌었던 병폐이기도 했었죠. 저는 그것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황제가 겸손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고듀트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헛. 황제폐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사실 황실의 틀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은 역대의 어느 황제께서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뮤스를 바라본 고듀트는 그가 없는 동안 황제가 단행했던 일들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대단한 일은 누가 뭐라하더라도 황실 귀족들의 체계 권한을 정리하고 제한한 것이었지요.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황실에 머물며 모자라는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정사에 참여를 해왔었습니다. 그러한 귀족들로부터 황실 비리가 시작되어 왔던 것이죠. 물론, 뮤스원장님께서도 피해자중 한 명이시니 더 이상의 설명이 없더라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아..." 말을 하던 고듀트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지 걱정하여 뮤스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는 추방에 대한 감정을 애초부터 가지고있지 않은 듯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었다. "흠... 어찌되었건 매쉬라스 후작의 음모가 드러난 것을 시작으로 하여 황제폐하는 가비르 재상님과 함께 그와 연관된 귀족들을 밝혀냈고, 그들의 권한을 박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황권이 크게 신장되었고, 각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뽑아 황실의 요직에 앉히게 됨으로서 보다 원활한 정책결정 체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제를 개혁함으로서 국민들의 소득을 증진시키고, 지방 관료들의 비리를 원천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고듀트는 마치 자신이 한 일이기라도 한 듯 침이 마르게 이야기를 이어갔고, 뮤스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황실의 개혁 내용을 듣고 있었는데, 그라프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정치와 경제에 대한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황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게 되었다. 황제는 뮤스와 고듀트의 대화를 들으며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훗... 이번에 온 것은 뮤스군과 개인적으로 대화나 할까하고 온 것인데, 결국은 황실의 이야기로 흐르는군요. 사실 뮤스군 앞에서 황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답니다." 이에 미소로 대답한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훗... 지난 일에 대해서 너무 크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간에 저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추방을 당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사실 저를 원망하고 계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이곳에 오는 며칠동안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답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하는 황제를 보며 찻잔을 비운 뮤스는 황제와 고듀트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후훗. 이제 고듀트경께서 저를 만나고자 하시는 이유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황제폐하께서도 그 이유를 대충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고듀트경께 직접 듣는 것이 더욱 좋겠군요." 뮤스의 말에 황제와 고듀트는 생각을 들킨 듯 깜짝 놀라고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고듀트가 황제를 따라 나선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고듀트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군요. 사실 제가 황제폐하를 따라 나선 것은 듀들란 제국의 일 때문입니다." 고듀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말을 받았다. "이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이 공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군요?" "어찌 그러한 사실을 아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듀들란 제국에 공학원이 세워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쯤 그 결실이 드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 중이었죠. 게다가 때 마침 외교대신께서도 오셨으니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의 표정을 지은 고듀트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흠... 역시 원장님은 제가 생각하던 이상이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드릴 것은 원장님의 말씀대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 때문입니다. 듀들란 제국은 4년 전부터 공학원을 중심으로 제국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는데, 벌써 상당한 진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내년 초, 제국개발 사업의 성과에 대한 발표회를 개최한다더군요. 그에 대한 초청장은 벌써 각국의 황실에 전달된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 사이의 라이벌 의식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듀트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으로서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겠군요. 황제폐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질문을 받은 황제는 머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 역시 황제이기 이전에 도이첸 제국의 핏줄입니다. 그러니 듀들란 제국에게 밀린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뮤스의 표정을 살피던 황제는 손톱을 매만지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었다. "저의 부탁 때문에 고초를 겪은 뮤스군께 또 다시 어떠한 부탁을 드리는 것이 무리일 줄은 알지만, 염치없게도 다시 한번 이번 일을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황제의 부탁에 뮤스는 조금 갈등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쉽게 결정할만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흠... 솔직히 국가 수준의 지원을 받는 일이라면, 저 혼자 결정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서 누님이나 드워프분들과 상의를 해봐야 하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 일을 맡고 싶습니다." 그럭저럭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 황제와 고듀트의 얼굴은 밝아지기 시작했고, 황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뮤스군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정말이지 기쁘군요.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뮤스군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대 제국의 황제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한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오히려 제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신 분이 몸소 찾아오셔서 부탁을 하시니 어찌 제가 거절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핫! 저를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해주신 분이 바로 뮤스군입니다. 그런 분께 힘을 휘두른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죠." 이로서 공적인 일에 대한 대화를 마치게 되자, 고듀트는 두 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뮤스와 황제는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대화가 오가는 사이 뮤스는 황제의 당당하고 사려 깊어진 모습에 내심 감탄을 하게되었고, 황제는 과거에 비해 한층 지혜로워진 뮤스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공학원 저택의 서재 내부는 작은 촛불 몇 개에 의지하고 있었다. 물론 전뇌력 공급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전뇌등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드워프들과 함께 의논을 할 때에는 정신집중이 안 된다는 성화에 따라 항상 촛불만을 켜놓곤 했던 것이었다. 흔들리는 촛불에 크라이츠, 드워프 형제들 그리고 뮤스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모두들 손으로 턱을 궤며 골돌히 생각 중이었지만 뮤스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크라이츠와 드워프들을 살펴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염을 한번 쓸어 내린 레딘이 가볍게 손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나저나 뮤스군에게 질문이 하나있네. 자네는 왜 도이첸 제국을 도우려고 하는가? 그 젊은 황제 때문에 그 험한 고생을 했지 않나? 실크로스교인가 뭔가를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런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레딘의 질문을 받은 뮤스는 이곳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물론 실크로스교에 관련된 일이 물론 황실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꼭 황제폐하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매쉬라스 후작의 간계를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당한 것도 저의 모자람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게다가 황제폐하는 제게 사죄의 뜻을 표하기 위해 황실의 개혁을 과감히 단행했고, 매쉬라스 후작 역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니, 남아있는 감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있었으니 어찌 보면 제가 감사해야하겠죠." 그것이 그라프와의 만남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던 켈트는 그 뒷 배경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있었기에 찝찝함을 느꼈고, 눈은 자연스럽게 크라이츠를 향해 돌아갔다. 마침 크라이츠 역시 뮤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음... 황제를 원망하는 감정을 가지고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꼭 그를 도와 주야할 이유도 없는 것 같구나. 엄밀히 말해 너는 도이첸 제국의 국민이 아니니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도 무관한 것이고, 황제 역시 네가 이번 일을 거절한다해도 그의 곧은 성품으로 봐서 네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뮤스는 크라이츠의 말에 충분히 수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도 이미 생각해 두었는지 입을 여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물론 누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제가 꼭 황제를 도와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제 능력이 닿는 모든 일을 이곳에서 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더욱 발전된 사회를 위해 연구를 하는 것이 공학도가 걸어야 할 길이니까요. 그것은 장영실 아저씨께서 제게 부탁한 일이기도 하고, 저도 역시 해보고 싶었던 일입니다." 이번에는 뮤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있던 블뤼안이 뮤스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듀들란 제국이 제국개발사업을 시작한지 4년이나 되었다고 했는데, 과연 지금부터 시작 한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듀들란 제국의 발표회까지는 겨우 다섯 달 밖에 남지 않았잖아?" "물론 듀들란 제국이 황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하고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공학원을 설립한 것이나, 전뇌거나 그 외의 제품들을 양산하고 판매한 것은 우리측이 훨씬 먼저였습니다. 그 만큼 먼저 소비시장을 확보했다는 뜻이 되고, 듀들란 제국에서 지금 당장 시제품을 양상하고 판매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가 확보한 소비시장이 있기에 그만큼 소비시장진입이 더뎌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듀들란 제국 내의 시장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블뤼안의 되물음에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비록 우리가 먼저 소비시장을 장악했다해도 결코 유리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이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거참... 말이 점점 복잡해지는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지는 이점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만든 제품들의 단점을 그들은 유연하게 보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전뇌거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죠. 그 동안 공학원에서 발매된 전뇌거는 뛰어난 성능을 인정받긴 했지만, 애초 구매자의 입장에서 설계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마나구나 자력통 등의 값비싼 부속을 쓸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가격이 비싸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한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은 처음 설계시점에서 부터 이 점을 계산에 넣어 가격을 대폭 낮출 뿐만 아니라 효율 역시 높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저가형 전뇌거를 찾는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한마디로, 그 어느 쪽도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의 물음에 뮤스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딱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결국 어느 쪽이 더욱 나은 물건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뮤스의 대답을 들으며 형제들의 표정을 살피던 블뤼안은 자신을 배를 한번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나는 찬성일세. 왠지 경쟁한다는 느낌이나를 설레게 만드는걸?" 그의 뒤를 이어 켈트 역시 찬성하고 나섰다. "나도 블뤼안과 비슷한 생각이야. 비록 우리 드워프들이 인간국가간의 세력싸움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런 일이라면 또 다르지... 나도 찬성이야." 그리고 브라이덴과 레딘 역시 찬성하고 나서게 됨으로서 드워프들은 모두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이제 뮤스와 드워프들은 마지막 남은 크라이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비밀 장부를 꺼내어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더니, 이내 장부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장사는 모험이지. 게다가 그에 대한 지원은 모두 황실에서 해줄 테니,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은 없을 테고, 오히려 일정 수준의 소득이 우리에게 돌아오니, 나야 마다할 이유가 없단다. 호홋! 내가 일을 해야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되건 무슨 상관이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물질만능주의의 전형인 크라이츠의 성격이 또 한번 드러나게 되자 드워프들과 뮤스는 어이없음에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라이델베르크의 공학원은 도이첸 제국의 국가 사업을 맡기로 의견이 모아지자, 그 다음날부터 국가 사업계획을 작성하는 등의 기초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고, 뮤스는 다시금 눈코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황제와 고듀트는 공학원에서 그들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기뻐했으며, 한 달 후 공학원에서 사업설명회를 개최하기로 약속을 잡은 뒤 공학원의 지원 예산을 짜기 위해 황궁으로 급히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전해들은 공학원의 식구들은 정신없는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는데, 각자 맡은 분야의 현황보고서를 며칠 후까지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공학원의 공학자들은 하던 일을 잠시 접고 보고서 작성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연구원들은 그들을 보조하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뮤스의 친구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만큼 잘 아는 관계였기에 더욱 분발해야만 했는데, 최소한 친구들 앞에서 창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무렵이 되자 연구실을 다섯 개 쯤 합해 놓은 크기의 회의실 안으로 뮤스의 친구들이 한 명씩 들어오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안고있었다. 그것들은 각 도시의 공학원에서 부터 올라 온 부품 수급현황이나 자원 수급현황, 개발비 내역, 인건비 내역등 수십 종에 이르는 서류 뭉치가가 섞여있는 것이었는데, 평소 서류의 중요성을 못 느낀 나머지 정리조차 하지 않던 차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자 눈에 보이는 모든 서류들을 모두 쓸어모아 온 것이었다. 손에든 서류더미를 힘겹게 내려놓은 바르키엘은 손을 털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지금까지 한번도 안 했던 현황보고서를 모레까지 제출하라니, 뮤스도 너무 하는거 아냐?"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이 고개를 끄덕인 가이엔 역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게... 서류들을 이럴 때 쓸 거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이 정도까지 쌓이기 전에 정리를 했을 텐데. 이 많은걸 언제 다 정리하지?" 이번 일에는 착실하기로 이름난 세이즈 역시 어쩔도리가 없었는지 난색을 표하고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작업을 해야할 것 같아. 그런데 벌쿤과 히안은 아직 안왔니?" 회의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자신의 서류를 몇 개로 분리하던 카타리나가 대답했다. "히안은 아까 연구실에서 나오는걸 봤으니 금방 올 거야. 그리고 벌쿤은 잘 모르겠는걸?" 카타리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들! 나 좀 도와 줘!" 이에 친구들이 시선을 돌려보니 문 앞에서 비틀거리며 머리 위까지 쌓인 서류뭉치들을 안고있는 히안을 볼 수 있었는데, 바싹 마른 체구에 다른 친구들 보다 두 배 정도나 많아 보이는 서류뭉치를 싸들고 오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고 있었다. "쯔쯧! 내가 좀 도와줄게." 짧게 혀를 찬 바르키엘은 그가 안고있는 서류의 반을 덜어줬고, 그제야 서류에 가려져 있던 히안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었다. 더운 날씨까지 더해져 땀을 비오듯이 흘리던 그는 신경질 적으로 서류를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뮤스 이 녀석 나타나기만 해봐. 내가 가만히 안놔둘 테니까!" 히안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그의 등을 밀치며 벌쿤이 들어왔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는 대조적으로 고작 몇 뭉치의 서류들만 가지고 오는 중이었는데, 오히려 표정은 더욱 울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진 세이즈가 물었다. "벌쿤. 너는 정리할게 겨우 그것 밖에 없어?" 카타리나 역시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러게! 벌쿤이 가사 일을 잘하는 만큼 정리도 잘 하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무슨 일인지 벌쿤은 고개를 저었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무겁디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 동안 내 앞으로 도착한 보고서는 전부다 연습장으로 쓰던지, 연구실이 비좁아 보여서 폐기처분을 했더니 남은건 이거 밖에 없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분명 보고서를 모두 폐기처분 한 사실을 형이 알면 엄청나게 화를 낼텐데..." 울상을 짓고있는 벌쿤을 바라보던 친구들은 자신들은 그나마 일할 거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안도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고, 남자친구의 불행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세이즈는 어깨를 두들겨주며 자신이 맡은 서류의 반 정도를 나눠주며 말했다. "벌쿤, 이거라도 열심히 정리해봐. 그럼 뮤스가 정상 참작 정도는 해줄지도 모르니까." 위로를 하는 것인지 화를 부축이는 것인지 모를 그녀의 말을 들은 벌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며 그녀의 서류를 받아들었다. 회의실의 창을 통해 붉은 저녁의 햇살이 스며들어 올 무렵이 되자 회의실을 가득 어지럽히고 있던 서류뭉치들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는데, 각자 바닥에 주저앉아 서류를 찾아 분류하던 뮤스의 친구들은 그만큼 많이 지친 표정이었다. 이마의 땀을 한번 훔친 카타리나는 정리해놓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휴우... 정리는 대충 되어 가는데, 이걸 언제 검토하고 보고서를 만든담..." 그녀의 말에 은근하게 웃은 가이엔은 서류의 모서리를 맞추며 말했다. "풋. 그렇게 힘들면 뮤스이게 일 좀 빼달라고 부탁해보렴. 설마 여자친구 부탁하나 못 들어주겠니?" 이에 심퉁해진 카타리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뮤스가 그렇게 융통성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니? 뮤스가 좀 꽉 막힌 면이 있어서 내가 부탁해도 안 될거야. 그리고 너희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나 혼자 얌체같이 빠져나가는 것도 말도 안되고." -똑똑! 카타리나의 이야기는 노크소리에 멈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뮤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하루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피곤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우...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구나?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사실 공학뇌동심결의 효용으로 인하여 며칠 동안 수면을 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그였지만, 밤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신적 피로가 쌓였던 것이었다. 그 모습에 불만조차 잊은 히안은 안타까움에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쯧... 대체 뭘 했기에 하루 사이에 이렇게 늙었냐? 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지 그래?" 카타리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뮤스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래 히안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녀의 따뜻한 말에 고마움을 느낀 뮤스는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훗! 나는 괜찮아. 오히려 너희들이 하루 종일 고생인 것 같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춘 바르키엘은 보란 듯이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충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을 맡았다는 소리는 켈트아저씨를 통해서 들었는데, 이 서류들 하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 바르키엘의 질문을 받은 뮤스는 회의탁자의 의자를 빼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해주기 위해서 찾아 온거야. 잠시만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으로 모여봐." 가볍게 말을 던진 뮤스는 자신이 가지고 온 문서들을 하나씩 나눠주었고, 친구들은 그것을 받아들며 각자의 자리에 앉고 있었다. "너희들도 듀들란 제국에서 공학개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은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우리가 맡게된 일도 그에 관계가 된 것인데..." 뮤스는 친구들의 눈을 한번씩 마주치며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어제 황제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하여 자신의 생각, 그리고 크라이츠와 드워프들 사이에 있었던 회의 내용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이번 일은 공학원에서 진행하고있는 모든 분야에 걸친 대규모의 일인만큼 공학원의 형황에 대한 서류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부탁했던 거야. 사실 내가 공학원에 없는 동안 너무 많이 변해서 아직도 공학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소하거든. 원장으로써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지... 후훗!" 뮤스의 엄살 섞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하루종일 자신들이 해왔던 일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듀들란 제국과의 라이벌의식에 의해 없었던 의욕마저 두눈에 흐르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흥분하고있던 벌쿤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듀들란 제국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질 수는 없지!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께!" 벌쿤이 당당하게 자신의 결심을 표하자 그에게 시선을 돌린 친구들의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는데, 히안이 자신의 서류더미를 두들기며 피식 웃었다. "풋! 벌쿤, 그런 말은 네가 맡은 서류들을 찾아온 후에 하는 것이 어떨까? 그 중요한 서류들을 모두 폐기처분해버렸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그..그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벌쿤을 보며 친구들은 동정의 한숨을 내쉬었고, 영원한 자신의 편이라 믿고있던 세이즈마저 그를 외면하자 결국 벌쿤은 모든 의욕을 한 순간에 상실 한 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뮤스는 벌쿤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주며 위로했다. "후훗. 너무 기죽지 않아도 되니까 얼굴 펴라 벌쿤. 사람이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실수를 하게되었다면 그에 실망하기보다는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하는 거야. 알겠어?" "응 형." 자신의 위로에 벌쿤의 얼굴이 밝아지자 이번에는 시선을 친구들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공학원의 가장 대표적인 제품은 바로 전뇌거이고,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은 틀림없이 이에 대한 대응으로 더욱 발전된 전뇌거를 발표하게 될거야. 그것이 어떠한 성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가 생산한 전뇌거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란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니 앞으로는 전뇌거의 개량 부분을 맡고 있는 너희들도 남다른 각오로 임해야 할거야.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친구로서, 공학원의 원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주기를 부탁한다." 뮤스의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대답대신 굳은 의지가 담긴 얼굴을 하고있었는데, 뮤스는 이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고, 책상을 한번 두들기며 마무리를 했다. "그럼 남은 작업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대한 공학자 설명회가 있을 테니 꼭 참석하도록 해. 그럼 나는 다른 공학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러 갈 테니 나중에 보자." 뮤스가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자 짧은 시간을 통해 큰 의무감을 새롭게 가지게된 친구들은 스스로 의욕을 부축이며 얼마 남지 않은 서류정리를 마무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난제 태양이 가장 기승을 부릴 늦여름이 되자 살갓을 파고들듯 따가운 햇살이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 시내를 내려 쬐고 있었다. 이에 여성들은 드레스가 치렁하게 달린 양산을 하나씩 가지고 다녔고, 남성들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채 느긋한 발걸음 옮기고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정도의 햇살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건강한 구리빛으로 그을린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대륙의 내륙에 위치한 쟈트란은 듀들란 제국의 도시들 중에서도 습도가 낮은 축에 드는 도시였기에 사람들은 더위를 크게느끼지 못했고, 그늘진 곳에서는 바람이 불어 약간의 땀 마저 식혀주었기에 비교적 쾌적한 여름을 지낼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었다. 뜨거운 햇살로인해 듀들란 제국 황궁의 건물들이 달아오르자 시녀들과 하인들은 황궁에있는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귀족들은 그늘진 곳에 모여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한 인물들 중에는 회색의 옷을 입고있는 장영실과 마법사의 망토를 어께에 걸치고있는 루스티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는데, 계절에 상관없이 매 한 가지의 옷을 걸치고 있는 둘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띄고 있었다. 장영실은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한 관계로 수염이 덮수룩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에는 뭔가를 해나가고 있다는 성취감에 빛이 나는 듯 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장영실은 작은 탁자 위의 음료수로 입을 적시며 말했다. "음...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지도 모르겠군요. 오히려 낮에 해를 본 적도 오래된 것 같고..." 그의 옆에 함께 앉아있던 루스티커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손에들고 있던 음료수를 마셨다. "허헛! 그러게 말일세. 일에 시달리다 보니 공학원에서 보름만에 나온 것이군. 그나저나 재상이 벌써 각국에 발표회 초청장을 발송했다고 하던데 시일을 맞출 수 있겠나?" 루스티커의 말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미 기관열차의 시범구역 운행이 어제로 끝난 상태이고, 듀들란식의 전뇌거도 모두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로서 최소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지는 않는 상황이죠." 루스티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모자라지는 않는다니? 어투를 보아하니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우리측의 전뇌거제작 기술이 경제적인 면이나 효율적인 면에서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정교함이나, 객관적인 성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많습니다. 특히 도이첸 제국 전뇌거의 주동력원인 마나구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어서 전뇌력을 충전해 쓰는 우리쪽의 전뇌거보다 월등하지요. 그렇기에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에게는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가 더욱 구미에 당길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기관열차는 어떤가? 아직 도이첸 제국에서는 기관열차라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랑스럽다는 듯한 루스티커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웃은 장영실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머금으며 대답했다. "후훗! 도이첸 제국에서 못만든 것이 아니라 아직 만들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측은 국가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것인만큼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그에 따라 기관열차를 우선적으로 제작했던 것입니다. 반면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은 개인적인 성향을 띄기 때문에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기관열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만일 도이첸 제국의 황실 역시 우리측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껴 공학원에 본격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쫓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장영실의 설명에 이마를 찌푸린 루스티커는 고개를 내저었다. "에잉...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알았다면 듣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뻔 했군. 오히려 기분만 더 불편해져버렸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던지는 루스티커를 바라보고있던 장영실은 위로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실 것은 없습니다." "음?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루스티커는 호기심이 이는지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고, 이번에는 장영실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우리측이 현시점에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그 문제의 마나구를 만들 수 없기에 전뇌력의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력발전소는 지형적인 문제 때문에 공급의 한계가 있는 것이죠." "흠... 그야 그렇지. 나 역시 마나구를 만들어 보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네. 여러면에서 살펴본 결과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볼수가 없겠더구먼.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니 말일세." 마법사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루스티커가 고개를 내젓자 피식 웃은 장영실은 그제서야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지난 기간동안 전뇌력 공급 문제에 대해 여러방면으로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만, 그러던 중에도 계속해서 마나의 존재가 저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더군요. 제 몸에서 흐르고있는 뇌공력이나, 무공에 사용하는 내공의 힘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데다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중에는 항상 그 기운이 충만해있다는 점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물이나 공기처럼 특정한 물체에 저장이 된다는 사실은 더더욱 매력 적인 요소였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루스티커는 씁쓸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 마나는 대기중에 항상 충만한 것이지만, 그것을 쓸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네. 그리고 몇 세대를 넘기지 않아 우리같은 마법사는 종적을 감춰 버리겠지... 그런만큼 마나를 가지고 전뇌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힘든 일일세..." 씁쓸해 보이는 루스티커의 표정을 한번 살핀 장영실은 한 쪽에 놓여있던 책을 펼쳐들며 물었다. "하지만 이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도서관의 서적들을 섭렵하던 동안 흥미로운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라듀아보라는 분께서 저술하신 책인데... 음, 이 부분이군요." 장영실이 건네준 책을 받아든 루스티커는 눈에 힘을주며 그가 가리킨 부분을 읽어내려갔다. "어디보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최고의 축복은 마나라 할 수 있다. 마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모든 만물들은 마나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의 한 예로 마법사가 아닌 이상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마나가 충만한 장소의 인간들은 항상 기운이 충만하여 자신의 일에 적극으로 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렇지 않은 장소의 인간들은 무기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정신이 나태해져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마나가 지역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마나는 항상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오늘 마나가 충만하다고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나에 대한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군..."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있는 루스티커를 바라본 장영실은 그 다음 구절을 짚으며 말했다. "이 부분 부터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구절에 아주 중요한 열쇠가 들어있으니까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루스티커는 대충 눈으로 그 내용을 훑어보며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말인가? 흠... 주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그들이 살아갈 터전인 땅과 하늘과 바다를 만들어내셨다. 주신의 한 조각 살점은 흙이 되었고, 한 올의 머리카락은 하늘이 되었으며, 한 방울의 땀은 바다를 이루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터전이 마련되자 주신께서는 한 모금의 숨결을 세상에 불어넣어 주셨고, 그 숨결이 닿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생명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주신의 숨결이 바로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마나인 것이다. ...중략... 주신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도 만물들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러나 그분의 숨결은 미물들이 직접 받아내기에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기에 이를 중화하기 위한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된 존재가 드래곤이다. 이후, 주신께서는 드래곤들의 몸에 고귀한 숨결을 불어넣으셨고, 드래곤들은 이를 중화시켜 세상으로 흘리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이 드래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마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라 설명될 수 있는것이다. ...중략... 드래곤이 발산하는 마나는 그들의 심장으로 부터 공급된다. 심장이 인간이나 동물들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작용을 하듯이 드래곤들의 심장은 마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로 드래곤의 심장은 엄청난 마나의 저장고라 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죽은 이후에도 일부의 마나가 드래곤의 심장에 남게 된다. 물론 일부라 해도 상상치도 못할 만큼의 마나이기에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연사한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되었던 적도 있었다." 다음 단락까지 모두 읽어내려간 루스티커는 뭔가 떠올랐기에 설마하는 생각을 가지며 물었다. "혹시! 자네 드래곤의 심장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아 버렸고,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 역시 간단하게 따진다면 마나구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니 전뇌기기들의 동력원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드래곤의 심장으로 전뇌력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후훗...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이 책의 설명대로 그 드래곤의 심장이 엄청난 양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장영실의 말에 루스티커는 턱을 쓸며 대답했다. "아마도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일 것일세. 마나의 양을 수치로 표현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애써 표현하자면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 채용된 마나구의 적게는 수십 만배, 많게는 수백만 배에 이르는 양으로 추정되고 있다네." 루스티커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짚은 것이군요. 바로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보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그 드래곤의 심장이 꼭 필요합니다!" 장영실이 흥분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루스티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소를 터트렸다. "헛! 세상 일 이 말처럼 쉽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네. 그만큼 자네는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있다는 것일세. 이 책에서 나와있듯이 과거 수 많은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손에 넣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나섰네. 하지만 어떠한 탐지 마법으로도 그 흔적을 찾아 낼 수 없었기에 별 성과가 없이 세월만 흘러가게 되었고, 마법사들 조차 드래곤의 심장을 찾는일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지. 결국 드래곤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되었다네." 루스티커의 부정적인 견해에 인상을 찌푸린 장영실은 루스티커가 들고있던 책을 짚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라듀아보라는 대현자께서 쓰신 이 책의 내용이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저은 루스티커는 먼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흠... 완전히 사실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도 없는 일일세. 말 그대로 과거의 마법사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가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니까..."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장영실은 진지한 표정으로 루스티커의 의자 가까이로 몸을 움직였다. "허면, 루스티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스티커님 역시 드래곤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불가능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속되는 장영실의 질문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은 루스티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드래곤의 심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있는 몇 안되는 마법사 중의 한명일세. 게다가 그것이 어디있는 지도 대충 짐작을 하고있지.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나의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생각지도 못했던 루스티커의 대답에 장영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추측이라도 좋으니 그 이야기라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사실 이번일을 떠나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너무나 강렬합니다. 직업탓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어서..." 반짝이고 있는 장영실의 눈빛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우려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 그렇다면 다른 생각말고 듣기만 하게나. 만에 하나, 나의 추측이 틀리기라도 한다면 인간이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되는 곳이니 말일세..."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장영실이 숨을 죽이며 루스티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루스티커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자신이 추측하게 된 경위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약 2000년 전, 아직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 그 외의 국가들이 성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라네. 대륙에는 한 마리의 드래곤이 오랜 수면기에서 깨어나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지. 그 드래곤의 이름은 헬보네츠라고 전해오고 있지만, 그저 떠도는 소문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이 확실한 이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어쨌든 그 드래곤은 검은 비늘을 가지고있는 블랙 드래곤이었고, 모든 종류의 드래곤을 통털어 보더라도 몇 되지 않는 고룡 중의 한 마리였다네."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듯이 눈을 반짝이면서 듣고있던 장영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루스티커의 말을 잠시 중단시켰다. "말씀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듣자하니 드래곤이 여러 종류로 나뉘어져 있는 듯 합니다만, 그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장영실의 질문을 받은 루스티커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드래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총 다섯 종류의 드래곤이 있다네. 지금 이야기에 나오는 드래곤을 블랙드래곤이라 부르는 것 처럼 그 비늘의 색깔에 따라 드래곤의 종류를 나누게 되는데, 블랙드래곤을 포함하여 레드드래곤, 블루드래곤, 화이트드래곤, 그린드래곤... 이 다섯 종류일세. 또, 고대의 문서를 보면 골드드래곤과 실버드래곤이 존재 했다고도 하지만 목격 된 적은 없었지." "흠... 상당히 많은 종류의 드래곤이 있었군요." 장영실이 어느정도 이해한 듯 하자 루스티커는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드래곤은 그 종류에 따라 성향 역시 제각각이었는데, 그 중 블랙드래곤은 여러 드래곤들 중에서도 흉폭하고, 독단적이었기에 다른 드래곤과 교류를 하지 않는 유일한 드래곤이라네. 그러한 드래곤이 본체의 모습으로 인간의 눈에 띄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대륙의 전역은 공포에 휩쌓이게 되었고, 당시 존재하던 국가의 왕들이 모두 모이는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회까지 열리게 되었지."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가 지금껏 생각하던 드래곤의 모습과는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곳에서는 용이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가 온 곳에서는 용이 성스러운 동물이라 하여 행운을 가지고 온다 믿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드래곤들이 흉폭한 것은 아닐세. 그중에서도 그린드래곤은 아주 유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없지." "그린드래곤이라면 청룡... 그랬던 것이군요." 그제서야 장영실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루스티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렇게 각 국의 왕들이 모이게 되자 이를 알아챈 블랙드래곤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드래곤의 브래스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 이를 보다못한 왕들은 블랙드래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고, 마침내 블랙드래곤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각국의 왕들에게 전달하게 되었지." "그 요구사항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로 자신이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었고, 이 대륙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겠으니 마땅한 장소와 황금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네. 그 블랙드래곤은 다른 대륙에서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이 오이랍대륙으로 오게 된것으로 추정되고 있지. 그리하여 각국의 왕들은 알맞은 자리를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찾게 된 장소가 바로 구바닌 산맥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호수였다네. 워낙 험했기에 각국의 왕들역시 전혀 관심없는 땅이었고, 가장가까운 도시가 200켈리 이상 떨어져 있었으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던 것이지." 제국개발 사업을 통해 장영실 역시 이곳의 지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구바닌 산맥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구바닌 산맥이라면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을 나누고 있는 산맥이 군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호수라면, 혹시 현재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우는 곳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물론 드래곤 역시 왕들의 속샘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흑룡의 호수가 워낙 아름다웠기에 만족했고, 그 곳에 레어를 틀게되었다네.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름답다는 곳을 드래곤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네. 쩝... 어쨌든 그 이후로 흑룡의 호수는 대륙의 마역중 한 곳으로 불리게 되었고, 인간이나 그외의 어떠한 종족도 그 주변에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되었다네." 그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며 까칠한 턱의 수염을 매만지던 장영실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렇다면 드래곤의 심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드래곤이 사는 곳이군요." 장영실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루스티커는 난간에 기대어 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의 심장은 드래곤이 죽은 자리에 있는 법... 자연사한 드래곤의 모든 신체부위는 공기중으로 흩어져 사라지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주먹만한 구형으로 그 자리에 남게 된다네." "루스티커님의 말씀은... 그 블랙드래곤이 죽었다는 것입니까?" "먼저 말했듯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쯤 생명력을 잃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네. 아무리 오래 사는 드래곤이라도 그 생명력은 끝이 있는 법이니까." 장영실은 루스티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블랙드래곤이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블랙 드래곤의 습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네." "습성이라니요?" "블랙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그 종이 다르더라도 가끔 교류를 한다네. 하지만 블랙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대한 욕심이 굉장한데, 심지어는 같은 드래곤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침범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헌데, 몇 백년 전 흑룡의 호수로 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틀림없이 붉은 비늘을 가진 레드드래곤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다면 블랙드래곤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 틀림다는 것일세. 만일 블랙드래곤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 레드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에서 움직이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일세." "결국 문제는 하나군요. 그 레드드래곤을 봤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보면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린 루스티커는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 목격자를 찾이 진위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거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네. 그런 이유로 결국은 추측머물게 될 수 밖에 없었지." 그렇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된 장영실은 루스티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루스티커님께서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주십시오. 재상 각하께 말씀 드리면 의외로 쉽게 알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훗... 이제는 내 개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게 되었으니 자네의 말대로 다시한번 그에 대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재상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하니 또 그놈의 복잡한 서류를 꾸며야 겠구먼." "그럼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러다간 제 명에 죽지도 못할 게야... 에잉...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루스티커는 엄살스러운 말을 뱉으며 몸을 돌렸고, 장영실 역시 잠시간의 휴식을 접으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며칠 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넓은 실내에는 백 여명의 사람들이 단상 위에 서서 조리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뮤스를 주시한 채 앉아있었다. 오늘이 바로 뮤스가 공학원의 원장으로서 처음으로 공학자 설명회의 날이었던 것이었다. 단상을 제외한 곳은 전뇌등을 꺼둔 상태였기에 어두웠고, 뮤스가 서있는 단상 부근에만 전뇌등이 켜져있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집중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상위에서 걸음을 옮기며 청중들을 향해 설명을 하던 뮤스는 손에들린 요약서를 한장 넘기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또, 이번 이번 국가사업을 맡는데 있어 듀들란 제국에 비해 유리한 조건은 앞서 설명 드렸던 시장선점의 측면이나 다수의 제품군을 가졌다는 측면 외에도 공학원 형태의 유리함도 들 수 있습니다.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에 비해 우리측의 공학원은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있습니다. 그 덕에 폭넓은 시장을 구축 할 수 있었고, 현지로부터 값싸고 질좋은 자재를 직접 조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까지 계산한 부품조립공정시설을 제국의 전역에 구축하고 있기에 제품의 대량생산에 가장 이상적인 모형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이곳에 모이기 이전부터 미리 나눠준 설명문을 읽어 보았던 청중들은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감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술렁임이 그치고 실내가 조용해지자 장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요약서를 말아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학원의 형태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각 도시의 공학원들이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있기에 공학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며칠전 보고서 작성때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 공학원에서 부터 모여든 정보들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현제의 업무에는 거의 활용을 못하는 실정이 되어 버린 것이죠. 게다가 이곳 본원으로 부터 발송된 지시사항이 각 공학원에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짧아도 3일... 앞으로 급박하게 돌아갈 상황들을 생각한다면 큰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청중들은 뮤스의 의견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있었는데, 지난 며칠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그 방식의 한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잠시 말을 멈추었던 뮤스는 단상의 한쪽에 서있던 켈트와 드워프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고, 그들은 흰색 천이 뒤덮여있는 탁자를 단상의 한 가운데로 들어날라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낀 뮤스는 손을 모아쥐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물건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워프분들과 함께 제작한 것입니다." 뮤스는 말과 함께 탁자를 덮고있던 흰색의 천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탁자 위에는 각기다른 모양을 가진 세개의 기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부터 첫번 째 자리에 놓인 것은 수 많은 전뇌선이 복잡하게 꽂혀있는 가로, 세로 50셀리 크기의 검은색 기기였고, 두번째 자리에 놓인 것 역시 그와 비슷한 크기에 몇개의 버튼이 빛을 내고있는 기기였다. 마지막 기기는 금속으로 된 관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그 끝이 뾰족했으며, 길이는 20셀리 안팎이었다. 손끝으로 세 종류의 기기들을 쓰다듬듯이 만지던 뮤스는 그 왼쪽에 서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 옆에있는 기기들은 장거리 통신을 위해 고안된 것들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원거리통신기를 장거리 통신과, 다 방향 통신에 알맞도록 개량한 것으로서 '광역통신기'라고 불리게 됩니다. 기기를 하나씩 설명해 드리자면, 가장 왼쪽의 기기는 '송수신설정장치'로서 송수신 할 대상을 선택하는 역할을 하게되며, 그 옆의 기기는 '단말장치'로서 소리를 파장으로 변환해 주고, 또 반대로 전달되어오는 파장을 소리로 변환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략 적인 설명을 하던 뮤스는 가장 오른쪽에 올려져있던 금속 막대를 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금속 막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공식적인 명칭은 '가변형전파축'이지만, 이를 줄여 전파축이라 하겠습니다. 전파축은 광역통신기의 핵심기술로서 단말장치에서 송출하는 전파의 한계도달거리를 연장시켜주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 전파축들은 땅속에 박아 넣는 간단한 작업만으로 설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10일 이내에 모든 설치가 완료될 것이며, 30켈리 간격으로 공학원과 공학원의 사이를 이어주게 됩니다. 광역통신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개별적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뮤스는 청중들이 놀라움을 모두 표시하기도 전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만 했다. 전달 사항은 많았고, 오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뮤스는 수 많은 중요사항을 직접 세밀히 제시하며 그에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야만 했는데, 아직까지 이곳에서 일하는 공학자들에게 직접 일을 맡기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네시간에 걸친 공학자 설명회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각자 이야기를 나누며 회의실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좋아서 공학자로 지원한 만큼 앎의 기쁨을 느끼는 듯 했는데, 회의중에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실내에는 뮤스가 몇몇 공학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뮤스에게 모여든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을 물어보는 중이었고, 뮤스 역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고 있었다. "원장님. 광역통신기에서 송출하는 전파는 원거리통신기에서 송출하는 전파와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전파의 출력 자체를 높이기도 했고, 전파축이 땅속에 설치되는 특성을 살려 지각을 타고도 전파가 송출이 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것은 보안을 염두에 둔것으로서 평소에는 안정적이고 속도가 빠른 공중의 전파를 이용하게 되고, 만에 하나 송수신설정장치가 지정한 장소 이외의 곳으로 전파가 빠져나가게 된다면 곧바로 공중의 전파는 송출을 멈추게 되고 그 때부터 지각을 통해 전파가 송출되기 시작합니다. 지각을 통해 전해지는 전파는 비록 속도와 안정성은 공중의 전파보다 떨어지지만, 전파축의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는 한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죠." "흠...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군요." 설명을 듣고있던 공학자들이 고개를 내젖자 미소를 띄운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광역통신기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 서류들을 배포할 테니, 그것을 참조하도록 하시죠." "아! 그럼 그때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바쁘실텐데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이만 연구실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공학자들이 뮤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그의 지식에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깍듯이 대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첫번째 전체회의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뮤스는 오랜 시간에 걸친 연설로 말라버린 목을 매만졌다. "흠... 정말 힘들군." 뮤스가 뻐근해진 목을 두들기고 있을 때, 설명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친구들이 다가왔고, 머리를 부여잡고있던 벌쿤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윽. 형! 지금까지 들은것들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어께를 으쓱거렸다. "글쎄... 더 공부를 하는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마. 표정들을 보아하니 다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니까 말이야." 뮤스의 말을 들은 벌쿤이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모두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벌쿤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는데, 뮤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차피 너희들이 오늘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들은 전파공학 쪽으로는 전혀 공부한 적이 없으니까. 아! 그리고 너희들과 따로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까 크라이츠 누님의 집무실로 함께 가도록 하자." 히안이 머슥한 기색을 지우며 되물었다. "응? 우리와 함께 따로 할 이야기란게 뭔데?"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거야." 각각 궁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살피며 뮤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유리잔의 투명한 떨림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조용한 방안을 흐르고 있었다. 정결하게 손질된 손톱이 석류 만큼이나 붉은 액체가 반쯤 담겨있는 잔을 튕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 손은 천천히 잔을 들어 그 보다 더욱 붉게 보이는 입술로 가져가고 있었다. 입술을 타고 액체가 살짝 넘어가자 충분한 만족을 느낀 손은 다시금 잔을 내려 놓았고, 혀는 입술에 남아있는 액체를 감아당겼다. "음... 이제 대충 때가 된 듯도 한데, 생각보다 더뎌지는군... 과연 뮤스는 어떻게..." 진한 향기를 품은 듯 고혹스러우면서도, 그 어떤 여성도 감히 따르지 못할 품위가 흐르는 목소리였다. 혼자만의 말을 나직히 흘리고선 잠시 입술을 멈추었을 때, 그녀가 머물러있는 방의 문밖으로 부터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크라이츠 누님, 들어가도 될까요?" 그 목소리는 크라이츠를 누님이라 부르는 유일한 인간인 뮤스의 것이었고, 고혹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크라이츠였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크라이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바꾸며 대답했다. "호홋! 어서 들어오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던 참이란다." 그녀의 허락과 동시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뮤스를 시작으로 그의 친구들이 집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들어오자 집무실은 자연스럽게 가득차게 되었는데, 원래 크라이츠의 집무실이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벽으로 책장들이 들어차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었기에 비좁아 보이는 것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들을 맞기위해 몸을 일으킨 크라이츠는 소파로 다가가며 말했다. "조금 비좁겠지만, 충분히 앉을만 할거에요. 이런 분위기도 단란하고 좋은 것 같으니 모두들 앉도록 하죠." 그녀가 소파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리를 지정하자 뮤스와 친구들은 각자 소파에 앉게되었고, 크라이츠 역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을 한번 훑어본 크라이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드워프분들은 아직 안오셨니? 그 분들도 참석한다고 하셨는데..." 크라이츠의 말에 들고들어온 서류를 정리하던 뮤스가 대답했다. "아... 드워프 아저씨들은 준비할 것이 있어서 작업실로 가셨어요. 어차피 오늘 이야기할 내용을 다 알고 계신데다가 작업할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거든요." "흠... 그렇구나. 그나저나 오늘 할 이야기는 어떤 것이니? 국가사업을 돕기로 결정한 이후 부터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통 모르겠더구나." 그녀의 말에 뮤스는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워낙 정신 없이 일을 준비하느라 미처 누님께 말씀 드릴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모여달라고 한 것이죠." 미소로서 크라이츠에게 양해를 구한 뮤스는 이 자리에 모인 친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달라고 한 것은 내가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나와 드워프 아저씨들이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거든." 친구들은 의아한 얼굴로 뮤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 중 카타리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몸을 바짝 끌어당기며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결정이라니? 설마...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 그녀의 물음에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뮤스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음... 꼭 황당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야. 듣기에 따라서는 말이지." 시원찮게 대답하고있는 뮤스의 태도를 본 카타리나는 도끼눈을 치켜뜨며 따지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왜그렇게 내 얼굴을 보지도 못하는 거니? 설마 나한테 뭔가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 "카..카타리나. 속이긴... 있는 그대로 말할거야." 카타리나가 강경하게 나오기 시작하면서 뮤스가 쩔쩔 매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본 히안은 어이가 없어하며 혼잣말을 했다. "모양을 보아하니 결국 뮤스 녀석도 카타리나 한테 잡혀 살고 있군. 내가 저런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하나?" 그 이후로도 히안과는 상관 없이 뮤스와 카타리나 사이의 기묘한 상황은 계속 되고 있었는데, 그들 둘을 보다 못한 세이즈가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카타리나, 일단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에 반대해도 되잖니? 그러니 조금만 참고 뮤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렴." 그제야 뮤스를 닥달하던 카타리나는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후우... 그래, 그럼 한번 이야기 해봐."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불편한 모습을 하고있던 뮤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희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드워프 아저씨들과 나는 흑룡의 호수에 다녀올 생각이야." 흑룡의 호수라는 말이 나오자 친구들의 눈은 자연스래 부릅떠지게 되었고, 카타리나는 기가막힌 기분에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는데, 뮤스의 입에서 나온 흑룡의 호수가 어떤곳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쿤만은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드베인 숲에서만 살았던 그로서는 흑룡의 호수가 어떤 곳인지 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왜그래? 흑룡의 호수가 굉장한 곳이기라도 한거야?"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벌쿤을 향해 바르키엘이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흑룡의 호수는 드베인 숲, 엘프의 숲과 함께 대륙 삼대 마역이라 불리우며 오래전 부터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어있는데,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삼대 마역중 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곳에 가기를 두려워 하고 있지." 바르키엘의 설명을 듣자 더욱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뭐? 드베인 숲도 그 삼대마역이라는 데 속한다는 말이야? 하하핫! 그렇다면 걱정 할 것 없잖아. 드베이 숲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 그저 마물들이 수시로 출현해서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는 점만 빼면 살만한 곳이라고. 뭐... 늪지대가 도처에 있어서 가끔 마을 사람들이 빠져 죽긴 했지만, 큰 문제점은 되지 않지. 아! 또 하나더, 쉴드옥토퍼스 산란기에만 조금 조심하면 정말 아무런 걱정이 없지." 벌쿤의 이야기가 하나씩 나올 때 마다 얼굴색이 점차 하얗게 변하는 카타리나를 바라본 히안은 급히 벌쿤의 입을 막았다. "이런 눈치없는 녀석! 그 정도면 충분히 위험한 거라고! 그냥 조용히 있기나 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히안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입은 히안의 손에 가로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뮤스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대체 흑룡의 호수가 어떤 곳인지 알고 그러는 거니?" 잔뜩 흥분해 있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자뭇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나 역시 흑룡의 호수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야.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공학원이 앞으로 큰 문제점을 가지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큰 문제점 이라니?" "지난 며칠간 공학자들이 제출해준 보고서를 살펴보니 앞으로 몇 개월 이내에 공학원의 전뇌력 수급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친구들은 아직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고, 히안이 벌쿤을 놓아주며 물었다. "지금까지 수력발전소에서 충분한 전뇌력을 공급받고 있는데다가 마나구의 보유량도 상당하잖아. 그런데 더 이상의 전뇌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물론 마나구의 보유량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의 수준에서는 린강의 수력발전소만으로도 전뇌력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야. 이제 도이첸 제국은 황실의 주도로 큰 개혁이 일어나게 될거야. 대충 예를 들자면, 제국내의 모든 집에서는 촛불대신 마나등으로 불을 밝히게 될 것이고, 광역통신기와 같은 통신수단도 급속하게 발달되어 보급 될 것이지. 게다가 전뇌거 역시 그 동력원을 마나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교체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까지 생각해본다면 마나구로 모든 전뇌력을 충당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게다가 현재 전뇌력 수급의 주축이 되는 수력발전소는 강이 없는 곳에는 세울 수 없다는 지형적인 한계점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에 화력이나 풍력을 이용한 발전소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원료로 쓰일 자원이 필요하거나 효율이 좋지 않다는 문제점을 가지지.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전혀 다른 형태의 전뇌력 공급 장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어. 바로... '마나융합발전소'." "마나융합발전소라..." 히안이 나직히 되세기고 있을 때 뮤스의 말이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온 마나구는 보통의 마나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그저 수정구에 마나를 저장하는 원리를 빌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뇌력을 압축하여 수정구에 저장해왔던 것이지. 그러나 마나융합발전소는 말 그대로 마나자체를 전뇌력으로 바꾸어 주는 곳이야. 마나의 불안정한 움직임을 제어하여 전뇌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고, 이렇게 생성된 전뇌력은 전뇌선을 타고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는 것이지. 한 마디로 제국 어디든 전뇌선이 설치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전뇌력을 사용할 수 있어." 그의 설명을 듣던 친구들은 이번일의 중요성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카타리나만은 딱딱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없이 뮤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타리나는 기분을 억누르며 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흑룡의 호수는 마나융합발전소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거니?"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뮤스는 갈등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흑룡의 호수에 마나융합발전소에서 쓰일 마나를 공급해줄 물체가 있어. 그저 그것을 드워프 아저씨들과 함께 가지고 오려는 것이니 아주 간단한 일이지." 뮤스는 카타리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세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 역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미심적인 눈초리로 뮤스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럼 내 생각만큼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거니?" "응. 그저 잠깐 다녀오는 일일 뿐이야. 게다가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니까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지." 뮤스가 자신의 안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 노력하고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어떠한 결심이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위험하지 않다면, 나도 따라가겠어! 그래도 상관 없겠지?" "으응? 네가 우리를 따라 가겠다고?" "응. 말 그대로야!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와 떨어져있기가 싫고, 네가 확신 하는대로 흑룡의 호수가 위험하지 않다면, 조금 힘이 들더라도 너를 따라 그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지!" 생각지도 못한 카타리나의 말에 뮤스가 당혹스러워 하고 있을 때, 카타리나는 쐬기를 박듯 몸을 일으켰다. "그럼 그렇게 결정 난걸로 알고 있으면 되지? 나도 짐을 좀 챙겨야 하니 먼저 일어날게. 너희들은 한 동안 뮤스와 못 볼테니 이야기나 더 나누도록 하렴." 이렇게 말을 한 그녀는 경직된 분위기에 한줄기 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고,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뮤스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크라이츠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뮤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카타리나양에게 멋지게 한방 먹은 듯 하구나.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저렇게까지 네가 그곳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데..." 뮤스의 친구들 역시 대답이 궁금한지 뮤스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뮤스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대답했다. "후우... 카타리나가 반대할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따라가겠다고 말을 할 줄은 몰랐군요. 비록 카타리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함께 갈수는 없어요. 아무래도 새벽에 몰래 떠나거나 해야겠죠." "글쎄... 아무래도 카타리나양이 이번만큼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 갈 것 같지는 않구나." "흠... 나중에 카타리나를 달래보던지 해야죠 뭐." 크라이츠의 말대로 뮤스는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쨌든 하던 이야기는 마무리 해야 했기에 잠시 생각을 접으며 흑룡의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저 이동 경로나 걸리는 시일 정도만 언급했을 뿐, 친구들 마저 걱정할 것을 우려하여 흑룡의 호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동행 비좁게만 보이던 서재는 어느새 원래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뮤스와 함께 찾아온 친구들이 모두 서재를 나섰기 때문이었고, 뮤스는 크라이츠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남아있는 상태였다.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있던 크라이츠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뮤스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뮤스, 너는 그 곳이 왜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내막을 충분히 알고 있겠지?" 한번 떠보려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훗. 바로 블랙드래곤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는 것이죠. 그 블랙 드래곤의 이름은 헬보네츠... 약 2000년 전 모습을 감춘 뒤 지금까지 목격한 사람이 없죠."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헬보네츠는 성격이 아주 나쁜 드래곤이란다. 다른 드래곤들은 레어 주변에 마물들을 키워 귀찮은 존재들이 근접하는 것을 막기도 하지만, 헬보네츠는 그 마저도 불쾌히 여겨 자신의 영역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지. 심지어는 같은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흑룡의 호수로 가겠다는 것이니?" 크라이츠의 물음에 은근한 미소를 지은 뮤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누님의 말씀 대로 블랙 드래곤은 자신의 영역에 여타 생명체가 접근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죠. 하지만 그것도 블랙 드래곤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아닙니다." 크라이츠는 눈에 이채를 띄웠다. "네 말투를 들어보니 그 블랙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었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어떤 근거로 그렇게 자신 할 수 있지?" "그건 바로... 누님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근거가 되는 것이죠. 흑룡의 호수는 누님의 레어로 부터 겨우 200켈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만약 그 헬보네츠라는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 누님의 영역과 그 블랙드래곤의 영역이 겹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리가 없겠죠." 그의 대답을 듣자 크라이츠는 돌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고, 잠시 숨을 가다듬은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오호호홋! 설마설마 했지만, 네가 우리 드래곤의 습성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니 정말 흐뭇하구나..." "그저 추측이었을 뿐이지 확신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누님께 여쭈어 보고 싶었던 것이죠." "사실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은건 그 녀석이 흑룡의 호수에 정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란다. 녀석은 다른 블랙 드래곤과 영역 싸움을 하게되었는데, 결국 패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고, 이곳으로 도주해 온것이지. 그런 이유로 레어조차 만들 힘이 없었던 헬보네츠는 자신의 상처를 숨긴 채 인간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레어를 준비하도록 만들게 했던 것이란다." 당시의 상황을 크라이츠를 통해 자세하게 듣고있던 뮤스는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랬던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당시 누님은 헬보내츠의 출현을 모르고 계셨었나요?" "호홋! 물론 나의 영역을 침범한 드래곤의 존재를 모를리가 없었지. 게다가 사이가 좋지 않은 블랙 드래곤이어서 내 영역에서 내쫓을 생각으로 지금 흑룡의 호수라고 불리는 곳으로 찾아갔단다. 그런데 막상 그곳으로 찾아가보니 헬보네츠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채였고,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그의 황금들만이 주변에서 나뒹굴고 있더구나." 크라이츠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황홀경에 빠지고 있는 듯 했는데, 뮤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때 좋은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걸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크라이츠는 아이들 마냥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있잖니... 헬보네츠는 그 더러운 성격을 앞세워 엄청난 황금을 긁어 모았단다. 다른 드래곤들과 비교도 안될만큼의 집착이었지. 그런데 그렇게 죽고나니 황금들은 가엾게도 주인을 잃었고, 내가 어쩔 수 없이 모든 황금들을 쓸어오게 되었단다. 호호홋! 한마디로 횡재 한 것이지..." "하... 그랬던 것이었군요." 허공을 응시하며 옛생각에 잠겨있던 크라이츠는 문득 시선을 거두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 물건이 혹시 헬보네츠의 심장이니?" "아... 그것은..." 뮤스는 대답하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헬보네츠의 심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같은 종족인 크라이츠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족의 장기라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뮤스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난처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드래곤의 심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장기의 종류가 아니거든. 인간들 중에서는 드래곤의 심장을 본 자가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을 장기의 모습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드래곤의 심장이란 드래곤의 체내에 존재하는 작은 구슬을 말하는 것이란다." 뮤스는 전혀 새로운 사실에 입을 벌리며 되물었다. "에? 장기의 일종이 아니라 구슬이라고요? 그런데 왜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이름을..." "드래곤의 체내에는 인간의 심장과 같이 실제로 피를 만들고 온몸으로 보내는 심장이 존재한단다. 하지만 네가 찾고있는 드래곤의 심장은 그러한 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가 응축되어있는 체내의 작은 구슬을 말하는 것은데,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는다면 육체는 모두 자연으로 흩어지고 마나를 간직한 구슬만이 남게 되니, 훗날 그 구슬을 발견한 인간들은 그것이 드래곤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물건이라 생각하여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란다." "정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는군요. 그렇다면 누님께서 과거에 헬보네츠의 심장이 남아있는 것을 보셨던 건가요?" 어깨를 으쓱인 크라이츠는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이지. 나 역시 그것을 보고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고개를 갸웃거린 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그 당시 녀석의 행동이 너무나 괘씸한 나머지 분풀이를 한다고 그 심장을 어디론가 던져버린 기억이 있는데... 어딘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이에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차피 그곳에 접근한 인간들은 없을 테니, 그 주변 어딘가에 있겠죠. 정 안된다면 마나 탐지기라도 만들면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일이야 어찌되었건 크라이츠와의 대화에서 큰 수확을 얻었던 뮤스는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던 뮤스는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떠날 준비를 하러 가볼께요. 아무튼 오늘 이야기 고마웠어요. 누님." 크라이츠는 미소로 대답을 했고, 뮤스는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뮤스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며 크라이츠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누님. 헬보네츠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 카타리나와 함께 가더라도 괜찮겠죠?" 그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던 크라이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흠... 그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지형이 험난해서 여자의 체력으로 힘이 들긴 하겠지만, 너와 드워프분들이 있으니 별 무리가 안될테고, 이번 기회에 카타리나의 근심을 좀 덜어주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카타리나가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는걸요? 그나저나 카타리나는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을려나..." 뮤스의 혼잣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드워프 분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보렴 그곳에 카타리나 양이 있을 테니..." "네? 그곳에요?" 그의 되물음에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이 크라이츠는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츳!! 야심한 밤, 제 2공학관에 위치한 '실험체 조립실'에서는 안구보호경을 낀 드워프들은 각자 앞에 놓여있는 설계도를 따라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설계도의 가장 윗부분에는 '소형잠수정'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날렵하게 생긴 유선형의 기체는 1멜리 내외의 길이로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드워프들이 들고있는 용접기가 닿을 때 마다 붉은색의 불똥이 튀면서 두개의 금속판은 천천히 접합되어가고 있었는데, 조금의 틈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드워프들의 손놀림이 꼼꼼해 보였다. 오랜 시간동안 용접을 하고 있던 드워프들은 잠시 쉬기라도 하려는 듯이 안구보호경을 머리위로 올리며 땀을 닦았고, 만들고 있던 기체에 기대어 앉은 채 한쪽에 내려놓았던 물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병에서 입을 뗀 블뤼안은 가죽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기체 내부로 물이 유입되지는 않을 것 같수. 게다가 멜리늄 합금의 강도가 엄청나서 웬만한 충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을거유." 멜라늄 합금은 드워프들의 마을에 떨어진 운석과 알루미늄을 혼합하여 만든 금속으로서 그들의 마을이 있는 멜산과 알루미늄이라는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운석의 엄청난 강도와 알루미늄의 가벼움이 합해져 아주 유용한 합금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석의 양이 그리많지 않다는 이유로 널리 보급할 수는 없었고, 한정적으로 나마 공학원에서 필요한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하게 되었다. 멜라닌 합금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인생이 어떻게 돌아갈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야. 그놈의 운석이 마을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재앙이라 생각했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 재앙이 복으로 바꼈으니 말이야."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레딘은 자신의 뒤로부터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닿은 곳에 카타리나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우물쭈물 하는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이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레딘은 몸을 일으키며 카타리나를 향해 물었다. "어라! 카타리나 아니야? 그런데 이 밤중에 여기는 무슨 일이지?" 레딘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 역시 시선을 돌렸고, 그들 역시 의아한 듯 했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행동을 살펴보던 켈트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지금 쯤 뮤스에게 내일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것 아니냐?" "저... 켈트 아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심상치 않은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켈트는 문득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혹시... 내가 뮤스보다 좋아진거냐? 허헛! 하지만 우리는 나이차이가 너무 많은것 같구나." 전혀 상황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켈트의 장난에 한참이나 예민해져 있던 카타리나는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누가 아저씨를 좋아한데요! 드릴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거란 말이에요!" 카타리나가 자신의 가벼운 장난에 생각지도 않게 소리를 버럭 지르자 켈트는 급히 귀를 틀어막았고, 기체에 기대어 앉아있던 드워프들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지경이었다. 곁눈질로 카타리나의 표정을 살핀 켈트는 이제 그녀가 진정했음을 느끼며 귀를 막은 손을 떼어냈다. "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군." "소리질러서 죄송해요, 아저씨. 사실은..." 켈트에게 사과를 한 카타리나는 서재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는데, 드워프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새로움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걱정스러움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카타리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켈트는 매끈하게 면도되어있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흠...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온것이구나. 그렇지?"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켈트는 아우들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도와 줬으면 좋겠냐? 뮤스를 흑룡의 호수로 가지못하도록 말려주기라도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가 마음먹은 이상 아무리 말리더라도 소용없을 거에요. 게다가 공학원에 아주 중요한 일이니 말릴 수도 없고요. 그러니 저를 뮤스 몰래 함께 데려가 주세요! 제가 뮤스에게 함께 따라 간다고 아무리 고집을 피우더라도 뮤스는 틀림 없이 저를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제 뮤스와 절대 떨어져 있기 싫어요! 그러니..." 드워프들은 그녀의 부탁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브라이덴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해 줄수가 없겠구나. 네가 아무리 따라가고 싶어하더라도 흑룡의 호수로 가는 길은 굉장히 험난한 곳에 있단다. 구바닌 산맥에 도착을 하면 전뇌거를 타고 이동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걸어야 하는데, 여자의 체력으로는 구바닌 산맥을 넘기가 힘들거든." 하지만 카타리나는 포기하기는 커녕 더욱 애원하고 있었다. "절대 아저씨들께 짐이 되지는 않을게요! 이번에 함께가지 못하면 뮤스가 돌아올때 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식사도 하지 못할 거에요." 그러나 카타리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들은 안된다고 마음을 굳혔는지 그녀를 도와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켈트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흠... 네가 아무리 부탁을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단다. 이번 일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우리도 가능하다면 너를 함께 데려가고 싶지만..." 켈트의 말을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불쑥 무엇인가를 켈트의 앞으로 내밀었고 그의 말꼬리를 자르며 말했다. "저! 제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이 것을 드리겠어요! 저희 집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120년 산 포루코타에요! 지금 이 정도의 포루코타를 구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는 오히려 드워프 아저씨들이 더 잘 아시겠죠?"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카타리나의 손에들린 술병에 시선을 빼앗긴 켈트는 입가로 흐르는 침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120년사~안! 포루코타! 신의 과실주라고 불리우는 그..." 물론 켈트 뿐만 아니라 다른 드워프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그들의 다리는 저절로 움직여 카타리나에게로 다가왔고, 그들의 오감은 저절로 반응하여 모든 신경이 카타리나의 손에 들린 술병에 집중되어있었다. "형님... 120년산 포루코타라면 지금 아무리 백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구할 수 없는 술이유!" "저런 술 한 방울이라도 맛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구먼!" "나보고 카타리나를 업고 가라고 해도 아무말 하지 않을 테니, 당장 카타리나의 제안을 받아 들이슈!" 동생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살피던 켈트는 헛기침을 몇번 하며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흠흠! 우리도 가능하다면 너를 함께 데려가고 싶지만... 생각해 보니 가능할 성 싶어서 데려가도 될 것 같구나. 흠흠! 절대 그 포루코타에 눈이 멀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결국 드워프들의 승락을 받아낸 카타리나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손에든 술병을 켈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호홋! 그럼요! 저는 처음부터 아저씨들이 허락해 주실 줄 알았는 걸요! 이 포루코타는 제 성의이니 맛있게 나눠 마시도록 하세요!" 술병을 품에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있던 켈트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껄걸! 아무런 걱정말고 오늘 푹 쉬거라! 내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니, 새벽에 우리 숙소로 찾아 오도록 하라고! 그 때 전뇌거에 숨겨주도록 할테니까!" "네! 고마워요!" 활기차게 대답한 카타리나는 드워프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실험체 조립실을 떠났고, 드워프들은 사랑스러운 연인이라도 되는 양 술병을 한번씩 품에 안아보며 행복감을 망끽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그러고 있는 사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는데, 바로 서재를 나와 이곳으로 온 뮤스였다. "정말 대단하군... 술 한병에 생각을 바꾼 아저씨들도 그렇지만, 아저씨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카타리나도 보통이 아니야. 후훗! 그래도 어차피 함께 가려고 했으니 나쁠 것은 없겠지." 나직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문 뮤스는 내일을 위해 숙소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긴 여름이어서 인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산등성이 넘어로 햇살이 뿜어지고 있었다.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공학원으로 분주하게 모여들고 있을 시간, 한 쪽에서는 공학원을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고, 뮤스는 타고갈 전뇌거를 정비했으며, 벌쿤은 지난 새벽 뮤스를 찾아와 함께 가기를 청했기에 일행에 합류해 있었다. 그리고 크라이츠와 친구들은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공학원 본관의 문앞까지 나와있는 상태였는데, 갑작스럽게 따라나선다는 벌쿤의 이야기를 듣고선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상체만한 짐을 손쉽게 들어올리며 전뇌거의 짐칸으로 올리는 벌쿤의 옆에 선 세이즈는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벌쿤! 꼭 따라가야만 하는거니? 그곳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고 하는데..." 세이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벌쿤은 힘을 과시하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가뿐하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하핫!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세이즈! 누가 감히 이 벌쿤님을 어떻게 하겠어? 설마 마물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드워프 아저씨들께 전투도끼 쓰는 법을 충분히 배웠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게다가 뮤스형을 내가 보호해 줘야하니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어." 짐을 모두 싣고 손의 먼지를 털며 그들의 옆을 지나던 켈트는 혀를 차고있었다. "쯔쯧... 이제 벌쿤녀석의 도끼질도 제법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게다 세이즈. 그러니 벌쿤 대신 내 걱정을 좀 해주면 안되겠냐? 이거야 원... 젊은 녀석들은 죄다 쌍쌍이 놀고 있으니 우리같은 늙은이들이 서운해 지는구먼." 켈트가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전뇌거 점검을 마친 뮤스가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아저씨들! 전뇌거 점검은 끝났어요! 어서 각자 전뇌거 타세요. 그리고 벌쿤 너도 세이즈와 그만 떨어지고 출발할 준비나 하라고!" 그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은 두 대의 전뇌거에 각자 나누어 탔고, 벌쿤은 세이즈를 내려 놓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녀올께 세이즈. 그 동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세이즈는 처음으로 벌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슬펐는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녀를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보인 벌쿤은 손을 흔들어 주며 뮤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형, 카타리나 누나는 안보이네? 혹시 어제 일로 화가나서 배웅도 안해주는 것 아니야?" "후훗... 아마 그럴거야." 짧게 대답한 뮤스의 시선은 전뇌거의 짐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방수천을 덮어놓은 그곳은 어색하게 불룩해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피식웃은 뮤스는 모른척 하면서 전뇌거에 올라탔고, 벌쿤과 켈트가 좌석에 앉는 것을 확인하며 전뇌거에 시동을 걸었다. 창을 열어 친구들과 크라이츠를 바라본 벌쿤은 손을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는데, 소풍가는 소년마냥 들뜬 듯 했다. "그럼 다녀올때까지 잘지내세요 큰 누님! 그리고 모두들 다녀와서 보자고!" 뮤스 역시 벌쿤만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마중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가벼운 눈인사를 친구들에게 건네며 천천히 전뇌거를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전뇌거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켈트는 피곤한 모습으로 하품을 하며 등받이에 깊숙히 몸을 기대었다. 그리곤 팔베게를 하며 노래를 흥얼 거리기 시작했는데, 밤새 기분 좋은 일이 있었음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켈트를 유심히 살펴보던 벌쿤은 턱을 궤며 물었다. "흠... 켈트 아저씨 어젯 밤에 무슨 좋은술이라도 드셨어요?" 그의 물음에 누구에게든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던 켈트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허헛! 우리가 말이다. 어제 그러니까... 아! 그렇지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그 녀석이 무려 120년이나 묵은 포르코타를 선물로 주더구나! 그래서 기분 좋게 형제들끼리 한잔 했는데, 과연 귀한 것이라서 그런지 별 숙취도 없고, 맛도 그만이더군!" "포르코타라니요? 그것도 술이름인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벌쿨이 물어오자 켈트가 대답하기도 전에 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포르코타란 남쪽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증류주의 일종인데, 그 중에서 포도의 품질이 최고인 스윈제국산이 고급에 속하지. 그리고 오래 숙성시킬 수록 향이 진해지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오래된 포르코타일 수록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게 되는데, 120년 정도 숙성된 포르코타라면 대륙 전체를 통털어도 100병 이내일거야." 벌쿤은 요리를 잘하는 만큼 술에 대한 관심도 많았기에 그 가치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우와! 엄청난 보물을 드셨군요. 그런 굉장한 것을 구하셨으면 저도 좀 불러주시지... 섭섭합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있는 벌쿤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뮤스는 은근한 말투로 켈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저씨들은 어제 하루종일 공학원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그 친구 분을 만나셨죠? 그리고 그 친구분도 120년 정도 되는 포르코타를 소지하고 다니실 정도라면 엄청난 위치에 있는 분이시겠군요? 최소한 후작 정도는 되어야..." 뮤스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음을 느낀 켈트는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그게... 허헛! 당연히 그 친구가 공학원으로 찾아온 것이지! 그리고 선물로 가지고온 포르코타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꼬치꼬치 캐묻는건 예의가 아잖아?" 켈트가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자 뮤스는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핫! 혹시 그 친구라는 사람이 제 또래의 여자는 아니겠죠? 어제 어떤 여자가 그 병을 들고가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서요." 이에 얼굴을 붉힌 켈트는 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네가 잘못 본것이야! 이 나이에 젊은 여자를 알턱이 있나..." 말끝을 흐리며 켈트가 시선을 피하자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띄운 뮤스는 거울을 통해 전뇌거 뒤의 짐칸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거참 이상하네. 대충 필요한 짐은 다 확인하고 실었는데 저 방수천 아래에 들어있는 짐은 뭐지? 켈트 아저씨의 짐이야 드워프 아저씨들 전뇌거에 있을 거고, 그럼 벌쿤 네거야?" 그의 물음에 몸을 돌려 짐칸을 바라본 벌쿤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건 방수천 안에 넣지 않았는걸? 어차피 방수처리된 짐이라서 그 위에 실었어." "음... 그럼 필요 없는 짐이군. 어차피 갈길이 먼데 필요없는 짐은 버리는 편이 좋을것 같군. 벌쿤 짐칸으로가서 방수천 아래있는 짐은 밖으로 던져 버려." 고개 갸웃거린 벌쿤은 조금 이상한 상황을 느끼며 되물었다. "에? 정말 저걸 꺼내서 내버리란 말이야?" 벌쿤의 되물음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이럴 때 너의 그 대단한 힘을 사용하는거라고! 저 정도 짐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버릴 수 있지?" 띄워주는 뮤스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벌쿤은 자신에 넘지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당연하지! 저정도 쯤은 한 손으로도 던져 버릴 수 있다고!" 그리고 대답과 함께 짐칸으로 넘어간 벌쿤은 방수천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 때, 그들의 행동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켈트는 득의에 찬 뮤스의 옆 얼굴을 보며 외쳤다. "뮤스 이 녀석! 저 뒤에 카타리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우리가 카타리나에게 포르코타를 얻어 마셨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뮤스는 능청을 떨며 자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럼 저 방수천 아래에 있는게 카타리나라는 말씀이세요? 에이 설마..." 켈트의 인상은 휴지조각 처럼 구겨지고 있었는데, 뮤스가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잡아떼며 자신을 놀리고 있으니 기분이 영 찝찝했던 것이었다. "에잉! 이 녀석 나를 데리고 놀려고 하다니... 벌쿤 너는 거기서 카타리나나 꺼내주라고!" "네? 카타리나 누나를 여기서 꺼내라니요?" 뮤스와 켈트의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있던 벌쿤은 켈트가 시키는 대로 방수천을 열었다. 그러자 머리가 헝클어진 카타리나가 쪼그려 누운채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며 놀라고있는 벌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안녕 벌쿤? 뮤스에게 들켰니?" "들키건 뭐건 간에 카타리나 누나가 어떻게 여기 들어있는거야? 어서 나오라고!" 벌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카타리나의 팔을 끌며 짐칸에서 일으켰고, 거울을 통해 뒤의 상황을 살피며 운전을 하던 뮤스는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했다. "하핫! 그 답답한 곳에 숨어있는다고 수고했어 카타리나. 하지만 짐칸 보다는 좌석이 훨씬 잘 어울리니까 어서 들어와서 앉아." 뮤스의 말을 들으며 민망함을 느낀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혔고,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뮤스... 언제부터 내가 저기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니?" 부끄러운 듯이 물어오는 카타리나가 유독 귀엽다고 느낀 뮤스는 곰곰히 생각하는 척 하며 대답했다. "글쎄... 어제 저녁때였나? 아무래도 너를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을 네게 전하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드워프 아저씨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는 것을 봤지 뭐. 그래서 그냥 모른척 했어. 후훗!" 그의 대답에 기가막혔던 카타리나는 오늘따라 뮤스의 미소가 얄밉게 느껴지고 있었다. "뭐얏! 그럼 처음 부터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고생한 것을 보고만 있었던 거니? 저 안이 얼마나 답답했는 줄 알아? 기분 나빠서 나 다시 돌아갈래!" 뮤스의 장난에 뾰롱퉁해진 카타리나를 보며 뮤스는 실소를 터트려야만 했고, 공학원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한 동안 고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지금 이 시간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팜구드. 듀들란 황궁의 재상 집무실은 오늘 따라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담배 파이프로부터 피어오르는 연기는 허공에서 아스라히 부서져 갔고, 투르코스 재상의 한 숨에도 담배 연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손에들고있던 구겨진 서류 몇장을 책상위에 던져놓은 투르코스 재상은 머리카락을 헝클어 트리며 담배를 한모금 더 빨았다. "후우... 정말 끝도 없군. 정말이지 국가규모의 사업은 만만한게 아니야..." 그의 굵직한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을 드둘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똑똑! "이보게 투르코스 재상. 잠시 들어가도 되겠는가?" 목소리를 확인한 투르코스 재상은 늘어트린 몸을 일으키며 담배 파이프의 불을 털어 꺼트렸다. "들어오십시오. 루스티커님." 그의 말이 끝나자 초록색의 로브를 입은 루스티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집무실의 광경을 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혀를차며 말했다. "쯔쯧... 자네의 업무가 힘든 것은 알겠지만, 몸을 생각해서라도 담배는 좀 줄이도록 하게나. 제국을 잘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부터 지킬줄 알아야 하는것이야." 투르코스 재상은 여전히 뻣뻣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루스티커는 그가 앉아있는 책상앞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나 하려고 찾아왔다네." 그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한 투르코스 재상은 손을 모으며 되물었다. "흠... 또 골치 아픈 부탁이시겠죠? 지난 몇 년간 루스티커님과 장영실 경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느라 머리가 깨질 지경입니다." 자뭇 진지하게 고통스러워하는 투르코스 재상을 바라보던 루스티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차피 자네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장영실 경을 이곳으로 데리고와 제국 개발사업을 맡긴 것도 자네였으며, 나를 끌어들인 것도 자네였네. 게다가 제국 개발사업의 총괄 담당을 하는 것도 자네의 일이니 그런 엄살은 피우지 말게나. 자네같은 일 벌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나?" 하나씩 따져봐도 틀린 점이 없는 루스티커의 말에 손을 내저은 투르코스는 다시금 파이프에 담배잎을 두들겨 넣었다. "아무튼 루스티커님의 말재간을 당해낼 수가 없군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다행 스럽게도 이번에는 그리 골치아픈 부탁이 아니라네. 그저 제국 내에서 레드 드래곤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조사해주면 되는 일이거든." 순간적으로 레드 드래곤이라는 말을 들은 투르코스 재상은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그 덕에 파이프로 밀어넣었던 담배 잎은 허공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콜록! 콜록! 레..레드 드래곤이라니요?" 평소 표정의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투르코스의 반응이 의외였던 루스티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놀라는가? 내 부탁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루스티커의 물음에 투르코스 재상은 입에 물고있던 파이프를 책상위에 내려 놓으며 되물었다. "레드 드래곤의 목격자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것이죠?" "사실 며칠 전 장영실 경과 전뇌력 수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바가 있다네. 그런데..." 루스티커는 투르코스 재상의 반응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잠시 접으며 장영실과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대충 설명해 주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투르코스 재상의 표정은 아주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그러니 레드 드래곤이 이 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그 블랙 드래곤의 생명력이 다했다는 말과 같으니 흑룡의 호수가 더 이상 마역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것이 판명된다면 바로 장영실 경과 내가 직접 흑룡의 호수로 떠날 것일세." 루스티커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투르코스는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는데, 오랜 시간동안 잊고 있었던 좋지않은 기억들이 되살아 났기 때문이었다. 가비르 재상과 크라이츠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무거운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따로 조사를 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그 레드 드래곤의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란 루스티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말이 사실인가? 자네가 어떻게 레드 드래곤을 목격했다는 것인가?" "물론 사실입니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은..." 물음에 뭐라 대답하려던 투르코스 재상은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돌렸다. "죄송하지만, 그저 개인 적인 일이니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왠지 슬픔이 묻어있는 그의 얼굴을 살피던 루스티커는 자세하게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정 그렇다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겠네. 아무튼 자네가 레드 드래곤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하니, 블랙 드래곤이 생명력을 잃은 것이 확실시 되는구먼. 며칠 이내로 일행을 몇명 뽑아 흑룡의 호수로 출발하도록 할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나." 투르코스 재상과는 별개로 손쉽게 궁금증이 풀려버린 루스티커는 앞으로의 행보를 간단히 말하며 재상의 집무실을 나섰고, 혼자남은 투르코스 재상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기 시작했다. 담배잎에 불을 붙인 투르코스 재상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며 입을 열었다. "흠...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런 식으로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군. 크라이츠 님." 크라이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본 투르코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고, 한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두두두... 전뇌거의 바퀴가 포장이 되지 않은 초원의 길을 지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뇌거의 내부까지 큰 진동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었는데, 효과적인 충격흡수 장치가 진동을 크게 줄여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뮤스 일행들은 콧 노래가 나올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카타리나는 뮤스와 함께 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즐거운 듯 손수 만들어온 음식들을 뮤스의 입에 넣어주며 재잘거리고 있었는데, 토라졌었던 분위기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호호홋! 어때? 맛있어?" 입에 한 가득 음식물을 머금은 뮤스는 힘겹게 턱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괴야이 마이어. 그어네 조으마 느어주므 아네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뮤스의 말이었지만 카타리나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조금씩만 넣어줄게." 어느새 카타리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뒷좌석으로 밀려난 켈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카타리나가 드워프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온 대형 도시락 이었지만, 가득차있던 음식들이 빠른 속도록 비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쩝쩝! 카타리나의 음식 솜씨도 굉장히 좋은걸? 거의 벌쿤과 비슷한 수준이야. 마치 요리사가 직접 만든것만 같군." 칭찬의 뜻으로 아무런 생각없이 던진 켈트의 말에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일행 중에는 아무도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시락을 비운 벌쿤은 만족한 모습으로 든든해진 배를두들기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낯선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켈트 아저씨 여기는 어디죠? 라이델베르크를 벗어난건가요?" 그의 물음에 입에 물고있던 음식물을 삼킨 켈트는 잠시 두리번 거리며 대답했다. "이곳이 아마 바쉬스 평원일게다. 조금만 더 간다면 팜구드라는 곳이 나오는데 도이첸 제국 최대규모의 밀 생산지이지. 나도 오래전에 와본 이후로 온 적이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정말 대단 했었지. 밀밭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물결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단다. 아마 벌쿤 너는 드베인 숲과 라이델베르크를 떠나본 적이 없었으니 아마 본다면 입이 떡 벌어지게 될게다. 오늘 저녁쯤이면 팜구드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기대하고 있거라." "이야... 정말 기대가 되는걸요? 지평선까지 펼쳐진 밀밭이라." 기대가 되는 것은 벌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또한 그러한 듯 했는데, 그녀 역시 이곳은 초행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지리학 수업에 배운 적이 있었지만 직접 와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쥬론 공국과 함께 도이첸 제국의 젖줄로 불리운다죠?" 뮤스 역시 팜구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기에 그녀의 이야기에 설명을 보충해 주었다. "팜구드의 밀밭에서 생산되는 밀의 양은 도이첸 제국 전체 인구의 반을 먹여 살릴 만큼이나 엄청나지. 또, 소비하고 남은 밀은 매년 황실에서 사들여 국고에 저장시켜 놓는데, 혹시 모를 흉년이 있을 경우에 부족한 밀의 양을 국고 저장시켜놓은 밀로 충당하게 되는것이지." 팜구드 밀밭의 중요성을 쉽게 알 수 있었던 카타리나는 감탄성을 터트리며 물었다. "아! 그럼 팜구드의 밀밭이 잘못되면 제국 전체가 식량 문제에 빠지겠구나?" "네 말대로 누군가가 팜구드의 밀밭을 독점하기라도 한다면, 제국 전체가 엄청난 혼돈에 휩쌓이게 되겠지. 그러니 황실에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토지 보유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고, 토지의 매매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야." 이후로도 그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고, 그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전뇌거는 묵묵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뮤스일행을 태운 전뇌거는 늦은 오후무렵이 되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초원의 끝을 보게 되었다. 나트막한 언덕을 경계선으로 제법 키 높은 나무들 길가에 드러서있었는데, 나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숲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라 보였다. 전뇌거 안에서 무료한 기분을 혼자서 달래고 있던 켈트는 점차 변하고 있는 주변경관을 유심히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오호! 팜구드에 거의 다 온 모양이군. 이 언덕을 시작으로 그리 크지 않은 언덕을 몇개 넘으면 바쉬스 평원이 끝나는 것이지.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팜구드의 마을에서 쉬었다가 가자고." 카타리나 역시 켈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는데, 전뇌거에 오랬동안 앉아있다 보니 다리를 펴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피로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정말 쉬지 않고 왔더니 몸이 너무 뻐근하네요." 그들 중 가장 불편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벌쿤이었는데, 워낙 튼 덩치로 인해 전뇌거가 비좁았던 그는 출발할 때의 들뜬 기분은 온데간데 없어 보였고, 뒤척거리며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 노력할 뿐이었다. 일행들을 바라보던 뮤스는 뒤를 따라오는 드워프들의 전뇌거를 한번 확인하며 말했다. "어차피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켈트 아저씨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군요. 얼마나 더가면 마을이 나올까요?" "이 언덕들만 모두 넘으면 팜구드의 밀밭을 볼 수 있을게야. 하지만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시간 정도를 더 들어가야 마을에 닿을 수 있을 테니 대충 한 시간 반쯤 걸릴 것 같군." "그럼 속도를 더 내는 편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한 뮤스는 전진 패달을 조금더 밟으면서 전뇌거의 속력을 높여갔고, 뒤를 따르던 드워프들의 전뇌거 역시 그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 않은 푸른 언덕 위로 석양이 비춰지고 있었다. 언덕의 허리부근은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 지고 있었고, 초목들은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하룻동안 쌓였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고 있는 초목들을 놀래키며 언덕 위로 두 대의 전뇌거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힘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한번 쯤은 쉬어넘을 성 싶은 언덕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속도를 맞추어 언덕을 달리던 두 대의 전뇌거는 마지막 언덕 위에서 멈춰서게 되었다. 그리고 전뇌거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 타고 있던 뮤스와 일행들이 밖으로 나왔는데, 그들은 놀라운 것이라도 본 듯 눈앞의 광경에 넋을 빼앗겨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 펼쳐진 광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노랗게 익어 황금빛을 띄고있는 밀밭은 켈트에 어김 없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고, 바람이 땅을 스칠때 마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밀은 생명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벌쿤은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으며 팔을 넓게 뻗었다. "이야아! 정말 대단한걸! 절벽 위에서 드베인 숲의 전경을 봤던 것도 이 보다는 못한 것 같아." 카타리나 역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고정시키며 뮤스의 팔짱을 꼈다. "정말 멋지다! 아마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장관을 못봤을 거야."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아무런 말 없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한 동안 드넓은 밀밭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둔 켈트는 문득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 그의 말을 듣고 가까이로 다가온 레딘이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유 형님. 멋지기만 하구만..." 레딘의 물음에 켈트는 손가락으로 구석진 곳에 위치한 밀밭을 가리키며 대답했는데, 다른 곳과 비교하여 조금 다른 색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저곳들을 한번 보게나. 다른 곳은 밀농사가 아주 잘되어 황금빛을 띄고 있는데, 유독 저곳의 밀은 매말라 훨씬 옅은 색을 띄고 있군. 내가 알기론 이곳의 토질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농가에서든 균일한 품질의 밀을 수확한다던데..." 그의 말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블뤼안은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껄걸! 별 대수롭지 않은데 신경을 쓰고 있군.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저 곳의 밀이 매말랐는지 아니면 베어냈는지 어떻게 알겠수? 그렇게 따진다면 밀은 초 여름에 수확하는 것이 정석인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이곳 전체가 이상한 것 아니유?" 드워프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뮤스는 켈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곳은 초여름에 밀을 수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팜구드는 다른 밀 수확지 보다 여름이 늦게 찾아 오기때문에 추수는 늦여름 쯤 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켈트 아저씨의 말대로 저곳은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군요." 뮤스가 턱을 매만지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벌쿤이 별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조금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배도 고픈데 어서 마을로 들어가자고! 게다가 몸도 여기저기 쑤셔서 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벌쿤의 말에 다른 드워프들도 동의하고 있었기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곳에서 우리끼리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지. 그럼 해가 지기전에 출발하죠." 뮤스의 말을 신호로 일행들은 전뇌거에 올라탔고, 곧 동력기의 소리와 함께 전뇌거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뮤스 일행들은 해가 거의 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팜구드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자체는 약 50여 가구 정도로 그리 큰 규모는 않았지만, 부촌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도로 주변으로 늘어선 집집 마다 일정한 크기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전뇌거들도 고급기종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또,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잘 포장되어있는 거리하며,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이나 깔끔하게 지어져 있는 건물들로 보아 마을 미화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뇌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던 뮤스 일행은 상당한 규모의 음식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음식점과 숙박업을 겸업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뮤스 일행의 눈에 띈 음식점 역시 그러한 듯 했다. 마땅한 곳에 전뇌거를 세워놓은 뮤스와 일행들은 필요한 물건들만을 간단히 챙겨 전뇌거에서 내렸고, 뮤스는 카타리나의 짐과 자신의 짐을 양손에 나눠진 채 그녀와 함께 먼저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딸랑! 음식점의 문에 달린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뮤스와 카타리나가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있던 여자 종업원이 밝은 미소와 함께 그들을 반겨주었다. "팜구드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식사와 숙박을 하시겠습니까?" 종업원이 한눈에 외부인임을 알아보자 카타리나는 잠시 의아해 했고, 그것을 눈치챈 종업원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님. 저희 팜구드 마을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모든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알고 있답니다." "아! 그랬었군요. 저희는 하룻밤 이곳에서 묵어가려고 싶어요. 방이 세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빈 방이 있나요?" 카타리나의 물음에 여종업원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곧 밀을 수확할 시기라 외부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답니다. 그래서 지금 남는 방이 두개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죠?" 여종업원의 물음에 뮤스와 카타리나가 고민하고 있을 때,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이 뒤이어 들어왔게 되었고, 그들의 대화를 들었던 켈트가 끼어들며 말했다. "고민할게 뭐가 있어? 우리 형제들과 벌쿤이 한 방을 쓰고, 너희 둘이 같은 방을 쓰면 될 거 아니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을 뱉은 켈트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며 여종업원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그 방 두개를 사용하도록 하겠네! 아... 그리고 우리는 아주 시장한 참이니까 식사 준비도 좀 해줬으면 고맙겠군." 켈트의 요청에 빙그레 웃은 여종업원은 뒤쪽에 걸려있는 열쇠 두 개를 꺼내주며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셔서 복도의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식사는 식당으로 내려 오셔서 주문하시면 금새 준비가 된답다. 그럼 편안하게 쉬십시오." 일사천리로 숙박 문제가 해결 되자 켈트는 여종업원이 준 열쇠 중 하나를 챙겼고, 나머지 하나는 뮤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을 게냐? 그럼 나는 먼저 올라갈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말을 마친 켈트는 다시 짐을 들어 계단을 통해 숙소로 올라갔고, 다른 드워프 형제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짐을 하나 어께에 매고 있던 벌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투덜거렸다. "하필면 왜 내가 드워프 아저씨들과 함께 자야 하는거야? 저 아저씨들 코고는 소리는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그러자 이미 다음층으로 올라간 줄로만 알았던 켈트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들려왔다. "이봐 벌쿤! 눈치없이 투덜대지 말고 어서 올라오기나 하라고! 빨리 짐 정리를 해야 식사를 하지!" "나참... 무슨 눈치를 말하는거야?" 켈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벌쿤은 여전히 불만 담긴 얼굴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뮤스와 카타리나의 사이에는 때 아닌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는데, 카타리나의 얼굴은 저물어가는 태양 마냥 붉어져 있었다. "뮤스... 어떻게 할 거야?"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가벼운 한숨을 내쉰 뮤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열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떻게하긴... 일단 올라가서 짐이나 내려놓고 나중에 아저씨들 방에 가서 잠을 자던지 해야지. 일단은 우리도 올라가자." "응..." 뮤스는 성큼걸음으로 윗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카타리나는 알지못할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며 뮤스의 뒤를 따랐다. 숙소에 대충 짐을 정리해 놓은 뮤스와 카타리나는 식당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을 통해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내부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의 음식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게 꾸며져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각 식탁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들 역시 평범한 식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호사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식당을 둘러보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일행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있는 곳에 일행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늘 그래왔듯 엄청난 양의 음식을 시켜놓고 분주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공공장소에서 드워프들과 벌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본 카타리나는 슬그머니 뮤스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우리 다른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면 안될까? 아무래도 저 식탁에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뮤스가 그녀의 기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른 자리를 찾아보며 동의했다. "뭐 그렇게 하자. 그런 저쪽 식탁은 어떨까?" 뮤스의 말에 드워프들과 같은 식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생각한 카타리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뮤스가 가리켰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뮤스와 카타리나가 자리에 앉자 곧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왔고, 적당히 먹을 음식들을 주문한 그들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늘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의 여행 일정이 내용의 주가 되고 있었다. -쾅! "내가 벌써 몇번이나 말했지 않나!" 대화를 나누고 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바로 옆 자리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런 소리에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과 벌쿤만은 예외라는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뻔한 사실이었다. 뮤스와 카타리나의 옆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고, 둥근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 중 식탁을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인물은 젊은 여성의 오른쪽에 자리하고있던 중년인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그의 얼굴은 벌겆게 달아올라 있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내쉬던 중년인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명의 인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자네들이 아무리 내게 압력을 가하더라도 나는 절대 자네들의 일에 가담 할 수 없네! 자네들도 지금에야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농사꾼이지 사업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야!" 그 중년인이 불같이 화를 내자 옆에 앉아있던 갈색머리의 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년인의 몸을 부축하며 말했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이러다간 아버님이 쓰러지시겠어요. 그리고 아저씨들도 아버지의 친구분들이신데 너무하시는군요. 이쯤 하셨으면 저희 아버지의 결심을 아셨을 테니 그만 하세요!" 그녀의 말에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던 중년인들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케니언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 너는 잠자코 있거라. 네 말대로 네 아버지와 친구이니 이 정도라도 대우를 해주는 것이란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케니언이라고 불린 여성의 아버지를 향해 냉소를 피우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보게 마고드...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주도록 하지. 자네가 이곳에서 농사를 계속 짓고 싶다면 선택을 잘해야 할 걸세. 물론 자네가 이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대환영이야! 하하핫!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할테니 다음번에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만났으면 좋겠군."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마친 중년인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일행들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마고드라는 중년의 남성과 그의 딸인 케니언 뿐이었는데, 마고드는 힘이 풀리는 듯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 앉았다. 그리곤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차라리 옛날이 더 좋았지. 저 친구들도 그 때는 순박한 농사꾼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놈의 돈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다니." 아버지의 혼잣말에 안스러움을 느낀 케니언은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모두다 옛날 이야기에요.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저 아저씨들과 손을 잡았다구요. 더 이상 아버지 혼자 이렇게 고집 피우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딸의 이야기에 마고드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허헛... 모두 저들의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란다. 내일 부터 그 사람들을 설득해 보도록 하자꾸나." 한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은 마고드는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케니언 역시 그의 팔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부녀가 식당 밖으로 사라지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 식탁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쯔쯧... 마고드도 그냥 고집을 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곳을 떠날 수 밖에 없지않나." "그렇다고 해서 마고드가 이곳을 떠나겠나? 몇 대째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집안인데." "그럼! 그럼! 솔직히 나는 마고드의 편이라네. 이대로 마고드가 팜구드를 떠나는 것은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니 그럴 리가 없네." 식당안에서 감돌고있는 이야기를 한 동안 듣고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는데,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듣고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탁에 놓인 찬물을 한모금 마신 뮤스는 카타리나를 향해 말했다. "흠 아무래도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카타리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아까 그 부녀가 무슨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겠지? 저쪽 사람들에게 물어보는게 어때?" 뮤스는 카타리나의 말을 따라 두 부녀에 대해 한마디씩 하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식사와 함께 술을 한잔씩 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는데, 금새 부녀에 대한 일은 잊어린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 있었다. 그들을 잠시 보던 뮤스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드르륵... "저,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얼굴의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이곳의 청년은 아닌것 같은데, 물어 보고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되물음에 뮤스는 부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전 저쪽에 앉아있던 부녀의 대화를 잠깐 듣게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이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뮤스의 물음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얼굴색을 바꾸었다. 그리곤 그 중 한명이 뮤스의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며 대답했다. "그것은 외부의 사람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네. 괜히 쓸데 없는 곳에 신경쓰지 말고 쉬었다가게나." 냉랭하게 대답한 그는 목에 걸고있던 냅킨을 식탁위로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식사도 다했으니 우리도 이만 일어 나세나." 그의 말에 일행들은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뮤스에게 심상치 않은 눈빛을 던지며 밖으로 나갔다. 결국 뮤스는 아무런 소득 없이 카타리나가 앉아있는 곳으로 돌아오며 말했다. "너도 들었지?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을 보니 보통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을 것 같은걸?" 카타리나는 먼저 나와있는 야채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우리의 일도 빨리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이곳의 일에 신경쓸 여유가 있는거니?" 카타리나의 맞은편에 다시 앉은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훗. 우리야 어차피 한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그리 촉박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이대로 이곳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찝찝할 것 같거든." "하긴... 예전부터 너는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잖니. 드워프 아저씨들과 의논해서 좋을 대로하렴." 그녀의 대답과 때를 맞춰 종업원은 주문했던 음식들이 하나씩 날라왔고, 뮤스와 카타리나 역시 드워프들이나 벌쿤 못지않게 허기진 상태였기에 대화를 잠시 미루고 식사를 시작했다. 등불이 걸려 분위기를 한껏 내고있는 숙소의 3층 복도는 지금 때 아닌 소란으로 몸살을 앓고있었다. 드워프들과 뮤스가 실랑이 하는 소리가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를 떨어 울렸고, 덜커덕 거리는 문소리가 벽을 부술 듯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쾅! "안된다! 안돼! 이 녀석아, 누가 우리 좋자고 이러는 것이냐? 다 너 좋으라고 우리가 고생해 준다는데 뭐가 불만인거야!" 식사를 마치고 온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군 상태였다. 뮤스는 문 밖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도저히 카타리나와 같은 방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 뮤스가 드워프들의 방으로 건너오자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넘긴 뮤스는 방문을 다시 두들겨보며 말했다. "장난치지 마시고 문 좀 열어 줘요!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방을 쓴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에서는 동시에 드워프들의 콧방귀소리가 들려왔고, 켈트의 오히려 방문을 두들기며 외쳤다. -쿵쿵쿵! "흥! 이 녀석아 순진한 척 하지 마라! 우리가 도와 줄테니 이번 기회에 카타리나를 완전히 네 여자로 만드는 거야! 어차피 너희들도 이제 성인이고 서로 좋아하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오히려 자연 스러운 거라고! 껄껄껄!" "정말 안 열어 주실 거에요?" "벌써 수십번도 더 대답했을 게다! 우리는 절대 열어 줄 수 없으니까 당장 돌아가도록 해!" "이것 참... 큰일이군." 도무지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드워프들의 반응에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던 뮤스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타리나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복도로 부터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자 뮤스가 떠났다는 것을 알아챈 드워프들은 걸어잠궜던 문을 열며 복도를 살폈고, 잠시 복도를 두리번 거리던 켈트는 나름대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방안에 있던 아우들을 향해 손짓 했다. "나와도 괜찮아! 이제 뮤스가 방으로 돌아간 것같군. 흐흐흣...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좀 하러 가볼까?" 켈트의 신호에 드워프들은 새끼로 엮어 놓은 듯 줄줄이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저 마다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헌데, 가장 마지막으로 따라나온 벌쿤은 아직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있었다. "이 야심한 밤에 대체 뭘 보러 간다는 거에요? 오늘 그냥 잠이나자고 내일 낮에 가면 안되요?" 벌쿤의 말에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긴 레딘은 주변을 살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거냐?" "정말 모르겠다니까요! 어디를 가는건데요?" 대답하는 벌쿤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 모른다고 결론을 내린 레딘은 귀를 달라는 손짓을 했고, 벌쿤은 허리를 숙여 레딘의 키높이에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뮤스와 카타리나의 방으로 가는것이란다. 그리고 녀석들을 몰래 훔쳐보는것이지. 이제 무슨 소리인지 알겠냐?"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이번에는 둘의 대화를 듣다 못한 블뤼안이 레딘을 밀치며 끼어들었다. "한번 잘 생각해보라구! 만약 너와 세이즈가 야심한 밤에 한 방에 있다라고 가정해보자. 너 같으면 뭘 하겠냐?" 블뤼안의 물음에 벌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저희야... 음... 같이 있으면 카드게임을 하죠! 얼마전에 세이즈에게 카드게임을 배웠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시간만 나면 카드게임을 하는걸요?" 벌쿤의 대답에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쉰 블뤼안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어색했고, 벌쿤이 스스로 깨우칠 확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포기하는 생각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쯔쯧... 그냥 따라오기나 해라! 대체 성교육도 제대로 못받은 녀석이라니... 어차피 직접 보면 알테니 그냥 가기나 합시다 켈트 형님." 이렇게 하여 드워프들은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뮤스의 방으로 나서게 되었고, 벌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뒤를 따를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뮤스와 카타리나는 반듯한 자세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평소 둘만의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고, 그 때 마다 별다른 어색함이 없었지만, 오늘만은 드워프들의 행동 때문인지 첫 만남 때 보다 더욱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특히 뮤스의 뇌는 쉴세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그라프에게 배운 상황대처법을 찾아보느라 분주했던 것이었다. 이내 나름대로 적당한 말을 떠올린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곤한데 그만 자자." 말을 던지고 나니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 뮤스는 아차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기에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대답도 그에 만만치 않았다. "그래, 그만 자자." 이렇게 어영 부영 함께 자는 분위기로 흘러가버리자 뮤스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옴을 느끼며 그라프와의 만남을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그라프와 만나기 전만 하더라도 남녀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한 그였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덕에 오히려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었다. 같은 시간, 드워프들은 방안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방문에 빈틈없이 달라 붙어있었고, 벌쿤은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멀찌감치 떨어져 복도의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드워프들 중 가장 아래쪽에서 방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켈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뮤스 녀석, 순진한 척 하더니 전혀 거리낌 없이 카타리나를 침대로 유도 하는군. 너도 이제 완전한 어른이 되는구나! 장하다!" 켈트의 말을 받으며 브라이덴도 한마디 거들었다. "뮤스도 뮤스지만 카타리나 역시 보통이 아닌걸? 생각보다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군 그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벌쿤은 잠이 오는 듯 하품을 하며 투덜 거렸다. "하암! 그냥 가서 잠이나 자면 안되요? 어차피 내일도 하루종일 전뇌거를 타고 움직여야 할텐데..." 벌쿤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레딘은 키가 닿지않았기에 힘껏 뛰어올라 그의 입을 가로막으며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 좀 줄여라 이 녀석아! 자고싶으면 너 혼자 가서 자면 될거 아니냐? 그리고 이 아저씨들이 좋은 교육을 시켜 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고 있는데, 고마워 할 줄은 모르고 투덜거리기만 하다니... 에잉!" 벌쿤의 불만을 한마디로 일축해버린 레딘은 계속해서 하던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방으로 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던 카타리나는 아무런 말없이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뮤스는 아직도 안절부절 못하며 침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 이불 정리를 마친 카타리나는 먼저 이불사이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서 올라와 뮤스. 오늘 전뇌거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일찍 자야지." "으...응." 더듬거리며 대답한 뮤스는 불편한 자세로 천천히 침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처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불쑥 카타리나의 몸이 뮤스에게 안겨 왔는데, 당황한 뮤스는 엉겁결에 그녀의 몸을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카..카타리나!" 카타리나는 그윽한 눈빛으로 뮤스를 올려다보았고, 뮤스는 침넘어가는 소리를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뮤스의 귓가로 다가와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뮤스... 나 하루종일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픈데 허리좀 주물러 줄래?" 예상과 전혀 빗나간 그녀의 말에 헛기침을 내뱉은 뮤스는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간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민망해 하고 있던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뮤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엎드려 누워봐." 뮤스가 흔쾌히 대답하자 한번 웃어보인 카타리나는 시키는 대로 침대에 엎드렸고, 뮤스는 갸냘픈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어찌되었건 이 일로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방안은 이미 어색한 분위기가 끝나있었지만, 방문 밖은 드디어 뜨거운 분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방문에 귀를 대고있던 드워프들은 눈에 핏줄을 곤두세운 채로 연신 입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문틈으로 뮤스와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 마다 드워프들의 오감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거기가 아니야 뮤스." "그럼 여기?" "아아아! 거기가 맞긴 한데... 너무 아파. 살살해." 자지러지는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침을 한번 꿀꺽 삼킨 켈트는 만족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흐흘... 역시 우리가 자리를 피해준 보람이 있군. 이제 녀석들은 결혼식 날짜만 잡으면 되는건가?" 평소 드워프들 중에서도 젊잖은 축에 속했던 브라이덴 역시 지금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껄걸! 처음에는 그렇게 아닌척 하더니 결국 뮤스도 어쩔 수 없나보군. 역시 녀석도 사내였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딘은 신경절 적인 모습으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하라는 시늉을 했다. "나참! 이제 막 재미있어 지려고 그러는데 왜그렇게 떠들고 있으슈?" 짧게 말한 레딘은 다시 방문에 귀를 기대었고, 레딘과 브라이덴 역시 문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하아... 너무 좋아 뮤스. 그런데 힘들지 않아?" "뭐 이정도 가지고. 계속 해줄테니까 편안하게 누워있어." "응." 시간이 갈 수록 드워프들의 흥분지수는 높아져 가기만 했고, 이미 이성을 잃은 듯한 드워프들은 머리로 문을 뚫고 들어가기라도 할 듯 드리밀고 있었다. 이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벌쿤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드워프들이 붙어있는 문쪽으로 걸어왔다. "나참! 그렇게 방안이 궁금하면 들어가서 보면 될 걸 이렇게 힘들게 듣고있어요?" 그렇게 말한 벌쿤은 서슴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는데, 드워프들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방문은 열렸고, 몸을 문에 기대고 있던 드워프들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쿠당탕탕! "으아아악!" "벌쿤 이 녀석! 뭐하는 게냐?" "거기서 갑자기 문을 열어 버리면 어떻게해!" 산통을 깨버린 벌쿤에게 저 마다 한 마디씩 던지며 화를 내던 드워프들은 순간적으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뮤스와 카타리나가 있을 침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뮤스가 도끼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거기서 뭘 하고 계셨던 거에요?!"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인 드워프들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가장 연장자인 켈트를 앞쪽으로 밀어냈고, 아우들에 의해 떠밀려 나온 켈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핫! 우..우연찮게 이 앞을 지나다가 말이지.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그...그냥 무슨 일인지 살펴 본것이란다. 그런데..." 변명을 하다 말고 침대위에 앉아있는 뮤스와 카타리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켈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상상과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뭘하고 있었던 게냐?" 켈트의 물음에 깔린 저의를 눈치챈 뮤스는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뭘하긴요! 카타리나가 전뇌거에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허리가 아프다길래 허리를 주물러 주고 있었죠. 혹시 이상한 상상하고 계셨나요?" "흠흠! 그..그게 아니라..." 얼굴을 붉힌 켈트가 헛기침을 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벌쿤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게뭐야! 아저씨들도 뮤스형에게 허리 마사지를 받고 싶었던 거에요? 그럼 진작 저한테 말해 주셨으면 제가 해드렸을 것 아니에요!" 벌쿤의 말에 눈을 번뜩인 켈트는 재빨리 벌쿤의 소매를 잡아끌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껄걸!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허리가 아프던 참이었는데... 이렇게들 서있지 말고 어서 벌쿤에게 마사지나 받으러 가자구!"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가 생기자 다른 드워프들 역시 어영부영 뒷걸음질 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그러게! 요즘 나이드니 허리가 예전만 못하다니까." "얼마전에 벌쿤이 마사지를 해줬는데 기가 막히더군!" "너희들도 피곤할 텐데 어서 자거라." 결국 방문 밖으로 드워프들이 모두 나온 것을 확인한 켈트는 정다운 표정으로 뮤스와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도 마사지나 받으러 갈테니 내일 아침에 보자고! 잘 자거라." 켈트의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방문이 닫히게 되었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멀뚱히 남게된 뮤스와 카타리나는 못말릴 드워프들을 향해 실소를 날려주고 있었다. 숨겨진 이야기. 팜구드 마을의 하루는 어둑한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농사일을 주로하는 마을이었기에 주민들이 대체적으로 부지런한 편이었는데, 그러한 습성은 일손을 사서 쓸정도로 부촌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는 듯 했다. 창으로 부터 시끌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뮤스는 눈을 부비며 뒤척였다. 그리곤 힘겹게 눈을 뜬 뮤스는 얇은 커튼이 쳐져있는 창으로 눈을 돌렸는데,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이른 시간임을 깨닫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벌써 사람들이 일과를 시작하는 가보군." 눈을 몇 번 깜빡거려본 뮤스는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허리가 뻐근함을 느꼈는데, 지난밤 카타리나와 같은 침대를 쓰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뮤스는 여분의 이불을 들고 바닥으로 내려와 잠을 청했던 것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뮤스는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푹신한 침대보다 바닥이 더욱 편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하룻밤 바닥에서 잔것으로 허리가 뻐근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보며 새삼스러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나도 이곳 사람이 다되었군... 후훗!" 말을 마친 뮤스는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아직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카타리나를 바라보았는데,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뮤스는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양쪽으로 열었다. 그러자 아직 어둑한 기운이 역력한 팜구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반듯하게 열을 맞추어 지어진 목조 건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창을 통해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어찌 본다면 초저녁인지 이른 새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광경이었다.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 보던 뮤스는 일행들이 일어날 때까지 시간이 제법 있다고 생각했고, 몸도 풀겸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대충 옷을 걸치며 카타리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온 뮤스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여름이었지만 새벽의 공기는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그 덕에 몸속의 온갖 탁한 기운이 씻겨져 나가는 듯했다. "후우! 정말 개운한걸." 그리곤 좌우를 돌려보며 갈 곳을 정한 뮤스는 아직 마르지 않은 이슬이 깔려있는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전뇌력이 공급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일찍 문을 연 가게들은 등불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구수한 빵굽는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싱싱한 야채들과 훈제 처리한 고기들이 가게의 진열장에 오르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는 사람들도 하나, 둘 씩 가게 앞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전원적인 분위기의 마을을 둘러보던 뮤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허기가 짐을 느낀 뮤스는 가장 먼저 눈에 띈 빵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가방에 손을 넣어 동전 몇 개를 꺼낸 뮤스는 막 구워진 빵을 내놓고있는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 "아주머니. 이 빵은 얼마죠?" 뮷스의 말을 들으며 그의 행색을 아래위로 살피던 아주머니는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처음 보는 젊은이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 오셨나보죠?" "네, 라이델베르크에서 왔습니다." "이런... 호호! 내 여 동생이 라이델베르크로 시집을 갔죠. 요 전에도 잘 지낸다고 연락이 왔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아참! 그런데 빵은 얼마나 필요하죠?" 아주머니의 물음에 잠시 빵을 살펴보던 뮤스는 어차피 간단한 요기만 할 것이기에 그 중 검은 색의 크림이 엊어진 작은 빵을 하나 짚으며 대답했다. "이것 하나면 되겠는데요?" 그의 말에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건 쇼코브로트라는 빵이라고 하죠. 우리 가게 최고의 인기상품인데, 그냥 하나 드릴테니 맛이나 보세요. 내가 원래 잘생긴 총각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말이야." 따뜻한 인심이 스며있는 아주머니의 말에 잠시 갈등을 하던 뮤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짚어들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게 먹겠습니다." 손에든 빵을 한입 물자 아직 식지않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또, 위에 얹어진 검은색의 크림은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들어 맛을 더하고 있었는데, 처음 먹어 본 빵의 기가막힌 맛에 매료된 뮤스는 어린아이 마냥 조금씩 아껴먹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것 참... 정말 맛있군요!" "호홋! 원래 우리집 빵이 팜구드에서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있죠. 벌써 30년이나 빵을 만들고 있는데, 그 실력이 어디 가겠수?" 빵집의 아주머니와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고 있을 때, 한 여인이 가게로 다가와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블룬 아주머니?" 그녀의 등장에 시선을 돌린 빵집의 아주머니는 따뜻한 웃음으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머, 케니언이구나. 오늘도 빵사러 왔니?" 케니언이라는 이름에 귀가 솔깃해진 뮤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진한 갈색의 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젯밤 식당의 옆 자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던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진열되어있는 빵을 몇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호밀빵 두개랑 쇼코브로트 다섯개만 주세요." "역시 오늘도 쇼코브로트는 빼놓지 않고 사는구나. 아버지 드리려는 거지? 그래 아버지는 좀 괜찮으시니?" 아주머니의 물음에 눈웃음을 지은 케니언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우... 그럭저럭 괜찮으세요. 사실 아버지 몸을 생각하면 쇼코브로트도 못드시게 해야 하는데 워낙 좋아하시니 어쩔 수가 없죠. 젊었을 적 부터 드시던 것이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빵을 포장하던 아주머니는 종이로만들어진 봉투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단다. 5실피만 주렴." "네, 여기 5실피 받으세요. 그럼 내일 또 뵐께요." 동전 몇닢을 건네주며 빵봉투를 전해 받은 케니언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이내 몸을 돌리려 했는데, 어제의 일을 떠올린 뮤스는 대충 입을 닦아내며 그녀를 불렀다. "저... 실례합니다." 뮤스의 부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케니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신 것인가요?" 그녀의 되물음에 뮤스는 머슥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습니다. 케니언 양이라고 하셨나요?"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자 케니언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만, 저는 그 쪽을 모르는데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죠?" 뮤스는 충분히 그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방금 전 아주머니께서 부르신 이름도 들었고, 어제 식당에서 아가씨의 옆 자리에 앉아있다 우연찮게 이름을 듣게 되었답니다." 잠시 생각을 되살려보던 케니언은 뮤스의 아래 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뮤스에 대한 경계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어제 식당이라면...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를 보며 뮤스는 그녀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양 손을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어제 식당에서 오고가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 마을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어제 오가던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죠. 물론 괜한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뮤스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말을 하자 경계를 하던 케니언의 표정도 조금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곧 어두워 졌는데, 어제의 일 때문인 듯 했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팜구드의 일인 만큼 타지에서 오신 분에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일이에요. 또, 설령 내막을 아시게 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힘으로 도와 주실 수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그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간략히 밝힌 케니언은 뮤스에게 뭐라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 남게된 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흠... 자존심이 강한 아가씨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뮤스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빵집 아주머니는 케니언의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며 뮤스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케니언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젊은이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의외의 대답을 해준 아주머니를 향해 시선을 돌린 뮤스는 얼굴을 들이 밀며 물었다. "아주머니도 그 일에 대해서 아시고 있으시는 것인가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볼을 긁적거린 아주머니는 주변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다면 어제 젊은이가 들었다는 이야기가 그 것에 관련된 이야기일 거에요." "그 것에 관련된 이야기라니요?" "음...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두 쉬쉬 하고 있는데, 공공연하게 거론 되는 이야기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외부로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고 있으니 젊은이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 것 같군요." "그렇다면 아주머니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뮤스의 부탁에 빵집의 아주머니는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이런... 나 역시 이 마을의 사람이라우. 솔직한 심정에서야 젊은이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앞으로도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 어쩔 수가 없어요." 더 이상 묻는 것도 아주머니에게 실례라고 생각한 뮤스는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고, 곧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빵 맛있게 얻어먹고 갑니다. 많이 파세요." "흠, 젊은이 잠깐만 기다려 봐요." 빵집의 아주머니는 막 돌아서려는 뮤스의 발걸음을 잡았고,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왼쪽의 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끝에 붉은 지붕을 가진 큰 집이 나타날 거요. 그곳이 케니언의 집인데, 케니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직접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아!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의 말에 아쉬운 기색을 날려버린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고, 잠시 진열장에 시선을 멈춘 뮤스는 자신이 먹던 쇼코브로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의 집을 방문하는데 맨 손으로 갈 수는 없죠. 그분께서 이 빵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으니 이것 좀 적당히 싸주시겠습니까?" "좋은 젊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주 예의 바른 젊은이군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막 구운 빵으로 싸드릴테니..." 따뜻하게 미소를 지은 아주머니는 빵을 꺼내오기 위해서 가게 안으로 몸을 돌렸고, 뮤스는 그녀가 가리켜준 방향을 바라보며 찾아갈 집을 머리 속에 되새기고 있었다. 빵집의 아주머니에게 들은대로 길을 따라간 뮤스는 상당한 규모의 저택 앞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설명대로 붉은 색의 지붕이었고, 길의 끝에 서있는 저택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뮤스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택의 문앞에 서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집이군. 이런 큰 집에 사는 아가씨가 이른 아침 부터 빵을 사러 나온다니... 그래도 이집 외에는 붉은지붕을 가진 곳이 없으니..." 혼잣말을 중얼 거린 뮤스는 나직하게 숨을 들이쉬며 저택의 나즈막한 대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아담하게 꾸며져있는 정원을 통과한 뮤스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린 문앞에 서게 되었다. 밀이삭의 모양을 한 특이한 종을 바라본 그는 그 아래쪽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금속으로 만들어져있는 금속의 밀이삭들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하며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띠리리링... 띠리링... 뮤스가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종을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을 때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수수한 면셔츠 위에 오래된 듯 거무튀튀한 색의 가죽 조끼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종이로 만든 빵봉투를 들고있는 뮤스를 아래위로 살피며 물었다. "젊은이는 누구신가? 이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중년인의 얼굴이 낯익음을 느낀 뮤스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라이델 베르크에서 온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밥갑습니다. 마고드씨 되시죠?" "흠... 내 이름이 마고드임은 틀림없네만, 나는 자네를 잘 모르겠군."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떠올리던 마고드는 뮤스가 들고있던 빵봉투에 시선을 멈추며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혹시, 자네가 아침에 빵집에서 우리 딸애를 만났다는 젊은이인가?" 마고드가 직접적으로 물어오자 오히려 이야기를 꺼내기가 쉬워졌다고 생각한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고드씨께 여쭈어 보고싶은 것이 있어서 빵집 아주머니께 물어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흠... 일단은 이렇게 찾아왔으니 들어오게나." 뮤스에게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한 마고드는 몸을 돌렸고, 뮤스 역시 집안을 살펴보며 안으로 들었갔다. 저택의 내부는 바깥에서 본 것 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물론 실제 넓기도 했지만,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나마 몇 가지 있는 가구들도 상당한 세월을 겪은 듯 색이 바라거나 칠이 벗겨진 곳이 군데군데 보이고 있었다. 소파를 지나쳐 방문 하나를 열어보인 마고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이르니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겠군? 기왕 우리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식사 대접은 해야겠지?" "그건..." 뮤스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마고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들만큼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식사도 아니니 그렇게 부담 가질 것은 없다네. 그저 아침 식사는 빵 몇조각과 따뜻한 차 한잔이 다일세."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뮤스는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 마고드의 직선적이지만 인정 많은 성격을 느낄 수 있었고, 흔쾌히 그의 접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앞치마를 두른 케니언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빵집에서 사온 빵을 작은 바구니에 담아 정리하고 있었고, 불 위에서는 찻물이 끓고 있었다. 그녀는 마고드의 기척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아침부터 누가 찾아온..." 질문을 던지는 도중에 뮤스의 얼굴에 시선이 닿은 그녀는 놀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은 아까 만났던... 분명 상관 하실일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 저희 집까지 찾아오시다니 무례하군요." 달갑지 않은 그녀의 말에 뭐라 대꾸하려고 하자 마고드가 나서며 대신 입을 열었다. "후훗... 너의 말을 들었겠지만, 이 애비의 말은 듣지 못한 것이겠지. 이 젊은이는 내 손님인 듯 하니 너는 잠자코 있거라. 그리고 준비하는 김에 이 젊은이의 아침도 좀 준비해 주렴." 마고드가 뮤스를 옹호하고 나서자 할 말이 없었던 그녀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는 마고드의 안내를 받으며 식탁에 앉았다. 잠시 후, 케니언은 세 개의 접시와 잔을 들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각각의 접시에는 적당하게 잘려진 통밀빵이 놓여있었고, 쇼코브로트가 두개 씩 놓여있었는데, 유독 한 접시에는 한개만이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마를 찌푸린 마고드는 불만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째 그 접시에는 쇼코브로트가 한개 밖에 없느냐?" 그의 물음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찻잔에 차를 따르던 케니언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미처 손님이 오실 줄 모르고 쇼코브로트를 다섯개 밖에 사오지 못했어요. 그래도 제가 하나만 먹으면 되니 괜찮아요." "그러게 내가 평소에 많이 사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니. 어차피 쇼코브로트는 시간이 흘러도 맛이 변하지 않으니 상관없지 않냐?" 케니언은 아이의 투정마냥 투덜거리고 있는 아버지를 바람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적당히 사다놓지 않으면 아버지가 시도때도 없이 다 드실것이니까 그렇죠." "흠... 쇼코브로트를 마음대로 먹을 정도의 재산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나직한 한숨을 내쉰 케니언은 따뜻한 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물론 아버지의 재산은 팜구드를 통털어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많죠. 하지만 이건 돈을 떠나 아버지의 건강문제란 말이에요. 몸이 약해지셔서 쇼콜라가 들어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위험하다고요." "내 몸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안다.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못먹어가면서 까지 두 부녀의 티격거리는 대화를 듣고있던 뮤스는 옆 자리에 내려놓은 빵봉투를 그들을 향해 내밀며 끼어들었다. "저 두 분다 그만 하시죠. 작은 성의지만 제가 쇼코브로트를 사왔으니 이것을 나눠 드시면 될 것입니다." 뮤스의 목소리에 다투고 있던 부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고정이 되었고 각각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데, 케니언은 더욱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마고드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아버지의 몸 때문에 받을 수가 없겠군요. 가실때 가지고..." 케니언이 뮤스의 선물을 사양하려 하자 마고드는 냉큼 빵봉투를 잡아채며 말을 가로막았다. "손님의 성의를 거절하면 되겠니? 이것 참. 깐깐한 딸 덕분에 좋아하는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나의 갈증을 풀어주는군." 이로서 부녀사이의 말다툼이 일단락 되자, 조금 딱딱해 보이는 부녀 사이에 끼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던 뮤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쇼코브로트를 작은 조각으로 뜯어 입에 넣은 마고드는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살짝 눈을 감았고, 나직한 탄성을 지었다. "으음! 과연... 먹을 때 마다 탄성이 나오는 맛이라니까. 이 맛있는 것을 못먹게 하다니 케니언 네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야 할게다." 하지만 케니언은 이러한 대화가 종종 일어나는지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뮤스를 바라본 마고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우리마을의 일에 대해서 알고싶어 한다고 딸애에게 들었다네. 맞는가?" 뮤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 해주도록 하지." 잠자코 식사를 하고 있던 케니언은 통밀빵 조각을 씹다 말고 마고드를 바라보며 말리려 했다. "아버지! 외지의 사람이 그 일을 알게되었다는 것이 갈리트 아저씨 형제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거에요. 입을 막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말끝을 흐리는 딸을 바라본 마고드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젊은이는 네게 거절을 당하고도 우리집을 찾아오면서까지 그 일에 대해서 알고싶어하지 않느냐? 성격을 보아하니 어차피 우리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그 일에 대해 알아낼 듯 한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뮤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마고드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듯 빵조각을 잘게 뜯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도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팜고드 마을은 도이첸 제국에서 손에 꼽는 밀 생산지라네. 제국 전체에서 소비되는 밀 중 절반 정도가 이곳 팜고드에서 재배된 것이지. 그러니 규모 만큼이나 밀을 판매하여 얻는 수익이 상상을 초월 하고, 주요 밀 생산지인 만큼 안정적인 밀수급을 위해 황실에서도 세금을 적게 받으니 이곳 팜고드 마을은 자연스럽게 부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세. 물론 마을 사람들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인력을 끌어오는데 상당한 돈이 들긴 하지만, 그것도 수입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 여기까지는 뮤스도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마을의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들어야만 했다. "그 중에서도 땅을 가진 지주들의 수입과 재산은 가히 제국에서 내노라하는 재벌들에게 비교해 보더라도 별 손색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는 겨우 여섯명의 사람들이 전체 경작지를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조금 놀란 얼굴하며 되물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경작지를 겨우 여섯 명이 나누어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경작지를 여섯 등분으로 나눈다 하더라도 개인의 재산으로 소유 할 수 있는 면적이 아닙니다. 황실에서도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면적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뮤스의 물음에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은 마고드는 식탁을 두들기며 말했다.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이미 도이첸 제국은 20여년 전 부터 황실에서 개입하던 개인토지소유 규제가 풀렸다네. 황실에서도 대규모 자본을 이용한 일률적인 대량재배가 훨씬 능률적이라고 보게 된 것이지.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곳 팜구드 마을일세. 즉, 소수의 지주들은 자신의 경작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일정한 품질의 밀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지. 게다가 이곳의 지주들은 수대에 걸쳐 밀 농사를 전문적으로 해온 집안이기에 그 효율성을 황실에서도 인정하여 모든 권리를 지주들에게 일임한 것이라네." 뮤스는 대화를 통해 한동안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닿게 되었다. 바로 그라프에게 얻은 지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가 은퇴를 한 이후에도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지식도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깨닿지 못하고 있던 것을 자책하고 있을 때, 근심어린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던 케니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역시 그 여섯 명의 지주 중 한분이시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뮤스는 케니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놀라며 되물었다. "네? 마고드씨가 이곳의 지주중 한 분이시라고요?" "사실이에요. 비록 아버지가 쓸데 없는 곳에 돈쓰기를 싫어하셔서 조금 볼품은 없지만, 이곳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소유하고 계신답니다. 그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고 계시지만요." "마음 고생이라... 그렇다면 어제 그 일과 연관이 된 듯 합니다만?" 뮤스가 어제의 이야기를 꺼내자 이마를 짚은 마고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물질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네. 물질에 대한 사람의 욕구는 그 끝이 없고, 오히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일 수록 그 욕구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 어제 우리와 함께 자리를 하고있던 갈리트 형제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네." "아... 그 중년의 아저씨들을 말씀하는 것이군요. 대체 그 사람들이 마고드씨께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뭐 쉽게 말하지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주길 바라는 것이지. 바로 수익을 늘리기 위해 팜구드 마을에서 생산되는 밀의 가격을 올리려고 하는 것일세." "밀의 가격을 말입니까?" 되물어오는 뮤스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과거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 수대에 걸쳐 갈리트 집안과 우리 집안은 팜고드의 밀 재배인으로서 절친한 사이였다네.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간의 상의를 통해 일을 해결하기도 하고, 농번기 때에는 인력을 서로 몰아 주어 농사 일을 돕기도 했지. 물론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갈리트 집안의 세 형제들과 나도 절친한 사이였다네. 하지만 그 놈의 돈은 사람을 타락시켰지. 그들의 부모가 돌아가시게 되자 세 형제들은 재산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누어 가진 재산이 형제들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게야. 그 이후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늘리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형제들이 이곳 밀경작지의 반을 소유하게 되었다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두 지주들에게서 땅을 빼앗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것이지." 대략적인 마을의 뒷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이 밀의 가격을 올려서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다른 지주분들도 모두 갈리트 형제들과 같은 생각인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다네. 나머지 지주들도 나와 같이 밀값을 인상하는 것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갈리트 형제들의 협박에 생각을 굽힐 수 밖에 없었지." "협박이라면 이 마을의 치안을 맡고 있는 공직자들에게 말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고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쯔쯧... 갈리트 형제들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네. 그들이 행사하는 것은 완력이 아니라 바로 물일세." "물이라니요?" 뮤스의 되물음에 케니언을 바라본 마고드는 깨끗이 비운 접시를 건네주며 말했다. "케니언 식탁 정리 좀 간단히 하고, 마을 지도를 가져 오거라."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케니언은 각자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과 접시를 모으며 식탁에서 일어났고 그것들을 물에 담궈 놓은 후 식당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지도를 가지고 오는 동안 마고드는 몇 마디의 이야기를 덫붙였다. "물이 농사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대한 지는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일세. 애초 이곳 팜구드 마을은 가뭄이 심한 곳이기 때문에 농작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네. 하지만 그 당시 정착할 곳을 찾고계셨던 선조들께서는 이 넓은 땅이 황무지로 버려지는 것을 아까워 하셨기에 북쪽의 류하크 강에서 부터 경작지까지 이르는 수로를 십 여년에 걸쳐 건설하셨고, 그 덕에 지금의 비옥한 토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일세."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케니언은 가죽으로 된 지도를 가져와 마고드에게 건네 주었고, 그는 접혀있던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지도를 잘 보게나. 방금 설명을 했듯이 수로는 북쪽으로 부터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네. 그리고 색깔별로 경작지가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의 빨강, 주황, 노란색의 경작지가 갈리트 형제의 땅이고, 그 바로 아래 보라, 파랑, 초록색이 경작지가 나머지 세 명의 경작지일세. 가장 오른쪽의 초록색 경작지가 바로 내 땅이지." 마고드의 설명대로 지도를 살펴보던 뮤스는 어제 팜구드 마을에 들어서며 켈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유독 밀이 매말라 보이는 그곳이 바로 마고드의 경작지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갈리트 형제의 경작지를 통과하고 있는 수로에서 시선을 멈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던 것이었군요. 수로가 갈리트 형제의 경작디를 통과해서 나머지 지주들의 경작지로 들어오고 있으니 만약 갈리트 형제들이 이 수로를 막는다면, 아랫 쪽에 있는 경작지들은..." "메말라 버리는 것이지." 잠시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수로를 막는다고 해도 도이첸 제국의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이런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수로가 아니니 수로가 자신의 땅에 속해있는 만큼 그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법은 그것을 제재할 수 없으니까요. 교묘하게 법의 구멍을 이용해 이런 짓을 하고 있군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마고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보기보다는 아는 것이 상당하구먼. 게다가 갈리트 형제들은 마을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해서 외부인들에게는 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도록 감시를 하는데다가 몇몇 고관들에게까지 뇌물을 주고 입을 막고 있는 상태이지. 또, 설령 외부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황실에서 법을 수정하기까지는 엄청나게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하더군. 족히 몇 년은 걸린다고 하니 법이 수정 될때까지 농사를 포기하고 지낼 수도 없는 일일세. 한마디로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는 것이지. 나머지 지주들을 최대한 설득하는 수 밖에..."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지주들이 마고드씨의 설득을 들어줄 확률도 희박하겠군요. 자신들의 경작지로 통하는 수로를 막아 버린다면 그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요." "자네의 말대로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기는 힘들겠지만 아무런 손도 써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동의 할 수는 없네. 팜구드에서 출하되는 밀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면 타 지역에서 출하되는 밀의 가격도 따라서 오르게 되는 것은 불보듯 뻔하고, 그렇게 된다면 넉넉하지 못한 제국 전역의 서민층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일세. 황실에서 밀 가격 인상에 대해서 조사를 나오긴 하겠지만, 서류를 조작해 농사에 드는 비용이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면 아무런 뒷탈도 없는 것이지. 자고로 농부는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세.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잊고, 사리사욕에 눈이멀어 이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니 정녕 부끄러울 따름일세." 뮤스는 마고드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서도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쉴세 없이 지형을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지도의 여러 곳을 손으로 찍어보던 뮤스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 곳은 일년에 비가 몇 차례나 옵니까?" 돌연한 물음에 마고드는 손을 꼽아 세어보며 대답했다. "대략 적으로 10회 내외 정도 일세. 다른 지역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라는 수치이지. 게다가 비는 내리는 족족 땅으로 스며 들기 때문에 반나절을 못가서 비가 내린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네." "반나절이라고 하셨습니까?" 뮤스의 되물음에 마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세. 그런 이유로 마고드 마을의 땅을 자우겐엘데라고 부른다네. 흡수하는 땅이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식수는 어떻게 공급받는 것이죠? 우물을 파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죠?" 마고드와 뮤스의 대화를 듣고있던 케니언은 그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지금까지 뭘 들었나요? 이곳에서 지하수맥이 발견되었다면 우리가 농업용수 걱정을 할리가 있을까요? 10멜리까지 파보았지만 우물은 커녕 물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죠. 그래서 경작지로 흘러가는 수로의 물의 일부분을 마을에서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에요. 갈리트 아저씨들도 마을에서 살고 있으니 식수까지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죠." 마고드의 대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뮤스는 식탁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지도 위를 두들기며 말했다. "세상의 존재하는 그 어떠한 물질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즉,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수맥이 없다는 것은 아직 그 빗물들이 지하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뮤스의 말에 마고드는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10멜리씩이나 파내려 갔지만, 우리는 수맥을 발견할 수 없었다네. 그런데 그 빗물들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바로 지층 아래겠죠." "지층?" 마고드의 되물음에 뭐라고 대답을 하려던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지금은 말로 설명해 드린다 하더라도 이해하시기 힘드실 테니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제가 오후쯤 동료들과 함께 찾아오도록 할테니 마고드씨의 경작지까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어렵지 않네만 무엇을 할 작정인가?" "제 생각이 맞다면 몇년 동안은 충분히 사용할 농업 용수를 확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럼 오후에 뵙도록 하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벼운 대답과 함께 몸을 돌린 뮤스는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두 부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탄성파 탐사. 다행스럽게 마고드의 집이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뮤스는 금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라이델베르크였다면 이제 막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기에 카타리나는 아직도 잠을 자고있었고, 드워프들과 벌쿤 역시 일어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카타리나와 일행들을 깨워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커튼과 창을 활짝 열어 햇빛이 잘 들게 만들었고, 눈이 부셔진 카타리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중얼 거렸다. "으음... 뮤스 벌써 아침이야?" 그녀의 물음에 침대의 한쪽으로 다가가 걸터 앉은 뮤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주며 대답했다. "후훗. 어제 먼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네? 어차피 하루더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더 잘래?"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카타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하지만 조금 더 자야겠는걸?"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나는 드워프 아저씨들이랑 벌쿤을 깨우러 갈게." "우웅... 나중에 봐 뮤스... 하암..." 잠에 겨워하며 하품을 하고 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미소를 한번 지어준 뮤스는 빠른 걸음으로 드워프들의 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워프들의 방에 도착한 뮤스는 문이 잠겨 있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문이 열리자 뮤스 시야에 두개의 침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벌쿤이 독차지 한 채 늘어져 자는 중이었고, 네 명의 드워프들은 나머지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듯 했는데, 키가 워낙 작았기에 침대를 가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이상해 보이는 방안의 풍경을 뒤로한 뮤스는 그들을 깨우기 위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곤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대보를 잡아 힘차게 당겼다. "여차!" 그와 동시에 드워프들과 벌쿤의 아래 깔려있던 침대보가 끌려나오면서 그들의 몸을 핑그르르 돌렸고, 순식간에 모두를 침대 밖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다. -꾸다탕탕! "으아아악! 뭐...뭐야!" "지진이라도 난 거유? 갑자기 땅이 뒤집혀 버리다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허우적 거리고 있는 드워프들과 벌쿤을 내려다 보고있던 뮤스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자자! 급히 해야할 일이 생겼으니까 모두들 일어나세요! 어서 식사하고 일하러 가야한다고요!" 드워프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엉거주춤 일어나기 시작하자 뮤스는 한명씩 팔을 부축해 주며 일으켜 나갔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있던 켈트는 눈을 부비며 물었다. "으... 졸려 죽겠는데 아침 부터 대체 무슨 일인게냐? 조금만 더 자면 안되겠냐?" 하지만 드워프들과는 달리 벌쿤은 아침 잠이 많은편은 아니었기에 금새 정신을 차리며 기지개를 폈다. "으아! 잘잤다! 그런데 아침 부터 무슨 할일이 있다는거야. 설마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식당에서 이야기 해줄테니 대충 씻기나 하라고. 그럼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어서와! 아저씨들도 서두르세요!" "알았다고... 알았어." 방문을 나서고 있는 뮤스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은 벌쿤은 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세면대로 걸어갔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비틀 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마을사람들은 식사를 마쳤을 시간이었기에 식당내부에는 뮤스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양의 빵을 쌓아 놓고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드워프들의 식욕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듯 했다. "흠... 그런일이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면 간단하게 넘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할 참이냐? 설사 수로를 다시 뚫으려고 하더라도 최고한 몇 년을 걸릴터인데..." 뮤스를 통해 마고드와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모두 들은 켈트는 빵조각을 하나 입에 넣으며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다른 드워프들과 벌쿤 역시 턱을 괜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 편에 앉아 금속 막대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던 뮤스는 그것들 중 하나를 내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것을 이용해서 이곳 경작지의 지층을 조사해 볼 생각이에요." 그의 말에 벌쿤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건 광역통신기에 사용하는 전파축 이잖아. 그것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또 다시 완성된 전파축 하나를 옆으로 내려놓은 뮤스는 계속해서 전파축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이 전파축은 조금 개조가 된것이지. 즉, 주변의 진동을 흡수하여 일정한 신호로 나타내 주는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지층의 형태를 알아볼 참이야." "지층이라면 땅속을 말하는 것 같은데, 파보지도 않고 땅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고?"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주도록 할게. 아참! 그리고 아저씨들은 시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준비 할 수 있겠어요?"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을 해보던 브라이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뭐 전뇌거를 용도변경하면 임시적으로 '금광석시추'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리 깊이 파고들어갈 수는 없을 게다. 기껏해봐야 20멜리 정도 될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그럼 서둘러 식사를 하도록 하세요." 뮤스의 말에 어께를 들썩인 브라이덴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헤휴... 최소한 식사를 할 시간 정도는 넉넉히 달라고. 시추작업이 여간내기가 아닐텐데 든든히 배는 채워야 할 것 아니냐?" 불만섞인 목소리에 피식 웃은 뮤스는 옆에 쌓아놓았던 전파축들을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라도 하게 해드린걸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들이 일어나자 마자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고요. 그리고 벌쿤은 나랑 같이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 전뇌거를 타도록 해. 알겠지?" "으응..." 입안가득 빵을 머금고 있던 벌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주었고, 뮤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뮤스는 식당앞의 길에 세워져있는 전뇌거로 다가갔다. 그리곤 손에든 전파축을 대충 짐칸에 실은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가방에 손을 넣으며 중얼 거렸다. "화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있었던가?" 가방속을 뒤적이던 뮤스는 이내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었다. 수분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름을 먹인 종이봉투의 안을 살펴보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전뇌거의 짐칸에 실려있는 다른 장비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마고드는 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해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가늠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마땅치 않아 마나시계를 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농사일을 주로하는 이런 마을에서는 정확한 시간을 따질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근검한 마고드가 마나시계를 구입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었다. 창에서 시선을 뗀 마고드는 나무로 조잡하게 깍아 만든 옷걸이에서 오래된 갈색의 외투를 짚어들었다. "흠... 지금쯤 그 젊은이가 올 때가 된 것 같군." 마고드가 외투를 걸치고 있을 때, 소파에 앉아 뜨게질을 하고있던 케니언은 잠시 손을 멈추며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그 뮤스라는 사람을 믿고 계신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 사람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요. 경작지로 이어진 수로가 끊어진 마당에 어디서 그 많은 양의 농업용수를 가지고 온다는 것인지... 아버지도 너무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거에요. 기대를 해봤자 결국 상처를 받는 것은 아버지일테니까요." 외투를 모두 걸친 마고드는 딸의 맞은편에 앉으며 가볍게 웃었다. "후훗... 설령 그 젊은이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아무렴 어떻겠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일말의 희망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란다. 나중에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희망을 쉽게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야." 마고드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어두운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네의 인생에만 신경을 쓰거라. 갈리트 형제들과 불미스러운일을 겪어온 지난 몇 년 동안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나의 고집때문에 너까지 마음 고생을 하게된 것이었단다. 정말 네가 걱정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건만... 누누히 말했지만 이 일은 애비의 일이니 너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의 말에 뜨게질 바늘을 내려놓은 케니언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일이 바로 제 일이에요! 그런 것이 가족이 아닌가요? 설마 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시겠죠?" 상기되어있는 케니언의 얼굴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던 마고드는 고개를 내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럴리가 있겠느냐. 비록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너는 내 딸이란다. 유일한 나의 가족이지... 내가 곧 죽더라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일게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앞으로도 몇 십년은 더 사실 것이라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케니언의 눈가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소매로 눈물을 재빨리 훔친 그녀는 원래의 딱딱한 표정을 되찾으며 말을 이었다. "몸에 해로우니 햇빛을 너무 많이 받지 마세요. 그리고 너무 늦지도 마시고요." 비록 잔정은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딸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마고드는 가슴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강한 척 하고 있는 딸을 위해 평소와 같이 털털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녀석! 이 애비가 서너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나갈 때 마다 그 소리를 하는구나. 이제는 네 목소리가 귀에 박혔는지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리더군!" 마고드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케니언에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집 밖으로 부터 전뇌거의 소리와 함께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고드씨! 준비 다되셨으면 나오십시오!" 그 소리에 고개를 잠시 창쪽으로 돌렸던 마고드는 시선을 떼며 딸의 어깨를 두들여 주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마. 저녁이나 맛있게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마친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고, 케니언은 문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주신이시여... 오늘도 부디 아버지께 아무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몰래 기도를 드리는 케니언의 두 손은 그녀의 간절함을 대신 보여주기라도 하듯 굳게 쥐어져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마고드는 길가에 서있는 두 대의 전뇌거를 볼 수 있었다. 전뇌거에 시선을 고정시킨 마고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뮤스가 타고있는 전뇌거는 보통의 전뇌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을 한것이었지만, 뒤 쪽의 전뇌거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고드 씨! 이 쪽으로 타세요!" "아..알겠네!" 뮤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마고드는 뮤스의 전뇌거 쪽으로 다가가 전뇌거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실내를 한번 살펴보던 마고드는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나도 일할 때 쓰는 라이노가 있지만, 내부가 완전히 다르군 그래. 겉 모습이 비슷하길래 같은 기종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이 신형인가보지?" 마고드의 물음에 뮤스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벌쿤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고드씨. 벌쿤이라고 부르세요. 이 전뇌거는 신형이 아니라 공학원에서 특별 제작된 전뇌거랍니다. 쓰임새에 따라 용도변경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동력기를 비롯한 모든 부품과 탑재되어있는 장비가 찰탁식이기 때문에 부품과 장비의 재조립을 통해 필요한 용도로 변환하여 쓸 수가 있죠. 한 마디로 움직이는 거대한 공구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비록 마고드는 벌쿤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이 전뇌거가 대단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곧 드워프들이 타고있는 기이한 모양의 전뇌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저 뒤에있는 전뇌거도 이것과 같은 전뇌거란 말인가?" "하핫! 이해가 빠르시군요. 원래는 저 뒤에 있는 전뇌거 역시 이것과 같은 모양이었죠. 하지만 곧 시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형태로 재조립한 것입니다." "허허... 이런 전뇌거 한대 있으면 농사일도 훨씬 쉬워질 것같군. 땅을 갈거나 씨를 뿌리도록 그 용도변경이라는 것을 할 수도 있을 것 아닌가?" 마고드의 상상력에 가볍게 웃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훗! 물론 그것도 가능할 것 같군요. 다목적 농기구라..." 마고드가 신기한 듯 전뇌거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동력기의 진동이 전해져 왔고, 뮤스는 전뇌거를 천천히 몰아 나가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황금빛으로 익은 밀 이삭들이 흥겨운 모습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평선까지 이어진 듯 끝 조차 보이지 않는 밀밭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탄성을 내뱉게 만들 정도로 광활했고, 일정한 크기로 반듯하게 정리되어있는 밀밭은 마치 자를 대고 금을 그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름의 태양이 하늘의 한 가운데에서 내려 쬐고 있을 무렵 밀밭 사이로 나있는 반듯한 길로 두 대의 전뇌거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 달리고 있는 전뇌거는 보통의 전뇌거와 그 모습이 다를바가 없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전뇌거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차체가 짧아 졌을 뿐만 아니라 전뇌거의 중심부에는 굵직한 금속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이들은 바로 팜구드 마을을 떠나 마고드의 경작지를 향하는 뮤스 일행들이었는데, 뮤스와 벌쿤은 멀리서 보던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주고 있는 밀밭에 시선을 빼앗긴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뇌거를 운전하며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밀밭을 구경하던 뮤스는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장관이라고 밖에 설명을 할 수가 없겠군요.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면적이었을 줄이야..." 벌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정말 끝이 없는걸요? 금방 수확한 햇밀로 빵을 만들면 정말 맛있겠어요!"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말도 하지않은 마고드는 그저 어두운 안색으로 창밖에 비친 밀밭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밖을 바라보던 그는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곳 까지는 다른 지주들의 경작지이고, 저 둑에서 부터는 나의 경작지라네."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를 들은 뮤스는 그가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초록의 풀로 덮여있는 둑이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있었지만 상당한 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뻗어있는 길의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던 뮤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2켈리 정도는 더 가야겠군요. 마고드 씨의 경작지까지 길이 일직선으로 뻗어있습니까?" "물론일세. 팜구드의 경작지는 관리에 수월하도록 체스판 모양을 하고 있다네. 그러니 모든 길은 직선으로 나있는 것이지." 마고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천천히 전뇌거를 세웠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던 드워프들의 전뇌거 역시 따라 멈추었고, 뒷 자리에 앉아있는 벌쿤을 돌아본 뮤스는 짐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고드씨와 나는 먼저 가있을 테니 벌쿤 너는 지금부터 드워프 아저씨들의 전뇌거를 함께타고 100멜리 간격으로 전파축을 땅에 심으면서 따라와 줘. 깊이는 30셀리씩 일정하게 심어야 해." 아무런 생각없이 밀밭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던 벌쿤은 뮤스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 100멜리 마다내려서 전파축을 심으라고? 2켈리라면 20개씩이나 심어야 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벌쿤의 칭얼거림에 마음이 약해질 뮤스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경작지에도 최소한 5켈리 쯤 더 심어야 하니 총 70개를 심어야겠군. 후훗! 부탁한다 벌쿤!" "뭐 70개라고?! 너무하잖아! 드워프 아저씨들도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잔소리 말고 어서 내리기나 해! 드워프 아저씨들이야 나중에 포르코타 한 병 구해다 준다고 하면 잠잠해 질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파축은 짐칸에 있으니 내려서 꺼내어 가도록 하라고!" "하지만 이건..." 아직도 벌쿤이 불만을 감추지 못하자 뮤스는 급히 몸을 움직이며 전뇌거의 뒷문을 열었고, 벌쿤을 힘껏 전뇌거 밖으로 밀어냈는데, 방심하고 있던 벌쿤은 산만한 덩치가 무색하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전뇌거 밖으로 떠밀려 버리고 말았다. "으아악! 떨어진다!" -쿵! 결국 볼썽 사납게 전뇌거 밖으로 떨어진 벌쿤은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한껏 볼을 부풀린 그는 어쩔 수 없이 짐칸에 쌓여있는 전파축을 꺼내들며 투덜 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마고드씨 때문에 참는데, 나중에 두고 보자고! 드워프 아저씨들도 그깟 술 한명에 잠자코 있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뮤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벌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수고해라! 잠시 후에 보자고!" 짧게 말을 마친 뮤스는 도망치기라도 하듯이 재빨리 전뇌거를 몰아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뿌연 먼지와 벌쿤만이 남게 되었다. 멀리 달아나고 있는 전뇌거의 꽁무니를 바라본 벌쿤은 콧방귀를 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쳇! 따라온다는 걸 순순히 받아 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니까. 다음 부터 어디가는데 따라 가나 봐라!" 벌쿤이 이번 여행에 동참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등 뒤로 부터 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쿤! 대체 무슨 일인게냐? 갑자기 전뇌거에서 떨어져 버리다니!" 그의 물음에 어께를 으쓱거린 벌쿤은 전파축을 한번 수습하며 몸을 돌렸다. "형이 이걸 100멜리 마다 하나씩 심으면서 따라오래요!" 그리고 드워프들의 전뇌거 가까이로 다가간 벌쿤은 전파축 하나를 꺼내들며 신경질 적으로 땅에 박아넣었고 그 후, 허리춤에 걸린 망치를 하나 꺼내 그 위를 두들겨 주었다. 그렇게 하여 전파축의 깊이를 적당히 맞춘 벌쿤은 허리를 펴며 전뇌거의 뒷문을 신경질 적으로 열어젖혔다. "보셨죠? 이런 식으로 70개나 심어야 한다고요!" 마침 뒷 좌석에 타고있던 레딘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한 두개도 아니고 70개 씩이나 심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성격이 불같은 레딘이 벌쿤의 예상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만족해 하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요! 부탁한다고 말만 남기고서 무책임하기 짝이없는 뮤스 형은 도망쳐 버렸다구요!" 전뇌거의 운전석에서 몸을 돌린 자세로 벌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흠... 이번 일은 뮤스가 너무 한 것 같군. 그런 일이라면 전뇌거가 두대 인만큼 거리를 나누어서 반씩 하는 편이 좋을 텐데, 우리에게 일임을 하다니... 아무래도 나중에 한 마디 해줘야 겠는걸?" 켈트의 말에 옆좌석에 앉아 팔짱을 끼며 기분상한 표정을 짓고있던 브라이덴까지 거들고 나섰다. "공학원의 일이라면 아무말 하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일은 뮤스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시작한 일인데, 우리에게 이런 잔일까지 시키려 하는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인 것 같수! 형님이 뭐라고 한 마디 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우." 이제 든든한 후원자들 까지 등에 엎게 되어 기고만장해진 벌쿤은 내친김에 그들의 마음을 확실히 얻고자 한 마디 더 던졌다. "그것 뿐인줄 아세요? 제가 아저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랬더니 글쎄... 나중에 포르코타 한병만 주면 아무일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저씨들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겨우 그런 술 한병으로 아저씨들을 어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 말이 벌쿤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어버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포르코타란 말에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블뤼안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정말 뮤스가 나중에 포르코타를 준다고 그랬단 말이냐?" "네! 정말이라니까요!" 아직 블뤼안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벌쿤은 그의 되물음에 자신의 가슴을 치며 확신했고, 형제들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블뤼안은 헛기침을 몇번 하며 형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흠! 흠! 뭐 70개 정도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 걸? 걸어서 7켈리를 가는 것도 아니고, 전뇌거를 타고가면서 심는 것인데 뭐가 그리 어렵겠수." 생각지도 않게 블뤼안이 배신을 해버리자 황당함을 느낀 벌쿤은 그를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설마 포르코타 한 병에 넘어가신건 아니시겠죠? 아무리 그 술이 좋다지만 아저씨들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니에요!" 블뤼안은 대답하기 껄끄러웠는지 애써 벌쿤의 시선을 피했고, 이번에는 브라이덴이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그렇게 생각해보니 블뤼안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군. 또, 우리가 뮤스 덕에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정도 부탁도 못들어 주어서야 되겠나?" 이어 가장 먼저 화를 내던 레딘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게다가 어차피 벌쿤이 내려서 전파축을 심을 테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는 것 같은걸? 허헛! 물론 절대 포르코타에 눈이 멀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다른 드워프들은 레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추어 외쳤다. "그야 물론이지! 우리가 설마 포르코타 한 병에 눈이 멀었겠어?" 벌쿤은 믿고있던 드워프들에게 배신을 당하자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마지막 남은 희망인 켈트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켈트 역시 드워프인 이상 형제들과 다를바 없었는데, 입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재빨리 닦으며 외쳤다. "흐흘... 자네들의 생각도 내 생각과 다를 바가 없군 그래! 그럼 어서 출발 하자고!" 켈트의 반응에 넋이 나간 벌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고, 기대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있던 레딘이 그의 팔을 잡아 당겨 전뇌거로 끌어올리자 드워프들과 벌쿤을 태운 전뇌거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전뇌거의 뒷 좌석에 앉아있던 마고드는 창을 통해 멀어지고 있는 벌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허탈한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마고드는 몸을 바로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뮤스를 향해 물었다. "일행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 것인가? 저 벌쿤이라는 청년 기분이 상당히 나쁠 것 같구먼." 마고드의 말에 거울을 통해 벌쿤의 모습을 바라본 뮤스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후훗! 그런 걱정이시라면 안하셔도 될것입니다. 벌쿤은 제 동생인걸요. 원래 형제들 사이에서는 작은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하긴...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형제들은 작은 의견 차이로 곧잘 다투기도 하는 것이니까." 사실 뮤스가 벌쿤과 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벌쿤에게 그런 잡다한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벌쿤 역시 뮤스를 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예의 때문에서라도 아무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벌쿤를 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서슴없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벌쿤 역시 뮤스를 친형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거리낌없이 동생으로서의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경작지 사이로 난 작은 길인 만큼 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2켈리란 거리는 전뇌거를 타고선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뮤스와 마고드는 금새 경작지를 나누는 둑에 다 다르고 있었다. 점차 둑의 모습이 크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높이는 1멜리 가량으로 그리 높지는 않았고, 길이 이어지는 곳에는 왕래를 위해 길 정도의 폭을 가진 통로가 뚫려 있었다. 둑에 가까워 질 수록 마고드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애초 다른 사람의 경작지를 가득채운 잘 익은 밀이삭들을 보고 있을 때부터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이 보더라도 금새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거울을 통해 마고드의 얼굴을 살피던 뮤스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하지만 마고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전뇌거는 어느새 둑을 통과하여 마고드의 경작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린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탐스러운 황금색으로 빛나던 세상이 희뿌연 회색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는데, 이맘때 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어야 할 밀이삭이 생기를 잃은 모습으로 땅을 향해 있었고, 잎사귀들은 매말라 군데군데 회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었다. 뮤스는 이 참담한 광경을 훑어보며 침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완전히 매말라 버렸군요." 그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 마고드는 지나쳐가는 자신의 경작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밀밭에 마지막으로 물을 댄것이 3개월 전일세. 그 때가 밀 재배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치 할 수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라네. 그나마 밀이라는 것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 이나마도 견디고 있는 것이지 다른 품종이었다면 벌써부터 포기했을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으셨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한 평생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밀은 자식들이나 다름 없는 것일세. 내 손으로 키우는 동안 나에게 고뇌를 주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도 했다네. 결국은 나를 뿌듯하게 하며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지. 그야 말로 내 자식이 아닌가? 그런 자식들이 지금 목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곳을 둘러보러 오지만, 그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네." 그리곤 주먹을 굳게 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갈리트 형제들에게 의지를 꺽일 수는 없는 일일세. 지금이야 나 한 사람의 마음만 아픈 것으로 전부이지만, 그들의 뜻대로 밀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형편이 어려운 수 많은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게 될 것일세. 그것 만은 막자는 것이 내 마지막 욕심이라네." 마고드의 이야기를 듣던 뮤스는 그의 생각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쳐주고 있었고, 전뇌거는 계속해서 황량하게 변해가고 있는 밀밭사이를 지나며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뮤스와 마고드를 태운 전뇌거는 십여분을 더 달려 5켈리 가량 떨어진 곳에 멈추어섰다. 그리고 전뇌거에서 내린 뮤스는 짐칸에 실려있던 검은 색의 기기를 꺼내었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탄성파 탐사를 하면 되겠군요." 그의 곁으로 다가온 마고드는 처음 보는 기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탄성파 탐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마고드가 물어오자 몸을 낮춘 뮤스는 기기를 분해하기 시작하며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탄성파 탐사란 인공적으로 발생한 탄성파를 사용해서 지하의 구조를 추정하는 방법이죠. 굴절파와 반사파 그리고 표면파 등의 다양한 파동을 이용해서 지반의 탄성파 속도 구조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기기의 내부에서 복잡한 모양을 하고있는 얇은 판을 꺼내보인 뮤스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원래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라는 것인데, 이 전뇌기판을 조금 손보면 탄성파 해석기로 쓸수가 있답니다." 잠시 설명을 이어나가던 뮤스는 잠잠한 마고드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 거리고 있었는데, 분명 뮤스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 했음이 확실해 보였다. 쑥스러운 얼굴을 한 마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간단하게 설명을 할 수는 없겠나? 평생 농사만 짓고 살던 무식쟁이라서 그런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구먼." "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군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니 개의치 마세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기기를 이용해서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땅 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 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던 마고드는 무릎을 쳤고, 자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아니! 땅을 파보지도 않고 땅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는 겐가?" "후훗 그렇답니다. 저는 잠시 광역통신기를 손볼테니 마고드 씨는 전뇌거에 있는 삽으로 땅을 조금만 파주시겠습니까? 드워프 아저씨들과 벌쿤이 도착할 때 쯤이면 단말기를 개조하는 것도 완료 될 것 같군요." "땅파는 일이라면 평생 해온 일인데, 그쯤 못해주겠는가? 얼마나 파야 하지?" "대충 50셀리 정도만 파주시면 됩니다." "50셀리라. 그 정도야 금방 팔 수있으니 조금만 기다리게나."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한 마고드는 전뇌거의 짐칸으로 걸어가 손에 맞는 삽을 골라 들었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과연 능숙하게 삽을 놀리는 모습이 한, 두해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멀리서부터 전뇌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드워프들과 벌쿤이 타고있는 전뇌거임을 알수 있었던 뮤스는 때 마침 작업을 마칠 수 있었기에 기기를 조립하며 몸을 일으켰고 마고드 역시 땅파는 일을 모두 끝냈는지 삽으로 땅을 짚으며 뮤스에게 다가왔다. "땅은 충분히 팠다네. 이제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벌쿤이 전파축을 하나씩 심으며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던 뮤스는 마고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마고드씨께서 하실 일은 없는 것 같군요. 지금 부터는 그저 지켜만 보시면 되죠. 전파축이 다 심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겠군요. 후훗! 벌쿤 녀석이 힘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는걸요." "그러고 보니 벌쿤이라는 청년의 몸이 참으로 좋군. 근육이 고루 발달 한 것 같은데, 험한 일을 많이 한 것 같아." 마고드의 말에 뮤스는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지만, 가사일로 단련된 몸이라고 말해주기는 꺼림직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땅땅땅! 그로부터 다섯개의 전파축을 더 심은 벌쿤은 시위라도 하듯이 뮤스의 발앞에 마지막 전파축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매번 그랬듯이 망치로 알맞은 깊이로 박아 넣은 그는 보란 듯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이제 내가 할 만큼은 모두 했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할 거라고! 에고 허리야!" 벌쿤의 엄살에 뮤스는 어깨를 두들겨 주며 대답했다. "후훗! 더 이상 네가 할 일도 없으니 걱정마라. 아무튼 힘든 일 한다고 수고했어." 벌쿤에 이어 재빨리 전뇌거에서 내린 드워프들은 뮤스의 앞으로 달려오며 기대가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고, 켈트가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허헛! 벌쿤에게 듣자하니 네가 우리에게 포르코타를 준다고 했다던데 사실이냐? 껄껄! 뭐 겨우 이런일로 그런 귀한것을 준다고하니 받기가 미안하긴 하지만, 애써 사양하지는 않도록 하지!" 그의 형제들도 켈트의 생각과 같은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뮤스는 자신의 예상과 한치 어긋남도 없는 드워프들의 반응을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물론 사실이에요. 하지만 포르코타는 돌아가서 드리도록 할테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도록 하자고요." 벌쿤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한 켈트와 드워프들은 잔뜩 기합들어간 모습이었다. "자자!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 뭐든 말만 하거라. 땅 끝까지라도 뚫어 줄테니까!" 드워프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은 뮤스는 미리 준비해놓은 화약을 꺼내며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들은 나중에 시추 작업만 하시면 되니 그렇게 몸에 힘을 넣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은 두꺼운 철판 하나를 저쪽에 파놓은 땅의 바닥에 깔아주시겠어요?" 그의 부탁에 자신들의 전뇌거로 걸어간 레딘은 짐칸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두께가 3셀리 가량되는 철판을 하나 꺼내어들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냐?" "네! 바닥에 최대한 접하도록 반듯하게 깔아야해요." 레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고드가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들었는데, 50셀리 밖에 되지 않는 깊이였지만, 워낙에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었기에 상체만이 땅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철판을 바닥에 내려놓은 레딘은 그 위에서 발을 몇번 구르며 고정시켰고, 더 이상 철판이 움직이지 않자 바둥거리며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레딘을 바라보던 켈트는 볼을 굵적이며 뮤스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이제는 설명을 해줄 때가 된 것이 아니냐?" 그 사이 화약을 점화할때 사용할 심지를 만드는 중이었던 뮤스는 잠시 손을 멈추었고, 일렬로 심어져 있는 전파축을 가리키며 드워프들과 벌쿤을 위해 미루어 왔던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탄성파 탐사라는 방법으로 지층 구조를 알아볼 생각이에요. 마고드씨에게는 간단하게 설명을 했지만, 보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죠. 탄성파 탐사는 인공적으로 탄성파를 일으켜 그에 의해 생성된 굴절파나, 반사파, 표면파 등의 다양한 파동을 이용하여 지반의 탄성파 속도 구조를 해석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에요. 보통 암석의 일부분에서 갑작스러운 교란 또는 변위를 일으키면 이 변위는 원점으로 부터 바깥쪽으로 구면의 형태로 전파되는데, 이것이 상당히 먼 거리까지도 전달된다는 원리를 이용한것이죠. 그렇게 생성된 파동을 감지하는데 바로 벌쿤이 심어놓은 전파축이 이용되는 것이에요. 원래의 전파축은 공중의 전파와 지층을 타고 흐르는 전파를 잡아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약간의 개조를 했기때문에 지층을 타고 흐르는 탄성파에 의해 생성된 파동들을 감지하게 되죠." 잠시 말을 멈춘 뮤스는 자신의 발아래 놓여있는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 후, 전파축들은 자신들이 감지한 파동들의 수치를 공중파를 통해 여기있는 광역통신기의 단말장치로 보내주게 되는데, 이 단말장치는 그 파동들의 수치를 일정한 관계식에 따라 계산하여 지하의 구조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해준 답니다." 길어진 뮤스의 설명을 듣고 있던 벌쿤은 머리를 부여 잡으며 휘청 거렸고, 켈트를 비롯한 드워프들 역시 벙찐 표정으로 뮤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켈트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몇 번 파며 물었다. "지금까지 네가 한 말이 도이첸 제국어가 맞는 것이냐? 이해하기는 커녕 알아들은 말이 오히려 더 적은 듯 하걸?" 마고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일행들의 반응을 살피던 뮤스는 아직 그들이 탄성파 탐사의 모든 원리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설명이 너무 어려웠나 보군요. 그렇다면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 직접 해보도록 하죠.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 보다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허헛! 맞는 말이야.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켈트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어준 뮤스는 심지를 마저 말았고, 손에 들린 화약종이에 꽂아 넣으며 마고드가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 내렸다. 잠시 철판의 고정 상태를 직접 확인해본 뮤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 위에 화약봉투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심지를 풀어내며 구덩이 밖으로 걸어나온 그는 옆에 쌓여있는 흙더미를 직접 밀어 넣으며 말했다. "지금 넣어놓은 화약이 폭발하게 되면 아래쪽에 깔린 철판에 큰 충격을 주게 되는데 일종의 인공적인 지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곳으로 부터 탄성파가 발생하게 되어 지반을 타고 멀리 퍼지게 되는 것이죠." 대충 흙을 밀어넣은 뮤스는 그 위를 대충 밟아주었고, 상태를 한번 확인한 뮤스는 심지를 길게 늘어트려 내려놓았다. 그리고 뇌공력을 끌어올려 손으로 불꽃을 튀기도록 만든 그는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귀를 꽉 막고 전뇌거 뒤로 몸을 피하도록 하세요!" 그의 외침에 잠시 우물쭈물 하던 일행들과 마고드는 서둘러 전뇌거 뒤로 몸을 숨겼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뮤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일행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생각한 뮤스는 손으로 심지를 점화시키는 동시에 전뇌거 쪽으로 달려왔고, 귀를 막으며 전뇌거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열을 세기도 전에 화약을 묻어 놓았던 곳의 흙이 솟아오르며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콰과쾅!! 생전 처음 듣는 폭발음에 크게 놀란 드워프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음츠렸고, 벌쿤과 마고드 역시 겁먹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푸드드득... 흙뭉치가 바닥과 전뇌거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폭발이 끝났고, 매케한 화약냄새와 함께 먼지가 밀려들자 뮤스는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떼며 눈앞으로 날리는 먼지를 밀어내었고,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고밀도 화약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폭발력이 크군." 그리고 아직도 긴장한 모습으로 귀를 막고있는 일행들을 발견한 뮤스는 가볍게 웃으며 한 명씩 몸을 일으켜 주었다. "이제 폭발은 다 끝났으니 안전해요." 하지만 그들은 뮤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고집스럽게 귀를 막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귀를 막고 있었으니 뮤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뮤스가 직접 그들의 귀에서 손을 빼내고 나서야 폭발이 끝났음을 알게되었고, 벌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후우... 정말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고! 공학원에서 화약 실험을 몇번 해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거야?" "고밀도 화약이라서 그래. 일반 화약의 여섯배나되는 폭발력을 내는 화약이지. 그럼 이제 확인해볼까?" 간단하게 대답해준 뮤스는 벌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먼지가 잔뜩 쌓인 광역통신기의 단말기로 걸어갔고, 드워프들과 마고드 역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불안한 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단말기앞에 앉은 뮤스는 가방에서 깨끗한 종이와 뾰족하게 끝이 깍여있는 흑연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다들 화약이 폭발했을 때 진동을 느끼셨죠? 바로 전파축들은 그 때 생긴 파동을 감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거에요. 그리고 그 파동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 단말기에서 요구할 때 송신해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전파축에서 보내는 모든 파동을 수집한 단말기는 몸체의 작은 등을 점멸시켜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일정한 약속대로 표시하게 되는데 그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설명을 마친 뮤스는 단말기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바깥쪽에 부착되어진 십 여개의 작은 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는데, 점멸하는 등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뮤스는 마치 그 신호들을 읽어 내기라도 하듯이 빠른 속도로 준비된 종이에 기록해 나갔다. 벌쿤과 드워프들은 점멸등만 보고서 신호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뮤스를 귀신 바라보듯이 했고, 마고드는 무슨 일인지도 잘 몰랐기에 눈만 꿈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벌쿤은 뮤스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적고있는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등의 깜빡임 만으로 내용을 알수 있는거야?" "이 열개의 작은 등은 신호의 내용에 따라 점멸하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 속도를 계산해서 수치로 나타내는 것 뿐이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뮤스를 보며 벌쿤은 혀를 내둘렀다.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열개의 점멸등을 동시에 보고서 해석 하는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냔 말이야!" 벌쿤이 놀라움이 섞인 비명성을 지르기 시작할 때 뮤스의 손은 멈춰졌고 그 사이 뮤스가 들고있던 종이는 알지못할 수치로 빼곡히 차있었다. 일행들을 향해 그 종이를 흔들어 보인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제 이 수치들을 참조해서 표를 이런 식으로 그리면 땅 속의 형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말을 마친 뮤스는 종이에 적힌 수치를 꼼꼼히 살피며 바닥에 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고, 몇 겹의 물결무늬를 가진 표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고있던 마고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마치 여러겹으로 만들어진 케익을 보는 것 같군." "사실 땅은 여러겹으로 지층으로 이루어 진 것이니 마고드씨의 말씀대로 케익 모양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가 쉽겠군요. 층마다 다른 성분과 밀도를 가지고 있는 점도 케익과 유사하니까요." 여러가지 빗금으로 나뉘어진 구역을 보기 좋게 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 뮤스는 손을 털며 웃었다. "이제 완성이 됐어요! 표를 설명해 드릴테니 모두 모여 보세요." 뮤스의 말에 호기심어린 얼굴을 한 일행들은 땅 위에 넓게 그려놓은 표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았고, 뮤스는 설명을 해주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 드워프들, 벌쿤 그리고 마고드의 얼굴을 한 번씩 살핀 뮤스는 자신이 그려놓은 표의 군데, 군데를 짚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표는 탄성파 탐사를 통해서 얻은 수치로 지하의 구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각각 빗금이 다른 부분은 성분이 다른 지층임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리고 이곳! 세겹으로 덮여있는 지층의 아래쪽. 즉, 지하 18멜리 가량이 되는 지점에 아무런 빗금도 쳐지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은 비어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뮤스의 설명에 눈을 둥글게 뜬 켈트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둘러보며 되물었다. "뭐라고? 이 땅의 속이 비어있다는 말이냐? 설마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후훗!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에요. 사람이 뛰거나 걸어다니는 행동을 땅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팔 위로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보다 훨씬 미약한 것일 테니까요." 그의 말을 들은 켈트는 괜한 걱정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뮤스와 켈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마고드가 끼어들며 물어왔다. "헌데, 이 표가 물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몸을 일으킨 뮤스는 마고드의 경작지를 넓게 둘러보며 말했다. "이 표를 보면 팜구드의 지하는 상당 부분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어있는 면적은 마고드씨의 경작지 면적의 수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만약 그 지하의 비어있는 공간에 물이 가득 차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무..물이 가득 차있다고?" 마고드의 되물음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부근에서 땅으로 스며든 빗물은 모두 지하의 비어있는 공간으로 흘러들게 되는데, 완전 밀폐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중으로 증발되거나 외부로 유출되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 스며든 모든 빗물들이 그 공간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충 짐작해 보더라도 저장되어있는 물의 양은 엄청날 것 같군요. 적어도 수백 년간 모은 빗물들이니까요." "그..그럴수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마고드의 얼굴을 살피며 미소를 지은 뮤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잠시 땅에 그려져있는 표를 살피더니 이내 드워프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아저씨들이 해주셔야 할 일이에요. 여기서 부터 5켈리 떨어진 곳이라... 둑의 근처군요. 둑 주변의 지층이 가장 얇으니 그곳에서 시추 작업을 해주세요. 전체적으로 지반이 약한 곳이라 시추작업을 하기에는 한층 수월할 거에요." 켈트는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전뇌거에 올라타며 형제들을 향해 외쳤다. "자 들었지? 이제 우리가 솜씨를 보여야 할 시간일세! 다들 가자고! 최소한 포르코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포르코타라는 말에 기운이 불끈 솟은 드워프들은 앞다투어 전뇌거에 올랐는데, 운전석에 앉은 켈트는 형제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며 전뇌거를 몰았고, 그들의 전뇌거는 왔던 길을 되돌아 둑을 향하기 시작했다. 유유히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드워프들의 전뇌거를 바라보던 벌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역시 아저씨들의 관심사는 포르코타였어... 나도 카타리나 누나에게 부탁해서 한 병 구해 놓던지 해야지 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뮤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봐 벌쿤! 우리도 아저씨들을 따라가야지! 전뇌거에 빨리 타라고!" 고개를 돌려보니 뮤스와 마고드가 전뇌거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벌쿤은 몸을 돌리며 전뇌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갈리트 형제. 해가 중천으로 부터 조금 기울어져 있을 무렵 팜구드의 밀밭 한 곳에서 시추작업을 위해 용도변경된 전뇌거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금속의 원통이 회전하며 기이한 음향을 흘리고 있었는데, 회전을 거듭 할 수록 금속의 원통은 천천히 짧아지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금속 원통이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자 드워프들은 다시 한번 바빠지기 시작했다. 땅에 늘어놓은 2멜리 정도 길이의 금속 원통을 들어 나르며 전뇌거 위에 올라가있는 켈트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는데, 금속 원통은 그 무게가 상당했는지 힘 좋기로 소문난 드워프들도 다리를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일에 대한 고집만큼은 대단한 그들이었기에 이빨을 악다물며 금속 원통을 날랐고, 벌쿤 역시 거들고 나섰기에 비교적 수월하게 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는 중이었다. 전뇌거 위에 서서 형제들이 날라준 금속 원통을 받아든 켈트는 조금씩 땅속으로 들어가며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금속 원통의 끝에 새로운 금속 원통을 조립하여 그 길이를 연장하기 시작했다. 뮤스와 마고드는 먼 발치에서 드워프들의 시추작업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뮤스는 간간히 마고드를 위해 시추작업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었는데, 탄성파 탐사 만큼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마고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저 금속 원통의 끝 부분에는 금광석을 박아 넣은 단단한 날이 부착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전뇌거의 동력기를 이용해 금속 원통을 회전시키게 되면 금광성이 부착된 날은 조금씩 지층을 깍아내며 깊숙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드워프 아저씨들은 금속 원통을 이어주어 더욱 깊은 곳까지 날이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중인데, 이제 일곱 개의 금속 원통이 들어갔으니 14멜리 가량을 뚫은 것 같습니다." 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고드는 남아있는 금속 원통의 갯수를 새며 물었다. "지금 남아있는 금속 원통이 세개 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으로 충분하겠는가?" "물론입니다. 물이 저장되어있는 곳까지의 깊이는 18멜리. 그러니 마지막 금속 원통 하나만 더 연결하면 그곳까지 닿게 됩니다. 십분 정도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확신감이 서려있는 뮤스의 이야기를 듣던중에 문득 그의 옆 얼굴을 바라본 마고드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괜찮다면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마고드씨." "대체 자네는 뭘 하는 사람인가? 내 비록 세상 소식에 어두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자네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구먼." 마고드의 질문에 가볍게 미소를 머금은 뮤스는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하...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다들 나름대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저 역시 이런 일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네말이 맞구먼.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없다라..." 뮤스의 대답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마고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는데, 뮤스가 한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켈트는 마지막 금속 원통을 연결하고 있었다. 공구를 이용해서 금속 원통의 접합부분을 단단히 조인 그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기에 작업용 장갑을 벗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전뇌거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몸이 뻐근 한 듯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형제들과 벌쿤이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제 대충 끝난 것 같군. 이제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는건가?" 켈트가 다가오자 상의를 벗고 누은 채 땀을 말리고 있던 벌쿤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도 도와드렸으니 나중에 포르코타인가 하는 술 좀 나눠 주서야 해요! 대체 무슨 맛이길래..." 하지만 벌쿤의 말에 드러누워있던 드워프 형제들은 몸을 일으키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흥! 누가 도와 달라고 그랬냐? 우리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네가 자진해서 나선것이 아니냐? 그런데 포르코타를 달라니 말도 안된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끼리 마시는 것도 모자란데 네게 줄게 있다고 생각하냐?" "흠흠... 술아 아깝다기 보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술이 몸에 나쁘다는 것은 오래전 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드워프들이야 몸의 구조가 인간과 다르니 별 상관 없지만, 인간에게 술은 정말이지 나쁜 것이란다. 그러니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게야." 포르코타에 대한 드워프들의 애착은 벌쿤의 생각 이상이었는데, 그의 작은 부탁 마저도 거부해 버리자 분노한 벌쿤은 씩씩거리며 아직 시추 작업을 하고 있는 전뇌거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 손을 거친 원통은 다 뽑아 버리겠어요! 기껏 도와 드렸더니 그깟 술 한 모금 못주겠다니!" 그러나 드워프들에게는 시추작업보다 포르코타 한 모금이 더 중요한지 벌쿤의 행동을 보고도 팔짱을 낀 채 요지부동이었다. 헌데, 벌쿤이 전뇌거에 오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그리고 땅을 울리며 들려오는 소리가 듣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는데, 두리번 거리며 땅을 살펴보던 레딘이 벌쿤을 향해 소리쳤다. "대체 뭘 했길래 땅이 흔들리는 것이냐?!" 하지만 벌쿤 역시 그 영문을 모르는 것은 레딘이나 마찬가지 였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고요!" "그럼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인게야!" "글쎄 모른다니까요!" 레딘과 벌쿤이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뮤스가 급히 달려오며 전뇌거 위에 서있던 벌쿤을 향해 외쳤다. "벌쿤! 금속 원통을 분리하고 전뇌거에서 내려와! 당장!" 갑작스러운 뮤스의 외침에 잠시 멍하게 서있기만 하던 벌쿤은 곧 그의 말을 이해 하고는 시키는 대로 금속 원통을 분리하기 시작했는데, 동력기를 분리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기에 금새 끝마칠 수 있었다. 금속의 원통이 동력기에서 분리되자 빈 병에 빨대가 빠지 듯이 시추 작업을 했던 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진동이 멈출 기미는 커녕 오히려 강해지자 당황한 벌쿤은 뮤스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런! 진동이 더 심해졌잖아! 이게 어떻게 된거야?" 그의 물음에 답해 줄 시간조차 없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전뇌거로 달려온 뮤스는 급히 운전석에 올라타며 시동을 걸었다. 그리곤 전진패달을 힘껏 밟으며 급출발을 시켰는데, 덕분에 그 위에 서있던 벌쿤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려야만 했다. "으아악! 나 또 떨어진다!" -부우웅! 그때 였다. 뮤스가 전뇌거를 몰고 작업을 하던 곳에서 떠나자 마자 시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구멍으로부터 엄청난 물기둥이 하늘로 솟아 오르기 시작했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물기둥에 밀려 전뇌거가 뒤집힐 뻔 했던 아슬아슬 한 순간이었던 것이었다. -촤아아악! 그렇게 솟아오른 물기둥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무지개까지 만들어 내는 중이었고, 드워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을 삼키며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는 물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뇌거야 어떻든 간에 땅의 한 가운데서 물 기둥이 솟아 오르는 모습이 그들의 넋을 빼놓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발치에서 물기둥을 목격한 마고드는 쉽게 믿겨지지가 않는 듯 두 눈을 부비며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나직히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허사였던 것이다. "이럴수가... 정말 물이 솟아 오르고 있다니... 이 메마른 땅에서 물이 솟아 오르다니..." 잠시 후, 하늘로 치솟았던 물기둥은 흡사 비처럼 변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옷이 젓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마고드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젖은 흙을 어루 만지고 있었다. 그런 마고드의 모습을 본 드워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었고,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뇌거에 타고 있던 뮤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뇌거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츰 잦아들어가고 있는 물기둥을 올려다본 뮤스는 벌쿤을 떠올리며 전뇌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짐칸에 추한 몰골로 처박혀있던 벌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미안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냐 벌쿤? 안다쳤어? 너무 급해서 미처 말해주지도 못했군." 뮤스의 물음에 머리를 매만지며 전뇌거에서 내린 벌쿤은 짜증이 듬북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저주에 걸렸나. 오늘은 왜이렇게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거야." 그런 벌쿤의 등을 두들겨준 뮤스는 턱짓으로 마고드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마고드씨의 밝아진 얼굴을 한번 봐. 이렇게 좋은 일을 하면 나중에 백배로 돌려 받을 일이 있을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런데 대체 왜 저렇게 물기둥이 솟아 오르는거야?" "너도 압력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을 텐데? 액체나 기체는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지하에서 압력을 받고있던 물이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상으로 움직이면서 솟구치게 되는거야. 양쪽의 압력이 같아 질때까지 계속 되는데 처음보다 많이 잦아든 걸 보니 곧 멈추겠군." 뮤스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훗. 그래도 일이 잘 되어서 다행이군. 혹시 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쩔지 걱정했거든." 벌쿤을 향해 피식 웃어준 뮤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녀석, 아직도 이 형을 못믿는 게냐?" 그의 말에 벌쿤은 고개를 내저었고, 뮤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대답했다. "나참. 형을 못믿었으면 애초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괜히 투덜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다했는 줄 알아?" "녀석... 어서 마무리나 하러가자." 둘은 몇 마디의 대화를 주고 받으며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이후로도 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지하의 물을 퍼올리는데 쓰일 기기를 제작해야만 했다. 뮤스일행이 묵고있는 숙소의 식당, 잔뜩 토라진 모습의 카타리나가 탁자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이렇듯 혼자 식사를 한 기억이 거의 없었던 카타리나는 시간이 갈 수록 서러운 생각이 들었고, 뮤스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다. "대체 뮤스와 아저씨들은 어디로 간거야. 조금 더 자라고 하더니 지금까지 돌아오지도 않고!" 볼을 잔뜩 부풀린 카타리나는 화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빵을 신경질적으로 뜯었다. 그러한 그녀를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수근덕 거리고 있었는데, 평소라면 잘 들릴 것 같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와닿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는 혼자 여행을 하는건가?" "이 사람아 그렇지 않으면 혼자 식사를 하겠나? 세상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 만큼 서러운 것도 없는데 말이야. 불쌍하군." "허헛! 그렇게 불쌍해 보이면 자네가 같이 식사라도 해주게. 그럼 될것 아닌가?" "누가 그렇다는 말인가 어디..." 그들의 대화를 등넘어로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쳇! 나도 일행이 있단 말이에요. 정말 다들 어디간거냐고! 뮤스..." 나직하게 뮤스의 이름을 불러보는 카타리나의 애절함에 하늘에 감동하기라도 했는지 때를 맞춰 식당 문으로 부터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휴우 피곤해 죽겠군요. 그래도 이제 몇 년 동안은 문제 없이 밀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어 켈트의 목소리도 이어졌기에 일행들이 모두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그 포르코타는 언제쯤 줄 생각이냐?" 여전히 포르코타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켈트와 드워프들을 바라본 뮤스는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건 카타리나에게 부탁을 해서... 앗! 그러고 보니 카타리나가!" 그제서야 숙소에 혼자 두고온 카타리나를 떠올린 뮤스는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뒷머리가 간질거린다고 생각한 그는 슬며시 뒤돌아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타리나가 성큼걸음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단단히 화가난 목소리로 외쳤다. "뮤스 이 바보야! 대체 아무말도 없이 어디를 다녀온거야! 잠깐 더 자라면서 사라졌다가 해가 져서야 들어오다니 대체 내 걱정을 하긴 하는거야?!" "카..카타리나 자..잘 있었어?" "내가 잘 있었을 것 같아? 갑자기 없어져서 하루종일 얼마나 걱정했는 줄 모를거야!" 이성을 잃은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드워프들과 벌쿤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슬 옆으로 피하기 시작했고, 옆으로 다가온 카타리나는 서슴없이 뮤스의 귀를 잡아 당겼다. "이제 내 생각이 났던거지? 맞지? 아무튼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아앗! 그..그게 아니라..." 카타리나에게 단단히 귀를 잡힌 뮤스는 난처해하며 드워프들과 벌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애써 뮤스의 안타까운 눈빛을 외면 한 채 옆 걸음으로 걸어가 식탁앞에 앉았고, 평소대로 식사를 주문하며 어색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흠흠... 여기 주문좀 받으시구려! 허헛! 오늘 날씨가 상당히 맑았지?" "그..그러게 말이유 아참! 아..아까 50셀리는 족히 됨직한 지렁이를 봤지 않겠수? 그 지렁이가 쥐를 잡아 먹습디다." "그..그럼 그건 뱀인 것 같군. 벌쿤 네 생각은 어떻냐?" "제 생각으로는 그건 지렁이가 맞는데, 잡혀 먹힌 것이 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흠... 새로운 입장의 표명이군."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료들에게 뮤스가 원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자 그의 귀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카타리나가 화를 억누르며 조용하게 말했다. "자... 우리는 이제 방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떻겠니?" 비록 어투는 의문형이었지만, 뮤스에게 주어진 결정권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별다른 반항을 할 수 없었던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뮤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불쌍한 소마냥 식당에서 사라지자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벌쿤은 다시 한번 그들이 서있던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휴우! 지금 그 사람이 그렇게 상냥하고 착하기만 하던 카타리나 누나 맞아요? 나참... 또 저런 모습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네." 그의 물음에 켈트 역시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카타리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구나. 역시 여자들이 한을 품으면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옛 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구나." 둘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레딘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모두 뮤스의 명복을 빌며 식사나 합시다. 뮤스도 뮤스지만, 점심부터 쭉 굶었더니 눈앞이 노랗게 변할 지경이유." 레딘의 말에 드워프들과 벌쿤은 대 찬성의 표를 던지며 뮤스를 동정해주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그러 들자 그 짧은 순간에 뮤스의 존재는 그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있었다. 싱싱한 야채와 과일, 구수하게 구워진 빵과 입맛을 자극하는 향기를 풍기는 소스가 뿌려진 돼지 고기 그리고 잘 익힌 생선과 훈제를 한 닭고기, 그 외에도 수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식탁에 놓이고 있었고, 그것을 날라오고 있는 식당의 종업원은 내심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바로 메뉴에 적힌 것을 모두 가져오라는 드워프들의 주문 때문이었는데, 그는 식당 개업 때부터 이곳에서 일을 해왔지만, 이런 식으로 음식을 주문한 이들은 처음이었던 것이었다. 식탁에 작은 빈틈조자 없을 정도로 음식들이 가득 차자 환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드워프들과 벌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날렸고, 개걸 스럽게 음식들을 먹어나가기 시작했다. "최고군! 최고야! 역시 열심히 일한 후의 만찬은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맞아요. 게다가 이 식당 음식 솜씨가 썩 괜찮은것 같은 걸요? 요리장이 제법 능력 있는 사람인가봐요." 입안에 있는 음식물들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던져 주었고, 그런 행동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는 듯 했다. 한창 드워프들과 벌쿤이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였다. 문득 바쁘게 오고가던 그들의 포크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는데, 식당의 입구로부터 누군가의 걸걸한 외침이 터지고 나서였다. "여기에 뮤스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나?!" 그 목소리에 가게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꺼리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감히 가게의 입구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과 벌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구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곳에는 세 명의 중년인과 그들이 이끌고 들어 온듯 한 장한 십 여명이 그 뒤에 서있었다. 식당의 내부를 잠시 둘러보던 중년인들 중, 가운데 서있던 인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켈트를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후훗! 당신은 드워프 족인가? 하지만 면도를 하는 드워프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인데 머리를 크게 다친 드워프인 것 같군. 하하하핫!" 그의 말에 함께 따라 들어온 장한들이 크게 웃기 시작하자 드워프들과 벌쿤의 표정은 싸늘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는데, 식욕조차 잊을 정도로 자존심에 손상을 입었던 것이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형제들과 벌쿤을 바라본 켈트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오랜만에 뜨거운 심장을 불살라 봐야겠군. 각자 몇 명씩 맡을 겐가?" 그의 물음에 볼을 긁적거리며 생각을 해보던 레딘은 그것 마저도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나설 것도 없수. 그낭 혼자 처리하고 올테니 식사나 마저 하시구려." 하지만 블뤼안과 브라이덴이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봐 레딘! 혼자서 재미를 다 볼 생각인겐가? 우리도 좀 생각을 해달라고." "그렇지! 형님이 수치를 당했는데, 형제들이 나누어 값아줘야 하지 않겠나. 혼자서 독차지 하려는 것은 욕심이 과한 것인 것 같군." 드워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있던 벌쿤은 직접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앉아 계세요. 저런 예의 없는 사람들은 제가 혼줄을 내줄 테니까요." 그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드워프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켈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훗! 그냥 다 같이 혼줄을 내주도록 하자고! 그래야 음식들이 식기전에 끝낼 수 있지 않겠나?" 너무나도 여유 자적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인들의 안색은 울그락 불그락 변하고 있었다. 그리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중년인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마져 잊은 채 뒤에 서있던 장한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저 녀석들을 당장 혼내주지 않고! 내가 쓸데 없이 네 녀석들에게 돈을 주고 있는 줄 아느냐!" 그의 닥달에 눈치를 살피던 장한들은 재빨리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지자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하나 둘 씩 눈치를 보며 뼈져나가고 있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식당은 한 순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격투장의 분위기로 돌변한 모습이었다. 같은 시간, 뮤스는 카타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방에 들어온 이후로 아무런 말도 없이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오히려 뮤스는 그녀가 화를 낼때 보다 더욱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이게 카타리나를 달래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카타리나 정말 화가 많이 난거야?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뮤스의 말에 고개를 살짝 돌린 카타리나는 가까이 다가오며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지금까지 뭘 하고 왔는지 이야기 해봐.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면 화를 풀도록 할게." 그녀의 말을 듣고 얼굴에 희색을 띄운 뮤스는 아침 부터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제 우리 옆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기억나? 왜 중년의 아저씨들과 우리 또래 쯤 되는 아가씨가 있던 식탁 말이야." 뮤스의 물음에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타리나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는지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고, 어제의 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히 기억나지. 뭔가 심각한 일이 있어 보였었잖아." 카타리나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듯 하자 이야기가 쉽게 풀릴 것임을 확신한 뮤스는 하루종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카타리나는 멋진 무용담을 듣기라도 하는 듯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갈리트 형제의 암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분노를 표했고, 탄성파 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또, 시추작업 끝에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는 대목에서는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었구나. 그럼 이제 마고드 씨의 일은 완전히 해결이 된거니?" "일단 농업용수일은 해결을 했으니, 이제 다른 지주들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는 일만 남았다고 볼 수 있지. 그리고 황제폐하를 만나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할 생각이야. 아무래도 임시적으로 갈리트 형제들의 계획을 막긴 했지만, 또 무슨 방법으로 다른 지주들을 억압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오늘 하루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뮤스는 카타리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이미 화를 풀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남자친구 더욱 믿음직 스럽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더 이상 화를 내면 안되겠지? 하지만 다음 번에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은 해주고 나가야 해! 알겠니?" "후훗! 알겠어." 믿음직 스럽게 대답한 뮤스는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는 카타리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고,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카타리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진전 되기도 전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아랫층에서 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콰당! 그 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뮤스는 아랫층에 드워프들과 벌쿤이 있음을 깨달으며 몸을 일으켰다. "카타리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문을 잠그고 방에서 나오지 말도록 해. 알겠지?" 카타리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응... 별일 아니겠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드워프 아저씨들이나 벌쿤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카타리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고,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식당으로 내려간 뮤스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무려 십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엉켜 싸우며 식당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는데, 그 중 덩치가 큰 벌쿤의 모습이 유달리 눈에 띄고 있었다. "우하하! 감히 우리를 얕잡아 보다니 혼이 좀 나 봐야 해! 이런 식으로 약자들을 괴롭히는 것 같군!" 기분 좋게 광소를 터트리며 양쪽 손에 장정들을 한명 씩 나누어든 그는 이리저리 흔들어 정신을 쏙 빼낸 후 한 쪽으로 던졌는데, 이미 세명 정도가 그곳에 정신을 잃고 드러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두 명이 더해져 다섯이 채워지자 손을 털어보인 벌쿤은 다음 주인공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장정들은 이미 그의 괴력에 쓴맛을 본 후였기에 아무도 그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그럭저럭 벌쿤을 걱정에서 덜어 놓은 뮤스는 드워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덩치 큰 장정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쓰러트릴 때 마다 모습이 보였는데, 식탁의 다리를 부러트려 만든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 드워프들이 전투에 능한 종족이라고는 했지만, 이런 식의 난투전에는 취약한 면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방에 비해 현저히 짧은 다리와 팔은 드워프의 공격범위를 제한했고, 그들의 작은 키로는 급소가 가장 많이 몰려있는 얼굴을 가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드워프들은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를 들고 싸워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식탁의 다리였던 것이었다. 켈트는 여기 저기서 날아오는 주먹질과 발차기를 기가 막히게 피하며 상대의 정강이를 가격했는데, 신체에서 가장 약한 부위 중 하곳 이었기에 상대는 정강이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레딘과 블뤼안은 서로 등을 마주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정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뒷쪽이 안전해지게 되자 그들은 막무가내로 몽둥이를 휘두며 다니는 중이었는데, 워낙 힘이 좋은 드워프들이었기에 장정들이 무엇인가로 막아보려 해도 몽둥이에 닿는 것은 뭐든 산산 조각이나 원래의 형체를 잃게되었고, 결국 장정들은 몸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라이덴은 가장 느긋하게 장정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접시를 쌓아놓은 곳으로 뛰어들어 장정들을 향해 접시나 그릇 등의 식기들을 하나씩 날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놀이라도 즐기는 표정이었지만, 막상 장정들은 크게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가 멀었기에 반격이 힘들 뿐만 아니라 강맹하게 날아오는 접시에 제대로 맞았다간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한 뮤스는 느긋한 자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식당의 입구 쪽에서 그의 시선이 멈추었는데,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흠... 저들은 갈리트 형제들이군. 하긴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졌으니 가만히 있지 못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뮤스는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을 살펴보며 드워프들과 벌쿤을 향해 외쳤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드워프들은 휘두르던 몽둥이를 멈추었고, 벌쿤은 손에 들고 흔들던 장정 두명을 가까운 곳에 던져 놓았다. 그로써 식당의 난투극은 끝이 났는데, 부서진 탁자와 의자 사이에 누워있는 이들은 모두 갈리트 형제들이 데리고 온 장정들이었고, 서있는 이들은 오직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 뿐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만족한 켈트는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장정을 발로 툭툭 치며 갈리트 형제를 향해 다가갔다. "자네들은 아주 운이 없었던 게야. 하필면 우리를 건들다니 말이야." 켈트가 다가갈 수록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을 한 갈리트 형제들은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참담한 결과는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벽에 등이 닿으며 더 이상 갈곳이 없어지자 마른 침을 삼킨 갈리트 형제들 중 가운데에 서있던 맡형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너희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나 이러는 것이냐!"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켈트는 오히려 심기가 상한 듯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허... 우리가 처음 보는 자네들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나? 그저 집안 교육 잘못 받은 망나니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군." 켈트의 담담한 반응에 갈리트 형제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외쪽 편에 서있던 둘째가 나서며 외쳤다. "당신들! 이곳에 처음이라 우리를 모르는 모양인데..." 그가 자신들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뮤스가 말을 자르고 나서며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혹시 갈리트 형제분들 아니십니까?" 뮤스가 공손한 말투로 자신들을 알아보자 조금 기가 살아나게 된 형제들은 원래의 거만한 얼굴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주며 뮤스 일행들을 향해 냉소와 함께 한마디씩 던졌다. "그렇다! 우리가 그 유명하신 갈리트가의 형제들이다. 감히 우리를 몰라보고 이런 짓을 하다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흐흣 너희들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야. 갈리트가를 건들이다니." "너희들 모두 무사하길 바라지는 말거라." 그 때, 떫은 표정으로 갈리트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벌쿤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장정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집어 던지며 외쳤다. "뮤스 형이 말을 곱게 하니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보군! 정신좀 차려라!" -쿠당탕탕! "으아아앗!" 불시에 날아오는 장정을 미처 피하지 못한 갈리트 형제들이 장정을 가슴으로 받으며 그자리에 쓰러지게 되자 그제야 기분이 풀린 벌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드워프 형제들 역시 눈 앞의 중년인들이 이야기로만 듣던 갈리트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들을 향해 다갔고, 켈트는 아이들을 다루 듯 갈리트 형제들의 볼을 차례로 꼬집으며 혀를 찼고 있었는데, 장정에게 깔린 그들은 옴싹달싹 하지도 못한 채 켈트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쯔쯧... 뮤스를 찾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자네들이 바로 갈리트 형제들이셨구만. 자네들의 뜻을 이루지 못해서 우리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찾아온 것인가?" 켈트의 말에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을 깨닫게된 갈리트 형제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식당의 한쪽에서 켈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갈리트 형제를 보며 웃고 있던 뮤스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곤 식당에 누워있는 장정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잠깐... 그렇다면 마고드씨는..." 마고드에게 까지 생각이 닿은 뮤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갈리트 형제들에게 향해 다가갔고, 거칠게 그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외쳤다. "당신들 설마 마고드씨와 케니언 양에게 까지 손을 댄건 아니겠지!?" 뮤스의 물음에 갈리트 형제 중 맡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후훗... 왜 아니겠나. 이곳에 오기 전에 마고드를 이미 손봐주었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야. 하하하핫!" 유쾌하다는 듯 웃고있는 그를 바라본 뮤스는 이빨을 갈았고, 멱살이 잡혀 있는 갈리트 형제들을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드워프 형제들과 벌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들은 벌쿤과 이 사람들을 지키고 있으세요! 저는 마고드씨의 댁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올게요!" "알겠다! 이들은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서둘러 가보거라! 켈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급히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뛰어 나갔다. 뮤스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켈트는 괘씸 하기 짝이 없는 갈리트 형제들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하는 짓들을 보니 도무지 말로는 용서가 되지 않을 자들이군. 뮤스도 나갔으니 이제 우리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자네들에게도 여기 쓰러져있는 자들에 못지 않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도록 하지." 나직하게 흘러나오며 으름장을 놓는 켈트의 목소리에 갈리트 형제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역력했고, 다른 드워프들 역시 켈트를 돕기 위해 그들의 주변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마고드의 집앞에 도착한 뮤스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집의 대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창의 유리는 대부분이 깨져 있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뮤스는 부서진 문조각을 밟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집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가구들은 이미 부서져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고, 화분들과 진열되어있던 식기들이 모두 깨져 그 조각들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뮤스는 모든 방문을 열어보며 마고드와 케니언 부녀를 찾기 시작했다. 일층을 대충 둘러봐도 부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뮤스는 윗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안쪽으로 부터 여성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케니언의 것임을 눈치챈 뮤스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반쯤 열린 문으로 부터 케니언의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흑! 아버지! 제발 돌아가지 마세요! 제발!" "쿨럭! 쿨럭!" 그리고 마고드의 거북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뮤스는 마고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잠시 기침소리가 멈추자 가래가 끓는 듯한 마고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케니언. 어차피 이 애비는 몹쓸 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몸이 아니었더냐. 그저 그 날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거라." 뮤스는 마고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중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마고드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누워있었고, 케니언은 그의 손을 굳게 잡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아시겠죠?" 케니언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마고드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허헛... 나는 이미 늦었단다. 이제 와서 그 누구를 불러오더라도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게야. 그러니 이대로 내가 눈감을 때까지 옆을 지켜 주었으면 좋겠구나." 마고드의 말에 굵은 눈물을 떨군 케니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흑흑! 꼭 옆에 있어 드릴게요. 아버지..." "후훗... 역시 내 딸은 착하구나..." 따뜻하게 웃으며 말을 하던 마고드는 기침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잠시 말을 끊었고,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헉... 헉..." 그리고 기침이 잦아들게 되자 마고드는 부드러운 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후우... 내가 죽으면 내 모든 재산을 네게 주도록 하마. 누누히 말했지만, 네가 꼭 이곳에서 밀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단다. 그저 네가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란다. 후훗... 그저 죽기 전에 갈리트 형제들의 악행을 막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야..." 그 때, 마고드와 케니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던 뮤스는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고드씨." 마고드와 케니언은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뮤스의 모습을 발견한 마고드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 자네가 무사한 것을 보니 천만 다행일세. 괜한 일에 끼어들이 자네마저 해를 당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네. 갈리트 형제 일당들이 자네에게 찾아가지 않았던가?" 침대 옆으로 다가온 뮤스는 마고드의 상태를 살펴보며 대답했다. "찾아왔지만 저희 일행들이 그들을 모두 혼을 내주었습니다. 지금쯤 드워프 아저씨들에게 응당한 죄의 대가를 치루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고드의 표정은 밝지 못했는데, 이후의 일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허어... 걱정되는군. 나중에 그들에게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쩔려고 그러나?" 진심으로 걱정어린 마고드의 말에 가볍운 미소를 지은 뮤스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주며 대답했다. "저희 스스로의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갈리트 형제들과 팜구드 마을에 얽힌 일은 제가 직접 황제폐하께 말씀드려 조치를 취하도록 할테니, 그 점이 아직 마음에 걸리신다면 이제 마음을 푹 놓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마고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자네가 황제폐하께 직접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긴... 남들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믿지 못했겠지만, 자네의 말이니 믿도록 하겠네. 후훗... 이제 팜구드 마을이 평온해 지겠군... 쿨럭!" 뮤스의 말을 전해들은 마고드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에 몸이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곤 이제 힘이 빠지는 지 나직한 목소리로 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후우... 죽기전에 하나만 말해주겠나?" 뮤스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마고드가 조용히 물었다. "대체 자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뮤스는 보기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제 이름은 뮤스 드라켄.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원장입니다." 마고드는 공학원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허헛... 소문이 떠들썩 하던 공학원의 원장이 자네였었군... 그랬었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그렇게 흘러나오던 마고드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뮤스는 가슴깊은 곳에서 치미는 슬픔을 참기위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고, 케니언의 통곡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는 이들.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의 열기가 바닥에 빼곡히 박혀있는 포장석들을 달구고 있었다. 비록 군데군데 깨진 모양의 포장석들의 모습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긴 세월을 그 자리에 고집스럽게 남아있을 듯 했다. -카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리며 군데, 군데 이가 빠져 무뎌진 검의 날이 포장석을 때렸다. 그리고 곧 방향을 바꾼 검은 다시한번 목표를 노려 봤지만, 이번 역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검에게 가로막혀야만 했다. -깡! 투박해보이는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몸을 맞물린 채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쥐고 있는 두명의 사내들 역시 시선을 맞물린 채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얼굴에 무수한 상처를 가진 중년인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한동안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대방을 밀어내며 뒷걸음질 쳤고, 대 여섯 발자국을 물러서고 나서야 몸을 세울 수있었다. 그렇게 긴장상태가 다소 수그러 들자 문득 검의 날을 손으로 매만지기 시작한 중년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쇼메트. 어느새 자네도 상당히 늘었군. 이제는 나와 검을 같이 겨룰 수 있게 되다니 말이야." 중년인의 말에 잔뜩 경직되어있던 청년은 굳은 표정을 풀어냈는데, 다리마저 풀려버린 듯 검으로 땅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말 하지 마십시오 카밀턴 대장님. 정말 대장님의 살기에 짓눌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카밀턴과 쇼메트. 듀들란 제국 소속의 특수기관인 특무대의 대원들이었다. 비록 뮤스의 회유에 실패하고 돌아온 그들이었지만, 그라프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인지 투르코스 재상으로부터 별다른 추궁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평소대로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잠시 쇼메트의 말을 되세겨보던 카밀턴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흠... 내가 자네에게 살기를 흘렸다는 말인가?" 카밀턴의 되물음을 받은 쇼메트는 땅을 짚고있던 검을 힘겹게들어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나참. 대장님은 못느끼고 계셨던 것입니까? 정말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단 말입니다. 한눈 이라도 잠깐 팔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니까요." 피식 웃어보인 카밀턴은 몸을 돌렸다. "후훗! 대련 때 한 눈을 팔면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일세. 싱거운 소리 하지 말고 잠시 쉬게나. 오늘도 하루종일 검술 수련을 할 예정이니." 청천벽력같은 카밀턴의 말에 쇼메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 또 하루종일 검술 수련이라니... 저는 이제 검을 들어올릴 힘도 없단 말입니다. 벌써 사흘째나 이러고 있으니 몸이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요. 지금 어께에 검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안보이십니까? 차라리 이럴 바에는 챠퍼나 죠슈드와 함께 작전에 지원하는 편이 훨씬 편할 것 같습니다." 연무장에서 내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쇼메트의 행동에 아랑곳 하지 않은 카밀턴은 바닥에 주저 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고, 병에들어있는 차가운 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자네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힘이 많이 남은 것 같군. 앞으로 보름은 더 강행해도 무리가 없을 게야." 카밀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쇼메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은 카밀턴은 터덜걸음으로 연무장에서 내려오고 있는 쇼메트에게 물병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쇼메트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라도 하려는지 아무런 잘못 없는 물을 거칠게 입안으로 쏟아 부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긴 쇼메트는 카밀턴의 옆자리에 주저 앉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뮤스 원장의 일을 실패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군요. 혹시 그에게 원한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은 카밀턴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훗... 원한? 그런 것 따위는 없다네. 그저 그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일 뿐일세. 맨 주먹으로 나의 검과 대등하게 겨룬 뮤스 원장이 큰 충격이었거든. 언젠가 한번 만날 날이 있다면 서로의 위치를 떠나 무인으로서 겨뤄보고 싶다네. 물론 그는 무인이 아니라 공학도이니 다시 만난다 해도 상대를 해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후훗!" 카밀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회상을 하던 쇼메트 역시 뮤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뮤스 원장...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죠. 사실 공학도라고 하길래 공부 밖에 모르는 허약한 연금술사 정도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의 예측을 허무하게 깨어 버리더군요. 정말이지 대장님과 겨루는 모습을 봤을 때는 기절 할 정도였다니까요." "후훗... 나 조차 기분나쁜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자네들이야 오죽했겠는가?" "하하핫! 대장님이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왠지 믿기지가 않는 걸요?" "나 역시 감정이 있는 사람일세." 과거를 회상하며 카밀턴과 쇼메트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철문이 열리며 한 명의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철의 가면이라도 쓴 듯 무표정한 얼굴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한 중년인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카밀턴과 쇼메트는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굳게 쥔 주먹을 절도있는 자세로 가슴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투르코스 재상각하를 뵙습니다!"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보이며 대답을 한 투르코스 재상은 카밀턴과 쇼메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카밀턴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카밀턴 대장. 조금 수척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겐가?"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카밀턴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린 투르코스 재상은 조금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흠... 내 귀를 아프게 하는 자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무일 없는 것같군."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서류뭉치를 하나 꺼낸 투르코스 재상은 그것을 카밀턴에게 건네주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장영실 경과 인연이 많은 것 같군. 이번에 장영실 경과 루스티커님께서 흑룡의 호수로 가시게 되었다네. 그 호위를 특무대에게 맡기고자 하는데 괜찮겠나?" 투르코스 재상의 되물음에 뒷꿈치를 붙이며 몸을 세운 카밀턴은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령이시라면 저희는 묵묵히 그에 따를 뿐입니다!" 하지만 카밀턴과 달리 쇼메트는 조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가야 하는 곳이 흑룡의 호수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표정을 통해 쇼메트의 마음을 읽은 투르코스는 카밀턴이 들고있는 서류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흑룡의 호수라지만,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일세.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네가 들고있는 서류에 들어있으니 참조하게나. 그리고 명령서는 가장 마지막 장에 첨부해 놓았으니 출발하기 전에 확실히 인지하도록. 한번의 실패는 눈감아 주었지만, 또 한번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으니 실수하지 말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재상각하!" 카밀턴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한 투르코스 재상이 금방 몸을 돌려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걷기시작하자 곧은 자세로 서있던 카밀턴과 쇼메트는 처음과 같이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예를 갖추었다. 투르코스 재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쇼메트는 불만섞인 말투로 중얼 거렸다. "쳇! '또 한번의 실패는 용납할 수 없으니 실수하지 말게나.' 아무튼 뻣뻣하기는... 정말이지 재미없는 분이라니까." 쇼메트가 투르코스 재상의 말투를 흉내며 비아냥거리고 있을 때, 카밀턴은 서류의 가장 마지막 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눈에 익숙한 붉은색의 작은 봉투가 붙어있었다. 입맛을 한번 다신 카밀턴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내어 내용물을 확인 하기 시작했고, 찬찬히 명령서를 읽어 내려가던 카밀턴은 바로 옆에있는 쇼메트 조차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입을 달싹거렸다. "이제는 장영실 경을 감시하라니...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치밀하신 분..."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생각에 앞서 명령을 최우선으로 받들어야 하는 위치였기에 머리속에 명령서의 내용을 한번 더 되새겼고 이내 작게 말아 입안으로 털어 넣어 삼켰다. 심각해져있는 카밀턴의 모습을 지켜보며 잠자코 앉아있던 쇼메트는 막 뭔가가 떠오른 듯 카밀턴을 부르며 물었다. "아참! 혹시 대장님은 투르코스 재상각하의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쇼메트의 뜬금없는 물음에 명령서에 대한 일을 미뤄놓은 카밀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대략 40대 후반 쯤?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 쯤으로 보이는군." 그의 대답에 쇼메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땡! 틀렸습니다. 듣자하니 겉모습은 저렇 듯 젊게 보여도 실제 나이는 50대 후반이라고 하더군요." "흠... 정말 의외로군. 그 정도까지는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는데." 카밀턴의 반응에 미소를 지은 쇼메트는 손가락을 하나 펼쳐보이며 말을 이었다. "자! 여기서 문제를 하나 더 드리죠. 그렇다면 투르코스 재상이 젊어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군."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답을 생각해보고 있던 카밀턴을 향해 쇼메트가 피식 웃으며 그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평생 웃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얼굴에 주름이 생길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 5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주름이 없을 수 밖에요." 어처구니 없는 쇼메트의 말에 농담이라는 것을 깨달은 카밀턴은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허헛! 나참. 자네의 쓸데없는 농담은 변하지를 않는군.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농담이었네. 그럼 이제 쉴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해야겠지?" "에?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벌써 시작한단 말입니까? "실제 전투에서는 이 정도의 휴식도 가질 수 없는 법일세. 그러니 잔소리 말고 연무장으로 올라오게나!" "대장님도 재상각하 만큼이나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여전히 고지식한 카밀턴의 말에 두 손을 든 쇼메트는 쑤시는 팔과 다리를 이끌며 다시금 연무장으로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 공학원 제 1전뇌거 보관 창고, 기밀을 위해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밀폐형으로 설계된 장소였다. 내부를 밝히고 있는 전뇌등의 불빛에 출하를 앞둔 전뇌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수는 어림잡더라도 수 백대에 이르고 있었다. 열을 맞추어 세워져 있는 전뇌거 사이를 산책로라도 되는 듯 걷고있는 두 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애초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이곳을 찾을 만한 사람은 단 두 명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맞추기란 아주 쉬웠는데, 바로 공학원을 책임지고 있는 장영실과 황궁 수석마법사인 루스티커였다.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흑룡의 호수로 출발하기 전 그들이 타고갈 전뇌거를 가지러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자신들의 노고가 그대로 스며있는 전뇌거들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 전뇌거의 본체를 매만지던 장영실은 흐뭇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얼마 안있어 이 녀석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겠군요." 그의 말에 가볍게 웃은 루스티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자네의 감회가 정말 색다르겠군. 지난 4년간 자네의 모든 정렬을 쏟아 부어 만든 녀석들일세. 한 마디로 자네의 자식들이지." "후훗! 자식이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지만 비슷한 기분일 것 같군요." 장영실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루스티커가 물었다. "전뇌거의 공정은 이제 다 끝났는데, 기관열차의 공정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 장영실은 루스티커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기본적인 철로 공사는 지난 달로 모두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기관열차의 공정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유로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대한 서두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에서 선보일 기관열차는 이미 완성된 상태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국은 시간이 문제인가..." "후훗! 그렇습니다. 항상 그 놈의 시간이 문제인 것이죠." 웃으며 대답해주는 장영실의 옆모습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와 황실과의 계약기간은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네. 그간 어떠한 심경의 변화도 없었는가?" 루스티커의 물음에 미안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생각은 처음과 전혀 변한 바가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마음이 답답해진 루스티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당부해줄 말이 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감사히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허공을 바라본 루스티커는 뒷짐을 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흑룡의 호수 행에 특무대의 대원들이 우리를 수행하기로 되었다네." 장영실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 거렸고, 그의 생각을 눈치 챌 수 있었던 루스티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특무대는 황실 직속의 특수기관의 한곳일세. 그 존재는 재상을 비록하여 몇몇 고위 관료들만이 알고 있는데, 바로 자네가 찾고있는 명신을 회유하기 위해 보냈었던 자들이지." 그제야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던 장영실은 팔짱을 끼며 이어지는 루스티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명목상이야 자네와 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의 목적은 자네를 감시하는 일일 것일세." 그의 말을 듣던 장영실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해가 됩니다. 제가 다른 마음을 품고 타국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듀들란 제국으로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일테니까요." "자네의 말대로라네. 지금 자네의 작위는 남작에 불과하지만 듀들란 제국의 역사를 통털어 보더라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그 만큼 제국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말이고 동시에 자네를 위험요소로 안고있는 것이지. 그러니 만에하나 자네가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한다면 황실에서는 아무런 주저없이 자네를 제거하려고 할 것일세." "듀들란 제국에서 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나직한 한숨을 내쉰 루스티커는 장영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황실측의 사람이 아닌 자네의 지기로서 말하는 것이네만 만에 하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더라 하더라도 1년만 참게나. 나는 진정으로 자네를 잃고 싶지 않다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듀들란 제국을 빠져나가 명신에게 가고 싶지만, 저는 듀들란 제국과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후훗! 제가 한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행일세. 그럼 이만 나가세나. 흑룡의 호수로 떠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훗.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대화를 마친 장영실과 루스티커는 빼곡히 세워져있는 전뇌거들 사이를 걸으며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슬을 머금어 한층 싱그러운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잘게 쏟아지고 있었고,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지저귀며 듣는이의 기분을 경쾌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야 말로 평소와 다름 없는 평온한 아침이었다. 아침일찍 일어난 장영실은 옷가지들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가죽 주머니 네개를 챙겨 튼튼한 가죽 포대에 넣으며 다시 한번 방안을 살펴 보았다.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작은 것 하나라도 빼먹는 다면 곤욕스러운 일이 생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을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빠진 것이 없는 듯 하자 장영실은 두터운 외투를 챙기며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내려오자 아침 청소를 하고 있던 메닐드 부인이 따뜻한 미소로 그를 맞아주었는데, 손에 들린 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남작님? 그런데 짐을 챙겨 나가시는 것을 보니 또 한 동안 못오시나 보군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메닐드 부인. 이번에는 조금 먼 곳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한 보름 정도는 집을 비워야 할 것 같군요." 장영실의 말에 섭섭한 표정을 지은 메닐드 부인은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벽을 쳤고,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벽에 새워두며 말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작님. 마침 빵을 구워 놓은 것이 있는데, 가면서 드시도록 하세요. 제법 잘 구워 졌답니다." "하핫!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고 나가서 조금 배가 고프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호홋! 아침식사를 거르면 하루종일 힘이 없는 법이죠." 밝게 웃은 메닐드 부인은 급히 부엌으로 들어갔고, 곧 노릇하게 구워진 빵이 가득 담긴 종이 봉투를 들고 나오며 건네주었다. "식기전에 드시도록 하세요. 기왕 먹는것이라면 맛있게 먹는 것이 좋죠." 장영실은 항상 자식처럼 꼼꼼히 챙겨주는 메닐드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빵봉투를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메닐드 부인.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호홋. 별것도 아닌 일로 매번 고맙다고 하시는군요. 아무튼 몸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장영실이 집을 나서자 메닐드 부인 역시 집 앞까지 나와 그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집을 나선 장영실은 집앞에 새워둔 전뇌거에 올라탔다. 그가 탄 전뇌거는 듀들란 제국에서 출시할 전뇌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개조를 거친 전뇌거였기 때문이었다. 험한 길을 자유롭게 다니기 위해서 동력기의 출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차체의 높이를 높였고, 바퀴의 크기 역시 보통의 전뇌거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동력원은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에서 분해한 마나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먼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전뇌력을 수시로 충전할 수 없었고, 전뇌력의 출력 또한 높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짐을 옆 좌석에 내려 놓으며 전뇌거의 상태를 간단하게 점검한 장영실은 이번 여행에 동행을 하게 된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인 쟈트란 공학원으로 전뇌거를 몰아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저택으로 부터 전뇌거로 삽십분 정도를 달린 장영실은 쟈트란 공학원 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이 자리에는 전뇌거와 기관열차의 개발을 담당하는 본관 건물 하나 뿐이었지만, 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십여개의 건물이 모여있는 대규모의 단지로 변해 있었는데, 자재보관, 제품생산, 완성품 보관의 역할을 하는 건물들이 본래의 공학원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공학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장영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고, 그들의 인사를 가벼운 고개짓으로 받아준 장영실은 전뇌거의 속도를 줄이며 약속 장소인 본관건물로 향했다. 공학원의 본관에 도착하여 전뇌거에서 내린 장영실은 루스티커 외에 초면인 두 명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얼굴에 무수한 상처를 가진 30대의 인물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깔끔해 보이는 외모를 지는 20대의 청년이었다. 장영실이 다가가자 루스티커가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여행하기에 딱 좋은 아침이구먼! 어잿밤 잘 쉬었는가?" "오랜만에 집에서 쉬니 그 동안 쌓였던 피로가 다 풀리더군요." "아무렴. 누가 뭐래도 집이 최고지. 그리고 이 사람들과 인사를 하게나. 이 둘은 우리를 수행할 사람들인데, 상당한 실력자들이라네. 카밀턴 대장과 그의 수하인 쇼메트라네. 그리고 자네들도 인사를 하게나 이쪽이 황실에서 소문이 자자한 장영실 남작일세." 루스티커는 그들이 특무대의 대원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있었는데, 어제 장영실에게 귀뜸을 해주긴 했지만, 원칙적으로 그들의 정체가 기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루스티커의 소개를 받은 카밀턴과 쇼메트는 처음 보는 장영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영실 남작님.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만나뵙게되니 영광입니다." "저 역시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들의 인사에 부담감을 느낀 장영실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힘든 여행을 함께 해야하니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작님." 하지만 장영실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밀턴과 쇼메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장영실이 그들의 직속상관이었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직속상관을 편히 대하는 군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 만큼 장영실과 특무대의 대원들 사이에서 서먹한 기운이 흐르자 루스티커가 그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서로 노려보면서 오늘 하루를 보낼 생각인가? 보름이나 함께 지내야 하는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들 말라고. 사이에 낀 사람만 더 고통스러운 법이니까." 루스티커의 농담섞인 말에 장영실은 실소를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후훗! 하긴 맞선보는 자리에서도 당사자들 보다 중매쟁이가 더 골치아픈 법이니까요. 자 그럼 출발 하도록 하죠. 밤이 되기 전까지 다음 도시에 도착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을 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그러도록 하세나. 어차피 성대한 환송식도 없는 것 같은데 이곳에 더 있어봐야 뭘 하겠나." 장영실과 루스티커의 말을 들은 카밀턴과 쇼메트는 자신들의 짐을 챙겨 전뇌거의 짐칸에 실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전뇌거의 뒷좌석에 올라탔는데, 자신의 임무 외에는 어떠한 일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카밀턴 역시 처음 타보는 전뇌거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쇼메트 역시 카밀턴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앞자리에 앉아 그들의 행동을 보던 루스티커는 손자뻘도 넘어보이는 카밀턴과 쇼메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쯔쯧... 젊은 사람들이 촌스럽기는... 그리고 자네들 여행하는 동안 군인처럼 행동하지 말게나. 우리 둘다 딱딱한 격식은 딱 질색인 사람들이니까. 알겠나?"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난섞인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특무대 대원들을 향해 루스티커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카밀턴과 쇼메트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 황실 수석마법사인 루스티커는 감히 바라볼 수 조차 없는 직책의 인물로 인식되어 왔고 어찌보면 자신들의 직속상관인 투르코스 재상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잔뜩 얼어있는 동안 장영실은 전뇌거의 전진패달을 밟았고, 전뇌거는 천천히 움직이며 공학원 단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뒷좌석에서 딱딱한 자세로 앉아있던 카밀턴과 쇼메트의 눈에는 신기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렇게 또 다른 일행들이 드래곤의 심장을 목적으로 흑룡의 호수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밀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들판사이로 두대의 전뇌거가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바로 팜구드 마을을 출발해 흑룡의 호수가 있는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고 있는 뮤스 일행의 전뇌거들이었는데, 마고드가 세상을 떠난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마고드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면서 유일한 가족이었던 케니언만이 남게 되자, 그녀 혼자 장례식을 치루게 할 수는 없다고 의견을 모은 뮤스와 일행들은 직접 나서서 마고드의 장례식을 도와주게 된 것이었다. 또, 갈리트 형제들은 당분간 마을 사람들의 손에 맡겨 두었는데, 그들은 마을 주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친히 내릴 벌을 기다려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케니언의 결정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마고드의 뒤를 이어 밀농사를 계속 짓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농사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씩 배워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짧은 시간동안 가지게 되었던 근심들을 모두 털어버린 뮤스 일행의 기분은 더할나위 없이 좋기만 했던 것이었다. 거칠 것 없이 달리고 있는 전뇌거 안, 카타리나에게 앞자리를 양보해준 켈트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편안한 자세로 좌석에 기대어 있었다. "룰루루루루!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팜구드에서 우리가 한 일은 정말 뿌듯한 것 같군. 그렇지 않냐 뮤스?" 그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걸요. 마고드 씨가 돌아가셔서 안타깝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죠."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타리나는 무슨 일인지 입을 삐쭉 내민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점을 의아하게 생각한 뮤스가 물었다. "카타리나. 뭐 기분 안좋은 일이 있어? 표정이 별로 밝지 않은데?" 카타리나는 그렇게 물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다들 가슴이 뿌듯했다는 둥, 보람을 느낀다는 둥 그런말을 하는데, 정작 나는 숙소에만 있느라 아무것도 못했잖아. 그러니 소외되는 기분이야!" "하핫! 물론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들었잖아. 오히려 그 편이 훨씬 좋을 지도 몰라. 직접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 "웅... 그런가?" "후훗 물론이지." 카타리나를 향해 웃어주며 대답을 해준 뮤스는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 마다 마고드의 얼굴이 가끔 씩 떠오르곤 했는데, 그 때마다 가슴 한곳이 아리는 느낌이었다. 한 동안 그런 기분이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마고드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은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문득 심심해진 켈트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지도를 보며 끙끙대고 있는 벌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쯔쯧... 아직도 지도를 모르겠냐? 아무튼 못난 동생 때문에 뮤스가 고생을 하는군. 네가 지도만 제대로 읽을 수 있었으면 뮤스가 좀 쉴 수 있었을 것 아니냐. 지도도 못 읽으면서 전뇌거를 운전하려고 했다니..." 그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벌쿤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무래도 방향치인 것 같아요. 지도를 아무리 봐도 도무지 방향을 모르겠으니... 그래서 드베인 숲에서도 자주 길을 잃었었나?" 켈트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음 너희 동네겪인 드베인 숲에서도 길을 잃었다면 아무래도 방향치임이 확실 한 것 같군. 나중에 구바닌 산맥에 도착하거든 절대 우리와 떨어지지 말거라. 그곳에서 길을 잃게 되면 그대로 죽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말이야." 켈트의 말에 눈을 반짝인 벌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켈트 아저씨! 혹시 구바닌 산맥에도 가보신 거에요?" 그의 물음에 켈트는 어깨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껄걸! 내가 대륙에서 가보지 못한 곳이 어디있겠냐? 물론 구바닌 산맥도 가본 적이 있지. 흑룡의 호수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말이야." 켈트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낸 벌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가본 곳이 없다면 삼대 마역에도 모두 가보셨단 말이에요? 에이! 삼대 마역은 못가보셨죠?" 정곡을 찌른 벌쿤의 말에 헛기침을 삼킨 켈트는 급히 머리를 굴렸고 이내 입을 열었다. "흠흠! 삼대 마역은 못 간것이 아니라 안간 것이란다. 우선 드워프들은 습기찬 곳을 싫어하니 드베인 숲은 가기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고, 엘프와의 사이도 좋지 않으니 엘프의 숲에도 가지 않지. 게다가 흑룡의 호수는 지금 가고 있으니 제외를 시켜야 하는 것이란다. 이제 내 말에 수긍을 하겠냐?" 얼럴뚱땅 둘러대는 켈트의 변명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던 벌쿤은 쉽게 수긍을 하고 있었다. "맞는 말인 것 같군요. 그럼 구바닌 산맥에 대해서 이야기좀 해보세요. 듣자하니 굉장히 험한 곳이라고 하던데..." "음 원한다면야 해주도록 하지." 잠시 옛기억을 회상을 하기라도 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던 켈트는 자신이 경험했었던 구바닌 산맥의 모습을 떠올리며 구바닌 산맥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구바닌 산맥은 대륙을 두개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 험난한 산맥이란다. 그 서쪽에는 우리가 있는 도이첸 제국이 위치하고 있고, 그 동쪽에는 듀들란 제국이 위치하고 있지. 사실 도이첸 제국과 듀들란 제국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이 구바닌 산맥 이란다. 이 산맥으로 인해서 서로의 교류가 자유롭지 않게 되자 점차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이지. 그런 이유로 언어 또한 서로 다르단다." 켈트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벌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구바닌 산맥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던 뮤스 역시 직접 가본 적은 없었기에 조금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자 켈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켈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으로 부터 40년 쯤 전의 일이겠구나. 그 당시 나는 몇 명의 모험가들과 파티를 이루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단다. 우리는 구바닌 산맥의 어떤 동굴에 진귀한 약초가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찾아 나선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더라도 상당히 쟁쟁한 사람들이었단다. 그 중에는 꽤나 인정을 받은 검사도 있었고, 5클레스의 마법사도 끼어있었지. 또, 페듀크라는 마을의 도적길드 장을 맡고있는 솜씨좋은 도적도 있었는데, 정말 재빠른 녀석이었지. 당시에는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우리 드워프 족은 말을 타는데 잼병이라서 나는 무척이나 고생을 했지. 그렇게 닷세 밤낮을 달려 우리는 구바닌 산맥의 산자락에 도착할수 있었던 게야.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일행들은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는데,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허술한 지도 하나만을 보고 찾아왔더니 생각보다 백배는 더 험준한 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더구나." 익살스러운 켈트의 몸짓이 이어지자 카타리나와 벌쿤은 웃음을 터트렸고, 켈트는 더욱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 험난하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산맥의 십분지 일도 올라가기 전에 말을 타고는 오르지 못할 정도의 경사가 시작되었고, 일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은 사람들의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지. 게다가 뾰족하게 솟아난 암석들은 굉장히 날카로워서 살짝만 잘못 긁히면 피를 보기 일수였단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는 켈트를 바라본 벌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정말 그런 곳을 올라가셨다는 말이에요?" "아무렴! 내가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것 같으냐? 정 못믿겠으면 뮤스에게 한번 물어보거라. 뮤스도 구바닌 산맥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을 테니." 켈트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켈트 아저씨의 말이 모두 사실일 거야. 구바닌 산맥은 높기도 높은 데다가 가파르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오르기는 힘들지." 뮤스를 통해 진실임을 확인한 벌쿤은 켈트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어요?" "녀석, 모두 이야기를 해줄테니 보채지 말거라... 쩝, 물론 혀를 내두를 만큼 험한 곳이었지만, 당시 보물에 눈이 먼 우리들은 거칠 것이 없었지. 하루에 고작 200멜리 조차 오를 수 없는 속도임이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 할줄 모르고서 산을 올랐고, 오르다가 좁다란 평지라도 눈에 띄면 그곳에서 두꺼운 모포를 다섯겹이나 덮고 잠을 청했단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밤이되어 밀려오는 엄청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보름 가량을 올랐을 때, 우리는 지도에 그려져 있던 동굴을 발견할수 있었단다. 정말이지 그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 할수 없는 것이었지. 그리고 기쁜 마음에 몸이 피곤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동굴 속으로 뛰어 들었단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켈트가 문득 입을 다물자 한창 이야기에 빠져들어있던 카타리나가 애를 태우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결국 그 진귀한 약초를 찾아낸 것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직한 한숨을 내뱉은 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 지도도 가짜가 아니었고, 지도에 나온 대로 그 동굴 속에는 약초가 존재하고 있었지." 잔뜩 흥분한 벌쿤은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켈트를 흔들며 외쳤다. "이야! 그럼 그 사람들이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었겠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내저었는데, 그 때의 생각만 해도 억울하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찌푸렸고, 입맛을 다시며 말을이었다. "쩝...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모두들 헛물만 들이키고 말았단다." "엥? 그 진귀한 약초를 찾아냈다면서요. 그런데 왜 헛물만 들이켜요?" "사실 문제는 그 지도에 있었단다. 그 지도가 제작된 것이 약 800년 전이었는데, 그 당시 어느 유명한 약사가 불치의 병에 걸린 딸의 살리기 위해 어떤 약재를 찾아나서게 되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가 찾는 약재는 제국 전역을 돌아다녀봐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은 그의 발걸음은 구바닌 산맥에까지 닿게 되었던게야. 비록 위험하긴 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접을 수 없었던 그 약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구바닌 산맥에 올랐고, 하늘의 뜻인지 그가찾고 있던 약재가 자라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는군.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던 약초를 구할 수 있었던 그 약사는 그곳을 잊어 버리지 않게 지도를 만들었고, 그 약초를 이용해서 딸의 목숨까지 구했단다. 그런데 그 약초라는 것이 알고봤더니 '큔의 날개'라는 것이더군. 그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기절 할 뻔 했단다. 겨우 큔의 날개였다니..." "푸하하핫! 정말 황당할 만 했겠군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만도 해요. 풋!" 켈트의 이야기가 끝나자 뮤스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는데, 벌쿤과 카타리나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카타리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뮤스에게 물었다. "대체 왜그렇게 웃는거니?" 그녀의 말에 힘겹게 웃음을 참은 뮤스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큔의 날개라는 것은 오래전에 엄청나게 귀한 약재로 쓰였었지. 왜냐하면 아주까다로운 조건이 아니고서는 자라나지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세상도 변하듯이 재배기술이 발달하게 되자 큔의 날개를 일반인들도 쉽게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근래에 들어서는 헐값에 팔리는 약초가 된 것이지." "호홋! 정말 헛수고만 한것군요!" 그제서야 이야기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된 카타리나와 벌쿤 배를 부여잡고 웃었으며, 켈트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듯 표정이 어두워져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웃음을 멈출 수 있었던 카타리나와 벌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고, 겨우 안정을 취하게 된 벌쿤은 켈트를 향해 물었다. "이야기가 웃겨서 좋긴 했는데 하나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응? 궁금한 것이라니?" "아저씨가 구바닌 산맥에 오르기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했다고 하셨는데, 설마 우리도 그렇게 올라야 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야 괜찮지만 카타리나 누나가 걱정이네요." 그의 물음에 대해 뮤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전체적으로 구바닌 산맥의 산세가 험하긴 하지만, 흑룡의 호수가 있는 곳은 예외이지. 비록 전뇌거를 타고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다른 곳과 같이 극단적으로 험난하지는 않거든. 카타리나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야." 뮤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벌쿤은 옆에앉아있는 켈트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사실 드워프 아저씨가 그랬던 것 처럼 보름이나 산을 오르기는 싫거든. 후훗! 아무런 보람도 없이 그 고생을 했으니 아저씨도 얼마나 억울 했겠어요." "이 녀석! 가만히 두지 않겠다!" 40년 동안 가슴에 담고있던 아픈 곳을 벌쿤이 찌르자 발끈한 켈트는 벌쿤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 덕에 전뇌거의 뒷좌석은 때 아닌 씨름판으로 변해 버렸다. 늘상 일어나는 이런 일에 이제 익숙해진 카타리나는 느긋한 자세로 그들이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었고, 뮤스는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켈트와 벌쿤의 몸부림 때문인지 아니면 거친 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뮤스 일행을 태운 전뇌거는 경쾌하게 들썩거리며 구바닌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0-1 투르코스 재상의 기억. 한낮의 드넓은 보리밭,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농부들의 손길이 쉴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농부들 사이에서 '보리 농사는 100일 동안 심어 3일 동안 거두어 들인다.' 라는 말이 전해 지는데, 초여름의 바람에 보리가 눕기 전에 거두어 들여야 했기에 봄날의 농부들은 그 어느때 보다 바쁜 것이었다. -사각, 사각... 보리이삭은 휘둘러지는 낫에 닿는 족족 힘없이 베어져 갔고, 농부들은 한줄조차 흘리기 아까운 듯 잘려진 보리이삭을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따분한 일련의 반복동작이었지만, 농부들에게는 그것 마저도 큰 즐거움이었기에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 무뚝뚝한 얼굴을 가진 농부가 눈에 들어간 땀방울을 닦아내기 위해 잠시 손을 멈추며 허리를 펴보았다. 등허리를 타고 뻐근함이 흘러내렸고, 해를 더 할 수록 전같지 않은 몸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세월을 한탄하는 말을 중얼 거렸다. "흐음... 이놈의 몸은 벌써부터 말썽이군.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태산인데 말이야." 그는 해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랗다 더해 새하얗게 보이기 까지하는 해는 이미 점차 서쪽녘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로서는 짧기만한 해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덜해진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던 농부는 무엇인가를 본 듯 단추구멍 만큼이나 작은 눈을 있는대로 부릅뜨며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트렸다. 그리곤 놀란 마음에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동료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다들 저걸 보라고! 뭔가가 하늘을 날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새..." 그의 부산스러운 외침에 낫질을 하던 농부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되었다. 마을에서도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가 안색까지 바꾸며 놀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겐가? 하늘이라니?" 하지만 그가 놀라는 이유를 다른 농부들이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필요치 않았는데, 좌우로 갸웃거려지던 농부들의 고개는 금새 쇠꼬챙이라도 꽂은 듯 뻣뻣하게 굳어졌고, 의아함으로 가득차있던 눈동자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 지기 시작했다. "드..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나타난 거야!" "오! 주신이여 어찌하여...!" "으아악! 브..브레스에 불타죽기 싫으면 모두 도망쳐라!"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평화롭기만 하던 보리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오늘 하루의 농사일만을 걱정하던 농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에든 농기구들을 내던지며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닿았던 곳에는 해를 가리울 정도로 거대한 비행선이 여유 자적한 모습으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광택을 띄는 순백의 선체는 빛을 은은히 반사시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 사이로 확연히 들어나는 진 붉은색의 드래곤 문장은 그 비행선이 도이첸 제국 공학원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비행선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농부들의 눈에는 그저 공포감을 이끌어내는 괴비행물체로 비춰질 뿐이었다. -우우웅... 지상에서 제풀에 놀란 농부들이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 다급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과묵하게 움직이고 있는 비행선의 내부는 평온함이 지나쳐 적막감까지 흐르고 있었다. 공학원에서 출항한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하늘을 난다는 신기함과 여행에 대한 설레임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던 것이었다. 게다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지상의 풍경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기에 밖을 내려다보는 재미 마저도 시들해지자 비행선의 한정된 공간은 그것에 탑승한 이들에게 감옥처럼 갑갑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비행선 내부에 마련된 응접실, 뮤스와 친구들은 금새라도 한숨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작은 탁자 주변에 둘러 앉아 카드놀이를 하는 중이었고, 크라이츠는 평소와 다를것 없이 고고한 태도로 안락 의자에 앉아 붉은표지를 가진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크라이츠 역시 뮤스와 친구들에 못지 않게 무료함을 느끼는 중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미지 관리란 그 무엇보다도 앞선 가치였기에 애써 참고 있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여 본 히안은 그것을 탁자위로 던지며 뒤로 벌러덩 드러 누웠다. "에고! 나는 죽었어! 이제는 카드놀이도 지긋지긋 하다고!" 히안이 손을 털며 자리를 벗어나자 폴린 역시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있던 카드를 내려 놓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으앙! 나도 그런걸. 역시 재미없는걸 억지로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다른 친구들 역시 히안과 폴린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카드놀이는 그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으음?" 친구들이 던져놓은 카드를 정리하던 뮤스는 문득 크라이츠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책을 훑고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았기에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누님? 지금 책읽고 계시는 건가요? 한참 전부터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는군요." 뮤스의 말에 친구들의 시선 역시 크라이츠를 향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미지 관리를 위해 힘겹게 침묵을 지키고있던 그녀는 말을 걸어오는 뮤스를 크게 반기며 아무런 미련없이 책을 덮었다. 이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호홋! 네가 정 원한다면 이 누님께서 함께 놀아 줄 수 밖에 없구나! 내가 워낙 부탁을 거절 못하는 성격이잖니!" "에?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어쨌든 빌미를 잡게된 크라이츠는 기회를 놓칠세라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자! 그런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니?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 것인가 란다." 결국 뮤스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크라이츠는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뮤스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이 누님께서 바쁜 와중에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냈단다." 자신이 꺼낸 말에 뮤스의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뮤스가 들고있던 카드를 빼앗아 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호홋...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카드놀이를 계속하는데, 다만 재미있는 벌칙을 정하는 것이지." 그녀의 엉뚱한 면을 잘 알고 있던 뮤스는 불안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심히 걱정이 되는군요. 그 재미있는 벌칙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하지만 뮤스의 말을 귀넘어로 흘려버린 크라이츠는 자신이 생각해 놓은 벌칙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규칙은 아주 간단하단다. 첫번째, 지금부터 쟈트란에 도착할 때 까지의 모든 점수를 합산하여 승자를 정한다. 두번째, 승자는 이외의 사람들에게 쟈트란에서 입을 옷을 골라 줄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세번째, 벌칙은 쟈트란 도착 이 후 3일간 계속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이기는 사람이 마음대로 나머지 사람들의 의상을 정할 수 있는 것이 란다. 예를 들자면 남자에게 여성용 드레스를 입혀도 되고, 히안이 준비해온 그 요란벅적스러운 옷들을 입혀도 상관없는 것이지. 어떻겠니?" 여기까지 크라이츠의 설명을 듣고있던 뮤스의 친구들은 그녀가 생각해낸 벌칙에 흥미를 느끼는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머! 정말 괜찮은 생각인걸요? 호홋! 그런 벌칙이라면 충분히 카드놀이를 할 맛이 나겠어요!" "푸훗!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 벌쿤이 드레스를 입고 비행선에서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봐. 아마 우리를 맞이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질거야." 특히 히안은 며칠 전 친구들에게 무시당한 일을 잊을 수 없었기에 더욱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럼 만약 제가 승리하게되면 제 취향대로 모두에게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죠? 흐흐흣..." "호호호! 물론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히안만은 승리를 못하도록 해야겠는걸? 타국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히안의 안목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던 친구들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구겨졌고, 단지 그 결과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끔찍한 듯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었다. "으..으...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어쨌든 이렇게 하여 벌칙이 정해지게 되자 크라이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른 이들에게 카드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밤낮을 잊은 승리 쟁탈전은 쟈트란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계속 되었는데, 어떠한 결과가 벌어질 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 * * 신이 정한 섭리에 따라 5월에 접어들며 봄의 기운은 절정에 치달았고, 지상위의 만물은 그 따스함에 녹아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눈꺼플을 내리 감는 것 조차 귀찮게 느껴질 만큼이나 포근한 어느날, 파르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덩이의 작은 구름조각에 정신을 빼앗기고 서있는 중년의 인물이 있었다. 양분을 잔뜩 머금어 만발해 버린 관상화들 사이에 서있는 그는 안면에 풀이라도 먹인 듯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그리는 듯한 그의 두 눈만은 연인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그것보다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주름진 눈꺼플을 한두번 꿈뻑인 중년인은 담담한 한숨을 짧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흐음, 도이첸 제국... 공학원... 재무부 책임자..." 자신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은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반복 되었고, 그럴수록 중년인의 얼굴에는 고심의 흔적이 진하게 그려졌다. 한동안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등뒤로 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투르코스 재상각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가볍게 놀란 그는 뒤돌아 서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진남색의 예복을 매끈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인물이었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눈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 없이 정감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게하임 부관이었군. 내가 이곳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투르코스 재상의 물음에 그의 곁으로 다가온 게하임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뭐 처음부터 재상각하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집무실로 가는 도중에 유난히 화원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 계시기에 유심히 살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재상각하시더군요." 비록 상관에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농담조의 대답이었지만, 투르코스 재상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게하임의 말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각하께서 재상직에 오르신 이후로 이렇게 심란한 얼굴은 처음 보는군요. 물론, 대학을 졸업할 당시만 해도 자주 그런 얼굴을 하고 계셨지만..." 게하임의 물음에 답답한 한숨을 내쉰 투르코스 재상은 다시금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자네도 알지 모르겠군. 크라이츠 드라켄이라는 여성의 이름을..." 게하임은 그 이름이 귀에 익숙함을 느끼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짚히는 사람이라도 있는 턱을 쓸며 입술을 떼었다. "크라이츠 드라켄이라... 혹시 스윈제국 국립 대학의 최연소 경제학 교수의 이름이 아닙니까? 음... 제가 막 대학에 입학해서 그란데 아인즈 때였으니, 재상각하께서 그란데 퓌어 때군요. 나이도 비슷한 데다가 뛰어난 미모와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 때문에 학교내에서 굉장한 인기였죠. 그분이 다니는 곳 마다 남학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마에 주름살을 잔뜩 만들어낸 투르코스 재상은 입주변을 매만지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오래전의 일인데 잘도 기억하고 있군.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나 역시 그 분을 짝사랑하는 수 많은 남학생들 중에 한명이었다네. 비록 보기 좋게 거절 당하고 말았지만 말이야." 생각지도 못하게 투르코스 재상의 옛이야기를 듣게된 게하임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호오... 정말 의외로군요. 재상각하께도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헌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그분의 이름은 왜 꺼내시는 것인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투르코스 재상은 뒷짐을 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으로 부터 온 초청회답을 보니 그곳의 재무부 책임자의 이름이 크라이츠 드라켄이더군. 그분과 같은 이름의..." "혹, 그렇다면..." 게하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투르코스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바로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 분과 동일인물일 것일세. 그녀 역시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에 오게 될 것이라네." 이에 게하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한마디로 첫사랑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인다는 것이군요." "..." 정곡을 찌른 게하임의 말에 투르코스 재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게하임은 왠지 쑥스러움을 느끼는 듯한 투르코스 재상의 뒷모습을 보며 붉은 머리칼을 가진 한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2 쟈트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도인 만큼 쟈트란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물들은 두터운 세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세워질 당시만 하더라도 순백이었음 직한 거리의 건물들은 이제 어두운 회색에 가까워 졌고, 목재로 만들어진 창과 창틀은 여러번 수리되어진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이 모든 것이 허름하고 지저분해 보일법도 했지만, 그곳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고풍스러운 멋은 인위적으로 이끌어 낼 수 없는 쟈트란만의 분위기였기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은 그것마저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도에도 작년부터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은 황실과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던 제국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민간에 도입되면서 부터였는데, 쟈트란의 일부분을 시범구역으로 지정해 근교의 수력발전소로 부터 전뇌력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황실의 보조금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각 가정에 전뇌등이 설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시내의 곳곳에는 듀들란 제국식 전뇌거의 전뇌력 충전 시설이 들어섰는데, 일부 상류층과 귀족을 대상으로 듀들란 제국식 전뇌거가 지급되면서 실험운행이 한창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도로 위에 자주색에 가까운 목재로 꾸며진 전뇌거 한대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흰색의 실험복을 걸쳐입은 장영실과 그의 일을 돕기 위해 따라나선 라이에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젊은 귀족인 라이에트는 능숙한 솜씨로 전뇌거를 운전하며 보고를 하는 중 이었다. "총 21개소의 전뇌거 충전시설중 18개의 충전시설이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세곳은 아직 안전상의 문제로 전뇌력 공급선을 땅밑으로 묻어야 했기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지만, 이틀내로 모두 완료 됩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에 첨부된 지도를 눈으로 확인한 장영실은 진척상황을 대조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마르트 삼거리와 듀마이어 거리, 그리고 파코마 광장이군.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보고를 마친 라이에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활기가 넘실거리는 거리를 살폈다. 거리에는 색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오가고 있었고, 여유를 가질 줄 아는 젊은이들은 여러 무리를 이루며 거리의 계단에 모여 앉아 각각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거리의 곳곳에는 작업복을 입고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각국에서 올 귀빈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욱 활력적인 도시의 모습에 라이에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재국개발 사업 발표회군요. 이번 기회에 군소국가들 뿐만 아니라 도이첸 제국 녀석들 따위는 이 듀들란 제국에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시켜 줘야 합니다. 제국 전역을 고속으로 이어주는 기관열차를 보면 다들 턱을 빼며 놀라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장영실 남작님?" 그의 물음에 뒷좌석에 타고있던 장영실은 서류에 닿아있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했다. "글쎄... 다른 국가들이야 아직 공학기술이 도입되지 않았으니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 없다네."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장영실의 대답을 들은 라이에트는 전뇌거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짐을 느꼈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에에? 지금 우리의 공학 기술력이 도이첸 제국에 비해 떨어진 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리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라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번에 발표하는 듀들란 제국식의 전뇌거나 기관열차 등은 그 기능적인 면에서 충분히 자랑할만 하지만,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에서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네. 확실히 기술력만 본다면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은 우리 이상이라는 말이지. 그 아이의 성장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 넘어 버렸거든." "만약 그 말씀대로라면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습니까? 뭔가 해결책이라도 강구해야..." 기분이 상해버린 라이에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높아졌고, 이에 가볍게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물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훗... 글쎄, 어떻게든 되지않겠나?" "어떻게든 되다니요? 그렇게 느긋하게 하실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공학원의 사람들은 장영실 남작님 한분만을 믿고서 지난 수년간 밤잠을 줄여가면서 노력해 왔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라이에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자 손에 들고있던 서류를 덮은 장영실은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농담이니 그렇게 열을 내지 말게나. 나는 그들이 기술력에서 앞선다고 말했지, 우리가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네." 농담이라는 말에 금새 머슥해진 라이에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아직도 장영실이 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농담이시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것이 없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기술력이 높은 쪽이 이런류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장영실은 매끈하게 가공되어진 팔받침을 천천히 문지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네는 이 대륙에 공학기술이 도입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나?" 돌연한 장영실의 물음에 잠시 머리를 긁적인 라이에트는 손가락을 꼽아보며 대답했다. "음... 5년쯤 되지 않았겠습니까? 5년전 도이첸 제국에 공학원이 세워지기 전만해도 오이랍 대륙에는 공학기술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까요." "후훗! 그렇군. 그 5년이라는 시간, 역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하나의 작은 점에도 미치지 못 할 만큼 짧은 시간이 아닌가?" "네? 아네..." 장영실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말을 자르기 싫었던 라이에트는 나직히 대답하며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고, 잠시 뜸을 들인 장영실은 창밖을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학기술이 발전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작업의 분담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라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공학자라도 인간인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설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시간을 불필요하게 허비하기 마련인 것이지." "음... 효율성..." "도이첸 제국의 공학원은 명신, 자네들이 뮤스라고 말하고있는 한 사람을 주축으로 모든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네. 비록 재능있는 인물들이 주변에서 뮤스를 돕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제 막 공학기술을 익히는데 발을 들여 놓은 초심자들이나 마찬가지기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순 작업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있지. 그러한 상황인 만큼 실생활에 쓰일 새로운 기기를 개발할 때 마다 설계단계 부터 부속제작과 조립, 그리고 시험과정에 이르기까지 뮤스가 일일이 신경을 써야만 하는데, 이런 일들이 누적 될 수록 전체적으로는 큰 시간적 낭비를 가지고오게 된다는 것일세. 뮤스 그 아이 역시 이러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공학자 지망생들을 모집하여 공학원에 필요한 인재로 기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짧은 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지." 숨을 한번 들이 쉰 장영실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흠... 정리 하자면 뮤스가 비록 높은 수준의 공학기술력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실생활에 응용하는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일세. 최소한 5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 대충 이해할 수 있겠나?" 장영실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이에트는 모든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아하! 결국 현재로서는 뮤스원장이 가진 역량을 모두 발휘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헌데, 한 가지만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 보게나." "남작님께서는 어찌 그런것까지 알 수 있으신 것입니까? 도저히 저의 평범한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라이에트는 자뭇 진지한 눈빛으로 장영실의 대답을 기다렸고, 그의 물음에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헛기침을 터트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흠...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그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네." "네..네에? 그..그랬었던 것입니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금까지 새로운 공학기술을 도입 할 때 마다 내가 얼마나 용을 써야했는지 자네는 모를 것일세. 단순한 조립이야 자네같은 이들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조금 복잡한 작업이다 싶으면 내가 손수 해야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게다가 그 기관열차라는 녀석이 어디 좀 커야 말이지. 아무튼 그러니 뮤스의 심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일세." "그..그랬었군요." "어디 그것 뿐인가? 수력발전소에 들어갈 발전기의 설계에만 꼬박 한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네. 애초 설계라는 것은 부분을 나누어 하는 것인데 나 혼자 그 모든 작업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투덜... 투덜..." 결국 그들의 대화는 장영실의 신세 한탄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도망칠 곳 조차 없었던 라이에트는 장영실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던진 자신을 원망하며 공학원에 도착할 때 까지 그의 한탄을 들어 줘야만 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걸려있는 수 많은 별들 사이로 뮤스와 일행들을 태운 비행선이 여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시리도록 하얀 달빛을 반사시키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비행선은 바람을 등지며 어딘가로 향하는 중이었고, 빠르지 않은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프로펠러는 멀어져가는 달을 향해 손을 흔드는 듯 했다. 벽에 걸린 대여섯개의 전뇌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 응접실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 앉은 뮤스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크라이츠는 손에 다섯장씩의 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암담한 안색이었고, 유일하게 히안만은 득의의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이어 히안은 일행들의 얼굴을 한번씩 살펴보며 음흉한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흣... 어차피 승자는 결정이 난것 같지만, 끝은 봐야겠지? 다들 카드를 펼쳐 보자고." 그의 말에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폴린은 신경질 적으로 카드를 덮으며 울상을 지었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거니? 우리는 뭔가 히안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벌쿤 역시 폴린의 말에 수긍하는 듯 그의 말을 받으며 투덜 거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게 뭐야! 운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가차없이 이겨도 되는거야? 뭔가 조작이 있을거야... 조작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벌쿤의 행동을 지켜본 히안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흥! 조작은 무슨 조작이냐! 이건 그 동안 내가 갈고 닦은 실력이란 말이다!" "실력이라니? 형이 무슨 전직 도박꾼이라도 된다는 거야? 듣자하니 집에서 공부만 하던 샌님이었다던데!" "새..샌님이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해댄거야?" "누구긴 누구야. 폴린 누나 외에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더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결국 히안의 눈총이 폴린에게로 날아가 꽂히자 폴린은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하며 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 때, 세이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흠... 이제야 생각이 나는데, 그러고보니 히안은 카드놀이를 잘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내용을 알 수 없는 세이즈의 말에 벌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소리야? 히안형이 카드놀이를 잘 할 수 밖에 없었다니?" "응. 히안이랑은 대학에 오기전 부터 같은 씨니어스쿨을 다녔었어. 그래서 잘 알고 있는데, 그때 부터 히안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어서 심심할 때 마다 혼자 카드놀이를 하고 놀곤했지. 3년 동안을 그렇게 놀았으니 잘 할 수 밖에 없잖니. 뭐, 그 전 부터 그렇게 놀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세이즈의 말에 히안의 얼굴은 벌겋게 변했고, 친구들과 크라이츠의 시선은 모두 히안에게 모아져 있었다. 이에 잠자코 있을 수 없었던 히안은 손을 내저으며 부정을 하기 시작했다. "누..누가 그런 불쌍한 짓을 했다는거야! 또, 설혹 그런 일이있었더라도 너랑은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소리를 버럭 지르는 히안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은 세이즈는 탁자에 놓인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더니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그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나랑 친구들이 심심할 때 마다 너 혼자 카드놀이 하는 걸 구경하면서 놀았거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혼자 여러 명의 역할을 하면서 카드놀이에 심취한 모습이 얼마나 웃겼는데. 우리 말고도 그거 구경하는 애들이 꽤 있었을걸? 아무튼 너는 잘 모랐겠지만 학교에서 상당히 유명했었단다." "그..그런일이..." 결국 덜미를 잡히게 된 히안은 더 이상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고, 그에게 고정되어있던 일행들의 시선 속에는 마치 불쌍한 강아지를 보는 듯한 측은함 마저 담겨 있었다. 벌쿤은 축쳐저 있는 히안의 어께를 두들겨 주며 입을 열었다. "형... 어렸을 때는 정말 불쌍했었구나.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형의 승리를 인정할게. 힘내라고!" 벌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항상 그를 놀리던 폴린 마저도 따뜻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해 주었다. "너... 그런 일이 있었는 줄도 모르고... 매번 짖굳게 굴어서 미안해, 히안. 하지만 이제 우리가 있잖아?" 평소 같지 않은 친구들의 다정함에 히안의 표정은 오히려 더 굳어 있었는데,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로라기 보다는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이봐들. 위로 같은거 안해줘도 좋으니까 이제 그만 해줄래? 별로 기억하기 싫은 일을 그렇게 계속해서 들춰낼 필요는 없잖아?" 히안의 말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폴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아픈 기억을 떠올렸으니 너도 기분이 좋지 않겠지. 아무래도 혼자 시간을 좀 가지는 것이 좋겠다." 히안이 무엇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친구들과 크라이츠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다들 자리를 좀 비켜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으음... 우리는 뭐좀 먹으러 갈까?" 그녀의 말에 뮤스가 먼저 자리를 일어나 응접실의 문을 열었고, 친구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다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후훗. 오랜만에 벌쿤이 실력을 발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걸?" "하핫! 그럼 벌쿤 특제 치즈케익을 만들어 보도록 할까? 하지만 밤인만큼 한 조각 씩 밖에 안돌아 갈거니까 그런 줄 알라고." 벌쿤은 자신있다는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친구들과 크라이츠 또한 히안의 어깨를 한번씩 두들겨 주며 응접실 밖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히안의 얼굴을 한번 살핀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럼 지난 일들을 모두 잊을 때까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도록해. 그럼 먼저 실례." -탈칵... 뮤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응접실에 혼자남게 된 히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져서인지 응접실은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고, 아직 눈에 어색한 가구들은 그의 기분을 더욱 착찹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쉰 히안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후우... 세이즈는 왜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기분을 눅눅하게 만드는거야. 쳇!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잊으라는거냐. 으음? 잠깐, 지난 일들을 잊으라고? " 혼잣말을 하던 히안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뭔가 떠오른 듯 갑자기 인상을 일그러트리더니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 녀석들! 자리를 비켜 준게 아니라 벌칙을 어영부영 넘기려고 도망간 거구나! 남의 아픈 과거를 이용하다니! 치사한 녀석들!" 히안의 외침과 동시에 아무도 없었던 것만 같던 문밖의 복도에서 부터 시끌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들켰다! 잡히기 전에 도망쳐라!" "문을 막아서 못나오게 하는 것이 더 빨라!" "이대로 응접실을 봉쇄해야되지 않겠니?"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직접확인 한 히안은 굳게 닫힌 응접실의 문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고, 그 밖에서는 뮤스와 벌쿤이 어깨를 기대며 힘껏 응접실의 문을 막고 있었다. -쾅! 쾅! "이 녀석들 당장 문을 열란 말이다! 두고 보라고! 너희들을 위해서 멋진 의상을 마련해 줄테니!" 그의 말에 불길함을 느낀 뮤스와 벌쿤은 더욱 힘을 주어 문을 막았고, 시간이 갈 수록 히안의 발길질 역시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10-3 듀마이어 거리는 쟈트란 시내에서 뿐만 아니라 듀들란 제국 전역에서 이름난 명소였다. 비록 거리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여 여느곳과 다른 점이 없었지만,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듀들란 제국을 대표하는 의상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달리 의상에 많은 신경을 쏟는 쟈트란의 여성들은 듀마이어 거리에 들러 새롭게 출시된 드레스를 살펴보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일 정도 였는데, 그런 이유로 듀마이어 거리는 항상 사람들로 분벼 발딛을 틈 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리 넓지 않은 거리를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의상점들은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간판을 가지고 있었고, 잘 닦인 대형 유리창을 통해 진열해 놓은 드레스나 연회복들을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성들은 진열해 놓은 드레스들을 보며 수다를 떨었고, 점원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손님들을 대하고 있었다. 그런 듀마이어 거리에서 5대째 의상점을 이어온 라펜은 몸에 베인 친절함을 과시하며 깍듯한 태도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두 팔에는 검은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섞여있는 드레스 한벌이 걸쳐져 있었는데, 소문을 듣고 가게를 찾아온 한 귀부인에게 자신이 직접 제작한 드레스에 대한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은 꿈을 표현한 작품이랍니다. 아련히 잡힐 듯 하면서도 눈을 뜨면 사라져 버리는 달콤한 아쉬움을 흑과 백의 몽롱한 조화를 이용해서 형상화 한 것이죠. 겉감의 원단은 로바드산 최고급 실크를 사용하였고, 안감은 보듀라스산 순면을 사용한 만큼 몸에 닿는 감촉은 최고라고 자부 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설레이는 표정을 한 귀부인은 옷감을 만져보며 구입의사를 밝혔고, 라펜은 그녀의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 포장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검은색의 종이 상자에 흰색의 리본이 묶인 드레스 상자를 가져나와서 귀부인에게 건넨 라펜은 미소를 지으며 무거운 문을 직접 열어 주었고, 문 앞에 서서 공손하게 손을 모은 그는 다음번에도 자신의 가게를 찾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 "찾아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드레스에 이상이 생기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들려 주십시오." 손님 배웅을 마친 라펜은 문밖에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한 줄 알았던 거리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으음? 비라도 올려나? 날이 어두워 졌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본 라펜 또한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석상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보통때라면 건물들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여야 할 곳에 지금 이 순간 거대한 괴비행체의 모습만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대..대체 저건 뭐..뭐지?" 그가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눈을 부비고 있을 때, 사람들 중 누군가가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앗! 이리로 뭔가가 내려 오고 있다!" 과연 그 외침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비행체로 부터 밧줄 사다리가 내려지며 무엇인가가 거리로 내려오는 중이었는데, 자세히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준 라펜은 그것이 틀림없이 사람이고,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을 식별할 만큼 가까워지자 괴비행체로 부터 내려온 인물은 멍한 눈빛으로 올려다 보고 있는 라펜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다. "거기 검은 옷입은 아저씨! 혹시, 도이첸 제국어를 알아 들으실 수 있나요?!" 듀바이어 거리가 유명한 관광 명소인 만큼 타국의 손님들도 상당수 찾아오는 편이었고,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가게 주인들은 도이첸 제국어를 할 수 있어야만 했는데, 라펜 역시 그 중 한 명이었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네? 조금은 할 수 있습니다만..." "아! 정말 다행이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땅에 내려선 그 젊은이는 급히 대형 유리창을 통해 라펜의 가게안을 들여다 보더니 팔을 머리 위로 뻗어보이며 물었다. "혹시, 이 정도 되는 여성용 드레스를 구할 수 없을까요? 디자인은 어떻든 상관 없습니다. 뭐 노출이 심할 수록 좋긴 좋겠지만..." "네? 그..그 정도 치수의 드레스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라펜이 고개를 내저어 버리자 젊은이는 급박한 일인 듯 그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아!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어떻게든 구할 수 없을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절실해 보이는 얼굴로 부탁을 해오자 어쩔줄 몰라하던 라펜은 곰곰히 기억을 되짚어 보더니 금새 희색을 띄우며 말했다. "자..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찾아보면 마땅한 옷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양해를 구한 라펜은 급히 가게로 뛰어 들어갔고, 젊은이는 기대 반, 불안 반의 모습으로 라펜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편, 벌쿤은 비행선의 창밖으로 목을 길게 빼어 지상을 내려다 보는 중이었고 뮤스를 포함한 친구들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벌쿤의 귀에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수근덕 거리고 있었다. "히안도 참 대단하지 않니? 벌쿤을 위해 직접 옷을 구하러 내려가다니! 푸풋!" "프흐흣! 그러게 말이야. 과연 어떤 드레스를 가지고 올지 정말 기대 되는걸?" 꾹꾹 참으며 그들의 놀림을 받던 벌쿤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이마에 핏발을 세우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흥! 다들 착각하고 있나본데, 나만 벌칙을 당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다들 똑같은 상황이면서 나를 놀려도 되는거야?" 벌쿤의 외침이 자극이 되었는지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턱을 받치며 고민하던 카타리나는 다시금 침침하게 변해버린 분위기를 추스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설마... 히안도 생각이 아주 없는 애는 아닌데 우리가 우려하는 만큼 심하게 하겠니? " 뮤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히안이 타고내려간 줄사다리를 가리켰다. "위험을 무릅쓰고 옷을 구하기 위해 저 아래까지 내려갈 정도인데 대충 끝내려는 것일까? 만만치는 않을 것 같은걸."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바람을 타고 진한 술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리고 등 뒤로 부터 켈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심하게 취한 듯 말이 꼬이고 있었다. "푸하하핫! 딸꾹! 무슨 고민을... 음? 고민... 아 그렇지!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는게냐? 듣자하니 내기에서 히안이 이겼다고 하던데 그래서 걱정인게냐? 쿠쿠쿡..." 그런 모습의 켈트를 보고서 깜짝 놀란 뮤스는 급히 술병을 빼앗아 들며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비행선 운항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술을 드신거에요?! "이..이 녀석! 어서 술병을 내놓거라! 이런 높이에서 드워프가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냐!" 켈트는 짧은 키로 뮤스에게 빼앗긴 술병을 찾기위해서 바둥거리기 시작했지만, 뮤스도 이번 만큼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듯 필사적으로 술병을 사수하고 있었다. "자 벌쿤 이거나 받아라!" 뮤스는 자신보다 더욱 키가큰 벌쿤에게 술병을 건네 켈트의 의욕을 끊으려했다. 하지만 켈트의 술에 대한 욕구는 쉽게 접을 수 없는 듯 다시금 벌쿤을 향해 몸을 날려 술병을 빼앗기 위해 매달리기 시작했다. "벌쿤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게냐?" 벌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뮤스의 기대 역시 저버릴 수 없었기에 쉽사리 넘겨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실랑이도 잠시, 켈트는 술을 마신 탓인지 금새 숨을 헐떡였고, 목까지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헥헥! 에고 죽겠다! 이봐 벌쿤 내가 제안을 한가지 하도록 하지! 만약 내가 히안을 해결해 주면 그 술병을 넘겨다오!" 켈트의 제안에 곁눈질로 뮤스의 얼굴을 살피던 벌쿤은 그의 기대를 져버리기로 마음 먹은 듯 고개를 돌리며 켈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그게 정말인가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까짓 술병 드리는게 문제겠어요?" 벌쿤의 배반(?)에 뮤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냉큼 벌쿤이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든 켈트는 술을 한모금 삼키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매다니 머리를 좀 쓰거라! 그리곤 허리춤에 걸려있던 원거리 통신기를 입에 가져간 켈트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자! 조종실, 어서 추진장치를 가동하라고! 다시 전진이다! 푸하하하! 히안을 버리고 가면 되지 않겠냐? 듀들란 제국어도 못하고, 길도 모르니 따라오지도 못할 게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켈트의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력기의 진동이 전해져 왔고, 비행선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 말고 깜짝 놀란 폴린은 눈에 불을 켜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서 비행선을 멈추라고요! 그러다가 히안이 다치기라도 하면 아저씨가 책임 지실 거에요?" 하지만 켈트는 실실 웃음 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흐흐흣... 폴렌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히안을 위해 줬었지? 히안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알다가도 모를 일인걸?" "그..그거야 단지 장난이었을 뿐이라고요! 그러니 어서 비행선을 멈춰요!" "뭐라는 하는지 안들려! 뭐라고?" 켈트가 폴린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술병과 원거리 통신기를 품에 꼭껴안은 채 히히덕 거리자 더욱 약이 오른 폴린은 켈에게 매달리며 원거리 통신기를 사이에둔 쟁탈전을 버리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폴린과 켈트의 실랑이를 바라보며 더 이상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직접 비행선을 멈추기 위해 조종실로 뛰어올라갔고, 남은 친구들은 히안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비행선 아래를 내려다 보는 중이었는데, 벌쿤의 입에서는 아쉬운 한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아... 벌써 줄사다리를 잡아 버렸군. 쳇! 조금만 더 빨랐어도 버리고 갈 수 있었는데..." 결국 히안을 비행선으로 끌어올린 친구들은 그가 나누어주는 옷가지들을 받아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해야 했으며, 켈트는 술병과 원거리 통신기를 빼앗긴 채 착륙을 할 때까지 비행선의 기둥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모여드는 사람들. 한결 따가워진 햇살을 받으며 짙은 자주색의 쟈트란식 전뇌거 여러대가 어디론가 급히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전뇌거의 존재가 아직 흔치 않은만큼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고, 전뇌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던 전뇌거는 곧 대로를 벗어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섰고, 20여 분을 더 달려서야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전뇌거가 멈춘 곳은 쟈트란에서도 제법 외곽인 곳이었는데, 재건축을 위해 오래된 건물들을 허물어 트리고, 지금은 넓은 공터로 남아 있는 장소였다. 전뇌거의 문이 열리면서 흰색에 금색의 수가 놓여진 복장을 한 십여명의 장정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전뇌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먼 발치의 하늘을 바라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더니, 이번엔 괴비행체라니... 대체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장영실은 투르코스 재상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행선이라는 것이죠." "비행선? 그렇다면 저것 역시 사람이 만든 것이란 말인가?" 어깨를 으쓱거린 장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행선의 선체에 새겨진 붉은 드래곤 문장을 보면 아시겠지만, 도이첸 제국 공학원의 것이군요.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번 행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것 같습니다." 장영실의 말과 같이 듀들란 제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선보일 기술보다 앞선 기술이 채용된 비행선의 등장이 달가울리 없었지만, 투르코스 재상은 지금 공적인 입장을 떠나 한 명의 사람으로서 비행선에 감탄을 하는 중이었다. "허어, 공학기술이라는 것이 하늘을 나는 일마저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군..." 혼잣말을 하고있는 투르코스 재상을 물끄러미 바라본 장영실은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후훗! 그렇게 느긋하게 말씀하실 처지가 아니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물론 나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듀들란 제국의 제상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헌데, 혹시라도 저 비행선이라는 것을 우리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에서도 만들 수가 있는 것인가?" 투르코스 재상의 물음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장영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예산과 시간이 충분하다면야 만들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혹시라도 제게 비행선 제작을 부탁하실 생각이시라면 포기하시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그 때는 이미 황실과의 계약이 끝난 후가 될 테니까요." "쩝... 나 역시 정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온 사람이지만, 자네 역시 만만치 않군.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것 까지야 있겠나?" "후훗... 그렇습니까? 어쨌든 어서 손님들이나 맞으러 가시죠.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면 곤란할 테니까요." 장영실은 못내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투르코스 재상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대공학자> 10-4 평소라면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는 공터에 이미 제법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비행선의 움직임을 쫓아 이곳까지 오게된 사람들이었는데,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치켜든 채 비행선에 닿아있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공터 위에 멈춰선 비행선은 점차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그럴 수록 거대한 비행선은 사람들의 눈에 가득차기 시작했고,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줄 모르고 있었다. "어..엄청나군. 저렇게 거대한 물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니..." "이렇게 내려오다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바보같은 소리 좀 하지 말게나. 애초 떨어질 것이었다면 진작에 떨어졌겠지!" 사람들의 수근덕 거림이 한창일 때 고도를 낮추던 비행선으로 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공터의 곳곳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본 비행선은 도이첸 제국 공학원 소속으로서 라이델베르크를 출발하여 일 주일간의 비행을 마치고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에 도착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쟈트란 시민 여러분들을 놀라게 했던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본 비행선은 잠시 후 착지할 예정이니 비행선의 아래쪽에 계신 분들은 안전을 위해 비행선과 50멜리 이상 간격을 유지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이첸 제국으로 부터 온 비행선이라는 말에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한번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시기와 부러움이 섞인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고 있었는데, 도이첸 제국의 경쟁국가인 듀들란 제국의 국민인 자로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도를 낮추던 비행선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곤돌라 부분이 땅에 닿게 되었다. 허나, 비행선의 선체는 불어오는 바람에 밀리며 조금씩 흔들렸고, 그로 인해 곤돌라의 밑바닦은 매마른 흙바닦을 끌며 먼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사람들은 먼지를 막기위해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는 동시에 불안감이 스며있는 눈빛으로 바람에 휘둘려지고 있는 비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안감은 아주 잠깐이었다. 곤돌라의 상단과 기체주머니, 추진장치 등 비행선 선체의 곳곳으로 부터 굵직한 밧줄이 연결된 화살들이 뻗어나오며 공터의 바닦에 단단히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파바박! 그리곤 느슨하게 연결된 밧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며 바람에 밀리며 움직이던 비행선은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로서 착륙이 모두 마무리 되어지며 다시금 비행선으로 부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비행선의 착지가 완료되었습니다. 간단한 기체 점검 후, 비행선을 개방합니다. 비행선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것이 확인되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비행선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눈에 모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비행선의 크기에 감탄사가 연신 흘러나옴을 주체하지 못했는데, 직접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물체가 하늘을 날았다는 것을 믿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 역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비행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앞서간 제복을 입은 장정들은 사람들 틈을 헤치며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이 지나갈 길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사람들은 비행선에 정신을 팔고있는 와중에도 투르코스 재상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순순히 길을 터주고 있었다. 잠시 후, 비행선 곤돌라의 측면에 위치한 문이 내려졌다. 그리곤 회색의 제복을 입은 비행선의 승무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뛰쳐내려와 비행선의 양옆으로 도열했고, 뒤를 이어 붉은 색의 융단이 계단 위를 덮으며 굴러나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마른 땅을 길게 가로질렀다. 그 붉은 융단의 끝은 우연찮게도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의 앞까지 닿아있었는데, 물끄러미 발 앞의 붉은 융단을 바라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붉은 융단이라니 스스로 귀빈대우를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준비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들 챙기는군." 투르코스 재상의 빈정거림이 담긴 말소리가 끝나자 비행선의 계단을 밟으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비행선 앞에 도열해 있던 승무원 들은 표정 관리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다물려진 입술 사이로 실소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은 안력을 돋구며 모습을 들어내는 이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눈에 들어온 인물들은 세명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볼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는데, 장영실과 투르코스 재상은 그저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이 그녀들의 몸으로 쏠리고 나서야 그녀들이 진정으로 부끄러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세 여인들이 걸치고 있는 복장이 그 이유였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만큼 짧으며,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 정도로 몸에 착 달라붙는 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들은 다름아닌 카타리나와 폴린, 그리고 세이즈였다. 세 친구들은 민망스러움을 느꼈기에 서로의 몸을 앞으로 밀치며 조금이라도 몸을 감추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떠밀려 그것마져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에 결국은 비행선 밖으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비행선 주변에 보여든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넋이라도 나간 듯한 멍한 눈동자로 그녀들의 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의상에 관한한 대륙의 그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인 생각을 가진 듀들란 제국의 국민들이었지만, 그녀들의 의상은 적지않은 충격을 전해주고 있는 듯 했다. "으음! 놀랍군, 놀라워. 이건 거의 속옷이나 다를 바가 없군." "호오! 그래도 보기는 좋지 않은가? 도이첸 제국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저렇게 아슬아슬한 옷이 유행인 모양이야! 내친김에 쟈트란에서도 유행했으면 좋겠는걸?" "쳇! 그렇게 된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아무나 소화해 낼 수 있는 옷이 아닐세. 내 마누라는 한쪽 다리에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야. 뭐 어쨌건 멋져 보이는군." 대체적으로 약간의 놀라움은 있었으나 이런류의 변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그녀들의 의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투르코스 재상의 눈에는 그리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쯔쯧... 함께온 공학원의 하녀들인가. 저런 민망한 옷을 입혀 놓은 것을 보니 뮤스 원장의 취향도 알만하군." 이때, 장영실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에서 생활한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났으나 오랜 동안 몸에 베인 유교적 습성을 바꿀 수는 없었는데, 허벅지까지 훤하게 들어나 보이는 그녀들의 옷차림은 장영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영실은 헛기침을 하며 투르코스 재상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흠흠!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저런 망측한 옷차림이 뮤스의 취향은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저 중 왼쪽에 서있는 아가씨는 구바닌 산맥에서 만난적이 있었죠. 그 아이의 여자친구랍니다." "저 아가씨들이 하녀든 아니든 그런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세. 최소한 손님으로서 타국을 방문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예의 정도는 갖춰줘야 하는 것이지. 헌데, 저 아가씨들은..." 하지만 투르코스 재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어지는 한 사내의 등장은 그의 얼굴살을 더욱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비단 투르코스 재상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여있는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바였는지 곳곳에서 야유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저 거구의 괴상한 녀석은 뭐냐!" "설마 여자는 아니겠지?" 사람들의 야유를 한몸에 받으며 등장한 인물은 바로 벌쿤이었다. 보통의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거구를 자랑하는 그는 가슴에 걸리는 분홍빛의 예식용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는데, 그것 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게다가 구리빛의 잘 발달 된 어께 근육과 우람한 팔근육은 하늘거리는 레이스와 어울리며 역겨움 마저 자아내고 있었기에 한참 들떠있던 분위기를 급속도로 가라앉히기에 충분해 보였다. "사내 녀석이 여자 옷이나 입고 튀어 나오다니! 당장 도이첸 제국으로 돌아가라!" "흐으... 틀림없이 보통의 취향은 아닐 것이야.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녀석이군." 이미 어느정도 예상했던 분위기였지만,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사람들의 반응이 반가울리 없었던 벌쿤은 이마에 핏발을 세우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빌어먹을... 다들 그럭저럭 봐줄만 하긴한데, 왜 나만 이따위 만들다 만것 같은 옷을 입어야 하는냐고!" 투덜거리고 있는 벌쿤의 등뒤로부터 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투덜거리지 말라고... 나 역시 만만치 않으니까." 목소리와 함께 벌쿤의 뒤로 뮤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히안의 손을 거친 이상 그의 복장 역시 범상스러울리 없었는데, 몸에 살짝 달라붙는 검은 색의 바지와 셔츠를 입었고, 그 위에 검은 바탕에 흰색의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길게 자란 머리카락까지 여러갈래로 땋아 내린 상태였기에 갸름한 몸집과 어우러져 유심히 보지 않으면 여자로 착각할 정도였다. 곁눈질로 뮤스를 살펴보며 피식 웃은 벌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풋! 그래도 형은 이쁘장하게 꾸며졌잖아? 혹시라도 멀리있는 남자들이 형을 여자로 여기고서 눈독을 들이고 있을 지도 모르지. 앞으로 3일 동안이나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녀야 할 테니까 어두운 곳에서는 꽤나 조심해야 할거야." "쳇...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 너도 방심하지는 말라고." 그렇지 않아도 몹시 심란한 상태였던 뮤스는 벌쿤의 농담을 가볍게 받아주며 카타리나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고, 벌쿤 역시 서둘러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히안과 크라이츠가 비행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먼저 히안은 자신이 라이델베르크를 출발하기 전부터 준비해온 여러가지 옷가지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몇 가지 골라 걸친 상태였다. 아래로는 윤택이 나며 신축성이 좋은 검은 바지를, 위로는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연남색의 셔츠를 입었고, 역시 비단으로 된 붉은 띠를 허리에 여러겹으로 감아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는데, 몸이 유약해 보이는 히안에게 썩이나 잘어울리는 의상이었다. 히안 역시 자신의 모습이 꽤나 뿌듯했는지 손을 허리에 얹으며 당당하게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훗! 나도 이렇게 신경써서 차려 입기만 하면 여느 귀공자들에게도 빠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혼자만의 만족감과 우월감에 빠져 입가에 미소를 머금던 히안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웃음기가 감돌고 있는 그의 눈에 크라이츠가 잡히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평생 한번도 입어 본적도 없음직한 초라히기 그지 없는 하녀복을 입은 상태였다. 거기에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손에는 흰색의 행주를 들고 있었고, 허리 밑으로 걸친 앞치마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묻어 생긴 누르스름한 얼룩이 져있었다. 말끔한 차림새의 히안과는 크게 대조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코끝에 걸린 안경을 살짝 치켜올린 히안은 어쩔수 없었다는 듯이 얄밉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후후훗... 크라이츠님, 저를 원망하지는 마세요. 이건 모든게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기였을 뿐이니까요. 저도 크라이츠님 처럼 아름다운분께 초라한 하녀복을 입혀야만 하는 현실이 원망스럽기 그지 없군요. 그렇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리시니 천만 다행입니다." 히안의 생각대로라면 신경을 자극하는 자신의 말에 그녀가 평상심을 잃고서 부끄러워 하거나 화를 내야만 했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히안의 기대를 보기좋게 져버렸는데, 오히려 은은한 미소까지 지어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호홋!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원래 미모가 받쳐주는 사람은 뭘 입어도 돋보이기 마련이지." 이렇게 말한 크라이츠는 서슴없이 히안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나갔고, 그녀의 태도가 평소보다 더욱 밝아보인다고 느낀 히안은 의아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히안의 의문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는데, 돌연 잠잠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듯이 흥분하며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야! 저 아가씨를 보라고! 괴..굉장한 미녀가 등장했다!" "먼저 나온 아가씨들도 예쁘긴하지만 저 아가씨에 비할 바가 아니군! 저 아가씨의 주변으로 성스러운 빛이 감도는 것 같아! 오오!" "틀림없이 저명한 귀족집안의 아가씨일 것일세. 단아한 분위기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저 기품하며... 그야말로 천사가 따로 없군!" 생각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에 깜짝 놀란 히안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듀들란 제국어를 알아 들을 수 있을리 만무했던 히안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유추해보기 시작했다. "대..대체 이 열기넘치는 반응은 뭐지? 호..혹시 나의 눈부신 모습에 대한 놀라움이란 말인가!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 분위기를 설명할 수는 없겠지. 역시 듀들란 제국에서는 나의 미학이 통하는 모양이로구나!" 혼자만의 착각으로인해 행복감을 맛보게된 히안은 금새라도 감동의 눈물을 흘릴 기색이었고, 보답이라도 할 생각에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반면 환호성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던 크라이츠는 사람들의 반응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뮤스에게로 다가갔는데, 이미 이러한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뜻밖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뮤스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뭔가 짚히는 점이 있었던 뮤스는 태연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으로 걸어오고있는 크라이츠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혹시 사람들에게 현혹계열의 마법을 쓰신겁니까?" 예리한 뮤스의 지적에 살풋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인 크라이츠는 금새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 "어머! 눈치를 채다니 대단하구나. 호홋! 하지만 내가 하녀복을 입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잘못한 것은 없단다. 애초 마법을 쓰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으니까." "에휴... 어쩐지 벌칙에 순순히 응한다 했더니 결국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있었던 것이군요." 크라이츠의 행동이 부당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도 틀린점이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고, 머리속에 담아둬 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았기에 모른척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대공학자> 10-5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뮤스의 등을 툭친 크라이츠는 먼저 발을 내딛으며 붉은 융단을 밟고 나서기 시작했다. "저쪽을 보렴.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인 모양이야. 양산도 없이 이런 뙤약볕 아래 오래 서있게되면 피부에 좋지 않으니 어서 가자꾸나." 실상 크라이츠의 외모가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만큼 햇볕 쯤은 어떠한 지장을 주지 않음을 알고있었던 뮤스는 실소를 흘리며 그녀를 뒤따랐고, 카타리나를 위시한 친구들 역시 불편한 의상으로 인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귀빈들을 맞으러 나서기 위해 붉은 융단에 발을 올려놓던 투르코스 재상은 떨리는 시선을 누군가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 세월과 함께 잊혀졌다고 여기던 설레임이라는 감정을 다시금 느끼는 중이었는데, 그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차갑기만하던 얼굴 위로 옅은 홍조까지 감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있는 두툼한 입술을 살짝 깨문 투르코스 재상은 신음성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여..역시... 크라이츠 드라켄님. 당신이셨군요." 냉정하기로 이름높은 투르코스 재상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감정 조절이 힘든 듯 했다. 장영실은 그러한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미심적인 눈빛을 던지며 말을 걸었다. "이런, 이런... 재상 각하까지 저 여성에게 반해버리신 것입니까? 흠... 연세도 지긋하시고, 가정도 있으신 분이 그러시면 위험합니다. 아마도 재상 각하의 늦둥이 아가씨가 실망할 겁니다." 그제야 자신을 실태를 알아차린 투르코스 재상은 헛기침을 했고, 본래의 음색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흠흠...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것이 아닐세. 다만 의외의 장소에서 저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놀란 것 뿐일세." "호오... 그렇다면 예전부터 안면이 있는 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제상 각하께서 저런 미녀분과 친분이 있다니 정녕 놀랍습니다." 장영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고, 투르코스 재상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투르코스 재상이 잠시 시선을 떼고 있는 사이 그와 장영실의 귓가로 크라이츠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듀들란 제국어 특유의 부드러운 발음이 그대로 살아있어 타국의 인물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호홋! 날씨가 정말 덥군요. 황궁에서 나온 분들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느새 일행들과 함께 가까이 다가온 크라이츠는 그들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는데, 강력한 현혹 마법의 효용으로 인해 그녀의 미소를 본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은 아찔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그..그렇습니다." 더듬거리며 짤막하게 대답한 투르코스 재상은 조심스럽게 크라이츠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크라이츠는 별다른 말 없이 장영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고 있었다. "음? 혹시 장영실 남작님이 아니신가요?" 처음보는 여성이 문득 자신을 알아보자 아무생각 없이 서있던 장영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해답을 구하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뒤에 서있는 뮤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에 가볍게 웃은 뮤스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장영실 아저씨,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이분이 에전에 말씀 드렸던 크라이츠 누님이십니다. 아저씨나 저의 외모가 이곳 사람들과 달라 금방 알아 보신듯 하군요." 생각해보니 간단한 이치였다는 것을 깨달은 장영실은 의문을 거두어들이며 크라이츠를 향해 목례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아! 크라이츠님이셨군요. 뮤스를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대단한 미인이라는 말은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미인이라는 말에 한껏 기분이 상승 된 크라이츠는 입을 가리며 주책스럽게 웃기시작했는데, 칭찬에 약한 그녀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호호홋!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되니 기분이 색다르군요. 그보다 장영실 남작님이야 말로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멋져 보이시는걸요? 공학자라고 해서 외소하고 볼품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늠름한 모습이시네요." 그들이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투르코스 재상은 불편한 표정을 하고있었다. 한 때 나마 사모하던 여성이 자신은 알아보지도 못한 채 다른 남자와 즐겁게 대화 하는 모습이 그의 심기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던 차에 투르코스 재상을 발견한 뮤스는 장영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이쪽 분도 소개 좀 해주시죠. 표정이 밝지 못하신것을 보니 우리들끼리만 인사를 나눈것에 대해 심기가 상하신 듯 합니다." 뮤스의 말을 들은 장영실은 투르코스 재상의 속도 모른 채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하하핫! 이분은 항상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계시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단다. 인사드리렴. 듀들란 제국의 재상직을 맡고계신 투르코스님 이시란다." 뮤스는 듀들란 제국의 재상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 짐작하긴 했으나 일국의 재상이라는 높은 직위를 지닌 인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을 수 없었던 뮤스는 비록 제대로 된 예복을 입고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의를 표했다. "아! 이런! 초면에 결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는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뮤스의 뒤를 이어 그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자세로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하지만 투르코스 재상의 신경이 크라이츠에게 쏠려 있었던 만큼, 인사쯤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기에 가볍게 받아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자네들은 제국에서 초대한 손님이고, 듀들란 제국에 속한 국민들이 아니니 크게 예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네." 지나치는 눈길로 크라이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더 살피던 투르코스 재상은 마음에 남은 아쉬움을 감추었고, 전뇌거를 대기시켜 놓았던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인사는 이쯤으로 마무리하고 황궁으로 자리를 옮기시도록 하세. 여행을 하느라 몸도 피곤할 텐데 이런 곳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된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재상 각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재상 각하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주변의 시선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카타리나, 폴린 그리고 세이즈는 투르코스 재상의 말을 크게 반겼다. 치렁하게 늘어져 다리에 걸리적 거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벌쿤의 마음 또한 그녀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일행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있던 제복의 사내들은 투르코스 재상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서둘러 전뇌거 쪽으로 길을 트기 시작했고, 장영실과 뮤스 일행들은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투르코스 재상이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았을 때였다.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호홋! 당신의 그 석상같은 표정은 아직까지 변함없군요. 개인적으로 당신은 순박하게 웃는 모습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크라이츠의 목소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 투르코스 재상은 잠시 주춤하며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행들과 대화를 나눌 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생각을 굴려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 떠올려 보았다. '크라이츠님이십니까?' 과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크라이츠와 말이 통했는지 바로 그녀의 대답이 이어졌다. '흐음, 그런 음흉한 얼굴로 훔쳐보지 말고 아무일 없는 듯 행동하세요. 과거사에 얽매이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그..그런...' 음흉하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투르코스 재상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매만졌고, 크라이츠는 그의 행동이 재미있었는지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호호호, 일국의 재상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순진해서야...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요, 투르코스 경.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만 빼면 예전과 전혀 다름 없는 모습인걸요?' 쾌활한 크라이츠의 말투는 그의 기억속에 담겨있는 추억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투르코스 재상은 아련한 눈빛을 하며 대답했다. '역시 저를 기억 못하시는 것이 아니셨군요. 오래전 크라이츠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대략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눈앞의 모습을 보니 정녕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크라이츠님이야 말로 전혀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군요.' '세월조차 저의 아름다움을 피해간다고나 할까요? 오호호호홋! 뭐 어쨌건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괜찮다면 간단한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시라면 어떤?' 투르코스 재상의 되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크라이츠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저와 일행들이 묶을 숙소를 국빈급으로 배정해주세요. 방에는 항상 다섯 종류 이상의 싱싱한 과일들과 서른 종류의 과자를 놓아 주시고, 차는 따뜻것과 차가운것 두가지로 준비해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부가적으로 장미씨앗에서 추출한 목욕기름, 실크로된 침구, 크리스탈 자기와 양가죽으로 덮인 소파도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아! 그리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담당 시녀들을 배치해 주시고...' 길어지는 크라이츠의 요구는 쉽사리 끝날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르코스 재상은 그녀의 요구들이 마치 중대사라도 되는양 여러번에 걸쳐 머리에 되세기며 전뇌거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켈트는 정신을 잃은 모습으로 비행선의 기둥에 꽁꽁 묶여있었다. 그는 지나친 음주 탓으로 속이 좋지 않은 듯 수시로 헛구역질을 해대는 중이었는데, 그럴 때 마다 술냄새가 입밖으로 새어나와 주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켈트는 목이 심하게 타는 것을 느꼈고,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으으음... 목이 마르군. 거기 누가있으면 물 좀 가져다 다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짜증을 느낀 켈트는 힘겹게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정신이 있었던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금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거야. 빌어먹을... 이거 귀찮게 되었군 그래." 직접 물을 마시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켈트는 몸을 움직이려 했다. 허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알게 된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고, 눈을 휘둥그레 부릅뜨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흐엑! 누가 날 이런데다가 묶어 놓은게냐! 잠시 술에 취해있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그리고 이건..." 무엇이라 말을 이어나가려던 켈트의 입은 금새 다물어졌다. 바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시원함이 다리를 타고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허리 아래로 원래 입고있었던 바지는 온데간데 없고 치맛자락만이 하늘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얀 치맛자락 위에는 보란듯이 검고 굵직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저를 두고가려고 했던 것에 대한 작은 벌입니다. 혼자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세요. 정의의 사도 히안 올림. 글을 읽고서야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알 수 있었던 켈트는 이성을 잃으며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히안녀석! 당장 이걸 풀지 못해?! 잡히면 가만 두지 않을테다! 당장 이걸 풀라고! 거기 누구 없나?! 히안!!!" 처절한(?) 켈트의 몸부림과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를 풀어주기 위해 나타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아무도 그의 외침을 듣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묵살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공학자> 10-6 히안의 전성시대. 듀들란 제국의 수도인 쟈트란에서도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황궁은 타국의 황궁에 비해 개방적인 구조를 띄고 있었다. 외벽은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는 돌벽 대신 황궁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철제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쟈트란 시내로 통하는 큰 출입로가 나있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입구들이 낮시간 동안 열려있어 간단한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 출입이 가능했는데, 외궁의 몇몇 정원들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개방해 주었기에 볕이 좋은 날이면 많은 수의 시민들이 찾아와 쉬곤했다. 그밖에도 황실에서는 예술, 문화 행사를 정규적으로 열어주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황실과 시민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쟈트란의 시민들은 황실에 대해 남다른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큰 행사나 중대사가 있을 시에는 항상 자발적으로 돕기위해 나서는 이들도 많았고,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준비 역시 상당부분 시민들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는 중이었다. 타국의 귀빈들을 맞이할 채비에 열을 올리던 쟈트란의 황궁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도착해버린 도이첸 제국의 손님들 이야기로 더욱 소란스러워 져 있었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던 이유로 그들에 대한 소문들은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 빠르게 황궁의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있었는데, 아래로는 허드렛일들을 도맡아하는 잡일꾼에서 부터 위로는 고위의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같은 주제를 놓고서도 위치에 따라 관심분야는 제각각이었다. 고위의 귀족들은 그들의 등장을 정치적인 측면으로 해석하기 위해 토론의 장을 만들었으며, 잡일꾼이나 황궁 근위병등의 남성들은 비행선의 등장이나 소문에 자자한 미녀들의 등장에 귀와 눈을 기울였다. 또, 귀족부인들과 궁녀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로 공학원의 젊은 원장에게 큰 관심을 보였는데, 황궁에 흘러다니는 그에 대한 소식을 주워듣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전후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뮤스와 일행들은 적지 않은 파급을 일으키며 성공적으로 입궁을 치룰 수 있었고, 수 많은 시선을 받으며 황궁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뮤스와 친구들은 숙소가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근처의 황궁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각국에서 몰려드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이 정원을 손 본 듯이 꽃과 나무들은 깔끔하게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실력 좋은 정원사들의 손을 거친 것으로 짐작되어지는 갖가지 모양의 정원수들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규모면에서는 그리 크다고 말 할 수 없었지만 흔히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임은 틀림이 없어보였다. 뮤스와 카타리나는 도이첸 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정원을 본적이 있었기에 큰 감흥은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이 초록의 정원이 각별하게 느껴졌는지 양탄자처럼 깔려있는 폭신한 잔디를 맨발로 밟으며 흥분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특히 폴린은 정원의 분위기에 완전히 도취되어 눈동자를 촉촉하게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 나도 이런 정원을 가져봤으면... 히안 정말 멋지지 않니? 역시 황궁은 뭐가 달라도 다른 곳이구나." 하지만 히안은 무엇엔가 심통이 났는지 입을 삐죽 내밀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카타리나와 세이즈, 그리고 폴린을 향해 불만이 가득찬 눈빛으로 쏘아볼 뿐이었다. 결국 히안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자 들떠있던 기분이 탁 풀려버린 폴린은 두 눈썹을 씰룩거리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인형뺐긴 여자애 처럼 빤히 보는거니? 뭐가 불만인거야, 앙!?" 이에 잠자코 있을만한 인내심을 지니지 못했던 히안은 말 한번 잘 꺼냈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따지고 들었다. "내가 지금 느긋하게 정원 구경이나 하고 있게 생겼냐? 약속을 한번 했으면 끝까지 지켜야될거 아냐! 그런 방법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가 버리다니..." 히안의 말을 듣고있던 폴린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시야에는 허리에 둘러져 무릎 아래까지 가려지는 푸른색의 천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히안이 심통을 부리는 이유를 뒤늦게야 눈치챈 폴린은 손뼉을 치며 유쾌하게 웃기시작했다. "호호홋! 평민들은 잘 모르겠지만 황궁에서는 꼭 지켜야 할 법도라는 것이 있는것이란다. 과도한 노출이 금지 되어 있다고하는데 우리 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어쩌겠어? 우리도 내기의 약속을 지켜주고 싶긴 하지만, 황궁에서 쫓겨날 판이니 어쩔수 않잖니? 정말이지 아쉽기 짝이없네~" 폴린의 말대로 뮤스와 일행들은 황궁에 들어서면서 약간의 제재를 받아야만 했다. 황궁내에서의 규정은 타국의 손님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중 이성의 의상을 입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명시되어 있는 규정이 없었기에 뮤스나 벌쿤은 약간의 헤프닝을 겪고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노출정도에 대한 규정은 엄연히 존재했기에 카타리나와 세이즈, 폴린에게 약간의 제재가 가해졌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벌쿤은 숙소에서 나오지도 못한채 켈트와 시간을 보내는 반면, 그녀들은 당당하게 황궁을 활보 할 수 있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히안이었지만 분한 마음은 숨길 수 없는 터였기에 친구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그..그게 어디가 아쉬운 표정이란 말이냐! 좋아서 입이 헤벌죽 벌어졌는데!" 새침한 표정을 한 폴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머! 내가 언제 입을 헤벌죽 벌렸다는거야? 너 아무래도 안경이 오래됐나보구나. 이번 기회에 안경을 새로 맞추는 것이 어때?" 역시 말싸움에서 폴린의 한수 아래였던 히안은 되받아칠만한 말을 찾느라 바쁘게 머리를 굴렸고, 폴린은 버벅이는 히안을 보며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폴린과 히안의 다툼을 잠시 지켜보던 친구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여러번씩 볼 수있는 일이었던 만큼 그들의 다툼에 이미 무감해진 것이었다. 같은 시간 정원의 한쪽에서 대여섯 명의 궁녀들이 뮤스와 일행들이 산책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에는 침대시트와 청소도구들이 가득쌓여있는 손수레가 세워져 있었는데, 손님들이 묶을 방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온 궁녀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왕성할 젊은 나이였던 만큼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뒤로 미룬채 도이첸 제국에서 왔다는 손님들에게 모든 정신을 쏟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눈높이 만큼 기울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던 궁녀들 중 한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저 중에 도이첸 제국 공학원의 원장이 있다는 거니? 아무리 봐도 우리와 비슷한 또래인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지?" 그녀의 옆에있던 궁녀 역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확실한 경로를 통해 들어온 소식이니까 틀림없을 거야. 그런데 과연 누가 공학원 원장일까? 분명 남자일 테니까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예쁘장한 검은 머리 쪽이 아니면 잘 차려입은 갈색 머리 쪽일텐데... 음, 아무래도 갈색 머리 쪽일 가능성이 높겠지? 왠지 허약해 보이는게 책만 파게 생겼잖아? 조금 고리타분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런것 같아. 입고 있는 옷을 봐도 돈냄새가 풀풀 풍기는 듯 하고말이야." 마치 연쇄반응이라도 하듯이 궁녀들의 수다는 이어지고 있었는데, 금발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한 궁녀가 동료들을 향해 답답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허약하면 어떻고, 고리타분해 보이면 어떻니? 공학원의 원장이란 말은 이제 부와 명예의 상징이란 말이야. 즉, 저 사람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한순간에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지." 이어 뭔가 결심에 찬 눈빛으로 다른 궁녀들의 얼굴을 한번씩 둘러본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뭔가에 홀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만큼 외모나 성격쯤은 얼마든지 좋게 봐줄 수 있다고. 게다가 콧대 높은 귀족들 보다 오히려 접근하기도 쉬울 것 같으니 이 만큼 좋은 기회는 없을걸?" 그녀의 말에 다른 궁녀들은 큰일날 소리라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뜨며 되물었다. "어머! 기회라니? 그건 무슨소리야? 설마 공학원의 원장에게 접근을 해보겠다는 말이니?" "그러다가 수석궁녀님들께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보나마나 황궁에서 쫓겨 날게 분명해." 하지만 동료들의 우려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금발의 궁녀는 이미 마음을 굳히기로 한듯 제법 강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수석궁녀로 진급하지 못한다면 몇 년 후에는 황궁에서 나가야하잖니. 그럴 바에는 한가닥 희망에 미래를 걸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거든. 그렇지 않아도 예전부터 마땅한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지 뭐. 아무튼 너희들은 마음대로 하렴, 나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공학원의 원장한테 접근을 시작할테니까. 호홋! 두고 보라고!" 가벼운 웃음으로 자신감을 대변한 금발의 궁녀는 히안의 얼굴을 한번 더 뇌리에 각인시키며 남은 일을 마치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에 남게 된 궁녀들은 갈등이 되는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분위기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금새 모종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궁녀들은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금발의 궁녀가 사라진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결국 겉모습 만으로 히안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버린 뮤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카타리나와 단란한 오후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고, 터무니 없는 오해로 인하여 궁녀들의 타겟이 되어버린 히안 역시 폴린과의 말싸움에만 정신이 팔려있을 뿐이었다. 황궁의 높은 첨탑들이 붉게 지고있는 석양을 가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리웠고, 황궁 곳곳에 우뚝 솟은 굴뚝에서는 저녁 식사준비를 알리는 흰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황궁 사람들의 식사 준비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데다가 귀족이나 손님들을 위한 식사준비에는 더욱 많은 일손이 필요했기에 요리장들은 일찌감치 식사준비를 시작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것은 여느때나 다름없었다. 요리장들의 구슬땀이 한방울씩 흐를 때 마다 음식들은 접시와 그릇에 담기게 되었고 좁은 주방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전쟁은 점점 끝을 보이고 있었다. 각자 숙소에 짐을 대충 풀어놓은 뮤스와 일행들은 그들에게 배정된 식당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 자리에는 그들 일행들 뿐만 아니라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 그리고 루스티커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모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에 가벼운 소개와 함께 이야기가 오고가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나이프로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를 자르던 투르코스 재상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는 껄끄러운 시선으로 벌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벌쿤의 옷차림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는 듯 했다. 하지만 벌쿤은 투르코스 재상의 따가운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개걸스러운 모습으로 식사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이래저래 시야가 어지럽혀지자 투르코스 재상은 살며시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흠흠... 벌쿤이라고 했나? 듣자하니 삼대 마역중에 한곳인 드베인 숲에서 왔다고 하던데 지금 입고있는 옷이 그곳의 전통 복식인가?" 투르코스 재상의 질의는 식탁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벌쿤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포크에는 큼직한 고기가 한덩어리 찍혀있었고, 번들거리는 기름기는 식탁보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마치 벌쿤이 경직된 시간을 재기라도 하는 듯 했다. 순간, 쇠로 만들어진 포크가 벌쿤의 손가락 안에서 종잇장 접히듯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식사 때 만큼은 잠시 잊고자했던 사실을 투르코스 재상이 일깨우자 기분이 아주 더럽게 변해버린 것이었다. -탁!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살피던 뮤스는 얼굴에 심상치 않은 웃음을 걸치며 벌쿤의 뒤통수를 때려 주었다. 가끔 욱하는 성격을 가진 벌쿤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엉겹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벌쿤은 씩씩거리며 뮤스를 노려보았고, 뮤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털어내고 있었다. "아얏! 갑자기 왜 때리는거야!" "이런, 이런... 벌써부터 모기가 극성이군 그래. 아무래도 네 피가 맛있나 본데?" 뮤스의 둘러댐에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던 벌쿤은 정말 그의 말을 믿는지 얻어맞은 자리를 긁적이며 헤프게 웃어보였다. "헤헷! 그런거였구나. 힘들게 먹어서 피를 체우는데 모기 따위한테 뺐기면 아깝지!" 그리곤 언제 기분 나빴냐는 듯이 엿가락 처럼 휘어진 포크를 다시 펴며 꽂혀있던 고깃덩어리를 입안으로 쏙 밀어 넣고 있었다. 이로서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크라이츠가 와인으로 입안의 기름기를 씻어내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투르코스 재상에게 해주었고, 그제서야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게된 투르코스 재상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식사가 대충 끝나게 되자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하던 켈트가 루스티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털어낸 켈트는 기름기가 그대로 묻은 손으로 루스터커의 옷자락을 끌며 땅딸막한 몸을 일으켰다. "자자! 식사를 다했으니 우리는 회포나 풀러가세. 늙은이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어울리려 해봤자 미운털만 박히거든. 예전에 약속 했듯이 멋진 술들을 챙겨왔으니 기대 하게나. 껄껄껄!" "뭐...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다. 귀한 술이라고 하니 오랜만에 무리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군요. 허허헛!" 사실 루스티커는 뮤스와 함께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켈트의 손길을 뿌리칠 수도 없었던 터였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고 있었다. 켈트와 루스티커가 자리를 뜨는 것을 지켜보던 폴린은 잠시 분위기를 살피더니 대뜸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물었다. "저... 투르코스 재상님, 혹시 지금 쟈트란 시내를 돌아 볼 수 있을까요? 쟈트란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어서 한시라도 빨리 구경하고 싶거든요." 카타리나와 세이즈 역시 귀를 쫑긋 세우며 투르코스 재상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사전 의논이 되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고, 투르코스 재상은 우려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흠... 황궁의 4대 출입로는 항상 열려있으니 나가고 들어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진 않는다네. 하지만 밤거리를 다니다가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당한다면 황실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 지는데..." 그러나 이쯤에 뜻을 꺾을 폴린도 아니었기에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투르코스 재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만 나간다는 것은 아니에요. 남자 애들도 함께 나갈 테니 별일이야 있겠어요?" 아무 생각없이 후식으로 나온 파이를 먹고있던 히안과 벌쿤은 폴린이 자신들을 거론하자 뭐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카타리나와 세이즈가 그들의 입을 막아버렸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폴린은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계속해서 날리고 있었다. 투르코스 재상이 대답을 주저하자 크라이츠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홋! 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일주일 동안 비행선 안에서만 생활한다고 답답했을 테니까요. 만약 우려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황실에 책임을 전가하진 않을테니 걱정은 안하셔도 될거에요." 크라이츠가 부탁한 이상 거부할 수도 없었던 투르코스 재상은 장영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다면 자네가 이 젊은이들을 안내해 주지 않겠나? 이대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말이지." 하지만 장영실은 안타깝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후훗, 보기와는 다르게 근심이 많으시군요. 죄송하지만 재상각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가 힘들것 같습니다. 재상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제 발표회가 닷새밖에 남지 않아서 오늘도 밤을 새워야 할 판국이니까요. 그리고 아까 켈트님의 말씀대로 젊은이들 사이에 껴서 눈치없는 아저씨로 보이기는 싫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장영실은 일어서며 의자에 걸쳐놓은 흰색의 연구복을 팔에 꼈다. 그리곤 투르코스 재상과 크라이츠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발표회가 가까이 다가온 만큼 시내 치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안심하시고 허락을 해주시지요. 그럼 저는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이있어서 먼저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까지 그렇게 말을 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허락하도록 하겠네." 투르코스 재상의 허락이 떨어지자 폴린과 친구들은 기쁜 마음에 입을 다물줄을 몰라했고, 여장차림으로 그녀들을 따라다녀야 할 운명에 놓인 벌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잠시 그들의 기뻐하는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장영실이 식당에서 나가려 하자 뮤스 역시 급히 따라나서며 말했다. "바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가시죠." 뮤스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 장영실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핫! 마음은 고맙지만 듀들란 제국의 공학원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단다. 지금 너와 나는 서로 경쟁하고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하거라. 후훗, 예전에는 너무나 철없는 아이 같더니 요즘은 딱 애늙은이 같은 느낌이야..." 말을 마친 장영실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등을 돌렸고, 그에게 뭐라 할말이 없었던 뮤스 역시 실소와 함께 다시금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핫... 애늙은이라니? 정말 그런가?" 뮤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살며시 다가온 세이즈는 손으로 턱을 받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흠, 확실히 미개척지에서 돌아온 이후로 할아버지같은 말만 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카타리나?" 세이즈가 묻자 카타리나 역시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는데, 지난 몇개월간 뮤스가 보여준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듯 했다. "으음... 애늙은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확실히 뭐랄까... 예전에 비해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투나 행동이 어른스럽긴해. 그래도 나쁠건 없잖니?" "어쩌면 대현자님과 오랜 시간을 보내서 그럴지도 몰라. 혹시 이러다가 할아버지들 처럼 시시콜콜한 말만 할지도..." 폴린이 과장된 몸짓과 함께 이야기에 끼어들었는데, 그것을 본 카타리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럴까? 앙~! 그런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카타리나까지 수긍하는 분위기로 흐르자 뮤스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그들의 대화를 끊고 나섰다. "이..이봐,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사람한테 늙은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차라리 나 없는데서 하라고! 다들 싱거운 소리는 그만하고 더 늦기전에 시내 구경이나 가자." 괜히 언청을 높인 뮤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을 향해 서두르라는 손짓을 하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뮤스를 본 카타리나와 세이즈, 그리고 폴린은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며 피식 웃었고, 히안과 벌쿤을 이끌며 뮤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7 뮤스와 친구들이 몰려나가면서 크라이츠와 투르코스 재상만이 남은 식당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크라이츠가 차를 들이키는 소리만이 어색하게 둘 사이를 맴돌고 있었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본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크라이츠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맑은 아이들이죠?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공학원의 일을 시작했다가 요즘은 뮤스와 저 아이들을 보는 재미로 살고 있답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착각이었는지 온기가 감도는 듯 했다. 뮤스와 친구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훑어 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크라이츠님의 말씀대로 참으로 보기좋은 젊은이들이군요. 헌데, 크라이츠님께서 그런 감상적인 면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조금 의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크라이츠는 편안한 표정으로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뭐, 드래곤도 아예 감정이 없는 존재는 아니니까요. 다만 인간들에 비해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일 뿐이죠. 인간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월등한 이유도 있고, 지루할 만큼 긴 수명을 가졌기에 먼저 죽게 될 인간에게 쉽게 정을 주지도 않는 것이랍니다." 투르코스 재상은 잠잠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그녀를 만나면 꼭 하고자 했던 하나의 질문이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젊은시절의 생생한 기억들이 그의 뇌리에 하나씩 떠올랐고, 오래전에 잊었던 것이라 여기던 미묘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죄여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투르코스 재상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라이츠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한 가지만 묻고 싶었습니다. 정녕 가비르... 그에게 정을 느끼셔서 세 번째 내기에서 그의 손을 들어 주셨던 것입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내용이었는지 크라이츠의 얼굴에서 망설임 따위의 감정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턱을 매만지던 그녀는 마치 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기라도 하는듯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투르코스 경은 이제 가정을 가졌으니 솔직히 말해도 괜찮겠죠? 사실 가비르 경이나 투르코스 경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답니다. 당시의 유희는 순수한 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연애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죠." 너무나 쉽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대답에 투르코스 재상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품어온 질문의 대답치고는 너무나 허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아니라 가비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의 물음에 머슥한 미소를 지은 크라이츠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쉽게 말하자면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수업을 끝내고 방에 돌아와보니 두 분이 보내주신 청혼 편지가 방바닦에 떨어져 있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던차에 길게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위에 올라와있는 가비르의 청혼 편지를 선택하게 된거에요. 선착순이라고나... 아!"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손뼉을 친 크라이츠는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어머! 그럼 당신이 가비르 경보다 먼저 청혼 편지를 보낸 것이로 군요? 호홋! 착각을 해버렸네? 먼저 보낸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만..." 순진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 크라이츠를 보며 투르코스 재상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핫!" 타인 앞에서 근 30년 만에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어색함은 전혀없어 보였고, 오히려 딱딱한 얼굴 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듯 했다. "하아! 겨우 그런 이유였다니 정말 허무하기 짝이 없군요. 후훗!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후련합니다.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큰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랄까요? 쿠쿠쿡..." 투르코스 재상은 그렇게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는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반면, 따분한 표정의 크라이츠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그의 웃음이 멈추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더 길어지면 짜증까지 날 참이었다. "이제 그만 좀 웃어요! 가비르 경과의 약속을 이대로 깨버릴 참인가요?" 힘든모습으로 배를 부여잡고서 웃던 투르코스 재상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크라이츠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큭... 이런, 죄송합니다 크라이츠님. 어떨결에 가비르와의 약속을 어기게 되어버렸군요. 하아... 헌데, 이 사실을 가비르도 알고 있습니까?" "아직 가비르 경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결혼을 하지 않아서인지 당신 처럼 여유롭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 보였거든요." "후훗, 그럼 그냥 저만 알고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보다 가비르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의 편지라도 써야겠군요." "호오... 이대로 가비르와의 약속을 없었던 것으로 할 생각인가 보군요. 그 대단하던 자존심도 흐르는 세월에 씻겨 흐릿해져 버린것인가요?" 웃다가 지친 몸을 등받이에 기댄 투르코스 재상은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이렇게 마음이 홀가분해진 이상 그에게 비난 받는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둘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며 때를 기다려 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30여년 만의 화해라... 흥미롭군요." 크라이츠 조차도 생각지 못한 의외의 행동이었는지 눈에 이채를 띄우며 투르코스 재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짐작하고있는 앞으로의 전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기에 아무런 말없이 미소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 전체를 드러낸 만월이 하늘에 걸려있었지만 쟈트란의 시내를 밝힌 불빛 앞에서는 미약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전뇌등을 이용한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식사 시간을 맞은 음식점들과 빵집,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여러 상점들이 밝히고있는 불빛 만으로도 쟈트란의 시내는 대낮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는데, 이는 쟈트란이 얼마나 활기넘치는 도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듯한 대리석이 촘촘하게 깔린 거리로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심심치 않게 타인의 어깨와 부딪힐 정도였으나 사람들은 번잡한 거리에 익숙한 듯 했고,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무리속에 뮤스와 친구들 역시 끼어있었다. 그들은 이국적인 쟈트란의 분위기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였는데, 축제기간을 제외하곤 이렇게 화려한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없는 라이델베르크와 크게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카타리나를 비롯해 폴린과 세이즈, 이 세명의 여성들은 줄을 지어 늘어서잇는 가게들의 진열장을 빠른 속도로 훑으며 이리저리 거리를 활보하는 있었다. 그녀들은 일찍이 본적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보는 족족 사들이며 만족감을 얻는 중이었고, 여행에서 쌓인 피로감은 이미 머리 저편으로 건너간지 오래였다. "어머 저 목걸이도 굉장히 특이하지 않니? 세공은 조금 투박한 것 같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모양이야." "정말 그렇네! 꺄~! 할인 중이라서 겨우 50셀피 밖에 안하는걸? 이 가격이면 거저나 다름없지!" "역시 듀들란 제국은 귀금속에 물리는 세금이 없어서 그런지 엄청 싸구나! 어서 들어가서 둘러보자!" 호흡을 멋지게 맞춘 그녀들은 아무런 거침도 없이 귀금속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가 버렸다. 결국 길거리에 남게 된 세 남자들, 그들은 이미 지쳐버렸는지 녹초처럼 허물어지며 가게의 계단턱에 주저 앉아 버렸다. 모두들 세삼 여자들의 저력에 놀라고 있었는데, 무려 다섯시간 이상을 쉼없이 걸어다니고도 쌩쌩한 그녀들을 보니 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것이었다. 허리에 묶고있던 앞치마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뮤스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먼저 말문을 열었다. "헤휴... 카타리나가 저렇게 건강하다는 사실은 정말 처음알았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짧은치마를 잘 추스린채 다소곳이 앉아있던 벌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뮤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래.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그보다 세이즈가 물건 사는걸 저렇게 좋아 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는걸? 오늘 쓴돈만 해도 얼만지 모르겠네." 그들의 말에 아픈 다리를 두들기고 있던 히안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훗! 그게 바로 여자들의 습성이라고 하는거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쇼핑하면서 돌아다니는걸 좋아하고, 그럴 때는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끌어내지. 예전에 한번은 폴린을 따라 10시간 이상 돌아 다닌 적도 있다고!" 뮤스와 벌쿤은 히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목과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으로 몸을 푼 히안은 창넘어로 가게안에 있는 폴린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폴린과 결혼해서 함께 살면 아마 내 등골이 남아나질 않을거야. 심심하면 쇼핑나가서 돈쓸 궁리나하고 있으니, 나의 능력으로서는 역부족인것 같다. 에휴, 그렇다고 성격이라도 좋나? 툭하면 주먹질이고 사람을 바보취급하니, 정말 못살겠다구. 어디 좋은 여자가 없을까? 괜찮은 여자만 나타나면 그날로 폴린과는 끝이야!" 한탄이 섞인 목소리로 토로하던 히안은 등뒤로 부터 문득 싸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함을 느꼈고, 생존본능에 의해 그의 입은 다물어지게 되었다. "지금 뭐라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고막을 긁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급해진 히안은 어줍잖은 변명이라도 해볼 생각으로 급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눈깜짝 할 사이에 날아온 손바닥에 의해 그의 고개는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찰싹! "그래! 자신 있으면 네가 원하는 그런 완벽한 여자를 찾아 보란말이야! 나정도 되니까 지금까지 너같은 애랑 교제를 해준거지 다른 여자였다면 어림없었다구! 흥!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저런 녀석을 남자 친구라고 생각해왔다니 말이야!" 뺨을 얻어맞은 데다가 정신없이 쏟아져 나오는 폴린의 말을 듣고있다보니 히안 역시 감정이 상하는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어디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볼까?! 툭하면 친구들 앞에서 나를 깔아뭉게고, 꼬투리 잡고, 무시하고, 항상 다른 녀석들과 비교 따위나 하잖아! 게다가 잘난 녀석들만 보이면 아양떨면서 친해질 궁리나하는데, 그게 남자친구 앞에서 할만한 일이냐?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고!" "그..그건..." 평소와 다르게 히안이 무서운 표정으로 따지고 들자 폴린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시로 다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말했던 적이 없었던 히안이었기에 폴린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는데, 큼직한 눈동자 주위로 눈물까지 고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눈물을 보이기 싫은지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깨가 축쳐진 폴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타리나와 세이즈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느꼈고, 급히 그녀를 쫓아가며 뮤스와 벌쿤을 향해 말했다. "뮤스, 폴린을 따라가봐야겠어. 나중에 황궁으로 바로갈게!" "나도 함께 갈테니까 벌쿤 너는 길잃지 않게 조심하렴! 다른데 한눈팔지도 말고!" 뮤스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고, 벌쿤은 아쉬움이 남는지 세이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 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었다. 그녀들이 사라지게 되자 뮤스와 벌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히안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분을 삭히지 못한 듯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주변을 둘러본 뮤스는 술집 간판을 하나 발견하고는 히안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렇게 서있을게 아니라 어디 좀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저기가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히안은 먼저 걸음을 옮겨 술집으로 들어갔고, 뮤스와 벌쿤 역시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건물 사이의 좁다란 골목, 그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술집으로 들어가는 세 남자를 지켜보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눈의 주인공은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외소한 체형의 인물이었는데, 은신의 기초도 모르는지 그 흔한 검은 후드를 놔두고서 흰색의 후드를 뒤집어 쓰고있는 모습이었다. "호호홋! 어디를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하인들과 술이라도 마시려는 것일까? 호호호! 뭐 술에 취한 상태라면 일이 한결 수월해 지니 상관없어. 술냄새는 좀 나겠지만 말이야..." 후드의 안으로부터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여성의 것이었는데, 그녀가 무슨 일로 이렇듯 세 남자들을 미행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미행이 전혀 비밀스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흰후드의 여인은 그쯤이야 어쨌든 상관없다는 듯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채 종종걸음을 걸으며 술집으로 향했고, 그녀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사람들은 다시금 가던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0-8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대화소리, 허공에는 매케한 연기가 가득차있고, 주정꾼들이 쏟은 술냄새가 여기저기 베어있는 전형적인 선술집이었다. 제 각각 다른 모양의 테이블들이 빈공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있었고, 서툰 솜씨로 수리를 해놓은 의자들이 그 주변으로 널려있어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곳이었지만, 싼 가격에 음식과 술을 제공해주었기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별다른 불만을 가지지 않는 듯 했다. 뮤스와 히안, 그리고 벌쿤 역시 가게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테이블에는 몇 가지의 안주와 작은 술병들이 나와있었는데, 안주는 모두 벌쿤의 앞쪽에, 그리고 술병은 모두 히안의 앞쪽에 놓여있는 상태였기에 그 사이에서 심심하게 앉아있던 뮤스는 연이어 비워지는 히안의 술잔에 술을 따뤄주는 중이었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갔는지 눈동자가 살짝 풀린 히안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뮤스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히안, 아직도 화가 나있는 거냐?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화가나도 그렇지 아까는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내일 폴린에게 먼저 사과하도록 해. 티격거리긴 하지만 지금도 예전처럼 폴린을 좋아하는 것만은 틀림없잖아?" 뮤스의 말에 술을 받고있던 히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네 말대로 아직 폴린을 좋아하지. 하지만 너는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해. 제법 잘 생긴 얼굴에 능력있지, 게다가 성격도 좋고... 어디다가 내놔도 빠지지 않는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는 말이다. 몸도 비실비실하고, 능력도 대단치 않은 데다가 성격까지 이따위인 내마음을 어떻게 알겠냐고. 후우..." 한숨을 내쉰 히안은 술을 한모금 더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는 모두 폴린의 잘못인 듯 소리를 질렀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내가 잘나지 못한 탓이야. 후훗... 원래 잘나지 못한 녀석들은 사랑을 할 자격도 없는 것이니까 말이야." 너무나 자신을 비하하는 히안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안타까운 듯 혀를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쯔쯧... 꼭 그런쪽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폴린도 너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서 사귀기로 결정했던 거야. 너의 능력이나 외모따위 보다 그저 히안이라는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교제를 해왔던 거라고. 그러니 네가 못났다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은 잊어버려." "그럼 폴린은 대체 왜그렇게 나한테 쌀쌀 맞게 구는거냐? 그 이유도 알고있으면 제발 좀 가르쳐 줘! 그래야 내가 노력을 해보기라도 할거 아냐!" 히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고 있을 때,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안주만을 축내던 벌쿤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흠... 지금 막 생각 난건데 말이야. 폴린 누나는 확실히 히안형을 좋아하고 있어. 그것도 상당히 많이 말이야." 뜬금없는 말에 뮤스와 히안의 시선은 벌쿤의 얼굴 위로 고정되었고, 술잔을 내려놓은 히안은 정신을 바로차리며 되물었다.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지금까지 폴린이 나한테 해온 모양을 보면 그런 말이 안나올텐데?" 히안의 되물어오자 머리를 긁적인 벌쿤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왜 이틀 전 비행선에서 형이 우리 옷을 만들 천을 구하러 비행선 아래로 내려갔었잖아." "응 그랬지." "켈트 아저씨가 술에 잔뜩 취해 형을 떼어놓고 간다고 비행선을 출발시키려고 했을 때 폴린 누나가 엄청 놀라서 소리를 지르더라고. 형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지. 아마 뮤스 형도 기억하고 있을걸?" 뮤스 역시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하! 그래 맞아. 나도 똑똑히 기억하는데 안색까지 하얗게 변해가지고 켈트 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였었어. 만약 애정이 식었다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뮤스와 벌쿤의 증언으로 인해 히안은 술기운이 싹 달아남을 느꼈고 얼굴에는 희색을 떠올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럼 대체 뭣때문에 그렇게 쌀쌀 맞게 구는거지? 오히려 더 이해가 가지 않는걸?" 남은 안주를 입안으로 털어넣고 있던 벌쿤은 히안의 중얼거림에 지나가는 말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럼 이유는 다른데 있겠지. 예를 들면 욕구불만이라든지..." "쿨럭!" 갑작스런 벌쿤의 말에 뮤스는 헛기침을 삼켜야만 했는데, 다른이도 아닌 벌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욕구불만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역시 그럴리는 없겠지?" 벌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히안만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뮤스와 벌쿤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욕구불만? 그런게 왜 생기는 건데?" 히안이 진지하게 물어오자 벌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엥,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거야? 말그대로 하고 싶은걸 못해서 생기는 거지. 서로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도록 만드는 행동들. 즉, 포옹이나 입맞춤 따위를 오랜시간 동안 못하면 그런게 생길 수도 있다구.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건 아니지만 말이야." 벌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오히려 자기가 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히안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되묻는 것이었다. "이..입맞춤! 서..설마 너희들은 벌써 그런걸 해봤다는 거냐! 너는 세이즈랑? 그리고 뮤스는 카타리나랑?" 그러한 히안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뜬 뮤스와 벌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외치고 있었는데, 여러가지의 의미가 복잡하게 섞여있는 외침이었다. "그럼 설마! 아직까지?!" 이어 벌쿤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나직한 음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음...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군. 과연 폴린 누나가 그런 행동을 할만 하지... 눈치 없는 히안 형이 그동안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벌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있던 뮤스 역시 히안의 어깨를 찬찬히 두들겨 주며 말했다. "모든 것이 명확해 졌구나. 이제 네가 뭘 해야 할 지 알겠지? 더 이상 우리가 도와 줄 일은 없는 거야." 히안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 했는데, 연거푸 술을 네잔이나 들이킨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더니 심호흡을 몇차례 한 후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지..지금까지 결혼을 해야지만 입맞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었다. 저..정녕 혼전 입맞춤이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이냐! 20년간 지켜온 나의 순결한 입술을 그녀에게 받쳐야 할 때가 벌써 온것인가!" 절규와도 같은 독백을 하고있는 히안을 바라보며 뮤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헤유, 대체 뭐야 이녀석은... 어떤 가정 교육을 받았길래 이러는건지..." 그리곤 히안에게서 등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쉽사리 진정이 될 분위기가 아닌 듯 했고, 더 이상 해줄 충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히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뮤스는 술집의 주인에게로 다가가 웃돈을 얹어주며 잠시 히안을 돌봐 줄 것을 부탁했고, 시원한 바람이나 쐬고 돌아올겸 벌쿤을 이끌고 술집을 나섰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출구의 옆에 놓여있던 조그마한 상자가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게의 어두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흰색의 천이 씌워져 있는 그 상자는 눈과 다리라도 달린 듯 사람과 사람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부비며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술기운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고, 움직이는 상자에 대한 기억은 금방 그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이윽고 움직이던 상자는 히안이 앉아있는 자리에 닿게되었다. 그리고 방향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제자리에서 한차례 돌더니 갑작스레 중심부가 솟아오르며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습을 나타낸 이는 다름아닌 뮤스 일행들을 따라다니던 흰색 로브의 여인이었는데, 나름대로의 고난도 기교를 발휘하며 술집 잠입(?)에 성공한 그녀는 답답함을 느끼고있었는지 곧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히며 입을 열었다. "휴우! 정말 더워 죽는 줄 알았네. 쳇 로브는 왜이렇게 두껍게 만드는거야? 여름용으로 좀 얇게 만들면 안되는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정체는 놀랍게도 히안을 공학원의 원장으로 착각하고있는 금발의 궁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서는 궁녀로서의 단정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는데, 꽤나 고생을 한 듯 반듯하게 틀어올렸던 머리카락는 이미 지저분하게 헝클어 진지 오래였고, 땀이 맺힌 얼굴은 불빛에 반사되어 번들 거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는지 다른 것은 뒤로한채 서둘러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며 행색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탁자에 한쪽 팔을 기대어 술잔을 기울이던 히안은 근심조차 잊은 채 눈앞에 나타난 수상스러운 여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뭐지 이 여자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딸꾹!" 급하게 술을 마신 탓으로 그의 눈은 벌써부터 반쯤 풀어진 상태였는데, 금방이라도 감겨버릴 듯 위태로워 보이고 있었다. 분주하게 머리를 다듬던 궁녀는 뒤늦게야 히안의 시선을 의식 하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곤 나름대로 교태로운 미소를 띄우더니 히안의 옆자리에 앉으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호호홋! 처음 뵙겠어요. 저는 유리아네뜨라고 해요. 줄여서 율리라고들 부르죠. 그 쪽은 이름이 뭐죠?" 율리라는 이름을 가진 궁녀는 여유로운 자세로 히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이정도의 성의를 보여서 넘어오지 않은 남자가 없었던 경험을 통해 히안 역시 쉽게 넘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히안의 태도는 냉담하기 그지 없었는데, 바로 언어의 장벽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으음... 이 여자가 뭐라고 그러는거야. 율리? 율리는 7월을 말하는건데... 아직 5월이라고. 정말 이상한 여자군 그래... 어라?!" 횡설수설 마음대로 그녀의 말을 해석하던 히안은 문득 세상이 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이어 세상이 어두워지며 몸이 곤두박질 쳐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허우적 거리려 해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콰당! 율리는 눈앞에서 허물어지는 히안의 모습을 보며 아찔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탁자에 기대어있던 모습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는데, 입에서는 악취를 풍기는 오물들이 흘러나와있었고, 팔과 다리가 축 늘어진 것으로 보아 정신을 완전히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난생 처음 경험한 율리는 충격을 숨기지 못한 듯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중얼 거렸다. "주..죽어버린거야?! 뭐..뭐 이런 녀석이 다있지?! 게다가 듀들란 어도 못하는 것 같잖아?" 율리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 정도의 일로 결심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고 생각며 냉정해 지기로 마음 먹었다. 주먹을 불끈쥔 그녀는 다시금 결의를 불태우며 정신을 잃은 히안에게 다가갔다. "그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있겠어? 잘만 된다면 이대로 인생이 바뀔텐데 이 정도 고생쯤이야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일단 숙소를 잡아야 할텐데 마땅한 곳이 있을려나..." 머리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대충 세운 그녀는 망설임 없이 히안의 두 발을 잡아 끌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의 몸무게는 여자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힘든점이 있었지만, 원대한 목표를 위해 입술을 깨물며 힘을 짜내는 중이었다. 정신을 잃은 히안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짐작치도 못한 채 율리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대공학자> 10-9 제국개발 사업 발표회. 높은 고건물에 둘러쌓인 파코마 광장, 규모면에서는 다른 도시에 존재하는 광장들과 별다른 점이 없었지만, 듀들란 제국의 건국을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라는 사실 만으로 쟈트란의 시민들에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중심부에는 대리석으로 깍아만든 높은 단상이 세월의 검은 옷을 입은채 우뚝 서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광장을 내려보고 있는 거대한 동상이 깨끗하게 손질되어 세워져 있었다. 파코마 광장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펴고 단란하게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높은 고건물들 사이의 틈새로 바람이 지나면서 차갑게 냉각되었기에 한여름에도 이곳만은 선선했는데, 그런 이유로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하루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쉬기 위해 몰려들곤 했던 것이었다. 자리를 펴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뮤스와 벌쿤이 섞여 있었다. 대리석으로 포장 된 맨땅에 반쯤 몸을 뉘인 그들은 짭짤한 과자와 함께 새콤한 과즙을 즐기는 중이었고, 간간히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역사가 숨쉬는 고도의 야경을 감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듀들란 제국의 건국왕인 루드비스 1세는 그를 따르는 다섯명의 충신들과 함께 술잔에 자신들의 피를 나누어 마시며 듀들란 제국의 건국을 세상에 알렸고, 동 오이랍 대륙의 군소국가로 부터 우수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기반을 다지게 되었지. 그 이후 이곳 쟈트란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철학, 예술이 크게 부흥하게 되었던거야. 음? 듣고 있는거냐, 벌쿤?" 한창 파코마 광장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던 뮤스가 확인차 고개를 돌려보니 졸린 눈을 하고 있는 벌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따분한 듯 하품을 하더니 귀를 파던 손가락을 후후 불며 대답했다. "하암... 역사이야기를 듣고있으려니까 엄청 졸린다구. 조금 더 유익한 이야기는 없을까? 예를 들어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있는 술집이라든지, 아니면 쟈트란을 대표하는 음식 같은거 말이야." "아무튼 너란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진지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군. 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조금은 어른스러워 질 생각 없냐?" 뮤스의 지적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벌쿤은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할아버지 소리 듣는 것 보단 이쪽이 훨씬 좋잖아. 나는 평생 젊게 살고 싶다고." "이..이 녀석! 너한테도 내가 할아버지 처럼 보인다는거냐, 앙?!" 발끈한 얼굴로 소리를 지른 뮤스는 벌쿤의 입과 콧구멍에 손가락을 끼우며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완력을 가진 벌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뮤스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뮤스와 벌쿤이 그렇게 티격거리고 있을 때였다. 파코마 광장의 구석쪽으로 부터 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꺄악! 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그 소리를 들은 뮤스와 벌쿤은 하던 행동을 멈추며 고개를 돌려 비명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는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하는 한 여인과 그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핏 보이고 있었는데, 호기심을 느낀 뮤스는 벌쿤의 손을 잡아끌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한번 가보자 벌쿤!" "엥? 그러게 말이야.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규모면에서 그리 크지 않은 광장이었기에 서둘러 움직인 뮤스와 벌쿤은 금새 사고장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걸친 중년의 여인이 안절부절 못하며 도움을 청하는 중이었고, 주변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스러운 표정으로 중년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직접 나서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누..누가 좀 도와 주세요! 딸아이가 이곳에 빠졌어요! 제발 우리 딸아이를 꺼내주세요!" 중년여인의 외침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간 뮤스는 지름이 1멜리쯤 되는 구덩이와 주변에 걸려있는 경고 문구를 발견하고는 금새 상황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 버렸군!" 바로 공사를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에 아이가 빠진 것이었는데, 구덩이의 주변으로 접근 금지를 뜻하는 안전띠와 함께 위험을 경고하는 문구가 잔뜩 붙어있었지만, 철없는 아이였기에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뮤스와 함께 주변을 살펴보던 벌쿤은 듀들란 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 아주머니가 뭐라고 그러는거야? 누가 저기에 빠지기라도 한건가?" "아무래도 저 아주머니의 아이가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아. 이거 위험하겠는걸?" 뮤스의 대답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던 벌쿤은 아이의 위험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지켜 보고만 있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버럭 화를 냈고, 급히 팔을 걷어올리며 구덩이로 뛰어들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빠졌으면 당장 꺼내줘야 할거 아냐! 멀뚱히 보고만 있으면 어쩌자는거야!" 반면 냉정한 눈빛을 한 뮤스는 벌쿤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너, 라이델베르크로 돌아가면 듀들란어 공부 좀 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도 너와 같은 생각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섣불리 뛰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는거야. 경고문에 따르면 이 구덩이의 안쪽으로는 전뇌거 충전시설과 이 근방에 전뇌력을 공급할 전뇌선이 매설되어 있다고 하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것이지." 주변 건물들을 둘러본 뮤스는 더욱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근처의 건물들에 전뇌등이 켜져 있다는건 저 아래에 매설된 전뇌선 중 일부, 또는 전체에 전뇌력이 이미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야. 아무런 생각없이 뛰어들었다가는 고압의 전뇌력 때문에 바로 통구이가 되어버릴걸?" 전뇌력에 대한 공부를 어느정도 했두었던 벌쿤은 그 위험성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잠자코 있을 느슨한 성격도 아니었기에 뮤스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외쳤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데?!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거잖아?" 다급해하는 벌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뮤스는 어깨에 얹어진 손을 두들겨주며 말했다. "설마 내가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거냐? 일단은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뭘 하더라도 할 수 있을테니까 살펴 봐야지. 너는 그동안 저 아주머니를 좀 보살펴 드려." 말을 마친 뮤스는 가방에서 작업용 장갑을 꺼내어 손에 끼며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뮤스의 등장을 바라보며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뮤스는 곧바로 구덩이로 향했고, 몸을 숙여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주변이 꽤나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덩이의 깊이가 상당했기에 안쪽의 상황을 식별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어둠 속에서 전해오는 아이의 울먹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뮤스는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엄마! 무서워... 빨리 꺼내줘..." 시야확보가 필요했던 뮤스는 가방으로 부터 휴대용 전뇌등을 꺼내어 구덩이 안을 비추어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뮤스는 구덩이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깊이는 대략 4멜리 정도 되어보였고, 고압의 전뇌력을 공급하는 굵직한 전뇌선들이 바닥으로 부터 1멜리 가량의 간격을 두고서 구덩이를 가로 지르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위험 천만했군. 운좋게도 떨어질 때 전뇌선들을 건들지는 않았나 본데..." 이어 전뇌선과 바닥사이의 구석진 공간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엇인가가 그의 시야에 잡히고 있었다. 그것이 아이의 눈동자라는 것을 알게된 뮤스는 휴대용 전뇌등을 구덩이의 구석쪽으로 비추었다. 휴대용 전뇌등으로 부터 발산되는 둥근 빛이 닿은 곳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대략 열살정도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였는데, 손바닥 보다 작은 얼굴에는 어린나이로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뮤스는 아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손을 흔들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무섭겠지만 오빠가 금방 꺼내줄테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그 자리에서 움직이면 안된다! 알겠지?" 뮤스의 목소리 들은 아이는 여전히 울먹이는 듯 했지만 나름대로 똘망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조금 안심을 한 뮤스는 아이를 위해 휴대용 전뇌등을 그 자리에 고정시킨 채 몸을 일으켰다. 이어 고개를 돌린 뮤스는 가방에서 밧줄 뭉치를 하나 꺼내며 벌쿤을 불렀다. "벌쿤! 아무래도 직접 들어가야 겠어! 밧줄을 여기에 둘테니 신호를 하면 아이를 끌어 올려 줘!" 말이 통하지 않는 탓에 손짓 발짓을 해가며 아이의 엄마를 안심시키던 벌쿤은 갑작스러운 뮤스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 형이 직접 들어간다니. 형이야 말로 전뇌선 주위로 흐르는 고압전뇌력에 통구이가 되고 싶은거야?"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숨을 한번 들이쉬어 보았다. "후우... 친구들을 놔두고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걱정 마라. 그럼 뒤를 부탁해!" 짧은 대답과 함께 벌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뮤스는 발로 구덩이의 양쪽 벽을 딛으며 몸을 지탱했고, 고정시켜놓은 휴대용 전뇌등을 뽑아 입에 물고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따라온 벌쿤은 뮤스가 내려간 구덩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런! 성급하기도 하지. 벌써 내려가 버렸군!" 흔들리는 불빛과 함께 뮤스의 검은 머리가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벌쿤은 이미 뮤스를 말리기에도 늦었음을 알고 가슴을 졸이며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뮤스를 지켜볼 뿐이었다. 약 2멜리쯤 구덩이 아래로 내려간 뮤스는 고개를 돌려 불빛을 비추어 보았다. 벽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 바로 아래로 손가락 두개 굵기의 전뇌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섣불리 전뇌선을 건들였다가는 고압으로 흐르고 있는 전뇌력에 감전되는 것이 뻔한 상태였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던 뮤스는 발을 이용하여 전뇌선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기 시작했다. 신발이 전뇌선에 닿게 되자 뮤스는 찌릿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전압이 아니었지만 뮤스에게 해를 끼칠 만큼은 되지 않았는데, 평소에도 엄청난 양의 뇌공력을 몸속에서 운용하는 그에게는 이 정도 전압의 전뇌력은 별 위협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뇌선과 벽사이에 몸이 들어갈 만큼의 틈이 생기게 된 것을 확인한 뮤스는 다리에 힘을 풀며 아래로 뛰어 내렸다. -첨벙! 무릎을 구부려 가볍게 착지한 뮤스는 전뇌선을 의식하며 몸을 낮추었다. 바닥은 물이 제법 고여 발목까지 들어가는 질퍽한 진흙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덕에 4멜리가량 되는 곳에서 떨어진 아이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입에 물고 있던 휴대용 전뇌등을 손에 들며 구덩이의 구석을 비추어 보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경계심이라도 없앨겸 아이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낸 뮤스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의 전뇌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다친곳은 없니? 이 줄을 건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랬다가는 정말 위험할뻔 했으니까." 상냥하게 목소리로 말하는 뮤스를 보며 어느정도 안심한 표정을 지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선생님이 저렇게 생긴 줄을 보면 만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만지지 않았던 거에요. 잘한거죠?" "응! 아주 잘한거야. 굉장히 똑똑한 아이구나?" "네! 학교에서도 제법 공부를 잘하는 편이에요!" 칭찬에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있던 뮤스는 손을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위로 올라야겠지? 어머니가 많이 걱정하시고 계시거든." 그러나 아이는 잠시 머뭇 거리더니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올라가면 혼나겠죠? 장난삼아 엄마를 놀래켜 주려고 한건데, 이렇게 문제만 일으켰으니..." 뮤스는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가볍게 웃었다. "훗!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머니는 지금 네가 안전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 만약 어머니가 널 혼내려고 하면 내 뒤로 숨도록 해. 알겠지?" "네!" 아이는 뮤스의 말에 믿음이 가는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이제 아이를 올릴 준비를 마친 뮤스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보며 벌쿤을 향해 외쳤다. "벌쿤! 밧줄을 내려 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고개를 빼고 뮤스의 신호를 기다리던 벌쿤은 서둘려 옆에 놓인 밧줄뭉치를 풀어 내렸다. 밧줄음 금새 뮤스의 앞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밧줄을 몇번 당겨본 뮤스는 아이의 허리에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이제 위에있는 힘센 오빠가 너를 끌어 올릴거야. 무섭더라도 움직이거나 하면 안된단다. 그럼 준비 됐어?" "네. 준비 됐어요!" 마음을 굳게 먹으며 대답하는 아이를 본 뮤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으로 전선 뭉치를 밀어 아이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만한 공간을 확보하기 시작했는데, 바닥의 물을 타고 전뇌력이 흐르게 된다면 아이가 감전 될 우려도 있었기에 양 다리와 양손으로 흐르는 전뇌력을 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낮자 전뇌선과 맨살 사이의 옷이 타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열기로 인해 통증을 느꼈지만, 어느 정도 참을만 했던 뮤스는 아이를 들어올리며 벌쿤에게 신호했다. "벌쿤! 이제 밧줄을 끌어 올려!" 뮤스의 목소리를 들은 벌쿤은 대답할 여유도 없이 서둘러 손을 놀려 밧줄을 잡아 당겼다. 워낙 힘이 좋은 벌쿤이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밧줄이 당겨졌고, 금새 아이의 진흙 묻은 얼굴이 구덩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차! 다올라왔군!" 아이를 구덩이 밖으로 끌어올린 벌쿤은 서둘러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완전히 긴장이 풀린 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고, 구덩이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서는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미뉴엔느! 괜찮은거니!" 금새 아이의 곁으로 달려와 품에 안은 중년의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고, 반대로 미뉴엔느라 불린 아이는 엄마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엄마. 나 혼내지는 않을거지? 응?"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뉴엔느의 물음에 실소를 금치 못한 중년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 하지만 다음부터는 위험한 곳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 해야한다. 다시 그랬다가는 한달동안 간식을 주지 않을테니까." "응! 다시는 안그럴게!" 두 모녀가 대화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뮤스가 뒤늦게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신발과 바지가 진흙에 더럽혀져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그에 전혀 신경쓰지 않은 뮤스는 벌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두 모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따님이 많이 놀랐을 테니 집에 가셔서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군요." 뮤스의 목소리를 듣고서에 황급히 몸을 일으킨 중년부인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제 딸을 구해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 들여야 할지... 괜찮으시다면 성함과 주소를 일러 주시겠나요? 아이의 아버지께 말씀드려 꼭 보답해 드리고 싶답니다." 그녀의 말에 멋적은 얼굴을 한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 염두에 두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리고 미뉴엔느와 눈 높이를 맞춘 뮤스는 더러워진 장갑을 벗고서 미뉴엔느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미뉴엔느라고 했지? 앞으로는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해. 그럼 오빠는 이제 가볼테니 몸조심 하렴." "네! 고마워요 오빠!" "그럼 이만..." 미뉴엔느와 작별인사를 나눈 후 아쉬워 하는 중년부인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건넨 뮤스는 벌쿤과 함께 미련없이 자리를 떴고,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존경의 뜻이 담긴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공학자> 10-10 히안을 남겨둔 술집으로 돌아온 뮤스와 벌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히안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히안은 온데간데 없고 다른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에 놀란 뮤스는 술집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까 부탁드린 제 친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저쪽 자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제 또래의 남자 말입니다." 뮤스의 물음에 수건으로 접시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던 주인은 기억을 되살려보더니 은근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아! 어떤 여성분이 모시고...라기 보다는 끌고 나가시던 걸요? 아시는 분인 듯 해서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상당한 미인이던데... 후훗! 역시 청춘은 좋은 것이더군요." "네?! 그렇게 부탁 드렸는데 보고만 있으셨단 말이십니까?" 뮤스의 다그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주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닳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그럼 제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이 일을 어쩌나."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됐습니다. 음... 혹시 여자애들이 데리고 간걸까? 아냐, 히안이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를 텐데. 그럼 누가 히안을 데리고 나간거지?" 옆에서 답답한 표정으로 듀들란어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벌쿤이 뮤스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대체 주인이 뭐라는거야. 히안 형이 여기 없데?" 벌쿤의 물음에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응. 어떤 여자가 히안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는걸?" "혹시, 히안형을 납치한게 아닐까? 번드르르한 옷을 입고 있으니 부잣집 도련님으로 봤을 수도 있잖아."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지만 납득하지 못할 구석이 있었기에 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는걸.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얼굴을 드러낸 채로 납치극을 벌일 사람이 어디있겠어?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히안을 끌고가는 일 조차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납치극을 벌이는 것이 가능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뮤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별일은 없을 거야. 히안이 듀들란 어를 못하긴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황궁까지 찾아 올 수는 있겠지. 일단은 나가서 찾아보기로 하고, 내일까지 찾지 못하면 황궁에 도움을 청할 수 밖에..." 대화를 마친 뮤스와 벌쿤은 히안을 찾기 위해 서둘러 술집을 나섰고, 어두운 밤 하늘에 뜬 하얀 달은 점차 서쪽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새벽의 이슬이 땅을 촉촉하게 적실 무렵, 황궁의 서문 앞에는 주변을 환히 밝히는 전뇌등의 불빛을 받으며 금빛의 갑옷을 걸친 근위병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늦은 밤이었지만 근위병들의 정신은 얼음처럼 차갑게 깨어있었고, 부릅떠진 한쌍의 눈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이렇듯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늦은 밤이었음에도 중대한 사명감을 가진 그들었던 만큼 한점의 흐트러짐 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슥... 스스슥... 무엇인가가 땅에 끌리는 마찰음이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이를 놓칠리 없었던 근위병들은 손에 들고있던 창을 바짝 끌어당겼고, 안력을 돋구어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살피며 외쳤다. "거기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번뜩이는 근위병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흰색의 로브를 걸친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한쪽 어깨에는 술집에서 사라진 히안이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다리가 풀려 땅에 끌리는 것으로 보아 정신을 잃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어 호흡이 거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헥...! 헥...! 아..아저씨, 저예요!"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근위병들은 눈앞의 여인이 말단궁녀인 율리임을 깨달았고, 얼굴에 맺혀있던 긴장감을 풀며 창을 거두어 들였다. 여러 근위병들 중 갈색의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근위병이 그녀를 향해 혀를 차며 꾸짓듯이 말했다. "쯔쯧... 율리구나! 늦은 시간까지 돌아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이제 들어온단 말이냐. 지금이 몇시인지 알기나 하는게야? 그러다가 늦잠이라도 자서 수석궁녀에게 혼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히안을 부축하느라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율리는 평소 알고지내던 중년 근위병의 잔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에고에고... 어차피 매일 혼나는데 한번 더 혼난다고 대수겠어요? 어차피 수석궁녀님 눈밖에 나버렸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구요. 그나저나 이 사람 좀 잠깐 잡아 주세요! 정말 팔이 빠질 것 같아요." 율리는 그대로 어깨에 걸치고 있던 히안의 축늘어진 몸을 중년의 근위병에게 넘겨주었다. 엉겁결에 히안을 떠맡게된 중년의 근위병은 율리와 히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술냄새 한번 지독하군! 그나저나 이 청년은 누군데 이렇게 술에 찌들어 있는게냐? 잠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이제야 자유로워진 어깨를 두드리며 뭉친 근육을 풀던 율리는 귀찮은 말투로 대답했다. "아이, 아저씨도 참! 어제 도이첸 제국에서 온 사람이잖아요!" 그제서야 궁금증이 풀린 중년의 근위병은 탄성을 터트렸고, 신기한 듯 히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아하! 정말 그렇구나. 헌데, 어째서 네가 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지? 분명 저녁때만 해도 일행들과 같이 황궁을 나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런 생각없이 중년 근위병과 대화를 나누던 율리는 그의 물음에 크게 당황하는 듯 했다. 얼굴을 잔뜩 붉힌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얼버부리기 시작했다. "아... 저... 그게... 우연찮게 술집에 가게 되었는데, 혼자서 술을 퍼마시더니 금방 정신을 잃더라구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제가 황궁으로 데리고 온거죠! 정말이에요!" 볼을 긁적이며 율리의 변명을 듣던 중년의 근위병은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술집이라고? 거참 이상한 일이군. 너는 원래 술집이라면 질색을 하지 않았었나? 게다가 혼자 술집에 들락거리다니 다 큰 처자가 할 일은 아닌 듯 한데..."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화들짝 놀란 율리는 소리를 빽 지르며 히안을 끌어 당겼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죠! 아저씨는 신경쓰지 마시고 문이나 잘 지키라구요! 아무튼 별 참견을 다하신다니까!" 그리곤 어디서 힘이 생겨났는지 히안의 몸을 번쩍 들어올린 율리는 쏜살같이 황궁안으로 내달렸고, 그 자리에 남은 중년의 근위병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사라져 버린 율리를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딸깍! 경쾌한 소리가 나며 방문의 손잡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고, 한 여성의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몇 시간에 걸친 고생 끝에 겨우 히안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던 율리였다. 힘겹게 방문을 닫은 그녀는 이제 서있을 힘도 없는 듯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방문에 등을 기대었다. "에고... 에고... 죽겠다. 쳇,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쟈트란으로 몰려들었길래 시내에 빈 방이 없는거냐고. 제국개발 사업 발표회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몰려 든담? 결국 황궁까지 들어오게 돼버렸잖아. 그리고 이 녀석은 장작같이 마른 몸인 주제에 뭐가 이렇게 무거워!" 투덜거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율리의 바로 옆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히안이 누워있었다. 다리를 잡혀 끌려 온 듯 그의 바지는 허벅지까지 내려 온 상태였고, 바닥에 쓸린 머리카락은 보기싫게 헝클어져 있었다. 대충 보더라도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히안의 몸을 끌고서 움직이는 것조차도 버거웠던 율리였기에 그의 상태까지 신경을 써줄 여유는 없었던 것이었다. 바닥에 앉아있던 율리는 창을 통해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으차! 사람들이 깨기 전에 일을 끝나쳐야해. 조금만 더 기운을 내자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다시 히안의 두 다리를 잡은 율리는 그를 침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힘이 바닥난 상태였기에 그 조차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계획을 성공시키겠다는 열의 하나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히안을 침대에 뉘인 율리는 바쁘게 손을 놀려 히안의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갔다. 그럴 수록 볼품 없는 히안의 맨살이 드러났고, 율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불만 스러운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건물들 위로 떠오른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은 새하얀 방을 가득 비추었고, 이 당돌한 햇살은 잠을 자고 있는 히안에게까지 닿아 있었다. 눈꺼플을 간지르는 햇살 때문에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던 히안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으음... 아침인가?" 손으로 부신 햇살을 가리던 히안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을 느끼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머리가 부숴 질 것 같군! 크윽..." 관자놀이를 몇번인가 문질러 보아도 두통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약이라는 생각에 체념 하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머리에 등을 기댄 히안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어제 배정받은 자신의 방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까지 오게된 경위가 기억나지 않았던 히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분명 술집에서 술을 퍼마시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거지? 뮤스가 날 여기까지 데려 온건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 거릴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귀에 익숙치 않은 소리가 자신의 옆자리에서 들려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왠지 불길한 기분에 휩쌓인 히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이불 안에서 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 그 소리에 잔뜩 긴장한 히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들쳐보았는데, 이불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히안은 그 자리에 얼어 붙고 말았다. 뽀얀 살결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실크 속옷을 입은 금발의 여인. 히안의 기억속에서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여인이 그의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코를 요란하게 골고, 벌어진 입가로는 타액이 강처럼 흐르고 있긴 했지만 얼굴만을 따지고 본다면 미인축에 들어가는 여인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사고 능력을 상실해버린 히안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내..내가 여자와 하룻밤을... 여자와 하룻밤을... 여자와 하룻밤을..." 한동안을 그렇게 중얼 거리던 히안은 정신을 차리며 번뜩 눈을 떴고 고개를 세차게 털어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아앗! 대체 이 여자가 왜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거냐고!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오, 주신이시여! 제가 그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는 말씀이십니까!" 히안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리고 있을 때였다. 복도로 부터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가벼운 노크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똑! 똑! "으앗! 하필면 이럴 때에..." 최악의 상황에 들려온 노크소리에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놀라버린 히안은 숨을 곳이라도 찾으려 급히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땅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신의 방이 3층이라는 생각에 그 조차도 불가능해 보였다.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하지않자 노크 소리는 더욱 커졌고, 히안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기 충분한 목소리가 덤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쾅쾅쾅! "히안! 안에 있는거니? 이 늦잠꾸러기야 당장 일어나! 대답 안하면 지금 쳐들어 간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폴린이었다. 어제 밤만 하더라도 풀죽어 있던 그녀였지만 하루만에 원래의 기분을 회복한 듯 더없이 기운찬 목소리였다. "하..하필면 폴린인거냐!" 전혀 생각지 못한 폴린의 출현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된 히안은 머리를 굴리더니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잠깐, 폴린! 지..지금 옷을 하나도 안입고 있으니까 잠시 후에 다시 올래? 이..이대로 볼 수는 없는 일이잖아?" 히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고, 굳게 닫혀있던 방문은 떨어져 나갈 듯이 세차게 열리고 있었다. -콰앙! 그리곤 특유의 방정맞은 웃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방으로 들어오는 폴린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호호호호홋! 홀딱 벗고 있다면 더욱 보고 싶은걸? 이 누님이 잘 감상해 주도록 하지!" 결국 방안으로 들어와버린 폴린의 얼굴을 확인한 히안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히안은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가리기 위해 이불을 위로 끌어당겼다. "자..잠깐, 폴린! 뼈밖에 없는 내 몸따위 봐도 좋을것이 없잖아? 아침부터 눈만 버린다고! 이건 모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히안의 열렬한 웅변이 제법 먹혀들었는지 침대 앞에서 걸음을 멈춘 폴린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 네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음 어떻게 할까?" "하..하핫! 차..차라리 근육질의 벌쿤이나 몸매좋은 뮤스의 방으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는 편이 훨씬 좋을 텐데..." "하긴 그러는 편이 훨씬 좋겠어. 하지만~" 말끝을 기이하게 말아올린 폴린은 이빨을 드러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침대 위의 이불자락을 와락 끌어당겼다. "그 녀석들은 이미 임자 있는 몸이잖아! 그러니 마음놓고 볼 사람은 너 밖에 없단 말이야. 호호...호...호..." 호탕하게 웃으며 히안을 놀려 주려했던 폴린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침대 위의 광경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속옷 하나로 몸을 가리고 있는 히안, 그리고 마찬가지로 속옷 차림으로 잠들어있는 금발의 여인을 번갈아 보는 폴린의 눈동자는 큰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히안은 변명이라도 해보려 입을 열었다. "그..그게 말이지. 오해라고 오해야! 나는 이 여자가 누군지도..." 허나, 그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폴린은 말허리를 잘랐다. "듣고 싶지 않아... 이제는 꼴도 보기싫어..." 나직하게 말한 폴린은 히안을 등지며 몸을 돌렸고, 활짝 열려있는 방문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히안은 폴린의 떨리는 어깨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약해보인다고 생각했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몸은 죄책감이라는 벽에 가려 생각을 외면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0-11 폴린이 막 나간 방문의 한쪽에서 뮤스와 벌쿤이 고개를 빼꼼히 드리밀고 있었다. 그들은 방에서 나오는 폴린의 모습을 보고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었는데, 똑같이 의아한 표정으로 방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있는 히안의 모습을 발견한 뮤스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어라? 역시 황궁에 먼저와 있었구나! 헌데, 폴린은 아침부터 왜 저러는거야? 어제의 일로 아직 화를 내고 있는..." 방안을 둘러보던 뮤스의 시선이 침대 위에 닿게 되면서 말끝은 자연스럽게 흐려졌고, 의아함이 황당함으로 변하며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하..하아! 이제 왜 저러는지 알 것 같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뮤스의 물음에 울상을 지은 히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나도 잘 모르겠어. 어제 술집에서 술을 마신 기억밖에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저 여자가 내 옆에서 자고 있더라고. 그 사이에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거야..."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히안의 옆으로 어느샌가 벌쿤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히안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며 입을 열었다. "정말 세상에는 불가사의 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 이렇게 볼품 없는 형에게 이런 미녀가 따르다니... 폴린 누나의 취향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도 만만치 않나보군.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차라리 이 여자와 결혼을 하는편이 어떨까?" -퍼퍽!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히안의 주먹은 벌쿤의 면상으로 날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판국에 옆에서 놀리고 있는 벌쿤이 더욱 얄미웠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남의 속도 모르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하지만 솜방망이 같은 그의 주먹은 벌쿤에게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는데, 주먹에 맞고도 씨익 웃은 벌쿤은 히안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말했다. "형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그렇게 열내지 말라고. 왈가닥 폴린 누나보다야 이쪽이 훨씬 좋잖아? 세이즈 보다야 못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말이지." "폴린이 왈가닥이라도 상관없어! 나는 왕가닥 폴린이 좋단 말이야!" 열을 내며 외치는 히안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던 문제의 근원인 율리가 부시시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잠을 덜깬듯 입가에 흐른 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머리를 긁적였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흐릿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아아암... 벌써 아침인거야?" 조금의 시간이 지나며 시야가 점차 또렷해오자 율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히안과 뮤스, 그리고 벌쿤의 얼굴을 식별 할 수 있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자신이 속옷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짤막한 비명과 함께 침대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꺄악! 어디를 보고 있는 거예요!" 이에 머슥해진 뮤스는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앞뒤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히안은 율리의 어깨를 흔들며 급한 목소리로 묻기 시작했다. "대체 당신은 누구길래 내 옆에서 자고있는 거죠? 그리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왜 내 옆에서 잠을 자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거냐고요!" 하지만 그녀는 도이첸 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 거릴 뿐이었는데,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뮤스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히안의 물음을 대신해 주었다. "저, 대체 아가씨는 대체 누구시죠? 그리고 어떻게 이방에서 잠을 자게 된겁니까?" 뮤스의 말을 듣고서야 물음의 내용을 알게된 율리는 급히 머리를 매만졌고, 수줍은 듯한 표정을 가식적으로 지으며 차곡차곡 준비해 놓았던 대답을 하기시작했다. "저는 유리아네뜨라고 해요. 황궁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 궁녀랍니다. 어제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이 분께서 잔뜩 취하신 상태로 제 손목을 잡아 끌어 방으로 데리고 오셨죠. 저는 당황스러웠지만, 황궁의 귀빈인 공학원 원장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그만..." 어느 정도 예상한 내용이었지만,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되자 답답한 한숨이 절로나옴을 느꼈다. 비록 자신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율리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히안을 대신해 용서를 구했다. "후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군요. 용서해 주십시오. 제 친구녀석도 원래 그런 녀석이 아닌데, 술에 취해 아가씨께 큰 결례를 범했던 모양입니다. 간단한 사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하니, 친구와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해결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사과를 건넨 뮤스는 율리의 대답을 히안과 벌쿤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히안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취한 상태였다지만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그럴리가 없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입맞춤 조차도 한번 해본적 없는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냐? 뭔가 잘못된거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히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뮤스는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 네 본의였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 남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지. 네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된 도리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라. 이 분께도 그렇게 말씀드리도록할께." 그들의 대화를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를 보아 자신이 계획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율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율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냉랭한 표정을 거운 뮤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 친구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상당히 괜찮은 녀석이랍니다. 너무나 성급한 말씀일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이 친구와 도이첸 제국으로 함께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뮤스의 입에서 기다리던 말이 나오자 율리는 뛸듯이 기뻤다. 하지만 철저하게 표정을 관리한 그녀는 가련한 모습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갑작스럽긴 하지만... 원장님께서 바라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원장님께 남은 평생 헌신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뮤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머뭇 거리던 뮤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그런데... 지금같은 상황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공학원의 원장은 저 친구가 아니라 바로 저랍니다. 저 친구의 이름은 히안이고, 제가 뮤스 드라켄이죠." 뮤스의 말을 들은 율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비련한 여인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는데, 충격이 컸는지 입술까지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지..지금 뭐라고 하셨죠? 저쪽이 아니라 당신이 공학원의 원장이란 말씀인가요?" 돌변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에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약간의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만, 히안도 자신이 한 일을 책임질 것입니다." 뮤스의 말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율리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라구욧!!!" "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뮤스가 되물어오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고, 이마에 손을 가져간 율리는 침대 아래에 떨어진 자신의 옷가지들을 챙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래도 저와는 인연이 없나보군요. 저 사람과는 어제 아무일도 없었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돼요." 뮤스는 이 생각지 못한 반전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히안과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분명 방금 전에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기분이었던 율리는 뮤스가 꼬치꼬치 캐물어오자 귀찮음을 느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저 사람이 공학원의 원장인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저 사람에게 접근해서 신세 좀 고쳐보려고 했는데, 완전 잘못 짚었지 뭐에요. 어제 술집에서 데리고 나온 일부터 모두 제가 꾸민 일이에요. 그리고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는 헤픈 여자도 아니고요. 이제 모두 이해하시겠죠?" 어느새 율리는 옷을 모두 차려입은 상태였다. "저는 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 아무튼 내 인생은 되는 일이없어..." 전혀 반성하는 기색없이 자신의 운을 탓한 그녀는 당당한 모습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섰다. 그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 수 없었던 히안과 벌쿤은 궁금한 표정으로 뮤스의 설명을 기다렸고, 너무나 어이없는 사건에 말문이 막혀 버린 뮤스는 멍하니 율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분을 숨긴 손님. 봄날의 산들한 바람에 체리나무의 꽃잎들이 날리며 분홍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뮤스는 머리위로 떨어진 꽃잎을 그대로 얹은채 쟈트란 황궁의 남쪽 대로를 산책하는 중이었는데,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 거리고 있었다. "...양과 음의 조화는 만물을 살아 숨쉬게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음양의 조화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거대한 줄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행을 먼저 이해하여야 하며..."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뮤스의 중얼거림은 금방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갈 수록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뮤스! 특종이야! 특종!" 저 멀리에서 부터 뮤스를 부르는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뮤스를 찾아 헤맸는지 상당히 지쳐 보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하지만 뮤스는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이러한 뮤스를 한두번 본 것이 아니었던 카타리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에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보네. 이런곳까지 와서 머리를 혹사시키고 있다니, 아무튼 여유를 즐길줄을 모른다니까." 카타리나는 넓은 황궁을 뒤지고 돌아다니느라 지친 다리를 이끌며 뮤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을 가로막은 카타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뮤스!!! 뭐하니?!" 갑작스러운 외침소리에 놀란 뮤스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앗! 무..무슨 일이야? 갑자기." 뮤스의 물음에 입을 삐죽 내민 카타리나는 심통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라니? 아까부터 계속 불렀어. 그런데 들은 척도 하지 않던걸?" 그제서야 자신의 고질병(?)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던 뮤스는 볼을 긁적이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미..미안, 내가 또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었나 보구나? 많이 불렀어?" 사과를 하는 뮤스를 보며 더이상 심통을 낼 수 없었던 카타리나는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괜찮아. 뭔가에 열중해 있는 모습도 보기 좋은걸?" "하..하하... 뭐 그런 말을." 뮤스가 쑥스러워 하고 있을 때 자신이 뮤스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카타리나는 손뼉을 치며 말을이었다. "아! 너 그 소식 들었니? 폴린이랑 히안 소식 말이야!" "응? 폴린이랑 히안? 겨우 오해를 풀어 줬더니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궁금해 하는 뮤스를 향해 미소를 띄운 카타리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설레이는 듯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둘이 결혼하기로 했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 아니니?"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뮤스는 카타리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상당한 놀라움을 표했다. "뭐?! 둘이 결혼을 하기로 했다니... 그럼 히안이 청혼을 한거야?" "아니, 청혼은 폴린이 했다는걸? 여자가 먼저 청혼을 한다는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폴린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잖아. 폴린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제는 기다리기도 지쳤어. 바보같은 히안이 진짜로 사고치기 전에 내가 먼저 거두어 들이기로 했지.' 라고 하던걸?" 폴린의 말투를 흉내내며 상황을 설명하는 카타리나를 본 뮤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정말 폴린이랑 똑같은걸? 그래도 다시는 폴린 흉내내기는 하지마라. 생각만해도 등이 오싹하니까." "풋! 알았어." 그러던 중 문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카타리나는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뮤스... 우리는 언제쯤 결혼할 수 있을까?" "..." 한동안 뮤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의 따뜻한 손길이 카타리나의 머리카락과 볼을 쓸어내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린 뮤스는 부드러운 눈빛을 건네며 듬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곧 끝나게 될거야. 그 때가 되면 나는 제일 먼저 네게 청혼을 할게. 나의 아내가 되어 달라고..." "응, 기다릴께. 언제까지라도..." 뮤스의 대답을 듣게 되자 카타리나는 더 없이 달콤한 행복감에 젖어 들었고, 두 남녀의 입술은 분위기를 타며 자연스럽게 가까워 지기시작했다. <대공학자> 10-12 촉촉하게 젖은 두 입술이 닿을 찰라, 원망스럽게도 그들의 애정행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장난기 잔뜩 섞인 벌쿤의 목소리였다. "이런, 이런...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런 대로에서 그런 낯뜨거운 행각을 벌여도 되는거야? 히안형과 폴린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충격발표를 하더니, 여기도 불이 붙어 버리셨구만!" 이미 내기의 기한이 지나버렸기에 원래의 옷으로 바꿔 입을 수 있었던 벌쿤은 평소보다 더욱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는데, 벌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굴을 붉힌 카타리나는 급히 뮤스에게서 떨어졌고, 뮤스는 머슥한 표정으로 먼산을 보며 딴청을 했다. "무..무슨 소리야. 카타리나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아서 보고 있는 중이었다고. 그런데 넌 무슨 일로 여기에 나타난 거냐?" "거참 클래식한 변명이로구만... 오늘부터 대륙 각국의 사절단이 황궁으로 도착하기 시작한다더군. 지금 도이첸 제국과 스윈 제국의 사절단이 들어온다고 해서 세이즈랑 구경이라도 할겸 산책 나온거야." 벌쿤의 옆에 붙어있던 세이즈는 은근한 눈초리를 보내며 뮤스와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고, 부끄러운 장면을 친구에게 들켜버린 카타리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더 이상 뮤스와 카타리나의 애정행각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세이즈는 벌쿤의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벌쿤, 어서 서두르자! 나 사절단 행렬은 처음 보는 거란 말이야!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걸?" 세이즈가 애교스럽게 보채자 유순한 양처럼 변해버린 벌쿤은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들었고, 체리나무가 우거진 대로사이를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공주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꽉 잡으세요!" "꺄하하하! 조금 더 빨리 달려, 벌쿤!" 벌쿤과 세이즈가 히히덕 거리며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타리나는 뮤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뮤스, 우리도 따라가보자. 뭔가 재미있을 것 같은걸?" "후훗! 나도 공주님이 원하시는데 가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럼 우리도 서두르자." 그렇게 말한 뮤스는 벌쿤이 했던 것과 같이 카타리나를 어깨에 들쳐 업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캬~ 뭐..뭐니, 갑작스럽게?" 뮤스의 돌연한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넓고 듬직한 어깨를 느끼며 그가 하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쟈트란 시내와 연결된 황궁의 남문에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나와 손을 흔들며 길게 이어진 사절단의 행렬을 반기고 있었다. 각국가의 사절을 태운 전뇌거들의 앞으로는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이 줄을 맞추어 말을 몰았고, 뒤로는 사절들의 수행원들을 태운 마차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천여명에 달했는데, 가문의 문장과 국가의 문장을 자랑스럽게 내건 그들은 당당한 모습으로 황궁의 남문을 통과하여 입궁하는 중이었다. -와아! 와! 전뇌거에 타고있는 사절들은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열어 열렬하게 자신들을 환영하고 있는 쟈트란의 시민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여러번 쟈트란을 방문하는 이도 있었고, 이번이 첫 방문인 이도 있었지만 이번만큼 대륙 전체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초청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모두들 설레이는 얼굴들이었다. 뮤스와 카타리나 역시 환영 인파에 묻혀 사절단의 입궁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을 지나가는 전뇌거와 마차의 안을 들여다보며 사절들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는데,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초롱한 눈망울을 움직이며 처음보는 사절단의 행렬을 구경하던 카타리나는 뭔가를 발견한 듯 행렬의 끝을 가리키며 뮤스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뮤스! 저기봐! 도이첸 제국 황실의 전뇌거야." 카타리나가 가리킨 곳을 본 뮤스 역시 도이첸 제국 황실의 전뇌거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저렇듯 우아한 금빛 곡선과 질주하는 말의 형상이 양각 된 전뇌거를 소유하고 있는 곳은 도이첸 제국의 황실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도이첸 제국 황실의 전뇌거구나." "저 안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가비르 재상님 이나 예전에 공학원을 찾아왔던 고듀트 외교대신님 이시겠지?" "아무래도 고듀트 외교대신님이 타고계실거야. 가비르 재상님은 국무를 책임져야 하는 만큼 황궁을 비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겠구나." 뮤스와 카타리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이첸 제국 황실의 전뇌거는 그들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에 잠시 대화를 멈춘 뮤스와 카타리나는 깨끗하게 닦여있는 창안을 들여다보며 그곳에 타고 있는 이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에는 창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이 선명하게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그곳에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 할 수 있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라움에 찬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며 외쳤다. "에엣? 저분은?!" 바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카타리나를 향해 말했다. "이거야 원... 저분이 오시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는걸? 아무래도 직접 가서 만나봐야겠어. 괜찮겠지 카타리나?" "응, 나는 괜찮아."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마음이 분주해진 뮤스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카타리나를 이끌고 사람들의 사이를 빠져나왔고, 사절들의 입궁수속이 이루어질 황궁의 내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황궁의 남문을 통과하여 황궁의 내부로 들어온 사절단의 행렬은 거대한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순백의 건물앞에 멈춰서고 있었다. 그들은 내궁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속을 밟기 위해 내궁으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인 '하늘의 문'으로 오게 된 것이었는데, 황궁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엄수할 것을 서약하고, 사절들과 수행원들의 방을 배정받거나, 황궁생활 중에 필요한 요구사항들을 접수하는 등의 일들을 하는 곳이었다. 자신들이 타고온 전뇌거에서 내린 사절들은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으며 하늘의 문으로 걸음을 옮겼고, 수행원들은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전뇌거와 마차등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의 문에는 듀들란 제국의 재상인 투르코스가 직접 사절들을 맞이 하기 위해 나와있었었다. 그의 뒤로는 게하임 부관과 몇 명의 보좌관들이 서있었는데, 한명씩 모습을 드러내는 사절들을 판별하여 소속국가와 직위등을 투르코스 재상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하늘의 문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고 있는 사절들의 생김새와 장신구들에 붙어있는 문장을 찬찬히 뜯어본 게하임 부관은 자신의 지식과 추론을 통해 사절들을 구분하고 있었다. "가장 오른쪽의 진보라색 셔츠를 입은 분은 스윈제국 황족계승 서열 12위인 카뮤드 폰 로베나인 후작입니다. 비록 서열 12위라고는 하지만, 황녀들의 수가 많기에 실질적인 서열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황실의 실권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대화를 나누며 올라오는 분은 오세프 국가연합의 외교차관인 오스텔 폰 듀라세미드 왕자이시죠. 연합국 중 미뉴하펜 공국의 왕자입니다. 그 뒷줄의 붉은 외투를 걸친 분은 역시 스윈제국의 외교대신인 코르메트 폰 그라페엘 후작으로 스윈제국 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이후 외교대신에 임명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잠시동안 게하임 부관의 보고는 계속 되었고, 이십 여명에 달하는 사절들에 대한 정보는 차곡차곡 투르코스 재상의 머리속에 쌓이고 있었다. "초청장을 발송한 8개 국가중 6개 국가의 사절들이 오늘 도착한 것으로 보고되었고, 나머지 2개 국가는 조금 차질이 생겨 내일 중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게하임 부관의 보고를 듣던 투르코스 재상은 빙그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발표회의 진행이 순조로운 것 같으니 기분이 좋군. 그럼 사절들을 맞이하러 내려가 봐야겠지?" 웃으며 말하고 있는 투르코스 재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게하임 부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헌데, 지난 며칠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문득 걸음을 옮기다 말고 게하임 부관의 물음에 뒤를 돌아본 투르코스 재상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글쎄, 그리 특별한 일은 없었네. 그것은 왜 묻는 것인가?" "다른게 아니라, 제상각하께서 갑작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이시니 황제폐하와 황녀님은 물론이시고, 제 아래의 사람들까지 무슨일인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걱정되는 점도 없잖아 있습니다." "걱정이라니? 내가 웃는게 불만스럽기라도 한것인가?" 투르코스 재상의 되물음에 놀라 손을 내저은 게하임은 자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갑작스럽게 변하면 명이 다한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투르코스 재상은 피식 웃었고,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헛!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어서 가세나. 예전에는 웃지 않는다고 철가면이라 부르더니 이제는 웃는다고 뭐라 하는군. 아무튼 사람들이란..." "아, 알겠습니다." 결국 투르코스 재상의 심경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게하임 부관은 아쉬운 얼굴로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사절들이 올라오고 있는 곳으로 내려간 투르코스 재상은 그들의 얼굴을 살피며 게하임 부관이 일러준 이름들을 떠올렸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윈 제국의 카뮤드 폰 로베나인 후작이시죠? 그리고 이쪽 분은 오세프 국가연합의 오스텔 폰 듀라세미드 외교차관님이시군요. 저는 듀들란 제국의 재상직을 맡고 있는 투르코스 드레스덴 이라고 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듀들란 제국의 재상이 현 듀들란 제국 황제 크로시드 3세의 친 숙부라는 사실은 대륙의 귀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는데, 이렇 듯 상위 서열의 황족인 동시에 재상직을 겸하고있는 인물이 직접 나와 자신들의 이름을 알아주고 환대하자 사절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투르코스 재상님이 셨군요. 재상님의 위명은 스윈 제국에서도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친히 맞이하여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누리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투르코스 재상은 이들을 시작으로 마주치는 사절들을 반갑게 맞으며 인사를 건넸고, 하나같이 그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모습이었다. 투르코스 재상이 십 여명의 사절들과 인사를 주고 받을 즈음 뒤 늦게 도착하는 사절단의 행렬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사절단 행렬들과는 규모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 순백의 전뇌거를 중심으로 이십여대의 마차가 앞뒤로 줄을 지었고, 백여기의 철갑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호위부대가 위용넘치는 모습으로 사절일행을 보호하듯 애워싸고 있었다. 사절들을 맞이하다 말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투르코스 재상은 그들의 소속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안면을 딱딱하게 굳히며 중얼 거렸다. "도이첸 제국이 자랑하는 쿠페란 기마병대로군. 일개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국가 최강의 기마병대를 호위부대로 붙여오다니. 그렇게도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건가?" 투르코스 재상의 중얼 거림을 들을 수 있었던 게하임 부관은 냉정한 표정으로 도이첸 제국의 사절단을 꼼꼼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재상각하의 말씀대로 힘을 과시하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달리 생각한다면 파견된 사절이 저 정도의 호위부대를 필요로하는 요인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인물이?" 투르코스 재상과 게하임 부관이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도이첸 제국 황실 전뇌거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도이첸 제국의 외교대신인 고듀트였다. 흰색의 예복은 약간 마른 체형을 가진 그에게 잘 어울려 보였고, 금장 도금이 된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전뇌거 앞에 섰다. 고듀트 외교대신의 얼굴을 본 투르코스 재상은 이미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느때와 같이 고듀트 외교대신이로군. 그리고 다른 일행이 있는 듯한데..." 멀리서 바라고있는 투르코스 재상의 시야에는 남색의 예복을 차려입은 이십대의 청년이 전뇌거에서 내리는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의 신분을 알수 없었던 투르코스 재상은 게하임을 향해 물었다. "저 청년은 누구인가? 고듀트 외교대신에게 저만한 자녀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물음에 게하임 부관 역시 알지못하는 얼굴인 듯 알송달송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말입니다. 단순히 고듀트 외교대신의 일행이 아니겠습니까? 설레여있는 얼굴을 보니 여행이라도 온듯한 기색이군요." "흐음... 조금 있으면 고듀트 외교대신이 소개라도 해주겠지. 먼저 내색치 말게나." 어쨌든 그들을 맞이해야만 했던 투르코스 재상은 전뇌거 앞까지 다가갔고, 오가는 수행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있는 고듀트 외교대신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 만에 뵙는군요. 고듀트 외교대신." 투르코스 재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고듀트 외교대신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숙여 목례를 했다. "아! 투르코스 재상님이셨군요. 재상님께서 직접 나와 계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난 18차 양국 회담때 뵙고 처음이니 벌써 4년이나 지났군요. 헌데, 오늘따라 얼굴에 화색이 도시는 것을 보니 그 동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고듀트 외교대신은 투르코스 재상의 표정이 이상하리 만큼 부드러워 졌음을 느꼈고, 이에 쓴웃음을 보인 투르코스 재상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하핫, 나이를 먹다보니 사람이 변하는 것이겠죠." 대충 얼버무린 투르코스 재상은 옆에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보다 함께 동행하신 이 젊은분도 소개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조금 머뭇거린 고듀트 외교대신은 청년의 얼굴을 살피며 나직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투르코스 재상님, 이분은 저희 도이첸 제국의 카로이트 4세 황제폐하이십니다." 놀랍게도 남색 예복의 청년은 바로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인 카로이트 4세였던 것이었다. "이..이분께서 정녕 귀국의 황제폐하이십니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청년의 정체를 듣게된 투르코스 재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국가의 수장이 일개 사절로서 타국을 방문한 것은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군소국가의 왕도 아닌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그런일을 했다는 것은 꿈에서 조차 생각지 못할 일이었던 것이었다. 투르코스 재상이 너무 놀란 탓에 어찌해야할 지 우왕자왕 하자 고듀트 외교대신은 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조용히 부탁의 어조로 말했다. "황제폐하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저희 황실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되지 않을 만큼 비밀리에 모신 것이랍니다." 고듀트 외교대신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투르코스 재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헌데, 무슨일로 황제폐하께서 몸소 이곳까지 왕림하시게 되었는지 여쭈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고듀트 외교대신이 대답을 하려 할 때, 젊은 황제가 먼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본인이 이곳까지 오게된 것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귀국의 제국개발 사업 성과를 보고싶었기 때문이랍니다. 비록 귀국과 도이첸 제국이 경쟁의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본국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다면 배우고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투르코스 재상은 그의 눈에서 한점의 사심조차 찾아 볼 수 없었고, 일국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그를 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한 투르코스 재상은 공손한 자세로 목례를 하며 젊은 황제를 맞이했다. "정식으로 예를 갖추지 못한점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쟈트란의 모든 시민들을 대신하여 황제폐하의 왕림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모든것이 본인이 원했던 바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본인이야 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내궁으로의 입궁 절차를 마치도록 할테니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한번 목례를 건넨 투르코스 재상은 급히 게하임 부관과 보좌관들을 이끌며 하늘의 문으로 걸음을 옮겼고, 고듀트 외교대신은 황제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학자> 10-13 고듀트 외교대신이 무엇이라 입을 열 찰라 행렬의 뒤쪽으로 부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황제와 고듀트 외교대신은 기마병들에 가로 막힌 검은 머리의 청년과 비슷한 또래의 여인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새 그들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었던 젊은 황제는 손을 들어보이며 외쳤다. "뮤스 원장님과 카타리나양이셨군요!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말고 어서 창을 거두어 들이거라!" 살기를띈 눈으로 뮤스와 카타리나를 내려보던 기마병들은 황제의 불같은 명이 떨어지자 급히 살기를 거두어 들이며 그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황제에게로 다가온 뮤스는 오랜만에 만나는 황제의 신색을 살폈고, 반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존체는 날이 갈 수록 훤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별고는 없으셨습니까? 고듀트 외교대신님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안부를 물어오는 뮤스의 손을 잡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하핫! 대륙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벨링궁에 매일 갖혀 지내왔는데 어찌 무슨 일이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카타리나양은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 지신 것 같습니다." 황제의 말에 카타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 했다. 뮤스의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정중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폐하. 폐하께서야 말로 날이갈 수록 위엄이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황제는 기쁨 반, 쑥스러움 반의 얼굴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예의를 갖춘 인사는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카타리나양. 기왕 벨링궁을 벗어났으니 조금은 자유롭게 지내고 싶군요. 요즘은 황위에 오르기전의 시절이 그리워져서 말이죠."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대답하고 있는 황제를 보며 가볍게 웃은 뮤스는 전뇌거와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수행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곳까지 황제폐하께서 어인일이십니까? 고듀트 외교대신님께서는 오실것이라 미리 짐작 하고있었지만, 황제폐하께서 친히 이 먼곳까지 오시다니 정녕 뜻밖이었습니다." 어느정도 짐작했던 뮤스의 물음에 황제는 머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핫. 오랜만에 뮤스 원장님을 만나고 싶기도했고, 오래 전부터 듀들란 제국에 한번 방문하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답니다. 또, 이번 기회에 제국개발사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효율을 거두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죠. 뭐 한가지 이유를 더 덧붙이자면..." 말끝을 흐리던 황제는 돌연 서운한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공학원에서 이번에 개발했다는 비행선을 하루빨리 타보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하핫,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제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혀 뜻밖의 이유를 듣게된 뮤스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하핫,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이유로 듀들란 제국까지 오셨다니 폐하도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그들의 곁에서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있던 고듀트 외교대신은 그동안의 애환을 뮤스에게 토로하듯 울상을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께서는 비행선의 제작 소식을 벨링궁에서 접한 이후로 타보고 싶은 마음에 일을 손에 잡지 못하셨습니다. 어쩔도리 없이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으로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이미 비행선은 듀들란 제국을 향해 출발을 한 이후였고, 뮤스 원장님이 돌아올 날까지 기다리실 수 없으셨던 폐하께서는 대신들의 반대를 뿌리치시고 저와 함께 이곳까지 오시게 된것입니다. 휴우,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국정에 영향이 있을까 우려하여 일부 대신들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이고, 투르코스 재상님께도 이 일을 비밀로 해달라 부탁드려 놓았습니다. 나쁜 뜻은 아니지만, 폐하께서는 뮤스 원장님을 만난 이후로 날이갈수록 활동적으로 변하셔서 궁내의 대신들에게 적지않은 당혹감을 안겨 주고 계십니다." 타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활약상(?)을 듣고있던 황제는 멋적은 웃음을 지었고, 황제의 행동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뮤스는 그의 행동이 자신의 탓으로 돌려지는 듯한 분위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절들에 대한 내궁으로의 입궁절차가 끝나게 되었고, 뮤스와 카타리나, 그리고 황제와 고듀트 외교대신은 그 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내궁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카일락스 리퀴드 쨍쨍한 아침의 햇살이 뮤스의 얼굴로 파고들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젊은 황제의 말동무가 되어 주느라 잠을 못잤던 터라 오늘따라 늦잠을 자고 싶었던 뮤스는 눈이 부셔옴에 짜증을 느끼며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눈은 다시 부셔오기 시작했고, 다시금 이불을 끌어 당기려했다. "으음... 눈부셔." 그러나 그의 의도를 져버리며 이불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함을 느낀 뮤스는 살포시 눈을 떴다. 흐릿한 그의 시야에는 한 여인 얼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는데,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나올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뮤스는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함! 카타리나구나. 아침일찍 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뮤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카타리나는 등을 돌린채 심통이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뮤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응? 왜그런 표정을... 무슨 기분나쁜일이라도?" 그제야 뮤스의 얼굴을 바라본 카타리나는 잔뜩 부풀린 볼에서 바람을 빼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흥! 어제 황제폐하를 만난 이후로 나와 시간을 전혀 보내주지 않았잖아! 함께 저녁먹을 시간도 없이 황제폐하와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고... 칫!" 카타리나의 투덜거림 만큼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뮤스는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한번만 봐달라고.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어. 황제폐하께서 놓아 주질 않으니 어떻게 빠져 나올 방도가 없었다구.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될까. 응?" 쩔쩔매고 있는 뮤스를 보며 혀를 삐죽 내민 카타리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헤헷! 이젠 됐어. 네가 어쩔수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혼자 심통이 나서 그래본거야. 실컷 투덜거렸더니 이제는 조금 속이 풀리는걸?" 잔뜩 긴장하고 있던 뮤스는 맥이 풀림을 느끼며 침대위에 주저 앉았다. "아... 그런거였구나. 역시 카타리나는 이해해 줄것이라고 생각했어. 휴우... 십년 감수했군." 가슴을 쓸어내리는 뮤스를 향해 가볍게 미소지은 카타리나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애들이랑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이 있어서 먼저일어날게. 전에 못했던 쇼핑을 계속해볼 생각이야. 그래서 나가는 길에 이야기라도 전할겸 들린거고." 멍한 표정으로 입맞춤을 받던 뮤스는 우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응? 같이가지 않아도 괜찮을까? 듀들란 제국어에 능숙한 사람도 없고..." 고개를 내저은 카타리나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며 서두르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야. 어차피 쇼핑에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늦기 전에 나가봐야겠어. 그럼 저녁 때 보자!" "으응.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카타리나는 바쁜 걸음으로 방에서 나갔고, 그새 잠이 모두 달아나버린 뮤스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시원스럽게 기지개를 폈다. "아하암! 아침부터 조금 당황스러웠군."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카타리나가 나간 후 조금 열려있는 방문을 발견하고는 문을 닫기위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폴린이 부축였을 거야. 설마 벌써 혼수를 준비 하는건 아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였다. 방문 넘어로부터 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뮤스는 확인을 위해 방문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어 바깥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으음? 황제폐하의 목소리인데..." 과연 그의 눈에는 몸을 낮춘 황제의 뒷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는데, 얼핏보이는 모습이 나이 어린 여자아이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 뮤스 원장님의 방을 찾다가 이곳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구나?" 황제의 물음에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무룩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엄마께서 나중에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감사드리고 싶어서 혼자 찾아온 것이에요. 그런데, 황궁에 워낙 방이 많다보니 찾을 길이 없었어요." "후훗, 그렇다면 잘 찾아 온것이란다. 바로 이 옆방이 뮤스 원장님의 방이거든. 나 역시 뮤스 원장님을 만나러 왔으니 함께 들어갈까?" "정말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핫!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가 부탁을 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 하지 않겠니?" 깜찍한 모습으로 고마워하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준 황제는 낮췄던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서 가보자꾸나."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서 뮤스의 방을향해 발걸음을 떼던 황제는 방문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뮤스를 발견하였다. 그를 향해 손을 들어보인 황제는 빙긋웃으며 자신의 옆에있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뮤스 원장님. 아침부터 귀여운 손님이 찾아오셨군요." 그의 말에 여자아이의 얼굴을 본 뮤스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아! 그때 그 아이구나. 이름이 미뉴..미뉴엔느였던가?" 동시에 뮤스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아이는 만면에 밝은미소를 피워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뉴엔느라고 해요. 부르기 쉽게 밍이라고 부르시면 된답니다." "그나저나 네가 어떻게 이곳에... 아 우선은 방으로 들어오렴. 폐하께서도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지요." 우연찮게 도움을 주게된 미뉴엔느가 어떻게하여 황궁의 내궁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찾아온 손님을 계속해서 밖에 세워 놓을 수 없었던 뮤스는 그들을 방안으로 안내했고, 대충 늘어놓았던 옷가지들을 치우며 차라도 한잔 대접할겸 찻잔을 챙기기 시작했다. -또로로록... 찻물이 새하얀 찻잔속으로 떨어지며 맑고 영롱한 소리가 들려왔다. 진하게 우러나온 찻물은 붉고 투명한 색을 띄었고, 찻잔이라는 좁은 틀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소파의 앞쪽에 걸터앉은 미뉴엔느는 조심스럽게 뜨거운 찻잔을 들어 입안으로 흘렸다. 이어 노릇하게 굽힌 쿠키 한조각을 입에 문 미뉴엔느는 꼭꼭 씹어 삼키며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맛있는 걸요? 엄마는 쿠키를 자주 먹지 못하게 하셔서 속상해요. 저는 쿠키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미뉴엔느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은 뮤스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물었다. "그것보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지?" 손에 남아있던 쿠키를 입안으로 쏙 넣은 미뉴엔느는 해맑은 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아버지께 그때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오빠가 이곳에 있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모르는게 없으시거든요. 그래서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황궁으로 온거에요. 지금 엄마는 아버지의 집무실에 계시구요." "아버지를 따라? 그럼 너희 아버지께서 황궁에서 일을 하시는 거니?" 뮤스의 물음에 미뉴엔느는 고개를 끄덕였고, 계속해서 쿠키를 먹는데 열중했다. 느긋한 자세로 차맛을 음미하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는 문득 미뉴엔느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황제는 의문을 느끼며 미뉴엔느를 향해 물었다. "아버지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이상하게도 네 얼굴이 눈에 익구나." 그의 말을 듣고있자하니 뮤스 역시 미뉴엔느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금새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뮤스는 무릎을 치며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러고보니 눈과 입매가 투르코스 재상님과 많이 닮았군요." 황제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과연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더니..." 뮤스와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미뉴엔느는 쿠키를 먹다말고 신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분 모두 저희 아버지를 알고 계시는군요!" 이로서 미뉴엔느가 투르코스 재상의 딸임이 확실해지자 뮤스는 기막힌 우연에 다시 한번 탄성을 터트렸고, 황제는 자신의 예리한 눈썰미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학자> 10-14 그후, 이들 셋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뮤스는 미뉴엔느를 구해주게된 일들을 황제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미뉴엔느는 그날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뮤스와 황제에게 들려주게 되었는데, 때로는 심각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며 즐거운 오전의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에 뮤스와 황제에게 친근감을 느낀 미뉴엔느는 더욱 활달해진 모습이었다. 욕심스럽게 양손에 쿠키를 집어든 미뉴엔느는 입가에 쿠키가루를 잔뜩 묻힌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저는 아버지께 많이 혼날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웃는 방법도 모르시는것 같던 아버지가 왠일인지 따뜻하게 웃으시더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라는 말씀만 해주셨어요. 그래서 겨우 안심할 수 있었죠." 그렇게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미뉴엔느는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설레이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오늘 황궁에서 연회가 있는건 아시고 계시죠? 제국개발..무슨 전야 라고 하던데..." 미뉴엔느의 말에 황제까지 덩달아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차차! 그러고보니 원래 그 일때문에 뮤스 원장님을 찾아온 것인데 이제야 생각이 났군요. 작은 선물로 예복이나 한벌 맞춰 드릴까해서 찾아온 것이랍니다. 마침 이번 사절단에 솜씨 좋은 재단사가 동행을 해서 말이죠."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전야 연회에 대해 얼핏 들은적이 있긴했지만, 그것이 오늘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뮤스는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전야연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것이 오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배려는 고맙지만, 예전에 준비해놓았던 예복이 있으니 저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답니다." 하지만 황제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뮤스 원장님께서도 엄밀히 따지자면 도이첸 제국을 대표하는 사절로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품위의 예복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뮤스 원장님께서 헌 예복을 입고 공식석상에 나서는 모습을 도이첸 제국의 황제로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황제의 눈빛을 보며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한 뮤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배려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가 없군요.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미뉴엔느가 끼어들며 뮤스를 향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이었다. "오빠, 혹시 연회에 함께 가실 분이 없으시다면 저와 동행해주면 안될까요? 원래는 쟝아저씨와 함께 갈 예정이었는데, 쟝아저씨는 오늘까지 많이 바쁘시다고 하시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오빠에게 부탁드리는 거에요." 미뉴엔느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기는 했지만, 카타리나의 얼굴이 떠오른 뮤스는 미안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어걸 어떻게하지? 나는 함께 동행할 사람이 이미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구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뮤스의 대답에 미뉴엔느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뭐. 혼자 연회에 가는 수밖에..." 더 이상 쿠키를 먹을 기분도 나지 않는지 미뉴엔느는 입가에 묻은 쿠키가루를 털어냈고, 작은 입술 사이에서는 나이답지 않은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황제는 안타까운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쯔쯧...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의 부탁을 거절하다니 뮤스 원장님도 참으로 냉담하시군요." 반 장난조로 말하는 황제를 본 뮤스는 볼을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미뉴엔느와 시선을 맞춘 황제는 따뜻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괜찮다면 나와 함께 연회에 동행을 할까? 나도 동행할 사람이 없던차에 잘되었구나." 그의 말에 미뉴엔느의 얼굴은 금새 밝아졌고,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하핫! 물론이란다. 오히려 귀여운 아가씨와 동행할 수 있으니 내가 더욱 영광인걸?" "고마워요 오빠!" -와락! 기분이 좋아진 미뉴엔느는 거리낌없이 황제의 품으로 달려들었는데,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처음으로 들어보는 오빠라는 소리가 왠지 정겹게 느껴진 황제는 미소를 떠올리며 미뉴엔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일락스 리퀴드.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서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전야 연회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황궁에는 몸이 절로 들썩거릴 흥겨운 음악이 울려퍼졌고, 초대를 받은 사절들과 황궁 귀족들은 동행인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뮤스와 일행들 역시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위에 있었다. 크라이츠를 제외하고는 모두 쌍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 히안과 폴린은 벌써부터 신혼부부라도 된양 가까이 붙어 눈꼴시린 친근함을 표하고 있었다. "히안, 이것좀 먹어봐. 아까 시내에 나가서 사온 과자인데 제법 맛있더라고." 과자를 한입에 넣을 수 있도록 작게 쪼갠 폴린은 히안의 입안에 직접 넣어주었고, 히안은 맛있게 받아 먹으며 행복에 겨워하는 중이었다. "하핫! 정말 맛있는걸? 네가 먹여줘서 더 맛있는 걸거야!" "호호홋!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여기 많이 있으니까 실컷먹어." 그런 모습을 뒤에서 보고있던 크라이츠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차라리 티격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가 훨씬 보기 좋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파트너를 못구해서 기분 나쁜 판국에 아주 속을 뒤집는걸? 이 황궁에는 왜이렇게 쓸만한 남자들이 없는지 원..."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뮤스는 위로라도 할 겸 입을 열었다. "쓸만한 남자들이 없다기 보다는 누님의 눈이 너무 높으신 것이 아닐까요?" 크라이츠는 뮤스의 말을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생각을 해보렴. 지상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과 어울릴 수가 있겠니? 음, 장영실경 정도면 어느정도 상대를 해줄만 한데..." 뜬금없이 장영실의 이름을 언급하던 크라이츠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고, 좋은 생각이 나기라도 한 듯 손뼉을 치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아하! 장영실경에게 부탁을 하면 되겠구나! 현혹계열 마법을 살짝 걸어준 후에 최면 마법을 쓰면 내 부탁을 거절 할 수 없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크라이츠를 본 뮤스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누님, 대체 무슨 생각을... 지금 장영실 아저씨는 마무리 작업으로 바쁘시답니다. 그러니 연회장에 가셔서 다른분을 찾아 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크라이츠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앞을 가로막고있는 뮤스를 유유히 지나쳐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고, 그녀가 결심한 이상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뮤스는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세이즈와 장신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있던 카타리나는 크라이츠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뮤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어? 크라이츠님은 갑자기 어디로 가시는 거니?" 하지만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기가 모했던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글쎄, 잠시 잊은게 있으신거겠지. 그보다 오늘 나가서 그 목걸이랑 귀걸이를 사온거야? 네게 굉장히 잘어울리는걸?"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나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고민도 하지 않고 사버렸지 뭐야." 뮤스의 칭찬에 금새 크라이츠에 대한 의문을 잊은 카타리나는 웃으며 목걸이를 뽐냈고, 하룻동안 있었던 일을 뮤스에게 들려주며 연회장으로 향하였다. 별관에 위치한 연회장의 입구에는 단정하게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문지기가 서있었다. 뮤스와 일행들이 연회장에 도착하는 것을 본 문지기는 몸에 베인 깍듯한 자세로 인사를 건넸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성함을 말씀해 주시고 초청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가방에 넣어놓았던 초청장을 꺼내어 보여주며 자신과 일행들을 소개했다. "도이첸 제국 라이델베르크 공학원 원장인 뮤스 드라켄과 일행들 입니다." 도이첸 제국 공학원의 원장이라는 소개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인 문지기는 뮤스 일행을 안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아! 뮤스원장님이시군요. 연회에 참석해 주신점 감사드립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뮤스와 일행들은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응접실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자 상아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나선형의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 아래에는 먼저온 손님들이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잡담을 나누며 원형의 거대한 연회장을 매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계단의 끝에 멈추어선 문지기는 아래쪽의 연회장을 향해 큰목소리로 말했다. "도이첸 제국 공학원의 원장님이신 뮤스 드라켄님과 그 일행분들이 연회에 참가하십니다!" 그의 목소리는 둥근 천장과 벽을 타고 퍼지며 넓은 연회장 전체에 울렸고, 잡담을 나누던 손님들은 소개된 인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계단의 위쪽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로서 문지기로서의 역할이 끝나자 뮤스와 일행들을 향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목례를 건네며 원래 있던 연회장의 입구로 돌아갔다. 장내를 한번 둘러본 뮤스는 카타리나의 손을 잡으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히안과 폴린, 벌쿤과 세이즈가 뒤따랐다. 이때 손님들의 시선은 한동안 이들의 모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소문만 무성하던 도이첸 제국 공학원 원장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다. 뮤스가 연회장까지 내려오는 모습을 확인한 손님들은 하나, 둘 그의 주변으로 다가 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뮤스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자신들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스윈 제국의 바르샤드 폰 비앙쉬 백작이라고 합니다. 원장님의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었는데,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샤빈 공국을 대표해서 온 크라펠 폰 알비움 백작입니다. 평소 흠모하던 원장님을 뵙게된 오늘을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군요." "듀들란 제국의 외교대신인 오켈라인 폰 라드플릭 입니다. 몇번 원장님을 멀리서 뵌적이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군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뮤스는 정신없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인사를 받아야만 했는데, 복잡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뮤스였지만,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저야말로 대륙의 고명하신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뵙게 되어 기쁨을 감출 수가없습니다. 이쪽은 저의 동료들로서..." 뮤스는 카타리나와 일행들의 소개도 잊지 않았는데, 특히 교제중이라고 밝힌 카타리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양해를 구하고 나서야 그들의 사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카타리나는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었는지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이었는데, 이를 본 뮤스는 안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신없었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겠어?" 뮤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카타리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응. 자리에 앉아서 조금 쉬면 괜찮아 질거야." 그녀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뮤스는 가까운 곳에 놓여있는 소파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카타리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힌 뮤스는 음식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조금 쉬도록해. 혹시 배가고프면 음식을 가져다 줄까? 아니면 마실 것이라도?" "아냐, 별로 음식 생각은 없는걸. 너는 어때?" "후훗. 나도 사람들한테 시달려서 그런지 별로 입맛이 없어." 몇마디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뮤스와 카타리나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연회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틈속에는 히안과 폴린 그리고 벌쿤과 세이즈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연회가 흥겹기만 했는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사람들과의 만남과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뮤스와 카타리나가 소파에 앉아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한 일단의 무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금속 갑옷으로 전신을 둘러싼 근위병들의 무리였는데, 비록 손에 무기를 들고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화기만연한 연회장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이어 그들은 뮤스와 카타리나의 앞까지 당도했고, 아무말 없이 굳은 자세로 멈추어 섰다. 당혹감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낀 뮤스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금속 갑옷의 근위병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더니 그들의 틈에서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 놀라실것 없습니다. 뮤스 원장님." 그리고 근위병들의 사이가 조금 벌어지더니 한 청년과 10살 가량의 여자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바로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와 투르코스 재상의 딸인 미뉴엔느였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뮤스는 근위병들을 한번 훑어 보며 물었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연회장에 이렇게 많은 근위병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시다니..." 황제 스스로도 머슥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미뉴엔느와 함께 연회에 가려고 방문을 나서는데 근위병들이 저를 보호한답시고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괜찮다고 해도 투르코스 재상의 특별명령이라고 막무가내더군요. 조금 귀찮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일이 생겨 버릴 줄이야." 황제의 옆에 있던 미뉴엔느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는데, 기대하고있던 연회가 근위병들로 인해 즐기지도 못할 판국이 되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뭐람. 조금 있으면 무도회가 시작될텐데 이래선 춤도 추지 못할 거라구요. 이 무서운 아저씨들이 같이 춤을 추지 않는다면말이죠." 입이 한치나 나온 미뉴엔느의 얼굴을 본 뮤스는 실소를 터트렸고, 카타리나에게 미뉴엔느를 소개해 주었다. "이 아이가 투르코스 재상의 따님이야. 이름은 미뉴엔느라고 하지." 예복을 귀엽게 차려입은 미뉴엔느를 본 카타리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주 예쁜 아가씨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괜찮다면 카타리나 언니라고 부르도록 해요." 미뉴엔느는 투덜거리던 기색을 바삐 감추며 예의 바르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미뉴엔느 드레스덴 이라고 한답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기뻐요, 카타리나 언니. 언니야 말로 굉장히 예쁘신걸요?" "투르코스 재상님의 따님이라면 듀들란 제국의 황족일텐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카타리나가 존칭을 쓰는 것이 불편했던 미뉴엔느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편안하게 미뉴엔느라고 부르시면 된답니다. 비록 혈통상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젊었을 때에 황족의 혈통을 거부하셨기에 저 역시 황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황궁에서 살지도 않고, 풀네임을 쓰지도 않는 거에요." 뮤스와 카타리나는 투르코스 재상가에 얽힌 이야기를 호기심 어린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에 대해 조금 들은 바가 있었던 황제는 내용을 덧붙일 겸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오래전 가비르 재상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듀들란 제국 선황의 형이었던 투르코스 재상은 원래 황제의 위를 계승할 황태자였다고 합니다. 당시 황실의 귀족들은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암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 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더욱 커지기를 원했고, 그 배경을 만들기 위해 형이었던 투르코스 재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동생이었던 선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황제위에 추대하려고 하였죠. 하지만 이들의 세력다툼에 휘둘리기를 싫어했던 투르코스 재상은 스스로 황족임을 거부한채 스윈제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답니다. 이후 투르코스 재상의 뜻에 따라 황제위에 올른 선황은 권력에 눈이 먼 귀족의 작위를 회수하여 추방시켰고, 지금의 황실기반을 닦게 된것입니다. 후훗, 어느 국가든지 황위 계승식 때만 되면 그런 말썽에 휩쌓이나 봅니다." 쓴웃음과 함께 긴 이야기를 마친 황제는 미뉴엔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지위를 떠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번인가 탄성을 터트렸고, 황제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공학자> 10-15,16 "제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답게 부풀려져서 떠도는 모양이군요." 돌연 뒤에서 들려오는 투르코스 재상의 목소리에 뮤스와 함께 대화하던 이들은 시선은 돌렸다. 그곳에는 연한 초록빛이 감도는 예복을 자려입은 투르코스 재상의 모습이 보이보였고, 바로 옆에는 역시 비슷한 색깔의 드레스를 입은 재상부인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목례를 한 투르코스 재상은 하던 말을 이었다. "당시의 일은 그저 제 욕심에 따라 황제위를 거부한 것이랍니다. 답답한 곳에 갖혀 살기에 적합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후훗, 무슨 말씀이신지 알것 같군요." 간단하게 인사를 한 투르코스 재상은 재상부인과 함께 뮤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우리 딸아이를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어제서야 집사람에게 들을 수 있었다네. 말로 그 고마움을 다 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자네에게 감사한다네." 옆에 있던 재상 부인 역시 그를 따라 허리를 깊숙히 굽혔다.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저희 딸아이를 구해주신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투르코스 재상 부부의 인사를 아무런 생각없이 앉아서 받고 있던 뮤스가 오히려 당황스런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침 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미뉴엔느의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몸을 일으키십시오." 그제야 투르코스 재상 부부는 몸을 일으켰고, 황제의 옆에 서있는 미뉴엔느의 얼굴을 보며 나직한 한 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그런 곳에 빠졌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말 아찔하더군. 자네 덕분에 안전하게 구출되었지만, 만약 자네가 그곳에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났을 것일세." 뮤스 역시 미뉴엔느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말했다. "공학기술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안전사고라는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니 앞으로도 따님이 겪은 사고를 잊지마시고, 안전에 더욱 신경을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일세. 앞으로 또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듯 하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젊은 황제가 양해를 구하며 끼어들었다. "저... 투르코스 재상.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린 투르코스 재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일입니까?"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은 황제는 자신을 둘러싼 근위병들을 탐탁치 않는 눈으로 훑어보며 대답했다. "뭐 자리를 옮길 것 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이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어 보이는 친구들 좀 물려주셨으면 할 뿐이니까요." 그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은 투르코스 재상은 고낯 내저었다. "모두 안전을 위한 것이랍니다. 만에 하나 신변상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말끝을 흐리고 있는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멋적게 웃은 황제는 근위병의 갑옷을 손으로 두들겼다. "이곳의 사람들은 저를 고듀트 외교대신의 친척쯤으로 알고 있는 상태인데, 이렇게 금속갑옷을 입은 근위병들이 이렇게 따라다닌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제 정체를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평범하게 행동 하는 편이 훨씬 좋을 듯 합니다만..." 평소였다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크라이츠의 일과 딸의 일때문에 자신의 정신이 산만해진 것을 느낀 투르코스 재상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제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었군요. 바로 이들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손짓을 하자 근위병들은 줄을 맞추어 연회장의 한쪽으로 물러났고, 그제야 주위를 훤히 둘러볼 수 있었던 황제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휴우, 이제 조금 살 것 같군요. 그럼 곧 무도회가 시잘될 것 같은데 함께 무도회장으로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제 파트너가 춤추는 것을 좋아 해서 말이죠." 황제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투르코스 재상 부부는 먼저 걸음을 떼며 무도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타리나에게 의견을 물은 뮤스 역시 그녀와 함께 무도회 장으로 향했고, 이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듀들란 전통 음악이 연회장의 중심에 넓게 마련된 무도회장으로 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자정이 다되어갈 무렵, 연회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될 시간이었지만 장내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무도회가 끝나게 되자 여성들은 마실것으로 목을 축이며 소파에 앉아 서로의 관심거리에 대해 수다를 떨었고, 남성들은 사람들은 연회장에서 만나 친분을 쌓은 이들과 함께 정치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들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한 연회장의 한쪽에는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서서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두명의 인물이 마주 앉아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뮤스였고, 다른 한명은 흰색의 수염을 멋드러지게 기른 노년의 인물이었다. 노년의 인물은 한참을 고심스러운 얼굴로 수염을 매만지더니 자신의 킹을 체스판에 눕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어, 내가 졌네. 대체 누구한테 체스를 배운 것인가? 내가 체스에 관심이 많아 여러사람과 수를 나누어 보았지만, 자네와 같은 수를 가진 인물은 처음 보네." 체스말을 정리하던 뮤스는 가볍게 웃었다. "하핫, 여행 중에 우연찮게 어떤분과 동행을 한 적이있엇는데, 그분이 체스를 즐기셔서 시간이 날때 마다 체스를 두었답니다. 그 때 조금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허! 자네의 실력이 조금 배운 것에 불과하다면 대체 그분의 실력은 어느정도라는 말인가? 혹 그분을 나에게 소개를 시켜 줄 수는 없겠나? 거처라도 가르쳐 준다면 그곳이 대륙의 어디더라도 찾아갈 의사가 있다네." 노년인의 물음에 그라프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린 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그분을 다시 만나고 싶지만, 워낙 방랑벽이 심하신 분이시라 거처가 정해져있지가 않습니다." "그것 참 아쉽구먼." "인연이 없으면 만나뵙기 힘드신 분이죠. 그럼 한번 더 두시겠습니까?" 뮤스가 묻자 노년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허헛! 벌써 여섯번을 내리졌다네. 지금의 실력으로는 더 이상 해봐야 자네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나의 저택에서 마련하는 체스 모임에 참석해 주지 않겠나?" "기꺼이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날을 잡아서 도이첸 제국 공학원으로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지. 오늘 정말 즐거웠다네." "별말씀을요. 저 역시 즐거웠습니다." 노년인은 자신의 패배에 아쉬움도 없다는 듯 가뿐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뮤스는 정중히 그를 배웅해 주었다. 먼 발치에서 따분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던 황제는 체스게임이 끝난 것을 확인했고 희색을 띄우며 뮤스에게로 다가갔다. "휴우... 이제야 끝이 난 듯 하군요. 마크듀엘 후작이 체스 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습니다. 연속해서 세시간 씩이나 체스를 두다니... 파트너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카타리나 양이 상심이 크겠는걸요?" 황제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뮤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버림 받은건 저인걸요." "버림받다니요? 두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정색을 하며 되묻는 황제를 보며 가볍게 웃은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하핫! 농담이었습니다. 사실 카타리나는 연회를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 무도회가 끝나고 친구들과 숙소로 돌아갔답니다. 저 역시 연회를 즐기지 않지만 마크듀엘 후작님께 발목을 잡혀 여지껏 남아있게 된 것이죠." 말을 잠시 멈춘 뮤스는 황제의 옆이 허전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보다 폐하야 말로 파트너에게 버림 받으신 것입니까? 미뉴엔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황제 역시 뮤스가 그랬던 것 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 파트너가 너무 어려서 그런지 밤이 깊어지니 꾸벅꾸벅 졸더군요. 지금쯤 투르코스 재상의 집무실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을 겁니다. 결국은 뮤스 원장님이나 저나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린 듯 하군요." "정말 그렇군요. 그럼 남은 사람들끼리 자리를 옮겨서 즐겨 볼까요?" 뮤스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황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 말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멋진 술을 한병 가지고 온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황제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뮤스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물론 괜찮겠지만, 오늘은 조금 자제를 하면서 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벨링궁에서 처럼 마셨다가는 황궁이 들썩 거릴 테니까요." "아무래도 손님으로 온 것이니 조금 자제를 해야겠죠?" 이로서 서로 의견을 맞춘 뮤스와 황제는 붐비고 있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출구로 향했고, 금새 사람들에게 가려지며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황제의 숙소에 딸린 응접실에서 뮤스와 황제는 술을 한잔씩 주고받으며 옛 이야기를 되씹는 중이었다. 뮤스의 얼굴은 고작 몇잔의 술로 벌겋게 달아 오른 상태였고, 황제 역시 눈동자가 살짤 풀려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들 모두 워낙에 술을 못마시는 체질이었기에 과하게 마시지 말자는 그들의 약속은 사실상 효력이 없는 듯 했다. 인상을 구기며 목을 태워버릴 듯한 독주를 힘겹게 삼킨 황제는 비어진 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이 쓴것을 왜 그렇게도 즐겨 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분이야 조금 좋아지긴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는 깨질듯 아파오고 속은 상처를 입은 듯 쓰려오는데 말입니다." 뮤스 역시 황제를 따라 자신의 잔에 부워진 술을 한입에 털어넣고 있었다. "저 역시 술맛을 아직 모릅니다. 막연하게 세상살이에 고단해진 사람들은 그 잠시뿐인 기분이라도 즐기고 싶은 심정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보고 있을 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요." "흠, 그런 것입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고민이 있는법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대륙에서 제일 가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를 가지신 폐하께서도 많은 고민을 가지고 계신데,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고민을 잠시나마 잊기위한 돌파구가 바로 술이라는 것이겠죠." "과연 그렇겠군요." "헌데 여기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기분이 좋을 때에도 술을 찾게 된다는 것이죠. 후훗..." 그들은 이렇듯 결론 없는 이야기들을 안주삼아 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가지 않아 술병은 바닥을 드러내었고, 황제는 비어버린 술병안을 들여다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술이 바닥나 버렸군요. 황궁안에서 술을 구할만한 곳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쉬워하는 황제의 얼굴을 본 뮤스는 손을 내저었다. "폐하, 술은 이쯤에서 그만 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마신다면 몸을 주체하지 못할 듯 하군요." "음... 하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데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딱히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후훗, 그렇다고 밤이 늦었으니 잠을 청하라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시죠. 벨링궁을 빠져나와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이니 만큼 조금이라도 더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으니까요." 뮤스 역시 약간의 취기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기에 이대로 잠을 청하기에는 아쉬움이 따르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필요한 것 같은군요. 마땅한 것이 있으려나..." 두 명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은 흥미거리를 찾기위해 머리를 맞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기를 한참, 뭔가가 떠오른 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고, 황제는 뮤스의 행동을 발견하고는 이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뮤스의 손에 들려나온 것은 푸른색의 액체와 붉은 색의 액체가 담긴 두개의 투명한 병이었다. 뮤스는 그것들을 불빛에 비추어 보며 침전물의 유무를 살폈고,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후훗, 이것을 조금 사용한다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궁금한 표정을 한 황제는 뮤스의 곁으로 다가가 유리병 안의 두가지 액체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약처럼 생기긴 했는데..." 황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유리병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딱히 정해놓은 이름은 없지만 편의상 카일락스 리퀴드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이 카일락스 리퀴드는 오래전 미개척지에서 만나게 되었던 카일락스라는 마물에게서 채취한 체세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랍니다." "카일락스라. 처음 듣는 마물의 이름이로군요." 낯선 마물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황제를 본 뮤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고대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서 세상에 아는 이들이 드문니까요. 그 중 암컷은 하늘을 날며 사람이나 동물들의 체액을 빨아먹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존재랍니다." "고대의 마물이라니... 어째서 고대에 멸종된 마물이 미개척지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까?" 뮤스는 심각한 얼굴로 되묻는 황제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그것까지 밝혀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개척지에서 만나게된 일행들과 힘을 합하여 번식지를 없앴으니 두번 다시는 볼 일이 없겠죠." "그건 참으로 다행이로군요. 그럼 카일락스 리퀴드라는 것에 대한 설명을 계속해 주시죠." 고개를 끄덕인 뮤스는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카일락스라는 마물은 아주 흥미로운 개성을 가지고 있답니다. 바로 그들의 몸이 투명하여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인데, 이것이야 말로 카일락스의 진정한 무기였죠. 후훗,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에서 웅웅거리는 카일락스의 날개짓 소리를 듣는 것은 굉장히 공포스러운 일이었답니다." 황제는 카일락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기에 마른 침을 삼키며 뮤스의 이야기에 몰입중이었다. "어쨌든 저는 카일락스가 어떠한 원리로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지 궁금했기에 사체의 표피 일부분을 채취했고, 공학원으로 돌아온 후 조금씩 시간을 내어 연구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결국 의문을 풀어 낼 수 있었죠." "음... 그러니까, 그 카일락스라는 마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를 밝혀낸 것이로군요." "네, 맞습니다. 바로 비밀은 카일락스의 특수한 표피에 있었는데, 그들의 표피는 빛을 흡수하여 반대편으로 방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뮤스의 설명이 선듯 이해가 되지 않았던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설명만으로는 어떤 원리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하핫! 물론 그러실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원리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지요." 잠시 말을 멈춘 뮤스는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거울 두개를 꺼내었다. 술병과 안주거리가 놓여있던 탁자의 한쪽을 치운 뮤스는 거울 두장을 등지게하여 세워놓았고, 그 사이에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세상의 모든 물체가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빛의 작용 때문이랍니다. 빛의 입자가 어떠한 물체에 닿게되면 그 물체는 반사율에 따라 빛을 반사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람의 망막에 닿아 물건을 식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뮤스는 거울을 가리켰다. "자, 이제 여기있는 거울을 보도록 하시죠. 거울은 물체에서 방출하는 빛을 흡수하고, 같은 양의 빛을 방출하는 역할을 하는것이랍니다. 즉,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보는 행동을 복잡하게 해석하자면, 내 얼굴에서 방출한 빛이 거울에 반사되어 다시 내 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죠." 처음 접하는 개념이었지만 알아듣기 쉬운 뮤스의 설명 덕분에 황제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 지고 있었다. "조금 헷갈리기는 하지만,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다. 후훗, 단순히 거울을 들여다 보면서도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해야하니 뮤스 원장님도 참으로 고달프시겠군요." 황제의 농담을 가볍게 웃어넘긴 뮤스는 설명을 계속하였다. "하핫! 폐하의 말씀대로 타인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자 이제 한가지 가정을 해보도록 하죠. 여기 등지고 서있는 두개의 거울이 어떠한 이유로 서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뒤쪽의 거울이 받아들인 빛을 앞쪽의 거울에서 대신 방출한다고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나가는 물음이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던 황제는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진 거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뒤쪽 거울에 비춰진 세상을 앞쪽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군요. 마치 투명한 유리를 들여다 보듯이..." 황제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뮤스는 호쾌하게 무릎을 쳤다. "바로 그것입니다! 거울들 사이에 제 손이 들어갈 만큼의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는 것이죠. 카일락스의 표피가 바로 그러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즉, 빛을 흡수하여 반대쪽으로 방출하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랍니다." "호오, 정말 신기한 일이로군요." 탄성을 지른 황제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 듯 푸른 액체와 붉은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들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 유리병안의 카일락스 리퀴드는..." "이제 대충 눈치를 채셨군요. 바로 사람의 피부가 카일락스의 표피와 같은 작용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액체입니다. 카일락스는 표피는 총 23쌍의 전면 표피와 후면 표피를 가지고 있는데, 전면표피에서 받아들인 빛은 후면 표피로, 후면에서 받아들인 빛은 전면 표피로 전달하여 방출하게 되는 것이죠. 각각 푸른색 카일락스 리퀴드는 전면표피, 그리고 붉은색 카일락스 리퀴드는 후면표피에 해당하는 피부를 만들어주고, 전신의 모발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답니다. 물론, 안전상의 문제도 없습니다. 피부층에서만 활동을 하도록 만들었고, 설령 몸속까지 침투를 한다고 해도 혈액속의 항체를 이겨내지는 못할 테니까요. 에, 또..." 뮤스의 설명이 길어질 듯하자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것을 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설명은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헌데, 설마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것은 아니겠죠?" 설명하는데에 한참 심취해 있던 뮤스는 황제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물론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체온에서만 왕성한 활동하기 때문에 체온이 변하게 되면 저절로 괴멸해 버리죠. 따뜻한 물이나 차가운 물로 씻으면 금새 본래대로 돌아오게 된답니다." 이 질문을 마지막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된 황제는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유리병을 뮤스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이제 직접 해보도록 하죠.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것입니까?" 장난 꾸러기 같은 황제의 표정을 보며 빙그레 웃은 뮤스는 두개의 유리병을 받아 그 뚜껑을 열었고, 두개의 면봉을 꺼내어 각각의 병에 담구며 대답했다. "간단하답니다. 몸의 앞뒷면에 이 카일락스 리퀴드를 각각 찍어 주는 것이죠. 상의를 벗으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짧게 대답한 황제는 서둘러 단추를 풀어 셔츠를 내렸다. 이로서 황제의 맨살이 드러나자 뮤스는 병에 담궜던 면봉을 꺼내어 그의 곁으로 다가갔고, 눈대중으로 위치를 가늠하며 명치 부분과 등의 한가운데에 두가지 색의 카일락스 리퀴드가 묻은 면봉을 찍었다. 한 발자국 물러난 뮤스는 그의 가슴과 등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후, 카일락스 리퀴드가 피부로 흡수되고, 피부층의 단백질과 반응하여 세포분열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가슴에 묻은 푸른색의 카일락스 리퀴드와 등에 묻은 붉은 색의 카일락스 리퀴드는 천천히 피부속으로 스며들며 은은한 빛을 발하는 중이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황제는 난생 처음 겪는 신기한 현상을 아무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스스... 어느 순간이 되자 푸른빛과 붉은빛은 빠른 속도로 몸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가슴을 넘어 아래로는 배, 위로는 목까지 닿는가 했더니 금새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두가지의 빛이 만나게 된 경계선이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본 뮤스는 팔짱을 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서로 맞닿게 된 전면표피와 후면표피가 유기적으로 결합을 하게되는 것이죠." 뮤스의 말대로 투명한 경계선은 점차 넓어졌다. 그럴수록 황제의 몸은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그 원리를 이해하고, 직접 눈으로 보고있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믿기 힘든 기색이었다. <대공학자> 10-17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장 잠입.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고요한 복도를 두 명의 근위병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잠의 기운이 진하게 걸려있었고, 입에서는 끊이지 않고 하품이 나오는 중이었다. "하아암..." 하품을 하면서 나온 눈물을 슬쩍 옷소매로 닦은 근위병들 중 한명은 못마당한 표정으로 동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힘들게 근위병 임용 시험을 통과했더니 고작 한다는게 따분한 순찰이라니." 그의 불만에 찬 목소리를 듣고 있던 또래의 동료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시덥잖은 소리는 치우라고. 그럼 너는 처음 부터 황제폐하의 경호를 맡기라도 할줄 알았던거냐?" "뭐 그런건 아니지만, 타국의 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밤잠을 설칠 거라는건 생각 못했지. 게다가 대부분 연회에서 신나게 놀고있을테니 빈방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우리같은 말단 근위병들이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거야. 괜히 투덜거려봐야 우리속만 상하니 손해잖냐. 그러니까 잠이 오더라도 조금만 참는게 상책이라니까." 동료의 위로에 나직한 한숨을 내쉰 근위병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발자국을 소리를 들으며 걷던 두 근위병은 문득 복도 바닥에 떨어진 흰색의 천을 발견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음, 저게 뭐지? 누가 떨어트러 놓은것 같은데?" "테이블 천인 것 같군. 궁녀들이 일하면서 흘린것인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근위병들은 그것을 줍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가서 보니 그들의 예상대로 테이블 천임을 알 수 있었다. 어께를 으쓱거린 근위병은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헤유, 아무튼 이번에 새로 들어온 궁녀들은 어딘가 모자라는 것같아. 매번 실수를 저질러서 윗사람들도 골치를 썩고있다고 하더군." 궁녀들의 흉을 보고있는 그를 보며 피식웃은 동료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도 고작 네달밖에 되지 않았잖아. 궁녀들을 흉볼 처지가 될지 모르겠군." "쳇, 말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건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한 근위병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테이블천을 낚아 챘다. 하지만 손이 허전함을 느껴야만 했는데, 분명 자신의 손에 잡혀있어야 할 천이 바닥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어라?"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한 근위병은 다시한번 테이블천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할 테이블천이 그의 손을 피하듯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놀란 근위병은 말까지 더듬거리며 동료를 바라보았다. "처..천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분명이 너도 봤지?" 동료 역시 그것을 봤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나..나도 분명히 봤어!" 그리곤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려는 듯 테이블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역시 테이블 천이 그의 손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이로서 자신들이 잘못본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된 근위병들은 무서운 마음에 뒤로 물러나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황궁의 근위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로서 이 정도에 꽁무니를 빼며 도망갈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분명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거야." "그..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테이블천이 혼자 움직일리는 없잖아? 침착하자고." 이렇게 이번 일을 합리화 시킨 그들은 서로에게 눈치를 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어느순간 한명이 고개로 신호를 하였고, 동시에 테이블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얏! 잡고야 말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천이 있던 자리 위를 몸으로 덮친 근위병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테이블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자신의 배밑에 깔려있어야 할 테이블천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경험하게된 근위병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대..대체 어디로 간거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해?!" 짜증스런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른 근위병은 동료를 밀쳐내며 바닥에 엎드려있던 몸을 뒤집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인지 바닥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 본 근위병은 입을 쩍 벌리며 기겁한 얼굴을 했고,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따라 천장을 올려다본 동료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들의 눈앞에는 기괴하게도 흰 색의 테이블 천이 하늘 거리며 공중에 떠있는 것이었다. 이쯤되니 더 이상 누군가의 장난이라 생각 할 수 없었던 근위병들은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아악!" "유..유령이다! 도망쳐!" 하지만 근위병들의 생각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거의 바닥을 기다시피 했고, 병장기를 내던진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줄행랑을 쳤다. 이리하여 근위병들의 모습이 복도끝으로 거의 사라지게 되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푸하하핫! 저들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황궁 근위병들도 유령은 무서워 하나봅니다." 다름아닌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의 목소리였고, 곧 뮤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핫, 물론 보다마다요. 근위병들도 사람이니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죠. 헌데, 벌써 다서번이나 같은 장난을 쳤는데, 앞으로도 계속 하실생각이십니까?" "음... 글쎄요. 이제 조금 다른 것을 해보고 싶기도 한데,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으십니까?" 황제의 물음에 뮤스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설레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국개발 사업 발표회장을 먼저 구경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낮에 보니 경비가 굉장히 삼엄하던데, 뭔가 대단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겠죠?" 허공에서 손뼉을 치는 소리가 나며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재미있겠군요! 어차피 내일이면 볼 수 있을테니, 조금 빨리본다고 크게 나쁠것은 없죠." "물론입니다. 나쁜 뜻을 가지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럼 저를 잘 따라오십시오. 황제폐하나 저 역시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도중에 놓칠수도 있습니다." 뮤스의 말에 황제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훗! 그보다도 옷을 모두 벗고 황궁을 활보한다는 것이 정말 어색하군요. 설마 도중에 카일락스 리퀴드의 작용이 멈춘다거나 하지는 않겠죠?" "후훗,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하긴, 어차피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옷을 좀 벗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발표회장으로 가보도록 하죠."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뜻을 맞춘 뮤스와 황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장으로 향했고, 허공에 떠있던 테이블천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쟈트란 황궁의 북쪽, 세상의 그 누구라 하더라도 감탄사를 아끼지 않을 만큼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야경이 있었다. 먹을 뿌려놓은 듯 검은 밤하늘 아래에 은은한 백색의 빛을 발산하고있는 반구형의 거대한 건물이 바로 그것이었다. 5층 정도 됨직한 그 건물은 신기하게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철골과 두터운 천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설계의 건물이었는데, 내부를 밝힌 빛이 건물을 뒤덮은 천을 통과하면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철골로 뼈대를 세운 거대한 움막과도 같은 이 건물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짝이는 두쌍의 둥근 눈동자 만이 허공에 떠있었는데, 정녕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기괴한 광경이었다. 바로 뮤스와 젊은 황제의 눈동자였다. 카일락스 리퀴드의 효용으로 피부와 모발은 숨길 수 있었으나, 점막으로 이루어진 눈동자까지는 그 효용이 미치지 못했기에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뮤스는 황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곳이 바로 내일 제국개발사업 발표회가 열릴 장소입니다. 얼마전 우연찮게 지나치다 보니 많은 경비병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더군요.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실눈을 뜨고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눈동자가 빛을 반사하면 쉽게 그들의 눈에 띄일테니까요." 뮤스의 언질을 들은 황제는 눈을 가늘게뜨며 대답했다. "하핫. 그 점은 이미 숙달 되었으니 걱정 마시죠. 그보다 저러한 건물은 난생 처음 봅니다. 벽돌대신 철골과 천으로 만든듯 한데, 바람이라도 조금 세게불면 날아가버릴 듯 약하게 생겼군요." 뮤스는 건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설계도를 보지 못한 이상 상세한 부분까지 알수는 없겠만, 바람으로 인해 건물이 훼손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건물의 형태가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반구형이고, 건물의 곳곳에는 바람을 흘려보내는 통풍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 뼈대 역할을 하는 철골 구조물 또한 치밀한 역학적 계산을 통해 설계되어있는 듯 하니, 벽돌로 만든 건물들과 비교하더라도 견고성 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들이 거주하는 용도의 건물이 아닌만큼 벽돌건물보다 저러한 철골구조의 가건물을 짓는 편이 비용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에서 득이된다고 판단했던 것이겠죠." 뮤스의 설명에 황제는 나직한 탄성을 질렀다. "호오, 역시 만만히 볼만한 사람들이 아니로군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라는 경제학의 기초 원리를 철저히 지키고 있으니... 말이야 기초원리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죠." "후훗! 그만큼 자신이 있으니 대륙전체를 상대로 이러한 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들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죠." 뮤스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먼저 걸음을 옮겼고, 황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뮤스와 황제는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열릴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새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까지 닿을 수 있었고, 동시에 경비병들의 움직임을 알아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채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 뮤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분명 낮까지만 해도 많은 경비병들이 울타리 주변을 돌며 감시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명도 보이지 않으니..." 뮤스와 같이 주변을 살피던 황제 역시 주변이 너무나 조용함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경비병들이 몇명만 있더라도 이리 조용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울타리가 너무 높으니 경비초소가 있는 정문쪽으로 가보도록 하죠."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몇 마디의 대화를 주고받은 그들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하며 정문을 향했다. 잠시 후 정문에 도착하게된 뮤스와 황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바로 십여명에 달하는 경비병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서 땅바닥이나 경비초소등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뮤스는 급히 그들 중 한명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공격받은 상처 따위를 찾아 볼 수 없었던 뮤스는 더욱 깊은 의문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로군요. 둔기로 맞거나 칼에 베인 상처가 없는데, 이렇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니... 게다가 모두들 잠을 자듯이 평온한 표정들입니다." 눈앞의 경비병들을 바라보던 황제 역시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말했다. "칼을 뽑은 흔적도 없습니다. 또, 전투가 있었다면 다른 건물에서도 충분히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 줄곳 조용했으니 침입자가 있었던 것은 아닌듯 하군요." 황제의 말을 조용히 듣고있던 뮤스는 뭔가 짚히는 것이 있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누님께서? 그러고보니 연회장에서 누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군. 흠, 누님이 수면 마법을 사용했다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지." 다시 한번 경비병들을 살피고 나서야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뮤스는 가뿐한 마음으로 황제와 함께 건물의 입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공학자> 10-18,19 길이가 무려 150멜리에 달하고, 폭 또한 100멜리는 족히 됨직한 드넓은 실내공간, 바로 이곳이 내일 제국개발사업 발표회가 열릴 장소였다. 높은 반구형의 천장에는 대형 전뇌등들이 촘촘히 박혀 발표회장의 내부를 대낮처럼 밝혔고, 그 주변에는 이곳을 방문할 손님들에게 환영의 뜻을 알릴 형형색색의 천들과 휘장들이 멋드러지게 걸려있는 모습이었다. 넓은 발표회장의 곳곳에는 십여가지의 크고 작은 전시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물들은 아무런 여과없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발표회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전시물만은 흰색의 천에 뒤덮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의 중심이 될 전시물임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각각의 전시물들에는 흰색의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밤잠을 잊은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매달려 있는 중이었다. 더운 날씨로 인해 이마에는 구슬땀이 쉴세없이 흘렀지만, 소매로 땀 훔칠 여유조차 없었던 그들은 꼼꼼한 손놀림으로 연장들을 움직이며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치지지지직... 치지지직... -까앙! 까앙! 갖가지의 연장 소리가 쉴세없이 울려퍼지고 있는 발표회장의 한 곳에서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다름아닌 장영실과 루스티커, 그리고 켈트와 크라이츠였는데, 크라이츠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특이한 형태의 전뇌거에 붙어 부속들을 하나씩 점검하는 중이었고, 마땅히 도울 만한 일이 없었던 크라이츠는 나무를 쌓아 만든 간이 의자에 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이 하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손에 설계도를 들고 부속을 점검하는 켈트를 바라보던 크라이츠는 눈앞에 서있는 기이한 모양의 전뇌거에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켈트씨, 그런데 이 전뇌거는 어디에 쓰는 것이죠? 바퀴 모양도 이상하고, 전뇌거의 앞뒤에 갈퀴같은 것도 달려있군요." 크라이츠가 물어오자 어깨를 으쓱인 켈트는 조임쇠로 장영실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껄껄! 저 역시 처음 보는 물건이라 잘 모르겠군요. 루스티커 저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요. 차라리 저기있는 장영실경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문득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듣게된 루스티커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 참, 막무가내로 발표회장을 구경시켜 달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모셨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억지로 끌고 왔다니요. 뭐 억울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방으로 들어가 함께 술이나 마시도록 하시죠." 하지만 그런 기억없다는 듯이 능청맞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은 켈트는 다시금 하던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이 맡은 일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를 만들고, 고치고, 정비하는 일 자체가 즐거웠던데다가,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에서 보지 못한 기기들을 새롭게 접한다는 것은 그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일이었기에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짓땀을 흘리며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땅땅! 연장으로 본체를 몇번 두들겨 조립 상태를 확인해본 장영실은 목에 걸고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크라이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전뇌거는 거리를 달리는 주행용 전뇌거가 아니라, 농사일을 돕기위해 고안된 전뇌거랍니다." "호오, 농사에 전뇌거를 이용한다니 아주 흥미로운 일이로군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 드려도 될까요?" 크라이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장영실은 기름때가 묻은 작업용 장갑을 벗으며 굵직한 목소리로 설명을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5할 이상이 농업에 관계된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현 시점에서 한 해의 농작물 수확량은 한 국가의 재정을 좌지우지 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과거부터 황실에서는 농업을 공식적으로 장려하고, 농작물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여러가지의 농법들을 개발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유지에서 개인이 작농을 하는 듀들란 제국의 농업 특성상 농법의 변화로만 농작물의 수확량을 늘리기에는 한계가있었습니다. 게다가 일정한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농촌의 젊은이들이 힘든 농사일을 기피하여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오히려 농작물의 수확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국가 재정을 뒤흔드는 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기본 생활유지비가 상승하는 등 국민들의 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죠." 켈트와 투르코스 역시 어느새 하던 일을 멈추며 장영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이유로 농업에 대한 지원을 재국개발사업의 한 분야로 지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 농업용 전뇌거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 있는 농업용 전뇌거는 일손을 많이 필요로하는 작업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는 작업 부터, 토지에 물을 대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작업까지 이 한대로 쉽고 빠르게 끝낼 수 있는데, 점차 일손이 부족해지고 있는 농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있습니다. 이 농업용 전뇌거는 약간의 보증금만으로 농민들에게 3년간 대여해주게 되고, 그 이후 일정한 금액을 황실에 지불하면 농민 개인 소유로 이전 된답니다. 이 밖에도 황실에서는 경작지 정리와 수로건설등의 사업을 장기적으로 시행할 예정입니다." 장영실에게 세부적인 설명을 듣고있던 크라이츠는 가벼운 탄성터트리며 놀라움을 표하고 있었다. "과연, 공학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생각의 깊이도 다르군요. 비단 듀들란 제국 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장영실경이 말씀하신 문제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대륙의 뛰어나다는 두뇌들이 모여 도시집중 현상의 해결 방안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돌파구를 장영실경이 제시해 주는 듯 하군요." 크라이츠의 칭찬에 머쓱함을 느낀 장영실은 머리를 긁적였다. "과찬이십니다. 실용성 검증이 끝난 상태라고는 하지만, 이 농업용 전뇌거가 사회에 어떠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올지는 짐작할 수 없으니 그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두고 봐야 알겠지요." 장영실의 설명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켈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헛! 이 농업용 전뇌거를 이용하게 되면 최소한의 인건비로 더 많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 만으로도 자네가 추진하고 있는 일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일세. 애써 젊은이들의 도시집중 현상을 막지 않는다해도 농작물의 수확은 안정되고, 젊은 노동력은 다른 분야로 돌릴 수 있을테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는 샘이라 할 수 있지. 껄껄! 이와 같이 유익한 기기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점차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게 될걸세." 장영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정확히 짚고있는 켈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이내 씁쓸함을 느낀 그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조용히 입을 열었다. "켈트님의 말씀대로 공학기술의 이상이란 참으로 멋진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고, 어려움을 손쉽게 해결해주기도 하는 마술과 같은 것이니까요." 안색이 어두워진 장영실을 보며 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것인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는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인가?" "크라이츠님이나 켈트님도 충분히 아시겠지만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는 듀들란 제국이 가진 공학기술을 타국에 자랑하기 위해 마련 된 자리입니다. 순수하게 공학기술을 전시하고 알리는 자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간의 이권의 다툼에서 듀들란 제국의 입지를 돈독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학기술이라는 것이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만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쓰여져야 할 공학기술을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내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팔짱을 낀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있던 크라이츠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영실경의 말뜻은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공학기술의 순수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말에는 수긍 할 수는 없네요. 국가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어떠한 형태로든 과시성 행사를 주최하는 것은 오래 전 부터 있어왔던 것이랍니다. 그런 류의 행사들은 국가간의 경쟁심을 유발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행사를 통해 열등성을 깨달게된 국가들은 더욱 발전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이죠." 장영실의 얼굴을 잠시 살핀 그녀는 턱을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거듭되는 경쟁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답니다. 남을 이기고 높을 곳에 올라서고자 하는 인간의 습성이 그대로 반영 된 것이죠. 그 과정에서 때때로 추악함을 보이긴 하지만 결국 그러한 경쟁심으로 인해 지금에 와서는 여러 종족들 중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 말에 잘못된 점이라도 있나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없으리 만큼 논리적인 그녀의 이야기에 장영실은 고개를 내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정말이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예리한 말씀이셨습니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 공학기술이 가진 위치를 생각해 보신다면 뭔가 잘못된 점을 찾아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 대륙에는 28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있습니다. 듀들란 제국이나 도이첸 제국, 그리고 스윈제국과 같은 강대국이 있는가하면, 자급자족 조차 힘든 공국이나 도시국가들 또한 많은 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또, 대륙의 인구 분포를 본다면 듀들란과 도이첸, 이들 양대 제국에 대륙의 총인구 중 반수가 거주하고, 나머지 반수는 군소국가들에 분포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정도는 씨니어 스쿨에서 배우는 내용이니 충분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크라이츠는 그 내용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실은 켈트와 루스티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공학기술은 저와 뮤스를 통해 이제 막 대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만큼 저와 뮤스가 거주하고 있는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만이 공학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지요. 이것이 과연 대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저는 공학기술이라는 힘을 바탕으로한 양국의 횡포로 이어질 것이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듀들란 제국과 도이첸 제국이 공학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면, 양국은 자연스럽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으로의 공학기술 유출을 제한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군소 국가들에 거주하는 사람들. 즉, 대륙인구의 반수에 달하는 사람들이 공학기술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채 살아가게 되고, 강대국과 군소국가 간의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질테죠. 오히려 강대국의 국민들 보다 군소국가의 국민들이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공학기술의 혜택이 더 절실한데 말입니다. 후훗, 제가 과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늘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결국 장영실의 이야기는 크라이츠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크라이츠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고있던 켈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라이츠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역정을 내기는 커녕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까지 피워올리고 있었는데, 켈트는 오히려 그러한 크라이츠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루스티커가 침중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뒷짐을 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음... 자네가 과민한 것이 아닐세.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나 역시 국가 정책의 결정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자네가 하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네. 이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가 끝나게 되면, 황실은 대규모의 투자를 감행하여 공학기술을 제국 전역에 보급하게 될 것이고, 한발 먼저 공학기술 보급을 시작한 도이첸 제국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겠지. 어차피 황실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권력 신장과 자국 국민들의 안녕에만 신경을 쓰면 되는 것이니 자네의 말대로 타국 국민들의 생활까지 걱정해 줄 아량은 가지고 있지 않다네." 잠시 턱을 매만지며 크라이츠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켈트가 루스티커의 이야기에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쯔쯧... 인간이란 족속들은 너무나 욕심이 많지. 주신께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위해 내려주신 신성한 대지에 마음대로 금을 그어놓고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하는가 하면, 그 땅 안의 모든 동식물들을 소유물로 생각하기도 한다네. 게다가 이 대륙을 통털어 같은 종족끼리 싸우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지 않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족속들인가? 지능이 높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미개척지의 마물들이나 별다를 바가 없는 족속들이지. 눈앞의 이해관계를 떠나 조금만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을..." 켈트의 신랄한 비판에 루스티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채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꿀 뿐이었다. 루스티커에게 다가간 켈트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 그렇게 풀죽은 얼굴은 하지 말게나.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친구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볼품없어 보인다네. 다만 자네가 장영실경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듀들란 황실에 좋은 방향으로 말해주었으면 좋겠구먼.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잘 살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듀들란 제국의 황실이 직접 나서서 모든 국가들을 도와주지는 못한다해도, 그들에게 공학기술을 전해주어 스스로 발전 할 기회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켈트의 이야기에 루스티커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먼저 듀들란 제국 황실의 입장을 먼저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해야겠군요. 겉으로 드러내고있지는 않지만, 듀드란 제국의 황실은 장영실경과의 계약이 끝난 이후의 일들을 걱정하고 있는 단계랍니다. 내년 중순쯤이면 장영실경은 1차 제국개발사업을 마무리 짓고서 듀들란 제국을 떠나게 되는데, 그 이후 장영실경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죠. 반면 도이첸 제국의 경우, 뮤스 원장이 계속해서 체류하며 공학원을 이끌게 될테니, 시간이 지날수록 두 국가간의 공학기술력 차이가 크게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이랍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듀들란 제국 황실로서는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허헛! 본국의 앞날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인 만큼 중소국가들을 도울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쪽과 협상을 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뜻을 제대로 전한다면 그 쪽에서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듯한데..." 하지만 루스티커는 그것 역시 쉽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협상 제의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쪽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상대측에서 협상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본국에서 협상을 제의 했다가 도이첸 제국에서 거부를 하기라도 하나면 국가의 위신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협상을 제안하려 해도 대신들과 황실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니까요." 켈트는 이야기가 복잡하게 진행되자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도무지 인간들의 정치는 알 수가 없군. 세상을 복잡하게 살기위해 안달하는 것 같단 말이야. 후훗..." 루스티커와 켈트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크라이츠는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조금 떨어진 나무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몰래 지켜 보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으음?"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커녕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 거린 그녀는 더욱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는데..." 두리번 거리는 크라이츠를 본 장영실이 물었다.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장영실의 물음에 잠시 대답을 미룬 크라이츠는 눈을 감으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드래곤 특유의 예민한 후각이 발휘되면서 코에 익숙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고, 이에 담담한 미소와 함께 눈을 뜬 그녀는 시치미를 떼 듯 고개를 저으며 장영실을 향해 대답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부의 공기가 조금 탁한 것 같아서요." 나무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을 향해 장영실 몰래 윙크를 해보인 크라이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켈트와 루스티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장으로 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황궁의 뒷뜰, 푸른 잔디밭의 중심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주변으로는 잠시 앉아 쉴만한 나무 벤치들과 어두움을 밝히는 조경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에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를 제외한다면 그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끼이익. 돌연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연못으로 가장 가깝게 붙은 나무벤치 하나가 조금 흔들리는 중이었는데, 벤치가 상당히 묵직했기에 바람의 행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어 벤치 위의 허공으로 부터 한 젊은이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핫, 정말 뮤스 원장님의 누님은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곳에 우리가 있는 것을 알아채다니 말입니다. 정확히 제 눈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실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딱하고 멈추는 줄 알았답니다." 맑으면서도 은연중에 힘이 실려있는 음색을 가진 도이첸 제국 젊은 황제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중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황제의 옆자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는데, 바로 뮤스의 목소리였다. "저 역시 누님이 눈치를 채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은 모른척하고 넘어가 주셨지만, 내일은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물으실 것이 분명한데 누님께 시달리게 될 것을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뮤스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황제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달리시다니요? 설마 저렇게나 고아해 보이시는 분이 뮤스 원장님에게 짖굿은 행동을 하시라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의 물음에 뮤스는 입을 달싹거리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후우, 고아하다니... 누님께 속고 있으신 겁니다." 하지만 너무나 작은 목소리였기에 황제는 그 말을 못들은 듯 했고, 뮤스는 화제를 돌릴겸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하핫, 뭐... 그보다 발표회장 구경은 어떠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훗, 제가 보기만 한다고 해서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이번 제국개발 발표회에 듀들란 제국이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뮤스 원장님이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개인의 능력으로 그만한 규모의 공학원을 일으켜 세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잠을 자다가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답니다." 크라이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황제에게 밝힐 수 없었던 뮤스는 가벼게 황제의 말을 받아주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 이후 제국 전역으로 규모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은 황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하하핫! 황실에서는 꼼꼼히 실리를 따져 행동했을 뿐입니다. 투자한 비용에 보다 더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죠. 공학원에 투자를 하고있는 다른 상가의 귀족들 역시 그런 생각이 아니었겠습니까? 황실의 명령만으로 그 만한 투자를 할만큼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긍정적으로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황제가 말끝을 조금 흐리는 듯 하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뮤스원장님은 발표회장에서 장영실경이 꺼낸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을 되짚어 보던 뮤스는 황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깨달았다. "아, 공학기술에 대한 이야기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답니다. 솔직히 강대국의 횡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으니까요. 우리 도이첸 제국 황실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있었던 사항이지만, 그들이 언급했듯이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강대국의 횡포라 부르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황제의 목소리는 무겁게 변해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뮤스는 오히려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핫, 걱정이 되시나 보군요. 그말인 즉, 폐하께서는 장영실아저씨의 의견에 찬성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개인적인 생각이야 그렇지만..." 황제는 잠시 갈등하는 듯 했고, 뮤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녕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고 계신다면, 우려하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찌 그렇게 장담을 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까?" 황제의 되물음에 뮤스는 전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바로 그것이 폐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있는 폐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의 불행을 지켜보고 있을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폐하 밑의 대신들 역시 그러한 폐하의 뜻을 충분히 받들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야 그렇지만... 본국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 아닙니까?" 우려섞인 황제의 말을 들은 뮤스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스티커님도 말씀하셨듯이 이 일의 열쇠를 쥐고있는 쪽은 바로 도이첸 제국입니다. 부디 그점을 유념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결국은 제 결정에 달려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황제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뮤스는 몸을 일으켰다. "초여름이라도 밤날씨는 제법 쌀쌀하군요. 밤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숙소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고민에 빠져있던 황제 역시 뮤스의 말대로 몸이 싸늘해짐을 느끼며 벤치에서 일어났고, 손으로 털이 곤두선듯한 몸을 부비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보니 조금 춥군요. 감기나 걸리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맘때 감기에 걸리는 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것이 없는데..." 몸을 부비던 중 손이 촉촉하게 젖음을 느낀 황제는 의아한 눈빛으로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조경등의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는 물방울이 손끝에 맺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그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뮤..뮤스 원장님, 이..이것이?"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에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는 뮤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이슬이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이슬점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카일락스 리퀴드의 세포들이 괴멸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한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옷을 하나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이대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나름대로 냉정함을 유지한 뮤스는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세포들이 완전히 괴멸할 때까지는 5분 정도의 여유가 있습니다. 형체를 식별할 수는 있겠지만, 얼굴까지 알아보지는 못할테니, 지금부터 숙소를 향해 열심히 뛰는 수 밖에요." "뛰더라도 5분내에 숙소까지 도착하는 것은 무리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으쓱거린 뮤스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대답했다. "하핫, 하지만 나체로 이곳에 서있을 바에는 시도라도 해봐야겠지요. 그럼 서두르도록 하죠!" 말을 마친 뮤스는 황제에게 손짓을 하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뮤스의 뿌연 뒷모습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듀들란 제국 황실에서 대대로 전해질 '나체유령전설'의 바탕이 되는 사건이었다. <대공학자> 10-20 제국개발사업 발표회. 동녘에 해가 떠오르며 제국개발사업 발표회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궁녀들은 발표회가 시작되기전 귀빈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궁내를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는데, 저 마다 아침식사의 성향이 달랐기에 가볍게 스프와 빵을 나르는 궁녀가 있는가 하면 만찬에 버금가는 화려한 요리들을 나르는 궁녀들의 모습도 눈에 띄고 있었다. 비교적 일을 빨리 끝낸 궁녀들은 한숨을 돌리며 복도에 위치한 대기 장소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특별히 재미있는 일이 있을리 없는 궁의 생활에서 짬짬히 하는 잡담은 그녀들의 유일한 여가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오늘과 같이 연회가 있었던 다음날이면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쏟아져 나왔기에 그녀들의 입과 귀가 즐거웠던 것이었다. 분홍색의 리본을 머리에 묶은 궁녀가 동료 궁녀들을 바라보며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너희들 어제 로텐그라스 백작님 봤니? 아아... 소문대로 대단한 미남이시더라! 그 뽀얀 피부에 오똑한 콧날, 멋진 수염... 나 정말 한눈에 반해 버렸어." 그녀의 말에 검은 머리의 궁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풋! 물론 멋지긴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로텐그라스 백작님이 여자관계가 복잡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대부분의 잘생긴 남자들은 얼굴값을 하느라 제대로 된 사람이 없는 법이지." "그럼 너는 누가 마음에 든다는 거니?" 동료의 물음에 검은 머리의 궁녀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뮤스 드라켄 공학원 원장님이 제일 괜찮던걸? 그 눈동자를 보면, 뭐랄까...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더라고. 사람을 잡아 끄는 신비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분홍리본의 궁녀는 심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뭐 아무리 신비하고 사람을 잡아 끌어봐야 어차피 애인이 옆에 딱 붙어있잖아. 카타리나라는 여자애 말이야."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검은머리 궁녀는 손가락을 내저었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 점이 더 마음에 든다는 말이야. 그런 대단한 사람이 한 여자만 바라보고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거든. 요즘에 몇 안되는 제대로된 남자라니까?" 뮤스에 대한 예찬을 하며 환상에 빠져드는 동료를 보며 분홍리본의 궁녀는 안타까운 듯 혀끝을 찼다. "쯔쯧... 정신좀 차리렴. 너는 너무 실속이 없는게 탈이야. 매번 그렇게 남의 남자만 좋아하다간 시집도 못갈 거라고." "그러는 너도 나만큼이나 실속 없잖니. 매번 혼자 좋아하다가 상사병이나 걸리면서." 조금 더 심한 말다툼으로 번지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듯 두 궁녀는 신세 한탄이 담긴 나직한 한숨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휴우...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가 이러고 있는게 벌써 몇년째인지..."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을 때 막 귀빈실에서 빈접시가 담긴 손수레를 밀고 나오던 궁녀 한 명이 다급하게 그들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마침 여기 있었구나! 너희들 어제 황궁에 유령이 출몰했다는 소문 들었니?" 유령이라는 말에 궁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유령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어제 글쎄 황궁 여기저기에서 유령들이 나타났다나봐.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한 두명이 아닌데, 그중에 경비병 두 명은 지금 정신까지 오락가락 하는 것 같더라고." 궁녀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계속해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새벽까지 연회 뒷정리를 하던 북궁의 궁녀들도 여럿 그 유령을 봤다는데 글쎄, 옷을 하나도 안걸친 총각유령이었데! 그것도 최소한 둘 이상은 된다는거야." "뭐?! 옷을 안입은 총각유령?" 눈이 더욱 커진 궁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으며 되묻자 이야기를 꺼낸 궁녀는 다시 한번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고개를 끄덕여며 말했다. "응! 희뿌연 빛을 내는 투명한 몸을 가진 유령이었는데, 민망하게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서 못볼 것까지 다 봤다고 하던걸? 내 친구들 중에 어렸을 때 부터 유령에 대해 관심이 많은 애가 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평생 여자한번 못 사겨보고 죽은 청년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가 궁녀들이 많은 황궁에까지 온 거래.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면 평생 그 여자 옆에 들러붙어 따라다닌고 하더라구." 그녀의 이야기가 듣던 궁녀들은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고, 얼굴은 백짓장 만큼이나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신경이 잔뜩 곤두선 궁녀들의 등 뒤로 부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 부터 수고하시는군요." 예의 바르고 매력적인 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인사를 건네는 시기가 그리 좋지 않은 듯 했는데,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궁녀들은 그 목소리에 놀라 펄쩍 뛰며 혼백이 달아날 듯 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꺄아아악! 나체총각유령이다!" "꺄악! 다가오지마!" "저리 가란 말이야!" 그리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전광석화라는 말을 무색케 하고 있었다. 이렇게 궁녀들이 사라진 복도에는 검은 예복의 청년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카타리나의 방으로 향하던 뮤스였는데, 그는 오히려 궁녀들의 비명소리에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뭐지? 저 귀신이라도 본듯한 반응은." 궁녀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뮤스는 문득 귀가 간지러워 짐을 느끼며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 몇개의 하얀 조각 구름만이 떠다니고 있는 맑은 하늘이었다. 햇살은 따사롭게 부서져 내렸고, 습기를 품지않은 선선한 바람은 포근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는데,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와 같이 국가의 중대한 행사를 치루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라 할 수 있었다. 황궁의 북쪽에 위치한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장, 건물의 앞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공식행사를 시작하기 전이었기에 한발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발표회장의 주변을 둘러보며 신기한 건축양식에 큰 호기심을 보였는데, 전날의 연회에서 안면을 튼 사람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행사 시작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웅성... 웅성...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뮤스와 일행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루스티커와 함께 발표회장에 도착 하였고, 발표회장 건물을 처음보는 뮤스의 친구들은 신기한 눈으로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눈을 간지르는 햇빛을 손으로 가린 폴린은 발표회장 건물의 은백색 지붕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와... 정말 눈이 부시다! 저런 건물을 어떻게 만들었담?"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루스티커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주름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헛, 저 건물을 세우는데 상당한 고생을 했었다네. 처음 장영실경이 설계도를 건네 주었을 때는 우리도 반신반의했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양식의 건물이었으니 말이야. 특히 대형철골 작업과 건물의 외피를 입히는 작업에서 많은 고생을 했는데, 딱히 경험자가 없었던 만큼 진척이 더뎌질수 밖에 없었던 것일세. 나중에는 꼭 저런 건물을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 하지만, 몇가지의 이유때문에 곧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조립형 건물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고, 비슷한 크기의 벽돌건물을 짓는 것 보다 예산 또한 반정도 절감되었으니 황실의 입장에서 손해날 것은 없다고 생각한 게야. 또, 채광이 유용하다는 것 또한 대단한 장점이었네. 천장 전체를 빛이 통과할 수 있는 천으로 만든 만큼 밝은 내부를 유지할 수 있으니 낮에는 따로 전뇌등을 밝히지 않더라도 작업하기에 적당한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일세. 그만큼 불필요한 전뇌력 사용을 줄일 수 있었지." 루스티커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폴린은 눈을 반짝였다. 크라이츠를 도와 공학원의 재무를 담당하던 폴린으로서는 귀가 솔깃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직업의 영향 탓인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루스티커가 말한 내용을 찬찬히 돈으로 환산해보기 시작했다. "이정도 규모의 건물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설비를 제외한다고 해도 25만 겔피 이상이 드는것이 보통인데 그 반이라면 12만 5천겔피의 예산을 절약 할 수 있고, 낮시간동안 전뇌등을 가동시키지 않는다고 하면 일년에 약 8천겔피를 절약 할 수 있는샘이군요. 게다가 건물의 이전이 가능하다면, 굳이 비싼값을 주고 용지를 매입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기간 동안만 용지를 임대 할 수 있을테니 이것의 이익 역시 돈으로 환산 한다면 상당 할거예요." 눈을 껌뻑이며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있던 루스티커는 혀를 내둘렀다. "허헛! 대단한 아가씨구먼. 그 짧은 사이에 그런 계산을 해내다니." 하지만 루스티커와 달리 폴린의 곁에 서있던 크라이츠는 그녀의 계산에 대해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짱을 낀채 건물을 훑어 보던 그녀는 폴린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내역을 종합한다면 대략 34만 3천 겔피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단다. 하지만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 때문에 보통의 건물보다 보수비용이 많이 발생하고, 건물 이전에 따른 인건비 또한 만만치 않을 테니 이 또한 계산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니?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15만 겔피 이상의 예산 절약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공학원으로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건물인건 틀림이 없구나." 폴린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학생처럼 다소곳한 태도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어디서 났는지 작은 쪽지와 펜을 꺼내어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까지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아 이것이 크라이츠와 폴린의 일상인 듯 했는데, 루스티커 뿐만 아니라 친구들 역시 폴린이 일을 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던 만큼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돈계산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켈트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따분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거리고 있었다. 성격이 급한 드워프족인 만큼 기다리는 것에 쉽게 염증을 느꼈던 것이었는데, 아직 발표회가 시작될 시간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쳇! 뭘 이렇게 뜸을 들이는거야. 그냥 문 열어놓고 둘러보라고 하면 될 것을... 아무튼 인간들의 격식이란 드워프들의 골치를 아프게 한단 말씀이야. 응?" 그러던 중 사람들의 시선이 발표회장의 입구쪽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 켈트는 반가운 표정으로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의 엉덩이 뿐이었는데, 키가 작다는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던 켈트는 서슴없이 벌쿤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벌쿤, 잠깐 목좀 빌려야 겠구나!" "에? 뭐..뭐라구요?" 벌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켈트는 날렵한 다람쥐마냥 벌쿤의 몸을 타고 그의 목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둔해보이는 드워프의 신체구조에서 나오는 동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날쌘동작이었다. 그로 인해 중심을 잃으며 몸을 기우뚱하던 벌쿤은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외쳤다. "으윽!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빨리 내려 오세요!" 벌쿤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켈트는 그의 목에 매달려 발표회장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이들! 이제 발표회가 시작하려나 보군. 저기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경이 발표회장에서 나왔는걸?" 켈트의 말을 들은 뮤스와 일행들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단상위로 오르는 두 명의 인물들이 보이고 있었는데, 너무나 멀었기에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을 정도였다.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아도 그들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던 히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렇게 멀리 있는 사람을 알아 보실수 있으시다는 거에요?" 켈트를 대신하여 뮤스가 대답해 주었다. "드워프족의 시력은 최대 인간의 다섯배 가량 되거든. 그래서 인간보다 정교한 세공에 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이 정도 거리쯤이라면 우리가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만큼 잘보이실걸?" 그의 말에 뿌듯한 얼굴을 한 켈트는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역시 잘알고있군! 이정도 거리에서는 투르코스 재상의 귓볼에 있는 작은 점도 보인다고! 끌끌끌... 이제 확성기를 들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구나!" 켈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행사장의 곳곳에서 투르코스 재상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먼저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 자리를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듀들란 제국의 국민들을 대표하여 감사말씀 드리겠습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간단한 인사말에 행사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단상을 주목했고, 그들을 향해 손을 한번 들어보인 투르코스 재상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 나갔다. -잠시 후면 이틀동안 이어질 제국개발사업 발표회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여러분께서 전혀 생각지 못한 놀라운 일정이 계획되어 있으니 큰기대를 하셔도 좋으실 것입니다. 자신감이 가득차있는 투르코스 재상의 말에 사람들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발표회장을 구경하는 것 외에도 다른 일정이 있다는 말인가?" "이틀간 진행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생각지 않았는데,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투르코스 재상님의 표정을 보니 평범한 것은 아니겠군요. 기대를 해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뮤스와 일행들 또한 다른 이들과 다름 없었는데, 어느정도의 친분이 있던 투르코스 재상이나 장영실, 그 누구에게도 행사 일정의 세부사항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만큼 일행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루스티커에게로 고정이 되었고,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수 있었던 루스티커는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헛! 그건 이번 행사의 일급 기밀이라네. 미안하지만 투르코스 재상이 직접 발표할 때까지는 말해줄 수 없겠구먼. 내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네." 루스티커의 난처한 표정에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켈트만은 루스티커의 입장을 이해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는지 벌쿤의 목에 매달린 모습으로 바둥거리며 소리쳤다. "우리 사이에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자고로 술로 맺은 친구는 피를 섞은 형제보다 가깝다고 했거늘! 그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주게나! 어차피 조금 있음 알게될 사실이 아닌가?" "허헛, 켈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국가기밀 누설 죄라면 비록 황궁수석 마법사라하더라도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중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제에게라도 말해줄 수 없는 사항이랍니다." "엄살피우지 말게나. 듀들란 제국에서 누가 감히 자네의 목을 위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한번만 선심을 써주면 안되겠나?" "허허헛!" 루스티커는 수염을 매만지며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고, 끝내 행사 일정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트는 끈질기게 보챘는데, 목이 뻐근해 오는것을 느낀 벌쿤은 그를 잡아붙들며 말했다. "아저씨! 그만 좀 얌전히 계세요! 나이값은 하셔야 할것 아닙니까?" "내 나이는 왜 거들먹 거리는게냐! 그렇지 않아도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아서 심란한 판국에!" 심술이 난 켈트는 벌쿤의 머리카락을 헝클으며 심술을 부렸다. 이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벌쿤 역시 투덜거리며 켈트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게 이 정도란 말이에요?! 거짓말 하지 마시고 당장 내려 와요!" "아이고 세상사람들! 이 무식한 녀석이 늙은 드워프를 잡는구나!" 켈트와 벌쿤의 그러한 모습에 일행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고, 집중되는 주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켈트와 벌쿤에게서 한발자국씩 떨어지고 있었다. <대공학자> 10-21 켈트와 벌쿤의 투닥거림이 계속되고 있을 때, 단상위의 투르코스 재상은 품에서 시계를 꺼내어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침이 정확히 11시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발표회장의 곳곳에 자리잡은 진행요원들의 상황을 확인하였고, 다시금 확성기를 입에 대며 말을 이었다. -주목해 주십시오! 이제 여러분께 공시해 드렸던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의 개막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의 개회를 선언해 주실 본 듀들란 제국의 황제폐하를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영광스럽게 크로시드 3세 폐하를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듀들란 제국의 황실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의래용 음악이 연주되며 황제의 존엄성을 높이는데 한목하고 있었는데, 듣는이의 가슴을 한없이 떨어울리는 장중한 음악이었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두두둥... 두두둥... 음악과 함께 수십명의 의장대를 앞세운 긴 행렬이 행사장의 입구를 통해 입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듯 일사분란하게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만들었고, 검은 예복을 입은 두 명의 장정은 단상까지 이어지는 길위로 금빛의 융단을 깔았다. 금빛의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쓴 의례관 한 명이 절도있는 모습으로 앞서 걸어나와 단상아래에 멈추어섰다. 그리곤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키며 굵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폐하와 황녀님이 나오십니다! 귀빈 여러분들께서는 예를 표하여 주십시오!" 그의 외침과 동시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고, 황제의 입장행렬은 금빛의 융단을 천천히 밟으며 단상을 향해 입장하기 시작했다. -처억! 처억! 처억! 고귀함을 뜻하는 금빛의 모자와 예복을 걸치고 금으로 도금된 의장용 검을 허리에 찬 황제의 의장대가 발을 맞춰 행진했다. 그 뒤로 화려한 금관을 쓴 앳된 모습의 청년과 금실로 수를 놓은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따르는 중이었는데, 어느덧 청년기에 접어든 듀들란 제국의 황제인 크로시드 3세와 그의 누이인 케티에론 황녀였다. 황제와 황녀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먼길을 찾아준 귀빈들을 향해 목례를 하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고, 그들의 인사를 받은 사람들은 크게 황송해하며 더욱 깊이 몸을 숙이고 있었다. 몸을 숙여 듀들란 제국의 황제에게 예를 표하던 벌쿤은 곁눈질로 황제와 황녀의 얼굴을 살피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와... 듀들란 제국의 황제폐하도 상당히 어리구나. 아직 스물도 안되어 보이는데?" 벌쿤의 목소리에 맞춰 곁에있던 세이즈가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응, 네가 드베인 숲에서 나오기 전에 듀들란 제국의 선황께서 몹쓸병으로 세상을 뜨셨거든. 그래서 크로시드 3세께서 성년이 되기도 전에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거야. 아직도 대륙의 많은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긴 하지만, 듀들란 제국은 국법상 일부일처제이기 때문에 자녀가 저 두분 뿐이었던 것이지." "이야! 역시 세이즈는 똑똑하구나. 그런걸 다 어디서 알게 된거야?" 벌쿤의 감탄성에 세이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가 책들을 많이 수집하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책들부터 근래의 책들까지 다양해. 그 중 대부분은 지금 내 방에서 바람막이용으로 쓰고 있는데 심심하면 가끔 꺼내어 읽기도 하거든." "호오... 그렇구나." 벌쿤과 세이즈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듀들란 제국의 황제와 황녀는 단상의 앞에 도달했고, 단상의 아래로 내려온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은 공손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황제와 황녀는 단상 위로 올랐다. 그리고 투르코스 재상에게서 확성기를 건네받은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본국을 찾아주신 많은 귀빈들께 듀들란 제국의 황제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분들이 익히 아시다시피 본국은 공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지난 4년간 제국개발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얼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기에 그것을 여러분들께 선보이고자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께 선보이기에 부끄러운 수준일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행사가 끝나는 때까지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그럼 제국개발사업 발표회를 개회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발표회의 개회를 선언하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보내며 발표회의 시작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표회장 건물의 주변에서 짧은 폭발음이 들려오며 십 여개에 달하는 오색의 연기 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는데, 그렇게 치솟은 연기 줄기들은 마치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굳건한 기둥과도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퍼버벙! 퍼벙!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폭발음에 잠시 놀라는 듯 했지만 곧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연기의 기둥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기에 여념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의 화려한 막이 오르고 있었다. * * * 제국개발사업 발표회장이 개방되자 수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발표회장의 안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타국에서 온 귀빈들과 특별히 황실의 초대를 받은 듀들란 제국의 귀족들이었는데, 하나 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발표회장의 엄청난 규모와 위용에 놀라는 중이었다. 발표회장의 내부는 밤에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높은 천장에 설치된 전뇌등으로 실내를 밝히던 밤과는 달리,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은은한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빛은 천장에 걸린 형형색색의 천과 휘장을 통과하며 환상적인 실내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루스티커가 자랑했던 대로 전뇌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상당한 실내의 밝기를 유지하고있는 중이었는데, 발표회장 전체를 통털어 단 몇 개의 전뇌등만이 진열된 전시물들을 비추기 위해 가동되고 있을 뿐이었다. 발표회장에 진열된 전시물들의 앞에는 듀들란 제국어와 도이첸 제국어로 자세하게 쓰인 설명판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전시물들의 용도와 작동방법을 설명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간단한 그림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전시물들의 주변으로 직접 전시물들을 사용해보거나 작동시범을 선보이는 자리가 마련되어 사람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내는 중이었다. 뮤스 일행들은 '순환동력기'라는 이름이 붙은 전시물의 앞에 서있었다. 특히 카타리나를 비롯해 세이즈와 히안은 순환동력기의 개념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는데, 라이델베르크 공학원에서 동력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명판을 유심히 읽어보던 카타리나는 그 내용을 금새 이해했는지 나직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우와! 동력을 순환시켜서 전뇌력을 다시 만들어 낸다는 개념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구나. 정말 대단한걸?" 곁에서 순환동력기가 작동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히안 역시 카티라나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력을 순환시킴으로 인해 동력기의 출력이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큰 출력이 필요없이 오랜시간 지속되는 작업에는 아주 유용하게 쓰일거야. 가사용 제품들에 적합한 동력기라고 할 수 있겠군." 카타리나와 히안의 대화를 들으며 순환동력기를 살펴보던 세이즈는 어떠한 의구심이 생기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듀들란 제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마나구를 사용하지 않나봐. 그럼 대체 어디서 전뇌력을 공급받는거지?" 카타리나와 히안 또한 세이즈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전뇌력을 공급하는 마나구를 찾기위해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서도 마나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외부로 연결된 전뇌선 역시 찾을 수 없었는데, 결국 순환동력기가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네! 마나구 없이 동력기가 작동하고 있어." "마나구가 없이 동력기가 작동할리가 없어. 루스티커님께서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놓은게 아닐까?" "그런 마법이 있을리가 없잖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거겠지." 친구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어보인 뮤스는 작동되고있는 순환동력기 쪽으로 다가갔고,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생각대로 듀들란제국의 공학원에서는 마나구를 쓰지 않아. 대신 축전지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지." 뮤스의 말에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되물었다. "축전지?" "응. 전뇌력을 화학반응으로 바꾸어 저장하는 장치를 말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 순환동력기 자체에 내장되어있는 것 같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나구에 비해 전뇌력의 축적양이 한참이나 모자라기 때문에 자주 충전을 해주어야 하는데다가 전뇌력의 출력면에서도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격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저렴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데 크게 유리하지." 그리고 뮤스는 순환동력기의 아래부분에 설치된 금속상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순환동력기의 하단에 부착된 금속상자가 그 축전지 일거야. 장영실 아저씨는 그 장단점을 잘 고려해서 이 순환동력기를 만든 것 같아. 전뇌력의 축적양이 적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동력을 순환시켜 축전지를 재충전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축전지의 충전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가격적인 면에서도 마나구에 비해 큰 우위를 점 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야. 후훗, 과연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이 순환동력기의 효용성을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모르겠군" 뮤스의 자세한 설명 덕에 쉽게 이해를 할 수는 있었던 친구들은 답답했던 머리가 개운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듀들란 제국의 공학기술력이 그들이 생각해오던 것 이상임을 증명하는 내용이기도 했기에 가슴 한구석이 찜찜해지고 있었다. -지이이잉! 지잉! 순환동력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뮤스와 일행들은 그들의 등뒤로부터 들려오는 동력기의 시동음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전시물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잠시 살펴보던 크라이츠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전시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고, 일행들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사이를 헤치며 들어가자 길이가 2멜리, 높이가 1멜리 가량 되는 검은색의 전시물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유선형의 날렵한 모양을 한 전시물은 앞쪽과 뒤쪽에 각각 한 개씩의 바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소형의 순환동력기가 장착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이륜의 전뇌거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설명판에는 '전뇌마'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흰색의 가운을 걸친 한 청년이 전뇌마라고 부르는 낯선 기체 위에 앉아 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지금 선보여 드리고 있는 전뇌마는 열악한 환경에서 유용하게 쓰일 교통수단입니다. 전뇌거가 도로위를 달리는 마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이 전뇌마는 길이 좁은 숲이나 바위가 많은 언덕에서도 타고 다닐 수 있는 말의 역할을 하는 교통수단으로서 앞쪽과 뒤쪽의 커다랗고 질긴 바퀴는 거친땅에서도 훌륭하게 적응하도록 고안되었습니다. 물론 마구간이 필요 없을뿐더러 여물을 먹이지 않아도 된답다. 단지 사흘에 한번 전뇌력을 충전해 준다면 시속 60켈리의 속도로 어디든지 달릴 수 있는 매력적인 제품입니다. 이륜으로 설계되어 있는 만큼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의 연습이면 금방 안전한 주행을 할 수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전부터 달리는 일에 남다른 집착을 보이던 크라이츠였기에 자연스럽게 전뇌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하! 이 위에 올라타서 운전을 하는 것이구나. 폭이 좁아서 시내의 골목길도 달릴 수 있을 테니 전뇌거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겠는걸? 저, 속도 조절은 뭘로 하죠? 그리고 방향 전환은 어떤 방식으로 하게 되는 것인가요?" 그녀는 전뇌마의 요모조모를 따져보며 흰색 가운의 청년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뮤스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별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기에 크라이츠를 놔둔 채 친구들과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군에서 온 사절들은 발표회장의 전시물들을 관심 어린 눈으로 바 라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듯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가져가기 위해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 는데, 작은 종이에 여러 가지 내용을 필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능숙 한 솜씨로 전시물들을 종이 위에 그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 깝게도 공학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없었기에 정작 중요한 내용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발표회장을 구경하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에 초록색의 고급 예복을 입은 청년이 재채기를 하며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있었다. "에…에… 에취!" 조금 왜소한 체구를 가진 청년은 다름 아닌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 제였다. 그는 가엽게도 감기에 걸린 듯했는데, 초여름에 감기만큼 사 람 속을 썩이는 것도 없었기에 표정에는 불만이 잔뜩 스며 있었다. 몸 이 좋지 않은 만큼 발표회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황제는 주변을 둘러보며 않아 쉴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에휴,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더 어질어질하군, 어디 위자라도 없는 것인가?" 혼잣말을 하며 발표회장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지만, 몸이 편치 않 은 상태로 이렇게 넓은 곳에서 쉴만한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었다. 이에 절로 한숨이 나옴을 느낀 황제는 어깨를 축 늘어뜨 리며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차라리 약이나 먹고 누워 있는 편이 훨씬 좋을 뻔했군." 그가 후회 어린 중얼거림을 내뱉고 있을때, 누군가가 뒤로 다가오 며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폐하가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 앉아서 무엇을 하는 중이신 지…….“ 귀에 익숙한 목소리에 황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는 자신 을 내려다보고 있는 뮤스의 모습이 잡히고 있었는데, 그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은 황제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아, 뮤스 원장님이셨군요. 잘주무셨습니까? 에…에취!”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챈 뮤스는 급히 그를 살폈다. 손으 로 이마를 짚자 약간의 미열을 느낄 수 있었다. 우려 어린 얼굴을 한 뮤스는 그를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아무래도 어제의 일 때문에 감기에 걸리셨나 보군요. 이 사 실을 고듀트 외교 대신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뮤스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은 황제는 힙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후훗, 제가 감기 걸린 사실을 고듀트 외교 대신이 알았다면 꼼짝없이 숙소에 누워 있어야 했겠죠. 오랜만의 휴가를 침대에 누워서 보내기는 싫답니다.“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없지만 이렇듯 몸을 소홀이 관리 해서는 안 될 신분입을 알기에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선 몸부터 챙기셔야 합니다. 만약 쓰러지기라도 하시는 날에는 적지 않은 파급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게 우려할 만큼 심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쉬고 있으면 괜찮아질 텐데 괜히 고듀트 외교 대신에게 알려 소란스럽게 만들기는 싫군요.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죠?“ 황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뮤스는 다른 방 법을 강구해 보며 입을 열었다. “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 잠시 쉬실 만한 곳이라도 찾아봐야 겠습니다.” “후훗,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뮤스는 황제를 부축하며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뮤스와 황제는 발표회장의 구석에 마련 된 의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황제를 편안하게 앉힌 뮤스는 어 디선가 시원한 과실 음료를 가져와 건네며 말했다. “이거라도 조금 마셔두도록 하십시오. 과실 음료를 마시면 감기에 효과를 볼수 있답니다.“ 과실 음료가 답긴 잔을 건네받은 황제는 가벼운 미소로 고마움을 표 했다. 그는 시큼한 맛이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오늘도 혼자시군요. 다른 일행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황제의 물음에 머쓱한 웃음을 지은 뮤스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훗! 어쩌다 보니 또 혼자가 되었군요. 모두들 전시품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준 것이 죠. 일종의 견학 수업이라고나 할까요? 아, 그보다 발표회가 시작되기 전에 폐하를 찾아보아도 모습이 보이지 않이시더군요. 조금 늦게 나오 신 것입니까?“ 뮤스가 되묻자 황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훗, 시간에 맞추어 숙소를 나서는데 고듀트 외교 대신이 말리더 군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이상 개회 행사에 참여하게 되면 듀들란 제 국의 황제에게 예를 올려야 하는데 도이첸 제국의 황제가 타국의 황제 에게 예를 올리는 일은 더없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죠, 그 덕에 뒤늦게서야 발표회장에 올수 있었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고듀트 외교 대신님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같은 행동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테죠. 아참! 혹시 오늘 황궁에 떠도는 유령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하핫! 아주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혔던 모양이더 군요. 궁년들에게 듣자하니…….“ 뮤스와 젊은 황제는 화제를 이어나가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 는데, 카일락스 리퀴드에 얽힌 이야기가 그 주된 내용이었다. 뮤스와 젊은 황제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에서일단의 행렬이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 에는 투르코스 재상과 듀들란 제국의 황제, 그리고 케티에론 황녀가 있 었으며, 그 뒤로 몇 명의 수행원들이 따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전시물 들을 관람하기 위해 발표회장을 둘러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투르코스 재상은 챠트란 식 전뇌거 앞에 멈춰 서며 황제와 황녀를 향해 자세한 설명을 건네고 있었다. “폐하, 이것이 바로 본국의 공학원에서 제작한 전뇌거입니다. 현재 20여 대의 전뇌거들이 쟈트란의 귀족들에게 지급되어 실험 운행 중이 고, 아주 만족할 만한 성능을 내고 있는 중입니다. 게다가 도이첸 제국 의 전뇌거에 비해 그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보급하기에 도 큰 무리가 없어, 도이첸 제국의 교통망은 크게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설명을 듣고 있는 황젱의 얼굴은 더 없이 진지해 보 였다. 비록 투르코스 재상이 자신의 숙부이긴 했지만, 유년 시절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온 황제였기에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처저히 신하 로서 그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본인 역시 전뇌거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네. 전뇌 거의 가격이 저렴해진 dlb가 바로 가격이 비싼 마나구를 대신하여 축전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에 대한 단점은 없는 것인가? 투르코스 재상은 황제의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본국의 전뇌거는 순환 동력이를 탑제하여 마나구에 비래 전뇌력의 축전 양이 적다는 축전지의 단점을 혁신적으로 보완하였습니다. 또 순 환 동력기는 그 특성상 출력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륜과 후륜, 총 두개의 순환 동력기를 전뇌거에 답제하여 전뇌 거의 성능을 높였습니다." "그렇다면 도이첸 제국의 전뇌거와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 는 모양이로군. 아니, 오히려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 대형 도시의 도로를 새롭게 정 비하여 전뇌거의 수가 증가할 훗날을 미리 대비할 예정입니다." "역시 재상의 치밀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구려." 이번에는 황제의 곁에서 다소곳한 자세로 설명을 듣고 있던 케티에 론 황년가 입을 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전뇌거들은 언제쯤 듀들란 제국의 국민들에게 발매되 는 것이죠? 소문으로는 이미 대량 생산 단계에 접어들어 상당히 많은 숫자의 전뇌거가 완성되었다고 하던데요." 케티에론 황녀를 바로본 투르코스 재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씁하신 대로입니다. 대향 생산에 심형을 기울인 결과 지금까지 1,500대의 전뇌거를 완성할 수 있었고, 공학원과 황구의 창고에서 발 매 날짜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전뇌력 충전 시설의 시험이 끝나는 다 음 달 중순쯤 정식 발매를 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투르코스 재상과 장영실 경계서 많은 수고를 해주셔야겠 군요." 대화를 마친 황제와 황녀는 투르코스 재상의 안내를 받으며 전뇌거 의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전시되어 있는 전뇌거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였다. 전뇌거가 전시되어 있는 것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들여온 것이었는데, 벽이 없는 발표회장의 구조 때문에 재채기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리게 된 듯했 다. "에… 에취야!" 듀들란 제국의 황제와 황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시선이 닿은 곳에는 뮤스와 도이첸 제국 젊은 황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젊은 황제는 재치기 를 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하햔색의 손수건으로 입 을 막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뜨거운 시선을 느낀 그는 자리에서 일어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일을 열었다. "이, 이런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실례를 해버렸군요. 변변찮 게도 여름 감기에 걸려서 몸이 정상이 아니랍니다." 그의 사과에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고개를 내저으며 나이답지 않은 차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감기에 걸려 어쩔수 없었던 것이니 그리 정색하며 사과하지 않은 차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감기에 걸려 어쩔수 없었던 것이니 그리 정색하며 사과하지 않아 도 괜찮소, 발음을 보아하니 타국에서 온 사절인 듯한데 어디서 오신 누구시요?" 말투와 행색, 그리고 그의 옆에서 깍듯한 태도로 기립하고 있는 투 르코스 재상을 본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는 그가 듀들란 제국의 황 제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동요를 보이자 않은 그는 가 볍게 인사를 건네며 자기 소개를 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도이첸 제국의 고듀트 외교 대신 님의 조키안 카롯이라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듀들란 제국을 한 번 방 문해 보고 싶은 염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운 좋게 기회가 되어 숙 부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카로이트라는 본명에서 따온 가명을 말한 그는 능청스럽게 연기를 했고, 그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를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 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 고듀트 외교 대신이라면 여러 번 만날 기회가 있었기에 본인도 잘 알고 있소, 그보다 본국에서 제대로 대접치 못하여 감기에 걸린 것 이나 다름없으니 손님을 초대한 주인의 입장으로서 면목이 없구려." "하핫, 아닙니다. 저의 불찰이었을 뿐이니 크게 심려치는 마십니요." 우연찮게 양국의 황제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던 투 르코스 재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도이첸 제국 황제의 부탁이 있었던 만큼 그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입장 이었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국 황제가 만에 하나 도이첸 제국의 황제에게 실수라도 하여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면 양국 간의 적지 않 은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투르코스 재상은 자국 황제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뮤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 다. "폐하, 마침 소개시켜 드려야 할 사람이 이곳에 있었군요, 폐하께서 도 그의 소문을 익히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쪽의 젊은 청년이 바로 도 이첸 재국 공학원의 원장인 뮤스 드라켄이라고 합니다." 투르코스 재상의 의도대로 황제의 시선은 뮤스에게로 향해졌다. 평 소 뮤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은 터라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황제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그대가 바로 소문의 뮤스 드라켄 원장이오? 입궁했다는 이야기 는 진작에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그대를 만나게 되었구려. 본인에 비해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듯한데 그리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있으니 정 녕 놀라지 않을 수가 없소." 투르코스 재상의 갑작스러운 소개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내색치 않 은 뮤스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제가 하고자 하는 이을 열심히 노력했을 뿐입니다." "하핫! 겸손이 지나치면 욕이 되는 법이오. 어찌 그것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란 말이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장영실 경이나 그대나 모두 주신께서 내려주신 인재임이 틀림없는 것 같소." 그의 말에 뮤스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고도의 공학 기술은 그에 관계되지 않은 이의 눈에는 대단하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학 기술 역시 인간이 가진 능력의 일 부분일 뿐입니다." "오오, 그렇다면 본인도 그대나 장영실 경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폐하. 일반인들에게 어려워 보일지는 몰라도 공학기 술이란 결국 도구의 사용 방법을 발전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지요." "그것참 흥미로운 발상이구려." 문득 대화를 나누던 황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투르코스 재상을 향해 말했다. "재상, 이 두 분과 함께 이후에 있을 행사에 참여하고 싶으니 지리를 마련해 주기 바라오. 이렇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그러는 편 이 훨씬 좋을 듯하구려." 황제의 요청에 투르코스 재상은 적지 않은 당혹감을 표하고 있었다. 양국의 황제를 떼어놓기 위해 뮤스를 소개시켜 주었건만, 둘을 더욱 붙 여놓은 결과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투르코스 재상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 만 했다. "그, 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자 만족한 표정을 지은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뮤스와 도이첸 제국 황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들었다시피 다음 행사를 두 분과 함께했으면 하오. 본인의 초 청에 응해주시겠소?" 뮤스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했지만 곁에 있던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반갑게 거의 초청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어찌 영광스러운 폐하의 초청을 거절할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처청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뮤스는 어쩔수 없이 그와 함께할 수 밖에 없었기 에 듀들란 제국 황제의 초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들이 자신의 초 청을 흔쾌히 받아 들이는 것을 확인한 황제는 잠시 후에 다시 만날 것 을 기약하며 황녀와 투르코스 재상, 그리고 수행원들을 이끌고서 계속 하여 발표회장을 둘러보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115장 기관 열차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는 발표회장의 한쪽에 마련되어진 푹신한 의자에 앉아 따듯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듀들란 제국 황제의 지시 가 있었던 듯 몇 명의 궁녀가 편안히 쉴 만한 의자와 감기에 좋다는 차 를 가져다 준 것이었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황제의 감기 기운은 훨씬 덜애진 듯했다. 감기에 걸린 황제 덕에 발표회장에 편히 앉아 향기로 운 차를 얻어 마실수 있었던 뮤스는 느긋한 표정으로 바쁘게 움직이 는 사라들을 구경하며 입을 열고 있었다. "차라리 어제 먼저 구경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듯합니다. 막상 당일 에 할 일이 없으니 따분하기 그지 없군요. 게다가 폐하께서는 감기까지 걸려 버리게 되셨으니……." 천천히 차를 마시며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는 따뜻한 미소 를 입가에 걸치며 말했다. "후훗, 아닙니다. 그 덕에 듀들란 제국의 황제와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리혀 좋은 기회를 얻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 각하고 있습니다. 320여 년 전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양국의 황제가 대면한 일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그만 큼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심했고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죠. 일 년에 몇 번씩 사절들이 왕래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직접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서로에 대 해 너무나 모르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왠지 기뻐 보이는 듯한 황제의 얼굴에 뮤스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듀들란 제국 황제와의 대면이 기대가 되는 모양이십니다. 대부분의 도이첸 제국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듀들란 제국의 사람들 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 듯 하군요." 뮤스의 말에 황제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러한 사람 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내 색은 하지 않았지만 듀드란 제국을 경계하는 관습이 몸에 배어서인지 직접 해를 끼친 거이 없더라도 듀들란 제국의 인물이라면 그리 좋게 생각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그리 생각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어느새 비워진 찾잔에 차를 따르며 뮤스의 물음에 답했다. "후훗,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뮤스 원장님도 보셧을 것입 니다. 일개 범인의 재채기 소리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건네는 듀들란 제국 황제의 모습을 말입니다. 대제국의 황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인물이 범인에게 그런 관심을 보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면 에서 볼때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천성적으로 선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인지 조금 더 그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뮤스 원장님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황제의 물음에 잠시 생각해 보던 뮤스는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뭐랄까…폐하와 많이 닮은 점이 있다고 느겼습니다." "거참, 저와 듀들란 제국의 황제가 닮았다는 말씁이십니까?" 의외의 대답에 황제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고, 뮤스는 확인 이라도 해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비록 그분의 어투는 폐하에 비해 격식에 얽매이고 딱딱하여 정감없 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곳은 폐하께서 푸익시는 느낌과 흡사하였 는데,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짓누르기보다는 온정으로 아랫사람을 감복 하게 만든는 분인 듯하더군요." "어투야 서로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천성만 은 그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법이니 뮤스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대로인 듯합니다. 흐음… 철이 들기도 전에 황제의 위에 올라 주변의 강압적인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던 그가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군 요, 그나마 숙부인 투르코스 재상이 철저하게 그를 보좌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황이 세상을 뜬 이후 황족들의 반락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테니까요." 어느새 대화가 황실의 이야기로 이어지자 뮤스는 투르코스 재상이 얼굴을 떠올리며 황제의 말을 보충했다. "듀들란 제국의 선황께서도 투르코스 재상님의 능력과 성품을 믿고 서 아무런 걱정 없이 세상을 뜰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재상 직에 오르기 전에도 정치, 경제학자로서 상당한 입지를 굳히고 계셨고, 곧은 성품으 로 주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이셨으니까요. 실제로도 재상 직에 오른 이후 구분의 노력으로 인해 황실의 기강이 오히려 선황이 살아 있을 당시보다 더욱 강화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랍니다." 뮤스는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흠… 듀들란 제국의 황제께서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 하여 투르코스 재상님의 두움에 의지하시는 모습이 간간이 보이지만, 앞으로 몇 년이 지나 장성하게 된다면 일국의 황제로서 손색없는 인물 이 되실 것입니다. 게다가 투르코스 재상님이나 루스티커님과같이 훌 륭한 분들이 곁에서 보좌하실 테니 듀들란 제국의 흔들림없이 발전 일 로를 걸을 것입니다." 한동안 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핫!이것 참, 뮤스 원장님께서 듀들란 제국을 그리 높이 평가하시 니 배가 아파오는 군요. 그렇다면 저희 도이첸 제국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농담조로 던짐 말이었지만 섣불이 대답할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에 잠시 고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를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던 황제는 뮤스와 시선을 맞추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그렇게 고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뮤스 원 장님은 다른 대륙에서 오신 분인 만큼 양국의 차이를 객관적인 시각으 로 보실수 있을 듯해서 여쭙는 것입니다." 황제의 말에 고심의 무게를 조금 덜 수 있었던 뮤스는 호흡을 가다 듬으며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듯하니 짧은 소견으로나마 말씁드리 도록 하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도이첸 제국의 정치적 기반 은 듀들란 제국에 비해 한 단계 정도 아래의 수준입니다. 양국 모두 대 젝국으로서 대륙 전체에 위용을 떨치고 있긴 하지만, 듀들란 제국의 황 실이 현재의 정치 체제를 기반으로 최대한 효율을 이끌어내고 있는 가 하면, 그와 흡사한 정치 체제를 갖춘 도이첸 제국은 그만큼 효율적 이지는 못한 듯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뮤스는 걱정스런 마음에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유려와는 달리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 었는데,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오."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황제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던 뮤스는 말을 이어 나갔따. "이번 듀들란 제국 개발 사업만 하더라도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듀들란 제국은 도이첸 제국에 비해 일 년이나 늦게 공학 기술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황실에서 공학 기술이 이용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여 체계적으 로 제국 개발 사업을 진행한 결과 최소한의 투자를 통해 공학 기술이 가진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입니다. 반면, 도이첸 제 국의 황실 역시 공학 기술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막대한 투자를 감 행하였지만 정작 공학 기술이 이용되어야 할 부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고, 결국은 저희 공학원에 모든 것을 일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뮤스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제가 가진 재주로 몇몇의 물건들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 았고, 운 좋게도 훌륭한 스승을 마난게 되어 일천하게마나 여러 가지 지식을 쌓을 수 있었지만, 저의 근분은 일개 공학도일 뿐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닙니다. 공학 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국가 각 해야 할 일이고, 저는 그에 부합하는 공학 기술을 제공하는 입장인 것이죠. 바로 이러한 점을 미리 인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듀들란 제 국과 도이첸 제국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뮤스의 이야기로 인해 황제의 표정은 침중해져 있었다. 뮤스 역시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황제 또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라 생각했기에 어느 정도의 역정을 감수할 각오까지 해둔 상태였다. 그러 나 뮤스의 생각과는 달리 한동안을 침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는 어느 순간 어두운 기색을 거두어들이며 뮤스를 바라보았다. 그 리곤 볼을 긁적이더니 평소와 다름 없이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 하는 것이었다. "역시 뮤스 원장님계서도 본국의 정치 체제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말인즉, 황제 역시 뮤스와 같은 문제점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라 이에 뮤슨는 깜짝 놀라며 될물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황제는 멋쩍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이첸 제국의 역사학자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이지만, 도이첸 제국이 건국될 당시 정치에 능하지 못했던 선조들은 국가의 틀을 잡기 위해 듀들란 제국의 정치 체제를 그대로 베껴 국가를 다시리는 데 이 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껍데기만을 가지 고 온것이기에 완전한 효율성을 낼 수가 없었는데, 부실한 벽이 금을 드러내듯 도이첸 제국의 정치 체제에 문제적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었 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선조들 역시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골격이 남의 것인만큼 어디서부터 문제점이 발생했는지 찾아낼 수 없었고, 결 국 마땅한 해결 방안을 마련할수 없었던 선조들은 본국의 치부가 타 국에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마 음속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껍데기 정치 체제가 천여 년이라는 세월을 전해 내려오면서 오늘날의 미흡한 정치체제를 이루게 되었죠." 뮤스는 황제의 이야기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천년 이나 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이첸 제국에서도 뛰어난 두되들이 많이 출현했을 것입니다. 한데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군요." 씁쓸한 얼굴을 한 황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도이첸 제국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그중 최고로 손꼽는 이가 바로 대현자라 불리우는 그라프 라듀아보님이십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이전에 활동하시던 분으로서 당시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학문에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단한 분이셨죠." 그라프라는 이름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자 뮤스는 눈을 반짝였고, 이어 지는 그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대한자님께서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본국의 국정에 많 은 신경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대현자님은 본국의 정치 제 제가 가진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셨고, 그에 대한 해결방법을 모색 하여 황제께 안겅으로 올리게 되었죠. 하지만 그 안건은 매몰차게 거 부되었습니다. 바로 현존하는 도이첸 제국의 정치체제를 모두 뜯어고 쳐야 하는 어청난 일이었고,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황실의 존엄성까지 흔들리게 될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손 된 입장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의 황제는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그릇이 되 지 못했던 것이죠. 게다가 정치 체제의 중심을 이루던 황족과 황실의 귀족들은 대현자님께서 제창한 정치 체제개편이 자신들의 입지를 흔 들어놓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거센 반발을 하고 나선 것입 니다. 이후로 어떤 한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로 인해 대현자님 은 황실의 일에서 손을 뗐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세 상을 등지고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셨다고 하더군요. 희대의 현자가 그런 식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쉬운 일입니다." "……." 황제의 입을 통해 그라프에세거 듣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 뮤스는 주름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이 섞인 함숨을 내쉬 고 있었다. 그러한 뮤스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황제는 그가 심란해하 는 듯하자 등을 두들겨 주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핫!어짜피 지난 일이니 아쉬위해 봤자 소용없겠죠.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현 시점에서 도이첸 제국이 미흡한 정치 체제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그리곤 가벼운 마음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황제 위에 오른 이후로 항상 정치 체제의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더랬죠. 나름 대로 해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공부도 하였고 지난 몇년간 여러 가 지 일들을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초조해하던 중 이었습니다. 후훗, 원장님이나 고듀트 외교 댄신에게는 비행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시실을 말씀드리자면 정치 체제의 문제로 듀들란 제국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국의 정치 체제의 뼈대가 되는 듀들란의 정치 체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사펴보기 위해서 말이죠." 그제야 황제의 진실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던 뮤스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는데, 어느 정도 짐작을 하긴 했지만 그토록 깊은 데 까지 황제의 생각이 닿아 있음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 아! 남 모르는 심중에 그런 깊은 뜻을 품고 계셨다니 정말 대단하시 군요. 그토록 국가의 앞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시고 계시니 반드시 조만간 만족할 성과를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도 끈질기게 도전하는 이는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뮤스의 격려에 기운이 도든지 황제는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비록 본국이 듀들란 제국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긴 했지만, 끊임없이 보완한다면 듀들란 제국보다 더 완 벽한 정치 체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황제인 제가 더욱 노력해야겠죠." 뮤스를 처음 만났던 몇 년 전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큰 그릇이 되 어버린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신념을 굳게 다지고 있었다. 황제가 찾잔에 따라놓았던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만큼 뮤스와 황제의 대화는 길어진 상태였다. 오랫동안 혼자 앓던 속을 겨 우 터놓은 황제였기에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인데, 뮤스 역시 싫은 기색 없이 흥미로운 태도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뮤스는 대화를 나누가 말고 목을 축이기 위해 차가워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으로 잔을 기울이려 할때 뮤스는 문득 기아한 느낌 을 받게 되었다. 환하기만 하던 발표회장에 난데 없이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실내는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었 다.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 역시 갑작스러운변화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 고개 들어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그중 먼저 눈으 로 확인한 누군가가 천장을 가리키며 외치는 것이었다. "검은 첨이 천장을 뒤덮고 잇는 것이로군! 이거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의 외침대로 반구형의 천장 둘레로부터 중심을 향해 검은 색의 차 양막이 쳐지고 있었다. 비록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수분 내에 천장 을 완전히 뒤덮기에는 충분한 속도였다. 황실 측은 이에 대한 어떠한 예고도 없었기에 발표회장 안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반면 뮤스와 황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와 같은 식으로 차양막을 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를 해야 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번 발표회를 위해 미리 준비된 연출이라는 판 단이 섰던 것이었다. 뮤스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장영실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지금 부터 뭔가 새로운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신들한걸요?" 뮤스의 말에 뭔기 짚이는 것이 있었던 황제는 발표회장의 중심에 위 치한 거대한 전시물을 가리켰다. "이제 저 대형 전시물을 공개할 생각인가 봅니다. 이것이 투르코스 재상이 자신있게 말한 행사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후훗, 잠시 후면 알게 되겠죠."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차양막이 반구형의 천장 전체를 뒤엎었다. 그로 인해 발표회장의 내부는 어둠에 물덜었고, 전시물을 비 추고 있던 몇개의 전뇌등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알마 있지 않아 모두 꺼지게 됨으로써 발표회장 내부는 자신의 손조차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져 버렸다. 사람들이 어두움에 적응하지 못하며 술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발표 회장을 울리며 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굵직하면서 도 낮은 음색의 그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듯했는 데 그로 인해 사람들의 술렁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지금 부터 제국 개발 사업 발표회의 메인 이벤트를 시작하도록 하 겠습니다. 귀빈 여러분들은 발표회장의 중아을 향햐여 서주시길 바랍 니다. 하지만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두움에서 발표회장의 중심을 찾기 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우좡좌왕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 작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사람들은 적절한 때에 천장으로 부터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불빛에 눈부심을 느껴야만 했다. 파팟! 불빛은 정확히 발표회장의 중싱을 비추었고, 사람들은 불빛의 인도 를 따라 중심의 전시물ㄹ로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멈 춘 발표회장의 중심에는 흰색의 천을 덮어씌운 거대한 전시물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이어 남성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오늘 여로분께 소개해 드릴 마지막 전시품은 엄청난 자금과 인력, 그리고 기술력을 투입하여 완성한 것으로써 이번 제국 개발 사업의 가 장 빛나는 결과물이라 감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이것은 듀들란 제 국 전 지역의 일일생활권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 며 나아가 듀들란 제국 전 지역의 생활 수준 균등화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라는 것을 느낀 뮤스는 황제를 향해 말은 건넸다. "역시 장영실 아저씨의 목소리로군요. 듀들란 제국 전 지역의 일일 생활권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어떠한 교통 기 관인듯한데……." 뮤스의 이야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황제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띠며 물었다. "교통 기관이라니요? 저렇게 거대한 교통 기관도 있다는 말씀이십 니까? 모습을 보아하니 마치 기다란 건물이라도 한 채 세워놓은 듯한 데, 저석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인지……." "하핫! 저것보다 큰 비행선을 하늘에 띄우기까지 했는데 지상을 달 리도록 만든다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다만 하늘과는 달리 지상은 산이나 숲, 강 등의 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큰 분제인 것입 니다. 장영실 아저씨도 이 점을 간과하지는 않았을 텐데 과연 어떠한 형태의 교통 기관을 선보일지 기대되는 군요." 뮤스는 대답과함께 다시금 발표회장 중심에 위치한 전시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때를 같이하여 전시물의 개봉을 알리는 장영실의 목소 리가 실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더 이상을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잊번 제 국 개발 사업 발표회의 마지막 전시물을 여러분의 앞에 선보여 드립니 다! 장영실의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시물의 개봉을 아리는 나 팔 소리가 발표회장 안을 가득 메웠고, 발표회장의 곳곳에 위치한 전뇌 등들이 순간적으로 점등되어 중앙에 위치한 전시물을 더욱 환하게 비 추었다. 이어 거대한 전시물을 뒤덮고 있던 흰색의 천이 위쪽으로 끌 려 올려지며 전시물은 가장 아래에서 부터 그 실체를 천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빰빠밤~! 빰빠밤~! 빰빠뻐빰~! 흰생의 천 아래로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전시물의 바퀴 모양새였 다. 놀랍게도 그 바퀴는 무쇠만으로 만들어진 듯 짙은 묵빛을 띠고 있 었는데, 크기가 일반 전뇌거의 세배에 달하여 그 무게 또한 엄청나 보였다. 마치 세셍의 그 어떤 단단한 바위라도 간단히 부수고 지나갈 듯 한 위용이었다. 그것을 얼핏 본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나직한 목 소리로 중얼걸렸다. "오오… 정녕 대단한 위압감이야. 저런 바퀴에 깔렸다가는 뼈 한 조 각도 온전치 못할 거 같군." "허.뼈는 커녕 살점 한 조각 남지 않을 듯합니다. 저런 뮈쇠 바퀴가 과연 구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사람들이 탄성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흰색의 천은 점차 끌어 올려졌 고, 전시물의 기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전시물의 기체ㅡㄴ 거대 한 망치로 내려치더라도 흠집이 너ㅏ지 않을 듯한 두꺼운 철판으로 이루 어져 있었다. 견고한 철판으로 겉을 두른 전시물, 그것은 마치 투박한 금속 갑옷을 걸친 기사를 보는 듯 한 느낌이었는데, 전시물을 이루는 요 소요소에서 강인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이쯤 되자 그 위압감에 닛눌린 사람들은 탄성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을 죽이며 전시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칀색의 천이 굴곡을 따라 전시물을 쓰다듭으며 천장으로 끌려 올라 갔다. 이로써 제국 개발 사업의 마지막 전시물은 자신의 실체를 모두 드러냈고, 사람들은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그 자리에 당당한 모습 으로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낯선 전시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전뇌거의 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부분에는 전시물의 심장 역활을 하게 되 기관들이 위치해 있는 듯했고, 그 뒤쪽의 작은 공간은 전시물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자리인 듯했다. 그야말로 전뇌거의 비슷 한 형태였다. 하지만 딱히 전뇌거라 말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바로 그 크 기와 바퀴의 형태 때문이었다. 전시물의 높이는 약 3멜리가량으로 일 반 전뇌거의 두배는 족히 되었고, 길이는 예의 일곱배나 되는 20멜리 에 달한고 있었다. 거기가다 상당한 크기의 무쇠 바퀴까지 더해진 만 큼 보통의 길에서는 달리는것이 불가능해 보였는데, 만약 이 전시물이 보통의 길을 달리는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이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떤 형태의 길이라도 잘 갈린 밭고랑 신세가 될것임을 보지 않아도 뻔히 알수 있었다. 이어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발표회장의 정적을 깨뜨리며 장영실의 목 소리가 다시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전시물은 바로 '기관열차'라고 하는 것입 니다. 이는 한번에 수백명의 인원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교통 수단으로써 각 도시 사이를 거물줄 처럼 연결한 철로 위를 시속100켈 리 이상의 속도로 달리게 됩니다. 장영실의 설명은 대단히 간단명료했고, 그 만큼이해하기 쉬운 것이 었다.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가 말하는 내용의 개념을 잘 이해하 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언급하고 있는 수치가 사람들의 상식을 벗어 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저 기관열자라는 것이 전뇌거보다 몇 배 크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 꺼번에 실어 나른다는 말인가?" "게다가 시속 100켈리 라니, 고든 시에서 루베드 시까지 한 시간 반 만에 갈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이론일 뿐이겠죠. 전뇌거가 시속60켈리 이상을 낸다고 하지 만 도로가 마땅치 않아 최소한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가 아닙니까?뭐, 비슷한 개념일 것 같군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분분한 의견 교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 역시 어느 정도 예견된것이었기에 장영실의 목소리는 여 유로웠다. -지금 당장 귀빈 여러분들께서 기관열차의 효용을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듀들란 제국의 황실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효과적이고 흥미로운 행사를 하나 준비하였습니다. 바로 기관열차를 이용한 1박2일의 듀들란 제국 횡단 여행이 그것입니다. 저의 고향에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번 보는 것이 한번 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과 같이 귀빈 여러분들께서 직접 기관열차의 효용을 느끼는 것이 모든 분들이 이번 행사에 참여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준 비를 마칠 때까지 잠시만 자리를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장영실의 목소리는 어두운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방영실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중있다. 듀들란 제국의 영토는 대륙 전체의 3분지1이나 차지할 정도로 광활한 것이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횡단하더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이나 걸 리는 험난한 길임을 이자리에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는데, 1박2일이 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듀들란 제국을 횡단하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믿 기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영실의 말이 농담으로 들 리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뮤스와 황제가 기관열차를 바라보며 장영실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에 뮤스의 친구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또한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온갖 의혹에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히안의 손을 꼬옥 잡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폴린은 뮤스 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끌었고, 급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뮤스! 정말 저 기관열차라는 것이 장영실님의 말씀대로 시속100켈 리 이상의 속도를 낼 수가 있는 거야?!" 그녀는 뮤스의 옆에 황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듯했고, 카타리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수송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 아무리 봐도 그만큼의 사람들이 탈 공간은 없는데 말이야." "아! 또 철로 위를 달린다고 했는데,그건 또 뭐니?" 아주 무례한 행동들이긴 했지만 황제는 그들의 궁금증을 충분히 이 해했고, 자신 또한 뮤스에게 묻고 싶었던 내용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서 조용히 뮤스의 대답을 기다혔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친구들의 물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뮤스는 일단 그들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이것 참, 다들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하나씩 물어봐야 대답 해 줄거 아냐, 우선 철ㄹ하는 것부터 설명해 줄게. 철로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철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길이야. 다만 땅 전체를 철로 포장 한 길이 아니라 기관열차의 바퀴가 닿는 부분에만 철을 가져다 댄 모 양으로 일종의 안내선 역활까지 동시에 하는 것이지. 철로를 까는 것 은 일반 도로픞 포장하는 것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든다는 장점 이 있는데, 연결할 구간 사이의 땅을 다지고 그 위로 철로를 길게 연결 하여 고정히키는 작업이 전부거든." 친구들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며 뮤스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실제적으로 전뇌거의 경우 최고시속 100켈리의 속도를 낼 수 있다 고 하더라도 주변의 환경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시속 60켈리 정도의 속도밖에 낼 수 없어. 반면 기관열차의 경우 최고 속도 가 시속100켈리라면 그 속도를 충분히 낼 수 있는데, 철로가 거의 직 선으로 놓여 있기에 최고 속도를 내기에 적합하고, 찰로의 상태가 역시 일정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그 뒤로는 추가 차량들을 연결할 수 있으니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태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짐까지 실어 나를 수 있어. 후훗, 나머지는 장영실 아저끼의 말대로 직 접 체험하고 느껴보도록 해. 비록 타국의 기술이지만 값진 경험이 될 테니까." 친구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황제가 한 마디 던 졌다. "으음, 듀들란 제국은 철로로 각 도시의 사이를 연결한 모양이로군 요. 그렇다면 정말 장영실 경이 말했던 대로 1박2일 이내에 듀들란 제 국을 횡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이곳 쟈트란 시에서부터 듀들란 제국의 가 장 동쪽에 위치한 트웨이드 항구 까지의 거리는 대햑700켈리, 계산상 으로 7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습2니다. 지금 출발한다면 이곳에 모인 모 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가 있겠군요." "저,정녕 놀랍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그런 일이 가능할 줄이 야……." 태연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뮤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의 놀라 움에 동의를 표했다. "후훗, 듀들란 제국이 기관열차를 개발할 것이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시범 운행 수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벌써 도시간의 철로 연결을 끝마친 듯하니 놀랍기 그지 없습 니다. 장영실 아저씨와 듀들란 제국의 수완에 혀가 절로 내둘러지는군요." 나직한 감탄사와 함께 대충 이야기를 마친 뮤스가 잠시 주변을 둘러 보며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카타리나, 그보다 크라이츠 누님과 켈트 아저씨 못봤어? 같이 있 는 줄 알았는데." 뮤스의 물음에 덩달아 주변을 살펴보던 카타리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기들과 함께 있는 줄로 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모습이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 이다. "글쎄, 분명 크라이트님이 우리와 합류했었는데 어디를 가셨지? 저 기관열차를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계셨었거든." 하얀 볼을 긁적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지가 뭔가 생각 나는 것이 있는지 입을 열어싸.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크라이츠님이 켈트 아저씨께 뭐라고 귓속말 하는 걸 본 것 같아. 무슨 말이 오간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켈트 아저 씨가 안색까지 바꾸면서 놀라시던걸? 그러다가 크라이츠님이 켈트 아 저씨의 팔을 붙들고 어디론가 사라지신 것 같아, 아마도 확실할 거야." 목격자(?)의 제보를 들은 뮤스는 조금 불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것 아니겠지? 이런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시면 안 되는데……." 그것은 지난 몇 년간 그들과 함께 생활해 오며 발달된 뮤스의 여섯 번째 감각이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기에 뮤스는 더 더욱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뮤스와 일행이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크라이츠와 켈트의 자취를 찾 고 있을 때, 발표회장 전체에 걸쳐 거대한 진동와 함께 기계음이 전해 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또 한 번의 생각지 못함 현상 에 놀라는 중이었고, 뮤스의 일행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구구구구궁-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발표회장 내부의 변화를 살펴보던 뮤스 는 반구형의 천장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이 낮아질수록 발표회장의 동쪽과 서쪽의 철골 벽이 아주 느린 속도로 열 리고 시작했는데, 그 모습은 건물 전체에 설치된 초대형의 기관이 서로 연계되어 발동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한발 늦게서야 그것 을 발견한 황제가 뮤스의 등을 두들기며 물어싸. "뮤스 원장님, 이것은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천장이 조금씩 내려앉 고 있는 듯 하군요!" 뮤스는 황제의 물음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뮤스 그 자 신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 저 었다. "하…글쎄요. 대충 천장의 철골 무게를 이용하여 건물 양측의 벽을 개방할 수 있는 설계인 듯합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한 준비를 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군요.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연출은 아닌 듯한데……." 뮤스가 말을 내뱉는 도중에도 발표회장의 양측 벽은계속해서 열리 고 있었고, 그 열린 틈 사리오 눈부신 햇살이 새어들며 점차 실내를 밝 히고 있었다. 차를 한 잔 마실 정도의시간이 흐르자 발표회장의 양쪽 벽이 완전 하게 개방되어졌다. 이어 검은색 복장을 한 사람들이 발표회장의 어 딘가로부터 뛰어나와 기관열차의 앞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발표회장은 기관열차를 중심으로 크게 양 등분 되어졌다. 그리고 또 한번 진동. 구구구궁! 기관열차가 전시되어 있던 자리의 앞뒤 바닥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부터 금속음과 함께 긴 사다리 모양의 철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철컹!철컹! 그렇게 모슴을 드러낸 철로는 놀랍게도 발표회장 바깥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연이어 계속되는 기현상에 입을 다 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문득 발표 회장의 서쪽 벽이 개방된 곳으로 부터 동력기의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 작하는 것이었다. 지이이잉… 철컹!철컹!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하게 되었고, 땅을 울리며 모 습을 드러내는 또 한대의 기관열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표 회장의 그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는데, 네모 반듯한 상자 모양의 차체 가 십여 개나 연결된 형태로써 총길이가 100멜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기관열차는 곧 전시되어 있던 기관여차와 맞닿게 되 었다. 몇명의 횐색 가운을 걸친 사람들은 급히 두 대의 기관열차가 맞 닿은 곳으로 뛰어가 그 사이를 고정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모두 끝난 후 완성 된 것은 그 길이가 무려 120멜리가량이나 되 는 기관열차였다. 사람들은 순식난에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철벽을 보며 놀라움 이 상의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전힌 그속의 향기를 풍기는 투박한 기관 열차의 모습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었다. "오오… 멋지군! 그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을 정도야." "으음, 범접치 못할 존재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감동으로 전해지 는 듯하군요." "과연 댚ㄱ 전체를 누비기에 전혀 손색없는 위상일세. 허헛!" 사람들의 입에서 기관열차의 모습에 대한 찬사가 끊임없이 흘러나 오고 있을 즈음 다시금 장영실이 목소리가 발효회장 내부에 울려 퍼지 고 있었다. -귀빈 여러분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기관열차의 본모습 입니다. 지금부터 이 기관열차에 탑승하여 본국의 최동단에 위치한 트 웨이드 항구까지 이동하데 됩니다. 왕복 14시간에 걸친 긴 여행이 되 겠지만, 기관열차의 내부에 각종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니 느긋한 마음으로 듀들란 제국 횡단 여행을 즐기십니오. 곧 탑승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귀빈 여러분 들게서는 안내인들의 지시를 따라주시기 바랍 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장영실의 이야기가 끝나자 회색의 제복을 걸친 사람들이 기관열차 를 따라 길게 배치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객실의 안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는데, 기관열차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 같이 소풍을 떠나는 아니마냥 설레이는 얼굴을 하구 있었다. 한편, 뮤스는 눈앞에서 펼쳐진 기관열차의 등장을 보며 자신의 이마 를 두들기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가진 공학 기술로 구현하지 못할 만 큼 놀라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발상만큼은 놀라운 것이었기에 새삼 장 영실의 능력에 감탕을 표하는 중이었다. "하… 과연 장영실 아저씨는 대단하시군요. 실시간으로 발표회장 건 물을 변형시켜 기관열차의 역사로 이용하다니. 이것이 바로 연륜의 차 이라는 것인가?" 그렇게 뮤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때 들뜬 표정으로 기관열 차를 바라보던 카타리나는 급히 뮤스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뮤스!우리도 어서 가서 줄을 어야 할것 같아. 늦으면 자리가 모자 랄지도 몰라!" 다른 친구들 역시 카타리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얼굴들이었는데, 서둘러 기관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자리가 모자라지 않 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득 뮤스의 등 뒤로부터 듀들란 제국어의 발음이 섞인 남성 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귀하들께서 카롯님과 도이첸 제국 공학권의 원장님인 뮤스 드 라켄님이십니까?" 그 목소리에 뮤스와 황제는 동시에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고, 친 구들 역시 궁금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전 이 닿은 곳에는 금빛의 실로 매운 문장을 수놓은 흰색 제복을 입은 한 남성이 있었다. 한눈에 매의 문장이 듀들란 제국 황제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아본 뮤스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으며 그들을 향해 되 물었다. "아!혹시 귀국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것입니까?" 과연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흰색 제복의 남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절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황제폐하께서 두 분을 특별 객실로 모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지금 자리를 옮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뮤스 일행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이쪽에 있는 일행과 함께 자리를 할 수는 없겠습니까?" 워낙 절친한 친구들이라 꼭 함께 기관열차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만……." 황제가 뮤스의 입장을 대변하듯 말하자 뮤스의 친두글은 간절한 기 대감이 섞인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물음에 흰색 제복의남성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러기를 잠시, 모종의 결정을 한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국의 황제폐하께 다시 여쭤봐야 할 사항이지만, 두분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라 명하셨으니 간단한 절차를 통하면 가능하리라 생각됩 니다. 그럼 일행 분과 함께 저를 따라와 주십니오." 그런대로 긍정적인 대답에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흔쾌히 고개를 끄 덕였다. 흰색 제복의 남성은 다시 한 번 황제와 뮤스 일행을 둘러 보며 몸을 돌렸고, 먼저 앞장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116장 듀들란 제국 횡단 기관열차의 가장 후미에는 흰제복을 걸친 이십여 명의 건장한 남 성들이 도열해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립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 들은 하나 같이 금빛 실로 수놓아진 매의 문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는데, 바로 듀들란 제국 황제의 신변을 책임지는 황제 직속 경호대의 인물들 이었다. 이것은 즉, 기관열차의 가장 뒤칸이 바로 황제를 위해 준비된 특별객실이고, 그곳에 지금황제가 탑습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할 수 있었다. 안내에 딸리 이곳까지 오게 된 뮤스와일행은 특별객실로 오르는 입구 앞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뮤스의 친구들은 이미 특 별 객실에 동승할 수 있도록 듀들란 제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낸 상태 였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쉽게 요구가 받아 들여진 것으로 바아 투르코스 재상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뮤스와 일행은 탑승에 앞서 듀들란 제국 황제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몸수색을 받아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기관열차의 내부를 구경하 고자 했던 뮤스의 친구들로서는 귀찮게 느껴질 만한 일이었지만, 황제 의 특별 객실에 탑승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겁기만 한 듯 환한 얼 굴들이었다. 그렇게 몸수색을 받은 이후에야 뮤스를 비롯한 일행은 흰 색 제복을 입은 남성의 안내를 받아 황제의 특별 객실에 오를 수 있었 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기관열차의 내부로 들어서자 응접 실과도 같은 모양새의 객실이 인행의 눈을 가득 메웠다. 몇 개의 탁자 와 이십여 개의 의자들이 서로 마주 보며 일정한 간겨그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었는데, 여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황제 직속 경호대가 대기 할 외부 객실이었다. 외부 객실을 가로지르며 뮤스와일행을 안해하던 흰색 제복의 남성 은객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목재로 만든 그 문에 는 듀들란 제국의 황실 문장인 비상하는 매의 문장이 양각되어 있어 그 뒤편이 황제가 머물 객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흰색 제복의 남성 은 절도잇는 동작으로 문을 열어주며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드십시오. 잠시 후면 이곳에서 황제폐하를 알현 하실수 있 을 것입니다." 안내에 따라 뮤스와 일행은 걸음을 옮겨 내부 객실로 들어섰고, 그 모습을 확인한 흰색 제복의 남성은 금세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뮤스와 일행의 시야에 들어온 내부 객실은 외부 객실에 비해 아늑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기관열차의 객실이라기보다 보통의 방과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벽지로 객실 벽을 치장하였 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에는 순백의 실크 커튼이 걸려 있었다. 또 창이 나 있는 벽을 따라라 몇 가지 장식장들과 편히 앉아 쉴수 있는 푹신한 쿠션의 소파들이 길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소파들 사이에는 테 이블이 설치되어 있어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해 보였다. 마치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자리 인 듯했다.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잘 꾸며진 공간이라 인정할 만 했다. 하지만 대제국의 황제를 위한 객실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일 정도로 수 수한 모습이었는데. 가기들이 놓여 있는 탁자에서보투 물건들을 수납 하는 장식장에 이르기까지 시내의 가구점에서 쉽게 볼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두리번 거리며 내부 객실을 살펴보던 풀린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 는 내부의 모습에 조금 실망한 얼굴을 하며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뭐야, 특별 객실이라고 해서 잔뜩 개대했더니 그리 특별할 것도 없 네. 그냥 듀들란 제국의 호아제 폐하와 자리를 함께하는 것으로 만족해 야 하는 건가. 폴린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 히안는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런건 그냥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되냐? 영광스럽게도 듀들란 제국의 황제 폐하께 초대받은 건데 그런 것 쯤이야 아무렴 어 때? 우리는 지금 양국의 호아제 폐하들께서 만나는 역사적인 자리에 함 께 있는 거라고!" "아무려면 어떻다니? 그래도 명색이 대제국의 황제폐하이신데, 황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곳에서 생활하시는게 당연하잖아. 어렸을때 부터 꿈꿔왔던 환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주변의 시선을 한 번 살펴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훗, 사실 모든 황제들이 풀린 양이 생각 하는 만큼 화려한 것을 좋 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오히려 화려한 것보다 이 렇듯 평범해 보이는 것에 아늑함을 느끼는 황제들이 많다고 할 수 있 죠. 아마 듀들란 제국의 황제도 그런 류의 사람인 듯하군요."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폴린은 수긍하는 듯 잠잠해지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고 황제는 가까이에 위치한 테이블을 손으로 한 번 쓸어 보 며 말을 이었다. "역시 제 생각 대로 로멘듀아산 단풍나무 원목을 사용한 가구들이로 군요." 황제의 중얼거림을 듣게 된 세이즈가 나서며 되물었다. "로멘듀아라면 오세프 국가연합 중 한 곳인 쟈멘그라드의 수도를 말 씁하시는 것인가요? 그곳의 단풍나무가 아주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들 어본 적이 있는것 같아요." 그녀의 되물음에 황제는 나직한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잘 알고 계시는 군요. 로멘듀아는 댚ㄱ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랍니다. 그곳은 여름에는 두터운 외투를 걸쳐야 할 만큼 날씨가 추운 척박한 땅이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단풍나 무가 두루 자라나는데 그 단풍나무로 지은 집은 제아무리 추운 날씨에 도 따뜻한 실내 온도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 덕으로 척박하기만 하 던 로멘듀아는 사람이 살수 있는 땅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상황 이 그렇다 보니 로멘듀아 지방의 사람들은 그 단풍나무를 신이 내린 신성한 선물이라 여겨 타지방으로 유출을 철저히 막았고, 그 희귀성 으로 인해 타지방에서의 로멘듀아산 단풍나무 원목은 황금에 필적하는 가격으로 거래가 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즉 , 이 객실 안의 평범해 보 이는 가구 하나라 할지라도 로멘듀아산 단풍나무 원모긍로 만들어진 이상 수천 겔피를 호가하는 초호화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숨을 죽이며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벌쿤은 수천 겔피를 호가한 다는 말에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눈앞의 가구들을 두들 겨 보고 매만져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나무로 만든 가구 하나가 전뇌거의 가격과 맞먹다니… 이 해가 안 되는 군. 가구에서 조금 따뜻한 느낌이 나긴 하지만, 고작 그 이유 하나로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 역시 벌쿤과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는 듯했다. 이에 뮤스가 가변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의 이해를 돕 기 위해 예를 들어 주었다. "후훗, 그렇다면 다이아 몬드는 어떨까? 다이아 몬드는 결국 따져 보 면 탄소를 고압으로 눌러놓은 돌덩어리일뿐인데 사람들 사이에서 엄 청난 가격에 거래가 되고 있잖아. 물론 반짝이고 아름답긴 하지만, 가 치에 비해 효용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와 같이 사람 들은 희소성이라는 개념을 돈으로 환산하는 거야. 관심이 없는 사람들 에게는 쓸데없는 낭비로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는 큰돈을 지불하면서 도 남들이 가지지 않은 것을 가졌다는 만족감을 얻으려 하는 것이지. 대상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그와 유사한 욕구를 가지 고,너희들 또한 그럴 거야." 다른 친구들은 뮤스의 설명을 이해하는듯 했다. 하지만 벌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느데, 오랜 세월을 미개척지에서 살아왔고, 공학 원에 온 이후에도 직접 금전을 이용하여 거래할 일이 많지 않았기에 남들에 비해 금전에 대한 개념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것이 몇마디의 설명으로 이해 시킬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뮤스는 시간이 해결해 줄것이라 생각하며 대충 설명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대화가 끝나고 잠시간의 저적이 찾아오고 있을때 미약한 마찰음과 함께 내부 객실의 안쪽 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고 있었다. 드르르륵-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했느데, 듀들란 제국의 황제, 황녀, 투르코스 재상과 재상 부인, 그리고 미뉴엔느와 루스티커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막 내부 객실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그들은 뮤스 일행을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앞에서 있던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뮤스 일행의 얼굴을 둘러보며 아주 능숙히 도이첸 제국어를 구사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저희가 조금 늦었군요. 제 초대에 이렇듯 흔쾌히 응해 주신 점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존칭을 쓰는 듀들란 제국의 황제였다. 전과 달라진 그의 태도에 흠칫 놀란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뒤편에 서 있는 투르코스 재 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듀들란 제국의 황제가 존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투르코스 재상이 자신의 정체를 그에게 귀띔해 줬을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르코스 재상은 그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가 벼운 미소와 함께 눈짓을 해주었다. 편안한 목소리로 뮤스와 일행을 바 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들 오게나. 자네들의 눈에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 이지만, 이번 여행이 조금 편안한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우 리는 있는 그래로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네." 하지마 투르코스 재상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후훗,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듀들란 제국 황실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가족으로서 자네들을 초대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이 있어주었 으면 좋겠다는 것일세. 황제나 황녀, 재상이라는 직위를 잠시 접어두 자는 것이지. 그러는 편이 자네들이나 우리나 서로 편하지 않겠나?" "그,그런……."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자 뮤스와 그의 친구들, 그리 고 도이첸 제국의 황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러 한 반응을 잠시 지켜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듀들란 제국 황제의 어깨에 친근히 손을 얹으며 말을 있었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소개를 하도록 하겠네. 이쪽은 본국의 황제인 동시에 나의 소중한 조카인 시너스라네. 공적인 자리에서는 목에 힘을 주지만, 이렇게 우리들과 있을때에는 비스한 또래의 소년들과 다를 바 가 없지. 아주 똑똑하고 착한 아이이니 자네들과도 제법 말이 통할 것 이라 생각하네." 시너스라는 이름으로 불린 듀들란 제국의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숙 여 보이며 뮤스 일행에게 복례를 했다. 그는 뮤스 일행과 함께할 여행 이 설레는지 한껏 상기된 얼굴이었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말대로 근엄 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또래의 소년들과 같이 해맑은 얼굴이 그 자리 를 대신하고 있었다. 투르코스 재상은 다음으로 케티에론 황녀를 소개 재 주었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시너스의 누나인 케니에론이라네. 조금 도도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일국의 황녀로서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지금은 나이가 나이인만큼 시집갈 날만 손꼽아 가다리고 있는 아가씨 이지." 케티에론 황녀는 투르코스 재상의 소개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콧대 높기로 유명했던 그녀는 과거의 모습을 모두 버린 듯했는데, 지금 은 그저 다소곳하고 부끄러움 많은 보통 여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처음 뵙겠어요. 케티에론이라고 합니다." 케티에론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투르코스 재상은 어깨를 으쓱이 며 루스티커와 자신의 부인, 그리고 미뉴엔느를 바라보았다 "흠, 루스티커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인 만큼 따로 소개하지 않 아도 되겠군. 우리 일가의 대두와 같은 분이시지. 이쪽 역시 알겠지만, 나의 아내와 딸이라네." 루스티커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손을 들어 보였고, 재상 부인은 두 손을 모은 채 따스한 미소로 그들을 대했다.또 미뉴엔느는 자신이 아 는 얼굴들이 나타나자 반갑게 손을 흔들어는데, 투르코스 재상의 앞이 어서인지 예전처럼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투르코스 재상의 소개를 듣고 있던 도이첸 제국 젊은 황제의 머리 속은 점차 복잡해 지는 중이었다. 투르코스 재상이 늘어놓은 설명 이 제법 그럴싸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 황실의 존엄성을 장고하기 위해 타국의 인물들 앞에서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 통임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편으를 봐주기 위해 자신들의 속내를 모두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그들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써던 것이다. 반면 투르코스 재상의 모리속은 시원하게 뜷어짐을 느끼는 중이었 다. 사실 그가 도이첸 제국의 황제에게 자신의 조카이자 듀들란 제국 의 황제인 시너스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응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를 신분을 숨기고 있는 도이첸 제국의 황제와 동등한 위치고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도이첸 제국 황제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대 화의 장을 열기에는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분이었다. 즉, 상대를 나에게 맞출수 없다면 나를 상대에게 맞춘다는 투르코스 재상의 치밀한 계책이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북새통을 이루던 발표회장의 내부는 어느 새 정적이 감돌았고, 흰생의 가운을 입은 십여 명의 공학도들만이 발표 회장에 남아 기관열차의 점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백 명에 달하 는 사람들이 모두 기관열차의 객실에 탐승한 상태였는데, 그들은 모자 람없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설레이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 며 기관열찰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관열차의 가장 앞부분, 장영실이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고서 기 관실에 올라서고 있었다. 두 평 남짓한 좁은 기관실에는 이미 흰색 가 운을 입은 두명의 젊은 공학도들이 기관열차를 출발 시키기 위해 준비 하는 중이었는데, 장영실의 모습을 발견한 그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 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장영실 남작님." "오늘 운행,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받으며 밝은 미소를 지은 장영실은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 며 격려했다. "후훗, 자네들이 수고가 많군. 힘들겟으나 내일까지만 수고를 해주 게. 발표회가 끝나면 휴가와 함께 황제 폐하로부터 적지 않은 포상이 내려질 것일세." 장영실의 말에 공학도 중 한 명이 섭섭한 얼굴을 하며 말해다. "수고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그저 이일이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많은 보상을 준다 해도 이렇게 고된 일을 몇 년동안이나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한 명의 공학도 역시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럼요! 이 친구 말이 맞습니다. 황실에서 주는 수백 켈피의 보 상보다 공학 지식 한가지를 깨우치는 일이 저희에게는 더욱 즐거운 일인걸요!" 듬직한 그들의 말에 장영실은 아무런 소리 없이 담담한 미소만을 지 어 보일 뿐이었다. 이어 몸을 돌린 장영실은 기관열차의 조종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 에는 기관열차의 현 상태를 나타내는 십여개의 계기판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장영실은 신중한 표정으로 그것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흠, 기관열차의 기체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던가?" 장영실이 물어오자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뭉치를 하났기 펼친 공학도들은 그 안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확인해 보며 대답했다. "1번 부터 12번 까지의 순환 동력기 상태 이상 없습니다. 전뇌력 공 급 상태와 윤활유 공급 상태, 공기 흡입 브레이크의 상태도 모두 양호 합니다. 냉각 장치도 이상없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객차 간 연걸 상태 이상무, 객실로의 전뇌력 공급 역시 이상 없습 니다. 객실의 실내등 두곳이 파손되었지만 금방 복구 할수 있었습니 다. 후훗,가장 중요한 기내식도 빠짐없이 준비된 상태입니다." 공학도들의 보고를 받은 장영실은 만조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들과 눈빝을 한 번 교환한 장영실은 조종석에 걸려 있는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대며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듀들란 제국 횡단 여행의 기관열차 운행을 맡게 된 장영 실이라고 합니다. 이 여행은 본국의 수도인 쟈트란 시를 출발하여 동 쪽 끝의 도시인 트웨이드 항구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여행으로서, 왕복 14시간의 여행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긴 시간이지만, 최대한 편안 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불편하신 사항은 각 객차 에 대기 중인 승무원들에게 문의 하시길 바랍니다. 본 열차는 잠시 후 출발합니다." 확성기를 통과한 장영실의 목소리가 발표회장과 기관열차의 객실에 울려 퍼지자 그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는 더욱 커졌으며, 그 소리는 결국 장영실이 있는 기관실에까지 닿았다. 사람들의 흥분된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며 흐뭇한 얼굴을 한 장영실 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채 입을 열었다. "전뇌력 출력을 2할로 맞추고, 동력기를 가동시키게." 장영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명의 젊은 공학도는 자신의 앞 에 있는 손잡이를 정확한 수치에 맞추어 당겼고, 힘찬 손놀림으로 붉은 색의 둥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력기가 작동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며 기관실은 잔잔한 진동에 휩싸였다. 구구구구구궁- 장영실은 눈앞의 계기판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계기판 속의 붉은 바늘은 여러 번 도리질 치더니 일정한 수치를 가리켰고, 그것들은 일일 이 살펴본 장영실은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며 금속으로 된 조종 간을 천천히 몸쪽으로 당겼다. "흐음… 이제 출발하세나. 도심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시속20켈 리로 속도를 고정시키게." 장영실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하고도 육중한 기관열차는 느 린 속도로 발표회장의 동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구궁. 구궁. 구궁. 조종간을 잡고 있는 장영실의 손을 고 거대한 기관열차의 박동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웅장한 박동을 뿜어 내고 있었는데, 그 순간 장영실이 느끼는 희열은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해 할수 없으리 만큼 가슴 벅찬 것이었다. 하늘의 정상에서 해가 살작 기울 무렵, 점심 식사를 마친 어른들은 따스산 햇살에 노곤함을 느끼며 낮잠을 즐길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네 아이들은 한숨의 달콤한 낮잠보다 뛰어 놀기를 좋아했기에 짧은 낮 시 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오늘도 도시 건물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뻐어엉! 땀으로 갈색 머리를 적신 소년 한 명이 가죽으로 만든 공을 힘껏 찼 다. 아이의 발에 맞은 공은 건물의 벽들에 이리 저리 튕기더니 알 수 없 는 곳으로 굴렀고, 또 다른 친구들은 그 동을 쫓으며 달음질을 치기 시 작했다. 어른 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고 목적도 없는 아이들만 의 놀이가 유치하게 보일지도 몰랐지만, 아니들에게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뛰고 있나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사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뻐엉! 어느새 아니들이 차고 놀던 공은 도시의 큰길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평소 부모님께 큰길에서 오가는 마차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 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긴 했지만,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에만 정신이 팔릴 대로 팔린 아이들의 머리 속에 부모님의 설교가 들어설 자리는 한 치도 없는 듯했다. 정신 없이 공을 쫓아가 잡은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있는 힘껏 공을 차올렸다. 뻥! 비교적 힘이 모자라는 소녀였기에 다른 소년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공은 제법 높이 떠올랐고, 공의 자취를 쫓던 아이들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른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물리력을 잃은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금 땅에서 떨어지기 시작해싿. 아이들은 좌우르르 살피지도 않은 채 떨어지고 있는 공만을 주시했고, 옆 걸음을 치며 공 의 움직임을 쫓기 시작했다. 통. 통. 때구르르르………. 이윽고 공이 떨어져 멈 춘 곳은 큰 길의 중심에 설치되어 있는 철로 사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을 향애 몸을 날렸고, 서로 공을 빼앗고자 웃으며 몸싸움을 벌 이기 시작했다. "이리 내! 나좀 차 보자!" "흥, 웃기지마!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그렇게 달린다고 누가 줄것 같아?" "너희들은 매너라는 것도 모르는 거니? 숙녀에게 양보를 하는 거라 고!" "꼬맹이 주제에 뭐가 숙녀라는 거야!" 한참 동안 그렇게 땅을 구르며 얽혀 있던 아이들은 문득 지진이라도 난 듯한 진동이 몸 전체를 타고 전해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공에 정신이 빼앗겨 있던 아이들 역시 그 진동에 만큼은 무관심할 수 없었는 지 하던 행동을 멈춘 채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구궁. 구궁. 구궁. 구궁. 일정한 빠르기로 들려오는 진동 소리는 아이들의 심장 소리와 장단 을 맞추며 귀를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아니 드른 두려움에 찬 얼굴로 철로의 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구궁. 구궁. 구궁. 구궁. 아이들의 시선이 멈춘 곳, 그곳에서는 전신에 철갑을 두른 집채만한 무엇인가가 땅을 울리며 달리고 있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한 이상 절 대 멈출 것 같지 안흔 중압감을 풍기는 그것은 보란 듯이 철로 위를 달 리는 중이었고, 그 연장선에 바로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는 점차 진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철로에 서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몸을 얼어붙도록 만드는 두 려움으로 인해 이미 다리가 풀린 상태였다. 게다가 서로 몸까지 얽혀 있었기에 철로 위에 누운 아이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눈을 빤 히 뜬 채 정체 모를 철갑괴물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철갑괴물과의 거리는 대략 30멜리. 그 거대한 크기로 인해 바로 눈 앞에까지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아이들은 난생처음 절망이라 는 감정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푸쉬~! 키기기기기깅! 철갑괴물의 양 옆으로 수증기가 방출되는 동시에 철로를 깎아 내는 듯한 요란한 금속의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돌진밖 에 모를것 같던 거대한 철갑괴물이 점차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아래로 파묻고 있던 아이들은 시간이 충분히 지났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자이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도 10멜리가량 떨어진 곳에 떡하니 서 잇는 철갑괴물을 바라보았는데, 그제야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는 지 반은 웃는 얼굴, 반은 우는 얼굴을 하며 자신들의 무사함을 자축하 고 있었다. "으아아아앙! 우리는 살았어!" "아아! 저 괴물이 멈춰주었어!" "훌쪽! 좋은데 울긴 왜 울어! 웃어야지!" "흑흑, 바보!그러면서 너는 왜 우는데?" 아이들이 서로의 우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을때, 철 갑괴물의 옆구리가(?)열리며 한 남성이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색 머리 카락에 검은 눈공자, 그리고 180셀리쯤 되는 키와 넓은 어깨, 기관열 차를 운전하던 장영실이었다. 그는 기관열차를 운전하여 쟈트란 도심을 빠져나가던 두중 철도의 먼발치에 몇 명의 아이들이 뒤엉켜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며 기관열차를 멈춘 것이었는데, 아직도 그 놀람이 가시지 않은 듯 딱딱히 굳어 있는 얼굴이었다. 아이들에게 다가간 장영실은 철로 위에 주저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 고 있는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또 아이들은 역시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아 저씨를 올려다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에게 꾸중을 듣게 될지도 모른 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 고, 낯선 아저씨는 오히려 자신들을 직접 일으켜 주며 따뜻한 목소리고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너희들, 괜찮은 거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거의 물음에 금세 환한 미소를 지은 아이들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 며 대답했다. "네! 저희는 멀쩡해요!" "그럼요! 우리는 엄청 건강하다구요!" 아이들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던 장영실은 철로 사이에 서 구르고 있는 가죽 공을 주워 건네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듭었다. "앞으로는 큰길에서 공놀이를 하면 안된단다. 알겠느냐?" 장영실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아이들은 방금 전의 무서운 기억을 잊 어쓴지 다시금 신이 난 표정을 하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네! 앞으로 꼭 조심할게요!" "죄송해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아이들은 장영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 고, 마차가 오고 가는 큰길을 조심스럽게 건너 건물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영실은 스스로를 책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이 조금만 더 깊었다면 이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던 장영실은 오늘은 소중한 경험을 가슴에 안고서 다시금 기관실에 올랐고, 그를 들뜨게 만들었던 희열감은 가슴 한구석 으로 조용히 물러나 있었다. 기관열차는 장영실의 마음을 대변하기라 도 하듯이 신중한 모습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관열차는 쟈트란 시의 절반쯤을 가로질러 달리는 중이었다. 일련 의 사건으로 인해 속도는 이전 보다 더욱 느려진 상태였지만, 오히려 승 객의 입장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느긋한 기분으로 미 처 둘러조비 못함 쟈트란 시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분은 타국에서 온 손님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 었다. 특별 객실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 보고 있던 듀들란 제국의 황제인 시너스 역시 그러했는데, 황위에 오른 이후 황궁 밖의 출입이 거의 없었던 그의 눈에는 자국의 수도인 쟈트란 마저도 신기하 게 비춰졌던 것이었다 창을두들기며 유려한 곡선형의 화려한 간판이 팔려 있는 가게를 가 리킨 시너스 황제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저 포멜로안이라는 가게는 무엇을 파는 곳이길래 저리도 화려한 간 판이 달려 있는 거죠?" 그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폴린이었다. "아! 저 역시 저곳이 궁금하길래 들러보았는데, 귀족들을 대상으로 애견을 파는 곳이더군요. 애건의 먹이나 군것질거리들, 그리고 털을 가꾸는 용품들을 팔고 있답니다." 풀론의 대답에 시너스 황제 역시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그런 가게도 따로 있군요. 가끔 귀족들이 황궁의 사교장에 들릴때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오던데, 그것을 역시 저러한 가게에서 구입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히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애견 용품이라는 것이 여간 값이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입니다. 애견의 먹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식사 값보다 비싸게 나가는 영우도 종종 있으이까요. 돈 많 은 상류층의 사치라고나 할까요?" 히안의 말에 시너스 황제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흠… 그렇다면 애견을 키우는 것 역시 국가로서는 상당한 낭비로 군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따뜻한 하루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품을 팔고 이쓴데, 상류계층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한낱 강아지들을 먹이기 위해 그러한 돈을 쓰다니… 숙부님, 이번 기회에 애견 사육을 금지시 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이상하게 꼬이는 듯하자 히안은 식은땀 을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 하핫…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폐하 께서는 너무나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음…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바르지 못한 사회 현상이지 않습니까? 잘못 된 점이라면 고쳐 나가야죠." 창을 통해 먼발치의 쟈트란 시내를 바라보던 투르코스 재상은 그들 의 대화에 잠시 시선을 돌려싿. 그리고 가벼운 어투로 그들의 대화에 기어들었다. "후훗, 무론 눈앞의 문제점을 고치는 것도 좋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단다. 네 말대로 지금 당장 애견 사육 을 금지시켜 봐야 상류계층 사람들의 반발심만 부추길 뿐 큰 효용을 이끌어낼 수는 없단다. 시간날때 그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시너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투르코스 재상의 말을 머리 속에 잘 새겨 놓고 있었다. 자신의 한마디 말로 애견 사육 금지법이 제정될 뻔한 위기를 넘기자 히안은 자직한 함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비록 투르코스 재상의 배려로 인해 시너스 황제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적 으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인물이라는 사시를 통감하는 중이었다. 사실 투르코스 재상의 언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황제와 편 안한 말을 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기관열차가 발표회 장을 출발한 이후에도 한동안 뮤스와 그의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보 며 서먹한 분위기를 느껴야만 했다. 하나 도이첸 제국의 젊은 황제는 조금 다른 듯했는데, 어차피 듀들 란 제국의 황제인 시너스가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만큼 말을 트 더라도 큰 무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이첸 제 국의 황제는 시너스 황제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수 있었고, 그 던 에 눈치만 보고 있던 뮤스와 친구들 역시 도이첸 제국의 황제를 따라 편안히 이야기를 주고받을수 있었던 것이다. 히안은 창에서 떨어져 객실 안을 둘러보았다. 뮤스, 카타리나, 도이첸 제국의 황제 그리고 미뉴엔느와 케티에론 황 녀는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중이었고, 벌쿤과 세이즈는 벌써부터 배가 고팠는지 간단한 음 식을 나눠 먹거 있었다. 또 투르코스 재상과 재상 부인은 오뭇한 모습으 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투르코스 재상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도 웃음이 헤픈 그가 어떻게 30년 이라는 긴 세월을 웃지 않고 살았는지 정녕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객실 안을 둘러보던 히안은 수염을 뜨다듭으며 책을 읽고 있 던 루스티커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따분한 이야기를 꺼낼 듯한 루스 티커의 어굴을 의식한 히안은 은연중에 그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 지만 르스티커는 마침 잘되었다는 듯 책을 덮었고, 흰색의 수염사이로 드러난 입술을 움직이며 히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거기 젊은 친구. 이름이 후안이라고 했었던가?" 이름마저 잘못 불리우자 결코 달가울 리 없었던 히안은 인상을 찌푸 리며 대답을 했다. "이, 이런, 후안이 아니라 히안 입니다, 히안." 그늬 대꾸에 루스티커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자네도 나 만큼 늙어보게나. 내 나이에 사람 이름 외우기가 얼 마나 힘이 드는지 알게 될 것일세." 그리고 멋쩍은 미소를 짓던 루스티커는 객실 아능ㄹ 한번 훑어보며 말 을 이었다. "그보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크라이츠님과 켈트님의 모습이 보 이지 않는군. 분명 발표회장에서 자네들과 함께 있었던 것 같은 데……." 루스티커의 물음에 히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저희들 역시 두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찾았는데, 어디 로 사라지셨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던 뮤스는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루스 티커와 히안의 대화를 듣고서야 잠시 잊고 있던 크라이츠 켈트의 일 을 떠올릴수 있었다. "아! 잠깐 잊고 있었군. 정말 누님과 켈트 아저씨는 어디로 가신거야?"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뮤스의 태도를 본 카타리나는 그의 심정을 이 해할 수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니? 두 분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 이 상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응 없잖니. 다른 객실에 타고 계시거나 바 쁘게 다른 일이 있으셨던 거겠지." 그러나 뮤스가 정작 걱정되는 것이 바로 그 '다른 일' 이라는 것이었 는데, 카타리나에게 이렇다 할 설명을 할 수 없었던 뮤스는 답답한 가 슴을 억누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느새 밢회장을 출발한 기관열차는 쟈트란 시를 빠져나가 들판 을 가로질러 놓인 철도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기관열차는 웅장한 소리와 함게 바람의 저항에 당당히 대항하며 거침없이 질주하 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먹이던 목동 은 기관열차가 질주하는 모습에 크게 놀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 며 소의 고삐까지 놓치고 있었다. "대, 대체 저 괴물은 뭐지? 호, 혹시 샌드웜인가?아냐, 샌드윔이 들 판에 나타날 리가 없지. 그럼 대체 저건 뭐야?" 자신이 가진 온잦 지식을 짜내어봐야 저 멀리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괴물체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고, 그저 자신에게 아무런피해를 입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특별 객실의 실내에는 이제 제법 오붓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딸라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늘어갔고, 그럴수록 어색 함이 사라지고 친근감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기관열차의 객실 이라는 협소한 공간이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미뉴엔느를 무릎에 앉힌 도이첸 황제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 는 풍격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이 기관열차라는 것이 정말 빠르긴 빠르구나. 이렇게 가다간 대륙 의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지 않니?" 쿠키 조각을 한입 베어 문 미뉴엔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박또박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맞아요. 마차보다 말보다 훨씬 빠른 걸요! 이 모든 게 쟝 아저씨 덕분이에요." "쟝 아저씨라니?" 황제의 되물음에 미뉴엔느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입술을 조잘거렸다. "어? 쟝 아저씨도 모르세요? 장영실 아저씨 말이에요! 아저씨 적분에 아이들이 밤에도 편안하게 그림책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학교에서 멀리 사는 친구들도 전뇌거를 타고 쉽게 등교할 수 있게 되었는 걸요. 또 겨 울에도 항상 따뜻한 물을 쓸 수가 있게 됐어요. 정말 대단히시죠?" 미뉴엔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말하는 쟝 아저씨가 장영실 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황제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장영실 남작님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말하는 것을 보니 미뉴 엔느는 장영실 남작님을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인걸?" 그의 물음에 미뉴엔느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밍은 쟝 아저씨를 너무나 좋아해요! 그리고 저의 엄마가 말해 주셨는데, 케티에론 언니도 쟝 아저씨를 너무 좋아한다고 그러시던걸 요?그렇죠?" 미뉴엔느는 케티에론의 확인을 박고 싶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물었 다. 이에 케티에론 황녀는 적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데, 새하얀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그건……." 그녀의 태도를 보며 대충 상황을 눈치 챌 수 있었던 황제는 미뉴엔 느의 머리를 가볍게 스다듬어 주며 말했다. "후훗,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아니란다. 미뉴엔느도 훗날 성숙 한 숙녀가 되면 별로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들이 생기기 마련 이지. 그런 비밀은 누가 뭐래도 지켜줘야만 하는 것이란다. 알겠니?" 황제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미뉴엔느 역시 그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또, 케팅론 황녀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용 히 덮어준 도이첸 제국 출신의 낯선 청년을 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잇었다. 뮤슨 ㄴ듀들란 제국의 시너스 황제와 대화를 나누는 중있었다. 시너 스 황제는 오래전부터 투르코스 재상을 통해 뮤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 어 왔기에 많은 궁금증을 품어온 듯했는데, 물 만난 고기 마냥 그동안 품 어왔던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숙부님께 듣자 하니 이번에 본국을 방문하면서 비행선이라는 것을 타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놀랍게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하고 하던 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좀처럼 믿기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뮤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투르코스 재상님께서 폐하께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겠죠. 물론 사 실입니다." "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저도 그 비행선이라는 것을 한 번 타 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수도 없이 하늘을 나는 꿈을 꾸어 왔는데, 실제로 한번 하늘을 날아보고 싶군요." "하핫, 폐하께서 부탁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 들을 이렇듯 기관열차에 타게 해주셨으니 그만한 보답은 해드려야겠죠." 뮤스가 흔쾌히 승낙을 하자 시너스 황제는 기쁜 표정을 감주지 못하 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가고 있을 때였다. 외부 객실 로 통하는 문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똑!똑! 가벼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한잔 마시던 투르코스 재상은 의아한 표 정으로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부 객실로 의 출입을 금한다는 명령을 경호대의 대원들에게 내려 놓은 상태였는 데, 이렇듯 노크 소리가 들리자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투르코스 재상이 묻자 문밖으로부터 한 남성의 대답이 들려왔는데, 과연 무슨 일이라도 일아났는지 당황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그게…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뭐라 말씁드리기가 … 아무래도 재상 각하께서 직접 나와보셔야겠습니다." 황제 직속 경호대라는 직분이 직분인만큼 웬만한 일로는 감정을 쉽 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투르코스 재상은 이토록 당황하는 그의 태도에 더욱 깊은 의혹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었던 그는 직접 문을 열고서 객실을 나섰고,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뮤스와 일행 역시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 했다. 시속 100켈리 이상의 속도로 달리고 잇는 기관열차를 대등한 속도 로 따르고 있는 물체가 있었다. 날렵한 유선형의 모양을 한 그것은 앞 뒤로 한 개씩의 바퀴만 가진 기이한 형태의 전뇌거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번 제국 개발 사업 발표회장에 전시되었던 전뇌마였던 것이다. 전뇌마의 커다란 바퀴는ㄴ 포장되니 않은 거친 땅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 내달리는 중이었는데, 기관열차 후미를 농락이라도 하듯 좌우로 요 란하게 움직이며 따르는 중이었다. 부아아아앙! 동력의 굉음이 벌판 위로 울려 퍼지고 있을 때, 투르코스 재상과 뮤 스 일행은 기관열차의 후미에 나 있는 창을 통해 밖의 상황을 내다보 고 있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는 전뇌마의 모습을 발견 할수 잇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발표회장에 얌전히 전시되어 있어야만 할 전뇌마가 이곳에서 달 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전뇌마에 올라타 그것을 운전하고 잇는 두 인물의 정체였는데, 바로 발 표회장에서 사라진줄 만 알고 있었던 크라이츠와 켈트였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카타리나는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손으로 두 눈을 부비며 뮤스를 향해 물었다. "서, 설마 정말 저분이 정말 크라이츠님이니? 그리고 뒤에 계신 분 이 켈트 아저씨? 내 눈이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켈트의 돌발적인 행동이야 평소에도 많이 보는 것이었기에 그러려 니 할 수 있었지만, 늘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크라이츠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자 카타리나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뮤스 역시 카타리나의 심정과 별다를 바가 없었는데, 크라이츠와 켈트가 무 슨 일을 꾸미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긴 해지만 설마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한 손만으로 전뇌마의 운전대를 잡은 크라이츠는 뮤스와 일행을 발 견하기라도 했는지 신나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호! 뮤스, 이 전뇌마라는 게 상당히 재미있구나! 너희들도 한번 타볼래?" 반면 켈트는 썩 재미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애처롭게도 전뇌마의 기체에 굵직한 밧줄로 꽁꽁 묶인 모습이었고,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있 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눈물이 가득 맺힌 두둔에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우우움! 움움! 우우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속도를 즐기는 크라이츠와 전뇌마의 뒷 자리에 묶인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켈트의 모습을 바로보던 뮤스는 때 아닌 두통이 몰려옴을 느꼈다. 지끈 거리는 머리를 매만진 뮤스는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역시, 나의 불길한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군."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크라이츠와 켈트의 생각을 바라도번 시너스 황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호,혹시 아는 분들이십니까?" 이미 체념의 경지에 오른 뮤스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 며 땅이라도 꺼뜨릴 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의 누님과 아저씨랍니다 물의를 일으킨 점 어떻게 사죄 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조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긴 했지만 다른 이에게 별다른 피해를 끼 친 것도 아니었기에 시너스 황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핫, 그렇게 사과하실것 까지는 없습니다. 원장님의 누님께서 는 상당히 재미있는 분이신 듯하군요." "재미있다느 말로 어찌 설명을 다 할수 있겠습니까?" 황제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는 뮤스가 왠지 측은해 보인다 는 생각을 했다. 뮤스가 심란해 하고 있을 때 벌쿤은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 라이츠를 향해 신나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큰누님! 아주 멋져요! 뭔가 멋진 묘기라도 보여주는게 어때요?" 크라이츠와 켈트를 태운 전뇌마는 벌쿤의 요구에 호응하기라도 하 듯 앞바퀴를 들어 올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뇌마의 뒤쪽에 묶여 있던 켈트는 어리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켈트는 마음 깊은 곳에 벌쿤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크라이츠를 향해 환호하던 벌쿤은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는지 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런데 말야. 분명 아까 발표회장에서 전뇌마는 시속 60켈리 정도밖에 낼수 없다고 말했는데, 크라이츠 누님이 타신 전뇌마는 어떻 게 기관열차를 따라올수 있는 거야? 적어도 시속 100켈리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벌쿤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 역시 그 설명을 듣고 싶었는지 뮤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뮤스는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 들의 시선을 저버릴수 없었기에 간단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흠… 아주 간단하게 추론할 수 있는 문제야. 크라이츠 누님이 켈트 아저씨와 함께 사라진 것을 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지. 바로 누님이 켈트 아저씨께 부탁해서 전뇌마를 개조한 거야. 우리 중에 전뇌마를 저만큼 개조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켈트 아저씨뿐인데, 나한테 말해 봐야 해주지 않을 것이 뻔하지 켈트 아지씨게 부탁을 한 거지. 뭐, 켈 트 아저씨야 모양새를 보아하니 부탁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것 같지 만 말이야." "아하, 그렇구나!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점이 생기는군, 전뇌마에 들어가 있는 순환 동력기의 구조가 우리 공학원의 그것과 다른데 어떻 게 개조할 수 있지? 그것도 몇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말이야." 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짧은 시간에 순환 동력기를 개조할 수는 없지. 순환 동력기가 가진 한계 성능이라는 것이 있으니 개조를 한다해도 큰 효과를 볼 수 는 없어.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지. 넌뇌력의 출력을 높이는 것, 즉, 전 죄마의 장착되어 있는 축전지를 대신해서 우리 공학원에서 사용하는 마나구를 장착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최소한 두 배에 달하는 동력을 얻 을수 있을 테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마친 뮤스는 다시 한 번 크라이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천진난만한 웃음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는데, 비록 겉으로는 그녀의 행동 이 골치 아프다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크라이츠의 모습은 뮤스에게 있어서 정겨운 기억 중의 하나였다. 가벼운 미소를 지은 뮤스는 전뇌마를 타는 크라이츠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몸을 돌려 객실로 들어 갔다. 하지만 크라이츠의 새로운 모습이 마 냥 신기하기만 했던 다른 일행은 그 자리에 남아 연신 그녀를 향해 환호 했고, 이에 더욱 탄력을 받은 크라이츠는 놀라운 묘기들을 관객들(?)에 게 선보여 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즐거움과 설레임을 가득 답은 기관열차는 지평선 위로 내려 앉는 붉은 석양을 맞으며 듀들란 제국의 동족 끝을 향해 힘 차게 달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