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이 박이수-------------------------------------------------------------------제1장. 폭풍우-------------------------------------------------------------------탁자 위에 놓여 있는 촛불이 두텁게 내려진 휘장자락에 아른거리며 한줌 그림자를 던졌다. "찾았다고 했느냐?" 육중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 나지막한 물음이 나왔다. "예, 리자드님. 지금까지의 그 누구보다 확률이 높습니다." 우뚝하니 서 있는 다른 남자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디냐?" "바드리오 근처에 위치한 딜람이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딜람이라....." 낮게 중얼거리며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 보이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 젖은 은빛 달이 남자의 얼굴에 뚜렷한 음영을 드리웠다. "말해봐라!"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천민 소녀입니다." "천민이라고?" 불안할 정도로 딱딱한 어조였다. "예, 그렇습니다. 약초를 캐어 간단한 약을 만들어 파는 노인의 손녀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라 손가락질까지 당하고 있었습니다. 단언하건대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닐 것입니다." "그 아이가 맞다면 페르가몬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군." 감정을 알 수 없는 극도로 절제된 목소리에서 싸늘한 냉소가 묻어 나왔다. "명령하신 대로 전 내일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아니다, 아몬. 마음이 변했다.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나서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아몬은 자신의 주인이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 머리를 조아리며 복종의 뜻을 밝혔다. 창 밖에서 날아든 한줄기 바람이 무겁게 내려진 휘장 자락을 흔들었다. 유난히 차가워 보이는 달빛이 불길하게 너울거리는 밤이었다. ------------------------------------------------------------------- "더러운 마녀!" 먼지가 뽀얀 발등 위로 침이 날아들었다. "더러운 마녀!" 작은 여자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 자신의 오빠가 소리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밤만 되면 괴물로 변해 갓난아기들을 잡아 먹는다며?" "우리 아빠가 너같은 건 불에 태워 죽여야 된대! 늙은 마귀할멈도 같이!" 엘은 못들은 척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주위를 포위하다시피 하며 따라오는 마을 아이들 때문에 그녀의 발걸음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엘이 작은 돌 뿌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린 순간, 오른편에서 종종 걸음을 걷던 남자 아이가 들고 있던 기다란 나뭇가지로 그녀의 옆구리를 세차게 찔렀다. 날카로운 통증에 격한 숨을 들이쉬며 엘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낚아챘다. 그리고 놀라 멈칫한 아이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놈들! 어서 꺼져! 당장 꺼지지 않으면 저주를 내려 모조리 개구리로 만들어 버릴 테다!" "으,으아악!" "엄마!" "으악! 사람 살려!" 아이들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은 찔린 옆구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를 공격한 남자 아이에게 떠밀려 네다섯 살 먹은 작은 여자아이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 아이는 공포로 인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엘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작은 얼굴은 먼지와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들고 있던 바구니를 고쳐 잡으며 걸음을 옮기려 하던 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성큼성큼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입에서 숨 넘어가는 헐떡임이 터져 나왔다. "울지 마!" 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불쑥 내밀었다. "야, 받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 몸이 얼어붙어 눈만 희번덕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새카맣게 때가 낀 아이의 맨발 앞에 사과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엘은 붉은 석양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할머니는 약 만드는 데 정신이 팔려 오늘도 하루 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하루 몸이 쇠약해지고 있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지런히 가파른 바위투성이 언덕을 올랐다. 짚으로 얼기설기 엮은 바구니 무게로 인해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오두막 굴뚝 위로 가느다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겨우내 불어 닥친 매서운 바람에 다 벗겨진 이엉지붕이 보잘 것 없는 작은 오두막을 더욱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삐죽 튀어나와 너덜거리는 비뚤어진 문고리를 잡는 엘의 얼굴엔 어느새 편안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엘이 크게 소리치자 작은 화로 앞에 서 있던 할머니가 못마땅한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나 귀 안 먹었다! 왜 그렇게 소리를 꽥꽥 질러 대는 거냐?" "치잇~ 작게 말하면 안 들린다고 야단치시잖아요!"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거칠게 깎은 나무 탁자에 바구니를 올려 놓았다. "저런 건방진 것이 있나? 어디 할미 앞에서 말대꾸야?" 서슬 퍼런 고함 소리에 엘의 입술에 배시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게 다 성질 괴팍한 할머니를 닮아서 그런 거잖아요." "뭐라고? 이 녀석이!" "우와! 화 내시니까 우리 할머니, 십 년은 젊어 보이시네!" 엘이 소리내어 웃으며 뒤에서 할머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엉망으로 뒤틀린 거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할머니의 얼굴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지독한 화마가 지나간 얼굴은 엉망으로 구겨지고 일그러진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보였고, 듬성듬성 가시가 돋듯 나있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얼굴을 한층 흉칙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이런 할머니 얼굴도 엘에게 있어서만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사랑해 주는 단 한 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갖가지 약초를 다룰 수 있는, 그들에겐 낯설기 만한 능력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마귀의 앞잡이 정도로 여겼다. 그들의 공포심과 혐오감은 엘에게도 이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둘만의 생활을 한층 힘겹게 만들었다. "참! 할머니!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오늘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엘은 활기있게 소리치며 바구니에서 서너 개의 라즈니쉬 뿌리를 들어 올렸다. 라즈니쉬 뿌리는 모르는 사람의 눈엔 흔히 볼 수 있는 잡초로 오인되기 쉽지만 고통을 완화시키고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는 귀한 약초였다. "봄이 오긴 왔나 보구나. 라즈니쉬 뿌리를 다 보다니." 할머니는 엘의 손에서 라즈니쉬 뿌리를 받아 들어 유심히 살펴본 후 가느다란 뿌리 끝이라도 상할까 싶은 조심스런 동작으로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 벽에 걸어놓은 무겁고 초라한 외투를 꺼내 들었다. "어디 가세요?"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소리쳤다. 밖은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는 가까운 문밖 출입도 몹시 힘들어 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리즈 부인에게 약을 전해줘야 한단다. 오늘 오라고 했는데 날이 저물도록 코빼기도 안 내미는구나. 풍병(風病)때문에 남편의 고통이 심할 텐데 말이다." "통증이 심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고맙다는 인사말도 한마디 안 할 사람들이잖아요." 할머니의 매서운 눈초리를 마주 바라보며 엘은 목청을 높였다. "지나갈 때 힘차게 침 뱉으며 욕설이나 소리치라고 힘들게 만든 약을 가져다 준단 말이에요? 그것도 할머니가 직접이요?" 항상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이나 당하면서 왜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꼬박꼬박 치료를 해주고 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지 엘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강경했다. "예에, 알았어요. 그런 말을 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지는 거고, 그들이 말하는 마녀보다도 더 못된 인간이 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힘든 사람을 보고도 못 본체 하면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진다느니, 사람의 생명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귀한 존재라느니 하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단 말이에요." 엘은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리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나 할머니가 이미 꾸려 놓은 약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마음이 정 그러시다면 제가 갔다 오겠어요." "아니다! 오늘은 내가 가마! 어서 이리 다오!" 다급하게 튀어나온 할머니의 반대에 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갔다. 대체 왜 그러시지?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자주는 아니지만 늘 제가 하던 일이잖아요. 마을까지 얼마나 먼지 아세요?" "이 말 많은 녀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군소리 말고 어여 꾸러미나 이리 내놔!" 평소와 다른 할머니의 모습에 엘은 머뭇거리며 들고 있던 약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꾸러미를 잡으려는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엘! 이리 돌아와!" "느림보 할머니는 집에서 저녁이나 차리시라고요!" 엘은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고 나서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엘! 안 된다! 어서 돌아와!" "금방 갔다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엘은 크게 소리치며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엘! 넌 오늘 마을에 가면 안돼!"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는 벌써 저 만치 달려가는 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뒤틀린 다리로 허겁지겁 문턱을 넘었을 때, 이미 엘의 모습은 언덕 아래로 사라진 후였다. 어둑어둑한 숲 그림자 위로 며칠 전부터 그녀를 괴롭혀 오던 악몽이 겹쳐졌다. 불이 그녀의 몸을 짓이긴 사고가 일어난 날과 모든 것이 너무도 흡사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불길한 꿈이 계속해서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고, 불안한 마음이 전신에 오한을 들게 했다. 현재와 그 때를 비교해보면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공포심이 한층 강하게 든다는 것과 악몽 속의 주인공이 그녀가 아닌 엘이라는 거였다. 힘껏 맞잡은 주름진 손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 "무슨 일이야?" 엘이 자신을 밀치고 들어올까 무서운지 리즈 부인이 뚱뚱한 몸으로 문 전체를 막아 섰다. 엘은 입술을 꼭 깨물며 아무 말없이 약 꾸러미를 내밀었다. 마녀의 힘을 빌리는 자신의 처지가 못마땅한 듯 리즈부인의 얼굴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마에 두 개의 깊은 주름을 잡은 채 무슨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 듯 엘의 손에서 약 꾸러미를 집어 올렸다. 빳빳이 편 팔 끝의 손가락 두 개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꾸러미를 바라보며 엘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꾸러미를 낚아채 바닥에 패대기 친 후 사정없이 짓밟고 싶었다. 입으로는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말이다. 그러면서 리즈 부인의 얼굴을 감상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 하는 손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엘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약을 만드느라 근 반나절 동안 화로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계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귀가 멍멍할 때까지 이를 악물어도 끝내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등 뒤로 침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길!" 엘은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굳게 닫힌 문을 노려봤다. 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불끈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이런걸 참아야 한다면 차라리 마녀가 되는 편이 나을 거야! 엘은 허리를 굽혀 주먹만한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눈 앞의 나무 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저녁 거리의 정적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문에 뚫린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램프 불빛을 보며 엘은 숨죽인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집안에서 놀란 고함소리와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잽싸게 몸을 돌려 어두운 골목 쪽으로 뛰어갔다. 씩씩대고 있을 리즈 부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충분히 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엘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딱딱한 무엇인가와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억센 손아귀가 거칠게 잡아 지탱해 주었다. 엘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그녀의 팔을 조이는 악력이 거세졌다. 엘은 눈을 크게 뜨고 희미한 불빛에 어른거리는 눈 앞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게 누구야? 새끼 마녀잖아!" 결코 착각할 수 없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그녀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주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호세가 틀림없었다. 난봉꾼으로 이름 높은 그와 소위 있는 집 자제들로 구성된 그의 패거리들은 이 곳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미 노쇠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차 백작이 될 호세는 세상에 무서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호세 패거리에게 걸려 모든 걸 잃고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여자들도 한둘이 아니었다.엘은 몸을 비틀어 억지로 호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열 여덟 살이 막 되었을 두 달 전 시장에서 호세 패거리에게 걸려 지독한 꼴을 당할 뻔한 사건 이후 엘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았다. 천민인 그녀가 귀족에게 대항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즉시 엘은 물론 할머니까지 더 이상 산 목숨이 아니게 될 것이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지?" 거만한 물음에 엘은 마른 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즈 부인 댁에 약을 갖다 주고 오는 길입니다, 나리."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호세가 거칠게 킥킥거렸다. "그게 아니라 저 더러운 골목 어딘가에 서서 치마나 걷어붙이고 있었겠지. 그렇지, 요 깜찍한 창녀야!" 호세 뒤에 서 있던 패거리들이 낄낄거리며 맞장구치는 소리를 들으며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눈 앞에 서 있는 여섯 명의 남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호세에게 달려들어 힘껏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안돼! 참아야 돼! 놈들의 도발에 걸려 들면 나만 손해라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봐야해. 엘은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도망치는 건 자신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복잡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발이 빠른 엘을 잡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호세가 고개를 자신의 패거리들에게 돌리는 순간 엘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어딜!" 호세가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짧은 비명소리를 지른 엘 앞으로 부딪힐 듯 호세의 얼굴이 다가들었다. "앙큼한 것 같으니! 내가 또 속을 줄 알았냐?"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는 호세의 입김이 볼에 확 끼얹어지자 엘은 숨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있는 힘은 더욱 우악스러워질 뿐이었다. 엘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소리를 삼키며 한 가닥 가느다란 용기를 움켜잡으려 애썼다. "이거 놔!" "이런 건방진!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패거리 중의 한 명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놔주지! 우리 볼일이 다 끝나면 말이야!" 호세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패거리들이 어슬렁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키득거리며 거리를 좁혀 오는 그들을 보며 엘은 바짝 긴장했다. 그들에게 둘러싸인다면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나기 불가능할 것이다. 엘은 있는 힘껏 호세의 다리를 걷어찼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머리채를 틀어쥐고 있던 손아귀가 풀렸다. 그러나 상황은 엘의 바램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남자 두 명이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 년 꼭 잡고 있어!" 이를 뿌드득 갈던 호세가 주먹으로 엘의 얼굴을 내려쳤다. 엄청난 통증과 함께 한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엘이 휘청하자 양쪽에 있던 남자 두 명이 단단히 팔을 붙잡아 몸을 지탱시켰다. 입술 안쪽이 뭉개졌는지 비릿하고 뜨듯한 피가 그녀의 입안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번엔 복부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허리가 반으로 꺾인 엘의 입에서 고여 있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런 폭력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한 악몽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멍한 머리를 뚫고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신이 번쩍 든 엘의 눈에 너덜거리는 옷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가슴이 보였다. "싫어! 이거 놔!" 미친 듯한 몸부림도 그들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엘은 지저분한 골목 바닥에 눕혀지고 있었다. 싸늘하고 축축한 냉기가 등에 느껴지는 순간 호세가 킬킬대며 그녀의 몸 위로 육중하게 덮쳐 왔다. 엘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녀의 양팔과 양 다리는 이미 호세 패거리들에게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 "제,제발...이러지 말아요!" 공포에 질린 흐느낌에 호세의 얼굴에 퍼져 있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그 순간 엘은 자신의 두려움이 오히려 그를 한층 즐겁게 해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 도와 주세요! 할머니! 호세가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몸을 거칠게 더듬어 댔다. "으아악!" 엘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온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그녀는 꼭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허겁지겁 상체를 일으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호세가 목각 인형처럼 뻣뻣이 몸을 굳힌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 다섯 명의 호세 패거리들이 쓰러져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엘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호세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자신을 향해 있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몸을 돌려 다가왔다. 엘은 흠칫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겁에 질린 작은 동물을 달래 듯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미한 불빛에 짙은 색깔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엘 앞에 멈춰 선 남자가 망토를 벗어 그녀의 드러난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엘은 이 모든 게 공포심이 불러낸 환영이 아니길 간절히 기도하며 따뜻한 망토의 깃을 움켜쥐었다. "이 아이냐?" 남자 뒤로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즉시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예."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보였다. 엘은 몸을 부르르 떨며 검은 그림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경련이 이는 건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검은 그림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소름 끼칠 만큼 강한 힘 때문이었다. 그 힘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사방에서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엘은 격렬하게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온몸을 부들거리며 검은 그림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서너 걸음 다가왔을 때, 정신을 잃고 있던 호세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이게 뭐야? 으아악!"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호세가 경악의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소리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패거리들도 몸을 꿈틀대며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향해 단호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엘에게 망토를 걸쳐 준 남자가 황급히 말했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는 그 말을 들었다는 어떠한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막 호세 앞에 멈춰 섰을 때, 엘은 비로소 그림자의 손에서 번뜩이고 있는 검을 볼 수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호세가 공포에 질려 크게 흐느꼈다. 그러나 검을 치켜드는 그림자의 동작엔 일말의 망설임도 찾을 수 없었다. "안돼요!" 엘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림자가 한순간 멈칫하더니 천천히 검을 내리며 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막는 거냐?" "그럼 그 쪽은 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건데요?" 엘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잔인한 맹수를 앞에 두고 있는 듯 조심스럽고 약간은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검은 그림자에게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석상처럼 서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말아요." 엘은 자꾸만 움츠려 들려는 자신을 추스르며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엘은 본능적으로, 검은 그림자가 모든 걸 자신의 의지와 법칙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 당장이라도 살이 베어지고 차가운 흙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지리라는 생각에 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때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 좁은 골목 안을 가득 울리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였다. 번쩍 떠진 눈에 허겁지겁 골목을 벗어나는 호세 패거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엘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이 호세 패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이들이라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감사합니다." 엘은 검은 그림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 앞의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지금 그녀의 마음 속엔 한시라도 빨리 할머니가 계시는 따뜻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 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이 무어냐?" 엘은 멍한 눈을 들어 올려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걸까? 저 사람이 정말 내게 원하는 것을 물은 건가? "말하라!" 소름 끼칠 만큼 거만한 어조였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완전히 미친 사람과 대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 없어요." 엘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성급히 말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허겁지겁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빨리 벗어 나야 해! 검은 그림자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그녀의 심장을 미친 듯이 고동치게 했다. ------------------------------------------------------------------- "리자드님, 왜 그들을 살려 보내신 겁니까?" 아몬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망토를 집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자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반짝였다. "그 아이가 그걸 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해코지하려 들게 자명하지 않습니까?" 아몬의 얼굴엔 걱정이 감돌고 있었다. "분명히 그럴 테지. 하지만 그걸로 인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뚝뚝한 어조의 말이 넓은 어깨를 넘어 아몬의 귀에 들어왔다. 아몬은 모든 걸 감당하기엔 너무 여려 보이는 소녀가 사라진 쪽에 다시 한번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예상대로 할머니는 엘을 본 순간 당장 뒤로 넘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는 얼굴에 엘의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을 정도였다. "전 괜찮아요, 할머니! 정말이에요!" 엘은 비틀거리는 할머니를 부축해 서둘러 의자에 앉혔다. 억센 손아귀에 잡혀 있었던 손목과 발목에 시커먼 멍이 들어있고, 뭉개진 입술과 복부가 참을 수 없이 아파 왔지만 그녀는 할머니를 향해 밝게 웃었다. "보이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아니에요. 하필이면 호세 패거리를 만났지 뭐예요. 운도 지지리 없지." "그.... 그래서?" 할머니가 신음소리를 내듯 물었다. "그래서 다리를 확 걷어 차주고 죽어라 도망쳤어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오자 엘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건지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얘긴 하나도 없었는데.... 그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왜 이렇게 꺼려지는 걸까? 엘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할머니의 눈을 애써 외면하며 꼭 잡고 있던 두 손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그랬다면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 정말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부르르 떠는 할머니에게서 평소의 활기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엘은 걱정스런 눈으로,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할머니를 조심스레 살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을 거니? 어서 깨끗이 씻고 와라.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 수도 있겠구나!" 크게 소리 친 할머니가 서둘러 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엘은 평온한 자신의 생활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눈을 질끈 감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식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며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른 아침 눈을 떠, 같은 장면을 보았을 땐 별 생각없이 지나쳤는데, 해가 저문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엘이 들어왔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 왔어요, 할머니." 자신을 말을 들었다는 기색이 전혀 없자 엘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 할머니가 몸을 흠칫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엘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는 거예요? 세상에! 화로에 불도 다 꺼졌네! 춥지도 않으셨어요? 추우면 다리가 아파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빨리 화로에 불부터 붙여야겠어요!" "엘, 화로는 그냥 놔두고, 이리 앉아 봐라." 엘은 탁하게 가라앉은 할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심각해 어둡게까지 보이는 할머니의 안색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시지? 엘은 눈을 깜박이며 할머니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다리 하나가 짧은 볼 품 없는 나무 의자가 그녀의 몸을 비스듬하게 받쳐 주었다. "엘...." 조용히 그녀를 부르고 난 후 할머니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잠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망설이는 기미가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다." "예, 어서 말씀하세요." 엘은 궁금한 마음에 할머니를 재촉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네가 널 낳아 준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말해 줄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 역정이나 내고 말았어.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넌 부모란 말조차 입에 담지 않았지.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할머니라 부르며 나를 따르는 널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마음 깊은 곳에서 말이다." 부모님! 내 부모님에 대해 말씀해 주시려는 건가? 엘은 잔뜩 긴장한 채 할머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슴 고동이 점점 거세지는 걸 느끼며 그녀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엘... 내가 널 처음 본 날은 심한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정말 혹독할 정도로 추운 날이었지.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난 바람 소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어떤 여인이 갓난아기였던 널 안고 있는 게 아니겠니. 난 서둘러 그 여인을 안으로 들였단다. 그렇게... 그 날 이후로 넌 내 손녀가 된 거란다." "그럼 할머니가.... 제 진짜 할머니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린 그냥 남남이라는 말씀이에요?" 엘은 세상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아찔한 충격과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보라색 눈동자기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아니다, 엘. 넌 누가 뭐라 해도 내 손녀다,내 손녀야. 널 키우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너 때문에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내가 얼마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지.... 널 만난 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받은 날이었다, 엘."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할머니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엘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궁핍하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늘 사랑으로 그녀를 대해 주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이 분은 내 할머니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일하게 사랑하는 내 할머니. 그런 생각이 들자 친 손녀가 아니라는 것도 더 이상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엘의 관심은 즉시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그럼 그 분은요? 제 어머니는요?" "올 때부터 몸이 안 좋은 것 같더니, 얼마 못 가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여인이 심한 부상을 입은 피투성이 몸으로 도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엘의 얼굴엔 충격이 가득했다. 자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다는 걸 알아서 좋을 건 없으리라. 하지만 정말 그 여인이 엘의 생모일까? 엘을 키우며 수백 번은 들었을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 때마다 그녀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단순히 직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인의 초라한 행색과 그녀가 안고 있던 엘의 모습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분명했으니까. "그럼 제 아버지는요." 고개를 드는 엘의 보라색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여인은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을 만큼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녀에게 아기를 건넨 후 여인은 안으로 한발 들어서려다 문턱에서 쓰러져 버렸다. 마지막 숨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건 '엘'이란 말뿐이었다. 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모든 환상과 기대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기억할 수도 없는 오래 전.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이 허전한 걸까? 깊숙이 가라앉은 눈으로 엘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몸을 일으켜 나무 찬장 위에 놓여 있던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덮개가 열리자 엘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의자에 기댔던 등을 바로 세웠다.지금까지 그녀가 약초 보관함이라고 알고 있던 상자 속엔 연한 푸른 색의 윤기 흐르는 천이 들어 있었다. 엘은 천에 정교하게 수 놓아진 화려한 새를 바라보다 할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예요, 할머니? 혹시...." "그래, 네가 두르고 있던 거다. 그 추위에 이것 하나만 두르고 있더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이걸 보여 주시는 거예요?" "이제 네가 갖고 있을 때가 된 것 같아서... 이것 말고 또 있단다." 상자 안엔 돌돌 말린 작은 천 조각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동작으로 신중히 매듭을 풀었다. 천조각 사이로 모습을 보인 건 놀랍게도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인 남자의 손가락을 장식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큰 반지가 신비스러울 정도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엘은 달빛을 머금은 듯 우유빛으로 빛나는 보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네 작은 목에 걸려 있던 거다." 눈 앞에서 반지가 꿰어져 있는 금줄이 벌려지자, 엘은 자신도 모르게 목을 내밀었다.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체온에 녹아 들며 점점 온기를 품어 갔다. 그에 따라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뜻 모를 아릿함이 조금씩 진해졌다. "고마워요, 할머니. 정말 소중히 간직할게요." 목이 메인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네걸 준 것 뿐인데, 고맙긴! 어이구, 이런! 벌써 밖이 어두워졌구나! 엘, 어서 화로에 불이나 붙여라!" 할머니가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엘은 반지를 손에 꼭 쥐어 본 다음, 조심스럽게 옷깃 속에 집어 넣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녀가 막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았을 때였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 이 소리 들리세요? 발자국 소리 같은 데.... 흐음! 이상하네! 배고픈 산짐승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 건가? 아니면..." "엘! 빨리 여기서 나가라! 어서!" 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버럭 소리쳤다. "하,할머니! 왜 그러세요?" "어서 나가기나 해! 빨리 숲 속으로 들어가!" 매섭게 소리치며 엘을 문 밖으로 미는 할머니의 얼굴엔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엘은 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긴박함에 웃옷도 걸치지 못하고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빨리 가! 최대한 빨리 이 곳에서 멀어져라, 엘!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 와선 안돼! 빨리! 빨리 가! 어서!" 숨 죽인 할머니의 외침을 들으며 엘은 어두컴컴한 숲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뭇가지가 그녀의 볼에 거칠게 부딪쳤다. 발 밑에선 겨우내 쌓인 낙엽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목덜미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사방에서 매서운 바람이 밀어 닥쳤지만 엘의 몸엔 어느새 식은 땀이 축축이 배어 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노리는 악의에 찬 괴물의 손이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다. 엘이 조금이나마 이성을 차린 건 무엇인가에 걸려 거칠게 넘어졌을 때였다. 그녀는 격렬하게 숨을 헐떡이며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잠시 동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쓸린 손바닥과 무릎이 쓰려 왔다. 엘은 통증을 무시하고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 바보! 멍청이! 어떻게 할머니만 남겨 두고 도망칠 수 있어? 그녀의 머리 위로 불길한 천둥 소리가 낮게 굴러가고 있었다. 바람결에 섞인 폭우의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오? 한밤중에 남의 집에 쳐들어오다니!" 일그러진 얼굴에서 버럭 호통이 나오자 호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도 늙은 마녀의 격한 기세에 눌렸는지 한순간 주위엔 횃불 타오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어여 돌아들 가시오! 지금 당장!" 젠장!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어! "이 흉칙한 늙은 마녀! 네 손녀 어디있어? 저 안에 있는 거지? 네 손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알아? 끔찍한 저주로 사람을 죽였어! 알아들었어? 사람을 죽였다고!" 호세의 짐작대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을 사람들이 거세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저주 받은 마녀들! 너희는 둘 다 죄값을 치러야 돼!" "지금 당장 마녀들을 지옥으로 돌려 보냅시다!" "더러운 마녀들! 우리 마을에서 당장 꺼져!" "사라져라! 이 사악한 괴물들아!" 감히 이 호세님에게 망신을 주고 네까짓 것들이 무사할 줄 알았느냐? 호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들고 있던 검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검으로 저 흉측한 늙은이를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싶었다. 그런 다음엔 엘이라는 작은 계집을 내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은 두 명의 마녀를 모두 죽이고 싶어 안달하겠지만 감히 호세의 말을 거역하진 못할 것이다. 호세는 엘의 얼굴을 떠올리며 탐욕스럽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제 곧 그 계집을 내 손에 넣게 될 거야! 이제 곧! 엘의 외모가 호세의 눈에 띤 건 올 초 시장에서였다. 그 전만해도 호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초라한 마녀 따위에겐 손톱 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우연히 정면에서 엘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호세는 그녀를 갖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지나치게 마른 몸은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지만 보라색 눈동자만 떠올리면 오금이 저려 왔다. 지금껏 그가 원하는 여자는 누구든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독 엘만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엘이 마을에 내려오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호세가 직접 숲속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는 은근히 엘의 할머니를 무서워 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날카롭게 번득이는 검은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두 손엔 끈적끈적한 땀이 고였다. 하지만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는 지금은 전혀 겁날 것이 없었다. 제아무리 흉측한 마녀 앞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엘이 사람을 죽였다고? 대체 누가 그런 천벌 받을 모함을 하는 거요? 감히 누가?" 당장이라도 자신의 몸을 찢어 발길 수 있는 무기를 수십 개나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늙은 마녀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네 손녀가 리즈 부인을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작은 마녀가 주문을 외우자 리즈 부인의 목에 줄이 감기더군!" 호세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목이 졸려 뻣뻣하게 죽은 시체가 떠오르는지 마을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호세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리즈 부인을 죽인 건 다름 아닌 호세였다. 어찌하면 자신이 겪은 굴욕도 갚고 엘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호세는 자신의 패거리들을 시켜 사람의 왕래가 없는 흉가로 리즈 부인을 끌고 오게 한 다음 그의 손으로 직접 목을 졸랐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 파르르 떨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 줄기의 감촉이 떠오르자 척추를 따라 전율이 일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호세에게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안겨 주었다. 엘의 하얗고 가냘픈 목을 천천히 조일 생각을 하자 그의 몸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엘은 절대 사람을 해칠 애가 아닙니다! 나리께서 잘못 보신 게 틀림없습니다!" 늙은이의 단호한 목소리가 희미한 천둥 소리에 섞여 들려 왔다. 젠장! 비가 오려나 보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되겠어! "이 사악한 마녀! 그 더러운 입 닥치지 못해!" 호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치켜 세웠다. -------------------------------------------------------------------할머니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엘은 손을 올려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려 하는 비명을 막았다. 당장이라도 할머니를 항해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할머니를 구하지도 못하고 그녀가 먼저 차가운 흙바닥에 피를 뿌리게 될 것이다. 침착해야 돼! 침착하게 생각해야 돼!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구할 수 있을지! 엘은 쓰러진 할머니를 마구 걷어 차고 있는 호세를 보며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 드는 걸 느끼며 그녀는 덤불에 웅크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한발한발 발을 움직이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피에 굶주린 마을 사람들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릴 것 같았다. 발 밑에 밟히는 풀잎이 조심하라며 쉴새 없이 그녀에게 위험을 속삭였다. 마침내 오두막 뒤쪽에 도착했을 때 엘은 한 가닥 자제심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며 부들거리는 손으로 벽에 매달아 놓은 부싯돌을 꺼냈다. 좀 더 가까워진 천둥소리가 돌 부딪치는 소리를 막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비가 너무 일찍 내려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꺼뜨리지 않길 기도하며 엘은 오두막에 불을 붙였다. 겨우내 바짝 말랐던 짚이 순식간에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시커멓게 뿜어지는 검은 연기로부터 서둘러 얼굴을 돌렸다. 이 순간 기침이라도 터뜨린다면 할머니와 그녀 둘 다 더 이상 햇빛을 볼 수 없게 되리라. 그녀는 살금살금 앞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은 불이 난 걸 깨달은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엘이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뻣뻣하게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어! 불! 불이다!" "뭐? 불이라고?" "불이다! 불이 났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일대 혼란이 일었다. 매캐한 연기가 주위에 가득 번지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엘은 재빨리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금세 눈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엘이 손으로 연기를 휘저으며 눈을 꼭 감았다가 떴을 때,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뿌옇게 드러났다. 피가 번지고 있는 할머니의 어깨가 눈을 파고 들었다. 엘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진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엘..." 할머니가 신음소리처럼 그녀를 불렀다.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엘은 다급히 속삭였다. 자꾸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려는 할머니를 추시려 등에 엎었다. 빨리 안전한 숲으로 도망쳐야 해. 어두운 숲은 잔인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제발! 엘은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최대한 빨리 몸을 움직였다. 뛰어다닐 땐 그녀의 앞마당 같았던 숲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길 수록 무심한 숲은 오히려 뒤로 달아나는 것 같았다. 숲을 열 걸음 정도 남겨 놓았을 때였다. 뒤에서 땅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마녀다! 마녀가 도망간다! 잡아라!" 목덜미를 낚아채는 듯한 호세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엘은 숨을 격하게 들이마셨다. 그들을 쫓는 사람들이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흥분에 찬 괴성을 질러 댔다. -------------------------------------------------------------------제2장. 계약-------------------------------------------------------------------빗방울이 그녀의 몸을 미친 듯이 때렸다. 엘은 축축하게 젖어 드는 등의 감촉이 할머니의 피가 아닌 빗물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세차게 퍼붓는 얼음 같은 빗줄기, 끊임없이 그녀를 몰아치는 귀를 찢을 듯한 천둥 소리, 온 몸을 잡고 매달리는 질척한 어둠..... 모든 게 절망이었다. 엘은 두려움에 내몰리지 않으려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 데만 매달렸다. 얼마나 숲 속으로 들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끔찍한 악몽 속을 질주하듯 달렸다가 걷고, 또 달리기를 반복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듯 했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당장이라도 끈적끈적한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엘은 쉴새 없이 비틀거리면서도 한순간도 숨을 돌리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듯한 공포가 그녀를 극한까지 몰아부치고 있었다. "하,할머니!"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불렀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싸늘한 공포에 심장이 죄어들었다. 엘은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나무 둥치에 기대 허겁지겁 할머니를 아래로 내렸다. "할머니! 할머니!" 미친 듯이 소리치며 힘없이 꺾인 할머니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 버린 그녀의 손가락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지는 굴곡진 살갗이 만져졌다.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눈 좀 떠보세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나? 바보! 멍청이! 빨리 지혈부터 했어야 하는데! 너덜거리는 할머니의 웃옷을 젖혔을 때 무엇인가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 그녀의 손끝에 느껴졌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엘은 할머니의 상체를 받치고 등을 살폈다. 은빛 번개가 작렬하는 순간 할머니의 뒤틀린 등에 단단히 박혀 있는 단도가 그녀의 눈을 파고 들었다.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엘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밀어 할머니의 목을 더듬었다.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세한, 아주 작은 진동조차도. "안 돼...." 엘은 낮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엘은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처럼 할머니의 머리와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차디차게 식어 버린 할머니를 부둥켜 안았다.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온 세상이 절망과 증오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엘은 성큼성큼 폭우 속을 걸었다. 그녀의 손엔 할머니의 등에서 뽑아 낸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 단도를 따라 빗줄기와 섞인 핏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피가 씻겨 나간 칼날이 이번엔 엘의 피로 적셔지고 있었다. 엉망이 된 손가락에서 쉴새 없이 피가 흘러내렸지만 엘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 앞에 좁고 지저분한 골목이 나타났다. 엘은 몸을 뻣뻣하게 세운 채 골목 한가운데 멈춰 섰다. "나와!" 잔뜩 잠긴 목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엘은 몸을 이리저리 돌려 텅 빈 골목 안을 살폈다. "원하는 게 있어! 원하는 게 있다고! 그러니 어서 나와!" 비명같은 날카로운 절규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갈랐다. 왜 이 곳으로 왔는지, 왜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쳐 버릴 것 같은 절망과 분노가 무의식 중에 그녀를 이끈 것 같았다. 골목 안엔 지독한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격한 비소리조차 엘이 느끼는 완벽한 고요를 깨지 못했다. 그녀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고개를 꺾고 있던 엘이 이상한 느낌에 얼굴을 치켜들었을 때, 그녀 앞엔 그토록 절망적으로 찾은 바로 그 존재가 서 있었다. "원하는 게 무어냐?" 지난 번의 질문과 완벽히 일치할 것 같은 거만한 어조의 물음이 다시 들려 왔다. 엘은 검은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빗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힘! 난 힘을 원해!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을, 내 자신을 짓밟히지 않을 강한 힘! 그런 힘을 원해!" 암흑 구덩이같은 그의 눈이 싸늘한 어둠을 뚫고 번득였다. "계약은 성립됐다!" 단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엘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잠시 후 점멸하는 은빛 번개가 골목 안을 비췄을 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몸 안쪽에서부터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것 같았다. 조각난 그녀 자신처럼, 그녀를 받치고 있던 바닥이 가루로 분해되어 새까만 암흑을 토해냈다. 엘은 무기력하게 그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거라는 절망이 집요 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엘은 깊은 구덩이에서 한발한발 올라오듯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고통없는 망각 속에서 계속 잠들고 싶었지만 무엇인가가 희미한 의식 속을 파고 들어 왔다. 하지만 눈을 뜨는 간단한 동작도 그녀의 의지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온몸이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아 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조차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뿌연 안개 속으로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그 소리를 좇아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꿈결처럼 뿌연 세상이 다가들었다. 엘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초점을 잡았다. 거미줄로 짠 것처럼 얇고 투명해 보이는 커튼이 춤을 추듯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 등을 돌린 남자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머리카락을 단정히 묶고, 바닥까지 끌릴 듯한 긴 회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엘의 시선을 눈치챈 듯 한순간 남자의 등 근육이 눈치채기 힘들만큼 미세하게 움직였다. "깨어나셨군요."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물이 흐르듯 매끄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섬세하게 생긴 하얀 얼굴에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날렵한 검은 눈썹. 그 아래 부드럽게 빛나고 있는 갈색 눈동자가 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좀 어떠십니까?" 엘은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자꾸만 눈을 감고 싶은 욕망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만류하려는 듯 손을 올리던 남자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렸다. "누구시죠?"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끼며 엘은 단호하게 말하려 애썼다. "전 아몬이라 합니다, 엘." 엘은 몸을 굳히고 아몬이라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엘이라 부르는 게 싫으십니까?"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신 거죠?" 엘은 남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몬이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이 깨어났다는 걸 보고 드리고 오겠습니다." "나가기 전에 내 질문에 답해 주세요! 그리고 보고라니요? 내가 깨어난 걸 보고한다고요? 대 체 누구에게요?" 걸음을 멈춘 아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 주인님, 그리고 엘의 주인이신 리자드님입니다." 엘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을 때 이미 아몬은 문을 나선 뒤였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주인이라고? 말도 안돼! 미친 사람이 틀림없어!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그런데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무튼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해. 할머니가 걱정하고 계실 거야. 할머니가.... 순간 싸늘하게 굳어있던 할머니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몸서리쳐지는 악몽이 태풍같이 그녀를 덮쳤다. 그건 꿈이야! 지독한 꿈일 뿐이야! 엘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손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래로 꽂힌 시선에 시릴 정도로 하얀 천이 감겨 있는 손이 보였다. 할머니의 등에서 손잡이까지 박혀 있던 단도를 이를 악물고 뽑아 내던 장면이 떠올랐다. 닥치는 대로 손에 잡고 미친 듯이 땅을 파헤치던 모습까지. "할머니를 내 손으로 묻어 드렸어.... 너무나 차가워서.... 뼛속까지 얼어 버릴 것 같은... 땅 속에..." 엘은 입 속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파리한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빠져나가며, 보라색 눈동자가 안개에 덮인 듯 흐려졌다. 그렇게 무감각한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엘의 정신을 들게 한건 복도를 울리는 단호한 발소리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이 뱃속에서 점점 단단하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을 올려 목에 걸고 있는 반지를 더듬으며, 육중하게 세워진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렸다. 매우 조용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 순간 강렬하게 빛나는 청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번개같이 옭아맸다. 엘은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영원같은 시간이 흐른 뒤 엘의 모든 걸 낱낱이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동자가 마침내 시선을 돌려 옴짝달싹 못하던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제서야 엘은 이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남자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이 청회색 눈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짙고 까만 눈썹, 곧게 뻗은 콧날, 아름답지만 딱딱해 보이는 입술과 단호한 턱, 그리고 얼굴 주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눈동자와 같 은 빛깔의 청회색 머리카락. 무척이나 오만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부드럽거나 녹록해 보이는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리자드란 사람일까? 엘은 시선을 내려, 거만하게 벌리고 있는 긴 다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탄탄하고 힘찬 선을 그리는 남자의 몸을 타고 올라갈 때만 해도 엘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상태가 어떠냐?" 엘이 남자의 짤막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였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아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에게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많이 회복되셨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삼 일은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엘이 바로 눈앞에 버젓이 있는데도 두 남자 모두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부른 거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서 희미한 짜증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녀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점점 불쾌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당신이 리자드인가요?" 불쑥 나온 질문이 한순간 숨막히는 침묵을 가져왔다. 엘이 다 뜯어진 넝마라도 되듯 가차없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던 남자가 조금은 딱딱한 동작으로 다시 그녀를 향했다. "그렇다." "이제 당신들이 누군지 알겠어요. 전에 골목에서 날 구해줬었죠? 그런데 여긴 어디죠?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죠?" 말을 끝마치는 순간 잔인하게 몸을 때리던 빗줄기와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자신의 절규가 생생이 떠올랐다.엘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린 듯 리자드에게 날아갔다. "그게 꿈이 아니었군요." 리자드는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엘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서 그것이 진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내게 힘을 줄 건가요?" "그렇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드러난 그녀의 질문에 리자드가 검을 내려치듯 단호하게 답했다. 맞다고? 정말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일까? 완전히 실성한 사람일지도 몰라. 리자드란 남자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이것만은 분명했다. 그녀가 지금껏 겪어 왔던 모든 사람들을 다 합해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 "당신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쳐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러는 거죠? 내게서 대체 무얼 바라는 건가요?" 청회색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친 순간 그의 입가에 뜻 모를 냉소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복종. 난 네게 완벽한 복종을 원한다." 메마른 어조에 엘의 뼛속까지 오싹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말도 안돼." 그녀가 겨우 이 말을 중얼거렸을 때, 이미 리자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몬이 신중한 동작으로 팔을 뻗어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된 문고리를 잡았다.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빛이 복도를 향해 길게 줄지어 선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엘은 손으로 빛을 가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황량하고 삭막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그늘 외진 협곡에 하얀 눈이 쌓여 있었고, 휑한 들판에 뿌려진 은색의 서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가볍게 튀어 오르는 햇빛을 제외하고 움직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엘은 빗장을 풀고 그녀의 키보다도 높은 거대한 창을 열어 젖혔다. 그 즉시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신선한 공기가 몸 안 가득 차 오를 때까지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 엘의 검은 머리카락이 격렬히 나부꼈고 풍성한 푸른 색 윗도리와 바지가 몸에 감겨 펄럭였다. 그녀를 안내하기 전 아몬이 가져다 준 옷이었다. 작은 탁자 위에 놓여진 옷이 여자 옷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을 때, 이미 그는 옷을 갈아입으라며 자리를 비켜 준 뒤였다. 엘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금은 어색해 하며 옷을 입었다. 생전 처음 입어 보는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살갗에 닿은 느낌이 어찌나 부드럽고 따스한지 마치 깃털을 걸친 것 같았다. 옷을 입으면서, 아몬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또 찬 바람을 맞고 있는 지금도 엘은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리자드에게 불려 가고 있다는 것,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늦추고 싶은 걸까? 엘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저항하는 바람의 힘에 맞서 힘껏 창문을 닫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몬이 그녀를 기다리며 조용히 서 있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몬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커다란 갈색 문 앞에 설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들어가십시오." 아몬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엘은 당황한 기색을 나타내며 그를 바라봤다. "나 혼자요?" "예." 극히 짧은 대답이 나왔다. 왜 이렇게 그를 만나는 게 꺼려지는 걸까? 대체 왜? 엘은 심장 박동이 조금씩 거세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리고 한줌의 용기를 얻으려는 듯 목에 걸고 있는 반지를 손으로 더듬었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절대 겁쟁이처럼 굴진 않으리라. 이미 엘은 리자드와 담판을 짓고 이 곳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힘을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아 바보짓을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귀족임이 분명한 그가 유흥거리를 찾아 힘없는 천민을 상대로 질 나쁜 놀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곳을 나가야 돼! 엘은 용기를 북돋기 위해 결연히 가슴을 펴고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눈이 부시도록 밝은 밖과는 달리 안은 엷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밖에 있던 아몬이 문을 닫자 한순간 앞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엘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두텁게 내려진 커튼과 육중하게 자리잡은 거대한 책상, 그리고 반대쪽 구석에서 낮게 타오르는 불길을 담고 있는 벽난로가 보였다. 바로 그 벽난로 앞에 리자드가 우뚝 서 있었다.엘은 무의식 중에 숨을 죽였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압감에 가슴과 목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미동도 없는 리자드도,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엘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잔인할 정도로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있어요." 엘에 의해 끈질기게 이어지던 정적이 깨졌다. 그녀는 시시각각 커지는 긴장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말해라." 리자드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짧게 응수했다. "이 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도와준 거....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이 곳이 어딘지, 또 딜람이 어느 쪽에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그러면 지금 당장 떠나겠어요." 엘은 두근거리는 가슴 고동을 무시하고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제서야 리자드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넌 나와 계약을 했고, 난 너를 놔줄 마음이 없다." 소름 끼치도록 감정을 배제한 메마른 말투였다. 잠시 멍했던 정신이 바로 잡히며 불끈 화가 치밀었다. "내가 당신과 계약을 했다고요?" 흥분해 소리친 엘에게 돌아온 건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제길! 난 당신과 계약 같은 거 한적 없어요! 그리고 생각해봐요! 말도 안되잖아요! 내가 원한 건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어요! 그 누구에게도! 그런데 당신이 요구한 건 뭐죠?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절대 복종하라고 했죠? 절대 복종이라니!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알 거예요! 당신이 말하는 우리 사이의 계약은 시작되기도 전에 성립부터 안 된다는 거!" 격앙된 엘의 목소리가 방안 구석구석을 울렸다. 딱딱하기만 했던 리자드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웃음기가 나타났다. 하지만 엘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리자드가 한발만 더 다가오면 두 사람의 신발 끝이 부딪힐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려 하는 다리에 잔뜩 힘을 줬다. 그리고 리자드의 청회색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어둑어둑한 방안에서 그의 눈은 얼음조각처럼 싸늘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무자비하게 그녀를 내리눌렀다. 엘은 강렬하게 시선을 잡고 있는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왜 이 사람 앞에서는 이리도 무기력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 사람은 어떻게 이리 쉽게 날 움츠러들게 하는 걸까? 천민이라는 신분을 지니고 마녀라 불리며 지금 이때껏 갖가지 핍박과 업신여김을 받아 왔지만, 엘은 그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힌 적이 없었다. 아마 생명은 모두 소중하고 귀천의 구별이 없다고 늘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이 곳에서 나가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거만한 질문에 엘은 냉큼 대답했다. "내가 한번 맞춰 볼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할머니를 죽인 놈에게 복수를 하러 가겠지." 핵심을 찌르는 말에 움찔해 엘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리자드의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복수를 할 생각이냐?" "시커먼 심장에 단도를 찔러 넣을 거예요. 할머니를 죽게 한 단도로 사지를 찢어 죽일 거예요. 반드시!" 내뱉듯 말하는 엘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말인가?" 엘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리자드 손에 둔탁하게 빛을 반사시키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거 이리 줘요!" 그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엘의 예상과는 달리 리자드는 순순히 그녀에게 단도를 건넸다. "그럼...." 엘은 두 손으로 단도를 꼭 움켜쥐고 말끝을 흐렸다. 그에게 새삼스레 작별인사를 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엘이 막 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 온 리자드의 목소리가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천민 따위가 귀족의 저택에 어떻게 들어갈 거지? 할머니가 그런 것까지 가르쳐 줬나?"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어조였다. "제길!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엘이 악을 쓰듯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리자드는 하찮은 벌레를 보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차가운 조소를 참으며 엘은 그의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아니, 당연히 내가 상관할 일이다. 난 싸늘한 송장 따위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앞으로 모든 욕설을 금지한다." "쳇! 뒈져 버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내가 알 바 아니야! 그리고 난 절대 송장이 되지 않아!" "과연 그럴까? 네게 그 놈을 죽일 수 있는 열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결국 땅에 뿌려지는 건 열번 다 네 피일 것이다. 물론 놈은 너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해치우고 나서 네 숨통을 끊어 놓겠지." 리자드의 잔인한 말이 심장에 와서 꽂히는 것 같았다. 엘은 분노에 몸을 떨며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말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선 수긍하고 있었다. "네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복수는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자, 어떻게 하겠나?" "난 역겨운 귀족 나리의 말은 조금도 믿지 않아!" 사납게 소리친 엘은 묵직하게 늘어진 문고리를 잡았다. "일을 재미있게 만드는군."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리더니 단단한 팔이 엘의 허리에 감겼다. 그녀가 놀라 숨을 들이 마셨을 때는 이미 두 발이 바닥 위로 들린 후였다. "이,이거 놔!" 엘은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는 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리자드의 팔은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엘을 조여 올 뿐이었다.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씨근덕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에 작은 반짝임이 지나갔다. 엘의 손에 들려 있던 단도가 리자드에게 휘둘러진 건 그 때였다. 칼날이 리자드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행동에 누구보다 놀란 건 자신이 단도를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엘이었다. 엘은 한순간 힘이 빠져 버린 헝겊인형처럼 리자드의 팔에 매달렸다. 엘을 꼭 잡고 있던 리자드가 그녀의 손에서 너무나 쉽게 단도를 빼앗았다. 멍하니 있는 엘을 무시하고 리자드는 뚜벅뚜벅 벽난로 쪽으로 걸음을 옮긴 후, 길게 늘어진 휘장을 걷었다. 그리고 육중하게 자리잡은 책장을 밀었다. 책장이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열리며 어두운 통로를 토해놓았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좁은 통로 안을 걷는 리자드의 발걸음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엘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리자드는 그 말을 들었다는 어떠한 내색도 비치지 않았다. 그저 묵묵이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통로가 꺾어지며 계단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계단에 접어드는 순간 엘의 허리를 휘감은 팔 힘이 강해졌다. "제길! 놔!" 엘은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며 허리에 감긴 단단한 팔을 길게 할퀴었다. 패인 상처에서 금세 피가 솟기 시작했지만 리자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한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욕." 엘은 그의 말에 발끈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어둠 속을 어지러이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엘의 몸 안에 점점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안과 공포가 그녀를 꼼짝 못하게 마비시켰다. 그녀의 격한 헐떡임이 질식할 듯한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워 나갔다. 두려움에 정신이 멍한 가운데, 어느 순간 엘의 발에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며 몸이 자유로워졌다.여기가 어디지? 엘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의 어둠을 살폈다.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리자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짙은 어둠을 채우고 있는 건 그녀의 숨찬 헐떡임 뿐이었다. 별안간 눈 앞에 환한 빛이 비췄다. 엘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잡았다. 횃불을 들고 있는 리자드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움직임없이 엘을 바라보던 그가 벽에 박힌 고리에 횃불을 걸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붉은 횃불에 일렁이는 그의 모습이 지옥에서 튀어나온 죽음의 사자(使者)를 연상시켰다. 엘은 무의식 중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녀 앞 서너 걸음 앞에 멈춰 선 리자드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으로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넌 복종이 무엇인지부터 배워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불안할 정도로 조용했다. 엘은 그제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싸늘한 철문을 움켜 잡았을 때 이미 리자드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싫어! 꺼내 줘!" 미친 듯이 터져 나온 외침에 붉은 횃불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엘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어깨에 두르고 있는 먼지투성이 모포 속으로 파고 들었다. 모포 속엔 나와 먼지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이를 딱딱 부딪치며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담요를 뒤집어 썼을 때, 엘은 살갗을 스치는 생명체의 감촉에 질겁하여 미친 듯이 모포를 흔들어 댔다. 그 후 견딜 수 없는 추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다시 모포를 둘렀지만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건 참을 수 없는 허기였다. 엘의 인생에서 끼니를 거르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물과 다를 바 없는 멀건 죽을 먹는 건 다반사였고, 어떤 때는 그것조차 없어 배가 찰 때까지 물을 마신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힘들고 괴롭지는 않았다. 이토록 무섭고 철저하게 외로운 적은 없었다. 눈물이 차디 찬 볼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떠올랐다.할머니... 나 너무 힘들어요. 왜 나만 두고 가셨어요? 막을 새도 없이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아니, 막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엘은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미칠 듯이 쓰리고 아파 왔다. 당장이라도 터져 올라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끈질기게 계속되는 울음 소리에 아몬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이토록 처절하고 절망에 가득 찬 울음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그의 주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몬은 조심스레 리자드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아몬은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이느냐?" "예." 아몬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끝까지 굽히지 않으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리자드가 그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 즉시 아몬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리자드님. 제가 주제 넘는 말을 했습니다." 아몬이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담담히 말하는 리자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난 쓸모없는 물건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게 제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말이다." -------------------------------------------------------------------엘은 미끄러지듯 바닥에 몸을 뉘였다. 몸 구석구석을 파고 들던 추위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녹아 버릴 것 같은 피로뿐이었다. 피곤해... 이제 쉬고 싶어. 스르르 눈이 감겼다. 얼마 남지 않은 횃불이 꺼지면 칠흑같은 암흑 속에 갇히게 될 거라는 공포도 무겁게 내려진 눈꺼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엘! 일어나라!'어둠 속에서 단호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꼭 다문 눈꺼풀 위로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그녀를 노려보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서 일어나!'일어나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 잠들고 싶어요. 깨어나지 않고 이대로 할머니와 함께 가고 싶어요.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느냐? 이렇게 무기력하고 약한 아이로 키웠느냐? 일어나라, 엘! 어서 일어나!'매서운 질책을 퍼붓는 할머니의 눈이 뿌옇게 흐려진 머리 속을 서서히 파고 들어왔다. '만약 이대로 네 자신을 포기한다면 절대 널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할머니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 엘은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직은 죽을 수 없어! 죽고 싶지 않아! 엘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무릎을 지탱하기 위해 창살을 움켜잡았을 때, 위태롭게 깜박이던 횃불이 사라지며 짙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숨 막히는 공포가 성큼 다가들었다. 그 순간 엘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리자드!" -------------------------------------------------------------------답답할 정도로 무료한 시간을 엘은 군소리없이 묵묵이 견뎠다. 삼일이 지났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자지러지듯이 리자드를 소리친 이후로. 리자드는 그 동안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삼일 전 밝은 불빛과 함께 나타나 엘을 꺼내 준 사람 역시 그가 아닌 아몬이었다. 엘은 아몬에게 어떠한 질문도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몬 역시 기진맥진한 그녀에게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말만 건넬 뿐이었다. 그는 불편한 마음이 들 정도로 엘을 정성껏 돌봐 주었다. 그녀가 빠른 시간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몬의 보살핌덕분이었다. 어느 정도는 무감각한 상태에 있었던 엘이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현실감이 점점 명확해졌다. 그 때부터 엘은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는 저택은 밖에 보이는 풍경이 말해주듯 무인도처럼 외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저택의 앞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이 보이는 강이 저택의 뒤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은 천천히 걸어 한때는 말끔하게 가꿔졌겠지만 지금은 뒤죽박죽 제멋대로 자라나 있는 정원수로 다가갔다. 그녀는 제멋대로 엉켜 뾰족하게 뻗어 있는 나무 줄기에 손을 얹었다. 딱딱하고 거친 감촉을 느끼며 엘은 몸을 돌려 눈 앞을 온통 막고 있는 거대한 저택을 응시했다. 저택 또한 야성적으로 자라난 정원수를 닮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뚜렷한 저택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웅장했지만,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 긁히고 패인 자국이 선명한 돌 벽엔 검은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햇살이 밝은 날에도 세상과는 동떨어진 음산함이 느껴졌다. 저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처럼 공허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엘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저택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사용하지도 손보지도 않았다는 걸 알아냈다. 그녀가 열어 본 수십 개의 방은 크기만 달랐을 뿐이지 겹겹이 내려 앉은 먼지로 제 색깔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하지만 이런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을 생전 처음 보는 엘로서는, 저택의 모든 것이 놀랍고 경이로울 뿐이었다. 너른 들판 쪽에서 한줄기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엘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옷깃을 여몄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여전히 바람은 매서움을 품고 있었다. 바람은 그녀를 스쳐지나 저택 주위를 잠시 배회하다, 저택에서 풍겨 나오는 쓸쓸함을 한 아름 안고 저 멀리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괜히 울적해진 엘이 그만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며 엘에게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루시였다.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이 곳에서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택엔 루시말고도 일꾼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부인으로 테나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엘을 귀공녀에게 하듯 정중하고 깍듯이 대해 주었다. 그런 대우를 처음 받아 본 엘은 그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보다 엘을 더욱 놀라게 한건 그들 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어느새 다가온 루시가 들어가야 한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엘은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루시의 뒤를 따라 가는 엘의 눈에 저택 옆에 위치한 마구간에서 나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남자가 사일러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마구간에서 살면서 말을 돌보는 마부였다. 이 황량하도록 넓은 곳에 사는 사람은 엘을 포함해 여섯 명이 전부였다. 물론 저택에 리자드가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엘은 현재 리자드가 이 곳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이 그런 대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에 그의 부재가 한몫 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루시는 그녀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엘은 자신이 지금 서재로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층에 있는 방중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건 서재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루시는 서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리며 보이는 사람은 둥근 탁자 뒤에 서 있는 아몬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엘은 그의 표정과 어조, 그리고 주위에 흐르는 분위기에서 그녀의 미래를 결정짓는 어떤 일이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운명에 압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몰아치자 엘은 빨라지는 심장고동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숨을 가다듬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 뒤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아몬이 의자에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적어 보았습니다." 엘의 눈 앞에 하얀 종이가 놓여졌다. "차근히 읽어보시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정성껏 답해 드리겠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를 들으며 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도 모르는 새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물방울이라도 되어 이대로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숨막히는 침묵 사이로 벽난로에서 나뭇가지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엘은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수치심과 비참함에 몸을 웅크렸다. 깊숙이 내리 떠진 눈에 종이를 집어 드는 기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그리고 담담한 아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글부터 공부하셔야 되겠군요." -------------------------------------------------------------------제3장. 시작을 위한 준비-------------------------------------------------------------------엘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다. 하지만 아몬은 한번도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엘이 까마득한 하늘 꼭대기에라도 오르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긴 해도 글을 읽는 건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쓰는 건 아직 별 볼일 없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엘에게 있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단한 일이었다. 띄엄띄엄이나마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뒤 책에 매료된 엘은 열심히 독서에 매달렸다. 그녀에게 책은 새롭고 신비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천상의 열쇠였다. 하루 종일 책만 읽으라고 한다면 아마 엘은 기쁨을 못 이기고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또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군요." 어제 밤을 새워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던 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몬을 바라봤다.아몬은 하품이 날 만큼 지루하고 난해한 어느 철학자의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던 중이었다.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든 엘은 아몬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몬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엘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몬은 엘이 어떤 실수를 해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놀랄 정도로 이해심 많고 다정한 그가 리자드같이 끔찍한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 것에 대해 엘은 깊은 연민을 느꼈다.갑자기 섬뜩하게 느껴지는 청회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엘은 부르르 몸을 떨며 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엘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허겁지겁 소리쳤다. "그럼 오전 공부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아몬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공부의 진도가 느린 것에 대해 걱정이 많은 눈치였다. 엘은 곁눈질로 아몬을 살피며 의자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엘의 발걸음을 빠르고 힘찼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그녀가 고대하고 있던 검술을 배울 시간이었다. 검술 교육은 엘이 바라는 복수를 가능하게 해줄 하늘이 내리신 선물과 같았다. 검술을 배우는 동안만은 아무리 몸이 고되고 힘들어도 기꺼이 견딜 수 있었다. 검술은 그녀에게 글을 깨치는 것과는 또 다른 만족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교육들은 엘을 지루하고 초조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는 왜 자신이 철학이나 역사, 신학, 예법 같은 걸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검술을 배웠으면 지금쯤은 이미 할머니의 원수를 갚은 후였을 텐데.... 이렇듯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갖은 상태에서의 공부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대부분의 고민이 공부 시간에 이루어졌으니 아몬도 꽤나 괴로웠을 것이다- 엘이 내린 결론은 그녀를 괴롭히고 고문하기 위해 일부러 리자드가 명령했으리라는 거였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진실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구간 앞 공터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일러스가 보였다. 사일러스는 엘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평범한 마부가 아니었다. 확실한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칠 때의 그는 마치 황제폐하의 근위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고 강인해 보였다.중간 정도의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사일러스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엘은 처음 사일러스를 봤을 때 그 역시 말을 못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술 교육이 시작되자 그녀는 낮게 깔리는 거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엘이 사일러스에게 처음 들은 건 검술의 기본은 상대의 심장을 공격하는 거라는 말이었다. 그는 단칼에 상대의 심장을 찔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뒤이어 했다. 사일러스의 지시에 따라 엘은 지난 보름 동안 배웠던 기본 동작을 해보였다. 찌르기, 베기, 피하기, 중심을 잡은 상태로 앞으로 전진하며 공격했다 방어하며 뒤로 돌아오기 등등. 계속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이 지루할 만도 했지만 엘의 보라색 눈은 진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 새 그녀의 등줄기와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됐습니다!"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엘은 숨을 헐떡이며 옷소매로 얼굴의 땀을 대충 닦았다.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은 대련을 해보겠습니다." 뜻밖의 말에 엘은 소금기가 스며들어 쓰라린 눈을 깜박이며 사일러스를 쳐다봤다. "조,좋아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기초만 배우던 거에서 벗어나 한 단계 발전했다는 것이 엘에게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엘은 묵직하게 느껴지는 어깨와 목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땀으로 미끈거리는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렀다. 그런 다음 사일러스를 마주보고 두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먼저 공격하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엘이 재빨리 사일러스와의 거리를 좁히며 대각선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사일러스가 한발 물러서며 검으로 맞서자 칼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엘은 어깨까지 올라온 강한 진동을 무시하고 그 즉시 옆으로 몸을 틀며 사일라스의 가슴을 향해 검 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허리를 굽혀 공격을 피한 사일러스가 무자비할 정도로 검을 빠르고 강하게 휘둘렀다. 그 순간 그녀의 검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저만치 떨어졌다.엘이 저린 손목을 움켜잡고 가슴까지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사일러스가 그녀의 검을 갖고 돌아왔다. 그녀에게 검을 내미는 그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힘들어 하는 자신과 다르게 얼굴이 붉어지지도 숨이 거칠어지지도 않은 사일러스를 대하자 은근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엘은 언젠가 반드시 그를 꺾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며 검의 손잡이를 힘껏 말아 쥐었다. ------------------------------------------------------------------- "검술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같습니다. 체력이며 순발력, 반사 신경, 거기다 정신력과 승부욕까지 고루 갖춘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껏 제가 보고 겪어 온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말입니다." 리자드는 어지러이 일렁이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게 찾은 건가? 그렇다면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성립되겠군. 그의 입술에 희미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리자드는 뜨겁게 데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아몬에게 무심하지만 날카로움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손을 꼭 맞잡고 조금 초조해 하고 있던 아몬이 찔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만족하실 만한 성과는 아직...." "어느 정도냐?" 아몬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칼칼해진 목으로 겨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글을.... 읽으시는 건...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순간 입술로 술잔을 가져가던 리자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침을 꿀꺽 삼키는 아몬에게 돌려지는 리자드의 얼굴은 슬쩍 찌푸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해라!" 싸늘한 노기를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오, 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아몬은 눈을 질끈 감으며, 단잠에 빠져 있을 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 "아몬! 잘 잤...." 밝은 얼굴로 걸어 들어오던 엘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어서 오십시오!" 그녀를 반기는 아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은 문턱에 뻣뻣이 선 채로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엘은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어린아이처럼 손을 들어 마구 비벼 댔다. 그러면 눈 앞에 있는 리자드의 모습이 없어지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더 이상 못 보겠는지 아몬이 다가와 팔을 잡고 의자로 인도했다. 엘은 한시도 리자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몬이 이끄는 대로 둥근 탁자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던 참이라 도와준 아몬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했지만, 지금 엘에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힘들게 말을 꺼낸 아몬을 엘은 주목하지 않았다. 아몬은 넋이 나간 엘이 애처로웠지만 마음을 모질게 먹고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전 엘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섬뜩한 불길함을 느낀 엘이 아몬을 향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날카로운 어조였다. "내가 말해 주지. 앞으로 널 가르칠 사람은 아몬이 아니라 나다." 짙은 절망과 경악에 쌓인 엘을 보며 아몬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사나운 맹수 앞에 어린 토끼를 던져 놓고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아몬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잠시나마 불충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 반사적으로 문을 세차게 닫았다. -------------------------------------------------------------------지옥의 시간에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엘은 슬쩍 눈을 치켜 떠 리자드를 살폈다. 열려진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조각해 놓은 듯한 얼굴에서 풍기는 거친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찬찬히 리자드의 얼굴을 바라보던 엘은 청회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허겁지겁 읽고 있던 책을 향해 얼굴을 내렸다. 리자드의 교육 방법은 아몬과 완전히 달랐다. 아몬은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나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엘이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면 다시 한번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는 설명을 들은 그녀가 또다시 질문을 해와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비록 알게 모르게 한숨은 내쉬었지만 말이다. 반면 리자드는 극히 단순하게 엘을 가르쳤다. 아니 가르쳤다는 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그저 거만하게 책을 내밀고, 그녀로 하여금 그걸 큰 소리로 읽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솔직히 그 정도는 이제 엘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처음 리자드가 내미는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엘은 안도감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하지만 그건 무지개를 잡기 위해 달려가는 어린아이의 희망처럼 허무한 감정이었다. 엘이 지정한 부분까지 책 읽기를 마치자 리자드는 소름 끼칠 만큼 거만한 얼굴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의 물음은 방금 그녀가 읽은 책의 내용이었다. 엘은 황당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리자드에게 어떤 항의의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말을 할 수 없을 지경까지 수치심이 밀려와 있었던 것이다. 리자드에게 자신은 그런 교육방법을 따라갈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비참한 말이나, 조금만 봐줄 수는 없겠느냐는 비굴한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당장 그녀의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말이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푹 꺾고 굴욕적인 시간을 견딘 날 밤부터 엘은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 낮에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다음 날 나갈 부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엘은 아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엘이 실수 투성이 맞춤법과 서툰 글씨체로 모르는 부분을 적어두면 다음날 새벽 아몬이 그녀에게 비밀교습을 시켜 줬다. 이런 방법은 엘 자신이 놀랄 만큼 많은 진척을 가져왔다. 종이를 빡빡이 채웠던 질문이 어느 순간에 이르자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서너 가지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가 느끼는 피로는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리자드의 막무가내식 교육과 점점 격렬해지는 검술수련은 육체와 정신 모두에 있어 엘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밤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잠을 쫒기 위해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차디 찬 바람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모르고 있던 신세계를 알아 간다는 것은 엘에게 진한 성취감과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이런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그녀는 리자드와의 숨막히는 시간을 그럭저럭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황당한 요구를 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게 뭐예요?" 앞에 놓여 있는 생소한 물건을 보고 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은 상당히 컸다. 높이는 서 있는 엘의 가슴 부근까지 올라왔고, 둘레는 두 사람이 팔을 활짝 벌려야 겨우 두를 수 있을 만큼 넓었다. 타원형으로 된 바닥은 넓적했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져 맨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엘의 새끼손가락만해졌다. 전체적으로는 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유독 가운데 촘촘히 꿰어져 있는 가느다란 실들만 거미줄같이 투명했다. 그 실들 옆으로 엄지 손톱만한 둥근 구슬 수십 개가 나란히 달려 있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요?" 엘은 들은 체도 안하는 리자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가만히 보고 있기가 불편해진 아몬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건 트레비아라는 악기입니다." 엘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악기라고요? 근데 왜 이게 내 앞에 있는 거예요?" "엘은 오늘부터 트레비아 연주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랍니다." 지금껏 그녀가 보아온, 악기와 비슷하기라도 한 물건은 풀피리가 유일했다. 난 풀피리도 제대로 못 불었는데.... 그런 나에게 이걸 연주해야 한다고? 엘은 손가락 끝으로 트레비아를 살짝 쓸어 보았다. 대리석 기둥같이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문외한인 그녀의 눈에도 이 트레비아라는 악기가 굉장히 귀한 물건이라는 것이 보였다. "그럼 먼저 트레비아의 각 명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몬은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지만 곧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목하고 있어야 할 엘의 관심이 온통 엉뚱한 데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아몬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엘이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예요?" 엘은 귓속말을 하면서도 연신 리자드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건..." 아몬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길게 말을 끌었다. 주인님이야 계시고 싶은데 계시는 게 당연한데.... "리자드님 마음대로십니다." 솔직한 아몬의 대답도 엘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그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리자드의 청회색 눈에 작은 반짝임이 스쳐갔다. "그럼 계속해서..." "거치적거리는데 나가라고 하면 안돼요?" 나지막한 엘의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에 아몬이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무,무슨 말씀을! 제가 어찌 감히!" 얼굴 색까지 변한 아몬을 바라보며 엘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리자드를 향해 당장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게 마냥 불편하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한 엘이 대체 그런 엄청난 짓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엘은 화살이 박히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강렬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몬은 트레비아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마치고, 손수 트레비아를 다루며 기본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다음 엘에게 직접 다뤄 보게 했다. 기본음 정도야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아몬의 장담도 엘에게만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음악은커녕 끔찍한 소음을 내는 엘에게서 아몬은 재빨리 트레비아를 빼앗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 살짜리 코흘리개를 다루듯 차근차근 설명을 하며 시범을 보였다.그런 식으로 똑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엘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다시 해 보라는 아몬의 말을 묵묵이 따랐다. 또 한번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소음이 공기를 갈랐다. 소리가 어찌나 끔찍한지 뒷골이 쭈뼛 곤두설 지경이었다. 아몬의 손에 닿으면 천상의 음악이 나오는 악기가 왜 그녀의 손에선 쓸모없는 고물덩어리로 변하는지 엘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창피하고 애가 탈 뿐이었다. "그만!" 짧고 단호한 말이 들리자마자 엘은 그 즉시 손을 멈췄다. 한순간 귀가 멍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 아직도 조각난 소음의 파편들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엘이 목소리의 주인공인 리자드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낮은 한숨이 섞인 통렬한 말이들려 왔다. "인간의 손이 어떻게 그 정도로 뻣뻣할 수 있지?" 이런 끔찍한 짓을 하는 게 다 누구 탓인데! "이 따위 것 배우지 않을 거야!" 불끈 화가 치밀어 오른 엘은 고함을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그걸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 어서 앉아라." 담담한 어조였지만 엘은 그 안에 담긴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억누르고 복종시키려는 의지말이다. "싫어!" 엘의 입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이미 패배감이 싹트고 있었다. "앉아라!"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하며 청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눈이 그녀를 옭아매고 꼼짝 못하게 내리눌렀다. 엘은 몸을 움찔하며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리자드를 외면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하고 비참한 마음을 못이긴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엘을 바라보는 아몬의 눈에 연민이 가득 차 올랐다. ------------------------------------------------------------------- "정말 너무해!" 짜증 섞인 말을 내뱉으며 엘은 트레비아를 노려봤다.연주법을 배운 지 벌써 열 번째 밤이 지나고 있건만, 그녀의 연주에서 나아진 부분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가뜩이나 모자란 잠을 줄이고 또 줄여 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도 말이다. 끈질기게 그녀를 독려하던 아몬도 오늘 낮엔 포기 단계에 진입했는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엘은 지금까지 버틴 아몬에게 씁쓸한 감탄의 마음까지 들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소음에 견디기 힘들 만큼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그의 괴로움은 오죽하겠는가? 좀더 솔직해지자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엘에겐 잘못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가 원해서 하는 일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녀의 판단으로 당연히 이번 일의 원흉은 리자드였다. 리자드는 엘이 이 끔찍한 물건-악기라는 말도 쓰기 싫었다-과 대면한 날, 보름 안에는 그런 대로 음악이라 부를 수 있는 걸 연주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하! 보름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엘은 그녀 앞에 놓인 시간이 보름이 아닌 십 년이라 해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란 걸 확신했다. 엘만큼 그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보름이라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때마다 엘의 걱정과 긴장 또한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리자드 앞에서 이 지긋지긋한 걸 연주해야 할 텐데... 그 앞에서 또 한번 비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엘은 바짝바짝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리자드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특히 엘을 궁금하게 하는 건 왜 그가 그녀의 반항적인 말투와 행동을 참아 넘기는가 하는 거였다. 엘은 으스스한 어둠에 갇혀 있다 나온 이후 리자드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곤 했다. 처음엔 그가 복종이니 뭐니 하며 그녀에게 혹독한 벌을 내리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리자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펄쩍 뛰어 오른 건 그 옆에 있던 아몬이었다. 아몬은 그녀와 둘만이 남았을 때, 왜 다른 사람에겐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 유독 리자드에게만은 그렇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엘은 그 때 자신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리자드에게 정중히 예의를 갖추면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그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예와 다름 없는 그의 소유물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무자비한 청회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리자드 앞에선 자신이 못나고 철없는 아이같이 느껴지는지 답답할 뿐이었다. 굴욕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그에게 왜 변변히 대항 한번 못 해 보는지.... 리자드 앞에서 무기력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검은 불꽃을 들이킨 듯 갑자기 가슴이 확 타오르며 부글부글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리자드는 그녀가 가장 고대하고 정성을 쏟는 검술교육까지 중단시켰다. 이 잘난 트레비아라는 것 때문에 말이다. 엘을 더욱 견디기 힘든 벼랑으로 모는 건, 호세가 응당 받아야 할 죄의 대가가 이런 하잘 것없는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거였다. 이대로 참고 있을 수는 없어! 엘은 벌떡 일어나 묵직한 트레비아를 들어 올렸다. -------------------------------------------------------------------낑낑대며 트레비아를 옮기고 있는 엘을 보며 아몬은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리자드의 얼굴을 재빨리 살폈다. 물론 방안에 유일하게 밝혀져 있는 벽난로의 불빛이 이 곳 발코니까지 비춰 줄리 만무했다. 비록 밝은 태양 아래 서 있는다 해도 그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아몬은 시선을 다시 엘에게 돌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여전히 무거운 트레비아를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대체 저걸 어디로 가져가는 걸까? 그리고 왜? 아몬으로서는 엘의 엉뚱한 행동에 대해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멀뚱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저.... 밖에서 연습을 하려는 생각이신가 봅니다, 리자드님. 으음~ 손가락이 얼어 힘드실 텐데...." 그게 아닐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아몬은 그 즉시 그럴 리 없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하지만 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 주인의 생각은 그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나지막한 혼잣말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어조가 섞여 있었다. 아몬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리자드를 바라봤다. 한번도 속을 비춘 적이 없는 그에게서 이런 미묘한 느낌을 받은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리자드의 입술에서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한숨소리 같기도 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 뒤를 이어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뒤따랐다.엘이 트레비아를 향해 힘껏 도끼를 내리찍고 있었다. 달빛을 반사시킨 도끼날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경악한 아몬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이럴 수가! 저 귀한 트레비아가 산산 조각나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웬만한 사람은 평생동안 한번 볼 수도 없는 악기인 트레비아. 더군다나 저 트레비아는 이미 세상을 떠난 최고의 장인이 십 년의 세월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마지막 유작이 아닌가? 아몬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술품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하는 그로서는 눈 앞의 광경이 악몽 같기만 했다. 주인님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리자드는 자신에게 대항하거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겐 어떤 인정이나 자비도 내리지 않는, 냉혹하기까지 한 주인이었다. 아몬은 식은땀이 나는 걸 느끼며 조금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한 악기긴 하지만 트레비아야 다시 사면...." "아니, 트레비아 수 백대를 사도 결국 불쏘시개가 되고 말 거다." "그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몬은 축축한 손바닥을 슬쩍 옷자락에 닦았다. "트레비아 연주는 포기한다." "리,리자드님! 하지만 그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걸 미련하게 잡고 있을 수는 없지." 주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느껴지자 아몬은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하지만 곧 이어 나온 말엔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내게 대항하려 한 것에 대한 적당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 아몬은 깊은 동정과 근심이 담긴 눈으로, 도끼를 내려놓고 시원하다는 듯 손을 털며 소리죽여 웃고 있는 엘을 바라봤다. -------------------------------------------------------------------문을 열자마자 심상치 않은 공기가 맡아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문을 닫는 엘의 손바닥은 어느새 축축하게 땀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든 자세로 당당히 걸어 리자드 앞에 섰다. "이게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는 리자드가 조금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의 시선은 발 밑에 놓여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에 꽂혀 있었다. 엘은 고개를 길게 빼어,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지막이 숨을 죽였다. 거칠게 달음박질치는 맥박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리자드는 대답을 기다리는지 예의 뚫어질 듯 강렬한 시선을 엘에게 못박고 있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그녀를 괴롭히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엘의 마음 속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고 싶은 욕구가 빠른 속도로 부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비등하게 더 이상 리자드에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강해졌다.차가운 두려움의 안개를 떨쳐 내며 그녀는 자신을 추슬렀다. 엘은 마음을 정하고 조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부순 거예요!" 엘은 허세를 부려 크게 소리쳤다. 리자드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사그라지려는 얼마 안 되는 용기를 단단히 잡으며, 그녀는 리자드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 그런 거지같은 걸 연주하게 한 당신이 나쁜 거예요! 난 잘못한 게 조금도 없어요! 조금도!" 인상을 쓰며 냉큼 소리쳤지만 그토록 아름다웠던 물건이 엉망으로 부서진 모습을 보는 건 그녀에게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의 자존심은 그런 감정을 절대 내색하면 안 된다고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잘했다는 거냐?" 엘은 한순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짧은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리자드가 올가미를 조여 왔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군." 말을 끝은 리자드가 탁자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엘의 심장은 덫에 걸린 새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숨막히는 긴장을 참지 못한 엘이 드디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내가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겠어요!" 얄밉게도 리자드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받아야 할 소름 끼치는 형벌이 흘러나왔다. "저택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청소해라."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벌이었다. 끝에서 끝까지 뛰어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쥐가 날것 같은 저택을 청소하라고? 예순 다섯 개나 되는 먼지투성이 방을 나 혼자 치워야 한다고? "제길! 그게 말이 돼요? 나 혼자 그 일을 다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네 입으로 네가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부순 트레비아의 가격이 그렇게 궁금한가?" 리자드는 이대로 땅 속으로 꺼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엘을 지나 문으로 걸어갔다. "욕을 했으니 오늘 점심은 없다." 닫히는 문 사이로 피도 눈물도 없는 리자드의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세상이 핑 도는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그녀 앞엔 트레비아 파편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엘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피곤에 절은 몸이 천근만근 늘어졌지만 몸 구석구석을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요 며칠간 죽을 힘을 다해 리자드가 내린 벌을 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 해도해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리자드는 엘이 받고 있는 갖가지 교육시간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벌을 수행하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뭄에 콩 나듯 있는 휴식 시간에, 한번 숨을 돌려보지도 못하고 끝없이 살아나는 먼지들과 전투를 치렀다.어찌나 고단하고 힘이 드는지 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엘은 다시 몸을 옆으로 돌리며 괴로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단도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꿈에서라도 할머니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그녀 스스로 올려 놓은 모습 그대로였다. 단도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엘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번쩍 정신이 났다. 그녀는 단도에 시선을 못박은 채 몸을 일으켰다. 달빛을 받은 칼날이 싸늘하게 반짝였다. 그 번뜩임이 그녀를 책망하고 원망하는 눈길처럼 느껴졌다.쓰디 쓴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할머니를 묻기 위해 미친 듯이 땅을 파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복수가 어느새 정신없이 고단한 하루하루에 밀려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동안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엘은 천천히 손을 뻗어 단단한 나무 손잡이를 잡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을 느끼며 할머니의 등에서 단도를 뽑아 내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를 둘러싼 어둠에서 비냄새가 맡아졌다. 엘는 단도의 손잡이가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 들 때까지 으스러져라 움켜쥔 채 축축한 어둠 을 노려봤다. -------------------------------------------------------------------제4장. 탈출시도-------------------------------------------------------------------새벽을 기다리며 숨소리를 낮춘 적막이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깨어 있는 건 오직 끊임없이 달음박질하고 있는 바람뿐인 것 같았다. 주위를 유영하는 고요는 멀리서 부는 바람의 속삭임을 아주 가까이에서 듣게 해주었다. 엘은 맑고 차가운 밤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안개의 숲을 헤치며 속도를 높였다. 냉기를 품은 이슬도 그녀의 결의에 찬 발걸음을 방해하지 못했다. 간단한 짐을 꾸리고 부엌에 들러 필요한 음식을 싸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 보냈다. 얼마 안 있으면 새벽의 첫 빛이 잠들었던 세상을 깨우려 할 것이다. 엘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한층 걸음을 빨리했다. 이 한발 한발이 그녀를 고대하던 복수에 조금씩 가까워지게 해주리라. 딜람으로 가는 길은 이 곳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루시에게 물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물음에 루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산봉우리들에게서 멀찌감치 뚝 떨어져 서 있는 외톨박이 산을 가리켰다.산은 온통 하얀 눈 옷을 걸치고 있었고, 그 주위로 솜털 같이 가벼워 보이는 구름이 떠 있었다.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산을 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한번도 산을 넘어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는 더하리라. 하지만 엘은 첫 걸음마를 뗀 이후, 집 주위의 거친 숲 속을 내 집 드나들 듯 뛰어다니며 자라났다. 그러니 그까짓 산 하나 넘는 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길고 긴 들판을 한번도 타 보지 못한 말 등에 매달려 건너야 하는 일이 남아 있지만 말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마구간의 그림자가 그녀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거리가 좁혀지며 마구간의 형체가 확연히 드러나자 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제발 안에 사일러스가 없기를 빌었다. 있다고 해도 이 시간엔 깊게 잠이 들어있기 십상이었지만 사일러스가 보통 이상으로 날카롭고 감이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엘로서는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있다면 들키지 않고 몰래 말을 훔쳐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꼭 해야 될 일이었다. 전설 속에 나오는 신비의 성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산까지 걸어서 간다면 딜람에 도착했을 때, 이미 호세는 호의호식하다 편안하게 늙어 죽은 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손에 넣어야 했다. 말은 눈으로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 한번도 직접 타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엘은 일단 무사히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 위에 올라타 움직이게 하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뭐가 어렵겠는가? 중심을 잡고 그저 힘껏 매달려 있으면 되겠지. 한가지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훔쳐낸 말을 돌려 줄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엘은 이 곳으로 돌아올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지만 그건 복수를 무사히 끝낸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심사숙고해본 끝에 엘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곳에 이르면 자유롭게 풀어 줄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얽매여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느니 말 자신도 맘껏 자유를 누리는 삶을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마구간 앞에서 엘은 일단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의 깊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부엌에서 들고 온 램프에 불을 붙였다. 평소와 달리 램프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것 같은 긴장이 만들어 낸 느낌일 뿐이겠지만 엘은 얼른 몸을 돌려 저택을 등지고 섰다. 지금 당장이라도 불빛을 본 리자드가 맹수같이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다. 엘은 묵직한 걸쇠를 풀고 마구간 문을 열었다. 녹이 쓴 경첩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그녀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잠이 깬 사일러스가 그녀를 도둑으로 오인해 - 실제로 말 도둑이 될 직전에 와 있지만 말이다 - 검을 날리지 않길 바라며 반쯤 열린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찬바람을 몰고 온 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 한 마리가 불만에 찬 울음소리를 터뜨리자 곧 이어 다른 말들까지 동요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쉿! 제발 조용히 해! 제발!" 엘은 숨가쁘게 속삭였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말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녀는 말이란 동물의 영특함과 사려 깊음에 진심으로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마구간엔 다섯 마리의 말만 있을 뿐 다행히 사일러스는 보이지 않았다. 엘은 안쪽으로 들어가며 말들을 하나씩 살폈다.그러나 어떤 말을 골라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희미한 램프 불에 비치는 말들 모두 비슷비슷해 보일 뿐이었다. 이 중엔 분명히 리자드의 말이 있을 거야. 대체 어떤 말일까? 리자드의 말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엘이 가장 우려하는 일이 바로 자신의 말을 찾기 위해 리자드가 그녀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엘이 어느 쪽으로 가는 지는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엘은 제일 별 볼일 없는 말을 훔쳐 가면 리자드가 귀찮아서라도 쫓아오진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욕은 좀 하겠지만 말이다. 말이 아닌 엘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리자드가 그녀를 찾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히 그는 그녀 따위는 잊고 금세 다른 장난감을 구할 것이다. 좀 더 흥미롭고 충분히 고분고분한 장난감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괴상한 유희를 계속하리라. 엘은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청회색 눈동자를 떨쳐 버리고 눈 앞에 닥친 현실문제에 정신을 집중시키려 노력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멍청하게 서서 머뭇거리다가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잡히고 말 것이다. 엘은 말들을 빠르게 한번 훑어보고 제일 안쪽에 매어져 있는 말을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안쪽의 말은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칙칙한 갈색이었는데 다른 말에 비해 유난히 몸집이 컸다. 수레를 끄는 짐말이 분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말이라면 다른 말들처럼 빠르진 않더라도 특유의 힘으로 꾸준히 달려 오히려 그녀를 더 빨리 딜람에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엘은 용기를 내어 말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당장이라도 말이 입을 벌려 그녀의 손가락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끝이 말의 부드럽고 촉촉한 코를 스쳤다. 엘은 말의 따스한 숨결이 자신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적어도 그녀를 공격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매여져 있는 고삐를 재빨리 풀고 말을 잡아당겼다. "착하지? 이리 와!" 의외로 말은 송아지같이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구간을 나서자마자 엘은 서둘러 램프의 불을 끄고 어깨에 매고 있던 짐을 풀어 말 목에 묶었다. 답답한지 말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높이 차올렸다. 엘은 기겁을 해서 고삐를 힘껏 당겼다. "제발 조용히 해! 부탁한다!" 다정하게 이름이라도 불러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말의 이름을 알리 만무했다. 아무튼 말은 그녀의 숨죽인 부탁을 무시할 생각은 아닌지 불만스럽다는 듯 푸푸거릴 뿐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엘은 재빨리 말의 목에서 짐을 풀어내 다시 어깨에 멨다. 어깨가 축 늘어졌지만 심술궂은 말의 성질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등에 타면 짐 무게까지 더해지는 건데....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마구간 옆에 놓여 있는 나무 구유를 집어 말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가 아무리 말에 관해 문외한이라도 받침없이 저 높은 등 위에 올라앉지 못할 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움직이면 안돼. 알았지?" 근심 어린 목소리에 말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엘은 먼저 한쪽 다리를 말의 등에 올린 후 구유를 힘차게 딛고 몸을 훌쩍 날렸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닥이 시선을 스치자 한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어지러움을 무시하고 손바닥으로 말의 따뜻한 목 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순간 말이 어둠에 쌓인 멀고 먼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아몬은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려 애쓰며 다시 한번 리자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가 엘의 도망을 알린 후 리자드에게선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밝아오는 잿빛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몬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리자드님. 요즘 노력하는 모습도 보이시고, 나름대로 잘 적응하시는 것 같아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다 저의 불찰입니다." "위치는 파악이 되는 거겠지?" 무뚝뚝한 목소리에서 주인의 심기가 편하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예, 물론입니다." 아몬은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정신을 잃은 엘이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아몬은 리자드의 명령대로 그녀에게 추적마법을 걸어놓았다. 때문에 세세한 행동까지는 파악이 되지 않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다는 것 정도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언제든지 알 수 있었다. "저... 제가 지금 가서 그녀를 데려오겠습니다." 아몬은 당연히 리자드에게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엘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리자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아몬은 놀란 기색이 드러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아니다." 잠시 후 나온 대답은 아몬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한순간 입을 다물었던 리자드가 아몬에게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을 내릴 때까지 움직이지 말아라!" "예, 알겠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감히 그가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몬은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작게 헛기침을 한 후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힘들게 움직였다. "저....리자드님. 엘이 타고 가신 말이 바로... 저기....저...." "휩을 타고 갔군." 라시드의 어조에서 묘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주인은 아몬과는 달리 그리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사일러스에게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몬은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는데 말이다.휩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운 말이었다. 유난히 큰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야만적인 힘과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공격하려 드는 날카롭고 포악한 성질 때문에 웬만한 마부들조차 옆에 가기 꺼려하는 말이었다. 그런 휩이 복종하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주인인 리자드 뿐이었다. 엘이 하필이면 휩을 타고 갔다는 걸 안 순간 아몬의 등줄기엔 싸늘한 공포가 흘렀다. 그 사나운 말에 어떻게 올라탔는지 상상도 안되지만, 휩이란 놈이 그녀를 무사히 살려 두기나 했을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졌다. 말발굽에 밟혀 몸이 짓이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엘의 영상이 떠오르자 아몬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아이가 어떤 말을 타고 갔건 상관없다. 넌 이만 나가 명령을 기다려라." 아몬은 즉시 고개를 숙여 복종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고개를 드는 그의 갈색 눈은 걱정으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제발 무사하시기를.... -------------------------------------------------------------------꾸벅꾸벅 졸다 말 등에서 떨어질 뻔한 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길게 새어 나왔다. 어찌나 몸 구석구석이 아프고 쑤시는지 누구에게 흠씬 두드려 맞아도 지금보다는 덜 괴로울 것 같았다. 말을 훔쳐 타고 길을 떠난 지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엘에게 있어 그 순간순간은 영원보다 더 긴 것 같은 느낌으로 지나갔다. 어제 저녁 해질녘에 엘은 말에서 미끄러질 듯 내려 몇 발작 떨어진 나무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갔다. 그리고 그 즉시 잠이 들어버렸다. 어쩌면 잠이 든 게 아니라 너무 힘이 들어 실신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저녁도 굶은 채 차가운 땅에서 잠이 들었던 엘이 뼈가 시린 추위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다행스런 일은 그 와중에서 어떻게 꺼냈는지 얇은 모포를 몸에 둘둘 말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몸이 쉬지 않고 덜덜 떨려 왔지만 얼어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않은가! 엘은 입맛이 없어 작은 빵 한 조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말에 올랐다. 안장이란 게 있었으면 지금처럼 초죽음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안장을 맬 줄도 모르는 그녀가 마구간에서 얼쩡대며 안장과 씨름했다면 필시 아직까지도 그 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은 리자드에게 잡혀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엘이 훔쳐낸 말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갈색이 아니었다. 기름을 칠한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말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깊고 짙은 밤하늘을 닮은 듯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덩치도 유난히 크고 생긴 것도 매서워 보였으나 의외로 말의 성격은 순하디 순했다. 또한 순한 반면 굉장히 민감하기도 해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의 조종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뿐 아니라 말은 생김새처럼 지칠 줄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엘이 녹초가 되어 바닥을 헤맬 때도 이 튼튼한 말은 세상 끝까지라도 달릴 수 있다는 자신있는 눈빛으로 그녀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엘은 자신을 이 말에게 인도해준 운명에 진심으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쑤시는 팔을 내밀어 말의 목을 토닥거렸을 때, 멀리서 천둥 소리가 울려왔다. 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전만 해도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던 하늘에 어느새 진회색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축축한 기운이 한줄기 바람결에 묻어 났다. 주위를 묵직하게 내리 누르는 습한 공기가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어두워진 하늘에 번개가 은빛 가지를 치고, 곧 이어 요란한 천둥소리가 낮게 하늘 위를 굴러 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내려치기 시작했다. 금세 거세진 빗줄기가 길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돌풍을 만나 소용돌이치듯 사방으로 흩날렸다. 엘은 아픈 근육을 무시하고 그녀의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도로 말의 속도를 높였다. 빨리 비를 피할 적당한 곳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거라곤 나무 몇 그루가 고작이었다. 이제 비는 그야말로 쏟아 붓는 것처럼 내리 꽂히고 있었다. 강한 바람을 타고 온 빗줄기가 쉴새 없이 엘의 몸을 거세게 때렸고, 차가운 물방울들이 그녀의 목을 타고 옷 속으로 흘러 들었다.이미 엘의 몸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점점 초라하고 비참해질 뿐이었다. 은빛 번개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놀란 말이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리며 앞발을 거세게 차올렸다. 엘은 반사적으로 말의 목덜미를 꼭 껴안았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나무 사이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눈을 스쳐 간 건 바로 그 때였다. 비와 바람이 온통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데도 엘은 그것이 폭우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안식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저기야!" 엘은 크게 소리치며 손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말이 슬쩍 방향을 바꿨다. 나무 사이로 들어서자 젖은 나뭇잎들이 빗방울과 함께 엘의 얼굴에 부딪쳤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가 발견한 것이 작은 판자집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위쪽만 겨우 붙어 바람에 달랑거리는 문과 눈에 보일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린 지붕이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집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엘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판자집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말도 함께였다. 공간이 좁고, 더군다나 그 좁은 공간 한쪽으로는 거리낌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를 도와준 고마운 말을 폭우 속에 혼자 방치할 수는 없었다. 오두막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는지 겹겹이 쌓인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했다. 또한 비가 쏟아지는 곳에는 작은 진흙탕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녹이 잔뜩 슬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낡긴 했지만 그런 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화로가 한쪽에 놓여 있었다. 엘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눈에 보이는 판자 조각과 지푸라기를 주섬주섬 모아 화로에 불을 붙였다. 손이 곱아 부싯돌을 꽉 잡는 것마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꺼지지 않을 정도로 불이 붙자 엘은 서둘러 질척거리는 얼음장같은 외투를 벗고 유일하게 하나 있는 모포를 뒤집어썼다. 짐에도 물이 스며들어 모포자락이 축축했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엘은 불 옆에 몸을 바짝 붙였다. 오래된 화로에서 뿜어지는 매캐한 연기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연기가 시간이 좀 지나자 제 갈 길을 찾아 무너진 지붕을 통해 빠져 나갔다. 천천히 맴을 돌다 떠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엘은 모포 속에서 몸을 더욱 작게 움츠렸다. 다른 때처럼 목에 건 반지를 만지며 용기를 내려 했으나 처량하고 비참한 마음에 자꾸 목이 메여 왔다. 울면 안돼. 이 정도 고생은 각오한 거잖아.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주먹 쥔 손으로 눈을 비볐다. "도망친 곳이 겨우 여기냐?" 별안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엘이 몸을 흠칫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리자드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리자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놀란 숨결이 정지된 듯한 차가운 공기 중에 떠올랐다. "이건 꿈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봐."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중얼거려졌다. 엘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리자드는 언제나 그랬듯 냉혹하고 무자비해 보였다. 갑자기 그가 몸을 움직이자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했다. "용케 이런 곳을 찾아냈군." 리자드는 그녀 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화로 앞에 주저앉았다. 워낙 공간이 좁아 리자드의 어깨가 엘의 어깨를 스쳤다. 엘은 펄쩍 뛰다시피 몸을 피하며 조심스런 경계심을 담아 그를 살폈다. 진짜 리자드야! 리자드가 정말 내 옆에 있는 거야! 어떻게 날 찾아낸 걸까?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안 거지? 리자드를 본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멍하던 머리에 서서히 현실감이 스며들었다. 꼼짝없이 그에게 잡혔다는 무력감에 엘은 크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말까지 훔쳤으니 분명히 끔찍한 벌을 받게 될 거야.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다시 한번 스치자 엘은 잔뜩 움츠리며 옆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리자드는 그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바닥에 뒹굴고 있는 부서진 의자 다리를 두 손으로 잡고 부러뜨려 녹투성이 화로에 던져 넣었다. 리자드를 곁눈질하며 엘은 어떻게 해서든 그와의 거리를 넓히려고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는 비가 새어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갑자기 리자드가 불쑥 팔을 뻗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뭐,뭐 하는 거예요?" 엘의 입에서 새된 외침이 튀어나왔다. 다른 때보다 더욱 비밀스러워 보이는 청회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그녀를 향했다. "네 눈엔 내가 무엇을 하는 것 같으냐?" 엘은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벌렸던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 허무하게 다물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타닥거리는 나무 타는 소리와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만이 주위를 채웠다. 엘은 왠지 모를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느끼며 슬며시 리자드를 훔쳐봤다. 비를 맞아 작은 물방울이 반짝이고 있는 청회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짙어 보였다. "왜 여길 온 거예요? 날 찾으러 온 건가요?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안 거예요?"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질문이 튀어나왔다. 리자드에게선 그녀의 말을 들었다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엘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난 안 돌아가요! 그 엉터리 계약은 시궁창에나 던져 버리라고요!" 엘은 가슴을 들썩이며 격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좋다." 리자드에게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엘은 한바탕 퍼부어 주려고 벌린 입을 스르르 다물었다.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갔다. "계약은 없었던 거로 하지." 놀라움에 멍해진 보라색 눈동자를 청회색 눈동자가 단단히 옭아맸다. "저...정말이에요? 정말 없었던 일로 하는 거예요?" 리자드의 짙은 눈썹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가는가 싶더니 칼로 자르는 듯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다!"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정말 날 놔주려는 거야! 대체 왜?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걸까? 이미 날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은 건가? 엘은 혼란스런 감정에 쌓여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과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왜 갑자기 아무도 없는 황량하고 쓸쓸한 곳에 외톨이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지?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군." 담담한 어조엔 슬쩍 놀리는 기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엘은 그가 한 말 자체에 놀라 격렬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희미하게 웃음기가 감돌았던 리자드의 입술이 눈 깜짝할 새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대신 다른 제의를 하나 하지." 드디어 그의 본심이 나온다는 생각에 엘은 숨소리를 죽였다. "지금 너에게 가장 절실한 건 복수일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놈의 심장에 단도를 박아 넣고 싶어 애가 타겠지." 리자드의 단정적인 말은 어떤 이의도 달 수 없을 만큼 명확한 진실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말을 멈춘 그를 향해 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얘기가 잘 통하겠군. 잘 들어라! 내가 네 복수를 도와주겠다. 그리고 넌 내 계획을 도와주는 거다." "당신 계획을 도와 달라고요? 그게 뭔데요?" "때가 되면 말해 주겠다. 만약 네가 이 계약에 동의한다면 앞으로는 어떤 반항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지독히도 무표정한 얼굴의 리자드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싫어요! 계약같은 거 하지 않겠어요!" 엘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다고?" 한 박자 늦게 반문하는 리자드의 눈에 살짝 재미있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조각한 듯 보이는 딱딱한 입술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요! 절.대.싫.어.요!" 엘은 한마디 한마디 똑똑 끊어서 소리쳤다. 그리고 리자드가 입을 열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복수는 내 손으로, 내 힘으로 할 거예요!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어요!" "복수를 제외하더라도 네게 줄 게 또 하나가 있는데." "난 듣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맹렬히 타올랐다. 리자드는 그 보라색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을 샅샅이 훑는 듯한 강렬한 시선에 그녀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네 생각은 잘 알겠다. 하지만 넌 내 말을 들어야 하고, 충분한 관심도 기울여야 할 거다. 왜냐하면 내가 제의하는 다른 하나는 바로 너의 목숨이니까." 엘은 귀를 의심하며 그를 바라보다 날카롭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웃음이라기보다는 혼란과 경악이 담긴 탄성에 더 가까웠다. "하! 그 따위 협박은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엘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리고 리자드를 향해 세차게 코웃음을 날린 후 펼쳐 놓았던 외투와 짐을 집어 들었다. 빗소리가 잦아든 걸로 봐서 폭우가 거의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을 훔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차피 말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걸 테니 말이나 갖고 돌아가요. 난 걸어가도 충분하니까." 엘은 입을 다물자마자 냉큼 뒤돌아 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리자드의 얼굴에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같은 미소가 어렸다. 엘의 손가락 끝이 막 문에 닿으려고 할 때 갑자기 그녀의 몸이 세차게 돌려졌다. 들고 있던 짐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엘은 자신이 짐을 놓쳤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자신을 꽉 잡고 있는 리자드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감정을 배제한 메마른 어조엔 싸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엘의 등줄기로 전율이 일었다. 지금껏 리자드를 대하며 한번도 그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암흑 속에 가두고 나가 버렸을 때조차도. 처음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리자드에게 두려움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며 그런 느낌은 색이 바래졌고, 요즘 들어 어떤 때는 그가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엘은 기겁을 해 자신이 미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말이다. "진심은 아니지요?" 엘은 용기를 끌어 모아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편이 될 수 없다면 그 순간부터 넌 나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살려 둘 필요가 없는." 리자드가 그녀의 목숨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값어치없는 고물처럼 말하자 두려움 속에서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날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그의 말투에서 희미한 장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를 틀어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내가 계속 그의 말을 거절하면 정말 날 죽일까? 정말... 리자드가 날 죽일까? 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리자드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청회색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치는 순간 엘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엘의 몸에 발작적으로 경련이 일었다. 리자드가 그것을 느꼈는지 잡고 있던 팔에서 조금 힘을 늦췄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픈가?" 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 찬 침묵이 흘렀다. 짧으면서도 한편으론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이 깊은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호수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한 엘이 허겁지겁 몸을 비틀자 예상외로 리자드가 순순히 그녀의 몸을 놓아주었다. 엘은 리자드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지붕 구멍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의 검은 머리칼 위에 반짝이는 푸른 줄무늬를 그려 넣었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날씨가 완전히 개인 모양이었다. 엘은 눈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리자드를 바라봤다. 빛 너머 어두운 곳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말도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 뭔가 기묘한 것이 쌓이는 듯한 느낌. 마치 리자드와 자신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선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힌 순간 엘은 자신의 일생을 뒤바꿀 결정을 내렸다. 그를 따라 가자.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리자드는 날 원하고 있어. 그게 어떤 이유에서든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건 사실이야. 마음을 다잡은 엘은 리자드를 똑바로 마주봤다. 그를 따라가기 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집 잃은 불쌍한 강아지마냥 맥없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긴 싫었다. "내 복수를 도와준다고 했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청회색 눈동자가 조금 누그러졌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걸 깨닫자 엘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돌아가서 말해주지." 리자드가 이제 할 말은 모두 끝났다는 식으로 몸을 돌리자 엘은 얼른 소리쳤다. "잠깐!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았어요!" 낮은 한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몸을 바로잡았다. "말해봐라!" 귀찮다는 듯 무뚝뚝한 명령조였다. 물론 그런 리자드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번엔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해요. 난 지난 번처럼 당신의 노예로 취급받지 않겠어요.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내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 아니, 맹세해 줘요. 그렇지 않으면 난 지금 즉시 딜람으로 떠날 거예요." "너한테 내릴 수 있는 형벌은 무수히 많다. 그걸 알면서도 같은 말을 할 테냐?"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엘은 아슬아슬하게 태연한 척 허세를 부리며,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 가슴에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심장고동이 점점 거세졌고,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있었다.벨벳같이 부드럽게 반짝이는 청회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리자드가 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걸 정확히 말해봐라!" 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한 승리감에 환호성을 울리며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리자드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동료가 될 거예요! 동등한 위치에서 모든 걸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동료가!" 리자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지만 엘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날 죽인다고 해도 절대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예요! 억지로 끌고 가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망칠 거고요!" 자신있게 소리친 후 엘은 숨죽여 그의 반응을 살폈다. 리자드가 자신의 허세를 알아채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그가 말이다. 리자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방지축 말썽꾸러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조금은 흥미있고, 또 어느 정도는 체념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의 말에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갑자기 리자드가 몸을 돌려 멀뚱히 서 있던 말의 고삐를 잡더니 밖으로 나갔다. 엘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그래서요?" 버럭 지른 소리도 리자드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할 건데요? 내 말에 동의하는 거죠? 왜 말을 안 해요? 입이 붙어 버렸어요? 이런 제길! 리자드!" 엘은 불끈 솟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써댔다. 먼 하늘을 살피던 리자드가 드디어 그녀에게 주의를 돌렸다. 그가 엘 앞으로 한발 다가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녀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엘은 기겁을 해 반사적으로 리자드의 단단한 어깨를 짚었다.한순간 멍해졌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 이미 엘은 말 위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뒤로 리자드가 가볍게 자리잡았다. "좋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거와 동시에 엘의 귓가에 리자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순간 그녀가 지금껏 맡아 본 중 가장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가 한껏 밀려들었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리자드? 분명히 좋다고 한 거죠? 동료가 되는 데 동의한 거죠?" 흥분한 엘이 연이어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흥분을 단번에 가라앉히는 말이 다시 들려 왔다. "그래, 말도 안 되는 네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또 욕을 썼으니 오늘 저녁은 없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엘은 아몬을 향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격스럽기까지 한 얼굴로 그녀를 반기는 아몬을 대하자 창피한 마음과 더불어 한쪽에선 훈훈함이 느껴졌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는 아몬에게 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 이상야릇한 표정이 나타났다. "조금도... 정말 조금도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아몬은 마치 그녀가 다치길 바랬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엘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럴 수가! 하지만 휩이 분명한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 사일러스가 잘못 안 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몬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혹시 타고 가신 말이 덩치가 큰 검정 말입니까?" 엘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짐말은 그것 밖에 없던데요. 모르긴 몰라도 다른 말들은 모두 엄청나게 비쌀 거 아니에요.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감히 그런 말을 데려갈 수야 없죠. 그랬다면 성격 나쁜 리자드가 날 통째로 잡아먹으려 할걸요." 엘은 말을 끝내며 실감나게 몸을 부르르 떨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걸 보며 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짐말이라... 녀석이 듣지 못하는 게 다행이군." 낮은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리자드가 문턱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즉시 아몬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킨 일은?" 리자드가 짤막하게 물었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리자드님." 아몬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리자드의 시선이 엘에게 옮겨졌다. "따라와라!" 동등한 위치라는 새로운 계약에도 불구하고 리자드의 말투는 여전히 거만한 명령조였다. 엘이 불만을 표시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는 곧바로 문을 나섰다. 엘은 따라가지 말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좇았다. 리자드는 지하 감옥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엘로서는 그 방에 절대 발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으나 호기심이 그녀를 이끌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방안은 두터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벽난로에서 낮게 타오르는 불길이 주변에 희미한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엘은 눈을 깜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리자드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 "왜 나를...." 질문을 하다 말고 엘은 리자드의 시선이 못 박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저 만치에서 벽난로의 불빛을 받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에 시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 갔다.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서너 걸음 걸은 후 그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엘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이게... 대체...."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네가 바라던 거 아니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조에 엘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 한번 엘의 시선이 호세에게 못박혔다. 자신의 눈앞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죽은 건가요?" "아니다." "그럼...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잠깐 잠을 재웠다." 엘은 떨리는 손을 불끈 쥐었다. "날 위해서 놈을 데려온 거군요. 내 복수를 위해서... 그럼 복수만 남은 건가요? 이제 내가 저 놈의 시커먼 심장에 단도를 박아 넣는 일만 남은 건가요?" "네 복수이니 네가 원하는 데로 해야겠지." 메마르고 건조한 답이 들려 왔다. 엘은 허리에 차고 있는 단도를 더듬어 보았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자 현실감을 막고 있던 멍한 감각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발작적인 몸서리와 함께. 그녀는 호세를 노려보다 움켜쥐고 있던 단도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무기력하게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에서 놈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새삼스레 그녀에게 자비로운 마음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엘은 호세가, 할머니가 느낀 공포와 고통의 몇 배를 느끼며 죽길 바랬다. 그러려면 우선 그를 깨워야 하리라. 엘이 호세를 깨운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저 탁자에 있던 물병을 집어 호세의 얼굴에 대고 뒤집은 거 뿐이었다. 호세가 눈을 번쩍 뜨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현기증이 나는지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엘은 입술을 꼭 다물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심코 엘을 지나쳤던 그의 시선이 빠르게 되돌아왔다. "넌 누구냐? 여긴 어디고?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호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그녀는 아무 말없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마침내 엘을 알아본 호세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넌! 작은 마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쓸데없는 잡소리는 그만두시지. 난 네가 저지른 죄값을 내 손으로 치르게 하는 데만 관심 있으니까." 엘은 이를 갈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 스스로도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어하기 힘들 만큼 그를 향한 증오가 북받쳐 올랐다. "천민 주제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말을 끝내자마자 호세가 몸을 흠칫했다. 그의 시선은 엘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는 리자드를 그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리자드에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호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엘 앞에서는 거만하게 소리치던 호세가 지금은 공포에 숨을 헐떡이며 도망칠 곳을 찾아 정신없이 고개를 휘젓고 있었다. "저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널 상대할 사람은 바로 나니까!" 엘이 날카로운 어조로 소리쳤다. "잘 들어! 이 쓰레기같은 자식아! 네 놈이 잠들어 있을 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네 놈처럼 졸렬하고 더러워지긴 싫어! 너와 난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해. 상대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 "내가 널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저 사람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 아냐?" 호세의 신경은 아직도 리자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엘은 그 즉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만약 네가 날 죽인다면 모든 일은 거기서 끝나는 거야. 저 사람이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말을 마친 엘이 리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둠에 쌓여 있는 그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엘의 얼굴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곧 눈 앞이 핑 돌며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엘이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정면에서 어떤 검은 형체가 감지되었다.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히고 있는 의자를 피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호세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발을 차올렸다. 호세가 의자를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르며 턱을 감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은 펄쩍 뛰어올라 그의 얼굴에 깨끗한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진 호세가 손을 마구 휘둘러 부지깽이를 잡더니 그녀를 향해 던졌다. 엘은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부지깽이를 왼팔로 막았다. 팔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뼈가 부러진 것 같은 고통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며 식은땀이 솟았다. 엘이 고통스러운 팔을 부여잡고 몸을 주춤한 순간 호세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거칠게 부딪친 두 사람의 몸이 한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탁자 다리에 막혀 움직임이 멈춘 순간 엘은 자신이 육중한 호세의 몸 아래 깔리게 된 것을 깨달았다. 엘은 재빨리 무릎을 차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눈치 챈 호세가 한 박자 빨리 자신의 몸무게로 그녀의 다리를 짓눌렀다. 그러면서 재빨리 퉁퉁 부어 오른 그녀의 팔을 움켜잡아 우악스럽게 비틀었다. 엄청난 통증에 엘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치를 떠는 그녀를 바라보는 호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승리감과 만족감이 떠올랐다. "천민 계집 주제에! 감히 나에게 덤벼? 너도 이제 곧 구역질나는 괴물 할망구 뒤를 따르게 해주지." 호세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통이 조여 들자 엘의 온몸에서 일시에 힘이 빠져나갔다. 뿌옇게 흐려진 세상 가운데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호세의 얼굴이 그녀의 눈 속을 파고들었다. 엘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고통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서도 자신마저 놈의 더러운 손에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분노가 부글거리며 그녀의 내부로 밀려들었다. 엘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상처 입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호세의 턱을 쳐올렸다. 충격의 반동으로 호세의 상체가 뒤로 젖혀진 순간 엘은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재빨리 다리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드디어 그녀의 몸에서 육중한 체중이 떨어져 나갔다. 옆으로 몸을 돌리며 엘은 재빨리 일어났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호세에게 달려들어 그의 얼굴에 연이어 주먹을 내리 꽂았다. 호세의 얼굴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엘은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호세를 때리고 또 때렸다. 엘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 살려 줘... 제발..." 뭉개진 호세의 입술에서 필사적인 애원이 새어 나왔다. 엘은 그 순간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그녀의 손엔 허리에서 빼낸 단도가 들려 있었다. 벽난로의 불빛을 받은 칼날이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반짝였다. 단도를 눈치 챈 호세의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이 단도 기억 나지?"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검은 색으로 보일 만큼 짙어진 보라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기억하겠지. 네 놈이 이 걸로 내 할머니를 죽였으니까." "오,오해야! 그건 내 것이 아냐! 내 것이 아니라고!" "네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왜 이 단도에 네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지?" 엘의 어조엔 비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할말을 못 찾던 호세가 절망과 공포가 넘실거리는 얼굴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제발 살려 줘....제발...." "살려 달라고? 내 할머니는 네 놈 때문에 차가운 폭우 속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는데! 그랬는데, 나보고 널 살려 달라고?" 눈을 질끈 감자 차디 차게 굳은 할머니의 시신이 생생히 떠올랐다. 용서할 수 없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눈을 번쩍 뜨자마자 엘은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에 이어 호세가 격렬한 흐느낌을 토해냈다. "제발! 제발! 살려 줘! 제발!"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듯 허공에 정지된 엘의 팔은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원하던 복수가 코 앞에 와 있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엘은 으스러져라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인양 단도가 경련을 일으켰다. "으아악! 살려 줘!" 호세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른 순간 엘의 찢긴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 한 방울이 그의 몸에 떨어졌다.호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 피와 똑같은 자신의 붉은 핏방울을 보는 순간 단도를 쥔 그녀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갔다. 엘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충격과 혼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호세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겠는지 엉금엉금 기어 그녀에게서 떨어지고 있었다. "왜 죽이지 않는 거냐?" 멍한 머리를 뚫고 리자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악몽에서 막 깨어난 느낌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엘에게서 잔뜩 쉰 나지막한 대답이 나왔다. "끝을 맺어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원한다면 말해주지. 죽이라는 말이다." 리자드는 날씨 얘기를 하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솜털이 곤두설 만큼 싸늘한 위험을 담고 있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고개만 든 채 그녀와 리자드를 필사적으로 살피는 호세를 바라보다 엘은 격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못해요! 못하겠어요! 도저히, 도저히 못하겠다고요!" 엘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도저히 못하겠다라... 복수하겠다는 말은 철없는 어린애의 치기 어린 말에 불과했나? 그 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쉬울 줄 알았다고 징징거릴 테냐?" 리자드에 어조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려있었다. 엘은 분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넌 이미 한번 저 놈을 살려 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그 대가를 누가 치렀지? 네가? 아니, 힘없는 네 할머니가 대신 치렀다. 그러고 보니 복수는 네 자신에게 해야 되겠군. 너 때문에 네 할머니가 죽은 거니 말이다." "그만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는 듯한 잔인한 말에 엘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한꺼번에 밀려드는 괴로움과 비참함 속에 얼어붙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괴로운가 보군. 만약 네가 저 놈을 살려 보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놈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량한 사람이 될 것 같으냐? 해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자, 어서 일어나라! 그리고 일을 깨끗이 마무리지어라!" 리자드는 무자비하게 그녀를 몰아쳤다. 엘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녀는 리자드에게 조종되는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호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공포에 질린 괴성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엘은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 몸을 굽혔다. 그리고 성난 불길이 자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치켜 올렸다. 날카로운 칼날에 벽난로의 불그스름한 불빛이 세차게 부딪쳤다. "으아악!" 엘이 허공에서 팔을 움직이는 순간 그녀와 호세에게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엘은 몸을 벌떡 일으켜 뚜벅뚜벅 리자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선 강렬한 섬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리자드 앞에 멈춰 선 엘이 들고 있던 단도를 의자 팔걸이에 힘껏 박아 넣었다. 리자드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아래로 향했다. 단도는 그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부분에 꽂혀 있었다. 그것을 본 리자드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그 때 뒤에서 호세의 신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공포를 못 이겨 기절한 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엘과 리자드 모두 호세에겐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들은 죽음을 건 대결을 앞둔 철천지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건 리자드였다. 그는 강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긴 손가락으로 단도의 칼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게 주는 선물인가?" 무심한 어조였으나 그의 눈엔 희미한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엘은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좋을 대로 생각하시죠." 리자드가 단도를 뽑아 들었다. "흐음~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선물이군. 그럼 다음은 내가 고맙다고 인사를 할 차례인가? 아니면 고마움의 표시로 너 대신 저 놈을 죽여 줘야 하는 건가?" 순간적으로 엘이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꽉 쥔 주먹을 척 허리에 올렸다. 엘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보라색 눈동자는 도전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만 좀 이죽거리시죠! 그리고 난 저 놈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당신에게 대신 죽여 달라고 하지도 않을 거고요! 당신 말처럼 할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나 때문에! 하지만 이제 다시는 나로 인해 목숨을 잃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자의 피라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처음엔 강경하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급기야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가 되었다. 엘은 고개를 푹 꺾고 바닥에 그려진 리자드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알아요. 할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손에 피가 묻는 걸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사람들은 마녀라고 손가락질하며 침을 뱉었지만, 할머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분이셨어요. 복수는 다 끝났어요. 이젠 앞만 보고 살 거예요. 그래요.... 이제 뒤는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 독백하듯 조용히 말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의 눈이 리자드의 청회색 눈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는 불가해한 눈빛으로 엘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한순간이 지나고 리자드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겁쟁이." 엘은 이글거리는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쿵쾅쿵쾅 발소리도 요란하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호세는 부서져라 닫히는 요란한 문소리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벽난로의 불도 거의 잦아들어 주위엔 답답할 정도의 어둠이 찾아왔다. 손으로 턱을 받치고 움직임없이 앉아 있던 리자드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위에 드리워진 줄을 잡아당겼다.오래지 않아 책장이 반으로 접히며 사일러스가 지하 통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리자드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리자드는 짧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처리하라!" 그의 눈짓을 따라 사일러스가 호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즉시 사일러스는 호세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그를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가 지하 통로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을 때 리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깨끗하고 조용히!" -------------------------------------------------------------------제5장. 급류------------------------------------------------------------------- "허리를 펴시고 턱을 조금만 더 드십시오. 아니, 어깨를 뒤로 젖히시라는 게 아니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펴시라는 겁니다. 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엘!" 엘은 계속되는 아몬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비틀거리며 의자로 다가갔다. 털썩 주저앉아 탁자에 팔꿈치를 기대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는 그녀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자에 앉으실 때도 항상 등과 어깨를 똑바로 펴고 몸을 세우셔야 합니다. 더더군다나 지금처럼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시면 안됩니다." 엘의 신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아몬! 제발 그만해요!" "죄송하지만 아직도 배우실 것이 산더미입니다." "그럼 조금만 쉬었다 해요! 잠깐만이라도! 제발이요! 아몬! 제발!" 간절히 애원하는 엘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아몬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로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 앞에서는 거절의 말을 하기가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아몬은 자포자기한 심장으로 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엘이 그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보냈다. 아몬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되돌렸다. 엘을 상대할 때는 그 자신도 도무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약해졌다. 지금까지 아몬은 자신을 냉정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 어느 부분에 이렇게 무른 구석이 있었는지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엘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낯선 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아몬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다른 사람, 특히 그의 주군인 리자드에게 감추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하지만 리자드님은 이미 알고 계실게 틀림없으리라. 사소한 것도 놓치시는 법이 없는 분이니까. "아몬!" 아몬은 엘의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왜 그러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몬은 어떤 사람이에요? 왜 아몬같이 좋은 사람이 인상 쓰고 심술만 부리는 리자드를 섬기는 거예요?" "리자드님께선 인상을 쓰시지 않는데요." 아몬의 갈색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엘이 입술을 비죽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겠네요.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장같이 차갑게 구니까요. 하지만 심술만 부린다는 말은 맞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체 아몬은 그런 폭군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 거예요?" 아몬은 리자드가 부재 중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안도감에 슬쩍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엘은 눈을 반짝이며 아직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몬은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휴식시간은..." "우와!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아몬! 햇볕이 너무 좋죠?" 재빨리 자신의 말을 가로채 엉뚱한 말로 돌리는 엘을 보며 아몬은 슬쩍 웃음을 감췄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리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엘을 바라보다 아몬도 그녀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걸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아몬."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엘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은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엘이 좀처럼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몬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왜 나한테 이런 걸 가르치는 거죠?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여러 가지 학문들과 갖가지 예절들... 심지어는 내 말투까지도..." 아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반짝이는 엘의 시선을 피하며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모든 건 리자드님께서 알려 드릴 겁니다" "거짓말." 엘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더 이상 곤란한 질문으로 아몬을 괴롭히진 않겠어요. 아! 한가지만 빼고요. 아몬 말로는 리자드가 나한테 모든 걸 알려 준다고 그랬는데, 대체 그게 언제쯤인지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분이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을 내리실 때일 겁니다. 저도 더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이 것만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모든 건 리자드님의 뜻에 달렸으니까. 거기엔 누구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어찌나 하루 일과가 꽉 짜여 있었는지 숨 돌릴 틈을 찾기도 어려웠다. 엘이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을 수 있는 시간은 잠자리에 든 이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시간조차 제대로 음미해 보기 전에 잠이 들어버리곤 했지만 말이다. 엘은 생활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갖가지 교육의 이유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매시간 끊임없이 의문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입을 다문 건 아무리 그녀가 매달리고 애원해도 아몬이 말해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몬은 리자드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야. 물어보려면 아몬이 아닌 리자드에게 직접 해야 돼.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물어본다고 리자드가 순순히 말해 줄리 만무하다는 거였다. 엘은 한숨을 내쉬며 창 밖을 바라봤다. 리자드를 떠올릴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를 생각할 때면 엘의 입술에선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리자드가 이 곳을 떠난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는 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호세 일이 있었던 날 늦은 밤에 말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연히 그녀의 방 창문으로 보아서 아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도 이 저택 안에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엘은 리자드가 저택에 있고 없고를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하늘을 가르는 번개처럼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도저히 무시하고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인 것처럼. 엘은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는 리자드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 창문을 떠나 넓은 홀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녀의 움직임에 먼지가 뿌옇게 피어 올랐다. 홀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지저분했다. 양쪽 끝에는 잿더미만 수북하게 쌓인 거대한 벽난로가 있었고, 벽 곳곳에 거미줄이 잔뜩 처져 있었다. 너무 높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우아한 둥근 천장까지 온통 거미줄 천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한때는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홀은 이제 색이 바래고 먼지가 쌓인 모습으로 휑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웅장한 모습은 변함이 없어 이 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엘을 압도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공간에서 경건함까지 느끼곤 했다. 이 먼지 투성이 홀이 요즘 들어 엘이 검술교육을 받는 곳이었다. 휑하디 휑한 홀은 지저분함을 떠나 검술을 배우기엔 두 말할 나위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하지만 엘은 바람과 햇빛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마구간 앞 공터가 훨씬 좋았다.갑자기 장소가 바뀐 이유에 대한 질문에 사일러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엘의 그을린 피부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황당한 대답에 엘은 어이없어 눈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사일러스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일이 리자드가 지시한 거라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자비한 리자드의 손에 의해, 그녀가 잠깐이나마 자유와 해방감을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도피처마저 막혀 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엘은 검술 교육을 받기 위해 사일러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언제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던 사일러스가 정해진 시간이 훨씬 초과된 지금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엘은 다시 한번 아치형 입구를 바라봤다. 그 때 거짓말처럼 입구에 사일러스와 아몬의 모습이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아니, 사일러스의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아몬은 억지로 끌려 온 것 같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아몬이 웬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엘의 질문에 아몬은 사일러스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사일러스가 저에게 간곡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엘은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아몬과 사일러스는 각자의 분야가 정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적어도 엘의 교육에 있어서는 말이다.놀랍게도 항상 무뚝뚝하던 사일러스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나타났다. 그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로 사일러스를 유심히 살피자 붉은 기운이 조금 더 강해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럴까? 사일러스가 입을 열기는 무리라 판단했는지 아몬에게서 답이 나왔다. "오늘부터는 검술 수련 전에 먼저 춤을 배우셔야 합니다." "춤이라고요? 지금 춤이라고 했어요? 내가 왜 그걸 배워야 하는 데요?"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높였다. 트레비아라는 악기 연주를 배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만큼이나 황당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배우셔야 합니다." 아몬이 늘 하던 말로 엘의 입을 다물게 했다.엘은 입술을 삐죽이며 사일러스와 아몬에게 번갈아 눈을 흘겼다.그 사람 모두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어서 그 춤이란 걸 시작해 봐요!" 그녀의 목소리엔 짜증이 조금 섞여 있었다. 사일러스와 아몬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 받을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엔 엘이 바닥에 발끝을 톡톡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그럼 오늘 교육은 없는 걸로 알고 난 낮잠이나 자겠어요!" 엘은 선언하듯 소리치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문까지 서너 걸음 정도 남겨 두었을 때 뒤에서 아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슬쩍 깨물며 몸을 돌렸다. 처음 들었을 때는 질겁했지만 아몬과 사일러스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니 의외로 춤이란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아몬의 정면에 섰다. 얼마나 재빨리 움직였는지 사일러스는 어느새 저 만큼 떨어진 곳에서 안도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럼 먼저 발의 기본동작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어서 시작해 봐요." 엘은 흥미롭게 아몬의 발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 "으윽!" 다시 한번 아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해요!" 엘은 아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괘,괜찮습니다. 윽!" "아몬! 정말정말 미안해요!" 엘은 울상을 지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이제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몬의 발을 밟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미안해 한줌의 염치도 찾을 수 없었다. "마흔 다섯 번째 군." 사일러스의 혼잣말이 들려 오자 아몬과 엘이 동시에 그에게 살기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잠시 이리저리 홀 안을 살피더니, 그래도 두 사람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자 자신의 손톱을 유심히 관찰하는 척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니 움직임에만 신경 쓰십시오." 아몬의 어조엔 간절함까지 배어 있었다. 엘은 그가 입 밖으로 내보내진 않았지만 끝부분에 반드시 붙이고 싶어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마 '특히 발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십시오, 제발!' 일 것이다. 그녀는 진실된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몬의 어두운 안색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지만 엘은 정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결심이었다.다시 한번 아몬이 박자를 세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은 고개를 숙여 발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박자를 따라 셌다.조금씩 되는 것 같았다. 서투르긴 했지만 그녀의 발이 아몬의 동작을 그런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뻣뻣하기가 쇠꼬챙이 같군." "으윽!" 리자드의 목소리에 이어 아몬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엘은 건성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타고 왔는지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리자드가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보는 순간 깊이 가라앉았던 엘의 가슴이 마구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리자드님!" 아몬과 사일러스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리자드는 그들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엘에게 못 박혀 있었다. "계속해라!" 리자드의 거만한 고갯짓에 아몬과 엘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며 서로를 마주봤다. 엘은 이 자리를 모면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평생 감사하며 살아가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힘내십시오. 잘 해내실 겁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아몬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엘은 힘없이 미소지으며 눈으로 고마움을 전했다.드디어 춤이 시작됐다. 엘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리자드가 보고 있다는 게 의식되니 더욱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왜 하필 오늘 돌아와서! 며칠 후엔 그런대로 흉하지 않게 춤을 출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몬의 발을 밟지 않았잖아. 그것만해도 잘 한 거야. 하지만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자꾸만 위축되는 그녀의 동작을 결정적으로 멈추게 한 건 리자드의 짧게 혀차는 소리였다. 엘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리자 아몬까지 동작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엘은 아몬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리자드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손을 척 허리에 올리며 리자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몬은 지금 많이 피곤할 거예요. 그러니 나머지는 리자드가 가르쳐 줘요." 그녀의 목소리가 도전적으로 울리자 아몬과 사일러스가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저 괜찮습니다! 제가 계속 하겠습니다!" "들으셨죠? 전혀 힘들지 않답니다!" 아몬과 사일러스가 차례로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엘과 리자드 모두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는 어떠한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는 거죠? 뻣뻣한 쇠꼬챙이한테 발이라도 밟힐까 봐 겁나요?" 엘은 리자드를 더욱 약 올리기 위해 비꼬는 말 끝에 코방귀를 달았다. 두 사람을 살피는 아몬과 사일러스의 얼굴엔 핏기가 가셔 있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리자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거만한 얼굴로 엘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뭐해요? 기다리고 있잖아요. 혹시 나와 춤추는 걸 겁내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정말 겁을 내고 있는 건가요?"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엘은 리자드가 이대로 물러나진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리자드의 눈에 슬쩍 재미있다는 빛이 스쳐 갔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자 엘은 무의식 중에 숨을 죽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기를 부리긴 했지만 사실 엘은 조금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난 철부지 어린애와 놀아 줄 시간없다." 담담히 말한 후 문을 향해 걸어가는 리자드를 보며 엘은 작은 승리감을 느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리자드의 등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겁쟁이!" 그녀의 말이 공기를 울리는 순간 리자드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아몬과 사일러스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 상태였다. 숨막힐 듯 냉기가 흐르는 노기를 드러낼 거라는 아몬과 사일러스의 근심과는 달리 엘에게 고개를 돌리는 리자드의 얼굴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눈 깊은 곳에선 희미한 흥겨움이 감돌고 있었다. "삼일 주지. 삼일 동안 완벽하게 춤을 출 수 있도록 해라!" 부풀어올랐던 기세가 단번에 사그라지며 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은 가차없이 밖으로 나가 버리는 리자드를 노려보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뚜벅뚜벅 복도를 걷는 리자드의 입가에 놀랍게도 즐거움을 담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삼일이 지나자 엘은 그럭저럭 춤이라 봐줄 수 있는 걸 출 수 있게 되었다. 리자드의 말처럼 완벽하게 출 수는 없었지만 엘은 더 이상 아몬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한 층 고무되어 있었다. 리자드가 찾아와 그녀의 어색한 동작을 보며 창피를 줄지 모른다는 처음의 걱정도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저택에 있는 건 확실한데 춤을 배우기 시작한 첫날 이후 리자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스치듯이 만난 적도 없었다. 엘은 서너 번 같은 부분을 반복해 읽다가 한숨을 쉬며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요 근래 저택에 갇혀 있다시피 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답답하고 심란한 마음이 드는 걸까? 점심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한 그녀였지만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된 지금도 시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는 늘 엘과 아몬, 단둘이 했다. 아몬은 그녀에게 식사 때마다 늘 한가지씩 식사 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때문에 엘은 별 어려움없이 예의를 갖춘 점잖은 식사법을 익힐 수 있었다. 이제 곧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리사가 나타나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할 것이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엘은 재빨리 걸어가 리사가 문을 열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사라지기 직전의 석양이 복도 전체에 붉은 물을 들이고 있었다. 엘은 창 밖으로 펼쳐진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휑하도록 넓은 식당에 한발을 들여놓았을 때 엘은 오늘 저녁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식사가 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몬이 아니라 리자드였다.놀라움에 잠시 멈칫했던 엘은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리자드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를 잡자마자 식탁에 음식이 놓이기 시작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리자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다. 엘은 리자드가 눈치채지 못하게 힐끗힐끗 그를 살폈다. 음식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음식물을 씹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별안간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에 못 박혀 있던 엘의 시선을 붙잡았다. 엘은 죄진 사람처럼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뜨겁게 화끈거리는 얼굴은 아마 음식의 김 때문일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불편한 침묵이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히는 동안 엘은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맛이 없나?" 갑작스레 침묵이 깨지자 엘은 퍼뜩 얼굴을 들어 리자드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무관심하기만 한 리자드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게 조금은 얼떨떨하고 신기했다. "아니오. 그저 입맛이 없어요." 엘은 솔직하게 말했다.리자드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라!"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엘은 서둘러 리자드를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밖엔 푸른 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회색의 어둠이 내려와 있었고, 막 모습을 드러낸 창백한 달이 엄숙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리자드의 뒷모습이 어둠과 한 몸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 곳은 엘이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문 앞이었다. 저택에서 유일하게 묵직한 자물쇠가 걸려 있는 단 하나의 문. 리자드가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자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짙은 어둠에 감싸인 방안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리자드가 램프에 불을 붙이고 엘에게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엘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며 문을 닫고 리자드를 향해 다가갔다. 어둠 속을 은은히 흐르는 불빛이 그의 얼굴에 뚜렷한 음영을 그려 넣고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 투성일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램프 빛에 비치는 공간은 깨끗했다. 누군가가 매일 공을 들여 쓸고 닦고 한 것처럼 리자드가 앉아 있는 책상은 매끄러운 윤기까지 나고 있었다.엘은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청천벽력같은 말이 들려 왔다. "넌 모레 여길 떠나야 한다." 엘은 멍하니 리자드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리자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새벽에 출발한다. 디바오까지 가서, 그 곳에 준비되어 있는 다른 마차로 갈아탄 다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리자드의 말을 잘랐다. "모레 이 곳을 떠나라고요? 내가 여길 떠나야 한다고요?" "내 말을 끊지 마라." 리자드의 목소리는 서늘한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엘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다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런 식은 싫어요! 일방적인 명령은 사양하겠어요. 내가 여길 왜 떠나야 하는지, 대체 나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는지, 자세히 말해 줘요! 당신이 내게 숨기고 있는 모든 걸 한가지도 빼놓지 말고 전부 말해줘요!" "그렇게도 죽고 싶나?" 리자드의 물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어 공기를 빼앗아 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의 목소리는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네가 모든 걸 알게 되면 내 손으로 널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리자드가 충격적인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인가를 말하려 입술을 벙긋거리던 엘은 스르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고동이 쿵쾅거리며 빨라질 뿐 머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아시리움 성전에 대해 알고 있나?" 갑자기 리자드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시리움 성전이요? 아시리움 종단의 중심 신전을 말하는 거잖아요. 법황님이 계시는 곳이기도 하고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다섯 살짜리 천민 아이라도 알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아시리움 성전이 있는 그루지아국은 실제 국명보다 신의 나라로 더 많이 불리어지는 나라였다. 그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바로 아시리움 성전과 법황 성하 때문이라는 건 코흘리개 어린애도 알고 있었다. "매 3년마다 열 다섯 살에서 열 아홉 살 사이의 각 국의 왕족들은 아시리움 성전에 모여 필요한 교육을 받는다. 지정된 나이가 된 왕족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한번은 아시리움에 가야 한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기간은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고, 참가자들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대부분 6개월을 넘지 않는다." 어리둥절해진 엘은 눈을 깜박이며 리자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건데요?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가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네가 가야할 곳이 바로 아시리움이니까." 리자드의 말이 귀를 울리는 순간 엘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듣기나 한 건지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마,말도 안돼!" 엘이 버럭 새된 소리를 질렀으나 리자드는 그녀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여행에 필요한 모든 건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루지아까지는 수행인들을 부릴 수 있으나 일 단 그루지아에 발을 디디게 되면 아시리움 종단 측에서 모든 걸 통제하게 된다. 당연히 왕족 본인을 제외한 어떤 사람의 출입도 용납되지 않는다." "잠깐!" 소리를 냅다 지르며 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얌전히 앉아 있는 건 불가능했다. "제길! ....이런 빌어먹을! 또 욕을 하고 말았네! 내 말투 갖고 뭐라고 하면 한대 때릴 줄 알아요!" 엘이 서슬 퍼렇게 소리치자 리자드의 입가가 희미한 웃음기로 슬쩍 비틀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주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떤 미친 짓을 시키려 한다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이런 방법은 싫어요! 이런 식으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겠어요! 내가 원하는 건 상세한, 아~주 자세한 설명이에요!" 조금 가빠진 그녀의 숨소리만이 돌연 찾아온 침묵 속을 울리고 있었다. "물어봐라." 드디어 리자드가 반응을 보였다. 엘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매 3년마다 참가 나이가 된 왕족들이 아시리움 성전에서 교육을 받는다고 했죠? 누가 그런 일을 하는 거죠? 이유가 뭐예요?" "법황의 뜻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유라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겠지. 장차 각 나라를 이끌어 나갈 왕족들을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잡아 두는 것만큼 확실한 권력 유지 수단은 없을 테니까." 예전 같으면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로 들렸을 테지만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갖가지 책을 섭렵한 지금의 엘로서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리자드를 응시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존귀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일컬어지는 법황 성하를 불손하고 조금은 무시하는 듯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어서였다. "다른 질문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는 엘이 답답해 보이는지 리자드가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어조로 물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곳에 내가 가야하는 이유는요?" 이번엔 리자드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는 거의 검은 색으로 보이는 눈동자로 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덩달아 긴장한 엘은 무의식 중에 숨소리를 죽였다. 이윽고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리자드의 입술이 열렸다. "찾아와야 할 물건이 있다." 말을 끝내자마자 리자드가 서랍을 열고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온통 검은 색으로 그의 긴 손가락으로 덮일 정도의 크기였다. 엘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반짝이고 있는 사이 리자드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동작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반으로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것과 같은 걸 찾아야 한다. 똑같지는 않지만 구별이 가능할 정도는 될 것이다." 엘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스르르 손을 내밀었다. 리자드는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에 종이를 건넸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조금 떨어져 나간 종이엔 어떤 물건이 그려져 있었다. 둥근 쟁반을 쪼개서 그 위에 정교한 문양을 새겨 놓은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이게....뭐예요?" 그녀의 귀에도 어눌하게 들리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긴 하지만 엘은 리자드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자드의 입술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와 거의 흡사한 물건이 아시리움 성전에 있다는 말이군요." "그래, 겉으로 보기엔 단단한 돌 같을 것이다. 크기는 그 그림과 비슷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찾아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엘은 한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나보고 훔쳐 오라는 거죠? 그렇죠?" "그렇다."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나오는 대답에 엘은 너무나 기가 막혀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나보고 도둑질을 하란 말이에요? 그것도 아시리움 성전에서요?" 리자드가 간단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아마 법황 주변에 있을 거다." 들으면 들을 수록 그녀가 느끼는 황당함과 혼란만 커질 뿐이었다. 엘은 고개를 숙이고 종이를 내려다보며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그림의 윤곽을 어루만졌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이걸 얻는 게 리자드한테 중요한 일인가요?" 이상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서둘러 리자드의 눈을 피했다.엘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리자드에게서 매우 낮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요하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어조였다. 엘은 뚫어져라 그림을 내려다봤다. 그래, 그럴 거야.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물건일 게 틀림없어.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도 다 이번 일이 원인이 된 거겠지. 리자드가 날 이 곳에 데려온 것도, 갖가지 교육을 시킨 것도, 또 나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이유도.... 갑자기 텅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 울며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는, 아니, 그럴수록 더욱 철저한 외톨이임이 뼛속 깊이 새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엘은 쓸모 없는 사념에서 벗어나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하겠어요!" 그녀는 허세를 부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있게 소리쳤다. "그 대신이라는 말이 뒤이어 나올 것 같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놀라움을 감췄다. "그래요. 그 대신 나도 원하는 게 있어요. 내가 당신이 원하는 걸 주면 당신도 내가 원하는 걸 주어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우린 동료잖아요." 마지막 말은 조금 망설이다 덧붙인 거였다. 코웃음을 치며 무시할 거라는 엘의 예상과는 달리 리자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 "왜 말이 없지?" "저....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내용도 들어보지 않고 그렇게 덜컥 좋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요?" 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리자드의 입가에 슬쩍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는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그 말은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인가?" 리자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은 펄쩍 뛰어올랐다. "마,말도 안돼!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해요? 나참, 기가 막혀서! 잘 들어요! 이 정신 나간 귀족나리! 내가 걱정하는 건 리자드가 아니라 나예요! 알아들었어요? 바.로. 나.라.고.요!" "알아들었다." 리자드가 가볍게 수긍했지만 엘은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다음 말을 꺼냈다. "난 백만 큐어를 원해요." 엘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부른 건 리자드의 냉정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어서였다. 펄쩍 뛰어오르며 터무니없다고 소리칠게 틀림없어. 아니, 싸늘한 시선을 던지며 내 말을 무시할 지도 몰라. "좋다." 펄쩍 뛰어오른 건 리자드가 아니라 엘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조,좋다고 한 거 맞아요? 내가 제대로 들은 거예요?" 톤 높은 목소리가 공간 가득 울렸다. "그래, 좋다고 했다." "저기... 난 백만 큐어라 했어요. 백만이요. 백 큐어가 아니라고요. 백만 큐어는 백 큐어의....으음~ 천 배나 된다고요!" 잘못들은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엘은 리자드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을 흔들어 댔다. 리자드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백만 큐어로 들었다. 그리고 백만 큐어는 백 큐어의 만 배다." 그의 목소리엔 슬쩍 놀리는 듯한 기미가 서려 있었다.엘의 얼굴이 한순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리자드의 입가엔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바보! 그렇게 쉬운 걸 틀리다니! 글자를 몰랐을 때도 셈은 자신있었는데.... 날 얼마나 멍청한 애로 볼까? 할 수만 있다면 연기로 변해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엘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너무나 창피해 영원히 리자드의 얼굴을 쳐다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으면 너 역시 원하는 걸 갖게 될 거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한 어조가 들렸다. 그러자 황당하게도 엘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엘이 슬며시 고개를 드니 목소리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청회색 눈동자와 부딪힌 순간 엘은 리자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군요. 정말 나한테 백만 큐어를 준다는 거로군요." 백 큐어만 해도 1년간 풍족함을 넘어 화려하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만 큐어만 있어도 난 평생동안 귀족처럼 생활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백만 큐어라니! 백만 큐어가 도대체 얼마만한 돈인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돈을 아무렇지 않게 주겠다고 말하는 리자드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신 누구예요? 뭐 하는 사람인가요?" 자신도 모르게 커지는 리자드에 대한 거리감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 엘은 강경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그의 얼굴엔 빛과 그림자가 신비롭게 얽혀 있었다. 리자드는 잠시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만 가서 쉬어라." 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지 리자드가 자신에 대한 얘기는 절대 하지 않으리 란 걸 알 수 있었다. "알았어요. 말하기 싫다는 표현을 정말 정 떨어지게 하는군요. 이제 리자드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묻겠어요." 귀찮다는 듯 비스듬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리자드를 못 본척하며 엘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어떤 방법으로 아시리움 성전에 들어가는 건가요? 하녀가 되어야 하나요? 아시리움 성전이라면 하녀로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아니, 넌 왕족의 신분으로 들어간다." 너무나 터무니없고 황당하여 해괴망측하기까지 한 말이 한순간 엘을 마비시켰다. 눈을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뜨고, 입을 딱 벌리고 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즐거움과 황당함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엘은 배를 부여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격렬하게 웃어 젖혔다. "와,왕족....이라니! 그럼... 내,내가... 공주....님이라도.... 되어야...한다는..." 웃음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엘은 눈물을 닦으며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리자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가 아니라 왕자가 되어야 한다." 웃음 소리가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농담이죠?" 엘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물론 리자드의 얼굴에선 느슨함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왜 농담이라 생각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난 여자라고요! 여자! 그런데 나보고 남자 행세를 하라는 거예요? 그것도 왕자를!" 새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귀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신경에 거슬리는지 리자드의 얼굴이 알아채기 힘들만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엘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나보고 왕자 노릇을 하라니! 정말 말도 안돼!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을 나에게 하라니!" "왜 말이 안 된다는 거냐?" "그거야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니까! 여자! 당신도 눈이 있다면 똑똑히 보라고!" 엘은 냉큼 대답했다. 그녀의 흥분된 외침을 받는 리자드의 말은 매우 통렬했다. "네 어디가 여자로 보인다는 거냐?" 순간 엘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려고 벌렸던 입술을 힘없이 닫았다. 그녀는 리자드를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의 얼굴은 침울해져만 갔다.비적 마른 몸에 앙상한 팔, 납작한 가슴, 볼품없이 길기만 한 다리. 그녀의 몸 어디를 봐도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리자드의 목소리에선 어딘지 모르게 짓궂음이 풍기고 있었다. 엘은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요. 천민이나 평민 남자애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누구도 날 왕자로 보지 않을 거예요. 한 순간도." "흐음!" 리자드가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이며 몸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엘은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너무 말랐군. 왕족 중에 너처럼 뼈가 앙상한 사람은 찾기 불가능할 거다. 그 동안 살을 좀 찌웠어야 하는데..." 가축이라도 고르는 듯한 리자드를 노려보며 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쳇! 욕한다고 날 굶긴 사람이 누군데!"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냐?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냐?" 리자드가 거만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욕 좀 한다고 누가 죽기라고 해요? 그게 도둑질이나 사람을 해치는 것만큼 그렇게 나쁜 일이 냐고요?" 기가 한풀 꺾인 엘이 볼멘 어조로 말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리자드가 그런 말을 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엘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욕을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네가 즐겨 하는 욕을 쓰는 왕족은 없다." "그럼 왕족들은 절대 욕을 안 한다는 말이에요? 그렇겠군요. 그 사람들에겐 욕이 나올 일은 생기지도 않을 테니!" "물론 욕을 하는 왕족도 있다. 하지만 천민의 욕을 입에 담는 왕족은 없다." 그 말은 엘의 기세를 우스울 정도로 간단히 꺾어 버렸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침울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앞으론 욕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참고 참다가 정 하고 싶어지면 왕족이 사용하는 욕을 배울게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엘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에 묘한 부드러움이 어렸다. 하지만 그 빛은 엘이 얼굴을 드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말 내가 남자가, 그것도 왕자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렌 국의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왕자가 되어야 한다." 리자드의 목소리가 귀에 스며드는 순간 엘의 가슴에 서늘함이 느껴졌다. "어떠냐? 새 이름이 마음에 드나?" -------------------------------------------------------------------제6장. 첫걸음------------------------------------------------------------------- "그녀에게 경고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리자드님." 아몬이 리자드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고라고?"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아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아시리움 성전에 보냈던 사람들 모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감쪽같이 들여보냈던 아홉 명 전부가 말입니다." 리자드에게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일렁이는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자드님, 전 엘이 위험에 처하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아니, 위험한 일을 겪게 되리란 건 당연한 걸 테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데....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라도 해주 면..." "그렇게 하면 위험이 줄어들거라 생각하나?" 리자드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그렇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불필요한 두려움과 긴장은 오히려 일을 망칠 뿐이다. 그 아이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내가 제대로 찾아낸 거라면 그리 쉽게 목숨을 잃진 않을 거다. 그 곳에서 죽음을 당한다면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겠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한 말에 아몬은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주인만 허락한다면 그 혼자만이라도 엘을 돕고 싶었다. 아몬이 용기를 내어 리자드에게 청을 하려는 순간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앞으로의 일이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행동하라." 도움을 주라는 사실상의 허락에 아몬의 얼굴에 끼었던 먹구름이 조금 옅어졌다. 그는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마치 온 세상이 숨을 죽인 듯 사방이 완벽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엘은 몸을 뒤척이며 어둠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힘든 여행을 떠나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다는 아몬의 충고를 받아들여 저녁 식사시간까지 앞당기고 침대에 누웠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이제 곧 아몬이 와서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러면 엘은 그 길로 영원히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아몬은 어딘지 슬퍼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긴 내 집이 아닌데.... 억지로 잡혀 있다시피 했을 뿐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닌 곳인데....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 드는 걸까? 난 무의식 중에 여기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곳을 떠나게 되면 닥치게 될 미래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무거운 담요처럼 그녀의 몸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내 앞엔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되는 것일까? 아마 내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겠지.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처음 리자드에게서 듣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엘의 머리를 온통 채우고 있는 이름이었다. 이 낯설기 만한 이름이 이제 그녀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비록 몇 달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속에 서만 지속되겠지만. 이 곳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어느새 어제가 되어버린 하루 동안 엘이 아몬에게 물은 것과 들은 것의 거의 대부분이 이 이름에 대한 거였다. 세렌국이라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왕자. 그녀보다 한살 아래인 열 일곱 살의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의 왕자. 엘이 하필이면 세렌국의 왕자 노릇을 해야 되는 이유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단 한 명의 왕족이 참가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것.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그 왕자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엘은 턱 밑까지 올라온, 세상에 존재하는 많고 많은 흑발들 중 왜 그녀를 선택한 거냐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그녀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리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나올지 모른다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놀랄 만큼 날카롭게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엘!" 아몬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예, 깨어 있어요." 그녀의 귀에도 거칠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죄송하지만 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준비가 되시면 말씀하십시오." "알았어요." 엘은 구석에 놓여 있는 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아몬이 준비해준 옷가지를 재빨리 몸에 걸쳤다. 그 동안 남자 옷을 입고 생활해 온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작은 램프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던 아몬이 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드릴 것이 있습니다." 깜박이고 있는 그녀의 눈 앞에 내밀어진 것은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엘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열어보십시오." 아몬의 얼굴은 매우 심각했다.입구를 벌린 다음 손바닥 위에서 주머니를 뒤집자 작은 구슬 세 개가 떨어졌다. 구슬은 그녀의 엄지 손톱만한 크기로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엘이 이게 뭐냐는 물음을 담아 아몬을 쳐다봤다. "필시 위험에 처하시거나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발생할 겁니다. 그 때 구슬을 공중에 던지며 '에나헤스 하르 델 카시메르'라 소리내어 말하십시오. 그럼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절 도와준다고요? 어떻게요?" 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엘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문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혼자 계실 때 사용하셔야 합니다.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에나헤스 하르 델 카시메르." 엘이 한마디한마디 정확히 발음하자 아몬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잊어버리시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글로 적어놓으셔도 안됩니다.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외우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구슬 하나는 사용하지 마시고 남겨 두셔야 합니다. 일을 끝마치신 후 쓰셔야 하니까요." 그 이상한 물건을 찾았을 때 쓰라는 말이구나. 엘은 신중한 손길로 구슬을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되셨으면 이제 떠나셔야 합니다." 아몬의 조용한 목소리가 채찍이 되어 매섭게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엘은 주머니를 필요 이상으로 꼼꼼히 묶었다. 이제 모든 걸 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해. 내 힘으로. 그녀는 결연히 고개를 들어 아몬을 바라보았다. "준비되었어요. 하지만 떠나기 전에 꼭 알아야 될 일이 있어요." 엘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세렌국의 왕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몬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 일에 대해서는 엘이 아실 필요없습니다." "나한테 필요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해요! 그리고 난 반드시 알아야겠어요!" 듣기 전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엘을 바라보며 아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전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엘이 일을 마무리지으면 그 즉시 세렌국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잠을 재운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요?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가능합니다." "왕자와 난 디바오에서 바꿔치기 되는 건가요? 그런데 그의 수행원들이 왕자의 얼굴을 모를 순 없을 텐데...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갈까요?" "아닙니다. 디바오에서는 엘을 수행해주는 사람들만 바뀌게 됩니다. 일단 세렌국 왕자가 그루지아에 발을 들여놓은 후 그의 수행인들이 모두 돌아가는 순간 엘과 바뀌게 되는 됩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아몬의 얼굴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면 귀신같이 시간을 잘 맞춰야겠네요. 그런데 바꿔 치기할 때는 어떤 방법을 쓰게 되는 건가요?" "세세한 건 아실 필요없습니다. 다 되셨으면 이제 그만." 엘은 아몬의 말허리를 끊으며 냉큼 끼어 들었다. "그런데요, 그 왕자 말이에요! 잠을 자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 아니에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 땐 이미 일이 마무리되어 있을 테니까요. 아시리움 종단측에서도 세렌국 왕자가 피해자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그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엘도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체념한 어조로 말하던 아몬이 이대로는 안되겠는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럼 저부터 나가 있겠습니다." "잠깐만요, 아몬!" 아몬이 멈칫거리며 엉거주춤 뒤를 돌아봤다. "정말 고마워요." 엘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에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문을 나서는 아몬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었으나 그 사이로 환한 햇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을 담고 있는 하늘도 차분하고 투명한 푸른 빛을 띠고 있어 온화한 하루를 약속하고 있었다. 엘은 커튼 사이로 감질나게 보이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려 뾰족하게 뻗어 있는 숲을 향해 서글픈 시선을 던졌다. 마차가 덜컥 소리를 내며 요동치자 엘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긴장도 됐지만 반면 기대감도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출발이었다. 하지만 힘든 마차 여행은 긴장과 기대감 모두 맥을 못 치게 만들었다. 험한 길을 달리는 마차가 어찌나 덜컹거리며 심하게 흔들리는지, 여기저기 부딪친 엘의 몸에는 십여개의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마차보다 그녀를 더 괴롭히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함이었다. 처음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커튼 사이로 홀린 듯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타 보는 마차에 가슴을 설레며 말이다.그 후 긴장이 조금씩 풀리며 피곤이 밀려오자 엘은 꾸벅꾸벅 졸다 마차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놀라 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자 다음엔 멀뚱히 앉아 있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활짝 열지도 못하게 한 커튼 사이로 바라보는 풍경도 그게 그거였고, 주위에 말 한마디 나눌 상대도 없었다. 엘은 마차 주변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시켜 볼까하고 몇 번 망설이다 포기하곤 했다. 낯선 사람들과 나눌 말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고, 딱딱히 굳은 얼굴로 위압감을 풍기는 그들이 대화에 친절히 응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저택을 출발할 때, 여섯 명의 사람들 중엔 사일러스도 끼어 있었다. 비록 말은 못 나눠도 그가 마차 밖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엘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녀가 졸다 일어났을 때 이미 사일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엘은 무의식중에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들과의 끈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엘은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엘 일행이 디바오에 도착한 것은 어제 어둠이 깔리는 저녁 무렵이었다. 엘은 커다란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채 서둘러 여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저녁식사를 대충 때우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지금까지 엘을 호위해준 사람들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엘이 이른 아침 밖으로 나가 보니 그들 대신 다른 다섯 명의 사람들이 그녀가 탈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그녀를 최종적으로 그루지아국의 국경 지대까지 데려다 줄 사람들이었다. 지난번과 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번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고, 바뀐 수행원들도 먼저 사람들처럼 무뚝뚝하긴 매한가지였다.지루한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 점심 때가 되자 엘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대충 식사를 했다. 밖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언제, 또 어떻게 식사를 하는 건지 짧은 휴식조차 취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한번 펄쩍 뛰어오른 엘은 딱딱한 나무 판에 호되게 엉덩이를 부딪쳤다.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투덜거리며 앉은 자세를 고쳤을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 온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엘은 커튼을 와락 젖히고 창을 열었다. 몰려드는 바람소리에 섞여 다시 한번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왼쪽에 위치한 어두운 숲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멈춰요!" 엘은 급한 김에 창 밖으로 팔을 빼내어 마차 지붕을 쾅쾅 두드려 댔다.놀란 마부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말을 탄 남자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재빨리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엘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비명을 못 들었을 리없는 사람에게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비명소리 못 들었어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도와줘야 하잖아요!"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전보다 더 날카롭고 고통에 찬 목소리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엘이 입을 딱 벌렸을 때 남자가 마부석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서 출발해!" 엘은 마차가 움직이려 하는 순간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당신들이 안 하겠다면 내가 도와주겠어!" 버럭 소리친 그녀가 부리나케 숲을 향해 달려가자 남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서 보호하라!" 다급한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들이 일제히 엘의 뒤를 따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엘은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갈구했던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 때 느꼈던 끔찍한 공포와 절망까지도. 그녀는 자신이 늦지 않길 바라며 미친 듯이 달렸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속에서 말을 타는 건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뒤따라 오던 남자들도 말에서 내려 달려오기 시작했다. 엘이 축축한 나뭇잎을 밟고 미끄러져 바닥에 호되게 부딪쳤을 때, 다시 한번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소리에 엘은 벌떡 일어나 늘어진 나뭇가지와 걸음을 방해하는 덤불을 헤치며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드디어 눈 앞에 비명의 진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엘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 앞을 노려봤다.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또 한 명의 남자는 나무에 기대선 채 여자를 보며 킥킥대고 있었다. 엘은 검을 빼어 들고 소리 죽여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있는 남자의 머리를 검 손잡이로 세차게 내리쳤다. 그가 힘없이 고꾸라지자 여자를 덮치고 있던 금발머리 남자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엘은 재빨리 그의 목덜미에 검 끝을 갖다 댔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그 즉시 목이 잘릴 줄 알아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목을 젖히자 검도 즉시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죽고 싶나?" "아,알았다." "천천히 일어나!"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자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짓이겨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반쯤 찢겨 나간 너덜거리는 옷 사이로 가늘고 긴 수십 개의 칼자국들이 나있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며 여자의 몸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피를 보며 엘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여기 계셨군요." 진한 안도감이 드러난 목소리와 함께 그녀를 뒤따라온 남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였다. "이놈 좀 꼭 잡고 있어요!" 남자 두 명이 양쪽에서 그를 단단히 잡는 걸 보고 엘은 여자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리고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폭력의 흔적이 역력한 여자의 몸을 덮어 주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여자의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엘은 손가락 끝을 여자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피멍이 들어있는 가냘픈 목에선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손가락을 움직여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여자의 몸엔 싸늘한 죽음이 가득 차있었다.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자를 내려다본 후 양쪽 팔을 잡힌 채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남자의 코 앞에 멈춰 서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봤다. 기분 나쁠 정도로 옅은 초록색 눈이 죽일 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가 죽었다." 낮고 거칠게 말하는 엘의 보라색 눈동자는 거의 검은 색으로 보일 만큼 짙었다. 부글거리는 격분이 내부로 밀려들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다. "천한 계집 하나 죽은 게 뭐 어때서? 감히 날 조금이라도 해친다면 저 계집처럼 네 목숨도 끝 장날 줄 알아라! 체면을 해칠까 싶어 가만히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소리만 지르면 이 숲을 초토화시키고 네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갈가리 찢을 수 있는 병력이 몰려들 테니까."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자신 만만함을 지나쳐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건 데 허풍이 섞였을 지는 몰라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 듯 싶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감히 내게 저지른 건방진 짓거리에 대한 벌을 톡톡히 받아 낸 후에 말이다!" 남자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엘은 엉뚱하게도 신발을 벗은 후 양말까지 벗고 있었다. "그래? 네가 소리만 지르면 우린 그 길로 끝장이란 말이구나! 그럼 네 놈의 잘난 주둥이부터 막아야겠군." 엘은 다짜고짜 자신의 양말을 남자의 입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경악이 서린 얼굴에 시선을 못박은 채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남자가 몸을 비틀거린 순간 이번엔 힘껏 따귀를 갈겼다. 남자의 볼에 그녀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새겨졌다. "시체를 마차로 옮기는 게 좋겠어요. 마을로 옮겨 가족을 찾아 주어야 할 테니까요." 말을 하는 중간 중간 엘은 남자의 따귀를 갈겨 댔다. 고통과 수치를 못이긴 남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갈 길도 바쁜데 이제 그만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마을에도 들리신다니...." 한숨과 초조함이 섞인 어조에 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어서 이 놈을 저 나무에 묶어요. 기어가서 우리를 찢어 죽일 병력이라도 부르면 안될 테니까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엘은 팔짱을 끼고 서서 남자가 나무에 묶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게 되면 내 손으로 널 죽이고 말 거다! 내 영혼을 걸고 맹세한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에 대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듯 말하고 마지막으로 남자의 뺨을 힘껏 갈긴 뒤 몸을 돌렸다. 그러다 뒤를 흘긋 돌아보며 진한 비웃음을 날렸다. "그 양말은 추억으로 간직해라!" -------------------------------------------------------------------그 일이 있은 후 그루지아 국의 국경지대에 도착하기까지 칠일 동안은 별 사건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지정해 준 여관은 잘 가꿔진 정원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건물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건물은 겉으로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화려했고, 다른 건물은 깨끗하긴 했지만 그저 평범해 보였다. 엘이 들어간 곳은 화려한 건물이 마주 보이는 작고 검소한 방이었다. 좁은 침대가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앞의 초라한 탁자 위엔 작은 램프가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얼굴을 보이지 말라는 말에 엘은 침대 끝에 앉아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작긴 하지만 커튼이 걸리지 않은 창엔 되도록 가까이 가지 않는 게 현명했다. 식사를 대충 마친 후 엘은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행에 지친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어떤 소리가 선잠에 빠진 그녀를 깨웠을 때, 주위엔 온통 어둠이 깔려 있었다. "일어나십시오." 머리 위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잠이 확 달아나는 걸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따라오십시오. 절대 말씀을 하셔서는 안됩니다." 엘과 몸집이 비슷한 검은 그림자가 문을 나서는 그녀를 스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이미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을 등불 삼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엘은 남자를 놓칠까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한발 뗄 때마다 요란하게 삐걱대는 마루 소리를 듣고 당장이라도 사람들이 문을 열 것 같았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두운 복도를 살금살금 걷고 있는 그들을 수상쩍게 볼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마당을 가로 질러 다른 건물의 이층에 있는 문 앞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췄다. 엘은 남자가 잡고 있는 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뒤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좀 전까지 엘이 있던 데와는 전혀 다른 방이 보였다. 면적만 해도 네다섯 배는 될 것 같았고, 침대며 탁자, 장식장, 의자 할 것 없이 크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엘은 서둘러 작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도 침대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채 가시지 않은 체온이 소름과 함께 밀려들었다.엘은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침대 가장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트를 머리 위까지 치켜 올렸다. "아시리움까지는 아직 멀었습니까?" "아닙니다, 왕자 전하. 이제 곧 성전을 육안으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엘은 자신있는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슬쩍 사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를 아시리움 성전까지 안내해 주는 중년의 사제는 마흔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지나치게 조용하여 어찌 보면 무뚝뚝할 정도였다. 말 한마디 하는 걸 얼마나 아끼는지 꼭 필요하다 싶은 말만 골라 했고, 묻는 말에도 극히 짧게 대답하곤 했다. 이틀 전 그루지아 국에서 처음 묵었던 여관으로 찾아온 사람은 이 중년의 사제를 제외하고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마부 일을 보며 여러 가지 잡일을 도맡아 하는 젊은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엘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의 소녀였다. 혼자 멀뚱히 앉아 꾸벅꾸벅 졸기나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마차여행도 내키지 않는 일이긴 매한가지였다. 불편한 걸로 따지면 엘은 단연코 후자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늘 그랬던 것처럼 두툼한 책을 펼쳐 드는 사제는 그렇다치고, 끈질기게 엘을 곁눈질하다 눈이 마주치면 허겁지겁 시선을 돌리는 소녀의 존재는 아슬아슬한 절벽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녀를 매우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바싹바싹 입안이 말랐다. "저쪽입니다." 엘은 사제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아시리움 성전이 전설 속의 성처럼 태양을 향해 우뚝 서 있었다. 성전 주위엔 높다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성전은 그들의 기세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오히려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엘은 창턱을 꼭 잡은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시리움 성전을 바라봤다. 경외의 대상이던 성전을 그녀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리라는 건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난 이제 성전 안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거야! 가슴 고동이 빨라지며 엘의 보라색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잠시 후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완전히 멈춰 섰다. "성전의 보안에 철저히 신경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엘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가 문을 열자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불쑥 보습을 보였다. 그는 엘과 사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빈틈없는 눈길로 마차 안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실 마차 안은 갓난아기조차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 "죄송하지만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기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왕자의 인장을 꺼내 기사에게 내밀었다. 기사가 신중한 손길로 인장을 받아 들었다. 이미 사제에게 보여 신분을 증명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아무 탈없이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이 마른 침을 삼켰을 때 기사가 공손한 태도로 인장을 돌려주고, 이번엔 사제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종이를 꼼꼼히 살핀 후에 사제에게 다시 건네주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마차 문을 닫는 순간 그들을 막고 있던 육중한 철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차를 포위하듯이 서 있던 기사들이 물러서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여 거대한 굴처럼 길게 이어진 출입구로 진입했다. 철문에는 뾰족하게 날을 새운 길고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위협적으로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살벌하게 보이는지 당장이라도 아래로 떨어져 마차를 뚫고 그녀의 머리를 관통할 것만 같았다.입구가 끝나는 곳에도 같은 모양의 철문이 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경비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잡고 있는 마부를 지나 엘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시야를 온통 가로 막고 있는 성전의 엄청난 규모에 저절로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대체 성전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어디까지 솟아 있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정말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왕자 전하?" 사제의 목소리엔 감탄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목이 잠겨 말이 잘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제는 그녀를 성전 중앙의 아치형 출입구까지 이어져 있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긴 계단을 올라 입구로 들어서자 으리으리한 홀이 나타났다. 홀 바닥엔 매끈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네 모서리 부분에 각각 대형 조각상이 높다란 천장까지 닿을 듯 솟아 있었다. 예술적으로 세운 우아한 기둥들이 까마득하게 솟은 천장을 굳건히 받치고 있었다. 엘은 화려하고 웅장한 홀을 흘긋흘긋 살피며 사제의 뒤를 따라 홀 밖으로 이어진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잘 가꿔진 으리으리한 정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들은 꽤 오랜 시간 정원의 바깥 부분에 나있는 갖가지 색깔의 돌이 깔린 길을 걸었다. 잠시 후 눈앞에 살짝 푸른 기가 도는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그들은 완벽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 기둥 사이의 입구로 들어서서 다시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기가 질릴 만큼 화려했다. 사제는 복도를 돌아 나란히 서 있는 문들 중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이 곳이 전하께서 머무르실 방입니다. 피곤하실 텐데 편히 쉬십시오. 곧 시중들 아이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든 건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그 외의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지금까지 잘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숨 돌릴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엘은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아듣지 못할 무슨 말인가를 횡설수설하던 그는 몸을 돌려 허겁지겁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봐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위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자각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용기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떨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소녀가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며 몸을 비틀거렸다. 엘은 재빨리 다가가 쟁반을 받아 들었다. "제,제가 하겠습니다!" 기겁을 한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엘은 그 말을 못들은 척하고 뚜벅뚜벅 걸어가 한쪽에 위치한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음식을 먹으려는데 한발쯤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소녀의 존재가 엘의 신경을 건드렸다. "함께 먹으려면 여기 앉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놀란 소녀가 크게 소리치더니 금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시중들 필요는 없어." 엘은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전 문 밖에 서 있겠습니다." "잠깐! 그러지 마!" 엘은 몸을 돌리는 소녀의 손목을 잡으며 만류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자 엘은 덩달아 놀라 허겁지겁 손목을 놔주었다. "여기 앞에 앉아." 의자에 앉는 소녀의 동작은 극도로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여자애들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 역시 여자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남자 아이들과는 곧잘 주먹다짐을 하며 흙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곤 했지만 여자 아이들은 엘을 전염병에 걸린 병자처럼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때문에 자신의 시중을 들게 된 이 소녀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할지 엘로서는 막막할 지경이었다. 특별히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탁자나 의자처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여행길을 동행했으면서도 아직 이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뭐지?" "시에나입니다, 전하." "몇 살이야?" "열 여섯입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엘은 멀뚱히 시에나를 바라보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참! 식사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거 없어?" 불쑥 고개를 들자 엘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시에나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안내해 주실 분이 오실 겁니다." "그럼 시에나는 나가서 다른 볼일이나 봐." "전 왕자 전하의 의복을 갖춰 드려야 하는데요." "그 정도는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어!" 엘은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말했다. 어제 저녁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기겁을 하지는 않았지만 옷을 입는 일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기가 막히다 못해 황당한 일이었다. 엘이 여자임을 숨겨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도 말이다.아몬에게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미리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시에나에게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내 똑똑히 말하겠는데, 앞으로 옷 시중이니 목욕 시중이니 하는 말, 한번만 더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엘은 시에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예, 알겠습니다." 기가 팍 죽은 대답이 나오자 엘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시에나가 탁자 위에 눈물을 뚝뚝 떨구자 만족스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슬그머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사실 시에나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잘못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려 하는 한심한 인간들에게 있는 거지. "저기... 그러니까 내 말은 시에나가 그런 귀찮은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다른 할 일도 많을 거 아냐."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말씀하세요. 그럼 다른 시녀가..." 울먹임 때문에 시에나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시녀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야! 난 시에나로 충분해. 충분히 만족한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에나를 달랬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애를 울리는 일만은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면서 말이다.시에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수줍게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겪어 본 귀족이나 왕족들 중 이렇게 다정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괴롭히기 일쑤였고, 그나마 나은 사람들은 무시하곤 했다. 시에나의 눈길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지자 엘은 벌떡 일어서며 식사는 다 했으니 이제 옷을 입어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쟁반을 들고 일어서는 시에나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문을 닫는 엘에게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녀를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하물며 왕족들은 오죽하겠는가? 옷을 갈아입는 그녀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어이, 너! 소속이 어디냐?" 뒤에서 엘을 부른 사람은 시선을 확 잡아끄는 강렬한 빨강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었다. 엘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입술 사이로 긴 휘파람 소리가 나왔다. 유난히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꽤나 성별이 모호한 쪽에 속하는구나!" "뭐야?" 험악한 어조에 소년이 악의는 없다는 듯 번쩍 두 손을 치켜 들었다. "미안미안! 신경 곤두세울 필요없어! 그 괴로움 나도 조금은 아니까." 그러고 보니 소년도 여자로 오인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우리 인사나 하자! 난 체르몬국의 다섯 번째 왕자야. 이름은 리오카사이. 그냥 리오라고 부르면 돼!" 엘은 선뜻 내밀어지는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난 세렌국에서 왔어. 이름은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이야." 그녀가 입을 다물기도 전에 리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야?" "하하하하! 너처럼 자기 이름을 어색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어어! 또 인상 쓰네! 너도 생긴 거와 어울리지 않게 성질 꽤나 있구나!" 사사건건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식이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이기 십상일 것이다.엘은 얼굴을 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젯밤 잠을 설쳤더니 좀 피곤해서.... 내가 괜한 짜증을 부린 것 같아. 미안하다." "꽤 시원시원한데! 너 마음에 든다. 여긴 목덜미 빳빳한 것들만 모이는 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알렉스! 알렉스라 불러도 되지?" 리오에게서 나오는 열정에 압도된 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참! 내 동생도 소개시켜 줄께." 고개를 길게 뺀 리오가 때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소년에게 손짓을 했다. 엘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소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 놀랐지?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우린 쌍둥이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니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이쪽은 내 동생 리반. 체르몬국의 여섯 번째 왕자야. 그리고 이쪽은 알렉스. 알렉스는 세렌국의... 알렉스, 너 형제가 어떻게 되냐?" "어? 어어, 나도 너처럼 다섯 번 째야. 왕자로는 세 번째고." "그나저나 혼자 참석해서 좀 외롭겠는걸. 다른 사람들은 다 형제들과 함께 왔거든. 뭐, 나와 리반처럼 사이 좋은 형제는 드물겠지만 말이야. 알렉스, 그만 좀 쳐다봐! 리반이 불편해 하잖아! 이 녀석은 나처럼 뻔뻔한 성격이 아니란 말이야!" 그제서야 엘은 얼굴을 붉히고 있는 리반을 눈치채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 "쌍둥이 처음 보냐?" "응."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말에 쌍둥이 형제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가슴이 철렁한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너희들처럼 똑같이 생긴 쌍둥이는 처음 본다고!" "난 또!" 엘은 그들의 얼굴에서 알겠다는 표정을 확인한 다음 남 모르게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왕궁에서 쌍둥이 한번 못 봤을 리야 없지. 그런데 알렉스, 우리 두 사람 그렇게 똑같지는 않아. 잘 봐봐." 리오의 말대로 두 사람을 찬찬히 비교해 보니 조금씩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리오의 머리카락이 좀 더 붉은 빛이 강했고, 푸른 눈 역시 좀 더 진했다. 그것말고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확실한 건 리오에게만 있는 턱의 희미한 흉터였다. 이제 두 사람을 구별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행동이나 얼굴 표정만 봐도 대부분 알아볼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활달한 리오와는 반대로 리반은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리오, 여기 모인 사람들에 대해 좀 알아?" 엘이 나지막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묻자 리오도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말고. 네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인사를 끝냈거든.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도 네다섯 명 있고." 그녀가 설명해 달라는 말을 하기 전에 리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저기 창가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푸른 드레스 차림의 사람있지. 리아잔 제국의 황녀야. 이름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아르벨라라고." 리아잔 제국의 아르벨라 황녀라고? 바로 엘이 자라난 나라의 황녀였다. 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창 밖을 내다보는 옆 얼굴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알렉스! 아르벨라 황녀한테 접근할 계획이라도 세우냐?" 리오가 빙글거리며 짓궂은 어조로 물었다. "말도 안돼!" "왜 말이 안 되냐? 저 정도면 얼굴도 예쁘지. 또 얼굴 좀 못생기면 어떠냐? 리아잔 제국의 황녀님인데. 우리처럼 왕위 계승권이 희박한 왕자들이야 두 말할 필요없지.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걸." 아르벨라 황녀를 보며 쑥덕거리고 있는 왕자들을 보건 데 리오의 말이 과장된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엘은 아르벨라 황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리오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너도 그 중에 한 명인가 보구나! 그만 쳐다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얘기 좀 해 봐!" "알았으니까 인상 좀 펴. 저기 아르벨라 황녀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이 바로 이 곳 그루지아국의 왕자야.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리반, 이름이 뭐지?" "알비노."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던 리반에게서 즉시 답이 나왔다. "그래, 맞아! 알비노 왕자야! 그리고 저기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공주들 중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알비노 왕자의 누나야. 이름은 다미아고. 그리고 놀라지마. 여기저기 퍼 져 있는 사람들 중 아홉 명이 다 슈벤 국의 왕자와 공주들이야. 슈벤 국은 왕족들이 많은 걸로 유명한데, 그게 사실이긴 한가 봐. 듣기로는 왕자와 공주들만 오십 명이 넘는다고 하더라고. 이름은 저기 가운데 있는 공주가...." 슈벤 국 공주들의 이름은 줄줄 말하던 리오가 왕자들에 이르러서는 계속 막히기 시작했다. 때문에 리반이 대신 이름을 말해 주었다.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이름을 들으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엘은 그 이름들을 다 외워야 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리오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나처럼 쓸데없는 왕자들은 집어 치우고 어여쁜 공주님들 이름만 외우라고. 그럼 한결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질 테니." 엘은 장난기 넘치는 리오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참! 그러고 보니 꼭 알고 있어야 되는 인물이 있었군." 갑자기 심각해지는 리오의 얼굴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사제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앞 쪽에 있는 낮은 단위에 올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안 오신 분이 있으시군요." 이 곳에 있는 사람들 말고 올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엘은 재빨리 사람들을 세어보았다. 그녀와 방금 들어온 사제를 빼고 열 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말이야. 바로..." 리오가 몸을 기울이며 귓속말을 했다.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문이 덜컥 열리며 세차게 벽에 부딪쳤다. 놀란 사람들 몇 명이 작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굳이 이런 데까지 참석해야 한다니!" 불만에 가득 찬 투덜거림이 들렸다. "드디어 왔군. 무서울 것이 없는 황태자께서!" 리오의 어조엔 빈정거림과 묘한 부러움이 어려 있었다. 새로 등장한 사람을 보는 순간 엘의 입이 멍하니 벌려졌다. "저 사람이 누구라고?" 다급히 묻는 말에 리오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리아잔 제국의 그 유명한 자일스 황태자잖아! 알렉스, 표정이 왜 그래?" 엘은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시작하기도 전에 일이 엉망으로 꼬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기원하며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엘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결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거들먹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이 곳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숲 속에서 그녀가 손이 퉁퉁 부어 오를 때까지 따귀를 갈긴 남자였다. 그 정도로는 지은 죄값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지만. 대체 이를 어쩌지?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게 되면 분명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그가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는 걸 알고 겁을 집어 먹은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엘의 앞 날에 가장 큰 장애가 되리라는 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병력을 부른다 어쩐다 하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군.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엘과 자일스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제7장. 악연-------------------------------------------------------------------눈살을 찌푸린 자일스가 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확연히 일그러졌다. 엘이 누군지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일스가 뚜벅뚜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둘러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어차피 맞닥뜨려야 할 일, 절대 비겁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야. 엘이 마음을 굳게 잡았을 때, 그녀의 바로 앞에서 자일스가 걸음을 멈췄다. "너!" 엘은 자일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 말인가?" "그래, 너 말이야! 너!"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주위 사람들이 한층 숨을 죽였다. 심지어는 사제조차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은 그들이 쏘아 대는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 기억하지?" "물론." 엘은 일부러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일스의 한쪽 볼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기묘할 정도로 옅은 초록빛 눈이 광포한 빛으로 번득였다. 자일스가 뿜어 대는 분노 어린 살기가 온 몸으로 부딪쳐 왔다. 어찌나 매서운지 실제로 엘의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너, 어느 나라의 누구냐?" 그 순간 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그녀는 지금 세렌국의 왕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였다. 얼마 전 지도를 보기 전에는 세렌 국이 어디 위치해 있는지도 몰랐던 그녀였지만, 그 나라 사람들에게 자일스의 보복이 가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왜 말을 못해? 어느 나라의 누구냐니까?" 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사악함이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만족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엘은 한발 앞으로 나서는 리오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일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이건 또 뭐야?" 자일스가 리오를 험악하게 노려봤다. 엘은 리오에게서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난 세렌국의 알렉시스 왕자요." 그녀는 마지못해 반존대로 말을 끝냈다.자일스의 얼굴이 더 한층 험악해졌다. 높으신 것들 비위 맞추는 일만은 제발 사양하고 싶은데...그래, 어차피 난 물건만 찾으면 그 길로 사라질 존재야. 그 때가 되면 내가 가짜라는 건 저절로 밝혀지게 될 거라고. 굳이 자일스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침울해졌던 보라색 눈동자가 다시 생기로 반짝였다. "세렌국이라.... 아, 생각났어! 세렌국이라면 언제 짓밟힐지 몰라 발발 떠는 나라로군. 네가 그 한심한 나라의 왕자란 말이지? 너와 꼭 어울리는 나라군." 이죽거리는 자일스의 얼굴엔 비웃음이 가득했다.세렌국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할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업신여김이 가득한 말에 엘의 성질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도 기억 나는군. 조공을 좀 감해 달라고 왔었지. 가뭄이 들어 몇 년째 흉작이라는 질질 짜는 소리를 하러 말이야. 그 때 네 아버지가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줄까?" 자일스는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벌벌 떨며 떠듬떠듬 몇 마디 지껄이더니 내 아버님이신 리아잔 제국의 황제께서 버럭 고함을 치시자 완전히 겁에 질려 산송장 꼴이 되더군. 그러더니 잘못했다고 울먹이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지. 자랑스런 네 아버지 덕분에 한동안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말을 끝낸 자일스가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이 자일스의 말을 듣고 있다, 천천히 그에게 고개를 가져갔다. 그녀가 겁에 질려 사죄의 말을 할 거라 생각한 자일스가 만족스런 얼굴로 귀을 기울였다. "내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너와 나 사이에선 어떤 일이 있었지? 그 일에 대해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이나 재미있어 할 것 같은 데.... 어때? 궁금하지 않아? 한번 해 볼까?" 거짓말처럼 자일스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자취를 감췄다. "두고 보자, 이 건방진 꼬마야!" 어찌나 살벌하게 이를 가는지 저러다 이가 모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뭘 쳐다보는 거야?"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자일스가 버럭 고함을 치자 사람들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자일스는 휘적휘적 걸어가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작은 소리로 몇 번 헛기침을 하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모두 저를 따라 오십시오. 성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제가 문을 열고 한발 나서자 자일스가 맨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루지아국의 알비노 왕자가 재빨리 그의 뒤를 바짝 따라 나섰다.엘은 일행의 맨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발 정도 앞서 가던 리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알렉스, 너 정말 대단하던데! 대체 어떤 말을 해서 저 잘난 황태자의 꼬리를 맥없이 내리게 한 거야?" 호기심이 가득한 푸른 눈을 바라보며 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웃지 말고 어서 말 좀 해 봐! 난 궁금한 게 있으면 속이 터져서 제 명대로 못사는 성격이라고." "그만하고 꺼지지 않으면 얼굴이 뭉개질 거라고 했어." 엘은 입을 딱 벌리고 우뚝 멈춰 선 리오를 지나치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 "아시리움 성전은 이렇게 중앙에 위치한 본관과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네 개의 별관이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서른 채 정도되지만 여러분들이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침실이 있는 곳이 바로 남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거의 대부분의 일정은 본관에서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이제 대충 말씀 드린 것 같군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질문을 한 사람은 리오의 쌍둥이 동생인 리반이었다. "별다른 건 아니고 일종의 꼭 필요한 교육을 받으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건 교육에 들어가며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루지아국의 다미아 공주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법황 성하께서 계신 곳은 어디입니까?" "성하께서 집무를 보시는 곳은 일정치 않습니다만 대부분은 본관에서 보십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서관엔 절대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서관은 법황 성하께서 휴식을 취하시는 곳이니까요. 명심하십시오. 법황 성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서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단호하게 강조하는 사제의 말에 엘은 서관이야말로 그녀가 찾는 물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곳에 어떤 방법으로 숨어드느냐가 문제였다. "저희도 법황 성하를 뵐 수 있나요?" 이름을 알 수 없는 공주의 목소리에 엘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전 법황 성하의 뜻을 따를 뿐이니까요. 성하를 꼭 뵈어야 하는 분은 정식으로 신청을 하십시오." "현재 이 곳에 계시는 겁니까?" 사제가 질문을 한 엘을 바라봤다. "지금은 계시지 않습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글쎄요... 정확하게는 모르나 가까운 시일 안에는 오시기 힘드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구나! 엘은 사제에게 말해 줘서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속으론 오늘 밤부터 당장 행동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서관은 다른 별관들처럼 본관과 이웃해 있지 않았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웃해 있다는 건 어폐가 있지만, 하여튼 다른 별관들에 비해 서관은 외톨이처럼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아시리움 성전은 그 안에 어마어마하게 넓은 들판과 숲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관은 숲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우뚝 서 있었다. 몰래 숨어들어야 할 서관이 숲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엘에게 있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숲에 몸을 숨기기 전에 휑한 들판을 가로 질러야 한다는 것만 감안하면 말이다. 엘은 그나마 서관과 가장 근접해 있는 북관 건물 그림자 속에 몸을 묻고 있었다. 난감함이 담긴 그녀의 눈앞엔 넓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불안할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드는 밤이었다. 밤은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고, 커다란 은광이 그 중앙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음산한 신음소리를 냈다. 엘은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나쁜 달 그림자에서 시선을 내렸다. 갈팡질팡할 시간이 없었다. 건물 전체를 샅샅이 뒤지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엘처럼 몰래 숨어들어야 하는 처지라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빨리 해치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엘은 건물 그림자에서 벗어나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엔 언제나 자신 있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다리가 무거웠다.엘이 제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긴장과 초조함으로 꽉 찬 마음을 따라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엘은 드물게 나있는 나무에 기대서서 거친 숨을 고르려 애썼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주위엔 무심한 달빛과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격한 숨소리가 조용한 밤하늘로 퍼져 오르는 것 같아 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으로 눈썹에 맺혀 달랑거리는 땀방울을 닦았다.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목적지를 향해 다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이번엔 서관 건물 앞에 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눈 앞에 다가든 서관은 불길함과 음산함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거대한 건물과 숲이 만들어 내는 기괴한 그림자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짙은 정적과 어둠에 쌓여 있는 건물이 마치 그녀를 향해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맥없이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건물 중앙으로 연결된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열려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문이 잠겨 있다는 걸 확인하자 묘하게도 실망감이 들었다. 이제 어찌한다? 그녀에게 문을 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이상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찾아 침입하는 것 말이다.건물의 옆 면을 따라 길게 가지를 뻗은 나무가 가장 적당해 보였다. 엘은 망설이지 않고 능숙한 동작으로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팔을 길게 뻗어 2층 창을 밀어 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엘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두 줄기로 나눠지는 가지 중 3층 창문 쪽으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를 두 팔로 잡고 몸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3층 창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엘은 작은 나뭇가지를 꺾어 창문 틀의 구석진 좁은 공간에 끼어 넣었다. 이렇게 해 두면 앞으로도 이 곳을 이용해 별다른 어려움없이 건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동작으로 창문을 넘어 들어간 그녀는 앞을 막고 있는 높은 벽을 발견하고 몸을 흠칫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을 깜박이며 벽을 노려보고 있자 오래지 않아 그것이 벽이 아니라 커다란 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의 벽에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곳은 도서관인 것 같았다. 아니, 도서관이라 하기엔 조금 규모가 작은 것 같으니 유달리 넓은 서재일지도 몰랐다. 이 곳을 둘러보는 것만도 오늘 밤을 온통 새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시작하기도 전에 엘의 입술에선 한숨부터 나왔다. 그녀는 창턱에서 일단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그러자 책장에 가려져 있던 책상이 보였다. 커다란 책상은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가장 그럴 듯해 보였다. 엘은 소리없이 걸어가 책상 서랍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 밝지 않은 시야와 손의 감촉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수색이었다. 때문에 엘은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서랍 안에 있는 건 죄다 서류와 서찰뿐이었다. 열 개에 가까운 서랍 모두 매한가지였다. 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서랍을 닫았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물에 어떠어떠한 것이 있는지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앞 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엘은 제발 일이 빨리 끝나기를, 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 때 보다도 길고 긴 밤이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왜 굳이 이런 행사를 가져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이 곳의 생활에서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갖가지 교육으로 채워졌는데, 신학이나 그것과 관련된 역사에 대한 공부가 대부분이었다. 성전 측에선 게으른 왕족들이 피곤해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때문에 사이사이 꽤 넉넉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밤마다 몰래 이곳 저곳을 배회해야 하는 일만 없었다면 엘은 무료함과 지루함을 참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장소가 성전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귀족 학교와 별다를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 학교 생활이 어떤지 알 지 못하는 엘이 이런 생각을 가진 데는, 그녀 옆에서 쉴새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떠드는 리오의 영향이 컸다. 지금도 그는 엘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나라인 체르몬 국에서 열렸던 검술대회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땐 건성으로 들어 넘기던 엘도 이번만큼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 요새 한창 검술 수련에 빠져 있는 그녀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화제였다. 이 곳 아시리움 성전에서는 왕족이 원하는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의식주는 물론이고 구하기 힘든 기호품이나 사치품도 입에 담기 무섭게 곧바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교육도 마찬가지여서 관심있거나 배우고 싶은 모든걸 개인교습 형식으로 받을 수 있었다. 엘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검술교육을 신청했고, 그 결과 실력있는 기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엘이 가지고 있는 검술에 대한 열의는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수련장엔 항상 먼저 나가 전날 배운 걸 연습했고, 교육이 끝난 후에도 오랜 시간 혼자 남아 땀을 흘렸다. 그뿐 아니라 엘은 잠시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때 검이 챙하고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데, 정말 소름이 쫙 돋을 만큼 멋지더라고! 알렉스, 너도 그 때 우리와 같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리오의 열정적인 외침에 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리오가 등받이 의자에 편하게 기대 앉아 멋진 검술시합을 즐기고 있을 때, 그녀는 아마 숲속을 돌아다니며 약초나 나물을 깨고 있거나, 마을 아이들이 던진 돌을 힘들게 피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깐만!" 리오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으며 걸음을 멈췄다. "알렉스, 잘 들어봐!" 저 멀리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 왔다. 엘과 눈이 마주친 리오가 히죽 웃었다. "누가 검술 대련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알렉스, 우리도 가보자!" 힘껏 내닫는 리오를 따라 엘도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소리는 그들의 숙소가 있는 남관 뒤쪽에 위치한 검술수련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시리움 성전엔 모두 네 개의 검술 수련장이 있는데, 이 곳에 있는 건 그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수련장이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자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몇몇 왕족들과 사제들이 수련장 입구를 막듯이 서 있었고, 반대쪽엔 십여명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 위쪽으로 하인들과 하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대단한 사람들이 겨루고 있나 본데?" 리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꿈치를 세워 앞을 살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두 주인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입구 쪽으로 몇 걸음 옮기던 그녀의 눈에, 자신의 패거리와 함께 서 있는 자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엘은 몸을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첫날 이후 자일스는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사소한 시비거리라도 찾으려 기를 쓰곤 했다. 그 때마다 엘은 자일스를 무시하려 했으나 워낙 그의 태도가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슬쩍 발길을 돌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앞서 가던 리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알렉스! 왜 그래? 다리에 쥐라도 난 거야?" 리오의 말에 자일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엘을 발견한 그의 눈동자에 기분 나쁜 번득임이 지나갔다.엘은 그를 못 본척하며 리오를 잡아 끌었다. 두 사람은 자일스 패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 건장한 체격의 기사 두 명이 매서운 눈초리로 서로를 견제하며 서 있었다. 엘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느끼며 그들을 바라봤다. 감탄이 가득한 구경꾼들의 얼굴을 보건 데, 틀림없이 멋진 대련을 구경할 수 있을 터였다.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두 기사 중 젊은 쪽이 검을 치켜 든 팔을 내리며 말했다. 반짝이던 엘의 눈빛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아닐세. 나야 말로 자네한테 한수 배웠네. 고맙네!" 두 사람은 만족스런 얼굴로 미소를 나누더니 몸을 돌려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엘과 리오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로 허탈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다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거지? 우리한테도 좀 가르쳐 주면 안되겠어?" 그루지아국의 알비노가 엘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는 자일스를 추종하는 패거리 중에서도 가장 열렬하게 따라다니는 인물로, 어떻게 해서든 자일스의 눈에 들기 위해 일부러 더 엘에게 시비를 걸곤 했다. 조용하고 사려 깊은 다미아 공주의 동생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글쎄, 말해 준다고 알까?" 엘이 슬쩍 비꼬자 그들 옆에 서 있던 세 명의 공주들이 작은 소리로 키득거렸다. 알비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일그러진 얼굴로 엘을 향해 한발 나서려는 그를 자일스가 간단한 팔 동작으로 막았다. "날씨도 좋은데 재미있는 놀이나 하는 게 어때?" 팔짱을 끼고 다리를 벌린 자세로 자일스가 엘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관심없습니다!" 크게 소리친 사람은 리오였다. "알렉스, 가자." 팔을 끄는 리오를 따라 엘도 순순히 몸을 돌렸다. 리오나 엘 모두 자일스의 도발에 말려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천하의 겁쟁이들!" "용기라고는 쥐뿔도 없군!" "꽁무니 빼고 달아나는 저 꼴을 좀 보라지!" 자일스 패거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엘의 팔을 잡고 있는 리오의 손아귀가 조여 들었다. "하나는 세렌국, 또 하나는 체르몬국이었지,아마. 왕족이 저렇게 비겁하다니! 혹시 가짜 왕자들 아냐?" 이죽거리는 알비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에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진 것처럼 리오가 몸을 휙 돌려 뚜벅뚜벅 걸어갔다. 왕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가짜 왕자'란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만든 것 같았다. 가짜 왕자인 엘은 잠시 하늘을 바라본 후, 고삐 매인 말처럼 리오의 뒤를 따라갔다. "그 재미있는 놀이라는 거 한번 해 보죠. 하지만 나 혼자하겠습니다." 리오가 웃옷을 벗어 던지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바람이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가자 마치 불꽃이 확 타오르다가 다시 잦아드는 것 같았다. "혼자는 좀 힘들 텐데? 하지만 일단 놀이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 말을 끊은 자일스가 손을 들어 검술 수련장 끝에 꽂혀 있는 불그스름한 깃발을 가리켰다. "저 깃발을 먼저 손에 넣는 쪽이 이기는 거다. 특별한 규칙은 없고. 단, 패자는 승자가 내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야. 근데... 정말 너 혼자 할 수 있겠냐? 5 대 1이 되는 데 말이야." 자일스는 자신의 패거리들을 모두 이용할 생각인지 리오에게 가소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어휴! 내 팔자야! "이걸로 5 대 2가 되는 거로군." 엘이 한 걸음 나서자 자일스의 입술이 만족스런 웃음으로 비틀어졌다.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리오가 입을 열었다. "이럴 필요없어, 알렉스." "무슨 소리! 재미있을 것 같은 놀이에 나만 빠질 수야 없지." 엘의 호기 어린 말에도 리오의 얼굴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너, 정말 괜찮겠어?" 엘은 피식 웃으며 그의 팔을 툭 쳤다. "당연하지.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몸 좀 풀겠는데!" 자신 만만하게 말했지만 그녀 역시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같은 조건 하에 붙게 되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다섯 명은 아무래도 벅찬 숫자였다. 더군다나 다섯 명 중 세 명은 엘의 두 배만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독을 품고 있는 자일스였고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뛰어든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하리라. 어느 새 주위엔 검술대련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왕족끼리의 대결이라면 그게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거라 해도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엘은 자그마하게 보이는 깃발을 똑바로 응시했다. 빠른 몸놀림만큼은 자신있었다. 자일스 패거리에게 잡히기 전에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면 의외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엘은 간단한 동작으로 몸을 풀며 곁눈으로 웃옷을 벗고 있는 자일스를 살폈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 할 자일스가 무슨 비겁한 수를 쓸지 안심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어던진 옷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자일스가 앞으로 뛰어나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출발!" 엘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몸을 움찔한 리오와 다른 왕자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자일스를 따라잡은 엘이 그를 막 앞서려는 순간 그가 슬쩍 발을 걸었다. 엘은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녀가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자 자일스가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게 부딪친 두 사람이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엘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져 왕자 두 명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리오가 보였다. 엘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라 어느새 뛰어온 알비노와 다른 왕자 한 명이 그녀의 몸을 덮쳤다. 이미 자일스는 몸을 일으켜 뛰어가고 있었다. 엘은 팔꿈치로 알비노의 가슴을 힘껏 찌른 다음 곧바로 주먹으로 턱을 쳐올렸다.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알비노가 뒤로 쓰러진 순간 그녀의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엘은 이를 갈며, 자신의 배를 걷어찬 왕자의 다리를 거칠게 건 다음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그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다리의 탄력을 이용해 펄쩍 뛰어 몸을 일으켰다. 저 만치 달려가는 자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엘은 순간적으로 모든 힘을 다리 근육에 집중시키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 많이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일스가 몸을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엘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승리감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절대 자일스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겠다는 투지가 엘의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올랐다. 자일스는 이미 깃발이 꽂혀 있는 깃대를 오르고 있었다. 엘은 자일스의 손이 막 깃발에 닿으려는 순간 펄쩍 몸을 날려 그의 어깨를 받침으로 삼아 깃발을 확 낚아챘다.그녀가 바닥에 막 착지했을 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귀가 뚫리며 사람들의 감탄사와 환호성 소리가 쏟아졌다. "시끄러워!" 자일스가 험악하게 소리치며 주위를 노려보자 사람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 우리가 이겼어! 정말 잘했어! 네가 해낸 거야!" 리오가 펄쩍펄쩍 뛰며 엘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활짝 웃고 있는 리오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이 졌고, 오른쪽 눈두덩과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야! 우리가 해낸 거야! 네가 저 두 사람을 막아 주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기지 못했을 거야!" 리오의 얼굴에 더욱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던 자일스가 씩씩대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리오가 자일스에게 들으라는 듯 목청을 높였다.엘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한번 봐 주자고, 리오. 위대한 황태자께서 꽤나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 "그래, 그러지 뭐. 이런걸 두고 승자의 아량이라고 하는 거겠지?" 두 사람은 쿡쿡거리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사이좋게 발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턱이 빠져라 크게 하품이 나왔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맑게 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다 엘은 다시 한번 소리내어 하품을 했다. "대체 어젯밤에 뭐했어?" "그건 왜 물어?" 엘은 리오를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던졌다. "정말 수상하네! 뭘 했기에 그렇게 가시를 세우는 거야? 혹시 유부녀와 달콤한 밀회라도 즐긴 거 아냐?" "실없는 녀석!" 킬킬거리는 리오를 향해 엘은 피식 웃어 보였다. 리오 말대로 너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방금 전에도 괜히 별거 아닌 농담에 찔끔해서 과민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이러다가는 엘 자신이 제풀에 먼저 나가 떨어지든지, 아니면 수상히 여긴 사람에게 덜미를 잡힐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이 빨리 끝나기는 애초에 그른 것이 확실하니까. 엘은 오늘 늦은 새벽까지 서관을 온통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한 바퀴 둘러보면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을 대충 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 보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엘이 유달리 의심이 많은 성격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다 수상해 보였다. 서재며 집무실, 수십 개의 침실과 응접실들은 그렇다 치고, 심지어는 계단 밑의 어두컴컴한 구석과 볼록 튀어 나온 장식이 달린 천장까지도 물건을 숨기기에 그럴싸한 장소로 비춰지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이 곳에도 리자드의 먼지 투성이 저택처럼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엘은 암담함에 소리내어 울음까지 터뜨리고 싶어졌다. 비록 금세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온실도 수상쩍게 보이네. 갖가지 이국적인 나무와 꽃들로 가득 찬 온실을 둘러보며 엘은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그녀는 지금 빨강머리 쌍둥이 왕자들과 함께 온실 속에 있는 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아니, 의자에 앉아 있는 건 그녀와 리오뿐이었고, 리반은 여기 저기 다니며 갖가지 식물들을 살피고 있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나무와 꽃들의 향기. 휴식을 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삼일 연속으로 새벽녘에야 잠시 눈을 붙인 엘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꾸벅꾸벅 졸고 있던 엘이 급기야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나른하게 손짓하는 잠에 빠져 들었다. "이 녀석 이거, 완전히 골아 떨어졌잖아." 리오는 혀를 차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엘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지워졌다. 햇빛을 받고 있는 매끄럽고 섬세한 피부가 너무나 부드러워 보였다. 리오는 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속눈썹을 홀린 듯 바라보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윤기 흐르는 검푸른 비단처럼 보였다. 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엘의 볼에 걸쳐져 있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볼에 닿을락 말락 할 때였다. "리오! 이것 좀 봐! 굉장한 걸 발견했어!" 커다란 식물도감을 펼쳐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식물들을 살피던 리반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리오는 몸을 움찔하며 재빨리 손을 거둬들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었다. "리오, 뭐해? 이것 좀 보라니까!" 리반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리오는 몇 대 때려 주고 싶은,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끼며 리반의 반질반질한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리오!" "조용히 해! 알렉스 자는 거 안 보여?" 리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리반이 아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난 여기서 나갈 테니, 넌 시간에 맞춰 알렉스 좀 깨어 줘! 알았지?" 대답 소리가 들리지 않자 리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리반, 내 말 들었어?" "그래, 알았어." 엉거주춤 서서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리반의 모습이 영 미덥지 않았다. 더군다나 리반이 어떤 일에 빠지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오였다. 하지만 리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온실을 나왔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건 도무지 지칠 줄 모르고 쿵쾅대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무엇인가가 곤한 잠을 방해했다. 한창 할머니와 살던 때의 꿈을 꾸던 엘은 중얼중얼 투덜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곧장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눈살을 찌푸리고 텅 빈 온실 안을 둘러보던 엘이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런!" 직감적으로 꼭 모이라고 한 시간이 이미 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은 의자 위에 놓여 있는 두툼한 신학책을 집어 들고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리오! 배신자 같으니!" 리오에게 한방 먹일 생각을 하며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복도의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눈 앞에 뿌연 형체가 보인다 싶어 아차 하는 순간 엘은 누군가와 세차게 부딪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엘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떨결에 딱딱한 바닥을 짚은 팔꿈치에 통증이 느껴졌다. "다치셨습니까?" 머리 위에서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엘과 달리 그녀와 부딪힌 사람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다쳤죠!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복도를 걸으면 어떡합니까?" 그녀 혼자만 흉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고, 시간에 더 늦게 됐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엘은 상대편을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뻔뻔함에 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몸을 완전히 일으키자 역광 때문에 형체만 보이던 사람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엘은 옷자락을 탁탁 털던 손길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야말로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빛 때문인 줄 알았던 머리카락 색은 찬란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잿빛이 살짝 감도는 실버블론드였는데, 남자의 길고 호리호리한 몸을 따라 흘러내려 허리 부근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피부는 살갗 속까지 비춰 보일 정도로 투명했고, 곧게 뻗은 콧날과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입술 등 모든 것이 완벽한 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엘은 신비롭게 빛나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천신인가 봐." 은회색 눈동자에 슬쩍 웃음기가 나타났다. "아닙니다." 자신이 소리내어 말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그랬군요! 물론 그렇겠죠. 제가 바보같은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이라니! 너무 아름다워 넋이 나갔나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어도 복도를 걸을 땐 주위를 살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당황한 엘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떠들어댔다. "제 말이 틀립니까?" "물론 맞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엔 은근히 장난기가 배어있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를 향해 매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엘은 휘적휘적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허리를 굽혀 엘이 떨어뜨린 책을 집어 들었다. 책 표지를 들추자 어린아이 같이 서툰 글씨체로 쓰여져 있는 '알렉스' 라는 이름이 보였다. 알렉스라.... 그가 막 책장을 덮었을 때 복도를 헐레벌떡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며 백발이 성성한 사제가 나타났다. 그는 아시리움 종단의 열명 밖에 안 되는 대사제 중의 한 명이었다. 숨을 헐떡이던 그가 남자 앞에서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오시는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중을 나갔을 텐데! 죄송합니다!"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마중은 필요없습니다." 대사제가 더욱 깊이 허리를 굽혔다. "법황 성하!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경축 드립니다!" ------------------------------------------------------------------- "늦으셨군요."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깜박 잠이 들어서 그만..." 엘은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 미간을 찌푸리는 차르 사제를 보고 얼른 팔을 내렸다. 간혹 옛날 버릇이 나오는 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간 하루도 못 가 기진맥진하고 말 것이다. "시간 엄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차르 사제의 얼굴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삼십대 초반의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하는 고위사제였는데, 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사제들 중 한 명이었다. 금욕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는 겉모습처럼 차르 사제는 여간 깐깐한 성격이 아니었다. 엘이 헐레벌떡 뛰어온 것도 그의 이런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이 진심을 담아 말하자 사제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자일스의 목소리가 상황을 한층 불쾌한 쪽으로 몰아넣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도 보일 겸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순간 긴장 어린 침묵이 주위를 덮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차르 사제를 향해 한층 의기양양해진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저지른 죄에 마땅한 벌을 내려야 합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매 시간 늦거나 아니면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거 치고는 말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덩달아 신이 나 떠드는 사람은 그루지아 국의 알비노였다. "이미 뉘우치고 있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건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고맙게도 리오가 그녀의 편을 들고 나섰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데 상당한 책임이 있는 그였지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엘은 리오에게 그러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녀 때문에 자일스에게 밉보여 리오나 체르몬국에게 불이익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늦은 거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엘은 일부러 당당하게 소리쳤다. 비굴한 모습을 보이느니 스스로 자결을 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조금은 비장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스스로 벌을 받겠다니! 정말 훌륭한 태도로군!" 자일스의 빈정거림이 끝나자 그의 패거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르 사제가 미안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엘을 바라봤다. 그로서도 자일스의 뜻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최고의 권력층인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들도 리아잔 제국 황태자의 눈치를 본다는 건 그녀가 이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씁쓸함을 느꼈지만 천민으로 자라나 신분과 권력의 힘을 뼛속 깊이 새긴 엘로서는 사제들을 탓할 수 없었다.제아무리 왕족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어도 세렌국이라는 약소국의 왕자는 이 곳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 "벌은 하크젤 신학서 1장부터 5장까지 낭송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신 후 제 집무실로 오십시오." "반대한다!" 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불만에 가득 찬 자일스가 소리쳤다. "고작 암송이라고? 지금 장난하는 건 줄 아나?" 다짜고짜 반말이 퍼부어지자 차르 사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얼굴엔 민망함과 수치심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고위사제라는 작자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내가 도와주지. 벌은 본관에 있는 복도 전부와 그것과 연결되는 계단을 모조리 닦는 것이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엘은 자일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움켜 쥔 주먹이 부르르 떨이고 있었다. "동의하오? 차르 사제!" 노골적인 협박이 담긴 어조였다. "동의합니다." 차르 사제가 엘을 외면하며 침울하게 대답했다. "태도가 불량한 사람은 그 즉시 자신의 나라로 돌려보내진다고 들었는데, 이번 경우에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는 거요?" "그,그건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되나, 안되나, 그것만 말하시오!" 자일스가 차르 사제의 말을 가차없이 잘랐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차르 사제에게서 예정된 대답이 나왔다.즐거움과 노골적인 악의가 뒤섞인 미소를 짓고 있는 자일스 보며, 엘은 마음 속으로 길고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자일스 따위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당하게 될 괴로움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심란한 마음과는 달리 자일스를 바라보는 엘의 얼굴엔 진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좀 더 창조적인 벌이 나올 줄 알았더니, 겨우 청소입니까? 정말 실망이 큽니다, 리아잔 제국의 위대한 황태자전하!" 의기양양하던 자일스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는 걸 보며 엘은 작지만 달콤한 승리감을 느꼈다. -------------------------------------------------------------------제8장. 수수께끼 사제-------------------------------------------------------------------코 끝에서 달랑거리던 땀방울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은 얼굴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뒤로 넘기며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열려 있는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엘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기저기 쑤시는 몸도 괴로웠지만, 이제 곧 자일스와 그 추종자들이 나타나 한바탕 난리를 치르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신음 소리는 한층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자일스가 그녀를 괴롭힐 좋은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고, 거기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은 이제 현명이고 뭐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조금도 굽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에 호기를 부리며 덜컥 벌을 받아들인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엘은 복도 바닥에 머리라도 박고 싶어졌다. 벌을 수행하게 되면서 물건을 찾는 일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나 몸이 고단한지 엉금엉금 기어 침대 위로 올라가면 그 즉시 혼수상태에 가까운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눈을 떠보면 이미 주위가 환하게 밝아져 있는 날이 반복되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엘이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물 양동이를 걷어차려 할 때였다.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제의 장면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쪼그리고 앉아 걸레로 바닥을 문지르던 그루지아국의 다미아 공주가 얼굴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 엉뚱하게도 다미아 공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예에." 엘은 얼떨결에 대답하고 있었다. "절 다미아라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저도 편하게 알렉스라 부를 수 있으니까요. 처음 왔을 때 인사를 드릴까 했는데 창 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신 것 같아 조용히 바닥을 닦고 있었답니다. 여기 좀 보세요. 정말 깨끗하게 잘 닦여지지 않았나요?" 엘을 바라보는 다미아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육체 노동으로 인해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왜 이런 일은 하는 겁니까?" 그녀가 칭찬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엘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물었다. 다미아의 얼굴에서 점점 흥분이 빠져 나갔다. "제 동생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제가 대신 치르는 겁니다. 알비노가 자일스 전하에게 붙어 알렉스를 괴롭히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보내더군요.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힘드시겠지만 제 동생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세요, 알렉스. 부탁 드립니다." 엘은 조금 난감한 눈으로 다미아 공주를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전 그렇게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라서... 알비노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건 힘들겠지만 솔직히 말해 그가 부럽긴 하군요. 이렇게 좋은 누이를 두었으니 말입니다." 다미아의 불그스름하던 얼굴에 한층 진한 홍조가 드리워졌다. "그만하시고 일어나십시오! 걸레도 이리 주시고요!" 엘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는 다미아의 손에서 반강제적으로 걸레를 빼앗았다.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마십시오! 마음은 고맙지만 이런 일은 절 더욱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다미아가 눈을 크게 뜨고 엘을 바라봤다. 그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직선적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루지아 국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타국의 귀족들과 왕족들 역시 그녀 앞에선 부드러운 어조로 예의 바른 말만을 하곤 했다.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어서요!" 엘은 귀찮다는 어조로 말하고 바로 등을 돌렸다. 익숙하지 않은 예절을 떠올려 세세한 것까지 신경쓰기에는 그녀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였다. 대체 어느 누가 걸레를 들고 길고 긴 복도를 닦는 걸 좋아하겠는가? 사실 리오조차도 첫날 도와주는 척하다, 자신은 허리가 약하다는 둥, 리반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둥, 온갖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꽁무니를 빼지 않았는가! "알겠습니다, 알렉스." 아쉬운 듯 머뭇거리다 묵묵이 복도를 걸어가는 다미아를 보며 엘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거 뭐야? 하라는 청소는 안하고 여자 뒤꽁무니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잖아!"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천장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어제 했던 것처럼 자일스 패거리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피하려 했는데, 오늘은 다미아 일이 생기는 바람에 꼼짝없이 잡히고 만 것이다.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는 엘의 얼굴은 자연히 어두울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그녀의 앞에 늘어 서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일스의 눈엔 기분 나쁜 광채까지 번득였다. 자일스는 어제 하루 종일 엘이 워낙 눈치 빠르게 요리조리 그들을 피했기 때문에 꽤나 약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곧 그 약을 상당 부분 가라앉힐 수 있게 될 터였다. "건방진 꼬마!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바닥이나 닦는 게 어때?" 말을 끝낸 자일스가 히죽거렸다.엘이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물론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일스의 야비한 만족감을 채워 줄 마음이 없었다. 엘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양동이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자일스 전하의 말씀 못 들었어?" 알비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나인 다미아와 달라도 저렇게 다를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엘은 고개를 돌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너희들 아직도 거기 있었냐? 왜, 날 도와 바닥이라도 닦으려고? 정말 친절하기도 하군." 비웃음이 가득한 말에 엘의 앞에 있는 얼굴들이 일제히 구겨졌다. "너, 감히 뉘 앞에서 반말 짓거리야?" 이번 역시 알비노의 외침이었다. "나야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고, 그러는 너야말로 한심한 짓 그만두고, 훌륭하신 누님의 반의 반만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게 어때?" 아직 앳된 기색이 선명한 알비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먹을 불끈 쥔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엘에게 덤벼들려는 순간 자일스가 팔을 들어 알비노를 막았다. 몸을 멈칫한 알비노가 엘을 죽일 듯 노려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넌 시키는 대로 더러운 바닥이나 닦으면 되는 거야! 알아 들어?" 버럭 소리친 자일스가 몇 발 뒤에 놓여 있던 양동이를 걷어찼다. 엘을 도와준답시고 다미아가 가져온 거였다. 엎질러진 물이 복도 바닥에 쫙 퍼지자 자일스 패거리들이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 물을 피했다. 엘은 미동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굽 낮은 가죽 신발 사이로 조금씩 물이 스며들었다. "물 청소라!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잠깐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엘이 자일스를 위시한 패거리들을 향해 양동이 물을 쏟을 행동을 취하자 그들 모두 일제히 몸을 움찔하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너! 설마, 그걸 우리에게!" "자일스 황태자 전하께 감히!" "못할 게 틀림없어요, 전하! 저게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면요!"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그들을 향해 엘은 위협적인 동작으로 양동이를 움직였다. "으아아!" "피하십시오, 전하!"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는 그들을 보며 엘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고 보자!" "후회하게 해줄 테다!" 저 만치에서 멈춰 선 남자들이 주먹을 흔들어 댔다. "비겁하게 우르르 몰려다니기나 하면서 큰 소리는!" 엘은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웃어 젖혔다. "무척 즐거우신가 보군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엘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얼마 전에 복도에서 부딪쳤던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이미 한번 안면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중한 인사를 건네며 남자가 엘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아, 예에. 안녕하지 못합니다." 엘은 얼떨결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엘과 남자의 얼굴에 동시에 놀랍다는 표정이 어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의 놀라움엔 어렴풋이 즐거움이 섞여 있다는 정도였다. "흐음!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먼저 이 주위를 보십시오." 엘의 눈짓에 따라 남자의 은회색 눈동자가 물이 흥건한 복도 바닥을 향했다. "다 보셨으면 이제 제가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그럼 쉽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반쯤은 자포자기하고 반쯤은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이제 제가 왜 안녕하지 못한지 아셨겠죠?"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기분이 유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제가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새 엘의 말투는 하소연조로 변해 있었다. 남자의 단정한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럼 제가 조금 전에 들었던 유달리 큰 웃음소리는 환청이었나 보군요." 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는 척하며 슬쩍 웃음을 감췄다. 못마땅한 눈으로, 가늘게 떨리는 남자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엘에게서 풋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내어 웃음을 나눴다. 서서히 웃음이 잦아들자 엘은 갑자기 머쓱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다가 갑자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걸레를 집어 드는 엘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전 할 일이 많습니다. 정 심심하시면 다른 데 가셔서 재미있을 만한걸 찾아 보십시오." 바닥을 몇 번 문지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자 엘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어휴! 귀찮고 답답해서 정말 미치겠네! 쓸모없이 거치적거리기만 하니! 지금 당장 잘라 버려야지!" 엘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을 때 갑자기 목덜미에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놀란 엘이 고개를 확 돌리려 하자 머리가 당겨 왔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남자가 자신의 허리에 느슨하게 두르고 있던 금빛 띠를 풀러 엘의 머리를 묶었다. "빌려 드릴 테니 편하게 사용하십시오. 더 이상 필요없게 되셨을 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단,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엘은 남자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질 때까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과 낮은 목소리에서 그녀의 몸을 옭아매는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엘이 이상한 느낌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였을 때 다른 데로 가리라 생각했던 남자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어쩌다 이런 일을 하시게 된 겁니까?" 질문을 던지는 남자의 은회색 눈동자가 미묘한 빛을 발했다. "시간을 안 지킨 거에 대한 벌을 받는 겁니다." 엘은 담담히 말하며 열심히 팔을 움직였다. "벌....이라 하셨습니까?" 엘은 남자를 힐끗 쳐다본 뒤 침울한 얼굴을 끄덕이며 양동이 물에 걸레를 집어넣고 힘차게 휘저었다. 물이 사정없이 튀자 남자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물 튀는 게 싫으면 다른 데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필요 이상으로 걸레를 세차게 빨았다. 그러면서 슬쩍 혼잣말을 갖다 붙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걸레를 짜다 말고 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엘의 보라색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이 벌에는 제 잘못은 물론 사제님의 잘못도 있었군요! 여유 시간이 풍부하신 것 같은 데, 저기 저쪽 좀 닦아 주십시오!" 수고를 덜게 됐다는 생각에 엘은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을 받는 남자의 말은 엉뚱했다. "절 사제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참! 정말 이상한 분이시군요! 사제복을 입고 계시면서 그런 질문이 나오나요?" 남자가 새삼스럽다는 듯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엘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것을! 터무니없는 말로 화제를 돌리기는! 내가 강제로 걸레라도 쥐어 줄지 아나? 다 큰 어른이 유치하기도 하지! 아름다운 외모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하며 엘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복장에서 시선을 떼는 남자의 은회색 눈동자에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사실 엘이 몰라서 그렇지, 그가 입고 있는 건 사제복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열심히 엘을 교육했던 아몬은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양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사제복은 푸른 색이었고, 견습 사제복은 회색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같은 색깔의 긴 띠를 허리에 두르게 되어 있었다. 또한 고위사제는 불꽃 문양이, 대사제는 태양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하지만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온통 검은 색이었고 금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은 엘의 머리를 묶고 있지만 말이다. "사제님, 저기 좀 닦아 달라니까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엘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남자가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엔 미안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도와 드리고 싶지만 전 바닥을 닦는 데 소질이 없어서..." "그럼 전 바닥 닦는 일에 소질이 있단 말입니까?" 기가 막힌 엘이 따지듯 소리쳤을 때 이미 남자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냥 하기 싫다고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투덜대는 엘을 뒤돌아보는 남자의 입술 끝이 슬쩍 들어 올려졌다. "그럼 열심히 하십시오. 지금 닦고 계신 곳보다는 그 반대쪽이 더 더러운 것 같습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엘의 시선을 은근히 즐기며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 "그들은 우리의 손님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건조한 어조는 나지막했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풍기고 있었다.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필리프 대사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축축한 손바닥을 슬쩍 옷자락에 닦았다. "당연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법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리프 대사제는 숨을 죽였다. 햇빛을 받은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이 눈을 의심할 정도로 화려한 빛을 발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는 법황의 모습엔 천상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신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몽롱함에 빠져 법황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필리프 대사제는 그가 몸을 돌리려는 찰라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시선을 내렸다. "누구의 책임이라 생각하십니까?" 법황의 은회색 눈동자가 얼음조각처럼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법황 성하!" "바로 잡으십시오." 모든 얘기가 끝났다는 듯 법황이 다시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필리프 대사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하,하지만 이번 일은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께서 관여하신 일입니다. 그 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말꼬리를 흐리며 필리프 대사제가 슬쩍 법황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말해 그는 법황이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각 국의 왕족들이 모이는 3년마다 이런 식의 크고 작은 잡음들은 항상 있는,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한 일종의 악습이었다. 그런 자리에선 힘의 우열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지난 번엔 힘없는 약소국의 왕자가 몰매를 맞고 벌거벗은 채 나무에 묶여 있던 사건까지 발생한 적도 있었다.그 때도 법황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는 성전 안에 왕족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별 관심없이 지나갈 때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법황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필리프 대사제는 극도의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말씀 계속하십시오." 법황의 말에 필리프 대사제는 용기를 내었다. "제 말은 그러니까,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 아시리움 종단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법황 성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법황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필리프 대사제의 얼굴에 여유있는 미소가 그려졌다. "제게 리아잔 황태자 따위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씀입니까?" 담담한 어조였지만 필리프 대사제를 향하는 법황의 눈은 그에게 싸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대사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는 법황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조아렸다. "버,법황 성하! 제가 그만 주제 넘은 말을! 진심으로 사죄 드립니다! 노망든 노인네의 실수라 생각하시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납작 엎드린 대사제의 몸이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법황의 말 한마디에 그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루 아침에 국왕과 거의 대등하다 일컬어지는 대사제 직을 박탈당하고 끔찍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요 근래 몇 년 동안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지만 그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위사제들과 대사제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사제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불려지는 법황의 별명은 다름 아닌 '피의 황제'였다. 법황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법황의 비위를 거슬린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그 누구도 말이다. 그의 권력과 겨를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리아잔 제국의 황 제가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필리프 대사제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마음 속으로 미친 듯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법황의 태도가 극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입술에서 공포에 질린 헐떡임이 나오려는 순간 법황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나가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고 성하께서 만족하실 수 있게 처리하겠습니다." 힘들게 몸을 일으킨 필리프 대사제가 법황을 향해 허리를 굽힌 후 비틀거리며 문을 나섰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복도를 휘적휘적 걷던 그는 갑자기 기력이 다한 듯 벽에 몸을 의지했다. 힘없이 기대고 있는 창백한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말도 안돼! 그럴 순 없어!"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자일스의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사제님의 특별 지시입니다." 차르 사제가 딱딱한 얼굴을 잠시 자일스에게 돌렸다가 다시 엘을 바라봤다.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 제가 더 이상 벌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얼떨떨한 상태에 있던 엘은 그제야 제대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엘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며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보라색 눈동자에 신비한 푸른 빛이 반짝이자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중 몇몇 왕자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몇몇 공주들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세렌국의 알렉스 왕자는 평소에도 유달리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드물게 보이는 미소가 나타날 때는 그야말로 한순간 정신이 멍해질 만큼 강렬한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엘은 힐끗 자일스를 바라봤다. 그는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성난 황소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엘은 입술을 떨며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손뼉을 치고 펄쩍펄쩍 뛰며 박장대소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성질이 나 있는 자일스를 자극해, 굳이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리라. "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내린 거야? 감히 누가?"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던 자일스가 급기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차르 사제는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필리프 대사제님이십니다. 황태자 전하께는 대사제님이 직접 이해를 청하시겠다고 하셨습니 다." "이해고 뭐고 난 절대 수긍할 수 없어! 절대!" 자일스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요란하게 닫히는 문소리의 진동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알비노를 위시한 추종자들이 슬금슬금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엘은 고소함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슬쩍 비웃음을 그렸다.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몰라 조금은 어리둥절한 상태였지만 더 이상 끔찍한 걸레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이 그녀를 불쌍히 여긴 게 틀림없었다. "물론 완전히 벌이 없어진 건 아닙니다. 그저 어느 정도 감해진 것 뿐입니다." 엘의 흐뭇한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형태의 벌을 받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차르 사제의 얼굴은 엄숙하기만 했다. 다른 형태의 벌이라고? 그게 뭘까? 그래, 아마 처음 말했던 대로 신학서를 큰소리로 낭송하는 것일 거야! 불안이 피어올랐던 엘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찾아왔다. "달게 받겠습니다." 엘은 자신있게 말하고 나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차르 사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웃음은 태풍을 맞은 모래성처럼 눈 깜짝할 새 무너져 버렸다. "왕자께선 트레비아 연주의 귀재라고 하시더군요.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 그 음악소리에 심취되어 홀린 듯 주위로 모여든다는 풍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성 아우렐리아 축일에 열리는 연회에서 트레비아를 연주해 주십시오. 벌이라 이름 붙이긴 했지만 왕자께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그 자리에 법황 성하께서도 참석하시니까요." 머리가 핑 돌며 그녀의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안개를 뚫고 도끼로 트레비아를 힘껏 내려치는 자신의 모습이 둥실 떠올랐다.다리에서 맥이 쭉 빠져나간 엘이 힘없이 비틀거렸을 때 어깨를 세차게 휘감는 손길이 느껴졌다. "알렉스! 정말 잘됐다!" 리오가 힘차게 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렇게 통쾌한 일이 생길 줄이야! 아까는 웃음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물고 있었다니까! 더군다나 법황 성하 앞에서 트레비아까지 연주하게 되었다니! 축하한다, 알렉스!" 환하게 웃고 있는 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주먹을 힘겹게 막았다. 핏기가 가신 엘의 안색은 너무 기뻐서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하며 리오는 더욱 세게 엘의 어깨를 내려쳤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부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주먹 쥔 손을 억지로 펴 움켜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 "이럴 순 없어! 정말! 정말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엘의 괴로움에 찬 외침과 신음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정적이 침대 위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엘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침대를 뒹굴어도 도무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암담하고 참담한 마음만 더 해질 뿐이었다. 며칠 간 미뤄 두었던 물건찾기를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이런 마음으로는 중앙 홀의 거대한 조각상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그럴 줄 알았다는 비웃음이 담긴 청회색 눈으로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리자드의 모습이 돌연 떠올랐다. "리자드! 이 천하의 나쁜 놈!" 엘은 이를 갈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해줬으면 때려 부수지 않고 열심히 배웠을 거 아냐!" 입을 다물기도 전에 열심히 배워 봤자 지금 상황과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엘은 처량한 얼굴로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다. 첫 번째로는 차르 사제를 찾아가 매달려 보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차라리 걸레질을 하겠다는 엘의 간절한 말을 의례적인 겸손으로 받아들였던 그가 과연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지 의문이 생겼다. 더군다나 이 방법은 그녀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엘은 한숨을 내쉬며 둘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 다음으로는 되도록 빨리 물건을 찾아 연회가 열리기 전에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다. 가장 이상적이지만 가장 힘든 방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방법이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하는데, 지금껏 살면서 엘은 한번도 운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세상의 운이란 운이 그녀에게 몰려드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에라! 모르겠다!" 셋째 손가락을 꼽지 않고 엘은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내려왔다. 그리고 옷 안쪽에 조심스레 달아 놓았던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아몬이 급한 일이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라던 구슬 이 담겨 있는 주머니였다. 이번 일보다 더 급하고 더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엘은 손가락을 들이밀어 매끈한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투명한 구슬이 비밀스런 빛으로 반짝였다. "에나헤스..." 주문을 외우던 엘의 목소리가 힘없이 끊겼다.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아몬이 말해 준 주문은 엘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 아몬을 불러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가 내 연주 실력을 높여 줄 수 있다면 예전에 그렇게 했을 거야.아몬이 사용하라고 했던, 급하거나 위험한 일은 이런 게 아닐 것이다. 엘은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 원래 있었던 곳에 다시 매달았다. 그리고 서둘러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어. 그 때까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돼. 결국 엘이 선택한 건 두 번째 방법이었다. 쓸데없는 고민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이미 어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린 지 오래였다.엘은 침대 밑에 숨겨 놓은 밧줄을 꺼내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려던 그녀는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 금빛 띠로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다른 때처럼 창을 통해 3층 서재로 침입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엘은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린 뒤 몸을 웅크리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늘 그랬듯 건물이 비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은 2층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3층과 4층은 여섯 번에 걸쳐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엘이 찾는 물건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엘은 서재를 나와 어둠에 묻혀 있는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2층엔 집무실과 커다란 응접실, 그리고 여러 개의 평범한 방들이 있었다. 집무실이 가장 유력한 장소일거라는 생각에 엘은 다른 방들을 지나쳐 중간쯤에 위치한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문고리가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졌다. 엘은 반쯤 열린 문 틈으로 한줄기 바람처럼 재빨리 스며들었다. 보통의 집무실과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책상과 견고해 보이는 팔걸이 의자, 언뜻 봐서는 책장처럼 보이는 몇 개의 보관함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보관함으로 곧장 다가갔다.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며 보관함을 열었던 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키를 넘는 보관함에 가득 들어있는 건 오직 서류뿐이었다. 엘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거운 서류뭉치를 당겨 틈을 만든 후 안쪽으로 손을 디밀어 보았 다. 손에 닿는 감촉으로 보아 온통 서류만 쌓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보니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엘은 서류를 마구 뒤집어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서류 뭉치들을 열었던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바로잡은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옆의 보관함으로 발을 옮겼다. 보관함을 열려던 엘의 얼굴에 흥분이 밀려들었다. 보관함 문이 잠겨 있었던 것이다. 비밀스럽거나 귀중한 물건들을 넣어 둔 보관함이 틀림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옆의 보관함처럼 쓸모없는 서류만 있다면 왜 굳이 힘들게 문을 잠가 두었겠는가? 숨겨 놓은 물건 중엔 내가 찾고 있는 것도 끼어 있을 거야! 잘하면 오늘 안으로 모든 일을 끝내고, 난 어마어마한 부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야! 가슴 벅찬 상상을 하며 눈을 반짝이던 엘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찌푸려졌다. 아무리 해도 보관함 문이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낑낑대던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호세 사건이 있은 다음날 그녀의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던 단도였다. 칼집은 물론 손잡이며 칼날까지 은빛으로 반짝였고 손잡이에 강렬한 색채의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아름다운 단도였다. 엘이 단도를 움켜쥔 팔을 들어 문의 연결 부분을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신경을 건드렸다. 몸을 흠칫한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쿵쿵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사람의 발소리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엘은 심장이 멈추는 걸 느끼며 미친 듯이 주위를 살폈다. 당황한 눈에 숨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제발 이 곳에 오는 게 아니길! 제발!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긴장이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그녀의 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엘은 달려가 온 힘을 다해 창문을 밀었다. 하지만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소음만 나왔을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초조함을 못이긴 엘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을 때, 집무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문이 열리는 순간 엘은 보관함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걸 어디에 두었더라? 대체 어디다 둔 건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으니... 흐음! 여기도 없군." 엘은 답답한 한숨소리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불편해 보이는 긴 옷자락을 펄럭이며 이리저리 책상 서랍을 열어 보는 사람이 보였다. 흰색이 드문드문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 아래의 얼굴은 마르고 위엄있어 보였으며, 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찌푸린 이마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고, 눈가와 입술 주위엔 자잘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엘의 예상보다 젊은 사람이긴 하지만 법황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으리라 믿었던 법황이 어느새 돌아와 있으니 앞으로의 일에 적지 않은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실망이 크긴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들키지 않고 제때 몸을 숨긴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리라. 엘은 안쪽 벽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측면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실제로 몸을 숨겨 보니 보관함과 보관함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은 의외로 꽤 넓었다. 둘은 힘들겠지만 한 사람은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만한 면적이었다. 피해야 될 눈이 보관함 쪽으로 가까이 오지만 않으면 말이다. 격하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엘은 열심히 서랍을 뒤지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만약 그가 보관함을 열기 위해 서너 걸음만 옮긴다면 그녀를 정면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시 함에 집어넣었나?" 남자의 시선이 그녀가 숨어 있는 어둠을 지나 첫 번째 보관함으로 날아갔다. 머리가죽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에 엘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쿵쾅거리며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엘은 손바닥으로라도 심장 부위를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엘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공기를 흔들어 남자에게 진동을 전해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시시각각 더해지는 긴장이 그녀를 소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군!" 문이 열리더니 약간의 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닫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 곳에 그녀 혼자만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몰아 닥친 안도감에 엘은 팔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엘은 집무실에서 나와 재빨리 복도를 걸었다. 아래층 현관으로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이 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들어왔던 방법 그대로 3층 창문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그녀가 막 층계에 한 발을 올렸을 때였다. 계단 꼭대기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계단 아래 어둠 속에 숨었다. 몇 계단을 내려오던 그림자가 갑자기 몸을 주춤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극도로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엘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 때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차피 엘은 3층으로도 1층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날개가 있어 난간으로 훌쩍 뛰지 않는 이상 계단을 이용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계단에 한발을 올리기도 전에 위 쪽에 있는 사람이 그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계단을 내려온 사람이 엘을 보기 전에 우선 문이 열려 있는 아무 방에라도 몸을 숨기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것도 되도록 서둘러야 했다. 이미 검은 그림자가 계단의 중간 부근까지 늘어져 있었다. 복도로 몸을 돌리던 엘은 황급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간과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머리를 마구 쥐어 뜯었을 것이다. 집무실을 떠나 다른 방에 들렀던 법황이 다시 복도로 나온 것도 피가 마를 지경인데, 설상가상으로 그가 바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야! 어떡한담!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야! 깊게 생각하고 말 것없이 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법황에게 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였다. 엘은 때마침 계단 아래까지 내려온 사람의 뒤쪽으로 번개같이 움직이며 동시에 손으로 상대의 입술을 막았다. 그녀의 반대편 손엔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단도가 들려 있었고, 칼날 끝이 남자의 등에 위협적으로 닿아 있었다. "소리내면 심장에 구멍이 날 줄 알아! 자,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가! 빨리!" 엘은 일부러 낮고 거친 어조로 속삭였다.그가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상당히 키가 커서 엘은 그를 제압한 채로 계단을 오르는데 여간 애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계단을 반쯤 오르자 미리 짜맞추기라도 한 듯 법황의 반들반들하게 벗겨진 정수리가 나타났다.당황한 탓에 엘은 남자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밑으로 내려와 이제 그의 턱에 걸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더불어 들이밀고 있던 단도가 허공에 멈춰 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엘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남자는 이상하게도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법황이 시선을 자신의 눈 높이 이상 들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그 때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엘은 기겁을 하여 다시 두 손을 원래 위치로 바로잡았다. 엘이 칼끝으로 쿡쿡 찌르며,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남자가 묵묵이 몸을 움직였다. 남자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엘은 재채기가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입김을 후 불어 남자의 머리카락을 치웠다. 상쾌하면서도 어딘가 달콤함을 풍기는 기분 좋은 향기가 맡아졌다. 코를 벌름거리던 엘은 그 향기가 남자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얼마 전에도 같은 향기를 맡은 적이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에! 그럼 이 사람이 바로 그 사제님이잖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등을 따라 흘러내린 긴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담담한 목소리에 엘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느새 두 팔을 축 내리고 있었다. 엘은 허겁지겁 단도를 사제의 등에 가져다 댔다. 자신같이 멍청한 인질범은 없을 거라는 뼈아픈 깨달음을 얻으며 말이다. "저,저쪽으로 가! 조용히!" 말을 마친 엘은 좀 미진하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지르면 재미없을 줄..." 엘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긴 다리를 이용해 이미 몇 걸음 앞서고 있는 사제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이 엉뚱한 사제님이 걸릴게 뭐야! 마음 속으로 열심히 투덜거리며 잰걸음을 옮기던 엘은 갑자기 멈춰 선 사제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코피가 나려는 듯 코가 시큰거렸다. "갑자기 멈추면 어떡합니까?" 엘은 따지듯 물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목소리를 변형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나온 다름에야 엘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미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벽을 뚫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처럼 그들은 어느새 복도 끝에 바싹 닿아 있는 상태였다. "아니면 이 안으로 들어 가야하는 겁니까?" 엉뚱한 사제가 엉뚱한 질문을 던져 왔다. 희미하게 장난기가 배어있는 어조였지만 엘은 그것을 눈치 챌 만큼 침착한 상태가 아니였다. "당연히 아니지!" 엘은 답답하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은근히 비웃는 말을 뒤에 달았다. "그렇게 머리가 단단하면 한번 해 보시지! 사제직에서 쫓겨나면 머리를 이용해 석공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땐 떨림이 그의 몸 전체로 번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기, 괜찮아요?" 놀라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냈다는 걸 깨닫고 엘은 재빨리 목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들면 그 벽에 몸을 기대! 아니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이런, 이게 아니지! 아무튼 난 이만 가야겠어! 그러니 잘 있으라고!" 굳이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사제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자 엘은 비로소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느낌과 함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왜 자신이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건지,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제대로 이성을 차리지 못하는 상대는 리자드와 이 이상한 사제가 유일했다. 이미 넘치도록 바보짓을 했어! 지금은 빨리 이 곳에서 나가는 일만 생각해야 돼!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아직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 이 짜증나는 사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협박에 얌전히 벽만 쳐다보고 있을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몸을 떨지, 웃음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엘이 머리를 묶고 있던 띠를 풀려는 순간, 이 띠의 주인이 바로 눈 앞의 사제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제의 눈을 가릴 띠로 이걸 쓰느니 차라리 알렉스라는 이름을 벽에 커다랗게 쓰고 가는 것이 덜 바보짓일 것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없이 엘은 사제의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사제의 몸이 얼어붙은 듯 고정됐다.마지막으로 한번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는 생각에 엘은 산산조각 났던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허리에서 풀어낸 띠로 사제의 눈을 가리고 남은 부분을 이용해 두 손을 묶었다. "소리를 지르면 어찌하실 겁니까?" 엘이 힘껏 매듭을 조이는데 사제가 조금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입을 열었다. "죽인다고 협박을 해봤자 겁을 낼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오." 말을 끝마치자마자 엘은 재빨리 복도를 달려 서재로 뛰어든 다음 높은 창턱으로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으라는 고함소리가 정적을 깰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자꾸 발이 나무에서 미끄러졌다. 엘은 이를 악물고 반쯤 내려온 나무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땅에 거칠게 부딪친 발목이 시큰거려 왔다. 그녀는 통증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엘이 도중에 쓰러지듯 나무에 몸을 의지했을 때도, 들판을 거의 가로질렀을 때도 그녀를 뒤쫓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엘이 몸을 돌리는 순간 푸르스름한 빛이 남자의 눈과 손목을 감고 있던 끈을 둘러쌌다. 한순간 빛이 작렬하듯 번쩍이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끈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자의 은회색 눈이 복도를 달려가는 엘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금빛 띠가 뒤로 날리며 어둠을 뚫고 반짝였다. 그 때 계단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리자 남자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복도 반대 쪽에 엘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투명한 막을 세웠다. 허겁지겁 서재로 뛰어드는 엘을 바라보며 그의 입술 끝에 선명한 웃음이 그려졌다. -------------------------------------------------------------------격한 숨소리가 하얀 입김과 함께 고요한 밤하늘로 퍼졌다. 엘은 남관의 싸늘한 돌 벽에 이마를 대고 거친 숨을 골랐다. 다리가 후들거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옥죄인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은 미끈거리는 땀투성이였다. 오늘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녀 자신이 한 행동 중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엘은 그저 모든 걸 다 잊고 침대에 몸을 묻고만 싶었다. 엘은 지쳐 구부러졌던 어깨를 펴고 마지막 힘을 모아 밧줄을 타고 올랐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겨우 2층까지 올랐는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녀의 침실이 있는 4층이 하늘 끝에 닿아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엘은 일단 좁은 2층 창문 턱에 멈춰 섰다. 한숨 돌리지 않으면 4층에 도달하기 전에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엘이 미끄러질 것 같은 발끝을 옆으로 옮기는 순간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건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애처로운 흐느낌이 끊어졌다가 잠시 후 다시 이어졌다. 열린 창을 통해 커튼 자락이 펄럭이자 방안이 슬쩍 들여다 보였다. 침대에 엎드려 있는 가냘픈 몸이 보였다. 그 몸이 가늘게 떨릴 때마다 숨막히는 흐느낌이 들려 왔다. 대체 누굴까? 누군데 이렇게 깊은 밤에 혼자 울고 있는 걸까? 엘은 앞을 막아 버린 커튼 자락을 살짝 들췄다. 공주들 중의 한 명이 분명했지만 엎드려 있는 모습만 보고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저렇게 우는 거지? 엘에게는 그 울음소리가 배부른 투정으로 들렸다.이 방의 주인이 누구며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알더라도 일국의 공주에게 그녀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엘이 처해 있는 상황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위태로웠다. 엘은 다시 밧줄을 움켜쥐고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들어 올렸다. 악 다문 입술에서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창턱을 움켜잡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까스로 방에 들어선 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을 닫았다. 그녀의 침실 창에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제9장. 함정-------------------------------------------------------------------엘은 공주들 서너 명이 모여 수군거리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고 혹시 지난 밤에 서관에 침입한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오지나 않는지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 나도 네 생각과 같아!" 어느새 가까워졌는지 그들은 모두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정말 처음 봐!" "내 말 좀 들어봐! 난 지난 번에 복도에서 살짝 부딪힌 적이 있는데.... 세상에!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어머! 왜?" "미안하다며 내게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거야! 아, 그 때 나를 향해 반짝이던 그 아름다운 눈동자!" 말을 끊은 공주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지긋이 감자, 다른 공주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엘은 흥미를 가지고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어젯밤 일에 대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자신도 저들 속에 끼어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알렉스! 거기 서서 뭐해?" 리오가 저쪽에서 크게 소리쳤다. "어머! 이를 어째!" "세상에! 난 몰라!" 엘의 존재를 깨달은 공주들이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붉게 상기된 볼을 감싸고 허겁지겁 자리를 피했다. "왜들 저러는 거지?" 누구의 흉을 본 것도, 험악한 욕설을 한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건지 엘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알렉스! 너 무슨 짓을 했기에 어여쁜 공주님들이 저렇게 도망을 치는 거야?" 어느새 다가 온 리오가 그들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말 한마디 안 하고 여기 서 있었던 것 밖에 없다고!" 엘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지만 이미 리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아르벨라 황녀는 왜 다른 공주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 있는 걸까?" "혼자긴 누가 혼자냐? 볼 때마다 왕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데. 지금도 마찬가지고." 엘의 말처럼 아르벨라 황녀 주위엔 어떻게 해서든 리아잔 제국과 인연을 맺어 보려는 왕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말하는 건 저런 쓸개 빠진 구혼자들이 아니라 친구를 뜻하는 거야. 그러니까 뭐랄까... 마음이 통하는... 그래서 마음을 열 수 있는 그런 친구말이야."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라고? 하! 세상에 그런 친구는 없어." 엘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렉스, 넌 이상하게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더라." "말이 좋아 친구지, 다들 자기 이익을 좇아 친한 척, 생각해 주는 척하는 것뿐이야. 그걸 모르고 마음을 여는 사람만 상처받고 손해를 보게 되는 거야." 펄펄 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은 마음에 엘은 리오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불만에 찬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오, 너 왜 그래?"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기라도 했나 하는 생각에 엘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 때문에 엘은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말한 거 말이야. 친구라는 건 모두 친한 척, 생각해 주는 척하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존재라는 거!" 리오가 점점 소리를 높이자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두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리오, 좀 조용히 말해." 엘이 사람들을 살피며 주의를 주자 리오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너, 나도 그런 식으로 보는 거지? 지금까지 내 행동을 친한 척, 생각해 주는 척하는 걸로 본 거지?"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주위엔 호기심 어린 침묵이 가득 차 있었다. "리오, 좀 진정해!" 엘은 강경하게 소리쳤다. "진정하라고? 내가 진정하게 됐어? 헛소리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헛소리란 말에 엘도 불끈 성질이 솟았다. "너한테는 헛소리도 아까워! 알아 들었어?"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분노가 번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잘 알아 들었어,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오늘 이 순간부터 넌 나와 모르는 사이야!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고!" "댁은 뉘신데 저에게 소리를 지르시는 겁니까? 정말 영문을 알 수 없군요." 이를 부드득 가는 리오를 보며 엘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당장 폭발할 듯이 씩씩대던 리오가 쿵쿵 발을 울리며 걸어가 문을 부서져라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저런 속 좁은 녀석! "이를 어째! 사이 좋던 두 짝짜꿍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몰래 숨어서 눈물을 질질 짜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 자일스의 비웃는 말과 뒤따라 나온 웃음소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주십시오, 리아잔 제국의 위대한 황태자 전하!" 말을 마친 엘은 싸늘한 비웃음을 날리며 자일스를 스치듯 지나쳐 문을 나섰다. ------------------------------------------------------------------- "이제 더는 못 참아! 더 이상은!" 우아한 응접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노와 증오가 넘실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맞습니다, 자일스 전하!"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알비노가 이때다 싶었는지 허리를 펴며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건방진 놈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 줘야 합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 손으로 그 놈을 뭉개 버리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알비노에 뒤질세라 다른 왕자들이 침을 튀기며 끼어 들었다. "난 그놈이 내 앞에 무릎 굻고 설설 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개처럼 내 발을 햝는 꼴을 보고싶다고!" 자일스가 버럭 소리치며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걷어차자 네 명의 왕자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그들은 자일스의 뒤를 받치고 있는 막강한 권력 못지 않게 그가 가진 포악한 성질을 두려워했다. "자일스 전하, 설설 기는 꼴은 언제든지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세렌국 정도면 한발로 밟아 버릴 수 있으실 테니까요." 알비노는 마치 자신이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일스에게서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의 얼굴은 단번에 오그라들었다. "감히 네가 날 훈계하려는 거냐?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멍청한 놈! 여긴 리아잔 제국이 아니고 그루지아국이야! 그것도 아시리움 성전 안이라고! 다시 말해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란 말이다!" 격앙된 말을 잠시 멈춘 자일스가 엷은 초록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알비노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같은 멍청이는 잘 모르겠지만, 난 위대한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되실 몸이다! 그게 무얼 말하는 줄 아나? 아시리움 종단과 사이가 틀어져서 좋을 건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 곳에선 세렌국의 건방진 애송이를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내 말을 알아들었나?" "예에,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일스 전하! 용서해 주십시오!" 알비노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일스가 몸을 바로잡으며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봐라!" 숨 죽인 침묵이 찾아 들었다. 자일스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들을 차례로 훑으며 지나갔다. "다들 벙어리가 됐나? 좋은 생각 없느냐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네 명의 왕자들은 하나같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은 놈을 손볼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슈벤국의 가베스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일스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 슬쩍 흥분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제게 꽤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엘은 답답하고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무엇을 하려 해도 의욕이 생기질 않았고, 좋던 식욕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전엔 몰랐는데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사이가 틀어져 서로 말 한마디 안 하게 되는 건 상상외로 괴로운 일이었다. 특히 상대가 편안하고 활기에 넘치는 리오같은 사람이면 괴로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휴우!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리오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리오라고. 리오와의 다툼이 있은 이후 엘은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깊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잠시 엘을 멍하게 만들더니 뒤이어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함으로 변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다툼의 원인이 그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리오와의 사이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엘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도무지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문제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당연히 사과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엘은 요 며칠 동안 사과하기 적당한 기회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런데 특유의 활달한 성격으로 인해 인기가 많은 리오 옆엔 대부분의 시간 다른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꼭 존재했다. 그렇지 않을 때가 간혹 찾아올 때면 엘 자신이 쑥스러운 마음에 망설이게 됐고, 뒤늦게 결심을 했을 땐 어느새 다른 사람이 끼어 들어 일을 망치곤 했다. 그녀와 달리 리오는 이번 사태를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엘은 웃고 떠드는 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리오는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겠다는 자신의 말처럼 엘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녀에게 말도 걸지 않았으며 시선도 주지 않았다. 어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엘을 아예 외면하고 지나가 버렸다. 의외로 생각되는 점은 어쩌다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엘은 당연히 리오가 서둘러 자리를 피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거였다. 리오는 그녀가 있는 걸 모르는 척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곤 했다.혹시 리오도 나와 화해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내 앞에서 크게 소리를 치겠지, 리오 성격에 뭉그적거리진 않을 거야. 엘은 먹는 둥 마는 둥 한, 음식 접시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식당을 나와 바람이나 쐴 생각에 정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알렉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엘은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리오가 그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엘의 얼굴이 저절로 환해졌다가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 앞에 선 사람은 리오가 아니라 리반이었다. "무슨 일이야, 리반?" 한눈에 자신을 알아봐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나하고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지금 정원에 가려던 참이었어. 거기서 얘기하자." 리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노란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앉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알렉스, 리오하고 언제 화해할거야?"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리반이 말을 꺼냈다. "그,글쎄..." "어린애 같다는 생각 들지 않아?" 리반이 정곡을 찔러 왔다.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나만 말해 줘.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거지?" 리반은 자신의 성격대로 계속 침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엘은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인 걸, 뭐. 사실은 후회도 많이 했고, 반성도 많이 했어." "그래, 그랬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리반이 갑자기 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알렉스! 제발 나 좀 살려 줘!"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리반의 간절한 어투에 놀라 저절로 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오 때문에 정말 못살겠어!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얼마나 나한테 심술을 부리고 못살게 구는지 말로는 다 못할 지경이야!" "하지만 평소와 다를 거 없던데? 웃기도 잘하고,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엘은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거야 네가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네가 없을 땐 얼마나 살벌하게 인상을 쓰는지 몰라. 옆에 가기도 무서울 정도라니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난 며칠 안에 말라 죽을 거야. 그건 순전히 리오 탓일 거고, 리오는 너 때문에 그런 거니, 너도 내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못 벗어나는 거라고." "미,미안해." 비장하기까지 한 리반의 태도에 엘의 입에서 저절로 사과의 말이 나왔다. "정말 미안해?" "으응,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럼 알렉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내가 알아서 너와 리오를 화해시켜 줄 테니까." "어떻게?" "나만큼 리오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리오에겐 좀 유치한 방법이 잘 먹혀 들 거야. 아니, 좀 많이 유치해야 될 것 같군." 그 말에 은근히 불안해진 엘은, 생각에 잠겨 있는 리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저기 말이야, 리반. 화해는 내가 알아서 할게. 리반이 이럴 필요는 없어." 그녀를 향하는 리반의 눈엔 진한 불신감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할 건데?" "으음~ 그거야.... 간단히 말해서.... 그냥 미안하다, 다시 친하게 지내자, 뭐 이러면 되는 거 아냐?" 눈을 지긋이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던 리반이 다시 한번 엘의 손을 움켜잡았다. "알렉스! 부탁한다! 나 좀 살려 줘! 제발! 내 계획대로 해줘! 너만이 날 도와줄 수 있어! 알렉스!" 열정적인 외침에 압도되어 엘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알았어, 리반! 나만 믿어!" 리반은 웃음이 나오려 하자 기침을 하는 척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평소엔 안 그러더니 의외로 알렉스에게도 단순한 면이 있구나! 그는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얼굴로 침착하게 말을 시작했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어.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지극히 간단한 일이니까. 그럼 잘 들어봐." ------------------------------------------------------------------- "피곤하다니까!" 리오가 짜증 섞인 고함을 질렀다.하지만 리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 게 중요하단 말이야.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도와주는 건 식물이 내뿜는 맑은 기운과 고요함 만한 게 없고." 리반은 부드럽게 달래듯 말하면서도 리오를 잡아당기는 힘을 늦추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는 지금 리오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인 온실을 향해. "다른 사람이 있을 게 틀림없어! 난 지금 사람들과 어울릴 기분이 아니라고!" 그 다른 사람이 알렉스란 걸 알면 얘기가 달라질걸. 솔직히 말해 리반은 알렉스에 대한 리오의 마음에 꽤 놀란 상태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성이 좋아 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다시피 살아온 리오였다. 그 때문에 사색과 책읽기를 좋아하는 리반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도 내심으로는 그런 리오의 성격을 좋아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스와 화해를 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이 있기 전에는 알렉스도 리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친구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에도 친구로 인해 마음 상해한 일은 종종 있지만 자신의 쌍둥이 형이 지금처럼 침울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리오가 알렉스를 대할 때처럼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경 쓰고 의식하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리반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리오를 작은 분수대 쪽으로 이끌었다. 유난히 잎이 넙적한 나무를 지나니 저 멀리 의자에 앉아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어! 저기 알렉스가 와 있군. 그것도 혼자!" 리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 연기를 그럴듯하게 해보였다. 고개를 길게 빼들고 알렉스를 바라보던 리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리반을 그를 잡으려 하지 않고, 다시 한번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알렉스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은 처음 봐!" "뭐? 괴로워 해?" 리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래, 저기 좀 봐봐.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잖아. 리오, 난 가서 의관(醫官)사제님을 모시고 올 테니까, 넌 어서 알렉스에게 가 봐!" 리반은 리오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온실 문 밖에 멈춰 서서 천천히 다섯을 세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온실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내밀어 보니, 알렉스의 뒤쪽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리오가 보였다. 리반은 씩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을 줄이야! 난 정말 바보였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였어!" 알렉스가 상당히 어색하게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친구란 정말 좋은 건데! 친구는 정말 소중한 존재야! 신이 내려 준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고귀한 건 바로 친구라고!" 리반은 낮게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저런 연기에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속아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민 종이를 막힘 없이 줄줄 외우는 거에 만족해 실제 연기를 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아아! 내 친구! 리....오. 너 같이 훌륭한 친구를 못 알아본 내가 어리석었어!" 열정적으로 소리치던 알렉스가 갑자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변해 리오를 힘겹게 부르더니, 다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순간 리반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의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알렉스의 형편없는 연기력 때문에! "리...오... 날 용서해줘! 리....오...." 리반의 허탈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알렉스의 연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리반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억지로라도 두 사람을 화해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그가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알렉스에게 다가가는 리오가 눈에 잡혔다. 리반은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리오를 바라봤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리오의 얼굴은 웃음으로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저 연기에 넘어가다니!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어색한 듯 쭈뼛거리며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보였다. 곧 이어 리오와 알렉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친구의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는 건 분명했다. 리반은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조용히 온실을 빠져 나왔다. 엘은 어디선가 들었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리오와 검술 수련장에서 만나 대련을 해보기로 약속한 그녀는 재빨리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비온 뒤 개인 것처럼 맑고 깨끗해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엘은 씩 미소를 지었다. 어제 저녁 리오와 화해를 한 후 그녀는 너무 기분이 좋아, 작은 행복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런 기분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맛보는 거였다. 눈 앞에 떠오른 할머니가 그녀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할머니. 거기서도 제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신다는 거 잘 알아요. 이제는 할머니를 생각해도 가슴을 송곳으로 후비는 듯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지만, 할머니와 살았던,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행복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엘은 다시 바삐 손을 놀려 단추를 채워 나갔다. 그녀가 웃옷의 자잘한 단추를 거의 채웠을 때였다.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엘은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녀의 등뒤로 검은 파도를 만들었다. 엘은 구르듯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비명이 들린 것 같은 이층 복도를 미친 듯이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터져 나온 비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엘은 방문을 힘껏 열어 젖히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엉망으로 흐트러진 방과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였다. "무슨 일입니까?" 엘의 다급한 질문을 받은 건 숨죽인 흐느낌이었다. 여자에게 한발 다가서던 엘은 몸을 멈칫했다.찢어진 옷깃 사이로 하얀 어깨를 드러내고 온 몸을 떨고 있는 여자는 바로 리아잔 제국의 아르벨라 황녀였다. 그녀는 수치심이 가득한 얼굴로 드러난 살갗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 가냘픈 손가락을 한껏 펴고 있었다. 너무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가루가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혹시...몹쓸 짓을 당하신 겁니까?" 엘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녀의 모습을 보면 그럴 확률이 높지만,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체 어느 누가 최고 권력자의 딸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아르벨라 황녀가 뾰족하게 세운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엘을 바라봤다. 챙하고 깨어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일스와 똑같은 연한 초록빛 눈동자가 그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가슴이 찡할 만큼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르벨라 황녀가 속삭였다.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진 엘이 황녀를 향해 한발 내딛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확 밀려들었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그녀 앞에 거대하고 질척한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엘은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끔찍한 예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죄어드는 걸 느끼며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엘이 문밖을 나서기 전, 이미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안으로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자일스가 엘의 정면에 우뚝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소리를 지르며 들어오던 차르 사제가 엘을 본 순간 입을 딱 벌렸다. 그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아르벨라 황녀와 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너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자일스가 이를 갈며 내뱉듯 소리쳤다. 그녀를 노려보는 옅은 초록빛 눈동자엔 격한 흥분과 승리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일스의 눈을 마주 노려봤다. 알비노와 거의 동시에 들어온 여사제가 재빨리 아르벨라에게 다가갔다. 여사제는 바닥에 떨 어져 있던 시트를 집어 아르벨라의 몸을 덮어 주며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너! 감히 아르벨라 황녀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알비노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제 눈에 보이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까?" 차르 사제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엘에게서 아르벨라 쪽으로 돌렸다. 아르벨라의 어깨를 안아 주고 있던 여사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지금 황녀께선 심한 충격에 빠져 계십니다! 편안하게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모두 나가 주십시오!" 차르 사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엘을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절 따라오십시오." 엘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힘겹게 밀어 넣으며 고개를 치켜들고 차르 사제의 뒤를 따랐다. 엘이 막 자일스의 옆을 지날 때, 그가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넌 이제 끝장이야." ------------------------------------------------------------------- "알렉스가? 말도 안돼!" 리반은 인상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선 리오를 바라봤다. "당연히 말도 안되지.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앉아." "자일스가 만든 함정이 틀림없어! 나쁜 자식!" 얼마나 씩씩대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리오의 붉은 머리카락에 확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알렉스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친구가 아니야! 절대로! 더군다나 여자한테 별 관심도 없다고! 알렉스는 대부분의 공주들이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또 그 중 몇 명은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어! 그걸 모르는 건 아마 알렉스 뿐일걸. 그 정도로 알렉스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애야! 그런데 그런 알렉스가 여자를 겁탈하려 했다고? 그것도 아르벨라 황녀를? 하! 기가 차, 말도 안 나온다!" "말이 안 나오는 게 그 정도냐?" "뭐?" 리반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리오가 험악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뭐라고 했어? 너도 알렉스가 그런 짓을 했다고 믿고 있는 거야?" "넌 흥분하면 귀까지 막히나 보지?" 리반이 핀잔을 주자 리오가 물이 끼얹어진 장작불처럼 피시식 의자에 주저앉았다. "알렉스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리오가 힘없이 물었다.그의 얼굴은 알렉스에 대한 걱정으로 잔뜩 흐려있었다. "나도 몰라. 사제님들도 그에 대한 얘기는 극도로 쉬쉬하더라고. 성전 안에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처음일 테니까. 그들도 꽤나 우왕좌왕하는 것 같아." "알렉스는 어떤 일을 당하게 될까?" 리반은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이번 사건으로 리아잔 제국은 물론 아시리움 종단까지도 적으로 만들었어.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을 당하게 될 거야." 리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알렉스를 구해야 돼! 알렉스를 우리 체르몬 국으로 피신시키자! 리아잔 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잖아!" "부모님은 물론 체르몬 국민들까지 모조리 죽게 하고 싶은 거야?" 리반의 말은 잔인할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앉아, 알렉스가 당하는 꼴을 보고 있자는 거야? 그런 거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어! 알렉스가 체르몬 국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하면 되잖아! 조용한 곳에서 걱정없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가 보살펴 주면 되잖아! 우리 힘으로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리반!" "리아잔 제국만 있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시리움 종단은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 해도 절대 피할 수 없어." "으아악!" 거친 고함을 지르며 리오가 울분을 담은 주먹으로 탁자를 힘껏 내려쳤다. 금이 간 탁자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리오!" 놀란 리반이 그를 불렀을 때, 이미 리오는 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그의 비장한 모습을 보며 리반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무거운 한숨이 바삐 재촉하는 발걸음에 흩어졌다. ------------------------------------------------------------------- "이 신성한 아시리움 성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일이 흐지부지 마무리 된다면 우리 아시리움 종단의 교권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흥분한 대사제들이 일제히 입을 열자, 주위가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히 하십시오! 법황 성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대사제 중 가장 나이가 젊은 클레르몽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가장 젊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다. 말소리가 잦아들며 클레르몽을 위시한 대사제들 모두 법황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상석에 앉아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법황 성하?" 필리프 대사제가 신중한 태도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법황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서투른 행동 이후, 금이 가려 하는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사제께선 그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법황이 되레 그의 의견을 묻자 필리프 대사제는 탁자 아래 내리고 있던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에게 내려진 최고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법황이 흡족해 할만한 의견을 내놓는다면 그의 자리 역시 전보다 한층 굳건해질 것이다. "지금껏 성전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왕족들은 그 즉시 각자의 나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아시리움 종단은 그 왕족은 물론 그가 속한 나라에까지 톡톡히 잘못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큰 죄를 지은 왕족은 없었습니다. 전 용서받을 수 없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왕자는 물론 그 나라에도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 생각합니다." 법황이 흥미롭다는 듯 필리프 대사제를 바라보자 그는 더욱 강경한 어조로 소리쳤다. "죄인에겐 죽음을, 세렌국에겐 파멸을 내려야 합니다!" 놀란 대사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리프 대사제는 그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법황에게 쏠려 있었다. 법황이 그를 향해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필리프 대사제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법황의 미소가 적어도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긴장을 늦췄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죄인에게 그같은 형벌이 내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법황의 승인이 떨어지자 필리프 대사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나타났다. 그는 얼른 표정을 지우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사제들을 둘러봤다. 대사제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너무 형벌이 가혹하다는 생각을 하는 지 어두운 얼굴로 법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클레르몽 대사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법황 성하! 죄인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는 거야 당연하지만, 이번 경우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젊은 왕자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도 모자라 아무 죄없는 백성들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가혹하다니요?" 필리프 대사제가 노기를 드러냈다. "클레르몽 대사제! 죄인이 이 신성한 성전에서 저지른 극악한 죄를 생각해 보시오! 조금도 지나치지 않은 합당한 형벌이오! 경솔하게 입을 열지 마시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클레르몽 대사제가 발끈 하는 순간 법황이 그만 하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이 붉어진 두 사람이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전 죄인에게 합당한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했지, 세렌국의 왕자를 죽인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법황이 의자에 몸을 기대자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법황이 질문을 한 필리프 대사제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말 그대로 세렌국 왕자에겐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대사제들의 입이 일제히 딱 벌어졌다. 넋이 나가 있던 필리프 대사제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몇 번 머리를 흔들었다.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죄를 저지르는 걸 목격한 사람이 여덟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어찌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필리프 대사제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려 나왔다. "그가 유죄임을 증명할 사람이 여덟이라 하셨습니까? 그럼 그가 무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저 혼자가 되겠군요. 간단히 말해 그 때 그는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르벨라 황녀의 첫 번째 비명이 울릴 때까지 말입니다." 담담한 말투엔 감정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반면 열 명의 대사제들은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이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법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사제들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들 중 누구도 반박의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니,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법황이 직접 왕자가 결백하다고 하는데, 감히 누가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법황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 대사제들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들 중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한 필리프 대사제는 경련을 일으키는 손으로 탁자를 힘껏 움켜잡아야 했다.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엘은 정신없이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그녀의 머리 위쪽에 나있는 손바닥만한 창을 바라봤다. 아니, 엄밀이 말하면 그건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갇혀 있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구멍이었다. 하지만 구멍과 통해 있는 곳도 이 곳과 마찬가지로 축축한 지하 감옥일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해도 구멍을 통해 보이는 건 짙고 짙은 어둠뿐이었다. 그 어둠과 닮은 한숨이 엘의 입술을 뚫고 무겁게 흘러나왔다. 은백색의 입김이 안개처럼 흩어졌다.발바닥이 닳도록 감옥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가운 몸은 점점 더 얼음장같이 싸늘해졌고, 그녀를 휘감은 두려움은 숨쉬기조차 버거운 절망을 불러일으켰다. 엘은 냉기를 뿜는 돌벽에 몸을 기댔다.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싶었지만 온갖 벌레가 우글거리는 곳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면 한순간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 때가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엘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작게나마 용기를 주는 것은 목에 걸려 있는 반지였다. 엘은 불안하거나 마음의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반지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그럴 때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용기를 내라는,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속삭임이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듯 램프의 불이 깜박였다. 그녀를 이 곳에 가둔 사제가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남겨 두고 간 것이었다. 그 때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힘없이 깜박거리는 램프의 불을 보건 데, 적어도 하루는 지난 것 같았다. 램프 불마저 꺼지면 이 곳엔 어둠만이 존재하게 될 거야. 램프의 불이 꺼지는 순간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지난번 리자드가 그녀를 가뒀을 때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때도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오는 순간 이성을 잃고 그를 미친 듯이 부르지 않았는가. 리자드....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걸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바보 같으니! 왜 하필이면 리자드를 떠올리는 거야?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엄밀히 말하면 리자드 때문인데!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걸 알게 되더라도 리자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혹시 황녀를 겁탈하려고 한 것이 이유라는 걸 알면 한쪽 눈썹 정도는 꿈틀할지도 모르지. 겁탈이라니! 생각할 때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여자임을 숨겨야 하는 그녀가 겁탈이라는 죄목으로 갇혀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황당한 얘기는 없을 거야. 나보다 운없는 사람도 없을 테고. 옷을 갈아입다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바람에 아몬이 준 구슬조차 방에 남겨 두고 말았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으로 흐르고 있었다. 램프의 불빛이 뿌옇게 흐려졌다. 엘은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다시 좁은 감옥 안을 오가기 시작했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비관적이 되고 있었다. 영원히 축축한 어둠 속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엘은 차가운 벽에 두 손을 짚고, 혼란스럽게 들이닥치는 절망적인 영상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지 않아 램프의 불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엘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바로 그때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두터운 철문이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엘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반쯤 열린 문 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오십시오." 아른거리는 작은 불빛이 보이는가 싶더니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조심스런 희망이 뾰족한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들었다. 엘은 금방이라도 다시 철문이 닫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잰걸음을 옮겼다.철문 옆에 키가 큰 사람이 서 있었다. 엘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램프 불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은회색 눈동자의 사제였다. "저...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얼떨결에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닫자 엘의 얼굴은 살짝 찌푸려졌고, 사제의 눈엔 웃음기가 스쳐 갔다. "저와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엘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 따라 오십시오." 몸을 돌린 그가 어제 엘이 들어왔던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엘은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살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축축하고 좁은 통로를 걷고 있자니 견디기 힘든 한기가 밀려들었다. 엘은 부르르 몸서리를 치 며 이를 부딪쳤다. 어찌 됐든 일단은 이 끔찍한 곳에서 나간다는 안도감이 더욱 몸을 떨리게 하고 있었다. 엘이 한층 몸을 옹송그렸을 때 갑자기 몸에 온기가 느껴졌다. 묵묵이 앞서 가던 사제가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엘의 어깨에 걸쳐 준 거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얼어붙었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얀색의 얇은 셔츠하나만을 달랑 걸치고 있는 사제를 못 본척할 수는 없었다. 냉기를 막는 데 그리 도움은 안되지만 그래도 그녀는 겉옷까지 입고 있지 않는가! 저 친절한 사제가 꽁꽁 얼어붙기 전에 서둘러 옷을 돌려줘야 하리라. "이러실 필요없습니다! 이 정도 추위는 참을 만합니다!" 엘은 단호하게 말하며 사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은회색 눈이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사제의 입가에 슬쩍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왜 그러냐고 엘이 따지기도 전에 이미 그는 성큼성큼 앞서 가고 있었다. 엘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살폈다. 어깨에 걸쳐진 망토 깃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누가 뺏어 갈까 무서운 듯 뼈마디가 하얗게 돌출되어 있었다. 창피한 생각에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은 뜨뜻해진 얼굴을 무시하고 긴 망토 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며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제10장. 달빛 눈동자-------------------------------------------------------------------엘이 안내된 곳은 본관의 오층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넓은 집무실이었다. 커다란 책상, 그 앞에 놓여 있는 검은 색 나무탁자와 의자가 이 곳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그 외에 작은 장식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봐온 아시리움 성전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순하고 검소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검소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곳에 있는 모든 것이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귀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에게는 눈을 씻고 봐도 그런 걸 알아볼 재주가 없었다. 때문에 엘은 눈앞의 사제가 그리 높은 신분은 아닐 거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확고히 해주려는 듯 사제는 언제 어디에서든 부를 수 있는 수많은 하인과 하녀들을 남겨 둔 채 손수 차를 준비했다. 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별 다른 게 눈에 띄지 않자, 사제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때마침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깜박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몸은 좀 녹으셨습니까?" 사제가 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예." 그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지금 엘에게 중요한건 그녀의 앞날이지 당장의 추위가 아니었다. 엘은 사제가 그녀 앞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전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겁니까?" 애가 타는 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제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떤 벌이 타당하다 생각하십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되물었다.엘은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소리쳤다. "전 벌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요! 지금껏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일만은 결코 책임이 없습니다!" "그 말씀은 아르벨라 황녀를 겁탈하려 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까?" 놀랄 만큼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하! 겁탈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흥분해 펄펄 뛰다 시피하는 엘과는 반대로 그녀를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는 눈이 덮인 깊은 호수처럼 극도로 고요했다. "물론 말이 된다 생각합니다. 아르벨라 황녀의 미모가 상당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황녀의 아름다움에 이성을 잃고, 숨겨져 있던 야수가 깨어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야,야수라고요? 숨겨져 있던 야수가 깨어난다고요? 제 안에 야수가 숨어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엘에게서 야수성을 찾으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살펴보는 사제의 눈동자에 살짝 웃음기가 감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가 무슨 괴물로 보이시나 본데, 제발 그 불쾌한 시선 좀 거둬주십시오, 사제님!" 엘이 뾰족한 어조로 말하며 그를 노려봤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지하감옥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얄미운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바짝 약이 오른 상태였지만 지하감옥으로 돌아가는 시간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늦추고 싶었다. 그녀는 재빨리 찻잔을 움켜잡아 미지근해진 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차 맛이 정말 훌륭하군요. 이렇게 향기가 좋은 차는 정말 처음입니다. 죄송하지만 한잔만 더 마실 수 있겠습니까?" 엘은 사제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쓰디쓴 차 맛이 입안에 가득 남아있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려 했다. "죄송하지만 마지막 남은 차 잎으로 끓인 거라서...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사제의 입술 끝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엘이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차는 있겠지요? 귀찮으시면 제가 직접 타겠습니다." 사제가 슬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엘은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차가 다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껴서 마시는 건데.... 이처럼 화려한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가 차 한잔 양껏 마시지 못한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곳의 사제들은 웬만한 귀족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들었는데.... 아몬도 그렇게 말했고.엘은 조금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눈 앞의 사제를 바라봤다. 민망한 듯, 아니 부끄러운 듯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가 왠지 안돼 보였다. 그녀는 그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다. "하잘 것 없는 차는 그만 잊어버리시고, 저에 대한 결정이 어떻게 났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결정이 나긴 난 거죠?" 잠깐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 일에 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엘은 미간을 찡그렸다.사제가 몇 번 헛기침을 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매우 진지하고 어찌 보면 엄숙하기도 한 시선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엘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숨소리를 죽였다. "잘 들으십시오. 내일부터 본관의 중앙 도서실에서 일을 하셔야 합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신 후 곧바로 도서관으로 가십시오." "도서관이라고요?" 엘이 황당하다는 말투로 되물었다.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그녀였지만, 막상 귀에 들린 건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거기서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가 보시면 일을 지시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하루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명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게 벌입니까?" 엘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아닙니다. 도서관 일은 성전을 위한 일종의 봉사라고 보시면 되실 겁니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그 일에 관해서는, 겁탈 건에 대해선 어떤 결과가 내려진 겁니까? 전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겁니까? 대체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두고 무슨 말들이 오간 겁니까?" 천장이 울릴 정도로 요란한 질문이 숨차게 쏟아졌다. "어떤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사제의 무심한 태도가 은근히 엘의 신경을 건드렸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좋은 대화법이 아니라 생각지 않습니까?" 그녀의 퉁명스러운 어조에 사제가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 사건은 무죄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엘은 믿기지 않은 상황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아,아 예." 엘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스르르 일어나 휘적휘적 문으로 행했다. 막 문고리에 손을 얹은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사제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전 루드비히 라스카 폰 리오벤이라 합니다." "그렇군요, 루드비히 사제님! 전 엘... 알렉스라 합니다." "엘...알렉스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잘못 들으셨군요. 전 그냥 알렉스입니다. 앞으로는 편하게 알렉스라 불러주십시오. 저도 루드비히라고 부를 테니까요.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엘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다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낮게 속삭였다. "엘이라..." -------------------------------------------------------------------엘이 무죄로 풀려 났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야말로 아시리움 성전 전체가 술렁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에서나 그 일에 대한 얘기가 가장 먼저 화제에 올랐다. 되도록 조용히 있어야 되는 엘의 입장으로선 집중되는 사람들의 주목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엘의 시중을 들어주는 시에나가 울먹이며 그녀의 무사귀환을 반겼을 때와 기쁨에 겨워 펄쩍 뛰어오르는 리오를 봤을 때는 그녀 역시 가슴이 복받쳐 오르는 걸 느꼈지만 그 외에 대해서는 무덤덤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엘의 무죄를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그녀를 따돌린다는 거 였다. 엘을 보면 공주들은 슬쩍 자리를 피했고, 왕자들은 얘기를 멈추고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일스는 풀려 난 그녀와 마주친 순간 유령을 본 사람처럼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곧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엘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마음이 역력한 눈으로 꽤 오랫동안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 다음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문이 부서져라 열어 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리오의 말에 따르면 자일스는 그 길로 몇 명의 대사제들을 만났다고 한다. 분명히 그녀를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건 데, 그의 행동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자일스가 자신의 여동생을 이용해 만든 함정을 생각하면 엘은 그가 그녀에게 갖고 있는 증오의 깊이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르벨라 황녀는 사건이 있은 후 며칠 간 두문불출하다가 엘이 풀려 나고 오 일째가 되는 날에야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엘을 볼 때마다 허겁지겁 도망치다시피 했는데, 그 행동이 엘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골치 아픈 일이 많아진 엘은 한시라도 빨리 성전에서 나가고 싶어 더욱 열심히 수색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물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엘은 서관에서 법황에게 걸릴 뻔한 사건 이후로 본관을 조사하고 다녔다. 그녀는 심사숙고한 끝에 법황이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얘기에 따르면 법황이 이 곳, 아시리움 성전에 머무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조만간 다시 서관이 빌 때가 올 것이다. 엘은 법황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전엔 법황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나 우연히 그녀의 무죄를 주장한 사람이 법황이라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왜 내 편을 들어준 것일까? 부드러움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은, 딱딱하고 매우 근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새삼스레 며칠 전에 들었던 법황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그에 대한 얘기를 들은 건 중앙도서관에서였다. 엘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한숨 잠이 간절한 노곤한 몸을 이끌고 투덜거리며 도서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를 맞은 건 엉뚱하게도 루드비히 사제였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를 봤을 때, 엘은 은근히 반가움을 느꼈다. 그녀를 흉악한 괴물 보듯 할지 모르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지만, 그것보다는 법황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이 더 컸다. "어서 오십시오." 그가 조용히 인사말을 건넸을 때, 엘은 함박 웃음을 지으며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루드비히가 나에게 일을 시킬 사람인가요?" 그녀 자신도 의외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이 나왔다. 루드비히는 아무 말없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저의 무죄를 주장하신 분이 법황 성하시라 하던데,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대체 그 분이 왜 절 구명해 주신 건가요? 그 분과는 말 한마디 나눠 본 적이 없는데요." "글쎄요... 그거야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요." 높다란 책장들이 일렬로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루드비히가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엘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루드비히는 직접 법황 성하를 배알한 적이 있습니까? 가까이에서 그 분의 얼굴을 본 적이 있겠죠? 어떤 분이십니까?" 갑자기 루드비히가 걸음을 멈췄다.그 바람에 엘은 그의 등에 몸을 부딪치게 되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잡아 주었다. "왜 갑자기 법황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신 겁니까?" 엘의 팔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은 처음 듣는 낯선 말투에 놀라 루드비히가 존칭을 붙이지 않고 법황을 거론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 목숨을 살려 주신 분이 법황 성하신데!" "그렇게 궁금하시면 직접 만나보십시오." 엘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을 하는 루드비히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나참!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저같은 약소국의, 그것도 다섯 번째 왕자가 법황 성하를 배알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한 나라의 국왕이 만나 뵙기를 청해도 거절되기 일쑤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루드비히가 손을 들어 도서관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가 보시면 작은 창고가 보일 겁니다. 그 곳에 있는 책들을 분류순서에 맞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엘은 몸을 돌리는 루드비히의 옷자락을 재빨리 잡았다. 그가 그녀에게 서늘한 은회색 눈을 돌리는 순간 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보라색 눈엔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루드비히는 도저히 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한동안 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심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자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이 농도 짙은 액체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잠시 후 루드비히는 조금 체념한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물어 보십시오." 엘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루드비히는 법황 성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적 있나요?" "예." "그럼 성하를 배알한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 그런데 어떻게 법황 성하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는 말인가요?" 놀란 엘이 소리를 높였다. "그럼 전 이만." 루드비히가 가차없이 몸을 돌렸다.엘은 재빨리 가장 궁금해 하던 질문을 꺼냈다. "사람들이 왜 성하를 피의 황제라고 부르는 겁니까?" 그녀의 말이 공기 중에 울리는 순간 루드비히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그렇게 어마어마한 별명을 가지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다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사제에겐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질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가 대답 듣기를 포기한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건 그가 피를 좋아하는 몹시 잔인한 성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이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신성 모독적인 말에 놀라 입을 벌렸을 때 이미 그는 도서관을 나간 후였다. -------------------------------------------------------------------기다란 은 촛대에 꽂힌 촛불들이 녹아 내리며 질척한 밀랍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불빛이 우아하게 내려온 휘장 위에 검은 그림자를 던지며 아른거렸다. 휘장 자락에 닿을 듯 붙여진 고풍스러운 의자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이 나른한 동작으로 고개를 흔들어 탐스러운 머리채를 어깨 뒤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녀는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어둠에 싸인 한 남자를 살피고 있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인에 의해 짙게 깔려 있던 침묵이 깨졌다.남자는 그 말을 들었다는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려 입술로 가져갈 뿐이었다. "당신께서 보잘 것 없는 나라에서 온 한 소년을 편애하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미동없이 굳어졌다. "소문이.... 사실입니까, 법황 성하?" "사실이라면?" 비웃음을 담은 싸늘한 어조였다. 여인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떤 소년입니까? 정말 그 소년을 남다르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에게.... 애정을 느끼시는 겁니까?" 그에게선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군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얼굴도 알 수 없는 소년에 대한 살의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힘껏 물어뜯은 여인의 입술에서 한줄기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제 손으로 그 놈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꼴을 보며 침을 뱉을 겁니다."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남자가 무심한 어조로 말하자 여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어! 그저 헛소리에 불과했던 거야! 누구에게 정을 주시거나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잠깐 동안 질투에 눈이 먼 거야! "사죄 드립니다, 법황 성하. 제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리석은 소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여인의 입술에 유혹을 담은 관능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여인의 가냘픈 손가락이 남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성하를 향한 애모의 마음이 너무 깊어 불충한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살며시 속삭이며 여인이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남자의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라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차가운 조소를 띤 어딘가 가혹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 순간 여자의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서,성하!" 놀라 소리치던 그녀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꼬챙이로 몸 속을 헤집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여인이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몸을 뒤틀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다. 잠시 후 극한의 고통으로 철저히 일그러진 여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흐느끼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던 여인이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울컥 핏덩어리를 토했다. "그 소년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엔 비천한 네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주지." 남자가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남자의 눈에서 섬뜩한 무엇인가를 본 여인이 몸을 흠칫하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핏기가 빠져나간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두려움과 충격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사라져라!"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여인이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다. -------------------------------------------------------------------루드비히는 자신의 눈 앞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무심한 동작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내가 편애를 한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반박하거나 노기를 드러낼 마음은 없었다. 그 자신도 일부는 인정하고 있는 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알렉스라는 소년.... 아니, 엘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소녀. 자신과 부딪친 소년이 사실은 여자라는 것은 그 즉시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감쪽같이 변장을 하고 있어도 사람의 성별을 알아내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신분과 성별을 속이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소녀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일까?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소녀에 대해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이 너무나 생소해 그 자신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 소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를 유쾌하게 했다. 만약 루드비히를 아는 누군가가 그 소녀와 있을 때의 그를 잠깐이라도 봤다면 자신이 실성해 헛것을 봤다고 생각할 것이다. 보라색 눈동자의 소녀는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토록 즐거움을 느낀 적도 없었고, 진심 어린 웃음을 지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워 했지만 루드비히는 이런 상황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가지 못하고 사라질 감정이었다. 그 동안 그는 그에게 찾아온 이 낯선 즐거움을 느긋하게 즐기면 그만이었다. 당돌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무나 맑고 솔직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루드비히의 얼굴을 그런 식으로 쳐다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머 리를 조아리기에 바빴고, 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힘과 분위기에 기가 질린 듯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당찬 소녀만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심지어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를 인질로 삼은 후 허세를 부리던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그녀가 다른 속셈을 갖고 이 곳에 들어왔다는 건 확실했다. 소녀에게 추적마법을 건 누군가가 그녀의 뒤에 있을 것이다. 루드비히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녀가 가진 비밀을 낱낱이 파헤칠 생각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잔에 술을 따르려던 그의 눈에 카펫에 스며든 검붉은 피가 스쳐 갔다. 그 순간 은회색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득였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소녀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얼룩 부분에 파르스름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불길에 갇힌 핏자국이 순식간에 녹아 내렸지만 연기는 조금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잦아들고 있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알렉스!" 리오가 엘의 어깨를 툭 치더니 그녀 옆에 주저 앉았다. "넌 어째 몇 번을 불러도 그렇게 못 알아 들을 수 있냐?" "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 아직도 알렉스란 이름이 귀에 설은 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건 그렇고, 알렉스! 우리 이번 해방의 날에 어딜 가 볼까?" "해방의 날이라니?" "몰라서 묻는 거야? 말 그대로 해방되는 날!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잖아." 엘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하자 리오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시작되는 오일 후부터 삼일 동안은 성전을 나갈 수 있다는 거 몰라? 멀리는 갈 수 없겠지만 그루지아는 그리 큰 나라가 아니니까 부지런히 움직이면 많은 곳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또 구경 좀 못하면 어때? 술집에 틀어박혀 술이나 실컷 퍼 마시고 와도 좋지! 예쁜 아가씨들도 만나고!"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리오의 얼굴은 마냥 싱글벙글했다. "전부 이 곳을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 "물론 나가고 안 나가고는 자기 마음이지. 하지만 어떤 멍청이가 기껏 주어진 행복을 발로 걷 어 차겠냐?" "바로 나!" 엘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리오가 휘둥그레진 눈을 그녀에게 돌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난 여기 남을 거야. 이 곳에서 잠이나 자고 말지 뭐 하러 밖에 나가 고생을 하냐?" 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수색을 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갑자기 리오가 불쑥 손을 뻗어 엘의 이마에 얹었다. "왜 이래?" 그녀가 머리를 뒤로 젖히자 리오가 순순히 손을 내렸다. "열이 있나 살펴본 거야.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테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다시 말하지만 난 안가!" 엘은 단호하게 말한 후 얘기는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의자 등받이 위에 팔베개를 하고 머리를 기댔다. "내가 얼마나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해방되는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지루하고 답답한 생활을 억지로 견뎠단 말이야. 알렉스,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자! 나하고 리반, 그리고 네가 함께 다니면 얼마나 재미있겠어." 리오가 열심히 엘을 구슬렸지만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엘은 은근히 리오의 말에 끌리고 있었다. 성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루지아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그녀라고 왜 유혹을 느끼지 않겠는가? 이 곳으로 오는 무료한 여정을 제외하고는 태어나서 한번도 여행을 해본적이 없는 그녀가 말이다. "같이 나가자, 알렉스! 응? 같이 나가는 거지? 너니까 말하는 거지만 리반하고 다니면 얼마나 지루한데. 그 녀석은 순 따분하기만 한 유적지같은 데만 돌아다닌다고. 이번에도 그럴 게 뻔해. 성질 같아서는 나 혼자 다니고 싶지만, 형인 내가 동생을 나몰라라 방치해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 끈질기게 계속되는 리오의 설득에 엘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리오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아! 하지만." "그럴 줄 알았어, 알렉스!"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리오를 보며 엘은 짐짓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 하지만 딱 하루 만이야. 삼일을 모두 밖에서 지내진 않을 거야. 알았지?" 리오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하지만 일단 나가기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는 생각이 들었는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알았어. 아무튼 잘 생각했어! 정말 재미있을 거야!" 엘은 이런 저런 일을 해 보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는 리오를 바라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리오의 열성이 엘에게도 옮겨졌는지 그녀 안에 점점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 "넌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니 잔말 말고 하라는 대로 해!" 자일스가 거만하게 명령을 내리자 긴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아르벨라가 파리한 얼굴을 치켜들었다.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 약하게나마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또 무슨 일을 하라는 건가요? 대체 저보고 얼마나 더 죄를 지으라는 거예요?" 그 앞에서는 항상 겁에 질린 모습만 보이던 아르벨라가 목소리를 높이자 자일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시는 오라버니 말을 따르지 않을 거예요! 다시는!" "내 말을 거역하겠다고?" 자일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래요! 알렉스 왕자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지난번에도 진심으로 절 걱정해 주었어요. 그런 분에게 더 이상 나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어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이제 그만 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네가 감히 날 가르치려 드는 거냐?" 바닥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엔 흉포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아르벨라가 용기를 내려는 듯 부르르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을 때, 자일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아악!" 공포와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디 다시 주둥이를 놀려 봐라!" 자일스가 움켜 쥔 머리채를 잔인하게 잡아당기며 위협적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하얗게 질린 아르벨라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오냐오냐 해줬더니 첩의 딸년 주제에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지금 당장 네 년의 숨통을 끊어 줄까?" 자일스가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휘어감아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숨 막힌 소리로 작게 헐떡이는 아르벨라의 눈은 진한 공포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너 같은 건 열번, 아니 백 번을 죽여도 아버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실 거다. 다시 한번 날 거역하면 뼈까지 갉아 돼지에게 던져 주마. 알아 들었겠지?" 아르벨라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일스가 내팽개치듯이 손을 풀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르벨라를 가소롭다는 얼굴로 내려다봤다. "네 방으로 돌아가라! 내가 허락할 때까지 빵 부스러기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감히 내게 맞서려 했던 것에 대한 벌이다!" 아르벨라는 천천히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일스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참으려 했던 눈물이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삐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엘은 반쯤 열린 기도실 문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언뜻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기도실 안에서 아르벨라 황녀를 본 것 같았다. 엘은 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안을 유심히 살폈다. 길게 늘어뜨린 밝은 금발을 보건 데 틀림없는 아르벨라 황녀였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며칠 전 밤에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던 사람이 바로 그녀라는 걸 깨닫게 된 이후부터였을까? 아니면 우연히 너무나 괴로운 눈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는 황녀를 발견하게 된 이후였는지도. 하여튼 언제부턴가 엘은 은근히 아르벨라를 신경 쓰고있는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르벨라 황녀와는 되도록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엘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엘은 황녀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막지 않았다. 황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엘은 그녀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중얼거리는 나지막한 속삭임이 조금씩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알렉스 왕자님이 다치시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기도 내용에 엘은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르벨라 황녀가 엘을 지켜 달라는 기도를 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도를 마친 아르벨라가 옆에 있던 기도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엘이 자리를 피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몸을 돌리던 아르벨라가 엘을 보는 순간 숨을 격하게 들이마셨다. 어찌나 크게 놀라는지 엘조차 몸을 움찔했을 정도였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큰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엘은 서둘러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아르벨라를 보건 데 그리 성공적이진 못한 것 같았다. 엘은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보이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의 자에 앉혔다. 그리고 엘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흘긋 옆을 쳐다보니 아르벨라의 안색이 조금 나아진 듯 했다. 무슨 얘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엘은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냈다. "절 위해 기도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핏기가 전혀 없던 아르벨라의 얼굴이 단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제가 황녀님의 기도를 방해한 이유는 지난번 일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아르벨라가 소리를 높였다. "사과를 받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닙니다. 황녀님을 탓하려고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저야 이번 일로 인해 지하 감옥도 구경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아르벨라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주려고 했으나 엘의 얘기에 그녀는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말 한마디 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저절로 한숨이 나오려 했다. 엘은 그냥 나갈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고쳤다. 아르벨라와 단 둘이 있게 되는 기회는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녀님." "아르벨라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르벨라가 의외의 말을 했다.엘은 눈을 깜박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아르벨라.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모든 걸 꾸민 사람이 자일스 황태자라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고.... 아르벨라는 왜 그 일에 관여하신 겁니까?" 잠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아르벨라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얘기를 듣는 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에 엘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아르벨라가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일스 오라버니와 제가 친남매가 아니란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엘은 모르고 있던 얘기지만 아르벨라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어머니는 바이람 국 출신이십니다. 리아잔 제국과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셨던 외할아버님이 어머니를 조공과 함께 황제폐하께 받쳤다고 하더군요." 아르벨라는 잠시 말을 끊고 깊이 숨을 들이셨다.다시 말을 시작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랄 정도로 담담해서 마치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리아잔 제국에서 제 어머니의 위치가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덧붙여 제가 아무 힘없고 보잘 것없는.... 허울만 좋은 황녀라는 것도 말입니다." 아르벨라가 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슬퍼 보여 엘은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제가 왜 이런 말까지 하게 됐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왕자님께 크나 큰 죄를 지은 제가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전.... 자일스 오라버니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거역할 수가...." 여러 번 끊기며 힘들게 이어지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아르벨라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엘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낮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로 아르벨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엘은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도 마실 겸 함께 정원이나 산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을 끝내는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자일스가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르벨라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이제 제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실에 오는 것도 오늘에서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일스의 횡포가 분명했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 해도 자신의 누이동생이 아닌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드러내 아르벨라를 더욱 비참하게 할 수는 없었다.엘이 막 알았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꼭 굶주린 배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점심 식사 시간이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엘이 의아한 시선을 돌려보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먹을 배에 갖다 대고 꾹 누르고 있는 아르벨라가 보였다. "아르벨라, 혹시 배가 고픈 겁니까?" 반신반의하며 물으니 아르벨라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참! 그럼 왜 이러고 있습니까? 어서 식당으로, 아니 방에 있어야 한다고 했죠. 그럼 어서 시녀를 시켜 음식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엘이 혀를 차는 것으로 말을 마칠 때까지 아르벨라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떤 생각이 엘의 머리를 스쳐 갔다. "식사를 안한 게 아니고 못 한 거로군요." 더 한층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아르벨라를 보건 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쁜 자식!" 엘이 욕설을 내뱉자 놀란 아르벨라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일스가 힘없는 시녀까지 손아귀에 넣었군요. 굳이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자, 일어나셔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창문을 열어두십시오. 감히 창문을 통해 아르벨라의 침실로 들어가려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저 밖에는요.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을 겁니다." 말을 끝낸 엘은 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 몸을 돌려 아르벨라를 바라봤다. "이번엔 비명소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아르벨라의 목청에는 감탄했지만 말입니다." 엘이 씩 웃음을 짓자 아르벨라의 얼굴에도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하의 못된 놈! 치사한 자식!" 엘은 이를 갈며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음식을 못 먹게 한다는 건 엘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었다. 리자드가 욕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굶게 했을 때, 얼마나 이를 갈며 치를 떨었던가? 그녀처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아르벨라를 생각하니 속에서 울분이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르벨라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밤이 깊은 후에야 그녀의 창을 통해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제길! 먹는 걸로 사람을 조종하려 해? 빌어먹다 뒈져라!"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바로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몸을 홱 돌렸다.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쿵쾅거리는 심장은 여간 해선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면 어떻게 합니까?" 엘의 목소리는 당연히 짜증이 섞인 힐난조일 수 밖에 없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루드비히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 "보면 모릅니까?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군요!" 엘의 어조는 누그러질 줄 몰랐다. 자일스로 인해 쌓인 화가 괜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살짝 고개까지 숙이는 루드비히를 보니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아시면 됐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루드비히가 그녀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이제부턴 꼭 앞이나 옆에서 말을 하겠습니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심쩍은 시선을 던지는 엘에게 루드비히 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전엔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엘은 눈을 깜박이며 반문했다. "무슨 말이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대충 핵심만 말씀 드리자면 빌어먹다 뒈지라는 말이었습니다." 너무나 우아하고 단정해 보이는 입술에서 욕이 나오니, 욕조차 무슨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왕족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욕을 했으니 이를 어쩐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책에서 본 것입니다." 당황한 것 치고는 꽤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엘은 한층 편해진 마음으로 그를 마주봤다. 은회색 눈동자에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반짝임이 지나갔다. "책이라 하셨습니까?" "예." 엘의 자신있는 대답을 들은 루드비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중앙 도서관 입구가 보이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엘이 걸음을 빨리해 막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루드비히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다시 던져 왔다. "혹시 제가 그 책의 제목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엘은 냉큼 대답했다. "책의 내용은 상세히 기억하시는 분이 제목은 모르시겠다고요. 으음~ 그럴 수도 있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희미한 웃음기를 담고 있는 눈을 보건 데, 그녀를 바보, 멍청이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은 한숨을 내쉬며 어제 정리 하다만 책장 쪽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엘을 한층 곤혹스럽게 만든 사건은 그녀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열심히 책을 분류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는 한 무더기의 책이 보였다.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책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옆 책장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루드비히를 힐끗거렸다. 그는 세 단으로 된 그리 높지 않은 사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루드비히가 마침 그 알 수 없는 글자가 금박으로 새겨진 두툼한 책을 집어 들었다. 엘이 숨을 죽인 순간 그가 자연스럽게 오른쪽 위 칸에 책을 꽂았다. 이 책들도 저 곳에 꽂으면 될 거야. 엘은 책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 두 팔로 받쳐 들어올렸다.그녀가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걸 본 루드비히가 빠르게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왔다. "몇 권만 들어 주십시오." 엘의 요청과는 달리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을 모조리 받아 들었다. 돌덩이 같이 무거운 책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들고 있는 루드비히를 보니 겉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힘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루드비히는 탁자 위에 책을 내려 놓고, 다시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엘이 이상한 글자가 적힌 책을 반 정도 정리했을 때, 루드비히가 팔을 뻗어 그녀가 막 꽂은 책을 뽑아 들었다.책 표지를 흘끗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엘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책을 이리저리 들쳐 보던 그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엘 옆에 섰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가 꽂아 놓은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족이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마땅할 글자라는 예감이 들었다. 곤란한 질문이 나오리라는 생각에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책들은 이 곳이 아닌 다른 장소로 옮겨야 되겠습니다." "그,그렇습니까?" 엘은 조심스럽게 대꾸하며 루드비히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책들을 하나하나 빼내고 있었다. 책을 다루는 신중한 손길을 보건 데 상당히 귀한 책들임이 분명했다.이런 글자가 있다는 걸 미리 가르쳐 줬어야지! 엘은 리자드를 원망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 책들은 샨 마라힐어로 쓰여졌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사라진 지 오래된 고대어입니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왕족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루드비히가 마치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은 것처럼 말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시간, 엘은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았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침묵이 흐른 뒤 먼저 시선을 피한 사람은 엘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엘은 루드비히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뒤 몸을 돌려 황급히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제11장. 성 아우렐리아 축일-------------------------------------------------------------------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조용하고 차분하기만 하던 아시리움 성전도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저기에서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축일의 시작은 4일 후였다. 극도의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3일 동안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듯 마음껏 웃고 즐기는 시간을 가진다. 때문에 성 아우렐리아 축일은 진정한 축일이 이어지는 30일과 그 전의 3일이 합쳐 33일간 지속된다. 축일 전의 3일은 희락을 뜻하는 하렐로, 그 뒤 30일 간은 깨달음을 뜻하는 바이람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33일간의 축일은 마지막 날, 밤을 새며 벌어지는 화려한 축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성 아우렐리아 축일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엘은 은근히 가슴이 설레였다. 그녀가 살던 딜람에서도 자그마한 행사가 벌어지곤 했으나 엘은 한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 울리는 음악소리나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게 고작이었다. 때문에 잔뜩 들떠 있는 리오처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엘 역시 하루 앞으로 다가온 축일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가지 엘의 마음을 괴롭히는 건 축일의 마지막 날 열리는 연회에서 트레비아를 연주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것도 법황 성하 앞에서 말이다. 연회를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엘은 뒷골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때마다 엘의 팔엔 싸늘한 소름이 돋곤 했다. 아무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연회 전에 물건을 찾아 성전을 떠나는 것 이외엔 좋은 해결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엘은 애써 스스로를 격려했다. 골치 아픈 걱정거릴 모두 잊고 내일 하루를 즐긴 후, 물건 찾기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인다면 연회 전에 일을 마무리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운이 따라 줘야 가능하겠지만... 이 곳에 와 40일째로 접어든 지금시점에서 아직 제대로 살펴본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엘의 입술에선 깊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엘은 이리저리 뒤지던 책 꾸러미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아 높이 쌓여 있는 책 더미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전에 조금씩 해 오던 것처럼 혼자 있는 틈을 이용해 책을 보관하는 창고를 수색했으나 먼지투성이가 됐을 뿐 그녀가 찾는 물건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의기소침해지고 힘이 빠질 대로 빠져 거의 자포자기에 이른 엘은 눈을 지긋이 감고 철추를 매단 듯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바닥에 축 늘어뜨렸다.계속해서 엉뚱한 곳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식이라면 평생을 헤매도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건의 행방만 떠올리면 엘은 숨쉬기가 힘들만큼 가슴이 답답해졌다. 엘은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저녁식사 전에 먼지투성이 몸을 씻으려면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엘이 창고의 문을 닫고 도서관을 반정도 가로 질렀을 때였다. 저 만치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루드비히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혼자 있다 생각하고있던 엘은 순간적으로 몸을 멈칫했다. 지난번 루드비히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이후 그와 처음 대면하는 거였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할 말이 있다는 생각에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휑한 도서관에 규칙적으로 울렸지만, 루드비히는 돌아보지 않았다. 엘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루드비히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서..." 엘은 힘들게 말을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루드비히를 대하는 게 마냥 어색하고 거북했다. "지난번 루드비히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하루도 도서관 일에 빠지면 안 된다고요. 빠지려면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그래서 말입니다만..." "하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엘은 성급하게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무심한 어조의 말에 엘은 잠시 머뭇거리다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사람들을 사귄 적이 거의 없는 엘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우울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며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도서관을 나서려다 루드비히에게 문득 시선을 되돌렸다. 그는 좀 전과 마찬가지로 미동없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고 성큼성큼 루드비히를 향해 다시 다가갔다.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엘은 답답한 마음에 따지는 말투로 강경하게 소리쳤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극도로 잔잔한 깊은 호수를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루드비히가 저에게 화를 내고 있으니까요!"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그가 아무 말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엘은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뾰로통해서 잔뜩 인상을 쓰고 절 아예 외면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이유도 말 안 해주고 팽 토라져서 있으면 누가 벌벌 떨기라도 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다 큰.... 그러니까 책임감 있어야 할 어른이 그렇게 어린아이같은 유치한 행동을 하는 건 보기 흉할 뿐입니다!" 엘의 숨찬 질타가 끝나자 주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엘은 조금도 꿀릴 게 없다는 도전적인 얼굴로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은회색 눈동자에 희미한 반짝임이 스친 순간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제가 뾰로통해져서 인상을 쓰고, 팽 토라져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자신이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귀를 의심하는 듯한 말투였다. "정확히 맞습니다!" 엘은 냉큼 대답했다. 그녀는 반박하려면 해 보라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똑바로 응시했다. 루드비히는 한동안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조각한 듯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찌 생각하면 모욕일 수도 있는 말에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엘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루드비히는 이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쿡쿡 웃고 있었다. 그러자 전염이라도 된 듯, 짐짓 얼굴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던 엘에게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엘과 루드비히는 동시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가득한 은회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남아있는 루드비히가 가까이 오라는 듯 엘을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루드비히를 향해 다가갔다. 루드비히가 엘을 위해 조금 자리를 비켜 주자,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자리잡게 되었다. 하늘 가장자리를 불그스름한 보랏빛으로 뒤덮어 버리고, 땅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엘은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답고, 숭엄하기까지한 광경에 정신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연보라빛으로 변한 하늘이 초저녁 별들을 마법처럼 하나 둘 드러낼 때까지 말없이 서 있었다. 엘은 뺨에 느껴지는 루드비히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엘은 그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루드비히 역시 엘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되돌렸다. 아름답고 특별한 시간을 공유했다는 마음 때문인지, 엘은 루드비히가 새삼스레 가깝게 느껴졌다. "이번 하렐에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루드비히가 은근히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엘은 갑작스런 질문에 머리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요. 리오가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긴 했지만, 딱히 정한 건 없거든요. 그러고보니 루드비히는 아직 한번도 리오를 만난 적이 없겠군요. 참 좋은 친구입니다. 장담하지만 아마 루드비히도 그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리오를 생각하며 엘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일순 서늘하게 빛났지만 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예요. 좀 단순하고 엉뚱한 면도 있습니다만, 그게 오히려 리오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하! 모르긴 몰라도 리오는 밖에 나가면 예쁜 아가씨부터 찾을 겁니다. 그 다음엔 술집에 들어가려 할 거고요. 순서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요. 어쩌면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녀석이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글쎄 저보고..." "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신이 나서 정신없이 떠드는 엘의 말을 루드비히가 조용한 어조로 끊었다. "아, 예 그러십시오. 바쁘실 텐데..." 엘이 얼떨결에 대답했을 때 이미 루드비히는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루드비히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가 막 문을 나서려 할 때 엘이 소리쳤다. 걸음을 멈춘 루드비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 "저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시는군요." 아르벨라가 수줍은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엘이 내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이번이 겨우 세 번째인데요. 또 고생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엘은 아르벨라를 향해 불편해 할 필요없다는 뜻을 담아 씩 웃음을 지었다. 아르벨라가 답례하듯 입술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짓자 그녀의 하얀 치아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사실 엘의 말처럼 아르벨라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넘쳐 나는 음식 중에 이동과 보관이 간편한 걸 골라두었다가 수색하러 나가는 길에 건네주면 됐으니까 말이다. "내일은 좀 양을 넉넉히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모레 하루는 성전을 떠나 있게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말하는 아르벨라의 어조엔 희미한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아르벨라도 이번 하렐에 밖에 나가실 계획이군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자일스가 자신의 힘을 충분히 과시했다는 판단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엘은 아르벨라에게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렉스." 그녀를 부르는 아르벨라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엘은 반쯤 돌렸던 몸을 바로 잡았다.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에게 아르벨라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별일이야 없겠지만....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제 걱정은 마십시오." 엘은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창틀에 서서 밧줄을 움켜쥐는 그녀의 얼굴은 슬쩍 찌푸려져 있었다. 아치형 입구를 나서는 순간 정면에서 세찬 먼지바람이 확 달려들었다. 엘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알렉스! 뭐해? 빨리 가자!" 계단을 달려 내려가며 리오가 크게 소리쳤다. 그는 먼지바람을 맞아도 마냥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야, 리반! 이 굼벵이 같으니! 좀 서두르란 말이야!" 엘과 리반은 서로 마주보고 피식 웃음을 지은 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리오를 따라,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하얀색의 마차엔 아시리움 종단을 상징하는 불꽃과 태양문양이 위아래 대각선 방향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마차만 타고 있으면 무서울 게 없겠는데!" 리오의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붉은 색의 강렬한 문양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뿐더러, 그 들 중 누구도 감히 마차에 접근할 마음을 먹지 못한다는 건 지난번 마차여행을 통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엘은 나란히 앉은 리오와 리반 맞은 편의 탄력있는 가죽의자에 앉아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아시리움에 도착할 때 타고 온 것보다 면적이 조금 넓은 거 빼고는 구분하기 힘들만큼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마차였다. 아시리움 성전측은 말을 원하는 사람에겐 말을, 마차를 원하는 사람에겐 마차를 제공했다. 아직 말을 다루는 데 자신이 없는 엘은, 마차가 낫겠다는 그녀의 의견을 쾌히 받아 준 리오와 리반이 고마울 뿐이었다.하지만 리반은 몰라도 리오는 답답한 마차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엘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 리오가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가장 먼저 할 건 거추장스러운 기사들을 떼버리는 일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리반이 낮게 혀를 차댔다. "왜 기사들을 떼버려야 한다는 거야? 우리 안전을 위해 성전 측에서 일부러 붙여 준 기사들이잖아." "그럼 재미없게 저들과 함께 다니자고? 모처럼의 소중한 자유시간을?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성전 안에 남아있는 게 낫겠다!" 엘과 리반의 반응이 불만스러운지 리오가 입술을 비죽였다.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리오의 희망대로 그들끼리만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에 엘은 씩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금세 얼굴이 밝아진 리오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염려하지마! 내가 이미 치밀한 작전을 세워 놓았으니까! 우린 아마 점심 때쯤 시내에 도착하게 될 거야. 그럼 자연스럽게 식당부터 찾게 되겠지.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식당 안으로 바로 들어가면 되지만, 기사들은 먼저 말부터 처리해야 할 거야. 그들이 밖에서 시간을 끄는 순간 우린 뒷문으로 살짝 빠져 나오면 되는 거야. 어때? 꽤 훌륭한 생각이지?" 희희낙락하는 리오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뒷문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를 빤히 쳐다보던 리반이 한숨을 내쉬며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그거야.... 그러니까...."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길게 늘이던 리오가 끝내 힘없이 입술을 다물었다.리오의 계획대로 되려면 치밀한 작전보다는 요행이 필요하리라.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오를 바라보다 엘은 피식 웃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막 육중한 철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철문을 벗어나자 마치 그녀가 성전에 잡혀 있던 죄수라도 되는 듯이 시원한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깊이 숨을 들이쉬는 엘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나만 믿어. 모든 게 잘 풀릴 테니까. 그런 예감이 들어." 히죽 웃으며 작게 소곤대던 리오가 식당 입구와 연결된 낮은 계단을 씩씩하게 올랐다. 엘과 리반은 어쩔 수 없다는, 조금은 자포 자기한 시선을 교환한 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권하는, 꽤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을 고집스럽게 거절하던 리오가 마침내 선택한 건, 골목 어귀에 위치한, 판자를 잇대서 조잡스럽게 만든,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식당이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리오가 엘의 귀에 대고 속삭인 말에 따르면, 이런 곳에 있는 식당의 말 보관소는 으레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거였다. 과연 그 말이 맞을지 반신반의하며 엘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주인을 붙잡고 몇 마디 나누던 리오가 환하게 웃으며 엘과 리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로 금화를 깨물어 보며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식당주인을 보건 데, 양쪽이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온 것이 분명했다. "빨리 와! 빨리! 이쪽이야!" 다급한 외침을 따라 리반과 엘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리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세 명의 왕자들만 남겨 두고 모조리 말을 맡기러 가는 기사들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거였다.그들보다 한발 늦게 식당 안에 들어온 기사들은 세 사람이 뒤쪽으로 뛰어가는 걸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결사적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뒷문은 쾌쾌한 냄새가 나는 지저분한 부엌을 지나, 잡동사니를 쌓아 둔 작은 창고 한쪽으로 나있었다. 여기저기 놓여 있는 크고 작은 꾸러미들과 그릇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는 단지들을 피해 재빨리 움직이는 건 꽤 골치 아픈 일이었다. 물론 엘은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는 일이 은근히 재미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뒷문을 나와 좁은 골목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리오가 비키라고 고함을 버럭 지르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내주었다. 엘은 옆 골목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손수레를 훌쩍 뛰어넘었다. 숨이 찬 와중에서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맹렬히 달리고 있으려니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리반!" 엘의 앞에서 달리던 리오가 뒤를 돌아다 보며 크게 소리쳤다. 엘은 반사적으로 속도를 줄이며 고개를 돌렸다. 저 만치에서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리반이 보였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리반은 점점 걸음을 늦추더니 급기야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멈춰 서 버렸다. "그렇고 있으면 어떡해? 빨리 와!" 리오가 다급히 소리쳤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서 기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리반은 이제 뛰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처럼 보였다. "난.... 이제....못 가..." 숨을 헐떡이며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너희들...끼리... 가." 리오와 엘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두 명의 기사가 리반을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기사들은 엘과 리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리반처럼 두 사람도 이미 포기했다고 판단했는지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가자, 알렉스!" 리오의 말이 떨어졌을 때, 이미 엘은 달리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그들을 따라오려고 하던 기사들이, 무언가를 밟고 비틀거리는 한 사람을 시작으로 모두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엘과 리오는 소리내어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 "리반은 괜찮을까?" 꼭 그를 배신한 채 버리고 온 것 같아 엘은 은근히 마음이 불편했다. "뭐야?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 느림보 녀석은 돌아가서 편하게 책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더 좋아하고 일을 걸. 이번에도 안 오려고 버둥거리는 리반을 끌고 나오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니 신경 쓸 필요없어."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나서 리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 엘은 물잔을 들어 올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은 작은 식당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겉모습은 도무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만큼 지저분하고 초라해 보였지만, 안은 의외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식당이었다. 음식 맛도 그럭저럭 입에 맞아, 한바탕 땀을 뺀 후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내가 이런 음식을 평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눈앞의 음식들은 예전 같으면 엘이 한번 입에 대보지도 못할 것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엘은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고플 땐 나무뿌리를 캐내 껍질을 벗겨 먹었던 내가 이렇게 바뀌다니.... 지금 내 앞에 할머니가 끓여 주시던 풀뿌리 죽이 있으면 난 그걸 먹을 수 있을까? 혹시 구역질을 하진 않을까? 점점 그녀 자신을 잃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엘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왜 그래, 알렉스?" 리오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리오는 누굴 보고 있을까? 그의 눈엔 고급 옷을 입고 있는 알렉스란 왕자가 비치고 있겠지?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를 걸친 천민 엘이 아니라.... 엘은 자꾸만 이어지는 쓸모없는 상념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 좀 이상하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엘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살피고 있는 리오를 향해 피식 웃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우자. 식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까." 엘이 재빨리 화제를 바꾸자 리오의 얼굴에 금세 활기가 찾아왔다. "골치 아프게 계획은 무슨 계획! 계획같은 건 집어던지고, 적당한 여관이나 하나 잡아 놓은 다음, 여기저기 다니며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자고. 어, 그러고보니 잊어버릴 뻔 했네.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는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는 거야. 그래야 제대로 하렐을 즐길 수 있지. 내가 생각해도 난 머리하나는 정말 좋은 것 같다니까!" 말을 마친 리오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엘도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라는 건 이렇게 편하고 기분 좋은 존재로구나. 리오, 넌 나에게 생긴 첫 번째 친구가 바로 너라는 걸 모르고 있겠지? 물건을 찾는 순간 리오와도 영영 못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잦아들었다. 이러지 말자. 어차피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을 붙잡고 우울해 하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말자. 그냥 내게 찾아온, 친구라는 귀한 행운을 고맙게 받아들이자. 비록 그 끝이 보인다고 해도... 엘은 벌떡 일어나며 활기있게 소리쳤다. "뭐해? 리오! 어서 일어나!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고!" ------------------------------------------------------------------- "이것 좀 봐, 알렉스! 이게 대체 뭐 같으니?" 나무 막대에 척척 걸쳐져 있는 기다란 끈을 유심히 살피는 보라색 눈이 쉴새 없이 반짝였다. 리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우울해 하던 그가 시장을 구경하는 사이 놀랄 정도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자 덩달아 리오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리오는 자신이 왜 이렇게 알렉스에게 신경을 쓰는지, 왜 그의 기분에 따라 자신도 개였다 흐렸다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알렉스가 좋았고,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나 지난번 온실에서 알렉스의 잠든 모습을 본 이후 리오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알렉스의 비단같은 검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릴 때나, 그가 자신을 향해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환하게 웃을 때는, 가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지금처럼 햇빛이 알렉스의 얼굴을 비칠 때면 너무나 부드러워 보이는 볼을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젠장! 정신 차려, 멍청아! 리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알렉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알렉스는 남자야! 남자라고!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남자를 보며 이런 이상한 감정이 생긴 적은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알렉스를 만나기 전에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서서히 미쳐 가고 있는 걸까? 아니, 이미 미쳐 버린 걸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리오, 이게 뭔 지 알았어! 리오! 리오!" "어,어어!" 리오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어?" "어, 그냥... 별거 아니야." 리오는 쑥스러운 마음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이게 뭔 지 알았다니까. 알고 보니 뱀 가죽이었어. 대단하지? 이 긴 가죽을 봐. 어른 키의 열 배도 넘을 것 같아.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뱀이었을 거야. 이름이 뭐 라더라?" 머리를 갸웃거리던 알렉스가 다른 사람과 흥정을 벌이고 있는 주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뱀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 아, 그거요! 칸타라는 놈입니다. 말이 뱀이지 실은 괴물같은 놈입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큰 건 웬만한 집도 무너뜨릴 수 있는 놈입죠. 거기 그 유난히 황금빛이 진한 놈은 사람을 열한 명이나 잡아먹었다고 하더군요." 신이 나서 소리치던 주인이 소매를 건드리는 손님에게 주의를 돌렸다. "우와! 대단하군! 사람까지 잡아먹는 뱀이라니!" 리오는 알렉스의 감탄사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리오, 대체 왜 그래? 너 정말 이상하다! 좀 전에 먹은 음식이 상하기라도 한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렉스가 리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기더니 피식 웃으며 그에게 은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알았다. 너, 저기 저 아가씨들한테 어떻게 접근할까 궁리하고 있었지? 하여튼! 알아줘야 한다니까."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들을 흘끗대며 소곤거리고 있는 젊은 여자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키득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리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꽤 예쁜데? 나이는 너보다 한참 위일 거 같지만, 뭐 어때? 천하의 바람둥이 리오님에게 그게 대수겠어?" 알렉스가 리오를 살살 놀리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야!" "하하하! 얼굴까지 빨개졌네! 왜 안 어울리게 부끄러워하고 그래? 내가 도와줄까? 응? 어느 쪽이 마음에 들어?" "이런 젠장!" 버럭 욕설을 내뱉은 리오가 씩씩대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알렉스가 뒤따라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리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늦췄다. =================================================================단순한 녀석! 어느새 풀어져 헤헤거리고 있는 리오를 보니 엘은 자꾸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인상을 쓰고 괜히 심술을 부리는 그를 버리고, 그냥 혼자 가 버릴까 하다 마음을 고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이 몇 마디 아부성 짙은 말로 부추기자 리오는 거짓말같이 기분을 풀었다. 리오와 함께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엘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시작한다!" 리오의 말에 엘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갖가지 화려한 끈과 천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마차가 멈춰 서더니 문이 열리며 함박 웃는 젊은 남녀가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혼인식 하객들은 나무방울을 흔드는 걸로, 구경꾼들은 환호성으로 그들을 맞아 주었다. 방울은 혼인을 하는 양측 집안에서 만들어 하객들에게 나눠 주는 것으로 신랑과 신부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종의 상징물이었다. 귀족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구슬을 사용했으나 평범한 사람들은 재료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걸 이용해서 만들었다. "저쪽에서도 혼인식이 열리는 것 같은 데? 잘 들어봐, 방울소리 들리지? 리반이 하렐 기간에는 혼인식이 많이 열린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봐." 엘은 리오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온 신경은 생전 처음 보는 이국적인 혼인식에 쏠려 있었다.신랑과 신부가 마주보고 서서 두 손을 맞대더니 그 자세 그대로 천천히 붉은 천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양쪽의 부모들이 나와 여러 개의 색실을 꼬아 만든 줄로 두 사람의 손목을 묶었다. "왜 저러는 거지?" "난들 아나?" 리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좀이 쑤셔 못 견딜 지경인 리오의 상태가 눈에 빤히 보였지만 엘은 모르는 척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신랑 신부가 이마를 맞대고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자 다시 방울소리와 환호성이 주위를 울렸다. 그리고 곧 이어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밝고 경쾌한 음악소리에 사람들이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하나 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렉스, 우리도 춤이나 추자!" 리오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크게 소리쳤다. 하객들과 구경꾼들이 왁자지껄하게 한데 어울려 즐기는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알렉스, 뭐해?" 일어서서 답답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리오를 보며 엘은 얼른 입을 열었다. "리오, 목 마르지 않아?" "마르긴 하지만 그건 먼저 춤을..." "리오! 우리 술집에 가보자!" 리오의 말을 끊으며 엘은 냉큼 소리쳤다. 그리고 그가 반대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어색한 춤 실력을 절대 리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엘로서는 우선 이 곳에서 멀어지는 일이 급선무였다. 얼마간 걷다 속도를 줄이며 슬그머니 동정을 살펴보니 리오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은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온 리오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씩 웃음을 건넸다. ------------------------------------------------------------------- "저기가 가장 괜찮아 보이는데!" 리오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지혜의 샘'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술집이었다. "그래, 괜찮은 것 같긴 해. 하지만 아직 초저녁인데... 술을 마시기는 좀..."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엘을 보며 리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소리쳤다. "나참! 술집에 가자고 한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해야 느긋하게 많이 마실 수 있지. 어떻게 할거야? 들어가는 거지?" 그래, 누가 널 말리겠니? "그래, 그렇지 뭐." 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체념 어린 투로 말했다. 그러나 사실 엘은 술집이란 곳에 은근히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술집은 겉모습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몇 번조차 엘은 제대로 보지 않고 도망치듯이 걸음을 빨리해 지나치곤 했다. 딜람에 하나 밖에 없는 술집은 지금 보고 있는 곳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다 떨어져 나간 간판이 쉴 새없이 삐걱거리는 먼지투성이 술집 주위엔 몸을 비척대는 지저분한 남자들이 하루종일 어슬렁거렸다. 간혹 엘이 그들 눈에 띄게 되면 남자들은 그녀를 향해 끔찍한 욕과 음담패설을 소리치며 낄낄거렸다. 심지어는 엘을 잡으려고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 때마다 엘은 기겁을 해서 전속력으로 도망치곤 했다. 때문에 그녀에게 술집이란 더럽고 불쾌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엘은 리오와 함께 있다면 혐오감을 누르고 용기있게 술집 문을 열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라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십여개의 탁자가 놓여 있는 꽤 넓은 술집 안은 식당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식당과 비교해서 조금 사람이 많고, 더 왁자지껄할 뿐이었다.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리오가 사람들 틈에서 빈자리를 발견하고 엘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의 사람들이 소리내어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심지어는 술잔을 들고 있는 열살 남짓한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한 아이가 몸을 비틀거리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엘은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마침 주문을 끝낸 리오가 그녀를 향해 씩 웃음을 지었다. "뭘 시킨 거야?" "술." 리오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그걸 누가 몰라! 그 술이란 게 대체 무슨 술이냐고?" "나참, 말해 주면 네가 알아? 보아하니 술집도 처음 와 보는 것 같은 데 말이야. 그런 건 이 형님이 알아서 할 테니 넌 느긋하게 즐기기나 하라고." 뻐기는 듯한 리오의 말에 엘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은 무슨 형님? 나이도 동갑이면서!" "뭐?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이가 동갑이라니? 알렉스, 넌 이제 열 일곱이잖아. 난 너보다 무려 한 살이나 많단 말이야." "어,어.... 그렇지! 내가 잠깐 착각했나 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엘은 재빨리 얼버무리며 리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리오는 그녀의 말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황한 그녀를 도우려는지 때마침 탁자에 두 개의 술잔이 놓여졌다. "리오, 술이나 마시자!" 엘은 짐짓 쾌활하게 소리치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호박 빛 액체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불덩어리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귀가 멍해졌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내부로 흘러 들며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엘이 거친 기침을 터뜨리는 순간 귀가 뚫리며 주위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알렉스, 괜찮아?" 거친 기침을 토해내고 있는 엘을 향해 리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무,물론이지."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엘은 씩 웃음을 지었다. 가슴부터 배 전체에 걸친 후끈 달아오른 감각이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몸이 둥둥 뜨는 것 같이 머리가 몽롱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엘은 남아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알렉스, 천천히 마셔!" 리오가 다급히 만류했을 때 이미 엘은 술잔을 비우고 그를 향해 히죽 웃고 있었다. "한잔 더!" 엘이 호기롭게 소리치자마자 손잡이가 달린 작은 항아리를 들고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던 술집주인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리고 따르기 편하게 앞이 뾰족하게 나와 있는 국자로 술을 퍼, 그녀의 잔을 가득 채웠다. 확연히 굼떠 보이는 나른한 동작으로 엘이 술잔에 손을 대려는 순간 리오가 재빨리 팔을 뻗어 잔을 집어올렸다. "리오, 그거 이리 내놔!" 엘이 불만에 차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주위가 상당히 시끄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만 마셔, 알렉스." 리오는 살살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 겨우 한잔 밖에 못 마셨는데! 나 아무렇지도 않아, 리오! 오히려 기분이 아주 좋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술을 마셔 보는 건데 그랬어."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넌 이미 술을 마실만큼 마셨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더 이상은 안 돼!" 리오의 어조는 강경했다.입술을 비죽이며 리오를 노려보던 엘이 갑자기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리오..." 무척이나 심각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만큼이나 엄숙하게 변한 엘의 얼굴을 보며 리오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나 너에게 고백할 게 있어." "어... 뭔데?" 리오의 목소리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네가 꼭 알아야 할 얘기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보며 리오가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을 때, 엘이 냉큼 리오가 들고 있는 술잔을 낚아챘다. "이 술은 내 술이라고!" 리오가 말릴 사이도 없이 단숨에 술을 들이킨 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을 세차게 탁자 위에 내려놨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를 보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웃긴 줄 알아, 리오?" 정신없이 웃고 있는 엘을 보며 리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불붙은 장작 개비 같아!" 기가 막힌 리오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요란한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놀라 고개를 내린 그의 눈에 식탁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리오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머리를 와락 움켜잡았다. ------------------------------------------------------------------- "알렉스, 정신 좀 차려! 어휴! 내가 다시 너하고 술을 마시면 네 동생이다!" 리오는 투덜거리며 축 늘어져 자꾸만 미끄러지려 하는 엘을 추스려 등에 엎었다. 낮에 미리 잡아 놓은 여관이 다행히 술집과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참! 술 두 잔에 사람이 이렇게 뻗을 수 있다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이라도 하듯 등 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들려 왔다. 리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낮에 비해서는 한산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모습이 꽤 많이 눈에 띄었고,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다. 다른 때 같으면 혼자서라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안달이 났을 그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빨리 가서 잠이나 푹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리오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이 걸음을 재촉했다. 리오가 막 여관 입구가 보이는 골목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였다. 눈 앞에 갑자기 사람의 다리가 나타났다. 리오가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움직이자 다리가 그를 따라와 다시 앞을 막아 섰다. 퍼뜩 치켜든 리오의 눈에 위협하는 것처럼 몸을 비딱하게 세우고 정면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였다. 리오가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뒤쪽에 있던 네 명의 남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그를 포위하듯 둘러섰다. "무슨 일이야?"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들을 살펴보며 리오는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리오의 전신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정면에 서 있는 남자가 히죽 웃음을 짓자 다른 남자들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용기가 꽤 가상한데? 말만 잘 들으며 널 해치진 않겠다! 우린 너한테 볼일 없으니까. 네 등에 있는 사람만 곱게 넘겨주면, 넌 손끝하나 다치지 않을 거다!" 알렉스! 이 놈들은 알렉스를 노리고 있구나! 대체 어떤 놈들이지? 놈들 뒤에 자일스가 있는 걸까? 리오는 자신의 내부에서 급속도로 단단하게 뭉쳐지는 긴장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을 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자, 어떻게 하겠나?" 리오는 얼굴을 찡그리고 잠시 생각해 보다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지. 친구를 넘겨주는 비겁한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내 몸이 다치는 건 더더욱 싫으니까." "잘 생각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오는 머리로 그의 가슴을 세차게 들이박았다. 그리고 그가 몸을 비틀거린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빨리 잡아!" 다급한 외침을 들으며 리오는 미친 듯이 달렸다.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나가면 놈들도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등에 엘을 업은 그가 다섯 명의 젊은 남자들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뒤에 바싹 따라붙은 남자가 리오의 등에서 엘을 번쩍 들어 올렸다. 리오는 그 순간 몸을 홱 돌리며 남자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짧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번엔 그의 뒤쪽으로 접근한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리오가 다리를 내리기도 전에 그의 복부에 세찬 발길질이 가해졌다. 엄청난 통증에 숨이 막힌 리오가 허리를 꺾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그의 눈에 축 늘어진 엘을 끌고 가는 남자 두 명이 잡혔다. 리오는 얼굴로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엘에게 닿기 전, 남자 한 명이 그의 두 팔을 잡고 거칠게 등뒤로 꺾어 올렸다. 리오가 격하게 숨을 들이키는 순간 어느새 그를 둘러싸고 있던 네 명의 남자들에게서 무자비한 구타가 퍼부어졌다. 얼마 못 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남자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마구 발길질을 가했다. "이제 그만해! 죽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까!" "알았어, 이 정도 했으면 이 놈도 우리에게 덤빈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겠지." 남자들의 말소리가 저 멀리서 불고 있는 바람소리처럼 아득하게 리오의 귀에 스며들었다. 정신을 잃으면 안돼. 빨리 알렉스를 구해야 돼. 리오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두 손을 받침으로 삼아 힘겹게 상체를 들어 올리고, 바닥에 무릎을 세웠다. 한시라도 빨리 아시리움 성전으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앉은 힘을 짜내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세상이 빙빙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리오는 메슥거리는 속을 무시하고, 다리를 질질 끌며 서너 걸음 움직였다. 후들거리는 무릎이 힘없이 꺾이자 리오는 다시 바닥에 널브러질 수 밖에 없었다. 숨결이 흩어지며 피로 얼룩진 살갗 위로 차가운 전율이 달음박질쳤다. 그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고통없는 망각이 그를 휘감았다. -------------------------------------------------------------------제12장. 삶과 죽음 사이-------------------------------------------------------------------어디선가 숨죽인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엘의 멍한 머리를 파고 들었다. 그 순간 엘은 눈을 번쩍 뜨며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두통이 느껴졌다. 괴로운 신음 소리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방의 벽에 하나씩 매달린 횃불이 넓은 공간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벽은 물론 바닥과 천장까지 검붉은 흙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놀라 숨을 급하게 들이쉬자 갖가지 악취에 섞인 축축한 흙냄새가 맡아졌다. 무엇보다 엘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답답할 정도로 어두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십 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그들은, 엘의 바로 옆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어린아이에서 힘없이 흙 바닥에 몸을 눕힌 노인에 이르기까지 성별은 물론 나이를 불문한 온갖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리오와 마주보고 앉아 술을 마시던 장면이 엘의 머리를 스쳐 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조금도 기억 나지 않았다. 대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리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은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중년여인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가요?" 그녀의 말을 못 들었는지 중년여인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아주머니!" 엘은 목소리를 높이며 좀 더 강경하게 여인의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침내 깊숙이 내려진 여인의 얼굴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 아니,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느리고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엘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뻥 뚫린 시커먼 구멍처럼 보이는 여인의 눈엔 숨막힐 듯 두터운 공포와 절망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엘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 사이, 여인은 천천히 움직여 다시 얼굴을 무릎에 파 묻었다. 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새삼스레 주위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중년여인처럼 어두운 모습으로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느낌이 한층 더해지며 마주 잡은 두 손이 싸늘해졌다.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귀를 파고드는 아이의 흐느낌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신경을 자극했다. 엘은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바르르 떨리는 가냘픈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몸을 움찔한 아이가 빠르게 고개를 치켜 올렸다. 퉁퉁 부어 오른 빨간 눈동자가 경계심을 담아 엘을 바라봤다. 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 머뭇거리다 힘들게 입을 열었다. "....울지 마."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는지 아이의 눈빛이 가라앉으며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니?" 엘은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페,페터요." 코를 훌쩍이던 아이가 소매자락으로 코밑을 세차게 문지르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이름을 갖고 있구나. 난 알렉스라고 해. 으음~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엘은 페터를 향해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웃음에 놀란 페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살이야?" "열 살이에요." 아이는 조금 전보다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니?" 엘은 자신의 질문이 아이의 울음을 되돌리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눈물과 먼지로 얼룩진 작은 얼굴을 살폈다. 엘의 걱정과는 달리 페터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묻는 거예요?" "응, 술 마신 후 잠이 들었나 봐. 깨어나 보니까 이 곳이었고." 엘은 말을 마치고 쑥스러움이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빨리 여기서 나가요! 형은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놀랄 정도로 강경한 어조로 소리친 페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엘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서 일어나요! 서둘러야 해요!" 엘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페터에게 이끌려 엉거주춤 다리를 움직였다. 페터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고 타넘기도 하며 잰걸음을 옮기더니 토굴의 맨 앞에 이르러 서야 멈춰 섰다. 어두워서 미처 몰랐는데 사방의 벽엔 엘의 키를 조금 넘을 높이로 시커멓게 썩은 나무판자가 빙 둘러 처져 있었다. 갑자기 페터가 주먹으로 나무판자를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서 저처럼 해요, 형!" 다급한 외침소리에 이끌려 엘도 팔을 들었다. 쿵쿵 소리가 토굴 안을 울리며 썩은 나무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쇠판에 사슬이 끌리는 것 같은,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별안간 천장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다. 엘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린 순간 험악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시끄러워! 대체 어떤 놈들이 소란을 피우는 거야?" "여기 이 형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요! 내보내 주세요!" 페터의 말에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죄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밝은 역광 때문에 보이지 않던 남자의 모습이 비로소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런 말하는 놈들이 한둘인 줄 알아?" 버럭 소리치는 남자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회색과 검정색이 섞인 목이 빡빡해 보이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그루지아국의 병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형은 정말이라고요! 정말 아무 죄도 없단 말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부탁이에요, 병사님!"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순간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밀려들었다. "여긴 감옥이구나, 그렇지?" 엘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단순히 그녀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예, 맞아요. 바로 슈바니츠 감옥이에요. 그것보다 형, 시간이 없어요! 아무 죄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 형은 금방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되면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엄마한테 제가 돈 벌러 멀리 떠났다고 말 좀 해주세요! 제 집은 찾기 어렵지만 엄마는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바베 시장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신의 축복'이라는 작은 술집이 있거든요! 거기 가서 고르키 부인을 찾으세요! 그분이 바로 ...." 페터의 말을 자르며 천장 위의 문이 열렸다. "누구냐?" 좀 전의 사병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이 형이에요!" 등에 얹어진 페터의 손에 밀려 엘은 엉겁결에, 밝게 내리 꽂히는 빛 속으로 한걸음 나섰다. 그녀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래, 바로 너구나!" 조롱기 섞인 남자의 어조엔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짙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런 데 들어오기 싫으면 높으신 어른께 밉보이지 말았어야지!" 킬킬거리는 웃음에 엘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특별지시가 떨어졌다!" 순간 엘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시리움.... 성전이라 했습니까?" "그래, 만에 하나 기적이 일어나 이 곳에 있는 죄수들이 다 풀려 난다 해도 네 놈만은 절대 여길 나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알았으면 조용히 입 닥치고 있어! 한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내 손으로 네 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테니까!"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문이 세차게 닫혔다. "이젠 방법이 없어요, 형." 페터가 얼어붙은 듯 미동없이 서 있는 엘의 팔을 건드렸다.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짙은 절망이 가득한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터, 우선 좀 앉자.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줘." 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페터를 서둘러 잡아끌었다. "여기가 슈...바니츠 감옥이라고 했니?" "예. 형은 그루지아 사람이 아닌가 봐요. 여기 사람들이라면 슈바니츠 감옥을 모를 수 없을 텐데...." 엘은 뒤이은 페터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감옥이라.... 아시리움 성전에서 특별지시가 떨어졌다고 했지. 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민 걸까? 이번 일의 뒤에도 자일스가 있을까? 자일스의 짓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다른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아시리움 성전이라니! 형은 대체 어떤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거예요?" "글쎄.... 너무 잘나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놈의 비위를 거슬렀다고나 할까." 엘은 냉소적으로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넌 무슨 일로 감옥까지 들어온 거니?" 페터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가 잠시 후 침울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시장에서 먹을 걸 훔쳤어요. 친....구와 함께요." "친구라고? 그럼 친구는 도망가고 너만 잡힌 건가 보구나." "아니오.... 바크가 절 신고했어요. 친구라 생각했던 바크가요. 아마.... 돈 때문일 거예요." 한순간 엘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세상의 추한 면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페터의 눈엔 절망과 자포자기가 담겨 있었다. "그럼 넌....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데?" ".....정말 형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아무 것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일 죽게 되요." "뭐? 좀 자세히 말해봐!" 엘은 경악에 싸여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긴장한 채 숨소리를 죽이며 페터를 응시했다. "내일이 하렐 마지막 날이잖아요. 마지막 날은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던 구경거리가 벌어져요. 바로.... 정화의식이요." "정화의식이라고? 그 정화의식이란 게 죄수들을 죽이는 일을 말하는 거야?" 입술을 바르르 떨며 힘겹게 울음을 참고 있는 페터를 보건 데,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 우린 모두 죽어! 모조리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는 거야!" 갑자기 엘의 뒤쪽에 있던 남자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죽게 될지 아무도 몰라!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지, 쇠꼬챙이에 배를 꿰어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수레에 매달려 사지가 찢겨 나갈지도 몰라!" 남자는 극도의 공포로 인한 광기에 사로잡혀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다. "차라리 누가 나를 좀 죽여 줘! 고통없이 죽고 싶어! 내일이 오기 전에 누가 나 좀 죽여 달라고!" 여기저기서 비명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워! 입 닥치지 못해?" 머리 위에서 발을 구르는 듯한 쿵쿵 소리와 함께 험악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난 굶주린.... 맹수의 먹이가.....되고 싶지 않아! 정말..... 그것만은...." 소리치던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이제... 형도 알았죠?" 페터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을 옷소매로 쓱 문질렀다. "매년 죽음의 방법이 달라져요. 바로 그 순간이.... 죽는 그 순간이 될 때까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어요."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던 거니?" 엘의 목소리는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몰라요.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내려온 건가 봐요. 바이람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러는 거래요. 잘 모르지만 정화의식이란 말이 그런 뜻인가 봐요. 세상을 더럽히는 죄수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뜻이요. 그래서 하렐이 가까워지면 사람들 모두 몸을 사려요. 죄수를 신고하는 사람에겐 돈까지 주니까요. 다른 때 같으면 금세 풀려 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저기 저 아주머니는 물건을 팔고 거스름돈을 잘못 줬다고 잡혀 온 거래요." 페터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삶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지칠 대로 지친 공허한 아이의 눈에서 엘은 시선을 돌렸다. "형....부탁이 있어요." 말을 끊고 잠시 망설이던 페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은 페터가 매우 하기 힘든 얘기를 꺼내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일.... 그러니까 내가 죽을 때요.... 옆에 있어 줄래요? 조,조금 무서워서....그래요....조금...." 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간절한 빛으로 반짝이는 페터의 눈을 들여다봤다. 도저히 그 눈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앞에 두고 엘은 거절의 말 따위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뻣뻣한 동작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형. 만약 형보다 나중에 죽게 되면 그 땐 내가 형 옆에 있어 줄게요." 엘은 페터에게서 눈을 떼어 아른거리는 붉은 횃불에 비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을 둘러싼 절망과 죽음의 향기에 숨이 막혀 왔다. 싫어! 페터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아! 죽어가는 그 애를 보며 내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아!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마음 속에서 미칠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가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웃옷을 더듬는 엘의 손끝이 경련을 일으켰다. 둥근 구슬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엘은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며 목까지 올라온 비명을 삼켰다. ------------------------------------------------------------------- "부르셨습니까?"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한 여인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짝 고개를 치켜든 여인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루드비히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전 성하께서 절 까맣게 잊으신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저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영원히 성하를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그 동안 헤어 나올 수 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하의 부르심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물기 어린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고혹적으로 반짝였다. "벨리타."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예, 성하." "네가 날 알게 된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하느냐?" 벨리타의 입술에 달콤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 정확히 기억합니다. 제가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바이르잔드에서 성하를 처음 뵈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 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성하를 은애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이르잔드.... 정말 오래 됐군." 루드비히는 의자 등받이에 더욱 깊숙이 몸을 묻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삼스레 옛일이 생각나신 겁니까, 성하? 그렇다면 오늘밤 성하를 모실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성하와 함께 옛 추억을 되새기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습니다." 벨리타의 말이 끝나자 루드비히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얼음조각처럼 싸늘히 반짝일 뿐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너에게 한 말 중 지키지 않은 게 있느냐?" "결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내가 널 왜 불렀는지도 알겠군." 벨리타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전 성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알려 주지. 난 네게 분명히 그 소년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엔 네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주겠다고 말했다." 말을 끊은 루드비히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벨리타를 차갑게 응시했다. "이제 기억이 나는가 보군." "성하의 말씀은 당연히 기억합니다. 다만 그토록 괴로운 기억을 들추어 내시는 이유를 모르겠 습니다." 벨리타는 얼굴에 살짝 울상을 지은 채, 애처로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라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네가 내 말을 거역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시리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줄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성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거리낌없는 어조로 말하며 벨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정말 그 아이를 남 다르게 생각하시는군요." 이를 악문 목소리엔 짙은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 두지." 루드비히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벨리타의 눈에 독기가 서리며 몸에 발작적인 경련이 일었다. "예, 제가 그 아이를 슈바니츠에 넘겼습니다, 법황 성하. 몇몇 쓰레기들과 아시리움의 이름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사실 너무나 간단해서 지루할 정도였습니다. 성하께서 제 행동을 모르실 거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전 제 행동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아이가 한낱 비천한 구경거리가 되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꼴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할 말이 아직 남은 것 같군. 계속 해 봐라." 벨리타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과연 성하시군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한 일이 밝혀진 이상, 성하께서 절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시란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자비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성하께선 매달리고 애원하는 이들을 더욱 가혹하게 대하셨죠." 루드비히에게 다가간 벨리타가 그의 옷자락을 들어 살짝 입을 맞추었다.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엔 유혹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법황 성하. 만약 성하께서 그 아이의 목숨을 계속 부지하고 싶으시다면, 저 역시 살려 두셔야 할 겁니다. 제가 목숨을 잃게 되면 그 아이 역시 오래 살아 있진 못할 테니까요." 무표정하던 루드비히의 눈에 한순간 섬광이 번득였다. "알아채신 것 같군요. 예, 성하의 생각이 맞습니다. 제가 만약 죽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제 형제들이 일제히 사냥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물론 감히 아시리움 성전에서 일을 벌이진 않겠지만, 그 아이를 언제까지 성전에 붙들어 두실 수야 없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갑자기 루드비히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오르더니 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즐거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르고 건조한 웃음소리였다.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벨리타의 얼굴에 희미한 불안이 스쳤을 때, 거짓말같이 웃음기를 지운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와 난 똑같이 실수를 저질렀다. 그게 뭔지 아느냐?" 벨리타는 가슴에서부터 서서히 번져 가는 두려움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 지금까지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말입니다." "그럼 내가 말해 주지. 내가 한 실수는 지난번에 널 살려 주었다는 거다. 그리고 네 실수는 감히 나에게 맞서려 한 것이다." 순식간에 벨리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녀가 두려움에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덮쳤다.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 고통없이 끝내 주겠다." 비웃는 어조로 말한 루드비히가 은회색 눈을 싸늘하게 반짝이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자 벨리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한꺼번에 그녀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벨리타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산산 조각나 터져 오르며 붉은 핏줄기를 내뿜었다. ================================================================== "정신이 좀 드나, 젊은이?" 걸걸한 목소리가 몽롱한 머리를 파고 들었다. 리오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뿌옇게 다가드는 세상을 멍하니 응시했다. 깨어 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생명이 다한 심장이 움직임을 멈춰 버린 것 같은 짙은 노곤함이 전신을 무기력하게 늘어뜨렸다. "약을 너무 많이 먹였나?" 다시 한번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오며 이마에 단단하면서 거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자 리오의 머리를 에워싸고 있던 짙고 묵직한 안개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느다랗게 벌어진 그의 시야 사이로 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리오는 번개 맞은 사람처럼 몸을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피가 말라붙은 리오의 입술에서 짧고 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서부터 둘로 쪼개져 나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숨이 막혀 왔다. 리오는 얕고 격한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공기를 빨아들였다. "아직 움직이면 안되네!" 남자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리오의 어깨를 눌렀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인해 거칠고 험악해 보이는 검붉은 얼굴을 보며 리오는 입술을 달싹였다. "빠...리.... 아....시리......." 그의 입술에서 귀를 기울여도 들릴까 말까 할 정도의 미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장 벌떡 일어나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리오는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커다란 고기덩어리로 변한 혀를 입안 가득 물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이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레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넨 편안히 쉬어야 하네. 하마터면 영영 깨어나지도 못할 뻔 했단 말일세. 아직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고. 자, 그러니 다른 일은 깨끗이 잊고 지금은 건강을 되찾는 것만 생각하게." 리오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며 이를 악물고 몸을 버둥댔다. 시야가 급속도로 어두워지며 세상이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허, 이거 참! 이러면 위험하다니까! 할 수 없군."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있는 목덜미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며 리오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 사이로 역겨운 냄새가 나는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 들었다. 숨이 막힌 리오는 반사적으로 액체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 피처럼 붉은 액체가 그의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둔한 감각을 어렴풋이 느끼며 서서히 깊고 불안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피던 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던 절망적인 흐느낌과 거친 욕설, 그리고 간절한 기도소리가 이젠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잦아들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고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 모두 잠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엘은 벽을 마주보고 앉아 신중한 손길로, 옷 안쪽에 견고하게 달아놓았던 가죽 주머니를 떼어 냈다. 싸늘한 손끝에 미약하게나마 따뜻한 온기가 묻어 나왔다. 그녀는 주머니를 단단히 틀어쥐고 다시 한번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엘의 옆에 누워 있던 페터가 코를 훌쩍였다. 몸을 흠칫한 엘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숨기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페터를 확인했을 때 그녀의 입술에서 깊은 숨이 새어 나왔다. 엘은 주머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꺼칠할 정도로 건조하게 메마른 손바닥으로 한껏 말아 감싸 쥐었다. "에나헤스 하르... 델 카시메르..." 떨리는 목소리로 엘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과연 아몬의 말처럼 구슬과 짤막한 주문이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지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엘은 그녀가 가진 마지막 희망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움켜쥐고 있는 구슬에서 별안간 서늘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놀란 엘이 살짝 손바닥을 편 순간 투명한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엘은 재빨리 몸을 웅크리고 손바닥을 오므렸다. 다행히 일부 새어 나간 빛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별안간 구슬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더니, 그와 동시에 회색의 안개같은 것이 피어오르며 춤을 추듯 부드럽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엘이 홀린 듯 그 움직임에 시선을 못박았을 때, 안개가 빠르게 뭉쳐지며 사람의 형체를 잡아갔다.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입술을 벌린 엘 앞에 드디어 아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몬..." 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그의 모습이 눈을 떼는 순간 사라지는 환영일지 모른다는 걱정에 엘은 눈도 한번 깜박이지 않고 아몬을 주시했다.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본 아몬이 엘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 아몬이군요. 정말 아몬이 내게 와 줬군요." 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힘껏 틀어쥐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안도감이 그녀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으음~ 그런데 대체 이 곳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모습은 무슨 감옥 같은데...." "예, 슈바니츠 감옥이래요." 아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완벽하게 침착을 되찾고,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일단 이 곳을 빠져나가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무슨 연유로 이 곳에 갇히게 되셨는지는 그 후에 말씀해 주십시오." 조용하지만 다급한 아몬의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잡으십시오." 아몬의 팔에 손을 얹으려던 엘은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만 이 곳을 탈출하는 건 아니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도망갈 수 있는 거죠?"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확연히 어두워지는 아몬의 얼굴에서 엘은 대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아몬... 안돼요." 아몬은 침울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엘." "하지만 어떻게...." 극히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한 엘은 깊이 숨을 몰아쉬며 어금니를 지긋이 깨물었다. "그럴 순 없어요!" "쉿!"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오자 아몬이 재빨리 주의를 주며 엘의 어깨를 잡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옆에 납작 몸을 엎드렸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의 동태를 살폈다. 몇 군데서 들리던 부스럭거림과 투덜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미안해요, 아몬. 하지만 아몬이 몰라서 그래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날이 밝으면 죽게 되요. 정말이라고요." 엘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필사적인 마음을 담아 아몬을 응시했다. 아몬은 극히 짧은 시간 엘의 눈을 들여다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한 채 조용히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지만..." 말을 이으려던 엘은 힘없이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아몬의 뜻을 바꿀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 일순간 그녀의 말을 빼앗아 갔다. "리자드...." 입속말을 중얼거린 후 엘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리자드를 만나게 해줘요. 지금 리자드 때문에 이러는 거죠? 그가 허락하면 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거죠? 그렇죠? 빨리 리자드에게 데려다 줘요, 아몬." "리자드님께 엘을 안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주인님도 엘을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사실 리자드님이 엘을 호출하셨습니다." 리자드가 자신을 만나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파문처럼 엘의 가슴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심장고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걸 느끼며 단호한 동작으로 아몬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럼 어서 가요." 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몬이 극히 낮은 어조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일순 그녀의 전신에 오싹함이 느껴졌다. 엘이 몸을 부르르 떨었을 때, 불그스름한 빛이 시야를 차단하며 두 사람을 에워쌌다.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지자 엘은 눈을 꼭 감으며 아몬의 팔을 움켜쥐었다. 쏴 하는 시린 바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쳐 갔다. -------------------------------------------------------------------쿠로베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남자의 근엄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남자는 아시리움 성전에서 나왔다는 짧은 말과 함께 한 장의 서류를 보였을 뿐, 자신의 지위며 이름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쿠로베의 입장에서 보면, 남자의 신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남자가 법황의 친필이 적힌 서류를 직접 들고 왔다는 것 하나였다.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지위여하를 떠나 쿠로베에게 가장 중요한 귀빈이 될 수 밖에 없었다.쿠로베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탁자 아래 놓여 있는 두 손을 슬쩍 비벼 댔다. 눈꼬리가 기묘할 정도로 올라간, 교활해 보이는 가느다란 그의 눈은 흥분과 기대로 쉴 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일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할 거라는 건 의심이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이 급박한 변화가 축복으로 다가올지, 아니면 그의 목을 조이는 재앙이 될 지는 아직 모른다. 모든 건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소년이 그를 데리러 간 사병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물론 이번 일이 쿠로베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행운이 되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시리움 성전 어느 높으신 분의 뜻이라는 말에 소년을 덥석 받아들인 건 바로 쿠로베 자신이니까 말이다. 때문에 소년이 이 곳 슈바니츠 안에 있다는 건 그의 목을 내놓고도 장담할 수 있었다. 쿠로베는 다시 한번 굳게 닫혀 있는 문을 슬쩍 살폈다. 왜 이렇게 늦어지나 싶은 마음에 조금씩 조바심이 생겼다. "술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걸 올릴까요?" 남자가 앞에 놓인, 손도 대지 않은 술잔을 흘끗 내려다본 다음, 쿠르베를 향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난 업무수행 중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소." "예, 물론 그러시겠죠." 쿠로베는 얼른 맞장구치며 두툼한 윗입술을 말아 올려 씩 웃음을 지었다. "왜 일이 이렇게 늦어지는 거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극도로 냉정한 남자의 목소리에 쿠로베의 이마에 저절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글쎄요.... 아마 이리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다가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 보십시오." 쿠로베는 금세 화색이 만연해져서 남자를 향해 히죽 웃었다. 그가 웃음기를 채 지우지 않은 얼굴을 문으로 돌렸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벽에 거칠게 부딪쳤다. "크,큰일 났습니다!" 쿠로베가 직접 명령을 내렸던 부관 캠벨이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핏기가 가신 캠벨의 얼굴은 흥분 때문인지 볼 부근에 붉은 홍조가 나타나 있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자를 넘어뜨리며 벌떡 일어선 쿠로베의 부릅뜬 눈에 부관의 얼굴 색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찾아봐!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슈바니츠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라고!" 쿠로베가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예, 알겠습니다!" 몸을 돌려 다급히 뛰어나가는 캠벨의 뒷모습에 대고 쿠로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안내하시오!" 의자에서 일어나는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껏 무표정하기만 했던 남자의 급작스런 변화에 놀라 쿠로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디를 안내하라는 말씀입니까?" "소년이 있다고 호언 장담하던 장소로 날 안내하란 말이오! 어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주위를 울렸다. "하,하지만 거긴 없다고...."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남자가 쿠로베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쿠로베는 부딪칠 듯 다가드는 검붉은 얼굴을 보며 숨막히는 신음을 토했다. "온전히 숨을 쉬며 내일을 맞고 싶다면 내 말 잘 들어! 사지가 잘려 시궁창에 던져지거나 뼈까지 바스러져 개먹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소년을 찾아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시퍼렇게 질린 쿠로베의 넓적한 얼굴은 어느새 끈적이는 축축한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죽기 싫으면 슈바니츠가 아니라 그루지아 국을 통째로 잡아 흔드는 일이 있어도 소년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알겠나?" "예에,예. 알겠습니다." 쿠로베의 얼굴에 나타난 노골적인 두려움을 본 남자가 별안간 팽개치듯 멱살을 놓았다. "이제 좀 상황을 이해한 것 같군! 어서 안내하시오!"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쿠로베가 허겁지겁 문으로 몸을 돌렸다. 뒤를 바짝 따르는 남자의 음울한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만약 그 소년을 못 찾으면 그 즉시 자결을 하시오. 마지막으로 하는 충고요." "도착했습니다, 엘." 조용한 아몬의 목소리에 엘은 악몽에서 깨어나는 기분으로 눈을 떴다. 처음 그녀는 명확하지 않은 물체들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불빛이 비치고 있는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무릎 높이에서 시작되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창문이 한쪽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서늘한 달빛이 바닥에 깔린 양탄자 위에 거리낌없이 쏟아져 내렸다. 달빛은 양탄자 위의 육중한 책상과 그 뒤에 앉은 사람에게도 오묘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 만치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리자드를 발견한 순간 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라자드는 그녀에게 옆모습을 보인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설레는 반가움이 막을 새도 없이 그녀의 내부로 밀려들었다. "리자드님, 엘을 모셔 왔습니다." "알았다." 짤막하게 대답한 리자드가 고개를 천천히 엘에게 돌렸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달음박질하는 심장고동을 느끼며 엘은 리자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또 어떤 말썽을 피운 거냐?" 리자드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썽이라고요?" 리자드를 만난 기쁨을 숨기기 위해 엘은 일부러 발끈한 것처럼 소리쳤다. 그러자 아몬이 재빨리 끼어 들었다. "세세한 내막은 모르나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신 듯 합니다. 슈바니츠 감옥에 갇혀 계셨습니다." "흐흠!" 리자드의 무심한 듯 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엘은 신발 속의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며 그의 시선에 꿋꿋이 맞섰다. "넌 그만 나가 봐라." 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리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몬이 리자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을 한번 바라본 다음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이리 와서 앉아라." 무뚝뚝한 명령이 끝나기도 전에 엘은 그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엘은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조심스러운 눈으로 찬찬히 리자드를 살폈다. 리자드는 그녀의 뇌리에 새겨진 모습 보다 더 어둡고, 더 강해 보였다. 엘의 시선을 잡은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강렬한 흡입력으로 그녀를 빨아들였다. 기억 나지 않는 혼란스러운 꿈 속에서 그의 눈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 슈바니츠엔 무슨 일로 들어가게 된 거냐?" 한동안 흐르던 침묵을 깨며 리자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요." 바보같은 대답이라는 생각에 엘은 입술 안쪽을 슬쩍 깨물었다. "모른다고?" "그래요, 몰라요. 잠에서 깨어 보니 슈바니츠 감옥이었어요." 리자드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샛눈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잠들기 전엔 어디 있었나? 그건 기억이 나겠지." 무심하면서도 은근히 추궁하는 기미가 섞인 어조였다. 그녀를 응시하는 리자드의 불가사의한 눈동자에는 주의 깊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엘은 좀처럼 열리지 않으려는 입술을 어색하게 움직였다. "술...집이요..." 아무 반응이 없는 리자드가 이상해 고개를 들어보니 황당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거기서.... 술을 마신 거냐?" 엘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리자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하지만 정말 조금 마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술을 마시면 그 다음 일들은 전부 깜깜해진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할머니도 그런 말씀은 하신 적이 없는데...." 잔뜩 주눅 든 엘의 목소리는 설상가상 점점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또 리자드도 술에 대해서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고개를 푹 꺾고 있던 엘은 용기를 내어 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이번 일이 내 탓이란 거냐?" "뭐.... 말하자면 그런.... 거지요." 엘은 눈을 치켜 떠 슬쩍 리자드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리자드의 청 회색 눈에 작은 반짝임이 스쳐 갔다.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던 리자드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네 억지가 맞다 해주지. 술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그가 한발 물러서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던 엘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리자드는 그런 엘을 못 본척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었다. "앞으로 술은 한방울도 입에 대지 마라." 조용하면서도 강경한 목소리였다. "한방울도 입에 대지 말라고요? 너무해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지키지 않을 거예요! 또 지킬 수도 없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가 무슨 수로 안다는 거예요?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떡해요?" 엘은 맹렬히 소리쳤다. 솔직히 말해 그녀 스스로도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리자드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항심이 불끈 솟았다. "다음 번엔 어디에서 깨어나고 싶은 거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리자드는 간단한 말로 엘을 제압했다. 그녀는 불만에 찬 거친 숨을 내쉬며 리자드에게 모가 난 시선을 던졌다. 물론 리자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기 싫은 오기가 생긴 엘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리자드를 응시했다. 서로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엷은 긴장이 감돌았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파고들어 마음 깊숙이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에 엘은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한 풀 꺾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입에 대지 않을게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묘한 부드러움이 어린 리자드의 말이 엘의 귀에 스며들었다. "그래, 착하다." 엘은 놀라움에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흐르는 불빛이 리자드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엘은 천천히 움직이는 리자드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했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뭐,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당황한 기미가 역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물건의 행방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느냐고 물었다." 감정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건조한 말투였다.리자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된 순간, 빠르게 뛰고 있던 엘의 가슴고동이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엘은 작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아니오, 아직은 전혀 모르겠어요. 아시리움 성전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요? 정말 어마어마하단 말이에요. 리자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말을 하는 도중 저절로 부풀어오른 방어본능이 엘의 목소리를 점점 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단 말이에요. 하마터면 법황 성하께 들킬 뻔까지...." "법황이라고?" 리자드가 엘의 말을 끊으며 기대고 있던 등을 똑바로 세웠다. 리자드에게서 처음 보는 강한 반응에 놀라 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법황을 만난 적이 있단 말이냐?" "만난 뵌 적은 없어요. 숨어서 얼굴만 잠깐 본 적이 있을 뿐이에요." 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중하게 대답했다. 리자드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리자드는 법황 성하를 뵌 적이 있어요?" 리자드의 입술에 서늘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물론." 무심한 듯한 어조였지만 엘은 본능적으로 리자드의 목소리와 눈에 나타난 강렬한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갖는 어떤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가능한 법황을 멀리해라. 되도록 법황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왜요?" 엘의 얼굴엔 의아심이 어려있었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섣불리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인 말투였다. 엘은 잠시 머뭇거리다 리자드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물건은 법황 성하 주변에 있다고 했잖아요. 리자드가 나한테 직접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성하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는 거예요? 혹시 물건을 포기한다는 뜻이에요?" 마지막 말은 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리자드의 눈에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 엘은 숨을 죽였다. "아니다, 포기란 있을 수 없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 한다." 리자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바람이 엘의 가슴 속을 파고 들 었다. "되도록 법황을 피하라는 뜻이다. 법황과 마주쳐서 도움되는 건 조금도 없을 테니까." 엘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서 있던 리자드의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행동한다면 법황을 만나게 될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엘은 입을 열었다. "날 부른 건 그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몬에게서 리자드가 날 호출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엘의 질문에 리자드는 믿어지지 않게도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놀란 엘이 눈을 몇 번 깜빡인 후에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의 진행을 알고 싶어서이다." 리자드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한데, 엘은 이상하게도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라." 단호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을 때, 엘의 머리에 슈바니츠 감옥에 갇혀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토록 긴박하고 두려웠던 시간을 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경악이 몰려들었다. 자신의 몸이 안전해진 순간 그들이 처한 상황이 전처럼 절박하게 와 닿지 않았다는 짙은 죄책감이 엘의 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금세 파리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는 리자드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리자드, 중요한 일이 있어요! 바보! 어떻게 그 일을 잊고 있었는지! 아,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있잖아요, 리자드! 슈바니츠 감옥이요! 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 모두...." "그들을 구하고 싶다는 거냐?" 리자드가 횡설수설하는 엘의 말허리를 끊으며 조금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어조로 물었다. "그래요!" 흥분한 엘이 숨가쁘게 소리쳤다. "돌아가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그들이 어떻게 되든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소름 끼치도록 무심한 어조였다. "그,그렇지만 사람들이 죽는단 말이에요, 리자드. 살기 위해 발버둥친 죄 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들 중엔 어쩌면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할 만큼의 죄는 아닐 거예요. 아이들도 많아요. 공포에 질려 흐느끼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그것만큼 가슴 아픈 장면은 없을 거예요.... 리자드는 그 모습을 못 봐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엘은 간절한 눈으로 리자드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을 마주보는 리자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 커다란 책장 앞에 늘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리,리자드?" 엘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문이 열리며 아몬이 안으로 들어섰다. "말씀 끝나셨습니까?" "지금 당장 저 아이를 돌려보내라." 고개를 숙인 아몬을 향해 리자드가 무뚝뚝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엘은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부스스 일어났다. "리자드...." 엘은 다시 한번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자드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접근에 엘은 다리에 잔뜩 힘을 줘 뒷걸음치려 하는 스스로를 막았다. 그녀는 리자드가 그녀의 정면에 멈춰 설 때까지 숨을 쉬지 않았다. 엘이 한껏 떨리는 숨을 들이 쉬었을 때, 리자드가 돌조각의 그것처럼 딱딱해 보이는 입술을 움직였다. "잘 들어라,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까. 슈바니츠에 누가 갇혀 있고, 그들이 어떤 죽음을 당할지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동시에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다." "그런 말이 어디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빤히 알면서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걸 모른 척 하라고요?" 엘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간절한 애원이 가득 담긴 눈으로 리자드를 바라봤다. "거긴 날 도와준 아이도 있어요.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난 그 끔찍한 곳에서 미쳐 버렸을 거예요. 이름이 페터라고 하는데....이제 열살 밖에 안된 정말 착한 아이예요. 집엔 몸이 약한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짐수레에 치어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요. 얼마나 착한지.... 눈 앞에 닥친 자신의 죽음보다 가족들을 더 걱정하더라고요." 엘을 바라보는 리자드의 얼굴에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리자드는 그들을 도울 수 있죠? 그렇죠? 그럴 힘이 있죠? 말 안 해도 난 알 수 있어요. 리자드, 부탁이에요....제발..." "엘, 그건..." 두 손을 맞잡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몬이 한 걸음 다가들었다. 그러자 리자드가 번쩍 손을 치켜들어 그를 막았다. "정신 차리고 네가 처한 상황을 직시해라! 가짜 왕자 노릇 조금했다고, 네가 진짜 왕족이라도 된 줄 착각하고 있는 거냐?"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였지만 리자드의 청회색 눈엔 격렬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 엘을 향해 리자드의 힐책이 매섭게 내리 꽂혔다. "넌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왕자 행세를 하는 천민일 뿐이다. 그런 네가 다른 사람들의 생사까지 간섭하려 하다니,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지 않느냐?" "그,그래요, 난 천민일 뿐이에요.... 하지만....." "입 닥치고 내 말부터 들어라." 들릴 듯 말듯 약하게 나온 엘의 말을 리자드가 가차없이 잘랐다. "네가 그 일에 끼어 든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테고, 그 사람들 중엔 세렌국의 알렉시스 왕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네 정체만 밝혀진다면 네 숨통을 끊어 놓는 걸로 간단히 마무리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네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내 일이 방해를 받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리자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지독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휘감았다. 리자드의 무자비한 청회색 눈에 갑작스런 불길이 확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엘은 멍하니 리자드를 바라보다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이상하게 다른 때처럼 소리를 지르며 대들 수 없었다. 목에 커다란 돌이 걸려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단지 그 뿐이었다. 자꾸만 목이 아파 올 뿐 엘의 다른 부분의 감각은 멍하기만 했다. 몸과 마음이 마비된 듯 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난.... 밖에 나가 있을게요." 엘은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고 몸을 돌렸다. 문을 향해 가는 그 짧은 길목이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을 때, 엘의 창백한 볼을 타고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보이는 엘의 등뒤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아몬은 혼란스러운 시선을 리자드에게 돌렸다. 리자드는 어느새 창가에 서서 짙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건해 보이는 그의 어깨 선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듯 보였다. 왜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신 겁니까, 리자드님....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지 않습니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주인에 대한 원망이 아몬의 마음 속에서 조금씩 부풀어올랐다. 리자드의 뒷모습과 상처받은 빛이 역력하던 엘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아몬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전 엘을 모시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리자드님." 그는 불충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 한층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몬...." 아몬이 막 허리를 펴는 순간 리자드가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그를 불렀다. "예, 리자드님." 아몬은 공손히 대답하며 그가 명령을 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리자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무엇인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같지 않은 리자드의 모습에 아몬이 숨을 죽였을 때, 리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다, 나가 봐라!" 한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아몬은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한번 몸을 숙였다. ================================================================제13장. 자각(自覺)-------------------------------------------------------------------그리 밝지 않은 이른 아침 햇살에 머리가 핑 돌자 엘은 비틀거리며 먼지투성이 벽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두 어깨는 황량함과 기진맥진함으로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힘없이 뜨자 다 떨어져 나간 차양이 바람에 이리저리 덜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천조각이 마치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비치고 있는 것 같아 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바로 잡았다. 지금은 이렇게 맥없이 흐느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비참한 자괴감에 싸여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를 미워하고 경멸하는 마음에 뿌리 속까지 잠식당해,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끝내는 벗어날 수 없는 맨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될 것이다. 엘은 말라붙은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지저분한 나무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와 큰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녀는 지금 리오의 행방을 찾는 중이었다. 엘 자신이 슈바니츠 감옥에서 눈을 뜬 것처럼 리오도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예상이 빗나가 리오에게 그 어떤 불길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도 이 거리 어딘 가에서 그녀를 찾고 있으리라. 엘이 방금 전에 문을 나선 술집에선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술집 안의 그 누구도 리오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로 넘쳐 나던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사 람이 있으리라는 희망 자체가 너무 허황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화려한 옷을 입고 있을 걸. 그럼 분명히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었을 텐데....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평민처럼 입어야 한다는 말끝에 자신은 역시 머리가 좋다며 환한 웃음을 터뜨리던 리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좁은 진열장에 갖가지 옷감을 쌓고 있는 젊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혹시 붉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을 가진 열여덟 살 정도되는 소년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키는 저보다 반 뼘 정도 큽니다." 진지한 얼굴로 엘 바라보던 여인이 옷감을 내려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기억이 안 나는군요. 요 근래 사람들을 한둘 봤어야지 기억을 하죠. 도움이 못돼서 미안해요." 엘은 괜찮다는 뜻의 미소를 힘없이 지어 보인 다음 그녀와 리오가 머물기로 했던 여관을 향해 계속 걸음을 옮겼다. 엘이 여관의 간판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숨가쁜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저기요! 잠깐만요!" 고개를 돌린 엘의 눈에 비틀거리며 힘겹게 뛰어오고 있는 젊은 여인이 보였다. 엘은 서둘러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걸음이 왜 그렇게 빨라요? 휴우! 세상에! 가슴이 터질 것 같네!" "저....그런데 무슨 일로...." "다른 게 아니라.... 찾는 사람이 빨간 머리라 했죠?"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에게 자신을 따라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럼 어서 이리 와 봐요! 확실한 건 모르지만 찾는 사람이 맞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어디 다치거나 한건 아니겠죠?" 엘은 여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크게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제가 직접 들은 게 아니라서.... 남편이 우리 집에 가끔 물건을 대주러 오는 아이에게 들었다며 몇 마디 해준 게 생각나서요. 그 아이가 말하길 자기 옆집에 사는 구엔자 노인이 빨간 머리 소년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는데.... 제가 아는 건 이 정도 밖에 없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어서 가 보세요. 위치는 제가 알려 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은 크게 소리치며 여인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슈바니츠 감옥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파리한 얼굴로 낮고 초라한 침상에 똑바로 누워 있는 리오를 발견한 순간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미동없이 우두커니 서서 리오를 내려다봤다. 퉁퉁 부어 오른, 상처 가득한 얼굴에서 잔인하게 퍼부어졌을 폭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아릿함이 느껴졌다. 엘이 자신도 모르게 리오의 헝클어진 앞머리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리오가 눈을 번쩍 뜨며 놀랄 만큼 선명한 푸른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알렉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리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열렸다. "괜찮아?" 엘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리오가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즉시 리오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움직이지마!" 다급하게 소리치며 엘은 서둘러 리오를 침상에 눕혔다. 리오는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 괜찮아?" 숨가쁜 질문에 엘은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보다시피 난 괜찮아. 근데 넌 어떻게 된 거야? 난 바보같이 아무 기억도 안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왜 네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떤 놈들이 널 이렇게 만들었어?" 질문 하나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소리가 높아졌다. 마지막 질문은 거의 악에 받쳐 터져 나온 듯한 새된 고함이었다. "흥분할 필요없어, 알렉스. 난 정말 괜찮으니까. 조금 전까지는 정말 끔찍하게 아팠는데, 널 보니까...." 말끝을 흐리던 리오가 어색하게 엘의 시선을 피했다. "보아하니 내 걱정 꽤나 한 것 같은데? 이거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너보다야 예쁜 여자가 해주는 걱정이 몇 배는 더 좋을 테지만." 리오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힘이 다 빠져나간 듯이 약한 목소리였지만,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는 리오를 보니, 엘은 깊은 안도감에 한순간 코끝이 찡할 정도였다. "하긴, 내 꼴을 생각하면 지금 내 앞에 너만 있는 게 천만다행이지. 쳇! 고대하고 고대하던 해방의 시간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엘은 리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침상 아래 반쯤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집안을 빙 둘러봤다. 어디에 쓰이는지 짐작도 안 되는 잡다한 물건들이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도 비좁을 것 같은 집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꽤나 신경 써서 청소하고 정리한 기미가 역력하지만 워낙 공간이 협소하고, 또 그 곳을 채운 물건들이 낡고 보잘 것 없어 슬쩍 봐서는 매우 혼란스럽고 지저분해 보였다. "좀 정신없지? 그래도 내 생명을 살려 준 고마운 은인의 집이야." "여긴 구엔자라는 노인의 집이라 하던데.... 그 노인이 널 구한 거야?" "구엔자? 이름까진 몰랐어.... 근데 노인이라고? 노인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말을 멈춘 리오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알렉스, 네 몰골이 지금 어떤 줄이나 알아? 완전히 거렁뱅이로 보여. 며칠 동안 음식이라곤 구경도 못해보고 물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거렁뱅이." 그러고 보니 만 하루가 넘도록 먹은 것이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엘이 입에 댄 거라곤 손을 씻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 죽은 벌레가 둥둥 떠있던 탁한 물 두 모금이 전부였다. "그러는 넌 좀 나아보이는 줄 알아?" 엘은 말을 끝내며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지만 리오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정말 무슨 일 있었어? 평소의 너 같지 않아." 엘의 얼굴에 어려있던 어색한 웃음기가 서서히, 그러나 철저하게 사그라졌다. 잠시 망설이던 엘은 걱정스런 빛이 가득한 리오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오.... 만약....네가 지키기 힘든 약속을 했다면.....어떻게 하겠어?" "지키기 힘든 약속이라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리오가 되물었다. 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키기가 정말 힘든.... 자꾸 피하고만 싶은....그런 약속말이야."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 그게 아무리 힘든 거라도 자신의 입에서 나와 약속이란 것으로 한번 정해진 이상 말이야." 리오의 말은 거리낌이 없었다.엘은 고개를 숙이고 마음 속으로 리오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리오. 고민할 필요도 없는 거였어. 리오, 나 다녀 올 데가 있어." "잠깐 만, 알렉스!" 성큼성큼 걸어 벌써 문을 나서려 하는 엘을 향해 리오가 고통으로 인해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소리쳤다. "조금 있으면 아시리움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옴짝달싹 못하는 나대신 내 은인이 대신 아시리움 성전에 도움을 청하러 갔거든.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났으니까 아마 우리를 도와 줄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오고 있는 중일 거야." 엘은 리오에게 뒷모습을 향한 채 문 턱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면 너부터 성전으로 돌아가, 리오. 난 나중에 갈 테니까."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고개를 돌려 리오를 바라보는 엘의 얼굴엔 진한 피로와 무거운 마음의 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약속을 지키러....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든." "무슨 약속인데? 알렉스!" 그녀를 부르는 리오의 목소리를 뒤로 한채 엘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슈바니츠 감옥 입구엔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벌써부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엘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흔들리며, 높이 치솟은 담에 가려져 뾰족한 위 부분만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검붉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내리쬐는 아침 햇살 아래의 슈바니츠 감옥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피비린내로 주위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폭력의 그림자가 슈바니츠 감옥을 휘감고 있었다. 그림자는 주위의 밝은 빛과 대조되어 더욱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정말 견딜 수 있을까? 사람들이....페터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죽음의 순간, 자신 옆에 있어 달라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이대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아시리움으로 돌아가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었다.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흐느낌도 잔인하게 파고들던 리자드의 매서운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거야? 거치적거리게!" 몸이 거칠게 떠 밀리며 험악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점점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엘은 사람들의 힘에 휩쓸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검붉은 슈바니츠 감옥을 끼고 돌아가니 놀랄 정도로 가파른 나무 계단이 벽처럼 눈앞을 가로 막았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계단을 올라가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나무계단이 요란하게 삐꺽거렸다. 엘은 사람들 무리에 섞여 계단을 오른 후 크게 숨을 들이쉬며 구부러졌던 허리를 폈다. 그 순간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배어 나왔다. 음식과 휴식이 부족하다는 것 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사방을 둘러봤다. 계단 저 아래 그리 넓지 않은 공터 주위에, 이중으로 둥글게 새워진 굵은 철망과 나무 막이 보였다. 엘이 머뭇거린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미 사람들이 대부분의 계단을 차지해버렸다. 엘은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어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여기저기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소리와 험악한 욕설이 들려 왔다. 엘은 계단 아래 흙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묵직한 머리를 무릎에 파 묻었다. 그녀를 둘러싼 소음들이 악몽 속 괴물의 으르렁거림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지독한 피곤과 절망에 빠져 무기력해진 엘은 마치 늪에 몸을 던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옅은 선잠에 빠져 있던 엘은 쇠줄이 긁히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녀를 깨운 소리의 진원지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사람들의 모습만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엘은 좁은 틈새에서 힘들게 몸을 비틀어 다리를 세웠다. 어느새 그녀의 맞은 편, 슈바니츠 감옥과 잇닿는 곳에 마련된 3층 높이의 상석에도 오십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중꾼으로 보이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떠나, 그들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만으로도 재력과 권력을 지닌 특권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요란한 함성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슈바니츠 감옥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흥분으로 들끓는 사람들 앞으로 남루하고 초라한 죄수들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는 사람들이 뒤에서 밀려드는 바람에 엘은 점점 앞쪽으로 나아가 급기야 철망에 바싹 달라붙게 되었다. 엘은 철망을 움켜잡으며 죄수들 사이에서 페터의 모습을 찾았다. 무장한 간수에게 떠밀려 비틀거리는 페터를 발견한 순간 엘은 통증이 느껴질 만큼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서 페터의 모습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갑자기 주위를 진동시키는 거센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사람들의 이목이 단번에 상석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에게 몰려들었다. "쿠로베 관장님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화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분의 뜻에 따라 정화의식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부족하나마 성스러운 의식을 훌륭히 마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정화의식을 통해 진정한 영혼의 성찰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성스러운 정화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러 댔다. 그 환호성 사이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외침이 섞여 들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덤불에 불이 번지듯 눈 깜짝할 사이 대다수 사람들이 같은 말을 소리치자 엘의 귀에 비로소 짧은 두 개의 단어가 들려 왔다. "삶과 죽음!" "삶과 죽음!"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엘은 즉시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를 향해 큰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삶과 죽음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걸 모른단 말이야?"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엘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긴 요샌 이걸 보려고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심심찮게 들어오니까. 골치 아프게 물어 볼 생각말고 눈이나 크게 뜨고 있으라고!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남자가 히죽 웃음을 보이더니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다섯 명의 간수들이 죄수들을 열 개 정도의 무리로 나누고 있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초췌한 얼굴의 중년여인이 다리를 심하게 절며 다른 무리 쪽으로 옮겨가려 했다. 그것을 본 간수 한 명이 들고 있던 철제장갑으로 여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간수가 무어라 소리지르며 위협적인 몸짓을 하자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허겁지겁 기어서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죄수의 부축을 받으며 여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얼굴을 흥건히 물들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붉은 피가 사람들을 한층 흥분으로 몰아넣은 듯 폭발할 듯한 환호성이 주위를 들끓게 했다. 엘은 어금니를 질끈 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참을 수 없는 격한 진저리가 그녀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북소리가 공기를 울리자 급속도로 소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작은 수군거림만이 남겨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에 한순간 엘의 귀에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주위를 가득 채운 건 엄밀히 말해 고요가 아니었다. 그건 터질 듯 부풀어오른 흥분과 광기였다. "시작해라!" 좀 전에 인사말을 했던 상석의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간수들이 상석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그들 중 두 사람이 가장 앞에 있는 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세 명의 간수들은 한쪽에 놓여 있는 철제우리로 나머지 사람들을 밀어 넣고 있었다. 물건을 고르기라도 하듯 잠시 죄수들을 둘러보던 간수 한 명이 작은 남자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상석 바로 아래 놓여 있는 단위에 세웠다. "페터...." 엘의 입술에서 신음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단 위에 서서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아이는 다름 아닌 페터였다.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어서 선택해라!" 페터를 단 위에 세운 간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페터의 앞엔 각각 붉은 색과 푸른 색으로 칠해진 두 개의 문이 우뚝 서 있었다. "한쪽엔 굶주린 맹수 떼가 있지만, 다른 한쪽은 텅 비어있다. 만약 네가 비어있는 쪽을 선택하면 넌 살아서 슈바니츠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속한 무리의 사람들은 네 선택으로 인해 맹수의 먹이가 되는 거다." 말을 마친 간수가 페터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고무된 듯 다시 입을 여는 간수의 얼굴엔 묘한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다시 말해주지. 만약 네가 맹수 떼를 택하면 넌 죽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곳을 나갈 수 있단 말이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자, 어서 선택해라!" 한층 숨을 죽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페터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악의에 찬 호기심에 숨이 막히려 하자 엘은 얕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잔인한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메슥거렸다. 멍하니 서서 죄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볼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함에 엘의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이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서 선택해!" 작은 석상처럼 뻣뻣이 서 있는 페터를 향해 다른 간수가 험악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페터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얼마나 격렬하게 움직이는지 작은 몸 전체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였다. "꼭 너같은 어리석은 놈이 있더군. 선택을 안 하면 너는 물론 다른 사람까지 모조리 죽음을 맞게 되는 거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을 거냐?" 비웃음이 가득한 간수의 말이 끝나는 순간 페터가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몸이 금세 바스러질 것같이 격렬하게 떨렸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이 불만 섞인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서 끌어내라!" 상석에서 짜증 섞인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간수가 페터를 거칠게 잡아챘다. "파,파랑이요! 파랑이요!" 비명같은 페터의 외침이 공기를 갈랐다.그 즉시 간수가 페터를 다시 단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간수 한 명은 이미 푸른색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위를 내리누르는 묵직한 침묵을 뚫고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걸쇠와 이어진 쇠사슬이 풀리고, 곧 이어 푸른 색 나무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보인 건 위협적으로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는 다섯 마리의 맹수였다. 즉시 사람들에게서 감탄사가 쏟아졌다. "칼라카! 칼라카다!" 엘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칼라카라는 맹수는 그 이름 만큼이나 생김새도 낯설었다. 크기는 엘이 몇 번 본 적이 있는 회색 곰과 비슷했는데, 누런 색의 털에 짙은 갈색의 타원형 무늬가 몸 전체에 나 있었다. 그런데 맹수 무리 중 유독 몸체가 큰 한 마리만은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다. 좁은 우리에 갇혀 굶주림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칼라카들이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쇠창살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흉포한 울음소리와 함께 자신들을 가둔 쇠 우리라도 단번에 끊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른 손가락만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멍하니 서 있던 페터가 무릎을 꺾으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잔인하게도 그런 페터의 뒤에선 간수들이 페터의 선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풀어 주고 있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나무막의 문이 열리더니, 계단을 올라온 간수가 열쇠를 꺼내 엘 바로 옆에 나 있는 쇠창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엘은 딱딱하게 몸을 굳힌 채 간수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뒷머리가 쭈뼛 곤두섰다. 그녀의 팔다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순간 엘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떠 밀린 듯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영 페터를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함 이었다. 엘은 간수를 밀치고 쇠창살을 통과해 나무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간수들의 고함소리와 구경꾼들의 괴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지만 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격한 숨소리만이 엘의 귀를 가득 울리고 있었다. "페터!" 찢어질 듯한 그녀의 외침에 페터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엘은 단에서 떨어지듯 내려서는 작은 몸을 와락 움켜잡았다. 놀란 간수들이 입을 딱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다급한 눈을 스쳐 갔다. 빨리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야 해! 그들 사이로 섞여 들면 쉽게 잡진 못할 거야! 엘은 페터를 잡은 오른팔에 잔뜩 힘을 준 채 미친 듯이 문을 향해 달렸다. "잡아!" 단 위에서 누군가 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무막 문 옆에 있던 간수 한 명이 허리에 벨트처럼 두르고 있던 쇠사슬을 꺼내 들며 문을 막아 섰다. 위협적으로 쇠사슬을 허공에 빙빙 돌리던 간수가 때마침 다가선 엘을 향해 거칠게 휘둘렀다. 엘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젖히며 몸을 옆으로 회전시켰다. 쇠사슬이 일으킨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귀를 살짝 스쳐 갔다. 엘이 옆에서 달려드는 다른 간수의 존재를 눈치챈 순간 피할 겨를도 없이 다시 한번 쇠사슬이 그녀의 머리 쪽으로 날아왔다. "형!" 페터의 고함소리와 함께 한순간 엘의 시야가 검붉게 변했다.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축축하고 거친 흙이 볼에 느껴졌다. 엘은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머리를 들었다. 머리가 산산 조각나는 것 같은 참기 힘든 고통에 악 다문 이 사이로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듯한 액체의 감촉이 생생히 다가들었다. 엘은 눈으로 스며들려는 피를 옷소매로 닦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바로 그 때 그녀의 목을 휘감는 거칠면서도 싸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순간 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조여 들고 있는 쇠사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엘의 목을 자르기라도 하려는 듯 간수가 쇠사슬을 맹렬히 조여 왔다. 숨이 막힌 엘이 목에 감긴 쇠사슬을 풀기 위해 몸부림치자 그녀 주위로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내 손으로 네 놈의 숨통을 끊어 주겠다!" 엘의 목을 조이고 있던 간수가 진한 비웃음을 흘리며 만족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만해라!"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엘의 목에서 쇠사슬이 풀렸다. 엘은 몸을 잔뜩 숙이고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쇠사슬에 쓸린 목과 손등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시간 끌지 말고 정화의식을 빨리 진행시켜라! 의식을 망치려 한 저 애송이 놈도 칼라카의 먹이로 던져 줘라!" 간수들이 상석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일사불란하게 나무막과 철망 사이의 계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 이어 나무 문이 닫히며 견고한 걸쇠가 채워졌다. "형...." 울먹이는 페터의 목소리와 함께 팔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힘없이 치켜든 그녀의 시야 가득, 눈물과 먼지로 얼룩진 작은 얼굴이 보였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일그러뜨린 페터의 볼을 타고 다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눈물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엘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살아 남는다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살아 남는다면 풀어 준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잠시 동안 침묵이 휩쓸고 간 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엘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상석의 남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거 재미있겠군. 그 말대로 해주는 거 어떻겠소?"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뒤이어 다른 사람들까지 일제히 말을 들어주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좋다! 네 말대로 둘 중 하나라도 살아 남는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색다른 재미를 즐기게 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흥분에 찬 환호성을 질렀다. 엘은 엉거주춤 일어서는 페터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잘 들어, 페터! 겁내지 말고 여기 몸을 구부리고 앉아. 아니 그렇게 말고." 그녀는 다급한 어조로 말하며 페터의 몸을 바로 잡아 주었다. "좀 아플 거야! 그래도 절대 움직이면 안돼! 알았지?" 입술을 꼭 다문 페터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칼라카를 풀어라!" 엘이 흠칫하며,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폈을 때 상석 가장자리에 서 있던 간수 한 명이 우리의 문을 지탱해주던 굵은 밧줄을 단숨에 끊었다. 쇠창살로 된 우리 문이 털썩 바닥으로 떨어지며 뿌연 먼지를 피어 올렸다. 엘은 우리 밖으로 뛰어나오는 칼라카를 돌아보지 않았다. 첫 번째 칼라카가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엘은 무릎을 꿇고 등을 구부리고 있는 페터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볼에 부딪치는 바람을 느끼며 페터의 작은 등을 밟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팔을 쭉 뻗어 나무막 윗 부분을 재빨리 잡아챘다.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엄청난 도약에 사람들에게서 요란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엘은 서둘러 몸을 들어 올려 나무 막 위에 걸터앉았다. 얼어붙은 듯 뻣뻣이 서 있는 페터 주위로 칼라카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페터." 엘은 칼라카들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 작은 소리를 페터를 불렀다. 그리고 페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페터는 잔뜩 긴장한 눈으로 칼라카들을 슬금슬금 살피며, 발꿈치를 들고 팔을 높이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손끝조차 스칠 수 없었다. 엘이 다리에 잔뜩 힘을 줘 몸을 지탱한 후, 최대한 힘껏 팔을 뻗어 봐도 손가락 하나만큼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힘내요! 조금만 더!"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힘내라!" "힘내! 포기하지 말고, 살아 남아!" 놀랍게도 사람들이 그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요란한 외침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오히려 칼라카들을 흥분시켜 엘과 페터를 더 깊은 위험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페터의 정면에 있는 칼라카가 이빨을 드러내며 흉포하게 으르렁거리더니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를 것 같이 몸을 낮게 도사렸다. 격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떨리는 두 사람의 손끝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아차 하는 순간 중심을 읽은 엘은 나무막을 놓치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바로 그 때 칼라카가 페터를 향해 맹렬히 뛰어올랐다. 엘은 본능적으로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페터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녀와 칼라카가 거의 동시에 페터에게 닿았다. 엘은 칼라카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부딪치며 재빨리 페터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칼라카의 날카로운 발톱이 천을 찢고 엘의 살갗을 깊게 할퀴고 지나갔다. 거칠게 바닥을 굴러 나무막에 세차게 부딪친 엘은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팔에 난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피냄새를 맡은 칼라카들이 더 한층 흥분해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엘이 다급한 손길로 페터를 그녀의 등뒤로 밀어 넣는 순간, 꼼짝 않고 엘을 견제하고 있던 칼라카 다섯 마리가 사방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안돼! 그러지 마!" 엘의 입술에서 숨막히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극도의 두려움에 몰린 엘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볼을 스쳐 갔다. 놀라 번쩍 뜬 그녀의 눈이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엘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얼어붙은 채 자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칼라카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붉은 눈동자 속에 어려 있는 경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칼라카들을 지배했던 살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놀란 사람들의 외침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엘은 멍하던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끼며,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가장 가까이 서 있는 하얀 칼라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칼라카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부정 할 수 없는 강한 본능이, 그녀와 칼라카들을 잇고 있는 확고한 정신적 교감(交感)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눈처럼 하얀 전신을 햇빛에 반사시키고 있는 칼라카에게 바짝 다가간 엘은 손을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칼라카의 머리로 가져갔다. 엘이 손가락을 스치는 힘차고 뜨거운 숨결을 느낀 순간 칼라카가 그녀의 손에 머리를 기대며 슬슬 비비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샘을 내기라도 하듯 엘의 주위를 둘러싼 다른 칼라카들 역시 그녀의 몸에 장난스럽게 코를 들이밀었다. 자신을 둘러싼 맹수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넌 누구냐? 정체가 뭐냐?" "칼라카를 길들이는 건 불가능해! 저건 눈속임일 뿐이야!" "어떻게 한 거냐? 어떻게 칼라카를 단번에 길들인 거냐?" 경악에 찬 외침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정적을 무너뜨렸다. 엘은 칼라카 머리에 손을 얹은 자세 그대로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꼭 다물고 서 있었다.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막막할 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에 그녀 자신조차 어안이 벙벙한데 그들의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선 안 된다는 리자드의 매서운 경고가 떠오르자 말은커녕 숨쉬기도 힘들만큼 목이 죄어들었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고?" 악을 쓰듯 버럭 터져 나온 고함에 놀라 엘이 몸을 움찔하자, 칼라카들이 소리친 남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찔끔한 남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홱 젖혔고, 비틀거리다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을 때,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갑자기 층계 위로 오십 명에 달하는 기사들과 다섯 명의 고위사제들을 대동한 아시리움 종단의 대사제가 나타난 것이다.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비켜 주는 사람들 사이를 위엄있게 지나온 대사제가 드디어 상단에 이르렀다. 그러자 입을 딱 벌리고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모든 그루지아국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오늘 이 시간부터 정화의식을 전면 금지한다! 정화의식을 하려 드는 자는 본인은 물론 일가 전부에게 참형이 내려질 것이다! 이 모든 건 성스러운 법황 성하의 뜻이시니 경배로써 받들라!" 대사제의 말이 엄숙하게 주위를 울렸다.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제 비천한 목숨을 받쳐 성스러우신 법황 성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바닥에 넙죽 엎드린 남자가 바르르 떨리는 어조로 소리쳤다. 근엄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던 대사제가 마침내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깜박였을 때 다시 한번 대사제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알렉시스 왕자를 뫼셔라! 안전하고 신속하게!" ------------------------------------------------------------------- "이제 됐습니다." 의관사제의 말에 엘은 말아 올린 팔 소매를 아래로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뼈는 상하지 않았지만 꽤 깊은 상처라 한동안은 움직이기도 힘들고, 고통도 심하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날, 빠짐없이 치료실로 오셔서 상처에 유용한 약초를 붙이시고, 또 제가 드리는 탕약을 빠짐없이 드신다면 보름쯤 후에는 그런 대로 불편하지 않게 쓸 수 있으실 겁니다. 으음~ 검술같은 과격한 행동을 하시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머리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며칠 간은 두통에 시달리시게 될 겁니다. 참! 피가 말라붙은 머리카락을 씻으실 땐 절대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리오는 좀 어떻습니까?" 의관사제의 말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엘이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그분은 상당히 심하게 다치셨더군요. 하마터면 목숨이 위험하실 수도...." "예?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엘은 의관사제의 말을 끊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머리에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런! 조심하십시오!" 의관사제가 머리를 감싸고 있는 엘을 부축해 얼른 의자에 앉혔다. "친구 분은 괜찮습니다. 많이 다치시긴 했지만 위기는 일단 넘기신 상태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긴 해도 그런대로 치료를 잘 받으셨더군요. 지금은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제가 책임지고 건강을 되찾게 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제님." 엘은 고마움이 감긴 눈으로 의관사제를 바라보다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전 이만 나갈 테니 편안히 쉬십시오."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던 의관사제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엘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몹시 망설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 왕자께선 어쩌다 이런 몹쓸 일을 당하시게 된 겁니까? 듣자 하니 슈바니츠 감옥에서 다치셨다던데...." "그,글쎄요. 어쩌다 그런 건진 저도 잘...." 엘은 대충 얼버무리며 쑥스러운 얼굴로 사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린 채 미심쩍은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엘은 재빨리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척했다. 그러자 사제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사제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의관사제가 엉거주춤 엘을 돌아봤다. "저.... 법황 성하께선...." "예? 뭐라고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엘이 소리를 높이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아닙니다! 아닙니다! 잠시 말이 헛나왔습니다! 못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간절히 애원하는 의관사제의 모습에 엘은 점점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의구심은 들었지만 필사적이기까지 한, 사제에게 엘은 서둘러 대답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제의 얼굴은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고개까지 숙이며 연신 고맙다고 하는 사제를 바라보며 엘은 피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을 내리누르는 짙은 피로감에 전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천근만근 늘어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엘은 비틀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대로 엎어져 시트를 덮기도 전에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침대 옆에 멈춰 서서 엘을 바라보는 루드비히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파리한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고, 채 씻겨지지 않은 핏자국이 볼과 귀에 남아있었다. 또한 목엔 가는 띠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피멍이 선명했고, 오른쪽 팔 소매엔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잠시 동안 미동없이 서서 만신창이가 다된 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따라 미끄러졌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엘의 어깨를 휘감고 내려와 고르게 움직이는 가슴 위에 비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엘의 귓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머리카락의 감촉을 음미하듯 그의 손길은 매우 느리고 부드러웠다. 루드비히의 손길을 느끼기라도 한 듯, 긴 속눈썹 위 가느다란 실핏줄이 그려진 엘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머리카락을 떠난 루드비히의 손이 그녀의 무겁게 감겨진 눈꺼풀 아래 검은 그늘로 다 가들었다. 연약한 피부를 부드럽게 쓸던 손끝에 나비날개처럼 바르르 떠는 속눈썹이 스치자 루드비히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어렸다. 잠시 후 엘의 눈을 떠나 낮은 허공에 잠시 멈춰 있던 루드비히의 손이 이번엔 그녀의 뺨으로 미끄러졌다. 루드비히가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을 때, 엘이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조용히 손을 거둬들이는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리자드..." 한숨소리처럼 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루드비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에, 폭풍이 시작되는 잿빛 하늘처럼 어두운 빛이 타올랐다. 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임없이 서 있던 그가 천천히 엘을 향해 얼굴을 내렸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감촉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은 손가락을 움찔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안개가 낀 듯 뿌연 세상 한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루드비히...." "편히 주무십시오....엘...." 부드럽고 낮은 속삭임을 들으며 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귀를 울려왔다. 그 소리에 섞여 무엇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엘은 돌덩이를 매단 듯 무겁게 늘어지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가느다랗게 열린 두 눈에 루드비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꿈이야.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깊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엘은 편안한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제14장. 그림자 밟기------------------------------------------------------------------- "이제야 좀 인간답게 보인다." "인간답게라고? 느낌으론 인간이 아니라 썩은 통나무가 된 것 같다!" 푸념조로 말하며 리오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으음! 다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엘은 소리내어 웃으며 침대 옆에 놓여진 네 개의 의자 중 하나에 앉았다. "인기 만점인 리오를 문병하러 벌써 여러 명이 다녀간 모양이군." "그렇지, 뭐." 리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의 얼굴을 살폈다. "넌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지긋지긋한 두통 때문에 펄쩍펄쩍 뛸 수는 없지만 천천히 걸어다닐 순 있어. 걸음걸이는 죽을 때가 다된 노인 같지만 말이야. 여기 오는 도중엔 50년 후의 내 모습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노인이 썩은 통나무보다야 낫잖아." 투덜대는 리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넌 언제쯤이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꽤 오래 있어야 하나 봐. 어디가 파열되고, 또 무슨 무슨 뼈가 부러졌다고 하는데, 내가 그런걸 알아야 말이지. 하지만 낑낑대고 기를 쓰면 일어나 앉는 건 지금도 가능해. 휴우~ 내 꼴이 이게 뭔 지..... 천하의 리오님이 말이야." 농담조로 말을 끝낸 리오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침대에 바짝 다가앉았다. "이제 말 좀 해 봐. 그 술집에서 내가 정신을 잃은 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여관으로 가는 도중에 껄렁껄렁한 놈들 다섯이 길을 가로막더라고. 처음엔 단순한 건달인 줄 알았는데, 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너란 걸 알게 되니까 나도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때 일이 떠오르는지 리오의 얼굴에 슬쩍 그림자가 덮였다. "그래, 네 말대로 평범한 건달은 아닐 거야. 날 슈바니츠에 넘기기까지 했으니까."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깊이 고민할 필요가 뭐 있어? 당연히 자일스 짓일 게 뻔한데." "그런 거겠지? 자일스의 계략이 틀림없겠지?" 엘은 확인하듯 재차 반문했다. 만약 이번 일을 꾸민 게 자일스라면 엘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정체와 목적이 확실한 적은 그만큼 경계하기도 쉬운 법이었다. 하지만 만약 보이지 않는 적이 존재한다면 그건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엘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그녀의 뒤쪽은 항상 무방비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당연하지! 자일스밖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더군다나 이번 일엔 아시리움 성전까지 끌어들인 모양이던데. 그런 짓은 감히 아무나 못하지. 자일스처럼 완전히 돌았거나 확실한 바람막이가 없다면 말이야." 자신하는 리오의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오의 말이 맞아. 자일스가 꾸민 일이 분명해. 어떤 의심도 들어갈 자리가 없는 명백한 진실이 틀림없어. 깊은 잠에서 눈을 뜨는 순간 그녀에게 서늘하게 다가왔던 막연한 불안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건 그렇고, 알렉스, 너에 대해 이상한 말이 들리던데.... 너도 알고 있어?" "어떤 말?" 반문하긴 했지만 엘은 리오가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 슈바니츠 감옥에서 열린 정화의식에서 말이야. 네가 맨손으로 굶주린 칼라카 떼를 애완동물 다르듯 간단히 제압했다던 데..... 그게 사실이야?" 리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내가 칼라카를? 그런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돈단 말이야?" 엘은 짐짓 정색을 하고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나도 그 말 들었을 때 정말 황당했다고! 그래서 쓸데없는 소문내지 말라고 면박을 줬지! 그게 말이 돼? 칼라카가 얼마나 사나운데! 칼라카 떼는커녕 한 마리만 있어도 팔다리 멀쩡한 몸으로 살아 있는 게 기적일걸! 난 몇 년 전에 한번 칼라카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이빨하며 발톱, 정말 상상을 초월하더라! 특히 살벌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은 보기만해도 오금이 저리더라고." 엘은 리오의 말을 흘려 들으며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스치던 칼라카의 숨결과 거친 털의 감촉이 떠오르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런 육체적인 감각과는 비할 수 없이 엘의 뇌리를 꽉 채우고 있는 건 꽁꽁 막혀 있던 문이 어느 순간 활짝 열린 것 같이 들이닥치던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마치 엘이 칼라카가 된 듯, 아니 칼라카가 그녀 자신이 된 듯 완벽하게 그들 사이를 잇는 강렬한 영혼의 교류. 만약 그 연결선이 어느 한순간이라도 끊어졌다면 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알렉스, 내 말 들었어? 알렉스!" "리오!" 엘이 별안간 그를 크게 부르자 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미안하지만 난 이만 가 봐야겠어. 급한 볼일이 있는데 깜박 잊고 있었거든.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났어." 엘은 말을 하면서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 알렉스! 무슨 일인데 그래? 조금만 더 있다 식사나 같이 하자!" 리오가 다급히 소리치자 문을 반쯤 열고 있던 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오..." 엘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부르자 리오가 커다랗게 뜬 눈을 끔벅였다. "말은 고맙지만 식사는 따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멀건 국물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음식은 누가 뭐라도 씹히는 맛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를 노려보는 리오를 향해 엘은 씩 웃어 보인 후 문을 나섰다. -------------------------------------------------------------------갖가지 화려한 빛깔의 들꽃이 미풍에 가볍게 흔들리는 들판에서, 엘은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 바퀴 빙 돌며 주위를 살폈다.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지만 엘은 잠시 망설이다 왼쪽에 위치한, 들판보다 더 한층 풍부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늘 높이 힘차게 솟은 나무들은 눈부신 햇살을 머금으며 생기를 내뿜고 있었고, 나무 아래 풍요로운 검은 흙 위엔 갖가지 키 작은 초록 식물들이 빛과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엘은 그리 깊지 않은 숲 언저리의 아름드리 나무 아래 주저 앉았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청명한 하늘이 밝은 햇빛과 섞여 부서져 내렸다. 엘은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쾌한 바람이 그녀의 피부를 기분 좋게 스쳐 갔다. 엘은 칼라카와 이어졌던 정신적 교감을 다시 한번 느껴 보길 원했다. 지금은 꿈결같기만 한, 아련한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뇌어 보고 싶었다. 깊은 심호흡을 천천히 반복할 때마다 엘의 정신이 현실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감각은 놀랄 만큼 맑아지고 선명해지고 있었다. 묵직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집요한 두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온갖 향기가 가슴 가득 맡아졌다. 피부에 부서지는 빛의 파편,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조각난 그림자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비로우면서도 너무나 편안한 감각에 엘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때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깊이 몰입해 있던 엘은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며 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엘의 보라색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새까맣게 몰려든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의 곤충 떼였다. 요란한 날개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거세게 귀를 파고 들었다. 곤충들이 그녀의 머리며 얼굴, 목, 팔다리 할 것 없이 몸 전체에 미친 듯이 부딪쳐 왔다. 일순간 경악에 싸여 얼어붙었던 엘은 본능적으로 격렬히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숨막히는 헐떡임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 이 터져 나왔다. 미칠 듯한 공포가 엘의 이성을 완벽하게 마비시켰다. 갑자기 무엇인가 강한 힘이 그녀를 꽉 움켜잡았다. 엘은 발작적인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쉿! 진정하십시오. 이제 안전합니다." 낮고 부드러운 어조의 낯익은 목소리가 엘의 귓가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감싸고 있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엘은 충격이 채 가라앉지 않은 뻣뻣한 동작으로, 단단한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는 잠시동안 커다랗게 열린 눈으로, 신비롭게 반짝이는 루드비히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미동없이 서 있었다. 격렬히 요동 치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에 따라 엘을 감싸고 있는 시간도 조금씩 움직임을 늦추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를 남긴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좀 앉으십시오."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유영하던 바람이 한달음에 달려온 것 같이 성큼 다가서며 마비된 듯한 머리를 깨웠다.엘은 그가 이끄는 대로 나무 아래 엉거주춤 앉았다. 곧 이어 루드비히가 그녀 옆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앞을 응시한 채 잠시동안 그렇게 앉아 있기만 했다. 이성을 잃게 했던 공포와 흥분이 가라앉자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창피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엘은 옆 눈으로 흘끗거리며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폈다 "어렸을 때...." 잔뜩 쉰 목소리가 나오자 엘은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렸을 때, 숲속에서.... 시체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벌에 쏘여 그렇게 된 거였어요. 죽은 아이는 제 또래의 여자 아이였는데.... 처음엔 진흙투성이 아이가 잠들어 있는 줄 알고 다가갔습니다. 그,그런데...." 제어할 수 없는 몸서리가 엘의 몸을 격렬히 흔들고 지나갔다. "그 아이 몸 전체에..... 버,벌레들이.... 잔뜩 달라붙어.... 몸을 파고들며....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얼마나.... 정말 얼마나 끔찍한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전 천천히 뒷걸음친 다음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어요. 가슴이 터질 듯 했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어요. 멈추면 벌레들이 내 몸에 달라붙어 꿈틀거리며 안으로 파고들것 같아서.... 그 때부터였을 겁니다. 곤충이나 벌레를.....무서워 하게 된 게.... 한두 마리는 괜찮지만.... 수가 많아지면 조금 전처럼..... 이성을 잃게...." 나지막이 이어지던 엘의 목소리가 힘없이 사그라졌다.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말한 루드비히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 속에는 언제나 온갖 두려움이 존재하니까요." 말을 멈춘 루드비히가 깊은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은회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려움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막연한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듯 했지만 잡을 새도 없이 엘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려움이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죽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드럽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를 보자 신기하게도 엘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럼 루드비히도 두려워하는 게 있나요?" 그녀의 질문이 떨어지자 엉뚱하게도 루드비히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웃지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루드비히는 무얼 두려워합니까?" "안타깝게도 전 두려워하는 게 없습니다." 엘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조금이라도 무서운 게 있을 겁니다!" 엘은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기대에 차 있는 엘을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루드비히에게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다. "제게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그토록 불만이십니까?" 슬쩍 미간을 찌푸린 루드비히였으나 그의 은회색 눈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지!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서요?" "무엇이든 예외는 존재하는 법입니다." 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기라도 한 듯 루드비히가 매끄럽게 응수했다. "너무나 겸손하신 루드비히도 그 예외에 속하니 참으로 행복하시겠습니다." 엘은 잔뜩 비꼬고 나서 일부러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쿡쿡거리던 루드비히가 급기야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줌의 그늘도 없이 밝게 웃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생각을 하며 엘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개인이 가진 두려움이 제각각 인 것처럼, 그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 또한 저마다 다른 색깔을 가집니다." 어느새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루드비히가 조용히 말했다.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엘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는 방법과 인내심을 갖고 때를 기다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섣불리 두려움을 다루려 하다간 더 강한 두려움에 삼켜질 수도 있으니까요. 모든 건 거기에 맞는 적절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당장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실제로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지연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말을 멈추고 그녀를 향하는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그윽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동하려 하지 말고 오로지 지켜봐야만 할 관조(觀照)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자가 두려움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육체와 영혼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두 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육체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혼일 뿐입니다." 엘은 천천히 루드비히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저 흐릿하게 마음에 와 닿을 뿐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었다. "루드비히는 제가 지금 당장 두려움에 맞서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하는군요." 루드비히는 그녀의 단정적인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앞으론 섣불리 곤충이나 동물을 불러 모으지 마십시오." 평온한 말투와는 정반대인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엘은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지,지금 무슨 말씀을...." 가까스로 움직인 입술에서 그녀가 듣기에도 어색한 목소리가 나왔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짧은 미소가 스쳐 갔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힘, 제어할 수 없는 힘은 그만큼 위험한 법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 하는지, 아니면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하는지 엘로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제가 안다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십니까?" "아,아니....저...그게...." 혼란에 싸인 엘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자 루드비히의 눈에 미묘한 빛이 반짝였다. 갑자기 루드비히가 팔을 뻗어 엘의 손목을 잡았다. 놀란 엘이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그의 손가락에 슬쩍 힘이 가해졌다. "상처가 다시 벌어졌습니다." 핏자국이 선명하게 배어있는 소매를 바라보며 루드비히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군요." 엘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후 심드렁하게 말하며 다시 한번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지도 않으셨습니까?" "아픔이야 당연히 느끼지만 이까짓 것은....." 퉁명스러움을 담고 있던 엘의 목소리가 별안간 뚝 끊겼다.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의 소매를 걷어 올리는 루드비히의 매끄러운 손놀림을 바라봤다. "지,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새된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루드비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옷소매를 엘의 어깨 부근까지 걷어 올린 그는 이제 그녀의 팔 위 부분을 온통 감싸고 있는 피가 밴 하얀 천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의관 사제님이 절대 풀지 말라고 하셨는데!" 소리 높여 나온 불만 역시 루드비히를 막진 못했다. 이윽고 천이 흘러내리며 그 사이로 하얀 피부와 움푹 패여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흉칙한 상처가 드러났다. "남의 상처 구경하는 게 취미십니까?" 은근히 비꼬는 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루드비히의 손바닥이 그녀의 상처를 덮었다. 일순 살갗을 태우기라도 할 듯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루드비히!" 상처에 사람의 손은 독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던 엘은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다시 한번 힘껏 팔을 잡아당기자 루드비히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손목을 놔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엉뚱한 분이라 해도 어떻게...." 엘은 투덜거리며 소매를 내리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팔을 와락 눈 가까이 가져갔다. 자신의 팔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보던 그녀는 급기야 상처가 있던 부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기까지 했다. 고통은커녕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작은 상처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엘의 눈엔 숨길 수 없는 경탄이 가득 차 있었다. "루드비히가.... 정말...." "이걸로 서로의 비밀 하나씩을 나눠 가진 겁니다." "정말 루드비히가 제 상처를 감쪽같이 낫게 해준 거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대단해요, 루드비히! 정말 대단합니다!" 엘은 계속 감탄성을 연발하며 매끈한 팔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 "의관 사제님이 제 팔을 보시면 그야말로 뒤로 넘어가시겠군요. 직접 옆에서 지켜 본 저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은데 그 분은 오죽하실까요!" 가라앉을 줄 모르는 그녀의 흥분에 루드비히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참, 리오!" 루드비히에게 상기된 얼굴을 돌린 엘이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루드비히! 제 친구 리오는 저 보다 훨씬 많이 다쳤습니다. 불쌍하게도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의관사제님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루드비히, 그래서 말인데...." 엘은 말을 끊고, 몸을 일으키는 루드비히에게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루드비히, 무슨 일입니까?" 그녀를 내려다보는 은회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발했다. "둘 만의 비밀이란 걸 잊으셨습니까?" 엘이 말을 꺼낼 시간도 주지 않고 루드비히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크게 소리쳤다. "비밀은 꼭 지키겠습니다!" 루드비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루드비히!" 엘은 악을 쓰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다시 한번 루드비히를 소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몸을 돌리더니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오른쪽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루드비히의 엉뚱한 행동에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한번 그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무슨 깊은 뜻이 있는 행동인가? 혹시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건가? 어리둥절한 상태로 엘은 팔을 들어 어색하게 옆 머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손가락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황급히 손가락을 떼어 보니 흑갈색의 진흙같이 끈적이는 것이 묻어 있었다. 이게 뭐지? 손가락 끝으로 정체불명의 물질을 비벼 보던 엘은 이상한 느낌에 손을 코 가까이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 즉시 불쾌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킬 듯 몰려들었다. 그것이 어떤 동물의 배변이라는 걸 깨달은 엘이 오만상을 찌푸렸을 때, 루드비히가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약이 바싹 오른 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제 손으로 루드비히의 머리에도 같은 걸 정성껏 발라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성큼성큼 옮기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자신의 옆 머리를 한번 쓱 쓸더니 그녀를 향해 아무 것도 묻지 않은 깨끗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씩씩거리는 엘의 거친 숨소리 위로 다시 한번 그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별안간 문이 거칠게 열리자, 시녀들과 희롱을 주고 받으며 낄낄대던 왕자들이 불쾌한 얼굴을 문으로 돌렸다. 그 순간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자세를 바로 잡았고, 얼굴이 시뻘게진 시녀들은 허겁지겁 열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래, 기껏 모여서 한다는 게 천한 것들 몸뚱이 더듬는 짓이냐?" 자일스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알비노 역시 자일스처럼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왕자들의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슬쩍 찌푸려졌다.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일스를 따라다니며 비위를 맞췄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나라에선 최고의 대우를 받는 왕족이었다. 때문에 자신들을 대하는 자일스의 거친 태도가 거슬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감히 밖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왕자들의 불만은 요 근래 들어 점점 부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거들먹거리는 알비노만큼은 그들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일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상석에 앉아 있던 슈벤국의 요하임 왕자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잔뜩 인상을 쓴 자일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난번 아르벨라를 이용해 만든 함정에서 알렉스가 별다른 피해없이 금세 풀려 난 사건 이후로 그의 얼굴은 항상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더군다나 하렐 때, 아시리움 성전 밖에서 알렉스를 확실히 손보아 주리라던 기대가 어이없이 무너져 버리자, 자일스는 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 상태에 몰려 있었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알렉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시장바닥을 헤매던 일을 생각하면 분노를 못이긴 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젠장! 이런 한심한 것들하고 있으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버럭 소리친 자일스가 앞에 있던 탁자를 힘껏 걷어찼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딪친 자신의 발가락만 고통스러울 뿐 육중한 탁자는 꼼짝도 안 하자 성질이 폭발한 자일스가 벌떡 일어나 의자를 들어 세차게 탁자를 내려쳤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의자가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광기에 단단히 사로잡힌 사람처럼 자일스는 연거푸 의자를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돌연한 자일스의 폭력에 놀라 허겁지겁 몸을 피한 왕자들의 얼굴엔 저마다 두려움이 나타나 있었다. 씩씩대며 부러진 의자다리를 바닥에 팽개친 자일스가 숨을 몰아쉬며 다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앉지 않고!" 험악한 고함에 왕자들이 서둘러 자일스의 명령을 따랐다. "빨리 생각 좀 해 봐라! 멍청한 머리를 움직여 놈을 확실히 거꾸러뜨릴 묘안을 말하란 말이다!" 자일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하임이 반사적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일스의 부릅뜬 눈이 당장 그에게 날아오자 찔끔한 요하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그런데 자일스 전하께선 왜 그렇게 알렉스를 미워하시는 겁니까? 전 아무래도 이해가 안됩니다." 요하임의 배다른 형제인 브레인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일스의 화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눈치없는 질문을 한 그에게 다른 왕자들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눈치없고 머리가 좀 떨어지는 브레인은 종종 자일스의 성질을 건드려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곤 했다. 가라앉아 가던 자일스의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눈썹이 험악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빠드득 이 가는 소리에 몸을 흠칫한 왕자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자일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자일스는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든지 가늘게 입술을 실룩거릴 뿐이었다. "그 놈, 세렌의 그 애송이 놈은 감히 날 능멸했다! 그까짓 놈이 감히 나를! 장차 리아잔의 황제가 될 이 자일스를 능멸했단 말이다!" 천장을 뚫을 듯 맹렬히 터져 나오던 목소리가 갑자기 이를 악문 낮은 중얼거림으로 변했다. "내가 당한 수모를 천배, 만배로 돌려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말 거다. 한줌의 자비도 없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죽게 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홀린 듯이 자일스를 바라보던 왕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비노조차 겁을 먹고 질린 얼굴로 자일스를 살피고 있었다. 자일스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숨막히는 증오의 파장이 그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 증오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짙은 안도감이 서로를 향하는 왕자들의 눈마다 빠짐없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요...자일스 전하. 전하의 말씀을 들어보니 전하께서 알렉스 놈을 만난 건 아시리움에 도착하기 이전인 것 같은 데....." 얼굴을 찌푸린 자일스가 간단히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요하임의 얼굴에 의아하다는 표정이 어렸다. "혹시 이 곳으로 오는 도중에 놈을 만난 겁니까, 전하?" "그래!" 자일스가 귀찮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군요. 세렌국 왕자가 왜 리아잔 제국에 있었던 건지.... " 요하임의 말이 끝나자 자일스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생각에 잠긴 그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자일스 전하!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합니다!" 알비노가 별안간 크게 소리쳤다. "그래, 이상한 일이야. 세렌국에서 떠났을 놈이 왜 반대 방향인 리아잔 제국을 통해 아시리움으로 온 걸까? 더군다나 그 숲은 국경지대와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자일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것 외에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일스 전하. 이 곳에 오기 전에 알렉스를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얘기는 종종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세렌국의 다섯 번째 왕자는 트레비아 연주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나 외모는 그저 평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알렉스의 형인 레드먼을 만난 적이 있는데 흑발을 제외하곤 알렉스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고 말입니다." 요하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음~ 그랬단 말이지?" 말을 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자일스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무언가 있어. 석연치 않은 뭔가가..... 그게 뭘까?" 퍼뜩 고개를 치켜 든 자일스가 처음 의문을 제기했던 요하임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발과 눈치가 빠른 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거다!" "알겠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자일스 전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자일스의 옅은 초록빛 눈동자가 음습한 기운을 발하며 쉴 새 없이 번득였다. -------------------------------------------------------------------절제와 금욕, 그리고 깨달음의 기간인 바이람에 접어들자 아시리움 성전의 기본적인 생활도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엘은 과거 제대로 바이람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많은 걸 알 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이람 기간엔 혼인과 남녀의 육체관계를 금하고, 육류와 술을 금하고, 또 해가 지면 큰 소리로 웃거나 말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시리움 성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대다수의 왕족들이 숨막힐 듯 낮게 가라앉은 성전 분위기를 불편해 했고, 육류란 육류는 모조리 사라진- 술은 바이람 기간이 아닌 평소에도 아시리움 성전에서 금하는 품목이었다- 식탁을 앞에 두고 슬며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엘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엘은 그 정도쯤이야 눈 하 나 깜박하지 않고 흔쾌히 수용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지나치게 화려한 색깔의 옷과 장신구를 자재해야 하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선 안되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하고, 또 교육시간과 지루한 설교시간이 좀 더 길어지는 등 열 가지 정도의 제재와 변화가 있었지만 이런 것들 역시 엘을 괴롭히지는 못했다. 리오는 불평 한마디없이 담담히 받아들이는 엘을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대단하다고 여러 번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듯 무던한 엘에게도 정말 참기 힘든 것이 하나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어떤 종류의 무기도 손에 대서는 안 된다는 금계(禁戒)였다. 바이람 기간동안, 엘이 갖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리던 검술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아찔한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바이람의 금계를 어길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잡다한 풍문을 꿰고 있는 리오의 말에 따르면, 금계를 어기다 걸린 사람은 그 즉시 아시리움 성전측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금된다 한다. 대사제들과 몇몇 고위사제들만 알고 있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 밀폐된 방은 갖가지 고문 도구로 꽉차 있는데, 만약 금계를 어겨 그 방에 발을 들여놓으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는 거였다. 엘과 함께 리오의 말을 들은 리반은 어이없고 근거없는 헛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나도 믿진 않지만, 만약 그런 비밀의 방이 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지금 내 처지야말로 그 끔찍하다는 방에 갇혀 있는 사람과 별다를 거 없잖아? 꼼짝도 못하고 하루종일 허리가 쑤실 정도로 누워 있어야 하다니! 이런 풀죽이나 빨아 먹으며! 바이람이라 고기는 못 먹어도 이로 씹을 수 있는 음식은 주어야 하는 거 아냐? 솔직히 이걸 음식이라 부르는 건 음식을 모욕하는 거라고! 쳇! 이러다간 정말 이가 몽땅 빠져 버리든지 내 몸 자체가 풀죽이 돼 버릴 것 같다니까."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리오는 그 사이사이 빠르게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엘과 리반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다 서로 피식 웃음을 나눴다. 리오는 며칠 새 많이 회복되어 이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비록 걸쭉한 유동식을 먹으며 쉴 새 없이 투덜대긴 했지만 떠 먹여 주는 물도 겨우겨우 삼키던 때와 비교해선 그야말로 장족의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연회엔 참석할 수 있겠지? 응? 그 때까진 완쾌되겠지?" "그럼!" 기대에 찬 리오의 질문에 엘은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엔 어느새 서늘한 불안이 차 오르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보낸 날들이 하루하루 쌓이자 어느 새 연회가 보름 앞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시리움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 그럭저럭 반이 지나 버렸네. 세월 한번 빠르다. 처음 올 때는 열흘도 못 배길 것 같았는데...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성전 생활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좀 답답하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야." 피식거리며 리오의 말을 듣고 있던 리반이 입을 열었다. "그러셔? 오기 전엔 차라리 죽겠다고 펄펄 뛰며 생난리를 부리더니.... 알렉스, 리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 글쎄, 아시리움에 안가겠다고...." "리반, 입 다물어! 한마디라도 더 하면 죽을 줄 알아!" 리오가 리반의 말허리를 자르며 험악하게 소리쳤다. "말해 봐, 리반! 재미있을 것 같은 데, 어서!" 엘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리오를 흘끗거리며 리반을 재촉했다. 그러자 실실 웃고 있던 리반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가장 먼저 한 건...." "리반! 이 나쁜 자식! 여기서 나가! 네 방으로 가버려!" 맹렬히 으르렁거리며 리오가 독기 어린 눈으로 리반을 노려봤다. 하지만 리반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자꾸 그러면 알렉스한테 페트라 사건도 말한다!" 리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놀랍게도 리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엘은 화를 못 참고 씨근거리고 있는 리오에게서,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을 리반에게 돌렸다. 눈이 마주친 리반이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계속해서 말해줄게. 리오가 아시리움 성전에 가지 않기 위해 처음 시도한 방법은 아슬아슬한 첨탑에 올라가 뛰어내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거였어. 그것 때문에 그야말로 왕궁이 발칵 뒤집어졌다니까! 아버님은 물론 어머님까지 뛰어나오셔서 제발 빨리 내려오라고 고함을 지르셨어. 아마 체르몬국 역사상 그렇게 목이 터져라 소리친 왕비님은 우리 어머님이 유일하실 거야." 엘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리오를 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지었다. 얼굴이 붉어진 리오가 쑥스러운 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부모님께선 부드럽게 타이르기도 하시고, 또 무섭게 야단도 쳐 보시며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셨어. 하지만 아시리움에 가는 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 하셨지. 사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고. 그런데 고집쟁이 리오가 아시리움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정을 해줘야 내려가겠다 고 끝까지 고집을 피우자, 화가 나신 부모님께선 거기서 살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불쌍한 리오는 그 후 얼마 안 있다 자기 발로 내려왔고." 엘과 리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움켜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엘은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그 다음 방법은 뭐야?" "그 다음 작전은 일명 '없는 병 만들기' 였어. 알렉스 너는 모르겠지만, 리오는 벌꿀만 먹으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며 고열이 나거든. 그렇게 한번 앓고 나면 꽤 오랫동안 기력을 찾기 위해 요양 비슷한 걸 해야 하지. 그것 이외에는 감기도 한번 걸린 적이 없을 만큼 튼튼한 리오는 당연히 자신에겐 독약과 같은 벌꿀을 이용해 위기를 극복하려 한 거야. 하지만 차마 진짜 벌꿀은 먹을 수 없었지." "젠장! 이제 그만해!" 더 이상 참지 못한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리반과 엘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리오를 못 본척 했다. "그래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왕자 리오님은 창고에서 벌꿀을 항아리 째 훔쳤어. 그리고 반 정도 덜어 다른 곳에 숨긴 다음, 역시 훔친 붉은 물감으로 몸에 정성껏 반점을 그린 거야. 난 리오가 한 자리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는 건 그 때 처음 봤다니까. 자신 만만한 리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어. 꿀이 아니고 파라잼인 줄 알고 먹었다는 그럴듯한 핑계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지. 사실 파라잼은 겉으로 보기엔 꼭 꿀 같거든. 아무튼 리오는 손에 닿지 않은 부분의 반점은 내 손까지 빌려 완벽하게 준비한 다음, 침대에 올라가 끙끙 앓는 흉내를 냈어." 리오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리반이 말을 멈추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다음 얘기가 못내 궁금한 엘은 서둘러 리반을 재촉했다. "당연히 다시 한번 왕궁이 발칵 뒤집혔지. 왕궁의 어의란 어의는 죄다 모여들었고. 근데 그들 중 누구도 리오의 병에 이렇다 할 치료방법을 내놓지 못했어.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정원사가 만들어 놓은 특제비료 때문이었어. 리오가 벌꿀인 줄 알고 훔친 게 바로 그 비료였거든. 비료의 재료 중엔 사람을 미치게 할 수도 있는 메지브 뿌리가 들어있었던 거야. 경악하신 부모님께선 체르몬국의 내노라 하는 치료사들을 죄다 불러 모으셨지. 그래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됐느냐 하면, 일이 너무 커지자 겁이 덜컥 난 리오가 깨끗이 목욕을 한 다음, 은밀하게 부모님을 만나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는 거야." 엘과 리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자, 얼굴이 시뻘게진 리오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희들 지금 아픈 사람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둘 다 내 방에서 나가! 지금 당장!" "리오,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러다가 상처라도 덧나면 어쩌려고 그래?" "리반 말이 맞아, 리오. 우린 신경쓰지 말고, 넌 편안히 안정이나 취하고 있어." 엘은 리반의 뒤를 이어 리오를 살살 약 올리며 쿡쿡 웃어 댔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전에 말한 페트라 사건은...." "알렉스, 너 아시리움에서 나가게 되면 우리하고 같이 체르몬 국에 가지 않을래?" 리오가 허겁지겁 엘의 말을 자르며 소리를 높였다. "어.... 그,글쎄... 힘들 것 같은데...." 한순간 말문이 막힌 엘은 리오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왜? 급하게 세렌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라도 있어? 아니면 향수병에라도 걸린 거야? 내가 보기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별일 아니라면 같이 가자, 알렉스. 부모님도 널 보면 무척 좋아하실 거야. 지난번에 말한 하데크도 소개시켜 줄게. 왜 있잖아, 검술시합에서 부러진 검으로 싸워 우승했다던 그 기사말이야." "앞일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래."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으며 엘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알렉스!" 리오의 목소리를 못들은 척하고 엘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더 이상은 리오를 속이며 진솔하게 반짝이는 그의 파란 눈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엘은 몸도 돌리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참기 힘들고 답답해도 지금은 건강을 되찾는 일만 생각해, 리오." "저 녀석, 좀 이상해." 닫힌 문을 바라보며 리오가 굳은 어조로 말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리반은 말을 마친 후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넌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야?" 리반의 무심한 반응에 화가 치민 리오가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한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더니 현기증이 느껴지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놀란 리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리오! 왜 그래? 어디 아파? 지금 가서 의관사제님을 모시고 올게! 조금만 참아!" "그럴 필요없어. 괜찮아졌으니까." 맥없이 중얼거리며 리오가 천천히 침대에 몸을 눕혔다. 방을 반 정도 가로질렀던 리반이 근심 어린 얼굴로 되돌아왔다. "정말 괜찮아?" "그래, 이젠 아무렇지 않아." "그러게, 왜 그렇게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 거야? 아까 널 지나치게 놀린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고, 넌 알렉스와 연관된 거라면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더라." 한숨 돌린 리반이 조금 퉁명스럽게 말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알렉스한테 유난히 신경을 쓴다고? 난 그냥 알렉스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 걱정이 돼서 그런 거야! 친구라면 그 정도 신경은 쓸 수 있는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별 뜻없이 나온 말에 정색을 한 채 강경하게 소리치는 리오를 보며 리반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그래?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야? 알렉스가 어쩌고 하더니, 정작 이상한 건 너 같다." 말을 끊은 리반의 입술에 짓궂은 웃음이 슬며시 피어났다. "너 혹시 알렉스한테 딴 맘 있는 거 아냐?" "이런 젠장!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얼굴이 시뻘게진 리오가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써댔다. 하지만 기세 등등하던 그의 노기는 밀어닥친 격통(激痛)에 금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리오!" 리오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괴로운 신음을 토하자 놀란 리반의 버럭 소리쳤다. "많이 아파? 숨을 못 쉬겠어?" "괜찮으니까 소란 피우지 마. 의관사제를 불러올 필요도 없어." 침울할 정도로 나지막이 말한 리오가 기력이 다한 듯 힘없이 눈을 감았다. "네 방으로 돌아가, 리반. 좀 쉬고 싶어." "그래, 알았어." 리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오를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나섰다. 복도를 천천히 걷는 그의 머리에 조금도 달갑지 않은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리반은 그 순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리오의 방문을 바라봤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그래,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이젠 별 말도 안 되는 망상까지 드는 구나. 리오가 내 생각을 알면 날 죽이려 들겠지? 리반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는 자신을 향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비노는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배꼼이 내밀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간 시녀는 여전히 나올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들어가서 해치우자!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알비노? 답답해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 브레인이 코를 훌쩍이며 투덜거렸다. "조용히 해!" 알비노는 그를 노려보며 험악하게 속삭였다. 하필 브레인과 함께 오다니 자신이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인은 슈벤국의 정확한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은, 멍청한 왕자와 공주들 중에서도 유달리 우둔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브레인이 알비노의 명령을 고분고분 잘 따른다는 데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자일스의 말에 더 복종했지만 말이다. 다른 이유로는 브레인이 우람한 몸집에 어울리는 무지막지한 힘의 소유자라는 거였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왜소한 몸 때문에 항상 열등감에 싸여 있던 알비노는 덩치 큰 브레인이 하인처럼 고분고분 자신의 명령을 따를 때마다 적지 않은 쾌감을 느꼈다. "알비노, 나중에 다시 오자!" 매서운 알비노의 눈초리에 찔끔한 브레인이 야단맞은 어린애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 잔뜩 풀이 죽은 브레인이 침울한 얼굴을 끄덕였다. 알비노는 그를 향해 위협적인 눈초리를 날린 후 시선을 다시 문으로 옮겼다. 얼마 전만해도 알비노는 이런 일을 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자일스와 가장 가깝고 누구보다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신감은 며칠 전 자일스가 요하임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 일이 발생한 이후로 흔들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자일스와 요하임이 그 후 단둘이 만나 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는 걸 알게 되자 불안감까지 생겨났다. 이대로는 자신이 지금껏 해 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알비노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알비노..." 브레인이 그를 부른 순간 문이 열리며 시녀가 밖으로 나왔다. 알비노는 그 즉시 브레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복도를 울리는 조용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복도를 살핀 후 알비노는 조금 전 시녀가 나왔던 문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그리고 여전히 복도 모퉁이에 서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브레인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브레인이 복도를 쿵쿵 울리며 뛰어오자 알비노의 얼굴이 한층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조용히 해! 이 멍청아!" 알비노가 이를 갈며 브레인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울상을 짓는 브레인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 "대체 뭘 찾아야 하는 거야, 알비노?" 옷장 안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브레인이 알비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놈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 올가미!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올가미를 찾아야 해." "여긴 끈같은 건 없어, 알비노. 이럴 필요없이 하인에게 튼튼한 밧줄을 가져오라고 하자. 그럼 이런.... " 알비노의 매서운 시선과 부딪친 브레인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다시 옷장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장식장의 문을 닫고 초조한 동작으로 몸을 돌리던 알비노가 갑자기 구석에 놓인 작은 선반을 향해 다가갔다. 선반 앞에 멈춰 선 그는 손을 뻗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을 문지르며 단도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얼굴에 이윽고 진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바로 이거야." 알비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브레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됐어! 원하던 걸 손에 넣었으니 빨리 여길 빠져 나가야 해. 놈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브레인은 알비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옷장 깊숙이 집어넣고 있는 머리를 빼내지 않았다. "브레인!" 알비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을 때야 비로소 브레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것 좀 봐, 알비노! 내가 발견한 거야!" 자랑스럽게 알비노 앞에 내밀어진 건 작은 가죽주머니였다. "그까짓 건 필요없으니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놔! 괜히 의심만 사게 될 테니까." "하지만, 알비노. 이 안엔 정말 예쁜 구슬이 들어 있단 말이야! 그것도 두 개나! 너도 한번 볼래?" 주머니의 좁은 입구 안으로 굵은 손가락을 밀어 넣는 브레인을 향해 알비노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당장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네 녀석의 굵은 목을 이 단도로 따버리고 말겠어! 그럼 무식한 네 입도 막을 수 있고, 나대신 알렉스 놈이 살인자가 될 테니 내가 바라던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는 거야." 노골적인 협박이 퍼부어지자 브레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알았어, 알비노. 네 말대로 할게." 그는 목이 잘릴까 봐 두려운 듯 손바닥으로 감싸며 얼른 옷장으로 몸을 돌렸다. "멍청한 놈!" 알비노는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브레인을 노려본 다음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브레인은 슬쩍 알비노의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에서 구슬 하나를 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구슬이 넙적한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브레인!" 험악한 목소리에 브레인은 얼른 손을 오므리고, 주머니를 원래 있던 옷장 구석의 좁은 틈새에 밀어 넣었다. "아,알았어!" 황급히 알비노를 향해 다가가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고동이 점점 빨라지고,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브레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힘껏 말아 쥔 축축한 손을 슬며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제15장. 다가드는 위험-------------------------------------------------------------------을씨년스러운 안개비가 엘의 머리에 촉촉이 내려 앉았다. 낮고 무겁게 드리어진 구름이 주위를 어두컴컴하게 만들고 있었고, 두터운 구름을 뚫고 빛을 내려 보내길 바라기에는 짙은 장막에 싸여 있는 달이 너무 미약해 보였다. 엘은 바닥에 발을 디디고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밧줄 끝을 뒤쪽 나뭇가지에 매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감췄다. 오늘은 요 근래 계속해왔던 것처럼 본관을 수색할 계획이었다. 앞으로 3일 내에 본관 수색을 끝마치기로 마음먹고 있는 엘은 서둘러 어둠 속을 걸었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직 반도 채 살피지 못한 본관 전체를 찾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부족함을 원망하며 맥없이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연회는 열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물건을 찾지 못한다면 엘은 상상하기 도 싫은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트레비아 연주를 못할 건 자명한 일일 테고, 그 순간 엘이 가짜 알렉스 왕자라는 게 수백명의 사람들 앞에서 밝혀지게 되리라. 상상만 해도 엘은 머리가 쭈뼛해지며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점점 더해지는 긴장 때문에 엘의 신경은 요사이 뾰족하게 날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밤부터 동이 트기 바로 직전까지 한시도 쉬지 못하는 강행군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피곤이 쌓인 몸이 무겁게 늘어졌지만 극한에 이른 초조함이 잠깐동안의 선잠조차 편히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엘은 낮에 잠깐 리오를 만나러 가는 시간을 제외하곤 자유시간 내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 곳에서 엘은 그녀가 직접 눈으로 보며 살핀 아시리움 성전의 건물 설계도를 그렸다. 그녀의 능력이 닿는 한 세밀히 그려진 설계도엔 이미 찾아본 곳과 그렇지 못한 곳, 그리고 물건이 있을 만한 곳들을 표시했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에 왜 이렇게 모든 걸 걸다시피 하는 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엘의 머리에 줄곧 떠오르는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물건이라는 말을 하며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의 모습이었다. 엘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리자드의 영상을 떨쳐 버리려 슬쩍 머리를 흔들었을 때였다. 그녀가 있는 모퉁이와 이어진 남관 현관 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낮은 말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벽에 바싹 붙이고 숨을 죽였다. "어, 비가 오잖아!" "입 다물어, 이 멍청아!" 소리 낮춘 날카로운 힐책이 들려 오자 엘은 그 즉시 목소리의 주인공이 알비노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걸. 난 비 맞기 싫단 말이야." "조용히 하라고 했지? 그 램프 위에 덮개나 씌우고 얌전히 따라와!" 알비노의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게 확실했다. 당황한 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질끈 깨문 순간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그녀가 몸을 붙이고 있는 벽을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엘은 숨을 멈춘 채 조금도, 심지어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날이 밝을 때 하면 안돼? 알비노, 내일 하자! 응?" "한마디만 더 나불대면 네 주둥이에 이걸 확 쑤셔 넣을 줄 알아! 네가 죽든 말든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어차피 죄를 뒤집어쓰는 건 알렉스 놈일 테니까." 자일스의 으르는 듯한 말끝에 딸려 나온 이름이 엘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한바탕 찬물을 흠뻑 뒤집어 쓴 것 같이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엘은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레 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북관으로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알비노 옆에서 휘적휘적 걷는 덩치 큰 사람은 슈벤국의 브레인 왕자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어깨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왼쪽 손에 램프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따라가 봐야 알겠지만 엘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막지 않으면 그녀에게 불쾌한 일이 생기리라는 것 말이다. 두 사람은 북관을 지나 숲과 연결된 너른 들판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들이 들판에서 무엇을 할 계획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늦췄다. 몸 숨길 곳을 찾기 힘든 들판에서 그들에게 미행을 들키지 않으려면 지금 보다 세배 정도의 거리는 더 벌려야 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램프 불빛 때문에 두 사람을 뒤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층 짙어진 구름이 약하게 내비치던 달빛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으니, 이 정도 거리에서 어둠에 싸인 엘의 존재를 알아채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숲으로 들어가려는 것 같은 데.... 스무 걸음정도 걸었을 때, 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엘은 한층 걸음을 빨리하며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서관이었던 것이다. 진한 짜증과 어느 정도의 호기심을 느끼며 두 사람을 뒤쫓고 있던 엘의 등줄기로 서늘한 불안감이 줄달음쳤다. 엘은 그 순간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지자 점차 신중함이 찾아 들었다. 엘은 발소리를 죽이고 격한 숨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서관 정면에 서 있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거무스름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서관 정문 계단 아래서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이 주의깊게 귀를 기울인다 해도 말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엘은 좀 더 가까이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발 밑에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에 섞여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황급히 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알비노와 브레인의 속셈을 알아내려면 이 곳으로 접근하는 사람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자신들의 계획을 바꿀 우려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을 감시할 시간이 없는 엘로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게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자꾸만 일이 골치 아프게 꼬인다는 생각에 엘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바삐 걸어 숲 가장자리에 이르자 들판을 걸어오고 있는 긴 그림자가 보였다. 엘은 그녀가 입을 막기도 전에 그가 소리를 지르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몸을 낮게 숙이고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림자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어 보인다는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져 볼 시간이 없었다. 엘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검은 그림자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검은 그림자에게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말하면 소리를 지를 시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몸을 던지다시피 한 엘이 번개처럼 재빠르게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으니까 말이다. "쉿! 조용히 해요!" 숨가쁜 속삭임에 엘에게 닿아 있는 사람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이럴 수 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손을 떼도 소리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러면 지금 당장 놔주겠어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엘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정말 약속 지킬 거죠? 절대 소리지르지 않을 거죠?" 엘은 미심쩍은 마음에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대답을 확인한 후에야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망설이는 동작으로 슬쩍 손을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루드비히!" 낯익은 목소리에 그녀도 모르게 말소리가 높아졌다. "쉿!" 이번엔 우습게도 루드비히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낯설지 않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설마 루드비히일 줄은 몰랐습니다. 후드 때문에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아 그랬나 봅니다." 엘은 입술에서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떨어지는 순간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루드비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조용히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루드비히는 묵묵히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엘은 처음 그녀가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 뒤에 멈춰 섰다. "저기 두 사람 보이죠?" 루드비히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무리를 지은 모양입니다." 조용한 루드비히의 말처럼 알비노와 브레인은 숲을 나가려는지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조금씩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걸로 정말 된 거야?" "그렇다니까. 알렉스 놈을 꼼짝 못하게 할 올가미가 만들어진 거야. 이번엔 지난번처럼 쉽게 빠져나가진 못할 거야." 만족감에 찬 알비노의 목소리에 엘은 슬쩍 실소를 지었다. "난 이렇게 간단할지 몰랐어. 자일스 전하가 아시면 정말 기뻐하시겠지?" 엘과 루드비히가 숨어 있는 나무 옆을 지나며 브레인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인, 넌 입 다물고 있어! 일이 잘되면 내가 직접 자일스 전하께 말씀드릴 생각이니까. 알았지?" "그래. 알았어, 알비노." 으르는 듯한 알비노의 어조에 브레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루드비히 역시 잠자코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이제 가 보도록 하죠." 조용히 말하고 나서 엘은 나무 뒤에서 나와 서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걸음은 계단 바로 아래 놓여진 커다란 덩어리 앞까지 이어졌다. "대체 이게 뭐지?" "글쎄요. 동물의 사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엘의 혼잣말에 루드비히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동물 사체라고요? 동물 사체가 왜...." 어리둥절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그녀 앞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번쩍였다. 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찡그린 시야에 두 주먹을 합친 크기의 투명한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감싸 안듯이 그들의 주위를 둥글게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어찌 된 거지? 루드비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드비히가 한 거죠? 루드비히가 저 빛나는 구슬을 만든 거죠? 대단해요, 루드비히! 정말 놀랍습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엘이 경탄에 가득 찬 어조로 소리쳤다. "제 생각이 맞았군요." 엘의 흥분엔 아랑곳없이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이 루드비히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그 순간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루드비히 말대로 그들의 발치에 놓여 있는 건 동물의 사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망아지의 사체였다.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망아지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엘을 더욱 경악하게 한건 피를 쏟아 내고 있는 망아지의 목 깊숙이 박혀 있는 은빛 단도의 존재였다. 단도 손잡이에 박혀 있는 강렬한 붉은 보석이 엘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단도가 틀림없었다. 모든 무기를 금하는 바이람의 금계 때문에 늘 몸에 지니던 단도를 빼내 선반 위에 올려 놓던 기억이 떠올랐다. 황당함과 놀라움으로 멍하니 서 있던 엘의 눈에 한순간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알비노와 브레인이 그녀의 방에 숨어들어 이리저리 물건을 만졌으리라는 생각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강한 불쾌감이 몰려들었다. "저 단도의 주인이 누군지는 물을 필요도 없겠군요." 엘은 루드비히의 말을 흘려 들으며 허리를 굽혀 단도를 뽑아 들었다. 손잡이에 묻어 있는 반쯤 마른 끈적끈적한 피얼룩이 손바닥에 기분 나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불쾌한 느낌 따위는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이람의 금계를 어기셨습니다." 탓하거나 꾸짖는 어조가 아닌 담담하고 무심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나온 말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었다. ==================================================================엘은 딱딱한 동작으로 루드비히를 마주했다. 그녀도 모르게 꽉 움켜잡은 단도의 손잡이가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 어떠한 무기도 손에 대선 안 된다는 바이람의 금계를 어겼습니다. 이번 일도 그걸 노리고 벌인 일일 테고 말입니다. 하지만 루드비히도 알다시피 이번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엘은 자꾸 높아지려 하는 목소리를 애써 자제했다. 루드비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생각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답답함과 초조함에 엘은 따지듯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루드비히는 제가 이대로 손놓고 있다가 이 망아지를 죽인 범인으로 몰리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어쩌다 그토록 많은 적을 만드신 겁니까?" 생각지 못한 물음에 놀라 엘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상황이....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하필이면 최고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일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같지 않은 놈을 미약하게나마 손봐 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엘은 자조 섞인 말끝에 쓴웃음을 달았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계십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전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같은 일을 하진 않겠군요. 이런 짜증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차라리 완전히 끝장을 낼 겁니다." "끝장을 낸다는 건, 말 그대로 죽인다는 뜻입니까?" "당연하죠! 그런 놈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게 세상을 위해서도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짜증이 담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루드비히의 입술 끝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은 결코 가볍게 받아 드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으십니까? 피를 토하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내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빛과 그림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루드비히의 얼굴엔 그녀가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과 함께 희미한 호기심이 어려있었다. 엘은 강렬하게 반짝이는 그의 눈을 홀린 듯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슬에서 나온 은은한 빛이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신비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마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이내 다물었다. "루드비히는...." 루드비히가 엘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바이람 금계를 어겼다고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에 무기를 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인간을 순수하게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극치라 생각하니까요. 만약 신이 바이람의 금계를 만들었다면 그 신을 받드는 인간들이 불쌍할 뿐입니다." 무척이나 냉소적인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자신의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엘이 불쑥 다가든 손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이고 있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에서 단도를 빼어 들었다. "자, 저 역시 죄인이 되었습니다." "루드비히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일순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늘한 빛이 지나갔다. "이 단도는 바이람이 끝날 때까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얼떨떨한 상태에 있던 엘은 잠에서 깨어난 듯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제 것이니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엘은 필요이상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은연중에 단도를 준 사람이 리자드라는 걸 느끼고 있던 엘로서는 한시라도 단도를 그녀 가까이에서 떨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엘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하여튼 그녀는 루드비히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루드비히는 그녀에게 단도를 건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유심히 살피더니, 피로 얼룩진 칼날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쓸어 보기까지 했다.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엘은 독촉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루드비히가 단도에서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미묘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몹시 아끼시는 물건인가 보군요.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것입니까?" 무심한 어조였지만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엘은 한순간 당황하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닙니다." 겨우 나온 말은 그녀의 귀에도 매우 어색하게 들렸다. "흐음~ 그렇군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린 루드비히가 조용한 몸짓으로 엘에게 단도를 내밀었다. 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루드비히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단도를 받아 들었다. "잘 간직하십시오. 원래 소중한 물건일수록 쉽게 망가지는 법이니까요." 루드비히의 말에서 뭔가 미묘한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엘은 눈을 크게 뜨고 루드비히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어느새 웃음기가 말끔히 지워진 루드비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루드비히는요?" 입술을 다물기 전에 루드비히가 왜 이런 야심한 밤에 이곳에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 "전 우선 일을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움직이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아 조용히 숲을 거닐어 볼까 했는데 이런 일에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엘의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는지 루드비히가 간단한 말로 의문을 풀어 주었다. "정리라면 같이 하죠. 꽤 무거울 것 같은 데...." 엘이 몸을 굽혀 망아지사체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닙니다. 돌아가십시오. 만약 이 곳에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더욱 곤란한 일이 생길 겁니다. 마무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용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엘은 머뭇거리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러자 따뜻하게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루드비히 말대로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엘의 말에 루드비히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왠지 그에게 무거운 빚을 지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들자 엘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루드비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루드비히에게 자꾸 도움을 받게 되는군요. 앞으로 받은 도움의 반이나마 갚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한 후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귀에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층 어두워진 하늘에서 떨어지는 섬세한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루드비히는 고개를 내려 뻣뻣하게 굳은 망아지 사체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순간 푸르스름한 불길이 망아지 몸 전체를 감싸며 안개가 피어오르듯 너울거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불길이 사라지며 싱싱한 풀잎이 모습을 보였다. "첸." 나직한 목소리가 축축한 대기 속에 섞여 드는 순간 루드비히 앞에 커다란 검은색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치명적인 힘을 발산하는 탄탄한 근육이 부드럽게 물결칠 때마다 칠흑같이 새카만 털이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루드비히 앞에 복종하듯 낮게 엎드린 검은 늑대의 몸체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길게 늘어나며 가늘어졌고, 어떤 곳은 넓어져 더욱 탄탄하게 변하며 인간의 형상을 갖춰 갔다. 잠시 후 늑대가 있던 곳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전라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루드비히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그의 등을 온통 덮은 채 바닥에 끌리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남자의 어깨를 타고 얼굴 쪽으로 흘러내렸다. "부르셨습니까?" 너무 거칠어 마치 쇠가 긁히는 것 같은 매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말해봐라." 짤막하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보고이후 그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낮에 교육을 받지 않을 땐 거의 대부분 방안에서 지냅니다. 그 외엔 간혹 체르몬국의 리오카사이 왕자를 만나러 갈 뿐입니다. 또 밤엔 여전히 본관을 수색하고 다닙니다." "내가 알아보라 한건?" "죄송합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남자의 얼굴 깊숙이 박혀 있는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가 강렬한 섬광을 내뿜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오늘밤 날이 밝기 전에 알아내겠습니다." 그 순간 루드비히의 몸이 미동없이 굳어졌다. "첸, 네게 내린 명령은 아직 유효하다. 난 그 아이를 살피라 했다. 어떤 형태로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 때 다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조용한 어조에서 싸늘한 경고가 느껴지자 남자가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그 아이 주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진 않았느냐?" "예, 아직까진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루드비히가 남자에게 무심하지만 날카로움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더 이상 그 아이 곁에 머물 필요없다. 물러나 내 명령을 기다려라." 루드비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순식간에 다시 검은 늑대로 변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원하는 걸 손에 넣는 방법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법이지." 천천히 서관의 계단을 오르는 루드비히의 입술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갔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알비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브레인이 넓은 어깨를 움츠리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이야, 알비노. 다들 망아지니 단도니 하는 얘긴 금시초문이래. 사제님들도 별 얘기 없는 거 보니까 모르는 것 같고. 이상하다 싶어 서관 앞에 가 봤는데, 죽은 망아지는커녕 피한방울 보이지 않더라고." "이런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분을 못이긴 알비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내뿜었다. "나도 몰라, 알비노. 혹시 우리가 꿈을 꾼 건 아닐까?" "멍청한 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알비노가 험악하게 고함을 지르며 브레인을 노려보자 찔끔한 브레인이 허겁지겁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브레인. 알겠지?" "알았어." 브레인은 냉큼 대답한 다음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자일스 전하께도 말하면 안돼?" "당연하지! 자일스 전하 앞에선 특히 말조심해야해! 입 한번 벙긋했다가는, 절대 네 놈을 가만 두지 않을 줄 알아!" 알비노는 험악하게 으름장을 놓으며 브레인의 눈앞에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아,알았어! 절대 말하지 않을게, 알비노." 브레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 좀 해야 하니까, 넌 이만 나가 봐." "알았어. 난 이만 갈게." 몸을 비비 꼬며 나가 보라는 말을 고대하고 있던 브레인은 벌떡 일어나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와 서너 걸음 걸었을 때, 뒤에서 조심스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브레인!" 그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르벨라 황녀였다.놀란 브레인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눈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아르벨라가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시는 것 같은 데.... 많이 바쁘신가요?" "아,아닙니다. 그저 제 방으로 돌아가던 중입니다, 아르벨라 황녀님." 브레인이 성급하게 대답했다. 그의 굵은 목덜미가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 저와 잠시 걸으시겠어요, 브레인?" "예?" 자신도 모르게 소리 높여 반문한 후 브레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쑥스러운 마음에 아르벨라의 눈을 슬쩍 외면했다. "물론 좋습니다, 황녀님." 브레인은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 아르벨라를 향해 조심스레 내밀었다. 하얗고 가냘픈 손가락이 그의 팔 위에 살포시 내려앉자 브레인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브레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어색한 걸음을 옮겼다. "그렇고 보니 궁금한 게 있습니다, 브레인." 두 사람이 계단에 나란히 발을 디뎠을 때 아르벨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거리는 커튼자락을 살짝 들추고 안의 동정을 살핀 후 엘은 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르벨라!" 조심스런 엘의 목소리가 울리자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아르벨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셨군요, 알렉스. 죄송합니다. 깜박 잠이 들어서 오시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왜 절 급히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녀에게 다가오는 아르벨라를 보며 엘은 성급히 질문을 던졌다. 오늘 낮에 복도에서 아르벨라와 부딪혔을 때,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르벨라가 재빨리 건네주었던 쪽지를 펴 보았을 때부터 엘은 궁금해 애가 탈 지경이었다. "알렉스에게 쪽지를 건네기 조금 전에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수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자일스 오라버니께서 세렌국에 사람을 보냈다 하더군요." 엘의 몸 속을 질주하던 피흐름이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멈췄다가, 다시 맹렬히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 줄기에 싸늘한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예, 듣긴 들었는데.... 좀 어이가 없는 얘기라서...."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어서!" 엘의 강경한 어조에 놀란 아르벨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일스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에.... 미안합니다, 아르벨라." "아닙니다. 알렉스의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황당하게도 자일스 오라버니께서 알렉스의 아버님을 이번 연회에 초청하신 모양입니다." 엘은 욕설이 튀어 나오려 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일스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 것이 분명했다. "연회까진 시일이 촉박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고, 그 후에 아시리움 측에 통보를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왜 자일스 오라버니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좋은 의도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은 자명한 데 말입니다. 해서 알렉스에게 서둘러 알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엘은 얼어붙은 듯 뻣뻣하게 서서 아르벨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들었다. "알렉스?" 그녀의 반응이 이상한지 아르벨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르벨라.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며 인사말을 건넨 후 엘은 서둘러 창턱에 올라섰다. "조심하세요, 알렉스. 그리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보잘것없는 저이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저 때문에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엘은 진심을 담아 말한 뒤 서둘러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온 엘은 창문을 닫자마자 옷장으로 뛰어가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구석의 좁은 틈새에 감춰 두었던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아시리움 성전 안에서라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보다 방에 두는 것이 안전하리라는 생각에 그녀 손으로 숨긴 거였다. 엘은 벌린 입구 안으로 손가락을 들이밀어 매끈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손끝을 스치는 구슬의 개수같은 걸 눈치챌 정신은 그녀에게 없었다. 급박함에 몰려 있는 엘의 온 신경이 쏠려 있는 건 오직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구슬 하나였다. "에나헤스 하르 델 카시메르." 고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엘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주문을 맞게 외웠는지 조차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이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며 구슬에서 투명한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녀 앞에 아른거리는 회색 안개에 휩싸인 아몬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몬!" 엘은 반가움에 와락 아몬에게 다가들었다. 아몬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더니 엘에게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난번 슈바니츠 감옥에서의 일 이후, 이렇게 일찍 그를 다시 부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몬의 얼굴엔 놀라움이 나타나 있었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지만 저 혼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번 축일 마지막 날에 열리는 연회에 세렌국 국왕이 참석하게 됐어요." 아몬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세렌국 국왕이라고요? 믿을 만한 정보입니까?" "예, 틀림없는 정보예요. 아무래도 자일스 황태자가 저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만 에 하나 제가 가짜라면 그 사실을 권력자들이 바글대는 곳에서 대대적으로 밝히고 싶었겠죠. 절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까요." 엘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몬이 그녀를 도와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아몬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일스 황태자라면, 물론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를 말하는 거겠군요. 하필 제국의 황태자를 적으로 삼으시다니, 일이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찔끔한 엘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아몬.내가 잘못한 건 조금도 없단 말이에요. 정말이에요.아몬은 잘 모르겠지만 자일스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힘없는 여자를 재미삼아 죽이는 놈이라고요."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있던 시체가 떠오르자 엘의 주먹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아몬은 좀 전보다도 한층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은 어차피 벌어진 것이니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겠군요. 무엇보다 확실한 건 세렌국 국왕을 아시리움 성전에 오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일국의 국왕이라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세렌국에서 연회 참석을 거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아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의 초대는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일부 왕족이나 귀족들이 초대장을 받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기도 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더군다나 세렌국 국왕을 초청한 사람이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면 불참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세렌국 국왕이 죽어가는 처지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국왕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왕족이 참석하게 될 겁니다." 이래저래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엘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이리저리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는 말이에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짜 왕자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전 십중팔구 처형당하게 될 거예요. 그게 싫다면 연회 전에 이 곳을 떠나야 되겠지요. 물건은 포기한 채로요." 엘은 걸음을 멈추고 아몬을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끝냈다. 아몬 역시 진지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 "아니오, 말씀하신 두 가지 일 모두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렌국 국왕의 참석을 막겠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엘의 전신에 조금씩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릴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자드님께 먼저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리자드란 말이 들리자 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살짝 어둠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아몬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게 염려하실 필요없습니다, 엘. 연회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엘의 입술에 희미한 웃음이 새겨졌다. "아몬에게 털어놓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아찔했거든요." "그럼 전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그것 외의 다른 문젠 없으십니까?" 아몬의 입장에선 아무렇지 않게 나온 질문이었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의 얼굴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몬이 바짝 긴장해 소리를 높였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그의 얼굴을 일순간 어둡게 만들었다. "아몬....." 처량하게 그를 부른 엘이 더욱 애처로운 말을 뒤에 붙였다. "나 어떡해요?" 싸늘한 불안감에 휩싸인 아몬은 무의식 중에 엘에게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비장함이 풍기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제 전부를 걸고서라도 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트레비아요....." 엘이 들릴락 말락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트레비아를 가르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아몬이 떠오르자 도저히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예? 뭐라고 하신 겁니까?" 답답한 마음에 아몬 쪽에서 목청을 높였다. "트레비아 말이에요." 여전히 풀이 죽어있긴 했지만 이번엔 그런 대로 알아들을 수는 있는 목소리였다. "트레비아요? 트레비아라면.... 바로 그 트레비아 말입니까? 혹시.... 그걸 연주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겁니까?" 아몬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을 보며 아몬은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놓았다. 그가 몇 걸음 움직여 의자에 앉자 엘도 그를 따라 맞은편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예, 그 트레비아요. 나보고 그걸 연주하라니! 어떡해요? 아몬!"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오려 하자 아몬은 재빨리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그걸 배우시라 한건 데.... 그러게 도끼로 부수지 마시고...." 자신을 노려보는 엘을 깨닫고 아몬은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헛기침을 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트레비아 연주야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시면 되시잖습니까? 심각하게 고민하실 이유가 없는 것 같은 데요." "핑계를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게 문제예요. 보통 자리가 아니라, 이번 연회에서 그걸 연주해야 하거든요. 법황 성하께서도 참석하신다며 부럽다느니 영광이라느니 하도 난리를 치니까, 연주를 못하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어요." 엘과 아몬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엘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잠깐만이라도 연주를 잘하게 해줄 수는 없어요? 아몬은 신기한 마법을 할 수 있잖아요." "가능하긴 합니다." "그래요?" 아몬의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엘이 크게 소리쳤다. "그럼 걱정할 필요없겠네요! 이런 좋은 방법이 있는 줄 모르고 고민을 했다니!" 흥분해 눈을 반짝이는 엘과는 달리 아몬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엘도 마법의 힘을 빌릴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엘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아몬, 이유가 뭔데요?" "마법을 몸에 직접 거는 건 극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춘 분야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특히 완전히 문외한인 기술을 능숙하게 만드는 건 극히 위험합니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는 엘을 향해 아몬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지도 마십시오." "알았어요." 풀 죽은 엘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아몬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연회가 열리기 전까진 좋은 방법이 생각날 것입니다. 우선은 한층 골치 아픈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래요, 아몬의 말이 맞아요." "되도록 빨리 연락 드리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엘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아몬의 모습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엘은 한동안 아몬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힘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만 휴식을 취한 뒤, 수색을 하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혼란스러운 선잠에 빠져 들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자신을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몬은 아찔한 현기증에 몸을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귀에 윙하는 이명이 들리더니 팔다리에서 일시에 힘이 빠져 나갔다. 그가 심호흡을 하며 힘없이 꺾인 묵직한 머리를 들어 올렸을 때, 낯선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많이 힘드십니까?"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번쩍 부릅뜬 눈에 안개가 낀 듯 뿌연 세상이 다가들었다. 아몬은 눈을 깜박이며 시야를 방해하는 안개 너머,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제가 마련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군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개가 흩어지며, 대신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이 휑하기만 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니,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공간 한가운데 팔걸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한 남자가 그린 듯이 앉아 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에 아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십니까? 누구이신데 제 길을 막고 절 강제로 이끄신 겁니까?" 아몬의 목소리에서 감춰지지 않은 긴장이 드러났다. "전 루드비히 라스카 반 리오벤이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 나갔다. "제가 누군지 아신 것 같군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난 루드비히가 아몬에게 다가왔다. 아몬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몬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선 루드비히가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아몬은 결연히 고개를 들고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절 돌려보내주십시오.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면 막고 계신 제 힘을 풀어주십시오." 루드비히의 단정한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얼음조각같이 싸늘하고 음습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돌려보내 드릴 생각입니다. 제가 알고 싶은 모든 걸 밝혀 낸 다음에 말입니다." 아몬의 얼굴이 한층 딱딱하게 굳어지자 루드비히의 입술에 새겨진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 도와 고통없이 일을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을 번거롭게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선택하십시오. 제 입장에선 어느 방법이나 별다를 게 없습니다." "제게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법황 성하." 묘한 표정을 짓고 아몬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두 번째를 택할 생각이시군요.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루드비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몬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단단히 결박되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놀란 아몬이 숨을 격하게 들이 쉬었을 때, 저 만치 떨어져 있던 의자가 눈 깜짝할 새 다가와 루드비히의 바로 뒤에 자리잡았다.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의자에 앉은 루드비히가 팔꿈치를 세우고, 손으로 턱을 받친 모습으로 아몬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기억 나지 않습니다." 아몬은 루드비히를 마주 바라보며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루드비히의 입술에 웃음기가 나타났다. "이번 질문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반드시 응하셔야 하실 겁니다. 당신을 조정하는 사람, 이 모든 일의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모래 웅덩이처럼 느껴지자 아몬은 두려움을 이기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은 질문을 또 한번 반복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건 절 매우 불쾌하게 만들 테니까요." 싸늘한 경고를 담은 건조한 목소리가 들리자 아몬의 뒷골이 쭈뼛 곤두섰다. 아몬은 자꾸만 빠져나가려 하는 가느다란 용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성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성하의 존명(尊名)에 누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아몬의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아몬은 자신의 말이 법황의 신경을 거슬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즉시 엄청난 고통이 그를 한 입에 삼켜 버렸다.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한,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내장을 이리저리 휘젓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무력한 그의 몸뚱이를 휘어 감았다. 비명을 참기 위해 스스로 물어뜯은 입술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참고 참았던 비명이 일그러진 입술을 통해 쏟아지려는 찰라 아몬을 극도의 고통으로 밀어 넣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몬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 가시지 않은 고통의 잔재가 그의 몸에 쉴새 없는 경련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무심한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아몬의 멍한 머리를 파고 들었다. 아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고통으로 흐려진 갈색 눈동자 위에 힘없이 드리워졌다. 아몬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어지며 위로 치켜 올라갔다. "예, 이젠 명확히 알았습니다. 정신 나간 고귀한 법황 성하께서 미천한 절 갖고 노신다는 걸 말입니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은 아몬의 말은 숨막힐 듯한 적막을 몰고 왔다. 아몬을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에 강렬한 섬광이 스쳐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루드비히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은 루드비히가 의자에서 일어나 느릿하고 잔인한 걸음걸이로 아몬을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허공에 매달려 있는 아몬의 몸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걸음을 멈췄을 때 두 사람의 눈이 같은 높이에서 맞부딪쳤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아몬의 한쪽 눈가에서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정말 보기 드문 분이시군요. 솔직히 말해 감탄할 지경입니다." 아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루드비히를 바라볼 뿐이었다. "더 솔직해 진다면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희망으로 그쳐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정신 나간 법황치곤 상황 판단이 그런 대로 쓸만하지 않습니까?" 아몬은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루드비히 역시 어떤 대답을 바라고 질문을 한 건 아니었다. "인간은 습관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철저히 길들여질 수 있는지 아시면 꽤 놀라실 겁니다. 저도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별 다른 수가 없겠군요. 어떠한 고통을 가한다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건 우리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시 말을 잇는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아몬이 루드비히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몸을 움찔했을 때, 그의 눈 앞으로 루드비히의 손이 불쑥 다가들었다. -------------------------------------------------------------------제16장. 연회의 시작-------------------------------------------------------------------지평선 너머로 반쯤 몸을 묻은 태양에서 빛줄기가 뻗어 오르며 생생한 붉은 빛과 자줏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저 멀리 오도카니 앉아 있는 매끄러운 연못은 어린아이의 맑은 눈망울처럼 색색으로 물든 하늘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은 창 밖을 향해 있는 엘의 보라색 눈동자를 풍부한 색채로 반짝이게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눈에 보이는 풍경은 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눈은 창 밖을 향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치 앞으로 다가든 근심거리에 묶여 있었다. 힘껏 맞잡은 두 손을 자신도 모르게 이리저리 비틀던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창틀을 부여잡았다.그녀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물론 이틀 앞으로 다가온 연회였다. 연회는 시시각각 그녀의 목을 조여 오고 있는데 아몬에게선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가 알아서 해결책을 찾았을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엘을 짓누르는 무거운 근심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엘이 갑작스런 말소리에 놀라 몸을 돌려보니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루드비히가 보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는 사이 그가 엘을 향해 다가왔다. "이런 저녁 무렵에 제일 가는 즐거움은 차츰 다가오는 어스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적막에 있습니다." 엘 옆에 자리잡은 루드비히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예." 엘은 건성으로 말하며 잔뜩 흐려진 눈으로 계속해서 창 밖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루드비히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자 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또 다른 비밀입니까?" "아니오....아니, 예." 엘이 재빨리 말을 바꾸자 루드비히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민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 자체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라는 단서가 붙겠지요." "그 믿을 만한 사람이 루드비히라는 말씀입니까?" 엘은 잠시라도 근심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농담조로 물었다. "글쎄요. 그거야 고민을 가진 쪽에서 판단할 문제겠지요." 응수하는 루드비히의 눈동자에도 슬쩍 장난기가 묻어 나왔다. "만약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이 바뀐다면, 다시 말해 루드비히가 저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루드비히를 믿고 고민을 털어놓으시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씩 웃는 엘을 향해 루드비히가 마주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가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니오,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사람이 바로 저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던 엘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를 향한 은회색 눈동자가 뜻 모를 빛으로 반짝였다. "참! 루드비히도 이번 연회에 참석하나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일단은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마음을 정한 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루드비히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사제님인가 보군요. 제가 듣기로는 웬만한 사제님들은 연회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루드비히는 도서관 사서 직만 맡아 하시는 겁니까?" 호기심 어린 그녀에게 루드비히가 슬쩍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뿐, 대답을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번 연회에서 트레비아를 연주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심한 루드비히의 말에 엘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준비는 다 마치신 겁니까?" "아, 예....그럭저럭...." 엘은 슬쩍 얼버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굳이 연습이 필요한 실력은 아니실 테지요. 이번 연주에 저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꼭 참석해야겠군요." 루드비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은근히 놀리는 기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동그랗게 뜬 엘의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진지하기만 했다. "가,감사합니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느끼며 엘은 괜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부담스러운 루드비히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배가 출출한 걸 보니 식사시간이 다 됐나 봅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이제 도서관에 오실 필요없습니다. 대부분 정리가 마무리됐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정리할 게 많이 남았는데.... 루드비히 혼자 다 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테고요." 머뭇거리는 엘을 향해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뒷정리 할 사람은 많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연주 준비를 하시라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루드비히를 보는 일도 예전처럼 쉽지 않겠군요." 도서관의 적막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루드비히와 함께 나누는 조용한 시간이 맘에 들었던 엘은 자신도 모르게 번져 가는 서운한 마음에 떨떠름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물론 도서관은 항상 열려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오시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십시오. 아시다시피 이 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루드비히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드비히를 보기 위해서라도 자주 발걸음할 생각입니다." 엘은 가벼운 말투에 슬쩍 진심을 담았다. "앞으로 이 곳에서 절 보기는 힘드실 겁니다." 루드비히의 말에 은근히 실망이 되는 건 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에게 있어 루드비히는 마음 편한 친구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다른 일을 맡으신 건가요?" "그렇다고 해 두겠습니다." 모호하게 말한 루드비히가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연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부지런한 초저녁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엘은 잠시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그림같이 서 있는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이지? 연회를? 아니면 내 연주를 말하는 건가? 엘은 루드비히에게 질문을 할 것인가에 대해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등을 돌린 채 우뚝 서 있는 루드비히에게서 섣불리 말을 붙일 수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자 머리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 "알렉스! 거기 서서 뭐해? 어서 안 오고?" 앞서 가던 리오가 성큼성큼 다가와 엘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난 참석 못하겠어, 리오." 다급한 엘의 외침에 리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그 소리야? 대체 왜 그래? 몸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래, 그거야! 몸이 아파서 그래!" 엘은 허겁지겁 리오가 내민 말꼬리를 잡았다. "으음~ 그러고 보니 얼굴이 벌건 게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군." "그,그렇지? 사실 머리도 묵직하고, 몸도 무겁고, 팔다리도 좀 결리는 것 같고....배도 좀 아픈 것 같아. 또.... 목도 좀 거북하고.... 또.... 귀도 울리는 것 같고.....또......" 혀차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리오가 보였다. "또 어디가 아픈데? 왜? 이제 핑계거리가 다 떨어졌어?" "핑계거리라니?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몸이 안 좋단 말이야!" 엘은 펄쩍 뛰며 강경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팔을 잡아끄는 리오의 손은 더욱 단호해질 뿐이었다. "네 목소리만 들어도 네가 얼마나 팔팔한지 단번에 알겠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진짜 아프더라도 일단 참석은 해야 돼!" 죽을 병에 걸리지 않는 한 연회를 빠질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엘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요 며칠간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느라 동분서주한 그녀가 그 정도 사실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뿐 아니라 정당한 이유없이 연회에 불참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형벌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죽을 상을 쓰면서도 리오가 이끄는 대로 엉거주춤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연회에 불참한 사람은 바이람 기간만큼인 30일 동안 골방같이 축축하고 좁은 기도실에 갇혀 지내야 했다. 형벌이 단지 그것뿐이라면 엘은 거짓왕자란 사실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혀지는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기도실에 갇히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형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엘을 경악하게 한 건 대사제와 고위사제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최소한의 속옷만을 걸친, 즉 벌거벗다시피한 몸으로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엘의 얼굴에선 핏기가 빠져나갔고, 아찔한 현기증이 그녀의 몸을 휘청하게 했다. 어느 정도 충격이 가시자 엘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연회 참석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몸을 감춘다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그녀의 결심을 도왔다.이렇게 해서 엘은 마음 내키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까지 한 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온 거였다. 하지만 막상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연회장의 모습과 쉴 새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마차의 행렬, 그리고 수많은 인파가 눈에 들어오자 한줌 용기는 재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엘은 리오의 손에 이끌려 종종걸음을 치며 쉴새 없이 주위를 살폈다. 그럴 리 없으리 란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엘의 눈은 무의식중에 아몬을 찾고 있었다. 아몬이 어떤 방법이로든 그녀를 도우리라는, 수백 번은 머리에 떠올렸던 생각을 하며 엘은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휴우! 대단한데!" 엘은 리오의 감탄사에 부스스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야말로 전율이 일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한 연회장이 한순간 그녀의 머리를 마비시켰다. 금빛 장식이 정교하게 새겨진 우아한 기둥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돔 형태의 천장을 받치고 있었으며, 천장 가장자리에도 화려한 금박 장식이 둘러져 있었다. 곳곳에 달린 육중한 크리스탈 샹들리에들은 은과 금으로 조각된 갖가지 조각상 위로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또한 발목 높이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팔각형 모양의 거대한 착색유리는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받은 빛을 사방에 반사시키며 화려한 색깔의 군무를 연출하고 있었다. 엷은 장미빛과 은색이 주조를 이뤄 우아하고 품위있어 보이는 연회장엔 있을지 모르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값비싼 예술품과 수십만 송이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입으로 벌레 들어가겠다!" 리오가 피식 웃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엘은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다물 수 있었다.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이렇게 화려한 연회장은 처음 봐. 이 모든 게 아시리움 성전이니까 가능한 거겠지." 리오의 어조엔 경탄과 함께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엘은 리오의 말에 대충 맞장구치며 이리저리 주위를 살펴봤다. 그런 엘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리오가 툭 던지듯 물었다. "대체 왜 그래? 누구한테 쫓기는 사람처럼! 뭐, 죄진 거라도 있어?" "아,아니야! 그런 거 아냐!"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아니,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엘에게 더욱 짙은 의혹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엘은 잔뜩 인상을 쓰고 리오를 못마땅하게 바라본 다음, 인명록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알렉스 왕자의 정식명을 쓰며, 위에 적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온통 낯선 이름만 눈에 띌 뿐이었다. 좀 더 주의 깊게 이름을 훑어 내려가던 엘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세렌국 국왕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던 것이다. 분명히 아몬에게 들은 기억이 나는데, 머리 속에서 연기처럼 맴돌 뿐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엘이 포기하고 고개를 들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화려한 차림의 중년남자가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그녀를 밀쳤다. 엘은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에 서 있는 건 아무래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리반은 어디 있는 거야? 먼저 가 있겠다고 했는데. 여기서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입구와 마찬가지로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리오가 투덜거렸다. 엘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알렉스, 뭐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 리오가 엘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아니, 별 생각없어." 엘은 대답을 하면서도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대다수가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어렵지 않게 눈에 익은 얼굴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자일스와 세렌국 국왕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엘은 주저없이 입구로 몸을 돌렸다. "알렉스, 어디 가?" 리오가 그녀를 뒤따라 오며 큰 소리로 물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다가오자 엘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엘은 걸음을 멈추고 리오가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가 그의 팔을 잡고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구석으로 데려갔다. "난 연회장을 떠날 생각이야. 머리만 아플 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전혀 취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미간에 주름을 잡고 엘의 말을 듣고 있던 리오가 냉큼 입을 열었다. "하지만 트레비아 연주는 어떻게 할 건데?" "우라질!" 참을 새도 없이 엘의 입술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눈앞에 닥친 세렌국 국왕 문제에 정신이 팔려 또 한가지 문제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던 자신에게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것보다는 손 쓸 방법없이 그녀를 조여 오는 숨막히는 상황이 한순간 엘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잠시 주위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따갑게 박히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엘은 저런 몰상식한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줄 모르겠다는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잠시 놀란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던 리오가 피식피식 웃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 넌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야! 널 알만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지 못한 행동으로 내 뒤통수를 때리거든." 엘은 말을 하는 내내 실실 거리는 리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욕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언제든지 말만해. 흡족할 때까지 해줄 테니까." "나한테 하는 욕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하지만 네 입이 아플 걸? 우리 주위만 해도 욕 먹을 놈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천연덕스럽게 말을 마친 마친 리오가 동그랗게 뜬 눈을 과장되게 이리저리 굴리자 엘의 입술에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리내어 웃음을 나눴다. 잔뜩 부풀었던 불안과 초조가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끼며 엘은 부드러운 눈길로 리오를 바라봤다. 만약 이 자리에서 그녀의 정체가 발각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 해도 아시리움 성전에 들어온 걸 후회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리오 하나만 놓고 봐도 이 정도 위험은 얼마든지 참고 넘길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그녀를 도와준 루드비히와 빼놓을 수 없는 아몬, 그리고 리반과 사일러스 역시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스치지도 못했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리자드.... 리자드를 떠올리는 순간 구름이 낀 듯 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알렉스, 왜 그래?" 리오가 당장 질문을 던져 왔다. "아니야, 아무 것도." 엘은 나지막이 중얼거린 뒤 리오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봐, 알렉스. 큰 도움은 못되겠지만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고민은 무슨! 하여튼 말만이라도 고맙다." 엘은 리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끊었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여길 나가야겠어. 그러니 내가 없더라도 재미있는 시간 보내라고." "어, 알렉스! 야!" 그녀는 리오의 외침을 못들은 척하고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하지만 이리저리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는 길이라 자연히 걸음이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엘이 입구로 향하는 계단에 막 발을 올려 놓았을 때였다. 연회장 중간쯤에 서 있던 알비노가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곧바로 알비노를 위시한 패거리들이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은 낮게 혀를 차며 재빨리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일단 입구만 나선다면 연회장 뒤쪽에 위치한 넓은 정원 어딘가에 몸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 너 거기 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뚫고 알비노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 왔다. 저 만치 서서 엘이 처음 보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리오가 그 소릴 들었는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즉시 엘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자 엘의 등줄기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더욱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가 걸음을 재촉해 어떤 두 명의 젊은 남녀 사이를 지나가려 할 때였다. 엘의 발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여자의 드레스 자락을 밟는 순간 하필이면 여자가 남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엘이 어떻게 막을 새도 없이 여자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사람들의 놀란 외침이 뒤이어 터져 나왔다. "세,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넘어진 여자가 몸을 버둥거리며 앙칼진 어조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당황한 엘이 사과의 말을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여자를 지나치려는 찰라 여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엘의 오른팔을 와락 움켜잡았다. "뻔뻔스럽게 어딜 그냥 가려는 거야? 빨리 정중히 사과하고 부축해 드리지 못해?" 조급한 마음에 엘은 잡혀 있는 팔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나 곧바로 누군가의 손에 다시 잡히고 말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팔을 잡고 히죽거리는 알비노의 모습이 보였다. "자일스 전하께서 널 친히 보자고 하셨다. 그러니 얌전히 따라와. 반항하면 우리만 더 재미있어진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어느새 왼팔 역시 자일스 패거리 중 한 명인 브레인이 움켜쥐고 있었다. 엘이 팔을 비틀자 두 팔을 조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주먹이라도 휘두를 생각으로 몸을 긴장시켰던 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연회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손으로 무덤을 파게 될 수도 있었다. "알렉스, 무슨 일이야?" 알비노 뒤쪽에서 리오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참견하지 말고 꺼져! 아니면 단단히 혼이 날 줄 알아!" "우리 일을 방해하면 자일스 전하께서 널 아예 통째로 으스러뜨려 버리실 거다!" 자일스 패거리들에게서 험악한 말이 터져 나왔지만 리오는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알렉스한테서 그 손 떼!" 잔뜩 인상을 쓴 리오가 처음 듣는 험악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자 꽤 놀란 듯 몸을 움찔한 브레인이 엘의 왼팔을 내팽개치듯 놓았다. 그와는 달리 알비노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가소롭다는 듯 리오를 아래 위로 훑어 내렸다. "못하겠다면? 못하겠다면 네가 어쩔 건데?" 알비노의 이죽거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오가 손을 뻗어 엘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알비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 마디가 하얗게 돌출될 정도로 리오의 손에 힘이 주어지자 알비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엘의 팔을 잡고 있던 알비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게 감히 누굴! 가만두지 않겠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알비노가 손목을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그러자 다른 패거리들도 잔뜩 인상을 쓴 채 포위하듯 엘과 리오 주위를 둘러쌌다.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 주위로 어느새 둥근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슬쩍 연회장을 빠져나간다는 그녀의 계획은 이미 틀어진 것이 확실했다. "연회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아시리움 성전에서 좋아할까?" 엘의 말에 자일스 패거리들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너희들이 떠받드는 위대한 황태자 전하도 그리 기뻐하진 않을걸?"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그들의 모습에서 엘은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얌전히 따라온다면 우리도 소란 필 생각없어." 거짓말이 아니란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요하임이 똑똑 끊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재빨리 그들을 제치고 밖으로 뛰어나갈까 하는 유혹이 엘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뒤이어 떠올랐다. 엘이 대항하면 자일스 패거리들은 그 야말로 그녀를 질질 끌고 자일스 앞으로 데려갈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그녀의 정체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마침내 결정을 내린 엘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요하임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 발로 갈 테니, 앞장 서!" 요하임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몸을 돌렸다. "알렉스, 그럴 필요가 뭐 있어?" 리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별일 아니니까 넌 여기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말을 마치고 나서 엘은 리오에게 어색한 미소를 던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리오의 얼굴에 슬쩍 불안이 스쳐 갔다. 엘은 다른 패거리들의 경계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요하임의 뒤를 따랐다. 겉모습만이라도 당당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고동치고 있었고 등줄기와 손바닥엔 축축한 땀이 배어 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수록 성큼성큼 다가드는 싸늘한 두려움이 서서히 그녀의 숨을 조여 왔다. 엘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을 때, 저 만치에 서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자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자일스 옆에 서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 시선이 꽂히는 순간 엘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이 바로 세렌국 국왕이야! 피의 흐름이 멈췄는지 일순간 손발이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갑자기 등을 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도 모르는 새 걸음을 멈춘 모양이었다. 엘은 묘하게 일그러져 보이는 세렌국 국왕을 응시하며 다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곤한 낮잠 속의 기억 나지 않는 꿈을 꾸듯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점점 느려지는 엘의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한번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엘은 그 힘에 밀려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일스가 세렌국 국왕에게 무슨 말을 하며 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칠흑같이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다 끝났어!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이제 가짜왕자라는 외침이 들리며, 그녀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세렌국 국왕의 모습이 파열할 듯 숨가쁘게 질주하는 심장 속으로 파고 들었다. 리자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가슴 깊은 곳에서 제어할 수 없는 절규가 쏟아졌다. ================================================================== 엘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안간힘을 다해 누르고 세렌국 국왕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드디어 알렉스가 왔군." 자일스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엘은 움직임을 멈춰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엉거주춤 몸을 세웠을 때,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넘실거리는 자일스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사랑스러운 아들을 만난 소감이 어떻소, 세바스티앙 3세?" 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얼얼해질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 순간 세렌국 국왕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알렉시스, 내 아들!"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며 등을 두드리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까지 뻣뻣하게 굳어있던 엘은 돌변한 상황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숨 돌릴 새도 없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격렬한 진저리가 전신을 훑어 내렸다. "정말 반갑구나, 알렉시스!" 몸을 뗀 세렌국 국왕이 이번엔 엘의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거지? 마음 속에 혼란스런 질문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근데 어떻게 된 거냐? 아비를 보고도 인사말조차 없다니!"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놓은 손길이 느껴졌다. "아,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아직 멍한 상태에 있던 엘은 꿈속에서 들려 오는 것 같은 천연덕스러운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래, 정말 오래간만이다. 많이 어른스러워진 것 같구나, 알렉시스." "감사합니다." 엘은 말을 끝내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몬이 마법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상상도 되지 않지만 마법이 불러일으킨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시게 된 것입니까?" "자일스 황태자 전하께서 특별히 날 초대해 주셨다. 베푸신 은혜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전하." 세렌국 국왕이 자일스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진 엘의 시선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는 자일스가 보였다. 꽤나 약이 오르겠지. 잔뜩 기대하고 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저도 감사 드립니다. 절 위해 이런 자리까지 마련해 주시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매끄럽게 말하며 엘은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엘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자일스의 옅은 초록색 눈동자에서 분노에 찬 섬광이 번뜩였다. 고소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기뻐하니 나 역시 만족스럽군." 이를 악문 기색이 역력한 자일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엘의 얼굴에 퍼져 있던 희미한 웃음기가 한층 진해졌다. "저....자일스 전하!" 자일스 뒤에 서 있던 알비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자일스를 불렀다. 기껏 신이 나 엘을 끌고 왔는데 자일스는 엉뚱하게 두 부자의 만남을 준비해 놓고 있었으니, 엘로서는 황당해 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자일스가 섣불리 입을 놀리지 말라는 듯 알비노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세렌국 국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두 사람이 편안히 얘기 나눌 수 있도록 난 자리를 비켜 줘야겠군." "감사합니다, 자일스 전하! 전하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렌국 국왕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씁쓸한 마음에 엘은 그에게서 슬쩍 시선을 뗐다.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자일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은근히 그들을 살피던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비켜 주었다.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사람들 사이를 걷는 자일스를 그의 패거리들이 서둘러 뒤따랐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군." 엘의 바로 뒤쪽에서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뻣뻣하게 서서 자일스를 바라보고 있던 엘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홱 돌렸다. "뭘 그리 놀래?" 리오가 유난히 파래 보이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녀의 질문이 맘에 들지 않는지 리오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친구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악당들에게 끌려가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냐? 너라면 그렇게 하겠어?"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엘을 노려보던 리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세렌국 국왕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전하. 전 보시다시피 알렉스의 친구로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보즐라르 드 아르트로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오의 정식명을 처음 듣는 엘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새삼스럽게 리오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리오가 낯설어 보였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그 짧은 거리가 영원히 좁혀지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민 소녀에게 리오는 그 길고 긴 이름만큼이나 먼, 도달할 수 없는 별세계의 사람이었다. "만나서 반갑소, 왕자. 알렉시스 친구라니, 더욱 반갑군." "앞으로도 오랫동안 친구로 남아있을 테니 어여삐 봐 주시기 바랍니다." 리오의 붙임성있는 말에 세렌국 국왕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런 유쾌한 친구를 가진 알렉시스가 부럽군." "원하신다면 전하께도 친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저야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엘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나누는 두 사람을, 남의 일인 것처럼 멀거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시스,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세렌국 국왕의 시선이 갑자기 엘을 향하자 그녀의 몸이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너와 그리고 네 친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자일스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릴까봐 말 안하고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세렌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말이다." "아, 예. 그러십니까?" 긴장이 일시에 풀리는 바람에 엘은 순간적으로 현기증까지 느꼈다. 하지만 그녀와 반대로 리오의 얼굴엔 놀라움과 서운함이 드러나 있었다. "오늘 밤 당장 떠나신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아시리움 성전에서 고맙게도 세렌국까지 호위를 해주겠다 하셨네." "하지만 밤에 먼 여행을 떠나신다니. 피곤도 아직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오늘 밤 푹 쉬시고 내일 떠나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열심히 만류하는 리오에게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엘의 시선이 쏘아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세렌국 국왕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만, 한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나 역시 서운하네. 하지만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테니, 그 날을 기약하기로 하세." "할 수 없겠군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전하." 리오가 세렌국 국왕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세렌국 국왕도 그를 향해 살짝 얼굴을 끄덕였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네. 아시리움 성전에서 좋은 가르침 많이 받고 건강히 돌아가길 빌겠네." 세렌국 국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렉시스, 너도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다." 검은 눈동자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느껴지자 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아버님." 엘은 잠시 망설이다 아버님이란 말을 작게 중얼거린 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미 저만치에서 걸음을 옮기는 세렌국 국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해, 알렉스?" "무슨 소리야?" 엘이 되묻자 리오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것도 먼 길을 떠나시는 아버님을 배웅도 안 해 드릴 거야?" "그럴 필요없어." 엘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리오." 리오의 말을 끊는 엘의 어조는 냉랭했다. 그녀는 굳어지는 리오의 얼굴을 외면하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건 누구보다 엘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 전에 일어난 모든 것이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쳤던 극도의 두려움과 긴장은 엘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미안해, 리오. 신경이 좀 곤두서 있어서...." 엘은 진심을 담아 말하며 리오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나가 있어야겠어.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나도 같이 가." 다른 때와 다른 엘의 모습에 놀랐는지, 리오의 눈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아니야,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엘은 리오가 반대할 틈을 주지 않고 즉시 몸을 돌려 입구 반대쪽에 보이는 연한 장미빛의 우아한 휘장을 향해 걸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입구보다는 넓은 정원과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유용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레비아 연주에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는 계획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필요했다. 엘은 묵직한 휘장을 젖히고 테라스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기분 좋게 식혀 주었다. 엘은 맑고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쉬며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연회장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정원 가장자리에 놓인 정교하게 휘어진 안락의자들을 비춰주고 있었다. 엘은 안락의자에 앉아 소곤거리고 있는 몇 쌍의 남녀들을 지나 불빛이 거의 비치지 않는 정원 깊숙이 들어갔다. 상쾌하고 맑은 밤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밝게 빛나며 반짝거려 그녀 자신이 별들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엘은 사람들의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곳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살핀 후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손으로 헤치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스무 걸음 정도 걸은 후 멈춘 곳에 두 사람이 앉기에 적당해 보이는 나무 의자가 마치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되어진 것처럼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사실 이 곳은 엘이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거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종종 찾던 장소였다. 엘은 힘이 다 빠져 버린 사람처럼 나무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다리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곧 이어 거칠고 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렌국 국왕과 대면했을 때의 일이 떠오르자 새삼스레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기절하지 않고 어떻게 참고 견뎠는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며칠 전, 아니 몇 달 전에 일어난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신 차려. 어차피 이것으로 한 고비는 넘긴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되뇌일 시간 따윈 없어. 눈앞에 닥친 문제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돼. 엘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안쪽 깊숙이 넣어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제17장. 끝나지 않는 밤-------------------------------------------------------------------세바스티앙 3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가득 채웠다. 흘러 넘친 액체가 손가락을 적셨지만 그는 알아채지도 못했다. 단숨에 술잔을 기울이자 불그스름한 술이 그의 턱을 타고 옷깃 속으로 흘러 들었다. 세바스티앙 3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옷소매로 턱에 묻은 술을 대충 닦았다. 혼자 있을 때조차 예의범절을 지키고 유난히 깨끗한걸 좋아하는 평소의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켜야 될 예의 따위는 그의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세바스티앙 3세, 세렌국의 국왕인 그의 머리를, 아니 그의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뒷골이 쭈뼛 곤두서는, 숨막힐 듯한 두려움이었다. 어둠에 싸여 있던 방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작된 공포는 아무리 독한 술을 들이켜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서 지금 막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그 때의 일이 생생하게 다가들자 세바스티앙 3세의 몸에 발작적인 경련이 일었다. ------------------------------------------------------------------- "아시리움 성전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하." 자신의 이름을 보르헤스라 밝힌 고위사제가 정중히 말했다. "반갑습니다, 보르헤스 사제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바스티앙 3세 역시 예의를 갖춰 인사말을 건넸다. 한 나라의 국왕인 그였지만 아시리움 성전의 고위사제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전하. 오늘 있을 연회 준비로 많이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세바스티앙 3세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이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었지만 아시리움 성전의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은 볼 때마다 그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방문자들의 숙소가 있는 동관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던 세바스티앙 3세는 보르헤스 사제가 자신을 본관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놀라움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세바스티앙 3세의 궁금증을 읽은 사제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숙소는 잠시 후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전하께서 꼭 만나 뵈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서두르십시오." 보르헤스 사제의 말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는커녕 한층 가중시켰다. "제가 꼭 만나 뵈어야 할 분이라니.... 그 분이 대체 누구십니까?" 어안이 벙벙한 세바스티앙 3세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지만, 보르헤스 사제는 엄숙한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문 채 묵묵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연 건 일층 본관 깊숙이 들어선 곳에 위치한 거대한 검은 색 문 앞에서 막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법황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놀라움에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세바스티앙 3세가 마음을 채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보르헤스 사제가 지체하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선 채 팔을 들어 올렸다. 법황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상상도 안 되는 세바스티앙 3세는 터질듯한 긴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그리 밝지 않은 공간이 보였다. 전면엔 바닥에 끌릴 듯한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사방의 벽과 천장, 고풍스러운 가구들, 하다못해 곳곳에 놓인 고급스러운 장식품 하나하나까지 온통 검은 색이었다. 검은 색에서 뿜어지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눌려 세바스티앙 3세는 잠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혹시 자신이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갔다. "반갑습니다."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서,성하!" 세바스티앙 3세는 다짜고짜 머리를 조아리며 숨가쁘게 외쳤다. 그리고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눈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법황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좀 더 가까이 오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같은 목소리가 들리자 세바스티앙 3세는 그제서야 법황이 있는 곳을 눈치챌 수 있었다. 법황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진 검은 색 휘장 뒤에서 나오고 있었다. 세바스티앙 3세는 어색하고 뻣뻣한 걸음으로 다가가 휘장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 즉시 기겁을 하며 일어나 휘장을 향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법황 성하, 제 무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감히 예도 올리지 않고...." "상관없으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두터운 휘장 뒤에 있는 법황이 눈으로 그를 본 것처럼 말하자 세바스티앙 3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놀라움이 나타났다. 그가 엉거주춤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법황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하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세바스티앙 3세는 단도직입적인 법황의 말에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원하시는 걸 말씀하십시오." "예? 서,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놀란 그의 외침에 법황이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전하께서 원하시는 걸 갖게 해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아,아닙니다, 성하! 제가 어찌 감히! 제가 성하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세바스티앙 3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쩔쩔매며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임의대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겠습니다.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전하께선 카이엔을 갖게 되실 겁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에 세바스티앙 3세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이엔이라면 갖가지 광물과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천연의 보고로서, 리아잔 제국을 위시한 모든 나라들이 탐을 내는 곳이었다. 세바스티앙 3세는 의자 팔걸이를 부서져라 움켜쥐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얼굴을 흥건히 적신 땀방울이 목을 타고, 이미 땀이 흠씬 배어 든 옷깃 속으로 흘러내렸다. 세렌국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엄청난 보물이 그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참기 힘들 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물론 제 부탁을 들어주셨을 때의 얘깁니다. 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카이엔은 물론 세렌국 조차 공기 중으로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청천벽력같은 말이 채 정신도 차리기 전에 세바스티앙 3세를 덮쳤다. 싸늘한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느낌에 그의 입술에서 거친 헐떡임이 터져나왔다. "그,그게 무슨.... 전 성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법황이 냉정한 어조로 그의 말을 잘랐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땀으로 끈적이는 두 손을 힘껏 맞잡은 뒤에야 세바스티앙 3세는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제 모든 걸 걸고서 성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없습니다." 법황이 말이 명령처럼 느껴지자 세바스티앙 3세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맺혀 있는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밤 연회에 참석하시면 알렉시스 왕자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말이 들릴 거라 예상하고 있던 세바스티앙 3세는 법황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자 미간을 찡그리며,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다음에 나온 법황의 말은 그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확히 말해 가짜 알렉시스 왕자를 만나시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제 부탁은 간단합니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를 진짜 알렉시스 왕자로 믿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가 세렌국의 왕자가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바스티앙 3세가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버둥대는 그에게 다시 한번 법황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리 꽂혔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신분을 의심하게 된다면.... 전하께선 태어난 날을 저주하게 되실 겁니다." -------------------------------------------------------------------달빛을 받은 칼날이 섬광이 일듯 반짝이며 눈을 자극했다. 엘은 단도를 왼손으로 옮겨 쥔 다음 오른쪽 팔 소매를 대충 걷어 올렸다. 근육이 막 붙기 시작한, 탄탄하면서도 가냘파 보이는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기분 좋을 정도로 상쾌한 밤 기운이 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녀의 팔엔 미세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엘은 단도를 한껏 말아 쥐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칼날 끝을 걷어 올린 팔뚝에 닿을 듯 가까이 댔다. 이제 단도를 아래로 긋는 일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상처 입거나 다치는 걸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트레비아 연주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피가 충분히 배어 나올 정도의 상처만 내면 되는 거야. 그러면 트레비아 연주를 피할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는 거라고. 엘은 계속해서 마음 속으로 별거 아니란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반대로 단도를 잡고 있는 손에서 자꾸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단도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엘은 턱이 얼얼한 정도로 이를 악물고 단도를 으스러져라 움켜잡았다. 바보 같으니! 이 정도도 못하면 여기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검술을 배우면서 상처는 많이 입어 봤잖아. 가느다란 핏줄기가 팔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통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칼 끝이 살갗을 파고 들어와 있었다. 그래 이제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움직이면 되는 거야. 엘이 눈을 질끈 감고 막 단도를 내려그으려는 순간이었다. "알렉스!" 커튼처럼 늘어진 나뭇가지가 들려지며 리오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흠칫한 엘이 얼굴을 퍼뜩 쳐들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어쩔 줄 모르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에 반짝이는 은빛 단도가 잡혔다. "대체 이런 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리오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단도를 숨기기 위한 그녀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하지만 극도로 당황한 엘의 동작은 어색하고 서툴 수 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의자 손잡이 틈으로 밀어 넣으려던 단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엘의 입술에서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을 때, 그녀 앞에 막 걸음을 멈춘 리오가 허리를 굽혔다. ================================================================== "이게 뭐야?" 엘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단도잖아. 보면 모르겠어?" "근데 왜 단도를 꺼내 들고 있는 거야?" 리오의 목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조용했다. "그,글쎄...어쩌다 떨어졌는지 모르겠어." 엘은 불편하게 파고드는 리오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어! 너 다쳤잖아!" 크게 소리친 리오가 엘의 손목을 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별거 아니야!" 엘이 다급히 말하며 손을 빼내려 하자 리오의 손가락이 한층 강하자 손목을 감아왔다. 리오에게선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는 엘의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고만 있었다. "정말 별거 아니야, 리오. 그냥 살짝 긁힌 거 뿐이야." 엘이 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은 것 같아." 리오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웃옷을 들추더니 안에 입은 하얀 셔츠자락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단도로 길게 찢기 시작했다. "리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엘의 입술에서 어이가 없다는 물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리오는 묵묵이 길게 자른 셔츠조각으로 엘의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 "나참, 이럴 필요없다니까! 검술시간마다 이 정도 상처쯤은 매일 입다시피 한단 말이야." "그래, 검술 시간엔 그렇겠지." 상처를 감은 천에 매듭을 지으며 리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도 알고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검술시간이 아니야." 리오의 말을 끝으로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엘의 얼굴에서 서서히 어색한 웃음이 빠져나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불편한 그녀의 마음처럼 목소리 역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이런 거야?" 리오의 시선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파고 들었다. 엘은 얼굴을 돌려 정면에 있는 나뭇가지를 응시했다. 그리고 굳어있는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계속 이럴 거야?" 갑자기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못 알아들은 척하면 내가 '그래 잘 알겠다'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네 마음대로 생각하면 되잖아!" 답답한 마음에 그녀 역시 언성이 높아졌다.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침묵이 다시 한번 두 사람 주위에 가득 찼다.엘은 리오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단도를 집어 허리춤에 걸린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잠시 머뭇거리며 할 말을 찾던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트레비아 연주 때문에 그런 거지?"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려 하던 엘의 손이 얼어붙은 듯 허공에 정지됐다. 엘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꿇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리오를 마주했다. 그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리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 말이 맞았군. 트레비아 연주를 피하기 위해서였어." ------------------------------------------------------------------- "저기....자일스 전하. 왜 세렌국 국왕을 초청하신 건지.... 전 아직도 잘 이해가...." 알비노가 자일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비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일스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찔끔한 알비노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게 엉망이야! 그 놈이 내 모든 걸 망치고 있어! 감히 날 조롱거리로 만들고, 내 위엄과 권위를 더럽히고 있다고!" 자일스가 뿌드득 이를 갈며 불끈 쥔 두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분노에 압도당한 왕자들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세렌국의 애송이따위가 감히!" 자일스의 고함이 공기를 울린 직후, 뒤이은 짧은 침묵을 깨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알렉스는 대단해." 격한 분노를 담은 자일스의 눈이 브레인에게 꽂혔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던 브레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렉스가 대단하다고 했는데요.... 지난번 일도 그렇고...." 브레인이 채 말을 끝맺지 못했을 때, 자일스가 다리를 들어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브레인이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졌다.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나기 위해 버둥대는 그의 복부로 세찬 발길질이 가해졌다. 자일스가 다시 한번 다리를 치켜들자 브레인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멍청하고 무식한 놈! 뭐라고? 다시 말해 봐라! 다시 말해 보라고!" 말을 하는 내내 자일스는 브레인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자일스 전하, 고정하십시오." 보다 못한 요하임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브레인 앞을 막고 나섰다.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 해도 브레인은 자신의 형제였다. 손톱 만큼의 형제애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요하임으로서는 이대로 자일스의 구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브레인을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마침내 뒤로 물러섰다. 숨을 죽인 채 자일스를 살피던 왕자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라 자일스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물병을 들어 브레인에게 던졌다. 충격의 반동으로 브레인의 얼굴이 뒤로 확 젖혀지며 깨진 물병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놀란 왕자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브레인! 브레인! 괜찮아?" 브레인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요하임이 걱정스런 어조로 그를 불렀다. 브레인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요하임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움찔하던 브레인이 몸을 격렬하게 떨더니 곧 바닥에 질펀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요하임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일어날 수 있겠어?" 요하임은 토악질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브레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브레인이 몸을 일으키려 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의 머리를 받치며 힘을 보태 주었다. 상체를 일으키자 유리병에 찢긴 이마와 머리에서 물과 뒤섞인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새빨간 피가 눈 깜짝할 새 브레인의 얼굴을 뒤덮어 버렸다. 브레인의 멍한 눈동자에까지 피가 스며들자 섬뜩한 공포를 느낀 요하임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질린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서는 요하임의 옷자락을 토사물과 피가 범벅이 된 브레인의 손이 와락 움켜잡았다. 그의 손을 격렬히 뿌리치는 요하임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자일...스....전하....." 잔뜩 쉰 목소리로 브레인이 중얼거렸다. "젠장! 입 닥쳐!"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자일스의 얼굴에도 불편한 기색이 슬쩍 드러나 있었다. "요....용서....해....주세...." 커다랗게 부릅뜬 브레인의 핏빛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저 놈을 어서 끌어내라!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하란 말이다!" 자일스가 이를 갈며 소리치자 요하임이 서둘러 브레인을 부축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구역질 나는 놈! 도살장의 더러운 돼지처럼 피를 질질 흘리는 꼴이란!" 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 순간 자일스가 내뱉듯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몸을 굳히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래,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라고!" 자일스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이어 웃음소리는 넓은 방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왕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자일스가 그들에게 한발 다가들었다. "모두 기대하고 있어도 좋을 거다. 재미있는 일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말을 마친 자일스가 다시 한번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옅은 초록색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당장이라도 터져 오를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회장의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그에 따라 엘의 두통도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엘은 뻣뻣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다미아 공주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두 명의 왕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조금 전 정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리오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던 일. 그리고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의 몸이 꺼질 듯한 안도감. 리오는 다행스럽게도 엘이 트레비아 연주를 기어코 피하려 하는 이유를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중압감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평소 나서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오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용기가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할 지경이니 용기없는 그녀에게 조금 나눠 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리오가 생각나자 엘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만약 리오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던 거라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 엘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엘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오가 고개를 돌려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르벨라 황녀의 겁탈 사건 이후 사람들을 대하기가 불편한 엘은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다 마음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먼저 엘이 어색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알렉시스 왕자님." 다미아 공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아는 체를 했다. 예의를 저버릴 수 없어, 마지못해 나온 말임이 분명해 보였다. 엘은 복도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걸레를 든 채 알렉스가 부르겠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엘과 몸이 스치기라도 할까 봐 옆으로 주춤주춤 움직이는 모습을 보건 데, 그녀를 천하의 파렴치범으로 여기고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다미아의 행동은 그 옆에 있던 두 명의 왕자들과 비교하면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잔뜩 인상을 쓴 채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엘을 노려보던 왕자 한 명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몸을 휙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왕자가 엘의 발치에 침을 퉤 뱉고는 그 뒤를 따랐다. 엘은 착잡함과 씁쓸함을 느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녀로서는 발끈할 수도,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리오의 반응은 격렬했다. "저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리오, 그러지 마!" 험악하게 소리치며 그들에게 달려들려는 리오를 엘은 서둘러 만류했다. 씩씩거리는 리오의 거친 숨소리 위로 다미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실례해야겠습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다미아가 도망이라도 치듯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러자 리오가 거세게 한쪽 발을 굴렀다. "어휴! 이거야,원! 속 터져서! 대체 언제까지 저럴 생각인 거야?" "죽을 때까지." 엘이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말하자 리오가 잔뜩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봤다. "저들의 행동에는 네 책임도 커! 왜 가만히 당하고 있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데? 덤벼들어서 주먹질이라도 하라는 거야?" 리오가 답답해 못 견디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내려쳤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라도 해! 바보처럼 멍하니 서서 당하지 말고!" "공주님들한테 주먹을 휘두르라고? 진짜 인간말종이 되게?" 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싱겁게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잔뜩 찌푸려진 리오의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최소한 말로라도 네 무죄를 주장해야지!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당할 생각이야?" "어차피 아시리움을 나가면 평생 얼굴 볼일 없는 사람들이야. 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위는 관심없어. 그리고 제발 날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구차한 짓 할 마음없어! 손톱만큼도!" "나참!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넌 세렌국의 왕자야! 앞으로 저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아?"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리오가 소리 높여 반박했다. 대답하기가 곤란해진 엘은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주위를 휙 둘러봤다. 때마침 운 좋게도 웅성웅성하며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엘이 과장되게 놀라는 척하자 리오가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시시 웃고 있는 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입술에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 답답아! 그나저나 네 말이 맞는 것 같긴 하군.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더라도 알 수 있겠어."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입구 쪽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걸 찾을 수는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 입장하려나 봐." 리오의 말을 끝으로 윙하는 아득한 울림이 엘의 귀를 가득 채웠다. 유령이라도 본 듯 커다랗게 열린 보라색 눈동자가 한 곳에 못 박혔다. 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헛것을 본 건 더더욱 아니었다. 반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통로를 걸어 성큼성큼 연회장으로 들러서는 사람은 틀림없이 리자드였다. 리오의 입술에서 나온 짧고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엘의 멍한 머리를 파고 들었다.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은 엘은 격하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먼저 자리를 뜨지 않길 정말 잘 했는걸! 만약 그랬다면 땅을 치며 후회했을 거야!" 리오의 목소리엔 놀라움과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잔뜩 가라앉은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대체 누구야?" "그러고 보니 알렉스, 너도 처음 보는 거겠구나!" 그녀를 향해 휙 돌려진 리오의 얼굴에서 단번에 흥분이 빠져나갔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핏기가 하나도 없잖아! 알렉스, 어디가 아픈 거야? 어지러워? 아까 머리가 아프다 하더니 혹시...." "아니, 난 괜찮아! 그것보다 지금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 말해줘!" 엘은 성급하게 리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궁금해서 그래. 사람들 반응도 예사롭지 않고 말이야." "사람들 반응은 당연한 거야!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든, 베일에 가려져 있다시피한 대단한 인물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말이야. 잘 들어, 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말이야...." 눈을 반짝이며 소리를 높이던 리오는 분위기를 북돋으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루벤스타인 대공이야! 리자드 카라우크 퀠름 폰 루벤스타인 대공이라고!" 리자드 카라우크 퀠름 폰 루벤스타인.... 엘은 낯설기만 한 이름을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바르테즈 공국의 그 루벤스타인 대공?" "그래! 너도 알고 있었구나! 뭐, 당연하겠지만 말이야." 리오의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던 시절의 엘도 루벤스타인 대공이란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항상 경외를 담은 어조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이름은 엘에게 있어 아무리 발꿈치를 높이 들고 손을 힘껏 뻗어도 닿을 수 없는 하늘보다 더 먼 존재였다. 리자드 카라우크 퀠름 폰 루벤스타인, 그는 바르테즈 공국의 절대군주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을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리아잔 제국 황제의 손에 의해 공작령으로 지정되어, 그 후 바르테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지만, 사실상 바르테즈 공국은 리아잔에 귀속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바르테즈 공국은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리아잔 제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하나의 독립왕국이었다. 리아잔 제국의 10분의 1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바르테즈 공국은 국토의 크기는 여타 나라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지만, 경제력과 군사력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월등했다.리아잔 제국과 바르테즈 공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리아잔 병사 열 명보다 바르테즈 병사 한 명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겠다는 우스개소리는 농담처럼 흔히 쓰이는 말이었다. 그 말처럼 바르테즈 공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어느 나라도 당해낼 수 없다는 실력과 용맹으로 유명했다. 리아잔 제국조차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만큼 바르테즈 공국의 군사력이 막강한 데는, 군대는 물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자신들의 군주인 루벤스타인 대공에게 받치는, 맹종에 가까운 절대적인 충성도 한몫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한 통솔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루벤스타인 대공은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이런 점은 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거의 빠짐없이 대공에 대한 허황되기까지 한 갖가지 풍문이 나오곤 했다. "법황 성하를 못 뵈어 서운했는데, 루벤스타인 대공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만으로도 서운함을 달랠 수 있겠어." 리오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벤스타인 대공이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나라는 통째로 살 수 있다고 하던 데.... 비밀리에 리아잔 제국 상권의 반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고.... 그게 사실일까, 알렉스?" "글쎄.... 근데 저 사람이 루벤스타인 대공인지는 어떻게 안 거야?" 리자드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던 리오가 엘을 흘끗 쳐다봤다. "몇 년 전인가 아버님께 들은 적이 있어. 루벤스타인 대공은 마주 보기만해도 기가 질리는, 뭐라 할까.... 숨막힐 듯 강한 힘과 얼음같이 냉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단한 미남이라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듣지 못했더라도 알아볼 수는 있었을 거야. 루벤스타인 대공이 특이하게도 청회색 눈과 청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건 유명하잖아. 하지만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의 반응만으로도 알아맞힐 수는 있었을 거야. 시간은 좀 걸렸겠지만." 잠시 말을 끊은 리오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였다. "다들 짧은 말이라도 한번 나눠 보고 싶어 기를 쓰는군. 저기 저 사람은 대공의 옷에 침이라도 떨어뜨릴 기세잖아. 정말 가관이다! 꼭 주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미친 듯 꼬리치는 강아지들 같지 않아?" 혀를 차대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리자드에게 못박힌 리오의 눈엔 숨길 수 없는 동경이 담겨 있었다. 리자드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가 쑥스러워서 그렇지, 그와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리오, 우리도 대단하신 루벤스타인 대공을 만나 뵈러 가자. 인사도 드리고 말이야." "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리오를 무시한 채 엘은 리자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리자드는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살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흥분된 사람들의 말에 짧게 응수하는 리자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엘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냉정한 얼굴에서 희미한 짜증을 읽을 수 있었다. "야, 알렉스!" 리오가 엘의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대공께 인사를 드린다고? 루벤스타인 대공이 우릴 쳐다보기나 할 것 같아?" "그거야 대면해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엘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리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 참!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난 저 사람들처럼 바보짓하기 싫단 말이야."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면서도 리오는 연신 투덜거렸다. 엘은 리오의 말을 흘려 들으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리자드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자 그것에 맞춰 심장고동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엘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리자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강렬한 섬광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녀와 반대로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는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리자드의 시선이 무심히 그녀를 지나치자, 마치 검 끝이 파고들기라도 한 것처럼 엘의 가슴에 싸늘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엘은 점점 부풀어오르는 약한 마음에 지지 않기 위해 더욱 단호하게 발을 내딛었다. 난 리자드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 걸까? 대체 그에게서 무얼 확인하고 싶은 것일까? 엘은 혼란에 싸인 채 걸음을 멈췄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리자드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서로를 밀치다시피 하며 앞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보건 데, 그들 사이를 뚫고 나가는 것 또한 용이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대공 각하!" 엘은 큰소리로 리자드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소란스런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결연한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루벤스타인 대공 각하!" 고함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나온 순간 놀랍게도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엘에게 몰려들었다. 그 속엔 리자드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은 따가울 정도로 그녀에게 못 박힌 사람들의 시선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눈 엔 오직 리자드 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엘은 주저없이 사람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에! 루벤스타인 대공 전하를 대공 각하라고 불렀어! 감히 그런 실례를 범하다니!" 톤 높은 여자의 말이 들리는 순간 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움츠러들려는 마음에 대항하듯 고개를 더 꼿꼿이 치켜들었다. 리자드에게서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엘은 정중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순한 인사말만 한 뒤 고개를 들자 리오가 다급히 그녀의 팔을 툭 건드렸다. 엘은 고집스럽게 리오의 행동은 물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무시했다. 그녀도 자신이 정식명을 밝히지 않은,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무례를 범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자드 앞에서 거짓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엘도 자신의 이런 고집스런 행동에 어떤 논리적인 이유를 붙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녀의 숨길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 불러일으킨 일일 뿐이었다. "저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보즐라르 드 아르트로, 루벤스타인 대공전하께 인사 드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리오가 재빨리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러자 엘에게 꽂혀 있던 리자드의 시선이 리오를 향했다. "제 친구는 세렌국의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입니다. 대공전하를 뵙게 되어 긴장되고 당황한 마음에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제 이름에 맹세코 무례를 범할 마음은 결단코 없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리오를 보는 청회색 눈동자에 미묘한 반짝임이 지나갔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리자드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반갑소, 리오카사이 왕자." 잠시 말을 끊었던 리자드가 엘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물론 세렌국의 왕자도."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리자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고소하다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리오가 엘의 팔을 잡으며 빨리 자리를 벗어나자는 눈짓을 보냈다. 엘은 그를 못 본 척하며 똑똑 끊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공께선 이런 자리에 참석하시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놀랍게도 연회장에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호기심으로 가득 찬 침묵이 그들 주위를 에워쌌다.리자드가 그녀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엘은 무의식중에 숨소리를 죽였다. 그녀를 향하는 리자드의 얼굴엔 전혀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엘은 그가 재미있어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렉시스 왕자라 했던가?" "예." 리자드의 무심한 질문에 엘은 짤막하게 답했다. "내가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가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이 곳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아시리움 성전의 초대를 받았소. 아시리움 성전에서 날 초대한 이유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거고.... 정 궁금하면 법황 성하께 여쭤 보는 게 어떨까 싶군." 리자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에게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공 전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크게 소리친 리오가 강하게 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엘은 아무 말없이 리오가 이끄는 대로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상대적으로 한산한 연회장 구석에 이를 때까지 리오는 꽉 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놓지 않았다. "대체 너 왜 그래?" 엘이 걸음을 멈추는 순간 리오가 힐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파란눈동자 가득 못마땅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루벤스타인 대공 앞에서 어떻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어? 마치 대드는 것 같더라! 또 그 말도 안 되는 질문은 뭐고? 평상시엔 나서는 걸 그렇게 싫어하더니만 대체 오늘은 어떻게 된 거야?" 엘이 입을 열기도 전에 리오의 말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루벤스타인 대공께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한 사람은 지금까지 너 밖에 없을 거다! 옆에 있던 내가 다 가슴이 섬뜩하더라고! 너 정말 오늘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대체 왜 그런 거야?" "리오, 넌 기분 나쁘지도 않아?" 엘의 물음에 리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루벤스타인 대공이란 사람, 거들먹거리며 우릴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했잖아. 그런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고?" 기가 막히다는 듯 리오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벤스타인 대공이 거들먹거렸다고? 게다가 우릴 무시하고 깔봤다고? 알렉스, 너 혹시 꿈꿨냐?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오금이 저리기까지 했는데, 뭐? 너무 황당해 말 이 안 나온다! 근데 정말 대단하더라!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야! 청회색 눈동자가 날 향할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니까!" 리자드 쪽을 바라보는 리오의 얼굴엔 경탄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저렇게 관심 끌고 싶어서 사족을 못쓰는 거겠지. 남자인 내 눈에도 멋있고 근사한데 여자들은 오죽하겠어. 더군다나 대공은 아직 미혼이기까지 하니까 다들 목숨이라도 걸고 싶을걸?" 리오의 말대로 리자드의 주위엔 화려한 차림의 여자들이 한껏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 중 리자드 옆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가 수줍은 듯 하면서도 유혹어린 미소를 지으며 리자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러자 리자드의 입술에 선명한 미소가 그려졌다. 리자드가 웃고 있어! 나한텐 한번도 미소를 보여 준 적이 없는 리자드가.... 사실 리자드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는 의례적인 예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에 시선을 못박고 있는 엘에게 그의 눈동자에 담긴 짜증에 가까운 지루함이 보일 리 없었다. "저럴 수가.... 너무해...." 엘의 입술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오자 리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쁜 놈! 냉혈한 악당 같으니!" 이를 악물고 내뱉듯 말하며 엘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리자드를 등지고 섰다. 더 이상은 희희낙락하고 있는 리자드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엘은 강한 어조로 성급하게 대답하며 휘적휘적 걸어가, 리자드의 모습을 가려 줄 수 있는 커다란 기둥에 기대섰다. "어, 아무래도 대공께서 연회장을 나가시게 될 것 같은 데?" 엘을 뒤따라온 리오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엘은 그 순간 기둥 그림자에서 벗어나 리자드 쪽을 바라봤다.나이 지긋한 고위사제와 몇 마디 주고 받던 리자드가 그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리오!" 엘은 다급히 리오를 부르며 그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나 급한 볼일이 생각났어! 잠깐 나갔다 올 테니 넌 여기 있어! 알았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리는 리오를 무시하고 엘은 서둘러 연회장을 가로지른 후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올랐다. 걸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엘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는 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오직 리자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18장. 루벤스타인 대공-------------------------------------------------------------------예술품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우아한 모양의 등불이 말끔하게 깔린 돌길 위로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부드러운 금빛으로 물든 돌길을 울리는 엘의 다급한 발소리가 서늘한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오래지 않아 그녀의 눈에 리자드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앞서 가는 사제의 느릿느릿한 걸음에 맞추느라 리자드 역시 속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벤스타인 대공전하!" 엘의 외침에 사제가 먼저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리자드 역시 더 이상 걸음을 떼진 않았지만 엘이 그 옆에 다다를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제가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루벤스타인 대공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엘은 사제가 아닌 리자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곤란합니다. 대공전하께선 매우 바쁜 분이시니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다른 적당한 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사제의 말이 끝나자, 뒤이어 리자드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게 꼭 할 얘기가 있다니, 궁금증이 생기는군." 예상치 못한 리자드의 말에 사제가 입술을 멍하니 벌리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거리던 사제는 리자드의 서늘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찔끔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며 허겁지겁 발을 놀려 자리를 피해 주었다. 사제의 발소리가 멀어지며 점차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리자드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지난번 엘이 리자드에게 잔인할 정도로 호된 질책을 들은 이후 두 사람만 있는 장소에서 그를 마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말이란?" 리자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검게 빛나는 비수처럼 그의 눈길이 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엘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꼭 잡고 있던 두 손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연회장을 나가는 리자드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대로 그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반드시 해야 될 말이 그녀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마구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를 불러 세운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자드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굳어버린 엘의 머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뿌옇게 흐려질 뿐이었다. "중요한 말은 아닌 것 같군." 단정 짓듯 말한 리자드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정말 루벤스타인 대공이에요? 리자드가.... 진짜 루벤스타인 대공이 맞아요?" 그녀도 모르는 사이, 정말 얼떨결에 나온 물음이었다. 그리고 말이 끝나는 순간 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어리석은 질문이기도 했다. 리자드 역시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여기 온 이유가 뭐예요? 리자드가 아시리움까지 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한 것 같은 데...." 엘은 조금 전 세렌국 왕자로서 리자드를 대면했을 때 나온 것과 비슷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말했다시피 아시리움 성전의 초대를 받아 왔소, 알렉시스 왕자." 질릴 정도로 냉정한 어조의 말에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루벤스타인 대공전하. 미천한 저에게 잠시나마 귀중한 시간 내주신 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엘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 뒤 뻣뻣하게 몸을 돌려 리자드에게서 멀어졌다. "알렉시스 왕자, 몸 건강히 아시리움 생활을 마치길 바라오." 너무 나직해서 서늘한 바람소리같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엘의 귀에 스며들었다. 놀라움에 몸을 멈칫한 엘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리자 성큼성큼 걸어가는 리자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날 걱정해서 한 말일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곳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뜻일까? 엘은 리자드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한 조각까지 어둠 속에 묻힌 후에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깊은 밤, 새까만 하늘을 뒤덮은 싸늘한 수정조각처럼 보이는 별들이 땅에 닿을 듯 낮게 걸려 있었다. 엘은 별을 잡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발꿈치를 세우고,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손바닥을 힘껏 폈다. 그녀의 헛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고 스산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나왔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시린 어둠만 한 움큼 움켜쥔 그녀의 손때문인지도 몰랐다. 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약한 바람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문이 닫혔다. 그러자 창가에 서 있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서 오십시오, 루벤스타인 대공." 루드비히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창가를 떠나 고풍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황 성하." 담담한 어조로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넨 리자드가 의자에 앉자 루드비히가 그의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그리 밝지 않은 파르스름한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서늘한 그늘을 만들었다. "제 취향에 맞춰 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대공의 입맛에도 맞았으면 좋겠군요." 두 개의 잔에 흑갈색의 액체가 부어지며 은백색 김을 피어 올렸다. 리자드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차 맛에 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루드비히 역시 앞에 있는 리자드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듯 조용히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어떠십니까? 차가 마음에 드십니까?"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며 루드비히가 질문을 던졌다. "예." 리자드가 짧게 대답하자 루드비히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 차를 너무 쓰다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요. 물론 말씀하시기는 마음에 든다 하셨지만 말입니다. 마음을 숨기시는데 서툰 분이라 그 분의 본심을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과 달리 대공께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니.... 저로서는 대공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수 밖엔 없겠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매끄러운 어조의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맛을 음미하듯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대공께서 과거 아시리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신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오랜만에 연회에 참석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이름에 걸맞게 훌륭하더군요." 잠시 말을 끊은 리자드가 루드비히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가 마련된 이유가 궁금하군요. 성하께서 제게 친히 초대장을 보내신 건 의례적인 일이라 치부해도 말입니다."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전 지금껏 제 손으로 누굴 초대해 본적이 없습니다. 대공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듯 루드비히가 리자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렇다면 저로선 더할 나위없는 영광입니다, 법황 성하. 비록 한층 가중된 궁금증이 절 괴롭히지만 말입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리자드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이거, 정말 말씀 드리기 곤란하군요, 대공. 솔직히 말하면 제 변덕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유명한 루벤스타인 대공과 마음 편한 담소를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을성이 없는 전 그 즉시 대공께 서찰을 보낸 거고 말입니다. 대공과 전 지금껏 몇 번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적은 있어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해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루드비히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처럼 그의 말투 역시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은회색 눈동자엔 오직 싸늘한 냉기만이 담겨 있었다. "담소의 상대로 절 택해주셨다니 저로선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군요. 더 이상 아시리움 성전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절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대답을 하기 전 리자드는 한쪽 입술 끝을 슬쩍 비틀어 올렸다. "제가 아끼는 말이 얼마 안 있으면 새끼를 낳을 것 같습니다. 용맹한 말이긴 해도 제가 없으면 가끔 불안한 모습을 보이곤 해서 말입니다." 담담한 어조로 모욕적인 말을 끝낸 리자드가 루드비히를 향해 서늘한, 그러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거기에 답하듯 루드비히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니 안타깝지만 대공을 만류할 수 없겠군요. 마음 편한 담소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킨 리자드가 루드비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당연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해야 할 루드비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의자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그럼 전 이만." "모쪼록 편안한 여행이 되시길 빌겠습니다." 인사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문으로 향하는 리자드의 발소리가 조용히 멈춰 있던 공기를 울렸다. 리자드가 문고리에 손을 뻗는 순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연회장에 잠시 들렀다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조금 있으면 제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던 트레비아 연주가 시작될 겁니다. 대공께서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 같군요. 세렌국의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왕자라고 말입니다. 만약 참석하신다면 대공께선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훌륭한 연주를 감상할 수 있으실 겁니다." "세렌국의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왕자라.... 그러고보니 조금 전에 들렀던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눈, 꽤나 호감 가던 왕자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법황 성하. 저 역시 알렉시스 왕자의 트레비아 연주를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거절해야겠습니다. 성하께서 제 몫까지 훌륭한 연주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담담한 어조로 정중하게 말한 다음 리자드는 루드비히를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루드비히의 시선에서 벗어난 순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리자드와 마찬가지로 문이 닫히자 루드비히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자드 카라우크 퀠름 폰 루벤스타인...." 루드비히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엔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연회장을 부드럽게 휘감던 감미로운 음악이 한순간 멈추자 사람들의 시선이 악사들이 있는 단 위로 몰려들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악사들 앞에 자리잡은 중년의 고위사제가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목소리를 높였다. 소란이 서서히 가라앉자 사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전 웅게러라고 합니다. 제가 감히 여러분들 앞에 선 것은 성 아우렐리아 축일의 마지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실 분을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밤 평생을 통틀어 다시는 경험해보지 못할 최고의 트레비아 연주를 감상하시게 될 겁니다." 웅게러 사제는 분위기를 좀 더 고취시키려는지 말을 끊고 사람들을 휙 둘러봤다. 엘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며 터져 나오려 하는 괴로운 신음소리를 억눌렀다. 그녀에게 작게나마 위안이 되는 건 연회에 참석할지 모른다던 법황이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였다. "세렌국의 알렉시스 라헬 드 이스파한 왕자전하!" 꿈을 꾸듯 정신이 멍한 가운데 이상할 정도로 사제의 목소리가 똑똑하고 명확하게 들렸다. 엘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제발 이 괴로운 시간이 그녀를 못 본 채 스쳐 지나가기를 빌었다. 하지만 사제의 말이 떨어지자 시간은 엘의 정면에서 멈춰 버렸고,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수백개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박혔다. "알렉스!" 리오가 용기를 내라는 듯 얼어붙은 엘의 어깨를 두드렸다.엘은 리오에게 입술을 찡그려 억지 미소를 만들어 보인 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악몽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악몽의 한가운데 있는 우윳빛 트레비아는 마치 천상에서 신의 손길이 닿길 기다리고 있는 듯 은은한 빛을 발하며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엘의 걸음은 자꾸 느려져만 갔다. 하지만 아무리 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해도 결국 그녀가 도착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엘이 단 아래에 이르자 사제가 환영하듯 한쪽 팔을 들어 트레비아를 가리켰다. 부르르 진저리가 쳐지며 그녀의 손과 발이 싸늘해졌다. 엘은 계단을 오르고 단 위를 걸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트레비아 앞에 멈춰 섰다.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엘은 단을 내려가는 사제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을 휙 둘러봤다. 하지만 그들의 생김새며 표정은 그녀의 머리에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엘이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시선뿐이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싶은 욕망이 치밀었다. 그녀의 눈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다면 그들 또한 자신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어린아이같은 희망이 짧은 순간 엘을 압도했다. 그녀는 어리석고 용기없는 자신에게 쓰디쓴 냉소를 날리며 눈 앞에 놓인 트레비아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무심하고 오만해 보이는 트레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사람들이 한층 숨을 죽였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투명한 줄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끊어졌다. 엘은 상처 난 손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끊어진 줄이 튕겨지며 만들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뚝뚝 떨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놀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웅게러 사제가 단을 뛰어 올라왔다. 그의 손엔 어느 귀부인이 내밀었을 게 분명해 보이는 분홍색 레이스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엘을 서둘러 의자에 앉힌 웅게러 사제가 손수건으로 재빠르지만 한편으론 꼼꼼하게 그녀의 손을 감싸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매듭을 지으며 질문을 던지는 사제의 눈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엘은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에 사제의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아, 예.... 조금....아니, 꽤 놀랐습니다." 얼굴에 나타난 표정처럼 그녀의 목소리 역시 어색하기만 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꼼꼼하게 살펴보고 조율까지 완벽하게 마친 건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웅게러 사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트레비아를 쳐다봤다. "원래 사고는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까? 어차피 연주는 불가능하게 됐으니 전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트레비아가 멀쩡하다 해도 이 손으론 연주를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아, 상처를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한 자리를 서둘러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엘은 빠르게 말을 주워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어서 의관사제를 찾아가 상처를 치료받으라는 웅게러 사제의 말을 뒤로 하고 재빨리 단을 내려갔다. 그 길로 엘이 찾은 곳은 연회장 뒤쪽의 넓은 테라스였다. 성큼성큼 걸어가 난간에 두 손을 얹은 엘은 상쾌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길고 긴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토록 가슴 떨리고 숨 죽였던 밤은 처음이었다. 오늘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게 느껴지는 밤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바람에 날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려 팔을 들어 올리던 엘은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흠칫했다. 그녀의 손을 감싼 손수건이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마치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근 70일 동안 집요하게 엘을 괴롭혔던 고민이 손에 난 작은 상처 하나로 깨끗이 해결되었다. 솔직히 엘은 별 탈없이 트레비아 연주를 모면할 수 있었던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만약 리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고통을 느끼며 상처 난 팔을 감싸 쥐고 있을 것이다. 엘이 어떻게 해서든 트레비아 연주를 피하려 한다는 걸 안 리오는 자신의 단도에 엘의 단도를 내려쳐 만들어진 작고 날카로운 파편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단단히 끼게 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곧잘 저지르던 장난이라고 말하는 리오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진지하기만 했다. 현악기를 망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호언 장담하던 그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손가락 끝으로 손수건을 살짝 쓸어 보았다. 이걸로 됐어. 이제 모든 게 다 끝난 거야. 서늘한 바람 때문인지, 안도감 때문인지 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우십니까?" 테라스의 구석진 곳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 오자 엘은 흠칫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누,누구십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엘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운하군요. 제 목소리를 못 알아들으시다니." 부드러운 어조의 말이 다시 한번 들려 오자, 엘은 그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대체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트레비아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루드비히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처럼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엘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과, 그것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오묘하게 얽혀 있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엘은 불편한 마음에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연주는 할 수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손이...." 엘이 말끝을 흐렸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 하며 눈을 깜박이고 있는 엘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상처도 그리 깊지 않으니까요. 뭐, 조금 아프기도 하고, 또 며칠 동안 불편하겠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순순히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 루드비히가 손을 내렸다. 그러자 변덕스럽게도 그의 행동에 대한 섭섭함이 슬그머니 엘의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엘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어이없어 하며 작은 소리로 혀를 찼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루드비히는 왜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겁니까? 여기도 연회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이니까 참석했다 말하기는 좀...." 엘의 말을 뒷받침하듯 말 울음소리와 덜컹거리는 마차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제가 직접 영접해야할 귀중한 손님이 계셨습니다. 때문에 시간에 맞춰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려는 하품을 억눌렀다. 그리고 뿌옇게 흐려진 눈을 깜박이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이걸로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완전히 막을 내리는군요. 아마 이번 축일은 평생동안 못 잊을 것 같습니다. 저와는 달리 루드비히는 매해 겪었던 일이니까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은 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엘은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꼭 다물어진 그의 입술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루드비히?" 그의 얼굴에 닿아 있는 엘의 시선을 붙잡으며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루벤스타인 대공을 만나 보셨습니까?" 엘의 모든 것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몸은 물론 머리와 심장까지도 숨을 멈췄다. 엘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별 뜻없이 나온 단순한 질문에 과민반응을 보인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엘은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루드비히는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루벤스타인 대공을 만나 보셨습니까?" 루드비히가 다시 한번 좀 전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 "만나 뵈었습니다." 엘은 무뚝뚝하게 말하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토록 유명한 분을 만나셨는데도 별 감흥이 없으신가 보군요." "간단한 인사말만 나눈 분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감흥을 느끼는 것이 더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엘의 말투엔 희미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그녀의 상태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더 한층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져 왔다. "혹시 그 분을 전에 만나 뵌 적은 있으십니까?" "아니오!" 엘은 엉겁결에 버럭 소리를 질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강한 부인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아시리움 성전이 아니라면, 또 이런 날이 아니라면 루벤스타인 대공전하를 제가 어떻게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러시겠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드비히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맥박에 맞춰 규칙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오자 엘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녹초가 된 그녀의 몸이 간절히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몹시 피곤하군요." 엘의 한숨 섞인 말에 루드비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쉬십시오." 엘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연회장으로 통하는 휘장을 걷어 올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루벤스타인 대공께선 어떤 분이신 것 같습니까?" 무의식중에 엘은 잡고 있던 휘장자락을 힘껏 비틀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런 걸 말할 만큼 그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왜 제게 그 분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에 순간적으로 섬광이 반짝였다. 엘은 워낙 대단한 분이라 궁금해서 그런 다는 정도의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온 그의 대답은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말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그 누구보다 루벤스타인 대공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 한 질문입니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예, 틀렸습니다. 틀렸고 말고요. 엉뚱한 질문이 모두 끝나셨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휘장을 걷고 몸을 들이밀려던 엘은 다시 루드비히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좀 이상하군요, 루드비히. 정말 이상합니다." 입술을 다물자마자 엘은 휘장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루드비히는 가만히 서서, 흔들리는 휘장자락을 바라보다, 조금씩 밤의 기운이 엷어지기 시작하는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에서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롭게 보이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서도 웃음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얼음조각처럼 싸늘하게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 "거 참, 이상하군요." 의관 사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 팔에 난 깊은 상처가 하루만에 감쪽같이 아물었을 때, 제게 뭐라 하셨는지 기억 나십니까?" "저....그,글쎄요...." 엘은 말을 얼버무리며 사제의 눈치를 살폈다. "유달리 상처가 빨리 아무는 체질이라 하셨습니다. 저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 이 일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얀 천이 감긴 손을 내려다보는 사제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엘은 괜찮다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온 리오를 원망하며,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더 있으면 한층 곤란한 질문이 나오리라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은 사제의 입이 움직이려 하는 순간 시기적절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은 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보폭을 넓게 하여 성큼성큼 치료실을 가로질렀다. "내일 저녁 때쯤 다시 오십시오." 내일이든 모레든 치료실에 올 생각이 전혀 없는 엘은 사제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재빨리 문밖으로 나왔다. "다 끝났어?" 엘을 본 리오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잡으며 물었다. "안가고 기다리고 있던 거야?" 놀란 엘의 반응에 리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연회 다음날은 휴식을 취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어제 밤을 새워 노는 건데 말이야."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는 리오를 보며 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발을 내딛는 엘과 나란히 걸음을 맞추며 리오가 다시 투덜거렸다. "대체 하루종일 뭘 하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교육이나 받으면 좋겠다!" "우와! 천하의 리오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과장되게 놀라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엘을 보며 리오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이십 일이 넘는 시간을 방에 갇혀 지내봐. 그럼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요샌 방문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다니까." 하소연조로 변한 리오의 말에 엘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사제 두 명이 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엘과 리오도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넸다. "사제님들은 평상시와 다른 거 없어 보이는데?"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제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며 엘이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휴식 시간이 주어지는 건 우리 왕족들 뿐이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들이 하루라도 휴식을 갖는 줄 알아? 지금껏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 단언하는 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걸."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것 같던 리오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법황 성하께서 명령이라도 내리신다면 아시리움 성전의 전통 아닌 전통도 그 날로 바뀌게 되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어젯밤이 법황 성하를 뵐 절호의 기회였는데...." 적지 않게 안타까운 듯 리오는 가슴까지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섭섭하긴 해. 하지만 워낙 바쁘신 분일 테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아시리움 성전을 떠나신 것 같아. 너 기다리다 슬쩍 들은 건데, 법황 성하께서 아시리움에 안 계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제 연회에도 참석 못 하신 건가 봐. 그나마 루벤스타인 대공을 봤으니...." 엘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리오를 바라봤다. "정말이야? 성전 안에 법황 성하가 계시지 않다는 말 사실이냐고?" 정색을 하며 묻는 엘의 반응을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리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내 귀로 분명히 들은 거니까. 근데 말이야, 온통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엔 괴상한 금관을 쓰고, 끔찍할 정도로 두툼한 황금벨트까지 차고 온 사람 기억 나? 유난히 키 작고 왜소했던.... 왜 있잖아, 계단에서 보기 좋게 넘어지기까지 한...." 웃음 띤 리오의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엘은 묵묵이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는 법황이 아시리움 성전에 없다는 사실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대충이나마 본관 수색을 다 마친 지금으로선 정말 절묘할 정도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셈이었다. 엘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성 아우렐리아 축일도 막을 내렸으니 이젠 물건 찾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물건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엘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즉시 상처 입은 손에 통증이 느껴졌다. "왜 그래?" 리오가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한 리오를 향해 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리오만큼 그녀를 걱정하고 위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겁게 웃기는..." 리오가 찌푸린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여자란 걸 알면.... 그것도 천민 여자애란 걸 알면.... 넌 어떤 얼굴이 될까? 아마 날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겠지? 엘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휑한 가슴 한복판으로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박혀 드는 것 같았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리오가 그녀의 정체를 모른 채 일이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며 엘은 리오를 향해 다시 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빛 속을 떠도는 자잘한 먼지가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 사이로 쉴새 없이 일렁이며 격렬히 나붓거렸다. 공기를 울리는 힘찬 발소리가 긴 복도를 가득 채우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옆으로 비켜서며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제러드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루벤스타인 대공에게서 너무 뒤쳐지지 않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 거리는 조금 가까워졌지만 대신 그는 거친 숨을 고르기 위해 입술과 코를 벌름거리며 안간힘을 써야했다. 제러드의 뒤를 따르는 다섯 명의 기사들 역시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짙은 피 로가 쌓인 그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땀과 먼지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바르테즈 공국 국민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최고의 기사들이라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아시리움 성전에서 바르테즈 공국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면 그들이 모두 실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였다. 마법이라는 내키지 않는 힘을 빌려 상당한 시간을 줄일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칠일 밤낮을 한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린 그들의 모습이 깔끔한 귀공자 같을 수야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제러드의 이런 자기위안은 그의 앞에서 걸음을 옮기는 루벤스타인 대공을 보는 순간 힘없이 사그라졌다. 대공의 모습은 그들과 똑같이 강행군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정하고 깔끔해 보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대공이지만, 제러드는 새삼스레 경이를 느끼며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피곤으로 흐려진 그의 시선엔 언제나 그랬듯 확고한 존경과 충성이 담겨 있었다. 제러드는 손등으로 이마에 밴 땀을 대충 닦으며 더 한층 속도를 높였다. 루벤스타인 대공의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하는 그의 신장으로,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걷는 대공을 따라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도를 돌아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이르렀을 때, 루벤스타인 대공이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깜짝 놀란 제러드는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해 대공과 두 걸음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몸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뒤에 오던 사람들이 그의 등에 세차게 부딪쳐 왔다. 한순간 중심을 잃은 제러드는 두 팔을 휘저으며 경악에 찬 얼굴을 대공의 등에 박고 말았다. 뒤에서 격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짙은 정적이 찾아왔다. 제러드는 황급히 몸을 세웠다. 평소에도 혈색이 좋은 그의 얼굴은 이제 그야말로 불덩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루벤스타인 대공이 몸을 돌려 석상처럼 굳어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이제 됐으니 모두 물러가라!" 낮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들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대공이 단호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대공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제러드는, 쭈뼛거리며 엉거주춤 서 있는 기사들에게 독기 어린 시선을 던졌다. "누구야? 누가 날 민 거야?" 제러드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자 찔끔한 기사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아니야! 나도 밀린 거라고!" "나도 마찬가지야!" "왜 날 보는 거야? 나도 이 녀석이 미는 바람에 중심을 잃게 된 거란 말이야!" "내 탓하지마! 나도 피해자니까!" 목소리가 잠잠해지며 제러드를 비롯한 다섯 명의 시선이 일행의 맨 뒤에 서 있는 에지몬트에게 날아갔다. "너냐?" "너였구나!" "그래, 바로 너였어!" "제러드, 바로 에지몬트 자식이 범인이야!" 이미 밝혀진 사실을, 기사들의 귀감이라 일컬어지는 이케르가 침을 튀기며 크게 소리쳤다. "애.송.이." 제러드가 이 사이로 밀어내듯 한마디 한마디 똑똑 끊으며 말하자 아직 애틴 기색이 남아있는 에지몬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현재 20살인 에지몬트는 최고의 검술교관으로 인정받는 베르하르트조차 혀를 내두르는 탁월한 검술실력으로, 바르테즈 공국에서 가장 실력있는 소수의 기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퀠름 기사단에 들어온 기사였다. 기사단에 소속된 지 이제 겨우 사십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과 스무 살이라는 그의 나이는 다른 퀠름 기사단 기사들에게 애송이로 불리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애송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에지몬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펄펄 뛰었지만, 경험이나 머릿수에서 한참 밀리는 그로서는 매번 기사들의 장난기 섞인 놀림과 구박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바,바......바,바닥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혀가 꼬이게 된 에지몬트의 얼굴이 더 한층 붉어졌다. 반면 다른 기사들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낄낄대고 있었다. "꽤나 얼었나 본데?" "에이 설마! 어여쁜 아가씨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뛰게 만드는 우리의 기사 에지몬트님이 이런 일로 얼기야 하겠어?" "당연하지! 지난 번에 그 라탄가 리탄가 하는 아가씨한테 온 편지 생각 안나? 오, 아름답고 용맹하신 에지몬트님! 에지몬트님의 늠름하시고 훌륭하신 모습에 제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카셀이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를 애써 간드러진 어조로 흉내내자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다른 사람한테 온 편지나 훔쳐 읽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 같으면 당장 검을 빼 들어 자결을 하였을 겁니다!" 흥분한 에지몬트가 한쪽 발을 세차게 구르며 말을 끝내는 순간,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네가 감히 우릴 모욕했겠다!" 에지몬트를 노려보는 이케르의 한쪽 볼에 경련이 일었다. "애송이, 진짜 기사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마!" 말을 끊은 제러드가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며 버럭 소리쳤다. "저 놈을 붙잡아!" 기겁한 에지몬트가 반대쪽으로 훌쩍 몸을 날리려 했을 때는, 이미 제러드를 뺀 네 명의 기사들이 그의 팔다리를 완벽히 제압한 뒤였다. "왜,왜 이래요? 이거 놔요!"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그의 몸이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에지몬트는 격렬히 몸을 뒤틀었지만 그의 팔다리를 감은 억센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키득거리는 여자 웃음소리를 들은 에지몬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급히 주위를 살피던 그의 얼굴에 경악과 함께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요란한 소리에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거의 오십 명에 이르러 있었다. 대부분은 하인과 하녀들이었지만 기사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젠장! 이거 놓으란 말이야!" 악에 받친 에지몬트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다섯 기사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너처럼 땀 냄새 풀풀 나는 애송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어딘 줄 아냐?" 제라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커다란 창문 앞에 멈춰 선 기사들이 들고 있던 에지몬트를 창문 밖으로 휙 집어던졌다.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친 에지몬트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성을 휘감아 도는 수로에 빠져 버렸다. "어이, 애송이! 거기서 목욕이나 시원하게 하고 나오라고!" 요란한 웃음소리를 뚫고 퀠름 기사단의 최고참으로 평소 에지몬트가 존경해마지 않던 제러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훌륭하신 선배님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오, 그거 고맙군! 답례로 향기나는 선물을 하나 내려 주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에지몬트의 목긴 가죽부츠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혔다. 재빨리 머리를 피한 에지몬트가 웃음을 터뜨리며 방심한 순간 다른 쪽 부츠가 그의 정수리를 맹렬히 가격했다. 에지몬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았다. 그리고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수로 가장자리에 이른 그는 먼저 부츠를 밖으로 던진 다음, 두 명의 하인들 손을 잡고 수로에 서 빠져나왔다.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에지몬트는 기둥에 반쯤 몸을 숨긴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다음 기사들에게서 터져 나온 요란한 야유소리를 들으며 부츠를 옆구리에 낀 채 맨발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몬은 아래층에서 들려 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평소 그의 주군인 루벤스타인 대공은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고 규율을 중요시했지만 반면 부하들이 일단 업무에서 벗어났을 때는 마음 편히 쉬고 즐기며 그 동안 쌓였던 긴장과 피로를 풀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때문에 지금처럼 커다란 웃음소리를 듣는 건 이 곳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웃음소리는 아몬이 계단을 내려와 커다란 검은 문 앞에 설 때까지 이어졌다. 그를 본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불편한 기색을 은근히 내보이는 시종을 바라보며 아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르테즈 공국의 유일무이한 마법사로 알려져 있는 그를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이 비단 눈 앞의 시종 혼자만은 아니었다. 거의 다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그를 괴물처럼 여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작게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 의미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 중 아몬의 전부를 소유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람은, 오직 그의 주군인 리자드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리자드님." 아몬은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순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몬은 그의 주군을 대부분 리자드님이라 호칭했다. 그는 감히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건 바르테즈 공국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통틀어 자신 밖에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몬은 의식적일 때는 물론이고, 무의식적일 때조차 그 호칭을 고집스레 사용했다. 이유는 그 자신조차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주군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필요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루벤스타인 대공을 리자드라 스스럼없이 부르던 엘의 모습이 일순 아몬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자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만약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신 걸 보니 정말 기쁩니다, 리자드님." 아몬은 충동적으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우뚝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리자드에게 다가갔다.그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리자드가 낮고, 조금은 거칠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알고 있다." 아몬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이며 리자드를 바라봤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법황이 이번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리자드의 말이 들리는 순간 아몬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아몬은 얕고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리,리자드님. 엘은 무사하십니까? 혹시 다치신 건...." 리자드가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는 괜찮다. 아직까지는." 말을 끊은 리자드의 입술에 서늘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아마 당분간은 그런 상태가 유지될 수 있을 거다. 변덕스런 법황의 감정이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예? 법황의 감정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그게 무슨...." 말끝을 흐리던 아몬이 갑자기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허,허면....법황이 엘을.... 엘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단... 그런 말씀입니까?" "그래, 그런 뜻이다." 아몬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몬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혼란과 경악으로 가득 찬 머리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법황이 그 아이의 정체를 눈치챈 건지, 또 이번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린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움직여야 한다." 말을 마친 리자드가 다시 창으로 몸을 돌렸다.아몬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법황은 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리자드가 지금까지 법황에 대한 사소한 정보라도 모으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동원했다는 건 아몬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맞바꾼 정보가, 값어치라곤 조금도 없는, 하찮은 것들 뿐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법황을 본 적이 없어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힘든 아몬과 달리 리자드는 짧고 형식적인 만남에 불과했지만 이번 연회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법황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완벽하게 가려진 복잡하고 위험한 존재. 말 몇 마디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지 궁금하군." 리자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가지 궁금한 건 대체 법황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경로로 정보를 손에 넣었는지 하는 거다." "아시리움 쪽엔 현재 우리 쪽 사람이 전혀 없으니, 방법은 알 수 없으나 엘을 통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리자드님." 아몬은 의아한 마음에 눈을 깜박였다. 별안간 리자드가 커튼을 내렸다. 그러자 어둠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둘러쌌다. "엘을 통해서라.... 그 아이가 법황에게 정보를 줄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알고 있다 생각하느냐?" "그렇군요, 리자드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엘이 그들이나 그들의 계획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아몬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봐라, 아몬. 최대한 빨리." 아몬을 향하는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제19장. 붉은 방-------------------------------------------------------------------엘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램프에 불을 붙였다. 달빛이 환한 밤이면 힘들긴 해도 신경을 집중해 그럭저럭 수색을 할 수 있었지만 오늘처럼 구름이 두텁게 낀 날은 램프 없이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누군가의 눈에 띌 위험이 있지만, 날씨를 탓하며 소중한 하룻밤을 그냥 날려보낼 수는 없었다. 엘은 램프의 심지를 작게 조종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몸을 떠는 파르스름한 램프 불을 조심스레 비추며 계단을 내려갔다. 엘은 칠일 동안 계속됐던 서관 수색을 오늘로 마칠 생각이었다. 어제에 이어 일층 복도 아래 부분만 살펴보면 서관에서 대충이라도 그녀의 눈이 스쳐 가지 않은 부분은 손바닥으로 가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내일부터 찾아봐야 할 다른 수십 개의 건물들이 떠오르자 엘의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녀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엘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연회이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며칠째 새벽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괴로움은 이차적인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물건을 찾지 못할 거라는 약한 마음이었다. 엘의 이런 생각은 하루종일 그녀를 따라 다니며, 그녀를 의기소침하고, 조금은 자포자기하게 만들었다. 엘은 넓은 홀을 가로질러 홀의 왼쪽으로 이어진, 괴괴한 정적이 감도는 복도를 걸었다. 아시리움 성전의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 서관이 다른 점은 이 곳엔 다른 데와 달리 벽이며 복도에 그림이나 장식품이 전혀 걸려 있지 않다는 거였다. 지금 엘이 걷고 있는 복도 역시 나무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벽과 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길게 뻗어 있었다. 엘은 복도 끝에서 다섯 번째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싸늘한 수정고리를 잡아 문을 열었다. 한쪽 구석에 팔걸이가 정교하게 휘어진 안락의자들과 견고하게 보이는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 편으로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커다란 책장이 보였다. 엘은 서관을 살펴보는 동안 법황이 유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서관엔 크고 작은 서재가 네 개나 있었고, 그 외의 방들에서도 지금처럼 커다란 책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색하는 입장에 있는 엘로서는 책이 많다는 건 조금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책장과 책장 사이며 선반, 칸막이 등은 그렇다치고, 물건이 들어갈 만한 두툼한 책만 골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하룻밤이 꼬박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법황 성하, 책을 좋아하시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좀 지나치다 생각지 않으세요?" 엘은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며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으로 해야 되는 일이었다. 엘은 책장 옆에 있는 선반 위에 램프를 올려 놓은 다음 수색을 시작했다. 의자를 받치고 책장 위며 어둡게 그늘진 구석과 뒤쪽까지 살펴보았으나 눈에 띌 만한 건 전혀 없었다. 다음으로 엘은 맨 위 칸에서부터 두툼한 책을 차례로 빼어 들춰 보기 시작했다. 엘이 의자에서 내려와 어깨정도 높이에 있는 가죽표지 책을 꺼내 살핀 뒤 아무 생각없이 다시 꽂으려고 할 때였다. 수를 샐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그냥 스쳐 지나쳤던, 어둡고 좁은 구석이 유난스레 신경을 건드렸다. 엘은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몇 권을 더 빼냈다. 그러자 넓어진 틈으로 안쪽에 숨어 있던 붉은 원이 나타났다. 엘은 램프를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좀 더 밝아진 시야에 보인 건 처음 생각처럼 단순히 붉은 색이 칠해진 원이 아니었다. 엘의 주먹만한 크기의 원 안엔 자잘한 무늬가 바깥쪽부터 안쪽을 향해 소용돌이치는 모양으로 적혀 있었다. 엘은 얼굴을 바싹 들이밀어 자잘한 무늬를 찬찬히 살폈다. 무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반복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낯선 문자 같기도 했다. 그래, 어떤 의미있는 문장을 반복해서 적어놓은 것일지도 몰라. 그 순간 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고대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휘둥그렇게 떠진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어딘지 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몇 개의 문자였다. 루드비히가 말한 고대어가 확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고, 뜻이 무엇인지 상상도 안 되는 그녀가 이런 확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개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직감이 너무 강렬해서 엘은 감히 반박의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샨....뭐더라? 샨....무슨 어라고 했는데.... 이걸 적어가서 루드비히에게 물어볼까? 루드비히는 이 문자를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엘은 그냥 못 본 걸로 치고 수색이나 계속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붉은 원을 이루고 있는 문자가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런 것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엘은 책을 들어 제자리에 꽂으려 하다, 붉은 원을 이루고 있는 문자의 소용돌이를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이유를 달 수 없는, 완벽하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원의 중심에 닿았을 때였다. 갑자기 가운데 손가락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놀라 손을 들어보니 뾰족한 것에 찔린 듯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엘의 시선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원을 향했다.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붉은 원 전체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빛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서서히 소용돌이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붉은 빛이 조금씩 진해지고, 또 넓어졌다. 엘은 눈 깜짝할 새 책장을 온통 점령해버린 붉은 빛을 피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대체 그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놀랍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엘이 알 수 있는 건 붉은 빛에서 나오는 어떤 강력한 힘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다는 것 하나였다.미친 듯이 회전하던 빛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수축하는가 싶더니 곧 작렬하듯 터져 올랐다. 엘은 그녀를 한 입에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빛이 맹렬히 달려드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그녀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을 때, 눈을 자극하던 빛의 파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엘은 눈을 번쩍 뜨고 그녀 앞에 나타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봤다. 한쪽 벽 전체를 온통 차지하고 있던 책장이 보이지 않았다. 책장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자리잡고 있는 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구멍이었다. 엘은 눈이 마비될 것 같은 짙은 어둠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일어나 구멍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아래로 향해 있는 계단의 윤곽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은 걸음을 멈추고 램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구멍이 시작되는 첫 번째 계단 위에 닿을 때까지 멈춰 서지 않았다. 좁은 돌계단이 낯선 어둠을 향해 나선을 그리며 아래로 뻗어 있었다. 엘은 팔을 내밀어 계단 아래 쪽에 램프 빛을 비춰 보았다. 하지만 짙은 어둠을 뚫기에는 램프 빛이 터무니없이 미약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이 계단 아래 내가 찾는 물건이 있을까? 어쩌면 이 어둠 속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끔찍한 악몽일지도 몰라. 엘은 마른 침을 삼키며 램프를 힘껏 움켜쥐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끝내 이 계단을 내려 갈 수 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오늘, 지금 당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시리움 성전의 다른 곳에서 물건을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다시 이 계단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엘은 허리에 찬 단도를 더듬어 본 다음, 손을 올려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녀에게 있는 건 단도와 반지, 그리고 희미한 램프, 이 세가지가 전부였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야. 용기를 내자. 엘은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졌다. 끝났구나 싶을 때마다 램프 빛은 엘 앞에 어김없이 계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어둠이 그녀를 놀리며 끊임없이 계단을 토해놓는 것 같았다. 돌계단엔 하나같이 미끈거리는 이끼가 끼어 있었다. 때문에 엘은 손으로 축축한 벽을 짚고, 긴장한 채 한발한발 신중히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가는 몸서리가 엘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온몸에 배어 드는 축축한 땀이 가뜩이나 싸늘한 그녀의 몸에서 얼마남지 않은 체온마저 빼앗아 가고 있었다. 저 어두운 계단 아래 어딘가에서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엘의 살갗에 축축하고, 어딘지 모르게 끈적끈적한 감촉이 느껴지자 바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계단을 다시 올라가라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엘의 마음 속을 울렸다. 용기없는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램프 불이 가볍게 팔랑거렸다. 차가운 공포가 뱃속에서 단단히 뭉치는 것을 의식하며 엘은 뻣뻣하게 튕기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드디어 계단이 끝나며 그녀 앞에 둥근 공간이 나타났다. 스무 명 정도로 채울 수 있을 만큼 그리 넓지 않는 공간엔 눈에 띌 만한 어떤 물건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텅 빈 바닥 따위는 엘의 눈을 끌지 못했다. 엘의 시선과 정신을 온통 점령해버린 건 그녀 앞에 우뚝 서 있는 붉은 문이었다. 희미한 램프 불에 떠오른 붉은 문이 소름 끼칠 만큼 강렬해서 엘은 도저히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엘은 천천히 걸어 문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손바닥을 문에 살짝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거칠고 싸늘하고 딱딱한 감촉으로 돌로 만들어진 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엘은 소리없이 내리는 안개비처럼 두려움 섞인 호기심이 슬며시 몸을 적시는 걸 느끼며, 붉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문에 밀착되어 있는 손에 조심스레 힘을 가했다. 육중한 돌문이 서서히 뒤로 미끄러지자 그녀는 벌어진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엘은 움직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 잠시 고동을 멈췄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자 그녀의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엘은 얕고 빠르게 숨을 헐떡이며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붉은 색이었다. 천장과 바닥, 사방의 벽이 붉은 핏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엘은 걷잡을 수 없이 부들거리는 다리를 한발한발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등에 뭉클한 감각이 느껴졌다. 조금 전 들어왔던 딱딱한 돌문의 감촉을 예상하고 있던 엘은 움찔하며 세차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문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도 그녀의 시선에 들어오는 건, 하나로 이어진 완벽히 밀폐된 붉은 공간뿐이었다. 엘은 혼란과 경악에 싸여 문이 있던 자리에 손을 가져가 댔다. 그러자 그녀의 등에 느껴졌던 불쾌한 감각이 되살아 났다. 사람의 체온처럼 온기를 품고 있는 뭉클한 감촉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났다.엘은 얼어붙은 머리가죽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심을 이기려 안간힘을 쓰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벽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벽 전체에 피가 흥건히 배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엘은 격하게 진저리를 치며 피가 묻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미친 듯이 문질렀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닿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두 개의 핏빛 눈동자가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불이 번지듯 벽 여기저기서 붉은 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열린 엘의 눈에 비명이 가득 차 올랐다.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엘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어 붉은 방을 가득 채운 피투성이 얼굴들을 바라봤다. 사방의 벽과 천장, 심지어는 그녀가 딛고 있는 바닥까지 엉망으로 찢기고 파헤쳐져 붉은 살점이 너덜거리는 얼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폭우가 쏟아지듯 핏방울이 후드득 내려치기 시작했다. 엘의 머리를 물들인 붉은 피가 그녀의 얼굴을 타고 몸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솟아 나온 피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끈적끈적한 손길로 엘의 발목을 휘감았다. 수천, 아니 수만 개의 얼굴에서 핏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엘의 입술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입안으로 흘러 든 비릿한 피가 미끄러지듯 목을 타고 몸 속 깊이 파고들었다. 엘을 둘러싼 얼굴들이 그녀를 흉내내듯, 아니, 저주받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찢어진 입을커다랗게 벌렸다. 그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그녀를 덮쳤다. 엘은 힘없이 꼬꾸라지며 질척한 피웅덩이 속에 잠겨 들었다. "......스! 야, 알렉스!" 엘은 눈을 뜨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격렬한 몸서리가 식은땀이 흥건한 그녀의 몸을 흔들고 지나갔다. "세상에! 지금 네 얼굴이 어떤 줄 알아? 핏기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송장 같아!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리오가 걱정스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엘은 격렬하게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리오에게서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밝은 푸른 색으로 물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청명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난 지금 여기 있어! 난 환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거야! 붉은 방에 있는 게 아니야! 끔찍한 피웅덩이 속에 묻힌 게 아니야! 그래, 지금 내 옆엔 리오가 있어! 리오가! 난 혼자가 아니야! "알렉스, 왜 그래?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꾸었기에 너답지 않게 이렇게 몸을 떠는 거야? 식은 땀까지 흘리고." 엘은 리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파리한 입술을 움직였다. "리오....잠깐만 나 좀 안아 줄래?" 억양없는 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리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잠깐만, 리오.... 잠깐이면 돼." 엘은 간절함을 담아 리오를 바라봤다.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게 허무한 꿈이나 환상이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붉은 방은 단순한 악몽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가 여기 있는 한, 잠들지 않는 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받길 원했다. 머뭇거리던 리오가 뻣뻣한 팔을 들어 어색하게 엘의 어깨와 등을 감쌌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엘은 그녀가 리오에게 한 낯뜨거운 부탁의 진짜 이유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건 극히 단순했다. 엘은 그저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던 거였다. 그녀를 아끼는 누군가의 체온을 간절히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엘은 그녀를 둘러싼 따뜻한 햇볕과 리오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격하게 뛰던 심장고동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리오..." 엘은 나지막이 속삭이듯 리오를 불렀다. 그녀의 몸을 감싼 리오의 팔이 슬쩍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왜...왜 그래?" 리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 상황을 몹시 거북해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 자, 엘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엘은 어색함과 쑥스러움을 느끼며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손으로 코를 막으며 몸을 바로 잡았다. "리오, 너 목욕 좀 해야겠다! 어휴! 이 땀 냄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리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도 반나절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지독한 교관에게서 검술교육을 받아 봐! 땀 냄새가 안 날 수 있나!" 버럭 소리를 지른 리오가 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세차게 돌려 뛰다시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목욕물은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리오!" 엘은 장난기 어린 말을 소리친 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휙 돌린 리오가 잠시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다 퍽퍽 발을 구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리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엘은 웃음을 멈췄다. 웃음기가 빠르게 사라지며 그녀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내리 덮였다. 붉은 방이 나오는 너무나 생생한 악몽이 떠오르자 발작적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엘은 그것이 악몽인지, 아니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엘이 처음 그 꿈을 꾼 날, 자신의 비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곳은 바로 그녀의 방안, 침대 위였다. 그 때 눈을 뜬 엘이 처음으로 한 일은 조금 전 잠에서 깨어났을 때와 똑같이 주위를 둘러보는 거였다. 그녀가 이른 아침 순수한 햇빛이 세상을 환히 밝히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후에야 엘은 그녀의 몸 어디에서도 악몽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몸이 축축한 건 땀이 배어 들어 그런 것일 뿐 그녀의 몸 어디에서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방은 그저 악몽이 빚어 낸 섬뜩한 환영(幻影)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피투성이 꿈은 엘의 마음 한구석에 웅크린 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엘은 사일 밤을 하루도 빠짐없이 공포에 질려 경련을 일으키며 끈적이는 땀투성이로 잠에서 깨어났다. 심지어 오늘은 잠깐 눈을 붙인 야트막한 낮잠에까지 집요하게 악몽이 따라왔다. 악몽은 엘의 생활을 완벽하게 점령해버렸다. 신경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졌고,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으며, 깨어 있는 내내 긴장과 불안에 싸여 자기 방어적인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리고 어둠을 꺼리게 되어 밤에 할 수 밖에 없는 수색활동도 잠정 중단하고 있었다. 밤마다 그녀는 밖에 나갈 준비를 마친 후, 방을 이리저리 오가며 한숨을 푹푹 내쉬다, 끝내는 침대에 눕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엘을 의기 소침하게 만들었다. 원래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붉은 방을 떨쳐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 자신이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즉, 다시 한번 서관의 같은 곳에 서서 악몽 속의 그녀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해 보면 되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은 당연히 악몽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선뜻 행동으로 나서지 못했다. 마음 밑바닥에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생생한 두려움이 그녀의 육체는 물론 의지까지 옴짝달싹 못하게 옭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허송세월 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엘은 팔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젖히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밝은 햇살에 눈을 지긋이 감고, 얼굴에 스며드는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을 음미했다. 그녀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자연의 숨결에 빠져 조금씩 현실과 멀어지려 할 때였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가벼운 발소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게 했다. 엘이 몸을 바로잡고 조금 긴장한 채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상기된 얼굴의 아르벨라가 노란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모습을 보였다. "아르벨라!" 엘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일어났다. "아,알렉스." 아르벨라가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해 살짝 몸을 숙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질문을 던지는 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이런 대낮에 아르벨라가 일부러 엘을 찾았다는 건 필시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걸 반증하는 거였다. "정원 깊숙이 들어온 곳이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렉스. 자일스 오라버니가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 것 같습니다." "흉계라고요?" 엘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문제만으로도 엘은 이미 넘치도록 힘들고 괴로웠다. 언제까지 자일스의 동정(動靜)을 살피고 그가 어떤 계략을 세운 건 아닌가 전전긍긍해야 하는 건지, 아르벨라의 얘기를 듣기도 전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예, 하지만 어떤 일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왕자들에겐 그때그때 자일스 오라버니가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계획은 자일스 오라버니만이 알고...." "아르벨라, 혹시 정보를 얻으려고 자일스 패거리들에게 접근한 겁니까?" 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르벨라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아르벨라가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엘의 시선을 피했다. "부정 못하시는군요." 엘은 잠시동안 아무 말없이 아르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르벨라,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그 사실을 자일스가 알게 되면 대체 어쩌려고.... 만약 그 자가 자일스에게 입을 놀리면 어떡하려고 그런 일을 한 겁니까?" "하지만 브레인 왕자님은 그럴 분이...." 고개를 치켜들고 결연히 소리치던 아르벨라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엘은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브레인이 착한 성품을 지녔다는 건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말입니다. 어쩌다보니 그들 패거리에 들어가게 된 거겠지요. 사실 브레인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엘은 말을 끊고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그리고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아르벨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브레인 뒤에는 자일스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인 또한 위험인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브레인과 자일스는 전혀 다릅니다. 아르벨라도 알다시피 그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권력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일스를 한층 더 위험한 인물로 만드는 건 그가 남을 괴롭히는 일에 관한 한 상당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겁니다. 이 사실은 저도 근래에 들어와서 깨달은 것이지요." 엘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알렉스가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건지 알겠습니다. 그만큼 절 걱정하고 계시다는 것 역시...." "앞으론 절대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엘이 진지한 얼굴로 강경하게 말하자 아르벨라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스. 그럼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예상외로 얘기가 길어졌네요." 엘과 아르벨라는 서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굴을 들며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몸 조심하세요, 알렉스." "조심하십시오." 엘과 아르벨라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나눴다. 하지만 아르벨라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엘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엘은 아르벨라가 완전히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약 하고 위태위태해 보여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거운 한숨이 또 한번 들려 오자 리반은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책 앞에서는 좀처럼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그였지만 땅이 꺼져라 터져 나오는 요란한 한숨 소리가 십여 차례 연이어 머리를 파고들자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거야? 지나가는 것조차 끔찍해 하는 도서관까지 찾아와 날 괴롭히는 이유가 뭐냐고?" 한숨 섞인 리반의 물음에 리오는 푸른 눈을 끔벅일 뿐이었다. 리반의 독서를 끈질기게 방해하다 자신의 노력이 성공했을 때, 재미있어 하며 리반을 놀려대곤 하던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리오의 얼굴을 살피는 리반의 눈엔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려있었다. "리반!" "그래, 리오." 별안간 리오가 정색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리반은 얼른 응수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꾹 다물어진 리오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리반은 리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열을 세기 시작했다. 평소 리오의 성격으로 보아 다섯 안, 늦어도 여섯 안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리오는 그가 여섯을 지나 아홉을 셀 때까지도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놀란 리반이 숫자 세기를 멈췄을 때, 드디어 리오가 입을 열었다. "리반...." 그 말만을 한 채 리오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해 봐! 내 이름만 부르지 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리반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침착하고 조용한 평소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이 지금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리반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젊은 사제는 이미 주섬주섬 책을 정리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리반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의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유난히 꺼려하는 리반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사제의 등을 향해 미안한 마음이 담긴 시선을 던지며, 이제 마음 편히 얘길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리반.... 나 요새.... 좀 이상해...." 리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뭐가 어떻게 이상한데? 좀 구체적으로 말해 봐, 리오. 그래, 맞아! 지난번에 다친 상처가 완 전히 낫지 않은 거지? 그런 거지?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야? 행동하는 게 불편해? 아니면,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워낙 심한 부상이라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러니까 내가 좀 더 누워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한 거잖아. 넌 도대체 내 말을 콧등으로도...." 열심히 소리치던 리반은, 팔짱을 끼고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를 본 순간 말끝을 흐렸다. "눈치라곤 조금도 없는 바보 같으니! 겉으로는 혼자 똑똑한 척 다하더니만, 이렇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니까! 내가 몸 조금 불편한 거 갖고 이러고 있겠냐, 이 답답아? 대답해 봐! 내가 기껏 상처 좀 입은 것 같고 이러겠냐고?" 찔끔한 리반은 매서운 리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야....뭐....난 그저.... 네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서.... 그냥.... 네가 지난번에 죽을 뻔 했던 일이 저절로 떠올라서....별 생각없이....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수세에 몰렸던 리반이 다시 공세로 나오자 이번엔 리오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나 요새.... 정말 이상해." "그 말은 좀 전에도 했잖아. 그리고 이상한건 사실이고." "그,그래? 그렇게 이상해? 어디가 이상한 데?" 리오가 상체를 들이밀며 다급히 물었다. "여러 가지로." 리반이 짧게 응수하고 입을 다물자, 불만에 찬 리오가 입술을 실룩였다. "리반, 그런 식 말고, 좀 자세히 말해 봐!" 대답을 기다리며 리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리반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긴장은 짜증으로 변했다. "너한테 진지한 대답을 기대한 내가 멍청이지!" 투덜대던 리오가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뒤로 밀었을 때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리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알렉스 때문이지?" 몸을 흠칫한 리오가 리반에게 고개를 홱 돌리는가 싶더니 리반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리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이럴 수가! 정말이구나! 정말이었어...." 부자연스럽게 높아졌던 어조가 급속하게 낮은 중얼거림으로 변했다. 숨막힐 듯한 침묵이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탁자에 나 있는 작은 홈을 손가락으로 파고 있 었고, 리반은 창백한 얼굴로 그런 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리반이 입을 연 건 리오가 그를 흘끗 올려다 봤을 때였다. "어느 정도야?" "모...모르겠어. 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혹시 완전히 미친 건 아닌지 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사실 너한테 말할 결심을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만약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내가 죽든지, 그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난 반드시 일어나게 될 거야." 두 사람 모두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알렉스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는 거 아냐? 그걸 네가 너무 확대해서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냐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알렉스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을 대할 땐 한번도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없어. 만져....보고 싶은 적도...."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리오가 쥐어 짜내듯 힘겹게 말했다. 그러자 리반이 이를 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알렉스는 남자야! 남자라고!" "젠장! 나도 알아! 내가 그걸 모를 거 같아?" 리오도 악을 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의자에서 거칠게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빨리 마음부터 정리해야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해진 리반 역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창턱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네가 알렉스를 대하는 걸 볼 때마다 종종 이상하다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끔찍한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리오, 넌 제 정신이 아니야! 네 말대로 완전히 미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감히 그런.... 더럽고, 구역질나는...." 흥분해 악을 쓰는 리반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얼굴이 확 젖혀지며 그의 몸이 거칠게 벽에 부딪쳤다.주먹을 불끈 쥔 리오가 쓰러져 있는 리반 앞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리고 씹어 뱉듯이 험악하게 소리쳤다. "더럽다고? 구역질 난다고? 다시 한번 말해봐! 다시 한번 주둥일 놀려 보라고! 내 손으로 네 숨통을 끊어 놓을 테니까!" 리반은 찢겨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리오를 똑바로 마주보고 섰다. 겉으로 보기엔 분간이 안갈 정도로 닮은 그들이었지만,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는 리오의 눈과 달리,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리반의 푸른 눈은 냉정하게 반짝일 뿐이었다.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야, 리오? 내가 한번 그 이유를 말해 볼까? 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내가 한 말을 수긍하고 있는 거야. 안 그래?" 리반의 말이 끝나는 순간 험악하게 이를 드러낸 리오가 다시 한번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던 리반의 대응은 리오보다 한 박자 빨랐다. 리반은 옆으로 몸을 비틀어 얼굴로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동시에 리오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숨을 격하게 들이 쉰 리오가 본능적으로 뒤로 한발 물러서며 허리를 굽히고 복부로 손을 가져갔다. "어릴 때처럼 너한테 일방적으로 당할 내가 아니야! 나한테 덤빌 시간에 완전히 돌아 버린 네 머리에 찬물이나 쏟아 붓는 게 어때?" 비웃음이 가득한 리반의 말이 끝났을 때, 리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잘난 체 하지마, 이 비실비실한 책벌레야! 네 놈한테 지는 날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 될 테니까! 다시 말해 너같은 건 내 손가락 하나로도 뭉갤 수 있다는 말이다!" 리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그러자 냉정함을 유지하던 리반의 얼굴도 불을 붙인 듯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해보겠다는 거냐?" "그래, 정말 해보겠다는 거다!" 마주 노려보는 두 사람의 푸른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 랄 것없이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오늘 저녁은 유달리 맛있는 것 같아. 그,그렇지?" 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리오와 리반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빨간 머리 쌍둥이 형제들은 그저 뚱하게 앉아 음식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리오와 리반이 상당한 차이를 두고 들어와 식탁의 양 끝에 한 명씩 자리잡은 후 지금까지 내내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심각한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들 사이에 끼게 된 엘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간간이 눈을 마주치며 살기를 내뿜는 두 사람에 대한 걱정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만약 엘이 식당을 나와 두 사람만 남겨진다면 다시 한번 혈전이 벌어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엘은 시에라가 방으로 음식을 가져다 주는 아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식사를 리오와 리반, 두 사람과 함께 했다. 한 건물 전체가 식당으로 이루어진 아시리움 성전에선 식사를 하고 싶을 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곳에나 들어가면 되었다. 그러면 그 곳에서 입맛을 자극하는 온갖 산해진미를 맛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같은 분위기에선 제아무리 최고의 음식이 눈앞에 있다 해도 제대로 손이 가지 않을 뿐더러 입에 넣는다 해도 별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엘은 한숨을 내쉬며 리오와 리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들이 식당에 오기 전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엘이 눈을 뜨고 있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못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식탁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엘에게 처음 얼굴을 보인 건 리오였다. 여기저기 멍과 핏자국이 선명한, 퉁퉁 부어 오른 얼굴을 보며 엘은 입을 딱 벌렸다. 리오는 그녀의 경악한 얼굴을 못 본 척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지만, 엘은 리오가 한쪽 다리를 조금 절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리오가 식탁의 맨 위쪽에 자리잡았을 때, 이번엔 리오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리반이 나타났다. 사실 옷차림을 보고 알았지, 두 사람이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면 엘은 누가 리오고, 누가 리반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리반이 몸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엉거주춤 걸어 식탁의 맨 아래쪽에 앉은 후에야 엘은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서로 싸운 거지?', '대체 싸운 이유가 뭐야?' 라는 식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 물음은 대답을 듣지도 못할 뿐더러, 잘못하면 가뜩이나 싸늘한 분위기를 한층 더 냉랭하게 만들 수 있었다. 때문에 엘은 날씨나 음식같은 뻔한 화제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조차 두 사람 모두에게 무시당했지만 말이다. "저녁 식사 후엔 뭘 할 생각이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 머리에 떠오른 대로 말한 엘의 물음에 웬일인지 리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리오의 시선은 엘이 아닌 리반에게 꽂혀 있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책벌레 녀석의 희멀건 얼굴을 자근자근 뭉개 줄 생각이야!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리오의 험악한 말이 끝나자마자 그 즉시 리반이 이죽거리는 어조로 응수해왔다. "난 완전히 머리가 돌아 버린 시커먼 녀석의 엉덩이를 마구 걷어차 줄 계획이야. 새털만 닿아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를 때까지." 두 형제의 푸른 눈이 맞부딪치며 맹렬히 타오르자 당황한 엘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그렇구나! 두 사람 다 바쁠 것 같으니까 난 혼자 검술연습이나 해야겠다!" 말을 마친 엘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였다. 그러면서 슬쩍 팔을 올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알렉스, 왜 그래? 목이 아픈 거야?" 리반이 조금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엘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니야, 괜찮아." 엘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리반이 의자 끌리는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목이 결리나 본데, 어디 좀 봐봐." 갑자기 엘의 목덜미에 리반의 손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린 그녀를 무시하고 리반이 그녀의 목덜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괜찮대도! 이럴 필요없어, 리반!" "이런 건 그때그때 풀어 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그렇지, 리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질문을 던지는 리반의 어조에서 묘하게도 약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자 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엘과 리반을 바라보고 있는 리오의 태도였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엘의 목에 닿아 있는 리반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시선을 올려 리반을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턱 근육이 단단히 조여진 거로 봐서 이를 악물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됐어, 리반." 엘은 단호하게 말하며 몸을 움직여 리반의 손에서 벗어났다. 평소와 다른 리반의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리오의 반응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목덜미를 만지는 리반의 손길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괜찮아졌다면 다행이고. 앞으로도 몸이 불편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알렉스. 리오와 난 널 정말 좋아하는 네 친구니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매끄럽게 말하며 리반이 엘의 양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해." 리오가 한마디 한마디 이 사이로 뱉어 내듯 뚝뚝 끊어 말했다. 불꽃이 튀기는 푸른 눈에서 성난 기운이 쭉쭉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뭘 그만 하라는 거야, 리오? 응? 좀 정확히, 차근차근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그만 둘지 계속할지 결정을 내리지, 안 그래?" "너희 둘 다 정말 이상해. 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엘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리반이 퉁퉁 부은 얼굴을 힘겹게 움직여 그녀에게 좀 흉측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안해, 알렉스. 리오는 신경 쓰지마. 아무래도 리오가 날 질투하는 것 같으니까." "저 자식이!" 리오가 험악하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엘도 리반의 팔을 밀치며 단호하게 몸을 세웠다. 두 사람을 노려보는 그녀의 보라색 눈엔 진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전 이만 물러갈 테니, 두 정신 나간 형제 분들은 남아서 따뜻한 우애를 더욱 돈독히 다지시길 바랍니다." 엘은 잔뜩 비꼬는 어조로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 문을 나섰다. 문소리에 섞여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한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리를 움직였다. 복도를 걷는 내내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 모두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식당 건물을 나와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방으로 방향을 잡았다. 빨간 머리 쌍둥이 형제의 골치 아픈 신경전 사이에 끼어 제대로 식사도 못한 엘은 방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엘이 주린 배를 손으로 꾹 누르며 방에 한발 들어섰을 때였다. 발끝에 가벼운 것이 부딪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원색의 카펫에 떨어져 있는 하얀 종이가 강렬하게 눈을 파고 들었다. 엘은 재빨리 복도 양쪽을 둘러봤다. 어둑어둑하게 엷은 어둠이 깔린 복도엔 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엘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후 꼼꼼하게 접혀 있는 종이를 펴들었다. 어둠 속에서 눈에 익은 글씨체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알렉스, 저 아르벨라입니다. 자일스 오라버니가 꾸미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너무 끔찍한 얘기에 아직도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네요. 알렉스가 제 글을 알아볼 수 있을지 조차 걱정이 됩니다. 오늘밤 자정 무렵에 제 2검술수련장으로 나와 주세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나무 뒤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방으로 오시면 안됩니다. 아무래도 자일스 오라버니가 절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알렉스, 전 너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제 발목을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 괴롭힙니다. 하지만 제가 알게 된 걸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렉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심 또한 확고합니다. 꼭 제가 말한 곳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알렉스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엘은 글을 다 읽은 다음 종이를 힘껏 말아 쥐었다. 자일스가 꾸미고 있다는 일에 대한 걱정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그건 이차적인 문제였다. 그것보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르벨라에 대한 근심이 더 컸다. 아르벨라의 글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섬뜩함 때문일까? 아니면 엘의 직감이 그녀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서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이렇게 쉴새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리라. 엘은 창가로 다가가 반쯤 열려 덜걱거리고 있는 창문을 완전히 열어 젖혔다. 그리고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바람에 날렸다. 자그마한 종이 조각들이 어둠이 내리고 있는 회적색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엘은 굳은 얼굴로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녀에겐 기다리는 일만 남아있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그녀를 괴롭히고 애태우며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길 것이 분명했다. -------------------------------------------------------------------제20장. 혈향(血香)-------------------------------------------------------------------이해할 수 없는 불길함이 넘실거리는 밤이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스산한 신음소리를 냈고, 기분 나쁜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 숨죽여 걷고 있는 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은 구름에 몸을 반쯤 가리고 있는 핏빛 달에서 서둘러 시선을 떼었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붉은 달은 그녀에게 겁을 줘 몸을 싸늘하게 만들 뿐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엘은 고개를 들고 오로지 앞만 응시한 채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벽처럼 거대하게 앞을 막고 있는 나무를 빙 돌아 나가자 어둠에 감싸인 검술수련장 입구가 나타났다. 짙은 숲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련장 내로 들어서며 엘은 걸음을 늦췄다. 아시리움 성전에 있는 다섯 개의 검술수련장 중 이 곳은 유일하게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또 다른 건물들과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게 돼, 요샌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련장이었다. 때문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을 앞에 두고도 엘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엘은 입구에 서서 신중하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 풀을 헤치며 아르벨라가 알려 준 다섯 번째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아르벨라!" 엘은 숨죽인 어조로 아르벨라를 부르며 나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곳으로 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엘이 나무에 등을 기댔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위로 검은 그림자가 육중하게 내리 덮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엘은 검은 그림자에 깔 려 바닥에 거칠게 넘어졌다. 그녀의 입술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충격이 가해진 가슴에서 일순 공기가 빠져나가더니 곧 엄청난 고통과 함께 죄어들었다. 몸을 덮쳤던 그림자가 어느 순간 떨어져 나갔지만 엘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얼굴을 스치는 거친 풀잎을 느끼며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숨을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거친 손길이 그녀의 양 팔을 잡아 질질 일으켜 세웠다. 그제서야 엘의 일그러진 입술에서 고통스런 기침이 터져 나오며 가슴을 옥죄던 숨통이 트였다. 그녀는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속하게 몸을 비틀며 다리를 들어 오른쪽 사람의 발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압력이 떨어져 나갔다. "빨리 잡아!" "놓치면 안 돼!" 엘이 왼쪽 팔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거친 고함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그녀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엘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을 붙잡아 뒤에 있던 나무에 거칠게 밀어 붙었다. "비켜! 이게 무슨 짓이야?" 엘은 딱딱한 나무줄기에 부딪치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가 채 입을 닫기도 전에 굵은 밧줄이 몸에 둘러지며 살을 파고들었다. "자일스! 네 짓이지? 이리 나와, 자일스!" 엘은 악을 쓰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녀가 묶어 있는 나무 뒤쪽에서 자일스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이거 놀랐는데? 네가 이 정도로 애타게 날 부르는 날이 올 줄이야!" 어슬렁대며 엘의 정면으로 다가온 자일스가 그녀를 향해 이죽거렸다. "나쁜 자식!" 뿌드득 이가는 소리가 엘의 입술을 뚫고 나왔다. "이 건방진!" 자일스의 팔이 번쩍 들어 올려지더니 엘의 오른쪽 뺨으로 그의 손등이 내리 꽂혔다. 충격의 반동으로 얼굴이 휙 돌려지며 윙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엘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터져있던 입술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멍한 머리를 파고들었다. "다시 한번 함부로 주둥일 놀리면 그 즉시 네 건방진 혀를 뽑아 주겠다!" 엘은 으르렁대는 자일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입안에 고인 비릿한 핏물을 꿀꺽 삼켰다. "꼴 좋다!" 램프를 든 알비노가 자일스 옆에 나란히 서서 히죽거렸다. 엘은 알비노를 무시하고 자일스를 향해 내뱉듯 소리쳤다. "아르벨라를 어떻게 한 거냐? 그녀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아르벨라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하하하! 우습군! 정말 우스워! 내가 귀여운 여동생을 괴롭히기라도 했을 것 같으냐?" 가슴까지 들썩이며 큰소리로 웃어 젖히던 자일스가 일순 웃음을 멈추고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엘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 환상을 깨뜨려 정말 미안하지만, 아르벨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고 마음 약한 아이가 아니다. 널 이 곳으로 불러내 함정에 빠뜨리자는 계획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줄 아느냐?" "그따위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은가 보지?" 엘은 자일스의 말을 일축하며 슬쩍 조소를 드러냈다. "못 믿겠다면 좀 더 자세히 말해주마. 시간도 많고, 또 어지간히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말을 끊은 자일스의 얼굴에 악의를 담은, 잔인해 보이는 미소가 그려졌다. "솔직히 말해주겠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러니까 네가 겪게 될 모든 일들은 내가 직접 계획한 거다. 하지만 오늘밤 이미 일어난 다른 일들은 아르벨라가 내게 말해준 것이다. 오늘 아침 날 찾아온 아르벨라가 당돌하게 말하더군. 이미 내 계획을 알고 있으니, 자신도 돕게 해 달라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널 적당한 장소로 끌어내는 일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청을 했다. 널 이리로 나오게 만든 서한(書翰)도 아르벨라가 자신의 방에서 미리 써와 나한테 내밀었단 말이다." "웃기지마! 아르벨라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난 네 말 한마디도 안 믿어!" 엘이 단호하게 소리치자 자일스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아르벨라가 말한 다른 얘기도 해줄까? 난 너와 아르벨라가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도, 또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지. 넌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기도실에 있는 아르벨라에게 접근했다. 거기서 아르벨라는 울상을 짓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얘길 꺼내 네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지. 넌 그 자리에서 창문을 통해 아르벨라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 말대로 하렐이 시작되는 전날까지, 거지에게 적선하듯 그 애에게 먹을 걸 던져 줬지. 어떠냐? 내 말이 틀리느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틀림없어! 모든 건 자일스가 꾸민 거야! 아르벨라가....아르벨라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엘은 수줍게 미소짓던 아르벨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자일스 말을 믿는 건, 그의 말에 잠시나마 의심이 생기고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르벨라를 배신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어금니를 악물고 결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충격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남은 자제력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선명한 미소가 그려진 자일스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의 노력이 별 소용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해주지." 자일스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는 엘의 올가미를 바짝 조여 왔다. "오늘 낮에 정원에서, 넌 아르벨라에게 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내 성격에 관한 말....그러니까 포악하다느니 잔인하다느니 하는 말은 좀 불쾌했지만 머리가 좋다는 말엔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더군." 차디찬 손이 얼어붙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충격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악문 입술을 뚫고 터져 나왔다. 엘이 짧고 괴로운 신음소리를 지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자 자일스가 히죽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내 말을 믿는 것 같군. 하긴, 아르벨라가 자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라도 그런 소소한 것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엘은 자일스의 말이 진실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리 없다고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댄다 해도 깊게 상처 입어 쓰라린 피가 흐르는 그녀의 마음까지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엘은 이를 악물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다 끝났으면 어서 날 풀어 줘!" 자일스의 눈에 작은 반짝임이 지나갔다. "역시 넌 용기가 있어. 그것만은 인정해 주겠다. 하지만 호기를 부릴 상대로 날 선택한 건 네 실수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나에게 네까짓 게 감히 맞서려고 한 것 자체가 큰 잘못이란 말이다. 때문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거지. 깨닫지 못한 네 주제를 내가.... 장차 위대한 리아잔 제국을 이끌 내 손으로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장차 위대한 리아잔 제국을 이끌고 나갈 분께서 이런 치졸한 짓을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엘이 잔뜩 비웃는 어조로 말하자 자일스 옆에 서 있던 알비노가 사납게 앞으로 나섰다. "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감히!" 으르렁대던 알비노가 번쩍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엘에게 휘두르지는 못했다. 자일스가 그의 팔을 잡아챘던 것이다. "물러 서!" 자일스가 짧게 명령을 내리자 찔끔한 알비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엘을 노려보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일스 전하, 제 손으로 저 놈을 뭉개 버리겠습니다." "내 생각은 너와 좀 다르다, 알비노." 자일스가 거만하게 말하자, 뒤에 서 있던 요하임이 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우린 오늘밤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엘은 자일스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숨을 죽였다. 그의 눈엔 광포하게 빛나는 터질듯한 흥분이 넘실대고 있었다. 서늘한 불안과 함께 두려움이 안으로안으로 밀려들어 앙금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애원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엘은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눈물 섞인 부탁이나 애원이 자신을 구해주지 못하리란 건 누구보다 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스스로 견뎌 내야 한다는 걸, 그녀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뭔지 알겠느냐?" 자일스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엘 앞에 들어 올렸다. "그게 뭡니까 자일스 전하?" 엘이 입을 열기 전에 알비노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자일스의 시선에 금세 몸을 움츠렸다. "이건 암베르 즙이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최고의 명약으로 알려져 있는.... 너무 고가품이라 웬만한 사람은 구경도 못하는 약이지." 엘은 잔뜩 긴장한 채,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는 액체를 바라봤다. 암베르 즙에 대해 많이는 모르지만 자일스가 말한 것 정도는 이미 할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일스가 그녀 앞에 암베르 즙을 내놓은 이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자일스의 행동은 다른 패거리들에게도 의외였는지 호기심이 가득한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일스 손에 들린 작은 병에 쏠려 있었다. "꽤 놀란 것 같군. 하지만 놀라는 건 아직 이르다." 자일스의 얼굴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음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허리 춤에서 금속성이 번뜩이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자일스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무엇이든 한번에 꿰뚫을 것 같은 치명적인 위험이 묻어 나오는, 길고 유난히 폭이 좁은 단도였다. 엘은 이제 곧 싸늘한 칼날이 그녀의 몸 깊숙이 파고 들어올 거란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런 엘을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자일스가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병을 요하임에게 내밀었다. "열어라!" 엘은 요하임이 병을 열어 자일스에게 내밀고, 그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병을 건네 받은 자일스는 엉뚱하게도 암베르 즙을 단도 양쪽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엘의 시선을 잡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암베르 즙의 다른 특징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건 암베르가 대단히 훌륭한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자일스 전하? 하지만 어떻게 독이 된단 말입니까? 암베르는 약인데 말입니다!" 요하임이 소리 높여 물었다.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자일스가 만족감이 가득한, 거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다들 알다시피 암베르 즙은 먹으면 훌륭한 약이 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직접 살 속에 집어넣으면 독이 된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독이 되지. 즉사하지는 않지만 야금야금 몸을 좀 먹어 들어가 고통스럽게 숨통을 잘라 버린다. 바로 이 두 번째 특징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암베르를 가져 온 것이다." 자일스가 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단도를 들이댔다. 칼날을 적신 액체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엘의 눈에 그건 그저 단순한 물인 것처럼 보였다.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말해 봐라! 어디에 암베르를 넣어 줄까?" 단도가 엘의 목으로 서서히 다가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끝이 격하게 뛰는 맥박을 지긋이 눌렀다. 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살갗을 태울 듯 뜨겁게 느껴졌다. "입이 얼어붙었나? 어디가 좋은지 묻고 있지 않느냐? 심장? 목? 아니면 입안 가득 단도를 쑤셔 넣어 줄까?" 자일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단도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네 건방진 눈은 어떨까?" 칼끝이 엘의 눈을 향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이자 속눈썹을 스치는 칼끝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름과 함께 싸늘한 공포가 밀려들어 그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엘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막을 새도 없이 그녀에게서 공포에 질린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자일스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렇게 무서워 할 것 없다. 눈은 피할 생각이니까. 네 눈이 안보이게 되면 그 만큼 재미가 떨어지니까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자일스가 엘의 오른쪽 어깨에 단도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한순간 엘은 자신의 어깨에 칼날이 파고들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녀가 느낀 건 갑자기 어깨가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싸늘해졌다가 일순 뜨거워졌다는 것 뿐이었다. 자일스가 두어 걸음 물러선 뒤, 어깨에 박혀 있는 단도를 그녀의 눈으로 직접 발견한 순간 비로소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엘의 악 다문 이 사이로 고통에 겨운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깨를 찔린 고통은 얼마 안가 사라지게 될 거다.그 대신 다른 고통이 밀려들겠지만 말이다." 말을 끊은 자일스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알비노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밧줄을 풀어 줘라!" 자일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알비노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일스 전하, 이대로 놈이 죽어가는 꼴을 구경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어서!" 자일스에게서 짜증 섞인 고함이 터져 나오자, 알비노가 검을 빼어 들며 엘에게 다가왔다. 밧줄을 자르는 그의 얼굴엔 마지못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드디어 엘의 몸에서 헐거워진 밧줄이 흘러내렸다. 꽉 조여 있던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자 수천개의 바늘이 쉴새 없이 몸을 찔러 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엘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어 버티며, 팔을 들어 단도가 박혀 있는 어깨 부위를 잡았다. 바로 그 때 그녀의 전신에 차가운 액체가 확 끼얹어졌다. 놀라움에 한순간 얼어붙었던 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해 빛을 내고 있었다. 머리카락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은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과연 효과가 탁월하군. 하긴 아시리움 성전에 싸구려 물건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최고급 염료를 뒤집어 쓴 소감이 어떠냐?"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엘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을 비틀거리며 묵직하게 느껴지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독이 점점 그녀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냥! 내가 원하는 건 사냥이다! 자, 어서 도망가라! 네가 도망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겠 다! 물론 그런 다음엔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는 거다!" 엘은 경악에 싸여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일스를 노려봤다. "사,사냥이라고요, 자일스 전하?" 알비노가 흥분해 소리쳤다. 그 말을 무시하고 자일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까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네가 굳이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하지만 조금이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뒤돌아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테니까." 엘은 자일스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뒤로 즐거움과 악의로 뒤범벅된 흥분에 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자일스 전하? 독도 모자라 사람사냥까지...." 넘어진 뒤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엘에게서 시선을 떼며 요하임이 말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하고 있던 베르그까지 요하임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저 역시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일스 전하, 알렉스를 진짜 죽일 생각이십니까? 알렉스는 일국의 왕자입니다. 또 지금은 아시리움 성전의 손님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강경한 어조에 자일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한 방편도 생각해 놓지 않고 이번 일을 벌인 거라 생각하느냐? 멍청한 것들!" 잠시 그들을 노려보던 자일스가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어차피 너희들은 잠시 후 나와 함께 사냥을 시작하게 될 거다. 이유를 말해 줄까? 사냥에 성공한 사람에겐 아르벨라를 줄 생각이니까. 알겠느냐? 너희들 중 한 명이 리아잔 제국의 황녀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딱딱하게 얼어붙어 눈만 끔벅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일스가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게 어떤 건지 아직 실감이 안 나겠지. 리아잔 제국의 황녀가 왕위계승권도 희박한 왕자와 맺어질 수 있다는 것에 의심도 생길 테고 말이다. 하지만 난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다. 그 정도 일은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 일이 제대로 풀린다면 너희들이 속한 어느 한 나라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나겠지. 어떤 난리가 날지 알겠느냐?" 자일스의 질문에 답을 한 건 요하임였다. "왕위계승권이 하루 아침에 뒤바뀌게 될 겁니다. 감히 아르벨라 황녀님을 아무런 힘도 없는 왕자와 혼인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요." "요하임, 네 말이 맞다. 넌 알아들을 줄 알았다." 자일스가 만족스러움을 담은 눈으로 요하임을 바라봤다. "자,잠깐만요...자일스 전하. 그럼 아르벨라 황녀님과 혼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나라에서 왕이 된다는, 그런 말씀인가요?" 극도로 흥분한 알비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말이 끝날 즘엔 공기를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 되었다.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자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왕이 되고 싶으면 사냥에 성공하란 말이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말을 마친 자일스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왕자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서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건 계획을 세울 당시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왕자들이 감히 뿌리치질 못할 조건을 단 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자신의 일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와 같은 공범이 된다면 그들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다물고 침묵할 수 밖에 없으리란 걸 자일스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왕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사냥할 마음이 있다면 숲이 꽤 넓으니까 각자 나눠서 찾아봐라. 그리고 놈을 발견한 사람은 도망가지 못하게 제압만하고 즉시 나에게 소리쳐라. 내 손으로 마무리짓고 싶으니까. 주어지는 상에 비해 사냥은 그리 힘들지 않을 거다. 방향을 못 잡고 흐느적거릴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잡아 달라고 온몸에서 찬란한 빛을 낼 테니까 말이다." 자일스는 말을 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급속도로 부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간은 충분히 준 거겠군. 난 이제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 내키지 않는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 말을 마치자마자 자일스는 램프를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발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꿈에서 들려 오는 듯한 풀벌레의 단조로운 울음소리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알싸한 나무 향이 몽롱한 감각을 자극했고, 다리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풀이 몽환적인 춤을 추며 너울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엘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온몸을 적신 염료 때문인지, 아니면 독의 영향인지,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몸이 떨렸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엘은 쉴 새없이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하면서도 사력을 다해 버텼다. 조금만 방심하면 여지없이 무릎을 굻고, 그녀를 빨아들이려 하는 질척한 늪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몸이 천근만근 늘어지며 참기 힘든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유혹에 넘어가 잠이 든다면 필시 자일스에게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자일스가 살의를 갖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 뒤편에서 그녀를 쫓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왕자들도 그녀를 사냥하는 일에 동참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자일스를 생각하면 그럴 것이 확실했다. 엘의 입술에서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거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쓰러지듯 나무줄기에 몸을 기댔다. 머리에 뿌연 안개가 덮이며 속이 참을 수 없이 메슥거렸다. 쓰린 식도를 타고 거의 소화되어 질척한 물이 된 음식물이 역류했다. 엘은 두 팔로 매달리듯 나무를 껴안고 힘겹게 토하기 시작했다. 어깨에 박혀 있는 단도가 나무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상처를 헤집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엘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도 기력도 없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스런 토악질이 멈추자 엘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꼭 감았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나무 줄기가 이마에 상처를 냈지만 그녀는 느끼지도 못했다.어둠에 덮인 세상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시커먼 바닥이 강한 자력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어서 움직여야 해! 어서! 엘은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그리고 한발한발 발을 옮기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걸음걸이가 마냥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른발을 내딛고, 그 다음에 왼발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잘 생각나지 않아 몇 번이나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하지만 한시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거리가 얼마나 좁혀진 걸까? 대체 어디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까? 지금 바로 내 뒤에 와 있을지도 몰라! 다시 한번 발작적인 몸서리가 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몸을 움직였다. 피가 얼어붙는 듯한 두려움에 감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필 수조차 없었다. 몸도 마음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숨은 턱 밑까지 차 올랐고, 몸을 타고 쉴새 없이, 차디차게 식어 버린 끈적끈적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팔다리가 길게 늘어져 급기야 땅에 질질 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찾았다!" 흥분에 찬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엘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할머니! 도와주세요! 할머니!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가슴을 헤집는 비명이 터져 올랐다. 그녀의 귀를 울리는 발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가까워지며 커져 갔다. 엘은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를 가득 채운 거대한 몸이 그녀를 덮쳐 왔다. 그 순간 엘은 죽음을 맛봤다. 코끝을 스치는 피의 향기가 맡아졌다. 목구멍에서 쓰디쓴 피 맛이 느껴졌다. "리자드!"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 엘은 비명처럼 리자드를 소리쳐 불렀다. 그녀는 거칠게 바닥에 넘어졌다. 질척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을 때, 엘은 자신이 진흙 위에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리자드가 누구야?"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거대한 진흙구덩이에서 벗어나듯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앉은 채로 한 걸음 다가왔다. "브레인....너 브레인 맞지?" 엘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자신이 말했다고는 믿기 힘든, 어눌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몽롱하게 들렸다. "그래, 나 브레인이야. 넌, 알렉스지?" 엘의 입에서 흐느낌에 가까운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브레인이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브레인이야. 그는 날 해치지 않을 거야. 날 해칠 사람이 아니야. "브레인..." "잠깐만, 알렉스." 엘이 입을 여는 순간 브레인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몸을 일으켰다. "찾았어요, 자일스 전하! 알렉스를 찾았어요! 여기 있어요! 바로 여기 있다고요!" 숲이 떠나가라 크게 고함친 후 브레인이 다시 그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하려고 한 거야, 알렉스?" 엘은 브레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도 겨를도 없었다. 그 때 엘은 두 손으로 진흙을 퍼 정신없이 몸에 바르고 있었다. 자일스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도망부터 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몸 상태로는 얼마 못 가 자일스에게 잡히게 될 게 자명했다. 지금 상황에서 엘이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해서든 어둠 속에 그녀 자신을 숨기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물들이고 있는 염료를 가리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엘은 자일스가 이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길 간절히 바라며 철추를 매단 듯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알렉스? 노는 거야?" 호기심 어린 물음을 들으며 엘은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어둠을 향해 서너 걸음 걸었을 때, 갑자기 눈 앞에 환한 빛이 비쳤다. 엘은 눈을 태울 듯 달려드는 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자일스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래, 여기 있었군." 한꺼번에 밀려든 충격과 절망이 엘에게서 얼마남지 않은 힘마저 빼앗아 버렸다. 몸을 휘청한 엘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지자 자일스가 램프를 내려놓고 그녀 앞에 다리를 벌리고 섰다. 흥분과 광기로 희번덕거리는 자일스의 눈이 몽롱한 그녀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엘의 마음속에 쉴새 없이 살고 싶다는 절규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엘은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이미 싸늘하게 굳어 무기력하게 뻗어 있을 뿐이었다. "잘했어, 브레인. 넌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 다른 왕자들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자일스 전하." 몸을 돌리려던 브레인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보자, 알렉스." 엘은 발작적인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힘없이 눈을 감았다. 엘은 몸에 퍼진 독이 빨리 그녀를 집어삼키기를 빌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자일스의 손이 닿기 전에 죽음이 찾아 들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꼴 좋구나!" 자일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무기력하게 열린 그녀의 눈에 허리에서 검집을 빼내 램프 옆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자일스가 보였다. "저런 장검은 별 재미가 없어서 말이다. 난 내 사냥감이 되도록 오랜 시간 살아남아 날 즐겁게 해주기를 바라거든. 그런데 장검은 까딱 실수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럼 즐거움은커녕 마음만 상하게 되지. 아무리 나라도 송장을 되살리는 능력은 없으니까 말이다." 엘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뿌연 안개에 덮인 몽롱한 머리 속으로 자일스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의미없는 중얼거림이었던 말이 메아리치듯 반복해 울릴 때마다 조금씩 명확해지기 시작했다.말을 멈춘 자일스가 히죽거리며 엘의 어깨에 박힌 것과 똑같은 단도를 꺼내 그녀를 향해 들어 보였다. "자, 봐라! 아까는 그럴 겨를이 없었을 테니까. 정말 아름답지 않느냐?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다. 듣자하니 오래 전 자신의 아들이었던 쌍둥이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느 황제가 만들게 했다 하더군. 이런 보검 맛을 보게 되다니, 세렌국 따위의 애송이에겐 과분하다 생각지 않느냐?" 자일스가 단도를 고쳐 잡으며 엘에게 바싹 다가와 몸을 굽혔다. 그리고 초점없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재미있을 것 같아 독을 사용한 건데 아무래도 실수였나 보군. 즐기기도 전에 이미 송장 꼴을 하고 있으니!" 이를 갈며 짜증 섞인 말을 뱉어 내던 자일스가 갑자기 손을 들어 엘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의 넋 나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젠장!" 악을 쓰는 자일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은 조금씩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거친 풀을 스치는 명확하지 않은 감촉이 느껴졌다. 죽기 전에....마지막 숨이 멎기 전에 기회가 한번 찾아올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단 한번의 기회.... 그걸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할 수 없지. 재미는 덜 하겠지만 네 죽음 자체가 나에게 큰 만족을 줄 테니까. " 말을 멈춘 자일스가 엘에게 바짝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귓가에 확 끼얹어지는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을 때 엘의 몸이 반사적으로 짧고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런대로 감각이 남아있는 모양이로구나!" 자일스가 몸을 바로 세워 그녀의 눈앞에서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거의 남아있지 않은 힘을 왼쪽 손가락으로 집중시켰다. "인간의 살갗 깊숙이 칼날을 밀어 넣는 기분이 어떤지 어느냐? 살이 베어질 때의 느낌, 붉은 피가 흘러나와 손을 적실 때의 느낌.... 그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나 할 수 있느냐? 공포와 고통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 귀를 멍하게 하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 이 모든 게 어우러지면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흥분과 짜릿함에 숨이 조금씩 차 오른다. 하지만 이때 자제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아직 진정한 즐거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감출 수 없는 격정이 숨찬 자일스의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섬뜩한 광기가 휘감아 도는 그의 눈동자가 아물거리는 엘의 눈을 꿰뚫었다. 자일스가 윗입술을 말아 올리며 히죽 웃었다. 바로 그 순간 엘은 자신의 어깨에 박혀 있는 단도를 뽑아 자일스에게 크게 휘둘렀다. 걷잡을 수 없이 고동치는 심방 박동위로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게 휘둘러진 팔의 반동으로 손에서 단도를 떨어뜨린 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어둠을 향해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저주에 찬 비명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 맹렬히 잡아챘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엘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 감았다. 그 순간 엘의 입술에서 절망에 질린 야트막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흐느낌에 겹쳐 무언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이게 뭐야?" 엘의 머리가 힘없이 땅에 떨어지며 경악과 공포에 찬 자일스 목소리가 명확하지 않은 울림으로 귀에 스며들었다. 엘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가까스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힘없이 벌어진 시야 구석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검은 불꽃이 보였다. 불꽃이 서서히 물결치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은 벨벳같이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물결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평화로운 암흑이 엘을 깊숙이 빨아들였다.그리고 고통없는 망각이 찾아 들었다. -------------------------------------------------------------------제 21장. 혼돈 속에서-------------------------------------------------------------------완전히 닫혀 있지 않은 창에 내려진 커튼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약한 달빛을 흘리고 있었다. 타고 있는 몇 개의 초만이 비추고 있는 공간은 어두웠고,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창백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흔들렸다. 안락의자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그들에게서 혼란과 두려움이 풍겨 나왔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요하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감히 내 말을 의심하는 거냐?" 험악하게 이를 갈며 요하임을 노려보는 자일스의 창백한 얼굴엔 송골송골 진땀이 배어있었다. "아,아니... 의심하는 게 아니라... 자일스 전하, 그러면 정말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씀입니까? 혹시 어둠 때문에 착각을 하신 건 아니십니까?" 요하임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이 상처는 내가 일부러 입힌 거란 말이냐?" 자일스가 피가 배어 나온 팔뚝을 요하임 앞에 들이대며 거칠게 소리쳤다. 사실 팔의 상처는 괴물이 아닌 알렉스한테 입은 거였다. 그 일만 생각하면 자일스는 분노 때문에 치가 떨릴 지경이지만 다 죽어가던 알렉스 놈이 휘두른 칼에 당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하지만 상처는 그렇다 해도 그가 본 괴물의 존재만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다시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엔 감출 수없는 두려움이 깃들여 있었다. "내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들었단 말이다. 마치 살갗을 찢는 것 같이.... 어둠을 뚫고 번뜩이는 괴물의 눈과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 그 엄청난 몸집...." 말끝을 흐린 자일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숲속에서 괴물과 맞닥뜨린 이후 계속되는 떨림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한 채, 아니 별다른 상처없이 그 자리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는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나는 건 알렉스 놈을 와락 잡아챘을 때,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괴물이 그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어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를 험악하게 드러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 괴물이 틀림없어. 피냄새를 맡고 온 거겠지. 하마터면 그 애송이 놈 때문에 끔찍한 괴물의 먹이가 될 뻔한 거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그 놈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한 채, 고통까지 겪어야 하다니..." 자일스가 이를 갈며 팔에 난 상처를 슬쩍 어루만지자 요하임이 이상하다는 듯 슬쩍 찌푸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상처는 괴물에게, 그러니까 괴물의 공격을 피하시려다 놈의 발톱에 긁혀 생긴 거라 하셨잖습니까, 자일스 전하?" 자일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러자 요하임이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일스 전하. 제가 생각이 짧아 고통스러우신 전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고통스럽다!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같이 고통스럽단 말이다! 대체 이 놈은 아직까지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멍청하고 한심한 놈! 요하임, 네가 가 봐라!" 요하임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알비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뒤로 긴장한 듯 보이는 젊은 의관사제가 엉거주춤 따라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자일스 전하!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의관사제님이 어디 계신 지 몰라.... 이리저리 찾다가 숙소까지 가게 되는 바람에...." 알비노는 자일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과장되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인상을 찌푸린 자일스가 알비노를 향해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자, 요하임이 눈치 빠르게 일어나 자일스의 시선을 막아 서며 의관사제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팔을 다치신 것 같군요. 이 위에 올려 놓아보십시오." 긴장된 어조로 말한 사제가 탁자 위에 올려진 자일스의 팔에서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냈다. 반 쯤 피가 말라 붙은 상처에서 약간의 저항을 일으키며 천이 떨어졌다. 그러자 길게 드러난 창상(創傷)에서 조금씩 다시 피가 솟기 시작했다. 의관사제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피를 닦으며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속을 파서 만든 작은 나무통을 꺼내 안에 들어있던 녹갈색 빛이 도는 약초가루를 그 위에 뿌렸다. "상처부위가 넓긴 해도 다행히 그리 깊지는 않습니다. 오일이나 육일 정도 조심하시면 괜찮아지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상처에 뿌린 가루는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초입니다. 약초가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 상처 회복에 좋은 다른 약초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말을 끊은 의관사제가 잠시 자일스의 얼굴을 살피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상처는 어떻게 입으신 건가요, 전하? 제가 보기엔 검상같은 데.... 이렇게 늦은 시간 검상을 입으시다니...."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제로군.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면.... 내가 좋아 할거라 생각하나? 아시리움에서 쫓겨나 별 볼일 없는 치료사 나부랭이가 되고 싶은 건가?" 자일스가 의관사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이 사이로 노골적인 협박을 뱉어 냈다. 그러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사제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죄,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입 닥치고, 어서 상처나 치료해라!"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치는 사제를 향해 자일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예, 알겠습니다!" 의관사제가 허겁지겁 납작한 나무상자를 열어 건조시킨 검푸른 색깔의 약초를 꺼내 자일스의 상처에 얇고 고르게 얹어 놓았다. 그리고 작은 병 속에 담긴 불그스름한 액체를 그 위에 떨어뜨렸다.약이 스며들며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어나자 자일스가 상처 입은 짐승마냥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젠장! 왜 이리 아픈 거냐?" 몸을 움찔한 의관사제가 사과의 말을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깨끗한 천으로 자일스의 팔을 꼼꼼히 감쌌다. "죄,죄송합니다. 통증은 잠시 후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전하. 그럼... 전 이만.... 제가 할 일은 이걸로 끝이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지! 내일... 내일 다시 와 치료를 해 드리겠습니다." 횡설수설하던 의관사제가 주섬주섬 약병과 약재가 든 상자들을 챙기더니 자일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뛰다시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팔을 감싸고 사제를 노려보던 자일스가 탁자 위에 쓰러져 있는 작은 병을 들어 사제의 등을 향해 힘껏 던졌다. 정신없이 서두르던 의관사제가 미처 챙기지 못한 약병이었다. 사제가 때마 침 밖으로 나가자 문에 부딪친 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 건방진 놈을 만나면서부터 제대로 되는 게 조금도 없다고!" 자일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멈추자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알비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자일스 전하, 그런데 아르벨라 황녀님과 브레인을.... 정말 혼인시키실 생각이신가요?" "물론이다.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자일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사실 그는 두 사람을 혼인시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르벨라의 상대가 브레인이 아닌 다른 왕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별 볼일없는 왕자들에게 주기엔 아르벨라는 아직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만약... 알렉스 놈이.... 죽지 않았다면...." 잔뜩 실망해 거의 울상을 짓고 있던 알비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답답한 놈! 좀 똑똑히 말해봐라!" 험악한 고함에 알비노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있던 요아힘이 서둘러 끼어 들어 살짝 말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알비노는 그러니까 알렉스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다는 말을 한 겁니다,자일스 전하. 저 역시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이번 일을 아시리움 측에 알리기라도 하면... 자일스 전하께선 물론 아무일 없으시겠지만, 우리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지게 될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법황 성하께서 알렉스를 유달리 잘 보셨다는 말도 돌고 있는 형국이니....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야 말로 큰일이지 않습니까?" 요아힘의 침착한 말을 들은 자일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통증이 가라앉자 그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자신 만만함이 나타나 있었다. "그래, 너희들의 근심이 뭔 지 알겠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없다. 알렉스 놈은 갈가리 찢겨 이미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그래.... 그 괴물이 지금까지 놈을 살려 두었을 리 없지. 너희들 모두, 괴물이 나타났다는 내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내가 정말 헛것을 본 거라 해도, 그러니까 설령 괴물이 없다 해도 그 애송이 놈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일스 전하." 요아힘이 얼굴을 슬쩍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독! 내가 직접 그 놈의 몸에 집어 넣은 암베르 즙을 잊었느냐? 괴물에게서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놈은 송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이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 하지만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난다 해도 어차피 알렉스 놈은 그 숲속에서 죽게 될 거다." 말을 끊은 자일스가 앞에 앉은 왕자들의 얼굴을 휙 둘러봤다. "더군다나 놈이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 "예, 언제나 입 조심하라는 전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우리만 입 다물면 알렉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이대로 조용히 묻히게 되겠지요. 시체가 발견된다 해도 우리가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을 테니까요." 요하임이 씁쓸한 어투의 말을 끝내고 자일스를 향해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자일스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거냐? 어리석은 놈! 시간문제였을 뿐, 어차피 세렌의 애송이 놈은 죽을 운명이었다.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놈의 숨통을 잘라 버렸을 거란 말이다. 한가지... 아시리움에 흔적을 남겼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것 역시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다." 말을 끊은 자일스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문제는 그 숲속에 내 단도를 떨어뜨리고 왔다는 거다. 우리 리아잔 제국의 보검이 더러운 진흙 바닥을 뒹굴고 있다니! 모두 잘 들어라! 날이 밝는 대로 너희들은 그 곳으로 가 내 단도를 찾아와라!" 그 숲에 발을 들여놓는 게 은근히 두려운 왕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자일스 전하, 제 생각으론 이삼일 정도 사태를 살피며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알렉스가 보이지 않으면 그와 가까운 사이인 체르몬국 쌍둥이 왕자들은 물론이고 아시리움 측에서도 우리 쪽을 예의 주시할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럴 때, 사람의 왕래가 없는 제 2검술 수련장 쪽으로 가는 건... 우리 손으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하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자일스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사람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따로 생각해 놓은 방편이 있긴 하지만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단도는 이번 일이 잠잠해진 연후에 찾는 것이 좋겠다." 말을 끊은 자일스가 왕자들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다들 맹세해라! 절대 입을 놀리지 않겠다고... 이번 일을 무덤까지 고이 가져가겠다고 맹세하란 말이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머뭇거리던 왕자들이 요하임을 선두로 맹세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일스의 얼굴에 희미한 만족감이 어렸다. "그럼 너희는 이만 나가 봐라!" 몸을 일으키는 왕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자일스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일을 저지를지 몰랐고, 더군다나 자신들이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이번 일에 대해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입 밖으로 내는 놈은 누구든 내 손으로 톡톡히 잘못을 뉘우치게 해주겠다! 평생동안 피를 토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말이다! 너희는 물론 너희의 피붙이와 그 나라까지." 그들이 막 문을 나서려 할 때 자일스가 노골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다.왕자들은 악귀가 자신을 낚아챌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앞다투어 문을 나섰다. 엘은 미친 듯이 달렸다.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보이는 건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칠흑같은 어둠은 싸늘하고 축축했다. 사로잡힌 새의 날개처럼 심장이 퍼덕거렸고 목에서 뛰는 맥박이 너무 크게 부풀어올라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죽음이 자신을 덮치리 란 걸 알고 있었다. 달려야 한다는, 도망쳐야 한다는 외침이 거칠게 박동치는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가쁜 숨소리 너머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져 가며 천둥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차가운 전율에 휩싸였다. 뒷골이 쭈뼛 곤두서며 공포에 질린 흐느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도망치지마.'살며시, 그러나 확실한 울림을 갖고 엘의 머리를 파고든 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온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도망치는 건 비겁한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건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일 뿐이야.'속삭임 뒤로 유령처럼 하얀 빛이 보였다. 감질날 정도로 희미한 빛이 부드럽게 일렁이더니 하얀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엘은 파문이 일듯 넓게 퍼져 그녀에게 다가오는 하얀 형상을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았다. 무언가 가볍게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하얀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피부에 새털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닿는 순간 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들어 올려 고통스러운 현실로 자신을 되돌렸다. 처음 그녀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마지막 숨조차 사라져 버린 후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무언가의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 그로 인해 싸늘한 두려움이 전신을 훑어 내렸을 때야 비로소 코 앞까지 다가든 죽음이 아직 그녀를 덮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옆에 있는 건 죽음인가? 엘의 목덜미에 따뜻한 공기가 확 끼얹어지더니 힘없이 벌어져 있는 시야에 어둠을 뚫고 번뜩이는 검은 불꽃이 들어왔다. 그녀는 힘없이 가라앉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버티며 불꽃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강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이 아닌, 치명적인 위험을 발산하는 어떤 것이 그녀 옆에 바싹 붙어 웅크리고 있었다. 엘은 자신이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가 그녀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켜 주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따뜻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가 이젠 안전하다는 것을,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어둠이 조금씩 흩어지며 대신 뿌연 안개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도 희미해져 갔다. 귓가를 가득 채운 짙은 적막이 점점 윙윙 거리는 울림으로 변했다. 그녀를 지탱해주던 가느다란 끈이 끊어지며 한순간 아득하게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자그마한 소리가 신경을 건드리며 곤한 잠을 방해했다. 부스스 눈을 들어 올린 리오는 방안을 물들인 어둑어둑한 잿빛을 확인한 후 투덜거리며 시트를 머리 위로 덮어썼다. 하지만 미처 잠에 빠져 들기 전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대체 누구야? 이런 새벽에!" 리오는 투덜거리며 일어나 커다랗게 하품을 한 후 어슬렁어슬렁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 새를 못 참고 누군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리오는 짜증 어린 몸짓으로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일이냐?" 리오는 퉁명스럽게 질문을 던지며 시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에서 하기 힘든 말을 꺼내려 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시녀를 살피던 리오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한 순간 시녀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저... 리오 왕자전하..." "누군데, 내 이름을 함부로...." 말끝을 흐린 리오가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알렉스! 그러고 보니 알렉스의 시녀였군. 알렉스 방에서 본 기억이 나." "예, 전하. 시에나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잠깐..." "그런데 네가 내 방엔 무슨 일로... 혹시 알렉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리오가 시에나의 말을 끊으며 한발 다가섰다. "그게...전하께서 어젯밤에 침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아서.... 이 새벽에 어디 계신 지... 방도 비어있고...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걱정이 되어서 감히 왕자전하를 찾아뵈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리오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잠깐만 기다려라! 아니, 먼저 알렉스 방에 가 있어라! 그 사이 알렉스가 돌아와 있는지도 모르니까. 난 의복을 갖춘 후 바로 가겠다!" 리오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한 뒤 문을 닫고 들어와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알렉스에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는 예감이 들자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리오는 웃옷의 단추도 채우지 않은 상태로 문을 박차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아!" 리반이 그답지 않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정신없이 주위를 왔다갔다하던 리오가 걸음을 멈추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터무니없는 헛소리야! 헛소리라고!"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대체 알렉스는 어디 있는 거야?"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리반 역시 벌떡 몸을 세웠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성전 측의 수색활동도 이미 중단된 상태고. 그럴 리 없다는 내 말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아. 모두 자일스의 주장만 철석같이 믿고 있어. 어떻게 그 정도로 어리석을 수 있지? 자일스 자식이 알렉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런데도 그 놈의 말을 믿다니! 젠장!"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리오가 악을 쓰듯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진정해, 리오. 아시리움 측에선 그럴 수 밖에 없잖아. 자일스는 물론이고, 아르벨라 황녀와 다른 왕자들도 같은 말을 하는데, 그걸 어떻게 의심하겠어? 하물며 경비병까지 알렉스를 봤다고 말하잖아!" "하지만 겁탈이라니! 겁탈이라니,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얼굴이 시뻘게져 악을 쓴 리오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자일스는 너도 알다시피 알렉스가 한밤중에 아르벨라 황녀의 방에 침입해, 지난번처럼 황녀를 겁탈하려 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람들은 그 말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전에도 알렉스는 무죄로 판명됐는데 어떻게 그런 헛소릴 믿는 건지..." "그래, 이상하긴 이상해. 당장 아시리움을 떠나라는 자일스의 협박에 짐도 챙기지 않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도망갔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 알렉스 성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오해는 못할 거야." "분명히 자일스 놈이 더러운 수를 쓴 거야! 아르벨라 황녀나 자일스 패거리들이야 당연히 그 놈이 시키는 대로 따를 거고, 경비병 대여섯 명 손에 넣는 것도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질 테고 말이야."" 리오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자일스 쪽에 사람을 좀 붙여 놓지 그랬어? 분명히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미 그렇게 해 놨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당장 보고하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식이 없어." 무거운 한숨을 내쉰 리오가 답답한 듯 창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잠시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창틀을 부여잡고 있던 그가 리반에게 몸을 휙 돌렸다. "이렇게 멍청하게 손놓고 있다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어, 리반! 알렉스는 분명히 아시리움 안에 있을 거야!" "또? 하루종일 미친 듯이 여기저기 뒤지고 다녔잖아! 지금도 사람들을 시켜 찾아보고 있고! 알렉스는 어쩌면 아시리움을 벗어났는지도 몰라! 최악의 경우는 말이야!"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리오를 향해 리반이 소리를 높였다. "다시 한번 둘러보고 없으면 아시리움 밖을 찾아보겠어!" 일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리반이 허겁지겁 뛰어와,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리오의 팔을 낚아챘다. "너,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아시리움 성전을 나가다니? 한번 나가면 그걸로 끝난다는 거 몰라? 지금까지 노력이 헛수고가 될 뿐만 아니라 아시리움 종단의 눈 밖에 나게 되는 거야! 너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리반을 돌아보는 리오의 푸른 눈동자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는 리반의 손을 뿌리치며 결연히 외쳤다. "몰라! 난 그런 건 몰라! 내가 아는 건 빨리 알렉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 하나야!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알렉스를 포기하면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야! 죽을 때까지!" 다시 리오를 잡으려던 리반은 그와 시선이 맞부딪친 순간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넌 여기 있어, 리반. 사소한 거라도 하나 찾으면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놓았으니까." 리오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리반을 외면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계단에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저 만치 복도와 이어진 모퉁이에서 간편한 복장을 하고 팔에 긴 망토를 걸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심히 여자를 지나친 리오의 시선이 황급히 그녀에게 되돌려졌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사람은 틀림없는 아르벨라 황녀였다. 리오는 어금니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예를 갖추고 인사말을 건네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 었으나,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리오는 싸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제 2검술 수련장입니다." 리오가 아르벨라와 막 교차했을 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숨가쁘게 속삭였다. 귀를 의심하며 퍼뜩 몸을 세운 리오에게 아르벨라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 아시리움의 승인을 받아 리아잔 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동안 즐거웠습니다." 아르벨라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지금 뭐라고..." "그럼 전 이만." 단호한 어조로 리오의 말을 끊은 아르벨라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바로 몸을 돌렸다. 리오는 무의식 중에 팔을 들어 아르벨라를 잡으려 했다. 손끝이 그녀의 팔 소매에 살짝 닿았을 때, 아르벨라가 한줄기 바람처럼 리오의 살갗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리오는 허공에 팔을 들어 올린 채 멍하니 서서 아르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 2검술 수련장...." 자신도 모르는 사이 리오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리오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여기 뭐가 있다는 거냐고?" 리오는 하늘을 향해 짜증 섞인 고함을 버럭 질렀다. 미쳐 버릴 것 같은 그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불그스름한 하늘은 무심하도록 말갛기만 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벨란가 뭔 가하는 간교한 여자 말에 혹한 내가 멍청이지! 젠장!" 리오는 이를 부드득 갈며 먼지가 나도록 털썩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애꿎은 붉은 하늘에 대고 불끈 쥔 주먹을 위협적으로 휘두른 다음, 힘이 다 빠져 버린 사람처럼 팔을 떨구며 눈을 감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함께 짙은 절망이 그의 전신을 축축이 적셨다. 한달음에 이 곳으로 달려와 미친 듯이 수련장 주위를 살핀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리오는 그저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라 버릴 때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알렉스의 흔적을 찾았을 뿐이다. 문득 알렉스는 아시리움 성전 밖에 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안에 있다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을 리 없어. 그래 맞아, 알렉스가 아시리움에 있다면 제아무리 자일스라 해도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알렉스를 모함할 수 없을 거야. 리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시리움 성전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며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곧 이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몰래 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 몇 일 정도는 리반이 내 역할을 그럴듯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난 최대한 빨리 알렉스를 찾은 다음 그와 함께 아시리움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야. 일단 아시리움 성전을 나가기로 하자 마음이 급해진 리오는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서둘러 몸을 세우려 했다. 바로 그 때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둥그스름한 붉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리오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붉은 점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검붉은 색의 작은 돌을 집어 들었다. 돌이 피부에 닿는 순간 그는 돌을 물들인 붉은 얼룩이 다름 아닌 핏자국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리오는 한순간 가슴이 싸늘해져 오는걸 느끼며 고개를 숙여 그 일대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좀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붉은 자국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알렉스.... 알렉스의 피가 틀림없어...." 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피얼룩을 따라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장을 빙 둘러싼 나무 중 하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리를 멈추고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무 아래 커다란 붉은 얼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주변의 돌멩이와 나뭇잎들은 물론 땅까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리오는 가슴이 조여 드는 두려움을 느끼며 다시 한번 핏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핏자국들이 조금씩 희미해지며 숲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렉스가 부상을 입고 저 숲속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빨리 찾지 못하면 금세 주위가 어두워져 오늘 안으로 알렉스를 발견하는 게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그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리오는 주의 깊게 바닥을 살피며 최대한 빨리 다리를 놀렸다. 숲속에 들어서자 시야가 더욱 어두워졌고 설상가상 바닥의 핏자국도 엷어져 한참을 헤맨 뒤에야 몇 걸음 옮기게 되는 일이 반복됐다. 잔뜩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그리 높지 않은 기온인데도 쉴새 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리오는 옷소매로 얼굴이 맺힌 땀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빨리 사람들부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넓은 숲속에서 자신 혼자 알렉스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오가 땀에 젖어 내려온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몸을 돌리려 했을 때,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덤불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이상한 물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물체에 눈을 못박은 채 무성한 덤불을 향해 다가갔다. 덤불을 헤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 끝에 무언인가가 살짝 부딪치는 느낌이 들자 리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그의 발끝에 채인 건 다름 아닌 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은색 천조각이었다. 리오는 허리를 굽혀 천조각을 집어 들었다. 은색 사이에서 살짝 내비치는 푸른빛과 눈에 익은 작고 둥근 단추를 보는 순간 리오는 그게 알렉스의 옷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천조각을 코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염료 특유의 톡 쏘는듯한 냄새와 비릿한 피냄새가 맡아졌다. 그는 피와 염료가 범벅이 되어 뻣뻣하게 말라붙은 소매를 힘껏 움켜쥐고 앞을 막고 있는 덤불을 거칠게 헤쳤다. "알렉스..." 중얼거리듯 입 속으로 말한 다음, 리오는 다시 크게 소리쳤다. "알렉스! 어디 있어! 알렉스!" 그의 외침에 섞여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 왔다. 고개를 치켜든 리오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덤불이 옅어지는 부근에 커다란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리오를 견제하듯 늑대의 매서운 눈이 어스름 한가운데서 강렬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를 경악하게한 건 늑대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건 늑대 발치에 쓰러져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었다. 알렉스는 얼굴을 아래로 향한 채 무엇을 잡으려는 듯, 아니 간절히 도움을 갈구하고 있는 것처럼 팔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리오는 진흙과 염료로 뒤범벅된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돼. 알렉스를 도우려면 나부터 침착해져야 해.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리오가 단단히 검을 움켜쥐고 늑대를 노려본 순간 살짝 몸을 웅크리고 있던 늑대에게서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리오는 늑대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발한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마른 침을 삼키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가슴고동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고 손바닥 가득 축축한 땀이 배여 왔다. 당장이라도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알렉스가 위험해. 그를 구해야 돼. 알렉스를 구해야 돼. 리오는 마음속으로 연이어 속삭였다.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듯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갑자기 늑대가 험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리오가 앞뒤 잴 것없이 알렉스 앞을 막아 섰을 때, 늑대가 우아한 몸놀림으로 훌쩍 덤불을 뛰어넘어 눈 깜짝할 새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그는 늑대가 사라진걸 확인하자마자 무릎을 뚫고 알렉스의 몸을 바로잡았다. "알렉스! 정신 차려! 알렉스!" 리오는 정신없이 알렉스를 부르며 그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알렉스는 말라 비틀어진 진흙과 은색염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범벅이 되어있었다. 또 피투성이인 오른쪽 어깨부근은 퉁퉁 부어 올라 흡사 두툼한 가죽 몇 겹을 옷 속에 구겨 넣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자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을 알렉스의 목으로 가져갔다. 맥이 짚어지지 않았다. 리오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얕게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다급한 동작으로 목에 닿아 있는 손을 알렉스의 코 아래 바싹 가져가 댔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한꺼번에 밀려든 안도감에 힘이 빠져나간 리오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알렉스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돼! 리오는 알렉스 옆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일으켜 등에 엎었다. "알렉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그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리...오...." 한줄기 바람같이 미세한 목소리가 들리자 리오는 귀를 의심하며 숨을 죽였다. "아...안...돼..." "알렉스! 정신이 들어?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이제 곧 치료받게 해줄게! 그럼 금세 괜찮아질 거야!" 알렉스의 목소리가 틀림없다는 걸 알게 되자 리오의 어조가 저절로 높아졌다. "아....시리..움...안....돼..."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힘들어서 헛소리가 나오는 건가? 말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렉스!" 정신없이 소리치던 리오는 팔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반사적으로 휙 돌려진 눈에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상처투성이 손이 보였다. "아... 알리면.... 안 돼, 리오.... 나...나에 대해.... 아시리움에.... 알리면.... 안 돼.... 절대..." 비록 여러 번 끊어지긴 했지만 알렉스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분명하고 단호했다. "너...그게 무슨 소리야?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거야?" 리오의 목소리엔 그가 느끼는 혼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알렉스! 아시리움에 알리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힘껏 목청을 높여 보았으나 등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알렉스는 다시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알렉스 말을 따라야 하는 건가? 하지만 빨리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알렉스는.... 죽을지도 몰라. 그럴 순 없어. 그래, 지금은 우선 알렉스를 살리고 봐야 해. "미안하다, 알렉스. 하지만... 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 리오는 낮게 중얼거리며 다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렉스가!" "쉿! 조용해!" 리오는 재빨리 리반의 말을 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봤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입 다물고 빨리 걷기나 해. 걸으면서 좋은 방법이나 생각해보란 말이야! 넌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고 머리도 좋잖아." 낮고 빠른 목소리로 숨죽여 말하며 리오는 자꾸 뒤로 쳐지고 있는 리반의 팔을 힘껏 잡아끌었다. "대체 알렉스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이런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혼란스럽기만 한지 리반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다 왔어. 바로 여기야." 리오가 걸음을 멈춘 곳은 숲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어스름 속에 우뚝 서 있는 먼지투성이 목조 건물 앞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잘은 모르지만 무슨 창고 같아. 다행히 문이 안 잠겨 있더라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퀴퀴한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확 밀려들자 리반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좀 어두우니까 조심해 들어와. 나도 아까 넘어질 뻔했거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어 창고 안으로 한발 들어서던 리반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힘없이 벽에 기대 축 늘어져 있는 알렉스의 모습에 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알렉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리오의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저런 알렉스를 지저분한 먼지투성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다니!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리반은 매섭게 리오를 힐난하며 알렉스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푹 꺾인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떤 거 같아?" 초조함을 이기고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던 리오가 성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 죽진 않은 것 같아." "그건 나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네 손으로 치료할 수 있겠느냐는 거야! 그리고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마!" 리오가 리반을 노려보며 험악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런 그에게 꽂힌 리반의 시선 역시 잔뜩 격앙돼 있었다. "리오, 이 멍청이! 알렉스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의학서적 몇권 읽은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빨리 의관사제님을 불러야 돼!" "젠장! 그건 안 돼!" 리오가 주먹을 벽에 힘껏 박아 넣으며 버럭 소리쳤다. "알렉스가 원한 거야! 알렉스가 아시리움에 알리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빨리 무슨 방법을 생각해 봐! 알렉스를 낫게 할 방법을 말하라고!" "너 완전히 미쳤구나, 리오!" 이를 부드득 가는 리오를 보며 리반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건 일의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리오." 리반이 애써 침착한 태도를 보이자 리오도 마음을 가라앉히려는지 긴 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도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알렉스가 이대로 죽으면 영원히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처음엔 나도 너처럼 알렉스 말을 그냥 무시하려고 했단 말이야. 근데 자꾸 그 말을 하던 알렉스의 목소리가 반복해 들리는 거야. 알렉스는 허튼 짓을 할 녀석이 아니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힘들게 그런 말을 한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어두운 얼굴로 리오를 바라보던 리반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말하지 마. 생각 좀 해 봐야 하니까." 리오는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긋이 눈을 감고 미동없이 앉아 있는 리반을 지켜봤다. 그의 푸른 눈엔 간절한 바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리반의 눈꺼풀은 여간 해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리오가 입을 열려는 찰나 리반이 번쩍 눈을 떴다. "리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시녀, 시종, 마부나 잡일꾼 가리지 않고. 평기사도 괜찮아. 하지만 사제나 왕족은 좀 곤란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리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자 급속도로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시에나라는 시녀가 알렉스를 꽤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넌 빨리 그 시녀를 찾아! 만나서 몰래 아시리움 성전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 말끝을 흐리는 리오에게 리반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뭐, 뭐라고? 시녀를 찾아 그건 걸 물어보라고? 기껏 생각한 게 겨우 그거야?" "빨리 움직여!"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를 무시하며 리반이 빠르고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리오가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래, 이렇게 거대한 아시리움 성전에 비밀스런 뒷문 하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만약 그런 문이 있다면 누구보다 아랫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거야. 이래저래 사용할 일이 많을 테고, 입 소문 또한 빠를 테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내 생각이 틀리다면.... 그 땐 리오가 뭐라 해도 내 손으로 알렉스를 의관사제에게 데려가는 수 밖에 없어. 부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는 알렉스의 몸을 바르게 펴 주며 리반은 무거운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 "빨리 서둘러!" "젠장! 대체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거야?" 리반의 재촉에 리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한발 정도 앞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시에나가 찔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쓸데없는 말 하지말고 빨리 서두르기나 해."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려 했지만, 극에 달한 초조와 불안 때문인지 의도와는 달리 리오의 어조는 퉁명스럽기만 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시에나가 울상을 짓자 리오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괜한 짜증 부리지마, 리오. 그러게 번갈아 알렉스를 업자고 했잖아." "내가 지금 힘들어서 이러는 줄 알아?" 버럭 소리지른 다음 입술을 꾹 다문 리오는 알렉스를 고쳐 업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냥 알렉스가 왜 이런 일을.... 젠장! 그만 두자, 그만 둬!" 리반은 못마땅한 눈을 리오에게 돌렸지만 쌍둥이형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무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지금 시에나를 따라 그들로선 한번도 발을 디딘 적없는, 시종들의 숙소 뒤쪽에 위치한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문 시간이었지만 하늘 중앙에 견고하게 박혀 있는 달이 세상을 연한 은빛으로 물들이며 어슴푸레하게 눈앞을 밝혀 줘 걸음을 걷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리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흥건히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맨몸인 자신도 이렇게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알렉스를 업고 넓디넓은 아시리움 성전의 반 정도를 뛰어 가로지른 후 이렇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리오는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리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오를 슬쩍 살폈다. 때마침 그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자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환한 달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리오의 턱에 맺혀 있는 땀방울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며 리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강제로라도 알렉스를 자신이 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시에나가 조심스런 어조로 말을 꺼냈다. "거기가 아니라 이 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시에라가 가리키는 곳은 언덕을 거의 올라온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아니 사람이 지나다닌 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는 풀밭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두 사람은 시에나를 따라 묵묵이 방향을 바꿔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걸었다. 잠시 후 언덕을 거의 내려왔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시야를 온통 막으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철문이었다. 검붉은 녹이 슬어 있지만, 그들의 앞을 막아 버린 장벽은 밖으로 나간다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낼만큼 크고 견고해 보였다. 리오와 리반이 질린 눈으로 육중한 걸쇠에 감겨진 팔뚝 굵기의 쇠사슬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에나는 허리를 굽히고 철문 아래를 온통 덮고 있는 긴 수풀을 이리저리 헤치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말로만 들은 적이 있어서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오래 전에 막아 버린 출입문에 있다는 말만 들었거든요!" 리오와 리반은 서둘러 시에나 쪽으로 다가가 그녀가 헤쳐 놓은 수풀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놀랍게도 수풀 사이로 살짝 틈이 벌어진 철문의 이음매가 보였다. 시에나가 틈에 손을 밀어 넣어 힘껏 잡아당기자 놀랍게도 이음매가 벌어지며 한 사람은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이거 놀랍군, 놀라워! 아시리움 성전에 이런 구멍이 나 있을 줄이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좀처럼 믿어지지 않아!" 눈이 휘둥그레진 리반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비켜, 리반! 시간 없단 말이야!" 리오가 그를 밀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네가 떠나 있을 동안 어떻게 해서든 네 부재를 숨길 테니까 되도록 빨리 돌아와야 해." "알았어." 짧게 대답한 리오는 몸을 숙이려다 재빨리 고개를 들어 시에나를 바라봤다. "수고 많았다. 빨리 돌아가 봐. 괜히 우리 때문에 곤란해지면 안되잖아."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나가셔서 조금 전처럼 수풀을 따라 똑바로 걸으시면 큰 길이 나올 겁니다. 거기선 어렵지 않게 마차를 잡을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 가지로 고맙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리오가 진지하게 말한 다음, 벌어진 틈새 사이로 알렉스를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내일 이맘때 이쪽으로 나와서 알렉스가 어떻게 됐는지 말 좀 해줘. 나도 아시리움 성전 반응에 대해 좀 더 알아낼 테니까." "알았어." 리반은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다 그의 모습이 막 사라지려는 순간 재빨리 입을 열었다. "리오, 조심해!" 리오에게선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철문 넘어 숨죽인 공기를 울리는 건 다급히 멀어져 가는 발소리 뿐이었다. -------------------------------------------------------------------제 22장. 강 건너기------------------------------------------------------------------- "송장을 가져와 무엇하겠다는 건지...." 리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혀를 차는 노인의 멱살을 와락 휘어잡았다. "말 조심하시오, 노인장! 그리고 송장이건 아니건 간에 죽고 싶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렉스를 살려야 할거요. 만약 알렉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노인장이 내 목숨을 살려 주었다는 사실도 내 행동을 막아 주지 못할 테니까!" 리오는 말 그대로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더욱 힘껏 노인의 목덜미를 조였다. 그러자 얼굴이 벌 겋게 된 노인이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래서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잘난 것들은 도와줄 필요가 없다니까. 왕족인 줄 알았으면 길바닥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텐데.... 이것 보십시오, 왕자나리. 내 당장 죽더라도 잘난 왕자나리를 내 집에서 퍽 걷어차 내쫓고 싶지만, 아픈 사람을 봐서 참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저 만치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기나 하십시오. 왕족이라 해봤자 치료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테니까요."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고 있어 치료사라기보다는 도적에 더 가까워 보이는 노인이 리오를 밀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오는 얼떨결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침상에 바짝 붙어서는 노인을 바라봤다. "아, 치료비는 나중에 지불하겠소, 노인장.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서...." "아시리움 성전에서 받은 분에 넘치는 포상금도 주체 못할 지경이니, 돈이란 말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내 이름은 노인장이 아니라 구엔자입니다요." 구엔자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화로 위에 얹어 놓은 놋쇠 주전자를 들어, 움푹 패인 나무통에 따랐다. "먼저 상처 주위를 깨끗이 닦아야 하는데.... 이 염료가 지워지기나 할지...." 리오는 바짝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구엔자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보십시오, 왕자나리! 저기 뒤에 달린 선반 맨 아래칸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항아리 좀 가져오십시오!" 리오는 재빨리 몸을 돌려 선반에서 먼지 투성이 항아리를 꺼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 크지 않은 항아리가 그의 두 팔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거 참! 빨리 빨리 좀 움직여요,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구엔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리오는 기겁을 해 낑낑대며 최대한 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그 나이에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구엔자는 혀를 차며 뚜껑을 연 다음 리오에게서 거뜬히 항아리를 받아 들더니, 흙탕물같이 시커먼 액체를 김이 피어오르는 나무통에 조금 쏟아 부었다. 그리고 방 중앙을 가로 질러 매달려 있는 줄에서 누런 헝겊조각을 걷어, 나무통 속의 액체로 흥건히 적셨다. "난 상처 부위를 먼저 씻고 치료를 시작할 테니, 왕자나리는 다른 곳을 좀 닦아 주십시오." 엘의 너덜거리는 웃옷을 별 힘들이지 않고 찢으며 구엔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리오는 서둘러 줄에서 다른 헝겊을 걷어 나무통에 집어넣었다. 알렉스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이런! 이제 보니 자기 애인을 데려왔군." "젠장!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발끈한 리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나운 기세와 어울리지 않게 그의 두 손은 헝겊을 힘껏 비틀어 짜고 있었다. "돌팔이 치료사에게 데려온 내가 멍청이지! 실력도 없이 입만 살아 움직이는...." 투덜거리던 리오는 구엔자의 손에 들린 작고 날카로운 칼을 보는 순간 입술을 벙하니 벌렸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구엔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잔뜩 몸을 도사리고 있는 리오를 보며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뭘 하긴요? 가슴을 온통 칭칭 감고 있는 이 답답한 족쇄부터 풀어 주려는 거지요. 보면 모르겠습니까?" 반사적으로 리오의 시선이 엘의 가슴으로 내려졌다. 오른쪽 부위가 붉은 피로 물든 폭넓은 헝겊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리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왜 천을 가슴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리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필시 여자임을 숨겨야 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게지요. 여자들은 이래저래 위험하고 불편한것도 많을 테니 말입니다. 뭐, 별로 놀랍지도 않군요. 남자 행세를 하고 다니는 여자를 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구엔자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능숙하게 칼을 움직여 엘의 가슴을 감싼 천을 잘라 나갔다. "여,여자라고? 지금 여자라고 말한 거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리오가 잔뜩 격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어허! 그러고보니 왕자나리는 지금까지 남자인줄만 알고 있었나 보군요." 리오를 향하는 구엔자의 눈엔 노골적인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하,하지만 알렉스는.... 남잔데, 남자가 틀림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여자가 될 수 있단 말이야." 리오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나참! 이렇게 답답한 왕자나리가 있나? 여자라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까?" 구엔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리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의심이 가면 이 가슴을 좀 보란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구엔자가 슬쩍 옆으로 비켜서자 막을 새도 없이 리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혼란스럽고 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기대에 차 있던 그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구엔자가 낄낄거리며 엘의 가슴을 덮고 있는 얇은 모포를 잘 여며 주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다자란 소녀의 몸을 함부로 내놓는 건 죄악이지, 암, 죄악이고 말고.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왕자나리?" 구엔자는 리오를 짓궂게 놀리며 헝겊으로 엘의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몸을 씻기는 건 날이 밝는 대로 옆집 부인에게 부탁해야겠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구엔자가 흘끗 리오를 바라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입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얼굴이군. 어서 그 뒤에 있는 옷궤에라도 걸터앉으십시오. 환자를 둘이나 보살필 여력은 없으니까요." 리오는 퍽 소리가 날만큼 요란하게 붉은 칠을 입힌 나무 옷궤 위에 주저앉았다. "정말 알렉스가 여자인 거요? 잘못 본 건 아니오? 맹세할 수 있소? 그러니까 당신 영혼을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냔 말이오?" 리오의 목소리는 그나마 많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아직은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침착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늙은이는 영혼을 건 맹세 따윈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얼마남지 않은 내 죽음에 대고 맹세하죠. 내 말이 거짓이면 난 그야말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왕자나리?" 구엔자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자 리오의 얼굴에서 점점 붉은 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약간 창백하긴 하지만 그런 대로 평상시의 얼굴 색을 되찾은 리오가 복잡한 마음을 담아 엘을 응시했다. "어허, 이상하군." 엘의 어깨에 찐득거리는 약초즙을 바르던 구엔자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요? 알렉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거요?" 놀란 리오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미간을 찡그린 구엔자가 어두워진 눈으로 리오를 바라봤다. "몸에 난 상처는 어깨뿐인 것 같은 데.... 어깨부상치고는 상태가 너무 위중한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뭐 알고 있는 거 있습니까, 왕자나리?" "그건 너무 오랫동안 축축한 숲에 방치돼 있어서일 거요. 그 어둡고 습한 곳에서 하루를 꼬박 혼자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 말을 마친 리오는 얼얼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구엔자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상처부위나 옷 상태를 봐서 그렇게 강혈(腔血)이 많이 빠져 나온 거 같지는 않은데... 상처도 비교적 깨끗한 관통상이고.... 뭔가 이상해...." 리오는 얼굴을 찌푸리고 잔뜩 긴장한 채 구엔자와 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엘의 뺨과 목을 손으로 만져 보던 구엔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약한 숨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는 한동안 눈을 지긋이 감고 숨소리를 들은 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엘의 옷을 집어 피가 말라붙은 부분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며 낮은 신음소리를 뱉어 냈다. "무슨 일이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리오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구엔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결심한 듯 리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능력 밖입니다. 다시 말해 내 힘으론 이 소녀의 목숨을 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요. 난 기껏해야 터지거나 째진 상처만 치료할 수 있지... 이렇게 온 몸에 독이 퍼진 반송장을 살리는 건 내 능력을 까마득하게 넘는 일입니다." "뭐,뭐라고? 뭐라고 그랬소? 지금 뭐라고 그랬느냐고?" 리오가 버럭 악을 써대자 구엔자 역시 한층 강경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래도 독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온몸에 퍼진 독이 야금야금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데,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이라고요!" "독....독이라고?" 눈 앞이 아찔해지자 리오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깜박이며 비틀비틀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니, 알렉스는 죽지 않아! 빨리 아시리움으로 데려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젠장! 내가 멍청했어! 아시리움에 바로 알렸어야 했는데!" 축 늘어진 그녀를 허겁지겁 일으키려 하는 그에게 침울한 구엔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늦었습니다. 아마 가는 도중에 죽음이 찾아 들게 될 겁니다. 요행히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아시리움에 도착한다 해도 별 소용이.... 독이 무서운 게 바로 그겁니다. 무슨 독인지 알아내는 것도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다시 말해 무슨 독인지 알아냈을 땐 이미 눈 앞에 산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만에 하나 독의 종류를 알아낸다 해도 그 독을 해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내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발 좀 도와주시오!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소! 그러니 알렉스만 살려 주시오!" 리오는 간절하게 애원하며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하지만 구엔자는 슬그머니 그의 눈을 외면할 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넋이 나간 듯 맥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리오를 향해 구엔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리를 비켜 줄 테니, 마지막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손이나 붙들어 주십시오. 정말 안 됐습니다, 왕자나리. 도움이 못돼 미안합니다." 말을 마친 구엔자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순간 리오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엘의 창백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눈 좀 떠봐 알렉스... 나 리오야....제발... 제발 눈 좀 떠봐.... 넌 절대 죽지 않아... 네가 죽을 리 없어...." 나지막이 속삭인 리오는 숨을 죽이고, 굳게 닫힌 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이 반짝 떠지며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하게 엘을 응시하던 리오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줌 희망이 숨막히는 절망으로 바뀌자 그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젠장! 죽지마, 알렉스! 죽으면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넌 나한테 네가 여자라는 사실도 숨겼어!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네가 남자인줄만 알고.... 내가 얼마나.... 그런데 이제 네가 여자란 걸 알게 되자마자 죽는다고? 이렇게 널 잃어버리라고? 젠장! 알렉스, 이 나쁜 자식!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고래고래 악을 쓰는 리오의 볼을 따라 굵은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리오는 엘의 손을 움켜쥐고 얼굴을 묻었다. 막을 새도 없이 숨막히는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알렉스.... 죽으면... 안 돼... 제발....제발.... 죽지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군." 바르르 떨리는 리오의 어깨너머로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리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뒤쪽으로 휙 돌렸다. 그리고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차갑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미끄러지듯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누구십니까?"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엄과 숨막힐 듯 전해지는 이질적인 분위기에 리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울며불며 매달리면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남자가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살피던 리오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루드비히! 당신이 바로 루드비히로군요! 알렉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루드비히가 여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루드비히, 알렉스가 몹시 위독합니다! 그러니 루드비히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루드비히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리오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맞지..." 리오가 채 말을 끝맺지 못했을 때, 회색의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그의 몸을 둥글게 감싸고 소용돌이치듯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이게 뭐야?" 그는 연기를 피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정신없이 팔을 휘저어 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널 죽음으로 인도할 안내자다." 루드비히가 소름 끼칠 만큼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 이름을 불렀다고 이러는 거란 말입니까? 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루드비히의 입술에 서늘한 조소가 피어올랐다.리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몇 번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당신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알렉스만 살려 주십시오. 알렉스만 살아난다면 그 땐 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에 미묘한 반짝임이 지나갔다. 잠시 그는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로 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리오는 이를 악물고, 머릿속을 파고 들어오는 듯한 강렬한 시선을 꿋꿋이 견뎌 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지."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무뚝뚝한 어조의 말이 나오는 순간, 리오를 감싸고 있던 회색 연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어리둥절해 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살피는 그를 무시하고 루드비히는 엘이 누워 있는 침상 가까이 접근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그녀를 찬찬히 살펴봤다. "알렉스를 살릴 방법이 있습니까?" 리오가 다급하게 질문을 던지며 한달음에 다가와 루드비히 옆에 멈춰 섰다. 루드비히는 리오 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손을 내밀어 퉁퉁 부어 오른 엘의 어깨에서 질척한 약초즙을 닦아 냈다. "맨손으로 상처를 만져도 괜찮을까요? 리반 말로는 절대 삼가야 할게 바로...." 열심히 떠들던 리오는 루드비히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순간 찔끔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루드비히가 상처 위에 손을 얹는 걸 보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빨리 알렉스를 살릴 방도를 모색해도 시간이 모자란 판국에... 정말 이상한 분이시군요! 알렉스도 엉뚱한 분이라는 말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흘끗 리오를 바라보는 루드비히의 눈엔 짜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리 민감하지 않은 리오가 그런걸 눈치챌 리 만무했다. "제 생각에는 빨리 아시리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데... 아니, 아직도 상처에 손을 얹고 계시는군요! 빨리 떼십시오!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괴롭히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갑자기 불쑥 나타나 이상한 연기를 피우더니, 이젠 터무니없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으시는군요. 알렉스가 깨어나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말해주겠습니다."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들릴락 말락 낮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리오를 향하는 순간 불그스름한 연기가 리오의 얼굴을 감쌌다. 놀란 리오가 숨을 훅 들이마시자 그의 입술과 코를 통해 붉은 연기가 한껏 빨려 들어갔다. 그 즉시 리오의 눈이 뒤로 넘어가더니 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루드비히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엘을 향해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상처에 손바닥을 밀착시킨 채 두 눈을 감았다. 살짝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딱딱하고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에서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 오자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루드비히는 리오와 침상 사이에 투명한 차단막을 세운 뒤, 다시 엘의 상처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피와 섞인 누런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액체는 계속 흘러내려 엘의 어깨 아래 모포를 적시고 면적을 넓혀 나갔다. 시간이 흘러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붉은 피가 흘러나오게 되자, 루드비히는 천천히 상처에서 손을 떼어 엘의 파리한 얼굴로 가져갔다. 그녀의 살갗에 손가락 끝이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동작을 멈춘 그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살짝 그늘진 은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짝이자, 그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곧 이어 핏자국이 말끔히 가신 하얀 피부가 나타났다. 루드비히는 그제야 천천히 팔을 뻗어 엘의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다음, 손가락 끝으로 볼을 살며시 쓸었다.창백하기만 했던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희미하게나마 핏기가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루드비히가 엘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깨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만.... 적당한 고통을 당해봐야 자신의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기게 될 테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살짝 고개를 들어 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마음이 들다니.... 내 자신도 믿기지 않는군." 루드비히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처는 그냥 놔두겠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십시오. 하지만 불필요한 추적마법은 이번 기회에 없애는 것이 좋겠군요." 은회색 눈동자가 미묘하게 반짝이며 그의 단정한 입술에 흥미를 담은 의미 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제 행동을 루벤스타인 대공은 물론 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팔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 속에서 물이 스며 나오듯 창백한 이마에 불그스름한 글자가 떠올랐다. "샨 마라힐어라.... 제법이군." 희미한 냉소를 머금은 루드비히가 이번엔 엘의 이마 위 낮은 허공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입 속으로 짧은 말을 중얼거린 순간 붉은 글자의 형태가 일그러지며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깨끗이 지워졌습니다." 루드비히는 낮고 조용하게 속삭이며 엘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넘어 주었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열었다. "물건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왜 그걸 못 찾는지.... 너무 심한 갈증이 오히려 샘을 가려 버린 겁니까?" 말을 끝내고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잠시 후 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파닥거리는 목으로 미끄러졌고,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은 열 때문인지 더욱 붉게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내려졌다. 따스한 입김이 부드럽게 뒤섞이며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부딪치려는 순간, 루드비히의 입술에 자조 섞인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도 스스로를 향한 씁쓸한 냉소가 담겨 있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입술을 훔치려 하다니...." 거의 쉰 것처럼 들리는 낮은 속삭임이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얼음조각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몸을 바로잡은 루드비히는 좁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회갈색의 탁한 연기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안으로 들어온 연기가 급속도로 뭉쳐져 하나의 덩어리가 되더니 곧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작은 오두막을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회색이었고, 회색 연기를 마치 옷처럼 몸이 두르고 있었다. "그래, 드디어 버러지 한 마리가 기어 들어왔군." 루드비히는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향해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움찔하며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없이 서 있더니, 이내 깊은 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탁하고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법황 성하. 저로선 법황 성하란 호칭이 아직 낯설지만, 감히 뜻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 이름은 버러지가 아닙니다. 제 이름은..." "네 이름 따위에 관심없다." 루드비히가 차갑게 말허리를 자르자 남자의 얼굴 깊숙이 박힌, 진흙 웅덩이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저 역시 성하께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어리석은 벨리타는 성하께 자신의 모든 걸 바쳤지만 말입니다."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 벨리타를 고기조각으로 만들어 죽인 게 바로 나인데도 말이냐?" "피를 나눴다 해서 제가 벨리타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 생각하진 마십시오. 지금 제 행동은 아만티, 제 어머니의 이름에 건 맹약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서 비켜주십시오. 전 저 아이에게 죽음을 내리러 온 거지 법황 성하께 대항하려 하는 게 아닙니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싸늘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저 아이를 해치려 하는 게 내게 대항하는 거라면 어찌하겠느냐?" 전혀 감정을 드러나지 않던 무표정이 일순 깨지며 놀라움 섞인 한 가닥 두려움이 남자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성을 찾으려는 듯 깊이 숨을 들이마신 남자가 돌조각처럼 딱딱해 보이는 입술을 움직였다. "제 길을 막아 서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루드비히의 얼굴에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루드비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짧은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그것을 들은 남자가 재빨리 자신의 몸을 연기로 변형시키려 했을 때는 이미 파르스름한 빛이 그의 몸을 덮친 후였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몸을 둘러싼 빛이 작렬하듯 터져 오르며 사라지는 순간, 남자는 자신이 넓은 들판으로 옮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곳은 제게 더 유리하다는 걸 모르시는 것 같군요."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해졌다. "하찮은 버러지 따위는 내 상대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공격준비를 하고있던 남자는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어마어마한 힘을 쏘아 보냈다. 곧 하늘이 무너질 듯한 굉음과 함께 대기가 격렬히 흔들리더니 공격이 가해진 땅이 사방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떠십니까, 법황 성하? 이래도 제가 버러지로 보이십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의 눈 앞에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루드비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공격이 한낱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남자가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는군." 두려움에 몰린 남자가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 모아 루드비히를 향해 번뜩이는 섬광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섬광은 믿을 수 없게도 루드비히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정지한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 딱딱하고 싸늘한 것이 자신의 몸에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다급하게 변형을 시도했다. 연기로 변해 대기에 스며든다면 제아무리 법황이라 해도 자신을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심장이 옥죄어 들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만을 느꼈을 뿐 손가락하나 변형시킬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주름지며 절망감으로 뒤틀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네가 얽매여 있는 어리석은 맹약을 깨겠다는 맹세를 하면 살려 주겠다." 부드러움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은회색 눈이 남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남자가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 루드비히 앞에 멈춰 있던 빛 덩어리가 그를 향해 날아갔다. 옴짝달싹 못하고 빛에 감싸인 남자의 몸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새 남자가 있던 자리에 질척한 액체가 고인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첸!" 루드비히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웅덩이를 바라보다,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입을 다문 그가 몸을 돌렸을 때 이미 그 앞엔 어둠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보이는 검은 늑대가 바닥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넌 저 아이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었다." 루드비히의 목소리엔 싸늘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더욱 몸을 움츠리는 늑대에게서 낮고 거친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유는 들을 필요도 없다. 당연히 명령을 받지 않아서일 테니까. 그래, 이 모든 건 내 어리석음이 빚은 일이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회갈색 액체가 담긴 작은 웅덩이로 시선을 돌렸다. 조각같은 얼굴엔 조금도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은회색 눈엔 매서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시 명령을 내리겠다. 내가 없을 땐 네가 그녀를 지켜라. 그녀를 해하려 하면 그 즉시 숨통을 잘라 버려라. 그게 누구든지."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자일스의 눈이 별안간 번쩍 떠졌다. 아직도 몸이 노곤하기만 한 그가 이렇게 갑자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전신을 압박하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것이 빚어 낸 불길한 예감이 그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커튼자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높다란 천장에 그려진 고풍스러운 천장화에 환한 달빛이 너울대며 괴이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자일스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이며, 침대 옆 낮은 선반에 올려 놓은 검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검을 움켜잡으며 벌떡 몸을 세웠다. "누구냐?" 기세 등등하게 소리치던 자일스의 몸이 흠칫하더니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는 눈을 의심하며 방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긴 그림자를 바라봤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서늘한 눈동자와 달빛에 은은한 빛을 반사시키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그림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일스는 침입자에게서 발산되는 치명적인 위험을 애써 무시하며, 매끄러운 단한번의 동작으로 검을 빼어 두 손으로 단단히 받쳐 쥐었다. 익숙하게 손바닥에 감겨 드는 서늘하고 단단한 느낌에, 그는 한순간 잃어버렸던 위엄과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누군데 감히 내방에 침입한 것이냐? 한심한 좀도둑인가 본데, 네 놈이 죽고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지!" 자일스는 거만하게 소리치며 정체불명의 침입자에게 한발한발 접근했다. "그 검으로 날 죽이겠다는 건가?" 낮고 건조한 목소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재미있어 하는 기미가 풍겨 나왔다. "그래, 내 친히 이 검으로 널 한점 한점 저며 주겠다." 검술에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는 자일스는 침입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거리낌없이 말했다. 살인에 대한 흥분이 급속도로 밀려들자 그는 혀로 입술을 축축이 적시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거 재미있겠군." 말과는 달리 침입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어찌 보면 어렴풋하게 지루함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네 말대로 곧 재미있게 해주마. 물론 재미는 너보다 내 몫이 더 많겠지만 말이다. 그래...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군." 자일스는 말을 마치자마자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가 치켜든 검을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렀을 때, 갑자기 눈앞의 침입자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허공을 크게 벤 자일스는 빗나간 공격의 반동으로 휘청거리다 허겁지겁 몸을 바로잡고, 침입자를 찾아 정신없이 고개를 휘저었다. "이제 이런 놀이도 지루하기만 하군." 자일스는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몸을 회전시키며 유연한 동작으로 검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쥔 검이 불이 붙은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건 바로 그 때였다. 자일스는 짫고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격렬한 동작으로 검을 떨쳐 냈다. 그는 화상의 고통으로 인해 험악한 욕설을 연이어 내뱉다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허공에 둥둥 떠있는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검이 침입자 앞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두려움이 밀려들며 숨이 서서히 막혀 왔다. 자신의 공격 앞에서 침입자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는, 그리 밝지 않은 시야와 유달리 빠른 움직임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침입자의 눈앞에 검이 멈춰 서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강렬한 빛이 번쩍 터져 오르며, 그의 검이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자일스는 검이 있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침입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넌 마법사로구나! 그래, 마법사가 틀림없어! 대체 뭘 노리고 감히 내 침소에 들어온 것이냐?" 자일스는 두려움을 감추며 애써 호기를 부려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침입자에게서 낮고 음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듯한 공포에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감히라....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인가?" 조소 섞인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문 침입자가 자일스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낌없는 접근에 질린 자일스는 주춤주춤 물러서 어느새 벽에 등을 기대게 되었다. 그가 축축이 젖은 등에 와 닿는 싸늘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을 때, 그와 침입자와의 사이에 두 개의 단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낯익은 단도의 모습을 깨달은 자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건을 돌려주러 왔다." 자일스는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차 올랐던 긴장과 공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자, 벽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상한 능력이 있는 침입자에 대한 두려움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침입자가 그에게 무언가를 얻을 목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거라는 안도감이 들자, 그는 잠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자일스는 몸을 세우고 침입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돌아왔고 쿵쾅거리던 가슴고동도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잠시 후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엔 어느새 평소처럼 거만함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를 원하느냐? 빨리 금액을 말하고 여기서 썩 꺼져라!" 어둠 속에서 침입자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에게서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압력이 느껴지자 자일스는 무의식 중에 몸을 움츠렸다. 허공에 매달린 단도 하나가 그에게 다가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코에 닿을 듯 접근한 칼끝이 탐색하는 것처럼 그의 몸을 타고 내려가, 하얀 천이 감긴 팔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놀란 자일스가 팔을 피할 겨를도 없이 천을 뚫고 상처 한가운데를 파고 들었다. 자일스의 입에서 고통과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왼쪽 손을 뻗어 단도를 뽑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일순 불이 붙은 듯 단도가 뜨겁게 달궈지자, 손잡이에 닿아 있는 피부가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타 들어가며 역한 냄새를 피워 올렸다. 자일스는 손바닥을 후벼파는 엄청난 통증에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대,대체 원하는 것이 무어냐? 모든지 다 들어줄 테니.... 원하는 건 모든 다 들어줄 테니... 제발.... 제발.... " 심하게 갈라진 거친 목소리로 간절히 애원한 자일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참았다. "말했을 텐데? 네 물건을 돌려주러 왔다고 말이다." 소름 끼칠 만큼 건조한 어조로 말한 침입자가 천천히 자일스를 향해 다가왔다. 자일스는 점점 가까워지는 침입자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숨을 헐떡였다. 그 앞에 막 멈춰 선 침입자가 서늘한 조소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돌려받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 걸려 있던 다른 단도가 자일스의 오른쪽 눈앞으로 미끄러졌 다. 칼끝이 눈을 찌를 듯 바짝 접근하자 자일스는 마침내 이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는 비명과 흐느낌이 섞인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혔다. 그러나 이미 그의 머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만큼 벽이 밀착된 상태였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피는 혈관 속에서 얼어붙고 몸은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지를 적시며 다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뜨듯한 액체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체면을 해쳤다거나 수치스럽다는 생각조차 공포에 짓눌려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을 바꿨다. 내 손으로 널 죽이진 않겠다. 네 하찮은 목숨을 거둘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말을 멈춘 침입자가 싸늘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네게 돌려주는 물건의 수만큼만 네게서 빼앗을 생각이다. 나한테는 쓰레기일 뿐이지만 네겐 그런 대로 귀중한 것일 두 가지를 말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상처에 박혀 있던 단도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한층 더 깊숙이 살갗을 파고들어 완전히 팔을 꿰뚫더니, 공기를 가르며 세차게 회전했다. 막을 새도 없이, 아니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완전히 절단된 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카펫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즉시 시뻘건 핏줄기가 맹렬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내 팔! 내 팔이!" 자일스가 잘려 나간 팔꿈치를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침입자의 입술에 싸늘한 냉소가 그려지는 순간 자일스의 눈앞에 멈춰 있던 단도가 그의 오른쪽 눈으로 달려들었다. 자일스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생명체처럼 눈을 파고드는 단도를 가까스로 뽑아냈다.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앞자락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후드득 아래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자일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쏟아지는 핏줄기를 막기라도 할 듯 남아있는 왼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그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찢어질 듯한 비명과 울부짖음을 뚫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고 보니 네게 요구할 것이 남아있었군." "어허, 이거 참!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좀 조용히 하시오!" 방금 전 만해도 엘이 무사한 걸 알고 요란한 환호성을 질렀던 리오는 짜증 섞인 어조로, 끈질기게 계속되는 구엔자의 중얼거림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긴 왜 믿을 수 없소? 난 어찌 된 일인지 빤히 보이는데!" "정말입니까? 왕자나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안다는 말이군요! 어서 말 좀 해 주십시오!" 구엔자가 리오에게 뻣뻣한 수염이 가시처럼 돋은 검붉은 얼굴을 불쑥 들이대며 소리쳤다. 잔뜩 인상을 쓴 리오는 몸을 홱 젖히며 얼굴에 튄 침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알았으니 제발 그 머리 좀 들이밀지 마시오! 꿈에 나올까 무섭군. 내 생각에 이번 일은 고민할 가치도 없소. 아는 건 개털뿐인 엉터리 치료사가 괜히 할말 없으니 독이니 뭐니 난리를 부린 거지. 그리고 죽을 줄 알았던 사람이 떡하니 숨을 쉬고 있는 걸 보고, '독이 빠져나갔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하고 일부러 소란이나 피우고." 리오는 잔뜩 비꼬는 말을 끝내고 혀를 차댔다. 그러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고 있던 구엔자가 그를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왕자나리가 정신이 나갔나? 여기 이 커다란 얼룩 안 보여? 이게 바로 독이 빠져 나왔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근데 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 이 날 이때껏 욕먹을 짓 많이 저지르며 살아왔지만 내게 찾아온 병자를 두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 그런데 뭐? 괜히 할말이 없어 독이라고 난리를 피운 거라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픈 사람 앞에서 철버덕 바닥에 자빠져 코를 드르렁대던 사람이 뭘 잘했다고 날 모욕하는 거야?" 화를 못 참은 구엔자의 입에서 모욕적인 반말이 튀어나오자 리오의 얼굴도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런 건방진 늙은이가 있나? 감히 누구한테 막말을 쓰는 거야?" "먼저 막말을 쓴 게 누군데? 치료사로서의 내 자부심을 깔아뭉갠 사람이 누구냐고? 왕자면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써도 되는 거야? 빌어 처먹을! 썩을 놈의 세상! 어디 더러워서 살겠나? 다 떨어진 넝마처럼 땅바닥을 뒹구는 걸 봤을 때, 엉덩이가 빠개져라 걷어 차주고 그냥 오는 건데 그랬어!" 구엔자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펄쩍 뛰며 고함을 지르자 리오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마주 서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 후끈 달아오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런 젠장!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 내가 할아범한테 날 살려 달라고 매달리며 애원이라도 했나? 응? 목소리만 크면 다야? 그렇게 병자를 위한다는 작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시나? 참! 잘났군, 정말 잘났어!" "왕자고 뭐고 이제 더는 못 참아!" 버럭 소리친 구엔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 듯 한껏 몸을 도사렸다. "조용히 해!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알렉스 상태가 악화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늙은이가 소리지를 힘은 있나 보지?" "누가 소리를 지르는 데? 소리는 나만 질렀나?" "이런 젠장! 나보다 할아범 목소리가 몇 배는 더 크고 요란하잖아!" 누구 목청이 더 큰가 내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점점 더 악을 써대고 있었다. "나 참! 기가 차서! 내 목소리가 왕자나리보다 크고 요란하다고? 정말 시끄러운 목소리는 바로 댁이라고!" "근데 이 늙은이가!" "그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발끈한 리오가 더 크게 악을 쓰려는 찰나 약하디 약한 말소리가 격앙된 공기에 섞여 들었다. 리오는 소리가 들린 침상 속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열렸다. "아,알렉스...." 신음처럼 나지막이 입 속에서 중얼거린 리오가 한달음에 침상으로 달려들며 크게 소리쳤다. "알렉스! 깨어났구나!" 흥분과 기쁨을 못이긴 리오가 손을 덥석 잡아 들어올리자, 엘이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리오는 얼굴을 찡그리며 엘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저... 미안해... 많이 아프지?" "아니, 괜찮아... 참을 만해." 잔뜩 가라앉은 미약한 목소리를 들은 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 소리냐? 네가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잖아. '괜찮아, 참을 만해. 이 까짓 건 별거 아니야'" 엘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야, 정말이야. 그저 힘이 좀 없고, 어깨가 아픈 것 뿐이야." "정말 괜찮은 거지? 난 네가 죽는 줄 알고...." "좀 비키시오! 거치적거리지 말고!" 리오의 몸을 밀치며 퉁명스럽게 말한 구엔자는 자신을 노려보는 리오를 무시한 채, 엘을 향해 그의 능력이 닿는 최대한도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약을 마시면 금세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어깨 상처는 조금 전에 새 약초를 붙였으니 오늘 밤까진 따로 손볼 필요없을 거고요. 붓기를 빨리 가라앉히려면 하루도 빼먹지 말고 부지런히 약초를 갈아 붙여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친구 생명을 살려 주시더니, 제 목숨도 구해주셨군요." 구엔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엘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등에 둘둘만 천을 고여 주고, 거친 손으로 머리를 살짝 받쳐 주었다. 그리고 불쾌한 냄새와 역한 맛이 나는 진갈색 액체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조금씩 흘러 넣어 주었다. 투박한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세심한 동작이었다. "더,더 이상은 못 마시겠어요." 약을 반 정도 마신 엘이 그릇에서 입술을 떼며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할 수 없군요. 자, 그럼 전 이만 물러납죠. 두 분께서 서로 할 말이 많을 테니...." 엘의 얼굴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나가 봐야 할 일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원스럽게 말한 구엔자가 커다란 짐 꾸러미를 들더니 쿵쾅거리며 나무가 깔린 거친 바닥을 걸어 밖으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두 사람 다 입술을 꾹 다물고 조심스럽게 서로를 살피고 있었다.점점 무거워져만 가는 정적을 깬 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괜히 이 곳 저 곳으로 시선을 옮기던 리오였다. "저,저기... 아직 많이 아프고 힘들 텐데 좀 자... 난 밖에 나가 이 근처나 한 바퀴 돌고 올게. 참, 오늘밤엔 아시리움 성전에 몰래 가서 리반을 만나기로 했어. 네가 무사하다는 걸 말해 줘야지. 그리고 너와 관련되어 어떤 말들이 오가나 하는 것도 궁금하고.... 아, 깜박 잊고 있었는데, 그건 리반이 알아보기로 했어. 리반 녀석 지금 꽤나 속이 타고 있을 거야. 사실 널 아시리움에서 빼내 오는 덴 리반의 공이 컸어. 그리고 시에나라는...." "알고 있구나." 엘이 조용한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리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토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긴...내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데... 네가 모를 리 없겠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리오가 끝내 아무 말없이 어색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안 물어봐?" 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름이 뭐야?"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리오가 불쑥 물었다. 엘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힘들게 입술을 움직였다. ".....엘" 그녀의 입술에서 낮고 자그마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엘?" "그래... 엘이야." 리오를 외면하고 있던 엘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에 못 박혀 있는 리오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이 진짜 내 이름이야. 그냥 엘. 이것저것 붙이는 것도 없어.난 성이 없거든.난.... 나는...."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얼굴을 숙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천민임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리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천민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견딜 수 없이 창피하고 비참했다.내가 정말 세렌국의 왕자라면.... 아니 천민이 아니라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천민만 아닐 수 있다면.... "난.... 천민이야. 천민 엘.... 그게 나야."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푹 꺾여진 얼굴이 점점 더 아래로 떨구어졌다. 멍청이! 왜 천민이라는 말을 한 거야? 그것까지 밝힐 이유는 없었잖아! 어느 시골 가난한 소작농의 딸이라고 대충 지어댈 수도 있었잖아! 리오에게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비천한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노기 어린 외침도, 놀랐다는 어떤 탄성도 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엘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점점 그녀의 가슴을 조여 왔다. "반갑다, 엘. 난 리오라고 해. 이것저것 붙은 건 많지만 그냥 리오일 뿐이야." 리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지만 엘이 몸을 흠칫할 정도로 단호했다. 얼굴을 퍼뜩 치켜든 그녀를 향해 리오가 씩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난 알렉스라는 이름이 더 편하고 익숙해. 하지만 앞으론 엘이란 이름이 더 친근해지겠지. 그리고 더 솔직해진다면 네가 여자라는 것도 아직 잘 믿기지가 않아. 그래서 그냥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어. 내가 나인 것처럼, 넌 너인 것 뿐이라고." 말을 끊은 리오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이며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내 입에서 나온 건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엘은 멍하니 입술을 벌린 채 리오를 바라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리오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네가 천민이건 왕족이건 상관없어. 네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변할 수도 없고. 내게 중요한 건 네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그것 뿐이야." 엘은 바르르 떨려 오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리오를 바라보던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갔 다. 왜 이렇게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이 아파 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쏴 하니 시려 오는데, 그 반대편은 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건 자신이 지금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려 한다는 것 뿐이었다. 엘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리자 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너 혹시 우는 거야?" "아,아니야!" 엘은 잔뜩 잠긴 소리로 재빨리 소리쳤다.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은 리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네가 이렇게 울보인줄은 정말 몰랐다, 알렉스, 아니 엘. 그 동안 그걸 숨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쯧쯧! 내 그 마음 알고도 남지! 암, 그렇고 말고! 앞으로 울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 리오님을 찾아 와. 멋진 오라버니가 든든한 어깨를 빌려 주지." 리오의 말을 듣는 동안 눈물이 완전히 말라 버린 엘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웃기고 있네! 누가 동생이고 누가 오라버니란 말이야? 이제 와서 밝히는 거지만 나도 너와 같은 열 여덟 살이야!" 으르렁대는 엘의 말을 받아 치는 리오의 대꾸는 매우 간단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버럭 소리지른 엘이 신음을 토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놀란 리오가 황급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와 머리를 받쳐 침상에 눕혀 주었다. "많이 아파, 알렉스, 아니 엘?" "괜찮아, 이 정도는 참을 만해." '참을 만해'를 엘과 똑같이 말한 리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쿡쿡거리며 웃어 대기 시작했다. "실없기는! 너처럼 실없는 왕자는 세상에 둘도 없을 거다!" 짐짓 인상을 쓰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다음순간 엘의 입술에 다시 피식피식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허! 아프다 엄살 부리며 누워 있으면 내가 늘씬하게 패지 못할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 뭐.... 하긴 내가 생각해도 실없는 것 같긴 하지만." 과장되게 험악한 어조로 소리치던 리오가 싱겁게 말을 끝내자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좀 쉬어. 한숨 푹 자란 말이야. 난 밖에 나가 있을 테니 마음 편히 자." "아니 나가지 마, 리오. 나 자고 싶지 않아. 졸리지도 않고. 그러니 얘기나 나누자. 거기 아래 상자 있지? 그거 꺼내 앉아." 엘은 리오가 나가는 게 두렵기라도 한 듯 서둘러 말했다.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그가 상자를 꺼내 털썩 주저앉자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이라도 힘들거나 피곤해지면 그 즉시 나한테 말해야 돼. 알았지?" 걱정이 묻어 나오는 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슨 얘기를...." "먼저 무슨 말을...."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이 다시 소리내어 웃음을 나눴다. 엘도 자신과 리오가 유달리 많이 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밝혀진 비밀이 야기시킨 일종의 어색함과 쑥스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두 사람의 사이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변함없이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리오의 눈빛, 그거 하나 밖에 없었다. "우리를 도와준 그 할아버지... 이름이 구엔자라고 했지?" 엘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냈다. "응." 짧게 대답한 리오가 미진하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구엔자가 뭐야, 구엔자가? 정말 웃긴 이름이지 않아? 뭐.... 널 치료해 준건 고맙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아시리움에서 포상금도 넉넉히 받았다면서 이 집이나 좀 고칠 것이지! 누가 여길 사람 사는 데라 생각하겠어? 잡동사니만 가득한 토끼우리로 알겠지. 알렉스, 아니 엘, 넌 잘 모르겠지만 그 할아범 말이야, 생긴 것처럼 성격도 괴팍하기 그지 없더라고. 글쎄 어제 널 데려왔을 때 첫 마디가 무엇이었는지...." 리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엘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천천히 닫으며 조금씩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엘." 귓가를 울리는 리오의 목소리를 끝으로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왔다. -------------------------------------------------------------------제 23장. 짧은 산책-------------------------------------------------------------------엘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온통 어둠이 내린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리오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밝혀진 엷은 불빛에 시선을 맞혔다. 그 희미한 불빛이 던진 그림자 때문인지 둥그스름한 작은 빛을 제외한 부분은 더욱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엘은 미약하지만 집요하게 눈을 파고 드는 불빛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무기력하게 늘어진 팔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팔 근육을 움찔하는 정도의 움직임에도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서둘러 이를 악물었지만 이미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간 뒤였다. "알렉스, 아니 엘! 왜 그래? 많이 아파?" 침상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고개를 받친 자세로, 끄덕끄덕 졸고 있던 리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엘은 입술을 꼭 다문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나아졌어." 그녀는 구부렸던 몸을 펴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얼굴이 왜 그래? 꼭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에 마음이 좀 놓이는지 리오가 한숨을 내쉬며 나무상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많이 피곤하지?" 손을 내리며 리오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갖고 피곤하면 다 된 거지. 난 쉰 여덟이 아니라 열 여덟이라고." "그래, 쉰 여덟은 영원히 안 올것 같은 열 여덟이겠지." 엘도 리오를 따라 가벼운 농담조로 응수했다. "아니, 나이에 맞는 인품과 훌륭한 연륜을 쌓은, 멋진 쉰 여덟이 되길 바라는 열 여덟이야." 말을 마친 리오가 씩 웃음을 짓자 엘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참! 그러고 보니 너한테 알려 줄 소식이 하나 있어! 글쎄 아시리움에서 말이야!"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던 리오가,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굳은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고 일순 말을 멈췄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알렉스, 아니 엘. 사실 기쁜 소식이거든. 너무 놀라지마. 자일스가 오늘 리아잔 제국으로 떠났대." "뭐?" 엘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나온 그녀의 행동은 참기 힘든 고통만 가져올 뿐이었다. "알렉스! 아니 엘! 괜찮아?" 엘이 거친 숨을 토해내자 리오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주의까지 줬잖아! 어린애처럼 왜 그래?" "그만하고, 나 좀 일으켜 줘! 그리고 자일스에 대한 얘기나 빨리 해 봐!"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는 리오에게 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침상 옆으로 다가 선 리오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녀를 일으켜, 둘둘 말려 있던 낮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끔하게 접은 천을 등에 받쳐 주었다. 구엔자가 꼼꼼하게 천을 접어 놓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까 리오가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게 분명했다. 엘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손으로 침상을 평평히 깔아 주는 리오를 바라봤다. "말 그대로야. 자일스가 오늘 날도 밝기 전인 이른 새벽에 허겁지겁 아시리움 성전을 떠났대." "그게 정말이야? 정말 자일스가 리아잔으로 돌아간 거야?" 도저히 믿겨지지 않은 말에 그녀는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정말인가 봐. 나도 너처럼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리반한테 몇 번이나 묻고 또 물었다니까. 더군다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어. 어제 늦은 밤에 아시리움 성전에 있는 의관사제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일스 방에 불려 갔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일스가 아니면 제삼자인 누군가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건 거의 확실한 것 같아. 방도 온통 피투성이었다니까." "뭐, 피투성이? 리반이 직접 본 거래?" 엘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아니, 리반이 실제로 본 건 아니고, 수근거리는 시녀들 얘길 들은 거래. 어찌나 선혈이 낭자한지 그걸 본 어떤 시녀는 기절까지 했다 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리반이 나중에 직접 자일스 방에 가 봤는데, 피범벅은커녕 작은 핏자국 하나 없었다지 뭐야. 리반 말로는, 아시리움의 분위기로 봐서 터무니없는 소문 같지는 않고 성전 측에서 재빨리 방을 정리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 자일스가 돌연 아시리움 성전을 떠났고, 그의 방은 피투성이였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은 리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사람들은 그 피가 알렉스, 아니 엘, 네 피인 줄 알고 있나 봐. 그러니까 자일스가 널 죽이고, 그 사실을 아시리움 성전측에서 알게 돼서 부랴부랴 일을 마무리지은 거로 말이야.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지.... 말해 봐, 널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자일스지?" 몸을 비틀거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일이 생각나자 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뻣뻣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일스! 이 나쁜 자식!" 주먹을 불끈 쥔 리오가 벌떡 일어서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거친 동작으로 좁은 바닥을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그 자식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너한테 감히 칼을 휘두르고... 그것도 모자라 넌 숲속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널 모함하기까지 하고! 내 이 자식을 무슨 일이 있어도..." "모함? 모함이라니?" 엘은 다급한 마음에 크게 소리쳤다. "네가 아르벨라 황녀를 다시 겁탈하려 했고, 그걸 본 자신이 널 협박해 아시리움을 떠나게 했다고.... 자일스가 아시리움 성전에 그렇게 알렸어. 사람들은 네가 세렌국에 나타나지 않아도,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허겁지겁 떠난 네가 필시 도중에 나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일거야. 자일스 자식도 그걸 노린 거겠지." "사람들은 자일스가 날 죽였다고 생각한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에 엘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거야 오늘 얘기지. 사람들 생각이 왜 바뀌게 된 거냐면 말이야... 놀라지마, 자일스가 리아잔으로 떠나기 직전 아시리움 성전측에, 세렌국 왕자는 아르벨라 황녀를 겁탈하려 한 적이 없다는 고백을 했대. 정말 이상한 일이지?"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도무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자일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건 절대 아닐 테고 말이다. "자일스 그 놈, 완전한 미치광이가 틀림없어." "리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야?" 엘이 누가 들을까 무서운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리오의 얼굴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는 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상으로 다가와 나무상자에 주저 앉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됐어. 자일스도 떠났고, 네 무고도 밝혀졌으니.... 아시리움에서 지금 네 행방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 "그래? 그럼 아시리움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구나! 몸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엘은 기쁨과 안도감에 환하게 미소지었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는 시선이 마주친 엘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아시리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입술을 꾹 다물고 엘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던 리오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무슨 이유로 남자행세까지 하며 아시리움에 온 건지는 몰라도... 난 네가 더 이상은 그 런 거.... 하지 않으면 좋겠어." "꼭 해야 될 일이 있어."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며 엘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거겠지! 하지만 만약 네 정체가 밝혀지면 어쩌려고? 그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어?" 격앙된 어조로 소리치던 리오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애써 진정시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상상도 안되고 하고 싶지도 않아. 넌 절대 아시리움으로 돌아가면 안 돼. 성전측에서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리고 그 순간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널 잡으려고 할 거야.... 도망가.... 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가....엘."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엘은 리오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생각을 하며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젠장! 너 기어코 돌아갈 생각인 거지? 자일스만 미쳤는지 알았더니 너도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나!" 리오가 크게 소리치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모른 척 해줘, 리오. 그냥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나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정말 무섭고 두려워....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날 잡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아,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적도 많아. 하지만... 이미 난 뛰어들었고, 너무 많이 와 버렸어.... 그러니까 견뎌 내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고 두려워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가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잠이나 자. 구엔자 할아범이 모레쯤엔 그럭저럭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그 말이 맞으면 쉴 시간이 하루 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 어서 눈감고 잠이나 자. 난 바람이나 좀 쐬고 와야겠어." 말을 마치고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리오의 등을 보며 엘은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리오.... 정말 고마워...." 리오의 등 근육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뻣뻣한 팔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심란한 걸음을 내딛었다. 엘을 맞이한 아시리움 성전 측은 의외일 정도로 조용했다. 호들갑스러울 거란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소란스러워 지리란 그녀의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처음 성전에 발을 디딘 후,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견습사제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걸을 때만 해도, 엘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어찌나 가슴이 세차게 고동치는지 편히 숨을 쉴 수도 없을 지경이었고, 손바닥엔 축축한 식은땀이 불쾌할 정도로 흠씬 배어있었다. 널찍하고 고풍스럽게 꾸며진 집무실에서 엘을 맞이한 세 명의 고위사제들은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먼저 정중한 태도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큰 오해를 했고, 그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겪게 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그들에게서 쏟아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걱정하고있던 엘은 어색한 목소리로 괜찮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근심과는 달리 사제들은 그녀에게 그 동안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앞으로 다신 이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중요한 일이 있어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불편한 만남을 끝냈다. 그러니까 엘은 곤란한 질문은 단 한가지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아시리움 성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갈 정도로 안도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녀는 아시리움 성전에서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단순한 의문이 의심으로 바뀌게 되리란 것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진행시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물건을 손에 넣기 전에 성전측에 덜미를 잡혀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엘은 굳은 얼굴로 고위사제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뒤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집무실 앞 복도를 정신없이 걸어다니고 있던 리오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됐어?" 그가 숨가쁘게 질문을 던졌다. 오히려 그녀 자신보다도 더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런 대로 잘 됐어."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엘이 씩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리오가 재빨리 그녀에게 발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대로 잘 됐다니? 무슨 대답을 그렇게 성의없이 하냐? 좀 더 자세히, 차근차근 말해봐. 처음부터." 리오는 꽤나 답답한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팔을 두어 번 크게 휘두르기까지 했다. "알았어알았어, 처음부터 자세히 말해 줄게. 먼저 문을 열고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다음, 난 근엄한 얼굴로 앉아 계시는 사제님들을 향해 다가갔어. 한발... 두발... 세발 그리고 네발.... 또 다섯 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이 먹혀 들지 않았을 뿐더러 그를 정말 화나게 했다는 걸 깨달은 엘은 얼른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리오. 생각보다 나도 꽤 긴장하고 있었나 봐. 어떻게 됐든 일이 마무리되니까 그저 좀... 괜히 실없는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변한 게 없다는 걸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나 봐." 엘은 슬쩍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끝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복도를 걸었다. 엘은 물론이고 리오도, 마치 죽은 사람을 맞닥뜨린 것처럼 우뚝 멈춰 서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리오가 입을 연 건 그들이 막 일층으로 이어진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너한테 어떤 벌이 주어지거나 불이익이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글쎄... 벌이 주어질 것 같진 않지만,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겠지. 아시리움 성전의 눈 밖에 난 건 분명하니까." 두 사람의 입술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기... 말이야. 지금까진 네 건강도 안 좋고 해서 물어보기가 좀 꺼려졌는데... 대체 자일스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숲속에서 그런 모습으로 정신을 잃고 있던 걸로 봐선 그 자식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게 분명한데 말이야. 그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린 리오는 엘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하고 찔끔해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말은 꼭 알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궁금해서... 그래서 그래. 하지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응... 말하기 싫어." 엘은 리오를 향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기 때문에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은 그녀가 겪은 악몽에 대해 리오가 모르고 있기를 바랬다. 그가 마음 상해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건 그저 반쪽 짜리 진실일 뿐이었다. 나머지 한쪽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었던 시간을, 공포에 질려 흐느끼며 숲 여기저기를 필사적으로 도망 쳤던 굴욕적인 모습의 단면을, 그에게 숨기고 싶어서일 뿐이었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이런 날은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한숨 늘어지게 자야 제 맛인데!" "그래, 나도 찬성이야. 그럼 편안한 잠자리를 향해 출발해 볼까?" 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바꿔 준 리오에게 고마움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발을 돌렸다. 그들이 막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문과 이어진 복도를 돌았을 때였다. 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자, 리오의 시선도 자연히 그녀의 눈이 향해 있는 곳으로 돌려졌다. "저 자식들이!" 그는 문 옆에 서 있는 자일스 패거리를 발견한 순간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어둠 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생생이 떠오르자 엘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다. 악몽 속의 얼굴들과 도저히 시선을 맞댈 수 없을 것 같았다. 달아나면 안 돼!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면, 난 저들이 내게 심어 준 굴욕적인 모멸감에 무릎을 꿇게 되는 거야! "저 놈들도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는 거지?" 이를 가는 리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엘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저...저기..." "아,알렉스..." 엘이 그들을 막 스쳐 지나가려고 할 때 잔뜩 주눅든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묵묵이 걸음을 옮겼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알렉스를 불러?" 리오가 험악하게 소리치며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요하임의 멱살을 와락 틀어쥐었다. 그리고 이를 부드득 갈며 내뱉듯 말했다. "말해 봐! 어떻게 죽여 줄까? 응? 어서 말해 보라고! 이 인간 같지 않은 개자식들아!" "말이 좀 지나치잖아!" 발끈하고 나선 베르그의 얼굴로 당장 리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엘은,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바닥에 쓰러진 베르그를 향해 달려들려는 리오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안 돼, 리오! 그만 둬!" "왜, 막는 거야? 이거 놔! 아예 저 놈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말겠어!" "바보같이 굴지마! 싸움이 커지면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만 있을 것 같아? 정말 쫓겨나고 싶어서 이래?" 단단히 죄어 있던 리오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자 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알렉스. 입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정말 미안하다." 요하임이 엘의 눈을 바라보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엉거주춤 서 있던 다른 왕자들도 앞다투어 사과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용서해 줘, 알렉스! 하고 싶어 한 게 아니야!" "나도 그래. 난 그저 자일스 전하가 나오라 하기에 그 검술수련장에 나간 것 뿐이야!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어! 정말이야, 알렉스! 믿어 줘!" "난 그 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뒤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 그것도 잘못이긴 하지만.... 미안하다, 알렉스." "나,나도 자일스 전하가 시키는 대로.... 정말 미안해." 엘은 분노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휙 둘러봤다. 알비노를 제외한 다른 자일스 패거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미안하다고? 그런 말 듣고 싶지도 않고 너희들을 용서할 수도 없어!"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럴 염치도 없고....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뿐이야." 요하임이 한 걸음 다가서자 리오가 재빨리 엘 앞을 막아 서며 험악하게 그를 노려봤다. "저...아시리움 성전에다...그러니까...."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누르고 있던 베르그가 발끝으로 바닥을 후벼파며 말끝을 흐렸다. "아시리움 측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엘의 냉랭한 말에 왕자들의 얼굴에 짙은 안도감이 나타났다. 그들과 달리 여전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요하임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알렉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어긋난 건지 모르겠어... 이제 와서 이런 얘길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너와 어쩌면.... 치,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뭐? 친구? 헛소리하지 말고 입이나 닥치시지!" 엘이 말을 하기도 전에 리오가 험악하게 으르렁대며 끼어 들었다. "리오, 금방 뒤따라갈 테니 너부터 먼저 정원에 나가 있어." "싫어! 이 놈들이 너한테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나보고 자릴 피해 달라는 거야? 그럴 순 없어!" 펄쩍 뛰어오르며 매섭게 소리쳤지만, 진지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리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알렉스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날엔, 너희들 뼈 마디 마디를 분질러 죽어버릴 테니 알아서 해! 괜히 해 보는 말 아니니까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문을 나서기 전 도끼눈을 뜨고 왕자들을 차례로 노려보던 그는 그들에게 한마디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오가 바람을 일으키며 문을 와락 밀어 젖히고 밖으로 나가자, 쭈뼛쭈뼛 엘의 눈치를 보던 왕자들이 갖가지 변명을 중얼거리며 하나 둘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그녀는 요아힘만이 남겨졌을 때,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넌 왜 안 가는 거야?" "네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엘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웃음을 완전히 지운 얼굴로 요아힘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가지만 묻겠어. 아...아르벨라 황녀...."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지려던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아르벨라를 말하는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나오자 엘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밤에 자일스가 아르벨라 황녀에 대해 한 말 사실이야?" 엘은 요아힘의 눈을 피하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질문이 의외였는지 요아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나도 다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 서찰을 쓴 사람은 아르벨라 황녀가 맞아." "그래... 그랬군."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알렉스, 아르벨라 황녀가 그런 일을 한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내 생각인데... 인생엔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이나 거미줄같은 게 있는 것 같아. 어찌 생각하면 어리석은 자의 한심한 변명일 지도 모르겠지만...." 자조 어린 말을 끝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요아힘의 등을 보며 엘은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 말처럼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좋은 친구가...." 리오는 다시 한번 엘을 흘긋거렸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이 곳에 모습을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곤하면 눈 좀 붙여." "아니, 괜찮아. 잠을 자기엔 시간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엘이 리오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 새삼스레 그들이 처한 현실을 떠올린 리오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왜 여기.... 아시리움에 들어온 거야?" 리오는 대답하기 힘들 거란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놀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엘의 얼굴에선 어떤 마음의 동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역시 침착하고 담담했다. "어떤 물건을 찾으러 왔어." "물건?" 의외의 말에 놀란 리오가 등을 세우며 급히 되물었다. "그래, 물건. 정확한 생김새도 잘 모르는 어떤 물건." 입술에 쓴웃음을 그린 엘이 잠깐 리오를 바라보다 고개를 바로잡았다. "그 외에 대해선 묻지마. 물어도 말해 줄 수 없으니까." 수십 개의 질문이 연이어 떠올랐으나 리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엘을 바라보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녀도 리오를 따라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뭐가?" 엘이 눈을 감은 채 짧게 물었다. "네가...여,여자라는 거 말이야. 아무리 마음 속으로 되뇌어도 실감이 안나. 그 주책 맞은 할아범이 날 놀리려고, 그저 장난으로 해본 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 여자라는 증거 어쩌고 하는 말만 들었지, 사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리오는 그야말로 펄쩍 뛰어올랐다. "아,아니 확인하고 싶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정도로 실감이 안 난다는 그런 말이야." 벌겋게 달아오른 리오의 얼굴엔 송골송골 땀까지 맺혀 있었다. 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자 더욱 당황하게 된 그가 허겁지겁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말을 못 믿는 것도 이해가 가는데... 내 솔직히 말할게. 사실 그 할아범이 네가 여자라는 증거를 보라느니, 확인하라느니 하는.... 으음.... 터무니없고 짜증나는 말을 했을 때, 난 버럭 화를 내며 매섭게 호통을 쳤어. 그러니까 새파랗게 질린 할아범이 울먹이며 잘못을...." 열심히 떠들어대던 리오는 이상한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꼬대를 중얼거리고 있는 엘을 맥없이 바라보다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헛소리란 건 너도 알겠지. 하지만....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말을 할 순 없지만 이거 하나 만은 진심이야. 네가 남자가 아니라서.... 여자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거... 정말 기쁘다는 거..."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리던 엘이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씩 웃음을 짓자,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의 입술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그 얼굴 그대로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축 늘어진 엘의 손을 잡았다. ------------------------------------------------------------------- "알렉스, 정말 반갑다!" 문으로 들어서던 리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엘 쪽으로 다가오려다 그녀를 둘러싼 공주들을 보고 주춤거리다 슬쩍 방향을 바꿨다. 그와 함께 들어온 리오는 얼굴을 찌푸리고 공주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더니 어슬렁거리며 리반의 뒤를 따랐다. "그 동안 오해한 거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어떻게 그런 끔찍한 오해를 할 수 있었는지... 정말 미안해요, 알렉스." "저도 사과드려요. 다 자일스 전하의 계략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저 역시 그 동안 알렉스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어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사과의 말에 엘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심 어린 얼굴들 앞에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자일스 황태자전하께 가장 큰 책임이 있겠지만 아르벨라 황녀님의 행동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글쎄 말이에요. 알렉스도 아르벨라 황녀가 또 다시 알렉스를 모함한 거 알고 있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죄송합니다, 좀 피곤해서...." 엘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한 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공주들이 알만하다는 눈짓을 주고 받으며 자리를 피했다. 사실 아르벨라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왕자들은 거의 없었으니, 그들의 오해도 당연한 거였다. 솔직하게 사과를 건넨 공주들과는 달리 불편한 얼굴로 엘을 흘긋거리던 왕자들이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그 중 한 명이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재빨리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걸 본 리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다른 왕자가 하필이면 그녀의 상처부위를 정확하게 건드렸다. "이제 그만해!" 몸을 움츠리고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엘은, 리오가 지른 고함에 놀라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엘 옆에 멈춰 선 그가 어깨를 쫙 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론 알렉스 대신 날 쳐! 내 말을 무시하고 알렉스를 건드리는 녀석은 내 손에 의해 잔인한 죽음을 맞게 될 테니 명심해!" 왕자들은 엄숙한 결의로 꽉찬 그의 외침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술을 피식거리며 '또 시작이야' 하는 눈으로 리오를 바라봤다. 그들 중 한 명이 엘에게 다가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알렉스, 나와 검술 대련해보지 않을래? 지난번부터 한번 꼭 해보고 싶었는데..." "안 돼!" 왕자의 말을 끊으며 리오가 그를 확 밀쳤다. "왜 이러는 거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 왕자가 발끈해 소리치자 리오가 그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데지르트! 너와 꼭 대련을 해보고 싶어! 지금 당장 검술수련장으로 가자!" "리오, 너와는 많이 해 봤잖아! 그리고 내 이름은 데자르트야!" "이름이 뭐면 어때? 중요한 건 내가 너와 대련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는 거야." 말을 끝낸 리오가 데자르트를 문 쪽으로 힘차게 잡아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급히 다시 돌아와야 했다. 멀뚱히 서 있던 다른 왕자 한 명이 엘에게 다가와 입을 연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나도 너와 검술을 겨뤄 보고 싶었어, 알렉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유리겐!" 한달음에 달려온 리오가 목을 휘어 감자, 그의 입에서 숨막히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난 유리겐이 아니라 유르젠이야!" 안간힘을 써서 리오의 팔에서 겨우 빠져 나온 유르젠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 "나한테는 중요해!" "아니야! 진짜 중요한건 내가 지금 너와 검술 대련을 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는 거야! 자, 이리 와!" 데자르트와 유르젠을 각각 양쪽 팔에 끼운 리오가 태풍처럼 맹렬한 기세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 후 잠깐동안 시간이 정지된 듯 꼼짝 않던 왕자 와 공주들이 일제히 일어나 앞다투어 문을 나섰다. 그들 모두가 검술대련에 특별히 흥미를 가진 건 아닐 테니, 리오가 또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하나 구경하러 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리오 녀석!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리반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두 사람을 빼고 어느새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대충 핑계를 대서 거절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리반이 맞장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술수련장에 가려는 거면 같이 가!" 뒤따라 일어나는 엘에게 리반이 홱 고개를 돌리더니 강경하게 소리쳤다. "너도 간다고? 제발 참아, 알렉스. 아예 리오를 죽일 생각이야? 네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검술 수련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마. 다친 걸 왜 숨겨야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앞으로 주의 좀 기울여야 할거야. 내 말 알아들었지? 절대 검술수련장에 오면 안 된다!" 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리오는 괜찮겠지?"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엘의 얼굴을 보며 리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신경 써? 보기엔 대책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리오, 그렇게 생각없는 녀석 아니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이번 일도 벌인 거고. 그러니 마음 편하게 생각해. 솔직히 말해 누가 리오를 막을 수 있겠어?" 엘도 리반의 말엔 동감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괜히 리오가 힘들게 되었다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알렉스." 리반이 이미 밖으로 나간 줄 알고 있던 엘은 놀라 고개를 들고, 문 가에 서 있는 그에게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힘든 얘기를 꺼내려는 듯 머뭇거리던 리반이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에 밖에 나갔을 때 말이야. 그 때 리오가 무슨.... 이상한 말이나 행동 안 해?" "이상한 말이나 행동?" 엘은 빠르게 되물었다. 리오가 그녀에 대해서 리반에게 무슨 말을 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입안이 말라 왔다. "아,아니 별 건 아니고.... 리반이 너한테 이렇게 신경 쓰는 건.... 그저 친구로서 걱정이 되서 그런 다는... 그런 말이야. 그러니까 너와 리오는 정말 사이 좋은 친구라는 말이지. 친구들은 원래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고, 걱정해 주는 그런 사이잖아. 그런 게 진짜 친구고." 리반이 유난히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평소와 달리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리반을 보며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새삼스럽게 왜 친구에 대한 말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불편해 하는 리반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리반." 리반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사히 돌아온 거 진심으로 환영한다!" 툭 던지듯 소리친 리반이 엘을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엘은 문에서 시선을 떼며 끊임없이 욱신거리는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약초를 붙여 봉곳한 상처 부위에서 뜨거운 열이 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구엔자가 준 약초는, 만약을 대비해 문에 의자를 받쳐 놓은 상태로 그녀가 직접 붙였다. 상처에 약초가 닿으면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다시 욱신거려 왔다. 그녀에게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자신의 어깨였다. 이 어깨를 가지고 수색활동을 벌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엘은 어깨를 보호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여 몸을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피곤한 숨을 길게 토해냈다. -------------------------------------------------------------------텅 빈 복도를 보니 더욱 기분이 울적해졌다. 엘은 자꾸만 검술수련장으로 향하려 하는 다리를 억지로 반대쪽으로 돌렸다. 모든 게 순조롭게 해결됐는데... 비록 이유는 모르지만 자일스도 아시리움을 떠났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던 난 당당하게 복도를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또.... 겁탈사건의 누명도 깨끗이 벗겨졌고... 그런데 아르벨라는 왜 리아잔으로 돌아간 걸까? 자일스가 시켜서 그런 건가? .....아르벨라는 왜 그런 일을 한 걸까? 애써 기분을 풀어 보려 한 시도가 오히려 더욱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엘은 연이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복도를 걸었다. 검술 수련장으로 가는 길과 반대 방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걷고 있는 복도는, 대사제들과 고위사제들의 개인집무실과 개인응접실, 또 개인기도실이 모여 있어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었다. 일정하게 복도를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오히려 복도를 가득 채운 정적을 한층 무겁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줄지어 늘어선 문들에서는 중압감까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바보같은 짓 그만두고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엘이 막 방향을 돌 리려는 찰나였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의 문이 열리며 세 사람이 복도로 나왔다. 그 세 사람중의 한 명이 루드비히란 걸 발견한 순간, 엘의 눈이 커다래지며 얼굴 가득 반가움이 나타났다. "루드비히!" 엘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치며 복도를 뛰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 "정말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이게 얼마만 인지! 루드비히를 보는 거, 연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 데... 그렇죠?" 흥분에 찬 숨가쁜 말이 끝나자, 묘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런 곳에서 루드비히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 동안 엄청 바빴나 보군요! 새로 맡은 일 때문인가 보죠? 아무튼 정말 반갑습니다, 루드비히!"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던 엘은,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를 따라, 루드비히 옆에 서 있는 다른 두 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술을 딱 벌렸다. 말을 해 보기는커녕 제대로 시선도 맞출 수 없었던 대사제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명씩이나! 사실 두 명의 대사제들은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악에 차, 당장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극도로 당황한 그녀에게 그들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대사제님! 아,이쪽 대사제님도 정말 반갑습니다!" 엘은 어쩔 줄 몰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연달아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입술을 다물기도 전에 자신이 예의에 전혀 맞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인사를 했다는 걸 깨닫게 되자, 금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진땀이 솟기 시작했다. 그 즉시 그녀는 허겁지겁 허리를 굽혔다. "저.... 세렌국의 알렉시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엘의 말을 끊은 루드비히가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성큼성큼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저.... 만나 봬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엘은 고개를 돌려,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사제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말이 끝날 때까지도 그들이 고개를 올리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전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 머리를 드십시오!" 대사제들이 핏기가 가신 얼굴을 부스스 들자, 엘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지 않는 루드비히에게 이끌려 계속 종종걸음을 치며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드비히, 대체 그 동안 뭐 하느라 얼굴도 한번 안보여준 거예요? 잘생긴 얼굴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엘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쿵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에르난드 대사제! 정신 차리시오! 에르난드 대사제!" 놀란 엘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대사제 한 명이 복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고, 다른 대사제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사제님이!" 엘이 그 쪽으로 뛰어가려고 하자, 루드비히가 잡고 있던 손목에 지긋이 힘을 가했다.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도와줄 사람들이 올 겁니다." "하,하지만...." 걱정이 된 그녀가 다시 뒤로 시선을 돌렸을 때, 사제들과 시종들 대여섯 명이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슬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 사람에겐 누구나 휴식이 필요한 건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슬쩍 호기심을 드러낸 루드비히를 향해 엘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도 사제님이니까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아시리움의 사제님들은 매일 일만할 뿐, 하루도 쉬지 못한다는 거 말입니다. 전 사제님들이 그렇게 지독한 혹사를 당하시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 친구 리오가 말해줘서 알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안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법황 성하께서 좀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휴식도 없이 일만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저 대사제님도 저렇게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걸 겁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인데..." 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루드비히를 올려다봤다. 그는 해석이 불가능한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드비히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 데... 골치 아픈 만사를 다 잊은 채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며, 책도 읽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며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거나, 아니면 성전을 벗어나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며 신나게 놀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십시오." 잠시 입을 다문 엘은 짓궂은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법황 성하께 고자질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루드비히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만 말고 솔직히 털어놓아 보십시오! 사실 루드비히도 아시리움 성전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죠?" 문득 걸음을 멈춘 루드비히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떨떠름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엘에게,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아준 다음, 두 손으로 밀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풍요로운 흙냄새와 톡 쏘는 듯한 나무향기가 맡아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정원과 연결되는 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바쁘십니까?" 루드비히가 부드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밖에서 쏟아지는 역광으로 인해 루드비히의 몸 자체에서 빛이 나오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엘은 손으로 빛을 가리고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리 오십시오." 말을 마친 루드비히가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엘이 다가가자 몸을 살짝 비켜 그녀 먼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원을 거닐었다. 자신과 루드비히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와 닿자, 엘은 그가 새삼 가깝게 느껴졌다. 루드비히를 만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생생히 살아 숨쉬는 자연의 싱그러움 때문인지, 그녀의 기분은 한결 풀어져 있었다.천천히 걸어 숲처럼 짙은 녹음이 우거져 있는 정원 깊숙이 들어서자,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며 두 사람에게 가벼운 빛을 드리웠다. "몸은 어떠십니까?" 루드비히가 조용한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혹시 그가 어깨 상처를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엘의 머리를 스쳐 갔다.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다는 얘길 들은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맞췄다. "몸은 괜찮습니다." 엘은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독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던 끔찍한 시간을 생각하면, 이까짓 어깨의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목숨을 구해준 노인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앞으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라며 묵묵이 다리를 움직였다. "자신의 몸을 좀 더 소중히 하십시오." 불쑥 나온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깊고 단호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넓게 펼쳐진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고통을 알아야 삶 속에 감춰진 기적의 파편을 찾을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자기 몫의 행복과 영혼의 평화로움도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씨앗이 생명을 얻기 위해 부서져야만 하듯, 고통과 삶과 안식의 길은 태초에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말을 멈춘 루드비히가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한 말인지 아십니까?" 엘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제이며 유명한 철학자이기도 했던 오르테 카릴 하비스만이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 남긴 말입니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을까요? 단언하는데 영혼의 평화로움을 느끼기는커녕 신을 저주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겁니다." 무척이나 냉소적인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엘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자신을 소중히 하십시오. 당장 눈앞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길 위에서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는 순간 죽음보다 싸늘한 공허가 찾아옵니다. 삶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고 그 표면을 삶 전체로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인간의 가장 큰 오류입니다." 엘은 마음 속으로 진지하게 그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루드비히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마음 속에 단단히 새겨 두면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루드비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그윽하게 느껴졌다.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시리움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한동안이라고요? 그게 대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엘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짧게 잡아도 100일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100일 후면 교육이 모두 끝나 이미 아시리움 성전을 떠나 있을 때였다. 물건을 찾든 못 찾든 그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었다.루드비히를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란 생각이 들자, 안타까움과 섭섭함,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심란함, 그리고 왠지 모를 슬픔까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럼... 이제 루드비히를 못 보겠군요." 엘의 입술에서 너무 낮아 거의 쉰 것 같이 들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루드비히의 입술에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그는 엘의 눈에 시선을 맞춘 채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엘은 놀라움에 멈칫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손가락에 살짝 힘을 가해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루드비히의 입술이 부드러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손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의 신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할겁니다." 나지막이 속삭인 다음 루드비히는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가 천천히 놓아주며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루드비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 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루드비히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비비고 있었다. 살갗이 따끔거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은, 그 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제 24장. 열쇠------------------------------------------------------------------- "뭐, 늑대?" 놀라 소리치는 엘에게 리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늑대가 틀림없어. 보통 늑대에 비해서 몸집이 상당히 크고, 온통 새카만 색의 늑대였어. 그 늑대가 네 바로 옆에서 날 노려보고 있는데...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튼, 사람이 너무 놀라면 뒷골이 쭈뼛 곤두서고, 머리가 하얗게 질린다는 게 사실이란 걸 처음 깨달았다니까." 그 때 일이 떠오르는지 리오는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엘은 몸을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시선은 초점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닐 뿐이었다. 늑대... 온통 새카만 색의 늑대... 그 때 내가 본 게, 내 옆에 있어 주었던 게 그 늑대였을까?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눈동자와 그녀가 느꼈던 짙은 안도감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그 늑대는 왜 날 지켜 준 걸까? 정신을 잃은 나와 어떤 교감이 이루어진 건 아닐 텐데... 그래,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가 봐야겠어." "가다니, 어딜?" 엘의 낮은 중얼거림을 들은 리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숲 말이야. 그 숲에 한번 가 봐야겠다고." "잠깐, 같이 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르던 엘은, 리오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다가오는 그를 멀뚱히 바라봤다. "너 조금 있으면 검술교육 받으러 가야하는 게 아니었어?" "검술교육이 대수야? 빠지면 그만이지."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말한 리오가, 탁자 위에 풀어놓았던 검집을 부산하게 챙겨 들었다. "늑대를 맞닥뜨릴 수도 있는데, 맨손으로 갈 수야 없지." 혼잣말을 하며 몸을 바로잡던 그는, 진지하게 반짝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발견하고 문득 동작을 멈췄다. "왜 그래?" 리오의 짧은 질문에 엘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럴 필요까진 없어, 리오."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일은 팽개치다시피 하고... 너무 나한테만 그렇게 신경 쓸 필요없다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리오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너 같으면, 내가 숲으로 늑대를 만나러 간다는데 의리없이 혼자가게 두겠어?" "아니, 내 말은 꼭 이번 일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매번 그랬잖아. 난 자꾸 문제만 일으키고, 넌 네 일은 생각지도 않고 날 도우려고 애쓰고... 정말 고맙긴 한데, 너무 그렇게 나한테 신경 쓰면 괜히 너만..." "그래서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리오가 그답지 않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엘의 말을 잘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엘은 자신이 리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둡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서, 자신의 말에 그가 상처 입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부담 간다는 말이야! 네가 너무 나만 졸졸 따라다니니까, 사람들이 실제 쌍둥이는 나하고 너 아니냐는 말까지 하더라!" 엘은 짐짓 매섭게 리오를 노려보며 소리를 높였다. "실없는 녀석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지네들 일이나 잘하라 그래! 왜 남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뒷소리를 하는 거야?" "자자, 이제 그만하고 빨리 움직이자, 내 사랑스런 쌍둥이 아우야!" 그녀는 퉁명스럽게 소리치는 리오의 팔을 잡아끌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래, 이 오라버니가 귀엽게 봐줄 테니 마음놓고 재미있게 놀아라, 건방진 아우야!" 투덜거리는 말투였지만 엘은 그의 기분이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오를 향해 씩 웃어 보인 그녀가 벌컥 문을 열어 젖히자, 막 문에 손을 대려던 시에나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어, 시에나! 많이 놀란 것 같은 데, 괜찮은 거야?" "아,아니... 안에 계시는 줄 모르고... 함부로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시에나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방에 있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마, 시에나. 그건 그렇고 이번에 네가 날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리오한테 말 들었어. 정말 고맙다." 엘이 말을 끝내며 시에나의 어깨를 툭 치자, 그녀의 얼굴이 일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 빙그레 웃어 보인 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리오는 동정 어린 눈으로 시에나를 흘끗 바라본 다음 그 뒤를 따라갔다. "남의 일 같지가 않군." "뭐가?" 엘은 한숨 섞인 말을 중얼거리는 리오에게 의아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시에나말이야." "시에나? 시에나가 뭐?" "있다, 그런 게!" 툭 던지듯 말한 리오가 속도를 높여 엘을 스쳐 지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둔한 녀석."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엘이, 그들을 따라오는 누군가의 낌새를 알아챈 것은, 두 사람이 막 남관 현관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나 참!" 엘이 나직하게 혀를 차대자 리오가 이상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왜 그래?" "잠깐 기다려 봐, 리오. 숨어 있는 쥐새끼 한 마리 잡아 올 테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엘은 몸을 흭 돌려 둥근 기둥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자 기둥 뒤에서 급하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알비노가 불쑥 튀어나와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잘난 체 하지마, 알렉스! 이 재수없는 놈!" 웬만큼 안전한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했는지, 저 만치 멈춰 선 알비노가 크게 소리쳤다. "자일스 전하가 안 계시다고 아주 살판나는 모양이로구나! 언제까지 네가 그렇게 희희낙락할 줄 아느냐? 머지 않아 자일스 전하께서 네 놈은 물론 세렌국까지 모조리 뭉개 놓으실 거다! 그 때 네 놈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내가 똑똑히 지켜봐 주마!" "아니, 저 자식이!" 주먹을 움켜 쥔 리오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빨간머리 반쪽 놈! 네 놈도 얼마 못 가 눈에서 피눈물이 펑펑 쏟아질걸? 자일스 전하께서 분명히 네 놈도 잊지 않고 손 봐 주실 테니까!" "내 저 자식을 당장!" 엘은, 이를 갈며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리오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리오, 저 정신 나간 녀석은 혼자 놀라고 그러고, 우린 우리 할 일이나 하자.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우리가 먼저 제풀에 나가 떨어지고 말 거야." 리오는 그녀가 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해서 폭언을 퍼붓고 있는 알비노에게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대체 저 놈은 언제나 철이 들까?" "글쎄... 지금 같아서는 백발 할아버지가 돼도 똑같을 것 같지만... 설마 그렇진 않겠지." 그녀는 말을 끝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진 않긴 뭘 그렇진 않아? 아마 저 놈은 죽을 때까지 저렇게 앞뒤 분간 못하고 방방 뛰어다닐걸? 그러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겠지, 한심한 자식." 엘은 건물 모퉁이를 돌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끈질기게 고함을 질러 대던 알비노는, 그들이 상대를 안 해줘서 그런지 아니면 목이 아파서 포기했는지 어느새 가 버려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내내 밝은 표정이던 리오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변한 건, 제 2검술 수련장이 막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이제 생각났는데... 너 괜찮겠어?"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푸른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반짝였다. "당연하지! 천하의 엘님이 겨우 이까짓 일에 벌벌 떨 줄 알아?" 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피식 웃으며, 리오가 평소 잘 쓰는 말을 장난스럽게 사용해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리오가 얼굴을 과장되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많이 컸구나, 짜식! 기특한 녀석!" 리오가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엘은 부드러운 눈으로 새삼스레 리오를 바라봤다. 그 자신보다도 그녀를 먼저 생각해주는 리오에게 엘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고마움이었지만, 받기만 할뿐 그에게 줄 것이 없다는 슬픔 섞인 미안함도, 리오를 대할 때면 항상 같이 떠오르곤 했다. 내 힘으로 리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을까? 리오는 부족한 것 없이 다 갖고 있는데... 혹시 되도록 빨리 떠나 주는 게 리오를 위하는 건 아닐까? 순간 숨 쉬기가 힘들만큼 가슴이 조여 들었다. 엘은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들어 맑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잔잔히 걸린 하늘은 물처럼 엷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부드러운 수증기의 장막으로 싸인 듯한 푸른빛이 이상하게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꼭 이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리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발 밑을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기던 리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꼭 여길 들어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좋은 일이 있던 곳도 아니잖아." 어느새 그들 앞에 다가온 숲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엘은 숲에 발을 디딘다는 것에 대해, 자신보다 리오가 더 꺼림칙해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녀도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늑대에 대한 궁금증이 그보다 컸을 뿐이었다. "그러면 넌 여기 있어. 숲엔 나 혼자 갔다 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리오가 잔뜩 찌푸린 얼굴을 그녀에게 돌리자, 엘은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히 해 보는 말 아니야." "쓸데 없는 말하지 말고 빨리 걷기나 해. 너 혼자 보내고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며 기다리느니,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하니까. 나도 괜히 해 보는 말 아니야." 퉁명스럽게 말한 리오가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복잡한 마음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 때 내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 나? 찾을 수 있겠어?" "글쎄, 워낙 정신이 없어서... 직접 보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데...." 생각에 잠긴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대던 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몇 번이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더니, 엘의 눈에는 전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래, 이 위로 올라갔던 거 같아." 엘은 속도가 빨라진 리오를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커다란 나무에 손을 짚은 채 잠깐 멈춰 선 다음, 비스듬하게 보이는 덤불로 곧장 방향을 잡았다. "바로 여기야." 리오가 자신있는 어조로 소리쳤다.엘은 그 즉시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여기저기 풀이 짓뭉개져 있는 것 빼고는 숲의 다른 부분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늑대의 모습은커녕 작은 생쥐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늑대가 이 곳에 머물러 있으리라는 허황된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슬그머니 실망감이 생기자, 그녀는 자신이 막연하게나마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쓰러져 있던 곳이 바로 이 부분이고, 늑대는 네 바로 옆에 서 있었어." 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리오가 가리키는 곳을 보진 않았다. 그녀의 눈은 저 만치 돌출된 나무 뿌리에 반정도 몸을 숨기고 있는 작은 동물에게 쏠려 있었다. 귀가 뾰족하고 눈이 커다란, 귀엽게 생긴 동물은 갈색 빛이 살짝 감도는 노란 털이 복슬복슬 나있었다. "됐지? 이제 여기서 나가자." "리오, 저기 좀 봐봐." 숨죽인 속삭임에 리오가 눈을 크게 뜨고 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저게 뭐야?" 늑대라도 발견할 줄 알았는지 리오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너도 몰라? 넌 네가 알 줄 알았는데." "저렇게 웃기게 생긴 놈은 처음 봐. 원래 동물같은 데 관심도 없고. 리반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리오는 두 번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시선을 돌렸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자세로 작은 동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귀를 쫑긋거리던 작은 동물이,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보고 흠칫해 경계심을 내보이며 도망치려던 동물이, 다음 순간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너 걸음 떨어진 부분에 이르자 조르르 달려와, 내밀고 있는 그녀의 손에 몸을 기댔다. "그만 가자니까. 어?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작은 동물을 발견한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굽혔다. 놀란 동물이 움찔하더니 재빨리 덤불 속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다. "이상한 녀석이네. 내가 잡아먹는다냐? 누구한텐 착 달라붙어 있더니만, 내가 말 한마디 하니까 바로 도망이나 치고." 엘은 리오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놀리듯 실실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갑자기 붉은 머리를 들이미니까 그렇지. 녀석도 눈이 있는데, 그럼 도망치고 싶지 않겠어? 아마 자기 몸에 불이 붙는 줄 알았을걸?" "어허, 그래. 조금만 더 붉어지면, 아예 이 숲 전체에 불을 붙일 수도 있겠다." 리오가 얼굴을 찡그리며 퉁명스런 어조로 응수했다. 엘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좀 더 찾아 볼 생각이야?" "아니, 보나마나 시간낭비일 거야. 늑대가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넓은 숲에서 늑대 한 마리를 어떻게 찾겠어? 무작정 와 본 내가 바보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발을 맞춰 숲 바깥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묵묵이 다리를 움직이던 리오가 엘에게 질문을 던진 건 그들이 막 숲을 벗어났을 때였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한 거야? 그렇게 겁이 많은 녀석이 어떻게 네 손에 몸을 비비기까지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먹이가 있던 것도 아니고." 엘은 조금 망설이다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저 동물들하고 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 어렸을 때도 가끔 숲속에서 작은 야생 동물하고 놀았던 것 같은 데.... 요새 들어 희미하게 그런 기억이 떠올라." 말을 멈춘 그녀는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이유로, 또 언제부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어." "좀 전의 그 털북숭이처럼 너도 정말 이상한 녀석이야." 리오가 들릴 듯 말듯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끝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네 말엔 동의할 수 없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골치 아프게 따져 봐야 내 입만 아플 테니까." 엘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씩 웃으며 밝게 소리쳤다. "리오, 우리 소풍가자! 시에나한테 맛있는 음식 잔뜩 싸 달라고 하는 거야! 그런 다음 리반도 부르고, 가고 싶어하는 다른 애들도 끼워 주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하! 소인은 그저 전하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리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사실 네 방에 있을 때부터 음식 생각이 간절했거든. 요샌 식당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배가 고파진단 말이야." 엘은 소리내어 웃으며 리오의 따뜻한 손을 맞잡았다. "그 아이를 직접 제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 데... 지금은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대공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며, 부드러운 눈길로 리자드를 바라보는 사람은 대예언자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이었다. 칼 베리만으로 불리는 그는 리아잔 제국의 재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칼 베리만은 몇 년 전부터 실질적인 업무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그러니까 현재는 형식적으로 명패만 달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가 국정에서 깨끗이 손을 떼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는 리아잔 제국에선, 이런 상태로라도 그를 붙잡고 있길 원했다. 리아잔 제국으로선 대다수 평민들은 물론 귀족들에게까지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황제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그럴듯한 바람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칼 베리만은 리아잔 제국의 재상이라는 직위보다 예언자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예언은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지변에서 개인의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닥칠 재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록 2~3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칼 베리만이 예언을 하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간혹 나오는 그의 예언은 소름 끼칠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리아잔 제국의 북부를 휩쓴 괴질(怪疾)의 희생자 수까지 정확하게 예언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예언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어느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확고 부동했고, 그로 인해 나라와 신분을 초월한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칼 베리만은 지금 자신의 저택에 있는 은밀한 내실에서 리자드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리아잔 제국의 재상인 그가 바르테즈 공국의 군주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괴이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이어져 온 두 사람의 관계는,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 리자드의 출생까지 거슬러 올라갔다.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부친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리자드의 친부와 막역한 친구 사이기도 했다. "저 역시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리진 못하겠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자드가 조용히 말했다. "어떤 아이인지 정말 궁금하군요. 어렴풋이 떠올리려 해도, 아는 것이 전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고 말입니다. 지난번에 기회가 있을 때, 만나 봤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 때 리아잔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기다니... 대공, 대체 어떤 아이입니까? 이렇게 라도 주책 맞은 늙은이의 호기심을 채우려 하니, 거절하지 말고 어서 말씀 좀 해주십시오." 칼 베리만은 몸을 내밀고 갈색 눈을 빛내며 리자드를 재촉했지만, 그의 입술을 쉽게 열리지 않았다. 리자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길게 늘이던 리자드가 슬쩍 장난기를 담아 말을 끝냈다. 그러자 칼 베리만이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기신 것 같군요, 대공. 보기 좋습니다." 리자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사려 깊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칼 베리만이 일부러 가벼운 어조를 사용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대공의 말씀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제가 먼저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겠군요. 그게 제 호기심을 빨리 충족시킬 방안이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럼 먼저, 가장 말씀하시기 편한 것부터 묻겠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뭐, 저도 기본적으로 머리 색과 눈동자색깔 정도는 알지만, 제가 원하는 건 좀 더 자세한 묘사라는 걸 대공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그에 알맞게 고집세고 발끈하기 잘하고,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섭니다. 또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에 따른 어처구니없는 책임감에 차있습니다." 리자드가 별거 아니라는 듯 조금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참, 간단히 제 기대를 무너뜨리시는군요. 자세한 묘사를 바라는 제게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졌다는 말씀만 하시다니.... 그건 그렇고, 고집세고 감정이 앞서며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찬 철없는 어린아이라.... 그렇게 평범한 아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칼 베리만은 은근히 실망감을 드러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막 찻잔을 내려놓으려 할 때 생각지 못했던 리자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평범하지 않습니다. 아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닌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칼 베리만도 아시다시피,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를 가까이서 대한 건 이번이 처음있는 일입니다.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데, 이거다 라고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어린아이같이, 커다랗게 뜬 보라색 눈동자에 생각하는 모든 것이 비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다 자란 숙녀처럼 신비스러운 비밀스러움이 그 자릴 채우기도 합니다." 리자드는 칼 베리만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하듯,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청회색 눈동자와 단정한 얼굴에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느껴지자, 칼 베리만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리자드를 바라봤다.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일단 마음을 정하면 자신의 몸이 다치든 말든 맹렬히 부딪칩니다. 무모할 정도로 말입니다. 또 겉모습만이라도 강하게 보이고 싶은지, 가끔 호기를 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저를 노려보며 대드는 모습이 꽤 귀엽습니다. 만약 그 모습을 칼 베리만이 보셨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을 겁니다." 리자드의 입술에 부드러움을 담은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굉장히 여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마음 상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물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를 애써 감추려 하는데.... 그럴 때는 정말 이상한 느낌이...." 갑자기 리자드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기대고 있던 등을 곧추세우고 얼굴에 나타난 감정을 딱딱한 표정 속에 감췄다. 그러자 걱정스러움이 깃든 온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칼 베리만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대공의 말씀을 들으니 궁금증이 가라앉기는커녕 한층 부풀어올랐지만 말입니다." 가벼운 농담조의 말에도 리자드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칼 베리만은, 항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완벽할 정도로 철저하고 강인하지만 그 만큼 외로울 수 밖에 없는 리자드에게, 그 정도 마음은 품고 있어도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차지해 버린 소녀에 대해 말하며, 미소짓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칼 베리만은 아무 말없이 리자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말을 하면 리자드는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더욱 차갑고 단단한 껍질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법황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없습니까?"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닫아 버린 리자드가, 평소처럼 조금은 딱딱하고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예, 별다른 건 없습니다. 대공도 아시다시피,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같은 인물이라 그를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고... 또 그들조차 법황이라면 벌벌 떨면서 입을 조개처럼 다물어 버리니....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말을 마치고,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다시 채우려던 칼 베리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법황이 요새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거였는데.... 워낙 비밀스럽게 말하는 통에 제대로 들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가볍게 응수하는 리자드의 입술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정말 법황이 이상해졌단 말씀입니까?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 정도면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 데... 제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군요." "가장 대표적인 걸 들자면 정화의식을 금지시킨 걸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동안 다른 나라는 물론, 아시리움 종단측에서도 중지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철저히 무시하고 넘기던 정화의식을 하루 아침에 없애 버렸습니다. 그것 하나만 놓고 봐도 그런 소문이 충분히 퍼질 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일의 원인은 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 법황을 움직인 겁니까?" 칼 베리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건에 대해선 섣불리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그 원인이 믿기지 않을 만큼 흥미롭다는 것입니다." 말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리자드의 목소리는 냉랭했고, 그의 청회색 눈동자 역시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칼 베리만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아하지만 절도가 느껴지는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칼 베리만은 서둘러 일어나, 이미 방을 반 정도 가로지르고 있는 리자드를 뒤따랐다. 리자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아몬이 책장을 덮고 서둘러 일어났다. "말씀이 다 끝난 것도 모르고 책만 보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리자드님." "그 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가져가게, 아몬. 나야 어차피 다 읽은 책이니까." 아몬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지자 칼 베리만의 입술에 인자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은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으며 간단한 인사말을 나눴다. 곧 이어 리자드와 아몬의 주위에 엷은 회색 안개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칼 베리만은 가만히 서서 리자드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목까지 차 올랐던 말을 그제야 입 밖으로 꺼냈다. "그 소녀가 대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과연 대공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을 지 걱정이 됩니다. 저로선 그걸 은근히 바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드는군요.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그 소녀인지.... 그 소녀가 맞길 바라야 되는 겁니까, 대공? 아니면 틀리길 바라야 되는 겁니까?" 엘은 눈앞의 나무를 바라보며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조심스런 동작이었는데도 근육이 당기며 뻐근한 둔통이 느껴졌다. 과연 이런 어깨로 온몸의 체중을 싣고 나무를 탈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루나 이틀정도 더 여유를 갖고, 상처가 낫길 기다리는 것이 현명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한숨을 내쉬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물들인 부드럽고 온화한 푸른빛이, 높고 연하게 드문드문 퍼져 있는 구름으로 인해 한층 강조되어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태양이 높이 솟아 있을 때의 수색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용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외따로 떨어진 곳이라 해도 환한 대낮에 서관을 침입하는 건,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을 걸어, 기억 속에 생생이 살아 있는 붉은 방을 찾아 나서는 일은,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도저히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겁쟁이... 리자드 말처럼 난 겁쟁이일 뿐이야. 겉으로만 아닌 척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엘은 몸을 바로잡고 왼팔만 이용해서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오른팔에 실어야 하는 체중은 대신 두 다리 쪽으로 분산시켰다. 팔 하나를 못쓴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일인 줄 전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나뭇가지를 움켜 쥔 왼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나뭇가지를 놓칠 것 같자, 엘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다른 쪽 가지를 잡아챘다. 그 순간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들며,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이를 악물어 비명을 삼키고, 3층 창문에 닿아 있는 굵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했다. 땀이 흘러내리는 등에 찰싹 달라붙은 옷자락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엘은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른 다음, 창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서늘한 공기가, 후끈 달아오른 땀이 밴 살갗에 기분 좋게 와 닿았다. 그녀는 이렇게 나무를 타고 서관에 침입하는 일이 이번이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라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울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재빨리 걸음을 옮겨, 서재 문을 열고 조용한 복도 좌우를 살핀 후 일층으로 내려갔다. 환한 빛이 비치는 홀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그저 고풍스러 움이 느껴지는 깨끗하고 널찍한 곳일 뿐,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만 보였을 때처럼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엘은 자신의 발소리에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볼 정도로, 팽팽하던 긴장을 조금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와 같이 조용한 복도를 걸어 다섯 번째 문 앞에 멈춰 서자,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엘은 당장이라도 몸을 돌리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고, 용기를 내어 문을 와락 열어 젖혔다. 그리고 눈을 온통 점령해버린 책장을 향해 곧장 다가갔다. 방의 구조가 꿈에서 본 것과 같은지 다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붉은 방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 외의 것들은 뿌연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기만 했다. 그 때처럼 안으로 들어와 책장 앞에 섰어. 그런 다음엔 의자에 올라가 책장 위를 살피다 책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아래로 내려왔어. 그래, 바로 여기야. 엘의 시선이 어깨 높이에 꽂혀 있는 두툼함 책에 못 박혔다. 그녀는 신중한 손길로 책을 빼낸 후 잔뜩 긴장한 채 그늘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진갈색의 나무 판만 보일 뿐 붉은 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엘은 서둘러 그 옆의 책 서너 권을 뽑아 들었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책장에 얼굴을 들이밀어도,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붉은 원은 찾을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책들을 제자리에 말끔히 꽂아 넣은 뒤, 터덜터덜 걸어 중앙에 위치한 팔걸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에 얼굴을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한 꿈을 현실로 착각한 나머지, 잔뜩 긴장한 채 책장 앞에 서 있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조소가 섞인 웃음이었다.엘은 계속 헛웃음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천천히 웃음이 빠져나갔다.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수색은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래, 난 열쇠가 되는 아주 단순한 걸 간과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어. 정체가 들통나기 전에 물건을 찾아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조급함이, 정작 중요한 걸 못 보게 눈을 가린 건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게 뭘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게 대체 무엇일까? 극히 간단한 걸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엘은 리자드가 물건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의 일을 곰곰이 더듬어 보았다. 리자드는 그 때 꼭 찾아와야 할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과 법황 성하 주변에 있을 거라는 말을 했어. "법황 성하 주변에 있는 중요한 물건...." 엘은 입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중요한 물건이라는 말에 얽매여 있는 건 아닌가? "그래, 그거야! 바보 같으니!" 엘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홀로 들어섰다. 그녀가 깨달은 건 극히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중요한 물건'을 '비밀스런 물건' 즉, 어딘가 찾기 힘든 깊고 깊은 곳에 숨겨 두어야 할, 은밀하고 값비싼 보물같은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누구에겐 가치있는 보물이라도 다른 사람에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물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난 지금까지 귀중품을 숨겨 두었을 것같이 보이는, 고급스러운 가구나 구석지고 은밀한 곳만을 찾아 헤맸어. 하지만 물건은 밝고 햇빛이 비치는 곳, 누구의 눈에도 쉽게 띌 수 있는 곳에 있을지도 몰라. 엘은 홀 중앙에 서서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다음,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 커다란 벽난로로 다가갔다. 붉고 매끄러운 돌로 이루어진 벽난로 위엔,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 조각상과 오묘한 빛을 발하는 은백색의 장식 돌이 놓여 있었고, 그 뒤쪽 대각선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벽난로 앞에 선 엘은, 먼저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검은 색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하지만 상자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상자로 팔을 뻗었다. 그건 강렬한 빛을 발하는 붉은 색 보석으로, 아시리움을 상징하는 불꽃과 태양문양을 새겨 놓은, 기가 질릴 만큼 화려한 상자였다. 힘들이지 않아도 문양 아래부분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는 긴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법황에게 바친 물건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해 숨을 죽인 상태인데도, 이 상자 하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없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금으로 만든 걸쇠를 위로 밀어 올리고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 즉시 그녀의 입술에서 실망스런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갖가지 호화 찬란한 보석이 가득 들어차 있는, 상자의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중으로 놓인 벽난로 위의 작은 장식 선반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엘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열렸다. 그녀는 뻣뻣한 팔을 길게 뻗어, 선반 위 조금 들어간 부분이 놓여 있는 묵직한 돌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반달 모양의 돌조각은, 물을 들인 듯 온통 검은 색이었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촘촘히 음각되어 있었다. 엘은 바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을 살짝 쓸어 보았다. 이거야... 그래, 바로 이거야! 찾았어! 찾았다고! 드디어 물건을 찾았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이 밀려들었다. 엘은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돌을 와락 가슴에 안아 들었다. 딱딱하고 싸늘한 느낌이 너무나 생생히 와 닿는데도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이토록 쉽게 물건을 찾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엘은 더욱 힘껏 돌을 껴안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한 숨죽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흥분에 차 어쩔 줄 몰라하던 엘의 정신을 들게 한건,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소리였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머리를 묶고 있는 금빛 띠를 풀어 돌을 허리에 단단히 묶어 고정시켰다. 그리고 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뜬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이제 아시리움을 떠날 수 있어! 무사히 이 곳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거야! 이제 리자드를 만나러 갈 수 있어! 3층 서재로 뛰어들던 엘의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웃음이 가득했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리오.... 리오와 헤어지게 되는 거야. 이제 영원히 리오를 볼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시린 상실감에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 "혹시 리오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못 봤는데..." 엘은 유르젠에게 알았다는 눈짓을 해 보인 뒤, 바로 몸을 돌렸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다른 때는 세 명중 적어도 한 명은 리오의 행방을 알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물어보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가 타 초조하게 복도를 걷는 엘의 눈에, 저 만치에서 책에 코를 박고 걸어가는 리반의 모습이 보였다. "리반!" 소리 높여 불렀지만 책에 몰두해 있는 리반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엘은 헐레벌떡 뛰어가 리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흠칫 놀라는 그를 향해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리반! 혹시 리오 못 봤어? 아무리 찾아도 없어!" "어,알렉스. 리오라면 졸려워 못 견디겠다고 아까 정원 쪽으로 갔는데..." 엘은 정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아시리움 측에서 그녀가 물건을 훔친 걸 알고 당장이라도 잡으러 올 것 같다는 걱정이, 그녀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리오에게 아무 말도 없이, 마지막으로 그를 한번 보지도 않고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지만, 리오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엘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속도를 늦추지 않고, 리오와 그녀가 자주 앉곤 했던 긴 의자가 놓 인 곳으로 곧장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의자에 기대 두 다리를 길게 뻗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들어 있는 리오 앞에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동안 리오를 바라보던 엘은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평온한 얼굴을 보며, 꼭 움켜 쥔 주먹으로 거칠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리오..." 엘의 입술에서 거친 숨결과 함께 리오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리오... 일어나. 그만 자고 일어나 봐.... 나 이제...." 나지막한 속삭임이 기어 들어가며 목이 메어 왔다. 견딜 수 없이 쓰리고 화끈거리는 것이 가슴 속에서 점점 단단히 뭉쳐지자, 엘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고통은 점점 넓어지고 강해질 뿐이었다. 마치 공기가 아닌 뜨거운 불덩이를 한 아름 마신 것 같이 온몸이 조여 들며 아파 왔다. "리오, 나 이제.... 가야 해...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 굵은 눈물 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의 리오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 동안... 정말...."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하자, 엘은 두 손으로 입술을 막았다. 이럴 생각으로 리오를 찾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 못난 모습으로 소중한 친구와 마지막 이별을 나눌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리오와 웃으며 농담이라도 주고 받을 생각이었다. 떠나야 한다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며, 눈물짓는 우울한 모습을 리오에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환하게 웃음짓는 그의 얼굴을 한번만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엘은 고개를 치켜들고 석양빛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봤다. 목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축축이 적셨다. 그녀는 잔뜩 잠겨 겨우 들릴까 말까 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네 말대로.... 숨어 지내야 해, 리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다시는.... 널 만날 수.... 없다는.... 말이야....." 눈을 질끈 감아 눈물을 털어 냈지만, 눈물은 곧바로 가득 차 오를 뿐이었다. "리오....널....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엘은 숨죽여 흐느끼며 겨우 말을 끝냈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자제력을 움켜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리오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팔 소매로 눈을 쓱 문지른 다음 애써 미소지었다. "앞으론 불만 봐도 널 떠올리게 될 것 같아." 잔뜩 목메인 농담조의 말엔 아픔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이제 일어나야 해. 이러다간 떠나기 전에 잡히게 될 거야. 그래, 이제 떠나야 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재차 되뇌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엘은 한동안 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석양이 비춰 든 리오의 머리카락이 한층 강렬한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항상 환하게 미소짓는 입술이 편안하게 살짝 벌어져 있었고, 활기있게 반짝이는 푸른 눈은 가지런히 속눈썹을 드리운 채 조용히 닫혀 있었다. 뜨거운 눈물 너머로, 꿈결을 헤매듯 그의 얼굴이 아스라이 잠겨 들었다. 엘은 리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등지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이 걸음을 옮기다가 정원이 끝나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제 25장. 전환점------------------------------------------------------------------- "없어! 구슬이 없어!" 주머니를 격렬히 흔들어 보던 엘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옷장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장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고, 옷들을 하나씩 꺼내 털어 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구슬은 나오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잘 생각해 봐!" 엘은 버럭 소리치며 두 손으로 힘껏 머리를 감쌌다. 가슴이 마구 고동치며 머리가 점점 화끈거렸다. 누군가 구슬을 가져간 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옷장 구석에 숨겨 놓은 주머니에서 구슬이 사라질 리 없어. 누굴까? 누가 가져간 걸까? 혹시 시에나가 옷을 정리하며 주머니를 발견한 건 아닐까? 아니야, 시에나가 내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댈 리 없어.엘은 거친 동작으로 방안을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길! 알비노!" 단도를 훔쳐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사건이 떠오르자, 알비노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 지 모르고 그저 날 괴롭힐 목적으로 가져간 게 틀림없어! 어떡하지? 알비노가 자신의 짓이라고 순순히 밝힐 리 없는데.... 더더군다나 얌전히 구슬을 내놓을 놈도 아니고.... "멍청이! 지금까지 구슬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화가 치밀어 오르자 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노와 흥분, 그리고 심한 불안감이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엘은 침대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고, 천둥처럼 쿵쾅대고 있는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뜨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후끈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자제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손이 떨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북하게 쌓인 옷 더미를 헤쳐 검을 찾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슬을 되찾아야 했다. 엘은 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문을 열어 젖혔다. -------------------------------------------------------------------조금씩 커지던 발소리가 한순간 멈추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숨죽이고 문 가에 서 있던 엘은, 안으로 들어서는 알비노의 목덜미를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목에 바짝 검을 겨눴다. "뭐,뭐야? 뭐 하는 짓이야?" 엘의 얼굴을 알아본 알비노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내 물건을 찾으러 온 것 뿐이야." 엘은 차갑게 굳은 그녀의 얼굴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물건이라니? 왜 네 물건을 나한테 와서 찾는 거야?" "긴말 필요없어! 네가 가져간 내 구슬이나 내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엘을 올려다보던 알비노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구슬이라니? 너 완전히 돌아 버렸구나! 정신 나간 미친놈..." 알비노가 말을 채 끝내기 전에, 엘의 발이 그의 가슴을 거칠게 짓눌렀다. "말 조심해! 너같은 건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베어 버릴 수 있으니까!" 숨막히는 신음소리를 내는 알비노를 향해 엘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아,알았으니까 바,발 좀 치워 줘."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알비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체중을 실어 꾹 밟고 있던 발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그리고 똑똑 끊어지는 어조로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구슬 내 놔!" "구슬이라니 난 본 적도 없어!" "목이 잘려 나간 후에야 정신을 차리겠군." 험악하게 눈을 부릅뜬 엘이 이를 뿌드득 갈자, 붉게 상기됐던 알비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저,정말이야 알렉스, 믿어 줘! 내가 네 방에서 훔친 건 단도 밖에 없어! 단도이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게 없단 말이야! 브레인에게 물어 봐! 브레인도 내 말이 맞다고 할거야! 그 때 브레인도 같이 있었으니까!" 알비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거짓말처럼 브레인이 불쑥 고개를 내밀 었다. "알비노, 저녁 먹으러...." 방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눈치챈 브레인이,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변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브레인, 빨리! 어서 빨리, 알렉스 놈을 붙잡아! 아예 뼈를 으스러뜨려 줘!" 엘이 당황해 멈칫한 사이, 목에 겨눠진 검 끝에서 재빨리 벗어난 알비노가 안쪽으로 피하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와, 브레인." 엘의 목소리는 그녀 자신도 의외일 정도로 침착했다. 눈을 끔벅이며 엘과 알비노를 번갈아 살피던 브레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빨리 저 놈을 혼내 줘! 박살을 내란 말이야!" 브레인의 굼뜬 동작에 애가 타는지 알비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어깨를 잔뜩 움츠린 브레인이 엉거주춤 엘에게 한발 다가섰다. "그러지 마, 브레인. 너도 알다시피 그건 나쁜 짓이야." 엘은 브레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잠시 미동없이 서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엘을 응시하던 브레인이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브레인! 이 멍청한 놈! 내 명령을 거역하는 거야? 빨리 움직이지 못해? 어서 알렉스 놈을 꼼짝 못하게 혼내 주란 말이야!" 알비노가 새된 목소리로 악을 써댔다. 얼굴 가득 조소를 드러낸 엘이, 한쪽 발로 중심을 잡은 삐딱한 자세로 알비노를 노려봤다. "멍청이는 브레인이 아니라 바로 너야! 뭐가 금 덩어리고 뭐가 똥 덩어리인지도 모르는 네 놈이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알비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잔뜩 몸을 도사리고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거로 봐서,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겁한 놈! 검을 앞세우니 없던 용기가 생긴다 이거냐? 피를 질질 흘리며 독에 중독돼 비실비실 대던 못난 놈이, 자일스 전하가 안 계시니 살판나는 모양이구나!" 알비노가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악몽 같기 만한 일을 들추며 이죽거리자, 엘은 얼얼해질 만큼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강렬하게 번뜩이는 보라색 눈으로 알비노를 노려보며,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마디한마디 씹어 뱉듯이 똑똑 끊어 말했다. "덤벼 봐, 알비노!" "빨리 저 놈을 잡아, 브레인! 브레인!" 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비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브레인은 두 손을 등뒤로 감춘 채 한층 더 물러설 뿐이었다.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비노, 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거냐? 진짜 비겁한 놈이 누군지는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구나!" "으아아악!" 비명같은 괴성을 지르며 알비노가 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움직임없이 가만히 서 있던 엘은, 알비노가 그녀의 몸에 부딪칠 만큼 바싹 접근한 순간, 재빨리 옆으로 몸을 틀며 동시에 그의 발을 걸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알비노가 바닥에 넘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거칠게 부딪치는 바람에 이에 찢겼는지, 벌떡 일어나는 알비노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젠장! 가만두지 않겠어!" 버럭 소리친 그가 다시 맹렬히 달려와 엘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는 머리를 젖혀 공격을 피하며, 그와 동시에 살짝 뒤로 물러나 가볍게 뛰어올라 알비노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요란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진 알비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 위로 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 기회에 네 얼굴을 아예 뭉개 줄까? 많이도 필요없어. 한번만 힘껏 밟으면 네 얼굴 정도야 간단하게 박살날 테니까." 분노로 이글거리는 보라색 눈동자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엔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알렉스! 이러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내,내가 잘못했어! 진심이야! 한번만 용서해 줘! 제발!" 겁에 질려 간절하게 애원하던 알비노가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발을 내렸다. 참기 힘들 만큼 치솟았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자, 그녀는 거친 한숨을 토하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만 울고, 내 물건이나 내 놔!" 브레인이 흘깃흘깃 엘의 눈치를 살피며, 알비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앉혔다. "울지마, 알비노. 울지마.... 이제 그만 울어." 달래는 듯한 브레인의 말을 들은 알비노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당장 울음 그치지 못해?" 짜증이 치민 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알비노가 코를 훌쩍이며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너무나 어린아이같은 행동에 그녀의 입술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알비노, 너 몇 살이냐?" "여,열... 네살." 알비노가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얼굴에서 앳된 구석이 종종 보이곤 했지만, 적어도 열 여섯은 됐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알렉스... 아시리움엔 말하지 말아 줘... 부탁해... 누나와 함께 오려고 열...다섯이라고... 하고 들어왔거든. 간혹 그런 일도 있다고 어머님이..." "그런 말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그리고 나이 때문에 그렇게 주눅들 필요없어.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열 네살 이란 거에 난 별 신경 안 쓴다는...." 자신이 상황에 맞지 않은 엉뚱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음을 깨달은 엘은,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브레인과 알비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여기서 이렇게 허송 세월할 여유가 어디있다고? 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새삼스레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몇 번 말해야 들을 거야? 빨리 내 구슬이나 내 놓으란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레인이 숨을 격하게 들이쉬었다. 그 즉시 엘은 물론 알비노의 시선까지 브레인에게 몰려들었다. "브레인, 혹시 네가?" "바로 너였구나!" 엘의 외침에 이어 알비노도 소리를 높였다.울상을 짓고 손을 비틀어 대던 브레인이, 엘과 알비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브레인! 너 때문에, 내가! 멍청한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꼴을 당한 줄..." "입 닥쳐, 알비노!" 엘이 매섭게 소리치자 찔끔한 알비노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 숨을 들이쉬며, 겁에 질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브레인에게 다가가, 그의 정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브레인, 내 구슬 어디 있어?" "미,미안해... 알렉스.... 처음부터 가져올 마음은 없었는데.... 너무 예뻐서.... 반짝이는 게 너무 예뻐서...."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내 구슬만 돌려 줘! 그거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구슬이야! 응? 구슬 어떻게 했어, 브레인?" 울상을 짓고 있던 브레인이, 급기야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자, 엘의 가슴에 서늘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잊어.... 버렸어.... 구슬.... 주,주머니에.... 넣었는데.... 그러니까 주머니에 있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손을 넣어 봐도.... 없었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어..." 엘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다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이를 갈며 다시 팔을 내렸다. "세상에! 그걸! 그게 어떤, 어떤 구슬인데! 그걸!" 몇 번 달싹이던 입술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한 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알렉스...미안해.... 정말 미안해..." 브레인의 울먹임을 흘려 들으며, 엘은 이리저리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방에 급히 숨겨 놓은 물건과 그걸 찾으면 구슬을 사용하라던 아몬의 말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다른 구슬을 줄게, 알렉스. 더 크고 예쁜 구슬을 줄 테니, 용서해 줘." "브레인!" 엘은 브레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단호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됐어, 용서할 테니 이제 그만 울어. 다음에 만나면 네 말대로 다른 구슬, 그러니까 더 크고 더 예쁜 구슬을 줘."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브레인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아무 말없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방향을 돌려 알비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깜박이는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내 말 잘 들어, 알비노. 더 이상 자일스를 따라다니지마. 자일스가 네 영혼을 한 입에 삼켜 버리기 전에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네 자신이 더 잘 알 거야." 말을 끝낸 엘은 멍하니 입술을 벌리는 알비노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엘의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졌다. 구슬이 없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 생각이 그녀를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고! -------------------------------------------------------------------어둠이 내렸다. 달빛을 가린 감청색 구름이 손에 잡힐 듯 낮게 걸려 있었다. 어둠 속을 살랑거리는 공기는 온화하면서도 상쾌했다. 하지만 엘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 골 맺혀 있었다. 너울대며 피어오르는, 융단처럼 낮게 깔린 안개를 휘저으며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조금씩 조금씩 차 오르던 숨소리가, 가파른 언덕의 중간 지점에 이르자 억누르기 불가능할 만큼 거칠어졌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인 듯 적막으로 가득 찬 밤하늘에 엘의 격한 숨소리만이 퍼져 올랐다. 드디어 언덕 꼭대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부분에, 좁고 비밀스런 길이 드러났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무성하게 우거진 풀을 헤쳤다. 축축한 흙냄새에 섞인 짙은 풀내음이 코끝을 아릿하게 만들었다.서둘러 비탈길을 내려가던 엘은, 자갈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앞에서 툭 튀어나오며 길을 막아 섰다. "왜 이제 나타나는 거야?" 너무 놀라 한순간 심장까지 멈춰 버린 엘은 낯익은 목소리에 숨을 훅 들이마셨다가 격하게 내뿜었다. "리,리오?" "그래, 나 리오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식사까지 쫄쫄 굶으며 저녁부터 지금까지 꼬박 여기서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단 말이야, 이 굼벵아. 엉덩이에 풀이 다 돋아나는 줄 알았다고."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서 있는 엘을 앞에 두고, 리오가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떠들어댔다. "대.... 어.... 그.... "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자, 엘은 답답함을 못이기고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그리고 어깨를 움츠리며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조심해! 한두 번도 아니고, 대체 번번이 왜 그러는 거야? 너처럼 자신이 다친 줄도, 또 아픈 줄도 모르고 성난 망아지마냥 날뛰는 녀석은 없을 거다! 저렇게 둔할 수가 있는 건지...." 말을 끊고 혀를 차대던 리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난 여자애들은 다 민감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줄 알았는데.... 또 고운말만 쓰고 다정다감하고...." "리오!" 엘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웅얼거림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리고 손을 뻗어 리오의 팔을 와락 움켜잡았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대체 내가 떠나는 건 어떻게.... 너.... 그 때 깨어 있었구나?" 리오의 팔에서 그녀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는 강렬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시선을 피하는 엘을 바라봤다. "그래, 네가 의자에 앉기 전에 이미 깨어 있었어. 한숨 자다 일어나 석양을 감상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리더라. 꼭 너일 것 같아 놀려 주려고 자는 척을 했어. 그 다음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고...." 한동안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이, 마침내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작별인사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도 알겠지만, 나 아까.... 좀 창피한 모습을 보였잖아. 바보같이 눈물을 질질 흘리고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또 그런 모습을 보일 것 같아 걱정이 돼." "아니야, 알... 아니 엘, 솔직히 말해 나 그 때 정말 감격스러웠어. 네가 얼마나 나와 헤어지는 게 싫으면 그렇게 울기까지 할까 하는 생각에 정말.... 가슴이 막 터질 것 같더라고!" 리오의 얼굴에 기쁨과 쑥스러움이 섞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울 뻔했어. 코가 간질간질하다 한순간 눈물이 핑 도는데, 네가 알아챌까 봐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한지.... 내가 끝까지 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뭔 지 알아?" 엘은 어느새 진지하게 변한 리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간단해. 난 너와 헤어질 마음이 없거든. 즉 다시 말해 네가 가는 곳엔 이 리오님도 간다 이 말씀이야!" 리오가 가슴을 쫙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뭐,뭐....뭐라고?" 기가 막힌 엘의 입에서 새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쉿! 조용히 해! 그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천연덕스럽게 그녀에게 주의까지 주는 리오를 바라보며, 엘은 한마디 한마디 씹어 뱉듯이 말했다. "잘 들어, 리오! 빨리 네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 "벌써 잠을 자?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리고 나 안 졸려 워. 아까 낮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봐. 그러게 낮잠은 그렇게 오래 자면 안 되는데... 뭐, 이번 낮잠은 나한테 해는커녕 상당한 득이 됐지만 말이야. 그러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나쁜 건 없나 봐. 목은 아직도 좀 뻐근하지만. 사실 그 의자, 잠자기엔 너무 딱딱하지 않아? 너도 거기서 잠깐 졸다 일어나 온몸이 다 쑤신다며 투덜거렸잖아. 그래서 말인데 푹신한 안락의자로 바꿔 달라고 아시리움에 건의라도...." "리오, 제발 그만해!" 엘은 단호한 목소리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리오의 엉뚱한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가 지금 잔뜩 긴장해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걱정스럽거나 초조한 일이 있을 때 괜히 말이 많아지는 건 리오의 버릇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 이제 실없는 소리 하지 않을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동행하겠다는 말은 꼭 해야겠어." "리오, 내 말 잘 들어. 날 걱정해서.... 날 위해서 이런 다는 건 알지만... 네가 이러면 내가 너무 힘들어져." 복잡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며 엘이 조용히 말했다. "아니 엘, 너나 내 말 똑똑히 들어. 난 널 걱정해서, 널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야. 난 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이기적이야.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는다 어쩐다 하는 건 내 비위에 맞지 않아.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리반하고는 정반대의 성격이지. 이번 일도 네가 아닌 날 위해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작고 하찮은 먼지 하나까지도 순전히 나만을 위한 거란 말이야." "바보 같으니!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 이게 널 위한 일이라고? 교육도 끝나기 전에 아시리움에서 네 마음대로 나가는 게 널 위한 거야? 말도 안 되는 괴변 늘어 놓지마! 진정으로 네 자신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 돌아가서 나 같은, 아무 것도 아닌 천민 여자애는 잊어버려!" 격앙된 외침을 끝낸 엘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리오를 노려봤다. "그런 말 다신 하지마! 아무 것도 아닌 천민 어쩌고 하는 말, 앞으론 절대 하지마! 한번만 더 그런 말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리오의 목소리 역시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 줄까, 리오? 얼마나 천대를 받았는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아! 난 아무 것도 아닌 천하디 천한 천민일 뿐이야! 왕족이나 귀족은 물론 평민들까지도 침을 뱉으며 상대하지 않으려 하는, 네 친구는커녕 시녀도 될 수 없는 더러운 천민이라고!" 이죽거리는 엘의 어조엔 그녀가 느끼는 쓰린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런 젠장! 내가 그런 말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각오해!" 이를 악문 리오가 갑자기 덥석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더니, 마구잡이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던 엘이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리오는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리오! 지금 뭐하는 거야? 대체 날 어디로..." 자신들이 아시리움 성전의 비밀 출입구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은, 잡혀 있는 손목을 힘껏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리오는 손아귀에 잔뜩 힘을 가하며 고집스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리오, 내 손목 놔! 셋 셀 동안 놓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줄 알아!" 엘이 으르렁거리며 매섭게 경고했지만, 리오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어떻게 할 건데? 네가 내 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힘 빼며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하나! 둘! 셋! 이렇게 할 거다!" 약이 바짝 오른 엘은 단호하게 소리치며, 리오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놓친 리오가 팔을 위로 번쩍 치켜 든 자세로 거칠게 넘어졌다. 엘이 얼얼한 손목을 문지르며, 은근히 스며드는 찜찜함에 얼굴을 찌푸렸을 때, 리오가 튀어 오르듯 재빨리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떻게 친구를 발로 걷어찰 수 있어? 이 악질아!" 너무나 기가 막혀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던 엘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맞고함을 쳤다. "뭐? 악질? 어떻게 친구를 발로 걷어찰 수 있느냐고? 너야말로 친구한테 이렇게 막무가내로 완력을 쓸 수 있는 거야? 솔직히 말해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악질인 거야?" "그거야, 잔인하게 엉덩이를 걷어찬 네 녀석이 악질이지!" 리오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해왔다. "어허 그러셔? 내가 진짜 악질이라면 한번이 아니라 아파서 앉지도 못할 때까지 네 엉덩이를 마구 걷어찼을 거다!" 말하는 도중 자꾸 웃음이 터지려 하자, 엘은 혀를 질끈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벌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지난번에 리반이 말한 대로 깃털만 스쳐도 비명을 지를 때까지 사정없이 마구마구...."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고 있는 리오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엘은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리오의 입술에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빠져나가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엘은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 이제 진짜 가야 돼, 리오.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했어. 그러니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고집부리지 말고 돌아가. 제발.... 이렇게 부탁한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간절하게 반짝였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은 리오보다 엘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대한 두려움에 자꾸 몸이 떨려 왔지만, 그녀의 입술에서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리오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해가 갈 거란 걸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친구보다 그녀의 두려움을 위에 놓을 수 있겠는가? "이젠 내 말 좀 들어줘, 알레... 아니 엘. 아시리움 성전에서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 걱정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 네가 더.... 그러니까 널 이대로 보내고 뒤돌아 선다면, 난 평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보내게 될 거란 말이야." "그건..." "아니, 난 알아!" 엘의 말을 자르며 리오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내가 단순하다 해도 그건 만은 알아. 그냥.... 마음 편하게 날 받아들이면 안되겠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아시리움 성전에서 어떤 조치가 내려지긴 하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왕위계승권도 희박한 별 볼일 없는 다섯 번째 왕자일 뿐이야. 그러니까 필요 이상으로 아시리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리반에게 편지도 남겨 두고 왔으니까, 리반이 잘 처리해 줄 거야. 워낙 똑똑한 녀석이니까."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던 리오가 엘의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안전해질 때까지만.... 내 눈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같이 있게 해 줘....엘." 엘은 얕은 숨을 작게 몰아쉬며 리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발아래 풀잎들이 뿌옇게 흐려지며 조금씩 조금씩 코끝이 시려 왔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요샌 왜 이렇게 툭하면 눈물이 나오려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점점 못난이 울보가 되어가는 건가? 어른이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되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엘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알레...아니, 엘!" 어쩔 줄 몰라하는 리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빨리 안 오고 뭐해? 한번 더 엉덩이를 채여야 정신 차릴래?"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다음 순간 리오가 커다란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 옆으로 뛰어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엘은,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헤벌쭉 벌리고 있는 리오를 보며, 짐짓 심술궂은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고생문이 훤한데, 그렇게 웃음이 나와? 어디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두고 보자, 이 고집불통아!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대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칭얼대다니? 너 감히 이 리오님을 어떻게 보고...." 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갑자기 말이 뚝 끊겼다. 의아한 마음에 엘이 입을 열려는 순간, 리오가 그녀를 와락 잡아채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그 와중에서도 어떻게 신경을 쓸 수 있었는지, 그의 한쪽 팔이 엘의 오른쪽 어깨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조용히 해! 누가 있어!" 숨죽인 경고에 엘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들킨 거야! 이미 아시리움에서 모든 걸 알아 버린 거야! 그녀는 오싹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끼며, 뻣뻣한 고개를 조심스레 세워 리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폈다. 리오의 말대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어둡고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 세세한 건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만든 장본인이,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지고 있고, 초조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오가고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정체 모를 사람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리오를 흘긋 바라봤다. 때마침 리오도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는 참이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엘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리오도 마찬가지인 듯 번쩍 눈동자를 빛냈다. "리반인가?" "혹시, 리반?"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오자 리반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근데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거야?" "네가 편지를 남겼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편지엔 애매모호하게.... 그러니까.... 여길 알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안 썼단 말이야." "근데 우린 왜 이렇게 숨어서 조심스럽게 소곤대고 있는 거지?" 마침내 자신들의 행동을 깨달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수풀 사이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리반을 향해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리반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기다리다가 다리에 쥐 나는 줄 알았다!" 리반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왜 우릴 기다린 거야?" 리오와 엘이 차례로 소리치자 리반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알렉스, 너 너무 한 거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갑자기 떠날 수 있는 거야?" 허를 찔린 엘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를 떠난 리반의 매서운 시선이 리오에게 옮겨졌다. "그리고, 리오! 이 바보야! 이걸 편지라고 남긴 거야? 내 몫까지 부모님께 열심히 효도하고, 예쁜 여자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라. 내가 아는 예쁜 여자들은 내 친구 테이어스가 모조리 꿰고 있으니까, 그 녀석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잘 있어라. 추신, 자유와 행복을 찾아 떠나는 날 찾지 마.... 이게 뭐야?" 엘은 막힘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던 리반의 말이 끝나는 순간,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리오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안 돌아가! 아무리 날 잡고 늘어져도 난 엘...아니 알렉스와 함께 갈 거야!" 리오가 비장하게 소리치자,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리반이 은근히 비웃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가 널 잡는데? 널 억지로 잡았다가, 길길이 날뛸 게 뻔한 네 등쌀에 나만 제 명대로 못 살게?" 예상하지 못한 리반의 말에 리오는 물론 엘까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리오의 뒤를 이어 엘도 입을 열었다. "혹시 작별 인사하러 나온 거야?" "아니, 너희들이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여행에 동참하려고 나온 거야." "뭐? 말도 안 돼!" "너 완전히 돌았구나!" 엘과 리오가 동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리반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 제정신이야. 그리고 말도 되고." 리반은 손을 번쩍 들어, 막 입을 열려는 두 사람을 막았다. "솔직히 말해 리오의 편지를 봤을 때, 알렉스 너와 관계된 일이란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리오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 마음으로 다급히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무조건 막으려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내가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해도 역부족이었을 거야. 리오, 저 녀석, 알렉스 네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거 잘 아니까." "그건 그렇지 않아!" 씁쓸함이 담긴 리반의 말이 끊으며, 리오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진한 쑥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사실 엘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리오가 그녀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도, 또 이번 일이 순전히 그녀 자신 때문이란 것도,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불편한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얘기가 빗나갔는데.... 사실 여행에 동참하려 마음 먹은 건, 그 이후로도 좀 지나서였어. 리오를 막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차라리 내가 리오 행세를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더 이상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거든." "뭐? 교육을 안받아도 된다고? 어떻게?" 리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내가 시험 본다고 한 말 그새 잊어버렸구나?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밤낮없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잖아. 하렐이 시작되자 공부해야 한다는 날, 네가 억지로 성전 밖으로 잡아끈 거고. 하여튼 넌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다니까!" "그럼 시험을 통과하면 더 이상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리오와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리반이, 질문을 던진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교육기간이 반을 넘어서면 가능해. 고위사제 열 분 앞에 앉아,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만 잘하면, 더 이상 교육을 받지 않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어. 까다로운 질문이 몇 개 나왔지만, 생각보다 그리 어렵진 않더라고." "대단하다, 리반! 정말 대단해! 늦었지만 축하한다!" "나도 그런 시험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 날로 당장 통과할 수 있었어!" 감탄사를 연발하는 엘을 바라보며 슬쩍 인상을 구기던 리오가 냉큼 소리쳤다. 리반과 엘의 떨떠름한 시선이 그에게 쏠렸지만, 리오는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리반, 네 말대로, 네가 리오 행세를 하면 좋을 것 같아. 시험을 통과한 리반은 체르몬 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쌍둥이 형제는 계속 남아 교육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하면 두 사람 다 감쪽같이, 아시리움 성전의 감시 아닌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걸 생각 못했을 리는 없고.... 왜 마음을 바꿔 우리와 함께 가려는 거야?" 말하기 곤란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리반이 한번 씩 웃음을 짓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유는 세 가지야. 먼저 한가지는 너희들도 알다시피 어차피 난 교육이 끝난 상태라는 거. 다시 말해,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도 아시리움에선 아무 신경 안 쓴다는 거, 그게 첫 번째 이유야.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리오가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체르몬 국을 떠나 아시리움 성전으로 출발하기 전날, 부모님이 날 따로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 있거든. 간단히 말하면, 너만 믿고 있으니 리오를 잘 보살펴 주고 무사히 집으로 데려와라, 뭐 그런 말씀이셨어." "말도 안 돼! 내가 형인데! 형인 내가 리반을 이끌고 보호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무척이나 억울한지 리오가 거칠게 퍽퍽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런 리오를 못 본척 무시하며 리반이 말을 이었다. "부모님 말씀이 떠오르자,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기더라고. 부모님이 염려하시는 건, 아니 부모님 말씀을 듣지 못했더라고 가장 중요한건, 교육을 충실히 받는 것도, 아시리움 성전의 눈 밖에 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어. 그건 리오와 내가 떠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는 거였어. 이제 내가 왜 이런 결심을 내리게 됐는지 두 사람 다 알겠지?" 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리오는 소리 높여 반박했다. "난 내 힘으로 무사히 체르몬으로 돌아갈 수 있어! 리반, 네 도움 같은 건 필요없어! 대체 누가 누굴 보살펴 준다는 거야? 나한테 매일 지는 녀석이!" "지긴 누가 져?" 리오의 고함에 이어 리반 역시 흥분해 소리를 높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리반,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며?" "어? 어...그,그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리반이 엘을 슬쩍 바라보다 갑자기 리오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리오한테 물어 봐! 세 번째 이유는 나보다 리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리반의 목소리는 감히 다시 질문을 던지지 못할 만큼 강경했다. 엘은 무슨 이유냐는 물음이 담긴 얼굴로 리오를 바라봤다. 그러자 리오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 번째 이유는 앞으로 자연히 알게 될 거란 생각을 하며, 그녀는 눈앞에 놓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떠나기 전에 두 사람에게 꼭 해야 될 말이 있어." 엘은 쌍둥이 형제들을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리오, 이번 여행은 정말 힘들고 위험할 거야. 굉장히 안 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래도 나와 같이 갈 거야?"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리오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즉시 엘은 리반에게 눈을 돌렸다. "네게도 같은 질문을 하겠어, 리반. 여행에 동참한다면 우린 네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고생을 겪게 될 거야. 운이 나쁘면 다칠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어. 그래도 나와 리오와 함께 갈래?" "내 마음도 변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던 리반이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전달하려는지 똑똑 끊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됐어, 그럼 빨리 움직이자!" "잠깐만, 알렉스!" 이걸로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엘이 몸을 돌려 몇 걸음 옮기는 순간, 리반이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목적지가 어디야?" "맞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제일 중요한 걸 모르고 있었네!" 새삼스럽다는 듯 말한 리오가 리반과 마찬가지로 엘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좀 멀어. 먼저 우린 그루지아 국을 벗어나 리아잔 제국으로 들어가야 해. 하지만 최종목적지는 리아잔 제국이 아니라 바르테즈 공국이야."" "뭐? 바르테즈라고? 그럼 리아잔 제국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거잖아! 리아잔 제국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이야! 정말 재미있겠다!" 긴 여행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리반과 반대로, 리오는 마냥 싱글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 갈 길이 머니까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엘이 먼저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하자,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리오와 리반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수풀을 헤쳐 비밀문을 찾아낸 다음, 두 사람에게 진지한 시선을 던졌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앞의 이 구멍은 다름 아닌 고생으로 향하는 문이니까." 말을 마친 엘이 가장 먼저 구멍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리반이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이제 우리 앞엔 고생길이 펼쳐져 있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리반! 넌 할 수 있어, 리반! 그래, 난 할 수 있어!"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리반의 결의에 찬 말을 듣고 있던 리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참! 고생문, 고생길이라고? 너희들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재미없게 굴래? 우리 앞엔 그저 신나는 여행과 모험이 있을 뿐이라고! 인상 잔뜩 쓰고 겁에 질려 벌벌 떨어야 되는, 꿀꿀한 고생길이 있는 게 아니란...." 기세 좋던 리오의 말이 한순간 끊어지며, 작은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엘과 리반이 허리를 굽히는 순간, 리오가 짜증 섞인 고함을 터뜨렸다. "나 좀 잡아당겨, 리반! 옷자락이 철판 사이에 끼었나 봐! 이거 왜 이렇게 안 빠져? 좀 더 세게 당겨 봐! 더 세게!" 리오의 팔을 하나씩 잡은 엘과 리반이 그를 힘껏 당기자,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리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런 젠장! 옷이 완전히 두 동강이 났잖아! 옷도 많이 안 가져 왔는데! 쳇! 시작부터 이게 대체 뭐야?" 엘과 리반은 피식피식 웃으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뒤에선 리오가 계속 투덜거리며 터벅터벅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늘 단정하던 갈색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아몬이 미친 듯이 복도를 달려가자, 그에게 떠 밀린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아몬은 복도를 돌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돌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그러다 반 정도 내려온 지점에서 반질반질 닳은 계단의 끝부분에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말았다. 몸이 붕 뜨며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지는 순간, 아몬은 본능적으로 마법을 시행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극도로 당황하고 혼란에 빠져 있던 그의 머리는 한층 더 멍해지고 하얗게 질릴 뿐이었다. 계단을 올라오던 기사 한 명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미는 모습이 눈을 스쳤을 때, 아몬은 난관 모서리에 머리를 짓찧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던 그는 체중을 고스란히 실은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자 날카로운 비명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아몬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에 둥글게 서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입을 벌렸다. "아이고! 정신을 차리셨네!" "머리를 심하게 다치신 것 같으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마법사님!" "예, 데오르그 기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머리에서 계속 피가 쏟아지네요!" "괜찮습니까, 마법사님?" "예끼, 이 사람! 이렇게 심하게 다치셨는데 괜찮으시겠어?" "어쩌다 이런 일을! 좀 조심하시지!" 사람들의 말소리가 뾰족한 얼음조각처럼 머릿속에 박혀 들자,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며 심한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아몬은 이를 악물고, 치밀어 오르는 격한 토기(吐氣)를 힘겹게 억눌렀다. "세상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그러시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으시네!"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빨리 편안한 곳으로 옮겨 드리고... 그....어,어..." "답답하기는! 어의관(御醫官)님을 불러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사람들의 말소리가 빠르게 뒷걸음질치며 머리가 아득해졌다. 아몬은 얕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갑자기 이상한 울림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풀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 소리 같기도 했다. 아몬은 자꾸만 내리 덮이려는 눈을 깜박이며, 희미하게 울리는 낯선 소리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조금씩 조금씩 울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몬은 마침내 그의 머리를 울리는 것이, 낮고 서늘한 누군가의 속삭임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원인 모를 불안과 두려움이 급속도로 부풀기 시작했다. 누구지? 누가 내 머리 속에서 말하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떠올려 봐! 기억해 봐! 중요한 어떤 것이 막 손끝에 잡히려 했다. 그 때, 두려움의 가닥이 손끝을 스치려는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격통이 밀려들었다. 잔인하게 몰아치는 고통이 다른 모든 걸 뒤덮어 버렸다. 아몬은 사람들이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을 적시고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의 감촉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몸을 사람들이 다시 추스려 올렸다. 무릎 뼈가 으스러졌는지, 힘없이 흔들리는 발에 이리저리 딱딱한 바닥이 부딪칠 때마다,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 통증과 함께 자신이 리자드에게 가는 중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리자드님...." 아몬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힘들게 중얼거렸다. "잠깐만! 지금 마법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뭐? 다들 조용히 해 보시오!" 축 늘어진 아몬을 지탱해 주고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전하께... 데려다.... 주십시오..." 아몬이 힘겹게 말을 끝내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대공전하께 모시고 가야하나?" "이렇게 아픈 분을? 그러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고?" "마법사님, 지금은 상처부터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아몬은 이를 악물고, 꺾여 있는 무릎을 바닥에 디뎠다. 다치지 않은 쪽이었으나 으스러진 무릎에 미세한 진동이 전해지자 고통을 못이긴 거친 헐떡임이 터져 나왔다.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전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이 자네들 빨리 양쪽으로 나눠 서게. 거기 자네는 머리를 받치고. 자, 그럼 당장 모셔다 드릴 테니, 아프셔도 꾹 참으셔야 합니다." 기사 데오르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 있어 아몬의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려졌다.그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며, 고통으로 흐려진 눈을 부릅떴다. ------------------------------------------------------------------- "멈추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지금 안에서 중대한 회의를 하고 계시단 말이오!"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빨리 전하께 고해 주십시오!" "이런 꼴로 어딜 들어가려고? 그럴 순 없소!" "안 돼! 빨리 막아!" 시종들의 외침이 들리며 잠시 소란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아몬을 들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열댓 명의 문무귀족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들 중 몇몇은 아몬의 피투성이 얼굴을 보고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다친 사람을 감히 전하 앞에 데려오다니! 이게 무슨 되먹지 못한 짓거리냐?" 노기에 찬 귀족들이 서슬 퍼렇게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리자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들 나가시오! 그리고 너희들은 아몬을 의자에 내려놓고 빨리 어의관을 불러라!" 리자드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귀족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린 사람들이 앞다투어 밖으로 나가자, 리자드가 뚜벅뚜벅 걸어 아몬의 정면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리,리자드님.... 큰 일이.... 좋지 않은 일이...전 어찌 해야 할지...." 불안감과 두려움이 역력히 느껴지는 떨리는 목소리에 리자드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몬의 모습은 리자드로서도 처음 보는 거였다. "진정해라, 그리고 차근차근 말해 봐라!" 냉정하고 단호한 리자드의 말에, 아몬은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엘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리자드님." 리자드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정확히 말해봐라!" "엘의 위치가... 어디에서도 잡히지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표출된 강렬하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리자드의 청회색 눈 속에 이글거리다 눈 깜짝할 사이 가라앉았다.추적마법을 건 상대의 위치가 잡히지 않는다는 건, 마법이 풀렸거나 생명을 잃었다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다. "제가 빨리 아시리움에 가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정보원들은 많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부상에나 신경 써라." "아닙니다, 리자드님! 제가 하겠습니다!" 다급하게 소리친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자 아몬은 신음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따로 지시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아라! 명령이다!" 리자드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몬의 얼굴이 안타까움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졌을 때, 문 밖에서 어의관이 도착했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자드는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고, 어의관에게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허겁지겁 고개를 숙여 보인 어의관이,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잰걸음을 옮겼다. "이 곳으로 침구 일체와 아몬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가져와라! 불편한 게 없도록 완벽하게 준비해라!" 중앙회의실로 침구와 개인물건을 가져오라는 말에 시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감히 군주가 내리는 명령에 자신의 사사로운 느낌이나 감정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즉시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또 한가지, 지금 당장 집무실로 트리스탄, 델라이, 마르키스를 불러들여라!" 시종이 조아리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렸을 때, 리자드는 이미 성큼성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다른 시종들을 휙 둘러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빨리 전하의 명을 받들지 않고?" 수석시종의 매서운 목소리에 질겁한 시종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리자드는 조용히 문을 닫은 후 곧장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검은 색으로 보일 만큼 어둡게 일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마법을 푼 건가? 아니면.... 그는 바람소리가 날 만큼 세차게 몸을 돌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견고한 선반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검붉은 액체를 은잔에 가득 따른 후 단숨에 들이켰다. 목을 태울 듯 독한 술을 마셨지만, 돌조각처럼 딱딱한 그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리자드는 다시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절도가 느껴지는 단호한 동작으로 입안에 쏟아 부었다. 자신을 올려다 보던 엘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가 막 술잔을 내렸을 때였다. 지난번 아시리움 성전에서 열렸던 연회에서 그를 불러 세웠을 때의 모습이었다. 견디기 힘들만큼 가슴이 답답해지며 심장이 격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격렬한 분노와 사나운 그림자가 그의 청회색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통증이 느껴진 후에야 리자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은잔을 우그러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날카로운 금속이 파고든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손바닥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자, 그의 입술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순간, 그가 힘껏 던진 은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고 이를 악무는 리자드의 얼굴엔, 갖가지 격렬한 감정이 당장이라도 터져 오를 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부하들을 맞는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제 26장. 풋내기 여행자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같은 게 아니고 실제로 나고 있어." 이맛살을 찌푸리고 코를 벌름거리는 리반을, 피식거리며 보고있던 리오가 가벼운 어조로 응수했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여관에 들자는 내 말을 극구 반대한 건 너야, 리반. 그러니 그만 투덜대고 얌전히 잠이나 청해봐." 리오는 소리내어 하품을 하며, 바로 누워 있던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루지아 국을 벗어날 때까진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한다는 리반의 말을 따라, 그들이 처음으로 찾아 든 잠자리는, 허름한 농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지저분하고 초라한 헛간이었다. 현명한 행동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먼지투성이 헛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리반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리오, 자는 거야?" "그래, 잔다 자." 리오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까는 길바닥에라도 쓰러져 잘 것 같았는데, 막상 자려고 하니까 잠이 안 와." "그렇게 꼿꼿하게 앉아, 돌기둥처럼 등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데 잠이 오겠냐? 뭐... 사실 나도 잠이 안 오긴 마찬가지야. 근데 씻으러 나간 녀석은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거야?" 별 생각없이 툭 던지듯 말한 리오의 얼굴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혹시 우리만 남겨 두고 혼자 도망간 거 아냐?" "알렉스는 그런 짓을 할 친구가 아니야." 리반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리오는 헛간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맞은 편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엘을 발견한 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릴 만큼 냇가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엘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곧 그를 알아보고 빠르게 다가왔다. "왜 여기까지 나왔어? 피곤할 텐데, 잠이나 잘 것이지." "어...그, 그냥....잠은 안 오고 좀 답답해서...." 엘이 도망간 줄 알았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리오는 대충 둘러대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나도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안 올 때가 있더라." 두 사람은 발을 맞춰, 사각거리는 풀이 덮여 있는 좁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근데 왜 이리 오래 걸린 거야?" "땀과 먼지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잖아. 대충이지만 옷도 빨고 시원하게 목욕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봐." 엘은 하품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목욕하는 그녀의 모습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리오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슬그머니 옆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얼굴을 가려 주는 어둠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리반은 자는 거야?" "글쎄... 내가 나올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엉이마냥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잠들었을지도 모르지." "저기 말이야...리오." 엘이 망설이는 기색으로 머뭇대자, 리오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그녀를 흘긋거렸다. "리반에게는... 나에 대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리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일에 대한 건 리반에게 비밀로 해 달라... 그런 말을 하는 거구나?" 엘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리반이 알아도 상관없긴 해. 그러니까 정 네가 불편할 것 같으면 말해도 돼." 그냥 해 보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말이었지만, 그녀가 천민 여자애라는 사실이 리반에게 알려지는 게, 은근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리오와 리반에게 각각 느끼는 감정은, 미묘하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확실한 차이가 났다. "말 할 생각없어. 내가 불편할 게 뭐 있나? 나야 그냥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피식 웃던 리오가 엘의 팔을 가볍게 툭 건드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빨리했다. 헛간이 가까워지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리반 녀석, 잠은 안자고 뭘 뒤지고 있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오를 따라 헛간에 들어선 엘은 놀라운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리반 앞에, 은 주전자와 촛대, 잔, 물병, 램프, 보석이 박힌 장식품과 세밀하게 깎아 만든 작은 조각품 등 갖가지 고급스럽고 화려한 물건들이 잡다하게 놓여 있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리오에게 물어봐, 알렉스! 나도 궁금하니까!" 리반이 삐딱한 어조로 말하며 리오를 노려봤다. "보면 모르냐? 당연히 우리 여행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줄 보물들이지." 리오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리반의 얼굴은 한층 더 찌푸려졌고, 엘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리오, 너 설마... 설마 아시리움 성전에서 이걸..." "그래, 값비싸 보이는 것들로 잘 챙겼지? 여유만 좀 있었어도 더 많이 가져왔을 텐데... 네가 먼저 떠나 버릴 것 같아 시간을 끌 수 있어야지... 그래도, 이거라도 챙긴 게 어디야? 그렇지?" 리오는 칭찬받기를, 아니 최소한 동조해주길 기대하는 눈으로 엘과 리반을 번갈아 살폈다. "바보!" "멍청이!" 그의 기대를 저버리며 엘과 리반이 동시에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아시리움에서 물건을 훔치다니! 너,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나?" 리반이 버럭 소리치자,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리오보다 엘이 더 흠칫해 몸을 사렸다. 그리고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 된 그녀 역시, 찔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더욱 소리를 높였다. "그래, 리반 말이 맞아! 어쩐지 가방이 왜 저렇게 크나 싶더니만!" "왜들 이래?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냐고? 이 정도 물건 없어졌다고 아시리움에서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리오가 불만 어린 고함을 터뜨리더니, 누가 빼앗아 갈까 두려운 사람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물건들을 자신의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넣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것들은 사용할 수 없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리반이 선언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일시에 동작을 멈춘 리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사용할 수 없어? 너 아주 쉽게 말하는데, 그러는 넌 여행 경비라도 좀 갖고 왔어? 여기서도 체르몬 국에서처럼 원할 때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앞에 받쳐질 줄 알아? 그리고 네 녀석이 이게 얼마나 무거운 지나 알아? 내가 이걸 짊어지고 끙끙대며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말을 할수록 억울함이 복받치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리오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더니, 급기야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난 이 짐 때문에 어깨가 다 벗겨졌단 말이다! 그런데 옷가지 몇 개 달랑 들고 나타난 녀석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뻔뻔한 네 녀석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이걸로 갈겨 줄까?" 리오가 들고 있던 은 주전자를 리반의 머리 위에서 위협적으로 흔들자, 주전자를 흘긋 올려다본 리반이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그 주전자나 내려 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머쓱한 표정이 된 리오가 팔을 엉거주춤 아래로 내렸다. "우린 지금 바르테즈 공국으로 가는 길이야. 그루지아 국을 지나 광활한 리아잔 제국을 가로질러야 하는, 극히 멀고 험한 여정이 막 시작됐어. 때문에 당연히 네 말대로 이 물건들을 처분해 금전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그만큼 여행은 즐겁고 편해질 거야. 시간도 상당히 단축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이건 그냥 내 직감인데...." 리오를 똑바로 응시하며 극히 이성적인 어조로 말하던 리반이 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알렉스... 아시리움 성전에서 널 뒤쫓을 위험이 있는 거지?"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침울한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내 예상이 맞았군. 이제 왜 아시리움 물건을 사용할 수 없는지 더 이상 말 안 해도 알겠지?" "아니, 모르겠어!" 리오가 딱 부러지는 어조로 소리친 후 리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물건들이 아시리움 성전측에 우리 행방을 알려 줄 수 있다는 네 걱정은 알겠어. 하지만 그 런 이유로 왜 굳이 힘든 여행을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어." "그건 억지야! 지금 네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알렉스, 너도 말 좀 해 봐!" 리오의 태도가 답답한지 리반이 엘에게 휙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진정해, 리반. 먼저 리오의 말을 들어보자." 엘의 자그마한 지지에, 굳어있던 리오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실 내 말은 별 거 아니야. 물건이야, 그루지아 국 안에서 처분하면 그만 이라는 거지. 아시리움 성전 측에서도, 우리가 그루지아국을 벗어나려 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어차피 길은 단 두 개로 압축되는 거야. 우리가 향하는 쪽과 그 반대방향 즉, 아비스 만(灣)을 통과하는 바닷길로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리오가 엘과 리반을 차례로 바라봤다. "어차피 아시리움 측은 그루지아 국까진 힘들이지 않아도 우릴 뒤쫓을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리아잔 제국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몸을 사려도 된다는 말이야.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겠지?" 엘과 리반의 시선에 은근한 감탄이 섞여 있음을 눈치챈 리오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치켜들고 가슴을 쫙 폈다.엘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때마침 그녀를 바라보는 리반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그 즉시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너무 피곤하다!" "잠이나 자자!" 두 사람은 미리 마련해 놓은 잠자리에 재빨리 누웠다. "치사한 것들! 한대씩 발로 걷어차 줄까 보다!" 투덜대던 리오가 자리에 눕는 기척이 들려 오자, 엘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낮은 속삭임이 혼란스런 머릿속을 집요하게 울려 댔다. 아무리 잡으려 안간힘을 써도, 속삭임은 한줄기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갔다. 속삭임이 점점 멀어지더니, 눈앞에 알 수 없는 그림자나 무늬같은 것들이, 연거푸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몬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이름을 좇아,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피곤이 묻어 나오는 명확하지 않은 시야에, 머뭇거리다 슬쩍 문으로 몸을 돌리는 사일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나 안자니까 그렇게 살금살금 걸을 필요없어.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고." 멈칫하며 동작을 멈춘 사일러스가, 아몬에게 고개를 돌리며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깼구나." "저기있는 의자 갖다 앉아." 아몬은 조용히 말하며,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노곤한 몸을 힘겹게 움직여 일어나 앉았다. 그의 파리한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침대 가까이 다가온 사일러스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했다. "아프냐?" 조금도 변함없는 사일러스를 보며 아몬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말주변도 없고 어떨 때는 심하다 싶을 만큼 무뚝뚝했지만, 아몬은 그가 얼마나 마음이 깊고 정이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바르테즈 궁에서 같이 자라다시피 한 두 사람은, 내색만 하지 않을 뿐이지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성격 때문에, 그들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웃는 걸 보니 많이 아프진 않은 모양이군." "그래, 견딜 만해. 최소한 죽진 않을 것 같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는 내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들긴 하지만 말이야. 나... 정말 한심해 보이지?" 자조 어린 말에 사일러스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낯설기까지 한 아몬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자 사일러스는 열심히 할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찾아낸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못난 녀석!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와 이 꼴을 하고 있다니!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그의 속내를 짐작한 아몬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내가 당장 죽는다고 해야 겨우 와 볼까 말까 할 네가." "나 내일 떠난다!" "....엘 때문이지?" 단번에 얼굴이 굳어진 아몬이 악문 이 사이로 내뱉듯 물었다. "그래, 조금 전에 전하께서 내게 친히 명령을 내리셨어. 실력있는 기사 몇 명을 추려 그루지아 국부터 거슬러 올라오며 엘을 찾게 될 거야. 사실 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아니, 나...내가 있잖아!"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상체를 일으킨 아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가 아찔한 현기증을 못이기고 눈을 감았을 때, 사일러스가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염려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닌 것만도 다행이잖아. 무사히 아시리움을 빠져 나왔다니까 틀림없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거야." "하지만... 아무 것도 못하는.... 머리 좀 다쳤다고 간단한 마법조차 시현할 수 없는 마법사라니.... 꼭 필요할 때 이렇게 늘어져 있어야 하는 마법사라니...." 아몬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창백한 얼굴을 가렸다. 이해와 연민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궁상떨지 말고 빨리 건강을 되찾을 생각만 해. 내가 지금에서야 여길 와 본 것도, 네가 이런 일 정도에 무너질 녀석이 아니란 걸 믿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사실 네가 미리 만들어 놓은 마법진과 네 힘을 담은 그.... 요상한 물건이 있으니, 공간이동도 가능한 거고... 만약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엘을 찾으러 갈 계획은 아예 세우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 넌 충분히 네 몫을 한 거란 말이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왠지 머쓱하고 쑥스러운 마음이 들자, 사일러스의 굵은 목덜미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그는 몇 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다음,재빨리 문으로 다가갔다. "사일러스, 꼭 무사히 엘과 함께 돌아와야 해." 사일러스의 널찍한 등에 대고 아몬이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막 문을 열던 사일러스는 간단히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후 결의에 찬 걸음을 옮겼다. ------------------------------------------------------------------- "어떻게 됐어?" 초조하게 골목어귀를 바라보고 서 있던 엘은, 리오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숨가쁘게 질문을 던졌다. "뭐가 그렇게 급해? 숨 넘어가겠다!"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한 리오가 만족스러운 듯 히죽 웃음을 짓자,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엘과 리반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내가 나만 믿으라고 했지? 자, 놀라지 말고 여길 봐!" 주머니에서 손을 뺀 리오가 엘과 리반 앞에 손바닥을 쫙 펴 보이며 자신있게 말했다. 도저히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는지, 그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이야! 대단한대? 리오, 정말 잘 했어! 역시 넌 내 형제야! 네가 훌륭히 해낼 줄 난 믿고 있었어! 정말 장하다! 넌 우리 체르몬 국의 자랑이야!" 흥분한 리반이 몸까지 부르르 떨며 찬사를 쏟아 내자, 리오가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환희에 찬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쌍둥이 형제들과 달리, 엘의 얼굴엔 기가 막히다는 허탈함이 가득했다. "알렉스, 리오 정말 대단하지?" "아니!" 엘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순간, 리오와 리반이 동시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그녀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아는지 히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둘이 똑같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쌍둥이겠지. 사실 엘도 그들의 즐거움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넘길 수 있는 일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법이었다. "두 사람 다 그 바보같은 웃음 지우고 내 말 들어 봐." 두 형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지금 그렇게 좋아할 때가 아니야. 리오, 어디 손 좀 펴 봐." 엘은 리오의 손바닥에 놓여진 돈을 눈으로 대충 헤아려 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50에서 55큐어 정도 되겠군." "이야! 대단한데? 정확히 52큐어야!"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한 리반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리오를 재빨리 툭 쳤다. "리오, 넌 물건의 반 이상을 갖고 가, 겨우 52큐어를 받아 왔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은 촛대 하나만 하더라도 30큐어는 될 걸?" "뭐? 정말?" "그럴 수가!" 세상 물정 모르는 두 왕자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엘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은근히 깔려 있었다. 너희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가 직접 보여 줄 수 밖에... "둘 다 날 따라와." 엘이 성큼성큼 걸어 골목을 빠져 나가자,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던 리오와 리반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규모가 꽤 큰 고급 잡화점 앞에서, 엘은 남아 있는 물건들 중 가장 값이 적게 나갈 것 같은 은컵을 꺼내기 쉬운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거리낌없는 동작으로 잡화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린 채, 리오가 금방 팔고 온 갖가지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피던 주인이, 문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 물건을 서둘러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경계심은 리오를 보는 순간 눈 깜짝 할 새 사라졌다. "아이고, 또 오셨군요!" 작은 키의 비쩍 마른 중년남자가, 거의 벗겨져 가장자리에만 조금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들 앞으로 뛰어왔다.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물건을 가지고 오셨다면 좋은 가격을 쳐드릴 테니 제게 넘기십시오!" 엘은 살짝 미소지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보여 드릴 물건이 하나있습니다." "자, 그럼 어서 이리 오십시오!" 희색이 만면한 주인을 따라, 그들은 가게와 이어진 작지만 깔끔한 응접실로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보아,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은 후 그 맞은편에 주인이 자리잡는가 싶더니, 열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차를 가지고 들어와, 조심스런 동작으로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느긋하게 차나 한잔하시며 저와 거래를 하시죠. 아마 이 일대는 물론 그루지아 국 전체를 놓고 봐도, 저처럼 후하게 물건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짐의 맨 위에 올려져 있는 은컵을 꺼내 탁자에 내려 놓았다. 달랑 하나 꺼내진 컵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에 슬쩍 실망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의 얼굴엔, 조금씩 흥분이 번지고 있었다. 사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가느다랗게 뜬 눈만 보더라도, 물건이 꽤 마음에 들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흠이 많이 생겼군요. 사실 이런 물건은 저로서도 받기 곤란하지만 첫 번째 거래도 아니니.... 3큐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런 식으로 계산했으니 기껏 손에 들고 나온 돈이 52큐어 밖에 안 되겠지. 엘은 아무 말없이 컵을 집어 들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이고 있는 리오와,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리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 일어나자! 차 대접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저희와는 좀 생각차이가 크신 것 같군요." 엘이 단호히 의자에서 일어나자,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던 주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5큐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엘은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없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뻗었을 때 뒤에서 걸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이도 아직 어리신 것 같은 데 대단하시군요. 어서 다시 앉아보십시오.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인데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엘은 그 즉시 씩 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은근한 감탄과 흥미가 섞여 있는 주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40큐어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인남자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사라지며, 신중함이 깃든 날카로움이 그의 눈에 나타 났다.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해 보이던 그가 이제는 빈틈없는 상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15큐어 드리죠. 아시겠지만 사실 많이 쳐드리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35큐어까지 봐드리겠습니다." 엘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치며 번쩍 빛을 내뿜었다. "20큐어." "30큐어." 잠시 주위에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주인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25큐어." "받아들이겠습니다." 엘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도 만족스런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럼 전 돈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거래는 지금부터 시작인데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주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엘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엉거주춤 의자에 다시 앉는 그 앞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 보였다. "보시다시피 모두 저 컵보다 훌륭한 것들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해 볼까요?" 엘은 세 남자들의 감탄 어린 시선을 받으며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 "모두 단단히 각오해 두어야 할거다! 육체적으로도 힘든 일이지만, 그것보다 몇 배 더 많은 정신력과 인내심이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사일러스는 굳은 결의에 차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한층 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해야한다! 목숨 버릴 각오로 임하지 못할 사람은, 탓하지 않을 테니 지금 당장 빠져라!" 부동자세로 서 있는 네 명의 기사들 중 누구도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제러드, 이케르, 카셀, 세르피언, 이들 네 명은 모두 최고의 실력과 용맹으로 이름 높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켈름 기사단의 사일러스 단장에게, 직접 선택됐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더 한층 몸을 꼿꼿이 세웠다. 바로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붉게 상기된 에지몬트가 뛰어들어왔다. "비밀작전을 수행하러 떠난다는 게 사실입니까?" "빨리 저 놈의 입을 막아라!" 사일러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러드가 재빨리 문을 닫았고, 나머지 세 명은 에지몬트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막고 양쪽 팔을 단단히 붙잡아 사일러스 앞으로 끌고 갔다. "젠장!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격렬하게 버둥거리던 에지몬트가 몸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버럭 고함을 질렀다. 꽤나 숨이 막혔는지 그는 가슴까지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험악하게 눈을 부라리고 그를 노려보던 사일러스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밀 작전이니, 떠난다느니 하는 건 어떻게 안 거냐? 대체 어디서 얘기가 새어 나간 거야?" "큰형이 떠난다는 건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비밀작전이란 건 기사단 분위기를 보고 대충 때려 맞춘 거고요. 근데 제 말이 맞았나 보죠?" 에지몬트가 한줌의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자, 사일러스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공적인 일에선 형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큰형이 내 형인 걸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단.... 알겠습니다, 단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사일러스의 매서운 시선과 마주친 순간, 에지몬트가 말을 바꿔 재빨리 소리쳤다. "이번 일은 극비니 모두 입 단속 철저히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단장님!" 에지몬트는 물론 다른 기사들까지 입을 맞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지몬트, 넌 빨리 여기서 나가라! 방해하지 말고!" "그럴 수 없습니다! 에지몬트가 사일러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서자 기사들이 놀라 숨을 죽였다. "저도 이번 작전에 끼게 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입 닥치고 빨리 나가!" 다른 기사들까지 찔끔할 정도로, 매서운 호통이 떨어졌지만, 에지몬트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 뿐이었다. "작전에 끼워주십시오! 훌륭히 수행할 자신이 있습니다! 허락하시기 전에는 한발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어머니께 이미 허락도 받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큰형, 아니 단장님만 믿는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란 말이 나오자, 석상같이 단단한 사일러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흐려졌다. 사일러스가 유달리 어머니에게 약하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는 에지몬트는 피어오르는 회심의 미소를 슬쩍 감췄다. 그리고 미세하게 벌어진 틈을 물고 들어졌다. "어머니가 형에게 전하라는 편지도 갖고 왔습니다. 그 편지를 쓰시며 눈물 지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제게 형, 아니 단장님 말씀 잘 들으라고 신신 당부하시며 단장님 몫까지 꼭 안 아 주셨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슬쩍 부하들을 살피던 사일러스가 더 한층 근엄하게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허락할 수 없다! 네 눈에는 지금 이게 애들 장난으로 보이나?" "아닌 걸 알기에, 작전에 참여시켜 달라고 청을 올리는 겁니다. 애들 장난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없습니다." 말을 마친 에지몬트가 간절한 눈으로 사일러스를 바라봤지만, 야속한 큰 형은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 들 일이 아니다! 어서 나가라!" "사사로운 감정도, 철없는 호기도 아닙니다! 실력으로 증명하게 해주십시오!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선배님들? 설마 절 두려워 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에지몬트가 자존심을 건드리고 나오자, 기사들의 얼굴이 일제히 험악하게 구겨졌다. "증명할 기회를 주는 게 어떠십니까, 단장님?" "동의합니다! 매서운 맛을 보여 주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저 애송이에게 지면 제가 작전에서 빠지겠습니다!" "제가 톡톡히 버릇을 가르치겠습니다!" 분노한 기사들이 앞다투어 소리치자, 사일러스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성질 같아서는 잔머리 쓰는 동생이나, 바보같은 도발에 말려든 멍청한 부하들 모두 시원하게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썽쟁이 막내는 물론,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있는 자긍심 높은 기사들 역시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 의견이 정 그렇다면 에지몬트에게도 기회를 주겠다. 에지몬트, 이 중에서 한 명 골라라. 검술대련에서 네가 이기면 상대를 빼고 널 데려가겠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당장 선택하라!" 사일러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지몬트는 이제 됐다는 기쁨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를 노려보고 있는 네 명의 기사들을 살피는 그의 눈엔, 굳은 결의만이 담겨 있었다. 제러드, 이케르, 카셀, 세르피언.... 사실 이 네 사람 모두 에지몬트의 대선배들이었다. 나이도 그렇지만 경력에서는 그야말로 에지몬트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그들은 누구나 영웅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을 만큼 많은 공을 세웠고, 그로 인해 기사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에지몬트는 일찌감치 제러드를 제외시켰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평소 자신에게 필요한 걸 이것저것 챙겨 주고, 충고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던 제러드에게 함부로 도전할 수는 없었 다. 물론 그 옆의 이케르도 당연히 열외로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대쪽같은 의지와 철저한 자기관리, 또 예의 바른 행동으로 기사들의 귀감이라 일컬어지는 그는, 검술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일각에서는 켈름 기사단 단장인 사일러스도 능가할거라는 조심스런 추측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에지몬트에게 남은 선택은 카셀이냐, 아니면 세르피언이냐의 두 가지였다. 두 사람 역시 그걸 알고 있는지, 날카롭게 날이 선 시선으로 에지몬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결정하라!" 짜증 섞인 사일러스의 외침이 나온 순간 에지몬트는 마음을 정했다. "세르피언 선배, 한수 가르쳐 주십시오!" "좋다! 그럼 대련장으로 가자!" 시원시원하게 소리친 세르피언이 일착으로 문을 나서자, 나머지 기사들도 재미있겠다는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맨 끝으로 문을 나선 사일러스가, 한발 앞서 걸어가고 있는 에지몬트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왜 세르피언을 택한 거냐? 제러드나 이케르는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고, 난 네가 카셀을 지목할거로 예상했는데 말이다. 우열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세르피언은 몸놀림이 재빠르고 카셀은 체력과 힘에서 앞서고... 평소 네 취향을 고려하면 카셀이 더 유력할 텐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카셀 선배에게는 있지만 세르피언 선배에겐 없는 것이 있거든요." 에지몬트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더욱 아리송해진 사일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지몬트가 씩 웃으며 간단히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어여쁜 여동생말입니다, 형님." "알렉스, 정말 대단하다! 난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는지 정말 몰랐어!" "난 알렉스가 다재 다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리오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듣기라도 한 듯 으스대며 소리를 높였다. 엘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은근히 기쁘면서도 계속되는 감탄사에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두둑한 여행경비를 마련한 세 사람의 얼굴은 한점 그늘없이 환하기만 했다. 352큐어라니! 내가 300큐어를 벌었다니! 왕자인 리오와 리반은 좀 다르겠지만, 엘에게 352큐어라는 돈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녀는 슬쩍 팔뚝을 꼬집어 보았다. 그들의 손에 앞으로 2년 동안은 걱정없이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 웃음이 피어올랐다. 물론 아시리움 성전의 물건이 워낙 고급품이어서 좋은 가격을 받은 거지만, 그녀는 조금 전의 거래를 자신이 훌륭히 해냈다는 거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세 사람이 물건들을 처분하고,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향하고 있는 곳은 말 매매소였다. 잡화점 주인에게 매매소의 위치를 자세히 들어 알고 있는 그들의 얼굴엔 느긋한 여유가 가득했다. "말을 사면 거기에 맞는 마구들은 알아서 챙겨 준다니까, 먼저 말을 고른 다음에 사람들이 이것저것 준비해 놓을 동안 우린 식사나 하자. 아까는 긴장한 탓인지 잘 몰랐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배가 상당히 고파." "그래, 그러지 뭐." 사실 며칠간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엘은 리오의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저기가 매매소인가 봐." 리반이 손으로 칙칙한 갈색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을 끌고 건물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과 곳곳에 세워져 있는, 크고 작은 마차와 수레를 보니 매매소가 틀림없어 보였다. 세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말똥을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통 키에 유난히 둥근 얼굴을 가진 친절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말을 둘러보러 오셨나 보군요." "예, 둘러보다 괜찮은 게 있으면 구입하려 합니다." 리반의 말에 남자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자, 이리로 오십시오." 남자는 매매소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으며, 세 사람을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매매소는 훌륭히 꾸며져 있었다. 1층에는 사냥말, 암말, 망아지, 짐말들을 두는 마구간이 각각 나눠져서 있었고, 그 옆으로 마차나 수레를 살수 있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있었다. 또한 위층에는 잘 손질된 각종 마구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건물 안 깊숙이 들어서자, 남자가 빈틈없는 눈으로 세 사람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으로는 짐말을 보러 오신 것 같진 않군요." "예, 먼 길을 여행하는데 적당한 튼튼한 말을 사러 왔습니다." 비싼 말을 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남자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그런 말이라면 이쪽에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제가 하나하나 장단점을 자세히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장 첫 번째 있는 이 밤색 말은, 3년생 암말로 아주 순해 초보자에게 적당한 녀석입니다. 힘도 좋고 건강상태도 좋습니다. 또 영리하고 발도 아주 빠르죠. 그래서 이 름도 셀라스라고 지었습니다. 셀라스는 크요르드 지방 방언으로 완벽이라는 뜻입니다. 이 녀석 고향이 크요르드거든요. 가끔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남자의 장황한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엘은 이 셀라스란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말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리오와 리반 역시, 만족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있는 녀석은....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갑자기 말을 끊은 남자가 엘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그들을 지나쳐 마구간 밖으로 나갔다. "이 말은 꼭 사자, 난 순한 말이...." "젠장!" 리오가 험악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자, 적당한 말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있던 엘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 그래?" 리반 역시 놀랐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기 봐!" 리오의 눈짓을 따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구간 밖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즉시 엘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고, 리반은 긴 신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나가야지." 리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구에서 세 명의 그루지아국 병사들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그들을 바라봤다. "튀어!" 급박한 리오의 외침이 터진 순간, 엘은 입구 반대쪽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어, 저놈들이!" "저,저놈들 잡아라!" "이 놈들 거기 서라!" 병사들의 고함과 바닥을 울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자, 싸늘한 두려움이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급한 마음에 발을 헛 딛고 비틀거리는 엘을, 뒤따라오던 리오가 힘껏 잡아 주었다. 엘은 허리까지 오는 나무 가로대를 훌쩍 뛰어넘은 뒤, 안쪽으로 열려진 창문틀을 움켜쥐고, 탄력있게 몸을 들어 올렸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계속되는 병사들의 고함이 채 신음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리부터 미끄러지듯 밖으로 나온 엘은, 리오의 손을 잡아 그를 도운 다음, 다시 리오와 함께 리반의 팔을 잡아 주었다. 마침내 마구간을 벗어난 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눈 앞에 보이는 길을 미친 듯이 달렸다. 창가에 서서 그런 세 사람을 나란히 내다보고 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안 쫓아가도 되나?" "쫓으려면 자네가 가! 저렇게 목숨 걸고 뛰는 젊은 애들을 어떻게 따라가? 내 나이 벌써 마흔 여섯이라고!" "근데 왜 우릴 보고 도망을 친 걸까?" 멀뚱히 서 있던 병사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들 아나? 지은 죄가 있는 놈들이겠지." "그래, 시시껄렁한 좀도둑일 거야. 에잇! 오늘 잘하면 건수 올리는 거였는데, 아깝게 됐군." 세 명의 병사들은, 이젠 작아져 콩알만하게 보이는 도망자들에게, 아쉬운 눈길을 다시 한번 던진 후, 몸을 돌려 이 곳에 온 목적대로 말을 고르러 갔다. ------------------------------------------------------------------- "난....이제....더는...." 가장 먼저 바닥에 고꾸라진 사람은 리반이었다. 그 다음엔 엘과 리오가 동시에 쓰러질 듯 바닥에 주저 앉았다. 한동안 주위엔 그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엘은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깊숙이 묻고,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을 흥건하게 적신 땀방울이, 코끝을 거쳐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후끈거리는 목을 타고, 비릿한 쇠 냄새가 올라왔다. 엘은 땀으로 미끈거리는 몸을 천천히 움직여, 허물어지듯 하늘을 향해 누웠다. 그리고 팔을 올려 눈부신 햇빛을 가렸다. 거친 숨과 함께 메마른 흙냄새가 맡아졌다. "우릴 쫓아오진 않는 것 같아." 숨찬 어조로 말한 리오가 그녀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쩌면.... 다른 병사들을.... 부르러..... 갔는지도.... 몰라." 리반은 아직까지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둘 다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나도.... 견딜 만해..." 그녀의 질문에 리오와 리반이 차례로 대답했다. 엘은 고개를 돌려, 들판 여기저기에 점점이 뿌려진 울긋불긋한 야생화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시리움에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어." 평소 목소리로 돌아온 리반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아직은 좀 여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리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엘은 침울하게 맞장구를 쳤다. "젠장! 하필 그 때 나타날게 뭐야? 식사나 마친 다음에 나타날 것이지!" "먹는 것 보단 말을 구입하지 못한 게 더 큰 문제야." "난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야! 나한테는 말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큰 문제라고!" 리오가, 자신의 말을 반박하고 나선 리반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심한 허기가 지는 건 리반과 엘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빼고는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게 전혀 없으니, 그들이 탈진해 쓰러지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제 그만 움직이자." 엘이 먼저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리반이 끙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이 곳에 있다 병사들과 맞닥뜨리면 그야 말로 큰일이야. 여긴 어디 숨을 만한 곳도 없으니까." 멀뚱히 누워 그들을 올려다보던 리오가,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엉거주춤 몸을 세웠다.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가서 조용히 음식만 먹고 빨리 도망치면 안될까?" "당연히 안되지!" "지금 급한 건 되도록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일이야!" 엘과 리반이 나란히 반박하자 리오의 얼굴에 짙은 실망감이 나타났다. 쉽게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리오는, 애타는 마음을 담아 간절한 눈빛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다, 터덜터덜 두 사람을 따르기 시작했다. -------------------------------------------------------------------제 27장. 온정(溫情)-------------------------------------------------------------------뿌연 먼지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무릎 아래에서 일렁이던 먼지는 발을 끌거나 거친 걸음을 놓으면 지체없이 얼굴까지 날아들어 가뜩이나 힘든 그들을 쉴새 없이 괴롭혔다. "젠장!" 갑자기 리오가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이럴 바에야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해? 너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눈에 뵈는 게 없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라고! 난 지금 당장 물과 음식이 필요해! 다리를 뻗고 쉴 곳이 필요하다고!" 주먹을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인 리오가 씩씩거리며 고개를 내리는가 싶더니, 일순 공포가 느 껴질 정도로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고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오솔길에서 벗어나, 왼편에 펼쳐진 들판 쪽으로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리오! 왜 그래?" "저 녀석이 드디어 완전히 미쳤나?" 엘이 걱정스럽게 외치며 리오의 뒤를 따르자, 리반 역시 투덜거리며 지친 다리로 비틀비틀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머지 않아 엘과 리반은 리오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목적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만치 떨어진 곳에, 어린아이 주먹크기의 노르스름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안 돼! 먹지 마!" 엘은 리오가 나무 열매를 막 입에 넣으려 할 때, 가까스로 그의 팔을 잡을 수 있었다. "왜?"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짧게 물었다.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만약 독이라도 들어있으면 어쩌려고?" "독은 무슨? 이건 그냥 평범한 나무열매야.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이미 베어 버렸지, 이렇게 클 때까지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리오의 억지 주장에 기가막힌 엘이 허공을 응시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리반이 가쁜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멍청이, 그거 먹으면 안 돼!" "이런 젠장! 왜? 너도 독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아무 말없이 다가온 리반이, 리오의 손에서 열매를 빼앗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 가며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이건 키에라 열매야." "먹을 수 있는 거야?" 질문을 던지는 엘의 얼굴에도 리오와 마찬가지로 간절한 희망이 배어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거긴 한데..." 리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오가 환호성을 지르며 잽싸게 손을 놀려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먹어선 안돼!" "먹을 수 있는 거라며? 왜 이랬다 저랬다하는 거야?" 리반이 큰 소리로 만류하자, 리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 말은 완전히 익은 다음엔 먹을 수 있다는 거야. 이건 아직 익으려면 멀었고. 다 익은 키에라는 불그스름한 노란색을 띠거든." "익은 거든 안 익은 거든 어차피 독이 든 건 아니잖아. 그건 먹을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멍청이! 억지도 부릴 때 부려야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먹든지 말든지 너 좋을 대로하라고!" 짜증을 못 참은 리반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휘적휘적 걸어가 나무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리오 역시 더 크게 목청을 높였다. "그래, 차라리 먹고 죽을 테다! 배 터지게 먹고 죽을 거라고!" 기진맥진할 정도로 지친 그들 세 사람은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안 돼, 리오. 너 그거 먹으면, 정말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플 거야. 조금만 더 참아. 먹을 수 있는 다른 걸 찾아보자." 설익은 과일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유발하는지 익히 알고 있는 엘은, 리오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걸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조용한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잠시 머뭇거리던 리오가,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서너 개의 열매를 슬쩍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계면쩍은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익지 않은 과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나도 잘 알아. 어렸을 때 종종 경험해 봤거든. 그 때마다 엄청 후회했고..."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건 피식거리는 엘의 웃음소리였다. 다음 순간 리반이 웃음을 터뜨렸고 ,리오 역시 실실거리다 크게 웃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오래 이어졌다. 후끈 달아올랐던 흥분이 웃음으로 바뀌며, 쉴새 없이 몸을 떨게 했고 눈물까지 줄줄 흘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간헐적인 웃음만 남겨졌을 때, 세 사람이 아무렇게나 기대고 있던 나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놀란 그들이 숨을 죽이는 순간, 작고 지저분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세 사람을 경악으로 밀어 넣었다. "저기.... 배 고파요?" 수줍은 듯 얼굴 반쪽만 내밀고, 온 몸을 나무 뒤에 감춘 아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 조,조금..." 엘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아이가 쭈뼛거리며 두 팔을 내밀었다. 아이의 손엔 알이 작은 감자 세 개가 들려 있었다. "이거....내 점심인데....같이 나눠 먹을래요?" 아이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세 사람의 얼굴에 일제히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니, 우린 괜찮...." "그래, 고맙다. 조금만 나눠 주겠니?" 엘은 재빨리 리반의 말허리를 끊으며 끼어 들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아이의 부족한 음식을 먹는다는 게, 마음 내키지 않는 건 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힘들게 내밀어진 아이의 온정을 거절해, 마음의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엘이 아이의 손에서 체온이 묻어 있는 감자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레아! 어디 있니? 레아!" "어, 엄마다! 엄마!" 아이의 소리를 들은 여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다, 세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내가 오빠들한테 먹을 걸 나눠 줬어!" "어...그래. 잘했다, 레아. 정말 착하구나." 그들에게 다가오는 젊은 여인은, 여기저기 기운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고, 몹시 피곤한 듯 다리를 조금씩 끌고 있었다. 또 햇볕에 그을린 마르고 초췌한 얼굴엔 짙은 그늘이 내리 덮여 있었다. 아무렇게 틀어 올린 머리엔 거칠게 다듬은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고, 밭일을 하다 왔는지 흙이 묻은 손엔, 끝이 뾰족하게 꺾인 녹슨 쇠붙이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짚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등에 메고 있었는데, 바구니 안엔 놀랍게도 갓난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여행자 분들이신가 보네요." 들고 있는 짐과 땀으로 얼룩진 세 사람을 살펴보던 여인이 말했다. "아, 예. 맞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리반이 정중히 인사말을 건넸고, 엘과 리오도 뒤따라 안녕하시냐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좀 쉬시다 가세요. 물과 감자 몇알 밖에는 대접할 것도 없지만...." "그래요! 우리 집에 가요!" 세 사람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레아가 흥분해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부드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여인이, 그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바짝 말라 하얗게 변한 입술을 움직였다. "이 근처엔 워낙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서 이런 답니다. 저희집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나무 때문에 지금은 안보이지만 저기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따라올 거라 생각하는지 여인이 종종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남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언덕을 오르자, 커다란 구멍처럼 보이는 굴뚝이 달린, 오두막집이 나타났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먼지바람을 맞은 오두막은, 벽이며 지붕할 것없이 거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고, 한쪽 귀퉁이가 썩은 나무 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아래쪽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엘은 나무 문 손잡이 부분의 구멍에 덧씌워진 낡고 해진 헝겊조각을 바라보다, 오두막 아래 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살던 집과 너무나 비슷한 오두막을 보니,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할머니가 불쑥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초라한 문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집안이 너무 좁고 지저분해서...." 머뭇거리며 말을 길게 늘이던 여인이, 거칠게 못이 박인 손을 들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냇가 나무그늘에 잠시만 앉아 쉬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말을 마친 여인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어린 딸의 손을 움켜쥐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에서 쉬다 가라고 하더니 왜 저러지?" 리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엘은 여인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지저분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들의 옷차림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집을 차마 보여 줄 수 없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답답한 집안 보단, 저 냇가가 훨씬 기분 좋은 휴식처가 될 것 같으니까 그런 거겠지. 땀과 먼지로 범벅인 얼굴도 씻을 수 있고 말이야." 가벼운 어조로 말한 엘이 앞서 언덕을 내려가자, 리오와 리반이 터덜거리며 뒤를 따랐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 땀을 식혀 주는 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실린 풍요로운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엘은 가슴 가득 바람을 들이 마셨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 바보! 멍청이!" 엘이 쏜살같이 언덕을 달려 내려가자,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와 리반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늦게가 아니라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바보, 멍청인 것 같은 데?" "아니, 가장 늦게 도착하는 녀석이 바보, 멍청이다!" 목소리를 높인 리오가 낄낄거리며 전속력으로 언덕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리오! 너 정말 이럴 래?" 버럭 소리친 리반마저, 붉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자, 엘의 입술에서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메릴랭이라면 잘못 오셨네요. 다시 마을로 내려가셔서 앞으로 연결된 큰 길을 쪽 따라가시면 어렵지 않게 메릴랭에 도착할 수 있으실 거예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과 쌍둥이 형제들에게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곳에서 메릴랭으로 직접 가는 방법은 없나요? 그러니까 마을을 통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 말이에요." 엘은 말을 끝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에게 씩 웃어 보였다. "있긴 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리오가 우물거리던 감자를 꿀꺽 삼키고 재빨리 말했다. "저기 언덕 아래 나있는 길로 올라가시면 작은 강이 나오는데요.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쭉 따라가시면 메릴랭과 연결되는 길이 나타날 겁니다." "그런 방법으로 가면 메릴랭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요, 저도 그건 잘.... 말만 들었지 실제로 가본 적이 없거든요." 여인이 질문을 한 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혹시 이 근처에서 말을 구할 수 있습니까?" 리반이 중요한 문제를 꺼내자, 엘과 리오의 시선 역시 긴장한 채 여인의 입술에 쏠렸다. "말을 사시려면 당연히 마을로 가셔야죠. 이 근처에 말이라곤 시즈아저씨 밖에 없는데, 워낙 애지중지하는 말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팔지 않으실 거예요. 마치 친자식이라도 된 것처럼 대하시거든요." 그럼 이 먼지 풀풀 나는 길을 다시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건가?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리오와 리반을 바라봤다. 그들도 그녀에게 잔뜩 흐려진 어두운 시선을 던졌다. "엄마, 우리 번개도 있잖아." 여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레아가 작게 소곤거렸다. "어휴, 그건..." "예? 번개라고요? 혹시 말을 갖고 계신가요?" 여인이 뭐라 말하기 전에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 하지만...." "그 말, 저희에게 파십시오! 부탁 드립니다!" 이번엔 리반이 여인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게...저..." 엘은 벌떡 몸을 세운 뒤, 여인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어서 일어나시죠." 여인은 우뚝 서 있는 세 사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엘의 손을 잡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을 오두막과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구간으로 안내했다. 놀랍게도 헛간을 겸한 마구간은 오두막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지어진 작은 목조건물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을 눈치챘는지, 여인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남편이 이 마구간을 지은 다음, 우리 집을 새로 지으려 했거든요. 그런데 마구간을 짓고 얼마 안있다.... 병에 걸려 그만...." 힘없이 말꼬리를 흐리던 여인이, 마구간 문에 걸려 있는 녹슨 걸쇠를 비틀어 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번개는 남편 말이에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지금보다 농사를 크게 지어서, 마을에 채소를 가져가 팔았거든요. 그 때 채소를 운반하기위해 마련한 거예요." 드디어 문이 열리며 불쾌한 냄새가 확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을 의심할 만큼 볼품없는 늙은 말이 눈을 끔벅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좀.... 늙었죠?" 얼굴을 붉힌 여인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오, 기절할 만큼 늙었네요. 지금껏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엘은 팔꿈치로 재빨리 리오의 옆구리를 꾹 찔러 말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는 리오를 무시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말씀대로 좀 늙긴 했지만, 그런 대로 쓸만해 보이는군요.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번개를 사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리반은 입을 딱 벌렸고, 리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뿜었다. "하지만... 마구도 다 낡았는데..." "상관없습니다." 엘은 단호하게 말한 다음, 양쪽에서 팔을 잡고 늘어지는 리오와 리반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어루만지고 있는 레아에게 다가갔다.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서운하겠다." "저.... 우리 번개 잘해 줄 거죠?" "그럼, 너만큼은 안되더라도 우리가 정말 잘해줄 테니 걱정하지마." "번개는 노래를 불러주면 아주 좋아해요. 잘 때도 꼭 노래를 불러줘야 자고요. 오빠가 나대신 번개한테 노래 불러 줄 수 있어요?" 엘은 숨이 막혀 오자 서둘러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시선을 리오와 리반에게 돌렸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리반과, 입을 벌리고 히죽거리는 리오를 발견한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아, 걱정할 필요없어. 노래라면 저기 저 빨간 머리 오빠들을 빼놓을 수 없단다. 한마디로 말해 두 사람 노래실력이 끝내 준다는 말이지." "야, 알렉스! 왜 우릴 걸고 넘어지는 거야? 나한테 노래를 부르라고? 절대 불가능해!" "그래, 이건 말도 안 돼! 정작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군데? 저 늙은 해골 앞에서 노래를 부르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든지, 입술이 뭉개질 때까지 얻어맞는 쪽을 택하겠다!" 맹렬히 힐책을 퍼붓는 두 사람을 향해, 엘은 재빨리 말조심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레아를 알아챈 리오와 리반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죽을 상을 하고 입을 맞춰 소리쳤다. "그래, 우리가 노래를 불러줄게!" 엘은, 입을 다물기 전 리오가 슬쩍 갖다 붙인 '젠장'이란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일부 새어 나간 웃음소리를 들은, 리오와 리반의 매서운 시선이 이미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엘은 잔기침을 하며 슬쩍 두 사람을 외면한 채, 레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오빠들은 열심히 노래연습을 해야 할 테니 우린 나가 있자." 리오와 리반을 바라보는 엘의 눈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내 생각엔 무엇보다 자장가부터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두 사람, 열심히 수고해!"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그들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어 보인 후 재빨리 마구간을 벗어났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찾아야 되는 사람은,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엘이라는 소녀다." 사일러스는 말을 멈추고 빈틈없는 눈으로 부하들을 쭉 훑어본 다음, 한층 단호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말해봐라, 카셀!" "예, 이름이 엘인 소녀로 검은 머리카락과.... 초...록..." 카셀이 사일러스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있던 에지몬트가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보라색!" "아, 보라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엘이라는 소녀입니다!" 카셀이 자신있게 소리친 순간, 에지몬트가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이마를 철썩 내려쳤다. "멍청이! 초록색 눈이 아니고 보라색 눈이다! 알았나? 보라색 눈이란 말이다!" 사일러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매섭게 노려보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던 카셀이, 목뼈라도 부러진 듯 고개를 푹 꺾었다. 그런 카셀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참던 에지몬트는, 마찬가지로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는 제러드를 향해 얼굴을 가져갔다. "근데 왜 카셀 선배님은 초록색 눈을 고집하신 거죠?" "저 녀석 부인이 초록색 눈동자를 갖고 있거든. 그래서 술만 마시면 세상에서 초록색만큼 아름다운 건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제러드가 히죽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셀은 생긴 거와 안 어울리게 귀여운 구석이 있거든." 근엄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이케르가 불쑥 끼어 들어 한마디 보탰다. 그러자 카셀이 고개를 치켜들고 한쪽 볼을 바르르 떨며, 낄낄거리는 세 사람을 죽일 듯 노려봤다. 맹렬히 타오르는 그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가장 만만한 에지몬트에게 몰려들었다. "애송이, 입 다물어! 왼쪽 눈마저 물들이고 싶지 않으면!" 세르피언과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에서, 오른쪽 눈두덩을 팔꿈치로 호되게 가격당한 에지몬트는, 재빨리 얼굴을 굳히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찌 생각하면 영광의 상처일 수도 있지만, 퉁퉁 부어 올라 앞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들바람에도 시린 통증이 느껴지는 괴로움을, 두 배로 감수할 수는 없었다. "조용히!" 사일러스가 간단한 말로 일순 풀어진 긴장을 되돌렸다. "이제 말도 웬만큼 체력을 회복한 것 같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어서 물어봐라! 나중에 딴소리하는 녀석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수색을 시작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제러드가 늘 그렇듯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루지아국 최남단 국경도시인 메릴랭이다!" "메릴랭이요?" 사일러스가 질문을 던진 에지몬트부터 시작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네 기사들을 차례로 둘러봤다. "그래, 우리가 찾아야 될 소녀가 거쳐 갈 것이 거의 확실한 장소가 바로 메릴랭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그루지아 국에서 일단 리아잔 제국에 발을 들여놓으면 당장 눈 앞에 나타나는 길만해도 한두 갈래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메릴랭에서 소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메릴랭이라면 상당히 면적이 넓은 도신데, 거기서 작은 소녀를 찾는단 말입니까?" 세르피언이 잔뜩 가라앉은 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바르테즈 공국을 출발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침울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기사들도,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비록 작전에서 빠지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지만, 애송이라 부르던 에지몬트와 비겼다는 건, 세르피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자기자신에게 진한 모멸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중심가부터 수색을 시작해 변두리로 이동할 생각이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전하께서 내게 친히 명령을 내리지도 않으셨을 테고, 내가 너희들을 자신있게 선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일러스가 힘있게 말하자, 제러드, 카셀, 이케르, 에지몬트는 물론, 기가 죽어있던 세르피언의 눈에도 결의가 불타 올랐다. 사일러스는 말을 극도로 아끼는 성격이었지만, 꼭 필요할 때는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부하들을 확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다. "질문없으면 그만 출발하겠다! 갈 길이 머니 서둘러라!" "그런데 그 엘이란 소녀는 몇 살입니까? 설마 코흘리개 어린애는 아니겠죠?" 사일러스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에지몬트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고, 열 일곱이나 열 여덟 정도 됐을 거다!" 어린애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에지몬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그를 보며 사일러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제러드는 피식 웃었으며 카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한 그에게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 세르피언은 입술을 실룩였으며, 이케르는 늘 그렇듯 과묵한 얼굴로 자신들이 말을 달려야 할 들판을 바라봤다. 잠시 후, 유일하게 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일러스를 제외한 네 명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찾아야 할 보라색 눈동자의 소녀를 막연히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임마! 좀 빨리 걸어!" 버럭 소리친 리오가 고삐를 당기자, 말이 불만스러운 듯 두툼한 입술을 떨며 푸르르 소리를 냈다. "어휴! 우리 꼴이 이게 뭐야? 혼자 걷는 것도 힘들어 미치겠는데, 이런 늙은 굼벵이 녀석을 질질 끌고 가야 한다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만 좀 툴툴거려, 리오." 엘이 퉁명스런 어조로 면박을 주자, 계면적은 얼굴로 변한 리오가 목덜미를 벅벅 긁어 댔다. 사실 그녀도 슬그머니 불편해진 마음 탓에, 생각보다 더 거친 목소리가 나온 거였다. 솔직히 말해 짐 하나 못 실을 말을 사서, 고삐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게 된 건, 순전히 그녀 탓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굳이 이 늙은 말을 산 건 무슨 이유에서야? 거기 레아란 아이도 무척 섭섭해 하던데...." 리반이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집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눈에 빤히 보이잖아. 그런데도 우릴 친절히 대접해 주었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오늘 우리가 먹고 또 얻어 온 음식이 그 모녀에겐 한 달 치 식량은 될걸?" "도와주고 싶었다면 그냥 돈을 주고 와도 되잖아." "아니, 아마 그런 돈은 받지 않았을 거야. 우린 고마움의 표현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동정으로 생각할 테니까. 어쩌면 더 나쁘게, 우리가 내미는 돈을 적선같은 거로 오해할 수도 있을 테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리반은 물론 리오 역시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묵묵이 걸음을 옮겼다. 엘은 두 사람을 흘긋흘긋 살피다, 풀 죽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너희 의견은 묻지도 않고... 아니,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내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했어.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게.... 미안해." 엘의 사과가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뜬 리반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알렉스. 사과할 필요없어. 나도, 그냥 돈을 내밀면 받지 않았을 거라는 네 말에 동의하니까. 그러니까 굳이 네가 아니라도 우린 어차피 이 말을 샀을 거라는 얘기야, 그렇지, 리오?" "아니, 나라면 사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친절한 모녀를 도왔다는 게 은근히 기분 좋으니까, 미안하다느니 하는 쓸데 없는 소리 할 필요없어." 심드렁하게 말한 리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엘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마음은 약해서..." "어쨌든 간에 만약 이 늙은 녀석을 그 정도 가격에 샀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우리가 완전히 미친 줄 알 거야. 그 돈이면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꽤 훌륭한 말로 두 마리는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엘은 리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 늙은 말을 찬찬히 살펴봤다.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말은 그런 대로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사실 답답한 곳에 갇혀 있다 밖에 나온 것이 기분 좋은지, 쉴새 없이 윗니를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꼭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어나서 어제오늘처럼 많이 걸어본 건 처음이야. 에...아니 알렉스 너는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엘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를 향해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 리오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벌리다가, 리반을 흘긋 바라보고나서 알았다는 듯 그 저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다. 엘도 리오가 그녀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하고, 듣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 그가 비밀을 지켜 달라는 그녀의 부탁 때문에, 속 시원히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는 것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리오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답답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엘은 은근히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리오의 질문에 솔직히 답할 수 있을지, 그녀의 초라한 과거를 그 앞에 드러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엘은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써 얼굴을 밝게 하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겨 리오에게 다가갔다. "이제 내 차례야." "뭐가?"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던 리오가 한쪽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엘은 고삐를 향해 좀더 길게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말 끌고 가는 거, 번갈아 하기로 했잖아. 처음엔 너, 그리고 나, 다음은 리반, 이렇게."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한 그녀가 고삐를 잡으려 하자, 리오가 슬쩍 옆으로 팔을 치웠다. "내가 계속 할게." "왜?"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너무나 싱거운 대답이 들려 오자, 그녀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렉스, 그냥 리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 저 녀석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당하니까." 엘은 리반의 말을 들으며, 기어코 리오를 따라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고삐나 이리 내놔!" "글쎄 내가 데리고 가겠다니까!" 크게 소리친 리오가 속도를 높여 막무가내로 말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별 뾰족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자, 엘은 그저 리오의 괜한 변덕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리오, 엉뚱한 짓 그만해. 네가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피곤하단 말이야." 엘은 걸음을 빨리해 리오와 나란히 발을 맞추며, 한숨 섞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끈질긴 녀석! 내가 한다고 했잖아!" 리오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누가 끈질긴데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답답한 마음에 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소리지르지 마! 말이 쉽게 놀란다는 거 몰라?" 리오가 황급히 주의를 주자, 엘은 반사적으로 찔끔해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노환 때문에 귀가 좋지 않은지 늙은 말은 커다란 눈만 끔벅일 뿐이었다. "어휴! 그럼 그렇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엘은, 투덜거리며 혀를 차는 리오의 손에서 재빨리 고삐를 낚아챘다. "잡았다! 뺏기고 싶지 않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지. 아무튼 네 차례가 금방 돌아올 테니 그 때를 생각하며 팔이나 풀고 있어." "천하의 고집불통 같으니! 나 혼자, 아니, 리반하고 나만 해도 충분하단 말이야!" "글쎄 왜 자꾸 날 빼려는...." 조금도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엘은 말을 멈추고 리오를 똑바로 노려봤다. 내가 여자라서 그러는 거야. 그게 틀림없어. "리오! 이 멍청이!" 엘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리오는 물론 리반까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다시는 이러지 마! 다시는! 알았어, 임마? 알아들었느냐고?" "그래... 알았어." 리오가 주눅든 어조로 말하며 흘긋흘긋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어느새 울컥 치밀었던 화가 바람 빠지듯 가라앉았지만, 엘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다시 한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 하면, 네 녀석 머리통을 구정물에 처박아 버리고 말 거야! 알아들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리반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리오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노려봤다. "왜 대답을 안 해?" "알았다고 했잖아!" 리오의 볼멘 소리에, 너무 심했나 하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고 그로 인해 그들의 짐이 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엘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지만 이미 두 사람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그녀가, 더 이상의 짐을 안길 수는 없었다. 내가 여자든 남자든 우린 친구인데, 왜 리오는 전과 다르게 날 대하는 걸까? 친구 사이에서도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녀가 여자임을 알게 된 후, 미묘하게 달라진 리오의 태도에, 엘은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말이야." 그녀와 나란히 걷던 리오가 슬쩍 말을 걸었다. 엘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리오가 흘긋 리반을 쳐다본 다음, 말소리를 낮췄다. "이제 너무 과격하거나 험한 말은 쓰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앞으로는 되도록 고운말을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뭐 그런 말이야." "웃긴 녀석! 실없는 소리 그만 주절거리고 부지런히 발이나 놀려! 굼뜬 엉덩이를 호되게 갈겨 주기 전에!" 엘은 퉁명스러운 말을 끝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리오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 정도면 고운말 아니야? 좀 더 해 볼까?"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으니까 제발 그만 둬. 어휴! 네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한 내가 바보지!" 엘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으로 리오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리오도 주먹 쥔 손으로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툭 건드렸다. 밝은 웃음을 나누던 두 사람의 손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엘과 리오는 서로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동시에 씩 웃고 나서 발을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서너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을 따라가는 리반의 눈엔 어두운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으,으아악! 저리 비켜! 가까이 오지마!" 요란한 비명이 터져 나오자 꾸벅꾸벅 선잠에 빠져 있던 기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두텁게 내려진 휘장으로 몰려들었다. "황태자 전하! 고정하십시오!" 자일스 황태자의 수석시종인 노소프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자일스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그 순간 그가 눈을 번쩍 뜨며, 굽히고 있는 노소프의 목을 왼손으로 와락 휘어 감았다. "죽여 버릴 테다!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자일스가 확연히 보일 만큼 격렬하게 몸을 떨며 악을 써대자,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휘장 밖에 서 있던 기사들이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환했다. "전하, 꿈을 꾸신 것 뿐입니다. 단순한 꿈일 뿐입니다." 노소프는 자신의 목에 감긴 자일스의 손을 풀어 정중히 침대에 내려놨다. 얼굴엔 아직 핏기가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금 잦아든 몸의 경련으로 그가 많이 진정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일스 황태자는 황궁에 발을 들여놓은 3일 전부터, 호위기사들을 죄다 불러 모아 밤이건 낮 이건 자신을 지키게 했다. 수가 모자란다는 그의 말에 80명이 채 안됐던 호위기사들은 20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 외에도 실력이 있다는 기사들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가 내실에까지 기사들 수십 명을 불러, 밤마다 침대를 가린 휘장 밖에서 자신을 지키게 하자, 사람들은 자일스 황태자가 드디어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는 말을 수군대기 시작했다. 황궁에 가득 퍼진 소문처럼, 자일스 황태자는 정말 완전히 실성한 사람 같았다. 밤마다 목이 터져라 질러 대는 비명과 전보다 한층 사납고 포악해진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은 가뜩이나 두려웠던 자일스를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노소프를 비롯해서 극소수이긴 해도, 그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동정은 자일스의 행동이 아니라 그의 변해버린 외모에서 기인한 거였다. 비록 아부가 섞이긴 했지만, 황궁 제일의 미남이라는 칭송을 듣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팔과 눈을 잃게 되었다니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노소프는 자신의 눈에 담긴 연민을 숨기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기사들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자일스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잠깐 기다려라, 노소프." 자일스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했다. 그는 애써 놀라움을 숨기려 하는 노소프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을 일으키게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무제한적인 돈과 사람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할 테니, 아시리움 성전에 소속된 자들을 최대한 많이 손에 넣어라. 하찮은 시녀에서 대사제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매수해라. 넘어오지 않는 것들은 깨끗하게 없애 버리고, 우리 쪽으로 넘어온 이들에게서 아시리움에 관한 모든 정보를 끌어 모아라.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최대한 빨리 세렌국에 사람을 보내 알렉시스 왕자에 대해 알아보게 해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자일스에게서 나온 명령은 항상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는 노소프를 극도로 당황하게했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사이, 자일스가 음산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먼저 놈에게 알맞은 형벌을 내린 다음, 감히 날 함부로 대한 아시리움을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가 기어코 내 손으로 움켜쥐고 말 것이다." 노소프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목숨 바쳐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또 한가지가 남았다. 실력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만큼 고분고분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런 마법사를 찾아내라." 말을 멈춘 자일스가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다음에... 내가 완전한 힘을 갖춘 후에 그 놈을.... 날 이렇게 만든 그 마법사 놈을 한점 한점 저며 죽일 것이다." 엉망으로 헤집어져, 이미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자일스의 눈에서, 번득이는 빛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노소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서늘하게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밀어 넣으며, 절도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28장. 메릴랭 도착------------------------------------------------------------------- "생각보다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여기 랑힐 시장, 타국에서도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잖아. 사실 다른 국경도시에 비해 메릴랭이 면적도 크고 인구도 많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유동인구야. 이 곳 토박이가 아니라. 여긴 리아잔 제국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대상(大商)들도 많고 행상(行商)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고." 엘은 리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 리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오 녀석, 또 어디로 샌 거야? 하여튼 눈만 떼면 어느새 사라진다니까." 리반이 혀를 차는 걸로 말을 끝냈을 때, 뒤쪽에서 사람들을 이리저리 헤치며 달려오는 리오가 보였다. "다른 데로 가려면 말을 하고 가야지! 만약 잘못해서 서로 놓치게 되면 여기선 찾을 수도 없단 말이야!" "둘 다 이리 와 봐!" 헐레벌떡 뛰어온 리오가, 퉁명스러운 리반의 말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두 사람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인데?" 엉거주춤 끌려가던 엘이 질문을 던지자, 리오가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발견했어!" "꼭 필요한 거? 그게 뭔데?" "분명히 별 볼일 없는 걸 거야. 혹시 이상한 군것질거리 발견하고 이러는 거 아니야?" 엘의 질문에 뒤이어 미간에 주름을 잡은 리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하지 말고 일단 따라와 보라고!" 자신있게 소리친 리오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허름해 보이는 작은 상점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상점엔 간판조차 붙어 있지 않았고, 입구엔 문대신 때가 시커멓게 낀 너덜거리는 천이 줄에 꿰어져,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말이 좋아 상점이지 겉모습은 버려진 폐가처럼 보였다. 엘과 리반은 마음 내키지 않는다는 시선을 교환한 후, 이미 천을 젖히고 몸을 들이미는 리오의 뒤를 따랐다. 안은 어두컴컴했고,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차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안쪽에선 무언가를 끊이고 있는지 뿌연 연기까지 더해져, 가뜩이나 묵직한 공기를 더욱 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매캐함에 섞여 익숙한 냄새가 맡아지자, 엘은 어렵지 않게 그것이 갖가지 약초냄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치료사의 집이나 약재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냄새도 그러했지만, 가게 여기저기 매어 있는 줄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건조된 약초와 상점 안을 채우고 있는 갖가지 크기의 상자와 단지, 그리고 병들이 그녀의 짐작이 터무니없진 않을 거라는 걸 뒷받침해주었다. "말도 안하고 냉큼 뛰어나가더니만 이제야 기어들어 오는군."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가게 안쪽에 세워진 나무판 뒤에서 할머니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노인은 매우 작은 키에, 앙상한 뼈가 여기저기 툭툭 불어질 만큼 심하게 말라 있었다. 또 머리며 눈썹까지 온통 하얗게 세었고, 광대뼈 아래가 움푹 패인 얼굴엔, 깊고 얕은 주름들이 빈틈없이 잡혀 있었다. 사실 어떻게 살아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늙고 약해 보였지만, 가느다랗게 뜬 잿빛 눈동자는 빈틈없고 예리해 보였다. 그런데 노인을 좀 기묘하고 섬뜩하게까지 보이게 하는 건, 유달리 빨갛게 칠해진 얇은 입술이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보고 있은 거야? 늙은이 처음 봐?" 노인이 버럭 역정을 내자 리오가 은근히 주눅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요기 상점 앞에 있던 젊은 아가씨는 어디로 갔습니까?" "개는 물건을 사러 온 거지, 여기서 일하는 애가 아니야! 아무튼 뭐가 필요한지 빨리 말해 봐! 이것저것 잡소리 풀어놓지 말고!" 노인의 매서운 시선은 물론, 엘과 리반의 떨떠름한 눈초리까지 몰려들자 리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 그 아가씨가 여기 머리색깔을 바꿔 주는 약이 있다고 하던데...." "누구야?" 노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좀 전에 문 앞에 서 있었다는 아가씨...." "이렇게 답답하기는! 누가 머리 색을 바꿀 거냐고?" 노인이 리오의 말을 가차없이 자르며 목청을 높였다. "그걸 꼭 아셔야 됩니까?" 질문을 던진 엘에게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당연하지. 뭐든지 자신에게 맞는 게 있는 반면, 아닌 것도 있어.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쓸데 없는 말 집어치우고, 누가 머리 색을 바꿀 건지만 말해 봐. 내가 그 사람에게 맞는 걸 골라 줄 테니까." "여기 이 친구입니다." 리오가 엘을 가리키면 냉큼 대답하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싫어! 왜 나야? 난 머리 색깔 바꾸고 싶은 마음 손톱만큼도 없어! 바꾸려면 리오, 네가 바꿔!" 엘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리오의 응수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당연히 네가 바꿔야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도...." 노인의 눈치를 흘긋 살피던 리오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더욱 강경해진 어조로 슬쩍 말을 바꿨다. "아무튼 변화가 필요한 건 우리 중에 너잖아." "나도 리오 의견에 동의해." 눈을 깜박이고 있던 리반이 리오를 거들고 나섰다. "말도 안 돼! 난 흔히 볼 수 있는 흑발일 뿐이야. 솔직히 눈에 확 띄는 건 너희 두 사람이잖아. 빨간 머리 쌍둥이보다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단 말이야." 엘은 펄쩍 뛰다시피 하며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비록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리오와 리반에게 은근히 수긍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걸 눈치챈 그녀는, 한층 의기양양해졌다. "빨간 머리가 좀... 그런 건 사실이지만 넌 흔히 볼 수 있는 흑발이 아니야. 넌 그러니까.... 네 머리카락 색깔은.... 말하자면, 그 뭐랄까...." "단순한 검은 색이지." 엘이 냉큼 끼어 들자 리오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안 사려면 여기서 나가!" 노인이 나무 판을 내려치며 짜증 섞인 고함을 버럭 질렀다. 소스라치게 놀란 세 사람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자, 긴장 어린 침묵이 찾아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셋이 다 바꾸겠습니다!" "셋이 다 바꾼다고? 말도 안 돼!" "바꾸려면 너나 바꿔!" 강경히 반대하고 나서는 엘과 리반을 번갈아 바라보던 리오가, 놀랄 만큼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펄쩍 뛰며 싫다고 할 일이 아니야. 지금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 머리색깔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 반박하려던 엘은 리오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자, 힘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사실 무사히 바르테즈 공국에 도착하는 것이 최우선이지 머리 색깔 따위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리반 역시 그녀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침울한 얼굴을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좀 전의 말처럼 우리 세 명 모두 머리 색을 바꾸겠습니다."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은 리오가 단호하게 말하자,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노인이 그 즉시 병들이 즐비한 선반에서, 작은 병 세 개를 꺼내 리오에게 내밀었다. "푸른빛이 도는 병은 검은 머리, 노란빛이 도는 두 개의 병은 빨간 머리들 거다. 그걸 물에 풀어 머리에 골고루 바르면 돼. 값은 좀 비싸지만 효과는 탁월할거야. 가격은 한 병당 1큐어 50디센토니까.... 세 병이면....." "4큐어 50디센토가 되겠군요." 노인이 말을 길게 늘이며 이맛살을 찌푸리자, 리오가 냉큼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우라질 놈! 누가 그걸 몰라?" 사납게 소리친 노인이 리오를 덮칠 듯 황급히 다가와 그의 손에서 돈을 낚아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독한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좀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리반이 리오와 엘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엘은 조금 망설이며 문 쪽으로 서너 걸음 걷다 다시 돌아가, 돈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노인 앞에 섰다. "무슨 일이야? 난 한번 판 건 절대 안 바꿔 줘!" 날카롭게 눈꼬리를 치켜 올린 노인이 빨간 입술을 뒤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시 메릴랭에 마법사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한층 가느다랗게 떠진 눈이 엘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핀 뒤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마법사라.... 대단히 강한 마법사를 알고 있긴 한데.... 어디 살고 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노인이 말을 질질 늘이자, 엘은 눈치 빠르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부탁 드립니다." 그녀의 손에서 돈을 걷어들이는 노인의 눈이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그래, 이제야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는군. 다루스만이라는 대상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시장만 나가면 금방이지. 코흘리개라도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가서 샤메가 보내 왔다는 말을 해. 그러면 다루스만이 너희를 만나 줄 테니까." "다루스만이란 대상이요? 그럼 상인이면서 마법사라는 말씀입니까?" 노인이 거칠게 킬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루스만이 마법사가 아니라 그가 데리고 있는 타마라가 마법사지. 이제 그만 귀찮게 하고 어서 가 봐." 엘은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문 가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리오와 리반에게 다가갔다. 그 즉시 상점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앞다투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무슨 냄새가 그렇게 지독한지 기절하는 줄 알았네. 한 십 년은 환기를 안 시켰나 봐. 코가 마비됐는지 지금도 얼얼해." 리오가 코를 벌름거리며 투덜거렸다. "근데 마법사는 왜?" 리반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엘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 있거든. 혹시 그런 능력이 있는 마법사를 만난다면, 우린 힘들게 여행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꽤나 놀란 듯 리오와 리반 둘 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마법사라니, 정말 좋은 생각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손으로 턱을 비비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리반이 잠시 후 질문을 던졌다. "전에 그런 식으로 먼 곳을 오간적이 있어." "그럼 이번 여행이 오늘 안에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운이 좋다면." 엘과 리반이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대답하자, 리오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빨리 움직여! 다루스만인지 뭔가 하는 사람을 찾아야 이 지긋지긋한 여행을 한시라도 빨리 끝낼 수 있을 거 아니야!" 말을 마친 리오가 발을 구르다시피 퍽퍽 소리를 내며 걸어가자, 리반이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의 눈엔 미안함과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이번 여행이 좀 더 오래 지속됐으면 좋겠어, 리오. 이렇게 금방 끝나는 건 나도 싫어. 하지만 너나 리반이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되는 건.... 더욱 싫어.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엘은 터벅터벅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눈 앞을 막고 있던 육중한 짐마차가 움직이자, 저만치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빨간 머리가 보였다. "이 굼벵아!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빨리 안 오면 우리끼리 간다!" 으르는 듯이 사납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엘은 리오의 화가 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피어올랐다. "알았어! 천하의 심술쟁이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엘은 환하게 웃으며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으아아!" 자신의 부하들 앞에서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일러스가 비명을, 그것도 겨우 들릴까 말까 할 정도로 미약한 비명을 터뜨리자, 기사들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일러스를 내려다보는 그들의 눈엔, 하나같이 짙은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편한 심경은, 사일러스가 느끼는 괴로운 자기혐오와 숨막히는 자괴감에 비해서는 애들 장난과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 만만했던 사일러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괴로움을 안겨 준 사건은 어제 저녁에 발생했다.삼일 동안 간간이 짧은 휴식만을 취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린 그들은, 바닥으로 꼬꾸라지기 일보직전에 몰려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허름한 마구간을 운 좋게-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발견한 그들은 마지막 힘을 내어 자신들의 소중한 말을 돌봐 준 다음, 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마구간에 발을 디밀었다. 비록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비틀대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사일러스는 의연한 걸음으로 마구간에 들어왔다. 심지어 그는 번개같이 빠른 동작으로 검을 빼 들어, 지푸라기 속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독사를 두 동강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켈름 기사단장다운 판단력과 강인함이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독사가 두 동강나기 전, 그의 다리를 물었다는 데에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사일러스가 갑자기 바닥에 넘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기사들은 작은 이빨자국에 칼집을 내여 독을 대충 빨아버린 다음, 그들이 그 날 낮에 지나온 마을로 되돌아가 황급히 치료사를 찾았다. 그들의 빠른 조치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사일러스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조금도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몸에 퍼진 일부 독이 그의 사지를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만들었고,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게 했으며, 혀까지 돌덩이처럼 굳게했던 것이다.순식간에 사일러스를 덮친 이 불행한 사건은, 한시가 급한 그들의 임무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사일러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즉 다른 기사들을 먼저 메릴랭에 보내고, 자신은 말 등에 올라탈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그들을 뒤따라 가기로 한 것이다. 이 조치는 눈치 빠른 에지몬트의 활약으로 기사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으으...." "부탁한다고요? 알겠습니다, 형 아니, 단장님." 사일러스의 말을 알아챈 에지몬트가 재빨리 말했다. "아아으.." "꼭 찾아야 한다고요? 최선을 다할 테니 단장님은 건강을 되찾는 일에만 전념하십시오." 사일러스의 눈에 감돌던 고마움이 갑자기 다급함으로 변했다. "아아..." "빨리 가라고요?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빨리 출발해야겠습니다!" 에지몬트를 비롯한 기사들이 황급히 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일러스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러 댔다. "알았어요, 알았어! 빨리 가고 있잖아요? 저렇게 성질이 급해서야,원. 그럼 우린 갈 테니 몸조리 잘해요, 큰형!" 에지몬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사일러스의 괴성은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된 사일러스가 점점 악을 써대자, 기사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시고, 저희만 믿으십시오, 단장님!" "빨리 완쾌하시길 빌겠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단장님!" "그럼 메릴랭에서 만나요, 큰형!" 에지몬트의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히자, 사일러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으....아아아!" 그의 가슴 속에서 피 끓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안 돼!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내 말을 들어야 해! 엘은 남장을 하고 있을 거란 말이다! 또 일행도 있다! 그러니까 빨간 머리 소년과 함께 있는 검은 머리 소년을 찾아야 한단 말이다! 어서 돌아와! 숨 넘어가는 듯한, 사일러스의 괴성을 듣는 기사들의 얼굴엔, 저마다 짙은 연민과 근심이 가득했다. "사일러스 단장님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제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카셀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대로 떠나려니 발이 안 떨어지는군." "하지만 메릴랭에 먼저 가서 임무를 수행하라는 건 단장님이 내리신 명령이잖아. 우리가 감히 어길 수야 없지." 세르피언의 말에 섞여 다시 한번 사일러스의 괴성이 문을 뚫고 들려 왔다. "대여섯 번 정도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할거라더니... 치료사 말이 맞나 봐요. 불쌍한 형님. 열이 잔뜩 올라 저렇게 헛소리까지 하다니..." 에지몬트의 얼굴은 사일러스에 대한 걱정과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자책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케르가 비장함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단장님을 생각한다면 이러고 있어서는 안 돼! 한시라도 빨리 메릴랭에 도착해 엘이란 소녀를 찾는 것이야말로 단장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이케르의 말이 끝나는 순간, 네 기사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치료사의 집에서 나와, 뿌연 먼지를 피어 올리며 전속력으로 메릴랭을 향해 달렸다. ------------------------------------------------------------------- "이쪽입니다." 층계를 다 오르자 그들을 안내하는 하인이,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 복도를 가리키며 정중히 말했다.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는, 여기저기서 보이는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넓적다리까지 오는 회색의 긴 윗도리와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폭이 넓은 푸른색 바지 차림이었다. "제법 잘 꾸며 놓았군." 이 곳 저 곳을 두리번거리던 리오가 지나가는 어조로 말하자, 하인이 좀 불쾌하다는 얼굴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한 나라의 왕자인 리오와 리반에게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겠지만, 그들이 안내되고 있는 저택은 혀를 내두를 만큼 크고 화려했다. 아시리움 성전에 그런 대로 익숙해져 있었기 망정이지, 과거의 엘이었다면 저택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현재 걷고 있는 복도만 보더라도, 마차라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그 넓은 바닥 전체에 걸쳐, 엄청나게 큰 정사각형 대리석이 반듯하게 깔려 있었다. 또 벽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고, 문양 아래엔 일정한 간격으로 아름다운 그림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걷고 또 걷던 하인이 마침내 멈춰 선 곳은, 저택 깊숙이 들어온 곳에서도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 앞이었다. "이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주인님께서 오실 겁니다. 그리고 갖고 계신 무기는 모두 저에게 주십시오. 바로 이 옆이 보관실이니, 이 곳을 나가실 때 돌려 드리겠습니다. 무기를 풀지 않으면 주인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은 찜찜함이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차고있던 검을 빼 하인에게 내밀었다. "갖고 계신 모든 무기를 주셔야 합니다." 엘이 단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을 때,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하인이 강경하게 말했다.그녀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은빛 단도를 하인의 팔에 올렸다. "그럼 편히 쉬고 계십시오." 하인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들이 안내 된 방은 일종의 접빈실(接賓室) 같았다. 돔 형식의 천장아래 중앙부분에, 거대한 탁자가 자리잡고 있었고, 그 양 옆으로 긴 등받이를 가진 의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또한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편안한 담소를 위한 안락의자들이 놓여 있었으며, 나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선반엔 갖가지 술이 갖추어져 있었다. 세 사람은 넓은 방안을 휘휘 둘러보며 탁자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대단한 갑부로군." 리반의 말에 공감하는지 리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장사도 꽤 할만한가 봐. 이 정도로 성공한 사람은 드물겠지만. 리반, 기억 나? 작년에 갔던 헤...뭐라던 사람의 저택말이야. 체르몬 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이었지만 이 정도로 화려하진 않았잖아. 그렇지?" "그래, 기억 나.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네가 그집 막내딸한테 반해 왕궁에 안 돌아가겠다고 고집 부리며 길길이 뛰기까지 했는데." "내,내가 언제?" 펄쩍 뛰며 소리친 리오가 걱정스런 눈으로 흘끗 엘을 살폈다.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안 봐도 눈에 선한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난 그저 정중하게 대해줬을 뿐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어! 사실은 클로델이 먼저 나한테 접근한 거란 말이야! 복도를 지나는데 갑자기 내 팔을 잡아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호기심에 가득 차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을 발견한 순간, 리오의 얼굴이 흡사 불이 붙기라도 한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구석으로 데려가서?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어? 재미있을 것 같은 데 왜 말을 안 해? 혹시 강제로 입맞춤이라도 당한 거 아니야?" 엘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 리오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며 낄낄거렸다. "알렉스, 너도 이미 알겠지만, 리오는 정말 여자를 좋아해.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녀석이야. 리오만큼 여자에게 약한 사람도 드물걸? 여자들도 은근히 리오를 좋아하고." 리반이 '여자'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이상할 정도로 진지하게 말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된 엘이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리오가 벌떡 일어났다. "한마디만 더하면 네 녀석 주둥이를 아예...." 리오가 채 말을 끝맺지 못했을 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람은 중년남자였고, 다른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앞서 들어온 짙은 갈색머리카락의 남자가, 굵직하면서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와, 그들의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그러자 주먹을 불끈 쥐고 리반을 노려보던 리오도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안색이 안 좋은 누르스름한 얼굴에, 움푹 들어가 좀 매섭고 날카로워 보이는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시커멓고 굵은 눈썹과 심한 매부리코가 시선을 끌었는데, 그 때문인지 좀 거만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제가 디우프 다루스만입니다." 다루스만이 의자에 등을 기대자 뒤에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다가와, 그 옆에 조용히 멈춰 섰다.여자는 자그맣고 오뚝한 코와 뽀로통해 보이는 조금 도톰한 입술을 갖고 있었는데, 작고 섬세한 얼굴과 밝은 갈색 눈, 또 곧게 뻗어 내린 짙은 금발과 금빛을 띤 피부가 그녀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했다. "상당히 젊은 분들이시군요." 다루스만의 말에, 비로소 자신들이 아직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 알렉...."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엘이 은근히 찜찜한 마음을 느끼며 말을 길게 끌었을 때, 다루스만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이 곳에 오는 손님들 중 신분과 성함을 밝히지 않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도 그분들의 사정과 감정을 고려해 개인적인 건 전혀 묻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건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절 찾으신 용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샤메 할멈이 여러분들에게 절 소개한 것 같은 데... 맞습니까?" "예,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온 것입니다." 리반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절 찾으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마법의 힘을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다루스만이 엘에게 신중함과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엘은 그 시선을 붙잡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순식간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 그 마법의 힘이 필요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상당한 돈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엘이 거리낌없이 말하자, 다루스만의 얼굴에 감탄 섞인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3백 큐어. 즉 한 분에 백 큐어가 되는 셈이죠." "좋습니다." 엘이 망설이지 않고 거래를 즉시 받아들이자, 리반과 리오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사실 그녀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대부분의 돈을 지불한다는 결정을, 마음 편하게 내린 건 아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금액을 낮추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루스만이 계약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절대 금액을 깎아 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제 소중한 마법사를 소개시켜 드려야겠군요." 다루스만이 미소 띤 얼굴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돌리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타마라라고 합니다." 타마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아름다운 얼굴을 살펴봤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타마라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거칠었다. "어렸을 때 목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타마라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엘이 당황하고 미안한 마음에 재빨리 시선을 떼어 내자, 그녀와 마찬가지로 타마라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리오와 리반도 서둘러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다루스만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바르테즈 공국입니다." 엘의 대답에 엉뚱하게도 다루스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타마라는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바르테즈 공국이라.... 농담을 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자꾸 웃어서 죄송합니다. 진담이라 생각하니 더 웃음을 참기 힘들군요." "뭐가 웃기다고 그리 웃는 것이오?" 리오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다루스만을 노려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웃음을 지운 다루스만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봤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가능합니다!" "아니오, 가능합니다!" 엘이 반박하고 나서자, 희미하게 얼굴을 찡그린 다루스만이, 철없는 어린애를 대하는 사람처럼 차근차근한 설명조로 말을 시작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 데... 이 곳 메릴랭에서 바르테즈 공국까지 공간이동 할 수 있는 마법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능력이 있는 마법사를 알고 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제 밑으로 데려오고 싶으니까요." "알고 있는 마법사는 없습니다." 엘은 아몬을 떠올리고 잠시 망설이다,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다루스만의 얼굴에 슬쩍 비웃음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르테즈 공국이 목적지인 것 같은 데.... 거기에 비해 많이 부족하겠지만, 리아잔 제국의 벨라인까지는 가능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물론 거래금액 조정은 불가능합니다. 공간이동은 매우 위험한 마법이라서, 제 소중한 타마라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벨라인이라면, 이 곳 메릴랭에서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 정도 거리에 그들이 가진 돈의 대부분을 쏟아 부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해 드렸군요." 엘이 정중히 말한 후 의자에서 일어나자 리오와 리반도 뒤따라 몸을 세웠다. "미안해 하실 필요없습니다. 전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요." 말을 마친 다루스만이 갑자기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작은 은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검과 창을 든 이십 여명의 사병들이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탁자 주위를 에워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리오가 버럭 소리치자 사병들이 위협적으로 무기를 세우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로 다가들었다. "요새 젊은 것들치고는 꽤 예의가 바르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군." 진한 조소를 드러낸 다루스만이 팔꿈치를 탁자에 올려 두 손을 단단히 깍지꼈다. 그리고 거들먹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선 갖고 있는 돈부터 내놔라. 별 볼일 없는 놈들 같으면 샤메 할멈이 보내지도 않았을 테고.... 또 300큐어를 거리낌없이 지불하겠다고 할 정도니,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겠지." "네 놈에겐 한푼도 내줄 수 없다!" 이를 뿌드득 갈던 리오가 내뱉듯 소리치자, 뒤에 서 있던 사병이 창대로 그의 등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리오!" 리오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 순간, 엘과 리반이 동시에 그를 소리쳐 불렀다. 리오의 등을 때린 사병이 이번엔 창대를 세워 그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리오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꼬꾸라지자, 이번엔 창대가 그의 머리위로 들어 올려졌다. 엘은 재빨리 자신의 몸으로 리오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창대 끝이 다 낫지 않은 그녀의 어깨를 잔인하게 파고 들었다. 엘은 이를 악물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힘겹게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에게 내리 꽂히고 있는 창대를 손으로 확 낚아챈 다음, 방향을 돌려 사병의 목에 뾰족한 창 끝을 바싹 갖다 댔다. "한번만 더 리오를 고통스럽게 하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 내 손으로 네 놈 목을 따버릴 테다!" 엘은 차가운 불길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한마디 한마디 똑똑 끊어 내뱉었다. 그러자 사병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빨리 무기를 뺏어라! 멍청한 놈들!" 어느새 사병들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다루스만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럴 필요없다!" 엘은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돈을 넣어 둔 가죽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러고 보니 돈이 더 있었군." 엘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리오 옆에 한쪽 무릎을 꿇자, 리반이 리오의 주머니에서 돈을 찾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엘은 몸을 일으켜 주머니를 다시 탁자 위로 던졌다. "이게 우리에게 있는 돈의 전부다.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한 사람씩 몸을 수색해도 상관없다. 기꺼이 응할 테니까." 그녀는 다루스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리낌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코를 실룩거리며 한쪽 눈가를 바르르 떨던 다루스만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저 빨간 머리 녀석을 꽤나 아끼는 것 같은 데... 네 대단한 자존심과 비교해선 어떨까?" 불길한 예감이 성큼 다가들자, 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루스만이 허리춤에 걸고 있던 긴 채찍을 꺼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병에게 내밀었다. "내가 명령을 내리면 쓰러져 있는 저 빨간 머리 녀석에게 시원한 채찍 맛을 보여 줘라!" "예, 알겠습니다." 채찍을 든 사병이 뚜벅뚜벅 걸어 리오의 등뒤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그녀는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원하는 걸 말해라!" "그래, 제대로 말을 알아들었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네 친구가 고통받는 걸 원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개처럼 기어와 내 발을 핥아라." 다루스만의 회색 눈동자가 악의 섞인 흥분으로 번들거렸고 그의 입술은 험상궂은 미소로 비틀어져 있었다.전신이 싸늘하게 굳는 걸 느끼며 엘은 이를 악물었다. "저 채찍으로 맞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아느냐? 저건 보통 채찍이 아니다. 질기기로 유명한 람펠 가죽 구석구석까지 정성껏 유리가루를 입힌 채찍이다. 그래서 한번 휘두를 때마다 피부가 움푹 패이며 살점이 종이 조각처럼 뚝뚝 떨어져 나간다. 차라리 죽음이 빨리 찾아 들기를 바랄 만큼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되지. 사실 숨이 오래 붙어 있지도 못한다. 제일 오래 버틴 놈이 몇 대였지, 타마라?" "쉰 두 대입니다, 주인님." 의자 옆에 자리잡은 후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타마라가 거칠고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놈이었지. 아마 저 빨간머리 녀석은 서른 대도 견디지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릴 거다. 자, 어찌 하겠느냐? 네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 어서 무릎을 꿇어라." "하지마... 하면 안 돼." 다루스만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를 악문 리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시선을 돌려, 어느새 상체를 구부정하게 세우고 바닥에 앉아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하지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리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옆에서 그의 등을 받쳐 주고 있던 리반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죽는단 말이야! 채찍에 맞아 죽는다고!" 말을 마친 리반은 차마 엘을 바라볼 수 없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그런 굴욕을 당하게 하느니 차라리 채찍을 맞겠어!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 절대 채찍 따위에 맞아 죽지 않는다고! 절대!"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몸을 펴지 못하면서도, 리오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강경했다. "자, 어서 선택하라! 네 잘난 자존심이냐, 아니면 친구의 목숨이냐?" 다그치는 질문에 대한 엘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게도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다루스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웃어서 죄송합니다. 답이 뻔히 정해져 있는 걸 선택하라 하시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너무나 정중하고 심지어는 다정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자존심이냐, 친구의 목숨이냐.... 제 선택은 당연히 친구의 목숨입니다. 잘난 자존심 따위는 개에게 던져 주겠습니다." "이런 젠장!" 말을 마친 엘이 거리낌없는 동작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자, 리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욕설을 내뱉었다.엘은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힘든 여행으로 인해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고, 진흙이 묻어 있는 옷자락은 너덜너덜했지만, 꼿꼿이 앞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은 당당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굴욕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녀에게서 고귀한 무언가가 느껴지자, 사병들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고 다루스만의 얼굴은 험악하게 변해갔다. 다루스만 바로 앞에 도착한 엘은, 그의 발을 향해 천천히 얼굴을 가져갔다. "젠장! 그만 둬!" 리오가 버럭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들려 하자, 리반이 서둘러 그의 몸을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엘의 얼굴이 조금씩 숙여지자, 거기에 맞춰 다루스만의 눈에 진한 만족감이 어리며 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입술이 발에 닿으려 하는 순간, 엘은 번개같이 다루스만의 허리에서 검을 빼어 들어, 그의 목에 바싹 들이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달려들려고 하는 사병들을 향해 단호하게 소리쳤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한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놈의 목살을 시원하게 도려 내주겠다! 자, 어떠냐, 다루스만? 네 썩은 몸뚱이에 깨끗한 공기 좀 넣어 줄까?" "모,모두...우...우,움직이지...마라!" 공포로 인해 창백하게 질린 다루스만이 덜덜 떨며 힘겹게 명령을 내렸다. "리반, 네가 리오를 도와 줘." "어? 어,어... 알았어!"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리반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리오의 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거기 너! 허리띠 풀어!" 엘의 예기치 않은 말에 다루스만의 뒤에 서 있던 사병의 얼굴이 멍하니 굳어졌다. "빨리 풀어!" 한층 매서운 명령이 나오자, 사병이 허겁지겁 허리띠를 푼 다음 잔뜩 긴장해 엘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로 이 놈의 손목을 등뒤에서 묶어라. 이 놈의 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는 꼴을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허튼 짓을 해도 좋다." "어,어서 말 들어!" 경악에 찬 다루스만의 외침에, 기겁을 한 사병이 그의 손목을 필요 이상으로 단단히 묶었다. 엘은 리반에게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낸 다음, 옆으로 다가선 그에게 빠르게 말했다. "우리 돈 챙겨서 먼저 나가 리반. 내가 그 뒤를 바짝 따를 테니까." 재빨리 돈주머니를 집어 든 리반이, 리오를 부축한 채 문으로 향했다. 엘은 그 즉시 검을 다루스만의 목에서 떼어 그의 등에 위협적으로 겨눈 다음, 묶여진 손목을 움켜잡고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자, 다루스만 대상님, 부하들에게 쫓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씀 좀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말 들어라! 절대 쫓아올 생각하지 마라!" 엘은 다루스만의 숨막히는 외침이 끝나자마자, 문 가에 서 있는 사병의 창을 빼앗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은 후, 양쪽 문고리에 창을 단단히 꽂아 넣었다. "서둘러, 알렉스!" 서너 걸음 앞에 서 있던 리반이 다급히 속삭였다. 세 사람은 뛰다시피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접빈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엘이 다루스만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검을 교묘히 숨긴 탓인지,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 중 그들을 수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얕은 꾀 부리지마! 수틀리면 네 놈의 시커먼 심장에 검을 박아 넣고 재빨리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엘은, 일부러 발을 헛 딛은 척하며 비틀거리는 다루스만의 귓가에 거칠게 속삭였다. 그러자 다루스만이 겁에 질린 헐떡임을 토해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워낙 저택이 큰데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태여서, 대문까지 도착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쯤은 접빈실에 가둔 사병들이 풀려 났을 거라는 생각에, 엘은 초조한 숨을 내쉬며, 답답할 만큼 서서히 열리고 있는 대문을 바라봤다.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문밖으로 나가는 다루스만을 향해 사병 네 명과 하인 두 명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은 주인과 함께 있는 손님들에게도 예의를 잊지 않았다.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엘은 다급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오려 하자,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점잖게 말했다. "고맙소. 수고들 하시오." 거대한 철문이 완전히 닫힌 순간, 그녀는 몸을 휙 돌려 다루스만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철문에 머리를 세차게 부딪친 후, 바닥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는 그를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앞으로는 사람을 봐가며 수작을 부리는 게 좋을 겁니다, 다루스만 대상님." "서둘러, 알렉스!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어! 이러다 잡히겠다고!" "알았어!" 리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난 엘은 허겁지겁 두 사람에게 달려가 우선 리오를 살폈다. 그는 목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리반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서 있었다. "리오, 괜찮아?" "당연하지! 겨우 이 정도에 천하의 리오님이 쓰러지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녀의 걱정스런 질문에 리오가 짐짓 기분 나쁘다는 듯 소리를 높이자, 엘과 리반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됐어! 빨리 가자!" 세 사람은 한층 걸음을 빨리해 다루스만의 저택에서 멀어졌다. "이 길로 메릴랭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해질 테니까." 리반의 말에 엘이 재빨리 응수했다. "나도 찬성이야. 난 말 보관소에 가서 번개를 찾아가지고 나올 테니, 너희 둘은 시장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대충이라도 사는 게 좋겠어. 둘이 따로따로 움직여야 하는 건 알지? 말 보관소는 이쪽이니까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잠시 후에 이 자리에서 만나. 참, 말을 찾으려면 돈이 필요하지!" 주머니를 더듬던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알렉스, 돈은 내가 챙겼잖아. 그러니 마음 푹 놔." 창백하게 질린 엘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리반이 서둘러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너희들부터 메릴랭을 떠나. 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 "해결해야 할 일이라니?" "무슨 일인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엘은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입술을 열었다. "다루스만의 저택에 다시 가야겠어. 단도, 내 단도를 두고 왔어." -------------------------------------------------------------------제 29장. 엇갈림-------------------------------------------------------------------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사병들은 물론 그루지아국 병사들까지 쫙 깔렸더라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온 리반의 말은 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루지아국 병사들이라면.... 아시리움 성전에서 손을 쓴 건가?" 리반은 대답하기 전, 작은 나무의자에 주저앉아 피곤한 듯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 다루스만의 짓이야. 사람들 여럿이 모여 얘기하는 걸 숨어서 들었는데, 다루스만이 자신의 엄청난 재력을 이용해서, 메릴랭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나 봐. 그러니까 관병들 움직이는 거야 애들 장난이었겠지. 기가 막히게도 우리한테 돈까지 걸렸더라고... 놀라지마, 다루스만이 우릴 도둑으로 몰았어." "나쁜 자식!" 리오가 버럭 소리치며 의자에서 일어나 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오가기 시작했다. "여기도 얼마 있지 못하겠군. 우리가 이 곳에 있다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문젤 테니까." 엘이 내뱉듯 말하자 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빨리 메릴랭을 벗어나야 해." "순전히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이런 고생을 하게 됐어. 내가 바보같이 마법사를 찾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침울해져서 고개를 숙이자, 리오가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다들 좋은 생각이라는 동의 하에 그 놈 집에 간 거잖아. 사실 잘못은 나한테 있어. 그 이상한 늙은이 가게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애초부터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둘 다 그만둬. 지금 그런 얘길 한다고 나아지는 거 있어? 이 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묘책을 생각해야지." 리반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섞어 말했다. "묘책이라 할만한 게 뭐 있어야 말이지. 이를 갈고 있을 다루스만이 메릴랭 전체에 이미 우리 생김새를 줄줄이 풀어놨을 텐데.... 그래 그거야!" 투덜거리던 리오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염색약! 일의 발단이 된 염색약으로 머리 색깔을 바꾸면, 우릴 알아보기 힘들 거 아니야! 왜 이 생각을 미리 못했지?" 엘과 리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본 리오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이런 젠장! 내 이 늙은이를 잡아 당장 요절을 내야지!" 이를 부드득 가는 리오에게서, 염색을 생각해 내고 기뻐하던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하고많은 색 중에서 하필이면 초록색이라니! 젠장! 세상에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여기 있잖아!" 리반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던 엘은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초록색으로 물든 자신의 머리를 보고, 경악에 차 있는 리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웃지마! 웃지 말라고!" 얼굴이 시뻘게진 리오가 펄펄 뛰며 격분을 드러냈다. 하지만 엘과 리반의 웃음소리는 오히려 더 커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건, 그들은 리오와 달리 인간의 머리 색을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엘의 머리는 현재 짙은 금발이었고, 리반은 원래 그대로 빨간색이었다. 쌍둥이를 찾고 있을 테니까, 둘 중 한 사람만 머리 색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리반의 말에, 그럼 자신이 하겠다고 맹렬히 주장한 사람은 바로 리오였다. 그는 금발로 변한 엘의 머리를 보며, 자신은 검은 색이나 갈색, 운이 나빠도 붉은 갈색 머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나야말로 문제야. 이렇게 머리 색이 밝으니 저택에 몰래 숨어들 수나 있을지 걱정된다.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야." "아니야, 어울려! 정말 예쁘다고! 넌 무슨 색을 하든 다 예뻐!" 가볍게 나온 말에 리오가 정색을 하고 소리치자, 다음 순간 침묵이 찾아 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리오는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진 엘은 살짝 상기된 얼굴을 어색하게 돌렸다. 그리고 리반은 입을 딱 벌린 채 커다랗게 열린 눈에 경악을 담아 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큼 날이 어두워졌으니 난 단도를 찾으러 가야겠어." 엘은 불편한 침묵을 깨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같이 가! 너 혼자 보낼 순 없어!" "그래, 알렉스. 혼자는 너무 위험해." 벌떡 일어서며 맹렬히 소리친 리오의 뒤를 이어, 리반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엘은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나 혼자 하는 게 좋겠어." "안 돼!" 그녀는 손을 올려, 반박하려는 리오를 막았다. "우선 내 말부터 듣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난 저택에 살짝 숨어들었다가 단도만 찾아가지고 재빨리 빠져 나올 계획이야. 즉 한숨 돌릴 여유도 없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야. 그런데 사실 리반은 그렇게 몸이 빠른 편이 아니잖아. 또 리오, 넌 지금 제대로 목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고." "그렇지 않아! 나도 얼마든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인정한다, 알렉스. 사실 몸을 움직여야 되는 일은 나한테 맞지 않아." 리오와 리반 모두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이자, 엘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리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 그리고 너희들도 여기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여관 주인도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나도 같이 가!" 기어코 따라 나서려는 리오를 뒤에서 꽉 잡은 리반이 진지하게 말했다. "조심해, 알렉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알았어, 리반. 리오 좀 잘 잡고 있어 줘. 일이 해결되면 말 보관소 뒤에 있는 작은 공터로 갈게." 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리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몸을 버둥거리고 있는 리오을 향해 모가 난 시선을 던졌다. "어린애처럼 굴지마, 리오." "알았어, 알았다고! 안 따라갈 테니까 이것 좀 놔!"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연 엘은, 밖으로 나가기 직전 리오에게 장난기 어린 말을 던졌다. "리오, 네 초록색 머리말이야, 처음엔 좀 흉칙했는데 자꾸 보니 귀엽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리오를 흘긋 바라본 다음, 키득거리며 문을 닫았다. ------------------------------------------------------------------- 다루스만의 저택은, 낮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곳이라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저택 구석구석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저택에 숨어 들어야할지 걱정이었던 엘은, 활짝 열려 있는 대문을 보고 낮은 탄성을 질렀다. 문을 열어 놓은 건, 총동원된 사병들과 관병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녀가 숨어서 살펴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문을 출입하는 병사들이 스무 명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하인과 하녀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녀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활짝 열려진 문을 지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좀도둑은 물론이고, 상금까지 걸려 있는 도망자가 병사들이 바글대는 이 곳에 침입하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엘은 잠시 주위 동태를 살피다 몸을 묻고 있던 골목그림자에서 나와, 자꾸 빨라지려는 걸음을 자제해 천천히 대문으로 다가갔다. 시장에서 사 입은 평범한 옷과 완전히 달라진 머리색깔 때문에, 가까이에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그녀를 알아볼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 엘의 모습은, 저택에서 자질구레한 잔심부름을 하는 잡일꾼 소년처럼 보였다.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대문을 통과한 그녀는, 낮에 그들이 안내되었던 길을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 둥근 기둥을 지나 안채로 들어섰다. 엘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긴장한 채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화려하게 차려 입은 중년여인이 문을 열고 나와, 십여 걸음 정도 떨어진 앞에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다루스만의 부인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꾸만 다급해지려 하는 걸음을 애써 자제했다. "너! 처음 보는 아이같은 데..." 심장이 죄어들며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마,마님..." 엘은 그녀의 정면에 멈춰 선 여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일하는 아이냐? 이름은 뭐고? 또 너같은 아이가 이런 늦은 시간에 안채까지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냐?" "전 부엌에서 일합니다, 마님. 이름은 알렉이고요. 여긴... 저녁식사를 다 하셨을 테니, 빈 그릇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고 들어온 것입니다." 엘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대충 둘러댔다.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그녀를 샅샅이 살피는 여인의 눈길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여인에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엘은 어금니를 지긋이 물고, 여차하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다리 근육을 긴장시켰다. "며칠 전에 새로 뽑았다는 하인 몇 명을 보긴 했는데, 그 때 들어온 아이인가 보구나. 감히 내게 인사도 안시키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이를 갈던 여자가 엘을 지나쳐 발을 퍽퍽 구르며 복도를 걸어갔다. 엘은 여인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순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제 곧 그녀가 새로 들어온 하인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게 되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안 순간 중년여인은, 사방에 깔린 병사들에게, 수상한 사람이 저택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릴 것이 분명했다. 엘은 제발 열려 있길 기도하며 보관실의 문을 밀었다. 다행히 문은 어떤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안으로 들어서 문을 반쯤 닫았을 때, 그녀는 보관실이 너무 어둡다는 걸 깨달았다. 복도의 불빛이 비춰 드는 지금도 보관실 안쪽은 어둠에 싸여 있는데, 문까지 닫으면 단도를 찾기는커녕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생각하고 자시고할 것없이 문을 다시 활짝 연 다음, 보관실 안쪽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복도에 걸린 등을 가져와 수색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시간에 이렇게 외진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또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시간을 줄이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보관실 안은 그야말로 무기창고나 진배없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보관함이 수십 개의 칸막이로 나눠져 있었고, 그 안에 갖가지 무기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이 곳에서 어떻게 작은 단도 하나를 찾아야 할지 막막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최소 하룻밤은 꼬박 새워야 할 것 같다는 막막한 생각에, 엘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걸 찾으시는 것 같은 데..." 문 쪽에서 귀에 거슬리는 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소스라치게 놀라 흠칫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은빛 단도를 손에 든 타마라가 안으로 한발 들어와,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둥근 돌로 팔을 뻗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손이 닿자, 어른 주먹 두 개 크기만한 돌에서, 살짝 회색이 감도는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단도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찾으러 오시지 않을까 싶어 기다린 겁니다. 그리고 이 돌은 따뜻한 것이 닿아 온도가 올라가면, 스스로 빛을 내는 은장석입니다. 마법의 힘이 아닙니다." 은장석을 손에 든 타마라가, 다른 쪽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은 다음, 조용한 발걸음으로 엘에게 다가왔다. "전 마법사가 아닙니다."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풍기는 타마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실 태어나 지금까지 마법사를 본 적도 없습니다. 이 은장석도 사람들에게 절 마법사라 내세우기 위해 주인님이 엄청난 돈을 주고 마련한 것입니다." "당신이 마법사든 단순한 사기꾼이든 관심없습니다.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엘은 긴장한 채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자, 이걸 받으십시오. 그리고 빨리 이 곳을 빠져 나가십시오." 엘은 불쑥 내밀어진 단도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타마라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의심스럽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러는 거죠? 뭘 노리는 겁니까? 이 단도에 무슨 나쁜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겁니까?" "제가 마법사가 아니란 말을 못 믿으시는군요. 당연한 감정이시겠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제게 마법의 힘이 있다면, 오늘 낮의 일은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겁니다. 즉 탈출도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을 거란 말입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엘은 대답대신 타마라의 손에서 단도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타마라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절 도와주시는 이유는요? 사실 순수한 마음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닐 거라는 의심이 자꾸 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러움과 동경.... 그것이 이유입니다." 타마라의 눈동자에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빛은 곧 인형같이 무감각한 표정에 가려졌다. "빨리 움직이십시오! 이번에 잡히면 살아서는 밖에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단도를 손에 꼭 쥔 채 문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어 젖히며 숨가쁘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타마라!" "제 이름은 타미입니다. 평범한 타미..." "타미, 잊지 않을게요!" 엘은 슬퍼 보이는 미소를 뒤로 하고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렸다. 건물 중앙의 거대한 현관에서 막 벗어났을 때, 그녀는 기둥 뒤에 몸을 감춘 채, 거친 숨을 고르며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직까지는 별 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엘은 옷소매로 얼굴에 맺힌 땀을 대충 닦은 다음, 복도를 달리며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단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과 연결된 잘 닦여진 돌길을 걷기 시작했다. 엘이 하인들의 숙소로 보이는 건물을 막 지나칠 때였다. 건물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더니, 그녀가 몸을 피하기도 전에, 십여명의 사병들을 앞세운 중년여인이 불쑥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바로 저놈이다! 빨리 잡아라! 빨리!" 엘은 여인이 입을 벌리는 순간, 이미 미친 듯이 대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병들의 고함소리에 섞여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 왔다. 안쪽에서 난 소란을 모를 리 없는 병사들이, 사병이나 관병할 것 없이 뒤섞여, 사방에서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사실 어느 한군데 강해 보이는 구석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손쉬운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대문엔 몇 겹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꼼짝없이 그들에게 잡혔다는 생각에, 엘은 목이 터져라 비명이라도 질러 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무기력한 포기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서 루드비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엘은 대문으로 향하던 몸을, 그나마 병사들이 적은 왼편으로 틀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놀라 엉거주춤 서 버린, 한 사병의 어깨를 짚고 몸을 날려 훌쩍 뛰어넘었다. "뭣들 하는 거냐? 빨리 잡지 않고! 놓치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든 놈을 잡아라!"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뒤를 바짝 뒤쫓기 시작했다. 엘은 대문과 이어진 높은 담을 따라 달렸다. 무슨 수를 써서든 최대한 빨리 담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덤빈다 해도, 키의 두 배가 넘는 담을 맨손으로 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로잡아라! 그럼 두 배의 상금을 주겠다!" 그녀의 뒤쪽에서 다루스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러 대며, 엘의 뒤를 더욱 바짝 따라붙었다. 체력이 떨어짐에 따라, 추격자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엘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다리에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한시라도 빨리 탈출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못한다면 오래지 않아 그녀를 따라잡은 억센 손길이 목덜미를 낚아챌 것이다. 희미한 나무의 윤곽이 보인 건, 엘이 자갈을 잘못 밟고 앞으로 꼬꾸라질 듯 비틀거렸을 때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필사적으로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다음순간 그녀의 발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부분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검이 보였다. 질겁한 그녀가 미친 듯이 다리를 움직였을 때, 오른쪽 발목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잔인하게 조여 들었다. 엘은 짧은 신음을 토하며,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남자의 얼굴을 힘껏 걷어찼다. 발목을 파고들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 그녀는 미친 듯이 눈 앞에 보이는 나뭇가지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공포로 인한 떨림이 자꾸 몸을 미끄러지게 했다. 엘은 단숨에 사람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나뭇가지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가지 위를 쓰러 질듯 말듯 비틀거리며 건넌 다음, 팔을 쭉 뻗어 담을 낚아챘다. 담 위로 몸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입술에서 이를 악문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놈이 담을 넘어가잖아! 빨리 움직여라! 놈을 놓치면 안 돼!" 다루스만의 고함을 뒤로 하고 엘은 펄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딱딱한 바닥에 엄청난 힘으로 부딪친 순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발목이 접질린 것 같진 않았다. "저기다! 저기 있다!" 대문 쪽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발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엘은 거칠게 욕설을 뱉어 내며, 어둠을 향해 다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젠장! 선배면 다야? 선배면 다냐고?" 에지몬트는 식당을 나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배들이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있을 때, 자신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지저분한 골목을 전전하며 방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에지몬트는 짜증을 넘어 격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엄연한 켈름 기사단에 소속된 정식기사인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대체 언제까지 꼴 보기 싫은 선배들의 시종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 한번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 그 땐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야! 선배고 뭐고 발이 부르틀 때까지 엉덩이를 걷어차 줄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허공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두른 에지몬트가 고개를 내리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흠칫하며 슬슬 그를 피해가기 시작했다. 민망해진 에지몬트는, 거미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섯 살 남짓한 여자아이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특별히 예쁜 여자들에게만 지어 보이곤 하던, 그에 따른 결과로 여자들의 호감을 이끌어 내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미소였다. 그의 이런 자신만만한 미소를 본 아이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리더니, 겁에 질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눈물에 한없이 약한 에지몬트가 어쩔 줄 몰라하며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아이가 엄마를 소리쳐 부르며 뛰어가기 시작했다.그는 아이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식당 주인이 말해준 여관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골목 어디라고 한 것 같은 데... 보이는 건 죄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뿐이니.... 길을 잘못 든 건가?" 몸을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펴보던 에지몬트가, 좀 더 앞으로 가 볼까, 아니면 되돌아갈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오른편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그의 몸에 세차게 부딪쳤다. 에지몬트는 팔을 내밀어, 쓰러지려 하는 그림자를 재빨리 잡아 주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몸을 부딪쳐 온 그림자가, 금발을 가진 호리호리한 소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몸에 닿아 있는 소년의 몸은 온통 땀 투성이었고, 불이 붙은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거 놔요!" 소년이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에지몬트의 팔을 힘껏 뿌리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 뛰어나가려 하는 소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도저히 이유를 달 수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었다.흠칫한 소년이 몸을 휙 돌리는가 싶더니, 그 즉시 그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에지몬트는 능숙하게 머리를 살짝 뒤로 젖히며, 소년의 주먹을 와락 잡아챘다. "제길! 이거 놔!"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소년이 한순간 동작을 멈추더니, 그의 급소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에지몬트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사나운 꼬마로군." 재미있어 하는 말이 끝나자, 소년이 갑자기 뻣뻣해지더니, 눈이 뒤로 돌아가며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놀란 에지몬트는 허겁지겁 소년의 등을 받쳐 몸을 지탱해주었다. "어이! 정신 차려, 꼬마!" 그가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그의 복부로 소년의 뾰족한 무릎이 날아들었다. 한순간 숨이 막힌 그가 허리를 굽혔을 때, 그의 손에서 벗어난 소년이 앞으로 훌쩍 몸을 날리려 했다. 에지몬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년의 옷자락을 와락 잡아챘다. "맹랑한 꼬마! 어딜 도망가려고?"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거 놓으라고!" 숨막히듯 터져 나온 소년의 외침에서 짙은 공포가 느껴졌다. 소년이 자신을 무서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몸이 단단히 굳어지며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그에게는 단순한 장난이었지만 소년에게는 두려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그러니..." "그 놈 단단히 잡고 있으시오!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놈이요!" 에지몬트의 말에 섞여 소년이 튀어나왔던 골목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숨찬 고함이 들려왔다. "너... 도망치고 있었던 거냐?" "그래, 이 머저리야!" 소년이 악을 쓰며 미친 듯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에지몬트가 힘들게 주먹을 피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골목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잘했소, 젊은이! 어서 죄인을 이리 넘기시오!" 좀 늦게 도착한, 병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난 죄인이 아니야! 날 잡으려고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운 거라고!" "그 놈은 도둑이오! 사람까지 해친 악질 죄인이란 말이오!" 에지몬트는 소년을 병사들에게 넘기기로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알았소! 미안하다, 꼬마야. 결백하다고 떠드는 죄진 놈들을 한두 명 본 게 아니라서 말이다!" 죽일 듯 그를 노려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번득였다. 소년은 병사들이 팔을 등뒤로 거칠게 비틀어 올릴 때도, 작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필요 이상으로 거친 병사들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린 건 오히려 에지몬트였다. "좀 살살 다루시오! 아직 어린애지 않소!" "젊은이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거만하게 소리친 남자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드디어 잡혔구나! 미꾸라지같은 놈! 다루스만님이 널 보시면 몹시 기뻐하실 거다! 자, 빨리 움직여라! 뭣들 하는 거냐?" 남자의 명령에 사병들이 소년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덩치만 큰 머저리! 오늘 일은 언젠가 톡톡히 갚아 주고 말 테다!" 소년의 기세 등등한 고함소리가 들려 오자, 잔뜩 찌푸려 있던 에지몬트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웃음이 퍼졌다. "좋다, 당돌한 꼬마! 내 이름은 에지몬트 하덴 제너시스다! 기억해 둬라!" "이름 따윈 필요없어! 넌 그저 머저리일 뿐이니까!"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소년의 목소리가 골목 안에서 들려 왔다. 에지몬트는 소리내어 웃으며 어두운 골목을 바라봤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찜찜한 죄책감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옳은 일을 했어. 해야 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그러니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잊어버리자."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그는 휙 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결심과는 달리, 그는 다섯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큰 길로 나갈 수 있었다. -------------------------------------------------------------------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거지?" 정신없이 리반의 주위를 걸어다니던 리오가 걸음을 멈추고, 엘이 이미 모습을 보였어야 할 말 보관소 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초조함과 불안을 못 이긴 그는 다시 소용없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설마...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별일 아닐 거야.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틀림없어."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리반의 질문에 리오가 성급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확신하지 못한 그의 입에선, 곧바로 자신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가? 만약 다루스만에게 잡힌 거라면 어떡하지? 아니,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아무일 없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텐데....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젠장!" 횡설수설하던 리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그 잘난 단도는 왜 찾으러 간 거야? 내가 더 좋은 걸로 사주겠다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더니만! 대체 이게 뭐야?" "누구에게나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게 있는 거야."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세상에 그런 건 없어!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리오가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다. "조용히 해! 나 여기 있으니 잡아가라고 포고령이라도 선포하는 거야?" 다급한 질책에 리오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대로 냉정을 되찾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멍청하게 서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 하려고?" 리반은 이미 서너 걸음 옮기고 있는 리오의 등에 대고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 놈 저택에 가 봐야겠어! 만약 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그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겠어!" 리반은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리오의 뒤를 따랐다. 잠깐, 리오가 지금 누구라고 했지? 엘.... 엘이라고 했나? 아니면 알렉스라 한 걸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무심코 흘려 들은 리오의 말을 곰곰이 떠올려 보던 리반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쓸데없는 생각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그 건방진 검은 머리 놈을 잡았단 말이지?" 흥분을 감추지 못한 다루스만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보고를 올린 하인이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저.... 주인님. 검은 머리가 아니라 금발이던데...." "멍청한 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느냐? 그래, 지금 놈은 어디 있는 거냐?" "태링턴 대장님이 창고에 가두고 사병 다섯에게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합니다." 다루스만의 얼굴에 불쾌감이 나타나자, 하인이 슬쩍 고개를 숙이고 그를 조심스럽게 흘긋거렸다. "나한테 보고를 올려야 할 태링턴은 어딜 간 거냐?" "그게... 놈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자마자, 영주님께 먼저 보고 드려야 한다 시며, 하그리브 성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뭐라고? 영주님께서 내게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셨다는 걸, 뻔히 아는 놈이 하그리브 성으로 돌아가? 일개 수비대장 주제에.... 감히 언제까지 내게 그런 건방진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태링턴!" 분노를 못이기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다루스만이, 뒤늦게 하인의 존재를 깨닫고 얼른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거만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놈을 이리 데려와라! 아니, 아니다! 내가 직접 가볼 테니, 넌 타마라를 찾아 와라! 타마라도 놈이 잡힌 걸 보면 무척 기뻐할 거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머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하인이, 조심스럽게 문까지 뒷걸음질 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다루스만은 앞으로 벌어질 재미있는 일을 생각하며 두 손을 마주 비볐다. 그리고 기대감과 흥분으로 바짝 말라 있는 입술을 혀로 축축이 적셨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문을 노려봤다. 다루스만은 모든 일에 타마라를 대동했다. 중요한 일이건 하찮은 일이건, 그의 옆엔 항상 타마라가 있었다.타마라는 오래 전에 그의 손으로 사들인 아이였다. 다루스만은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녀를 최고급만으로 꾸며 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입맛에 맞춰 길을 들였다. 오직 순종과 복종만을 아는 타마라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뜻을 거스른 건, 오직 한번 뿐이었다. 더러운 마구간지기와 눈이 맞아 도망치려고 한, 삼년 전 심한 폭우가 퍼붓던 밤. 다루스만은 사병들을 풀어 두 사람을 잡은 다음, 타마라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구간지기를 고문했다. 감히 그의 것을 넘보려 했던 더러운 마구간지기의 숨이 끊어진 건, 고문이 시작된 지 3일이 지나서였다. 그 이후로 타마라는 절대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오로지 그만을 바라봤고, 그가 묻는 말에만 입을 열었으며, 심지어 그가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하루종일이라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까지 했다.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가끔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타마라에게, 무슨 벌을 내릴까 생각하며 손톱을 물어뜯던 다루스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른 손을 내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 주인님..." "비켜라!" 걸걸한 소리가 들리더니, 태링턴이 하인을 확 밀치며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태링턴 대장. 다시 보게 되어 정말 반갑소. 대장이 하그리브 성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오." 속에선 태링턴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정중히 말하는 다루스만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하그리브 성에서 돌아오는 길이오. 짧게 말하겠소. 죄인을 넘기시오. 지금 당장 하그리브 성으로 죄인을 데려가야 하니까." 다루스만의 얼굴에 퍼져 있던 거짓웃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그게 무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명히 영주님께서 내게 전권을 넘기..." "입 닥치고 내 말부터 들으시오, 다루스만!" 태링턴이 다루스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하고 거친 어조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지금 하그리브 성에 누가 계시는 줄 아시오? 어떤 분이 계시는지나 알고 하는 소리냔 말이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다루스만이 침을 꿀꺽 삼켰을 때, 비밀얘기라도 하려는 듯 태링턴이 슬쩍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낮게 속삭였다. "성하께서, 바로 법황 성하께서 계시단 말이오." "뭐,뭐...뭐라...뭐라 그랬소? 버,법황 성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경악한 다루스만이 자지러지는 고함을 터뜨리자, 태링턴이 우악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루스만에게 부딪칠 듯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으르듯이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시오, 다루스만. 법황 성하께선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밝히셨소. 성하께서 지금 하그리브 성에 계시다는 건, 영주님과 나만 아는 비밀이란 말이요. 죄인을 데려간다고 하면 대상이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해준 것 뿐이요." 말을 멈춘 태링턴이 노골적인 협박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 명심, 또 명심하시오, 다루스만. 이 얘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거요. 그 누구에게도... 부인이나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그 석상한테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알아들었소?" 핏기가 가신 다루스만이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슬쩍 경멸을 드러낸 태링턴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소. 난 빨리 죄인을 데리고... 아니, 그러고 보니 죄인이 아니었군. 잘 들으시오 다루스만, 그 소년을 위시해서 빨간 머리 쌍둥이들도 더 이상 죄인이 아니오. 그러니 사병들을 빨리 거둬들이는 게 좋을 거요. 내 병사들에겐 이미 하그리브 성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소." "그럴 순 없어! 그 놈들이 죄인이 아니라니? 내 하인을 죽이고 내 돈까지 훔쳐 간 놈들이란 말이오!" 다루스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태링턴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진한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두툼한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렸다. "정 그렇게 억울하면 법황 성하께 울며 하소연이라도 올려 보시오, 다루스만. 이번 일은 그분의 뜻이니까." 격하게 숨을 들이쉰 다루스만의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그럼... 설마 그 소년들이.... 성하와 가까운 사이라는...." "모르는 일일 뿐 아니라, 우리가 감히 경솔하게 입에 올릴 말이 아니오! 난 이만 가 보겠소, 다루스만!" "자,잠깐! 나도 가겠소! 나도 하그리브 성에 가야겠소!" 세차게 몸을 돌린 태링턴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그리브 성엔 왜 가겠다는 거요? 설마 내 말대로 성하께 소년들의 유죄를 하소연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아니, 이제 그 일은 중요하지 않소. 하지만 성하를 뵐 수 있는 기회를, 평생에 한번 오기 힘든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순 없소! 그래, 절대 그럴 순 없어....가서 성하를 배알해야겠소!" 고개를 퍼뜩 치켜든 다루스만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경련을 일으킨 것같이 심하게 꿈틀거렸고, 흥분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엔 격한 광채가 번뜩였다. "단단히 미쳤군! 제 정신이 아니야! 감히 성하를 배알하겠다고?" "그래, 바로 그 말이오! 내 금방 준비할 테니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태링턴을 뒤로 하고, 다루스만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미동없이 서 있던 태링턴의 입술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그리브 성에 가겠다는 거야 내가 막을 수 없지만.... 성하께서 네 놈의 머리털 한 가닥이라도 보실 것 같으냐? 어리석고 탐욕스런 놈!" 태링턴은 바닥에 깔린 최고급 융단에 침을 퉤 뱉고, 그 길로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 "먼저 목욕을 하고 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모,목욕을 하라고요?" 기가 막힌 엘이 소리 높여 되묻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명의 하녀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래, 영주님의 명이다." "목욕물은 지금 올라오고 있는 중이고." 하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문이 열리고 남자 여덟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앞의 네 사람이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거대한 욕조를, 낑낑대고 들여와 바닥에 내려놓자, 뒤의 네 사람은 각각 들고 있던 양동이의 더운물을 욕조에 쏟았다. 남자들이 숨을 몰아쉬며 밖으로 나간 후, 하녀 한 명이 작은 항아리에 담긴 불그스름한 액체를 욕조에 부었다. 그리고 다른 하녀는 작은 병에 든 투명한 액체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금세 욕조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목욕할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엘은 하녀들을 한 명씩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둡고 습한 창고에 갇혀 추위와 두려움에 떨던 그녀를, 다짜고짜 아무 설명없이 마차에 태워 이리로 데려오더니, 이젠 목욕을 해야 한다니!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영주님의 명이니 목욕은 꼭 해야 한다. 그러니 어서 옷을 벗어라!" "어서 얌전히 말 들어! 우린 네 시중 드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산더미란 말이야!"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하녀들을 보자,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먹혀 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두 사람 다 나가 주십시오!" "건방진 녀석! 자꾸 이러면 남자들을 데려와 톡톡히 후회하게 해줄 테다!" "내가 알아서 한다 하잖아요! 나가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엘은 놀란 하녀들이 미처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막무가내로 밀어 문밖으로 내보낸 다음, 재빨리 의자를 가져와 문을 받쳤다. 그녀가 의자에서 손을 떼는 순간, 문이 쾅쾅 울려 대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엘은 빨리 문을 열라는 고함을 무시하고, 커튼이 내려진 창문으로 달려갔다. "이런 제길!" 커튼을 확 젖히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갖가지 색으로 예쁘게 장식된 착색유리가 끼워져 있는 창문엔, 정교하게 세공된 쇠기둥들이 박혀 있었다.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엘은 미친 듯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극도의 초조감에 싸여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다짜고짜 의자를 들어 창문을 향해 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색색의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엘은 옷소매로 쇠기둥에 묻은 유리조각을 대충 치운 다음, 두 손으로 움켜잡고 체중을 실어 힘껏 잡아당겼다. 이를 악문 입에선 신음이 터져 나왔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엔 땀방울이 맺혔지만, 쇠기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부숴라!" 밖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문이 당장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다. -------------------------------------------------------------------제 30장. 재회-------------------------------------------------------------------다루스만은 축축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려다, 때마침 정신을 차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손바닥에서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꼼꼼하게 닦으며, 자신의 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가 갖고 있는 최고급 옷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것으로 차려 입었지만, 아무리 봐도 법황 성하의 눈에 들기에는 미진한 감이 들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하인의 옷을 빌려 입고 온 듯 불편하고 초라한 느낌까지 생겨났다. 더군다나 마차를 타고 오는 바람에, 옷 곳곳에 작은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그는 옷을 잡아당겨 최대한 구김을 편 다음, 의자에 앉아 있는 타마라를 내려다봤다. 타마라는 평소 그가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차려 입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느낌이, 잔뜩 긴장해 있는 그를 더욱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거지? 다루스만이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손수건을 이리저리 비틀며 혀로 입술을 축였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그를 이 곳에서 기다리게 한, 백발이 성성한 고위사제 가 밖으로 나왔다. "성하께서 수락하셨네." 사제의 말이 나오는 순간, 다루스만의 얼굴에 숨찬 환희가 피어올랐다. 이제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 꼭대기에 오를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제 내 손아귀에 모든 걸 쥘 수 있게 되는 거야! 법황을 배알하는 게 어려워 그렇지, 일단 그 앞에 서기만 하면 법황과 친분을 쌓는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법황을 그의 편으로 만들 자신까지 있었다. 법황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권력자들을 상대하는 건 다루스만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세상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그의 돈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다루스만은 그루지아 국의 국왕을 통해, 리아잔 제국의 황제에까지 선이 닿아 있었다. 이 문이야말로 내 인생을 최고의 자리로 끌어올릴 수 있는 천상의 사다리가 될 거야.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여자와 함께 들어가게." 다루스만은 고위사제의 말에 놀라 엉거주춤 허공에 팔을 멈춘 채, 타마라를 바라봤다. 비록 하그리브 성까지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런 중요한 자리에까지 그녀가 낀다는 것이 영 탐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그가 고위 사제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따라와라." 다루스만이 마지못해 말하자, 타마라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어서! 서두르시오!" 사제의 단호한 말에 찔끔한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여러 번 와 봤던 접견실이 이상하게도 낯설게 보였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 풍기는 숨막힐 듯한 위압감에 비해서는,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다루스만은 법황임을 모르고 만나더라도,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세상 꼭대기에 앉아 있는 법황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과는 무엇인가가 다를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다만 범인(凡人)들과의 차이점이, 이 정도로 소름 끼칠 만큼 강렬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루스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닿을 때까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법황 성하, 소인은 디우프 다루스만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이옵니다! 정말 영광이옵니다! 너무 기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루스만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아니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댔다. 몇 년 전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일부러 배웠던 예절은, 지금 이순간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미천한 종, 타마라가 성스러운 법황 성하를 뵙습니다. 미약한 육체와 순결한 영혼과 꿈의 실체를 거두어 성하를 경배하게 하소서."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타마라가, 오른쪽 손을 심장 부근에 얹고 왼팔은 접어 무릎에 올린 자세로, 완벽하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셔서 앉으십시오." 법황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낮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법황이 말을 높였다는 사실에 경악한 다루스만이,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비죽 들었을 때, 이미 타마라는 법황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감히 법황 앞에서 창피를 준 타마라에게, 톡톡히 벌을 내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허겁지겁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법황의 맞은 편에 타마라와 나란히 앉았다. "저.... 법황 성하...." 다루스만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고민하며, 조심스럽게 법황을 살폈다. 문 가에서 흘긋 본 것처럼 법황은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검은 색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망토조차 벗고 있지 않았는데,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올려 쓴 후드 속에 감춰져 있었다. 즉 법황에게서 다루스만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오직 눈 밖에 없는 셈이었다. 다루스만은 얼음처럼 싸늘해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작정을 입술을 열었다. "서,성하... 그 소년들은, 그러니까 오늘 있었던 사건은.... 서로간의 오해 때문에 생긴 것 같습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그 소년들이 결백하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그런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진땀을 흘리며 겨우 말을 끝낸 다루스만은, 법황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법황은 아무 말없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이, 다루스만을 한층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 그렇지!" 그는 벌떡 일어나 타마라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상자를 집어 들어, 법황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성하께 바치는 미천한 소인의 공경의 표시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나 제 정성을 살피셔서 거두어주십시오." 숨가쁘게 터져 나온 말이 끝나자, 뒤이어 침묵이 찾아 들었다. 법황은 입을 열지도, 다루스만이 내밀고 있는 상자를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려 올 때까지도 법황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나오지 않자, 다루스만의 얼굴이 벌게지며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열어 보십시오, 법황 성하." "직접 열어보십시오." 드디어 법황이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에, 다루스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성하." 그는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며, 재빨리 금으로 된 작은 걸쇠를 푼 다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법황의 눈앞에 상자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접견실에 발을 들이민 이후, 처음으로 다루스만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나타났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스타칼로의 심장'입니다, 성하." 다루스만의 목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이제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는 걸 증명하듯이, 자신 만만함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자신감은 법황의 시선이 상자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자 더욱 커져 갔다.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법황이라해도 '아스타칼로의 심장' 앞에서는 맥없이 녹아 버릴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스타칼로의 심장'은 지금은 신화로만 남아있는 고대국가 바이르잔드의 시조인 아스타칼로 여왕이, 죽는 순간 자신의 손으로 심장을 꺼내 만들었다는 전설의 목걸이였다. 핏빛으로 빛나는 붉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아스타칼로의 심장'은 감히 돈으로 따질 수 없고, 그 값어치를 매길 수도 없는 성물 중의 성물이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응이 나오자, 다루스만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깊이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라니요, 성하? 감히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성하를 향한 제 마음의 표시일 뿐입니다." 다루스만의 말이 끝나는 순간, 법황이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다루스만은 심장을 꿰뚫는 듯한 은회색 눈동자에 찔끔해, 허겁지겁 얼굴을 돌렸다. "원하는 걸 말씀하십시오." 법황이 그의 예상대로 다시 질문을 던져 오자, 다루스만은 준비해온 대로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성하께 감히 바라는 건 없지만.... 성하께서 계속 마음을 쓰시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 오래 전부터 장사를 해 왔고, 제 모든 걸 장사에 받칠 결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름대로의 신념 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 지금은 대상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상태에 만족해 안주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전 좀 더 큰 세계로 나가고 싶습니다. 법황 성하, 감히 말씀 드리옵건 데... 아비도스 해의 해상무역권을 독점하게 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다루스만은 잔뜩 숨을 죽인 채, 법황의 반응을 기다렸다. 법황의 한마디에 그가 세상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졸부 소리를 듣는, 그저 조금 알려진 일개 상인으로 남느냐가 달려 있었다. 아비도스 해는 리아잔 제국과, 체르몬 국을 위시한 여섯 개 나라를 연결해주는 바다였다. 만약 다루스만이 아비도스 해만 손에 넣는다면, 그는 웬만한 왕들은 따라올 수도 없는 재력과 권력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성하. 하지만 제 말을 들으시면 좀 더 쉽게 성단(聖斷)을 내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비도스 해의 독점무역으로 인해 얻는 총이익의 반을 아시리움 종단에 바치겠습니다." 다루스만의 말이 끝나는 순간, 법황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법황이 자신의 말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생각에, 다루스만의 입술도 헤벌쭉 벌어졌다. 거절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법황의 반응은, 그에게 당장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 같은 환희를 느끼게 했다. "더러운 짓거리로 돈맛을 보더니, 이젠 세상을 손아귀에 넣어 싶어진 것이냐?" 갑자기 돌변한 말투와는 달리, 법황이 목소리는 조금 전과 똑같이 극도로 담담했다. 하지만 감정을 싣지 않은 법황의 말은, 다루스만에게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버,법황 성하!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꼭 맞잡고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을 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는 백발의 고위사제가 그에게 다가와, 말끔히 정돈된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황급히 종이를 받아 들고 딱딱한 글씨체를 눈으로 따라 내려가던 다루스만은,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종이를 움켜쥐었다. "지난 이십 년간 네가 저지른 죄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걸 보니 감회가 깊겠군." 다루스만은 고위사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격하게 흐느끼며 무릎으로 설설 기어 법황에게 다가가,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공포와 절망에 찬 얼굴을 들어, 간절한 애원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요,용서를....법황 성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재물에 눈이 멀어....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 한번만! 제발!" 부드러움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은회색 눈동자가, 일말의 동정심도없이 오직 피가 얼어붙는 듯한 싸늘함으로 그를 내리눌렀다. "무엄하게 이게 무슨 짓이냐? 성하 앞에서 감히 이런 망거(妄擧)를 행하다니!" 얼굴이 벌게진 고위사제가 서슬 퍼렇게 호통을 치며, 다루스만의 손을 황급히 떼어 냈다. 매섭게 다루스만을 노려보던 고위사제는, 법황이 냉정하게 일어나 접견실을 나가자마자, 근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디우프 다루스만. 넌 날이 밝는 거와 동시에 막대한 포상금이 걸린 수배자가 된다. 그리고 네 모든 재산은 지금 이 시간부터 타미 클라우디오의 소유가 된다." 말을 멈춘 고위사제가, 얼어붙은 듯 꼿꼿하게 앉아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사제는, 천천히 몸을 세운 여인을 정중히 문으로 이끌었다. "타마라! 타마라! 가지 마! 난, 난 어떡해? 타마라!" "내가 당신이라면 노예로 팔아 넘긴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며 자결하겠어요."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다루스만이 이를 갈며 험악하게 소리쳤다.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타마라, 이 배은 망덕한 계집!" "말 조심해, 다루스만!" 매섭게 말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다루스만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똑똑 끊어 말했다. "타미 클라우디오, 그게 내 이름이야." 혼자 남겨진 다루스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그렇게 마비된 듯 굳어있던 그는, 어느새 시간이 흘러 동이 터 오자, 천천히 일어나 힘이 다 빠져 버린 노인처럼 휘적휘적 걸어 접견실을 나섰다. 그리고 자기 집처럼 익숙한 복도를 지나, 길고 긴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날 어디로 데려 가는 거냐고요?" 대답을 듣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엘은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예상대로, 철퇴로 문을 부순 우락부락하게 생긴 다섯 명의 병사들은 물론, 그 옆에서 뚜벅뚜벅 걷고 있는 메릴랭의 영주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자, 엘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거친 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문을 부순 사람들이 방으로 뛰어들어와 그녀를 잡으려 했을 때, 엘은 그야말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집어던졌고, 누구든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에겐 주먹과 다리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댔다.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그녀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엘은 잡히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되리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메릴랭의 영주가, 병사들과 하녀들을 향해 아직까지 목욕도 안 시키고 뭐했느냐고 신경질적으로 역정을 내자, 눈 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의 원인이 목욕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엘이 어이없는 사실에 놀라 주춤한 순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했다. 병사들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하녀 한 명이 재빨리 건네준 길다란 천으로 엘의 손목을 묶기까지 했다. 그리고 몸을 뒤틀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문을 나서더니, 계단을 오른 후 긴 복도를 걸어 현재에 이른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쉴 정도로 끈질기게 몸부림친 엘의 발이, 바닥에 닿은 건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 앞에서였다.그녀를 내려 준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메릴랭의 영주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거뭇거뭇 얼룩이 진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영주의 어이없는 행동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엘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얼굴을 휙 돌리며, 짜증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손으로 닦을 테니까 이 손목이나 풀어 주시지요, 영주님!" 그 즉시 영주의 신호를 받은 병사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얼얼한 손목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는 엘의 눈 앞으로 불쑥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자, 그 볼에 묻은 얼룩만이라도 대충 닦아라! 이런 몰골을 해 가지고, 주제에 감히 누구를 뵙겠다는 건지..." 영주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혀를 차는 순간, 울컥 화가 치민 엘은 손수건을 확 낚아챈 다음 힘껏 코를 풀었다. 영주와 병사들이 일제히 입을 딱 벌리자, 잠시 주위엔 그녀의 코 푸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얼할 때까지 코를 푼 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빨리 안으로 들여보내라!" 도전적으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을 바라보던 영주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즉시 병사 한 명이 문을 열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엘이 대응방법을 찾기도 전에,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 이거 빨리 안 열어요? 지금 당장 안 열면 후회할 줄 알아요! 정말이라고요! 제길! 당신들 모두 가만 안 둘 줄 알아!" 아무리 힘껏 밀어도 문이 꿈쩍하지 않자, 엘은 씨근덕거리며 발로 문을 힘껏 걷어찼다. 하지만 기세 등등하던 그녀는 곧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발가락을 부여잡을 수 밖에 없었다. 엘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화끈거리는 발끝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얇은 가죽신을 신은 발로 육중한 문을 부서져라 찼으니, 발가락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바보 같으니.... 매번 후회하면서 생각없이 발끈하기나 하고.... 바보, 멍청이." 엘은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로 자책의 말을 중얼거렸다. "저도 동의합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흠칫하며 급하게 숨을 들이쉰 엘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신비롭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녀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열렸고,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녀는 시간이 정지된 듯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은회색 눈동자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창가에 그림같이 서 있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아...아니오." 얼떨결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엘은 완전히 넋이 나간 눈으로, 자신의 발을 향해 다가오는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가락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루,루...드비히?" 어안이 벙벙한 엘의 얼굴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도 도저히 못 믿겠다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루드비히라면 제 이름이 맞습니다." 침착하게 말한 루드비히가,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누구신지.... 절 아시는 분이십니까?" 담담한 말끝에 그가 장난기 어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루드비히..." 엘은 조금 숨찬 어조로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루드비히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루드비히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닿을락 말락 살며시 그의 볼을 쓸어 내렸다. 민감한 살갗을 스치는 매끄러우면서도 서늘한 감촉이 너무나 생생히 다가왔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틀림없다는 깨달음이 한순간 밀려들었다. 그를 만났다는 기쁨에,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고 몸이 붕 뜬 것 같은, 조금 아찔한 기분까지 느껴졌다. "이럴 수가! 정말 루드비히로군요!" 엘은 안에서 불을 밝히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루드비히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 순간 그가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더니, 파닥거리며 뛰고 있는 손목 부분에 간지러울 만큼 가볍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루드비히!" 엘은 숨가쁘게 소리치며 따뜻한 그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내 눈으로 루드비히를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말 반가워요!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데, 느낌으로는 몇 년만에 만난 것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감격 어린 기쁨에 엘은 정신없이 웃다가 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루드비히의 단정한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그는 잡고 있던 엘의 손을 살짝 당겨,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한쪽에 놓여진 안락의자로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엘은 그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무의식 중에 의자에 주저앉았다. "루드비히가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도 좀처럼 현실 같지가 않아요! 꼭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러니, 그렇게 웃지만 말고, 무슨 말 좀 해 봐요, 루드비히! 뭐 저에게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미소를 지우고 할 말을 찾는 듯 진지한 얼굴로 변한 루드비히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싱겁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엘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웃음이 조금 잦아 들었을 때, 깊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정말 반가워요, 루드비히. 이런 좋은 일이 생기려고 그랬나 봅니다. 조금 전만해도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는데... 정말 끔찍한 하루였는데...." "끔찍한 하루라.... 대체 어떤 일을 겪으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다루스만 저택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엘은,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고,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상한 노인이 있는 상점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대충 간추려 말해 주었다. "아무 죄없는 우릴 도둑으로 몰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까지 해쳤다는 끔찍한 악질 모략까지 하다니! 루드비히,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다루스만, 내 이 놈을 잡기만 하면!" 주먹을 불끈 쥐고 맹렬히 분노를 드러내던 엘은, 어느새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드비히, 무슨 일입니까?" "단도를 찾기 위해 다시 그 집에 발을 들여놓다니...어떻게 그 정도로 무모할수 있는 겁니까?" 루드비히의 어조는 무뚝뚝하고 냉정하기까지 했다. 엘은 낯설기만 한 그의 모습에 놀라 한순간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루드비히... 저도 제가 잘못한 줄..."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하라는 말을 잊으셨습니까?"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가 주눅든 엘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루드비히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자,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어둡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던 엘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술에서, 숨막힐 듯 무거운 침묵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상에... 이,이럴 수가..." 킥킥거리던 엘은 슬쩍 얼굴을 들어, 감탄 섞인 눈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루드비히, 대단해요! 루드비히가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니! 정말 전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한순간은 정말 가슴이 뜨끔했다니까요!" 그녀의 입술에 배시시 웃음이 그려졌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에 일순 서늘한 빛이 스쳐 갔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어깨까지 떨며 킬킬거리던 엘은, 여전히 냉정하기만 한 루드비히를 보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루드비히가 해준 말씀 잊지 않았습니다. 단 한마디도 말입니다." 진지한 어조의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엘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 참! 겨우 그 정도 갖고 심각한 분위기를 잡는 겁니까? 별거 아닌 일에 괜히 삐치기나 하고..." 그녀는 혀까지 차며 슬쩍 루드비히를 흘겨봤다. "어서 인상 좀 펴요. 그런 얼굴 루드비히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몰라요? 다시 말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냉기 도는 표정은, 루드비히같이 잘생긴 얼굴엔 어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엘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은근히 아부 섞인 말을 늘어놨다. 그러자 은회색 눈동자에 살짝 그늘이 내리며 루드비히의 미간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하고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잠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입술에 허탈 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 보십시오! 그렇게 웃으시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엘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루드비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메릴랭에 어떻게 온 겁니까?"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엘은 문득 머리에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아시리움 성전을 떠나 있어야 한다던 루드비히의 말이 생각나자 그녀 스스로 답을 내놨다. "당연히 일 때문에 온 거겠군요." 그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루드비히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에게서, 왜 성전에 있지 않고 메릴랭에 있는 거냐는 질문이 나오리라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저도 아시리움에서 나왔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답답해서 여행이나 좀 하려고...." "알겠습니다." 힘겹게 나온 궁색한 핑계에 대한 루드비히의 반응은 맥 빠질 정도로 간단했다. "그런데, 루드비히.... 아시리움 성전 소식은 좀 아십니까?" "소소한 건 몰라도 중요한 건 알고 있습니다. 성전 측과는 그 동안 종종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루드비히도 이미 아시고...." 엘은 말을 길게 늘이며 루드비히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흘긋거렸다. 하기 힘든 말을 꺼내려 하자, 자꾸만 망설여지며 입안이 말라 왔다. "말씀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조용한 어조로 재촉했다. "저.... 그러니까 아시리움에서... 저희를 잡으려 하는 것 같은 데...." "아시리움에서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예? 아시리움에서 우릴 잡으려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말씀입니까?" 생각지 못한 말을 듣자 엘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대체 아시리움에서 왜 도망친 왕족들을 쫓겠습니까? 교육 받기 싫어 야반도주까지한 사람들을 잡아서 무얼 하겠습니까?" 루드비히의 말에서 엘은, 그녀가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아시리움에서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가짜 왕족이란 사실 역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아시리움 성전 측에선, 우릴 그저 교육받기 싫어 도망친 철없는 왕족들 정도로 보고 있 는 건가? 그렇다면 사실이 밝혀지기까진 그런 대로 여유가 있겠군. 엘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다 다른 생각이 떠오르자 금세 얼굴이 흐려졌다. 그럼 그 병사들은 왜 우릴 잡으려 한 거지? 우린 그저 말을 사려고 한 것 뿐인데... 그래,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었어.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 잠깐! 혹시... 그 때 상황을 떠올려 본 엘은, 자신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가는 신음소리가 길게 새어 나왔다. 겁에 질려 가슴이 터져라 먼지 길을 달린 일이, 어처구니없는 착각 때문에 벌어진 생고생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식사나 하고 가자는 리오를 윽박지르며, 주린 배를 안고 달리고 또 달렸는데... 엘의 입술에 허탈한 미소가 피어오르더니, 곧 이어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크게 웃어 젖혔다. 이 얘길 알게 되었을 때, 리오와 리반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계속 몸을 떨던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머쓱함을 느끼며 서둘러 웃음을 멈췄다. "좀 우스운 일이 생각나서... 아니 그렇게 웃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웃긴 일이라서..." 엘이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루드비히가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불쑥 꺼냈다. "어딘가 모르게 좀 변하신 것 같습니다." "아...예, 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정확한 부분을 찾기 힘든지, 루드비히가 살짝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엘은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금발로 변한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사실 검은 색에서 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현실에 맞지 않았다.그런데 금세 알아볼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루드비히는 좀처럼 그녀의 바뀐 머리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흐음! 정말 이상하군." 혼잣말을 하는 루드비히의 시선은 엉뚱하게도 엘의 발에 꽂혀 있었다. "아,아니... 거기가 아니라....좀 더 위쪽이 변했습니다." "위쪽이라 하셨습니까?"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올라오던 그의 시선이 이번엔 무릎에 고정되자, 혹시 루드비히가 뻔히 알면서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루드비히, 엉뚱한 행동은 여전하시군요. 대체 발이나 무릎이 변하면 얼마나 변한다고 계 속...." 그녀의 떨떠름한 말이 끝내기 전에, 루드비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힌 엘의 입술에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루드비히의 얼굴에 엷은 미소만 남겨졌을 때,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금발이라니... 좀 이상하게 보이죠? 머리색깔 같은 데 신경을 쓴다는 게 좀 우습다는 생각도 들지만...." 갑자기 루드비히가 불쑥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쓸어 보더니, 다시 잡아 이번엔 살짝 냄새를 맡았다. "땀 냄새가 지독할 거예요. 오늘밤 땀을 많이 흘렸거든요."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 루드비히가, 창피함에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엘을 바라보며, 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댔다. "본래 색으로 돌아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엘은 직감적으로 그가 금발로 변한 그녀의 머리색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잡히지 않으려면 물을 들이는 방법 밖에는 없어서.... 그 때 상황에서는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거든요. 그래도 리오에 비해서는 그런 대로.... 이런 리오!" 얼떨결에 변명을 늘어놓던 엘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두 사람이 떠오르자 버럭 소리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리오와 리반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는지! 루드비히, 혹시 이 성에서 몰래 도망칠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문은 잠겼는데.... 그렇지! 밧줄! 루드비히, 밧줄 가진 거 좀 있습니까? 아, 루드비히가 밧줄같은 걸 갖고 있을 리 없지.... 그럼 창문으로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걸 어떡하지?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래, 바로 그거야!"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며 횡설수설하던 엘이 갑자기 다리를 멈추고 루드비히에게 몸을 돌렸다.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루드비히의 시종인 척하는 겁니다! 누구도 감히 아시리움의 사제님을 의심하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물론 루드비히가 협력해줘야 가능하겠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없겠죠. 루드비히라면 당연히 도와줄 테니까요!" "그럴 생각없습니다." 루드비히가 간단한 말로 엘의 흥분을 단숨에 가라앉혔다. 잔잔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에 짓궂은 웃음이 어리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녀를 말 몇 마디로 회복시켜 주었다. "이미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저, 지금 뭐라고... 무죄가 밝혀졌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엔 기쁨에 앞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먼저 나타났다.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만 무죄가 밝혀졌다니... 그럼 난 이제 도망칠 필요없이 당당하게 여길 나갈 수 있게 된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엘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리오가 리반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한시라도 빨리 두 사람을 찾아야 돼. 하지만 여기서 루드비히와 헤어지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텐데... 이번이 마지막인데... 안타까움과 뒤섞인 아릿한 슬픔이 조금씩 밀려들어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저 이제 떠나야 해요. 만나서 정말.... 루드비히를 다시 보게 돼, 정말 기뻤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잠깐이지만 이렇게 라도 루드비히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번엔 변변히 작별인사도 못 나눴잖아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루드비히가 있어 아시리움 생활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엘은 말을 멈추고 잠시동안 루드비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면.... 영영 만나지 못하겠군요." 루드비히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지자, 그녀는 슬쩍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박여 눈물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막을 새도 없이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은 당황해 어린아이같이 손등으로 눈을 비빈 다음, 루드비히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뜻 모를 빛을 담은 은회색 눈동자가 깊게 반짝였다. "전 이제 가 봐야 합니다." 엘은 일부러 씩씩하게 말했다.루드비히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메릴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나요?" "아닙니다. 날이 밝는 대로 이 곳을 떠날 계획입니다."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이 곳이 메릴랭이니 다시 아시리움 성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리아잔 제국이 되겠군요." "리아잔 제국에도 볼일이 있긴 하지만, 최종목적지는 바르테즈 공국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려던 그녀가 마침내 크게 소리쳤다. "바르테즈 공국이라고요? 루드비히가 바르테즈 공국에 가야한단 말입니까?" "바르테즈에 중요한 볼 일이 있습니다."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와 달리,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잔잔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주의 깊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엘은 탁자에 손을 짚고 얼굴을 루드비히 가까이 가져갔다. "놀라지 말아요, 루드비히! 사실은 우리도 바르테즈 공국에 가는 길입니다! 우리 목적지도 루드비히와 같은 바르테즈란 말입니다! 이런 우연이 있다니! 루드비히, 함께 가지 않겠어요? 우리하고 바르테즈까지 동행하지 않겠느냐고요?" 열정적으로 반짝이던 보라색 눈동자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안되겠군요. 루드비히에게도 동행이 있을 텐데.... 다른 사제님들과 떨어져 우리와 함께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요." "동행은 없습니다. 혼자하는 여행입니다." 담담한 말이 끝나는 순간, 엘은 진지한 얼굴로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 봤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행이 돼 드리죠. 어때요, 루드비히? 함께 가겠어요?" 루드비히가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이 환한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입술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 31장. 새로운 동행-------------------------------------------------------------------세상이 이른 새벽의 적막 속에 잠들어 있었다. 엘은 하루 중 새벽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간인지 새삼스레 감탄하며, 창틀을 꼭 잡고 마차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길게 뻗어 있는 돌길과 줄지어 늘어선 석조가옥을 휘감은 눅눅한 안개 속으로 새벽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안개를 흔들고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지나가자 바람이 스친 곳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엘이 리오와 리반을 발견한 건, 하늘을 바라보며 상쾌한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다 문득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순간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잠깐만 마차 좀 세워 주십시오!"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서자, 엘의 목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던 리오가 리반이 한달음에 뛰어왔다. "거봐! 진짜 알렉스잖아!" "그래, 나도 봤어. 근데 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영주님이 마차를 빌려 주셨어. 얘기가 기니까 우선 마차에 타. 지금 너희를 만나러 마을로 가는 길이었거든. 자세한 얘긴 가면서 해줄게, 어서." 안도감과 의아함이 드러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엘은 활기 차게 말했다. 엘은 리오와 리반이 그녀 앞에 나란히 자리잡은 후,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지난밤 겪은 일들을 간추려 말해주었다. 눈을 끔벅이며 아무 말없이 얘기를 듣고 있던 그들이 입을 연 건 엘이 다루스만의 죽음을 말했을 때였다. "뭐? 정말이야? 정말 다루스만이 죽었단 말이야?" 크게 소리친 리오를 향해 엘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니, 왜 죽었는데?" 리반이 상체를 기울이며 성급히 물었다. "어젯밤에 하그리브 성의 첨탑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야." "혹시... 일부러 떨어진 건 아닐까?" "설마 자살을 했겠어? 그렇게 탐욕스럽고 거만한 사람이? 아마 발을 헛 딛거나 갑자기 현기증이라도 난 거겠지." 조심스런 리반의 질문에 리오가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래서 우리의 무죄가 밝혀진 건가 보다!" "너희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두 사람을 놀라게 해주려고 마음먹고 있던 엘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널 찾으러 다루스만 저택에 무조건 쳐들어갔을 때, 거기 있던 병사가 말해 줘서 알았어. 괜히 잔뜩 긴장해 벌벌 떨고 있던 우리만 우스운 꼴이 되었다니까." 엘은 얼굴을 구기고 투덜거리는 리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직 해야 될 말이 남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기쁜 일이 생겼다는 걸 아직 말 안 했다." "기쁜 일? 무슨 일인데?" 호기심과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엘은 씩 웃음을 지었다. "어젯밤에 하그리브 성에서 루드비히를 만났어! 정말 놀랍지 않아? 이런 우연이 있다니! 더 놀라운 건 루드비히도 바르테즈 공국에 가는 길이라는 거야. 정말 신기하지? 하그리브 성에서 루드비히를 만난 것도 놀라운데, 믿을 수 없게도 목적지까지 같은 거야!" 보라색 눈동자를 샛별처럼 반짝이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엘과 달리, 리오와 리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한숨도 못잔 상태로 그녀를 찾아 다루스만의 저택에서 하그리브 성까지 걸어온 그들이 웃는 얼굴이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생각을 하며 엘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너 설마... 설마 그 사제님께 함께 가자고 한 건 아니겠지?" 리반이 엘의 얼굴을 살피며 제발 아니길 바라는 것 같은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지! 설마 그런 일을 저질렀겠어? 우리한테 말 한마디 없이! 넌 잔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야, 리반." "아니, 그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진실을 고백하는 엘의 목소리는 자연히 기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이상하게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을 하며 슬쩍 두 사람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두쌍의 푸른 눈동자를 발견하자마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렉스, 이번 건은 좀 심했어. 너 혼자하는 여행이 아니잖아. 우린 네 친구이자 여행의 동료라고." 리반의 말에 찔끔한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의견도 묻지 않고 나 혼자 결정해서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목적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되자 너무 흥분해서.... 하지만 루드비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처음엔 좀 낯설겠지만 너희들도 루드비히를 좀 알게 되면..." "안 돼! 무조건 싫어! 난 결단코 반대야!" 리오가 단호하게 엘의 말을 잘랐다. "왜 그래, 리오? 내가 루드비히에 대해 말할 때마다 너도 궁금해하며 만나 보고 싶어했잖아. 괜찮은 사제님 같다고 하면서!" "그거야, 그 때 생각이지. 지금은 절대 아니야. 우선 그 루... 루.... 루.... 젠장! 하여튼 그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리오가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을 펴자 엘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본 다음 리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어때, 리반? 너도 리오와 같은 의견이야?" 갈등이 역력히 드러난 얼굴로 잠시 머뭇거리던 리반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난 잘 모르겠어. 네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꽤 괜찮은 사제님 같다는 생각도 들고 또 호기심도 생겨. 그런데 잠깐 만나는 건 몰라도 함께 먼 길을 여행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럼 너도 반대하는 거야? 다시 생각해보면 안되겠어? 루드비히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실망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엘을 보며, 리오와 리반은 한동안 서로 불편한 시선을 교환했다. "젠장! 에라, 모르겠다! 그래 좋아! 좋다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리오가 자포 자기한 투로 말하자 뒤이어 리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찬성이야. 알렉스, 네 말대로라면 앞뒤 꽉 막힌 고리타분한 사제님은 아닌 것 같으니까." "고맙다! 두 사람 다 정말 고마워!" 엘은 환하게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리오와 리반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근데 그 대단하신 사제님은 언제 만나게 되는 거야?" "루드비히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대. 그래서 그 일부터 마무리지은 다음, 시장을 가로지르는 큰 교차점에서 만나기로 했어. 아침식사 후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아직은 여유가 좀 있어. 난 우선 다루스만 저택에 들러 타미를 만나려고 해. 너희는 모르겠지만 어제 날 도와줬거든...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하고 싶어. 참! 내가 말하는 타미는 바로 다루스만이 마법사라고 소개했던 타마라야. 그런데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다루스만의 재산 전부가 타미 소유가 되었다고 수군대는 소릴 들었어." 하룻밤 새 큰 사건이 많이도 벌어졌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피곤한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럼 네 말대로 타마란지 타민지를 먼저 만난 다음, 식사도 하고 필요한 물품도 대충 구입하자. 그런데 좀 이른 시간이라 시장이 열릴지 모르겠다." 말을 끝낸 리오가 엘 쪽으로 다리를 길게 뻗으며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리반이 하품 섞인 불분명한 어조로 응수했다. "상점 몇 군데는 열어 놓았겠지. 그리고 말 보관소에서 번개도 찾아야 하잖아." "참, 중요한 말을 빼먹었네. 말보관소에 갈 필요가 없어졌어. 번개는 루드비히가 하그리브 성에 부탁해 주기로 했거든. 메릴랭 영주를 보면 그런 부탁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싫다는 말은 차마 못할걸? 아시리움 사제의 청을 거절할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마음 놓고 있어도 될 거야." 리반이 가벼운 어조로 그녀의 걱정을 없애 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엘과 리반의 얘길 듣고 있던 리오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왠지 이번 여행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네. 다루스만이 죽은 걸 모르고 있진 않을 텐데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던 리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몸이 찌뿌드드한지 팔과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리오가 목덜미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다루스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사람이 있기나 하겠어? 모르긴 몰라도 잘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걸?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말이야." 조용한 인기척이 들리자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를 쫓았다. 타미가 하인의 뒤를 따라 안채와 이어진 긴 돌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세 사람 앞에 멈춰 서서 붉고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문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엘은 무표정한 타미의 얼굴에 불편함을 느끼며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이른 아침에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메릴랭을 떠나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싶어 서..." "오늘 떠나시나요?" "예, 시장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출발하려 합니다. 필요한 물품도 사고, 또 일행이 한 명 더 생겼거든요." 엘이 입술을 다물자 타미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하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하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팔에 받쳐들고 있던 꾸러미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여러분의 검입니다. 한 번 들러 주시지 않을까 싶어 준비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검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엘이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을 끝냈을 때 타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한 손으로 감쌀 수 있을 크기의 둥글고 납작한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받으십시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타미가 더욱 길게 팔을 뻗었다. 엘은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았다. 타미의 손에 놓여 있었다고 믿기 힘들 만큼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 통 안엔 모습을 감춰 주는 마법가루가 들어있습니다. 저한테는 있으나마나한 물건이지만 여러분의 여행엔 요긴하게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정확한 사용방법이나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같은 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모습을 감춰주는 가루라고요?" 소리를 높인 리오가 엘의 손에서 살짝 푸른빛을 띠는 매끄러운 통을 집어 올려 신기한 듯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굉장히 귀하고 값이 비쌀 텐데, 이걸 받아도 될지..." 부담스러운 듯 리반의 얼굴은 슬쩍 찌푸려져 있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제겐 어차피 소용없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로 빼앗아 갈까 염려되는지 리오가 재빨리 타미의 말을 가로챘다. "고마워요, 타미. 그런데 타미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엘과 시선이 마주치자 타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거창한 계획같은 건 없습니다.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후회없이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갑자기 짊어지게된 막중한 책임에 겁도 나지만 그 동안 보고 배우고 느낀 걸 되살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어쩌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은 희망에 차 눈을 반짝이는 타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갑자기 뒤쪽에서 앙칼진 고함이 들려 왔다. "타마라, 이 더러운 계집!"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산발한 채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타미에게 달려드는 중년여인이 눈에 잡혔다.엘은 반사적으로 타미를 밀치며 몸을 옆으로 휙 돌렸다. 그녀와 거의 동시에 움직인 리오가 중년여인의 손을 와락 낚아채 재빨리 검을 빼앗았다. "놔! 내 손으로 저 년의 배를 갈라 버리겠어!"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여인의 머리에 턱을 얻어맞은 리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엘은 헝클어진 머리채가 흔들리며 여인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비로소 그녀가 다루스만의 부인이란 걸 깨달았다. 지난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의 화려하고 당당했던 모습은 떠올리기 불가능할 만큼 흐트러지고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핏발이 곤두선 눈동자 가득 담겨 있는 살기 어린 독기에 엘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 변하는 건 없다고? 그러니 여기서 전처럼 살라고? 이 집이 누구 건데, 네 년이 감히! 더러운 년! 내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모두 가로채? 네 년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뒤늦게 달려온 사병과 하인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벌렁 바닥에 드러누운 여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터뜨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격렬히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팽팽하던 줄이 끊어진 것처럼 한순간 몸부림을 멈추고 땅바닥에 머리를 떨구었다. "마님을 어서 안으로 모셔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타미가 조용한 어조로 말하자 하인 네 명이 여인을 들어 올려 끙끙대며 안채로 향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불편한 분위기를 더 이상 참기 힘든지 리오가 짧은 침묵을 깨며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는 엘과 리반에게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오의 뒤를 따르려다 충동적으로 타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이 분명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힘내요, 타미." 타미의 입술에 따뜻함이 느껴지는 미소가 살짝 피어올랐다. "앞으로 메릴랭을 오시게 되면 꼭 다시 찾아 주십시오." 엘은 타미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 놓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타미가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강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흔들림없는 눈빛에서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음에 만났을 땐 꼭 행복하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해요, 타미!" 엘은 대문을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보폭을 넓게 해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카셀은 위쪽, 이케르는 오른쪽, 그리고 세르피언은 아래쪽을 돌아라. 에지몬트 넌 왼쪽을 맡고. 난 시장 뒤쪽 골목을 찾아보겠다." 사일러스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제러드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결의에 찬 얼굴을 힘차게 끄덕였다. "그럼 빨리 움직여라! 메릴랭이 작은 시골마을이 아니란 건 다들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제러드 선배! 보면 아시겠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상점들도 다 닫혀 있고, 사람도 한 명 안 다니는데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라는 말씀입니까?" 제러드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에지몬트를 흘긋 본 다음 카셀에게 간단한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 즉시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여 텅 빈 거리를 걸어갔다. "제러드 선배님!" 답답한 마음에 에지몬트가 큰 소리로 제러드를 불렀을 때, 카셀이 그의 등을 철썩 갈기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은 잠을 자라고 있는 거고, 아침은 일어나라고 있는 거다. 지금은 아침이니 문이 닫혀 있으면 열면 되는 거다, 애송이." 기가 막힌 에지몬트가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이, 이미 다른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구역의 상점 문을 부서져라 두드려 대고 있었다. "저러다 몰매 맞고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에지몬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상점 주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문을 열기 전까진 험악한 욕설을 내뱉거나 투덜거렸지만, 일단 에지몬트의 건장한 체격과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본 다음엔 그런 대로 친절히 물음에 답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메릴랭 같이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서 작은 여자아이를 찾는다니... 내 충고하는데,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수염이 더부룩한 중년남자가 튀어나온 아랫배를 북북 긁으며 말하더니 에지몬트가 뭐라고 더 물어보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이미 같은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막 문을 열고 있는 옆 상점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주인을 뒤로 하고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에지몬트는 그의 무거운 기분과는 반대로 유달리 밝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고 길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어느새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다 쓰러져 가는 판자집 서너 개가 전부였다. 에지몬트는 들러 봐야 시간낭비일 게 뻔하다는 생각을 하며 왔던 길을 터벅터벅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그는 거칠게 몸을 돌려 다 쓰러져 가는 먼지투성이 판자집으로 다가갔다. 꼼꼼한 제러드가 한군데도 빠짐없이 들러 봤느냐고 물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십중팔구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집일 게 뻔한데..." 에지몬트는 툴툴거리면서 엉망으로 찌그러진 문 앞에 섰다. "계시오? 문 좀 열어 주시오! 말 좀 물읍시다!" 그는 덜렁거리는 문을 차마 부술 수 없어 그 옆의 벽을 쾅쾅 두드려 대며 컬컬한 목을 울려 크게 소리쳤다. "우라질! 어떤 놈이야?" 험악한 고함소리와 함께 신발 끄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이 반정도 옆으로 들리며 그 사이로 노파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에지몬트가 흉칙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노파의 기묘한 생김새와 기분 나쁠 정도로 빨간 입술에 놀라 잠시 할 말을 못 찾자, 주름투성이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무슨 일입니까요?" 그를 아래 위로 훑어보던 노파가 슬그머니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자 에지몬트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웠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소녀를 찾고 있소. 나이는 열 일고여덟 정도 됐고.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 주면 고맙겠소.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소."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이라고요? 그런 여자애는 본 적 없습니다요. 그런데 기사님, 웬 놈팡이와 도망친 마누라라도 찾는 겁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새 장가를 드시는 게 나을 겁니다." 노파가 말을 끝내고 거칠게 킥킥거렸다. 은근히 기분이 불쾌해진 에지몬트는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누이동생을 찾는 거요. 아무튼 말해 줘서 고맙소." "누이동생이라굽쇼? 아이고 저런, 기사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습니다. 하필이면 그렇게 행실 나쁜 누이동생을 두셨다니!" 서너 걸음 걸어가던 에지몬트는 빠르게 되돌아와 노파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틈 사이로 발을 밀어 넣었다. "본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군. 그래, 이제 알겠어." 순간적으로 떠오른 놀라움을 재빨리 감춘 노파가 성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거짓말이라고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입니까요? 절 어떻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요? 늙고 가진 거 없다고 무시하는 겁니까?" "솔직히 털어놓으시지! 난 내 누이동생이 남자와 도망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소. 그러니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입에 담은 건, 노파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게 되는 거지.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불안감이 피어오른 눈동자와 그의 발을 밀어내려는 다급한 행동에서 에지몬트는 자신이 의표를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망친 마누라 어쩌고 한 얘기 때문에 헷갈려서 그런 말이 나온 것 뿐입니다! 기사님이 찾는 아이는 결단코 본 적이 없습니다요!" "순순히 털어놓진 않으시겠다? 내 존경하는 큰 형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옳다는 확신이 들면 온 힘을 다해 맹렬히 부딪쳐라.... 여보시오, 내가 노파라면 좀 멀찍이 떨어지겠소." 에지몬트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리를 들어 문을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두 동강이 난 문을 발로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가게! 그만 해요! 정말 모른단 말입니다! 모른다고요!" 노파가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지만 에지몬트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봤습니다! 그런 아이를 봤습니다! 다 말할 테니 제발 그만 해요! 그만 하라고요!" 그가 상점을 반 정도 부쉈을 때 비로소 진실이 터져나왔다. 에지몬트는 동작을 멈추고 노파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 정도에서 일을 끝내려면 절대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알아들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지 말고 털어놓으시오."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아이가 여기 온 게 바로 어제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빨강머리 쌍둥이와 함께였습니다." 의외의 사실에 놀라 에지몬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저 예쁘장한 남자아인 줄 알았더니...." 노파가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 에지몬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아이? 예쁘장한 남자아인 줄 알았다고? 그럼 남장을 하고 있단 말이요?" "그렇습니다요. 겉모습은 꼭 남자아이였습니다. 사실 특이한 보라색 눈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그 아인 여기서 나가 어디로 갔소?" "다루스만 대상 저택에 갔습니다. 마법사를 찾는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면서요." 에지몬트는 노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리며 크게 소리쳤다. "가게 부순 건 먼저 중요한 일부터 해결한 다음에 와서 물어주겠소!" 요란한 발소리가 멀어지자 노파가 눈을 표독스럽게 빛내며 분노에 못이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 가게! 내 가게가 이게 무슨 꼴이야! 우라질! 내 저 놈을! 기사란 무식한 족속들은 다잡자 사지를 찢어 죽어야 돼! 그래 바로 그거야! 다루스만 나리께 말해 저 무식한 놈도 노예로 팔아 버리라고 하는 거야!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허겁지겁 몸을 돌리던 노파는 문 가에 서 있는 에지몬트를 발견한 순간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그냥...홧김에... 화가 나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요! 믿어주십시오! 절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괜히 마음에 걸려 그 소녀가 여기서 무엇을 샀는지 물어보려 왔는데!" 노파는 머리가 핑 도는 안도감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염색약이요. 금발 염색약을 사갔습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을 예상하고 있던 에지몬트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젊은 여인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신가요?" 여인이 아름다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놀랄 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에지몬트는 여인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할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껌벅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다시 한 번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퍼뜩 정신을 차린 에지몬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못난 편견이겠지만 다루스만 대상이라고는 좀 믿어지지 않아서... 참, 제가 여기 온 온 이유는 누구를 좀 찾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검은 머리카락과... 아니, 염색을 해 지금은 금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흑발이나 금발을 가진 보라색 눈동자의 소녀를, 참! 남장을 하고 있으니 소년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흑발, 아니면 금발을 가진...." "보라색 눈동자의 남장소녀를 찾고 계시다는 건가요?" 여인이 말을 가로채 끝을 맺었다. "예, 그렇습니다. 좀 헷갈리시겠지만 잘 좀 생각해 보십시오." "모릅니다! 그런 소녀는 만나 본 적 없습니다!" 필요이상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여인의 태도에서 에지몬트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당장 일어나서 이 곳에 있는 물건들을 때려부숴야 할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 잠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맑은 갈색 눈동자를 보니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에게, 특히 미인에게 한없이 약하다는, 바르테즈 공국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약점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 바르테즈 공국에서 온 에지몬트 하덴 제너시스라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절 믿어주십시오. 그 소녀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위험에서 보호하기위해 찾는 것입니다. 그 소녀에게 어떤 종류의 피해라도 끼친다면 전 그 즉시 제 손으로 자결을 할 것입니다!" 에지몬트는 여인의 눈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긴장된 공기를 울리는 비장한 말이 끝났을 때 먼저 시선을 돌린 것도 그가 아닌 여인이었다. "저도 많은 건 알지 못합니다."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여인이 드디어 입을 열자 에지몬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조금 전에 이 곳에 들러 메릴렝을 떠난다는 말을 했습니다." "메렐렝을 떠난다고요? 언제요? 언제 떠난다는 겁니까?" 에지몬트가 벌떡 일어서며 크게 소리치자 여인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시장에 들러 물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가시면...."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지몬트는 이미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 쪽은 루드비히 사제님이야." 엘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나서, 역시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아랑곳없이 리오와 리반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루드비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은 루드비히가 준비해온 마차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어 그 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루드비히를 어려워 하는지 엘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창백하게 질리기까지 한 그들의 얼굴을 보니 제대로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아,안녕하십니까?" 먼저 정신을 차린 리반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팔꿈치로 옆에 있는 리오를 툭 쳤다. 그러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지 몸을 격렬하게 흠칫한 리오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처...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과 달리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조용했다. "이쪽이 리반이고, 이쪽이 리오예요. 지금은 누가 누군지 구별이 힘들겠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별 어려움없이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가끔은 헷갈리지만요." 엘은 짐짓 밝은 미소를 지으며 리오와 리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무튼 이렇게 넷이 함께 여행을 하니까 정말 기쁘다! 마차도 편하고 또.... 번개도 잘 살 테고.... 또....그렇지, 여행경비도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거야! 더군다나 루드비히는 리아잔 제국을 여러 번 다녀 보기까지 했다니, 길 잃고 헤맬 걱정도 없잖아! 그렇지?" 머리를 쥐어 짜내 좋은 점을 열정적으로 소리쳤건만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동조하거니 맞장구 쳐주지 않았다. 엘의 얼굴에 슬쩍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실망하긴 너무 이르다는 위로를 보내며 괜히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엘이 한숨을 삼키며 등을 기대자 옆에 앉아 있던 리오가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근데 왜 저렇게 온몸을 가리고 있는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감싸고도 모자라 얼굴에까지 검은 천을 둘렀잖아." 흘긋흘긋 루드비히를 살피던 리오가 작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엘은 충분히 그런 의문을 가질만하다고 생각하며 리오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리오, 너도 앞으로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지만 루드비히는 사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사람이야. 한 번 보면 넋이 나갈 정도로. 난 처음 봤을 때 거의 기절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어. 아마 저렇게 얼굴을 가린 것도 정신을 잃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런 것 같아." 엘은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리오는 그녀가 상황에 안 맞게 농담을 한 걸로 받아들였는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 다음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엘은 분위기가 제발 빨리 풀어지기를 빌며 창 밖을 바라봤다. 먼지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창문을 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엘은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부의 모습이 보일까 싶어 목을 길게 빼어 앞쪽을 바라보다 애꿎게 뿌연 먼지만 한껏 들이마신 후 몸을 바로잡았다. 마부는 메릴랭의 영주가 마련해준 마차를- 그의 외아들이 타던 마차라 한다- 몰고 루드비히와 함께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루드비히의 말과는 달리 그에겐 동행이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여행길을 함께 가게 된 마부는 키가 크고 탄탄한 체격을 가진 남자로 놀랄 만큼 새까만 눈동자와 역시 칠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피부색까지도 거무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강렬하면서도 어둡고 음울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루드비히는 그의 이름이 첸이라는 것과 앞으로 마차를 몰 사람이라는 말만 간단히 했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첸이 상당한 실력을 가진 마부라는 건 그가 마차를 출발시킬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별 흔들림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마차를 타는 건 그녀에게 처음있는 일이었다. 엘은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억누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까지 불편해질 정도로 계속해서 루드비히를 흘끗거리던 리오는 어느새 눈을 감고 꾸벅꾸벅 고갯짓을 하고 있었고, 리반 역시 편안한 가죽 등받이에 얼굴을 기댄 자세로 잠에 들어 있었다. 엘은 두툼한 책을 꺼내 읽고 있는 루드비히를 보며 다시 한 번 하품을 참았다. 필사적인 도망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던 어제의 여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녀가 눈을 언제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옅은 잠에 빠졌을 때였다. 갑자기 꿈결처럼 어떤 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선잠에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소리가 들리고 있는 창 밖을 바라봤다. 저만치 뒤쪽에서 말을 타고 그들이 탄 마차를 쫓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고함을 치고 있었는데 덜컹거리는 마차와 바람소리에 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자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를 살폈다. 그러다 그의 황갈색 머리가 햇빛을 반사시키며 한순간 금빛으로 보이자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머저리..."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의 입술에서 금세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맞아! 바로 그 머저리야!" "뭐,뭐야? 무슨 소리야?" "머저리라고? 누가?" 고함소리에 놀라 눈을 뜬 리반과 리오가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저기 좀 봐봐! 우릴 따라오고 있는 사람보이지?" 엘의 손가락 끝을 따라 가던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말을 달리다니....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본데?" 졸음기가 말끔히 가신 푸른 눈을 반짝이며 리오가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렇진 않아. 그저 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첫인사를 나눈 사람이랄까?" "그 정도면 만나 볼만한 사람은 되는 것 같은 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리오. 마차를 세워야겠어!" 엘은 마음을 정한 그 즉시 마부석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막을 주먹으로 힘껏 두드렸다. 마차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는 걸 느끼며 그녀는 다시 한번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 동안 거리가 많이 좁혀져서 이젠 남자의 생김새를 그럭저럭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엘을 발견한 남자가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입을 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위험합니다." 엘과 눈이 마주친 루드비히가 조용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엘이 속도가 빠르지 않아 위험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때, 갑자기 말이 울음을 터뜨리며 거칠게 앞발을 차올리더니 미친 듯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엘!" 에지몬트는 눈앞의 마차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심하게 흔들리며 속도를 높이는 순간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날카로운 말 울음소리와 뒤섞이는 바람에 소녀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노파에게서 다루스만이란 이름과 금발 염색약 얘길 들었을 때부터 에지몬트는 꺼림칙한 예감에 시달렸다. 애써 무시하며 그럴 리 없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던 금발소년의 모습은 집요할 정도로 그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에지몬트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단란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그는 일찌감치 실력을 인정받았고 이미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렇듯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성공일변도의 인생을 걸어온 그는 지나치게 높은 자의식으로 거의 자만심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에지몬트는 다루스만의 저택에서 여인의 얘길 듣고 미친 듯이 시장을 헤맬 때도, 그 와중에서 제러드를 만나 그가 알아낸 사실을 보고할 때도 마음 한쪽에선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에 차있었다. 또 마차에 오르는 빨간 머리를 멀리서 어렴풋이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허겁지겁 말을 구해 뒤쫓을 때도 에지몬트는 자신이 그토록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차 창문으로 비죽 내민 금발의 소년, 아니, 소녀의 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의 이런 자신감과 확신은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에지몬트는 몸을 낮춰 말 등에 달라붙다시피한 자세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마차 뒤를 바싹 따랐다. 반드시 찾아야하는 소녀가 저기 있었다.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령 그의 몸이 바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마차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사실 에지몬트는 자신이 소녀를 찾으리란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차의 속도가 빠르긴 해도 탁월한 승마실력을 자랑하는 그가 마차하나 따라잡지 못해 놓친다는 건 고민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이렇듯 자신 만만한 에지몬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한 건 당장이라도 부숴질 듯 거칠게 요동치는 마차가 소녀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저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마차가 길을 벗어나거나 중심을 잃고 전복되기라도 하면 멀쩡한 몸을 유지하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망상일 것이다. 에지몬트는 만약 소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직까지도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무능한 마부를 곱게 놔두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다리로 말을 바짝 조였다. 그리고 세차게 부딪치는 먼지바람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더욱 가느다랗게 떴다. 그는 이제 팔을 뻗으면 마차를 만질 수 있을 정도까지 접근해 있었다. 잠시 후면 창문을 통해 소녀가 무사한지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힘으로 마차를 멈추고 멍청한 마부를 속 시원히 걷어찰 수 있을 것이다. 마차 안이 조금씩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에지몬트는 점점 흥분이 부풀어오르는 걸 느끼며 소녀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그 순간 매서운 바람이 그를 할퀼 듯이 덮쳐왔다. 그를 공격한 돌풍은 말의 다리를 땅에서 들어 올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겁에 질린 말이 미친듯이 몸부림치자 눈 깜짝할 새 제어력을 잃은 에지몬트는 공중으로 붕 날아올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고통스런 격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불처럼 뜨거운 억센 손아귀가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에지몬트는 가슴을 움켜쥐고 공기를 빨아들이기 위해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몸의 고통보다 그를 더욱 괴롭게 하는 건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소리였다. 에지몬트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을 하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신음을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거리가 많이 벌어졌지만 서둘러 말을 달린다면 마차를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상체를 일으키기도 전에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귀를 파고 들었다. 에지몬트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여 있는 말의 다리를 보는 순간 하늘을 향해 목이 터져라 비명같은 울분을 토해냈다. 옆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혀끝을 깨문 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틀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넘어져서 일어나기는커녕 거의 허우적거리고 있는 리반의 팔을 잡아 그를 도와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의자 등받이에 달라붙다시피 한 리오가 심하게 떨리는 불분명한 어조로 소리쳤다. 엘은 갑자기 뱀이라도 나타나서 말이 놀란 것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혀를 깨물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 모르겠다는 듯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말을 탄 남자가 지금까지도 마차를 쫓아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억눌러야 했다. 중심을 못 잡을 만큼 격렬히 요동치는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차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 위협적이었다. 속도와 충격을 못이긴 마차가 당장이라도 산산조각나거나, 아차 하는 순간 중심을 잃고 전복되어 거친 흙 바닥을 나뒹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당장이라도 넘어올 듯 속이 울렁거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진땀이 배어 흐를 지경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짐에 따라 덜컹거리는 소리와 몸을 뒤흔들던 진동도 잦아들었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린 리반이 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엘은 정신이 멍해지는 현기증을 느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줘 리반의 뒤를 따랐다.마차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진 거친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질펀하게 토하고 있는 리반이 보였다. 그 순간 엘은 입술을 꼭 다물고 서둘러 마차를 돌아 리반과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메슥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 심호흡을 반복했다. "괜찮아?" 어느새 엘을 뒤따라 온 리오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엘은 축축한 흙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럭저럭." "그래, 퍽이나 괜찮아 보인다." 리오가 비꼬는 어조로 말하며 입술을 실룩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 먼지가 날 정도로 털썩 내려앉았다. "리반은 좀 어때?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흐물흐물해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 보고 왔어. 속에 있는 걸 모조리 쏟아 냈으니 곧 괜찮아지겠지. 리반녀석, 꾸역꾸역 쉬지 않고 정말 열심히 늘어놓더라. 어찌나 푸짐하게 토하는지 저러다 이 일대가 전부 오물로 뒤덮이지나 않을까 걱정되더라고." 리오의 말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올라올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엘은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얼마나 아침을 많이 먹었는지 단번에 알겠더라니까. 하긴 폭식해도 할말 없을 만큼 음식이 맛있긴 맛있었지만... 특히 수플레 소스가 질척하고 푸짐하게 얹어 있던 통들새구이는 정말 끝내 주더라! 리반 녀석도 그걸 먹었나? 혹시 리반이 뭘 먹었는지 기억 나? 기억 안 나면 살짝 가서 보고 오던가." "리오, 이제 그만해!" 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치자 리오가 어깨를 떨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난 네가 리반에 대해 묻기에 정성껏 성의를 다해 대답해 준 거 뿐인데. 그렇게 비위가 약해서 힘든 여행을 어떻게 이겨낼래?" 리오를 매섭게 노려보던 엘은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위협적인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리오, 넌 고래고래 비명이 터질 때까지 맞아야 정신 차릴 녀석이야!" "이럴 수가! 그러지 마! 내가 때릴 때가 어디있다고? 그리고 네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뭐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제발 때리지만 말아 줘!" 리오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벌벌 떠는 연기를 그럴 듯 하게 했다. 피식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엘은 장난스럽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리오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주먹을 막으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어떻게 된 녀석이 항상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거냐?" 엘의 주먹을 이리저리 피하던 리오가 투덜거리며 얼굴로 돌진하는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내가 주먹이 앞선다고? 그럼 이건 어때?" 엘은 발로 리오의 가슴을 밀며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감히 리오님의 가슴을 걷어차고, 그것도 모자라 주먹으로 머리를 가격하기까지 해? 땅을 치며 후회하게 해줄 테다, 각오해라!" 엘은 리오가 으름장을 놓는 동안 재빨리 몸을 일으켜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게 준비한 다음 코웃음을 날렸다. "대체 어떻게 후회하게 만들 건데? 겁 하나도 안 난다!" "어허, 그래? 겁내는 게 좋을 텐데... 그것도 많이!" 일어나려 하는 리오의 낌새를 눈치채자마자 엘은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이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흠칫하며 그 자리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잡았다, 겁대가리 없는 녀석!" 리오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와락 휘어 감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날리며 고개를 들던 리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루드비히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찍어 누르는 듯한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리오는 엘의 어깨에 두른 팔을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무의식 중에 그런 행동을 할만큼 그에게 전해지는 싸늘한 압박감은 강렬했다. "루드비히도 바람 쐬러 나오셨나 보군요." 리오와 마찬가지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느끼고 있던 엘은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엘은 루드비히의 말에 재빨리 동의하며 걸음을 떼었다. 엘이 루드비히 옆을 막 지나치려 할 때 뒤따라온 리오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척 올렸다. "어때? 속이 그럭저럭 가라앉은 것 같지 않아?" "어? 그러고 보니 많이 나아졌는데?" 엘이 의외의 사실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짓자 리오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게 다 사려 깊은 이 리오님 덕분이란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래, 정말 가슴 떨리게 고맙다!" 히죽거리는 리오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한 엘은 입술을 닫기 전 싱겁게 피식 웃었다. "리반은 괜찮아졌나 모르겠다." 엘이 걸음을 재촉하며 어깨에 걸쳐진 팔을 치우려고 하자 리오는 손에 지긋이 힘을 가했다. 조금 전에 루드비히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밀려 맥없이 꼬리를 내렸던 일이 떠올랐다. 수치심이 왈칵 밀려들자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리오는 엘의 어깨를 더욱 바짝 당기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이번에야말로 엘과 자신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를 확실히 보여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있으리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루드비히는 마차가 지나온 먼길을 응시하고 있었다.리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바로잡았다. 자신이 넘겨짚고 너무 과민하게 행동한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제님은 엘이 남자인 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상대가 남자라고 그런 감정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잖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 우선은 정확한 상황판단을 내리는 것이 급선무야. 그런 다음에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면.... 그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워야 해! 싸워서 사랑을 쟁취해야 돼! 리오는 결연한 마음으로 팔에 단단히 힘을 가했다. "팔 치워, 리오! 무겁잖아!" 엘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야속할 정도로 그의 팔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한순간 움찔한 리오는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범해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하고는! 도적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멋지게 보이려는 리오의 노력을 가차없이 무너뜨린 엘이 그것도 모자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러려면 연습 좀 더 해야겠다. 지금 같아서는 도적은커녕 시시껄렁한 건달에도 한참 못 미치니까" 낄낄거리는 엘을 보며 리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엘이 자신을 전혀 남자로 보지 않는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쳐 내며 걸음을 빨리해 그녀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붉은 핏줄기가 터져 올랐다. 그와 동시에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낮은 신음으로 바뀌었고, 이내 그 미약한 소리조차 급속도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에지몬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피로 얼룩진 검을 으스러질 듯 틀어쥐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붉은 피를 쏟아내고 있는 늘어진 말의 사체를 외면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에지몬트는 악을 쓰며 애꿎은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한쪽 발로 잡고 있던 몸의 중심이 무너지게 되자 그는 먼지를 피어올리며 거칠게 넘어지고 말았다. 고장난 게 분명한 오른쪽 발목이 땅바닥에 호되게 부딪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는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가혹한 고통에 에지몬트는 피가 나올 만큼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입술의 좁은 틈을 비집고 목구멍에서 짜낸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곧 끈적끈적한 땀이 전신에 배어 들었다. 땅을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말발굽 소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빨리 길 한복판에서 비켜나야 했다. 하지만 에지몬트는 팔다리를 쭉 뻗은 채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소녀를 놓쳤다는 것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까지 저지른 멍청한 행동을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불덩이같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으아악!" 비명같은 괴성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에서도 패배감 섞인 분노가 분출되고 있었다. "에지몬트!" 거친 말 울음소리에 섞여 제러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지몬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순간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이 났지만 그는 단호한 동작으로 몸을 세웠다. 에지몬트는 다리를 절뚝이며 힘겹게 제러드를 향해 다가갔다. 의지력을 총동원해 고통을 억누르려 했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 좀 빌려 주세요! 어서요!" 제러드는 다급하게 내밀어지는 에지몬트의 손을 피해 고삐를 옮겼다.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이 어떻게 말을 타겠다는 거야? 그럭저럭 걷는 걸로 보아 발목이 부러진 것 같진 않지만, 상당히 심하게 접질린 것 같은 데..." "어서 고삐나 이리 주십시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지금 빨리 쫓아가면 따라잡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멍청한 녀석!" 제러드는 코웃음을 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너도 눈이 있으니 봐라. 저기 지평선까지 이어진 실 타래같은 길 위에 개 한 마리 보이는지 똑똑히 보란 말이다!" "젠장! 그럼 이대로 포기하라고요? 거의 잡을 뻔했는데!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었는데! 저보고 이렇게 멍청히 서서 속수무책으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란 말입니까?" "어디로 갔는지 방향도 모르는 상태에서, 또 제대로 걸음도 못 걷는 놈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이럴 때일수록 신중하게 행동해야 되는 거다, 애송이. 잔말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건방지게 단독으로 나서려 하지 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질끈 깨물고 있던 에지몬트가 고개를 푹 꺾었다. 그리고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메릴랭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사일러스 단장님과 합류한 다음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물론 네 발목도 살피고 네가 알아낸 얘기도 자세히 들어야겠지. 자, 빨리 움직여라." 에지몬트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발목이 잘라지는 한이 있어도 말을 달리고 싶은 길에서 억지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제러드의 손을 빌려 힘겹게 말에 올라탔다. 다른 때 같으면 제러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신경을 건드렸겠지만, 패잔병처럼 힘없이 말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금의 에지몬트에게 그런 마음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에지몬트의 머리를 꽉 채운 건 호기심 어린 보라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뿐이었다. -------------------------------------------------------------------제 32장. 붉은 눈의 여인------------------------------------------------------------------- "이게 사실이냐?" 험악한 고함소리와 함께 둘둘 말린 서찰이 곧장 자일스에게 날아갔다. 자일스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찰이 그의 관자놀이를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하고 있는 거냐? 거기 적힌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자일스는 이를 가는 마르키젤의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서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한쪽 팔이 없는 그가 돌돌 말린 서찰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쯤 폈다 싶으면 종이는 어김없이 힘겹게 받쳐진 뭉뚝한 팔에서 튕겨 나와 원 상태로 돌아갔다. "개처럼 입으로 물어 펴는 것이 더 빠르겠구나!" 마르키젤에게서 노골적인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일스와 똑같은 초록빛 눈동자에도 싸늘한 냉기가 감돌뿐 아들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그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마르키젤은 그의 뒤를 이어 리아잔 제국을 다스릴 자일스에게 맹목적이다 할 정도로 애정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일스가 아시리움 성전에서 돌아와 마르키젤 앞에 모습을 보인 그 순간 그가 아들에게 갖고 있던 애정은 눈 깜짝할 새 말라 버렸다. 마르키젤은 자신의 앞에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는 불구자를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첫날 마르키젤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일스를 내쳤다. 그리고 다시는 불러들이지도, 그의 상태가 어떤지도 묻지 않았다. 세상을 호령하는 리아잔 제국의 황제에게 있어 불구자 아들은 이미 죽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마르키젤의 모든 애정은 클레지오에게 옮겨졌다. 마르키젤에겐 모두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다. 우선 유일하게 황후란 명칭으로 불리는 쥬네비아가 낳은 자일스 황태자가 있었고, 크란제르트 황비에게서 태어난 레슈트 황자와 이르티어 황녀가 있었다. 그리고 가프네 황비와의 사이에 아르벨라 황녀와 클레지오 황자를 두고 있었다. 마르키젤이 최근 들어 애정을 쏟고 있는 클레지오는 약 1년 전에 태어난 황자였다. 마르키젤은 이미 자일스가 아닌 클레지오를 황태자로 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해결해야 될 귀찮은 일이 산재해 있었지만, 그의 대를 이어 리아잔 제국을 이끌 황제의 자리에 불구자를 앉힐 수는 없었다. 물론 그에겐 자일스와 클레지오 말고도 레슈트 황자가 있었다. 레슈트 황자는 현재 열 세살이었는데 여섯 살 때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한쪽 발을 심하게 절고 있었다. 때문에 레슈트는 마르키젤의 관심에서 멀어진지 오래된 황자였다. 두 명의 황녀들 역시 그에게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황자가 아닌 황녀에게 리아잔 제국을 물려준다는 건 마르키젤에게있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악과 같았다. 그는 여자란 남자를 위해 태어나 남자를 위해 살다가 역시 남자를 위해 죽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르키젤이 황녀들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하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인형'이라는 표현은 그의 여성관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었다. "누가 저 한심한 놈을 좀 도와줘라." 마르키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쪽에 서 있던 시종 한 명이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찰을 펴 그의 눈 앞에 펼쳐 주었다. "그래, 눈 하난 남아있으니 대충이라도 볼 수 있겠지. 사실대로 말해라! 네가 슈벤 국의 어느 멍청한 놈에게 아르벨라를 주겠다는 약조를 했다는 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절대 그런 약조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일스는 최대한 공손히 대답했다. 치욕스런 모멸감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무자비한 아버지를 자극해 종말을 앞당길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털끝만큼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 분명하렸다?" "예, 믿어주십시오! 슈벤 국이 감히 리아잔 제국에 선을 대기 위해 더러운 술수를 쓰는 게 분명합니다." "알았으니 여기서 썩 나가거라! 만약 네 말이 거짓임이 드러난다면 그 즉시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 자일스는 그를 외면하고 있는 마르키젤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고 문을 나섰다. 참고 참았던 격분이 밀려들었다.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킨 듯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자일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가 아닌 클레지오를 황태자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황궁 전체에 퍼진 말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리아잔을 내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절대 내 것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치자 놀란 시녀들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썩 꺼져라!" 자일스는 그들을 노려보자 험악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시녀가 용감하게 한 걸음 나서며 떨리는 어투로 말했다. "화,황태자 전하! 무슨 일로..." 자일스가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 네 년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 줄까?" 공포에 질린 시녀들이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즉시 자일스는 방을 가로 지른 다음 안쪽에 내려진 우아한 휘장을 걷어 올렸다. 그가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자 침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젊은 유모가 두려움에 질려 숨을 헐떡였다. 자일스는 몸을 숨기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가 힘껏 검을 내 려쳤다. 핏줄기가 터져 오르며 클레지오 황자가 잠들어 있는 침대보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자일스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어 클레지오를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작은 몸뚱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이 감히 내 것을 빼앗는다고? 감히 날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자일스는 거친 숨결을 터뜨리며 피가 방울 져 흘러내리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가 괴성을 지르며 검을 내려치려고 할 때였다. 휘장이 거칠게 젖혀지며 가프네 황비가 뛰어들었다. "안 돼!" 침대에 몸을 던지다시피한 황비가 작은 몸뚱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잡아 안아 들었다. 그 와중에 놀라 잠이 깬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안됩니다, 황태자! 차라리 날 죽이시오! 클레지오만은! 내 아기만은 안됩니다! 날 죽이고 대신 클레지오를 살려 주시오!" 흐느낌 섞인 간절한 애원이 터져나오자 자일스의 얼굴에 진한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너부터 죽인 다음 네 새끼의 숨통을 잘라 버려야 되겠군." 공포에 질린 얼굴로 미친듯이 뒷걸음치던 가프네가 갑자기 결연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클레지오를 죽이고 무사할 줄 아오? 황제폐하께서 황태자를 살려 둘 것 같소?"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며 휘장 자락이 걷어졌다. 그리고 아르벨라가 천천히 피투성이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주십시오, 오라버니." 말을 멈춘 아르벨라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클레지오와 나란히 죽고 싶으신 겁니까?" 자일스가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기세로 아르벨라에게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바짝 검을 가져다 댔다. 가프네 황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클레지오 황자를 안은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멈추십시오, 오라버니. 일이 더 이상 커지면 황제폐하께도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라버니께선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시게 될 겁니다." 검 끝이 목을 누르고 있는데도 아르벨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노려보는 자일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네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겠다." 이를 악물고 내뱉듯 말한 자일스가 거칠게 휘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아르벨라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부짖는 어린 동생과 어머니를 힘껏 끌어안았다. "램에 들르신다니 그렇다면 벨라인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겠군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반이 루드비히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아니오, 그럴 필요없습니다." "그럼 벨라인을 경유하지 않고 램으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루드비히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반의 눈이 한층 휘둥그레졌다. "그 길목에 고르키 산이 버티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설마 고르키 산을 넘어가신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산을 돌아가려면 소요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텐데요." "첸이 알고 있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산을 조금 도는 건 사실이지만 벨라인으로 다시 방향을 돌리는 것보다는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루드비히가 잔잔한 어조로 설명했다. 리아잔 제국에 대해 극히 기본적인 지명만 알 뿐 세세한 부분은 전혀 알지 못하는 엘은 멀뚱히 리반과 루드비히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리오의 행동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간간이 리반을 편들고 나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럴 바에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지금이라도 벨라인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왕이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로 이동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내 생각도 너와 같아, 리반." 두 사람의 대화에 재빨리 끼어 든 리오가 금세 무언가 궁리하는 것 같은 얼굴로 변해 엘을 바라봤다. "네 생각은 어때? 너도 나와 리반하고 같은 의견이지?" "어? 저... 그러니까 난..." 엘이 갑작스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자 리오가 의뭉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동의할 줄 알았어. 그럼 벨라인을 거치는 쪽으로 결정된 거야." 리오는 의기양양한 눈으로 루드비히를 흘끗거리다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뒤늦게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이런 식으로 맥없이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리오는 오기를 부려 고개를 꼿꼿이 치켜 세웠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리오가 어떤 행동을 하든 전혀 관심없다는 듯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냉랭해 보이는 은회색 눈은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엘에게 닿아 있었다. 움직일 줄 모르는 루드비히의 시선을 살피는 동안 리오의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엘조차 그의 어두운 심기를 건드리고 나왔다. "리오, 난 동의한다고 말한 적 없어. 네 마음대로 결정짓지마." "뭐? 너 뭐라 그랬어?" 리오가 필요 이상으로 사납게 반응하자 놀란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넌 나와 리반하고 반대의견이라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아는 게 많지 않다는 말이야. 리반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계속 이 길로 가자고 한 루드비히 역시 괜히 꺼내 본 말은 아닐 것이 분명해. 사실 별 차이가 없다면 굳이 방향을 바꾸면서까지 벨라인을 거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없어. 네 생각이 어떤지 잘 알았으니까. 그래, 내 예감이 맞았어. 역시 넌... 그랬던 거야." 엘이 마치 자신을 배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리오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리오가 잔뜩 흐려진 얼굴로 그녀를 외면하기까지 하자 엘은 답답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내가 뭘? 그리고 그런 말이 아니라니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리오에게서 시선을 뗀 엘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의문을 담아 리반을 쳐다봤다. 하지만 리반 역시 같은 물음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볼 뿐이었다. 어휴! 한 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루드비히에게 미안하다는, 이해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첸!" 루드비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 즉시 마부석을 향해 짧게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차 안에서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방법이 없는 첸이 능숙하게 말을 조정해 마차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엘은 루드비히를 향해 입모양으로 고맙다는 말을 건넨 다음, 뚱하게 앉아 있는 리오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속 시원히 발로 걷어 차주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며 살살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리오,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벨라인을 들러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이 갑자기 놀라는 일만 없었다면 거의 그렇게 했을 테고 말이야. 솔직히 벨라인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엘은 말을 하는 내내 마차천장을 올려다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잠시 후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실소를 짓고 있는 리반이 보였다. 엘은 재미있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 그를 못마땅하게 노려본 다음 한층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리오, 벨라인에 가면 내가... 그러니까.... " 엘은 리오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 만한 걸 서둘러 찾아보았다. 하지만 딱히 '이거다'하고 생각나는 게 없었다. "네가 원하는 거 하나 해줄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리오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잡더니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엘을 응시했다. "내가 원하는 걸 해준다고?" "그래." 리오의 기분이 풀렸다는 생각에 엘은 씩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럼, 당연히 진심이지." "뭐든지?" "그래, 뭐든지." "나중에 딴 말하지 않을 거지?" "그럴 생각이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질문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점점 가중되었지만 엘은 다시 한번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리오가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 보이는 미소를 짓자 불안함을 넘어 불길함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꼭 벨라인일 필요는 없는 거지? 앞으로 내가 원할 때 아무 때나 말하면 해주는 거지?" "그,그...그러지 뭐." 떨떠름한 대답이 나오자마자 리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엘은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며 히죽거리는 리오를 향해 마주 미소를 지었다. 대체 무슨 요구를 할 생각인데 한입 가득 벌꿀을 물고 있는 곰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래저래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엘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리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차진동을 느끼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걸 요구하진 않을 거야. 내 처지를 모르는 리오가 아니니까. 그리고 좀 힘든 일이면 어때? 리오에게 아까운 게 뭐가 있다고...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는 리오를 볼 수 없을 텐데... 엘은 리반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벼운 말투로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따라 환하게 미소지었다. 태양이 지평선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뭐...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라." 귀를 의심하는듯한 사일러스의 묵직한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공간을 울렸다. 에지몬트는 자꾸만 숙여지려 하는 고개를 꼿꼿이 세워 사일러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이 이렇게 어긋난 것이 자신의 잘못이란 걸 잘 알고 있는 그는 모든 비난과 질책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사실 마음 한쪽에선 간절히 그걸 바라고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호된 벌이 내려진다 해도 그가 스스로에게 퍼붓는 쓰라린 자책보다 더 괴롭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소녀를 제 어리석음으로 인해 놓쳐 버렸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에지몬트에게 들어 모든 걸 알고 있는 네 기사들은 근심 어린 눈으로 사일러스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든 공평하고 맡은 임무에 대해 냉철하기로 유명한 사일러스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근심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사일러스의 얼굴은 흡사 그대로 굳어져 돌조각이 돼 버린 것처럼 딱딱해 보였다. 대낮부터 술집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부하들을 발견하고-사일러스가 메릴랭에 도착하자마자 부하들을찾을 수 있었던 건 랑힐 시장입구에서 첫 번째 위치한 술집에다 그들의 숙소를 알려놓기로 미리 약속을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잔뜩 인상을 썼을 때도 지금보다는 덜 험악한 분위기였다. "네가 다루스만이란 자의 사병에게 넘긴 금발의 소년이 엘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곳 사람들 대부분이 어제 다루스만이 관병과 사병들을 풀어 검은 머리카락 소년과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쌍둥이 형제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상점 노파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에게 염색약을 팔고 다루스만의 저택을 가르쳐 주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마주친 소년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다루스만의 사병들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확실합니다. 또 하나 제가 결정적으로 그 소녀가 엘임을 확신하게 된 건 눈동자 색을 본 이후부터입니다." 결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에지몬트는 괴로운 마음에 말을 끊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층 거칠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마차 창문으로 내밀어진 소녀의 눈동자는 누가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보라색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침묵이 좁은 여관 방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꺾은 에지몬트는 물론이고, 나머지 네 사람도 입을 열려는 시도조차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잔뜩 기가 죽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흘긋흘긋 사일러스의 눈치를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숨도 크게 못 쉴 정도로 긴장된 공기는 꽤 오랫동안 기사들을 괴롭혔다. 그 시간 내내 사일러스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에지몬트의 어깨 너머 회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악몽 같기 만한 시간은 에지몬트의 숨통을 바싹 조여 들어왔다. 그 순간순간이 어찌나 괴로운지 차라리 끔찍한 형벌이 한시라도 빨리 내려지기를 바랄 정도였다. "모두 잘 들어라!" 사일러스의 우렁찬 음성이 방안 가득 울리자 기사들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일제히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에지몬트의 발이 나을 때까지 이 곳 메릴랭에 머물겠다. 그런 다음..." "저 때문에 그럴 순 없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에지몬트가 목청을 높여 사일러스의 말을 가로챘다. "입 닥쳐라!" 사일러스가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눈을 부라리며 험악하게 소리쳤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입을 여는 녀석은 그 즉시 목이 잘릴 줄 알아라!" 확고한 의지가 담긴 사일러스의 시선이 인장을 찍듯 단호하게 기사들을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닿자 이케르는 결연한 눈빛으로 사일러스를 응시했고, 세르피언은 침을 꿀꺽 삼켰으며 제러드와 카셀은 서로를 바라봤다. 볼에 경련을 일으킨 에지몬트는 불끈 쥐고 있던 주먹에 더욱 힘을 가했다. "어차피 우린 엘을 놓쳤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순 없다. 내 계획은 이렇다. 우선 이 곳 메릴랭에서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알아낸다. 특히 에지몬트가 말한 노파와 젊은 여인은 중요한 정보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에지몬트가 그럭저럭 걸을 수 있을 만큼 호전되면 그 즉시 나시크로 공간 이동을 할 것이다. 우린 이제 메릴랭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시크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게 될 거다. 다시 말해 뒤쫓는 게 아니라 미리 가서 기다린다는 말이다. 이상이다." "단장님, 나시크에서 훑어 내려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소녀의 목적지가 우리 바르테즈 공국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 판국에, 아니, 명확하다해도 대체 어떤 길을 거칠지 무슨 수로 알고 방향을 잡으라는 겁니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제러드가 질문 끝에 무거운 한숨을 달았다. "그 정도 어려움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우린 엘이 바르테즈로 향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어떤 의심도 망설임도 가져 선 안 된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선 모험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임무 완수는 불가능하다. 성공 아니면 실패, 우리 앞엔 이 두 가지 길 밖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다. 머리를 써서 안되면 직감을 최대한 이용하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일러스의 말은 기사들의 얼굴을 한층 어둡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아랑곳없이 사일러스는 더 이상 낭비할 시간없다는 듯 단호하게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단장님, 나가시기 전에 임무를 망친 것에 대한 합당한 벌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자결을 하라 셔도 군말없이 따르겠습니다!" 에지몬트가 비장하게 외쳤다. 그러자 그를 향하는 사일러스의 짙은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당장 자결하라해도 따르겠다고? 정 그렇게 죽고싶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까짓 일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멍청한 놈은 백번 자결을 한다해도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네 소원을 이루려면 우선 엘부터 찾아야 할거다. 임무를 팽개치고 무책임하게 목숨을 잃는 녀석들은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테니까." 에지몬트는 내리 꽂히는 사일러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죽어야한다면 나 역시 더 이상 숨을 쉬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일의 모든 책임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던 내 잘못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잘잘못을 따지는 건 일을 완수한 다음으로 미루겠다. 자, 모두들 빨리 움직여라." 당장 벌을 내려 달라고 말하려던 에지몬트는 문으로 향하는 사일러스의 완강한 어깨를 보며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뭣들 하는 거냐? 빨리 움직여라!" 문을 연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예, 단장님!" 기사들이 절도있게 대답하며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힘내, 애송이." 이케르가 에지몬트 옆을 지나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러드와 카셀이 에지몬트의 어깨를 툭 건드린 다음 이케르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세르피언이 입을 열었다.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잘못을 만회할 기회는 앞으로 수없이 많다. 그리고 내 장담하는데 그런 기회가 온다면 넌 누구보다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거다." 말을 끝낸 세르피언이 쑥스러운 듯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요, 선배." 에지몬트가 나지막이 진심 어린 말을 던지자 세르피언이 그를 돌아보며 씩 웃어 보인 다음 문을 닫았다.혼자 남게 된 에지몬트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조심스럽게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괴로움 섞인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붉은빛이 작렬하듯 터져 올랐다. 높은 천상에 닿을 듯 솟구친 빛이 급속도로 잦아들더니 이내 사람 얼굴크기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바람이라도 맞은 듯 이리저리 흔들리다 끝내는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이럴 리가 없는데..." 빛이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년남자가 심하게 떨리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흠칫하더니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전하!" 절박하게 소리친 남자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상석에 앉아 있는 자일스를 바라봤다.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또 달란 말이냐?" 자일스의 입에서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나오자 벌겋게 상기된 중년남자의 얼굴에서 일순간 핏기가 빠져나갔다. "평소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습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긴장 때문에... 고귀하신 황태자전하 앞이라 너무 긴장되어 제 실력이 나오지 않은 것 뿐입니다! 기회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간촉(懇囑)드립니다, 전하!" 깊숙이 숙여진 남자의 머리위로 짜증 섞인 눈초리가 쏘아졌다. 금방이라도 폭발할듯한 자일스의 마음을 읽은 노소프는 뒤 쪽에 정렬해 있는 호위기사들에게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남자가 격한 숨을 뱉어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위기사들을 눈치챈 그의 사지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저,전하! 제발! 한 번만!" 남자에게서 눈물과 흐느낌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한층 험악하게 변한 자일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 저 놈의 입과 혀를 도려내버려라!" 재빨리 다가선 기사들이 남자의 입을 막고 거칠게 잡아일으켜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어서 다른 마법사를 들여보내라!" "전하, 더 이상의 마법사는... 찾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그럼 지금까지 기껏 찾은 게 이런 놈들 밖에 없단 말이냐? 어떻게 다섯이나 되는 놈들 중에 쓸만한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노기 가득한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가 내리 꽂히자 노소프는 마른 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그리 흔한 존재도 아니고... 또 시일이 너무 촉박하여... 시간을 좀 더 주시면 전하께서 흡족해 하실 그런 마법사를 찾아내겠습니다." "좋다, 노소프. 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하지만 다음 번에도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네가 내 앞에 들이댄 한심한 놈들보다 네 피가 먼저 땅에 뿌려질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썩 꺼져라! 거기 너희들도!" 머리를 조아린 노소프와 호위기사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자일스는 주먹으로 의자 손잡이를 연거푸 내려쳤다. "젠장!" 자일스가 욕설을 뱉어 내자마자 뒤이어 조금 쉰 듯 하면서도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누구냐?" 흠칫한 자일스는 미친 듯이 고개를 휘저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디에서도 눈이 띄지 않았다. 환청을 들은 거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을 때,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붉은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저,저게 뭐야?" 겁에 질린 자일스는 본능적으로 움직여 의자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밖에 누구없느냐? 빨리 들어와라! 빨리! 뭣들 하는 거냐?" "소용없습니다, 전하." 다시 한번 같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안개같이 피어오르던 붉은 빛이 일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육감적인 몸매를 붉은 드레스로 감싼 젊은 여인이었다.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지르셔도 밖에선 작은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자신을 공격한 마법사를 떠올리고 있던 자일스는 여인의 모습에 어느 정도 자제심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여인을 살피며 의자에 앉았다. "넌 누구냐? 누군데 감히 내 앞에서 이런 돼먹지 못한 짓거리를 한단 말이냐?" "인사 올립니다, 자일스 황태자전하. 전 마체라타라 합니다." 마체라타가 유연한 몸짓으로 허리를 굽히자 길게 늘어진 검붉은 머리채가 등과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며 찰랑거렸다. "무엇을 노리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냐? 조금이라도 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 즉시 목이 잘릴 줄 알아라." 고개를 들어 자일스를 바라보는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불을 내뿜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원하신다면 제 목 정도야 언제든지 전하 앞에 바쳐 올리겠습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농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일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체라타를 바라보며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이 곳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전하를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전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이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마법사라 불릴 자격도 없는 한심한 놈들 때문에 실의에 빠져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네가 마법사란 말이냐?" 자일스의 어조에서 놀라움과 의심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마체라타의 얼굴에 희미한 불쾌감이 나타났다. "제가 전하 앞에 어떤 방법으로 나타났는지 그새 잊으셨습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지만 마체라타의 말에 놀란 자일스는 커다랗게 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을 해드린다면 절 믿으시겠습니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걸 해주겠다고? 네 까짓 게 말이냐?"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자일스가 눈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아 여인의 몸을 훑어 내렸다. "비천한 네 몸뚱이 따위는 내가 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러니 몸이 반으로 잘리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지는 게 좋을 것이다." 노골적인 모욕에 대한 대답은 놀랍게도 톤 높은 웃음소리였다. 몹시 즐거운 듯 웃어 젖히던 마체라타는 자일스가 눈을 부릅뜨며 노기를 드러낸 순간 웃음기를 말끔히 지워 버렸다. "전 전하께서 잃으신 팔과 눈을 고쳐 드리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초록색 눈동자의 동공이 팽창하며 자일스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황급히 다시 열었다. 그러나 거친 숨결만 터졌을 뿐 제대로 된 말은 한마디로 나오지 않았다. 자일스는 몇 번 크게 숨을 몰아쉰 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다시...다시 말해봐라...." "이 마체라타가 전하의 눈과 팔을 당당하시던 예전 모습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자일스의 반응을 즐기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낸 마체라타가 매끄러운 어조로 자신있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 정말 네게 그런 힘이 있단 말이냐? 어서 말해봐라! 정말 내 눈과 팔을 돌려줄 수 있단 말이냐?" "물론입니다, 전하. 그럴 능력이 없다면 제가 어찌 전하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냐? 아,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내 눈과 팔을 고쳐만 준다면 네가 원하는 뭐든 걸 들어주겠다! 원한다면 리아잔 제국의 반을 떼어 줄 수도 있다!" 침을 튀기며 숨가쁘게 소리친 자일스는 마체라타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리아잔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 전하의 발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전 그저 전하 옆에서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 뿐입니다." 자일스의 손을 살짝 뿌리친 마체라타가 두 팔을 내밀어 그가 입고 있는 웃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자잘한 단추가 풀어지고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다음 순간 옷이 흘러내리며 절단된 팔이 드러나자 자일스의 몸이 단단히 굳어졌다. 지금껏 그의 팔을 본 사람은 그림자처럼 옆에서 시중을 드는 노소프와 어의 서넛을 제외하곤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자일스는 덜렁거리는 팔 소매를 사람들의 시선에서 감추기 위해 철심을 박은 옷을 입기까지 했다. "가엾고, 또 가여운 팔." 마체라타가 팔의 절단 부위를 어루만지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자일스는 미동없이 앉아 그녀의 유연한 손놀림을 홀린 듯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때의 자일스라면 감히 이런 주제넘은 말을 한 자의 혀를 뽑아 내고 그 즉시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도 분노가 치밀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 어린 말투와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에 가슴 뭉클한 어떤 감동같은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체라타가 얼굴을 숙여 살짝 입을 맞추자 팔 근육이 수축되며 단단히 굳어졌다. 검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고혹적으로 반짝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자일스는 극도의 초조감에 휩싸여 버럭 역정을 내며 거칠게 팔을 뿌리쳤다. "이 따위 것으로 내 팔을 낫게 해준다는 거냐? 만약 이 모든 게 네 앙큼한 혓바닥이 지어낸 거짓이라면 내 손으로 널..." "고정하십시오, 전하." 마체라타가 달래는 어투로 자일스의 격앙된 말을 멈추게 했다. "성급함과 분노는 일을 그르칠 뿐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마체라타는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금빛을 띤 가느다란 줄에 꿰어져 있는 건 엄지 손톱 크기의 검은색 돌이었다. 자일스는 숨을 죽인 채 가볍게 흔들리는 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체라타가 돌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에서 낯선 속삭임이 흘려 나오자 돌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검은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연기가 사라진 후 펼쳐진 손바닥 위에 모습을 보인 건 검붉은 색을 띤 작디작은 알갱이였다. "처음엔 조금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알갱이 하나를 집어 든 마체라타가 손을 자일스의 절단된 팔로 가져갔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를 찌르자 작은 핏방울이 번져 나왔다. 마체라타는 신중한 손놀림으로 검붉은 알갱이를 상처 위에 올렸다. 피에 잠긴 알갱이가 갑자기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단숨에 피를 빨아들였다. 흡수한 피의 양만큼 몸집을 부풀린 알갱이가 이번엔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이게 뭐야?" 경악과 두려움에 찬 자일스가 벌떡 일어나 격렬하게 팔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점점 크게 벌어지는 상처 사이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자일스의 입술에서 고통을 못이긴 비명이 터져 올랐다. 진흙덩어리같이 보이는 질척한 것이 피투성이 팔을 뚫고 꿈틀거리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 순간 자일스는 끔찍한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토록 고통스러우십니까, 전하?" 울부짖으며 몸을 뒤트는 자일스를 내려다보던 마체라타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네 년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서슬 퍼런 고함에 마체라타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이제 웬만큼 고통이 사라졌나 보군요. 일어나십시오, 전하. 그리고 새로 생겨난 팔을 마음껏 움직여보십시오." 그 즉시 자일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예전처럼 온전한 모양으로 변한 팔을 발견하고 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투성이 팔을 어루만지는 조심스러운 손끝이 겉잡을 수 없이 떨렸다. "이,이게 정말 현실인 거냐?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냐? 말해봐라... 아니지? 절대 꿈은 아닌 거지?"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자일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목 멘 어조로 물었다. "예, 전하. 분명한 현실입니다." 마체라타를 향하는 초록빛 눈동자에 물기가 서리더니 곧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일스는 눈을 질끈 감아 눈물을 털어 낸 다음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눈을 고칠 차례다." "눈 역시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전하." "상관없다! 어서 해라, 어서!" 자일스는 목을 길게 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가오는 마체라타 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마체라타입니다, 전하. 감히 단언하건데 앞으로는 전하께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입술에 그려진 미소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제 33장. 암운-------------------------------------------------------------------마차가 멈춰 선 건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 무렵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게 흔들린 마차가 완전히 정지하자 가장 먼저 마차에서 떨어지듯 밖으로 나간 사람은 리오였다. 그 다음으로 땅에 발을 디딘 엘은 리오가 터뜨린 요란한 신음성을 들으며 통나무처럼 느껴지는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한군데도 빠짐없이 구석구석 결리고 쑤시는 몸 때문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음을 옮기는 리반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처럼 그게 뭐야? 그렇게 있으면 몸이 굳어져서 더 힘들어진단 말이야. 어서 일어나 천천히 걷기라도 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반의 끙하는 소리와 리오의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난 안 돼.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아." 리반이 팔다리를 길게 뻗고 누워 있는 리오 옆에 몸을 뉘이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한참 어린 너같은 녀석은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을 알지 못할 거다." 엘이 무슨 말을 해도 자신과 그녀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던 리오가 반박하려면 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엘은 흘끗 리반의 눈치를 살핀 다음 리오를 노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리와서 어르신 다리나 좀 주물러라!" 잔뜩 무게를 잡은 리오가 팔베개를 하며 약올리듯 히죽거렸다. "두 분, 할아버지 정말 고생이 많으시네요. 정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영원히 편안하게 쉬실 수 있게 바로 그 자리에 정성껏 묻어 드릴 테니까요. 특히 그 헛소리 잘 하시는 입 주위는 신경 써서 꼭꼭 다져 드릴 테니 마음 푹 놓으세요." 엘은 비꼬는 어조로 말한 다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여튼 저 녀석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한 번도 없다니까." 엘은 투덜거리며 그녀를 흘겨보는 리오에게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키 득거리며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주위를 살폈다. 저만치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루드비히를 본 순간 엘은 즉시 걸음을 떼었다. "자,잠깐!" 리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쳤다. 엘은 걸음을 멈추고 왜 그러냐는 물음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저기 그러니까... 궁금한 게 있어! 중요한 일이야!" "뭔데?" 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에게 다가갔다. "우선 여기 좀 앉아 봐." 리오는 엘이 자신의 앞에 앉자 루드비히를 흘끗 바라본 다음 그녀 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무슨 말인데 그래?" 리오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리반까지 몸을 일으켰다. 리오는 뜸을 들이며 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비밀얘기를 하듯 몸을 낮췄다. "뭐가 궁금하냐면 저 첸이란 마부말이야.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리오를 따라 엘과 리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첸에게 향했다. 그는 몸을 구부려 마차바퀴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엘의 반문에 이어 여전히 첸을 바라보고 있던 리반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도 유난히 과묵한 성격일 뿐 딱히 이상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 데?" "너희들 저 마부가 말하는 거 한 번이라도 들은 적 있어? 또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걸 본 적은 있어?" 엘과 리반에게 수긍하는 빛이 떠오르자 리오가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생긴 것도 좀 기분 나쁘고 분위기도 왠지 음울하고... 또 난 저렇게 긴 머릴 가지고 있는 마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있던 엘은 어이없는 말에 실소를 지었다. "머리가 길어서 수상하다고? 그게 말이 돼? 나만 해도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고 루드비히는 허리까지 닿는단 말이야. 참,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루드비히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야! 색깔도 정말 신비로워 보이는 실버블론드인데, 감촉도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그거야! 어렸을 때 작은 새끼 고양이를 만져 본 적이 있는데, 루드비히 머리카락 감촉이 그 새끼 고양이와 비슷해! 그것 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향기가 나는지, 아마 천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흥분해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소리치던 엘은 재빨리 입술을 다물었다. 잔뜩 인 상을 쓰고 있는 리오와 불편한 표정으로 흘끗흘끗 그녀의 어깨 너머를 살피고 있는 리반을 보건 데 뒤에 누가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엘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듯 뻣뻣한 목을 조심스레 돌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검은 망토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엘의 시선이 망토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루드비히와 시선을 마주할 정도로 넉살이 좋지 않은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내렸다. "아...하하...하... 루드비히..." 엘은 창피함에 잠시 울상을 지었다가 매우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이 곳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담히 말한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멀어지자 엘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정말 다행이다! 루드비히는 내 말을 듣지 못했나 봐. 못들은 게 틀림없어. 만약 들었다면 분명 짓궂게 날 놀렸을 거야.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이야." "알렉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저 사제님은 네가 실버블론드란 말을 꺼냈을 때 이미 네 뒤에 서 있었으니까." 리반은 말을 끝내고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렸다. "이 배신자! 그럼 나한테 무슨 신호라고 줬어야지!" 엘이 도끼눈을 뜨고 매섭게 노려보자 리반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난 분명히 몇 번이나 신호를 줬어. 눈짓으로 안돼서 발로 네 다릴 건드리기까지 했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신호를 줘도 말하는데 정신이 팔려 아랑곳하지 않은 건 너라고." 결국 둔한 자신을 원망할 수 밖에 없게 된 엘은 길고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과 같이 얼굴이 화끈거리는 창피함은 사라지겠지만, 당장 루드비히를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루드비히가 날 얼마나 이상한 애로 볼까?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느니 촉감이 새끼 고양이 같다느니 하는 낯뜨거운 말을 잔뜩 늘어놨으니.... 더군다나 루드비히는 날 남자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난 내 느낌을 솔직히 말한 것 뿐이잖아. 창피해야할 일이 아닐 것도 같은 데... 루드비히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고. 루드비히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게 분명해. "그래,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그럭저럭 마음을 가라앉힌 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내렸다. 불을 피우고 있는 첸과 어느새 자리를 옮겨 마차에서 이것 저것 필요한 물건을 내리고 있는 리반이 보였다. "우리도 가서 돕자." 엘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뚱한 얼굴로 앉아 있는 리오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앞장서 성큼 성큼 걸어갔다. 리오는 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굼뜬 동작으로 어정쩡하게 몸을 세웠다. "새끼 고양이..." 그는 입술을 비죽이며 팔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쓸어 보았다. 잡초처럼 뻣뻣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스치자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후 팔을 내리던 리오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가까이 가져와 유심히 살폈다. 머리카락은 그 동안 초록색이 군데군데 벗겨지며 붉은 색과 반정도 뒤섞이는 바람에 한층 흉측해 보였다. "실버블론드..." 침울한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리오, 어서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리오는 엘의 외침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빨리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는 어차피 사제야. 당연히 내가 유리할 수 밖에 없어. 아부일수도 있지만 나도 잘 생겼다는 말은 꽤 여러 번 들었고, 또 외모에서 밀린다 해도 난 나름대로 장점도 많잖아. 그래, 난 그냥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가면 되는 거야. "난 뭘 하면 돼? 말만 하라고. 뭐든지 해낼 테니까." 리오는 자신을 돌아보는 엘을 향해 씩 웃으며 자신있게 소리쳤다. 무엇인가가 잠을 깨웠다.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바람 탓인지 작은 나뭇가지가 불에 타며 가볍게 튀어 오르는 소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불편한 잠자리 탓일지도 모른다.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했을 때 엘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쏟아지는 잠을 쫓은 후에야 루드비히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부스럭거리는 작은 기척을 느낀 루드비히가 천천히 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잤어요?" 엘은 대답이 뻔한 질문을 던지며 모포를 두른 채 굼뜬 동작으로 일어나 앉았다. 루드비히 역시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그녀를 바라 보기만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앉아 발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루드비히." 나직이 그를 부른 엘이 머뭇거리자 루드비히가 잔잔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말이에요. 루드비히는 사제님이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님이니까... 어쩌면 알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엘이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리자 그가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말을 꺼내기 전 엘은 용기를 내려는 듯 선선한 밤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리오는 이번 일로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건가요?" "아시리움에서 그에게 어떤 조처를 취할지 궁금하십니까?" "예, 궁금합니다!" 엘은 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리오가 낮게 웅얼대며 몸을 뒤척이자 찔끔해 금세 숨소리를 죽였다. "알고 계신 게 있다면 아무 거라고 좋으니 말씀 좀 해주십시오. 루드비히가 맡은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제님들께 전해 들으신 얘기가 있을까 해서요. 혹시 전에 같은 일로 벌을 받은 왕족이 있나요? 있다면 대체 그 왕족에겐 어떤 벌이 내려졌는지 아십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이 보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알고 있기로 교육이 끝나기 전 아시리움을 이탈한 왕족은 이번 경우를 제외하고 두 명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벌이 주어졌습니까?" 엘은 루드비히의 단정한 입술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명에겐 벌금형이, 다른 한 명에겐 참회의 시간이 내려졌습니다." "벌금형과 참회의 시간이라고요?" 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잔뜩 긴장한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그녀는 예상과 다르게 형벌이 극히 경미하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금은 그렇다치고, 그 참회의 시간이란 뭘 뜻하는 겁니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엘을 보며 루드비히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왕족이란 신분에 따른 모든 특권을 빼앗기고 어느 외진 곳에 노예로 보내졌다 하더군요. 더 이상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꺼내려하다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그,그럼 리오도... 어쩌면 리오도 그런 벌을 받게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모든 건 아시리움에서 결정될 겁니다." "그 두 왕족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무슨 차이가 있기에 그렇게 다른 벌이 내려지게 된 겁니까?" 애타는 그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루드비히의 태도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조금 잦아든 모 닥불에 서너 개의 굵은 나뭇가지들을 던져 넣은 다음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시리움은 벌을 내리기 전, 먼저 그 왕족과 그의 이탈사유에 관해 상세히 조사합니다. 그 후에 형벌의 강도를 결정짓는 겁니다." "하지만 그 왕족이 어떤 사람이고 사유가 무엇이든 간에 죄목은 기껏 해야 교육이 끝나기 전에 아시리움 성전을 나왔다는 거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하루 아침에 노예로 만들 수가 있는 건가요? 아시리움 종단이 일방적으로 정한 규칙에서 벗어난 게, 높으신 분들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이 그토록 엄청난 죄란 일입니까? 대체 아시리움이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하는 거죠? 법황 성하께서 결정하신 일인가요? 대체 그분은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일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잔뜩 흥분한 엘이 당장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신성 모독적인 말을 쏟아냈다. 격앙된 어조로 소리치던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깨닫고 흠칫 놀라 허겁지겁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엘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은 사람이 루드비히 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쩍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저, 루드비히... 제가 좀 흥분해서.... 루드비히는 그저 사제님이실 뿐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엘은 계면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정면을 응시한 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불그스름한 음영 때문에 한층 신비로워 보이는 수려한 이목구비를 조심스레 흘긋거렸다. "설마 리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니겠죠? 이번 일은 모두 제 탓일 뿐 리오에겐 잘못이 조금도 없습니다. 손톱만큼, 아니, 먼지만큼도요." 엘은 그녀에게 닿은 루드비히의 시선을 붙잡으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녀를 응시하는 은회색눈동자에 한순간 불가해한 빛이 스쳐갔다. "루드비히, 리오는 괜찮겠죠? 아시리움 성전에 가기 전, 그러니까 절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리오에겐 잘못이 없으니까 벌금을 내는 정도의 벌이 내려지게 될 것 같은 데... 루드비히 생각은 어떤가요? 돈이라면 제가 대신 내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돈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일만 잘 풀리면 곧 꽤 많은 돈.... 아니, 엄청난 돈이 생기게 되거든요." 엘은 두 손을 맞잡고 매달리듯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루드비히가 어떤 확실한 말을 해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엘은 그저 괜찮을 거라는, 아무일 없을 거라는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루드비히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게 느껴지는 얼굴로 아무 말없 이 앉아 있었다.시간이 지나 조금씩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엘은 차라리 루드비히가 시끄럽다는 호통이라도 쳐주길 바라는 심정이 되었다. "루드비히, 생쥐가 혀를 물어 가기라도 했습니까? 왜 벼락 맞은 나무처럼 뻣뻣하게 앉아 볼 것도 없는 모닥불만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는 겁니까?" 루드비히가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기는 엘을 바라봤다. 달빛이 그의 은회색 눈동자 속에 깊이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은은한 빛이 동공 속에 신비로운 금빛 반점들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만 주무십시오."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정중해서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은 잠시동안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두툼한 가죽깔개 위에 모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멀뚱히 루드비히를 바라보다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루드비히는 지금 주무시지 않을 건가요?" "예." "졸리지도 않으십니까?" "원래 잠이 없는 편입니다." 엘은 루드비히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도 않나요?" "....예." 잠시 뜸을 들인 루드비히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하루종일 마차에 시달렸는데도 피곤하지 않으시다고요? 겉보기와 달리 몸이 무척 튼튼하신가 보네요! 아, 물론 좋은 뜻으로 한 말입니다!" 감탄조로 말한 엘은 배를 깔고 엎드려 턱을 받친 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루드비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루드비히,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별 생각없이 나온 질문이었지만 일단 입 밖으로 꺼내 보니 새삼스레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디 제가 한 번 알아맞혀 볼까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마냥 엘의 눈이 쉴 새없이 반짝였다. 그녀와 달리 루드비히는 어떻게 손댈 수 없는 골치덩어리를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고 있었다. "어디 보자, 흐음! 키도 그만하면 큰 것 같으니 대충 눈대중으로 짐작해도 일단 열 살은 넘은 것 같이 보이는군요."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말한 엘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재빨리 입술을 깨물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가까스로 웃음을 삼킨 그녀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근엄한 표정을 그럴듯하게 지어 보였다. "으음... 허리가 꼿꼿한 걸 보니 아직 손자가 있을 만한 나이는 안된 것 같고..." 어이없다는 얼굴의 루드비히와 시선이 마주치자 엘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리오와 리반을 깨우게 될까 봐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심지어는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웃어댔다.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음이 많이 수그러진 엘은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장난치지 않을게요, 루드비히. 진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루드비히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일단 열 살은 넘었습니다." 그는 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뉘었다. "저도 잠을 청해 볼 테니 어서 주무십시오." 엘은 타이르는 듯한 조용한 말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금세 눈을 반짝 뜨며 고개를 부자연스런 각도로 돌려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루드비히, 자는 건가요?" 낮은 신음 소리와 섞인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예." 엘은 루드비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는 어쩌다 사제님이 되신 겁니까? 스스로 원해서인가요? 아니면 주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엘이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저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담담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난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의지대로 선택하며 살아온 건가? 엘은 흩뿌린 듯 반짝이는 별무리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일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루드비히, 잠 들었나요?" 나지막한 목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루드비히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져왔다. "제 머리카락 감촉이 정말 새끼 고양이 같습니까?" 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감싸며 서둘러 그럴듯한 대답을 궁리했다. "생쥐가 혀를 물어간 겁니까?" 그녀가 좋은 말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루드비히가 얄밉도록 매끄러운 어조로 짓궂게 물었다. 엘은 루드비히를 향해 슬쩍 혀를 내밀어 보인 다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잠드셨습니까?" "예." 엘은 작게 말한 다음 모포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모포자락 안으로 스며들었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서던 노소프는 문 가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자일스는 노소프에게 들어오라고 수락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는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자일스의 신경은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노소프는 방자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태도에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자는 너무나 손쉽게 자일스를 휘어감아 버렸다. 자일스의 입장에선 자신의 눈과 팔을 온전하게 고쳐 준 그녀에게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고마움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노소프가 익히 알고 있던 자일스는 마체라타의 오만 방자한 태도를 곱게 보아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단언하건데 누군가가 마체라타의 말과 행동을 흉내라도 냈다면 그에겐 당장 끔찍한 죽음이 내려졌을 것이다. 노소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찌푸린 얼굴을 펴고 못마땅한 기색을 조심스레 감췄다. 마체라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자일스가 그녀에게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 분명한 지금-자일스는 그의 주위에 불러들였던 수많은 호위기사들까지 모조리 물러가게 했다-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섣부른 행동을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노소프는 목을 가다듬은 후 점잖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소인이 긴히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작게 소곤대던 마체라타의 목소리가 끊기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자일스가 노소프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냐?" "전하께서 제게 내리신 명령에 대한 것입니다." 초록빛 눈동자에 섬광이 번쩍이더니 자일스가 몸을 기울인 마체라타를 밀어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서 고하거라!" 노소프는 망설이는 얼굴로 마체라타를 흘긋거렸다.아무리 마체라타에게 빠져있다 해도 중요한 일에까지 그녀를 끼어 줄 자일스가 아니었다. 노소프는 자일스가 여자를 물러가게 하리라 확신했다. 이제 곧 네 주제를 알게 해 주겠다.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불이 붙은 듯 날카로운 빛을 내뿜었다. "마체라타는 신경쓰지마라. 어차피 마체라타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자일스가 좀 신경질적으로 말한 다음 노소프의 정면에 섰다. 노소프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애써 놀라움을 감췄다. "방금 전 아시리움 성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하께서 감시하라 하신 세렌국 왕자는 이미 아시리움을 떠난지 오래라 하옵니다. 그리고..." "뭐? 놈이 아시리움을 떠났다고? 어떻게?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수로 아시리움의 승인을 받았단 말이냐?" 놀란 자일스가 침을 튀기며 크게 소리쳤다. "승인을 받아서가 아니라 성전을 무단이탈한 것이라 합니다." 자일스의 옅은 초록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입술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시리움을 무단 이탈했다고? 알렉스 놈이 제멋대로 성전을 빠져 나왔단 말이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어투로 혼잣말을 중얼대던 자일스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노소프에게 돌렸다. "이탈사유가 무엇이냐? 아시리움에선 분명 그것부터 조사했을 거다. 그래야 놈에게 합당한 벌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아시리움에서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사유를 밝혀 내지 못했다 합니다, 전하.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건 무단이탈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입니다." "무단이탈자가 한 명 더 있다고? 그럼 둘이 함께 성전을 나왔다는 말이냐?" 자일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소프에게 한발 다가섰다. "예, 전하. 그가 누군가하면..." "내가 맞춰 보마. 그 어리석은 놈은 아마 빨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을 거다." 노소프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자일스의 말이 맞음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군. 멍청한 놈, 가만히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을... 스스로 무덤을 팠군. .....그런데 대체 놈은 무슨 이유로 아시리움을 이탈한 것일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자일스가 문득 멈춰 섰다. "세렌국에선 아직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이냐?" "사실 보내 온 정보가 있긴 한데, 식성이니, 취미니 하는 너무 자질구레한 것들이라... 정리해 오늘 안에 서면으로 올리겠습니다, 전하." 노소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요란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노소프는 물론 자일스까지 흠칫해 마체라타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 거냐?" 몸을 떨며 계속해서 웃음을 멈추지 않는 마체라타를 보며 자일스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마체라타가 쿡쿡거리며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전하, 저 늙은이가 오늘 안에 올리겠다는 문서는 펴 보지 말고 찢어 버리시는 게 현명하실 겁니다. 거기에 무엇이 써있든 쓸모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노소프는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자 마체라타의 입술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려졌다. "아무리 하찮은 정보라 해도 보고하라는 명령은 내가 직접 내린 것이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면 다시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는 자일스를 보며 노소프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마체라타는 조금도 기가 죽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술엔 살짝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역시 혀에 최고급 비단을 감은 듯 매끄럽기만 했다. "자일스 전하, 세렌국 따위는 되도록 빨리 머리에서 지워 버리는 게 현명하실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올릴 수 있는 건 전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제가 전하의 시야를 가린 두터운 막을 치워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이란 간단히 말하면...."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듯 말을 끊은 마체라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세렌국의 왕자라 알고 있는 자는 가짜입니다." 한순간 짙은 침묵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마체라타를 응시하고 있던 자일스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숨을 격하게 들이쉬며 마체라타의 양어깨를 우악스럽게 부여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감히 네 년이 날 갖고 놀려는 것이냐?" 마체라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일그러졌다. 그녀가 살갗을 파고드는 손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틀자 자일스가 한층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아,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하! 제 말은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진실이라고? 알렉스 놈이 세렌 국의 왕자가 아니란 말이 정말 사실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신경질적인 대답이 터지는 순간 자일스가 마체라타의 어깨를 내팽개치듯 놓았다. "자세히 말해봐라! 네가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털어놓으란 말이다!" 찡그린 얼굴로 어깨를 어루만지던 마체라타는 자일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겨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거만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좀 앉으십시오, 전하." 궁금해 애가 탈 지경인 자일스는 군말없이 다가가 마체라타 앞에 자리잡았다. 마체라타는 기대고 있던 등을 세우고 다짜고짜 자일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이마로 가져갔다. 자일스는 놀라 반사적으로 손끝을 움츠렸지만 마체라타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매끈한 이마에 손바닥이 밀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일스의 머리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보석이 달린 장식끈으로 묶고 있는 열세네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머리에 떠오른 얼굴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코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인가에 깊이 몰두한 듯 지긋이 감고 있던 소년의 눈꺼풀이 살짝 들리며 짙은 갈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눈 옆엔 엄지 손톱만한 점이 달려 있었고, 안색이 좋지 않은 볼 여기저기엔 검붉은 주근깨가 박혀 있었다. "지금 전하께서 보고 계신 사람이 진짜 알렉시스 왕자입니다. 3년 전 세렌국 왕궁에서 트레비아를 연주할 때의 모습입니다." 자일스의 손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졌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마체라타는 한대 크게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일스를 보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넌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내가 말하는 놈이 가짜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거냐?" "제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전하. 저와 한 공간에 있는 사람의 생각이 번개가 치듯 스쳐 갈 때가 있습니다. 매우 드문 경우긴 하지만 말입니다. 좀 전에 전하께서 저 늙은이와 말씀하실 때 한순간 제 머리에 어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말을 멈춘 마체라타가 은밀한 미소를 띠며 자일스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전하께서 진짜인 줄 알고 계셨던 가짜 세렌국 왕자는 보기 드물게도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더군요." "가짜라... 가짜왕자라... 그래서 놈이 부랴부랴 아시리움에서 도망친 거로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자일스의 입술에서 곧 쇠붙이가 긁히는 듯한 거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과연 이 얘기가 알려지면 콧대 높은 아시리움에서 어떻게 나올까? 놈이 왕족행세를 하며 자신들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필시 모든 걸 걸고서라도 자신들을 능멸한 놈을 잡으려 하겠지요. 그리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내릴 것입니다." 마체라타의 대답을 들은 자일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흥분이 가득 찬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소프를 바라봤다. "당장 이 곳 바드리오에 있는 아시리움 신전에 사람을 보내라. 아시리움의 신출귀몰한 정보망을 감안하면 내일 저력 무렵, 늦어도 모레엔 아시리움 성전이 발칵 뒤집혀 있을 것이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숙여 보인 노소프가 뒷걸음질 친 다음 서둘러 문을 나섰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느냐, 마체라타?" "부디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길 바랍니다, 전하. 따분한 건 딱 질색이니까요." 말을 멈춘 마체라타가 혀끝을 내밀어 붉은 입술을 육감적으로 핥았다. 그리고 자일스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기대하고 또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하." "우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지. 그 다음엔 더운 물에 몸을 푹 담글 생각이야.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올라 내일 아침까지 눈뜨지 않고 곤한 잠을 자는 거야." 생각만 해도 행복한지 리오가 윗니를 드러내고 히죽거렸다. "마차에서 내내 졸더니 또 잠타령이야?" 엘은 피식 웃으며 점점 빨라지는 리오의 걸음에 맞춰 발을 재촉했다. "그건 잠이라 아니라 고문이란 말이야. 바닥으로 넘어지지 않으려 하도 몸에 힘을 줬더니 근육은 물론 뼈까지 다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아. 어찌나 마차가 심하게 요동하는지 아직도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고." 리오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걷고 있던 리반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엘 역시 몸 구석구석까지 쑤시고 결리지 않는 부분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더군다나 연이어 떠오르는 갖가지 심란한 생각 때문에 삼일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한 탓으로 그녀는 서서라도 잠에 빠져 들만큼 지쳐 있었다. 하지만 저만치 앞에서 넓은 보폭을 이용해 성큼성큼 걷는 루드비히에게선 지치거나 피곤한 기색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엘이 아는 한 그녀보다 더 잠을 자지 않은 상태인대도 말이다.지난 삼일 밤 내내 엘은 리오와 리반이 깊은 잠에 빠진 뒤 루드비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사실 얘기를 하는 쪽은 대부분 그녀였고 루드비히는 거의 듣기만 했다-길고 긴 밤을 보냈다. 모닥불과 풀벌레부터 신분이나 종교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다. 그만하고 잠을 청해보라는 루드비히의 타이름에 한숨이 섞이게 될 때에야 엘은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옅은 선잠에 빠졌던 그녀가 가끔 눈을 뜰 때마다 루드비히는 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이나 잦아드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은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어둠 속에서 첸과 무슨 말을 나눈 것 같은 데... 매우 낮고 거친 목소리를 내던 이가 첸일거라 짐작하는 거지 엘이 실제 그의 모습을 본 건 아니었다. 사실 첸은 그들과 어울리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마차를 몰 수 없을 만큼 날이 어두워지면 야영할 자리와 음식을 준비한 다음 언제 없어졌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 엘은 첸의 모습이 보일까 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를 맡기자마자 그들을 따라올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첸이 그들 뒤를 따르고 있다면 그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에 사람이 꽤 많긴 했지만 키가 훤칠할 뿐만 아니라 놀랄 만큼 강렬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못보고 지나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사제님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는데?" 엘은 만족스러운 리오의 목소리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하얀 색의 고풍스러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루드비히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을 출입하는 고급스러운 여행복 차림의 사람들로 보아 어렵지 않게 최고급여관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곳은 굉장히 비쌀 텐데..." 무슨 일에서든 우선 금액부터 따지게 되는 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또 시작이냐? 걱정하지마. 300큐어가 넘는 돈이 우리 수중에 있잖아." 리오가 여유만만한 미소로 말을 끝내자 리반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그래, 맞아. 그 돈이면 질릴 때까지도 이 곳에서 머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괜한 걱정하지 말고 오랜만에 찾아온 풍요로움을 맘껏 즐기자고."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폭을 넓게 해 여관과 이어진 낮은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평범한 옷차림의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회색의 제복을 차려 입은 남자 두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희같은 아이들은 이런 데 오면..." 세 사람이 때마침 루드비히 옆에 멈춰서자, 험악한 어조로 입을 연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엉거주춤 서서 흘끗흘끗 루드비히를 살피던 남자들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찔끔한 얼굴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 분들이 동행이시군요. 다행입니다. 방 네 개를 말씀하셔서 어찌해야하나 근심 중이었는데, 네 분이 다 남자 분이시고, 방은 2인용이니 두 개면 충분하실 것 같군요." 희끗희끗해진 회색 머리카락과 말끔히 손질된 콧수염이 달린 중년남자가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 두 개면 됩니다." 리반의 말에 엘은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사실 그녀는 복도 바닥에서 자야한다 해도 쾌히 수락할 만큼 잠이 간절한 상태였다. "안 돼!" 다시 한 번 하품을 하던 엘은 맹렬히 터져나온 리오의 외침에 놀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 두 개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방은 꼭 세 개가 있어야 돼!" 리오가 사생결단이라고 내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리오, 목소리 좀 낮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불편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리반이 소리죽여 말했다. "이분 말씀이 옳습니다. 이 곳에 오시는 손님들 모두 점잖은 분들이시니 주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좀 흥분해서... 하지만 방은 반드시 세 개여야 합니다." "사실 그게 불가능합니다. 빈 객실이 단지 두 개 뿐이라서요." "그럼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야겠군. 이 곳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리오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이미 남자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세 사람을 허겁지겁 따라잡았다. 그리고 엘의 팔을 잡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이 바보야! 대체 어쩌려고 졸래졸래 따라가는 거야?" "리오, 네 걱정은 알겠는데, 이인용 방이라 하잖아. 그럼 침대도 당연히 두 개일 테고. 지금까지 아무 말없다 오늘따라 왜 새삼스럽게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엘이 뭐가 걱정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답답아! 노숙하는 거하고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게 같은 건 줄 알아? 넌 대체 네가 여..." 끙 소리를 내며 말을 멈춘 리오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네 처지를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남자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건, 그 뭐랄까...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주의해야 할... 극도로 위험한 일이란 말이야. 왜냐하면 남자는 다..." 엘은 팔꿈치로 재빨리 리오의 팔을 쿡 찔러 입을 다물게 했다. 리오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남자와 잔뜩 얼굴을 찌푸린 리반을 깨닫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괜히 복도 이 곳 저 곳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이 슬쩍 붉어지고 있었다. "이 방하고 그 옆방입니다. 목욕물이 필요하시면 창문 가에 걸린 붉은 줄을 두 번 잡아당기십시오.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식사는 아침에만 제공됩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그리 불편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남자가 서둘러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뒤를 흘끗대며 서두르는 모습에서 그들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녁식사는 좀 느지막이 해도 괜찮지? 난 우선 한숨 자야되겠어." 말을 마친 엘이 방문을 열려 하자 리오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 봐! 우선 방을 어떻게 나눌지 결정해야지." "그거야, 간단하지. 나하고 너, 그리고 알렉스하고 사제님이..." "뭐? 절대 안 돼! 그럴 순 없어! 절대! 절대 안 돼!" 리오가 리반의 말을 끊으며 맹렬히 소리쳤다. 그리고 싸움이라도 걸려는 사람처럼 리반에게 잔뜩 구긴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그런 터무니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말을 하다니! 너 단단히 미쳤구나?" "그러는 넌 정상인 것 같아? 방 갖고 이렇게 난리 치는 이유가 뭐야? 왜, 말 못하겠어?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리오! 완전히 돌아 버린 건 바로 너라고!" 얼굴이 벌게진 리반까지 소리를 높이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왜들 이래? 별일 아닌 거 갖고. 둘 다 좀 진정해." 엘은 살살 달래는 어조로 말하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때마침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루드비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 일을 보고 오겠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아, 예." 엘은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리오와 리반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주먹을 불끈 쥔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들 해. 너무 피곤해서 두 사람 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다. 장담하는데, 한숨 푹 자고 나면 내가 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야." 엘은 피곤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그녀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한숨을 내쉬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은 상당히 큰 편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침대 두 개가 안쪽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오른편 커다란 창문 가까이 안락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만족스럽게 방안을 둘러본 엘은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서 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손이 쭈글쭈글 해질 정도로 오랜 목욕을 마치고 막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루드비히는 벨라인을 거치지 말고 곧장 램으로 가자고 했는데... 대체 벨라인에서 해야 될 일이 뭘까? 커다란 하품이 터져나왔다. 엘은 제대로 생각해 보기도 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제 34장. 진실 그리고 혼돈-------------------------------------------------------------------반쯤 열린 커다란 창문이 삐걱대며 바람에 흔들렸다. 바람과 함께 밀려든 노을이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에 일말의 부드러움을 던져주었다. 중앙에 놓여진 딱딱해 보이는 나무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칼날처럼 곧고 뾰족해 보이는 코 아래의 얇은 입술은 야무지게 다물어져 있었고 비스듬히 들린 관자놀이 언저리엔 가는 혈관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이는 갸름한 얼굴은 비정상적일 만큼 유난히 창백했다. 예리한 광채를 띠는 검은 눈동자가 가려졌다면 시체로 오인될 정도였다. 석상처럼 미동없이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움찔하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법황 성하." 루드비히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로 비치는 석양이 그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감히 성하께 연락을 취한 이유는 제 선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입니다. 이런 말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성하." 말을 끊은 남자가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아시리움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아직은 더러운 손에 매수된 자들이 십여 명에 불과합니다만 제 직감으로는 이 정도에서 멈추진 않을 것 같습니다." "매수라..." 루드비히가 낮게 중얼거린 뒤 무심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그들 중엔 고위사제 세 명도 포함되어있습니다. 필리프 대사제와 노게일스 대사제에게도 접근하는 것 같은 데 아직 이렇다 할만한 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희 감시 자들의 눈을 벗어나진 못할 것입니다, 성하." "어느 선까지 알아냈느냐?" "그루지아국의 호르헤 공작이 대부분의 일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을 그 혼자 저지른다는 건 불가능하고 그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확실한데.... 그루지아국 국왕이 연루됐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잘못 짚었다. 선은 다른 쪽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다." 남자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게 누구입니까, 성하? 성견(聖見)을 내려주십시오." 루드비히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일단 떠오르는 건 두 사람이다." 아니, 루벤스타인이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루드비히가 재미있다는 듯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을 때 갑자기 웃음을 멈춘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머지않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조급해 할 필요없다. 너희는 그저 감시자로서의 본분만 이행하면 된다." "그럼 이대로 덮어두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이번 기회에 썩은 부분을 깨끗이 도려 내겠다는 말이다." 루드비히의 단정한 입술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냉정하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외 다른 보고는 없는 것이냐?"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소견으로는 성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니지만 어차피 아시게 되실 테니 일단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 성전을 발칵 뒤집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지금 대사제들이..." "중앙회의실이냐?" 루드비히가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끊었다. "예, 그렇습니다, 성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말에 놀랐지만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슬쩍 비웃음을 드러낸 루드비히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가 나왔을지 궁금하군." "지난번 기회가 있을 때 철저히 밟아 버려 숨통을 끊어 버렸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오?"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린 필리프 대사제가 세차게 탁자를 내려쳤다. "하지만 법황 성하께서 친히 그 소년의 무고를 증명하셨지 않소!" 에르난드 대사제가 못마땅한 듯 언성을 높이자 필리프 대사제의 매서운 눈길이 곧장 그에게 날아들었다. "가짜 왕족 노릇을 한 놈이 못할 짓이 뭐가 있겠소? 법황 성하께서 잘못 아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 또 누가 알겠소, 모든 걸 아시고 계셨을지도 모르지." 놀란 대사제들의 시선이 일제히 필리프에게 몰려들었다. "가,감히 성하를 의심하는 겁니까, 필리프 대사제?" 입을 딱 벌리고 있던 클레르몽 대사제가 숨찬 어조로 소리쳤다. "내 말은 그 때 죄인을 곱게 놔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언성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는 거요. 아시리움 종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일은 애초에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필리프 대사제! 아시리움 종단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니요? 어찌 그런 경솔한 말씀을 입에 담으신단 말입니까?" "경솔하다? 지금 감히 내게 경솔하다고 한 거요?" 필리프 대사제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제발 좀 신중하게 말씀하십시오!" "클레르몽!" 얼굴이 시뻘게진 필리프 대사제가 목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필리프 대사제,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어차피 벌어진 일입니다. 대체 우리끼리 이런 식으로 얼굴을 붉히는 게 일의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대사제들이 한마디씩 하고 나서자 클레르몽 대사제가 침울한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던 필리프 대사제는 화를 못 이기겠는지 몸을 가늘게 떨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번 일은 되도록 빨리 해결해야합니다. 비밀리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시리움 종단은 한낱 우스개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게일스 대사제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지금껏 한마디로 하지 않고 있던 니제르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죄인을 잡으려면 어차피 얘기는 밖으로 새어 나가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소수의 추적자들로 하여금 은밀히 뒤쫓게 한다면 비밀이 유지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만 믿고 손놓고 있다가 죄인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아시리움 종 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말을 멈춘 니제르 대사제가 신중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봤다. "여러 대사제님들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선..." 노게일스 대사제의 말을 끊으며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누가 감히..." 서슬 퍼렇게 소리치던 필리프 대사제가 경악에 차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머리를 조아린 시종들과 고위사제들을 지나 루드비히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대사제들이 낮은 비명을 지르거나 격하게 숨을 들이마시거나 또는 목 졸린 듯한 신음을 터뜨리며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 성하!" "법황 성하, 돌아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성하께서 돌아오신 줄도 모르고..." "돌아오신 걸 경축드립니다, 성하!" 대사제들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앞다투어 소리쳤다. 그들을 지나친 루드비히가 상석에 놓인 의자에 앉은 다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앉으십시오." 서둘러 의자에 앉는 부산한 소리가 사라지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대사제들은 법황이 밖에서 그들의 말을 들었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자신들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조심스럽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필리프 대사제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색이 되어갔다. "계속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무심하게 말했다. "저... 성하께선 오늘 회의의 의제를 아시는지요?" 머뭇거리며 질문을 던진 클레르몽 대사제를 향해 루드비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으니 어서 진행하십시오." 대사제들의 얼굴에 일제히 놀란 기색이 스쳐갔다. 그들은 계속 아시리움 성전을 떠나 있던 법황이 이번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넘어 왠지 모를 두려움까지 느꼈다. 회의의 의장격인 에르난드 대사제가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회의를 원활히 진행시키기 위해 제가 니제르 대사제께서 하셨던 말씀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니제르 대사제의 말씀은 최대한 죄인을 빨리 잡는 것이 아시리움 종단을 위한 최선 의 방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말이 새어나가는 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니제르 대사제께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죄인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이신 것 같습니다. 니제르 대사제, 제 말이 맞습니까?" "예, 정확히 맞습니다." "저 역시 니제르 대사제와 같은 의견입니다." 에르난드 대사제가 다른 대사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몇 명의 대사제들이 동의하고 나서자 다른 이들의 생각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의견이 모아진 것 같으니 구체적인 방법을 정해야겠군요." "이미 그루지아국을 빠져나갔을 테니, 우선 형식적이나마 각 국에 협조 공문을 보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각국의 기사와 병사들을 모조리 동원해 죄인을 찾아야 할 테니까요." "추적자들은 늦어도 내일 안으로 출발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방법은 죄인의 목에 막대한 상금을 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노라하는 실력자들에서부터 별 볼일없는 시장잡배에 이르기까지 죄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될 테니까요. 물론 남녀노소를 불문한 일반 백성들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자신의 주위를 샅샅이 살피게 될 것입니다." 대사제들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니제르 대사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이면 죄인이 이미 죽어 한줌 흙이 된 상태라 해도 그 흙까지 찾아낼 수 있겠습니다." "법황 성하께선 이번 회의 결과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클레르몽 대사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루드비히를 향해 신중하게 물었다.이제 남은 건 법황의 승인뿐이란 걸 알고 있는 대사제들이 하나같이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모았다. 단순히 추적대만을 보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의 대규모 일엔 반드시 법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법황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몇날 며칠 밤을 새워 나온 결과라 해도 한낱 휴지조각이 될 뿐이었다. 긴장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루드비히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은회색 눈으로 대사제들을 한 명씩 쳐다봤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정면에 고정되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동의합니다." 불안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살짝 들린 눈에 들어온 건 온통 어둠 뿐이었다. 엘은 잠이 완전히 달아나는 걸 느끼며 일어나 앉았다. 어둠에 잠긴 방을 이리저리 둘러본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여관방에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목욕을 한 다음 바로 잠자리에 들었어. 이렇게 어두워질 때까지 자다니... 대체 내가 얼마나 잔 거지?엘은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그 때 신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 아직 자는 거야?" 리반이 틀림없었다. 리오와 비슷하긴 했지만 엘은 이제 별 어려움없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엘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푹신한 카펫 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딱딱한 무엇인가에 무릎을 호되게 부딪쳤다.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른 뒤 절뚝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자 다시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던 리반이 흠칫하며 팔을 떨어뜨렸다. "왜 그래? 다친 거야?" 무릎을 문지르는 엘을 보며 리반이 물었다. "걸어오다 욕조에 부딪쳤어. 사람들을 불러 욕조를 치웠어야 하는데 목욕하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거든. 근데 무슨 일이야?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아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잠깐 나와. 아래층에 꽤 넓은 응접실이 있던데 거기서 잠시 얘기 좀 나누자." "알았어, 신발만 신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엘은 문 가에서 한짝, 욕조 옆에서 한짝 씩 찾아낸 신발에 서둘러 발을 밀어 넣고 리반이 기다리는 복도로 나왔다. "리오는?" "아직 자고 있어." 엘은 연거푸 하품을 하며 리반의 뒤를 따랐다. 조금 어두워 보이는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리반은 응접실에 들어설 때까지 꼭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때마침 저녁식사시간이라 그런지 널찍한 응접실엔 단지 두 쌍의 남녀만이 마주보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엘과 리반은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구석진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엘은 다리를 길게 뻗고 깊숙이 등을 기댔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 그런지 노곤함이 느껴지며 몸이 축축 늘어졌다. "무슨 얘긴데?" 계속해서 입을 열지 않는 리반을 흘끗거리며 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면 좋겠어." 말을 끊은 리반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널 대하는 리오의 행동...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뜻밖의 말에 놀라 엘은 기대고 있던 등을 천천히 세웠다.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여자임을 알게 된 후 리오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리반 앞에선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여자란 걸 밝히지 않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글쎄..." 엘은 어색하게 말하며 슬그머니 리반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너도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했어." 리반은 그녀의 불편한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모른다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을 거야. 네가 그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 리반이 이렇게 나오는 데 언제까지 못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엘은 거의 울상을 지으며 마지못해 입술을 움직였다. "으,으응... 그렇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알렉스. 어차피 시간 끈다고 더 말하기 편해 질리는 없으니까." 리반이 고개를 돌려 엘의 시선을 잡았다. "리오는 널 좋아하고 있어."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혹 어린 말이 나오리라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엘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피식 웃었다. "나도 리오를 좋아해." 엘은 리반이 서운해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말을 붙였다. "물론 너도 좋아해." 괜스레 쑥스러운 마음이 들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도 좋아해. 또 넌 모르는 사람이지만 아몬도 좋아하고... 또... 그러니까 흥얼흥얼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해. 으음... 또 있어. 갓 구운 빵도 좋아하고 또..." "알렉스!" 리반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신선한 우유를 좋아한다고 말하려 하던 엘은 입술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제발 엉뚱한 말 좀 하지마!" 울부짖듯 소리친 리반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알았어. 미안해, 리반." 사실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리반의 격렬한 폭발에 엘은 은근히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녀는 서둘러 응접실을 나가는 남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슬금슬금 리반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좀 진지해져 봐.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사실 너한테만 말하는 거지만 난 리오에게 이런 일이 있기 전엔... 그러니까 같은 성끼리도 서로만 좋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막상 내 형제한테, 리오한테 이런 일이 생기니까... 나 역시 편협하다고 경멸하던 인간과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어떤 욕을 먹어도 리오만 예전으로 돌아온다면..." "잠깐!" 리반의 얘기를 듣는 동안 머리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르자 엘은 재빨리 리반의 말을 끊었다. "너 설마... 리오가 날... 그,그런 식으로 좋아한다고...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연하지! 너 지금까지 내 말을 듣기나 한 거야?" 멍하니 벌어졌던 엘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엘이 어이없다는 어조로 말하자 리반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미쳤군. 정말 미쳤어.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어." "말 잘했어, 알렉스. 나도 리오한테 그런 말을 한두 번한 게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한 건 리오가 아니라 바로 너야!" 엘은 어리둥절해 하는 리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바보 같으니! 그게 말이 돼? 리오가 날? 정말 어이가 없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게 된 거야?" "터무니없는 오해라고? 그럼 넌 리오가 단순한 친구에게 하듯 널 대한다는 거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벌떡 몸을 일으킨 리반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엘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 지금은 어안이 벙벙하겠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내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알렉스. 네 말대로 네가 정말 리오를 좋아한다면 무엇이 리오를 위하는 길인지... 신중하게 결정하길 바래." 엘은 리반이 응접실을 나가자 다리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길게 흘러나왔다. "왜 그래?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너 음식도 거의 남겼잖아." 리오가 걱정스런 얼굴을 엘에게 바짝 들이댔다. 엘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자신도 모르게 리반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야, 좀 피곤해서... 잠을 그렇게 잤는데도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았나 봐.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두 사람 잘 자." "잠깐만!" 엘이 방문을 반쯤 열었을 때 리오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재빨리 소리쳤다. 그는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주위를 살피고 나서 그녀의 귀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만약 루...뭐라는 사제님이 돌아오면 그 즉시 우리 방으로 건너와.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알았지?" "그래, 알았어." 엘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대충 대답하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리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반... 잘 자. 그럼 난 이만 들어갈게." "램프 하난 네가 가져가야지." 리오가 들고 있던 램프를 내밀며 말했다. 못들은 척하고 안으로 들어선 엘은 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내 바보같은 행동 때문에 리반의 의혹이 더 커졌을 게 틀림없어.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언제까지나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견딜 수도 없고. 또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는 리오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고.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방법은 하나뿐이야." 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다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난 못 해!" 엘은 문에 이마를 부딪치며 소리쳤다. "불가능해!" "도저히 할 수 없어!"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쿵 소리가 연이어 어둠 속을 울렸다. "겁쟁이라 욕을 먹어도 할 수 없어!" 이상하게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겁쟁이인걸 뭐." 풀 죽은 어조로 중얼거린 그녀는 낮게 욕설을 뱉어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결투장에 나가는 기사처럼 결연히 걸음을 옮겨 힘차게 문을 열어 젖혔다. "뭐,뭐야?"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막 바지를 벗으려던 리오가 소스라치게 놀라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문 가에 서 있는 엘을 발견한 순간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젠장!" 리오는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번개같이 움직여 시트로 드러난 몸을 가렸다. 그러자 멀뚱히 서 있던 리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렉스 앞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어? 문닫고 안으로 들어 와, 알렉스." 그제야 리반이 최소한의 속옷만을 걸치고 있는 상태란 걸 깨달은 리오는 격하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날려 다른 시트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시트를 리반에게 전해 주기도 전에 자신이 두른 보호막 자락을 밟고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웃긴 녀석, 유난떨긴!" 슬쩍 눈을 흘긴 리반이 몸을 가린 속옷을 벗으려 하자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던 리오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벗지 말고 빨리 가리란 말이야! 그거 벗으면 넌 그 즉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그리고 너!" 이번엔 엘에게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이 날아와 꽂혔다. "넌 뭘 보고 있는 거야? 빨리 눈 감지 못해!" 멍하니 서 있던 엘은 허겁지겁 몸을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을 통해 화끈거리는 살갗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은근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뭘 봤다고 그래? 사실 본 것도 없단 말이야!" 엘은 잔뜩 볼멘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리오가 그녀의 팔을 잡아 안으로 들인 다음 문을 닫았다. 엘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리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옷을 단정히 입고 있는 그의 뒤로 투덜거리며 양말을 신고 있는 리반이 보였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눈을 동그랗게 뜬 엘이 반문하자 리오가 한층 심술궂은 어투로 말했다. "본 게 없어서 억울하다는 거야?" "뭐,뭐라고?" 엘은 기가 막혀 한순간 입을 딱 벌렸다가 버럭 소리쳤다. "리오, 너 자꾸 헛소리할래?" "헛소리라고? 한밤중에 남자들만 있는 방문을 벌컥 열어 젖힌 정신 나간 녀석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뻔뻔한 말이라 생각되지 않아?" 엘은 얄밉게 이죽거리는 리오의 입술을 한대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희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침대에 앉아 있던 리반이 기가 막히다는 투로 말했지만 리오와 엘은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 나간 녀석은 바로 너야! 네 입으로 좀 전에 루드비히가 돌아오면 그 즉시 이 방으로 오라고 했잖아! 그럼 그 말은 심심해서 해본 거짓말이란 말이야? 문 앞에서 한 말을 문 안에서 싹 바꿀 수 있는 거야?" "그럼 사제님 때문에 그런 거란 말이야? 사제님이 빨리 옆 방으로 가서 다짜고짜 문부터 열라고 하셨어?" "아,아니...그런 게 아니라... 루드비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난 그냥..." 엘이 쩔쩔매며 말끝을 흐리자 리오의 얼굴이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이제야 좀 네 잘못을 뉘우치는 거냐?" "뉘우치긴 뭘 뉘우쳐? 대체 내가 무슨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리오, 너 정말 너무한다!" "그건 알렉스 말이 맞아. 이해해라, 알렉스. 리오 녀석,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 같으니까." 슬쩍 얼굴을 찌푸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던 리반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리반, 넌 나서지 마! 이번 기회에 아무 것도 모르는 저 맹한 녀석을 내 손으로 깨우쳐 줄 생각이니까!"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그리고 리오, 네가 날 깨우쳐 줘?" 엘은 방안이 울릴 만큼 세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를 응시하는 리오의 푸른 눈동자에서 일순 섬광이 번득였다. "잘 들어, 이 맹꽁아. 너와 우린 틀려." "그건 나도 알아." "어떻게 틀린데? 대체 뭐가 틀린데?" 엘과 리반이 들은 체도 안 하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리반이 머리를 움켜잡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니, 넌 몰라. 안다면 그렇게 행동하진 못했을 거야.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어." "비슷한 일이라고?"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리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아시리움에서 나온 다음날, 나와 리반이 냇가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인기척도 없이 불쑥 다가온 일 있지? 그 때 내가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알아?"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이유야 있었지, 식사준비가 다 됐으니 서두르라는 말을 하러 온 거였으니까." "그럼 된 거 아니야!" 엘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또 있어. 그 늙은 말을 샀던 시골에서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 나도 기억난다!"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지루한지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리반이 소리쳤다. "그 때 리오 엉덩이에 가시가 박혔잖아. 알렉스, 네가 빼 주겠단 걸 리오가 구태여 내가 해야 한다고 박박 우겼고. 정말 웃긴 녀석이라니까." "너... 아직도 모르겠어?" 리오가 엘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골치 아프게 그런 걸 꼭 신경 써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만약 네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내가 불쑥 들어갔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아무렇지 않겠어?" 엘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리오가 한층 단호하게 말했다. "너, 내 앞에서 옷 벗을 수 있어? 발가벗을 수 있느냔 말이야? 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벗어 봐!" "싫어! 절대 못 해!" "리오, 저 미친 자식!" 날카로운 엘의 외침에 이어 리반이 버럭 소리치며 리오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와락 휘어잡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너 완전히 돌았구나? 뭐? 옷을 벗으라고? 너 어떻게 알렉스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것도 내 앞에서!" "더한 말도 할 수 있어! 저 철없는 녀석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면 내 손으로 옷을 벗길 수도 있어!" 얼굴이 시뻘게진 리오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전에 내 손으로 널 죽일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그 꼴은 절대 볼 수 없어! 그러니까 네 마음을 고칠 수 없다면 차라리 날 죽여!" "젠장! 네가 이럴 이유가 없단 말이야! 날 좀 믿으라고! 날 믿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널 믿으라고? 내가 어떻게 이런 널 믿을 수 있어? 눈앞에 자꾸만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는데... 그럴 때면 정말 미칠 것같이 괴로운데 어떻게 널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고? 대체 부모님이 이 일을 아시면..." 감정이 복받친 리반이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자 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리반, 이 고집불통아! 네가 이럴 이유가 없다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갑자기 험악하게 변한 분위기에 놀라 엉거주춤 서 있던 엘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리오의 멱살을 틀어진 리반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난 여자니까." 안으로 한발 들어서려던 아몬은 창가에 우뚝 서 있는 리자드를 발견하고 흠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리자드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창에 부딪히는 빗줄기를 얼굴에 반사시키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자드님께서 친히 제 방까지 오시다니... 어쩐 일이십니까?" "몸은 괜찮은 거냐?" "몸 상태는 더할 나위없이 좋습니다, 리자드님. " 아몬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리자드가 치유능력이 있는 마법사로 하여금 아몬의 부상을 고치게 한 삼일 전부터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비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이 당기고, 가끔가다 심한 두통이 일었지만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때를 생각하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아몬을 잠깐 바라본 다음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아몬은 리자드가 그의 과장된 대답을 이미 알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네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아몬은 엘과 관계된 일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그는 내일 일찍 리자드를 찾아가 자신도 엘을 찾게 해달라고 청을 할 계획이었다. "가능한 빨리 세렌국 왕자를 돌려보내라." 예상치 못한 명령에 아몬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세렌국 왕자를... 그러니까 그의 나라로 돌려보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리자드님, 그렇게 되면 아시리움에서 엘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고... 그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될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어찌 그를 돌려보내신다는 겁니까?" "이미 아시리움에서 그 아이를 추적하고 있다." 아몬은 급히 숨을 들이쉬며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현재 알고 있는 건 그것 뿐이다." "어떻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아시리움에서 사실을 알아낸 걸까요, 리자드님?" "글쎄... 법황이 닫고 있던 입을 연 것일 수도 있겠지." 말을 멈춘 리자드가 창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에 청회색 머리카락을 날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제삼자가 개입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단언할 순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몬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리자드님, 세렌국 왕자에 대한 건 좀 더 상황을 지켜본 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떻시겠습니까? 감히 리자드님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건 결단코 아닙니다. 단지 엘에게 좀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최악의 경우... 엘이 아시리움에 잡혔을 때, 세렌국 왕자를 긴요하게 이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질교환이라도 하자는 거냐?" 리자드의 입술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이번 일은 그 정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위험이 크고 말이다. 세렌국 왕자는 작지만 확실한 불씨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망칠 재앙의 불씨가."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아몬을 바라봤다. "세렌국 왕자의 상태는 어떠냐?" "몸 상태는 양호합니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깊은 무의식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되돌리는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성급하게 깨우려 하는 건 그를 해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필요한 시간은?" "아마 이틀 정도는 소요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리자드님, 그를 어떤 방법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겁니까? 제 생각으로는 리아잔의 수도 바드리오가 어떨까 싶습니다. 어차피 왕자 혼자 세렌으로 돌아가긴 힘들 테고, 리아잔에 도움을 청하면 그들이 거절하진 않을 테고 말입니다. 아니면 세렌국 어느 한적한 시골도 괜찮을 것 같은 데..." "아니다, 세렌국 왕궁까지 데려다 주어라. 도움을 줬으니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정도는 해주는 게 좋겠지." 말을 마친 리자드가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리자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몬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엘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자드가 들릴듯 말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사일러스와 다른 기사들이 최선을 다해 그녀를 찾고 있는 줄은 압니다. 하지만 아시리움 종단에서 엘을 쫓는다면 그들이 아시리움보다 먼저 그녀를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넌 그 아이를 찾아낼 자신이 있다는 것이냐?" 한순간 말문이 막힌 아몬은 리자드와 시선이 부딪치자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는 깊숙이 파고드는 듯한 리자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라면 엘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부탁 드립니다, 리자드님. 허락해 주십시오." 아몬은 간절함을 담아 리자드를 바라봤다. "아니, 허락하지 않겠다." 단호히 말한 리자드가 그 즉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리자드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리자드는 밖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다 흘긋 아몬을 바라봤다. 그리고 극히 냉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다려라, 아몬. 아시리움이 그 아이를 가리고 있던 안개를 치워 줄 때까지." "농담이지?" "아니라니까." 엘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이 분명해. 둘이 짜고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그래, 맞아. 그게 틀림없어." "어휴! 답답해! 멍청아, 아니라 하잖아! 대체 몇 번을 아니라고 해야 믿을래?" 벌떡 몸을 세운 리오가 가슴을 퍽퍽 두드려댔다. 리반을 노려보는 살기어린 눈초리로 미루어 자신이 아닌 리반을 때려주고 싶어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리반은 이제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씩씩대는 리오를 향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다음 짓궂은 얼굴로 엘을 바라봤다. "그래, 네가 여자라 치고. 대체 어떻게 증명할래? 네가 여자라는 증거 하나만 대봐. 그럼 믿어 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가지는 말해줄 수 있으니까 잘 들어." 이제야말로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짓게 됐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자신있게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는... 그러니까...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말이 막히자 엘의 눈엔 경악이 스쳤고, 리오의 얼굴엔 황당함이 어렸으며 리반의 입술엔 얄미운 미소가 그려졌다. "첫 번째는 뭐?" "내 모든 것! 내 모든 게 여자임을 증명하고 있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이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어? 사실 날보고 여자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야." 그녀의 억지어린 말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리반이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라고? 그럼 발가락에 낀 때도 네가 여자임을 증명해주는 거냐? 어디 신발 좀 벗어 봐!" 리반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엘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리반을 노려보다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리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천장을 향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생각해! 넌 내가 발가벗고 네 앞에서 춤을 춰도 끝까지 아니라고 할 녀석이니까!" 버럭 소리친 엘이 퍽퍽 발을 구르며 밖으로 나가자 리오가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엘, 네가 이해해. 리반, 저 녀석 은근히 꽉 막힌 구석이 있거든. 뭐랄까... 한번 머리에 박힌 건 어지간해서는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리반이 어렸을 때 유모에게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고 물은 적이 있어. 당황한 유모는 쩔쩔매며 깊은 밤에 별들이 아기를 데려다 준다고 대답했어. 난 코웃음을 쳤지만... 그 때 난 어떤 기사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리반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거야. 그 후 녀석은 밤을 꼬박 새우며 하늘을 올려다봤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유모까지 나서서 수도 없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지. 리반이 사실을 받아들인 건 무려 한 달이나 지나서였어. 리반은 그런 녀석이야. 스스로 납득하기 전에는 우둔할 정도로...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아."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리오가 말을 끝내고 좀 맥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너희 둘처럼 다른 쌍둥이는 없을 것 같다." 엘은 농담조로 말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넌 대체 왜 그런 거야? 갑자기 리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한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 하긴, 그 때 나하고 리반 분위기가 좀... 험악해서 얼떨결에 나온 거 같긴 하지만." "아니야. 사실 그 방에 갑자기 쳐들어간 건 리반에게 모든 걸 밝힐 결심을 해서야. 일이 엉뚱하게 꼬였지만 말이야." 미간을 찌푸린 리오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왜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한 건데?" "그게 말이야, 사실 별 건 아니고..." 엘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자 무척이나 궁금한지 리오가 한발 다가섰다. "아까 저녁식사 전에 네가 자고 있을 때, 리반이 엉뚱한 얘길 했거든.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서 응접실로 가자는 거야. 난 은근히 긴장해서 따라갔고. 근데 여기 정말 고급스럽긴 하더라. 난 세상에 응접실까지 있는 여관이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사실 반신반의하며 리반을 따라간 건데 응접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근사하게 꾸며 놓았더라고. 사방에 꽃장식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엘의 말을 듣고 있던 리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리반이 무슨 말을 했는지나 빨리 말해 봐!" "쉿! 조용히 해! 다른 사람들은 다 자는 시간이란 말이야." 엘이 재빨리 주의를 주자 찔끔한 리오가 복도 양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리반이 무슨 말을 했느냐면... 글쎄 갑자기 '리오는 널 좋아해' 이러는 거야." "젠장! 내 이 자식을!" 주먹을 불끈 쥔 리오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라.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리반이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리반은 내가 남자인 줄 알고 있잖아. 내가 여잔 걸 알고 난 후 네가 좀 이상하게 행동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고민고민하다 어렵게 결심한 건데....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다니 좀 허탈한 느낌이 들어. 그나저나 리반의 오해가 풀리지 않았으니 어떡하지? 넌 그저 내가 여자라서 쓸데없이 신경을 써주는 건데 리반은 그걸 엉뚱하게 받아들였으니." "아니, 리반 말이 맞아." "오해를 풀만한 좋은..." 리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엘은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깊숙이 빛나는 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너 지금... 뭐라고..." "리반이 맞는 말을 했다고 했어. 난..." 깊이 숨을 들이쉰 리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좋아." 엘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숨을 멈추고 있던 그녀는 파고드는 듯한 리오의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나도 네가 좋아. 그리고 리반도 좋고 루드비히도 좋고 신선한 우유와 갓 구운 빵도 좋아.... 그럼 잘 자, 리오." "야, 엘!" 엘은 리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문에 기대서서 화끈거리는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리오는 문이 부서져라 걷어찰까 말까 잠시 고민하며 엘이 사라진 문 앞에 서 있었다. "젠장!" 그는 휙 몸을 돌려 싸우러 가는 사람처럼 씩씩대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리반이 문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리오는 리반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인가가 느껴지자 그를 유심히 살피며 가까이 다가갔다. "너 엿들었구나!" 코 앞에 멈춰 선 리오를 향해 리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알렉스 말이 사실이란 걸 알게 됐어. 이젠 나도... 엘이라 불러야 하는 건가?" "네 마음대로 해." 리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리반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리오 옆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바닥에 초점없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리반이 등을 세우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난 그 동안 네가 여자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어. 그렇게만 되면 지긋지긋하게 날 괴롭히던 고민이 깨끗이 사라지리라 생각했어. 그런데...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생겼는데... 네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조금도 기쁘지가 않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어." 말을 멈춘 리반이 갑자기 리오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젠장! 자는 척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 어디 네 입으로 말 좀 해보라고!" "할 말 없어." 리오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리반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뭐? 할 말 없어? 가짜 왕족 노릇을 한, 그것도 아시리움 종단을 속인 사람을 좋아한다면서... 그래도 할 말이 없어?" 가슴을 들썩이며 심호흡을 반복하던 리반은 잠시 후 낮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 리오. 너 알렉스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거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밀고 나갈 생각인 거지?" 리오는 대답하기전 몸을 일으켜 리반 옆에 나란히 자리잡았다. 그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어떡할 거야?" 리오는 정면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엘하고 혼인할거야." "너...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해? 혼인이 가능할 것 같아?" 리반이 목에서 짜내는 듯한 어투로 힘겹게 물었다.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엘과 혼인할거야. 그 무엇도 날 막지 못해." "아시리움도? 아시리움도 널 막지 못할 것 같아?" "그래, 아시리움도 날 막지 못해." 리오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너 정말 완전히 돌았구나. 아시리움에서 우릴 공범으로 결정지으면 우린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말 그대로 끝장이야."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두려움에 리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 리반. 체르몬으로." "널 이대로 두고? 네가 끔찍한 일을 당할 걸 빤히 알면서 나 혼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돌아가서 부모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아?" 당장이라도 폭발할듯한 침묵이 자리 잡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리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날이 밝자마자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시리움 신전을 찾아갈 거야. 가서 너와 난 이번 일에 아무 연관이 없다는 걸 밝힐 거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 알렉스를, 아니, 엘을.... 아시리움에 넘길 수도 있어." 번개같이 움직인 리오가 리반의 멱살을 움켜잡고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한마디한마디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 순간부터 넌 내 형제가 아니야." -------------------------------------------------------------------제 35장. 안개-------------------------------------------------------------------밤하늘 끝자락을 물들인 흐릿한 회적색 여명이 어슴푸레하게 방을 밝혔다. 그 희미한 빛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의 얼굴을 더욱 그늘져 보이게 했다. 오랜 시간 밤바람을 맞은 그녀의 볼은 시퍼렇게 얼어 있었고,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은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엘이 무의식 중에 한숨을 내쉬었을 때 문이 열리며 루드비히가 어둑어둑한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를 발견한 루드비히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엘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흠칫한 엘은 루드비히를 발견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금 뭐라고..." "피곤하지 않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제 저녁에 꽤 오랫동안 잠을 잤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저보다는 루드비히가 더 고단하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처럼 루드비히는 어딘지 모르게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살피는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서둘러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잠깐만요, 루드비히!" 엘은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재빨리 불러 세웠다. "피곤한 루드비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미안하지만... 루드비히 말고는 딱히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말씀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려 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뿐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으음... 그러니까 말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건가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왜 생기는 겁니까? 그 감정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건가요? 그러니까 어느 날 어떤 사람을 가슴에 담게 되면 심장이 뛰는 한 그 사람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건가요?" 자신도 모르게 연거푸 질문을 쏟아 내던 엘은 말을 멈추고 루드비히를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루드비히가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저 혼자만 떠들고 있었군요. 다시 질문 드리자면..." "질문상대를 잘못 택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따위엔 조금도 관심없습니다." 루드비히가 무뚝뚝한 어조로 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그 즉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루드비히..." "또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놀란 엘이 그를 불렀을 때,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닫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폐하." 칼 베리만은 상석에 앉아 있는 쥬네비아 황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쥬네비아 황후가 우아하게 팔을 들어 자신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지만 쥬네비아 황후는 한창 때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불빛을 받은 섬세한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게 빛났고, 흑단같은 머리채는 높게 틀어 올려져 길고 우아한 목을 한층 강조하고 있었다.칼 베리만은 수심에 찬 듯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푸른 눈동자를 찬찬히 살피며 쥬네비아의 맞은 편에 앉았다. "갑작스런 연락에 많이 놀라셨겠군요." 그를 똑바로 응시하던 황후가 시선을 떼며 조용히 말했다. 칼 베리만은 주위에 시종이나 시녀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는 쥬네비아 황후가 그와의 독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폐하.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사실 폐하의 전갈을 받고 기쁘기도 하고 몹시 궁금하기도 해서 부랴부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니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절 부르신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쥬네비아는 말을 꺼내기 전 초조한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칼 베리만께서도 자일스에 대한 얘기를 이미 아시고 계실 겁니다." "예전 모습을 되찾으셨다는 거 말씀입니까?" "예." 쥬네비아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런 기쁜 일을 말씀하시며 왜 옥안에 수심이 가득하신 겁니까, 황후폐하?" "마음놓고 기뻐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졌던 팔이 붙고 헤집어졌던 눈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과연 이런 변괴를 제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재상?" 날카롭게 소리친 쥬네비아 황후가 탄식하며 초조한 동작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흉한 모습을 보였군요. 괜히 애꿎은 칼 베리만께 역정이나 내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폐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생각없이 굴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황후폐하." 잠시 서로를 이해하는듯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면 칼 베리만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자일스가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기쁘고 또 기쁩니다. 그로 인해 황제폐하의 총애도 되찾았고, 황태자의 자리도 더욱 굳건해졌으니까요. 제가 간절히 기도하던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자일스 옆에 붙어 있는 마체라타란 아이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명확히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 눈으로 직접 그 아이를 보진 못했습니다. 몇 번 만나 보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행방이 묘연하더군요." "마체라타라..." "재상께선 그 아이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대체 어떤 아이입니까?" 쥬네비아가 푸른 눈을 빛내며 몸을 숙였다. "아닙니다, 폐하.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칼 베리만은 쓴웃음을 능숙하게 감추며 정중히 말했다. 대예언자라는 명성 때문인지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갖가지 질문을 던져 오는 사람은 지금까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떻게 하면 마체라타를 자일스에게서 떼어 낼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인줄은 알지만... 딱히 조언을 구할 곳이 없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말씀은 해보셨습니까?" "예...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관여할 일이 아니란 말만 하고 나가 버리더군요." 칼 베리만이 예상한 것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제아무리 쥬네비아 황후라 해도 자일스 황태자를 움직이는 건 역부족이었다. 자일스가 복종하는 유일한 존재는 황제인 마르키젤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쥬네비아의 근심을 웃어 넘기기 십상이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무언가를 꾸미고 계획할 머리가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할 마르키젤은 마체라타가 자일스의 몸을 감쪽같이 고쳤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를 단순히 자일스의 장난감정도로 여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여인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하셨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폐하?" "맞습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이 전무합니다. 스스로 밝힌 마체라타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쥬네비아 황후가 무거운 한숨으로 말을 끝냈다. 간간이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칼 베리만이 이윽고 쥬네비아 황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생각으로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일스 전하를 자극하는 일 은 가급적 피하시고, 마체라타의 행동을 좀 더 두고 보십시오. 그 동안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미 해 보신 일이니 시간낭비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 소견으로는 그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칼 베리만의 말씀대로 일단 사태의 추이를 두고 보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쥬네비아 황후는 칼 베리만을 문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빠르게 말했다. "무언가를 알아내신다면 제게 즉시 전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칼 베리만은 문을 닫고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엔 왠지 모를 그늘이 덮여 있었다. "칼 베리만님, 무슨 근심거리가 있으신 겁니까?" 그의 한숨을 들었는지 한발 뒤에서 걸음을 옮기던 호위기사 맥노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칼 베리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그저 황궁에 한바탕 호된 비바람이 불 것 같다는... 노망난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일세." "이케르, 네 생각은 어떠냐?"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그렇다면 세르피언, 네가 말해봐라!" "저도 모르겠습니다, 단장님!" 사일러스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어차피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므로 이케르나 세르피언을 나무라지 않았다. 사실 명확한 답이 나올 수도 없는 문제고 말이다. "제 생각으로는 군델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눈이라도 박을 듯 지도에 얼굴을 찰싹 갖다 대고 있던 카셀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신있는 그의 목소리에 사일러스를 비롯한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이유는?" "그건 그러니까... 군델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카셀은 기어 들어가는 어조로 말한 다음, 불편하게 꽂히는 시선들을 서둘러 피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들어 땅바닥에 의미없는 선을 이리저기 그리기 시작했다. "아하! 이제 알았다!" 제러드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크게 소리쳤다. "너, 네 부인이름이 아델이라 그런 거지?" "아,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카셀은 격렬히 부인했지만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이미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 아내이름과 비슷하다고 군델로 가자고 한 거란 말이냐?" 너무나 기가 막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일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단장님!"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말이 정확히 맞았으면서." 제러드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카셀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넌 어째 어딜 가든, 또 무엇을 가든 네 부인에게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냐? 하루도 빠짐없이 '아델, 아델' 잠꼬대를 하고, 시장만 보면 뭐 사다 줄 거 없나해서 눈깔이 튀어나오고... 얼마 전엔 멀쩡한 사람 눈 색깔을 바꾸더니, 이젠 군델로 가자고 우기고...." 제러드가 혀를 끌끌 차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저,저 자식이!" 주먹을 불끈 쥔 카셀이 그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사일러스가 근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만둬라! 이렇게 허송세월할 시간따윈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도이에르든 램이든 아델이든, 어느 쪽으로라도 결정을 내려야 한단 말이다." "저 단장님, 아델은 카셀이 사랑하는 부인이름인데요. 만약 아델로 간다면 카셀은 너무 좋아 하늘 꼭대기에라도 오를 겁니다." 제러드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사일러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카셀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엘을 놓친 사건이후 계속해서 기가 죽어있던 에지몬트조차 오랜만에 만사를 잊고 웃을 수 있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사일러스는 어느새 시무룩해진 에지몬트를 바라봤다. "에지몬트, 머리를 써서 안 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직감을 최대한 이용하라 하셨습니다." "그래, 잊지 않고 있었군." 에지몬트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을 때 사일러스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발하며 말했다. "직감을 발휘해 봐라, 에지몬트. 길은 세 갈래다. 도이에르, 군델, 램... 자, 어디로 이동하면 되겠느냐?" 한순간 긴장된 침묵이 묵직하게 자리잡았다. 카셀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지도를 들어 에지몬트 발치에 부스럭거리며 펴 주었다. 망연자실해 있던 에지몬트는 사막에서 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지도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띄엄띄엄 놓인 세 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메릴랭에서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곳은 도이에르야. 하지만 군델이나 램도 도이에르와 큰 차이는 나지 않아. 편한 길로 이동한다 가정하면... 도이에르나 램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수량이 많지 않다면 그레인 강을 건너 군델로 갔을 수도 있어.아무리 지도를 훑어봐도, 또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봐도 가슴만 답답해질 뿐 이렇다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지도는 오히려 판단을 흐릴 뿐이라는 결론이 나자 에지몬트는 넓게 펼쳐진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도이에르, 군델, 램... 도이에르, 군델, 램..." 눈을 감고 주문을 외듯 세 지명을 반복해 중얼거리던 에지몬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램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빨리 움직여라! 램으로 이동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그들은 하나 둘 서둘러 말에 올랐다. "왜 램으로 결정한 거야? 단장님 말씀대로 직감을 이용한 거냐? 램이 틀림없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나 보지?" 제러드는 말 등에 오르는 에지몬트에게 못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아니오, 우리가 찾는 소녀 이름이 엘이지 않습니까? 엘과 램, 둘 다 한 글자입니다." "....겨우 그거야?" 기가 막힌 제러드의 물음에 어서 출발하라는 사일러스의 외침이 섞여 들었다. "제 나름대로의 직감입니다, 선배님." 제러드를 향해 싱겁게 웃어 보인 에지몬트가 힘차게 말을 출발시켰다. "괜히 물어 봤어... 차라리 이유를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제러드는 무거운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서둘러 뿌연 먼지구름을 좇았다. "램까진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리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물음을 못들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먼 들판만 바라보던 리반이 짧게 대답했다. "몰라." "대충 잡아 반 정도는 온 것 같아?" "몰라." 무뚝뚝한 어조에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말이 느껴졌다. 엘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다시 한번 리반을 바라본 다음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리반을 노려보고 있는 리오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기 힘든지 격한 콧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나뭇가지를 들어 화풀이하듯 모닥불을 들쑤셨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소리와 규칙적으로 들리는 낯선 풀벌레 울음만이 무거운 침묵 속을 채웠다. "리반, 나와 얘기 좀 하자." 리오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왜? 무슨 얘길 하려고?" 리반이 대답하기 전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엘의 물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러자 엉덩이를 툭툭 털던 리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우리가 그렇게 어린애인줄 알아?" 아시리움 성전에서 퉁퉁 부어 오른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던 그들의 모습이 반사적으로 떠올랐지만 엘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하지마. 할 얘기가 있는 것 뿐이니까." 말을 끝낸 리오가 리반에게 따라오라는 고갯짓을 하자 리반이 뚱한 얼굴로 일어섰다. 엘은 어둠에 조금씩 잠겨 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오와 리반은 물론 루드비히와의 사이에도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었다.농담으로 얼렁뚱땅 넘기긴 했지만 리오의 고백은 그를 대할 때마다 집요하게 떠올라 엘을 불편하게했다. 리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계속해서 그 때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러니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다는 것이 오히려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오와의 불편한 관계는 리반과 비교하면 얼마든지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반이 조금 전처럼 그녀를 무시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간혹 가다 나타나는 적대감보다는 그나마 견디기 쉬웠다. 그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녀를 바라볼 때는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주저앉아 엉엉대고 울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루드비히까지 은근히 날 피하는 것 같고... 간단한 저녁식사가 끝난 후 아무 말없이 사라진 루드비히는 밤이 깊도록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다들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은 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건가?" 처량한 중얼거림이 이어지며 엘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가장 먼저는 머리부터 들어야 할 것 같군요. 태울 나무가 모자란 것도 아니니까요." 엘은 루드비히의 목소리에 번쩍 얼굴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왔는지 루드비히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루드비히가 제 머리카락을 위험에서 구해줬군요." 엘은 짐짓 농담조로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가까이 다가온 루드비히가 한 걸음 정도 사이를 두고 그녀 옆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끝이 조금 그슬린 것 같기도 하군요. 여기 이 부분이 말이에요." 엘은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루드비히 앞에 불쑥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채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엘은 혹시 루드비히의 기분이 나아졌을까 싶어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은회색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그늘져 보였고 조각해 놓은 듯한 단아한 입술도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 동안 머리색도 거의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머리를 감을 때 금색이 빠지는 것 같진 않았는데... 제 생각엔 아무래도 햇빛과 바람 때문인 것 같아요. 루드비히, 정말 신기한 일 아니에요? 리오는 나보다 더 많이 색이 빠졌던데...." 애써 밝게 말하던 엘은 루드비히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 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다리를 세워 팔로 꼭 끌어안고 왠지 모를 비침한 심정을 느끼며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한숨과 함께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군요. 이제 거의 예전 색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놀란 엘이 퍼뜩 고개를 들어 루드비히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루드비히의 시선은 좀 전과 똑같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고 있던 엘의 입술에서 잠시 후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드비히가 그녀를 보며 뭐가 그리 우스우냐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자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금 루드비히가 얼마나 거만하게 보이는지 알아요? 꼭 너무 먹어 배가 축 늘어진 사람이 끅끅 트림을 하며 정말정말 맛없어 보이는... 그러니까 돼지 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키득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린 채 소리쳤다. "이런! 그럼 내가 돼지 죽이란 말이잖아!" "너무 먹어 배가 축 늘어진 사람도 그리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루드비히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돼지 죽이란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원망어린 눈으로 절 바라보시는 겁니까?" "그건 알지만...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의 볼멘 소리가 끝나는 순간 루드비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짐짓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던 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조금씩 잦아들던 그들의 웃음소리가 완전히 멈춘 건 리오와 리반의 발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가까이 온 리오가 의혹 어린 눈초리로 엘과 루드비히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리오 뒤로 침울한 표정의 리반이 보였다.엘은 슬그머니 한숨을 내쉰 다음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자. 우릴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램을 꿈꾸며!"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그녀였지만 모포를 끌어올리는 엘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루드비히와의 사이가 예전처럼 좋아졌다는 생각이 그녈 낙관적으로 만들었는지,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리오와도 리반과도 예전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이대로 아무 일없이 바르테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날 보면 아몬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 아마 위험하지 않았느냐며 걱정 어린 눈으로 날 살펴볼 거야. 그럼 난 정말 힘들었다고 잔뜩 엄살을 부려야지. 리자드는 뭐라고 할까? 잔뜩 무게 잡은 근엄한 얼굴로 '수고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어쩌면... 날보고 환하게 웃어 줄지도 몰라. 어느새 잠이 든 엘의 입술엔 살짝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자일스가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곧추 세우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엉거주춤 서 있던 젊은 기사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내 말이 말같지 않은 거냐?" 막 입을 열려던 기사는 자일스의 불호령에 놀라 급한 숨과 함께 말을 삼키고 말았다. "황태자전하 앞이라 너무 긴장했나 봅니다." 보다 못한 노소프가 침착한 어조로 말하며 남자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저 그러니까... 얼마 전 그루지아국의 메릴랭에서 빨간 머리 쌍둥이 형제와 검은 머리 소년을 잡기 위해 군병들이 동원되었다 합니다, 전하. 어떤 귀한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해쳤다는 죄목인데.... 이상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령이 돌연 취소되었다고... 그게 들어온 보고의 전부입니다, 황태자전하." "검은 머리 소년... 그리고 메릴랭..."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자일스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리아잔 안에 있는 거야. 바로 이 곳에 놈이 들어온 거야." 노소프는 점점 높아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전하,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스럽습니다만, 메릴랭에 있던 소년이 전하께서 찾으시는 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소년이 맞다면 같이 있던 쌍둥이 형제는 체르몬 국의 왕자들이 분명할 텐데... 일국의 왕자들이 물건을 훔쳤다니....아무래도 그들은 다른 사람인 듯 합니다." "아니, 난 안다, 노소프. 메릴랭에서 소란을 피운 좀도둑이 바로 내가 찾는 놈이란 걸 안단 말이다. 넌 못믿겠지만 놈이 메릴랭을 거쳐 우리 리아잔 제국에 기어 들어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제가 그 놈을 잡아 올까요, 전하? 전하를 위해서라면 지금 즉시 리아잔을 샅샅이 뒤져 놈을 전하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긴 안락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나른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마체라타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자일스는 그에게 다가오는 마체라타를 보며 입술 끝을 비스듬히 비틀어올렸다. "너까지 나설 필요없다, 마체라타. 이미 아시리움에서 추적을 시작했을 테니까. 아시리움에서 놈이 리아잔 안에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지. 나 역시 이번 일만큼은 아시리움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이고. 이 기회에 아시리움과 돈독한 관계를 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물론 겉으로는 말이다." 의자에서 일어난 자일스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마체라타가 자일스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유혹적으로 어루만지며 점점 몸을 밀착시켰다.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자일스의 입술로 접근했다. 노소프는 눈앞의 민망한 장면에서 서둘러 굳은 얼굴을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고 마체라타가 도발적으로 입술과 혀를 움직이자 자일스가 그녀를 슬쩍 밀어 떼어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모욕감을 느낀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사나운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을 통해 나온 어조는 지극히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군요, 전하.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고민이라... 그래, 고민일수도 있겠지. 난 너무 성급하게 일을 처리했다. 아시리움의 힘을 빌리지 말고 내 손으로 놈을 추적했어야 하는데... 놈이 리아잔에 기어들었다는 걸 모르고 아시리움에 정보를 주고 말았다니! 이제 내 고민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마체라타? 그건 아시리움 종단에서 순순히 놈을 내줄 것 같지 않다는 거다. 아시리움에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놈을 아시리움의 이름으로 처단하려 할 것이다." "물론 전하께선 놈을 아시리움에서 빼내 직접 처리하길 원하고 계시고요." "그래, 마체라타. 네 말이 정확하게 맞다. 말해봐라, 어찌하면 내 손아귀로 놈을 움켜잡을 수 있겠느냐?" 마체라타의 붉은 입술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간단합니다, 전하. 아시리움과 직접 협상하십시오. 전하께서 아시리움이 만족할만한 조건을 제시하신다면... 아시리움에서 놈을 넘기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일스의 옅은 초록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아시리움이 만족할만한 조건이라고? 대체 그게 무엇이냐?" "아시리움 종단이 놈을 쫓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하? 그건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다는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즉 아시리움은 온 세상에 그들의 존엄을 알리길 원한다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전하께선 아시리움이 쫓는 그 죄인을 원하십니다. 그 두 가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 극히 간단합니다. 전하께선 죄인을 갖으시고 아시리움은 그럴듯한 무대에서 죄인 아닌 죄인을 처단하면 되는 겁니다." "죄인 아닌 죄인? 가짜를 아시리움에 주고 난 진짜를 넘겨받는다... 그런 것이냐?" 흥분을 못참겠는지 자일스가 숨찬 어조로 소리쳤다. "예, 전하. 바로 그 뜻입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썩 괜찮은 방법이야." 자일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굴을 물들인 붉은 기가 맥박이 펄떡이는 목줄기로 번져갔다. "그런데 오만불손한 아시리움에서 순순히 내 뜻을 따라 줄까?" "그 또한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전하께서 그들이 원하는 그럴듯한 무대를 제공하시면 말입니다." "그럴듯한 무대라고? 대체 아시리움이 왜 그런걸 아쉬워한단..." 말을 멈춘 자일스가 번쩍 고개를 들어 마체라타를 응시했다. "놈을 처형할 가장 그럴듯한 무대는 아시리움 성전일 것이다. 하지만 아시리움 측은 가짜 왕족노릇을 한 극악한 죄인의 더러운 피로 성전을 물들이고 싶어하지 않겠지. 다른 장소에서 일을 치른다면 그들이 원하는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테고 말이다." 자일스가 목 안쪽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은 낮고 거친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그래, 아시리움은 리아잔 제국의 황궁이란 훌륭한 무대를 쉽게 거절하진 못할 거다." "또 한가지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하." 마체라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초록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자일스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건 바로 아시리움의 상대가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전하라는 것입니다." 마체라타의 붉은 입술에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을 때, 자일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거칠게 입을 맞췄다. "조급하게 생각지 마시고 느긋한 마음으로 성과를 기다리십시오. 처음엔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된 듯 느껴지고 무엇하나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다림이 끝나고 그 곳에 가려져 있던 현실이 나타납니다." 루드비히가 입술을 다물자 엘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드비히 몰래 슬쩍 팔뚝을 꼬집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막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었지만 팔뚝에서 손을 떼기도 전에 눈앞이 흐려졌다. "동물과의 교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정신능력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오로지 생각의 흐름만을 지켜보십시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입니다. 그것에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정신세계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자신을 맡기고 몰입하십시오. 하지만 무아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힘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선에 머물러야 합니다. 즉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중요합니다.... 집중하십시오." "지금 꼭 이걸 해야 하는 건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엘은 눈을 깜박이며 처량한 어조로 물었다. 그리고 루드비히의 엄숙한 눈빛에 밀려 금세 스스로 답을 내놨다. "당연히 지금해야 되겠죠." 입을 다무는 순간 리자드에게 받았던 막무가내식 교육이 떠오르자 엘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리자드도 언제나 눈 하나로 날 조종했는데... 난 리자드가 눈썹만 꿈틀해도 질겁해서 눈치보기 바빴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루드비히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요. 그 사람하고 루드비히는 정말 다른데... 우습게도 좀 전에 루드비히를 보다가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오르지 뭐예요."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루드비히하고는 비슷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사람인데... 루드비히는 친절하고, 또 상냥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정말 냉정하고 무뚝뚝하거든요. 보고 있기만 해도 괜히 주눅이 드는... 그런 사람이에요." 잠시 현실을 잊고 갖가지 상념에 빠져 있던 엘이 문득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 "이런! 제가 엉뚱한 말만 늘어놔서 화나셨군요. 이제 쓸데없는 말하지 않을게요, 루드비히." "오늘은 그만하겠습니다." 루드비히가 단호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왠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드비히,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엘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스쳐갔다. 루드비히는 한동안 우뚝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다 아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칼 베리만은 문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울림에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서둘러 문을 활짝 열자 옆모습을 보이고 서 있던 리자드가 몸을 바로 잡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칼 베리만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리자드를 안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의자 옆에 멈춰 선 리자드가 망토를 벗자 하얀색 셔츠와 진회색 조끼로 감싸인 군살없는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리자드는 망토를 옆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고개를 들다 자신에게 못박혀 있는 감탄 어린 시선을 깨달았다. 그가 의자에 앉으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칼 베리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군요. 매일 제멋대로 퍼진 제 몸만 보다 대공의 근사한 모습이 들어오니 눈이 놀랐나 봅니다." 리자드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올라갔다. "제 눈엔 칼 베리만의 모습이 훨씬 더 멋지고 훌륭해 보입니다." "어허, 대공.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만드시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성공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나눴다. 칼 베리만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앞에 놓인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리자드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보다는 술이나 한잔 주십시오." 칼 베리만은 뜻밖의 말에 놀라 한순간 멈칫했다가 묵묵이 일어나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리자드 앞에 내려놨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이는 리자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늘 이전엔 제 앞에서 한 번도 술을 드신 적이 없다는 거 대공도 알고 계십니까?" "제가 그랬습니까?" 술잔을 내려놓는 리자드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칼 베리만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리자드를 바라보며 들릴락 말락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신 대공께 뵙자는 연락을 보낸 건 리아잔 황궁에 석연치 않은 일이 생겨서입니다." "석연치 않은 일이란 자일스 황태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예, 맞습니다. 대공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말을 끊고 슬쩍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칼 베리만이 리자드와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괴이한 일이지 않습니까, 대공?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도 믿지 못할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어 본 저이지만, 이번 일은 어찌 된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루 아침에 절단됐던 팔이 다시 생기고, 완전히 망가졌던 눈이 멀쩡해 지다니... 치유능력이 있는 마법사는 몇 명 알고 있지만 이번 일은 그런 능력과는 차원이 틀린 것 같습니다, 대공."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칼 베리만의 얼굴엔 혼란과 근심이 가득했다. "쥬네비아 황후께서도 근심이 크시더군요. 딱히 해드릴 말이 없어 한동안은 그냥 두고 보시라고만 했는데...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여인에 대해선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일단 조사를 지시해놓긴 했는데 아직까진 이렇다할 보고가 없습니다. 마체라타라는 이름만 알고 있는데 그것이 본명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할 노릇입니다." "마체라타라..." 리자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공, 혹시 알고 계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는 데 선뜻 떠오르진 않습니다." "마체라타란 이름은 그리 흔하지 않을 텐데요. 만약 생각이 나시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대공." "알겠습니다." 리자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바쁘신가 보군요." 한순간 리자드의 얼굴에 좀 쓸쓸해 보이는 미소가 스쳐갔다. "아니오,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뭔가를 빨리 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조급증이 뿌리깊게 박 혔나 봅니다." 칼 베리만의 갈색 눈동자에 깊은 이해의 빛이 나타났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여유라곤 조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셨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지요." "못난 조급증이 계속 절 채근하니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그러십시... 아, 대공! 그 아이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칼 베리만은 막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리자드에게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잠깐 동안 미동없이 서 있던 리자드가 망토를 집어 들며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대공,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을 휘둥그렇게 뜬 칼 베리만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시리움에서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추적이라고요? 허면 그 아이가 아시리움 성전을 나왔다는 말씀입니까?" 리자드의 눈빛을 읽은 칼 베리만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전 아직까지도 그 아이가 아시리움 성전 안에 있는 줄만... 제가 모르는 사이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졌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공께서도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어차피 아시리움에서 이번 일을 알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단지 그 시기가 예상보다 조금 앞당겨졌을 뿐입니다." 냉정한 어조로 말한 리자드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칼 베리만은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리자드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아시리움에 잡히는 것도 물론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심되는 것이 있습니다, 대공. 만약 그 아이가 겁에 질려 사람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리면 어찌 되는 겁니까? ....어쩌면 벌써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겠군요." 우뚝 멈춰 선 리자드가 칼 베리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씁쓸하게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아니오, 지금도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겁니다." 어둡게 빛나는 청회색 눈엔 자신을 향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딛으며 낮고 거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리석게도 말입니다." -------------------------------------------------------------------제 36장. 위험 속으로-------------------------------------------------------------------쉭하는 바람소리가 연이어 귀를 파고들었다. 엘은 목을 옆으로 비틀어 얼굴 정면으로 달려드는 목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마치 검 끝이 살갗을 베고 지나간 듯 일순 서늘한 느낌이 볼을 스쳤다. 숨쉴 틈없이 이번엔 목검이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복부로 날아왔다. 엘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검을 힘껏 쳐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방향을 바꾼 목검이 낮게 깔리며 그녀의 발목을 공격했다. 펄쩍 뛰어오른 엘이 아차하며 숨을 멈췄을 때 그녀는 목 가운데를 누르는 딱딱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하겠습니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결 아래로 거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대답할 기운도 없는 엘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알싸한 나무향기를 안고 온 바람이 후끈 달아오른 살갗에 기분 좋게 부딪혔다. 엘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을 때 풀을 스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리오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살아 있는 거야?" "아니." 엘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리오가 피식 웃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유령치고는 상태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은데?" "금방 죽은 유령이니까." "유령이 넙죽넙죽 대답은 잘하네. 내가 보기에 유령은 네가 아니라 저 첸이란 마부 같다. 사람이 어떻게 저 정도로 검을 쓸 수 있겠어? 아니, 사실 마부가 아닐 게 틀림없어. 맞아, 저런 사람이 평범한 마부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대련을 보았지만, 검을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 아까 마지막에 첸이 그 짧은 시간 힘을 빼지 않았다면 넌 정말 유령이 돼 있을 거야." 햇빛에 눈을 찡그리고 리오의 말을 듣고 있던 엘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맞는 순간 목이 부러졌을 테니까." "직접 검을 나눠 본 소감이 어때?" "으음... 간단히 말해, 이게 꿈인가, 아니면 생신가야." 엘은 장난기를 담아 대답한 다음, 금세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어. 만약 첸이 목검을 쓰지 않았다면 난 무서워서 검을 들지도 못했을 거야.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첸의 공격을 받을 때면... 간혹 숨이 막힐 만큼 두려울 때가 있거든." 그럴 때는 검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엘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첸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검술은 위력적이었다. 사실 엘은 비록 서너 번이긴 했지만, 목숨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 동안 사일러스를 비롯해서 실력있는 사람들에게서 검술을 배운 그녀였지만 첸과의 대련은 지금까지의 교육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그는 단한순간도 그녀가 듣고 보고 몸에 익힌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엘은 첸과의 첫 번째 대련에서 제대로 검을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온 몸에 멍이 든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야 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첸이 '그만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갈 때 엘은 가슴을 짓누르는 비참함에 힘없이 눈을 감아야 했다. 그 이후로 엘은 그녀가 익혔던 검술동작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첸의 공격을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엘이 오늘 그나마 이 정도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오로지 본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아직 확실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그녀가 배운 대로만 움직인다면 첸과 수백 번 검을 나눈다 해도 결국 그녀에게 남는 건 쓰디쓴 패배감뿐일 것이다. "나도 첸한테 검술을 배울 수 있을까?" 리오가 작은 돌을 들어 올려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가능할 것 같아. 내가 배우는데 너라고 안 될 리 있겠어? 이걸 배운다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첸한테 말 좀 해줄래?" "왜? 네가 안하고?" 조금 머뭇거리던 리오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첸이 좀... 뭐라 그럴까... 대하기 어렵거든. 지금까지 말 한마디 해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나보다야 네가 말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그래도 넌 요 며칠동안 검술을 배우며 대화도 나눠 봤잖아." "대화라고? 첸이 나한테 하는 말은 딱 두 가지야. 하나는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만하겠습니다'. 이것도 대화를 나눈 거에 속하는 거야?" 헛웃음을 짓던 리오가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넌 첸이 검을 잘 다룬다는 건 어떻게 알고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거야?" "내가 그런 걸 무슨 수로 알아? 난 그저 루드비히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따르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루드비히가 첸한테 날 가르치라고 말해 준거지. 일정까지 늦추면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요새 너하고 그 사제님하고 무슨 공부를 하는 것 같던데... 책도 하나 없이 뭘 배우는 거야?" "으음... 그러니까..." 망설이며 말끝을 흐리던 엘은 어차피 리오도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정하고 등을 곧게 폈다. "워낙 말재주가 없어 말로는 잘 설명 못하겠으니까 잘 봐." 엘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노란색 들꽃 위를 닿을락 말락 낮게 날고 있는 작은 나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비가 팔랑거리며 날아와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설마 네가 한 거야?" 눈을 휘둥그렇게 뜬 리오가 숨가쁘게 물었다. 엘은 나비를 손가락 끝으로 옮긴 다음 살짝 흔들어 날려보냈다. "그래,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비나 풀벌레, 아니면 작은 동물이 고작이야. 그것도 눈에 보일 때만 통하고. 루드비히는 눈에 보이지 않을 경우에도 가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언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겠지. 조급함은 오히려 일을 망치는 법이라고 루드비히가 그러더라."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엘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리오를 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묻는 거야?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칼라카!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네가 칼라카를 길들였다는 말! 그거 헛소문 아니었지? 진짜 있었던 일이지?" "길들였다는 건 맞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있긴 했어." 입술을 멍하니 벌린 리오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존재를 대하듯 엘을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난 변한 거 하나도 없어." 리오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엘에게서 손에 들린 조약돌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돌을 한 번 꾹 움켜쥐었다가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들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만 일어나자! 말도 기운을 차렸을 테니까 이제 출발할 수 있을 거야. 리반 말로는 부지런히 간다면 오늘 저녁 전에 램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래." 말을 마친 리오가 보폭을 넓게 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시무룩한 얼굴로 땅을 퍽퍽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중간쯤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왜 애꿎은 땅에다 심술을 부리는 거야?" 삐딱하게 선 리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혹시 날 그렇게 차고 싶은 거 아냐?" "아,아니야!" 엘은 얼떨결에 부인하며 우뚝 멈춰 섰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녀석 생각이야 훤히 보이는데!" 엘에게 다가온 리오가 그녀의 어깨에 척 팔을 올렸다. "하여튼 넌 내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제대로 걸음도 못 걷는다니까." "내가 언제?" 엘은 엉거주춤 다리를 움직였다. "부인해도 소용없...." 갑자기 입술을 꾹 다문 리오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리오의 시선을 따라가던 엘은 마차 앞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리반을 깨닫고 황급히 리오의 팔을 치웠다. "너 왜 그래? 죄라도 졌어?"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리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욘 없잖아." 엘은 이를 악문 리오를 향해 달래듯이 말했다. "이 녀석 기분같은 건 신경 쓸 필요없어." 리반의 코 앞에 멈춰 선 리오가 험악하게 말하더니 시비라도 걸듯 노골적으로 리반과 어깨를 부딪치며 마차에 올랐다. 엘은 걱정과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리반을 바라보다 힘없이 걸음을 뗐다. "저기 알렉스..." 마차에 타려던 엘이 리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을 때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중에... 나중에 말할게." "미안해, 리반." 엘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느닷없는 사과에 꽤 놀란 듯 흠칫한 리반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어조로 낮게 속삭였다. "나도 미안해, 알렉스... 정말..." "여관과 식당을 중심으로 찾아봐라. 만약 램에 온 게 틀림없다면 여관과 식당 중 어느 한 군데는 들렀을 게 분명하니까. 그럼 먼저 각자 구역을 정하는 게 좋겠군. 시장이 이 아래쪽이니까..." 사일러스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단장님, 힘든 강행군으로 모두들 많이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임무수행이 가장 우선시되어야하겠지만 목구멍에 낀 깔깔한 먼지나 좀 씻어 내리고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러드가 기사들의 소박한 바람을 대변하고 나섰다. 간절함이 담긴 기사들의 시선이 사일러스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잔뜩 구겨진 사일러스의 얼굴을 발견하고 곧 무겁게 고개를 떨궈야 했다. "좋다!" 불호령이라도 칠 듯하던 사일러스가 호쾌하게 승낙하자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눈 앞에 보이는 술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이 들어선 술집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만큼 북적거렸다. 공기는 갖가지 사람들의 체취와 쾌쾌한 곰팡내,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정도로 탁했고 경쟁하듯 소리 높여 떠들어대는 고함과 웃음소리로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하지만 좁은 탁자에 어깨를 부딪치며 앉아 있는 기사들은 오랜만에 누리는 행복감에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은 유난히 술을 좋아하나 봐. 대낮 술집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야." "나도." 세르피언의 말에 카셀이 맞장구를 쳤다. "아니면 무슨 마을축제라도 열린 거 아닐까? 거리에도 꽤 사람이 많던데." 말을 끝낸 제러드가 주위를 살피더니 때마침 지나가는 주인을 불러 세웠다. "주인장, 무슨 일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넘치는 거요? 혹시 주인장이 공짜 술이라도 주겠다고 한 거요?" 잠시 소리내어 웃던 주인이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으며 말했다. "공짜 술이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 죽기 전에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럼 무슨 축제라도 벌어진 거요?" 주인이 질문을 한 에지몬트에게 감탄 어린 시선을 던졌다. "어이고, 정말 잘생긴 분이시군요. 길거리만 나가도 여자들이 줄을 서겠습니다. 역시 남자는 기사님처럼 이렇게 듬직해야 진짜 미남이라 할 수 있죠. 얼굴은 꼭 여자처럼 곱살하게 생겨가지고 바람만 세게 불어도 픽 쓰러질 것 같이 흐느적거리는 놈을 누가 남자로 보겠습니까? 그런 놈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글쎄 딸자식 하나 있는 게 자꾸 속을 썩이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부모 복 없는 놈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처량하게 신세한탄을 늘어놓은 주인이 힘없이 몸을 돌리려 하다 다시 에지몬트를 바라봤다. "근데 뭘 물으신 겁니까?" "혹시 축제가 열리고 있는지 물었소이다." "아, 그렇죠! 이제 생각이 납니다. 예, 곧 가겠습니다! 잠시만요, 기사님." 술잔을 흔드는 손님 몇 명에게 술을 갖다 준 주인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왔다. "축제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돈이 걸린 죄인을 잡으려고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든 겁니다. 그런 중죄인이 램에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시골 구석 보단 도시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생각하는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죄다 이 곳으로 몰려드는군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반 정도는 바드리오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넓은 바드리오에서 사람 하나를 어떻게 찾을 생각인지... 저 같으면 그런 무식한 짓은 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놈을 못잡으면 황궁이나 실컷 구경하고 올 생각이오!"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지저분한 차림의 남자가 불쑥 끼어 들었다. 그는 자신있다는 듯 히죽 웃더니 넓적한 손바닥에 코를 풀어 바지춤에 쓱쓱 문질렀다. "그런 몰골을 해가지고 황궁 가까이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경비병한테 목이 잘려 시궁창에 내동댕이쳐지기 십상이지." "뭐,뭐라고? 목이 잘려 시궁창에 내동댕이쳐진다고? 이거 왜 이래? 사람 우습게 보는데 어디 두고 보자고! 놈을 잡아 내 팔자가 펴지면 이렇게 날 괄시하지 못할 테니까!" "행여나? 아마 네가 그 놈한테 잡히게 될 거다!" "제기랄!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말싸움이 지리하게 이어졌다. 침을 튀기며 핏대를 세우고 있는 두 남자를 짜증 섞인 눈으로 보던 사일러스가 기사들에게 일어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돈 관리를 맞고 있는 제러드가 에지몬트에게 몇 개의 동전을 쥐어 준 다음 턱으로 주인을 가리켰다. 에지몬트는 열심히 삿대질을 하고 있는 주인의 팔을 잡아 그의 손에 억지로 동전을 밀어넣었다. "이거 왜 이래?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내가 겨우 열 몇 살 먹은 애송이 하날 못 잡을 것 같아?" 막 몸을 돌리려던 에지몬트는 남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돈이 걸렸다는 그 죄인에 대해 말해 보시오! 설마...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소년인 거요?" 에지몬트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남자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가슴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겁니까?" "젠장!" 버럭 터져나온 욕설에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자 숨소리도 들릴 만큼 술집 안이 조용해졌다. "이런 젠장!" 에지몬트는 미친 듯이 사람들을 밀치며 다시 한 번 목이 터져라 욕설을 내뱉었다. 그라우스는 경건하게 느껴지는 동작으로 종이에 붓을 가져갔다. 아주 작은 실수라도 일어난다면 그림은 그 즉시 쓰레기와 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섬세한 붓끝이 흔들리까 봐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이제 그림은 거의 완성되어 마지막 마무리를 남겨 놓고 있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힘든 부분, 즉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눈동자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라우스는 보라색 눈동자에 푸른 색을 엷게 칠해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며 받침대 위에 붓을 내려놨다.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끝났다. 색과 명암을 제대로 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빛이 남아있는 동안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살짝 허리를 젖혀 신중한 눈으로 그림을 바라봤다. 곧 얼굴 가득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들뿐만 아니라 설령 법황이라 해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내노라 하는 유명화가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살아 숨쉬는 듯한 섬세한 인물화는 절로 탄성을 터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 일품이었다. 그라우스가 아시리움 종단의 고위사제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특출한 그림 실력 덕분이란 건 부인 못할 사실이었다. 그는 아시리움의 고위사제라는 자신의 지위가 대단히 만족스러웠고 높은 자긍심도 갖고 있었다. "내 그림을 겨우 사람 잡는데 사용해야 하다니..." 그는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록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예상하고 있지만 자신이 이런 그림까지 그려야 한다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그라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림이 완전히 마르기까진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급한 노게일스 대사제를 생각하면 되도록 빨리 그림을 올리는 게 현명하리라. 이미 그림을 다른 종이에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들까지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니 그가 그림만 넘긴다면 며칠 내 죄인의 얼굴이 붙여지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라우스는 시종들을 불러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뒷정리를 해놓으라 지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무심코 서너 걸음을 옮기다 방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하며 멈춰섰다. "그라우스 드사이 알바그로 사제인가?"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바닥에 낮게 깔렸다. "그,그렇습니다." 그라우스는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이신데..."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갔다. 이상하게 날카로우면서도 한편으론 부드럽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그라우스는 멍하니 자신을 내려다봤다. 가슴에 묻은 붉은 물감을 발견했을 때, 까다로운 대사제를 만나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라우스는 점점 번져 가는 붉은 얼룩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자신의 손이 뜨듯한 액체에 잠겨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곧 이어 목구멍 아래에서 역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그제야 그라우스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축축한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하며 초점없는 눈을 남자에게 돌렸다. "왜...나를...왜..."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둡게 빛나는 청회색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우스는 꿰뚫는 듯한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친 숨이 몇 번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 그친 후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리자드는 사제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후에야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았다. 검자루를 떠난 그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짧은 비명이 울리며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리자드는 뚜벅뚜벅 걸어 거친 신음을 흘리며 발목에 박힌 단검을 뽑아 내려 애쓰고 있는 남자 앞에 멈춰 섰다. "네가 말로만 듣던 감시자인가?" "그러시는 분은 분명 루벤스타인 대공전하신 것 같군요." 남자가 놀랄 만큼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쳐갔다. "날 알고 있군." "물론입니다. 전에 연회에 참석하신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널 살려 둘 생각이 없단 것도 알고 있겠군." 남자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아시리움의 사제를 해치시다니...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아시리움 성전에 피를 뿌리시다니... 왜 이런 일을 하신 겁니까, 대공전하?" "이유가 무엇이든 네가 알 바 아니다." "대공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당연히 이유 따위는 알 필요없습니다. 감시자의 임무는 오직 아시리움을 지키는 일뿐이니까요." 억양없는 단조로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리자드의 정면 으로 붉은 섬광이 달려들었다. 섬광이 용광로의 불처럼 이글거리며 천장까지 치솟는 순간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리자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 일을...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거칠게 갈라진 음성이 들리자 리자드의 입술에 냉정한 미소가 스쳐 갔다. 리자드는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딱딱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세르피언의 말에 제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나도 마찬가지야. 대체 왜 아시리움 종단에서 그 소녀를 잡으려 하는 걸까?" "글쎄말이야. 무슨 엄청난 죄를 저지른 거 아닐까?" 카셀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의 눈이 사일러스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내내 그랬듯이 우뚝 서서 창 밖만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장님, 대체 왜 아시리움에서 그 소녀를 쫓는 것입니까?" 기사들의 시선을 받은 제러드가 사일러스의 등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사일러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린 오직 임무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할 수 없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단장님. 우리와 아시리움이 같은 소녀를 쫓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절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이케르가 제러드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누가 무시하고 넘기라 했나? 중요한 건 아시리움이 이번 일에 개입됐다는 사실 그 자체지, 그 이유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사일러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에지몬트가 들어왔다. 그는 줄곧 뛰어왔는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 앞에 멈춰 선 에지몬트 주위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 거냐?" "빨리 말해봐!" "그래, 뭐 알아낸 거 있어?" "그 소녀가 정말 맞는 거냐?" 기사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예, 맞습니다!" 에지몬트가 고함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사일러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진정하고 네가 알아낸 사실이나 소상히 말해봐라." 무뚝뚝하게 말한 사일러스가 걸음을 옮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설마하던 게 모두 맞았습니다. 아시리움 종단에서 그 소녀에게 만 큐어를 걸었습니다." 기사들에게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겁니다. 만 큐어가 아니라 백 큐어, 아니, 십 큐어에도 자신의 부모까지 죽일 수 있는 쓰레기들까지 모조리 말입니다." "하지만 그 소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수도 있잖아?" 질문을 던진 세르피언을 흘긋 바라본 에지몬트가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빨간 머리 쌍둥이가 일행인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을 찾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아시리움 측은 여자란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젠장! 하필이면 아시리움이라니!" 카셀이 버럭 소리쳤다. 그에 이어 세르피언이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그 소녀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곳에 온다면 그 즉시 사람들에게 잡히게 될 거라는 거야." "램에만 사람들이 몰려들었겠어? 아마 웬만한 도시는 다 마찬가지일걸?" "그래, 제러드 말이 맞다. 어느 도시나 이 곳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을 끝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일러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만약 너희가 엘이라면 어떡해 하겠나? 너희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냔 말이다." "저 같으면 아무도 못 알아보게 변장을 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세르피언이었다. 다음으로 제러드가 입을 열었다. "저라면 낮엔 어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움직이겠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데 어둠보다 좋은 건 없으니까요." "전 차라리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외진 곳으로만 다니겠습니다. 물론 환할 때 말입니다. 밤눈이 좀 어두워서 밤에 움직이는 건 더 위험이 클 것 같으니까요." 카셀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 여장을 하겠습니다." 이케르가 걸걸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그러자 경악에 찬 시선들이 여기저기 칼자국이 선명한 우락부락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만약 내가 그 소녀라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 얼굴이 벌게진 이케르가 사납게 소리쳤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내가 여장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절대!" 여장한 이케르를 떠올렸던 기사들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계획을 변경할 테니 모두 주목해라!" 사일러스가 방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앞으로는 엘이 너희의 말대로 행동할거란 가정 하에 움직인다. 즉, 변장과 여장을... 아니, 여장은 아니겠군. 아무튼 그렇게 꾸미고 사람들을 피해 외진 곳으로만 이동할 거란 가정 하에 계획을 세우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장님, 그 소녀가 이번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걱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제러드가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린 어차피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어느 쪽도 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면 백이면 백, 실패하고 말 것이다. 즉 우린 수많은 가능성 중 단 하나만을 좇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우선 오늘은 이 곳 램에서 머문다.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데클란 평원으로 출발한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자리잡았다. "데클란 평원이 대체 어떤 곳이야?" 카셀이 제러드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나도 잘 몰라. 그저 몇 마디 들은 게 전부야." 말을 멈춘 제러드가 사일러스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데클란 평원이라면 그냥 붙여진 게 평원이지 실은 말할 수 없이 험하고 거친 황무지라 들었습니다. 소수의 유목민들이 모여 사는 부락 몇 개를 빼면 변변한 마을도 없다 합니다. 더군다나 데클란 평원의 반 정도는 자갈투성이고 나머지 대부분도 풀 한 포기 안 날 정도로 메말랐다 하던데, 정말 데클란을 지나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사람들의 눈을 거의 완벽하게 피할 수 있으면서 바르테즈 공국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 그게 바로 데클란 평원이다." "단장님께선 데클란을 지나신 적이, 아니 잠깐 동안이라도 겪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일러스는 기대에 찬 부하들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광활한 평원을 헤매야 한다는 생각에 은근히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그 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잠깐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바르테즈 공국의 기사였다. 다름 아닌 켈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것이다. 사일러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니,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데클란 평원에 발을 디딘 적도, 눈으로 한 번 본 적도 없다." "단장님, 우리가 찾는 건 어린 소녀일 뿐입니다. 일행이 있다 하지만 십대 세 명이 데클란 평원을 지난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밝혀 내지 못했을 뿐 엘에겐 다른 일행이 더 있을지 모른다. 지난번 메릴랭에서 만난 여인도 그런 얘길 들었다 했지 않느냐. 하지만 일행의 유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아시리움 종단이 너희 뒤를 쫓는다고 가정해 봐라. 아시리움 종단과 데클란 평원...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 둘 생각에 잠긴 얼굴을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해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소용돌이치듯 몰려든 구름이 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음산함을 풍기는 하늘뿐만 아니라 주위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축축한 공기도 폭우가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엘은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하늘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세찬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들을 좇아 창문 밖으로 비죽 얼굴을 내밀었다.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이 격렬히 나부꼈다. "위험해!" 리오가 강하게 그녀의 팔이 잡아당겼다. 엘은 고개를 바로 잡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러다간 램에 도착하기 전에 폭우를 만나게 되겠어. 낮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나 봐.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편안한 침대에서 쉬고 있을 텐데..." "마차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지체된 거잖아. 그리고 비 좀 쏟아지면 또 어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오 역시 얼굴이 밝지 않았다. 가뜩이나 험한 길에서 폭우라도 만나면 움직이기 힘든 건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마차가 전복될 위험이 크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곧 이어 확연히 가까워진 천둥소리가 하늘 위로 낮게 굴러갔다. "루드비히, 램까진 얼마나 남은 건가요? 아직 멀었나요?" "이제 곧 도착하게 될 겁니다." 창 밖을 응시하고 있던 루드비히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마차에 올랐을 때부터 줄곧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 리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루드비히는 평소에도 질문에만 간단히 답할 뿐 원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 편한 농담과 웃음을 주고 받았던 리반의 갑작스런 변화는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며칠 전 밤에 리오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돌아온 이후로 리반은 마치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리반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어찌나 괴로운지 엘은 차라리 적대감을 나타내던 때의 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리반은 왜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한 걸까? 예전처럼 지내면 좋겠다는 뜻인가? "램이다!" 흘긋흘긋 리반을 살피던 엘은 리오의 외침에 재빨리 창 밖을 바라봤다. 아직은 거리가 멀어 정확한 모습을 드러나지 않았지만 희미한 가옥들의 윤곽만 보더라도 램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확연히 줄어든 마차의 흔들림 또한 그들이 잘 정비된 길로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었다. 엘과 리오는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먼저 식사부터 한 다음 술집에 가야겠어. 거기서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밤새도록 술을 마셔야지. 오늘 낮에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이번 여행 내내 술을 한방울도 마시지 않았더라고.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 않아? 풍류를 즐기는 이 리오님이 말이야."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리는 리오를 보며 엘은 피식 웃었다. "술과 풍류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어허! 넌 어려서 아직 모르나 본데, 술과 풍류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같은 존재란 말씀이야. 오늘 내가 차근차근 잘 가르쳐 줄 테니..." 일순 말을 멈춘 리오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변해 소리쳤다. "넌 안 돼! 넌 술 냄새도 맡아 선 안 돼! 술 옆에도 가지마! 절대로! 내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 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런 맹세를 해야 한단 말이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실..." 맹렬히 소리치던 엘의 머리에 갑자기 술은 한방울도 입에 대지 말라던 리자드의 말이 떠올랐다. "수가 없지... 난 술을 마실 수 없어." 엘이 돌연 침울해져서 말을 바꾸자 어안이 벙벙해진 리오는 한순간 할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엘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다독거려 주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현명한 판단이야. 정말 훌륭하다." "나도 내가 훌륭하다 생각해." 엘은 진지하게 말한 다음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그리고 눈을 스치는 불빛을 따라 낯선 도시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렸다. "저기 방이 있어야 할 텐데..." 웃옷을 머리까지 올려 쓴 리오가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려 폭우 속을 달려갔다. 그 뒤를 이어 옷깃을 단단히 여민 리반이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으, 차가워!" 마차 문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 엘은 얼음같이 차디찬 빗물에 손가락을 움츠렸다. 곧 이어 으슬으슬 몸이 떨려 오자 따뜻한 차 한잔이 간절해졌다. "그럼 루드비히, 저부터 들어가겠습니다." 밖으로 뛰어나가려던 엘은 팔을 잡는 손길에 놀라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엘보다 먼저 땅에 내려선 루드비히가 그녀의 머리위로 자신이 걸치고 있던 긴 망토자락을 들어 올렸다. 엘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에 조금 거친 듯 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리 덮었다. 엘은 루드비히의 체온을 느끼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가 루드비히의 가슴에 닿고 두 사람의 다리가 살짝살짝 부딪치자 엘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차양이 드리워진 곳에 이르러 엘이 망토 밖으로 나가려 하자 루드비히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문을 열었다. "두 배! 아니 세 배 지불하겠소! 꼭 방 세 개가 필요하오!"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부부가 난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온 손님들껜 죄송스럽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죠. 그 손님들껜 창고라도 내어 드려야겠습니다. 이런 폭우에 갑자기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곳에 가도 이미 방이란 방은 죄다 찼을 테니까요." 말을 마치고 네 사람을 둘러보던 중년남자가 망토에 감싸인 엘을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중년남자의 시선을 좇아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리오가 입술을 실룩이며 눈을 부릅떴다. 당황한 엘은 바르작거리며 어깨를 감싼 팔을 치우려 했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팔에 힘을 가해 그녀를 바짝 당기자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루드비히!" 얼굴이 시뻘게진 엘이 다급히 속삭였지만 루드비히는 평소와 똑같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은회색 눈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내하십시오." 조용하고 정중한 말에서 강압적인 명령을 느낀 주인남자가 눈을 끔벅이며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그리고 얼음조각처럼 싸늘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흠칫해 허겁지겁 시선을 피했다. "저,절 따라 오십시오." 남자는 떨리는 어조로 말한 다음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온몸을 꽁꽁 옭아매는 듯한 은회색 눈동자에서 벗어난 후에야 그는 자신의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바로 감시자의 발목에 꽂혀 있던 단검입니다, 성하." 루드비히는 천천히 단검을 받아 들었다.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단검으로 오인되기 쉬웠지만 견고한 자루와 단단하고 예리한 칼날로 미루어 최고의 야장이 수도 없는 담금질을 거쳐 정성껏 만들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루드비히는 손가락으로 살짝 휘어진 칼날 끝부분을 쓸며 입을 열었다. "마무리는 깨끗이 한 거냐?" "예.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하. 감시자를 치우기 전 노게일스 대사제에게 시체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마음대로 대사제를 처리할 수도 없어 지금까지 그저 동정을 살피는 정도로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가 조심스럽게 루드비히의 표정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흐르는 불빛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상관없다. 떠들어봐야 믿어 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예, 성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노게일스 대사제가 말을 옮긴 사람은 필리프 대사제 뿐인데, 그는 노게일스 대사제가 그라우스의 시체를 발견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헛것을 본 거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습니다." "그라우스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어떠냐?" "성전 안에서 사제가 살해된 건 처음있는 일이라 그런지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대사제들까지 동요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그리던 그림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으니 더욱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 슬쩍 비웃음이 어렸다. "그래, 보지 않아도 그 한심한 꼴들이 눈에 선하다." "저... 성하..." 루드비히의 시선을 피하는 남자의 얼굴엔 어두운 자책이 드러나 있었다. "그라우스 사제와 감시자를 죽인 자가 누군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감히 누가 아시리움 성전에 피를 뿌린 건지... 이 정도의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라면 필시 보통사람은 아닐 게 분명합니다. 법황 성하, 이번 일은 제가 반드시, 감시자의 이름을 걸고 기필코 밝혀 내 응분의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아니다, 이번 일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라." 남자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졌다. 폭우가 내리는 창 밖을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빛 번개가 어둠을 꿰뚫자 찰나적으로 그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필요하면 내가 다시 명령을 내리겠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루드비히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렸다. "성언을 받들겠습니다, 법황 성하." 남자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려고 했을 때 서늘한 조소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를 스쳐 갔다.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제 37장. 검은 폭우------------------------------------------------------------------- "어디 가는 거야?"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리오가 눈을 뜨더니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리오에게 등을 보인 채 문 앞에 서 있던 리반이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곳에서 음식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 보려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나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리반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굳어있었지만 리오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만약 음식이 안 된다면 수고스럽겠지만 밖에 나가서 먹을 만한 거로 좀 사와. 넉넉히." "그래, 알았어." 이미 문을 열고 있던 리반은 재빨리 대답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불구덩이를 향해 가는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며 한발 한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내가 정말 잘하는 걸까?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알렉스를 내 손으로... 바로 이 손으로 넘길 수 있을까? 바르르 떨리는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아시리움은 알렉스를 살려 두지 않을 거야. 알렉스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될 거야.... 날 원망하면서.... 리반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층 뻣뻣해진 동작으로 휘청거리며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어쩔 수 없어.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번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리오가 날 죽인다 해도 난 이럴 수 밖에 없어. 이것만이 리오는 물론 부모님과 모든 형제들, 그리고 체르몬 국을 살리는 길이야. 그가 할 일은 매우 간단했다. 이미 리반은 이 곳 램에 아시리움 신전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아무 마차나 집어 타고 아시리움 신전으로 가서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걸로 그가 할 일은 끝이었다. 정말 손쉬운 일이었다. 알렉스를, 그의 친구를 죽음으로 몬다는 숨막히는 죄책감만 생기지 않는다면. 리반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곧 쓰디쓴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이 지켜야 될 사람들을 떠올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마침내 너무나 짧게 느껴지는 복도가 끝나고 계단이 나타났다. "글쎄 내 눈이 틀림없다니까! 분명히 망토자락 속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봤다니까요!" 잔뜩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리반은 뒤로 물러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쉿! 조용조용 말해!" 남자가 재빨리 주의를 주며 날카로운 눈으로 계단을 살폈다. "당신 정말 분명히 본 거지? 틀림없지?" "그렇다니까!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는 거예요? 보라색 눈동자에 검은 색 머리카락!" 여자가 숨가쁘게 속삭였다. "보라색 눈은 나도 분명히 봤어." "그것말고 또 있어요. 빨간 머리 쌍둥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나서 사람들을... 아니, 아니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지. 상금을 뺏기면 큰일이니까. 병사들을 부르는 것도 불안하고. 그래, 아시리움! 아시리움 신전에 알리면 되겠어."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어서 서둘러요, 어서! 난 그 동안 감시를 하고 있을 테니. 이럴 줄 알았으면 삼층 방을 주는 건데 그랬어요. 도망치지 못하게." "할 수 없지. 저기 내 외투나 좀 집어 줘. 금세 올 테니 감시 잘하고 있어."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라고요." 리반은 여자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빠르게 되돌아갔다. "젠장!" 숨죽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젠장! 젠장!" 리반은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방문을 열어 젖혔다. "빨리 일어나! 한시바삐 여기서 도망쳐야 해." 침대에 낮아 짐을 뒤적이던 엘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곧 널 잡으러 아시리움 신전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야. 길게 설명해 줄 시간없어. 빨리 짐 챙겨. 아, 그 전에 사제님한테도 알리고. 난 리오한테 말할 테니까. 준비되면 그 즉시 우리 방으로 와." "아,알았어." 리반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긴박함에 엘은 서둘러 짐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헐레벌떡 옆 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루드비히!" 숨가쁘게 외쳤지만 방은 텅 비어있었다.엘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있다 루드비히가 이미 리오와 리반에게 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빨리 들어와." 그녀를 본 리반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어떡하지? 루드비히가 없어! 난 이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하는 수 없어. 우리만이라도 여기서 나가는 수 밖에." "하지만..." "정신 차려! 아시리움에 붙잡혀 죽고 싶지 않으면!" 날카롭게 소리친 리반이 뻑뻑한 창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너부터 나가, 알렉스. 차양은 절대 건드리면 안돼. 지금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 빗소리도 우릴 숨겨 주지 못할 거야." 엘은 짐을 등에 단단히 고정한 다음 창문 밖으로 길게 다리를 내려 조심스럽게 발끝을 더듬었다. 좁긴 하지만 몸무게를 지탱해 줄 수 있을 것같이 단단히 박혀 있는 장식 돌이 느껴졌다. 한가지 걱정은 비에 젖은 돌의 표면이 위험할 정도로 미끄럽다는 거였다. "받침돌이 있긴 한데 굉장히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엘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는 리오와 리반에게 주의를 준 다음 창턱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냉기를 품고있는 거친 돌벽에 닿은 가슴과 복부가 단단하게 죄어들었다. 엘은 신경을 집중해 한발한발 신중하게 발을 움직였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시야를 가려 더욱 걸음을 위 태롭게 만들었다. "저쪽으로 돌이 연결되는 것 같은 데." 어느새 그녀와 가까운 곳에 리오가 서 있었다. "응, 나도 봤어." 엘이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려는 순간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휘청하는 그녀를 리오가 재빨리 잡아 주었다. "조심해!" "아,알았어."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이 뒤늦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엘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팔 길이만큼 떨어진 다른 돌로 신중하게 몸을 옮겼다. 차가운 빗방울이 이미 흥건히 젖은 온몸에 쉴새 없이 부딪쳤다. "아무 것도 안보여! 하나도 볼 수가 없어!" 겁에 질린 리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눈으로 보려고 하지말고 발로 더듬으면서 움직여." 리오의 말이 끝나고 리반이 위태로운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곧 이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양이 무너져 내렸다. 살펴보지 않아도 리반이 미끄러져 차양 위로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젠장! 뛰어내려, 엘!" 리오가 그녀의 손을 움켜잡는 순간 두 사람은 펄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 찌그러진 차양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휘청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이,이게 무슨 소리야?" 새된 고함과 함께 여관문이 열리며 주인여자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세 사람을 발견한 여자가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변하더니 엘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 감았다. 머리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에 엘은 고통스런 비명을 터뜨렸다. "이 놈! 어딜 도망가려고!" "이 손 놔! 이거 빨리 놓지 못해!" 리오가 여자의 손목을 잡고 필사적으로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여자가 더욱 악착같이 머리카락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엘의 고통만 심해질 뿐이었다. "이런 제길!" 엘은 버럭 욕설을 뱉어내며 주먹으로 여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머리를 휘감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 즉시 엘은 리오와 리반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저 놈! 저 놈들 잡아라! 검은 머리! 보라색 눈! 바로 저 놈입니다! 그 흉악한 죄인이 바로 저기 있어요! 바로 저 놈이라고요!" 물 웅덩이에 주저앉은 여자가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곧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나왔다. "뭐? 그 놈이 나타났다고?" "어디? 어디야?" "어, 바로 저기다!" 그들을 뒤쫓는 요란한 발소리가 대기를 가득 채운 폭우 속을 맹렬히 파고들었다. "젠장! 이제 어떡하지?" 빗줄기를 뚫고 리오의 외침이 들려 왔다.엘은 목이 터져라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세 사람 중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차디찬 어둠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내일 날이 밝는 순간 출발할 테니 오늘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라. 폭우 때문에 많은 상점이 문을 닫았지만 필요한 식량과 물품도 그럭저럭 갖춰졌다. 그러니 이제 식수만 넉넉히 준비하면 될 거다." 말을 마친 사일러스가 커다란 고기조각을 베어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한층 격렬해진 폭우가 울부짖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간헐적으로 터지는 은빛 섬광으로 식당 안을 밝혔다. "지금 상태로 봐 선 아침이 돼도 날씨가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폭우가 그치질 않는지..." 걱정스러운 눈을 지저분한 창으로 돌린 제러드는 먼지에 가려 밖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혀를 차며 고개를 바로잡았다. "폭우가 계속된다해도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렇겠죠. 데클란 평원이 동네 시장도 아니고... 데클란에서 작은 여자아이를 찾아야 한다니... 차라리 강 바닥에서 동전하나 찾는 게 빠를 겁니다." 카셀이 시무룩하게 푸념조로 말하자 기사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사일러스가 주먹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려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소스라치게 놀라 흠칫한 기사들의 시선이 사일러스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사나운 눈초리에 기가 질려 허겁지겁 시선을 피해야했다. "한심하게 징징거리는 꼴이라니! 너희들이 그러고도 바르테즈의 기사라 할 수 있느냐? 켈름 기사단 단원이란 이름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다섯 살 먹은 코흘리개 어린애도 너희들보다는 용감할 것이다! 너희같은 비겁한 녀석들은 내 쪽에서 사양하겠다! 내일 당장 바르테즈로 돌아가라!" 격렬히 화를 폭발시킨 사일러스가 무언가를 짓밟고 싶다는 듯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남은 기사들은 고개를 깊숙이 꺾고 있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쓰라린 자괴감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저 으스러져라 움켜 쥔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을 뿐이다. 얼어붙은 시간이 무겁게 흘렀다. 단단히 굳어있던 그들을 움직이게 한 건 밖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였다. "그 놈이 나타났소! 그 중죄인이 바로 저기 있소!" 퍼뜩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본 기사들은 다음 순간 의자를 박차고 문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앞다투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저쪽입니다!" 버럭 소리친 에지몬트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가자 다른 기사들도 전속력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에지몬트는 앞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제쳤다. 어둠과 폭우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에 이어 은빛 번개가 작렬했다. 그 짧은 순간 저 멀리 앞 서 있는 세 사람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났다. 에지몬트는 눈을 질끈 감아 안으로 흘러드는 빗물을 재빨리 털어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부릅떴을 땐 어둠이 이미 그들의 모습을 가린 뒤였다. 에지몬트는 자신이 지금 좇고 있는 사람이 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한가닥 희망을 갖고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에지몬트!" 사일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흘긋 옆을 바라보니 그와 서너 명을 사이에 두고 달리고 있는 사일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에지몬트! 빨리!" 사일러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급박함이 느껴지자 에지몬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저 그림자가 바로 그들이 찾는 소녀라는 걸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터질듯한 심장박동이 빗소리를 뚫고 머리를 울렸다. 엘은 격하게 헐떡이며 입술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두려움과 퍼붓는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앞에도 있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어!" 리반이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다. 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처음엔 대여섯 명이었던 추격자는 어느새 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 있었다.희망이 없었다. 이제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나야! 나만 잡히면 더 이상 쫓지 않을 거야!" 속도를 점점 줄이던 엘은 말을 끝내며 완전히 멈춰 섰다.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빨리 움직여! 빨리 움직이라고!"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리오가 막무가내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다친단 말이야! 난 그 꼴은 절대 볼 수 없어!" 엘이 비명을 토해내듯 소리쳤다. 그러자 리오가 고래고래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 네가 잡히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널 두고 도망을 가라고? 차라리 나한테 죽으라고 해!" 리오의 손가락이 손목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 맹렬히 조여 들었다. "알렉스!" 리반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일렁이고 있었다. 엘은 리반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막 교차점이 희미하게 보였을 때였다. 뒤쪽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더니 곧 이어 축축한 어둠을 뚫고 눈에 익은 마차가 튀어나왔다. 그들 앞에서 마차가 급히 멈춰 섰을 때, 문이 열리며 따뜻한 불빛과 함께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타십시오." "루드비히!" 엘은 탄성처럼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그리고 리반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르려다 한순간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췄다. "왜 그래?" 뒤에서 리오가 다급히 물었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아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등을 떠미는 리오의 손이 느껴지자 엘은 재빨리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리오가 채 앉기도 전에 마차가 맹렬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마차 문에 머리를 부딪친 리오가 괴로운 신음을 터뜨렸다. 그는 엘과 리반의 도움을 받아 겨우 자리에 앉은 다음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엘은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강한 안도감을 느끼며 거친 숨을 골랐다. 밖에선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고함이 요란하게 들려 왔지만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 앞에 앉아 있는 루드비히의 존재가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다. "고마워요,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없었다면.... 정말, 정말 고마워요." 엘은 떨리는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은회색 눈동자가 음울하게 반짝였다. 루드비히는 엘이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에지몬트는 엘이 막 마차에 오르려 하는 순간 목이 터져라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폭우와 사람들의 고함 때문에 그의 외침을 못 들었는지 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번 메릴랭에서 엘을 놓쳤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자 에지몬트는 이를 악물었다.아니야! 이번엔 달라! 두 번이나 코 앞에서 놓칠 수는 없어! 미친 듯이 돌진한 에지몬트는 마차 옆을 나란히 달렸다. 잘만 한다면 마부석 아래부분에 달린 발판에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를 노리던 그는 교차로를 돌며 마차의 속도가 조금 줄어든 틈을 놓치지 않고 펄쩍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리며 마치 불꽃이 지나간 듯 얼굴과 목이 화끈거렸다. 낚아채려던 발판이 손끝을 스치고 제어력을 잃은 에지몬트가 허공에 붕 떴을 때, 강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의 눈 속을 파고 들었다. 에지몬트는 거칠게 부딪치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진흙이 그의 코와 입으로 밀려들어 숨통을 막아 버렸다. 에지몬트는 가슴이 죄어드는 통증에 몸을 뒤틀며 고통스런 기침을 토해냈다. 미칠 듯한 패배감과 안타까움에 목이 터져라 악을 쓰고 싶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약하디 약한 신음뿐이었다. "제,젠장!" 옆구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며 달려온 사일러스가 욕설을 내뱉더니 에지몬트 옆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이미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던 에지몬트는 사일러스의 헐떡임을 들으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형님.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날이 밝길 기다리다간 영원히 이런 꼴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였다. 헐레벌떡 뛰어온 기사들이 하나 둘 두 사람 주위에 멈춰 섰다. 에지몬트는 그들을 휙 둘러본 다음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자신을 위해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린 바르테즈의 기사이자 켈름기사단의 당당한 일원이니까요." 묘한 감동과 일체감, 그리고 벅찬 자긍심을 느낀 기사들이 구부러졌던 등을 세우고 어깨를 폈다. 사일러스는 에지몬트의 손을 힘껏 움켜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엔 동생에 대한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서 움직여라. 부지런히 말을 달리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씩씩하게 소리친 기사들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에지몬트, 넌 우선 그 상처부터 치료받는 게 좋겠다. 데클란 평원에서 치료사를 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사일러스는 말을 멈추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아깝게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에도 넌 엘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그건 네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다. 잘 했다, 에지몬트. 난 네가 정말..." 사일러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에지몬트가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다. "으아악! 이런 젠장! 젠장!" 사일러스는 에지몬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던 손으로 그의 몸을 휙 돌려 세웠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에지몬트! 무슨 일이냐? 어디 부상이라도 입은 거냐?" "형님!" 에지몬트가 절망 어린 눈으로 사일러스를 바라봤다. 미칠 듯한 걱정에 사일러스의 입술이 바싹 타 들어갔다. "그래, 어서 말해 봐라!" "제 얼굴이요, 제 얼굴말입니다, 형님! 얼굴부터 목까지 줄이 그어졌습니다! 흉터가 남을 게 분명한데.... 젠장! 하필이면, 하필이면 얼굴을! 감히 내 얼굴에 채찍을 휘두르다니! 그 마부 놈을 잡기만 하면!" 사일러스는 이를 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맥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형님! 분명히 흉터가 남겠지요?" 간절한 에지몬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사일러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흉터가 남지 않게 하는 방법 없을까요? 뭐 아는 것 좀 없어요? 예?" 뒤꽁무니에 따라붙은 에지몬트가 손가락으로 등을 꾹꾹 찔러 왔지만 이번에도 사일러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형님! 흉터를 없애 주는 치료사나 탁월한 약이 있다는 말은요? 그런 말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사일러스는 그저 묵묵이 걸음을 옮기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을 꼭 쥔 채 넓적다리에 단단히 고정시키면 그만이었다. "여자들이 날 보면 뭐라고 할까요?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죠?" "도망가라, 에지몬트." 사일러스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에지몬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형님, 지금 무슨 말을..." "내 주먹에 얼굴이 뭉개지고 싶지 않으면 빨리 도망가란 말이다!" 에지몬트는 사일러스의 고함이 끝나기 전에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아,아니에요. 괘...괜찮습니다." 엘은 부들부들 떨리는 어조로 겨우 말한 다음 루드비히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참! 고집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 자, 봐! 내 쪽까지 이렇게 물이 스며들었잖아! 번개 맞은 강아지마냥 바들바들 떨고 제대로 말도 못하면서!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야?" 리오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엘을 노려봤다. "그래, 알렉스 빨리 갈아입어. 우리도 갈아입었잖아. 마른 옷을 입으니까 얼마나 따뜻한지 몰라."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살피던 리반까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괜찮대도!" 엘의 말과는 달리 다음 순간 터져 나온 요란한 재채기가 전혀 괜찮지 않음을 그대로 드러났다. 다시 한 번 격렬한 진저리가 몸을 훑어 내리더니 곧 이어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너 빨리 안 갈아입을래? 자꾸 고집 피우면 내 손으로 갈아입힌다!" 리오가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적으로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알았어!" 뼛속까지 스며든 냉기가 마침내 엘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절대 보면 안 돼!" 정신이 산란할 만큼 심하게 떨면서도 엘은 경고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네 발가락도 안 볼 테니까 걱정하지마!" 어이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던 리오가 퉁명스럽게 맞받아 쳤다. 엘은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없이 주섬주섬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 신이 가진 옷 중 가장 두툼한 것으로 바지 하나와 윗도리 두 개를 고른 다음, 잠시 망설이다 각각 하나씩을 더 꺼냈다. 그리고 겉옷의 첫 번째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엘은 고개를 돌리고 있는 리오를 향해 경계심어린 시선을 던졌다. "리오, 절대 보면 안 돼." "알았대도! 너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그런 거나 몰래 훔쳐볼 정도로 한심한 줄 알아?"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로 펄쩍 뛰는 리오를 보자 엘은 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리반, 만약 리오가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는 것 같으면 나한테 꼭 말해줘. 눈꺼풀이 얼굴의 반을 덮을 때까지 주먹으로 때려 줄 테니까." "쳇! 치사하고 기분 나빠서 보라고 사정해도 안 볼 거다! 그리고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 리오가 슬쩍 엘에게 눈을 흘겼다. "어,어! 거 봐! 너 지금 이쪽 본 거 맞지?" 엘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리오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왜 나한테만 이래? 이 안에 나만 있는 거 아니잖아. 또 나만 눈 달린 것도 아니고." "당연히 너한테만 그럴 수 밖에. 리반이 날 보겠어? 절대 아니지. 또 루드비히가 날 볼 것 같아? 역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 자신있게 말한 엘은 무거운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무심코 루드비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힌 순간 엘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짓궂음과 왠지 모를 은밀함을 담은 루드비히의 시선이 가느다란 목 앞으로 흘러내린 윤기 나는 까만 머리카락을 따라 가슴 부근까지 내려갔다. 반 정도 말라 곱슬곱슬 말려 있는 머리끝을 바라보던 그가 반응을 살피듯 엘의 보라색 눈으로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어색하게 씩 웃자 루드비히가 답례하듯 입 꼬리를 살짝 치켜 올렸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어렴풋이 흥겨움이 감돌았다. 맨살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엘은 조금씩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루드비히를 향해 고개를 돌리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신호를 눈치채고도 남았을 루드비히는 얄밉게도 되묻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엘이 눈앞에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자 루드비히가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엘은 루드비히에게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서둘러 단추를 풀어 내렸다. 이제 그녀의 경계심은 리오가 아닌 루드비히에게 쏠려 있었다. 엘은 윗도리를 갈아입고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바지를 끙끙대며 벗을 때야 비로소 루드비히가 그녀를 남자로 알고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러자 루드비히 입장이라면 충분히 좀 전 같은 행동이 나오고도 남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바지 단추를 모두 잠근 엘이 크게 헛기침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난을 떨어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엘은 쑥스러운 마음에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러자 리오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얼굴로 흘러내린 젖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뒤로 넘겨주었다. "이 옷들은 뭐야?" 엘의 무릎에 놓인 옷가지를 본 리오가 팔을 뻗어 윗도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위에 덧입으려고.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한기가 가시지 않아." 리오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투실투실하게 옷을 껴입는 엘을 쳐다보다 슬쩍 비꼬듯이 말했다. "젖은 옷을 기어코 입고 계시겠다던 용감한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엘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리오를 노려보다 피식 웃었다. "난 추운 건 정말 질색이란 말이야." "아시리움에서 왜 널 쫓는 거야?"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떨던 엘은 리반의 물음이 끝나는 순간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수많은 질문들이 허공에 매달려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폭우가 차분한 비로 잦아들었는지 멀리서 간간이 들리는 천둥소리와 마차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만이 고요 속을 조용히 울렸다. "전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묻지 않았어. 그런데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어. 너도 아니라는 말은 못할 거야." 침묵을 깨며 리반이 음울하게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엘은 깊숙이 파고드는 리반의 시선을 피하며 싸늘한 손을 맞잡았다. "전에 네가... 너에 대해 말했을 때 난 바보같이 장난이라고만 생각했어. 복도에서 너와 리오가 하는 말을 들은 후에야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지. 솔직히 말해 난 아직도 네 말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그만 해!" 리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리오, 넌 가만히 있어. 난 꼭 들어야겠으니까. 알렉스, 내가 궁금한 건..." "난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어!" 리오가 더욱 험악해진 눈으로 리반을 노려보자 엘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 리오. 리반 말이 다 맞아. 난 괜찮으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 봐, 리반.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하겠다고 약속할 순 없지만..." 엘은 리반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 "사실 아시리움이 널 쫓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 내가 궁금한 건 그것말고 다른 이유가 또 있느냐는 거야." "다른 이유가 있긴 한데... 아시리움에서 그걸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엘은 조용히 말하며 무의식 중에 물건이 들어있는 짐을 자신 옆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는 거야?" 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반이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거야? 대체 누가 시킨 거야? 너 혼자, 네 스스로 그런 일을 했을 리 없어. 누구야? 누가 뭘 노리고 너한테 그런 일을 시킨 거야?"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엘은 그저 입술을 질끈 물고 고개를 가로저을 수 밖에 없었다. "말 좀 해 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아시리움을 속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짜..." "리반!" 허겁지겁 리반의 말을 끊은 엘은 근심 어린 눈을 루드비히에게 돌렸다. "어차피 사제님도 다 알고 계실 거야. 일이 이 정도까지 커졌다면 아시리움 종단 전체에 네 얘기가 퍼졌을 테니까. 만약 모르셨다면 아까 우릴 구하지도 못하셨을 거야." "나도 알아! 나도!" 안타깝게 소리친 엘은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해도... 루드비히한테는 내가 직접... 내가 직접 말하고 싶어." 리반이 지친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렉스." "저... 루드비히, 마차 좀 잠깐 세울 수 있을까요?"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첸." 그러자 놀랍게도 마부석에서 그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차가 완전히 정지하자 엘은 등을 떼밀린 사람처럼 서둘러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섬세한 빗방울이 채 마르지 않은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폭우의 기운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올 것처럼 짙은 암청색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주위를 무겁게 유영하고 있었다. 엘은 축축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어둠 속을 걸었다. 뒤에서 들리는 조용한 발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엘은 걸음을 멈추고 어두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짙은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을 발하는 별을 응시하며 괴로운 고백을 시작했다. "제 진짜 이름은 엘이에요. 알렉스가 아니에요. 전 세렌국 왕자도 아니고 왕족은 더더욱 아니에요. 아시리움 종단이 절 잡으려 하는 이유는 아마 제가 가짜왕족 노릇을 해서일 거예요. 그것도 감히 아시리움 성전에서 그랬으니까요. 천민인 주제에 왕족의 가면을 쓰고 감쪽같이 사제님들을 속였으니까요." 단숨에 토해놓은 엘은 몇 번 떨리는 숨을 몰아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해도 전... 아시리움 성전에 들어가 가짜왕자 행세를 할 것 같아요. 정말 한심하고 뻔뻔한 애라 생각하시겠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시겠지만..." 엘은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미안해요, 루드비히.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속이고 싶어 속인 건 아니에요. 루드비히 앞에서 가짜 왕자노릇을 하면서 한 번도 기분 좋았던 적 없어요... 아니, 사실은... 사실은 대부분 기분이 좋았어요. 속이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루드비히가 저한테 너무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줬으니까요."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가며 엘의 얼굴이 아래로 숙여졌다. "제가 왕족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조금씩 목이 아파 오더니 어느새 침을 삼키기도 숨을 쉬기도 버거워졌다. 뒤에선 아무 소리도, 심지어 작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은 차라리 루드비히가 없기를 바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엘은 어둡게 반짝이는 루드비히의 눈을 들여다봤다.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루드비히,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아무 말이라도... 욕을 해도 좋고... 기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요." 루드비히의 팔이 움직이자 엘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살갗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속눈썹을 스친 손가락 끝이 눈물자국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차가운 달빛이 그녀의 젖은 뺨을 타고 미끄러져 살짝 벌려진 입술에 닿았다. 손을 뗀 루드비히가 한숨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를 나지막이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루드비히가 자신을 버리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밀려드는 외로움과 상실감 속에서 망연히 서 있는 것 밖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엘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터지려는 울음을 막았다. 그 때 걸음을 멈춘 루드비히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빨리 오십시오. 갈 길이 멉니다." 엘은 코를 훌쩍이며 목메인 어조로 힘겹게 물었다. "어딜 가는데요?" "데클란 평원으로 갑니다." 말을 마친 루드비히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은 루드비히가 금방이라도 손을 내리고 등을 돌릴 것 같아 허겁지겁 그에게 다가갔다. 엘이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자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마차 앞에 설 때까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쓸모없는 것들! 한심한 밥버러지들! 모두 꺼져라! 여기서 썩 꺼지란 말이다!" 자일스는 쟁반에 받쳐진 물잔을 집어 허겁지겁 밖으로 나가고 있는 시종들에게 던졌다. "어,어이쿠!" 젊은 시종이 뒷머리를 감싸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또 다시 날아온 쟁반에 어깨를 맞은 그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무릎으로 설설 기어 가까스로 문을 나섰다. "젠장!" 자일스는 문이 닫히는 순간 욕설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섰다. 움켜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물론 몸 전체가 끈적끈적한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참을 수 없는 갈증이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갈증은 물은 물론 수십 가지의 차와 술을 마셔도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지기만 했다. 혀와 목은 습기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말라 버렸고 바짝 조여 든 가슴에선 숨을 쉴 때마다 금방이라도 산산 조각나 터져 오를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의 몸 속을 가득 채운 이글거리는 화염이 탐욕스럽게 혀를 날름대며 마지막 남은 핏방울까지 모조리 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제발! 제발 누가 나 좀!" 괴로움을 못이긴 자일스가 무릎을 꿇으며 목쉰 절규를 토해냈다. "많이 힘드신가 보군요, 전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마체라타가 자일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체라타! 나 좀 도와줘! 날 좀 어떻게, 어떻게 좀 해 줘! 제발!" "가엾고 또 가여우신 전하! 예,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마체라타가 전하의 괴로움을 깨끗이 사라지게 해드리겠습니다." 입을 다문 마체라타가 유연한 손놀림으로 허공에 간단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녀의 손이 지나간 곳에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둥글게 쥐고 있는 마체라타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 됐습니다." 마체라타가 자일스 앞에 손을 펼쳐 보이자 핏빛을 띤 작은 구슬이 나타났다. "이,이게 뭐냐?" 자일스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치켜들었다. "어서 드십시오, 전하." 그는 망설이며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구슬 가까이에서 머뭇거리기만 할뿐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어서요, 전하!" 마체라타가 매섭게 재촉했다. 결심한 듯 자일스가 구슬을 집어들어 꿀꺽 삼켰다. 그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갔다. "어떻습니까, 전하?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자일스가 마체라타를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정말 고통이 사라졌다. 끔찍하던 갈증까지 완전히 가셨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자일스의 얼굴에 갑자기 짙은 의혹이 나타났다. "네 짓이구나! 그렇지? 네가 나한테 무슨 사악한 저주를 건 게 틀림없어!" 옅은 초록색 눈동자에 사나운 광채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자일스가 두 손으로 마체라타의 목을 와락 휘어감았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요망한 마녀!" "전하의 눈과 팔을 돌려 드렸습니다! 제가 한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목이 졸려 얼굴이 일그러진 상태이면서도 마체라타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이를 갈며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자일스가 마침내 내팽개치듯 손을 풀었다. "어디 소상히 말해봐라." "전하께서도 잘린 팔과 구멍 난 눈이 갑자기 정상으로 회복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란 걸 알고 계시겠지요. 전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으로 전하를 낫게 해드렸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전하의 옥체에 작은 이상이 생긴 겁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이런 일은 앞으로 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될 테니까요." 노기가 말끔히 가신 자일스의 얼굴엔 어느새 걱정스런 기색이 드러나있었다. "그 때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 때마다 네가 낫게 해줄 수 있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전하. 고통이 찾아 든 그 순간 도와 드리지 못한 건 제 크나큰 불찰입니다. 하지만 다음부턴 전하께서 절 필요로 하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있겠습니다."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자일스가 걸음을 옮겨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마체라타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와라." 유혹적인 미소를 지은 마체라타가 자일스에게 바짝 다가와 다리 사이에 서더니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자일스는 반사적으로 근육을 단단히 조였지만 곧 부드러운 허리에 팔을 둘러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전하, 제가 드린 선물이 만족스러우십니까?" 마체라타가 자일스의 오른팔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물론이다, 마체라타." 자일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처음 며칠간 이어졌던 아찔한 기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팔과 눈을 잃어버렸던 과거의 시간들은 꿈같이 아득하기만 했으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젯밤부터 조금 전까지의 고통스런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자신의 상태가 극히 만족스러웠다. 새로 생긴 눈과 팔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게 없었지만 그 기능만큼은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큰 차이가 났다. 아주 멀리 있는 작은 것까지 자세히 보일 만큼 시력이 좋아졌을 뿐 아니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낮과 비슷할 정도로 또렷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오른쪽 팔과 손의 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 힘들이지 않아도 은쟁반을 우그러뜨리고 돌기둥을 부실 수 있었다. 심지어 피부는 철갑을 두르기라도 한 듯 탄탄해져 혹시나하는 마음에 들이대 본 검에도 희미한 상흔조차 생기지 않았다. "마체라타, 원하는 것이 무어냐? 내 모든지 들어주겠다!" 자일스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원하는 것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마체라타가 달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전하의 말씀을 믿고 청을 드리겠습니다. 전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체라타가 놀랄 만큼 직설적으로 말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게 해 달라고? 높은 관직을 내려 달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전하. 전 관직 따위에는 관심없습니다. 제 청은 말 그대로입니다. 같잖은 것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게 해 달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전하와 많이 봐드려 황제폐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말입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일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보기 드문 여자다, 마체라타.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자일스는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 마체라타를 힘있게 안아들었다. -------------------------------------------------------------------제 38장. 구출------------------------------------------------------------------- "당장 중지해야합니다!" 클레르몽 대사제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그럼 그런 중죄인을 곱게 내버려 두자는 말이오? 아시리움의 이름에 우리 스스로 먹칠을 하자는 거요? 그런 되지도 않는 발언을 하다니 혹시 완전히 실성한 건 아니오, 클레르몽?" 그와 앙숙이 된지 오래인 필리프 대사제가 비웃음을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말이면 다 되는 줄 아십니까? 실성이오? 예, 실성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 죄없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말입니다! 상금에 미쳐 버린 사람들이 심지어는 코흘리개 어린애까지 닥치는 대로 잡고 있단 말입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클레르몽 대사제가 세차게 탁자를 내려쳤다. "진정하시오, 클레르몽 대사제. 지금 그 문제를 의논하려고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 아니오?" 의장격인 에르난드 대사제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 듯 씨근덕거리던 클레르몽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으로 너무 감정적인 말씀은 서로간에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흥분해 실례를 범했습니다." 클레르몽이 먼저 머리를 숙이자 필리프도 마지못하나마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말이 지나쳤소." "자, 그럼 안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에르난드 대사제가 주위를 환기시키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니제르 대사제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전 두 분 대사제께서 하신 말씀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을 놓쳐서도 안되고, 또한 그로 인해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걸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어찌 하자는 겁니까, 니제르 대사제?" 마음을 진정시킨 클레르몽이 진지하게 물었다. "글쎄요... 그라우스 사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죄인의 모습이야 다른 화가에게 그리게 하면 되는 거 아니오? 그림을 옮길 마법사들도 아직 성전에 남아있는데 뭐가 걱정인 게요?" 필리프가 별거 아니라는 듯 거만하게 말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라우스 사제만큼 정확하게 죄인의 얼굴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찾기 불가능할 겁니다. 대체 어느 누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모습을 말만 듣고 똑같이 그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한숨을 푹 내쉰 노게일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공한 정보를 모조리 무시한 채, 오직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사냥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말입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검거령을 내리고 돈을 걸되 너무 높은 금액을 제시하여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만 큐어란 돈을 탐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노게일스 대사제는 얼마를 걸었어야 한다는 거요? 천 큐어? 아니면 백 큐어? 혹시 일 큐어를 걸어야했다고 주장하는 거 아니오? 아시리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금액이 과연 얼마인 거요? 차라리 빵 부스러기를 준다 하지 그러오." 필리프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끝내자 모욕감을 이기지 못한 노게일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의장으로서 말하겠소, 필리프 대사제. 앞으로 한마디라도 더 입 밖에 낸다면 그 즉시 회의실에서 나가야 할거요." 근엄한 얼굴로 필리프를 바라보고 있던 에르난드가 말했다. "뭐라고? 감히 날 회의실에서 쫓아내겠다고?" 필리프가 노기를 드러나며 버럭 소리쳤다. "그렇소, 필리프 대사제! 당장 이 곳에서 나가시오!" "그래, 잘 알았소. 나 역시 멍청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긴 싫소." 의자에서 일어난 필리프는 대사제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꼭 이 모욕을 천배, 만배로 돌려주리라 맹세했다. 특히 내 권위에 사사건건 도전하는 클레르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짓밟아 주고 말리라. 필리프가 문을 세차게 닫고 밖으로 나가자 다른 대사제들이 일제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 한시가 급합니다. 빨리 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좋은 의견 있으신 분은 어서 말씀하십시오." 에르난드가 초조함을 드러내며 재촉했다. "이제 와서 검거령을 취소할 수도 없고 상금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모두 아시리움의 이름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될 테니까요." "저 역시 니제르 대사제 말씀과 같은 생각입니다. 우선 시급한건 무고한 사람을 해친 이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중한 벌로 다스리겠다는 걸 공고하는 일입니다." 노게일스의 말에 니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그것과 병행해 최대한 빨리 죄인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똑같을 순 없겠지만 비슷한 그림이라도 있다면 일의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사제들은 구체적인 방법을 더 의논한 다음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죄인이 거짓왕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근처 마을에 들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드비히의 말에 리반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데클란 평원에 아무 준비없이 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데클란 평원이 어떤 곳인데 그래?" 리오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리반을 바라봤다. "나도 몰라. 그저 굉장히 광활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 정도 밖에는. 몇날 며칠을 걸어도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볼 수 없는 곳이라 하더라." 리오와 엘는 진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는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얼마나 황폐한 곳이기에 그럴까 하는 생각에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루드비히, 데클란 평원이란 델 꼭 가야하는 건가요?" 루드비히가 창 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엘에게 돌렸다. "예." 그의 짧고 단호한 말에 엘과 리오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마주봤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리오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향해 싱겁게 씩 웃었다. 엘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마주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 마을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을 때 마차가 속도를 늦추더니 오래지 않아 완전히 멈춰 섰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팔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마을엔 저와 첸이 다녀오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다 아무 말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럼, 수고 좀 해주십시오, 사제님." 가장 나중에 내린 리반이 정중히 말했다. 엘은 그가 마차 문을 닫으려 할 때, 재빨리 손을 내밀어 문을 잡았다. "저... 루드비히 몸조심하시고 빨리 돌아오십시오." 엘은 루드비히의 어깨 부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어색하게 말했다. 지난밤 일이 떠오르자 쑥스러운 마음에 차마 루드비히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웃음기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루드비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저도 가야겠습니다!" 크게 소리친 리오가 갑자기 마차에 훌쩍 뛰어올랐다. 어안이 벙벙해진 엘과 리반이 멍하니 마차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창문 밖으로 리오의 것일 게 분명한 팔뚝이 불쑥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쥔 팔뚝이 장난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 녀석, 정말 엉뚱하다니까." 엘은 리반의 말투에서 리오에 대한 진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젯밤의 폭우로 인해 부옇게 흐려진 시내가 그들이 서 있는 구릉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그 옆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으로 풀이 드문드문 나있는 들판이 보였다. "저기가 데클란 평원이 있는 쪽이야?" 엘은 다가갈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황량해 보이는 들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이 아래쪽은 나무도 많고 풀도 무성한데..." 엘은 자신들이 가야할 방향이 반대쪽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기 좀 앉자." 리반이 조용히 말하며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그늘을 피해 햇빛이 내리쬐는 폭신한 풀밭에 나란히 앉았다. 엘은 리반이 입을 열길 묵묵이 기다렸다. 머뭇거리는 리반의 모습에서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 저 나무는 어젯밤에 번개라도 맞았나 봐." 불쑥 팔을 치켜든 리반이 시커멓게 탄 채 반으로 꺾여 있는 관목을 가리켰다. "어, 그래, 그런가 보다." 엘은 얼떨결에 맞장구를 친 다음 곁눈으로 리반의 얼굴을 살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맞잡은 손을 쉴 새없이 움직이던 리반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어젯밤부터 어떻게 꺼내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올 줄 몰랐어. 리오한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겠어. 리오가 내 마음을 알고 자릴 피해준 건 아닐 테지만." 말을 끊은 리반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난 말이야... 정말...정말 나쁜 놈이야. 난 널... 아,아시리움에... 넘기려 했어. 어제... 램에서..." 리반이 목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힘겹게 말했다. 한순간 머리가 하얗게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엘은 눈을 꼭 감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잠시 미쳤던 것 같아. 미안해, 알렉스... 정말... 미안해." "그런 말 하지마, 리반. 넌 나한테 미안해 하면 안 돼. 진짜 미안한 사람은 바로... 나니까." "아니야! 정말 미안한 사람은 나야! 왠지 알아?"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리반이 어둡게 가라앉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앞으로 널... 배신하지 않겠다는... 널 아시리움에.... 넘기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 엘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빛깔의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녀는 생명력이 가득한 하늘을 크게 호흡했다. "바보 같으니! 겨우 그 말 할거면서 갖은 분위기를 다 잡은 거야?" 엘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반을 보며 쯧쯧 혀를 차댔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뻐기는 투로 말했다. "너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빠른지 모르는구나? 난 네가 아시리움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땅 끝까지 도망가 있을걸? 다시 말해 난 아시리움이 아니라 아시리움 할아버지가 쫓아온다 해도 전혀 겁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 말씀이야. 이제 알겠어, 이 바보야?" 엘이 거만한 얼굴을 치켜들고 리반을 바라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과장되게 인상을 찌푸린 엘이 눈을 부라리자 그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왜 자꾸 웃는 거야?" "모,몰라... 그냥 웃음이...나와." 엘은 리반을 따라 웃었다. 배속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조금씩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웃던 리반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알렉스." "응?" "나 계속 널 알렉스라 불러도 될까?"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자 리반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서로의 고통을 공유하는 듯한 친밀감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팔 다리를 쭉 뻗으며 크게 기지개를 켜던 엘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리반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이게 무슨 소리지?"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이던 엘이 리반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말발굽 소리! 말발굽 소리가 분명해!" "사제님이 돌아오시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벌써 돌아올 리 없어!" 엘은 다급하게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리반의 팔을 잡고 구릉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구릉 아래 움푹 패인 부분에 낮게 엎드려 소리가 들리는 언덕을 살폈다. 곧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소년 두 명과 말을 타고 그들을 쫓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글쎄, 저 아이들은 형제같이 보이는데...." 엘은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발을 헛딛은 아이가 거칠게 넘어지자 형으로 보이는 소년이 황급히 되돌아와 그를 일으켰다. 하지만 두 소년이 다시 달리려 했을 때는 이미 거대한 말들이 사방을 막아 버린 후였다.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선 남자 한 명이 다짜고짜 큰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그는 뒤로 나가떨어진 소년의 멱살을 움켜잡아 우악스럽게 흔들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요 미꾸라지 같은 놈들! 다시 한 번만 도망치면 네 놈들 머리통을 빠개 버릴 테다! " 목이 졸린 소년이 괴롭게 몸을 버둥거리자 벌벌 떨며 서 있던 작은 아이가 달려들어 남자의 다리를 힘껏 물었다. 괴로운 비명을 지른 남자가 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채 땅바닥에 팽개쳤다. "우라질! 피까지 나잖아!" 남자의 세찬 발길질이 아이의 등에 꽂히려는 순간 소년이 자신의 몸으로 와락 아이를 감쌌다. 엘은 고통에 가득 찬 흐느낌을 들으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섣불리 끼어 들면 안 돼! 어찌 된 일인지 상황을 좀 더 파악해야 된다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리반이 다급히 속삭였다. 엘은 걱정할 필요없다는 뜻으로 리반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분노가 치민 상태긴 하지만 경솔한 행동은 자신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해, 카우." 갈색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남자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요 쥐새끼 때문에 피까지 난단 말이야! 내 이 자식을!" "그만하라고 했지?" 험악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카우란 남자가 찔끔한 얼굴로 아이들을 향해 번쩍 들어 올린 다리를 내렸다. "아,알았어, 쿠르트. 하지만 정말 얼마나 아픈지 몰라. 살점이 뚝 떨어진 것 같단 말이야." "카우, 엄살부리지 말고 애들이나 잘 감시해. 한눈 팔았다가 또 놓치는 날엔 머리통이 빠개지는 너일 테니까! 바콘하고 브릭스는 말들을 저기 냇가에 데려가 목 좀 축이게 해줘. 그리고 브릭스, 넌 내가 마실 물부터 떠와!" 거만한 명령과 군소리없이 그 말을 따르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쿠르트라는 수염 난 남자가 무리의 대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떡하지? 이러다간 들키겠어." 리반이 다급히 속삭였다. 고삐를 양손에 하나씩 나눠진 두 남자가 그들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쉿!" 엘은 재빨리 리반의 머리를 아래로 누르고 몸을 최대한 낮게 웅크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리며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주위에 난 풀과 그늘진 지형이 조금은 몸을 숨겨 줄 테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엘은 남자들이 말을 끌고 가는데 정신이 팔려 그들을 보지 못할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카우 녀석 때문에 이게 뭐야? 애들 감시해야 할 놈이 술 진탕 처마시고 자빠져 자기나 하고! 이러다간 내일 해가 저물 때까지 꼬박 달려도 램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땅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툴툴거리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근데 말이야, 브릭스, 넌 저 애들 중 한 명이 맞긴 맞을 것 같아? 난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저 애들 좀 보라고! 검은 머리긴 하지만 한 놈은 기껏 해야 열 넷, 다른 놈은 열이나 열 한살 정도로 밖에 안보이잖아. 근데 아시리움에서 찾는 놈은 열 일곱인가, 열 여덟인가 된다며?" 엘은 피가 얼어붙는 충격에 숨을 멈췄다가 낮게 헐떡였다. "아니면 어때? 아시리움 신전에서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팔아 버릴 텐데." "하지만 만 큐어라고! 만 큐어! 일만 잘되면 우리 팔자는 그 순간 활짝 펴지게 되는 거란 말이야! 우라질! 다들 만 큐어에 눈깔이 시뻘겋게 뒤집혀서 방방 뛰고 있는데, 우린 이게 뭐야? 우리 꼴을 좀 봐! 매일 고생만 죽도록 하지 막상 푼돈도 손에 쥐어보기 힘들잖아!" 얼굴에 검버섯이 심하게 핀 남자가 고삐 쥔 주먹을 격렬히 흔들며 소리쳤다. "조심해! 그러다 말이 놀라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쿠르트가 저 성질에 가만있을 것 같아? 아마 네 몸의 뼈란 뼈는 모조리 으스러뜨려 버릴걸?" 남자들이 엘과 리반에게서 열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 냇가로 내려갔다. 웬만큼 거리가 떨어졌다고 판단됐을 때 엘은 리반에게 움직이자는 신호를 보냈다. 이대로 있다 간 되돌아온 남자들에게 들키게 될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최대한 자세를 낮춘 상태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잎이 거의 붙어 있지 않은 거대한 고목 뒤에 몸을 숨겼다. "리반, 어떻게 하지?" 엘은 잔뜩 옹송그리고 앉아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소년들을 훔쳐보며 물었다. "말에게 물만 먹이고 금세 떠날 것 같은 데? 우린 그냥 여기 숨어 있으면 되는 거잖아." 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리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저 애들을 구하자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어떻게 모르는 척 할 수 있겠어? 리반, 너도 아까 남자들이 말하는 거 들었잖아. 아시리움에서 아니라고 해도 팔아 버린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 "이번 일은 네 책임이 아니라 돈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탐욕스런 인간들 탓이야. 그리고 나도 너처럼 저 애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저 사람들을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반박하려던 엘은 힘없이 입술을 닫았다. 몇 번 검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있을 뿐 검술하고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리반과 갖고 있는 무기라곤 단도와 낡고 녹까지 슨 검이 전부인 그녀가 남자 다섯 명을 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겁하게 숨어서 그녀와 머리색이 같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나뿐만 아니라 리반까지 위험해지게 될 거야. 무슨 좋은 방법없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하나도 없는 걸까? 엘은 거친 나무줄기에 이마를 맞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왜 이렇게 무기력한 거지? 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지? 아몬이 있었다면, 아몬이라면 마법으로 저들을 구할 수 있을 텐데... 마법의 힘으로... "그래, 그거야!" 엘은 눈을 번쩍 뜨며 숨가쁘게 속삭였다. "무슨 좋은 수라도 생각났어?" 리반이 바짝 다가들었다.엘은 대답대신 안주머니에서 둥근 통을 꺼내 보였다. "어? 그건..." "그래, 타미가 준 마법가루야!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어!" 흥분이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가 강렬하게 반짝였다. "몸을 안 보이게 해서 저 애들을 구하겠다는 거야?" 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반이 걱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렉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우리만 몸을 감춘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진 않아. 우리가 구해야 되는 애들은 눈에 빤히 보일 텐데... 저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우선 이 가루부터 시험해 보자. 양만 넉넉하면 저 애들까지 쓸 수 있을 거야. 그럼 일도 한결 쉬워질 테고. 그리고 가루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해 봐야지. 아이들을 구할 방법이 있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엘은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손바닥에 가루를 반 정도 쏟은 다음 리반과 자신의 머리 위로 힘차게 뿌렸다. 은백색의 고운 가루가 반짝이며 그들이 몸으로 내려앉더니 곧 몸 전제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세상에! 리반 거기 있는 거지?" "어,어어..." 꽤나 놀랐는지 리반이 어눌하게 대답했다. "아직 가루가 반 정도 남았어. 얼마나 효과가 지속될지 모르니까 빨리 움직이자. 리반, 손 좀 내밀어 봐." 엘은 리반이 있음 직한 허공을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았다. 두 사람은 용기를 내려는 듯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서둘러야겠어." 리반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말에게 충분히 물을 먹인 남자들이 이미 구릉 위로 올라와 있었다. "자, 빨리빨리 움직여! 갈 길이 멀다고!" 크게 소리친 쿠르트라는 남자가 말에 올라타기 위해 안장을 잡고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 때 갑자기 말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거친 울음을 터뜨리며 마을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말들도 맹렬히 그 뒤를 따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잡아! 빨리!"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넘어진 쿠르트가 벌떡 일어나 악을 써댔다. 엘과 리반은 남자들이 일제히 말을 쫓기 시작했을 때, 재빨리 소년들에게 뛰어갔다. "카우! 너까지 오면 어떡해? 빨리 돌아가! 애들이나 지키란 말이야!" 엘은 언덕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고함을 들으며 마법가루를 뿌렸다. 빛나는 가루가 자신들의 몸을 감싸자 놀란 소년들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놀라지마! 너희를 도우려는 거야!" 엘은 가루를 피해 몸을 뒤틀며 뒤로 물러서는 소년들에게 숨가쁘게 속삭였다. 그리고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한 소년의 팔을 움켜잡았다. "리반!" "그래, 작은 아이는 내가 잡고 있어." "저기 우리가 숨어 있던 나무 뒤로 가자." 엘이 막 걸음을 떼는 순간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없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디로 간 거야?" 소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손을 통해 전해졌다. 엘은 안심하란 뜻으로 손에 지긋이 힘을 가했다. 소년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비틀거리면서도 자신들을 도우려는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이끄는 손길을 순순히 따랐다. "이 쥐새끼같은 놈들이 대체 어디 숨은 거야?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 카우라는 남자가 미친 듯이 주위를 뛰어다니며 소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나무 뒤에 바싹 붙어 섰다.나무 옆에 멈춰 선 남자가 거칠게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근처엔 없는 게 분명해! 대체 쿠르트한테 뭐라고 말하지? 우라질! 내 이것들을 잡기만 하면 대갈통을 부숴 버리고 말겠어!" 부드득 이가는 소리를 남기고 남자가 터덜터덜 마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엘은 그의 모습이 언덕 아래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겠지?" 질문을 던지는 리반의 어조에도 짙은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돌아올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 좀 멀리 갔을 테니까 돌아온다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그런데 어떻게 말이 한꺼번에 도망을 갈 수 있었던 걸까?" 비록 보이진 않겠지만 엘은 씩 웃고 나서 농담조로 말했다. "글쎄... 우리를 가상히 여긴 말이 알아서 도와준 거 아닐까?" 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방귀를 뀌는 소리에 슬쩍 웃음을 지었다. 사실 엘도 말들이 그녀의 뜻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잘 따라 주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슈바니츠 감옥에서 있었던 칼라카와의 교감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엘은 그녀의 두 주먹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동물과는 교감을 시도해 본적이 없었다. 때문에 비록 급박한 상황에 쫓겨 일을 벌이긴 했지만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이 앞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기... 고맙습니다."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리며 엘의 손에 잡혀 있던 팔이 빠져나갔다. "저도요." 그 말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엘은 소년들의 불안감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모습이 사라져서 많이 놀랐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더 이상 할말이 떠오르지 않자 엘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다 그냥 보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나서 반갑다! 난..." 엘은 잠시 망설이다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엘이라고 해." "난 리반이야. 반갑다." "전 이리스라고 해요." "전 바젤이에요." 모두의 통성명이 끝나자 엘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스, 바젤, 정말 반가워. 이런,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있었네." 소리내어 웃던 엘은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내 웃음을 멈췄다. "이리스? 이리스라고 했어? 너... 혹시 여자니?" "예." "뭐? 여자? 정말? 농담이지?" 놀란 리반이 소리를 높이자 주눅든 대답이 흘러나왔다. "농담 아니에요. 저 정말 여자 맞는데..." "예, 우리 누나 여자 맞아요." 억울하다는 듯한 바젤의 외침이 끝나자 엘은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왠지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선 좀 앉는 게 어때? 어차피 모습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 그게 좋겠다."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부산하게 들렸다. "누나,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근심이 가득한 바젤의 속삭임에 엘은 서둘러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걱정하지마. 조금있으면 마차가 올 거야. 아까 그 놈들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집까지 데려다 줄게. 집은 저기 마을에 있는 거지?" "아니오, 우린 집이 없어요. 전엔 있었는데 불이 나서 다 타버렸어요. 그 때 아버지, 어머니도 돌아가시고요. 그래서 우리 둘만 남게 됐어요." 이리스가 억양없는 단조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 계획은 있는 거야?" 리반이 진지하게 물었다. "바드리오로 갈 거예요." "뭐?" 엘과 리반이 동시에 소리쳤다. "바드리오로 갈 생각이라고요. 사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벨라인을 떠난 것도 바드리오에 가기 위해서였어요." "바드리오라면 수도인 바드리오를 말하는 거야? 리아잔 제국의 수도인 그 바드리오?" 리반이 재차 되물었다. "예.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거기 고모가 살고 계셔요. 보로스 시장에서 큰 식당을 하고 계시대요." "바드리오라면 굉장히 먼데 어떻게 가려고?" "저기.... 가시는 데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안돼요?"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어조에 엘은 차마 나오지 않는 거절의 말을 힘들게 꺼냈다. "그건 곤란해."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드릴 돈은 없지만 그 대신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할게요! 정말이에요!" "저도 말 잘 들을게요!" 바젤까지 말을 거들고 나섰다. "거절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야. 우린 데클란 평원으로 가는 길이거든."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아요! 데클란 평원엔 우릴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 까요. 제발 부탁해요, 엘 언니! 예?" 언니란 호칭에 엘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언니란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울리더니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왠지 가슴도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저기 말이야, 이리스.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거든. 우리 말고도 일행이 둘, 아니 세 명이 더 있어. 일행이 오면 의견을 물어 볼게." "고마워요, 엘 언니!" "물어 보기만 할 건데 고맙긴 뭐. 그리고 불편하게 언니니 뭐니 그럴 필요없어. 그냥 엘이라고 불러." "고마워요, 엘." 엘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물어 보나마나 이미 결정은 났군." 리오가 한숨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 이거 마차소리 같은 데?" 엘은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친구를 만나는 듯한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 "잠깐!" 그녀가 막 뛰어나가려는 찰나 리반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그래? 분명히 마차소린데!" "네 모습을 좀 봐! 볼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그 모습을 해갖고 갑자기 튀어나갔다가 마차에 치어 죽고싶어?"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 엘이 엉거주춤 몸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아니까 마차가 멈출 거야. 그럼 그 때 다가가서 이러이러해서 모습이 투명해졌다고 설명을 해야지." "말 시키는 순간 리오가 기절하면 어떡해?" 엘은 리반이 있음 직한 곳을 바라보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루드비히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지만 리오의 반응은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기절이야 하겠어? 비명 정도면 몰라도." 엘과 리반은 언덕을 올라오는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선 이리스와 바젤이 발을 끌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쯤에서 서자." 마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그들 쪽으로 돌진할거라 생각하는지 리반이 길에서 열 걸음도 더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여럿이 말하면 더 놀랄 테니까 대표로 내가 말할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엘은 모두 자신의 말에 찬성한거라 결론짓고 마차를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그녀가 정지한 마차 옆에 막 자리잡았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리오가 뛰어내렸다. "어? 이것들이 얌전히 기다리지 않고 어딜 간 거야?" 엘은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리오에게 한발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입을 열었다. "리오, 놀라지마." "으,으아악!" 고개를 휙 돌린 리오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엘은 뒤로 넘어가는 리오의 몸을 재빨리 받치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바보야!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젠장! 그만 웃어! 둥실둥실 떠있는 눈 두 개가 허공에서 노려보고 있는데, 너 같으면 기절하지 않을 것 같아?" 실실 웃고 있던 엘은 씨근덕거리는 리오에게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법가루를 뿌리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거든. 그래서 마법이 가장 빨리 풀린 건가 봐. 미안해, 리오. 그 때 눈만 나타난 상태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나도 네가 기절한 다음 뛰어온 리반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단 말이야." 엘은 리반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을 때 자신도 한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었다는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리오를 놀리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그런 말을 꺼내겠는가! "미안해, 리오. 가루 남은 게 있으면 널 위해 눈에만 발라보는 건데... 그럼 아마 넌 또 한 번 멋진 비명을 공중에 날리며 뒤로 철버덕 넘어가겠지?" 엘의 말이 끝나자 리반이 온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그녀도 배를 움켜잡아야 했다. "치사한 것들! 어디 두고 보자!" 주먹을 불끈 쥐며 위협적인 동작을 해 보이던 리오가 엘 옆에 앉아 작게 키득거리고 있는 이리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만 웃고 둘 중 아무나 말 좀 해 봐. 얘들은 대체 누구야?"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이리스가 꽤 놀랐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이리스가 바젤의 손을 덥석 잡고 냇가로 뛰어갔다. 엘은 나풀거리는 두 개의 검은 머리에서 시선을 떼며 설명을 시작했다. 리오는 엘이 두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추려 말해 주는 동안 진지한 얼굴로 냇가 쪽을 흘긋거렸다. "데클란 평원으로 간다고 했는데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단 말이야?" 놀라움이 담긴 리오의 물음에 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 좋다는 말까지 했어." 리오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가슴에 팔짱을 꼈다. "사실 저 애들 말도 일리가 있어. 요기 아래 마을도 지금 난리가 아니더라고. 손바닥만한 마을이 그 정도니 다른 곳은 얼마나 가관일지 안 봐도 뻔해. 내 머리를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따가운 시선을 쏘아대는지 피부가 다 따끔거릴 정도였다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빨간 머리 쌍둥이와 함께 다닌다는 말이 벌써 쫙 퍼졌나 봐.리반이 같이 갔으면 아마 돌아오기 힘들었을 거야." 씁쓸한 미소를 지은 리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식료품 상점에서 들었는데, 검은 머리만 눈에 띄면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든대. 물론 좀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램에서 겪은 일만 보더라도 절대 허황된 말은 아니야. 만약 저 애들이 그런 사람들의 눈에 띈다면.... 생각만해도 소름끼친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엘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죄책감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안도감이, 그녀 자신은 안전하다는 부끄러운 감정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럼 넌 저 애들과의 동행에 찬성하는 거야?" 리반의 목소리에 엘은 푹 꺾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눈이 마주친 리오가 용기를 내라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난 찬성이야. 물론 죽었다 깨도 뿌리치지 못할 마음 약한 녀석은 들으나마나 찬성일 테고... 거절했다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할 내 쌍둥이 동생도 당연히 찬성 쪽일 거야. 어때? 내 말이 정확하지?" 리오가 다리를 쭉 뻗으며 엘과 리반을 번갈아 바라봤다. 세 사람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동시에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럼 이제 루드비히만 남은 건가? 아, 첸도 있었지!" 엘은 두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제님께만 말씀드리면 될 것 같은 데? 사제님이 찬성하시면 첸이야 당연히 거기에 따를 테니까." 리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면 첸이 슬퍼할 거야." 엘은 조용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루드비히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에게 뒷모습을 향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마차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반대쪽에 있는 첸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엘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루드비히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할 일이 생겨서요. 다른 게 아니라... 아까 루드비히도 보셨죠? 이리스와 바젤말이에요. 그 둘과 같이 동행할 수 있을까 해서요. 마차도 넓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루드비히?" 엘이 말을 하는 내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던 루드비히가 좀 딱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루드비히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거라 예상하고 있던 엘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제가 거절하면 저 둘을 떼어버리고 가실 수 있습니까?" 루드비히의 눈엔 그녀를 살피는듯한 주의 깊은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어... 그건... 모르겠어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럼 생각해 보십시오." 엘은 발끝으로 땅을 후벼파며 불편하게 느껴지는 은회색 눈동자를 피해 얼굴을 숙였다. 잠시 후 그녀의 머리위로 들릴듯 말듯 낮은 한숨이 지나갔다. "됐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엘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루드비히."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루드비히가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첸만 승낙하면 되는 거네요. 루드비히, 첸이 좋다고 할 것 같아요?" 은근히 뜸을 들이며 엘을 답답하게 하던 루드비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거야 제가 알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기... 루드비히가 좀 물어 봐주시면 안될까요?" "직접 하십시오. 첸도 그걸 더 좋아할 테니까요. 또 전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첸을 대하는 게 마냥 불편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루드비히가 은근히 놀리는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일이요? 그게 뭔데요?" "그건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입술을 비죽이며 눈을 흘기는 엘을 향해 루드비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비스 듬히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의 입술엔 짓궂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약이 잔뜩 오른 엘이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인 후 바로 몸을 돌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걸음을 옮기는 엘의 입술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차를 빙 돌아가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퀴를 점검하고 있는 첸이 보였다. 엘은 그와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크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첸은 그녀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첸, 다른 게 아니라 좀 물어 볼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이리스와 바젤말이에요." 엘은 쉬지 않고 이리스와 바젤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그렇게 돼서 같이 갔으면 하거든요. 첸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그녀가 말을 끝내고 숨을 몰아쉬자 첸이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마부석으로 걸어갔다. "첸, 어떻게 생각해요? 찬성이에요?" 엘은 마부석에 훌쩍 올라타는 첸을 보며 크게 물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 좀 해 봐요!"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싫어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기랄! 좋아요?" 씩씩거리는 숨결 위로 신음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었다. 엘은 그 소리를 좋으냐는 질문에 대한 긍정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끼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엘이 첸과 힘들게 의견 종합을 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마차에 올라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엔 이리스와 바젤도 포함되어있었다 엘이 이리스 옆자리에 앉자마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선언하듯 소리쳤다. "첸도 흔쾌히 찬성했어!" "그게 흔쾌히 찬성한 거야?" 리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첸은 감정표현이 좀 서투르니까 주위사람들이 알아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어야 하는 거야!" "뭐? 감정 표현이 좀 서투르다고? 그렇기 때문에 알아서 마음을 헤아려 주어야 한단 말이지?쳇! 해석이 좋다!" 엘은 빈정거리는 리오에게 모난 시선을 던진 뒤 이리스와 바젤을 차례로 바라봤다. 긴장이 풀렸는지 바젤은 어느새 리반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어있었다. "우리와 동행하게 돼서 기쁘다! 진심으로 환영해!"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이리스가 놀랄 만큼 맑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엘을 바라봤다. 엘은 까만 눈에 어른거리는 물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리스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의자아래 보관함에서 모포를 꺼내 바젤에게 덮어 주었다. 엘이 몸을 바로잡자 이리스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울먹이는 어조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엘." -------------------------------------------------------------------제 39장. 바람의 땅------------------------------------------------------------------- "여기가 데클란 평원입니까?" 사일러스를 바라보는 카셀의 얼굴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사일러스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카셀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데클란 평원이 아니라 평범한 들판같은 데... 풀도 나있고 나무도 몇 그루 있고..." "답답하기는! 단장님은 데클란 평원이 맞다 하신 게 아니라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신 거라고! '여기부터 데클란 평원이 시작됩니다' 라는 이정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혀를 차던 제러드가 손등으로 이마에 밴 땀을 닦아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푹푹 찌는 거죠?" 에지몬트가 웃통을 벗어 던지자 잔뜩 얼굴을 찌푸린 사일러스가 옷을 집어 내밀었다. "어서 다시 입어라. 시뻘겋게 익은 뒤 징징 짜지 말고." "옷 입을 생각도 징징 짤 생각도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에지몬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옷을 받아 들어 아무렇게나 한쪽 어깨에 걸쳤다. "경솔한 녀석같으니!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사일러스가 벌떡 일어나 부하들을 둘러봤다. "휴식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어서 움직여라!" "예, 단장님!" 씩씩하게 대답한 기사들이 나무 그늘에서 나와 절도있는 동작으로 말 등에 올랐다. "출발한다!" 그들은 까마득하게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힘차게 말을 출발시켰다. 말을 달린 지 얼마되지 않아 풀과 나무들이 줄어든다는 게 확연히 구별되더니 급기야 잡초하 나 보기 힘든 메마른 대지가 펼쳐졌다. 데클란 평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기사들의 활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물기 하나 없이 먼지만 풀풀 날리는 땅과 곧장 내리쬐는 뙤약볕은 그들뿐 아니라 말들의 체력까지 소진시켰다. 평원엔 치열한 열기를 식혀 줄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사방에서 쉴새 없이 불어왔지만 이미 뜨거운 태양에 달궈졌는지 입김처럼 그들 놈에 엉겨 붙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장님, 지금 우리가 방향은 맞게 잡은 겁니까? 사방이 다 똑같으니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네요." 카셀이 풀 죽은 어투로 말했다. "그래, 맞게 잡았다. 우리 바르테즈 공국이 바로 저쪽에 있다!" 사일러스는 길게 팔을 뻗어 그들이 향하고 있는 북동쪽을 가리켰다. "까마득하긴 하지만 그 말에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에지몬트가 가슴에 달라붙은 옷을 떼어 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에지몬트, 좀 어떠냐?" 사일러스가 던지려던 질문을 제러드가 먼저 꺼냈다. "괜찮습니다. 살갗이 조금 붉어진 것 뿐이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에지몬트는 구부정하던 등을 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누구도 그의 연기에 속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사일러스는 목까지 올라온 '그러게 내가 뭐라 했느냐' 라는 말을 밀어넣었다. 의기소침해 있을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화상의 고통까지 겪고 있는 동생을 쓸모없는 말 한마디로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단장님, 아무래도 말들을 좀 쉬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세르피언의 말에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올려 일행을 멈추게 했다. 오늘 들어 벌써 세 번째의 휴식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말을 지나치게 혹사시킬 수는 없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말은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생명줄같은 존재였다. 혹시 내가 잘못된 판단과 어리석은 아집으로 부하들에게 괜한 고생만 시키는 건 아닐까? 사일러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는 평원을 바라봤다. 대체 이 넓은 곳 어딘가에 엘이 있기나 한 건가? 만약 있다면 찾을 순 있을까? 그는 자신부터 이렇게 흔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부하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보이는 건 황폐한 대지와 메마른 먼지바람 뿐인 곳에서 그를 지탱해주는 건 오직 자신과 부하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뿐이었다. 쥬네비아 황후가 모습을 드러내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서둘러 물러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황후의 뒤엔 이십 여명의 시종과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쥬네비아는 흥분한 어조의 수군거림이 들리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른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젊은 여인이 보였다. "그 마녀야." 젊은 시녀 한 명이 누가 들을까 두려운 것처럼 숨죽여 말했다. 여인의 등을 따라 흘러내린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 위로 햇빛이 반사되자 마치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쥬네비아가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을 때, 시녀장인 아르덴이 작게 속삭였다. "폐하, 저 여인이 바로 마체라타입니다." 쥬네비아는 굳은 얼굴로 마체라타를 똑바로 응시했다. 황후의 존재를 모를 리 없는데도 마체라타의 움직임은 느긋하기만 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마체라타가 앞에 서 있는 쥬네비아를 못 본 척하며 스쳐 지나자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 들이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쥬네비아는 견디기 힘든 분노와 모욕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을 때 노기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멈춰라! 감히 황후폐하 앞에서 이게 무슨 돼먹지 못한 짓거리냐?" 마체라타를 향해 사납게 다가가는 사람은 시녀장인 아르덴이었다. "어서 무릎 꿇고 사죄 올리지 못하겠느냐?" "네 까짓 것한테 일없다!" 마체라타가 진한 비웃음을 날리자 아르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렸다. "아니, 그래도 이것이!" 새된 소리를 지른 아르덴이 마체라타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크게 휘청한 마체라타가 벽에 몸을 기대 중심을 잡았다. 숨죽인 침묵이 깨어지며 곳곳에서 고소하다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체라타의 얼굴이 천천히 올려졌다.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를 본 순간 아르덴의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을 떨쳐 내며 한층 기세충천하게 소리쳤다. "뭘 잘 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거냐? 네 죄를 조금이라도 뉘우친다면 어서 무릎을 꿇어라!" "그만해라!" 일이 너무 소란스러워졌다는 생각에 쥬네비아는 위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알겠습니다, 폐하. 저것의 행동이 너무 괘씸하여...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참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됐다." "아니오...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마체라타의 가시 돋친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덴의 발 주위에 검은 색의 아지랑이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처음엔 희미하기만 하던 아지랑이가 눈 깜짝할 새 폭발하듯 커지더니 순식간에 검은 화염으로 변해 아르덴을 덮쳤다. 너무 놀라 피할 생각도 못하고 뻣뻣이 서 있던 아르덴이 격렬히 몸을 뒤틀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쥬네비아는 날카롭게 외마디 소리를 토해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신의 시녀장이 바로 눈앞에서 잔혹하게 살해되고 있는데도 그녀는 발작적으로 터지려 하는 비명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르덴은 살과 뼈가 타 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도움을 갈구하며 복도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허겁지겁 그녀를 피하기 급급했다. 어떠한 고통도 더 이상 아르덴을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을 때 검은 화염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새까맣게 탄 검붉은 덩어리가 나타났다.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사람들, 바닥에 질펀하게 토하는 사람들, 또 공포에 질려 비명을 터뜨리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로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차가운 조소를 띠고 눈 앞의 난장판을 음미하는 것 같던 마체라타가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쥬네비아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쥬네비아의 얼굴에 경련을 일었다. 그러자 마체라타가 톤 높은 웃음을 터뜨리며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쥬네비아는 마체라타의 모습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조용히 해라!" 황후의 날카로운 명령이 복도를 울리자 급속도로 소란이 가라앉았다. "어서 시체를 치우고 더럽혀진 복도를 청소해라! 그리고 누구도 날 따라오지 마라!" "폐하! 어딜 행차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쥬네비아는 나이 지긋한 시종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엄숙한 얼굴로 그를 일별한 뒤 몸을 돌려 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단단한 결의가 담긴 거리낌없는 발걸음은 자일스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춥다!" 둥그렇게 주위를 밝히는 불꽃 위로 은백색의 입김이 하늘거리는 깃털처럼 피어올랐다. "그래, 정말 춥다! 낮엔 푹푹 찌더니만...." 엘의 말에 맞장구친 리오가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투덜거렸다. "하도 몸을 웅크리고 있었더니 등이 다 뻐근해. 가슴도 쑤시는 것 같고." "추운 건 정말 싫어." "아까 낮엔 더운 건 정말 싫다고 차라리 추운 게 낫겠다고 했잖아." 리반이 엘을 향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랬었나?" 엘은 겸연쩍게 웃으며 이리스와 바젤이 자고 있을 마차로 고개를 돌렸다.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감기라고? 흠뻑 젓은 옷을 입고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면서도 감기에 안 걸린 네가?" 리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말투가 꼭 감기에 걸리길 바랐던 사람같다? 그리고 난 내가 아니라 이리스와 바젤에 대해 말한 거라고." 엘은 미간을 찡그리고 리오에게 눈을 흘겼다. "찬바람 막아 줄 사방의 벽에다 푹신하고 긴 가죽의자, 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새로 산 모포도 모조리 갖다 안겼으면서." 마차를 바라보는 리오의 눈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네가 지금보다 다섯 살만 어렸어도 저 마차에 들어가 잘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부러우면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봐. 마차 지붕에라도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엘의 말이 끝나자 재미있다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던 리반이 냉큼 끼어들었다. "나한테 형이라 그러면 모포는 내가 곱게 마차지붕까지 올려 줄게." 낄낄대는 두 사람을 노려보던 리오가 불 가까이 당겨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래 웃어라 웃어. 그렇게 의견이 잘 맞는 걸 보니까 형제는 나와 리반이 아니라 꼭 너희 둘 같다." 동시에 고개를 돌린 엘과 리반이 서로를 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근데 넌 왜 마을에 따라 간 거야? 평소엔 사제님 옆에 가는 것도 무척 어려워했잖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리오가 발끈하고 나섰다. "어려워한 적없어! 그저... 좀 불편해 한 것 뿐이야!" "리오, 너 정말 이상하다? 대체 루드비히가 뭐가 불편하다는 거야?" "사실 나도 좀 그래." 리반까지 리오의 말에 동조하고 나오자 엘은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희들이 루드비히를 잘 몰라서 그래. 조금만 알게 되면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얼마나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지 몰라. 너희들도 생각해 봐. 루드비히는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님이고 난.. 아시리움에게 쫓기는 몸이잖아.그런데도 루드비히는 날 도와주고 있고..." 엘의 말이 새삼스러운지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그 사제님의 행동을 아시리움에서 알게 된다면..." "알게 된다면?" 엘의 걱정스런 시선이 리반을 향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대사제님께 심한 꾸중을 들으셔야 할 거야. 지금까지의 일에 대한 보고서같은 것도 쓰셔야 될 테고..." "정말 그 정도로 끝나게 될까?" 엘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사실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근심으로 흐려진 보라색 눈동자를 향해 그 사제님은 분명히 끔찍한 방법으로 죽게 될 거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는 리반은 애써 자신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연하지!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아? 아시리움에 대한 거라면 웬만한 평사제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걸?" 리반은 엘이 그의 과장된 말투를 눈치챈 듯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리오, 마을에 갔다 오면서 사제님과 대화 좀 나눴어?" "대화는 무슨? 날 거들떠 보기나 한 줄 알아?" 말을 멈추고 몇 번 헛기침을 한 리오가 점잖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 정말 화창하군요. 사제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제님께서 입고 계신 망토는 이런 날씨에는 좀 더울 것 같은데... 벗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제님께선 어떻게 아시리움에 들어가시게 된 겁니까? 그것도 보통 신전이 아닌 성전에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님이 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말입니다. 사제님께선 정말 과묵하신 분이시군요. 사실은 저도 말이 적은 편이랍니다. 사제님, 혹시 주무시는 겁니까? 아, 그건 아니군요. 제가 귀찮으시면 그렇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젠장! 말을 좀 하란 말입니다! 누구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 이러시는 겁니까? 말을 해요! 말을! 말 좀 해달라고요!" 피식피식 웃으며 리오의 얘기를 관심있게 듣고 있던 엘은 끝부분에 나온 고함에 놀라 등을 곧추 세웠다. "정말 루드비히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젠장 어쩌구 하는 말을 한 거야?" "아니, 젠장 이후부턴 하고 싶었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말이야." 계면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는 리오를 보며 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루드비히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리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리반도 마찬가지인 듯 한시름 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기억력 대단하다, 리오. 대체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는 거야?" "별거 아냐. 사실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고르고 또 골라 한 말이거든." 엘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리오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정말 루드비히가 아무 말도, 그러니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말은커녕 쳐다보지도 않더라. 아, 그렇지! 내가 말이 적은 편이라고 했을 때, 꼭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한 번 흘긋 보긴 했어. 소름 끼칠 정도로 얼마나 분위기가 싸늘한지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니까." 리반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제님도 그렇지만 첸이란 남자도.... 뭐라고 할까? 좀.... 아무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같아. 내가 그 동안 나한테도 검술 좀 가르쳐 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얼굴 볼 때마다 했으니 서른 번도 넘었을 거야. 나중엔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런데? 첸이 귀찮다고 짜증이라도 낸 거야?" 리오가 엘에게 잔뜩 찌푸린 얼굴을 돌렸다. "차라리 그러면 속이나 시원하게? 그 사제님처럼 입술을 꾹 다문 채 날 거들떠도 안 보더라. 혹시 귀가 안 들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시장입구에서 내려 달라는 말에 마차를 세운거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고." 리오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리반이 입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어서 털어놔 봐. 마을에 왜 갔는지 말이야. 심심해서 놀러간 건 아닐 테고." "어... 그,그건...." 머뭇거리는 리오에게 두 사람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집중됐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그러니까... 그냥 볼일이 좀 있었어." "리오, 소화도 시킬 겸 바람이나 쐬고 오자." 리반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자 리오가 어이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바람을 쐰다고? 난 여기 바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궁상떨려면 너나 가. 지금도 바람 때 문에 뼈가 시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군소리말고 어서!" 단호하게 말한 리반이 앞장서자 리오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엘은 점점 희미해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눌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형제간의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엘은 물끄러미 불꽃을 바라보다 루드비히가 어디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하지만 짙은 어둠과 적막에 싸인 평원만 펼쳐져 있을 뿐 루드비히도 첸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 밤중에 어딜 간 걸까? 리오와 리반이 있을 때 루드비히가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엘은 대부분 짧은 식사시간이나 모두 잠자리에 든 늦은 밤에만 루드비히를 볼 수 있었다. 간간이 휴식을 취할 때 이루어지는 '교감능력향상교육'- 엘이 첫 번째 교육이 끝난 뒤 붙인 명칭이다- 시간은 별도로 치고 말이다. 루드비히도 첸도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야. 엘은 두르고 있던 모포를 잘 펴서 몸을 감싸고 가죽깔개 위에 누웠다. 차디찬 가죽의 감촉에 몸서리가 쳐졌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평원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온 스산한 풀벌레소리가 귀를 스쳤다. 걸음을 멈춘 리반이 휙 몸을 돌렸다. "자, 솔직히 털어놔 봐." "더 이상 털어놓을 것도 없어. 아까 말했잖아. 볼일이 있었다고." "그 볼일이란 게 대체 뭐냔 말이야?" 발로 땅을 퍽퍽 차대던 리오가 결심한 듯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잠시 후 무언가를 움켜쥔 손이 리반 앞에 펴졌다. "이게 뭐야?" 리반은 손을 내밀어 색색의 돌이 꾀어져 있는 둥근 고리를 집어 들었다. "너... 설마?" "그래, 쥬엘라야." 리오가 할말 있으면 해 보라는 얼굴로 리반을 바라봤다. 쥬엘라는 체르몬 국에서 혼인의 증표로 쓰이는 일종의 팔찌였다. 보통은 은이나 금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어졌는데 귀족이나 재력가들은 그 위에 화려한 보석을 박아 장식했다. "여기 사람들은 쥬엘라가 뭔 지 몰라서 설명하는 데 애먹었어.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말해 줬더니 즉석에서 이걸 만들어 주더라고. 사실 내 거도 만들까 했는데, 내가 이런 걸 차며 영 우스꽝스러울 것 같아서..." 리반의 손에서 쥬엘라를 받아 든 리오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이건 그저 임시일 뿐이야. 체르몬에 돌아가 혼인식을 할 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쥬엘라를 끼워 줄 거야." "혼인이라니? 너 아직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야?" "당연히 말이 돼.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반드시 엘과 혼인할거야." 리오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했다. "아시리움을 어떻게 피하려고? 아시리움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다행히 아시리움에선 엘을 남자로 알고 있어. 내 계획은 이래. 바르테즈 공국에서의 일이 끝나면 그 즉시 엘은 여자로 돌아오는 거야. 그래서 나와 함께 체르몬 국으로 가는 거지. 잘만 하면 아시리움에서 눈치 못 채게 할 수 있어." 리반은 아시리움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아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일단 리오의 얘기를 들어보자는 생각에 말을 끊지 않았다. "체르몬에 가면 최대한 빨리 혼인식을 올릴 거야. 정식으로 부부가 되면 내 손으로 엘을 보호해 줄 수 있어." "그것 때문에 혼인하겠다는 거야? 보호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싶고 항상 행복하게 웃게 해주고 싶어. 또... 언제나 같이 있고 싶어." 리반은 눈을 질끈 감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이 막막하고 두려울 뿐이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아시리움을 속인다 해도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하려고? 절대 승낙하지 않으실 텐데." "승낙받는 건 그 때 가서 고민할 거야. 지금은 바르테즈에 가는 것, 아니, 무사히 이 평원을 지나는 일만 생각할 거야." 두 사람은 묵묵이 걸음을 되돌렸다. 불빛을 향해 반 정도 다가갔을 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정식 왕자비는 아무래도 힘들 거야. 부모님 문제도 그렇고. 또 아시리움 종단의 주의를 끌 위험도 크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난 반드시 엘과 혼인하고 말 거라고." 짜증이 와락 치솟았지만 엘이 들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리오는 애써 목소리를 자제했다. "누가 혼인하지 말래? 내 말은 꼭 정식 왕자비로 맞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거야." 리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너... 그럼 설마... 후..." "그래, 후궁을 말하는 거야." 리오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리반이 마무리했다. "후궁이라니 말도 안 돼!" 리오가 버럭 소리쳤다. 엘이 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난 평생을 통틀어 딱 한 번 혼인할 거고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오직 그 사람만 사랑할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알았으니까 제발 목청 좀 줄여." 리반이 못마땅한 어조로 핀잔을 주자 리오가 정신이 번쩍 난 얼굴로 엘이 있는 쪽을 살폈다. 다행히 잠을 자고 있는 듯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리오는 안도감에 숨을 푹 내쉬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제야 알겠다. 네가 혼인을 성공하기 위해 해결해야 될 가장 큰 문제가 뭔 지." 혀를 차던 리반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당연히 아시리움이지." "아니." "그럼 부모님?" "아니." 뒤따라오던 리오가 리반의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들이댔다. "내가 모르고 있는 문제가 또 있는 거야?" "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는 문제야. 넌 그걸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것 뿐이고." "그게 대체 뭔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리오가 소리를 높였다. "너 알렉스한테 좋다는 대답 받아 낼 자신은 있는 거야?" "어... 그건...." 리반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오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알렉스가 들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네가 혼인하자는 말이나 꺼낼 수 있겠어?" 결정적인 말을 남긴 리반은 혀를 차며 리오에게서 멀어져갔다. "나와 혼인할래?... 너무 밋밋해. 내가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 제발 나와 혼인해주라... 이건 좀 구차한 것 같은데... 엘,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딱 하나만... 젠장! 이러다간 아예 무릎 꿇고 비는 일이 발생하겠다!" 중얼거리는 리오의 말이 바람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음은 심란하고 착잡하기만 한데도 어느새 리반의 입술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램에서 목격되었다던 소년들이 엘 일행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리자드님. 조사자 세 명 모두 같은 보고를 올렸습니다." 아몬의 말이 끝나자 리자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아시리움에도 같은 보고가 전해졌을 거다. 추적자들은 그 전에 알고 지금쯤은 이미행동에 들어갔겠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아몬의 갈색 눈엔 근심이 가득했다. "일단 램에선 무사히 피하신 것 같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어디 계시는 건지..." "리아잔을 잘 모르는 세 명의 아이들이라면 당트나 리스터로 이동할 확률이 크다. 어쩌면 수로요가 될 지도 모르고." 말을 끊은 리자드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보고는 없는 거냐?" "아, 그러고 보니 일행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리자드가 아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일행이 더 있다고? 자세히 말해 봐라." "여관주인이 여관에 든 사람은 남자 셋이 아니라 넷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검은 망토를 걸친 키가 크고 강렬한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라는데.... 제 생각으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보 같습니다, 리자드님. 심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무렵이니 마을 변두리에서 누군가를 태워 주었다거나 아니면 한꺼번에 뛰어든 사람들을 보고 여관주인이 착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갑자기 리자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흠칫한 아몬이 숨을 죽였을 때, 리자드가 거친 동작으로 의자를 밀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진주같은 햇살이 그에게로 밀려들어 그의 청회색 눈동자를 칼날같은 금속성으로 번쩍이게 했다. "그 아이들이 어느 쪽으로 이동했는지 아느냐?" 리자드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신빙성이 전혀 없는 정보긴 하지만 램에서 남동쪽으로 간 것 같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데클란 평원..." 리자드가 낮게 중얼거렸다. "리자드님..." 아몬이 자신도 모르게 리자드를 불렀을 때 매서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강렬한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다. "어리석게도 데클란 평원으로 갔을 거다." "데클란 평원이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데클란 평원으로 갔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고생은 되겠지만 일단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정보를 역이용한다면 쉽게 피할 수 있다.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은 다르다. 데클란 평원이라면... 절대 그들에게서 숨을 수 없다. 추적자들의 시선을 방해할 것이 조금도 없을 테니까." 일순 섬뜩한 두려움을 느낀 아몬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이란 어떤 이들입니까? 그들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목표를 쫓는 것입니까?" "추적자들의 정체는 아시리움의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다. 아마 법황과 대사제들, 그리고 추적자들을 직접 다루는 두세 명의 고위사제가 포함될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추적자들 모두 대단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그들 중에 개개인이 가진 독특한 원기(元氣)를 읽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리자드님, 추적자들이 사람의 원기를 읽고 그것을 따라 움직인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리자드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엘을 본 적도 없을 텐데 그녀의 원기를 어떻게 알고 뒤쫓을 수가 있는지... 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원기는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곳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몬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그 말씀은 사람이 쓰는 물건 하나하나에도 그의 원기가 남아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런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지만 그 아이는 아시리움에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고, 그걸 놓칠 추적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일 것 같으냐?" "잘... 잘 모르겠습니다, 리자드님." 아몬이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이 많고 사방에 즐비한 방패막이가 세워져 있는 곳, 즉 잘 발달된 도시에 숨는 것이다." "그,그렇다면 데클란 평원은.... 사람도 방패막이도 없는 데클란 평원은...." 아몬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데클란 평원은 거대한 덫이다. 그 아이는 자신의 발로 덫을 향해 걸어 들어 간 거다. 아니.... 누군가가 그 아이를 이끌었을 것이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폭풍이 시작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빛이 타올랐다. 이를 악문 그가 내뱉듯 거칠게 중얼거렸다. "루드비히 라스카 반 리오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가?" 놓쳐 버린 목검이 높은 호를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만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그의 어조가 엘이 느끼는 짙은 패배감을 한층 가중시켰다. 저릿저릿한 손을 움켜쥐고 있던 엘은 막 걸음을 떼려 하는 첸 앞을 재빨리 막아섰다. "안 돼요! 한 번만 더 해요!" 엘은 숨가쁘게 소리치고나서 도무지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거무스름한 얼굴을 흘긋 살폈다. 그리고 부리나케 뛰어가 목검을 집어들고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첸에게 달려갔다. "이번엔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예요!" 말을 끝내자마자 엘은 검을 세우고 첸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첸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의 오른쪽 허공을 힘차게 갈랐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첸의 몸놀림을 고려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피해 오른쪽으로 몸을 돌릴 거라는 엘의 단순한 예상을 깨고 첸은 그녀를 훌쩍 뛰어넘어 뒤로 이동했다. 엘은 등줄기를 오싹하게 하는 서늘한 바람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연하게 상체를 틀어 왼쪽으로 회전했다. 빈 허공을 벤 목검이 즉시 방향을 바꿔 엘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목검이 매서운 바람처럼 허리를 살짝 스쳤다. 엘은 몸의 중심을 잃은 것처럼 짧게 비틀거렸다. 그러자 예상대로 검끝이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첸의 팔이 올려지며 빈틈이 살짝 드러나는 순간 번개같이 검을 찔러 넣었다. 됐다! 엘이 성공을 확신했을 때 옆구리를 찌르는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진 그녀는 격한 숨을 들이쉬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엘은 자신이 노린 곳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에 첸의 공격이 들어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를 썼건만 결국 그녀는 첸의 손바닥 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하겠습니다." 제기랄! 저렇게 얄미울 수가! "안 돼!" 엘은 지칠 대로 지친 무거운 몸을 날려 첸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간절히 외쳤다. "하,한 번만... 한 번만 더해요!" 그녀를 내려다보는 첸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엘은 슬그머니 움직이려 하는 발목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이요." 첸의 새까만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난처한 빛이 스쳤다. 그는 재빨리 엘의 뒤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러자 재미있다는 얼굴로 서 있던 루드비히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습니다." 엘이 처음 듣는 말을 중얼거린 첸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가차없이 발목을 빼냈다. "첸! 정말 이렇게 치사하게 굴 거예요?" 엘은 투덜거리며 하늘을 향해 벌렁 드러누웠다. "참으로 열심히 하시는군요."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을 배경으로 루드비히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열심히 하면 뭐해요? 나아지는 게 없는데..." 엘은 풀 죽은 어조로 말하며 루드비히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어깨와 목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고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적어도 그 노력만큼은 훌륭하지 않습니까? 아마 첸도 다리에 매달리기까지 하는 열정적인 제자를 두어 본 적은 없을 겁니다." 짓궂게 말한 루드비히가 눈을 흘기는 엘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루드비히, 제가 없을 땐 대체 뭘 하며 노셨습니까?" 엘이 슬쩍 비꼬자 루드비히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 "음... 생각해 보니 그 땐 정말 재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셨군요. 루드비히가 저로 인해 그토록 즐거워하시니 저 역시 무진장 행복합니다." 엘은 가슴이 벅차다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들고 있던 목검을 힘차게 흔들었다. "너무 감격스러워 이걸로 루드비히를 퍽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미소를 짓고 있던 루드비히가 급기야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엘은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놀랄 만큼 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우와! 루드비히! 혹시 검술 배웠어요?" 그는 엘의 감탄 어린 물음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루드비히, 우리 한 번 본격적으로 해 봐요. 제가 먼저 선제 공격할까요?" 흥분한 엘이 목검을 치켜세우자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엘은 아무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루드비히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루드비히, 그러지 마시고..." "엘!" 그녀를 부르는 리오의 목소리엔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엘은 고개를 돌려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일이야." 리오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루드비히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루드비히, 금방 갈게요!" 엘이 다가가자 리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사제님하고 헤어지는 게 그렇게 안타까워?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뭐? 나 참! 오늘 받아야 되는 교육 때문에 그런거다. 시간없으니까 괜히 심술부리지 말고, 그 중요하다는 말이나 해 봐." 침을 꿀꺽 삼킨 리오가 슬쩍 엘의 시선을 피했다. "뭔데 그래?"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내가 중요한 거라고 말했지?" "그래, 어서 말해 봐." "알았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하면.....나와.... 그러니까 나와.... 호..." 엘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리오를 찬찬히 살폈다. 관자놀이 주위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그는 이마에 땀까지 배어있었다. 무척이나 하기 힘든 말을 꺼내려 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한테 큰 잘못이라도 한 건가? "괜찮아, 리오. 말해 봐. 무슨 말을 들어도 화내지 않을게." "뭐,뭐? 화를 내?" 리오가 경악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화내지 않는다니까!" "됐어! 나중에! 나중에 말할게!" 리오가 무엇인가에 쫓기듯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발을 잘못 디뎠는지 외마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넘어졌다. 엘은 사납게 내뱉는 욕설을 들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무슨 일로 여기까지..." 칼 베리만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후드를 깊게 내려 쓴 쥬네비아를 바라봤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녀를 접빈실로 안내했다. "감히 폐하를 기다리시게 하다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황후폐하." "제 모습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이 곳에 왔다는 걸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재빨리 말한 쥬네비아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알겠습니다. 말조심 하겠습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두 명의 여인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칼 베리만은 마르셀 백작에게 보낼 서신을 쓰고 있었다. 도중에 일을 중단하는 걸 몹시 싫어하는 그는 두 명의 여인이 궁금하긴 했지만 서신을 완성한 다음 하인에게 빨리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한 두 여인이 쥬네비아 황후와 항상 그녀를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요아상 백작부인이란 걸 알게 되자 칼 베리만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분께서 말씀 나누실 수 있게 전 이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접빈실 앞에 이르렀을 때 요아상 백작부인이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아닙니다, 따로 자리를 마련할 방법이 있으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칼 베리만은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백작부인에게 의자를 권한 뒤 접빈실 안쪽에 마련된 비밀스런 내실로 황후를 안내했다.문을 연 그가 한 발 비켜서자 쥬네비아가 불안감을 드러내며 머뭇거리다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안심하십시오. 이 곳은 안전합니다." 쥬네비아가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칼 베리만은 쥬네비아가 입을 열길 기다리며 신중한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칼 베리만,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잔뜩 쉰 목소리에서 쥬네비아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칼 베리만은 그녀를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점잖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차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에 쫓기듯 성급히 거절한 쥬네비아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 마체라타가 내... 시녀장을 죽였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칼 베리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장의 끔찍한 죽음은 황궁은 물론 이미 바드리오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까지 퍼져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직 후 제가 자일스를 찾아갔다는 건 모르실 겁니다." 쥬네비아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칼 베리만은 놀라움을 감춘 침착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그것도 내 사람이 새카맣게 타서 죽었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습니까? 만약 칼 베리만이시라면 그러실 수 있으십니까?" "저 역시 참을 수 없었을 겁니다, 폐하." 칼 베리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요 며칠간 그를 의아하게 만든 궁금증을 밖으로 꺼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번 일에 대한 여파가 예상외로 작다는 것입니다.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족여인이 살해당했습니다. 그것도 사악한 힘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황태자께서 마체라타라는 여인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신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제가 이번 일이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막아서입니다." 칼 베리만이 입을 멍하니 벌리자 쥬네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놀라시겠지요. 하지만 전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자일스의 거처에 발걸음했다는 건 이미 말씀 드렸지요.... 거기서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쥬네비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놀란 칼 베리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그저... 그 때 일이 떠올라서..." "대체 무엇을 보셨기에 그러십니까, 폐하?" "자일스가... 여자를 안고 있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얘기가 나오리라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칼 베리만은 엉거주춤 의자에 내려앉았다. 민망하고 당황하긴 했겠지만 사실 별 거 아닌 일에 황후가 왜 이리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역시 혼란스러워 하시는군요.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일스는 성불구자입니다. 아니, 성불구자였습니다." "그,그러니까...그런 의미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칼 베리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예, 그런 의미입니다. 자일스는 기형적인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쥬네비아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했다. "지금까지 이 사실은 저와 자일스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전 자일스가 태어난 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입을 영원히 막아 버렸습니다. 산파 두 명과 네 명의 시녀, 그리고 자일스의 상태를 진단한 의관 두 명까지 모조리 말입니다.... 잔인하다 생각하시겠지요." 칼 베리만을 바라보는 쥬네비아의 눈엔 짙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자일스는... 자일스의 앞날은... 지옥 그 자체였을 겁니다. 끔찍한 어미의 더러운 핑계라 욕하시겠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전 똑같이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칼 베리만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계셨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오, 아니겠군요. 폐하께서 그런 일을 철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셨을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번 일은 지난번 황태자전하의 눈과 팔이 고쳐진 일과 무관하지 않겠군요." 쥬네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여자와 함께 있는 자일스를 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자일스의 팔과 눈이 감쪽같이 나았을 때도... 제 눈으로 그걸 확인하고 만져 보기까지 했을 때도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몇 년 전 자일스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여자들을 끔찍하게 죽인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도... 전 그저 자일스가 너무 가엾고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칼 베리만은 씁쓸한 마음에 쥬네비아에게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몰두해 있는 쥬네비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처럼 자일스에게... 내가 낳은 내 아이에게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말입니다." "폐하,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쥬네비아의 푸른 눈동자에 강렬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마체라타를 없애 주십시오." "그 대사제 이름이 뭐라 했느냐?" "필리프 대사제라 하옵니다, 전하." 노소프가 공손히 말하자 자일스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옆에 앉은 마체라타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날 만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까지는 밝히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유라면 굳지 밝힐 필요도 없습니다." 마체라타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아시리움의 대사제란 그야말로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가 자신을 확고히 받쳐 주던 기둥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겠습니까? 당연히 새로운 기둥이 되어주실 전하를 만나 일종의 확신을 받고 싶을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잠재우고 싶겠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자일스가 노소프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언제 어디서 만나길 바라고 있느냐?"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루지아 국에서 만나 뵙길 바라고 계시다 합니다, 전하." "그루지아 국? 나보고 그루지아 국까지 오라는 거냐?" 자일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시리움 성전에 이런저런 일이 많아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실 수 없다고 말씀하신 모양입니다.또한 시작하기도 전에 의심을 살위험이 커서 그루지아 국이 아니면 곤란하다 하셨답니다." "하지만 대체 그루지아까지 언제 간단 말이냐?"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전하. 지금 당장이라도 제 손으로 전하를 그루지아까지 모실 수 있으니까요." 자일스의 눈이 강렬하게 번득였다. "정말 네게 그런 능력이 있단 말이냐?" "예, 전하. 그리 힘들지도 않은 일입니다." 자일스와 마체라타의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입술에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 넌 놀라운 존재다, 마체라타. 널 이제야 만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구나!" 불편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노소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하, 대사제껜 뭐라 답변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거절한다해라! 날 만나고 싶다면 직접 리아잔으로 오라 전하라! 아시리움 성전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단 말이다! 내 그 때 아시리움을 떠나면서 그루지아에 대신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저... 만약 황태자전하께서 거절하시면 이런 말씀을 전하라 하셨답니다." 자일스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등을 세웠다. "전하라는 말이 무어냐?" "만약 전하께서 그루지아 국에 와 주신다면, 또 그 만남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아시리움 성전에서 전하께 위해를 가한 자에 대해 알려 드리겠다고 하셨답니다." 자일스의 온몸이 단단히 얼어붙었다.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가 경련이 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날 다치게 한 놈.... 내게 피가 거꾸로 솟는 고통과 수치를 안겨 준 놈... 그 놈이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이냐? 그 놈이 누군지 내게 알려 주겠다고 했단 말이지?" 자일스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징조를 느낀 노소프는 마른 침을 삼키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예, 전하. 틀림없습니다." 자일스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얼굴근육이 심하게 꿈틀거렸고 옅은 초록빛 눈엔 사나운 광채를 이글대고 있었다. "준비해라, 마체라타. 아무래도 그루지아에 가야 할 것 같다." -------------------------------------------------------------------제 40장. 차가운 달-------------------------------------------------------------------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가시는 거예요?" 이리스의 검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엘은 정말 귀여운 애라는 생각을 하며 싱긋 웃었다. "바르테즈 공국에 가." "예? 바르테즈요? 정말 바르테즈 공국에 가는 거예요?" 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스가 부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바르테즈에 가보고 싶어요. 거기 사람들은 다 잘 산다는데 그게 정말이에요?" "그건 모르겠어. 나도 이번이 처음 가는 거야." 엘은 가벼운 어조로 응수했다. "전엔 어디 살았는데요?" 한순간 말문이 막힌 엘이 머뭇거리자 리반이 끼어들었다. "체르몬 국에서 살았어." "우와! 그럼 체르몬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불편한 질문이 더 나오기 전에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리스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재빨리 말했다. "그런데 바젤은 왜 저렇게 잠이 많은 거야?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몸이 약해서 그래요." 이리스가 슬픈 얼굴로 바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보다." "괜찮아요. 사실 엄청난 잠꾸러기긴 하잖아요. 그래도 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진 거예요. 어렸을 땐 훨씬 심했거든요. 거의 하루종일 한 번도 눈뜨지 않는 날도 많았어요. 겁이 난 제가 막 흔들어 깨우면 그때서야 눈을 뜨고 왜 깨우느냐고 투덜거렸죠."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변한 이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이없게 또 자는 거예요. 나중엔 그러려니 할만도 한데 전 그게 안되더라고요. 자고 있는 바젤을 보고 있으면 항상 걱정이 돼요. 어느 날 갑자기... 영원히 잠에서 깨지 않을 것 같아서요." "동생을 정말 아끼는구나." "바젤은 이 세상에 절 좋아해주고 또 믿어 주는 유일한 존재거든요. 저한테는 바젤밖에 없어요." 엘이 이리스의 말에서 할머니를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귀착이었다. 그녀 역시 할머니에 대해 이리스가 바젤에게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니 말이다. 그 때 이후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난 얼마나 변한 걸까? 전혀 달라진 데가 없는 듯도 하고 완전히 변해 전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내 자신도 모르는 걸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있을까? 내 예전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난 바젤이 없으면 안돼요. 만약 바젤이 죽으면 나도 죽을 거예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은 이리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오! 이해하지 못해요! 괜히 이해하는 척하지 말아요!" 이리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엘이 놀라 흠칫할 정도로 사나웠다. "어...미,미안해." 엘이 어색하게 사과하자 이리스가 불끈 쥐고 있던 주먹을 풀더니 꼭 맞잡았다. "아니에요. 사과할 사람은 저예요. 미안해요." "서로 미안하다고 했으니 이제 웬만하면 소리 좀 지르지마. 잠이 다 달아났잖아."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리오가 투덜거리더니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미안해." "미안해요." 엘과 이리스가 동시에 말하자 리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발 걸핏하면 사과하는 그 버릇 좀 고쳐. 별것도 아닌 일에 만날 미안해 미안해, 입 아프지도 않아?" 엘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리스를 바라보자 때마침 이리스도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씩 웃음을 지었다. "이제 보니 너희 둘 꼭 남매같다. 아니, 남매가 아니라 자매가 되는 거지. 아무튼 머리 색깔이 같아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여.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른 데 말이야." 엘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리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좀 날카롭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 뾰족하다 싶을 만큼 오뚝한 코, 크고 얇은 입술. 엘의 눈에는 자신과 닮은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분위기 때문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슬퍼 보이는 분위기? 내가?" 엘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자 리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항상이라 할 순 없지만 네가 말 없이 있을 때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런 느낌을 종종 받았거든." 말을 멈춘 리오가 갑자기 목덜미를 긁적였다. "별 말도 아닌데 괜히 낯간지럽네. 대체 왜 이런 얘기가 나온 거야? 할 일도 없는데 난 다시 잠이나 청해 봐야겠다." "넌 매일 잠만 자냐?" 책에 머리를 박고 있던 리반이 못마땅한 얼굴로 리오를 바라봤다. 그는 뒤늦게 발견한 마차 보관함에서 십여권의 서적을 찾아낸 이후로 거의 온종일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럼 네 녀석은 매일 잠 안자냐? 웃긴 놈! 항상 나보다 먼저 자고 늦게 일어나는 녀석이 말이 많아." 리오는 어이없다는 리반의 시선을 받으며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엘은 잠시 키득거리다가 리반이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책을 집어 들었다. "무슨 책이야?" "어, 그거 이리 줘!" 다급히 소리친 리반이 엘의 손에서 책을 가로챘다. "무슨 책인데 그래?" "별거 아냐! 넌 몰라도 돼!" 엘의 물음에 리반이 허겁지겁 대답했다. 엘은 보라색 눈을 예리하게 반짝이며 리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리반이 질겁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나타나 있던 붉은 기가 점점 진해졌갔다.대체 어떤 책을 읽고 있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저 녀석 무슨 야한 소설 읽고 있었던 거 아니야?" 리오가 잠이 완전히 가신 얼굴로 짓궂게 말했다. 그 순간 리반의 얼굴은 물론 그 아래 목덜미 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 진짜인가 보네?" 리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등을 세웠다. "설마? 리반이... 그런 책을 읽을 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엘과 히죽거리고 있는 리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오가 음흉한 얼굴로 슬쩍 눈짓을 하자 엘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임마! 네가 뭘 읽던 관심없으니까 괜히 몸 사리고 그러지 마!" 퉁명스러운 말을 끝낸 리오가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그러자 책을 가슴에 꽉 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리반이 머뭇거리며 허리를 조심스레 펴기 시작했다. 그는 잠을 청하고 있는 리오와 관심없다는 듯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엘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이내 마음을 놓고 가슴에서 책을 떼어 냈다. 그 순간 샛눈을 뜨고 있던 리오가 펄쩍 몸을 날려 리반의 몸을 꽉 잡았다. 리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움직인 엘의 손에 책이 들린 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는데 정말 잘됐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친 엘은 표지에 적힌 책제목을 소리내어 읽었다. "금단의 열매!" "우와! 금단의 열매! 멋지다!" 리오가 숨찬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 책 이리 내놔!" 여전히 리오에게 잡혀 있는 리반이 버둥대며 소리쳤다. "어서 읽어 봐, 엘!" "알았어!" 엘은 짓궂게 웃으며 책 중간 부분을 펼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젠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요! 우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에요!' 여인의 애달픈 흐느낌에 기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오, 질비아! 내 사랑!'.... 세상에! 여주인공 이름이 질비아인가 봐! 이름이 질비아가 뭐야? 질비아가! 조금도 낭만적이지 못하잖아! 연애소설에 나오는 이름은 적어도...." "질비아든 질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빨리 다음 부분이나 읽어!" 리오가 엘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그는 리반이 몸을 빼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엘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반은 자포자기에 빠졌는지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알았어. 다음은... 아, 여기다! '오, 질비아! 내 사랑! 새벽녘 살포시 내려앉은 이슬에 청초한 몸을 떠는 한 떨기 꽃송이조차 그대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시기하는구려!'" 피식피식 웃던 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 유치할 수가! 정말 이런 말로 여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남자가 있을까? 나 같으면 이런 말을 하는 남자의 입에 먼저 주먹 한방을 크게 먹인 뒤 다시는 내 앞에 얼쩡거리지 못하게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날려 버리겠어!" 엘이 주먹을 흔들며 씩씩하게 소리치자 리오와 리반은 물론 이리스까지 천장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한편 루드비히는 입술에 보일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혀를 쯧쯧 차던 리오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네가 어련하겠냐? 입에 주먹을 날리든 엉덩이를 걷어차든 아니면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리든 다 좋으니까 제발 빨리 읽기나 해. 그 부분 말고 다른 데.... 그러니까 더 화끈한... 아니, 재미있는 부분으로." "어디가 재미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은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대충 읽어볼게. 그럼 잘 들어." 엘은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기사는 여인을 가두어둔 야속한 벽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사랑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제 가련한 사랑을 지켜 주소서!' 신의 눈부신 광채와 성스런 축복을 입은 기사는 힘차게 벽을 기어올랐다. '오, 내 사랑! 내 생명! 내 영혼! 내가 당신을 만나러 왔소! 안개와 어둠을 헤치고 당신을 위해 내가 왔소!' 기사의 달콤한 목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 여인이 갇혀 있는 첨탑에 닿았다.... 하! 말도 안돼! 첨탑을 기어오르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려고 하다간 숨이 막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걸!" 엘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세차게 코방귀를 뀌자 리반이 냉큼 소리쳤다. "그건 기사가 신의 광채와 축복을 입어서 그런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리반이 머쓱한 얼굴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그럼 계속 읽을게. 사실 별로 읽고 싶진 않지만.... 첨탑을 오르는 장면이 지루하게 나와 있어. 그 장면 내내 신의 광채와 축복을 입은 남자가 지치지도 않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고 있고. 이 부분은 빼고 기사가 첨탑을 다 올라 두 사람이 만나는 곳부터 읽을게. 자, 그럼 시작한다! 마지막 장막마저 사랑의 힘에 무너지자 기사와 여인은 신의 축복에 감사 올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기사가 천국의 샘같이 촉촉한 여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며... 그 달콤함에....흠뻑 취했다." 조금씩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엘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청중들을 곁눈으로 살폈 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만 읽으라는 말을 꺼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오와 리반은 그렇다 치고 루드비히조차 재미있다는 눈길을 그녀의 얼굴에 고정하고 있었다. 엘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며 결연히 다음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기사는 여인의 잘록한 허리를 으스러져라 안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더,더,더,더,더듬었다." 엘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는 책을 재빨리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책을 떨어뜨렸잖아! 이럴 수가! 이 일을 어째! 안타깝지만 어느 부분인지 모르니 이제 그만 해야겠다!" 비참할 정도로 어색하게 말한 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리오와 리반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리스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떨고 있었고, 심지어는 루드비히조차 쿡쿡거리고 있었다. "빨간 머리 쌍둥이! 그만 웃어! 이리스 너도! 세상에! 어떻게 루드비히까지!"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화난 척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웃음소리만 더욱 커질 뿐이었다. 몰릴 대로 몰린 엘은 궁여지책으로 자신에게 향한 활을 리반에게 돌렸다. "리반, 난 네가 이런 책을 읽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리오라면 몰라도." 그녀의 말에 리반은 물론 리오까지 단번에 웃음을 멈췄다. "뭐? 나라면 몰라도? 이거 왜 이래? 난 지금까지 세상에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몰랐단 말이야!" 리오가 맹렬히 부인하고 나섰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엘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잔뜩 얼굴을 구겼다. "그런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읽을 책이 그런 것 밖에 없었단 말이야." 엘과 마찬가지로 떨떠름하게 리오를 바라보던 리반이 잔뜩 풀이 죽은 변명조로 말했다. "그랬구나." 엘은 리반에게 은근히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무슨 말을 해도 조금도 믿지 않고, 리반 녀석이 한마디하면 '어어, 그랬구나. 난 널 철석같이 믿어. 넌 정직의 화신이야.' 이런 말이나 하고. 너 정말 이럴 수 있는 거야?" "난 그저 내 감정과 느낌에 충실할 뿐이야, 리오." 엘은 리오를 일별하고 바로 리반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그런데 네가 읽어본 다른 책도 내용이 저... '금단의 열매'와 비슷해?"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리반이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저기 있잖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엘이 리반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재미있는 책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엘을 바라보던 리반이 피식 웃으며 역시 작게 속삭였다. "그래, 알았어."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대체 무슨 얘길 나눈 거야?" 리오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엘과 리반은 비밀모의를 한 사람들처럼 은밀한 미소를 나눴다. "참! 리반, 책이 그런 것 밖에 없다고 했지? 말도 안 돼. 그럼 루드비히가 읽는 책은 대체 뭐냔...." 말끝을 흐린 엘이 루드비히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루드비히, 지금 뭐 읽고 계신 겁니까?" 엘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잠깐 천장을 바라본 다음 보라색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에게 시선을 맞췄다. "책을 읽고 있습니다." "누가 책 읽으시는지 몰라서 묻습니까? 책은 책인데 무슨 책을 읽으시냐가 궁금하단 말이지요." 엘은 긴 한숨을 내쉬는 루드비히에게 씩 웃어 보인 뒤 그가 들고 있는 책을 재빨리 가로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제목을 뚫어지게 바라본 다음 손을 내밀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얌전히 건넸다. "무슨 책인데 그래?" "책 제목이 뭔데?" 리오와 리반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차례로 물었다. "역사적 선험성으로서 신학이 타 학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리적 추론과 고찰" 엘은 시무룩한 얼굴로 맥없이 대답했다. 리오와 리반의 흥겹던 기색이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시끄럽던 마차 안에 묵직한 한숨이 짙게 깔렸다. ------------------------------------------------------------------- "변변하진 않지만 많이 드십시오." 에지몬트는 심하게 찌그러진 투박한 그릇을 기쁘게 받아 들었다. "고맙게 먹겠소." 저마다 손에 그릇 하나씩을 들고 있는 기사들은 누가 빼앗아 갈까 두려운 사람처럼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스튜를 후후 불어가며 바삐 떠먹었다. 천상의 음식을 음미하는 듯 카셀의 입에선 만족스런 신음이 길게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많이 시장하셨나 보군요. 대접할만한 다른 음식은 없고 이거라도 더 드십시오." 그들에게 스튜를 퍼 준 노인이 바짝 말린 딱딱한 육포를 꺼내 놓으며 말했다. 작은 키에 앙상할 정도로 마른 노인은 머리가 거의 벗겨져 가장가리에만 백발이 조금 남아있었고 움푹 들어간 뺨과 눈가엔 힘들게 살아온 세월의 흔적인 듯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하지만 짙은 갈색 눈동자엔 따뜻해 보이는 인정이 가득했다. "그런데 기사님들은 이 곳 데클란 평원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저희같은 놈들이야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다 이 곳까지 흘러 들어왔지만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전에 램에서 살 땐 기사님들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데클란에 발을 들여 놓은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거든요." 노인의 아들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볼 일이 있어서 그렇소." 사일러스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무뚝뚝하게 말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하자 제러드가 재빨리 말을 꺼냈다. "이 근처엔 그나마 풀이 좀 나 있군.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마른 먼지만 풀풀 날렸는데 말이오." "요 일대와 저기 서쪽으로 쭉 내려가면 나오는 곳하고 또 거기서 나흘쯤 걸리는 반대편엔 꽤 넓은 초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황무지에 비해 워낙 면적이 작아 우리같은 사람들을 빼면 죄다 데클란 평원 전부가 바싹 말라붙은 소똥처럼 별 볼일 없는 곳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데클란 평원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땅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점점 날이 추워지니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겠어." 울타리 한쪽 기둥이 위태위태하다며 고치고 오겠다던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르르 몸을 떨며 노인 옆에 주저앉았다. "이 친구는 제 먼 친척인데 7년인가 8년 전부터 우리 부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와 무슨무슨 관계가 된다는데 들어도 모르겠으니..." "나참! 그걸 또 말해 줘야 돼? 그러니까 자네 할아버지의 큰아버지가 내 할머니의..." "할아버지고 큰아버지고 간에 제발 그만하게. 먹은 음식 얹히게 하지 말고." 노인이 말을 가로채자 남자가 크게 코방귀를 뀌더니 육포를 집어 들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그런데 키우는 가축은 몇 마리나 되는 거요?" 제러드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이 사이를 후비고 있던 노인이 고개 를 돌려 찌꺼기를 퉤 뱉어 낸 후 대답했다. "몇 마리 안 됩니다. 들소 다섯 마리와 서른 마리가 조금 넘는 양을 치고 있습니다." 말과는 달리 노인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배어있었다. "대접 잘 받았소." 사일러스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 지금 떠나시려는 겁니까?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는데요?" 중년남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 더 이동하려고 하오." "위험하실 텐데요. 그러지 마시고 오늘 밤은 이 곳에서 머무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떠나시면 되시지 않습니까? 저희도 동이 틀 무렵엔 일어나니까요." 노인의 만류에 다섯 명의 기사들이 은근한 기대감을 드러내며 사일러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사일러스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자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정 그러시면 할 수 없군요. 조심해 가십시오, 기사님들." 인사말을 건넨 기사들이 매어 둔 말들에게 다가갔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말 등에 오르려 하던 에지몬트가 가까이 있던 카셀에게 고삐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그는 카셀이 얼떨결에 고삐를 받아 들자 즉시 몸을 돌려 불가에 앉아 있는 부자에게 다가갔다. "혹시 요 근래 마차 본 적 있소?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꽤 고급스러운 마찬데... 대부분은 검은 색이지만 곳곳에 붉은 색을 입힌 마차요. 이렇게 광활한 곳에서 봤다는 게 더 이상할 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거요." "이 곳에서 마차를 볼 리가 있나요? 데클란 평원에서 마차를 탄다는 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입니다요. 아마 여기서 조기 야트막한 구릉까지 가기도 전에 바퀴가 빠지든지 마차가 부숴지든지 할걸요?" 노인이 터무니없다는 얼굴로 열심히 말을 늘어놨다. "알았소." 예상한 대로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던 에지몬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자네 혹시 요 근래 마차 본 적 있나?" 노인이 천막에서 담요를 갖고 나오는 수염 난 남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당연히 못 봤지." 냉큼 대답한 남자가 슬쩍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바퀴 자국은 본 것 같기도 한데. 수레바퀴인지 마차바퀴인지는 모르지만... 아니, 그 게 정말 바퀴자국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근데 그건 왜 물어?" "어디서 봤소? 바퀴자국 말이오!" 에지몬트가 다급히 묻자 남자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그러니까... 아마 여기서 저기 동쪽으로 좀 내려간 곳에서 봤을 겁니다. 아, 예 맞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방향은 저기가 틀림없을 겁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참! 그 자국을 본 게 언제요?" "이틀 전... 그림자가 아주 짧았으니까 아마 정오를 막 지난 때였을 겁니다." 에지몬트는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소리친 후 그를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방향이 약간 어긋났습니다!" "들었다! 어서 말에 올라라!" 사일러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말에 훌쩍 올라타는 에지몬트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널 데려와서 다행이다, 에지몬트." 문이 열리며 호리호리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문 가에서 잠시 멈췄다가 촛불이 밝혀진 육중한 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촛불이 일렁이며 높은 광대뼈 아래의 움푹 패인 곳에 그늘을 만들었고 완고하면서도 차가워 보이는 회색 눈동자를 칼날같은 예리함으로 번쩍이게 했다. 관자놀이 언저리에는 가는 혈관들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으며 눈가와 입 주위엔 깊고 가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는 긴 잿빛의 모직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날렵한 회색 눈썹과 높은 이마 뒤로 가지런히 빗어 넘긴 회색 머리카락이 금욕적인 인상을 더해줘 수도사나 순례자같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필리프 대사제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던 자일스는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례한 자일스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낀 필리프 대사제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뾰족하고 딱딱하게 생긴 코 위의 가죽이 모아지며 콧날 위의 양 미간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먼길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말한 필리프가 의자에 앉으려다 멈칫하며 몸을 세웠다. 그의 눈길은 자일스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마체라타라 합니다." 팔걸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마체라타가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반갑습니다, 대사제님." 마체라타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예법을 지키지 않은 인사에 필리프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기분이 상했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필리프는 자일스 황태자가 자신을 떠보려 하거나 그의 심사를 흐리게 만들어 유리한 입장에 서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히 이런 자리에까지 자신의 정부를 데려온 것이리라. 필리프 대사제가 마체라타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일스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흘긋 그녀를 돌아봤다. 사납게 눈을 빛내고 있으리라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마체라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절 공격한 범인의 정체를 아신다 하셨지요?" 자일스는 필리프 대사제가 앞에 자리잡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필리프 대사제가 반사적으로 자일스의 오른쪽 눈에 시선을 가져갔다. 곧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열리며 경악이 나타났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자일스는 보란 듯이 오른팔을 탁자 위에 올렸다. "어,어떻게? 어떻게... 되신..." 자일스의 초록빛 눈이 만족스럽게 반짝이며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이미 수도 없이 많이 겪어 본 일이지만 그의 변한 모습을 보고 뒤로 넘어갈 듯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원래의 제 모습을 되찾은 것 뿐이니까요." 자일스는 여유있는 표정을 지으며 편안히 등을 기댔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흔들리던 필리프의 회색 눈이 빠르게 냉정을 찾아갔다. 곧 그는 의례적인 미소를 띤 얼굴로 점잖게 말했다. "진심으로 경축 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감히 어떤 액운이 전하께 미약하게나마 위해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흡족한 얼굴로 필리프의 말을 듣고 있던 자일스가 매끄럽게 응수했다. 하지만 이내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엔 애써 억누른 분노와 긴장이 엷게 깔려 있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그 놈이 누구입니까?" 필리프가 마체라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여인부터 물러가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자일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필리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차피 마체라타도 알게 될 수 밖에 없는 얘기입니다. 마체라타의 손을 빌려 놈을 잡게 될 테 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마체라타는 믿으셔도 됩니다." 자일스가 조금도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잠시 긴장 어린 침묵이 이어졌다. 마체라타가 느릿느릿 다가와 자일스의 옆에 섰을 때 마음 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던 필리프가 결심하듯 얼굴을 치켜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전하를 공격한 범인은 놀랍게도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부인, 즉 아시리움 성전에 소속된 자라는 말씀이군요. 저 역시 그 정도의 마법사라면 어떤 식으로든 아시리움 성전과 연관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자일스의 턱은 단단히 뭉쳐 있었다. "그럼 말씀드리기가 한결 수월해지겠군요. 너무 엄청난 사실이라 어떻게 얘길 꺼내야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 위해를 가한 자는 다름 아닌..." 필리프는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듯 말을 끌었다. 그리고 자일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마디한마디 정확하게 발음했다.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 바로 아시리움 성전의 클레르몽 대사제입니다." "클레르몽? 그가 누구요? 누군데 날, 대체 누군데 나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흥분을 못이긴 자일스가 벌떡 일어서며 악을 썼다. "차근차근 말씀드릴 테니 고정하시고 앉으십시오." 다짜고짜 나온 모욕적인 말투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필리프가 얼른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자일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몇 번 내쉰 다음 한결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날밤 제가 본 마법사는 클레르몽 대사제의 하수인이 되겠군요." "하수인이 아니라 단순히 사주를 받은 자입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러니까 어떤 증거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전하. 그렇지 않다면 범인이 아시리움의 대사제란 사실을 제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증거는 물론이거니와 클레르몽 대사제의 짓이란 걸 증명해 줄 사람까지 있습니다." 필리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자일스가 숨을 죽이고 상체를 기울였다. "클레르몽 대사제가 이번 일을 계획하며 작성한 자필문서와 일을 사주한 마법사에게 보내는 서찰이 있습니다. 그 서찰엔 클레르몽 대사제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증명해 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문서와 서찰을 제게 가져온 사람, 클레르몽 대사제가 천인 공노할 죄를 저지르는 걸 직접 눈으로 본 사람... 바로 그의 수석시종입니다. 물론 더 이상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필리프는 광포하게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자일스 황태자가 자신의 말을 의심없이 받아들였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는 필리프의 눈엔 애써 숨기려 했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만족감과 흥분이 어려있었다. 눈의 가시같은 클레르몽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그 자신도 의외일 정도로 손쉬운 일이었다. 아시리움의 대사제인 필리프에게 문서위조 따위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클레르몽의 수석시종을 매수하는 것도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수석시종을 시켜 위조한 서찰에 인장을 찍어 오게 하고 자일스 황태자에게 말 몇 마디를 흘린 것으로 그가 할 일은 끝난 거와 진배없었다. 나머지는 자일스 황태자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말이다. 클레르몽, 이제 네 놈은 끝장이다. 내게 저지른 건방진 짓거리를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 해 주겠다. 필리프는 자일스 황태자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포악하고 무자비한 성격은 훨씬 전부터 익히 알아 온 사실이었다. "대사제님, 궁금한 게 한가지 있는데.... 감히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마체라타가 희미한 미소가 그려진 얼굴로 말했다. 필리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르몽 대사제께서 그런 일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나 되시는 분이 왜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 위해를 가하신 건지.... 제 생각으로는 머리가 완전히 돌지 않았으면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작자는 없을 것 같은 데 말입니다." 마체라타의 말이 끝나자 자일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필리프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런, 그 얘기부터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일이 워낙 중대한지라 나부터 경황망조(驚惶罔措)하고 있었나 보오. 깨우쳐 줘서 고맙소." 필리프는 마체라타를 바라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자일스에게 옮겼다. "황태자전하께서도 분명 저 여인과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럼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간단하게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클레르몽 대사제는 리아잔 제국 출신입니다. 스마라는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지방영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하더군요. 그런 자가 어떻게 아시리움의 대사제가 될 수 있었는지..." 필리프의 얼굴에 미처 감추지 못한 경멸감이 지나갔다. "각설하고, 클레르몽 대사제는 그 곳을 떠난지 오래지만 그의 일가친척들은 스마에 계속 남아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3년 전에 일어났던, 그러니까 일부 귀족들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파비앵 백작을 모함한 사건은 아마 전하께서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일로 인해 파비앵 백작은 물론 그와 가까웠던 모든 귀족들과 그 친족들까지 참형을 받은 사실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들 중 클레르몽 대사제의 피붙이들이 포함되어있었다는 건 아마 모르셨을 겁니다." 필리프는 클레르몽의 과거에 이런 일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에 흡족함을 느끼며 겉으로는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마 그 일로 리아잔 제국에 앙심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말입니다."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였군."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자일스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시선을 옮겨 필리프를 바라봤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무엇이라도 말씀하십시오.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원하는 걸 말씀 드리기 전에 전하께 직접 확답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아시리움을 손에 넣고 싶으십니까? 일이 잘못된다면 최악의 경우 전하의 자리조차 지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 결심을 바꾸지 않으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시리움 성전에 머무르면서 리아잔 제국이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시리움이 버티고 있는 한... 리아잔의 황제란 자리도 절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일을 서두르시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또 신중하게 진행시키셔야 합니다. 인내심을 요하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격적인 일은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 연후에 시작하셔야 합니다. 또 한가지, 전하께서 일을 맡기신 호르헤 공작은 이 정도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못됩니다." 자일스가 동감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땅한 인물이 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에 자일스가 눈을 크게 뜨고 필리프 대사제를 살폈다. 그러자 그가 자일스의 시선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전하의 물음에 지금 답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단 한가지... 그건 바로 법황의 자리입니다." 지평선으로부터 서늘한 빛이 서서히 하늘을 덮쳐 왔다. 창백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아래 데클란 평원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 품었던 온기가 급속도로 사라지자 광활한 대지는 은백색의 안개를 피어 올려 몸을 덮었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의 데클란 평원은 황량하고 삭막하지만 현실 세상 같지 않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오직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평원 한가운데 강렬한 붉은 빛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며 안개 를 꿰뚫었다. 눈 깜짝할 새 붉은 빛이 자취를 감추자 태초부터 그 곳에 머무른 듯 평원의 일부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보였다. 삼 십여개의 그림자는 전부 검은 색 수도사복을 발목아래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후드를 올려 쓰고 있었다. 언뜻 보면 보통의 수도사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에게선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섬뜩함은 그들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은빛가면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가운 달빛을 받아 번쩍이며 금속성을 띠고 있는 얇은 은빛가면은 피부처럼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듯 섬세하면서도 한편으론 소름끼칠 만큼 지독하게 딱딱했다. "느껴지는가?" 억양없는 굵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동안 귀가 멍해질 정도의 압도적인 고요가 흐른 뒤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어렴풋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확실한 기운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다시 이동해서 정확한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오늘밤 안으로 모든 걸 마무리 짓는다." 갑자기 나타난 불그스름한 빛이 점점 진해지며 그들의 몸을 둥글게 감쌌다. 수도사복이 가볍게 팔랑거리며 붉게 물든 안개를 휘저었다. 높이 솟아오른 붉은 빛이 분노하듯 맹렬히 이글거린 순간 그들의 모습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요리 솜씨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맛있는 건 지금껏 먹어 본 적이 없어! 정말 대단해!" 연이어 감탄사를 터뜨리는 리오를 흘긋 쳐다본 이리스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별 것도 아닌데요." 엘은 바닥에 그릇을 내려 놓으며 이리스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아니야, 정말 맛있어. 지금까지 식사는 딱딱하거나 눅눅한 게 전부였거든. 이렇게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 "나도 마찬가지야. 고맙다, 이리스." 리반까지 거들고 나서자 이리스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맛있는 식사도 했겠다, 소화도 시킬 겸 좀 걷는 게 어때?" 리오가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엘을 바라봤다. "웬일이야? 배부르면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네가." 엘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야. 피곤할 때만 그랬지. 그럴 땐 팔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으니까." "오늘은 내가 그래.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까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 같아." 엘은 여기저리 결리는 어깨와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또 뒷정리도 해야 돼. 오늘 당번이 나란 말이야. 그러니 이리스나 리반하고 가." 리오가 재빨리 발끝으로 리반의 다리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리반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갔다 와.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고맙다, 리반. 말 들었지? 어서 일어나." 엘은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리오를 따라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야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엘을 마주보고 섰다. "저... 말이야..." 리오가 머뭇거리며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괜히 쓸어넘겼다. "지난 번 해준다던 중요한 말 하려는 거야?" "어? 어어.... 그래." 흠칫한 리오가 대충 얼버무리듯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인데 꺼내기가 그렇게 힘들어?" 갑자기 리오가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주먹 쥔 손을 엘에게 불쑥 내밀었다. 엘은 어리둥절한 눈을 리오의 주먹에서 그의 얼굴로 옮겼다. "뭐 하는 거야?" 리오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엘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색색의 돌이 꿰어져 있는 팔찌를 올려 놓았다.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이게 뭔데?" "보면 알잖아." "그래, 팔찌라는 건 알겠어. 근데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그건 쥬엘라야. 그냥 팔찌가 아니야." 리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쥬엘라." 엘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음미하듯 중얼거렸다. "모양이 좀... 그렇지? 워낙 마을이 작아서 변변한 게 없더라고." 리오는 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지난번에 마을에 간 이유가 이거였어?" 엘이 그녀의 얼굴에 꽂혀 있던 리오의 시선을 붙잡았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심심해서 구경이나 할까 하고... 그러다 우연히 그걸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네 생각이 나서... 그래서 산 거야." 리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걸 보고 내 생각을 했다니, 진짜 엉뚱하다니까." 엘이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너 내가 이런 장신구한 거 본 적이나 있어? 내 손목에 이런 알록달록한 팔찌가... 아니, 쥬엘라가 어울리기나 할 것 같아? 거치적거리기나 해서 괜히 검술에 방해나 되겠지. 정 그렇게 돈이 쓰고 싶으면 괜히 이런 데 쓰지 말고 검이나 하나 사 줘. 검이 얼마나 엉망인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게 검인지 지팡이인지 모를 정도라니까." 엘은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는 리오를 발견하고 아차 싶은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든다는 말이 아니야, 리오. 너도 알다시피 난 장신구를 해본 적이 거의 없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이거 정말 예쁘다, 리오." "그거 이리 줘!" 엘이 피하기도 전에 리오가 쥬엘라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 즉시 팔을 크게 휘둘러 쥬엘라를 멀리 던져 버렸다. "리오!" 놀란 엘이 크게 소리쳤다. "젠장!" 버럭 욕설을 뱉어 낸 리오가 사나운 동작으로 엘을 지나쳤다. "리오, 너 정말 이럴래?" 엘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리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하고는... 누가 네 녀석의 신부가 될지 정말 걱정된다. 아마 그 불쌍한 여자는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주먹을 부르르 떨어야 할거다. 지금 나처럼!" 엘은 쥬엘라가 떨어졌음직한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야양지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비춰 사물을 구분하는 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넓은 곳에서 작은 팔찌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손과 발이 싸늘하게 얼었고 허리와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와 본 리반과 이리스가- 리오는 잔뜩 심술을 부리다 잠이 들었다고 한다- 찾는 걸 도왔지만 쥬엘라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엘은 자신도 금방 따라가겠다고 말하며 리반과 이리스를 반강제적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몸을 구부렸다. "내 이걸 찾기만 하면 그 녀석 입에 확 쑤셔 넣어 줘야지!" 엘은 이를 갈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시린 바람이 시퍼렇게 얼은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수백개의 가느다란 바늘에 찔린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렸다.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히자 엘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을 못 참고 버럭 소리쳤다. "제기랄! 이제 나도 몰라!" 엘은 몸을 세우려 하다 흠칫하며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차디차게 얼어붙었다. 수도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넓은 원을 그리듯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달빛에 번득이는 섬뜩한 은색가면이 뒷골을 쭈뼛 서게 했다. 마치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 있는 사형집행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바로 너로구나." 음산한 목소리가 저주받은 낙인처럼 엘에게 내리 꽂혔다. "당신들... 당신들 대체 누구예요? 뭘 원하는 거예요?" 정적이 되돌아왔다. 엘은 절대적인 긴장의 어둠 속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시리움 성전을 나오면서 항상 엘을 따라다녔던 두려움이 그녀 앞에 뚜렷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날 죽일 건가요?" 엘은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추적자 너머 어둠에 싸인 평원을 바라봤다. "아니다, 우린 널 아시리움 성전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녀의 정면에 서 있는 추적자가 말했다. 엘은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조용한 숨결 속에 섞여 들었다. 이상하게 침착하고 초연한 기분이었다. 무감각했다. 어차피 겪게 될 일이라는 자포자기한 생각이 그녀의 전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엘은 이런 일을 대비해 짐 밑바닥에 넣어 둔 물건 아래에 그녀를 대신해서 리자드에게 전해 달라는 쪽지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니 그녀가 없더라도 물건은 리자드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친구들한테 인사라도 하고 가면 안 될까요?" 엘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그녀에게 다가오던 추적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내가 갑자기 없어지면 다들 무척 걱정할 거예요. 이 넓은 곳을 온통 헤매며 날 찾아다닐지도 몰라요." "그들을 처리하기 전에 잠깐 시간을 주겠다." 단조로운 중얼거림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엘을 조여 왔다. 그녀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뒷목에 난 솜털이 곤두서며 등뼈를 따라 한기가 치솟았다. "내 친구들을 죽인다는 건가요?" "우리 모습을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살려 둘 수 없다." "하지만 보지 못했잖아요. 저기서 당신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엘은 악을 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면 리오와 리반, 루드비히, 그리고 이리스까지 이 곳을 향해 다가올 게 분명했다. "우리 존재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용납할 수 없다." 억양없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엘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거다." 그녀의 신경이 하나하나 깨어나기 시작했다. 가슴 고동이 빨라지며 근육이 급속도로 단단히 뭉쳐졌다. "네가 우릴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거야, 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 아닌가." 엘은 힘차게 땅을 차며 추적자들의 우두머리일 게 분명한 중앙의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검 끝이 남자의 심장을 파고들려는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걸 눈치채자마자 엘은 본능적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녀의 발이 있던 곳에 꽂힌 작은 표창이 눈을 스쳐 갔다. 엘은 표창의 중심에서 뭉글거리며 피어오르는 탁한 연기를 재빨리 피했다. 그리고 몸을 탄력적으로 돌려 어느새 그녀의 뒤쪽에 나타나 있는 남자를 향해 번개같이 검을 움직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엘은 뒤로 몸을 돌리려다 다시 한 번 똑같은 자리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무언가가 베어지는 느낌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엘은 재빨리 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핏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곳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그 순간 밝은 빛 덩어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몸 전체가 단단히 묶인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엘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고통이 덮치리란 생각에 본능적으로 근육이 굳어졌지만 그녀를 옥죄고 있는 빛이 몸을 보호해 주었는지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들은 저기 있는 자들을 서둘러 처리해라." 기를 쓰며 일어나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 오르고 피가 솟구칠 것 같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엘은 몸을 비틀며 고통스럽게 소리쳤다. "도망 가! 어서 도망 가!" 엘의 목소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누르고 있는 듯 겨우 짜낸 외침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갑자기 그녀를 짓누르던 압박이 깨끗이 사라졌다. 엘은 그 즉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지켜야 될 사람들을 향해 뛰어가려던 엘은 이상한 느낌에 흠칫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더 이상 추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 엘은 뒤를 돌아다 봤다. 그녀의 눈을 점령한 건 하늘까지 닿을 듯 높이 솟아 있는 투명한 막이었다. 광활한 땅을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막은 세상을 둘로 나눠 추적자들과 그녀 사이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장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엘은 무엇인가 익숙한 것이 눈을 스치는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투명막이 조금씩 다가들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는 실버블론드가 시선을 붙잡았다. 엘은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무너지는 순간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추적자들에게 둘러싸였던 바로 그 곳에 루드비히가 서 있었다. "루드비히!" 엘은 미친 듯이 그를 부르며 막을 뚫기라도 하듯 세차게 몸을 부딪쳤다. 하지만 막은 그녀를 밖으로 튕겨지게 할 뿐이었다.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엘을 바라봤다. "물러나십시오!" 단호한 목소리가 막을 뚫고 전해졌다. "루드비히! 거기 있으면 안돼요! 빨리 도망가요! 빨리요!" 엘은 주먹으로 막을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어서 물러나십시오!" 냉기가 감도는 어조엔 주위를 압도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찍어 누를 듯 강렬하게 번득였다. 그 눈빛이 주변을 감싸고 그녀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엘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제 41장. 파문(波紋)-------------------------------------------------------------------마치 살아 있는 듯한 밤이었다. 이슬 내린 대지를 은빛으로 물들인 달빛이 그 끝자락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워 지평선을 이루었고, 광활한 평원을 뒤덮은 고요를 밀어내려는 듯 심술궂은 바람이 쉴 새없이 불어왔다. 루드비히는 엘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추적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주위를 둘러싼 추적자들은 미동없이 서서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곳에서 목표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신경은 앞을 가로막은 존재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감히 우리 일에 끼어 든 넌 누구냐?" 추적자 중 한 명이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추적자들의 우두머리가 그에게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번개같이 팔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추적자가 입술을 채 다물지 못한 채 피가 솟구치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곧 목 깊숙이 박힌 가느다란 표창에서 진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추적자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모두 말조심해라!" 질척한 액체가 땅에 스며들어 그 흔적조차 희미해졌을 때 숨죽인 추적자들을 향해 우두머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절제있는 동작으로 은빛 가면을 벗으며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미천한 종 사바호, 성스러운 법황 성하께 경배 올립니다." 우두머리의 말이 끝나자 추적자들에게서 경악에 찬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곧 급히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추적자들을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 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저희는 아시리움을 능멸한 중죄인을 잡아 아시리움 성전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이 곳에 왔습니다, 성하." 사바호가 공손히 대답했다. "중죄인이라...."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루드비히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넓게 펼쳐진 은빛 평원을 바라봤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짧고 낯선 언어가 튀어나오자 푸르스름한 빛이 주위를 감쌌다. 빛은 루드비히와 추적자들을 까마득하게 먼 평원의 끝부분으로 옮겨다 놓은 후 안개처럼 흩어졌다. "너희들이 찾는 중죄인은 이 곳에 없다." 추적자들이 공간이동을 눈치채고 긴장된 얼굴을 들었을 때 루드비히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서,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드비히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추적자들을 천천히 둘러본 후, 질문을 던진 추적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제대로 못 들었다면 다시 한 번 말해주지. 데클란 평원엔 너희들이 찾는 죄인이 없다고 말했 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에게 꽂힌 위압적인 시선을 느낀 추적자의 입에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진땀이 솟는 걸 느끼며 몇 번 깊은 숨을 몰아쉰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성하,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조금 전 저희가 잡으려던 아이가 그 중죄인이 틀림없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네 목숨을 걸겠다고?" 루드비히의 입술에 냉혹한 미소가 그려지자 일순 강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추적자들이 숨을 죽이며 잔뜩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은 이는 오직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바호뿐이었다. 그는 처음 루드비히 앞에 무릎 꿇었던 그 자세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루드비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말이 네 하찮은 목숨보다 못하다.... 그런 말이냐?" "아닙니다, 성하!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찌 제가,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마음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어조에 실린 매서운 경고를 느낀 추적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리고 간담을 서늘하게하는 은회색 눈을 피해 차가운 흙바닥에 이마가 닿을 때까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얼굴을 흥건히 적신 끈적이는 땀방울이 벌레처럼 기어 내려 메마른 흙을 적셨다. 그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들릴듯 말듯 낮은 한숨을 흘리며 시선을 올렸다. "오늘밤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라. 너희는 이 곳에서 죄인은 물론 나 역시 보지 못했다." 망연자실해진 추적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어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법황 성하의 뜻을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추적자 한 명이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아시리움 성전으로 돌아가라. 가서 어디에서도 죄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해라." 혼란스런 침묵을 깨며 사바호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성하,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죄인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건 그가 이미 죽음을 맞았거나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경우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해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죄인의 시체라도, 아니, 그의 뼛조각이라도 가져가야 합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나타났다. "잘 들어라,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 앞엔 두 갈래의 길이있다. 내 말을 따르든지 아니면 아시리움의 추적자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든지." "성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추적자 한 명이 다급히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불안정한 걸음을 옮긴 추적자가 루드비히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옷자락 끝에 복종의 입맞춤을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다른 추적자들도 차례로 루드비히의 옷자락에 입을 맞춘 다음 한쪽으로 물러섰다. 남아있는 건 오직 사바호뿐이었다. 그는 숨죽인 추적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못 박힌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질식할 듯한 침묵을 깨며 사바호가 딱딱한 입술을 움직였다. "저 역시 성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청하옵건데 아시리움 성전으로 돌아가라 하시는 명령을 조금만 늦춰주십시오. 추적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죄인을 찾을 수 없었다는 보고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아시리움의 추적자로서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성하." "알겠다, 사바호. 시간을 재촉하진 않을 테니 네 판단대로 움직여라." "감사히 성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사바호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얼굴을 들었다. "목숨 걸고 성하께 꼭 올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는 루드비히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격앙된 어투로 말을 시작했다. "성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제가 감히 판단하고 관여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 주제넘은 행동이 성하의 노여움을 사리란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하. 오늘 제 앞에 계신 성하는 예전의 그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모시던 분은, 제가 지금껏 목숨 바쳐 따르던 분은 이렇듯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시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바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예전으로 돌아오십시오, 성하. 아시리움을 위해, 아니, 성하 자신을 위해 본래의 모습을 찾으십시오." 루드비히의 입술에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얇은 미소가 번졌다. "내 자신을 위해 본래의 모습을 찾으라고?" 지극히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엔 섬뜩할 정도의 위험이 담겨있었다. 사바호는 냉혹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과 마주친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살지 못하리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나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다. 먼 옛날, 생전 처음 자신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 그에게 매혹되고 마음 속으로 그를 자신의 주인으로 삼았을 때부터 사바호는 그를 위해 죽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사라져라!" 입술을 굳게 다물고 사바호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에게 내려질 죽 음을 기다리고 있던 사바호는 뜻밖의 말에 놀라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서,성하!" "꺼지라고 했다!" 한층 매섭게 명령을 내린 루드비히가 사바호를 외면하듯 몸을 돌렸다. 그 유연한 움직임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억눌린 감정이 배어있었다. 사바호는 섬세한 얼음조각처럼 은은하면서도 서늘하게 빛나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추적자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바호를 보며 참았던 숨을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한꺼번에 몰려든 짙은 안도감이 그들로 하여금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끼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만 싶은 추적자들은 등을 돌리고 있는 루드비히를 향해 서둘러 머리를 숙였다. 다음 순간 붉은 빛이 작렬하며 그들의 모습이 일제히 사라졌다. 싸늘한 먼지바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살갗에 매섭게 부딪쳤다. [물러나십시오!]귀를 가득 채운 바람소리에 섞여 다시 한 번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맹렬히 고동쳤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머리가 화끈거렸다. 돌아보지마! 망설이지마! 뒤를 돌아본다면.... 그래서 루드비히를 본다면 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야.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 엘은 격렬히 흔들리는 불꽃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달려야 한다는 말만 연거푸 되뇌었다. "리,리오! 리반!" 엘이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힘겹게 외치자 리반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녀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모포를 걷고 엉거주춤 다리를 세웠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서둘러 뛰어간 리반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엘의 팔을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 "빠,빨리... 가야 해." "가다니, 어딜?" 엘은 어리둥절해진 리반을 지나쳐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격렬히 리오를 흔들자 귀찮다는 신음을 흘리며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엘은 리오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리오, 일어나! 빨리! 추적자들!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이 왔어!" 얼음물을 뒤집어 쓴것처럼 리오의 전신이 뻣뻣해 지더니 다음 순간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 추적자들이 어디 있어?" 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리오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시간없어, 리오! 빨리 도망쳐야 돼! 잡히면 너희들 모두 죽게 될 거야!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할 거라고!" "난 마차를 준비시킬게! 너희는 사제님과 첸을 찾아!" 말을 매어 둔 곳을 향해 달려가며 리반이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첸은 네가 찾아, 리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 아주 멀리,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해!" 리오가 막 내달리려는 엘의 팔을 움켜잡아 돌려 세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넌 어디 가려는 거야?" "루드비히한테! 지금 루드비히가 추적자들과 함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네 발로 추적자들에게 걸어가겠다는 거야?" 리오가 이를 갈며 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놔, 리오!" 엘이 팔을 비틀자 리오가 으스러져라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안 돼! 넌 우리와 함께 가야 해! 널 남겨 놓고는 한발도 움직일 수 없어!" "나도 금방 따라갈게, 리오!" "거짓말하지마! 젠장! 거짓말하지 말라고!" 얼굴이 벌게진 리오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흥분과 두려움에 몰려있던 엘이 악을 써댔다. "이 거 놔! 루드비히가 죽는단 말이야! 루드비히가 죽는다고!" "네가 가서 어떻게 하려고? 둘이 같이 죽으려고? 그 사제님과 함께 죽겠다는 거야? 그런 거야?" "나도 몰라! 하지만 루드비히 혼자 놔둘 수는 없어! 절대!" 엘은 리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그가 다시 팔을 내밀 새도 주지 않고 어둠을 향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젠장! 사제님이 그걸 바라실 것 같아? 잘 돌아왔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실 것 같아? 정신 차려, 멍청아! 네가 이러면 우리 모두 다 함께 죽게 되는 거란 말이야!" 리오가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그의 말이 얼음조각처럼 가슴에 박혀들자 엘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리오의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되돌아오는 걸 원할 루드비히가 아니라는 것. 지금 루드비히에게 간다면 모두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받아들이고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진실이었다. 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다 함께 죽는 거라고! 알아들었어, 멍청아? 알아들었느냐고?" "그래, 알아들었어!" 엘은 버럭 고함을 지른 다음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힘껏 깨물며 몸을 돌렸다. "빨리 첸을 찾아, 리오. 내가 이리스와 바젤을 깨워 준비시킬 테니까. 첸을 못 찾을 것 같으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돌아와." "너, 설마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내가 없는 틈에 멍청한 짓 하려는 건 아닌 거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리오가 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럴 생각없어." 엘은 목에서 겨우 짜낸 것 같이 거칠고 탁한 어조로 말하며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거친 달음박질 소리와 첸을 부르는 다급한 외침이 조금씩 멀어졌다. 엘이 다가가자 마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리반이 당황한 얼굴을 그녀에게 향했다. "이리스와 바젤이 없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이리스! 바젤!" 엘은 두 사람을 소리쳐 부르며 반쯤 열려 있는 마차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하지만 리반의 말대로 마차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딜 간 걸까?" 리반이 조금 떨리는 어투로 다급히 물었다. "보이진 않지만 이 밤중에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내가 두 사람을 찾아볼게." 엘은 주위를 살펴보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추적자들이 나타날 것 같다는 초조함에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아니야, 알렉스! 이리스와 바젤은 내가 찾을 테니, 넌 마차를 좀 살펴줘. 말을 마차에 매달긴 했는데 처음 해본 거라 맞게 했는지 잘 모르겠어." "알았어!" 엘은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마차와 말 모두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리반이 두 사람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리오가 뛰어간 방향과 반대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엘은 그 즉시 말 가까이 다가갔다. 주위를 감도는 다급하고 두려운 공기를 느꼈는지 세 마리 말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안한 듯 땅을 차고 있었다. "괜찮아. 진정해." 엘은 부드럽게 말을 달래며 말과 마차의 연결부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가 눈매를 좁히며 한층 깊숙이 고개를 숙였을 때 뒤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엘은 저만치 떨어진 모닥불 가까이 서 있는 이리스를 발견하고 몸을 바로 잡았다. "이리스, 거기 있었구나. 바젤은 어디 있는 거야? 빨리 여기서 피해야 돼, 이리스." 다급한 외침이 공기를 울렸지만 이리스의 얼굴엔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엘은 이리스가 바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린 거라 생각하며 크게 소리쳤다. "무서워 하지 말고 마차에 타고 있어, 이리스! 바젤은 내가 찾아올게!" 그녀가 막 걸음을 떼려 했을 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다. 바젤은 네가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바젤을 귀찮게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엘은 귀를 의심하며 이리스에게 몸을 돌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과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낯선 분위기가 엘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리스?" 조소가 희미하게 드러난 작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건가? 아니, 정말 모르고 있는 거로군." 이리스의 목소리는 음울할 정도로 낮고 거칠었다. 엘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리스를 살피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리스?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눈에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 네가 모르는 게 바로 그거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일을 마무리지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멍청하고 무기력한 여자애놀이가 이젠 재미없어졌다. 상상외로 흥미로운 시간이었지만 이쯤에서 끝맺을 생각이다."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엘은 강렬히 파고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뻣뻣한 동작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너도 아시리움에서..." "널 잡기위해 아시리움에서 날 보낸 거냐고 묻는 거냐?" 이리스의 입술이 비틀어지며 선명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난 아시리움에 목을 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대체 네 정체가 뭐야?" 엘은 살짝 떨리는 어조로 한자한자 정확히 발음했다. 그녀를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글쎄... 과연 내 정체가 뭘까? 네가 지금껏 알고 있던 불쌍한 고아소녀? 쓰레기들에게 잡혀 매를 맞는 비참한 짐승?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력한 벌레? 아니면.... 네 목숨을 거둘 죽음의 사자?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맞을 수도 있겠지. 네 생각은 어떠냐? 난 차라리 날 '자기자신으로서 기억되길 원하지 않는 자'라 하고 싶은데 말이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극도로 건조한 어조였다. 엘은 지독할 정도로 메마른 목소리에 몸서리치며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사실 너같은 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널 찾아낸 그 순간에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벨리타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없애고 싶어한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를 거꾸러뜨린 존재. 바젤도 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더군. 그래, 호기심과 궁금증이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다. 그것 때문에 우린 너에게 접근했다. 한심한 놈들을 이용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해야했지만, 어쨌든 넌 예상대로 우릴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사실 우린 네가 마법가루까지 사용해 우릴 도우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등에 싸늘한 마차가 와 닿자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어금니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두 가지 중 하나겠군. 네가 완전히 미쳐 버렸거나 누군지도 모르는 벨리타란 자가 꽤나 심심했거나." 이리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벨리타는 내 동생이다. 영악하고 아름다운 벨리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벨리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저주스러운 벨리타. 어머니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미약한 몸뚱이말고는 내세울 것이 조금도 없는 벨리타만을 걱정했다. 너무나 사랑스런 벨리타를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심장까지 파냈다.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삼키게 한 후 자신의 이름과 심장에 대고 피의 맹세를 하게 했지." 잠시 말을 멈춘 이리스의 입술에 음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다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하더군. '벨리타가 너희들에게 내 심장을 보내 오면 그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줘라. 그게 무엇이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 심장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몸 안에서부터 살과 피가 조금씩 썩어 들어가 끝내는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며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 영혼까지도 철저히 저주받으리라....' 정말 다정하고 인자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느냐?" 이리스가 즐거운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같이 느껴지자 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난 벨리타가 어머니의 심장조각을 보내 오기 전까지 그 아이를 잊고 지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별 관심도 없었지. 사실 벨리타를 위해선 벌레 한 마리 죽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와 바젤이 살기 위해선, 어머니의 심장이 우리 몸과 영혼을 한 입에 삼키기 전에 널 죽여야 한다." 이리스가 조용한 동작으로 한발 다가섰다. 비록 겉모습은 연약해 보이는 소녀이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리스를 둘러싸고 있던 벽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엘은 작은 몸에서 뿜어지는 매서운 힘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리스를 살피며 천천히 허리춤을 더듬었다. 빈 검집이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추적자들이 있는 곳에 검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음같은 거친 숨이 터져나왔다. 유난히 크게 와 닿는 그 소리가 더 이상 리오와 리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엘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이리스가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 목표는 오직 너 하나다. 난 너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해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모두 잠을 자게 만들 계획이었지.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쌍둥이 한 명을 제외하곤 눈에 띄지 않더군. 나답지 않게 인정을 베풀어 잠을 자는 동안 얼어죽지 않도록 보온까지 해줬다. 이 정도면 나도 할만큼은 한 것이 아니냐? 아시리움의 추적자들로 인해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지만 내 일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겠다." "나만 죽이겠다는 말이로군. 마음을 써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죽어야한다라...." 말을 끊은 엘은 움직임을 방해하는 마차에서 벗어나며 매끄러운 동작으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런 건 이쪽에서 사양하겠다." "대항하겠다는 거라면 대환영이다. 널 죽이는 것이 새삼스레 양심을 건드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일도 아니니까." 이리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보이자 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얼굴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이 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몸 속에서 진흙덩어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작은 몸이 급속도로 부풀어올랐다. 급기야 걸치고 있던 옷이 헝겊조각처럼 찢겨져 나가더니 완전히 변한 이리스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물을 들인 듯 온몸이 회적색으로 변한 채 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녀에게서 예전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키는 엘의 두 배 정도로 커졌고 몸집은 다섯 배 가량 육중해져 있었다. 또 그 거대한 몸 전체를 피부보다 조금 짙은 회적색 연기가 둥글게 싸고 있었으며 날카로 운 빛을 발하는 검은 눈은 툭 불거진 이마 아래, 움푹 패인 웅덩이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시체같이 창백해 보이는 크고 가느다란 입술 밑엔 턱인지 목인지 구별이 안 되는 육중한 살덩이가 몸통에서 흘러내린 것처럼 흉칙하게 늘어져 있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던 엘은 숨을 격하게 들이쉬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건 변해버린 이리스의 모습도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도 아니었다. 그건 이리스의 등과 옆구리에 혹처럼 달라붙어 있는 바젤의 존재였다. 팔다리는 물론 어떤 뚜렷한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마치 거추장스러운 짐 꾸러미처럼 그는 이리스의 몸체에서 불룩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은 오직 얼굴뿐이었다. 엘은 이리스의 옆구리에 바싹 붙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리스와 완벽하게 몸을 공유한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평온하게 잠이 들어있었다. "우리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가 보구나. 하긴, 어머니조차 우리가 눈앞에 있는 걸 견디지 못했으니까... 어머닌 우리에게 변형능력이 있는 걸 알게 된 후 무슨 일이 있어도 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 변형체로 있을 땐 나와 바젤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더군. 하지만 그 눈에 담긴 구역질나는 혐오감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너와 바젤이 어떤 모습이든 나완 상관없는 일이야." 엘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 위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우릴 어떻게 생각하든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이리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팔이 올려지며 엘의 정면으로 탁한 연기가 달려들었다.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연기를 피했다. 그녀가 있던 허공에서 매끄럽게 방향을 바꾼 연기가 빠른 속도로 몰려들었다. 그 순간 엘은 망설이지 않고 이리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단도를 가진 그녀가 효과적으로 공격과 수비를 하기 위해선 되도록 이리스와의 거리를 좁혀야 했다. 그녀의 공격을 예상한 듯 이리스의 몸체가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그들 사이에 불그스름한 빛이 작렬했다. 엘은 재빨리 몸을 낮춰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빛을 가까스로 피했다. 싸늘한 기운이 뒷머리를 스치며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빛과 맞부딪친 연기가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흩어져 어두운 하늘로 날아올랐다. 탄력적으로 몸을 굴린 엘은 움켜쥔 단도를 날카롭게 휘두르며 다리를 세웠다. 번득이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이리스가 몸을 움직인 순간 엘은 그녀의 약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는데도 이리스는 부자연스럽게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왼팔은 바젤을 보호하듯 안으로 둥글게 말려있었다. 엘은 망설이지 않고 그 즉시 이리스의 왼쪽으로 움직였다. 약점이 있다면 그걸 노려야했다. 만약 약한 마음에 잠시라도 주춤한다면 그 대가는 바로 그녀자신의 목숨이 될 것이다. 그녀의 공격이 바젤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이리스가 동요해 몸을 움찔했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엘은 맹렬히 단도를 움직였다. 칼날이 이리스의 팔을 깊게 베고 지나갔을 때 눈앞에서 밝은 빛이 번쩍이며 엄청난 힘이 엘의 전신을 덮쳤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몸이 붕 뜨는가싶더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뒤로 내동댕이 쳐졌다. 딱딱한 땅바닥을 거칠게 구른 엘은 몸을 강타한 충격에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냈다.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몸 아래 깔렸던 왼쪽 손목이 시큰거리더니 곧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들었다. 신음이 터져 나오려 하자 엘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단도를 움켜쥔 손으로 이미 퉁퉁 부어 오른 손목을 받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질척한 진회색 액체가 흘러내리는 팔을 길게 늘어뜨린 이리스가 사납게 윗입술을 말아 올렸다. "어리석은 것! 바젤을 깨웠으니 넌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게 될 것이다." 바젤을 가리고 있던 팔이 치워지며 커다랗게 부릅뜬 검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눈동자가 엘을 향해 번득이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눈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신에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으로 엘은 명확한 존재감을 갖는 어떤 것이 그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얇은 옷감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이 거미줄처럼 미세하게 갈라지며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질척한 땅이 피난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면적을 넓혔다. 안전한 곳을 찾아 정신없이 몸을 피하던 엘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엘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거친 으르렁거림과 함께 이리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번쩍 뜬 눈에 보인 건 한덩어리의 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이리스와 바젤을 공격하는 검은 그림자였다. 몸을 부스스 일으킨 엘은 그림자가 이리스의 목을 물어뜯은 후에야 그것이 검은 늑대라는 걸 깨달았다. 이리스가 거칠게 울부짖으며 너덜거리는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손가락을 뚫고 회적색 액체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리스의 몸을 적신 액체가 바젤의 얼굴을 물들이자 그가 괴성을 터뜨리며 뭉글거리는 탁한 안개를 검은 늑대에게 쏟아부었다. "엘!" 엘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부석에 올라탄 리오가 그녀를 향해 격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엘은 리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늑대가 이리스와 바젤을 막아 주는 동안 이 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늑대의 공격이 매섭긴 했지만 이리스와 바젤의 능력으로 미루어 두 사람이 곧 그녀를 쫓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엘이 훌쩍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리오가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그 즉시 말이 거칠게 땅을 박차며 미친듯이 어둠 속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게 된 엘은 거칠게 바닥에 넘어졌다. 그 순간 시큰거리는 왼쪽 손목이 마차 문에 호되게 부딪쳤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참기 힘든 고통이 엄습했다. 엘은 신음을 흘리며 오른팔을 높이 들어 창틀을 부여잡았다. 어느 정도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되자 엘은 주위를 둘러봤다. 곧 어둠에 싸인 마차 안에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리반하고 첸은?" 엘은 마부석과 연결된 막을 내리고 크게 소리쳤다. "찾지 못했어!" 리오가 악을 쓰듯 거칠게 대답했다. 피를 흘리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엘은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두 사람 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그래, 이리스도 다른 사람을 해칠 마음은 없다고 했잖아! 그제야 쌍둥이 중 한 명을 잠재웠다는 이리스의 말이 생각났다. 엘은 첸도 리반과 마찬가지로 어딘 가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루드비히의 모습을 쫓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리오와 그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리스와 바젤에게 잡힌다면 분노한 그들은 그녀는 물론 리오까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살고 싶다면, 리오를 살리고 싶다면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달아나야 하리라. 엘이 싸늘한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을 때 그녀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한 듯 말들이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리며 더욱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연거푸 호된 엉덩방아 찧은 엘은 창틀에 가까스로 매달려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영원토록 마차를 달린 듯한 느낌이 들다가도, 이리스와 바젤에게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불안감이 마음을 괴롭혔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태로운 비명소리가 들린 건 엘이 밖을 내다보기 위해 한쪽 무릎을 세웠을 때였다. 리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녈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야?" 엘의 날카로운 물음이 끝나기 전에 리오가 다급히 소리쳤다. "꽉 잡아!" 그 순간 마차가 격렬히 흔들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동댕이 쳐지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제 42장. 힘겨운 시간-------------------------------------------------------------------감각을 마비시키는듯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엘은 얼어붙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메마른 흙냄새가 코끝으로 흘러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불분명한 무채색들이 안개가 낀 듯 뿌연 시야를 채웠다. 엘은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췄다. 희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이 조금씩 선명하게 다가들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엘은 모닥불이 꺼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목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수천 마리의 벌에 쏘인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 생생한 아픔과 함께 지난밤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그녀는 이를 악문 채 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힘껏 디디고 단숨에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을 짚은 왼쪽 손목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다. 엘은 거친 신음을 터뜨리며 퉁퉁 부여 불룩해진 손목을 오른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다리를 세웠다. 처참할 정도로 산산조각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차의 잔해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굳이 주위를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리오..." 엘은 신음처럼 속삭이며 리오를 찾았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리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두려움에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고 맥이 빨라졌다. "리오, 어디 있어?" 엘은 크게 소리쳤다. 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나 고요했다. 그 잔인한 장막을 뚫을 만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듯, 아니, 숨을 멈춰 버린 것처럼 작은 생명체의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리오!" 그녀는 다시 한번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연거푸 그를 소리쳐 부르며 마차의 잔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지만 리오에 대한 걱정이 신음조차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차는 그녀의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게, 아니,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부숴져 있었다. 마차가 산산조각나기 전에 밖으로 튕겨져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멀쩡한 상태로 걷고 있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 확신과 동시에 마부석에 앉아 있던 리오라면 그녀보다 먼저 마차에서 떨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엘이 잘못 짚은 게 아니라면 리오는 그녀가 쓰러져 있던 곳보다 앞쪽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엘은 통증을 무시하고 뛰기 시작했다. 잔해의 끝이 보이는 곳에 멈춰 선 그녀는 낮게 패인 지형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붉은 색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곧 한쪽 볼을 바닥에 대고 길게 쓰러져 있는 리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은 허겁지겁 달려가 리오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부들거리는 손끝을 목에 가져다 댔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아찔한 안도감에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리오." 엘은 떨리는 어조로 그를 부르며 얼굴을 가린 붉은 머리카락을 치웠다. 비록 얼굴 전체가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상처는 관자놀이 부근에 생긴 작은 찰과상뿐이었다. 부상 정도를 알아보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그녀는 무릎으로 리오의 등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바로 눕혔다. 걱정스런 눈으로 그의 몸을 훑어보던 엘은 넓적다리에 박혀 있는 나무파편을 보는 순간 숨을 훅 들이쉬었다. 바지를 물들인 핏자국이 눈을 파고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엘이 입술을 힘껏 물어뜯었을 때 심하게 잠긴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엘은 놀라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파리한 얼굴 때문인지 유난히 짙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근심 어린 시선으로 리오의 얼굴을 살피자 그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새삼스레 나한테 반한 거야?" 엘은 힘이 다 빠져 버린 사람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오의 농담을 들으니 이 상황이 조금 전처럼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엘은 온몸을 싸늘하게 굳게했던 불안과 두려움을 밀어낼 수 있었다. "안 아픈 구석이 없네. 내 얼굴 그만 보고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기나 한지 좀 살펴 봐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 이제 생각난다! 괘씸한 말들이 마차는 버려 둔 채 지네만 살겠다고 신나게 달려가던 모습이! 젠장! 그 배신자 놈들! 내 그 놈들을 잡기만 하면 통째로 껍질을 벗겨 구워 먹어야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채 툴툴거리던 리오가 근심 어린 눈을 엘에게 돌렸다. "넌 괜찮은 거야?" "그래, 괜찮아. 네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멀쩡한 것 같지 않아? 아마 다른 사람들은 내가 저런 꼴이 된 마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절대 믿지 못할 거야.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으니까. 비록 몸은 좀 쑤시지만." "네가 날 원망할 것 같아 하는 말인데, 마차와 말의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았나 봐. 낮은 둔덕을 막 올랐을 때 갑자기 덜컥하더니 마차에서 말이 쑥 빠져 버리더라고. 그 순간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마치 자기 잘못으로 생긴 일인 것처럼 리오의 얼굴엔 미안함이 어려있었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난 마차가 먼저 전복됐는지 알았어. 그랬다면 이 곳에 우리만 있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래, 상처 입은 말들이 여기저기서 뒹굴고 있겠지." 몸을 일으키려는지 꿈틀거리던 리오가 거친 신음을 터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딱 죽지 않을 만큼 아픈 걸 보니 아직 살아 있긴 한가 보군." 엘은 오른손을 내밀어 리오의 어깨를 받쳐주며 가볍게 응수했다. "당연하지. 이만한 일로 천하의 리오님이 죽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숨이 끊어질걸?" 장난기 섞인 말을 끝내고 씩 웃던 엘은 리오의 팔에 가려져 있던 옆구리가 드러나는 순간 버럭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 것도 아니야." 엘의 숨가쁜 질문에 리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 것도 아니긴? 옆구리부근이 온통 시뻘건데!" "좀 다쳤나 봐." "어디 좀 봐봐." 리오가 겉옷 자락을 들추려는 엘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좀 긁힌 것 뿐이야." "긁힌 거든 스친 거든 내 눈으로 봐야겠어." 엘은 단호하게 말하며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 겉옷 단추를 풀어 젖히고 피가 말라붙은 뻣뻣한 셔츠자락을 걷어 올렸다. 옆구리와 배에 걸쳐 길게 패인 상처가 드러나자 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리오의 상처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고 출혈도 멈춰 있었다. 오히려 옆구리의 찰과상보다는 가슴의 반 정도를 덮고 있는 커다란 피멍이 더 심각해 보였다. 엘이 피멍으로 손을 가져가자 리오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많이 아파?" 멍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레 만지던 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리오가 피식 웃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래, 네가 잔인하게 손가락으로 쿡쿡 쑤시는 바람에 죽을 만큼 아프다!" "설마 뼈까지 다친 건 아니겠지?" 그녀는 리오에게 슬쩍 눈을 흘긴 다음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안색이 많이 좋아진 얼굴로 농 담을 하고 있었지만 엘은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멍이 좀 거창하게 생겼을 뿐 뼈는 괜찮은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전에 뼈가 부러진 적이 있잖아. 그 거지같던 하렐에 말이야. 뼈가 부러지면 지금처럼 편하게 말도 할 수 없어. 아니, 제대로 숨쉬기도 힘들어." 가볍게 말한 리오가 어느새 심각해진 얼굴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가슴보다는 다리하고 발목이 문제야." "뭐, 발목?" 엘은 크게 소리치며 서둘러 리오의 발목을 살폈다. 찢긴 채 너덜거리는 바지 사이로 발목이 검붉게 변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난 넓적다리 상처에 정신이 팔려 발목까지 이렇게 된 줄은 몰랐어." 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암담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봤다. 약초는커녕 풀 한포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대체 치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얼굴을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그녀는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버럭 소리쳤다. "그렇지!" 엘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리오가 놀란 눈으로 그녈 올려다봤다. "왜 그래?" "리오, 메릴랭에서 떠나던 날, 리반이 약초상에 들렀다면서 내밀었던 꾸러미 기억 나?" 미간을 찌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던 리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 나. 근데 그건 왜?" "마차, 마차말이야! 우리가 마차를 타고 왔잖아! 어쩌면 약이 있을지 몰라! 가서 찾아봐야겠어, 리오!" 흥분해 소리친 엘은 마차파편이 흩어져 있는 곳을 이리저리 다니며 유심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흙투성이가 된 그녀의 옷가지들이었다. 엘은 찌그러진 쇳조각에 반 정도 깔려 있는 윗도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판자가 옆으로 조금 미끄러지며 그녀의 가죽배낭이 나타났다. 숨찬 탄성을 지른 엘은 좁은 틈새에서 서둘러 가방을 빼냈다. 그리고 물건이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찢어져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초조하게 더듬는 손끝에 울퉁불퉁하고 딱딱한 돌조각이 느껴졌다. 엘은 가슴을 들썩이며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느슨하게 풀어져 물건을 감고 있는 천을 꼼꼼하게 바로잡은 뒤 배낭 밑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다시 파편을 뒤적이는 엘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큰 걱정거리 하나가 없어지자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파편은 믿기지 않을 만큼 넓은 지역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엘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쓸만한 물건이 발견 될 때마다 보물을 찾아낸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엘! 아직 멀었어?" 엘이 막 리오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기다림에 지친 리오가 크게 소리쳤다. 엘은 갖가지 물건이 올려진 찢어진 웃옷을 질질 끌며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그러자 참기 힘든 고통으로 찌푸려져 있던 리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게 다 뭐야?" "이것 저것. 우선 눈에 띄는 것들만 가져왔어." 물건을 훑어보던 리오는 자신의 가죽배낭을 발견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흙이 좀 묻고 몇 군데 긁힌 자국을 제외하면 배낭은 놀랄 만큼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오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을 눈치챈 엘이 입을 열었다. "상처를 감쌀 만한 천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놨어." "그래, 다행이야. 상처도 그렇지만 갈아입을 옷 하나없이 평원을 헤매고 싶진 않으니까." 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앉아 한껏 밝은 어조로 말했다. "물주머니도 하나 찾았어. 정말 다행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리오 앞에 자랑스레 내밀어진 건 어른 머리만한 크기의 꾸러미였다. 리오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엘은 단도로 묶여진 줄을 잘랐다. 그리고 신중한 손놀림으로 꾸러미를 풀었다. 곧 모습을 보인 건 각기 다른 색깔의 나무통 네 개와 얇은 종이로 싸인 여러 겹의 천 뭉치였다. 굳이 나무통의 뚜껑을 열거나 종이를 풀어 보지 않아도 각각 약통과 상처부위에 약초를 단단히 밀착시키는 데 쓰이는 천임을 알 수 있었다. "약이 맞긴 하겠지만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모르잖아." 리오가 걱정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엘은 대꾸하지 않고 약통을 하나씩 열어 안에든 약초가루를 주의 깊게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통을 코에 가져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자 리오의 얼굴에 불안이 피어올랐다. "너 대체 뭘 알긴 알고서 그러는 거야?" 이번에도 엘은 리오의 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약초가루를 조금 집어 들어 혀끝으로 맛을 볼 뿐이었다. 이윽고 나름대로 정리를 끝낸 엘이 리오를 마주봤다. "솔직하게 말할게. 두 가지는 알겠는데 나머지 두 가지는 확실하지 않아. 이건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해주는 약초고 또 이건 진통효과가 있는 약초가루야." 엘은 나무통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답답하게 하는 나머지 약통들로 시선을 옮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해주는 약초 같기도 한데.... 또 이건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 좋은 약초 같고..." "그냥 써보면 되잖아. 그럼 자연히 알게 될 테고." 리오가 무엇이 걱정이냐는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엘이 어느 정도 약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녀 말대로라면 특별히 몸에 해로운 약초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리오는 어느새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염증을 막아 주는 약초라면 상처에 직접 뿌려야 하고, 열을 내리게 하는 약초라면 먹어야 하는 거야. 만약 그 두 가지가 바뀐다고 생각해봐." 엘이 소름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서리를 치자 리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바뀌면 어떻게 되는데? 혹시 목숨을 잃는다거나...." 리오가 엘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잘은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좋은 약도 잘못 쓰면 독약과 같다고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근심이 가득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러는 편이 좋겠지?" "그래, 나도 찬성이야." 엘의 물음에 리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즉시 엘은 정체가 모호한 약초들을 도로 꾸러미 안에 집어넣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약을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리오, 넌 깨끗한 옷을 찾아 상처를 감싸기 편한 크기로 잘라 줘. 그리고 발목은 네가 직접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를 받아 들던 리오가 갑자기 축 늘어져 있는 엘의 왼쪽 팔을 덥석 잡아 들어 올렸다. "젠장!" 퉁퉁 부어 오른 손목을 발견한 그의 입술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쩐지, 행동이 좀 이상하다 싶더니만!" "보이는 것만큼 상태가 나쁜 건 아니야. 어제 마차에 타기 전에 좀 다쳤거든. 그 후 어딘가에 살짝 부딪친 것 같아." "먼저 네 손목부터 묶어야겠어." 리오는 지체하지 않고 짐을 뒤적이더니 셔츠 한 장을 꺼내 단도로 길게 찢기 시작했다. 너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우겨 봐야 시간만 지체될 뿐이라는 생각에 엘은 손을 내밀라는 리오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리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연신 엘을 흘긋거리며 꼼꼼하게 손목을 감았다. 손목이 조여 들자 날카롭게 욱신거리던 아픔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괜찮아?" 리오가 매듭을 지으며 엘의 얼굴을 살폈다. 엘은 이제 둔통만이 느껴지는 손목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였다. 힘든 일은 못하겠지만 간단한 동작을 하는 데는 별 불편이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응, 훨씬 좋아졌어. 그건 그렇고 어서 물 좀 부어 줘, 리오. 손부터 깨끗이 해야 하니까." 엘은 리오에게 물주머니를 집어 주며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지저분한 손을 닦은 다음 리오의 겉옷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셔츠가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리오가 불편한 듯 슬며시 몸을 들썩였다. "굳이 상처를 씻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길다란 창상에 약초를 고르게 붙인 엘은 상처에 천조각을 올리고 잘게 자른 셔츠로 감싼 다음 피멍이 들어있는 가슴부위까지 꼼꼼하게 휘감았다. 리오는 묵묵이 그녀의 손놀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초가 스며들어 감에 따라 상당한 통증이 일어날 게 분명한데도 그는 작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좀 서두르면 안 되겠어? 추워, 못견디겠어." 리오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의 가슴과 양쪽 팔엔 어느새 자잘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춥긴 뭐가 추워? 해 뜬지가 언젠데? 솔직히 털어놔 봐. 사실은 맨 가슴 내놓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그렇지?" 엘이 짐짓 짓궂은 표정으로 드러난 상체를 훑어보자 리오는 얼떨결에 몸을 웅크리며 손을 들어 맨살을 가렸다. 그리고 킥킥거리는 엘에게 성난 시선을 던졌다. "너 일부러 시간 끄는 거지?" "아니야, 불편한 손목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 뿐이라고."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대체 시간 끌어서 나한테 좋은 일이 뭐가 있다고!"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 엘에게 리오가 음흉한 미소를 던졌다. "그거야 물론 내 늠름한 가슴을 좀 더 오래 바라보고 싶어서겠지." 기가 막힌 엘의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샌 갈비뼈가 앙상한 가슴을 보고 늠름하다고 하나 보지?" 엘이 입술을 비죽이자 리오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졌을까?" 리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쩡하던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리오가 정신없이 낄낄거리자 약이 잔뜩 오른 엘이 손가락을 슬쩍 아래로 내려 피멍을 꾹 눌렀다. "아얏!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리오가 버럭 소리치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살살 문질렀다. "미안해, 리오. 거기서 손가락이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 네 늠름한 가슴에 넋이 나가 실수를 한 것 같아." 엘은 믿어 달라는 얼굴로 리오를 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리오는 죽일 듯 엘을 노려보면서도 그녀가 내민 천 끄트머리를 받아 힘껏 매듭을 지었다. "옷은 네가 입어, 리오. 난 다리 상처를 살펴야 하니까." 엘이 넓적다리에 깊숙이 박힌 나뭇조각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을 때 리오가 셔츠를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파편을 빼내지 않고 그냥 놔두면 혹시 거기서 맛있는 열매라도 자라는 거 아닐까?" "다리가 이 꼴인데도 농담이 나와? 아프지도 않아?" "조금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잘하는 말처럼 참을 만해."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한숨을 내쉰 엘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짐짓 씩씩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 천하의 리오님이지!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다리 상처를 치료하겠습니다, 왕자전하! 엄청나게 아플 테니 목이 터져라 비명을...."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오자 엘은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비명을 질러도 엄살 부린다고 흉보지 않겠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잔뜩 쉰 목소리가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리오의 푸른 눈동자에 일순 섬광이 번득이더니 그가 극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전에 내가 원하는 거 하나 들어준다고 한 적 있지? 기억 나?" "어? 으응..." 뜻밖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엘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요구하려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나중에 하면 안돼? 지금은 무엇보다 치료가 시급하잖아." "아니, 바로 지금이어야 돼." 단호하게 응수한 리오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애써 당당하게 소리쳤다. "내가 원하는 건 입맞춤이야." 리오의 요구가 명확히 드러난 순간 묵직한 침묵이 찾아 들었다.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리오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농담이지?" 리오는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엘을 향해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이런 꼴을 한 채 농담을 할 것 같아? 이러쿵저러쿵 긴 말 필요없어. 내가 원하는 건 입맞춤뿐이야. 해주기 전엔 절대 치료도 받지 않을 거야." 이왕 입 밖으로 꺼낸 거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을 굳히며 리오는 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 한순간 드러나자 엘은 숨을 죽였다. 그녀는 리오의 두려움이 입맞춤을 거절당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리오는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하고 있는 거야. 고통을 못 참고 무너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 있는 거야. "좋아!" 비장함까지 풍기는 리오에게서 시선을 떼며 엘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정말? 정말 해준다는 거야?" "그래, 지금은 우선 치료가 급한데, 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할 수 없잖아. 자, 그럼 할 테니, 준비해." "준비?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걸 나한테 물어? 리오, 넌 이미..." 말끝을 흐리는 엘의 얼굴에 슬그머니 의혹이 찾아 들었다. 그러자 리오의 얼굴이 일순 벌겋게 달아올랐다. "혹시 너도 해 본적 없는 거야?" "아니야, 해본 적 있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 리오가 금세 겸연쩍은 얼굴로 변해 중얼거렸다. "이,이마에..." 웃음이 터지려하자 엘은 재빨리 입술을 꼭 물었다. 그리고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넌 바람둥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된 거야. 으음... 그리고 안심해. 우리 둘 다 경험이 없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니까. 수많은 입맞춤장면이 나오는 책을 두 권이나 읽은 내 가 있잖아. 사실 처음엔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하도 많이 나오니까 나중엔 '또 나왔네', 대충 이렇게 되더라고. 근데 말이야, 입맞춤장면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뭔 지 알아? 바로 사랑이야. 왜 입맞춤하기 전에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걸까? 더 웃긴 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엘! 대체 입맞춤은 언제 하는 거야?" 애를 태우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리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꽤나 놀랐는지 흠칫한 엘이 못마땅한 눈으로 리오를 흘겨보며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지금 할 테니까 고개 들어. 그리고 절대 움직이지 마. 요구를 들어주는 쪽은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오가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웠다. 너무나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엘은 되도록 빨리 그를 편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싹 다가들었다. 하지만 커다랗게 열린 푸른 눈을 발견하는 순간 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눈 감아, 리오." "싫어, 난 널 계속 보고있을 거야." "그럼 계속 봐. 하지만 네가 그렇게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으면 난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을 거야."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더니..." 입술을 비죽이며 그녈 노려보던 리오가 내키지 않는 다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말대로 다 했으니까 이제 그만 시간 끌고..." 재빨리 움직인 엘이 리오의 이마에 쪽 소리나게 입을 맞추고 몸을 바로잡았다. 그 즉시 리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자, 됐지?" "돼? 되긴 뭐가 돼?"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던 리오가 버럭 소리쳤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엉뚱한 짓 그만하고 그 상처나 치료하자."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니?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야! 절대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난 그러니까.... 말 그대로 진짜 입맞춤을 원한 거라고! 이마가 아닌...." "그만해, 리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엘은 단호하게 리오의 말을 끊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때부터, 아니 흔쾌히 해준다고 말할 때부터 눈치 챘어야 하는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엘을 바라보던 리오가 낮게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시작할게." 엘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 속으로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시선을 내리자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암담하기만 한 상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우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오른쪽 넓적다리를 비스듬히 관통한 나무조각을 유심히 살폈다. 나무조각은 그녀의 손보다 조금 길었는데 아래로 향한 쪽은 뾰족하고 위로 갈수록 굵어져 끝부분은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 정도로 뭉뚝했다. 뾰족한 부분이 살을 뚫고 나와 있어 언뜻 보면 파편을 빼내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무결이 뭉뚝한 쪽을 향해 나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살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매끈하다면 몰라도 만약 불규칙적으로 잘라진 거친 조각이라면 그걸 쉽게 뽑아 내려 하다간 살 속에 가시가 박힐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리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위험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다리를 절단하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하지? 위험을 무릅쓰고 뽑아 볼까? 아니면 아래부분의 상처를 조금 넓게 만든 다음 빼내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리오가 너무 고통스러울 텐데... "난 괜찮으니까 네가 생각해서 좋은 쪽으로 해줘." 엘의 고민을 읽은 듯 리오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선을 들어 그의 파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조각을 밑으로 빼낼 거야. 그러려면 구멍을 넓혀야 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리오가 씩 웃음을 보였다. "창피하게 기절이나 하지 않게 해주십사 기도해야겠지?" "그래." 순순히 맞장구를 쳤지만 엘의 본심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리오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망각의 세계로 빠졌다가 고통스런 치료가 끝난 다음에 돌아오기를 원했다. 엘은 단도를 물로 씻은 다음 깨끗한 천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자리에 누워, 리오." 리오가 길게 드러눕자 엘은 다리를 접어 리오의 무릎 바로 위를 눌렀다. 이 정도의 힘으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은 단도를 힘껏 부여잡고 서늘한 칼날을 세워 상처 가까이 가져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칼끝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내 손으로 리오의 살을 찢을 수 있을까? 고통스러워 하는 리오를 보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머뭇거리면 머뭇거릴수록 리오의 고통만 커지리라는 생각이 들자 엘은 어금니를 악물고 단도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피가 말라붙은 상처 부위에 칼날을 밀어 넣었다. 붉은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리오에게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 악문 듯 잔뜩 억눌린 한숨처럼 들렸다. 단도가 삼분의 일 가량 들어간 후에야 칼끝에 딱딱한 나무조각이 느껴졌다. 칼날을 빼낸 엘은 단도의 각도를 틀어 상처와 십자형이 되게 잡은 다음 다시 한 번 리오의 살 속에 차가운 금속을 들여보냈다. 리오의 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엘은 무릎에 잔뜩 힘을 가해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다리를 짓눌렀다. 땀방울이 코를 타고 흘러내려 쏟아지는 핏속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화끈거렸다. 리오의 피가 눈에 스며들기라고 한 것처럼 시야가 붉게 변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리오의 숨소리인지 그녀 자신에게서 나온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엘은 부서져라 이를 악물고 불룩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밀어 넣었다. 리오가 날카로운 비명을 터뜨렸다. 나무조각을 힘껏 뽑아 내며 그녀도 비명을 질렀다. 엘은 연이어 터지려 하는 비명을 삼키며 넓적다리 아래부분에 천을 깐 다음 접은 셔츠를 대고 상처를 힘껏 눌렀다. 우선 쏟아지는 피를 지혈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얀 셔츠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엘은 손바닥을 적시는 뜨거운 선혈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화상을 입기라도 한 듯 화끈거리는 손바닥에 더욱 힘을 가했다. 영원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엘은 축축한 셔츠를 들어 올려 지혈이 됐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상처 양쪽에 약초가루를 뿌린 다음 정성껏 천을 감았다. 그런 다음에야,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그녀는 시선을 리오의 얼굴로 가져갔다. "리오..." 엘은 떨리는 어조로 그를 불렀다. 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바람대로 그가 정신을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끈적이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창백한 얼굴엔 가혹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일그러진 채 지금껏 펴지지 않은 주름과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로 그녀는 리오가 무의식상태에서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보야, 왜 날 따라온 거야? 내 옆에 있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네가 이런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는데.... 엘은 핏방울이 맺혀 있는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어 먼 하늘을 바라봤다. 한줄기 시린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엘은 옷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깊게 잠긴 불분명한 어조로 낮게 중얼거렸다. "바보는 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리오. 내가 먼저 널 떠났어야 했어.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것 밖에 없었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지...." ss창가를 이리저리 걷고 있던 자일스가 걸음을 멈추고 초조함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모든 게 별 어려움없이 전하의 뜻대로 진행될 테니까요." 마체라타가 조금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앉은 그녀의 얼굴엔 무료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자일스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앞에 놓인 포도 송이를 집어 들어 나른한 동작으로 입에 넣었다. "넌 언제 봐도 만사태평이구나." "따분하기 짝이 없는 그루지아에서 이틀을 기다렸습니다, 전하. 그런데 겨우 몇 분 지체되었다고 소란을 피울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빗대서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자일스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나이 지긋한 고위사제가 안으로 들어섰다. 자일스에게서 풍기는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챈 사제가 조심스런 시선으로 그를 살피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전하. 이리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던 사제는 마체라타가 의자에서 일어나 자일스의 뒤를 따르려 하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황태자전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 여인은 이 곳에서 기다리게 하시는 게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사제는 자일스가 불쾌감을 드러내지나 않을까싶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자일스는 그저 간단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의 거만한 명령에 마체라타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사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체라타를 살피다 그녀와 시선이 부딪힌 순간 희미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재빨리 돌렸다.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제를 바라보며 마체라타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자일스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여 그녀의 시선을 막아 섰다. "뭐 하는 건가? 빨리 안내하지 않고?" 자일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사제가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복도로 나왔다. 그는 곱지 않은 자일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어색하게 걸음을 옮겨 중앙회의실 앞에 멈춰 섰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자일스는 정중하게 문을 잡고 서 있는 사제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는 거만해 보이는 겉모습 것과 달리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제아무리 무서울 게 없는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라 하지만 아시리움 성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일은 그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갈색과 검은 색이 주조를 이룬 엄숙해 보이는 공간으로 들어서며 자일스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중앙에 거대한 탁자가 육중하게 자리잡고 있는 회의실은 한 눈에 온전히 담기도 힘들 만큼 휑하니 넓었다. 지나칠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는 건 넓은 창문들 통해 들어오는 빛과 바닥에 깔린 기하적적 문양의 양탄자가 전부였다. 자일스는 부드럽게 닫히는 문소리에 놀라 흠칫한 다음에야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고 의식적으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세우는 대사제들을 바라봤다. 아시리움 성전을 이끄는 열 명의 대사제들 중 일곱 명이 참석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기다리시게 한 점 사과드립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예전 모습을 찾으신 걸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전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사제들에게서 의례적인 인사말이 쏟아졌다. 그에 맞춰 자일스도 정중히 답례의 말을 꺼냈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전하." 자일스는 탁자를 돌아 노게일스 대사제가 가리키는 상석에 자리잡았다. 대사제들 모두 의자에 앉은 후 의장인 에르난드 대사제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후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 대사제님들도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이번 자리는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 아시리움에 보내신 특별요청을 받아들여 마련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매우 드문 경우라 서너 분을 제외하곤 다들 처음 경험하실 겁니다."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은 에르난드 대사제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선 그는 줄곧 뛰어왔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일스는 비록 흐트러지긴 했지만 대사제복을 걸치고 있는 남자에게 호기심어린 시선을 던졌다. 갑작스런 등장으로 모두를 놀라게 한 그는 자일스가 평소 대사제들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근엄해 보이는 다른 대사제들과 비교해도 놀랄 만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중간 키에 조금 통통하다 싶을 정도로 살이 찐 그는 대사제라기보다는 평범한 상인이나 농부처럼 보였다. 그리고 쉴새 없이 반짝이는 짙은 밤색 눈 때문인지 희끗희끗해진 반백의 머리에도 불구하고 의욕과 희망에 넘치는 젊은이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히 온다고 서둘렀는데도 이렇게 지각을 하게 되었군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꾸중받는 시종처럼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인 남자가 자일스를 향해 반갑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참! 황태자 전하께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황태자전하. 전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이라 합니다." 번개라도 맞은 듯 일순 자일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지자 클레르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일스는 재빨리 분노를 감추고 점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클레르몽 대사제님." "아...아, 예." 자일스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짓는 클레르몽의 얼굴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이제 참석하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즐거움과 비웃음이 담긴 눈으로 클레르몽을 응시하고 있던 필리프가 점잖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에르난드 대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일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우선 황태자 전하의 말씀을 듣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렇겠군요.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 대사제님들 앞에 나선 건 아시리움 종단에 한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사제님들도 제가 아시리움을 능멸한 죄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저 역시 아시리움에서 중죄인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머지 않아 죄인이 잡히는 되리란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까지 합니다. 사실 제가 드릴 제안은 죄인이 잡혔을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말을 멈춘 자일스가 대사제들을 둘러보며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중죄인을 처단할 장소로 아시리움 종단에게 리아잔 제국의 황궁을 제공하겠습니다." 자일스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던 대사제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개인적인 말씀은 삼가시고 정식으로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에르난드 대사제의 말에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제 생각으로는 황태자 전하께서 매우 훌륭한 제안을 하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의견을 밝힌 사람은 노게일스 대사제였다. 다음으로 니제르 대사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노게일스 대사제와 같은 생각입니다. 지난 회의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 겁니다. 죄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신경 써야 할 것이 죄인의 처리문제라는 걸 말입니다. 또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해도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전하께서 직접 아시리움 종단에 도움을 주시겠다 하시니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 도의라 생각합니다." 몇몇 대사제들이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걱정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클레르몽 대사제가 만족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자일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태자 전하, 제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아시리움 종단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신 것 같은 데.... 우선 그것부터 꺼내 보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자일스의 눈매가 좁혀지며 양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찬성 쪽으로 좀더 의견이 기울었을 때 속셈을 드러내려 했던 그로서는 허를 찔리게 된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당장 달려들어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은 클레르몽이 아닌가. 의지력을 총동원해 본심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클레르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성질을 끝끝내 참지 못한 자일스가 비틀린 입술을 열려는 순간 그의 상태를 눈치챈 필리프 대사제가 한 박자 빨리 소리쳤다.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 제 정신이오, 클레르몽? 황태자전하께서 우리 아시리움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어서 백배사죄 드리시오!" 필리프 대사제가 필요이상으로 험악하게 소리치자 일순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긴장이 흘렀다. 주제넘게 나서는 클레르몽이 언제나 그랬듯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사실 필리프의 행동은 자일스에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대사제들이 모두 모여있는 이런 자리에서 자일스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 꺼낸다면 애써 세운 그의 계획이 일시에 무너지게 될 위험이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해 자일스가 클레르몽에 대한 모략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될 수도 있었다. 필리프는 흘긋 자일스를 살폈다. 불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자일스는 이미 얼굴에서 클레르몽을 향한 증오와 적개심을 모두 지운 후였다. "전 제가 백배사죄를 올려야 할 만큼 중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황태자전하께서 무언가를 바라시고 하신 말씀이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숨겨진 부분을 알지 못한 채 결정을 내리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은 없다 생각합니다." 클레르몽 대사제가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나한테 어리석다고 하는 거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필리프가 이를 갈자 클레르몽을 위시한 대사제들에게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필리프 대사제께서는 어째서 제가 하는 말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에르난드 대사제가 클레르몽의 말을 끊으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예, 클레르몽 대사제께선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현명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말씀에 동감입니다." 에르난드 대사제는 완곡한 말을 끝내고 자일스를 바라봤다. "황태자 전하, 클레르몽 대사제의 말씀이 옳다면, 그러니까 전하께서 아시리움에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되도록 빨리 밝히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자일스가 곧바로 수긍하고 나왔다. 그는 호기심을 슬그머니 드러내고 있는 대사제들을 둘러본 다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원하는 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 아시리움이 쫓는 죄인을 갖고 싶습니다." 자일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휘둥그레진 눈들이 일제히 자일스에게 집중되자 그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전하, 죄인을 갖고 싶으시다니... 전 무슨 뜻인지..." 노게일스 대사제가 혼란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이 앉아 있던 테르제 대사제가 굳은 얼굴로 자일스를 바라봤다. 어지간해서는 아시리움의 회의에 잘 참석하지 않는 그녀는 학식이 높다는 대사제들 사이에서도 지략가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릴만한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아시리움 성전에서 거짓 왕족 노릇을 한 흉악한 죄인뿐입니다. 그 죄인을 제게 넘겨주신다면 아시리움에게 리아잔의 황궁을 제공하겠다, 그런 말입니다. 설마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자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실 것 같은 데... 여러 대사제들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대사제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일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비틀어지며 비스듬히 올라갔다. "죄인을 대신할 그럴듯한 인물은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이미 적당한 자를 물색해 두었습니다." 자일스는 자신이 던져 넣은 충격과 혼란을 한껏 즐기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전하의 말씀은 못들은 거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클레르몽 대사제가 딱딱한 어조로 침묵을 깼다. 자일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가며 급속도로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테르제 대사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좀 더 시간을 갖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자리를 비켜 주시면, 충분한 회의를 거쳐 나온 결과를 조속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뭐 있소? 이 자리에서 결정해도 충분한 사안이요." 필리프 대사제가 반박하고 나서자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대사제들도 앞다투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노게일스 대사제? 심각한 일이 아니라니요?"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판단해 보면 이리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저도 필리프 대사제와 노게일스 대사제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니제르 대사제, 그걸 지금 말씀이라 하십니까? 황태자께선 죄인을 넘겨 달라는 요구를 하신 겁니다. 애꿎은 사람을 대신 형살(刑殺)시키는 것이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는 일이란 말씀입 니까?" "클레르몽 대사제 진정하시오. 그리고 다른 대사제님들도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난드 대사제의 말에 화끈 달아올랐던 논쟁이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전 무고한 사람을 처형시키겠다는 게 아닙니다. 감히 아시리움을 농락한 중죄인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준비해 놓은 자 역시 더 이상 숨쉴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갖가지 악행을 일삼은 짐승같은 놈이란 말씀입니다." 자일스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럴듯하게 날조된 거짓에 불과했다. 그가 한 말 중 진실은 자신이 죄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과 죄인을 대신할 가짜를 준비해 두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럴듯한 가짜를 찾는 건 지극히 간단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죄인에게 걸린 상금을 노리는 자는 부지기수였다. 자일스는 그런 자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슷하게 보이는 자를 고르면 그만이었다. 그런 식으로 잡아 최종적으로 남겨 둔 검은 머리 소년이 자일스의 수중에 현재 세 명있었다. 세 명 모두 보라색보다는 푸른색에 가까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자일스는 아시리움 종단에서 죄인으로 지목한 자를 가짜라 의심할 사람은 한 명도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억울하게 끌려 왔다는 사실은 자일스에게 고려할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의 뼛속까지 각인될 그럴듯한 장면만 연출된다면 우리 아시리움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필리프 대사제가 자일스를 편들고 나섰다. 그러자 너무나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클레르몽 대사제가 탁자를 내려치며 거칠게 반박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럴듯한 장면만 연출되면 누구 목이 잘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요?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할 죄악으로 천하를 속이자고요? 정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아시리움의 대사제로서 그게 하실 말씀입니까? 아니, 인간으로서 그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클레르몽! 입 닥치시오! 감히, 감히 내게!" 노기를 참지 못해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검붉게 변한 필리프 대사제가 침을 튀기며 격분을 토해냈다. "아니오, 닥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습니다! 대체 그런 썩어 빠진 생각을 갖 고 누가 누굴 벌주고 심판한단 말입니까? 감히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가짜 왕족 노릇을 한 죄인에게 사죄를 해야 될 겁니다! 무릎 꿇고...." "그만 하면 충분합니다, 클레르몽 대사제!" 에르난드 대사제가 단호하게 클레르몽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한층 근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분, 대사제 모두 이 자리에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다는 걸 명심하고 말을 삼가십시오. 앞으로 다시 한 번 이런 식으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발생하면 두 분 모두 더 이상 회의실에 남지 못하게 될 겁니다."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꼭 감고 있던 클레르몽 대사제가 기력이 소진된 사람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 곳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의견은 다들 충분히 아셨을 테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클레르몽은 대사제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조용히 회의실을 나갔다. 문소리를 끝으로 짙은 적막이 묵직하게 깔렸다. "회의를 이만 중단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던 테르제 대사제가 손을 내리며 다른 대사제들을 둘러봤다. 그러자 심각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니제르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전 미룬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 사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의견이 분분한 것 같지만 사실 결론은 황태자 전하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닙니까? 몇 분이 참석하지 않으셨지만 이 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아시리움을 이끄시는 대사제님들입니다. 이 곳에서 어떤 결론이 난다면 그게 곧 아시리움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대체 법황 성하께선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노게일스 대사제의 어조엔 희미하게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법황 성하께선 이번 일에 별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지난번 죄인을 잡기 위한 방편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서 다른 분들도 저와 같은 걸 느끼셨을 겁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일은 우리 대사제들 손에서 끝내야지 성하께 알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니제르 대사제의 말에 몇몇 대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편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저 역시 굳이 성하께서 관여하실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만 남은 거겠군요." 테르제 대사제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의장인 에르난드 대사제에게 집중됐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없겠습니까, 에르난드 대사제?" "의견이 너무나 상반되니 절충안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또 절충안이 나올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 말입니다. 괜히 시도했다간 조금 전처럼 언성이 높아지고 불쾌한 말들이 오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차라리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대사제 분들이 좋다 하시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에르난드 대사제." 필리프 대사제는 말을 끝내고 재빨리 대사제들을 둘러봤다. 그들이 하나, 둘 동의하고 나서자 회색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슬며시 드러났다. 자일스의 요구를 지지해줄 확실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그리고 반대할 것이 분명한 이는 클레르몽을 포함한다 해도 두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의장인 에르난드 대사제는 중립을 고수할 테고 나머지 한 명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이길 만한 쪽에 붙을 것이다. 만약 양쪽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게 된다 해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참석하지 않은 두 명의 대사제 중 한 명은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다른 한 명은 사치스러운 씀씀이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빚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물론 필리프에게 그 정도의 빚을 갚아 줄 능력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번 일이 성사된다면 자일스 황태자도 만족할 테고 그로 인해 우리 두 사람의 비밀스런 연대도 더욱 견고해 지겠지. 사실 필리프는 자신을 도와 달라는 자일스 황태자의 집요한 요구 때문에 그를 편드는 거지 죄인을 아시리움에서 직접 처단하든 자일스에게 넘기듯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죄인은 죽을 운명이고, 죄인의 생사 따위는 그와 완벽하게 별개일 뿐이었다. 필리프는 흘긋 자일스를 바라봤다. 진행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거만하게 눈썹을 휘어 올린 채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기댄 상태였다. 어둡게 번득이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필리프는 분노와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을 눈치챈 자일스가 그를 마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고 자일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을 때, 필리프는 자신을 믿으라는 뜻을 담아 입 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차 싶은 마음에 표정을 감추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모두 눈앞의 사안에 정신이 팔려 필리프와 자일스 사이에 오간 무언의 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대부분의 대사제들은 수군거리며 서로 의견을 나누기에 바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심각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리라. 아주 작은 실수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커져 어느 순간 거대한 무덤이 되어 그의 코앞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서늘한 두려움이 몰려들자 지금이라도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릴 스쳐 갔다. 하지만 일이 성공했을 때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엄청난 권력이 뒤이어 떠올랐다. 어차피 일은 이미 시작됐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겁쟁이처럼 포기할 수는 없어. 계획을 완벽하게 진행시키면서 아니다 싶은 순간 깨끗하게 빠져 나올 수 있는 적당한 선. 가장 중요한 건 그 선을 유지할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란 생각을 하며 필리프는 천천히 등을 기댔다. "이제 그만하면 마음을 정하셨을 테니 표결로 들어가겠습니다." 필리프는 에르난드 대사제의 말에 깊이 몰두해 있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를 향해 걱정할 필요 없다는 자신만만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그 선까지만 발을 담그면 되는 것이리라. -------------------------------------------------------------------제 43장. 평원의 끝에서------------------------------------------------------------------- "썩 괜찮지 않아? 모양은 좀 그렇지만 튼튼해 보이긴 하잖아. 난 나한테 이런 손재주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짐짓 밝게 말하며 엘은 뚱하니 앉아 있는 리오를 흘긋거렸다. "잘만하면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 같아. 그렇지?" 그녀의 예상대로 리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엘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얼굴이 불어지고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힘껏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아픈 왼손까지 이용해 단단히 묶었다. 이제 햇빛을 가려 줄 수 있는 천을 나무판 윗부분에 고정하기만 하면 근 반나절을 낑낑대며 만든 운반용 수레가 완성되는 거였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를 이용해 만든 납작한 받침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떨어져 나온 마차문과 나무판자를 겹쳐 밧줄로 묶어 연결한 다음 그 위에 모포를 깔고 끝부분에 잡아끌 수 있도록 가죽 끈을 달아놓은 게 전부였다. 사실 그녀가 붙인 수레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조잡해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받침이 리오의 몸무게를 지탱한 채 거친 여정을 이겨낼 수 있느냐는 거지 겉모습이 아니였다. 엘은 마지막 마무리를 끝내고 끙 소리를 내며 뻐근한 허리를 폈다. 어깨와 팔을 움직이며 자신의 작품을 훑어보는 그녀의 눈엔 만족감보다는 근심이 어려있었다. 불편한 받침 탓에 리오의 부상이 더 악화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엘은 이런 거라도 만들 수 있었던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해며 리오를 돌아봤다. "어때? 보면 볼수록 정감가게 생기지 않았어?" 엘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때 리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바보 같으니! 정말 이게 가능할 것 같아?" 엘은 리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응수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땀 뻘뻘 흘리며 이걸 만들었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말라고!" 주먹을 불끈 쥔 리오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소리 좀 지르지마. 귀가 다 따갑잖아. 출발하기도 전에 기운을 다 써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내 발로 걸어갈 수 있다고 했잖아." "그래, 걸을 수 있겠지. 비록 한쪽 다리엔 커다란 구멍이 났고, 다른 쪽 발목은 퉁퉁 부어 올랐지만 말이야." "그럼 그냥 너 혼자 가. 난 상관하지 말고." "나 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엘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리며 받침을 리오 옆으로 끌고 가 바짝 붙였다. 그녀가 리오를 도와주기 위해 어깨를 잡으려 하자 그가 거친 동작으로 팔을 뿌리쳤다. "너 정말 이럴래?" 엘은 목소리를 높이며 리오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 리오는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엘은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리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녀의 말에 대한 리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엘이 흠칫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돌린 리오가 한마디한마디 거칠게 뱉어냈다. "그걸 아니까, 이러다간 너까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난 상관하지 말라는 거야. 알았어, 바보야? 그러니까 빨리 가란 말이야!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 떠나라고!" 엘은 잠시동안 입술을 꼭 다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리오를 바라봤다. 그리고 리오의 팔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그를 힘껏 들어 올린 다음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써서 조심스럽게 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엘이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 다리를 들려고 할 때 리오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떠나라는 말 못 들었어? 난 신경 쓰지 말고 떠나란 말이야, 멍청아!" "멍청이는 너야.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젠장! 왜 그럴 수 없어? 그럼 같이 죽을래? 이 거지같은 먼지 속에서 나하고 사이좋게 말라 죽기라도 하고 싶어?" 손목을 자르기라도 할 것처럼 리오의 손가락이 매섭게 조여 들었다. 엘은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벌떡 몸을 세웠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 거지같은 먼지 속에서 죽을 생각없어. 또 널 여기 남겨 두고 나 혼자 갈 생각은 더더욱 없어. 난 너와 함께 살아남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둘 다 살아서 이 평원을 벗어나게 만들 거야, 반드시." 엘은 임시변통으로 받침과 연결해놓은 나무 판자 위에 갖가지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물 주머니 하나, 바닥에 흩어진 것까지 주워 담는 바람에 흙이 좀 섞인 약간의 호밀가루와 말린 고기, 그리고 약초꾸러미와 기온이 떨어지면 유용하게 쓰일 모포 한 장과 몇 개의 옷가지들.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네가 결정해, 리오." 엘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리오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봤다. "우리 둘 다 이 곳에서 죽든지, 아니면 둘 다 살아 남든지. 신중히 생각해야 할 거야. 만약 네가 죽음을 선택하면 너와 나만 죽는 게 아니니까. 리반도 우릴 기다리다 천천히 죽음을 맞게 될 거야. 리오,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엘은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리반이 그 곳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고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거. 네가 이렇게 바보같이 굴면 우리 세 사람 다 죽는 거야." 리오가 옆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엘은 창백한 얼굴로 침울하게 앉아 있는 리오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힘내, 바보야! 천하의 리오님이 그렇게 풀 죽은 모습을 보여서야 쓰겠어? 그리고 앞으로는 혼자 가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 절대하지 않는 거다!" 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받침과 연결된 가죽끈을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리오를 돌아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출발한다!" 클레르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펼쳐 놓기만 했을 뿐 한 줄도 읽지 못한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미 집무실 구석구석까지 어스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숨막힐 것 같던 회의실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정원을 거닐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무실에 틀어박힌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고민한 건 과연 그가 계속 대사제란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무거운 한숨만 연이어 토해냈을 뿐 명확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클레르몽에게 참기 힘든 무력감과 절망을 안겨 준 회의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테르제 대사제의 배려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보낸 견습사제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막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견습사제가 그에게 내민 건 극비임을 알 수 있는 붉은 밀랍봉인이 찍힌 서찰이었다. 클레르몽은 어두운 눈으로 한동안 서찰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봉인을 뜯었다. 서찰엔 찬반 모두 같은 수의 표결이 나왔고, 그 때문에 이틀 후 다시 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악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던 클레르몽은 서찰을 움켜쥐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조금 미뤄졌을 뿐 결론이 그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나리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두 명의 대사제 모두 반대쪽 의견을 지지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시리움 종단은 역사상 유례없는 더러운 사기극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클레르몽은 차라리 그 꼴을 보기 전에 아시리움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괴로운 탄식을 토해냈다. "그래, 어차피 이 곳을 나가는 건 시간문제가 될 테니까." 막 입술을 다물던 클레르몽은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이렇게 어리석다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한탄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한심한 꼴이라니!" 그는 얼얼해질 만큼 으스러져라 어금니를 악물고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죄인이 잡히기 전까지, 아니, 가짜와 진짜가 뒤바뀌기 전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전에 막아야 하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사제들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클레르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탄자 위를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대사제들을 한 명씩 찾아가 설득해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기나 할까 하는 걱정이 뒤따랐다. 힘없는 지방영주의 서자라는 출생 때문에 대부분의 대사제들이 그를 낮춰 보고 무시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대사제들이 그들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필리프에게 등을 돌리려 하지 않으리 란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덮어놓고 무작정 덤벼 들었다간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거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번 일을 막을 수 있는.... "성하!" 클레르몽은 걸음을 멈추고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법황 성하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다고!" 황급히 책상으로 돌아온 클레르몽은 직인이 찍힌 문지(文紙)를 꺼내 이번 일에 대한 개요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회의 결과를 밝힌 뒤 이틀 뒤 대사제들이 다시 모이게 될 거란 사실을 쓰려고 했을 때 시야에 어떤 움직임이 감지됐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든 클레르몽은 집무실 중앙에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발견하고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사제님."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여인이 고개를 들며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어떻게..." 클레르몽은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엉거주춤 일어났다. "갑작스런 방문에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경황이 없어 미리 연락 드리지 못한 점 사죄 드립니다." "저한테 무슨 볼 일이 있으신 겁니까?" "제가 모시는 분께서 개인적으로 대사제님을 꼭 만나 보고 싶어하십니다. 전 그 분을 대신해서 대사제님을 모셔 가려 온 것입니다." 클레르몽은 쓰다만 문서를 흘긋 내려다본 후 미안함이 담긴 얼굴을 여인에게 향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지금은 시간 내기가 어렵습니다. 절 만나고 싶어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려 주시면 내일이라도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여인의 붉은 눈동자에 재미있다는 기미가 어리며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조금씩 깊어졌다. "참으로 죄송하지만 그건 좀 곤란하겠습니다." 의외의 말에 놀란 클레르몽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을 때 작렬하는 붉은 빛이 정면에서 달려들어 그를 덮쳤다. 클레르몽은 아찔한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몸을 지탱할 것을 찾아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건 텅 빈 공간뿐이었고 곧 그 허공조차 그가 디디고 있는 바닥과 함께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황토색 바람이 불었다. 엘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았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격렬히 나부끼며 얼굴이 따끔거렸다. 평원을 가로지른 바람은 매우 거셌고, 그 거친 물살에 휘감긴 메마른 흙을 가득 안고 있었다. 성마른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평원은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엘은 고개를 들어 바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땅은 멀리 갈수록 부드러워 보였다. 조금씩 색이 옅어진 평원은 마치 황금빛 융단이라도 깔린 듯 보이다가 멀리 지평선 쪽에 이르러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졌다. "괜찮아?" "응." 등뒤에서 들리는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은 애써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많이 힘들지?" "아니, 힘 안 들어. 그보단 지루해 못 견디겠으니까 다른 얘기나 해 봐. 아무 거나."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리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일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나도 대충은 들었지만. 도망칠 준비를 할 때 몇몇 말소리가 들렸거든. 그런데 그 귀엽던 애들이 사실은 소름 끼치는 괴물이었다니... 내 눈으로 본 건데도 믿어지지가 않아. 가까이서 보고 싸우기까지 했던 넌 더 하겠지. 그런 괴물들하고 지금까지 여행을 함께 했다니..." "이리스와 바젤이야." 엘이 불쑥 말을 꺼내자 리오가 어리둥절한 어조로 반문했다. "무슨 말이야?" "괴물이 아니고 이리스와 바젤이라고.... 그냥 이리스와 바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리스의 검은색 눈을 떠올리며 엘은 천천히 말했다. 처절할 정도로 깊은 아픔이 담겨 있던 그 눈동자를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서 그러지?" 엘이 내쉰 한숨소리를 들은 리오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라니까." "거짓말!" 리오가 퉁명스럽게 단정짓듯 말하자 엘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제발 이제 그만 하면 안 되겠어?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간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알기나 해?" 엘은 투덜거리며 허리에 두른 줄을 풀었다. 그리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털썩 주저앉은 다음 한층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그마치 스물 두 번째야! 들었어? 네가 스물 두 번이나 똑같은 걸 물었다고!" "그 스물 두 번 내내 넌 거짓말을 했고!" 리오 역시 지지 않고 곧바로 응수해왔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할말 있으면 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끈질긴 바보 녀석!" 입술을 비죽이던 엘이 툭 던지듯 말하며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넌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에 정신 나간 녀석이고!" 리오의 심술궂은 말이 끝나자 팔로 눈을 가리고 있던 엘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피식거리던 그녀는 팔을 내리며 리오의 푸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엘의 웃 음이 꽤 오랫동안 이어지자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던 리오도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눈엔 서로에 대한 근심이 담겨 있었다. 엘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 분명한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리오에게서 시선을 뗐다. 계속 리오를 보고 있다 간 그의 상태에 대한 걱정 어린 말이 나올 테고, 그는 자신을 남겨 두고 가라는 말을 꺼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엘이 시선을 돌린 후에도 리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곧장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 벌겋게 익은 얼굴과 목. 천을 감았는데도 불구하고 전보다 더욱 심하게 부어 오른 것이 확연한 손목. 주먹을 불끈 쥐고 시선을 내리던 리오는 얇은 천에 배어 나온 핏자국을 보며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었다. 가죽 끈이 그녀의 복부를 파고든 흔적이란 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물음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자신이 엘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최악의 경우 그녈 죽게할지 모른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살고 싶었다. 엘에게 자신을 버리고 가라고 소리치는 그 순간에도 그의 가슴은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살아남아,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그녀 옆에 있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는 그가 이상했는지 엘이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쓰디쓴 자조가 치밀어 오르자 리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리오?" 리오는 엘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두려움을 감지하고 그녀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스럽게 리오를 살피던 엘이 일어나 앉으려 했을 때, 그가 불쑥 팔을 내밀어 옷소매로 이마와 볼에 배인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리오가 막 팔을 들려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쑥스러운 듯 서둘러 고개를 돌리는 그의 목덜미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방향은 잡은 거야?" 몇 번 어색한 헛기침이 이어진 후 리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엘은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뭔데?" 묵묵히 짐을 뒤적이던 엘이 호밀가루가 든 자루를 꺼내며 흘긋 리오를 바라봤다. "마차바퀴자국을 따라 거슬러 가는 중이니까. 천만다행으로 이 일대 땅은 심하게 메마르지 않았나 봐. 선명하진 않지만 바퀴자국을 구별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더라고. 조금씩 나 있는 풀을 봐도 알 수 있잖아." 엘은 점점 바퀴자국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방향이 막막해지는 그 순간까지는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길을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발한발 나아갈수록 커졌지만,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그녀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리오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 모든 것이 잘 풀릴 테니까. 바퀴흔적이 사라진다 해도 리오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 신중하게 방향을 잡으면 반드시 리반을 만나게 될 테니까. 엘은 리반을 만난 후 맞닥뜨리게 될 일에 대해서도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막막하기만 한 앞 일을 걱정하고 그 때문에 좌절하게 된다면 자신은 물론 리오까지 죽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이리스와 바젤이 우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리오가 불쑥 질문을 꺼냈다. 걸어오는 동안 그와 같은 물음을 떠올렸던 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어. 기다리고 있을지 날 찾아다니고 있을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르고. 가보면 알겠지." "그래, 가보면 자연히 알게 되게 되겠지. 리반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짐짓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빵 만들어 줄게." "뭐? 빵을 만든다고?" 리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소리를 높였다. "그래, 그럼 저 호밀가루를 그냥 먹을래?" 엘은 태연하게 말하며 물을 묻힌 헝겊으로 손을 닦고 얼굴까지 문질렀다. 먼지와 땀을 말끔하게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소중한 물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불도 없는 곳에서 무슨 수로 빵을 만들어? 더군다나 그릇도 없잖아." "다 만드는 수가 있으니까 궁금하면 눈 크게 뜨고 봐." 어리둥절해 하는 리오에게 씩 웃어 보인 엘은 본격적으로 빵 만들기에 착수했다. 우선 호밀가루에 섞인 흙을 대충 골라내고 한 움큼 움켜쥔 다음 물을 조금 부어 반죽을 했다. 반죽에 가루를 조금씩 묻혀 가며 다시 주무르는 행동이 몇 번 반복되자 이내 흔히 볼 수 있는 빵 크기의 반죽이 만들어졌다. 엘이 느닷없이 반죽을 납작하게 누르자 그녀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리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그럼, 이제 반죽은 다 끝났으니까 익히기만 하면 돼." "어떻게 익히는데?" "우릴 끈질기게 괴롭히는 저 살인적인 태양열을 이용하면 돼. 뜨겁게 달아오른 평평한 돌 위에 반죽을 놓고 그 위에 다른 돌을 얹어 놓으면, 잠시 후엔 반죽이 익어 납작빵이 만들어지는 거야." 자랑스러운 듯 씩 웃으며 어깨를 펴는 엘과 달리 리오의 얼굴엔 황당함이 어려있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해서 정말 빵이 만들어진다고?" 엘은 반신반의하는 리오를 무시하고 근처에서 평평한 돌 두 개를 찾아와 헝겊으로 닦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두 개의 돌 사이에 반죽을 끼어넣었다. "너, 그런 방법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전에 말한 네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거야?" "아니, 책에서 읽었어."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리오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을 반짝였다. "무슨 책인데? '위기상황에서 살아 남는 법', 뭐 그런 책이야?" "그런 게 아니라...." 엘이 말하기 난처하다는 듯 말을 길게 끌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꽂힌 푸른 눈을 슬쩍 피하며 마지못해 입술을 움직였다. "리반이 재미있다고 말해준 책.... 거기에 나온 내용이야." "설마.... 그 연애소설은 아니겠지?" 엘이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이자 기가 막힌 리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겨우 그거였다니!" "겨우 그거라니? 그런 말 하지마. 그런 대로 읽을 만 했단 말이야. 모르던 것도 많이 알게 되었고." 재미있다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던 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난 네가 책 읽는 걸 본 기억이 안 나지?" 리오의 질문이 끝나자 엘이 씩 웃음을 지었다. "네가 알면 날 얼마나 놀릴까 싶어서 네가 잠잘 때만 읽었거든."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고 리오의 눈치를 살피던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재빨리 소리쳤다. "그렇지! 리오, 이제 빵이 다 됐을 거야! 얼마나 근사하게 만들어 졌을까?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리오가 그녀의 과장된 말에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네 말대로 가슴이 사정없이 두근거리고 있으니까 빨리 빵이나 줘.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그런 것 같으니까." 크게 고개를 끄덕인 엘이 귀한 보물을 다루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돌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보라색 눈은 기대감으로 쉴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것 봐, 리오!" 엘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며 리오 앞에 너덜거리는 납작한 덩어리를 불쑥 내밀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빵이 만들어졌어. 리오, 너무 근사하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걸레같이 보이는 빵을 바라보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있던 리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정말 근사하다." "어서 먹어 봐. 맛은 더 멋질 테니까." 빵을 한입 베어 문 엘이 슬며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옮겨지기라도 한 듯 리오의 입술에도 어느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뼈가 얼어붙는 듯한 오싹한 감촉이 전신을 엄습했다.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가들었다. 클레르몽은 숨을 헐떡이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유령의 그림자처럼 음산하게 흔들리는 횃불이 보였다. 싸늘하게만 느껴지는 붉은빛이 습기를 머금은 축축한 돌벽과 돌바닥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 낯선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그래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본능이 전신의 뼈와 근육을 바짝 긴장시켰다. 하지만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클레르몽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멈추고 허겁지겁 자신을 살폈다. 움직임을 방해할 만한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클레르몽은 그저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전신을 옥죄고 있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군." 거만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선뜻 잡히진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게 분명한 음성에 클레르몽은 눈을 깜박여 서둘러 초점을 맞췄다.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남자가 자일스 황태자라는 걸 깨닫게 되자 가늘게 좁혀졌던 눈매가 커다랗게 열렸다. "화,황태자전하?" 어눌한 목소리에서 극도의 혼란이 묻어 나왔다. "맞다, 난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다. 그리고 넌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이고." 클레르몽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자일스의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려졌다.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그리고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여기가 어딘 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연거푸 질문을 토해내던 클레르몽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떠오르는 순간 크게 소리쳤다. "그 여인! 그 여인이 말한 분이 바로 전하십니까? 절 만나고 싶어 하신다던 그 분이 바로 황태자 전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사제님." 자일스 뒤쪽에서 조금 쉰 듯 하면서도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클레르몽은 불빛이 비추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나오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마체라타라 합니다, 대사제님.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이 분은 제가 모시는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전하십니다." 자일스옆에 멈춰 선 마체라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자일스와 마체라타를 번갈아 바라보던 클레르몽이 굳은 어조로 말했다. "전 분명히 당장 시간을 내는 건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절 강제로 데려오신 것 같은 데, 제가 수긍할만한 이유를 대주십시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전 지체없이 이 곳을 나가겠습니다." 클레르몽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자일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급속도로 험악하게 변해갔다.그와는 대조적으로 클레르몽을 바라보는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엔 희미한 감탄이 서려있었다. "합당한 이유? 합당한 이유를 대라고?" 자일스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글대는 초록빛 눈동자엔 증오가 넘실거렸고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참지 못한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상태를 눈치챈 마체라타가 손을 뻗어 하얗게 마디가 불거진 주먹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손을 뿌리치려고 하던 자일스가 거친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애써 자제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유라면 대주지. 네 놈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과 치욕. 그 두 가지가 이유다." "고통과 치욕이라 하셨습니까? 저 때문에 전하께서 고통과 치욕을 당하셨단 말씀입니까?"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클레르몽이 뒤늦게 반문했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자일스의 입술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오늘 회의에서 전하의 의견을 반대한 것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전 그저 제 견해를 밝힌 것뿐 전하께 모욕감을 드리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 외람된 말 씀이지만 제 뜻을 바꿀 생각도 없습니다." 클레르몽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일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려 하는군. 물론 네 사주를 받고 날 공격한 마법사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하겠지.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살점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가 뼈가 하얗게 드러나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마,마법사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클레르몽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힘없이 다물고 말았다. 급속도로 몰려드는 혼란과 두려움에 몸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조금씩 마비되어갔다. 심장은 미칠 듯이 고동치는데 머리는 하얗게 색이 바랜 듯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전하, 크나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정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네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날 공격한 그 마법사 놈이 어디 사는 어떤 놈인지, 오직 그것 밖에 없단 말이다." "마법사라니... 제가 마법사를 사주해 전하를 공격했다니.... 지난번 아시리움 성전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 데 전 정말 모르는...." "닥쳐라! 입 닥치란 말이다!" 버럭 소리친 자일스가 클레르몽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네 놈 때문에 내가 겪은 고통과 치욕... 그 끔찍한 고통과 피가 거꾸로 솟는 치욕을 생각하면... 그것만 생각하면...." 숨이 막힌 클레르몽의 얼굴이 금세 사색이 되었다. 그가 괴롭게 몸을 꿈틀거리자 자일스가 더욱 목을 바싹 조였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그러다 정말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살짝 비꼬듯 말한 마체라타가 팔을 뻗어 목덜미를 휘감은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냈다. "언제가 됐든 어차피 죽을 놈 아니냐?" 험악하게 이를 갈면서도 자일스는 마페라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마법사를 생각하십시오, 전하. 아직 그 마법사에 대해 알아낸 것이 조금도 없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또 한가지, 죽음의 순간을 꼭 보고 싶다고 하시던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머지 않아 도착하실 텐데.... 만약 전하께서 분노를 참지 못하신 나머지 일을 벌이신다면 그 분께서 몹시 서운해 하실 겁니다." "그래,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해라." 자일스가 클레르몽에게서 한발 물러서며 못마땅한 눈초리로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클레르몽은 흘긋거리더니 묘한 흥미가 담긴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너한테 맡기겠다, 마체라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늙은이의 입을 열게 만들어라. 처음엔 내 손으로 직접하려고 했지만... 네 실력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 단, 네 말대로 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마무리를 지어라." 마체라타가 자일스를 향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명령을 제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족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자일스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를 따라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불이 붙은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오직 고통뿐이었다. 잔인한 아픔이 눈앞에 서 있는 여인도, 분노 섞인 자일스의 외침도,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 어둠 저편으로 침강시켜버렸다. 어둠이 조금씩 진해지며 정신도 감각도 몽롱해졌다. 자신의 영혼이 만신창이가 된 몸에서 분리되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클레르몽이 이 약하디 약한 안식의 세계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을 때, 다시 한 번 격렬한 고통이 살을 후벼팠다. 거칠게 갈라진 비명이 일그러진 입술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미약한 울부짖음 속으로 살이 타는 역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호흡도 생각도 불가능했다. "클레르몽! 빨리 입을 열란 말이다!"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고통이 조금 잦아들었다. 악몽 속을 어렴풋이 울리는 자신의 이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전하, 더 이상 계속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어떤 고통을 가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놈입니다. 이러다간 필리프 대사제께서 도착하셨을 땐, 차디 찬 시체만이 남게 될 것 같아 올리는 말씀입니다." "젠장! 젠장!" 독기서린 초록빛 눈을 부릅뜨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악을 쓰며 욕설을 뱉어 냈다. 그는 성질을 못 참겠는지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램프를 들어 벽에 집어던졌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에 쏟아진 기름에 불이 번지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체라타가 팔을 내리며 자일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탁하고 습한 공기가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할까 염려스럽군요. 필리프 대사제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밖에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전 나중을 위해 이 매캐한 연기를 조금이라도 없앤 다음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아무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문 채 클레르몽을 노려보던 자일스가 발을 쿵쿵 울리며 밖으로 나갔다. 육중한 쇠문이 귀가 멍멍해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마체라타는 공기를 울리는 진동이 사라지기 전에 바닥의 불을 말끔히 없앴다. 뒤이어 연기까지 깨끗하게 처리한 그녀가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을 때였다. 클레르몽에게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유난히 신경을 거슬린 듯 마체라타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클레르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힘없이 꺾인 얼굴을 내려다보다 허리를 굽히고 그의 귓가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대사제님." 나지막한 속삭임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피투성이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원하신다면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클레르몽에게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고 판단한 마체라타가 몸을 바로잡으려 했을 때 클레르몽이 놀랄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거짓말하는 게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마체라타가 가볍게 응수했다. "필리프 대사제가 증인이 있다느니 인장이 찍힌 문서와 마법사에게 보내는 서찰이 있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어지간히 멍청한 작자가 아닌 이상 그런 수준 낮은 실수를 저지를 자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자일스 전하를 공격한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따위는 저와 별개의 일일 뿐입니다. 필리프 대사제의 독기가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마체라타가 조금 날카롭게 느껴지는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고통없이 죽음을 맞고 싶으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이 발소리가 들리십니까?" 돌계단을 내려오는 규칙적인 울림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편안한 죽음이 다 무슨 소용있겠소? 어차피 오래 살아 있지도 못할 텐데... 내가 원하는 건.... 레지나.... 내 딸 레지나를 멀리서라도 한 번 보고 싶은 것 뿐이오. 고향을 등지며 버리고 온 내 딸...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한 그 아이를..." 처연한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잔뜩 웅크린 클레르몽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며 목에서 짜낸 것 같은 괴로운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섬광이 번득였다. 그녀는 입술을 힘껏 깨물며 클레르몽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대사제란 직위를 버리고 클레르몽이란 이름을 머리에서 지워 버릴 수 있나? 맹세하라!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란 말이다!" 마체라타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클레르몽의 어깨를 흔드는 그녀의 격렬한 몸짓엔 광기가 배어있었다. "그게 무슨 말..." "말해! 어서 말하라고!" 마체라타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매,맹세하겠소!" 다급한 외침이 공기를 울렸을 때 마체라타의 입술에 짧고 강렬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의자에 결박되어 있던 클레르몽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무슨 일이냐?" 자일스가 문을 열어 젖히며 크게 소리쳤다. 마체라타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오셨습니까, 전하? 이런, 대사제님께서 이 곳까지 발걸음하시다니!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살짝 허리를 굽히는 마체라타를 응시하며 자일스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시선엔 의혹이 어려 있었다. "크게 소리치는 것 같았는데...." "놈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약간의 회복마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걸 눈치채고 제발 빨리 죽여 달라며 울며불며 소리를 질러 대더군요." 마체라타의 목소리엔 여유가 가득했다. 자일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필리프 대사제가 꺼림칙한 얼굴로 클레르몽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전만해도 소리를 질렀다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축 늘어져 있는 거요?" "죄송합니다, 대사제님.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그만.... 이성을 잃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서,설마..." 놀란 필리프가 말을 잇지 못하자 마체라타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전 그저 입을 닥치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쉽게 숨이 끊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뭐라고? 그렇다면 놈이 죽었단 말이냐?" 자일스가 성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저 우발적으로 생긴 불행한 사건일 뿐, 전하의 뜻을 거역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슬쩍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자일스가 잠시 후 얼굴을 펴며 입을 열었다. "조금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놈이 고통스러워 하는 꼴을 실컷 보았으니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 자일스의 시선이 마체라타에게서 필리프에게 옮겨졌다. "대사제께서 많이 서운하시겠군요. 원하신다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시체가 되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실 겁니다." 만신창이가 된 피투성이 시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필리프가 진저리를 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클레르몽의 죽음자체는 더할 나위없이 흡족했지만 자신이 죽인 거와 다를 바없는 흉칙한 시체를 바로 코 앞에서 보는 건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닙니다. 마음 써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전하." 필리프는 서둘러 자일스의 권유를 거절했다. 죽어가는 클레르몽을 보며 한껏 비웃어 주려던 마음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새 필리프는 자신이 오기 전에 클레르몽의 숨이 끊어진 것에 대해 안도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이만 나가는 게 좋겠군요. 늙은이가 입을 열지 않고 죽어버렸으니 그 마법사 놈을 찾을 길이 막막하게 되었습니다. 현명하신 대사제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필리프의 얼굴에 슬며시 불편한 심경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점잖은 어조로 좋다고 말 하며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일스의 뒤를 따랐다. 사실 그는 클레르몽의 시체를 본 순간부터 자일스와 마체라타에게 은근히 두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자일스를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자신 또한 클레르몽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공포가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막 문을 나서려던 자일스가 고개를 돌려 마체라타를 바라봤다. "넌 뒤처리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다음 나와라. 어느 누구도 클레르몽의 시체를 보아 선 안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습니다, 전하. 클레르몽은 핏방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공손한 마체라타의 대답이 끝나고 자일스의 흡족한 얼굴이 문 저편으로 사라졌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서 있던 그녀가 잠시 후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거칠어지는 웃음소리에서 짙은 혼란이 묻어 나왔다. 마체라타는 계속해서 웃어대며 클레르몽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씩 몸 떨림이 잦아들더니 잠시 후 그녀의 입술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사제님,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대사제님의 그 무엇이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입니까?" 고개를 숙인 채 미동없이 앉아있는 클레르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체라타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뿐입니다. 맹세를 깨신다면... 다시 제 앞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나타나신다면... 그 즉시 오늘 못 다한 일을 마무리지을 겁니다." 마체라타가 입술을 닫는 순간 그녀가 만든 허상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제 44장. 잃을 수 없는 것------------------------------------------------------------------- "모두 멈춰라! 여기서 잠깐 쉬어 간다!" 말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사일러스는 지체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터지려 하는 재채기를 애써 억누르며 서둘러 말에서 내려섰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사일러스의 입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한 요란한 재채기가 연거푸 쏟아졌다. 놀란 말이 펄쩍 뛰어오르자 상황을 눈치채고 어느새 옆에 와 있던 제러드가 서둘러 말을 진정시켰다. "물 좀 드십시오, 형님." 사일러스는 형님이란 호칭에 대해 꾸짖기는커녕 입 한번 방긋하지 못한 채 에지몬트가 내미는 물통을 황급히 받아들었다. 바싹 마른 먼지로 가득 차 있는 건조한 공기는 사일러스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까지도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귀같은 존재였다. 물통을 내리고 손등으로 턱을 훔치던 사일러스는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는 이케르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이케르?" 저 멀리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케르가 사일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기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있습니다, 단장님. 명령을 내리시면 제가 즉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반짝이는 것이라고?" "예, 단장님. 바로 저 지점입니다." 사일러스는 이케르가 가리키는 쪽을 유심히 살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다른 기사들도 하나 둘 일어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켰다. "어, 진짜 반짝인다!" 카셀이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쳤다. "저게 대체 뭘까요?" "뭐긴 뭐야? 그저 그런 돌멩이지." 에지몬트의 질문에 제러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도 돌멩이 같아. 반들반들하게 닳은 돌멩이는 빛을 받으면 간혹 저렇게 반짝일 때가 있거든." 눈매를 좁히고 있던 세르피언까지 제러드의 견해에 힘을 보태주었다. "나 역시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확인하고 오겠다는 널 굳이 말리지 않겠다." 사일러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간단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이케르가 말을 출발시켰다. 사일러스와 기사들은 먼지가 섞인 누르스름한 햇살을 반사시키며 조금씩 작아지는 이케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여튼 이케르 녀석은 호기심도 많아." 카셀이 다리를 길게 뻗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아니래? 이틀 전에도 이상한 게 있으니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득부득 고집을 부렸잖아. 그래서 방향을 바꾸면서까지 가보니 말라 비틀어진 동물 뼈다귀가 전부였고. 맥 빠진 우리 앞에서 이케르 녀석은 그 뼈다귀를 들고 보물이라도 되는 듯 샅샅이 살피기까지 했잖아. 아무튼 이케르같이 별난 녀석도 드물 거야." 제러드의 말에 기사들은 물론 사일러스까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케르 선배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사뭇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나는 에지몬트를 향해 카셀이 시큰둥하게 반문하더니 제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아냐?" "아니, 그걸 알아서 내가 뭐하겠어? 이케르 녀석이 여섯 살이든 예순 살이든 그 험악한 얼굴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물어볼까 봐 미리 밝히는데 나도 몰라." 세르피언의 말이 끝나자 에지몬트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선배님들 모두 편하게 말을 놓는 거로 보아 다들 동갑인 줄 알았는데..." 제러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갑은 무슨? 우리 중에 서로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다. 우리 켈름기사단 단원들은 절대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괜히 밝혔다간 그 나이가 빌미가 돼서 얕잡아 보일 수 있거든. 나이가 적으면 적은 대로, 또 많으면 많은 대로. 얕잡아 보일 걱정이 없다 해도 나이 따위는 알 필요도 없는 거고. 아마 우리 중엔 지 나이도 모르는 녀석이 있을 걸?" 제러드가 히죽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카셀을 바라봤다. 그러자 얼굴이 시뻘게 달아오른 카셀이 맹렬히 분노를 터뜨렸다. "뭐야, 임마? 나이를 몰라? 내가 왜 내 나이를 몰라?" "누가 뭐래? 웃긴 녀석! 난 카셀의 '카'자도 입에 담은 적 없다고." 제러드의 능청스러운 말이 끝나자 세르피언이 벌렁 드러누우며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씨근덕거리던 카셀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에지몬트가 한발 먼저 크게 소리쳤다. "말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저는요? 제 나이는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네 나이는 다들 잘 알고 있지." 카셀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굳은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던 에지몬트가 갑자기 의혹 어린 시선을 사일러스에게 던졌다. "난 그런 쓸데없는 말까지 옮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러자 피식거리며 에지몬트를 바라보고 있던 제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걸 말씀하실 단장님이 아니시지. 네 나이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건 바로 카밀라야. 카밀라 덕분에 우린 네가 언제 동정을 잃었는지도 알고 있다고. 네 열 여섯번째 생일날이었다며? 너와 황홀한 밤을 보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아마 그 다음날 아침부터 그랬을걸. 그 이후로도 심심할 때마다 꼭 한 번씩 꺼내고." "맞아, 카밀라는 워낙 소탈해서 비밀이 없거든." 맞장구를 친 카셀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머니 연배인 카밀라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던 에지몬트는 사일러스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이케르 선배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제히 얼굴이 굳어진 기사들이 앞다투어 몸을 세웠다. 긴장 어린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날카로운 시선들이 한 곳에 모아졌다. "어, 저기!" 조금씩 피어오르는 먼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에지몬트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구릉 위로 이케르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고 있음을 깨달은 기사들이 불안한 시선을 나눴다. "무슨 일이냐?" 이케르가 도착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일러스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서는 그를 향해 물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단장님." 이케르가 숨찬 어조로 말하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넓적한 손바닥 위엔 색색의 구슬을 꿰어 만든 팔찌가 묘한 위화감을 풍기며 놓여 있었다. "이건 팔찌 아니냐?" 사일러스의 말에 이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 카셀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런 팔찌가 데클란 평원에 떨어져 있는 걸까요, 단장님?" "더욱 놀라운 건 팔찌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는 점입니다. 먼지가 묻고 살짝 긁힌 것 외에는 조금도 흠집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팔찌가 아주 최근에 버려졌다는 말이잖아?" 제러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말이 그렇게 되나?" "혹시 그 소녀가 얼마 전에 여길 지나친 거 아닐까요?" "글쎄 말이야!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을 것 같은 데!"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고조돼 있던 사일러스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해라! 아직 밝혀진 것도 없고 확실한 것은 더더욱 없다! 땅에 떨어진 사소한 물건 하나를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추측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란 말이다. 괜한 억측은 모든 걸 망칠 뿐이니 모두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 "알겠습니다, 단장님!" 기사들의 단호한 대답이 끝나자마자 이케르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보고드릴 게 더 있습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어 팔찌가 떨어져 있던 곳을 지나 구릉 아래로 내려갔습니다.그리고 거기서 누군가 야영한 것이 분명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야영의 흔적이라고? 자세히 살피고 온 것이냐?" "살필까 하다 제 독단으로 행동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사실말이 흔적이지 모포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엉망이 된 채 널려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사일러스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혹시 유목민이 잠시 머물던 곳일까 싶어 울타리를 친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풀이라곤 띄엄띄엄 난 잡초 몇 개가 전부인 곳에 유목인이 머무르진 않았을 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사일러스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두 서둘러 말에 올라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기사들은 사일러스를 따라 힘차게 말을 출발시켰다. 그들은 빠르게 말을 달려 순식간에 구릉을 넘었다. "좌측입니다!" 이케르의 외침에 능숙하게 방향을 틀은 그들이 저만치 떨어진 야영지를 확연히 알아보게 되었을 때였다. 급하게 숨을 들이쉰 사일러스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멈춰라!" 반사적으로 고삐를 당긴 기사들이 흥분한 말들을 애써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말이 아니라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돌을 쌓아 올린 낮은 기둥 위에 모포를 얹어 만든 초라한 천막 앞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얼어붙은 듯 멈춰 있던 소년이 경계심을 드러내며 한발 물러서자 햇빛을 반사시킨 붉은 머리카락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신원을 밝히시오!" 소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위엄을 발하며 소리쳤다. "혹시 체르몬 국의 왕자전하십니까?" 사일러스의 물음이 떨어지는 순간 소년의 파란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차 올랐다. 도망갈 곳을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소년이 결연히 기사들을 마주했다. 사일러스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마비된 것처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다른 기사들도 땅에 발을 딛었다. "리오카사이 왕자전하십니까? 아니면 리바너프 왕자전하십니까?" 사일러스는 거칠게 쿵쾅대는 심장박동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소년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위압감을 풍기며 거대한 벽처럼 자신 앞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일러스가 그를 안심시키려 했을 때 소년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난 리바너프 메디우 드 아르트로 왕자요." 리반에게서 의연한 대답이 나오는 순간 기사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왕자전하, 경계심을 푸십시오. 신원을 밝힐 순 없지만 저흰 명예와 신의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기사입니다. 저희가 말을 멈춘 이유는 전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절대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점잖고 무게있는 사일러스의 어조에 리반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조금 잦아들었다. "내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난 지금 도움을 청할 입장이지 누굴 도울 처지가 못되오. 하지만 결정은 먼저 기사의 말을 들어본 다음 내리겠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사일러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저흰 얼마 전까지도 전하의 일행이었던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소녀를 찾고 있습니다." 리반의 눈에 경악이 나타났다. 그는 놀란 나머지 부인해야한다는 생각을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알렉스! 알렉스를 찾는다고? 아시리움에서 보낸 추적자들이오? 그래,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이 틀림없어! 아시리움이 우릴 잡기 위해 보낸...." "아닙니다, 전하!" 사일러스가 리반의 외침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잔뜩 흐려진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찾는 건 알렉스란 이름을 가진 소년이 아니라 엘이라 불리는 소녀입니다." 먼지바람에 혹사당한 눈이 당장이라도 빠질 듯 화끈거렸다. 더 이상 아픔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자 세상이 빙빙 도는듯한 어지러움과 함께 눈꺼풀 위로 붉은 기운이 아른거렸다. 엘은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헉헉 거친 숨이 쏟아졌다. 그 숨과 함께 가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고통스러운 건 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의 살갗들이 아팠다. 엘의 전신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깨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고통이었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 얼마나 걸어온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신경 쓸 기력도 없었다. "내가 잠이 들었었나 봐." 조금 잠긴 듯한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엘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대답했다. 친숙한 목소리가 기운을 북돋아 주었는지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열기가 한결 가신 것 같아. 해가 기울어져서 그런가 봐." 엘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리오의 말과는 달리 태양은 여전히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갑게도 그 주위엔 엷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한결 밝아진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맹렬한 태양을 막아 주기엔 운층이 너무나 약해 보였지만 오직 거대한 불덩어리만 존재하던 하늘에 구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열기가 식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오, 네 말대로 해가 좀 기울어진 것 같아. 그리고 운이 좋으면 구름이 해를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수도 있겠어.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이제 얼마 있으면 한결 견디기 쉬워질 거야." 엘은 힘을 내어 씩씩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뜨거웠던 대지는 어스름이 깔리며 식어 갈게 분명했다. 그리고 어스름은 소리없이 그 서늘한 손을 넓게 펼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의 육신을 감싸 안으리라. 하지만 시간이 흘러 대지가 품었던 태양의 열기가 모두 사라지게 되면 그들을 다시 고통으로 밀어 넣을 냉기가 찾아 들것이다. 엘은 다가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 때 리오가 조용한 어조로 질문을 꺼냈다. "무슨 생각해?" "으음... 시원한 숲속의 부드러운 이끼에 누워 구름이 두텁게 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내 모습." 엘은 장난기를 담아 대답한 다음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리오의 말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그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엘, 내 말이 맞았어." "무슨 말?" "전에... 내가 그랬잖아. 앞으론 알렉스라는 이름보다 엘이 더 친근해질 거라고." 엘은 자신도 모르게 씩 웃었다. 바짝 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통증이 일었다. 혀끝으로 핥자 비릿한 피맛이 났다. "이젠 네가 언제 알렉스였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 "나도 요즘 들어 종종 내가 언제 아시리움 성전에 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 아니, 꼭 꿈속에서 있었던 일 같아." "엘..." "왜?" 잠시 침묵하던 리오가 나지막한 어조로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 "그래, 나 여기있어. 내 이름이 바로 엘이고. 왜 자꾸 부르는 거야?" 리오는 엘의 모습이 흐릿해지자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그녀와 창백하게 흐려진 하늘이 뒤엉켜 아물거렸다. "몰라, 그냥 불러보고 싶어.... 자꾸만...." "싱겁기는... 너 아직 잠이 덜 깬 거 아니야? 다시 잘래? 내가 자장가 불러줄까?" 엘이 숨죽여 웃는 어린아이처럼 자그맣게 키득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리오의 입술에도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며 대신 짙은 피곤이 찾아 들었다. 눈꺼풀이 조금씩 늘어지더니 어느새 가느다랗게 뜨고 있기도 힘겨워졌다. 리오는 내리 덮이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버티며 입술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엘을 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힘없이 벌어진 입술에선 작은 숨결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리오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햇빛이 노닐다가 점차 희미해졌다. "왜 말을 안 해? 내가 불러주는 자장가 듣고 싶지 않아? 아니면 상상만해도 끔찍하고 소름 끼쳐서 그래?" 엘은 장난스럽게 묻고 나서 슬쩍 미소를 머금은 채 리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오에게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리오, 자는 거야?"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침묵이 다가들었다. 뭐라고 집어낼 수는 없지만 마치 어둠의 파문처럼 퍼지는 어떤 불길함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으며 멈춰졌다. 엘은 참고 있던 숨을 조금씩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리오가 보였다. 잠시 침묵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그녀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오... 자는 거야?" 리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의 세계로 가 버린 것 같았다. 마비된 듯 딱딱하게 굳어있던 엘은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렸을 때야 비로소 허겁지겁 리오 옆에 주저앉았다. "리오, 일어나 봐. 눈 좀 떠봐." 부들거리는 손을 내밀어 리오의 볼을 살짝 만지던 엘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살갗에 순간적으로 손끝을 오므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신이 번쩍 난 것처럼 리오의 얼굴과 목덜미를 다급히 더듬었다. 땀이 흥건한 그녀와 달리 리오의 피부에선 최소한의 습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메마르고 건조한 살갗을 태워 버릴 듯 몸 속에서 고열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해 봐! 어서 생각해 봐! 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금슬금 밀려드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에게 리오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엘은 리오의 웃옷 단추를 풀어 내린 다음 양쪽으로 활짝 펼쳤다. 어떻게 해서든 되도록 빨리 위험할 정도로 치솟은 열을 내려야 했다. 물 주머니를 풀어 천을 적시는 그녀의 동작은 다급할 수 밖에 없었다. "걱정하지마, 리오. 넌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을 주문처럼 연이어 속삭이며 엘은 리오의 얼굴을 정성껏 닦았다. 그녀의 손길은 그의 목과 가슴까지 이어졌다. 리오가 내뿜는 열기가 순식간에 천을 마르게 했다. 엘은 천에 물을 묻혀 그의 몸을 식히는 일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하지만 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리오의 몸 안에서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기라도 하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맹렬해졌다. 그리고 리오의 숨결도 조금씩 약해져 갔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비명이 터지려하자 엘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주는 것으로는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리오를 살리려면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를 잃지 않으려면 그게 무엇이든 우선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엘은 서둘러 약초꾸러미를 푼 다음 나무통 두 개를 들어 올렸다. 뭐가 염증에 좋은 건지 또 열을 내려 주는 효험이 있는 건 무엇인지 헷갈리는 바람에 사용하지 않고 넣어 둔 약통이었다.그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뚜껑을 연 다음 약초의 냄새를 맡고 손가락에 살짝 묻혀 맛을 봤다. "대체 뭐지? 뭐가 맞는 거지? 뭐가 열을 내려 주는 약초지?"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자 극도의 초조감이 밀려들어 그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갔다. 엘은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이는 리오를 응시하며 거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바스러져라 이를 악문 채 약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이쪽입니다, 성하." 루드비히는 머리를 조아린 남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문가에 자리잡았다. 차분하고 잔잔하게 느껴지는 연한 불빛이 고급스러우면서도 간소해 보이는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서두르지 않는 조용한 걸음으로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클레르몽을 내려다봤다. 잠시동안 묵묵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보고해라." "예, 성하." 매끄러운 동작으로 다가온 남자가 루드비히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어제저녁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클레르몽 대사제를 납치했습니다. 그 여인을 추적한 결과 리아잔제국 황태자의 수하임을 알아냈습니다." "리아잔의 황태자..." 루드비히의 입술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납치의 이유는?" "제가 알아낸 바로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하. 지난번 아시리움 성전에서 황태자를 공격한 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가 그 하나입니다.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는 그 사건을 사주한 자가 클레르몽 대사제라 확신하고 있는 듯 합니다. 다른 한가지는 물론 클레르몽 대사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잔혹한 고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대사제를 보며 꽤나 흡족해 하더군요."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냐?" "클레르몽 대사제의 입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성하.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가 아시리움 측에 무슨 요구를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황태자의 요구를 받아 들이자는 쪽과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감히 중앙회의실에 들어갈 수 없어 저희 감시자들은 대사제들이 모였다는 것만 확인하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성하." 사실 중앙회의실과 서관을 포함한 몇몇 곳에 대해 감시자들의 눈을 가리고 모든 행동을 차단한 이는 법황 자신이었다. 법황은 스스로를 완벽한 어둠으로 가린 채 아시리움을 통제하길 원했다.또한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으려 하는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용납하지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령 아시리움이 붕괴되는 일이 발생해도 법황이 금지한 곳을 보려 해선 안 된다는 건 감시자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불문율이었다. 그러니까 감시자가 자일스 황태자의 요구나 그 아래 가려진 속셈에 대해 알아낼 수 없었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바로 법황 자신이었다. 남자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법황의 눈치를 살폈다. 감시자의 능력을 벗어난 일을 문제 삼아 노기를 드러내거나 벌을 내릴 법황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엔 두려움이 어려있었다. 그건 법황에게서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탓이었다. 간혹 싸늘한 노기를 드러내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일을 제외하면 평소 법황은 대부분의 일에 초연하거나 서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 불쑥 아시리움 성전에 모습을 보인 그에게선 평소와 확연히 다른 것이 느껴졌다. 주위를 숨 죽이게 만드는 압도적인 위엄은 변하지 않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은회색 눈동자엔 강렬한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팽팽히 당겨져 미약한 자극에도 끊어질 것 같은 위협적인 어둠이 전신에서 풍겨나왔다. "계속해라." 루드비히가 날카로운 어조로 명령했다. 그제야 자신이 보고를 끝내지 않은 채 멍하니 법황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죄,죄송합니다, 성하! 계속 말씀 올리겠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리아잔의 황태자와 필리프 대사제의 밀담을 통해 알아냈습니다. 클레르몽 대사제의 죽음으로 균형이 무너졌으니 황태자가 원하는 일이 손쉽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필리프 대사제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러자 리아잔의 황태자가 말하길 자신도 그걸 노리고 계획보다 서둘러 클레르몽의 입을 막은 거라 했습니다." 클레르몽에게 못 박혀 있던 은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그에게 옮겨졌다. "너희가 클레르몽을 구한 것이냐?" 남자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의 내부를 샅샅이 꿰뚫어 보는듯한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성하. 자일스 황태자의 수하인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직위와 이름을 버리겠다는 맹세를 받아 낸 후 그를 바베 시장 뒤쪽의 지저분한 골목으로 공간 이동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정신을 잃고 진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를 저희 감시자가 데려와 간단하게나마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클레르몽 대사제를 도피시킨 여인은 그 후 그의 환영(幻影)을 만들어 황태자와 필리프 대사제를 속였습니다. 이것이 저희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성하." 그는 말을 멈추고 깊숙이 보관했던 종이를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클레르몽 대사제가 납치당하기 전 쓰고 있던 서찰입니다, 성하." 말끔히 접힌 서찰을 받아 들어 빠르게 훑어 내리던 은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에게서 섬뜩하리만치 사나운 감정의 파장을 느낀 남자가 흠칫하며 숨을 죽였다. 남자가 루드비히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을 때, 그가 서찰에서 눈을 떼며 억양없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보고가 없으면 나가 봐라." "예, 성하." 남자는 공손히 예를 갖춘 후 뒷걸음질로 서너 발자국 물러선 다음 모습을 감췄다. 클레르몽에게서 고통스런 신음이 길게 흘러나왔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그에게 다가갔다. 묵묵이 그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서찰을 말아 쥐었다. 그는 엉망으로 구겨진 서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딱딱하고 절제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리오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선을 걷고 있듯 미약한 숨결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엘은 자신의 선택이 리오를 더욱 악화시켰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피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듯한 두려움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 리오! 열 셀 동안 일어나지 않으면 사정없이 엉덩이를 걷어차 줄 거야!" 으름장을 놓은 엘은 큰 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급속 도로 작아져 여섯을 세기도 전에 힘없이 사그라졌다. "리오, 이제 그만 자. 그 정도로 잤으면 일어날 때도 됐잖아. 대체 언제까지 잠을 자려는 거야?" 들릴듯 말듯 낮게 속삭인 엘은 다리를 세워 팔로 꼭 끌어안고 무릎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지칠 대로 지쳐 축 늘어진 그녀를 더욱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건 지켜보는 것 외엔 리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이었다. 엘은 리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땅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불안한 선잠에 빠져 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순간 번쩍 눈을 뜬 엘은 리오의 얼굴로 황급히 손을 뻗었다.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메마른 피부가 심장을 멎게 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리오의 코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가져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어! 리오,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 바보야! 어서 일어나!" 미친듯이 리오를 흔들던 엘은 벌떡 몸을 세워 실성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었다. "누구 없어요? 도와줘요! 제발! 제발, 좀 도와줘요!" 영혼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절규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무심한 바람만이 그녀를 스쳐 갈 뿐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리오를 살려 줘요! 제발 리오를 살려 주세요! 엘은 도움을 갈구하듯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한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움켜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심장이 고동쳤다. 그 거센 움직임이 몸 전체로 번졌다. 꼭 감은 눈앞에 혼란스런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불이 붙은 듯 머리가 후끈 달아올랐을 때였다.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엘은 그 미약한 느낌을 놓칠까 싶은 두려움에 숨을 멈췄다. 조금씩 조금씩 울림이 강해졌다. 환청이 아님을 확신한 엘이 눈을 번쩍 뜨자 저 멀리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듯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시선을 잡아챘다. 점점 짙어지는 먼지구름을 뚫고 말에 올라탄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엘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와줘요! 리오가, 친구가 숨을 쉬지 않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엘은 남자를 향해 뛰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이쪽이에요! 어서요!" 남자가 서둘러 말에서 내려 다급히 손을 흔드는 엘을 따라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리오의 목을 만져 보더니 불쑥 단검을 빼들었다. 놀란 엘이 숨을 멈추고 한걸음 다가갔을 때, 남자가 칼날 부분을 리오의 코 밑에 바짝 가져다댔 다. 그리고 엘에게 김이 살짝 서린 칼날을 들어 보였다. "조금 약하긴 하지만 숨 쉬는 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저,정말인가요? 정말 괜찮은 건가요?" "예, 잘은 모르지만 그리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리오를 주의깊게 살피던 남자가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을 엘에게 돌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오랜만입니다, 엘." 예상치 못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엘이 당장이라도 날아올라 도망치려는 새처럼 몸을 잔뜩 도사렸다. "수염 때문인가? 그것 빼고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은 데..." 멋쩍은 얼굴이 된 남자가 굵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엘은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몬 녀석이 이 장면을 보면 절 꽤나 놀릴 겁니다." 그 순간 엘의 보라색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사,사일러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새된 물음이 터져나왔다. 햇볕에 그을린 사일러스의 검붉은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에.... 정말 사일러스가 맞아요?" 반신반의하는 엘을 똑바로 응시하던 사일러스가 어느새 웃음기를 말끔히 지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대공전하의 분부를 받고 엘을 찾아 바르테즈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기 위해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엘이 입술을 달싹였을 때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에 떨어지듯 말에서 내려서는 리반의 모습이 보였다. "리오! 대체 리오가 어떻게 된 거야?" 허겁지겁 뛰어와 무릎을 꿇은 채 리오를 훑어보던 리반이 걱정스런 얼굴을 엘에게 돌렸다. "알렉스, 리오는 괜찮은 거지?" "리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나중에 알려 줄게! 우선 리오가 괜찮은지 그것부터 말해줘!" 불안감을 못이긴 리반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엘의 옆에 서 있던 사일러스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크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리반이 가슴을 들썩이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엘이 그에게 달려들 듯 와락 다가서며 황급히 물었다. "리반, 루드비히는? 루드비히하고 첸도 같이 온 거야?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말 좀 해 봐! 루드비히는 어디 있는 거냐고?" "사제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는 나도 몰라, 알렉스." 엘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빠져나가자 놀란 리반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진정해, 사제님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으셨어." "진짜야? 정말 괜찮은 거야? 루드비히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네 눈으로 직접 본 거야?" 살갗이 패일 만큼 힘껏 리반의 손을 움켜 잡으며 엘이 필사적으로 물었다. 섬뜩할 정도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던 루드비히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리반은 그저 자신을 믿으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알렉스. 내 눈으로 직접 봤어. 사제님은 늘 봐왔던 그대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셨어."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루드비히는 정말... 괜찮은 거구나." 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리반이 잡기도 전에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엔 육중한 나무문을 제외하곤 작은 창문조차 나있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이 밀폐된 곳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낮은 불꽃뿐이었다. 벽난로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팔걸이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조금씩 기운을 잃어 가는 불꽃은 주위를 둘러싼 어둠은 물론 축축한 냉기를 쫓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남자의 얼굴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심함이 가득했다. 흔들림없던 남자의 눈에 일순 미세한 움직임이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의 등뒤로 불그스름한 빛이 일렁이더니 어느새 흩어지며 검붉은 머리채를 길게 드리운 마체라타가 모습을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움을 담고 있는 어조였다. "왜 그런 경솔한 일을 저지른 것이냐?" 남자의 무뚝뚝한 힐책에 마체라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표정을 풀고 가볍게 반문했다. "경솔한 일이라니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마체라타에게 엄격한 시선을 던졌다. "황궁에서 사람을 죽인 일 말이다. 그것도 황후가 보는 앞에서." "아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마체라타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남자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절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내 주의를 잊었느냐?" "아니오,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 명령을 어긴 이유에 대해 말해봐라!"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치미는 분노를 못 이겨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하겠습니다." 진지한 어투로 말한 마체라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바로잡았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 "예, 물론입니다. 자일스 황태자는 아마 제가 독약을 내밀어도 의심없이 받아 먹을 겁니다. 예상외로 날카로운 면이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것 역시 크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남자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루지아에 간 일은 어떻게 됐느냐?" "예상대로 진행됐습니다." "소상히 보고해라."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 마체라타가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섰다. "자일스 왕태자와 필리프 대사제의 뜻이 그럭저럭 맞아떨어졌습니다. 자일스 황태자는 아시리움 종단의 실질적인 권력을 원하고 필리프 대사제는 법황의 자리를 원하더군요. 필리프 대사제는 제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였습니다. 겉으로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기회가 오면 자신의 이익을 좇아 언제든지 칼을 꽂을 수 있는 자라고 할까요? 자일스 황태자는 필리프 대사제가 얼마나 거만하고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인지 모르고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한심스럽게 보이다가도 한순간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아시리움 쪽에서 눈치챈 거 같진 않았느냐?"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쳐갔다. "그렇고 그런 작자들만 모여있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 계획을 눈치챈다면 제가 직접 그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다. 세상을 호령한다는 아시리움의 대사제라 하여 기대를 많이 했는 데.... 사실 실망이 큽니다." "자만하지 마라. 또 경솔하게 판단하지도 행동하지도 마라. 네 말대로 대사제들은 별 거 아닌 그럴듯한 허수아비에 불과할 지 모른다. 하지만 아시리움 그 자체는 결코 만만히 보아 선 안 된다. 만약 아시리움과 관련된 일을 맡게 되면 그저 하는 척만 해라. 절대 아시리움을 건드리지 말아라. 특히 법황에겐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법황 앞에서 숨 한 번 잘못 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법황을 너무 과대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체라타는 남자의 매서운 시선이 날아와 꽂히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넌 법황을 모른다, 마체라타. 그가 얼마나 강하고 무자비한 존재인지 모른다. 아마 법황은 이미 아시리움을 건드리는 손길을 알고 있을 거다. 머지 않아 법황이 그 손길을 응징하려 할 때 넌 그의 시선 밖에 머물러야 한다." "저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가요?"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체라타의 얼굴엔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다. "알겠습니다, 언제나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돌아가라."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던 마체라타는 이내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전하, 아르벨라 황녀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종의 말에 자일스가 놀란 얼굴로 등을 세웠다. 지금까지 아르벨라 황녀가 스스로 자일스를 찾아온 일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노소프 역시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자일스는 거만하게 명령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얼굴엔 알만하다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자일스의 명을 전하는 시종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문이 열리며 아르벨라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아르벨라가 깊숙이 숙인 허리를 펴기도 전에 자일스가 차갑게 물었다. "지금 막 아버님을 알현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제 방문이유에 대해선 오라버니께서 더 잘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래? 하지만 난 도무지 모르겠는데?" 노골적인 이죽거림에 아르벨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아르벨라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야노쉬 공작에 대해 오라버니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주위를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거절한다! 할말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해라! 그렇게 못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창백하게 질린 아르벨라가 노소프를 비롯한 이십 여명의 시종과 시녀들을 둘러봤다. 불편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던 그들은 아르벨라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저야 상관없습니다, 오라버니.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 입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될 말.... 즉, 아시리움 성전에서의 일이 황궁 전체에 퍼지길 원하지 않으신다면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나으리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단히 뭉쳐진 턱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아르벨라의 목소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했다. 급속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자일스가 눈을 사납게 번득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모두 물러가라." 시종과 시녀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간 뒤 조용히 문이 닫혔다. "네 말대로 했으니 어디 마음껏 지껄여 봐라!" "왜 저와의 약조를 어기셨습니까?" 깊이 숨을 들이쉰 아르벨라가 토해내듯 질문을 던졌다. 놀랄 만큼 닮은 두 사람의 초록빛 눈동자가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불쾌감이 가득했던 자일스의 얼굴에 서서히 재미있다는 기색이 찾아들었다. "내가 약조를 어겼다고? 내 기억으로는 너와 약조한 것이 없는 것 같은 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르벨라?" "야노쉬 공작말입니다, 오라버니." 한마디 한마디 똑똑 끊어 발음하는 아르벨라의 태도에서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났다. "그 늙은이가 뭘 어찌했단 말이냐?" "오라버니를 도와 드리는 대가로 야노쉬 공작과의 혼인을 막아 주신다고, 분명히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격앙된 말을 토해낸 아르벨라가 도저히 흥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렉스... 세렌국의 왕자를 함정에 빠뜨리면 책임지고 아버님의 마음을 돌려놓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고 오라버니 입으로 직접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르벨라,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구나.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걸 내가 하나하나 짚어 주겠다. 첫째, 내가 그럴듯한 미끼로 널 유혹한 것처럼 말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날 찾아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놈을 함정에 빠뜨리겠다는 말을 한 건 다름 아닌 너다. 내가 널 찾은 게 아니란 말이다. 대답해 봐라, 아르벨라. 내 말이 틀리느냐?" 잔인한 질문을 던진 자일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히죽거렸다. 아르벨라가 피가 나올 정도로 힘껏 입술을 깨물자 웃음기가 그의 얼굴 전제로 번져갔다. "둘째, 난 그 대가로 야노쉬 공작과의 혼인을 막는 데 힘써 주겠다고 했을 뿐 책임지고 아버님의 마음을 돌려놓겠다는 말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물론 그 약속을 지켜 아버님께 다시 한번 재고해 보시는 게 어떠시냐는 말씀을 올렸다. 하지만 아버님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옅은 미소를 지은 자일스가 말을 길게 끌며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르벨라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그의 시선에서 악의 섞인 흥미가 느껴지자 아르벨라의 손끝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내가 말한 두 가지 이유가 없다 해도 이 세 번째 이유 때문에 너와 나 사이에 오간 약조는 한낱 우스갯소리 밖에 될 수 없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다면 네 마음을 존중해 말하지 않겠다. 충격이 꽤 클 테니 신중하게 결정하는 게 좋을 거다." "말씀해 주십시오." 자일스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가 그려졌다.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넌 세렌국의 알렉시스 왕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대가로 혼인을 막아달라 요구했다. 하지만 네가 실제로 함정에 빠뜨린 건 세렌국의 왕자가 아니다." 아르벨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잠시 말을 멈춘 자일스가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올가미를 바짝 조였다. "정확히 말해 주지. 네가 세렌국의 왕자인 줄 알고 함정에 빠뜨린 놈은 극악한 죄인이다. 감히 왕족을 사칭한 비천하고 더러운 놈이란 말이다!" "아,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르벨라가 잔뜩 잠긴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아시리움 신전에 가서 네가 직접 알아봐라. 아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지나가는 시종이나 시녀 중 아무나 잡고 물어 봐도 될 테니까. 알겠느냐? 놈이 가짜 왕족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건 너뿐이라는 말이다,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누이동생아!" 말을 끊은 자일스가 귀찮다는 듯 거만하게 손을 흔들었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져라! 네 영악한 잔꾀도 수포로 돌아갔으니 네 거처로 돌아가 얌전히 혼인식이나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다!" 아르벨라가 무섭도록 창백한 이마에 손을 얹으며 몸을 돌렸다. 휘청대며 뻣뻣한 걸음을 옮긴 그녀는 자일스의 웃음소리에 등이 떠밀린 것처럼 쓰러지듯 문을 나섰다. -------------------------------------------------------------------제 45장. 꼬마와 머저리-------------------------------------------------------------------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말이 왜 그렇게 갑자기 방향을 돌렸을까?" "글쎄 말이야. 나도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갑자기 말머리가 옆으로 훽 돌려지는데 한순간 몸이 붕 뜨더라고. 하마터면 낙마까지 할 뻔 했다니까." "가장 신기한 건 말이 맹렬히 달려간 바로 그 곳에 우리가 찾던 소녀가 있었다는 거야. 난 그걸 깨닫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돌더라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생각엔 그 뭐랄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한 것 같아." "그래, 바로 그거야!" 엘은 커다란 고함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밤하늘에 총총히 걸려 있는 별무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셀, 조용히 말해." 짙은 고동색 머리를 바짝 묶은 탓에 더욱 얼굴이 둥글어 보이는 남자가 갈색수염이 가시처럼 돋아난 남자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수염 난 남자가 계면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조심할게, 제러드." "하여튼 넌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냐? 죽자살자하는 부인이 매일 입에 손가락을 달고 사는 데도 나아지는 게 없으니. 그러니까 네 별명이 먹통인 거야." 엘이 일어나 앉자 열심히 카셀을 타박하던 제러드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를 비롯하여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엘에게 집중되었다. 낯선 이들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그녀가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리오 옆에 앉아 있는 사일러스에게 다가갔다. "사일러스, 리오는 좀 어때요?" "약간 열이 있는 상태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물론 호흡도 맥박도 규칙적입니다." 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런 눈길로 리오를 찬찬히 살폈다. 잠이 든 리반 과 나란히 가죽깔개에 누워 여러 겹의 모포를 덮고 있는 그는 깊은 숙면에 빠진 듯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오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고 힘차게 뛰고 있는 맥박을 확인한 후에야 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포자락을 잘 여며 준 다음 무심코 고개를 들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깨닫고 문득 동작을 멈췄다. 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기사들을 바라보자 그들의 얼굴에도 쑥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저.... 안녕하세요?" 그녀가 입술을 다물자마자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다투어 인사말과 자신의 이름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만!" 사일러스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소란이 일순 가라앉았다. "정신 사납게 하지말고 한 명씩 차례를 지켜 말해라." "그럼 제가 먼저." 기다렸다는 듯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카셀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안녕하세요, 카셀?" 엘이 자연스럽게 카셀의 이름을 말하자 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분이 세르피언, 그 옆에 계신 분이 제러드, 그리고 뒤에 계신 분이 이케르.... 사일러스는 이미 알고 있고.... 모두들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장난스럽게 씩 웃은 엘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재빨리 말을 붙였다. "그리고 제 이름은 엘이에요. 모두 앞으로는 편하게 이름을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엘!" 크게 소리친 카셀이 멋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자 다른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엘도 그들을 따라 빙그레 미소지었다. "저기... 이거...." 그녀에게 다가온 이케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자그마한 장신구를 본 엘이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케르가 어떻게 이걸 갖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맞긴 맞았군요. 혹시나해서 물어 본 건데..." "찾는 건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엘은 구슬이 꿰어진 쥬엘라를 들어 올리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행운의 팔찌가 틀림없으니까 절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엘. 엄밀히 말해 우리가 엘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팔찌덕분이니까요." 제러드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 말 명심할게요." 흐뭇한 눈으로 부하들과 엘을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 녀석이 대체 어딜 간 거지?" 사일러스의 중얼거림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던 제러드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에지몬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장님!" "어, 정말이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금방 돌아오겠지. 이 밤중에 멀리 갔겠어?" 시큰둥한 카셀의 말이 끝난 후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을 바라보고 있던 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기 있는 그림자가 그 에지몬트란 분 아니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모닥불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등을 돌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에지몬트를 발견하고 눈을 껌벅였다. "저 녀석, 왜 저렇게 궁상을 떠는 거지?" 이케르의 물음에 제러드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지은 죄? 그게 뭔데?" 엘이 하고 싶은 질문을 카셀이 먼저 꺼냈다. "답답하기는! 그걸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제러드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엘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렸다. "있어, 그런 게. 머지 않아 너도 알게 될 거야." "못난 녀석." 사일러스가 한숨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나 에지몬트에게 다가갔다. 잠시동안 소리죽인 말싸움이 이어지더니 에지몬트가 발을 질질 끌며 사일러스의 뒤를 따라 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형체가 뚜렷해지는 에지몬트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던 엘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에 살짝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에지몬트가 그녀 앞에 멈춰 선 후에도 머리에서 뱅뱅 맴돌기만 할뿐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나요?" "그,글쎄... 그게...." 에지몬트가 슬그머니 그녀를 외면하며 어색하게 얼버무렸다. 그에게 다가간 엘이 얼굴까지 들이대며 유심히 살피자 에지몬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몰릴 대로 몰린 그가 어쩔 줄 몰라하며 반대 쪽으로 고개를 꺾었을 때, 설상가상 기사들이 참고 참았던 웃음을 요란하게 터뜨렸다. "저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데... 괜찮으시다면 제게도 좀 알려 주시지 않겠어요, 기사님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싶네요." 엘이 슬쩍 비꼬자 기사들이 헛기침을 하며 하나 둘 웃음을 그쳤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녀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준 사람은 웃음을 참기 위해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카셀이었다. "그러니까 메릴랭에서 만난..." 일순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엘이 카셀의 말을 끊으며 냉큼 소리쳤다. "아아! 머저리!" 그녀의 외침이 나오고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기사들이 일제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머,머저리...머저리래, 머저리!" 벌렁 드러누워 차가운 바닥 위를 격렬히 헤매던 카셀이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하더니 이내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젠장!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이제 그만 해요! 그만 웃으란 말입니다!" 기사들을 향해 악을 쓰던 에지몬트가 엘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그는 피식피식 웃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건방진 꼬마같으니, 입 닥치지 못해!" 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급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함부로 말하지마, 머저리." 엘은 에지몬트의 약을 올리기 위해 머저리란 말을 일부러 천천히 발음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에지먼트가 씩씩대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너야 말로 함부로 혓바닥 놀리지마, 꼬마.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숨통이 잘리는 수가 있으니까." 엘은 한쪽 다리로 중심을 잡아 삐딱하게 선 자세로 크게 코웃음을 날렸다. "머저리님, 머저리 짓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지가 발기발기 찢겨 죽은 머저리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인정 많은 농부가 땅에 묻어 주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진 살점들을 모았지만 끝 내 혀는 찾지 못했다고 하던데... 정말 처음 듣는 얘깁니까?" 살살 비꼬는 말이 끝나자 재미있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살피고 있던 기사들이 작게 키득거렸다. 그들은 물론이고 사일러스조차 두 사람을 말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실 사일러스는 동생의 낯선 모습이 놀랍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흥미도 느끼고 있었다. 여자 앞에선 언제나 친절하고 부드러운 행동만을 보이던 에지몬트가 아닌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장면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게 분명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동생의 얼굴을 살피는 사일러스의 눈이 쉴새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흥분하면 자신만 손해라는 말을 되뇌고 있던 에지몬트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애써 음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살던 동네에선 너같은 건방진 꼬마에게 어떤 벌을 내리는지 아냐? 우선 튼튼한 가죽 끈으로 온몸을 단단히 묶은 다음 마을 입구에 대롱대롱 매달아 둔다. 그 아랜 큼직한 글씨로 이렇게 써 놓지.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 하는 놈이니 엉덩이가 뽀개져라 사정없이 갈겨 주기 바람." 엘은 히죽거리는 에지몬트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몇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싼 반짝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성질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할 수없이 엘은 그 대신 진한 비웃음을 날렸다. "마을 입구에 가장 많이 매달려 본 사람은 당연히 머저리겠지? 아쉽게 됐군. 진작 알았으면 그 즉시 달려가 큼직하게 써있는 글씨대로 엉덩이가 뽀개져라 사정없이 갈겨 주는 건데 말이야." "이,이 꼬마가!" 에지몬트가 눈을 부릅뜨며 덤벼들기라도 할 듯 주먹을 쥐고 몸을 도사렸다. 엘도 거기에 대응해 팔다리를 단단히 긴장시켰다. "그만해라, 에지몬트!" 사일러스는 근엄하게 소리친 다음 헛기침을 하며 슬쩍 웃음을 감췄다. "하지만, 이 건방진 꼬마가!" "그만하라고 했다!" 분을 참지 못해 씨근덕거리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에지몬트를 보자 엘의 입술에 고소하다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사일러스의 엄격한 시선을 받는 순간 머쓱함을 느끼며 서둘러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내일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움직일 계획이니 모두 잠자리에 들어라! 불침번은 내가 먼저 서겠다." 엘은 서둘러 자리에 눕는 기사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사일러스를 바라봤다. "사일러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어요? 가장 급한 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리오를 옮기는 일일 텐데...."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충이라도 알려 달라고 부탁하려던 엘은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라는 사일러스의 말에 마음을 바꾸고 묵묵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싸늘한 가죽깔개 위에 누워 모포를 머리 위까지 덮어썼다. 갖가지 상념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리오를 잃었다는 생각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던 절망부터 사일러스와 리반을 보는 순간 들었던 강한 안도감. 그리고 루드비히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벅찬 기쁨. 이 모든 것이 하루동안 일어났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더불어 이제 곧 리자드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실감나지 않았다. 엘은 그녀를 둘러싼 것들이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불러일으킨 환상이나 허무한 꿈일지 모른다는 걱정에 눈을 살짝 드러내고 주위를 살폈다. 환상도 꿈도 아니란 사실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납득시킨 다음에야 그녀는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재상? 더군다나 독대까지 청하시다니.... 더 이상 재상과 나눌 얘기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 데 말입니다." 칼 베리만은 쥬네비아 황후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황후폐하,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황망히 찾아 뵈었습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칼 베리만을 똑바로 응시하던 쥬네비아가 잠시 후 주위에 있던 시종과 시녀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바라시던 대로 이제 재상과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만족하셨으면 그 긴히 하실 말씀이란 걸 어서 해보십시오." 칼 베리만은 들릴락 말락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체라타를 없애 달라는 청을 완곡히 거절한 이후 자신을 대하는 황후의 태도가 곱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앞에서 받는 노골적인 냉대와 막연한 생각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폐하, 감히 여쭙겠습니다. 아직도 뜻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쥬네비아가 망설임없이 답했다. 그리고 주의 깊게 칼 베리만을 살피며 그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렸다. "재상께선 어떠십니까? 뜻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칼 베리만은 날카롭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예, 폐하. 저 역시 그 때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쥬네비아의 단정한 입술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제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란 것도 말입니다." 황후의 담담한 말투에도, 칼 베리만을 향하는 시선에도 더 이상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엔 오히려 짙은 피로감이 담겨 있었다. "폐하, 지난번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오늘까지 폐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이건 아니라는 결론 밖엔 나오지 않았습니다. 폐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마음을 돌리십시오." 칼 베리만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쥬네비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 베리만은 번민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황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을 때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말이 들려왔다. "마음을 돌리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그,그게 무슨...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칼 베리만이 상체를 기울이며 다급히 물었다. 그를 향하는 쥬네비아의 눈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아마 지금쯤 마체라타는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의 처소에 자객을 보내셨다는..." "그렇습니다." 쥬네비아가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당당하게 시인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칼 베리만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이럴수가!" 칼 베리만이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문을 향해 갔을 때 쥬네비아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기라도 할 듯 냉정하게 말했다. "만약 이번 일을 막으려 하신다면 제아무리 칼 베리만이라 하셔도 순순히 넘기지 않겠습니다. 제 말 명심하십시오." 칼 베리만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미동없이 서 있었다. 그에게 꽂혀 있는 쥬네비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도와주실 수 없다면 차라리 모르는 척 하십시오. 이번 일은 자일스 만을 생각해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칼 베리만께서도 쥬네비아가 장차 리아잔 제국에 큰 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진 않으리라는 말을 반박하지 못하실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칼 베리만. 그리고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십시오." 칼 베리만은 바르르 떨리는 손을 문고리에서 떼냈다. 비틀거리며 몸을 돌리는 그의 얼굴은 어두운 번뇌로 일그러져 있었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일곱 개의 날렵한 그림자들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듯한 스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새 그들의 손에 저마다 예리하게 날을 새운 검이 들려 있었다. 그림자들은 목표물이 도망칠 수 없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둘씩 짝을 이뤄 침대를 세 겹으로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 남은 그림자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침대엔 눈을 꼭 감은 마체라타가 누워 있었다. 먼 발치긴해도 이미 마체라타를 본 적이 있는 그림자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깨끗한 동작으로 그녀의 심장을 향해 곧장 검을 내리 꽂았다. 순간 마체라타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목표를 잃은 검이 침대 깊숙이 박혔다.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달은 그림자가 흠칫하며 몸을 도사렸을 때 허공에서 조소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까짓 검으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마체라타가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그림자들이 목소리가 들리는 허공을 향해 지체없이 단검을 날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무거운 정적 속에서 숨을 죽이며 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긴장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임무를 성공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림자들이 조심스럽게 긴장을 늦췄을 때였다. "이제 내 차례인 것 같군." 거만한 목소리와 함께 마체라타가 그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흠칫한 그림자들이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가 그들을 덮쳤다. 검은 연기에 닿은 몸이 눈 깜짝할 새 모래처럼 잘게 부숴져 연기를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살과 피로 검붉게 물든 연기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녹아 버린 듯 자취를 감췄다. 마체라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그림자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을 늦춘 마체라타는 소리내어 하품을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잠을 청하던 그녀는 자객들을 모두 죽임으로서 배후에 있는 존재를 밝혀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굳이 배후를 밝혀 낼 필요도 없겠군. 날 없애기 위해 멍청한 놈들을 보내는 자가 그리 많진 않을 테니까. 마체라타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요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떨며 한껏 웃어 젖힌 그녀는 짙은 비웃음을 담아 낮게 중얼거렸다. "쥬네비아 황후.... 그토록 죽고 싶은가?" 부랴부랴 복도 모퉁이를 돈 아몬은 계단에 발을 디디려 하다 움찔하며 걸음을 늦췄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계단에서 미끄러져 부상을 당하는 바보짓을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아몬은 벽에 손을 짚고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와 다시 잰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앞에 멈춰서자 두 명의 시종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요근래 언제나 어둡게 그늘져 있던 얼굴이 별안간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환하게 밝아져 있으니 그들이 놀라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시종들은 호기심을 애써 숨기며 옆으로 몸을 비켰다. 루벤스타인 대공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도 그의 집무실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 수수께끼같은 마법사라는 건 잘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만의 특권을 행사해 본 적이 없는 아몬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부풀대로 부푼 기쁨과 조급함이 다짜고짜 집무실 문을 벌컥 열게 만들었다. 요란한 문소리에 흘긋 시선을 올린 리자드가 훑어보던 두툼한 보고문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등을 기댔다. "리자드님!" 다급히 안으로 들어서던 아몬이 카펫자락을 잘못 밟고 넘어질 듯 휘청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자 리자드의 짙은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리자드님!" 아몬이 다시 한번 그를 부르며 달려들듯 책상으로 돌진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더니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는군."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 리자드님! 방금 전 사일러스가 마법구슬을 시현했습니다!" 흥분을 못이긴 아몬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소리쳤다. 마법구슬은 엘을 찾으면 사용하라는 말과 함께 아몬이 직접 사일러스에게 건넨 것으로 그들이 있는 위치를 아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긴요한 물건이었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마법력이 없는 사람은 태양의 힘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햇볕이 강한 시공간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리자드님 말씀대로 데클란 평원에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리자드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몬이 머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고개도 채 들지 않은 상태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겨진 물건을 발견한 리자드가 피식 웃었을 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아몬이 다시 나타나 바닥에 놓인 신발 한 짝에 황급히 발을 밀어 넣었다. 흘긋 리자드의 눈치를 살피다 희미한 미소를 발견하게 되자 아몬의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리자드는 아몬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창 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한동안 물끄러미 먼 하늘을 응시하던 그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등을 기댔다. "이만하면 떠날 준비는 끝난 것 아닌가요?" 엘은 이미 여러 번 던진 질문을 반복하며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검을 손질하고 있는 사일러스 옆에 앉았다. "이제 거의 준비가 됐으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동이 틀 때 이미 들은 말이라고요." 엘의 입술에서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도 자신이 너무 안달복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리오에 대한 걱정이 속을 바짝바짝 마르게 하고 있었다. "사일러스, 리오 좀 다시 봐줄래요?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된 거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왜 지금까지 눈을 뜨지 않겠어요?" 사일러스는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매달리듯 그의 팔에 감겨 있는 엘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가 퉁퉁 부어 오른 손목을 신중하게 살피자 엘이 재빨리 말했다. "전 괜찮아요, 사일러스. 그러니 리오 좀 봐줘요." 사일러스는 엘의 말을 못들은 척하며 말에 짐을 싣고 있는 에지몬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지몬트, 깨끗한 천 좀 찾아와라!" "알겠습니다!" 부상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깨끗한 천꾸러미를 찾아 든 에지몬트가 빠르게 다가왔다. "사일러스, 전 괜찮다니까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입술을 실룩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에지몬트가 이죽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넘쳐 나는 것 같은 데, 이 꼬마에게 아까운 천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에지몬트는 어이없다는 시선과 분노 어린 시선을 나란히 받으며 엘을 향해 약을 올리듯 천천히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맞는 말이에요, 사일러스. 아까운 천을 저한테 낭비할 수는 없죠. 훌륭하신 머저리님의 목을 조르는 데 써야할 귀중한 천이니까요." 엘이 피식거리며 살살 비꼬자 에지몬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밤톨만한 꼬마 주제에!" "한 주먹거리인지 두 주먹거리인지는 겨뤄 봐야 아는 거 아냐, 머저리?" 서로에게 살기를 내뿜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부하들을 둘러본 다음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에지몬트, 엘의 손목은 네가 묶어라. 난 왕자전하를 살펴봐야 하니까." "싫습니다!" "싫어요!" 입술을 떡 벌리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엘의 손목에 깨끗한 천이 감겨 있지 않으면 단단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발하며 에지몬트를 노려보던 시선이 엘에게 옮겨졌다. "왕자전하께 적절한 치료를 빨리 받게 해 드리고 싶으면 얌전히 말을 따라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사일러스는 불만에 찬 시선을 받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젠장!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빨리 손 내밀어, 꼬마. 짜증나는 일 후딱 해치워 버리게." "됐어! 내 손으로 할 테니 나한테 손가락 하나도 대지마!" 에지몬트가 욕설까지 내뱉으며 이를 갈자 엘도 격앙된 어조로 응수했다.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가슴에 팔짱을 꼈다. 엘은 에지몬트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꾸러미를 사나운 동작으로 낚아챘다. 그리고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솜씨 좋게 푼 다음 단도를 꺼내 천을 능숙하게 잘랐다. 단도를 집어넣으며 그녀는 어떠냐는, 좀 뻐기는 듯한 눈으로 에지몬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은근히 약 올라 하는 그에게 씩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엘의 의기양양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 끄트머리를 턱으로 받치고 오른손으로 어찌어찌 손목을 감았지만 천은 얼마 못 가 헐거워지며 흘러내릴 뿐이었다.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에지몬트는 몸을 떨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제길!" 약이 바짝 오른 엘이 욕설을 토해내며 천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순간 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그녀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던 에지몬트가 혀를 차며 불쑥 팔을 내밀어 엉망으로 감긴 천을 풀어 내렸다. 그는 놀라 흠칫하는 엘을 무시하고 조심스런 손길로 그녀의 손목에 천을 꼼꼼히 감았다. 잠시 후 말끔히 매듭을 지은 에지몬트가 고개를 들었다. 황갈색 눈동자와 보라색 눈동자가 정면에서 마주쳤다. "고,고마...고마워." 순간적으로 당황한 엘이 얼떨결에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지몬트도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아니, 별 것도 아닌데.... 그것보다 지난번... 메릴랭에서...." "그래, 맞아! 메릴랭!" 엘이 별안간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럴 수가! 그걸 잊고 있었다니."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다음, 그녀의 고함소리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만 에지몬트를 노려봤다. "친절하시게도 메릴랭에서 날 다루스만에게 넘겨주었지." "그,그건 그렇지만.... 그 후 얼마나.... 후회를...." 엘의 격앙된 목소리가 잔뜩 주눅든 말을 가차없이 잘랐다. "나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주제에 미안하다고 사과는 못할 망정 감히 날 꼬마라고 부르며 구박을 해? 어떻게 그 정도로 뻔뻔할 수가 있어?" "아니,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엘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는 구경꾼들에게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날 꼬마라 부르는 이 머저리님은 대체 연세가 얼마나 되시나요?" "에지몬트가 지금 스무 살이지?" 카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기사들을 둘러봤다. "그래, 맞아! 스무 살이야, 스무 살!" 세르피언이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이자 정신없이 낄낄거리던 제러드가 엘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50일 정도 모자란 스물 한살입니다!" 엘은 에지몬트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올려다보는 건 아무래도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 어느새 우뚝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른인 척 잘난 체를 하더니.... 이제 겨우 스무 살?" 피식거리던 엘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에지몬트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겁니까?" 정신없이 웃던 엘은 갑자기 들려 온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몬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아....아몬?" 아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되었군요." 감격을 못이긴 듯 아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엘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아몬은 격렬하게 몸을 부딪친 엘 때문에 휘청거리면서도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이럴 수가! 아몬! 정말 아몬인거죠? 어느 순간 사라지는 바보같은 환상이 아닌 거죠? 정말 아몬이 나한테 와 준거죠?" 불을 밝힌 듯 환하던 얼굴이 조금씩 가라앉더니 급기야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엘은 눈을 깜박이며 아몬이 갑자기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의 팔소매를 움켜잡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질거리는 코끝을 주먹으로 문지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마 며칠 밤을 새워도 다 하지 못할 거예요.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아몬? 이 곳에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신이 나서 떠들던 엘이 말을 멈추고 사일러스를 돌아봤다. "그래서 사일러스가 그렇게 시간을 끈 거였군요. 난 그것도 모르고. 미리 말 좀 해주시죠. 갑자기 눈앞에 아몬이 서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엘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사일러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몬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리자드님께 먼저 보고 드리느냐고." 씩 웃던 아몬이 별안간 사일러스를 껴안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수고했어, 사일러스." "수고는 무슨."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몸을 뗀 사일러스가 죄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부하들을 발견한 순간 굵은 목덜미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단장님. 두 분 모습, 정말 보기 좋았으니까요." 제러드가 짓궂게 놀리자 카셀이 즉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단장님. 한 폭의 그림이라고나 할까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사일러스가 낄낄거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제 곧 출발할 테니 빨리 움직여라! 노닥거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단장님!" 씩씩하게 대답한 그들은 하릴없이 괜히 이곳 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지만 사일러스의 매서운 눈초리 때문에 바쁜 시늉이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으니까 이제 바르테즈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건가?" "임무완수는 아직 아니지. 엘을 무사히 바르테즈까지 데려가야 완전히 끝나는 거잖아." "마법사님이 오셨으니 바르테즈로 돌아가는 거야 일도 아니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신이 난 기사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엘이 꼭 잡고 있던 아몬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몬, 리오 좀 봐줘요.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사일러스는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몬은 엘이 이끄는 데로 순순히 걸음을 옮겨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가 멈춰서자 리오 옆에 있던 리반이 서둘러 자리를 옮겨 앉았다. 얼굴부터 다리상처까지 꼼꼼하게 살펴본 아몬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왕자전하께 무슨 약을 드시게 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서둘러 약 꾸러미를 뒤져 아몬에게 작은 약통을 내밀었다. "이걸 조금 먹였어요. 열을 내리게 하는 약초 같아서요. 정확히 알지 못해 불안하긴 했지만 열이 펄펄 끓는 바람에..." 엘은 말끝을 흐리며 약초를 조금 꺼내 유심히 살펴보는 아몬을 주시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약초를 비벼 본 다음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자 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몬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제가 잘못한 거죠? 엉뚱한 약을 먹인 거죠? 그것 때문에 리오가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거죠? 아몬, 말 좀 해 봐요. 설마 리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저 때문에 리오가..." 아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엘의 손등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안심하십시오. 엘의 조처는 훌륭했습니다. 다리 상처도 잘 아물어 가는 상태고, 또 이 약초엔 분명히 열을 내리게 하는 효험이 있습니다."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는 말에도 엘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는 아몬에게서 무언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약초가 맞았다면 리오는 왜 계속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건가요?" "왕자전하께선 혼수상태에 빠지신 게 아니라 주무시고 계신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리오가 정말 잠을 자고 있는 거요? 눈을 깜박이며 아몬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리반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정중히 대답한 아몬이 엘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건 움이란 식물의 잎과 뿌리를 말린 것으로 해열제로도 쓰이지만 그보다는 탁월한 수면효과로 더 유명한 약재입니다." "수면효과라고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엘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럼 리오는 언제쯤 잠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그건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복용한 약재의 양뿐 아니라 그 사람의 몸 상태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니까 말입니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사일러스가 아몬을 부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괜히 시간 끌며 뙤약볕 아래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 "알았어, 사일러스." 엘은 사일러스를 따라 몸을 돌리는 아몬의 옷자락을 재빨리 잡았다. "떠난다고요? 리오는 어떡하고요? 리오를 이대로 두고는 한발도 움직일 수 없어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아몬이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엘. 먼저 왕자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우릴 보면 사람들이 새카맣게 몰려들 텐데..." "데클란 평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에크젤에 유이나르님이 살고 계십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우선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왕자전하 두 분을 바르테즈로 모실 수는 없으니까요." 아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난 엘이 반사적으로 리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바르테즈 공국에 가야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리오와 리반에게 리자드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리반이 좀 씁쓰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마, 알렉스. 누군가에게 말을 옮길 수 있을 만큼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마음도 전혀 없으니까." 엘은 리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유이나르님이 놀라실 테니 우선 제가 가서 말씀을 드 리는 게 좋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아몬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우와! 이럴 수가! 정말 대단하다!" 카셀이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며 무릎까지 꿇고 아몬이 서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엘은 왁자지껄한 기사들의 농담과 웃음소리를 들으며 리반 옆에 앉았다. "리오 상태가 그리 나쁜 건 아니라니까 정말 다행이야." "응." 리반이 간단히 대답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가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입을 꼭 다문 채 리오를 내려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깬 건 리반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헤어지게 되는 건가?" 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이 이렇게.... 뭐라고 할까? 이런 식으로 금방 끝나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 금방이 아닌 건가? 잘 판단이 안 서. 아시리움 성전을 나와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굉장히 긴 것 같기도 해. 넌 어때, 알렉스?" "나도 마찬가지야." 리반과 똑같은 걸 느끼고 있던 엘이 조용히 동의했다. 침묵이 다시 자리잡았다. 왠지 가슴에 쏴하는 바람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에 엘은 다리를 세워 팔로 꼭 안았다. 리반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여행이 끝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바르테즈가 아니라서 그런가 봐. 우리 목적지는 바르테즈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알렉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리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침울하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의 입술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당연하지.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리반도 씩 미소를 지었다. "그 때까지... 으음.... 건강해야 돼." "너도 리반. 너도 건강해야 돼." 싱거운 인사말을 건넨 두 사람은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제 46장. 헤어짐 그리고 만남-------------------------------------------------------------------유이나르란 사람의 저택은 시내와 떨어진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우아한 멋이 풍기는 이층 짜리 건물이었는데, 유난히 크게 뚫려 있는 커다란 창문으로 미루어 집주인이 답답한 걸 싫어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취향은 비단 저택내부에만 국한된 게 아니어서 정원인지 숲인지 구분이 안가는 풍경이 창문 밖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엘과 리반은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를 마친 후 앞에 향기 좋은 차를 두고 앉아있었지만 유이나르란 사람을 만나 보진 못한 상태였다. 아몬의 말에 따르면 이 저택의 주인은 유난히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성격으로 요샌 거의 은둔자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엘은 그가 리오와 리반만 잘 보살펴 준다면 입술이 이마에 붙어 있고 괴팍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라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걸까?" 그녀처럼 멀뚱히 창 밖을 내다보던 리반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글쎄 말이야." 엘이 리반의 말에 맞장구치며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흘긋거렸을 때, 문이 열리더니 백발의 수염을 가슴부근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엘의 턱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작고 비쩍 마른 노인은 단호한 턱과 높은 이마, 날카롭게 훑어보는 듯한 진녹색 눈동자로 인해 완고하고 까다로워 보였다. "리오는 괜찮은가요?" 엘이 벌떡 일어서며 다급히 물었다. 노인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오는 엘과 리반을 본 체 만 체 무시하고 걸음을 옮겨 창가에 놓인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리고 서둘러 되돌아오는 두 사람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노인의 태도에 왈칵 겁이 난 엘이 얼어붙은 듯 자리에 멈춰섰다. "리오가 많이 안 좋은 건가요?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그는 얼굴에 핏기가 가신 두 사람이 리오를 부르며 앞다투어 문으로 달려가자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냉큼 이리 오지 못해? 곤히 자는 사람 괴롭혀서 뭘 어찌하겠다는 거야? 왜, 깨워서 같이 소풍이라고 가려고?"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엘과 리반이 주춤거리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하여튼 요새 젊은 것들은...." 두 사람은 끌끌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노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저... 치료사 할아버지, 리오는 괜찮은 거죠?" 엘은 노인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잠시 후 밤을 새며 기다려도 열릴 것 같지 않던 입술이 움직이며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럭저럭." 성의없는 뜨뜻미지근한 대답에 왜 안도감이 생기는지 어리둥절한 상태로 엘과 리반은 씩 웃음을 주고 받았다. "저기 반송장처럼 누워 있는 불쌍한 아이의 입에 수면제를 쏟아 부은 놈이 누구냐?" 엘의 얼굴에서 단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냐?" 노인이 엘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의 예리한 눈이 잔뜩 주눅든 그녀를 못 보고 지나칠 리 없었다. "예...." 기어 들어가는 대답이 힘겹게 흘러나온 후 예상치 못한 말이 뒤를 이었다. "잘했다.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아프다고 난리치는 것 보다는 얌전히 자고 있는 편이 치료하기 훨씬 편하니까. 전엔 뒤통수를 냅다 갈겨 정신을 잃게 만든 다음 치료를 했지만 요샌 기력이 딸려서 그것도 힘들고 말이다." "아, 예." 엘은 치료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꺼림칙한 말이라는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넌 무슨 대단한 일을 저질렀기에 아시리움에서 눈을 벌겋게 뜨고 잡는다고 난리를 부리는 거냐?" 노인의 물음이 엘의 호흡을 막아 버렸다. 그녀는 손끝이 싸늘해지는 걸 느끼며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다급히 되뇌었다. "새파랗게 질린 꼴이라니!" 혀를 차던 노인이 갑자기 은근한 표정으로 변해 엘에게 몸을 기울였다. "듣자하니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짜왕자 노릇을 했다 하던데.... 사실이냐?" 엘이 딱딱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정말 재미있었겠구나! 고리타분한 사제들이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 자리에서 그 꼴을 볼 수만 있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한참을 웃어 젖히던 노인이 배를 움켜잡고 눈물을 닦으며 엘을 바라봤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엔 희미한 감탄이 담겨 있었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아시리움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이다니.... 마음에 들었다. 네 친구는 내일 오후나 늦어도 모레 아침나절엔 정신을 차릴 테니 걱정할 필요없다." 노인이 할말 끝났다는 듯 일어나 정원으로 나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만 큐어가 아니라 백만 큐어가 걸려있다해도 내 손으로 귀찮은 일 벌일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볼썽사납게 벌벌 떨 필요없다." 노인의 모습이 문 저편으로 사라진 후 리반이 입을 열었다. "저 말 믿을 수 있어?" "으,응....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나도 그래." 엘과 리반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살짝 가서 리오를 보고와도 될까?" "그럼,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텐데." 리반이 막 입을 다물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몬이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유이나르님께서 두 분 전하를 책임지고 체르몬 국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약조를 하셨습니다." 아몬은 큰 근심거리를 해결한 듯 한결 얼굴이 밝아져 있었지만 엘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유이나르란 분,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가 좀 만나 보면 안 될까요? 만약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 약조를 한 거면 어떡해요?" 엘의 말이 끝나자 아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만나 뵙지 않으셨습니까? 유이나르님이 제게 엘과 두 분 왕자전하에 대한 얘길 하시던데...." "그럼 그 치료사 할아버지가?" 리반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가 봐, 리반." 엘은 피식 웃으며 아몬에게 시선을 옮겼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좀 심술궂고 괴팍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바로 아몬이 말하는 유이나르님인 거죠?" "아니라고는 못하겠군요." 아몬이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따라 가볍게 웃던 그는 이내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아몬이 밖으로 나가고 문이 조용히 닫혔다. 엘과 리반은 뭘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연자실한 사람들처럼 바닥에 그려진 자신들의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린 이미 인사를 끝냈으니까 리오에게 들어가 봐, 알렉스." 엘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옷을 뒤적여 돈이 들어있는 가죽주머니를 찾아내 리반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거 받아, 리반." "넌?" 리반이 짧게 물으며 엘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난 너도 알다시피 이제 힘든 여행을 할 필요가 없게 됐잖아." 엘은 리반의 손을 잡아 주머니를 꼭 쥐어 준 다음 천천히 걸음을 옮겨 리오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고 잠깐 멈춰 선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리반이 뒤에서 조용히 문을 닫아 주었다. 엘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리오를 바라봤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이렇게 널 보고 있으려니 지난번 일이 생각나. 네가 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작별인사를 했던 일 말이야. 리오, 혹시 그 때처럼 자는 척하고 있는 거야?"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애써 씩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바보처럼 울지 않을 거야.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듣고 있어, 리오? 언젠가 내가 너와 리반을 찾을 거야. 그래, 꼭 그럴 거야, 언제가 됐든.... 반드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던 엘은 안주머니에 넣어 둔 쥬엘라를 꺼내 리오 앞에 들어 보였다. "이것 봐, 리오. 믿기지 않지? 나도 그래. 이걸 찾았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기만 해. 이제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게. 팔에 끼고 있을까 했는데 잘못해서 줄이 끊어지면 그땐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서...." 엘은 쥬엘라를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다음 목에 걸고 있던 금빛 줄을 풀어내 리오에게 걸어주었다. 줄에 꿰어진 반지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꼭 다시 만날 거라는 약속의 증표야. 그러니까 다시 만나는 날 나한테 되돌려 줘야 하는 거야, 알았지?" 엘은 리오의 손을 잡아 꼭 깍지를 꼈다. 따뜻한 체온이 혈관을 거슬러 올라 심장에 이르렀다. "이제 다신 아프지마, 리오. 절대 아프지마." 심장 부근에 알싸한 통증이 이는 걸 느끼며 엘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짝 말라 버린 리오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녀는 몸을 바로잡고 다시 한 번 리오를 바라봤다. 그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자 엘은 얼굴을 치켜들었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재빨리 몸을 돌린 그 녀는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빳빳이 세운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문을 나서자 창가에 서 있는 아몬과 이리저리 응접실을 서성이고 있는 리반이 보였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은 아몬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해, 리반." 리반이 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도... 엘." 엘은 물기 서린 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아몬에게 다가갔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눈에서 끝끝내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서 비키거라!" 가프네 황비는 그녀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막 입을 열려는 시종을 지나 문을 열어 젖혔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서며 아르벨라를 찾는 그녀의 다급한 움직임엔 두려움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몸을 묻고 있는 아르벨라를 발견하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점없는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르벨라에게선 작은 손놀림에도 산산 조각나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풍겨나왔다. "아르벨라, 오늘도 음식이라곤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어미 속을 태울 생각이냐? 몸이 상하는 건 둘째치고 이러다간 네 목숨도 위험해진다는 걸 왜 모르느냐?" 탄식하듯 쏟아진 황비의 말에도 아르벨라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탕약과 간단한 음식을 올리라 명을 내렸다. 제발 이 어미를 생각해서 먹는 시늉이라도 해 다오, 아르벨라." "어머니, 기억 나세요?" 하얗게 말라버린 아르벨라의 입술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르벨라, 괜찮은 거냐?" "어렸을 때.... 제가 슬퍼하거나 아파할 때면 언제나 어머니가 절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곤 했죠. 전 어머니의 관심을 받는 게 너무 좋아 어떨 때는 엄살도 부리고 또 가끔은 꾀병도 피었어요. 어머니는 그걸 아시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셨죠. 그 때와 달리 전 이제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어머니를 찾지 않게 되었어요." 아르벨라가 황비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어머니를 찾지 않게 되었는지 아세요? 제가 열 세살되던 해 어머니가 슬피 우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예요. 전 그 때부터 어머니를 의지해야할 존재가 아닌 보호해야할 존재로 보게 되었어요. 내가 지켜야 할 존재로...." 아르벨라의 입술에 처연해 보이는 미소가 그려졌다. "이틀 전 자일스 오라버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아르벨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가프네 황비의 얼굴엔 근심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살려 주세요, 어머니! 저 좀 살려 주세요!" 아르벨라가 돌연 쓰러질 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르벨라!" 경악한 가프네 황비에게서 새된 고함이 터져나왔다. "야노쉬 공작과 혼인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의 신부가 되느니 차라리 목을 매달고 말겠어요! 제 목숨을 구해주시는 셈치고 제발 그와의 혼인을 막아주세요! 어머니, 제발이요!" 두 손을 꼭 맞잡은 아르벨라가 흐느끼며 간절한 눈으로 가프네를 바라봤다. "그만해라, 아르벨라! 누가 들을까 두렵구나!" 가프네 황비가 연신 문을 흘긋거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어머니, 이렇게... 이렇게 간절히 부탁 드려요! 혼인소식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세요? 그 끔찍한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아르벨라! 제발 진정해라! 야노쉬 공작과의 혼인은 황제폐하의 결정이란 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 "황제폐하의 결정이라고요? 그래서 거역할 수 없다고요? 어머니! 제가 야노쉬 공작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겨우 여섯 살이었던 제게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는 추악한 괴물이에요! 사람이 아니라 구역질나는.... " 가프네 황비가 미친 듯이 악을 쓰는 아르벨라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입 닥쳐라! 네가 미천한 작부의 딸인 줄 아느냐? 넌 리아잔 제국의 황녀다! 칼리안 국의 공주와 리아잔 제국의 황제사이에서 태어난, 고귀한 피가 흐르는 황녀란 말이다!" 멍한 얼굴로 볼을 감싸고 있는 아르벨라에게 호된 질책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황제의 누나가 될 지 모르는 네가 감히 입에 담지 못할 천박한 말을....." 갑자기 아르벨라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격렬히 터져 나온 새된 웃음소리는 차라리 절망 어린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미친듯이 웃어 젖히던 아르벨라가 일순 웃음을 멈추고 하얗게 질려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가프네 황비를 바라봤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직까지도 황제의 어머니가 되실 희망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때문에 황제폐하의 뜻을 거역한다는 건 꿈도 못 꾸실 일이겠지요.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분인 줄 알았는데.... 어차피 진실을 알게 됐으니 이제부터라도 어머니의 소망을 위해 성심껏 기도 드리겠습니다." 아르벨라의 입술에 섬뜩할 정도로 싸늘한 미소가 그려지자 가프네 황후가 흠칫하며 무의식 중에 한발 물러섰다. "이제 그만 나가주십시오, 어머니. 클레지오가 어머니를 찾으며 울고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전 기도에 앞서 어머니의 애정이 담긴 탕약과 음식을 먹을 생각입니다." 가프네 황비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아르벨라... 네가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은 데..." "나가십시오." 아르벨라는 황비의 말을 단호하게 끊고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가는 어머니의 등을 외면했다. 초조했다. 그리고 두렵기까지 했다. 엘은 싸늘한 두 손을 맞잡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엘이 리오와 리반과 헤어진 후 아몬은 사일러스를 비롯한 기사들과 함께 그녀를 어둡고 썰렁하기까지 한 지하로 공간이동시켰다. 그 곳에서 기사들은 뒤쪽으로 이어진 비밀통로를 이용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엘은 아몬을 따라 긴 계단을 오른 뒤, 역시 비밀통로를 통해 햇볕이 잘 드는 우아한 내실로 들어섰다. 리자드님께 보고드리고 오겠다며 문을 나서기 직전 아몬이 해준 말로 그녀는 이 곳이 바르테즈의 왕궁임을 알게 되었다. 엘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초점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어찌나 거세게 쿵쾅거리는지 숨도 편히 못 쉴 지경이었고 얼굴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가 이내 싸늘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음 속으로 침착하자고 수없이 타일러도 나아지는 게 없자 엘은 이리저리 바닥을 오가며 스스로를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욕을 퍼부어 댔다. 기껏해야 리자드를 만나는 것 뿐인데 왜 이렇게 못나게 구는 건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엘은 리자드에게 이런 꼴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가 막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복도를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전신이 마비된 듯 미동없이 서서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문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그리고 리자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없이 서서 서로를 바라봤다. 리자드의 조각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밝은 빛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단호한 턱과 반듯한 이마, 오만하리만치 곧게 뻗어 내린 콧날. 엘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청회색 머리카락 위에 감도는 신비로운 푸른 빛을 바라봤다. 창문이 덜컥하는 소리에 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리자드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입술을 움직였다. "점심 먹었어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엉뚱한 질문이 귀를 파고 드는 순간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 리자드가 짧게 대답했다.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당황한 엘과 달리 그에겐 전혀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저 다녀왔어요." 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자드를 곁눈질로 살폈다. 리자드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에 마음이 불편해지자 엘은 신발 속의 발가락을 잔뜩 오므린 채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다친 데는 없는 거냐?" 형식적인 절차처럼 건조하게 느껴지는 질문이 들려 왔다. 엘은 재빨리 입술을 깨물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긍정의 대답을 막았다. "아니오, 있어요!" 크게 소리친 그녀는 서둘러 리자드에게 다가가 하얀 천이 감겨진 손목을 불쑥 내밀었다. "천을 감아서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심하게 부었는지 몰라요. 커다란 빵조각을 갖다 붙인 줄 착각할 정도예요.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파요.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아요. 그래서 잠도 잘 못.... 아니, 한숨도 못 잤어요." 아무 말없이 엘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리자드가 팔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부드럽게 손목을 어루만지는 리자드의 긴 손가락을 홀린 듯 응시하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그리고 또 있어요. 온몸에 멍이 들었어요. 데클란 평원에서 마차가 부숴졌거든요. 그 땐 정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리자드가 시선을 들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듯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퍼져 나갔다. "마차가 부숴진 것치곤 그런 대로 멀쩡해 보이는구나." 리자드가 엘의 손목을 놓으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 안 멀쩡해요! 정말 온몸이 아프단 말이에요! 얼마나 아픈지 리자드는 상상도 못할 거예요!" 엘은 그의 말에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리자드는 그녀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겨 의자에 몸을 묻을 뿐이었다. 그가 거만한 고갯짓으로 의자에 앉으라는 명령을 내리자 엘은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다가가 리자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겉옷과 셔츠 자락을 한꺼번에 잡고 들어 올려 하얀 복부 중앙을 가로질러 나있는 피멍과 찰과상을 그에게 불쑥 들이댔다. "자, 똑똑히 보라고요!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복부에 닿아 있던 리자드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맹렬히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황당하다는 듯 비스듬히 올려져 있는 짙은 눈썹을 보고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던 엘은 리자드의 입술에 그려진 재미있다는 미소를 발견한 순간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옷자락을 내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리자드의 맞은 편에 앉았다. 목덜미까지 상기된 채 애써 시선을 피하는 엘을 바라보며 그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대체 몇 살이냐?" "열 여덟이요." "열 여덟이라...." 리자드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톡톡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열 여덟이나 먹은 여자아이가 아무 앞에서나 배를 드러내다니...." 사실 혼잣말처럼 나직한 어조였으나 그녀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 이전에는 지금까지 절대 그런 일 없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무 앞이라니요? 리자드는 리자드지, 아무가 아니잖아요." 엘이 리자드를 흘겨보며 볼멘 어조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어린애 투정쯤으로 생각하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의자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엘은 리자드가 그녀를 보고도 그리 반가워하지 않고 더욱이 수고를 알아주지도 않은 것 같자 서운함을 넘어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리자드,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반갑다는 말은커녕 인사말도 한마디 안 했잖아요. 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갑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좀 해주면 안돼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와 난 단순히 계약으로 성립된 사이다. 다시 말해 계약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너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줄도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리자드를 만나는 순간부터 내내 밝게 빛나던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그늘이 내려졌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낯선 사람들인 건가요? 엘은 리자드의 대답이 두려워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침울한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알아들었으면 일어나라."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리자드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아몬이 살짝 머리를 숙여보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아몬을 따라가라. 아몬이 네가 머물 곳으로 널 데려가 줄 것이다." "내가 머물 곳이라고요? 거기가 어딘 데요?" 엉거주춤 일어나는 엘을 보며 아몬이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엘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분의 저택입니다." "난 여기 머무는 줄로 알았는데..." "이 곳은 엘이 머물기엔 적당하지 않습니다. 또 안전하지도 않고요." "정확히 거기가 어떤 곳인지 말해줘요." 엘의 단호한 요구에 아몬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그 곳에 도착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는 엘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 오래 계시게 되진 않을 겁니다." "얼마 동안 머물러야 하는 데요?" "글쎄요, 섣불리 단정해 말할 수 없는 문제라....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두 달에서 여섯 달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두 달에서 여섯 달이나요?"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시리움 종단이 쫓고 있는 범인은 이미 산사람이 아니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는 중입니다. 또 검거령에 걸린 상금으로 인해 갖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여 곳곳에서 불만이 커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아시리움측도 머지않아 이번 일을 서둘러 정리하려 들게 분명합니다." "검거령이 취소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수그러지는 게 그 때쯤 될 거라는 말이군요." 풀 죽은 말에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돼요? 소란같은 거 절대 피우지 않을게요! 말도 조용조용하고 숨도 크게 쉬지 않을게요!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이렇게 큰방도 필요 없어요! 작은방 하나만 주면 거기서 나오지 않을 게요! 아무리 답답해도 꾹 참을 게요! 아니, 방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낮엔 어디 숨어 있다 밤엔 부엌 구석에서 대충 잘게요! 음식같은 것도 내가 알아서 찾아 먹을 수 있어요!" 눈썹을 비스듬히 올린 채 엘의 간절한 애원을 듣고 있던 리자드가 흘긋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몬, 제발이요! 그냥 여기 있게...." "어린애 투정은 그만하면 충분히 들었다." 리자드가 무뚝뚝한 어조로 엘의 말을 잘랐다. "지금 난 리자드가 아니라 아몬에게 말하는 거예요!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일에 끼어 드는 거예요? 내가 리자드한테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심심하면 가서 낮잠이라도 자는 게 어때요? 괜히 상관없는 일에 끼어 들지 말고요!" 엘의 숨찬 질타가 끝나자 숨막힐 듯 고요한 적막이 찾아 들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무례한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아몬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긴장된 시선을 리자드에게 옮겼다. 싸늘한 격노를 드러내고 있으리라는 그의 우려과는 달리 리자드는 오히려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의 청회색 눈동자 깊숙한 곳엔 어딘지 모르게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희미한 흥겨움이 감도는 듯 했다. "네 얘기는 잘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란 말은 틀린 것 같구나." 리자드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여긴 내 집이니까 말이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곧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몬은 웃음이 터지려 하자 재빨리 입술을 깨물었다. "아몬.... 그만 가요." 엘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며 아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리자드님, 다녀 오겠습니다." 아몬이 리자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재촉하는 엘의 손에 이끌려 종종걸음을 쳤을 때였다. 불쑥 들려 온 리자드의 목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몬, 저 아이가 이 곳에 다시 오게 될 땐 충분한 여유를 두고 보고해라. 부엌바닥을 청소하고 빵 부스러기라도 뿌려 놓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아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뻘게진 얼굴로 씨근덕거리던 엘이 갑자기 들고 있던 짐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천으로 감싼 손바닥만한 물건을 꺼내 리자드에게 힘껏 던졌다. 리자드가 얼굴로 날아드는 물건을 한 손으로 날렵하게 받아 들었다. "거기에 맞아 코피라도 줄줄 흘려야 되는 건데!" 엘이 안타깝다는 듯 소리치자 리자드가 피식 웃으며 그녀가 생각지 못한 말을 불쑥 꺼냈다. "수고했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엘이 잠시 후 잔뜩 인상을 쓰며 으르듯이 말했다. "약속 꼭 지켜요. 그것만 갖고 입 씻으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감히 그럴 수야 없지." 리자드가 가볍게 응수했다. 아몬은 자신이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가싶은 생각에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을 할 정도로 그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오늘 그의 눈에 비친 리자드의 말과 행동은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낯설고 생소했다. "그만 가 봐라." "알았어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는 리자드를 보며 엘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선뜻 문을 나서지 못했다. 할 말이 남아있다는 느낌이 자꾸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저기... 할 일이 없어 심심하면... 날 만나러 와도 좋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엘은 리자드가 입을 열려는 찰나 재빨리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리로 오십시오." 이미 한발 앞서 있던 아몬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엘을 조금 전 도착했던 지하로 다시 안내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이미 몇 번 경험했던 불그스름한 빛에 감싸인 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아몬의 팔을 꼭 잡았다. "도착했습니다." 아몬의 말에 감고있던 눈을 치켜 뜬 엘에게 가장 먼저 보인 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주름이 잡히긴 했지만 아직도 뚜렷한 선을 유지하고 있는 미남형 얼굴과 부드럽게 빛나는 갈색 눈을 가진 남자로, 좀 뻣뻣해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엔 드문드문 백발이 섞여 있었다. "반갑습니다, 엘. 이리 오십시오. 앞으로 지내게 될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엘을 안쪽으로 이끌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 전 칼 베리만이라 합니다." "아,예... 안녕하세요, 칼 베리만님?" "예, 물론 안녕합니다. 그런데 성가신 '님'자는 붙이지 마시고 그냥 칼 베리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엘은 스스럼없는 그의 태도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칼 베리만." 따뜻함이 어린 눈으로 엘과 칼 베리만을 바라보던 아몬이 입을 열었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엘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몬은 마치 버림받은 어린아이처럼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그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칼 베리만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겁니다. 그걸 아시기에 리자드님께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부담을 주는구만. 아몬, 자네가 이렇게 고단수일지 몰랐네." 칼 베리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눈치채실 줄 알았습니다." 장난기섞인 말이 끝나자 아몬과 칼 베리만은 기분 좋은 웃음을 나눴다. "어서 이리 오십시오. 아무래도 아몬이 떠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릴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휑하니 사라지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으니까요." 엘은 칼 베리만에게 이끌려 잰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돌려 아몬을 바라봤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몸을 바로 잡았다. "아마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겁니다. 이 하릴없는 늙은이와 놀아주려면 말입니다." 문이 닫히며 엘의 웃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아몬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리오는 자신이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음을 감지하며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온몸이 질척한 액체로 변한 듯한 짙은 노곤함이 손가락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잠시 동안 얕은 선잠에 빠져 있던 리오는 다시 정신을 차리며 바짝 마른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입술이 터졌는지 혀끝에 씁쓸한 피맛이 묻어 났다. "리오!" 그를 부르는 리반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불안이 느껴졌다. 리오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둘러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리반의 얼굴 뒤로 내리쬐는 밝은 빛이 눈을 파고 들어가 찌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만약 그 아픔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 다. 그 만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서울 만큼 낯설었다. "여기가 어디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유이나르란 사람의 집이야." "그럼 데클란 평원에서 빠져 나온 거야?" "응, 여긴 에크젤이야." 안도감이 감돌던 리오의 얼굴에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여기 있으면 안되잖아. 사람들이 우릴 알아보고 신고라도하면 어떡해?" "걱정하지마. 유이나르란 사람, 그런 짓 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또, 신고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틀 전에 했지 이렇게 시간을 끌진 않았을 거야." 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틀전이라고?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잔 거야? 너와 떨어져 엘과 함께 데클란 평원을 헤매던 것까진 기억 나는데... 그 때 이후로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야?" "사일. 내가 너와 알렉스를 다시 만난 게 바로 사일 전이야."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리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일이라니... 내가 사일 동안 잠을 잤다니...." "그래, 바로 조금 전 일인 것 같은 데 벌써 사일이 지났어." 리반이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한 데클란 평원을 벗어났는데,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만약 나 때문이라면 인상 펴. 조금 전엔 눈뜨는 것도 낑낑댈 정도로 힘이 없었는데, 이젠 이렇게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있게 됐어.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니까." 얼굴이 벌게지며 진땀이 솟기 시작하자 리오는 열심히 흔들던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고 싱겁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엘은 어디있는 거야?" 리오의 얼굴에 이내 그림자가 덮였다. "많이 피곤할 텐데... 데클란 평원에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거든. 그 녀석이 날 끌고 그 험한 길을 걷던 걸 네가 봤다면...." 목이 잠기자 리오는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엘은 지금 다른 방에서 쉬고 있는 거야?" "몰라." 짤막하게 대답한 리반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무슨 대답이 그래? 가서 보고 와, 리반. 자고 있으면 그냥 오고, 아니면 내가 깨어났다고 말 좀 해줘. 그럼 그 녀석 성격에 아마 당장 이리로 달려 올 거야." 리오를 외면한 채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리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바로잡았다. 그의 시선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낀 리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뭐하고 있는 거야? 가서 엘을 불러오라니까!" "알렉스는 여기 없어." 리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살얼음같은 침묵이 그들 주위에 엷게 깔렸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없다니? 그럼 엘은 어디 있다는 거야? 대체 어디 있다는 거냐고?" 나직하던 리오의 물음이 끝내 악을 쓰듯 거칠게 터져 나왔다. "가야할 곳. 알렉스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려고 했던 곳. 그 곳으로 갔어." 리오는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죄어들었다. 혈관 속의 핏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찾을 거야. 내가 엘을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낼 거야." 리오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천천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대체 네가 알렉스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무작정 바르테즈로 가겠다는 거야?" 리오는 리반의 말을 무시하고 일어나 앉았다. 그가 이를 악문 채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리려 하자 리반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제 그만해, 리오! 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다고!" "끝나? 뭐가 끝나? 누구 마음대로 끝나?" 이를 갈며 소리치던 리오가 리반의 멱살을 와락 휘어 감았다. "왜 막지 않았어? 젠장! 왜 막지 않았어? 왜? 왜 막지 않았어? 이 나쁜 자식아, 왜 막지 않았어?" 일그러진 리오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내팽개치듯 손을 뗀 리오가 옆으로 고개를 꺾었다. 리반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숨죽인 흐느낌이 문을 뚫고 들려 왔다. ===================================================================제 47장. 은신(隱身)-------------------------------------------------------------------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라는 칼 베리만의 말과는 달리 엘의 하루하루는 무료하기만 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잠자고 식사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라며 눈이나 깜박이는 것 외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칼 베리만은 엘이 지루해 할까 봐, 손쉽게 할 수 있는 여러가지 놀이기구와 수십 권에 달하는 책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여행에 대한 후유증인지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이 종일 그녀를 따라다니며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답답함보다 엘을 더 못 견디게 하는 건 외로움이었다. 리오와 리반, 루드비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어찌나 그리운지 엘은 매일 밤 눈물을 찔끔거리며 잠이 들었다. 마음에 비해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손목부상도 완전히 낫을 뿐만 아니라 온 몸에 들었던 타박상의 흔적과 오랜 여행으로 인한 피로도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은신처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환경을 제공한 칼 베리만 덕분이었다. 그는 식솔들에게 엘을 자신의 먼 친척이라 하고 그녀의 안전을 고려해 안채에서 외따로 떨어진 별채에 머무르게 했다. 사방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별채는 은밀하게 지어진 작은 왕궁처럼 화려하면서도 우아함을 지닌 놀라운 곳이었다. 엘에게 이런 풍요로움을 아낌없이 베푼 칼 베리만은 아몬의 말처럼 그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비록 며칠에 한 번 찾아와 겨우 안부만 확인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사소한 것까지 자상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사실 아무리 실질적인 업무에서 손을 뗀 상태라 해도 리아잔 제국의 재상인-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엘은 너무 놀라 오랫동안 딸꾹질을 해야 했다- 칼 베리만이 얼마나 바쁠지는 엘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칼 베리만을 제외하고 별채에 드나드는 사람은 두 명의 중년부인이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식사와 의복, 목욕물 등을 챙겨 주었고, 다른 한 명은 청소를 해주고 꽃이나 장식품으로 집안을 꾸미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해주었다. 엘은 모든 것을 두 사람에게 의지하는 처지였지만 그들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실수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만들었고, 칼 베리만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들 또한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엘은 한숨을 내쉬며 읽지도 않은 채 들고만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풀 죽은 얼굴을 창 밖으로 돌렸다. 높고 연한 운층이 엷게 깔려 있는 하늘은 수증기의 장막으로 가려진 물처럼 부드럽고 따스해 보였다. 그 잔잔한 푸른 빛과 완벽하리만치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있자니 이해할 수 없게도 더욱 기분이 우울해 졌다. "너무해. 날 여기 처박아 둔 채 한 번 보러 오지도 않고...." "누굴 그렇게 원망하는 겁니까?" 엘이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문 가에 서 있던 칼 베리만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날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 데... 대체 누구입니까?" "그,그러니까..... 아몬이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엘이 크게 소리치자 칼 베리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짓궂게 말했다. "으음.... 아몬도 아몬이지만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데..." 엘은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바쁘지 않으세요?" 칼 베리만이 알만 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사실 중요한 업무가 있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일하기가 싫어 무작정 도망쳐 나오는 길입니다." "잘하셨어요. 일하기 싫을 땐 그저 아무 생각없이 노는 게 진짜 현명한 행동이에요." 엘은 칼 베리만이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라 편안한 시골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들으니 한결 위로가 되는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지금까지 집주인 노릇도 제대로 못했으니 오늘만큼은 귀하신 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뭘 하고 싶으십니까?" "그냥 이렇게 앉아 얘기를 나누면 안될까요?" "안될 게 뭐 있겠습니까?" 칼 베리만이 흔쾌히 수락하자 엘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 혼자 묻고 대답하는 것도 이젠 별 재미가 없더라고요." 엘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건 나도 해 봐서 잘 아는데 가끔 해야 재미있지, 매일하면 금세 질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미친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받게 됩니다." 칼 베리만은 웃음을 터뜨리는 엘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얘기를 먼저 꺼냈다. "이 늙은이 생각으로는 루벤스타인 대공전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 데... 성의껏 답할 테니 물어 보십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엘이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몸을 기울였다. "리자드는 언제 알게 되셨나요?" 스스럼없이 나온 리자드란 호칭에 놀라 눈을 깜박이던 칼 베리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대공이 태어나고 한 달 정도 지나서였을 겁니다." "우와! 그럼 갓난아기 때부터 리자드를 알아 오신 거군요! 그렇지! 나이는요? 대체 몇 살이에요?" "올해로 예순 네 살입니다." 엘이 미간에 주름을 잡자 칼 베리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놀리는 게 은근히 재미있어서... 으음.... 그러니까 대공은 올해 서른 한살이십니다." 엘은 재빨리 리자드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해 보았다. 서른 하나와 열 여덟.... 열 세살 차이는 너무 많이 나는 걸까? 그런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든 적게 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 거지? 자신이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은 엘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궁금한 건 더 이상 없는 겁니까?" 의아하다는 눈으로 그녈 바라보고 있던 칼 베리만이 넌지시 물었다. "리자드는 어렸을 어땠나요?" 엘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리자드에 대해 들을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민한 소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시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면에 특출한 능력을 보였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깊은 소년이었습니다." 아련한 눈빛으로 먼 옛날을 회상하던 칼 베리만이 갑자기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사실 대공이 가진 능력보다 그의 외모가 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나이를 불문한 여자들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때부터 여자들을 피하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여유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대체 대공같은 사람이 아직까지 정부조차 한 명 둔 적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긴 한숨을 내쉬던 칼 베리만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엘을 살폈다. "여자들을 피한다고요?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희희낙락하는 걸 제 눈으로 봤는데도요? 입을 귀까지 찢은 채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단 말이에요!" 엘이 입술을 비죽이며 흥분해 소리쳤다. "대공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입을 귀까지 찢고 희희낙락했단 말인가요? 장담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 본 게 틀림없습니다." 칼 베리만이 완강하게 말하자 엘은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리자드한테 정부가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이에요. 대체 어떤 여자가 리자드같이 재미하나 없고 무뚝뚝하기만 한 남자와 혼인을 하겠어요?매일 인상을 잔뜩 쓰고 명령만 해대는 그런 남자와 어느 여자가 평생을 살겠느냐고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아요. 칼 베리만은 안 그러세요?"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칼 베리만이 슬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정부(貞婦)는 그 정부(情婦)가 아닌데..." "예? 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아닙니다. 그저... 이제 그만 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말을 한 겁니다." "벌써 가시게요?" 칼 베리만은 시무룩해진 엘이 측은했지만 더 있다간 또 무슨 말실수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혔다. "서운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칼 베리만." 칼 베리만은 문까지 배웅하는 엘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 주며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요새 대공께서 왜 이렇게 발걸음을 안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시나?" 그는 당황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엘을 보며 짓궂게 말을 이었다. "바로 저 말입니다." 칼 베리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엘은 그의 등을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경첩에서 끼익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오자 리오는 숨을 죽인 채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다시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온 서늘한 바람이 송골송골 땀 맺힌 얼굴에 부딪쳤다. 그가 반쯤 열린 출입구를 통과해 밖으로 나온 후 문을 원래대로 닫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짓, 다시는 안 하려고 했는데..." 흠칫하며 몸을 휙 돌린 리오는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리반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서두르자. 조금 후면 날이 완전히 밝겠어." 리반이 어깨를 들썩여 짐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리오는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가, 리반." "그럴 수 없어." 리반이 고개를 돌려 리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겠어." "너와 입씨름할 생각없어." "그렇다면 어서 다리나 움직여."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리반이 먼저 걸음을 뗐다. "젠장! 리반!"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간 리오가 그의 팔을 낚아채 거칠게 돌려 세웠다. "말했지, 들어가라고!" 리오가 이를 갈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분명히 말했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맞부딪치며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었다. "어떤 녀석들이 오밤 중에 소란을 피우는 거냐?" 매서운 호통을 지르며 유이나르가 그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젠장!" 리오가 낮게 욕설을 내뱉자 유이나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욕 나올만 하지." "노인장이 왜 여기 있는 거요?" 리오가 따지듯이 물었다. "허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치료까지 해줬는데 집주인한테 한다는 말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내 말은 이 새벽녘에 왜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느냐는 말이오." "늙으면 원래 새벽잠이 줄어드는 거다. 또 낮에 바르테즈로 가는 길을 꼬치꼬치 물은 거로 미루어 야반도주할 생각임을 눈치채는 건 애들 머리 쥐어박는 것보다 쉬운 일이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할 말을 못 찾고 있던 리오가 잠시 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고맙다는 인사나 하고 가겠소. 그동안 여러모로 고마웠소, 노인장." "그것도 인사라고 하는 꼴이라니..."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리오를 노려보던 유이나르가 등뒤로 돌리고 있던 팔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요?" 눈을 껌벅이며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던 리오가 뚱한 어조로 물었다. "네 구멍난 다리에 붙일 약하고 그 우스꽝스런 머리를 가릴 수 있는 가발, 또 내가 애지중지하는 지팡이지! 보면 몰라?" "이런 것보다 그 때 날 데리고 온 사람들에 대한 얘기나 해 주시오. 어딜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거요?" 리오가 유이나르에게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나도 몰라. 아니, 알긴 알지만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날 이 지팡이로 죽을 때까지 때려도 절대 말할 수 없어!" 비장하게 말하던 유이나르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역정을 냈다. "날도 밝지 않은 오밤중에 이게 뭔 짓이야?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가! 그리고 이건 필요없는 것 같으니까 그냥 내가 갖겠어!" "이리 주시오! 한 번 준 걸 도로 물리는 게 어디 있소?" 리오가 유이나르에게서 물건들을 잽싸게 가로챘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맙소. 그럼 잘 계시오." 말을 마친 그가 리반에게 가발을 휙 던졌다. "이건 네가 써. 난 답답한 건 딱 질색이니까." 피식 웃던 리반이 유이나르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신세가 많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세가 많긴 많았지. 알면 됐어." 유이나르가 당연한 말이라는 듯 냉큼 응수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둥그렇게 굴리던 리오가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떼기 시작하자 리반이 나란히 보조를 맞췄다. 그들이 열 걸음 정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유이나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일러스 하덴 제너시스! 기억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외로움에 지칠 대로 지친 엘이 칼 베리만의 부름을 받은 건 그의 저택에 머문 지 이십 일하고도 칠 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엘은 그녀를 돌봐 주는 중년부인의 안내로 칼 베리만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 텅 빈 집무실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문이 반 정도 열리며 칼 베리만이 불쑥 상체를 들이밀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엘은 손짓을 하는 칼 베리만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그는 잰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 그녀를 우아하게 꾸며진 접빈실로 데려갔다. 엘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으며 접빈실 안쪽에 놓인 커다란 장식장으로 다가간 칼 베리만이 장식장 모서리에 새겨진 작은 말머리조각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장식장이 부드럽게 옆으로 밀리며 갈색 나무문이 나타났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에게 칼 베리만이 안으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가 비밀스런 공간에 한발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엘은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문가에 서서 정면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커다란 책상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리자드에게 닿아있었다. 놀라움이 역력했던 엘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날 만나러 온 건가요?" "아니, 다른 일이 있었다." 리자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라 그런지 서운하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리자드에게서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그녀는 짐짓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리자드는 그녀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난 잘 지냈어요. 그런대로요." 엘은 싱겁게 씩 웃고 나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몬은 잘 지내요?" 리자드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엘이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깼다. "여긴 참 좋은 곳이에요.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요. 칼 베리만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아버지같이 너무나 자상하게요. 만약 아버지가 있다면 꼭 칼 베리만같은 분일 것 같아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요." 엘은 고개를 들어 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여긴 음식도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요리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솜씨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말을 멈춘 엘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리자드, 여기서 점심 먹고 가요. 여긴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는 아주 근사한 정원도 있어요. 그렇지, 칼 베리만, 리자드, 나, 이렇게 셋이 같이 식사하는 거예요." 기대감에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엘을 바라보며 리자드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지금 떠나야 한다. 네가 잘있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시간이 늦어졌다." 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쳐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리자드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걸음을 멈추고 외투자락을 꼭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봤다. "저기.... 나 리자드하고 함께 가면 안되나요? 아몬이... 아몬이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별거 아니지만 여긴... 좀 춥거든요.... 그렇게 많이 추운 건 아닌데.... 이상하게 몸이 떨릴 때가 있어요.... 그냥 자꾸.... 그래서 그래요." 리자드가 천천히 손을 올려 엘의 머리로 가져갔다. 머리에 닿으려던 손길이 잠시 머뭇거리다 내려졌을 때 엘이 고개를 들어 리자드를 바라봤다. "말썽부리지 않을게요.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내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조용히 있을게요. 그러니까 리자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칼 베리만이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계셨군요, 대공."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리자드가 칼 베리만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일이 생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배웅도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앞으로 언제 또 대공을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엘은 완강하게만 보이는 리자드의 등에서 시선을 떼냈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엘은 제가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보살필 테니 대공께선 심려치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리자드가 엘을 흘긋 바라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잘 있었어요, 아몬? 정말 오래간만이죠?" 엘을 본 아몬의 반응은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진 눈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자 엘은 쑥스러운 마음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오늘부터 이 곳에 있게 할 생각이다." 대답을 한 사람은 엘을 이리로 데려온 직후부터 줄곧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던 리자드였다. 아몬의 시선이 리자드의 등을 향했다가 다시 엘에게 돌아왔다. "잘 오셨습니다, 엘." "고마워요, 아몬."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는 엘을 향해 아몬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미리 알았다면 준비를 해 놓는 건데 그랬습니다." "준비요? 무슨 준비요?"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안전장치말입니다." "안전장치라고요? 그런 건 필요없어요." 자신있게 말한 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몬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으슥한 곳, 그러니까 안 쓰는 창고나 지하에 있는 비밀통로같은 곳에 숨어 있으면 돼요. 하루 종일 있으면 답답하니까 사람들이 다 잠든 깊은 밤에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몸을 풀 생각이에요. 그러면 감쪽같을 거예요. 리자드나 아몬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엘은 말을 마치고 아무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아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신경이 더 쓰일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엘이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을 때 리자드가 육중한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써내 아몬에게 내밀었다. "성 내에선 위험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는 게 현명하겠지." 엘은 종이를 펴 들고 있는 아몬 옆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눈앞의 종이엔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엘과 얼마나 흡사한지를 떠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만으로도 그녀를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실 종이엔 색채를 제외하고는 엘과 유사점을 거의 찾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험악하다 싶을 만큼 불거진 광대뼈과 뾰족하게 튀어나온 턱선, 사납게도 교활하게도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내가 이 그림 옆에 나란히 서 있다 해도 이걸 보고 날 알아맞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 같아요. 날 잘 아는 사람조차도요." "중요한 건 일말의 의심도 갖지 못하게 하는 거다. 사소한 실수가 모든 걸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알았어요. 안전해질 때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성 밖으로 나가지 않을게요. 이 곳에서도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할게요." 리자드의 말에 새삼스레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 엘이 진지하게 말했다. "의심을 사지 않고 이 곳에 머물려면 적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말했다. 그는 엘이 입을 열려고 하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으슥한 곳에 숨어 있겠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눈을 깜박이며 아몬을 쳐다보던 그녀가 슬그머니 한숨을 흘렸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병약해서 요양이 필요한 아가씨가 좋을 것 같습니다." 아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엘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병약한 아가씨요? 내가 그런 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체 누가 날 요양이 필요할 만큼 몸이 약한 사람으로 보겠어요?" "그건.... 그렇겠군요." 아몬은 햇볕에 살짝 그을린 탓에 더욱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는 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은 엘이 소매를 팔꿈치까지 대충 걷어 올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피부를 살폈다. "데클란 평원에서 거의 허물이 벗겨질 정도로 탔는데 생각보다 그리 심하진 않네요. 요새 통 햇볕을 안 쬐고 거의 실내에만 머물러서 그런가봐요. 그래도 병약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사냥꾼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엘과 아몬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사냥꾼은 그냥 해본 말이지만 가능하면 자유롭게 성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텐데 안에서까지 답답하게 있고 싶지 않아요." "자유롭게 성을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아몬은 혼잣말을 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갖가지 잡일을 하는 일꾼이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심부름꾼정도 밖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는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을 바라봤다. "어때요, 아몬? 내가 할만한 거 있어요?" 아몬이 적당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때, 리자드가 한발 앞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몬에게 일을 도와줄 조수나 심부름꾼을 붙여 줄까 했는데 잘됐군." "리,리자드님..." 아몬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 멍하니 벌어졌다. "잘 부탁해요, 아몬. 아무 일이나 시키기만 해요. 아몬이 흡족할 만큼 잘 해낼 테니까요." 아몬은 환하게 웃고 있는 엘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골칫덩어리를 그에게 넘겨 버린 야속한 주군을 향해 잠깐동안 원망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대체 엘에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근심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갑자기 생각났는데 이름도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렇겠군요." 아몬이 거의 자포 자기한 투로 동의했다. "이름은 그러니까.... 그냥 알렉으로 할게요. 알렉스와 비슷하니까 귀에도 익숙하고 또 잊어버리지도 않을 테니까요."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이 아몬을 향해 머리카락을 조금 들어올려 보였다. "그런데 머리 색깔도 바꿔야 할까요?" "글쎄요, 이 곳에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으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지만... 으음.... 그래도 미리 조심하는 것이 현명하겠지요. 제가 전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마련해 놓은 가발이 있습니다. 그러니 답답하시더라도 그걸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 잠시 말을 끊은 아몬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을 바라보다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외모를 바꾸고 정체를 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장 시급히 해야 할건 아시리움의 추적자들이 엘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인데,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성 주위에 결계를 치는 건 오히려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되는 빌미가 되기 쉽고.... 또 장시간 몸에 보호막을 씌우는 건 엘에게 해가 될 테니...." "난 여기 있어서는 안돼요!" 엘이 터뜨린 날카로운 고함이 아몬의 말을 잘랐다. 그는 창백하게 질려 있는 엘의 얼굴에 놀라 그녀에게 한발 다가들었다. "엘, 왜 그러십니까?"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 "추적자들이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요? 자신들을 봤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누구든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에요!" 한순간 할 말을 못 찾고 있던 아몬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추적자들을 만나 보셨군요. 이미 그들과 대면하셨군요." "예, 맞아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고요!" 답답해진 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추적자들을 어떻게 따돌리신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루드비히가 도와줬어요." 순간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강렬한 섬광이 번득였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준 거냐?" 엘은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이 비췄던 평원의 밤을 떠올리며 리자드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나와 추적자들 사이에 갑자기 거대한 막이 나타났어요. 그게 루드비히의 힘인지는 모르겠지 만.... 아니, 그의 힘일 게 분명해요." 말을 끊은 엘은 주먹을 꼭 쥔 채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날 밤 난 루드비히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쳤어요. 그가 추적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나만 살겠다고 도망친 거예요. 루드비히는 날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는데...." "그래서... 그가 죽기라도 한 것이냐?" 리자드가 서늘한 조소를 드러냈다. 엘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나 봐요. 리반한테 들었는데 상처하나 입은 것 같지 않았다고 그러더라고요. 루드비히는 아시리움 성전의 사제님이시니까 추적자들도 감히 해치지 못하고 그저 성전으로 데려가기만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쯤 나 때문에.... 끔찍한 벌을 받고 있을 거예요." 엘의 침울한 얼굴이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가 아몬에게 간단한 눈짓을 했다. "저도 곧 갈 테니 먼저 제 거처에 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엘이 고개를 들어 아몬을 쳐다봤다. "알았어요. 근데 아몬의 거처가 어디인데요?"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몬이 살짝 미소지었을 때 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내 웃음을 지운 그가 등을 돌린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리자드를 향했다. "엘이 말하는 루드비히 사람이 바로 법황 성하십니까, 리자드님?" "그렇다. 루드비히 라스카 반 리오벤... 다른 사람일리가 없지." "엘의 말을 들어보면 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한 것 같은 데.... 왜 갑자기 그녀를 떠난 것 일까요?"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나지막한 웃음을 짧게 터뜨린 리자드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글쎄다... 어울리지 않는 유희에 실증이 났거나... 너무 깊게 발을 담근 자신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몬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리자드님, 엘에게 알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없다." 아몬이 의외의 대답에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리자드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그 아이가 법황을 만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복도 중앙에 우뚝 멈춰 선 필리프는 자신에게 허리를 굽혀 보인 후 막 지나치려 하는 두 명의 견습사제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이 뭐 실수한 게 있나 하는 걱정에 얼굴이 창백해진 그들 앞으로 성큼 다가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이냐?" "대,대사제님... 저희가 무슨 잘못이라도...."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지 않느냐?" 쩔쩔매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견습사제에게 필리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눈앞이 캄캄해질 뿐 대사제가 무엇을 묻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울상을 지었다. 필리프는 거친 숨을 내쉬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방금 전, 그러니까 나에게 예를 갖추기 전에 게르트 사제를 비롯한 몇 명의 고위사제들이 며칠 전부터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 "저희가 생각없이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명의 견습사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너희를 탓하려는 게 아니니 그 고위사제들이 누군지 어서 고하기나 해라!" 필리프가 거칠게 역정을 내자 견습사제 한 명이 납작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그,그러니까 게르트 사제님, 도프만 사제님.... 또, 베르히스 사제님... 또... 아, 메리안 사제님..." 서너 명의 사제들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그의 전신에 끈적끈적한 식은땀이 배어 들기 시작했다. "그,그리고...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몰린 견습사제는 팔을 툭 치는 손길에 놀라 격렬히 몸을 떨었다. "이제 됐어." 그는 안도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친구에게서 복도를 걸어가는 필리프 대사제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대사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대사제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에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울 수 있었다. 황급히 복도를 돌은 필리프는 싸늘한 손을 단단히 말아 쥐고 노게일스 대사제의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스라치게 놀란 고위사제 두 명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게일스 대사제는?" "대사제님께선 오늘 집무실에 나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필리프는 고위사제의 대답을 듣자마자 복도로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우선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다음에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할 계획을 세워야 하리라. 그는 별거 아닌 일에 자신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라 애써 생각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채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필리프를 본 보르헤스 고위사제가 서둘러 일어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성기사들이 필리프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했다. "워낙 일이 막중하여 감히 대사제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집무실에 발걸음하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보르헤스 사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 위로 딱딱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막중한 일이라니, 그것이 뭔가?" "법황 성하께서 대사제님을 찾으십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지금 즉시 저와 함께 가 주셔야 하겠습니다." 눈앞이 아찔해진 필리프가 비틀거리자 보르헤스 사제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런,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이런 식으로 흔들린다면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리라는 자각이 필리프의 이성을 빠르게 되돌렸다. 그는 몸을 꼿꼿이 세우며 위엄을 담아 말했다. "아니다. 성하께서 부르신다니 어서 안내해라." 보르헤스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필리프는 스스로를 향해 침착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잠시 후 설령 법황이 그를 의심하고 있다 해도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조심스런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상태니 변변한 증인도 없을 것이고, 또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남길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법황이 눈치를 챈 것일까? 그래 멍청한 호르헤 놈이 자일스 황태자만 믿고 날뛰다 일을 그르친 게 틀림없어. 한심한 놈! 아니, 오히려 그 놈 때문에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군. 만약 일부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호르헤가 모든 걸 책임지고 목이 잘리면 될 테니까. "다 왔습니다, 대사제님." 보르헤스의 말에 깊은 생각에서 벗어난 필리프는 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법무실 앞에 멈춰 선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보르헤스가 옆으로 한발 물러서며 육중한 문을 열었다. 필리프는 그를 지나 거대한 대리석이 깔린 넓디넓은 바닥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멀리 안쪽에 위치한 단위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법황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 오십시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차디찬 돌벽과 바닥을 울렸다. 필리프는 루드비히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앞으로 나아갔다. 단 아래 앉아 있는 오 십여명의 사람들에겐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굳이 그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지 않고서도 법황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필리프가 걸음을 멈추자 노게일스 대사제가 그를 올려다봤다. 극도의 공포감에 질린 검푸른 얼굴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필리프는 도움을 갈구하는 필사적인 눈빛을 외면하며 싸늘한 두 손을 맞잡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나 꽉 움켜쥐고 있는지 손바닥의 살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손등에는 새파란 힘줄이 불룩 솟아있었다. 필리프를 내려다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살아서 이 곳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숨막히는 비명과 공포에 질린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조용." 루드비히가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하게 말하자 급속도로 소리가 잦아들며 이내 숨죽인 헐떡거림만이 남았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는 자는 그 횟수에 달하는 수만큼 가까운 혈족들의 목이 잘리게 될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필리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급히 노게일스를 찾았다. 뻣뻣이 고개를 든 채 눈을 부릅뜨고 있던 노게일스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마비시키고 있는 듯했다. 그와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이자 필리프는 다음 순간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성하!" 필리프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오해를... 크나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하. 아시리움을 배신하면 그 대가로 엄청난 부를 주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말을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물론 그것도 큰 잘못이긴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았다면 제 손으로 그의 목을 잘라 버렸을 것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성하! 이제와서 제가 성하께 어찌 거짓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제게 그 말을 한 자가 누구인지도 밝히겠습니다. 그는 바로 그루지아국의 호르헤 공작입니다." 필리프는 피를 토하듯 결사적으로 소리친 다음 간절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올려다봤다. 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은회색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머리가죽이 오그라드는 공포에 숨을 헐떡였다. "대사제께선 지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제 남은 피붙이는 딸 하나뿐인 것 같은 데... 계속 하시겠습니까?" 필리프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넋이 나가 있는 그에게서 눈을 뗀 루드비히가 몸을 일으켜 울부짖는 사람들을 지나 문으로 향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두툼한 문서를 손에 든 법무사제 서른 명과 육십 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육중한 문이 굳게 닫혔다. ===================================================================제 48장. 결투------------------------------------------------------------------- "내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이 바드리오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난 내가 리아잔 제국의 수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 말을 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나 알아?" 리오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리반의 감격 어린 흥을 깨버렸다. 그는 못마땅하게 눈을 흘기는 리반을 본체 만체하고 식당 안을 휘휘 둘러봤다. 이미 오래 전에 점심시간이 지난 탓에 두 사람을 제외하곤 그들과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남자 세 명이 손님의 전부였다. 꽤 한참동안 진을 치고 있었던 듯 남자들 앞엔 깨끗이 속을 비운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분위기가 뭐 이래? 장작 위에선 통돼지가 지글거리며 돌아가고 탁자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리고, 한쪽 구석에선 얼굴이 벌게진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주먹다짐을 벌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여긴 조용한 식당이지 소란한 술집이 아니야, 리오." 리반은 말을 끝내며 소리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바르테즈 공국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리오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루 종일 옆에서 툴툴거리는 소릴 들어야 한다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일러스 하덴 제너시스란 사람은 어딜 가서 찾을 수 있는 거야?" "바르테즈 공국이겠지." 리오는 리반이 너무 쉽게 말한다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바르테즈 공국의 어디냐가 문제지. 바르테즈가 작은 시장 바닥만한 줄 알아?" "바르테즈가 얼마나 넓은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퉁명스럽게 말한 리반이 크게 하품을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하마르칸으로 가는 게 순서겠지. 거기 왕성이 있으니까." "하마르칸?" "그래, 바르테즈의 수도가 하마르칸이잖아.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모르긴? 당연히 알고 있었지." 찔끔한 리오가 재빨리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여기서 바르테즈 국경까진 얼마나 걸리는 거야?" 대답을 기다리던 리오는 자신의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어. 지도를 보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 데.... 지도는 반 정도만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터득했거든." "원래 종이로 이루어진 것치고 믿을 만한 건 없는 거야. 그러니 너도 그렇게 책에 목매달지 말란 말이다." 은근히 잘난 체하는 말투에 리반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드디어 두 사람이 애타게 기다리던 음식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리오는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두툼한 고기를 잘라내 한입 가득 넣고 씹기 시작했다. 곧 만족스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즐기는 고기맛에 턱에 미세한 통증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두 사람은 옆 탁자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대화에 문득 동작을 멈췄다. "아시리움 사제님이 그러시는데 글쎄 그 중죄인이 죽었다고 하더라고. 자네들 모르고 있었지?" "뭐? 그게 정말이야?" "내가 직접 아시리움의 사제님에게서 들은 얘기라니까!" "거짓말! 네가 어떻게 사제님한테서 그런 말을 들어?" "나 참, 며칠 전 아시리움 신전에 물품 배달하러 가서 우연히 사제님들이 얘기하시는 걸 들었단 말이야." "사실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어. 송장을 봤다는 사람들도 꽤 많더라고." 리오와 리반의 시선이 날카롭게 마주쳤다. "그걸 믿어? 지네들이 송장을 보긴 어떻게 봐?" "그런데 말이야, 그럼 상금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글쎄... 놈이 죽은 게 확실하다면 송장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주지 않을까?" "주긴 뭘 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는 공고도 못 봤어?" "젠장! 내 눈앞에 그 놈이 턱 하니 나타나기만 했어도 내 팔자는 활짝 펴지는 건데!" "누가 아니래?" 남자들이 저마다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얘기... 설마 아니겠지?" 리오가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숨죽여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오랫동안 잡히지 않으니까 괜한 헛소문이 퍼진 걸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걸지도 모르고."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말대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엘의 뒤에서 그런 일을 시킨 사람.... 필시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그래, 평범한 사람일리 없어." 리반은 엘을 찾으러 왔던 기사들과 상상하지도 못했던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갈색 눈동자의 젊은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 아래부분으로 손을 가져가는 리오를 보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너 요새 괴상한 버릇 생긴 거 알아? 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걸핏하면 손을 목에 가져다 대는 거야?" 새삼스레 깨달은 듯 리오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내렸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바짝 몸을 기울였다. "엘이 나한테 뭘 남겨 줬어." 리반의 눈이 커다래지며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게 뭔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리오가 살짝 옷깃을 젖혀 목에 걸린 반지를 드러냈다. "바로 이거야." 리반이 반지를 집어 이리저리 돌려 가며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눈매가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곧 목이 졸린 것 같은 거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인상을 찌푸리며 리반의 손을 떼어 낸 리오가 재빨리 옷깃 속으로 반지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리반을 향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왜 그러는 거야?" "알렉스에 대해 말해 봐, 리오." "뭘? 대체 뭘 말하라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뭐든 것!" 심상치 않은 얼굴과 강경한 어투에 놀란 리오가 눈을 껌벅거리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사실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어. 리아잔 제국의.... 이름이 뭐더라? 지나가는 말로 슬쩍 들은 적이 있는데.... 아무튼 리아잔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좀 어렵게 살았다는 것 밖에는 몰라." "부모는? 부모님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없어?" "부모님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 없어." 리반이 실망감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리오가 소리를 높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리오, 넌 그 반지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어?" "뭐가 이상해? 반지는 반지일 뿐인지." "멍청이!" 눈을 부라리는 리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리반이 입을 열었다. "대충 봐도 보통 반지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잖아. 시골마을에서 할머니와 어렵게 살았다는 열여덟 살 소녀가 그런 반지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넌 기껏 한다는 말이 반지는 반지일 뿐이라고?" "듣고 보니 이상하긴 이상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말끝을 흐리던 리반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일어나, 리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무슨 방법을 써서든 확인하고 넘어가야겠어." "뭘 확인한다는 거야?"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리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미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리반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빨리 꺼지지 못해?" 리오는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는 창을 피해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함부로 무기를 휘두르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위엄 어린 고함에 놀라 눈을 껌벅이던 경비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아니, 이 애송이가 감히 어디서...." "죄송합니다, 경비병님."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든 리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부라린 채 입을 열려 하는 리오에게 재빨리 눈짓을 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좀 봐주십시오." 리반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미리 준비해둔 돈을 꺼내 슬쩍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볼일만 보고 즉시 나오겠습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경비병이 돈을 집어 바지춤에 잽싸게 찔러 넣었다. "늦게 나오면 내가 들어가서 당장 요절낼 줄 알아!" 경비병이 막고 있던 길을 내주며 으르듯이 말했다. 리반은 경비병을 노려보고 있는 리오의 팔을 잡아끌며 낮은 계단을 올랐다. "돈까지 찔러 주며 여길 꼭 들어가야 하는 거야? 대체 이유가 뭐야?" "아까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확인하고 넘어가겠다고. 그리고 여긴 귀족들하고 일부 부유층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야. 우리 행색에 돈을 건네주지 않았으면 발이나 들여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젠장! 바르테즈에 가는 일이 한시가 급한 마당에, 뭘 찾는 지도 모르면서 이 넓은 곳을 헤매게 됐으니...." 리반은 툴툴거리는 리오의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놀랄 만큼 넓고 잘 꾸며진 도서관이었으나 이용률은 그리 높지 않은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군데군데 눈에 띌 뿐이었다. 리반은 커다란 책장 앞에 서 있는 나이 지긋한 노부인에게 다가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에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친절히 질문에 답해 주었다. 리반은 상냥한 미소까지 짓는 노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그녀가 알려 준 곳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를 멀뚱히 바라보며 서 있던 리오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적을 빈틈없는 시선으로 훑어 가던 리반이 대여섯 권의 두툼한 책을 빼 들어 구석에 놓인 작은 받침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신중한 손길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는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리오가 몸을 배배 꼬게 될 때까지 고개도 한 번 들지 않았다. 괜히 이런저런 책을 빼어 들고 훌훌 넘기다 금세 다시 꽂는 행동을 반복하던 리오는 하품을 하며 끝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책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반이 일순 격앙된 어조로 소리쳤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였어!" "뭐,뭐야? 무슨 일이야?" 놀란 리오가 벌떡 몸을 세웠다. "찾았어, 리오! 찾았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리반이 리오의 팔을 마구 흔들어 댔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엔 격한 감격까지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내 느낌이 맞았어. 그림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정교하게 그려 져 있는 책이 있더라고." 졸음을 쫓으려 눈을 비비는 리오에게 리반이 책을 바짝 들이밀었다. "잘 봐, 리오. 자세히 살펴 봐." 리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책에 그려진 반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두툼한 테에 은은한 광채를 띤 커다란 보석을 박아 넣은 반지로, 테에 새겨진 자잘한 문양이 놀랄 만큼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럼 이게..." "그래, 네가 지금 목에 걸고 있는 반지야." 재빠른 손놀림으로 반지를 꺼내 그림과 비교해 보던 리오가 휘둥그렇게 뜬 눈을 리반에게 가져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엘이 갖고 있던 반지하고 이 책에 그려진 반지가 이렇게 비슷한 거지?" "비슷한 게 아니고 똑같은 거야, 리오. 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조품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반지인 거야? 책에 실릴 정도면 대단한 보물인 것 같은 데." "책을 읽어봐, 리오. 그 그림 아래에 적힌 글을 읽어봐." 글자를 따라 미끄러지던 푸른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열리더니 리오의 입술에서 격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핏기가 가신 리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반이 숨찬 어조로 속삭였다. "어쩌면 우린 아시리움에서 대단한 친구를 사귄 건지도 몰라."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뺨을 손바닥에 기댄 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엘은 한숨을 쉬며 아몬을 뒤돌아봤다. 그는 엘이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는 것도 못 알아차릴 만큼 앞에 놓인 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엘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괜히 이곳 저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와 아몬이 있는 곳은 성의 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첨탑의 꼭대기 방이었다. 초록방이라 불리는 이 곳은 바로 아몬의 거처였다. 방을 둘러싼 색채는 초록색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옅은 푸른색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람들 모두 초록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초록방은 아몬의 침실과 아담한 집무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꼭 필요한 몇개의 가구만이 놓여 있어서그런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휑해 보였다. 그 허전함을 상당부분 채워 주는 건 여닫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탁 트인 조망이었다. 자연과 도시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근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창문이 위치한 부분이 첨탑에서 조금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창밖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창문 앞은 아몬의 집무실에 있을 때마다 엘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아몬, 나한테 뭐 시킬 일 없어요?" 엘은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힘겹게 삼키며 아몬을 바라봤다. 아쉬운 듯 천천히 책에서 시선을 뗀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피곤하시면 자릴 비켜 드릴 테니 한숨 주무십시오." "피곤하긴요? 뭐 하는 일이 있어야 피곤하죠. 아몬이 전혀 일을 안 시키는 데 어떻게 피곤할 수 있겠어요?"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흘겨보는 엘에게 아몬은 그저 싱거운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엘은 누가 누구의 심부름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따라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아몬이 엘에게 시킨 일이라곤 창문을 열어 달라는 것과 -그녀가 창가에 기대서 있을 때였다- 바람에 날려 그녀 쪽으로 날아온 문서를 집어 달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아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차 있던 그녀가 잔뜩 풀이 죽어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일을 시키고 싶어도 못 시킬 테니 괜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아요, 아몬." 엘이 협박하듯 말하자 아몬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그는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못내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엘,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가 없게 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는 엘은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체르몬 국으로 갈 거예요." 아몬이 부드러운 눈으로 그녈 바라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왕자전하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으신가 보군요." "사실은 말이에요. 아몬한테만 말하는 건데요, 체르몬 국에 하나, 그루지아 국에 하나, 또 여기 바르테즈 공국에 하나씩 집을 마련해 둘 생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굉장히 바빠질 것 같아요. 체르몬 국에서 살다가 루드비히가 보고 싶어지면 그루지아 국으로 가고, 아몬하고 또.... 리자드가 보고 보고 싶어지면 바르테즈로 오고."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수줍은 미소를 짓던 엘이 벌떡 일어섰다. "아몬, 배 고프지 않아요?" "제가 가서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몬이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섰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그를 보던 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수가 있는데 왜 아몬이 그런 일을 해요?" 그녀는 아몬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아몬. 금방 갔다 올게요." 밖으로 나온 엘은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가다, 조심해야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아몬의 말을 떠올리며 속도를 줄였다. 사실 그의 거처가 성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라는 것과 -엘의 방은 바로 그 아래층이었다- 길게 내리 뻗은 돌계단을 감안하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충분하지 않았다. 계단을 거의 내려오자 굳건히 기초를 다진 거대한 기둥들이 우아하게 자리잡고 있는 넓은 홀이 나타났다. 첨탑으로 곧장 향하는 계단이 홀의 왼쪽 구석에 놓여 있었고 거대한 아치형 출입구 정면엔 내성으로 이어지는 으리으리한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엘은 홀을 가로지른 후 요리실이 있는 오른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녀가 기사들이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대형식당을 지나갈 때였다. "어이, 애송이!" 엘을 알아본 기사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그녀가 못들은 척하고 지나치려 하자 식당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요란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너 거기 못 서?" 소란이 급속도로 가라앉으며 기사들의 시선이 하나 둘, 문 가에 서 있는 엘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엘이 딱딱한 어조로 묻자 그녀를 불러 세운 기사가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볼일이 있다. 그러니 이리 와 봐, 어서." 엘은 잠시 망설이다 거만하게 턱짓을 하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엔 그녀가 반항이라도 해 재미있는 일이 생기길 바라는 악의 섞인 흥미가 담겨있었다. 엘은 그런 천박한 기대를 만족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엘이 비딱하게 앉아 있는 기사 앞에 멈춰 서자 그가 히죽거리며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안톤?" 문 가까이 앉아 있던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그거야, 눈 크게 뜨고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안톤이란 기사대신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기사가 대답했다. 엘에게 불쾌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안톤이란 기사는 그녀의 처음 생각과 달리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스물 대여섯 살 정도, 아무리 많게 봐도 아직 서른은 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잿빛이 드문드문 섞인 금발을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고, 그녀의 약을 올리려는 듯 조금 탁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거만하고 조금 염세적 으로 보였다. 또 까칠해 보이는 짧은 수염이 얼굴의 반 정도를 덮고 있어 기사가 아니라 흉악한 도적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이목구비 자체는 대부분의 사람이 미남이라 할만큼 균형이 잡혀 있었다. "네가 그 잘난 마법사의 심부름꾼이냐?" 안톤이 비꼬는 어투로 이죽거렸다. "안톤, 그게 정말이야? 이 꼬마가 정말 마법사님의 조수야?" "글쎄,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 왜 대답이 없는 거냐, 꼬마? 질문을 듣지 못한 거냐?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네가 그 훌륭하신 마법사님의 충실한 조수냐?" 이를 지그시 물고 있던 엘은 딱딱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습니다." "충실한 조수라... 정말 궁금하군.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충실한 조수가 될 수 있는 거냐?" "그건 저도 알 수 없으니 직접 해 보시고 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엘의 대답이 끝나자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순간적으로 짙은 적막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곧 누군가가 터뜨린 너털웃음을 시작으로 요란한 박장대소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꼬마가 대단한데?" "글쎄 말이야, 겉은 비실비실해 보이는 데 속은 꽤나 당차잖아." "보기 좋게 한방 먹은 소감이 어때, 안톤?" "그저 멍하겠지, 뭐."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안톤을 놀려대자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건방진 꼬마, 뭘 믿고 그렇게 겁없이 떠드는 거냐? 그래, 역시 곱살하게 생긴 대로 말은 잘 하는구나. 그 매끄러운 혀로 마법사를 살살 녹인 거냐?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니지 않는 은밀한 곳에 둘의 침실을 만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군그래." 엘은 이를 악물고 격한 분노를 담아 안톤을 노려봤다. "그 비리비리한 마법사가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밤마다 화끈한 신음소리로 첨탑이 들썩인다 하던데 말이야." 여기저기서 웃음 섞인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와 과장되게 내는 음탕한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떠냐, 꼬마? 마법사가 충분히 만족시켜주긴 하는 거냐?" "입 닥쳐!" 엘은 씹어 뱉듯이 똑똑 끊어 발음했다. 그러자 안톤의 입술이 진한 비웃음으로 뒤틀렸다. "그렇지 못하나 보군. 욕구불만 때문에 이렇게 앞뒤 못 가리고 까부는 거라면 오늘밤에라도 기사숙소를 찾아와라. 날 비롯해서 널 귀여워해주는 기사들이 꽤 많을 테니까." 다시 한 번 천장이 떠나갈 듯한 소란이 휩쓸고 간 다음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호기심 섞인 침묵이 찾아왔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엘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지면 네 말대로 오늘밤 기사숙소를 찾아가겠다. 하지만 내가 이기면 넌 무릎 꿇은 자세로 납작하게 엎드려 내가 엉덩이를 걷어찰 때마다 '전 개돼지만도 못한 쓰레기입니다'라고 크게 외쳐야 하는 거다. 물론 둘 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의 얘기다. 자, 선택해라. 검이냐 창이냐?"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안톤의 얼굴에 슬쩍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안톤, 저 꼬마가 너한테 결투신청을 한 것 같은 데?"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안톤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에지몬트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엘 옆까지 와서야 그녀를 알아 본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우뚝 멈춰섰다. "너도 이 꼬마를 아는 모양이구나, 에지몬트?" "어, 어어..." 에지몬트는 안톤의 물음에 대충 얼버무린 다음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검술수련장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던데." "아주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에지몬트." 안톤이 엘에게 시선을 맞추며 빙글거렸다. "네 결투신청을 받아들이겠다. 물론 무기는 검으로 하고." "뭐,뭐....뭐라고? 겨,결투?" 경악한 에지몬트가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엘과 안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결투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말 좀 해 봐!" 잔뜩 흥분해 있던 기사들이 앞다투어 일의 전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엘은 그들의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단호하게 물었다. "시간과 장소는?" "장소는 문을 나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검술수련장이 좋겠지. 장소는 내가 선택했으니 시간은 네가 결정해라." "물론 지금 당장....은 안되겠군. 충실한 조수로서 마법사님께 식사를 가져다 드려야 하니까. 시간은 한 시간 후가 좋겠다." 안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그 즉시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 나왔다. "취소해, 당장!" 서둘러 그녀를 뒤따라 나온 에지몬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못들은 척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엘의 팔을 잡아 거칠게 돌려 세웠다. "취소하라고 했어!" "내 일에 상관하지마." 엘이 성가시다는 듯 팔을 뿌리치자 에지몬트가 험악하게 눈을 부릅떴다. "나도 상관하고 싶지 않아!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꼬마 하나 때문에 바르테즈 기사단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꼴을 볼 수 없는 것 뿐이야!" "명예라고? 저 놈한테 명예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나와 아몬을 두고 그런 말을 하진 못했을 거야!" "물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 정도의 말은.... 그러니까...." 난감한 얼굴로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던 에지몬트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남자들 세계에선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야." "정말? 그런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말이 남자들 사이에선 일상용어란 말이야?" 에지몬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는 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아니, 일상용어까진 아니고... 아무튼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들어가서 안톤에게 사과하고 그 우스꽝스러운 결투인지 뭔지도 취소해." 나무나 기가 막혀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엘은 몇 번에 걸친 심호흡 뒤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과하라고? 그 놈한테 사과를 하라고? 내가 왜 사과를 해야 돼? 뭘 잘못했다고 내가 그 놈한테 머리를 숙여야 돼?" "잘못은 당연히 안톤 녀석이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우선 결투부터 취소하는 게 급선무잖아!" 에지몬트가 답답하다는 듯 한쪽 팔을 크게 휘저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젠장! 정신 차려, 꼬마! 결투가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안톤은 아직 이름만 안올렸지 켈름기사단의 기사로 거의 내정된 사람이라고! 그게 뭘 뜻하는지 알기나 해? 너같은 건 검을 잡는 그 순간 심장에 구멍이 뚫려 바닥으로 고꾸라진다는 말이다! 아니, 죽이지는 않겠군. 왜 그런지 알아?" 격앙돼 있던 에지몬트의 목소리가 일순 나지막해졌다. "안톤은 널 탐내고 있거든. 입맛을 다시며 호시탐탐 널 노리고 있단 말이다, 이 겁없는 꼬마 야." 엘은 에지몬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제기랄! 이제 그만해, 머저리!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바르테즈 기사단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다고? 내 말 똑똑히 명심해. 난 나와 아몬을 모욕한 놈을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그녀는 손아귀의 힘을 천천히 풀며 에지몬트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기사단이나 그들의 명예같은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난 기사도 아니고, 또 단순해서 내 자신과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만이 중요하거든." 엘은 말을 끝내고 슬쩍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석상처럼 우뚝 서 있던 에지몬트는 엘이 요리실문에 손을 댔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너 잘났다! 네 마음대로 해! 네가 죽든 말든 나완 아무 상관없으니까! 아니, 네 녀석이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지면 너무 기쁘고 통쾌해서 널 밟고 올라가 춤을 추게 될 것 같다!" 반쯤 열린 문을 잡고 에지몬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지몬트, 너 혹시 스무 살이 아니라 열 살인 거 아니니?" 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에지몬트에게 싱긋 웃어 보인 다음 재빨리 요리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젠장! 내, 저 건방진 꼬마를! 절대!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뒤늦게 터져 나온 분노의 외침이 복도를 가득 울렸다. 황제가 그를 찾는다는 시종의 말을 듣는 순간 자일스의 머리엔 올게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태의 중대성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마르키젤이 그와의 독대를 준비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자일스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초조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던 마르키젤이 돌진하듯 다가와 다짜고짜 그의 뺨을 거칠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자일스를 내려다보며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 네 놈이 정말 제 정신인 거냐?" 자일스는 이에 찢겨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님의 격분하심은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제 말부터 들어주십시오." 눈을 부라리고 자일스를 노려보던 마르키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털썩 내려 앉았다. "좋다, 자일스. 어디 네 잘난 변명 좀 들어보자." 자일스는 손등으로 턱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마르키젤의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지난번 아시리움 성전에서 전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오만방자한 아시리움이 저를,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인 저를 천하디 천한 일개 무지렁이로 취급했습니다. 거짓왕자 노릇을 한 미천한 놈을 감히 저보다 위에 두었단 말입니다." 자일스는 사납게 이글대는 초록빛 눈동자에서 자신이 아버지의 분노를 자극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우둔한 일을 저지른 거냐?" "그렇습니다. 전 더 이상 아시리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시리움의 권세가 지금처럼 기세 등등하다면 머지않아 우리 리아잔 제국까지 좌지우지하려 들게 분명하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미리 아버님께 말씀 드리지 않은 건 백배천배 사죄 올려야겠지만 전 제가 한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자일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던 마르키젤이 입을 열었다. "그래, 자일스. 과연 내 아들답다." 마르키젤은 자일스의 말이 그를 흡족하게 했다는 걸 조금도 숨기지 않고 아들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넌 당장 숨통을 끊어 버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아시리움에게 달려들다니!" "무작정 달려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님!" 자일스가 강하게 반발하자 마르키젤이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윗입술을 말아올렸다. "입 닥쳐라, 자일스! 아시리움이 시골 구석에 처박힌 다 쓰러져 가는 폐성인 줄 아느냐? 아시리움은 나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알겠느냐? 아시리움을 섣불리 건드리는 건 내 손으로 내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보다 더 한심하고 멍청한 짓이란 말이다!" 이를 악물고 마르키젤의 맹렬한 힐책을 듣고 있던 자일스가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자일스, 잘 들어라. 넌 내 아들이고 내가 인정한 리아잔의 후계자이지만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내 손으로 네 사지를 찢어버리고, 네 피가 마르기도 전에 클레지오를 네 자리에 앉힐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습니다, 아버님." 자일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돌아가라, 자일스. 네 거처에 얌전히 틀어박혀서 아시리움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마라." "대체 아시리움에서 어떻게 나왔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르키젤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사나운 미소가 그려졌다. "아시리움에서 황태자폐위를 요구해왔다." 자일스의 입에서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네가 이번 일을 주동했다는 아시리움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모략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아시리움의 압력이 거세진다면 네 폐위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을 거다." "폐위라고요? 제 폐위결정이 내려진다고요?" 자일스가 주먹으로 의자 손잡이를 거칠게 내려쳤다. "폐위결정이 내려진다해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시간이 흘러 일이 잠잠해지면 네 자리를 다시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치욕은요, 아버님?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가 아시리움에 무릎을 꿇다니! 대체 제가 받을 치욕과 모멸감은 무엇으로 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분노를 못이긴 자일스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 듯 부들부들 떨려왔다. "진정해라, 자일스! 치욕은 천배 만배로 돌려주면 된다!" 두 사람의 옅은 초록색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자신의 것과 똑같은 자일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르키젤이 한자한자 가슴에 새기듯 천천히 내뱉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내 아들아! 그리고 때가 왔을 때 철저하게 갚아주면 되는 것이다." "이걸로 하겠다." 엘은 앞에 내밀어진 두 개의 검 중 검신이 길고 날렵해 보이는 것을 골라 몇 번 휘둘러보았다. 다소 무겁게 느껴지긴 하지만 크게 문제 삼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안톤이 나머지 검을 집어들자 환호성 섞인 열성적인 응원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처럼 검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안톤이 주위의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히죽거렸다. "어떻게 알고 많이도 몰려들었군." 안톤의 말처럼 검술 수련장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은 거의 백 명에 달했다. 기사, 시종, 시녀, 잡일꾼, 요리사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일손을 놓은 채 어서 결투가 시작되길 바라며 기대감어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안톤이 느물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재미있는 놀이를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그의 얼굴엔 한껏 흥분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먼저 시작해라." "아니, 네가 먼저 시작..." 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안톤이 검을 휘두르며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엘은 검끝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몸을 움직였다. 안톤이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다시 공격해 들어오자 그녀는 짧은 순간 무방비상태로 드러난 그의 복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안톤이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을 때는 이미 그녀의 검끝이 그의 복부 중앙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자신이 당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거의 넋이 나가 있는 안톤을 바라보며 엘은 싱긋 웃었다. "빈틈이 너무 많으시군요, 기사님." 험악하게 눈을 부릅뜬 안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엘의 검을 쳐냈다. 그녀는 팔을 거쳐 어깨까지 올라온 진동을 무시하고 앞으로 돌진하며 번개같이 검을 휘둘렀다. 곧 안톤의 왼쪽어깨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엘은 순간적으로 주춤한 그를 향해 연이어 매서운 공격을 퍼부어댔다. 공격은커녕 이곳 저곳에서 정신없이 휘둘러지는 검을 막기에 급급하던 안톤이 끝내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 정도면 승자와 패자는 확실하게 구분이 된 것 같은 데...." 안톤의 목에 위협적으로 검을 겨누고 있던 엘이 담담하게 말하며 땅에 떨어져 있는 그의 검을 옆으로 차냈다. "내가.... 졌다." 엘은 안톤이 침울한 어조로 패배를 시인하자 검을 내리고 의외의 결과에 놀라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휙 둘러봤다. 기사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제러드와 카셀, 세르피언이 보였다. 엘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세 사람이 재빨리 주위를 살피더니 그녀를 향해 슬쩍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엘은 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기서... 그걸... 해야 하는 거냐?" 풀 죽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엘은 고개를 깊숙이 꺾고 있는 안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엉덩이를 걷어 차일 때마다 '난 개돼지만도 못한 쓰레기입니다'라고 소리치는 걸 말하는 거겠지?" 마치 그녀가 실제로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차기라도 한듯 안톤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어. 하지만 또 한번 돼먹지 못한 말을 입에 담는다면 그 땐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경고의 말을 끝낸 엘은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검술수련장은 언제 그렇게 북적거렸는지 모를 정도로 한산하고 조용했다. 수련장 주위에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을 무심코 바라보던 엘은 나란히 서 있는 에지몬트와 사 일러스를 뒤늦게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사일러스가 보고 있는지 몰랐어요." "실력이 대단히 많이 늘었습니다." 엘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늘기는요, 뭐. 그냥 어쩌다보니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이에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런 몸놀림은 어떻게 익히게 된 것입니까?" "첸하고 대련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것 같아요." "첸이라고요?" 이름난 검술사들 중 자신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일러스는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거예요. 사실 첸은 마부거든요." "마,마부라고요?" 사일러스가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엘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사실 보통 마부는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어요. 검술실력이 정말 대단했거든요. 첸 앞에서는 제대로 검을 움직여 보지도 못했어요." "그렇군요." 사일러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엘은 그가 그녀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말한 사일러스가 에지몬트에게 시선을 던지며 혀를 끌끌 차더니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의아한 눈을 에지몬트에게 가져갔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좀처럼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황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 에지몬트가 엉뚱한 질문을 던져왔다. "너 몇 살이냐?" "열... 여덟인데..." 나이 갖고 그를 놀렸던 일이 떠오르자 엘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너 정말 여자냐?" 어이없는 표정으로 에지몬트를 잠시 동안 응시하던 엘은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렸다. "너 사실은 남자지?" 엘이 하늘을 향해 눈동자를 크게 굴렸을 때, 안심한 듯한 에지몬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아시리움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는 데, 대공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칼 베리만은 리자드를 보자마자 그를 안으로 안내하기도 전에 질문부터 꺼냈다.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허어, 이거 참....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이제야 알고 소란을 피우게 되는군요. 사실 그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이런, 대공을 아직까지 서 계시게 했다니!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어서 이리 앉으십시오, 대공."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던 칼 베리만이 리자드에게 서둘러 의자를 권했다. "제가 듣기로는 아시리움 종단에서 이번 일의 배후로 자일스 전하를 지목했다 하던데, 아시리움에서 아무 근거없이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를 거명했을리는 없고.... 그렇다고 자일스 전하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과연 벌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대공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정말 자일스 전하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했다 보십니까?" "물론입니다. 아시리움의 의견을 차치하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일을 경솔하게 벌인 점, 코흘리개 어린아이정도의 머리도 없이 되는대로 일을 진행시킨 점, 또 사건이 터지자 숨죽인 채 아버지의 등뒤로 숨어 버린 점.... 이것만 놓고 봐도 답은 확실합니다. 그 정도로 어리석을 수 있는 자가 세상에 또 있을 수 없습니다." 리자드의 얼굴엔 진한 냉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칼 베리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예, 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일스 황태자만큼 무모한 사람도 드무니까요." 칼 베리만이 완곡한 표현을 써서 리자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런데 아시리움 종단에선 이번 일을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일 생각일까요? 듣자하니 자일스 전하의 황태자폐위를 요구한다 하던데 끝까지 그걸 관철시키려 할지... 쉽게 판단이 안 서는군요, 대공." "제 생각으론 쉽게 유야무야 끝날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모든 건 법황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겠지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시리움 종단 그 자체가 법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라.... 법황, 생각할수록 대단한 존재입니다." 칼 베리만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참, 그렇지! 바쁘신 대공께 괜한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공." 부랴부랴 몸을 일으킨 칼 베리만이 그들이 있던 내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그리 넓지 않은 방으로 리자드를 안내했다. 서적이 가득 꽂힌 책장이 이면을 차지하고 있는 방 안쪽으로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엔 열 권에 달하는 책이 펼쳐진 채 겹겹이 쌓여 갖가지 잡동사니와 뒤섞여 있었다. 새삼스럽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칼 베리만이 쑥스러운 얼굴로 리자드를 돌아봤다. "이렇게 엉망이라니... 매일 이 곳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도 이 정도인줄은 저도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리자드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웃음기가 말끔히 가신 얼굴로 외투 안쪽에서 천으로 감싸인 작은 꾸러미를 꺼내 칼 베리만에게 내밀었다. "바로 이것이군요." 조심스럽게 받아 든 칼 베리만이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 위에 꾸러미를 내려놨다. 그가 신중한 손길로 천을 풀자, 곧 안에 있던 물건이 드러났다. 그건 손바닥만한 크기의 검은 색 돌조각이었다. "예,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칼 베리만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책상서랍에서 나무상자를 꺼내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물건을 손에 넣으신 게 언젠데, 제 게으름 탓에 이제야 수수께끼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군요. 하지만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니.... 제가 너무 부족한 탓에 대공께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칼 베리만께서 안 계셨다면 해독은 아예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공. 사실 대부분의 해독은 이미 오래 전에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또 그동안 풀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선 대공도 아시다시피 요 며칠간 나름대로 노력도 해 보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고대어 몇 개가 도무지 풀리지 않으니..." 말끝을 흐리며 슬며시 한숨을 내쉰 칼 베리만이 나무상자를 열고 안에 든 돌조각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돌조각들은 몸체에 새겨진 미묘한 문양을 제외하면 분간이 안갈 정도로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칼 베리만이 두 개의 돌조각을 잇대자 칼로 자른 듯 깨끗한 선이 서로 맞물리며 둥근 원을 이루었다. 칼 베리만은 돌조각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표면에 새겨진 문양을 주의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일정한 속도로 미끄러지던 그의 눈길이 일순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는 돌에 코끝이 부딪칠 정도로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무슨 일이십니까?" 심상치 않은 그의 행동에 리자드가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칼 베리만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책과 잡동사니들을 마구 뒤지더니 안에 파묻혀 있던 작은 단도를 찾아 탁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칼날을 돌조각의 모서리로 가져갔다. 다음 순간 단도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칼 베리만?" 칼 베리만이 고개를 들어 리자드를 바라봤다. 격렬히 흔들리는 그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리자드는 숨을 죽였다. "왜 그러십니까?" 칼 베리만의 입술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곧 목에서 짜낸 듯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짜입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일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리자드가 무섭도록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저 물건은 가짜입니다, 대공.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드는 리자드를 보며 칼 베리만이 침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 극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입니다. 진짜라면 그런 칠감이 묻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칼날에 묻어 있는 미세한 검은 가루를 응시하던 리자드가 뚜벅뚜벅 탁자로 다가가 단호한 동작으로 몸을 숙였다. 곧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탁자 위로 검은 가루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리자드를 응시하던 칼 베리만은 칠이 벗겨지며 어떤 글자들이 나타나는 것 같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옆에 멈춰 섰을 때 리자드가 단도를 탁자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리자드의 시선이 못 박혀 있는 돌 위엔 법황의 자필임이 분명한 짧은 문장이 놀랄 만큼 매끄럽게 새겨져 있었다. [루벤스타인 대공,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리자드의 입술에서 낮고 거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공..." 칼 베리만이 리자드를 걱정스럽게 불렀을 때, 그가 주먹으로 거칠게 돌조각을 내려쳤다. "대공!" 두 쪽으로 갈라진 돌조각 위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괜찮으십니까, 대공? 어떻게 이런 일이!" 칼 베리만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리자드의 손을 감쌀 만한 걸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었다. 적당한 것이 눈에 띄지 않자 그는 허겁지겁 자신의 겉옷을 벗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리자드가 옷자락을 들이대는 칼 베리만에게서 살짝 몸을 돌리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청회색 눈동자에서도 전혀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간단히 고개를 숙여 보인 리자드가 절제어린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 베리만은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옷을 내밀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제 49장. 고백------------------------------------------------------------------- "그 아이가 바르테즈에 있단 말씀입니까?" 남자가 마체라타를 흘긋 쳐다본 다음 읽고 있던 문서로 다시 시선을 가져갔다. "그렇다고 했지 않느냐?" "루벤스타인 대공답지 않은 일이군요. 왜 그 치밀하고 빈틈없는 루벤스타인이 그 아이를 옆에 두고 있는 걸까요?"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이유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그 말씀이 옳습니다. 중요한 건 그 아이가 바르테즈의 왕성에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마체라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자 남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그녈 바라봤다. 마체라타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다음 긴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뉘었다. 검붉은 머리채가 의자 아래로 미끄러져 바닥에 드리워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아이말입니다. 아시리움 종단과 자일스 황태자가 기를 쓰고 잡으려 하는 보라색 눈동자의 소녀." "네가 알아서 해라. 그래서 너한테 알린 거니까." 마체라타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리아잔 제국에만 관심을 기울이실 뿐, 작은 여자아이의 운명 따위에 신경 쓰실 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니, 그렇지 않다. 요새 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중이 니까 말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더욱 궁금해 지는군요. 그 아이가 정말 페르가몬의 피붙이가 맞을지.... 어찌 생각하십니까?"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가 책상을 돌아 창가로 걸어갔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는 페르가몬 밖에 없을 거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볼 수는 없는 거고... 궁금증을 풀 방법이 없겠군요."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물론 그 아이에 대해 물으신 거겠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남자가 놀랍다는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그럼 이대로 덮어두겠다는 말이냐?" "예, 바로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마체라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매끄럽게 말했다. "의외의 대답이구나, 마체라타. 난 네가 이 사실을 듣자마자 그 즉시 자일스 황태자에게 알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적지 않게 갈등이 생기긴 합니다. 그 아이가 세상에 드러나면 재미있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될 테니까요. 또,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체라타는 대답하기 전 일어나 앉아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그 아이 때문에 자일스 황태자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이 그 무엇보다 재미있으니까요." "그래, 듣고보니 네 말이 맞을 것 같구나." 남자가 거칠게 킬킬거리며 마체라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 요새 황태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내실에 틀어박혀 꼬리 잘린 사나운 강아지처럼 왕왕대고 있습니다. '아시리움, 아시리움'하며 이를 가는 데... 참고 들어주려 해도 금세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남자의 얼굴이 엄격하게 변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 성질을 참지 못해 일을 망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마체라타가 남자의 말을 가로채 매끄럽게 끝을 맺었다. "예,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알았으면 어서 돌아가 봐라. 오랜 시간 자릴 비우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알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마체라타가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직 그 일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얼마 전 몇몇 멍청한 놈들이 절 공격했습니다. 누가 시킨 일인지 알아낸 후 숨통을 잘랐어야 하는데 분노가 치밀어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쥬네비아 황후의 짓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네 생각이 맞다." 마체라타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공격당한 날.... 그 전에 아신 겁니까?" "그렇다." "이미 알고 계셨다면 왜 미리 알려 주시지 않은 겁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 몇 명의 자객들에게 당할 네가 아니지 않느냐?" 신경질적으로 반문하는 남자의 얼굴엔 성가시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제가 깊이 잠들어 있기라도 했다면... 절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기 못했다면... 아마 전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그만해라! 대체 그런 말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이냐?" 마체라타는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제가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철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돌아가라! 내 딸이면 내 딸답게 돌아가서 얌전히 명령을 따르란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마체라타의 입술에 좀 구슬퍼 보이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남자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어? 이상하네? 매일 근엄한 얼굴로 서 있더니만." 집무실 앞을 지키는 시종들이 보이지 않자 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리자드, 아몬이 이걸...." 무심코 말을 꺼냈던 그녀는 리자드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엘은 아몬이 리자드에게 전하라고 한 몇 장의 문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다음,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의 의자에 앉았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을 둘러보다, 별다른 게 눈에 띄지 않자 곧 서랍으로 관심을 돌렸다. 엘은 은밀한 긴장과 재미를 느끼며 첫 번째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두 번째 서랍에 손을 가져갔다. 예상했던 대로 두 번째 서랍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문서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밑의 서랍 두 개에서도 그녀의 흥미를 끌만한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재미없는 사람 아니랄까 봐." 엘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며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해 보자는 마음으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서랍을 열었다. 가죽 끈으로 묶여 있는 서찰뭉치를 들춰 본 엘은 그 밑에 놓인 종이를 무심코 꺼내 펴 들었다. 놀랄 만큼 섬세하게 그려진 그녀의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엘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좀 낯설게 느껴졌지만 보면 볼수록 비슷해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떻게 리자드가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는 걸까? 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림을 접었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부딪치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해 몸을 웅크리고 주위를 살폈다. 집무실 안쪽으로 살짝 들어간 측면에, 벽과 같은 색깔의 문이 작은 틈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문 저 안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이 분명했다. 엘은 재빨리 그림을 원래 자리에 넣은 다음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문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 누구있어요?" 조심스럽게 물은 엘은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은 살며시 문을 민 다음 넓어진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길게 내려진 커튼으로인해 대낮인데도 엷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부드러움과 엄숙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공간엔 어느 정도의 격식을 갖춘 편안함이 배어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침범해선 안될 것 같은 왠지 모를 비밀스러움도 풍겨나왔다. 엘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나가기로 마음먹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방 안쪽에서 조금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리자드? 혹시 거기 있는 게 리자드예요?" 귀를 쫑긋 세우고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엘은 의자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리자드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상상도 못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도 그녈 놀라게 했지 만 그의 손에 아무렇게나 들려 있는 술잔은 그야말로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리자드에게서 눈을 뗀 엘은 탁자에 놓인 몇 개의 술병을 훑어본 다음 다시 그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그의 옆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조심스러운 물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깊숙이 꺾인 리자드의 얼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은 잠이 든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리자드의 긴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묵직한 은잔을 빼냈다. 반쯤 차 있는 잔을 가까이 가져와 냄새를 맡아보던 그녀는 독한 술냄새가 밀려들자 코에 주름을 잡으며 서둘러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리자드, 자는 거예요? 그럼 침실로 가서 편안하게 자요." 예상했던 대로 리자드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그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용기없는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살며시 움직여 흘러내린 청회색 머리카락에 닿았다. 조금 거센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리자드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청회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리자드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엘은 숨을 죽였다. 검은 색으로 보일 만큼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그 속엔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어떤 것, 정체를 알 수없는 깊은 어둠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리자드가 마치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낯선 곳으로 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엷은 두려움으로 변해 스며들었다. "리자드,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죠?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거죠?" 엘은 목소리를 높이며 리자드의 팔을 움켜잡았다. "안 좋은 일이라... 성가신 파리처럼 내 귀에 대고 시끄럽게 떠드는 네 자체가 나한텐 안 좋은 일이다.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여기서 나가라." 리자드가 그녀의 손을 단호하게 떼어 내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엘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리자드의 심술궂은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날 내보내고 뭘 하려고요? 또 술이나 마실 생각인 거죠? 그렇죠?" 리자드는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엘을 흘긋 바라본 다음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인 거냐?"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고요?" 엘은 심호흡을 하며 잠시 천장을 올려다본 다음 리자드에게 매서운 시선을 날렸다. "당연히 상관이 있죠? 나한테 술은 한방울도 마시지 말라고 한 사람이 누구예요? 바로 리자드 잖아요. 날 죽일 듯 노려보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퍼 마시다니!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작게 코웃음을 친 리자드가 마치 그녀더러 보라는 듯 팔을 뻗어 술잔을 집어들었다. 엘은 리자드의 입술로 향하는 술잔을 재빨리 가로챈 다음 목소리를 굵직하게 내어 점잖게 말했다. "어어,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대공전하. 고귀하신 분께서 이토록 자제력이 없으셔야 쓰겠습니까?" "자제력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리자드의 입술에 자조 섞인 미소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그를 바라보던 엘이 슬며시 얼굴을 찌푸렸을 때 리자드가 술병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후 술병이 조금 내려지며 그 위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앞으로는 리자드가 술을 마시면 나도 마실 거예요." "마음대로 해라." 리자드가 관심없다는 듯 입술을 슬쩍 비틀었다. 엘은 잔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는 호박색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여 단숨에 들이켰다. 불길을 들이마신 듯 목과 귀가 화끈 달아오르더니 이내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더 줘요." 그녀는 잔뜩 쉰 목소리로 힘겹게 말하며 리자드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가 병을 기울여 술잔을 반쯤 채워 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천천히 마셔라." 엘은 미소가 피어오르려 하는 입술을 재빨리 깨물었다. 그리고 애써 딱딱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리자드도 천천히 마셔요." 이해할 수 없는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자드가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많은 술을 마신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낮은 장식선반에서 은잔을 꺼내 들고 몸을 돌리는 절도있는 동작에선 우아함까지 느껴졌다. 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되돌아오는 리자드를 바라봤다. 자리를 옮겨 그녀의 맞은 편 의자에 앉은 그가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엘이 버럭 소리쳤다. "손이 왜 그래요? 어쩌다 다친 거예요?" 허공에 멈췄던 리자드의 손이 다시 움직여 술병을 집어들었다. "어디 좀 봐요." 엘이 불쑥 팔을 내밀자 리자드가 짜증스럽다는 듯 그녀의 손을 처냈다. "귀찮게 하지 마라!" "나참! 누가 귀찮게 했다는 거예요? 그냥 한 번 보기만 하겠다는데... 내가 본다고 손이 썩기라도 해요?" 리자드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엘은 리자드에게 잔뜩 얼굴을 찌푸려 보인 다음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술병을 억지로 빼냈다. 그리고 손에 난 상처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 중앙엔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었고 살갗이 벗겨진 뼈마디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엄청 아플 것 같은 데... 왜 치료받지 않았어요? 어의관들이 잔뜩 있잖아요. 또 아몬도 있고." "필요없으니까." 리자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든 엘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 다음 단도를 꺼내 들었다. 리자드는 엘이 위협적으로 칼날을 세운 채 다가와 다짜고짜 그의 셔츠자락을 빼낼 때도, 또 그 끝부분을 길게 자르기 시작할 때도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연 건 엘이 잘라낸 셔츠조각으로 그의 손등을 감싸고 매듭을 지을 때였다. "왜 이런 걸 하는 거냐?" "왜냐하면 상처를 감쌀 만한 천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또 난 내 옷을 망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요." 엘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어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가 술병을 들어 앞에 놓인 잔을 가득 채웠다. 그는 술을 단숨에 들이킬 거라는 그녀의 예상을 깨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면 말이나 해 봐라." "뭐, 뭐를요?" 어리둥절해진 엘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거나."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시작했다. "칼 베리만이 그러시는데 여자들이 리자드를 엄청 좋아한다면서요? 그래서 오래 전에 여자들 한테 질린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꽤나 할 얘기가 없으셨나 보군." 엘은 리자드를 곁눈으로 살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칼 베리만은 리자드한테 빨리 정부가 생기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나이가 몇 인데 아직까지 정부가 없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녈 바라보던 리자드가 아무 말없이 술잔을 집어 들어 반 정도 비운 다음 입을 열었다. "그건 칼 베리만이 모르셔서 하신 말씀이다." "뭐라고요? 그럼 리자드한테 정부가 있단 말이에요?" 엘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술이 넘치며 손가락을 적셨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언제부터요? 아니, 대체 누구예요? 누가 리자드의 정부인 거예요? 지금 여기, 이 성에 살고 있나요?" 엘은 보라색 눈동자를 맹렬히 이글거리며 따져 물었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얘길 해야 하지?" 리자드가 귀찮다는 듯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엘은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오르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부릅떴다. "좀 말해 주면 안돼요? 정부가 있다는 건 지금까지 내색한 적도 없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엘은 사납게 소리치며 그를 물어뜯을 듯 노려봤다. 그녀는 리자드에게 배신감조차 느끼고 있었다. "리오는 리자드가 미혼인 줄 알고 있던데,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술을 마시려던 리자드가 일순 동작을 멈추더니 천천히 팔을 내렸다. "부인이 불쌍해요! 남편이 총각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을 부인이 너무 불쌍해요!" 그리고 나도요. 나도 너무 불쌍해요. 엘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떠올리며 리자드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기가 막힌 얼굴로 거의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네가 알고 있는 정부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거냐?"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곁눈질로 리자드를 살피며 마지못해 대 답했다. "정부... 정식부인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리자드가 잠시 후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정부가 무슨 뜻인데요?" "그건... 아몬에게 물어 봐라." 리자드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는 엘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리자드. 백만 큐어는 언제 줄 거예요? 설마 모르는 소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정말 주는 거죠?" 몸 속에 퍼진 술기운이 흥분을 부추겨 엘의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자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원하던 걸 손에 넣으면 너도 원하는 걸 갖게 된다... 그런 약속이었지." "언제 줄 건데요?" "네가 그 돈을 마음껏 쓸 수 있을 만큼 안전해지면, 그 때 주겠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던 엘은 급기야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대체 돈이 생기면 뭘 할 생각인데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 리자드가 슬쩍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하지만 가장 먼저는 집을 살 생각이에요. 이건 전에 아몬에게도 한 말인데요. 여기에 하나, 체르몬 국에 하나, 그루지아 국에 하나씩 집을 마련하려고 해요. 또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그루지아에 집을 마련하겠다고?" "그래요, 집이 있으면 루드비히를 만나는 일이 한결 편해질 테니까요. 으음... 어떻게 생각하면 꼭 집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네 루드비히에 대해 말해봐라." 리자드가 딱딱한 어조로 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날카롭게 살피는듯한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고정했다. "내 루드비히라고요?" 엘은 피식 웃고 나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좋아요. 그러니까 루드비히는.... 그러니까 아주...." 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가더니 이내 진지하게 변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말 몇 마디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게 그를 더 잘 표 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리자드의 입술에 슬쩍 냉소가 피어올랐다. "그에게 애틋한 연정이라도 품고 있는 거냐?" "연정이라고요? 아니에요!" 엘은 펄쩍 뛰어올랐다. "물론 루드비히를 좋아해요. 하지만 연정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그러니까 좀, 아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리오와 리반을 좋아하지만 그 감정에 연정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아요. 물론 루드비히에게 느끼는 감정과 두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르지만... 아니, 사실 리오와 리반에게도 각각 다른 감정을 느끼지만...." 자신이 횡설수설하고 있음을 깨달은 엘은 슬쩍 말끝을 흐렸다. 리자드의 입술이 험상궂은 미소로 비틀어졌다. "아주 편리한 감정이로구나. 너와 관련있는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고 떠들 수 있으니... 어디 더 늘어놔 봐라. 루드비히도 좋아하고, 리오와 리반도 좋아하고, 물론 아몬과 사일러스도 좋아하겠지.... 며칠 전 네가 결투를 벌였던 안톤은 어떠냐?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아직 그에 대한 감정은 잘 모르겠군. 그렇다면 나는 어떠냐? 네 루드비히에게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겠지만.... 혹시 나도 좋아하고 있는 거냐?" 리자드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드러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듯 그에게 고정되어 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봤다. "네가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댄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 다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난 그 명단에서 제외시켜주면 고맙겠다. 철없는 어린아이의 사랑놀음에 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 말을 끝낸 리자드가 건배를 하듯 엘을 향해 술잔을 들어 보인 뒤 단숨에 들이켰다. "알아들었으면 나가 봐라." "대체 당신이 뭔데 내 감정을 비웃는 거예요?" 엘은 이를 악문 채 거칠게 속삭였다. "당신이 날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나가라고 했다!" 짜증 섞인 단호한 어조가 엘의 말을 잘랐다. 그녀에게 꽂혀 있는 청회색 눈동자는 얼음으로 조각된 듯 싸늘하고 무자비해 보였다. "아니오, 나가지 않겠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낸 다음에, 그 때 나가겠어요! 이제 리자드가 내 말을 들을 차례예요!" "네 발로 나가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나가게 해주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어조로 말한 리자드가 몸을 세우며 다짜고짜 엘의 팔을 움켜잡았다. 엘은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하는 강한 완력을 거칠게 뿌리쳤다. "난 하고 싶은 말이 있고, 당신은 듣기 싫어도 그걸 들어야 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냐?" 비웃음이 가득한 질문에 엘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제길!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요란한 외침이 끝나고 한순간 짙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관심없다 해도....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이 말만은 해야겠어요." 엘은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는 심장고동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리자드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사랑해요." 무표정한 청회색 눈동자에 어떤 강렬한 감정이 갑작스레 이글거리는 걸 본 순간 엘은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 알 수없는 빛은 눈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리자드에게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둠 속에 남아있고 싶어하는 감정에 밝은 빛을 들이대는 것처럼. 귀가 멍멍할 정도의 압도적인 침묵이 흘러가자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엘이 버럭 소리쳤다. "알아들었어요? 사랑한다고요!" 엘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리자드가 등과 다리를 받치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말했을 텐데? 철없는 어린아이의 사랑놀음에 관심없다고."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그의 얼굴은 완벽하게 무표정했다. 엘은 문을 나선 리자드가 그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으려 하는 순간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힘껏 끌어당기며 강하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닿아 있는 리자드의 팔과 가슴이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엘은 입술을 떼어내고 전에 읽었던 연애소설을 떠올리며 리자드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진 다음 손을 가슴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래도 내가 철없는 어린아이예요?" "물론." 리자드가 짧게 응수하며 그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제길!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사납게 소리쳤다. 푹신한 카펫덕분에 몸은 아프지는 않았지만 산산 조각난 자존심이 맹렬히 가슴을 찔러 대고 있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 폭군! 야만인!" 엘의 맹렬한 외침이 끝나자 오만한 군주의 모습 그대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자드가 입을 열었다. "악당, 폭군, 야만인, 그 외에는 또 없는 거냐?" 발끈해 더 크게 소리치려던 엘은 슬며시 입술을 다물었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어리게만 보는 리자드의 생각을 더욱 굳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명한 판단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녀는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펴고 재빨리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리자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 봐도 돼요?" 엘은 몸을 비틀며 일어선 다음 문에 손을 짚고 비스듬히 서 있는 리자드를 마주봤다. "사실 내가 입 맞출 때 기분 좋았죠?" 머리가 아픈 듯 지그시 이마를 누르고있던 리자드가 잠시 후 손을 내리고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 "대체 이 얼토당토않은 것들은 어디에서 배운 거냐?" "그,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서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요. 싫지 않았죠? 속으론 좋았으면서 괜히 심술부리고 트집 잡는 거죠? 그런 거죠? 솔직히 말해봐요." 엘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리자드를 향해 집요하게 물었다. 그녀의 눈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담겨 있었다. 고개를 내린 리자드가 엘의 입을 단번에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을 꺼냈다. "너는 어떠냐? 내가 보기에 우리 두 사람 중 기분이 좋았던 쪽은 내가 아닌 것 같은 데 말이다." 할말을 못 찾고 입술을 달싹이는 엘의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잠시 동안 씨근덕거리던 그녀는 퍽퍽 발을 구르며 몇 걸음 옮겼다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힘껏 걷어차며 크게 소리쳤다. "겁쟁이! 그래요! 기분 좋았어요! 그래서 또 하고 싶어요! 난 리자드와 달라요! 난 적어도 내 감정에 솔직하다고요!" 막 술을 따르려던 리자드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 "리자드는 겁쟁이에 거짓말쟁이예요!" 그는 요란한 발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술을 따랐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올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겁쟁이에 거짓말쟁이라.... 틀린 말은 아니군." 에지몬트는 얼굴에 와 닿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자신의 침대에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즐긴 그는 기지개를 시원하게 켠 다음 시트를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와 천천히 복도를 걷던 에지몬트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아치형 창 앞에 멈춰섰다. 그가 창 밖을 내다보며 요란하게 하품을 했을 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에지몬트는 고개를 돌려 복도에 멈춰 선 채 그를 보며 키득거리는 두 명의 젊은 하녀들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나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반응을 확인한 다음 -금발머리하녀는 붉어진 얼굴을 수줍게 돌렸고, 갈색머리 하녀는 그에게 유혹이 담긴 미소를 던졌다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으로 들어선 에지몬트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거나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주방하인들과 하녀들을 지나 여러 개의 화덕이 나란히 놓여진 곳에 멈춰 섰다. 그의 짐작대로 화덕 위에선 갖가지 음식들이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에지몬트는 입맛을 다시며 큰 국자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걸쭉한 스튜를 퍼 입으로 가져갔다. "도련님!" 뒤에서 튀어나온 걸걸한 목소리에 놀라 혀끝을 덴 에지몬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젠장, 카를로! 혀를 데었잖아.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떡해?"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에지몬트를 노려보던 카를로가 크게 코웃음을 치며 불룩 튀어나온 배로 그를 밀었다. "괜한 엄살부리지 마시고 자리나 비켜주십시오. 음식이 다 타겠습니다." "엄살이라니! 자, 여길 좀 보라고!" 혀를 쑥 내밀고 있던 에지몬트는 카를로가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자 씩 미소를 지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도련님?" 다혈질에 열정적인 감정표현으로 유명한 카를로가 에지몬트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한순간 숨이 막힌 에지몬트는 재빨리 그의 팔을 풀며 피식 웃었다. "어젯밤에.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좀 생기는 바람에 늦어지게 됐어." "그러셨군요. 그런데 도련님 얼굴을 뵙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글쎄, 한 달 조금 넘었나?" "그동안 얼굴이 많이 상하셨군요. 기사단으로 복귀하시기 전에 제가 책임지고 예전모습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에지몬트는 따뜻한 눈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를 애지중지해준 백발노인을 바라봤다. 친부의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채 자란 그에게 카를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먹을 거 좀 줘, 카를로. 예전모습을 찾기 전에 배가 고파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그건그렇고 어머니는 어디 계신 거야?" "글쎄요, 오전 내내 정원에서 일을 하셨는데, 점심식사를 하신 후엔 모습을 뵐 수 없었습니다. " 카를로가 쟁반에 부지런히 음식을 쌓아 올리며 말했다. "외출하신 건 아니시겠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성으로 돌아갈 생각인데... 어두운 곳에서 말을 달리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 말씀은 이미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들었습니다. 도련님을 모르실 마님이 아니시니 외출을 하셨다해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니 이거나 받으십시오." 에지몬트는 조리대에 냉큼 올라앉아 쟁반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코우, 이리와 봐라!" 문 가에 서서 부엌을 기웃거리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 카를로가 크게 소리쳤다. 부리나케 뛰어온 소년이 슬금슬금 카를로의 눈치를 살폈다. "부르셨어요?" "그래! 그런데 네 녀석은 하라는 일은 안하고 왜 여기 있는 거냐? 또 마리나 훔쳐보러 온 거지?" 주근깨 가득한 소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녀석이 마리나를 훔쳐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꼴을 내가 몇 번이나 봤는지 알아? 그건 그렇고, 마님이 어디 계신 지 아는 거 좀 없냐?" "응접실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계실 겁니다. 제가 막 손님들을 그 곳으로 안내하고 나왔거든요." 소년이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 서둘러 대답했다. 재미있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에지몬트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손님?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는데 대체 누가 찾아온 거야?" "제가 봤는데요, 작은 도련님.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 두 명이었습니다." "네 또래의 남자아이?" 에지몬트가 흥미를 나타내자 신이 난 소년이 열심히 말을 늘어놨다. "예, 한 명은 빨간 머리고 다른 한 명은 우중충한 금발머리인데 신기하게도 얼굴이 쌍둥이처럼 아주 똑같이 생겼습니다, 도련님. 사실 저도 처음엔 그저 머리카락 색깔만 보고 별 관심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마님께 안내하는 길에 둘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살펴보니 비슷한 것 정도가 아니라 똑같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얼굴이 똑같이 생겼다고?" 조리대 위에서 펄쩍 뛰어 내려선 에지몬트가 소년의 말을 끊으며 재빨리 물었다. "예, 도련님." 에지몬트는 소년의 대답을 뒤로 하고 서둘러 부엌을 빠져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앞에 도착한 그는 형식적으로 서너 번 문을 두드린 다음 곧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어머니와 마주 앉아 있는 소년들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순간 에지몬트는 딱딱하게 굳은 채 문 가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때마침 왔구나, 에지몬트. 지금 이 분들에게 네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사일러스를 만나려면 먼저 널 찾는 편이 빠를 거라고 말이다." 에지몬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바라며 소년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채 반도 가기 전에 그들이 체르몬 국의 왕자들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에지몬트는 속으로 욕설을 뱉어 내며 애써 얼굴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큰형님을 만나러 온 손님들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에지몬트 하덴 제너시스라 합니다." 자신들을 간단히 리오와 리반이라 소개하는 왕자들의 모습에서 에지몬트는 그들이 신분을 밝히는 걸 원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일러스에게 무척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 데, 네가 수고 좀 해야겠다. 이 분들께도 네가 쾌히 사일러스에게 안내해 드릴 거라는 말씀을 드렸다, 에지몬트."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형님을 찾아오신 손님이신데 당연히 제가 모셔야 하겠지요."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격식을 차린 아들의 말투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어머니를 향해 에지몬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제발 더 이상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애원을 담아 어머니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오늘 해지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저희도 같이 동행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그건.... 그러니까...."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에지몬트가 이 곳에서 중요한 볼일이 있다는 말을 저한테 미리 했는데, 제가 그만 잊고 있었군요." 멍한 얼굴로 어머니를 응시하던 에지몬트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예, 사실 중요한 임무를 맡고 성을 나오게 된 거라 이삼일, 아니 삼사일 정도 이 곳에 머무르게 될 것 같습니다. 묵고 계신 숙소를 알려 주시면 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여관이름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왕자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에지몬트는 문까지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어머니를 향해 다급히 말했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어요, 어머니. 되도록 빨리 형을 만나는 일이 급선무일 것 같아요. 아, 그렇지! 방금 나간 그 두 소년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도 제가 연락을 드리기 전엔 그냥 대충 둘러대셔야 해요." "그래, 알았다. 어서 가 봐라." 문으로 서너 걸음 옮기던 에지몬트는 재빨리 되돌아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조금 만 더 닮았어도 아마 지금쯤 천재지략가라 불리고 있을 거예요." "괜한 아부 그만하고 어서 가기나 해, 녀석아." 에지몬트는 어머니를 향해 씩 웃어 보인 후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제 50장. 그녀를 향하는 바람------------------------------------------------------------------- "꼭 사일러스 단장님을 만나야 합니다!" 리오는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꾹 참고 애써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비병은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쓸 뿐이었다. "대체 너 따위가 단장님을 만나려 하는 이유가 뭐냐?" "젠장! 이유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소?" "뭐, 뭐라고?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리반은 주먹을 불끈 쥐고 기사에게 달려들려는 리오의 팔을 재빨리 잡으며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죄송합니다, 병사님. 사일러스 단장님을 뵙는 일이 워낙 급하고 중요해서 제 형이 잠시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기사가 좀 누그러진 얼굴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내 특별히 사일러스 단장님께 너희들 얘기를 해 볼 테니까 이름과 용건을 말해봐라." 리반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얼굴로 리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리오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잡은 리반이 품에서 손바닥만하게 접은 종이를 꺼내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이걸 사일러스 단장님께 전해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하지만 교대시간까진 이 곳을 떠날 수 없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더군다나 사일러스 단장님께선 워낙 바쁜 분이시니 어쩌면 며칠 후에야 이걸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늦더라도 꼭 좀 그 분께 전해 주십시오. 부탁 드리겠습니다." 리반은 고개까지 숙여 보인 후 투덜거리는 리오를 끌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허탕칠 줄 알았으면 그냥 에지몬트란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기나 얌전히 기다릴 걸 그랬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리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이삼일이나 삼사일 후에나 성으로 복귀한다고 했잖아. 그 때까지 멍하게 앉아 손놓고 기다릴 바엔 이렇게라도 해 보는 게 훨씬 낫지, 뭐." 우울한 어조로 말한 리반은 애써 목소리를 밝게 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사일러스 하덴 제너시스란 사람, 어지간히 유명한가 보더라. 너도 봤잖아. 이름을 대자마자 잔뜩 침을 튀기며 칭찬을 늘어놓던 사람들." "당연하지. 켈름기사단은 바르테즈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최고 중의 최고라는 말이 나오는 기사단이야. 사일러스 하덴 제너시스는 바로 그 켈름기사단의 단장이고. 유명한 게 당연하지. 나도 이름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리반은 그런 사람이 왜 엘을 찾아 데클란 평원까지 온 걸까 하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리오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데클란 평원에서 만난 기사들과 젊은 마법사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쪽지는 대체 언제 준비한 거야? 경비병한테 건넨 쪽지말이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리반은 리오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제 여관주인에게 필기도구를 얻어서 썼어. 성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 "뭐라고 썼는데?" 리오가 작은 돌을 걷어차며 물었다. "'여행자의 쉼터'에 묵고 있음. 꼭 만나 보길 원함. 리오와 리반." "그렇게 밖에 안 썼어?" "다른 사람이 종이를 펴 볼 위험이 있잖아.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때문에 알렉스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말이야." "네 말이 맞아, 리반. 사실 난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어. 경비병한테 쪽지를 남기는 일도 그렇 고..." 리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날 데려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그래, 임마. 네 말이 정확하게 맞다." 피식 웃는 리오를 향해 리반이 씩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묵묵이 걸음을 옮겼다. "여기 어딘가에 알렉스가 있을까?" 시장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리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응, 틀림없이 그럴 거야." 리오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아몬의 부탁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가지고 나오던 엘은 복도를 걸어가는 사일러스의 모습이 보이자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엘은 그를 소리쳐 부르려하다 살짝 가서 놀라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사일러스를 따라 복도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계단 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일러스와 아몬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다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이 굉장히 심각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엘이 자리를 비켜 주기위해 슬그머니 걸음을 돌리려 하는 순간 아몬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려 왔다. "엘을 찾아온 거로군." 그녀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계단 아래의 그늘 속으로 들어섰다. "대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대체 누가 말해 준 걸까?" "유이나르님." 초조함이 담긴 사일러스의 목소리에 비해 아몬의 대답은 침착했다. "젠장! 그 괴팍한 할아범! 언젠가 큰 일 저지를 줄 알았다니까! 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거야?" "두 왕자전하가 꽤나 마음에 드셨나 보지." 두 사람이 리오와 리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엘은 허겁지겁 손을 올려 터지려 하는 탄성을 막았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바르테즈까지 와서 순순히 돌아가려 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그 러니까 집까지 찾아왔을 테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사일러스. 무슨 일이 있어도 엘을 만나려 할거야." "전하께 말씀 올려야 하나?" "내 생각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 엘이 성밖을 나갈 일은 없을 테니, 그 분들이 이 곳에 못 들어오게 막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겠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사일러스가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관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행자의 뭐라고 했는데... 가만 있어 봐. 쪽지를 가져왔으니까." 주머니를 뒤지는 듯 천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 적혀 있으니까 펴 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몬이 무슨 말인가를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오와 리반이 묵고 있는 여관이름이 분명했지만 너무 낮아 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아몬.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친구까지 못 만나게 막아야 한다니... 우리한테 그럴 권리는 없잖아." "보통 친구면 이럴 필요까진 없을 테지.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기 이전에 왕족이야. 그걸 잊어서는 안돼, 사일러스." "그래, 그렇겠지." 사일러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우선 경비병들부터 철저히 단속시켜 돼, 사일러스. 그 이외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어서 돌아가. 지금이라도 엘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알았어. 앞으로 엘을 제대로 쳐다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사일러스." 아몬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는 사일러스를 불러 세웠다. "엘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해. 그녀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라고만 생각해. 그럼, 조금은 마음이 편해 질 거야." 사일러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죽상하고 있지 말고 얼굴 좀 펴. 엘이 보면 죽을 병에 걸린 줄 알겠다."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몬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 서 있는 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엘은 계단을 오르는 아몬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다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성 밖을 나가면 안된다는 것도, 아몬과 사일러스가 그녀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 이곳까지 온 리오와 리반에게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쓸쓸히 바르테즈를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엘은 벌떡 일어나 단호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은 성가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중년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열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불러 세웠다. 길게 늘어진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눌러 쓴 그녀를 본 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무서워 하지마.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혹시 이 근처에 여행자란 말이 들어가는 이름의 여관이 있니?" 유난히 크고 동그란 검은 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아이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런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긴 해요. 여행자의 어쩌구란 이름이었던 것 같은 데... 저기 저 골목을 쭉 따라 가보세요. 그럼 넓은 길이 나오거든요. 거기서 본 것 같아요. 아마 골목을 다 나가지 않아도 간판이 보일 거예요." "그래, 알려 줘서 고맙다." 싱긋 웃어 보인 엘이 몸을 돌리려하자 아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요. 저기... 전 글을 모르거든요." "아니라도 괜찮아. 어차피 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거든." 엘은 수줍게 웃는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다음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날이 저물어 아몬이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려면 한시라도 빨리 리오와 리반을 찾아야 했다. 골목을 반 정도 빠져 나오자 상점과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행자라는 글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큰길로 나서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엘이 막 골목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그녀보다 두 세살쯤 어려 보이는 두 명의 소년이 갑자기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앞에 보이는 상점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엘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왼쪽어깨를 한 소년과 거칠게 부딪혔다. 그리고 아차하는 순간 엉덩방아를 찧으며 딱딱한 바닥에 팔꿈치를 짚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그녀와 부딪힌 소년이 빠르게 중얼거리며 이미 앞서고 있는 다른 소년의 뒤를 따랐다. 끙끙대며 일어나 앉은 엘은 화끈거리던 팔꿈치를 어루만지다 후드가 젖혀졌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팔을 치켜 올렸다. 다음 순간 후드뿐 아니라 가발까지 벗겨진 상태라는 걸 알게 되자 엘은 경계심어린 시선으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골목 어귀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숨을 죽였다.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듯 한달음에 다가온 남자가 그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리워진 남자의 금발이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을 발했다. "별일 아닙니다." 엘은 슬쩍 얼굴을 돌리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후드를 올려썼다. "제 눈에는 별일같이 보이는군요." 남자가 살짝 패인 볼우물을 드러내며 엘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꼬리가 갸름하게 좁혀지자 나른하게 보이던 남자의 금빛 눈동자에 유혹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엘은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정교하게 다듬은 조각상처럼 섬세하게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 냈다. "이런 다치셨군요!" 다리를 세우는 엘을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 아래를 부드럽게 잡았다. "찢겨진 천 사이로 피가 비치는군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살짝 부딪친 것 뿐입니다." 엘이 입술을 다물었을 때 남자가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모르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팔꿈치를 감싸 주었다. "이러실 필요없습니다." 엘의 팔 앞쪽에서 매듭을 지은 남자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곤란에 처하거나 다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편하기 위해 하는 일이니 마음 편히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손수건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상관없으니 필요없게 되셨을 때 그냥 버리시면 됩니다." 매끄러운 남자의 말에 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남자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체사레라고 합니다." "아, 예. 체사레...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엘이 막 걸음을 떼려 했을 때 체사레가 입을 열었다. "잊으신 게 있군요." 의아한 눈으로 체사레를 바라보던 엘은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발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온통 진흙범벅이 된 가발은 그 자체가 커다란 오물덩어리처럼 보일 만큼 형편없이 더럽혀져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제가 그걸 밟은 것 같습니다." 엘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슬쩍 입꼬리를 들어보였다. "괜찮습니다. 깨끗이 씻으면 멀쩡해지겠는데요?" 가발에 엉겨 붙은 진흙을 대충 훑어 내린 다음, 열심히 손을 털고 있는 엘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체사레가 쿡쿡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꽤나 소탈하시군요." 엘은 손바닥을 겉옷자락에 쓱 문지르며 그를 따라 미소지었다. "그러시는 분도 그리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신 것 같군요." "잘 보셨습니다. 소탈하신 분이 사람 보는 눈까지 있으시군요." 엘은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을 풍겼던 첫인상과는 달리 편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경계심을 한결 늦추게 만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체사레가 탄성을 터뜨리며 몸을 기울여 엘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저그런 보라색 눈일 뿐이에요."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아닙니다. 신비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푸른 색이 살짝 감도는 보라색 눈동자라... 만약 제가 화가라면 화폭에 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을 겁니다." 리자드의 책상서랍에 들어있던 그림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엘은 자신이 너무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깊이 내려쓰고 있던 후드를 슬쩍 잡아당겼다. "급한 볼일이 있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저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기실까 염려되는군요." "그런 염려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참, 체사레! 혹시 여행자란 말이 들어간 여관에 대해 아시는 거 있나요? 들어보신 적은요?" "여행자란 말이라고요?" 입속말로 작게 반문한 체사레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슬쩍 턱을 비비더니 곧 주먹 쥔 손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래, 여행자의 쉼터! 바로 '여행자의 쉼터'를 찾으시는 것 같군요." "여행자의 쉼터.... 예, 그게 맞을 것 같아요!" 흥분한 엘이 소리를 높였다. "'여행자의 쉼터'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앞길에서 우측으로 걸어가다 보면 큰 포목점이 나옵니다. 바로 그 포목점 옆에 '여행자의 쉼터'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그 곳에 묵은 적도 있으니 틀림없을 겁니다." 엘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체사레가 말해준 쪽으로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곧 리오와 리반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마음을 달뜨게 했다.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그녀를 흘긋거린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십여개의 상점을 지나쳤을 때였다. 엘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전속력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듯 다리 근육이 단단히 조여들었다. 하지만 곧 자신이 가발을 앞뒤로 흔들며 걷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엘은 가발을 단단히 뭉쳐 옆구리에 바짝 끼었다. 막 팔을 내리려던 그녀는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로브 안쪽을 더듬어 보았다. "아까 그 놈들!" 돈주머니가 없어졌음을 알아채자마자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골목에서 그녀에게 부딪친 소년의 짓이 분명했다. "멍청하게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엘은 퍽퍽 구르다시피 걸음을 옮기며 이를 갈았다. 어찌나 화가 치미는지 험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 했다. 그 주머니엔 바르테즈 왕성에 살게 되면서부터 그녀가 한푼도 쓰지 않고 애지중지 모아온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처음 아몬이 적지 않은 돈을 억지로 쥐어 주었을 때는 성을 나가지도 못하는 데 이게 무슨 소용이냐며 얼굴을 찌푸렸던 그녀였다. 하지만 주머니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하고 돈 모으는 재미에 빠지게 되자 그 때부터 엘은 아몬이 내미는 돈을 군소리없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었던 것이다. "내 눈에 띄기만 하면 코뼈를 으스러뜨려 주겠어!" 주먹을 불끈 쥐고 험악하게 으르렁거린 엘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낮은 구릉을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뒤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엷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것 좀 봐!" "우와! 대단한데?" "어쩐지 묵직하다 싶더니만!" 으슥한 골목에 서서 가죽주머니를 열어 본 세 명의 소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오늘 정말 횡재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좋은 꿈을 꿔서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며 텅 빈 골목을 달리다 뒤에서 날아든 창에 배가 꿰뚫리는 꿈이었거든. 그것뿐인 줄 알아? 갑자기 어둠속에서 어마어마한 괴물이 튀어나와 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거야.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말이야...." 피비린내나는 꿈 얘길 신나게 떠들어대는 소년은 열 여섯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떡 벌어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무리의 대장인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꿈을 맹신해왔는데, 끔찍하면 할수록 길몽이라는 굳은 신념에 차있었다. "그 꿈 얘기 좀 제발 그만 해. 속이 다 메슥거리는 것 같단 말이야." 지저분해 보이는 잿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알았어, 임마. 어차피 더 꺼낼 얘기도 없어. 그건 그렇고 좀 전에 우리한테 당한 그 비리비리한 놈 말이야. 지나치지 않길 정말 잘한 것 같아. 겉보기엔 동전 하나 건지기 힘들 것 같았잖아."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뭔가 있을 것 같다고 했지?"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 소년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체력이 약해 직접 몸으로 뛰지 못하는 대신, 목표물을 찍고 망을 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래, 너 잘난 거 알았으니까 어서 돈이나 나누자." 대장의 말에 다른 두 소년이 입맛을 다시며 바싹 다가들었다. 그 때 그들의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자가 되고 싶으냐?" 소스라치게 놀란 소년들이 격렬히 흠칫하며 몸을 도사렸다. "다,당신 누구야?" 용기를 끌어 모은 대장소년이 애써 강하게 소리쳤다. "부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소년의 질문을 무시하고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체사레였다. 그의 접근에 두려움을 느낀 소년들이 도망칠 곳을 찾아 이곳 저곳 정신없이 시선을 옮겼다. 체사레는 그런 소년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미소엔 마치 등뒤로 칼을 숨기고 겉으로는 다정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듯한 가려진 사악함이 담겨 있었다. "막다른 골목이긴 하지만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날 밀치면 그 즉시 통로가 만들어질 테니까. 또... 난 하나고 너희는 셋이나 되니 어쩌면 날 죽이고 골목을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 날 보면 알겠지만 강해 보이는 것하곤 거리가 머니까 말이다." 체사레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 소년들이 그제야 잔뜩 곤두서 있던 긴장을 늦췄다. "어서 꺼져! 우린 네 말대로 널 죽일 수도 있으니까!" 몸집이 왜소한 소년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오츠, 그만 둬. 우선 저 사람의 말부터 들어보자고." 대장소년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체사레를 살폈다. "부자가 되고 싶으냐고?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있어? 당연히 부자가 되고 싶지." 체사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 "뭐? 부자? 네가 우릴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한 거로 아는데?" 체사레의 거만한 반문이 끝나자 눈을 껌벅이고 있던 왜소한 소년이 다른 두 소년들을 향해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미친 놈인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대장소년이 진지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체사레를 주시하고 있던 잿빛머리의 소년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후 불어 넘기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런 저런 군말 집어치우고.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대해서나 자세히 털어놔 봐." "그래, 너하고는 말이 좀 통하겠구나. 아시리움 종단이 쫓고 있는 중죄인에 대해 들어봤을 거다. 만 큐가 걸려 있는 흉악무도한 죄인말이다." 순간적으로 서로를 쳐다본 세 소년이 다시 체사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죄인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겠다." 소년들이 일제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 네가 그 놈이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위치를 가르쳐 주면 너희는 곧장 아시리움 신전으로 가서 그 장소를 알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나머지는 아시리움이 알아서 할 테니까. 물론 만 큐어는 너희 손에 고스란히 떨어지는 거고." 입술을 닫는 체사레의 얼굴엔 진한 짜증이 어려 있었다. "저 말이 정말 사실일까?"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 만 큐어를 벌 수 있는 정보를 왜 우리에게 주겠어?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손해 보는 건 없잖아. 만약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 손에 만 큐어가 들어오는 거고." "멍청하고 답답한 것들! 그걸 이제 알았느냐? 어서 말해라! 할 거냐, 안 할 거냐?" 체사레가 참았던 성질을 폭발시켰다. "하겠다! 하겠으니 그 놈이 어디 있는 지나 빨리 말해라!" "좋다, 잘 들어라! 죄인은 '여행자의 쉼터'에 있다." "여행자의 쉼터라면... 그 여관?" "그래, 하지만 아시리움에선 너희같은 놈들의 말을 호락호락 믿으려 하지 않을 거다." 체사레의 말에 소년들이 서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아시리움 신전에 가서 범인은 검은 색 로브를 걸치고 있고, 푸른 빛이 살짝 감도는 지극히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말해라. 그럼 반신반의하면서도 너희를 따라오게 될 테니까."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고...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뭐, 뭐라고?"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봐라! 만약 놓치기라도 하면 네 놈들을 산채로 조각내어 한입 한입 씹어 먹을 테니까." 허겁지겁 내달리는 소년들의 발소리가 골목 안을 가득 울리다 급속도로 잦아들었다. 체사레는 그들이 사라진 골목을 무심히 바라보다 불그스름한 하늘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잠시 후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쿡쿡거리던 그는 급기야 허리를 젖히며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움과 악의가 뒤범벅된 웃음이었다. 체사레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웃어 대다 숨을 헐떡이며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진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성하의 운명을 감히 제가 돌려 드렸습니다. 존귀하시고 아름다우신 법황 성하, 제 행동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새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체사레의 금빛 눈동자엔 자학에 가까운 냉혹함이 새겨져 있었다. "전 성하께서 그 같잖은 운명을 흔적조차 남지 못할 만큼 철저히 짓밟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휴! 이런 바보!" 엘은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완만한 구릉을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지척에 있는 여관을 못 찾고 괜한 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위를 전혀 살피기 않고 무작정 돌진했던 그녀도 성급하고 경솔했지만, 사실 잘못은 틀린 길을 가르쳐 준 체사레에게 있었다. '여행자의 쉼터'는 두 사람이 만났던 곳에서 겨우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엘은 체사레의 말에 따라 여관과 정반대방향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졸지에 넓디 넓은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원래 위치로 오게 된 엘은 갈증과 목마름까지 겹쳐 기진맥진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엘은 고생은 좀 했지만 '여행자의 쉼터'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기자는 생각을 하며 힘을 내어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뻑뻑한 문을 힘껏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아담하고 깔끔해 보이는 공간이 보였다. 그녀가 서 있는 여닫이 문 안쪽으로 계단이 놓여 있었고, 그 아래 구석진 곳에 업무를 보기 위한 작은 탁자가 있었다. 엘이 사람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탁자 옆으로 나 있는 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후드를 깊이 쓰고 있는 엘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여자가 이내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손님. 방이 필요하신 건가요?" "아니오, 여기에 아는 사람이 묵고 있다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세요? 손님들 성함은 저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생긴 분인지 말씀하시면 그 분께 연락해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조금 긴장하고 있던 엘은 여자의 말에 비로소 마음 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제 또래의 소년입니다. 아마 둘이 같이 있을 텐데... 두 사람이 형제거든요. 그러니까 좀 마른 체형에..." "어떤 분들을 말씀하시는지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말을 멈추고 싱긋 웃어 보인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지금 객실에 계실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가서 말씀 전하고 올게요." 엘은 걸음을 옮기려는 여자를 재빨리 만류했다. "아닙니다, 방이 어디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건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엘은 간곡히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소란이나 말썽을 피우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조용히 얘기만 잠깐 나누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와 함께 올라가시는 거예요. 전 서로 아시는 분들이란 것만 확인하고 내 려오면 되니까요." 엘이 빙그레 웃으며 좋은 생각이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밖에서 나무계단을 올라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안으로 사제 한 명과 스무 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색 로브! 바로 저 놈입니다!" 기사들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민 소년이 새된 어조로 소리쳤다. 그 뒤를 이어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릴 듯한 강경한 호령이 터져나왔다. "뭣들 하느냐? 어서 죄인을 잡아라!" 엘은 커다랗게 열린 눈으로 그녀에게 돌진하는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맹렬한 발소리와 고함소리가 윙하는 이명(耳鳴)과 섞여들자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하지만 곧 거칠게 팔이 꺾여지고 무릎이 굽혀지고, 차디찬 바닥에 머리가 짓이겨지자 그녀의 짧은 망상도 산산조각나 부서져 내렸다.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추상(秋霜)같은 고함이 한순간 공기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 아몬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는 기사들 사이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놔주십시오!" 엘 앞에 멈춰 선 아몬이 오만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를 누르고 있던 완력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굼뜬 움직임이 답답한 듯 아몬이 엘의 몸에 닿아 있는 억센 손들을 거칠게 떼어 낸 다음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경악에 차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아시리움의 고위사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는 제가 거느리고 있는 아이이니,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몬이 엘의 팔을 잡은 채 걸음을 떼려는 순간 사제가 버럭 고함을 쳤다. "멈춰라! 대체 네가 누군데 감히 아시리움 종단의 일에 끼어 드는 것이냐?" "전 이 아이의 주인입니다. 주인이 자기 사람을 보호하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 놈은 아시리움의 이름을 더럽힌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만약 네가 이 죄인을 비호하려 든다면 너 또한 참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서릿발같은 호통이 떨어지자 아몬이 엘의 팔을 놓으며 사제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크나큰 오해가 있는 줄 모르고 경거망동했습니다." "오해라고?" 사제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데로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는 미천한 심부름꾼입니 다. 더군다나 간단한 일조차 변변히 못해내는 둔하고 어리석은 놈입니다. 그런 놈이 아시리움을 더럽힌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니..." 아몬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괜한 소란을 피운 꼴이 되겠지만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저 아이를 봐라.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 지금까지 죄인임이 의심되는 자들을 수없이 봐온 나이지만, 저 아이처럼 죄인과 유사점이 많은 아이를 보진 못했다. 네가 미천한 심부름꾼이라 주장하는 저 아이는 아시리움 성전에서 내려온 갖가지 정보와 놀랄 만큼 일치점이 많단 말이다. 이런데도 끝까지 네 주장을 굽히지 않을 생각이냐?" "물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제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십시오. 성스런 아시리움에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감히 아시리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매섭게 소리친 사제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예, 그런 분이 계십니다." 자신있는 대답이 나오자 사제가 슬며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게 누구냐?" 아몬이 사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단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제 주인이시자 바르테즈의 군주이신, 리자드 카라우크 켈름 폰 루벤스타인 대공전하십니다." 사제와 성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열리며 경악이 서린 침묵이 찾아들었다. 천천히 그들을 둘러본 아몬이 엘의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가져갔다. 갈색 눈에 담긴 짙은 죄악감에 숨이 막혀오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몬의 단호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그분께서 진실을 증명해 주실 겁니다." 엘은 살을 파고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묵묵히 견뎠다. 발을 하나씩 차례로 움직이는 단순한 반복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길게 이어지는 동안 몸을 움츠리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를 향한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은 엘을 별반 괴롭히지 못했다.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무력감과 죄책감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자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지고 있다는 죄책감이 엘을 현실로부터 괴리(乖離)시켜 무감각한 공간 속에 머물게 했다. 갑자기 뒤로 묶인 손목이 당겨지며 거친 줄이 살을 파고들었다. 찌르는 듯한 그 작은 아픔이 일순 그녀를 현실로 되돌렸다. 그제야 엘은 자신이 리자드의 집무실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나이 지긋한 시종을 향해 고위사제가 간단하게 용건을 밝혔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시종이 미끄러지듯 조용히 집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엘은 건조한 혀로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핥았다. 잔인한 기다림이 조금씩 그녀를 좀먹어 들어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시종의 모습이 나타났다. "들어가십시오." 점잖게 고개를 끄덕인 사제가 뒤에 늘어서 있는 성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은 이 곳에서 기다려라." 사제와 아몬이 차례로 들어가고 엘이 맨 마지막으로 집무실에 발을 디뎠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리자드에게 사제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리자드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의 얼굴에 슬며시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무슨 일인가?" 리자드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몇 번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한 사제가 말을 꺼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게 돼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사정이 여의찮아 생긴 일임을 너그러이 헤아려주십시오." 그는 의례적인 말을 마친 후 자신이 꺼낼 얘기를 재빨리 정리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뒤에 서 있는 저 아이는 아시리움 종단에서 찾는 극악무도한 중죄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또 단언하건 데 죄인에 대한 여러 정보와 놀랍도록 많은 일치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이 청년은 저 아이가 죄인이 아니라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해 주실 분으로 감히 대공전하의 존명까지 입에 담았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쉰 사제가 더욱 경건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청하옵건데, 대공전하의 뜻을 밝혀주십시오. 전하께서 저 아이가 아시리움의 이름을 더럽힌 중죄인이 아니라 하시면 저흰 전하의 뜻을 받들어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숨막힐 듯 짙은 침묵이 내리 덮었다. 그 침묵 위로 엘을 괴롭히는 흥분과 불안, 그리고 짙은 공포심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 모든 게 어우러져 더욱 잔인하고 가혹한 또 다른 고요를 토해냈다. 엘은 그녀 앞에 서 있는 사제의 어깨 너머로 리자드를 바라봤다. 서늘한 불꽃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그의 얼굴은 그녀의 예상처럼 극도로 무표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을 때 엘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 속엔 억지로 찍어 누른 듯한 분노가 배어있었다. 그 분노와 섞인 냉혹함을 본 순간,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그를 느낀 순간, 엘은 자신이 그 안에 감춰진 어떤 끔찍한 문을 열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기력하게 늘어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싸늘한 공포가 스멀거리며 등을 타고 올랐다. 리자드,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러지 말아요. 날.... 버리지 말아요. 한마디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로 살점을 도려 내듯 고통스럽게 떠올랐다. 리자드가 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끌고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안개를 뚫고 리자드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려오자 엘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저 아이가 그 중죄인이 맞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모르는 아이라는 뜻이다."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엘은 힘없이 입술을 벌렸다. 열린 입술 사이로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산산 조각난 가슴파편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녀는 헉헉거렸다. "알겠습니다, 대공전하. 그렇다면 이 아이는 아시리움 신전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무례를 범한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전하." 엘은 등을 미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던 그녀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리자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못 박혀 있는 그의 시선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 속엔 싸늘하게 식은 분노와 창백하게 죽어가는 그녀 자신이 들어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엘은 꼿꼿이 등을 세웠다. 어깨를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한없이 가라앉아 가던 보라색 눈동자에 위엄을 담았다. 그리고 더 이상 리자드를 바라보지 않았다. ===================================================================제 51장. 악몽의 잔해===================================================================문이 조용히 닫혔다. 뒤이어 무덤처럼 암울하고 막막한 고요가 찾아왔다. 주위를 둘러싼 불그스름한 음영 속에서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적막이 군림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얼어붙은 시간 동안 아몬은 세차게 얻어맞아 귀청이 멍멍해진 사람처럼 못 박힌 채 그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라." 아몬은 깊고 어두운 동굴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리자드의 목소리를 좇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넋 나간 얼굴엔 공포에 가까운 충격과 절망이 뒤엉켜 있었다. "리자드님." 아몬이 속삭이듯 리자드를 불렀다. "나가라. 근신을 명한다. 내가 부를 때까지 네 거처에서 머물러라." 낮고 거친 음성으로 리자드가 명령을 내렸다. 아몬은 리자드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력이 다한 노인처럼 조금씩 비틀대며 느릿느릿 밖으로 나갔다. 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그 묵직한 정적 속에서 리자드는 미동없이 앉아있었다. 오직 그의 눈동자만이 풀려나길 기다리는 광포한 야수처럼 격렬히 일렁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억눌러 온 갖가지 혼란스런 감정과 생각들이 위험할 정도로 표면 가까이 떠올라 있었다. 분노가 점점 부풀어올랐다. 어둡고 음울한 분노가 자신을 점령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리자드는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아래로 거칠게 쓸어 내던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광기에 찬 몸짓으로 벽에 힘껏 주먹을 박아 넣었다. 손등을 감싼 헝겊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피흘리며 죽어가는 작은 새처럼 힘없이 나풀거리며. 리자드는 허리를 굽혀 너덜거리는 천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뼈가 으스러질 듯 주먹을 틀어쥐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괴괴한 정적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어둠을 향해 나선을 이루며 솟아 있는 계단 위로 긴 그림자가 너울댔다. 사일러스는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횃불로 주위를 휘감아 도는 짙은 어둠을 밀어내며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앞을 가로막은 문을 두드렸다. "아몬! 나야, 사일러스!" 응답을 기다리던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아몬!" 사일러스는 아몬을 부르며 다급히 안으로 들어서서 긴장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을 통해 스며든 흐릿한 빛이 사방을 푸르스름한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아몬을 발견한 순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색이 바랜 듯 희미한 어둠 속에서 몸을 작게 옹송그리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아 쉴 새없이 벽에 부딪치는 창문을 닫은 후 아몬에게 몸을 돌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춥지도 않았어? 더군다나 난로에 불씨 하나 남지 않았잖아. 이런 냉방에서 대체 뭐하는 거야? " 대답을 듣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사일러스는 소용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주위를 둘러싼 숨막힌 적막을 몰아내고 싶었다. 사일러스는 곁눈질로 아몬을 살피며 협탁 위에 놓인 촛대를 집어 들어 세 개의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차디차게 식은 난로에 횃불을 던져 놓고 그 위에 서너 개의 장작을 아무렇게나 올렸다. 손을 털며 잠시 머뭇거리던 사일러스는 아몬에게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몬." 사일러스는 조심스럽게 아몬을 살폈다. 무릎을 바짝 당겨 안고 있는 그는 깊은 잠에 빠지기라 도한 듯 힘없이 고개를 꺾고 있었다. 하지만 팽팽히 당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같은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그의 전신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부정할 수없는 그 느낌으로 사일러스는 그가 결코 잠들지 못했음을, 아몬을 얽매고 있는 현실의 끈이 한순간도 그를 놔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몬." 다시 한 번 아몬을 부르는 사일러스의 어조엔 한층 근심이 더해있었다. 아몬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몬의 눈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 어둡고 황폐했다. "괜찮은 거야?" 아무 말없이 사일러스를 바라보던 아몬이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입술을 움직였다. "사일러스...." "너 괜찮은 거지?" 사일러스가 바짝 당겨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괜찮지 않아. 괜찮을 수가 없어, 사일러스." 아몬의 입술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가슴 시릴 만큼 처연하게 느껴지는 미소에 사일러스는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엘이 잡혀 갔어. 아시리움에." 아몬이 억양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나도 들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너한테 와 본 거고. 내가 궁금한 건 왜 네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이렇게 축 늘어져 있느냐는 거야. 물론 엘에 대한 걱정 때문이겠지. 나도 네가 엘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고 엘이 풀려나는 것도 아니잖아. 야박하고 잔인한 말일지 모르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쩌면 엘의 운명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번 일이 마치 너 때문에 벌어진 것같이 죽상 좀 하고 있지 말란 말이다." "아니, 엘은 나 때문에 잡혔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듯 아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젠장!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마!"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그의 태도에 불끈 성질이 치밀어 오르자 사일러스는 주먹으로 거칠게 침대를 내려쳤다. "네가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돼? 엘이 몰래 성을 빠져나간 게 네 탓이야? 엘을 알아본 누군가가 하필 그 시간, 그 곳에 있었다는 게 네 탓이야? 아시리움이 그 빌어먹을 여관에서 그녀를 잡았다는 게 네 탓이냐고? 제발 억지 좀 부리지마, 임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악과 더러운 일이 네 책임이라는 그 알량한 착각 좀 버리라고! 내 눈엔 네 그런 행동이 잘난 체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니까!" 사일러스는 격앙된 말을 끝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골랐다. 성마른 질책이 이어지는 동안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아몬이 억지로 쥐어 짜내는 듯 힘겹게 말했다. "넌 몰라, 사일러스. 나도 그곳에 있었어. 엘이 잡히는 순간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사일러스가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엘은 '여행자의 쉼터'에서 잡혔다며? 난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 "그래, 엘은 네가 들은 대로 '여행자의 쉼터'에서 잡혔어." "그런데? 설마... 너도 거기 있었다는 말이야?" "난 아시리움과 거의 동시에 그 여관에 도착했어. 해가 저물어 가는대도 엘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성을 나갔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즉시 '여행자의 쉼터'로 갔어."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사일러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왜...." "왜 엘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사일러스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엘을 구할 수 없었어, 사일러스. 마법이......"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아몬은 말을 멈추고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법이 되질 않았어. 그렇게 손쉽게 시현되던 마법이 조금도.... 아무리 기를 써도 말을 듣지 않았어." 믿을 수 없는 고백에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입귀만 실룩이고 있던 사일러스가 잠시 후 겨우 의문을 표시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얼마 전만 해도 괜찮았잖아. 데클란 평원에서도, 또 에크젤에서 이 곳으로 돌아올 때도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잖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어, 사일러스. 그 땐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하고 정확하게 마법을 시현할 수 있었거든. 마치 아무리 퍼 써도 고갈되지 않는 기적의 마법력을 소유하고 있기라도 한듯 조금도 힘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난 내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왔다는, 아니, 부상당하기 전보다 훨씬 좋은 상태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됐어." "부상당하기 전이라고? 그 사고? 네가 층계에서 구른 사고를 말하는 거야?" 사일러스가 날카롭게 물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 그 사고 이후 난 꽤 오랫동안 마법을 쓸 수 없었어. 조금씩 힘이 돌아왔지만 예전엔 쉽게 할 수 있었던 마법도 제대로 시현하기가 불가능했어. 그래서 네 연락을 받고 데클란 평원으로 갈 때도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그 때, 자유자재로 마법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몰라. 난 그 이후부터 줄곧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망념(妄念)에 빠져 있었어. 오늘... 그 여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두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였다. 그 경직된 벽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사일러스가 벌떡 몸을 세웠다. "이렇게 멍하니 있어서는 안 돼. 그 사고 때문에 입은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면 우선 그것부터 치료해야 하잖아. 그런 다음에 엘을 구할 방도를 찾아야지." "아니, 두 가지 다 불가능해." 사일러스가 엉거주춤 몸을 굽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자세히 말해봐." "아시리움은 바보가 아니야, 사일러스. 아시리움 성전은 물론이고 수많은 아시리움 신전엔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 있어. 철저하게 마법력을 막아 버린 공간. 아마 엘은 그 곳에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예전처럼 마법을 시현할 수 있고 의지대로 제어가 가능해진다고 해도 내 힘으로 엘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것말고 다른 건? 네 치료가 불가능하단 말을 무슨 뜻이야?"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봤어. 또 미친듯이 책도 찾아봤어. 그 끝에 나온 결론이 뭔지 알아? 아니,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기 전에 이미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던 것, 그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 사일러스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그 단순한 사고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전부터 다른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는 것. 알 수없는 이물질이 점점 내면 속으로 장악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것." 말을 멈춘 아몬이 사일러스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그리고 심하게 잠긴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사일러스... 난 무서워......" 순간 사일러스의 내부로 서늘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는 조금씩 짙어지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위해 단호하게 질문을 꺼냈다. "전하께선 뭐라고 하셔?" 아몬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전하께 그런 말을 올릴 네가 아니지. 그냥 혼자서 끙끙 앓아다 속병때문에 제 명대로 못사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사일러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한층 강경하게 말했다. "언제 말씀 드릴래? 네가 안 하겠다면 내가 할 거야." "그러지 마, 사일러스." 아몬이 다급히 만류했다.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사일러스가 즉시 말을 받았다. "왜? 내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 하나만 대봐. 그럴 수 없다면 난 날이 밝는 대로 전하를 찾아뵐 거야." "이유라면 네가 흡족할 때까지 수십 가지는 대줄 수 있어!" 아몬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격앙된 시선으로 사일러스를 응시하다 촛불로 눈길을 가져갔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아몬이 입을 열었다. "리자드님껜 내가 말씀 올릴게. 시간을 줘, 잠시만... 네 마음은 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사일러스. 이런 상황에서 나까지 심려를 끼쳐 드릴 수는 없어. 더군다나 딱히 말씀드릴만한 것도 없고. 조금 더 알아낸 다음, 내가 직접 리자드님을 찾아뵐 거야. 그 때까지 그냥 모르는 척 해줘... 부탁한다." 아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네 말대로 기다리긴 하겠지만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어. 되도록 빨리 전하께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고. 그래, 엘이 잡혀 간 마당에 네 문제까지 안겨 드리고 싶진 않겠지. 나 역시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친 듯 사일러스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만하자. 이런 말 백날한다고 네가 마음을 고쳐 먹을 것도 아니고. 넌 뒤돌아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한이 있어도, 전하 앞에선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을 녀석이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사일러스. 네가 모르는 게 있어." 깊이 숨을 들이쉰 아몬이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난 오늘 리자드님의 믿음을 저버렸어. 그 분을...... 배신했어." 사일러스의 전신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마,말도 안 돼. 누구보다 널 잘 알고 있는 나야. 네가 그럴 리 없어, 절대." "그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세상이 무너진다해도 리자드님을 배신한다는 건 감히 머리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어. 그 분을 실망시켜드리느니 차라리 고통스러운 죽음이 내겐 더 행복했을 거야. 사일러스.... 우스운 게 뭔 지 알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얽혔다. 아몬이 사일러스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짝 말라버린 그의 입술이 애처로워 사일러스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뭔데?" "아직도 그런 마음엔 변함이 없다는 거." 사일러스는 싸움이라도 걸려는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아몬을 주시했다. 시선을 떼는 순간 바스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엘때문이야?" 사일러스는 거의 따지듯이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아몬에게서 짙은 회오(悔悟)가 전해졌다. "아니, 나때문이야. 내 어리석음 때문이야. 엘에게 위험이 닥쳤는데도 마법을 시현할 수 없자...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자... 참을 수가 없었어. 엘이 아시리움에 잡히는 걸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리자드님을 언급했어. 내 행동이 불러일으킬 결과에 대해선 눈을 감아버렸어."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한동안 아몬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던 사일러스가 시선을 되돌렸다. "전하께선 뭐라 하셔?" "아무 말씀도.... 내게 근신을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 "그럼 한동안은 여기 있어야 하는 거로군." "아니, 곧 아시리움 신전에서 날 부를 거야. 만약 지금보다 더 일이 꼬인다면 철저한 조사를 받기위해 아시리움 성전에 가게 될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난 정식으로 아시리움 성전을 구경할 수 있겠지." 농담조로 말을 끝낸 아몬이 목쉰 웃음을 흘렸다. 낮고 미미한 소리가 흐느낌같이 느껴지자 사일러스는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 사일러스. 혼자 있고 싶어." 아몬이 조용히 속삭였다. 사일러스는 묵묵이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을 향해 반정도 다가갔을 때 아몬이 빠르게 말했다. "거기 탁자 위에 있는 램프 가져가. 지금 굉장히 어두울 거야." 사일러스의 입술에 힘없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촛불을 집어 들어 램프심지에 불을 붙이며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청승떨지마, 임마. 불운이 조금 닥친 것뿐, 하늘이 무너진 것도, 세상이 멸망한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앞이 캄캄하겠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러니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 뭐랄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으니까 그만 가 봐." 아몬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사일러스. 네가 오기 전보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어." "빈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다. 이제 가볼 게." 몸을 돌리려던 사일러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너 혹시... 그러니까 혹시......"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사일러스가 결심한 듯 아몬을 똑바로 쳐다봤다. "엘 좋아하니?" "난 또 뭐라고...." 피식 웃은 아몬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좋아해." 그가 거리낌없이 인정하고 나오자 사일러스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사일러스가 마른침을 삼킨 다음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정말이야? 정말 좋아하는 거야? 엘을 정말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여자로서 좋아하는 거냐고?" "여자로서 좋아하느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해?" 아몬이 피곤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중요한지 아닌지는 네 말을 듣고 판단할 테니까 어서 대답이나 해 봐!" 사일러스가 강경한 어투로 재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그냥 그녀 자체가 좋으니까. 여자로서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판단도 안 서고." "판단이 안 선다고?" 꽤나 답답한지 고함을 지르다시피한 사일러스가 목소리를 조금 낮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경험을 말해주지. 그녀한테 욕망을 느끼고, 옆에 와 살랑거리는 남자 놈들에게 힘껏 주먹을 날리고 싶어지는 것. 그게 바로 여자로서 좋아하는 거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 나오자 아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알았을 테니까, 어서 말해 봐." "네 말대로라면 난 엘을 여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욕망을 느낀 적도 없고,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낀 적도 없으니까." 사일러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배어 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넌 엘을 그저... 그 뭐랄까... 그래, 여동생! 여동생같이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몬은 사일러스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고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길게 뉘었다. 그를 바라보며 조금 머뭇거리던 사일러스가 문을 열었다. "이런 저런 생각 다 떨쳐 버리고 푹 자." 아몬은 사일러스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낮은 바람을 일으키며 문이 닫혔다. 아몬은 똑바로 누워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느릿느릿 시간이 흘러 동이 터 올 때까지 그는 움직임없이 그렇게 누워 있었다. 새벽 여명이 빈 공간을 채워 나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를 시작하는 어렴풋한 기척들이 마비된 머리를 깨웠다. 아몬은 조금씩 커지는 활기찬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 계단을 오르는 희미한 울림이 섞여 들었다. 아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얼굴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을 때 조심스럽게 문 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숨찬 어조가 들려왔다. "마법사님! 아직 주무십니까?" 아몬은 문을 열어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중년기사를 마주했다. "말씀하십시오." 놀라움에 눈을 껌벅이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 아시리움 신전에서 방금 기별이 왔습니다. 오전 중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몬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동정 어린 눈길을 붙잡았다. 불편해진 기사가 시선을 피한 다음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제 목 [달의 아이] 51장.악몽의 잔해-2=================================================================== "오늘쯤 다시 그 저택에 찾아가 보는 게 어떨까? 그 에지몬트라는 사람, 임무가 빨리 끝났을 지도 모르잖아." "그래,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릴 바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리오와 걸음을 맞추며 리반이 진지하게 동의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즉시 가보는 게 어때? 굳이 여관에 들를 필요는 없잖아." 마음이 급해진 리오가 리반의 팔을 잡아세웠다.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리반이 삐딱한 눈초리로 리오의 몸을 훑어내렸다. "너 지금 네 몰골이 어떤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하는 거야? 그 점잖은 댁에 그렇게 꾀죄죄한 꼴로 가겠다고?"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리오에게 슬그머니 겸연쩍은 기색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색할 그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남부끄러울 것 없겠는데, 뭘 그래?" "그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눈곱이나 좀 떼고 해라. 일어나서 세수도 안한 녀석이 말은." "아침 먹으러 가자고 새벽부터 날 깨운 녀석이 바로 너잖아. 그리고 식사하기 전에 씻어야 하는 건 손이지 얼굴이 아니란 말이다. 너 식사 전에 어머니가 '가서 세수하고 와라' 하고 말씀하신 거 기억 나? 백이면 백, 다 손 씻고 오란 말씀이셨잖아." 리반은 리오를 여관 쪽으로 밀며 피식 웃었다. "그래, 자랑이다. 한마디만 더 하겠는데, 좀 일찍 깨운 건 네가 어제 초저녁부터 자는 바람에 나까지 저녁식사를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날 원망하지마. 또 어머니에 대한 건 네 얘기가 맞긴 맞지만, 그런 말씀은 너한테나 하셨지 난 한번도 들은 적 없다는 것도 잊지말고." "한마디만 하겠다는 녀석이 줄줄이 늘어놓긴." 리오가 못마땅하게 리반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리반이 싱겁게 웃으며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야. 식사시간에 찾아가는 것만큼 큰 실례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우선 여관에 들러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자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잡아당겨. 몇 벌 있지도 않은 옷 늘어나겠다." 여관계단에 발을 들여놓으며 리오가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단을 뛰어올라 여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 딛을 틈도 없이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입구에 멈춰섰다.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리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리반을 쳐다봤다. "글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리반의 얼굴엔 어느새 불안감이 어려있었다. 그 막연한 감정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아시리움이니 죄인이니 하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확연한 두려움으로 변했다. "리,리반 지금 저 말 들었어?" 리오가 숨을 헐떡이며 리반의 팔을 움켜잡았다. 리반은 핏기가 가신 그의 얼굴을 흘깃 본 다음 앞에 서 있는 중년여인의 어깨를 건드렸다. 여인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겁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아직 얘기 못 들었나 보네." 중년여인이 신이 난 듯 침을 튀기며 목청을 높였다. "어제 그 중죄인이 잡혔다지 뭐야! 만큐어가 걸린 그 죄인말이야!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놈이 잡힌 곳이 바로 여기란 사실이야! 바로 이 여관에서 어제저녁 그 죄인이 잡혔다니, 정말 놀랄 노자 아니야?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내 눈으로 확인하러 왔다니까! 그 놈이 하마르칸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바로 여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반은 여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리고 리오의 팔을 틀어쥐고 사람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석상처럼 굳어있던 리오가 휘청거리며 그가 이끄는대로 발을 움직였다. "어떡하지? 리반,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리오가 떨리는 어조로 매달리듯 연거푸 질문을 중얼거렸다. "우선 이곳에서 나가는 일이 급선무야." 리반은 이를 악물고 더욱 힘껏 리오를 잡아당겨 나무계단을 올랐다. "우리 때문이야. 우리 때문에 엘이... 우릴 만나러 왔다가 엘이..." "정신차려, 리오!" 버럭 소리친 리반이 리오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여기 있다간 우리까지 위험해진단 말이야. 아시리움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조사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돼. 어쩌면 알렉스가 우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그 사람이 우릴 신고하기 전에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우리까지 잡힐 수는 없잖아. 우선 여기서 벗어난 다음 알렉스를 도울 방안을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 숨가쁘게 속삭인 리반이 입술을 닫자 리오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리반은 리오를 따르기 직전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얼핏 지나친 그는 황급히 시선을 되돌렸다. 리반과 눈이 마주친 젊은 여인이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눈을 내리깔았다. 리반은 그녀가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더불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여인이 그들과 알렉스의 관계를 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리반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를 좇는 눈길이 등줄기를 뻣뻣하게 만들었으나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는 계단을 다 올라 여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그 순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들어가 보시게, 성하께서 수락하셨네." 메르트 사제는 보르헤스 사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뒷모습을 보인 채 창가에 서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루드비히에게 못 박힌 그의 눈엔 감출 수 없는 경외감이 가득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개인적으로 법황을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시리움 성전에 들어온지 채 1년이 안된 스물 두살의 메르트 사제는 지금까지 먼발치서 법황을 스치듯 본 적이 한번 있을 뿐이었다. 그 때도 그는 제대로 법황을 쳐다보지 못했다. 머리를 조아린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법황을 향한 흠모에 가까운 마음은 이미 동료사제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기였다. 비록 메르트 사제의 우격다짐에 밀려 마지못해 나서긴 했지만, 평사제가 직접 법황에게 보고를 올리는 이례적인 일이 이루어진 것도 동료사제들이 보르헤스 사제에게 간곡히 청을 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평소 단 한 번이라도 법황을 가까이서 보길 소원했던 메르트 사제는 물 한방울만 떨어져도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루드비히가 냉랭할 정도로 건조하게 물었다. "예, 법황 성하!" 소스라치게 놀란 메르트 사제가 반사적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새된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소인, 메르트 리안 뮐러, 성하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저기... 그러니까... 일을 맡아보시던 가디너 고위사제께서 급한 일로 성전을 떠나시는 바람에 제가 그분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문서로 올릴까 했지만 사안이 막중하고, 또 시급을 다퉈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본론이나 말씀하십시오." 장황한 말을 끊는 루드비히의 어조엔 엷은 짜증이 깃들어있었다. 메르트 사제는 등줄기에 진땀이 배어 드는 걸 느끼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그 죄인이, 그러니까 아시리움을 능모(凌侮)한 중죄인이 잡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성하. 잡힌 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 자세한 조사와 확인 절차가 필요하지만 죄인이 틀림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메르트 사제는 루드비히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법황이 기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안도감이나 놀라움을 나타내리라 예상하고 있던 메르트 사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곧은 등줄기를 살피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고 할 때 루드비히가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입니까?" "바르테즈 공국의 하마르칸에서 잡혔다 합니다, 성하." "아니, 지금 어디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루드비히가 조금 날카롭게 말하며 메르트 사제를 돌아봤다. 메르트 사제는 서늘한 은회색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어제까진 바르테즈 공국에 있었으나 칼락 대사제께서 죄인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리아잔 제국의 바드리오로 이송토록 명하셨다 합니다. 또 대사제께선 한치의 의혹도 없이 일을 명명백백히 밝히기 위해 죄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누군가를 보내달라 요구하셨습니다. 더불어 조속히 죄인의 처리문제를 결정하여 그 편에 알려주길 바라신다는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들어온 보고의 전부입니다, 성하. 성견을 내려주십시오." 메르트 사제는 긴장한 채 루드비히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얼굴 전제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그에게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동료 사제들의 조심스런 충고를 듣지 않고 괜히 자신의 고집대로 행동했다는 후회가 시시각각 부풀어올랐다. 대사제들 중 한 명을 찾아가 보고하라는 권고를 극구 뿌리친 이유는 법황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가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울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고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메르트 사제로선 그저 아무 일없이 이 곳을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알았으니 나가십시오." "예, 성하." 메르트 사제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다음 서둘러 다리를 움직였다. 막 문을 열려던 그는 법황에게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엉거주춤 걸음을 멈췄다. "저... 성하,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칼락 대사제껜 뭐라고 답해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창 밖을 향하고 있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죄인에게 손대지 말라 하십시오. 어떤 식으로든 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메르트 사제는 루드비히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매끄럽게 몸을 바로잡자 어눌한 목소리로 알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란스런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보르헤스 사제에게 무의식적으로 목례를 건넨 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본관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메르트 사제는 가슴을 들썩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건 법황의 명을 이행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엔 이제나저제나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동료사제들에게 그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두려울 만큼 아름다운 모습, 모든 것이 경외스럽기만 하던 법황이 떠올랐다. 걸음을 재촉하는 메르트 사제의 얼굴엔 어느새 자신에 대한 이유 모를 자랑스러움이 피어올라 있었다. 아시리움신전 앞은 죄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리오와 리반은 사소한 정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들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 흥분에 찬 갖가지 고함소리와 섞여 험악한 욕설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중년남자의 발을 밟은 리반이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을 때였다. 신전의 문이 열리더니 젊은 사제 세 명이 밖으로 나왔다. 소란이 일시에 가라앉으며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됐다.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사제들이 얼굴을 가까이 해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정면을 보고 섰다. 그리고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사제가 목을 가다듬은 후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다들 돌아가시오! 신전 앞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거 잘 알지 않소!" "사제님, 그 중죄인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정말 신전안에 놈이 있는 건가요?" "잠깐만 죄인을 보여 줄 수 없으신가요, 사제님?" "저도요! 저도 꼭 죄인을 보고 싶습니다!" "사제님, 만 큐어는 누가 갖는 겁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경쟁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 조용히들 하시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사제 한 명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래도 소란이 수그러지지 않자 다른 사제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모두 입 다무시오! 앞으로 허락없이 한마디라도 떠드는 자는 병사들로 하여금 죄다 잡아들이게 하겠소! 빈말 아니니 명심하는 게 좋을 거요!" 사제의 말이 끝나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여기서 밤낮없이 기다려 봐야 죄인을 보기는커녕 그에 대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할 테니 어서 돌아들 가시오! 내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보겠소. 만약 그 때까지 돌아가지 않는 자들이 보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잡아들여 중죄로 다스리겠소!" 사제들이 신전 안으로 사라진 후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가자, 리오!" 단호하게 말한 리반이 신전 앞의 큰길로 나섰다. "어디로?" 막막함을 느끼며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던 리오가 잔뜩 흐려진 얼굴을 돌렸다. "바드리오로." "바드리오? 왜 바드리오로 간다는 거야? 엘은 바로 여기 있는데. 너 설마 이대로 모른 척하고 체르몬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겠지?" 리오는 보폭을 넓게 해 이미 몇 걸음 앞서고 있는 리반을 따라잡았다. "말 좀 해봐! 왜 바드리오로 간다는 거냐고?" 답답함을 참지 못한 리오가 버럭 소리치자 리반이 그를 흘긋 쳐다본 다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알렉스는 아마 바드리오에 있을 거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엘이 바드리오에 있다고?" 리반이 입을 다물기 바쁘게 리오가 말을 받았다. "그래, 아직까지는 뭐라 단정할 수 없지만 난 알렉스가 이미 하마르칸을 떠났다고 생각해. 하마르칸에 없다면 십중팔구 바드리오로 옮겨졌을 거야.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시리움 성전을 제외하면 가장 규모가 큰 신전이니까." "어떤 이유로? 그런 생각이 든 무슨 근거가 있을 것 아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죄인이, 아시리움 종단에서 기를 쓰며 쫓던 죄인이 잡혔어. 그런데 하마르칸의 아시리움 신전엔 평상시와 다른 게 조금도 없어.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다시 말해 경비병을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두 명으로 줄였을 뿐 아니라 그들도 그저 신전 앞에 형식적으로 서 있을 뿐이야. 새벽같이 이곳으로 달려왔을 아시리움 종단의 관계자들도 전혀 보이지 않고 그로인해 바삐 드나들어야 할 마차도 눈에 띄지 않아. 사제들의 얼굴에서도 긴장감은커녕 귀찮다는 짜증이 나타나 있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오가 미간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사제들이나 경비병에 대해선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마차나 아시리움 관계자들이 안 보이는 문제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잖아. 또 아직 그 일 자체를 모를 수도 있고." 신전에서 웬만큼 멀어졌다는 판단이 서자 리반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 어귀에 멈춰섰다. "리오, 넌 아시리움 종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알렉스가 잡힌 건 어제저녁 해질녘이라 했잖아.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오늘 날이 밝기 전에 아시리움 성전은 물론 웬만한 신전엔 이미 그 사실이 알려졌을 걸? 존재하는 모든 아시리움 신전에 얘기가 전해지는 것도 아마 오늘을 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무거운 한숨을 내쉰 리오가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맥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초점없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던 그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리반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그렇다해도 엘이 이곳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이야. 네 말대로 엘이 잡힌 건 어제저녁이야. 그런데 아시리움 종단에서, 아니, 이곳 하마르칸에 있는 아시리움 신전에서 그 늦은 시간에 엘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을까? 소위 자신들을 능멸했다는 중죄인을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마차나 말로 밤길을 달린다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야. 더군다나 아무리 하마르칸과 바드리오가 가깝다고 해도 전속력으로 달려 엿새는 걸리는 거리고. 여기서 리아잔 제국의 국경까지 도착하는 것만 해도 최소한 사나흘은 걸릴걸? 만약 내가 아시리움의 사제라면 죄인을 바드리오로 옮기려 하는 일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거야. 일이 잘못되어 죄인을 놓치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내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될 테니까." 리반이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가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넌 아시리움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리오. 이번처럼 큰 일은 아니라 해도 지금까지 아시리움 종단에서 누군가를 잡아 처벌한 경우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그런데 그들 중 단 한 명도 먼 거리를 마차로 달려 수송되었다는 얘긴 들어본 적 없어.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찬가지일거야. 사소한 죄를 지은 사람은 물론 예외겠지. 그런 자는 아시리움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 죄인이 소속된 국가가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말이야." 잠시 숨을 돌린 리반이 엄숙하기까지한 얼굴로 리오를 쳐다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 알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네 말은 그럼 아시리움에서 죄인을 옮길 때 다른 방법을 이용한다는 거야? 으음... 일종의 마법같은 거 말이야. 그러니까 넌 엘도 그런 방법으로 바드리오로 이송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 리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럴 거라 확신해. 사실 이번 일이 있기 오래 전부터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온 거야."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오가 혼란스럽다는 듯 천천히 도리질을 했다. "잘 모르겠어, 리반. 네 말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말을 믿고 무작정 바드리오로 간다는 건... 만약 그랬다가 하마르칸에 엘이 있으면 어떻게하나 걱정이 돼. 그저 그럴 거라는 예상과 짐작뿐이잖아. 선뜻 네 말을 따르기엔 모든 게 불투명해. 물론 이 곳에 죽치고 있는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건 바드리오도 마찬가지야, 리오. 만약 내 생각이 맞아서 알렉스가 바드리오에 있다해도, 또 우리가 그 곳에 간다해도 우린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수도 있어. 솔직히 털어놓자면 알렉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얼굴도 보기 힘들 가능성이 높아. 그걸 예상하면서도 바드리오로 가자는 말을 하는 이유는......" 말끝을 흐린 리반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엘을 한 번 보기 위해서라는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리반, 혹시 말이야!" 리오가 갑자기 리반의 팔을 움켜잡았다. "혹시... 그걸로 엘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리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발끝으로 땅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그거라는 건 반지를 말하는 거지? 나도 그 생각을 해 보긴 했어.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봐도 불가능하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어." "왜 불가능하다는 거야?" 리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잘 생각해봐, 리오. 그걸 누가 믿어 주기나 할 것 같아? 미친 사람으로 오인받아 몰매나 맞을걸? 또 알렉스가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선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야. 알렉스는 지금 아시리움 종단을 속인 중죄인으로 세상에 드러난 상태라고. 아마 코흘리개 어린애도 우릴 비웃을 거야." "하지만 우리한텐 그 반지가 있잖아. 그걸 보여주면 믿어 줄지도 모르잖아." "그걸 누구에게 보여 준다는 말이야? 말해 봐, 리오. 아시리움 신전의 사제한테? 아니면 고위 귀족이나 왕족한테? 우린 그들 앞에 반지를 내놓기는커녕 그들의 손가락 하나 볼 수없는 처지야." "우리도 왕족이야. 잊었어? 우리도 그 잘난 왕족이라고!" 리오가 사납게 소리쳤다. "조용히 해, 리오! 거짓 왕족 노릇을 했다는 죄인 얘기로 온 세상이 들썩이고 있어. 우리마저 같은 죄목으로 잡히고 싶어서 그래?" 반박하려는 리오를 리반이 재빨리 막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그래, 우린 거짓왕족이 아니야. 하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하려고? 너 지금 인장이라도 있어?" 입술을 달싹이던 리오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엘을 놓칠까 봐 부랴부랴 짐을 싸서 떠나는 바람에 미처 챙기진 못한 인장은 아마 지금도 아시리움 성전에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면 네 인장은 내가 챙겼어." 리반은 번쩍 고개를 드는 리오를 외면하며 말을 계속했다. "난 그걸 내 것과 같이 상자에 넣어 마차 보관함에 넣어 놨어. 부피가 커서 몸에 지니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어.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여긴 우리 체르몬 국이 아니야. 데클란 평원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인장을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왕족이란 걸 믿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그런 우리가 반지를 내밀었다고 가정해봐. 운이 좋아 그 반지를 가짜라 생각해주면 내쫓기는 거로 끝나겠지만 만약 그 반지를 진짜로 여기게 된다면 우린 목숨도 부지할 수 없을 거야. 너도 알겠지만 그 반지는 대단한 보물이야, 리오. 그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목숨을 걸고서라도 차지하려 들 만큼." 리반은 이를 악물고 있는 리오를 바라봤다. "문제는 또 있어, 리오. 네 목에 걸린 반지가 진짜라는 걸 우리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것." 불끈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리오가 갑자기 발을 내딛었다. "어서 서둘러! 우선 말부터 구해야 바드리오로 가든지 체르몬 국으로 돌아가든지 할 거 아니야!" 리오의 입에서 체르몬이란 말이 나오자 리반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르몬으로 돌아갈 리오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리반은 두려움에 가까운 불안감을 느끼며 리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안 따라오고 뭐하는 거야?" 리오가 목소리를 높여 재촉했다. "알았어, 지금 가!" 리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쉰 다음 크게 대답했다. 그는 괜히 바드리오로 가자는 얘길 꺼냈다는 후회를 곱씹으며 리오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이른 엘보다 자신과 리오를 더 걱정하고 우선시하는 자기자신에게 환멸에 가까운 쓴웃음을 던졌다. ===================================================================제 목 [달의 아이] 52장.시련-1=================================================================== "마체라타!" 문을 세차게 열어 젖히고 안으로 바삐 걸어 들어오며 자일스는 크게 소리쳤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어디에서도 마체라타가 보이지 않자 더욱 목소리를 높여 연거푸 그녀를 불러댔다. 하지만 마체라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마체라타는 어디 있는 거냐?" 신경질적인 물음에 노소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원체 말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아서..." "다들 물러가라! 아니, 노소프, 넌 남아라!" 자일스는 총총히 문을 나서는 시종과 시녀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다시 한 번 악을 쓰듯 마체라타를 소리쳐 불렀다. "저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제야 아른거리는 붉은 빛과 함께 마체라타가 자일스 앞에 모습을 보였다. "소녀 여기 대령했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절 찾으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 어디서 뭘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기어들어 온 거냔 말이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자일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격렬히 역정을 내며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살짝 찌푸린 마체라타의 얼굴에 성가시다는 기색이 희미하게 스쳐갔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하지만 제가 전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한다는 사실은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설령 시종과 시녀들이라해도 말입니다. 제 입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씀드렸고 전하께서도 알겠다는 말씀을 하신 걸로 아는데요. 기억 나십니까, 전하?" 자일스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래, 기억난다. 이번만큼은 내가 성급히 행동했으니 네 주제넘은 말투를 문제삼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한번 내 앞에서 건방을 떨면 그 즉시 내 손으로 네 잘못을 톡톡히 깨닫게 해주겠다. 알아들었느냐?" "물론 잘 알아들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절 너무나 아껴주시는 바람에 제가 잠시 분수를 잊고 경솔히 행동했습니다. 앞으론 절대 경거망동하는 일 없을 테니 노여움을 푸시고 절 찾으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화가 누그러지자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를 가득 채웠던 흥분이 빠르게 되돌아왔다. "놈이 잡혔다, 마체라타. 드디어 아시리움에서 놈을 잡았단 말이다!" "놈이라면... 전하께서 자주 언급하시던 보라색 눈동자의 소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 놈이 잡혔단 말이다. 현재 이곳 바드리오에 있다 한다. 어서 준비해라, 마체라타. 지금 당장 아시리움 신전으로 가야겠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전하. 신전방문은 조금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제를 당부하셨던 황제폐하께서 전하의 아시리움 방문을 아시게 된다면 크게 노여워하실 겁니다."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마체라타에게 자일스가 히죽 웃어 보였다. "걱정할 필요없다, 마체라타. 지금 아버님을 뵙고 나오는 길이다. 놈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려 준 분이 바로 아버님이란 말이다. 아시리움 측에 황궁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으셨는지 현명한 행동이었다고 칭찬하시더구나. 그리고 꼭 이번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셨다. 아시리움 종단과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난 당장 아시리움 신전으로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아버님께선 내가 아시리움 측에 대가로 요구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신다는 거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마체라타가 안심했다는 듯 살짝 눈웃음을 쳤다. "전하, 제 소견으로는 전하께서 아시리움 신전을 방문하시는 게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닐 듯 싶습니다." 묵묵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소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자일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소프를 돌아봤다. "무슨 뜻이냐? 나와 아시리움 종단과의 사이가 껄끄럽게 되었으니 되도록이면 그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게 좋다는, 그런 말을 한 것이냐?"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전하. 거기에 더해 죄인을 바꿔치기 하신다는 계획도 어차피 틀어졌으니 놈을 만나시는 일이 오히려 전하의 심경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알겠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자일스가 다음순간 슬며시 입귀를 들어올렸다. "노소프, 네 말은 알겠다만 난 놈을 내 손에 넣겠다는 마음을 바꾸지도 않았고, 또 계획이 틀어졌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아시리움으로 가겠다는 말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노소프?" 노소프가 대답하기 직전, 묘한 미소를 띠고 있던 마체라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한발 앞서 움직이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전하와의 사이가 틀어졌다해도 이미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들 사이에서 내려진 결정을 일개 신전에서 쉽게 번복하진 못할 테니까요. 또 마음이 바뀌더라도 감히 황궁에 찾아와 전하께 죄인을 돌려달라 요구하진 못할 테고 말입니다. 죄인을 넘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걸 누구보다 원하지 않을 아시리움에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리 만무할 것입니다." 자일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체라타. 네 말이 맞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마음을 잘도 짚어내는구나." 감사를 표하듯 살짝 고개를 숙인 마체라타가 고개를 들며 유혹적인 미소를 던졌다. "전 이미 전하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시리움 신전은 물론, 그곳이 세상 끝이라도 말입니다." 마체라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 자일스가 노소프에게 시선을 옮겼다. "난 마체라타와 먼저 출발하겠다. 노소프, 넌 준비해둔 놈들 중에서 아무나 하나 골라 내 뒤를 따라라.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안되니 평범한 마차를 이용하고 수행기사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한정하라. 내 너를 믿고 내리는 명령이니 한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습니다, 전하. 충심을 다해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소프가 내키지 않는 마음을 교묘하게 감추며 정중히 대답했다. 그가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가자 자일스가 마체라타를 돌아봤다. "어서 서둘러라, 마체라타.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놈을 이 손아귀로 움켜쥐고 말 것이다." "저 역시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전하." 성큼성큼 앞서 가는 자일스의 뒤를 따르며 마체라타는 슬쩍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 그래야 더욱 재미있어질 테니까요. 정말 기대되는군요. 예, 정말 기대가 큽니다." "들어가십시오." 사일러스는 시종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절도있는 동작으로 걸음을 떼었다. "신, 사일러스 하덴 제너시스,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대령했습니다!" 문가에 멈춰 선 사일러스가 강건하게 소리쳤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창을 향해 서 있던 리자드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가까이 와라." 사일러스는 리자드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멈추자 리자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네게 내릴 임무가 있어 불렀다." 리자드에게서 전해지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에 사일러스의 탄탄한 근육이 바짝 조여들었다. "목숨 걸고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일러스가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잘 들어라, 사일러스. 이번 일엔 그 어떤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강렬한 청회색 눈동자가 그의 눈을 똑바로 파고들었다. 사일러스는 숨을 멈췄다. 팔에 소름이 번지며 곧추 선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치달았다. 그의 시선을 놓지 않은 채 리자드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일러스는 참고 있던 숨을 조금씩 흘리며 온 신경을 집중해 리자드의 말을 머리에 각인시켰다. 옅은 구름이 해를 가리며 두 사람에게 담청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끊임없이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자 마체라타의 얼굴에 짜증이 스쳐갔다. 못마땅한 눈으로 자일스를 노려보던 그녀는 자신에게 향하려 하는 시선을 감지하고 재빨리 표정을 감췄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냐? 지난번 일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틀림없어. 시건방진 아시리움, 감히 날 이따위로 대하다니! 내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지셔서 민감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은데 사실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곳이 바로 아시리움 신전인데, 시간이 지체되면 얼마나 지체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아시리움에서 일부러 전하께 무례를 범하려 하는 것도 아닐 테고요. 아시리움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습니까? 사실 이제나저제나 고대하던 죄인이 잡혔으니 아시리움도..." "아시리움, 아시리움! 제발 좀 그만해라! 네 입에서 나오는 그 아시리움이란 소리, 단 한마디도 더는 못 들어주겠으니까!" 자일스가 신경질적인 고함을 터뜨렸다. 마체라타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씨근덕거리는 자일스에게 알겠다는 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심경이 제 예상을 초과해 이토록이나 불편하셨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신경하고 둔하기 짝이 없는 소녀를 참을성 많으신 전하께서 어여삐 봐주십시오." "이런 건방진!" 살짝 비꼬는 말이 끝나자 자일스가 이를 갈았다. 마체라타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에게 싱긋 미소지어 보였다. "제가 조금 건방진 건 사실이지만 전하께선 그걸 더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신 겁니까? 제가 지금껏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전하?" "그래, 네 착각이다, 오만불손한 것 같으니!" 으르듯이 말하긴 했지만 자일스의 화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만불손이라... 기분 나쁘진 않군요, 전하. 전하께서 오랜만에 내리시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체라타는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일어나 자일스가 앉아있는 의자 팔걸이에 살짝 몸을 기댔다. 부드러운 여체가 밀착해오자 자일스가 불편한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세를 고쳤다. "그만해라, 마체라타. 네 자리로 돌아가라." "싫은데요, 전하. 전 지금 바로 이 자리가 그 어디보다 아늑하고 마음에 듭니다." 마체라타가 자일스의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자일스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자 재미있다는 듯 양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전하께서 얼굴을 찌푸리실 때마다, 또 절 매섭게 노려보실 때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속엔 장난꾸러기 요정이라도 살고 있나 봅니다, 전하." "장난꾸러기 요정이 아니라 심술궂은 마녀가 살고 있겠지." "으음... 듣고 보니 전하의 말씀이 맞을 것 같군요. 요정이라면 벌벌 떨며 눈물을 질질 짜느라 전하 옆에 오래 붙어있지도 못했을 테고, 또 요정 따위보다야 마녀가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일스가 마체라타를 와락 끌어당겨 미소가 머금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마체라타는 입술을 벌려 거친 입맞춤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였다. 정신없이 입맞춤에 몰두해 있던 자일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하며 재빨리 마체라타를 밀어냈다. 몸을 일으킨 마체라타가 선홍색 혀를 내밀어 부풀어오른 입술을 육감적으로 핥았다. 자일스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을 때 문이 열리며 고위사제 두 명과 아시리움 신전의 대사제가 들어섰다. "황태자 전하, 인사 드리겠습니다. 전 이 곳을 책임지고 있는 페르디낭 알폰 드 칼락이라 합니다.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급한 전갈이 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됐으니 어서 앉으시오, 대사제. 시간이 많이 지체됐소." 자일스는 수굿이 고개를 기울이는 칼락 대사제를 향해 질책하듯 말했다. 그는 의례적인 미소도 띠지 않았고 심지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와 보통 신전의 대사제는 불리는 호칭만 같을 뿐, 현실적인 직위나 힘에 있어 어마어마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신전의 대사제 역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권력자였으나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에게 그 정도는 무시해도 좋을 하찮은 명패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칼락은 불쾌하다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자일스의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처리해야 될 일이 산재해 있습니다, 전하. 그러니 신전을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소. 하지만 그 전에 저 사제들부터 물러가게 하시오. 철저히 비밀을 지켜야 할 매우 중대한 얘기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제 모두 함부로 행동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제가 책임지고 보장할 수 있지만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점잖은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뾰족한 날이 느껴지자 자일스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자리를 비켜 주면 고맙겠네." 대사제의 말에 고위사제 두 사람이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방문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짧게 말하겠소, 대사제. 난 이곳에 있는 죄인을 넘겨받으러 왔소." 자일스에게 못 박힌 칼락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그는 재빨리 놀라움을 감추며 평정을 찾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자일스가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만족스러운 눈으로 마체라타를 흘긋 쳐다봤다. 그러자 마체라타가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죄인을 넘겨 받으러 오셨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대사제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을 받는 자일스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고 곤혹스러워 하는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굳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뗄 이유는 없지 않소? 이미 모든 걸 알고 온 거니 그렇게 숨기려고 무리할 필요없다는 말이오." 천천히 숨을 들이 쉰 칼락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더욱 바르게 정돈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얼마 전, 그러니까 삼십 일쯤 전에 아시리움 성전에서 극비문서를 받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그 문서엔 죄인을 잡으면 즉시 황태자전하께 연락을 취하라는 것과 철저한 비밀유지 속에서 죄인을 전하께 넘기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저를 제외한 다른 신전의 대사제들은 죄인이 잡히면 최대한 빨리 이곳 바드리오로 이송하라는 내용의 문서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전준비가 된 상태라면 얘기가 잘 풀리겠군." 흡족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일스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잘 들으시오, 대사제. 지금 신전 밖엔 죄인과 맞바꿀 놈이 기다리고 있소. 미리 준비한 장식장에 들어가 있을 테니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할 필요없을 거요.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 해도, 안에 들어갔던 장식장이 잠시 후 다시 나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전하, 진정하시고 잠시만 제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이러쿵저러쿵 말이 무슨 필요가 있소? 쓸모없는 말로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서두르시오, 대사제." 자일스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칼락이 한층 더 몸을 꼿꼿이 세우고 강경하게 입을 열었다. "제 말부터 들으셔야 합니다, 전하." "이런 젠장!"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자 칼락의 엄숙한 얼굴에 노기가 스쳐갔다. "그렇다면 빨리 말하시오! 그리고 어서 그 굼뜬 몸뚱이를 움직이란 말이오!" "우선 자리에 앉으십시오." 자일스가 이를 갈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젠 만족하시오, 대사제?" "예, 전하." 자일스의 이죽거림에 칼락이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응수했다. 그를 노려보는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적의가 이글거렸다. "이름이 뭐라 했소?" "페르디낭 알폰 드 칼락이라 합니다, 전하." "오늘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겠소, 페르디낭 알폰 드 칼락. 내 충고하는데, 날 더 이상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할 거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내 성질을 건드리면 대사제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아낀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최대한 신중히 행동하는 게 좋을 거요." 노골적인 협박을 뱉어낸 자일스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의자에 기댔다. "알겠습니다, 전하. 전하의 말씀대로 신중하게 행동하겠습니다." 예의바른 대답이었을 뿐 칼락의 얼굴이나 말투에서 비굴함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죄송하지만 죄인을 넘겨 달라시는 전하의 요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자일스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경악이 서렸다. "뭐,뭐라 그랬소?" 귀를 의심하는듯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던 자일스가 불분명한 어조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죄인을 넘기라는 전하의 요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말씀 드렸습니다, 황태자 전하." "감히... 감히 내 요청을 거절하겠다고? 네 놈이 뭔데... 감히 너 따위가 내 말을 거역하겠다고?" 벌떡 일어난 자일스가 광분한 듯 사납게 탁자를 걷어찼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칼락에게 위협적으로 접근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마체라타는 자일스의 분노가 정도를 넘어섰다는 판단이 들자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전하,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거 놔라!" 자일스가 거칠게 마체라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자일스를 막아서며 다소 날카롭게 소리쳤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먼저 이유부터 알아내는 것이 순서입니다!" 마체라타를 밀치려던 자일스가 멈칫하더니 천천히 팔을 내렸다. "대사제께서 전하의 요청을 거절하신 데는 분명히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체라타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하얗게 뼈마디가 돌출된 자일스의 주먹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경직됐던 그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하자 그에 따라 단단하게 뭉쳐진 주먹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놀란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칼락과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칼락은 재빨리 시선을 피한 다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서 전하의 오해를 풀어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대사제님." "예, 알겠습니다." 순순히 마체라타의 말을 받아들인 칼락은 몇 번 헛기침을 하며 꺼낼 말을 정리했다. "저 여인의 말대로 전하께선 오해를 하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문서를 받고 놀라긴 했지만 아시리움 성전에게 내려온 명을 거역할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제 본분과 위치를 망각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전하." "그런데?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요?" "전하를 기다시리게 한 이유가 급한 전갈 때문이란 건 이미 말씀 드렸을 겁니다. 정확히 말해 아시리움 성전에서 내려온 명을 받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예감에 자일스의 낯빛이 흐려졌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무슨 명이 내려온 거요? 지난번 협상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으니 무시하라는 내용이었소?" "아닙니다, 전하. 제가 받은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어떤 식으로든 죄인에게 손대지 말라는 명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죄인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명이라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악문 이사이로 짧은 질문을 내뱉었다. "누구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명을 내린 자, 이미 결정된 사안을 이제 와서 뒤집은 이가 누구냔 말이오? 어서 말하시오! 대사제들 중 한 명이오? 그들 중 한 명이 그런 돼먹지 못한..." "말을 삼가십시오!" 칼락이 자일스의 외침을 강경하게 잘랐다. "모르고 하신 말씀이니 이번만큼은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런 불경한 말씀을 입에 담으신다면 제아무리 황태자전하라 하셔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서,설마...." 자일스가 말을 잇지 못하자 마체라타가 끼어들었다. "성하시군요. 법황 성하께서 직접 그런 명을 내리신 거로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성하께서 내리신 성견입니다." 칼락이 거북스러움을 드러내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받진 않았지만 한순간 이성을 잃고 자일스 앞에 법황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완고할 정도로 고지식한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겠소, 대사제. 법황 성하께서 내리신 명이라면 당연히 거역할 수 없지. 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자일스가 예상외로 고분고분 받아들이자 마체라타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반면 그의 반응을 당연하다고 여긴 칼락은 의례적인 말을 꺼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부족한 저지만 아시리움을 대신하여 전하의 사려 깊으심에 진심으로 사의(謝儀)를 표합니다." "기꺼이 대사제의 진심을 받아들이겠소." 짐짓 점잔을 빼며 말한 자일스가 마체라타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어나라, 마체라타. 안타깝지만 내 요구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됐으니 이만 돌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전하." 이미 자일스의 속셈을 눈치챈 마체라타는 웃음을 감추고 문으로 향하는 자일스를 뒤따랐다. "아아, 그렇지!" 무슨 생각이 난 듯 자일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배웅하는 칼락을 돌아봤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잡혔다는 자가 죄인이 맞긴 맞는 거요, 대사제? 당연히 명확한 확인절차를 거쳤겠고, 또 무고한 자를 잡아들일 아시리움 종단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소. 다만 그 동안 나 역시 죄인이라며 잡혀 온 검은머리 소년을 수없이 봐온 처지라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오." 망설이던 칼락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죄인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아시리움 성전에 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머지 않아 그가 도착하게 될 테니 전하께선 심려치 마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 없소, 대사제. 마침 죄인의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이 곳에 와있지 않소? 놈과 내가 함께 아시리움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은 대사제도 알고 있을 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직접 죄인을 확인해 주겠소. 시간도 많이 소요되지 않을 테고, 적지않은 호기심도 생기고... 또 아시리움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고... 어떻소, 대사제? 꽤 좋은 생각 아니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맥없이 발을 돌리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오, 대사제. 이왕 아시리움 신전에 발걸음 한 거, 나가는 길에 잠깐 들러서 얼굴만 확인하고 가겠소." 이렇게까지 나오는 황태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는 칼락은 슬그머니 한숨을 내쉰 다음 수락의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 수고를 해주신다니 저로선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소, 대사제. 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을 테니, 어서 앞장서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칼락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서려던 자일스가 마체라타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그는 마체라타가 알겠다는 듯 눈웃음을 치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몸을 바로 잡았다. ===================================================================제 목 [달의 아이] 52장.시련-2=================================================================== "대체 어디까지 가야하는 거요?" 대사제의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초조감을 이기지 못한 자일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다 왔습니다, 전하.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칼락이 걸음을 재촉하며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눈앞에 보이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육중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십여명의 기사들에게 놀란 자일스가 흠칫하며 멈춰섰다. 철통같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다음 순간 양편으로 나눠 길을 내주었다. 그들 사이로 나타난 갈색문을 향해 걸어가며 칼락이 입을 열었다. "바로 저기입니다, 전하." 자일스가 재빨리 칼락의 앞을 막았다. "나 혼자, 아니,마체라타와 나, 둘만 들어가겠소. 처리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데 바쁜 대사제의 시간을 더는 빼앗을 수 없소."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리움 성전에서 내려온 명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전하를 못 미더워 하는 것도 감히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맡은 바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것이니 제 입장을 헤아려 주십시오." "좋소, 대사제.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듣고보니 대사제 말이 온당하다는 걸 알겠소. 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소." 자일스는 흔쾌히 수긍하며 빙그레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되도록 피하는 게 현명하다는 건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여보인 칼락이 자물쇠를 열고 문고리를 휘감고 있는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신중한 손놀림에 좀이 쑤신 자일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칼락의 손을 노려봤다. 마침내 칼락이 쇠사슬을 성기사에게 넘기며 옆으로 한발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시지오, 전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일스가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문이 열리고 자일스가 옅은 불빛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뒤를 따르는 마체라타의 모습에 칼락은 슬그머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를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외부인과 죄인의 접촉을 금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되도록 빨리, 또 아무 말썽없이 이 골치아픈 황태자를 돌려보내고 싶은 칼락으로서는 그저 못 본 체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발 들어서던 마체라타가 숨을 훅 들이쉬며 비틀거렸다. 자일스가 벽에 손을 짚은 채 몸을 기대고 있는 그녀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그저 발을 헛디딘 것 뿐입니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다는 미심쩍은 느낌에 자일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정말이냐?" "예, 전하." 마체라타가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자일스는 몸을 바로 잡고 고개를 빙돌려 주위를 살폈다. 딱딱해 보이는 나무침상, 그 앞에 놓인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 눈에 들어온 건 평범하고 깔끔해 보이는 중간 크기의 방이었다.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시리움 신전의 다른 곳과는 비교 불가능할 만큼 달랐으나 그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쥐와 벌레들이 바글거리는 습하고 지저분한 지하감옥과도 거리가 멀었다. 짐작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자일스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불만스럽게 볼을 실룩였다. 하지만 엘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자 이곳은 죄인을 가둬 둔 감옥이 아니라 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일거란 생각에 조금은 기분을 풀 수 있었다.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 어둡고 서늘합니다, 전하."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소." "이미 아시겠지만 창문도 나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은 램프하나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난로도 없고 말입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장소라 그러니 거북하시더라고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불미스러운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니 무슨 뜻이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탈출시도나 자해를 미리 막기 위해서입니다, 전하." 고개를 끄덕이던 자일스는 작은 불씨 하나 없는 곳이 그다지 어둡지도, 또 춥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리비치고 있는 부드러운 불빛을 따라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예상대로 주위를 밝히고 있는 옅은 불빛은 팔각형을 이루고 있는 높은 천장에서 시작된 거였다.가운데 부분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팔각형의 정중앙에서 달빛을 닮은 은색의 물결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불빛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군." "맞습니다, 전하. 빛과 열을 발산하는 간단한 마법기구입니다." 자일스의 눈에 탄복의 기색이 나타났다. 자신을 이런 장소로 안내한 대사제에게 은근히 노기를 느끼고 있던 자일스는 과연 아시리움이라는 감탄을 하며 한결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전하, 이 곳에서 언제까지 허송세월하실 생각이십니까?"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마체라타가 조금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자일스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걸 눈치채고 날이 서 있던 눈초리에 의아함을 담았다. "저 여인의 말대로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빨리 죄인을 데려와야 일을 서두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나라고 이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걸 좋아할 것 같소?" 짜증이 치밀어 오르자 자일스는 소리를 높였다. "오해를 하고 계셨군요, 전하. 죄인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어두워 미처 보지 못하신 것 같은데 바로 저기 있지 않습니까?" 자일스는 칼락의 눈길이 쏠려 있는 곳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가느다랗게 좁혀 있던 눈이 한순간 부릅떠졌다. 그는 봉곳하게 솟아 있는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저 여러 겹의 모포가 겹쳐 있는 줄 알고 무심코 지나쳤던 침상, 그 미동없는 얇은 천 속에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침상 옆에 멈춰선 자일스는 모포를 단번에 걷어 올렸다. 다리를 가슴부근까지 치켜 올린 자세로 잔뜩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자일스는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채를 치웠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득였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전하?" 칼락이 자일스 옆에 자리잡았다. "지금 시간까지 자고 있는 이유가 뭐요? 일부러 잠을 재운 거요?" "그게 아니라 이 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계속 이렇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고 말입니다." "잠을 잔다고 마냥 내버려 두다니... 고문은커녕 심문도 안한 채... 이렇게 하려고 상금까지 걸며 놈을 뒤쫓은 거요, 대사제? 아시리움은 마음씨 고운 자선단체인가?" 칼락의 엄격한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전하. 아시리움은 죄인임이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을 고문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형벌은 모든 것이 명확히 밝혀졌을 때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되겠군."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 자가 틀림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칼락 대사제. 제대로 맞혔소. 이 놈이 바로 그 죄인이오. 아시리움의 이름에 먹칠을 한 극악무도한 중죄인." 자일스는 칼락을 향해 음습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몸을 굽혀 입술을 엘의 귓가에 가져갔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널 애타게 그리워한 얼굴을 봐라." 낮게 속삭인 자일스가 그녀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엘이 흠칫하며 눈꺼풀을 번쩍 들어올렸다. 보라색 눈동자와 초록빛 눈동자가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그래, 드디어 네 눈을 다시 보게 되는구나.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격스럽다." 자일스가 몸을 세우며 히죽거렸다. 엘은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그녀는 꼭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귀가 먹었나?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자일스가 얼굴을 들이밀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두었다간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지 모른다는 판단이 선 칼락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죄인임을 확인해 주셨으니 이제 그만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휙 돌려 매섭게 칼락을 노려보던 자일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물러서시오, 대사제." "황태자 전하, 제 말씀은...." "내 분명히 물러서라고 했소! 내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리는가? 한 번만 더 날 방해하면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소, 페르디낭 알폰 드 칼락!" 험악한 기세에 눌린 칼락이 흠칫하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자일스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소, 대사제. 궁금증만 풀리면 그 즉시 이 곳을 나갈 생각이오." "아,알겠습니다, 전하." 신중하게 걸음을 옮긴 칼락이 문가에 멈춰섰다. 자일스의 시선이 다시 엘에게 되돌려졌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엘이 대답했다. "물론." 자일스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디 자세히 말해봐라." "리아잔 제국의 위대한 황태자 전하."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억양없는 목소리였다. 킥킥거리던 자일스가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 급기야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여전히 건방지구나. 그래, 정말 변한 게 조금도 없어. 너와 있으면 마음에 드는 게 무엇인 줄 아느냐? 무료하지 않다는 것. 넌 날 꽤나 화나게 했지만 지루하게 만든 적은 단한순간도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엘을 내려다보던 자일스가 옆에 놓인 의자에 내려앉았다. "네게 물어 볼 게 있다는 말은 들었을 테지. 이리 와서 앉아라." 엘은 묵묵이 자일스의 명령을 따랐다. "꽤 고분고분하구나. 아시리움에 잡혔다는 사실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등등하던 네 기세마저 꺾어 놓은 모양이지? 뭐, 아무튼 좋다." 말을 멈추고 엘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던 자일스가 천천히 등을 기댔다. "널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떠오르는군.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밤, 아시리움 성전의 어느 한적한 숲속이었던 것 같은 데... 내 기억이 맞는 거냐?" "그래." "예상대로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긴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그 숲속을 잊을 수는 없었겠지. 그토록 재미있고 짜릿한 시간을 보낸 곳이니 당연할거다. 나도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무표정하던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스쳐갔다. 그걸 눈치챈 자일스가 놀리듯 히죽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데 그렇게 망설일 필요없다. 어서 털어놔 봐라." "궁금한 거나 묻고 빨리 꺼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자일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가,감히 네 까짓 게...." 자일스가 당장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듯 부들거리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놀란 칼락이 앞으로 뛰어나오려 하는 순간 흥미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마체라타가 불쑥 끼어들었다. "과연 아시리움을 속인 죄인답군요, 전하. 설마 전하께서 이성을 잃으시고 저런 놈의 도발에 걸려 드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겠지요?"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버릇을 고쳐 줄 시간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은 떠오른 그 순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괴롭혀 온 의문을 푸는 것이 선결문제였다. "그 숲속에서의 일이 있었던 다음날밤 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내가 너한테 물을 건 바로 그 범인에 대해서이다." "습격이니 괴한이니 따위는 모른다." "대답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본 다음에 해라. 나도 얼마 전까진 너와 그 날 밤 사건을 연관 지어 생각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두 개의 사건. 난 당연히 별개의 일일거라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불현듯 그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 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날 밤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너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이유가 무언지 아느냐? 먼저 날 공격한 그 단도, 네 옆에 떨어져 있었을 게 분명한 단도가 그 마법사 놈의 손에 의해 내게 다시 돌아왔다. 또한 마치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듯 석연치 않았던 마법사의 행동. 그 마법사 놈의 말과 태도를 보면 단순한 지시나 사주에 의해 움직였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 자일스가 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너의 존재. 암베르에 중독된 자가 살아 남았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암베르를 해독할 수 있는 치료사나 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마 넌 무언가 알 수없는 힘에 의해 독이 해독되어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힘, 그게 과연 무엇일까? 죽음의 문턱에 이른 목숨을 되돌린,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 그 힘, 그게 무엇일 것 같으냐? 그건 아마 마법일 것이다." 보라색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지금껏 구엔자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고 믿고 있었던 엘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너와 그 마법사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하고 오싹한 기운을 풍겼던 그 마법사...... 그 놈이 누구냐?" "난 아는 게 없어." "아니, 분명히 네 놈은 알고 있어!" 자일스가 탁자를 내려치며 사납게 반박했다. "어서 말해라! 그 마법사 놈이 누구냐? 그 놈만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단 말이다! 얼음조각처럼 눈을 자극하던 놈의 실버블론드만 떠올리면....." 일순 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며 등줄기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그녀를 주시하던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섬광이 스쳐갔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았어! 넌 알고 있어! 그 놈이 누군지 넌 알고 있어! 빨리 말해라! 그 놈이 누군지 어서 말해라!" 자일스가 거칠게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며 악을 써댔다. "내가 아는 건 네가 완전히 미쳤다는 것 하나야." 엘은 이를 악물고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자일스가 두 손으로 덥석 목을 움켜잡았다. 억센 힘이 목을 조여 오자 순식간에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들어 엘의 얼굴을 검푸른 색으로 물들였다. "전하!" 경악한 칼락이 허겁지겁 자일스에게 달려왔다. "죽이진 않을 테니 끼어 들지 마시오, 대사제!" 기세 등등하게 소리친 자일스가 손아귀에 힘을 풀며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그 놈이 누군지 말해주면 그런대로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주겠다. 마음이 내키면 널 곱게 살려 줄 수도 있다. 자비를 내려 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 어서 말해라." 목을 감싼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엘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입술에 걸려 있는 짙은 비웃음을 본 자일스가 험상궂게 입술을 뒤틀었다. 그 순간 엘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네 자비를 구걸하느니 차라리 살이 뜯겨나가고,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자신이 당한 일을 믿을 수 없어 멍하던 자일스의 얼굴이 격노로 일그러졌다. 엘이 피할 새도 없이 자일스가 주먹을 휘둘렀다. 볼을 세차게 가격당한 엘이 탁자위로 거칠게 넘어졌다. 충격을 못이긴 나무탁자가 갈라지며 내려 앉았다. "전하! 그만 하십시오!" "죽이진 않겠다고 했다!" 버럭 소리친 자일스가 오른손으로 두툼한 탁자조각을 들어 올려 힘껏 움켜쥐자 나무파편이 흙덩어리처럼 부서져 내렸다. "만약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갈겼을 거다. 그럼 그 자리에서 숨통이 끊어졌을 테니까." "그만 하십시오, 전하. 이제 더는 전하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칼락이 강경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일스는 그를 흘긋 쳐다보기만 했을 뿐 눈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칼락을 철저히 무시한 채 쓰러져 있는 엘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틀어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엘은 짧은 신음을 토했다. 뭉개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건방진 놈, 맛이 어떠냐?" 자일스가 머리채를 힘껏 잡아당겼다. 엘은 머리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전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칼락이 허겁지겁 뛰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황태자 전하를 막아라!" 안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는 놈은 살아서 내일을 맞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서슬 퍼런 위협에 성기사들이 주춤거리며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어차피 죽음을 맞게 될 죄인 때문에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뭣들 하는 거냐?" 평소 점잖기만 하던 칼락이 목에 핏발을 곤두세우고 소리쳤지만 기사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사실 법황이 내린 명령을 알지 못하는 기사들로선 황태자가 죄인을 죽이려 하거나 밖으로 끌고 나가지 않는 이상 그를 막아 설 명분이 없었다. "어서 죄인을 보호해라! 이건 바로..." 칼락이 법황의 뜻임을 밝히려는 찰라 엘이 자일스의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칼락은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놀라 말을 삼키고 말았다. 몸이 자유로워진 순간 엘은 벌떡 일어나 발로 의자 다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그리고 부러진 의자다리를 움켜잡아 일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리는 자일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자일스의 가슴을 짓누르며 뾰족한 나무 끝을 목덜미에 위협적으로 밀착시켰다. 자일스의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어때, 자일스? 목이 커다란 구멍이 뚫려도 네가 그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을까?" "건방떨지마. 넌 날 못 죽여." 자일스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왜? 네가 그 잘난 황태자라서?" "그래, 네 까짓 것한테 죽을 내가 아니니까. 또 너같이 마음 약한 못난 놈은 절대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엘이 쇠가 긁히는 것 같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장담하지마, 자일스. 난 어차피 죽게 될 몸이야. 그게 뭘 뜻하는 줄 알아? 잘 들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널 길동무 삼아 죽음의 길을 나란히 걸을 수도 있단 말이다. 더군다나 난 널 오물 속에서 꿈틀거리며 더러운 벌레로 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거든." 자일스가 사납게 이를 갈았다. 칼락과 성기사들은 믿기 힘든 광경에 넋이 나간 듯 숨소리조차 죽인 채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네 말대로 살아서 이 곳을 나가게 될 거다. 더러운 피를 묻힌 채 마지막 길을 가고 싶진 않으니까." 엘은 자일스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며 일어섰다. 그리고 오만한 표정을 지은 채 자일스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어서 일어나 여기서 썩 꺼져!"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이는 자일스의 얼굴이 시시각각 검붉게 변해갔다. "두고 봐라. 내 기필코 오늘 일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네 놈 영혼 깊숙이 각인시켜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해주마." 자일스가 악다문 이사이로 씹어 뱉듯이 말했다. 반면 응수하는 엘의 목소리는 정해진 사실을 나열하듯 초연함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러려면 서둘러야 할 거다. 내가 죽기 전에 네 바람을 이루고 싶으면 말이다." "그래, 그 말 마음에 새겨두지." 자일스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자 얼어붙어 있던 기사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분노를 못이긴 그의 팔다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자일스를 따라 나가려던 마체라타가 흘깃 엘을 뒤돌아봤다. 그녀의 붉은 입술엔 이상야릇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기진맥진한 엘은 낯선 여인의 뜻모를 미소에서 시선을 떼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칼락이 기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숴진 탁자와 의자를 처리해라! 이곳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모조리 치워라! 아니, 무기가 될 만한 모든 걸 없애라!" "알겠습니다." 칼락은 기사들의 대답을 뒤로 하고 자일스를 배웅하기 위해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희 넷은 바닥을 치우고, 그 옆의 넷은 이 곳에 위험한 물건이 있는지 조사해 나에게 보고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죄인을 감시해라." 대장이 명령을 내리자 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바닥부터 천장까지 구석구석 주의깊게 훑어보던 네 기사들은 서로 난감한 시선을 교환했다. 대장이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알아낸 게 있으면 보고해라!" "위험한 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장님. 이 곳에 남은 물건이라곤 오직 침상 밖에 없습니다." "치워라!" 말뜻을 못 알아들은 기사들이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씀...." "침상을 치우라고 했다! 어서 움직여라!" "예, 알겠습니다!" 엘은 다가오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침상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물러섰다. 동정어린 눈으로 그녀를 흘긋거리던 기사들이 모포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나무침상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모든 걸 마무리지은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대장이 빈틈없는 눈으로 텅 빈 방을 둘러본 다음 문을 잠갔다. 엘은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서러움이 냉기와 뒤섞여 밀려들었다. 천천히 모포를 집어들어 몸을 감쌌다. 거친 모포 속에서 그녀는 작게 웅크렸다. 울부짖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쓰디쓴 절망이 가슴 속을, 영혼의 속살을 헤집고 파고들었다. 차라리 무감각한 체념이 찾아오길 바라며 엘은 눈을 꼭 감았다. ===================================================================제 53장. 친구와 적===================================================================헐레벌떡 검술 수련장에 들어선 카셀은 저만치 모여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고 곧장 그 쪽으로 뛰어갔다. 요란한 발소리에 제러드와 세르피언, 에지몬트는 물론 명상에라도 잠긴 듯 눈을 감고 정좌를 하고있던 이케르까지 카셀을 바라봤다. 카셀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려는 찰나 제러드가 한발 앞서 말을 꺼냈다. "들었구나?" 카셀이 시무룩한 얼굴을 끄덕이며 세르피언 옆에 주저앉았다. "너희들은 언제 알았어?" "방금 전에, 식당에서." 세르피언이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나도 식당에서 들었어, 게일 녀석한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거 듣자마자 너희들한테 알려주려고 바로 뛰어온 거야."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린 카셀이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왠지 좀... 뭐라고 말해야 될까... 커다란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식사를 방금 했는데도 아랫배가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좀 그래.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솔직히 말해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녀잖아. 얼굴 본 시간도 얼마 안되고." "글쎄... 내 생각엔 만나기 전부터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정이 들었던 것 같아.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야. 워낙 필사적으로 찾아다녀서 그런가?" 제러드의 말이 끝나자 네 사람의 얼굴에 수긍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 꼬마...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요?" 누가 들을까 염려스러운 듯 에지몬트가 몸을 기울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제러드, 세르피언, 카셀이 차례로 대답했다. 그 뒤를 이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이케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처형당하겠지." 못마땅한 시선들이 이케르에게 몰려들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속이 시원하십니까?" "글쎄 말이야, 야박한 녀석 같으니."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정말 저럴 때는 얼마남지도 않은 정까지 모조리 떨어진다니까." 카셀이 제러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기분 좋게 그런 말한 줄 알아? 애써 외면한다고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아?" "그래, 이케르 말이 맞아. 우리가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시리움에서 살려 두지 않을 테니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제러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를 좇아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투명하고 청결한 하늘에 싱그러워 보이는 레몬빛 태양이 걸려 있었다. "젠장! 날씨는 왜 이리 화창한거야? 폭우라도 쫙쫙 퍼부었으면 좋겠다!" 카셀이 푸념조로 투덜거렸다. "사이좋게 나란히들 앉아 뭐해? 진한 연애라도 하는 거야?" 이죽거리는 소리가 침울하게 내려앉았던 침묵을 깼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여덟 명의 남자들을 보며 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몰려다니며 시비 걸고 말썽 일으키는 걸로 유명한 패거리들이 반가울리 없었다. "다른 곳으로 조용히 떠나는 게 나을 거야. 너희들하고 어울릴 만큼 좋은 기분 아니니까." 제러드의 조용한 경고에 이어 카셀이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굉장히 기분이 언짢아." "우리는 기분 좋은 줄 알아? 만 큐어가 걸린 놈이 잡혔다는 말을 지금 막 들었단 말이야. 젠장! 바로 눈 앞에 있는 놈을 못 알아보고 만 큐어를 날렸다니!" "누가 아니래? 재수없는 놈은 물만 씹어도 이빨이 빠진다더니 내가 바로 그짝이라니까." "그게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는 말이냐, 임마?" "아무튼 그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야!그자식이 온몸에 금칠을 한 채 주위를 알짱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잖아!내 그 생각만하면 속에서 집채만한 울화통이 치밀어오른다고!제기랄!"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성질을 못 참겠는지 허공에 대고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마법사 때문이었지, 뭐. 마법사가 기를 쓰고 싸고도는 놈을 누가 그런 중죄인으로 의심하겠어?" "그 마법사도 아시리움 신전으로 불려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왕이면 두 놈 다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 그럼 조금은 분이 풀릴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둘이 그렇고그런 사이라는 소문, 그거 진짜일까?" "진짜니까 목숨까지 걸고 그런 놈을 숨겨 준거지. 내 장담하는데 처음부터 그 놈이 죄인이란 걸 알았던 게 틀림없어.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그 갈색눈동자만 봐도 딱 알겠더라. 그런데 자 신의 목숨까지 걸다니... 그 비리비리한 놈 말이야, 맛이 좋긴 좋았나 봐. 그렇지 않아?"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쳐댔다. 입술을 오므린 채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던 카셀이 몸을 세웠다. "아무튼 어디서 뒈질 진 모르지만 꼭 가서 시원하게 몇 대 갈겨 주고 와야겠어.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겠지." "차라리 돌이나 몇 개 던지는 게 낫지 않겠어? 그 곱살한 얼굴에 침이나 뱉고 오는 것도 괜찮고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쥔 에지몬트가 벌떡 일어난 후 세르피언과 제러드가 거의 동시에 그 뒤를 따랐다. "난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런 것보다 화끈하게 놀아보고 싶어. 그 야들야들, 나긋나긋하게 보이던 허리에 한번 타 보면, 꽤 짜릿할 것 같지 않아?" "난 네 놈 허리에 타보고 싶은데." 이케르의 말에 요란한 웃음소리가 단번에 사라졌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케르가 험상궂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정 마음에 안 들면, 잘 생긴 에지몬트는 어때?" "사양합니다, 선배님. 상황판단 못하고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돼지는 목을 따야지 걸터앉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너희들, 지금 우리한테 시비거는 거냐?" "글쎄... 우리가 지금 시비거는 거 맞냐?" 제러드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시비라면 시비일 수도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니군." "전 시비보다는 응징이라 하고 싶습니다, 선배님." 카셀, 세르피언, 에지몬트가 차례로 대답했다. "다들 들었겠지?" 제러드의 이죽거림이 끝나자 남자들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간단한 동작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잘난 켈름 기사단이라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너희들 오늘 톡톡히 잘못 걸렸어." "그래, 다시는 얼굴도 못 들고 다니도록 우리가 친히 골고루 자근자근 밝아주마." "우리한테 뭉개진 다음 켈름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쫓겨나게 되면 날 찾아와라. 내 시중이라도 들게 해줄 테니까." 이를 드러나며 히죽거리던 남자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어차피 여덟명 대 다섯명의 싸움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제러드는 여유있는 태도로 응수한 다음 카셀, 이케르, 세르피언, 에지몬트를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엔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다섯 사람은 서로 간단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일제히 주먹을 틀어쥐었다. 아몬은 사제의 어깨부근에 생긴 작은 얼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입술을 움직이면서 그는 검은 얼룩이 점점 커져 자신을 한 입에 삼킬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졌다. 자신에게 못박힌 그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사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자세를 고쳤다. "그게 전부요?" "예." 사제의 질문을 놓치고만 아몬은 의도적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제의 갸름한 얼굴에 미심쩍은 기색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조그만 입술이 야무지게 다물어졌고 눈꼬리가 처진 가느스름한 눈은 골난 사람처럼 반정도 찡그려져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인 듯 사제가 코 밑에 달린 사마귀를 만지작거리며 아몬을 주시했다. 쭈글쭈글한 가죽에 싸인 바싹 야윈 손이 해골처럼 앙상해 보였다. 딱딱하게 생긴 넓적한 콧마루를 서너 번 꿈틀거리던 사제가 그들 뒤쪽에 앉아 있는 기록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빠뜨리지 않고 적었는가?" "그렇습니다, 사제님!" 밤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앳된 얼굴의 기록관이 대장에게 보고하는 병사처럼 씩씩하게 소리쳤다. 움찔한 사제가 못마땅한 눈으로 기록관을 노려보자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죄, 죄송합니다, 사제님." 사제의 눈치를 살피던 기록관이 기어 들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사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몬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몇 번 헛기침을 하던 그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의 얼굴에 진한 짜증이 나타났다. "누구냐?" "카포틴 사제, 나 안드레빌이오." 대사제의 목소리에 질겁한 카포틴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허둥지둥 문으로 향했다. 그는 문을 열고 창백한 대사제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바짝 긴장해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사제님?" 아침에 그를 따로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대사제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조사를 중지하시오, 카포틴 사제."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사를 중지하라니요?" "시간이 없으니 이유는 나중에 말해주겠소." 안드레빌 대사제가 어리둥절해진 카포틴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벌떡 일어서는 기록관에게 다가간 그가 앞에 놓인 문서를 집어들었다. "이게 이번 사건의 개요인가?" "예, 대사제님!" 잔뜩 긴장한 기록관이 크게 소리쳤다. 그 즉시 대사제의 시선이 아몬을 향했다. "날 따라 오시오, 젊은이." 아몬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서는 안드레빌 대사제의 뒤를 따랐다. "서두르시오." 서너 발자국 앞서 있던 대사제가 아몬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듯 부랴부랴 걸음을 옮겨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요, 기다리시오." 안드레빌 대사제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닦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에야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문 안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연 대사제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데리고 왔습니다, 성하." 아몬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경직된 목줄기가 경련을 일으킨 듯 가늘게 떨렸다. 잰걸음을 옮긴 대사제가 루드비히 앞에 들고 있던 문서를 공손히 내려놨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성하." 아몬을 스치며 문을 나서던 대사제가 단단히 굳어있는 그에게 다급한 눈짓을 보냈다. "뭐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들어가게." 아몬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루드비히를 보며 불안정한 걸음을 옮겼다. 어지러웠다. 이번 일에 법황까지 나섰다는 사실이 짧은 길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울퉁불퉁한 황무지를 걷는 듯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고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몬은 마음 속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가 후들거리는 무릎을 꿇으려 했을 때 루드비히가 차갑게 말했다. "예같은 건 필요없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앉으십시오." 아몬은 아무 말없이 거대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루드비히와 마주 앉았다. 길고 잔인한 침묵이 흘렀다. 아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망자의 손처럼 싸늘한 긴장이 그의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입을 열려던 아몬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숨을 죽였다. 오래 전 꾸었던 흐릿한 꿈속에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어떤 기묘한 것이 작게 조각난 기포처럼 떠오르려하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다소 날카로운 물음이 혼란스런 머리를 파고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몬은 공손히 대답했다. "아몬이라 합니다, 법황성하." 바르르 떨리는 어조에서 그를 괴롭히는 동요가 드러났다. "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관심없다는 듯 루드비히가 곧바로 다른 질문을 꺼냈다. "아시리움에서 쫓는 죄인을 비호했다는 혐의 때문입니다." "그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일부는 인정합니다, 성하."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조소가 지나갔다. "루벤스타인 대공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시는군요. 대공께선 이번 일에 대한 관련설을 전면 부인하신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선 이번 일과 무관하십니다. 모든 건 저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아몬이 강하게 주장했다. "좋습니다. 절 설득시켜보십시오." 루드비히가 편하게 등을 기댔다. 아몬은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제가 죄인을 만난 건 약 30일 전입니다. 상점에 진열된 여러 가지 물건을 구경하며 길을 걷는데, 시장 안쪽에서 험한 욕설이 들려 왔습니다. 호기심에 소리를 따라가보니 건장한 중년남자가 초라해 보이는 소년을 닥치는대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전 구경꾼들에게 물어, 소년이 중년남자의 돈을 훔치려 하다 그 자리에서 잡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이 울부짖으며 잘못을 빌었지만 남자의 구타는 오히려 잔인해졌습니다. 소년은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가는데 누구 한 사람 남자를 말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그건 단순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웃어대며 큰 소리로 남자를 응원까지 했습니다." 아몬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매우 흥미진진하군요." 루드비히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계속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하. 시간이 흐르자 흥미를 읽은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소년과 저만 남겨졌습니다. 전 망설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절 그 중년남자로 착각한 소년은 격렬히 몸부림을 치더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전 소년이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혼절한 소년을 업고 부랴부랴 치료사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찌나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는지 소년은 그 다음날 저녁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소년이 의지할 피붙이하나 없음을 알게 되자, 전 그를 거두어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으나 소년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 소년이 아시리움을 속인 극악한 죄인임을 알았다면 한줌의 연민조차 생기지 않았겠지만, 전 눈앞에 있는 상처투성이 소년이 죄인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한순간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어리석음이 빚은 불행한 사건일 뿐입니다. 대공전하께선 죄인이 잡히기 전까지 제가 그 소년을 거두었다는 것도, 또 그 소년이 지금껏 성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셨습니다." 루드비히가 앞에 놓인 문서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대단하군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모든 게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문서에 적힌 모든 게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법황 성하." "진실이라......" 루드비히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진실을 따라가 보면 무엇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성하." "진실의 끝엔 기만이 있습니다." 아몬의 갈색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애써 동요를 감췄다. 루드비히의 마음을 읽는 것도, 그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도 불가능한 아몬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시키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 본능이 기만을 서서히 변형시켜 어느 순간 진실로 바꿔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엔 그 자신조차 기만인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성하께서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없이 아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던 루드비히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대강 알게 되었으니, 한 가지 질문만 한 후 끝내겠습니다. 대공이 소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가 죄인이 아님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분으로 어떻게 대공의 성함을 입에 올린 것입니까?" "그것 또한 제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시리움 신전의 사제님을 위시한 성기사들과 맞닥뜨리게 된 일로 전 그 당시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을만큼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이 빚어 낸 강한 중압감 위에 소년에 대한 책임감과 걱정이 더해져 저도 모르게 터무니없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된 것 같습니다." "루벤스타인 대공께 바치는 충성심이 대단하시군요. 거기에 비한다면 소년에게 느꼈던 감정은 보잘 것 없는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감정이 허울좋은 연민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말입니다." 루드비히가 아몬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몬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영혼을 잡아채는 듯한 은회색 눈동자를 재빨리 외면했다. "돌아가십시오. 추가소환 여부는 일의 진행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일의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든 가장 먼저 루벤스타인 대공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몬은 천천히 일어나 루드비히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가 문을 향해 반 정도 접근했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 온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그의 전신을 단단히 결박지었다. "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잔인한 물음들이 연이어 싸늘하게 굳어버린 아몬을 몰아붙였다. "그녀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까? 이제 이용가치가 떨어진 것입니까? 그래서 그녀가 어떤 고통을 겪든 아무 상관 없는 것입니까? 그녀를...... 버리려는 것입니까?" 루드비히가 짧고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차가운 조소가 느껴지는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루벤스타인 대공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돌아가셔서 제 대신 여쭤보십시오. 대답이 어떻게 나오든 굳이 제게 알려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몬은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얼어붙은 손가락 끝에 문고리가 닿는 순간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한가지만, 한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성하. 엘은... 그녀는 괜찮은 겁니까?"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섬뜩할 정도로 냉혹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짧은 시간이 천천히 흐른 뒤 굳게 닫혀 있던 단아한 입술이 움직였다. "나가십시오." 아몬은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제 목 [달의 아이] 53장.친구와 적-2=================================================================== "지금껏 뭐하다가 이제 나타나는 거냐?" 자일스의 고함에 움찔한 마체라타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외투를 벗어 안락의자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다.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자일스가 퍽퍽 발을 구르며 다가와 그녀의 정면에 멈춰섰다.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왜 이제야 나타난 거냐고 묻지 않느냐?" "신전에서 나와보니 어디에서도 마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황궁으로 먼저 돌아가신 줄 모르고 여기저기 마차를 찾아다니느라 늦었습니다." 마체라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냐? 네가 마차를 찾아다녔다는 말을 믿으라고? 그따위 헛소리를 늘어놓다니 지금 네가 날 기만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전하. 전 그저 사실을 말씀 드린 것 뿐입니다."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마체라타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드시겠지만 노여움을 푸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전하. 전하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하실지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시면 전하의 옥체만 상하시게 될 것입니다." "네 까짓 게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예, 전하.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말입니다." "그래서? 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자일스가 바짝 다가서며 따지듯 물었다. "우선 편히 앉으십시오, 전하. 얘기가 꽤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른다는 것이 마음 내킬 리 없는 자일스는 망설이다 먼지를 피워 올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네 말대로 앉았으니 어디 말해봐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전하. 먼저 무엇부터 말씀 드릴까요?" "좋은 소식." 자일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흥적으로 선택했다. "전하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지만 사실 시간이 늦은 건 그 일 때문입니다." "선물이라고?" 의외의 말에 자일스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예, 전하. 정성껏 준비하긴 했지만 매우 보잘 것 없는 선물입니다." "그게 무언지 어서 말해봐라." "선물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을 가진 소년입니다, 전하. 제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전하께서 손에 넣고 싶어하시는 죄인과 똑같이 보이게 손을 써 놨습니다. 그러니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비록 덧없는 눈의 착각이라해도 겉모습만큼은 구분이 안되니 불쾌했던 기분도 푸시고 마음껏 즐기다 오십시오, 전하." "놈과 똑같아 보이게 만들었단 말이냐?" 자일스가 바짝 몸을 기울였다. "그렇습니다. 전엔 전하께서 놈을 떠올리실 때마다 찰나적으로 스쳐가는 모습을 잡는 데 급급했으나 오늘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오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어렵지 않게 환영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놈과 똑같이 만든 가짜가 있다니! 기분을 풀라느니 하는 말은 집어치워라. 놈과 바꿔 치는데 사용해야지, 그런 소소한데 낭비할 수는 없다. 난 그 놈 자체를 원한다, 마체라타. 수백, 수천명의 가짜보다 그 놈 하나를 더 갖고 싶단 말이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갈망을 채울 것이다." 마체라타가 한숨을 내쉬며 팔걸이에 놓여진 자일스의 팔을 어루만졌다. "나쁜 소식을 말씀드릴 때가 된 것 같군요." "입을 닫아라, 마체라타. 나쁜 소식 따위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난 지금 다른 곳에 신경쓰고 싶은 마음이 없다." "죄송하지만 들으셔야 합니다, 전하. 진짜와 가짜를 바꿔치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바로 제가 말씀드릴 나쁜 소식이니까요." 자일스가 마체라타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손가락이 죄어들자 마체라타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비틀어 빼냈다. "말씀 드린 그대로입니다. 오늘 죄인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제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모습을 전하께서도 보셨을 겁니다. 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박에 한동안은 숨을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긴 했지만 그 정도가 심했으면 혼절까지 할 뻔..." "그만해라!" 마체라타의 말을 사납게 끊은 자일스가 한층 분노를 드러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따위 쓸데없는 말 집어치워라! 괜한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왜 놈을 바꿔치기 할 수 없는지, 그 이유나 말해라!" 성질이 불끈 솟은 마체라타도 소리를 높였다. "그 방에선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습니다! 마법 그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이란 말입니다!" 작은 숨소리에도 끊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자일스가 한껏 치켜뜨고 있던 눈을 깜박이며 마체라타에게 시선을 맞췄다. "인정하긴 싫지만 제 힘으론 그 방을 둘러싼 차단막을 뚫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거냐? 정말 불가능하단 말이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일스가 재차 확인했다. "예, 전하. 놈이 그 안에 있는 한, 바꿔치기는 불가능합니다." 자일스의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그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아니야, 이럴 순 없어... 불가능하다니... 놈에게 치욕스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고 또 참았는데...... 오직 그 날만을... 놈이 완전히 내 손에 들어올 날, 놈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날만을 생각하며 그 모든 걸 참았는데......" 어깨를 늘어뜨린 자일스가 힘없이 넋두리를 중얼거리자 마체라타의 눈에 희미한 연민이 피어올랐다. "어차피 놈은 죽게 될 것입니다, 전하. 단언하건대, 아시리움에서 그에게 편한 죽음을 내리진 않을 겁니다. 미약하지만 그걸 위안으로 삼으십시오, 전하." 자일스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는 놀라 흠칫한 마체라타에게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법을 찾아내라! 놈을 빼내 올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마체라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을 나에게 데려와라!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가능하게 만들어라!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전하." 살짝 고개를 숙이는 마체라타를 향해 자일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들어주실 수 있다는 말씀...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 감히 내게 맹세를 요구하는 네 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진심으로 한 말이다.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마. 내가 지금껏 네게 빈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 원하는 걸 말해봐라." "사실 원하는 게 한가지 있습니다, 전하. 그게 무엇인지는 그 아이를 빼내 올 수있는 방안을 찾은 연후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마체라타의 입술에 달콤한 미소가 그려졌다. "전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희들이 정말 생각이 있는 놈들이냐?"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와 박혔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에지몬트는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등을 곧추 세웠다. 그를 떠난 시선이 옆으로 옮겨지자 이번엔 카셀이 숨기라도 하려는 듯 목을 잔뜩 움츠렸다. "너희들이 코흘리개 어린애들인 줄 아느냐? 대체 지금이 어느 땐데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사일러스가 다시 한 번 험악하게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눈두덩에 시퍼런 멍이든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제러드가 진중하게 말했다. 뚜벅뚜벅 다가간 사일러스가 제러드 앞에 멈춰섰다. "내 너까지 이토록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내가 널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냐? 너라면 이렇게 후회할 일은 애초부터 만들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단 말이다." "전 후회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단장님." 제러드가 사일러스와 시선을 맞대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일러스의 눈가에 경련을 일었다. "이번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단장님. 다소 경솔하긴 했지만 후회하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뭐라... 후회하지도 잘못했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른 녀석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냐?" "예, 그렇습니다!" 네 명의 기사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시비도 너희가 먼저 걸고 주먹도 너희가 먼저 휘둘렀다 하던데, 대체 뭘 잘했다고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냐? 네 녀석들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하느냐? 가뜩이나 성내 분위 기가 어지러운데 그 위에 어의관이 다섯이나 동원됐단 말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다섯이나! 생각없고 대책없는 녀석들 같으니! 해산하라! 꼴도 보기 싫으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지,집으로 돌아가라고요, 단장님?" 카셀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피가 말라붙은 턱을 실룩였다. "그래, 집에서 꼼짝하지 말고 있으란 말이다! 너희들이 저지른 잘못을 가슴 속 깊이 뉘우쳤다는 판단이 서면 그 때 부르겠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굼뜬 놈들은 호되게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니 빨리 움직여라!" 사일러스의 사나운 기세에 눌린 기사들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젠장! 단장님도 정말 너무하시지,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터덜터덜 복도를 걷던 카셀이 불만을 토해냈다. 세르피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잘한 것도 없지, 뭐. 가뜩이나 분위기도 안 좋은데 그런 소란을 피웠으니... 속은 후련하지만 말이야." "후련하긴 후련하죠. 벌렁 나자빠지던 놈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려 하니까요." 에지몬트가 터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불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턱이 쑤셔 제대로 음식을 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리저리 턱을 움직여 보던 카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때려눕힌 놈들을 떠올리면 돌덩어리도 씹어 먹을 수 있을걸?" 제러드가 픽 웃으며 응수했다. "그건 그래. 그 놈들은 끙끙 신음소릴 내며 떠 넣어주는 멀건 국물을 날름날름 받아 먹을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낄낄거리던 카셀이 금세 얼굴을 구기고 턱을 살살 문질렀다. "근데 대체 집에 틀어박혀서 뭐하며 시간을 죽이지? 멍하니 벽보고 앉아 가려운 발바닥이나 긁고 있어야 하나?" 제러드의 탄식에 세르피언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정말 심심하겠다. 말상대할 사람 하나 없을 테니까. 나야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어머니라도 있지." "그게 좋은 거야, 임마. 손톱이 닳도록 발바닥을 긁어도 씻으라고 잔소리하는 부인이 있나, 잠만 자려고 하면 빽빽 울어대는 조막만한 아들 녀석이 있나? 난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둘한테 내내 들볶인단 말이다. 머리에 찌르르 찌르르 쥐가 날 때까지." 불만스런 투덜거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카셀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나타나 있었다.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제러드가 혀를 차며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렸다. "이번 기회에 가족들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나 갔다 올까? 펄펄 뛰시던 단장님이 그리 쉽게 불러주실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생각해?" 카셀이 기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안 돼. 단장님이 집에 얌전히 있으라 하셨잖아." 이케르가 걸걸한 어투로 반대하고 나섰다. "꽉 막힌 녀석 같으니! 그래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거냐?"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든 채 카셀을 바라보던 이케르가 너한테 맡긴다는 식으로 제러드를 툭 치더니 걸음을 빨리 해 앞서 나갔다. "하나만 알고 둘은커녕 하나반도 모르는 녀석! 저 녀석은 단장님이 손바닥만한 말구유 속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가장 먼저 마구간으로 달려갈게 분명해. 이케르만큼 답답한 녀석도 없을 거야, 그렇지?" 카셀이 동조해주길 기대하는 눈으로 제러드를 쳐다봤다. "너보다 이케르가 백배는 낫다!" 제러드가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자 카셀이 눈을 부라렸다. "뭐야, 임마? 내가 왜 앞뒤 꽉 막힌 이케르 녀석보다 백배 아래로 취급받아야 하는 거냐?" "괜히 아픈 턱 실룩거리며 열 내지 말고 집에 가 잠이나 자, 카셀. 여행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리고 얌전히 쉬고 있으란 말이다. 그렇다고 너무 퍼져 있진 말고." "젠장! 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 해도 기필코 여행가고 말 거다!" "카셀, 내 말 잘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봐." "뭘?" 카셀이 덤벼들듯 물었다. "사일러스 단장님이 왜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노기를 드러내셨는지... 칭찬이든 벌이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려 주시던 단장님이 왜 우리에게 집에서의 근신을 명하셨는지... 그 속뜻을 잘 생각해 보란 말이다." 눈을 깜박이던 카셀이 일순 걸음을 멈췄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그 일이... 그런 뜻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 우리 중에 그걸 못 알아챈 녀석은 아마 너 밖에 없을 거다." 카셀이 에지몬트와 세르피언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도 정말 알고 있었던 거냐?" 카셀과 마찬가지로 의외의 깨달음에 놀라고 있던 두 사람이 재빨리 표정을 정돈했다. "당연하죠. 제가 제 형님을 그렇게 모르겠습니까?" "물론이지. 난 단장님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실 때부터 혹시 그런 속마음을 갖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한숨을 푹 내쉰 카셀이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난 대체 왜 이럴까?" "그 말을 믿는 거냐? 정말 안 어울리게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제러드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글쎄 말이다." "동감입니다." 짓궂게 말한 세르피언과 에지몬트가 나란히 발을 맞춰 제러드를 뒤따랐다. "뭐,뭐라고? 내 저것들을! 너희들 거기 안서?" 카셀이 쿵쾅거리며 돌진하자 세 사람은 전속력으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음울하던 공기를 깨우며 복도 가득 울려퍼졌다. 신전을 발칵 뒤집은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벌어진 건 칼락이 한참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는 갑작스레 늘어난 막중한 업무로 인해 기진맥진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부서져라 두드려 대는 요란한 문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칼락은 반쯤 잠에 취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이름도 가물가물한 젊은 사제가 핏기가신 얼굴로 소리쳤다. "대, 대사제님, 큰일났습니다! 오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이곳 바드리오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무슨 일인데 신전 안에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가?" 엄한 꾸지람을 내린 칼락은 사제의 대답이 나온 순간 격한 숨을 들이켰다. "성하께서, 법황 성하께서 오셨습니다!" "서,성하께서... 성하께서 바로 이 신전 안에 계시다는 말인가?" "예, 대사제님!" 사제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은 숨을 몰아쉰 칼락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모셨는가?" "중앙접빈실로 모셨습니다." "알았네." 칼락은 지체하지 않고 그 즉시 걸음을 떼었다. "대사제님, 잠시만! 아직 의복을 갖추지 않으셨습니다!" 사제가 그를 따라오며 다급히 말했다. 그제야 자신의 잠옷차림을 깨달은 칼락이 거친 신음을 터뜨리며 발길을 되돌렸다. "어서 이리 오게. 자네가 의복정제를 도와줘야겠네."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방으로 들어선 칼락은 젊은 사제의 도움을 받아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그는 베개에 눌린 자국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미처 살피지 못한 채 헐레벌떡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중앙접빈실 앞엔 생소한 얼굴의 고위사제 두 명과 다섯 명의 성기사들이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칼락 대사제님이시군요. 많이 늦으셨습니다." 그보다 이십 년은 젊어 보이는 고위사제가 책망하듯 말하며 못마땅한 눈으로 칼락 대사제를 바라봤다. "미안하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미처 준비하고 있지 못했소." 칼락은 정중히 말했다. 그보다 아랫사람이긴 하지만 법황이 대동한 고위사제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서두르십시오.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위사제의 고갯짓에 성기사들이 옆으로 비켜났다. 칼락은 숨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고위사제가 초조함을 드러내며 재촉했다. 칼락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 가에 우뚝 멈춰 선 채 눈을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생각지 못한 법황의 모습에 그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알카나라는 지방의 작은 신전에서 이 곳 바드리오로 옮겨 온지 겨우 200일 남짓한 그로서는 생전 처음 법황을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로알드 칼 마테슈츠로군요." "예에?" 루드비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칼락이 얼떨결에 되물었다. "이 벽화를 그린 화가말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칼락은 법황의 시선이 한쪽 면을 가득 채운 벽화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황한 그에게서 어눌한 대답이 새어나왔다. "아아...예." "제가 왜 이 곳에 왔는지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루드비히가 일순 화제를 바꿨다. "예, 성하. 죄인에 대한 처리문제 때문이시겠지요." 칼락은 입을 다물며 마음 속으로 꼬리를 달았다. 다만 성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죄인을 확인해 줄 사람과 죄인의 처리방안을 알려 달라 요청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성전에 그런 청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정오 경에 죄인이 틀림없음을 확인했으니 그 처리방안만 알려 주면 되겠다는 서한을 다시 보냈습니다." 루드비히가 칼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누구입니까? 누가 죄인을 확인한 것입니까?" "그,그게 그러니까...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몸소 확인해주셨습니다." 칼락은 어쩔 줄 몰라하며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폈다. 껄끄럽게 변한 아시리움 종단과 리아잔 제국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는 그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리아잔의 황태자...... 그가 왜 신전에 있었던 것입니까?"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선듯한 어조였다. "그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우나 황태자전하께선 죄인을 넘겨 달라는 요구를 하러 오셨습니다, 성하." 루드비히의 입 언저리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가 딱딱하게 물었다. "어찌 처리하셨습니까?" "황태자전하의 요구를 거절할 수 밖에 없음을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 말을 이해해주신 전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죄인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제 생각으론 단순히 확인만으로 끝났을 것 같진 않군요. 자세히 말씀해 보십시오." 의표를 찌르는 말에 칼락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야기시킨 황태자를 원망하며 건조한 혀를 움직였다.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을 끌던 칼락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세웠다. "숨김없이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하. 죄인의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가겠다 하셨던 황태자전하께선 그 말씀을 어기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전하께선 죄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성하.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처음엔 죄인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하시며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질문은 어떤 마법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었는데,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시리움 성전과 무슨 관련이 있는 마법사인 것 같았습니다. 황태자전하께선 죄인에게 그 마법사에 대한 걸 반복해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모른다고 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시고 그에게 폭력을 가하셨습니다." 루드비히의 단아한 턱선이 움찔하더니 이내 단단히 굳어졌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십시오." "처음엔 목을 조르시더니 죄인이... 그러니까... 전하의 얼굴에 침을 뱉자 주먹으로 죄인을 때리셨습니다. 그리고 입술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죄인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셨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죄인역시 만만히 당하고 있진 않았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황태자전하의 다리를 걸더니 부러뜨린 의자다리를 전하의 목에 대고 위협하더군요. 그 모습이 얼마나 의연하면서도 매서운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얘기에 도취한 칼락이 감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꽤나 재미있게 구경하신 모양이로군요." 루드비히가 싸늘한 냉기를 풍기며 말했다. 칼락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성하, 오해십니다! 죄인에게 손대지 말라 하셨던 성하의 명을 어기려고 한 게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불찰로 발생한 사건입니다만,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전하께 무례를 범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 점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 성하!"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루드비히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칼락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떼냈다. 그제야 칼락은 목까지 차 올랐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내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짤막하게 명령했다. 느닷없는 말에 놀란 칼락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죄인에게 안내해 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어찌 성하께서 직접!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제가 죄인을 이 곳으로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필요없습니다." 황급히 걸음을 떼는 칼락을 향해 루드비히가 단호하게 말했다. 칼락은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머뭇 몸을 돌렸다. "하,하지만..." 루드비히가 냉기가 느껴지는 어조로 말을 잘랐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성하. 지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숨찬 어조로 말한 칼락이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대기하고 있던 고위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따라오지 마십시오." 두 명의 고위사제들이 걸음을 옮기려하자 루드비히가 조용히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성하." 공손히 허리를 굽힌 사제들이 뒤로 물러났다. 칼락은 루드비히의 두어 발 앞에서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뒷골이 쭈뼛할 정도로 법황을 의식하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솟아난 혈관이 팔딱팔딱 뛰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와 겨드랑이가 축축해지더니 이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길고 긴 여정이 끝났을 때 칼락은 지금껏 꿈꾸던 인생의 목표 - 5년 이내에 아시리움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 - 를 깨끗이 포기한 채 자신이 지금 바드리오에 있음을 깊이 감사했다. ===================================================================제 목 [달의 아이] 54장.파열-1===================================================================눈꺼풀을 건드리는 연한 빛이 아슬아슬하게 잠겨있던 선잠을 깨웠다. 눈을 뜨자 혼란스런 꿈의 연속인 듯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루드비히..." 엘은 낮게 중얼거리며 기대고 있던 등을 세웠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향해 엘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루드비히..." 조심스런 속삭임 뒤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여긴 의자도 없는데..." 엘은 두르고 있던 모포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루드비히, 이 위에라도 앉아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루드비히가 잠시 후 말했다. "필요없습니다." "앉기가 좀 그렇죠? 하지만 여긴 다행히도 벌레 한 마리 없어요. 내가 벌레 무서워하는 거 루드비히도 알죠?" 엘은 어색하게 윗입술을 들어 올려 애써 미소지었다. "난 루드비히가 날 만나러 올 줄 몰랐어요. 아니... 루드비히 입장에서는 날 확인하고 조사하러 온 거겠지만요. 사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래서 '아, 조만간 아시리움 성전에서 누군가가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던 참이에요. 다행이에요. 다른 사람이 아닌 루드비히가 와서요. 정말 다행이에요. 왜 다행인 줄 알아요? 루드비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거든요." 말을 멈춘 엘은 얍하는 기합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루드비히가 그렇게 서 있으니까 목이 아프잖아요. 그래도 올려다보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에요." 짐짓 밝게 말한 엘은 뒷걸음질쳐 벽에 몸을 기댔다. "몸에 퍼진 암베르를 해독해준 사람이 바로 루드비히죠?" 두 사람의 눈길이 깊숙이 얽혀 들었다. "맞았군요.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진작 알았다면... 하긴... 진작 알았다해도 내 힘으로 루드비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을 거예요. 단 한가지도요." 엘은 루드비히에게 구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루드비히. 이런 말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진심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루드비히가 그녀를 외면하듯 시선을 돌렸다. "그런 말 듣기 싫은가 보군요. 왜 아무 말 안 해요? 나하고 말하기 싫어요? 빨리 일이나 끝내고 이 우중충한 곳에서 나가고 싶은 거예요? 아시리움에서...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날 쳐다보기도... 싫어진 거예요?" 목이 칼칼해지며 눈 언저리가 달아오르자 엘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눈물 한 방울이 힘겹게 버텨 온 그녀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턱을 들어 올렸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루드비히. 아무거나요. 조사할 사람으로 루드비히를 보내다니 아시리움은 정말 모르는 게 없나봐요. 루드비히 앞이라면 뭐든 걸 다 털어놓으리란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요." 엘은 루드비히를 응시한 채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지켜볼 뿐 단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묻고 싶은 거 없어요? 내가 아시리움 성전에서 거짓왕자 노릇한 거 루드비히도 잘 알잖아요. 그런데도... 궁금한 거 없어요?" "많이 아프십니까?" 루드비히가 불쑥 물었다. 엘은 그가 볼에 생긴 멍과 입술 상처를 바라보고 있단 걸 깨닫고 얼굴로 손을 올렸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아파요. 그런데 이상한 게 뭔 지 알아요, 루드비히? 말을 할 때가 입술을 꼭 다물고 있을 때보다 덜 아프다는 거예요. 보통은 반대일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 같아요. 시끄럽죠?"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엘에게 루드비히가 다가갔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오!" 엘은 팔을 들어 그를 막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럴 필요없어요. 말했다시피 조금 아플 뿐이니까요. 이제 나한테 잘해 주지 말아요, 루드비히. 난 아시리움을 더럽힌 극악무도한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면 루드비히가 곤란해 질 거예요. 그건...... 싫어요." 엘은 고개를 꺾으며 쉰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그녀의 볼로 가져갔다. 검붉은 멍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입술로 미끄러졌다. 서늘한 손가락 끝이 부어 오른 입술을 쓸고, 또 쓸었다. 쓰라린 아픔이 가라앉았다. 그 대신 가슴이 조금씩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 알알한 통증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엘은 고개를 돌렸다. "그거 알아요? 루드비히도 나만큼이나 바보라는 거요.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한 바보일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루드비히가 들릴듯 말듯 낮게 속삭였다. 휙 몸을 돌린 그가 엘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후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아시리움 성전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호기심에서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엘이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호기심 때문에 아시리움에 들어가셨단 말입니까?" 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드비히가 반문했다. "예... 이름은 기억 나지 않지만 그루지아 국 국경지대에 있는 여관에 머문 적이 있어요. 거기서... 그러니까 정원을 걷다가 우연히 땅에 떨어져 있던 나무조각을 발견했어요.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내가 주운 게 세렌국 왕자의 인장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시작된 거예요...... 이렇게 작은 게 왕족임을 증명해주는 인장이라니! 이런 걸 갖고 다니는 왕족들은 어떤 생활을 할까? 그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근사하게 살아갈까? 내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을까?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단 한순간이라도 그런 삶을 맛볼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을 텐데! 그런 기회만 온다면 죽을 힘을 다해 물고 늘어질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을 텐데!" 엘은 격앙된 말을 멈추고 잠시동안 숨을 골랐다. "내가 인장을 주운 그 다음날 여관으로 사제님 한 분과 작은 소녀가 찾아왔어요. 그들은 세렌국의 왕자전하를 마중 나온 거였어요. 난 그들 앞으로 나섰어요. 그리고 내가 바로 세렌국 왕자라고 말했어요. 증거를 요구하는 사제님 앞에 인장을 내밀었어요. 너무나 두려워 심장이 멎을 것 같았지만 나에게 찾아온,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에 꾹 참았어요. 그것으로... 난 내가 꿈꾸던 왕족이 될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난 두려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시리움 성전에서 도망쳐 나올 때까지 그토록 원했던 왕족노릇을 실컷 해볼 수 있었어요... 그게 다예요." "그 말을 아시리움에서 믿어줄 것 같습니까?"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작은 반짝임이 스쳐갔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되레 질문을 던졌다. "루드비히는 어때요? 내 말을 믿어요?" 루드비히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믿지 않습니다. 단 한마디도."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정말 바보같죠? 내가 그랬잖아요. 바보라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살풋 미소짓던 엘이 쑥스러운 듯 루드비히의 눈길을 피했다. "살고 싶으십니까?" 루드비히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꺼냈다. 은회색 눈동자와 보라색 눈동자가 얽혀들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살짝 떨리는 입술에서 다소 경직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십시오. 그럼... 살려 드리겠습니다." 엘은 불규칙한 숨결을 토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얼굴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리오와 리반, 아몬과 칼 베리만, 사일러스를 비롯한 다섯 명의 기사들...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청회색 눈동자까지...... "배후같은 거 없어요. 나 혼자 한 일이에요." 엘은 강경하게 부인했다. "그가 누군지 말씀하십시오. 드러나지 않은 이면 속의 그가 누구인지 밝히십시오. 그것만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서운 명령을 담은 은회색 눈동자가 찌를 듯 파고 들었다. 하지만 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배후는 없어요." 루드비히가 짧게 웃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래요, 두렵지 않아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난 겁쟁이가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요!" 엘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아무 말없이 등을 돌렸다. 엘은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매달리듯 그를 불렀다. "루드비히..." 문고리를 향하던 루드비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두려워요... 사실은 너무 두려워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 무서워서... 계속 잠을 청하게 돼요. 잠을 자는 동안엔... 꿈을 꾸는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나...... 정말 겁쟁이죠?" 엘은 그녀를 움켜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암울한 절망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루드비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두려움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걸 느끼는 거라고요. 루드비히... 그게 정말인가요?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건가요? 하지만 말이에요...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는 거잖아요. 죽으면 그걸로 끝이잖아요." 엘은 말을 멈췄다. 흐려진 보라색 눈동자에 시린 아픔이 젖어들었다. "루드비히....." 조용히 루드비히를 부른 엘이 거의 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은 흐르는 눈물을 막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의 루드비히를,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 그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조금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죽음이 두려우면 그걸 거부하고 회피하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요? 난 이미 잡혔는데... 이곳에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데... 어떻게 죽음을 피한단 말이에요?" 이를 악문 듯 루드비히의 턱이 팽팽히 당겨졌다. 그가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배후가 누군지 말씀하십시오." "말했다시피 그런 사람없어요." 엘의 부인을 무시하고 루드비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 일을 계획하고 조종한 그가 누군지 밝히십시오." "루드비히, 이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같으니! 그런 사람없다고 했잖아요!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한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바보! 멍청이! 잘난 체만 하는 거만덩어리!" 엘이 울부짖듯 악을 써댔다. 성큼성큼 다가온 루드비히가 엘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못하겠다면 내가 대신 말해주지!" 매섭게 소리친 루드비히가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갈퀴처럼 살을 파고들었다. "리자드 카라우크 켈름 폰 루벤스타인." 엘의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감춰진 비밀의 반영(反影)이 심연처럼 벌어진 보라색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매우 친숙한 이름이지 않습니까?" 루드비히가 비웃음을 드러냈다. 숨막히게 조여 드는 침묵을 깨며 엘이 숨죽여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요...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이대로 덮어둘 것 같습니까? 아니면 대공의 목을 잘라 돼지에게 던져 줄 것 같습니까?" 엘은 비명이 터지려하는 입술을 막았다. 그녀의 어깨를 옥죄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루드비히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루드비히,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아시리움에 밝히지 말아 줘요. 너무 뻔뻔스럽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루드비히. 다시는, 맹세코 다시는 이런 부탁하지 않을게요.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소원이에요." 엘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루드비히의 눈을 들여다봤다.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단단히 결박한 손을 들어 올려 입술로 가져갔다. 뜨거운 입술이 화인처럼 그녀의 손등을 내리눌렀다. 천천히 입술을 뗀 루드비히가 손을 놓아주고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엘은 다시 그를 잡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손끝이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얼음처럼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작게 오므렸다. "루드비히... 제발......" 목매인 애원이 힘겹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엘은 완강한 등을 바라보며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시린 바람을 일으키며 문이 닫혔다. 가느다란 울음소리만이 텅 비어버린 사위(四圍)를 감싸안았다. 초조하게 복도를 서성이던 칼락은 법황이 모습을 보이는 순간 재빨리 다가갔다. "끝내셨습니까? 변변하진 않지만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놓았습니다, 성하. 시장하실 텐데...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성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에? 벌써 돌아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락은 이미 그를 지나 복도를 걷고 있는 루드비히를 허겁지겁 따라갔다. "성하, 앞으로의 일에 대한 성견을 내려주십시오. 죄인은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그러니까 죄인을 계속 이곳에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지난번 내려온 명을 따라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 넘겨야 하는지... 또..." 루드비히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에게 몸을 부딪친 칼락이 시뻘게진 얼굴로 펄쩍 뛰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성하! 정말 죄송합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칼락을 무시하고 루드비히가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죄인은 아시리움의 이름으로 처형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른 구체적인 사항은 차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직접 허락하기 전엔 그 누구도 죄인을 만나지 못하게 하십시오.그리고 경비와 보안을 철저히 재정비하십시오. 거기엔 죄인에 대한 완벽한 보호도 포함되어야 합니다.만약 죄인을 놓치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모든 책임을 대사제께 묻겠습니다." "아,알겠습니다, 성하! 목숨 바쳐 성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칼락이 머리를 조아리며 숨가쁘게 외쳤다. "또 한가지... 죄인이 불편함을 겪지 않게 보살펴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말에 칼락이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성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걸 갖춰 주란 말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도록 날카롭게 말한 루드비히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칼락은 혼란스런 머릴 흔들며 서둘러 그의 뒤를 좇았다. ===================================================================제 목 [달의 아이] 54장.파열-2===================================================================앞에 놓인 문서를 훑어보던 남자가 한순간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마체라타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널 부른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내가 부르기 전엔 이 곳에 오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무뚝뚝한 꾸짖음에 마체라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긴히 의논드릴 중요한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 좋다, 이번 일을 문제 삼을지 아닐지의 여부는 그 중요한 일이란 걸 들어본 후에 결정하겠다. 그러니 어서 말해봐라." "그 아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남자가 관심없다는 듯 흘긋 문서를 내려다봤다. "그 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남자가 이미 모든 걸 간파했음을 눈치챈 마체라타가 뾰족한 어투로 말했다. "페르가몬의 피붙이일지 모르는 보라색 눈동자의 소녀말입니다, 아버지." "이해할 수 없구나. 전엔 그냥 묻어 두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갑자기 그 아이를 탐내는 것이냐?"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탐을 내는 건 제가 아니라 자일스 황태자입니다. 전 자일스 황태자의 갈증을 풀어 주고 얻게 되는 반대급부를 원할 뿐입니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그래, 만족한다. 네 건방진 말투까지 날 매우 만족스럽게하는구나." 남자가 노기를 드러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쉰 마체라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흥분 때문에 잠시 못난 성질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남자는 한동안 못마땅한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아버지. 노여움을 푸십시오." 마체라타가 다시 한번 사죄의 말을 꺼냈다. 이윽고 웬만큼 마음을 누그러뜨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좋다, 마체라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해봐라." "오늘 아시리움 신전에 가서 그아이를 만나고 왔습니다.물론 자일스황태자도 함께였습니다."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등을 세웠다. "그 아이를 얻기 위해 꽤나 발 빠르게 움직였구나. 하지만 네 말을 들어볼 때 황태자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진 않은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버지 말씀대로 자일스 황태자는 그 아이를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신전을 책임지고 있는 칼락이란 자가 정중하게 거절하더군요. 말과 행동이 짜증날 정도로 답답했지만 황태자를 상대하면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그럭저럭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내세운 거절이유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마체라타는 궁금증을 부추기려는 듯 대답하기 전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그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손을 대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 하더군요." "어떤 식이로든 손을 대지 말라... 자신들을 능모(侮凌)했다는 죄인을 상대로 그런 명을 내리다니 참으로 괴이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저 역시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명을 내린 이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마체라타가 야릇한 미소를 짓자 남자의 눈에 예리한 빛이 스쳐갔다. "법황이로구나! 법황이 그런 명을 내린 거로구나!" "예, 아버지. 그렇다고 하더군요. 상당히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법황이 직접 나서서 그런 명을 내린 걸까요?" 생각에 잠긴 남자의 미간에 점점 깊은 골이 패어졌다.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다. 원래 법황은 가늠할 수 없는 행동으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넘기는 건 어리석은 일이고... 좀 더 파고들어 갈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구나. 운이 좋다면 그 과정에서 유용하게 써 먹을 만한 그럴듯한 대어가 낚일 수도 있을 테고."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될 것 같은 데 제가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다, 마체라타. 상대는 법황이다. 그건 털끝만큼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말한다.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넌 네가 맡은 일에나 전심전력을 다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분고분 받아들이는 마체라타에게 남자가 의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내 말 명심해라, 마체라타. 넌 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정보를 내게 보고하는 정도로만 이 일에 관여해라. 내 말을 어기고 네 단독으로 나서려 하지 마라, 절대." "예에,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습니다." 마체라타가 과장되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알아들었으면 네가 하던 말이나 계속해봐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꼬장꼬장한 대사제가 자일스 황태자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고... 그 후에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이 틀어지자 황태자는 재빨리 계획을 바꿨습니다. 거절할지 모른다는 걸 이미 염두에 두고 그걸 대비해 다른 방안을 준비해 둔 것 같더군요. 그러니까 저로 하여금 마법을 쓰게해서 그 아이를 빼돌리게 하는 것 말입니다. 하긴, 다섯 살짜리 코흘리개 아이도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시리움에서 마법으로 그 아이를 빼내는 건 불가능하다." 마체라타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그렇더군요. 전 오늘에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황태자는 자신이 직접 죄인을 확인해 주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들어 그 아이를 만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산발적으로 웃음을 흘리던 마체라타가 이윽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린 듯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하면 됐다, 마체라타. 아시리움 신전에서의 일은 충분히 들었으니, 그 아이를 손에 넣으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나 말해라." 마체라타는 싱긋 웃어 보인 후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에 두 손을 짚은 자세로 상체를 기울였다. "자일스 황태자에게 그 아이를 넘겨주면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황태자가 그런 조건을 달았단 말이냐?" "예, 아버지.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말이긴 하지만 절 속이기 위해 드리운 허망한 미끼는 아닐 겁니다. 제 성격을 모르는 황태자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까?" 기대감에 찬 마체라타를 향해 남자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 주의를 벌써 잊은 거냐? 아시리움과 연관된 일엔 되도록 몸을 사리라고 네게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그 정도 이유로 아시리움을 건드리겠단 말이냐?" "아시리움에선 제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본 자가 있으면 그 즉시 입을 막아 버리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만큼은 절 믿고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설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요?" 입술을 꾹 다문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던 남자가 뒤늦게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하다, 마체라타." 마체라타의 눈동자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시리움 종단과 리아잔 제국의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처형식은 황궁에서 열리게 될 거다. 아마 아시리움보다는 리아잔이 그걸 더 강하게 희망하겠지. 또, 아시리움 측도 리아잔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을 테고. 세상의 모든 눈이 이번 일에 쏠려 있으니 속마음은 아닐지라도 표면적으론 리아잔의 체면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전 처형식이 열리는 장소엔 관심없습니다. 그 아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 오직 그걸 알 고 싶은 것 뿐입니다." "성급하게 굴지 마라, 차근차근 말해 줄 테니까." 마체라타가 몸을 세우며 초조한 손길로 머리채를 쓸어 넘겼다. "아시리움 신전에서 그 아이를 빼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아시리움 측은 처형이 이루어질 황궁에도 사전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다. 그 아이가 아시리움 신전에도, 또 리아잔의 황궁에도 얽매이지 않는 시간,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움켜잡는 것... 그게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과연 그렇겠군요. 하지만 제 생각엔 아시리움 측에서 그런 구멍을 방치해 둘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세상에 작은 결점도 없이 완벽하게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 어떤 것이든 약한 부분을 골라 뚫으면 구멍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남자가 깊숙이 등을 기댔다. 삐걱거리는 의자소리가 은밀한 공기를 흔들었다. "아시리움 측은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에 따라 죄인의 수송도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깊은 밤에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 잘 들어라, 마체라타. 아시리움 신전과 황궁 사이의 중간 지점엔 숲이 하나 놓여 있다. 변변한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매우 작고 보잘 것 없는 숲이다. 사실 나무 몇 그루만 서 있는 공터라고 해도 그리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숲에서 일을 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마체라타. 그 아이를 손에 넣고 싶으면 그 숲에 미리 완벽한 준비를 해둔 다음 기다리고 있어라. 잊지 말아야 할 건 아시리움 측이 이동경로의 안전에 대한 조사를 끝낸 다음, 지체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조사단이 돌아가 이상이 없음을 보고하면 그 즉시 죄인에 대한 수송이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이송날짜는 언제가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십중팔구는 처형식이 열리는 그 전날이 되기 쉽다. 어쩌면 이틀전쯤이 될 수도 있겠고... 정확한 날짜는 내가 알아내 주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마체라타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전 그럼 이만 돌아가 그에 필요한 세부계획을 세우겠습니다." 간단히 목례를 해 보인 마체라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가 넌지시 질문을 꺼냈다. "황태자에게 무엇을 요구할 생각인데 네가 이번 일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거냐?" 별거 아니라는 듯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인 마체라타가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전 황태자에게 쥬네비아 황후의 죽음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후의 죽음? 쥬네비아 황후의 죽음을 요구한다고? 자일스 황태자에게 말이냐?" "왜 그리 놀라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절 죽이려한 쥬네비아 황후를 가만두지 않으리란 건 아버지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을 것 아닙니까? 사실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방법이 더 완벽한 복수가 될 거란 생각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주긴 싫고... 또, 당한 건 몇 십배, 몇 백배로 되갚아주는 제 입맛에도 맞고 말입니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어머니라... 그래, 그보다 더한 복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런 일을 하려고 들진 않을 것이다. 잔인하고 포악한 면은 있으나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만큼 패륜아는 아니니까."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잔인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요. 전 그 아이가 제 손에 들어와도 황후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엔 자일스 황태자에게 손가락 하나 보여 주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그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과연 자일스 황태자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까요? 상상만 해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황후는 어떤 얼굴이..." "이번 일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어느새 엄격한 표정으로 변한 남자가 마체라타의 말을 끊었다. "허락하지 않으시겠다고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유라면 말해주마. 넌 자일스 황태자가 기꺼이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가 죽길 바라는, 더군다나 자신에게 어머니를 죽여달라고 요구하는 이를 어느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느냐?"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능력은 된단 말입니다!" 마체라타가 강하게 반발했다. "철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번 일은 깨끗이 잊어버려라. 그 아이를 손에 넣어 황태자에게 넘겨주는 선에서 끝내란 말이다. 그럼 황태자와 너의 관계도 좀 더 친밀해질 테니까. 명심해라, 마체라타. 만약 내 말을 어기고 더 이상 나가려 한다면..." 말을 늘인 남자가 마체라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나가려 한다면요?" "황후의 죽음을 보기 전에 네가 먼저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마체라타의 눈동자가 검붉게 변했다. "절... 죽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난 내 명을 거스르는 자식따윈 필요없다. 어차피 나로 인해 얻은 목숨, 내가 거두어들이면 그만이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괜히 해 보는 빈말이 아님은 잘 알 것이다. 말해봐라, 마체라타. 이래도 내 말을 거역하겠느냐?" 상처 입은 눈으로 남자의 매서운 시선을 마주보고 있던 마체라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아버지께 복종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 아버지의 애정을 구걸하는 착한 딸로 남아있을지는 저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는 아버지. 그녀는 흡족해 하는 아버지에게 쓸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 목 [달의 아이] 54장.파열-3=================================================================== "다들 오신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에르난드 대사제는 마지막으로 들어온 휴이츠 대사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개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한 여섯 명의 대사제들을 둘러봤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빈자리가 마음을 무겁게 하자 그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의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갑자기 회의가 소집된 거로 보아 급히 해결해야할 문제가 발생한 것 같군요." "맞습니다, 니제르 대사제. 많이들 짐작하시겠지만 얼마 전에 잡힌 죄인의 처리문제 때문에 여러분께 급서(急書)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마그넬 대사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처리문제는 이미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까? 전 리아잔 제국의 황궁에서 처형식을 갖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에 따른 소소한 문제까지 우리 대사제들이 나설 필요는 없는 거고 말입니다." "성하께서 내리신 명입니다, 마그넬 대사제. 오늘 아침 성하께서 좀 더 상세한 계획을 세워 바드리오에 전하고,대사제들이 직접 관여해 일을 빈틈없이 진행시키라는성문을내리셨습니다." 일의 중대성을 깨달은 대사제들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우선 처형식을 거행할 정확한 날짜를 정해 공표해야 하는데... 제 생각으로는 되도록 빠른 시일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 좋은 일도 아니고, 아니, 그것보다는 불쾌한 쪽에 더 가까운 일의 처리를 굳이 늦출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도 에르난드 대사제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하지만 아시리움의 이름에 걸맞을 수준으로 처형식을 준비해야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만큼의 시간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겠지요. 제 생각으로는 그 소요기간을 최소한으로 잡는다 해도... 으음... 칠일은 여유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르난드 대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겠군요. 그렇다면 니제르 대사제의 말씀을 받아들여 팔일 후로 결정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은데.... 다른 분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대사제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나섰다. "그럼 장소와 날짜는 정해졌으니 다음으로 내려야 할 결정은 처형의 방법이겠군요. 좋은 의견있으신 분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 전 새로 대사제 직에 오른 보르헤스가 스스럼없이 견해를 밝혔다. "교수형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 생각이 좀 다릅니다. 처형식엔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껏 교수형이라니... 괜히 불만에 찬 사람들로인해 아시리움에 대한 뒷소리만 무성해질 겁니다." 반대하고 나선 마그넬 대사제를 향해 보르헤스가 은근히 불쾌감을 드러냈다. "기껏 교수형이라고요?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저로선 이해할 수가 없군요. 처형식은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마그넬 대사제." "꼭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일 생각이 없다면 리아잔의 황궁을 빌려 공개처형을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테르제 대사제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휴이츠 대사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느 정도의 구경거리도 되어야하고 또 적절한 충격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뒷말도 나오지 않을 테고, 또 처형식이 갖는 의미도 백성들에게 잘 전달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가장 좋은 처형방법은 화형입니다. 사실 눈요기거리가 될 만한 건 그 이외도 무수히 많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면 배에 구멍을 내서 창자를 뽑아낸다거나, 눈을 도려 낸 다음 꼬챙이로 찔러 끓는 기름에 밀어 넣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 좀 지저분해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은 화형입니다. 그럭저럭 볼만도 하고 말입니다." 말을 끝낸 마그넬 대사제가 에르난드 대사제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에르난드 대사제?" "화형이라... 제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아직 앳된 소년에게 내리기엔 너무 모진 형벌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전 되도록 잔인한 방법은 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즉, 죄인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높다는 말입니다. 제가 극악한 죄인을 두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해 하시는 것 같군요." 에르난드 대사제는 숨을 고르며 다음에 꺼낼 말을 정리했다. "여러분들은 죄인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조잡한 그림만 알고 계실뿐 한 번도 그 죄인을 직접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여러분들과 달리 지금 이 곳에 계시진 않지만 클레르몽 대사제와 전 가까이에서 죄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잔혹한 인상을 풍기는 형벌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사제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에르난드 대사제에게 집중됐다. "죄인이 어떻게 생겼는데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에르난드 대사제?" "글쎄요, 말주변도 없는 제가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라우스 사제의 그림이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도 제가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외모와 성품은 별개의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인상은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그 영향이 상당히 큰 법입니다. 제가 본 죄인은 해맑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아름다운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을 직접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극악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요." 동요한 대사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겠군요. 처형식이 아시리움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문제로군요, 정말 문제입니다." 니제르 대사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처형방법을 신중하게 결정해야겠습니다. 죄인이 잡혔으니 처형식 정도야 별일 아닐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성하께서 이번 일을 우리 대사제들에게 맡기신 이유가 여기 있나 봅니다." 테르제 대사제의 얼굴도 걱정스럽게 흐려져 있었다. "저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묘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마디로 안 한채 다른 대사제들의 얘길 경청하고 있던 가드리안 대사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좋은 묘책이라 하셨습니까?" "가드리안 대사제, 그게 무엇입니까?" "좋은 묘책이라니, 어제 말씀해 보십시오." 궁금증을 못이긴 대사제들이 한 마디씩 그를 재촉하고 나섰다. "제가 유난히 고대역사를 흥미있어 한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 오래 전에 읽었던 고문서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니까... 들어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천 이백 년 전에 에르메스라는 작은 부족국가가 있었습니다. 위치는 슈벤국과 체르몬국 중간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 부족을 다스리던 족장들이 하나같이 마흔 살이 되는 해에 목숨을 잃었다는 겁니다. 더욱 놀라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의 이유가 자살이라는 것입니다." "자살이라고요? 무슨 이유로 족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관심있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테르제 대사제가 의문을 표시했다. "에르메스를 세운 족장이... 그의 이름까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지자라 칭송받던 부족의 주술사에게 마흔 번째 생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날 예언을 들었다 합니다. 예언은 그가 마흔 살에 죽게 되리란 거였는데 그걸 들은 족장이 주술사를 시켜 강한 주술을 걸게 했다 하더군요. 주술의 내용은 그 이후의 에르메스 족장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답니다. 만약 그보다 하루라도 더 산다면 본인은 물론 그 자자손손 저주가 내려지리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저주를 두려워한 족장들이 마흔 살 되던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씀이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가드리안 대사제. 분명히 흥미로운 얘기긴 하지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제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니제르 대사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에 거의 근접했으니까 요. 만약 여러분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가드리안 대사제가 진지한 얼굴로 대사제들을 둘러봤다. "그건 아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었을 겁니다. 즉 족장들이 그 두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그것이 제가 말하는 묘책입니다." "참으로 궁금하게 하시는군요. 대체 그게 무엇입니까?" "칼데아 산맥에서만 볼 수 있는 오귀스트라는 작은 늪지식물이 있습니다. 그 식물의 열매를 먹으면 전신의 신경이 마비되고 환각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찌나 강한지 자신의 팔다리가 찢겨 나가는 걸 보면서도 웃음을 터뜨린다 하더군요. 그런 이유로 에르메스의 족장들은 자살하기 전 이 오귀스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그러니까 죄인에게 그걸 먹이자는, 그런 말씀이시군요!" 보르헤스 대사제가 숨가쁘게 소리쳤다. "예, 그렇습니다. 오귀스트 열매를 먹게 되면 죄인은 자신의 살과 뼈가 타들어가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방긋방긋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한순간 오싹함을 느낀 대사제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시선을 교환했다. "제 소견을..." 헛기침으로 컬컬한 목을 가다듬은 테르제 대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오귀스트 열매란 걸 사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사람들은 웃으며 죽어가는 죄인을 두려워하고 혐오하지 동정심을 갖진 못할 겁니다. 오히려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괴물이나 악귀 취급을 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다른 분들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가드리안 대사제께서 내신 의견에 찬성하십니까?" 에르난드 대사제의 물음이 끝나자 회의장 전체에 침묵이 깔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보르헤스 대사제를 시작으로 대사제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모두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술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모두 여기 좀 보시오. 양해를 구할 일이 있소. 불편하더라도 여기 이 두 소년과 방을 나눠 써야 되겠소."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우리 네 사람으로도 방이 꽉 차는 데 어떻게 둘이나 더 여기에 처넣는단 말이오?" 여관주인의 말에 덩치 큰 남자가 불만을 표시했다. 그와 일행인 세 남자들도 리오와 리반에게 못마땅한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지금 바드리오 전체에 사람들이 바글거린다는 건 잘 알지 않소. 방 잡는 게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힘들다는 것도 말이오. 피차 좋은 구경거리를 좇아 온 사람들이니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 마시오." "야박하다니? 돈을 곱절이나 주고 얻은 방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둘씩이나 끼어 넣는다는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소?" "그러니까 이렇게 양해를 구하는 거 아니오. 거 인상들 좀 펴시오. 서로간에 하룻밤만 불편함을 참으면 되는데 뭘 그러시오." 주인이 강압적인 태도를 바꿔 살살 달래듯 말했다. "하룻밤이라 하지만 대체 잠을 어떻게 자란 말이오? 둘이 침대를 차지하면 나머지 둘은 바닥에서 자야 하는데, 이 좁은 바닥에서 넷이나 자라니. 몸을 포개서 자란 거요?" "두 사람은 침대 양 옆으로 눕고, 여기 두 소년은 문 가에 나란히 누워 자면 그럭저럭 잘 수 있을 거요. 그러면 그렇게 알고 난 나가겠소." 여관주인이 리반에게 모포뭉치를 내밀었다. "여기 이거 받으시오." 모포뭉치를 손에 든 리반은 여관주인에게 방을 마련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는 리오를 흘깃 쳐다봤다.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이런 방이라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리반은 입술을 일자로 다문 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리오를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리오, 그렇게 인상쓰고 있는다고 사태가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 "나도 알아. 그냥...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리오가 침울하게 대꾸했다. "저리 비켜! 왜 문 가에 서 있는 거야? 거치적거리게!" 리반의 등을 거칠게 밀은 남자가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넘어지며 어깨로 리오의 얼굴을 치게 된 리반은 중심을 잡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광대뼈 언저리가 벌겋게 부어 오르고 있는데도 리오는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감각이 마비되기라도한 듯 천천히 눈을 끔벅일 뿐이었다. 방안엔 어느새 두 사람만 남아있었다. 한 방을 쓰게 된 네 명의 남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리반은 그들이 모두 아시리움 신전으로 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신전 앞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눈을 빛내고 있으리란 것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바드리오를 향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것이다. 단지 내일 벌어질 처형식을 구경하고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말이다. 바드리오 전역이, 아니, 이 세상 전부가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반은 리오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망설이며 말을 걸었다. "저기 말이야... 우리도 가 볼까?" "싫어." 퉁명스럽게 말한 리오가 리반의 팔에서 모포를 빼내 바닥에 깔았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고 채이며 굳게 닫힌 철문이나 구경하고 오는 거 마음 내키지 않아. 어차피 조금있으면 날도 어두워질 테니 난 잠이나 자야겠어. 그래야 새벽같이 일어나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그러니까......" 길게 누운 리오가 모포를 끌어 덮으며 말꼬리를 붙였다. "구경하기 좋은 자리말이야." 리오의 입술이 깊이 패인 상처처럼 힘없이 벌어졌다. 리반은 황폐하게 말라버린 파란 눈동자를 외면했다. 그리고 목이 걸린 큼직한 돌덩이를 토해내듯 강하게 말했다. "가지 말자, 리오! 차라리 보지 말자!" "아니, 그럴 수 없어." "왜?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야? 보고 싶지 않은 걸 굳이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뭐야? 꼭 볼 필요는 없잖아. 그걸 꼭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일이 오기 전에, 아니, 지금 당장 여길 나가 체르몬으로 돌아가자. 응?" 리반은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집으로 가자, 리오. 그렇게 하자." "돌아가려면 너 혼자 가, 리반. 난 이대로 갈 수 없어." "젠장! 왜?" 리반이 버럭 소리치며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직 희망을 버릴 수 없으니까." 리오가 작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엇인가에 크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리반이 휘청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설마..." "아직 포기할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 리반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가능해, 리오. 너도 알 거야. 네 말은 그저 덧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오히려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야." 절망 어린 침묵 속에서 리반은 리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윽고 리오가 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언제나 그랬듯이 네 말이 맞아. 난 한 번도 널 속이는데 성공한 적이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체르몬 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내일 그곳에 꼭 가겠다는 건... 사실 엘이... 보고 싶어서야.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엘을 보고 싶어. 잠깐만이라도... 그 이유가 뭘까...... 대체... 그 이유가... 뭘까?" 리오의 푸른 눈동자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응? 리반... 난... 왜 이럴까?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걸까......" 리반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이 조여 들며 아파 왔다.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너도 모르는 게 있구나." 눈물을 숨기려는 듯 리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모포를 머리 위까지 덮은 후 작게 몸을 말았다. 리반은 가늘게 떨리는 모포자락에서 시선을 떼냈다. 그리고 점점 뿌옇게 흐려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제 55장. 은령(銀嶺)의 밤===================================================================무엇인가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 순간 에지몬트는 번개같이 몸을 돌려 정체 모를 공격자를 향해 매섭게 주먹을 날렸다. 허공을 가른 주먹의 반동이 몸을 휘청하게 했을 때야 비로소 그는 자신을 건드린 게 비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에지몬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해 후 그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 자신을 향해 피식 웃었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에지몬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내린 숲속의 공기는 신선하고 청결했다. 또 상당히 차갑기도 했다. 하지만 몸의 떨림은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어두울 때 말을 달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 그 자체를 몹시 싫어했다. 세상이 어스레해지기 시작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 얼토당토아니한 생각에 어떤 타당한 이유를 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녁 무렵마다 찾아오는 꺼림칙한 느낌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를 괴롭혀오고 있었다. 에지몬트는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 바닥엔 소리없이 다가오는 살수의 손길처럼 슬금슬금 안개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드니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배경으로 괴물의 손톱같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에지몬트는 혀를 차며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그가 걸음을 재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사이로 작은 오두막이 흘긋 나타났다. 오두막은 차츰 밝아지는 달빛을 희미하게 반사시키며 오도카니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에지몬트는 날카로운 눈길로 주변을 살피며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오두막을 향해 다가갔다. 한쪽 경첩이 떨어져 나가 비딱하게 기울어진 문 앞이 멈춰 선 그는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힘껏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텅 빈 공간을 발견하고 멈칫했을 때,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며 날카로운 검 끝이 등을 찔러 왔다. "죽고 싶지 않다면 숨도 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에지몬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뒤를 돌아봤다. 친숙한 얼굴들이 그를 향해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냥 죽으라고 한다고 네가 죽을 녀석이냐?" 제러드가 피식거리며 검을 검집에 꽂아넣었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고 제대로 찾아오긴 했구나." 카셀이 에지몬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선배님들도 저와 같은 내용의 서찰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일어나보니 침대 맡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 한 장을 서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받은 건 받은 거니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맞아,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모일 수 있었겠지." 세르피언과 카셀이 차례로 말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서찰을 손에 쥐니 기분이 묘하더라. 뭐라 할까... 좀 오싹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짜릿한 느낌이라고 할까?" "나도 그것과 비슷한 걸 느꼈어. 난 말이야, 팔에 소름이 쫙 돋으며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갑자기 정수리가 시원해지더라고." 카셀이 제러드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정수리가 시원해진 이유는 허전한 네 머리 숱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러드의 짓궂은 놀림이 끝나자 카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게진 카셀이 분통을 터뜨리려는 순간 이케르가 몸을 도사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긴장이 내리덮였다. 소리없이 움직이는 그들 손엔 언제 빼어 들었는지 저마다 검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좁은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포진한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어떤 녀석이 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냐?" 사일러스가 반쯤 부숴진 문을 밟고 들어서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단장님!" 기사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들을 훑어보던 사일러스가 입술을 실룩였다. "어제만해도 멀쩡했던 문이 왜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거냐?" "제가 그랬습니다, 단장님. 있을지 모르는 공격을 견제하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럼 너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무방비 상태로 콧노래라도 흥얼대며 왔다는 말이냐?" 에지몬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네가 저지른 일이니 에지몬트 넌 문을 잡고 서 있어라. 그리고 나머지는 가까이 모여봐라." 얼굴을 구긴 에지몬트가 먼지를 일으키며 꺾여진 문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희들을 비밀리에 소집한 이유에 대해선 다들 짐작하고 있을 거다. 간단히 말하겠다. 중요한 건 딱 두 가지다. 첫째, 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라. 둘째, 임무가 끝나는 순간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라.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철저한 응징이 가해질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은 녀석은 내 말을 거역해도 좋다." 말을 멈춘 사일러스가 기사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로 주시했다. "난 너희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차한 맹세따위는 시키지 않겠다. 그건 너희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모욕하는 일이 될 테니까." 기사들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상이다. 에지몬트, 문은 대충 기대 놓고 이쪽으로 와라." 성큼성큼 걸어온 에지몬트가 이케르 옆에 섰다. 사일러스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입구를 벌린 주머니를 거꾸로 잡아 흔들자 손바닥위로 진주빛의 미세한 가루가 쏟아졌다. 가느스름해진 기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사일러스가 가루를 먼지와 거미줄이 수북한 한쪽 구석에 뿌렸다. 섬세한 날갯짓을 하듯 팔랑거리던 가루가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텅 비어 있던 바닥에서 커다란 나무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사일러스가 상자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꾸러미들을 기사들에게 하나씩 던져주었다. "그 안에 든 옷으로 바꿔 입어라." 기사들이 신속하게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엔 후줄근한 검은 색 웃옷과 바지, 그리고 짐승의 가죽과 털로 만든 겉옷이 들어있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들 모두 군소리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이윽고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사일러스를 응시했다. 그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일러스가 상자 뚜껑을 뒤집은 후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칼날을 세워 뚜껑 안쪽에서 얇은 송판을 뜯어낸 다음, 그 안에 끼어져 있던 둥글고 납작한 금속조각을 꺼내 목에 걸었다. "더 바짝 붙어라. 바드리오로 이동한다." 기사들이 다가들자 사일러스가 금속조각을 움켜잡으며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금속조각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오두막을 가득 채운 빛이 그들을 중심으로 잦아들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몸을 점령한 이질적인 손길을 묵묵히 견뎠다. 감각이 둔해지더니 귀가 멍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지럼증이 사라지며 갑자기 코끝을 톡 쏘는 풀내음이 맡아졌다. 그들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싼 낯선 풍경을 맞아들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나칠 정도로 기름칠을 한 철문은 낮은 한숨만을 흘리며 매끄럽게 입을 벌렸다. 말을 탄 삼십 여명의 기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창문 하나 뚫려 있지 않은 마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고, 약 사십 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마차의 옆과 뒤를 철통같이 봉쇄한 채 말을 달리고 있었다. 반 수 정도의 기사들 손에 들린 횃불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소리가 멈춰 있던 대기를 요동시키며 멀리 퍼져 나갔다. 행렬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는 적당한 속도를 유지한 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갑자기 그들 앞에 붉은 기둥이 솟아올랐다. 놀란 말들이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높이 차올렸다. 허겁지겁 말을 달랜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긴장한 채 주위를 경계했다. "동요하지 말고 마차를 지켜라!" 기사단장의 다급한 명령이 터진 후 작은 웃음소리가 그 뒤를 좇았다. 핏빛으로 물든 기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그 동안 거대한 빛기둥은 양 옆으로 미끄러지듯 퍼져 나가 어느새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원한다면." 거리낌없는 대답과 동시에 붉은 머리카락을 드리운 여인이 나타났다. "넌 누구냐? 누군데 감히 사악한 힘으로 아시리움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원하는 게 뭐냐?" "난 마체라타라 한다. 전엔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있다. 오늘 너희들 앞에 나타난 이유는, 다시 말해 사악한 힘으로 아시리움의 일을 방해하는 이유는 황태자전하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라 할 수 있을 거다. 즉, 그 마차 안에 있는 걸 가져다 드리기 위해서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아시리움을 더럽혔다고 난리 치는 중죄인이 되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튼 이미 밝혔다시피 내가 모시는 황태자 전하께선 그 마차에 들어있는 아이를 원한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할 정도의 대답은 된 것 같은 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뻔뻔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말을 끝낸 마체라타가 싱긋 웃었다. "놀란 것 같구나. 특별히 숨길 필요없다는 생각 때문에 털어놓은 건데... 그 이유를 말해줄까? 난 너희 모두를 죽일 생각이거든.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실성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있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사단장이 위엄을 담아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물러서라!" "그렇게 못하겠다면? 날 대체 어떻게 할 셈이냐?" 마체라타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죽일 생각이냐? 아니면 사로잡아 너희들이 굽실굽실 떠받드는 법황에게 날 끌고 가고 싶은 거냐?" "입 닥쳐라! 네 까짓 게 감히!" 기사단장이 격렬히 노기를 터뜨렸다. "꽤 화가 나는 모양이로구나. 내가 그 화를 식혀 주면 어떨까?" 마체라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단장의 앞을 막고 있던 빛덩어리가 불룩 튀어나와 그를 덮쳤다. 기사들이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불그스름한 빛은 하얗게 얼어붙은 말과 기사단장을 토해낸 다음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기사들이 붉은 막을 피해 서로를 밀치며 안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마체라타가 여전히 동작을 멈추지 않는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차댔다. "보잘 것 없는 자비나마 베풀어 되도록 빨리 너희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좋겠구나. 빨리 일을 끝내는 게 나한테도 훨씬 낫고 말이다." 깨끗이 미소를 지운 마체라타가 짧은 단어를 소리쳤다. 그러자 붉은 빛이 솟아오르며 천장처럼 기사들의 머리 위를 덮었다. 빳빳이 들린 창백한 얼굴로 일제히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다음 순간 귀가 먹먹한 적막이 찾아들며 빛이 힘없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살육의 현장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기사들의 시체는 물론 말들의 사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힘없이 흔들리는 횃불들만이 흩뿌려진 핏방울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마체라타는 횃불들 사이를 걸어 마차로 다가갔다. 조금씩 깊어지던 미소가 이내 얼굴 가득 머금어졌다. 마차 문을 겨우 한 걸음 남겨 놓은 지점에서 마체라타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잠시 동안 마차를 노려보다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막에 닿은 손가락이 싸늘해지며 욱신거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마체라타가 비명같이 새된 외마디 소리를 터뜨렸다. 거대하고 육중한 것이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놀란 남자가 숨을 들이쉬며 벌떡 몸을 세웠다. 강력한 진동이 공기를 뒤흔들자 책상과 책장, 장식장에 놓여 있던 작은 물건들이 맥없이 곤두박질쳤다.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뒤늦은 말을 중얼거리며 마체라타가 모습을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남자의 눈이 매섭게 번득였다. "아버지, 저 좀 도와주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아니, 먼저 설명부터 해라." 한숨을 푹 내쉰 마체라타가 초조한 몸짓으로 방 한가운데 자리잡은 마차를 가리켰다. "이 안에 그 아이가 들어있습니다. 제 힘으로 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힘을 빌리려 이렇게 허겁지겁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까짓 거 하나 해결 못해 내게 손을 벌리는 거냐? 네 자만심의 반만이라도 능력을 키우는 게 어떻겠느냐, 마체라타? 그렇다면 이런 불쾌한 타박도 듣지 않게 될 테니까 말이다." 마체라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 말씀은 잘 알겠으니 우선 이것부터 열어주십시오." 못마땅한 얼굴로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남자가 검은 색 마차로 눈을 가져갔다. "마차에 별도의 보호막까지 두르다니... 예상했던 대로 아시리움에서 매우 신중하게 일을 진행시키는구나. 그렇다해도 별 소용은 없었지만 말이다. 네가 감쪽같이 죄인을 빼돌린 일이 알려지면 아시리움은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힐 것이다. 이번 일과 관련된 사람들은 목이 떨어질까봐 바들바들 떨게 되겠고. 그 꼴이 눈에 선하구나."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그래, 알았다. 재촉하지 마라. 더 이상 시간 끌지 않을 테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 문을 살펴보던 남자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불쑥 팔을 내밀었다. 남자의 손이 닻자 투명하던 막이 안개가 피어오르듯 시야 속으로 떠올랐다. "막을 이중으로 세웠군. 이렇게 정성을 쏟았는데도 죄인을 빼앗기고 말았다니.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구나. 아시리움이 내 생각을 알면 몹시 불쾌해 하겠지만." 이중 보호막을 말끔히 제거한 남자가 마체라타를 돌아봤다. "너한테 양보하겠다, 마체라타. 이번 일은 네 작품이니까 말이다. 어서 열어 봐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빨리 보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저 역시 그 아이가 절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아니, 자일스 황태자에게 데려갔을 때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몹시 궁금합니다." 마체라타는 기대감에 입술을 살짝 축이며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남자가 마체라타를 밀어내고 텅 빈 마차 안을 들여다봤다. "당했구나. 시원하게 당했어. 역시 아시리움은 너보다 몇수 위라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구나. 기분이 어떠냐, 마체라타?" 발작을 일으킨 듯 부들부들 떨고 있던 마체라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니오, 지금은 우열을 따질 수 없습니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결론이 내려진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리석은 것 같으니! 다시 돌아가 아시리움에서 그 아이를 언제 내보내나 기다리겠단 말이냐? 멍해질 만큼 크게 한 방 먹었으면서도 아직도 그들을 모르겠느냐? 아시리움이 지금까지 널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것 같으냐?" "그럼 이대로, 이렇게 당한 채로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네가 포기하든 그렇지 않든 이미 내려진 결론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차피 넌 졌다, 마체라타. 그러니 얌전히 돌아가서 네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봐라." 마체라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황태자에겐 뭐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씀입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그 뿐 아니냐? 어차피 그 아이는 내일 처형식에서 한줌 재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상대는 아시리움이었다. 분노를 터뜨리긴 하겠지만 황태자도 널 심하게 탓하진 못할 거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저만큼 그를 알지 못하십니다." 남자의 얼굴에 짜증이 나타났다. "네 우는 소린 이제 더 이상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어서 돌아가라!" 남자가 성가시다는 듯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이 말만은 하고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이번엔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번엔 그 잘난 아시리움을 제 손으로 꺾어 보이고 말겠습니다." "마체라타! 아시리움을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마체라타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모습을 감췄다. 카셀은 다급히 손을 올려 터지려는 비명을 막았다. 칠십 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일말의 망설임없이 냉혹하게 죽인 여인이 마차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섬뜩하게 눈을 파고 들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뒷골을 쭈뼛하게 만드는 사악함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이 카셀의 입안을 바짝 마르게 했다. 여인이 접근하고 있는 저 마차엔 분명히 엘이 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뛰어나가 마녀에게서 그녀를 구하고 싶은 생각에 카셀은 이를 악물었다. "혀,형님." "쉿!" 사일러스가 안타까운 에지몬트의 속삭임을 재빨리 끊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에지몬트가 연거푸 거친 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은 여인과 사일러스를 번갈아 흘긋대며 명령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눈을 부릅뜬 채 여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단독행동을 할 수 없는 기사들은 그저 미칠 듯한 무력감에 싸인 채 앞을 노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차에 손을 뻗던 여인이 갑자기 날카로운 괴성을 터뜨렸다. 놀란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들은 숨죽인 채 분노에 찬 몸짓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여인을 지켜봤다. 팔을 내린 여인이 이상한 언어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말만 덩그러니 남기고 마차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단장님! 그 마녀가 엘을 데려갔습니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엘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그녀가 잡혀 가는 걸 구경하러 온 겁니까, 단장님?"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형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조용히!"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그들의 입을 막았다. "시간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또, 빈틈없이 내 명령을 따라라! 카셀과 에지몬트는 준비해 놓은 나무와 덤불을 저 앞에 쌓아라. 이케르와 세르피언은 기사들의 흔적을 말끔히 치워라. 그리고 횃불 하나는 끄지 않은 채로 나한테 가져와라. 마지막으로 제러드, 넌 활과 화살을 준비한 상태로 대기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명령을 이행한 그들이 서둘러 잠복장소로 돌아왔다. "모두 두건을 꺼내 얼굴을 가려라. 안주머니에 들어있다. 내 말 명심해라. 절대 우리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된다. 이제부터 우린 기사가 아닌 도적이 되는 거다." 사일러스가 제러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불을 붙이면 넌 그 즉시 저기 쌓아 놓은 덤불로 불화살을 쏘아라. 기회는 단 한 번 뿐이 다. 한순간이라도 망설이면 시간이 늦어져 놀란 말들로 인해 큰 사고가 벌어질 위험이 있다. 또 서두르면 기습은커녕 우리가 먼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명심해라, 제러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제러드가 결연히 대답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왔다, 모두 준비해라." 검을 빼어 든 기사들이 잔뜩 몸을 도사렸다. 사일러스는 횃불에 흙을 뿌려 불을 반쯤 잦아들게 만들었다. 날카롭게 감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일러스가 횃불로 화살에 불을 붙었다. 다음 순간 제러드가 힘껏 불화살을 날렸다. 곧 덤불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마차 앞에서 말을 달리던 두 명의 성기사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지금이다!" 제러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은 날뛰는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네 명의 성기사들을 덮쳤다. 성기사들은 검을 빼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억센 손아귀에 낚아채여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얌전히 검집을 풀어 이쪽으로 던져라!" 목에 검 끝이 겨눠진 성기사들은 사일러스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거칠게 을러댄 사일러스가 벌벌 떨고 있는 마부에게 내려오라는 눈짓을 했다. "아,알았어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숨을 헐떡이던 마부가 울상을 지은 채 마부석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척하며 발목에서 단도를 빼 들었다. 마부의 속셈을 짐작하고 있던 제러드가 화살로 그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다. 마부가 단도를 떨어뜨리며 팔을 움켜잡았다. "이제 다들 알았겠지? 우린 너희 눈에 보이는대로 다섯 명만 있는 게 아니다. 최고의 명궁 일곱 명이 곳곳에서 너희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단 말이다. 우리에게 대항하려 하지 마라! 죽고 싶지 않다면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또 허튼 짓 하려 들었다간 그 즉시 화살에 목을 뚫리게 될 테니까."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따위 짓을 하는 거냐? 우린 아시리움의 성기사들이다." "이,이럴수가! 아시리움이라고?" 카셀이 경악한 듯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낄낄대며 비아냥거렸다. "그 대단하시다던 아시리움의 성기사님들도 별 거 아닌가 보군. 우리같은 놈들에게 털리게 됐으니 말이야." "자, 빨리빨리 움직여라. 거기 셋은 기사나리들 몸을 샅샅이 뒤져봐라. 명색이 아시리움의 성기사님들이니 어마어마한 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우선 기사들을 밧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에 일을 시작해라. 그리고 거기 너는 이쪽으로 와라, 마차를 살펴봐야 되니까." 에지몬트가 서둘러 사일러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를 흘긋 쳐다본 사일러스가 검을 치켜들어 마차 문에 달린 자물쇠를 단번에 잘라냈다. 에지몬트는 덜렁거리는 쇠사슬을 풀어낸 다음 마차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는 검을 치켜든 채 어둠에 싸인 마차 안으로 신중하게 상체를 들이밀었다. 뒤에 있던 사일러스가 그의 어깨를 힘껏 움켜잡았다. 에지몬트는 검자루를 틀어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서서 사일러스에게 다급히 신호를 보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사일러스가 활짝 열린 마차문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마차엔 그 누구도 타고 있지 않았다. 어둠만이 텅 빈 공간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사일러스가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걱정스런 시선들이 몰려들었다. "아시리움의 성기사들이라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이게 뭐야? 마차에 있는 거라곤 잘난 먼지뿐이잖아! 젠장! 그 검이라도 챙겨 들어라. 명색이 성기사들이니 싸구려 검을 차고 있진 않았을 거다. 그렇지, 말도 잊지 마라. 다 됐으면 이제 그만 돌아간다!" 사일러스는 빠르게 발을 놀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선 기사들이 말을 끌며 따라오고 있었다. 무언가 짓밟고 싶다는 듯 사납게 땅을 차며 걷던 사일러스는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는 판단이 들자 멈춰 서서 부하들을 기다렸다. "단장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나도 모르겠다, 제러드." 카셀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혹시 그 이상한 여인과 함께 사라진 마차에 엘이 타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형님?" "그건 아닐 거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진짜를 내보인 다음, 초라한 가짜로 그 뒤를 따르게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천하의 어리석은 자도 그렇게 일을 꾸미진 않을 거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아시리움의 작품이다." "단장님 말씀대로 두 개가 다 가짜라면 대체 엘은 어디 있는 걸까요?" 사일러스가 세르피언을 향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세르피언. 이번 일만큼은 정말 모르겠다." "단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카셀이 침울하게 물었다. "돌아간다!" "예? 이대로 돌아간다고요?"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이다. 오두막으로 돌아가면 세르피언, 이케르, 에지몬트는 옷을 갈아입고 곧장 귀가해라. 그리고 제러드와 카셀,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오두막에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그런 다음 말과 검을 처분한다." 사일러스는 부하들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리 밝지 않은 달빛이 그들의 양미간을 희끄무레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아래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어 동공에 자잘한 가루를 뿌려 놓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침울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오늘 일은 너희들 책임이 아니다. 너희는 빈틈없이 내 명령을 따랐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난 너희가 정말 자랑스럽다." ===================================================================제 목 [달의 아이] 55장.은령의 밤-2===================================================================무성하게 드리워진 넝쿨사이로 잔뜩 녹이 슨 철문이 나타났다. 철문에 달라붙은 기사 세 명이 낑낑대며 문을 밀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빨리빨리 하지 못하고!"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서서 기사들을 감독하고 있던 사제가 역정을 냈다. 기사들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뻑뻑한 철문이 별안간 활짝 열리자 기사 한 명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이렇게 한심하니 문하나 여는 것까지 내가 일일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바쁜 내가 꼭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 아무튼 난 들어가 볼 테니 너희는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그리고 내가 시킨 그대로 빈틈없이 실행해라." "알겠습니다, 사제님." "횃불은 절대 꺼뜨리면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예, 사제님. 명심하겠습니다." "이거야, 뭘 믿고 맡길 수가 없으니..." 혀를 차며 기사들을 노려보던 사제가 휙 몸을 돌려 안쪽으로 바삐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길! 우리가 횃불에 오줌이라도 갈길 줄 아나? 대체 왜 저렇게 난리를 부리는 거야? 이거야 원 더러워서!" 기사 한 명이 사제가 사라진 쪽을 향해 침을 퉤 뱉었다. "누가 아니래? 요 며칠동안 얼마나 사람을 들들 볶는지 환장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나마 자네들은 덜한 거야. 꼼짝도 못한 채 문앞에 멀뚱히 서 있어야 하는 처량한 신세는 아니었잖아." "하루종일 서 있는 건 우리도 매한가지였어. 그것도 찬바람 부는 밖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어야 했단 말이야." "난 추위는 둘째치고 다리가 아파 죽는 줄 알았다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투덜거리던 기사들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자네가 지키고 있던 방안엔 누가 갇혀 있었던 거야?" "나도 그게 가장 궁금했는데...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것도 다 그 정체불명의 죄수 때문이잖아." "뭐, 죄수? 그 방에 죄수가 갇혀 있었단 말이야? 대체 그 말은 어디서 들었어?" "문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던 사람이 누군데 그걸 나한테 물어?" "어서 대답이나 해 봐." 기사가 재촉하며 앞으로 다가들었다. "어디서 들은 게 아니라 그저 내 추측이야. 생각해봐, 죄수가 아니라면 왜 하루종일 문 앞에다 기사들을 세워 놓았겠어? 아마 내 생각이 틀림없을걸?" "그건 자네가 그 방을 못 봐서 그래. 폭신한 침대와 크고 작은 안락의자, 책상과 식사를 위해 놓여진 탁자, 심지어는 장식장까지... 아무튼 없는 거 없이, 그것도 최고급으로 꾸며진 방이더라고. 흘긋 본 거긴 하지만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니까. 그런데 죄수한테 그런 방을 쓰게 하겠어?" "그것도 그렇네. 그럼 내 생각이 틀린 건가? 사실 난 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중죄인이 우리 신전에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뭐? 말도 안 돼!" "그래, 정말 말도 안 된다! 그런 중죄인이 코벨같은 시골 구석으로 보내 질 것 같아?" 동료들의 타박에 기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 말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건 아니야. 사실 바드리오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이 바로 여기잖아. 더군다나 지금은 디우스 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시기란 말이야. 디우스 강을 건너 가면 황궁까지 반나절도 안 걸릴걸? 반나절이 뭐야? 운만 좀 따른다면 반의 반나절도 안 걸릴 거다."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죄인이 이곳에 있을 것 같진 않아. 사실 멀쩡한 바드리오 신전을 두고 왜 코벨에 그런 중죄인을 보내겠어? 바드리오라면 여기보다 수십, 아니, 수 백배는 더 잘해 놨을 텐데 말이야. 보안이나 경비도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테고." "아무튼 이러쿵저러쿵해도 보통 사람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그래, 맞아.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으슥한 곳에 이 모양 이 꼴로 있는 거 아니겠어? 자네들도 우리 신전에 이런 뒷문이 있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지?" 기사들이 처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잘 들어봐! 혹시 이거..." "그래, 맞아! 난 빨리 들어가 보고할 테니 자네 둘은 어서 횃불을 흔들라고! 워낙 외진 곳이라 잘못하면 입구를 못 찾고 그냥 지나칠지 모르니까!" "그래, 알았어. 어서 가 봐!" 기사 한 명이 신전을 향해 헐레벌떡 내달았다.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서둘러 철문 밖으로 뛰어가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작은 마차가 기사 여섯 명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속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철문을 통과했다. "됐다, 성공이다! 이제 저 마차가 다시 이 곳을 빠져나간 뒤 문만 잘 잠그면 우리가 할 일은 끝나는 거겠지?" "그거야 모르지. 다른 명령이 또 내려올지도. 아무튼 자네 말처럼만 됐으면 좋겠어. 어서 한숨 자야지, 이러다간 꾸벅꾸벅 졸다 횃불에 머리가 홀랑 타 버릴 것 같아." "횃불꽂이에 넣어두면 되지. 마차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걸 계속 들고 있을 생각이야? 어여 이리 줘 봐." 횃불을 받아 든 기사가 자신이 들고 있던 것과 함께 횃불꽂이에 꽂아 넣은 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자네도 여기 앉으라고. 워낙 피곤해서 그런지 냉기도는 땅바닥도 포근하게만 느껴지는군." "그러다가 우리 둘 다 잠이라도 들면 어떡하려고?" "잠이 들어도 마차소리에 다시 깨겠지, 뭐." "에라, 모르겠다." 털썩 주저앉은 기사가 팔짱을 낀 채 철문에 등을 기대더니 금세 코를 골기 시작했다. 피식 웃던 다른 기사도 이윽고 고개를 늘어뜨렸다. 요란하게 코 고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듯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두 명의 기사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든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아몬은 참고 있던 말을 속삭였다. "이 곳이 틀림없나 봅니다, 리자드님." 흥분을 못이긴 조금 격앙된 목소리였다. "사실 전 코벨로 가신다는 말씀을 따르면서도 많이 불안했습니다. 엘은 바드리오에 있을 텐데 왜 그런 명을 내리시는 건지... 왜 바드리오를 버리고 코벨을 택하신 건지...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애가 타고 답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엘은 바로 이곳에 있었군요. 전 아시리움에서 엘을 코벨로 보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리자드님께선 아시리움이 어떻게 나올지 이미 예상하고 계셨군요." 리자드를 향하는 아몬의 눈엔 경외감와 신뢰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바드리오일지 코벨일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사실 확률은 반반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드리오엔 다른 조처를 취하셨다는..." 아몬은 며칠 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사일러스를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 네 생각이 맞다." "사일러스가 많이 실망하겠군요. 엘이 이곳에 있는지도, 또 리자드님이 이곳을 찾으신 것도 모를 테니까요. 그런데 엘은... 엘은 괜찮겠지요. 리자드님? 설마 모진 대우나 고문을 받은 건 아니겠지요?" 리자드는 아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마법을 시현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는 것이냐?" 아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곳으로 떠나기 직전 시도해 보았을 때는 놀랄 정도로 강한 마법력이 발산되었지만 지금까지 그게 유지될 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리자드님. 심려치 마십시오." 아몬은 불안을 내색하지 않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태도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리자드가 그에게 날카롭게 시선을 가져갔다. "진심입니다, 리자드님. 저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시거나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아몬은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는군요. 마차가 사라진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말입니다. 설마 무슨 문제가 생긴건 아니겠지요?눈에 보이지 않으니자꾸 불길한 생각만떠오르는군요." "준비해라." 리자드가 짧게 명령을 내렸다. 아몬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넝쿨과 어둠에 반쯤 가려진 철문을 주시했다. 그는 이제 애타는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웅성거림 같던 마차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려왔다. "어이, 일어나! 빨리!" 퍼뜩 눈을 뜬 기사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동료를 흔들어 깨웠다. "뭐,뭐야?" 기사가 화들짝 놀라 등을 세웠다. "어서 일어나라고! 이 소리 안 들려?" 서둘러 움직인 두 사람이 횃불을 손에 들고 철문 양 옆으로 한 명씩 나눠 섰다. 곧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마차와 여섯 명의 성기사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 밖으로 달려 나왔다. "공격하지말고 막아 서기만 해라." "예, 리자드님." 아몬은 환상마법으로 일행 앞에 육중한 벽을 만들었다. 갑자기 하늘까지 솟은 듯한 벽이 나타나자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멈춰라!" 기사들이 능숙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최정예 성기사들은 날카롭게 주위를 견제하며 검을 뽑아 들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모두 제자리에서 마차를 지켜라! 프레스, 저게 무엇인지 확인해라!" 대장 바로 뒤에 있던 기사가 말에서 내려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신중하게 검을 움직여 검끝이 아무 저항없이 벽을 통과한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서자 이번엔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단순한 허상인 것 같습니다, 대장님!" 기사가 몸을 세우며 보고했다. "알았으니 돌아와라!" 부하들이 전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확인한 대장이 주위를 휙 둘러봤다. 그리고 위엄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어딘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다!" 예리하게 감을 곤두세운 대장이 어둠 속의 어느 한 곳을 노려봤다. 그는 바로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귓구멍 크게 열고 똑똑히 들어라! 어서 길을 여는 것이 좋을 거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 만 죽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내 말을 따라라!" 실제가 아닌 환상에 불과했지만 아시리움 종단의 성기사가 장난처럼 세워진 벽을 뚫고 지나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사소한 일로 성기사의 명예와 존엄을 훼손할 수는 없었다. "리자드님..."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몬이 안타깝게 리자드를 불렀다. 하지만 리자드는 대답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는 얼굴을 정면에 고정한 채로 마차 문에 시선을 못박고 있을 뿐이었다. "순순히 길을 연다면 우린 그 즉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열 셀 동안 저 장난감을 없애지 않는다면 아시리움의 이름을 걸고 절대 이 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리자드님, 어서 명을 내려주십시오. 왜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겁니까?" 아몬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장이 위협하듯 더욱 강건한 어조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리자드님, 제발." "길을 열어라." 리자드가 천천히 말했다. "리,리자드님..." 입술을 달싹이던 아몬이 어눌하게 그를 불렀다. "길을 열라고 했다." "리자드님!" "어서!" 아몬을 노려보는 청회색 눈동자가 매섭게 번득였다. "알겠습니다." 아몬은 미칠 듯한 혼란에 휩싸인 채 마법을 풀었다. "어서 출발해라!" 말들이 힘차게 땅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소리가 점점 잦아들어 희미한 흔적만 남았을 때 아몬이 참고 참았던 질문을 꺼냈다. "마차에 엘이 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아니, 그 아이는 마차 안에 있었다." "그런데 왜... 리자드님, 그런데 왜 그들을 그냥 보내신 겁니까?" 애절할 정도로 감정이 복받친 물음들이 연이어 쏟아졌다. "왜 그들을 보고만 계셨습니까? 눈앞에 엘이 있는데 왜 그녀를 구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사지로 떠나 보내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코벨까지 온 이유는엘을 구하기 위해서였잖습니까? 설마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리자드님,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아몬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했다. "그 아이를 구하게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네 말대로 보고만 있다가 허무하게 그 아이를 떠나 보냈다. 하지만 틀린 게 하나있다. 난 그 아이를 구하지 않은 게 아니라 구할 수 없었던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차 둘레뿐 아니라 기사들에게까지 강한 방어막이 쳐져 있었다.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막이." "하지만 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을 하려던 아몬은 자신의 상태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힘없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리자드가 입을 열었다. "느낌으로 알지 못했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증거들이 너무나 확연했다." "눈에 보이는 증거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첫째, 환하게 밝혀진 마차 주위로 작은 벌레 한 마리 모여들지 않았다. 둘째,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튕겨지기라도 한 듯 바깥쪽으로 휘어졌다. 셋째, 그 아래 풀들이 순식간에 말라 죽었다. 넷째, 불빛에 비친 분진들이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마차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고 단순한 증거인 다섯째, 마차와 기사들의 모습이 굴절되어 비춰졌다." "전... 몰랐습니다, 리자드님. 눈앞에 닥친 흥분과 초조가 시야를 막아버려 단 한가지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단 한가지도......" 아몬이 독백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다!" 별안간 소리를 높인 리자드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선이 칼날같이 하얗게 드러났다. 희미한 그림자가 불끈 솟은 목줄기의 힘줄을 비추고 있었다. 아몬은 그제야 리자드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침착한 상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돌아간다." 리자드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그녀가 죽는 걸 볼 수 밖에 없는 겁니까? 리자드님께선 엘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으신 겁니까? 정말 그녀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아몬은 쏟아지려는 물음을 삼키며 힘없이 고개를 꺾었다. "알겠습니다, 리자드님." ===================================================================제 목 [달의 아이] 56장.막다른 길-1=================================================================== "자, 이걸 마셔라." 엘은 불쑥 내밀어진 작은 병을 받아들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한숨을 푹 내쉰 여사제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엷은 동정이 깔려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약이다. 지금쯤 마셔야 내일 처형식 때 약효가 충분히 발휘된다고 하더구나. 네가 그토록 큰 죄를 저질렀는데도 아시리움 성전에서 그 약을 직접 내려 보냈다. 그러니 아시리움의 자비에 감사드리며 그 약을 마셔라. 네겐 정말 다행스런 일 아니냐? 나도 전해들은 거라 잘은 모르지만 어찌나 약효가 뛰어난지 죽음의 순간에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약이라 하더구나." "죽음의 순간에도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약..." 엘은 혼잣말을 속삭이며 병에 담긴 액체를 들여다봤다.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군요. 이 약만 마시면 말이에요." 여사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병 뚜껑을 열었다. "은혜로우신 아시리움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 엘이 병을 기울여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자, 이제 옷을 갈아입어라. 너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서고 싶진 않겠지. 꽤 피곤해 보이는데 옷 갈아입는 건 내가 도와주겠다." "아니오, 제가 직접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제 손으로 갈아입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여사제가 부드럽게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라." "잠시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며 옷을 갈아입고 싶어서 그럽니다." 눈살을 찌푸린 여사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된다. 내일 처형식이 열리기 직전까지 잠시도 혼자 두지 말라는 명이 내려왔다." "잠깐이면,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제발... 제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사제님. 부탁드립니다." 엘의 간절한 말에 여사제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너그럽게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아시리움 성전에서 내려온 명을 거역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제님..." 어둡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좋다, 하지만 네 말대로 잠깐일 뿐이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사제가 밖으로 나갔다. 그 즉시 엘은 침대로 다가가 모포를 집어들고 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곧 격한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엘은 소리를 막기 위해 얼굴을 모포에 묻었다. 빈 위장을 채웠던 약물이 쏟아지며 얼굴을 적셨다.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울컥하며 다시 토악질이 시작됐다. 거친 돌로 문지르기라도 하듯 목과 가슴 전체에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웃으며 죽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두려워도 아픔조차 느낄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죽음을 맞진 않으리라. 내일이면, 아니, 고개를 드는 순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엘은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바로잡고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시트자락을 적셨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토사물의 흔적을 말끔히 닦았다. 모포와 시트를 뭉쳐 침대 아래로 깊숙이 밀어넣는 손길이 바르르 떨려 왔다. 엘은 서둘러 옷을 훌훌 벗은 다음 말끔하게 접힌 옷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마지막 단추로 손을 가져갔을 때 문이 열리며 사제가 들어왔다. "이만하면 충분했을 거다. 그래, 옷도 갈아입었구나. 잘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테니 그 동안만이라도 편히... 그러니까 내 말은......" 마음이 불편해진 사제가 말을 끝맺지 못하자 엘이 조용히 그 뒤를 이었다. "예, 편히 쉬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안쓰러움이 담긴 사제의 눈길을 받으며 얌전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사제가 슬그머니 한숨을 흘리더니 침대 위에 앉았다. 피곤한 듯 몇 번 하품을 하던 그녀는 급기야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엘은 그녀의 깊은 숨소리를 들으며 잔인한 시간들을 하나하나 흘려보냈다. "실패했다고?" "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자일스가 마체라타를 향해 돌진하듯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뒷목을 휘어 감아 얼굴이 부딪칠 정도로 바짝 끌어당겼다. 마체라타는 광포하게 이글거리는 자일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라." "아시리움에게 당했습니다. 마차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럼 그 놈은 어디 있는 거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황궁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건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시리움을 제외하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장소에 갇혀 있겠지요." 자일스가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오늘밤 떠나기 전 네 입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느냐? 네가 그 건방진 입을 놀려 한 호언장담을 기억하느냐?" "예, 기억합니다." 마체라타는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하며 목덜미를 파고드는 난폭한 손을 뿌리쳤다. "제가 경솔했다는 건 저도 압니다. 또 전하를 실망시켜드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전하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진 않겠습니다."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진 않겠다고? 뭘 잘했다고 그 따위 말을 지껄이는 거냐? 일을 망친 주제에 뭘 잘했다고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냐?" "제 잘못은 아시리움을 과소평가했다는 것 하나입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따라서 제 잘못을 인정하긴 하겠지만 눈물 흘리며 속죄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일스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가 급기야 마체라타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전하, 전 전하께서 절 필요로 하시는 그 날까지 전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마음이 변치 않을 정도로 인내심이 많진 않습니다." 짙어진 초록빛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를 꿰뚫듯 노려봤다. 팽팽하게 대치된 침묵이 흐른 뒤 자일스가 손을 내려 마체라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마체라타. 네 앙큼한 협박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네게 폭력을 휘두르진 않겠다. 하지만 앞으로는 네 운을 너무 맹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마체라타가 살포시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전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마체라타의 볼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던 자일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어 젖힌 그는 옆에 서 있는 시종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안으로 낚아챘다. 시종이 바닥으로 거칠게 넘어졌다. "어,어이쿠! 전하! 왜 그러시는." 시종의 복부로 자일스의 발이 날아와 꽂혔다. 시종이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자일스는 울부짖는 시종에게 계속해서 무자비한 발길질을 가했다. "전하,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시종이 애원하며 자일스를 피해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자일스는 그를 따라가 머리채를 잡아 올린 다음 공포에 질린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연거푸 주먹을 휘두르던 자일스가 손아귀의 힘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피투성이 얼굴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창백한 낯빛으로 문가에 서 있던 다른 시종들에게 자일스의 시선이 날아갔다. 놀란 그들이 몸을 흠칫했다. "이 놈을 데려가 치료받게 해줘라." "알겠습니다, 전하." 시종 세 명이 축 늘어진 동료를 들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이제 기분이 풀리셨습니까?" 마체라타가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한 자일스가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이제 조금있으면 날이 밝아올 테니 전하께서도 어서 침소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개운한 기분으로 내일 처형식에 참석하려면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지. 내 손으로 직접 응분의 벌을 내리진 못하겠지만 놈이 불에 타며 몸부림치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너무 시시하게 숨통이 끊어진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볼만 할 것 같긴 하다. 그걸 위안으로 삼고 네 말대로 난 이만 침소에 들겠다." "편히 쉬십시오, 전하." 마체라타는 자일스의 등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일스가 침실 문을 닫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여기저기 피가 고여있는 바닥을 둘러봤다. "피투성이 방이라... 난폭하고 더러운 짐승의 우리같군. 그렇다면 짐승의 비위를 맞추는 나는 하찮은 먹이인가, 아니면... 현명한 사육사인가?" 마체라타가 진한 조소를 드러냈다. "두고 보면 저절로 알겠지. 원하지 않아도 답이 보일 테니까." "일어나시게." 니제르 대사제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던 여사제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점잖게 말했다. 눈살을 찌푸린 사제가 성가시다는 듯 입속말로 투덜대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니제르 대사제는 몇 번 혀를 찬 다음 한발 뒤에 서 있는 고위사제를 돌아봤다. "대체 이 사제 이름이 뭔가?" "시스티나 사제입니다, 대사제님." 고위사제가 공손히 대답했다. "시스티나 사제!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는가?" 고함이라도 지르듯 니제르 대사제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눈을 번쩍 뜬 시스티나 사제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뭉쳐진 시트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 한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로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대,대사제님,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해서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든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바짝 조아린 머리를 보며 그럭저럭 노기를 가라앉힌 니제르 대사제가 조금 뚱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히 우려할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은 것 같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네. 하지만 임무에 불성실한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면, 그땐 이번 일까지 더해 톡톡히 잘못을 묻겠네. 알아들었는가, 시스티나 사제?"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사제님.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사죄 올리겠습니다." "됐으니 그만하고 일어나게." 니제르 대사제가 정렬해 있는 열 두명의 성기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스티나 사제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나가 봐라. 또 사제들도 자릴 좀 비켜 주게." 다섯 명의 고위사제들이 불편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완곡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저... 대사제님. 저런 중죄인이 있는 방에 어찌 혼자 남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시스티나 사제가 있긴 하지만 그러다 만에 하나 불상사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명을 내리시는 겁니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저 아이가 날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인가 보군. 하지만 저 아이를 좀 보게. 내 눈엔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데 어찌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사제와 기사들의 시선이 엘에게 몰려들었다. 그녀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살피던 고위사제의 얼굴에 수긍의 빛이 나타났다.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여전히 눈엔 근심이 담겨있었다. "겉모습은 약해 보여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놈입니다, 대사제님. 사납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말이 바드리오 신전에 파다합니다. 리아잔 제국의 왕태자 전하께서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으실 뻔 했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부탁드리옵건데, 물러가라는 명을 재고해주십시오, 대사제님." 엘을 바라보는 니제르 대사제의 얼굴엔 어느새 꺼림칙한 불안이 어려있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뒷짐을 진 채 기사들을 훑어보던 니제르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거기 맨 뒤의 기사 두 명은 남아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이제 됐을 테니 사제들도 어서 자릴 비켜 주게나." 기사들과 사제들도 부랴부랴 문을 나섰다. 니제르 대사제가 근엄한 얼굴을 두 기사에게 향했다. "이곳에서 들은 얘기는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 만약 단 한마디라도 새어 나간다면 중죄로 다 스리겠다. 알겠느냐?" "예, 대사제님.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들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니제르 대사제는 조금 의심쩍은 눈길로 그들을 바라본 다음 시스티나 사제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창백하게 질려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아까 일을 다시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니까. 그저 몇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게 있는 것 뿐이네." 니제르 대사제는 기사에게 시켜 구석에 놓인 의자를 가져오게 한 다음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내려 보낸 오귀스트는 죄인에게 먹였는가?" "예, 대사제님." "틀림없는 거겠지?" 니제르 대사제가 재차 확인하고 나오자 시스티나 사제가 한층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물론입니다. 마시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엘을 흘긋 쳐다본 니제르 대사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자네 눈으로 분명히 봤다면 왜 저렇게 표정이 어두운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약물을 마신 건 분명합니다." "양이 부족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직 약효가 충분히 퍼지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럼 그건 됐고... 이곳에 오는 길에 사소한 불상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상세히 말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하지만 전 죄인과 함께 마차 안에 있었던 관계로 직접 눈으로 보진 못했습니다. 제가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올리자면, 코벨을 막 출발했을 때 앞에 커다란 벽이 나타났다 합니다. 다행히 벽은 단순한 허상이었고 누구의 장난인지는 모르지만 없애라는 말을 순순히 따랐다고 하더군요. 그 이후엔 아무 일없이 이곳 황궁까지 순탄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습니다." 성기사의 보고와 시스티나 사제의 말이 일치함을 확인한 니제르 대사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됐네. 내가 묻고 싶은 건 그 두 가지가 전부였네. 그럼 난 이만 나가 봐야겠군.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또 죄인과 오랜 시간 함께 있느라 노고가 많았네. 이제 잠시 후면 처형식이 열리게 될 테니 조금만 더 수고해 주게." 부드러운 격려의 말에 시스티나 사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에게 점잖은 미소를 지어보인 니제르 대사제가 문으로 향했다. "저, 대사제님... 혹시 법황 성하께서도 오늘 처형식에 참석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걸음을 멈춘 니제르 대사제가 시스티나 사제에게 엄한 시선을 던졌다. "성하의 참석여부를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시스티나 사제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사,사실은... 그저 먼 발치에서나마 성하를 뵐 수 있을까 해서... 주제넘은 질문이었습니다, 대사제님. 죄송합니다." 표정을 누그러뜨린 니제르 대사제가 몇 번 헛기침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질문은 나 역시 궁금해하고 있던 물음이었네. 자리를 마련해 놓긴 했지만 성하께서 참석하실지의 여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네. 성하께서 굳이 이런 자리에 오실 필요까진 없으실 테고, 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일도 아니고... 내 생각엔 성하를 먼 발치에서나마 뵙고 싶다는 자네의 소망이 이뤄지긴 힘들 것 같군. 언제 기회가 되면 성하께 자네 얘기를 한 번 올려 보겠으니 그것으로 섭섭함을 달래보게." "아,아니... 그게... 저..." 니제르 대사제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시스티나 사제에게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문을 나섰다. ===================================================================제 목 [달의 아이] 56장.막다른 길-2=================================================================== "꾸물거리지 마라, 시간이 없단 말이다!" 거칠게 떠밀린 엘은 휘청거리며 눈앞으로 돌진하는 쇠창살을 움켜잡았다. "조심해라! 처형식을 치루기도 전에 피를 보고 싶은 거냐?" 시스티나 사제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기사를 노려봤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네 마음은 알겠다만 굳이 그토록 거칠게 다룰 필요는 없지 않느냐?"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진심으로 후회한다는 듯 기사가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스티나 사제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자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것을 본 동료기사가 조심하라는 뜻으로 그의 팔을 툭 건드렸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냐?" 엘의 어깨에 따뜻한 손이 얹어졌다. "예,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저 기사의 말대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엘은 묵묵히 낮은 단을 올라 입을 벌리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그 즉시 쇠창살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라!" 시스티나 사제가 거대한 철문 옆에 나란히 정렬해 있는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제님!" 엘은 다급히 외쳤다. "이걸 치워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꼭 이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겁니까?" 쇠창살 안에서 짐승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건가요? 시스티나 사제가 엘의 심정을 눈치챈 듯 슬며시 한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네 안전을 위해서도 그 안에 있는 게 나을 거다. 내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다만..." 미안함이 깃들어 있는 말을 들으며 엘은 물끄러미 사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사제님." 울적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던 시스티나 사제가 별안간 흠칫하더니 엘에게 눈길을 되돌렸다. "그 약... 너 설마..." 엘이 타고 있던 수레가 삐걱대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씩 멀어지는 시스티나 사제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활짝 열려 있는 거대한 철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엘은 눈을 꼭 감았다. 수레의 진동을 따라 그녀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듯 엄청난 고함과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귀를 멍하게 하는 사나운 풍랑 속에서 엘은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열어 그녀를 둘러싼 수천, 아니, 수만 개의 얼굴을 대면했다. 입을 크게 벌린 채 무슨 소리인가를 쉴 새없이 외치는 얼굴들. 무섭도록 낯설기만 한 얼굴들은 그녀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난 저 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더러운 자식!" 그녀 또래의 소년이 펄쩍 뛰어올라 쇠창살을 움켜잡으며 침을 뱉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피한 엘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질척한 타액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건가? 가짜왕자 노릇을 했다는 게 그토록 엄청난 잘못인가? 엘은 이를 악물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해도 상관없어. 난 후회하지 않아. 난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리오의 눈이, 그녀만큼이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작은 통증이 일었다. 엘은 그 아픔이 기쁨인지 서러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 쳐죽일 놈!" "죽여라! 사지를 찢어 죽여라!"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라, 이 악귀야!" "뭘 잘 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거야? 이거나 먹어라!" 험악한 고함과 욕지거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들리지 않는 말을 소리치며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리오... 날 보지마... 이런 모습, 이런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너한테 보여 주기 싫어... 제발... 제발 날 보지마...... 정면에서 날아온 침이 볼을 적셨다. 그 순간 엘은 두 손으로 쇠창살을 움켜잡으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돌아가! 어서 돌아가, 바보야! 내가 여기 오라고 했어? 누가 너 보고 싶대? 꼴도 보기 싫어! 어서 가 버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가란 말이야... 제발......" 엘은 숨죽여 흐느꼈다. 리오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에 젖어 들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리오... 이제 나 때문에 울지 마... 나 때문에 아파하지 마......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리오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다. 엘은 무릎을 세웠다. 리오를 찾기 위해, 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높이 치켜세웠다. 하지만 리오는 보이지 않았다. 나 정말 후회 안 해, 리오. 나한테 남겨진 추억 하나하나.... 그게 너무 소중해서 도저히 후회할 수가 없어. 엘은 천천히 몸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처형대를 똑바로 응시했다. 흔들림이 멈췄다. 빗장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나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은 그 말을 좇아 수레에서 내려섰다. 차고 공허해 보이는 처형집행인의 눈이 그녀를 맞았다.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처형집행인이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제단같이 높이 솟은 화형대를 향해 거칠게 그녀를 잡아당겼다. "뭘 저렇게 꾸물거리고 있는지... 화형식은 해가 저물어서야 시작하겠군."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남자를 보며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생글생글 웃었다. "금방 시작하게 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보채는 게 어때요, 기데온?" "보챈다고요?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말이군요, 알린느." 짐짓 인상을 쓰던 기데온이 말을 끝내며 눈을 찡긋거렸다. 알린느가 물방울이 톡톡 튀는 듯한 밝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수가! 알린느,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군요. 제발 평생을 저와 함께 하며 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십시오.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꿇겠습니다." "기데온, 또 시작이군요. 벌써 올해 들어서만 서른 두 번째 청혼이라는 거 알아요?" 알린느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잔인한 말투로 짐작하건대 전 지금 막 서른 두 번째 거절을 당한 것 같군요." "제발 그만해요, 기데온. 기데온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망정이지 몰랐다면 오래 전에 결투라도 신청했을 거라고요." "겨,결투라고요?" 기데온이 과장되게 몸을 떨며 알린느의 반대쪽으로 바짝 붙어앉았다. "제 가련한 심장에 검을 박아 넣겠다는 말입니까?" "이제 그만하고 저거나 봐요, 기데온. 싫다는 날 억지로 끌고 왔으면서 처형식은 보지도 않고 괜한 말장난만 하는군요." "아름다운 알린느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앞쪽으로 고개를 돌린 기데온이 눈을 빛내며 자세를 고쳤다. 두건을 눌러 쓴 두 명의 처형집행인이 죄인을 화형대에 묶으려 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처형식으로 접어들었군요." "그렇네요." 알린느가 한숨섞인 어조로 말을 받았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군요, 알린느. 분위기를 북돋는데 가장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이겁니다." 기데온의 눈짓을 받은 하인이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은쟁반에 받쳐진 술잔을 내밀었다. 미소로 감사를 표한 알린느가 잔을 집어 들었다. "으음... 썩 괜찮군." 술을 한 모금 마신 기데온이 음미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훌륭해. 이런 술은 여럿이 함께 나누며 즐겨야 더 제맛이 나는 건데......" 기데온은 안면이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귀족과 일부 부유층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자리였지만 워낙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드리오를 찾아오는 바람에 온통 낯선 얼굴들만 눈을 스쳐 갈뿐이었다. 고개를 휘휘 돌리던 기데온은 찾기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알린느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 뒤쪽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발견한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기데온, 무슨 일이에요? 아는 사람이라도 본 거예요?" 기데온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는 알린느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왜 그래요?" 알린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곁눈질로 봐봐요. 알린느 바로 뒤에서 왼쪽으로 다섯 번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에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이 아닌 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래요. 기데온 말이 맞을 것 같군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알린느가 귓속말을 했다. "온몸을 가리는 것도 모자라 눈을 제외한 얼굴까지 몽땅 감춘 사람이라니... 대체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 생기지 않아요?" "호기심이 생기긴 하네요. 어디 먼 나라에서 온 대상이 아닐까요? 아니면 단순히 얼굴에 심한 흉터가 생긴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제 느낌으론 그렇게 단순한 사람일 것 같진 않아요. 이거 참,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되겠어요." "뭘 어떻게 하려고요?"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알린느. 내가 저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테니까요. 화형대에 불이 붙기 전엔 임무 완수하고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기데온은 의자에서 일어나 하인의 손에서 술잔 두 개와 병을 집어들었다. "기데온,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알린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인 기데온은 알린느가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와 한잔 하시겠습니까? 낯선 얼굴이 불쑥 와서 말을 거는 바람에 많이 놀라지나 않으셨는지 걱정되는군요. 놀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술맛이 너무 좋아 혼자 마시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유들유들할 정도로 매끄럽게 말한 기데온이 남자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제 마음을 생각하셔서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꺼져라." 남자가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데온은 눈을 껌벅거리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저 지금 뭐라고 하신..." "꺼지라고 했다." 금속성을 띤 은회색 눈동자가 냉혹하게 파고들었다. 남자에게서 전해지는 섬뜩한 공포가 뒷덜미를 낚아채며 솜털을 곤두세웠다. 등뼈를 따라 한기가 퍼지더니 이내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기데온은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얼굴은 핏기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하얗게 질려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린느가 엉거주춤 일어나 그를 맞았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잠깐 현기증이 나서..." 기데온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대충 둘러댔다. 남자의 은회색 눈동자에서 느낀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알린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알린느, 저부터 돌아가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빠르게 중얼거린 기데온은 알린느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데온!" 새된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기데온은 돌아보지 않았다. 알린느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처럼 사람들을 밀치며 걸음을 옮기는 기데온을 근심스럽게 지켜보다 서둘러 따라 나섰다. 억센 밧줄이 살을 파고 들었다. 몸이 떨릴 때마다 밧줄은 더욱 맹렬히 살갗을 후벼파며 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불이 붙으면 밧줄이 조금 느슨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엘은 발작적으로 터지려하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한발한발 광기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미쳐 버리면 좋을 텐데...... 아니, 아니야. 그걸 원했다면 약물을 토해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엘은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난 만들어진 거짓웃음을 원하지 않아. 그걸 버리고 고통과 두려움을 택한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몸에 불이 붙어도... 살갗과 뼈가 녹아 내려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창백한 하늘이 가늠할 수 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흥분을 고취시키기 위한 북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몸을 울리는 진동이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엘은 숨을 헐떡이며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진 구름을 바라봤다. 할머니, 도와주세요. 제 선택을, 제 인생을 후회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후회를 되씹으며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제가 견딜 수 있을 정도만... 아프게 해주세요. 울림이 멈췄다. 보지 않아도 그녀 앞에 이글거리는 횃불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엘은 눈을 꼭 감았다. 두려움 섞인 현기증이 났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빨려 드는 것 같았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무칙칙한 재들이 불꽃을 타고 올라와 엘을 둘러쌌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루드비히, 이제 시간이 없어요. 난 아직도 무서워요, 루드비히... 내게 힘을 줘요... 루드비히는 뭐든지 알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열기가 느껴졌다. 소름끼치는 불꽃의 속삭임이 머리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엘은 번쩍 눈을 떴다. 불그스름하게 물든 하늘에서 죽음의 냄새가 맡아졌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엘은 몸을 뒤틀며 소리없는 비명을 토해냈다. 리자드! 이 나쁜 사람! 어디 있어요? 여기 있나요? 지금 날 보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날 좋아했나요?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불꽃의 열기가 얼굴을 적신 눈물을 탐욕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처형집행인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과장된 몸짓으로 횃불을 들이댔다. 그러자 기름 배인 나무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화형대 끄트머리에 불이 옮겨졌다. 주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흥분에 찬 고함과 탄성을 터뜨렸다. 몸을 돌려가며 서너 군데 더 불을 붙인 처형집행인이 탁한 연기 속으로 들고 있던 횃불을 던져 넣었다. 불이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하자 점잖을 빼던 귀족들도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며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그 소란 한가운데 딱딱하게 경직된 루드비히가 있었다. 그는 연기 속에서 보일듯 말듯 아른거리는 엘에게 시선을 못박은 상태로 의자에 고정되어있었다.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의자 팔걸이를 틀어쥔 채 가늘게 경련하는 손가락밖에 없었다. "불이 붙었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마치 자신의 몸에 불이 붙기라도 한 듯 루드비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엘이 어둡게 물든 은회색 눈동자 속으로 투영됐다. 악 다문 입술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순간 화형대 위에 거대한 막이 드리워졌다. 번쩍하는 섬광이 작렬하더니 하늘을 점령한 푸르스름한 빛이 꿈틀거리는 불꽃을 향해 곧장 내려앉았다. 빛은 눈 깜짝할 사이 허공에 희미한 반조(返照)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불씨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반쯤 탄 화형대가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완벽한 고요가 주위의 모든 것을 침묵시켰다. "시간이 없는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칼 베리만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더 이상 초조감을 참을 수 없게 되자 마차 창문을 열어 젖히고 크게 소리쳤다. "어서 서두르게! 대체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가?" "길이 막혔습니다, 각하. 처형식에 가려고 한꺼번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마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길을 알아보라 시켰으니 조만간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각하!" 호위기사 맥노트가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는 보고를 하는 내내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말과 사람들 때문에 계속해서 비틀거려야 했다. "알았네. 막중한 일이 있으니 최대한 빨리 황궁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게.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각하!" 칼 베리만은 창문을 닫고 몸을 바로잡았다. "좀 더 빨리 출발했어야 하는데..." 사실 그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보통 때보다 두 배 정도의 여유시간을 갖고 저택을 나섰다. 하지만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그의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수였고, 그 결과 이렇게 오고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길 한복판에 잡혀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조금만 더 서둘렀어도 이런 처지가 되진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자책의 말을 중얼거리던 칼 베리만은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그 때 마차가 덜컥하며 크게 흔들렸다. 그는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아차하는 순간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마차 문을 벌컥 연 호위기사가 칼 베리만을 부축해 의자에 앉는 걸 거들어주었다. "무슨 일인가?" "옆을 지나던 수레가 마차에 부딪쳤습니다. 그 충격으로인해 마차 바퀴가 파손되고 말았습니다." "뭐, 뭐라고? 그럼 마차가 못쓰게 되었다는 말인가?" "지금 마차 바퀴를 갈고 있습니다, 각하.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아니, 안되겠네." 칼 베리만은 단호하게 호위기사의 말을 끊었다. "예에?" "여기서 이렇게 허송세월할 수는 없단 말일세." "그럼 어찌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맥노트, 자네 말 좀 빌려야겠네." 칼 베리만은 뻣뻣하게 서 있는 호위기사를 지나 서둘러 땅에 발을 디뎠다. ===================================================================제 57장. 하나의 진실=================================================================== "어서 다시 불을 붙여라!" 거칠게 갈라진 고함이 터져나왔다. 눈앞에서 일어난 믿기 힘든 광경에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초고위층들을 위한 귀빈석으로 집중됐다. "뭣들 하는 거냐? 내 말을 거역하는 거냐? 어서 불을 붙이란 말이다!" 자일스가 더욱 사납게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처형집행인은 아시리움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직 아시리움의 명령만을 따라야 합니다." 보르헤스 대사제가 놀라 울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시리움의 명령만을 따른다고요? 그래서 일개 처형집행인이 제 말을 무시하는 게 타당하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자일스가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어서 답변해 보시오, 대사제. 몹시 궁금하군. 그런 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의 말은 무슨 뜻이었소?" 황제인 마르키젤까지 끼어들자 보르헤스의 이마에 진땀이 배기 시작했다. 이제 막 대사제의자리에 오른 그로서는 리아잔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을 잡을수 없었다. 또한, 이런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 나갈 수 있는 대처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난감해 안절부절못하던 보르헤스는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옆에 앉은 니제르 대사제에게 던졌다. "니제르 대사제, 뭐라 말씀 좀 해주십시오." 보르헤스가 바라는 도움의 손길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니제르 대사제는 핏기가 가실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문 채 오직 화형대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니제르 대사제, 어디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 "이런 변괴가... 이런 변괴가 있다니..." "갑자기 화형대의 불이 꺼져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기괴한 일인 건 사실이지만 갑자기 세찬 역풍이 불었을수도 있고, 아니면, 불로 인해 대기에 급격한 변화가 생겨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니제르 대사제가 보르헤스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화형대 주변엔 보호막이 둘러싸져 있었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 여덟 명이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보호막을 쳤단 말이오." "니제르 대사제, 말씀을 삼가십시오!" 놀란 보르헤스가 버럭 소리쳤다. 그제야 자신이 아시리움의 극비를 입 밖에 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니제르 대사제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서 일순 핏기가 빠져나갔다. 리아잔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기어 들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저... 제 말은 못 들으신 걸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사제는 이게 애들 장난으로 보이오?" 마르키젤이 눈을 부라렸다. "조금 전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시든지 저 우스꽝스러운 처형식을 바로잡으시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사제님들. 지금도 아까운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일스의 빈정거림에 두 대사제들의 얼굴에 슬며시 불쾌감이 나타났다. "어서 다시 진행시켜라!" 보르헤스 대사제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고위사제가 머리를 숙였다. 그가 처형집행인에게 간단한 고갯짓을 하자 북소리가 다시 공기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맞춰 횃불을 치켜든 처형집행인이 화형대가 놓인 계단을 올랐다. "이것 하나만 약조해 주십시오, 대사제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경계심을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묻는 보르헤스를 향해 자일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 다시 한 번 변괴가 일어나 불이 꺼진다면 죄인의 목숨을 제게 넘어주십시오. 리아잔의 황궁을 제공하는 대가로 제가 요구한 것. 기억 나십니까?" 난처해진 두 대사제가 서로를 마주봤다. "뒷문으로 은밀히 넘겨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손으로 죄인을 처단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망설이던 니제르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부족한 저이지만 아시리움을 대표하여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미 한 번 전하와의 약조를 어긴 마당에 어찌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 다시 한 번 불이 깨졌을 때라는 단서가 붙겠지만 말입니다." 니제르 대사제는 수락의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불만스럽게 얼굴을 찌푸린 자일스가 화형대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 옆에 대기하고 있던 처형집행인이 반쯤 탄 나무더미에 기름을 뿌리고 있었다. 그 위에 매달린 죄수는 정신을 잃었는지 머리를 떨군 채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름이 충분히 배어들자 횃불을 든 처형집행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불을 붙이려 했을 때 요란하던 북소리가 별안간 사라졌다. 주춤거리던 처형집행인이 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찢겨져 너덜거리는 북 앞에 검을 뽑아 든 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칼 베리만과 함께 방금 말에서 내린 호위기사 맥노트였다. 칼 베리만은 맥노트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던진 후 처형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저 늙은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자일스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식을 진행시켜라!" 성질을 못 참은 자일스가 크게 외쳤을 때, 뒤를 이어 칼 베리만이 근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멈춰라! 화형대에 작은 불씨 하나 떨어뜨린다면 널 참형으로 다스리겠다!" 움찔한 처형집행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재상, 무슨 이유로 아시리움 종단의 일을 방해하는 겁니까?" 니제르 대사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의 어조엔 노기보다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전 리아잔 제국의 재상이 아닌 예언자로서 이 자리에 선 것입니다." 웅성거림이 급속도로 커졌다. "조용!" 마르키젤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재상, 그럼 예언을 하기 위해 처형대에 오른 거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예언 따위야 나중에 해도 충분하지 않소?" 자일스가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내려쳤다. "자일스." 마르키젤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일스에게 엄중한 시선을 던졌다. 찔끔한 자일스가 마지못해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말이 지나쳤소, 재상." "아닙니다, 전하. 제가 처형식을 중단시킨 이유로 내민 예언이란 말이 납득하기 힘드시리란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의 내용을 알게 되시면 이럴 수밖에 없었던 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아들었으니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어서 그 예언이란 걸 발표하시오." "알겠습니다." 정면을 향해 선 칼 베리만이 숨을 크게 들이 쉰 다음 쩌렁쩌렁 울리는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나,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의 이름과 영혼을 걸고 내 생애 서른 번째 예언을 발표하겠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내 예언의 증인이 될 것이오!" 칼 베리만은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더 한층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예언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위대한 리아잔 제국의 피를 이어받은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나리라! 그래서 리아잔의 이름을 더욱 찬란하게 빛내리라!" 청천벽력같은 선언이 거친 탁류처럼 주위에 모인 수만 명을 휩쓸었다. "뭐... 뭐라고... 뭐라고?" 눈을 부릅뜬 채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마르키젤이 거칠게 속삭였다. 그의 말은 자일스에게만 겨우 들렸을 뿐 칼 베리만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여기 처형대에 묶여 계신 분은 거짓 왕족도, 아시리움의 죄인도 아니오! 리아잔 제국의 전 황제이셨던 페르가몬 폐하의 따님이신 엘리시엔 마그누스 차르 드 칼리트라바 전하시오!" "페르가몬의 딸..." 입속말을 중얼거리던 마르키젤이 벌떡 일어서며 서슬 퍼렇게 소리쳤다. "그 아이는 죽었어! 태어난 지 한 달만에 죽었다고!" "저도 지금껏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폐하. 바로 오늘 새벽까진 말입니다." 칼 베리만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일스가 악을 써댔다. "거짓말! 저 놈은 더러운 죄인일 뿐이야! 천하디 천한 버러지일 뿐이라고!" "말씀을 삼가십시오, 전하!" 칼 베리만이 꾸짖듯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 베리만을 노려보던 마르키젤이 거친 숨결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재상이 죄인이 아니라 주장하는 저 아이는 사내아이요. 물론 엘리시엔은 당연히 여자아이였고. 말이 된다 생각하오, 재상? 어떻게 설명하겠소?" "폐하께선, 아니,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잘못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분의 성별을 감히 입에 담진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이 분은 분명히 엘리시엔 전하시고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시라는 것. 세상에 단 한 분뿐인 유일한 달의 아이시라는 것 뿐입니다." 칼 베리만의 침착한 어조엔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좋소, 칼 베리만. 훌륭한 헛소리 잘 들었소. 내 언제까지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일 수 있을지 두고 보겠소." 물어뜯을 뜻 뱉어낸 마르키젤이 자일스를 돌아봤다. "따라오너라, 자일스!" 칼 베리만은 사납게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에게서 대사제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분께서도 제 예언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제가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재상. 아시리움 종단의 입장은 차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신중한 태도를 보인 보르헤스 대사제가 몸을 세웠다. "어차피 처형식의 진행이 불가능해졌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물론 바드리오에 있는 신전으로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마당에 성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일어나십시오, 니제르 대사제." 니제르 대사제는 걸음을 떼는 보르헤스 대사제를 따라 발을 내딛으려다 충동적으로 본심을 내보였다. "그 예언을 믿는다 안 믿는다, 단정해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선 사실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베리만이 점잖게 답례했다. "제 말은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재상."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는 듯 니제르가 대사제가 꺼림칙한 기색을 내보였다. "알겠습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으음...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용감하신 예언자님." 칼 베리만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채 니제르 대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신이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라 크게 외쳤다. "어서 엘리시엔 전하를 뫼셔라!" "이 일을 어떻게 합니까?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아버님, 뭐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정신없이 융단 위를 걸어다니던 자일스가 마르키젤을 향해 격렬하게 팔을 흔들었다. "진정해라, 자일스. 그렇게 날뛴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없어지기라도 하느냐?" 극도의 초조와 흥분에 몰려 있는 자일스와 달리 마르키젤은 이제 웬만큼 냉정을 찾은 상태였다. "진짜 그 놈이 페르가몬 황제의 핏줄이라면 전 어찌되는 겁니까? 이대로 물러나야 되는 겁니까? 놈이 리아잔을 차지하는 꼴을 이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겁니까?" "자리에 앉아라, 자일스" 마르키젤이 위엄을 담아 명령하자 자일스가 마지못해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제 질문에 답해 주십시오." "좋다, 자일스. 그 아이가 진짜 달의 아이가 맞다면 넌 결코 리아잔의 황제가 될 수 없다." "아버님!" 마르키젤이 손을 들어 자일스의 말을 막았다. "최악의 경우 나 또한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자일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건...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 오직 그거 하나다. 자일스, 넌 그것만 명심하고 있으면 된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마르키젤이 입귀를 비틀어 올렸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야노쉬 공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이 도착하면 보고하지 말고 즉시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던 마르키젤은 침착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야노쉬 공작은 아르벨라 황녀와의 혼인을 앞두고 있었지만 쉰 한살인 마르키젤보다도 다섯 살이 더 많았다. 그는 느슨해 보일 정도로 긴 팔과 다리를 늘어뜨리고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다녔는데, 그 때문인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물론 거기엔 외모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야노쉬 공작은 간단히 말해 볼품없이 생긴 사람이었다. 완전히 세어버린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두피가 훤하게 드러나 보였고, 길쭉한 얼굴엔 심한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또 탁한 잿빛 눈은 쏟아질 듯 불룩 튀어나왔으며 두툼한 입술은 커튼처럼 늘어져 화가 나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뿐 아니라 탄력을 잃은 지 오래인 턱살은 억지로 달아놓은 고기덩어리처럼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곤 했다. 마르키젤이 야노쉬 공작을 자신의 사위로 결정한 이유에 그의 외모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건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수 있는 사실이었다. 외모는 보잘 것 없었지만 야노쉬 공작은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하곤 리아잔 제국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약소국의 왕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웬만한 나라의 국왕조차 그를 만나면 아부의 말을 늘어놓기 바빴다. 하지만 마르키젤이 그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재력에 있었다. 그는 마르키젤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재력가였다. "폐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황급히 출발했는데도 이제야 폐하를 배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인사말은 필요없소, 공작.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오." "예, 폐하." 공작이 자일스와 나란히 자리잡았다. "오늘 공작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요." "조금은 그렇습니다, 전하." "야노쉬 공작, 어떻게 하면 그 늙은이의 예언을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겠소?" 마르키젤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 곳으로 오면서 그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았습니다, 폐하. 그리고 고민할 필요도 없는 하찮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자일스가 와락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게 정말이오? 무슨 방법이 있다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자일스, 넌 끼어 들지마라. 잠자코 옆에서 듣기만 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자일스는 야노쉬 공작의 말을 빨리 듣고 싶은 마음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어서 말해 보시오, 공작." "예, 폐하. 사실 말씀드릴만한 것도 없습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말썽거리는 오직 칼 베리만 의 예언 하나뿐입니다. 즉, 그 어떤 증거나 증인도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생각해 낸 방법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칼 베리만에게 증거를 요구하십시오, 폐하. 진짜 달의 아이가 틀림없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대라 명령하십시오. 단, 따로 불러서 내리시는 명이 아니라 공식적인 황명으로 발표하셔야 됩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 아이가 진짜라 해도 증거가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말이오, 공작. 예언자로서 그 늙은이의 명성은 지나칠 정도로 높소. 더군다나 지금까지도 페르가몬을 추앙하는 자들이 곳곳에 널려 있단 말이오. 귀족은 물론 평민들까지. 그러니 예언을 입증하라는 황명은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거요." "물론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하셔야 됩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칼 베리만이 내세운 달의 아이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입니다. 페르가몬 폐하를 추종하는 자들이라 해도 아직 스무 살도 안된 소녀에게 리아잔 제국을 맡긴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다음 황위를 잇게 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뭐라고? 그럼 내 자리를 내주란 말이오, 공작? 지금 그렇게 말한 거요?" 자일스가 발끈해 목소리를 높였다. 야노쉬 공작의 잿빛 눈에 살짝 경멸이 스쳐갔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하. 전 그저 사실을 말한 것 뿐입니다. 우선 급히 꺼야 할 불은 황제폐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만 확실히 잡을 수 있다면 그 다음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을 겁니다." "공작의 말이 옳다, 자일스. 계속해 보시오, 공작." "사실 워낙 막중한 일이라 어느 쪽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갈팡지팡하는 귀족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또한 페르가몬 폐하와 칼 베리만의 예언을 추종하는 자라해도 쉽게 마음을 결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귀족들은 어떤 계층보다 보수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근히 마음이 불안해진 마르키젤이 몸을 구부렸다. "하지만 만약 그 아이가 달의 아이라는 증거가 있다면 큰 일이지 않소?" "심려하지 마십시오, 폐하. 만약 증거가 있었다면 칼 베리만은 수만의 시선이 몰려있던 처형대에서 밝혔을 겁니다. 그보다 더 훌륭한 장소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어림짐작만 믿고 마음을 놓고 있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일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제가 자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폐하. 우선 가장 먼저 하셔야 할건 그 소녀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키는 일입니다. 오늘 일로 많이 다쳤을 테니 치료와 요양을 위해서란 그럴듯한 명분은 이미 준비돼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칼 베리만입니다, 폐하.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셔야 됩니다. 물론 이미 아 시겠지만 그 소녀에게도 감시를 붙여야 합니다. 혈혈단신으로 황궁에 들어왔으니 그 소녀에겐 눈치 빠른 시종과 시녀 몇 명을 붙여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칼 베리만을 못 만나게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긴요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마르키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다음으로 해야 될 일은 뭐요?" "조금 전에 말씀 드린대로 칼 베리만에게 예언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십시오. 물론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시간은 그럭저럭 넉넉히 주셔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엔 저와 아르벨라 황녀님의 혼인식까지 말미를 주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마르키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혼인식은 보름이나 남았지 않소? 한 오일 정도만 주어도 충분할 텐데 왜 그리 길게 잡는 거요?" "폐하, 사실 보름은 최소한으로 잡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불필요한 반발은 되도록 피해야 합니다." "알겠소, 공작과 아르벨라의 혼인식까지." 마지못해 받아들인 마르키젤이 털썩 등을 기댔다. "내 그 재상 놈을 예전에 제거했어야 하는데!" "보름만 참으십시오, 폐하." "그게 무슨 뜻이오, 공작?" 마르키젤이 귀가 솔깃한 얼굴로 재빨리 물었다. "보름 후 증거를 내밀지 못하면 거짓 예언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칼 베리만을 처형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거기엔 그 소녀도 포함되어 있겠고요." 자일스가 철썩 허벅지를 내려쳤다. "맞아! 그러면 되겠군요!" "마침 제 혼인식이 열리는 날이니 각국의 권력자들이 리아잔의 황궁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무대는 찾기 힘들 것입니다, 폐하." "그래, 그 말이 맞소!" 마르키젤이 흡족한 웃음을 터뜨리자 야노쉬 공작도 답례의 미소를 건넸다. "과연 공작은 다르오. 공작의 말을 듣고 나니 노기도 근심도 다 날아간 것 같소. 내가 사위 복은 있는 모양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저 역시 이젠 그리 근심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자일스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말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두려워 할 일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솔하게 처리해선 안 되는 문제입니다. 명심하셔야 됩니다. 상대는 페르가몬 폐하의 따님일지도 모르는 소녀입니다. 어쩌면 진짜 달의 아이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아까부터 그 말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던데, 그 달의 아이란 무슨 뜻이오? 대체 뭘 말하는 거요?" 야노쉬 공작이 자일스를 향해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역시 전하께선 나이가 어리신 관계로 모르고 계시는군요." 어리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자일스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불쾌감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기 때문에 입을 열진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 나온 김에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도 리아잔 제국의 상징이 달과 바람이라는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이건 좀 엉뚱한 말이지만 반면 아시리움 종단은 태양과 불꽃이지요. 상반되는 이미지라 전부터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설하고, 달과 바다의 신이 리아잔을 세웠다는 전설 때문에 상징이 그 두 개가 되었다는 것도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또 페르가몬 폐하께서 전설의 제왕, 시조(始祖)의 현신(現身)으로 불리셨다는 말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페르가몬 폐하께선 달과 바람의 현신이라는 말을 들으실 때마다 그저 재미있는 우스갯소리정도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황후께서 수태를 하시자 복중태아를 달의 아이라 부르겠다는 황명을 공표하셨습니다. 곧 그 황명은 리아잔은 물론 타국에까지 널리 퍼져 황후께서 출산을 하셨을 땐 달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야노쉬 공작이 입을 다물자 자일스가 비꼬는 말을 꺼냈다. "공작은 그 때가 절절히 그리운 것 같소. 그윽해 보이는 눈빛도 그렇고, 페르가몬 폐하, 폐하하며 공경을 담아 말하는 것으로 봐도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제가 페르가몬 폐하를 공경한다는 전하의 말씀은, 죄송하지만 어불성설입니다. 한때 리아잔 제국의 황제이셨던 분을 존칭없이 거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실성한 나머지 부인과 어린 딸을 자신의 손으로 살해했다는 말까지 들으시는 불쌍한 분을 말입니다. 이제 오해가 풀리셨습니까, 전하? 자일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렇소." 야노쉬 공작이 한층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페르가몬 폐하께 갖고 있는 감정은 경멸과 약간의 연민일 뿐입니다." ===================================================================제 목 [달의 아이] 57장.하나의 진실-2=================================================================== "정신이 드십니까?" 눈을 가늘게 뜬 엘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칼 베리만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가 아는 분과 너무 똑같아요. 칼 베리만이시라는 분인데... 얼마나 좋은 분인지 몰라요. 죽어서 칼 베리만과 똑같이 생긴 분을 만날 줄 알았으면 그렇게 무섭진 않았을 거예요." "엘은 죽지 않았습니다. 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한건 약 기운 때문입니다." 칼 베리만은 측은한 눈으로 진갈색 약초즙을 바른 화상자국을 바라봤다. 화상의 흔적은 손과 팔, 다리는 물론 엘의 머리카락과 볼, 또 목에도 선명하게 나있었다. "내가 죽지 않았다고요? 그럼 칼 베리만도 진짜 칼 베리만이겠네요." 자신의 말이 우습게 느껴지는지 엘이 약한 웃음을 흘렸다. "반가워요, 칼 베리만. 다시 만나서 정말... 정말 기뻐요." "저도 기쁩니다, 엘.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하마터면 엘을 구하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칼 베리만은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여긴 어디예요? 칼 베리만의... 저택인가요?" "아니오, 아닙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신 후 알게 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때까진 그저 편히 쉬십시오." 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 너무 졸려워요... 자고 싶어요... 칼 베리만......" "아무 생각 마시고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엘. 깨어나시면... 지금처럼 편히 주무실 수 없으실 겁니다." 착잡함이 담긴 한숨을 흘리던 칼 베리만이 번쩍 정신이 든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그럽니다, 엘!" 칼 베리만은 안타까운 눈으로 엘을 살폈다. 그는 황제가 예언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엘, 잠깐이면 됩니다! 혹시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물건같은 거 없습니까?" 엘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물건... 이요? 무슨... 물건이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거나 아니면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럽고 귀해 보이는... 뭐, 그런 물건 없었습니까?" "아아... 그 물건이요... 반지... 반지요....." "반지라고요? 엘, 반지라고 한 겁니까? 어디 있습니까? 아시리움 신전에 있습니까? 아시리움에서 그걸 몰수한 겁니까?" "리오... 리오에게... 리... 오....." 그 말을 끝으로 엘은 깊은 무의식 세계로 빠져 들었다. "리오, 리오라니? 리오라는 사람에게 반지를 주었다는 말인가?" 암담한 눈으로 엘을 바라보던 칼 베리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괴로운 탄식을 토해냈다. "대체 누군지도 모르는 리오라는 사람을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가까이 와 봐라." 잔뜩 웅크리고 있던 시녀가 맹수에게 다가가는 어린 들짐승처럼 한발한발 조심스레 다리를 움직였다. "이름이 무어냐?" "샤,샤론이라 합니다, 황제폐하." "그래, 샤론... 네가 무슨 중요한 말을 들었다고 하던데, 소상히 고해봐라." 시녀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중요한 말인지 아닌지 미천한 소녀는 알지 못합니다, 폐하. 그저 제가 들은 말은 반지라는 것과 그걸 리오라는 사람이 갖고 있을 지 모른다는 것뿐입니다." "반지라..." 마르키젤이 낯빛을 흐렸다. "그 반지라는 말이 어떻게 나온 것이냐?" "재상께서 혹시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물건이 있으시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반지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이냐?" 자일스가 앞으로 나서며 시녀의 말을 가로챘다. "예, 전하. 제가 들은 건 그게 전부입니다." "알았으니 이제 물러가라. 내 너의 공로는 충분히 생각해주겠다. 하지만 철저히 입단속하는 게 좋을 거다. 이번 일에 대해 한마디라도 혀를 놀린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 핏줄들 모두 극형에 처하겠다. 알아들었느냐?" "알겠습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핏기 가신 시녀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주의 깊게 그 아이를 살펴라. 지금처럼만 하면 큰 상을 내려주겠다." "황공합니다, 폐하." 시녀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뒷걸음질쳐 밖으로 나갔다. "반지라니, 대체 무슨 반지를 말하는 걸까요, 아버님?" "증거가 될 만한 반지는 딱 하나다. 후계자의 반지... 바로 후계자의 반지일 것이다." "후계자의 반지라 하셨습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후계자의 반지일리 없습니다! 그건 바다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아버님? 페르가몬이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흥분한 자일스가 침을 튀기며 반박했다. "넌 그저 전해들은 얘기라 나만큼 세세히 알지 못한다, 자일스. 페르가몬은 가벼운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 날도 반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느 귀족의 말에 장난처럼 바다에 빠뜨린 것 같다는 말을 한 것뿐이다. 그 때는 모두 농담으로 받아들여 웃어 넘겼지만 페르가몬이 죽은 후, 어디에서도 반지가 나타나지 않자 그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견해가 나왔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후계자의 반지는 바다에 빠져 영영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 정론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더러운 자식이 언급한 반지가 바로 후계자의 반지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그 땐 아직 달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지만, 자신의 소중한 어린 딸에게 선물하기 위해 페르가몬이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마르키젤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느릿느릿 바닥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반지를 손에 넣어야 한다. 만약 그 반지가 후계자의 반지고, 그걸 칼 베리만이 먼저 찾게 된다면......" 자일스를 바라보는 마르키젤의 눈동자가 어둡게 일렁였다. "그 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자일스, 네게 맡기겠다. 넌 그 반지를 찾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라.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칼 베리만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버님.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반지를 손에 넣겠습니다. 그리고 제 손으로 직접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부숴 버리겠습니다." 자신 만만한 말투에 마르키젤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경솔해선 안 된다, 자일스. 그렇다고 몸을 사리란 말은 아니다. 신중하게 판단하고 일을 진행시키다가 이 때다 싶을 때 무자비하게 낚아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누구도 이 일 뒤에 네가 있다는 걸 눈치채게 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린 겉으로나마 그 달의 아이란 하찮은 계집애를 반기는 척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내 너를 믿지 않았다면 너에게 이런 막중한 일을 맡기진 않았을 거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 칼 베리만과 그 계집애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마르키젤이 수긍하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자일스. 칼 베리만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혼인식까지 예언을 증명하라는 내 명령을 군소리없이 받아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다. 그러니 서로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도록 그 둘을 철저히 떨어뜨려 놔야 한다. 그 문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만 나가 봐라. 나가서 그 리오란 자를 어떻게 찾을 지 생각해 봐라. 물론 가장 먼저는 그 자의 정체부터 알아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리오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빨간머리 놈이 지금 어디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놈은 이곳 바드리오에 있을 겁니다. 처형식을 보러 왔을 테고, 칼 베리만이 예언이랍시고 헛소리를 지껄여 댄 지금은, 뭐 작은 빵 부스러기라도 얻을까 싶어 황궁 주변을 맴돌고 있을 겁니다." 자일스가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놈을 잡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아버님." 엘은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팔을 휘젓고 몸을 뒤틀어도 질척한 피웅덩이에서 한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선혈이 순식간에 가슴까지 기어올랐다. 곧 끈적끈적한 손길이 목을 휘감아 왔다. 하지만 이제 엘은 비명은커녕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무력하게 벌려진 입으로 뭉글거리는 핏덩어리가 기어들었다. 갑자기 터져나온 외마디 소리에 놀라 엘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초점없는 눈으로 높은 천장을 노려봤다. "괜찮으십니까?" 낯선 음성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 왔다. 엘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인을 마주했다. "무슨 악몽을 꾸신 것 같은 데..." 엘은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여인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물론 괜찮다마다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여인이 허겁지겁 문을 나섰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며 엘은 식은땀이 흥건한 이마에 팔을 얹었다. 격한 진저리가 몸을 내리훑었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붉은 방에 갇혀 피웅덩이에 잠기는 소름 끼치는 꿈. 다시 찾아온 피비린내나는 망령은 조금씩 엷어져 가던 두려움을 고스란히 되돌리고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왜 붉은 방을 다시 본 거지? 왜 그 꿈을 떨쳐 내지 못하는 거지? 대체 붉은 방이 뭐기에 날 놓아주지 않는 거지? 해답을 알 수없는 혼란스런 질문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꿈이 시작된 건 오래 전 아시리움 성전에서였다. 그 때부터 며칠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던 악몽은 여러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서서히 과거 속으로 묻혀 갔다. 엘은 붉은 방이 다시 찾아오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악몽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까? 아시리움 성전에 다시 돌아가 봐야하나? 하지만 악몽이 시작된 서관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래, 어디에서도 붉은 방은 보이지 않았어.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엘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잠깐! 내가 확인한 건 겨우 방 하나뿐이었잖아. 붉은 방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몰라. 그래, 서관에 붉은 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순 없어. 만약 그것에 다시 가본다면 악몽 속의 방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깊은 숨을 내쉬던 엘은 미간을 모으고 눈을 치켜떴다. 자신이 아시리움 성전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능하리라는 뒤늦은 분별이 맥을 쭉 빠지게 만들었다. 유난히 높고 우아한 천장이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엘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녀가 놀랄 만큼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공간을 보고 입을 딱 벌렸을 때, 스무 명에 달하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엘은 경계심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 땀에 젖은 잠옷이 기분 나쁘게 살갗에 달라붙었다. 무리 중 가장 앞에 있던 여인이 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보라색 눈동자... 정말 보라색 눈동자로군요." 여인의 나직한 목소리엔 가냘픈 떨림이 스며들어 있었다. 엘은 자신에게 못 박힌 파란 눈동자에 마음이 불편해지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알리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이보다 더한 실례는 없겠군요. 하지만 깨어났다는 말이 너무 반갑고 기뻐 생긴 일이니 불쾌하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아... 예." 엘은 정중한 사과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정말 페르가몬 폐하를 많이 닮으셨군요." "그 분이 누구이신데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인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엘을 흘긋거리며 소곤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라." 여인이 위엄있게 명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로써 엘은 파란 눈동자의 여인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건 외모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화려함보다는 우아함을 강조한 남보랏빛 드레스, 높이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와 여인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아름다운 보석들. "모두 물러가라." 엘은 단호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넋을 읽은 채 여인을 관찰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두 사람만 남았을 때, 여인이 천천히 다가와 엘을 비스듬히 마주보고 앉았다. "열일곱살 이후 침대에 이런 식으로 앉아 보는 건 처음입니다. 어렸을 땐 어머니께 무지한 평민들이나 하는 행동이란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몰래 침대에 걸터앉곤 했었답니다." 여인이 눈을 그윽하게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에 이끌린 엘도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었군요. 낯선 환경 때문에 많이 놀라셨을 분 앞에서 말입니다." "저... 전 그런 경어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엘은 마님이란 호칭을 붙여야 되는 건가 생각하며 여인을 곁눈질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말투가 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 얘기를 듣고 나시면 그런 마음을 가지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우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인이 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리아잔 제국의 전황제이신 페르가몬 폐하의 단 한 분뿐인 따님이십니다. 성함은 엘리시엔 마그누스 차르 드 칼리트라바이십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는 엘에게 여인이 자신의 말을 믿으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사실 전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이 혼란을 느낄 겁니다. 하지만 전 전하께서 달의 아이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칼 베리만께서 거짓예언을 하실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말도 안 돼요... 이건 말도 안 돼요, 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뭔가 잘못 아시고 계신 게 틀림없어요." "제가 두서없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혼란만 더 가중시켜 드리고 말았군요. 이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말을 멈추고 있던 여인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를 시작했다. 엘은 여인의 말을 들으며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 후 칼 베리만께서 전하를 이 곳 별궁으로 모시게 한 다음 어의들을 불러 화상을 치료하게 하셨습니다." 여인은 엘의 신분이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아 본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하지만 리아잔 제국의 실력있는 어의들이 총동원되었으니 곧 완치될 수 있으실 겁니다. 또 화상으로 인한 흉터도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이건 전하께만 알려 드리는 건데 흉터를 감쪽같이 없앨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치료사를 알고 있습니다." "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요. 제가 그... 폐하의 따님이란 거 말이에요." "믿으십시오." 여인이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면 조금은 확신을 가질 수 있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전하와 전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정확히 말해 전 전하를 낳아 주신 헤르티아 황후의 언니, 즉 엘리시엔 전하의 이모가 되는 사람입니다." 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인의 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쏟아져 들어온 혼란을 감당하기 힘들어 나온 작은 몸짓이었다. "전하께선 헤르티아보다는 페르가몬 황제폐하를 더 많이 닮으셨습니다. 사실 검은 머리카락과 선이 고운 얼굴 윤곽을 빼곤 모든 걸 황제폐하께 물려받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집안 피가 좀 약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아들도 절 거의 닮지 않았답니다." "아,아드님이 있으세요?" 엘은 몸을 내밀며 소리 높여 물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입술이 말라왔다. 여인의 말처럼 그녀가 전황제의 딸이고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이 이모라면, 그녀에겐 이모말고도 사촌이 생기게 되는 셈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여인이 상냥한 미소를 그렸다. "예,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자식이라고는 오직 그 아이뿐입니다. 두 달 전에 생일을 치러 스무 살이 되었으니 전하와는 두 살 차이가 나겠군요." "그럼 저한테..." 엘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저한테 사촌오빠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두 살 위의 사촌 오빠가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기뻐하시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싫어하실까 봐 은근히 가슴을 졸이고 있었거든요." "제가 왜 싫어하겠어요? 아무도 없던 저에게 이모님과 사촌오빠가 생겼는데요. 사실 지금 좀 무섭기까지 해요. 화형대에서 살아남은 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데... 이제 가족이... 제게도 가족이 생겼다니......" 말을 끝맺기 힘들 만큼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 엘은 떨리는 입술에 한껏 미소를 담은 채 수줍게 여인을 쳐다봤다. 여인의 손도 잡아 보고, 고운 얼굴도 만져 보고, 또 그녀의 따뜻한 품에 안겨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아직 서먹서먹한 여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내보인다는 게 쑥스럽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했다. "많이 궁금하시겠군요. 그러실 줄 알고 이곳으로..." "폐하,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조심스런 목소리가 여인의 말을 끊었다. "때마침 왔군요." 엘이 여인의 눈길을 좇자마자 문이 열리며 밝은 금발머리를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옅은 초록빛 눈동자와 보라색 눈동자가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촌오라버니를 만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전하?" 여인이 사뭇 기대된다는 듯 들뜬 어조로 물었다. "꿈에도 그리던 오라버니를 만나서 할 말을 찾지 못할 만큼 감격스러운 것 같구나." 경멸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자일스가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는 무섭도록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엘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즐기는 듯한 음조로 말을 붙였다. "나 역시 널 만나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귀여운 누이동생아." ===================================================================제 58장. 새로운 국면===================================================================리반은 단숨에 층계를 뛰어올랐다. 복도를 달리던 그는 바닥에 패인 작은 구멍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방문 앞에 도착했다. "리오!" 버럭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든 리반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리오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리오, 어디 있는 거야?" 리반은 침대 아래 구석진 곳에 삐죽 나와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다가갔다. "야, 리오! 내가 지금 무슨 얘길 들었는지 알아?" 달뜬 어조로 소리치던 리반은 걱정스런 마음에 푹 꺾인 리오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리오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아직까지 울고 있다니. 그만하면 눈물이 마를 때도 되지 않았어?" "그냥 내버려 둬... 울든 미쳐 버리든 그냥 내버려 두라고......" 리오가 목매인 어투로 가만가만 속삭였다. "내 말부터 들어봐, 리오. 알렉스는 살아 있어! 죽지 않았어! 내 말 들었어? 알렉스, 아니, 엘은 죽지 않았단 말이야! 살아 있다고!" 기쁨에 겨운 리반이 리오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멍한 얼굴로 눈을 껌벅이던 리오가 그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정말, 정말 엘이 살아 있는 거야?" "그래, 한두 사람에게 들은 게 아니야! 지금 이 일 때문에 난리도 아니더라고!" "살아 있구나. 그 불구덩이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리오의 얼굴이 다시 젖어 들었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아무튼 일관성 있어 좋다!" 장난스럽게 말한 리반이 리오의 어깨를 툭 치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좀 자세히 말해 봐, 리반. 아직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 어떻게,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황궁을 빠져 나온 다음, 기적이 일어났나 봐. 그것도 두 가지나. 갑자기 하늘에서 이상한 빛이 내려와 화형대의 불을 순식간에 꺼버렸대. 정말 신기하지? 난 처음에 그 말을 한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다니까? 다음으로...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워낙 유명한 예언자니까.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이라고, 들어본 적 있지?" 충혈된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하고 있던 리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 유명한 예언자가 처형대에 올라 리아잔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나... 뭐라더라? 의견이 분분하던데... 이름을 빛낸다는 사람도 있고, 모든 사람이 다 잘 살게 된다고 들은 사람도 있어. 심지어 어떤 사람은 페르가몬 황제가 환생하셨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우기더라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 이상한 빛과 예언 때문에 알렉스가 살게 되었다는 거야." "엘이 진짜 달의 아이가 맞았구나. 네 생각처럼."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의 예언인데 틀림없겠지. 하지만 난 솔직히 말해 아닐 거라는 마음이 더 강했어. 받아들이기엔 워낙 엄청난 사실이라서." "그래, 엘이 리아잔 제국의 정통후계자라니....." 자랑스러움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알렉스가 무사하다는 거잖아." "그거야 물론이지!" 리오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서로를 장난스럽게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머리를 헝클어뜨리기도 하며 마음껏 벅찬 기쁨을 발산했다. "시끄러워! 대체 뭐 하는 거야? 조용히 좀 해!" 사나운 고함소리와 함께 옆방과 붙은 벽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고 있던 리오가 찔끔한 얼굴로 리반을 돌아봤다. 둘은 짜기라도 한듯 동시에 씩 웃었다. "리반, 나가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답답한 방안에만 박혀 있을 수는 없잖아. 나가서 축배라도 들자." "그래, 누가 널 말리겠니?" 리반은 피식 웃으며 문가에 서서 헤벌쭉 입술을 벌리고 있는 리오에게 다가갔다. "리반, 축배를 든 다음엔 엘을 만나러 갈까? 아니, 차라리 지금 즉시 황궁으로 가는 건 어때?" "그건 좀... 내 생각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엘이 우릴 만나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 녀석은 절대 그럴 녀석이 아니야. 아마 지금쯤 우릴 기다리고 있을걸?"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리반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리오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알렉스가 좀 다쳤나 봐." "얼마나? 많이 안 좋은 거냐?" 리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 그저 화상을 입었다는 거하고 그것 때문인지 정신을 잃었다는 말만 들었어."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빨리 가 봐야지!" "안 돼, 리오!" 리반은 밖으로 뛰어나가려 하는 리오의 팔을 재빨리 낚아챘다. 리오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왜? 엘이 다쳤다는 데 안 가볼 생각이야? 넌 걱정도 안돼?" "나도 너만큼이나 알렉스가 걱정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황궁으로 갈 수는 없어. 그건 뭐라 그럴까... 아주 위험한 행동이야, 리오. 잘못되면 우린 굉장히 심각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리오가 핵심을 찔러왔다. "황권다툼을 말하는 거야?" 리반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현황제와 자일스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일일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엘을 몰아내려 할거야.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엘을 만나는 건 그거완 별개의 일이잖아. 우리가 엘을 받쳐 줄 수있는 권력자도 아니고. 인정하긴 싫지만 말이야." 리오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네 말이 맞아, 리오. 하지만 알렉스의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몰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황궁으로 가는 건 알렉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도 있어." 한숨을 흘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오가 반대의견을 내놨다. "우린 어차피 엘을 만나야 돼. 그리고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건." "내 말부터 들어봐, 리반." 리오가 서둘러 리반의 입을 막았다. "넌 중요한 걸 잊고 있어. 반지가 우리한테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고 있어. 네 말대로 반지가 정교하게 만든 모조품이 아니라면, 또, 그 예언이 사실이라면 그건 책에 적혀 있던 것처럼 후계자의 반지일 거야. 그리고 엘은 리아잔 제국의 황권다툼, 그 한가운데 서 있게 됐어. 이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되도록 빨리 알렉스한테 반지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겠지." 고개를 크게 끄덕인 리오가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래, 리반. 우린 되도록 빨리 엘을 만나야 돼." "나도 네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되도록 빨리란 말엔 반대야. 지난번 바르테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봐, 리오. 그 때 우린 그저 알렉스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 그거 하나만 갖고 행동했어.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았어.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리오의 푸른 눈에 짙은 그늘이 덮였다. "알렉스가 화형대에 매달리게 됐잖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적일 뿐이야, 리오. 그런 기적은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 "네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겠어. 신중하게 행동해야 된다는 거겠지." "맞았어.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문지르던 리반이 걸음을 옮겨 침대에 내려앉았다. "내 생각엔 우선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아.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알긴 힘들겠지만, 지금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알렉스에게 쏠려 있으니 웬만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거야. 또 한가지 다행스러운 건 네가 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와 나, 그리고 알렉스뿐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우린 그만큼 좋은 위치에 서 있다는 말이지." "그 생각도 섣부른 판단일 수 있어." 리오가 리반의 의견에 제동을 걸었다. "너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 반지의 존재를 꼭 우리 셋만 알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어." 심각한 얼굴로 리오의 말을 되새겨 보던 리반이 수긍하고 나왔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을 위해 대비책을 세워 놓는 게 좋겠어." "대비책? 무슨 대비책?" "대충 말하자면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럴듯한 장소라든가, 비상식량이라든가, 뭐 그런 거 말이야. 바드리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니까 안전을 위해 몇 가지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리오가 한숨을 내쉬며 문에 등을 기댔다. "난 아직도 엘에게 반지를 빨리 건네주어야 한다는 쪽에 더 가까워. 하지만 네 의견을 반대하진 않겠어. 나 때문에 엘이 위험해지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그래서 신중하게 행동하자는 말을 한 거야. 알렉스의 그런 모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그럼 골치 아픈 문젠 대충 해결됐으니 아까 말한 대로 축배나 들러가자." "그래, 알렉스가 새 생명을 얻은 날인데 흐지부지 흘려 보낼 수야 없지." 리반이 흔쾌히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말이야." 문을 반쯤 열던 리오가 뒤돌아봤다. "너 언제까지 엘을 알렉스라 부를래?" 주춤한 리반이 곧장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엘은 제대로 된 호칭인 줄 알아? 알렉스는 이제 전하라고 불리는 위치에 올랐단 말이야." "전하든 폐하든 나한테 엘은 언제까지나 엘일 뿐이야. 그렇지, 엘의 본명! 그것 좀 말해 봐, 리반." 리반이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엘리시엔 마그누스 차르 드 칼리트라바." 입속말로 천천히 따라해보던 리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그렇게 이름이 마음에 들어?" "아니... 아,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고, 전에 엘이 자신은 이것저것 붙은 거 없는 그냥 엘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서...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길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와." "내 생각엔 이걸 다 외어야 하는 건가 하며 잔뜩 얼굴을 구길 것 같아." "그러기 쉽겠지?" 두 사람은 소리 맞춰 웃으며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내가 이긴 거지?" 계단에 발을 디디던 리오가 엉뚱한 질문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이기긴 뭘 이겨?" "엘 이름 말이야. 본명도 알렉스보단 엘에 더 가깝잖아." 리반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래, 이겨서 좋겠다. 하지만 난 그냥 내가 좋은 대로 알렉스라 부를란다." "하여튼 꽉 막힌 녀석이라니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관을 나섰다. 싱거운 농담을 건네며 발을 놀리던 리오가 갑자기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멈춰섰다. "왜 그래?" "거짓말 아니지? 엘은 진짜 살아있는 거지?" 갑작스런 불안에 사로잡힌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리반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엘은 분명히 살아 있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도 나와 같은 대답을 할거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리오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말을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알아. 내가 너와 붙어 다닌 게 몇 년짼데 그걸 모르겠어?" "붙어 다니긴 내가 너하고 언제 붙어 다녔냐?" 리오는 퉁명스럽게 반박하고나서 이내 은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론 마음을 바꿔 종종 붙어 다닐 생각이야." 와락 달려든 리오가 뒤에게 리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빨리 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리반이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쳐다보면 어때서? 형이 동생 좀 귀여워해주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형 좋아하네! 빨리 이거 못 놔?" "반항하지말고 얌전히 따라오렴, 귀여운 아우야." 리오는 바르작거리는 리반을 더욱 힘껏 끌어안고 행진하듯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별안간 문에 세찬 충격이 가해졌다. 끄덕끄덕 졸거나 잠을 자지 않으면 서너 명씩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던 기사들이 요란한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시 한 번 문을 걷어차기 위해 발을 들고 있던 에지몬트가 기사들에게 밀려 뒤로 넘어졌다. "젠장!" 그의 입술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어처구니없어진 기사들이 혀를 차댔다. 그들 중 몇 명은 에지몬트를 노려보며 타박을 시작했다. "뭘 잘했다고 욕을 하고 난리야? 얼씨구! 아주 술독에 들어앉았다 나왔구만." "술에 취했으면 얌전히 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대체 문은 왜 걷어찬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도 마찬가지야! 뭐가 무너진 줄 알고 서둘러 나오다가 탁자에 발가락을 짓찧기까지 했단 말이야." "그건 약과야. 난 술 한잔 홀짝이다가 놀라는 바람에 그 독한 걸 코로 들이마셨어!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고!" 목부터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기사가 발을 사납게 굴렀다. "그게 자랑이냐? 기사숙소에서 왜 몰래 술을 마셔? 걸리면 무슨 좋은 꼴을 보려고? 경칠 일 있어? 하여튼 저 녀석은 지난번에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허구한 날 술타령이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엉뚱하게 왜 날 걸고 넘어져?" "시끄러워! 조용히 해!" 일어날 생각도 안하고 마냥 하늘을 보고 누워 있던 에지몬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듣기 싫으니까 제발 귀에 대고 쫑알대지 말고 들어가!" "뭐야? 저 자식이 누구한테 쫑알거린다는 거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건방진 애송이 녀석!" 분위기가 급속히 험악해지자 벽에 기대 눈을 굴리고 있던 제러드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자자, 다들 진정해. 보아하니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한 것 같은데, 한살이라도 더 먹은 우리가 봐주자고." "제러드 선배님... 아니, 제러드 형님..." 에지몬트가 처량하게 제러드를 불렀다. "선배님도 형님도 다 듣기 싫으니 빨리 일어나.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고 들어가 잠이나 자란 말이다." "그게 사실이에요? 정말로 그 꼬마가... 저한테 바락바락 덤비던 그 건방진 꼬마가 리아잔의..." 번개같이 에지몬트를 덮친 제러드가 그의 입을 단단히 막았다. 그러자 어느새 움직인 카셀과 세르피언, 이케르가 에지몬트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술을 좀 깨워줘야 할 것 같아서..." 궁색한 변명을 끝으로 얼굴을 구긴 네 명의 기사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몸부림치는 에지몬트를 데리고 간 곳은 기사 숙소 뒤쪽에 위치한 마구간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입에서 제러드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에지몬트가 고함을 질렀다. "뭐하는 짓이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선배들이 앞에 놓인 말구유에 그를 빠뜨렸다. 마치 벽에 부딪친 것 같은 퍽 소리와 함께 반쯤 차있던 물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젠장! 그 꼬마얘기를 했다고 이러나 본데, 그 얘길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꿀릴 것 없다는 듯 기세 등등하게 소리친 에지몬트는 뒤를 이어 나온 제러드의 말에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그 예언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겠지. 하지만 아까 모인 기사들 중에 네가 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다. 우리를 빼곤 말이다. 이제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좀 되냐?" 풀이 죽은 에지몬트가 물이 줄줄 흐르는 머리를 힘없이 숙였다. 그만할까 고민하던 제러드는 흐지부지 넘어가선 안 되는 실수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본격적으로 꾸짖기 시작했다. "네가 정말 생각이 있는 녀석이냐?" "생각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낸 거겠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누설하지 말아야 할 비밀을 그렇게 경솔히 입에 담다니." "정말 웃긴 녀석이라니까."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냐?" "술에 취해 정신이 홀딱 나간 거겠지." 제러드는 말끝마다 끼어들어 토를 다는 카셀에게 매서운 시선을 날렸다. 카셀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코끝을 비볐다. "잘못했습니다.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저도 제가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 꼬마 얘길 들으니까... 괜히 기분이... 기분이 좀......" 침울한 목소리가 힘없이 사그라졌다. "엘이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나빴단 말이야?" 카셀이 침을 튀기며 앞으로 한발 나섰다. "그런 게 아니라 그 뒤에 나온 엄청난 이야기 때문이겠지. 나도 한동안은 머리가 띵했으니까. 카셀, 너는 씹고 있던 음식을 내뿜기까지 했잖아, 지저분하게." 카셀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엄청 놀랐어. 엘이... 이제 엘이라고 부르면 안되겠지? 아무튼... 에라 모르겠다, 엘이 그렇게 엄청난 사람일 줄은 몰랐어. 세상에, 다른 데도 아니고 바로..." "이제 그만 하는 게 좋겠어. 여길 안전하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따끔하게 주의를 준 이케르가 마구간을 나갔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던 세르피언도 어슬렁어슬렁 그를 좇아갔다. "어서 나와라.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에지몬트는 제러드의 손을 잡고 비좁은 구유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물을 뚝뚝 흘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제러드와 카셀은 서너 발 뒤에서 그를 뒤따랐다. "혹시 말이야, 저 녀석 엘한테 딴 마음먹고 있었던 거 아닐까?" 기사 숙소가 눈에 들어왔을 때 카셀이 제러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에지몬트가 세차게 몸을 돌렸다. "뭐라고요? 제가 누구한테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어디 여자가 없어서 그런 선머슴같은 녀석을! 내 평생 이렇게 황당한 말을 들어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빨리 그 말 취소하십시오! 빨리요!" 에지몬트의 격한 분출에 기가 눌린 카셀이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알았어, 취소할게." 세찬 콧바람을 내뿜은 에지몬트가 기사숙소를 향해 퍽퍽 발을 구르며 걸어갔다.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말을 하지, 되게 살벌하게 구네." "아픈 곳을 찔려 봐라. 넌 아마 더할 거다." "뭐? 그럼 너도 내 생각과 같은 거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며 정이 든 것 같은데... 불쌍한 녀석... 하필이면 그런..." 혀를 차던 제러드가 말을 이었다. "지금 밝혀진 게 다행이야. 어차피 가망없는 거 한시라도 빨리 접는 게 나을 테니까." "네 말을 들으니 정말 저 녀석이 안돼 보인다. 사실 나만큼 에지몬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말했던가? 아델하고 하마터면 헤어질 뻔 했다는 거." 카셀이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얘길 꺼내려하자 제러드는 몸서리를 치며 발을 빨리했다. 걸음을 재촉해 바짝 따라붙은 카셀이 기어코 자신의 연애담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 때가 그러니까 내가 기사단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거야. 노을이 짙게 깔린 어느 날 저녁 무렵 갑자기 아델이 날 만나러 왔어. 노을에 비친 아델이 얼마나 예쁜지..." 열정적인 카셀의 목소리 위로 괴로운 신음이 길게 흘러나왔다. ===================================================================제 목 [달의 아이] 58장.새로운 국면-2=================================================================== "너,넌 누구냐?" 마체라타는 버럭 소리치는 남자를 밀치고 거리낌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비밀스런 동굴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바닥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양편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십 개의 방엔 문 대신 검은 휘장이 내려져 있었다. 마체라타는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음탕한 신음소리를 들으며 실소를 지었다. 복도 벽에 기댄 채 낄낄거리며 남자와 엉켜 있던 여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체라타는 계속하라는 뜻으로 여인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여인이 불쾌한 듯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를 노려봤다. 매춘굴도 꽤 재미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체라타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계집을 잡아라!" "멈춰라! 여긴 네까짓 게 기어들 곳이 아니다!"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달려오며 크게 소리쳤다. 마체라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남자들은 사납게 번득이는 붉은 눈동자에 흠칫했지만 곧 자신 만만함을 되찾았다. 무엇을 믿고 혼자 몸으로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여자 한 명은 그들에게 작은 강아지만큼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대체 어떤 계집이기에 감히 이곳에서 소란을..." 채 말을 끝맺지 못한 남자가 허공으로 번쩍 들렸다. 그를 잡아주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던 다른 남자도 똑같은 처지가 되어 둥실 떠올랐다. "일을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정만 없었다면 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것이다. 경고하는데 앞으로는 내 앞에서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다시 한 번 내 성질을 건드리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네 놈들을 곱게 갈아 저 밖에 있던 귀여운 개들에게 먹이로 줄 테니까." 마체라타는 남자들을 받치고 있던 힘을 일시에 풀었다. 남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들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복도바닥이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부숴졌다.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내 옷, 내 옷 어디 있어?" 놀란 사람들이 옷을 반쯤 걸친 채 밖으로 뛰어나왔다. 개중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이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새된 고함을 질렀지만 정작 일대 혼란을 야기시킨 마체라타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복도 구석에 기대서서 눈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랴부랴 매춘굴을 나서고, 남은 이들도 하나둘 방으로 돌아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복도엔 엷은 정적마저 흐르게 되었다. 마체라타는 자신의 앞에 주춤거리며 서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경계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살필 뿐 접근은 생각도 못하고 있던 남자들이 기가 질린듯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난 너희들에겐 관심없다. 너희들의 대장을 만나러 온 것이니까. 뭐라 하더라... 오메른이라 했나? 아무래도 좋으니 어서 그에게 날 안내해라." "하,하지만 오메른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신데...요" 마체라타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그렇다면 이곳을 완전히 박살내야 그를 만날 수 있는 거냐?" 당황한 남자들이 어쩌면 좋으냐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봤다. "말썽피우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오." 마체라타는 귀에 거슬리는 투박한 목소리를 좇아 몸을 돌렸다. 등이 구부정한 백발노인이 마땅찮은 얼굴로 그녀를 흘긋 보더니 다리를 절뚝이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마체라타는 잠자코 노인을 따라나섰다. 복도 끝에 이른 노인이 그녀를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안내했다. 한발을 디딘 후 다른 쪽 발을 힘들게 끌어올리며 한계단한계단 나아가는 노인 때문에 층계를 다 오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마체라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짜증을 억눌렀다. 두 사람은 다시 아래 층과 별다를 거 없는 복도를 걸었다. 마침내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앞에 멈춰 선 노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들어가시오." 마체라타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고 당당히 걸어들어갔다.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가오는 마체라타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흑갈색 머리카락을 가죽끈으로 묶고 있는 남자는 광대뼈가 도드라진 희고 갸름한 얼굴로 인해 까다롭고 날카로워 보였다. 가느다랗게 뜬 짙은 흑안, 길게 내리 뻗다 새의 부리처럼 구부리진 코, 흉할 정도로 힘줄이 불거진 목줄기등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녹록한 구석을 찾기 힘들었다. "네가 오메른인가?" "그렇다면?" "네가 오메른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밝혀라." 마체라타가 오만하게 명령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책상을 돌아나와 그녀를 마주보고 섰다. "내가 오메른이다. 네 요구대로 정확히 밝혔으니 이제 네가 용건을 밝힐 차례 같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가?" "글쎄, 네 태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의 성격으로 봐서 그리 짧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렇다면 좀 더 편안한 상태에서 얘길 시작하는 게 좋겠군." 의자에 앉은 오메른이 팔을 들어 마체라타에게 자리를 권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잠시 입을 열지 않은 채 견제하고 평가하는 눈으로 상대방을 주시했다. "이제 날 찾은 이유가 뭔 지 말해봐라." "네 힘을 빌리려고 왔다. 즉 어떤 특정인을 찾아달라는 요구라고나 할까?" 오메른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요구라... 거래는 여러 번 해봤지만 요구를 받아 보는 건 처음이군." "받아들일 거냐, 거절할 거냐?" "누구를 찾는지는 모르지만 난 지저분하고 보잘 것없는 매춘굴 몇 개를 갖고 있을 뿐인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요구는 다른 곳에 가서 하는 게 나을 거란 얘기다." 마체라타가 높은 음조로 짧게 웃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네가 바드리오 일대를 손에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다. 뭐라 하더라... 그림자의 황제라고 했나? 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란 생각이 강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불리는 것 같더군." 살짝 비꼬는 말이 끝나자 오메른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그림자의 황제니 어둠의 지배자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와 같은 생각을 했다. 동료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마음에도 없는 그럴듯한 말은 집어치워라. 난 네가 내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만 관심있으니까." 일순 웃음을 멈춘 오메른이 마체라타를 빤히 쳐다봤다. "요구를 들어주면 난 무엇을 얻게 되는 거냐?" "만 큐어." 오메른이 팔짱을 끼며 등을 기댔다. "만 큐어라... 그리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섭섭한 금액도 아니군." "물론 실패하면 단 한푼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거래조건을 지키지 않는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따져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내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머리에 단단히 새겨 놓지."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난 누구를 찾아야 하는 거냐?" 마체라타는 대답하지 않고 한쪽 팔을 내밀었다. "잠깐 손 좀 빌릴 수 있을까?" 오메른의 눈꼬리가 가늘게 좁혀졌다. "너와 연애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뭐, 좋다." 가볍게 수락한 오메른이 자신의 손을 마체라타의 손바닥 위에 스스럼없이 얹었다. 마체라타가 그의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갔을 때도 검은 눈동자엔 약간의 호기심만이 어려있었다. 하지만 손이 그녀의 이마에 밀착되고, 그 순간 머리에 어떤 소년이 떠오르자 오메른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나타났다. "사소한 것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자세히 보고 기억해라. 네가 찾아야 할 사람이니까. 이름은 리오고 리반이라는 쌍둥이 형제와 함께 있을 것이다.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반드시 둘을 함께 잡아야 한다."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손을 놓아주며 말을 이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쌍둥이형제는 지금 이곳 바드리오에 있을 거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변두리로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조치해라. 중요한 건 무슨 수를 쓰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는 거다." "찾아낸 후엔 죽여야 하는 건가?" "아니, 몸에 손을 대선 안 된다. 몸수색도 철저히 금지시켜야 한다. 그 소년을 찾으면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놓은 뒤 즉시 나에게 알려라." "몸수색도 하지 말라... 그 소년의 몸에 꽤 재미있는 것이 있나 보지?" 마체라타가 날이 선 눈초리로 노려보자 오메른이 씩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론 그 소년이 누구이고 몸에 뭘 지니고 있는지 따위엔 흥미없다. 난 그저 사랑스러운 만 큐어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족하니까. 일이 성공하면 마렌 광장 깃대에 붉은 기를 달아놓겠다." "붉은 기는 고위귀족이 죽었을 때 걸리는 거로 아는데... 기를 달기 위해 귀족을 죽이겠단 말이냐?" 오메른이 뭐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넌 그 깃발이 눈에 띄면 와서 소년을 데려가면 그만이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여기 온 목표는 그럭저럭 달성한 것 같으니까." 마체라타가 몸을 세우며 말했다.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던 오메른이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일할 생각없나?" "이곳이라면 매춘굴을 말하는 거냐?" 마체라타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되물었다. "그래, 네가 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 겉으로 보기엔 천하고 지저분해 보이지만 이곳에도 왕비 못지않은 칭송을 받으며 화려한 생활을 맘껏 즐기는 여자들이 많다."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난 남자 놈들을 자근자근 짓밟은 걸 유난히 즐겨서 말이다. 혹시 그런 걸 원하는 자가 나타나면 마렌 광장에 붉은 깃발을 달아라. 장담은 못하지만 마음 내키면 한 번 와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인 마체라타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여인이라......" 오메른은 탁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등을 편안히 기댔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어투로 낮게 중얼거렸다. "왜 자일스 황태자가 기를 쓰고 그 소년을 찾으려 하는 걸까?" "대공, 어서 오십시오." 칼 베리만은 서둘러 리자드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의자에 앉자마자 다급한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어조로 곧장 용건을 꺼냈다. "대공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차근차근 말씀해보십시오." 칼 베리만이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아르벨라 황녀님의 혼인식 날까지 제가 한 예언이 진실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만약 증명하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모든 게 끝장입니다, 대공. 너무 비관적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그 아이는 만나 보셨습니까?" "예, 대공. 처형식이 있던 날 저녁에 잠깐동안이긴하지만 만나 보긴 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엘과 한두 마디 말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전 엘이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기 직전,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물건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엘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아십니까, 대공? 바로 반지입니다. 반지라는 말을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후계자의 반지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군요." 들뜬 칼 베리만과 달리 리자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렇습니다, 대공. 만약 엘이 진짜 달의 아이라면 후계자의 반지를 말한 게 틀림없습니다. 워낙 옛날 일이라 대공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후계자의 반지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사리진 거지 통설처럼 바다에 가라앉은 게 아닙니다. 제가 대공께 드릴 부탁이 바로 그겁니다. 반지를 찾아 주십시오, 대공. 혼인식 전까지 후계자의 반지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저는 물론 엘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칼 베리만이 간절함을 담아 리자드를 바라봤다. "후계자의 반지..." 리자드가 음미하듯 천천히 발음했다. "처음엔 제가 직접 나서서 찾아보려 했습니다, 대공.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대공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전 지금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문밖으로 한발만 내밀어도 십여명의 사람들이 어느새 나타나 뒤를 따라붙습니다. 더 기막힌 건 집안이라고 안전한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정확한 수를 알 수는 없지만 매수당한 자들이 제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이 다 수상하고 의심스러운 것 같아 아무 것도... 심지어는 식사조차 마음 편히 할 수없을 정도입니다." 칼 베리만이 탄식하듯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경을 희미하게 드러낸 채 칼 베리만을 응시하고 있던 리자드가 말머리를 다시 본론으로 돌렸다. "그 반지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아, 리오!" 칼 베리만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흠칫하며 탐색하는 것처럼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다. "이런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이곳은 안전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만."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칼 베리만을 편하게 해주려는 듯 리자드가 살짝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칼 베리만. 저는 그보다 더한 모습도 많이 보여 드렸잖습니까? 그건 절 아기때부터 지켜보신 칼 베리만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칼 베리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잠시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계속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공." 한결 긴장이 풀렸는지 칼 베리만의 입술엔 엷은 미소가 배어있었다. "엘이 잠들기 직전 리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에게 후계자의 반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리오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리오란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왕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체르몬 국의 왕자라고요?" 칼 베리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칼 베리만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그 아이와 체르몬의 왕자는 꽤 가까운 사이입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함께 교육을 받았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리오카사이 왕자를 제외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예, 잠이 드는 바람에 그 길로 곧장 나와야 했습니다. 반지에 대해 좀 더 물어보고, 또 안부도 살피기 위해 어제오늘 연이어 별궁에 가 보았지만, 발 한쪽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겹겹이 둘러싸인 경비병과 기사들이 앞을 막아 서더군요. 빠른 회복과 안정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이 저와 엘의 접촉을 막고, 그녀를 고립시키기 위한 황제폐하의 술책이라는 걸 모를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엘은 저보다 몇 배는 더한 감시에 시달리고 있겠지요." 칼 베리만이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별궁에 있다 하셨습니까?" "예, 대공.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후궁들이 머물던 곳에, 그것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별궁에 엘리시엔 전하를 머무시게 하다니... 아직 달의 아이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걸 그런 식으로라도 알리고 싶었나 봅니다. 그것보다는 철저한 고립과 감시가 더 큰 이유 였겠지만 말입니다. 그나저나 꿋꿋하게 잘 견디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대공."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십시오. 굳이 그 아이를 만나려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그냥 손놓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되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대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엘이나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대공께선 체르몬 국의 왕자를 찾는 데 주력해 주십시오." 말을 멈춘 칼 베리만은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공. 과연 이 난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왕자에게 후계자의 반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저와 대공, 그리고 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체르몬 국의 왕자도 자신이 갖고 있는 반지가 평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리자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마르키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할 것입니다. 칼 베리만과 그 아이에게 철저한 감시를 붙인 그라면 이미 반지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놀란 눈으로 리자드를 바라보던 칼 베리만이 느닷없이 탁자를 내려쳤다. "이럴수가!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다니! 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저와 거의 동시에 그 정보를 알아내셨을 겁니다!" 칼 베리만이 벌떡 일어나 격앙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공께 이제야 연락을 취한 것도 반지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대공이시라면 쉽게 성공하실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자책어린 말이 연이어 쏟아졌다. "어떻게 이 정도로 생각이 짧을 수 있는지... 폐하께선 이미 행동으로 들어가셨을 텐데... 저란 작자는 그 동안 엘에게 좀 더 정보를 알아낸 다음 대공께 알리는 게 나으리라는 천하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심한 착각이 이틀이란 귀중한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칼 베리만, 이제 됐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리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정된 것 역시 전무합니다. 모든 건 얼마 뒤 열리게 되는 혼인식에서 판가름날 것입니다. 칼 베리만 말씀대로 귀중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긴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십 삼일 중 단 하루도 아직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공께선 언제나 절 깨우쳐 주시는군요. 예, 그 말씀이 옳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십 삼일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말한 칼 베리만이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다면 일찌감치 폐하께 혼인식을 늦춰 달라는 상소라도 올릴 걸 그랬습니다." 리자드의 단정한 입매에 미소가 그려졌다. "사실 혼인식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늦출 수 있습니다." 칼 베리만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라고요? 정말 궁금하군요, 대공. 대체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간단합니다. 리아잔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 될 테니까요." 장난기어린 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친밀감이 담긴 웃음을 나눴다.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은 칼 베리만이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대공께선 아르벨라 황녀님의 혼인식에 참석하실 생각이십니까?" 리자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참석하셔서 엘을 만나시는 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리자드가 칼 베리만의 말을 끊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를 올려다보던 칼 베리만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러십시오, 대공." 칼 베리만이 리자드를 배웅하기 위해 의자를 밀었을 때, 이미 문을 향해 걷고 있던 그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걸음을 늦췄다.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괜찮으십니다, 대공. 화상을 조금 입으시긴 했지만 크게 우려할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자드가 짧게 웃었다. "제가 그 아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예, 대공.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군요. 칼 베리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속마음과 달리 완곡한 말을 내놨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면 거짓말일 테니, 조금 은 걱정하시는 것 같다는 말 정도로 끝내겠습니다." 칼 베리만을 돌아보는 리자드의 눈엔 희미하게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몸 조심하십시오, 칼 베리만." 리자드는 마음을 담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 목 [달의 아이] 59장.유리-1=================================================================== "성하,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아시리움의 입장을 밝히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뒷말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 데,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간 아시리움의 이름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될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니제르 대사제는 말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루드비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어떤 감정을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저런 뒷말들이란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루드비히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니제르 대사제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나 고민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좀 노골적인 말입니다, 성하. 괜히 저 때문에 성하께서 마음 상해하실 것 같아 근심이 됩니다." "그런 걱정 마시고 아시는 그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만 큐어까지 걸며 쫓았던 죄인이 리아잔 제국의 후계자라 밝혀졌으니 아시리움... 꼬,꼴만 우습게 되었다느니... 또, 화형대의 불을 끈 신비로운 빛은 오만한 아시리움을 벌하기 위해 내려진 신의 손길이라느니... 또, 앙심을 품고 있을 게 분명한 달의 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아시리움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거라느니...." 루드비히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숨을 죽이고 있는 니제르 대사제를 돌아봤다. 니제르 대사제는 보기만해도 오싹할 만큼 흐렸던 법황의 심기가 많이 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아시리움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 이때 오히려 법황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 있습니까?" "아,예. 정말 말씀드리기 힘든... 그러니까 말도 안되고 터무니없는 더러운 오물같은 헛소리, 아,아니, 풍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성하." 찔끔한 니제르 대사제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가장 심각한 얘기가 아닐 수 없는데, 다름 아니라 이미 달의 아이임을 알고 있던 리아잔의 황제가 아시리움과 결탁해 아무 죄없는 사람을 화형대에 매달았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성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루드비히의 얼굴 어디에서도 노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해 후에야 니제르 대사제는 조여들었던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왕 내친 김이라는 생각을 하며 몹시 궁금했던 질문을 슬그머니 꺼냈다. "저, 성하. 그 예언이 사실이라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 그 소녀가 정말 페르가몬 황제의 따님이 맞다 생각하십니까?" 루드비히가 가벼운 말투로 되물었다. "대사제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니제르 대사제가 솔직히 마음을 털어놨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성하. 처형식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기적을 떠올리면 그 소녀가 틀림없이 달의 아이일 거란 확신이 듭니다. 그런 기적이 아무 이유없이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자꾸만 의혹이 생깁니다. 왜 그 소녀는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짜왕자 노릇을 한 것일까... 왕족이 되어 화려한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대체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석두나 멍청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이,이런 죄송합니다, 성하. 제 말투가 원래 좀 거친지라 조심하려 해도 자꾸 제 말에 취해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상관없으니 계속 말씀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조용히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의문은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의 예언내용입니다. 그의 예언 어디에서도 화형대에 묶여 있는 소녀가 달의 아이라는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진정한 리아잔의 후계자가 나타나 그 이름을 더욱 빛내리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만 갖고 어떻게 처형식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무슨 수로 그 소녀를 정확히 지목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선 미처 생각지 못한 까닭에 신전으로 돌아왔지만, 언제 기회가 되면 직접 물어 보고 싶기까지 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의문은 없습니까?" "사실 저를 은근히 괴롭히는 것이 있습니다 성하. 이번 일이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짜집기라도 한 듯 맞아떨어집니다. 소녀가 잡히는 과정도 왠지 석연치 않고... 세 명의 신고자들도 수상쩍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고경위를 묻자 우연히 죄인과 한 번 스치는 순간 단번에 알아봤다는 말을 하다가, 조금 추궁해 들어가자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여관 이름을 알려 주었다는 말을 늘어놨다고 하더군요. 또 소녀를 비호하려 했다는 젊은 남자도 상당한 호기심을 유발시킵니다. 그 젊은이가 루벤스타인 대공전하를 모신다 는 사실도 궁금증을 부추기도 말입니다." 니제르 대사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제 그 건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루드비히가 말머리를 돌렸다. "리아잔의 황제가 예언자에게 그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라는 황명을 내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한이 황녀의 혼인식이 열리는 날까지라 하던데, 제가 알고 있는 게 사실입니까?" "예, 성하.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시리움의 입장은 바로 그 날 밝히겠다는 공문을 리아잔 측에 보내십시오. 제 이름으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성하. 즉시 성언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허락만 내려 주신다면 아시리움의 입장을 발표하는 일은 제가 하고 싶습니다. 전 이미 바드리오에 머물고 있는 상태니 굳이 다른 대사제를 불러올 필요도 없고, 또 어차피 황녀의 혼인식에 가려던 참이었으니 겸사겸사 일을 처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루드비히가 망설임 없이 수락의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성하. 그건 그렇고... 몹시 궁금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 귀띔이라도 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어딘지 모르게 복잡하고 심란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루드비히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차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니제르 대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든 망설이거나 미루는 법이 없었던 법황에게서 나온 대답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루드비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더욱 종잡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한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제 됐어요." 엘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상을 뒤로 밀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다가와 상을 들고 문으로 향했다. 엘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하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했다. 불편한 드레스를 물리치고 편한 복장을 고집했을 때도 그들은 난처하다는 기색만을 보였을 뿐 엘의 요구를 군말없이 들어줬다. 지금처럼 그녀가 음식을 뒤적거리다 치우라고 해도, 또, 올려진 약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물려도, 그들은 그저 묵묵이 따를 뿐 건강을 위해 꼭 먹어야 한다는 식의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무서울 만큼 철저한 복종에 예외가 있다면 혼자 있고 싶다는 말과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요구, 두 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감시하듯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엘이 완강한 태도로 관철시킨 목욕시간과 잠깐 동안의 낮잠시간을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두세 명 내지는 일고여덟 명의 시녀들과 붙어 있어야 했다. 심지어는 밤에 잠을 잘 때도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을 견뎌 내야했다. 참다참다 폭발한 엘이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간 건 이틀 전 정오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절대안정이 필요하다는 시종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별궁을 둥글게 싸고 있는 정원을 거닐었다. 아니, 거닐려고 했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뒤꽁무니에 따라붙은 사 십여명의 시종과 시녀들에게 기가 질려 몇 걸음 채 떼어 보지도 못한 상태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말이다. 상황이 이러니 별궁을 나선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엇보다 엘을 가장 괴롭히는 건 불안감이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참기 어려운 괴로움을 주었다. 더군다나 처형식 이후 연이어 몰아친 충격의 여파는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비웃음과 만족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반짝이던 초록빛 눈동자가 떠오르자 엘은 몸서리를 쳤다. 엘은 아직도 자일스가 그녀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 대한 거부반응은 그녀의 마음은 물론 몸에서도 일어나 그 일만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리며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고 등줄기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엘은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는 듯한 자일스의 눈동자를 떼어버리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시녀가 말을 걸었다. 걱정스럽다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눈엔 엘이 지금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무관심이 가득했다. 거짓된 친절. 미소 띤 얼굴 뒤에 감춰진 위선.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엘은 벽을 보고 누워 머리 위까지 시트를 올려 썼다. "한숨 자고 싶어요." 머뭇거리는 기척이 느껴진 후 그녀를 지켜보던 두 개의 시선이 사라졌다. 엘은 그제야 시트를 내리고 똑바로 누웠다. 칼 베리만은 왜 날 만나러 오시지 않는 걸까? 그분도 나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 처해 계신 건가? 그래, 그럴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엘은 입속말로 답을 중얼거렸다. "분명한 건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거야. 그래, 어떻게 해서든 이 곳을 나갈 방법을 찾아야 돼." 계단을 뛰어오른 사일러스는 저만치 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아몬을 발견하고,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 뒤돌아보는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사일러스, 중요한 일 때문에 지금은 얘기 나눌 시간이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아몬이 눈매를 좁히며 사일러스를 바라봤다. "혹시 너도 리자드님을 뵈러 가는 거야?" "그럼 너도?" 두 사람은 진지한 시선을 주고받은 후 누가 먼저랄 것없이 속도를 높였다. 그들이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종이 즉시 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나란히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창가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리자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의자에 앉아라." 리자드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낀 아몬과 사일러스가 서둘러 명령을 따랐다. "짧게 말하겠다. 이 곳을 나가는 즉시 믿을 수 있는 기사 몇 명을 추려 바드리오로 가라. 너희는 바드리오에서 최대한 빨리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왕자를 찾아야 한다. 왕자는 자신의 쌍둥이 동생과 함께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황궁 근처에서 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바드리오 전역을 뒤져서라도 찾아내라. 시간은 열 이틀이다. 그 안에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리자드님." "충심을 바쳐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두 사람이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왕자를 찾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그가 후계자의 반지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다. 후계자의 반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을 거다." "후계자의 반지를 찾은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전하?" "왕자를 무사히 리아잔의 황궁으로 들여보내라." 예상하지 못한 말에 아몬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반지를 리자드님께 갖다 드리는 게 아니라, 체르몬의 왕자전하와 함께 황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아몬. 후계자의 반지가 내 손에 들어온다면 그 즉시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반지는 엘의 손안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 내 손을 거쳐 그 아이에게 전해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왕자전하께 맡기기엔 일이 너무 위험하고 또 막중합니다. 후계자의 반지를 찾으라는 리자드님의 명령을 듣는 순간, 그 반지에 엘의 목숨이, 그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차라리 칼 베리만께 반지를 갖다 드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엘에게 전달하게 하시는 것이 더 안전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리자드님." "네 마음은 알겠다만 불가능하다. 내가 너희에게 열 이틀이란 한정된 시간을 내린 건, 그 다음날 그 아이의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그 전에 그 아이의 손에 반지가 쥐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건 이번 일에 칼 베리만이 깊숙이 개입되셨다는 거다. 칼 베리만은 그 아이에게 가까이 접근하실 수조차 없다. 접촉이 가능해지는 건 수많은 시선들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을 때, 다시 말해서 후계자의 반지를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그 순간일 것이다. 내가 왜 그런 명령을 내린 건지 이제 알겠느냐?" 아몬이 무거운 어투로 대답했다. "예, 리자드님. 칼 베리만께서 직접 엘에게 반지를 건네주시면 세상 모두가 이번 일을 악랄한 사기극으로 치부하게 될 것입니다. 아시리움 종단의 죄인을 단번에 달의 아이로 만들어 버린 예언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증거물을 전해 준다는 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칼 베리만께서 모든 걸 조작했다 여기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리아잔의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에게 죽음을 내릴 테지요." 아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사일러스가 훅 숨을 들이마셨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왕자를 찾는 건 너희뿐만이 아닐 것이다. 황제나 황태자가 직접 나서진 않을 테고, 아마 힘있는 제삼자를 내세워 일을 벌이기 쉬울 거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자는 물론 보이지 않은 상대까지 철저히 경계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사일러스가 맹세하듯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으면 이제 나가 봐라." 두 사람은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문을 나서려던 아몬이 리자드를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리자드님, 만약 왕자전하께 반지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로 돌아와야 하는 겁니까?" 리자드가 낮은 한숨을 흘리며 아몬을 마주했다. "왕자들을 보호해줘라. 어떤 식으로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제 목 [달의 아이] 59장.유리-2===================================================================옷을 벗기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리오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며 후드를 올려 썼다. "넌 가발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바람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 같아. 이럴 때는 정말 따뜻한 우리 체르몬이 그리워. 여긴 왜 이렇게 추운 건지." 훌쩍거리던 리오가 코끝을 문지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리반이 서둘러 그에게 발을 맞췄다. "그래, 상당히 추워졌어. 되도록 빨리 두툼한 외투를 장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바드리오에 두툼한 외투가 있기나 할까? 우리 빼놓고는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잖아. 홑옷 하나만 걸치고도 말이야. 옷감을 사서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는 이상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그럼 특별주문이라도 하지, 뭐." 리반이 뭐가 걱정이냐는 얼굴로 가볍게 받아쳤다. "그럴 돈은 있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흥청망청 쓰면 안 될거 아니냐?" "걱정하지마, 최고급은 안되더라도 웬만한 외투는 장만할 수 있으니까.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사실 알렉스가 헤어질 때 갖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줬어." 리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그걸 그냥 받았어? 혈혈단신으로 떠나는 애가 내미는 돈을 넙죽 받았단 말이야?" "누가 혈혈단신이고, 누가 넙죽 받았다는 거야?" 마음이 상한 리반이 리오를 노려봤다. "그래, 아닐 수도 있겠지. 그 녀석 고집에 싫다고 해도 억지로 쥐어 줬을 테고." 리오가 순순히 물러서자 리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프긴? 추운 거 빼고는 더할 나위없이 좋다. 마음은 좀 불편하지만." 심술을 부리듯 땅을 걷어찬 리오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지난번 황명 이후로 변변한 정보도 들리지 않는데. 빨리 엘을 만나야 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혼인식은 앞으로 열흘 밖에 남지 않았어." "나도 알고 있어, 리오. 사실 요 며칠간 어떻게 하면 황궁에 들어갈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어. 몇 가지 방법이 떠오르긴 했는데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고민이야. 어쨌든 앞으로 삼사일 안에 그럴듯한 묘안을 생각해 낼 테니까 너무 그렇게 안달복달하지마. 그 동안 더 들리는 게 없나 귀나 쫑긋 세우고 있으라고." 리오는 벗겨지려 하는 후드를 재빨리 잡으며 툴툴거렸다. "귀 세우고 있어도 들리는 건 만날 똑같은 거더라. 진짜 달의 아이가 맞을까, 혼인식까지 진실임을 입증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밖에 없더라고." "그래도 모르는 거니까 오늘도 주의깊게 사람들 얘기 좀 들어보자고. 혹시 알아? 식사하다 괜찮은 걸 건지게 될지." "알았으니까 서두르자. 빨리 가서 따뜻한 것 좀 먹어야겠어."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좁은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갔다. 그들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피식거렸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10디센토만 주시면 안 될까요?"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린 리오와 리반은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많이 봐야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앙상한 팔다리를 드러낸 채 다 떨어진 넝마를 걸치고 있었다. 비참할 정도로 초라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두 사람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자 작고 지저분한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나타났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잠깐, 가지마." 서둘러 아이를 불러 세운 리오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10디센토라고? 아, 여기 있다." 선뜻 내밀어진 동전을 받아 든 아이가 크게 숨이 들이셨다. "이,이건 10큐어 짜린데요." "괜찮으니까 받아." 동그랗게 뜬 아이의 눈을 보며 씩 웃어 보인 리오가 갑자기 망토를 벗어 가녀린 어깨에 둘러 주었다. "자, 이것도 받고." 아이가 애처로워 보일 만큼 입술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믿어지지 않는 듯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럼 우린 간다!" 쑥스러운 마음이 든 리오가 리반의 팔을 잡아끌며 빠르게 말했다. 그를 따라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리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 돈은 그렇다치고 망토까지 벗어 주다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괜히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리반이 알만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 머리가 검은색이었지 아마? 솔직히 말해봐. 너, 알렉스가 생각난 거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왜 그 꼬마를 보고 엘을 떠올리겠어?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리오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부인했다. 하지만 리반의 미소는 이제 얼굴 전체로 번져 있었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그나저나 온 세상의 검은머리 여자애들을 따뜻하게 해주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돈이 있어야겠다." 장난기 어린 리반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오가 그에게 확 달려들어 목을 휘어 감았다. "우선 빨간 머리 녀석부터 따뜻하게 해주마!" "어어, 너 이거 못 놔? 요새 왜 이렇게 자꾸 엉겨붙는 거야?" "추워서 그런다, 왜?" 길 한복판에 서서 낑낑대며 몸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그들의 머리위로 투명한 햇살이 부서져내렸다. "찾았다! 저 놈들이 틀림없어! 내가 그랬지? 붉은 머리카락을 본 것 같다고!" 신이 나 떠들어대는 오빠의 말을 들으며 이렌은 망토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렌, 빨리 대장한테 가서 그 빨간 머리 놈을 찾았다고 전해. 난 저 두 놈들이 어디로 가는지 뒤쫓아야 하니까. 아니, 넌 걸음이 느리니까 대장한테는 내가 갔다 오는 게 좋겠다. 넌 저 놈들을 쫓아가고. 어서 빨리 움직여! 그러다가 놓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알았어, 오빠." "그 망토는 벗어야지. 그래야 간 김에 대장한테 넘길 것 아니야." "이,이건 내 건데......" 이렌은 울상을 지으며 오빠를 올려다봤다. "씨도 먹히지 않을 소리하지 말고 빨리 벗어. 때묻으면 괜히 값만 떨어진단 말이야." 이렌의 얼굴에 아이답지 않은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온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망토를 느릿느릿 벗어 오빠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굼뜬 동작이 답답한지 망토를 잽싸게 낚아챈 오빠가 등을 떠밀었다. "어서 서둘러! 그러다 놓치겠어!" 이렌은 저만치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절대 놓치면 안 되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좁은 골목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내밀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을 보니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대장한테 매를 맞는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렌은 작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쩌면 대장은 저 사람들을 죽일지도 몰라. 그래, 내 고양이를 죽였던 것처럼 벽에 힘껏 던질 지도 몰라. 대장은 힘이 세니까. 그럼 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죽게 될 거야. 난 또 빨간 피를 닦아야 할거고. 닦고... 또 닦고... 또 닦고..... 이렌은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골목에서 나와 막 걸음을 떼려하는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에게 망토를 벗어 준 사람의 팔 소매를 움켜잡았다. 놀란 얼굴이 그녀에게 돌려졌다. "빨리 도망가야해요! 이제 금방 오빠가 대장을 데리고 올 거예요! 어서요! 대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대장이 우리를 잡으러 온다고?" 리반이 빠르게 물었다. "예, 빨리 가야해요!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급한 마음에 이렌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알았으니까, 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만 말해 줘." "빨간 머리와 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보면 즉시 알리라고요. 그럼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어요." "알았어, 고맙다!" 리반이 리오에게 서두르라는 눈짓을 한 후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를 따라가려던 리오가 멈칫하며 이렌을 돌아봤다. "넌 괜찮은 거야? 우리한테 그런 말 했다고 혼나는 거 아니야?" "그냥 몇대 맞는 걸로 끝날 거예요.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렌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잊지 않을게." 리오는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며 이렌의 어깨를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서 있던 리반이 그를 돌아봤다. "우선 짐부터 찾아야 돼. 빨간 머리를 찾고 있을 테니 짐은 내가 찾아올게. 넌 지난번에 봐두었던 곳에 가있어." "조심해, 리반!" 긴박함이 담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반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도, 너도 조심해야 돼." 살갗이 따끔거리는 이상한 감각이 잠을 깨웠다. 엘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잠기운이 단숨에 빠져나가며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엘은 공격준비를 하듯 팔다리근육을 단단히 수축시켰다. 그리고 두 눈을 활짝 열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의 입술에서 놀란 숨결이 터져나왔다. "루드비히!"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엘은 허겁지겁 입을 막았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기대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는 두 명의 시녀를 확인해 다음에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엘은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옮기며 일어나 앉았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경비병들이 몇 겹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아, 그렇군요. 루드비히는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나와는 달리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겠군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던 엘이 침대를 툭툭 내려쳤다. "여기 앉아요, 루드비히. 이번에도 거절할 거예요?" 루드비히가 아무 말없이 침대에 걸터앉자 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무리 마법을 썼다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불쑥 찾아오다니... 루드비히는 언제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루드비히의 시선이 뺨을 타고 미끄러져 그늘진 목에 고정됐다. "언제나 상처가 끊이지 않는군요." "아아, 이거요." 엘은 손을 올려 아직도 채 통증이 가시지 않은 상처를 만졌다. "화상을 조금 입었어요. 처음엔 솔직히 말해 굉장히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졌어요. 화형대에 매달렸던 사람들 중에 나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앞으로 그슬린 머리도 정리하고 흉터도 없어지면... 끔찍했던 기억도 점점 사라지게 되겠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화상의 흔적을 지워 드리겠습니다." 엘은 목으로 다가오는 루드비히의 손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치료하기 편하도록 고개를 비스듬히 치켜세운 채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루드비히. 항상 루드비히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군요. 정말 고마워요. 이번 일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지난번 내 부탁 들어준 거요. 루드비히가 아시리움 측에 아무 말 안한 거 알아요." 목에 닿은 그의 손끝이 살짝 굳어졌다. 엘은 괜한 말을 꺼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자책을 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요샌 황후폐하와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즐거워요. 하루에 한 번씩 절 만나러 와 주시거든요. 아직은 좀 서먹서먹하지만 그래도 그 분이 좋아졌어요. 참, 흉터에 대해서는 황후폐하께서 걱정할 필요없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잘 아시는 치료사가 그런 걸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시더라고요." 어느새 통증이 사라졌다. 엘은 계속해서 목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루드비히처럼 상처를 낫게 해주는 마법이 아니라 흉터를 없애 주는 마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봐요. 나도 여러 번 루드비히한테 치료를 받았지만 그 때마다 신비롭다는 생각이..." 엘은 서서히 다가오는 루드비히의 얼굴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매끄러운 감촉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팔과 어깨를 스치더니 곧 목줄기를 부드럽게 쓸었다. "루드비히, 왜 그래요..." 엘은 숨죽여 속삭였다. 루드비히가 목덜미로 손을 미끄러뜨리더니 지그시 힘을 가해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살짝 벌린 입술을 화상의 흔적이 사라진 피부에 밀착시켰다. "루,루드비히..." 돌덩이처럼 굳은 엘이 어색하게 그를 불렀다. 따뜻한 입술이 민감한 살갗을 더듬자 솜털이 파르르 떨며 일어섰다. 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루드비히가 음미하듯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촉촉하고 은밀한 감촉이 팔딱팔딱 뛰고 있는 가느다란 맥박을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그 순간 엘은 두 손으로 루드비히의 어깨를 밀며 뒤로 몸을 젖혔다. "됐어요, 이제 됐어요. 이제 멀쩡해졌어요. 고마워요." 엘은 붉어진 얼굴로 숨가쁘게 중얼거렸다. "다른 곳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이 상황을 한껏 즐기기라도 하듯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반사적으로 몸 여기저기에 남은 화상자국을 떠올리게 된 엘은 도리질까지 하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없어요, 상처는 이게 다예요. 정말이에요. 거짓말 아니에요. 다른 데는 그을음 하나 묻지 않았어요." 온몸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엘은 서툴게 웃었다. 루드비히가 짓궂게 입꼬리를 치켜 올려 미소를 되돌렸다. "조금 섭섭하군요." 얄궂은 말에 가뜩이나 상기돼 있던 얼굴이 불이 붙은 듯 시뻘겋게 달아 올렸다. "하...하... 그런가요?" 엘은 울상같은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허겁지겁 눈을 피했다.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몸이 배배 꼬이려고까지 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루드비히 앞에서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건 더 흉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빨리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엘은 황급히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루드비히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가 되고 싶으십니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루드비히를 쳐다보던 엘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짜고짜 황제가 되고 싶으냐니."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여제(女帝)가 되어 리아잔을 갖고 싶으십니까?" 조금도 흔들림없는 잔잔한 어조였다. "별 생각없이 말하면 잘 모르겠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싫다는 답이 떠올라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됐어요?" "대답으로 받아들이기엔 미진합니다. 생각하실 시간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엘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이곳 생활은 마음에 드십니까?" 루드비히가 돌연 화제를 바꿨다. 엘은 모난 눈으로 그를 흘겨본 다음 말을 받았다. "아니오, 정말 끔찍해요. 밖으로 나간다는 건 꿈도 못 꾸는 데다 날 살피는 시선을 하루하루 견뎌야 해요. 루드비히도 봐서 이미 알겠지만 밤엔 혼자 잠을 잘 수도 없어요. 루드비히라면 이렇게 갇혀 지내는 게 마음에 들겠어요? 그리고 이곳엔 내 편이 한 명도 없어요. 어린애가 하는 투정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냥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거예요." 하소연하듯 처량한 목소리였다. "항상 약을 가져다 주던 내 또래의 소녀와 얘길 나눈 적이 있어요. 이름이 아네스라는 소녀였어요. 아네스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어렸을 때 동생들과 싸웠던 얘기도 해주고 할머니에게서 배웠다는 노래도 가르쳐 줬어요. 그런데 다음날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아요? 아네스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난 이리저리 아네스를 찾다가 하녀장에게 어떻게 된 거 냐고 물었어요. 처음엔 모른다고 하더니 내가 강하게 나가자 다른 곳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귀하신 전하께 너무 무례하게 굴었다면서요." 엘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부턴 사람들에게 되도록 말을 안시키려고 노력해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슬퍼하고 힘들어 한다는 거... 그거 정말 재미없는 일이더라고요." 애써 가볍게 말을 끝낸 엘은 루드비히를 향해 괜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루드비히도 말씀 좀 하시죠. 왜 항상 나만 얘기해야 하는 거죠? 루드비히는 무게 잡은 얼굴로 근엄하게 앉아 있는데 말이에요. 언제나 이랬던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짧게 묻고 난 구구절절이 다 털어놓고. 너무 일방적인 대화라는 생각 안 들어요?" "그게 불만이시면 앞으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얄밉게 맞받은 루드비히가 그녀를 더욱 약 올리고 싶은지 입술 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오기가 생긴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루드비히를 빤히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시녀들의 깊은 숨소리를 제외하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은 시큰거리기 시작한 눈을 더욱 크게 부릅떴다. 힘들어하는 그녀와 달리 루드비히는 매우 편안해 보였다. 엘은 그의 차분한 은회색 눈동자에서 처음 시작했을 때와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물기가 차 올랐다. 자연스럽게 고통도 더 심해졌다. 하지만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깜박일 수는 없었다. 엘은 루드비히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한 대결에서 그를 이기고 싶었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눈싸움을 할 생각을 갖고 루드비히를 마주본 건 아니었다. 자신도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 그후 생겨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지금같은 괴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 거였다. "루드비히, 힘들지 않아요?" 입을 여는 순간 하마터면 눈을 깜박일 뻔 했지만 엘은 무사히 질문을 끝낼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루드비히가 아무렇지 않게 응수했다. 여유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서 엘은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눈이 더욱 쓰려 왔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엘은 가련할 만큼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웃음을 참는지 루드비히의 단아한 입매가 살며시 떨렸다. 충혈된 눈에서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코 나오려 하자 엘은 더욱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루드비히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 저,저기!" 한숨을 내쉬며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다소 체념 어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 사이 엘은 마음껏 눈을 깜박일 수 있었다. "그렇게 절 누르고 싶으십니까?" 루드비히가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물었다. 머쓱해진 엘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루드비히. 왜 그렇게 어린애같은 행동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루드비히를 누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쩌면 루드비히가 너무 편해서 일종의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뭐라고 할까... 그 동안 좀 힘들었거든요. 처형식도 그렇고... 그 이후의 일도 그렇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게 뭔지 알아요?" 엘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빠져나갔다. 루드비히는 그늘진 보라색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거요. 창피한 말이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무서워요. 이곳에 갇혀있는 것도 무섭고, 날 전하라 부르며 머리 숙이는 사람들도 무서워요. 화형대에서 살아 돌아오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일들도 무서워요. 심지어는 내게 너무나 잘 해주시는 황후님도요." 엘은 어느새 자신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세를 바로했다. "황후폐하가 내 이모님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자일스가 내 사촌이라는 걸 어떻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거칠고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엘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시녀들을 살피자 루드비히가 조용히 말했다. "아침까진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루드비히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즉시 자일스나 황제에게 알릴 게 분명해요. 내게서 작은 것 하나라도 알아내기 위해 모든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놓칠 리 없을 테니까요. 저들은 내가 감시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날 허수아비나 살아 있는 인형으로 알거든요. 마치 손대면 안 되는 값비싼 장식품정도로요. 이런, 자꾸 신세한탄만 늘어놓게 되는군요." 엘은 루드비히에게 구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비스러운 그림자가 은회색 눈동자를 스쳐갔다. 갑자기 루드비히가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엘은 서둘러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야무지게 움켜쥔 손을 흘긋 내려다본 루드비히가 엘에게 시선을 올렸다. "나도 이곳에서 나가야겠어요, 루드비히. 더는 있고 싶지 않아요. 아무 곳으로나 데려다 줘요. 황궁을 벗어난 곳이면 어디라도 좋아요." 침대에서 내려오던 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깨닫고 서둘러 옷가지들을 챙겨 들었다. 그녀는 목이 높고 장식이 없는 옅은 푸른빛의 긴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줘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그러지 마십시오." "시간없으니까 그냥 가져가라는 말이에요? 그래요, 루드비히 말이 맞아요. 이런 데다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죠." "아닙니다. 이곳을 나가는 건 저 혼자라는 뜻입니다." 엘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였다. "루드비히 혼자 간다고요? 나까지 함께 이동하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잘난 체하는 말투가 아닌 그저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왜요? 왜 날 도와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유가 뭐예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마음 내키지 않을 뿐입니다." 그녀는 놀랍도록 솔직한 답변에 할말을 못 찾고 입술을 벙긋할 수 밖에 없었다. 루드비히가 그런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대신하듯 조금 비딱한 미소를 건넸다. 엘은 그가 사라지려 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 라스카 반 리오벤, 어서 날 밖으로 인도하시오. 명령이오." 루드비히가 미끄러지듯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뒤엉켰다. 망자의 숨결처럼 차디찬 은회색 눈동자가 엘의 뇌리속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명령이라...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엘은 흠칫했다.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루드비히에게서 전해지는 어떤 압도적인 느낌 이 그녀를 바짝 긴장시켰다. 그녀를 위압하고 무릎 꿇리려하는 듯한 강한 힘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또렷이 다가왔다. "루드비히는 평범한 사제님이 아니에요, 그렇죠?" 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표면에 떠오른 느낌 그대로 말했다. 루드비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엘도 대답을 듣지 못하리란 걸 이미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내 말을 따라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죠? 지금 답변해 드리죠." 엘은 루드비히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강경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달의 아이이기 때문이에요." 왜 이런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는 건지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엘은 그저 그녀를 누르려하는 압력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드비히는 내 요구를 거절하면 안 되는 거예요. 루드비히가 아무리 높은 사제님이라 해도, 아니, 설령 법황성하시라해도 마찬가지예요. 치사하게 내 말을 법황성하께 이르는 건 아니겠죠? 아무튼 여긴 아시리움이 아니라 리아잔 제국의 황궁이니까 이곳에선 싫든 좋든 내 말을 따라야 하는 거예요." 루드비히의 눈에 묘한 이채(異彩)가 반짝였다.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따르지 않으면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 실수를 깨달은 엘이 혀를 깨물었을 때 루드비히의 입술엔 어느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엘은 바보같은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부어야 할지, 예전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온 루드비히를 보며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궤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지체 높으신 달의 아이 말씀을 받들어 전 이만 여길 나겠습니다." 약 올리듯 입귀를 들어 올린 루드비히가 한순간 모습을 감췄다. "제기랄! 루드비히, 돌아와요! 명령이에요! 명령이라고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엘은 자신이 왜 안도감을 느끼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투덜대며 지금껏 방패처럼 가슴에 꽉 안고 있던 옷가지들을 떨어뜨렸다. ===================================================================제 목 [달의 아이] 60장.상흔-1===================================================================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 마르키젤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프네는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움찔하며 구부정하게 어깨를 좁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르키젤을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겁에 질려 있었지만 사실 그는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르키젤은 자신이 한 번도 여자를 손찌검하지 않았다는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비록 황제란 지위에 따른 여자들의 순종적인 태도와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편견에서 기인한 거라해도 그의 자부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가프네의 답답한 행동으로 인해 짜증이 치밀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점잖은 어조를 사용했다. "무슨 일로 날 만나러 왔는지 묻고 있지 않소? 어서 말해 보시오, 황비." "저... 폐하, 올리고 싶은 청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가프네 황비는 용기를 내기 위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축이고 싸늘한 손을 맞잡았다. "야노쉬 공작과 아르벨라의 혼인을 취소해 주십시오, 폐하." "뭐,뭐... 뭐라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던 마르키젤이 목에 커다란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꺽꺽대는 어조로 물었다. "아르벨라의 혼인을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폐하."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집어치워라! 혼인을 취소하라니! 이제 사흘 밖에 남지 않은 혼인을 취소하라니! 네가 지금 제정신인 거냐?" 마르키젤이 거칠게 역정을 냈다. "폐하, 아르벨라는 야노쉬 공작을 싫어합니다. 아니, 싫어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소름 끼치게 혐오스러워 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것! 야노쉬 공작이 그럴듯한 미남이 아니라서 투정을 하나 본데, 그는 웬만한 왕들은 따라오지 못할 권력과 재력을 갖고 있단 말이다. 더군다나 날 뒷받침해 주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기도 하고. 이번 혼인이 성사되면 난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될 테고, 그로 인해 리아잔을 완벽하게 내 뜻대로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바르테즈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마르키젤이 입을 다물었다. "폐하께서 심사숙고하셔서 내린 결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 아르벨라의 마음도 헤아려주십시오. 폐하께선 그 아이의 군주가 아니십니다. 부디 그 불쌍한 아이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해주십시오." 마르키젤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며 일그러졌다. "감히 너 따위가 날 가르치려 드는 거냐? 페르가몬의 딸이라며 나타난 계집애 때문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내게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명색이 어미라는 게 이토록 한심하고 멍청하니 아르벨라까지 앞뒤 구분 못하는 게 아니냐? 썩 나가라! 네 얼굴만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서 꺼져라!" "폐하, 아르벨라가 야노쉬 공작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나이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닥쳐라! 듣기 싫다!" 사납게 책상을 내려친 마르키젤이 손을 위협적으로 치켜들고 가프네에게 돌진했다. "아르벨라는 여섯 살 때 겁탈을 당했습니다!" 가프네가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마르키젤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야노쉬 공작이... 그 짐승같은 놈이 여섯 살, 그 어리고 연약한 아르벨라를... 내 딸을 겁탈했단 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야노쉬 공작은 시녀들과 숨바꼭질하며 놀고 있던 아르벨라를 감언이설로 꼬여 아무도 없는 온실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르벨라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그 아이를... 아르벨라... 내 어린 아기를......" 뼛속까지 곪아 버린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살아나자 가프네는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밤마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그 아이의 입을... 제 손으로.... 막아야 했습니다......" 마르키젤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이를 갈았다. "어린아이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내 딸에게까지 손을 대다니! 야노쉬, 내 이 놈을!" "폐하, 혼인을 취소해 주십시오!" 쓰러지듯 무릎을 꿇을 가프네가 절절한 아픔이 배어 든 얼굴을 치켜들었다.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아르벨라는 야노쉬 공작과 혼인하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폐하, 그 가련한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 아르벨라를 사지로 밀어 넣지 말아주십시오." "아니, 그럴 수 없다. 이제와서 혼인을 취소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의 혼인을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야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가프네가 숨을 헐떡였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럼 그 더럽혀진 아이를 야노쉬 공작이 아니면 누가 거둔단 말이냐?" 마르키젤이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더럽혀졌다니요?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르벨라는 상처 입은 것 뿐입니다!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더러운 건, 진짜 더럽고 추악한 건 바로 야노쉬 공작입니다!" 새된 외침이 쏟아졌다.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나가라." 가프네는 모든 얘기가 끝났다는 듯 걸음을 떼는 마르키젤의 다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제발 다시 한 번만! 혼인을 취소할 수 없으시다면 조금만 늦춰주십시오, 폐하. 제가 그 동안 아르벨라를 달래 보겠습니다. 제발 그것만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마르키젤이 거칠게 다리를 빼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시종과 시녀들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비를 거처로 데려가라." 마르키젤이 가프네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가느다란 흐느낌만이 무거운 침묵 위를 떠다녔다. 황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시종들이 뒤로 물러서자 네 명의 시녀들이 가프네를 부축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그녀를 단단히 지탱한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하얗게 색이 바랜 얼굴을 타고 서러운 체념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감시의 눈길이 모두 사라지자 엘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카펫에 주저앉아 등을 곧추 세우고 눈을 감았다. 기회는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그것을 잡지 못하면 계획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테고, 그로인해 그녀는 더욱 현실과 멀어지고 세상에서 고립될 것이다. 엘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직 한 곳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어느새 익숙해진 감각이 몸 구석구석을 휘돌기 시작했다. 엘은 충분하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이제 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즉시 엘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여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을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긴 외투를 걸쳤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갖추어진 것들을 그녀가 잘 실행하고 제어할 수 있느냐의 문제뿐이었다. 엘은 당당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과 시종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잠이 오지 않으니 잠깐 정원을 산책해야겠어요." "전하, 그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신 것..." 엘은 시종의 말을 뒤로 하고 정원으로 나있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급한 마음에 자꾸만 걸음이 빨라지려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그것에 발을 맞췄다. 그녀의 행동을 수상쩍게 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정원으로 나서자 별궁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까지 그녀를 뒤따르는 무리에 합세했다. 엘은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미심쩍은 기색을 드러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엘은 그들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사흘 전부터 하루에 두세 번씩 정원을 거닐다 얌전히 들어가곤 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젊은 시녀가 옆에 서 있는 비슷한 연배의 다른 시녀를 향해 소곤댔다. 불분명하던 소리가 양철그릇을 서로 맞부딪치는 것같이 요란하게 변하더니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소리가 들려 오는 먼 하늘을 바라봤다. 희미한 산자락 쪽에서 길다란 선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물결이 서서히 하늘을 덮어 왔다. 급속도록 넓어지고 가까워지는 무시무시한 장막이 해를 가리며 대지를 검게 물들였다. "저,저건 새야. 새떼야." 한 기사가 넋이 나간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지만 나머지 말은 섬뜩할 정도로 다가든 새들의 날갯짓과 울음소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황궁의 하늘을 온통 점령한 수만 마리의 새떼가 빛 덩어리처럼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다 사람들을 스치며 힘차게 비상했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미처 별궁으로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엎드렸다. 엘은 말 그대로 새떼를 헤치며 침착하게 나아갔다. 사람들에게서 웬만큼 떨어진 곳에 이르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은 다음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다. 서너 번 같은 행동이 이어지자 어느새 엘의 머리는 목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게 되었다. 그녀는 단도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작은 주머니에 넣어 둔 야크 다섯 개를 손바닥에 쏟았다.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야크는 귀족들이 주로 간식으로 즐기는 값비싼 나무열매였는데 초록빛을 띠고 있는 껍질 속엔 진한 붉은 색 알맹이가 들어있었다. 엘은 야크를 짓이긴 다음 선혈처럼 흘러내리는 즙을 얼굴과 목에 발랐다. 그런 다음 저만치 보이는 궁문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새가, 새떼가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어요!" 엘은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궁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피투성이처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대하고 창백하게 질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기사님들!" "우린 이곳을 떠날 수 없다. 하지만 도와줄 기사들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곧 괜찮아 질거다. 그러니 진정해라, 얘야." "전하께서 많이 다치셨어요! 가서 어의님을 빨리 모셔 와야 해요!" 울먹이며 말한 엘은 어서 가라는 기사들의 격려를 뒤로 하고 힘껏 내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이 더 이상 따라붙지 못하는 곳에서 달리기를 멈췄다. 그리고 외투자락을 뒤집어 얼굴과 목을 닦았다. 엘은 길게 이어진 돌길을 재빠르게 걸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황궁 전제가 들썩이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별궁을 향해 뛰어가는 병사와 기사들, 시종과 시녀들 무리가 쉴새 없이 곁을 스쳐 갔다. 그들 중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엘은 단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푼 건 황궁을 완전히 벗어나 영업마차에 올랐을 때였다. "칼 베리만 재상님의 저택으로 가 주세요." 엘은 허리에서 단도를 꺼내들었다. "돈은 없지만 대신 이걸 드리죠." 색다른 마차삯을 본 마부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팔을 뻗었다. 엘은 단도에 닿으려 하는 먼지투성이 손을 바라보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니오, 다른 걸로 하겠습니다!" 숨가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단도를 지키려는 듯 엘은 어느새 몸을 옆으로 틀고 있었다. "이 외투를 드리겠습니다." 엘은 재빨리 옷을 벗어 마부에게 내밀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부가 마지못한 기색을 내보이며 외투를 받았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은 옆에 내려놨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손에 잔뜩 힘이 가해졌다. 마치 칼날을 쥐고 있는 것처럼 단도자루가 살을 파고들었다. 엘은 꼼짝 않고 단도를 내려다보다 허리춤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힘없이 눈을 감았다. 클레르몽은 침구를 말끔히 정리한 다음 벗어 놓은 옷을 개어 침상 위에 내려놨다. 몸을 펴며 그는 팔소매와 아랫단이 헤진 초라한 겉옷을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머물던 방을 둘러보는 클레르몽의 눈엔 착잡함이 어려있었다.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당장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그로서는 이 작은 안식처를 떠나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식객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그를 도와준 친절한 농부에게 더 이상의 신세를 진다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았다. 골목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그를 거두어 정성껏 보살펴 준 은인을 떠올리며 클레르몽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옹이 진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놨다. 반지 하나로 은혜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클레르몽은 반지자국이 선명한 손가락을 쓸어 보았다. 흉터처럼 새겨진 불그스름한 자취마저 사라지면 그에게 남아있던 과거의 흔적은 깨끗이 씻겨 나가게 될 것이다. 클레르몽은 손을 꼭 움켜쥔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봤다. 그가 막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중년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인사도 못 드리고 가나 했는데...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클레르몽은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정중히 목례를 했다. 그가 채 고개를 들기도 전에 순박한 농부로만 알고 있던 중년남자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은 예를 갖춰 법황 성하의 뜻을 받드시오."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벌리고 있던 클레르몽은 남자의 엄격한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 법황 성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바닥에 닿을 듯 조아린 머리 앞에 정교한 나무받침이 놓여졌다. 받침 위엔 대사제의 인장과 봉인된 문서가 올려져 있었다. "성하께서 클레르몽 대사제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내리셨소. 만약 인장을 잡으면 다시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로 복귀하게 될 것이오. 성하께선 그에 따른 안전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소. 하지만 인장이 아닌 문서를 선택하면 대사제는 클레르몽이란 이름을 버리고 완벽히 다른 이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오. 그 문서엔 대사제가 갖게 될 새로운 신분과 이름이 적혀 있소. 물론 아시리움에서 앞으로의 평안한 삶을 보장해줄 것이오." 클레르몽은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을 두 가지 물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더욱 엄숙하게 말했다. "선택하시오, 오프리트 베른 클레르몽." 마음을 정한 클레르몽이 신중하게 팔을 뻗어 문서를 집어들었다. "좋소, 일어나시오. 지금 밖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클레르몽은 걸음을 떼는 남자를 다급히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오?" "시간을 좀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과거를 버리기 전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능하오. 지금 마차에 오르지 않으면 그 문서는 휴지조각이 될 것이오." 기계적으로 나열되는 메마른 목소리가 간절한 염원을 잘라 버렸다. 클레르몽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밖으로 나가려던 남자가 바스러질 듯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클레르몽을 흘깃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나타났다. "마차를 타시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만나고 싶어하던 얼굴을 보게 될 것이오." 클레르몽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아른거렸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목매인 어조로 말했다. "성하께 한 말씀만 전해 주십시오. 성하를 모신 지난 3년이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제 목 [달의 아이] 60장.상흔-2=================================================================== "날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람이 자네인가?" 엘은 안도감을 느끼며 칼 베리만을 돌아봤다. "엘!" 버럭 소리친 칼 베리만이 흠칫하더니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엘을 비밀스런 내실로 데려간 칼 베리만이 그녀에게 의자를 권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절 찾는 사람이 엘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 곳까지 오신 겁니까?" "조금 소란을 피운 다음 그 틈을 이용해 빠져 나왔어요. 그것보다 칼 베리만,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 주셔야겠어요. 도움을 청할 분이 칼 베리만 밖에는 안계세요." 긴장한 칼 베리만이 몸을 내밀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좀 뻔뻔한 부탁이에요. 그러니까... 말하고 돈이 필요해요." "말과 돈이라면... 설마 이곳을 떠나신다는..."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생각이에요. 죄송해요, 칼 베리만. 하지만 이곳에서... 그 삭막한 황궁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전 칼 베리만이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전 페르가몬 황제폐하의 딸이 아니에요. 리아잔 제국의 후계자라는 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일 뿐이에요." "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드리오를 떠나신다니... 안됩니다, 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없던 걸로 하고 물러서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칼 베리만은 절실한 바람을 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부탁드립니다, 엘. 마음을 바꾸십시오." "그럼 그곳으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란 말씀이세요?"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엘의 얼굴에 파리한 그늘이 내렸다. 탁자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이윽고 시선을 들었다. "제가 이대로 바드리오를 떠난다면, 그래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숨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엘이 모습을 감춘다면 세상은 엘이 달의 아이가 아니라서 도망친 거라 믿을 겁니다. 그럼 아시리움 측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들을 두 번이나 속인 죄인을 잡지 않으면 그 이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니까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칼 베리만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 등을 기댔다. "리아잔 제국 또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비록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해도 엘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안할 겁니다. 어느 날 자신들의 자리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설령 평생이 걸린다해도 엘을 찾아내 제거하려 할 겁니다." 엘은 눈을 감은 채 칼 베리만의 말을 듣고 있었다. 스스로 막아버린 시야였지만 눈을 떠도 언제까지나 어둠 속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신 겁니까? 갑자기 현기증이 나신 겁니까?" 칼 베리만이 걱정스럽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뇌리 깊숙이 울리는 순간 엘은 자신이 못난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지레 겁을 먹고 있었어. 내가 친 울타리 안에 갇혀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그저 고개만 가로젓고 있었던 거야. "대체 이 일을 어떡한담. 엘, 눈 좀 떠 보십시오!" "전 괜찮아요, 칼 베리만." 엘은 근심어린 갈색 눈동자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저...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칼 베리만. 제가 별궁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누구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고요." "혹시 반지에 대해 하셨던 말씀 기억나십니까?" "반지라고요? 제가 반지 얘기를 칼 베리만께 했다고요?" 반문하는 엘의 말투에서 칼 베리만은 그녀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화형식이 있던 날, 어렸을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던 물건이 없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엘이 반지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반지를 리오란 사람에게 주었다는 식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엘이 진지하게 답했다. "예,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반지가 있긴 해요. 제가 직접 몸에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요. 할머니께서 반지를 주셨어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요." "어떻게 생긴 반집니까?" "남자 반지에요. 가운데 연한, 그러니까 꼭 달빛같은 빛을 내는 돌이 박혀 있고, 그 옆으로 이상한 문양이..." "맞았군요! 바로 그겁니다!" 흥분을 못이긴 칼 베리만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그걸 리오란 사람에게 주었습니까? 그 리오란 사람은 체르몬 국의 왕자전하가 맞으신 거겠죠?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신 겁니까?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는 겁니까?" 칼 베리만이 연거푸 질문을 쏟아 냈다. "리오는 체르몬 국의 왕자가 맞아요. 제가 그 반지를 리오에게 준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리오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처형식 때 잠깐 얼굴을 보긴 봤지만..." 오열하던 리오가 떠오르자 엘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렇다면 바드리오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런데 리오는 왜 찾으시려는 거예요? 그 반지 때문인 것 같은데, 그 반지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엘이 갖고 있었다는 반지는 후계자의 반지가 틀림없을 겁니다. 후계자의 반지는... 그러니까 리아잔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보물입니다. 그 반지를 꼭 찾아야 합니다, 엘. 폐하께서 아르벨라 황녀님의 혼인식까지 제 예언이 사실임을 입증하라는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즉, 그 날 엘이 달의 아이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그 반지를 세상에 내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리오를 찾고 계신 거로군요." 엘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왕자 전하를 찾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전 지금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엘이 저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도 이미 보고가 되었을 겁니다." "그럼 반지는 누가..." 엘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칼 베리만이 입을 열었다. "예, 대공께 그 일을 부탁 드렸습니다. 아마 대공께서 최선을 다해..." "필요없다 그러세요!" 엘은 소리 높여 칼 베리만의 말을 잘랐다. "그 사람의 도움같은 거 필요없어요. 왜 하필... 왜 하필 그 사람에게 제 일을 말씀하신 거예요?" "엘... 엘이 왜 이러시는지 저도 압니다." "아니오, 칼 베리만은 모르세요. 누구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엘은 가만가만 속삭였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엘... 이것 하나만은 믿으셔야 합니다. 대공께선 엘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엘을 아끼십니다."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보던 칼 베리만이 속내를 조금 내보였다. "아니오, 믿을 수 없어요. 칼 베리만껜 죄송하지만 단 한 말씀도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엘. 대공께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엘을 소중히 생각하십니다.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칼 베리만은 눈을 꼭 감았다. 처형식이 열렸던 날 새벽에 있었던 일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떠올랐다. 칼 베리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뒤척이다 얼마 전에야 겨우 눈을 붙였지만 심상치 않은 예감이 잠기를 단번에 몰아냈다. 그는 부랴부랴 옅은 새벽빛이 깔린 카펫 위를 걸었다. 문을 열어 리자드를 발견한 칼 베리만은 아무 말없이 몸을 비켰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리자드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지금까지 밖에 계셨던 것 같군요." "코벨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칼 베리만은 그 말에서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창가에 놓인 의자를 권하며 리자드를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움직임엔 힘과 절제가 배어있었지만 의자에 몸을 묻는 단순한 동작에선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흐트러진 청회색 머리카락을 빗어 올리는 손짓에서도 지친 기색이 묻어 나왔다. 리자드는 칼 베리만이 그의 앞에 자리 잡은 후에야 말을 꺼냈다. "실패했습니다." 담담한 말투에 스며든 고뇌가 느껴지자 칼 베리만은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말씀은..." 그는 칼칼한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말씀은 엘을 구해내지 못하셨다는 거겠지요. 역시 그녀를 구하려 하셨군요. 엘이 잡혔을 때부터 대공께서 그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칼 베리만께서는 저에 대해 너무나 많은 걸 알고 계십니다. 제 자신보다도 더." 리자드가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늘진 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응시하던 칼 베리만이 불쑥 물었다.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오, 생각없습니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 아니, 부탁이 있어 찾아뵌 것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대공.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리자드가 칼 베리만의 눈을 꿰뚫을 듯 직시했다. "그 아이를 구해주십시오." 칼 베리만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대,대공...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럴 힘이 어디 있다고..."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칼 베리만 뿐이십니다." "대공, 전 엘을 구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안됩니다. 저도 그럴 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엘을 구하고 싶습니다. 절 향해 환하게 미소짓던 그 소녀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공도 아시다시피 전 무능력한, 그저 그럴듯한 명패를 단 허수아비 재상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아시리움의 일입니다. 제가 손써 볼만한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저보다 대공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칼 베리만이 절실한 마음을 토해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칼 베리만께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리자드가 강하게 주장했다. "대공, 그럼 지금... 제 예언능력을..." "예, 바로 그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밝혀 주십시오. 그것만이 그 아이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문젠 대공께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계시잖습니까?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 고... 그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엘을 찾아내신 것 아닙니까? 저 역시 이렇다 저렇다 감히 판단할 수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걸 믿어 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 베리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리자드가 조금 격해진 어조로 말했다. 칼 베리만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걸 저보고 발표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예언하는 것처럼 속여 세상에 알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안 됩니다, 대공! 불가능합니다!" 칼 베리만이 숨가쁘게 소리쳤다. "힘든 일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엘을 살리고 싶어 하시는 대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말씀 드렸다시피 저 역시 대공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거짓예언을 하라니요? 어찌 거짓예언으로 세상을 속이고, 제 영혼을 더럽히라 하시는 겁니까? 불가능합니다. 당장 죽음이 닥친다 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 하지만 제 심정도 좀 헤아려 주십시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절 이해해 주십시오." 리자드의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청회색 눈동자에 비친 미명(微明)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리자드가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 베리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공!" 소스라치게 놀란 칼 베리만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부탁 드립니다." "대공... 대공......" 칼 베리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리자드의 목소리가 점점 낮게 가라앉았다. "제 힘으론 할 수 없습니다. 제 힘으론... 그 아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대공." 칼 베리만은 꽉 막힌 목을 겨우 울려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대공의 그런 모습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칼 베리만은 같은 말을 되뇌며 깊이 빠져들었던 회상에서 벗어났다. 그는 어두운 눈으로 고개를 꺾고 있는 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던 칼 베리만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내실 안쪽에 놓인 문으로 걸어갔다. 그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상자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 엘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시 의자에 자리한 칼 베리만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엘, 앞에 놓인 걸 보십시오." 눈에 익은 물건을 확인한 엘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건 제가 갖고 온 거잖아요. 제가 직접...... 리자드에게 건넨 물건 말이에요." "맞습니다, 엘. 엘이 아시리움 성전에서 목숨을 걸고 찾은 물건입니다. 그리고 대공께 전하신 물건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저에게 보이시는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반으로 갈라진 걸." "제가 큰 실수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제 손으로 뚜껑을 열어 버렸으니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칼 베리만이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감추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 물건은 가짜입니다. 엘은 대공께 가짜를 갖다 드린 겁니다. 그런데도 대공께선 엘에게 그 사실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물건을 집어 들었다. "가짜... 이게 가짜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칼 베리만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감정대로 움직인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침울하게 인정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문양을 몇 번이고 쓸어 보던 엘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거친 감촉을 깨닫고 물건을 뒤집었다. 뒷면엔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엘은 물건의 나머지 쪽을 들어 두 개를 맞대었다. "루벤스타인 대공... 제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엘은 혼란스런 시선을 칼 베리만에게 옮겼다. "누가 이런 글을 새긴 건가요?" "법황 성하십니다. 어떤 증거를 내밀 순 없지만 그분의 필적이 틀림없습니다." 엘은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시야가 흐려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잠시 후에야 띄엄띄엄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성하께서... 모든 걸... 아시고... 나를 이용해... 가짜를..." "죄송합니다, 엘. 충격받으실 줄 잘 알면서도 엘 앞에 그걸 들이대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엘은 손바닥 가득 돌조각을 움켜쥐었다. 거친 모서리에 살이 패이며 아픔이 느껴졌다. "정말 잔인하군요. 차라리 도둑이라며 그 자리에서 목을 자를 것이지. 그게 더 자비로웠을 거예요. 왜 나를... 왜 하필 나를..."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지자 엘은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언젠가 그 분을 만나게 되면 왜 저를 이용하신 거냐고 묻고 싶어요. 그럼 전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너같이 비천한 건 그걸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대답일까요? 아니면 감히 성하께 무례한 질문을 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화형대에 묶이게 될까요? 칼 베리만... 대체 저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 걸까요?" 엘이 입술을 떨며 가냘픈 웃음을 흘렸다. 칼 베리만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뗐다. "죄송해요, 칼 베리만. 제가 한 못난 투정은 잊어버리세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 더 늦기 전에 제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가야겠어요. 아무도 반겨 주진 않겠지만요." 엘은 누구도 자신을 업신여기거나 상처 입힐 수 없다는 듯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가던 칼 베리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몸 조심하십시오, 엘." 엘은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전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문 앞에 멈춰 선 후에야 칼 베리만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칼 베리만... 건강하세요." "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엘은 약한 미소를 그리며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청회색 눈동자가 전신을 옭아맸다.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작은 실핏줄이 파리한 눈꺼풀 위에 그려졌다. 리자드가 문을 두드리기 위해 들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이,이런 대공께서 오셨군요." 어쩔 줄 몰라하던 칼 베리만이 서툴게 침묵을 깼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루벤스타인 대공전하." 엘은 리자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그와 시선을 맞댔다.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늘에서야 제가 갖다 드린 물건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전하와 저 사이를 잇고 있던 한 가닥 줄이 완벽하게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하께선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엘은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 보고 드렸으니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리자드를 스쳐 지난 엘은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의 눈길이 느껴졌다.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무릎에 잔뜩 힘을 가했다. "처형대에 묶여 본 소감이 어떠냐?" 리자드가 잔인한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엘은 걸음을 멈췄다. "제법 짜릿할 것 같은 데..." "대,대공!" 경악한 칼 베리만이 소리 높여 리자드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층 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수만 명의 시선을 받으니 우쭐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느냐? 아니면 처량한 신세타령을 늘어놓느라 미처 음미할 여유가 없었느냐?" 엘은 성난 불길이 자신을 덮치는 걸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리자드를 향해 걸어갔다. 그 바로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팔을 높이 치켜 들었다. 리자드가 사납게 내리 꽂히는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놔!" 엘은 이를 악물고 손을 힘껏 비틀었다. 거친 맥박을 휘감은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마치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기라도 한 듯 리자드가 강하게 손목을 조여왔다. "날 때리고 싶다면 지금보다 최소 열 배는 강해져야 할거다. 철이 들려면 백 년은 지나야 할 테고." "대체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철이 들든 말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들었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엘은 이를 갈며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리자드가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그 즉시 엘은 걸음을 떼었다. 부릅뜬 눈으로 선명하지 않은 문을 노려봤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하는 거친 숨결을 참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문이 닫히자 칼 베리만은 진이 다 빠져 버린 사람처럼 힘없이 리자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공,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엘이 지금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대공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리자드가 거칠게 속삭였다. 칼 베리만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엔 알 수 없는, 어떤 아픔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말대로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듯 딱딱한 어조로 말한 리자드가 내실로 들어갔다. 칼 베리만은 단단히 경직된 넓은 어깨에서 시선을 뗐다.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는 두 사람의 상처를 외면하기엔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걸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목 [달의 아이] 61장.대면-1===================================================================서서히 짙어지는 저녁빛 사이로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왔다. 쌀쌀한 바람은 엘의 얼굴을 더욱 파리하게 만들었고, 엉망으로 잘린 검푸른 머리카락을 헝클어 그녀를 갈 곳 잃은 처량한 떠돌이처럼 보이게했다. 엘은 마차진동에 몸을 맡긴 채 작은 창 너머 세상을 바라봤다. 갖가지 관목과 교목들이 외발이 거인처럼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엷은 노을에 감싸인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려 팔을 길게 뻗고 있는 듯 보였고, 몇 그루는 기력이 다한 부상자처럼 흑갈색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마차가 덜컥 흔들리자 엘은 창틀을 움켜잡았다. 땅 위로 튀어나온 뼈마디같은 뿌리들이 자꾸만 바퀴를 잡아챘다. 마차 움직임이 부드러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이 나타났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은 웅장하고 장엄해 보였고, 신비스러운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엘은 다가오는 황궁을 응시하다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녀가 칼 베리만을 만났다는 사실이 황제에게 이미 보고되었겠지만 경비병들에게까지 그의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엘은 마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일으킨 소동은 오래 전에 가라앉았는지 주위는 평온했고 경비병들 역시 일상의 업무로 돌아간 듯 보였다. 마흔 명에 달하는 경비병들이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부터 간편한 통행을 위해 따로 나있는 출입문까지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론 눈에 띄는 그 어떤 곳에서도 사라진 그녀를 찾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엘의 입술에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건 구태여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씁쓰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엘에게 경비병들의 따가운 이목이 집중됐다. 엘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자 유난히 우람한 몸집의 경비병이 위협하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경비병의 얼굴에 의심쩍은 표정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용건을 말해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지, 보면 모르겠소?" 엘은 경비병과 시선을 맞대며 당당하게 말했다. 경비병의 눈에 슬그머니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지 뒤를 돌아보자 다른 경비병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 중 키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병사가 위협하는 듯한 동작으로 어슬렁거리며 엘의 주위를 빙돌았다. "통행증은?" 황궁을 출입하는데 구태여 통행증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엘은 그들이 금품을 요구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없소." "그럼 황궁엔 발가락 하나 디딜 수 없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돌아가는 게 나을 거다. 어서 꺼지지 않으면 단단히 혼구멍을 내줄 테니까." 엘은 거들먹거리는 병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압적인 경비병을 상대하는 일은커녕 꼿꼿하게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설상가상 애써 외면하고 있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머리까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비키는 게 좋을 거요." 엘은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협박하는 듯한 말투를 사용했다. 요란하게 콧방귀를 뀐 경비병이 입술을 실룩이며 이죽거렸다. "비키지 않으면 네 녀석이 어쩔건데? 통행증도 없는 주제에 겁도 없이 어디 와서 깝죽대는 거야?" 언성이 높아지자 무슨 일인가 궁금해진 경비병들이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엉? 비키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동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경비병이 더 한층 인상을 쓰며 폭력이라도 쓰려는 것처럼 엘에게 바짝 다가섰다. 엘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걷지도 못할 만큼 물볼기를 쳐주지." 놀란 경비병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엘과 말싸움을 벌였던 남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멍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무,물볼기라고?" 누군가가 낄낄거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경비병들 전체로 웃음이 번졌다. "거참, 맹랑한 녀석일세." "카이버는 엉덩이가 넙적하고 대문짝만해서 때리기도 쉬울 거야. 안 그래?" "그래, 맞아. 눈감고 쳐도 어지간하면 걸릴 테니까." 요란한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얼굴부터 목까지 화끈 달아오른 경비병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엘을 향해 번쩍 팔을 치켜올렸다. "이,이 건방진 자식!" 경비병이 엘의 따귀를 갈기려는 찰나 뒤에서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멈춰라!" 일제히 뒤를 돌아본 경비병들이 흠칫하며 경비대장과 시종장에게 길을 내주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그들 사이로 걸어온 두 사람이 엘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엘은 그녀가 황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이미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시종장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경비병들이 격하게 숨을 들이켰다. "뭣들 하는 거냐? 엘리시엔 전하께 인사드리지 않고?" 대장의 매서운 시선을 받은 경비병들이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엘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납작하게 수그린 경비병들의 머리를 보며 그녀는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저,전하, 못 알아 뵙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를... 전하, 잘못했습니다..." 엘에게 팔을 치켜들었던 경비병이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더니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저 목숨만..." "알았소! 알았다고!" 숨가쁘게 소리친 엘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그들을 지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아직 일을 마무리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빙글 몸을 돌렸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엘은 그들에게 엄격한 눈길을 던졌다.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통행증을 요구하지 마시오. 다시 한 번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경비병 모두 물볼기를 피할 수 없을 거요. 보아하니 모두들 눈감고 때려도 웬만하면 걸릴 것 같으니까."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던 엘은 말을 끝내고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왠지 모를 홀가분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를 바라보던 경비병들 사이에서 조금씩 웃음이 번져나갔다. 엘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슬쩍 미소지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헐레벌떡 뒤좇아온 시종장이 엘을 불러 세웠다. 그는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그녀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빠른 걸음걸이에도 시종장의 머리카락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빗어넘긴 회색머리카락을 보며 엘은 '무엇을 발랐기에 저럴까' 하고 잠시 궁리했다. 그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을 깨닫고 작게 실소를 지었다. 잠시후면 황제를 만나게 되는 마당에 시종의 머리에 관심을 갖다니. 독심술사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며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드리오를 떠나면 사람들은 그녀가 달의 아이가 아니라서 도망쳤다고 생각하게 될 거라는 칼 베리만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엘이 다시 돌아오리란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는지 그녀를 본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엔 의외라는 놀라움이 나타나 있었다. 엘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내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손바닥에 땀이 배일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엘은 자신이 리아잔 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황제란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존재였다. 황궁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그에게 느끼고 있던 막연한 경외감이 조금 줄어들긴 했으나 마음 편히 대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비록 황제가 그녀의 이모부라해도 말이다. 엘이 축축한 손을 바지에 문질렀을 때 걸음을 멈춘 시종장이 그녀를 돌아봤다. "다왔습니다, 전하." 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도착하면 고하지 말고 즉시 들여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는지 접견실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엘은 활짝 벌려진 문을 통과해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어서 오너라." 굵고 조금 거친 목소리가 그녀를 맞아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 폐하." 엘은 짧은 순간 망설이다 우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평민이나 천민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이마를 바닥에 대어야 했고, 귀족이나 왕족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반절상태로 자신의 정식명을 밝혀야 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엘은 어느 한쪽을 주저없이 선택하기엔 입장이 모호했다. 때문에 그녀의 인사 역시 어중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이 황제뿐이었다면 엘은 위압감을 풍기는 그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라도 무릎을 꿇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제 옆에 앉아 있는 자일스의 존재는 오히려 그녀의 무릎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엘은 고개를 들며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자일스와 달리 황제는 그럴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단순히 입술 끝을 치켜 올리는 데에 그쳤을 뿐 그녀에게 닿아 있는 초록빛 눈동자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엘은 그가 자일스의 아버지일 뿐, 진정한 의미로서 자신의 이모부가 되진 못하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라." 엘은 공손한 태도로 몸을 움직였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두 사람의 시선이 걸음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지난번 처형식에선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널 대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구나. 건강해 보여 한결 마음이 놓인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엘의 답례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어디 처박혀 있다 이제야 기어 들어온 거냐?" 자일스를 향하는 엘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잠시 동안 자일스를 빤히 쳐다보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귓구멍이 막혔느냐?" 자일스가 사납게 윽박지르자 엘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던 마르키젤이 그를 점잖은 어투로 나무랐다. "자일스, 말투가 왜 그리 거친 거냐? 엘리시엔이 많이 놀랐겠구나. 손아래 누이동생을 대할 때는 신경을 써서 말과 행동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자일스는 누이동생이라는 말에 입술을 실룩였으나 고분고분 마르키젤의 타이름을 받아들였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상태로 황궁 밖을 나가다니... 어찌 된 일이냐? 더군다나 보호해 줄 호위기사 한 명없는 혼자 몸으로 말이다. 대체 어디 갔다 온 것이냐? 무슨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마르키젤의 말투엔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같은 과장된 부드러움이 어려있었다. 엘은 그가 차라리 자일스처럼 적의를 나타내는 편이 마음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칼 베리만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보고받았을 일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엘이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을 줄은 몰랐는지 자일스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저택까지 찾아가다니. 재상과는 황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나 보구나."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마르키젤의 시선이 엘에게 못박혔다. 그녀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오늘 뵙기 전엔 그분의 얼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전부터 그분을 알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절 죽음에서 구해준 분이 칼 베리만이시라는 황후폐하의 말씀을 들었을 때부터 그 분을 꼭 만나 뵙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말 몇 마디로나마 제가 느끼는 고마움을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인사말고 그와 무슨 얘길 한 것이냐?" 마르키젤이 좀 더 직접적으로 추궁했다. "황궁생활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저 소소한 얘기일 뿐, 폐하께 말씀드릴만큼 중요한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키젤의 얼굴이 굳어졌다. 질문만 하면 엘이 고분고분 사실을 털어놓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있던 그는 한순간 불쾌감을 숨길 수 없었다. "재상을 만나고 싶었다면 그에게 전갈을 보내면 됐을 것 아니냐? 왜 도망이라도 치듯 갑자기 황궁을 빠져나가 그의 저택을 방문한 것이냐?" "오랜 시간 갇혀 지내서 그런지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바람도 쐴 겸해서 겸사겸사 나갔다 온 것입니다." 엘은 노기를 드러내며 점점 짙어지는 초록색 눈동자를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갇혀 지냈다니... 아랫것들이 네 건강을 위해 좀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 같구나. 네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줄 나는 물론이고 그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저도 그런 이유일거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건강을 되찾았으니 더 이상의 요양은 필요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보기엔 안색이 많이 창백한 것 같구나. 앞으로 며칠동안은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 그럼 피곤할 테니 네 거처로 가서 편안히 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엘은 마르키젤의 명령을 얌전히 따랐다. "엘리시엔, 잠깐 멈춰봐라." 마르키젤이 문을 나서려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새떼가 황궁으로 몰려들었던 사건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거라 생각하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족한 제 소견으로는 굶주린 새들이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다가 우연히 황궁으로 이동하게 된 것 같습니다." 긴장한 상태로 서 있던 엘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르키젤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없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엘은 조금 딱딱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서둘러 접견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마르키젤이 난폭하게 탁자를 내려쳤다. "방자한 계집!" "예,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되바라진 계집애입니다! 감히 아버님 앞에서 그따위 시건방진 행태를 보이다니!" 자일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지는 어떻게 됐느냐, 자일스?" 벌떡 일어선 마르키젤이 자일스에게 성큼 다가들었다. "왜 아직까지 이렇다 저렇다할 보고가 없는 거냐? 혼인식은 이제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진정하십시오." "그 따위 말 필요없으니 일의 진행에 대해서나 털어놓으란 말이다! 설마 일을 망친 건 아니겠지?" 마르키젤이 조금도 성질을 누그러뜨리지 않자 자일스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보고드릴만한 사안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지는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만약 반지가 우리 손에 들어오지 못한다면 그 늙은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또... 솔직히 말씀 드려 전 그 반지에 대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키젤이 미간을 모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계집애가 언급한 반지는 그저그런 싸구려 장신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후계자의 반지일리 없습니다." 자일스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한눈에도 더러운 피가 흐른다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일부이긴 하지만 그 천한 계집애와 제 몸에 같은 피가 흐른다니... 시궁창에서 빌빌대는 무지렁이도 비웃을 얘기입니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니! 그러니까 아직까지 반지를 못 찾은 거 아니냐?" 마르키젤이 물어뜯기라도 할 듯 험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잘 들어라, 자일스! 리아잔 제국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너처럼 태평하게 있다가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들었느냐? 일이 틀어지면 네 말대로 그 천한 계집애한테 리아잔을 빼앗기게 된단 말이다!" 자일스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왜 갑자기 마르키젤이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 핏대를 곤두세우기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계신 모양이로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이 아버님의 심기를 이토록 흐리게 만든 것입니까?" 자일스를 노려보며 거친 숨을 토해내던 마르키젤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입을 여는 그의 목소리는 많이 침착해져 있었다. "어제만해도 난 칼 베리만이 거짓예언을 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이긴 했지만 내심으로는 노망난 늙은이 말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저 그렇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일스가 숨가쁘게 물었다. "그 예언이 사실일지 모르는 증거가 나타났단 말이다." 마르키젤이 숨을 죽이고 있는 자일스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페르가몬이 갖고 있던 능력 중 하나가 무엇이지 아느냐? 페르가몬은 자유자재로 동물을 부릴 수 있었다. 마치 마법을 쓰기라도 한 듯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였단 말이다. 그 능력이 놈의 딸에게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물을 부리는 능력... 그러니까 오늘 새 떼가 몰려든 일을 말씀 하시는 겁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일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래, 그걸 말하는 거다. 엄청난 수의 새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혼란스런 틈을 이용해 그 계집애가 황궁을 빠져나갔다.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연이라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입을 다물고 석연치 않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마르키젤이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정도 규모의 새를 움직이다니... 페르가몬도 그런 적은 없었는데......" "터무니없습니다, 아버님. 그 계집애는 절대 페르가몬의 딸이 아닙니다. 그런 천한 계집애가 어떻게 리아잔의 정통후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만만한 어조와 달리 자일스의 눈엔 불안감이 엷게 깔려 있었다. "이번 일은 네 마음 편한 대로 규정지을, 그런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계집애가 페르가몬의 딸이 맞고 그의 능력이 핏줄을 타고 전해졌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페르가몬은 어마어마한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집애는 불에 타 죽을 운명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만약 페르가몬의 딸이 맞다면 제아무리 아시리움이라해도 화형대에 묶을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일스를 응시하던 마르키젤이 천천히 등을 기댔다. "거기에 대해선 네가 모르는 일이 있다, 자일스." "그게 무엇입니까?" "네가 알 필요없는 것이다. 넌 그저 그 반지를 손에 넣는 엘에만 신경쓰면 된다. 알아들었으면 나가 봐라." 자일스는 마르키젤의 완고한 얼굴에서 어떤 말로도 그의 입을 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기심이 점점 부풀어올랐지만 마르키젤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마르키젤은 걸음을 옮기는 자일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자일스는 문을 나서기 직전 흘끔 마르키젤을 돌아봤다.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 걸까? 무슨 일인데 나한테까지 입을 다무시려 하는 걸까? 자일스는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 목 [달의 아이] 61장.대면-2===================================================================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정신없이 헛간을 휘젓고 다니던 리오가 걸음을 멈췄다. "지금쯤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벌써 석양이 내리려고 하잖아." "지금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해. 조금 더 어두워진 후에 움직이는 편이 안전할거야." "그래, 그렇겠지. 네 말이 맞아, 리반. 아는데도 자꾸..." 리오는 심란한 한숨을 내쉬며 건초더미 위에 앉았다. "그런데 말이야, 그 계획... 성공할 수 있을까?" "글쎄, 운이 따르면 성공할 수 있겠지. 그것 외에는 뭐라 할말이 없어. 이제와서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우울한 대답이 나오자 리오가 심술을 부리듯 옆에 놓인 건초더미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짝 마른 먼지가 머리 위까지 피어올랐다. "리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기침을 하던 리반이 못마땅한 눈으로 리오를 노려봤다. "알았어, 알았어." 건성으로 말하던 리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숨을 죽였다. 그는 헛간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확인한 다음 리반에게 다급한 눈짓을 했다. 신호를 알아들은 리반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었다. 그 사이 리오는 바닥에 나있는 곡식보관함 들창을 열고 있었다. 리반이 먼저 보관함 속으로 들어가고 뒤를 이어 리오가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들창을 내리자 미리 문에 달아놓은 건초더미가 협소한 은신처를 가려주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갇힌 두 사람은 들창 틈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몇 개의 빛줄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삐꺽하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으로 들어서는 몇 개의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이것 봐. 내 말대로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잖아." "나도 이럴 줄 알았다니까." "확인했으니까 그만 나가자. 이러고 있을 시간없어. 오늘 안에 이 근처를 샅샅이 훑어야 한단 말이야." "제기랄!" 벽을 걷어찬 듯 퍽소리와 함께 둔한 진동이 느껴졌다. "난 이제 이런 팔푼이 같은 짓 그만 두겠어. 벌써 몇 번째 허탕이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열흘 이 넘도록 이게 무슨 쓸데없는 고생이냐고? 그 시간에 작업을 벌였으면 벌써 수중에 최소한 백 큐어는 떨어졌을 거다. 안 그래? 내 말이 틀리냐고? 어디 말 좀 해 봐!" "누군 뭐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여기서 괜히 우리한테 성질부리지 말고 오메른님 앞에 가서나 그런 말해봐. 그 즉시 깨끗하게 인생 종치게 될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빨간 머리 놈이 누구기에 직접 우리까지 불러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걸까?" 말소리를 낮춘 조심스러운 물음이 나오자 곧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무슨 좋은 꼴을 당하려고 그런 걸 알려고 해? 우리같은 놈들은 그저 주둥이 꽉 닫고 위에서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게 최고야. 그러다가 일이 잘되면 자연히 돈도 들어오는 거고." "그래, 그건 칼부림 말이 맞아. 그러니까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제야 리반과 리오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들창을 밀고 얼굴을 내민 리오가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구부리고 있던 다리에 피가 돌자 그의 입술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건 리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저 안에 있었다면 다시는 걷지 못했을 것 같아." 리반이 동의하듯 처량하게 끙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먼지투성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반쯤 썩어 들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보이는 서까래와 대충 덮은 허름한 지붕 가득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오메른이란 사람, 누군지 알겠어?" "아니, 처음 듣는 이름이야." 맥없이 대답한 리반이 심각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들 말을 들어선 꽤 힘있는 사람인 것 같아. 잔인하기도 하고." "우리를 도와준 그 여자애가 말했던 대장이 오메른이란 사람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쩌면 오메른의 수하일지도 모르고." "모르는 것 투성이야. 답답하다,답답해. 정확히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리오가 탄식하듯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왜 오메른이란 자가 우릴 찾느냐는 거야. 내 생각엔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은데... 순순히 잡히든지, 아니면 오메른이란 사람을 찾아가 직접 물어 보든지 하지 않으면 알 길이 막막하니..." 리반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그를 흘끔 본 리오가 일부러 밝은 어조를 사용해 말했다.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진 않았잖아. 그 김에 오메른이란 이름도 들었고, 한층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으니까." "그래, 황궁에 들어가는 일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더욱 확실해졌고." "문제긴 문제야. 조금 더 상황을 알아본 다음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잖아. 이제 먹을 것도 다 떨어졌으니..." 리반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을 보탰다. "또 남아있던 돈도 이번 일에 모조리 쏟아 부었고." 리오가 착잡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몸을 돌려 팔로 머리를 받치더니 눈을 빛내며 히죽 웃었다. "리반, 아까 그 놈들 중 한 명이 칼부림이었잖아. 칼부림이라니 정말 웃기지 않아? 난 그걸 듣는 순간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니까." 리반이 피식거렸다. "그게 웃긴 거야? 소름 끼치는 거지." "웃긴 거나 소름 끼치는 거나, 그게 그거지." 괜한 억지를 부린 리오가 일어나 앉아 리반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아, 리반." 리반은 아무 말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신보다도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리오. 이제 시간이 됐어."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낮게 혀차는 소리에 엘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 거냐?" 쥬네비아가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놨다. 그러자 엘의 머리를 요모조모 살펴보던 젊은 시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황공합니다, 폐하. 어디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난감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쥬네비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황궁 내에서 네 솜씨가 제일이라는 말을 듣고 널 특별히 부른 것이다. 너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시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쥬네비아가 엘을 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엘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어쩌다 머리카락이 그 지경이 된 것입니까, 전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머쓱해진 엘은 자신도 모르게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이런,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전하! 잘못하면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놀란 시녀가 소리를 높였다. "어... 미,미안." 상상하지도 못한 사과의 말이 나오자 시녀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갔다. 그녀는 눈을 서너 번 깜박인 후 날카롭게 날을 세운 자그마한 칼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손놀림을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실 겁니다, 전하." 쥬네비아가 격려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엘은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주고받았다. 어느새 엘은 따뜻하게 대해주는 쥬네비아에게 깊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속마음을 터놓을 만큼 편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엘의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녀 덕분에 엘은 막연히 상상해오던 어머니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헤르티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어머니는 쥬네비아를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을 테고 역시 그녀와 비슷한 미소를 짓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진짜 황후폐하의 조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땐 이모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며칠 전 쥬네비아에게 이모라고 불러 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엘은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쥬네비아는 이모라는 호칭이 들리면 자신도 엘이라 부르겠다는 말을 끝으로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그 이후로 호칭에 관한 말은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비록 고집이 세다는 것뿐이지만 자신과 쥬네비아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엘의 입술에 미소가 그려졌다. "참,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는데..." 엘은 아깝다는 듯 그녀의 머리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쥬네비아를 보며 씩 웃었다. "금방 자랄 텐데요, 뭐. 그렇지 않아도 불에 그슬리는 바람에 어차피 잘라야 했고요. 생각보다 조금 짧아졌지만요." 엘의 머리에서 손을 뗀 시녀가 옆으로 비켜서며 입을 열었다. "끝났습니다, 전하. 많이 부족합니다만 최선을 다했으니 크게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조심스런 말이었지만 시녀의 얼굴엔 만족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디 자세히 좀 보고 싶군요." 몸을 일으킨 쥬네비아가 엘의 주위를 돌며 말끔하게 다듬은 머리를 찬찬히 살폈다. 그녀뿐 아니라 십여 명에 달하는 시녀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엘은 쑥스러운 마음에 손을 올려 머리를 만져 보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가 살짝 이마를 덮고 있었고 뒤쪽은 머리 모양을 따라 둥그스름하게 깎여 있었다. 이리저리 손을 더듬던 엘이 곱슬곱슬한 귀밑머리를 만졌을 때 쥬네비아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꼭 열살 먹은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이시는군요." "열살 난 개구쟁이같이 보인다고요?" 왠지 모를 서글픔에 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소녀처럼 키득거리던 쥬네비아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귀엽습니다, 전하." 엘은 쥬네비아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리반은 바람에 덜컹거리는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리오가 초조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질문을 꺼냈다. "혹시 돈만 챙기고 나타나지 않는 거 아닐까?" "설마... 그렇진 않겠지. 꼭 올 거야, 돈도 아직 다 치르지 않았으니까." 리오와 같은 걱정에 빠져 있던 리반이 맥없이 대꾸했다. "그래, 나머지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약속을 어기진 않을 거야."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은 듯 리오가 씩씩하게 말했다. 리반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사리 수소문한 끝에 알아낸 할트라는 남자를 만나건 이틀 전이었다. 그는 얼마남지 않은 황궁 혼인식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을 배달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병든 부인과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할트는 황궁에 몰래 들어가게 도와 달라는 리반의 부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백 큐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요구했다. 십중팔구 거절당할 거라며 반쯤 체념하고 있던 리반은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손에 오십 큐어를 쥐어주었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된 거 같아, 리반.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들어. 빨리..." 리오가 몸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 밖에서 삐걱대며 굴러오는 수레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재빨리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반쯤 부숴진 창고 문이 열리며 할트가 수레에 매단 노새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여 나오시오!" 리오와 리반은 서로를 한 번 마주본 다음 할트 앞으로 나섰다. "거기 있었군. 빨리 이 안으로 들어가시오." 할트가 수레에 실린 나무통 두 개를 턱으로 가리켰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통을 보며 리오와 리반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았다. "어서 들어가지 않고 뭣들 하는 거요? 나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 같이 죽을 생각없으면 서두르시오!" 할트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리오와 리반을 노려보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경계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몸짓이 경각심을 일깨우자 리오와 리반은 서둘러 수레에 올라 군말없이 좁은 나무통에 몸을 구겨 넣었다. "소리가 나면 큰일이니 그 검은 나한테 맡기는 게 좋겠소." 리오는 찜찜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리며 검집을 풀어 할트의 손에 건네주었다. "조금 비좁긴 하겠지만 숨쉬는 건 그리 불편하지 않을 거요." 할트가 억센 손으로 리오의 머리를 꾹 누르며 뚜껑을 덮었다. 그는 리반이 들어있는 통까지 닫은 후 몸체에 달린 쇠사슬을 올려 뚜껑 가운데에 위치한 고리에 단단히 연결했다. 그렇게 리오와 리반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둔 그는 천천히 노새를 몰아 창고 밖으로 나갔다. 할트의 모습이 보이자 창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십여명의 남자들이 위압적인 태도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 안에 들어있습니다." 할트에게서 고삐를 받아 든 덩치 큰 남자가 빈틈없는 눈으로 두 개의 나무통을 살폈다. "틀림없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제 손으로 놈들의 머리를 밀어 넣고 그 즉시 입구를 봉했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은 리오와 리반이 소리를 지르며 뚜껑을 밀고 통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들썩이는 나무통을 바라보던 남자가 히죽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틀림없는 것 같군. 어서 놈들을 옮겨라!" 명령을 받은 남자들이 상자를 번쩍 들어올려 준비해 놓은 짐마차에 실었다. "먼저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틀림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오메른님이 섭섭하지 않을 만큼 상을 내리실 거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할트가 연신 머리를 굽실거렸다. "입 조심해야 하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예,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절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할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날렵한 동작으로 마부석에 올라 앉았다. 곧 마차가 움직이자 바퀴에 깔린 자잘한 돌들이 가볍게 튀어 올랐다. 할트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기분 좋을 때마다 늘 하던 버릇대로 신나게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이 넓은 바드리오에서 사람 하나를 찾아야 하는데, 설상가상 누구한테 속 시원히 물어 볼 수도 없으니... 이런 상태로 임무를 완수한다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일겁니다." 에지몬트는 입을 다물기 전 긴 한숨을 꼬리처럼 붙였다. 풀 죽은 그의 말이 끝나자 제러드, 카셀, 세르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 혹시 바드리오를 떠난 거 아닐까요?" 카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일러스를 바라봤다.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일러스가 그에게 시선을 맞혔다. "그건 아닐 거다, 왕자들도 황명을 모르진 않을 테니까. 아마 바드리오에 머물며 황궁에 들어갈 방도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저도 단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체 그 곳이 어디인지... 오늘까지 내내 허탕만 치지 않았습니까? 이제 시간도 이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염이 뾰족뾰족 돋아난 턱을 문지르며 제러드의 말을 듣고 있던 에지몬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기를 쓰고 피하려 들지 않았을 텐데... 이젠 반대로 그들을 찾아야 되는 처지니...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 일인 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 네 말이 맞다, 에지몬트. 정말 얄궂은 상황이다." 사일러스의 표정이 한층 무거워졌다. "지난번 일 이후로 이제 사람 찾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이런 일을 겪게 되다니... 차라리 집채만한 바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게 낫지. 아니면 홀딱 벗은 채 가시덤불을 헤치든지. 그것도 아니면 빽빽 우는 애들 스무 명과 골방에 갇혀 있든지." 혼잣말로 신세한탄을 늘어놓던 카셀이 주위를 휘 둘러본 다음 공표하듯 말했다. "아무튼 사람 찾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세상에 없는 것 같아." "동감이다." "나도." "저도요." 제러드, 세르피언, 에지몬트가 차례로 카셀의 견해에 동조하고 나섰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이케르조차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렸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라." 사일러스가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하지만 아직 마법사님이 돌아오지 않으셨잖습니까?" 세르피언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의 눈길이 아몬이 서 있던 창가로 몰려들었다. 급한 일이 생겼다며 모습을 감춘 아몬은 벌써 몇 시간째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일이 늦어지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않느냐? 내일 동이 트자마자 깨울 생각이니 어서 움직여라." 근엄한 시선에 밀린 기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별안간 허공에서 진지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아몬이 그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마법사님, 돌아오셨군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친우를 만난 듯 카셀이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사일러스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나타났다. 기사들의 환대엔 그가 일의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사소한 정보라도 가져왔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우선 앉으십시오." 의자가 아닌 바닥에 자리잡는 아몬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기사들이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았다. "무슨 일이야?" 사일러스가 심각한 얼굴로 아몬을 주시했다. "리자드님을 뵙고 오는 길이야." 뜻밖의 말에 놀란 기사들이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럼 전하께서 마법사님을 호출하신 겁니까?" 아몬이 제러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이유로 마법사님을 부르신 겁니까?" "일이 지지부진해서 많이 노하셨을 것 같은 데... 혹시 야단을 맞으신 거 아닙니까?" "전하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은 없으십니까?" 아몬은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본 다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부터 그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깊이 숨을 들이쉰 아몬이 한층 진지해진 어조로 본론을 꺼냈다. "오메른이라고 바드리오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자가 두 왕자전하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진 않지만 매우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오메른이란 자가 왕자들을 손에 넣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얼굴을 찌푸린 에지몬트가 앞으로 당겨앉았다. "그렇진 않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직 전하들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합니다." "그럼 그 자 주변을 철저히 감시해야겠군." 아몬이 가슴에 팔짱을 끼는 사일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리자드님께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해 놓으셨어. 우린 정보원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해 왔던 그대로 왕자전하들을 찾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마법사님, 바드리오를 무작정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는 그 오메른이란 자에게 모든 초점 맞추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제러드가 현실적인 방안을 내놨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오메른은 이미 우리가 왕자전하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린 며칠 전부터 그의 감시를 받아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말입니다." "젠장! 그 놈이 우릴 감시하고 있었다고요?" 에지몬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도 불쾌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오메른인가하는 그 썩을 놈을 보기만 하면 온 몸의 뼈를 분질러 주겠어!" 이를 갈던 카셀이 성질을 못 참겠는지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진정하십시오. 보호막 때문에 말이 새어 나가진 않겠지만 앞으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카셀이 곧 요란하게 하품을 했다. "밤이 깊었다. 다들 일어나 잠자리에 들어라."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인사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부하들을 지켜보다 아몬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몬, 너도 이제 좀 쉬어야지. 요 며칠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아몬은 잠자코 사일러스의 말을 좇아 침대로 다가갔다. "대체 왕자들은 어디 있는 걸까?" 사일러스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물었다.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한 거로 봐서 어딘가에 숨어 계시기 쉽겠지." "그래, 나도 그들이 이 근방에서 황궁에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동안 침묵이 흐른 뒤 이번엔 아몬이 질문을 꺼냈다. "전하들이 어떤 방법으로 황궁에 들어가시려 할까?" "글쎄, 어떤 방법이 있을지... 혹시 신분을 밝히려 하진 않을까?" "그건 아닐 것 같아. 내 추측일 뿐이지만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있었다면 아마 처형식전에 왕족임을 밝혔을 거야." 사일러스가 천장을 향해 긴 한숨을 내뿜었다. "정말 골치 아프다. 왕자들을 찾는 일만으로도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인데, 거기에 더해 오메른이란 불청객까지 끼어 들었으니... 왜 일이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몬은 천천히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피곤한 눈을 감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사일러스. 한가지 일이 풀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더 큰일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 ===================================================================제 62장. 반지의 행방=================================================================== "나와라!" 숨통을 조여 오던 뚜껑이 열리더니 통이 옆으로 뉘어졌다. 리오는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인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뱀처럼 꿈틀거리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어쩔 수없이 괴로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옆에선 리반이 그와 흡사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단단히 뭉쳐 있던 근육과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하자 저릿저릿한 둔통 대신 송곳으로 후비는 것같은 참기 힘든 고통이 몰려들었다. 리오는 영영 걷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며 일그러진 얼굴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볼을 찔러 댔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아픔이 잦아들었다. 리오는 팔다리를 움직여 본 다음 고개를 치켜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들은 어느새 밖으로 나가 버렸는지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리오는 그들만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문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긴 견고한 나무문은 그가 아무리 힘껏 걷어차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부딪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소용없어, 리오." 보다 못한 리반이 리오를 만류했다. 리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탈출구를 찾아 침침한 공간을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다. 바닥에 쌓인 먼지들이 그의 움직임에 좇아 구름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도망은 불가능해." 리반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리오가 욕설을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있는 통로라고는 잠긴 문과 천장에 달린 손바닥만한 먼지투성이 창이 전부라는 걸 알게 되자 팔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난번에 들었던 그 오메른이란 자에게 잡힌 거겠지?" "아마도." 굳은 얼굴로 짧게 대답한 리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반지 때문일까?" 리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반지를 더듬거렸다. "이걸 빼앗길 수는 없어, 절대!" 그는 뼈마디가 하얗게 돌출될 때까지 조그만 덩어리를 꽉 움켜잡았다. "그런데 대체 여기가 어디일까?" 리반의 질문이 끝나자 두 사람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을 둘러봤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거미줄이 우글거리고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구석에 놓여 있는 녹이 슨 난로엔 잿더미와 반쯤 타다 만 나무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옆엔 도끼로 대충 잘라서 만든 거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또 탁자 위, 말라붙은 음식찌꺼기엔 벌레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속이 메슥거리자 리오는 서둘러 눈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벽에 걸린 서너 개의 주먹만한 기름단지가 보였다. 그 속에 숨은 듯 간들거리는 조그만 불꽃이 희미하고도 불그스름한 빛을 힘겹게 뿌려대고 있었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인 것만은 분명해." 리오는 리반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애써 가벼운 투로 말했다. 불안감에 전신이 싸늘해졌지만 눈에 보일 만큼 몸을 떨고 있는 리반에게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리,리오!" 숨가쁘게 소리친 리반이 겁에 질린 눈으로 문을 주시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리오도 출입구에 시선을 못박았다. 걸쇠가 올려지고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일곱 명의 남자들을 바라보며 리오와 리반은 느릿느릿 몸을 세웠다. "틀림없군." 유심히 두 사람을 살펴보던 오메른이 만족감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의자." 그가 짧게 말하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재빨리 의자를 가져와 오메른 뒤에 내려놨다. 여유있는 동작으로 의자에 앉은 오메른이 입을 열었다. "누가 리오냐?" "나다." 리오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그의 복부로 거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리오가 격한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꺾었다. "감히 뉘 앞에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이런이런, 거칠게 다루지 마라. 보아하니 고생이라곤 조금도 모른 채 귀하게 자란 양갓집 자제들 같은데..." 오메른이 즐기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네 몸에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난 관심없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너희들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뿐이다." 잠시 말을 멈춘 오메른이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왔습니다, 오메른님." "들어와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어마어마하게 덩치가 큰 남자가 밧줄로 묶인 중년남자를 질질 끌며 들어와 오메른 앞에 세웠다. 피투성이 남자를 바라보는 오메른의 얼굴에 짙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몰골이 형편없으시군요, 백작님." 힘없이 흔들리던 남자의 고개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네 이놈, 오메른!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무사할지, 아니면 천벌을 받을 지는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되겠지요. 한가지 안타까운 건 백작님께선 제 운명이 어느 쪽으로 결론 날지 모르신 채로 눈을 감게 되실 거라는 점입니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오메른, 부탁이네! 제발 목숨만 살려 주게! 이렇게 빌겠네! 그동안 내가 자네를 좀 섭섭하게 대했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앞으론 절대 그런 일 없을 걸세! 내 자네가 원하는 건 모든지 다 들어주겠네! 그러니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게!" 비릿한 조소를 띤 채 남자의 애원을 듣고 있던 오메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회는 이미 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백작님." "오, 오메른, 제발!" 남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다가간 오메른이 부하가 들고 있던 팔뚝 길이만한 쇠꼬챙이를 건네 받았다. 살기를 느낀 남자가 퍼뜩 얼굴을 치켜들었을 때,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오메른이 단숨에 그의 정수리에 쇠꼬챙이를 박아 넣었다. 힘없이 늘어진 남자의 입술에서 바람소리같은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오메른이 꼬챙이를 뽑자 그 즉시 시뻘건 선혈이 터져 올랐다. 뜨듯한 핏줄기를 맞은 리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빠져나갔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리반이 몸을 돌리더니 격한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뒤덮은 피가 끊임없이 솟구치며 그의 전신을 물들였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공포와 충격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여다보던 오메른이 뒤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렌 광장에 놈을 버리고 와라. 그리고 깃대에 붉은 기를 매달아라. 귀족 놈이 죽었다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점잔 떠는 관리들도 대신 기를 달아주었다고 불쾌해 하진 않을 거다." 마침내 남자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리오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남자를 쳐다봤다. 부릅뜬 눈을 가득 채운 피가 남자의 얼굴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 질척한 액체가 먼지투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던 리오가 미친 사람처럼 오메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잔인한 놈!" 오메른에게 닿기 직전 그의 뒤에 있던 수하 중 한 명이 리오의 가슴을 걷어찼다. 채 온기가 가시지 않은 시체 위로 쓰러진 리오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친 기침을 터뜨렸다. "조심해라,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만약 돈을 받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네 놈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오메른이 위협을 담은 선뜩한 눈으로 노려보자 공포에 질린 남자가 허겁지겁 머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오메른님!" 자세를 바로잡은 오메른이 거만한 동작으로 턱을 움직였다. 그 즉시 세 명의 남자들이 준비해 두었던 지저분한 거적에 시체를 둘둘 싼 다음 밖으로 내갔다. "이제 그럭저럭 정리가 된 것 같군. 그럼 이제 못 다한 얘길 나눌 차례가 온 건가?" 리오와 리반의 눈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찾았다. 몸을 일으킨 오메른이 두 사람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네가 리오라고 했지?" "그렇다." 리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맞댔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오메른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리오, 너부터 말해봐라. 넌 누구냐?" "말하면 꽤 놀랄 텐데?" "난 쉽게 놀라는 사람이 아니다." 오메른이 여유있게 응수했다. "그렇다면 흔쾌히 말해주지." 리오는 가슴에 느껴지는 뻐근한 통증을 무시하고 다리를 세웠다. 그는 오메른의 정면에 당당하게 버티고 선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난 리오카사이 보즐라르 드 아르트로 왕자다." ===================================================================제 목 [달의 아이] 62장.반지의 행방-2=================================================================== "일어나, 사일러스." 어깨에 닿는 손길을 느낀 순간 사일러스는 번쩍 눈을 떴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아몬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오메른 쪽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연락이 왔어. 빨리 움직여야 돼, 사일러스." 사일러스는 아몬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밖으로 나갔다. 부하들을 깨운 후 다시 돌아온 그는 재빨리 겉옷을 걸쳤다. 그를 비롯한 기사들 모두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기본적인 복장을 갖춘 채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이미 몸에 배어있었다. 때문에 사일러스가 부츠를 신고 검집을 몸에 착용하자마자 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들어왔다. 졸음이 말끔히 가신 그들의 얼굴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복도를 살핀 후 마지막으로 들어온 제러드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두 분 왕자전하께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오메른이란 자에게 잡히신 건 아닌지..." 아몬이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어서 가까이 와라, 시간이 없다." 사일러스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아몬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의 몸 상태를 염려스러워하는 사일러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아몬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근래 들어 갑자기 마법력이 사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아몬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현상태가 유지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몬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온 후 얼마 안있어 차가운 밤 공기가 그들의 전신을 둘러쌌다. 마체라타는 굼뜨게 움직이는 남자를 밀치고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었다. 성급히 들어서는 그녀를 보며 오메른이 피식 웃었다. "예상보다 일찍 왔구나. 혹시 그 동안 마렌 광장에 서서 깃대만 지켜보고 있었던 거냐?"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아느냐?" 마체라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마렌 광장 깃대에 약한 감지마법을 걸어놓고 있었다. "일은 제대로 한 거겠지?" 오메른을 지나친 붉은 눈동자가 리오와 리반에게 고정됐다. 곧 마체라타의 입술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제대로 처리한 거 같긴 하구나." 당연하다는 듯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 올린 오메른이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거래금은?" "아직 확인해 볼 것이 남아있다. 일이 만족스럽게 마무리되었다는 것만 증명되면 그 즉시 약 속했던 금액을 받게 될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군. 그럼 난 밖에 나가 있겠다." 오메른이 문을 닫자마자 마체라타가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반지를 내놔라. 정확히 말해 리아잔 제국의 정통후계자라며 나타난 소녀가 준 반지말이다. 반항하면 너희들만 괴로울 뿐이니 얌전히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다." "우리한테 반지는 없다." 리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호오, 그래? 내 충고를 무시할 생각인 것 같구나. 차라리 반지를 몸에 지닌 적도 없다고 말하지 그러냐?" "내 말을 오해한 것 같군. 난 네 말대로 엘에게 반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반지를 지금까지 목에 걸고 다녔다.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리오의 말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이 전해지자 마체라타가 눈꼬리를 가늘게 좁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오메른이란 자가 방금 전, 그러니까 네가 도착하기 직전, 날 위협해 반지를 갈취해 갔다는 말을 하는 거다." 마체라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리오의 옷깃을 움켜잡아 양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단추가 뜯겨져 나가며 리오의 목과 가슴이 드러났다. 반지가 없음을 확인한 마체라타가 사납게 소리쳤다. "오메른!" 곧 오메른이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불쾌감이 짙게 깔려있었다. "무슨 일이냐?" "반지! 네가 이 아이에게서 빼앗아 갔다는 반지를 어서 내놔라!" "헛소리! 살기위해 바르작거리는 놈의 말 한마디에 감히 날 의심한다는 얘기냐?" 오메른이 분통을 터뜨리며 마체라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의 기세에 밀린 마체라타가 한 걸음 물러섰다. "난 철저히 확인해야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좋다, 확인이라면 간단하다. 어차피 둘 중 어느 한 놈이 갖고 있을 테니까." 오메른이 리오와 리반에게 시선을 던졌다. "두 놈 다 옷을 벗어라." "젠장! 옷을 벗으라고? 그럴 수는 없다!" 리오가 분연히 소리쳤다. "얌전히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내 기분이 지금보다 더 더러워지면 두 놈다 산채로 껍질을 벗길 테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기라도 한 듯 오메른이 윗입술을 말아 올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겁에 질린 리반이 팔꿈치로 리오를 쿡쿡 찌른 다음 일어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리오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속으로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리반을 따라 옷을 벗었다. 희멀건 피부가 점점 드러나더니 급기야 두 사람은 최소한의 속옷만을 걸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들의 몸 어디에서도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살기를 띤 채 두 사람을 노려보던 오메른이 밖에 대기시켜 두었던 부하 일곱 명을 불러들였다. 그는 그들을 시켜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털어보는 것은 물론 천장부터 벽에 생긴 갈라진 틈까지 샅샅이 훑어보게 했다. 그래도 반지가 나타나지 않자 리오와 리반은 완전히 발가벗은 채 입안까지 조사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시체를 버리고 오느라 뒤늦게 합류한 남자가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리오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목구멍까지 살펴본 다음 결과를 보고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메른님." "젠장! 저리 비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던 리오가 그를 밀치고 바지를 집어 들었다. 리반도 잔뜩 움츠린 채 주춤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격한 수치심에 두 사람의 온몸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메른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리오와 리반을 막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깊은 골을 만든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체라타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오메른은 그녀를 무시하고 부하들을 둘러봤다. "스무 명을 더 추려 저 두 놈들이 잡혔다는 창고로 가라. 그리고 그곳을 구석구석 빈틈없이 뒤져 조금이라도 수상한 물건이 나오면 나에게 갖고 와라. 또 놈들을 넘긴 할트란 자와 그 자의 집도 철저히 조사해라. 반지를 찾아내는 사람에게 천 큐어를 주마." "알겠습니다, 오메른님!" 천 큐어란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남자들이 앞다투어 밖으로 나갔다. 리오가 그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며 오메른을 노려봤다. "괜한 헛수고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 손으로 직접 내 목에 걸려 있던 반지를 낚아채지 않았느냐?" "이 곳에 없다면 반지는 분명히 그 창고에 있을 것이다." 오메른이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아니, 난 분명히 그걸 목에 건 채 나무통 속으로 들어갔다. 황궁에 몰래 숨어들기 위해 그런 쥐구멍까지 기어들었던 내가 정작 가장 중요한 반지를 떨어뜨리기라도 한 줄 아느냐? 난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난 분명히 반지를 지닌 채 이곳으로 끌려 왔고 너에게 그걸 빼앗겼다. 그러니 네 부하들이 덧없는 돈에 눈이 멀어, 수확없는 고생을 하게 되리란 건 네가 잘 알고 있을 거다." 오메른의 관자놀이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네놈이 그걸 목구멍으로 삼킨 거겠지." "내 배라도 갈라 보고 싶은 거냐?" "그래, 바로 그 말이다. 기대하고 있어도 좋을 거다. 반지를 손에 넣지 못하면 날이 밝기 전에 너희를 한점한점 저며서라도 기어코 내 손으로 찾아낼 테니까." 리오는 검은 눈동자를 가득 채운 살기가 뇌리를 파고들자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지금까지는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오메른에게 꿋꿋하게 맞섰지만 뒷골을 쭈뼛 서게 만드는 섬뜩한 두려움이 일순간 용기를 앗아갔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오메른." 마체라타가 몸을 움직여 비딱한 자세로 오메른의 시선을 막아 섰다. "무슨 뜻이냐?" "오늘밤 안에 반지를 찾지 못하면 너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다." 탁한 웃음을 짧게 터뜨린 오메른이 코가 부딪칠 정도로 마체라타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날 의심하더니 이젠 협박까지 하는군. 네 눈엔 내가 그토록 우습게 보이느냐?" "그렇다면?" "날 적으로 삼으면 오래 살아 있진 못할 테고, 만약 그렇지 않다해도 앞으로의 삶이 그리 행복하진 않을 거다." 숨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반은 팔을 건드리는 손길에 놀라 흠칫했다. 리오가 그에게 눈짓을 하더니 흘끔 문 쪽을 곁눈질했다. 가느다란 틈을 벌리고 있는 출입구를 깨달은 리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인 리오가 깊이 숨을 들이 쉰 다음 리반의 팔을 낚아채 문으로 달려갔다. 악몽같은 방에서 뛰쳐나온 두 사람은 짧은 통로를 지나 계단을 미친듯이 뛰어올랐다. "젠장!" 앞을 막아 선 문이 나타나자 리오가 거칠게 욕설을 토해냈다. "잠기지 않았어!" 리반이 문고리를 비틀며 숨가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은 문을 통과해 좁은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피가 흩뿌려진 듯 보이는 검붉은 융단 위를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층계를 오르는 발소리를 들으며 마체라타는 피식 웃었다. "이제 저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군."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으니 추적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마체라타가 오메른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쏘아보냈다. "아니, 내가 직접하겠다." "그렇다면 함께 하는 것이 낫겠군. 나 역시 이대로 손떼면 영 기분이 개운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좋다,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라. 난 부디 네 떨거지들이 내 발목을 잡는 일만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널 믿었는데...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다니. 실망이 크다, 오메른." 분노에 찬 눈으로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오메른이 뜻밖에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인정하겠다. 불쾌하긴 하지만 네 말대로 일을 깨끗이 처리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다. 그러니 반박하진 않겠다. 더불어 만 큐어도 받지 않겠다. 반지를 찾더라도 말이다." 마체라타가 그다지 큰 감흥을 받지 못한 듯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돈을 포기하시겠다니, 꽤나 인심이 후하시군." 그녀는 이내 정색을 한 채 날카롭게 말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메른. 그러니 어서 움직여라!" ===================================================================제 목 [달의 아이] 62장.반지의 행방-3===================================================================가까스로 버티던 리반이 끝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자, 잠깐만... 더,더는 못... 가겠어..." 헐떡이는 거친 숨결 사이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그는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힘없이 늘어진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그래... 조금... 쉬자." 몇 걸음 앞서 있던 리오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이끼 긴 돌담에 몸을 의지했다. 그는 예리한 통증이 파고드는 옆구리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숨결을 고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리오와 마찬가지로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리반이 어느정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무사히 도망친 거 같지?" "응, 다행히 쫓아온 놈들은 없는 것 같아." 리오가 소매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등을 세웠다. "이제 웬만큼 쉬었으니까 어서 일어나, 이러다간 다시 잡히겠어." 리반이 흐느적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기계적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무작정 도망칠 수는 없잖아. 내 생각엔 우선 우리가 숨어있던 헛간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지금 같아서는 밤을 새워 고민해도 크게 나아질 건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리반이 암담한 한숨이 내쉬며 헛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떼려 했을 때, 리오가 한발 앞서 그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리오, 그 쪽이 아니잖아." "헛간에 가기 전에 우선 들를 곳이 있어." 뜻밖의 말에 놀란 리반이 걸음을 재촉해 리오를 따라붙었다. "거기가 어딘데?" "가보면 알아, 리반. 그리고 사방이 쥐죽은듯 조용하니까 앞으로는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리반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알기에 리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빠르게 발을 놀렸다. 리반이 그들의 목적지를 눈치챈 건 눈앞에 넓은 광장이 나타났을 때였다. "여긴 왜 온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반이 숨을 훅 들이쉬며 걸음을 멈췄다. "혹시?" 리오가 엄숙해 보일 만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제야 알겠군." 바짝 움츠린 두 사람 앞으로 오메른이 걸어 나왔다. 숨을 훅 들이 쉰 그들이 도망치려 했을 때는 이미 십 여명의 남자들이 둘레를 에워싼 후였다. "감히 날 갖고 놀다니... 네놈들이 바라던 대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려 주마." 오메른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듯 느릿하게 발음했다. 공포감에 휩싸인 리오와 리반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는 안될 거다." 갑자기 허공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대치하고 있던 그들 사이로 여섯 명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분 전하를 보호해라!" 오메른의 정면에 서 있던 사일러스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어 들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물러서라." "누가 할 소리!" 오메른이 이사이로 거칠게 말을 뱉어내며 부하들을 둘러봤다. 그들 손엔 이미 검이며 갈고리, 손도끼 등의 갖가지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이런, 일이 예상외로 재미있어지는구나." 오메른 뒤편에 모습을 보인 마체라타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기사들을 바라봤다. 첫눈에 그녀를 기억해 낸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가 나설 필요없다." 오메른이 흘긋 마체라타를 돌아봤다. "섭섭한 말이지만 반대하진 않겠다. 느긋하게 구경하는 것도 제법 흥미진진할 것 같으니까." 마체라타가 팔짱을 끼며 물러 섰을 때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아몬이 나타났다. 흠칫하며 고개를 휙 돌린 마체라타가 아몬을 발견하고 눈을 치켜떴다. 이내 그녀의 얼굴 가득 흥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둘러싼 채 세상과 분리시킨 결계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내 상대가 바로 너로구나." "그런 것 같군요." 아몬이 조용히 응수했다. "정체는 모르겠다만 친절을 베풀어 고통없이 죽여 주마." 말이 끝나는 순간 아몬의 정면으로 붉은 빛 덩어리가 달려들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아몬이 재빨리 방어막을 세웠다. 투명한 막에 부딪친 빛 덩어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선혈처럼 터져 올랐다. 공격의 충격파가 고스란히 아몬을 덮쳤다. 숨이 막힌 그가 신음을 토해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법이구나." 눈을 의심하는 얼굴로 아몬을 주시하던 마체라타가 정색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되도록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제대로 몸을 펴지 못하고 있는 아몬을 향해 검은 연기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연기에 둘러싸인 방어막이 맥없이 무너지려 하자 아몬은 서둘러 두 번째 막을 만들었다. 하지만 검은 연기를 모조리 차단하기엔 이미 한발 늦어 있었다. 일부 새어 든 연기가 가느다란 실뱀처럼 아몬의 가슴 한복판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아몬은 이를 악물고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연기를 뽑아 냈다. 그의 손에 잡힌 연기가 수증기처럼 맥없이 흩어졌다. "이제 마지막이다!" 사나운 외침을 들으며 아몬은 무릎을 꿇었다. 그가 검붉은 핏덩어리를 고통스럽게 토하기 시작했을 때 마체라타가 비명을 질렀다. "이,이게 뭐야? 날 어떻게 한 것이냐?" 아몬은 숨을 헐떡이며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리고 방어막을 없앤 후 마체라타에게 다가갔다. "어서 말해라!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마체라타가 악을 써댔다.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몸을 조여들며 마법력을 묶어 버리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날이 밝아 올 때쯤 힘이 돌아올 것입니다." 아몬은 흔들림없는 차분한 눈으로 마체라타를 바라봤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힘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입 닥쳐, 이 주제도 모르는 빌어먹을 마법사 놈아! 죽여 버릴 테다! 기필코 네놈을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 테다!" 성질을 참지 못한 마체라타가 새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몬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결계 밖으로 나왔다. 그를 가장 먼저 맞은 건 여기저기 보이는 핏자국이었다. 아몬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후인지 오메른 패거리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법사님!" 제러드가 반가운 마음에 크게 소리치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다른 기사들이 아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 가운데 사일러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된 아몬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단장님이 다치셨습니다." "별거 아니니 호들갑떨지 마라." 사일러스가 꾸짖듯 말했다. 아몬은 서둘러 사일러스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법사님, 여기 좀 봐주십시오." 사일러스의 왼쪽 옆구리를 누르고 있던 에지몬트가 창백한 얼굴을 아몬에게 향했다. "상처를 자세히 봐야겠습니다." 에지몬트가 피투성이 웃옷을 떼고 옆으로 비켜났다. 아몬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핏방울이 조금이 흘러내리는 창상을 신중하게 살폈다. "내 말대로 별거 아니지?" 사일러스는 겸연쩍은 마음에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야. 지혈도 웬만큼 된 것 같고." 아몬이 사일러스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그런데 어쩌다가 부상까지 입게 된 거야?" 사일러스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몬은 누군가 그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사일러스가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에지몬트가 분연히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 오메른이란 자, 검술실력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또 다른 놈들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한 명이 네다섯 명을 상대해야 했고, 형님은 그보다 많은..." "그만해라, 에지몬트." 사일러스가 근엄한 얼굴로 에지몬트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두 분 전하는 어디 계신 겁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아몬은 리오와 리반을 발견한 순간 입술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밧줄로 결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들의 입엔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아,아니 어...어떻게..." 아몬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카셀이 벅벅 머리를 긁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그게... 자꾸 도망을 치려 하시는 바람에..." 말없이 벌떡 일어선 아몬이 사일러스가 내밀고 있는 단검을 받아들었다. 그가 다가가자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한 리오가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반면 이미 아몬과 구면인 리반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몬은 우선 리오 입에서 재갈을 풀고 단검으로 밧줄을 잘랐다. 그리고 리오의 살기어린 시선을 받으며 리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들 정체가 뭐요?" 거친 숨을 몰아쉬던 리오가 내뱉듯 물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리오가 달려들 것처럼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렸을 때 리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우리 적이 아니야, 리오. 오히려 우리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리오는 낯선 얼굴들을 살피며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알렉스와 연관된 사람들이니까." 리오가 리반에게 휙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 리오의 푸른 눈동자가 한순간 번쩍였다. "데클란 평원! 데클란 평원에서 마주친 사람들이구나! 엘을 데려간 사람들!" 리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 우리와 같은 편인 거요? 그러니까 우리처럼 엘을 도우려는 사람들인 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좋은 편, 그러니까 악당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소녀를 구하는 정의의 편입니다!" 카셀이 냉큼 소리쳤다. 놀랍게도 이런 어린애같은 선언이 의심을 누그러뜨렸는지 반신반의하던 리오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만나서 반갑소. 또, 우리를 도와줘서 고맙고." 경계심을 푼 리오가 새삼스런 말을 꺼내자 사일러스를 뺀 기사들이 벌떡 일어나 꼿꼿한 자세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데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이요?" 아몬이 침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두 분 전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서라고? 왜 우리를..." 리오가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래, 그 반지 때문이로군!" "그렇습니다, 전하." 말을 끊은 아몬이 리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반지는 어디있습니까?" "아까 그놈들에게 빼앗긴 건 아니겠지요?" 카셀이 불안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반지를 손에 넣었다면 놈들이 그렇게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달려들었겠냐?" 제러드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꼈다. "그럴 수도 있지,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놈들일지도 모르잖아." 카셀이 억지를 부리자 늘 그랬듯 기사들이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놈들이 다친 동료들까지 말끔히 챙겨 가냐?" "혹시 머리가 반쯤 돌아 버린 녀석들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살짝 돌다가만 놈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중에 누구처럼." 제러드가 카셀을 향해 눈을 깜박이며 장난스럽게 히죽거렸다. "뭐야, 임마? 내가 왜 살짝 돌다가 말았냐?" 목에 핏발을 세운 카셀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너도 회까닥 돈 거냐?" 세르피언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이 어깨를 흔들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라!" 맥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사일러스가 목소리에 무게를 실어 말했다. 그는 피식거리고 있는 리오와 리반을 발견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반지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몸에 지니고 계신 겁니까?" 아몬의 물음에 분위기가 일순 진지해졌다. "좋소, 어차피 한 배를 탔으니 말해주겠소. 난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소." "설마 그걸 잃어버리신 것 아니겠지요?" 리오가 질문을 던진 카셀을 흘긋 쳐다보고 다시 아몬에게 시선을 맞혔다. "오메른이란 자에게 붙잡혔을 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반지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소.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걸 숨길 방법을 찾았소." "반지를 숨기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반지는 오메른의 거처에 있는 겁니까?" 아몬은 물론 기사들의 안색까지 어두워졌다. "아니, 그렇지 않소. 반지는 바로 이 곳에 있소." 리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외의 답을 내놨다. "여기에 있다고요?" 카셀이 목을 빼고 고개를 휘휘 돌려가며 넓은 광장을 살폈다. "이 곳에선 보이지 않지만 저기 안쪽 깃대 근처에 시체 하나가 버려져 있을 거요. 반지는 바로 그 시체가 걸치고 있는 외투 주머니에 있소." 반지의 위치가 명확해지자 그 즉시 사일러스가 명령을 내렸다. "이케르, 가서 반지를 찾아와라. 에지몬트와 카셀, 세르피언은 이곳에 있을지 모르는 우리의 흔적을 찾아내 말끔히 지워라. 그리고 제러드, 손 좀 빌려야겠다." 제러드의 손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선 사일러스가 아몬을 바라봤다. "서둘러 이 곳을 떠나야 되겠어. 멍청히 있다간 살인누명을 쓸 수도 있으니까." "그래, 반지만 찾으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출발하자." 아몬은 고개를 돌려 이케르를 찾았다. 달빛이 거의 잦아든 시간이고 광장전체에 엷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몬은 그의 움직임만을 어렴풋이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시체에다 반지를 숨긴 거야?" 아몬과 같은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리반이 리오의 팔을 툭 건드렸다. "그럴 틈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릴 지켜보고 있었잖아. 그 중에 한 명은 바로 그 오메른이란 자였고."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 좀 아프긴 했지만..." 리오가 싱겁게 웃으며 가슴을 슬슬 문질렀다.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리반이 크게 소리쳤다. "그 때구나! 네가 시체 위로 넘어졌을 때!" "응, 바로 그 때야. 넌 내가 성질을 못참고 멍청이처럼 매를 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모든 게 다, 이 현명하신 형님의 번뜩이는 계략이었단 말이다." 리반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는 리오에게 감탄 어린 시선을 던졌다. "대단하다, 리오. 난 그때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 대단해." "그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우쭐대며 말한 리오가 별안간 숨을 죽였다. 리반도 그를 따라 반사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축축한 안개를 뚫고 전해졌다. 사일러스의 명령을 이행한 기사들까지 귀를 쫑긋 세우고 한 곳에 시선을 모았다. 드디어 이케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애가 탄 동료들이 그에게 달려가 질문을 퍼부어댔다. "반지는 찾은 거야?"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반지 좀 보여 주십시오, 선배님! 틀림없이 찾은 거겠지요?" "말 좀 해 봐, 임마! 반지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카셀이 주먹을 덥석 잡아 억지로 펴려하자 이케르가 단호하게 손을 뿌리쳤다. 그는 궁금한 나머지 머리를 쥐어뜯을 지경에 처한 동료들은 아랑곳없이 입을 굳게 다문 상태로 사일러스 앞에 멈춰섰다. "여기 있습니다, 단장님." 넙적한 손바닥 위에 놓여진 반지가 드러나자 기사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수고했다." 사일러스가 신중한 동작으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에 서 있던 리오와 리반에게 걸어갔다. "리오카사이 전하십니까?" "그렇소." 사일러스는 아무 말없이 리오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리오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반지를 받아 목에 걸었다. 기사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반지를 찾았으니 한 고비는 넘겼고, 이제 두 분 왕자님들을 무사히 황궁에 들어가시게 하는 일만 남았군요."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는지 카셀은 헤벌쭉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문젠 돌아가서 의논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몬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멀뚱히 서 있는 리오와 리반을 향해 아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리반이 주춤거리는 리오의 팔을 잡고 가까이 다가섰다. 아몬은 힘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둥글고 납작한 돌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가 입속말을 중얼거리자 돌조각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빛은 눈을 질끈 감은 그들을 순식간에 목적지로 옮겨다 놓은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 63장. 전야===================================================================웅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위를 보고 반듯이 누워 팔다리를 쭉 폈다.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깔린 천장엔 기이하게 보이는 옅은 그림자가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밤새도록 뒤척이기만 했을 뿐 그녀는 한순간도 잠들 수 없었다. 몸은 늘어지고 눈은 따끔거렸지만 머리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맑아졌다. 혼인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잠이 오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혼인식 이후에도 지금처럼 숨을 쉴 수 있을까? 엘은 반지가 걸려 있었던 곳에 손을 가져가 댔다. 느린 발걸음같이 쿵쿵 울리는 심장고동이 체온을 타고 전해졌다. 살아 있음을 가장 극명히 느낄 수 있는 작지만 강한 움직임. 무슨 일이 있어도 반지를 찾아야 한다던 칼 베리만의 말이 떠올랐다. 엘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작은 반지 하나에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쉽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아니, 그 반지엔 나뿐만 아니라 칼 베리만의 운명도 달려 있어. 예언이 진실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 즉시 칼 베리만께 세상을 농락했다는 죄가 씌워질 테니까. 엘은 칼 베리만이 그런 일을 당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없는 자신의 처지가 인식되자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리오와 리반도 나 때문에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아니, 이미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애초부터 리오에게 반지를 맡기면 안 되는 거였는데... 분별없이 그저 감정으로만 움직인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으리라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엘은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리던 리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반도 그 옆에 지친 몸을 묻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기사들 역시 바닥이며 창틀, 탁자 등, 마음 내키는 곳에 몸을 기댔다. "우선 상처부터 손봐야겠어." 아몬의 말에 사일러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럴 필요없어." "고집 부리지마, 사일러스." 아몬은 사일러스를 반강제로 침대에 앉히고 치료를 시작했다. 이윽고 간단한 조치를 끝낸 아몬이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피곤하시겠지만 시간이 촉박하니 먼저 남은 문제를 의논한 다음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몬의 말에 섞여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시선이 카셀에게 집중됐다. 카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제러드가 그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뭐, 뭐야?"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카셀이 상황을 알아채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좋은 의견 있으면 말해봐라." 사일러스의 말 뒤로 침묵이 찾아들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두 분 전하께서 다 황궁에 들어가실 필요는 없는 겁니까?" 제러드가 고개를 들며 질문을 꺼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차피 반지를 전하기 위한 목적이니 한 분만 들어가셔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몬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한가지 방법이 생각나긴 했는데...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말씀해 보십시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제러드가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먼저 왕자전하를 시종이나 뭐... 그러니까 황궁 여기저기를 다녀도 의심받지 않을 그런 인물로 변장시키는 겁니다. 그런 다음 마법사님이 마법을 써서 무사히 황궁에 들어가시도록 하면 될 것 같은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카셀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전 썩 괜찮은 것 같은 데요?" 에지몬트의 말에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은 방법입니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말씀도 맞고요.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몬이 깊은 숨을 내쉬며 창 밖을 내다봤다. "저... 이만 잠자리에 들면 안될까요?" 말을 끝낸 카셀이 요란하게 하품을 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다들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피곤에 지친 기사들이 반색하며 일어나 부랴부랴 자신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두 분께서도 어서 쉬십시오." 끄덕끄덕 조는 리오 옆에서 반쯤 잠에 취해 있던 리반이 불편한 얼굴로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가 두 개 밖에 없지 않소?" "여분의 모포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몬이 선반에서 모포를 꺼내 들어 바닥에 깔았다. 허리를 펴던 그가 느닷없이 신음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놀란 사일러스가 그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사일러스. 조금 다친 거 뿐이야." "다쳤다고? 어디를?" 고개를 든 아몬이 조심스럽게 겉옷을 젖혔다. 피로 벌겋게 물든 앞섶이 나타나자 사일러스가 버럭 소리쳤다. "젠장! 피를 철철 흘린 주제에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환장할 만큼 답답하고 무모한 녀석같으니! 끝까지 입 다물고 있다 그냥 죽지 그랬어, 멍청아?" 사납게 이를 갈고 있었지만 옷을 벗기는 사일러스의 손길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아몬의 상체가 드러나는 순간 격한 숨을 들이켰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찔린 것처럼 가장자리에 거무스름한 그을음이 묻은 상처가 가슴 중앙에 나있었고, 그 작지만 불길한 구멍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쉴 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서 여기 침대에 눕히는 게 낫겠소." 질린 얼굴로 아몬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던 리반이 다급히 권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몬이 당장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우린 이미 불편한 잠자리에 익숙해진 상태니 신경쓰지 마시오." "전 여기가 더 편합니다." 리반과 사일러스는 아몬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내가 도울 만한 거 없소?" 옆으로 비켜서 있던 리오가 한발 다가들었다. "깨끗한 물이 필요합니다." 사일러스는 지체없이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내 금방 가져오겠소." 막을 사이도 없이 리오가 밖으로 뛰어나가자 아몬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얌전히 누워 있어." 무뚝뚝하게 말한 사일러스가 깨끗한 천과 약 꾸러미를 찾아가지고 돌아왔다. "넌 이제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신경 써.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일러스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아몬이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럼 이 꼴을 한 채 임무를 수행하겠단 말이야?" 사일러스는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마구 흔들어 주고 싶다는 얼굴로 아몬을 노려봤다. "피 때문에 보기 흉할 뿐이지, 몸을 사릴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상처는 아니야. 더군다나 이번 일엔 엘의 목숨이 걸려 있고. 이제 시간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맥없이 누워 있을 수는 없어. 쉬는 건 나중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래, 똑똑한 척 혼자 다하는 멍청아, 너 용감하다." 사일러스가 심술 난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비죽이며 비아냥거리자 아몬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리반이 잠시 망설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오. 이런 말을 물어 봐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하고 알렉스는 대체 어떤 사이인 거요?" 아몬과 사일러스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저희는 엘의 친구일 뿐입니다." 아몬은 신중하게 답했다. "친구라..." 리반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 전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친구인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내가 듣고 싶은 건 알렉스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왜 그녀를 돕는 건지, 또 바르테즈의 기사들이 무슨 이유로..." 리반이 얼굴을 찌푸리며 도중에 말을 멈췄다. 문밖에서 리오의 인기척이 들려 오고 있었다. 궁지에 몰려 있던 아몬과 사일러스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안으로 들어서는 리오를 바라봤다. "어서 오십시오!" 사일러스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을 반기자 리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이 담긴 양동이를 침대맡에 내려놨다. 채 가시지 않은 불편한 공기를 느낀 그는 쓴웃음을 짓고 있는 리반에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반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고맙습니다, 전하." 사일러스가 천을 물에 담그며 감사를 표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뭘... 그것보다 내가 도울만한 다른 일은 또 없소?" "이제 저 혼자서도 그럭저럭 할 수 있으니 전하께선 편히 쉬십시오." 사일러스는 능숙하게 피를 닦아 냈다. 갖가지 크고 작은 부상을 많이 접하고 겪어봤기에 그는 치료사 조수정도는 능히 해낼 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젠장!" 상처에 약초를 붙이던 사일러스가 거칠게 욕설을 뱉어냈다. "왜 그래?" "피가 멈추지 않아. 작은 구멍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사일러스가 아몬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낮게 속삭였다. "전하께 알려야겠어." 아몬이 몸을 세우는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괜한 짓 할 생각말고 어서 상처나 묶어 줘. 그럼 저절로 지혈이 될 테니까." "저절로 지혈이 될 거였으면 지금껏 피가 나오지도 않았어." "시간이 없어, 사일러스. 우린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나가야 된단 말이야. 그 오메른이란 자, 당한 채 얌전히 물러설 사람이 아닐 테니까. 너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오메른은 놀랄만큼 상황판단이 빠른 자야. 아까는 사정이 여의찮아 물러선 것일 뿐 절대 포기한 게 아닐 거야." 오메른에 대해 아몬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사일러스는 반박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아몬은 손을 풀며 조용히 말을 붙였다. "제발,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마, 사일러스." 사일러스는 아몬과 얽혀 있던 시선을 풀었다. 아몬이 바라는 대로 잠자코 손을 움직이며 그는연거푸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전하? 다른 걸 가져오라 할까요?" 엘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살피는 쥬네비아에게 싱겁게 웃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 배가 불러서요." 쥬네비아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뭘 드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침식사도 변변히 들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마르셨는데 더 체중이 줄어 건강이라도 나빠지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입맛이 없더라도 조금만 더 드십시오." 엘은 쥬네비아의 엄한 시선에 밀려 가루설탕을 묻힌 작은 과자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과자를 먹고 달콤한 과일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찻잔을 내려놨다. "으음... 정말 맛있어요.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아요." 과장되게 말하며 고개를 든 엘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쥬네비아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리광을 부린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에선 가슴이 따뜻해졌다. "잠자리가 불편하셨나보군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예,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쥬네비아의 눈에 사려 깊은 이해의 빛이 나타났다. "그러셨군요. 하긴,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편하실 순 없으시겠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쥬네비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일이 혼인식이니......" 엘은 쥬네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속마음을 내비쳤다. "황후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지만... 그러니까 제가 황후님의 조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지도 모르지만... 황후님은 언제까지나 제게 있어 단 한 분뿐인 이모님으로 기억될 거예요." 말없이 엘을 응시하는 파란 눈동자에 물기가 아른거렸다. "고맙습니다, 전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전하께선 단 한 분뿐인 제 조카십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따뜻한 미소를 나눴다. "이런, 제 마음을 이렇게 약하게 만드시다니." 짐짓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살짝 눈을 흘긴 쥬네비아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내일 혼인식엔 무엇을 입을 생각이신가요?" "옷이요? 그냥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혼인식 복장에 적용되는 특별한 규칙같은 게 있는 건가요? 그런 거 없으면 좋겠는데..." 무엇을 입을지 고민해 본 적도 관심도 없었던 엘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쥬네비아가 조그맣게 혀를 찼다. "특별한 규칙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보이시는 날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신경을 쓰셔야지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쥬네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엘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꼭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전하께서 입으실 드레스 몇 벌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전하를 놀라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제가 눈대중으로 본 치수대로 옷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니 성가시더라도 우선 입어 보셔야 합니다. 내일 입으시려면 고칠 부분을 찾아 서둘러 손을 봐야 할 테니까요." 엘이 좋아하리라 기대하고 있던 쥬네비아는 뜻밖에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죄송한 말이지만 드레스는 나중에 받는 게 좋겠어요.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자리에 화려한 치장을 한 채 나가고 싶지 않아요." "전하, 모든 사람이 잔뜩 멋을 부리고 참석할 것입니다. 꾸미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자리란 말입니다." 쥬네비아가 차근차근 설명조로 말했지만 엘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와 위치가 확실한 사람들이에요. 전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내일 당장 처형대에 매달릴 지도 모르는 처지고요. 실수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 우스꽝스런 어릿광대 꼴이 되긴 싫어요. 못난 생각이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세요. 잠시 빌리게 된 이 자리가 제가 있어야 될 곳이라는 게 밝혀지면 그 때 감사히 받을게요." 쥬네비아가 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미처 전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늘져 있던 쥬네비아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혼인식은 어차피 내일 밤에 열리게 되니 만찬 전에 옷을 갈아입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혼인식이 밤에 열린다고요? 아침이 아니고요?" "모르고 계셨군요. 황가의 혼인식은 지금까지 항상 날이 어두워진 다음 시작되었습니다. 리아잔 제국의 번영을 기원하고 신랑신부에게 신성한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리아잔의 상징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쥬네비아가 잔잔한 미소를 건넸다. 하지만 자신이 내일 겪게 될 일이 그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엘은 미소를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럼 제가 먼저 무대에 올라야되는 거군요." "예, 아마 정오 무렵 일을 치르시고, 그 후 간단한 다과회를 거쳐 조금 이른 만찬에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만찬이 끝나면 혼인식이 열리기 전까지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지게 될 테고요. 전하께서 굳이 다과회까지 참석하실 필요는 없으시니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의복을 갖추시면 될 겁니다. 저도 만찬과 혼인식에만 참석할 생각입니다. 제가 미리 준비를 해 놓을 테니 전하께선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너무 늦지 않게 제 처소로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쥬네비아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던 엘이 심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후님은 제가 내일 만찬에도, 또, 혼인식에도 참석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쥬네비아가 엄숙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물론입니다, 전하께선 내일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실 것입니다." ===================================================================제 목 [달의 아이] 63장. 전야-2===================================================================리오는 뻐근한 허리를 펴고 목덜미를 주물렀다. 손바닥에 생긴 상처에 소금기가 스며들자 땀투성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리오의 손바닥은 군데군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터져 진물이 흐르는 대여섯 개의 물집 옆엔 새로 만들어진 놈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젠장, 이러다간 일을 해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겠다." 리오는 툴툴대며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짧지만 달콤한 휴식을 만끽했다. "가만히 서서 뭐해?" 터덜거리며 다가온 소년이 리오의 등을 철썩 때렸다. 그는 고개를 휙 돌린 리오가 눈을 부라리자 싱겁게 씩 웃었다. 한스라는 이름의 열일곱살 난 이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고된 일을 해온 탓인지 얼굴만 조금 상기되었을 뿐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리오의 목에 닿을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어깨는 부자연스러워 보일만큼 넓어 무심코 지나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한스는 리오를 비롯한 다섯 명의 소년과 함께 장작 나르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능숙한 일 처리와 황궁에서 오랜 시간 일한 경험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장 역을 맡게 되었다. "서둘러야지 괜히 이러다가 또 쥐어 박히겠다." 허리를 굽힌 한스가 장작묶음을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뭐 하느냐는 얼굴로 리오를 쳐다봤다. "여기서 몸 성히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리오는 투덜거리며 장작을 들어 올렸다. 한스가 든 양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팔과 어깨가 떨어질 것처럼 쑤셔왔다. "너처럼 일하다간 그런 거 고민하기 전에 쫓겨날 걱정부터 해야겠다. 보아하니 힘든 일은 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데 왜 여기 들어온 거야?" "당연히 돈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 손바닥이 너덜거리도록 이 거지같은 걸 옮길 것 같아?" 리오가 시큰둥하게 응수했다. 바람을 타고 군침 도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리오와 한스의 배에서 동시에 꼬르륵 소리가 새어나왔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아무리 황녀님과 공작님의 혼인식이라지만 난 그렇게 어마어마한 음식을 만들 줄은 몰랐어. 쉬지 않고 땔감을 쌓아도 순식간에 동이 나잖아." 콧잔등이 가려운지 한스가 우스꽝스럽게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리오는 건성으로 말을 거들며 한스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새로 나타나신 엘리시엔 전하가 어디 계신 지 알아?" "글쎄... 서쪽 별궁에 계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그런데 그건 왜?" "그냥, 괜히 궁금하잖아.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으신 분인데... 이런저런 말들도 엄청 많고... 어떻게 생긴 분일까, 호기심도 생기고... 넌 안 그래?" 아래로 축 늘어진 팔을 추스르며 리오가 가볍게 물었다. "궁금하긴 궁금하지만, 생전가야 우리같은 놈들이 그 분 옷자락이라도 한 번 쳐다볼 수 있겠어?" "그거야 모르는 거지. 혹시 또 알아? 우리에게 멋진 미소를 던져 주실지." "뭐, 미소씩이나? 너도 참, 팔자 편한 녀석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한스가 피식 웃으며 요리실 문을 열었다. "이 굼벵이 녀석들, 어디서 놀다가 이제야 기어들어 오는거야?" 화덕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요리사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눈치 빠른 한스가 몸을 피하자, 대신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리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가발이 벗겨지는 느낌에 리오는 반사적으로 팔을 치켜들었다. 어찌해 볼 도리없이 그의 품에서 장작이 빠져나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엄청난 충격음이 공기를 진동시키자 시끄럽던 요리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요리실 안을 북적대던 육십 여명의 사람들이 리오에게 시선을 모았다. "우라질! 머리가죽이 훌러덩 벗겨졌는지 알았네!" 놀라 하얗게 질린 요리사가 소매단추에 걸려 대롱거리고 있는 흑갈색 가발을 바닥에 팽개쳤다. 망연자실해 있던 리오는 허겁지겁 가발을 집어올려 붉은 머리카락을 가렸다. "왜 가발같은 걸 쓴 거야? 주제에 안 맞게!" 리오는 요리사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일부러 거칠게 대들었다. "온통 빨갛기만 한 머리색이 싫어서 쓴 겁니다! 내가 가발을 쓰든 안 쓰든 아저씨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같은 놈이 가발 쓰면 천벌이라도 내립니까?"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더 맞기 싫으면 빨리 장작이나 가져와, 늘씬하게 패주기 전에!" 리오는 요리사의 주먹을 피해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가발을 고쳐 썼다. 잔인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흘러갔지만 야노쉬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열릴 줄 모르는 문에 시선을 못박고 있던 아르벨라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초조감이 치밀어 오르자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그녀를 외면하듯 무심히 펼쳐진 풍경 구석구석까지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려 있었다. 갑자기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탁하게 느껴졌다. 아르벨라는 입술을 꼭 닫고 뛰어가 창문을 힘껏 밀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시원하고 청결한 공기를 가슴 가득 호흡했다. 잠시나마 엷은 평온에 싸여 있던 아르벨라의 얼굴에 일순 두려움이 나타났다. 비록 문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뒤에 야노쉬 공작이 있다는 사실이 온 신경을 타고 전해져 왔다. 아르벨라는 가슴이 불규칙하게 방망이질치는 걸 느끼며 몸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아르벨라 황녀님." 기다렸다는 듯 야노쉬 공작이 즉시 인사말을 했다. 짧은 공백이 흐른 뒤 아르벨라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려 왔지만 아르벨라의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했다. 침착성을 유지한 채 일을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르벨라는 빠르게 냉정을 찾아갔다. "황녀께서 제 저택까지 몸소 찾아주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그것도 혼인식을 바로 하루 앞두고 있는 분께서 말입니다." 아르벨라는 입을 열기 전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얘기가 길어질 테니 우선 앉는 게 좋겠습니다." 야노쉬 공작의 눈에 의외라는 놀라움이 스쳐갔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린 야노쉬 공작이 아르벨라의 맞은 편에 자리잡았다. "절 찾으신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아르벨라는 흉할 정도로 튀어나온 잿빛 눈과 시선을 맞댔다. "약혼을 파기하러 왔습니다." 아르벨라가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야노쉬 공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르벨라의 약점을 파고 들었다. "황제폐하께선 뭐라 하십니까?" "제 약혼이고, 제 혼인입니다. 아버님은 이번 일과 상관없으십니다." "폐하께선 그렇게 생각지 않으실 텐데요?" 말문이 막힌 아르벨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야노쉬에게 지는 거라는 생각을 하며 꿋꿋이 마음을 다잡았다. "전 공작과 혼인할 마음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은 황녀님과 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아르벨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전 황녀님과 혼인할 마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르벨라의 말을 살짝 바꿔 대답한 야노쉬 공작이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그의 눈에 비웃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르벨라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게 그런 짓을 했으면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면서! 어떻게 나와 혼인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네 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새된 고함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야노쉬! 네놈은 인간이 아니야! 더럽고 추악한 괴물일 뿐이야! 난 절대 너같은 괴물과 혼인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할 수 없어!" 별안간 야노쉬 공작이 탁한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몸을 떨던 그가 일순 웃음을 멈췄다. "천지가 개벽해서 리아잔이 송두리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도 혼인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다. 그러니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얌전히 돌아가라." 야오쉬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자꾸 그렇게 보채면 첫날 밤을 하루 앞당겨 치를 수도 있으니까." 아르벨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분노가 빠져나간 그녀의 눈에 공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첫날 밤은 이미 오래 전에 치렀군. 그게 그러니까... 벌써 십 년이 됐나? 그래, 생각나는군... 부숴질 듯 여리고 가냘픈 몸, 갓 피어난 어린 꽃봉오리같은 피부... 너무나 순진하고 맑은... 겁에 질린 눈동자......" 야노쉬가 두툼한 입술을 천천히 움직여 입맛을 다셨다. "그 땐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끈적끈적한 색욕이 담긴 잿빛 눈이 벌레처럼 아르벨라의 몸을 더듬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뻣뻣하게 앉아 있던 아르벨라가 숨을 헐떡이며 일어났다. 그녀는 야노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더듬 문으로 다가갔다. "어서 빨리 내일 밤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라. 나 역시 그럴 테니까." 야노쉬 공작이 거칠게 킬킬댔다. 밖으로 뛰어나온 아르벨라는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악몽처럼 펼쳐진 어두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야?" 리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봤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한스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볼일이 좀 급해서... 금방 올 테니 어서 자." 한스가 배를 긁적이며 돌아누운 다음에야 리오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침상들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다행히 한 방을 쓰게 된 열여덟 명의 막일꾼들 모두 피곤에 지쳐 곯아떨어진 듯 보였다. 리오는 진땀을 흘리며 뻑뻑한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차가운 밤 공기 속으로 들어서자 축축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몸을 웅크린 채 바삐 다리를 움직여 일꾼들의 숙소 뒤편으로 향했다. 아몬에게 자세히 들어 별궁에 갈 수 있는 십여개의 길을 알고 있었지만 리오는 정원을 빙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별궁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상당히 오래 걸리겠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예상대로 리오는 어두워 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 문제없이 별궁 입구가 보이는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리오는 키 작은 묘목과 풀 사이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겼다. 약 이십 명에 달하는 경비병과 기사들이 궁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아있었다. 그것만 잘 해결되면 아무 탈없이 엘에게 반지를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담을 넘어갈 생각을 하며 고개를 치켜든 리오는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높이에 기가 질려 바로 시선을 내렸다. 담을 넘는 건 불가능하단 걸 깨달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궁문을 통과하는 방법뿐이었다. 기사들을 관찰하던 리오는 시녀나 시종들이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별궁을 출입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환호성이 터지려 하는 입술을 허겁지겁 막았다. 그리고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궁문 쪽을 살폈다. 내일로 다가온 혼인식 때문에 경비가 느슨해진 것 같았다. 리오는 빈틈없는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본 다음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걸어 숨어 있던 곳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옷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 낸 다음 당당한 태도로 궁문을 향해 걸어갔다. 리오를 흘긋 쳐다본 기사가 별 관심없다는 듯 얘기를 나누고 있던 동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오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궁문을 통과했다. 그가 승리의 포효를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저 놈이다! 잡아라!"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무기를 빼어 든 경비병과 기사들이 순식간에 리오의 주위를 둘러쌌다. "대담한 놈이구나. 감히 황궁에서 도둑질을 하려 들다니." 마체라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리오의 정면에 멈춰섰다. 첫눈에 그녀를 알아본 리오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얼굴을 감췄다. 지난밤 그에게서 반지를 빼앗으려 했던 여인이 틀림없었다. "전 도둑이 아닙니다. 윗분들이 시키는 대로 그저그런 허드렛일을 하는 놈일 뿐입니다. 여긴 잠결에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실수로 오게 된 것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리오는 연신 굽실거리며 울먹이듯 말했다. 재미있다는 얼굴로 리오를 바라보던 마체라타가 그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소곤거렸다. "괜한 헛수고하지 말고 손바닥만큼 남은 체면이나마 지키는 것이 어떻겠소, 리오카사이 왕자? 정말 보기 딱해서 하는 말이오." 번쩍 고개를 든 리오가 그녀를 노려보자 마체라타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이 한심한 도둑을 지하감옥에 처넣어라. 그리고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걸쇠를 잠가라." 경비병들이 리오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팔을 뒤로 꺾어 올렸다. "이 사악한 마녀, 죄값을 치르게 해주마!" 리오는 마체라타를 지나치며 험악하게 이를 갈았다. 마체라타가 즐기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그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다." 리오는 축축한 감옥 안을 쉴새 없이 돌아다녔다. 한순간이라도 움직임을 멈추면 폭발할듯한 분노와 좌절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숨은 턱까지 차 올랐지만 싸늘한 몸은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식은땀만이 전신에 배어들 뿐이었다. 돌바닥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들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문을 노려봤다. "여기냐?" "예, 전하." 거만한 질문과 공손한 대답이 들린 후, 곧 그를 가둬 둔 철문이 열리고 자일스와 마체라타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다." 리오의 정면에 자리잡은 자일스가 히죽 웃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널 만나니 제법 반가운 생각이 드는구나." "저 역시 반갑습니다, 황태자 전하." 자연스럽게 말을 받은 리오가 정중히 고개까지 숙이자 자일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무슨 속셈인진 모르지만 재미있군. 어디 계속해봐라." "왜 제가 이런 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전 그저 혼인식에 참석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런 제가 왜 이런 터무니없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선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럼 성심껏 오해를 바로잡겠습니다, 전하." 자일스가 진한 비웃음을 날리며 한쪽 다리로 중심을 잡고 비딱하게 섰다. "왜 이렇게 능청을 부리는 거냐? 그 동안 같잖은 계집애랑 어울리더니 너도 천한 물이 든 것이냐? 그래, 그렇겠군. 들을 필요도 없다. 두 연놈이 무슨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니까." 자일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리오가 그에게 몸을 날렸다. 이미 리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자일스는 매끄럽게 공격을 피하며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친 리오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신이 멍해지고 시야가 흐려지자 리오는 자일스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무방비상태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바닥에 짚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자일스가 발을 들어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감히 네까짓 게!" 리오는 턱을 치켜들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어디 다시 덤벼봐라! 온 몸의 뼈를 으스러뜨려 줄 테니까!" 리오의 몸에 연이어 잔인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폭력을 피해 구석으로 기어 가던 리오가 이내 전신을 늘어뜨렸다. "그만 고정하십시오, 전하. 중요한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지루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체라타가 끼어 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듯 가만히 서 있던 자일스가 허리를 굽혀 리오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찢겨진 천 사이로 반지가 보이자 그의 눈에 격한 흥분이 밀려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리오가 반지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 자일스가 한발 앞서 금빛 줄을 낚아챘다. "바로 이것이로군." 자일스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반지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중얼거렸다. 반지를 움켜쥐는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만족감으로 번들거렸다. "마체라타, 불 속에 이걸 던져 넣은 다음 술이라도 한잔하며 느긋하게 구경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지 않느냐?" "그렇겠군요, 전하." "가자, 마체라타. 더 이상 이곳에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그의 말뜻을 알아챈 마체라타가 살짝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즉시 자일스와 자신을 그의 거처로 공간이동시켰다. 물론 거기엔 자일스의 손아귀에 감싸인 채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 64장. 갈림길에 서서=================================================================== "준비 되셨습니까, 전하?" 어느새 익숙해진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나가겠소!" 엘은 문을 향해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이미 모든 채비를 마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갖기 위해 서둘러 준비를 마쳤지만 기다림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다. 이제 시간이 됐어. 엘은 의자 팔걸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녀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쥬엘라를 꺼내 손목에 끼었다. 손을 움직이자 색색의 구슬들이 순박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괜스레 마음이 든든해지는 걸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엘이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엘의 옷차림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사람들 중엔 황제직속의 황궁호위대 단장과 호위기사 열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듣기 좋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엘은 그들이 황제가 보낸 죽음의 전령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시지오, 전하." 호위대 단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의 신호를 받은 기사 두 명이 포박하듯 양쪽에서 엘의 팔을 잡았다. "내 몸에서 손떼시오." 위엄 어린 목소리에 발을 내딛으려던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그들은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어서 안내하시오." 기사들이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눈빛으로 단장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단장이 목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전하." 엘이 걸음을 떼는 단장을 따라나서려는 찰나 구석에 서 있던 중년의 시녀가 소리쳤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전하! 건강하신 전하를 다시 뵙게 해주십사 마음을 다해 기도 드리겠습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거북할 정도로 높았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엘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그녀를 돌아봤다. "이름이 뭔가요?" 입술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시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메, 메이나 서튼입니다, 전하."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초조한 듯 연신 문을 흘끗거리던 단장이 희미하게 짜증이 배인 어조로 끼어들었다. 엘은 그를 무시하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메이나." 엘이 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호위대 단장이 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 기사들은 포위하듯 질서정연하게 엘의 양 옆과 뒤에 자리잡았다. 엘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장소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드넓은 곳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호위대 단장이 걸음을 멈췄을 때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연회장엔 이미 오백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장이라... 모두들 멋진 유흥거릴 기대하고 있겠군. 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화려하고 거대한 덫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입구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 불이 번지듯 흥분에 찬 술렁거림이 연회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엘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받아 내며 상석에 있는 마르키젤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왼쪽 단 아래에 자일스와 쥬네비아가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옆, 조금 떨어진 곳엔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 두 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증거의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 모인 원로들도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칼 베리만이 죄인처럼 서 있었다. 엘은 두 걸음 정도 사이를 두고 칼 베리만 옆에 멈춰섰다. 칼 베리만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 색으로 보일 만큼 어둡게 그늘진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엘은 일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귀가 멍해지며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힘없이 늘어지려 하는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재상, 만나서 반갑소. 엘리시엔, 너도 마찬가지고." 딱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던 마르키젤이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신,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 황제폐하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칼 베리만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엘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재상, 재상이 보름 전에 한 예언을 기억하시오?" 마르키젤이 급한 성격을 드러내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예, 폐하." "물론 그 직후 내가 내린 황명도 기억하겠지. 그 내용이 뭔지 재상이 직접 말해보시오." 칼 베리만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오늘까지 제 예언이 진실임을 입증하라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르키젤이 초록빛 눈을 번뜩이며 칼 베리만을 직시했다. "시간이 됐소, 재상. 황명을 받드시오. 재상의 예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재상의 옆에 서 있는 아이가 페르가몬 황제의 딸임을, 달의 아이가 틀림없음을 입증하시오." 숨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은 창백하게 질린 칼 베리만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 지금 뭐 하는 건가?" 마르키젤이 의자팔걸이를 내려치며 버럭 소리쳤다. 놀라 흠칫한 사람들이 더 한층 숨을 죽였다. "입증할 수... 없습니다... 폐하." 일그러진 입술에서 힘겨운 말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마음껏 즐기듯 편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자일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입증할 수 없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마르키젤의 목소리가 연회장 가득 울려퍼졌다. 험악한 얼굴로 칼 베리만을 노려보던 마르키젤이 무자비하게 올가미를 조여왔다. "거짓예언의 책임을 물어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의 작위와 직책, 그리고 모든 사유재산을 박탈하겠다! 또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은 그가 달의 아이라 내세운 저 계집아이의 목과 자신의 목을 그 죄값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곳곳에서 놀란 비명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전 제 목을, 제 옆에 계신 분이 달의 아이가 분명하시다는 데 걸겠습니다!" 칼 베리만이 결연하게 맞섰다. "그럼 증거를 대라! 네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란 말이다!" "증거라면 제가 갖고 있습니다!" 엘이 의연한 어조로 소리쳤다. 모든 시선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굵은 눈썹을 치켜세운 마르키젤이 엘을 똑바로 노려봤다. "어디 네가 갖고 있다는 증거를 꺼내 봐라!" "알겠습니다." 엘의 자신있는 태도에 불안감을 느낀 마르키젤이 미간을 찌푸렸다. 몸 여기저기를 뒤지던 엘이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며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없습니다! 분명히 안주머니에 넣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으로 오는 도중 반지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반지? 반지라니?" "무슨 반지인데 증거가 될 수 있는 걸까요?" "당연히 대충 지어낸 말이지, 그걸 믿는 거요?" "혹시 후계자의 반지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뭐, 후계자의 반지?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오?" 이를 갈던 마르키젤이 성질을 폭발시켰다. "모두 조용히! 앞으로 허락없이 입을 놀리는 자는 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목을 잘라 버리겠다!" 찔끔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단번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지껄이다니... 네 목을 따기 전에 감히 날 능멸하려한 그 혀부터 도려내주마!" 마르키젤의 시선이 연회장 뒤쪽에 정렬해 있던 호위기사들에게 옮겨졌다. "뭣들 하느냐? 어서 두 죄인을 끌어내라!" "예, 폐하! 즉시 명을 받들겠습니다!" 호위대 단장이 간단한 신호를 보내자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차디찬 손을 맞잡았다. 이제 끝장이라는 절망이 밀려들었다. "죄송합니다, 엘... 정말 죄송합니다." 칼 베리만이 비통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칼 베리만이 이런 일을 당하시는 게 누구 탓인데요. 제발...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목이 잠기며 점점 말이 기어 들어갔다. 엘은 목에 걸린 커다란 덩어리를 삼키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 앞까지 접근한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손을 내밀어 엘과 칼 베리만을 잡으려 했을 때 입구 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잠깐만! 잠깐만이요!" 사람들 사이를 헐레벌떡 달려오는 사람은 귀족자제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망설임없이 기사들을 헤친 소년이 엘의 정면에 멈춰 섰다. 휘둥그레진 엘의 눈과 소년의 파란 눈동자가 깊숙이 얽혀 들었다. "이, 이걸 떨어뜨리고 가셨습니다." 리반이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었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 전하의 모습을 놓치는 바람에 이제야 돌려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하가 누구신지 몰라서 황궁 곳곳을 헤매느라 그만... 죄송합니다, 전하." 엘이 떨리는 손으로 리반이 내밀고 있는 반지를 잡으려는 순간 상황을 눈치 챈 자일스가 벌떡 일어서며 리반을 가리켰다. "침입자다! 당장 저 놈을 잡아라!" "전 침입자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어디 초대장을 보여 봐라!" 리반이 어쩌면 좋으냐는 얼굴을 엘에게 돌렸다. 가슴만 바짝바짝 탈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자 엘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초대장도 없는 놈이 침입자가 아니라고? 그럼 황궁엔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근처를 지나던 길에 심심해서 한 번 들른거냐? 그랬다가 저 계집애가 떨어뜨렸다는 반지를 때마침 주었단 말이지?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자일스가 가소롭다는 어조로 이죽거렸다. "그 소년은 저와 함께 온 아이입니다, 전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언을 하며 앞으로 나서는 사람은 흰 수염을 점잖게 늘어뜨린 유이나르였다. 헛소리하는 놈까지 같이 잡아들이라 명령하려던 자일스는 유이나르를 알아보고 마지못해 입술을 닫았다. 평민출신이긴 하지만 유이나르는 당대 최고라는 치료술로 5년 전까지 리아잔 제국의 수석어의관을 지냈고, 그 탁월한 실력과 공로로 인해 전황제인 페르가몬에게 백작의 작위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백작과 함께 왔다니? 자세히 말해 보시오!" 자일스가 악문 이사이로 말을 뱉어냈다. "제 뒤를 잇게 하기위해 얼마 전부터 옆에 두고 있던 아이입니다. 먼길 혼자오기 적적해 이 곳까지 데려온 거고 말입니다." 눈을 깜박이고 있는 리반에게 시선을 옮긴 유이나르가 호통을 쳤다. "뭐하고 있는 거냐, 이놈아? 전하께 물건을 돌려 드리고 어서 이리 오지 않고?" "아,알겠습니다!" 엘에게 반지를 건넨 리반이 서둘러 유이나르를 향해 뛰어갔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니, 단단히 혼이 날 줄 알아라!" 리반의 머리를 쥐어박은 유이나르가 몸을 돌리며 엘에게 은근슬쩍 눈을 찡긋거렸다. 엘은 리반을 끌고 문 쪽으로 가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마르키젤을 바라봤다. 그리고 침착한 태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야 증거를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군요. 증거는 바로 후계자의 반지입니다." 관자놀이를 바르르 떨던 마르키젤이 시종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 즉시 시종장이 엘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은받침을 내밀었다. 엘은 신중한 손길로 반지를 받침 위에 올렸다. 시종장은 가장 먼저 반지를 마르키젤에게 보였다. 후계자의 반지는 오직 그 주인만이 손 댈 수 있다는 불문율 때문에 마르키젤조차 눈으로밖에 살필 수 없었다. 철천지원수라도 대하듯 반지를 노려본 마르키젤이 사납게 손사래를 치자 시종장이 재빨리 자일스와 쥬네비아를 향해 움직였다. 가짜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자일스 앞으로 받침이 내밀어졌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감았다 떴지만 눈앞에 놓인 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없애 버린 것과 똑같이 생긴 반지였다. "이건 가짜야!" 자일스가 버럭 소리쳤다. 움찔하는 바람에 은받침을 놓칠 뻔한 시종장이 서둘러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가짜라고요? 어찌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엘은 말을 끝내고 희미하게 조소를 지었다. "왜냐하며 가짜가 분명하니까. 너 따위가 진짜 후계자의 반지를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 자일스가 이를 갈며 말을 받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쥬네비아가 조용한 위엄을 담아 입을 열었다. "황태자, 지금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반박하려던 자일스가 입술을 꾹 닫고 털썩 등을 기댔다. 쥬네비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원로들의 차례가 되었다. 후계자의 반지를 본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급하게 숨을 들이쉬는 사람, 미심쩍은 표정으로 반지를 살펴보는 사람, 달려들듯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 또 반지를 집으려 하다 시종장의 정중한 주의를 받고 손을 거둬들이는 사람. 웬만큼 충격이 가라앉자 원로들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이제 됐을 테니 어서 의견을 말하시오!" 초조함을 참지 못한 마르키젤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후계자의 반지가 확실하다는 분들도 계시고, 반면 그럴 리 없다는 분들도 계시고......" 원로회 의장이 말끝을 흐리며 야노쉬 공작을 곁눈질했다. 가짜일 거라고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야노쉬 공작이었고, 거기에 더해 공작은 그가 가진 막강한 권력으로 원로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원로회 귀족 대다수가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폐하."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칼 베리만이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게 뭐요?" 마르키젤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후계자의 반지는 대대로 황위계승자에게 이어진 성물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아시겠지만 전설처럼 구전되어 온 말에 따르면 이 성물은 자신의 주인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일의 진위를 판단하는 데 후계자의 반지만큼 훌륭한 존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반지 스스로 주인임을 증명하게 하라는 말이로군." 마르키젤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재상. 내 생각에도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소."" 마르키젤은 칼 베리만이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생각을 하며 흔쾌히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반지를 이리 갖고 오게." 시종장이 지체없이 칼 베리만의 말을 따랐다. "어쩌시려고요?" 엘이 다급히 속삭였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직 이 방법만이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엘은 칼 베리만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 속으로 침울한 말을 중얼거렸다. 예, 그렇겠죠. 다만 실패할 경우 종지부는 우리 두 사람에게 찍히게 되겠지만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칼 베리만이 더 한층 목소리를 낮췄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후계자의 반지는 가짜라는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증명해야 합니다." 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체념을 밀어내려 애쓰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암울한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딱딱하고 차가운 반지를 집어들었다. 새삼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엘은 반지를 쥔 주먹을 다른 쪽 손으로 감쌌다.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야 돼. 이일엔 나뿐 아니라 칼 베리만의 목숨까지 걸려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두 사람의 생사가 결정되는 거야. 엘은 칼 베리만을 보며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제발 아무 일이라도 일어나게 해주세요.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든지... 어디선가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린다든지... 당장 벼락이 내려친다해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엘은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손바닥만 축축해졌을 뿐 그녀와 칼 베리만을 위기에서 구할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체 지금 뭐하는 거냐? 혹시 잠을 자고 있는 것이냐?" 이제 완전히 여유를 찾게 된 자일스가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여기저기서 재미있다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쓰라린 패배감이 밀려들었다. 엘은 얼얼해질 만큼 힘껏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비명을 지르든지, 아니면 히죽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든지, 하다못해 실컷 욕을 퍼붓든지. 엘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엘... 괜찮습니다." 칼 베리만이 울고 싶을 만큼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갈색눈동자가 시린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칼 베리만... 더 이상 희망이 없나요?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건가요? 엘은 마지막 숨결을 내쉬는 그 순간까지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미친듯이 머리를 굴렸다. 방법은 단 하나뿐이야. 내 스스로 사람들이 놀랄 만할 일을 만들어 내는 것. 연기하곤 거리가 멀지만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어. 반지를 손에 쥐었을 땐 아무 사건도 생기지 않았으니, 이제 그걸 손가락에 끼고 일을 벌려야 하리라. 엘의 계획은 매우 단순했다. 반지를 끼는 순간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면 되는 거였다. "이제 다 끝난 거냐?" 자일스가 느물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엘은 어깨를 펴고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유지한 채 반지를 왼쪽 집게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엘은 자신의 계획대로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술을 크게 벌렸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에선 비명대신 숨막히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반지 중앙에 박힌 돌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회장을 채운 모든 이가 숨죽인 걸 아는 듯 섬세한 은광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반지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엘의 손가락에 꼭 맞는 크기로 변했다.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고 당사자인 엘조차 방금 전 일어난 작은 기적을 되새기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증명되었군요."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하며 앞으로 나온 사람은 니제르 대사제였다. 그는 본론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마르키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지난번 보내 드렸던 공문의 내용대로 이 자리에서 아시리움 종단의 뜻을 밝히려 합니다. 황제폐하, 윤허해 주시겠습니까?"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마르키젤이 다소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오, 대사제." "감사합니다, 폐하." 점잖게 답례한 니제르 대사제가 정면을 향해 섰다. 그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엘리시엔 전하께선 직접 스스로를 증명하셨소. 이로써 아시리움 종단이 그 분께 씻지 못할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소. 아시리움 종단을 대표해 먼저 엘리시엔 전하께 사죄말씀 드리오." 엘에게 고개를 돌린 니제르 대사제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당하신 고통을 말 몇 마디로 사라지게 할 순 없겠지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아... 아, 예..." 얼떨떨한 상태에 있던 엘이 서툴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니제르 대사제가 다시 몸을 바로 잡았다. "아시리움 종단은 앞으로 엘리시엔 전하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오! 그 노력은 전하께서 황위를 잇게 되시든 그렇지 않으시든 변함없이 지속될 거요! 만약 엘리시엔 전하께 위해를 가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아시리움 종단의 적이 될 것이오!" 아시리움 종단이 사실상 황제가 아닌 엘 편에 서겠다는 발표였다. 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언은 마르키젤의 얼굴에서 단번에 핏기를 빼앗아 갔다. 그는 혼이 나간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마르키젤과 마찬가지로 충격에 휩싸인 자일스는 이를 갈며 연거푸 주먹을 내려쳤다. 오른쪽 주먹으로 가격당한 팔걸이가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연회장전체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옆에 있던 쥬네비아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됐습니다, 엘! 이제 됐습니다!" 칼 베리만이 감격에 찬 얼굴로 엘을 바라봤다. "칼 베리만... 전 뭐가 뭔 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전하께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오신 겁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으신 겁니다." "진정한 제 자신을 찾았다고요?" 엘의 목소리엔 그녀가 느끼는 혼란이 짙게 묻어 있었다. 엘은 연회장을 한번 빙 둘러본 다음 출입구로 향했다. 연회장을 나온 그녀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걸음을 떼었다. 가위에 눌려 버둥거리다 가까스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다란 돌을 이고 있는 듯 머리가 묵직했고 한발한발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엘은 길고 긴 복도를 걸어 그 끝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추고 그늘진 벽에 몸을 의지했다. 진정한 내 자리... 엘리시엔 마그누스 차르 드 칼리트라바... 정말 이게 진정한 내 자리일까? 하지만 전하라니... 내가 엘리시엔 전하라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엘의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토막토막 흘러나왔다. 그녀는 황궁에 들어와 쥬네비아를 만나고, 칼 베리만의 예언내용을 듣고, 또 전하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자신의 자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방금 전 연회장에서의 일도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회장에 모였던 사람들 중 이번 일을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건 엘 자신일지도 몰랐다. 파리해 보이는 손이 눈에 잡혔다. 아름다운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손은 낯설고 생소하기만한 이 곳 황궁을 닮아 있었다. 엘은 반지를 빼 손바닥 위에 올렸다. 가만히 반지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렸다. 난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제 목 [달의 아이] 64장. 갈림길에 서서-2=================================================================== "모두 물러가라!"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있는 시종들에게 마르키젤이 날카롭게 명령했다. 그는 시종들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뻣뻣하게 서 있는 자일스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곧 그의 입술에서 사나운 고함이 터져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자일스가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모른다고? 지금 모른다고 했느냐? 그럼 그 말은 무엇이었느냐? 네가 직접 네 손으로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분명히 제 손으로 처리했습니다. 펄펄 끓고 있는 쇳물에 제 손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쇳물로 검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입니다." 자일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난로에 던져 넣어도 반지는 전혀 모양이 변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석에 작은 흠조차 생기지 않았다. 때문에 완전히 형태를 바꿔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마체라타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가짜를 없앤 것이다! 한심하게 가짜를 처리하고 만족스러워 한 것이란 말이다!" 마르키젤이 자일스를 향해 문진을 집어던졌다. "멍청한 놈!" 자일스의 얼굴에서 한뼘 정도 떨어진 곳을 스쳐 간 문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식장에 부딪쳤다. 속에서 부글부글 분통이 터지려 했지만 조금 전 연회장에서의 일이 아직도 선명하기만 한 자일스는 아버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일스를 노려보던 마르키젤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어지간히 냉정을 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벌어진 걸 되돌릴 수는 없는 법... 내 더 이상 그 일로 널 탓하지는 않겠다." 자일스는 마르키젤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앞으로는 절대 아버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입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 마르키젤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등을 기댔다. "대체 그 계집애 뒤에 누가 있기에... 이 정도까지 일을 벌일 수 있는 걸까?" "그 늙은이가 틀림없습니다! 빨간머리 놈이 자신의 제자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던 노망난 늙은이 말입니다!" 마르키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있겠지만... 그 늙은이는 나와 맞설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없다. 아마 다른 누군가가 그 뒤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알지 못하는 놈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지금 눈앞에 닥친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아시리움입니다." 자일스가 심각한 얼굴로 마르키젤 앞에 앉았다. "눈 앞에 닥친 가장 큰 위기가 아시리움이라고?" 마르키젤이 별일 아니라는 듯 되묻자 자일스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예, 아버님! 아시리움이 그 계집애를 편들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미 예상됐던 일이지 않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일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황태자폐위까지 요구하고 나섰던 아시리움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네 편을 들기라도 할 것 같으냐? 더군다나 아시리움은 그 요구를 아직까지도 철회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관자놀이를 파르르 떨며 마르키젤을 똑바로 바라봤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버님?" 마르키젤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일이 예상외로 꼬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크게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건재하지 않느냐? 이제 얼마 후면 야노쉬까지 완전한 내 사람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감히 내게 대항하려 들지 못할 것이다. 또 그럴듯한 말을 발표하긴 했지만 리아잔의 내정까지 간섭할 아시리움이 아니다. 아마 아시리움은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려 들 것이다." 자일스의 눈에서 불안감이 빠져나갔다.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그가 별안간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러니까 아시리움 종단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그로인해 귀족회의에서..." 마르키젤이 말을 가로챘다. "그 계집애에게 황위를 잇게 하자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어떻게 하느냐... 그걸 묻고 싶은 거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날 믿어라, 자일스. 네 아버지를 믿으란 말이다. 내 후계자는 바로 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황제의 자리에 올려 주겠다. 감히 계집 주제에 리아잔을 가지려 하다니... 그 계집애에게 황권을 물려주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리아잔을 부숴 버리고 말 것이다." 마르키젤이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페르가몬의 딸년을 없애 버리면 그만이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리반이 벌떡 일어섰다. "알렉스!" 한껏 미소를 머금은 엘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기쁨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가 춤을 추듯 가볍게 일렁였다.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환한 웃음을 나눴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책상을 돌아 나온 리반이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짐짓 엄숙하게 대꾸한 엘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옷 갈아입기 전에 잠깐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들른 거야. 지나가는 시종한테 유이나르님이란 말을 하니까 다른 시종에게 물어 본 다음 친절하게 이곳까지 안내해 주더라고. 그런데 넌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유이나르님의 제자가 된 거야?" 리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 높여 반박했다. "제자라니, 그럴 리가 있겠어?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마음에 무턱대고 연회장으로 뛰어 든 상황이었는데... 그 노인도 일이 심각해지니까 얼떨결에 나서서 도와준 거겠고." "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이 책상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다 뭐야? 일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리반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내렸다.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쉰 그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 유이나르라는 노인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준 값을 받아야겠다며 저걸 강제로 맡기고 자신은 놀러 나갔어. 무슨 일인 줄 알아? 다른 게 아니라 혼인식 참석자 중 그 노인과 친분있는 사람들에게 안부편지를 쓰는 거야. 일일이 만나긴 귀찮고 모른 척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나?"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는 리반을 보며 엘은 피식피식 새어나오려 하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대체 몇 통이나 써야 하는데?" "이백 통! 믿어져? 자그마치 이백 통의 편지를 써야 하는 거야! 그런데 날 이렇게 혹사시키는 이유가 뭔 지 알아? 몇 명이 참석했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넉넉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해?" 리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움찔한 엘은 머리를 움켜잡는 리반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졌다. 그녀는 분위기도 바꿀 겸, 사뭇 궁금하던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리오는 어디 있는 거야? 같이 오지 않았어?" 리반의 표정이 금세 침울해지자 엘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리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잘 모르겠어, 알렉스. 아니, 전혀 모르겠어. 리오가 지금 어디있는지, 또,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자세히 말해 봐!" 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리오는 나보다 빨리, 그러니까 어제 오전에 황궁으로 들어왔어. 막일꾼처럼 꾸민 상태로... 그 후론 나도 몰라. 얘기를 들을 수도 만날 수도 없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넓은 황궁을 헤매고 다닐 수도 없고. 다만 너한테 반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걸로 봐서 그저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막연히 걱정하던 참이었어." 엘의 낯빛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리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일스와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아마 자일스는 리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오늘 연회장에서도 그렇게 자신있는 태도를 보였던 것일 테고.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엘은 벌떡 일어났다. 리반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넌 여기 있어, 리반." 리반은 걸음을 떼려 하는 엘의 팔을 재빨리 잡았다. "지금 리오 찾으러 가는 거지? 나도 함께 가겠어." 결연히 빛나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문을 향해 반 정도 걸어갔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유이나르가 들어왔다. "하라는 일은 내팽개치고 어디 가는 거야?" 리반은 퉁명스러운 질책을 곧장 맞받아 쳤다. "일은 갔다 와서 하겠습니다! 안부편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 있단 말입니다!" 유이나르를 지나친 리반이 문고리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너와 똑같이 생긴 버릇없는 쌍둥이를 찾는 거라면 우선 지하감옥부터 들러 봐. 어젯밤 잡힌 좀도둑이 빨간 머리를 갖고 있다니까 헛수고는 아닐 거야."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유이나르가 심술궂은 말을 덧붙였다. "왜들 안가고 그래?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편지라도 쓰고 싶은 거야?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나야 황송하지만." 리반과 엘은 그의 말을 뒤로 하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릴 흘려 들으며 힘껏 복도를 내달렸다. 금방이라도 리오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던 엘과 리반은 그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지하감옥으로 가는 도중, 경비병이 감옥 문을 막아 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엘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지하감옥에 갇힌 사람 한 명 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엘의 예상대로 경비병들은 불편한 마음이 들만큼 그녀에게 저자세로 나왔다.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던 그들이 난감한 얼굴로 조심스레 반대의사를 내비친 것은 엘이 리오를 가둔 철문을 열라고 말했을 때였다. 엘은 완강한 태도로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경비병들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고집스레 버티던 그녀도 제발 살려 달라는 그들의 애원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엘은 이번 일의 뒤에 자일스가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확신만을 얻은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즉시 엘과 리반이 향한 곳은 자일스의 거처였다. 얼마 남지 않은 만찬으로인해 자일스가 자신의 거처에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고, 그가 두 사람을 만나 주기나 할지도 불투명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바로 코 앞에 리오가 있는데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엘과 리반을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엘은 시종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목소리에 잔뜩 무게를 담아 말했다. "황태자전하를 뵙고 싶어 왔소."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알았소." 맥없이 말한 엘이 리반에게 돌아가자는 눈짓을 했을 때, 마체라타가 살며시 문을 열고 자일스의 거처에서 나왔다. "이런, 말소리가 들려 혹시나 해서 문을 열어 본 건데 공연한 수고가 아니었군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전하의 대화상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엘과 리반은 거의 본능적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리반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는 걸 느낀 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좋소." "그럼 어서 들어오십시오. 주인없는 방을 객이 차지하게 되었지만 황태자전하께서도 크게 노여워하진 않으실 겁니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마체라타가 옆으로 비켜섰다. 엘은 그녀를 놀리는 것처럼 나른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끼며 발을 내디뎠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마체라타가 정중히 의자를 권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는 엘을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두 분다 저와 구면이신 것 같군요." 마체라타가 지나칠 만큼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군요." 엘은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시리움 신전에 자일스와 함께 자신을 만나러 왔던 마체라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건 리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체라타가 언제 돌변해 자신들을 공격할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한시도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발걸음하신 이유는 당연히 감옥에 갇힌 친구 분을 구하기 위해서이겠지요?" 마체라타가 곧장 핵심을 파고들었다. "말 잘했소, 지금 감옥에 내 친구가 갇혀있소. 좀도둑이 아닌 바로 내 친구가." 엘은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아... 친구요. 친구는 정말 소중한 존재지요. 변변한 친구 하나없는 저이지만 그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친구를 얻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전하께선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마체라타가 말의 방향을 슬쩍 비틀자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분노가 스쳐갔다. "이곳에서 쓸모없는 말이나 주워들으며 죽일 시간따윈 없소." 엘은 신랄한 말을 끝내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오만한 표정을 지은 채 마체라타를 내려다봤다. "우린 이만 가볼 테니 방 주인이 돌아오면 감옥에 갇힌 무고한 사람을 풀어주는 게 좋을 거란 말이나 전해 주시오." 엘의 목소리는 냉랭하기만 했다. 마체라타가 눈웃음을 치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문으로 향하는 엘과 리반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의 친구 분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엘은 딱딱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봤다. 마체라타에게 꽂히는 그녀의 눈길엔 짙은 의혹이 깔려있었다. "그게 진심이오?" 리반이 한발 다가서며 소리 높여 물었다. 흘끔 리반을 본 마체라타가 다시 엘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진심입니다. 절 믿고 돌아가 계십시오. 오늘 안으로 풀려 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리오가 나오면 유이나르님 거처로 안내 좀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리반의 말에 응수하면서도 그녀의 눈길은 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꼼짝 않고 서서 마체라타를 응시하던 엘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은 지금껏 유지해 왔던 뻣뻣한 태도를 버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마체라타의 입술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체라타는 입술을 움직여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불길하게 느껴지는 말을 꺼냈다. "이로써 전하께선 제게 작은 빚을 지시게 되는 겁니다." ===================================================================제 목 [달의 아이] 65장. 베일이 걷히다-1===================================================================잠시도 쉬지 않고 좁은 방안을 들쥐처럼 헤매고 다니던 카셀이 제러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정신 사납게 하지말고 제발 좀 앉아, 카셀." 제러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란하게 재채기를 한 세르피언이 코를 비비며 카셀을 노려봤다. "카셀, 당장 앉지 않으며 네 넓적한 얼굴로 주먹이 날아갈 줄 알아. 너 때문에 코가 간지러워 미치겠단 말이야." 카셀이 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희들은 걱정도 안되냐?" "당연히 성공했을 텐데 그런 쓸데 없는 걸 왜 하냐? 난 너와 달리 마음이 아주 편안하다." 거들먹거리며 잘난 체를 하던 제러드가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이미 네 번이나 손질한 덕분에 예리한 빛을 번뜩이고 있는 검날을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마음이 정말 편해 보인다, 임마." 피식 웃던 카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바라봤다. "그런데 알아본다고 후닥닥 뛰쳐나간 녀석은 왜 아직도 깜깜무소식인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쿵쾅거리며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서로 시선을 맞춘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이 벌컥 열리며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에지몬트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됐습니다, 됐다고요! 성공했습니다!" 기사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누가 제의하지 않았는데도 앞다투어 옆방으로 몰려갔다. "단장님!" "말 안 해도 안다. 저 녀석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으니까." 잔뜩 무게를 잡아 말하고 있었지만 사일러스의 눈엔 진한 안도감과 기쁨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만큼 시간이 더디게 간 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애가 타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저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고역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세르피언과 이케르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맞장구를 처대며 웃어 젖히자 좁은 방안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제야 침대에 누워 있는 아몬에게 신경이 간 사일러스는 즉시 기사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찔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을 때 아몬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전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마법사님, 정신이 드셨군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많이 힘드십니까?" 아몬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움직였다. 그가 일어나려 한다는 걸 눈치챈 사일러스는 힘을 보태주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아몬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했다. 착잡한 마음이 들자 사일러스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좀 더 누워 있는 게 낫지 않겠어?" "괜찮아, 사일러스." 아몬의 어조는 밝았지만 사일러스는 근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리던 아몬의 모습이 계속해서 뇌리를 맴돌며 그를 괴롭혀댔다. 리오를 황궁으로 공간이동 시킨 후 아몬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만큼 힘겨워했다. 설상가상 그 위에 마법까지 시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리오에 이어 리반을 어제저녁까지 들여보내려던 애초의 계획도 자연히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아침 마법력이 돌아와 리반을 황궁으로 공간이동시킬 수 있었지만 대가라도 치르듯 그 직후 아몬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제오늘 정말 죽다살아난 기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일러스는 남몰래 긴 한숨을 흘렸다. "반지는 어느 분이 전해주셨다고 하던가요?" 아몬은 대답을 기다리며 기사들을 한명 한명 차례로 바라봤다. "말쑥한 붉은머리 소년이라 했으니, 아마 나중에 떠나신, 리반이란 전하신 것 같습니다." 입을 다물던 에지몬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런데 그 반지는, 그러니까 가짜 반지는 어디서 나신 겁니까, 마법사님?"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또 두 분 중 리바너프 전하께서 성공하실 거란 건 어떻게 아시고 그분께 진짜를 맡기신 겁니까?" 제러드가 질문 하나를 보탰다. "가짜반지는 리자드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전하의 호출을 받아 바르테즈로 돌아가셨을 때 전하께 직접 받으셨다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반지를 생각하시다니 과연 전하시군요. 또 단시일 내에 그토록 정교한 모조품을 만들게 하셨다니..." 제러드가 감탄조로 중얼거렸다. "예, 정말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후계자의 반지와 똑같은 반지였습니다." 조용히 응수하던 아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전 두 왕자전하 중 어느 분이 진짜 후계자의 반지를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마법사님." 카셀이 제러드의 말을 재빨리 거들고 나섰다. "전 가짜반지와 진짜반지가 얼마나 비슷한지 비교해보겠다는 이유를 들어 리오카사이 전하께서 갖고 계셨던 후계자의 반지를 잠시 빌렸습니다. 하지만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만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 할 수없이 두 분 전하께 '이게 바로 진짜 후계자의 반지입니다. 형제 분이 가지신 건 가짜입니다' 라는 말을 하며 반지를 나눠 드렸습니다." "아아, 얘기가 그렇게 된 거였군요!" 카셀이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이제 궁금한 건 그럭저럭 풀렸을 테니 방으로 돌아가 떠날 채비를 해라." 사일러스의 명령에 기사들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만 남았을 때 사일러스가 정색을 하고 아몬을 쳐다봤다. "실수가 아니었지? 일부러 반지를 섞은 거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못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아몬이 순순히 진실을 털어놨다. "그래, 사일러스, 네 말이 맞아." "왜?" 사일러스가 짧게 물으며 바짝 당겨 앉았다. "진짜든 가짜든 별 상관없으니까.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엘에게 무사히 전해지면 그뿐이니까. 중요한 건 엘이지 후계자의 반지 따위가 아니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짜를 진짜로 알고 떠받들어도, 성물이라 칭송한다해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으니까. 또, 자신이 갖은 게 진짜라 확신해야 두 왕자전하들께서 필사적으로 반지를 전하려 하실 테니까...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전혀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극도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사일러스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친구의 모습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을 것 같은데... 아직도 부족해?" 어느새 아몬의 얼굴엔 익숙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 그만 움직이자. 바드리오는 아니지만 여기라고 오메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아니니까. 또 빨리 가서 리자드님께 보고도 올려야 하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야." 사일러스의 어깨를 툭 친 아몬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사일러스는 그를 따라 어정쩡하게 몸을 세웠다. 그는 이 곳에 도착한 후 풀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짐을 대충 점검한 다음 검집을 집어 들었다. 허리에 검집을 고정하던 그의 손길이 문득 멈춰졌다. 사일러스는 갑자기 떠오른 의문을 곧바로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지금 엘이 갖고 있는 반지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짐을 챙기던 아몬이 사일러스를 돌아봤다. 그리고 쓴웃음이 그려진 입술을 움직여 간단하게 답했다. "어쩌면." 유이나르의 방 앞에서 리반과 헤어진 엘은 잠시 고민하다 만찬장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만찬 전에 옷을 갈아입기로 한 쥬네비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치장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엘은 만찬이 끝난 후 옷을 갈아입고 혼인식에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길게 뻗은 복도를 바삐 걸었다. 혼인식에 초대받은 왕족과 귀족들의 숙소가 있는 이곳 동쪽궁은 만찬 준비로 분주한 본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도 그리 많이 눈에 띄지 않았고, 그들 대부분은 별 관심없이 엘을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서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당연한 거였다. 물론 엘은 덕분에 마음 편히 복도를 걸을 수 있었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세 명의 시녀가 그녀를 알아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엘은 걸음을 빨리해 그들을 서둘러 지나쳤다. 대체 언제쯤이면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불편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짜왕자 노릇을 할 땐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이곳에선 하나하나 마음에 걸리니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긴 엘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엘은 자신이 어느새 본궁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만찬장의 위치를 모른다는 생각도 떠올랐다. 하지만 십여명의 귀족들이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잡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손님들이 다 도착해야 출입을 허용하는 관례같은 것이 있는지, 만찬장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만찬장과 이어진 넓은 홀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엘은 슬금슬금 구석으로 물러섰다.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럴듯한 인사치레를 받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엘을 알아본 사람은 없어 그녀는 으리으리한 홀과 한껏 멋을 부린 초대객들을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따분함이 찾아 들며 연이어 하품이 나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여파가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엘은 하품을 참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반쯤 감긴 채 홀 입구에 무심히 고정돼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별안간 커다래졌다. 엘은 잘못 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시야를 가로막은 사람들을 피해 고개를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섯 명의 고위사제들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루드비히가 분명했다. 비록 눈을 제외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엘은 그가 루드비히라는 거에 그녀의 목숨이라도 걸 수 있었다. 엘은 서둘러 사람들을 헤치고 루드비히를 향해 나아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루드비히가 할 말이 있는지 사제들에게 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때마침 그 앞에 도착한 엘은 루드비히가 입을 열기 전에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를 발견한 은회색 눈동자가 반가움을 나타내며 신비롭게 반짝였다. 엘은 발꿈치를 세워 루드비히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다급히 속삭였다. "여기 오면 어떡해요? 빨리 나가요!" 엘은 루드비히를 열심히 출구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는 꼿꼿하게 버티고 선 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힘 못 빼요?" 으르듯이 말한 엘은 고위사제 다섯 명이 경악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놀라 루드비히의 몸에서 손을 떼냈다. 민망한 마음에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바, 반갑습니다, 사제님들." 엘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얼어붙어 있던 사제들 중 두 명이 얼떨결에 그녀와 똑같이 움직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친구 분을 잠깐 빌려야 되겠습니다." 그녀는 헤퍼 보일 만큼 환한 웃음을 연신 흘리며 루드비히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제 두 명이 숨이 넘어가는 사람처럼 괴상한 소리를 토해냈고 다른 사제 한 명은 요란하게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턱이라도 빠진 듯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제들을 향해 루드비히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번쩍 정신이 든 사제들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루드비히를 구석으로 데려가느라 바쁜 엘은 그들 사이에 오간 무언의 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그늘진 곳에 이른 엘이 날카롭게 주위를 살펴봤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자일스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루드비히, 자일스 눈에 띄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요. 만약 자일스가 루드비히를 알아보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자신을 다치게 한 마법사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눈을 벌겋게 뜨고 있단 말이에요." "상관없습니다." 루드비히가 맥 빠질 만큼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그녀의 말에 허겁지겁 황궁을 나서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엘은 답답한 한숨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도 자존심을 굽히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루드비히가 왜 그러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고집 부릴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살살 달래듯 말하던 엘은 루드비히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떼는 순간 버럭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빨리 가리지 못해요? 이리 와 봐요, 내가 해줄게요!" 엘은 루드비히의 얼굴에 다시 천을 씌우기 위해 허둥대며 팔을 들어 올렸다. 루드비히가 피식 웃으며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그녀의 손을 피해 얼굴을 젖혔다. "왜 자꾸 피하는 거예요? 이리 가까이 오란 말이에요!" 끌끌 혀차는 소릴 들은 후에야 엘은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구석에 서서 남부끄러운 짓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아는지 대다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은 그녀를 훑어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다음에야 그녀는 투덜거리며 몸을 바로잡았다. "그러게 왜 여길 와서... 우리 둘 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고요?" 엷은 미소를 띤 채 엘을 찬찬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그녀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자르셨군요." "예, 며칠 전에요. 그것보다 루드비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엘은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기 직전이었지만 루드비히는 느긋하기만 했다. "꼭 개구쟁이 꼬마 같습니다. 놀리면 발끈하는 귀여운 꼬마."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엘은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루드비히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하다,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그의 손목을 와락 움켜잡았다. "루드비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은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루드비히가 웃음을 참으며 왜 그러냐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이런 엉뚱한 행동을 하는 거냐고요?" 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루드비히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재미있으니까요." 어이가 없어진 엘이 요란하게 코방귀를 끼자 루드비히가 어깨를 떨며 쿡쿡거리기 시작했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엘의 입술에도 어느새 웃음이 피어올랐다. 엘은 머리를 가지런히 쓸어 주는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루드비히가 얼굴을 서서히 엘의 귓가로 가져왔다. "짧은 것도 마음에 들지만 전 긴 머리가 더 좋습니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귓불을 살짝 스쳤다. 엘은 손을 올려 귀를 가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루드비히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몸을 세웠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던 엘은 일부러 크게 코웃음을 쳤다. "긴 머리가 더 좋다고요? 그럼 루드비히 머리나 만지고 있으라고요, 천하의 호색한 같으니." 루드비히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엘은 그에게 잔뜩 인상을 써 보인 후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찬장으로 들어갔는지 담소를 나누는 스무 명 정도의 사람만 눈에 띌 뿐이었다. "기필코 만찬에 참석할 거예요?" 엘은 심각하게 물었다. "그럴 생각으로 왔으니 목적을 이뤄야겠지요."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긴, 루드비히는 아시리움의 사제님이시니까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겠죠. 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루드비히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엘은 그를 보며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해 보자고요, 루드비히. 힘은 없지만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자일스가 루드비히를 함부로 대하면 내가 한방 크게 먹여 줄게요" 엘이 만찬장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미가 나타났다. "만찬장에 들어가기 전에 아셔야 될게 있습니다." "알아야 될 거요? 그게 뭔 데요?" 엘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만찬장 쪽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계셨군요."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아시리움 성전의 니제르 대사제였다. "전 성하께서 만찬회에 참석하셨다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에 성하를 모시고 온 사제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성...하......" 니제르 대사제를 보며 어눌하게 속삭인 엘이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루드비히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곧 참석할 테니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아,알겠습니다, 성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니제르 대사제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루드비히... 지금 저 분이... 무슨 말씀을......"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비밀스런 섬광이 스치는 순간 엘은 거짓말같이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위엄, 지나치리만큼 쩔쩔매며 저자세로 그를 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사제가 아닐 거라는 느낌. 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현기증이 났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성하..." 떨리는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엘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나타내며 루드비히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무의식 중에 잡아당겼다. 루드비히가 조금 강하다 싶을 정도로 손목을 조였다. 루드비히를 처음 만나건 아시리움 성전의 복도에서였어. 두 번째 만남 역시 복도를 닦는 벌을 수행할 때였고. 하지만 세 번짼... 바로 서관이었어. "법황 성하..." 엘의 입술에서 신음에 가까운 숨결이 토해졌다. 눈을 꼭 감은 엘이 휘청거리자 루드비히가 그녀의 등과 허리를 받쳐 주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엘은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몽롱한 백색의 공간이 뇌리를 채워 나갔다. 무감각하게 비어버린 공간엔 어떠한 생각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엘은 숨결을 가누며 창백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던 주의깊은 눈길이 보라색눈동자를 찾아 들었다. 엘은 전력을 다해 매달리듯 루드비히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법황 성하신가요?" 떨리는 물음에 루드비히가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엘은 허리에 감긴 루드비히의 팔을 밀어냈다. 잠시 망설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그녀를 풀어주었다. 엘은 루드비히를 외면하며 만찬장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는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 정도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회색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미세한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엘에게서 눈을 떼고 만찬장으로 몸을 돌리려던 루드비히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그래,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복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엘은 루드비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뚜렷이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 강렬한 느낌에 그녀는 눈길의 움직임까지 잡을 수 있었다. 루드비히의 시선을 의식하며 엘은 일정한 보폭으로 또박또박 복도를 걸었다. 그에게 그녀가 느끼는 충격과 동요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침착하기만 했다. 비록 겉모습일 뿐이지만 엘은 힘들게나마 태연을 가장할 수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엘은 속도를 늦출 수도,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견디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엘은 뻣뻣한 다리를 세웠다. 법황 성하... 루드비히가 법황 성하...... 엘의 입술에서 거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발작적으로 어깨를 떨던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숨쉬기도 힘들만큼 쓰디쓴 배신감이 차올랐다. 감각없는 손가락을 말아 쥐며 그녀는 벽에 이마를 기댔다. 싸늘하고 딱딱한 느낌이 혼란스런 머리를 오히려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있은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엘은 복도를 울리는 밝은 웃음소리에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은쟁반을 든 두 명의 젊은 시녀가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깔깔대며 별 생각없이 그녀를 지나치려 했을 때, 엘은 서둘러 그들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이요!" 소스라치게 놀란 시녀들이 펄쩍 뛰어올랐다. 받쳐들고 있던 은쟁반이 흔들리며 물병에서 물이 넘쳐 흘렀다. "세상에! 깜짝 놀랐잖아요!" 시녀 한 명이 발끈하며 성을 냈다. 엘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다른 시녀가 발로 그녀를 다리를 다급히 걷어찼다. 그리고 엘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전하..." 짧은 비명을 토해낸 시녀가 핏기 가신 얼굴로 사죄의 말을 쏟아냈다. 엘은 그녀의 사과를 흘려들으며 비교적으로 침착해 보이는 다른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들고 있는 게 물인가요?" "예, 전하. 준비해 놓은 식수가 부족할 것 같다시며 시녀장께서 만찬장으로 물을 가져가라 명하셨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물 좀 빌려야겠어요. 곤란한가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두 시녀가 주춤주춤 엘의 눈치를 살폈다. "아,아닙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전하." 엘은 시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뚜껑을 벗겨 쟁반에 올린 다음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물을 모조리 머리에 쏟아 부었다. 놀란 시녀들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엘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실성한 사람을 대하듯 두려움을 서린 표정을 짓고 있는 시녀들을 향해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아... 예에......" 시선이 마주치자 엘을 곁눈질 하고 있던 시녀들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미친 짓을 했으니 저런 눈길을 받는 게 당연하겠지. 엘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빈 물병을 건넨 다음, 다른 시녀의 손에서 은쟁반을 받아들었다. "이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무,무슨 말씀을!" "전하,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만찬장에 가는 길이었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오." 엘은 어쩔 줄 몰라하는 시녀들을 뒤로 하고 만찬장을 향해 걸어갔다. 물병이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쟁반을 고쳐 잡으며 엘은 가까워지는 만찬장을 응시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서야 하리라. ===================================================================제 목 [달의 아이] 65장. 베일이 걷히다-2===================================================================만찬장은 두 장소로 구분되어 있었다. 먼저 귀족과 일반 초대객들을 위한 대형 만찬장이 있었고, 규모는 조금 작으나 훨씬 화려하고 격조있게 꾸며진 특별한 공간이 그 안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곳은 리아잔 제국의 황족과 고위 귀족 몇 명, 그리고 중요할 수밖에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빈들을 위한 장소였다. 엘은 거대한 식탁 사이에서 매끄럽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엘은 그녀를 나이든 시동정도로 생각한 사람들 몇 명으로부터 물을 따라 달라는 명령을 받아야 했다. 엘은 그들의 요구를 못들은 척하며 곧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시종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문 좀 열어 주면 고맙겠소." "예, 전하." 퍼뜩 정신을 차린 시종들이 정중하게 말하며 양쪽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엘은 활짝 열린 문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흥분서린 침묵 한가운데 멈춰섰다. 눈치 빠른 시종장이 서둘러 다가와 엘에게서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는 다른 시종에게 그것을건넨 후 엘을 그녀의 자리로 안내했다. 귀족들과 대사제들이 예의바르게 일어나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엘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시종장을 뒤따랐다. 그녀를 좇는 사람들의 눈엔 조심스럽게 감춘 기대감이 숨겨져 있었다. 사실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이 괴상한 황녀의 출현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엘이 도착하기 전 만찬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르키젤과 자일스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말을 아낄 수 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생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법황이 자신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숨막히는 긴장까지 유발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쥬네비아가 부드럽게 엘을 반겨 주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엘은 그녀의 눈에서 근심을 읽을 수 있었다. 엘의 자리는 쥬네비아와 레슈트 황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 낯선 얼굴의 소년 사이에 마련되어있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사람들 중엔 레슈트 황자처럼 쥬네비아에게 들어 이름만 알고 있는 가프네 황비와 크란제르트 황비, 또 그녀가 낳은 이르티어 황녀도 끼어 있을 것이다. 엘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쥬네비아의 맞은편에 자일스가 앉아 있었고, 양쪽 상석엔 각각 마르키젤과 루드비히가 자리잡고 있었다. 엘은 루드비히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입술이 바짝 타 들어갔다. 눈앞에 온갖 산해진미가 놓여졌지만 한 입도먹을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극명히 깨달았다. "이런 자리에 늦게 오다니, 내가 다 창피하구나."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던 자일스가 과장되게 혀를 찼다.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치장 때문에 늦었다는 변명은 하지 마라. 네 너저분한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그건 절대 아닐 테니까. 연못에서 헤엄이라도 친 거냐? 어쩌면 지나가는 시종과 바닥을 뒹굴며 격렬한 몸싸움을 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심술궂게 빛나는 자일스의 초록색 눈에서 엘은 그가 톡톡히 망신을 주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자리에 낄 주제가 못 된다는 걸 공개적으로 밝히고 싶겠지. 그래, 자일스, 그 장단에 기꺼이 맞춰 주마. "머리가 아픈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지나가는 시녀가 들고 있던 물병의 물을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으로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는 물벼락만큼 훌륭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두통이 생기시면 황태자께서도 저처럼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자 쏟기 힘드시면 언제든지 제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전하를 위해 항상 냉수를 준비해두고 있겠습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곳곳에서 소리 낮춘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에 자일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또 그는 그 정도의 말에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다 다를까 사람들의 웃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그가 더욱 노골적인 모욕을 던져 왔다. "너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더러운 방법을 내게 권유하다니...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천박하기 짝이 없구나." 놀란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황태자." 타이르는 어조로 자일스를 부른 쥬네비아가 재빨리 그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독이 잔뜩 오른 자일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러니까 네가 아시리움 성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며 세렌국 왕자를 연기할 때 말이다. 그때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없느냐?" 엘이 대항할 말을 찾기 전에 조심스런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니제르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전하, 아시리움 종단은 예전의 불행했던 일들을 모두 묻어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더 이상 그 일과 관련된 사사로운 얘기에 아시리움의 이름을 결부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은근히 아들의 행동을 즐기고 있었던 마르키젤은 불쾌한 마음에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무서울 것없는 그라해도 법황이 있은 자리에서 대사제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자일스, 이곳에 법황 성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앞으로는 말을 삼가도록 해라." "주의하겠습니다, 아버님." 마지못해 받아들인 자일스가 사납게 눈을 번뜩이며 엘을 노려봤다.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꾸중받는 어린아이같은 꼴이 된 걸 모두 그녀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엘은 태연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분노만이 넘실거리던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느닷없이 야릇한 빛이 번쩍였다. 그 순간 엘은 그가 다시 공격을 하려 든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엘리시엔,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대체 꼴이 그게 무어냐? 법황 성하께서 참석하신 이런 중요한 자리에 그렇게 형편없는 모습으로 나올 수 있다니... 리아잔 제국의 황족이면 거기에 맞는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리아잔의 체면을 해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이냐?" 엘은 새삼스럽다는 듯 자신의 옷차림을 찬찬히 살폈다. 고개를 드는 그녀의 입술엔 감미로운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어깨가 조금 젖었다는 것만 빼면 단정하고 깨끗해 보이는군요.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이 리아잔의 체면을 해친다니... 다음부턴 시간을 내어 진흙바닥에라도 몇 번 뒹굴다 만찬에 참석하겠습니다." 자일스가 입술을 실룩이며 비아냥거렸다. "주절주절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하지만 잘못 짚었다. 난 네가 옷이랍시고 몸에 걸친 넝마조각말고 최소한 그저그런 드레스라도 입었어야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내가 입은 옷은 넝마조각이 아닙니다." 엘은 이사이로 똑똑 끊어 뱉어 냈다. "그건 어리석고 무지한 너의 착각일 뿐이다. 대체 지금까지 어떤 생활을 해왔기에 안목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모르겠구나. 말해봐라, 세상을 속일 생각을 하기 전엔 어디서 무얼 하며 살았는지..." 자일스가 어투를 바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천하고 부끄러운 과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 엘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그녀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당당한 태도로 말을 시작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제 과거를 궁금해 하신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전 이곳 바드리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딜람이란 작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갓난아기였던 절 거두어 주신 할머니께서 진심어린 사랑으로 키워 주셨습니다. 비록 천민으로 자라났지만 전 누구보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경악에 찬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물어 보십시오. 전 제 과거를 숨길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전 천민으로 자랐다는 제 과거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으니까요." "과거가 부끄럽지 않다고? 천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고?" 자일스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구나, 엘리시엔. 정말 대단하다. 악취나는 시궁창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더러운 구더기만도 못한 천민으로 자라났다니... 또,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니...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치미는구나." "속이 그토록 안 좋으시다니...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신다 해도 붙잡지 않겠습니다. 유치하고 졸렬하신 황태자전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일스가 주먹으로 식탁을 내려쳤다. "뭐라고? 감히 내게 유치하고 졸렬하다고?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네 주제를 내가 깨우쳐 주마! 잘 들어라, 시궁창을 뒹굴던 더러운 계집이 반지 하나 낀다고 고귀해지진 않는다! 알아들었느냐?" "이제 그만 하시오, 황태자!" 쥬네비아가 강경하게 말했다. 마르키젤이 자일스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먼저 나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진 가시 돋친 설전을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리아잔 황실의 치부가 드러나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엘은 쥬네비아에게 죄송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몇 번이나 쥬네비아의 신호를 받았지만 번번이 자일스의 말을 되받아 쳤던 그녀로서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절 그만 두게 하시려면 저 시건방진 계집부터 쫓아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자일스가 눈을 부릅뜨며 반발했다. "그만하면 됐다, 자일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마르키젤이 마침내 한마디하고 나섰다. 겉모습은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사실 그는 이번 만찬이 자신에게 상당한 득이 되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마르키젤은 천민으로 자라난 어린 여자아이가 리아잔의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속마음을 능숙하게 감추고 더욱 엄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젊은 혈기로 벌어진 말싸움을 구태여 막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져 만찬장 분위기까지 해치게 되니, 더는 보고 있을 수 없구나. 자일스, 엘리시엔은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모르는 게 많고, 또, 서투른 게 당연한 거다. 그런데 모르는 걸 가르쳐주고 잘 이끌어 주어야 할 네가 다짜고짜 엘리시엔을 꾸짖으면 되겠느냐?" 마르키젤의 위엄어린 책망에 자일스는 억지로나마 성질을 누그러뜨릴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자중하겠습니다." "사죄의 말은 지금까지 널 너그럽게 보아주신 법황 성하께나 드려라." 자일스가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몽롱할 정도로 신비스럽고 잔잔한 빛을 발하는 실버블론드 머리카락에 눈길을 멈췄다. 그의 눈에 석연치 않은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만찬장으로 들어서는 법황을 처음 봤을 때, 자일스는 아시리움 성전에서 자신을 공격한 마법사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자일스가 어떤 행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때마침 들어온 마르키젤이 반색을 하고 이 수상한 남자를 맞이하자 그는 어리둥절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남자가 법황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하지만 법황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 법황이 날 공격한 마법사와 동일인일 순 없어.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뿐이지. 자일스는 법황에게 품었던 의혹을 서둘러 접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 마법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떠오르는 건 어둠 속에서 서늘한 빛을 발했던 실버블론드와 키가 키고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짐작할수 있는 어렴풋한 윤곽선이 고작이었다. 아니, 한가지가 더 있지. 지금도 귀에 생생한 목소리... 그래, 냉혹하고 잔인했던 목소리가 있었어. "자일스, 뭐 하는 거냐? 성하께 사죄의 말씀 올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마르키젤이 재촉하고 나섰다. 자일스는 관심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는 법황을 바라보며 사과의 말을 꺼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성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루드비히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황태자." 자일스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가며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경련이 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엷은 조소를 드러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흥미진진한 시간이었습니다. 피튀기는 장면을 매일 보는 건 아니니까요." 교묘하게 감춘 속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자 자일스는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고 딱딱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무슨 일이오, 황태자?" 자일스의 얼굴과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쥬네비아가 걱정을 나타냈다. "몸이... 좀 불편해졌습니다."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짜낸 자일스가 출구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한발한발 내딛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자일스가 문을 열어 주려는 시종을 거칠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체라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걱정스럽다는 듯 소리친 그녀는 자일스에게 다가가며 주의깊게 그를 살폈다. 회색으로 보일 만큼 안색이 좋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 마체라타는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거로군요. 이리 오십시오, 전하. 어서 침대에 누우셔야겠습니다. 전 시종을 시켜 한시라도 빨리 어의를 불러오게 하겠습니다." 마체라타는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자일스를 부축했다. 그녀가 침소 쪽으로 발을 떼려 했을 때 자일스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에 누울 필요없다. 백날 누워 있는다 해도 나아질 병이 아니니까. 그렇게 간단히 나을 병이라면 이토록 치가 떨리진 않을 거다." 아무 말없이 움직인 마체라타가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와 자일스에게 내밀었다. 순순히 잔을 받아 든 자일스가 단숨에 술을 들이킨 후 침을 튀기며 기침을 터뜨렸다. 마체라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됐으니 앉아 봐라, 마체라타." 그의 말을 따르는 마체라타를 보며 자일스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위해 긴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궁금해 애가 탈 지경이 된 마체라타가 빠르게 물었다. "마법사를... 날 다치게 한 그 마법사를 찾았다." "마법사라고요? 그를 찾으셨다고요? 대체 그를 어디서..." 마체라타의 입술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만찬장! 바로 만찬장에서 보셨군요." "그래, 바로 그 곳에서 찾았다." 자신이 찾던 마법사가 바로 법황임을 깨달았을 때의 일이 떠오르자 자일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만찬장이라니... 상당한 신분을 가진 자겠군요. 그가 누굽니까, 전하? 대체 어느 놈이 감히 전하를 공격한 것입니까?" "법황이다." 자일스가 험악하게 내뱉었다. 제대로 듣지 못한 마체라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법황? 지금 법황이라 하신 겁니까?" "그래, 법황이라 했다! 날 공격한 자가, 내 팔을 자르고 내 눈을 헤집은 그 마법사 놈이 바로 법황이다! 다름 아닌 아시리움의 법황이었단 말이다!" 자일스가 물어뜯을 듯 얼굴을 들이대며 고함을 질렀다. 마체라타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화들짝 열렸다. "세,세상에..." 마체라타는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달싹였다.믿기 힘든 말에 그녀는 조금 얼이 빠진 상태였다. "처음부터 무슨 속셈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아시리움 성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날 함부로 대하던 사제들을 볼 때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 이 모든 건 미리 짜여진 음모가 분명해! 감히 내게 위해를 가한 것하며, 또 황태자폐위를 요구한 것! 맞아, 그 계집애를 편들고 나온 것도 날 공격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야! 젠장,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자일스가 벌떡 일어나 앞에 놓인 탁자를 팽개치듯 사납게 뒤집어엎었다. 그래도 분노가 누그러지지 않자 그는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가구와 장식품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아시리움! 법황! 절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오만방자한 아시리움을 산산조각 내어 더러운 오물 통에 처박아 버리고 말겠다! 법황이 내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며 피 토하는 꼴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야 말겠다! 그 꼴을 보며 내 손으로 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말 것이다!" 마침내 자일스가 동작을 멈췄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다 바닥에 뒹구는 의자를 바로잡아 내려 앉았다. "물론 그러셔야죠, 전하. 저도 목숨 바쳐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구석으로 몸을 피한 채 자일스의 발작을 구경하고 있던 마체라타가 약삭빠르게 그의 비위를 맞췄다. 그녀는 이리저리 흩어진 물건들을 피해 자일스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 단단히 뭉친 그의 목덜미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전하가 바라시는 대로,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잠시 모든 걸 다 잊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제가 전하 곁에 있겠습니다." 경직돼 있던 근육이 풀리며 몸이 나른해지자 자일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체라타의 손길이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마체라타가 그의 이마에 손을 밀착시키고 처음 듣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잠에 빠져 들었다. 자일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마체라타가 몸을 굽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제 말 잘 듣고 기억하십시오, 전하. 전하께선 잠드시기 전 저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빨간 머리 놈을 풀어 줘라, 마체라타.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졌으니까' 아셨습니까? 어디 한 번 말씀해 보십시오, 전하. 전하가 제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자일스의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빨간 머리 놈을 풀어 줘라, 마체라타.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졌으니까..." "잘하셨습니다, 전하." 마체라타의 입술에 은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 목 [달의 아이] 66장. 뜻밖의 선물-1===================================================================자일스가 만찬도중 자리를 떠난 후 사람들의 얼굴엔 김빠졌다는 실망이 알게 모르게 나타났다. 사람들은 딱딱하고 격식을 갖춘 의례적인 대화에 무료함을 느끼며 괜히 문 쪽을 흘끔거렸다. 자일스가 돌아와 다시 한번 설전이 벌어지길 바라는 그들의 희망은 아랑곳없이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만찬은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포기단계에 접어들었던 사람들을 다시 흥미진진하게 만든 사건은 만찬이 거의 끝나 갈쯤에 일어났다. "이 자리를 빌어 엘리시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을 발표하듯 엄숙한 목소리로 말한 사람은 니제르 대사제였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엘이 전혀 생각지 못한 얘기를 꺼냈다. "아시리움 종단에서 전하께 범한 무례에 대한 사과와 전하께서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신 일을 축하드리기 위해 부족하게나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음만 앞설 뿐 전하께서 기뻐하실 만한 선물을 고를 수가 없어 이렇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시면 성심껏 들어드리겠습니다." 얼떨떨한 상태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사제님." 니제르 대사제가 빙그레 웃으며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선물은 제가 아니라 아시리움에서 드리는 것이니 전하께선 부담가지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 기회에 아시리움을 곤란하게 만드시는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으실 겁니다." 사람들이 니제르 대사제의 농담에 호응해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엘과 루드비히에게서만 웃음기를 찾을 수 없었다. "아시리움에서 제게 선물을 주고 싶어하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움을 받는 건 아시리움이니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지요. 그럼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말씀드리기에 앞서 한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니제르 대사제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음 편히 물어 보십시오, 전하." "알고 싶은 건 제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의 개수입니다. 그에 대한 답은......" 엘은 고개를 돌려 루드비히와 시선을 맞댔다. 그를 향한 보라색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반짝였다. "법황 성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놀라 급히 숨을 들이쉰 사람들이 숨죽인 채 루드비히를 살폈다. 조각같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원하시는 걸 먼저 말씀하십시오. 답은 그 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말씀은 성하께만 드리고 싶습니다." "전하!" 무례한 요구에 경악한 쥬네비아가 무의식 중에 소리를 높였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보일듯 말듯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좋습니다." "그러시다면 두 분께 정원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대화의 장소로 정원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곳곳에 달린 수정램프에 불을 붙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쥬네비아가 애써 밝은 어조로 말했다. 엘은 쥬네비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가 앞으로 해야 될 얘기와 아름다운 정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절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니오, 말씀을 감사하지만 접빈실같은 곳이 좋겠습니다." 나지막이 한숨을 흘린 쥬네비아가 시종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서둘러 다가온 그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두 분을 중앙접빈실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폐하." 서둘러 걸음을 옮긴 시종장이 루드비히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성하." 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드비히를 보며 몸을 세웠다. 시종장이 두 사람을 안내하는 동안 그녀는 루드비히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역시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묵묵히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디다 엘이 가볍게 비틀거렸을 때였다. 빠르게 움직인 루드비히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엘은 몸을 세우며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걸음을 옮기려던 엘은 피식 웃는 루드비히를 발견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루드비히가 놀리듯 정중히 팔을 들어 어서 가자는 뜻을 내보였다. 엘은 가볍게 흔들리는 매끄러운 실버블론드를 확 잡아당기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자제하며 거칠게 계단을 올랐다. "수고 많았다." 리자드 입에서 나온 이 단순한 말은 사일러스와 아몬에게 가슴 뿌듯한 자긍심을 안겨 주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짧은 미소를 나눴다. "이번 일에 참여한 다른 기사들에게도 공로에 대한 포상을 내리겠다. 휴가를 비롯한 소소한 처우는 사일러스, 네가 알아서 조치해라. 그리고 어의관을 집으로 보내줄 테니 일이 끝나면 곧장 귀가해 부상을 치료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감사히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일러스가 기쁨을 애써 숨기며 진중하게 말했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리자드의 눈길이 아몬에게 옮겨졌다. 파리해 보이는 그의 낯빛에 리자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안 좋은 거냐?" "아닙니다, 리자드님. 그저 조금 피곤한 것뿐입니다." 아몬이 서둘러 부인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일러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사일러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결심을 굳히고 진실을 털어놨다. "그게 아닙니다, 전하. 아몬은 저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일러스!" 아몬이 다급히 소리쳤다. 사일러스는 그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전 검에 살짝 긁힌 정도지만 아몬은 가슴에 구멍이 났습니다. 지혈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전하. 말을 하지 않아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붉은머리 마녀에게..." "그만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아몬이 사일러스의 말을 끊자 리자드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계속해라." "예, 전하. 마렌 광장에 나타난 자들은 오메른과 그의 패거리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도 끼어 있었습니다. 지난번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전하께 보고 드렸던, 그러니까 아시리움의 성기사들 칠십여명을 순식간에 죽인 바로 그 여인이었습니다." "마체라타... 역시 황태자가 나선 거로군." 리자드가 낮게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이름은 모르지만 황태자의 수하가 틀림없습니다, 전하. 기사들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황태자전하를 모신다고 당당하게 밝히기까지 했으니까요. 아무튼 저희가 오메른 패거리를 상대하는 동안 아몬은 그 여인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마녀에게 부상을 입게 된 것 같습니다." 체념한 눈빛으로 사일러스를 쳐다보던 아몬이 힘없이 탁자를 내려다봤다. 사일러스는 아몬을 곁눈질하며 더욱 심각한 얘기를 꺼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하. 아몬의 몸 상태는 훨씬 전부터 좋지 않았습니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아몬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일러스에게 다급히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단단히 결심을 굳힌 사일러스를 막지는 못했다. "자세히 말해봐라." 리자드가 딱딱한 어조로 명령했다. "예, 전하." 숨을 깊이 들이쉰 사일러스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아몬이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제가 직접 말씀 올리겠습니다, 리자드님." 그에게 눈길을 옮긴 리자드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지난번 계단에서 굴렀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전 머리를 다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심한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뇌리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환몽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전 그 알 수 없는 속삭임역시 머리를 세게 부딪친 후유증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게 아닐 지 모른다는, 이상은 그 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일 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잡히는 건 없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아몬이 말을 계속했다. "가장 큰 문젠 머리를 다친 사건 이후 꽤 오랫동안 마법을 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법을 시현할 수 없었다고?"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득였다. "예, 리자드님. 엘을 찾은 다음 보내 온 사일러스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그나마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있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전 데클란 평원과 에크젤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마법력을 손쉽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그 아이가 아시리움에 잡힐 무렵 다시 나빠진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아몬이 괴롭게 시인했다. "지금은 어떠냐?" "수시로 상태가 바뀝니다, 리자드님. 나아졌구나 싶으면 다시 나빠지고,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옵니다." "마법력 외에 다른 이상은 없는 거냐?" "이삼 일에 한 번 꼴로 몸을 가누기 힘들만큼 심한 현기증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후 어김없이 머리가 갈라지는 것 같은 두통이 따릅니다." 아몬은 말을 끝내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지만 약한 마음을 뚫고 자꾸만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오늘부터 네 거처에서 안정을 취해라. 어의관에겐 보이나마나 일 테고... 마법치료사를 구해보겠다. 몸 상태는 네 자신이 가장 잘 알 테니 오늘부터 매일매일의 상태를 내게 상세히 보고 해라." "알겠습니다, 리자드님." "그럼 둘 다 나가 봐라." 고개를 숙여보인 두 사람이 문을 나섰다. "현기증과 두통... 그리고 제어할 수 없는 마법력이라......" 리자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등을 기댔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내렸다. 발빠르게 움직인 시종들 덕분에 엘과 루드비히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십여개의 등불이 접빈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두 사람을 안내해 준 시종장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엘은 냉랭한 태도로 루드비히를 지나친 다음 그보다 앞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성하께서 서 계시는데 감히 제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더니... 정말 죄송합니다, 법황 성하. 부디 경솔하고 무지한 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법황 성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법황 성하." 엘이 말끝마다 법황 성하를 강조해서 외치자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군요, 법황 성하. 무릎 꿇고 잘못을 빌라고 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법황 성하." 루드비히는 아무 말없이 엘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말씀이 없으신 겁니까, 법황 성하? 지금 당장 무릎을 꿇을까요, 법황 성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조용히 대답한 루드비히가 피곤하다는 듯 조금 나른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엘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유치한 어린애같이 행동했다는 자각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면 맞서 보기도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리라. 엘은 약해진 마음을 다잡고 발그스름하게 물든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으며 꺼낼 말을 재빨리 정리했다. "제가 원하는 걸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루드비히가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왕자에게 아시리움 성전을 무단이탈한 죄를 묻지 말아주십시오." 루드비히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제 기억으로는 무단 이탈한 왕자가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군요." "리반은 죄가 없어요! 시험을 통과하고 나온 거란 말이에요!" 흥분한 엘이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맹렬히 주장했다. "그토록 크게 소리치시니... 그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놀리는 듯한 기미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엘은 인상을 찌푸린 채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심입니까?" 엘이 미심쩍은 속마음을 내비쳤다. "물론 진심입니다. 아시리움 종단은 리오카사이 왕자에게 성전의 무단이탈에 대한 죄를 묻지 않을 거고, 또 그에 따라 어떤 형벌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듯 높낮이없는 목소리를 내던 루드비히가 오만하게 느껴질 만큼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제가 한 말을 의심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엘은 슬쩍 콧방귀를 뀐 다음 보기 싫다는 듯 루드비히를 외면했다. 그리고 입술을 비죽이며 혼잣말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예예, 물론 그러시겠죠. 다른 분도 아니시고 그 엄청나게 훌륭하신 법황 성하신데요. 저같이 평범한 애가 감히 성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랬다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릴 텐데요." 루드비히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치켜 올라갔다. 그는 엘이 그에게 시선을 던지려는 순간 교묘하게 얼굴을 틀어 웃음을 감췄다. "그 외에 원하시는 걸 말씀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엘은 자신도 루드비히처럼 능숙하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중하게 두 번째 요구를 꺼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는 능력... 공간이동이라고 하던가요? 그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 루드비히는 이렇다 저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가능하신가요?" "특별히 만나고 싶은 분이 있는 겁니까?" 루드비히가 의외의 질문을 던져 오자 어리둥절해진 엘이 얼떨결에 되물었다. "특별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요?" "예, 특별히 만나고 싶은 분..." 말을 끌던 루드비히가 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이를테면 루벤스타인 대공같은 분 말입니다." 순간 엘의 얼굴이 단단히 경직됐다. "아니오... 그런 사람 없습니다." 무겁게 말한 엘이 조금 풀어진 어조로 나름대로의 이유를 밝혔다. "지난번처럼 어딘가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 싫은 것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탐색하는 듯 날카롭게 그녀를 응시하던 루드비히의 눈빛에 어느순간 선명한 자조가 나타났다. "그런 기분 아십니까?" "무슨 기분이요?" 루드비히에게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엘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못난 행동을 한 다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어느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느끼는 기분말입니다." "예, 알아요... 조금은요." 루드비히가 잔잔한 웃음을 터뜨렸다. 엘에게 머무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엔 묘한 부드러움이 깃들어있었다. "두 번째 역시 들어드리겠습니다." "고,고마워요." 엘은 반사적으로 감사를 표한 자신을 깨닫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루드비히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냉정하게 대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무뎌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법황 성하라고 계속해서 되뇌어도 그녀의 눈에 비치는 친숙한 얼굴은 법황이 아닌 그저 루드비히일 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해드리겠습니다. 후계자의 반지는 갖고 계시겠지요?" 엘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잠시 빌려야겠습니다." "그건 왜요?" "엘이 원하는 힘을 후계자의 반지에 넣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도 가능해요?" 루드비히는 짧은 한숨을 흘렸다.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는 언제나 고분고분 말을 듣는 적이 없는 엘의 행동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가끔은 은근히 거슬리기도 했다. 루드비히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보라색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엘을 대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어쩔 수 없다는, 조금은 자포자기한 생각을 하며 루드비히는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참을성을 발휘해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반지라면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겠지만 후계자의 반지는 가능합니다." "그렇군요. 잠깐만요." 엘이 안주머니를 뒤져 반지를 꺼내 내밀자 루드비히가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후계자의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는 겁니까?" "오늘 낮에 잠시 끼고 있긴 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불편하더라고요. 반지를 껴 본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루드비히가 말없이 반지를 받아들었다. 순간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와 반지를 번갈아 살피던 엘이 당장 입을 열었다. "왜 그래요?" 루드비히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미묘하게 비튼 채 반지에 박힌 보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엘이 다시 질문을 하려고 했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두 번째 요구는 차후에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건데요?" "단순한 변덕입니다." 루드비히가 가볍게 응수했다. 엘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반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다른 요구가 또 있으십니까?" 앞서 말한 두 가지만을 염두에 두고 있던 엘은 이대로 접기엔 아까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 요구할만한 그럴듯한 걸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돈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엔 전하라 불리게 된 그녀가 돈을 달라 요구하는 건 남부끄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대사제직을 내려 달라고해서 천장까지 펄쩍 뛰게 만들까? 하지만 그러다가 진짜 내려 주기라도하면 어떡하지? 난 그런 거 하기 싫은데... 그래, 루드비히라면 그럴 수도 있어. 그럼 이건 안 되겠고...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탁자를 노려보며 꽤 오랫동안 끙끙대던 엘은 썩 마음에 드는 게 생각나지 않자 오만상을 찌푸 리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시야에 잡힌 은회색 눈동자엔 재미있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리자드도 저런 눈으로 날 바라본 적이 있는데... 몇 번 안되긴 하지만 날 향해 미소지은 적도 있는데... 자신이 리자드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은 스스로에게로 질책을 퍼부었다. 바보 같으니, 이제 리자드를 떨쳐낼 때도 됐잖아! 그와 연결된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잖아. 네가 직접 리자드에게 마지막 줄이 끊어졌다고... 그 순간 엘은 번쩍 턱을 치켜들며 등을 곧추 세웠다. "세 번째 요구를 말하겠습니다." 엘은 루드비히의 시선을 단단히 잡았다. "전 진짜를 원합니다. 성하께서 절 이용해 루벤스타인 대공께 선물하신 것 같은... 가짜가 아니라......" ===================================================================제 목 [달의 아이] 66장. 뜻밖의 선물-2===================================================================얼굴이 조금 굳어졌을 뿐 루드비히는 의외일 정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일이라 부인하실 생각이면 일찌감치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미 모든 걸 알고 하는 말이니까요." 갑자기 루드비히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겁니까, 법황 성하? 사람을 갖고 노신 게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으신 겁니까?" 엘이 발끈해 따져 물었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루드비히!" 그 순간 루드비히가 거짓말같이 웃음을 멈췄다. 실버블론드 사이로 떠오른 은회색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뜩였다. "날 이 정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게 우습습니다."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스스로를 비웃듯 입술귀를 틀어 올렸다. "제발 부탁 드리옵건대, 알아듣지 못할 애매모호한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법황 성하! 미천한 전, 성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제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해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엘의 어조엔 여전히 뾰족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걸 말씀하십시오.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가 지나칠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엘은 곧장 질문을 꺼냈다. "제가 그 물건을 훔치려 한다는걸 아시고 일부러 눈에 잘 띄는곳에 가짜를 놓아두신겁니까?" "그렇습니다." 뻔뻔할 정도로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숨을 훅 들이쉰 엘은 주먹을 움켜쥐며 조금씩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제가 가짜왕족이고 도둑질을 하러 아시리움에 들어온 거라는 사실을 아셨다면... 왜 그냥 두고 보신 겁니까?"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또, 그 도둑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루드비히가 좀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기댔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도둑을 지켜보는 일이 매우 흥미진진했습니다." 엘은 이를 악물었다.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다.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극단적인 상태로 몰리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어리석은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갖고 놀았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준 그가 오히려 그걸 재미있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엷어지던 배신감과 적개심을 몇 배로 부풀려 놓았다. "그 도둑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으십니까?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가질 바엔 애초부터 시작조차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엘은 깊이 숨을 들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루드비히에겐 제가 한낱 유흥거리에 불과했군요... 가지고 놀다 버리는 하찮은 장난감같은 존재였군요." 엘과 맞닿아 있는 은회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루드비히가 그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그 동안 얼마나 재미있으셨습니까? 진흙투성이가 된 채 허우적거리는 제 꼴이 얼마나 우스웠습니까? 그걸 보며 얼마나 비웃었습니까?" 루드비히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듯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자 엘은 화가 폭발하고 말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루드비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짚고 부딪칠 듯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날 봐요, 루드비히! 날 똑바로 보고 말해 봐요! 왜 그런 일을 한 거예요? 왜 내게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난 대체 루드비히에게 어떤 존재인 건가요?" 쓰린 상처처럼 벌어진 입술에서 격앙된 외침이 쏟아졌다. 루드비히가 손끝으로 엘의 볼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의 손길처럼 느릿느릿 흘러갔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깊숙이 가라앉은 어조가 흘러나왔다. "엘의 말처럼 한낱 유흥거리에 불과했습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멈추고 부숴 버릴 수 있는 장난감이라 생각했습니다." 엘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루드비히가 그 곳에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지막한 독백이 이어지는 동안 따뜻한 입술이 엘의 살갗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엘의 볼에 촉촉한 입맞춤을 한 루드비히가 얼굴을 들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석상처럼 굳은 채 정면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우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비릿한 공기를 마시며 엘의 고백을 듣고 있었을 때입니다. 볼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을 보았을 때... 욕을 해도, 때려도 좋다는 떨리는 속삭임을 들었을 때......" 엘의 이마와 볼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준 손길이 볼을 타고 미끄러져 턱에 닿았다. 루드비히가 엄지 손가락으로 엘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따라 그렸다. "그 때부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드비히의 눈동자 깊숙이 자신을 향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하찮던 장난감은 이미 감당하기 힘들만큼 커져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루드비히의 얼굴이 엘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보드랍고 가볍게 포개졌다. 음미하듯 잠시동안 가만히 있던 루드비히가 입술을 움직여 그녀의 아랫입술을 감미롭게 머금었다. 몸을 움찔한 엘이 경련을 일으킨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루드비히가 아쉬운 듯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짙어진 은회색 눈동자가 동요를 드러낸 채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를 찾았다. 그녀의 눈을 떠난 시선이 조금씩 미끄러져 살짝 벌려진 입술에서 멈췄다. 루드비히는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움직여 엘의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가져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엘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성하의 손길을 거부하면 전 다시 화형대에 묶이게 되는 겁니까?" 루드비히의 전신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엘조차 그의 변화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는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루드비히가 말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움직인 후에야 엘은 굽히고 있던 몸을 펼 수 있었다. 그녀는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엘이 의자에 앉은 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루드비히가 입술을 움직였다. "이번 공격은 제법 매서웠습니다." 엘은 루드비히를 노려보며 즉시 맞받아쳤다. "다시 한 번 절 갖고 노시려 한다면 진짜 매서운 공격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법황 성하. 그 땐 성하의 잘생긴 얼굴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루드비히가 입술가에 놀리는 듯한 미소를 그리며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번번이 그에게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엘을 약 오르게 했다.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협박조로 질문을 던졌다. "세 번째 요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겠습니다." 부드럽지만 그 속에 뼈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던 엘은 즉시 입을 열었다. "왜요? 이유가 뭡니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입니다." "그러고 싶지 않으시다고요?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예, 가짜물건으로 사람을 갖고 노신 분이 어련하시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못된 심보를 가진 악당도 성하 앞에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세계 제일의 악당으로 뽑히셨군요!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법황 성하!" 엘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동안 루드비히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씨근덕거리고 있는 엘에게 루드비히가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려던 엘은 물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없이 입술을 닫았다. 처음 그 물건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아는 거라곤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과 법황 근처에 있으리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던 리자드의 싸늘한 경고에 짓눌려 물건에 대한 의문조차 제대로 품고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물건인데요?" 루드비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 그가 잠시 후 말을 꺼냈다. "세 번째 요구에 조건을 하나 걸겠습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십시오. 그걸 아시고도 물건을 원하시면 그 땐 군말없이 내어 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는 그게 무엇인지 아시는군요?" 엘이 빠르게 물었다. "정체도 모르는 물건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럼 말씀해 주세요. 그 물건이 뭔 지, 왜 리자드가..." 흠칫하며 말을 끊는 엘에게 루드비히가 서늘한 미소를 건넸다. "이미 알고 있으니 감추려 하실 필요없습니다." 루드비히의 말은 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 앞에서, 아니, 그녀 혼자 있는 곳이라 해도 마음 편히 리자드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 모르지만 아직도 상처의 아픔이 생생한 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그걸 왜 손에 넣으려 하는 건지... 루벤스타인 대공께 여쭤보십시오." "아니오, 루드비히가 말해줘요!" 엘은 강하게 요구했다. "제 입에선 해답을 얻지 못하실 겁니다." 너무나 건조해 그 미세한 입자 하나하나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기가 질린 엘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루드비히가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시리움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해 유감이라는 뜻을 제 대신 황제께 전해주십시오." 루드비히의 등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엘은 이대로 보낼 순 없다는 급박함에 의자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그럴 순 없어요!" 엘은 허겁지겁 루드비히 앞을 가로막았다. "그 물건이 뭔 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한발도 나가실 수 없어요!" 결연히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드비히가 느닷없이 엘을 번쩍 들어 올려 짐짝처럼 아무렇게나 한쪽에 내려놨다. 멍해진 그녀가 잡기도 전에 그는 이미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요구를 말씀 드리죠!" 엘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다시는 제 인생에 끼어 들지 마십시오, 법황 성하! 제 앞에 나타나지도 마십시오! 두번 다시 성하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고고하신 코끝은 물론, 찬란하신 머리카락 한 올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이 가련한 소녀의 간절한 부탁을 제발 들어주십시오!" 반쯤 열린 문을 잡고 있던 루드비히가 엘을 뒤돌아봤다. "거절하겠습니다." 짐짓 엄숙하게 말한 루드비히가 몸을 돌리려는가 싶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엘에게 눈을 맞췄다. "저도 한가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땐 제발 지금보다 철 좀 들어 계시길......" 루드비히는 말을 끝내고 놀리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씨근덕거리던 엘은 던질 만한 걸 찾아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적당한 게 눈에 띄지 않자 그녀는 급한 김에 구두를 벗어 루드비히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얼굴로 날아드는 구두를 피한 그가 쿡쿡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엘은 재빨리 뛰어가 복도를 걷고 있는 루드비히를 향해 주먹을 흔들어댔다. "루드비히! 천하의 악당 같으니!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코피를 줄줄 흘리게 해줄 테니 그리 알아요!" 조금 더 커진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엘은 힘없이 문에 얼굴을 기댔다. 그녀는 루드비히가 그녀에게 한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에게 화를 내는 게 쉽지 않은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은 심지어 이미 반쯤은 루드비히를 용서하고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쉽게 용서가 되면서도... 다른 사람은 그게 어려운 걸까? 왜 그가 입힌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아파지기만 하는 걸까? 엘의 입술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의자에 앉아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초조하게 자세를 바꾸던 마체라타는 남자가 나타나는 순간 발딱 일어섰다. "왜 이제 오시는 겁니까? 제 연락을 못 받으셨습니까?" 귀찮다는 얼굴로 마체라타를 흘끗 본 남자가 책상으로 걸어가 위에 놓여 있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문서를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찾아올 시간을 고려해 일을 보라는 말이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느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께서 얼마나 바쁜 분이신지 잘 압니다. 그저 황태자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애가 타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마체라타는 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놨다. 하지만 응수하는 남자의 어조는 조금 전보다 더 짜증스럽기만 했다. "내가 부르기 전엔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네게 주의를 주었는지 아느냐? 내 말을 사사건건 거역하려는 네 되바라진 행태가 처음도 아니고, 나도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할 생각이 없으니, 어서 할말이나 하고 돌아가라." 미간을 모은 채 남자를 응시하던 마체라타가 잠시 후 표정을 풀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군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리아잔 제국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른 소녀 때문이시겠지요. 묻혀 있을 땐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였지만 그 소녀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분을 찾은 이상... 아버지 계획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소녀가 아버지께 독이 될지, 아니면 약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 아닙니까?" 들고 있던 문서를 책상 위에 던진 남자가 피곤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마체라타. 그 아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다. 하지만 그 아이만 떠올리면 자꾸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우리에게 독이 되면 독이 됐지, 결코 약이 되진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실 문제 아닙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실수하실 아버지가 아니시니... 그 소녀가 어떤 영향을 끼치든 아버지께선 원하시던 바를 이루게 되실 겁니다."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이 일이 내게만 국한된 것처럼 말하는구나. 이건 나만의 계획, 나만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 계획이자 우리 목표란 말이다." 그건 아버지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마체라타는 싹싹하게 동의하며 씁쓸한 속마음을 감췄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 아버지께 드릴 말씀을 어서 꺼내겠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하게 등을 묻었다. "보고 드릴게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오늘 황태자에게 암시를 걸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 결과를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전 그렇게 초조하게 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말입니다." "너무 이른 것 아니냐?" 남자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예상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겁니다. 매우 약한 암시였으니 실패한다 해도 그 영향은 미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있게 말씀드리는데 이번 첫 시도는 제가 기대했던 결과 그대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황태자에 대한 일은 너에게 맡겼으니 네가 알아서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해라. 큰 문제가 아니면 난 되도록 나서지 않을 생각이다. 그럼 그건 됐고... 다른 보고는 무엇이냐?"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일순 환한 빛을 내뿜었다. "오늘 황태자가 마법사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그를 다치게 한 마법사말입니다." "그래? 그가 누구냐?" 남자가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걸 듣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고 머리가 핑그르르 돌 정도로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자일스 황태자는 저보다 훨씬 더 충격이 컸을 테지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도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서 말해봐라!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냐?" 남자가 마땅찮은 눈초리로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은 바로 법황입니다." 등을 곧추 세운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법황? 법황이라 했느냐?" "예, 아버지. 바로 법황이 황태자를 공격한 그 마법사였습니다." "법황... 법황이었다니......" 남자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법황이 리아잔의 황태자를 다치게 한 것일까? 리아잔 제국과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정확하진 않지만 그 사건 뒤엔 그 소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남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소녀? 달의 아이말이냐?" "예, 아버지. 지난번 아시리움 신전에서 그 소녀를 만났을 때 황태자가 그런 뜻의 말을 내비쳤습니다." "어디 자세히 털어놔 봐라." 마체라타는 말하기 전 남자에게 다가가 책상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마체라타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으나 마음이 급한 남자는 내색하지 않고 그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아시리움 성전에서 황태자가 부상을 입기 전날, 그와 달의 아이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나 봅니다. 숲이며 암베르 즙 얘기가 나온 거로 추측하건대, 아시리움 성전의 어느 숲 속에서 황태자가 암베르로 소녀를 죽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바로 다음날 황태자가 수수께끼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두 사건이 서로 연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황태자도 그런 확신을 갖고 마법사의 정체를 대라며 죽일 듯 소녀를 윽박지르더군요. 클레르몽이 범인이라는 필리프의 말을 냉큼 받아들일 때는 언제고." 코웃음을 날린 마체라타가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황궁으로 돌아온 다음날,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어 황태자를 넌지시 떠봤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건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더군요. 분명히 비겁한 방법으로 그 소녀를 공격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떠벌렸을 테지요. 빼먹지 않고 매일하는 일과 중 하나가 아시리움과 그 소녀에 대한 험담이거든요. 앞으론 법황까지 그 명단에 추가될 테고요." 남자는 마체라타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린 마체라타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결론은 법황이 그 아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말인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구나." 남자가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가능한 일이지요. 개인적인 감정이 있으니 그 소녀가 아시리움에 잡혔을 때 자신의 입으로 직접, 손 대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 아닙니까? 그 개인적인 감정이 단순한 관심이나 호감일지, 애틋한 마음일지, 아니면 그 보다 더 깊은... 그러니까 흔히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사랑일지는 법황만이 알겠지요. 어쩌면 그 소녀도 알고 있을 지 모르겠군요. 어떨 땐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감정이 느낌으로 전해질 때가 있으니까요." 남자가 별안간 고개를 젖히고 웃어 대기 시작했다.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마체라타. 애틋한 마음이니 사랑이니... 너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생각지 않느냐?" 굳은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던 마체라타가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 생각과는 달리 전 애틋한 마음이 무엇인지도, 또,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흘려 듣고 있던 남자가 말머리를 다시 본론으로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넌 법황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마체라타. 법황이 어떤 특정인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페르가몬의 딸이라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조금도 없는 아이를 말이다. 조금 더 캐고 들어가면 진실이 나오겠지만...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직접 만나 보니 예상 외로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아이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황태자의 목에 부러뜨린 의자다리를 들이댈 때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그 보라색 눈동자는 탐이 날만큼 아름답더군요... 좀 전에 만났을 땐 머릴 짧게 잘라서 그런지 귀여운 소년처럼 보이기도...." 남자가 짜증 섞인 어조로 마체라타의 말을 끊었다. "마체라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쓸데 없는 말이 많아진 것이냐?"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마체라타가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몸을 들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잠깐만 기다려라, 마체라타. 조금 전에 그 아이를 만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나눈 거냐? 그 아이가 널 찾아온 거냐?" 마체라타가 긴 머리채를 어깨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 소녀가 절 무슨 이유로 찾겠습니까? 복도에서 우연히 한 번 스친 것 뿐입니다, 아버지." ===================================================================제 67장. 혼인식===================================================================엘은 루드비히와 헤어진 뒤에도 한동안 접빈실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심란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상념을 떨쳐 내기위해 고개를 휘휘 젓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접빈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뒤에서 급히 서두르는 발소리가 들려 왔다. 엘은 어깨너머로 허겁지겁 다가오는 중년여인을 별 관심없이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바로 잡으려 했을 때 중년여인이 고르지 않은 어조로 소리쳤다. "자, 잠시만! 전하, 잠시만! 기,기다려 주십시오!" 엘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야 여인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반정도 거리를 좁힌 여인에게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엘 앞에 멈춰 선 여인이 머리를 숙였다. "감히 큰 소리로 전하를 부르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일이 다급한지라 저도 모르게... 사죄드립니다, 전하."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그 다급한 일이 무엇인지 말해주십시오." "전 마린 사르트로라 하며 아르벨라 황녀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르벨라 황녀께서 전하를 꼭 만나 뵙고 싶어하십니다." "아르벨라 황녀가 나를요?" 놀란 엘이 크게 소리쳤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움찔한 여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잠시라도 좋으니 꼭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전하시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얼마 안있으면 혼인식인데... 설마 지금 만나자는 말은 아니겠지요?" "꼭 혼인식 전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전하. 조금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엘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르벨라를 만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잔뜩 긴장한 채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년여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거절의 말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엘은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고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장서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여인이 이상할 정도로 감격스러워하며 엘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엘은 얼굴을 찡그린 채 고삐매인 망아지처럼 발을 끌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그녀를 맞는 아르벨라를 보며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엘은 아르벨라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앞엔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가 놓여있었다. "절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셨으리란 거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 얼굴을 떠올리시는 것조차 소름 끼치셨을 겁니다." 담담히 말한 아르벨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제 자신이 소름 끼치니까요. 그때 일... 그 때 제가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처량한 신세타령 듣자고 이곳에 온 거 아닙니다." 엘은 단호하게 아르벨라의 말을 잘랐다. 잠깐동안 불편한 침묵이 흐른 뒤 아르벨라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이런 말 듣기 싫으시겠지만... 전 정말 알렉스를, 아니, 전하를 좋아했습니다. 태어나서 어머니나 유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 건 전하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만은 믿어주십시오...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꼭 한 번 전하를 만나...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초록빛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린 아르벨라가 손으로 볼을 닦아 냈다. 엘은 혼란을 느끼며 평정을 찾기위해 안간힘을 쓰고있는 아르벨라를 주시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르벨라가 천천히 몸을 바로잡았다.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단지... 그것 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가냘팠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거야. 자신이 어떻게해서든 아르벨라를 이해하고, 변명해주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혼인식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마음을 진정시킨 아르벨라가 조용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엘은 배웅하기 위해 일어서는 아르벨라를 보며 혼인식을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행복한 신부로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바꿔 잠자코 문으로 향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한발 앞서 문을 열어 준 아르벨라가 옆으로 비켜났다. 엘은 밖으로 나가려다 머뭇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르벨라에게서 느껴지는 처연한 어둠같은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르벨라, 혹시...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멍하던 아르벨라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순간 엘이 아시리움 성전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미소는 꾸밈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 말씀만으로도 전하께선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절 도와주신 겁니다." 엘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문을 나섰다. 그녀는 무언가를 잊고 나온 것 같다는 느낌에 시달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 석연치 않은 느낌은 엘로 하여금 긴 복도를 걸어 모퉁이를 돌아 설 때까지 아홉 번이나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혼인식장에 들어선 엘은 잠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옆에 앉은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칼 베리만을 발견한 건 그녀가 막 발을 떼려고 할 때였다. 엘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칼 베리만도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전하." 칼 베리만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하라는 말에 놀란 귀족들이 엘에게 시선을 모으더니 앞다투어 일어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인사말을 정신없이 받아내던 엘은 칼 베리만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낸 다음, 혼인식 단 바로 아래 마련되어 있는 황족들의 자리로 걸어갔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황족들이 참석해 있었다. 엘은 만찬장에서 대충 안면을 트게 된 그들과 간단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엘이 도착했음을 눈치챈 자일스가 그녀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잊지 않고 이곳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쥬네비아가 이해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황후님,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켰어야 하는데......" 엘은 만찬장에서 하고 싶었던 사과를 뒤늦게 꺼냈다. 쥬네비아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드레스 차림의 전하를 못 보게 된 건 서운하지만,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 그것으로 섭섭함을 달래면 됩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마음쓰지 마십시오." 쥬네비아가 말투를 장난스럽게 바꿨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긴 하셨군요. 제 기대엔 한참 못 미치지만 말입니다." "예, 옷이 너무 축축해서요." 엘은 배시시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소란스럽던 혼인장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엘은 반사적으로 입구를 돌아봤다. 신랑 신부에게 축복을 내려 주기 위해 아시리움 성전에서 특별히 초청된 테르제 대사제가 입장하고 있었다. "혼인식에 참석해 축복을 내려 주는 성복(聖福)의식은 지금까지 여사제님들께서 도맡아 하셨습니다." 쥬네비아가 엘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왜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암묵적인 관례라 할까요? 그러니까 리아잔 제국이 세워지고 오십 년 정도 지났을 무렵 황녀의 혼인식이 열리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곳에 초청받은 사제가 공교롭게도 젊은 미남자였다 하더군요. 운명의 장난인지 혼인식 바로 전날 밤 황녀와 사제는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결국 첫눈에 반해버린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하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졸지에 신부를 빼앗긴 불쌍한 신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끄는 쥬네비아에게 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불쌍한 신랑은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었나요?" "매일 술로 시름을 달래다 자주 가던 술집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쥬네비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엘은 풋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쥬네비아도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어린 소녀처럼 키득거렸다. 두 사람은 의전관(儀典官)이 황제의 입장을 알리기 전까지 이런저런 얘길 나누며 따뜻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기립한 채 허리를 굽히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온 마르키젤이 상석에 자리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혼인식이 시작됐다. 먼저 사방에 한 명씩 네 사제에게 둘러싸인 야노쉬 공작이 혼인식장으로 들어섰다. 막연하게 아르벨라와 잘 어울리는 젊은 남자를 상상하고 있던 엘은 신랑을 보는 순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첫눈에 흉칙하다는 말부터 먼저 떠오르는 야노쉬 공작의 모습은 엘을 멍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입구 쪽에서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곧 혼인식장 전체로 소란이 번져나갔다. 엘은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길게 빼고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하지만 통로 쪽에 앉은 사람들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갈팡질팡하며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소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걱정스럽게 말하던 쥬네비아가 별안간 콧등에 주름을 잡더니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곧 지독한 악취가 밀려들자 엘도 서둘러 코를 잡아야 했다. 어찌나 냄새가 끔찍한지 구역질이 치밀며 머리가 띵해질 지경이었다. 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하지만 악취의 진원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냄새를 막고 있을 수 없었다. 잿빛이 도는 질척한 액체를 뚝뚝 흘리며 아르벨라가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무엇을 뒤집어썼는지 그녀의 머리는 한덩어리로 뭉쳐진 채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찢겨진 드레스엔 진흙과 썩은 음식찌꺼기, 동물의 배설물, 또,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갖가지 오물들이 처덕처덕 발라져 있었다. 악몽에서 뛰쳐나온 것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아르벨라의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꼿꼿하게 들린 머리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반짝이는 초록빛 눈은 야노쉬 공작에게 못박혀 있었다. "아, 아르벨라..." 비척대며 일어난 가프네 황비가 헐떡이는 숨결사이로 아르벨라를 불렀다. 하지만 아르벨라는 조금도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경악에 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리 높지 않은 단을 올랐다. 소란은 급속도로 가라앉아 그녀가 야노쉬 공작 정면에 섰을 땐 적막감이 흐를 정도가 되었다. 단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야노쉬 공작은 물론, 심지어는 황제인 마르키젤조차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벨라가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섰다.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러분,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제 모습을 똑바로 보십시오! 야노쉬 공작님과 어울리는 신부가 되기 위해 정성들여 단장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게 많을 겁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장차 제 부군이 되실 야노쉬 공작께선 사람이 아니라 추악한 괴물이시랍니다!" 야노쉬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구역질나는 짐승에게 강간당해보신 분 있으십니까?" 핏기 가신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가프네 황비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입 닥치시오!" 야노쉬 공작이 아르벨라의 뺨을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아르벨라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전 사람의 탈을 쓴 야노쉬란 짐승에게 강간당했습니다! 그 끔찍한 짐승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전 제 자신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아르벨라의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가라앉았다. "제 나이... 여섯 살이었습니다..." 야노쉬가 아르벨라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연거푸 따귀를 갈겨 댔다. 곧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엘은 아르벨라의 얼굴을 적시는 붉은 피를 바라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단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야노쉬의 옆구리를 사납게 걷어찼다. "이 더러운 자식!" 바닥을 한 바퀴 뒹군 야노쉬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아예 숨통을 끊어 주겠다!" 이를 갈며 내뱉은 엘이 야노쉬에게 한발 다가갔을 때 마르키젤이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만! 모두 그만해라!"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듯 사람들이 말과 행동을 멈췄다. "야노쉬 공작을 귀빈실로 옮기고 어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치료하게 하라!" 황제의 이글거리는 초록빛 눈동자가 아르벨라에게 꽂혔다. "그리고 저 실성한 계집애는 거처로 데려가 가두고 내가 허락하기 전엔 물 한 모금도 주지 마라!" 시종과 시녀들이 황급히 아르벨라와 야노쉬에게 달려갔다. 아르벨라는 몸을 일으키려 하는 시녀들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온통 피범벅이 된 얼굴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단을 내려와 혼인식장을 나갔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공?" 칼 베리만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다급히 물었다. "진정하십시오.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지 칼 베리만께 충격을 드리려 온 것이 아닙니다." 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침착한 말에 불규칙한 숨을 고르며 평정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아몬을 도울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놀라 우왕좌왕하는 건 일을 더 악화시키기 십상이었다. "아몬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킨 칼 베리만이 가장 궁금한 질문을 꺼냈다. "거처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으라는 말을 해 놨습니다. 억지로 붙여 준 시종들의 보고에 따르면 바람을 쐬러 잠깐 밖으로 나가는 것 외에는, 안에서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대공. 원인은 모르나 저도 되도록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공께서 지금까지 조처를 취하지 않으셨을 리 없을 테고... 알고 계신 걸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리자드가 입을 열기도 전에 칼 베리만은 무거운 그의 표정에서 희망적이지 않은 대답을 듣게 되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의관들은 예상대로 병인(病因)조차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또 곳곳에서 불러들인 다섯 명의 마법치료사들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몬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마법치료사들을 부른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은 실마리라도 하나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을 뿐입니다." 칼 베리만이 탁자에 팔을 얹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요? 원하시던 대로 어떤 단서를 찾으셨습니까?" "마법치료사들 중 두 명이 정신적인 면과 연관이 돼 있을 것 같다는 뜻을 조심스레 비추더군요. 단서가 될지 안될 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시작해 볼 수 있는 어느 한점은 찾은 것 같습니다." 리자드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실마리라 하기엔 너무 애매하고 추상적인 말이어서 두 사람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졌다. "그저 가슴만 답답해질 뿐 생각은 제자리에서 맴을 돌게 되는군요." 칼 베리만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리자드가 칼 베리만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정신마법으로 인해 다치거나 부작용을 일으킨 사람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눈이 커다래진 칼 베리만이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정신마법이요? 그렇다면 대공께선 아몬의 병인이 마법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단언할 순 없지만 병인은 질환보다 마법 쪽에 더 가까우리라는 생각입니다." "정신마법이라......" 의자에서 일어난 칼 베리만이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신마법은 아니지만 무리하게 마법을 시현하다 이상이 생긴 마법사를 본 적은 있습니다. 그 마법사는 손가락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이 마비되어 스무날 가까이를 침대에 누워 보내야 했습니다. 그 기간 내내 끔찍한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하더군요." 칼 베리만이 걸음을 멈추고 리자드를 쳐다봤다. "정신마법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건 고문서나 고서를 읽다가 얻게 된 검증되지 않은 고담(古談) 몇 개가 전부입니다. 간단히 정리해 말씀 드리자면, 지금은 정신마법에 대해 아는 자가 거의 없으나, 고대국가에선 그런대로 사용되던 마법이었나 봅니다. 어느 주술사가 정신마법으로 누굴 죽였다느니 누굴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다느니 하는 문장을 서너 번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 어느 족장은 이웃부족과 전쟁이 났을 때 적군을 자신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여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하더군요."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예리한 빛이 스쳐갔다. "알겠습니다, 칼 베리만. 말씀 잘 들었습니다." 리자드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것이 느껴지자 칼 베리만이 그를 유심히 살피며 의자에 앉았다. "무언가 생각이 나신 것 같군요, 대공." 리자드가 깊숙이 등을 기댔다. "아몬은 제가 내린 명령을 수행할 때면 지나치리만큼 상세한 보고를 올립니다. 그가 입을 다무는 건 자신만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것 아니면, 이번 경우처럼 자신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몬의 병인은 그가 보고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그의 여가시간이나 제가 자유재량에 맡긴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입니다." 홀린 듯 리자드를 주시하고 있던 칼 베리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여가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거처에서 보내니 그 시간에 무슨 일을 당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가능성은 나머지 하나로 좁혀지는데, 제가 아몬에게 재량권을 준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사소한 것을 제외하면... 그 아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만이 남습니다." "그 아이라면 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칼 베리만이 소리를 높였다. "예, 그 아이를 아시리움 성전으로 들여보내기 직전, 근심에 싸인 아몬이 제게 그 아이를 도울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청을 했습니다. 전 일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라는 말로 그의 청을 수락했습니다." 칼 베리만의 갈색 눈이 커다래졌다. "대공께선 아몬이 엘을 돕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아시리움 성전에서 어떤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리자드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시리움 성전이라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 칼 베리만의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고대국가에서 성행했던 정신마법이 지금까지 남아있을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충 생각나는 곳은 서너 군데 뿐이로군요. 칼 베리만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시리움은 그 중에 가능성이 가장 높고 말입니다." 말을 끝낸 리자드가 다리를 세웠다. "바르테즈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대공?" 칼 베리만이 리자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아시리움 신전에 가 보려고 합니다." "예에? 아시리움 신전이요? 대체 아시리움 신전에 왜 가신다는 겁니까?" 칼 베리만이 리자드를 만류하려는 듯 한발 다가섰다. "법황이 아시리움 신전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왕 바드리오에 발걸음했으니..." 리자드의 입술에 냉정한 미소가 걸렸다. "간단한 인사말이나 올릴까 합니다." ===================================================================제 목 [달의 아이] 67장. 혼인식-2===================================================================엘이 리반의 연락을 받은 건 그녀가 유이나르의 방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리반의 부탁을 받은 시종이 밖으로 나오다 때마침 걸어오고 있는 엘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시종에게서 리오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엘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좀 조용히 해! 환자는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 몰라?" 침대 옆에 서 있던 유이나르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노려봤다. 리반이 흘긋 천장을 올려다 보더니 엘에게 네가 이해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지금 둘이 내 욕한 거지?" 감이 빠른 유이나르가 냉큼 소리쳤다. "에이, 설마 우리가 고마우신 치료사 할아버지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엘은 배시시 웃으며 유이나르의 비위를 맞췄다. 그리고 서둘러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엔 창백한 얼굴의 리오가 눈을 꼭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지금 자고 있는 건가요?" 걱정스런 마음에 엘이 숨죽여 물었다. "보면 모르냐? 그 보라색 눈은 남 주기 아까워 그냥저냥 달고 다니는 거냐?" 유이나르가 심술궂게 응수했다. "노인장, 좀 너무하다 생각지 않소?" 보다 못한 리반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노인장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나와 리오는 체르몬 국의 왕자요. 노인장이 지금 무례하게 대한 사람은 리아잔 제국의 황녀이자 정통후계자이고. 그간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신분이 밝혀진 이상,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오?" 유이나르가 킬킬대기 시작했다. 엘과 리반이 어떻게 된 거냐는 눈길을 주고받았을 때, 유이나르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이냐? 높으신 분들 앞이니 납작 엎드려 살려 달라고 싹싹 빌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냐? 안 그러면 내 쪼글쪼글한 목을 댕강 잘라 버리겠다는 말이냐? 어차피 난 살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다. 그러니..." 리반에게 바짝 다가간 유이나르가 다짜고짜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서 죽여라!" 엘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황당해 입을 딱 벌리고 있던 리반은 자꾸 치받아 들어오는 유이나르의 머리를 피해 점점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엘은 아픈 배를 움켜잡으면서도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알렉스, 너 정말 그럴래?" 배신자를 대하듯 리반이 엘을 노려봤을 때였다. 침대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엘과 리반은 한달음에 침대로 달려갔다. 엘이 시야에 들어오자 반쯤 닫혀 있던 리오의 파란눈동자가 활짝 열렸다. "에,엘..." 리오가 신음처럼 그녀를 불렀다. 시선을 떼면 엘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는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많이 아프지?" 엘은 리오의 상처투성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리오가 그녀의 손을 힘껏 쥐는가 싶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얼씨구! 그런 몰골을 하고도 연애할 기분은 나나보지?" 유이나르가 세차게 콧방귀를 날리며 걸어오더니 리오를 향해 끌끌 혀를 찼다. "넌 어째 볼 때마다, 다 떨어진 넝마처럼 이렇게 자빠져 있는 거냐?" "젠장! 내가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아나? 뭐, 다 떨어진 넝마? 이 건방진 늙은이, 말이면 다 되는 줄..." 분통을 터뜨리던 리오의 얼굴에서 얼마남지 않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이 힘없이 감겼다. "이래서 다혈질인 놈들은 치료도 편하다니까. 뻑하면 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벌렁 나자빠지니..." 유이나르가 싱싱한 음식재료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요리사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게 손을 비볐다. 엘과 리반은 왠지 모를 감탄과 착잡함, 또 섬뜩함 같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제 치료를 시작할 테니 너희는 괜히 거치적거리지 말고 멀찍이 물러나 있어라." 이미 유이나르에게 기가 눌려 있던 엘과 리반은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리오는 괜찮겠지?" 책상 앞에 앉으며 리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유이나르님이 예전처럼 잘 치료해 주실 거야." 엘은 유이나르에게 묘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입줄을 비죽 내민 리반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유이나르를 흘긋거렸다. "치료하기 전에 리오를 죽이지만 않으면 그렇겠지." 리반의 말을 알아들은 유이나르가 요란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리반이 죽상을 하고 쓰다만 안부편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 그럴 필요없어." 한마디로 거절한 리반이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야 어차피 심술궂은 괴물에게 붙잡힌 몸이니까 할 수없는 거고... 손가락에 쥐가 나고 팔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을 너한테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괴물이란 말에서 야노쉬 공작을 떠올리게 된 엘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뒤를 이어 루드비히까지 생각나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리반은 편지를 작성하는데 정신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다. "리반... 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또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하는 걸까?" 리반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봤을 때, 유이나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인간은 물방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이나르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끙 소리를 내며 리오를 뒤집었다. 리오의 등뼈를 꼼꼼히 만져 보던 그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방울과 인간은 저마다 가까이 모이려 하는 습성이 있다. 근데 물방울은 서로 상처 입히는 법없이 서로 흡수하고, 또, 흡수되며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지만, 인간은 그러지도 못하는 주제에 상대방을 자꾸만 지배하려고 든단 말이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개똥보다도 더 쓸 데가 없는 존재다, 이거다."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 리반은 입술을 실룩이며 혼잣말을 했다. "아무튼 인간이 개똥보다 더 쓸모없는 존재라 해도, 내 옆의 누군가가 다치고 아프고 하는 모습은 제발 더 이상 안보고 살 수 있으면 좋겠어." 힘없이 말한 리반이 더욱 우울한 어조로 말을 붙였다. "리오도 그렇고, 알렉스, 너도 그렇고... 또, 아몬이라는 마법사와 사일러스 단장도 그렇고..." "뭐? 아몬과 사일러스? 지금 그 두 사람 얘길 한 거지? 설마 아몬하고 사일러스가 다치기라도 한 거야?" 엘은 발딱 일어서며 크게 물었다. 리반이 심각한 얼굴로 철필대(철필촉을 꽂아쓰게 만든 자루)를 내려놨다. "자세한 건 몰라. 그저 아몬이 정신을 잃는 모습을 본 것 뿐이야." "아는 그대로 말 좀 해봐. 지난번 데클란 평원에선 그런 일이 없었으니, 그 후에 아몬을 본 것 같은데..." 엘은 리반에게 다가가 책상에 손을 짚었다. "그러고보니 넌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를 이곳에 들여보내 준 사람이 바로 아몬이야. 그 전에 마렌 광장에서 리오와 내가 위험에 빠졌을 때, 구해준 사람도 역시 아몬과 지난번 데클란 평원에서 만났던 그 기사들이었고." 아몬과 사일러스, 그리고 기사들이 리오와 리반을 도와줬다고? 반사적으로 리자드의 명령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곧 엘의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사일러스 단장은 마렌 광장에서 옆구리에 창상을 입었어.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움직이는 걸로 봐서 그리 심각한 건 아닌 것 같더라. 아몬도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런데 정작 아몬은 우릴 구하느라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지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고. 리오를 황궁에 들여보낸 다음 정신을 잃기까지 했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하게 된 거야. 아몬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럼 지금 아몬의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겠구나." "응,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무리해서 그런 것 같으니까 푹 쉬면 괜찮아지겠지."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는 리반에게 엘은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곤해 보이는데 이제 돌아가 좀 쉬는 게 좋겠어." "리오 상태부터 좀 보고." 유이나르가 한마디하고 나섰다. "볼 것도 없으니까 어여 가. 꼴은 좀 흉하지만 이 정도로 죽을 팔자 같지는 않으니까." 엘은 리오의 안색을 살핀 다음 유이나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리반에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잠자리에 든 시간이라서 시종과 시녀들 몇몇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엘은 정말 힘든 하루였다는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걸었다. 줄지어 선 장식등이 그녀의 피곤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덴로드는 리자드를 접견실로 안내하는 내내 연신 그를 힐끔거렸다. 발을 헛딛는 바람에 하마터면 계단에서 구를 뻔까지 했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조심스런 곁눈질은 그치지 않았다. 덴로드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이런 행동은 당연한 거였다. 사실 그는 평상시 말로만 듣던 루벤스타인 대공을 처음,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까지 느끼고 있었다. 또한 대공을 다른 사람도 아닌 법황에게 안내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더욱 벅차게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토록 늦은 시간 루벤스타인 대공이 법황을 만나러 왔다는 것과 법황이 그와의 만남을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즉시 받아들인 일은 흥분을 넘어 그를 짜릿하게까지 만들었다. 대단히 무례하다고 볼 수 있는 덴로드의 이런 행동에 리자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엄숙해 보이는 얼굴로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걸음을 떼 놓고 있을 뿐이었다. 덴로드는 리자드를 살피는 것과 동시에 그의 넓은 보폭에 속도를 맞추느라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했다. 때문에 접견실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제대로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법황에게 대공의 도착을 간신히 알렸다. "서,성하, 모시고... 왔습니다." 문이 열리더니 발센 고위사제가 밖으로 나와 리자드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대공전하.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자드는 사제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접견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가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하."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았다. "대공의 말씀대로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지난 성 아우렐리아 축일 이후 처음인 것 같은 데... 제 기억이 맞습니까?"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리자드를 쳐다보고 있던 루드비히가 화제를 바꿨다. "귀한 분이 오셨는데 대접할 만 게 없군요. 부족하게나마 따뜻한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생각없습니다." 리자드가 정중히 거절했다.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자연스럽게 응수한 루드비히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오만한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인사치레는 충분한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리자드의 입술에도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시라면 저 역시 바라던 바입니다." 말을 끊은 리자드가 루드비히를 똑바로 쳐다봤다.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무례한 질문이 끝나는 순간 루드비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더군다나 거짓웃음은 제가 원하던 답이 아닙니다, 법황 성하." 리자드가 냉정하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루드비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나가더니 이내 엷은 조소만이 남겨졌다. "거짓웃음이라... 좀 은근하신 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직선적이시군요. 대공의 이런 변화는 대공이 데리고 있다는 사람, 정확히 말해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사람이 그만큼 대공께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거겠지요. 그게 아니면... 제게 적대감을 가지실 만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밀얘기를 하듯 루드비히가 살짝 몸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말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리자드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을 깼다. "전 그 아이에 대한 말을 하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성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루드비히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순순히 리자드의 말을 인정했다. "대공께서 말씀하시는 분... 아몬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 같군요." "맞습니다." "대공의 질문에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전 그에게 간단한 마법을 걸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잔잔한 말투였다. "그 간단한 마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일종의 정신적인 함락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제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생사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존재..." 루드비히의 입술에 냉혹한 미소가 스쳤다. "말 그대로 아몬이란 분은 제가 소유한 살아 있는 인형입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매섭게 번득였다. "살아 있는 인형..." 리자드가 거칠게 중얼거렸다. 그를 더욱 자극하고 싶기라도한 듯 루드비히가 매끄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물론 제가 조종하기 전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심지어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공께서 아시고 절 만나러 오기까지 하셨으니... 분명히 어떤 변수가 생긴 것 같군요." "성하의 말씀이 정확히 맞습니다. 하지만 어떤 변수가 생겼고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됐는지는 성하께서 아실 필요없습니다. 성하께선 그저 아몬에게 거신 마법을 풀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리자드의 목소리엔 거의 명령에 가까운 무게와 힘이 실려 있었다. 루드비히가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거절합니다. 그러니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돌아가주십시오." 리자드는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거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성하." "대공께 말입니까?" 루드비히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예." 짧고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전 대공께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또대공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 중 탐이 나는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습니까?" 루드비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엘을 대공께서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까?" 리자드가 가볍게 맞받아쳤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전 그저 간단한 예를 든 것뿐입니다." 말을 잇는 리자드의 입술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물론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아이를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은회색 눈동자가 얼음조각처럼 차디차게 번뜩였다. 루드비히는 처음으로 리자드 앞에 순수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절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대공. 바르테즈와 목숨이 조금이라도 소중하다면 말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입니다." 리자드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하의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아울러 저도 감히 성하께 충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다시 한 번 제 사람을 건드리신다면... 절절히 후회하시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마음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리자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대공."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의 갖춘 인사말을 주고 받았다. "아아, 대공..." 리자드가 문을 열려 했을 때 중요한 용무가 생각난 듯 루드비히가 그를 불러세웠다. 리자드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딱딱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왜 엘을 찾아내신 겁니까?" 루드비히는 리자드의 숨통을 조이듯 곧장 약점을 파고들었다. "대공께서 엘에게 맡기신 임무는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 임무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녀를 힘들게 찾아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대공?" 리자드가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 것처럼 도발적으로 맞받아쳤다. "성하께서 그 아이에게 빠지실 줄 미리 알고 한 일이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차디찬 섬광이 번뜩였다. "그렇다면... 대공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리자드는 일부러 가식임을 드러내듯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마음 변치 마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리자드는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는 그의 딱딱한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내리 덮여 있었다. 법황에게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리라는 건 분명했다. 아몬을 고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그게 무엇이든지. ===================================================================제 68장. 신전방문===================================================================마르키젤이 그녀를 찾는다는 시종의 말에 엘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그녀는 전날 꾸었던 붉은 방의 악몽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더군다나 악몽을 꾼 후 동이 틀 때까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정오가 다 된 시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몸도 과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엘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리며 축축 늘어지는 팔다리를 추슬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을 따라 마르키젤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황제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서너 가지가 떠올랐지만 분명한 건 그 이유가 어제 있었던 혼인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거였다. 그녀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집무실 문이 열리는 순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르키젤 옆에 비스듬히 앉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야노쉬 공작이었다. 엘은 그를 마주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또 인사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저 등을 기댄 체 거만하게 눈썹을 치켜세워 그녀에게 노골적인 조소를 드러냈을 뿐이다. "부르셨습니까?" 엘은 조금 경직된 동작으로 마르키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래, 엘리시엔, 내가 널 불렀다. 그 이유가 무엇일 거 같으냐?" 마르키젤은 일부러 엘을 세워 둔 상태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여기 이렇게 야노쉬 공작이 있는 데도 모르겠단 말이냐?" "예, 모르겠습니다, 황제폐하." 엘의 조금 전보다 더욱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경우없고 뻔뻔하구나. 네게 실망했다, 엘리시엔. 이러쿵저러쿵 긴 말은 필요없으니 간단하게 명하겠다. 지금 당장 야노쉬 공작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한쪽에 서 있던 십 여명의 시종과 시녀들이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였다. 그들의 시선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엘에게 몰려들었다.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엘이 입을 열지 않자 마르키젤이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다고? 어제 야노쉬 공작에게 그런 막돼먹은 짓을 저질렀으면서도 잘못한 게 없다고?" 엘은 격노어린 초록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예,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밝힌 엘이 야노쉬에게 시선을 옮겼다. "굳이 잘못을 인정하라 하시면 하겠습니다. 전 야노쉬 공작이 겨우 하루만에 이렇듯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 못하도록 그를 철저히 손 봐주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 제 잘못은 오직 그것 뿐입니다." 모욕감을 느낀 야노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뭐라고?" 마르키젤이 주먹으로 팔걸이를 사납게 내려쳤다. "감히 내 앞에서 그 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어서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아랫것들을 불러 강제로라도 꿇어앉히겠다!" "야노쉬 공작은 제 아랫사람입니다, 폐하. 만약 절 강제로 공작 앞에 무릎 꿇게 하신다면, 그 문제를 정식으로 귀족회의에 상정하겠습니다." 엘은 단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의 의지와 영혼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가,감히... 감히 너 따위가... 날 세치혓바닥으로 위협하다니..." 광분한 마르키젤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며 전신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폐하를 위협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 그저 제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을 제 의지대로 지키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말을 끝낸 엘이 걸음을 옮겨 야노쉬의 정면에 섰다. 곧 그녀의 입술에서 엄중한 꾸짖음이 터져 나왔다. "야노쉬 공작, 대체 공작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리아잔 제국의 공작으로 나라의 녹(祿)을 먹는 자가 어찌 위아래도 모르는 건가? 공작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잡배인가?" 야노쉬의 잿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한층 매섭게 호통을 쳤다. "어서 일어나지 못하겠는가? 내가 서 있는 데 어찌 공작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폭발할 듯한 긴장과 흥분이 침묵과 함께 찾아들었다. 엘과 시선을 맞대고 있던 야노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아 감히 의자에 앉은 채 전하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몸이 다 낫지 않은 사람이 이곳까진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군. 아무튼 좋소, 공작. 쉽진 않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겠소." 위엄있게 말한 엘이 마르키젤을 바라봤다. "허락하신다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마르키젤은 이를 악문 채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이 다가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나서려던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마르키젤에게 몸을 돌렸다. "폐하,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아르벨라 황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마르키젤이 거들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실성한 아이는 더 이상 리아잔의 황녀가 아니다. 평민의 신분이 되어 멀리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엘은 마디가 하얗게 불어지도록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아르벨라 황녀는 실성하지 않았습니다." "헛소리! 실성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끔찍한 몰골로 혼인식에 나타나 야노쉬 공작을 모함할 수 있었겠느냐? 어의 다섯도 모두 실성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 즉시 참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또 내 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아르벨라 또한 목이 잘리게 될 것이다." 흔들림없는 초록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르키젤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엘은 그가 결코 자신의 이모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누군가의 남편도 아버지도 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될 수 있을까? 엘은 마르키젤에게서 눈을 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즉시 아르벨라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여섯 명의 황궁호위대 기사들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황명을 들어 무슨 말을 해도 비켜서려 하지 않았다. 다시 황제를 찾아가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리 없는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리오와 리반에게로 돌렸다. 리오의 상태도 궁금했지만 이런 기분으로 혼자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이끌었다. 엘이 도착했을 때 리오는 등을 고인 상태로 침대에 앉아 약을 먹는 중이었다. 후딱 해치우지 못하겠느냐는 유이나르의 잔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엘을 보는 순간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냄새도 제대로 맡지 못했던 쓰디쓴 약을 단번에 들이켰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유이나르가 엘과 리오를 번갈아 흘겨보며 심술궂게 말했다. 엘은 그가 약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간 다음 왠지 모를 쑥스러움을 느끼며 리오에게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엘은 침대맡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리오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젠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지?" 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궁금해 할까 봐 먼저 밝히는데, 많이 나아졌어.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있잖아. 괴팍한 할아범도 그러더라고. 워낙 맷집이 좋아 웬만큼 맞는 건 끄덕 없으니 복받은 녀석이라고. 나참, 그러면서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이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엘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따라 웃던 리오가 얼굴을 구기며 신음을 흘렸다. "조심해, 리오. 아무래도 눕는 게 낫겠다." 엘은 리오의 머리와 등을 받쳐 조심스럽게 그를 눕혔다. 손을 뗀 엘이 허리를 펴려고 했을 때 리오가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정말, 정말 오랜만이야... 난... 다시는 널... 못 보는 줄 알았어." 리오가 깊이 잠긴 어조로 속삭였다. "나도... 나도 그랬어." "엘, 난 말이야... 난... 네가 죽으면... 따라 죽을 생각이었어..." 엘은 떨리는 리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아니... 살고 싶지 않았어... 네가 없으니까... 네가 없으니까......" 리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눈물이 섞이며 그와 닿아 있는 엘의 볼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엘은 코를 훌쩍이며 몸을 세웠다. 물기 고인 눈이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말로 다하지 못한 마음을 담아 미소지었다. 엘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리반은 어디 간 거야?" "글쎄, 뭐라고 하더라? 편지를 돌려야 된다고 그랬나? 아무튼 그런 엉뚱한 말을 하더니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나갔어." 엘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넌 언제쯤이면 완쾌할 수 있는 거야?" "다행히 뼈가 부러진 데는 없나 봐. 늦어도 열흘 후엔 펄펄 뛰어다니게 될 거라고 할아범이 그러더라." "잘 됐다, 리오. 네가 건강해지면 황궁 곳곳을 구경시켜줄게.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많지만 말이야. 아니, 오히려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날 테니까." 엘은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리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난 여기서 많이 떨어진 별궁에 머물고 있어. 전엔 답답해서 못 견딜 정도였는데, 이젠 꽤 마음에 들어. 감시하는 눈들이 없어져서 그런가 봐. 넌 모르겠지만 그동안 좀... 그랬거든. 어쨌든 이젠 계속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사람은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운 존재인가? 아니면 나만 그런 건가?" 싱겁게 웃던 엘은 리오에게 말해 줄 기쁜 소식이 생각나자 다짜고짜 그의 손을 와락 움켜잡았다. "리오, 너 말이야, 이젠 걱정할 필요없어! 아시리움에서 너한테 성전무단이탈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게 됐어! 정말 잘됐지?" 엘은 환하게 웃으며 리오의 손을 흔들었다. "가장 큰 근심거리가 단번에 떨어져 나간 거야! 잘 믿어지지 않지? 하지만 틀림없는 얘기니까 마음 푹 놓고 믿어도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드... 아니, 법황성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거든.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내가 정말 그런 말을 들었나' 하고 자꾸 의심이 생기려고 하지만." 흥분해 말을 늘어놓던 엘은 심각해 보이는 리오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별거 아니야." 리오는 엘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별거 아닌 게 뭔데?" 엘이 따져 묻자 리오가 조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기분이 좀... 그러더라고. 그것뿐이야." 엘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녀는 리오와 리반을 다시 만나고, 리오의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그들이 체르몬 국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언제... 언제쯤 갈 생각인데?" 엘이 침울하게 물었다. 리오는 자신이 괜한 말을 해 그녀의 기분을 망쳤다는 자책을 하며 일부러 농담을 꺼냈다. "네가 제발 가달라고 사정사정하며 빌면, 그때 언제쯤 떠날지 심사숙고해 볼게." "그래, 이 거머리야.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라." 엘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내린 그늘은 걷히지 않고 있었다. 리오와 리반이 체르몬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나 있을까? 여기서 체르몬은 어마어마하게 먼데... 혹시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엘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크게 소리쳤다. "그래, 맞아!" "왜 그래?" 리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리오, 어쩌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어!"" 엘이 들뜬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뭐가?" 리오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리반을 만나러 가는 거 말이야!" 환하게 웃던 엘이 문으로 뛰어갔다. "나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 리오! 무슨 일인지는 갔다 와서 말해 줄게! 좋은 일이니까 기대하고 있어!" "좋은 일이라니?" 리오가 질문을 끝냈을 때 이미 엘은 복도를 쿵쾅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리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피식 웃었다. "저렇게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녀석이 리아잔 제국의 후계자라니......" 리오는 힘없이 입술을 닫았다.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웃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텅 비어버린 의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와 혼인해줄래? 내가 행복하게 해 줄께...... 엘... 나와는... 안 되는 거니? 정말... 안 되는 거야?" 안개가 낀 듯 의자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리오는 주먹 쥔 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마체라타는? 마체라타는 어디 있는 거냐?" 자일스는 마체라타를 부르러 갔던 시종이 혼자 돌아오자 분통을 터뜨렸다. "그게... 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하." "그렇다고 네놈 혼자 돌아오느냐? 어서 나가 마체라타를 찾아와라! 다시 한번 네놈 혼자 돌아오면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어서 나가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시종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기 너희들도 모조리 나가서 마체라타를 찾아라!" 시종과 시녀들이 황급히 자일스의 명령을 따랐다. 문이 닫히자 자일스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내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제 곤한 잠에서 눈을 뜨는 순간 시작된 불안과 초조는 그 후 자일스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의 이런 증상은 마체라타가 옆에 없으면 더욱 심해져 그를 미칠 듯한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였다. 시종과 시녀들이 마체라타를 찾은 건 자일스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에 몰려 있을 때였다. 자일스는 그의 눈치를 살피는 시종과 시녀들부터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나서야 참고 참았던 성질을 분출시켰다. "이 앙큼한 계집!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 대체 어디에서 누구와 있었던 것이냐? 어서 말해라! 다른 놈과 더러운 짓거리라도 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렇다면 내, 그놈과 네년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찢어 버릴 테다!" 참고 들어주기 힘든 욕설과 고함이 터져나오자 마체라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답답한 마음이 들어 잠시 정원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절 찾으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거고 말입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자일스가 진이 다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겁니까, 전하?" 마체라타가 은근히 비꼬는 투로 물었다. 말문이 막힌 자일스가 괜히 언성을 높였다. "꼭 용건이 있는 경우에만 널 찾아야 한다는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빙긋 웃어보인 마체라타가 자일스에게 다가가 몸을 밀착시켰다. 그녀는 자일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전하, 제가 그렇게 보고싶고 그리우셨습니까?" 부인하려던 자일스는 마체라타를 와락 끌어안으며 자신의 마음을 내보였다. "이젠 내 옆에만 머물러라.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 "저 역시 그러고 싶습니다, 전하... 하지만... 황후폐하께선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마체라타가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자 자일스가 몸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짝을 지키려하는 수컷처럼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슨 말이야?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니? 왜 네가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곳이냐? 혹시 어머니가 널 괴롭히시기라도 한 것이냐? 어서 말해 봐라!" 마체라타는 진정하라는 뜻으로 자일스의 넓적다리를 다독거렸다. "황후폐하께서 제게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또 폐하께서 만에하나 절 괴롭히신다고 제가 괴롭힘을 당할 사람입니까?" "그럼 좀 전의 그 말은 무슨 뜻이었느냐?" 자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이곳을 찾아오시는 황후폐하를 대할 때마다 황후께서 절 싫어하시고, 혐오스러워하신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은 황후폐하께서 거느리고 오신 시종과 시녀들에게서도 받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황후폐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질을 못참고 앙갚음이라도 했겠지만 제가 어찌 전하를 낳아 주신 분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체라타는 호소하는듯한 말을 끝내고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어머니가 네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계시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널 내보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까. 하지만 감히 시종과 시녀들까지 널 함부로 대하다니..." 자일스가 마체라타를 슬쩍 밀어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전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마체라타는 문으로 향하는 자일스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머니께 간다! 다시는 네가 그런 걸로 마음 상하는 일 없도록 해주겠다!" 문이 닫히자 마체라타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재미있군.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는 맛이 이런 것일까?" 그녀는 붉은 눈을 빛내며 나른한 동작으로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제 목 [달의 아이] 68장. 신전방문-2=================================================================== "돌아가시오." 중년의 고위사제가 딱딱하게 말했다. 엄격함이 담긴 흑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제는 그 위에 쇠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회색 머리카락과 커다란 매부리코가 더해져 고지식하고 완고해 보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법황 성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엘은 사제의 눈을 응시하며 입이 아프도록 반복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꺼냈다. 경비병부터 시작해 견습사제, 지나가던 평사제, 또, 신전의 방문자를 관리하는 다른 평사제를 거쳐 그의 상관인 고위사제에 이르기까지 엘은 법황을 만나게 해달라는 청을 서른 번 이상이나 되풀이해야 했다. 그녀도 루드비히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그를 둘러싼 장막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그로 인해 법황이 얼마나 높고 까마득한 존재인지 통렬히 실감하게 되었다. 엘은 지치고 기가 죽은 상태였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 또한 잔뜩 부풀어올라 있었다. "성하께선 방문자들을 일일이 만나실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시오. 그러니 무슨 용건인지 나에게 밝히고 이만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될 것이오." 사제는 이제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전 문 앞에서부터 비슷한 으름장을 연이어 들은 엘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말에 몸을 돌릴 그녀였다면 지금처럼 고위사제 앞에 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 꼭 성하를 배알해야 합니다. 절 강제로 쫓아내신다 해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고위사제의 각진 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매섭게 호통을 치고 경비병을 불러 뻔뻔하기 짝이 없는 눈앞의 아이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의지력을 발휘해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법황이 있는 신전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건 그에게있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철부지에게 휘둘려 언제까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분과 용건을 밝히시오. 신분이 정확하고 용건이 타당하면 칼락 대사제께 말씀 드려 보겠소. 대사제께서 승낙하시면 성하께도 알현신청이 올라가게 될 것이오." 어금니를 지그시 문 사제가 근엄한 얼굴로 최후통첩을 내놨다. 답답한 한숨을 푹 내쉰 엘이 입을 열었다. "이것 보십시오, 사제님.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다시피 전 엘이라하고 성하께 중요한 볼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만 성하께 말씀 올려주십시오. 그럼 성하께서 절 만나시겠다 하실 겁니다. 그럼 사제님은 그분께 절 안내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자꾸 복잡하게 만드시려는 겁니까?" 엘은 뭐가 어려운 일이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제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한 발언일 뿐이었다. "그,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자연스럽게 사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정하십시오, 사제님. 그렇게 흥분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 힘드시면 성하께서 어디 계시는지만 귓속말로 알려 주십시오. 몰래 가서 살짝 만나 뵙고 나오겠습니다. 사제님께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뭐,뭐,뭐라고? 몰래 가서 살짝 만나 뵙는다고?" 목덜미부터 뾰족한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제가 노기를 폭발시켰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결론에 이른 사제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저 안에 있는 정신 나간 녀석을 밖으로 내쫓아라!" 사제의 맹렬한 명령을 받은 경비병 세 명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 우두커니 서 있던 엘은 방어본능이 치솟자 잔뜩 몸을 도사렸다. 그리고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와락 덤벼드는 경비병들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그들을 따돌린 엘은 문가에 서 있는 사제를 지나쳐 밖으로 튀어나갔다. "뭣들 하느냐? 어서 놈을 잡아라!" 사제의 고함을 들으며 엘은 전력을 다해 눈앞에 펼쳐진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저 잡히면 안 된다는 단순한 생각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모퉁이가 나타났을 때 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두 명이 더 늘어난 경비병 다섯이 그녀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또, 중년의 고위사제를 비롯한 세 명의 사제들은 허둥대며 경비병들의 뒤쪽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도 이런 상황도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자 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껏 감정이 고조된 그녀는 놀리듯 실실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달리기 실력이 형편없으시군요, 사제님들! 어이구! 거기 배불뚝이 병사님들, 웬만하면 운동 좀 하셔야 겠습니다!" 사제들과 경비병들이 이를 갈며 속도를 높였지만 재빠른 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낄낄대며 모퉁이를 돈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를 흘긋거렸다. 엘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무슨 일인가 궁금해진 사제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코앞까지 다가든 문을 피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몸의 중심까지 완벽히 잡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그녀는 거칠게 넘어졌고 매끄러운 복도 바닥을 미끄러져 벽에 머리를 짓찧고 말았다. "이런 제길!" 엘의 입술에서 당장 욕설이 튀어나왔다. 부딪친 머리가 어찌나 아픈지 눈물까지 찔끔찔끔 나올 정도였다. 엘은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세웠다. 하지만 그녀가 채 다리를 일으키기도 전에 경비병들이 육중한 몸으로 그녀를 덮쳐 왔다. "자,잡았다!" "어디 또 도망가 봐라, 요놈아!" "요 맹랑한 녀석! 어디 맛 좀 봐라!" 세 명의 경비병들에게- 엘에겐 천만다행이도 다른 경비병 두 명은 덮치고 싶은 욕망을 자제할 수 있었다- 깔린 엘은 빠져 나오기는커녕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비,비켜!" 엘이 숨막히는 가슴에서 힘겹게 말을 뽑아냈지만 경비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기양양해진 그들이 엘을 더욱 납작하게 내리눌렀을 때, 뒤늦게 도착한 고위사제가 숨을 헐떡이며 명령을 내렸다. "어... 어서... 놈을 들어... 밖으로... 내던져라..." 사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엘은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만치 보이는 계단을 내려와 반대쪽 복도로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루드비히가 틀림없었다. "서, 성하!" 엘은 바르작거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엘의 마지막 희망은 소리를 못 들었는지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질 뿐이었다. "감히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니! 그런다고 네가 성하를 배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뭣들 하느냐? 어서 밖으로 내던지라니까!" 사제의 매서운 호통이 귀를 파고들었다. 엘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법황 성하!" 우뚝 멈춰 선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경비병들에게 깔려 버둥대고 있는 엘을 첫눈에 알아본 그의 얼굴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엘은 다가오는 루드비히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발걸음은 속이 탈 정도로 느렸지만 그녀는 이제 위기가 지나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이럴 수가! 법황 성하!" 사제 한 명이 놀라 숨 넘어가는 어조로 외쳤다. 얼어붙어 있던 경비병들이 부랴부랴 몸을 일으켰다. 엘은 자신에게 걸쳐져 있는 경비병의 다리를 홱 밀치고 차디찬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소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좀 으쓱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못난 감정이라는 찜찜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엘은 그만큼 고생을 했으니 이 정도 즐거움은 만끽해도 된다는, 억지에 가까운 생각으로 재빨리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이제와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저와 법황 성하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조금 뻐기듯 말한 엘은 어깨를 곧게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속셈은 맞아떨어져 사제들과 경비병들 모두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들은 엘의 말이 사실이면 어떻게하나 싶은 걱정때문에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은 싱글싱글 웃으며 더욱 의기양양한 말을 덧붙였다. "다시 말해 법황 성하와 전 꽤 돈독한 친분을 쌓은 사이라는,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때마침 그녀의 뒤에 멈춰 선 루드비히가 눈썹을 비스듬히 휘어올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움찔하는 사제와 경비병들을 보며 엘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는 쑥스러운 마음에 곁눈으로 루드비히를 살폈다. 그는 엘에겐 전혀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예, 성하... 저기 성하 옆에 서 있는 소년이 성하를 뵙게 해 달라는 청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도, 또 알현신청 이유도 밝히지 않아 저로선 부득이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흥분을 참지 못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복도를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더군요." 기가 막힌 엘이 입술을 딱 벌렸다. "워낙 심하게 날뛰는 바람에 그를 잡는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소란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성하." "자,잠깐만요!" 엘은 한발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그녀는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사제의 말에 얌전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체 누가 흥분을 못 참고 실성한 사람처럼 난동을 부렸다는 겁니까? 거기다가 워낙 심하게 날뛰는 바람에 소란을 피울 수 밖에 없으셨다고요?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아시리움의 사제님이 거짓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알현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자 복도를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는 건가?" 사제가 즉시 맞받아 쳤다. "물론 조금 복도를 뛰어다니긴 했습니다. 또 조금...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꼭 성하를 뵈어야 하는 중요한 일 때문에......" 엘은 잘못을 시인하며 루드비히에게 이해해 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엘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을 때 흥분한 고위사제가 냉큼 소리쳤다. "그럼 그렇지! 저 맹랑한 녀... 이,이런 죄송합니다, 성하. 감히 성하 앞에서 막말을......" 엘은 쩔쩔매며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제를 바라보다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법황 성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엘은 차근차근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루드비히가 흔들림 없는 음조로 답했다. 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엘은 루드비히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대하리라고는 상상해본적도 없었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법황 성하. 저와의 인연을 끊으시겠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나타내시는 겁니까?" "편하신 대로 생각하십시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엘은 망연자실해졌다. "알겠습니다, 성하.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엘은 책을 읽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발을 떼려던 그녀는 루드비히에게 바짝 다가가 발꿈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속삭였다. "매일 행복한 악몽에 시달리게 해 달라고 정성껏 기도 드리죠. 그럼 잘 먹고 잘 살아요, 루드비히." 엘은 몸을 바로잡으며 루드비히를 신랄하게 노려봤다. 은회색 눈동자에 엷은 웃음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엘." 루드비히의 갑작스런 태도변화에 사제들과 경비병들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엘 자신이었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그녀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괴상한 숨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루드비히가 엘의 손목을 꼭 잡은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경황이 없는 상태였지만 넋이 나가있는 사제들과 경비병들을 향해 빙긋 웃어 주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이게 무슨 해괴망칙한 장난입니까,법황 성하?" 엘은 엄숙하게 물으며 손목을 비틀었다. 루드비히가 경고하듯 손아귀에 힘을 가하더니 그녀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단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다시." "뭘 다시 하라는 말씀입니까?" 영문을 알 수없는 엘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 하신 말, 다시 한 번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웬 해괴망측한 장난이시냐는 말이 불쾌하시다는 말씀입니까, 법황 성하? 그러셨다면 진심으로 잘못을 빌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엘은 과장된 동작으로 머리를 숙이며 빈정거렸다. "다시." "말 조금 틀렸다고 다시 하라고요?" 빽 소리친 엘은 지레 놀라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뭐,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린 말씀을 그대로 하자면... 이게 무슨 해괴망칙한 장난입니까, 법황 성하? ...이거였습니다. 설마 법황 성하께 이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이는 건 아니시겠죠?" 한숨을 내쉰 루드비히가 몸을 움직여 엘의 정면에 섰다. 그리고 그녀의 양 어깨를 꼭 잡았다. "절 따라 해보십시오... 이게 무슨." "세상에, 지금 대체 뭐하시는..." 루드비히가 어서 하라는 듯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엘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지못해 입술을 움직였다. "이게 무슨..." "해괴망칙한." "나참, 해괴망칙한..." "장난입니까?" 눈을 둥그렇게 굴리며 있던 엘이 심술궂은 어조로 말을 받았다. "예, 당연히 장난이죠. 위대한 법황성하께서 매우 심심하신가 봅니다." "장난 아닙니다, 제대로 하십시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루드비히가 살짝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예예, 알겠어요... 장난입니까, 정신 나가신 법황 성하?" 피식 웃은 루드비히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루드비히." 강렬하게 반짝이는 은회색 눈동자에 밀려 엘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루드비히..." 루드비히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하셨습니다." 마치 상을 주듯 루드비히가 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뗀 그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을 때, 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법황 성하가 아니라 루드비히라 부르라는 말씀을 하신 건가요?" "맞습니다." 루드비히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몇 번 헛웃음을 흘린 엘이 루드비히를 살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사제님들과 경비병들 앞에서 절 모르신다고 하신 것도... 혹시 호칭 때문이었나요?" "편하신대로 생각하십시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한 루드비히가 엘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의 은회색 눈동자엔 쑥스러운 기미가 어렴풋하게 나타나 있었다. 엘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더니 피식피식 웃음을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루드비히를 다시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비히... 그래, 이 사람은 루드비히야. 법황 성하시기 이전에... 그저 루드비히인 거야. 엘은 루드비히의 따뜻한 체온을 의식하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건가요?" "우리 두 사람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조용히 대답한 루드비히가 엘을 돌아보며 말을 붙였다. "다시 말해... 어떤 행동을 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은밀한 곳 말입니다." 엘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루드비히가 짓궂게 웃으며 몸을 바로잡았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루드비히?" "글쎄요, 은밀한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엘은 장난을 그치지 않는 루드비히를 흘겨보며 짐짓 매섭게 쏘아붙였다. "제발 그만해요,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천하에 둘도 없는 중증호색한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어떤 얼굴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루드비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엘의 손을 들어 올렸다. 미소 띤 입술이 그녀의 손등을 내리눌렀다. 불편한 마음을 느끼며 엘은 슬며시 손을 잡아당겼다. 루드비히는 순순히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상태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엘이 앞에 나타난 계단에 한 발을 디뎠을 때 루드비히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는 손을 뿌리칠까 말까 고민하는 엘의 마음을 아는지 손아귀에 살짝 힘을 가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반사적으로 미소를 되돌린 엘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난 왜 루드비히만 대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엘은 루드비히에게 이끌려 층계를 오르며 긴 한숨을 흘렸다. 쥬네비아는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자일스에게 망연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요아상 백작부인은 시녀장에게 서둘러 눈짓을 보냈다. 백작부인의 뜻을 알아들은 시녀장이 시종과 시녀들을 내보내려 했을 때 자일스가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나가기 전에 내 말을 뼛속 깊이 새겨 둬라. 앞으로 마체라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가만두지 않겠다. 형틀에 매달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돌로 쳐서 온 몸의 뼈를 으스러뜨린 다음 죽여 버리겠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나가 다른 것들에게도 내가 한 말을 알려 줘라, 한 자도 빼먹지 말고 그대로." 명심하겠다는 말을 중얼거린 시종과 시녀들이 자일스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 요아상 백작부인을 향해 자일스가 이죽거렸다. "눈치 많고 예의바른 백작부인도 자리를 비켜 주면 참으로 고맙겠소." 요아상 백작부인은 자일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쥬네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쥬네비아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찾아 뵙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문을 나섰다. "대체 저 여자는 언제까지 어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작정이랍니까?" 백작 부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자일스가 빈정대며 쥬네비아에게 몸을 돌렸다. "말이 지나치십니다, 황태자." 쥬네비아가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예, 어머니가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죠. 어머니 말씀대로 제 말이 지나쳤습니다." 자일스는 계속해서 비딱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조금 전 이 어미에게 한 말... 마체라타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는 말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보다 한결 흥분이 가라앉은 자일스가 불편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지나친 말이였습니다." "됐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하시고 어서 나가보십시오." 쥬네비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험한 말을 던진 아들을 아직 용서할 수 없었다. "마체라타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아랫것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신경 좀 써 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자일스 딴에는 신경 써서 완곡하게 말한 거지만 쥬네비아는 아들에게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게 마체라타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을 하는 겁니까, 황태자? 어머니에게 정부의 눈치를 보라고 말하는 아들이라니, 그게 도리에 맞는 행동이라 생각합니까?" 매서운 꾸짖음을 받자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분노가 나타났다. "제 말을 일부러 곡해해서 들으시는군요. 그 계집애와 어울리시더니 어머니도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그 계집애가 어머니와 저를 이간질시키려고 어머니 귀에 독을 흘려 넣은 겁니까? 아니면, 그 천박한 계집애한테 혹시 천한 물이 드신 건 아니십니까?" "황태자, 그 입 닥치시오!" 쥬네비아가 벌떡 일어서며 분개해 소리쳤다. 그러자 덩달아 흥분한 자일스도 성질을 폭발시켰다. "대체 그 계집애가 뭐기에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그 주제넘은 계집애는 제 자리까지 노리고 있단 말입니다! 어머니,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그 천한 계집에게 리아잔을 빼앗기길 바라십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황태자! 엘리시엔은 황태자의 사촌누이요! 황태자와 피를 나눈 가족이란 말이오!" 자일스가 실성한 사람처럼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어 젖히던 그가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쥬네비아를 직시했다. "가족이라고요? 저와 그 더러운 계집애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요? 전 절대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또,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언제까지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요, 황태자? 진실은 아무리 외면하고 거부하려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오!" 쥬네비아는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계집애가 아들인 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겁니까? 그게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소위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제 귀엔 어머니께서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로 들립니다! 저보다 그 계집애를 우선시하시는 것 같단 말입니다!" 말을 끊은 자일스가 진한 비웃음을 날렸다. "그 계집애가 혹시 어머니께서 숨겨 놓은 자식인 건 아닙니까? 더러운 쓰레기와 몸을 섞어 낳은 자식..."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일스에게 다가온 쥬네비아가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휙 돌아간 고개 그대로 멈춘 듯 움직이지 않던 자일스가 천천히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또 제게 손을 대신다면 제아무리 어머니라해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쥬네비아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의 냉혹한 눈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전 이만 물러갈 테니 적적하시면 그 계집애라도 불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자일스가 가차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쥬네비아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버티고 선 그녀는 축축한 땀이 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힘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제 69장. 마음을 열고===================================================================루드비히가 엘을 데려가 곳은 아담한 응접실이었다. 전면을 차지한 넓은 창문이 빛과 공기를 전달하며 응접실 안을 환히 비췄고, 바닥에 깔린 크림빛 양탄자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또, 잘 가꿔진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엔 엷은 푸른색 안락의자들과 그것보다 조금 짙은 빛을 띤 장식탁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엘은 곳곳에 놓여진 우아한 장식품을 보며 의자에 앉았다. 아시리움 신전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기자기하고 소박하게 꾸며진 공간은 심란해 있던 그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루드비히가 창을 향하고 있던 의자를 엘 쪽으로 비스듬히 돌려 앉았다. 그리고 감추어진 비밀을 찾듯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더듬기 시작했다. 엘은 왠지 모를 거북스러움에 슬그머니 그의 눈길을 피했다. "절 용서하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예기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놀란 엘이 그에게 황급히 시선을 가져갔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잠시동안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이미 그를 더 이상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지만 엘은 그런 마음을 루드비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난 루드비히가 좀 더 힘들어 하길 바라는 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를 조금이라도 흔들고 싶은 건가? 엘은 약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루드비히를 아직 용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비히는 아직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제가 용서하길 바라시나요?" 엘은 일부러 강경하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에 남은 앙금을 씻어 내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다시 한 번 엘을 속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게 미안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으시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루드비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이 작게 웃었다. "정말 솔직하시군요, 루드비히. 이런 분이 어떻게 그 오랜 시간 절 속일 수 있었나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예요. 사실 어제오늘 루드비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루드비히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나를 속인 걸까? 왜 나를 이용한 걸까?" 엘은 숨을 가다듬은 후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제가 내린 결론이 뭔지 알아요? 제가 루드비히였다해도 비슷한 행동을 했을 지 모른다는 거예요. 루드비히는 제가 거짓왕족이란 것도, 아시리움 성전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루드비히가 법황 성하신걸 밝힐 수 있었겠어요? 아마 저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거예요." 엘은 느슨하게 포개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먼저 루드비히를 속인 건 저예요. 그러니까 전 루드비히를 원망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루드비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조금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왜 루드비히가 날 속인 건가'에 대한 문젠 깨끗하게 지워졌어요. 그럼 남은 건 '루드비히가 왜 날 이용했는가' 하는 물음 뿐이에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전 지금도 루드비히가 왜 절 이용해 가짜 물건을 전하게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 문제에 대해 제가 아는 건, 수십 번 질문을 해도 루드비히는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는 거, 그거 하나뿐이에요. 제 말... 틀리지 않죠?" 루드비히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엘은 그녀를 바라보는 서늘한 눈빛에서 긍정의 답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이 문제도 덮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엘은 두 손을 꼭 깍지꼈다. "전 지금까지 항상 루드비히에게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기분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빚을 지고 있었다는 거 알아요. 암베르에 중독된 절 살려 준 사람도 루드비히고... 또, 루드비히는 아시리움 성전에서도 여러 번 절 도와주셨죠."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건! 아시리움에서 겁탈사건에 휘말렸을 때 절 구명해 주신 분은 법황 성하셨어요... 그러니까 루드비히였군요. 루드비히가 제 목숨을 구해준거로군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이나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데......" 엘은 말끝을 흐리며 울상을 지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루드비히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루드비히가 절 이용한 거하고, 제 목숨을 구해준 거하고 서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네요... 그러니까 대충 말하면 비긴 걸로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목숨을 구해준 빚이 또 하나 생기는 거잖아요." "그렇군요." 루드비히가 그녀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엘은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담긴 웃음기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루드비히, 그냥 내놓고 마음 편히 즐거워하셔도 됩니다. 루드비히의 기쁨이 바로 저의 기쁨이니까요. 하하!" 비꼬는 말이 끝나자 루드비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엘이 제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꽤 마음에 듭니다." "그러시다면 앞으로 루드비히에게 되도록 많은 빚을 질 수 있도록 성심껏 노력해 볼게요." 엘은 농담조로 받아넘겼지만, 그의 말에서 전해진 불길한 느낌에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만하면 마음도 홀가분해졌으니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이루는 것만 남았네요." 엘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제가 한 요구... 기억하시겠죠?" 루드비히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체르몬 국의 리오카사이 왕자는 다음 교육에 참가해 모자란 일수만큼 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만 완수하면 무단이탈 건은 깨끗이 일단락될 것입니다." 말을 끝낸 루드비히가 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엘은 순순히 그에게 손을 맡겼다. 루드비히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와 동시에 다른 쪽 손이 그녀의 손목으로 다가왔다. 손목을 느슨하게 감은 루드비히가 짧은 문장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엘의 손목 주위에 은색의 빛 고리가 나타났다. 빛 고리는 손목 주위를 느리게 회전할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엘의 손목에 꼭 맞는 은빛 브레이슬릿(bracelet)이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 엘의 엄지손가락 길이와 비슷한 폭의 브레이슬릿은 중앙에 짙푸른 색 돌이 박혀 있었고, 신비로운 문자가 가장자리를 따라 전체적으로 양각되어있었다. "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입니다. 제가 사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엘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우선 브레이슬릿을 둥글게 감싸십시오. 잊지 마셔야 할건 푸른 돌에 손바닥이 밀착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이 중요합니다. 졸지 마십시오." 진지하게 말하던 루드비히가 일순 장난기를 드러냈다. "나참, 제가 언제 졸았다고 그래요? 숨까지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눈을 빛내며 브레이슬릿과 루드비히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엘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드비히가 씩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엘의 손등을 다독거렸다. "꼭 중요한 부분에서 정신을 못 차리시던 모습이 떠올라 걱정이 되어 드린 말씀입니다." 루드비히에게 받았던 '교감능력향상교육'이 떠오르자 반박의 말이 자연스레 기어들어갔다. 대신 엘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드비히의 자상하신 마음, 충분히 알았으니까 하시던 설명이나 마저 해주시죠." "알았습니다. 푸른 돌에 손바닥이 밀착되어야한다는 것까지 말씀 드렸을 겁니다. 그 다음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우선 눈을 감으십시오." 엘은 즉시 루드비히의 말을 따랐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이 없는 루드비히를 재촉했다. "그리고요? 그 다음엔 뭘 해야 되는 거예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샛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엘이 움찔했을 때 루드비히가 재빨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엄숙할 만큼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고 싶으신 장소나 만나고 싶으신 사람을 떠올리십시오. 반드시 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숙달되시기 전엔 그 편이 정신을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루드비히는 보라색 눈을 번쩍이며 그에게 모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엘을 향해 장난스런 미소를 건넸다. "이제 됐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그의 말에 엘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엘의 입술에서 끝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게 다예요?" 엄청나게 까다롭고 복잡한 사용법을 예상했던 엘은 너무나 간단한 설명에 은근히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루드비히가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무슨 신비로운 주문같은 거, 그런 거 없어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는 엘을 보며 루드비히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주문이 있긴 있습니다. 하지만 뇌리 깊숙이 각인시킨다 해도 위기상황에 처해 두려움에 몰리게 되면 주문같은 건 제대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문을 그 푸른색 돌 표면에 새겼습니다. 돌에 손바닥을 밀착시켜야 한다는 주의도 그래서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브레이슬릿은 엘에게만 반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직 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가지 명심하셔야 할 건, 침대에 드시기 전 반드시 브레이슬릿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잘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잠을 깰 수도 있다는 뜻이로군요." "예, 사용법을 최대한으로 단순화시켰더니 엉뚱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주의만 조금 기울이신다면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엘은 손목을 돌려가며 브레이슬릿을 살피다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옮겼다. "루드비히,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많이 건방졌잖아요. 제 태도 말이에요. 부탁을 해도 부족할 판에 뻔뻔하게 요구라는 말을 들이댔으니......" "상관없습니다. 더 건방지고, 더 뻔뻔해도..." 루드비히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 사람이 엘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엘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당혹스러움이 드러난 어조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시간이 너무 늦어졌어요." 루드비히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렇지, 이 브레이슬릿을 사용하면 되겠군요. 이번 기회에 잘되나 시험도 해보고요." 엘은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두근거려요, 루드비히. 꼭 마법사가 된 기분이에요. 먼저 어디부터 가 볼까요?" 엘은 머리를 갸웃대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리오에게 가 볼까? 아니면 처음이니까 좀 가까운 곳이 좋을까?" 마음을 정한 엘이 루드비히를 향해 씩 웃음을 건넸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잘 있어요, 루드비히." 인사말이 끝나는 순간 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루드비히 바로 앞에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내가 진짜 간 줄 알았죠?" 루드비히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자연스레 높아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잠시동안 친밀함이 담긴 웃음을 교환했다. 웃음이 잦아들고 엷은 흔적만이 남았을 때, 엘은 충동적으로 루드비히의 이마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까..." 말문이 막힌 엘은 허겁지겁 그럴듯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어떤 말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작별인사예요. 잘 있어요, 루드비히! 안녕!" 엘은 대충 얼버무리며 황급히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루드비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부드러운 빛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제 목 [달의 아이] 69장. 마음을 열고-2===================================================================아르벨라는 몸을 돌려 자신의 내실을 둘러봤다. 이미 필요한 짐을 꾸려 밖으로 내보낸 상태였지만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낯선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아르벨라는 늘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곤 하던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익숙한 느낌이 지친 육신을 받쳐 주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편안함을 가져다 주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미 이곳을 떠났든지, 그게 아니라면 공간 자체가 그녀를 거부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르벨라는 힘없이 이지러진 미소를 지었다. 문 밖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아르벨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문을 향해 서너 걸음 접근했을 때 가프네 황비가 들어왔다. 가프네는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아르벨라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아르벨라..." 가프네가 죄진 사람처럼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아르벨라는 그녀가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아르벨라의 입술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감정이 복받쳐 오른 가프네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르벨라... 내 딸... 내 아가......" 오랜 시간 운듯 붉게 충혈돼 있던 가프네의 눈이 다시 젖어 들었다. "미안하다, 아르벨라... 미안하다... 내 탓이다... 다 내 탓이다... 나 때문에 네가... 못난 어미 때문에 아무 죄없는 네가......" 아르벨라는 가늘게 떨리는 어머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어요. 왜인지 아세요?" 가프네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어머니를 찾았으니까요. 아니, 지금까지 어머니를 잃어버린 적도 없다는 걸 마침내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아르벨라는 푸른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깊숙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제 혼인을 막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거 알아요. 또... 언제나 변함없이 절 사랑하셨다는 것도... 잘 알아요." 가프네가 작게 흐느끼며 아르벨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르벨라는 그녀의 손에 볼을 기댔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 오늘은 기뻐해야 될 날이지, 눈물 흘리며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 날이 아니에요. 저도 이제 울지 않을게요. 그러니 어머니도 더 이상 울지 마세요." 가프네가 코를 훌쩍이며 애써 미소지었다. "그래, 아르벨라. 네 말이 맞다. 네 말처럼 오늘은 기뻐해야 될 날이다. 그 이유를 알겠니? 우린 헤어지지 않을 거란다. 나도 너와 함께 갈 생각이다, 아르벨라." 아르벨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어머니..." "황제폐하께 청을 올릴 생각이란다. 내게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니, 울며 매달리면 귀찮으셔서라도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주실 거다." 아르벨라는 가프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그건 절 위하시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저도 조금은 알고 있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클레지오에게서, 제 어린 동생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을 수 있겠어요? 또... 어머니께서도 클레지오를 두고 황궁을 떠나신다면 불행해지실 거예요. 저도 어머니와 함께 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그건 절 영원히 죄인으로 만드는 일이 될 거예요. 그럼 전... 행복할 수 없어요." 아르벨라의 입술에 떨리는 미소가 그려졌다. "저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요..." 체념의 빛이 떠오르며 가프네의 입꼬리가 구슬프게 처졌다. "그럼 국경까지 만이라도 함께 가면 안 되겠니? 그것도 안 되는 거니?" "안 될 리가 있겠어요?" 아르벨라는 짐짓 밝게 반문했다. 그러자 약하긴 하지만 가프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폐하께 청을 올리고 짐을 싸라 명을 내려야겠다. 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아르벨라, 정말 기대되는구나." 가프네가 어색하게 보일 만큼 들뜬 표정을 지었다. "예, 정말 재미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여행간 게 제가 열 두살 때였잖아요. 벌써 4년이나 됐다고요. 우리 최대한 즐겁게 보내요, 어머니. 여러 가지 구경고 하고요. 그 동안 못했던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요." 비록 마지막 여행이지만요... 아르벨라는 마음 속으로 쓸쓸한 말을 속삭이며 더욱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가프네가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아르벨라는 미소를 지우고 의자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조금 전의 감정분출이 기력을 소진시켰는지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던 아르벨라는 무엇인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르벨라는 허겁지겁 뛰어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세상에! 전하!" 찬바람을 맞아 얼굴이 붉어진 엘이 씩 웃으며 내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이에요, 아르벨라." "이,이게 대체 어떻게... 어떻게......" 아르벨라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엘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나타났다. "많이 놀랐나 보군요. 아르벨라를 꼭 만나고 싶은데, 문 밖에 서 있는 기사들은 한발도 물러서려 하지 않잖아요. 완강하게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요. 그래서 어쩔 수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게 됐어요." "하지만 여긴 5층이나 되는데..." "밧줄을 타고 내려오거나 목숨 걸고 벽을 기어 올라온 것은 아니에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을 얻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사용한 거예요. 무작정 이곳으로 오면 다른 사람에게 걸릴 위험도 있고, 또, 갑자기 방에 불쑥 나타나면 아르벨라가 너무 놀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시리움 성전에서 아르벨라 방에 드나들던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또,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살펴야하니까 썩 괜찮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 아르벨라는 진지하게 응수하며 엘에게 의자를 권했다. 의자에 앉아 아르벨라를 바라보던 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괜찮아요?" "예, 괜찮아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니까 마음 쓰지마세요."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마음이 불편해진 엘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준비는 다 끝내신 건가요?" 아르벨라가 이를 드러내고 살포시 웃었다. "사실 준비라고 할만한 것도 없어요. 몇 개의 옷가지와 기본적인 물건 서너 개 정도... 말 그대로 추방이잖아요. 이 정도라도 챙겨가게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야지요." 아르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엘은 그녀가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슈벤국의 남동쪽에 위치한 디카엔이요." "슈벤국이요?" 엘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예, 그리 크지 않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래요." "하지만 칼리안 국으로 가시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아르벨라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어머니께서 칼리안 출신이시거든요.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나 보네요. 사실 어머니께서도 제가 칼리안으로 가는 줄 아실 거예요. 경황이 없어 아직 말씀 못 드렸으니까요." "칼리안 국으로 가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황비님을 봐서라도 아르벨라에게 잘 대해주실 테고요." "예, 그러시겠죠. 칼리안 국엔 어머니 형제분들도 많으시니까요. 하지만......" 아르벨라가 말을 흐리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누구도... 특히 그들이 왕족이라면 리아잔 제국에서 쫓겨난, 그것도 황녀의 신분마저 잃은 추방자를 기쁘게 받아 줄 순 없을 거예요. 칼리안 국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라면 더욱 그럴 테고요. 반겨 주지 않는 곳에 가서 그들의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엘은 아르벨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유모가 함께 가겠다고 해주었어요. 디카엔에 유모의 언니가 살고 있대요. 양잠을 해서 실을 만들어 판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디카엔에 가면 그 일을 배우게 될 것 같아요. 마린은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지만요. 하지만 제가 고집 부리면 누구보다 친절히 가르쳐 줄 거예요. 언제나 그랬건 것처럼요. 참, 마린은 전하께서도 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전하께 뵙고 싶다는 제 부탁을 전해준 사람있죠? 그 사람이 바로 제 유모예요." 아르벨라는 밝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엘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져 갔다. "미안해요, 아르벨라." 엘은 조금 잠긴 어조로 말했다. 아르벨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 대체 전하께서 왜 저한테 미안하다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르벨라... 잘 모르겠어요. 그냥... 무언가 꼭 했어야 될 일을 그냥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르벨라가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자꾸 생겨요." 두 사람의 눈길이 이어졌다. "전... 전하를 배신한 사람이에요... 제 안위를 위해 전하를 팔아 넘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에요. 그런데도... 제게 미안하세요?" 아르벨라의 초록색 눈동자에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그 안에 고인 아픔이 느껴지자 엘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깊이 심호흡을 한 아르벨라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전 죽을 생각이었어요, 전하." 엘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혼인식이 시작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어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어요. 삶에 대한 미련같은 건 조금도 없었어요. 절 붙잡는 건... 죽기 전에 전하를 꼭 한 번 뵙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래서 유모에게 전하를 뵙고 싶다고 부탁했어요. 제 계획을 눈치챘는지 유모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전하를 찾아봐 주었어요." 아르벨라가 엘의 눈을 들여다봤다. "무엇이 제 생각을 바뀌게 했는지 아세요?" 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께서 나가시기 전에 제게... 도와줄 거 없느냐고 물으셨어요... 그 순간 제 안의 무엇인가가 변했어요.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깜깜한 암흑 속에서 싸울 힘도 일어날 의지도 없이...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 작은 빛을 발견한 것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제 영혼을 비치는 그 작은 빛이... 죽고 싶지 않다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의지를 생기게 해주었어요. 그래서 전 전하께서 나가신 후 제가 살 수 있는 길을 필사적으로 찾았어요.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어요. 길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혼인식을 막아야 한다... 그게 바로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어요." 아르벨라가 자그맣게 웃었다. "그래서 그런 꼴로 혼인식에 참석하게 된 거예요. 야노쉬 공작은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전 끔찍한 몰골로 나타나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신부를 맞아들일 그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어요." "대단해요, 아르벨라. 정말 대단해요." 엘은 숨김없이 감탄을 나타냈다. "대단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유모예요. 제 계획을 말해주었더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황궁 곳곳을 뒤져 갖가지 오물들을 모아왔어요. 그리고 그걸 커다란 음식함에 넣어 낑낑거리며 손수 혼인식장까지 옮겼어요. 제 몸에 그걸 골고루 발라 준 사람도 역시 유모였고요. 유모가 없었다면 전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대단한 유모를 두셨군요, 아르벨라와 잘 어울리는." 엘은 빙그레 웃었다. 아르벨라도 그녀를 향해 조금 쑥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르벨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을 따라 아르벨라도 몸을 세웠다. "만나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전하." 엘은 따뜻한 눈으로 아르벨라를 바라보며 인사말을 건넸다. "건강해요, 아르벨라. 그리고 행복해요." "예, 그럴게요. 꼭 그렇게 살게요... 전하께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야 돼요." 아르벨라의 음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엘은 씩 웃고 나서 밝게 말했다. "언제 시간내서 놀러 갈게요, 아르벨라. 발코니에 갑자기 나타났던 거, 기억하죠? 그런 식으로 불쑥 찾아갈 테니 너무 놀라면 안돼요?" 아르벨라가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은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막 문고리에 손을 뻗었을 때 아르벨라가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우리... 친구인 거죠?" "그럼요." 엘은 아르벨라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르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엉거주춤 걸음을 떼었다. "내가 여기서 나갔을 때 근엄한 기사들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어디 얼마나 웃길지 구경 좀 해보자고요." 아르벨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엘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환한 웃음을 주고받은 뒤 힘차게 문을 열었다. 허공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자일스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사납게 소리쳤다. "마체라타!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한 것이냐?" 자일스 앞에 모습을 보인 마체라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절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이렇게 지체없이 달려왔습니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기가 불편해지신 겁니까?" 자일스가 들고 있던 몇 장의 문서를 마체라타에게 집어던졌다. 문서가 팔랑거리며 그녀의 발 주위에 흩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네가 일을 형편없이 망쳤다는 증거다!" 마체라타는 허리를 굽혀 문서 한 장을 집어들었다. 문서를 훑어내리던 마체라타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오메른, 이놈!" "그래, 그 오메른이란 놈이다! 바로 그놈이 일곱 번이나 알현신청을 했다! 노소프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다면 난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일을 한심하게 처리했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옆으로 물러나 있던 노소프가 득의만면한 얼굴로 마체라타를 쳐다봤다. 마체라타는 그에게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자일스를 향했다. "전 제 신분이 드러날 만한 행동이나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오메른이란 놈이 왜 계속해서 날 만나겠다고 찾아온단 말이냐? 네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알고서 하는 행동이 분명하지 않느냐?" "오메른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딱 한가지를 말해줍니다. 즉, 그가 그만큼 힘있는 사람이란 것." 딱 잘라 말한 마체라타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전하와 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메른은 절 만나기 전에 이미 저와 전하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정보망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거래가 성립된 후 하나의 안전조치로 조사를 해본 것일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일스가 신경질적으로 마체라타의 말을 가로챘다.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놈이 날 만나려고 기를 쓴다는 사실이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전 그 이유에 더 관심이 생기는군요." "아마 놈은 그 일을 빌미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거다. 감히 날 상대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그래, 네놈이 바라는 대로 철저히 짓밟아주마!" 이를 가는 자일스를 지켜보고 있던 마체라타가 넌지시 반대의견을 내놨다. "전하, 이번 일은 되도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자세? 그럼 넌 내가 오메른이란 놈의 눈치라도 봐야 한다는 말이냐?" 자일스는 성질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마체라타는 막무가내인 그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하,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라는 건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오메른은 전하를 상대로 섣부른 행동을 할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다.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엔 분명히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냐?" 자일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선 제가 오메른을 만나 보겠습니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낸 다음 전하께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그를 전하께 데려오겠습니다." 마체라타는 평상시 보기 드문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내게 도움이 안될 것 같으면?" "물론 그 즉시 깨끗하게 처리해야 되겠지요. 다시는 전하의 신경을 건드리지 못하게 말입니다.제 소견에 찬성하십니까. 전하?" 자일스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짓자 마체라타의 입술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제 목 [달의 아이] 69장. 마음을 열고-3===================================================================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전하."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쥬네비아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기쁜 소식이요?" 쥬네비아는 눈을 깜박이며 되묻는 엘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 전하. 그것도 두 가지나 된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전하를 한 가족으로 맞아들이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촐한 행사를 가지려 합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리아잔은 물론 각국의 귀빈들을 초청해 정식무도회를 개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황제폐하께 말씀 올렸더니 좋은 생각이시라며 부족함없이 준비하라고 하시더군요." "무,무도회라니..." 엘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쥬네비아의 기분에 맞춰주고 싶었지만 형편없는 춤 실력이 떠오르자 좀처럼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쥬네비아가 걱정스럽게 엘의 안색을 살폈다. "뭐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절 위해 무도회까지 열어 주신다는 데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겠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죠." 엘은 재빨리 부인했다. 그리고 쥬네비아를 곁눈질하며 슬그머니 속마음을 갖다 붙였다. "그저 돈이 엄청나게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까 굳이 돈 들여가며 그런 행사를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꾸미는 데 쏟아 붓는 것보다 차라리 그 돈을 다른 곳에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전하께선 그런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전하께만 알려드리는 비밀인데..." 쥬네비아가 몸을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리아잔은 돈이 꽤 많답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쥬네비아를 따라 엘도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쥬네비아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준비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전하께선 그저 무도회에 참석하셔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면 되는 겁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 편히 생각하십시오." "그럴게요, 황후님." 더 이상 반대할 수도 없게 된 엘은 쥬네비아의 말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하나 더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직 그걸 말씀 드리지 않았군요. 두 번째 기쁜 소식은 전하께서 드디어 본궁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번 것 역시 엘에겐 그리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어차피 옮길 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일도 제가 알아서 할테니 전하께선 몸만 움직이시면 될 겁니다." "전 그냥 이곳에 머물겠어요."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쥬네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까 구태여 이곳을 떠나 본궁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황후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진 않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전 본궁보다 이곳에 있는 게 더 마음이 편해요." "전하, 이곳 별궁은 전하께서 머무실 만한 곳이 못됩니다." "이곳이 전부터 후궁들이 주로 살던 장소라는 건 저도 알아요." 황당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듯 쥬네비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그런데... 그걸 아시면서도 여기 머무시겠다고요?" "과거에 누가 살았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후궁들이면 어떻고, 시종이나 시녀들이면 어떻고, 또 막일꾼들이면 어때요? 저나 그들이나 다른 게 뭐가 있다고요?" 흥분한 쥬네비아가 당장 반박하고 나왔다. "세상에! 당연히 다르지요! 어찌 그런 말씀을! 그런 사람들을 전하와 비교하다니요? 그들은 전하의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엘은 얼굴까지 붉히고 있는 쥬네비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제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황후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라온 환경과 경험에 따른 가치관의 차이쯤 되겠죠." "예, 그런 것 같군요, 전하. 거처를 옮기는 문젠, 좀 더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엘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인 쥬네비아가 다시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 전 전하께서 하신 말씀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 말 명심하십시오, 전하.전하께선 보통사람이 아니십니다. 빨리 그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엘과 쥬네비아의 입술에서 동시에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까진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망설였지만, 어차피 얘기가 나왔으니 지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엘은 희미하게 울상을 지었다. 쥬네비아에게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 없었다. "앞으로는 아랫사람들에게 경어를 쓰지 마십시오." 쥬네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엘의 굳은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하에 대한 갖가지 얘기들이 황궁 전체는 물론, 밖으로까지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전하의 어투 또한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전하, 경어는 아랫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더군다나 전하의 위엄을 손상시키기까지 합니다." 쥬네비아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엘이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황후님, 전 경어를 사용한다해서 위엄이 손상되고, 또, 말을 놓는다고해서 없던 위엄이 생긴다고 여기진 않아요." "전하!" "먼저 제 말부터 좀 들어주세요." 엘은 서둘러 쥬네비아의 말을 막았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누구나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계시지만 함부로 말을 놓지 않으세요. 신분을 막론하고 항상 존대어를 사용하시죠. 하지만 그 누구도 그분을 낮춰 보지 못해요. 위엄은 어떤 말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같은 어투를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쥬네비아의 목소리엔 씁쓰레한 실망이 깃들어있었다. 엘은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 지금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황후님께서 보시기엔 부족한 게 많겠지만, 제 딴엔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분을 따져가며 거기에 따라 다른 말투를 사용하고 싶진 않아요. 나중엔 어떻게 바뀌게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힘드시겠지만 절 좀 이해해주세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쥬네비아가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소문이 틀리지 않았군요. 사람들이 전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보라색 눈을 가진 반항아라 부르더군요." "반항아라고요?" 엘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행동이며 말투, 옷차림, 심지어는 머리모양까지...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게 뭔 지 아십니까, 전하?" 엘은 그다지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못해 물었다. "뭔데요?" "다른 건 몰라도 전하의 머리모양을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잠자코 있지만 어느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머리를 자른다면 아마 너도나도 앞다투어 머리에 손을 댈 것이 틀림없습니다." 쥬네비아가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냈다. 생각지 못한 얘기에 엘은 그저 싱겁게 씩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전부터 알고 싶었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황후님...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부모님에 대해 듣고 싶어요." 쥬네비아의 얼굴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짝 굳어졌다. "뭘 알고 싶으신 겁니까?" "글쎄요... 성격이나 갖고 계셨던 버릇같은 거... 또, 좋아하셨던 것과 싫어하셨던 것... 어떻게 생기신 분들인지도 자세히 알고 싶고... 아무튼 부모님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좋아요." 생각을 정리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쥬네비아가 잠시 후 얘기를 시작했다. "헤르티아는 섬세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몸은 약했지만 매우 아름다웠고요. 저처럼 푸른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눈은 좀 더 부드러운 푸른색이었고 머리는... 전하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색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헤르티아는 유난히 꽃과 어린아이를 좋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페르가몬 전 폐하께서도 어린아이를 좋아하셨다는 게 생각나는군요." 쥬네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폐하께선... 강하시면서도 한편으론 부드러운 분이셨습니다. 성격은 좀 급하신 편이셨고 고집이 굉장히 세셨습니다. 고집세기로 유명한 원로회 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셨으니까요. 또, 어디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셨는데... 그래서 그러셨는지 혼자 몸으로 훌쩍 황궁을 나가시곤 하셨습니다. 때문에 호위기사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셨습니다... 자주 농담을 하시고는 크게 웃곤 하셨죠... 웃으실 때 그분의 보라색 눈동자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는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쥬네비아의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죄송하지만 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쥬네비아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엘은 엉거주춤 의자에서 몸을 들었다. "황후님, 몸이 편찮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좀 피곤해서 그럽니다." 엘은 근심스러운 눈으로 쥬네비아의 해쓱한 얼굴을 살폈다. 그때 조용히 대기하고있던 요아상 백작부인이 다가와 쥬네비아를 조심스레 부축했다. "이럴 필요까진 없네, 난 괜찮으니까." 쥬네비아가 백작부인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그리고 엘에게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전하." "예, 저도요." 엘은 쥬네비아를 문까지 배웅한 다음 푹 쉬시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문을 닫고 돌아와 다시 의자에 앉는 그녀의 얼굴엔 혼란이 묻어 있었다. 엘은 조금 전의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봤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는 게 거의 없는 그녀의 생각은 계속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엘은 골치 아픈 일은 다 떨쳐 버리고 리오와 리반이나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 머리도 식힐 겸 걸어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서자 서둘러 문을 나섰다. 하지만 창백하게 변했던 황후의 얼굴과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갖가지 의문들은 좀처럼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어휴, 골치야. 이제 제발 그만 좀 떠올라라." 엘은 툴툴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오메른은 날렵한 솜씨로 단검을 빼어들었다. 그가 허공의 어느 한점을 향해 단검을 날리려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냉소를 띤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그렇게 겁에 질릴 필요없다, 오메른. 우선은 네 말부터 들어본 다음, 어떻게 죽일 지를 결정할 생각이니까." 오메른은 단검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멈춰섰을 때, 그에게서 한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정면에 마체라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 반갑다." "그래? 난 네가 조금도 반갑지 않은데, 미안해서 어쩌지?" 마체라타는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 오메른에게 화가 나 있었다. "상관없다,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네 속셈이나 밝혀라!" 마체라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다, 우선 앉아라." 오메른이 여유만만한 태도로 응수했다. 마체라타는 그를 노려보며 부숴 버릴 기세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네가 상당히 불쾌한 기분으로 날 만나러 올 줄 짐작하고 있었다. 내 예상보다는 다소 늦긴 했지만 말이다." "말은 잘 하는구나. 그럼 계속 매끄럽게 혀를 놀려 왜 내 뒤통수를 친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해봐라." "네 뒤통수를 친 기억은 없는데?" 마체라타가 표독스럽게 눈꼬리를 치켜떴다. "오메른... 제법 영리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고그런 우둔한 놈들 중 하나였구나. 네 별명이 네게 너무 과분하다 생각지 않느냐? 어둠의 지배자라니... 하! 지나가던 개가 다 포복절도할 일이군." 오메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마체라타의 입술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곧 고음의 웃음소리가 얼어붙었던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제야 좀 인간다워졌구나. 난 가면 쓴 거 같이 무표정한 놈들한텐 통 정이 안가서 말이다. 그럭저럭 내 입맛에 맞춰졌으니 말장난은 그만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 같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지더니 오메른의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감탄의 빛이 어렸다. "처음 봤을 때, 날 알아본 것이냐?"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거다. 너와 거래를 진행하는 도중 눈치챈 것이니까." 마체라타는 등을 기댄 다음 머리채를 어깨 앞으로 빼냈다. "우리 사이의 거래는 깨진 걸로 알고 있는데?" "거래야 다시 맺으면 그만이다." "너한테 원하는 게 조금도 없다면?" 오메른이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신경쓰지 않는다, 황태자의 생각은 너와 다를 테니까." 마체라타가 코웃음을 쳤다. "꽤나 자신만만하구나. 하지만 네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우선 나부터 설득시켜야 할거다." "알고 있다, 그걸 몰랐다면 너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날 황태자와 만나게 해줘라." 마체라타의 입술에 우습다는 미소가 번졌다. "날 설득시킨다는 게 고작 그거냐?" "황태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겠다. 또 그의 확실한 정보원이 되어주겠다. 정확히 말해 내가 할 수있는 모든 걸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뜻이다." 오메른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런대로 구미가 당기기는 하구나. 하지만 우선 네 요구사항부터 들어본 다음 결정을 내리겠다." "널 설득시키기 위한 내 노력은 여기까지이다. 나와 황태자를 만나게 해줄 것인지, 아니면... 날 깨끗하게 없애고 돌아갈 것인지의 판단은 네 몫이다." 마체라타는 팔꿈치를 의자손잡이에 대고 손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탐색하는 얼굴로 오메른의 검은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마체라타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날 선 눈초리로 그를 살폈다. 남자가 결이 가는 금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다가와 오메른의 어깨에 한쪽 손을 얹었다. 그러자 오메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부드러운 기미가 서렸다. 마체라타는 오메른이 즉시 남자를 내보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어깨에 걸쳐진 남자의 손을 느른한 동작으로 어루만질 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남자가 마체라타를 향해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눈웃음을 쳤다. 입가에 패인 볼우물이 그를 천진한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는 남자를 무시하고 마땅찮은 얼굴로 오메른을 노려봤다. "오메른, 이게 재거래를 원하는 사람의 태도이냐?" "흥분하지마라. 체사레는 내 계획을 나만큼이나 상세히 알고 있다." "오메른 말이 맞습니다. 사실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모든지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체사레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미소지었다. ===================================================================제 70장. 빙경(氷鏡)의 바람===================================================================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오메른이라 합니다." 오메른은 비굴하게 보이지도, 그렇다고 예의에서 벗어나지도 않는 적당히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자일스의 얼굴은 그가 자신을 모욕하기라도 한 것처럼 험상궂게 변했다. 자일스는 첫눈에 이 오메른이란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자같이 보일 만큼 희고 마른 얼굴, 갈고리처럼 휘어진 코끝, 또,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말해주는 듯한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까지 그의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날 만나고 싶어한 이유가 무엇이냐?" 자일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호기심도 어느정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빨리 이 귀찮은 만남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신중하게 우회적으로 얘기를 진행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오메른은 자일스의 속내를 간파하자마자 즉시 자신의 계획을 수정했다. "장차 리아잔의 황제폐하가 되실 전하께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이 돼 드렸으면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나도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내게 바치겠다 한 말은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자일스가 거만하게 응수했다. "숨겨진 제 속셈을 지칭하신다는 거 압니다, 전하.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서클랜드백작 자리를 원합니다." "서클랜드백작이라고?" 자일스는 찌푸린 얼굴을 마체라타에게 돌렸다. "서클랜드라면 얼마 전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예, 전하. 온통 피범벅이 된 채 마렌 광장에 버려져 있던 시체... 바드리오 전역을 시끄럽게 했던 그 시체가 바로 서클랜드백작이었습니다." 설명을 끝낸 마체라타가 오메른에게 야릇한 미소를 던졌다. "그래, 생각나는군. 그런데 백작의 자리를 달라니... 백작의 작위가, 그 가문과 전혀 상관없는, 그것도 지저분한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던 자에게 승계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자일스가 오메른을 같잖다는 눈으로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전하..." 자일스는 오메른이 말을 꺼내려고 하자 짜증스럽게 그의 입을 막았다. "더 들어볼 것도 없으니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꺼져라."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십시오, 전하. 제가 보기에, 전하 앞에서 실없는 소릴 지껄일 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체라타가 은근히 오메른를 거들고 나오자 불쾌해진 자일스가 눈을 부라렸다. 당장 호통을 치려던 그는 조금만 더 참아보자는 생각에 성질을 억눌렀다. "좋다, 내 잠시만 더 시간을 주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 역시 백작의 작위가 아무에게나 승계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또, 서클랜드백작이 후사(後嗣)를 남기지 못하고 변사(變死)하는 바람에, 그의 먼 아저씨뻘 되는 자가 작위를 넘겨받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승계입니다. 서클랜드백작은 바로 제가 되어야합니다. 전 죽은 서클랜드백작의 배다른 동생이니까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문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문서라고?" 자일스가 관심을 나타냈다. "예, 제 아버지, 그러니까 14년 전 작고하신 전대 서클랜드백작님이 친필로 쓰는 문서입니다. 문서엔 바로 제가 그분의 친아들이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자일스는 코웃음치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보아하니 백작의 정부나, 아니면 백작과 살을 섞은 고급창부를 어미로 둔 것 같구나. 그런데 그 정도로 네가 백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종이쪼가리 하나로?" "그걸 알기 때문에 제가 황태자전하께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힘을 실어주신다면 제가 당연히 받아야 될 것을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요." 오메른의 검은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희번덕거렸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난 아직 네가 나한테 필요한 존재인지, 불필요한 존재인지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제가 전하의 결단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좋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자일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리아잔은 물론, 그 어느 곳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보석세공기술을 가진 자가 바드리오 외곽에 살고 있습니다. 사디키라는 자인데 얼마 전 그에게 매우 흥미진진한 얘길 듣게 되었습니다. 얘기인 즉, 자신이 후계자의 반지를 그 누구도, 설령 페르가몬 전 폐하라 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위조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고작 그 따위 말을 나불거리러 여기까지 기어든 것이냐? 그 얘긴 이미 알고 있다! 내 손으로 그 빌어먹을 가짜를 끓고 있는 쇳물에 던져 넣었단 말이다!" 자일스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일이 생각나자 거칠게 윽박질렀다. "아닙니다, 전하. 가짜후계자의 반지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젠장! 내가 분명히 내 손으로..." 자일스의 낯빛이 흐려졌다. "설마..." "예, 전하. 전하께서 없애신 반지가 진짜후계자의 반지입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봤단 말이다! 반지가 빛을 내며 그 계집애 손에 딱 들어맞게 변하는 걸 분명히 봤단 말이다!" 자일스가 침을 튀기며 반박했다. "사디키는 정교한 세공기술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바로 보석에 간단한 마법을 걸 수 있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보석에서 빛이 나오고 반지의 크기가 알맞게 조정되는 마법쯤은 어렵지 않게 걸 수 있는 자입니다." "그 놈을 내게 데려와라! 감히 가짜를 만들어 날 능멸하다니! 내 손으로 놈의 눈알을 뽑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광분한 자일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자 오메른이 그를 진정시킬 말을 재빨리 꺼냈다. "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 제가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아니, 그 몇 배로 놈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놈에게 그 일을 의뢰한 자를 알아냈습니다." 자일스가 와락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놈이 누구냐? 칼 베리만이냐?"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일의 특성상 앞으로 몇 단계는 더 거쳐야 정확한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전하." 침착하게 말한 오메른이 복종을 맹세하듯 자일스를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이제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자일스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래, 오메른, 네 너를 기꺼이 받아주겠다." "거기 선반에 내려놓고 나가시면 제가 알아서 마시겠습니다."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시종을 보며 아몬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시종이 내밀고 있는 탕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감시하듯 지켜보는 시종 앞에서 고약한 맛이 나는 약을 단번에 들이마셨다. 입술에서 그릇을 떼는 순간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몬은 눈을 꼭 감고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가 눈을 뜨자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시종이 황급히 허리를 들었다. "시간도 늦었고 약도 드셨으니 이제 책은 그만 보시고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 마법사님께서 침실에 드신 후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시종의 강압적인 권유에 아몬은 얌전히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그의 말을 따를 때까지 절대 포기할 시종이 아니라는 걸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발 앞서 침실 문을 연 시종이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아몬은 쓴웃음을 지으며 침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엘이 창턱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몬!" "에...엘? 이게 대체 어떻게..." 아래로 뛰어내린 엘이 춤을 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발쯤 앞에 멈춰서서 화사하게 웃었다. "놀랐죠?" 아몬은 얼떨떨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아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얘길 꺼내기 전에 침대에 눕는 게 좋겠어요, 아몬.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리하면 안될 거 아니에요?" 괴로운 신음을 토한 아몬이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엘한테마저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거짓말 안보태고 그 동안 정말 침대에서 살다시피 했단 말입니다. 엘 제발..." "아몬, 얌전히 말 들어요." 엘은 상냥하게 말하며 손을 들어 침대를 가리켰다. 아몬이 긴 한숨을 흘리며 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간 엘이 어린애를 돌보듯 모포를 꼼꼼히 여며 주자 아몬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엘이 시키는대로 얌전히 침대에 누웠으니,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주십시오." 엘은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으며 씩 웃었다. "그 얘길 꺼내기 전에 우선 아몬의 상태부터 알아야겠어요. 얼굴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데... 괜찮은 거예요?" "물론 괜찮습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것 뿐이니까요. 더군다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요 근래 계속 침대에만 머물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몸이 안 좋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이군요, 정말......" 엘은 빙그레 웃는 아몬을 보며 어느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분위기를 바꿔 활기있게 말했다. "그럼 아몬이 궁금해 하는 걸 알려 줄게요. 다른 게 아니라 선물을 받았어요. 바로 이거예요." 엘이 자랑스럽게 손목을 드러내자 아몬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유심히 브레이슬릿을 살피던 아몬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의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힘과 놀랄 만큼 비슷한 파장이 은빛 브레이슬릿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몬은 브레이슬릿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는 손가락을 오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이 푸른 돌에 손을 얹고 원하는 곳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그 즉시 이동이 돼요. 정말 대단하죠? 지금까지 네 번 사용해봤는데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어요.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내 팔뚝을 꼬집어 보기까지 했다니까요." 신이 난 엘은 말하는데 정신이 팔려, 핏기가신 아몬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몬은 고개를 꺾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렇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그는 자신의 동요를 가까스로 감출 수 있었다. "이건... 법황 성하께서 주신 겁니까?"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몬은 찌꺼기처럼 남아있는 일말의 의구심을 떨쳐 내고 싶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엘이 입술을 찡그려 억지웃음을 만들었다. "아몬도 알고 있었군요. 내가 말하던 루드비히가 법황 성하시라는 거...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사실 루드비히가 보통사제님이 아닐 거라는 건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멍청하게도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엘,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저 상황이......" "괜찮아요, 아몬. 루드비히와도 화해했는걸요, 뭐. 솔직히 말하면 루드비히가 법황 성하시라는 게 아직 실감이 안나요. 아시리움 신전에서 그에게 쩔쩔매는 사람들을 봤을 때... 또... 그들 앞에서 잘난 체하며 루드비히와의 사이를 과시했을 때만 제외하면요." 엘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몬이 웃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그의 심각한 표정을 깨닫고 살짝 미간을 모았다. "아몬, 왜 그래요?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진 거예요?" 잠시 갈등하던 아몬은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좀 엉뚱한 질문이겠지만... 엘, 혹시 제가 아시리움 성전에 간 적이 있습니까?" "그럼요, 성 아우렐리아 축일이 거의 끝나 갈 무렵, 구슬로 아몬을 불렀잖아요. 자일스가 연회에 세렌국 왕을 초청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요. 기억 안나요?" 아몬은 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밀려드는 어둠과 맞서고 있었다. 그가 겪은 악몽이 의식표면으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아몬은 본능적으로 그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구슬을 사용했어요. 남은 하나는 바보같이 잃어버렸고요. 그래서 무작정 아시리움 성전을 나와 바르테즈로 향하게 된 거예요. 난 아무것도 묻지 않기에 아몬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전 엘이..." 목소리가 잠기자 아몬은 말을 멈추고 메마른 입술을 축였다. "엘이 주문을 잊었든지, 아니면 구슬을 잃어버린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하긴 했지만 데클란 평원에서 만났을 땐, 안도감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후엔 엘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묻지 않은 거고요." 아몬은 기억에 대한 부분은 살짝 뺀 채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벌써 밤이 깊었는데 이곳에 오래 계셔도 되는 겁니까?" "이제 돌아가야죠.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는 바람에 좀 늦어졌어요." 엘은 아몬을 만나러 갈까 말까 망설이다 시간이 지체됐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리자드에게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로선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아몬. 이번에 아몬과 사일러스, 또 기사분들이 절 도와주셨다는 거 알아요. 그 일 말인데요... 혹시......" 엘은 말끝을 흐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결연히 턱을 치켜들었다. "리자드의 명령을 받고 한 일인가요? 그러니까 그가 날 돕기위해... 날 구하기위해......" 목소리가 갈라지자 엘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아몬의 갈색 눈동자가 깊게 반짝였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엘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답을 내놨다. "예, 리자드님께서 저와 사일러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두분 왕자전하를 찾아 황궁으로 들여보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랬군요..." 엘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몬을 향해 가냘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아몬. 리자드가 칼 베리만의 부탁을 받고 그를 돕기 위해 한 일이란 거 알아요... 하지만 그가 그런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 속을 꽉 채웠던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 같아요." "엘, 제 말 잘 들으십시오. 리자드님께선 그 누구보다 엘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칼 베리만께서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아몬... 전엔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지난번 아시리움에게 잡혔던 일이 제 눈을 빼앗아 가기라도 했나봐요." 아몬은 사실을 밝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엘을 향해 당겨앉았다. "지난번 처형식이 열리기 전날, 어디에 계셨는지 아십니까?" 엘이 천천히 도리질을 했다. "몰라요. 그저 바드리오가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엘은 그때 코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자드님께서도 엘과 같은 곳에 계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엘이 갇혀있던 아시리움 신전 밖에서 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엘을 구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넋이 빠져나간 듯 엘의 얼굴이 멍해졌다. "사정이 여의찮아 뜻을 이루진 못하셨지만 리자드님께선 최선을 다해 엘을 구하시려 애쓰셨습니다." 입술을 달싹이던 엘이 발딱 일어서며 소리를 높였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엘." 엘은 단호한 대답이 나오자마자 거칠게 소리쳤다. "바보같으니!" "엘은 모르고 있었던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오,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에요." 엘은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린 자세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바로 아몬이 정성을 다해 떠받드는 근엄한 바보한테 한 말이에요." "그,근엄한... 바,바보...라고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몬이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구긴 채 떠듬거렸다.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그러니까 리자드님 말씀입니까?" 엘은 크게 턱을 끄덕였다. "밤이 늦었으니 이미 침소에 드셨을 것 같은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조심스레 엘을 살피는 아몬의 눈은 근심으로 검게 물들어있었다. "침소라......" 엘의 입술에 야릇한 미소가 그려지자 아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엘... 서, 설마......" "아몬, 가르쳐 줘요." "안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몬은 강하게 거부했다. 구태여 듣지 않아도 그는 엘이 리자드의 침소가 어디 있는지, 그 정확한 위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이, 아몬...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요. 가르쳐 줄 거죠? 그럴 거죠? 난 아몬을 믿어요." 엘이 콧소리까지 내며 달콤하게 말하자 아몬의 이마에 진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엘, 제발... 안됩니다... 죄송하지만 그것만큼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엘이 안쓰러웠지만 아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지를 굽힐 수 없었다. 침소에 갑자기 들이닥친 엘과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리자드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몬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좋아요, 아몬. 이제 더 이상 아몬을 괴롭히지 않을게요. 참, 가기 전에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물어봐도 돼요?" "물론입니다." 아몬은 마음을 바꿔 준 엘이 고마워서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궁금한 게 뭐냐 하면... 리자드에게 정부가 있나요?" 너무나 황당한 질문에 아몬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리자드님께 정부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신 겁니까?" 아몬은 엘이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라며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예." 엘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조금 뻔뻔스러운 어조로 아몬의 바람을 꺾어버렸다. "그건 엘도 아시겠지만 말씀 드리기가 좀......" "아니오, 난 몰라요. 그러니까 어서 말해줘요." 엘은 더욱 강경하게 요구했다. 아몬은 꿋꿋하게 버티고 선 그녀를 바라보며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리자드님에 대해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듯 깊이 숨을 들이쉰 아몬이 드디어 진실을 밝혔다. "리자드님께 정부는 없습니다." "지,진짜요? 진짜 없어요?" 엘이 재차 반문하자 아몬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있다고 했는데..." 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아몬이 그답지 않게 험한 말을 소리쳤다.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단 말입니까?" 어느 정신나간 작자가 바로 리자드란 걸 알면 아몬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싶은 마음에 엘은 허둥지둥 얼버무렸다. "말해도 아몬은 모를 거예요. 시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거든요. 아무래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나봐요. 참, 실없는 사람도 다 있지." 엘은 배시시 웃었다. 아몬의 얼굴에도 멋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가 조금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엘의 질문은 리자드님껜 모욕이나 진배없습니다. 리자드님께선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부끄러울 만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아몬이 하는 말인데 틀릴 리가 있겠어요?" 엘은 눈치 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못내 궁금했던 질문을 넌지시 꺼냈다. "그런데 정부가 뭐예요, 아몬? 모욕이라니, 부끄러운 일이니 하는 걸로 봐서 좋은 뜻은 아닐 것 같은데..." "그,그건....." 천장에 뜻풀이가 써있기라도 한듯 고개를 치켜든 아몬이 숨가쁘게 말했다. "사일러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냥 아몬이 말해주면 안돼요?" "저보다는 사일러스가 더 친절하게 설명해 드릴 겁니다." 아몬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요. 그럼 질문도 끝났으니 전 이제 돌아가 봐야겠군요."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엘." "그럴게요, 딱 한군데만 들르고요." "예에? 그게 무슨 말씀......" 엘은 어리둥절해진 아몬을 향해 생글생글 웃으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아몬,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해요? 이 브레이슬릿 말이에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그 즉시 그 사람에게 데려다 준다는 말." 아몬이 급한 숨을 들이쉬며 허겁지겁 엘에게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을 잽싸게 피한 엘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리자드한테 안부 전해줄게요, 아몬!" 밝은 웃음소리만을 남긴 채 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몬은 그녀가 서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쿡쿡 웃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몸을 떨던 그는 뜻밖의 손님을 맞고 있을 자신의 주군을 떠올리며 마음이 담긴 충언(忠言)을 중얼거렸다. "리자드님, 각오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제 목 [달의 아이] 70장. 빙경의 바람-2===================================================================엘은 리자드의 침소를 보자마자 그가 답답한 걸 싫어하고, 조금 서늘한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널찍한 공간과 활짝 열려있는 커다란 창문이 그 두 가지를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몇 개의 기본적인 가구만이 놓여있는 침소는 창을 통해 들어온 비밀스런 달빛과 축축한 밤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리자드가 있었다. 그는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한 채 똑바로 누워 있었는데, 엘은 미동없는 모습에서 그가 깊이 잠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엘은 살금살금 리자드를 향해 접근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도망칠 준비를 갖춘 작은 들짐승처럼 매우 조심스러웠다. 엘은 침대에서 한발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그녀의 눈이 자연스레 리자드를 찾았다. 굳게 닫힌 눈꺼풀, 반듯한 이마와 이어진 곧은 콧날, 그 아래 자리잡은 단호한 입술... 엘은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리자드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봤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주저하던 엘은 마른침을 삼킨 다음 침대에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 리자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입술이 타들어갔다. 엘은 이러다간 리자드에게 닿기 전에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목까지 차 오른 숨을 조심스레 내쉬었다. 그 순간 리자드가 번개같이 엘을 낚아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침대 위로 거칠게 넘어졌다. "누가 보낸 거냐?" 리자드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리자드의 단단한 몸 아래 깔린 채, 그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있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당장 입을 열지 열지 않으면 그 즉시 목을 따주겠다." 그녀의 목을 휘감은 손힘이 강해지더니, 곧 펄떡이는 맥박을 지그시 누르는 칼날이 느껴졌다. 엘은 그녀의 정체를 알려야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잔인하게 죄어진 목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일순 죽음의 공포를 느낀 엘이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비,비켜요." 리자드의 전신이 딱딱하게 경직되더니 다음 순간 목을 조이던 악력(握力)이 사라졌다. 리자드가 살짝 몸을 틀어 엘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자신의 그림자를 거둬 냈다. "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리자드의 목소리는 거친 탄식같이 들렸다. "비키란 말이에요!" 그녀의 사나운 외침을 무시하고 리자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또 왜 들어온 거냐?" "제길! 빨리 못 내려가요? 무거워 죽겠단 말이에요!" 엘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새된 고함을 질렀다. 한숨을 푹 내쉰 리자드가 몸의 중심을 바꿔 압사의 위기에서 그녀를 구해주었다. 엘은 리자드에게 들으라는 듯 안도의 숨을 요란하게 내뿜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몸을 짓누르던 고통이 없어지자 따뜻한 체온은 물론 꽉 죄어진 탄탄한 근육의 감촉이 그녀의 온 신경을 타고 생생히 전해진 것이다. 부끄러움이 몰려들며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제 말해봐라,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리자드가 무뚝뚝하게 추궁했다. 엘은 그가 두 사람의 불편한 상태를 유지한 채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비키기나 해요!" 엘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리자드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녀의 요구를 묵살했다. "먼저 말, 그 뒤에 행동. 자, 시작해라." 기사나 병사들에게나 사용함직한 간단명료한 지시에 엘은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작하긴 뭘 시작해요? 빨리 비켜요! 안 비키면 주먹이 날아갈 줄 알아요!" 엘은 리자드의 눈을 노려보며 최대한 험악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위협에 꼬리를 내릴 그가 아니었다. 리자드는 가소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 채 엘이 기겁할 말을 꺼냈다.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군." 엘은 격렬히 움찔했다. 그녀의 얼굴을 물들였던 화끈거림은 이제 피부전체로 번져 있었다. 어찌나 당황스럽고 애가 타는지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하고 있는 거냐? 이대로 아침까지 기다릴 생각이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감정을 싣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거기엔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한 야릇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걸 깨닫자 엘의 마음속에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치솟았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리자드를 움직이게 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야하리라. 그가 질색할만한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마음을 정한 엘은 먼저 경직됐던 얼굴근육을 풀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수줍은 어조로 리자드를 불렀다. "리자드..." 엘은 그의 몸이 슬쩍 굳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날짜?" 리자드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짧게 반문했다. "그래요, 날짜요. 함께 밤을 보내게 됐는데... 아무리 그래도 혼인식을 언제 올릴지 정도는 미리 정해야하잖아요." 엘의 허풍이 끝나자마자 침묵이 찾아들었다. 긴장된 공기가 묵직하게 사방을 눌러왔다. 리자드는 마치 그대로 돌조각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혼인식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그가 최대한 빨리 몸을 떼리라 예상하고 있던 엘은 뜻밖의 상황전개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와 혼인하기 싫으면... 어서 비켜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음울한 한숨처럼 바닥에 깔렸다. 리자드가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섰다. 엘은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리자드의 체온이 사라지자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과 상실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리자드가 팔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는 엘이 일어나 앉았을 때, 잡고 있던 손목의 각도를 살짝 틀었다. 달빛을 받은 브레이슬릿이 서늘한 은광을 발했다. 브레이슬릿을 내려다보고 있던 리자드가 아무 말없이 엘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는 그 즉시 몸을 돌려 구석에 놓여진 선반으로 걸어갔다. 엘은 은잔에 술을 따르는 리자드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가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단숨에 술을 들이킨 리자드가 거친 동작으로 잔을 내려놓은 다음 창가로 다가갔다. 어둠을 뚫고 온 달빛이 강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그의 옆얼굴을 비춰 주었다. "리자드가 날 구하려 했다는 말 들었어요. 그거 정말이에요?" 엘은 숨죽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자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소리를 높였다. "진짜 코벨로 날 구하러 왔었나요?" "돌아가라."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리자드가 짧게 명령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말아요. 난 리자드의 부하가 아니에요." "그래, 넌 내 부하가 아니다. 그러니까 곱게 보내 주는 거고. 네가 내 부하였다면 눈에 띄자마자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거다." 리자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용기가 빠져나가려 하자 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것만 해결되면 그 즉시 이곳을 나갈 거예요." 리자드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늘진 그의 얼굴엔 조소가 그려져 있었다. "코벨로 널 구하러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를 확인하고 싶다는 거냐?" "그래요." 엘은 꿋꿋이 대답했다. "그래, 그 날밤 코벨에 갔다. 하지만 그 이유가 너 때문만은 아니니 괜한 착각은 하지마라." "너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어쨌든 이유 중 하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란 말이잖아요. 그렇죠?" 엘이 집요할 정도로 파고 들어오자 리자드가 피곤하다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널 구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널 살리고 싶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거냐?" "아니에요, 난 그저 리자드가 진실을 말해 주길 원할 뿐이에요!" 엘은 분연히 소리쳤다. "진실이라..." 리자드가 냉랭한 웃음을 흘렸다. "넌 리아잔의 황녀고 난 바르테즈의 군주라는 것, 그게 바로 진실이다. 다시 말해, 너와 난 이렇게 마주보며 얘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다는 게 진실이다. 네 말대로 너와 나 사이를 잇고 있던 줄이 완벽하게 끊어졌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만해요." 엘은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리자드는 잔인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내게 더 이상 너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 나에게 있어 넌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더 이상 이용가치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 그게 바로 진실이다." "제길, 그만해요! 그만하라고요!" 엘은 벌떡 일어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침대를 내려와 미친듯이 리자드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리자드에게 세차게 몸을 부딪쳤다. 리자드가 한쪽 발을 뒤로 옮기며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엘은 두 손으로 그의 옷깃을 와락 틀어쥐었다. "꼭 그래야 돼요? 내가 그렇게 많은 걸 바랐어요? 꼭 그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려요? 왜 그렇게 못됐어요? 왜 나한테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요?" 사납게 대들던 엘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좀 더 부드럽게 말해줄 수도 있잖아요.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줄 수도 있잖아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리자드 때문에......" 목이 조여들며 눈에 물기가 차 오르자 엘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리자드가 날 아무 쓸모없고... 값어치없는... 물건처럼... 아시리움에 넘길 때... 그때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요?"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입을 벌렸다. 엘은 터져나오려는 흐느낌을 가까스로 참았다. 창백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자드는 천천히 팔을 들어 가늘게 떨리는 엘의 어깨와 등을 감싸 안았다. 꼿꼿하게 굳어있던 엘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리자드의 체취를 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참았던 서러움이 걷잡을 수없이 쏟아졌다. 리자드가 팔에 힘을 가해 엘을 바짝 당겨안았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를 아프게하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길을 매우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자드의 셔츠는 축축이 젖어들었고 엘의 눈물은 조금씩 말라갔다. 코를 훌쩍이며 리자드에게 찰싹 달라 붙어있던 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에게서 몸을 떼냈다. 내키지 않는 결정이었지만 당장이라도 콧물이 나오려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한 그녀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은 쥬네비아가 손수 챙겨 주었던 손수건을 꺼내 시원하게 코를 풀었다. 리자드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그려졌다. 속눈썹 사이로 그를 곁눈질하고 있던 엘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수건을 뭉쳐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 리자드가 조용히 말했다. "나 좋아하죠?" 엘은 불쑥 물었다. 본능적인 반사작용처럼 생각하기도 전에 나온 질문이었다. "넌 여덟 살이 아니라 열여덟 살이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철부지처럼 굴 생각이냐?"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리자드가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잔뜩 기분이 고조된 엘은 그저 생글생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리자드는 날 좋아해요." 단정적으로 말한 엘은 곧바로 자신을 납득시키듯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리자드는... 날 좋아해..."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돌아가기나 해라." 리자드에게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완곡한 말이었다. 엘은 그가 그녀를 상대로 '제발'이라는 단어를 쓰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리자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녀가 그의 견고한 벽을 얼마나 약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지만 확실한 증거물인 셈이었다. "알았어요, 이만 가볼게요." 엘은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도 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음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리자드와 헤어진다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엘은 주춤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또 무슨 일이냐?" 리자드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엘은 발꿈치를 들어올려 그의 볼에 재빨리 입을 맞췄다. 리자드는 그녀의 서툰 애정표현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극히 짧은 순간 그의 손이 엘을 향해 움직였지만 그녀가 알아챌 사이도 없이 되돌려졌다. 엘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바로잡았다. 리자드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제아무리 술기운을 빌렸다지만 지난번엔 어떻게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엘은 두 사람을 감싼 환한 달빛이 자신을 수줍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엉거주춤 몸을 돌리던 그녀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리자드를 바라봤다.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리자드가 나한테 찾아오라고 한 물건에 대해서예요... 그걸 왜 찾는지... 그 물건의 정체는 무언지......" "전에도 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느냐?" "그래요, 기억해요." 엘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 뒤늦게 답을 내놨다. "내가 모든 걸 알게 되면... 리자드 손으로... 날 죽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이제 내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 줄 알겠군." 아무 감정없는 목소리가 엘의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시린 물결처럼 퍼지는 아픔을 느끼며 엘은 리자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져 버린 것 같았다. "만약... 만약 말이에요... 내가 그 물건을... 가짜가 아닌 진짜를 찾아올 수 있다면... 말해 줄 수 있어요?" 갑자기 리자드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엘에게 꽂히는 청회색 눈동자가 싸늘한 불꽃처럼 그녀를 꿰뚫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섰다. "네 루드비히가 그런 조건을 달았나?" 엘은 부인하려는 마음을 바꿔 반항적으로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요, 내 루드비히가 그런 조건을 달았어요." "그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나대신 수고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리자드의 입술이 노골적인 조소로 비틀어졌다. "난 리자드의 심부름꾼도 아니고, 리자드와 루드비히 사이에서 이용당하는 불쌍한 꼭두각시도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엘은 이를 악물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요, 그리고 그걸 용납하지도 않을 거예요."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혀들었다. 먼저 시선을 뗀 사람은 리자드였다. 그는 창 쪽으로 몸을 돌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할말 끝났으면 돌아가라." 엘은 잠시동안 그를 응시하다 말없이 브레이슬릿에 손을 가져갔다. 눈으로 보진 않았지만 리자드는 엘이 떠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드문드문 밝혀진 횃불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일까? 어쩌면 그 아이를 찾아낸 것부터가 잘못일 수도 있겠지. 바람이 불자 채 마르지 않은 셔츠자락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리자드는 엘의 입술이 스쳤던 볼에 손을 가져갔다. 곧 음울할 정도로 탁한 자조가 흘러나왔다. 관두자, 이런 유치한 감상 따위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은 틀어진 일을 바로잡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때다. 그래,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설사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여야 될 때가 와도 포기할 수 없다. 리자드는 잠시나마 흔들렸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파고 들어온 감정의 조각들은 그를 쉽게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셔츠자락이 다 마르고 온몸이 차디차게 식을 때까지, 격렬히 부딪쳐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 이것으로 7권이 끝났습니다. --------------------------------------------------달의 아이 8권.txt제 목 [달의 아이] 71장. 깊어지는 갈등-1 제 71장. 깊어지는 갈등 난장판이 되어버린 혼인식이 끝나고 아르벨라 황녀가 속죄양처럼 리아잔 제국에서 추방된 후 황궁을 가득 메우다시피 했던 초대객들도 하나 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바드리오에 거주하는 귀족들과 리아잔 제국의 주변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은 손님으로서 계속 황궁에 머물게 되었다. 사십여 일 남은 황궁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체류였지만 화려하고 풍족한 황궁 생활이 좀 더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반기지 않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물론 각국에서 중책을 맞고 있는 왕족과 귀족들은 되도록 빨리 환국(還國)을 서둘러야만 했다. 바삐 짐을 꾸리는 사람들 중엔, 황궁에서 지내는 내내 이런 답답한 생활은 하루도 더 견디지 못하겠다고 투덜대던 유이나르도 끼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 엘은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유이나르를 만나 작별인사도 하고 간단하게나마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엘은 작별선물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선물은 약재인 사피알민 열매로 담근,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귀하고, 약술이라 불릴 만큼 몸에 좋은 술 한 병이었다. "전하, 시종장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귀에 익은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아니, 내가 나가겠소!" 엘은 술병을 집어들고 뛰어가 문을 열었다. 백발이 성성한 시종장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오?" "황제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놀란 엘이 얼떨결에 되물었다. "예.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연히 엘이 따라오리라 생각했는지 시종장이 한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엘은 신음을 삼키며 그를 따라 나섰다. 짧지 않은 노정 내내 엘은 연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키젤은 그녀가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 중 자일스 다음으로 꼽는 사람이었다. 마르키젤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은 문을 지키고 있는 시종들과 작은 소리로 몇 마디를 나눴다. 그리고는 엘에게 다가와 조금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계신 거요?" "아닙니다, 전하. 폐하께선 검술수련을 하고 계십니다. 곧 돌아오실 테니 접빈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엘은 술병을 흘끗 내려다본 다음 시종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그럼 그 동안 다른 곳에 잠깐 들렀다 오면 안되겠소?" "그건 좀...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러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께선 기다리시는 걸 몹시 싫어하십니다, 전하."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엘의 혼잣말을 들은 시종장이 불편한 듯 서너 번 헛기침을 했다. "알았으니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이거나 좀 맡아 주시요." 엘은 시종장에게 술병을 불쑥 내밀었다. 눈을 깜박이던 시종장이 아무 말없이 병을 받아 들었다. "접빈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바로 여기로군." 엘은 집무실 옆에 위치한 접빈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저,전하! 잠시만! 거기가 아닙니다!" 엘은 그 순간 시종장이 왜 펄쩍 뛰어올랐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이미 접빈실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누가!" 반사적으로 몸을 들었던 자일스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로구나, 엘리시엔. 이런 곳에서 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만나서 반갑다." "전하, 제가 다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엘이 망설임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려 했을 때 자일스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없다. 안으로 들어와라, 엘리시엔. 너도 아버님을 뵈러 온 것 같은 데, 굳이 따로 떨어져서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너와 마주보고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면 기다리는 시간도 무료하지 않을 테고......"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가 심술궂게 반짝였다. "설마 이 오라버니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겠지?" 엘은 자일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시종장을 돌아봤다.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폐하께서 오시면 즉시 알려주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뒤로 물러선 시종장이 근심스런 눈으로 엘과 자일스를 조심스레 훔쳐보며 문을 닫았다. "이리와 앉아라." 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 자일스 앞에 앉았다. "너저분한 꼬락서니는 여전하구나. 혼인식 만찬 이후 조금은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망이 크다, 엘리시엔. 천하디 천한 너에게 불가능한 걸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구나." 엘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품위를 지키려는 노력이라...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절실히 필요할 것 같은 데?" 자일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에게 그따위 말을 하다니! 조잡한 반지 하나를 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지속될 것 같으냐?" "그게 무슨 말이야?" "하루 아침에 가장 깊은 구덩이로 고꾸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네가 기어 올라온 진흙바닥보다 더 끔찍하고 더러운 구덩이 속으로." 히죽거리는 자일스의 눈이 야릇한 빛을 발했다. 엘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며 자일스를 노려봤다.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없다. 꼭 널 지칭해서 한 말은 아니니까.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냐? 너뿐 아니라 나 역시......" "난 그런 말이나 들으려 이 곳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처음엔 안으로 들어오라는 네 말을 무시하려 했으나 네게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 "내게 할 말이라고? 궁금하구나, 어서 꺼내 봐라." 자일스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너도 리오와 리반이 황궁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맞춰 보마." 자일스가 엘의 말을 가로챘다. 엘은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둘의 정체를 숨겨 달라는 거 아니냐? 너와 손잡고, 아버님은 물론 세상을 농락한 놈들이 체르몬 국의 왕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조용히 끝나진 않을 테니까. 체르몬 국에도 상당한 불이익이 돌아갈 테고... 어떠냐? 내 말이 정확하지 않느냐?" "정확하진 않지만 요점은 얼추 맞았다."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흥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넌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원하는 걸 말해봐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엘은 가볍게 응수했다. "글쎄... 말하기가 좀 곤란하구나. 너한테 원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다. 우선은... 무릎부터 꿇어라." 두 사람의 눈이 맞부딪쳤다. "무릎을 꿇으라고?" "그래,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무료해서 말이다. 네가 무릎 꿇고 개처럼 짓는 꼴을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뭐하고 있는 거냐? 빨간 머리털을 가진 한심한 놈들을 구하고 싶으면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복종해라." 의기양양한 자일스를 바라보던 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자일스. 내가 네 유치한 장단에 맞춰 춤이라도 출 줄 알았나 보지? 내가 무릎을 꿇든 안 꿇든 넌 어차피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 그 이유를 말해줄까?" "말해봐라!" 자일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리오를 좀도둑으로 몰아 지하감옥에 가둔 사람이 누구지? 바로 너다. 또 연회장에 뛰어 들었던 리반을 침입자로 몰고 간 자는? 그것도 역시 너다. 그런데 리오와 리반이 체르몬 국의 왕자임을 네가 직접 밝힌다고? 뒤를 이어 나올 수많은 질문들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인 거냐?" "내가 겨우 그 정도를 무서워 할 것 같으냐?" 가소롭다는 얼굴로 엘을 노려보던 자일스가 코웃음을 날리더니 급기야 어깨를 떨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해 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엘의 느긋한 목소리에 자일스는 서서히 웃음을 지웠다. "신성한 아시리움 성전에서 겁도 없이 사람사냥을 했던 일...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아시리움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자일스에게서 이제 웃음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말을 믿어 줄 자는 단 한 명도 없어!"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실종됐던 일과 네가 부상을 입고 허겁지겁 성전을 떠났던 사건을 아는 아시리움만큼은 내 말을 믿어 줄 거다. 만에 하나 믿지 않더라도 너에 대해 일말의 의혹은 갖게 될 테지. 만약 내가 아시리움 종단에 정식으로 조사를 요청하면 아시리움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엘은 조소를 지으며 자일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네가 왜 내 말을 따라야 하는지 알아 들었겠지?" "너 따위가 감히 날 위협하는 거냐? 무식하고 천한 계집주제에!" "말 조심해!" 사납게 소리친 엘은 자일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경고조로 말했다. "리오와 리반을 내버려 둬, 자일스. 그러면 나 역시 널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난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난다해도 널 사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아마 너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너와 난 어차피 리아잔의 황족이란 같은 명패를 달게 되었다. 즉, 원하진 않지만 이미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겼다는 말이다." "연결고리라고? 개소리 집어치우고 하고싶은 말이나 어서 지껄여봐라." 자일스가 이 사이로 거칠게 말을 뱉어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겠다. 물론 널 위해서가 아니라 황후님을 생각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너와 나만이 있는 공간에서까지 널 대우해주길 바라지는 마라.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게 하기에 난 네 추악한 영혼을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 부들부들 몸을 떨던 자일스가 별안간 팔을 뻗어 엘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 자리에서 네 년의 목을 뽑아 주마!" 자일스의 입술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엘의 목을 더욱 우악스럽게 틀어쥐려 할 때였다. 가슴에 느껴지는 작은 통증이 신경을 건드렸다. 자일스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심장부근을 찌르고 있는 단도를 발견하자 그의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마음대로 해 봐, 자일스. 내 목이 뽑히는 것과 네 심장에 구멍이 뚫리는 것... 과연 어느 쪽이 더 빠를까?" "장담하는데 네 년의 목이 뽑히는 게 더 빠를 거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내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그 날이 그리 멀진 않을 테니... 기대하고 있어라." 자일스의 손에 조금씩 힘이 더해졌다. "이 자리에서 내 목을 뽑을 계획이 없다면 당장 손을 떼라." "아니, 너부터 단도를 거둬들여라." "재미있군. 이런 유치한 장난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둘이 동시에 움직이는 게 좋겠다." "내키진 않지만 어쨌든 동의한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서서히 거리를 벌렸다. 그들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의자에 깊숙이 앉았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시엔 전하, 황제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알았소." 엘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자일스에게 시선을 맞췄다. "저부터 나가야겠군요. 제가 드린 말씀... 부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엘은 자일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기다리고 있는 시종장에게 다가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 자일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래 절대 잊지 않겠다, 엘리시엔. 그러니 너 역시 단 한자도 빼먹지 말고 내가 한 말을 머릿속 깊이 똑똑히 새겨 둬라." ********* 괴로움을 참지못해 (난 왜 이리 마음이 약한 건지... 훌쩍훌쩍) 맛보기로 올리는 것이니 양이 적다 구박하지 말아 주세요. 대충 훑어보기만 했을 뿐 수정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부족해도 이해해 주시길... 정식으로 돌아오는 날, 좀 넉넉히 올리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덧) 시험보시는 분들... 좋은 결과 나오길 빌겠습니다. 공부하나 안 하나 그 성적이 그 성적인 분들은 괜히 책 펴들고 고개운동하지 마시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맛난 삼겹살이나 구워 먹는 게 어떠신지... 배가 출출해서 하는 말이라죠. 허허허~ (퍽!) 제 목 [달의 아이] 71장. 경계-2 엘이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마르키젤은 땀이 채 식지 않은 상태로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었다. "그루지아에서 국혼을 축하한다며 올린 검이다. 내가 사용하기엔 너무 가볍다는 것 빼곤 흠잡을 데 없는 검이로구나." 마르키젤이 엘을 흘끗 쳐다봤다. "너도 검을 다뤄 본 적이 있을 것 같은 데... 어떠냐, 엘리시엔? 네 실력이 어느 정도라 생각하느냐?" "어이없게 당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어이없게 당할 정도는 아니라......" 마르키젤이 갑자기 들고 있던 검을 엘에게 던져 주었다. "자, 받아라." 엘은 반사적으로 검 자루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서 검을 받아 드는 마르키젤을 바라봤다. "네 검술실력을 좀 보고 싶구나, 엘리시엔." 말이 끝나자마자 마르키젤이 엘의 정면으로 성큼 다가들었다. 엘은 심장을 노리고 위협적으로 파고드는 검을 처냈다. 그리고 한발 물러서서 재빨리 방어자세를 취했다. 마르키젤이 다시 검을 휘두르자 그녀는 매끄럽게 몸을 돌렸다. 검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스쳤다. 마르키젤은 쉬지 않고 공격해 들어왔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연이어 공기를 갈랐다. 엘이 허리를 굽혀 검을 피하자 마르키젤은 능숙하게 검의 방향을 바꿔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내리그었다. 엘은 번뜩이는 검날을 피해 재빨리 몸을 굴려 마르키젤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 즉시 마르키젤이 빙그르르 돌아서며 공격해 들어오는 그녀의 검을 막았다. 엘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수비에 전념하면서도 이따금 날쌘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만하면 됐다, 엘리시엔." 마르키젤이 맞대고 있던 검을 치웠다. 엘도 그를 따라 천천히 팔을 내렸다. "네가 너무 수비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재미가 반감되긴 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손에 익지 않았을 뿐 아니라 네겐 제법 무거운 검이었을 텐데... 검술실력이 상당하구나. 놀랐다, 엘리시엔." 마르키젤은 칭찬하듯 엘의 어깨를 서너 번 툭툭 쳤다. 그리고 시종에게 검을 건넨 다음 물잔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수비위주로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없다. 공격의 손길을 늦추지 말고 밀어붙이다 기회를 노려 단번에 심장을 찌르는 것, 그게 바로 검술의 기본이다." 말을 끝낸 마르키젤이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엘은 숨을 고르며 욱신거리는 팔과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마르키젤에게 많은 걸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공격을 자제하며 소극적으로 맞선 것이 충격을 배가시킨 것 같았다. 마르키젤은 검술실력도 상당했을 뿐 아니라 엘이 검을 나눠 본 사람들 중 가장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그 힘을 고스란히 검에 실을 수 있을 만큼 단련된 사람이었다. "언젠가 너와 정식으로 겨뤄 보고 싶구나. 그 때는 마음놓고 실력발휘를 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 검은 네게 주겠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준 답례다." 엘은 놀라움을 감추며 생각지 못한 마르키젤의 호의에 정중히 답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마르키젤이 시종장을 쳐다봤다. "검을 엘리시엔의 거처로 보내 줘라." "즉시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시종장이 젊은 시종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서둘러 엘에게 다가와 두 손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널 부른 이유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이다." 엘을 쓱 훑어본 마르키젤이 의자로 걸어갔다. 그는 편하게 몸을 묻은 후에야 지나가는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체르몬 국의 왕자들이 황궁에 머물고 있다 하던데, 사실이냐?" 엘은 바짝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신중해야 한다는 다급히 경고가 머리를 울렸다. "예, 폐하. 사실입니다." "난 그들이 도착했다는 보고도 인사도 받은 기억이 없구나. 대체 체르몬의 왕자들은 황궁에 언제 들어온 것이냐?" 엘은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 입을 열었다. "혼인식날 도착했습니다. 폐하께 인사드리기 위해 알현신청을 했을 텐데, 워낙 귀빈들이 많이 초대된 탓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요 며칠간 어찌나 많은 얼굴들을 대면했는지, 제대로 기억 나는 사람이 채 스무 명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마르키젤이 그녀의 말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자 엘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마르키젤을 살피며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체르몬 국의 왕자들이 황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체르몬의 국왕이 올린 전문이 오늘 아침 도착했다." "체르몬 국에서 전문을 보냈다고요?" 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 거리가 너무 멀어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죄송하다는 사의를 표해왔다. 또 전문과 함께 왕자들을 체르몬 국까지 호위할 기사들과 수행원들을 동시에 출발시켰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엘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왕자들은 네가 초대한 것이냐?" "예, 리오카사이 왕자와 리바너프 왕자는 제 친구들입니다." "네 친구들이라니 만나 얘기라도 몇 마디 나눠 보고 싶구나. 오늘 저녁만찬에 참석하라는 말을 전해라." 엘은 입술을 꼭 깨물어 터지려하는 신음을 막았다. "으음... 그러고보니 오늘저녁에 중요한 볼 일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네 친구들을 보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엘은 마르키젤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넌지시 말을 붙였다. "말씀 끝나셨으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엘은 뛰어나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녀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시종장님이 전하께 이걸 잊지 말고 전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유이나르가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린 엘은 술병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그리고 쿵쾅거리며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던 가운데,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엘이 팔을 휘젓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시종들은 다시 내닫는 그녀를 보며 자그맣게 혀를 차댔다. 초조하게 걸음을 옮기던 자일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받아들이셨느냐?" 안으로 들어선 시종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전하. 폐하께서 독대를 수락하셨습니다." 자일스는 시종의 말이 끝나자마자 접빈실을 나와 마르키젤의 집무실로 향했다. "긴요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님." "그 말은 시종장에게 이미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독대까지 청한 것이냐?" 마르키젤이 못마땅한 눈으로 자일스를 쳐다봤다. "우선 자리에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 어서 털어놓기나 해라!" 자일스는 마르키젤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음을 깨닫고 군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제가 말씀드릴 얘긴 바로 후계자의 반지에 대해서입니다." "후계자의 반지라고?" 마르키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 아버님. 그 계집애가 내놓은 반지는 진짜 후계자의 반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미천한 세공사가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습니다." "모조품? 그 말이 사실이냐?" 마르키젤이 날카롭게 물었다.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처리한 반지가 진짜 후계자의 반지였습니다."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감히! 어떤 놈이 감히 날 농락한 것이냐?" 버럭 소리친 마르키젤이 거칠게 씨근거렸다. 검게 그을린 얼굴근육이 팽팽히 당겨졌고 광대뼈 주위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아버님. 가짜를 만든 놈은 이미 그 죄값을 치러 더 이상 산목숨이 아닙니다. 또 계속해서 뒤를 캐고 있으니 이번 일을 꾸민 놈도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자일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말을 잇는 그의 눈동자에 흥분이 넘실거렸다. "이제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아버님. 칼 베리만과 그 계집애를 드디어 처형틀에 매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직접 제 손으로 두 연놈을 처단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님. 당장 칼 베리만과 그 계집애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겠습니다." 마르키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에게서 좀처럼 대답이 나오지 않자 초조해진 자일스는 연거푸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 했을 때, 마르키젤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이리와 앉아 봐라." 마르키젤은 자일스가 앉기를 기다렸다 본론을 꺼냈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자일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일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잡아들일 명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명분이 부족하다고요? 지금 명분이 부족하다 하셨습니까? 그럼 후계자의 반지는요? 후계자의 반지는 뭡니까, 아버님? 그 반지가 가짜라는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제 말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자일스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의자팔걸이를 내려쳤다. "후계자의 반지가 진짜든 가짜든 더 이상은 중요하지 않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자일스? 그 계집애는 예언이 진실임을 입증하라는 황명에 후계자의 반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이들이 가짜 후계자의 반지를 진짜로 믿고 있고, 이미 그 계집애를 페르가몬의 딸로 받아들였다. 그런 마당에 후계자의 반지를 다시 문제삼고 나선다면 우리 입장만 우스워질 것이다. 그건 앞으로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르키젤이 무게를 실어 말했다. 얼굴이 벌게진 자일스가 벌떡 일어나 사납게 발을 굴렀다. "그건 말도 되지 않습니다! 가짜 후계자의 반지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걸 그냥 덮고 넘어가신다니! 가짜임을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습니까, 아버님? 가짜라는 것만 밝혀지면 두 연놈의 목을 자를 수 있고, 그것으로 모든 건 깨끗이 종결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냐, 자일스?" 한순간 말문이 막힌 자일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르키젤은 날카로운 어조로 연이어 추궁해 들어갔다. "그 계집애가 가지고 있는 반지가 가짜라는 걸 어떻게 밝힐 셈이냐? 진짜 후계자의 반지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한 명도 없다!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느냐, 자일스? 모든 이들이 연회장에서 벌어진 일을 마법이 아닌 기적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짜라는 네 말을 믿어 줄 자가 과연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들은 이미 기적을 보았고 그걸 뼛속깊이 각인시켰다! 그런 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납득시킬 셈이냐?" "그건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별 볼일없는 마법나부랭이였을 뿐입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깊이 숨을 들이 쉰 마르키젤이 어느 정도 진정된 어조로 말했다. "앉아라, 자일스." 자일스가 뻣뻣하게 몸을 움직였다. "잘 들어라, 가짜후계자의 반지는 이대로 덮어둔다. 그러니 더 이상 들추지 마라. 내가 조금 전 말한 기적은 단순히 반지에서 빛이 나오고 크기가 줄어든 것만을 칭한 게 아니다. 그 전에 일어났던 사건, 즉 그 계집애가 화형대에 매달렸을 때에 벌어졌던 일을 포함해 언급한 것이다. 생각해봐라, 자일스. 사람들의 눈에 기적으로 비춰질 만한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들은 더욱 깊고 견고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거기에 더해 마르키젤은 시조의 현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자이다. 그 누구도 둘의 관계를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섣불리 그 계집애를 건드리려 하다간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마르키젤이 자일스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제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이를 악물고 있던 자일스가 마르키젤의 시선을 피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후계자의 반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또 전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엘리시엔을 네 친누이처럼 대해줘라." 자일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말이 나오기는커녕 숨까지 막혀 오자 그는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그렇게 놀랄 필요없다, 자일스. 사람들의 눈이 널 향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하라는 뜻이다. 즉 그럴듯한 연기를 하란 말이다." "대체 제가 왜 그런 짓까지 해야 됩니까?" 자일스가 숨가쁜 어조로 물었다. "그 계집애를 깨끗이 제거해야 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그게 바로 이유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든 걸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줘야 아는 거냐?" 마르키젤의 얼굴에 짜증이 나타났다. "아시리움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지금 리아잔과 아시리움의 사이는 무시하기 힘들만큼 틀어진 상태다. 거기에 덧붙여 아시리움은 그 계집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적이 될 거란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시리움이 누구를 겨냥해 그런 발표를 했을 것 같으냐? 멍청하고 어리석은 평민들과 귀족들? 아니다, 그건 바로 너와 나에게 보낸 경고였단 말이다." 자일스가 격한 숨을 들이켰다. "차기 황권의 행방이 불확실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집애가 의문의 죽음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 세상의 모든 이들이 가장 먼저 누구를 의심하겠느냐?" "아버님과 저겠지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마르키젤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아시리움에선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아 보복하려 들 겁니다. 그럴듯한 빈말이었다해도 자신들의 입으로 세상에 공표한 이상 그 말을 지키려 할 테니까요." "그래, 자일스. 네 말이 맞다. 우린 되도록 아시리움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이번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소한 불씨가 빌미가 되어 아시리움이 우리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법황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를 다룰 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건드리지 않으면 아시리움도 움직이려하지 않을 것이다. 리아잔 제국의 적이 되는 건 그들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자일스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였다. "그러니까 전 아시리움과 그 천한 계집애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 그럴듯한 연기를 하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란 말이다. 그렇다고 가짜 후계자의 반지로 우릴 우롱한 놈까지 묻어 두라는 말은 아니다.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내라, 자일스. 뒤에서 모든 일을 조종한 놈... 그 놈의 정체를 반드시 찾아내라. 그 계집애를 없애야 할 때가 오면 그 놈도 살려 두어서는 안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버님.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잡겠습니다. 그래서 제 손으로 숨통을 끊어 버리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감춰진 사실을 모조리 토해내게 만들어야 되겠지요." 마르키젤은 만족스런 얼굴로 등을 기댔다. "그만 나가 봐라, 자일스." 자일스는 묵묵히 자리에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 계집애를 없애야 될 때가 오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허락할 수 없다." 마르키젤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왜 허락하지 않으시겠단 겁니까?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좀 전에도 말했지만 경솔히 일을 처리하면 아시리움이 개입할 위험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네게 그 일을 맡기란 말이냐? 넌 지금까지 내가 만족할 만큼 훌륭히 일처리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믿고 그처럼 중요한 일을 맡기겠느냐?" 발끈하려던 자일스는 애써 성질을 가라앉혔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아버님. 우선 가짜후계자의 반지를 만들게 한 놈을 찾아내겠습니다. 그 일을 잘 해낸다면...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십시오." "알았으니 어서 나가 봐라." 마르키젤이 성가시다는 듯 팔을 크게 휘저었다. 자일스는 다시 한 번 예를 갖춰 보인 후 문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힘은 뒀다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낑낑대는 거냐? 왜, 아껴 두었다가 마누라한테 귀여움 받으려고? 네놈 하는 꼴을 보자하니 엉덩이 채여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만." 유이나르에게 쓴소리를 들은 남자가 투덜거리며 짐을 어깨에 걸쳤다.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일꾼을 괴롭히던 유이나르는 마지막 짐이 나가자 끙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동안 꼴 보기 싫은 얼굴 참아 주느라 고생들 많았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소. 고맙소, 백작." 조금 침울한 얼굴로 창가를 서성이던 리반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유이나르가 떠난다는 사실에 자신도 놀랄 정도로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헤어지는 게 꽤 가슴 아픈 모양이로구나." 히죽 웃어 보인 유이나르가 요란하게 혀를 차댔다.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나중에 후회하면 뭐하누? 답답한 녀석같으니." 기가 막힌 리반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리오를 쳐다봤다. 인상을 구기고 있던 리오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후회는 무슨 후회? 괴팍한 늙은이 면상 다신 보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날아갈 것 같고만." "그런 누더기 꼴로 날면 볼만은 하겠구나. 허우적대다 고꾸라져 납작하게 뻗어도 날 찾진 말아라." 유이나르가 낄낄대며 말을 받았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시오!" 걸음을 옮기려던 유이나르는 엉거주춤 침대를 빠져나오는 리오를 멀뚱히 바라봤다. 절뚝이며 다가온 리오가 다짜고짜 유이나르를 끌어안는가 싶더니 후닥닥 몸을 떼냈다. "징그럽게 이게 뭔 짓이야? 내 눈을 똑바로 봐라, 난 네가 죽고 못사는 보라색 눈도 아니란 말이다!" "그 흉칙한 얼굴에 보라색 눈이 가당키나 한 소리요? 못생긴 얼굴 더 이상 보기 싫으니 빨리 사라지시오!" 애써 감추려하는 리오의 얼굴엔 옅은 홍조가 그려져 있었다. 유이나르가 입술을 헤벌쭉 벌리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겼다. "죽상한 채 서 있지 말고 빨리 침대로 돌아가. 다음엔 후줄근한 넝마 꼴을 봐도 못 본 체 지나갈 생각이니 알아서 몸조심해." 심술궂은 말을 남기고 유이나르가 밖으로 나갔다. 리오와 리반은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닫힌 문을 바라봤다. 한숨을 내쉰 리반이 리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가서 마차 타는 거까지 볼 걸 그랬나?" "아서라, 무슨 좋은 소릴 들으려고? 볼썽사납게 낄낄거리며 '내가 그렇게 좋으냐',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하는 짜증나는 말이나 할 게 뻔하지." 리반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난 이상하게 그 노인을 보면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떠오르더라고." "뭐? 할아버님이 떠올라? 어떻게 우리 할아버님한테 그 괴팍한 늙은이를 들이댈 수 있냐? 무덤에 계신 할아버님이 경기를 일으키시겠네! 내 평생 그렇게 웃긴 얘긴 처음 듣는다. 그 능글맞은 할아범한테 단단히 홀린 것 같은데... 정신 차려, 임마!" 퉁명스럽게 핀잔을 줬지만 리오도 리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리반의 미심쩍은 눈길을 받자 리오의 얼굴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당황한 리오가 시선을 피하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은 왜 안 오는 거야? 할아범이 떠나기 전에 오겠다고 제 입으로 말했으면서. 아마 자기가 한 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괴상한 브레이슬릿이나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을 거야.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괜히 알짱대며 엄청나게 자랑하던 모습 너도 기억하지?" 리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고 엘이 들어왔다. "젠장!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네!" "알렉스,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떡해?" 소스라치게 놀란 두 사람이 모난 눈으로 엘을 노려봤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나랑 말도 하지 않겠다며? 사람이면 당연히 문으로 출입해야한다고, 둘이 지난 번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서 브레이슬릿도 쓰지 않고 힘들게 뛰어왔단 말이야! 오면서 두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고!" 엘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거야, 네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게 소름 끼쳐서 그런 거고... 기껏 힘들게 뛰어왔다면 안에 있는 사람 놀라지 않게 문을 두드려야지." "아니면 인기척이라도 내든지." 리반이 리오의 말에 꼬리를 붙였다.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잊지 않을게." "그런데 치료사 할아범을 만나기 위해 온 거라면 한발 늦었어. 벌써 나갔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오래되진 않았으니 서둘러 좇아가면 출발하기 전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엘은 리오에게 씩 웃어 보인 뒤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실은 여기 들어오기 전에 복도에서 인사를 나눴어. 조촐한 선물도 전해드렸고. 난 유이나르 할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는지 몰랐어. 술병을 보더니 입을 함지박하게 벌리고, 신통하다며 내 머릴 쓰다듬어 주기까지 하시더라고. 누가 뺏어 갈까 무서운지 술병을 꼭 품에 안고 가시는걸 보니 웃음이 나오더라." "나참, 술에 찌든 치료사한테 목숨을 내맡기고 있었다니... 진작 알았으면 내 옆엔 오지도 못하게 하는 건데..." 리오가 투덜거렸다. "그것보다, 둘 다 이리 앉아 봐. 할 말이 있어." 갑자기 심각하진 엘의 어투에 놀란 두 사람이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참, 넌 누워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 엉거주춤 걸어오는 리오를 보고 뒤늦게 리오의 몸 상태에 생각이 미친 엘이 걱정을 드러냈다.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약골인 줄 알아?" 리오는 재빨리 찌푸린 얼굴을 펴고 뻐기듯 말했다. 미심쩍게 리오를 바라보던 엘이 말을 시작했다. "너희들이 관련된 일이 좀 생겼어." "무슨 일인데?" 리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은 리반과 리오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본 다음 한숨을 섞어 말했다. "조금 전 황제폐하를 뵈었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체르몬 국에서 공식전문이 왔대." "뭐?" 얼떨결에 등을 곧추 세운 리오가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굽혔다. 엘과 리반이 동시에 소리쳤다. "괜찮아?" "그래, 괜찮으니까 어서 말이나 해 봐." "그 전에 우선 침대에 누워." 리오의 창백한 안색을 살피던 엘이 고갯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그럴 필요없어." "난 있어." 엘은 강하게 주장했다. "속 터져 쓰러지는 꼴 보기 싫으면 어떤 전문이 왔는지나 빨리 말해." "차라리 쓰러져. 그럼 널 침대에 던져 놓고 말해 줄 테니까." "어휴! 짜증나는 고집불통 같으니!" 리오가 눈을 부라리자 엘도 덩달아 눈꼬리를 치켜 떴다. "내가 고집불통이라고? 넌 아닌 거 같아? 너도 마찬가지야, 리오! 아무튼 난 네가 침대에 눕지 않으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 절대!" "너 이럴 때마다 정말 못생겨 보인다는 거 알아? 지지리도 못생긴 들창코 마귀할멈처럼 보이는 게 모르지?" 심술궂은 말이 끝나자마자 엘이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입술 삐죽삐죽 내미는 네 모습도 그리 멋지진 않아, 리오. 오히려 웃기게 보이지." "뭐, 웃기게 보여?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 "말했잖아, 웃기다고."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둘의 실랑이를 들으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리반이 마침내 끼어 들었다. "두 사람 다 제발 그만해.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으니까. 어린애들처럼 그게 뭐야? 정말 누가 엿들었을까 봐 무섭다. 너희들 좀 창피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안 들어!" 입을 모아 소리친 엘과 리오가 서로를 마주봤다. 곧 두 사람의 입술에 슬그머니 웃음이 번졌다. "내가 알렉스 옆으로 자리를 옮길 테니까, 정 침대가 싫으면 의자에라도 누워, 리오. 침대보다야 못하겠지만 등 세우고 앉아 있는 거 보단 훨씬 나을 거야." 리반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럴 필요없다니까. 멀쩡한 사람 다 죽어가는 병자취급하고 있어." 힘든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던 리오는 괜히 툴툴거리며 리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엘은 조금이라도 리오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베개를 가져왔다. "이제 됐지? 어서 말해 봐." 엘은 리반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전문을 직접 보지 못해서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저 내가 폐하께 들은 대로만 간단히 말할게. 체르몬 국에서 너희를 데려가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했어. 전문을 띄우며 동시에 그들을 출발시켰다니까, 내 생각엔 빠르면 30일, 늦어도 40일 안엔 도착하게 될 것 같아." "우리 신분이 드러났다면 큰일이잖아. 우리도 그렇지만 너도 입장이 난처해질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리오가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들었다. "벌써 잊었어? 지금은 엘의 손님 자격으로 황궁에 있지만, 난 치료사 노인의 제자로 알려져 있어. 더군다나 넌 좀도둑으로 잡히기까지 했고. 그런데 우리가 체르몬 국의 왕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거야. 일이 잘못되면 우리는 물론 엘까지 곤란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단 말이야." 리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근심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리반이 엘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황제폐하께서 우리에 대해 무슨 말씀 안 하셔?" "별다른 말씀 안 하셨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없어. 아직까지는 너희 둘과 체르몬의 왕자들을 연관지어 생각지 않고 계시니까. 연회장에서 리반을 보긴 하셨지만 잠깐동안이었고, 리오가 도둑으로 몰렸던 일은 전혀 모르고 계실 가능성이 높고... 오늘 날 불러서 몇 가지 물어 보시긴 했지만 내 생각엔 크게 신경 쓰진 않으시는 것 같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안도감이 돌던 리반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자일스 황태자가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어. 분명히 입 다물고 있진 않을 텐데...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마, 리반. 자일스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리오와 리반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흘긋 본 다음 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황태자의 성격을 잘 아는 네가 어떻게 그런 장담을 할 수 있는 거야?" "맞아, 자일스 놈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자식이야. 피에 굶주린 거머리같은 놈이라고." "너희를 안심시키려고 괜히 해본 말 아니야. 그러니까 날 믿고 자일스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하지마." 엘의 자신있는 말은 오히려 두 사람의 의혹만 부풀려 놓았다. "자일스와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알렉스, 빨리 털어놔 봐!" "그 자식하고 비밀만남이라도 가진 거야? 널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놈하고?" 엘은 두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말을 막았다. "둘 다 그만해, 별 일 아니니까. 난 그저 너희들의 신분을 밝히는 일이 자일스한테도 좋지 않으리라란 걸 깨닫게 해준 것 뿐이야. 그러니 자일스는 잊어버리고 다른 얘기나 하자. 으음... 그래, 너희 부모님께선 둘이 지금 리아잔의 황궁에 있는지 어떻게 아시고 사람들을 보내신 걸까?" 쓴웃음을 짓던 리반이 순순히 엘에게 발을 맞춰 주었다. "아시는 게 당연하지. 아시리움 종단이 성전에서 가짜 왕족 노릇을 한 죄인을 쫓는다는 얘기로 오랫동안 천지가 들썩였어. 그와 함께 다닌다는 빨간 머리 쌍둥이 얘기도 세상에 파다했고. 그러다가 그 죄인이 리아잔 제국의 정통후계자란 믿기 힘든 사실이 밝혀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실 수 있겠어?" "걱정 많이 하셨겠지? 화도 많이 나셨을 테고..." 리오가 불편한 심경을 내보였다. "그렇시겠지. 각오 단단히 하고 돌아가야 할거야." 힘없이 말한 리반이 다소 밝게 어투를 바꿨다. "아시리움 측에서 성전무단이탈에 대한 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뜻을 이미 부모님께 전했을 거야. 어마어마한 근심거리가 없어졌으니 부모님도 크게 안심하셨을 테고." "그래, 우리가 돌아가면 처음엔 좀 화를 내시겠지만 심하게 혼내진 않으실 거야. 당분간 성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정도의 벌을 내리시겠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럼 이번 일도 점점 과거 속으로 묻혀지겠지... 어쩌면 다 잊어버리게 될 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면......" 리오는 그늘진 눈으로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엘의 얼굴에도 울적한 표정이 그려졌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리반이 한숨을 삼키며 화제를 돌렸다. "지금 남아있는 가장 큰 문제는 체르몬에서 온 수행원들이 황궁에 도착하면 우리 신분이 밝혀지게 되리란 거야. 그 즉시 황제폐하께 보고가 올라갈 테니까. 더군다나 떠날 때 정식으로 인사도 드려야 되고." 리오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맞아! 우리 신분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야!" "그래, 큰 문제가 남아있었어." 엘이 말을 거들었다. "우리 신분이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리오는 숨죽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잘 모르겠어. 우리 체르몬 국에게 그리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는 것...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 심란한 침묵이 흘렀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이 말을 꺼냈다. "어쩌면 아무 탈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 "무슨 방법이 있는 거야?" 리오와 리반이 눈을 크게 뜨고 엘을 주목했다. "체르몬 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삼사십일 후에 도착한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황궁 무도회의 초대객들이 오는 때와 겹쳐지게 돼. 이제 알겠지? 그 때쯤에는 왕족이며 귀족, 또 그들과 함께 온 기사와 하인들로 황궁이 넘쳐 나게 될 거야." 리반의 안색이 밝아졌다. "네 말이 맞아, 알렉스. 그 소란 속에서 체르몬 국 사람들을 눈 여겨 볼 이들은 없을 거야. 또 우리가 먼저 만나 주의를 시키면 될 테고." "혼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떠나는 걸 봤는데, 황제폐하를 뵙고 직접 인사 올리는 사람은 아주 드문 것 같더라." "그래,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그 많은 초대객들을 하나하나 만나진 않을 거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전관이나 시종장에게 알리고 황궁을 떠나겠지. 네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놓인다. 정말 한시름 놨어, 알렉스." 리반이 따뜻한 눈으로 엘을 바라봤다. "이제 와 말하는 거지만, 정말 고마워. 아시리움 종단이 우리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한 거 다 네 덕분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마음 편히 앉아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정말 고맙다, 알렉스." "애초부터 누구 때문에 일이 시작된 건데... 그런 말 하지마, 리반. 빈말이 아니라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진단 말이야." 리반은 엘이 울상을 짓자 장난스럽게 씩 웃어 보였다. "엘리시엔 전하, 어찌 고귀하신 분이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전하 정도 되시면 적어도 개구멍은 찾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리반, 너 계속 그럴래? 자꾸 그러면......" "자꾸 그러면?" 리반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음흉하게 매일 야한 소설만 읽는다고 소문낼 거다!" 엘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어이가 없어진 리반이 입을 딱 벌렸다. "내가 언제 야한 소설만 읽었어? 지난번 데클란 평원에서 몇 권 읽은 게 전분데! 그리고 그 책은 나뿐 아니라 너도 읽었잖아! 나중엔 자기가 더 열심히 읽었으면서!" "그거야 사실이지만... 너도 생각해봐, 나 정도되는 고귀한 분이 그런 책을 읽었다는 말을 어느 누가 믿겠어?" 약 올라 하는 리반을 보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있던 엘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피식거리던 리반도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리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쉴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래, 리오? 일이 잘 안 풀릴까 봐? 걱정하지마, 아무 일없이 체르몬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알렉스 말이 맞아. 그러니 괜히 어울리지도 않는 분위기 잡고 있지마." 엘과 리반도 리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별을 슬퍼하며 우울해 하기엔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두 사람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리오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왜 이래? 난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애들 장난같은 말싸움이 듣기 싫어 그런 건데. 너희들 좀 유치하다는 생각 안 들어?" "안 들어!" 엘과 리반이 입을 맞춰 소리쳤다.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제 목 [달의 아이] 72장.소리없는 움직임-1 제 72장. 소리없는 움직임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모든 것이 밤의 적막 속에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한갓 어둠이 던진 눈속임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남자는 어둠 속에 몸을 묻은 채 건조한 밤 공기를 호흡했다. 그가 조심스레 걸음을 떼자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열흘 가까이 하늘에선 따가운 햇살만이 쏟아질 뿐 빗방울 하나 내리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차가운 건물 벽에 다다랐을 때 남자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묘한 화음을 빚어 내고 있는 낮은 바람소리와 구슬픈 풀벌레 소리가 날 선 긴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는 안쪽 깊숙이 넣어 두었던 작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연한 금빛을 띤 구슬은 남자의 손길이 닿자 갓난아기의 주먹만한 크기로 변했다. 남자는 구슬을 손에 쥐고 머리에 새겨 두었던 주문을 외웠다. 구슬이 점점 달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남자는 신중하게 걸음을 세어, 정확히 여섯 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구슬을 벽에 힘껏 집어던졌다. 벽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았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모든 걸 삼켜 버리려는 듯 순식간에 벽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동자에 만족감이 차 올랐다. 그는 요란한 고함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뒤로 하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꾸벅꾸벅 졸다 정신을 차린 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여 뭉친 근육을 풀었다. 졸음이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자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아몬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엘이 그만 돌아갈까, 생각하며 졸린 눈을 비빌 때였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아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갑게 맞으려던 엘은 그를 부축하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을 발견하고 재빨리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어서 누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스럽게 말한 중년의 시종이 고갯짓을 하자 다른 시종이 허겁지겁 뛰어가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왜 이렇게 자꾸 두통에 시달리시는지......" 시종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아몬을 침대에 눕혔다. "전 괜찮으니 나가 보십시오." 아몬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거칠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편히 쉬십시오." 두 시종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왔다. "어의관님들도 모르시겠다며 하나같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시니... 정말 큰일이네요." "그러게 말이네, 좋다는 약을 다 써봐도 소용이 없고......"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신 게 분명한데... 안색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리는 걸 처음 봤을 땐 당장 숨이 넘어가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때,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하루종일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그뿐인 줄 아세요?" 언성이 높아지자 중년의 시종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찔끔한 남자가 침실 문을 살핀 다음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시끄러웠죠?" "괜히 우리 때문에 통증이 더 심해지시면 큰일이니 어서 나가는 게 좋겠네." 젊은 시종을 먼저 내보낸 중년남자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엘은 발소리가 희미해지자 몸을 펴고 책상 앞으로 걸어나왔다. 가느다란 신음소릴 들은 건 그녀가 침실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는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고 가느다란 틈 사이로 침실을 들여다봤다. 엎드린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몬이 보였다. 엘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당장 아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잠시동안 아몬을 지켜보다 힘없이 브레이슬릿에 손을 가져갔다. 참고 참았던 비명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나왔다. 아몬은 연이어 쏟아지는 비명을 참기 위해 으스러져라 말아쥔 주먹에 이를 박아 넣었다. 패인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끔찍한 두통을 상쇄시킬 수는 없었다. 아몬은 고통으로 요동치는 머리를 움켜잡고 몸부림쳤다. 눈을 질끈 감자 이대로 숨이 멎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필사적인 아우성이 그의 이성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몬은 스멀스멀 두려움이 피어오르자 커다랗게 눈을 부릅떴다. 선혈이 낭자한 피웅덩이에 빠진 듯 세상이 온통 붉은빛으로 보였다. 그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 시선을 집중했다. 불분명했던 시야가 선명해짐에 따라 그의 육체와 영혼을 지배했던 잔인한 고통이 서서히 뒷걸음질쳤다. 돌연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아몬은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기침이 터질 때마다 둔탁한 꼬챙이로 후벼 파내는 것같은 통증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기침이 잦아들자 그는 숨을 멈췄다. 이제 숨을 쉬는 것조차 겁이 났다. 아몬은 잠시동안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느릿느릿 움직여 위를 향해 누웠다. 이상한 느낌이 든 건 그가 가슴에서 막 손을 떼었을 때였다. 그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피로 얼룩진 손바닥이 눈을 파고들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가슴에 꿇렸던 작은 상처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몬은 부들거리는 손을 축축한 가슴 위에 얹었다. 그리고 텅 비어 버린 듯한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더듬었다. 아몬은 자신의 운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 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한동안 몸을 떨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웃음은 어느새 가느다란 흐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쥬네비아는 자일스의 기척을 느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가느다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에 걸려있었다. 자일스는 무시하는듯한 쥬네비아의 태도가 불쾌해 일부러 거친 동작으로 의자에 앉았다. 쥬네비아는 그제야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절 찾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오늘이 아니라 이틀 전에 들으셨을 텐데요?" 짜증이 치밀자 자일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쥬네비아에게 모난 시선을 던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애써 정중한 답변을 내놨다. "요 사이 이런저런 바쁜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 힘들었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어미를 만나러 올 시간조차 없었는지 궁금하군요, 황태자.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어머니께선 아실 필요없는 일입니다." 자일스는 딱 잘라 말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실 말씀 끝나셨다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어서 앉으시오, 황태자!" 쥬네비아는 팔걸이를 움켜잡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가 자일스를 보자고한 이유는 심각할 정도로 벌어진 아들과의 관계를 바로잡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자일스와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보면 서로간의 오해도 풀리고, 아들과 엘과의 사이도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틀동안의 초조한 기다림과 귀찮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자일스의 태도는 당초 계획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감히 내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가, 감히... 감히라고요? 지금 내게......" 쥬네비아는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예, 감히라 했습니다! 감히 내게 명령하지 말라고, 제가 어머니께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일스는 날카롭게 소리친 다음 거만한 얼굴로 쥬네비아를 내려다봤다. "전 장차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될 몸입니다. 그 누구도, 설령 어머니라해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못합니다." "명령을 하려는 게 아니오! 왜 황태자는 내 말을 고깝게만 듣는 것이오? 왜 자꾸만..." 호된 질책을 퍼부으려던 쥬네비아는 입술을 꼭 닫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말해 보시오, 황태자. 이렇게 엇나가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황태자의 마음이 풀리겠소?" "그건 제가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어머니께선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엘리시엔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로군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쥬네비아의 모습에 자일스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일부는 맞습니다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전 그 계집애와 어머니 사이를 질투할 정도로 어리지 않습니다. 그 계집애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자리를 넘보지만 않는다면 황궁에 살든 말든 무시하고 지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꽤 오랫동안 아시리움 성전에서 나란히 교육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찌보면 그 계집애와 전 동기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일스는 말을 멈추고 재미있다는 얼굴로 히죽 웃었다. "아시리움 성전에서의 일이 떠오르니 새삼스레 그 계집애가 가깝게 느껴지는군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쩌면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쥬네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황태자가 리아잔의 황위를 잇게 되면 엘리시엔을 누이동생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글쎄요... 노력은 해볼 수 있다는 말 정도로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 주제넘은 계집애를 톡톡히 손봐 준 다음, 마음 내키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때는 이미 뻣뻣한 송장이 되어있을 테지만... 자일스는 마음속으로 본심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그가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쥬네비아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요새 신분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자가 황태자의 거처에 자주 드나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자일스가 거친 동작으로 빙글 돌았다. "절 감시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눈들 때문에 황궁에선 비밀이 없다는 것쯤은 황태자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험악하게 치켜 뜬 자일스의 눈썹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관심 두실 만한 자가 아니니 품위없게 염탐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문제로 절 오라가라 하지도 마십시오. 그 계집애와 지금처럼 구역질나는 관계를 유지하시는 한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관심없습니다. 그러니 용건이 있으시면 다음부턴 어머니께서 직접 절 만나러 오십시오." 자일스가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가 버리자 쥬네비아의 입술에서 가냘픈 탄식이 흘러나왔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요아상 백작부인이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폐하..."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아무 말도......" 쥬네비아는 느릿느릿 고개를 가로젓다 힘없이 눈을 감았다. "전하, 돌아오셨군요!" 베린은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리자드를 발견하자마자 반색하며 달려갔다.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리자드가 그를 지나쳐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베린은 서둘러 그 뒤를 따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자릴 비우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지금 막 물러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지난번 명하셨던 성벽보수 문제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리자드는 집무실 앞에 이르러서야 베린을 흘긋 돌아봤다. "들어와라." 안으로 한발 들어서던 리자드가 돌연 멈칫하더니 절도있게 몸을 돌려 가로막듯이 문 중간에 버티고 섰다. "내가 따로 부를 테니 보고는 나중에 올려라." "저, 전하..." 어안이 벙벙해진 베린의 코 앞에서 단호하게 문이 닫혔다. 그가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 문이 다시 열리더니 이번엔 경비병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너희들도 물러가라." 베린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있는 경비병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서 왜 저러시는지, 아는 거 없나?" "저희도 모르겠는데요." "혹시 나보다 먼저 온 중요한 손님이 계신 건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지키고 있는 한, 개미새끼 한 마리도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일까?" "글쎄요." 베린과 경비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리자드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잔뜩 찌푸린 그의 청회색 눈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엘에게 꽂혀 있었다. "일어나라, 여긴 네 침실이 아니다." 리자드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엘의 입술에서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흘러나왔다. "이... 나쁜 놈... 어서 꺼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엘을 내려다보던 리자드의 입술에 조금씩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대체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는 심란한 한숨을 내쉰 다음 엘을 향해 몸을 굽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와 다리를 조심스럽게 받쳐 안아 올렸다. 엘이 불편한 듯 몸을 바르작거리더니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곧 그녀의 입술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집어던져 버릴까?" 말과는 달리 리자드는 그녀를 편히 고쳐 안으며 걸음을 떼었다. 그는 엘을 깨우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천히 걸어 휴식을 위해 집무실 안쪽에 마련해 놓은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긴 안락의자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리자드가 허리를 펴려 했을 때 엘이 몸을 뒤척이더니 그의 목에 양팔을 감았다. 리자드는 손을 올려 뱀처럼 휘감긴 팔을 풀어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간지러울 만큼 보드랍게 치워 주었다. 그리고 팔을 내리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엘의 이마를 좀 강하다 싶을 만큼 세게 튕겼다.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라." "이런 제길!" 엘은 벌떡 일어나 앉아 화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리자드를 노려보며 번뜩이는 보라색 눈동자에선 졸음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야만인! 피곤해 잠이 든 숙녀한테 폭력을 휘두르다니!" 리자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내가 때린 건 잠자는 숙녀가 아니라, 잠자는 척하는 철부지였다." "내가 자는 척하고 있었다고 누가 그래요?" 리자드는 발끈해 쏘아붙이는 엘을 무시하고 술병이 놓인 선반으로 걸어갔다. 엘은 잔에 술을 따르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려고요?" "너 때문에 골치가 아파 마시는 거다." 퉁명스럽게 말한 리자드가 눈을 흘기고 있는 엘을 향해 건배하듯 술잔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잔을 기울여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청회색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흩어졌다. 그 작은 변화가 평소의 엄격하고 딱딱한 분위기의 그를 부드럽고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기 쉬운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그녀의 가슴에 기묘한 파문이 일었다. 엘은 그 정체 모를 미세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술잔을 채워 창가로 가 서는 리자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심스레 비밀을 품고있는 듯한 침묵이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널 보는 거,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신 날 찾아오지 마라." "하, 말도 안돼!" 엘은 즉시 반발했다. 리자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의 판단은 내가 한다. 넌 내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군말없이." 리자드의 말투는 오만하리만큼 냉정했다. "내가 리자드 보고 싶어 여기 온 줄 알아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혼자 착각하지 말아요." 엘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리자드가 비스듬히 눈썹을 치켜들자 그녀의 볼이 괜스레 붉어졌다. "아몬을 만나러 왔다 가, 잠깐 들른 거예요. 물어 볼 것도 있고... 또 그냥 가면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여기 온 거란 말이에요." 고통스러워하던 아몬의 모습이 떠오르자 엘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아몬이 아픈 것 같던데... 많이 안 좋은 거예요? 며칠 전 봤을 때 괜찮아 보여서, 다 나은 줄 알았어요. 대체 어디가 아픈 거예요?" 리자드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엘은 답답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말 좀 해줘요! 리자드는 알 거 아니에요!" "넌 알 필요없다." 엘은 숨을 죽였다. "심각한 거로군요. 아몬한테 뭔가 나쁜 일이 생긴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혹시 나 때문인가요? 지난 번에 날 돕다가 정신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일 때문인가요?" 엘은 리자드에게 다가가다 대답을 듣기가 무섭기라도 한 듯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겨 리자드의 팔을 잡았다. "그런 거죠? 날 돕다가 아몬이 큰 부상을 입은 거죠? 나 때문에 아몬이 아픈 거죠?" 엘의 손가락이 리자드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리자드는 말없이 엘을 응시하다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네가 아프게 하고 있는 건 아몬이 아니라 나다." "리자드가 이까짓 걸로 아파할 사람이에요? 괜히 말 돌리려 하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줘요. 아몬이 아픈 거... 나 때문이죠?" 보라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리자드는 손을 올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엘의 머리를 서너 번 쓰다듬은 다음 그녀의 어깨를 한 번 강하게 잡았다 놓아주었다. "너 때문이 아니다. 아몬은 나 때문에 아픈 거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그리고 왜 아프게 된 건데요? 리자드 때문에 아픈 거라고 했죠? 대체 아몬한테 뭘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했기에......"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에 나타난 괴로움을 깨닫는 순간 엘은 입술을 닫았다. 리자드가 몸을 돌려 창 밖을 내다봤다. 엘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눈길이 마디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술잔을 움켜쥐고 있는 리자드의 손에서 멈췄다. 엘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술잔에 단단히 감겨있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냈다. 리자드는 술잔을 빼내 창턱에 올려 놓는 엘을 막지 않았다. "난 뭘 해야 하나요? 아몬을 돕고 싶어요." 엘은 살며시 리자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리자드도요. 리자드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 리자드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줘요. 아몬을 도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청회색 눈동자가 일순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어두워졌다. 리자드를 괴롭히는 갖가지 감정들이 그의 강렬한 눈동자 속에서 몸부림치며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엘은 숨을 죽였다. 굳은살이 박인 길고 강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강하게 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리자드가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아몬은 괜찮을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 "내가 도울 일 없어요?" 느닷없이 리자드가 낮고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그가 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엘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리자드는 창턱에 놓여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단숨에 술을 들이킨 그가 팔을 내렸다. 그의 입가엔 자조가 그려져 있었다. "돌아가라." 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함이 묻어 나오는 리자드의 목소리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엘은 리자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팔은 아래로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늘진 넓고 꼿꼿한 어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해할 수 없게도 엘의 가슴에 쏴하니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엔 언제 만날까요?"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냉랭한 말만 나왔을 뿐 리자드는 그녀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정떨어지는 말을 하려면 최소한 상대방 얼굴은 쳐다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빈정거렸다. "뭐, 좋아요. 리자드가 이러는 것도 다 날 위해서일 테니까요." 즉시 어림없는 얘기라는 뜻의 코웃음이 날라왔지만 엘은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보게 되면, 리자드나 나나 입장이 곤란해질 테니까요. 이상한 소문도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테고... 잘못하면 날... 으음... 그렇게 한 사람이 리자드라는 사실도 밝혀질 테고요.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거예요." 리자드가 엘을 잠깐 돌아본 다음 몸을 바로잡았다. "지금까지 네 입에서 나온 것 중, 유일하게 말이 되는 얘기였다. 혹시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냐?" 엘은 끓어오르는 성질을 참기 위해 세 번 연달아 심호흡을 했다. "역시 리자드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하는군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날 오지 못하게 한다는 거요.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해요.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만나면 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널 만나기 위해 사막 한복판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냐? 차라리 팔이 부러질 때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 먼바다로 나가는 건 어떻겠느냐?" 리자드는 비딱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나참, 심술 난 어린애처럼 자꾸 그럴 거예요? 난 내가 리자드의 침소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한 거라고요." 리자드의 등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침소로 찾아오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청소니 뭐니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일찌감치 오전에 다 끝마치게 해야 돼요. 내가 알아서 주의를 하겠지만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으음... 리자드가 하루종일 침소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좀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게 좋겠군요." 뻔뻔할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말한 엘이 별안간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예요? 세상에, 혹시 이상한 상상한 거 아니에요? 리자드와 내가... 뭐... 그런 거요." 엘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 볼을 감싸자 리자드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엘은 터지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재빨리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내가 침소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한 건, 솔직히 말해 농담이었어요." 그녀는 찔리는 마음을 감추지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런데 리자드는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난 리자드가 그렇게 음흉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세상에... 어떻게 리자드하고 내가... 우리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또 리자드는 멀쩡한 정부까지 있는 사람이고......" 엘은 슬며시 눈을 치켜 떠 속눈썹 사이로 리자드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리자드가 거만한 어조로 말했다. "헛소리는 벌써 끝난거냐? 어디 계속해봐라. 되바라진 강아지가 겁없이 짖어댄다고 생각하면 그뿐이니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저 농담이었을 뿐이에요. 누가 리자드 보고 싶어하기나 한대요?" 엘은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만약 내 침소에 있는 네가 눈에 띄면, 그 즉시 창 밖으로 집어던져 버릴거다. 절대 농담이 아니니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랬단 봐요! 며칠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하게 무릎을 빠개져라 걷어차 줄 테니까!" 엘은 으르듯이 말하며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한 다음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난 이만 가볼 테니...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또... 혼자서 모든 짐을 지려고 하지 말아요... 내가... 내가 있잖아요." 말이 끝나자마자 엘의 모습이 사라졌다. 리자드는 엘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에서 거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아버님, 전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제 목 [달의 아이] 72장.소리없는 움직임-2 "왜 자꾸 이렇게 흉흉한 일이 벌어지는 건지......" 에르난드 대사제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였다. 말을 받는 보르헤스 대사제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괴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니... 더군다나 뭐 하나 정확히 아는 것도 없고... 이렇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은 제 생전 처음 겪어 봅니다." 두 명의 대사제는 시선이 맞닿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테르제 대사제만 계셨더라도 이런 일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결하셨을 텐데... 하필이면 이럴 때 성전을 비우시다니......" "그렇군요, 테르제 대사제가 계셨군요! 테르제 대사제께 연락을 취해 한시라도 빨리 성전으로 돌아오시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갖가지 해괴한 사건들을 여러 번 해결하신 테르제 대사제시라면 이 정도 일쯤은 눈감고도 처리하실 겁니다." 에르난드 대사제의 말에 보르헤스가 반색을 했다. "하지만 테르제 대사제께선 지금 리아잔 제국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시리움 신전이 세워지지 않은 도시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가까운 신전에 들어가 대사제임을 밝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잘만 되면 하루이틀 안으로 돌아올 수 있으실 겁니다." 보르헤스는 당장이라도 테르제 대사제와 연락을 취하고 싶은지 엉덩이까지 들썩였다. "제 말은 오랜만에 친우며 친족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계실 분께 갑자기 돌아오시라는 연락을 한다는 게 좀...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성전엔 우리말고도 두 명의 대사제가 더 계시지 않습니까?" 보르헤스 대사제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 분들 얘긴 꺼내지도 마십시오. 별 거 아닌 일에 괜한 소란을 피운다며, 관심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셨습니까?" 무시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던 두 대사제의 모습이 떠오르자 보르헤스는 불쾌감을 숨길 수 없었다. "만약 성하께서 성전에 계셨다면 그 분들이 어떻게 나오셨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분명히 우리보다 먼저 나서서 일을 해결하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에르난드 대사제가 보르헤스의 다리를 툭 건드리며 헛기침을 했다. 보르헤스는 그제야 그들 두 사람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르 고위사제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건넸다. "내 말은 에르난드 대사제와 내가 있으니 굳이 그분들까지 피곤한 일에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네."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정중히 응수한 차르 고위사제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날이 완전히 저물게 될 것입니다. 불상사를 막으려면 철저하게 사전준비를 해야 하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결정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알았네, 늦지 않게 명을 내릴 테니, 그보다 먼저 이번 사건에 대해 되도록 자세히 말해보게.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얘기를 듣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 수도 있으니까." 에르난드 대사제의 요구에 차르 고위사제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사흘 전 자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문서보관소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연기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근처를 지나던 순찰병 두 명이었습니다. 놀란 두 사람이 불이 났다고 소리치자 순식간에 이십여 명의 사제와 병사들이 불을 끄러 달려왔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몰려든 사람들이 거의 이백 명을 헤아릴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불은 아무리 많은 물과 모래를 날라다 쏟아부어도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이상히 여긴 메리나 사제가 갖고 있던 손수건을 불에 가져가 대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손수건엔 불은커녕 그을음 하나 묻지 않았다, 그런 말이로군." 보르헤스 대사제가 끼어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계속해보게." "그제야 사람들은 문서보관소를 덮은 화염이 실제 불이 아닌 단순한 환상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생각에 잠겨 깊은 신음소릴 내던 보르헤스가 에르난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 그 점이 이해되지 안됩니다. 환상이라면 당연히 열기도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거움을 생생히 느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매캐한 연기 냄새를 분명히 맡았다고 모두 입을 모으기까지 하더군요." "혼란스러운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르헤스 대사제.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감각까지도 실제와 똑같이 일깨울 수 있는 환상마법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 하더군요. 충분한 마법력만 뒷받침 된다면 말입니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보르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말씀 계속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차르 고위사제가 입을 열었다. "불이 난 틈을 노린 도둑이 물품보관소에 침입해 서너 개의 고가품을 훔쳐 달아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그러니까 이틀 전 비슷한 시각에 문서보관소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이번엔 좀더 일찍 환영이란 걸 알아챘지만 그땐 이미 남사제관이 털린 뒤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 자정 무렵 똑같은 사건이 다시 발생했습니다." 차르 사제가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추자 보르헤스가 뒤를 이었다. "문서보관소에 또다시 불길이 솟았고, 이번엔 남관에 있는 두 고위사제의 처소에서 이백 큐어가 없어졌다는 말이겠지." "예, 대사제님.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마커스 고위사제가 백 이십 육 큐어를, 헌트 고위사제가 구십 오 큐어를 잃어버려, 도합 이백 이십 일 큐어가 됩니다."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없네. 중요한 건 사건을 빨리 해결해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거지, 훔쳐 간 돈의 액수가 아니지 않나?" 보르헤스의 짜증섞인 꾸지람에 차르 사제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말씀이 옳습니다, 대사제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상세한 얘기를 명한 건 바로 우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서 사건에 대한 얘기로 돌아갑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르난드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 에르난드 대사제께서도 오늘 밤 역시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시는 거로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흘 연속 일어난 사건이라면 오늘도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르헤스 대사제. 제가 가장 이상하게 여기는 건,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자라면 굳이 환상마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냥 곧바로 물건을 훔칠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고를 구태여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보르헤스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저 역시 그 점이 수상합니다. 사실 없어진 물건도 고가품이긴 하나, 그리 귀한 건 아니었잖습니까? 그런데 물건 몇 개와 이백 큐어가 조금 넘는 돈을 훔치기 위해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아시리움 성전은 그 어느 곳보다 보안과 경비가 철저한 곳입니다. 만약 제가 그 범인이라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성전에서 도둑질을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의 저택을 택하면 훨씬 손쉽지 않겠습니까?" 탁자에 둘러앉은 세 사람의 얼굴엔 하나같이 짙은 혼란이 나타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제, 기사, 또 시종들 할 것없이 성전의 모든 사람들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범인이 사람까지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빠져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 더 발생한다면 성전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것이고, 얘기가 성전 밖으로 흘러 나가 아시리움의 이름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범인의 진짜 속셈은 따로 있는 것 아닐까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차르 고위사제가 소견을 밝혔다.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하지만 우선 자네의 견해를 들어보고 싶군. 어서 말해보게나." 에르난드 대사제가 차르 사제를 재촉했다. "범인이 노린 건 금붙이같은 단순한 물건이나 돈이 아니라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지난 사흘 연속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의 목적을 쉽게 이루려는 계책인 것 같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틀림없을 것 같네!" 흥분한 보르헤스 대사제가 소리를 높였다. 에르난드 대사제도 동조하고 나섰다. "예, 저도 차르 고위사제의 말이 맞다 생각합니다. 없어진 돈이나 물건은 논외로 밀어내고 그 나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겠습니다. 즉 문서보관소와 환상마법에 말입니다." "문서보관소라고요? 문서보관소에서 불길이 치솟은 건 사람들의 눈을 그 곳에 쏠리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을 테니...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을 것 같은데요?" 보르헤스가 반대의견을 내놨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 대사제. 아시리움 성전엔 세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건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하필 문서보관소를 선택해 사흘 연속 불이 난 것처럼 꾸몄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문서보관소를 선택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보르헤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듣고 보니 그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대체 범인은 무엇을 노리고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른 걸까요?" "글쎄요, 범인의 윤곽조차 알 수 없으니... 첫날은 그렇다 치고 둘째 날과 셋째 날은 불길이 치솟자마자 문서보관소 주위를 샅샅이 뒤졌잖습니까? 그런데도 범인에 대한 작은 단서하나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환상마법을 사용한 거로 봐서 아마 범인은 마법사가 아니면 마법도구를 가지고 있는 자일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그저 어림짐작일 뿐이니... 대체 범인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 정말 암담합니다." 에르난드 대사제의 한탄을 끝으로 세 사람은 한동안 입을 꼭 다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르 사제, 혹시 지도 가지고 있나?" 갑작스레 나온 질문에 움찔한 차르 고위사제가 에르난드 대사제를 바라봤다. "지도라면, 성전지도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예, 필요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지도를 챙겨 왔습니다." "그거, 잘했네! 어서 그 지도 좀 펴 보게!" 늘 침착하고 조용하던 에르난드 대사제가 크게 소리치자 차르 사제는 덩달아 흥분해 허둥대며 지도를 폈다. "건물이 너무 많고 복잡해 잘 모르겠군. 문서보관소는 어디쯤 있는 건가?" "바로 여기입니다, 대사제님." 차르 고위사제가 지도 위에 표시된 문서보관소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으음... 문서보관소가 여기라면 남관과 남사제관은... 어디 보자,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바로 여기 있군. 그리고 물품보관소는......" "물품보관소는 남사제관과 건물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차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르난드 대사제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게 된 거였어!" "에르난드 대사제, 무엇을 알아내신 겁니까?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에르난드는 보르헤스가 보기 편하도록 지도의 방향을 돌렸다. "지도를 자세히 보십시오. 범인은 문서보관소에서 남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세 건물에 침입했습니다. 문서보관소가 중요하리라는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문서보관소는 하나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범인은 우리가 문서보관소에서 눈을 뗄 수 없으리라 예상했을 겁니다. 보르헤스 대사제도 아시겠지만 문서보관소는 목조건물입니다. 요사이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바짝 마른 오래된 목조건물은 작은 불씨 하나에도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것입니다. 환상마법으로 몇 번이나 골탕을 먹었다고 해도 당연히 우리는 문서보관소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지도에서 눈길을 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문서보관소에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놓고 다른 중요한 걸 훔치려 했다는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남관과 남사제관 모두 중요한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범인이 가장 먼저 침입했던 물품보관소엔 값비싼 물건이 상당히 많을 테지만 말입니다." 보르헤스가 돌연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렇군요! 범인의 목표는 아마 처음에 침입했던 물품보관소일 겁니다. 그런데 첫날엔 시간이 촉박하여 귀중품 서너 개 밖에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그 후 경계가 삼엄해져 물품보관소의 침입이 어려워지자 차선책으로 그 곳과 가까운 남관과 남사제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범인은 우리의 시선을 문서보관소와 성전의 남쪽지점에 잡아 두려 했습니다. 범인의 진짜 목표는 거기가 아닙니다. 그 곳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 바로 북쪽일 겁니다." "북쪽이라고요? 하지만 북쪽엔 그리 중요한 건물은 없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서,설마......" 보르헤스가 입을 멍하니 벌리자 에르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제께서도 알아차리신 것 같군요. 예, 범인이 노리는 건 아시리움 성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물, 바로 유물보관소입니다." 보르헤스 대사제와 차르 사제는 잠시동안 유물보관소라 표시된 지도의 작은 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들은 자신들이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결론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에르난드 대사제 말씀이 옳습니다. 유물보관소엔 값을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한 귀하디 귀한 유물들이 보관되어있습니다." "저도 이제 알겠습니다. 범인이 노리는 건 유물보관소가 틀림없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에르난드를 향하는 두 사람의 눈엔 숨김없는 감탄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차르 사제가 황급히 일어섰다. "전 어서 가서 유물보관소에 철통같은 경계를 펴라 지시하겠습니다. 모든 성기사들과 병사들을 총집결시키겠습니다. 아, 만약을 위해 문서보관소에도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야겠군요. 범인이 진짜 불이라도 지르면 큰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눈속임이란 것이 확인되면 최소한의 필요인원만을 남긴 채 그 즉시 유물보관소로 이동하라는 명을 내려놓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주게. 그 동안 우리 두 사람은 고위사제 서너 명과 유물보관소에 가보겠네. 모두 귀중한 보물이긴 하지만,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유물들을 선별해 잠시동안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는지 살펴봐야겠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막고 귀중한 유물을 지켜야 하니까요." 세 사람은 굳은 의지와 사명감이 깃든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빠르게 발을 놀려 부랴부랴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탁자 옆에 검은 연기가 아른거리더니 두 명의 감시자가 모습을 보였다. "에르난드 대사제의 생각이 맞다고 보십니까?" "그래, 맞다고 확신한다. 대사제들 중에서도 꽤 쓸만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차분하던 어조가 별안간 날카로워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유물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지키겠지만, 범인을 잡는 건 우리 몫이다. 사흘 내내 놈을 잡는데 실패했다. 우리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다니... 범인은 아마 상당한 능력을 가진 자일 것이다." "몇몇 주요 장소만 제외하고 최대한 많은 수의 감시자들을 모아 유물보관소 곳곳에 배치시키겠습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감시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여라." "예, 알겠습니다." 절도있는 동작으로 머리를 숙여 보인 감시자가 머뭇거리며 질문을 꺼냈다. "성하께 보고 드리는 일은 직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기껏해야 성가신 좀도둑에 불과하다. 성하께서 신경 쓰실 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다. 사건이 깨끗하게 마무리되었을 때, 즉 범인의 정체를 밝힌 다음 보고 드릴 생각이다. 자, 우리도 어서 움직이는 게 좋겠다. 대사제들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는지도 점검해야 하니까." 일순 피어난 검은 연기가 두 감시자들을 휘감았다. 어느새 그들이 사라진 곳에 묵직한 땅거미가 가라앉고 있었다. 제 목 [달의 아이] 73장.그림자의 윤곽-1 제 73장. 그림자의 윤곽 무거운 발자국 소리들이 나무계단을 울렸다.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가 심하게 부어 오른 젊은 남자가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인 채 비틀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바닥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남자가 몸을 휙 돌리며 뒤따라오던 사내를 힘껏 밀쳤다. 그가 다른 사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뒤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그의 팔과 가슴을 한꺼번에 휘어감고 바짝 조였다. 발이 들리며 옴짝달싹 못하게 된 남자가 격렬히 몸부림을 쳤다. 마침내 몸이 풀려 났을 때 그의 얼굴로 억센 주먹이 날아왔다. 충격을 못이긴 남자가 중심을 잃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남자에게 밀려 넘어졌던 사내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 이를 갈며 연거푸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 정도만 해, 그러다 재수없게 숨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오메른님이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실 것 같아?" 마지못해 주먹을 내린 사내가 씨근덕거리며 남자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그만 좀해, 살짝 넘어진 거 갖고 너무하는 거 아냐?" "하여튼 저 지랄같은 성질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남자를 일으켜 세운 두 명의 사내가 축 늘어진 그를 질질 끌고 좁은 복도를 지났다. 복도 끝 에 이르자 사내들 중 한 명이 문을 열었다. 나무의자에 앉아 작은 탁자 위로 다리를 걸치고 있던 오메른이 남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래, 드디어 잡았구나. 어떤 놈인지 좀 자세히 보고싶다." 오메른이 부하들에게 가까이 데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 즉시 그들이 남자를 오메른 앞으로 끌고 가 꿇어앉혔다. "얼굴을 좀 들어봐라." 뒤에 서 있던 부하가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남자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오메른은 남자에게 위협적으로 얼굴을 접근시켰다. 피투성이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채 스무 살도 안된 것 같군. 이런 애송이일 줄이야." "사,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오메른님... 제발 목숨만... 시키시는 대로 뭐든지 다할게요...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울먹이며 애원하던 남자가 두려움에 질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묻는 말에만 고분고분 대답하면 살려 주겠다. 나도 너같은 어린애가 죽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감사합니다, 오메른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남자가 숨차게 소리치며 연신 머리를 굽실거렸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딱 한가지다. 너에게 사디키를 만나 반지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 자, 그 자가 누구인지만 말해라. 그럼 죽이지 않겠다." "베르그님입니다! 바로 글렌 베르그님이 그런 명을 내리셨습니다!" "베르그라고? 정말 글렌 베르그가 맞느냐? 베르그가 직접 너를 불러 사디키를 만나라는 명을 내렸단 말이냐?" 오메른이 재차 반문했다. "예, 그렇습니다! 베르그님입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오메른의 입술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잘 알았다. 네가 협조해 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게 되었다. 고맙다." 남자의 얼굴에 짙은 안도감이 나타났다. 오메른의 미소가 깊어지자 남자가 그를 따라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난 이만 나갈 테니, 이 놈은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해라.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으니 너무 고통스럽게 죽이진 마라." 넋이 나간 남자를 일별한 오메른이 밖으로 나갔다. 히죽거리는 얼굴들이 남자를 에워쌌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덮쳐 온 끔찍한 고통이 그의 덧없는 망상을 산산조각 냈다. "이렇게 셋이 함께 식사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탁자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둘러보던 리오가 감회 어린 눈을 엘과 리반에게 올렸다. "글쎄... 내 기억으로는 데클란 평원에서 모닥불을 쬐며 먹은 저녁식사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그래, 그 때 이후로 처음이야." 엘이 리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 데클란 평원에서 사고를 당하고, 그 때문에 너희들과 떨어지게 되었고, 마차가 부서져 리오가 다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다행히 사일러스 단장과 기사들, 또 아몬을 만나고..." "괴팍한 치료사 할아범도 만나고." 리오가 리반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며 엘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 사제님은 어떻게 됐어? 그 루... 뭐라던 사제님 말이야." "아아, 루드비히?" "그래, 그 사제님 말이야, 눈빛 하나로 사람을 꽁꽁 얼려버리던. 친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꽤 오랫동안 여행을 함께 했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좀 너무 했다는 생각도 들고. 설마 나쁜 일 당한 건 아니지? 아시리움의 사제 신분으로 도망자였던 널 도와줬잖아. 그런데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그게... 으음... 그러니까 말이야... 루드비히는......" 엘은 두 사람에게 루드비히가 법황이란 사실을 밝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혹시 처형 당한 거야?" "리오!" 리오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으며 리반을 쳐다봤다. "내가 못할 말 했어? 그 사제님을 곱게 놔둘 아시리움이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 만약 법황성하께서 그 사제님에 대해 아셨다면... 죽어도 곱게 죽진 못했을 텐데... 혹시 팔과 다리를 네 마리 말에 하나씩 묶은 다음 철썩 채찍을 갈겨 사지를 찢어 죽인 거 아닐까?" 엘과 리반 모두 인상을 썼지만 리오는 자기 말에 취해 더욱 목청을 높일 뿐이었다. "교육을 중시하는 아시리움이라면 의관 견습사제들을 위한 해부용으로 넘겼을지도 몰라. 좀 안됐다는 마음은 들지만 외모가 워낙 뛰어나니 해부할 맛은 났겠다. 그래, 바로 그거야. 외모하니까 생각난건데, 아시리움 성전의 어느 음습한 곳에 갇혀 있는 거 아닐까? 그곳에 갇힌 채 괴상한 취향을 가진 대사제한테 희롱을..." "그만해, 멍청아!" 리반이 버럭 소리치자 리오가 눈을 부라렸다. "저게 누구한테 멍청이래! 임마, 넌 위아래도 없냐?" "위아래 좋아하시네! 너같은 바보가 내 위에 있다면 난 행복을 위해 평생 바닥만 내려다보며 살 거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네 고개는 내가 발로 꾹꾹 밟아 주마." "네가 행여나? 그 시간에 잠이나 쿨쿨 자고 있겠지, 눈치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무신경한 녀석같으니." "어어, 그래. 넌 눈치 많아 좋겠다, 지겹게 잘난 체만 하는 녀석아! 웃음을 참고 있던 엘이 말다툼 사이로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 좀 해. 루드비히는 아무 일없이 잘 있으니까." "뭐? 그거 정말이야? 정말 아무 일 없이 잘 있는 거야? 어떤 피해도 없이? 작은 상처하나 없이? 사제직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처음엔 웃는 낯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엘도 질문이 계속되자 더 이상 호응해 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덧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오, 너 이제 보니 루드비히한테 이만저만 감정이 쌓인 게 아닌가 보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난 그냥 사제님이 걱정돼서......" 엘과 리반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리자 너무 했다 싶었는지 리오도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식사나 하자, 음식이 다 식었겠어." 엘은 리반의 말이 끝나자 의자 밑에 감춰 두었던 술병을 꺼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축배부터 들자. 좀 늦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걸 축하해야지." "잘했어, 엘! 정말 훌륭한 생각이야! 그럼 당연히 축배를 들어야지!" 엘은 지나치게 기뻐하는 리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넌 그저 입술만 축여야 돼, 리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잖아." "말도 안 돼! 난 너희 둘보다 몇 배는 건강해!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거뜬히 이길 수 있단 말이야! 어디 지금 당장 덤벼보라고!" 엘은 맹렬히 부르짖는 리오를 무시하고 리반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리오 앞에 놓인 잔에 술병을 가져갔다. 그녀는 채 한 모금도 안 되는 술을 따른 후 슬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간절하게 빛나고 있는 푸른 눈과 마주치자 마음이 약해졌다. 엘은 한숨을 내쉬며 잔을 반 정도 채웠다. 리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드디어 인간다운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리오를 위해! 또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은 알렉스를 위해!" 리반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엘이 말을 받았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날 친구로 삼아 준 리오와 리반을 위해!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정말 고마워." "괜한 말로 분위기를 망치는 바보를 위해! 또 아무 탈 없이 잘 있다는, 짜증날 정도로 운 좋은 루, 뭐라는 사제님을 위해!" 진지하게 소리친 리오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붙였다. "아름다운 사제님! 오오,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제님! 사제님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절 불쌍히 여기시어, 애정이 담긴 그 싸늘하고 살벌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절 꽁꽁 얼려주십시오!" "아서라, 그러다가 사제님이 진짜 나타나시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리반이 실감나게 몸서리를 쳤다. 엘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희들 자꾸 그러면 루드비히한테 이른다!" "겁 안 나니 이르고 싶으면 일러라. 설마 사랑한다고 울며 매달리는 사람을 죽이기야 하겠냐?" 세 사람은 낄낄대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후끈 달아올랐던 체온이 식자 오메른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를 집어 들어 걸치며 침대 위에 길게 엎드려 있는 체사레를 바라봤다. "자는 거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체사레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는 건 아니로군." 오메른은 탁자로 다가가며 물었다. "술 한잔 하겠나?" "좋아." 체사레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대꾸했다. 그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다음 느릿느릿 일어나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술잔을 두 개 들고 온 오메른이 그에게 하나를 건넸다. 체사레가 팔을 뻗어 술잔을 받아 들자 그의 날씬한 근육이 매끄럽게 꿈틀거렸다. 오메른의 눈동자에 가라앉았던 욕망이 되살아 났다. 오메른은 체사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손을 등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그의 목줄기에 입술을 묻었다. "생각없어." 체사레가 단호한 손길로 오메른의 얼굴을 밀어냈다. 오메른은 잠시 망설이다 순순히 체사레에게서 물러났다. 갖고싶은 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었던 그였지만 체사레에게만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메른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메른이 체사레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종종 찾는 고급식당에서였다. 시중꾼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오는 체사레를 봤을 때 오메른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떨 수 없었다. 그게 겨우 삼십 일전의 일이라니...... 그 짧은 기간 동안 오메른은 체사레에게 그의 과거는 물론, 평생을 간직해온 비밀스런 열망까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오메른은 자신 외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믿음에 어긋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체사레 앞에선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로 자신을 숨김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어떤 이유를 달든, 어떤 핑계를 대든 오메른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가 가장 어처구니 없어 하는 건 정작 자신은 체사레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동안 여러번 체사레를 조사해 보았지만 손에 들어오는 건 전무했고, 체사레 역시 자신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오메른은 체사레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 옆에 머무는 체사레에게 늘 강한 의혹을 느꼈다. 하지만 체사레은 이미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언젠가 체사레로 인해 내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겠지. 오메른은 나른하게 하품을 하는 체사레를 바라보다 씁쓸하게 웃었다. "글렌 베르그란 자는 언제 잡아 올 거야?" 질문은 마친 체사레가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오메른은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탁자 위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나흘이나 닷새 후." 오메른은 약간 딱딱하게 대답한 다음 술잔을 비웠다.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체사레가 다가와 그의 술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오늘 해 버리면 될걸. 왜 며칠이나 미룬 거야?" "베르그같은 거물을 다룰 땐 먼저 완벽한 계획부터 짜는 게 순서니까." "어떻게해서든 작위 하나 얻을까 싶어 귀족 놈들 앞에서 빌빌거리는 졸부도 거물측에 들어가다니... 정말 요지경세상이 따로 없군." 체사레가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사병과 경호원들이 베르그의 저택을 이중삼중으로 싸고 있다. 또 베르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경호원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나? 자그마치 스무 명이다. 이 바닥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실력자 스무 명이 눈에 불을 켠 채 그를 보호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베르그를 쉽게 봤다간 오히려 이쪽이 먼저 당할 수도 있다." "그 대단하다던 오메른도 몸을 사릴 때가 있군." 기분이 상한 오메른이 딱딱한 어조로 맞받았다.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신중을 기하는 거다. 시끄러워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랬다간 말이 새어 나갈 위험도 있고... 일을 망칠수도 있다. 또 일의 진행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황태자를 위해서도 며칠 늦추는 게 낫다." 오메른은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나서 거추장스러운 쓰레기를 버리듯 빈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체사레가 발끝으로 잔을 걷어찬 다음 오메른 앞에 앉았다. "그럼 황태자한테 벌써 연락을 취한 거야?" "그래, 그러니까 베르그를 만나는 자리엔 아마 마체라타도 참석하게 될 거다." "마체라타라... 아, 그 붉은 머리 여자 말이군. 그 사나운 여자를 꽤 잘 본 것 같던데......" 체사레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오메른이 피식 웃었다. "질투하는 거냐?" "글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체사레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말대로 마체라타가 상당히 마음에 든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종잡을 수 없고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여자는 처음이다. 마체라타같은 여자는 자신을 버리는 남자에게 울며불며 매달리진 않을 테지." 오메른의 입술에 진한 냉소가 피어올랐다. "술로 자신을 망치지도 않을 테고... 분풀이로 어린 아들을 때리는 일도 하지 않을 거다." "아직도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 아들을 위해, 건배!" 체사레가 조소 띤 얼굴로 오메른을 향해 술잔을 치켜들었다. 오메른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이글거렸다. 체사레가 술을 마시려는 찰나 오메른이 그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으스러져라 움켜쥐는 손아귀 힘에 눌려 은잔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날 비웃으면 내 손으로 네 목을 분질러 버릴 테다." 체사레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치켜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나대신 운명을 달리한 그 불쌍한 잔이나 놔주라고. 그냥 농담이었단 말이야. 넌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탈이야, 오메른. 사실 그럴 땐 네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해. 하지만 실제는 소름끼칠 만큼 잔인하지. 그래서 내가 널 못 떠나는 것 같아." 체사레의 금빛 눈동자가 야릇하게 반짝였다. "난 냉혈한들에게 유난히 강한 매력을 느끼거든." 오메른이 체사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나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냐?" "내 기억이 맞다면 접근은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옆 자리에 앉은 내게 같이 술 한잔 하자고 말을 건 사람이 누구였지?" "넌 분명히 의도적으로 그 식당에 들어와 바로 그 자리에 앉은 거다. 나한테 접근하기 위해서." 체사레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이런 들켜 버렸군." "다시 묻겠다. 왜 나한테 접근한 거냐?" "인생이 너무 재미없어서. 네 옆에 있으면 적어도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았거든. 지금까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의자에서 일어선 체사레가 침대로 걸어갔다. "맨몸으로 앉아 있기엔 공기가 좀 쌀쌀하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메른? 너도 이쪽으로 오는 게 어때?" 체사레가 뒤를 돌아보며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왜 싫어?" 오메른은 침대에 눕는 체사레를 바라보다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은잔을 던져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제 목 [달의 아이] 73장.그림자의 윤곽-2 "편히 주무십시오, 전하." 엘은 머리를 조아리는 중년여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메이나도 잘자요." 그녀의 미소를 본 메이나가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메이나는 엘이 자신을 증명해야 살 수 있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 시종과 시녀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그녀를 걱정해준 사람이었다. 엘은 자신의 위치가 확실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마자 메이나를 자신의 시녀장으로 삼았다. 처음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며 펄쩍 뛰어올랐던 메이나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누구보다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나가 밖으로 나가자 엘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자신의 침소를 둘러봤다. 늘 봐왔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이상하게도 낯선 곳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넓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왜 오늘따라 이렇게 휑하고 쓸쓸해 보이는 걸까? 엘은 작게 도리질을 하다 침대로 다가갔다. 푹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나아질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녀는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엘은 은은하게 빛나는 브레이슬릿이 눈에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그녀는 망설임없이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엘을 맞은 건 어둠이 내린 정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드비히를 찾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엘은 어렵지 않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엘과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루드비히를 향해 걸음을 떼려고 했을 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안 오십니까?" 엘은 루드비히 옆에 멈춰 선 다음 입을 열었다. "예, 몸은 피곤한데 이상하게 침대에 들기는 싫더라고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울적한 마음도 들고... 또 아까 저녁식사 시간에 루드비히 얘기가 잠깐 나왔거든요. 그래서 말동무할 사람으로 루드비히가 떠올랐나 봐요. 거기다 루드비히는 워낙 잠이 없는 분이니까 잠깐동안만이라도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잠깐동안의 친구라... 절 친구라 생각지 않으셨나 보군요." "아니요, 그건......" 반박하려던 엘은 혼란을 느끼며 입술을 닫았다. 그녀에게 있어 루드비히는 친구라 규정짓기엔 불편하고, 그렇다고 친구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내키지 않는 존재였다. "좋습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친구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다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루드비히의 어조는 담담하기만 했다. "좀 걷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어두운데요?" 엘은 꺼림칙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달이 뜨긴 했지만 구름에 반 정도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정원을 걸을 만큼 환한 건 아니었다. 엘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나뭇가지에 눈이 찔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산책을 방해할 정도로 어둡지 않습니다."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선한 바람이 살짝 들어 올린 얼굴 위로 기분 좋게 와 닿았다. "술을 드신 것 같군요." "술 냄새나요?" 엘은 옷자락을 들어 올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루드비히가 웃음 띤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체온이 변하신 것 같아 해본 말입니다. 그런데 제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군요." "예, 술을 마셨어요. 두 잔이요. 리오와 리반하고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축하하고 싶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우리 셋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고 장난치고 얘기하는 걸 제가 그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루드비히는 모를 거예요." 루드비히가 엘의 어깨를 잡더니 살짝 끌어당겨 늘어진 나뭇가지를 피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지들을 젖혀 앞길을 터주며 편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키 큰 교목 숲으로 그녀를 들여보냈다. 그 순간 달이 구름을 젖히고 말간 얼굴을 드러냈다. 엘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슬 젖은 나뭇잎들이 달빛을 모아 엮은 화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엘은 기분을 더욱 울적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에서 눈을 돌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는 분이 왜 그렇게 우울해 하시는 겁니까? "익숙하지도 않은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봐요." 엘은 가볍게 응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본심이 털어놨다. "그게... 사실은 친구가 아프거든요. 이름이 아몬인데, 어떤 때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 같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자상한 오빠 같기도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몬이 힘들어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요. 도와주고 싶은데 내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게 절 자꾸 힘 빠지게 해요. 어의관들도 고개를 가로젓는다는데 약초 몇 개 아는 제가 대체 아몬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어요?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루드비히처럼." 엘이 별안간 탄성을 터뜨리며 걸음을 멈췄다. "루드비히! 그래요, 루드비히가 있었어요! 이럴 수가! 루드비히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엘은 루드비히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몬 좀 도와줘요, 루드비히! 아몬이 지금 많이 아파요.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는 몰라요. 하지만 루드비히라면 아몬을 낫게 해줄 수 있을 거예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아몬한테 가는 게 좋겠어요." 흥분해 어쩔 줄 몰라하는 엘과 반대로 루드비히의 얼굴은 점점 냉정하게 변해갔다.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어리둥절해진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시간이 늦어서 그래요?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인데 그까짓 시간이 무슨 상관이에요." 낮은 한숨을 흘린 루드비히가 엘을 마주보고 섰다. "잘 들으십시오. 전 아몬이란 사람을 도와 줄 마음이 없습니다." 엘은 무심결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와 줄 마음이 없다고요? 아픈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데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도와 줄 마음이 없으시다고요? 어디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죠. 아, 그렇군요. 거룩하신 성하께선 같은 말씀을 반복하는 걸 몹시 싫어하시는 분이셨죠." 냉소적으로 비꼰 엘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러지 말아요, 루드비히."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어조였다. 엘은 루드비히에게 한발 다가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몬을 반드시 고쳐줘야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아몬을 한 번 보시기만이라도 하면 안되나요? 고쳐줄 수는 없다해도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이라도 해 주실 순 있잖아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만약 그조차도 싫다 하시면......" 엘은 심호흡을 한 다음 강경하게 말을 붙였다. "다시는 루드비히를 보지 않을 거예요. 절대 농담이 아니에요."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이채가 번득였다.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같은 거 할 마음 없어요. 하지만 루드비히가 제 말을 협박으로 느끼셨다면 협박일 수도 있겠죠."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협박이라... 겨우 그 정도로 절 움직일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루드비히의 입술에 보일듯 말듯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냉기가 서려 있는 은회색 눈동자가 즐거워서 생긴 미소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루드비히에게 제 말이 먹혀 들었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중요하지,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이유를... 아몬을 도와주지 않겠다 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루드비히는 선선히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유라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한 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말을 끊은 루드비히가 엘의 손을 들어 올려 오목하게 패인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조금씩 미끄러진 입술이 엘의 손목에 이르렀다. 팔딱팔딱 뛰는 맥박에 깊숙이 입을 맞춘 루드비히가 얼굴을 들었다. "그 상대가 제아무리 소중한 영혼의 반려자라해도 말입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빼냈다. 루드비히는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 바라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보였다. 엘은 엉뚱한 상상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까닭 모를 느낌에 사로잡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미풍이 불어와 루드비히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의 주위로 아름다운 은빛 후광이 물결치는 듯 보였다. 엘은 마치 한올 한올 생명을 가지고 있는 듯 섬세하게 나부끼는 실버블론드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루드비히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엘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그냥 가면 어떡해요? 말을 해주고 가야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혼 어쩌구가 대체 무슨 뜻이냐고요? 엉뚱한 말만 하고 휭 하니 가 버리면 어떡해요?" 질문이 더해질수록 언성도 높아졌지만 루드비히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루드비히 때문에 미치겠다고요." 엘은 투덜거리며 이미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루드비히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하지만 밤눈이 그리 밝지 않은 그녀가 걷기에 낯선 정원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엘은 채 열 걸음도 가지 못하고 움푹 패인 곳에 발을 디디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되었다. 탁월한 순발력의 소유자인 엘은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탄력있게 몸을 굴렸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빠져 데클란 평원에서 다쳤던 왼쪽 손목을 돌출된 나무뿌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런 제길!" 엘은 밤하늘을 향해 험한 말을 뱉어 낸 다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일어나 앉았을 때 앞엔 어느새 되돌아온 루드비히가 서 있었다. "또 다치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한숨 섞인 어조로 물었다.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엘은 따지듯 맞받아쳤다. "그래요, 또 다쳤어요! 내가 루드비히같은 부엉이 눈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알아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와서 약 올리는 거예요? 괜히 아픈 사람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어서 가버려요! 목에 칼이 아니라 칼, 창, 활, 도끼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루드비히한테 치료해달라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드비히가 쿡쿡 웃으며 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디를 다치신 겁니까?" 엘은 뚱한 표정만 지을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으르듯 말했다. "셋 셀 동안 말씀하시지 않으면 그냥 가 버릴 겁니다. 아프다고 울어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하! 기막혀! 울긴 누가 울어요?" "하나... 둘..." 엘은 버럭 소리쳤다. "그래요, 가 버려요! 가 버리라고요! 그러면 내가 무릎하고 손목이 아프다고 말할 것 같아요? 어림도 없죠!" 엘과 루드비히의 시선이 맞닿았다.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채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은 루드비히가 엘의 왼쪽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손목을 다쳤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것도 알아낼 수 있는 마법이 있나 보지요? 별의 별 마법이 다 있네요. 정말 마법은 신기한 것 같아요. 말하지 않아도 아픈 곳을 알 수 있으니." 엘이 감탄사를 쏟아내자 루드비히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른쪽 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치고 계셨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엘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브레이슬릿을 풀고 있는 길고 우아한 손가락을 바라봤다. "브레이슬릿이 충격을 막아줘서 다행히 심하게 삔 것 같진 않아요." 루드비히는 브레이슬릿을 바닥에 내려놓고 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곧 서늘한 기운이 손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됐습니다." 루드비히가 엘의 손목을 놔주고 이번엔 오른쪽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얄밉게 꺼냈다. "이쪽 무릎에 흙이 묻어 있어 알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마법이 아닙니다." 엘은 루드비히를 흘겨보다 브레이슬릿을 집어 들어 다시 손목에 찼다. 손목에 닿는 견고하고 친숙한 느낌이 왠지 모르게 들었던 허전함을 밀어냈다. 거기에 더해 화끈거리던 무릎의 통증도 사라지자 그녀의 기분도 자연스레 풀어졌다. "고마워요, 루드비히. 아픈 사람의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있다니...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능력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엘은 주저하다 민감한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왜 아몬은 도와주지 않으려는 거예요?" 루드비히가 엘의 무릎을 향해 천천히 얼굴을 숙였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살갗을 스치자 엘은 움찔하며 무릎을 가슴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잔뜩 움츠린 무릎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어 엘의 눈을 들여다봤다. "엘을 치료해주는 건 엘이 고통당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루드비히는 입술에 비틀어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엘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화난 척 소리를 높였다. "뭐 그런 엉터리같은 이유가 다있어요?"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서서히 팔을 뻗었다. 그는 다소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눈길을 그녀의 얼굴에 고정하고 있었다. 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바라보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루드비히도 그녀를 따라 몸을 움직이자 거리는 멀어지기는커녕 더욱 좁혀지게 되었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 하기만 해 봐요, 신전 전체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줄 테니까요. 그러면 신전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올 테고... 그러면 법황 성하는 변태라고 모든 나라에 소문이 날 테고... 그러면 루드비히는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거예요. 그,그러면......" 등에 딱딱한 나무 결이 와 닿자 엘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루드비히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어딘지 모르게 사악해 보이는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루드비히가 코끝이 부딪칠 정도까지 얼굴을 접근시켰다. 긴장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엘이 눈을 질끈 감고 루드비히를 밀치기 위해 양팔을 힘껏 뻗었다. 그녀는 텅빈 허공을 느끼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옆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있던 루드비히가 그녀의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으음... 역시 흙이 묻어 있었군요." 엘은 벙벙한 상태가 되어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본 루드비히가 웃음을 감추며 몸을 세웠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정중히 말하며 흐트러진 옷자락을 가다듬던 루드비히가 문득 손길을 멈췄다. "그런데 조금 전에 저보고 변태라 하셨습니까?" "그,그건 그러니까... 농담으로......" 엘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을 때, 루드비히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엘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변태란 말은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루드비히가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클란 평원에서 읽은 책에서요. 거기서 남자가 이상한 짓을 하려 하자 여자가 그렇게 소리쳤어요." "이상한 짓이라고요?" "예, 남자가 여자한테 입맞춤을 하다가... 정말 할 일도 없지, 글쎄 자기 혀를... 혀를... 웩! 아, 아무튼 대충 그런 거예요. 그걸 읽고나서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 몰라요. 상상만해도 징그럽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고..." 루드비히는 부르르 몸을 떠는 엘을 재미있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도 봐요, 팔에 소름이 돋았잖아요. 자꾸 몸서리가 쳐져 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루드비히 말씀대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루드비히도 쉬셔야 할 테니까요. 저기... 그리고 아몬에 대해선 다시 한 번 생각해주세요. 그러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좋으니 제게 연락해 주시고요." 루드비히가 피곤하다는 듯 가는 신음을 흘렸다.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요?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악당에, 소름이 뚝뚝 떨어지는 냉혈한이에요." "이제야 아셨군요. 예, 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악당에, 소름이 뚝뚝 떨어지는 냉혈한입니다." 루드비히가 유들유들할 정도로 매끄럽게 받아넘겼다. 엘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다 따지듯 말했다. "왜 아몬을 돕지 않으려 하시는지에 대한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 누구도 루드비히에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가 첫 번째였죠.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뭔가요?" 루드비히의 입술에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은회색 눈에 떠오른 날카로움은 그의 미소에 어두운 감정이 담겨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위협적일 만큼 엘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건 그가 루벤스타인 대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웃음소리가 엘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 멍하니 벌려진 그녀의 입술에 루드비히가 자신의 입술을 부딪쳐왔다. 엘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젖혀 그의 입술을 피했다. "루, 루드비히!" 겁내지 말라는 듯 루드비히가 그녀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쉬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받치며 허리에 팔을 감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엘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놀라 거칠게 쿵쾅거리는 심장고동을 느꼈는지 루드비히가 달래듯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탐닉하기 시작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엘의 입술을 따라 느릿느릿 맴을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움찔한 엘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루드비히의 어깨를 밀었다. 루드비히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징그럽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셨습니까?"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자 엘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자...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닌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엷은 미소가 머금어진 입술을 다시 엘의 입술에 보드랍게 포갰다. 엘은 그의 가슴을 세차게 밀쳤다. "그만해요, 루드비히." 순순히 뒤로 물러선 루드비히가 악동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 엘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그걸 원했단 말이에요?" 기가 막힌 엘이 쏘아붙였다. "흐음... 글쎄요." 루드비히가 헷갈린다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시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실까봐 미리 밝히는 건데요. 앞으로는 저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 주세요. 전 루드비히가 저한테... 그러니까... 그러는 거 원하지 않아요. 분명히 루드비히 입으로 그러셨죠? 제가 원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신다고요." 루드비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단 말씀입니까?"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뗀 루드비히는 엘이 반격할 말을 찾기도 전에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자,잠깐!" 엘이 다급히 소리쳤을 때 이미 루드비히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다시 한 번 아몬의 일을 부탁해보려 했던 그녀는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피곤에 지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런 날은 붉은 방의 악몽을 꾸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무겁게 내리 덮이는 눈꺼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엘은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까지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제 목 [달의 아이] 73장.그림자의 윤곽-3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글쎄, 난들 알겠어?" "아무래도 오늘은 영 그른 것 같아. 조금 있으면 동이 터 올 시간인데, 아직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잖아. 도둑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괜히 지레 겁먹고 헛수고만 한 셈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휴! 이게 뭔 꼴인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제대로 밥도 못먹고 꼬박 서서 말이야.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정말 죽겠다!"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기사가 찔끔해 반사적으로 부단장을 살폈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다시 한 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톡톡히 혼을 내주겠다." 기사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녹초가 된 부단장이 짜증스럽게 으름장을 놨다. "명심하겠습니다!" "또, 또! 조용히 하란 말이다!"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부단장이 돌연 숨을 죽였다. 바삐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기사들도 긴장한 채 어둠 속을 노려봤다. "저 브루노입니다, 부단장님!" 숨가쁜 목소리가 들리더니 앳된 얼굴의 기사 한 명이 부리나케 뛰어와 부단장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부단장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조금 전 유물보관소로 보낸 기사였다. "왜 벌써 돌아온 거냐?" "가는 도중 때마침 이곳으로 오고 있는 연락병을 만났습니다, 부단장님. 보르헤스 대사제께서 명을 내리시기 전까진 한 명도 움직이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알았다. 너도 네 자리로 돌아가라." "네, 부단장님." 걸음을 옮기려던 기사가 별안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부단장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문서보관소 한쪽 귀퉁이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부단장님! 저,저기 불이!" 부단장은 허겁지겁 불길을 향해 달려가며 준비해 두었던 기름 배인 천을 꺼냈다. 붉은 화염 속에 천을 던져 넣은 그는 천에 불이 붙지 않음을 확인한 다음, 철저히 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가져가 댔다. 예상대로 따뜻한 온기만이 전해졌을 뿐 화상의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은 눈속임일 뿐이다! 거기 안쪽의 열 명은 이 곳에 남아 근처에 수상한 자가 있는지 살펴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유물보관소로 이동해라!" 부단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공기를 울렸다. 기사들이 불길하게 너울대는 불꽃을 뒤로 하고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임시로 세운 천막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보르헤스와 에르난드는 밖에서 들리는 다급한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곧 천막이 젖혀지며 차르 고위사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문서보관소에 또 가짜 화염이 나타났다 합니다!" 두 대사제는 서로를 마주본 다음 앞다투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을 본 성기사단장이 황급히 다가왔다. "범인이 나타났는가?" "혹시 없어진 유물이 있는 건 아닌가?"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가?" "설마 범인을 놓친 건 아니겠지?" 흥분한 대사제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진정하십시오. 아직 범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사라진 유물도 없습니다. 유물보관소는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지금 물샐틈없는 경계를 펴고 있으니 범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 즉시 놈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리던 에르난드 대사제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이상하군. 문서보관소에 또 환상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았나?" 차르 고위사제가 앞으로 한발 나섰다. "예, 대사제님. 문서보관소를 지키고 있던 부단장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분명히 불길이 치솟았고, 그것이 가짜임을 확인하자마자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채 이 곳으로 달려왔다고 합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르헤스가 에르난드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유물보관소에 나타나지 않은 걸까요? 이 곳의 상황을 눈치채고 계획을 바꾼 걸까요?" "아직까지 아무 일 없는 거로 봐서 그러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아무리 범인이 대단한 능력자라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유물보관소에 나타나기는 힘들 겁니다." "눈치채지 못하게 꼭 필요한 인원만 동원할 걸 그랬나 봅니다. 괜히 실속없이 소란만 피운 꼴이 돼버렸군요." 의기소침해진 보르헤스 대사제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날이 밝기 전에 범인을 잡고 일을 깨끗이 마무리지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던 에르난드 대사제도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물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걱정이 너무 커, 다른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우선 기사들과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밤에 다시 유물보관소를 지켜야 될 테니까요." 에르난드 대사제가 기사단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들과 병사들을 해산시키게."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단호하게 대답한 기사단장이 점점 커지는 말발굽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곧 흐릿한 새벽여명을 뚫고 말에 올라탄 기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선 기사가 보르헤스와 에르난드 앞으로 달려왔다.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범인이 다른 곳에 나타난 건가? 그 곳이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보르헤스가 기사를 향해 부랴부랴 다가갔다. "문서보관소입니다! 문서보관소에서 극비문서들이 사라졌습니다!" "무,문서... 보관소라고?" 보르헤스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에르난드 대사제를 바라봤다. "들으셨습니까? 문서보관소랍니다. 바로 문서보관소가 털렸답니다." 핏기 가신 얼굴로 서 있던 에르난드 대사제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했습니다... 범인이 쳐놓은 함정에... 완벽하게 빠졌습니다." "여기 이것입니다." 남자가 얇은 가죽피대를 책상에 내려놨다. 리자드는 가죽피대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오십여 장의 문서를 신중하게 꺼내 들었다. 문서 몇 장을 대충 넘겨보던 리자드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을 수행하는 과장에서 정체가 드러날 만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느냐?" "예, 전하. 절 의심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하의 말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모든 게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때문에 손쉽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어조엔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일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범인을 곱게 내버려 둘 아시리움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라. 완벽하게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일체의 연락을 끊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남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리자드는 단호하지만 부드러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 많았다, 네가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남자가 애써 기쁨을 감추며 뒤로 물러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리자드는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빈틈없는 눈으로 한장 한장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 극비문서를 도둑 맞았다고 했느냐?" 날카로운 물음에 움찔한 감시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성하. 날이 밝아오기 직전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장의 극비문서가 사라졌습니다. 정확히 몇 장이, 또 어떤 문서가 사라졌는지는 아직... 감시자의 책무를 벗어나는 일이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루드비히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려움에 몰려 있던 감시자는 잔인한 침묵을 견뎌 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사건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자세히 말해봐라." "알겠습니다, 성하." 감시자는 서둘러 루드비히의 명령에 복종했다. 루드비히는 보고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범인의 목표가 문서보관소라는 걸 눈치챘을 때는... 범인은 사라지고 이미 모든 게 끝나 버린 뒤였습니다." "누군가가 문서보관소에 불을 내고 남쪽건물에 침입했다. 그래서 북쪽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 바보놀음에 감시자들까지 함께 춤을 췄다, 이런 말이로구나... 재미있군. 어린애장난에 아시리움 전체가 놀아난 꼴이라니." 높낮이없는 말투에서 싸늘한 분노가 느껴지자 감시자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왜 지금에서야 보고를 올린 것이냐?" "성하께 심려를 끼쳐드릴 만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때 말씀 올려도 되리라..." "누가 너에게 그런 판단을 내려도 좋다 했느냐?" 루드비히가 감시자의 말을 잘랐다. 하얗게 질린 감시자가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게 다 제 불찰입니다, 성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무슨 벌을 내리셔도, 그게 설령 죽음이라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루드비히가 짧게 웃었다. "네까짓 놈의 죽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차라리 이번 일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내릴 것이다." 피흐름이 멈추는 것 같은 냉혹함에 감시자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한가닥 자제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납작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성하, 전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성견을 내려주십시오." "잘 들어라,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기회다." 감시자가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범인을 찾아내라. 범인은 감시자들 중 한 명이다." 믿을 수 없는 얘기에 감시자가 격한 숨을 들이켰다. "우,우리 감시자 중에 범인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범인은 아시리움 성전을 잘 아는 내부인이다. 또 일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건 나흘동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도 감시자들의 눈을 감쪽같이 피했다는 점이다. 그건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내부인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범인은 감시자들의 시선을 받는다 해도 의심을 사지 않는 자, 즉 같은 감시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시자 중에 범인이 끼어 있었다니... 알겠습니다, 성하.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찾아내고 말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새벽빛이 깔린 창가로 걸어갔다. "돌아가라." 감시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세웠다. "난 내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배신자를 참아 줄만큼 너그럽지 않다." "제 모든 걸 바쳐 성언을 받들겠습니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돌려 결연히 빛나는 감시자의 눈을 직시했다. "열흘간의 말미를 주마. 그 안에 배신자를 찾아내라. 그렇지 못하면 감시자 전원에게 죽음이 내려질 것이다." 제 목 [달의 아이] 74장.승부수-1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루드비히는 칼락 대사제가 올린 보고문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성하, 저 류젤 하이저입니다. 올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루드비히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문이 열리며 신전의 방문자를 관리하는 고위사제가 안으로 한발 들어섰다. "성하, 바르테즈 공국의 군주이신 루벤스타인 대공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이리로 모셔오십시오." 루드비히는 리자드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치의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잠시 후 칼락 대사제의 안내를 받으며 리자드가 나타났을 때도 그를 정중히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그렇잖아도 아시리움 성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 들러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참입니다." "갑작스런 방문임에도 이렇듯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자드 역시 예의를 갖춰 루드비히를 대했다. 책상을 돌아나온 루드비히가 리자드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대공." "감사합니다, 성하."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살피던 칼락 대사제가 점잖게 말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전 이만 나가 간단한 다과라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그리 오래 계실 분이 아니니까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 루드비히가 리자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떻습니까, 대공? 제 말이 틀리다 하시겠습니까?" 리자드는 루드비히가 아닌 칼락을 향해 대답했다. "다과는 필요없소. 성하의 말씀대로 오래 있진 않을 테니까 말이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대립을 느낀 칼락은 혼란스런 얼굴로 문을 나섰다. "이토록 이른 시간에 절 만나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새벽 아시리움 성전에서 극비문서를 도난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단히 정보가 빠르시군요, 대공. 놀랐습니다. 대공껜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전 아시리움 사람이 아니라면 오직 범인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끊은 루드비히가 입술에 엷은 조소를 그렸다. "아무튼 그걸 아시고 범인이라도 함께 잡아 주시기 위해 오신 겁니까?" "물론 아닙니다, 성하.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용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미 눈치채고 계시겠지만 사라진 아시리움의 극비문서는 지금 제 수중에 있습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루드비히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란 걸 증명해 보십시오." "아시리움 종단의 3대 법황이셨던 브렌스트림 성하께선 대대적인 빈민구제활동을 벌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존경과 추앙을 아낌없이 그분께 바쳤고 그건 아시리움의 비약적인 세력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브렌스트림 성하께선 자비롭고 성스러운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계십니다.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니 더러운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더군요." 루드비히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지금 그 말씀은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시군요." "갈 곳없는 가난한 어린애들과 여자들을 노예로 팔아 넘긴 자는 쓰레기란 말도 아깝다 생각합니다. 그럼 성하께선 자신의 추악한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천명이 넘는 어린아이들을 고문해 살해한 자를 무엇이라 부르고 싶으십니까?" 리자드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글쎄요... 구역질나는 죄악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리낌없이 말을 받은 루드비히가 리자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깊숙이 등을 묻었다. "아직 말씀이 다 끝나지 않으신 것 같군요, 대공." "성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브렌스트림은 오물덩어리 중 그저 조금 큰 조각에 불과합니다. 만약 제가 갖고 있는 극비문서가 공개된다면, 그로 인해 아시리움 종단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난다면......" 리자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경고조로 끝을 맺었다. "아시리움은 결코 지금과 같은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시리움의 추악한 치부가 드러나는 걸 바라지 않으면 내 요구를 들어줘라'...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제가 원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리자드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두 가지라...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좋습니다, 대공. 갖고 계신 문서를 단 한 장도 빠짐없이 곱게 돌려주시면 원하시는 것 중 한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리자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전 분명히 두 가지를 원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성하." "문서를 넘기시고 한 가지를 가지시거나, 문서를 공개하시고 아무 것도 갖지 못하시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아시리움의 몰락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성하?" 루드비히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 전 대공께서 문서를 공개하시든, 난로에 던져 넣으시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시리움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더럽혀져도, 산산조각나 가루가 돼 버려도 전 아무 상관없습니다. 빌미를 제공한 분이 대공이시란 건,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아시리움따위야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입니다." 말을 끊은 루드비히가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칼자루를 쥔 쪽은 대공이 아닙니다." 리자드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어서 선택하십시오, 대공."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리자드는 오직 냉기만이 감도는 은회색 눈동자에서 루드비히의 말이 모두 진담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몬을 고쳐주십시오. 그럼 문서를 넘겨드리겠습니다. 또 이번 일에 관해 영원히 입을 닫겠습니다." "아몬을 고쳐 달라......" 엷은 미소를 띤 루드비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끝까지 절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대공. 전 대공께서 물건을 요구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대공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 싶어하시는 물건말입니다. 그런데 바람을 이루실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허무하게 포기해버리시다니... 아몬이란 분을 상당히 아끼시는가 보군요. 혹시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대공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시게 부추긴 건 아닙니까?" 이를 악문 듯 리자드의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오늘 안으로 아몬을 완벽하게 원상회복 시키십시오. 만약 오늘을 넘기신다면 성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아시리움을 철저히 뭉개버리겠습니다." 냉정한 목소리에선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리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 모두 의례적인 인사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았다. 찍어누른 분노를 말해주듯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루드비히는 느긋하게 등을 묻었다. "루벤스타인... 날 감탄하게 만드는군." 그의 입술에서 깊고 매끄러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루드비히는 리자드가 앉았던 의자에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의자 주위에 불그스름한 빛이 나타났다. 빛은 가볍게 일렁이며 의자를 둘러쌌다. 다음 순간 가루로 분해된 의자가 소멸하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파리한 얼굴을 보며 사일러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몬의 모습은 흡사 무덤 속에서 되살아난 시체처럼 보였다. 푸석해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고, 아래로 푹 꺼진 눈 밑엔 거무스름한 어둠이 묻어 있었다. 그를 덮고 있는 침대시트엔 붉은 피까지 배어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가슴의 출혈을 막을 수 없었다. 생명이 빠져나가듯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선혈이 옷과 두툼한 천은 물론 침대시트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건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가냘픈 숨결뿐이었다. 하지만 아몬은 가슴의 통증으로 인해 숨조차 편히 쉴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의식과 무의식의 틈바구니에서 아예 숨을 쉬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버티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그가 끝내 죽음을 맞았다고 오해한 어의관들과 시종들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아몬, 이 멍청아... 이게 무슨 꼴이야?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고?" 사일러스는 거칠게 속삭였다.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미친 듯이 악을 쓰며 밖으로 뛰어나가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는 자제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먹을 틀어쥐었다. "살아남아, 아몬. 이대로 죽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사일러스는 아몬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입술을 굳게 닫은 채 문을 나섰다. 사일러스가 나오자 밖을 지키고 있던 제러드와 카셀이 걱정스런 눈길로 그를 살폈다. 먼저 제러드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좋아 보이진 않는다." 무뚝뚝한 어조에서 아픔이 느껴지자 제러드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었다. 하지만 카셀은 그처럼 민감하지도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다. "그럼 마법사님은 곧 돌아가시게 되는 건가요?" 제러드는 잽싸게 카셀의 다리를 걷어찼다. 얼굴을 구긴 카셀이 제러드를 노려봤다. 제러드는 그보다 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코웃음을 친 카셀이 구석에 내려놓았던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단장님, 이거 아델이 마법사님 갖다 드리라고 싸준 건데요. 소화 잘되고 몸에 좋은 음식이랍니다. 지금 갖다 드려도 될까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신 전하의 명령엔 우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윽!" 단장님은 들어가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던 카셀은 제러드에게 다시 한 번 다리를 걷어 채여야 했다.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너희는 그만 내려가라, 음식은 거기 내려놓고. 아몬이 깨어나면 전해주겠다. 아마 매우 좋아할 거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가라는 말씀입니까?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 했는데... 이왕 온 거 아깝지 않게 저도 여기서 기다리면 안될까요, 단장님? 전하의 명이 철회되면 들어가 마법사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저희는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제러드는 난간을 잡고 악착같이 버티는 카셀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리고 질질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장님! 전하께선 왜 그런 명을 내리신 건가요? 마법사님께 조용한 곳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게... 젠장,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왜 꼬집어, 임마? 내가 꼬집히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 차라리 때리란 말이다! 윽! 아니, 그렇다고 진짜 때리냐, 이 치사한 놈아?"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이 눈치라곤 먹고 죽을래야 없는 녀석아!" "근데 이 자식이, 누구보고 눈치가 없대? 네녀석이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고 했냐? 엉?" 사일러스는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왜 전하께선 아몬의 거처에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걸까? 정말 아몬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게 해주려 그러신 건가? 전하께선 이제 아몬을 포기하신 건가? 그렇다면 아몬은 정말... 죽는 되는 걸까? 사일러스는 충동적으로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아몬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일러스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절대자를 향해 생전 처음 기도를 드렸다. 루드비히는 침대로 다가가 아몬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자신이 걸었던 마법을 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온 그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아몬의 상태에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루드비히는 아몬의 몸을 쭉 훑어본 다음 시트자락을 걷었다. 그가 두텁게 감겨 있는 피투성이 천을 간단한 마법으로 없애자 가슴 중앙에 난 작고 검은 구멍이 드러났다. 구멍을 주의 깊게 살피던 루드비히는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 올렸다. "암기(暗氣)라... 오랜만에 보게 되는군." 낮게 중얼거린 그는 아무 관심없다는 듯 구멍에서 시선을 떼고 아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곧 연한 푸른 빛이 일렁이며 아몬의 머리를 감쌌다. 푸른 빛이 조금 짙어지는가 싶더니 이마위로 핏빛의 괴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루드비히가 짧은 말을 속삭이자 푸른 빛과 함께 문양이 깨끗하게 자취를 감췄다. 그 순간 아몬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누구이신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루드비히임을 알아 본 아몬이 간신히 더듬거렸다. "서,성하? 어...어떻게..." 아몬은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루드비히가 냉정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대공과의 거래조건을 지키러 온 것뿐입니다. 조건대로 제가 걸었던 마법은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리자드님께서 저 때문에 성하와 거래를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대체 무슨 거래를 하신 겁니까?" "자세한 건 대공께 직접 여쭤보십시오. 그건 그렇고 매우 흥미로운 상처가 보이더군요." 아몬은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피가 묻은 손바닥을 확인한 그는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그 상처는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어떤 여인에게서 입은 상처입니다." "어떤 여인이라... 그 여인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 여인에 대해선 저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몬은 날카롭게 파고드는 루드비히의 시선을 피했다. 여인이 자일스 황태자의 수하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지만 여인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법황에게 섣불리 입을 놀릴 수는 없었다. "공격을 당하셨다면 여인의 모습 정도는 보셨을 것 같군요." "너무 갑작스런 일격이었고, 또 어두운 곳이어서 여인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상처를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만약 상처를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차츰차츰 안쪽까지 썩어 들어가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미 상당부분 회저가 진행되었으니 그 시기가 그리 멀어 보이진 않는군요." 루드비히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몬은 힘겹게 몸을 움직여 일어나 앉았다. "어차피 죽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온전한 영혼을 지닌 채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전 만족합니다." "전에도 느낀거지만 확실히 남다른 분이로군요. 지난번 성전에서 제가 왜 마법을 풀지 않은 상태로 돌려보내 드렸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루드비히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생각해서입니다. 제 마음이 정해졌을 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루벤스타인 대공을 없앨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서 말입니다." "그, 그럼 저를 이용해 리자드님을......" 아몬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통스레 기침을 터뜨렸다. 가슴을 쥐어 짜내는 듯한 통증이 일더니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그의 가슴을 적신 선혈이 시트를 물들이며 번져 나갔다. 가슴을 움켜잡는 아몬을 빤히 지켜보던 루드비히가 잔인할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리둥절한 엘의 목소리가 침실 안을 울렸다. "루드비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제 목 [달의 아이] 74장.승부수-2 허겁지겁 달려온 엘은 피를 토하고 있는 아몬을 보고 뒤로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세,세상에, 아몬! 왜 그래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피를 토하는... 이럴 수가, 가슴에서도 피가 흘러내리잖아요!" 경악에 찬 보라색 눈동자가 루드비히에게 날아가 박혔다. "루드비히! 아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몬을 도와 달라고 했지, 괴롭히라고 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요?" 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루드비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살짝 얼굴을 젖혀 주먹을 피한 루드비히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의 공격을 피하신 게 꽤나 흐뭇하신가 보군요, 법황성하. 그렇다면 어디 이번 것도 피해보시죠." 엘이 루드비히를 노려보며 공격자세를 취했을 때 겨우 기침을 멈춘 아몬이 힘겹게 소리쳤다. "엘, 그게 아닙니다! 성하께선 절 도와주시러 오신 겁니다!" 주먹을 쥔 모습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던 엘이 스르르 팔을 내렸다. 그녀는 루드비히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날리며 아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루드비히가 아몬을 도와주러 오신 거라고요?" "그렇습니다, 엘." 엘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대체 뭘 어떻게 도왔는데 아몬을 만신창이로 만든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에 난 상처는 오래 전에 입은 것입니다." "이런... 그러니까 루드비히가 아몬을 치료해주기 전에 내가 들이닥친 거로군요." 엘은 등 뒤에 서 있는 루드비히를 따갑게 의식하며 아몬에게 어쩌면 좋으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몬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상을 하고 있던 엘은 화사한 미소를 한껏 지으며 루드비히에게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 고마워요. 전 루드비히가 꼭 아몬을 도와주시리라 믿고 있었어요. 좀 전에 루드비히한테 주먹 휘두른 건... 그냥... 그래요! 반가워서, 너무 반가워서 장난으로 한 번 그래 본 거예요. 하하! 루드비히, 정말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반가워서 장난으로 주먹을 휘두르셨단 말씀이군요, 너무 반가워서... 다음부터 절 만나실 땐 조금 덜 반가워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은 은근슬쩍 비꼬는 루드비히를 흘겨보며 옆으로 비켜섰다.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있을 테니 이제 아몬을 고쳐 주세요. 빨리 출혈을 막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아요. 물론 루드비히라면 아몬보다 상태가 훨씬 더 나쁜 사람도 쉽게 고치시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아몬은 아직 모르겠군요, 루드비히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엘의 보라색 눈동자가 춤을 추듯 실 새없이 반짝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루드비히가 된 것처럼 이유모를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몬은 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걱정스런 눈길로 루드비히를 살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은 채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 삔 것부터 맞아서 멍든 거, 또 화상의 흔적까지 루드비히가 못 고치는 건 없어요. 피가 철철 흐르는 움푹 패인 상처도 루드비히가 한 번 만지기만 하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라고요. 그것 뿐만이 아니에요. 지난번 암베르 즙에 중독되었을 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계시겠다는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루드비히가 엘의 말을 끊으며 아몬에게 다가갔다. "나가 계십시오." "루드비히,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씀을... 아픈 사람한테 어딜 나가라는 거예요?"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엘은 그에게 쑥스러운 미소를 던졌다. "알아요, 저한테 하신 말씀이란거요. 제가 좀 시끄러웠죠? 하지만 지금부터는 입 꼭 다물고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절대 방해되지 않을 거예요" "셋 셀 동안 나가시지 않으면 치료는 없을 것입니다." 한숨을 내쉰 루드비히가 단호하게 말했다. "루드비히, 너무하신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안 듭니다, 하나." "천하의 악당같으니! 차라리 날 꽁꽁 묶어 문밖으로 걷어차시지 그래요?" "그러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습니다, 둘." "이 말만 하고 나갈게요. 내가 없다고 아몬한테 심술부리면 안돼요." "안 부립니다, 그리고 잊고 계신 것 같은데 이제 셋 셀 차례입니다." "알았어요, 지금 나가잖아요." 엘은 툴툴거리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아몬이 루드비히에게 멍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누우십시오." "성하,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이대로 간다면 밖에 계신 분께서 절 영원히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몬은 감탄어린 눈으로 문을 슬쩍 쳐다본 다음 위를 보고 반듯하게 누웠다. 법황의 무심한 눈길에도 전신이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을 느끼는 자신과, 법황과 스스럼없이 장난을 주고받던 엘을 비교해보니 새삼스레 그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암기를 끄집어 내야합니다. 아마 상당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성하, 엘을... 그녀를 좋아하십니까?" 아몬은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니오,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몬은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나타난 뜻 모를 광채에 숨을 죽였다. 루드비히가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좋아한다, 혹은 사랑한다 따위의 말엔 제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럼 아몬은 이제 괜찮아진 겁니까? 완전히 예전 모습을 되찾은 것입니까?" 칼 베리만은 리자드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리자드는 엉거주춤 의자에 앉는 그를 서둘러 안심시켜 주었다. "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힘겨워 하던 두통도 사라졌고, 출혈이 멈추지 않았던 가슴의 상처도 깨끗이 아물었습니다. 더 이상 각혈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아몬의 병세가 그 정도로 위중했는지는 몰랐습니다. 각혈까지 했다니......" 칼 베리만은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을 하며 김이 피어오르는 흑갈색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편하게 휴식을 취하면 머지않아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설마 병이 다시 재발하는 건 아니겠지요, 대공?" 리자드는 쉽게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칼 베리만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병이 재발한다해도 다시 고치면 그만이니, 마음 놓으십시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병도 제풀에 지쳐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대공... 어째 대공은 농담을 하셔도 매번 그렇게 재미없는 것만 골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능력이신지......" 칼 베리만이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혀를 차자 리자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후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던 칼 베리만이 문득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여쭤 보지 않았군요. 아몬을 고친 치료사말입니다.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실력이 대단하면 다른 치료사들은 병인조차 밝히지 못한 병을 깨끗이 낫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궁금해지는군요." "법황입니다." "그럼 법황 성화께서 치료사를 소개해 주셨다는 말씀입니까? 거참, 이해되지 않는군요. 성하께서 아몬을 어떻게 아시고 도움을 주셨는지......" 리자드의 말을 엉뚱하게 받아들인 칼 베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자드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닫고 있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가 법황을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일을 안다면 칼 베리만은 충격에 휩싸일 게 자명했다. "아무튼 성하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전문이라도 보내야겠습니다. 아, 이런...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대공과 저의 친분을 숨겨야 한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요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기억이 깜박깜박합니다. 글쎄 며칠 전엔 바로 코앞에 놓아둔 문서를 못 찾고, 온 집무실을 하루종일 헤집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문서를 찾았을 때 얼마나 허탈하던지......" 쓴웃음 짓던 칼 베리만의 얼굴이 별안간 심각하게 변했다. "문서얘기가 나오니 오늘 아침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다른 게 아니라 이틀 전 아시리움 성전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합니다. 문서보관소에 있던 문서 수십 장이 사라졌다는 게 그 이유인데, 그도 그럴 것이 보통문서가 아니라 극비로 분류되어 따로 보관되던 문서였다 하더군요. 법황 성하도 안 계시던 차에 그런 일까지 당했으니... 대사제님들이 얼마나 놀라셨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남의 일인 것 같지 않은 듯 칼 베리만은 이마에 굵은 주름을 잡았다. "법황 성하께 그 문서가 있다는 걸 아셨을 때 그분들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제 생각엔 아마 죽다 살아난 기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성하께서 극비문서를 바드리오로 가지고 오셨으니 망정이지, 만약 누군가 아시리움 성전에서 그걸 훔쳐낸 거라 하면 다시 한 번 아시리움에 피바람이 몰아쳤을 겁니다." 리자드의 입술에 희미한 실소가 묻어나왔다. "그런데 성하께선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걸까요? 그런 중요한 문서를 가지고 여행을 하시다니... 이해되지가 않는군요. 항간에 떠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문서건도 그렇고 아몬을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칼 베리만이 일순 등을 곧추세웠다. "아몬... 극비문서... 그리고 법황 성하......." 칼 베리만은 숨죽인 채 리자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공, 제 심중이 맞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리자드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일시에 힘이 빠진 듯 칼 베리만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였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성하께서 친절을 베푸신 걸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어리석었군요...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칼 베리만. 진작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닙니다, 대공. 대공이 왜 그러셨는지 알고도 남습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할까 봐 말씀을 아끼신 거겠지요." 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빙그레 미소지었다. 하지만 갈색 눈동자에 나타난 무거운 그림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대공께서 어련히 잘 알아서 처리하셨겠느냐마는... 이번 일로 대공과 아시리움, 다시 말해 법황 성하와의 관계가 혹시 적대적으로 변한 건 아닌지... 자꾸 근심이 되는군요." 리자드가 짧게 웃었다. "법황과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틀어졌습니다. 이번 일로인해 더 나빠질 것도 더 좋아질 것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로선 금시초문이군요. 혹시 제 기분을 풀어주시려 괜한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경솔히 행동할 리자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칼 베리만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갯소릴 하면 재미없다 하시고, 진실을 얘기하면 믿을 수 없어하시고... 저로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리자드는 싱거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응수하는 칼 베리만의 어조는 엄숙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지했다. "대공, 아시리움 종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시리움의 태도 여하에 따라 최악의 경우, 대공의 계획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아시리움은 제 계획을 무산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요." 리자드의 입술에 냉혹함이 깃든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자신하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공?" 칼 베리만은 탄식을 토해내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칼 베리만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한 제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리시겠지요. 하지만 전 젊은 호기만 믿고 무작정 적진으로 돌진하는 경솔한 철부지가 아닙니다." 칼 베리만은 지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화제를 바꿨다. "골치 아픈 얘긴 그만하시고, 아시리움을 감쪽같이 속여넘기신 일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아시리움 성전에서 기밀문서를 빼내신 겁니까?" 리자드는 담담하게 말을 시작했다. "칼 베리만이 감탄하실 만한 거창한 방법을 쓴 건 아닙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사람들은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풀려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거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엔 그런 경향이 몇 배는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위에 시간의 제약이 주어지고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더해지면... 바로 눈앞에 답이 보여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게 됩니다. 전 그런 심리를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리자드가 입을 다물자 칼 베리만의 얼굴에 실망감이 나타났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궁금증만 부풀려 놓으시고 말을 끝내시는군요.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 일을 자랑삼아 떠벌리실 대공이 아니시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상세한 얘긴 제가 직접 알아보는 수 밖에 없겠군요." 리자드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으시다면 그 문서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십시오, 대공. 법황 성하를 움직이게 한 비밀문서라... 궁금해 견딜 수가 없군요." "문서의 내용에 대해선 칼 베리만께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영원히 입을 닫는다는 게, 계약조건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이번 일은 제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 중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으로 꼽히게 될 것입니다." 리자드의 눈동자 깊숙이 짙은 회오가 지나갔다. "전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아시리움의 치부를 세상에 밝히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문서가 제 손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열망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손에 문서를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으로서 전 아시리움과 공범이 되었습니다." 찻잔을 움켜쥔 손아귀에 으스러져라 힘이 가해졌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던져 준 먹이를 받아 먹었습니다. 다시 말해 더러운 개가 된 것입니다." 찻잔이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깨어졌다. "대공!" 칼 베리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겁지겁 다가온 그가 손바닥을 펴려하자 리자드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이러실 필요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굴지 마시고 어서 손 내미십시오, 대공!" 칼 베리만은 자식을 꾸짖는 아버지같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반강제적으로 리자드의 손목을 잡은 그가 신중하게 파편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워낙 단단하게 검술로 단련된 손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엄지손가락 아랫마디와 손바닥 가운데 부분에 살짝 베인 듯한 가느다란 창상이 생겼을 뿐이었다. 상처에서 배어난 핏방울이 가느스름한 줄기를 만들며 미끄러져 내렸다. 칼 베리만은 더 이상 파편이 눈에 띄지 않자 손수건을 꺼내 흉터투성이 손을 감쌌다. 지난번 리자드가 가짜물건을 주먹으로 내려친 사건 이후부터 항상 잊지 않고 준비해두었던 손수건이었다. "파편이 남아있을 위험이 있으니 돌아가시면 꼭 어의관의 치료를 받으십시오. 아셨습니까, 대공?" "알겠습니다." 리자드가 순순히 대답하자 칼 베리만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칼 베리만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리자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공은 아몬을 살리셨습니다. 아시리움이 던져 준 먹이는 바로 아몬의 목숨이었습니다.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대공. 자책하지 마십시오. 대공께선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최선의 선택이라......" 청회색 눈동자에 희미한 자조가 배어 들었다. "전 문서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두 가지라면... 하나는 아몬의 목숨이겠고, 다른 하나는... 대공! 그렇다면 그걸 손에 넣으신 겁니까?" 칼 베리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요,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리자드는 무덤덤한 어조로 사실을 밝혔다. 실망감에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칼 베리만이 털썩 주저앉았다. "문서는 제 예상만큼 법황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언제든 아시리움을 버릴 수 있다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두 요구 중 하나를 선택하라 했습니다. 전 망설이지 않고 아몬의 목숨을 택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시간을 끌면 아몬을 버리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공, 차라리 물건을 택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면 아몬까지 살릴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 칼 베리만은 안타까움에 울상을 지었다. "아니요, 아몬은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수수께끼가 풀릴 때까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어쩌면...... 아니, 아닙니다. 저도 대공의 판단과 선택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대공이었다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자꾸 어리석은 미련이 생기는군요." 칼 베리만이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칼 베리만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리자드는 충동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칼 베리만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몬의 목숨을 선택하자 법황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런 선택을 하게 했느냐고 말입니다. 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도 답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칼 베리만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가 아직까지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십니까?" "대공께서도 모르시는 마음에 대해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지러운 마음 속을 너무 깊게 파고들려 하지 마십시오, 대공. 그건 괜한 혼란과 괴로움만 야기시킬 뿐입니다. 이제 이번 일은 묻어두십시오. 자꾸 되새김질하지 마십시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아몬이 살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칼 베리만은 확답을 피했다. 답은 알고 있었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리자드에게 자신까지 무게를 더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로써 물건을 손에 넣는 일이 더욱 요원해졌군요.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어째 시간이 갈수록 더욱 꼬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법황 성하께서도 이번 일을 기분 좋게 생각지 않으시리란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또 부분적이나마 대공의 능력을 알게 되셨으니 물건을 더욱 더 깊고 은밀한 곳에 숨겨 놓으실 가능성도 높고......" "잘못 아셨습니다, 법황이 물건을 숨기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리자드는 말을 끊고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제 눈앞에서 흔들고 있으니까요." 종잡을 수 없는 말에 칼 베리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하께서 그 물건을 대공의 눈앞에 내놓으셨단 말씀이십니까?" "직접 손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그것과 진배없습니다. 그 아이에게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 오면, 황송하게도 그걸 내주겠다는 말을 했으니까요." 칼 베리만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공? 성하께서 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단 겁니까? 그 물건의 정체를 알면 그걸 주겠다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칼 베리만. 위대하신 법황께서도 진흙탕 싸움을 즐기시나 봅니다." "대공,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엘에게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으신 것 같은데, 어서 빨리 물건을 찾아오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리자드의 턱이 단단하게 뭉쳐졌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말씀하기 곤란하시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엘에게 모든 걸 다 알려 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대공? 그저 간단한 말 몇 마디 해주시는 정도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전 그 아이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십시오." 리자드의 태도는 완강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칼 베리만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없다는 듯 리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 베리만은 그를 따라 몸을 세우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대공, 만약... 만약 진실과 거짓을 섞어 그럴듯한 얘기를 만들어 엘에게 말해주면......" "칼 베리만!" 리자드가 다소 매섭게 소리쳤다. 흥분한 칼 베리만이 주먹을 움켜쥐며 목청을 높였다. "저도 제가 그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대공 앞에서 그런 못난 말을 한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대공! 하지만......" 칼 베리만이 말을 끊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울 만큼 탁하게 갈라진 음성으로 뒤를 이었다. "너무나 좋은 기회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이토록 허무하게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시고...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전 후회 따윈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일과 아몬의 목숨을 놓고 선택하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전 미련없이 전자를 택할 것입니다." 입술을 굳게 다문 리자드가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칼 베리만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진이 다 빠져 버린 사람처럼 비틀대며 탁자에 몸을 의지했다. 제 목 [달의 아이] 75장.위험한 도박-1 제 75장. 위험한 도박 "내가 그 천한 계집애 눈치를 봐야 한다니... 어머니까지도 그 더러운 계집애에게 홀려 제정신이 아니시고... 젠장! 아시리움만 아니라면 내가 이런 처지에 놓일 이유가 없었을 텐데... 그 계집애도 오래 전에 갈기갈기 찢겨져 지금쯤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을 테고... 이 모든 게 다 아시리움 때문이야. 그래, 아시리움... 아시리움만 없었다면......" 자일스는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시리움... 감히 날 이따위로 대하고 무사할 줄 아느냐? 두고 봐라,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내가 아니다. 내 맹세코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마체라타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뇌까리고 있는 자일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까지 저런 소릴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정말 지루하고 답답해 못 견디겠군.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하품을 참는 마체라타의 얼굴엔 무료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궁리했다. 일순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광채가 스쳐갔다. 그래, 재미있을만한 일이야 내가 직접 만들면 되는 거지. 마체라타는 자일스를 유심히 살피며 일어나 앉았다. "전하, 말씀 도중 끼어들어 죄송하지만... 너무나 궁금한 것이 있어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한가지 의문이 집요하게 떠올라 절 못내 괴롭히는군요." "그게 무엇이냐?" 자일스는 마체라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응수했다. "전하께 위해를 가한 마법사가 법황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일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하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뭐라 한 거냐? 감히 내가 있지도 않은 얘기를 지어냈다는 망발을 한 것이냐?" 얼굴을 일그러뜨린 자일스가 독기서린 눈을 부릅떴다. 마체라타는 말없이 창가로 걸어가 활짝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말이 새어 나갈 리는 없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겠지요." 자일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리로 돌아오는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녀가 채 자리에 앉기고 전에 말을 뱉어냈다. "어서 말해봐라! 네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전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건방진 아시리움은 차치하고라도 법황이 진짜 그 마법사가 분명하다면 그는 전하의 팔과 눈을 빼앗아 간 장본인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당하시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전하께서 겪으셨을 그 끔찍한 고통을 생각하면... 심장이 조여 들고 숨이 막혀 옵니다. 그런 제가 전하께서 이야기를 지어내셨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어찌 잠깐이나마 마음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마체라타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호소하듯 말했다. "어제저녁 복도를 걷다, 만찬장에서 전하와 달의 아이 사이에 거친 설전이 오갔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혹시 전하께서 마법사의 정체를 잘못 아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떠오르더군요. 그 당시 상당히 흥분한 상태이셨을 테니 한시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지셨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마체라타는 속눈썹 사이로 자일스를 훔쳐봤다. 자일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시고 법황이 그 마법사임을 알아채셨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마법사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으시다는 말씀도요. 불충한 말이지만 목소리만으로 아시리움의 법황을 범인으로 지목하신 건... 저로선 조금 납득하기 힘든 결정입니다, 전하." 마체라타는 자일스에게 다가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귓속말을 속삭였다. "법황이 그 마법사가 틀림없다고 확신하십니까, 전하?" "그래, 확신한다! 확신하고말고!" 억지임을 나타내듯 자일스의 얼굴엔 석연치 않은 기미가 서려있었다. 처음엔 법황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마체라타의 얘길 들으니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이 조금씩 부풀어올랐다. 이런 마음엔 버거운 상대일 수 밖에 없는 법황을 피해가고 싶은 속내도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초점없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자일스를 보며 마체라타는 실소를 지었다. 법황이 피 토하는 꼴을 보며 사지를 찢어죽인다 어쩐다 하더니... 역시 말뿐이었군. 그녀는 재빨리 웃음기를 지운 다음 한층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전하. 이번 일은 괜한 호기를 부리실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를 해친 마법사를 찾아 톡톡히 그 죄값을 치르게 해주겠노라 맹세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대가 법황이라고해서 그 맹세를 깨뜨릴 전하가 아니시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법황이 그 마법사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던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이냐?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란 말이다." 마체라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스쳤다. "답은 간단합니다, 전하. 하지만 매우 위험하기도 합니다." "답이 있다고? 그게 무엇이냐?" 자일스가 마체라타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댔다. "전하께서 직접 법황과 대면하시는 겁니다." "법황을 직접 만나라고? 그러니까 법황을 만나서 날 공격한 마법사가 맞느냐고 물어 보라는 말이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한 것이냐? 네가 정말 제정신인 거냐?" 자일스의 입술에서 새된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평정을 잃은 그와 달리 마체라타는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대답하기 전 머리채를 어깨 뒤로 넘기고 다소 거만한 동작으로 팔짱을 꼈다. "진정하십시오. 전 전하께 그런 뜻의 말을 올릴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단순히 법황을 만나보는 것만으로도 희미하던 전하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 날수도 있지 않습니까? 또 만약 법황이 진짜 범인이라면 그 과정에서 법황 스스로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말을 흘릴 수도 있을 테고요. 마체라타는 살짝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제아무리 아시리움의 법황이라해도 자신의 손으로 위해를 가한 당사자를 바로 코 앞에서 보는 건 마음 편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마체라타의 말이 끝났을 때 자일스는 많이 침착해져 있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마체라타. 법황와 가까이서 얘기를 나눠 보면 틀림없이 뭔가 얻어지는 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고 법황을 만난단 말이냐?" "그거야, 대충 그럴듯한 걸 갖다 붙이면 되지 않습니까? 으음... 무엇이 좋을까?"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마체라타가 별안간 눈을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전하. 법황이 내일 바드리오를 떠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잘 가시라는 인사말 정도는 하는 게 손님에 대한 예의 아니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마체라타." 자일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마음을 정하셨으니 되도록 빨리 신전에 사람을 보내 전하의 뜻을 알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시리움은 감히 황태자 전하의 방문을 거절하진 못할 것입니다. 또한 지극히 타당한 명분이 있으니 황제폐하께서도 전하의 행동을 칭찬하면 칭찬하셨지 나무라진 않으실 겁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 당장 아시리움에 방문사실을 알리고 법황을 대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전 잠시 제 거처에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무슨 이유로 거처까지 갔다 오겠다는 거냐?" 자일스는 몸을 세우는 마체라타에게 의혹어린 눈길을 보냈다. 마체라타의 입술에 유혹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아시리움에서 답변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습니까? 또 법황 성하를 배알하게 될 지 모르는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결례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 분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의 준비는 갖춰야겠지요." "그렇다면 너도 법황을 만나겠다는 말이냐?" 자일스가 소리를 높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아시리움의 법황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 제가 이런 아까운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습니까?" "법황이 널 만나 주기나 할 것 같으냐?" "전하께서 힘을 써 주신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마음 내키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겠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전하. 제가 법황을 만나는 일이 전하께 작은 도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법황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마체라타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매끄럽게 말을 붙였다. "운이 좋다면 말입니다." "대체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다 들어오는 거야?" 문을 열자마자 짜증 섞인 질타를 들은 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오를 바라봤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매서운 눈초리로 무릎 위에 놓인 애꿎은 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은 리반을 향해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피식 웃은 리반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널 무턱대고 나가서 찾아볼 수도 없고. 또 마음먹은 대로 몸은 따라 주지 않고. 사정이 이러한데 리오 성격에 기분이 좋을 리 있겠어?" "다 들려, 임마!" 리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엘은 씩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무릎 위에 놓인 책을 집어 올렸다. "영혼으로의 여행? 뭐야, 이거 철학책이잖아? 철학서나 신학서는 잠자고 싶을 때 읽는 거라더니... 웬일이야, 리오? 네가 이런 책을 다 읽고." 살살 놀려대는 엘을 쏘아보던 리오가 책을 낚아챘다.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어서 나가 그 짜증나는 브레이슬릿이나 갖고 놀아." "너무 그러지 마, 리오. 좋은 일이 생겨서 말해주려고 온 거란 말이야." "좋은 일?" 리반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응, 그동안 말은 안했지만 아몬이 좀 아팠거든. 그런데 이제 말끔히 병이 나았어. 지금도 아몬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데 갑자기 병이 싹 나을 수 있어?" "그건 나도 몰라." 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다음 리반 옆에 앉아 다리를 쭉 폈다.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건 어떻게 안건데?" "아몬이 직접 그랬어, 루드비히도 마찬가지고." "루... 뭐라면, 그 사제님?" 리오가 별안간 크게 소리쳤다. 흠칫한 엘과 리반이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래, 루드비히. 그리고 이건... 지난번 같이 식사할 때 말해주려고 한 건데, 어쩌다 보니 기회를 놓쳐서 지금 해주는 거야. 뭐냐 하면... 잘 들어봐, 루드비히 말이야... 보통사제님이 아니야." "당연하지. 찬바람 쌩쌩 도는, 소름 그 자체인 얼음덩어리가 보통사제님이라면, 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거다." 말도 안 되는 비유를 끝낸 리오가 기세등등하게 콧방귀를 날렸다.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엘과 리반은 따지지 말고 넘어가자는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루드비히는......" "몸 안에 피대신 얼음물이 흐르는 냉혈사제!" 리오가 심술궂은 어조로 끼어들었다. 엘은 그를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루드비히의 진짜 정체는......" "매일 밤마다 어린애를 잡아먹는 살인마사제!" 리오는 계속해서 불퉁거렸다. "리오, 이제 그만해! 으이구, 네 앞에서 그런 진지한 얘길 꺼낸 내가 바보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엘은 분통을 터뜨리며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나선 그녀는 벽에 기대선 채 뒤따라 나올 리반을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곧 문이 열리고 리반의 모습이 나타났다. 엘은 그의 팔을 잡고 문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어서 말해봐." 엘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리반이 낮게 소곤거렸다. "놀라지 말고 들어, 리반. 루드비히가 바로 법황성하셨어." 순간 리반의 전신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숨이 차 오를 때까지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노, 농담이지?" 리반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엘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현기증이 이는 머리를 벽에 기댔다. "그럼 정말... 그 사제님이... 정말......" "응, 법황 성하셔. 나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지금 너만큼이나 놀랐어." 벽에 몸을 의지한 채 충격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떠오르자 엘의 입술에 씁쓰레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씩씩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 생각인데, 리오는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좀 전에 괜히 화내는 척하며 밖으로 나온 것도 너한테만 알리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어. 루드비히에게 별의별 괴상한 말을 붙였는데...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리오는 아마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 거야." "리오... 그래, 리오가 있었어!" 리반이 느닷없이 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알렉스, 어떡하지? 난 괜찮지만 리오는 성하께 결례를 범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성하께서 그 일을 문제 삼으시면 리오는...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거야." 놀라 눈을 깜박이고 있던 엘은 부들부들 떨리는 리반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진정해, 리반.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루드비히는... 법황 성하께선 절대 그런 일을 문제 삼아, 누굴 벌주시거나 하실 분이 아니야. 틀림없어, 리반. 내 말을 믿어." 확고한 장담에도 핏기 가신 리반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넌 몰라, 알렉스. 넌 법황 성하가 어떤 분인지 몰라. 그래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아니, 세상에서 나만큼 루드비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단정적으로 말하는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반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휴! 리반, 이 바보야!" 엘은 답답한 마음에 리반의 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생각해봐, 만약 성하께서 리오에게 어떤 식으로든 벌을 내리려 하셨다면 성전무단이탈 건을 문제삼지 않겠다고 하셨겠어? 말이 안되잖아." 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리반이 머리를 들었다. 한결 밝아진 안색을 발견하고 엘은 빙그레 웃었다. "내 말이 맞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알렉스. 좀 전엔 너무 놀라 머리가 꽉 막혔었나 봐." 리반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 리오가 나와 보기 전에. 참, 리오한텐 비밀로 하는 거다?" "알았어. 그런데 넌 벌써 가는 거야? 리오 녀석, 내가 널 설득해서 데리고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을 텐데......" "황후님이 점심식사에 초대하셨거든. 식사하고 다시 올게. 그럼 난 간다." 엘은 리반의 팔을 툭 친 다음 몸을 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예닐곱 걸음쯤 옮겼을 때 리반이 불쑥 말했다. "조심해, 알렉스." "뭘?" 엘은 리반을 돌아보며 가볍게 물었다. "그러니까......" 법황을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하려 했던 리반은 마음을 바꿔 서툴게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가라고." "난 또 뭐라고.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조심해서 들어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인 엘이 다시 걸음을 떼었다. 리반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듯한 심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뭐, 뭐라고?" 남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한껏 부릅떴다. 마체라타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황태자와 함께 법황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알현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께 말씀 드리러 온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 남자가 책상을 내려치며 버럭 소리쳤다. "왜 그렇게 노여워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노여워하는지 모르겠다고? 네게 수없이 아시리움과 관련된 일엔 관여하지 말라는, 몸을 사리라는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얼마나 한심하고 멍청하기에 그런 것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마체라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은 단 한마디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것이냐? 황태자가 네 목에 밧줄을 걸어 법황에게 끌고 가겠다는 결심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황태자가 이제야 너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아 기쁘기 한이 없구나." 남자가 경멸을 담아 비아냥거렸다. 마체라타는 이를 악물고 바르르 떨리는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고정하십시오, 아버지. 예...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일은 벌어졌습니다. 절 꾸짖으신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긴 한숨을 내쉬며 깊숙이 등을 기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봐라." 남자는 이제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황태자가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더군요. 발단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해친 마법사가 법황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엔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혀야 된다며 제게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전 경솔하게도 별 생각없이 법황을 만나 직접 물어보라는 농담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그걸 물어 보러 간다는 말이냐? 법황에게?" 남자는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설마 황태자가 그 정도로 어리석겠습니까? 법황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러 가는 것 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함께 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 "저도 황태자에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는 반드시 저와 동행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더군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마체라타는 하소연조로 말했다.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하며 법황을 만나려 하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계획에 작은 파문을 만들고 싶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마체라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불편한 생각을 재빨리 떨쳐 버렸다. 아니야, 난 법황이 듣던 대로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이야. "안 된다! 이번 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내 말 명심해라, 마체라타.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법황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남자의 강압적인 태도에 마체라타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버지. 제가 법황을 만날 수 없다고 주장하면 황태자는 저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 황태자의 의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법황은 널 보는 순간 네 정체를 알아챌 거란 말이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전 제 자신을 완벽하게 숨겼습니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제 정체를 알아 챈 자는 단 한 명도 없단 말입니다." "고작 네 힘으로 법황의 눈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느냐? 네가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 줄 아느냐? 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구나, 마체라타. 네 까짓 게 법황을 속일 수 있다면, 법황이 그 정도로 별 볼일없는 존재라면 내가 진작 법황을 없애 버렸을 것이다." 격한 모멸감에 마체라타는 부들부들 사지를 떨었다. 그녀는 폭발하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어차피 전 법황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 정체가 드러나는 걸 바라지 않으시면 힘을 보태주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면 전 법황이 제 정체를 알아채든 말든 지금 이 상태로 그의 눈앞에 나갈 겁니다. 제 정체가 드러나면 그 다음 차례는 당연히 아버지이실 거란 건... 잘 아실 테지요." 남자의 관자놀이에 경련이 일었다. "감히 네가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반발심에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려하자 마체라타는 피가 배어 나올 만큼 힘껏 혀를 깨물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대답여하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위협하다니요? 흥분이 격해져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일 뿐입니다. 절대 본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제가 아버지께 복종하리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체라타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남자의 노기가 점차 누그러지는 게 느껴지자 그녀는 끈적이는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네 말대로 법황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을 보태 주겠다. 하지만 이번 일을 피할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걸 붙잡아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법황 앞에 모습을 보이는 순간부터 시선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절대 긴장을 풀지 마라. 법황이 네게 직접 질문을 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도 열지 마라."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체라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알았느냐? 절대 경거망동해선 안 된단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법황 앞에선 숨도 크게 쉬지 않겠습니다." 마체라타는 진지하게 다짐하며 마음 속으로 간단한 말을 더했다. 마음이 내키면 말입니다. 제 목 [달의 아이] 75장.위험한 도박-2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엘은 루드비히가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책상에 앉아 문서를 읽고 있던 루드비히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엘." "반갑다고요? 속으론 지겹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죠?" 루드비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일 성전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그게 정말인가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인사말 한마디 없었다니... 황후님이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루드비히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배신당한 사람처럼 루드비히를 노려보던 엘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냥 떠나려는 생각은 없으셨죠? 떠나시기 전에 절 만날 생각이셨죠?" "아니오,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한 루드비히는 황당해하는 엘을 못 본척하고 문서로 시선을 내렸다. "떠나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얌전히 앉아 책이라도 읽고 계십시오." "책 읽기 싫어요." "그럼 안락의자에 누워 낮잠이라도 주무십시오." "내가 꼬부랑 할머니인 줄 알아요? 졸리지도 않은데 낮잠을 자게?" 엘은 뚱한 얼굴로 콧방귀를 날렸다. 그녀도 자신이 어린애같이 굴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관심없다는 듯한 루드비히의 태도에 자꾸만 심술이 났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뭘 하시든 저만 방해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알았어요, 나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없어요!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알아요?" 엘은 분개한 척하며 큰소리쳤지만 루드비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곤한 잠을 자고 있을 리오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을 리반이 떠오르자 엘의 입꼬리가 처량하게 내려왔다. 할 일이 없긴 없지... 아몬은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하고, 이 시간에 리자드한테 갔다 간 구박이나 당할 테고...... 지레 지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책상 맞은 편에 커다란 책장이 서 있었고, 그 옆으로 하얀색 장식장 두 개가 모서리를 맞댄 채 놓여 있었다. 엘은 책장 앞으로 걸어가 위칸부터 아래칸까지 쭉 훑어보았다. 난해하고 고리타분한 제목들만 눈에 들어올 뿐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이 가는 대로 아무 책이나 꺼내 몇 장 넘겨 본 다음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한숨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책장 넘기는 손길도 거칠어졌다. 그녀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을 때, 뒤에서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책은 영혼의 양식이므로 책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보다 더 무지몽매한 자는 세상에 없다. 그런 자는 책의 소중함을 깨닫기 전까진 물 한방울도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찔끔한 엘은 책을 조심스럽게 꽂은 후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두툼한 문서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거 누가 한 말이에요? 방해하긴 싫지만 궁금해서 그래요." "방금 전 제가 하지 않았습니까?" 루드비히의 말투에서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음조가 느껴지자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책장 옆에 자리잡은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장식장엔 우아해 보이는 작은 조각품들과 화려한 빛을 발하는 보석세공품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엘은 장식장 문을 열고 은은한 빛을 발하는 보석함을 꺼냈다. 보석함의 뚜껑을 연 그녀는 낮은 탄성을 질렀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손거울과 빗, 그리고 머리장식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잘한 문양마다 금박장식을 한 거울과 빗의 손잡이엔 호박빛 보석이 박혀 있었고, 십여 개에 달하는 머리장식들은 휘황찬란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만큼 갖가지 보석들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 엘은 질린 눈으로 함을 들여다보다 그나마 부담이 적어 보이는 거울을 집어 들었다. 처음 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그녀는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는 걸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엘은 거울을 내려놓고 빗을 꺼내 머리를 쓱쓱 빗어내렸다. 별 생각없이 빗을 집어넣으려던 그녀는 장난기가 발동하자 슬그머니 루드비히를 곁눈질했다. 빗을 들고 있어서 그런지 루드비히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긴 실버블론드가 유난히 탐스러워 보였다. 엘은 빗을 허리춤에 꽂고 붉은 보석이 꽃잎 모양을 이루고 있는 머리 끈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벽화를 감상하는 척하며 슬금슬금 루드비히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엘이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자 루드비히가 그녀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엘은 서둘러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 날씨 정말 화창하네요. 그렇죠?" 잠시동안 구름이 두텁게 깔린 하늘을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렇군요." "어머, 세상에! 루드비히, 머리가 헝클어졌잖아요!" 엘이 호들갑스럽게 놀란 척을 하자 루드비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루드비히. 내가 가지런히 빗겨 줄게요." 엘은 결투에 임하는 기사처럼 허리춤에서 날렵한 동작으로 빗을 꺼냈다. 그리고 루드비히에게 반대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그의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매끄러우면서도 서늘한 머리카락이 손끝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믿기 어려울 만큼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지자 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루드비히만큼 예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없었어요." 엘의 돌출행동에 루드비히는 꽤 놀란 상태였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엘을 제지하려던 그는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 잠시만 참아 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자 그는 자신이 엘의 엉뚱한 행동을 불쾌해 하기는커녕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루드비히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문서로 시선을 가져갔다. 처음엔 유혹적으로 와 닿는 감촉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 상태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기분 좋은 편안함이 이어지자 만사를 다 잊고 문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엘은 만족할 만큼 머리를 빗겼다는 판단이 서자 숨겨 두었던 머리장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할까 궁리하며 루드비히의 머리를 요모조모 살펴봤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엘은 윗 부분의 머리카락을 반정도 그러모아 정수리 쪽으로 높이 올린 후 머리 끈의 붉은 꽃장식 보석이 앞으로 향하도록 묶었다. 엘은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루드비히를 찬찬히 바라봤다. 웃음이 터지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입을 막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루드비히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엘을 바라봤다. 그가 이유를 물어 보려 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성하, 저 칼락 대사제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어서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엘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셔야 하겠습니다." "싫어요. 온지 얼마 됐다고 벌써 돌아가라는 거예요?" "대사제가 이 곳에 있는 엘의 모습을 봐도 상관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일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건 엘 자신입니다." 루드비히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엘은 뻔뻔해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대사제님이 꼭 이 곳에 들어오실 필요는 없잖아요." 루드비히가 입을 열려는 순간 칼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하, 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자, 빨리 일어나요! 어서요!" 엘은 다급히 속삭이며 루드비히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쉰 루드비히가 말없이 문으로 향했다. 엘이 실버블론드 머리를 묶고 있는 장식끈을 깨닫고 허겁지겁 루드비히를 부르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성하..." 머리를 숙여 보인 칼락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는 법황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붉은 보석에게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니까... 꽃장식께서..." 칼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아니, 그거 아니라...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께서 성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성하께서 오전에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하우저 고위사제가 황태자 전하의 알현신청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조금 전 신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렇게 늦게서야 말씀 올리게 되다니... 사죄 드립니다, 성하." "괜찮습니다. 알현신청은 받아들일 테니 황태자를 이곳으로 모셔오십시오." "즉시 성언을 받들겠습니다. 아, 그렇지! 성하, 잠시만!" 루드비히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칼락이 그를 불러 세웠다. "황태자전하께 동행이 있으십니다. 전하를 모시는 여인인 것 같은 데... 성하를 배알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또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십니다." 칼락의 얼굴엔 불편한 심경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황태자의 정부로 보이는 여인을, 더군다나 신원도 알지 못하는 여인을 법황 앞에 세운다는 건 그에게 있어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두 분을 함께 모셔오십시오." 가볍게 수락한 루드비히가 문을 닫았다. 그는 배시시 웃고 있는 엘을 향해 걸어가며 머리로 손을 올렸다. 장식 끈이 풀리자 묶여 있던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엘 바로 앞에 멈춰 선 루드비히가 장식 끈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꽂히는 은회색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발했다. "어, 그거 루드비히가 가지고 계셨네요.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서 지금까지 계속 찾고 있었는데..." 엘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장식 끈을 받아들었다. 루드비히는 찬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일만큼 쌀쌀맞은 동작으로 그녀를 지나쳐 의자에 앉았다. "루드비히, 마음 많이 상했어요? 루드비히가 하시면 어울릴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보게 되리란 생각은 못했어요. 미안해요, 루드비히. 하지만 정말 잘 어울렸단 말이에요. 그러니 화 풀어요." 엘은 루드비히에게 바짝 다가가 팔꿈치로 그를 쿡 찔렀다. "루드비히, 삐쳤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냉랭하기만 했다. "삐친 것 같은 데요, 뭐." "전 유치하게 삐치거나 하지 않습니다." "에이, 삐쳤으면서, 괜히." 엘은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해서 루드비히를 놀려댔다. 어린아이같은 그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서늘함이 담긴 은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거 봐요, 삐친 거 맞잖아요." 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루드비히의 입술에도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즐거움이 담긴 엘의 웃음과는 달리 루드비히의 미소엔 심란함이 배어있었다. 그가 엘에게 느끼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빚어 낸 심란함이었다. 엘은 어둡게 가라앉은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서히 웃음을 지웠다. "루드비히..." 루드비히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이 손을 겹치자 루드비히는 그녀의 손가락 마디부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엘은 언제든지 절 만나러 오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난다는 연락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루드비히가 천천히 엘의 손을 놔주었다. "돌아가십시오. 이제 곧 황태자가 도착할 것입니다." "싫어요." "엘." 루드비히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자일스가 온다면서요. 그걸 알면서 루드비히만 남기고 어떻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어요? 자일스가 루드비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요?" 기가 막힌 루드비히가 흘끗 천장을 올려다봤다. "제가 해코지를 당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엘은 루드비히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꼼꼼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숨어 있을 만한 곳이 별로 없네요. 장식장은 내가 들어가기엔 작고 그렇다고 카펫 속에 납작 엎드려 있을 수도 없고.... 책상이 크니까 책상 속이나, 저기 긴 커튼 뒤가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으음... 커튼은 비칠 위험이 있으니까 책상이 더 낫겠군요." 루드비히는 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장식장으로 다가가 보석함을 꺼내들었다. "책상 아래에 숨어 있을 테니까 자일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한 번... 아니, 두 번 기침을 하세요. 당장 뛰어나가서 자일스를 걷어차줄게요." "받으십시오." 엘은 루드비히가 내미는 보석함을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이건 왜요?" "선물입니다." "이런 거 필요없어요. 머리도 짧은 내가 이걸 갖다 뭐에 쓰겠어요?" 루드비히는 묵묵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빗까지 챙겨 함에 넣어주었다. "갖고 계시면 머지 않아 사용하실 일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굉장히 비쌀 것 아니에요?" "그렇겠지요." 건성으로 응수한 루드비히가 엘의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느슨하게 잡았다. 그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나와 브레이슬릿을 둘러싸는가 싶더니 가운데 박혀 있던 푸른색 돌이 검게 변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시적으로 기능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 무렵에는 정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남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더군다나 전 타고 갈 마차도 말도 없단 말이에요!" 루드비히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엘의 어깨를 잡았다. 그제야 그의 계획을 눈치 챈 엘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죠? 내 생각이 틀린 거죠?" "틀리지 않았습니다." "설마... 아니에요, 루드비히가 그런 일을 하실 리 없어요." "할 겁니다." 루드비히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루드비히는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난 루드비히를 믿어요." 루드비히는 천천히 엘을 끌어당겨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믿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일렁이는 은은한 빛이 엘의 전신을 감쌌다. "루드비히!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어디 두고 보자고요!" 쿡쿡 웃어대던 루드비히가 놀리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 돌아가십시오, 엘." 더 퍼부어 주려던 엘은 몸이 붕 뜨는듯한 약한 현기증이 나자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입술을 다물어야 했다. 차선책으로 주먹을 흔들려 했으나 루드비히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후일을 기약하며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문을 연 칼락이 옆으로 물러났다.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자일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채 감추지 못한 긴장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칼락은 자일스의 뒤를 따르는 마체라타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던지며 문을 닫았다. 자일스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루드비히를 발견한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섰다.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그를 보며 자일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루드비히는 조용히 인사말을 건넨 다음 자일스가 답례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팔을 들어 자일스와 마체라타에게 의자를 권했다. 마체라타는 루드비히를 주의 깊게 살피며 몸을 움직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법황의 모습과 그에게서 전해지는 숨막힐 듯한 위엄에 그녀는 두려움 섞인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 떠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인사말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에 부랴부랴 신전을 찾았습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하." 불편한 마음과는 달리 자일스의 어조는 침착했다. 긴장감에 싸여 뻣뻣하게 경직돼 있던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소 여유를 되찾았다. "바쁜 건 사실이나 황태자께 시간을 못 내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서둘러 성전으로 돌아가셔야 될 중요한 일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며칠 동안만이라도 바드리오에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제가 직접 바드리오를 안내해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성하께서 수락하시면 말입니다. 성하께 바드리오의 좋은 점을 조금이라도 더 알려 드리고 싶어 그럽니다." 자일스는 말을 하는 내내 루드비히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성전에서 급히 처리해야 될 일이 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운하지만 급한 일이 있으시다니 하는 수 없겠군요." 자일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법황에 대한 의혹을 빠르게 지워갔다. 형식적이긴 하나 몇 마디 얘길 나누자 자신이 법황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어.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가지고 아시리움의 법황을, 그 더러운 마법사 놈으로 오인하다니. 마체라타의 말대로 만찬장에선 너무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뿐이야. "바쁘신 분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군요. 이만 일어날 테니, 생각이 짧았던 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성하." "돌아가시기 전에 명심해야 될 게 있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자일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앞으로 사촌누이를 대하실 땐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갖추십시오, 황태자. 말 한마디에도 말입니다." 자일스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일스는 고르지 않는 어조로 어렵사리 질문을 꺼냈다. 무표정하던 루드비히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엘리시엔 황녀는 아시리움의 보호를 받는 분입니다. 황태자께선 그것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럼 조심해 돌아가십시오." 루드비히는 할말 끝났다는 듯 책상으로 걸어가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런 루드비히를 보며 자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뻣뻣하게 서 있던 그는 루드비히에게서 시선을 떼고 문으로 향했다. 마체라타 역시 자일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려던 그녀는 극도로 위험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혹적인 법황을 뒤돌아봤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성하, 한 말씀만 여쭤 보겠습니다. 황태자전하께서 아시리움 성전에 머무르실 때, 큰 부상을 입으셨다는 건 성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혹시... 성하께서 하신 일입니까?" 루드비히가 천천히 마체라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침착한 대답이 나온 순간 마체라타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을 하실 정도로 엘리시엔 전하를... 아끼시는 겁니까?" 루드비히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낯선 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을 만큼 경솔하진 않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자 마체라타는 깊숙이 파고드는 은회색 눈동자를 재빨리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성하.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제가 감히 성하께 무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죄 드립니다." 마체라타는 머리를 조아린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긴 복도를 걸어 신전문을 나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발작적으로 손을 떨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향해 걸으며 그녀는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 자일스 옆에 앉는 마체라타의 얼굴에선 전혀 동요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전하? 진실을 알아내셨습니까? 법황 성하와 전하를 공격한 마법사가 동일인이라 확신하십니까?"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은 자일스가 속마음을 털어놨다. "잘 모르겠다. 법황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박혀 있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다. 법황이 내게 위해를 가할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접기에는 어딘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 같고...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마체라타?" "전 법황 성하와 전하를 공격한 마법사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 확신합니다." 자일스가 미간을 좁혔다. "별개의 인물이라 확신한다고? 어떻게?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냐?" "전하를 뒤따르기 직전 성하께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뭐, 뭐라고? 지,지금 뭐라고 말했느냐?" 숨이 막힌 자일스가 힘들게 더듬거렸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그렇게 놀라실 필요없습니다. 제가 좀 당돌하게 행동한 것은 사실이나 법황 성하께선 전혀 노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질문을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이시고 너그럽게 넘겨주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제 직감이 그 누구보다 날카롭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전 성하의 모습에서 미심쩍은 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하께선 절대 그 마법사가 아니란 사실을 말입니다." "고작 그 정도로 확신을 했다고? 혹시 법황의 그럴듯한 외모에 넘어간 것은 아니냐?" 자일스의 말투는 거칠었으나 마체라타는 그가 그녀의 견해를 받아들였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게 무릎 꿇고 감사해야 할 거요, 황태자. 황태자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까. 법황은 황태자가 감히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전 이미 전하께 모든 걸 바친 몸입니다." 마체라타는 자일스의 팔을 유혹적으로 어루만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서서히 내려앉고 있는 석양이 그녀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 목 [달의 아이] 76장.깊어지는 갈등-1 제 76장. 깊어지는 갈등 망연자실해 있던 엘은 쥬네비아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그러니까... 앞으로 하루종일...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전 하루종일이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전하." "하지만 철학, 역사, 신학, 예법, 지리 등을 총망라한 교육을 매일매일 받아야 한다면서요? 그걸 다 공부하려면 하루종일도 부족할 거라고요." 엘은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몸을 내밀고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 교육은 전에 이미 다 받았어요, 황후님. 아시리움 성전에서도 받고... 또 다른 곳에서도 받고요." "공부는 끝이 없는 겁니다, 전하. 황실교육관들이 전하께 맞는 수준으로 빈틈없이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전하께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르기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따르기만 하다간, 전 아마 햇볕도 한 번 쬐어 보지 못한 채 책에 파묻혀 불쌍한 삶을 마감하게 될 거예요." 엘이 너무나 애처로워 보이자 강경하기만 하던 쥬네비아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령이 되어서도 전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예요. 매일 밤 구슬프게 울면서 도서관을 배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책장 사이를 걸어다닐 때마다 줄줄줄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흥건히 고이게 되겠죠. 그럼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진 사람들은 아무 죄없는 절 원망하게 될 거예요. 그걸 생각하니 너무 슬퍼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쥬네비아가 끝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전하... 미처 몰랐는데 상당한 고단수이시군요." 엘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제가 성공한 건가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 약간은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햇볕도 쬐어 보지 못한 채 책에 파묻혀 불쌍한 삶을 마감하시게 할 수는 없으니, 전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실 정도로 여유있게 교육을 진행하라는 말을 해놓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 외에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건 정원이라도 거닐며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물론 좋아요." 엘은 흔쾌히 찬성하며 벌떡 몸을 세웠다. 쥬네비아는 부리나케 문을 나서는 엘을 웃으며 바라보다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요아힘 백작부인에게까지 따라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동적이고 이례적인 결정이었으나 엘과 보내는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쥬네비아는 어느새 엘에게 친딸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최근 들어 부쩍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녀와 엘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여러가지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었다. 비록 내색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자일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멀어지기만 하는 아들과의 사이가 떠오르자 쥬네비아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하루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은 그저 즐거운 생각만 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자 복도를 서성대고 있던 엘이 그녀에게 밝은 미소를 건넸다. 웃음기 가득한 보라색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쥬네비아는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은 행복감을 느끼며 엘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정원에 도착했을 때 쥬네비아가 처음 꺼낸 말은 리오와 리반에 대한 몇 가지 물음이었다. 쥬네비아를 속이고 싶지 않은 엘은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말을 둘러대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다행히 쥬네비아는 별다른 의심없이 리오와 리반을 그녀의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황후님. 지금 있는 곳은 너무 멀어 리오와 리반을 제가 머무는 별궁에서 지내게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동성친구면 몰라도 이성친구들과 한 건물 내에 머무는 건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쥬네비아가 진지하게 답했다. "한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별궁이 얼마나 넓은지는 황후님도 아시잖아요. 아마 미리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하루에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전하. 그것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경솔하게 행동할 분이 아니시란 것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궁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입니다. 만약 친구 분들과 한 건물에 머무신다면 그런 자들로 인해 추문에 휩싸이시게 될 겁니다. 지저분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테고, 끝내 전하의 존명에 되돌릴 수 없는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쥬네비아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엘은 속속들이 맞는 조언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바꾸는 게 좋겠군요."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전하." "저기......" 엘이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쥬네비아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저... 이제 엘로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빠르게 중얼거린 엘이 수줍게 말을 붙였다. "이모님." 쥬네비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엘에게 닿는 푸른 눈동자가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걸음을 옮기는 쥬네비아의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한층 가까워진 것 같은 친밀감을 느끼며 정원을 벗어나 본궁에 발을 디뎠다. "이런, 꼭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군요. 앞으로는 어디를 가시든 항상 호위기사들의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보호라고요? 전 보호같은 거 필요없어요!" 쥬네비아는 펄쩍 뛰는 엘을 못 본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실력있고 믿을 만한 기사들을 선별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선별이 매우 까다로울 테니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 테지만 늦어도 열흘 이나 보름 후엔 호위기사들의 보호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보호가 필요없다는 제 말, 괜히 해본 말 아니에요, 황...이모님. 전 제몸 하나 정도는 너끈히 지킬 수 있어요. 낯선 사람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니... 그런 모습은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요." "엘." 쥬네비아가 걸음을 멈추고 엘의 손을 잡았다. "싫어하신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또... 이런 말하긴 싫지만 엘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좋지 않은 일을 당하실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쥬네비아는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흔들어 엘의 말을 막았다. "절 위해서라 생각해 주십시오. 걱정 많고 근심 많은 이 늙은 이모를 위해서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어요, 이모님. 답답해도 참아 볼게요. 단, 호위기사들의 보호는 황궁 밖으로 나갈 경우에만 받겠어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황궁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엘은 고집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쥬네비아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겠군요. 이 정도 성과라도 올린 것에 만족하는 수 밖에요."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모님." 엘은 진지하게 말한 다음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걱정 많고 근심 많은 늙은 이모라 하시기엔 너무 아름답고 젊어 보이시네요." "괜한 아부 늘어놓으셔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꾀를 쓰셔도 더는 한발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자못 엄중한 표정을 지어 보인 쥬네비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엘과 쥬네비아는 소리 맞춰 웃으며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엘." 쥬네비아는 얘기를 꺼내며 무심코 앞을 바라봤다. 돌연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엘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붉은머리 여인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두 분을 한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로군요." 약간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층계를 내려온 마체라타가 두 사람보다 두 계단 높은 곳에 멈춰 섰다. 고의로 한 행동임을 모를 리 없는 쥬네비아는 노기를 참기 위해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반갑습니다, 엘리시엔 전하." 마체라타는 엘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별 관심없다는 듯 쥬네비아를 흘끔 쳐다봤다. "황후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따로 찾아 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몸소 제 처소까지 손님들을 보내주신 폐하의 은혜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날 밤부터 지금까지 말입니다." 쥬네비아의 입가에 파르르 경련을 일었다. 엘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살피다 마체라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눈길이 마주치자 마체라타가 살포시 이를 드러냈다. "친구 분은 좀 어떠십니까, 전하?" "많이 나아졌소." 엘은 망설이다 인사말을 덧붙였다. "도와줘서 고마웠소." "별 말씀을요, 전하. 전하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마체라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쥬네비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처로 돌아가십시오, 전하!" 놀란 엘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모님..." "어서 돌아가지 않고 뭐하시는 겁니까?" 쥬네비아가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모님." 엘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마체라타가 입을 열었다. "조심해 돌아가십시오, 전하. 또 뵙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습니다." 불편한 마음이 들만큼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엘은 마체라타를 흘긋 쳐다본 다음 아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쥬네비아는 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계단을 올라 마체라타와 눈을 맞대고 섰다. "엘리시엔에게 접근하지 마라, 단 한발자국도." "소중한 조카님을 제 사악한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싶으신가 보군요." "그래, 네 말이 정확하다." 쥬네비아는 얼굴이 부딪칠 정도로 마체라타에게 바짝 다가갔다. "난 네 정체가 뭔 지 알아. 넌 요사스러운 사귀(邪鬼)일 뿐이야." 마체라타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정말 감탄할 만큼 고풍스러운 분이로군요, 황후폐하. 마녀라는 말은 심심찮게 들어봤지만... 사귀라 불리는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던 시종 세 명이 쥬네비아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두려움 어린 눈으로 마체라타를 곁눈질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허둥대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만하면 흥미진진한 소문거리는 넘치도록 안겨 준 것 같군요. 이쯤에서 그만 하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나 역시 너 따위와는 더 이상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다. 명심해라, 엘리시엔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이면 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가만두지 않으시겠다니... 대체 절 어떻게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마체라타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손으로 직접 네 목을 잘라 버리고 말 것이다!" 마체라타의 눈에 비웃음이 스쳐갔다. "제 목을 자르시겠다고요? 자일스 전하께서 황후폐하보다는 황제폐하를 더 많이 닮으신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군요." "너와 더 이상 할말없다." 쥬네비아는 냉정하게 쥬네비아를 일별한 뒤 몸을 돌렸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드레스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을 때 마체라타가 말을 꺼냈다.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뭔 지 아십니까, 폐하?" 쥬네비아는 경멸어린 눈초리를 그녀에게 던질 뿐 대꾸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어머니입니다." 마체라타는 부릅뜬 눈 속에 어린 경악을 들여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보십시오. 내 아들이 날 죽이다니! 내가 낳은 내 아들이 내 심장을 파내다니! 피 흘리며 죽어가는 날 짓밟고 침을 뱉다니!" 연극조로 과장되게 소리친 마체라타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머지 않아 폐하께서 몸소 겪게 되실 일입니다." 쥬네비아는 부들거리는 손을 올려 거친 숨결이 쏟아지는 입술을 막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에도 같은 일을 계획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찮아 안타깝게도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덕분에 폐하께서 지금까지 이렇게 건재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럴 날도 얼마남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 사악한 요물!" 쥬네비아가 마체라타의 뺨을 후려쳤다. 마체라타는 손자국이 선명한 뺨에 손을 얹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고맙게도 제 계획을 도와주시는군요." 쥬네비아의 팔이 다시 번쩍 치켜올라갔다. 마체라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폐하.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니까요." 마체라타는 조소 띤 얼굴로 빈정거린 다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드님이 눈에 띄시면 최대한 빨리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폐하." 잔인한 일격을 날린 마체라타가 별안간 모습을 감췄다. 쥬네비아는 망연히 서서 마체라타가 사라진 곳에 초점없는 시선을 던졌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종과 시녀들이 그녀를 곁눈질하며 곁을 스쳐갔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이 지긋한 시종이 머뭇거리며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시종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시녀를 불러 모시게 할까요, 폐하?" "그럴 필요없다, 난 괜찮으니까." 쥬네비아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올랐다. 그리고 등을 꼿꼿하게 편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이 주춤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됐으니 그만 가 봐라." 쥬네비아는 자신의 내실 앞에서 시종을 돌려보냈다. 쥬네비아의 목소리를 들은 요아상 백작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첫눈에 황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백작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이럴 필요없네." 요아상 백작부인의 팔을 뿌리친 쥬네비아가 비틀거리며 내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뒤따라온 백작부인이 다시 팔을 내민 순간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폐하!" 놀란 시종과 시녀들이 허겁지겁 몰려들었다. 쥬네비아가 요아상 백작부인과 시녀에게 의지해 몸을 세웠을 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벽에 부딪쳤다. "그게 정말입니까?" 문 가에 버티고 선 자일스가 버럭 소리쳤다. 쥬네비아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손길을 떼어내고 자일스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황태자?" "어머니께서 정말 마체라타의 뺨을 때리셨습니까?" "그렇소, 바로 내가 그 돼먹지 못한 요물을 때렸소."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에 살기가 타올랐다. 그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검을 뽑아들었다. 혼비백산한 시종과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쥬네비아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얼굴 가득 잔인한 미소를 띤 자일스가 걸음을 빨리해 그들을 뒤쫓아갔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 시녀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자일스!" 쥬네비아가 악을 쓰며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섬뜩한 빛을 번득이는 검날이 시녀의 여린 목줄기를 반으로 갈랐다. 시녀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핏기 가신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져 카펫 위를 굴렀다. 머리를 잃어버린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몸뚱이가 시뻘건 핏줄기를 사방에 뿌리며 힘없이 무너졌다. 귀청이 터질듯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시종과 시녀들이 자일스를 피해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무시무시할 정도로 짙은 적막이 찾아왔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앞으로는 마체라타를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마체라타에게 또 다시 손을 대시면 다음 번엔......" 자일스는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검을 들어 요아상 백작부인을 가리켰다. "이 여자의 목이 잘리게 될 것입니다. 소중한 소꿉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시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또 계속 이런 식으로 제 말을 무시하신다면 다음 차례는 어머니가 되실지도 모릅니다." 미동없이 꼿꼿하게 서 있던 쥬네비아가 자일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일스의 정면에 멈춰 서서 힘껏 따귀를 후려쳤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세 번 연속 정적을 무너뜨렸을 때 자일스가 쥬네비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쥬네비아는 손목이 끓어질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제게 손을 대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쥬네비아는 잡히지 않은 왼쪽 손으로 자일스의 뺨을 때렸다. "자, 어쩔 생각이오? 이번엔 이 어미의 목을 자를 생각이오?" "예, 그럴 생각입니다!" 부드득 이가는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자일스가 쥬네비아를 거칠게 팽개쳤다. 장식장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쥬네비아는 맥없이 눈을 감았다. "폐하!"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외침이 어렴풋이 귀를 울렸다. 쥬네비아는 눈을 뜨기 위해 애썼지만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는 없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노곤하고 숨이 가빠졌다.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쥬네비아는 침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제 목 [달의 아이] 76장.깊어지는 갈등-2 "부르셨습니까?" 루드비히는 낮게 조아린 검은 머리를 내려다보며 곧장 명령을 내렸다. "리아잔 제국의 황태자 곁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만두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목숨 걸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음울할 정도로 탁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그리고 남자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곧 뭉글거리는 연기로 변한 남자가 열려진 창을 통과해 공기 중으로 숨어들었다. 루드비히는 창가로 다가가 먼 하늘을 바라봤다. 아침 내내 하늘을 점령했던 두터운 운층이 어느새 연한 안개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루드비히의 얼굴을 스치고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머리를 만지던 부드러운 손길이 떠오르자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루드비히는 손을 올려 머리를 쓸어보다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 때 밖에서 조심스런 인기척이 들렸다. "성하, 저 니제르 대사제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선 니제르가 루드비히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성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아침 내내 자리를 비운 탓에 성하께서 절 찾으신다는 연락을 이제야 받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사제께서 저 대신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충심으로 성언을 받들겠습니다." "우선 편히 앉으십시오." 니제르는 조금 망설이다 주춤거리며 의자로 다가갔다. 법황이 서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먼저 의자에 앉는다는 게 거북스러웠으나 법황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반주 삼아 기분 좋게 술 한 병을 비우고 온 상태라서 푹신한 안락의자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들었다. 루드비히는 니제르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기 위해서인지 그가 의자에 몸을 묻은 뒤에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얘길 꺼낸 사람은 더 이상 조바심을 참기 어려워진 니제르 대사제였다. "송구스럽지만 제가 해야 될 일에 대해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성하. 이상하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이 힘겨워지더군요.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자꾸 이런저런 쓸모없는 생각이나 떠올리게 되고... 또 금붕어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답답한 사람을 보면 당최 좀이 쑤셔서, 원..." 말실수를 깨달은 니제르 대사제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이미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던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극도로 당황한 그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사죄를 하려 했을 때, 루드비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답답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니제르 대사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법황이 놀랄 만큼 변했다는 건 그도 느끼고 있었으나, 싸늘한 냉기만이 감돌던 법황에게서 전해진 인간적인 온기는 한순간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머지 않아 리아잔 제국의 황권계승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사제께선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즉 후계자가 결정될 때까지 바드리오를 떠나지 마십시오." "바드리오에 머물라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성하. 그런데 전 바드리오에서 무엇을 해야 되는 것입니까?" 루드비히는 차분하면서도 힘있는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리아잔의 황위결정논의에 참석하십시오. 원로회의든 귀족회의든, 하다못해 비중있다 판단되시면 사적인 모임에도 빠지지 마십시오. 혼자하기엔 벅차실 테니 칼락 대사제와 일을 분담하십시오. 성전으로 돌아가면 며칠 내로 대사제 한 분을 더 보내 드리겠습니다." 숨 죽인 채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듣고 있던 니제르가 소리를 높였다. "허면, 리아잔 제국의 황권문제에 관여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루드비히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성하, 아시리움 종단이 각국의 주요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건 사실입니다. 강제성을 띤 적이 없진 않지만 대부분은 말 그대로 간접적인 조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리아잔 제국의 황위결정에, 가장 핵심적인 내정에 관여하시겠다니... 저로선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성하께서 어떤 의중을 갖고 계신 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대사제께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대사제께선 제가 하는 말을 명심하시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루드비히의 어조엔 싸늘한 노기가 서려있었다. 니제르 대사제는 잠시 잊고 있었던 법황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자 몸을 움츠렸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결론이 나왔는지에 대한 상세한 결과보고를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십시오. 쉽게 결정될 사안이 아니므로 알맹이없는 소모적인 논쟁이 꽤 오랫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엔 그저 구경만 하셔도 될 것입니다." "성하..." 니제르 대사제는 주저하며 카펫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에 의미없는 시선을 던졌다. "말씀하십시오." 루드비히가 차분한 어조로 재촉했다. 니제르는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시엔 전하께 힘을 실어 주시려는 겁니까? 그 분께 리아잔 제국을 되찾아 드리고 싶으신 겁니까? 황태자전하 때문에 내리신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주제넘고 불충한 줄 알면서도 여쭤 보는 것입니다." 잠자코 니제르 대사제를 바라보던 루드비히는 창을 향해 선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세부적인 사항은 차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질문의 답은... 저 역시 모르겠습니다." 루드비히는 니제르 대사제를 돌아봤다. 그의 입가엔 피곤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절 괴롭히는 갈등이 정리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을 때 황후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당장 눈앞에 죽음이 닥쳐온 사람처럼 단번에 흙빛이 되더군요. 만약 그 자리에서 황후의 얼굴을 보셨다면 아버지께서도 박장대소를 터뜨리셨을 겁니다." 얘기하는 동안 간간이 실소를 흘리던 마체라타는 말이 끝나자 고개를 젖히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마체라타. 넌 적당히 하는 게 단 한가지도 없구나.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냐?" 남자가 짜증 섞인 어조로 꾸짖었다. 그는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흥분이 좀 과했나 봅니다." 마체라타는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후 남자를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전부터 궁금해오던 건데, 왜 쥬네비아 황후에게 그리 가혹한 것이냐?" "그런 걸 물으시다니... 황후가 절 죽이려 했던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지금까지 네 목숨을 빼앗으려 한 자가 오직 황후만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아는 것만 헤아려도 얼추 열 번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그 놈들 중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았습니다. 황후 역시 머지 않아 그자들의 뒤를 따르게 될 테고요. 절대 황후에게만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마체라타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박했다. "그 자들을 죽인 건 사실이나 네가 황후에게 보이는 것 같은 적의나 복수심을 가졌던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혹시 말이다, 마체라타......" 남자가 감춰진 비밀을 캐내려는 듯 탐색적인 시선을 마체라타에게 고정했다. "널 버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쥬네비아 황후에게 옮겨진 것은 아니냐?" 마체라타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한껏 치켜 뜬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닙니다." "황후가 자일스 황태자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네가 벌인 일 때문에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 왔고 말이다. 쥬네비아 황후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팔아 넘긴 네 어미와는 극과 극일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선명히 떠오르는구나. 울며불며 매달리는 어린 널 밀치고 가차없이 돌아서던 네 어미의 모습을... 그래,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심지어는 발목을 붙잡은 가냘픈 손가락을 발로 짓밟기까지 했지." "그만 하십시오." 마체라타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남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그녀의 반응을 빈틈없이 살피며 잔인한 말을 계속했다. "만약 내가 널 불쌍히 여겨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나마저 네 어미처럼 널 버렸다면 넌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내가 말해보겠다. 아마 넌 몸을 팔며 비참하고 아무 쓸모없는 목숨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것이다. 네 어미와 똑같이 더러운 쓰레기가 돼서 말이다. 아니 똑같지는 않겠구나. 아무리 비천한 창녀라고해도 네 어미보다는 깨끗한 피가 흐를 테니까.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 마체라타?" "예,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마체라타가 순순히 인정하고 나오자 남자의 눈 깊숙이 감돌던 야릇한 섬광이 사라졌다. 흥이 깨진 남자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이 얘긴 충분히 했으니, 이제 법황을 만나고 온 일에 대해서 말해봐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마체라타는 남자에 대한 증오심을 능숙하게 감추며 그의 말에 복종했다. 그녀의 입술엔 엷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법황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지금껏 제가 봐온 사람들을 전부 합친다해도 법황에게서 풍겨 나오던 존재감과 견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강렬한 힘과 위엄이라니... 법황과 대면하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왜 그토록 법황을 두려워하시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체라타는 교묘하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그 따위 추상적인 말은 필요없다. 네가 보고 들은, 있는 그대로를 고하란 말이다." "그렇게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버지.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사실 제가 보고 들은 건 별 거 없습니다. 그저그런 뻔한 인사말이 몇 마디 오간 것 뿐이니까요. 아버지께 보고드릴만한 거라면 황태자를 공격한 마법사가 법황이 아니었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법황이 그 마법사가 아니었다고?" "예, 아버지. 황태자의 경솔한 오판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남자가 미심쩍은 기색을 내보였다. "신전을 나오자마자 황태자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습니다. 가까이 앉아 얼굴을 마주보며 얘길 나눠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사실 만찬장처럼 사람이 많고 넓은 곳에서는 실수로 사람을 잘못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곳에서 자신을 공격한 마법사를 알아봤다니... 지금에서야 말씀 드리지만 황태자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법황과 황태자의 자리가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면서요?" "그래,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니 표정이나 반응을 살펴 법황이 그 마법사임을 확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그렇다고 첫눈에 알아본 것 같지는 않았고... 첫눈에 알아봤다면 그 아이와 불꽃 튀는 설전을 벌이지도 못했을 테니까." 마체라타가 눈을 반짝이며 책상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 아이라면 달의 아이말입니까?" "그래 둘이 마주보고 앉아 가시 돋친 설전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코웃음이 날만큼 유치한 말다툼이었지만 어지간히 재미있긴 하더구나."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황태자와 법황 사이엔 단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습니까? 대화를 좀 나눴다면 괜한 오해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아 여쭤 보는 것입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긴 했다만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만큼 길진 않았다. 또 황태자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폈어야 했는데 옆에 앉은 멍청이가 자꾸 말을 거는 바람에......"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황태자의 판단착오였음이 확실해졌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나저나 그 마법사를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군요. 우리를 도우려고 일부러 황태자를 공격하진 않았겠지만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럴듯한 길을 만들어 줬다는 건 사실이니까요." "넌 착각이었다는 황태자의 말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구나. 평소의 네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말이다." 남자의 눈에 의혹이 서리자 마체라타는 바짝 긴장했다. 그녀가 자신을 속이려 했다는 걸 알게 되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아버지였다. 마체라타는 머뭇거리며 남자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마체라타에게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치켜들었다. 남자의 따가운 시선이 붉은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어서 말해라." "부끄럽게도 법황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마체라타,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네가 법황에게 첫눈에 반하다니... 너도 여자라는 걸 깜박 잊고 있었다.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만, 법황 정도의 외모라면 그럴 만도 할거다." "저도 제 자신에게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할만큼 어리지도 않고, 생각이 얕지도 않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거든요." 마체라타는 그럴듯하게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태자와 네 생각이 맞다면, 법황이 그 아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 또한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다." "물론입니다, 아버지. 그런 보잘 것없는 아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질 법황이 아닙니다. 법황을 직접 만나 보니 제가 그 동안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도 네 생각과 같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잡혔을 때, 자신의 입으로 직접 손대지 말라는 명을 내린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남자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아보니 그 일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얘기이더군요. 그러니까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말이 와전된 것 뿐이었습니다. 실제는 공개처형을 할 죄인이니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뜻의 명이 내려졌다 합니다. 빈틈없다던 아시리움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은 제아무리 완벽을 기한다해도 구멍이 생기게 마련인가 봅니다. 자신이 내린 명이 잘못 전달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법황도 과히 기분이 좋지는 않을 테지요. "단순한 실수였다니... 그래,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남자의 눈에 남아있던 의혹의 찌꺼기가 사라졌다. 마체라타는 구슬픈 미소를 희미하게 머금은 채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제가 아버지를 속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비밀들을 하나하나 쌓아 가는 것일까요?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제 몸 안에 어머니의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의 애정을 구걸하는 일에 점점 지쳐 가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두 가지가 모두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그건그렇고 지난번에 내리신 명, 아직 철회하지 않으셨겠죠? 황태자와 관련된 일은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명 말입니다." "그래, 아직 유효하다."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쥬네비아 황후역시 황태자와 무관한 일은 아니니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선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니, 아니다. 쥬네비아 황후의 일은 예외로 두겠다. 처음엔 황후가 죽든 살든 계획에는 아무 영향 없을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요근래 들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난 황후와 그 아이가 그토록 가까워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적일 수 밖에 없는 아들과 조카, 그 사이에 낀 쥬네비아 황후... 잘만 이용하면 그럴듯한 장면이 나올 것 같지 않느냐?"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빛났다. "그럼 쥬네비아 황후를 이대로 곱게 살려두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돌아가라." 남자가 성가시다는 듯 거칠게 손사래를 쳤다. 이를 악물고 있던 마체라타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쥬네비아 황후를 죽이지 않겠습니다. 세상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마체라타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체라타!" 남자는 이를 갈며 사납게 책상을 내려쳤다. 제 목 [달의 아이] 77장.은월의 향기-1 제 77장. 은월의 향기 칼 베리만은 시종이 문을 열자마자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를 본 요아상 백작부인이 몸을 세웠다. 어둡게 흐려있던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오셨군요, 칼 베리만." "폐하는 어떠십니까?" 요아상 백작부인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아직 아는 것이 없습니다. 조금 전 수석 어의관이 폐하의 침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곧 이렇다 할 말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보다 서둘러 오시느라 지치신 것 같은데 어서 앉으십시오." 칼 베리만은 백작부인 앞에 앉아 그녀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왜 갑자기 혼절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으셨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몸이 그렇게 약한 편도 아니신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신 겁니까?" "제가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얘기지만 어차피 알게 되실 일이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체라타라는 여인이 나타난 후 황후폐하와 황태자전하 사이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셨다는 건 칼 베리만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위에 엘리시엔 전하의 문제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도 말입니다.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황후폐하께서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지......" 요아상 백작부인은 말끝을 흐리며 굳게 닫힌 침소를 돌아봤다. "예, 마음고생이 크셨을 겁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폐하께 아무 도움 못 드렸다는 것이, 그저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칼 베리만도 그러하신데 바로 곁에 있으면서도 폐하께서 그런 몹쓸 일을 당하시는 걸 그저 보기만 한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일만 생각하면 정말... 당장이라도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요아상 백작부인이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쥬네비아의 그림자처럼 뒤에 서 있던 모습만 보아온 칼 베리만은 생소한 그녀의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백작부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나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없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백작부인께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만약 백작부인이 일에 관여하셨다면 문제가 더 악화되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백작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 폐하께서 엘리시엔 전하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시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어찌나 창백하시던지 안 좋은 일을 당하셨다는 걸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폐하께서 자리에 앉으시기도 전에 황태자전하께서 내실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요아상 백작부인은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말을 이었다. "소리를 지르시며... 검을 빼어드셨습니다." "검을 빼드셨다고요?" 칼 베리만이 소리 높여 반문했다. 다음순간 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황태자전하께서 폐하께 거,검을... 휘두르신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요아상 백작부인이 서둘러 칼 베리만을 안심시켰다. "전하께서 검을 휘두르신 상대는 황후폐하가 아니라 아무 죄없는 젊은 시녀였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화가 나신 황태자전하 앞에 서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 불쌍한 시녀는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시녀에게 검을 휘두르시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대체 황태자 전하께서 그토록 분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후폐하께서 마체라타의 뺨을 때리셨나 봅니다." "또 그 여인입니까? 요샌 무슨 일만 벌어졌다하면, 특히 상서롭지 못한 일엔 그 여인이 꼭 연관되어있더군요." 칼 베리만이 씁쓸하게 말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붉은머리 여자가 황궁에 들어온 후 연이어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말마따나 사악한 마녀가 틀림없습니다." "글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황후폐하께선 시녀의 죽음을 목격하신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으신 겁니까?" "그게 사실은......" 머뭇거리던 백작부인이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어의관이 문을 열고 나왔다. "폐하께선 좀 어떠신가?" 칼 베리만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어의관에게 다가갔다. 어의관이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마침 이 곳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각하. 어서 들어가보십시오. 폐하께서 각하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다면 정신을 차리셨나 보군. 알았네." 칼 베리만은 눈으로 요아상 백작부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황후의 침소로 들어갔다. 칼 베리만이 침대 옆에 멈춰서자 그를 알아본 쥬네비아가 가냘픈 미소를 건넸다. "와 주셨군요, 칼 베리만." "좀 어떠십니까, 폐하?" "많이 좋아졌습니다." 칼 베리만은 황후의 관자놀이 옆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천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혼절하신 이유가 궁금했는데 머리를 다쳐 그러신 거로군요." 쥬네비아는 상처를 가리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거기 앉으십시오, 칼 베리만. 제가 칼 베리만을 뵙고 싶어하리라는 걸 요아상이 잘도 짚어 내었군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백작부인께서 폐하를 위하는 마음이 참으로 깊으신 것 같습니다. 폐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금까지 자릴 못 떠나신 채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쥬네비아는 불편한 자세를 고치며 입을 열었다. "프란은 옛날부터 자신보다 절 먼저 생각해주었습니다. 아마 저만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열 네살 때였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둘이 함께 낙마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 발목이 약간 접질리고 조금 멍이 든 정도의 경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눈물이 나오더군요.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픔보다는 낙마의 충격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두려움에 떠는 절 열두 살 밖에 안된 프란이 어찌나 다정하게 돌봐 주었는지... 전 프란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많이 고맙기도 하고, 많이 미안하기도 한 친구입니다." 칼 베리만은 차분하지 못한 쥬네비아의 어조에서 그녀가 진짜 말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따로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폐하, 마음 편히 말씀하십시오." 칼 베리만이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쥬네비아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가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일스도 마체라타도...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마체라타가 제게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분노가 치밀더군요. 그래서 뺨을 후려쳤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그럴 힘만 있었다면... 아마 마체라타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을 겁니다." "폐하..." 쥬네비아는 서둘러 칼 베리만의 입을 막았다. "압니다, 칼 베리만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어하시는지 압니다. 예... 이런 마음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마체라타도 저도 서로에 대한 미움을 없앨 수도, 숨길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일스를 교묘하게 조종해 저와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자일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그 사실을 극명히 깨달았습니다. 자일스가 제 눈앞에서 어떤 짓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왜 마체라타를 때렸느냐고 윽박지르며......" 말을 잇는 것이 너무 힘들어 보이자 칼 베리만은 재빨리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면 자일스가 절 밀쳤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칼 베리만은 놀라 표정이 굳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마체라타를 때리면 프란을 죽이겠다 위협하더군요. 그리고 그 다음엔 어미인 제 차례가 될 거라는 말까지......" "폐하, 감정이 격해지신 상태라 말이 험하게 나온 거지 절대 본심에서 하신 말씀이 아닐 겁니다." "아니오, 본심에서 한 말입니다. 그냥 홧김에 해본 말이 아닙니다. 자일스의 눈을 보셨다면... 저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그 아이의 눈을 보셨다면 칼 베리만께서도 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으실 겁니다." 쥬네비아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녀에게 닿아 있는 칼 베리만의 눈길에 연민이 담겼다. "다 털어놓겠습니다.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까지 보여 드렸는데, 칼 베리만께 무엇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전... 자일스가 두렵습니다. 언젠가 그 아이의 손에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이..." "폐하!" 경악한 칼 베리만이 말을 잘랐다. "자일스는 절 죽일 겁니다." 쥬네비아는 잘라 말했다. 그녀의 초췌한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지금 폐하께선 심신이 다 지쳐 있는 상태십니다. 그래서 자꾸 약한 마음이 들고, 그 약한 마음이 터무니없는 망상을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저도 제 생각이 터무니없는 망상이길 바랍니다. 칼 베리만을 뵙고 싶어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쥬네비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기 전에 전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제 자신은 물론 자일스를 위해서도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폐하?" 심상치 않은 느낌에 칼 베리만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칼 베리만, 제가 염려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엘리시엔이 리아잔 제국의 황위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일스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물론 엘리시엔까지 해하려 들 겁니다. 전 어떻게 해서든 그걸 막아야 합니다.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시겠습니까, 칼 베리만?" 쥬네비아는 필사적으로 칼 베리만의 시선을 잡았다. "부탁입니다, 엘리시엔에게 황위를 포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동안 칼 베리만은 멍하니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칼 베리만, 제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조언을 좀 해주십시오. 왜 그리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겁니까?" 쥬네비아가 초조하게 그를 다그쳤다. "폐하, 엘리시엔 전하는 리아잔 제국의 정통후계자십니다." "그래서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시엔이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요? 그런 말씀이십니까? 정통후계자가 아니니 자일스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대체 자일스가 엘리시엔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성불구자였다는 거요? 아니면 자일스에겐 페르가몬 폐하의 피가 흐르지 않아서입니까? 그게 바로 이유입니까? 실제 페르가몬 폐하의 피를 받아야 했던 건 자일스입니다! 자일스, 내 아들입니다! 헤르티아의 딸이 아니란 말입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칼 베리만이 강경하게 소리쳤다. 쥬네비아는 비명같은 신음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칼 베리만은 안타깝게 그녀를 불렀다. "폐하......" "나가주십시오. 혼자있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꺼내려던 칼 베리만은 마음을 바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어주십시오. 방법은 제가 알아서 찾겠습니다." 칼 베리만은 쥬네비아를 돌아봤다. "폐하...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불행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전 그걸 막아야 합니다." 칼 베리만은 그 어떤 말로도 쥬네비아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광기 에 사로잡힌 듯 어둡게 일렁이는 눈동자를 외면했다. 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문을 나섰다. 엘은 칼 베리만이 그녀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달려나갔다. "칼 베리만!"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칼 베리만이 팔을 내리며 빙그레 웃었다. "잘못했으면 길이 어긋날 뻔 했어요.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약속이 있으신 겁니까?" 칼 베리만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 건 아니고... 이모님께 가보려고요. 아까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보였거든요." "나가시기 전에 잠깐 시간을 내주십시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으음...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지... 좀 곤란할 것 같은데......" 고민하는 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이 키득거렸다. "당연히 시간을 내드려야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칼 베리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눈치 빠른 시종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았다. "칼 베리만과 이렇게 마주보고 앉은 거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요." 칼 베리만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니요? 혹시 제가 보고싶어서 괜한 핑계를 대신 거 아니에요?" "이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칼 베리만은 웃음을 지우며 그늘 한점없이 해맑아 보이는 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황궁 생활에 잘 적응하시는 것 같군요." "아직 멀었는걸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하지만 황궁생활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걸,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상당히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여태껏 살아오면서 요즘같이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리오와 리반도 옆에 있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볼 수 있고, 또... 절 친딸같이 아껴 주시는 이모님도 계시고요. 어떨 때는 꿈이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서 몰래 팔을 꼬집어 볼 때도 있어요." 엘은 쑥스럽게 웃다가 그늘져 보이는 칼 베리만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칼 베리만, 무슨 일 있으세요?" "엘, 오늘은 황후폐하를 만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엘은 어리둥절해졌다. "폐하께서 조금 다치셨습니다." "예에? 어디를 얼마큼 이시나요?" "이마를 조금 찢기신 것 뿐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 그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으실 것 같아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오늘 낮에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쳐갔다. "그 여자 때문이죠? 마체라탄가 하는 여자 말이에요. 오늘 우연히 마체라타를 만났을 때, 이모님과 그 여자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눈치챘어요. 대체 그 여자가 이모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폐하께선 그 여인 때문에 다친 게 아니십니다, 엘. 단지 실수로 넘어지신 것 뿐이랍니다. 그러다 운 나쁘게도 가구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치시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 말씀을 해주러 오신 건가요?" "그것도 있고......" 칼 베리만은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정하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물건말입니다, 엘." "그 물건이요? 아아, 그거요!" 엘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피고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그건 왜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법황 성하께서 그걸 엘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던데... 사실입니까?" "리자드에게 들으셨나 보군요. 예, 사실이에요." "대공의 말씀이 맞으셨군요. 사실 전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성하께서 엘에게 왜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 이해되지 않더군요. 두 분이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신 겁니까? 지금까지 제게 그런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칼 베리만이 섭섭함을 나타내자 엘은 싱겁게 웃었다. "특별히 말씀드릴만한 게 있어야지요. 그 물건도 아시리움에서 사과의 의미라며 선물을 제의했을 때 갑자기 생각나서 말하게 된 것뿐이에요. 괜히 물건에 이상한 조건만 붙이는 꼴이 되었지만요. 리자드한테 말했더니 잔뜩 인상을 쓰고 절 노려보더군요. 분위기가 어찌나 험악한지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칼 베리만도 리자드가 인상쓰면 얼마나 살벌한지 잘 아시죠?" 엘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칼 베리만은 심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물건에 대해 왜 제게 묻지 않으신 겁니까, 엘?" 엘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칼 베리만께 여쭤보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을 여러 번 하긴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망설여지더라고요. 리자드에게 직접 들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가 봐요. 바보같이 제대로 묻지도 못 할거면서요." "엘, 제가... 제가 말씀드릴까요?"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칼 베리만을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칼 베리만은 생각을 정리하듯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마침내 그가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엘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래도 리자드한테 직접 듣는 게 좋겠어요. 죄송해요, 칼 베리만. 하지만 리자드가 그렇게까지 꺼려하는 얘길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아니, 칼 베리만이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 그냥......" "말씀하지 않으셔도 압니다, 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엘 말씀대로 대공께 직접 들으셔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어 못난 행동을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칼 베리만은 진이 다 빠져버린 사람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흔들었다. 엘은 유난히 지치고 피곤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위로의 말을 삼켰다. 무슨 얘기를 해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입을 막았다. "이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엘.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요." 엘은 칼 베리만을 문까지 배웅했다. "엘, 힘든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힘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예, 그럴게요. 칼 베리만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칼 베리만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고맙습니다, 엘. 말씀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조심해가세요, 칼 베리만." 엘은 한동안 문가에 서서 복도를 걸어가는 칼 베리만을 지켜봤다. 유난스레 마르고 작아보이는 그에게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부른 거긴 하지만 야노쉬 공작을 보는 마르키젤의 눈은 곱지 않았다. 마르키젤은 몸이 아프다는 궁색한 핑계로 그의 부름에 세 번이나 불응한 야노쉬에게 적지 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공작. 거동조차 힘들다는 얘길 들었는데 직접 보니 꽤 건강해 보이는군. 난 공작이 다 죽어가는 송장 꼴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이오. 그래, 몸은 좀 어떻소, 공작? 혹시 아랫것들에게 장엄한 장례식준비라도 지시하고 입궁한 건 아니오?" 마르키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야노쉬는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마음 써 주신 덕분에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야노쉬는 눈치 빠르게 마르키젤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기분이 전혀 풀리지 않았음을 알아챈 야노쉬는 일부러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머뭇거리는 척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공작." "예...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허리가 조금 거북스러웠다는 것만 제외하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폐하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이유도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르키젤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야 진실을 털어놓는군. 그럼 감히 내 명을 세 번이나 거역한 이유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해보시오. 다시 한 번 조잡한 핑계로 날 농락하려 들면 제아무리 공작이라해도 무사히 황궁을 나서진 못할 것이요." 야노쉬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다 저의 부덕으로 인해 발생한 일입니다, 폐하. 지난번 혼인식 이후... 전 집을 나서기만해도 의혹에 찬 시선들을 받아야 했습니다. 절 파렴치한 괴물로 보는 시선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절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는, 견디기 힘든 모욕까지 당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분노를 터뜨릴 수도 없고, 또 제 무고를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따가운 시선들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게 너무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그만 폐하께 씻지 못할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만!" 마르키젤이 사납게 탁자를 내려쳤다. 흠칫한 야노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르키젤은 맹수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야노쉬의 멱살을 와락 휘어잡았다. 그리고 바짝 끌어당겨 부딪칠 듯 얼굴을 맞댔다. "감히 내 앞에서 얕은 꾀를 피우려 하다니! 공작의 그 유별난 성적취향에 대해선, 나는 물론이고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소.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공작에게 경멸이 담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단 말이오. 하지만 난 공작이 어린애를 좋아하든 겁탈을 즐기든 상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내가 참을 수 없을 수 건 공작이 그 세치 혀로 날 속이려 했다는 거요." 목이 조여들자 야노쉬는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입술을 벌렸다. "공작, 내 말 명심하시오. 앞으로 내 앞에선 절대 거짓말을 입에 담지 마시오. 만약 공작이 내게 거짓을 고했다는 걸 알게 되면, 공작이 얕은 꾀를 생각해내기도 전에 감히 황녀를 겁탈한 죄를 물어 공작의 껍질을 벗길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소, 공작?" "예에..." 야노쉬는 간신히 목에서 소릴 뽑아냈다. 마르키젤은 천천히 손을 푼 다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목을 어루만지며 마르키젤을 곁눈질하는 야노쉬의 잿빛 눈에 독기가 아른거렸다. "공작을 보자고 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겠소. 공작도 알겠지만 머지 않아 차기황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오. 내 자리가 흔들리진 않을 테고, 자일스가 페르가몬의 딸년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앞 일은 모르는 거 아니오? 멍청하게 손 놓고 있다가 당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 일을 의논하시려고 절 부르신 거란 말씀입니까, 폐하?" 마르키젤은 반백의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공작." 야노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왜 폐하께서 저와 그런 문제를 의논하신다는 건지... 저로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르키젤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해할 수가 없다? 공작, 감히 날 능멸하려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적인 자리에선 국정에 관련된 중요사안에 대한 언급을 피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걸 폐하께서 잠시 잊고 계신 것 같아 노파심에 드린 말씀입니다." 야노쉬의 말투는 능글맞을 정도로 매끄러웠다. 볼을 실록이며 그를 노려보고 있던 마르키젤이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공작은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오. 내 지금까지 수많은 자들을 접해봤지만 공작같이 음흉한 능구렁이는 한 명도 없었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야노쉬는 여유있게 받아넘겼다. "조금 전 내 행동이 어지간히 서운했나 본데... 좋소, 공작. 원하는 걸 말해 보시오. 단지 마음이 상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행동을 할 공작이 아니란 걸 알고 있소. 분명히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거요." "과연 폐하시군요. 전하께선 절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실 폐하께 꼭 드리고 싶은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공작." 야노쉬는 마르키젤과 시선을 맞대며 본심을 털어놨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 앞으로 벌어지게 될 황권다툼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달의 아이를 제게 주십시오." 마르키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소?" "엘리시엔 황녀를 제게 달라는 청을 올렸습니다." "그,그러니까 그 아이와 혼인을 하겠다는 거요?" 입을 딱 벌리고 있던 마르키젤이 목청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엘리시엔 황녀가 제아무리 정통황위계승자라해도 지금 리아잔 제국을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폐하십니다. 엘리시엔 황녀 또한 폐하를 섬기는 아랫사람으로서 당연히 폐하께 복종해야 됩니다." "물론 엘리시엔은 내게 복종해야하오. 하지만 엘리시엔을 달라니! 그 아이와 혼인을 하겠다니! 내 공작에게 엘리시엔을 주느니 사사건건 내게 맞서는 루벤스타인과 그 아이를 혼인시키겠소! 차라리 그게 더 안전할 테니까! 내가 공작의 속셈을 모를 것 같소? 엘리시엔을 등에 엎고 리아잔을 삼키려고 이러는 것 아니오? " 분노를 참지 못한 마르키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야노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제게 리아잔 제국을 삼키려는 야욕같은 건 없습니다, 폐하. 전 말 그대로 달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 뿐입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제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폐하. 엘리시엔 황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절 걷어찼습니다." 경멸이 가득했던 보라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야노쉬는 한순간 냉정을 잃어버렸다. "그 계집애가 비천한 심부름꾼을 야단치듯 절 걷어찼단 말입니다! 그 치욕을 고스란히 되갚아 주기 전엔, 눈도 편히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공작이 왜 엘리시엔을 요구하는지 이제 알겠군. 공작의 마음, 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소. 하지만 말이오, 공작.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오. 지금은 오직 눈에 복수만이 가득 찬 상태라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겠지. 하지만 막상 엘리시엔과 혼인을 하게 되면 딴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소?" 야노쉬가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걱정 때문이시라면 마음 놓으십시오, 폐하. 엘리시엔 황녀를 달라는 제 청은 모든 것이 깨끗이 마무리된 다음에 들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자일스 전하께서 황태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내신 연후에 말입니다. 물론 전 성심을 다해 황제폐하와 황태자전하를 도와 드릴 것입니다." 마르키젤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엘리시엔과 공작을 혼인시킨다... 정말 좋은 생각이오. 새삼스레 공작에게 감탄하게 되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그런데 방금 전에 하신 폐하의 말씀을, 제게 엘리시엔 황녀를 주시겠다는 확답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렇소, 공작. 일만 잘 풀리면 공작은 틀림없이 엘리시엔을 손에 넣게 될 것이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은밀한 미소를 나눴다. 제 목 [달의 아이] 77장.은월의 향기-2 엘은 몸을 버둥거리며 시트를 할퀴었다. 얇은 천을 놓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작은 아픔이 그녀를 피투성이 방에서 건져 올렸다. 엘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부릅떴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축 늘어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전신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엘은 겁먹은 들짐승처럼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고동쳐 손을 대지 않고서도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천둥같은 소리가 악몽 속을 울리던 그녀의 비명소리와 맞물려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붉은 방의 악몽.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붙어 놔주지 않는 숨이 막힐 듯한 피비린내.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흠칫하며 더욱 커다랗게 치켜떴다. 다시 악몽에 사로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을 감는 것조차 겁이 났다. 갈라진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거친 웃음 속엔 어리석은 자신에게 던지는 질타가 담겨있었다. 엘은 일어나 앉아 땀에 젖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끈적끈적하게 엉기는 살갗의 감촉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선반에 놓여진 물병을 들어 대리석세면기를 반쯤 채웠다.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세차게 얼굴을 씻었다. 엘은 잠옷소매로 대충 물기를 닦은 다음 헝클어진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발길이 가는 대로 카펫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문득 멈춰 서서 달빛이 내려오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어둠과 어우러진 은은한 달빛 위로 청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순간 엘은 망설임없이 걸음을 옮겨 침대맡, 작은 협탁 서랍에 넣어 둔 브레이슬릿 꺼내들었다. 싸늘한 감촉이 달아오른 피부에 기분 좋게 와닿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마음을 바꿀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 브레이슬릿을 재빨리 손목에 찼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엘은 리자드가 잠을 자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리자드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대화는 나누지 못하더라도 잠자는 그의 얼굴을 잠시 보고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리자드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술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엘은 잠시동안 방 가운데에 꼼짝 않고 서서 리자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선반으로 걸어가 은잔을 꺼내들었다. 그녀의 행동을 모를 리 없는 리자드는 말을 하기는커녕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엘은 의식적으로 또박또박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그녀의 시선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리자드의 얼굴에 고정되어있었다.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은 다음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리자드를 조심스레 살피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리자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엘이 아닌 넘칠 듯 가득 채워진 술잔에 닿아있었다. 리자드가 느닷없이 그녀의 술잔을 들어 찰랑거리는 술을 삼분의 이 가량 자신의 잔에 따랐다. 엘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의 잔을 내려놓는 커다란 손을 노려봤다. 저 못된 성격에 이 정도라도 마시게 해주는 걸 고마워해야겠지. 엘은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마음먹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에 불이 붙었다. 뜨거운 불길이 목과 귀를 가득 채우더니 순식간에 정수리까지 치솟았다. 가슴이 조여들며 숨이 막혀왔다. 엘이 질식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거친 기침이 쏟아졌다. 리자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연신 기침을 토해내는 엘을 흘긋 본 다음 술잔을 집어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얄밉게 말했다. "네가 마시기엔 너무 독한 술이다." "너,너무해요. 그런 건... 미리 알려... 줬어야죠." 엘은 얼얼한 목구멍을 울려 간신히 말했다. "미리 알려준다고 안마실 네가 아니지 않나? 오기를 부려 더 마셨겠지." 리자드는 그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내가 리자드같은 고집불통 술꾼인줄 알아요?" 뜨끔한 엘은 괜스레 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보일듯 말듯 미소가 묻어 있는 입술과 흘러든 달빛에 젖어 투명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훔쳐봤다. 갑자기 리자드가 고개를 돌렸다. 엘은 그의 예리한 시선에 잡히자 딴청을 부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이 많이 덮였네요. 비가 올 것 같지 않아요?" "폭풍이라도 몰려들면 비가 올 수도 있겠지." 리자드가 무심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폭풍이 몰려들면 당연히 비가 오겠죠. 그렇게 뻔한 얘길 꼭 해야겠어요?" 엘은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리자드와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거냐?" "리자드요. 가끔가다 되게 웃긴 거 모르죠? 리자드가 처음 대하는 희귀한 생물을 보는듯한 눈으로 엘을 응시했다. "이상해요.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온 건데 기분이 좋아졌어요." "내 방은 네 기분 풀이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엘은 리자드의 냉랭한 말을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자꾸 악몽을 꿔요. 오늘도 악몽을 꾸다 잠이 깼어요. 간단히 말하면 피투성이에 방에 갇히는 꿈인데... 완전히 밀폐된 그리 크지 않은 방이라 그런지 꼭 웅덩이처럼 느껴져요. 꿈은 내가 붉은 문 앞에 서 있는 것부터 시작돼요. 아, 첫 번째 꿈은 아니었어요. 그땐 아시리움 성전의 서관에서 시작되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꿈부턴 시작이 바뀌었어요." 엘은 심호흡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꿈속의 난 붉은 문을 열면 안 된다는 걸 알아요. 붉은 방에 갇히면 죽게 되리란 것도요. 그런데도 무엇인가에 떠밀린 것처럼 문을 밀어요. 그리고 한발한발 걸음을 옮겨요. 그러면 내가 들어선 걸 알기라도 하는지 소리없이 문이 닫혀요. 난 뒷골이 쭈뼛 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며 붉은 방을 둘러봐요. 축축하게 젖은... 날 지켜보고 있는 피투성이 방을요.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되는지... 알아요?" 목소리가 한껏 잦아들었다. 얘기소리도 우물우물 입안에서 가라앉았다. 엘의 눈길이 리자드를 찾았다. 창 밖을 내다보던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위로 청량한 달빛이 내려왔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걸 봐요. 정말 터무니없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걸 봐요. 내가 말하면 리자드는 아마 웃을 거예요. 내가 리자드라도......" "네가 나라도 웃을 거라고?" 엘은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난 웃을 수 없어요. 내가 리자드가 된다 해도 웃지 못할 거예요. 정말 무섭고 끔찍하다는 걸 아니까요." "나도 웃지 않는다." 리자드가 조용히 말했다. 엘은 이상스레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자그맣게 웃었다. "내가 악몽 속에서 보는 건 바로 리자드예요. 지금처럼 잔뜩 인상쓰고 있는 리자드라고요." 엘은 익살스럽게 코에 주름을 잡아 보인 다음 다리를 세웠다. "이제 그만 가서 자야겠어요. 그래야 기분 좋게 아침을 맞죠. 리자드도 술 그만 마시고 잠이나 자요. 요새 술 너무 많이 마신다는 거 알아요?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모든지 과하면 좋지 않은 거라고요." 리자드가 몸을 돌리는 엘의 손목을 잡았다. "말해봐라, 붉은 방에서 무엇을 보는지." "말했잖아요, 리자드라고." "장난치지 말고." 길고 강한 손가락이 엘의 손목을 조였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지만 엘은 얼굴을 찌푸리며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리자드는 그 즉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어, 바로 속아넘어가네! 바보, 내가 그 정도로 약할 것 같아요?" 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자드를 보며 키득거렸다. "돌아가라." 술잔을 비운 리자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가 붉은 방에서 무엇을 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별로." 엘은 안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서둘러 좇아갔다. "왜 또 심술이에요? 사실은 궁금하죠?" "난 분명히 별로라고 했다." 리자드가 단추 서너 개를 풀어내리더니 셔츠를 머리위로 벗어내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엘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는 뚜렷한 음영을 그리고 있는, 탄탄하면서도 날씬한 근육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넓은 어깨를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조금씩 미끄러져 군살 하나없이 날씬한 복부에서 멈췄다. 가슴고동이 빨라졌다. 곧 관자놀이에 솟아난 혈관까지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자유의지라도 가졌는지 그녀의 눈길이 멋대로 리자드의 긴 다리를 더듬었다. 리자드가 아무 말없이, 또 움직임없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비딱하게 세워진 다리를 발견했을 때였다. 엘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쭈뼛쭈뼛 시선을 올렸다. 비스듬히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리자드와 눈길이 맞닿았다. 그 순간 엘은 허겁지겁 눈을 내리깔았다. "저기... 어디까지 했죠?" "잘 자라는 인사말까지." 엘은 부츠를 벗는 리자드를 훔쳐보며 그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렇지, 생각났어요. 내가 붉은 방에서... 무엇을 보는지 리자드가... 그러니까 리자드가...... 이런 제길! 옷 좀 입으면 안돼요!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잖아요! 그걸 노리고 일부러 벗은 거죠? 그렇게 몸매자랑이 하고 싶으세요, 대공전하? 그럼 사람 감질나게 하지말고 화끈하게 발가벗는 게 어때요?" 엘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호기있는 외침이 끝나자 알 수없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그녀의 뺨을 화끈거리게 했다. 엘은 주위가 그리 밝지 않아 리자드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떠올리며 태연한 척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던 리자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넌 소녀다운 수줍음같은 것도 없는 거냐? 열 여덟이 아니라 예순 여덟 살인 것 같구나. 그리고 난 분명히 돌아가라고 했다." "수줍음같이 쓸모없는 걸 왜 가져요? 그리고 멋대로 날 할머니로 만들지 말아요. 또 난 아직 할말이 남아있어요." 엘은 허세를 부리며 구석에 놓여진 옷궤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끔하게 정리된 옷가지 중 손에 잡히는 대로 셔츠 한 장을 꺼냈다. "자, 받아요." 리자드는 휙 날라 오는 셔츠를 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그거 입고 얌전히 내 말이나 들어요. 말을 다 끝내기 전엔 여기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자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에 든 셔츠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두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다 논거냐?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거다." 리자드가 엘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뿌리친 다음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디 마음대로 해 봐요,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일어나라." 당장 거만한 명령이 나왔다. 엘은 단호하게 맞섰다. "싫어요. 말 했잖아요, 할 말을 다 끝내기 전엔 여기서 한발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엘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리자드가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그러더니 그녀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창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놔! 덩치만 큰 무식한 야만인 같으니!" 주먹으로 리자드의 등을 때리던 엘은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단단한 팔뚝에 이를 힘껏 박아 넣었다. 리자드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엘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아 창턱에 앉혔다. 그리고 엘을 사이에 두고 창턱에 양손을 짚은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말해봐라." 엘은 불안정한 자세를 보완하기 위해 두 손으로 리자드의 팔을 하나씩 움켜잡았다. "붉은 방에서 무엇을 보는지 가르쳐 줄게요. 그럼 리자드는 나한테... 그 물건에 대해 얘기해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 하나씩 주고 받자는 말이에요, 우리 둘이 공평하게 말이죠." "내 대답은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날... 죽이겠다는 말이요?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엘은 거칠게 속삭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단단한 근육을 파고들었다. 창백한 달빛이 흘러 든 청회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숨죽인 침묵이 조금씩 깊어졌다. 리자드는 엘의 눈에 고정돼 있던 시선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엘은 가슴고동이 불규칙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리자드가 손을 올려 그녀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이 머리를 따라 그녀의 목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리자드의 눈동자엔 강렬하게 번뜩이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깊숙이 감춰졌던 욕망이 청회색 눈동자를 어둡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리자드가 엄지손가락으로 엘의 볼을 어루만졌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감촉에 솜털이 파르르 떨며 일어섰다. 목덜미로 손을 움직인 리자드가 그녀를 앞으로 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를 향해 다가들었다. 리자드의 숨결이 살짝 벌어진 입술을 간질였을 때 그의 얼굴이 정지했다. 리자드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달아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리자드가 돌연 그녀의 어깨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더니 몸을 젖히며 훅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토해냈다. 경직된 목줄기가 환한 달빛에 드러냈다. 엘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두 팔을 올려 리자드의 목을 감쌌다. 꼿꼿이 굳어있던 리자드가 그녀의 등을 힘있게 감싸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두 사람은 어떤 작은 변화가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무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정말 리자드 손으로 날 죽일 수 있어요?" 엘은 조금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잠시동안 꼼짝 않고 그녀를 안고만 있던 리자드가 단호하게 몸을 떼어냈다. "그 물건에 대해 말해줘요!" 엘은 강하게 요구했다. 리자드가 날카롭게 맞받았다.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걸 원하잖아요? 그 물건을 원하잖아요? 그런데 왜 말해주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난 그걸 리자드에게 갖다 줄 수 있단 말이에요. 말만 해주면 리자드가 원하는 걸 갖게 해줄 수 있단 말이에요." 안타까움을 담은 말이 이어지는 동안 리자드의 얼굴은 점점 냉정해져 갔다. "그런데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거냐고요?"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정신이 좀 들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리자드가 그녀의 어깨를 슬쩍 떠밀었다. 중심을 잃은 엘은 비명을 지르며 성 주위를 감고있는 수로로 곤두박질쳤다. 곧 엄청난 소리가 귓전을 때리더니 차디찬 찬 물이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수로의 거의 밑바닥까지 빠진 엘은 신선한 공기를 찾아 물을 박차고 올랐다. 몸에 척척 달라붙는 옷 때문에 팔다리를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한 양동이는 족히 될 만큼의 물을 삼켜야 했다.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마자 엘은 기침을 터뜨리며 허겁지겁 공기를 빨아들였다. "정신이 좀 들었나?" 머리 위에서 놀림을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은 고개를 치켜들고 리자드를 노려봤다. "리자드, 이 나쁜 놈!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죽여 버릴 거야! 들었어? 죽여버릴 거라고! 그 뻣뻣한 목을 졸라 죽여버릴 거야!" 맹렬히 주먹을 흔들던 엘은 머리꼭대기까지 물 속에 빠졌다가 켁켁 대며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서너 번은 더 빠져야 정신을 차리겠군." "잘난 체 하지마! 이 나쁜 놈아! 어디 두고 보자고!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난 너처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리자드의 어조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언젠가 똑같이 갚아 줄 거야! 아니, 열 배, 스무 배로 갚아 주고 말 거야!" "열 배, 스무 배가 어느 정도인지나 알고 그런 말 하는 거냐?" "제길! 그 뻔뻔한 입부터 뭉개 줄 테다, 이 폭군아!" 더 쏘아붙이려던 엘은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슨 일이지?" "수로에 뭔가가 빠지는 같은 소리가 들렸어!" "그래, 나도 분명히 들었어!" "혹시 성에 도둑이 든 거 아니야?" "빨리빨리 서둘러! 어서 가보자고!" "어, 저기 뭔가 보이 것 같은데?" 엘은 마지막으로 리자드에게 주먹을 한 번 휘둘러 보인 뒤 손을 더듬어 브레이슬릿을 찾았다. 사람들의 눈을 가까스로 피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카펫 위에 털썩 드러누워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결이 잦아들자 그녀의 입술에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바보야, 그렇게 당하고도 웃음이 나오냐?" 엘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리다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게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마음 한구석에선 심지어 작은 행복같은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엘은 미소 띤 얼굴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청결하고 신선한 밤내음이 한껏 밀려들어 가슴을 채웠다. ********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늦어졌군요. 이틀간 쉬고 수요일에 다음 편 올리겠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시길... 덧)오타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ちあめ님, 지금 막 쪽지 확인했습니다. 덕분에 잘 고쳤습니다. 본문만 수정했기 때문에 연재글엔 오타가 그냥 남아있을 겁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워낙 바쁜데다, 또 워낙 게을러서...(긁적긁적) 제 목 [달의 아이] 78장.원로회의-1 제 78장. 원로회의 "세상 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한 여자가 오메른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전 이만 가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강아지들에게 같은 말을 전하겠습니다. 아마 지금쯤 애를 태우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경호원들이 돌아간 게 확실해지면 집으로 가도 좋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불러만 주시면 언제 어디서든 그 즉시 달려오겠습니다. 그리고 성심을 다해 오메름님을 모시겠습니다." 노골적인 유혹을 던진 여자가 매끄럽게 몸을 돌렸다. 마체라타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다 오메른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가엾은 여자는 네 성적취향을 모르는 것 같구나." "내 성적취향이 어떻든 네가 알 바 아니다. 다만 난 꽤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밝혀 두겠다." "흐음... 다양한 취향이라... 궁금해지는군." 마체라타는 오메른을 아래위로 훑어본 다음, 옆에 서 있는 체사레에게 흥미 섞인 눈길을 던졌다. 눈이 마주치자 체사레가 살짝 이를 드러냈다. 마체라타는 관심없다는 듯 바로 얼굴을 돌렸다. "그나저나 제법 신경을 많이 썼구나, 오메른. 베르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한 그럴듯한 집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미모의 여인까지." "베르그는 의심이 많은 자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조개처럼 문을 닫고 깊숙이 숨어 버릴 거다."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에 흥분이 서렸다. "들을수록 얼마나 대단한 자일지 궁금해지는구나, 더 이상 참고 기다리기 힘들만큼. 이만하면 강아지들도 돌아갔을 것 같은데 이젠 베르그를 방문해도 되지 않을까? 운없이 제때 움직이지 못한 놈들은 입을 막아버리면 그뿐이고." "좋다." 지체없이 결정을 내린 오메른이 내실 안쪽으로 나있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마체라타는 안으로 들어서는 오메른을 따라 서너 개의 장식등이 비치는 침실에 발을 디뎠다. 그녀의 뒤로 들어온 체사레가 문을 닫고 나른한 동작으로 몸을 기댔다. 오메른과 마체라타는 침대 옆에 멈춰 서서, 다리를 넓게 벌리고 잠들어 있는 베르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검은 천으로 눈이 가리워진 채 양팔을 치켜들고 있었는데 손목을 감은 끈이 침대 위에 달린 청동조각과 연결되어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호오, 상당히 거나하게 즐긴 모양이로군." 마체라타가 비웃는 눈으로 베르그를 훑어내리자 오메른이 바닥에 떨어진 시트를 들어 노출된 그의 하반신을 가렸다. "같은 남자로서 민망한가 보지?" 마체라타는 피식 웃었다. 오메른이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작해라, 오메른. 어서 네 실력을 보고 싶다." 마체라타가 가슴에 팔짱을 끼며 뒤로 물러섰다. 오메른은 몸을 굽혀 베르그의 뺨을 철썩 때렸다. 끙 소리를 내며 뒤척이려던 베르그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자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예 귓가에 대고 자장가를 불러주지 그러냐, 오메른?" 마체라타의 빈정거림이 끝나자 체사레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둘 다 여기서 당장 꺼져!" 오메른이 버럭 소리지르며 험악하게 입술을 말아올렸다. "무...무슨 일이야?" 잠이 깬 베르그가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뒤이어 요란하게 하품을 하자 오메른이 이를 갈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 "누구냐?" 바짝 긴장한 베르그가 숨가쁘게 소리쳤다. "이 집의 주인이라고나 할까?" 흠칫한 베르그가 미친 듯이 팔을 잡아당기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나크! 나크! 펜스! 카디온! 멍청한 놈들! 어디있는 거야?" "널 지켜주던 놈들은 다 돌려보냈다. 그러니 그렇게 소리질러 봐야 네 목만 아플 뿐이다." 꼼짝없이 걸려 들었다는 걸 깨닫자 베르그는 망연자실해 졌다. 그는 몸을 도사린 채 가슴을 들썩이며 빠르고 가쁜 숨을 헐떡였다. "말을 꽤 잘 알아듣는구나." "워,원하는 게 뭐냐?" 베르그가 겁에 질린 어조로 묻자 오메른은 한층 느긋해졌다. "몇 가지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물음에 대답만 잘해주면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다." 오메른은 의자를 가져다 여유있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네가 순진한 애송이를 시켜 사디키로 하여금 가짜 후계자의 반지를 만들게 한 사실을 알고 있다. 난 네게 그 일을 사주한 자가 누군지 알고 싶다." "난 모르는 일이다! 사디키란 자는 누구고, 가짜 후계자의 반지는 또 뭐냐? 왜 내게 그런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묻는 거냐? 대체 네 정체가 뭐냐?" 오메른은 지루하다는 듯 나른한 동작으로 일어나 침대에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 주먹으로 베르그의 얼굴을 힘껏 내려쳤다. 베르그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입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다시 한 번 허튼 수작을 부리면 네 어미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을 뭉개주마." "난 정말 모른다! 정말 모른단 말이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돈 때문이냐? 그런 거라면 말만 해라!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주겠다!" "정말 모르는 거 같은데,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어때?" 체사레가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거,거기 누구요?" 체사레 쪽으로 퍼뜩 고개를 돌린 베르그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좀 살려 주시오!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소! 뭐든지 다 들어주겠소! 제발, 제발 나 좀 살려 주시오!" "살려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한가지 문제라면 제가 힘이 없다는 겁니다. 힘은 오메른이 갖고..." "입 닥쳐!" 오메른이 사납게 체사레의 입을 막았다. 악의는 없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보인 체사레가 한가롭게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오메른? 오메른이라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르그가 격렬하게 팔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난 오메른이 의자를 낚아채 체사레에게 집어던졌다. 체사레는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 부딪친 후 바닥을 뒹구는 의자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봤다. "젠장! 미친 자식같으니! 네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봐라! 일을 얼마나 더럽게 망쳤는지 보란 말이다, 이 멍청한 개자식아! 놈이 내 이름을 알게 됐으니 이제 꼼짝없이 놈의 숨통을 잘라야하지 않느냐?" "정말 눈뜨고는 못 봐주겠군." 마체라타는 마뜩찮은 눈으로 오메른을 노려봤다. 그 때 베르그가 고래고래 악을 써대기 시작했다. "오메른! 네가 날 죽인다고? 날 죽이고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오메른, 이 놈! 상종 못할 더러운 창녀새끼 주제에! 네가 날 죽인다고!" 오메른은 뚜벅뚜벅 걸어가 장식장에 놓인 팔뚝길이 만한 돌조각상을 집어들었다. 조각상을 틀어쥔 채 베르그에게 다가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이글거렸다. 오메른은 일말의 망설임없이 베르그의 머리 위로 돌조각상을 번쩍 치켜올렸다. "멈춰, 오메른!" 마체라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멈칫한 오메른이 다시 조각상을 내려치려 하자 마체라타가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멍청하긴, 이대로 놈을 죽이면 너는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넌 또 누구냐?" 마체라타는 베르그의 악에 받친 질문을 무시하고 오메른의 손아귀에서 조각상을 빼내 체사레에게 던졌다. "받아라." 조각상을 받아 든 체사레가 순진한 어린아이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체라타는 조소어린눈으로 그를 보며 빈정거렸다. "꽤나 심심한 것 같은데, 무료해질 때마다 그걸로 네 예쁜 금발머리나 내려치며 놀아라." 체사레가 어깨를 흔들며 웃기 시작했다. 마체라타와 체사레를 번갈아 바라보던 오메른의 눈에 질투가 어렸다.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낮게 속삭였다. "난 버릇없는 금발머리 인형에 관심없다, 오메른." 몸을 바로잡은 마체라타가 거들먹거리는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뒤로 물러나라, 오메른. 물러나 내가 하는 걸 잘 봐라. 난 너처럼 단순무식한 방법은 쓰지 않으니까, 잘보고 배우란 말이다." 짙은 흑안을 번뜩이며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오메른이 잠시 후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바닥을 펴보였다. "잠깐!" 마체라타가 막 걸음을 떼려하는 오메른을 불러 세웠다. 오메른은 그의 허리를 더듬는 마체라타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메른의 허리에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 든 마체라타가 베르그를 향해 섰다. "글렌 베르그라 했지... 자, 베르그, 이제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난 참을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란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런 제길! 네 년은 또 누구냐?" 마체라타는 베르그의 턱을 움켜잡고 강제로 그의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뾰족한 칼끝을 그의 입속에 밀어넣었다. "함부로 놀린 혀를 도려내야겠군. 아니면, 목구멍 깊숙이 단도 맛을 보게 해줄까?" 겁에 질린 베르그가 목이 졸리는 듯한 괴성을 터뜨렸다. "베르그, 난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협조를 안해주면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게 이 단검을 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약속하마, 네가 고분고분 사실을 털어놓으면 널 살려주겠다." 마체라타는 베르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웅얼거리자 그의 입 속에서 단검을 빼냈다. "날 살려 주겠다는 네 말을 어떻게 믿느냐?" "난 적어도 내가 한 말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생각해봐라, 베르그. 네가 입을 열지 않으면 넌 절대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다. 하지만 말을 하면 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은 생긴다.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너라면 일말의 가능성에라도 매달려 볼 거다. 살아 남기 위해서 말이다." 마체라타는 부르르 떨리는 베르그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떻게 하겠느냐, 베르그? 벌거벗은 채 침대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볼썽사나운 꼴로 죽고 싶으냐? 아니면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네 발로 이곳을 걸어나가고 싶으냐?" "마, 말하겠다." 마체라타의 입술에 흡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잘 선택했다, 베르그. 그럼 말해봐라, 네게 가짜후계자의 반지를 만들게 한 자가 누구냐?"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베르그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난 그게 무슨 반지인지 몰랐다. 정말이다. 가짜후계자의 반지를 만드는 일인 줄 알았으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일을 맞지 않았을 거다." "잘 알았으니, 이제 네 뒤에 있는 배후가 누구인지나 말해라." 마체라타는 짜증을 참으며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야, 야노쉬 공작님이다."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 들었다. 오메른이 다가와 베르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네놈이 죽고싶어 발광을 하는구나!" "정말이다! 야노쉬 공작이 직접 날 찾아와 그런 명을 내렸다!" "헛소리! 야노쉬 공작이 네놈을 어떻게 알고 그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하지만 야노쉬 공작이 분명했단 말이다!" 목이 바짝 조여들자 베르그가 끅끅 소리를 냈다.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검붉게 변했다.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손을 단호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베르그의 눈에 감긴 천을 풀었다. 베르그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고개를 모로 틀었다. "날 봐라, 베르그." "싫다! 날 죽이려고 이러는 거 다 안다! 널 보면 네 얼굴을 안다는 이유를 들어 날 죽이려는 거 아니냐?" "어차피 넌 죽게 될 거다. 널 살려주려 했는데... 그렇게 하기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넌 이제 너 혼자만 죽느냐, 아니면 네 가족들까지 모두 함께 죽느냐를 선택해야 한다." 마체라타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야노쉬 공작을 걸고 넘어지다니...... 지어낼 인물이 그렇게 없었느냐?" "지어낸 게 아니다! 분명히 야노쉬 공작이다! 마차며 인장, 호위기사들까지, 야노쉬공작이 틀림없다! 젠장! 야노쉬 공작이 내게 남작의 작위를 내려 주겠다며 일을 시킨 거란 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 베르그가 목이 터져라 악을 써댔다. 마체라타는 아무 말없이 그의 눈에 다시 천을 감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몰릴 대로 몰린 베르그는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짜증 섞인 눈으로 베르그를 노려보던 마체라타는 시트자락을 뭉쳐 그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그런데 야노쉬가 배후였다니......" "이놈의 말을 믿는 거냐?" "그래, 믿는다. 절대 거짓말하는 게 아니다." 오메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야노쉬같은 거물이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황제의 오른팔로 온갖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말이다.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글쎄...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좀 더 파고 들어가면 알게 되겠지. 아무튼 베르그 입에서 더 이상 나올 건 없을 테니 난 이만 가보겠다. 베르그를 잘 돌봐 줘라." "그래, 되도록 편안하게 죽여 줄 테니 걱정하지마라." 오메른이 이죽거렸다. "베르그에게 손대지 마라, 오메른." "웃기는군. 놈에게 그새 정이라도 든 거냐?" "전엔 그런대로 머리가 돌아가더니만 오늘은 한심한 닭대가리가 따로 없군." 오메른은 마체라타의 비웃음에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베르그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이내 마체라타의 속뜻을 알아챈 오메른이 그녀에게 시선을 맞혔다. "알았다, 네 말대로 베르그를 고이 살려 두겠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놈의 목숨은 완전히 내 소유가 되는 거다." "나야 물론 상관없지만, 소위 진실이란 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게 될 거다." 마체라타는 베르그의 흙빛얼굴을 측은한 눈으로 응시했다. "야노쉬가 진짜 이번 일의 배후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야노쉬의 이름을 빌려 널 완벽하게 이용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모반을 꾀한 역적보다는 단순한 멍청이가 나을 테니, 후자이기를 간절히 빌어라. 넌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네 불쌍한 가족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체라타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절망 가득한 눈에서 시선을 떼고 밖으로 나갔다. 제 목 [달의 아이] 78장.원로회의-2 원로회 귀족들이 하나 둘 회의실로 들어와 거대한 탁자를 채웠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원로회는 리아잔 제국을 대표하는 권력의 핵심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단체였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원로회에 들 수 있길 갈망했고, 그것을 위해선 못할 일이 없을 정도로 원로회 귀족들은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원로회에 들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했다. 조건은 네 가지였는데, 그중 쉰 살이 넘는, 백작이상의 작위를 가진 고위귀족에 한한다는 게 기본자격으로 주어졌다. 또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품과 학식을 겸비해야 한다는, 모호한 조건이 있었고, 기존 원로회 귀족들 삼분의 이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승인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원로회는 정기적인 회의를 갖진 않았다. 그저 리아잔 제국의 미래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사안이 대두될 때마다 모여 의견을 나눴고, 그 결과를 국정에 반영시켰다. 현재 리아잔 제국의 가장 큰 쟁점은 엘리시엔 황녀의 출현으로 불거진 황위계승문제였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회의 시작을 기다리는 원로회 귀족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하지만 늦게 도착하는 귀족들로 인해 시간이 기약없이 지체되자 그들의 얼굴에 짜증과 무료함이 나타났다. 이윽고 개인사정으로 회의불참가를 사전 통보해온 세 명의 귀족을 제외한 원로회 의원 열 두명이 탁자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귀족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의장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회의개최를 선언해야 할 니콜라우스 공작은 연신 문 쪽만 흘끔거릴 뿐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한 제스트 백작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다들 참석하신 것 같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잠시만 더 기다려주셔야 하겠습니다. 참석하겠다고 연락하신 분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족들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중 급한 성격으로 유명한 랑케 백작이 니콜라우스 공작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참석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고요? 편찮아 못 오신다던 헤이우드 백작께서 뒤늦게 회의참석을 결정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거 아니라......" 니콜라우스 공작은 말을 멈추고 때마침 회의실로 들어서는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착하셨군요, 대사제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오는 도중 마차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그만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니제르 대사제는 니콜라우스 공작에게 사의를 표한 다음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귀족들을 둘러봤다. 그들의 굳은 얼굴에서 니제르 대사제는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긴 나라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겠지. 그는 쓴웃음을 감추며 회의실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시리움 종단을 위해 마련된 자리지만 그 동안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던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니콜라우스 공작의 말이 끝나자 에젠버그 후작이 입을 열었다. "회의시작에 앞서 해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해명이라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후작?" "대사제께서 리아잔 제국의 원로회의에 참석하신 이유에 대한 해명말입니다." 에젠버그 후작이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오자 회의실 전체에 긴장이 깔렸다. 난처한 기색으로 니제르 대사제를 곁눈질하던 니콜라우스 공작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후작, 그 문제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니제르 대사제가 니콜라우스 공작의 말을 잘랐다. 그의 얼굴엔 엄숙해 보이는 위엄과 함께 불쾌감이 배어있었다. "전 개인자격이 아닌, 아시리움 종단의 대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의참석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습니다. 아셨으면 어서 회의를 시작하십시오." 잠깐동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야오쉬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고 니콜라우스 공작을 쳐다봤다. 작위는 같았으나 두 사람 사이엔 뚜렷한 상하관계가 존재했다. 니콜라우스 공작은 야노쉬 공작의 허수아비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영향력을 행사해 그를 원로회 의장자리에 앉힌 사람도 야노쉬 공작이었다. 또한 니콜라우스는 우유부단하고 자신감없는 성격으로인해 사소한 일에서도 야노쉬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아니나다를까 니콜라우스 공작은 야노쉬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깨닫자마자 허둥대며 회의시작을 알렸다. "오늘 회의는 리아잔의 황위계승권을 명확히 하여,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리아잔 제국의 발전과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회의진행 중의 발언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게 될 것이고, 회의결과에 따른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기탄없이 소신을 밝혀 달라는 의장의 당부가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몇몇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고, 또 몇몇은 이리저리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물론 개중엔 야노쉬 공작처럼 사태의 추이를 느긋하게 지켜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논의는 불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제스트 백작이었다. "불필요한 논의라고 했소? 이처럼 중요한 사안이 또 어디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제르트 백작?" 에젠버그 후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후작께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리아잔엔 황위를 이으실 황태자전하가 버젓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회의를 열어 황위계승권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그분에 대한 명백한 모반행위입니다." "모, 모반행위라고요?" "말씀이 지나치시오, 제스트 백작!" "모반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시다니요?" "당장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시오!" 몇몇 귀족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하지만 제스트 백작은 호전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럼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대체 왜들 이렇게 흥분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전 지극히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신성한 원로회의를 모반이라는 말로 더럽혔으면서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오?" 전부터 제스트 백작과 사이가 안 좋았던 폰 데어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제스트 백작의 얼굴에 조롱기가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께서 폰 데어 백작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으신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제스트 백작!" 분을 못 참은 폰 데어 백작이 탁자를 내려쳤다. "두 사람 다 그만하시오." 점점 거칠어지는 언쟁에 제동을 건 사람은 야노쉬 공작이었다. 그는 엄중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본 다음 니콜라우스 공작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회의를 원활히 진행시키는 건 의장의 역할 아니오, 니콜라우스 공작? 대체 거기 앉아서 뭘 하는지 모르겠군." 니콜라우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우물우물 말을 꺼냈다. "아,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측은한 눈으로 니콜라우스를 보던 귀족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어색해진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제스트 백작과 폰 데어 백작은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 엘리시엔 전하께서 당연히 황위를 이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폰 데어 백작이 선언하듯 소리쳤다. 서너 명의 귀족들이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 중, 폰 데어 백작이 제스트 백작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그와 반대입장에 서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도 폰 데어 백작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엘리시엔 전하는 페르가몬 전 폐하의 따님이십니다. 리아잔 제국의 황위를 이으실 분은 엘리시엔 전하 밖에 없습니다." 에젠버그 후작이 폰 데어에게 힘을 실어 줬다. 에젠버그는 페르가몬이 살아 있을 때, 법무행정을 총관할하는 법무당상관(法務堂上官)을 지낸 사람으로, 페르가몬의 추종자로 불리는 이들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귀족이었다. 큰 키에 다소 마른 체형을 지닌 그는 완전히 새어 버린 백발이 머리가장자리에만 조금 남아있었고, 거칠고 홀쭉한 뺨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숱이 적은 머리와 달리 그의 턱엔 검은색과 뒤섞인 반백의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있었다. 때문에 어찌보면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주위를 날카롭게 훑어보는 암갈색 눈동자엔 누구도 쉬이 보지 못할 강한 무게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페르가몬 전 폐하의 따님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분께 리아잔 제국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습니다. 황위계승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조차 아직 검증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게 타당한 말이라 생각하오? 황위계승자의 자질검증을 감히 어느 누가, 또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단 말이오, 제스트 백작?" 에젠버그 후작이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때다 싶은 폰 데어 백작이 서둘러 동조하고 나섰다. "후작의 말씀이 옳소, 제스트 백작, 다음부턴 말부터 덜컥 꺼내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을 먼저 해보시오. 그럼 최소한 그런 터무니없는 발언은 하지 않게 될 테니까." "터무니없는 발언이라니?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오, 폰 데어 백작?" "먼저 무례를 범한 사람은 제스트 백작, 바로 당신이오! 엘리시엔 전하의 자질검증이 안됐느니 하는 망언으로, 그분께 용서받지 못할 결례를 범했지 않소!" 제스트 백작이 맞받아치려는 순간 니콜라우스 공작이 손바닥으로 연거푸 탁자를 두드렸다. "두 분다 입을 다무시오! 앞으로 예의를 지키지 않고 회의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은 의장의 권한으로 퇴장을 명하겠소!" 보기 드물게 강경한 태도를 보인 니콜라우스가 슬그머니 야노쉬의 눈치를 살폈다. 야노쉬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턱을 문질렀다. 탄력을 잃고 늘어진 턱살이 흉측하게 흐느적거렸다. "어째 회의가 실속없이 제자리에서 계속 맴을 돌고 있는 것 같소. 또 의견을 밝힌 사람보다 입을 닫고 있는 사람이 더 많고." 원로들을 쭉 훑어보던 야노쉬의 눈길이 칼 베리만에게서 멈췄다. "재상, 말해보시오. 재상의 의견을 듣고 싶군. 엄밀히 말하면 이번 일을 야기시킨 사람이 바로 재상이지않소." 사람들의 시선이 칼 베리만에게 집중됐다. "전 예언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황위계승에 대해 언급하는 건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그건 좀 무책임한 발언이라 생각지 않소, 재상? 재상은 예언자로서 회의에 참석한 게 아니오. 원로회에 소속된 귀족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오만... 내 말이 틀리오, 재상?" 칼 베리만은 야노쉬와 시선을 맞댔다. "이 곳에 계신 분들 중, 제가 예언자임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또 지난번 제가 처형대에 올라 한 예언내용에 대해서도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야노쉬 공작의 말씀대로 전 예언자로서 이곳에 참석한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을 밝힐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신 분들은 제 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되실 게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예언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라면, 야노쉬 공작의 말씀과는 달리 전 거리낌없이 제 의견을 밝혔을 겁니다. 역설적인 얘기긴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칼 베리만은 야노쉬의 트집을 차근차근 반박했다. 분노가 치민 야노쉬의 턱이 두툼하게 튀어나왔다. 몇몇 귀족들이 칼 베리만의 말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이자 야노쉬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검버섯이 핀 쭈글쭈글한 목줄기에 굵은 혈관이 불룩 치솟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하자 윈스턴 백작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니제르 대사제에게 시선을 멈췄다. "대사제께선 하고 싶은 말씀이 없으십니까?"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니제르 대사제는 돌연 자신에게 관심의 화살이 돌려지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사제님께서 굳이 원로회의까지 참석하신 이유는 아시리움 종단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지금껏 입을 굳게 닫고 있던 랑케 후작이 끼어들었다. 황위계승자에 대해 명확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내심 아시리움의 의견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가타부타 말씀드릴 만한 게 없습니다." "그 말씀은 아시리움에서도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아시리움은 이미 확고한 입장을 정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밝히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니제르 대사제는 필요이상으로 강경하게 말했다. 원로회의까지 끼어든 그가, 법황이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때문에 그냥 상황을 살피러 온 것뿐이라는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니제르 대사제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아시리움의 입장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니 전 신경쓰지 마시고 여러 원로분들께서나 좋은 의견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아직 대다수 분들이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좀 여유시간을 갖은 후에 다시 회의를 소집하는 게 어떻습니까?" 랑케 후작의 제안에 윈스턴 백작이 반대의견을 내놨다. "일리있는 말씀이긴 하지만, 어차피 다른 분들의 견해를 듣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또 각각의 주장들을 종합해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모인 것 아닙니까? 오늘 회의에서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낼 수는 없겠지만, 이왕 힘들게 발걸음했으니 좀더 의견을 나눠보는 게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명망 높은 윈스턴 백작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바덴 백작이 잠에서 깨어나 소리쳤다. "맞습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귀족들이 실소를 지으며 어이없다는 시선을 교환했다. "말씀 계속 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현재 확실히 입장을 정하신 건 두 분뿐인 것 같습니다. 제스트 백작께선 자일스 전하를 지지하시고, 에젠버그 후작께서는 엘리시엔 전하를 지지하십니다. 이 분들 외에도 의견을 밝힌 분이 계시지만 충동적인 감정이 결정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폰 데어 백작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윈스턴 백작은 그에게 이해해 달라는 눈길을 보낸 뒤 말을 계속했다. "편을 가르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의견이 나눠질 수밖에 없는 문제고, 또 회의진행상의 이해편의를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 드린 겁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제 생각도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황위계승에 있어 정통성을 지키는 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리고 리아잔 제국의 정통후계자는 페르가몬 전 폐하의 따님이신 엘리시엔 전하십니다. 이 사실은..." "잠깐, 잠깐만!" 제스트 백작이 윈스턴 백작의 말을 끊었다. "그럼 현실은 무시한 채 오직 정통성만을 따지겠다는 말이오? 그럼 우리 원로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뭐요? " "제스트 백작, 진정하시고 우선 제 말부터 들어주십시오." 윈스턴 백작이 마음 상한 기색없이 정중히 청했다. "알았소, 어서 말씀하시오." 제스트 백작이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가슴에 팔짱을 꼈다. "엘리시엔 전하께 황위계승의 정통성이 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리아잔 제국을 이끌어 가실 분을 결정하는 데 있어 오직 정통성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리아잔 제국의 흥망성쇠가 이번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자일스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자일스 전하께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신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6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자일스 전하께선 장차 황제가 되실 후일을 위해 많은 노력과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자일스 전하께선 지금 당장 황제가 되신다해도 훌륭히 국정을 이끄실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자일스 전하께서 리아잔의 황위를 이으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윈스턴 백작의 달변에 감응한 서너 명의 원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까다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젠버그 후작이 입을 열었다. "윈스턴 백작, 백작은 한가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저도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윈스턴 백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건넸다. 하지만 에젠버그 후작은 윈스턴의 눈을 스쳐간 분노를 놓치지 않았다. 에젠버그는 고지식한 면은 있지만 속 깊고 자상한 성격이라 알려져있는 윈스턴이 실제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임을 오래 전에 눈치채고 있었다. "많이 깨닫고 배울 수 있도록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걸 말씀해 주십시오. 부족한 말로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내가 듣기엔 윈스턴 백작의 말씀이 구구절절이 다 옳던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겸손도 적당해야 미덕이 되는 겁니다." 농담을 하며 털털한 웃음을 짓던 랑케 후작이 에젠버그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껄끄러운 시선을 던졌다. 졸지에 옹졸한 사람이 되어버린 에젠버그는 노기를 참지 못하고 윈스턴이 교묘하게 파놓은 구멍에 발을 빠뜨리고 말았다. "윈스턴 백작, 내가 백작의 속셈을 모를 줄 아오? 리아잔의 미래를 걱정한다 어쩐다 하지만 실제는 백작의 부귀영화를 위해 자일스 전하를 지지하는 거 아니오!"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윈스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현황제폐하께 잘 보이기 위해, 페르가몬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그 분에 대해 있지도 않은 흉악한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람이 백작이란 걸 알고서 하는 말이오! 처녀를 좋아해 매일 밤마다 여인들을 갈아치우셨다느니, 헤르티아 황후폐하께 자주 손찌검을 해 상처가 끊이지 않으셨다느니, 또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들르신 곳이 지저분한 매춘굴이었다느니, 그런 입에 담지 못할 망발을 퍼뜨리지 않았소! 지금 이러는 것도 만약 엘리시엔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면 백작의 죄가 드러나게 될까 봐 걱정이 돼서가 아니오?" 윈스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에젠버그 후작! 대체 무슨 근거로 절 모략하시는 겁니까? 제가 페르가몬 전 폐하께 바친 충정은 에젠버그 후작보다 강하면 강하지 약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도 에젠버그 후작의 말씀처럼 제가 그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큰 충격을 받은 듯 윈스턴의 낯빛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침울하게 쳐진 아랫입술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젠버그에게 꽂혀 있는 그의 눈길엔 음험한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백작의 성품이 얼마나 곧은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가 말이오." "랑케 후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를 비롯해 이 곳에 계신 분들 중 에젠버그 후작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질책이 담긴 시선들이 에젠버그에게 몰려들었다. 에젠버그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를 계속 진행한다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다음 회의일정이 결정되면 알려 드리기로 하고, 이번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 한 말씀만 더 드리겠소."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귀족들이 에젠버그 후작의 말을 못들은 척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우린 지금 황제폐하가 아닌 황위계승자를 결정하는 거요. 그러니까 엘리시엔 전하께서도 황위를 이을 준비를 지금부터 차근차근하시면......" 귀족들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밖으로 나가자 에젠버그는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보다못한 니제르 대사제가 말을 꺼냈다. "지금은 어떤 말씀을 하셔도 먹혀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진 마십시오. 다음 회의를 기약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예... 다음 회의가 남아있으니 힘을 내겠습니다." 에젠버그 후작이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윈스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분통이 터져서... 그만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원로들은 물론, 이유야 어떻든 그나마 엘리시엔 전하를 지지해주던 폰 데어 백작까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으니... 여러 귀족들에게 윈스턴이 얼마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지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저 씁쓸하기만 합니다." "그만하시고 일어나십시오." 니제르 대사제는 몸을 세운 다음, 에젠버그 후작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먼저 나가십시오, 대사제님. 전 잠시만 더 앉아있다 일어나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그럼 저부터 나가겠습니다." 간단히 목례를 주고받은 니제르 대사제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문을 나서려다가 에젠버그를 돌아봤다. "다음 회의에선 엘리시엔 전하의 과거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 미리 준비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아시리움 종단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입장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두 사람은 공모자같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제 목 [달의 아이] 79장.과거의 조각-1 제 79장. 과거의 조각 엘을 맞은 건 코끝을 파고드는 짙은 향내였다. 지나치게 달콤하면서도 톡쏘는 듯한 자극적인 냄새가 넓은 침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쥬네비아의 침소에 처음 들어와 보는 엘은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 춥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벽난로에선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커튼이 내려진 공간엔 엷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엘은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수한 하얀색과 부드러운 크림빛이 조화를 이뤄 우아하고 예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침대 위엔 얇은 휘장이 반쯤 드리워져 있었는데, 일어나 앉아 있는 쥬네비아를 휘장너머로 비치는 희미한 윤곽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쥬네비아는 엘이 가까이 가자 줄을 잡아당겨 휘장을 걷었다. "괜찮으세요?" 엘은 조금 어색하게 물었다. 코를 마비시킬 듯 몰려드는 강렬한 향기와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인지 쥬네비아가 왠지 모르게 낯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조용히 대답한 쥬네비아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엘은 의자등받이에 바짝 들어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처음 맡아보는 향긴데... 어디에서 나는 건가요?" 쥬네비아가 손을 들어 침대맡에 나란히 놓여진 협탁을 가리켰다. 협탁 위엔 여러 개의 초가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하늘거리며 타오르는 불그스름한 촛불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엘은 투명한 유리받침에 엉겨있는 붉은빛의 밀랍웅덩이를 바라보다 쥬네비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때마침 그녀에게 시선을 향하던 쥬네비아는 눈이 마주치자 흐릿한 미소를 보냈다. 엘은 미소를 되돌린 다음 짐짓 씩씩하게 말했다. "공기가 탁한 거 같은데 창문 좀 열까요, 이모님?" "향기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인데 전하께선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엘은 싱겁게 웃었다. "예, 부담없이 맡기엔 좀 진한 것 같아서요. 전 향기나 향수같은 건 잘 모르거든요." "헤르티아를 닮으셨군요, 전하. 헤르티아도 전하와 똑같이 이 향기를 싫어했습니다. 너무 진해 조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가시 돋친 어조에 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딸이 어머니를 닮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전하의 말씀대로 딸이 어머니를 닮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쥬네비아가 입술을 깨물며 촛불로 시선을 돌렸다. 엘은 그늘진 그녀의 옆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피곤하시면 말씀하세요. 나중에 다시 오면 되니까요." "피곤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연락을 취한 겁니다." 엘은 가만히 앉아 쥬네비아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오전에 원로회의가 열렸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예, 아침식사를 할 때, 메이나... 제 시녀장이 말해줬어요." "엘......" 쥬네비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자 엘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이모님, 왜 그러세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번쩍 눈을 뜬 쥬네비아가 엘을 향해 다가앉았다. "황위계승을 포기해 주십시오." 보라색 동공이 커다랗게 열렸다. "절 미쳤다 생각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부탁입니다, 엘. 황위를 잇지 않겠다고,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주십시오. 그것만이 이 기막힌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기막힌... 상황이라니요?" 엘은 입안에서 불분명하게 우물거렸다. "사촌사이에 서로 반목하고 증오하는 일말입니다. 그 모든 게 다 황위 때문에 생긴 일이지 않습니까? 절 야속하다 생각하시겠지만... 이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일스는 차라리 죽음을 맞을지언정 리아잔을 포기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가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쥬네비아가 엘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터무니없고 있을 수 없는 부탁이란 건 압니다. 하지만 엘이 황권을 포기해야만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이모님. 이모님이 틀리셨어요. 제가 황권을 포기한다해서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지진 않아요. 오직 자일스만 행복해지겠죠." 엘의 손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스르르 떨어져나갔다. "제 부탁을 거절하시겠단 말씀인가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모님."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없으시다는 건 황권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단 말씀입니다." 쥬네비아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반박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엘은 끝내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정말 헤르티아를 그대로 닮으셨군요. 헤르티아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그랬었죠.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 없다고......" 쥬네비아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음조로 중얼거렸다. "우습군요, 정말 우스워요... 헤르티아는 내 모든 걸 빼앗아 가고... 그 딸은 내 아들의 모든 걸 빼앗으려 하고... 헤르티아의 딸이... 헤르티아를 똑같이 닮은 딸이 내 아들을 망치려 하다니...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거였어......"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서서히 가슴이 막혀 왔다. 엘은 가볍게 팔랑거리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일으켰다. 목에 시린 아픔이 느껴지더니 이내 색이 바랜 듯 불꽃이 흐릿해졌다. 이 향기 때문이야. 그래, 향기가 너무 독해서 눈이 따가워진 것뿐이야. 엘은 불꽃에서 시선을 떼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엘,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쥬네비아가 주춤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엘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향기가 마음에 들어요, 이모님. 계속 맡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이모님처럼 이 향기가 좋아요. 별거 아니지만... 이모님을 닮았나 봐요... 조금은요." 엘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한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야노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르키젤과 자일스를 재빨리 살폈다. 야노쉬는 그들의 표정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안트차르 비저 드 야노쉬, 황제폐하께 인사올립니다." "어서 오시오, 공작." 마르키젤의 어조엔 날이 서 있었다. "황태자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소, 야노쉬 공작." 야노쉬는 마르키젤이 자리를 권하기 전에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마르키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좀 더 일찍 찾아 뵙고 싶었지만 폐하께서 절 부르신다는 연락을 너무 늦게 받았습니다. 때문에 원로회의를 마치고 귀가하다 도중에 마차를 돌려야했습니다." "그렇소, 공작? 좀 더 일찍 서둘렀어야 했는데... 괜한 고생을 하게 만들었군." 마르키젤이 지나치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자일스가 피식 웃었다. 야노쉬는 마르키젤이 일부러 연락을 늦췄다는 걸 간파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점잖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글렌 베르그." 마르키젤이 다짜고짜 이름을 내뱉았다. "글렌 베르그라니요?" 야노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이건 어떻소, 공작? 가짜후계자의 반지." "가짜후계자의 반지라니......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끝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이로군!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어서 털어놓으시오, 공작! 왜 날 속이고 추잡한 반역을 공모한거요? 그 계집애와 손을 잡고 날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소? 날 몰아내고 리아잔 제국을 갖기 위해서?" 마르키젤이 험악하게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힌 야노쉬가 격한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함입니다, 폐하. 제가 가짜후계자의 반지를 만들어 폐하를 속였다는 오해를 하고 계신 듯 한데... 사실이 아닙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폐하. 베르그란 놈이 절 음해하려고 벌이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 대체 제가 뭘 얻겠다고 폐하를 속이겠습니까? 전 이미 만족하고도 남을 만큼의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 제 안위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루아침에 제 모든 걸 잃어버릴 수 있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마르키젤의 얼굴에 혼란이 나타났다. 자신의 말이 반정도 먹혀 들었음을 눈치챈 야노쉬는 지체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절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잘라주십시오! 죽음으로서라도 저의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폐하!" 야노쉬는 피를 토하듯 격렬히 부르짖었다.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이가 바득바득 갈리려 했지만 어떻게해서든 최대한 빨리 황제의 의심을 잠재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릎을 꿇는 일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일어나시오, 공작." 야노쉬는 이제 됐다는 생각을 하며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전 이미 폐하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버러지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느니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알았으니 어서 일어나시오, 야노쉬 공작." 마르키젤은 야노쉬를 함부로 대했다는 찜찜한 마음에 손수 그를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내 이제 더 이상 공작을 의심하지 않소. 실성한 놈의 말만 듣고 괜한 오해를 해서 미안하오, 공작." "아버님을 속이기 위해 그럴듯한 연극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일스는 야노쉬에 대한 의혹을 접지 않고 있었다. "그만해라, 자일스. 난 야노쉬 공작을 믿는다." "하지만 아버님, 베르그란 놈이 눈물을 질질 짜며 몇 번이나 야노쉬 공작이 틀림없다고 소리쳤다 합니다. 죽음을 코 앞에 둔 놈이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내 분명히 그만하라고 했다, 자일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마르키젤이 자일스를 엄하게 꾸짖었다. "네가 이번 일의 배후로 야오쉬 공작을 지목했을 때부터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공작을 음해해 나와 공작과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하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하지만 공작에 대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난 무슨 방법을 써서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 방금 전 야노쉬 공작을 거칠게 대한 것도 그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런거라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버님. 베르그란 놈을 데려와 공작과 대질시켜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떻소, 공작. 베르그란 놈을 만나 보겠소?" 자일스는 야노쉬를 떠보듯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저의 무고를 밝힐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야노쉬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자일스는 그의 흔들림없는 태도에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마르키젤에게 시선을 돌렸다. "놈을 데려오라는 명을 내리겠습니다. 은밀하게 진행시킬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엔 기사들과 병사들을 보내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추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다, 자일스. 그런 놈과 야노쉬 공작을 대질시키는 건 공작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니 네가 가서 비밀리에 놈을 만나 봐라.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란 소리다." "그럼 일을 이대로 묻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억울하다는 야노쉬 공작의 말만 믿고 이번 일을 덮으시겠단 말씀입니까?" "난 분명히 야노쉬 공작을 믿는다고 말했다. 실성한 놈이 어떤 말을 지껄이든 그 믿음은 바뀌지 않는다." 마르키젤은 단호하게 말했다. 야노쉬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렇다할 증거도 없는 일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면 더욱 큰 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황위계승논의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지금,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야노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 했다. "하지만 아버님, 이번 일을 그 계집애의 목에 걸 올가미로 쓰려면 일을 더욱 떠들썩하게 벌여야 합니다. 왜 자꾸 없었던 일처럼 묻으려 하시는 겁니까?" 마르키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직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니... 가짜후계자의 반지로 그 계집애를 엮으려는 생각은 버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후계자의 반지가 가짜임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그 계집애가 일을 사주했다는 증거를 내놓을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냐?" "베르그란 놈의 입에서 그 계집애 이름이 나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또 야노쉬 공작이 배후로 밝혀진다면 공작과 그 계집애가 함께 일을 공모했다고 발표하면 그뿐이고요." 자일스는 엘을 거꾸러뜨릴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첫째, 화상을 입고 꼼짝없이 황궁에 잡혀 있던 엘리시엔이 베르그란 놈에게 일을 사주했으리라 믿을 자는 한 명도 없다. 둘째, 만에 하나 야노쉬 공작과 공모해 일을 벌였다는 것이 사실이라해도 세상에 밝힐 수는 없다. 야노쉬 공작은 내 오른팔로 불리는 사람이다. 또 내가 사위로까지 삼으려 했던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야노쉬 공작이 날 속이고 모반을 꾀하려 했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할 것 같으냐? 훌륭하신 황제폐하께서 현명하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셨다고 칭송할 것 같으냐?" 마르키젤의 광대뼈 주위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날 우둔하게 속아넘어간 불쌍한 멍청이 정도로 취급할 것이다. 페르가몬을 신처럼 떠받드는 놈들은 또 뭐라 하겠느냐?" 자일스는 입을 열려하다 마음을 바꿨다. 마르키젤이 지나치리만큼 페르가몬을 의식하고, 그와 연관되어 나오는 사람들의 평판에 민감하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 일을 터뜨려 엘리시엔을 잡으려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계집애를 황권다툼의 희생양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즉, 내가 더러운 술수로 페르가몬의 딸을 몰아내려 한다고 여기게 될 거란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자일스? 왜 일을 조용히 처리해야하는지?" "알겠습니다." 자일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어서 가 베르그란 놈의 입을 막아라. 더 이상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도록 깨끗이 처리해야한다." "책임지고 뒤탈없이 일을 마무리짓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자일스를 따라 야노쉬도 몸을 일으켰다.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하시오, 공작." 마르키젤는 걸음을 떼는 야노쉬를 바라보다 그를 좀 더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야노쉬 공작, 괜한 오해로 공작의 마음을 상하게 했소. 내 다시 한 번 정중히 사의를 표하겠소."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폐하. 절 의심할 수 밖에 없으셨던 폐하의 심경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로 저와 폐하 사이에 있었던 합의가 틀어지지나 않았는지 우려스러울 뿐입니다." 마르키젤이 알만하다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안심하시오, 공작. 공작과의 약속을 깨뜨릴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합의는 뭐고, 약속은 또 뭡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기분이 상한 자일스가 따지듯 물었다. "좋다, 자일스. 네가 안다고 해도 나쁠 건 없으니 말해주겠다. 엘리시엔과 야노쉬 공작을 혼인시킬 생각이다. 자일스, 네가 황위계승자로 확정된 뒤에 말이다." 자일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커다란 박장대소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이거 걸작이군, 정말 걸작이야. 건방진 계집애와 야노쉬 공작이라... 꽤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겠어." 자일스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대단하십시다, 아버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는지... 야노쉬 공작과의 혼인은 주제도 모르고 까분 계집애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형벌입니다. 그보다 더 재미있고 그럴듯한 벌은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족감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벌쭉거리던 마르키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소중한 딸의 혼인식 날, 페르가몬은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무덤이라도 파내 그 꼴을 보고 싶구나." 모욕감을 느낀 야노쉬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두 분의 말씀을 방해하긴 싫지만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침부터 원로회의에 참석해서 그런지 많이 피곤하군요." "그렇겠군, 공작의 나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돌아가 편히 쉬시오, 공작. 그리고 자일스, 너도 더 이상 지체하지 말아라.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일이니까. 네 정체를 감춰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버님. 신중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사근사근하게 대답한 자일스가 야노쉬를 향해 느물거리는 웃음을 던졌다. "마차까지 배웅해 드리겠소, 공작. 머지않아 내 소중한 사촌매제가 될 공작과 좀 더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어 하는 말이오." "영광입니다, 전하." 야노쉬는 오늘 받은 모욕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미소 띤 얼굴로 자일스를 따라 나섰다. 제 목 [달의 아이] 79장.과거의 조각-2 "이야, 내가 또 이겼다! 너 벌써 나한테 연속으로 다섯 판이나 진 거 알아?" "응..." "맹하게 앉아서 지금 뭐하는 거야? 너, 내 말 듣기나 하는 거야?" "그래..." 리오는 건성으로 대꾸하는 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은 정원에 놓인 긴 의자에 다리를 한쪽씩 접고 앉아 모바인이라는 자판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바인은 일종의 글자맞추기 오락이었는데, 글자가 새겨진 작은 나무조각을 일정한 차례에 따라 배열하면 점수를 따게 되고, 그 점수만큼 상대의 글자판을 차지하는 놀이였다. "난 엘이고, 네 이름은 리오지?" "응..." "얼씨구, 갈수록 가관이군." 리오는 피식 웃으며 옆 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던 리반을 돌아봤다. 왜 그러는지 아느냐는 무언의 질문에 리반이 도리질을 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응..." "너, 혹시 나한테 음흉한 마음 품고 있냐?" "그래..." 리오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호오, 그래?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한테 입 맞추고 싶어 좀이 쑤신다든지... 아니면 내 옷을 홀딱 벗긴 다음 침대에 묶고..." "멍청아, 그만해! 이 지저분한 저질 놈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리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근데, 저 자식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뭐, 지저분한 저질? 심심해서 농담 한 번 해본 건데 농담하면 다 저질이냐? 웃기지도 않은 자식, 멀쩡한 사람, 저질 만들고 있잖아! 짜증나는 놈! 잘난 척 하기는!" 맹렬히 으르렁대던 리오는 엘에게 머리를 한대 쥐어박힌 후에야 입을 다물었다. "나도 다 듣고 있었어!" 리오는 머리를 문지르며 엘을 노려봤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리반의 말로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던 엘은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어... 그러니까... 그게, 뭐?" 엘이 우물거리자 리오는 더욱 기세 등등해졌다. 어이없는 눈으로 리오를 쏘아보던 리반이 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더 이상 못 들어주겠네. 내가 말해줄게, 알렉스. 리오가 뭐라고 했느냐면 네가 자기한테 입 맞추고 싶어 좀이 쑤시고..." "입 닥쳐, 리반! 한마디만 더하면 네 녀석의 머리털을 몽땅 뽑아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네놈의 반들반들한 머리통을 사정없이 갈겨 줄 테다!" "그래, 뽑아서 갈겨 봐! 그럼 난 가만 있을 줄 알아? 난 네 머리털을 뽑고 머리통을 갈겨 준 다음,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줄 거다!" "호오, 그래? 난 네놈 머리털을 뽑고 머리통을 갈겨 주고,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준 다음, 쓰러진 네놈을 밟고 올라가 승리의 포효를 터뜨릴 거다!" 리반이 코웃음을 날렸다. "거창하게 승리의 포효까지?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난 네 머리털을 뽑고 머리통을 갈겨주고,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준 다음, 퉁퉁 부은 네 엉덩이를 짓밟고 올라가 너보다 더 크게 승리의 포효를 터뜨린 후, 발바닥으로 네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줄 테니까." "근데, 저 자식은 끝까지 지질 않아요! 어휴! 이 지겨운 놈아! 난 네놈의 머리털을 뽑고 머리통을 갈겨주고......" "그새 까먹었냐?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주는 거잖아, 멍청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던 리오와 리반도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엘은 서서히 웃음을 지우며 리오와 리반에게 온기 어린 눈길을 던졌다. 리오와 리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함께 나눌 수 있는 웃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했을 거야.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알렉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그래, 계속 우울해하는 것 같던데......" 어느새 리오와 리반의 눈에 걱정이 담겨있었다. "별일 없었어. 그냥 좀... 너희들도 괜히 울적해질 때 있잖아,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신경쓰지마." "나도 신경 안 쓰고 싶은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냐? 넌 리반하고 나 빼고는 이 넓은 황궁에 친구하나 없잖아." "아니야, 나도 친구있어." "친구 누구? 네가 친구가 있긴 누가 있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리오가 별안간 뒤를 돌아봤다. "누가 오는 것 같은데?"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엘과 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치 서 있는 나무 뒤에서 칼 베리만의 모습이 나타나자 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칼 베리만!" 엘을 발견한 칼 베리만이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오세요, 칼 베리만.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원로회의를 끝내고 가는 길에 잠깐 얼굴이라도 볼까해서 별궁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엘이 정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나왔는데 웃음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 그 웃음소리를 따라 온 겁니다." "저희 웃음소리가 크긴 컸나 보네요. 참, 여긴 제 친구들이에요. 이쪽이 리오고, 한발 뒤에 있는 친구가 리반이에요. 그리고 이분은 칼 베리만이셔. 내가 조금 전에 말했지, 너희말고도 친구있다고. 칼 베리만이 바로 내가 말한 그 친구야." 엘은 칼 베리만에게 쑥스러운 미소를 던졌다. "괜찮으시죠?" "괜찮고 말고요. 엘이 절 친구로 생각해주신다니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칼 베리만의 입술에 인자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나저나 두 분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소, 칼 베리만." "반갑습니다, 알렉스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알렉스라고요?" 칼 베리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리반이 절 부를 때 사용하는 애칭같은 거예요." "아, 예... 그런데 제가 세 분을 방해한 거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에요,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모바인을 했는데, 제가 연속으로 다섯 번을 졌거든요. 그러니 더 할 기분이 나겠어요?" 엘은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시다면 저와 잠깐 얘기 좀 나누시겠습니까, 엘?" 엘이 대답하기 전 리반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우린 들어가 있을게. 그럼 천천히 얘기 나누십시오." 칼 베리만과 눈인사를 주고받은 리오와 리반이 책과 놀이도구를 챙겨들었다. 엘은 걸음을 옮기는 칼 베리만을 따라 천천히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기 전 황후폐하를 만나 뵈었습니다. 황궁을 막 떠나려는데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와 폐하의 전언을 알려주더군요." 칼 베리만은 걸음을 늦추며 엘의 얼굴을 살폈다. "폐하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들었습니다, 엘." 엘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눈물 흘리던 쥬네비아의 모습이 떠오르자 칼 베리만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쥬네비아가 오늘 일을 후회하면서도 엘에게 황권을 포기시켜야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폐하께서 많이 후회하고 계십니다." 엘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다리를 움직였다. 나뭇잎 사이를 지나온 햇살이 바닥에 따스한 무늬를 그려 놓고 있었지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엘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신 것 같더군요." "저희 어머니와 이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말씀해 주세요, 칼 베리만은 알고 계실 거예요." "선뜻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또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겁니다, 엘." 엘은 걸음을 멈췄다. "듣기 좋은 얘길 기대하진 않아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실대로만 말씀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칼 베리만." "제 개인적인 소견으론 엘이 모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선 황후폐하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칼 베리만은 이리저리 얽혀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예... 알겠습니다. 많은 걸 알진 못하니 그저 제가 보고들은 대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쥬네비아 폐하께선 오래 전에 작고하신 안드레아스 공작님의 영애십니다. 워낙 손이 귀한 가문이라 지금은 황후폐하와 황태자전하만이 유일한 자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엘도 계셨군요." "안드레아스 공작님이 제 외할아버지이시군요." 칼 베리만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쥬네비아 폐하께서 열 일곱 살이 되신 해였을 겁니다. 공작부인께서 시름시름 앓아누우시더니 채 백일이 못돼 외동 따님만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외동 따님이라고요? 이모님 아래로 제 어머니가 계셨을 거 아니에요?" "헤르티아 폐하께선 황후 폐하의 이복동생이십니다. 공작부인이 돌아가신 후, 공작께서 저택으로 불러들이시기 전까지 쥬네비아 폐하는 이복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셨다 하더군요." "그럼 열 일곱 살 때 처음 어머니를 만나셨다는 거예요?" 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항간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니 웬만큼 나이가 든 사람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엘은 몸을 돌려 칼 베리만을 마주봤다. "그 당시 페르가몬 폐하께선 황태자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아버님이신 차베스 폐하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계셨기 때문에, 황태자전하의 혼인식을 서둘러야 한다는 귀족들의 압력이 점점 높아질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인식을 차일피일 미루시는 황태자전하를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미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셨고, 오래 전에 연을 맺으신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계셨거든요." 약혼녀란 말에서 엘은 숨을 멈췄다. 흐릿하던 그림이 점점 명확히 떠올랐다. "그 약혼녀가 바로 이모님이셨군요. 저희 어머니가 이모님에게서 사람하는 사람을 빼앗은 거고요." 칼 베리만이 우뚝 멈춰 서서 엘에게 놀란 시선을 던졌다. "그걸 어떻게......" "그냥 전부터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이모님께 부모님 얘길 들었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 그 때 숨겨진 비밀같은 게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칼 베리만 말씀을 듣고 있으려니 그 느낌이 뚜렷해졌고요. 그리고 오늘 이모님 말씀에서도... 뭐라, 그럴까... 어떤 원망같은 거... 그런 걸 느꼈거든요." "엘, 황후폐하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칼 베리만을 쳐다봤다. "안 그래요, 칼 베리만. 조금도 미워하지 않아요. 이모님이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이모님께 그런 마음을 갖겠어요? 이모님이 절... 미워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는 제가 말이에요." "그런 걱정 마십시오, 엘. 황후폐하께선 진심으로 엘을 사랑하시니까요." "예...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모님은 절 사랑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제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사랑하시는 걸까요? 엘은 속마음을 감추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어려있던 슬픈 기색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밝은 어조를 사용해 화제를 돌렸다. "오늘 원로회의에선 어떤 결론이 내려졌나요? 천민으로 자란 근본없는 여자애에게 황위를 잇게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훌륭하신 자일스 황태자전하만 계시면 된다... 뭐, 이런 결론이 나온 거 아니에요?" 칼 베리만은 장난기 어린 질문에 진지하게 답했다. "공식적인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는 원로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졌고, 또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입 밖에 낼 수 없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말씀해주세요, 칼 베리만. 원로회 의원이 아닌 제 친구로서요. 제가 황위를 포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까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일까요?" 칼 베리만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엘의 친구로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약 엘이 황위를 포기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감돌던 긴장도 사라지고, 혼란스럽던 황궁도 곧 안정을 찾게 되겠지요. 하지만 몇몇 이들은 엘의 결정에 실망하고 또 슬퍼할 것입니다. 그 중엔 쉽게 포기해버린 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도 있다니... 모두 자일스 편인 줄 알았는데......" 엘은 발을 조금씩 끌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엘. 리아잔 제국의 황위계승... 예,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막중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엘의 인생엔 황위계승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선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시는 일만 생각하십시오. 그저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늘의 이치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후회없이 사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엘... 우리의 삶 속엔 마음먹기에 따라 황위계승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권력과 지위에 따라 행복의 양이 결정되는 건 아니니까요." 칼 베리만의 말이 끝나고 엘이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처음 발걸음을 떼었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고마워요, 칼 베리만.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혼란이 정리된 것 같아요. 저만큼 좋은 친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허어, 이거 참, 괜히 쑥스러운 마음이 드는군요." 두 사람은 온기어린 미소를 주고받았다. "저 때문에 시간을 많이 지체하신 것 같은데 이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혼자하는 외로운 저녁식사만이 절 기다리고 있지만 가보긴 가봐야겠지요. 처리해야 될 일도 남았고 오늘 안으로 보내야 할 서신도 있으니까요." "그러시다면 더 잡을 수도 없겠군요. 오늘 고마웠어요, 칼 베리만." 간단한 인사말을 남긴 칼 베리만이 몸을 돌렸다. 엘은 칼 베리만을 지켜보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의 발소리를 들은 칼 베리만이 걸음을 멈췄다. "하나만 더, 한가지만 더 여쭤 볼게 있어요!" 엘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절 부르시면 되지, 왜 이리 힘들게 뛰어오신 겁니까?" "마음이 급해서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던 엘이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들어 악몽을 자꾸 꾸는데, 더 이상 안 꿀 수 있는 방법 없을까요?" "악몽을 꾸신다고요?" 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꿈이냐 하면... 아니, 칼 베리만께서 구태여 내용까지 아실 필요는 없겠죠. 아무튼 굉장히 기분 나쁜 악몽이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요. 칼 베리만은 그런 거 잘 아실 것 같아서요." "제가 예언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군요. 그런데 죄송스럽게도 꿈에 대해선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희망에 차 있던 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럼 예언은 어떻게 하시는데요? 전 지금까지 칼 베리만이 꿈에서 예언을 들으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칼 베리만의 입술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제가 예지몽을 꾸는 줄 아셨군요. 사실 전 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랍니다. 전 꿈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미래를 봅니다." "현실에서요?" 엘은 눈을 빛내며 칼 베리만에게 한발 다가섰다. "예...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현실이 아니겠군요. 뭐라고 할까... 현실과 환상의 경계라고나 할까요.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군요.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다 갑자기 눈앞에 환영같은 게 보이거든요. 어떨 때는 책을 읽다가, 또 어떨 때는 식사를 하다가... 심지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미래의 환영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런 절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놀랄지... 상상이 가십니까?" 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굉장히 짧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데, 현실로 돌아와 보면 어느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더군요. 그 시간 동안 석상처럼 꼿꼿한 상태로 눈을 뜨고 있었을 테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언자로서의 삶... 힘들지 않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칼 베리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아졌습니다. 힘들 때도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무심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넘겨 버립니다. 아무래도 예언능력을 제 일부로 받아들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육십이 넘어서야 철이 들었는지......" 잠깐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칼 베리만이 말머리를 되돌렸다. "꿈 얘기를 하다 엉뚱한 곳으로 빠지고 말았군요. 제 생각으로는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요새 이런저런 고민이 많으셔서 그런 꿈을 꾸시나 본데... 마음이 안정되시면 자연스레 악몽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니요, 칼 베리만. 요새 시작된 악몽이 아니에요. 아시리움 성전에 있을 때 처음 꾸고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꾸기 시작했어요. 매일 꾸는 건 아니고 며칠에 한 번 불규칙하게 찾아와요. 왜 그럴까요, 칼 베리만? 악몽을 꾸게 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이유일지는 상상도 안되지만... 분명히 무언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내야 할지......" 두 사람의 입술에서 똑같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엘의 말씀을 들어보니 보통 꿈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으음... 오래 전이긴 하지만 꿈에 대해 언급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간단한 것 몇 개만 기억 나는데... 의미있는 꿈을 꾸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 하더군요. 또 의미있는 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답니다. 하나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과거의 잔상을 보는 거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 주는 거랍니다. 흔히 말하는 예지몽이 후자를 가리키는 거겠군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잔상... 아니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견......"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에 엘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시 한 번 몸서리가 쳐지더니 팔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팔을 감싸 안았다. "추우신 겁니까?" "예, 조금 쌀쌀한 느낌이 들어요.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칼 베리만." "전혀 도움을 못드린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이 생기는군요." "제 얘길 들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엘은 고른 잇새를 드러내며 살풋 웃었다. "엘, 언제 시간 내어 그 꿈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머릴 맞대는 게 조금이라도 낫지 않겠습니까? 같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면 악몽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럴 게요. 사실 악몽에 대해 말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해졌어요. 리자드에게 삼분의 일, 또 칼 베리만께 삼분의 일, 짐을 떠넘긴 것 같아요." "허어, 대공께도 말씀하셨다고요? 대체 대공과는 언제 만나신 겁니까?" 칼 베리만이 갈색 눈을 반짝였다. 밤에 불쑥 리자드의 침소로 찾아간 일이 떠오르자 엘의 뺨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얼굴까지 붉히시다니...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요." 칼 베리만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짓궂게 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혹시 아름다운 달밤에 두 분만의 낭만적인 시간을 즐긴 건 아니십니까?" "나,낭만적인 시간이라고요?" 엘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리자드가 그런 걸 할 사람이에요? 아마 낭만적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며 절 창 밖으로 집어던져 버릴걸요? 리자드를 잘 아시면서 그런 엉뚱한 말씀을 하시다니 칼 베리만도 참......" 웬만큼 거리가 떨어진 것 같자 엘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전 이만 가볼게요!" "엘, 다음 번엔 잊지말고 저도 꼭 불러주십시오! 늙긴 했지만 저도 낭만적인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달밤이 따라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지요!" 엘은 곰살궂은 놀림을 뒤로 하고 빠르게 발을 놀렸다. 발그스름한 홍조 위로 저녁놀이 내려왔다. 제 목 [달의 아이] 80장.악몽을 찾아서-1 제 80장. 악몽을 찾아서 "이쪽입니다, 전하." 오메른이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다보던 자일스가 발을 내디뎠다. 오메른이 그 뒤를 따르려 하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마체라타도 몸을 움직였다. "불이 붙은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이는구나. 대체 뭐가 널 이렇게 흥분시킨 거냐?" 오메른이 희롱하는 듯한 눈으로 마체라타의 몸을 훑어내렸다. "넌 아니니 헛물켜지 마라." 쌀쌀맞게 쏘아붙인 마체라타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메른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좇았다. 계단을 내려와 좁은 복도를 열 걸음정도 걸어 모퉁이를 도니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칠이 벗겨져 괴기스러워 보이는 문 앞에 자일스가 서 있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대체 둘이 뭘 했기에 이렇게 늦은 거냐?" 마체라타와 오메른을 번갈아 노려보는 자일스의 눈엔 짙은 의혹이 서려 있었다. "문단속을 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전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자일스의 성질을 재빨리 가라앉힌 오메른이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따로 열쇠가 필요한 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체라타는 자그맣게 혀를 찼다. 손에 먼지가 묻을까 봐 겁이 났나 보군. 황족은 다 저렇게 무능력한 걸까? 아니면 내가 모시는 황태자전하만 유달리 한심한 걸까? 마체라타는 안으로 들어서며 비웃음을 흘렸다. 초라하고 너저분해보이는 밖과 달리 안은 그런대로 기본적인 방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침상은 물론 작은 탁자와 의자도 놓여 있었고, 나무판자로 두텁게 막아 버린 창문엔 노란색 커튼까지 달려 있었다. 마체라타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오메른을 쳐다보자 그가 불쾌한 듯 콧날을 실룩였다. "저 놈이냐?" 자일스가 손가락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침상 위엔 두 손과 두 발이 결박된 베르그가 누워있었다. "그렇습니다." 침상으로 다가간 오메른이 베르그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었다. 베르그가 겁에 질린 얼굴로 연거푸 세 사람을 두리번거렸다. "날 똑바로 봐라." 자일스는 베르그의 턱을 움켜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모,모르오! 당신이 누군데 그런 걸 묻는 거요?" "내가 바로 야노쉬 공작이다." 자일스가 입술을 실룩이며 이기죽거렸다. 멍하던 베르그의 동공에 일순 광기 어린 섬광이 번뜩였다. "아니야! 당신은 야노쉬 공작이 아니야! 절대 공작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베르그는 거듭 악을 써댔다. 흡사 죽어가는 짐승이 부르짖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침상에 얼굴을 파묻고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급속도로 잦아들더니 어느새 가느다란 흐느낌으로 변했다. 자일스는 경멸어린 눈초리로 베르그를 내려다보다 오메른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한심한 놈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책임지고 확실하게 숨통을 잘라 버리겠습니다."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여 보인 자일스가 문으로 걸어가다 마체라타를 돌아봤다. "뭐하고 있는 거냐? 따라오지 않고." "먼저 환궁하십시오, 전하. 전 놈에게 더 알아낼 것이 있는지 조사해 본 연후에 전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오메른을 흘긋 본 자일스가 탐탁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요한 걸 알아내면 그 즉시 전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마지못해 승낙한 자일스가 밖으로 나가자 오메른이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황태자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날 이용하려는 거라면 일찌감치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다. 너 때문에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네 계획이라면, 무사히 서클랜드 백작이 되는 걸 말하는 거냐?" "그래, 바로 그거다. 명심해라, 너 때문에 일이 틀어지면 산 채로 네 목을 따 피를 마시고, 심장을 꺼내 한입 한입 씹어 먹을 것이다!" "식성 한 번 고상하구나." 마체라타는 코웃음을 쳤다. "빈말 아니니 깊이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난 황태자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마음도, 네 계획을 망치려는 생각도 없다. 잘 들어라 오메른, 내 충고 하나 해주마. 네 계획을 무사히 달성하고 싶으면 네 옆에 붙어 있는 금발머리부터 떼어 내라." 오메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체사레를? 체사레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냐?" "그 체사레란 놈이 널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 끝내는 한 입에 삼켜버릴 거란 건 알고 있다." "헛소리!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냐?" 오메른이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지금 네 모습을 봐도 뻔하지 않느냐? 넌 이미 잔혹할 만큼 냉정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자신만만하던 예전모습을 잃어버렸다. 지난번 체사레와 함께 있는 널 보니 그 이유가 쉽게 짐작되더구나. 없어질까 잃어버릴까,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꼴이라니...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 애처롭기 짝이 없더구나." 마체라타는 비웃음을 날리며 오메른을 밀치고 침상 옆에 바싹 붙어 섰다. 그리고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않고 있는 베르그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네가 본 야노쉬 공작에 대해 말해봐라.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그와 같이 온 자는 누구인지... 솔직히 털어놓으면 살려 주겠다." 베르그가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어있는 얼굴을 코앞에서 맞닥뜨리게 된 마체라타가 벌떡 몸을 세웠다. "그 말을 어떻게 믿소? 지난 번에도 날 속였는데,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커다랗게 벌어진 입술 한귀퉁이에서 질척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마체라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 널 살려 줄 마음이 없다! 하지만 네 태도 여하에 따라 고통없이 죽여 줄 수는 있다! 선택해라, 끝내 입을 열지 않겠다면 난 지금 즉시 이 곳을 나갈 것이다. 그럼 네 목숨은 오메른에게 맡겨지게 될 거다. 오메른이 널 곱게 죽일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겠지?" 마체라타는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높였다. 베르그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네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만 잘해준다면... 내 손으로 직접 아무 고통없이 죽게 해주겠다. 넌 깊고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며 평온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자, 어떤 죽음을 원하느냐?" 베르그는 숨을 헐떡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마체라타는 가차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마,말하겠소! 말하겠소!"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미끄러지듯 되돌아온 마체라타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럼 먼저 네 집으로 널 직접 만나러 왔었다는 가짜 야노쉬 공작에 대해 말해봐라." 베르그가 더듬더듬 얘기를 시작했다. "나이는... 쉰에서 예순 정도로 보였소. 키는 보통이었고... 조금 마른 체형에... 눈은... 갈색 아니면 좀 더 어두운 잿빛같이 보였는데... 잘 기억이......" 건질 만한 게 전혀 나오지 않자 마체라타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회색의 긴 외투를 걸치고 있었고, 그 안에 검정색 겉옷과 조끼를......" "이제 그만해라! 더 들어봐야 시간낭비일 테니까!" 마체라타는 신경질적으로 베르그의 말을 잘랐다.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한다. 저 놈이 말한 인상착의를 가진 자는 오늘밤 안에 백 명은 모을 수 있을 거다." 오메른이 빈정거렸다. "쓸모없는 말만 나불댔으니 이제 저놈은 내 차지인가?" "그, 그래, 그거야! 기억 났소!" 베르그가 허겁지겁 소리쳤다. "붉은 점이 있었소! 이상한 모양이었는데... 어찌 보면 별모양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투구모양 같기도 하고......" 마체라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점이 어디 있었느냐?" "손목 안쪽에 있었소! 차를 마실 때 점을 발견했으니까, 아마 오른쪽 손목일거요!" 돌연 마체라타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누군지 알아낸 거냐? 그래, 손목에 붉은 점이 있는 자를 알고 있는 거로구나!" 오메른이 마체라타의 팔을 움켜잡았다. "누구냐? 대체 야노쉬 공작을 사칭한 자가 누구인 거냐?" "네가 알 필요없는 사람이다." "내가 알 필요없는 사람? 설마... 진짜 야노쉬 공작인 건 아니겠지?" 마체라타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난 알아야겠다! 어서 말해라!" "네가 목을 매달고 있는 금발머리 체사레다. 이제 만족하느냐?" 마체라타가 깔보는 어조로 이죽거리자 성질이 치민 오메른이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감았다. 통증이 일만큼 머리가죽이 바짝 당겨졌지만 마체라타는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오메른, 난 널 죽이고 싶지 않다. 네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부인 못할 사실이다. 하지만 죽여야 될 이유가 생기면 난 망설임없이 널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도 있다. 너도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오메른... 내가 널 죽여야 될 이유를 만들지 마라."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던 오메른이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넌 날 많이 닮았다. 너무 많이 닮았어... 지나치리만큼." "내가 널 닮았다고? 소름끼칠 만큼 기쁜 말이로구나." 오메른은 마체라타의 머리를 놔주기 전 그녀의 입술에 강하게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입술을 핥아 보던 마체라타가 피식 웃었다. "내가 받아 본 것 중 가장 형편없는 입맞춤이었다." "널 만족시킨 남자가 있긴 있는 거냐?" 오메른이 가볍게 비꼬자 마체라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웃고 일이나 마저 끝내라. 그래야 한시라도 빨리 네가 꺼지는 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은가 보구나. 좋다, 네 바람을 들어주겠다." 마체라타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맥없이 널브러져 있는 베르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오메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네 단검 좀 빌려야겠다." 넋이 나가 있던 베르그의 얼굴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날 편안히 잠들게 해주겠다고 그랬지 않소! 고통없이 죽게 해주겠다고 당신 입으로 분명히 말했지 않소! 안 돼! 이럴 순 없어!" 마체라타는 베르그의 절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메른이 단검을 꺼내 그녀의 손에 건넸다. 마체라타가 단검을 말아쥐자 베르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작게 웅크렸다. 마체라타는 우선 단검으로 그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 그녀가 발목에 묶인 밧줄마저 자르자 베르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늘밤 안에 바드리오를 떠나라. 죽고 싶지 않으면 이곳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다. 리아잔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들어가, 구석진 곳에 숨어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물론 혀도 얌전히 간수하고 있어야 할 거다. 만약 내 말을 어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더 이상은 내 자비를 기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 어서 움직여라.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란 말이다." "놈을 살려 주겠다는 말이냐?" 오메른이 버럭 소리쳤다. "그래, 바로 그 뜻이다." 마체라타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베르그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그는 다리에 저릿한 통증이 일자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가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오메른은 비틀거리며 문으로 뛰어가는 베르그를 쫓아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벽에 밀어붙였다. "네가 못하겠다면 내 손으로 처리하마!" "손을 놔, 오메른." 오메른이 마체라타에게 살기어린 시선을 던졌다. "황태자는 이놈의 처리를 나한테 맡겼다. 그런데 놈을 놔주라고? 놈의 목숨과 내 미래를 맞바꾸라고? 그리고 너와 함께 시궁창으로 떨어지란 말이냐?" "황태자를 꽤나 두려워하는구나. 하긴, 네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황태자가 무섭기도 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오메른, 네가 황태자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바로 나다." "정신 나간 붉은머리 계집따위를 두려워할 나였다면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메른이 노골적인 조소를 내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마체라타가 베르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불거진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오메른의 손은 매우 거칠었고, 금방이라도 뚝 하고 부러질 것처럼 뻣뻣했다. "오일 안에 네가 그토록 바라던 서클랜드 백작이 되게 해주마. 난 황태자처럼 차일피일 미루며 네 피를 쥐어짜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내 조건은 네가 지금 즉시 이 손을 놔야 한다는 것 뿐이다. 아, 또 하나가 있었지. 앞으론 내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 어떠냐? 이 정도면 네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한 계약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하겠느냐, 오메른? 나와 계약을 맺을 테냐?" 오메른이 검은 눈동자를 광포하게 번뜩이며 베르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베르그가 비명을 터뜨리는 순간 오메른이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냈다. 오메른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가는 베르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베르그를 쫓아가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지, 아니면 마체라타의 목을 비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잘했다, 오메른. 말 잘들은 착한 너에게 맛있는 먹이라도 던져주고 싶구나."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약을 올리며 키득거렸다. "꺼져라." 오메른이 거칠게 뱉어냈다.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꺼져주마. 먼저 빌린 것을 돌려준 다음에......" 마체라타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들고있던 단검을 오메른의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잘 썼다, 오메른." "한가지만 묻자. 베르그를 살려 준 이유가 무엇이냐? 놈이 말한 가짜 야노쉬 공작과 가까운 사이인 거냐? 베르그에게 같잖은 동정심이 생길 만큼? 아니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 네 약한 마음 때문인 거냐?"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마체라타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아니, 중요하다. 이유가 야노쉬 공작의 정체에 있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은 거고. 네 약한 마음에 있다면... 네가 나한테 한 말을 고스란히 돌려줘야 할 테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마체라타가 미간을 좁혔다. "넌 이미 예전의 네가 아니다. 내가 감탄할 만큼 냉혹하고 오만하던 네 모습이 아니란 말이다. 이대로 네 자신을 내버려 둔다면 네 안에 스며든 약한 마음이 널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 끝내는 네 모든 걸 한 입에 삼켜 버리게 될 거다." "웃기지마, 오메른.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마체라타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오메른은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스친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내가 잘못 짚었다."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어서 돌아가 네가 목숨 거는 금발머리 품에나 안겨 편안히 쉬기 바란다." "충고 고맙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조소를 던졌다. 다음 순간 마체라타가 모습을 감췄다. 오메른은 그녀가 있던 곳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체사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너도 약한 마음을 떼어 낼 수 없을 거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눈앞에 벼랑 끝이 나타나도 멈추지 않으니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엘은 눈을 번쩍 뜨며 격한 숨을 토해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인기척이 커지더니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 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엘은 심호흡을 한 다음 크게 소리쳤다. "괜찮소!" "저... 제가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불러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없으니 가서 일 보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엘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까지나 비명을 터뜨리며 잠에서 깰 수는 없어. 악몽이 따라올까 무서워, 눈을 감는 것조차 겁을 내는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악몽의 정체를 밝혀야 돼.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엘은 침대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뇌리에 박히다시피한 악몽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기가 돌던 몸이 따뜻해진 걸로 봐서 시간이 제법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칼 베리만은 꿈이 과거의 잔영이나 미래의 예견이라고 하셨어. 내가 꾸는 악몽은 어느 쪽에 속해 있는 걸까? 피투성이 방을 본 기억은 전혀 없으니 과거의 잔영은 아닐 것 같은데... 그래, 실제로 그런 방을 봤다면 절대 잊어버리지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답은 미래의 예견인가? 내가 미래에 악몽과 같은 일을 겪게 된다는 건가? 차디찬 전율이 등줄기를 치달아올랐다. "아니야." 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할 수는 없어. 붉은 방은 그저 꿈에서만 나타나는 환영일 뿐이야." '아니, 현실에 존재할 수도 있어.' 마음 속에 가느다란 속삭임이 울렸다. 그럴 수 있을까?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붉은 방이 현실이라면 난 그 방을 찾을 수 있어." 엘은 무엇인가를 겁내는 사람처럼 발을 끌며 협탁으로 다가가 브레이슬릿을 꺼내 손목에 찼다. 이게 날 악몽 속으로 데려다 줄거야. 브레이슬릿에 손을 올리려던 엘은 자신의 잠옷차림을 깨닫고 혀를 찼다. "정신 차려, 바보야.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악몽 속으로 들어갈래? 이건 네 목숨이 달린 일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엘은 중얼중얼 자신을 질책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단도와 마르키젤이 준 검을 챙겨 허리에 찼다. 엘은 잠깐 망설이다 그 위에 긴 망토를 걸쳤다. 조금도 춥지 않았지만- 오히려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치르게 될지 알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엘은 돌아오지 못하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자신의 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자 악몽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짙은 혈향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브레이슬릿을 사용할 때마다 느껴지던 약한 현기증도 없었고,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엘은 조심스럽게 샛눈을 떴다. 자신의 방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음을 깨닫자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역시 붉은 방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어!" 엘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끈질기게 맴돌았다. 만약 붉은 방이 현실에 존재하고, 이유는 모르지만 브레이슬릿의 힘이 그 곳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였다. 그녀가 직접 붉은 방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엘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결연히 브레이슬릿을 감쌌다. 그 즉시 브레이슬릿은 그녀를 아시리움 성전의 서관으로 데려갔다. 제 목 [달의 아이] 80장.악몽을 찾아서-2 엘은 숨을 죽이고 사방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서관 일층에 위치한 넓은 홀이었다. 그녀는 루드비히가 서관 안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귀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들리는 거라곤 불규칙하게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소리뿐이었다. 늦은 시간이니까 루드비히는 아마 위층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야. 엘은 살금살금 홀 안쪽에 있는 벽난로로 다가가 위에 놓여 있는 램프를 집어 들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그녀는 부지깽이를 들어, 타다 만 나무와 재를 뒤적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채 꺼지지 않은 불씨 두세 개가 나타났다. 엘은 깜박이는 불씨를 후후 불어가며 램프에 어렵사리 불을 붙였다. 그리고 심지를 조정해 밝기를 적당히 맞췄다. 엘은 램프를 들고 곧장 홀의 왼쪽과 연결된 복도로 갔다. 그리고 처음 꾼 악몽에서와 마찬가지로 끝에서 다섯 번째 문 앞에 멈춰섰다. 지난번 물건을 찾을 목적으로 악몽을 따라왔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허탕을 친 기억이 떠오르자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욱 내키지 않아졌다. 엘은 다른 곳을 가볼까 궁리하며 복도 양쪽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작정 서관을 헤매기 전에 악몽이 시작됐던 방을 꼼꼼히 훑어보는 편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엘은 탁자 위에 램프를 내려놓고 빙돌아가며 방을 둘러봤다. 지난번 꿈의 영향 탓인지 책장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간다는 것만 제외하면 특별히 수상쩍게 보이는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공연한 헛수고일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육중하게 버티고 서 있는 책장으로 걸어갔다. "이 많은 책을 다 빼 봐야 하는 건가?" 암담한 마음에 저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시작하기도 전에 우는 소리하지말자. 루드비히를 깨워 책이 왜 이리 많은 거냐고 따질 수도 없고... 또 어차피 내 손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엘은 힘차게 팔을 걷어붙이고 아래칸부터 시작해 책을 차곡차곡 바닥에 쌓았다. 부지런히 움직여 책장을 반 정도 비웠을 때 그녀는 망토를 벗어 던지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칼칼한 목이 의식되자 물 생각이 간절해졌다. 엘은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책장과 조금 떨어진 탁자에 술주전자와 잔이 준비되어있었다. 엘은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탁자로 다가갔다. 한잔 가득 물을 따라 마시고 팔을 내리던 엘은 문득 동작을 멈췄다. 그녀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측면으로 보이는 책장을 살폈다. 가지런하게 맞춰진 다른 받침에 비해 책장의 맨 아래칸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대충 만든 싸구려 책장이 아니니 목공의 실수는 아닐 테고, 일부러 아래받침을 짧게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엘은 무릎을 꿇고 허리를 납작하게 굽혀 책장 아래칸을 들여다봤다. 오른쪽으로 받침이 나와 있어야 할 부분에 직사각형의 홈이 패어 있었다. 낮은데다 그늘진 구석에 나있었기 때문에 신경 써서 살펴보지 않으면 무심코 넘겨 버리기 십상인 홈이었다. 엘은 검지손가락을 홈에 밀어 넣었다. 그녀가 무심코 손가락을 앞으로 움직였을 때, 무엇인가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달칵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책장이 두뼘 정도 앞으로 밀려나왔다. 엘은 탄성을 지르며 일어나 벽과 책장 사이에 만들어진 틈새를 살폈다. 아니,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책장 뒤에 감춰져 있던 검은색 문이 어느새 분명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엘은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나 문을 가린 방해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밀 문을 사용하지 않은 듯 그녀가 낑낑대며 전신의 힘을 쏟아 부었을 때야 비로소 책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문 전체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엘은 우선 램프부터 챙겨들었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단도와 검의 존재를 확인했다. 길 잃을 위험에 대비해야한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벗어 놓은 망토를 걸치고 단추를 잠갔을 때였다. 엘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적당한 게 눈에 띄지 않자 커튼자락을 큼직하게 잘라낸 다음, 자른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주름을 잡아 놓았다. 문 정면에 서는 엘의 얼굴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검은 문 안에서 악몽과 맞닥뜨리게 될지, 아니면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분명한 건 그것을 알고 싶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가 직접 확인해 봐야한다는 것뿐이었다. 엘은 심호흡을 한 다음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냉기가 손바닥을 감쌌을 때, 문득 루드비히도 이런 비밀 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엘은 고개를 살짝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며 문을 열었다. 램프 불에 비친 건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통로였다. 하지만 높이는 엘의 키보다 세뼘 정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넉넉해 움직임에는 큰 불편이 없어 보였다. 엘은 겹겹이 쌓여 커튼처럼 늘어져 있는 거미줄로 램프를 가져갔다. 대충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엄지손가락 크기의 거미 네 마리가 시야를 점령했다. 꼭 여기를 들어가야 하는 걸까? 안 들어가면 안 될까? 엘은 괴로운 신음을 길게 토해냈다. 그리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 쓴 다음 무거운 발을 내밀었다. 통로 안은 거미줄과 메마른 먼지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한발 움직일 때마다 푸석푸석한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코를 간지럽혔다. 때문에 엘은 재채기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엘은 잔뜩 긴장한 채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이 사방에서 그녀를 압박해 들어왔다. 좁은 통로와 희미한 램프 빛은 심지어 엘의 그림자까지 기괴하게 만들어 무서움을 부추겼다. 당장이라도 흐릿한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와 그녀를 덮칠 것 같았다. 빛이 비치거나 그녀가 가까이 가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벌레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때마다 엘은 살갗이 스멀거리는 듯한 느낌에 시달리며 벌레가 멀리 도망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했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나자 엘은 커튼 조각을 길게 잘라 통로를 받치고 있는 들보에 묶었다. 벌써 일곱 번째나 같은 일을 반복한 터라 커튼 조각도 두세 번 밖에 쓸 수 없는 크기로 줄어 있었다. 엘은 달랑거리는 천을 툭 건드려 본 후 한숨을 쉬며 오른쪽 통로로 들어섰다. 암울한 현실속에서 작게나마 위안이 되는 건 적어도 통로가 무너지진 않으리라는 것뿐이었다. 낡고 지저분하긴 하지만 문외한인 엘의 눈에도 통로는 제법 튼튼해 보였다. 통로는 견고하게 만들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머지 부분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지 엘은 통로를 만든 사람이라해도 이곳에 들어오면 헤맬 수 밖에 없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또한 통로는 도저히 용도를 짐작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끝을 막아 버린 부분도 있었고, 굳게 닫혀 꿈쩍도 하지 않는 문과 연결된 곳도 있었다. 또 열심히 걷다보면 이미 지나친 장소에 다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이상한 통로를 생각해낸 사람은 누구일까? 대체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곳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엘은 밖으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걸음을 늦췄다. 그 때였다.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알 수없는 어떤 기묘한 공기의 흐름이 뒤쪽에서 전해져 왔다. 엘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어둠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어느덧 미세한 기류는 작지만 뚜렷한 울림으로 변해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단조로운 소리. 그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였다. 순간 심장이 죄어들었다. 차가운 공포가 뒷골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내달리려던 엘은 가느다랗게 남아있던 이성이 붙잡았다. 무작정 도망부터 친다면 십중팔구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쫓는 괴물- 엘은 무의식 중에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에게 잡히게 될 테고, 끝내는 괴물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엘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램프 갓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불을 껐다. 칠흑같은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무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날렵하게 단도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감촉이 두려움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엘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도사린 채 괴물을 기다렸다. 그리고 괴물이 가까이 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펄쩍 몸을 날렸다. 중심을 잃은 괴물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와 함께 넘어진 엘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괴물 위에 걸터앉았다. "움직이면 죽여버릴 거야!" 엘은 거칠게 을러댔다. "예리한 단도가 바로 네 눈앞에 있어. 그러니 눈에 구멍이 뚫리는 걸 바라지 않으면 허튼 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갑작스런 공격에 전의를 상실했는지 괴물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엘은 커튼조각을 꺼내며 더욱 위협적으로 말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놔." "그건 좀 곤란하겠군요." 상상 밖의 목소리에 엘이 흠칫했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단도를 빼냈다. 어둠의 제약을 조금도 받지 않는 것처럼 그의 동작은 매끄러웠다. "루,루드비히... 대체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이제 좀 내려가 주시겠습니까?" 루드비히의 어조는 불안할 정도로 차분했다. 엘은 그제야 자신이 루드비히를 깔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허둥대며 다리를 세웠다. 그러다 옆에 놓여 있던 램프에 발이 걸려 루드비히 위로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이마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는 찰나 루드비히가 훅 숨을 들이쉬었다. 엘은 허겁지겁 몸을 움직여 그에게서 떨어졌다. "미,미안해요, 루드비히! 많이 아파요? 어디를 다친 거예요?" 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루드비히의 얼굴을 더듬었다. 다급한 손끝이 가지런한 속눈썹과 날카로울 만큼 곧은 콧날을 거쳐 부드러운 입술에 닿았다. 루드비히가 턱으로 미끄러지려는 엘의 손을 잡아 단호하게 떼어 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루드비히 앞에 떠있는 주먹만한 구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은은한 빛에 감싸인 루드비히를 훔쳐보던 엘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턱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니까 루드비히 턱하고 내 머리하고......" 웃음이 나오려하자 엘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까지 터뜨려 분위기는 더욱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꾸 비어져 나오려하는 웃음을 참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엘이 손으로 입을 막았을 때 그녀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늘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는 물론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웃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엘의 입술에 묻어있던 웃음기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머쓱함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일어나십시오." 루드비히가 말했다. 엘은 감정을 완벽히 배제한 목소리에서 그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음을, 정확히 말해 심각할 정도로 화가 나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일어나시라 했습니다." 엘은 어정쩡하게 몸을 세웠다. 루드비히는 위압감을 풍기며 그녀를 내려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위험한 기운을 품은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이어졌다. 긴장이 급속도로 고조되자 엘은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불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점점 무거워지는 침묵 속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어떤 위기감을 느끼며 목을 가다듬었다. "루드비히, 저 때문에 자다가 깨신 건가요?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루드비히. 아, 그리고 느닷없이 제가 달려드는 바람에 많이 놀랐죠? 전 루드비히가 절 잡으려고 쫓아온 괴물인 줄 알았거든요. 나도 참, 루드비히를 괴물로 오해했다니... 리오가 오늘 일을 알게 되면 무척 재미있어 할 거예요." 엘은 서툴게 웃으며 다시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여기 좀 답답한 거 같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긴 벌레가 엄청 많아요, 루드비히. 제 손가락보다 더 큰 벌레도 한두 마리 본 게 아니에요. 제가 아직까지도 기절하지 않고 이런 곳에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벌레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나 봐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두르지도 말라고 루드비히가 그러셨죠? 그 말씀이 정확히 맞는 것 같아요."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엘이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루드비히가 물었다. "으음... 그러니까... 잠이 안 와서 지난번처럼 루드비히를 만나러 왔어요. 그런데 루드비히가 어디 계신지 몰라 여기저기 찾아 다니다가 우연히 이 통로를 발견하게 된 거예요." "다시 말씀해보십시오, 거짓말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의표를 찔린 엘이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많이 늦은 건 같은데... 전 이만 가 볼게요, 루드비히." 엘은 루드비히를 향해 살짝 이를 드러내 보인 후 브레이슬릿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루드비히가 무슨 말인가를 낮게 속삭였다. 엘은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은 후에야 루드비히가 공간이동능력을 막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덫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몰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엘은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이곳에 오신 이유를 아직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다... 그런 뜻인가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루드비히의 어조는 냉정하기만 했다. "말하지 못하겠다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엘은 반항적으로 물었다. 루드비히가 다소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대항하려 하지 마십시오, 엘." 은회색섬광이 엘의 눈을 위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엘이 다치게 됩니다." 루드비히의 조용한 경고는 오히려 엘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절 위협하지 마십시오, 법황 성하. 예, 알겠습니다. 모든 걸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악몽을 찾아 이 곳에 왔습니다. 붉은 방... 피비린내 가득한 피투성이 방을 찾아 여기 온 것입니다. 수천, 수 만개의 머리가 겹겹이 쌓여 피를 토해내는 저주받은 방... 그 방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엘은 거친 숨을 골랐다. "붉은 방......" 루드비히가 마치 음미라도 하듯 낮고 느리게 속삭였다. 엘은 지친 한숨을 흘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그래요... 붉은 방... 자꾸만 붉은 방이 나오는 꿈을 꿔요, 루드비히. 처음 악몽을 꾼 곳은 바로 여기 아시리움 성전이었어요. 서관에서 물건을 찾다 우연히 책장에 그려진 이상한 붉은 원을 발견하게 됐어요. 거기에 손을 댔더니 책장이 사라지며 계단이 나타났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갔더니... 바로 거기 붉은 방이 있었어요. 이게 바로 제가 꾼 첫 번째 악몽이에요." 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따라 오십시오." "예예... 알겠습니다, 성하. 감사히 복종할 테니 성하께선 그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엘은 상냥한 어조로 비꼰 다음 루드비히를 좇아 발을 옮겼다.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춘 건 불에 비친 루드비히의 실버블론드가 한순간 붉은빛으로 번뜩였을 때였다. 엘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갑작스레 떠오른 물음을 입에 담았다. "루드비히, 혹시 말이에요... 혹시... 루드비히가 그 붉은 방의... 주인인가요?" 루드비히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를 뒤돌아봤다. 온기라곤 보이지 않는 차디찬 눈이 엘을 옭아맸다. 그녀는 정체 모를 두려움에 휩싸였다. 엘은 오싹한 냉기가 전신을 파고드는 걸 느끼며 더듬더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루드비히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예, 제가 바로 붉은 방의 주인입니다." 엘은 짧고 격한 숨을 토해냈다. "지,지... 진짜예요?" "물론 진짜입니다. 그런 방을 만든 건 엘같은 골칫덩어리들을 가뒀다가 심심할 때마다 한 명씩 꺼내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전 식성이 까다롭기로 유명하거든요. 그 중에서도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말괄량이들은 유난히 맛이 좋더군요. 그래서 한 입에 삼키지 않고 조금씩 아껴 먹으려고 붉은방 옆에 푸른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엘의 모습... 유난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요. 저와 함께 푸른방에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엘?" 슬쩍 비꼬는 목소리가 주위를 둘러싼 긴장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엘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미안해요, 루드비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는지......" 까다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루드비히가 엘에게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엘은 성큼성큼 앞서가는 루드비히에게 이끌려 잰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난 이만 돌아가 잠이나 자고 싶은데......"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하는 겁니다." "벌이라고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벌까지 받아야 해요?" 엘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며 목청을 높였다. 그녀가 손을 빼내려 하자 루드비히가 손아귀에 지그시 힘을 가했다. "엘이 어질러 놓은 건 엘이 치우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방청소시키려고 날 이렇게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거예요?" 엘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루드비히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얼굴로 엘을 돌아봤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엘은 생글생글 웃으며 아부의 말을 늘어놓았다. "벌이 겨우 방청소였다니... 고마워요, 루드비히. 루드비히는 역시 친절하고 관대하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세요. 세상에 루드비히같이 마음 넓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루드비히가 피식 웃었다. 그의 기분이 풀어졌음을 알게 되자 그녀는 하품소리를 요란하게 낸 다음 넌지시 물었다. "저기... 내일 와서 하면 안 될까요?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안됩니다, 그러니 엄살부리지 마시고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루드비히의 어조는 강경하기만 했다. 엘은 화풀이하듯 발을 구르며 걷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친절하고 관대하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말 취소예요. 심술궂고 속좁고 옹졸한 분이라 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루드비히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힌 엘이 비꼬는 말을 덧붙였다. "칭찬으로 한 말 아니라는 거 아시죠?" "제 귀엔 칭찬으로 들리는군요." "귀가 상당히 어둡고 제정신이 아니시라는 말을 추가해야겠네요." 요란하게 뀐 콧방귀가 무색하게 엘의 입술엔 어느새 미소가 담겨있었다. 왜 루드비히 앞에서는 늘 이렇게 기분이 금세 풀어지는 걸까? 대체 루드비히는 내게 어떤 존재인 걸까? 엘은 혼란스런 눈길로 가볍게 흔들리는 실버블론드를 바라봤다. 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루드비히가 손을 들어올려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왜 엘한테는 화를 내는 게 불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엘은 들릴듯 말듯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루드비히의 손을 맞잡았다. 한 몸처럼 이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좁은 통로를 감싸며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 이것으로 8권이 끝났습니다. 부족한 글, 꾸준히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꾸벅) -------------------------------------------------- 달의 아이 9권 제 81장 결심 벽난로의 불꽃이 잦아들자 카펫과 커튼 자락 위로 그림자가 흐느적거렸다. 마체라타는 힘없이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침대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는 쥬네비아를 내려다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뺨에 드리워진 창백한 불빛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마체라타는 나지막이 주문을 외우며 파를 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연기가 흘러나와 쥬네비아의 얼굴을 감쌌다. 검은 연기는 쥬네비아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마체라타는 연기가 모조리 빨려들 때까지 가만히 서서 쥬네비아를 바라봤다. “아버지 말씀이 맞을까요?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이 폐하께 옮겨진 것일까요? 만약..... 제게 폐하 같은 어머니가 계셨다면.... 전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쥬네비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복수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괴로움을 못 참고 미쳐 버리시든 스스로 목을 매다시든....모든 건 폐하의 몫입니다.” 마체라타는 구슬퍼 보이는 미소를 남긴 채 한층 짙어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요 엘은 바닥에서 세 권의 책을 집어 들며 뒤에 앉아 있는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오늘 다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때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곳에 온 거예요. 악몽이 시작된 곳에 오면 어떤 단서를 찾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요. 그게 전부예요.” 엘은 마지막 책을 꽂아 넣는 것과 동시에 말을 끝냈다. 그녀는 시원하다는 듯 손을 탁탁 턴 다음 뻐근한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입술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게 이 정도로 힘든 일인지 몰랐어요. 아무튼 허리가 부러지기 전에 루드비히가 내린 벌 청소를 끝마쳐서 정말 다행이예요.” 뒤죽박죽 꽂혀 있는 서적들을 쭉 훑어보던 루드비히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전 분명히 이 방에 있는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원래 상태로 감쪽같이 되돌렸잖아요” “감쪽같이라고요? 역사서 옆에 신학서와 철학서가 나란히 꽂혀있는 모습이 감쪽같은 겁니까?” 엘은 어이없어하는 루드비히에게 불만 섞인 눈초리를 던졌다. “온몸이 쑤시도록 고생한 사람한테 괜히 트집 잡지 말아요. 신학서나 철학서나 재미없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엘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으음.... 이 정도면 원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데.... 아, 커튼은 복구가 힘들 테니 새 걸로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런 루드비히가 알아서 조치해 줄 수 있죠?” 그제야 밑자락이 쑹덩쑹덩 잘려 나간 커튼을 알아챈 루드비히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엘은 자신이 온통 헤집고 다녔던 통로의 문을 닫으려 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루드비히에게 돌렸다. “그런데 이 괴상한 비밀 통로는 누가 만든 거예요? 무슨 목적으로요? 설마 루드비히가 만든 건 아니겠죠?” “오래전 이곳을 관리하던 사람이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들었다 합니다.” 대답을 마친 루드비히가 의자에서 일어나 엘에게 다가왔다. “취미요? 무슨 취미요?” 루드비히는 엘을 비켜서게 한 뒤 통로 문을 닫고 옆으로 밀려나 있던 책장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렸다. “무슨 취미인데 이런 통로가 필요한 건데요?” 엘은 궁금한 마음에 루드비히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루드비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었다. “서관은 오래전에 성전 방문자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당시 어느 대사제가 그들의 사생활을 엿보기 위해 만들었다 하더군요.” 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루드비히 옆에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대사제님이 사람들을 훔쳐보기 위해 저런 걸 만들었단 말씀이에요? 세상에.... 누군가 몰래 숨어 날 훔쳐보고 있다니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대체 어떤 대사제님이 그렇게 할 일이 없으셨대요?” 루드비히는 기분 나쁘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는 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엘이 지난번 언급한 적 있는 변태가 아닐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도 징그럽고 메스껍고... 으음.... 나머지 하나가 뭐였더라....?” 장난스러운 표정과 달리 루드비히의 어조는 매우 진지했다. 놀림을 담은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루드비히와의 입맞춤 장면이 번개같이 엘의 머리를 스쳐 갔다. 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뺨에 피어오른 홍조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아, 소름 끼치는 변태 말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엘은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루드비히와 시선을 맞댔다. 그리고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만 해도 징그럽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는 변태는 당연히 기억하옵니다, 성하. 제 옆에 그 누구보다 고귀하신 변태님이 한 분 계신데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엘은 말을 끝내며 의미심장하게 씩 미소 지었다. 루드비히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입술이 그녀의 귓가로 다가왔다. “겁이 없으시군요. 변태를 자극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엘은 부드러운 숨결을 피해 얼굴을 틀며 반대편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숨 가쁜 대답을 무시하고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보드랍게 넘겨주던 손길이 엘의 귓불을 스치고 턱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리고 살짝 벌려진 입술이 그녀의 목줄기로 내려왔다. 따스하고 촉촉한 입김이 살갗을 스쳤을 때, 엘은 루드비히의 어깨를 밀어내며 허겁지겁 질문을 던졌다. “부,붉은 방에 대해 아시는 것 좀 없어요?” 일순 루드비히가 움직임을 멈췄다. “왜 자꾸만 그런 악몽을 꾸게 되는 걸까요?” 엘이 두 번째 물음을 꺼냈을 때 루드비히가 그녀의 맥박에 깊숙이 입을 맞췄다. 그리고 몸을 바로잡았다. “아시는 거 있으면 말씀 좀 해주세요.” 루드비히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이 안 되는 얼굴로 엘을 쳐다볼 뿐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그가 마음을 바꿨는지 입술을 닫았다. 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유를 물으려 했을 때 그가 별안간 화제를 돌렸다 “지난번 제가 드렸던 질문 기억하십니까? 리아잔의 황제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 말입니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드비히를 바라보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이번에도 엘은 말없이 얼굴만 흔들었다. “조속히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황위 결정 논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 알고 있어요. 갈팡질팡할 시간이 없다는 거요. 루드비히도 계속 이렇게 어물거리기만 하는 제가 많이 답답하실 거예요. 하지만... 정말 모르겠어요, 루드비히. 리아잔 제국의 통치자가 되기엔 전 너무 부족한 게 많아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낼 자신도, 능력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떠올라요. 만약 저와 황권을 다투는 사람이 자일스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예전에 포기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무엇이 제 발목을 붙잡는지 알아요, 루드비히?” 엘은 루드비히와 눈길을 이으며 스스로 답을 내놨다 “적어도 자일스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런 유치한 생각이 섣불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엘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눈을 내리깔았다. “황태자뿐만 아니라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해내실 겁니다.” 루드비히가 조용히 말했다. 엘은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깜박이다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야 루드비히가 제 진가를 깨닫게 되셨군요. 그래요, 이 세상에서 내가 못해낼 일은 하나도 없어요. 리아잔 제국의 황제뿐 아니라 시켜만 준다면 아시리움의 법황까지도 문제 없다고요.” 엘이 거드름을 피우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자 루드비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깍지 꼈다. “그런데 붉은 방 마리에요,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아시는 거 있으면...” 루드비히의 입술에서 들릴 듯 말 듯 낮은 속삭임이 나오자 엘은 말을 하다 말고 하품을 했다. “그,그러니까... 붉은 방에 대해... 말씀 좀...” 엘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한번 커다랗게 하품이 나왓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불편하게 꺽고 있는 엘을 가까이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볼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넘겨주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엘을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그녀를 안아 들로 일어섰다. 그는 엘의 침소로 이동해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루드비히는 얼굴을 숙여 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코끝을 스친 입술이 깊고 부드러운 숨결이 새어 나오는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루드비히는 입술을 포갠 채 살며시 속삭엿다. “편안히 주무십시오” 고개를 들려던 그는 다시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몸을 바로 잡았다 “붉은 방의 악몽도 엘을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엘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루드비히는 손끝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다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밤의 정적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놀란 시녀들이 쥬네비아의 침소로 뛰어들었다. 황후의 침소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시종들과 경비병들은 문가에 선 채 긴장된 시선을 나눴다. “폐하!” 시녀장이 연거푸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쥬네비아를 소리쳐 불렀다 “헤르티아!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쥬네비아가 목쉰 어조로 울부짖었다. “폐하, 눈을 뜨십시오! 꿈입니다! 꿈을 꾸고 계신 것뿐입니다!” 시녀장이 버둥거리는 쥬네비아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 그 순간 쥬네비아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잠시 눈을 부름 뜬 채 거친 숨을 몰아쉬다 움켜쥐고 있던 시녀장의 손을 놓았다. “모두 나가라. 그리고 프란을.... 요아상 백작 부인에게 입궁하라는 전언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폐하.” 시녀들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쥬네비아의 두 눈 가득 물기가 차올랐다. 쓰디쓴 눈물이 비통한 기억을 되돌리려는 듯 연이어 귀속으로 스며들었다. “페르가몬....” 쥬네비아의 입술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엘은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짧은 시간 잠잤을 뿐인데도 오랜만에 숙면을 취해서인지 기분이 놀라울 만큼 상쾌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보라색 눈동자는 물론 얼굴 전체에 활기가 담겨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리오와 리반을 떠올리며 엘은 걸음을 재촉했다. 세 사람은 리오의 건강 때문에 미뤄두었던 황궁 구경을 오늘부터 시작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엘은 옆으로 비켜선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두 명의 젊은 시종에게 환한 미소를 던졌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종들은 어떨떨한 상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고 있는 엘을 다시 하 번 돌아본 시종이 걸음을 떼며 말뭄을 열었다. “엘리시엔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실 수 있을까?” “쉿!” 재빨리 주의를 준 다른 시종이 조심스레 복도 양쪽을 살폈다. 그런 다음 누가 엿들을까 두려운 것처럼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소곤거렸다.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목이라도 잘리고 싶어서 그래?” “새삼스럽게 눈치는 왜 보는 거야? 기사든 우리 같은 시종이든, 또 높으신 귀족나리든 모였다 하면 침 튀기며 떠드는 얘기잖아” “그거야 우리끼리 있을 때 얘기지. 귀가 어디 있을지 모르는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입 놀리다 걸려봐라. 운 좋으면 잔소리 몇 마디나 태형 몇 대로 끝나겠지만 재수 없으면 그날로 인생 종치는 거란 말이야” “난 그저 황태자 전하보다는 엘리시엔 전하께서 되시면 좋겠다는 마음에....” 풀 죽은 어조로 말하던 시종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 앞으로는 입조심 할게” “경솔한 녀석” 핀잔을 주며 앞서 나가던 시종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너하고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여기저기 들리는 말로 짐작하건데..... 아무래도 우리 바람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아” 모퉁이를 돌려는 찰나 사람의 형상이 코앞에 나타났다. 엘은 민첩하게 몸을 세웠지만 충돌을 막기엔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머리를 호되게 부딪치고 엉덩방아를 찧게 된 그녀는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자 앞에 섰다. “저.. 많이 다치셨나요?” 걱정스런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어, 지난번에... 하마르칸에서...” 남자의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하자 엘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만난 적이 있는 분이로군요” 남자가 금빛 눈을 반짝이며 몸을 세웠다 “제게 ”여행자의 쉼터“ 라는 여관 위치를 물으셨던 분 말입니다. 그때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한 건 아니신지 모르겠군요. 글쎄, 방향을 정반대로 가르쳐 드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 뭡니까? 아치 싶어 부랴부랴 뒤를 쫓아갔는데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더군요.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엘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숨을 몰아쉬며 시장을 헤맬 때나 아시리움 종단 측에 잡힐 때 마주쳤더라면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뿐 화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고생은 좀 했지만 원한에 사무칠 정도는 아니니 마음 놓으십시오. 그냥 가뿐하게 주먹 한 대만 맞으신다면 그일은 없었던 셈 치겠습니다.” 엘이 장난기를 드러내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탈하시고 사람 보는 눈만 있으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너그러운 마음까지 갖춘 분이셨군요.” “제게 그렇게나 많은 장점이 있는 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으음.... 이번엔 제가 겸손하시다는 말을 꺼낼 차례인가요?” 두 사람은 기분 좋은 웃음을 주고받았다. “아까 보니 제 이름을 잊으신 것 같더군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체사레라고 합니다.” “아아, 체사레! 맞아요. 이제 기억나는군요.” 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데 이곳 황궁엔 어쩐 일로 오신 건지... 볼일이 있어 방문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체사레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발 다가들었다. “호오, 황궁에 거처하신다고요?” 엘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궁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레 신분을 밝히는 일이 쑥스럽게 느껴졌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엘!” 체사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만,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복도 끝에 서 있던 리오가 두 사람을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엘이라면... 혹시 엘리시엔 전하십니까?” 엘은 반신반의하고 있는 체사레를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맞았군요! 이런 세상에, 감히 전하께 무례를 범하다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전하!” 다소 경망스럽게 소리친 체사레가 정색을 하고 머리를 수그렸다. “아니, 이럴 필요 없어요, 체사레. 조금 전처럼 마음 편히 대해주세요. 빈말 아니라 나 역시 그게 더 편하니까요.” “역시 소탈한 분이시군요, 전하” 체사레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볼우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체사레는 여기 어쩐 일이신가요?” “친구를 따라왔습니다. 백작 작위를 승계받게 된 친구가 있는데, 작위를 받은 직후 황제 폐하께 인사 올려야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 친구덕에 황궁 구경이나 좀 해볼 욕심으로 따라나선 겁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친구 분....” 엘이 친구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을 때 리오가 옆에 와 멈춰 섰다. “무슨 일이야?” 엘은 무뚝뚝한 어조에 놀라 리오에게 고개를 돌렷다. 그는 의혹 어린 눈초리로 체사레를 훑어보고 있었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거든. 이쪽은 체사레, 그리고 여긴 리오라고 제 친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체사레가 정중히 인사말을 꺼냈다. 리오는 입을 꾹 다문 채 거만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리반이 기다리고 있어, 어서 가자” 리오가 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리오를 쳐다보다 순순히 걸음을 떼었다. “다시 만나 반가웠습니다, 체사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시엔 전하.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다시 뵙게 되길 간곡히 바라고 있겠습니다. 그럼 살펴가십시오, 전하. 아, 물론 전하의 친구 분도 살펴 가십시오.” 체사레를 돌아본 리오가 냉랭하게 응수햇다 “내 걱정까지 해줄 필요 없다, 네가 아니라도 걱정해 줄 사람은 많으니까” “리오!” 엘은 팔꿈치로 리오의 팔을 꾹 찌르며 체사레에게 미안하다는 뜻이 담긴 미소를 건넷다. 그러자 리오가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날렸다. 리오를 끌고 잰걸음을 옮긴 엘은 체사레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힐난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왜 그랬어? 체사레가 너한테 시비를 건 것도 아니잖아. 체사레와 무슨 원수 사이도 아니고. 옆에서 보는 내가 다 민망하더라. 대체 이유가 뭐야? 어젯밤에 체사레가 괴물로 나오는 악몽이라도 꾼 거야?” “저 체사레라는 녀석과 되도록 만나지 마” 리오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퉁스러웠다. “왜?” 어쩐지 기분 나쁜 녀석이야“ 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리오가 눈썹을 찌푸렸다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진 녀석은 처음이란 말이야. 분명히 뭔가가 있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너한테 접근하는 게 틀림없어.” 수상한 냄새라도 맡는 듯 코를 벌름대는 리오를 보며 엘은 피식거렷다. “나참, 넌 왜 그렇게 의심이 많냐? 너도 체사레와 몇 마디 얘길 나눠보면 근거 없는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리고 체사레를 만난 건 오늘까지 딱 두 번인데, 그 두 번 다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우연인지 그 녀석이 교묘하게 꾸민 일인지 어떻게 알아?” 하마르칸에서 체사레와 마주쳤을 때 들었던 꺼림칙한 느낌이 떠오르자 엘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오해라는 생각을 하며 리오를 흘겨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을 못 믿게 된 거야? 세상사에 찌들대로 찌든 노인처럼. 정말 앞일이 걱정된다.” “나한테 무슨 얘길 해도 좋으니까 내 말이나 잊지 마. 되도록 녀석과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 알았지?” “특별히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럴 마음이 있어도 만나기 쉽지 않을거야. 황궁엔 친구를 따라온 거라 했으니까” 엘은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체사레가 미소 지으며 목례를 건넸다. 엘은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일부러 피할 생각도 없어.” “고집불통 같으니.” 엘은 못마땅한 표정을 짖는 리오를 향해 장난스레 인상을 썼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서 가자, 리오. 리반 목이 한 뼘은 늘어났겠다.” “이상하게 여기가 꼭 아시리움 성전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셋이 함께 다녀서 그런가 봐” 말을 끝낸 리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나도 그래. 그래서 그런지 아까부터 자꾸 엤날 생각이 떠오르더라고” 엘은 진지하게 동의했다. “말이 안 나올 만큼 넓고 화려하다는 점에서도 두 곳이 비슷하니까” 리오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디쯤인 거야? 동서남북이 다 비슷하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지도라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리아잔 제국의 황궁 지도를 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황궁 내부 지도는 극비에 들어간단 말이야.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는게 아니라고”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가 아무나에 들어가냐?” 리오가 리반의 말을 즉시 맞받아쳣다. 그제야 엘의 신분에 생각이 미친 리반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리오 말대로 지도가 있으면 좀 더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텐데... 왜 지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다음번엔 잊지 말고 지도를 가져올게”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맞장구를 친 리반이 다시 하품을 햇다. “그러게 불 끄고 잠이나 자라고 했을 때 얌전히 따를 것이지. 그럼 술 취한 망아지처럼 그렇게 비실대진 않았을거 아냐? 내 말은 싹 무시하고 죽어라 책만 읽더니만 꼴 좋다. 거봐라, 임마, 현명하신 형님의 충고를 따르면 자다가도 복을 받는단 말이다.” 리오가 으스대며 말하자 리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면박을 줬다. “자려고 할 때 일어나 시끄럽게 떠든 녀석이 누군데? 괜히 들떠서 노래까지 흥얼댄 녀석이 누구냐고?” “그럼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잔거야?” 엘이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고작 하룻밤 새웠다고 그 다음날 일에 지장받을 만큼 약하지도 않고” 씩씩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리반의 눈은 충혈된 상태였고 다소 창백해 보이는 얼굴엔 고단함이 나타나 있었다. 점심 식사 때를 제외하고 줄곧 이어졌던 도보가 피곤을 배가시킨 것 같았다. 엘은 이제야 리반의 상태를 알아챈 자신을 향해 자그맣게 혀를 찼다 “오늘은 이걸로 끝내는 게 좋겠어. 너무 편하게만 지내다 갑자기 무리를 했나봐.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는 거 있지? 머리도 좀 무거운것 같고. 아무래도 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야겠어. 그럼 내일 보자” 엘은 반대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끝내자마자 걸음을 옮겻다. 엘이 오십 보 정도 걸었을 때 리오가 그녀를 부르며 뛰어왔다. “리반은?” 상기된 얼굴로 멈춰 선 리오가 악동 같은 웃음을 보였다.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테니깐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이제 뭐 할까?” “으음....” 가슴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엘이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왠지 몸이 찌뿌드드한 것 같은데... 어때, 리오? 오랜만에 몸 좀 풀까?” “그야 물론 좋지” 씩 웃어 보인 리오가 혼쾌히 받아들였다. 엘은 발을 내디디려 하는 그의 팔을 서둘러 잡았다. “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네요” “검술 수련장으로 가려는 거 아니었어?” “멀리 갈 필요 없잖아. 일일이 내 발로 찾아가 본 적은 없지만 검술 수련장 위치는 대충 알고 있거든. 저기 봐봐, 커다란 나무 뒤로 붉은색 건물 보이지? 유난히 뽀족하게 튀어나온 건물 말이야. 저 건물만 지나면 황궁에서 제일 큰 검술 수련장이 보일 테니까 군소리 말고 따라와.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꽁무니 빼고 달아나던지. 엉덩이 차주려고 쫒아가진 않을 테니까” 엘이 약 올리듯 말하지 리오가 험상궂게 얼굴을 구겼다 “뭐? 무서우면 꽁무니를 빼라고? 건방진 녀석, 묵사발을 만들어 주마! 각오해라!” 리오가 엘의 목을 와락 휘어감았다. 엘이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빼려하자 리오가 팔을 내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두 사람은 친밀한 미소를 교환한뒤 나란히 발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검술 수련장은 외부인의 출입을 불허하는 비밀스런 성채처럼 높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엘은 구태여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려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그럴듯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리오 역시 그녀의 질문에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사람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보기 좋게 이어진 교목들을 따라 갔다. 검술 수련장을 거의 한바퀴 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수련장 입구가 나타났다. “그런데 검도 없이 대련을 할 수 있을까?” “검이야 빌리면 그만이지. 황궁에서 제일 큰 검술 수련장이라는데 설마 기사 서너명 정도도 없겠어?” 엘은 가볍게 받아넘기며 리오보다 한발 앞서 검술 수련장에 들어섰다. 그녀의 예상대로 수련장엔 제법 많은 수의 기사들이 모여있었다. 어뜻 봐도 족히 사십 명은 되어 보였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그들 전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정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두 사람을 의아하게 만든 건 기사들의 맞은편에 모여있는 시종과 시녀들의 모습이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마주 서 있는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령 두 사람이 귀를 막고 있다 해도 연이어 들리는 날카로운 금속성을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온 누군가가 대련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응 그런가봐” 엘은 동의하며 발꿈치를 들고 고개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장막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사들에게 가려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종과 시녀들의 존재에서 그가 상당한 신분의 사람이리란 것 정도만 짐작 할 수 있었다. 고위 귀족일까? 아니면 황족? 엘은 궁금증이 커지는 걸 느끼며 기사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팔과 어깨 근육을 가볍게 풀고 있던 리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대련을 방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눈앞에 기사 네명을 남겨놓았을때 엘은 우뚝 멈춰섰다. 그들의 어깨사이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일스가 뚜렷이 보였다. 하필이면! 엘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뒤에 오던 리오과 부딪치고 말았다. 일순 중심을 잃은 엘이 휘청하다 옆에 서 있던 기사를 치자 놀란 기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냐?” 자일스가 검을 내리며 짜증을 부렸다. 기사들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엘에게서 멈췄다. “너로구나, 엘리시엔.” 자일스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 물러갈테니 계속 하십시오.” 엘은 리오에게 빨리 움직이자는 눈짓을 보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리오가 몸을 돌렸다. 엘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했을때 자일스가 입을 열었다. “거기 서봐라 엘리시엔. 보아하니 너도 검술 단련을 하기 위해 온 것 같구나. 그러다 괜히 나 때문에 돌아가려던 참인 것 같고.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귀여운 누이동생을 헛걸음하게 만들 수야 없으니까.” 엘과 리오는 동시에 실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별 재미가 없어 그만두려던 참이었는데 널 보니 다시 흥미가 생기는구나. 이리나와봐라, 엘리시엔, 네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한번 보고 싶다.” 검술 수련장을 채운 모든 사람들이 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엘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발을 떼려 했을때 리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자일스와의 대련을 받아들이려 했던 엘은 푸른 눈동자에 담긴 근심을 본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하게 소리친 그녀가 채 서너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자일스가 웃어대기 시작했다. “네가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벌벌떨며 몸을 사릴줄은 몰랐다. 엘리시엔. 내가 그토록 무서운 거냐? 왜, 널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서? 아니면 네 더러운 피를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냐?” 엘이 멈춰서자 리오가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렸다. 그는 엘이 행동으로 나서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다급히 소곤거렸다. “참아야 돼. 놈의 도발에 말려들면 십중팔구 더러운 꼴을 당하게 될거야. 자일스의 검술 실력은 체르몬 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단 말이야.” “걱정하지마 리오” 엘은 리오의 어깨를 툭 친 다음 자일스를 향해 돌아섰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거 다행이로구나.” 자일스의 입가에 의뭉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엘은 그를 향해 나아가며 부동자세로 서 있는 기사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맨 앞줄에 정렬해 있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집이 왜소한 기사는 엘이 자신의 정면에 자리잡자 침을 꿀꺽 삼켰다. “검 좀 빌릴 수 있겠소? 대련이 끝나면 그 즉시 돌려주겠소.” “무, 물론입니다. 전하” 기사가 허겁지겁 두 손으로 검집을 내밀었다. “고맙소” 엘은 간단히 답례하며 검집을 받아들었다. 검을 뽑아 든 그녀가 다가가자 이미 대련 준비를 갖추고 있던 자일수가 환영한다는 듯 능청스러운 몸집으로 팔을 벌렸다. 시녀와 시종, 기사들 모두 숨죽인 채 엘과 자일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친히 네 주제를 깨닫게 해주마. 그렇다고 숨통을 끊어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오늘은 그저 네 비명소릴 듣는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니까 말이다.” 가식을 벗어던진 자일스가 검자루를 그러쥐었다. 엘은 턱을 약간 당기고 검을 치켜세우며 그를 똑바로 직시했다. 건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수축됐다. 자일스가 거리낌없이 접근해 왔다. 그리고 엘을 향해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엘은 허리를 굽혀 정면에서 번뜩이는 섬광을 피했다. 노련하게 방향을 튼 검날이 그녀의 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엘은 날렵하게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천한 계집치고는 제법이구나” 동작을 멈춘 자일스가 입술을 비틀며 이기죽거렸다. 엘의 보라색 눈동자에 분노가 타올랐다. 그녀는 자일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어.자일스 넌 오늘 치욕이 무엇인지 알게 될거야. 그걸 피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고개 숙여 사과해. 날 모욕한 것에 대한 잘못을 빌면 너그럽게 용서해줄 테니까.” “뭐, 고개 숙여 사과를 해? 그럼 너그럽게 용서를 해줘?” 자일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감히 네까짓게!”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한달음에 다가들었다. 그는 군더더기없는 능숙한 동작으로 곧장 엘의 심장을 노렸다. 검날이 고동치는 심장을 향해 깊숙이 꽂아졌다. 엘은 민첩하게 몸을 틀었다. 목표물을 빗나간 검이 곧바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자일스는 숨 돌릴틈 없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엘의 옷자락 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젠 내 차례야.”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선 엘이 침착하게 말했다. 자일스가 가소롭다는듯 코웃음을 날렸다. 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움찔한 자일스가 재빠르게 검으로 맞섰다. 엘이 여유있게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나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자일스의 오른쪽 소매 부분이 재단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말끔하게 잘려 있었다. 보기 흉하게 늘어진 채 덜렁거리는 소맷자락을 발견한 자일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를 갈며 엘을 노려보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잘려진 천 조각이 춤을 추듯 그의 팔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엘은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사이사이 효과적으로 검을 움직였다. 그녀의 동작은 절도있고 우아했다. 예리한 바람 소리가 공기를 가를때마다 옷이 잘려지며 자일스의 속살을 드러냈다. 엘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처럼 능란하고 여유있게 자일스를 다루자 구경꾼들의 입이 쩍하니 벌어졌다. 찢겨진 바닥에 끌리던 바지자락을 밟은 자일스가 검을 놓치며 흉한 모습으로 넘어졌다. “이, 이럴순 없어. 저게 무슨 더러운 수를 쓴게 틀림없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저런 천한 계집애한테 진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납작하게 엎어진 채 혼잣말을 뇌까리는 자일스의 얼굴은 망연자실하기만 했다. “유치한 투정은 그쯤에서 끝내고 어서 일어나십이오. 전하. 이왕 시작한 거 귀하신 전하의 두발(頭髮)부터 족부(足部)까지 정성껏 다듬어 드리겠습니다. 자일스 앞에 버티고 선 엘이 상냥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곳곳에서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즉시 자일스의 낯빛이 검붉게 변했다. “모두 꺼져라! 어서 꺼지란 말이다! 당장 꺼지지 않는 연놈들은 모조리 잡아 사지를 찢어 죽여 버리겠다!” 자일스가 목이 터져라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질겁한 시녀와 시종, 기사들이 한데 뒤섞여 허겁지겁 검술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엘은 어느새 텅 비어버린 검술 수련장을 둘러본 다음 자일스에게 시선을 멈췄다. “내 말 똑똑히 들어, 자일스. 또 한번 날 건드리면 바로 그 자리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러니 이제부턴 알아서 행동하는 편이 좋을 거야, 아주 조신하게 말이야.” 진한 비웃음을 날린 엘이 혼자 동그마니 서 있는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너... 정말 엘 맞아?” 믿기지 않는다는 물음에 엘은 피식 웃었다 .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거야? 어서 여기서 나가자, 리오, 더 있다간 자일스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을지도 모르니까. 만약 이모님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자일스와 마주 선 순간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 엘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뒤쪽에서 빠드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렸다. “네까짓게 날 죽이겠다고? 내 심장에 검을 박아 쳐 넣겠단 말이지?” 엘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하늘을 쳐다본 다음 자일스를 향해 돌아섰다. “귀는 제대로 들리는 것 같은데 웬만하면 이쯤에서 끝내는게 어때?” “겁도 없이 까부는 구나. 실성한 네 아비의 피가 네게 전해지긴 전해졌나보지?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짖고 까불어봐라. 그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자일스가 돌연 고개를 젖히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엘과 리오는 얼굴을 찌푸리며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어리둥절 한 것 같구나.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된 내 모습이 떠오르니 저절로 웃음이 터진 것 뿐이다. 내가 제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 같으냐?” 자일스는 엘이 대답하지 않자 지체없이 답을 내놨다. “난 가장 먼저 너에게 네 비천한 주제를 톡톡히 깨닫게 해줄 생각이다. 주제도 모르고 까분 네가 당연히 받아야될 합당한 벌. 그걸 내손으로 직접 네 뼈 마디마디에 새겨주겠단 말이다. 아, 그렇군!”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자일스가 별안간 소리를 높였다. 엘은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는 생각에 리오의 발을 넌지시 건드렸다. 자일스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리오가 그녀에게 눈길을 옮겼다. 그는 엘이 그만 가자는 신호를 보내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야노쉬 공작이 있었어. 야노쉬가 저 비천한 계집애의 피를 모조리 쥐어짜지 말아야 할텐데...” 자일스의 혼잣말이 끝나는 순간 엘은 걸음을 멈췄다 . “야노쉬 공작? 야노쉬 공작이 내 피를 쥐어짠다고?” 자일스가 윗입술을 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그렇군. 넌 아직 모르고 있었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자신의 코앞만 보고 희희낙락 하다니, 한심하고 멍청한 계집.” 엘은 틀어쥐고 있던 검을 자일스의 목에 겨눴다. “네가 무슨 이유로 야노쉬 공작을 언급했는지 어서 털어놔. 그렇지 않으면 지금 즉시 목을 따버릴 테니까.” “건방 떨지마. 넌 어차피 날 죽이지 못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아마 저 빨간 머리 놈도 알고 있을걸?” 깔보는 투로 비아냥거리던 자일스가 보란 듯이 검 끝에 목을 들이댔다. “반박하고 싶으면 어서 찔러보시지.” 그는 엘이 천천히 팔을 내리자 어깨를 떨며 킬킬거렸다. “내가 왜 야노쉬 공작을 입에 담았는지 아느냐?”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엔 악의 섞인 흥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 “모르지만 곧 알게될 것 같군” “뭐 좋다. 자비를 베풀어주마. 머지않아 리아잔 제국에 다시 한 번 국혼이 열리게 될 거다. 물론 지난번과 같은 개판 혼인식이 아니라 경건하고 축복이 넘치는 진짜 혼인식 말이다. 그 혼인식의 주인공이 누구일 것 같으냐?” 엘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리오가 급히 숨을 들이쉬며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엘과 야노쉬 공작! 엘과 야노쉬 공작이 혼인을 한단 말입니까?” “그래 빨간 머리 애송이. 그러니 일찌감치 정신 차리는 게 좋을거다. 이 계집애 옆에 붙어 있어봤자 손에 넣는건 아무것도 없을테니까.” 엘은 뻣뻣하게 굳은 리오의 팔을 한번 힘있게 잡은 다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날 두고 더러운 뒷거래가 오간 모양이지? 그래, 나와 야노쉬 공작의 경건하고 축복이 넘치는 혼인식은 언제 거행되는 거야?” “내가 널 깔아뭉개고 리아잔 제국의 정식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다.” 자일스가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리아잔 제국을 갖게되면 그 대신 난 야노쉬 공작을 갖는다.... 이런 말이로구나.” “그래, 네 말이 정답이다. 아버님이 야노쉬 공작에게 널 주겠다는 약조를 하셨다. 천하고 무식한 너라 해도 황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다. 기분이 어떠냐, 귀여운 누이동생아? 새파랗게 질린 꼬락서니로 보아 능히 짐작은 가지만, 지금 당장 혀 깨물고 자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아니, 그보다는 목을 매고 싶어할지도 모르겠구나.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제법 볼 만은 할테니까.” 자일스가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난 자결할 생각도, 야노쉬와 혼인할 생각도 없어.” “황명을 거역한 죄로 형틀에 묶여보고 싶은가 보구나. 그게 네 소원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이죽거리던 자일스는 엘이 피식 웃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자일스.” “네 아비처럼 완전히 실성이라도 했나보지? 뭘 믿고 그렇게 기세등등한 거냐?” “왜냐하면 리아젠 제국은 내가 갖게 될테니까. 원한다면 야노쉬는 네게 주겠어.” 자일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말끔히 가셨다. “네까짓게 리아잔 제국을 갖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거야.” 엘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렸다. 리오도 그녀를 따라 검술 수련장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네 같잖은 망상을 내가 산산조각 내주마!” 자일스가 버럭 소리쳤다,. 엘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고마워, 자일스, 네 덕분에 결심을 굳히게 됐어. 고마움의 표시로 한가지만 약속할게. 황제가 돼도 널 형틀에 너무 오래 매달아두진 않겠다고.” 엘은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입구를 나섰다. 자일스는 이를 갈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쩔 생각이야?” 리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쩔 생각이냐고?” “들었쟎아.” “황제가 되겠다는 말?” “그래” 엘의 간단명료한 대꾸에 리오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정신차려, 바보야! 좀 더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지!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되는 일이 애들 장난이야? 네가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리아잔이 네 품에 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대체 뭔데?”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오가 느닷없이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런 젠장! 젠장!” “진정해, 리오” “뭐, 진정? 내가 진정하게 됐어? 네가 야노쉬란 놈하고 강제 혼인을 하게 됐는데! 야노쉬라면 아르벨라 황녀와 혼인하려던 바로 그놈이쟎아! 그놈 취미가 뭔지 알아? 바로 겁탈이래! 여자가 저항하면 할수록 흥분해 미쳐 날뛰는 변태 자식이라고! 그런데 그런 놈하고 네가!” 눈앞이 벌겋게 물들자 리오는 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그놈을 죽여버릴 거야! 네 손끝을 건드리려고만 해도 내 손으로 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 엘은 거세게 쿵쾅거리는 리오의 심장 고동소리를 들으며 그가 웬만큼 평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그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리오, 내 말 잘들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야노쉬와 혼인하지 않아.” “무슨 방법이 있는거야? 황제 폐하께 간곡히 청이라도 올리려고? 그래, 그러야!” 리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네가 직접 황제 폐하를 만나 확답을 받아내는 거야. 리아잔의 황권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폐하도 네 청을 거절하진 못하실거야. 그레 그 더러운 자식과의 혼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아니 그렇지 않아. 자일스 얘기 못 들었어? 리아잔 황위 계승자로 자신이 결정되면 나와 야노쉬의 혼인식이 열리게 되리란 말. 만약 내가 직접 황권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혼인식을 앞당기는 결과가 초래될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말했쟎아.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라는 듯 엘의 말투는 차분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원로 회의, 귀족 회의 할 것 없이 다 너한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대. 귀족들 대다수도 자일스를 지지하고 있고, 회의도 만날 네 과거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끝난다더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 “그럼 형세를 뒤집을 무슨 방안이라도 있는거야?” “아니, 지금부터 생각해볼거야.” 엘은 장난스레 웃어 보인 뒤 걸음을 떼었다. 리오는 허탈한 얼굴로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리오, 빨리 안오고 뭐해? 하늘에 뭐 근사한 거라도 떠 있어? 그게 아니라면 빨리와! 배고프지 않아? 가서 메이나한테 맛있는것 좀 달라고 하자!” 저만치 멈춰 선 엘이 리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기껏 생각해 낸 게 고작 간식이냐? 어휴! 속터진다. 속터져. 내 이러다 제명대로 못살고 말지. 대체 저 녀석 머리엔 뭐가 들어 있는지...” 리오는 투덜대며 서둘러 엘의 뒤를 좆았다. 제 82장 출구찾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은 몸을 낮추고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가느다란 틈 사이로 책상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엘은 무작정 리자드 앞에 나타나지 않고 내실로 숨어든 자신의 선견지명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보름안에 성벽보수를 마무리 지어라. 시간이 조금 빠듯할 테지만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모든 걸 끝마쳐야 한다.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거다. 그리고 내가 따로 명을 내리기 전까진 경비병의 수를 현 상태로 유지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보고 끝났으면 나가봐라.” 고개를 숙여보인 남자가 절도있는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나와라.” 리자드가 내실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엘은 허겁지겁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 이내 겁쟁이 같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문고리로 손을 가져갔을때 리자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셋 셀동안 나오지 않으면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엘은 문 앞에서 버티고 선 채 리자드를 노려봤다. 냉기 서린 경고는 엘의 반항심을 부추겼을 뿐 그녀를 움직이게 하지는 못했다 .리자드가 무심한 눈길을 창밖으로 옮기더니 역시 무심한 어조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엘은 리자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어젖혔다. “잘 있었어요?” 리자드는 책상앞으로 씩씩하게 걸어오는 엘을 빤히 쳐다봤다. “오래간만이예요, 리자드. 정확히는 얼마 만이죠? 으음... 친절하시게도 날 물속에 쳐박은 밤 이후 처음 만나는 것 같군요. 반가운 마음이 들 리 없지만 예의상 거짓말이라도 해야겠죠? 반가워요 리자드.” 엘은 책상 앞에 멈춰 서서 방긋 미소 지었다. “다시는 날 만나러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더군다나 이런 백주대낮에 모습을 보이다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또 그 소리예요? 대체 날 죽이겠다는 말을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하겠어요?” 엘은 콧방귀를 날리며 가슴에 팔짱을 꼈다. “내 손으로 네 목을 조르는 날까지.” 리자드의 어투엔 냉소가 가득했다. “고정하십시오. 전하. 그렇게 자꾸 인상 쓰시면 느는 건 오직 주름살뿐이랍니다. 게다가 소녀가 오늘 전하를 찾아뵌 이유는 전하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중요한 볼일이 있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녀의 가슴 아픈 사정을 살피시어 목을 조르는 거사는 일을 끝낸 후로 미뤄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대공전하.” 엘은 익살스럽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리자드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입술을 다물었을때 어느덧 진지해진 엘이 책상에 바짝 붙어섰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리자드. 그러니 안전한 내실로 들어가는게 좋겠어요.” “너와 더 이상 할 얘기 없다.” 리자드가 앞에 놓인 문서를 집어 들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녀는 애가 타서 소리쳤지만 리자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리자드를 노려보던 엘이 그의 손에서 문서를 낚아챘다. “드디어 완전히 실성이라도 한 거냐?” 눈썹을 휘어 올린 리자드가 팔을 뻗어 문서를 빼앗으려 했다. 엘은 움켜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뒤쪽으로 집어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고집불통 같으니! 누구 속 터지는 꼴 보려고 이래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꼭 해야 될 말이 있다고 했쟎아요!” “어서 문서를 가져와라.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살려 보내주긴 할테니까.” “야노쉬 공작에 대해 알아요?” 엘이 갑작스레 말머리를 돌리자 리자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벨라 황녀와 야노쉬 공작의 혼인식이 무산된 건 알고 있죠? 어쩌면 야노쉬 공작의 혼인식이 머지않아 다시 열리게 될지도 몰라요. 만약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야노쉬 옆에 누가 서 있을 것 같아요?” 엘은 말을 끝내자마자 곧장 내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의자에 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리자드가 들어왔다. 그는 묵묵히 움직여 엘 옆에 멈춰 섰다. “야노쉬와 너와의 혼인 얘기는 언제 나온거냐?” “그건 몰라요. 나도 자일스에게서 오늘에서야 들은 얘기니까요.” 엘은 즐거움이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우습지 않아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가 내 운명을 결정하다니...” “그래서... 어찌할 생각이냐?” 엘은 리자드를 올려다봤다. “무기력한 꼭두각시처럼 고분고분 야노쉬와 혼인하겠다면요? 그럼 리자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리자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불가해한 눈빛으로 엘을 내려다보던 그가 잠시 후 시선을 떼며 대답을 내놨다. “혼인 축하 선물이라도 보내야겠지.” 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혼인식은 언제 열리게 되는거냐?” 엘은 말을 꺼내기 전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듯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자일스가 리아잔 제국의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예요. 그때 가엾은 패배자인 내가 동정 어린 눈길을 받으며 비참한 꼴로 혼인식장에 들어가게 되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리자드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엘은 그의 눈길을 잡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만약... 만약 내가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 아주 멀리 도망가서 살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흡사 얼음을 깎아 만든 가면을 쓴 것처럼 리자드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엘은 그의 입술이 부자연스런 움직임을 보이려는 찰나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그냥 어쩌다가 충동적으로 나온 말일 뿐이니까요. 어떤 대답이 나올 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엘은 그의 대답을 듣는게 두려웠다는 말을 삼키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야노쉬와 혼인하게 되었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도, 같이 도망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엘은 리자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리자드는 조심스레 끌어당기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엘은 발꿈치를 세우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입술이 느껴지는 순간 엘은 눈을 감았다. 입술과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의 감촉이 그녀의 신경 하나하나를 깨워 나갔다. 엘은 입술을 떼고 짙게 물든 청회색 눈동자에 시선을 못 박았다.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거세게 가슴을 때렸다. 리자드의 귀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엘은 사그라지려 하는 용기를 단단히 붙잡으며 짧은 질문을 던졌다. “나와 혼인해 줄래요?” 숨을 훅 들이쉬는 리자드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엘은 뒷걸음질치며 참았던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대답은 다음에 만났을때 해줘요. 좋다고 해주길 바라지만...거절해도 괜찮아요. 거절당한 반발심 때문에 야노쉬와 혼인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나... 그 정도로 어리진 않거든요.” 하지만 싫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는 리자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 같아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은 얼굴을 들며 애써 밝은 미소를 건넸다. “하고 싶은 말 했으니까 난 이제 가볼게요.” 그녀는 석상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리자드를 뒤로하고 모습을 감췄다. 루드비히를 찾는 엘의 움직임엔 다급함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당장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게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불안감에 싸여 있었다 . “루드비히!” 엘은 찻잔을 앞에 놓은 채 창가에 앉아 있는 루드비히에게 허둥대며 걸어갔다. “루드비히가 도와주셔야 될 일이 있어요!” 루드비히는 그녀에게 짧은 시선을 던진 후 일어나 안쪽에 놓인 선반으로 향했다. 엘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뒤를 바짝 좇아갔다.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죠? 언제나 루드비히한테 아쉬운 소리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루드비히말고는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요!” 엘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루드비히의 등에 부딪혔다.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는 선반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든 다음 엘의 손목을 잡고 창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 처럼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엘은 눈을 깜박이며 찻잔을 채우는 연갈색 액체를 쳐다봤다. “우선 마음을 진정시키는게 좋습니다.” 조용히 말한 루드비히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엘도 그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감도는 향긋하고 그윽한 차 맛이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 같자 그녀는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엘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의 입술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은회색 눈동자에 반짝임이 스치는가 싶더니 미소가 깊어졌다. 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루드비히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신 건가요?” “찻잔을 든 엘을 보니 아시리움 성전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아아. 그 맛없는 차요.” 엘은 혀가 마비될 정도로 쓰디쓰던 차 맛을 회상하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제 기억으로는 상당히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신 후 또 한 잔을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엘은 장난기 가득한 은회색 눈동자를 쏘아보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대로 마실 만은 했던 것 같아요. 꼭 약같이 느껴졌던 걸로 봐서 몸에는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쳤을 테고요.” “마침 그 찻잎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한 잔 하시겠습니까? 열잔이든 백잔이든 말씀만 하십이오. 이번엔 원없이 마시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차를 함부로 마실 수야 없죠. 전 지금 이 차로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루드비히께서나 많이 드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엘은 상냥하게 말한 다음 빙그레 미소 지었다. 루드비히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엘은 그를 따라 웃다 충동적으로 물었다. “루드비히,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주시는 건가요?” 루드비히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시리움 성전의 복도에서 루드비히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 루드비히는 언제나 절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었어요. 심지어는 가짜왕족이란 사실이 밝혀졌을때 조차도요. 왜 제게 그러셨는지 알고 싶어요.” “제가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요.” 루드비히는 농담을 하듯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니에요. 유독 제게 특별하셨다는 거 알아요. 저도 루드비히에 대해... 법황 성하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대충은 알아요. 저도 듣는게 있으니까요. 믿기지 않지만 루드비히가 ‘피의 황제’라 불리신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분이 남다르게 절 대해주시는지는 모르겠어요.” 엘은 진지한 얼굴로 루드비히의 시선을 잡았다. 아니, 그녀의 눈은 물론 정신까지 움켜쥐고 있는 쪽은 루드비히였다. 엘은 그녀의 모든 걸 빨아들이려는 듯 강렬한 흡입력을 발하는 은회색 눈동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가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꼈을때 마침내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운명적으로 연결된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둥절해진 엘이 눈을 깜박였다. “다시 묻겠습니다. 만약 엘에게 영혼의 상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혼의 상대라고요?” 엘은 엉겁결에 반문했다. 루드비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의 상대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나와 운명적으로 연결된 특별한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 엘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로군요. 현실에 그런 존재가 있을리 없어요.”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거부하겠어요.” 엘은 턱을 꼿꼿이 들고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었다. “거부하시겠다고요?” 루드비히의 입술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미소가 그러졌다. “그래요. 설령 신이 정해준 상대라 해도 내 의지대로 내가 직접 선택한 상대가 아닌 이상 거부하겠어요. 만약 운명에 순응했다면 전 오래전에 딜람에 사는 어느 쓰레기의 노리개가 되었을 거예요.” “운명은 신이 정하는게 아닙니다. 신조차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엘이 지금 이 자리에, 바로 내 앞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운명일지 모릅니다.” 루드비히의 어조는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올려진 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화인을 찍듯 강하게 입술을 눌렀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작은 감촉 하나하나가 바로 운명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엘은 설명하기 힘든 느낌에 휩싸인 채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루드비히의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여기 온 건 지난번 물으신 루드비히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예요.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셨죠? 예, 전 리아잔의 황제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루드비히한테 도움을 청하려고 여기 온 거예요.” “엘.” 루드비히가 그녀를 불렀다. 엘이 고개를 들지 않자 그의 어조가 한층 강해졌다. “엘, 절 보십시오.” 엘은 루드비히를 흘끗 쳐다본 다음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토록 당황한 상태인지, 왜 제대로 눈을 맞추기 힘들 만큼 루드비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비롯한 이 상황 전부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리오하고 리반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잘있어요, 루드비히.” 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브레이슬릿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무작정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엘이 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때 성큼성큼 걸어온 루드비히가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 세웠다. “나 역시 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엘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후 나 역시 모든 걸 부정하고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발버둥 쳤단 말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엘은 루드비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무슨 말일 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둘이 운명적으로 이어진 사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엘의 얼굴이 시시각각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어조 역시 점점 격해져 갔다. “내 영혼의 상대가 루드비히라고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조금도 흔들림없는 대답이 엘을 더욱 흥분시켰다.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길 나한테 믿으라는 거예요? 영혼의 상대라니, 루드비히가 내 영혼의 상대라니! 그걸 믿으라고요? 만에 하나 그게 진실이라 해도, 루드비히가 정말 내 영혼의 상대라 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루드비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예요! 난 루드비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에 냉혹함이 서린 차디찬 분노가 타올랐다. “들었어요? 난 루드비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나한테 중요한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루드비히가 엘의 목덜미를 낚아채듯이 움켜잡고 강하게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아픔이 느껴질 만큼 난폭하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엘은 답답하게 죄어오는 루드비히의 가슴을 밀치며 고개를 힘껏 젖혔다. 그러나 한순간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 맛이 느껴졌다. 엘에게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선혈이 두 사람의 입술을 적셨다. 엘은 흐느낌같이 들리는 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무자비하게 그녀의 입술을 유린하던 루드비히의 입술이 부드러워졌다. 혀로 상처 입은 입술을 어루만져 주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엘은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밀착 된 상태라 루드비히에게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지만 엘은 붉어진 그의 뺨에서 적지 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의 생각으로는 맞을 짓을 하신 것 같은데... 제 소견에 반대하십니까, 법황 성하?” 엘은 덤비려면 덤벼보라는 듯 두 주먹을 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손끝으로 볼을 쓸어보던 루드비히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맞을 짓을 했다는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건 엘도 마찬가지니 제 행동에 대해 사과하진 않겠습니다.” “맞을 짓을 했다고요? 제가요?” 엘은 억울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서슬 퍼런 얼굴로 와락 달려든 사람이 누구였죠? 저였나요? 바로 루드비히쟎아요! 또 짐승처럼 입술을 물어뜯은 사람은요? 그것도 역시 루드비히였고요!” “하지만 서슬 퍼런 얼굴로 달려들게 만든 사람은 엘이었습니다.” 절대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엘은 흥분해서 소리치던 말이 떠오르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통증이 느껴지는 입술을 혀끝으로 핥다 볼멘 어조로 투덜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루드비히 같다면 퉁퉁 붓지 않은 입술은 찾아보기도 힘들 거예요.” “그렇겠군요.” 맥 빠질 만큼 담담히 인정한 루드비히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십시오. 이곳에 계시면 조금 전보다 더한 일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니까요.” 엘은 얼굴을 찌푸린 채 창가에 멈춰 서는 루드비히를 응시했다. 루드비히가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계속 하길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오십이오.” 루드비히가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엔 노골적이지 않은, 어떤 은밀한 굶주림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허둥대며 브레아슬릿을 더듬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루드비히에게 유혹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갔다간 주먹 한 방으로 끝내지 못하고 성하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군요.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소녀의 진심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성하.” 엘은 루드비히의 웃음소릴 들으며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루드비히와 잠시동안 웃음을 나누던 엘은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서늘한 그림자를 깨닫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채 비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날 만나고 싶어한 사람이 젊은이인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체사레는 소리를 좇아 몸을 돌렸다. 그를 알아본 남자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이내 감쪽같이 돌아왔다. “오래만에 뵙습니다.” 체사레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젊은이는 날 알고 있나보군. 아, 그러니 내 저택까지 찾아온 것이겠지만. 혹시 전에 날 만난 적이 있는건가? 미안하네만 난 통 기억이 안나서 말일세.”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체사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이러십니까? 제 능력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체사레를 노려보던 그가 마침내 가면을 벗었다. “그래, 네 쓸모없는 능력은 잘 알고 있다 .” “미천한 체사레가 다시 한번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체사레가 몸을 세우며 눈웃음을 쳤다. 남자의 얼굴에 짜증이 나타났다. “너와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날 어떻게 찾아낸 거냐? 또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것이냐?” “여전히 급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지금 곧 고할테니 진정하십시오. 살벌한 말씀 때문에 오금이 저려 그러한데 우선 의자에 앉으면 안되겠습니까?” 체사레에게 마뜩찮은 눈초리를 던지던 남자가 의자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턱짓으로 자신의 앞 자리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체사레는 여유있게 응수하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어서 말해 봐라.” “으음... 무엇을 물어보셨더라.... 그렇지, 감쪽같이 정체를 숨기고 계셨던 분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또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셨죠. 솔직히 말씀드려 끊어질 듯 말 듯한 미세한 가닥을 따라오는 일이 생각보다는 어려웠습니다. 따님께서 제법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까닭에 말입니다.” “마체라타... 마체라타를 만난 모양이로구나.” 체사레가 이를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 볼우물이 살짝 패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따님께선 모친 쪽을 많이 닮으신 것 같더군요.” “마체라타는 널 만났다는 말은 물론 너에 대한 얘기는 단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 남자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 “그러야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따님께선 과거에 절 만난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요. 또 저 역시 인간들과 어울릴 땐 제 기를 철저히 감추고 말입니다. 보잘것 없는 저이지만 그 정도 능력은 갖고 있으니까요.” “자화자찬은 충분히 들었으니 날 찾아온 용건이나 밝혀라.” “몇가지 유용한 정보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우해서이기도 합니다.” “네가 무슨 소릴 지껄이든 관심없다면?” 남자가 약간 공격적으로 응수했다. “그러시다면 지금 즉시 눈앞에서 사라져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관심을 갖는게 좋으시리라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제가 드리려는 정보가 다름 아닌 법황 성화와 관련된 것이니까 말입니다.” 남자의 눈에 예리한 섬광이 번득였다.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동했다는 사실을 눈치 cos 체사레가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필요없다 하시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체사레는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 몸을 움직였다. “말해봐라. 우선 법황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난 연후에 네 청을 들어 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죄송하지만 그건 좀 곤란하겠군요. 가는게 있으면 당연히 오는것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감히 네가 날 가르치려는 것이냐?” 남자가 노기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렸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 한 순간이라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드릴 청 역시 하잘것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입니다.” “좋다. 네 청을 들어주겠다. 하지만 정보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네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사레의 입술에 웃음기가 번졌다. “어서 말해봐라.” “법황 성하께서 남달리 아끼시는 존재가 있습니다.” “법황이 아끼는 존재? 그게 누구냐?” 남자가 등을 세우며 눈매를 좁혔다. “모르셨나 보군요. 전 짐작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어서 대답이나 해라!” 남자가 역정을 냈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입니다. 달의 아이라 불리는 소녀, 또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라 불리는 소녀 말입니다.” “무슨 속셈으로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냐?” 체사레는 남자가 놀라워하기는 커녕 분개해 소리치자 어리둥절해졌다. “법황이 그 아이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는 네 말은, 한 줌 값어치도 없는 헛소리란 걸 이미 알고 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을 고하는 거냐?” “제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시는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만 잘못된 판단이십니다.” “그렇다면 네 말이 사실이라는 소리냐?” “물론입니다. 법황 성하께선 그 소녀에게 개인적인 감정, 그 이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체사레는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니까 법황이 보잘것 없는 인간 여자 아이를 사랑이라도 한다는 말이냐? 법황이 널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고 그에대한 유치한 앙갚음을 하고 싶은가 보구나. 남창 노릇을 하더니만 머리 속까지 썩어 들어간 것이냐?” 남자가 노골적인 조롱을 퍼붓자 체사레는 모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법황 성하와 엘리시엔 황녀는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럴듯한 말이로구나. 차라리 법황이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러냐?” 체사레는 남자의 조소를 무시하고 또박또박 말을 뱉어냈다. “즉, 영혼의 상대란 말입니다.” 남자의 눈에 떠오른 경악을 보며 체사레는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영혼의 상대라고?” 남자가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진실임을 맹세하겠습니다.” “그 사실을 법황도 알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오래전에 성하께서 절 직접 찾아오셔서 그 소녀에게 느끼시는 감정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분명히 영혼의 상대라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남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연의 끈은 종종 우리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성하와 그 소녀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갖지 않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여러 곳에서 증거가 나타났는데 말입니다.” “마체라타...” 거칠게 중얼거린 남자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것 외에 또 다른 정보가 있는거냐?” “성하께서 따님께 꼬리를 붙이셨습니다.”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그렇다면 법황이 마체라타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말이냐? ” “저도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하께서 조용히 계시는 걸로 봐서 비밀의 대부분은 묻혀 있다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전 다만 계획을 앞당기는 편이 현명하시리라는 생각에 그런 말씀을 드린 것 뿐입니다. 성하께서 모든 걸 알아내시는 시기가 그리 멀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네가 원하는걸 말해 봐라.” 몸을 일으킨 체사레가 남자 옆에 자리 잡았다. 그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나뭇잎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전 그 소녀의 영혼을 갖고 싶습니다.” “그 아이의 죽음을 원한다는 뜻이냐?” 체사레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영혼을 손에 넣으려면 어차피 죽음이 선행되어야 할테니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군요.” “그러니까 나한테 그 소녀를 죽여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로구나.” “아닙니다.” 남자는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눈을 가늘게 뜨고 체사레를 살폈다. “그렇다면 네 청이라는게 뭐냐?” “소녀의 영혼은 제가 알아서 손에 넣을 생각입니다. 제 청은 그 일에 관여하지 마시고 못 본 척해 주십사 하는게 전부입니다.” “난 그 아이가 내게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아직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네놈이 그 아일 죽이는걸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냐?” 체사레는 남자의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여유있게 말을 받았다. “제 청이 없었다 하더라도, 아니, 만약 제가 그 소녀를 곱게 살려둔다 해도 어차피 소녀를 죽이려 하셨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못 알아들은 척하실 필요 없습니다. 리아잔 제국을 손에 넣고 싶어 하신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체사레를 노려보던 남자가 못 당하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이 세상에 네가 모르는 일이 있기나 한 건지 궁금하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아이가 법황과 예사롭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살려둘 수는 없다. 내 계획이 성공하더라도 그 아이가 법황에게 가서 리아잔을 갖고 싶다고 질질 짜기라도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남자가 줄을 잡아당겨 커튼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제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래 네 청을 들어주겠다. 생각지 못한 골칫거리를 대신 처리해 주겠다니, 어쩌면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이냐? 영혼의 상대를 죽인 자를 법황이 곱게 살려두진 않을 텐데 말이다.” 남자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체사레를 바라봤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두려웠다면 방에 틀어박혀 손가락이나 빨고 있었을 것입니다.” 체사레가 창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하지만 저도 맨몸뚱어리만 지닌 채 불구덩이로 뛰어들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앞을 가릴 방패라도 있다는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썩 훌륭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방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남자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체사레의 금빛 눈동자가 재미있다는듯 느른하게 빛났다. “오메른이란 자입니다.” “부르셨습니까?” 남자 앞에 모습을 보인 마체라타가 싱긋 미소 지었다. 다음 순간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녀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왜 저자가 이곳에 있는 겁니까?” 마체라타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체사레를 노려봤다. “오랜만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장소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드는군요.” 체사레는 능청스럽게 말하며 마체라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마체라타는 저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아, 마체라타라 불러도 괜찮겠지요?” 마체라타는 같잖다는 얼굴로 체사레를 훑어본 다음 남자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부터 이자를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다고 해두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설명은 나보다 네가 먼저 해야 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마체라타?” 남자의 음조에서 석연치 않은 느낌이 전해지자 마체라타는 긴장한 채 그의 얼굴을 살폈다. 수십가지의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빠르게 스쳐갔다. “꽤나 심심하고 변변찮은 자가 아버지의 귀에 대고 헛소리를 지껄여댄 것 같군요. 그 한심한 작자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체라타는 체사레에게 분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당장 꺼져라.” 체사레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지금 당장 꺼지겠습니다. 아버지께 꾸중받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마체라타의 눈꼬리가 독살스럽게 솟아올랐다. 그녀는 빠르게 주문을 외며 체사레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손끝에서 뭉클거리는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멈춰라!” 남자가 강경하게 명령했다. “싫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마체라타가 반발하고 나서자 남자의 얼굴에 노여움이 나타났다. “내 말을 거역하려는 거냐? 내 분명히 멈추라고 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몸을 도사리고 있던 마체라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팔을 내렸다. “더 있어봤자 두 분께 방해만 될 것 같군요. 두분의 편안한 담소를 위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체라타를 향해 얄미운 미소를 지어 보인 체사레가 밖으로 나갔다. “저놈을 보여주시려고 절 일부러 부르신 겁니까?” 남자는 잠시 마체라타의 붉은 눈동자를 꿰둟듯 직시했다. 그리고 곧장 핵심을 파고들었다. “왜 날 속인 거냐, 마체라타?” 마체라타는 숨을 죽였다. 일순 얼어붙었던 심장이 거칠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속히 동요를 감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아버지를 속였다고요?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아버지?” “아직까지도 날 기만하려 드는구나.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왜 법황과 그 아이의 관계를 거짓으로 고했는지 털어놓으란 말이다.” 전 아버지께 거짓을 고하지 않았습니다! 맹세코 제가 아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말씀드렸단 말입니다!“ 조금도 미덥지 않다는 듯 남자의 눈꼬리에 가느스름한 주름이 패었다. 마체라타는 즉시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믿어주십시오! 그 금발 머리 놈이 제게 누명을 씌운 모양인데, 그런 놈의 말만 믿고 절 의심하시다니요? 전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아버지의 딸입니다! 그런 제가 djWL 아버지를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숨막히는 적막이 흐른 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네 말을 믿어보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만 일어나 의자에 앉아라.” 마체라타는 얌전히 남자의 말을 따랐다. “체사레가 말하길 법황과 그 아이가 영혼의 상대라 하더구나.” 마체라타를 살피는 남자의 눈엔 여전히 의혹의 잔재가 깔려있었다. “영혼의 상대라고요?” 예상밖의 말에 마체라타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는지 남자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그래 정말 경악할 일이다. 둘이 그 정도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금발 머리 놈이 꾸며서 한 얘기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다. 체사레는 자신의 능력으로 알아낸 사실에 대해선 절대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랬다간 그 즉시 모든 힘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능력을 이어받은 자들에게 전해지는 계율같은거다. 보기드문 능력에 따라붙은 희한한 저주라 할 수도 있겠지.” “그러고보니 사람들의 감정과 인연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자에 대한 얘길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게 바로 체사레란 놈이었군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내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가장 큰 걸림돌로 떠오른 달의 아이다.”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 아이 뒤에 법황이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끌어들이지 않으려 하셨던 아버지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큰일이군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체라타는 속눈썹 사이로 남자를 살폈다. 그녀의 눈엔 미처 숨기지 못한 미묘한 흥분이 서려 있었다. “체사레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거다.” “체사레의 계획이라고요?” 마체라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우리가 구태여 나서지 않아도 체사레가 그 아이를 처리해 줄 것이다. 우리로선 생각지도 못한 상대에게 도움을 받는 셈이지. 내가 너한테 이 얘길 해주는건, 모르고 있다가 체사레를 방해하게 될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까 그 아이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눔직임이 보여도 넌 절대 끼어들어선 안된다. 알겠느냐, 마체라타?” “명시하겠습니다. 아버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마체라타를 바라보던 남자가 창을 향해 돌아섰다. “알아들었으면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남자에게 목례를 건넨 마체라타가 조금 망설이다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체사레는 언제 그 일을 시행할 생각이랍니까? 대충은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여쭙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열릴 무도회 날이라 하더구나. 쥬네비아 황후가 조카를 위해 준비한 환영 무도회 말이다.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다 최후를 맞는다... 그 아이에게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구나.”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군요. 제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 해도 죽음의 고통까지 없애주진 못할 테지만 말입니다.” 마체라타는 사근사근한 어투로 비꼰 다음 남자가 입을 열기 전에 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감시자는 마체라타를 따라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쫓아가기는 커녕 사지가 결박된 듯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뭉쳐지며 공기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법황이 직접 붙인 꼬리라 해서 대단할 줄 알았더니, 그거 그런 조무래기에 불과했군.” 남자가 완전히 형체를 갖춘 감시자에게 접근했다. “먼저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또 법황에겐 무엇을 전했는지부터 알아내는게 순서겠구나.” “성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절대 무사할 수 없으실 겁니다!” 감시자는 의연하게 맞섰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법황이 모르게 하면 그만 아니냐?”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한 남자가 감시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곧 남자의 손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감시자의 얼굴 전체를 둘러 쌌다. 그러자 감시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법황이 내린 명령은 깨끗하게 잊어라. 이제부터 네 주인은 나다. 내 명을 거역하면 그 순간 네게 죽음이 내릴 것이다.” 남자가 감시자의 머리에서 손을 들었다. “네 본래 임무대로 마체라타를 잘 감시해라. 그리고 법황에게 가기전, 알아낸 사실ㄷ을 나한테 먼저 보고해라. 그러면 내가 그 후에 법황에게 전할 말을 알려줄 것이다.” 남자 앞에 무릎을 꿇은 감시자가 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목숨 바쳐 주인께 복종하겠습니다.” 남자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으로 한 발 들어선 시종이 쥬네비아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엘리시엔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요 근래 황후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음을 알고 있는 터라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몸이 불편해 만날 수 없다 말씀 올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시종이 나가고 잠시 후 문 밖에서 엘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모님!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전 내일 다시 찾아뵙겠어요!” 쥬네비아는 문을 외면하며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를 바라보는 요아상 백작 부인의 미간에 근심스런 주름이 잡혔다. “폐하 언제까지 엘리시엔 전하를 만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모르겠네... 나도 모르겠네. 내일, 아니면 모레? 어쩌면 영원히 엘리시엔을 피하게 될지도 모르지.” 백작부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페하. 올려진 탕약까지 도로 물리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후폐하. 먼저 기력을 찾으셔야 합니다. 건강을 회복하시면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으실 겁니다. ” “그런게 아니네! 그렇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란 말일세!” 쥬네비아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요아상이 시녀장에게 재빨리 눈짓을 했다. 백작 부인의 뜻을 알아챈 시녀장이 서둘러 시종과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쥬네비아는 평생동안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친숙한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매달리듯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프란... 어떻게 해야 하지?” “악몽을 이겨내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룻밤에도 똑같이 악몽이 쉴 새 없이 반복되는데... 그날 밤 일이 하나하나 뚜렷이 뇌리에 새겨지는데....” 요아상은 쥬네비아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 일은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절대 폐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네. 헤르티아의 죄에 비하면 내 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해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고. 헤르티아가 저지른 죄값을 조금이나마 내손으로 치러준 것 뿐이라고. 그래, 헤르티아는 수십번, 수백번 자결을 해도 씻지 못할 죄를 범했어. 감히... 감히.. 페르가몬 폐하를 ... 페르가몬 폐하를 죽이다니...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분께 끔찍한 오명까지 덮어 씌웠지.” 쥬네비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왜 헤르티나는 밤마다 날 괴롭히는 걸까? 자신의 죽음을 방관한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렇다면 왜 지난 십팔 년 동안 잠자코 있었던 거지?” “죽은 사람은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폐하. 그리고 헤르티아 폐하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쥬네비아가 요아상의 손을 뿌리쳤다. “나도 알고 있네! 내 눈으로 직접 헤르티아가 피 토하며 죽는 모습을 qhdkTdmslRK!" "폐하!“ 요아상이 핏기 가신 얼굴로 황망히 문쪽을 살폈다. “내 죄가 세상에 알려질까 봐 두렵나 보군. 걱정할 필요 없네. 내 입으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진 않으니까.” 쥬네비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켯다. 요아상은 수심 어린 눈길로 창가를 향해 다가서는 그녀를 좇았다. “그런데 말일세....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네. 악몽을 반복해서 꿀 때 마다... 날 바라보며 흐느끼는 헤르티아를 볼 때마다 무엇인가가 잘못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쥬네비아가 요아상을 돌아봤다. “혹시 그래서 자꾸 악몽이 나타나는 걸까?헤르티아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그래서 날 찾아오는 걸까? 그날 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폐하, 터무니없는 망념일뿐입니다!” 요아상이 날카로운 어조로 쥬네비아의 말을 잘랐다. “자네도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지 않나. 그날 밤에 대해 말해보게. 자네가 기억하는 그대로 나에게 말해주게.”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요아상은 입술을 깨물며 쥬네비아의 눈을 피했다.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네만.... 부탁하네, 요아상, 난 어떻게 해서든 악몽을 떨쳐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일세. 한번만 더 헤르티아를 보면... 그 피투성이 얼굴을 보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러니 제발 날 좀 도와주게... 프란... 제발....” “전 모릅니다! 그날 밤 일은 잊었습니다! 모조리 다 잊었습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벌떡 일어난 요아상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쥬네비아는 창틀에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제 83장 얻는 것과 잃는 것 엘은 긴 설명을 끝낸뒤 오래전에 식어버린 미지근한 차로 칼칼한 목을 달랬다. “허어, 그것참, 붉은방.. 피투성이 방에 갇히는 꿈이라....” 칼 베리만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악몽을 꾸신 날짜는 정화하게 기억하십니까?” “첫번째 악몽은 기억나요. 제가 물건을 찾아 아시리움 성전을 나오던 날로부터 딱 열흘전이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엔....”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모르겠어요. 악몽을 잊어버리려고만 했지,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또 요 며칠간은 한번도 꾼 적이 없거든요.” 칼 베리만의 얼굴에 실망감이 나타났다. “힘드시겠지만 악몽이 나타난 날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동일한 장소에 가셨든지 특정인을 만나셨든지, 아니면 같은 물건에 손을 대셨든지... 분명히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엘은 미간을 찌푸리고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무엇인가 잡힐 듯 아른거렸지만 정체를 알아챌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엘의 얼굴이 점점 시무룩해지더니 이윽고 풀 죽은 대답이 나왔다. “모르겠어요” “그러시군요”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진 않은 듯 칼 베리만이 간단히 응수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말이예요. 칼 베리만은 그 붉은 방에 대해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나요?” 칼 베리만이 주저하는 듯한 기미를 보였다. “무엇이든 좋아요. 칼 베리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가르쳐 주세요. 대체 그 붉은 방의 정체가 뭔가요?” “그저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짐작 가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진 마시고 그저 참고 정도로 받아 들여 주십시오.” 엘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마른침을 삼켰다. “제 생각엔 엘이 꿈속에서 본 붉은 방은 일종의 전리품을 보관하는, 그러니까 창고역할을 하는 곳 같습니다.” “저, 전리품을.... 보관하는 곳이라고요?” 예상을 뛰어넘는 말에 엘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손으로 죽였거나 앞으로 죽이려는 희생자들을 모아둔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말도 안돼... 정말 말도 안돼요. 그런 걸 모아두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대체 이유가 뭔데요? 무엇을 위해 그런 끔찍한 짓을 한단 말이에요?” “짐작하건대 붉은 방의 주인은 사람이아닐 겁니다. 자신의 원기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그 같은 전리품을 모으는 고위 마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족이라고요? 세상에 마족 같은게 있단 말씀이세요?” 엘은 목청을 높였다. “마족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챌 만큼 확연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지요. 지금은 거의 묻히다시피 했지만 고서나 고문서를 보면 심심찮게 마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엘에게 드린 말씀도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유추한 것이랍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족의 피를 받은 인간들 역시 상당수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마족이라니... 붉은 방이 마족과 연관되어있으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마족들이 인간을 죽이고 힘을 얻는 다는 것도요.” 칼 베리만이 차분한 어조로 엘의 생각을 고쳐 주었다. “모든 마족들이 그런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아마 엘이 꿈속에서 본 붉은 방은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위 마족이라 해도 단순히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에서 힘을 얻지는 못합니다. 으음...또 뭐가 있더라...아. 생각났습니다. 능력이 높은 마족은 인간의 영혼을 다룰 수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붉은 방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 방을 이루고 있는 머리들 각각에는 그들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을 겁니다" "그, 그러니까... 영혼이...“ 엘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물론 늙은 이의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한층 심각해진 엘과 칼 베리만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잠시간이 지나고 칼 베리만이 긴 신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엘이 그런 꿈을 연이어 꾸었다는 건 붉은 방과 어떤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더 이상은 생각이 진척되질 않습니다.” 칼 베리만이 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혹시 말입니다. 엘,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본 적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일종의 마법사 같은 거 말입니다.” “아몬이요.” 엘은 냉큼 대답했다. 칼 베리만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아몬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도 찾기 힘들테니까요. 하지만 제가 장담하는데 아몬은 그런 끔찍한 방을 만들만한 친구가 아닙니다.” “저도 알아요. 아몬이라면 붉은 방을 만들기는 커녕 그걸 보기만 해도 까무러치고 말 거예요.” 엘은 아몬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새삼스레 아몬이 보고 싶어진 그녀는 되도록 빨리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칼베리만이 말머리를 악몽 쪽으로 되돌렸다. “아시리움 성전에 계실 때 처음 그 꿈이 나타났다 하셨죠?” “예,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을 떠나기 열흘 전에 꾸었어요.” “혹시 아시리움 성전에서 알게되신 분들 중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까?” 일순 은회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엘은 숨을 죽였다. 설마 루드비히가... 아니야. 아닐꺼야 그럴리 없어 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반응에 칼 베리만의 얼굴에도 긴장이 나타났다. “누군가를 알고 계신것 같군요. 엘, 그가 누구입니까?” 칼 베리만의 목소리가 혼란스런 머리를 파고들었다. ‘혹시... 루드비히가 그 붉은 방의 주인인가요?’ 어둑한 통로에서 그녀가 루드비히에게 던졌던 질문이 거듭뇌리를 울렸다. ‘혹시... 루드비히가 그 붉은 방의 주인인가요?’ “아니야!” 엘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엘, 대체 누구를 떠올렸는데 그러십니까?” “절대 그럴리 없는 사람이오.” “하지만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아니오, 장담할 수 있어요. 칼 베리만이 아몬을 믿으시는 것처럼 전 그분을 믿어요. 아니 그 이상으로 전 루드비히를 믿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루드비히라는 분과는 꽤 가까운 사이신가보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엘의 안색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그러자 어두워진 분위기를 풀려는듯 칼 베리만이 말투를 가볍게 바꿨다.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엘과 가까운 사이시라니 루드비히라는 이름도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고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법황 성하의 존명도... 아니, 성하의 존명을 함부로 입에 담을수는 없겠군요. 아무튼 제 말은 그러니까.... 에르이 친구분 성함이 마음에 든다는... 뭐, 그런 말입니다.” 칼 베리만이 군색하게 말을 끝냈다. 엘이 키득거리자 그의 얼굴에 멎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붉은 방에 대해선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고 느긋하게 생각하십시오.” “예 그럴게요. 그런데 칼 베리만을 너무 괴롭혀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꼭 알고 싶은게 있어요.” “마음 편히 말씀하십시오. 친구 좋다는게 뭐겠습니까?” 칼 베리만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전에 자일스가 제게 이상한 말을 했어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실성한 내 아버지의 피가 내게도 전해진 것 같다는, 그런 말이엇어요.” 칼 베리만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이모님껜 차마 여쭐 수 없었어요. 만나뵙기도 힘들고 또 요새 건강이 안 좋으시거든요. 그렇지 않다 해도 입이 떨어지진 않았겠지만...” 엘은 난감한 빛이 역력한 칼 베리만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말씀해주세요. 칼 베리만. 자일스가 홧김에 터무니없는 악담을 한것뿐인가요? 그게 아니면 정말 제 아버지가 실성한 분이셨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엘.” 엘은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상하게 그분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더구요. 그분의 딸이라는 이유하나로 절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개자’니 ‘달의 아이’니 하며 떠받들면서도요. 그런데 왜 정작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선 모두 입을 봉하는 것일까요?” “그건 아마 현 황제 폐하 때문일 겁니다.” “폐하게서 제 아버지에 대한 얘기에 함구령이라도 내리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뭐라 할까요.... 권력의 판도가 뒤바뀌자 사람들 모두 자연스레 그 흐름을 좇게 된 거라고나 할까요. 너무 애매한 답변이라 생각하시겠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게 마음 편하실 겁니다.” 엘과 칼 베리만의 입술에서 잇달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눈길이 맞닿는 순간 동시에미소 지었다. 아버지는 분명 칼 베리만과 비슷한 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어쩌다 실성했다는 얘길 듣게 되신 건지 말씀해주세요.” 칼 베리만은 고민하다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다. “페르가몬 폐하께선 엘이 태어나시기 얼마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큰 걱정거리가 있으신 것처럼 굉장히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하셨고, 평소엔 웃어넘기시던 일들에 대해서도 자주 노기를 드러내셨습니다. 때문에 황궁 전체에 언제나 긴장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 칼 베리만은 숨을 고르며 꺼낼 말을 정리했다. “엘이 태어나신 후 한동안은 예전 모습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증세가 더욱 심해지시더군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엘에 대한 애정은 정말 각별하셨습니다. 따님에 대해 말씀하실땐, 보는 사람도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용안에 웃음이 가득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선 한시도 시야에서 엘을 떼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엘을 한쪽 팔에 안으신 채 국정르 보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엘은 조그마한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아련히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페르가몬 폐하께서 실성하셨다는 소문이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한 건 그분이 승하하신 후부터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엘은 무릎위에 올려놓고 있던 두 손을 맞잡았다. 칼베리만이 곤혹스러운 표정만 지을뿐 입을 열지 못하자 그녀는 더욱 강경하게 요구했다. “말씀해 주세요. 칼 베리만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전 어차피 알게될거예요. 어떤 방법을 써서든 반드시 알아낼 테니까요.” “폐하께선 둘도 없는 친우를 살해하고 돌아오신 날 밤에 사체로 발견되셨습니다. 황후 폐하의 침소였는데... 그분 옆엔 헤르티아 폐하께서 싸늘한 주검이 되신채 쓰러져 계셧습니다.” “그, 그리고요?” 엘은 컬컬한 목을 울려 힘겹게 물었다. 칼 베리만이 침통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침소 안쪽으로 새까맣게 탄 갓난아기와 젊은 여인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훼손된 상태였지만 사람들은 그 두구의 시체를 엘과 엘의 유모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 어디에서도 두 사람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 묵직한 침묵이 주위를 내리눌렀다. 엘은 탁자 위, 희미한 얼룩에 멍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칼 베리만은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엘이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엘... 괜찮으십니까?”예, 전 괜찮아요, 그런데 그 친구분이 누군지 아세요? 제 아버지한테 ... 살해되셨다는 분이요.“ “모릅니다.” 칼 베리만이 엘의 시선을 피했다. “칼 베리만!” “모릅니다. 엘 그러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제발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칼 베리만의 말투는 완고했다. 엘은 착잡한 마음을 느끼며 칼 베리만을 쳐다보다 인사말을 건넸다. “알겟어요. 칼 베리만. 이제 가볼게요.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엘은 칼 베리만의 저택에서 곧장 아몬의 거처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아몬이 그녀에게 필요한 온기를 나눠줄 수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아몬은 활짝 열린 여닫이 창문앞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의 무릎위엔 책이 펼쳐져 있었고 옆에 놓인 협탁엔 찻잔이 올려져 있었다. 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가 너무 눈부셔 엘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생전 처음 밝은 세상을 만난 사람처럼. “엘” 아몬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엘은 자신을 둘러싼 어둠속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다가갔다. 한발 한발 걸음이 더해질 때마다 그녀의 미소도 깊어졌다. 아몬의 입술에도 어느새 미소가 되돌아와 있었다. 엘은 뒤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아몬 옆에 자리 잡았다.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켠 그녀가 눈을 감고 햇살을 향해 얼굴을 올리자 아몬도 조용히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엘은 평온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몬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입가엔 편안한 미소가 배어 있었지만 꼭 감긴 눈 아래엔 엷은 그늘이 덮여 있었다. 엘이 팔로 눈을 가리더니 부르르 떨며 몸을 웅크렸다. 햇살은 너무 강했고 반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냉기를 품고 있었다. 아몬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엘의 의자를 비스듬히 틀어 찡그린 눈가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워 주었다. 아몬은 엘을 내려다보다 모포를 가져와 몸을 덮어주었다. 더 이상은 그녀를 위해 해줄 것이 생각나지 않자 아몬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책을 집어드는 그의 입술에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미소가 감돌았다. 원로들의 얼굴엔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정오에 시작된 회의는 한번의 짧은 휴식시간만을 가진채 해질 녘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진척이 있거나 건설적인 의견이 나왔다면 그들의 안색이 그토록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 똑같은 공방만이 오가는 지루한 회의는 나이든 원로들의 기운을 쉽게 소진시켰다.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몇몇 원로들은 회의 시간이 짧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결정을 못내리고 갈팡질팡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고문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이 넌더리나는 회의가 끝없이 지속될지 모른다는 암울한 근심에 싸여 있었다. 이미 비슷한 회의를 네차례나 치렀다는 사실도 그들의 심경을 비관적으로 만드는데 한몫 거들 뿐이었다. “황위는 당연히 자일스 전하께서 이으셔야합니다.” 윈스턴 백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젠버그 후작이 맞받아쳤다. “지금 당연하라고 했소? 그건 엘리시엔 전하께 붙여야 하는 말이오. 엘리시엔 전하야말로 단 한 분 뿐인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시니까 말이오!” “그 말씀은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에젠버그 후작! 대체 어쩌자고 앵무새처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겁니까?” 제스트 백작이 짜증스럽게 응수했다. 모욕감을 느낀 에젠버그가 분노를 터뜨리려는 찰나 폰 데어 백작이 탁자를 내려쳤다. “제스트 백작, 후작께 그 무슨 무례한 언사요? 에젠버그 후작께선 엄연히 백작보다 위에 계신 분이지 않소?” “회의 석상에서까지 서열을 따져야 한단 말이오. 폰 데어 백작? 이 자리에 앉은 이상 우린 다 또같은 원로회 의원일 뿐이오!” 말을 마친 제스트 백작이 아차 하는 얼굴로 야노쉬 공작을 곁눈질했다. 그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야노쉬에게 겸연쩍은 미소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윈스턴 백작이 헛기침을 터뜨려 산만해진 주의를 환기시켰다. “진정을 우리 리아잔 제국의 앞날을 생각하신다면 엘리시엔 전하가 황위를 이으셔야 한다는 말씀은 하지 못하실 겁니다.” “진정으로 리아잔의 앞날을 걱정하기 때문에 엘리시엔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거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에젠버그 후작? 엘리시엔 전하께선 바로 얼마 전까지도 비천한 생활을 하셨던 분입니다. 십팔년 동안을 천민으로 사셨던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 분이 리아잔 같은 대제국을 어찌 통치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곧바로 반박하려던 에젠버그는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백작의 말대로 엘리시엔 전하께선 천민으로 자라나셨소. 그리고 그사실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신다는 말씀까지 이비에 담으셨소.” “이제야 제 의견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엘리시엔 전하께선 리아잔을 훌륭히 이끌어 나가실 제목이 아니라는 의견말입니다. 그러시다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겠군요. 드디어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끝낼 수 있는 희망이 보이니 말입니다.” 윈스턴의 어조엔 얕보는 듯한 기미가 은근히 배어 있었다. 에젠버그는 발끈하려는 마음을 자제하고 진중하게 말을 계속했다. “내 솔직히 털어놓겠소. 엘리시엔 전하께서 나타나셨을때, 난 기쁨보다 그분이 리아잔 제국을 통치할 수 있으실지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이 먼저 들었소. 모든 원로들도 잘 알고 계시는 바대로 전하께선 나이도 어리실 뿐 아니라 황족으로서 갖춰야 될 모든 걸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자라셨소. 그 때문에 난 엘리시엔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신다면 리아잔이 뿌리채 흔들릴지 모른다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단 말이오. ” 에젠버그 후작이 자신들과 별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자 원로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 짤막한 시선을 주고 받은 뒤 에젠버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난 지난번 만창장에서 내가 갖고 있던 우려와 의구심을 말끔히 씻을 수 있었소. 그 이유가 뭔지 아시오?” 에젠버그는 말을 멈추고 원로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 “엘리시엔 전하께서 하신 말씀, 즉 천민으로 자란 과거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걸 숨길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소. 난 그분의 의연한 태도에서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단호한 의지와 기백 어린 위엄을 똑똑히 보았소.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이루신 페르가몬 폐하께 느꼈던 제왕다운 기품을 그분의 따님에게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이오. 그때서야 난 확신할 수 있었소. 엘리시엔 전하야말로 리아잔 제국을 이끄실 분이라는 걸 말이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원로들도 그분에게서 나와 같은 걸 보고 느꼈을 것이오.” 에젠버그가 입을 다무는것과 동시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반박의 말도, 동조하는 의견도 나오지 않았다. 적막하나 공허하지 않은, 어떤 의미로 꽉 찬 듯한 고요가 회의실을 덮었다. 야노쉬는 마땅찮은 눈초리로 원로들을 한명 한명 살폈다. 반 정도는 에젠버그에게 감화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분위기에 기가 눌린 것 처럼 불편한 기색이 완연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야노쉬는 눈살을 찌푸렸다. 후에 있을 엘리시엔 황녀와의 혼인을 고려해 지금까진 구경꾼의 입장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대로 손놓고 있다간 일이 틀어지게 되리라는 생각이 그를 긴장시켰다. 경각심이 들자 야노쉬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것참 듣기 좋은 말이오. 후작. 단호한 의지와 기백 어린 위엄.... 또 뭐가 있더라... 아. 제왕다운 기품이었나?” 야노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대단하오, 에젠버그 후작.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럴듯한 말들을 잘도 생각해 내었소. 솔직히 고백하자면, 후작의 말을 듣는 동안 몇 번이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려 할 정도였소. 하지만 말이오, 후작. 듣기 좋은 말 몇마디로 인정받을 수잇는건 이야기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깝소. 더군다나 이번 일은 우리 리아잔 제국의 미래가 걸린 막중대사요. 달콤한 말 몇마디로 포장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부꾼으로 유명한 헤이우드 백작이 약삭빠르게 야노쉬의 비위를 맞췄다. 그를 흘긋 쳐다본 에젠버그가 야노쉬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공작? 애매모호한 말로 논점을 흐리려 하지 마시고 원하시는 바를 명확히 밝혀주십시오.” 노여움이 치밀자 야노쉬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숨죽인 원로들의 눈길이 야노쉬와 에젠버그 사이을 쉴 새 없이 옮겨 다녔다. 야노쉬는 오늘의 모욕을 톡톡히 갚아주겠다고 결심하며 에젠버그를 노려봤다. 에젠버그 역시 야노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것인지 저 역시 궁금하군요 야노쉬 공작” 긴장된 침묵이 깨지자 원로들이 니제르 대사제에게 고마움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야노쉬는 마지못해 에젠버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문을 열었다. “이런 식이라면 원로 회의를 백날 가진다 해도 지금 이곳에서 한발도 전진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오. 그래 이 자리를 빌어 한가지 제안을 하겠소. 계속 이렇게 실속없이 아옹다옹할 게 아니라 차라리 이번 황위계승 건을 귀족회의의 정식 표결에 부치는게 어떻소?” “정말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헤이우드 백작이 냉큼 거들고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표결에 부쳐 결정할 정도로 가벼운 사안이었다면 지금까지 힘들게 원로 회의를 열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닙ㄴ까?” 에젠버그는 즉시 반대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그의 말이 먹히길 기대하기엔 원로회에 미치는 야노쉬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대다수 귀족들이 야노쉬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에젠버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결정권이 귀족 회의로 넘어가게 되면, 더군다나 표결에 부쳐지게 된다면 십중팔구 황위 계승자는 자일스 황태자로 결정되리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원로들조차 갈팡질팡 하는 사안이었다. 하물며 다른 귀족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야노쉬의 말 한마디에 휩쓸리게 되리란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에젠버그가 매달려 볼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시조의 현신이라 불리는 페르가몬의 명성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발판 역시 반 수 이상의 귀족들이 페르가몬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마르키젤과 야노쉬의 벽을 뛰어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디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대사제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랑케 후작이 몹시 궁금하다는 듯 니제르를 향해 몸을 틀었다. “흐음... 글쎄요...” 니제르의 얼굴에 낭패감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가 처한 현상황에서는 찬성과 반대 중 어느 쪽으로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니제르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눈길이 에젠버그 후작에게 이르렀다. 에젠버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니제르 대사제를 바라봤다. 아시리움 종단의 대사자게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면 안건이 귀족 회의 표결로 넘어가지 않을 가능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질 수 있었다. 에젠버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니제르 대사제가 알게 모르게 눈짓을 보내왔다. 에젠버그는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의자 팔걸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니제르는 원로들의 주목을 받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 했을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밖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섰다. “죄, 죄송합니다. 대사제님께 올려야 될 중요한 전언이 생겨서 그만.” 쩔쩔매며 용무를 밝힌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니제르 대사제에게 다가갔다. 시종의 소곤거림을 주의깊게 듣고 있던 니제르가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의장인 니콜라우스 공작이 점잖게 요청을 받아들였다. 니제르 대사제는 급한 마음에 문을 완전히 닺지 않은채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원로들은 문가에 서서 니제르를 맞고 있는 고위 사제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고위 사제와 몇 마디 주고받은 니제르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회의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황위 계승건을 귀족 회의 표결로 넘기느냐 마느냐의 논의 도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 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 야노쉬 공작께서 내신 의견에 친성합니다.” 에젠버그 후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야노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아시리움 종단의 대표로서 아시리움의 뜻을 밝히겠습니다.” 니제르 대사제의 갑작스런 발표는 회의실 전체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아시리움 종단은 리아잔 제국의 황위 계승자로서 엘리시엔 마그누스 차르 드 칼리트라바 전하를 지지합니다. 아시리움 종단은 지금 이 순간부터 오직 엘리시엔 전하만을 황위 계승자로 인정할 것이며 그분의 진정한 벗으로서 전폭적인 성원을 바칠 것입니다.” 경악한 원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젠버그는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는 자신이 혹여 잘못들은 건 아닐까, 생각하며 야노쉬 공작을 찾았다. 야노쉬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야노쉬를 살피고 있든 사람은 에젠버그만이 아니었다. 윈스턴 백작도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야노쉬를 주시하고 있엇다. 에젠버그와 눈이 마주치자 윈스턴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는 니제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추궁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물었다. “대사제님, 조금 전의 말씀은 법황 성하의 뜻입니까?” “성하의 뜻이자 아시리움의 뜻입니다.” 니제르는 반박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 딱 부러진 대답을 내놨다. “이건 정도를 넘긴 간과할 수 없는 내정 간섭이오!” 야노쉬가 거칠게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니제르 대사제의 얼굴에 불쾌감이 배어들었다. “내정 간섭이 아니라 아시리움의 뜻을 밝힌 것뿐입니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건 리아잔 제국과 여러분들의 권한이지 않습니까? 야노쉬 공작, 앞으로 발언을 하실 땐 말씀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괜한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공작의 사견을 문제 삼는 일은 없을테니 생각은 편할 대로 하셔도 무방하실 겁니다.” 두사람 사이의 공기가 눙에 보일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원로들이 니콜라우스 공작에게 어떻게든 좀 해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니콜라우스는 서너번 헛기침을 한 다음 폐회를 선언했다. 한시라도 빨리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원로들이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들을 멈추게 한 건 니제르에게 던진 칼 베리만 의 질문이었다. “내정 간섭이 아니라는 말씀은 두 분 전하중 어느분이 황위를 잇게 되시든 아시리움에서도 그 분을 인정하시겠단 뜻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방금 전에 아시리움 종단은 오직 엘리시엔 전하만을 황위 계승자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랑케 후작이 니제르에게 한발 다가들었다. “애사제님, 만약 자일스 전하께서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시면 어떤 일이, 그러니까 아시리움에선 어떻게....” “아시리움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신가 보군요. 확실한 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건, 리아잔 제국의 앞날이 그리 평탄하진 않을 것이라는.. 그 정도 뿐입니다.” 니제르는 아연실색한 원로들을 지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보니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아. 그래. 맞아. 분명히 달라졌어.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로 밝혀졌으니 당연한거겠지만.... 니들은 안그래?” 카셀은 주위를 에워싼 동료들을 빙 둘러봤다. “글세... 난 잘 모르겠는데?” 세르피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둔한 녀석, 잘 좀 살펴봐. 분명히 달라진게 있을테니까.” 자신만만한 카셀의 말에 네명의 기사들이 허리를 굽히고 엘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난 포기하겠어.”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세르피언이었다. 그를 따라 제러드도 몸을 세웠다. “나도,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 “달라진게 어디 있다고 그럽니까?보면 볼수록 건방지게 생긴 눈, 코, 입, 모두 전과 똑같은데 말입니다.” 에지몬트가 입술을 실룩이며 빈정거리자 세르피언이 피식 웃었다. “너, 그러다 엘 깨어나면 뼈도 못 추린다?” “에이 설마, 명색이 켈름 기사단 최고의 호남아인데 최소한 뼈는 추리겠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말이야.” “한 손으로 걷어차인 엉덩이를 문지르면서.” 카셀이 능청스럽게 말꼬리를 붙였다. 에지몬트는 낄낄대고 있는 선배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아몬이 허둥지둥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몬은 엘 주위에 모여있는 기사들의 정체를 깨닫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여러분들이셨군요.” 아몬의 창백한 낯빛을 대한 기사들이 겸연쩍은 시선을 나눴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하다는 카셀의 말에 잠긴 문을 억지로 밀고 들어온 그들로선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 “저희들 때무에 많이 놀라신 것 같군요, 마법사님” “죄송합니다. 마법사님도 안 계신 방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되는 건데....”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신겁니까?” “벼르고 벼르다 마법사님이 어떠신지 보러 온 겁니다.” 제러드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이 새삼스레 아몬의 안색을 살폈다. 서둘러 다가온 카셀이 아몬이 들고 있던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는 쟁반에 담긴 갖가지 음식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식사 시간도 아닌데 웬 음식입니까, 마법사님?” “엘이 깨어나면 시장해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음식을 조금 챙겨 왔습니다. 드시고 싶으면 드십시오. 음식이야 다시 가져오면 되는거니까요.” 희색이 만면해진 카셀이 탁자에 걸터앉아 음식을 멀기 시작했다. “하여튼 저녀석 식탐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꼭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먹을 걸 밝혀야 되겠냐? 네녀석 때문에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글세 말입니다. 점심 먹고 또 간식 먹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니들 내가 부러우니까 괜히 그러는 거지?”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차던 기사들이 하나둘 카셀에게 다가가 음식을 집어들었다. 아몬은 슬그머니 웃음을 감추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거 뭐야?” 제러드가 열심히 음식을 씹으며 카셀의 발목을 툭 걷어찼다. “뭐가?” “좀 전에 엘 보면서 전하고는 다른게 느껴진다느니 하며 잘난 척했쟎아. 뭐가 달라진 거냐고?” 기삳르은 물론 아몬까지 카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음식을 꿀꺽 삼킨 카셀이 거드름을 피우며 입을 열었다. “둔한 녀석들, 그걸 아직까지도 못 알아채다니. 그러면서 못생긴 눈들은 왜 달고 다니냐? 잘 봐라, 머리 모양이 확 바뀌었쟎아.” 반사적으로 엘에게 몰려들었던 눈길이 다시 카셀을 향했다. 카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들을 보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모르겠얼?” “모르긴 뭘 몰라? 하여튼 저 녀석은!” 제러드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댔다. “난 기품이나 분위기 같은 걸 말하는 줄 알았더니만... 기껏 머리 짧아진 것 갖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냐?” 콧방귀를 뀐 세르피언의 뒤를 이케르가 이었다. “기가 차 말이 안 나온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델이 어떻게 너 같은 미련퉁이를 지금까지 안 내쫓고 데리고 사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것들이! 못알아 본게 창피하니까 괜히 애꿎은 사람 구박하고 있어.” 어느덧 기사들의 타박에 익숙해진 카셀은 코웃음만 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는 왜 자른 걸까요?” “자르고 싶었으니까 자른 거겠지. 뭐, 별거 있겠냐? 그럼 넌 머리 안자르고 싶은데도 그냥 막 자르냐?” 에지몬트의 물음에 카셀이 전혀 도움 안되는 답을 내놨다. 에지몬트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엘은 어린아이처럼 뺨에 손을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에지몬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긴장된 손끝이 엘의 볼에 닿으려 했을때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에지몬트는 번개같이 손을 거둬들이고 주위를 살폈다. 기사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웃어대고 이엇고 아몬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맥이 탁 풀리는 듯한 안도감에 천장을 올려다보던 에지몬트는 의아한 생각이 들자 다시 엘에게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어떻게 계속 잠을 잘 수 있는 걸까? 에지몬트는 엘의 뺨에 손등을 대본 다음 이마로 가져갔다. “어, 저 녀석 지금 뭐하는 거야? ㅇ미마, 너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고 있냐?” “저 녀석 저거, 조용하다 싶더니만 우리 몰래 엉큼한 짓 하고 있었쟎아.” “하여튼 티를 내요, 티를 내. 누가 음흉한 녀석 아니랄까봐.” 에지몬트는 선배들의 놀림을 흘려들으며 다른 쪽 손을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 그에게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아몬이 의자에게 일어났다. “마법사님!” 에지몬트가 급히 아몬을 부르자 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에지몬트는 아몬에게 서둘러 자리를 내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병이 난 것 같습니다.” 아몬은 엘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본 다음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건조한 살갗에서 쏟아지는 고열이 그의 손을 뜨겁게 달궜다. “죄송하지만 그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아몬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님” 기사들이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갔다. 발을 떼려던 에지몬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괜찮을까요?” “예, 그저 열이 좀 나시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겟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문을 나서는 에지몬트의 얼굴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자일스는 한걸음에 두세단씩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올랐다. 원로회의가 끝나자마자 마르키젤의 호출이 떨어졌다는 사실이 그를 긴장시켰다. 자일스는 실속없이 횟수만 늘어가던 원로 회의에서 예사로이 넘길 수없는 일이 발생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덩구 걸음을 빨리했다. 자일스를 본 시종이 그의 도착을 마르키젤에게 고하자 그 즉시 들여보내라는 명이 떨어졌다. 자일스의 예상대로 마르키젤은 주위를 모두 물린 채 야노쉬 공작과 마주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어서 앉아라.” 마르키젤은 자일스가 야노쉬 옆에 자리 잡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시리움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시리움이 그 계집애에게 달라붙어 널 거꾸러뜨리려고 한단 말이다!” 마르키젤이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자일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어찌 된 일인지 좀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야노쉬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오늘 있었던 원로 회의에거 대사제가 차일피일 미루던 아시리움 종단의 뜻을 정식으로 밝혔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아시리움은 엘리시엔 전하만을 황위 계승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계집애를 황위 계승자로 인정한다. ... 그 계집애만을...” 거의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던 자일스가 사납게 탁자를 내려쳤다. “젠장! 아시리움! 아시리움! 아시리움! ” 자일스는 벌떡 일어나 격렬한 몸짓으로 카펫 위를 돌아다녔다. “대체 아시리움이 뭡니까? 아시리움이 뭔데 사사건건 우리 일에 기어드는 겁니까? 왜 우리 리아잔이 아시리움의 헛소리에 영향을 받아야 되는 겁니까?” “그게 바로 권력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눈짓 하나로 세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인 것이다.” 자일스가 마르키젤을 향해 휙 몸을 돌렸다. “힘이라면 리아잔 제국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시리움을 능가합니다! 아시리움 따위야 지금이라도 밟아버릴 수 있단 말입니다!” “나도 너처럼 모든 걸 단순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마르키젤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넌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자일스” “전 이미 예전에 스무살을 넘어섰습니다!” 자일스는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줄 아느냐? 눈앞에 벽이 나타나자 이성을 잃고 날뛰는 네 모습을 봐라. 자일스. 정말 네가 어른이라 생각하느냐?” 잠시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던 자일스가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상태로 의자에 앉았다. “원로들의 반응은 어떻소?” 자일스는 야노쉬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경악과 혼란에 싸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일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하오? 공작은 그 자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원로들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누구보다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거요.” 야노쉬의 눈동자에 신중한 빛이 떠올랐다. “이미 확고한 입장을 밝힌 원로들은 마음을 바꿀 정도로 흔들리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원로들은 아시리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개중엔 반발심이 생긴 원로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시리움의 견해 쪽으로 기울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계집애가 리아잔을 갖게 될 거라는 말이로군” 자일스가 악문 이 사이로 말을 뱉어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하. 아시리움 종단이 확고하게 엘리시엔 황녀를 지지하고 나선 지금, 설상가상 황위 계승건이 귀족 회의의 표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모든 상황이 우리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마르키젤이 야노쉬의 말을 받았다. 자일스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으며 몸을 들었다. “그래서요? 이대로 그 계집에 손에 리아잔이 떨어지는 걸 두고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맥없이 주저앉아 제 것을 그 천한 계집애가 가로채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버님?”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자 자일스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쳤다. “리아잔을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리아잔은 바로 제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마르키젤이 딱 잘라 말했다.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일스가 털썩 등을 기댔다. “네 말대로 리아잔을 지키기 위해,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널 부른 것이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막다른 길이 나타났을때 고려해야 될 최후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래, 그건 야노쉬 공작이 알려줄 것이다.” 마르키젤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섰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야노쉬가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페르가몬 전 폐하께선 실성한 나머지 부인과 어린 딸을 살해하셨다는 얘긴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최소한 따님을 태워 죽였다는 오명에선 벗어나셨지만 말입니다.” “그런데?페르가몬이 실성을 했든 하지 않았든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 없지 않소?”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만약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면, 즉 의문의 살인이 일어나고 그 자리에 엘리시엔 황녀가 있었다면...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야노쉬가 스스로 답을 내놨다. “그들은 페르가몬 폐하의 광기가 엘리시엔 전하께 이어진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시엔 전하가 리아잔 제국을 통치하게 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일스의 안색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군! 정말 좋은 생각이오! 그런 일이 생기면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실성한 계집애를 리아잔의 후계자로 삼자는 망발은 감히 꺼낼 수 도 없을 것이오! 설령 페르가몬을 떠받드는 놈들이라해도 말이오! 대단하오 공작! 정말 대단하오!” “별말씀을요 전하, 제 부족한 소견이 마음에 드신다니 저로선 황공할 따름입니다” 야노쉬가 여유있게 응수했다. “그럼 그 일은 언제 실행하면 되는거요?” “사건의 충격이 최고조에 달했을때 귀족 회의가 열려야 최상의 결과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회의가 열리기 이틀이나 사흘 전이 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겠군. 공작은 회의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힘쓰시오. 그 계집애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자일스가 마르키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님” “이번일은 나와 야노쉬 공작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넌 그렇게 알고 이만 물러가거라.” “제가 일을 망칠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저도 제가 그동안 여러번 아버님을 실망시켜 드렸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훌륭히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 믿고 일을 맡겨주십시오.” 자일스는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엘을 거꾸러뜨리길 원했다. 또한 이번 일을 성공시켜 잃어버린 아버지의 신뢰도 되찾고 싶었다. “넌 일이 완벽하게 해결될때까지 일말의 의혹도 사서는 안된다. 사소한 실수는 모든 걸 망치고 그 대가는 바로 리아잔이 될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물러가라. 네 거처에서 시간이 가길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다.” 마르키젤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자일스는 얼굴을 구기며 일어나 예도 갖추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신 것 같군요. 송구스런 말슴이지만 전하의 청을 받아주지 그러셨습니까 폐하?” 마르키젤이 신랄한 눈초리로 야노쉬를 노려봤다. “자일스에게 ‘네가 알아서 네 어머니를 감쪽같이 죽여라’ 그런 말을 ㅎ ㅏ라는 거요, 공작?”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상심이 크신 것 같아 안타까운 심경에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일 뿐입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를 희생시키는 일이 마음에 걸리시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수정하면 되시지 않습니까?” “아니 계획을 바꿀 수는 없소. 다른 사람 수백 수천 명을 죽인다 해도, 리아잔 제국의 황후를, 더군다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던 이모를 살해했다는 것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진 못할테니까.” 그럴줄 알았다는 듯 야노쉬가 곧장 말을 받았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나 이번 계획에 황후 폐하만큼 적당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황후 폐하의 죽음을 맞닥뜨리면 세상 전부가 엘리시엔 황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야노쉬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비틀어졌다. 그리고 실성한 달의 아이는 제 수중으로 떨어지게 되겠지요. 피투성이 악몽이 다시 찾아왔다. 가쁜 숨결을 따라 숨 막히는 피비린내가 울컥울컥 밀려들었다. 엘은 피 웅덩이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엘이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을때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신기하게도 피비린내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엘은 악몽을 쫒아준 온기를 놓쳐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두려움을 아는 것처럼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이마에 느껴졌다. 엘은 그제야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누구일까? 아몬인가? 볼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따스함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배어드는 것 같았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무의식의 세계로 가라앉았다. 평온한 잠을 방해한 건 입 안으로 흘러드는 질척한 액체였다. 반사적으로 액체를 삼킨 엘이 고약한 맛에 오만상을 찌푸렸을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모금만 더” 엘이 그 말을 따르자 같은 목소리가 몽롱한 머리를 울렸다. “그래 착하다.” 엘은 왠지 모를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며 그녀를 끌어당기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아몬은 엘이 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몬고리로 팔을 내렸다. 그는 거의 인기척을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맡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리자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엘의 손을 잡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열은 내린 것 같은데 한번 살펴봐라.” “예 이젠 마음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혈색이 돌아온 얼굴만 보더라도 엘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잠도 못 주무신 것 같군요. 그만 가서 쉬시는게 어떠십니까?아, 아니, 곧 엘이 깨어날테니 그녀를 만나보시는게 낫겠군요.” “일은 잘 처리된 거겠지?” 리자드가 화제를 바꿨다. “예 황궁에서 칼 베리만께 호위 기사들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 엘은 칼 베리만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몬이 리자드에게 엘의 상태를 보고했을때, 그가 내린 명령 중 하나가 칼 베리만한테 연락을 취하라는 거였다. 고개를 끄덕인 리자드가 일어나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풀려 하자 엘이 불만스런 신음성을 내며 그의 손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아몬, 손 좀 빌려야겠다.” “예에?” 리자드가 말없이 아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몬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엘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낸 리자드가 아몬의 손을 대신 갖다 댔다. 아몬은 엘에게 손을 잡힌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문으로 향하던 리자드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몬, 어젯밤 그 아이 옆을 지킨 건 내가 아니라 너다.” “리자드님, 굳이 사실을 숨길 필요는.......” 내 말대로 해라.“ 리자드는 단호하게 아몬의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대답이 나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아몬은 한숨을 내쉬며 리자드가 그랬던 것처럼 먼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제 84장 안개바다 “어서와” 엘은 안으로 들어서는 리오과 리반을 향해 장난스레 손을 흔들었다. 리반을 앞질러 성큼성큼 다가온 리오가 그녀에게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젠 괜찮은거야?” 엘은 씩 웃으며 리오의 이마를 밀어냈다. “그만 봐 얼굴 닳쟎아.” “실실대며 실없는 말 하는거 보니 이제 좀 살만한가 보구나? 쓰려져 외박까지 할 땐 언제고” 마음이 놓이자 괜히 쑥스러워진 리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냐말로 알렉스 얼굴을 보니 이제 좀 살만한 것 같은데?” 침대 가까이 의자 두 개를 끌고 온 리반이 비밀 모의를 하듯 몸을 굽히며 소곤거렸다. “네가 아프다는 말 듣고 리오가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아? 당장 널 보러 가야한다며 길길이 날뛰는데 정말 숨넘어가는줄...” 리오가 뒤에서 리반의 어깨를 와락 감싸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뭐 숨이 넘어갈 것 같아? 빨리 의자에 앉아 안정을 취해, 리반!” 리반을 메다꽂다시피 의자에 앉힌 리오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험악하게 얼굴을 구겨 입 다물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알았으니까 어깨 좀 그만 눌러. 이러다 탈구되겠다.” 리오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리반을 견제하며 슬금슬금 의자에 앉았다. 리반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런데 넌 이렇게 일어나 있어도 되는 거야? 누워 있어야 하는거 아냐?” “열이 조금 난 것 뿐인데 뭐 이제 멀쩡해졌는데 어의관이 내일까진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혀 있게 된거야.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허리가 아프도록 누워있어야 한다니...” 엘이 처량한 표정을 짓자 리오와 리반이 피식 웃었다. “아, 그렇지! 너 그 말 못 들었지?” 리오가 소리를 높이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무슨 말?” “그 일 때문에 지금 황궁 전체가 난리도 아니야! 뭐냐 하면, 아시리움에서 네가 아닌 자일스가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했다는거야!” 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아시리움에서 그랬단 말이야? 내가 황위 계승자가 안되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그렇다니까!” 신이난 리오가 으스대며 어깨를 폈다. 엘이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야 야노쉬와의 혼인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리오는 시녀들의 수군거림에서 아시리움 얘기를 듣는 순간 환호성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 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정보들을 수집했기에 황궁에 떠도는 소문들 중 그가 모르는 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마 아시리움에서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했겠어? 같은 뜻의 말이라도 좀 더 완곡하게 표현했겠지.” 리반이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가슴에 팔짱을 꼈다. “그런거겠지?” “당연하지” “이것들이 속아서만 살았나? 한두 곳에서 들은 얘기가 아니란 말이야” 리오가 억울하다는 듯 크게 팔을 휘둘렀다. “네가 들었다는 얘기 좀 말해줘, 리오.” “알았어, 근데 워낙 많은 걸 들어서...” 엘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억을 더듬는 리오를 향해 당겨 앉았다. “아, 그래! 황위 계승 문제가 귀족 회의 표결에 부쳐졌다고 하더라. 늙다리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리라며 뺐기지 않으려고 끝가지 버텼는데, 아시리움의 대사제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는 거야. 어찌나 분위기가 살벌했는지 병약한 몇몇 원로들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하더라고. 정말 놀랍지 않아?난 아시리움에서 그 정도로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 너도 그렇지?” 설마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엘은 의심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된 자일스가 회의실로 뛰어들어 대사제님의 멱살을 잡았다는 거야.” “뭐?” 엘의 입술이 딱 벌어졌다. “얘긴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야. 가장 극적인게 뭔지 알아?” 리오의 어조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홀연히 나타나신 법황 성하께서 자일스 놈의 엉덩이를 빠개져라 걷어차셨다는거야.” 어안이 벙벙해서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엘을 보며 리오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맹꽁아. 그 말을 정말 믿냐?” 피식거리던 리반도 웃어대기 시작했다. 엘은 다물 줄 모르는 두 사람의 입술을 몇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같은 바보가 리아잔의 황제가 된다니... 정말 리아잔 제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농담조의 말이었지만 리오의 목소리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묻어있었다. “걱정되는건 나도 마찬가지야,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나도 그래” 엘에 이어 리반가지 한마디 하고 나서자 세사람은 소리 맞춰 웃음을 떠뜨렸다. “그런데 황제니 리아잔의 미래니 하는 말을 꺼내기엔 아직 시기상조쟎아. 이렇다 할 결론이 난 것도 ㅇ ㅏ니고.” “이미 열에 일고여덟 정도는 네 쪽으로 기울어졌어. 아시리움이 확실하게 네 편임을 밝혔으니?. 자일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아시리움의 결정에 반박할 명분이 없는 상황이고. 누가 뭐라 해도 넌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니까 말이야.” 리반의 말투는 자못 엄숙했다. 엘과 리오도 어느새 웃음기가 말끔히 가신, 숙연하게 보일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리반이 어조를 가볍게 바꿨다. “알렉스, 리아잔의 황자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어?” 엘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싱겁게 웃었다. “글세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지금 생각해봐” 꽤나 궁금한지 리오가 재빨리 말했다. “으음... 그러니까... 우선은 아르벨라를 돌아오게 하고 싶어. 이곳에서 살고 싶은지 먼저 물어본 다음에 말이야. 지금 생활이 더 행복할 수도 있으니까.” 의외의 말에 리오와 리반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르벨라에게 연락을 취하기 전에 야노쉬 공작부터 손봐야겠다. 야노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싶어할리 없으니? 말이야.” “그리고 나선?” “너희 둘이 원하는 걸 하나식 들어줄게.” 엘은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리반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우리가 원하는걸 들어주겠다ㅗ?” “그래, 그러니까 어서 말해봐” 엘은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그녀는 막연한 흥분에 싸여 있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마에 주름가지 잡은 채 심사숙고하던 리반이 마침내 생각을 밝혔다. “난 잘 모르겠어. 그저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을 말하자면... 난 우리 사이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지금 이대로... 언제까지나 편한 친구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원하는건 그거야.” 세사람은 잠시동안 서로 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씩 미소를 지었다. “리오, 넌 원하는거 없어?” 리오가 평소 성격과 맞지 않게 매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실... 나도 .. 나도 하나가.. 있어” “그게 뭔데?” “그러니까...” 리오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리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오가 무슨 말을 꺼내고 싶어하는지 아는 듯 리반은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젠장!” 리오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는 엘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장소가 좀... 하여튼 나중에 말해줄게.” 엘은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었지마 리오에게서 전해지는 심각한 분위기에 밀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알렉스, 너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리아잔의 황제라면 원하는건 뭐든지 가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으음... 있긴 있는데... 나도 나중에 말해줄게. 아직 대답을 못들었거든.” “무슨 대답?” 리오와 리반이 동시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엘은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뭔데 그래?” 쌍둥이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춰 묻자 그녀의 목까지 홍조가 번졌다. “점점 더 수상해지네.” 궁지에 몰린 엘을 도와준 건 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점잖은 목소리였다. “전하, 황후 폐하게서 방문하셨습니다.” 엘은 생각지 못한 보고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전하, 황후폐하께서...” “어서 안으로 모시세요!” 엘은 재빨리 소리쳤다. “우리는 이만 가볼게.” “몸조리 잘해.” 리오과 리반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안으로 들어서던 쥬네비아는 머리를 숙이는 두 사람에게 간단한 목례를 건넸다. 문이 닫히자 쥬네비아가 침대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 엘은 말을 끌다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 얘기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단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군요.” 쥬네비아를 곁눈질하던 엘은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번적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놀랄 만큼 창백해 파리하게까지 보이는 안색, 고단함이 배어든, 퀭하게 열려있는 충혈된 눈동자, 쥬네비아의 갑작스런 변모에 엘은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제모습이 흉하긴 흉한가 보군요” 쥬네비아가 부서질 듯 가녀린 미소를 지었다. 엘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이모님! 그렇지 않아요!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이모님은 젊고 아름다우세요! 정말이예요!” “엘처럼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겁니다.” 엘은 미소짓는 쥬네비아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예요, 이모님? 대체 이모님께 무슨 일이 생긴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요새 잠을 못자서 족므 피곤한 것뿐입니다.” 엘은 입술을 개물며 고개를 숙였다. “저때문인가요?제가 지난번에 이모님의 부탁을 거절해서... 그래서 잠을 못 이루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쥬네비아는 강경하게 말했다. 뒤를 이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벌어지던 그녀의 입술에서 긴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괜찮으시단 걸 알았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엘은 몸을 일으키는 쥬네비아를 좇아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지 마십시오” 쥬네비아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문으로 향했다. 엘은 가만히 서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문 앞에 다다른 쥬네비아가 정면을 응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엘... 리아잔의 황제가 되고 싶으십니까?” 엘은 깊이 숨을 들이쉰 다음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에 전 황제가 되고 싶어요.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어요/. 하지만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있는 힘껏 노력해 보고 싶어요. 그 누구보다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제 모든 걸 바쳐 노력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모님... 절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엘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쥬네비아의 등을 바라봤다. 그녀가 몸을 돌려준다면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만 그려져 있다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꼭 껴안고 투정을 부릴수도 있을것 같았다. 쥬네비아가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엘은 삐걱대는 문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엘과 헤어진 리오와 리반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별궁을 막 벗어났을때 리반이 지나가는 어투로 말을 꺼냈다. “네가 원한다는거, 그거지?” “뭔소리야?” 리오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리반이 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못 들은 척하기는. 이미 다 알고 하는 얘긴까 어서 털어놔 봐. 너, 알렉스한테 청혼하려는 거지?‘ 리오는 쑥쓰러운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고, 구겨진 옷자락을 펴고, 팔 소매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내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리반과 눈이 마주치자 공연스레 자갈을 걷어찬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 너 잘나서 좋겠다 임마! 이 넘겨짚기 선수야!” “난 네가... 그러니까 포기한 줄 알았어” 리반이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이 천하의 리오님이 그렇게 쉽사리 나가 떨어질 거라 생각했단 말이지? 고얀 놈 같으니” 농담조로 응수한 리오가 멀리 떨어져 형체만 희끄무례하게 드러난 산을 바라봤다. “사실은 거의 포기 단계에 있었어. 어차피 안될게 뻔한데 ㄱ ㅡ런 일로 혼자 끙끙거리는 것도 좀... 뭐라 그럴까... 우습다고 할까, 청승맞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더라. 괜히 말꺼냈다간 사이만 서먹해질 것 같고...또 친구라는 관계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고, 창피한 말이지만 제 그림자에도 놀라는 겁쟁이처럼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것 같아.” 리오의 말투가 한층 진지해졌다. “그런데 며칠 전 자일스 놈한테서 이상한 소릴 들었어. 엘이 황위 계승자가 도지 못하면 야노쉬란 작자하고 혼인해야 한다는 말을 지껄이더라고” 리반은 걸음을 멈추고 리오의 팔을 잡았다. “뭐? 그게 정말이야? 알렉스가 야노쉬 공작하고 혼인해야 된다고? 자일스 황태자가 황위 계승자가 되면?”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야노쉬 공작이라면 아르벨라 황녀와 혼인하려던 사람이쟎아. 그 어린애들을 좋아하고 여자들을...” 리오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그래, 그 변태 늙은이야! 그런데 그런 놈이 엘하고 혼인을! 변태 쭈글탱이 주제에 감히 엘을 넘보다니! 당장 고자로 만들어 쇠몽둥이로 두드린 다음 사지를 댕강 잘라낸 후 한점 한점 저며 죽여야 될 놈!”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리반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놈은 곱게 죽여선 안돼! 한점 한점 저미기 전에 펄펄 끓는 물에 살짝 담갔다가 가죽을 벗겨야 돼!” 리오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노 어린 콧김을 내뿜었다. 리반은 진정하라는 뜻으로 리오의 어깨를 툭툭친 다음 걸음을 떼었다. “혹시 자일스 황태자가 지어낸 말 아닐까? ” 리오는 걸음을 빨리해 리반과 보조를 맞췄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엘과 자일스 놈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고. 절대 지어낸 말이 아니야. 자일스 놈이 으스대는 꼴을 봤다면 너도 단번에 알아챘을 거야.” “아무튼 그래서 알렉스한테 청혼하기로 마음먹은거야?” “그래, 그 일이 계기가 됐어. 리아잔 제국의 정통 황의 계승자와 체르몬 국의 다섯 번째 왕자... 누가 들어도 고개를 가로젓겠지만 이대로 맥없이 포기할 순 없어” 깊이 숨을 들이쉰 리오가 맹세하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 리오카사이 보즐라르 드 아르트로는 반드시 사랑을 쟁취한다! 그래서 천년만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리반은 열정적으로 빛나는 리오의 눈동자를 쳐다보다 피어오르는 미소를 슬그머니 감췄다. 그래, 리오, 그게 바로 진짜 네 모습이야, 시무룩해져서 축 늘어져 있는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바보스러울 만큼 한가지 일에 자신의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붓는 그. ㄱ어느덧 자신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리반은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어어, 너 지금 비웃은 거냐?‘ 리오가 도끼눈을 뜨고 리반을 노려봤다. “비웃은 게 아니라 네가 제법 귀여워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거다.” “뭐, 귀여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감히 형님한테 귀엽다는 망발을 해/” 리반의 목을 와락 휘어 감은 리오가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어디 또 귀엽다고 해봐라. 요녀석아!” “야, 너 이거 빨리 못 놔?” 리오과 리반은 낑낑거리며 한동안 몸싸움을 벌이다 키득대는 웃음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시녀들이 그들을 쳐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두 사람은 점잖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바로잡은 뒤 즉시 잰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이냐?” 시녀들의 눈길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리반이 리오에게 모난 시선을 던졌다. “거, 그 자식 참 말 많네. 내 덕분에 뭇 여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 고마워하진 못할 망정” “말이나 못하면 때려주고 싶지나 않지” 리반은 툴툴대며 리오를 흘겨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뭇 궁금하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청혼은 언제 할 생각이야?” 리오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지금 생각으로는 내 생일날이 어떨까 싶지만.” “네 생일?” 리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내 생일. 네 생일이기도 한 날.” “그러고 보니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돈 좀 꿔줘, 리반” “돈? 돈이 왜 필요한데? 네가 내 생일 선물 때문에 그럴 리는없을테고”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선물 같은걸 왜주냐? 닭살스럽게!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 피오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럼 대체 돈을 어디다 쓰려고... 너, 혹시?” “그 혹시가 쥬엘라를 뜻하는 거면 맞아. 지난번에 산 싸구려는 내가 데클란 평원에서 확 집어 던져 버렸거든. 그래서 다시 장만하려고 하는데 수중에 돈은 얼마 없고, 이번엔 좀 괜찮은걸 주고 싶어서” 리오의 입술에 쑥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굳이 돈 주고 살 필요는 없쟎아. 우린 알렉스의 손님 자격으로 머무는 건까 웬만한 팔찌는 황궁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야” “그건 싫어. 가만히 앉아 손쉽게 얻은 물건을 엘에게 주고 싶진 않아.” 리반이 이해 안된다는 얼굴을 리오에게 돌렸다. “누구를 좋아하면 다 그런거냐? 모든지 하나하나 살펴야 되고, 따져야 하고, 신경 써야 되고.” “어른이 되면 너도 자연히 알게될테니 이 형님을 본받아 부지런히 커라. 아우야” 어깨를 펴고 으스대던 리오가 코웃음을 치는 리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꿔주는거지?” “알았으니까 그만 좀 찔러” 리오가 코를 문지르면서 어린애처럼 헤헤거렸다. “단순한 녀석, 그렇게 좋으냐?”“그래 좋다. 좋아 죽겠으니까 빨리 가서 돈이나 가져와” “지금? 지금 사러 가려고?” “어차피 살거, 시간 끌 필요 없쟎아. 난 여기 앉아 햇볕이나 쬐고 있을 테니 넌 날쌔게 갔다 오기나 해” 말을 끝낸 리오가 팔을 길게 뻗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뭐해? 빨리 가지 않고? 맞고 갈래?” 리오는 멀뚱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리반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리반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빛 바랜 양피지에 신경이 쏠려있던 칼 베리만은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가, 무슨 용무로 그를 찾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칼 베리만이 문을 열자 등을 보이고 있던 리자드가 몸을 돌렸다. “대공!” “주무시는 줄 알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고문서에 정신이 팔려 문소리를 듣지 못했나 봅니다. 그것보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대공” 칼 베리만이 옆으로 비켜서자 리자드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내실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칼 베리만은 의자에 앉자마자 걱정을 드러냈다. 리자드는 안심하라는 듯 그에게 싱거운 농담을 건넸다. “제가 그동안 칼 베리만을 많이 괴롭혀 드리긴 했나보군요” “맞다 하면 예의에 어긋다겠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이니... 그냥 입을 닫고 있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어스레한 내실 안을 울렸다. “혼자 창 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괜스레 그런 제모습이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같이 술 한잔 나눌 친구를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대공” 칼 베리만은 입술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술을 내와야겠군요” “그러실 필요 없으니 자리에 앉으십시다” 칼 베리만은 엉거주츰 몸을 굽혔다. 장난스런 미솔르 지은 리자드가 망토속에서 술병과 잔 두 개를 꺼내 보란 듯이 그 앞에 내려놓았다. “이 곳에 올때마다 칼 베리만의 술을 축내고 가는 것 같아 오늘은 큰 맘먹고 제 술을 준비해 왔습니다.” 칼 베리만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대공 이무료한 늙은이를 찾아와 주신것만도 고마운데, 오늘 밤엔 대공 덕분에 공짜 술까지 마실 수 있게 되었군요” 리자드는 씩 웃으며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잔을 들어 술을 두어 모금 마신 칼 베리만이 만족스러운 탄성을 흘렸다. “공짜로 얻어 마시기엔 미안할 만큼 좋은 술이로군요” 두사람은 편안한 침묵 속에서 주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세 번째 술잔을 비웠을때 리자드기 조금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잘 돌아갔습니까?” “예. 처음 눈을 뜨고 절 보셨을땐 어리둥절해하셨지만, 설명을 꺼내기도 전에 상황을 알아차리시더군요. 그 후 이곳에서 몇 시간 더 휴식을 취하신 뒤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과 함께 무사히 입궁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병이 나셨는지 모르겟군요 .몸이 꽤 튼튼하신 줄 알고 있었는데....” “억지부리고 큰소리만 칠 줄 알지 나머지는 형편없습니다.” 리자드의 목소리엔 채 숨기지 못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 칼 베리만은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술잔을 내려놨다. “아, 손 힘은 제법 강하더군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느 리자드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대공,” 리자드가 고개를 들며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칼 베리만은 잠시 고민하다 결심을 굳히고 민감한 문제를 꺼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리자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뜻으로 드린 질문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바뀌는 건 없습니다. " 리자드의 어조는 단호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왜 같은 질문을 반복하시는 겁니까? 누구보다 답을 잘아시는 건 칼 베리만이시지 않습니까?” 칼 베리만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토해냈다. "엘 때문입니다, 대공. 그리고 엘을 사랑하시는 대공의 마음 때문입니다. "리자드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제 말이 틀리다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엘에 대한 대공의 마음을 부인하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침묵이 가로놓였다. 칼 베리만은 암담한 심정을 드러내며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응시하던 리자드가 자조 띤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칼 베리만께선 제자신보다도 더 저를 잘 알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 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눈을 감았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에선 리자드가 그의 말을 부인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칼 베리만, 만약·. 만약 제가‥‥‥‥” 리자드가 말끝을 흐리며 술잔을 그러쥐었다. 칼 베리만은 가늘게 떨리는 술잔과 하얗게 돌출된 손 마디에서 그가 무엇인가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리자드는 술잔을 들어 올려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베리만." 만류하려던 칼 베리만은 마음을 바꿔 잠자코 리자드를 배웅했다.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공의 마음을 되돌릴 수도, 대공의 사랑을 지켜줄 수도 없는 제가 말입니다. 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등을 바라보다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감시자들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새하얗기만 한 사방의 벽이 시시각각 그들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을 담고 있는 공간은 답답함을 느리기엔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다. 가늠할 수 없이 솟은 광활한 장막이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고, 마지막이 보이지 않는 공간의 이음매는 한눈에 담기 불가능할 만큼 끝없이 뻗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이 부자연스런 공간은 감시자들에게 참기 힘든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하나의 낱알까지도 놓치지 않고 찾아낼 듯 눈부시게 반사되는 투명한 빛부터 고르지 않은 자신들의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두려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감시자란 존재를 만들고 그들을 이곳에 불러들인 법황이 모습을 보인 건 기다림으로 인한 불안이 한계까지 치솟았을 때였다. 루드비히는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선두에 있는 한 감시자에게 시선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감시자가 고개를 들고 의연하게 앞으로 걸어나왔다. "보고해라." 루드비히가 짧게 명령했다.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배신자를‥‥‥‥“ 꿋꿋하던 감시자의 어조에 비통함이 섞여 들었다.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루드비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내려주십시오!" 결안하게 외친 감시자가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자를 찾아내겠습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기필코 놈을 잡아 처단하겠습니다!" "넌 이미 마지막 기회를 써버렸다. "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오직 냉기만이 감도는 은회색 눈동자만큼이나 차디찼다. 심장을 파고든 절망이 감시자를 지탱해 주던 한 가닥 희망을 삼켜버렸다. 흐느낌이 쏟아지려 하자 감시자는 입술을 힘껏 배어 물었다. 뜨거운 피가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루드비히는 가늘게 떨리는 감시자의 어깨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공포에 질린 얼굴들을 바라봤다. 극도의 두려움에 내몰린 그들의 시선엔 애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살려달라는 단순하면서도 절실한 열망이 그들의 눈동자를 채우고 있었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용납할 수 없는 망설임이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루드비히는 처음 대하는 낯선 느낌에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낯선 느낌이라..... 엘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생소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순간부터 난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한 방울 한 방울 내가 자각하지 못할 만큼 서서히 내 속에 무엇인가가 쌓이고 있었던 것일까? 루드비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입술에서 미소가 자취를 감췄을때 감시자들 앞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불꽃이 사라지기 전에 배신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라. 내가 내리는 마지막 기회다. " 감시자들이 숭을 죽였다. 짙은 적막 속에서 그들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불꽃을 응시했다.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불꽃은 이미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지만 배신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죽음의 순간이 잔인할 정도로 숨 가쁘게 다가들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바로 제가 성하와 아시리움을 능멸한 배신자입니다!" 루드비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감시자가 벌떡 일어섰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얼굴엔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눈물겨운 희생 정신의 발현인 것이냐?“ 조소 어린 목소리였지만 루드비히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닙니다, 성하. 제가 진짜 그 배신자입니다. 목숨으로써 제가 저지른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 감시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루드비히의 옷자락에 입을 맞췄다. 절제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킨 그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솟아올랐다. 감시자는 지체없이 자신의 심장을 겨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가 팔을 힘껏 내려치려는 순간 격앙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멈추십시오!" 흠칫한 감시자가 세차게 몸을 돌렸다. 그는 앙으로 걸어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항상 그의 곁을 지켰던 감시자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그의 옆에 멈춰 섰다. "제가 그 배신자입니다. " 남자의 어조는 놀랄 만큼 당당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남자가 대답하려는 찰나 감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닙니다, 성하! 그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단지 절 위해,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성하! 그는 절대 배신자가 아닙니다!" 싸늘한 은회색 눈동자가 감시자를 향했다. "난 유치한 감정 놀음 따위를 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 힘없이 고개를 꺾은 감시자가 뒤로 물러났다. 루드비히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성하." 남자는 꿋꿋하게 루드비히와 눈길을 맞댔다. "제 주군께선 성하와 달리 절 하찮은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살아 숨 쉬는 존재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로서 절 대해주십니다. 바로 그게 성하를 배신한단 한가지 이유입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루드비히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라‥‥‥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중받기 위해선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 것 같으냐?“ 의연하던 남자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건 바로 그 안에 담긴 영흔이다. 꺼져 가는 촛불에도 영혼이 있을지 모른다. 영혼의 유무에 따라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인지, 아니면 쓰고 버려도 될 고깃덩어리인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 무표정하던 루드비히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렇다면 넌 어느 쪽에 속해 있다 생각하느냐?“ 남자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는 사그라지려 하는 용기를 가까스로 쥐어짜 질문에 답했다. "전 영혼을 가진 존중받아야 할 생명체입니다. " "만약 내가 네 영혼을 소멸시켜 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냉혹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남자의 시선을 파고들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네 스스로 답을 깨닫게 해주마." 남자의 정면에서 선혈같이 붉은 빛이 작렬했다. 무자비하게 남자를 덮친 핏빛 섬광이 그의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 한입에 삼켜 버렸다. 빛이 흩어지며 숨을 쉴 수조차 없는 두려움이 적막과 함께 내리 덮였다. "모두 사라져라." 루드비히가 조용히 명령했다. 갑작스레 깨진 침묵에 흠칫 놀란 감시자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일시에 모습을 감다. 루드비히는 자신이 만든 공간을 둘러봤다. 생명력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극도로 정제된 공간엔 오직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영혼이 없는 쪽은 내 자신일지도 모르겠군. 루드비히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그리고 거친 동작으로 공간의 문을 막아버렸다. 무릎에 놓인 책을 건성건성 훑어보던 엘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 방 중간에 서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루드비히가 침대로 다가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루드비히도 같은 걸 물으시는준요. 어제부터 오늘까지 그 질문을 몇 번이나 들은 줄 알아요?” 루드비히는 말없이 침대 옆에 멈춰 섰다. "그런데 내가 아팠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엘에 대해 제가 모르는 건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 엘의 미소가 조금 흐려졌다. 그녀는 루드비히의 어조에서, 또 그녀에게 향해 있는 은회색 눈동자에서 평소와 다른 미묘하고도 이질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루드비히는 꼼짝 않고 서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엘은 답답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팔을 길게 뻗어 루드비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손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왔다. 엘은 씩 웃으며 루드비히를 끌어당겨 침대에걸터앉게 했다. "앉으니까 루드비히도 편하죠? 매일 우두커니 솟아 있는 루드비히를 올려다보느라고 내 목이 얼마나 뻐근했는지 알아요?“ 엘은 투덜거리며 보란 듯이 목덜미를 주물렀다. 루드비히가 손을 들어 그녀의 관자놀이에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루드비히, 왜 그래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루드비히는 어렴풋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엘은 맞잡고 있던 그의 손을 흔들었다. "말 좀 해봐요, 루드비히." "영혼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엘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심장이나 그 근처에 있을 것 같아요. 죽으면 심장이 멎게 되잖아요. 혹시 영혼이 빠져나가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심장이 뛰는 건 영혼이 숨을 쉬기 때문이 아닐까요?“ 루드비히가 엘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곧 루드비히의 심장 고동이 엘의 손바닥 가득 전해졌다. "제 영혼도 이 안에 담겨 있는 것일까요?“ 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엘은 조금씩 강해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숨결이 입술을 스치자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루드비히는 지그시 힘을 가해 엘의 손을 자신의 심장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엘의 심장이 손바닥을 울리는 고동에 맞춰 흡사 하나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녀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엘은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 얼굴을 젖히며 루드비히를 밀어냈다. 루드비히가 거친 숨결인지 낮은 신음인지 분간이 안 되는 소리를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이런 식이로군요." 루드비히의 목소리엔 엘이 처음 들어보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줄 듯하다 다시 빼앗는 것 말입니다. 그런 걸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루드비히가 짧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강도는 조롱기를 느낀 엘은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전 모르겠으니 힘들지 않으시다면 루드비히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죠. " 루드비히의 입술에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엘의 귓가로 얼굴을 내렸다 "그건 요녀(妖女)의 기술 중 하나입니다. 잠자리로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 말입니다. " 엘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리며 루드비히를 노려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흘긋 내려다본 루드비히가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내가 요녀고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일에서부터 백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해도 루드비히한테 써먹는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고 이만 돌아가 주시죠, 짜증나는 법황 성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 순순히 받아들인 루드비히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배우고 싶으시면,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언제든 제게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 "루드비히!" 엘은 루드비히에게 힘껏 베개를 집어 던졌다. 베개를 받아 든 루드비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르쳐 달라는 뜻인 겁니까?“ "루드비히, 징그럽게 자꾸 그럴 거예요?“ 루드비히는 씨근덕거리는 엘을 향해 정중히 베개를 내밀었다. "이럴 물건은 아무에게나 선물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잘 기억해 두십시오." 엘은 베개를 확 낚아채 루드비히를 향해 휘둘렀다. 교묘하게 몸을 돌려 공격을 피한 루드비히가 쿡쿡 웃어대는가 싶더니 그녀가 분통을 터뜨리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엘은 아무 죄 없는 베개에 주먹을 꽃아 넣는 것으로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제 85장 진실과 슬픔 "잘 있었어요, 아몬?' 엘은 아몬에게 인사말을 건넨 다음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일러스를 향해 화사한 웃음을 날렸다. "사일러스도 잘 지냈죠?'‘ 아몬은 마치 유령을 목격한 듯 충격에 휩싸여 있는 친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얼굴을 봐서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일러스도 물론 잘 지냈습니다.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일러스가 괜스레 헛기침을 터뜨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엘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난 엘한테 마법력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래요? 정말 몰랐어요? 어, 이상하네? 왜 몰랐을까?“ 엘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탁자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아몬과 사일러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식사 중이었는지 탁자 위엔 몇 가지 음식과 반주 삼아 곁들인 것으로 보이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럼 정말 엘이 마법을 시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요, 내가 얼마나 강한 마법사인데요. 주문만 외면 뭐든지 다 할수 있어요. 그렇지, 지금 당장 사일러스를 돼지로 만들어볼까요? 그럼 믿겠어요?” 사일러스가 엘과 반대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엘과 아몬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목덜미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엄청나게 강한 마법력이 생겨도 사일러스한테 쓸 생각은 없으니까 마음 푹 놔도 돼요." 엘은 짓궂게 웃어 보인 뒤 아몬의 접시에서 작은 과일 조각을 집어 들어 입속에 던져 넣었다. "시장하신가요? 음식을 좀 가져다 드릴까요?“ 엘은 아몬을 향해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방금 전에 식사했는걸요. 배가 어찌나 부른지 맛있는 음식이 산처림 쌓여 있어도 더는 한입도 못 먹을 지예요. 그러니까 괜히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식사해요, 아몬, 사일러스도요." 엘은 군말없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아몬과 사일러스를 흐뭇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에요, 두 사람은 어떻게 친구가 됐어요? 아몬하고 사일러스가 친구라는 거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던데."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지던 엘이 사일러스의 접시에서 생선 튀김을 집어 들었다. 아몬과 사일러스는 생선 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는 엘을 멀뚱히 바라보다 넌지시 미소를 교환했다. "나한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에요?“ 옛 기억이 떠오른 듯 사일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히 말하면 싸우다 친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싸워요? 아몬하고 사일러스가요?“ 엘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예, 지금 봐서는 상상이 안 되겠지만 어렸을 때 아몬은 뭐라 그럴까 좀 독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고 할까요? 하여튼 비리비리한 녀석이 어찌나 사나웠는지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전 그때 아몬에 대해 말만 조금 들었지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을 가지러 마구간에 갔는데 웬 비쩍 마른 녀석이 대공 전하를 감히 '리자르님‘ 이라 부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전 마구간 밖에서 그 건방진 녀석이 혼자가 되길 기다렸다가 패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좋은 말로 타일렀습니다. " 아몬은 피식 웃었다. "한 번만 더 리자드님이라 부르면 온몸의 뼈를 발라주겠다는 협박이 좋은 말이었던 거야?“ “당연하지. 그때 난 한창 선배 기사들에게 갖가지 욕설을 배우는 중이었다고.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네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퍼부어줄 수 있었단 말이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뒷 얘기가 궁금한 엘이 사일러스를 재촉했다. "그렇게 좋은 말로 타이르는 저한테, 글쎄 저 녀석이 다짜고짜 달려들지 뭡니까? 그래, 온 마구간을 헤집고 다니며 정신없이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그 뒤로도 똑같은 이유로 아마 네다섯 번 정도 더 싸웠을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들었는데, 어느새 저 녀석과 친구 비슷한 사이가 되어 있더군요. 그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영부영 친구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 나이에 치고 받고 하는 것도 남부끄러운 짓이고 해서 말입니다. " 사일러스가 말을 끝내고 씩 웃었다. 엘은 씹고 있던 고기 조각을 꿀꺽 삼킨 다음 마주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녀는 이미 아몬과 사일러스의 음식을 상당량 축낸 상태였다. " 그런데 그때 아몬하고 사일러스는 몇 살이었어요?“ “전 열네 살이었고 아몬은 열세 살이었을 겁니다. " 사일러스가 엘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열여덟 이요." 별 생각 없이 대답한 엘이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곰곰이 되짚어보다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이제 보니 저 열여덟이 아니고 열아홉이었어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지난번 이곳에 머물 때 생일이 지나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늦었지만 열아홉 살이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엘." 아몬이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고마워요, 아몬." "저도 축하드립니다. " 자신의 말이 좀 낯간지럽게 느껴졌는지 사일러스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사일러스도 고마워요. 그런데 말이에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뭐라 그래야 하나...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열아홉 살이면 당연히 어른이죠, 혼인도 너끈히 할 수 있는." 사일러스가 놀리는 투로 말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엘은 장난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둔 분이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엘이 서툴게 얼버무리자 사일러스의 얼굴에 호기심이 나타났다. 그가 엘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아몬이 그의 발을 슬쩍 건드렸다. 아몬은 왜 그러냐는 무언의 질문에 넌지시 눈을 찡긋거렸다. 사일러스의 머리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아몬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참, 인연이 있긴 있나보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일러스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엘이 물었다. "엘, 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대공 전하와 엘을 두고 혼인 얘기가 오갔다는 거 아십니까?“ “예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엘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하긴 저도 전해 들은 거라 제대로 아는 게 거의‥‥‥‥“ 사일러스가 아몬의 다리를 걷어찼다. 짐짓 인상을 써 보인 아몬이 그를 대신해 설명을 시작했다. "저 역시도 많은 건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선대 대공 전하와 페르가몬 황제 폐하께선 둘도 없는 친구 사이셨다 하더군요. 비록 나이차이는 좀 나셨지만." "친구요? 두 분이 친구 사이셨다고요?“ 엘은 성급히 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역한 친구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쳤다. "그분은, 리자드의 아버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아몬과 사일러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 줘요, 아몬." 엘의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아몬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엘은 굳은 얼굴을 풀기 위해 애쓰며 별일 아니라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괜히 궁금해서 그래요. 제 아버지가 좀‥‥ 안 좋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분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아몬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성에 잠입한 자객에게 목숨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객의 정체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이고 말입니다. " 상상하기도 끔찍한 가설이 머리 속을 온통 점령하자 엘은 벌떡 일어섰다. 놀란 아몬과 사일러스가 어정정하게 몸을 세웠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요. 이만 가볼게요." 두 사람이 인사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급한 선약이라도 있었나 보군." 술기운이 돌고 있던 사일러스가 털썩 의자에 내려앉았다. 엘의 행동을 예사롭게 생각하는 그와 달리 아몬은 정체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엘을 발견한 리자드가 멈칫한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주군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가 휘청거리며 검을 떨어뜨렸다.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리자드의 옷자락을 스쳐 본 적도 없는 그로서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이, 이런, 전하!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사죄드립니다!" 하얗게 질린 기사가 쩔쩔매며 말을 쏟아냈다. "괜찮으니 물러가라." "가서 어의관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전하!" "필요없다. " 리자드는 잘라 말했다. 그가 자신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가 뒤를 돌아봤다. 순간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러가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퍼뜩 정신을 차린 기사가 허둥대며 검술 수련장을 나갔다. 엘은 리자드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앞에 멈춰 서자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처를 묶어야겠어요." 엘은 붉게 물든 리자드의 팔로 손을 가져갔다. 리자드가 그녀의 손목을 와락 낚아챘다. . "이게 무슨 짓이냐?“ “화난 거 알아요. 하지만 아까 그 기사는 내가 누군지 모를 거예요. 머리 색도 바뀌고 길이도 짧아졌으니까요." 엘의 손목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아픔을 느낀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을 때 리자드가 팽개치듯 손목을 놔주었다. "꺼져라." 엘을 스쳐 지난 리자드가 보폭 넓게 걸음을 옮겼다. "물어볼 게 있어요." "꺼지라고 했다. " 엘은 후닥닥 뛰어가 리자드의 앞을 막아섰다. "리자드 아버지와 내 아버지 얘기 들었어요."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려던 리자드의 팔이 얼어붙은 듯 정지했다. "그분들이 친구 사이셨다는 얘기요." 리자드가 다소 거친 동작으로 엘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를 검술 수련장과 연결된 숲 속으로 이끌었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리자드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누구에게서 들은 거냐?“ “누구한테서 들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해요?” “칼 베리만께 들은 거냐?” 엘이 고개를 가로젓자 경직돼 있던 리자드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칼 베리만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걱정되나 보군요. 예를 들어‥‥ 그분들이 겪으신........죽음의 비밀 같은 거 말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청회색 눈동자에 차디찬 광채가 이글거렸다. 그 순간 엘은 자신이 핵심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있었다. "사실이군요‥‥ 사실이었어요‥‥‥‥ 내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리자드의 아버자를‥‥‥‥“ 엘은 휘청거리다 거친 나무줄기에 몸을 의지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돌아가라!" 엘은 걸음을 떼려 하는 리자드의 팔을 움켜잡았다. "피하지 말아요! 왜 자꾸 피하려고만 드는 거예요? 정말 내가 한 말이 헛소리예요?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예요?“ 엘은 제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가느다란 희망을 필사적으로 잡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리자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내 아버지가‥‥ 리자드 아버지를‥‥‥ 살해한 거예요.? 정말....그런.... 거예요?“ 고통스런 물음이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리자드의 팔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엘을 마주 봤다. 분노를 담은 어두운 눈길이 밤의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한테서 무슨 얘길 듣고 싶은 거냐? 말해 봐라, 네가 원하는 대로해줄 테니까" "진실이요....내가 듣고 싶은 건 진실이에요."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진실을 얘기해 주지." · 리자르의 입술에 냉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네 생각이 맞다. 페르가몬이 내 아버님을 살해했다. 난 그가 아버님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더 듣고 싶나?“ 엘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페르가몬을 죽이고 싶었지만 칼 베리만이 날 움켜잡고 놔주지 않았다. 난 아버지의 피투성이 주검 앞에서 다짐했다. 원수를 갚겠다고, 페르가몬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느냐? 어이없게도 내가 복수를 맹세하던 바로 그날 밤 페르가몬이 죽어버렸다. 하지만 난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페르가몬이 죽었어도 온몸의 피가 솟구치는 듯한 분노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난 다른 형태의 복수를 결심했다." “그래서 날 찾아냈군요, 복수를 위해서‥‥‥ 날 아시리움 성전으로 보내 물건을 찾게 한 것도 복수의 하나였고요." 엘은 억양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물건에 대해 말해 줘요. 이젠 말해 즐 수 있겠죠.“ 어둡고 강렬한,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리자드의 청회색눈동자를 스쳤다. "페르가몬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헤르티아 황후는 인간을 능가하는 그의 힘을 두려워했다. 황후의 수태 사실을 알게 된 페르가몬은 그녀를 위해 자신의 힘을 봉인했다. 그리고 봉인체를 반으로 갈라 하나는 예언자인 칼 베리만한테 다른 하나는 아시리움에게 맡겼다. " 조각 하나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 물건이 봉인체였군요. 리자드가 그 물건을 손에 넣으려 한 건 아버지의 힘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리자드가 결심한 다른 형태의 복수.....내 생각이 맞나요?'" “그래, 난 페르가몬이 소유했던 모든 걸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의 힘은 물론 리아잔 제국까지." 엘은 눈을 꼭 감았다. "왜, 듣기 괴롭나? 진실을 원한 건 네 자신이다. " 리자드가 진한 조소를 드러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라, 네 소원대로 모든 걸 다 말해 줄 테니." "내가 알고 싶은 건 딱 한가지예요. 지난번 내가 했던 질문 기억하죠?“ 엘은 절망의 안개를 떨쳐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까칠하게 말라 버린 입술을 축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나와 혼인해 줄래요?“ 부릅떠진 청회색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이미 알겠지만 나와 혼인하면 리아잔을 가질 수 있어요. 내 아버지가 소유했던 모든 걸 갖고 싶다고 했죠? 난 내 아버지의 딸이에요. 나와 혼인하면 리자드의 복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엔 힘이 배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완벽하게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냐?“ “아니오, 미치지 않기 위해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널 제정신으로 살게 하기 위해 너와 혼인을 해야 한단 말이냐? 네 말대로 넌 네 아버지인 페르가몬의 딸이다. 그런데 내가 페르가몬의 딸과,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과 흔인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리자드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거뿐이에요? 정말 그거뿐이에요? 난 그저 원수의 딸일 뿐이냐고요?“ 엘은 크게 부르짖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아니잖아요!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잖아요!" 리자드가 거친 동작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고? 대체 뭘 어떻게 하잔 말이냐?“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한 목마름 가득한 눈빛이 그녀의 가슴을 헤집었다. 미칠 것 같은,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리자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지 말아요. 지금 가면... 다시는 리자드를 찾지 않을 거예요." 한순간 멈칫했던 리자드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엘은 손을 올려 흐느낌이 터져 나오려 하는 입술을 막았다. 그녀는 그렇게 서서 멀어지는 리자드를 바라보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제길! 리자드, 이 나쁜 놈! 내가 질 줄 알아? 난 물러서지 않아! 난포기하지 않아! 들었어? 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엘은 주먹으로 뿌옇게 흐려진 눈을 문질렀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남자는 창가에 서서 마체라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그의 등 뒤에 있었고 그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마체라타는 남자의 눈 속에 깃든, 어둠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분노를 느낀 순간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왔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남자는 인사를 받지 않았다. 마체라타는 마른침을 삼킨 다음 이를 드러내며 천연스레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아버지를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 제 앞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나셨죠. 아버진 지금처럼 창가에 서 계시다 제게 손을 내미셨어요. 그때 아버지의 어깨 뒤로 비치는 역광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내가 널 왜 부른 것 같으냐? 마주 앉아 오순도순 정겨운 옛날 얘기나 하고 싶어 부른 것 같으냐?” 역정이 난 남자가 가차없이 쥬네비아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럴 아버지가 아니시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 마체라타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난 널 믿었다, 마체라타. 그래서 지난번 네 말도, 법황과 달의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인 줄 몰랐다는 네 변명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니 진실은 그게 아니더구나. 마체라타, 넌 날 배신했다. " 커다랗게 열린 마체라타의 시선이 정신없이 카펫 위를 배회했다. 그녀는 동요를 아슬아슬하게 감추고 얼굴을 올렸다. "세상에,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배신이요? 제가아버지를 배신했다고요?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어떻게 제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마체라타는 소리 높여 항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충격과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아른거렸다. "과연 훌릉하구나, 마체라타. 언제나 그랬지만 보면 볼수록 네 연기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정말 네 어미를 그대로 닮았구나. 네 어미도 지금 너와 똑같았다. 가면이 벗겨졌는지도 모르고 너처럼 가소로운 연기를 계속했지. 한심하게도 말이다. " 남자가 잔인한 조소를 퍼부었다. 마체라타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턱을 꼿꼿이 세운 채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다. " "내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무엇인지, 어디 네 입으로 털어놔 봐라." 마체라타는 지체없이 입을 열었다. "첫째, 제 마음대로 클레르몽 대사제를 살려주었습니다. 둘째, 잘못되면 일이 틀어질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글렌 베르그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쥬네비아 황후에게 손대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했습니다. " "이유가 뭐냐?“ 입술을 달싹이던 마체라타가 남자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클레르몽을 살려준 이유가 뭐냐? 왜 글렌 베르그를 없애지 않았느냐? 왜 내 허락도 없이 황후에게 손을 댔느냐? 말해 봐라! 날 속이고 내 명을 거역한 이유를 어서 털어놓으란 말이다!" 남자가 사납게 윽박질렀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넌 아직도 내게 숨기는 것이 있다. " 궁지로 몰듯 남자가 마체라타를 향해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무, 무슨 말씀 ‥‥‥‥“ 마체라타에게 바짝 접근한 남자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후계자의 반지. 바로 네가 갖고 있는 후계자의 반지 말이다. " 마체라타이 눈에 불꽃이 작렬하듯 타올랐다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절 감시하셨군요, 아버지."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마체라타가 남자의 손을 밀어내며 미소 지었다. "어리석게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어떤 방법으로 후계자의 반지를 수중에 넣었는지 말해 봐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황태자에게서 후계자의 반지를 가로채는 일은 우스울 만큼 손쉬웠습니다. 간단한 암시를 걸었더니 자신의 손으로 후계자의 반지를 없앴다고 철석같이 믿어버리더군요." 마체라타는 가늘게 어깨를 떨며 키득거렸다. "후계자의 반지를 끓고 있는 쇳물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검을 만들게 했다.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아버지? 철부지 어린애도 한번쯤은 의심을 가져 볼 것 같은데‥‥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속아 넘어가다니. 얼마나 자만심이 차고 넘치면 그런 유치한 말장난에 놀아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으니 어서 후계자의 반지를 내놓기나 해라." 마체라타는 곱게 양미간을 좁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짜 후계자의 반지를 왜 가지시려는 겁니까, 아버지?“ “마체라타!” 남자가 험악하게 소리쳤다. 마체라타의 얼굴에 가식적인 놀라움이 나타났다. "아아,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갖고 있는 반지가 진짜 후계자의 반지로군요. 아버지가 만들게 한 가짜반지는 달의 아이에게 있고 말입니다. " 남자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떻게 알았느냐?“ “가짜 후계자의 반지 뒤에 숨은 배후가 아버지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그게 궁금하신가보군요."· "어서 대답이나 해라!" 마체라타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책상에 몸을 기댔다 "글렌 베르그가 아버지 손목에 있는 붉은 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 붉은 점 얘길 듣는 순간 아버지시란 걸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그 일에 관여하신 겁니까? 달의 아이가 자신의 위치를 찾든, 목이 잘려 죽어버리든 별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 "그것도 그렇겠군요." 마체라타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관심한 어깻짓을 보였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어서 후계자의 반지를 내놔라."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지금은 후계자의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그럼 어디 있는 거냐?“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제 거처에 있습니다. 후계자의 반지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실수로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큰일 아니겠습니까? 해서 그 누구도 찾지 못할 비밀 장소를 만들어 반지를 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럼 지금 당장 가서 반지를 가져와라." "그것도 좀 곤란하겠습니다. " "네가 지금 날 갖고 놀려는 것이냐?“ 남자가 이를 갈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버지. 요사이 황태자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릅니다. 잠시라도 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야단법석을 피웁니다. 이미 오랜 시간 황궁 을 비웠는데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불필요한 소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게 신중히행동하라 하신 건 바로 아버지시지 않습니까?“ 마체라타는 호소하는 것처럼 두 손을 맞잡았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 황태자가 잠자리에 들면 그 즉시 후계자의 반지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 "알았다. " 남자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런데 왜 그토록 후계자의 반지를 갖고 싶어하시는 겁니까? 저로선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아잔 제국의 정통 황위 계승자가 아니면 후계자의 반지는 그저 그럴듯한 장신구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 네 말이 맞다. " "그런데요?“ 마체라타가 빈틈없는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넌 알 필요 없다. 그 대신 네가 명심해야 할 걸 말해 주마." “말씀하십시오 뼛속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 “두 번 다시 날 속이려 들지 마라.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넌 더 이상 산목숨이 아닐 것이다. 알겠느냐? 네 보잘것없는 목숨을 내 손으로 끊어주겠단 말이다. " 심장을 깊이 할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지자 마체라타는 숨을 멈췄다. 아버지에게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 상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마체라타는 떨리는 숨결을 토해내며 몸을 세웠다. "말씀 끝나셨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명심하라, 마체라타! 다시 날 속이려 든다면 네가 내 딸이란 사실도 너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다. "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순간도 잊지 못하도록 아버지께서 늘 일깨워 주셨으니까요" “마체라타는 입속말을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별말 아닙니다. 그저 잘 계시라는 인사말을 드린 것뿐입니다.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서던 마체라타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 혹시.... 어머니가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또 그 하찮은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다. 너도 알 필요 없는 일이고." "그 하찮은 여자는 바로 제 어머니입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더러운 피가 흐를지도 모르지만 바로 제 어머니란 말입니다. " 놀라움이 스쳤던 남자의 눈에 비웃음이 나타났다. "네 안에 흐르는 네 어미의 더러운 피가 널 부추기는가 보구나. 지금 당장 나가 몸이라도 팔고 싶은 거냐?“ 마체라타는 입술을 질끈 물어뜯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붉은 액체가 묻은 손을 남자에게 들어 보였다. "제 핏속엔 어머니의 피는 물론 아버지의 피도 섞여 있습니다. 제 피를 자세히 보십시오, 아버지. 어떻습니까? 반은 더럽고 반은 깨끗해 보입니까?“ 마체라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군요, 제 눈엔 온통 더러운 피만 보이니 말입니다. " 격노를 참지 못한 남자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체라타는 남자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인 다음 모습을 감다. 엘은 어스름이 깔린 카펫 위를 걸었다. 물러가라는 명을 받은 시종과 시녀들이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총총히 문을 나섰다 다가오는 엘을 지켜보고 있던 쥬네비아가 말없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엘은 의자에 등을 세우고 앉았다. 그녀가 쥬네비아를 찾아온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인 페르가몬에 대해 알고 싶었고,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쥬네비아 말고 다른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이모님께 꼭 여쭙고 싶은 얘기가 있어 찾아뵈었어요." "말씀하십시오." 쥬네비아의 어조는 차분했다. 엘은 자신이 무얼 궁금해 하는지 그녀가 이미 간파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제가 부모님에 대해 듣고 싶어했을 때 이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세요? 이모님은 제 아버지가 성격이 급하고 고집은 세셨지만 부드럽고 농담을 좋아하시던 분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아이를 좋아하셨다는 말씀도요. 그런데 그 후에 듣게 된 아버지의 모습은‥‥ 이모님이 말씀하셨던 그런 분이 아니었어요." 엘은 무릎 위에 힘없이 걸쳐 놓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실성하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절 살해하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전 이렇게 살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말은 이미 온전한 진실이 아니란 게 밝혀진 거예요. 이모님, 전 그날 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알고 싶어요." “전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갔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습니다. 어떻게 손써볼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피투성이 바닥에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멍하니 서서 페르가몬 폐하를 바라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쥬네비아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엘은 그녀가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은 어둠이 내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제 부모님께선 절 사랑하셨나요?“ “물론입니다. " 쥬네비아가 놀랄 만큼 힘을 주어 말했다. "페르가몬 폐하께서 왜 엘을 '달의 아이'로 명명했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그냥 리아잔 제국의 상짐이 달이어서 그런 명칭이 붙여졌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꺼낼 말을 정리하는 것처럼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쥬네비아가 입을 열었다. "달은 금방이라도 죽음을 맞을 듯 이지러졌다가 다시 힘을 내어 차오릅니다. 그래서 달은 강한 생명력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을 상징합니다. 전에 제가 헤르티아의 몸이 약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엘은 세 번의 유산 끝에, 그러니까 페르가몬 폐하께서 혼인하신지 칠 년 만에 갖게 된 그분의 분신이었습니다. 기적처럼 얻은 아기를 잃어버리게 될까 봐 폐하께서 얼마나 걱정이 크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페르가몬 폐하께선 엘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엘에게 ·달의 아이 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여주신 겁니다. 달의 힘을 빌려서라도 건강하게 태어나길 기원하신 겁니다. " 쥬네비아는 말을 멈추고 숨을 올랐다. "또한 리아잔 제국에서 달은 성스러움을 의미합니다. 특히 풍요를 상징하는 보름달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페르가몬 폐하께선 리아잔 제국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졌습니다. 그래서 엘이, 자신의 분신이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 만물을 비추는 성스러운 달처럼 리아잔 제국을 풍요롭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말들어주길 바라셨을 겁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페르가몬 폐하께서 엘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셨는지,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던 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모님은 왜 아버지를 사랑하신 건가요?“ 엘은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쥬네비아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땐 수십 가지, 아니, 수백가지는 댈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말을 하려 들면.... 단 한 가지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 쥬네비아의 입가에 애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런 마음.....이해할 수 있으신가요?“ “네, 조금은‥‥‥ 아니, 모르겠어요. 모든 게 뒤죽박죽이어서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세상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시랑하고 계시는군요" 두사람의 시선이 이어졌다. 엘은 쥬네비아의 눈길에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염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이모님, 지금도 아버지를 사랑하세요?” 쥬네비아가 힘겯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동자에서 처연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그분이 밉지 않으세요? 이모님의 사랑을 외면한 그분이 밉지 않으세요?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엘은 연이어 물었다. 자신이 쥬네비아를 아프게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엘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가슴을 꽉 막아버린 무엇인가가 자꾸만 꾸역꾸역 목을 타고 올라왔다. "밉습니다..... 그리고 원망스럽습니다.... 정말 밉고.... 원망스럽습니다.“ 쥬레티아가 숨죽인 흐느낌을 토해냈다. "저도요, 이모님. 그분이, 제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워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절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는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워요." 엘은 입술을 움직여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 파문이 일듯 아픔이 번져 나갔다. "전... 아버지의 딸이 될... 자격이 없나봐요."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공,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칼 베리만은 허둥대며 리자드를 내실로 안내했다. "제가 왜 대공께 뵙자는 연락을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리자드는 묵묵히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은 칼 베리만이 부랴부랴 그의 뒤를 좇아왔다.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리자드는 걸음을 멈추고 칼 베리만을 돌아봤다. "들으셨습니까? 드디어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대공! 여기 이것 좀 보십시오!" 칼 베리만이 리자드를 지나쳐 책상에 놓여 있던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들뜬 어조로 빠르게 말을 늘어왔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고문서입니다. 바로 이걸 훑어보다 그동안 풀지 못했던 고대어 대부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아는 글자들의 뜻을 하나하나 적고 모르는문자는 앞뒤 문맥을 맞춰 유추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서 읽어본 듯한 서사시 한편이 만들어지더군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보관해 두었던 고문서들을 꺼내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사시를 직역해 놓은 문서가 떡하니 나타나는 거 아닙니까? 고대어의 뜻을 알게 되니 저절로 수수께끼가 풀리더군요. 이렇게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다니!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칼 베리만이 더 이상 기쁨을 참지 못하겠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지러운 감흥에 싸여 리자드의 굳은 얼굴을 깨닫지 못했다. "믿어지십니까, 대공? 전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 물건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봉인을 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그래서였습니까?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그 아이에게 말을 흘리신 겁니까?“ 어리둥절해진 칼 베리만이 채 미소가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대공, 지금 무슨 말씀을‥‥‥"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봉인체를 가져오라는 뜻으로 그 아이에게 비밀 한 조각을 흘리신 거냐고 여쭸습니다. " 칼 베리만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웃음기가 지워졌다. "대공‥‥‥‥" “그 아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전 대공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비밀을 흘렸다니‥‥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대공, 엘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리자드가 한 응절 한 음절 명확히 발음했다. 칼 베리만은 말없이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도 손댈 수 없을 것 같은 적막이 깊어져갔다. 이윽고 칼 베리만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엘한테 좋지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페르가몬폐하에 대한 얘기였는데, 엘이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절 만나러 오셨습니다. 전 워낙 널리 퍼져 있는 얘기여서 엘이 알게 되는 것도 시간 문제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페르가몬 폐하께서 승하하신날 벌어진 일에 대해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렸습니다. " 칼 베리만은 힘이 모조리 빠져 버린 사람처럼 발을 끌며 걸어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공 페르가몬 폐하께선 황후 폐하의 침소에서 돌아가셨고, 황후 폐하의 주검과 신원을 알 수 없는 아기, 또 여인의 사체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제가 말씀드린 건 그것뿐입니다. " "페르가몬이 죽기 전, 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었던 칼 베리만과 저뿐입니다. 칼 베리만도 아시겠지만전 그날 밤 이후 단 한 번도 그 일을 입에 담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모든 걸 눈치 챈 상태로 제게 왔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칼 베리만?“ 리자드의 딱딱한 음성이 도전적으로 공기를 울렸다. "아.... 제가 말을 흘렸습니다. " 칼 베리만이 자포자기한 투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페르가몬 폐하께서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를 살해하고 돌아오신 후 황후 폐하까지 해치셨다고‥‥ 제가 엘한테 그렇게 말했습니다. " 칼 베리만의 어조가 필이 가라앉았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그 당시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눈에 막 보이기 시작하던 때라 잔뜩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또 이러다간 영원히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하리라는 불안감 또한 부풀대로 부푼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 칼 베리만은 팔꿈치로 탁자를 짚고 두 손에 이마를 기댔다. "아니, 어쩌면.... 엘이 모든 걸 알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물건을 손에 넣고 싶었으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대공의 바람을 이루어 드리고 싶었으니까요" 칼 베리만이 자조 섞인 탁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비겁하고 치졸한 짓이었습니다. " "아닙니다, 비겁하고 치졸한 짓을 한 건 칼 베리만이 아니라 저입니다. " 뚜벅뚜벅 걸어온 리자드가 칼 베리만 정면에 멈춰 섰다. "전 복수를 갈망하면서도 몸을 사렸습니다.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막상 기회가 왔을 땐 외면했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칼 베리만은 리자드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엘... 때문이시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 솔직히 인정한 리자드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황량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그의 청회색 눈동자 위로 떠올랐다. "전 그동안 그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밝혀지면 그 아이는‥‥ 제가 미워하고 증오해야 될 원수의 딸이 됩니다. 원수의 딸‥‥‥‥ 모든 것이 그 족쇄 하나로 묶이게 됩니다. 서로 만날 수도, 마주 볼 수도, 얘길 나눌 수도 없게 됩니다. 절 향해 미소 짓는.... 그 아이의 얼굴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칼 베리만은 리자드가 쏟아내는 진실의 무게에 억눌려 있었다. 그가 가슴에 묻어두었던 엘을 향한 감정의 깊이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지나치리만큼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여겨온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 복수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쳤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보다 더 추악한 죄악도 망설임 없이 저질렀습니다. 페르가몬에 대한 복수심이 제가 숨 쉬고 있는 단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칼 베리만? 왜 그 아이를 잃는다는게‥‥ 그 아이가 절 미워하게 될 거라는, 그 아무것도 아닌 사실이‥‥ 절 숨 막히게 하는 걸까요?“ 칼 베리만은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온 건 길고 긴 탄식뿐이었다. 암담하게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리자드가 짧게 웃었다. "제가 한 말은 다 잊어버리십시오. 술이 과해 헛소리가 나온 것뿐입니다. " 몸을 돌린 리자드가 내실을 가로질렀다. "대공!" 칼 베리만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어떻게........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리자드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차디찬 문고리를 잡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변하는 건 없습니다. " 제 86장 불길한 기운 엘이 생각지 못한 방문자를 맞은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든 늦은 시간이었다. 책에 초점없는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는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체라타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엘은 눈을 의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놀라신 것 같군요. 워낙 골치 아픈 일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아무연락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전하." 수굿이 얼굴을 굽힌 마체라타가 고개를 들며 곰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용건이 뭡니까?“ 엘은 다소 공격적으로 물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마체라타를 대할 때마다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예의를 갖춰 말하면 청을 드리러 온 것이고, 솔직히 털어놓자면 빚을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 "빚이라고요?“ 엘은 엉겁결에 되물었다. 입을 다무는 순간 오래전 자일스의 거처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듯 마체라타의 미소가 진해졌다. "생각나신 것 같군요. 예, 지난번 제가 지하 감옥에 갇힌 전하의 친구 분을 구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때의 빛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간단한 일이니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 은근한 어조로 비꼰 마체라타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간단한 일이 무엇인지 어서 밝히고 되도록 빨리 여기서 나가 주면 고맙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원하는 건 후계자의 반지입니다. "엘의 입술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어찌나 기가 막힌지 그녀는 잠시간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지, 지금 후계자의 반지를 달라고‥‥‥‥" “오해하신 것 같군요, 전하. 후계자의 반지를 제게 넘겨달라는 게 아니라 한 번 보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요구가 엘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눈앞의 여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후계자의 반지를 보고 싶어 이러는 거란 말입니까?“ “예, 전하. 후계자의 반지를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 반지가 오직 리아잔 제국의 정통 황위 계승자에게만 전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터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갈망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 엘은 의혹 어린 눈초리로 마체라타를 바라보다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넣어둔 후계자의 반지를 꺼냈다. "그 귀한 후계자의 반지를 너무 허술하게 보관하시는군요, 전하." “그건 그쪽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퉁명스럽게 말한 엘이 후계자의 반지를 내밀었다. 마체라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반지를 받아 들었다. "으음.... 이게 바로 후계자의 반지로군요. 정말보통 반지와는 다른 어떤 신비로움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연신 감탄성을 터뜨리며 반지를 살펴보던 마체라타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잘봤습니다, 전하. 제 청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너그러우신 전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엘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닌 일에 지나치게 인사를 받는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자, 여기 받으십시오." 엘이 손을 내밀었을 때 마체라타가 반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마체라타가 후계자의 반지를 집어 들어 엘에게 건넸다. 엘은 개운치 않은 느낌에 얼굴을 찌푸리며 차가운 반지를 감싸 쥐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전하.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마체라타가 짧은 말을 중얼거리자 그녀 주위로 불그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기 전에 사소한 조언 한마디 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후계자의 반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십시오." 마체라타는 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붉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이리저리 초조한 걸음을 옮기다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일어나 다시 카펫 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그가 같은 행동을 서너 번 더 반복한 뒤에야 마체라타가 모습을 보였다. "좀 늦었습니다, 아버지." "왜 이제야 오는 거냐?“ 남자가 버럭 윽박질렀다. "오늘따라 황태자가 유난스레 짜증을 부리지 뭡니까? 때문에 일찍 자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후계자의 반지는 어디 있는 거냐? 갖고 오긴 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그걸 잊을 리 있겠습니까?” 마체라타가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자 남자가 성큼 다가섰다 "자, 보십시오, 아버지. 후계자의 반지입니다. " 마체라타는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린 후 남자의 눈앞에 내밀었다. 남자가 눈을 빛내며 반지를 집어 들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래, 아름답구나." 남자가 달뜬 손길로 반지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반지도 무사히 전해 드렸고... 이 늦은 밤에 제게 시키실 일도 없을테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 “마체라타!" 남가 다소 날카롭게 그녀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 “마무리는 깨끗하게 한 것이냐? 나중에라도 황제와 황태자가 의심가질 수도 있지 않느냐? 성물 중의 성물이라 불리는 후계자의 반지를 쇳물에 녹였다니·...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십상일 것이다. " 마체라타가 안심하라는 듯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계셨군요. 염려 마십시오, 아버지. 완벽히 처리해 놓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 해도 후계자의 반지에 의혹을 가질 황제와 황태자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후계자의 반지가 가짜든 진짜든 별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달의 아이가 이미 페르가몬의 딸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물론 아버지껜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마체라타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으며 속마음을 감췄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냐?' 오메른을 흘끔 쳐다본 체사레가 후드를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어디 있었고, 어제와 그제는 또 어디 있었던 거냐? 대체 사흘 동안 어디 처박혀 있었던 거냐?“ 오메른이 험악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사흘이나 지난 줄은 몰랐어. 그동안 잠도 안 잔 채 뜬눈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이거 정말 감격스럽군." 체사레가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외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 피곤하다. 그다지 한 일도 없는데 왜 이리 피곤한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체사레가 오메른에게 도발적인 미소를 던졌다. "넌 알겠어, 오메른?“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오메른이 체사레의 목을 움켜잡았다. "날 갖고 노는 게 왜나 재미있는 모양이로구나." "왜나 재미있진 않지만 그럭저럭 즐길 정도는 돼." 체사레가 비웃듯 피식거리자 오메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부들부들 손을 떨던 오메른이 체사레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젠 내가 널 갖고 놀 차례다. " 순식간에 체사레의 낯빛이 검붉게 물들었다. "어떠냐? 이래도 재미있나?'" “그, 그래." 체사레는 가까스로 말을 토해냈다. 뿌드득 이를 갈던 오메른이 사납게 그를 팽개쳤다. 침대에 쓰러진 체사레가 기침을 터뜨렸다. "오메른, 넌 멍청이야. 날 죽일 주제도 못 되는 한심한 멍청이." 침대에 얼굴을 묻고 낄낄거리던 체사레가 크게 웃어 젖히며 벌렁 드러누웠다. 오메른이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려 물어뜯듯 사납게 입을 맞췄다. 체사레는 혹독하게 퍼부어지는 형벌을 기꺼이 감수하며 오메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광기 어린 짐승처럼 서로의 몸을 파고 들었다. 거친 숨결이 잦아들었을 때 체사레가 입을 열었다.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믿어?“ 오메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체사레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팔로 머리를 받쳤다.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적으로 이어진 네 영혼의 짝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헛소리. 난 복에 겨운 놈들이 할 짓 없어 떠들어대는 그런 헛소리 믿지 않는다, 단 한 마디도." "그렇겠지." 흥이 깨진 체사레가 불퉁스럽게 응수했다. 한동안 흐르던 침묵을 깬 사람은 오메른이었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내 것으로 만들겠지." "네 것으로 만든다고?“ 체사레의 금빛 눈동자가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였다. "그래, 당연히 내가 가져야 될, 내 소유물을 다른 놈에게 빼앗길 순 없으니까." "그 상대가 널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오메른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으냐?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으면 그만이다." "만약 그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네 영혼의 상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지. 내가 못 가질 바엔 차라리 깨끗하게 없애 버리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 체사레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간단명료하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미련없이 부숴 버린다.... 정말 내 마음에 쏙드는 답변이야." "그런 쓸데없는 얘긴 왜 꺼낸 거냐?“ 체사레는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로 걸어갔다. 반쯤 채워진 술잔을 집어 든 그가 오메른을 돌아봤다. "너와는 달리 난 영혼의 상대를 믿거든. 그런데 문제는 운명의 선이라는 게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로 이어져 있다는 거야. 난 그걸 바꾸고 싶어." "그게 불가능하다면?“ “글세‥‥‥‥” 술을 들이켠 후 잔을 내리는 체사레의 입술에 감미로운 미소가 그려졌다. "어쩌면 네 말대로 깨끗이 부숴 버릴 수도 있겠지. " 엘이 오전 중에 방문하겠다는 쥬네비아의 전언을 들은 건 아침 식사를 거의 마칠 때 즈음이었다.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괜히 음식을 뒤적거리기만 하던 그녀는 식사를 물린 뒤 창가에 앉았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항상 같은 시각에 나타나 그녀를 교육실로 안내하는 시종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엘은 얼마 전부터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교육을 받아오고 있었다. 교육 시간은 그날그날의 진도와 배우는 교과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였는데, 아무리 길어도 하루 다섯 시간을 넘지 않았다. 엘의 교육을 담당하는 일곱 명의 교육관들은 지나칠 만큼 그녀를 정중히 대했다. 요 며칠 동안 엘이 워낙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근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녀는 교육관들이 대체로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지식 수준이 유달리 높아서가 아니라 교육관들의 기대가 워낙 낮았기 때문임을 눈치 채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듯한 모습으로 들어와 엘이 완전한 무식쟁이가 아니란 걸 알고 환하게 밝아지던 교육관들의 얼굴을 그녀는 지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민으로 자라난 황족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을지 엘도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쥬네비아는 전언과 달리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간에 나타났다. 엘은 그녀의 뒤를 따라들어오는 한무리의 여자들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들의 손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갖가지 빛깔의 드레스와 옷감들이 들려 있었다. "자, 어서 일어나십시오. 할 일이 많습니다. 어서요, 엘." 엘은 쥬네비아의 재촉에 이끌려 엉거주춤 다리를 세웠다. "저.... 이게 다 뭔가요? 저 사람들은 또 누구고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 간단히 대답한 쥬네비아가 여인들을 돌아봤다. "무엇들 하는 거냐?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여인들이 엘을 둘러쌌다.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엘은 정신없이 움직이는 여인들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쥬네비아를 바라봤다. 쥬네비아는 도움을 갈구하는 듯한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터지려 하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엘의 무도회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착한 요정들이지 엘을 죽이려고 달려든 악귀가 아닙니다. " 쥬네비아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엘이 정력적인 착한 요정들에게서 벗어난 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들이 내일은 좀 더 일찍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순간 엘은 안락의자에 지친 몸을 묻었다. 기진맥진한 그녀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 준 건 저녁 식사 전까지 이어진 곤한 수면이었다. 엘은 간단히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리오와 리반을 만나러 갈 채비를 했다. 낮에 그녀를 찾아왔다가 얼굴도 못 본 채 발을 돌려야 했던 그들이 문전박대의 이유를 쫴나 궁금해 하고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농담을 건네고 웃음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엘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염려스런 눈길을 보내던 리오와 리반을 떠올리며 생각을 돌렸다. 자신의 일로 더 이상 두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엘은 망설이며 계속 미뤄왔던 일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정한 그녀는 지체없이 아시리움 성전으로 이동했다. 엘이 나타나자 창가에 서 있던 루드비히가 그녀를 돌아봤다. “나 왔어요, 루드비히." 엘은 싱거운 인사를 건넸다. 루드비히가 가까이 오라는 듯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겨 루드비히 옆에 자리 잡았다. "루드비히는 내가 언제 올 줄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불쑥 찾아와도 루드비히는 항상 오늘과 똑같았어요. 놀라는 법 없이 날 맞아주었어요." 엘은 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봤다. 무겁게 내려앉은 땅거미 위로 희미한 윤곽만이 비치는 이지러진 달이 떠 있었다. “루드비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그냥·. 웃고 싶으면 웃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또 찡그리고 싶으면 찡그릴 수 있어서 그런가 봐요. 루드비히 앞에서 말이 많아지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아요. 루드비히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평소엔 이렇게 시끄럽지 않아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루드비히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오, 아니, 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별일 아니지만 나한테는 별일인....그런 일이 생겼어요. 나 참, 대체 뭘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건지. 나 때문에 정신없죠, 루드비히?“ 엘은 코끝을 문지르며 계면쩍게 웃었다 "오래 있으면 루드비히 머리만 아파질 게 뻔하니까 찾아온 용건이나 말할게요. 그 물건이요, 루드비히. 그거 가지러 왔어요." 엘은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그 물건에 조건 하나를 걸었던 것 같군요." "그래요, 조건이 있었죠.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그게 조건이었죠." "알아내셨습니까?“ “네, 그게 무엇인지 알아요. 설명하라고 하면 하겠어요. 안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확인도 없이 물건을 받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그 물건은. · ." 갑작스레 목이 잠겨_오자 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 아버지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루드비히가 고개를 숙여 엘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너머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은 그의 눈길을 따라 몸을 돌렸다. 연한 빛에 감싸인 흑색 함이 허공을 미끄러져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은 두 손으로 함을 잡았다. 그 순간 함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자취를 감췄다. 엘은 뚜껑을 들어 올렸다. 둔탁한 빛을 발하는 검은색 돌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로군요. 이상해요. 전에 본거와 너무나 똑같은데... 이상하게 낮설어 보여요." 엘은 뚜껑을 닫고 짐짓 명랑하게 말했다. "이제 이건 내 거예요. 그러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도 돌려달라고 하지 말아요. 아, 그렇지! 루드비히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가는게 좋겠네요. 잘 있어요, 루드비히.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루드비히가 브레이슬릿으로 향하는 엘의 손을 잡았다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모르겠어요. 방에다 장식을 할지, 비밀 장소에 숨겨둘지, 없애 버릴지, 아니면‥‥‥“ 엘은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으며 다소 가라앉은 어조로 말을 더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줄지‥‥‥‥“ 쥬네비아는 칼 베리만이 도착했다는 시종의 보고를 받자마자 뛰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명이 내려지길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 중 한 명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칼 베리만." 칼 베리만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쥬네비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칼 베리만에게 의자를 권하자마자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냈다. “프란이 실종됐습니다, 칼 베리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그렇게 뛰어나갔는데 충격을 받아서 혼절이라도 한 건 아닌지·....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걸까요?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혹여 험한 일을 당한 건 아닌지." "폐하, 진정하십시오." 칼 베리만은 두서없이 나오는 쥬네비아의 말을 멈추게 했다. "요아상 백작 부인께서 실종됐다고 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후 상황을 차근차근 말씀해 보십시오, 폐하." 쥬네비아는 설명을 시작하기 전 크게 심호흡을 했다. "프란이 며칠 전부터 계속 입궁하지 않기에 오늘 집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집엔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하지 뭡니까? 전 당연히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들은 워낙 황궁에 마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그저 이곳에 지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 "백작 부인이 계실만한 다른 곳은 없습니까?“ “프란은 언제나 황궁 아니면 자신의 집밖에 몰랐습니다. 저 말고는 변변한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입니다. " 칼 베리만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조치는 취해놓으신 거겠지요?“ “예, 지금 기사들과 병사들이 프란을 찾고 있습니다. 프란이 갈 만한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샅샅이 뒤지라는 명을 내려놓았습니다. " 쥬네비아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잦아들었다. "칼 베리만, 전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프란이 나쁜 일을 당한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 "별일 아닐 겁니다, 폐하. 아마 무슨 사정이 생겨 연락을 못하고 계시는 것뿐일 겁니다. " 칼 베리만의 말에도 쥬네비아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칼 베리만 말씀이 맞으면 다행이지만‥‥‥" “혹시 뭔가 짐작하고 계신 게 있는 겁니까, 폐하?” 쥬네비아의 이마에 주름이 패었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는 실종되기 전 제가 본 프란의 마지막 모습 때문입니다. " "백작 부인의 모습이 어떠했는데 그러십니까?“ 칼 베리만이 신증하게 물었다. "어떤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곳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때 우린 악몽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 "악몽이라고요? 엘이 꾸신다는 그 악몽 말입니까?“ “엘도 악몽을 꾼단 말씀입니까?” 쥬네비아가 화들짝 놀라자 실수를 깨달은 칼 베리만이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예, 요새 조금 피곤하셔서 그런지 몇 번 악몽을 꾸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 그 생각이 따올라 저도 모르게 경솔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큼 심각한 건 아니니 마음 놓으십시오.“ 칼 베리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다음 즉시 화제를 되돌렸다. "그런데 백작 부인께서 꾸신다는 악몽은 어떤 것입니까?“ “아니오‥‥ 악몽을 꾸는 건 프란이 아니라 저입니다. " 칼 베리만이 등을 곧추세웠다. "폐하께서 악몽을 꾸신단 말씀입니까?“ 쥬네비아는 탄식 같은 한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날 밤‥‥ 페르가몬 폐하께서 돌아가신 날 밤의 일이 자꾸 꿈에 나타납니다. 어찌나 꿈이 생생한지 발끝을 적시던 선혈의 감촉까지... 너무나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날 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쥬네비아는 할 말을 못 찾고 있는 칼 베리만에게 몸을 내밀었다. "제가 벌을 받고 있는 걸까요? 죽어가는 헤르티아를 그저 보고만 있었던 죗값을 이제 와서 치르는 것일까요?“ "폐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께서 죄를 지셨다면 그 일을 덮어버린 저 또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칼 베리만께선 저를 위해 그러셨잖습니까? 제가 난처한 상항에 처하게 될까봐 입을 다무신 것뿐이지 않습니까?“ 어지러이 일렁이는 두 시선이 맞닿았다. 그 속에 담긴 비밀이 가슴을 짓누르자 두 사람은 서로를 외면했다. "백작부인께선 머지않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칼 베리만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몸을 일으켰다. 쥬네비아도 문을 나서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란스럽게 밀려드는 불안한 상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엘은 얼떨떨한 상태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상상해 몬 적도 없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모습. 엘은 자신의 낯선 모습이 조금은 놀랍고 또 조금은 거북스러웠다. 그녀는 은빛이 감도는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살짝 파이고 허리선이 조금 위에 잡혀 있는 드레스는 자연스런 곡선을 만들며 흘러내리다가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끝자락과 이어진 부분에서보기 좋게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엘에게서 변한 건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귓불에선 드레스와 맞춘 은빛 귀고리가 달랑거렸고, 귀고리와 한 쌍인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 걸려있었다. 또한 우아하게 올려진 머리엔 눈을 의심할 만큼 아름다운 진주 머리장식이 꽂혀 있었다. 머리장식은 루드비히가 선물이라며 내민 보석함에 들어 있던 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엘의 머리를 솜씨있게 틀어 올려준 시녀가 탄성을 터뜨리며 보석함을 들여다보다 고른 머리장식이었다. "정말 너무나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옆으로 물러서 있던 시녀들 중 한 명이 감탄을 담아 말했다. 엘은 그제야 시녀들의 기대감 어린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깨닫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두 고마워요, 수고 많았어요." 시녀들의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저‥‥ 그런데 전하‥‥‥‥“ 한 시녀가 몹시 힘들게 말을 꺼냈다. 엘이 무도회 준비를 하는 내내 옆에 서서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입에 넣어주었던 시녀였다. "그 브레이슬릿은‥‥안하시는게 어떠실지· . ." "왜요? 이상해요?“ “예, 전하. 다른 장신구들은 모두 드레스와 완벽하게 어울리는데‥‥아무래도 그건 좀‥‥‥‥” 엘은 새삼스런 눈으로 브레이슬릿을 내려다봤다 짙푸른 돌이 박혀있는 브레이슬릿은 신비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시녀의 말처럼 그녀의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몸치장에 관한 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엘도 드레스와 브레이슬릿에서 배어 나오는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하, 아무래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 한 시녀가 용기를 내어 말하자 다른 시녀들도 한결같이 동조하고 나섰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엘은 열정적인 의견에 밀려 브레이슬릿을 풀 수밖에 없었다. 시녀들이 어미 닭을 좇는 병아리처럼 의복실을 나서는 엘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불편한 마음이 든 엘이 뒤를 돌아보자 눈치 빠른 시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됫걸음질친 시녀들이 문을 연 것과 거의 동시에 시종이 리오의 도착을 알렸다. 시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한 발 들어서던 리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엘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튀어나을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엘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리오의 눈길에 쑥스러움과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어서 들어와. 아니, 내가 가야 하는 건가? 그래, 그래야겠다. " 무도화를 신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엘은 평상시처럼 보폭 넓게 발을 옮겼다. 그러다 채 두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중심을 잃고 말았다. 엘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크게 휘청거렸다. 신속하게 달려온 리오가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잡아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엘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엘은 대답하며 리오에게서 몸을 떼냈다. "신발 때문에 그래. 얼마나 불편한지 넌 모를 거야, 리오 무도화라며 억지로 내 발에 꿰였는데 춤은커녕 무도회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야. 자, 이 바보 같은 신발 좀 봐봐. 너라면 이런 걸 신고 제대로 걸을 수 있겠어?“ 엘은 툴툴대며 드레스 자락을 발목 부근까지 끌어올렸다. 우아하면도 날렵한 선을 이루고 있는 은빛 무도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은 리오가 잘 볼 수 있도록 그를 향해 한쪽 발을 치켜들었다. 경악한 시종ㅇ;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다 "무슨 고문 도구 같지 않아?“ 용케 한쪽 다리로 서 있던 엘이 약간 비틀거리며 발을 내렸다. 뾰족한 무도화 끝이 드레스 자락 속에 감춰졌다. "하긴, 이런 드레스를 입고 장화 같은 걸 신으면 우스꽝스럽기나 할거야. 할 수 없지, 불편해도 참는 수밖에." 엘은 체념조로 말한 다음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뭐 해, 리오? 어서 가자. 그런데 리반은 정말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겠대?“ 엘은 대답이 나오지 않자 리오를 돌아봤다. 그녀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리오가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정말 예쁘다, 엘." 순간 엘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반사적으로 부인했다.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 예뻐. 내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네가 훨씬 예뻐... 비교도 안 될 만큼‥‥‥‥“ 리오는 상기된 말굴을 슬그머니 돌렸다. "그럼 내가 예쁘긴 예쁘지." 엘은 뽐내듯이 말하며 리오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자, 뭐 하십니까, 잘생긴 왕자님? 이렇게 아름다운 공주님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리오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가시죠, 아름다운 공주님." 엘은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밤 만큼은 모든걸 다 잊고 즐거운 생각만 하고 싶었다. 리오를 위해서라도 이제 슬프고 우울한 얼굴은 하지 말자. 오늘밤만, 아니,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자. "리오, 너 그거 알?“ "뭘?“”너 말이야, 지금 굉장히 멋져 보인다는 거“ 엘은 그녀의 낯간지러운 말에 리오가 웃음을 터뜨리거나 능청스럽게 응수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뭔데,?“ “아니, 지금 말고. 조금 후에‥‥ 그때 말해 줄게‥‥” 엘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너, 설마 나한테 춤추자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왜, 나하고 춤추기 싫어?” 걸음을 멈춘 리오가 조금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엘은 평상시와 다른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춤엔 영 자신이 없어 해본 말인데." 리오의 얼굴에 멋쩍은 기색이 번졌다. "정 나하고 춤추고 싶다면 춰줄 순 있어. 하지만 발가락에 피멍이 들고 발등이 부어올라 걷지 못하게 돼도 날 원망하진 말아줘." 리오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야?“ “그래, 그 정도다. " "상관없어. 내 발 가죽은 워낙 튼튼하고 질겨서 웬만큼 밟히는 건 끄떡없으니까. 뭐라 그럴까..... 깃털이 스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라고나 할까." "어허, 그러셔?“ 엘은 다리를 들어 리오의 발등을 꾹 밟았다. 순간적으로 훅 숨을 들이쉰 리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거봐, 끄떡없잖아." "그래, 정말 장하다. " 엘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환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발을 맞다. 리오는 엘을 무도회장 입구와 연결되어 있는 정원으로 이끌었다. 초저녁을 갓 넘긴 시간이었지만 어스름 내린 회적빛 하늘엔 부지런한 별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 곳곳에 달린 장식등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부드러운 어둠과 은은한 불빛이 어우러진 정원은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엔 왠지 모를 불길함과 스산함이 배어 있었다. 엘은 약간 긴장한 채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왜 온 거야?' "그냥...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우연히... 아니, 우연히는 아니고‥‥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당황한 리오가 얼버무리듯 대꾸했다. "아까 말한 나한테 꼭 하고 싶다던 그 얘기?“ “그래, 그 얘기." 엘은 어서 말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리오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마른 입술을 축였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나한테 못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엘은 이상하리만치 긴장하고 있는 리오를 풀어주기 위해 장난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음 ..뭔가에 단단히 겁먹고 있는 것 같은데? 천하의 리오님을 이렇게 만든 게 과연 뭘까?무시무시한 괴물인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리오는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 나와.... 나와‥‥ 그러니까, 나하고‥‥‥‥“ 리오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얼굴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런 젠장! 젠장! 멍청한 놈!“ “나 참, 리오, 정말 너 때문에 답답해서 미치겠다. 셋, 아니, 봐줘서 넷 셀 동안 말해. 그렇지 않으면 나 혼자 그냥 가버릴 거야." 엘은 으름장을 놓은 다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빨리 말해! ""그래, 알았어." 리오는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 너, 정말 말 안 할래?“ "이런, 젠장! 알았대도!" 머리를 움켜쥔 리오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셋‥‥ 바보야, 빨리 입 못 열어?“ “나하고 혼인해 줘!” 리오가 버럭 소리쳤다. "넷‥‥‥ 너, 지금 뭐라고....“ “나하고 혼인해 줘, 엘." 리오가 분명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엘과 리오는 미동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마차 소리, 말 울음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연이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가슴 고동 소리만이 귀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내가...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럴 자신 있어, 엘. 정말 행복하게 해줄게‥‥‥‥” 쉰 목소리가 나오자 리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해, 엘." 리오의 시선이 숨 막힐 듯 가슴을 파고들자 엘은 고개를 돌렸다 “난, 난....리오, 난‥‥‥‥" 지금 당장 말해 주지 않아도 돼!" 리오는 재빨리 엘의 입을 막았다 "내가 떠나기 전까지, 그때까지만 말해 줘. 너도 알지? 우리 부모님이 보내신 수행 기사들 말이야, 이틀 전에 도착했잖아. 오랜 여행 뒤라 그런지 다들 녹초가 됐더라. 그래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사흘이나 나흘쯤 후에 출발하려고 하거든. 부족한 물품도 다시 갖춰야 하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말해 주면 돼." 리오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숨 가쁘게 말을 늘어놨다. "리오, 난 너와 혼인할 수 없어." 엘은 작게 속삭였다. 리오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뀌지 않을 대답을 기다리며 한순간 한순간 가슴 졸이게 할 수는 없었다. 엘은 리오에게 그런 잔인한 시간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리오가 물었다. "넌 내 친구야, 리오." "그러니까...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리오의 시선은 어스레한 나무 그림자에 걸려 있었다. "리오‥‥‥‥“ 엘은 안타깜게 그를 불렀다. 더 이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어둠은 점점 짙어가는데 머리 속은 온통 하얗게 빛이 바래 버린 것 같았다. "너부터 무도회장에 가야 되겠다. 난 바람 좀 더 쐬고 들어갈게." 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나한테 소중한 친구야. 정말 소중한 친구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리오. 엘은 그녀를 외면하고 있는 리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아득하게만 보이는 무도회장의 불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리오는 무작정 무도회장과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젠장!" 리오는 험한 말을 뱉으며 물기가 아른거리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멍청아, 이러니까 거절을 당하지." "그러니까 우리한테 당하는 거고." 갑자기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흠칫한 리오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억센 손길이 그의 입을 막고 팔을 비틀어 올렸다. 어깨 빠지는 듯한 고통에 리오는 숨 막힌 비명을 터뜨렸다. "어서어서 움직이자고." "그래,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말짱 꽝 되는 거야."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조금이라도 오래 숨을 쉬고 싶으면...“ 다섯 명의 남자들이 리오를 질질 끌고 정원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 87장 절망 엘은 일곱 번째 춤 신청을 물리치고 다시 한 번 입구를 살폈다. 여전히 리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땀이 배어든 손바닥을 슬그머니 드레스 자락에 문질렀다.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도회장을 채운 귀족들은 아름다운 엘의 모습에 감탄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심을 느끼고 있었다. 한 귀족여인이 '몸이 불편하신 것 같다‘라는 말을 하자, 그 얘길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창백한 얼굴로 앉아 연이은 춤 신청을 거절하는 엘의 행동을 다른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잠시 후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귀족 여인의 의견에 한층 신빙성이 더해졌다. 엘은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에 닿자마자 곧장 리오와 헤어졌던 정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저, 전하! 전하!"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엘은 몸을 돌려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젊은 시종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요?“ “전하의 친구 분께서, 그러니까 리오라는 분께서 다치셨습니다!" "리오가 다쳤다고요?“ 소스라치게 놀란 엘이 버럭 소리쳤다. "예, 전하. 아무래도 누군가의 습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피투성이가 되신 채 쓰러져 계십니다!" "거기가 어디인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엘은 한발 앞서 내닫는 시종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불편한 옷차림과 신발 때문에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그녀의 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급해졌다. 엘을 사로잡은 불안이 쉴 틈 없이 그녀를 몰아대고 있었다. 무도회장 정면에서 뻗어 나온 돌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시종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요!“ 엘은 몸을 굽혀 재빨리 신발을 벗어 들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시종을 지나쳐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서요! 서둘러요!" 시종은 숨이 턱까지 차 오를 때까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본궁을 지나 서궁 뒤쪽으로 펼쳐진 들판에 이르러 있었다. 엘은 숨을 헐떡이며 이미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다시 꺼냈다. "대체‥‥ 리오는‥‥ 어디 있는 거예요?'' “다 왔습니다, 전하" 시종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허름해 보이는 목조 건물을 가리켰다. 너무 낡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창고 같았다. 엘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저 안에 리오가 있다고요?“ “예, 전하! 저기 산책로에 쓰러져 계신 걸 마구간지기가 급한 마음에 이곳으로 모셔왔답니다. " "그 마구간지기는 어디 있는데요?“ “저한테 알려주자마자 어의관님을 모셔오겠다며 헐레벌떡 뛰어갔습니다. 어서요, 전하!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시종이 먼지투성이 문을 활짝 열었다. 엘은 가까이 다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창고 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안에 리오가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불은 어디 있는 건가요?“ “안에 들어가시면 저절로 밝아질 겁니다. "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엘이 의문을 표시하기도 전에 시종이 그녀의 등을 와락 떠밀었다. 엘은 거칠게 바닥으로 넘어졌다. 문밖에서 걸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엘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덟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눈에 익은 얼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반값습니다, 전하 " 체사레의 금빛 눈동자가 진득거리는 벌꿀처럼 나른하게 반짝였다. "이거야 원, 정말 답답해서 환장하겠네. 대체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일 끝나면 바로 연락이 오겠지. 그러니 너무 그렇게 안달복달하지마. 너 때문에 나까지 좀이 쑤시잖아." 리오는 남자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손목에 감긴 밧줄을 나무줄기에 대고 조심스레 문질렀다. 처음엔 남자들이 자신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그들의 주 목표가 자신인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남자들은 리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나무에 묶은 후엔 그다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생각난 듯 흘끔 쳐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 아닐까?“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너무 조용하잖아." "조용한 게 당연하지. 그럼 북이 둥둥 울리고 사람들이 꽥꽥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는 거야?'면박을 당한 사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이더니 코를 팽 풀어 바지춤에 문질렀다. 그런 다음 겉옷 안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저런 추접스러운 놈! 정말 드러워서 같이 못 앉아 있겠네!" "누가 아니래? 난 저놈 차문에 작년에 뜯은 양다리가 다 올라오려고 한다니까!"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꼬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참아주면 고맙겠구나. 나도 더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기겁한 남자들이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말해 주면 너희들이 알까?” 빈정거림이 들리더니 마체라타가 남자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너, 너는!" 마체라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날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저번에 오메른님과 함께 있는 걸‥‥‥‥“ 남자가 마체라타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뭐, 오메른님?“ 다른 사내들이 일제히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마체라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메른의 한심한 조무래기들이었군."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오메른과 마체라타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들로선 달려들 수도,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다. "대체 여긴 왜 나타난 거요?'“ “더 이상 너희들과 노닥거릴 시간 없다. " 마체라타가 남자들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 확 피어난 붉은 연기가 그들을 덮쳤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라." 남자들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마체라타는 그 즉시 리오에게 다가가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엘리시엔 황녀가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저 불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 혼자가면 십중팔구 죽음의 길을 사이좋게 걷게 될 테니, 기사나 병사들을 데려가는 게 좋을 거다. " 빠르게 중얼거린 마체라타가 뜻 모를 미소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리오는 저릿한 통증이 이는 다리를 절뚝이며 어둠 속을 내달렸다. 마체라타의 말이 거짓일 수 있다는 의심은 떠오르지 않았다. 엘이 위험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모든 걸 눌러버렸다. 제발 무사하길‥‥ 제발 아무 일 없길‥‥‥‥ 리오는 간절히 염원하며 하늘거리는 작은 불꽃을 좇아 달리고 또 달렸다. “리오는 어디 있는 거냐?' "글쎄요,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있겠지요." 체사레가 관심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엘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한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리오를 손톱만큼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내 손으로 네 목을 비틀어버릴 테다. " "대단하십시다, 전하. 본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친구를 걱정할 수 있다니. 저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뜨거운 우정이로군요. 산산조각 내어 오물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을 만큼 진실한 우정말입니다. " 체사레는 어깨를 떨며 킬킬거렸다. 그러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들도 하나둘 그를 따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체사레가 웃음을 멈추고 갑작스레 그들을 돌아봤다.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에 머쓱해진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서 시작해라." 명령을 내린 체사레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남자들이 들고 있던 갖가지 무기들을 틀어쥔 채 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엘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둥에 딱딱한 나무문이 와 닿았다. 손도끼를 앞세우고 있던 남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엘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체사레를 향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꼭 지금 당장 죽여야 하나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죽이기엔 좀 아까운 것 같아서요. 그렇게 생각들 안 해?“ 음탕한 시선들이 엘에게 몰려들었다. 엘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니까 뻣뻣한 송장이 되기 전에 즐거운 여흥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말이로군." 체사레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엘을 훑어 내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진 마라." 남자들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욕정으로 질척거리는 눈동자들이 엘의 전신을 기어 다녔다. "내게 한 발만 더 가까이 오면 누구든 그 즉시 숨통을 끊어주겠어." 엘의 경고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추악한 색욕을 부추길 뿐이었다.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위협적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체사레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마음껏 즐기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먼저야!" 엘의 정면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와락 덮쳤다 엘은 민첩하게 움직여 남자를 피했다. 여덟 명의 사내들이 숨통을 조이듯 주위를 에워쌌다. 그때 무언가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급속도로 커지며 귀청을 울리자 남자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그가 입술을 닫기도 전에 엄청난 수의 벌떼가 새까맣게 안으로 몰려들었다. 공포에 질린 남자들이 괴성을 터뜨렸다. 이를 갈며 엘을 노려보던 체사레가 그들을 남긴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벌 떼는 반쯤 허물어진 지붕이며 덜렁거리는 창문, 또 벌어진 나무틈사이 등 가리지 않고 모든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눈깜짝할 사이 경악한 남자들의 전신을 휘감았다. 남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마!" 엘이 거칠게 소리치자 다섯 명의 사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나머지 남자 세 명은 더욱 격렬히 팔다리를 뒤흔들며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몸을 부딪칠 뿐이었다. 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벌침에 쏘인 남자들이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쓰러졌다. 엘은 불규칙한 숭결을 토해냈다. 연거푸 몸서리가 쳐졌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겨우 떠올리며 그녀는 널브러진 사내들에게서 눈을 뗐다. “너희에게 이런 일을 시킨 자가누구냐? 체사레가 모든 걸 꾸민 거냐?' 엘이 질문을 끝내자 남자들의 입을 막고 있던 벌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오, 오메른‥‥ 님입니다. " 한 사래가 떨리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전신을 뒤덮은 벌 때문에 남자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오메른·. 대체 오메른이란 자가 누군데‥‥‥‥“ 문너머에서 들리는 급박한 발소리들이 엘의 말을 멈추게 했다. 곧 문에 몸을 부딪친 듯 쿵 소리가 나더니 리오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엘! 괜찮은 거야, 엘?“ “그래, 난 괜찮으니까 너무 급하게 들어오지 마. 안에 벌이 있어. 그러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돼." 엘은 서둘러 주의를 줬다. 잘못하면 놀란 벌 떼가 리오를 공격할 위험이 있었다. 엘은 벌들을 조심스레 밖으로 내보냈다. 상당수의 벌들이 창고를 빠져나갔을 때 리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십여 명에 달하는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공포에 질려 멍하니 서 있는 남자들과 바닥을 구는 세 구의 시체, 또 곳곳에서 날아다니는 벌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해 주춤거렸다. “다친 덴 없는 거지?” 리오가 엘을 꼼꼼히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는지 기사와 병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사체를 밖으로 내갔고 기사들은 창고에 걸려 있던 밧줄로 남자들을 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사 한 명이 소곤거렸다. "난들 알겠어?“ “아무튼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건 틀림없는 것 같아. 여기 있던 시체봤어?” 남자의 몸에 밧줄을 감고 있던 다른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슬쩍 봤는데 말이야‥‥ 글쎄, 얼굴이‥‥‥‥” 주위를 살핀 기사가 한층 소리를 낮췄다. 두 기사는 얼굴을 가까이해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그들이 방심한 사이 남자에게 감겨 있던 밧줄이 조금 느슨해졌다.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힘껏 팔을 당긴 다음 가까이 서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곧장 엘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기사와 병사들이 고함을 터뜨렸다. 엘은 획 고개를 돌렸다. 리오가 그녀의 이름을 소리쳤다. 남자가 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흠칫한 그녀를 리오가 감쌌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 일시에 벌어졌다. "저건 마녀야! 마녀라고!"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 남자를 네 명의 기사들이 제압해 밖으로 끌고나갔다. “엘... 너‥‥ 괜찮니?” 엘은 멍하기만 했다. 무겁게 몸을 눌러오는 리오도, 토막토막 끊기는 그의 속삭임도, 손을 적시는 뜨거운 액체의 감촉도 모든 것이 아득했다. 마치 그녀와 세상 사이가 까마득히 멀어진 것 같았다. "엘....너‥‥‥괜찮‥‥니· . 엘‥‥‥‥“ 엘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깨에 전해지던 뜨거운 숨결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엘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기사들이 리오를 바닥에 눕히고 있었다. 리오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더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리오 ‥‥‥‥“ 엘은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목을 만져 보던 기사가 침울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엘은 기사를 지나쳐 리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그분은 이미‥‥‥‥“ 옆에 있던 동료가 팔꿈치로 기사를 쿡 찔러 입을 다물게 했다. 그의 신호를 받은 기사와 병사들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깊고 깊은 적막 속아서 엘은 리오를 바라봤다. "리오.... 일어나‥‥‥‥“ 심장 소리가 접점 커졌다. 귀가 멍멍해질 차가지 계속해서 미친 듯 쿵쾅거렸다. "제발· 일어나· 리오‥‥‥제발.....“ 절망이 숨죽인 채 목을 타고 올라왔다. 엘은 손을 내밀어 리오의 얼굴을 만졌다. 따뜻한 체온이 손끝을 적셨다. 그녀는 리오를 부둥켜안았다. "리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바보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엘은 비명을 토해내듯 부르짖었다. 그녀를 지탱해 주던 바닥이 허물어졌다. 아니,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난‥‥ 널 잃을 수 없어, 리오." 엘은 리오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브레이슬릿이 있는 별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로 얼룩진 드레스를 입은 엘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엘은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 루드비히의 팔을 움켜잡았다. "리오가 숨을 쉬지 않아요! 리오 좀 살려줘요, 루드비히! 제발이요!" "불가능합니다. " 루드비히가 조용히 말했다. "왜요? 루드비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잖아요! 루드비히는 뭐든지 다할 수 있잖아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순 없습니다. " "아니에요! 리오는 죽지 않았어요! 리오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엘은 격렬하게 루드비히의 팔을 흔들었다. "엘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닙니다. " 엘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루드비히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 " 루드비히의 어조엔 그녀에 대한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루드비히가 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내려다보던 엘이 말없이 모습을 감췄다. 체사레는 두 손바닥을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밀착시켰다. 땀이 배어든 오메른의 피부는 뜨겁고 미끄러웠다. 체사레가 갈비뼈를 하나하나 짚으며 복부로 손을 미끄러뜨리자 오메른이 몸을 꿈틀거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굶주린 듯 오메른의 입술을 탐하던 체사레가 돌연 그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오메른은 체사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난폭하게 그를 팽개쳤다. 침대 위에 쓰러진 체사레가 키득거렸다. 오메른은 입 안에 고인 핏물을 까펫 바닥에 뱉어냈다. "무슨 짓이냐?“ "왜, 마음에 들지 않았어?“ 오메른은 체사레를 노려보다 침대에서 내려섰다. 빤히 쳐다보던 체사레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색다르게 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마지막 추억은 그럴듯 하게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오메른이 체사레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마지막 추억이라고?“ “떠난다는 말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체사레가 피식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럼 무슨 뜻이냐?“ “조금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오메른은 체사레의 목덜미를 잡고 와락 끌어당겨 얼굴을 맞댔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라, 지금 당장‥‥" “알았어, 오메른. 별일 아니니까 그렇게 열 낼 필요 없어. 간단히 말할게. 이제 곧 사람들이 널 잡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 거야‥‥” 오메른의 얼굴이 경직되자 체사레가 천연덕스럽게 혀를 찼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오메른? 아직 중요한 핵심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이 더러운 개자식,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f' 오메른이 물어뜯을 듯 험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가엾은 오메른,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널 파멸시켰어. 넌 서클랜드 백작에서 시궁창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될 거야. 더러운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다 끝내 목숨까지 잃게 될 테고‥‥ 이 소리 들리지? “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조금씩 커져 갔다. 차사레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오메른의 손을 밀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집어 들었다. 바지를 입은 체사레가 윗옷을 걸쳤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클랜드 백작! 어서 문 여시오! 지금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숴 버리겠소!" "안 됩니다! 거기는 백작님 침실입니다!" "저리 비켜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체사레가 오메른을 돌아봤다. 오메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넌 기회가 있을 때 날 죽였어야 했어. 그게 네가 저지른 두 번째 실수야. 그럼 네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뭘까? 무엇일 것 같아?“ 체사레는 문을 부수는 굉음을 들으며 오메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날 사랑했다는 것." 체사레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순간 기사와 병사들이 부서진 문을 밟고 쏟아져 들어왔다. 침소에 들어서던 리자드는 멈칫하며 날카롭게 주위를 살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긴장시켰던 수상한 느낌의 원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리자드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달빛이 밀려들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엘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무슨 일이냐?“ 엘은 대답하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리자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술을 한 잔 따른 후 창가에 가 섰다. 엘이 입을 연 건 그가 술잔을 반 정도 비웠을 때였다. "리오가 죽었어요." 일순 리자드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리오가·. 죽었어요." 엘은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황폐한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눈물이 안 나와요. 리오가 죽었는데‥‥ 눈물이 안 나와요, 리자드. 그냥·... 그냥 꿈을 꾼 것 같아요 이 모든 게‥‥ 꿈인 것 같아요.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리오를 보러 갈 생각이에요. 꿈 얘기를 해주면 리오는 아마·. 싱겁게 웃고 말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개꿈이라고...·. 날 놀릴지도 몰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리자드‥‥ 그런데‥‥ 꿈이 아니면 어떡하죠?“ 엘은 매달리듯 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더욱 작게 몸을 웅크렸다 "오늘 리오가 나한테 청혼을 했어요. 대답은 나중에 해달라고 했는데‥‥ 난 그 자리에서 청혼을 거절했어요. 언제하든 대답은 똑같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자꾸 그 일이 후회가 돼요.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아니, 대답을 미루기만 했으면.... 조금만 미루기만 했으면....리오는 죽지 않았을 텐데‥‥ 죽지 않았을 텐데‥‥‥‥“ 리자드는 술잔을 창턱에 내려If다. 그리고 엘에게 다가가 냉정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유치한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거냐? 그럼 그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것 같으냐?“ “그래요, 살아 돌아올 것 같아요! 살아 돌아을 것 같아요! 살아 돌아와서 날 보며 미소 지을 것 같다고요!” "네가 이렇게 정신 나간 걸 안다면 그도 꽤나 기뻐할 거다. 무덤에서 돌아 을 정도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 리자드가 잔인한 비웃음을 드러냈다. "리자드가 뭘 알아요? 리오에 대해 뭘 알아요? 나에 대해 뭘 알아요? 리오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알아요?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 하나도 모르잖아요!" 엘은 리자드에게 사납게 대들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란 말이다! 징징대는 꼴은 더 이상 못 참아주겠으니까!" "리자드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 같아요? 치를 떨 때까지 울어줄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고래고래 울어줄 거예요!" 엘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팔 소매로 눈을 비볐다. “나쁜사람..... 이제 만족해요? 이제‥‥ 만족해요?” 엘의 입술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가슴이.... 너무 아파요...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리오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알아요? 엘... 너 괜찮니... 엘... 너‥‥ 괜‥‥‥‥“ 가슴이 터지도록 목이 메어왔다. 엘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지도, 숙이지도 않았다. 눈물이 걷잡을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울음이 계속해서 쓰라린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보라색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처절한 슬픔이 리자드의 가슴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그는 엘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엘이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리자드는 격렬히 흐느끼는 그녀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벽에 부딪친 물병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산산이 깨어졌다. "오메른! 내, 오메른 이놈을," 마체라타는 의자를 집어 드는 자일스를 보며 눈썹을 휘어 올렸다. 곧 장식장으로 내던져진 의자가 카펫 위를 굴러 그녀의 발치에서 멈췄다. "감히 내 뒤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그놈의 목을 내 손으로 따버릴거야! 다시는 일을 꾸미지 못하도록 놈의 시커먼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말겠어!" 자일스가 그악스럽게 고함을 쳤다. 마체라타는 눈동자를 크게 굴린 다음 자일스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자일스가 사납게 팔을 뿌리쳤다. "진정하라고? 내가 자금 진장하게 됐느냐? 그놈이 날물고 늘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느냐? 그걸 몰라서 그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냐?“ "사람들 모두 전하께서 이번 일을 꾸미신 걸로 여기게 되겠지요. 엘리시엔 황녀를 없애고 리아잔 제국의 황제가 되시려고 말입니다. " 마체라타가 심드렁하게 말하자자 자일스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솟았다. "이런, 제 말이 전하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군요. 짧은 소견 탓에 말살수를 하게 된 것뿐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릴 테니 크게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전하." 씨근거리며 마체라타를 노려보던 자일스가 의자에 내려앉았다. "놈의 입을 막아라, 마체라타." "그러니까 오메른을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마체라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 내가 놈을 서클랜드 백작 자리에 올려주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니 금세 밖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놈이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 날 걸고넘어질 수도 있다. 내 명령을 받고 사건을 도모했다 하면, 그것만으로도 놈의 죄는 가벼워질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거리낄 것도 없을 테고." 자일슨가 마체라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 거렸다. 마체라타의 눈동자에 불쾌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감정을 숨기고 자일스에게 다가섰다. "뒤탈을 없애려면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놈의 입을 막아야 한다. 즉, 날이 밝기 전에 놈을 죽이라는 뜻이다. " 마체라타는 허리를 굽혀 자일스의 옷자락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엔 농염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성심껏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칼 베리만은 은백색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리자드 앞에 내려놓았다. "차 말고 좀 더 강한 걸 드시겠습니까?“ “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됐습니다, 칼 베리만. 그러잖아도 술이 과해진 것 같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 리자드는 의자에 앉는 칼 베리만을 보며 말을 더했다. "누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뭐든지 지나치면 좋지 않은 거라고 말입니다. " "틀리지 않은 말이로군요.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 칼 베리만은 일부러 가벼운 말투를 사용했다. 풀벌레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두 사람의 눈길이 창밖을 향했다. "조용하군요. 잠들지 않은 건 작은 풀벌레와 우리 두 사람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든 깊고 깊은 밤에 마시는 차 한 잔이라....왜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일상이 되어버리면 그저 무덤덤해지는데 말입니다. " 리자드는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칼 베리만의 얼굴을 응시했다 "외롭지 않으십니까?“ 칼 베리만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담겼다 "혼자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외로운 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누군가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 누군가가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는지‥‥‥‥“ 칼 베리만은 혼잣말을 하듯 말끝을 흐렸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적 있으십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던 칼 베리만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예,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제 모든 걸 다 주고 싶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 여인을 잃었을 때‥‥ 세상 전부를 잃은 것만 같았습니다. " 칼 베리만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선웃음으로 짧은 침묵을 깼다. "어쩌다가 이렇게 감상적인 말이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대공. 오늘 황궁에서 안 좋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알고 계십니까? “예” 리자드가 짤막하게 답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어떻게 황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갑자기 친구를 잃으셨으니‥‥ 엘이 얼마나상심이 크실지‥‥‥" “누가 저지른 일입니까?” 리자드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까지는 못 들으셨나 보군요. 바로 얼마 전에 서클랜드 백작이된 오메른이란 자였습니다. " "오메른." 리자드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처음엔 오메른이 서클랜드 백작이란사실도 몰랐나보더군요. 이번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게 되었답니다. 그토록 악명 높은 자가 서클랜드 백작이 되어 있었다니‥‥ 자신의 정체를 감쪽같이 숨기고 신분을 조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하나 더 있더군요." 칼 베리만이 비밀을 털어놓듯 말소리를 낮췄다. "오메른을 서클랜드 백작 자리에 올린 사람이 바로 자일스 전하라는 것입니다. 전 얘기가 그렇게 연결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 "이번 일로 황궁이 왜나 시끄러워지겠군요." "그렇겠지요. 엘을, 리아잔 제국의 정통 후계자를 노린 범행이었으니·, 또 그 선이 황태자 전하와 닿아 있으니 말입니다. 자일스 전하의 연루 여부를 떠나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더군다나 아시리움에서 엘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아시리움의 적이 될 거라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칼 베리만은 심란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이 심각해진다면 아마 황위 계승 문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아시리움에서 이번 사건을 어느 정도 까지 문제 삼고 나올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 "법황이 그 아이에게 리아잔 제국을 갖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확고하다면 아마 리아잔을 발칵 뒤집어놓을 겁니다. " 리자드의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저라도 그렇게 할 테니까요." 칼 베리만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엘이 걱정입니다, 대공. 그 왕자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는데‥‥ 친구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으니 그 충격이 오죽하겠습니까? 듣자하니 엘에게 휘둘러지는 검을 자신의 몸으로 막다가 목숨을 잃었다하더군요. 정말 엘이 받은 충격과 슬픔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 오열하던 엘의 모습이 떠오르자 리자드는 창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칼 베리만." "예, 대공." 리자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던 칼 베리만이 먼저 이유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공?“ 리자드가 고개를 돌려 칼 베리만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모든 걸 접겠습니다. " 칼 베리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루벤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버리겠단 뜻입니다. " 칼 베리만의 전신이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공,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겁니까?'" “제 뼈 속까지 스며든 복수심을 없애려면 루벤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버려야 합니다. 그 이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국정을 맡길 만한사람도 두세 명은 되니, 발길이 닿는 대로 떠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없어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준비는 해야 될 테니까요." 사색이 된 칼 베리만이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됩니다, 대공! 말도 안 됩니다! 떠나시겠다니요? 모든 걸 포기하시겠다니요?“ “전 모든 걸 포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본연의 제 자신을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허울 좋은 말장난일 뿐입니다!" 칼 베리만이 탁자를 내려쳤다. "진정하십시오, 칼 베리만." 거친 숨을 몰아쉬던 칼 베리만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리자드와 눈길을 맞댄 채 강경한 어조로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리자드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다 서서히 사라졌다. "딱히 이유라 붙일 만한 게 없습니다. 어쩌면 조금 지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우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 칼 베리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에서 목쉰 어조가 흘러나왔다. "엘 때문이었군요." "아닙니다, 그 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 리자드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모르겠습니다, 대공. 왜 대공이 그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시겠다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 "이해해 주시길 바라고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다만 칼 베리만께 알리지도 않은 채 떠날 수는 없어서 말씀드린 겁니다. " 리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대공,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싫시오!" 칼 베리만은 안타깝게 소리쳤다. 문가에 멈춰 선 리지드가 그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칼 베리만."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칼 베리만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꽤나 청승맞은 꼴을 하고 있구나." 냉기 도는 바닥에 앉아 있던 오메른이 마체라타를 흘긋 쳐다봤다. “반갑다, 오메른." 마체라타는 감미로운 미소를 던졌다. 그런 다음 몸을 돌려가며 사방을 둘러봤다. "축축하고 지저분한 지하 감옥이라‥‥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구나. 네게도 썩 잘 어울리는 것 같고. 네 생각은 어떠냐, 오메른? 몸소 겪어봤으니 네가 나보다는 잘 알 것 아니냐?“ “꺼져라." "네 처량한 몰골을 제대로 구경해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꺼지라는 말이냐?“ 마체라타는 오메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정말 꼴이 딱하게 됐구나. 사랑스런 연인에게 배신당한 걸로도 부족해 목까지 잘리게 됐으니 ‥‥‥‥“ 오메른의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차올랐다. 마체라타는 그를 더욱 도발시키려는 듯 과장되게 혀를 찼다. "가엾은 오메른, 네가 어찌나 초라하고 궁상맞게 보이는지 눈물이다 핑 돌 것 같구나." 오메른은 번개같이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까짓 건 지금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다. " "얌전히 손을 거두는 게 좋을 거다, 오메른. 네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난 너처럼 곧 죽을 운명이 아니라서 말이다. "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가하던 오메른이 서서히 손을 떼냈다. "여긴 뭐 하러 온 거냐? 날 보며 비웃어주기 위해?“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거칠고 흘쭉한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가볍게 웃어대며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널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니라는 것뿐이다. 혹시 실망한 건 아니냐?“ 오메른이 실소를 지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 "그 대신 널 배신한 체사레를 내가 대신 죽여주면 어떨까? 전부터 비릿하게 웃는 면상을 대할 때마다 이상스레 피 토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체사레에게 손대지 마라 " 오메른이 을러대듯 거칠게 말했다. "아직까지도 그에게 애틋한 정이 남아 있나보지?“ 코웃음을 날린 마체라타가 계속해서 빈정거렸다. "정말 감동적이구나, 오메른.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더러운 배신자를 끝까지 아끼고 사랑하다니‥‥ 정말 성인이 따로 없구나. 말해봐라, 오메른. 체사레와 보낸 밤이 그 정도로 황흘했던 거냐?“ 오메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분노를 터뜨리길 은근히 바라고 있던 마체라타는 실망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할 말 다 했으면 꺼져라." 오메른이 지저분한 모포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마체라타는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동안 그를 바라봤다. "지난번에 네가 한 말‥‥ 너와 내가 지나치리만큼 닮았다고 했던 말·. 기억하느냐?'“ “기억한다. " "그렇다면 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느냐?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의 모든 걸 망가뜨리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감정‥‥ 느껴본 적 있느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오메른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래, 역시 너도 그런 감정을 품었던 누군가가 있었구나. 그때 넌 어떻게 했느냐, 오메른? 네 모든 걸 다 주었는냐, 아니면 그를 망가뜨렸느냐?“ “둘 다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거다. 난 마지막까지 어느 한쪽만을 택할 수 없었으니까." "둘 다라‥‥ 나도 너처럼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게 될까?“ 스스로를 비웃듯 탁한 웃음을 흘리던 마체라타카 벽에서 몸을 들었다. "네 처량한 꼬락서니도볼 만큼은 본 것 같으니 난 이제 사라져 주겠다. 잘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오메른. 곧 숨통이 끊어질 네겐 어울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뭐가 좋을까? 으음‥‥ 행복해라, 건강해라, 편안히 눈감아라...딱히 마음에 드는 말이 없구나." "날 죽이지 않고 곱게 살려 보내줘서 고맙다, 이 말은 어떠냐?“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던 오메른이 이죽거렸다. 마체라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긴 싫으니· 대신 이 말을 해주마, 오메른." 마체라타는 오메른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살아남아라." 오메른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내 유일한 능력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그거다, 살아남는 것."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짧은 미소를 교환했다. 엘은 마치 숨어 있는 것처럼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둥글게말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다 헝클어진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루드비히‥‥‥‥“ 엘이 울음 가득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루드비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처음엔 한 방울도‥‥나오지 않았는데· .이젠 멈추지 않아요. 왜 하필·. 왜 하필 리오가·. 죽은 걸가·. 자꾸 그런 생각만 떠올라요." 엘은 루드비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사람을 죽였어요, 루드비히‥‥ 세 명이나요. 세 사람을 죽였는데‥‥ 내 머리엔 온통 리오만 떠올라요. 내가 죽인 사람들·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그런 건 생각나지도 않아요‥‥‥나 정말‥‥ 못됐죠?“ 눈물이 고통으로 얼룩진 뺨을 끊임없이 적셨다. 루드비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볼을 닦아주었다. 엘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난 정말 못됐어요. 리오는 나 때문에 죽었는데· 난 온통 내 생각만하고 있어요‥‥ 리오가·,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하나....리오를·. 다시는 볼 수 없는데‥‥ 그럼 난 어떡하나.. 리오가 너무너무... 보고 싶으면 그땐‥‥‥‥“ 엘은 루드비히의 손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리오가·.보고 싶어요...루드비히‥‥ 리오가·. 너무· 보고 싶어요‥‥ 리오가‥‥‥‥“ 목메인 흐느낌이 심장 고동처럼 루드비히의 가슴을 채웠다. 그는 몸을 굽혀 가늘게 떨리는 엘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제 88장 살아가는 이유 간수병은 횃불로 발 밑을 비추며 습기 찬 돌계단을 내려갔다. 늘 해오던 일이고 익숙할 대로 익숙한 장소였지만 그는 신경이 약간 곤두 선 상태였다. 동이 터 오기 직전의 어둠은 한층 깊고 무거운 법이라서 횃불 하나만으로는 마음 놓고 움직일 정도의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황족 살해를 기도했던 중죄인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간수병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감옥 벽엔 저마다 작은 기름 단지가 달려 있었다. 파문에 흐릿하긴 했지만 잠들어 있는 죄수들을 살피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간수병은 철문에 뚫린 주먹만한 구멍으로 중죄인이 갇혀 있는 감옥 안을 들여다봤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죄인이 배를 움켜 잡은 채 바닥을 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오?“ 중죄인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간수병에게 돌렸다. 살려 달라는듯 팔을 뻗던 그가 비명을 지르며 울컥 피를 토했다. 간수병은 허겁지겁 빗장을 올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격렬히 몸을 뒤틀고 있는 중죄인에게 달려갔다. "왜 그러는 거요? 무슨 독이라도 마신 거요?“ 간수병은 엎어져 있는 중죄인을 바로 눕히기 위해 그의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중죄인이 민첩하게 몸을 돌리며 그의 목을 잡았다. 간수병의 눈에 공포가 밀려들었다. 오메른은 그 즉시 무자비하게 그의 목을 꺾어버렸다. 숨이 끊어진 간수병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오메른은 재빨리 일어나 간수병이 입고 있던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쳤던 윗옷을 찢어 피를 내기 위해 이로 물어뜯었던 손목을 감았다. 옷 뭉치를 불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으로 던져 넣은 그는 간수병의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가슴까지 모포를 덮어주었다. 오메른은 빈틈없는 눈으로 감옥 안을 살필 다음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간수병이 떨어뜨린 횃불을 집어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르키젤은 자일스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술잔을 집어 던졌다. "멍청한 놈!" 자일스를 살짝 비켜 나간 잔이 문에 부딪쳐 산산조각났다. 날아온 파편에 스친 자일스의 관자놀이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대체 넌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일을 엉망으로 망치는 것 외에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냔 말이다!" 자일스는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탯속까지 파고드는 자기혐오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야노쉬 공작이 보는 앞에서 치욕을 당한다는 모멸감에 비할 수는 없었다. "말해 봐라, 자일스! 네가 내 아들이 맞기나 한 거냐?“ 마르키젤의 광분은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야노쉬는 교묘하게 표정을 감춘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구경거리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자일스의 검붉은 낯빛을 훔쳐보던 그는 이 이상 황태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자신에게도 이로울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점잖게 입을 열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외람된 말씀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고의로 하신 일도 아닐 테고, 또 이렇게 노여워하신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일스를 노려보던 마르키젤이 탁자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잔을 내려놓은 후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서너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일스를 향해 명령했다. "앉아라." 자일스는 묵묵히 걸어와 야노쉬 옆에 자리 잡았다. 그가 앉자마자 마르키젤이 채 식지 않은 분노를 드러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가 서클랜드 백작 자리에 올린 놈이 실제는 오메른이라 하는 됫골목 버러지라 하던데· 맞느냐?“ “맞습니다. " 자일tm는 고분고분 인정했다. "고런 놈을 백작으로 만들다니‥‥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냐?'". "오메른은 됫골목 버러지이긴 하지만 이용하기 좋을 만큼의 능력과 힘을 가진 자입니다. 서클랜드 백작 작위는 놈을 편리하게 써먹기 위한 하나의 그럴 듯한 미끼였습니다. " 마르키젤이 자일스 옆에 멈춰 섰다. "아무리 유용한 놈이라 해도 써먹을 데가 따로 있지, 너와 연결된 놈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에서 그토록 민감한 일을 맡기다니! 내 너한테 섣불리 엘리시엔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말을 분명히 하지 않았느냐?'" “이번 일은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억울한 마음에 자일스는 등을 곧추세우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뭐라고? 네가 시킨 게 아니라고? 그게 말이 되느냐? 그럼 놈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오메른 놈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는지. 분명한 건 저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놈이 일을 저지른 후에야 보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 마르키젤의 얼굴에 석연치 않은 기미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번 일 뒤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인데‥‥‥‥" “그 오메른이란 자가 황태자 전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벌인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야노쉬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마르키젤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듣자 하니, 오늘 새벽에 간수병을 죽이고 도망쳤다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위험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놈이 탈옥을 한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험한 놈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조금만 어긋나도 해가 되어 돌아오기 십상이니까 말입니다. " "나도 공작과 생각이 같소. 놈이 살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말이오“ 자일스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마체라타에게 오메른을 죽이라 시킨 이후 그가 탈옥을 했다는 것도, 마체라타가 명령에 즉시 복종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는 사실도 마음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오메른을 추적해 입을 막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그건 이미 손을 써왔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는 오메른이란 놈이 아니라 바로 아시리움 종단이다. " "아시리움이라고요? 아시리움에서 벌써 이번 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인 겁니까?“ 마르키젤은 대답하기 전 자일스와 야노쉬 앞에 앉았다. "아시리움에서 자신들이 직접 이번 사건을 조사하겠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 계집애를 편들고 나온 거로 미루어, 널 어떻게 해서든 이번일에 연루시키려 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또 귀족 회의의 빠른 개회를 요구해 왔다. 표면적으로는 조언이라며 한시라도 빨리 황위 계승자가 결정되어야 국정이 안정될 거라는 그럴듯한 말을 붙여서 말이다. 아마 이번 사건의 여파가 잦아들기 전에 모든 걸 마무리 지으려는 속셈이겠지. 어쩌면 우리에게 일을 벌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한 가지 의아한 건 아시리움에서 왜 그토륵 엘리시엔 황녀를 돕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들자 애가 탄 자일스가 목청을 였다 “아버님, 그 계획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귀족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그 계집애를 함정에 빠뜨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제 아비와 같이 실성한 것처럼 꾸미기로 한 것 말이냐?” “예, 바로 그 계획 말입니다. 설마 이대로 덮으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마르키젤은 자일스의 입 안이 바짝 타 들어갈 때까지 말문을 열지 않았다. 참다못한 자일스가 소리쳤다. "아버님, 말씀 좀 해주십시오!"· “소란 피우지 마라, 자일스. 그래, 네 짐작이 맞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옳기기엔 시기가 적절치 않다. "· “그, 그럼 정말 덮으시겠단 말씀입니까? 절.... 포기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자일스의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지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널 포기하고 그 계집애에게, 페르가몬의 딸에게 리아잔을 곱게 바치라고? 어리석은 놈!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봐라!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할 것 같으냐?“ 마르키젤이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자일스를 노려봤다. 머쓱해진 자일tm가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어찌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 계집애를 실성한 것으로 모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번 사건이 모든 일을 망쳤다, 자일스. 살인 기도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석연치 않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 두 가지 사건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시리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일단 의혹이 생기면 엘리시엔을 실성한 계집애가 아닌 가엾은 희생자로 여기게 될 거다. 즉, 우리가 꾸민 계획이 그 계집애에게 해가되기는커녕 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시간이 갈수록 자일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그는 심술난 어린애처럼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냥 밀고 나가 그 계집애를 거꾸러뜨리면 되는 거지, 왜 이렇게 몸을 사리고 하나하나 따져야 하는지 그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기분이 언짢은 건 비단 자일스뿐만이 아니었다. 야노쉬 또한 계힉을 세웠다가 바꿨다, 또 포기했다 하는, 어찌 보면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황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이러다간 엘리시엔 황녀를 손에 넣는다는 당초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을 게 분명한 황제에게 그의 불만을 내보일수는 없었다. 야노쉬는 목을 가다듬은 후 공손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폐하, 부족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공작." 마르키젤이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야노쉬의 청을 수락했다. "폐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으려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시라면 귀족 회의가 지금 이 상태에서 열린다는 건데‥‥ 좋지않은 결과가 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단 엘리시엔 황녀가 황위 계승자로 확정된다면 그 결과를 뒤집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니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저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자일스가 얼른 동조하고 나섰다. 마르키젤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찼다. "무작정 계획을 밀고 나간다면 득보다 해가 더 클 거라는 말을 그토록 여러 번 하지 않았소? 그런데 아직도 내 뜻을 모르겠단 말이오? 이러쿵저러쿵 더 이상 들을 말도 없고, 할 얘기도 없으니 그렇게 알고 물러가시오, 공작. 자일스, 너도 마찬가지다. " 마르키젤의 태도가 강경하긴 했지만 자일스는 불안감과 혼란만을 얻은 상태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버님,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만약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그 계집애가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면 어찌합니까? 리아잔을 고스란히 그 계집애에게 넘겨줘야 하는 겁니까?“ 마르키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야노쉬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언의 명령을 눈치 챈 야노쉬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야노쉬가 나가자마자 마르키젤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번 내가 해준 말을 벌써 잊었느냐? 리아잔을 페르가몬의 딸에게 주느니 차리리 내 손으로 부숴 버리겠다고, 분명히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자일스는 기억이 떠오르자 눈을 반짝이며 마르키젤을 향해 당겨 앉았다. "예, 분명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얘기 뒤에 나온 말, 그것도 기억하느냐f'자일슨의 입술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예, 기억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계집애를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래, 자일스. 그게 바로 내 계획이다. 이번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나면, 그 계집애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게 될 것이다. " 마르키젤은 묘한 흥겨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운 나쁜 사고를 말이다. "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막막함이 느껴질 만큼 오래도록 깨어지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엘과 리반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로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서로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는 그들의 시선은 아득하도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늘‥‥‥‥“ 리반은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와 닿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슨 말을 꺼내려 했는지조차 한순간 까맣게 잊혀졌다. "오늘 떠난다고?“ 엘이 그의 말을 대신했다. 리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 떠나는구나." "그냥 가려고 했는데‥‥ 시종이 이걸 갖다 줘서‥‥‥‥“ 리반이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렸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랏빛 보석들이 촘촘히 박힌 팔찌였다. "리오가·. 너 주려고 산 거야." 엘이 손을 내밀자 리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건 쥬엘라야, 그냥 팔찌가 아니야. 그걸 사기 위해 상점이란 상점은 다 돌아다녔어. 계속 고개를 가로젓더니만 그걸 보더니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리고 좋아하더라고. 웃을 때 네 눈동자 색과 똑같다고 하면서." 엘은 쥬엘라를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시린 아픔이 젖어들었다. "전해주었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리오는‥‥ 나하고 함께 갈 거야." 리반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방을 가로질렀다. 엘은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리반. " 리반이 걸음을 멈다. “나,나 말이야·. 리오를 보면 안 될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리오를 보고 싶어." "보지마, 알렉스. 보지마‥‥‥‥ 리오도 너한테·,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을 거야." 엘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 올랐다. 흐릿하게 비치는 리반의 모습이꼭 리오처럼 보였다. 리오가 그녀 앞에 서 일는 것만 같았다. "리반‥‥ 날 엘이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한 번만‥‥‥‥“ 리반이 거칠게 몸을 돌렸다. "난 리오가 아니야! 난 리오가 아니라고! 젠장! 난 리오가 아니라고!" "그래‥‥ 난·. 리오가·. 아니야." 엘은 그녀의 영혼 밑바닥에서 겨우 끌어올린 듯 힘겸게 속삭였다. "난 네가 원망스러워. 난 정말·. 네가 원망스러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리오가 싫어하리란 걸 알면서도‥‥ 너만 만나지 않았다면...·. 너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리오가....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눈물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리반의 얼굴을 적셨다. 리반이 휘적휘적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엘은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문을 나서던 리반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잘 있어‥‥ 엘." 쥬네비아는 입가에 피어오르는 구슬픈 미소를 힘겯게 감췄다. 그녀를 맞는 자일스의 얼굴엔 귀찮다는 마음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자일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제 거처까지 오신 겁니까?“ 자일스는 쥬네비아가 앉기도 전에 마치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용건을 물었다. 쥬네비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보름이 넘도록 황태자를 만나지 못했잖습니까? 잘 지내시는지 걱정도 되고, 또 짧게나마 황태자와 몇 마디 담소라도 나누고 싶어 발걸음 했습니다. " 자일스의 토난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어머니께서도 좋아 보이십니다. "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겨워 보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쥬네비아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일스가 그들의 만남을 빨리 끝내기 위해 성가신 질문과 대답이 딸려 나오게 될 말을 일부러 피했음을 알 수 있었다. 황태자에게 이미 난 있으나마나 한 존재‥‥ 아니, 차라리 없길 바라는 존재가 되었군요. "그러고 보니 중요한 선약이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좀이 쑤시는 듯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던 자일스가 핑계를 대며 일어났다.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 쥬네비아의 어조엔 무시하기 힘든 위엄이 담겨 있었다. 자일스는 비딱하게 선 자세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우선 앉으십시오." 쥬네비아가 한층 무게를 실어 말하자 자일스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을 따랐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쥬네비아는 자일스의 불만스러운 얼굴을 보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마체라타를 언제까지 곁에 둘 생각이십니까?“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마체라타를 내보내십시오, 황태자 " "또 그 말씀입니까? 마체라타가 어머니께 무슨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 이러시는 겁니까? 이제 그만 하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자일스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분개조로 따져 물었다. "마체라타를 내보낼 마음이 조금도 없으신 겁니까? 그 아이를 평생 곁에 둘 생각이십니까?" “예, 그럴 겁니다! 마체라타를 황태자비로 맞을 생각입니다!" 쥬네비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게 정말 진심입니까?“ 자일스는 사색이 된 쥬네비아의 얼굴에 찜찜함을 느꼈다. 사실 그도 평생 곁에 두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정도 였지 마체라타와 혼인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는 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일 뿐 아니라 그의 체면까지 해치는 일이었다. "정말 마체라타를 황태자비로 맞을 생각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 자일스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다음 그 즉시 자신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쥬네비아는 한동안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암담했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프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쥬네비아는 허공을 향해 소용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잠꼬대를 웅얼대며 몸을 뒤척이던 소년이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를 체사레에게 걸쳤다. 체사레는 소년의 다리를 가차없다 싶을 만큼 냉정하게 밀쳐 냈다. 소년인 긴 신음을 흘리며 돌아누웠다. 체사레는 침대에서 내려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병에 반 정도 차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빈 병을 내려놓고 탁자 모서리에 걸쳐져 있는 다른 술병으로 팔을 뻗었다. 딱딱한 감촉이 손끝을 스치는가 싶더니 카펫 위로 떨어진 술병이 둔탁하게 굴러 탁자 아래로 들어갔다. "술병하고의 숨바꼭질이라‥‥ 이거 정말 멋진 밤이로군." 체사레는 빈정거리며 무릎을 꿇고 탁자 아래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래, 얌전히 거기 있어라." 술병을 움켜쥐려던 체사레가 일순 멈칫했다. 그의 눈앞에 사람의 다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체사레는 술병을 손에 쥐고 태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한잔 마실래?“ 체사레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오메른을 향해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나 혼자 마셔야겠군." 체사레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길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할았다. "놀랐어, 오메른. 날 어떻게 찾아낸 거야? 아니, 아니야, 솔직히 말해 난 네가 날 찾아오리라 짐작하고 있었어. 네 탈옥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네가 살아서 지하 감옥을 나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지만 말이야." 체사레는 조금 비틀대며 의자에 앉았다. "이런, 술이 많이 약해졌나 봐."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오메른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왜 말이 없어, 오메른? 아아·. 저 아이를 보고 있었군." 체사레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소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 새로운.... 으음·. 연인? 아니, 상대라는 말이 더 낫겠어. 내 새로운 육욕의 상대 어때, 오메른? 썩 괜찮지 않아?“ 갑자기 체사레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미안‥‥미안해, 오메른. 네겐 너무 가죽이 연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자꾸 웃음이 나와." "네 새로운 육욕의 상대는 만족스럽나?“ 오메른의 어조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매끄러웠다. 체사레는 웃음을 멈추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뭐, 그럭저럭.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데, 사실 내 취향은 바로 저런 아이야. 보기만 해도 잡아먹고 싶어지는 가냘프고 귀여운 아이." 체사레가 오메른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넌 내 취향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오메른. 그런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 너와 뒤엉켜 있는 시간이 그다지 싫진 않았다는 거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거냐?“ “아니, 그렇진 않아. 고맙다는 말은내가 해야 될 테니까. 내가 널 찾기 전에 네가 먼저 나한테 와줬잖아, 오메른. 널 찾아내 죽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머리가 좀 아팠거든. 난 골치 아픈 일은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고맙게도 네가 내 수고를 덜어준 셈이지.정말 고마워, 오메른." 어둠 속아서 오메른의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뭐야, 이미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체사레가 놀리듯 눈웃음을 쳤다. "내가 널 죽이러 왔다는 걸 너도 모르진 않을 거다. "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네 손에 죽을 정도로 한심하진 않아. 내 힘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널 죽일 만큼은 되거든." 두 사람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이제 죽느냐, 죽이느냐‥‥ 눈을 뗄 수 없는, 목숨을 건 혈투가 벌어지는 건가?“ 자못 비장하게 말한 체사레가 히죽 웃었다 "오메른, 걱정하지 마. 고통없이 죽여줄 테니까. 네가 힘들어 하는건 나도 보기 싫거든." 체사레는 오메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법은 시현되지 않았다. 체사레의 얼굴이 망연자실해졌다. "이,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된 거지?“ “넌 술을 마시면 힘을 쓸 수 없다.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 오메른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체사레의 입술에 일그러진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조차 몰랐던 걸 네가 알고 있었단 말이야, 오메른?“ “그래, 네 말대로 난 널 사랑했으니까 말이다. " 오메른은 말을 끝내자마자 체사레의 심장 깊숙이 단검을 박아 넣었다. 의장이 연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술렁거림이 잦아들었다. 연단을 향하는 귀족들의 눈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저마다 흥분과 자긍심이 서려 있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귀족 회의에 한두 번 참석해 보았을까 말까 한 젊은 귀족들의 고조된 마음은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공기까지 후끈 달아오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황위 계승자를 결정할 수 있다는, 그런 중대한 일에 자신도 한몫 담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건 강한 최음제처럼 귀족들을 사로잡고 달뜨게 만들었다. 황위 계승자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은 오로지 황제만의 권한이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고, 관여할 마음조차 품을 수 없는 절대 권력자만의 성역이었다. 지금과 같이 귀족 회의에서 황위 계승자를 결정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게 된 건, 정통 황위 계승자의 예상치 못한 출현으로 빛어진 미증유의 사건일 뿐이었다. "표결에 앞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소견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회의 의제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토론이 아닌 발표의 형식이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희망하는 분께선 멀저 발언권을 청하신 뒤 연단에 올라주시기 바랍니다. " 의장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이 고개를 길게 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먼저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걸걸한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리며 일어선 사람은 에젠버그 후작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에젠버그는 당당한 태도로 걸음을 옮겼다. 연단을 오르는 그에게 모든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에젠버그는 연단 중간에 서서 엄숙한 얼굴로 귀족들을 둘러봤다. "나와 여러분들은 리아잔 제국의 황위 계승자를 선택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소! 다시 말해, 바로 우리 손에 리아잔의 미래가 달려 있는것이오! 리아잔 제국의 미래를, 리아잔 제국의 앞날을 결정짓는 이 막중한 책임이 바로 우리 손에 놓여 있소!" 에젠버그는 쥐 죽은 듯 고요한 회의실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에젠버그의 위엄과 열정이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돌리지 못하토록 귀족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내, 지루한 얘기로 더 이상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않겠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건 오직 이거 하나뿐이오! 리아잔 제국의 미래, 오직 리아잔 제국의 미래만을 생각해 주시오!" 에젠버그는 발언을 끝내고 연단을 내려왔다. 그가 엘리시엔 황녀를 황위 계승자로 뽑아야 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늘어놓으리라 예상하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이 담긴 시선을 교환했다. "에젠버그 후작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회의 진행 중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평생 잊지 말고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충언이었습니다. " 의장이 에젠버그의 발언을 치하했다. "에젠버그 후작 외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싶으신 분은 말씀하십시오. " 자일스 황태자의 지지자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제스트 백작과 명실공히 황제의 오른팔로 불리는 야노쉬 공작에게 귀족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제스트 백작이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윈스턴 백작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보냈다. 윈스턴은 제스트 백작을 보지 못한 척 시치미를 떼며 옆에 앉은 랑케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제스트의 눈에 일순 노기가 나타났다. 하지만 윈스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로선 대놓고 분통을 터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시엔 황녀는 아시리움 종단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황위 계승자로 결정될 것이 거의 확실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공개 석상에서 자일스 황태자를 편드는 발언을 한다는 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원로회 귀족들이 이해득실을 따져 몸을 사리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 셈이었다. 상석에 앉아 제스트와 윈스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야노쉬는 불쾌한 마음에 턱을 실룩였다. 줏대없는 것들‥‥ 저러다 자일스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발 밑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어대겠지. 엘리시엔 황녀에게 고이 황권을 물려줄 마르키젤이 아님을 잘 알고있는 야노쉬는 눈치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귀족들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마뜩찮은 눈초리로 제스트와 윈스턴을 일별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한마디 하겠소." 조금씩 커지던 수군거림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야노쉬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들을 은근히 즐기며 느긋하게 연단을 올랐다. 발언을 시작하는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은커녕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에젠버그 후작이 정말 훌륭한 말을 해주었소! 오직 리아잔 제국의 미래만을 생각하라. 내가 지금 꺼내려는 얘기도 그 말과 크게 다르지 않소! 리아잔 제국은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초강대국이오! 감히 어느 누구도!" 야노쉬는 됫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리고 한층 목소리에 힘을 실어 발언을 계속했다. "설령 아시리움 종단이라 해도 우리 리아잔 제국의 일에 간섭할 수 없소! 아시리움의 태도는 리아잔 제국을 얕보고 행하는, 있을 수 없는 내정 간섭이오! 아시리움 종단은 리아잔을 자신들의 속국처럼 대하고 있단 말이오!" 야노쉬가 극도로 민감한 부분을 노골적으로, 더군다나 적대감까지 드러내며 파헤치자 놀란 귀족들이 일순 숨을 멈췄다. 그들은 다시 말을 꺼내려 하는 야노쉬를 주시하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모인 여러 귀족들 모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거요! 아시리움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못난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는 막이오! 아시리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리시엔 전하를 편들고 있소! 아마 이 사실을 모르는 귀족은 한 명도 없을 것이오!" 야노쉬는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귀족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직접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내, 이제 여러 귀족들에게 묻겠소! 리아잔 제국의 존엄한 국권을 지켜 자일스 황태자 전하를 우리의 주군으로 섬길 것이오, 아니면 리아잔제국은 물론 자신의 명예까지 더럽히며 아시리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에젠버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노쉬의 얼굴에 선명한 비웃음이 나타났다.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요, 후작?“ “그럼 공작의 발언이 타당하다는 겁니까? 왜 귀족들의 감정을 자극해 마치 이번 일이 리아잔 제국과 아시리움 종단의 권력 다툼인 것처럼 몰고 가시는 겁니까? 왜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糊塗)하시는 겁니까,공작?'" “말조심하시오, 후작.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하다니 !" 야노쉬가 격분해 소리쳤다. "예, 어떻게 해서든 자일스 전하를 황위 계승자로 추대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말장난을 치신 겁니다. " "마, 말장난? 말장난이라고? 감히 내게 말장난이라고?“ 야노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지자 당황한 귀족들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도량 넓고 명망 높으신 분들께서 왜들 이러십니까? 두 분 다 고정하십시오." "예,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두 분 모두 리아잔 제국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워낙 깊은 까닭에 흥분이 과해지셨나 봅니다. " "니콜라우스 공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 귀족들 중두분의 충정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중요한 회의를 생각하셔서라도 마음을 푸십시오.“ 야노쉬는 더 이상 버텨봐야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에젠버그도 묵묵히 의자에 앉았다. "더 이상 발언을 원하는 분이 없으시다면 표결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귀족들의 얼굴엔 숙연함까지 감돌고 있었다. 의장이 회의 진행을 돕는 두 명의 의전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이 나무를 얇게 잘라 만든 현판을 들고 회의실을 돌기 시작했다. 현판엔 각각 엘리시엔 황녀와 자일스 황태자의 정식명이 새겨져 있었다. 의제의 중대성에 비해 표결 방법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의전관이 현판을 내밀면 귀족들은 자신의 인장을 찍든지, 거부 의사를 밝히고 의전관을 보내든지,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눈앞에 현판이 내밀어진 후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금방 끝날 것 같던 회의는 하염없이 길어졌다. 기진맥진한 귀족들이 회의장을 빠져나왔을 때 사방엔 온통 석양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왠지 모를 미련에 회의장을 돌아봤다. 몇몇 귀족들은 친분있는 사람과 귓속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선뜻 회의장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귀족들은 싸늘한 저녁 바람에 소름이 돋자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귀가를 서둘렀다. 침대에 누워 있던 엘은 가프네 황비가 방문했다는 메이나의 말에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병자처렁 발을 끌며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멍하기만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엘이 문을 열고 나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가프네 황비가 몸을 일으켰다. "전하." 예를 갖추는 황비를 따라 엘도 머리를 숙였다. 놀라 눈을 크게 떴던 가프네가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뵈었습니다 " 가프네는 엘의 마음을 배려해 리오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치 착을 읽는 것처럼 엘의 어조는 극도로 메말라 있었다.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에 닿아 있는 가프네의 눈길에 연민이 담겼다. 그녀는 황폐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에 엘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엘과 아르벨라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가프네는 충동적으로 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힘내십시오, 전하. 힘내십시오." 황비의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했던 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벨라 황녀가 황비님을 많이 닳은 것 같아요. 모르고 봐도 두 분 관계를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요." "전하께서 우리 아르벨라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전하." 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마르키젤과 자일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가프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괜한 말로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군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아무쪼록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걸음을 떼려던 가프네가 머뭇머뭇 엘에게 몸을 돌렸다. "저‥‥ 만약 전하께서‥‥‥‥“ 가프네는 몇 번이나 마음을 바꾸며 주저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신다면....우리 아르벨라가 돌아을 수 있을지‥‥‥‥" “예‥‥ 아르벨라가 윈한다면 언제든지요." 가프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암울하기만 하던 마음에 희망이 밀려들자 그녀는 감사의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두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엘에게 그녀의 심정을 대신 전해주었다. 가프네는 다시 한 번 엘의 손을 꼭 잡은 다음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부랴부랴 문을 나섰다. 엘은 그녀의 됫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리오, 이런 게 산다는 걸까?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는 거· 그게 삶일까? 난 잘모르겠어, 리오 하지만‥‥‥ 나 기운을 내야 하나봐. 나한테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이 있어. 내 손을 꼭 잡아준 사람·. 내 아픔을 함께해 준사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하는 건가 봐. 제 89장 뒤틀린 운명 귀족 회의의 표결 결과가 정식으로 발표된 건 회의가 있은 지 이틀째 되는날 아침이었다. 발표가 끝나자 새벽같이 입궁했던 많은 귀족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교차됐다. 페르가몬의 추종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얼굴엔 감격 어린 기쁨이 서려 있었고, 자일스를 지지하던 귀족들은 착잡함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몇 표를 얻고, 어느 귀족이 누구를 뽑았는지 등의 세세한 사항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수의 귀족들이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이미 상세한 정보를 손에 넣고 있었다. 표결 결과는 황궁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그걸 몰라서 물어? 현 황제 폐하께서 물러나시면 엘리시엔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시녀가 다시금 넌지시 물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선?“ “황태자 전하께선‥‥ 아니, 이제 황태자 전하라 부르면 안 되는‥‥‥‥” 친구의 격한 숨소리를 듣는 순간 시녀는 획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서 있는 황후를 발견하자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폐, 폐하‥‥‥‥" “시녀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냐? 보내온 전문이나 전언도 없고?” 쥬네비아는 시녀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친구를 대신해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아직 아무 소식 없으십니다 " "알았다. 도착하는 즉시 접견실로 들어오라고 전해라." 쥬네비아는 가늘게 한숨 지으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발길이 가는 대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몸에 땀이 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싸늘해질 대로 싸늘해진 손과 발은 조금도 온기가 돌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가 견디기 힘들 만큼 차 오른 쥬네비아가 직접 가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일tm의 거처로 보냈던 시녀장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어떻던가? 어서 말해 보게." 쥬네비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시녀장을 성급히 재촉했다. "분위기는 그저 평온합니다. 폐하께서 염려하실 만한 일은 조금도 없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자일스 전하께선 어찌하고 계시다 하던가?'" "전하의 수석 시종 말에 따르면 평상시와 크게 다른 점은 없으시다합니다. 표결 결과를 들으시고 몇 마디 험한 말씀을 하신 것 빼고는 평소와 똑같다, 아니, 오히려 더 조용하시다 합니다. " "더 조용하다‥‥‥‥" 쥬네비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녀장은 소식을 듣고 안심할 줄 알았던 황후의 얼굴이 펴지기는커녕 더욱 깊게 주름지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폐하,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 "아니, 아닐세. 그것 외에 내가 명한 일은 잘 처리했는가?'" “예, 폐하께서 내리신 명대로 전하의 거처에 시종 세 명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소소한 일까지 빠뜨리지 말고 보고하라는 말을 일러놓았습니다. 물론 엘리시엔 전하가 계시는 별궁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 "그래, 수고했네. 그만 나가서 일 보게." 쥬네비아는 문을 나서는 시녀장을 뒤로하고 창가로 걸어갔다. 지나치게 밝은 햇살이 눈을 시리게 했다. 그녀는 고통을 반기기라도 하는것 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시큰거리더니 곧 찌르는 듯한 아품이 머리까지 파고들었다 쥬네비아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그녀의 지쳐 버린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고단한 몸을 창틀에 기댔다. 햇볕에 잠긴 전신이 노곤해졌다. 한동안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던 쥬네비아는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요근래 그녀는늘 이런 상태였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하다가도 어느 순간 넋이 빠져나간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쥬네비아는 커튼을 내렸다. 우수 어린 그녀의 얼굴에 창백한 그늘이덮였다. 어쩌면 악몽이 가져다 준 저주받은 선물일지도..... "전하께서 황위 계승자로 확정되셨다 합니다! 지금 이 얘기로 황궁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경축드립니다, 전하!"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겠는지 메이나는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메이나." 엘은 메이나의 흥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걱정스레 흐려지는 메이나의 얼굴에서 자신의 의도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지금 심신이 편찮으신 상태라는걸 잘 알면서도‥‥ 흥분이 과해 경거망동했습니다. " "아니에요,메이나. 아니에요. 그저‥‥좀 얼떨떨해서 그래요. 너무 갑작스런 얘기라‥‥ 그것뿐이에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전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메이나는 엘에게 근심 어린 시선을 던진 다음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갔다. 엘은 자신이 기뻐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왜 놀라움조차 느끼지 않는지, 왜 이렇게 무덤덤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황위 계승자로 결정되면 환호성을 지르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릴까? 원하던 것이 막상 이루어지면 나처럼 그저 멍하기만 할까? "리오라면 아마 천장까지 펄쩍 뛰어올랐을 거야 " 엘은 리오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눈앞이 흐릿해지자 그녀는 투덜거리며 눈을 문질렀다. "아직까지도 나을 눈물이 남아 있다니‥‥ 리오가 봤다면 바보, 멍청이라 했을 거다. 이 바보, 멍청아." 엘은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리오, 언제쯤이면 널 생각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환하게 웃고 있는 널 떠올리며 나도 웃을 수 있을가?" “절 보고 싶어해 주신 것만으로도 기쁘고 황송한데, 절 위해 다과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폐하 " 마체라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쪽으로 앉게." 쥬네비아는 손을 내밀어 의자를 권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어려 있는 정중한 부드러움에 놀란 마체라타가 눈을 크게 떴다. "감사합니다, 폐하." 마체라타는 의중을 떠보는 듯한 시선으로 쥬네비아를 살피며 그녀의 말에 따랐다. 쥬네비아가 예의를 갖춘 점잖은 투로 말을 꺼냈다. "내,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이네." 마체라타는 싱긋 웃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쥬네비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체라타도 그녀를 따라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 맛이 어떤가? 내가 가장 즐겨 마시는 차라네." "제 취향에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폐하" 쥬네비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조용히 찻잔을 내려놨다. "말 돌리지 않고 솔직히 털어놓겠네. 자네가 꼭 말해 주었으면 하는게 있네. 뭐냐 하면 자일스에 대한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 그 아이의 몸을 고쳐 주었는지, 그걸 알고 싶네." 마체라타는 거리낌없이 답했다. "자일스 전하제 세상에 둘도 없는 비약을 드렸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몸의 불완전한 곳을 정상으로 고쳐 주는 비약입니다. 간혹 정상을 뛰어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 "불완전한 곳을 정상으로? 그래서 그랬던 건가? 없던 팔이 생기고 못 쓰게 된 눈이 보이게 되고 또‥‥‥‥" “또 없던 생식 능력이 생기고 말입니다. " 마체라타는 쥬네비아가 말 중간에 입을 다물어 버리자 유연하게 뒤를 이었다. 쥬네비아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그녀는 냉정을 잃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약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어떤 약인데 그런 일이 가능한 건가?' "이 세상엔 폐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 마체라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쥬네비아는 경계 어린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고정했다. 차를 두어 모금 마시던 마체라타가 별안간 찻잔을 떨어뜨렸다. 쥬네비아는 목을 움켜쥐는 그녀를 보며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이럴 생각까진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정말‥‥ 하지만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울컥 피를 토해낸 마체라타가 쥬네비아를 노려봤다. "독을·. 차에 독을 넣으셨군요." “다른 건 다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해도, 모든 걸 다 참을 수 있다 해도 너와 내 아들이 혼인하는 것만은·.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 바닥으로 쓰러질 뻔한 마체라타가 탁자를 부여잡으며 기침을 터뜨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쏟아지는 선혈이 카펫을 검붉게 물들였다. "차라리·. 말씀을 하셨으면‥‥‥‥“ 겨우 기침을 멈춘 마체라타가 고개를 꺾은 채 갈라진 어조로 속삭였다. "차라리 나한테 떠나달라고 말씀하셨으면..... 들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입 닥쳐라! 그럴 네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내 말을 들을 네가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그 따위 헛소리 집어치워라!" 쥬네비아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마체라타가 거칠고 탁한 웃음을 흘렸다. ·. “예, 알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헛소리는 이만 집어치워 드리겠습니다. " 마체라타의 어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명확했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쥬네비아가 눈매를 좁혔을 때 그녀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쥬네비아는 격한 숨을 를이켰다. 부릅뜬 눈에 공포가들어차며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어,어떻게· 어떻게....“· ”그걸 묻고 싶으신 겁니까?“ 마체라타는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쥬네비아에게 보여주었다. ·.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제 몸에 흐르는 제 아버지의 피. 제 아버지의 피가 모조리 말라 버리지 않는 한, 독 따위로는 절 죽일 수 없습니다. " 마체라타는 잔인할 정도로 서서히 쥬레비아에게 접근했다. · “정말 안타깝군요. 절 죽이고 싶으셨다면 목을 따든지, 아니면 심장을 찌르든지 하셨어야 했습니다, 폐하." 쥬네비아의 전신에 발작적인 경련이 일어났다. 더듬더듬 뒤로 물러서던 쥬네비아가 더 이상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폐하에 대한 증오심을 이대로 묻어두려 했는데‥‥ 이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 "마녀! 사악한 마녀! 넌 살아 있어선 안 돼! 너 같은 건 태어나서도 안 되는 거 였어 !" 쥬네비아가 새된 고함을 질린다. 마체라타의 눈동자가 완전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쥬네비아 황후, 당신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어. 이제 바라던 대로 해주지." 마체라타가 입술을 비틀어 음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쥬네비아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혹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십니까?“ 심상치 않은 소리에 긴장하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이 질문을 던져 왔다. 다. "폐하!" 놀란 시종과 시녀들이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쥬네비아는 자신을 부축하는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의지하며 입을 열었다. “가서 엘에게...·. 엘리시엔 전하께 뵙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라‥‥” "그거 알아요?“ 엘은 리자드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그녀를 흘긋 쳐다본 리자드가 쓰고 있던 서신을 다시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안다. " "그게 뭔데요?“ 엘은 따지듯 물었다. "그거는 그거겠지." 리자드가 싱겁게 대꾸했다. "그거는 그거가 아니에요! 모르면서 괜히 아는 척하지 밀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척하지 말라고요!" 엘은 계속해서 뾰족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들릴 듯 말 듯 낮은 한숨을 내쉰 리자르가 철필대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바쁜 사람 붙잡고 시비 거는 거냐?'" “그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리자드가 제일 못됐으니까요. 얼굴을 볼 때마다 시비 걸고 때려주고 싶을 만큼 못됐으니까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자드가 뒤늦게 말을 받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맞긴 뭐가 맞아요? 바보 같으니! 바보, 멍청이 같으니! 그럴 땐 화를 내며 아니라고 소리쳐야 하는 거라고요!" 엘은 주먹을 움켜쥔 채 씨근덕거렸다. 이유 모를 분노가 가슴을 치받아왔다. 당장이라도 리자드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면 네 마음이 편해지겠나?“ 두 사람의 눈길이 맞닿았다. 그리고 침묵이 다시 자리 잡았다. 청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못난 마음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지자 엘은 스르르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높낮이없는 음조로 말을 꺼냈다. "난 리아잔의 황제가 될 거예요. 리자드가 갖고 싶어하는 리아잔 제국의 황제요. 난 리아잔을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그 누구에게도요. 설사·. 그 사람이 리자드라고 해도요." 엘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하지만 그 물건은 줄 수 있어요. 리자드가 달라고 하면, 원하기만하면....·. 언제든지 줄 수 있어요." "필요없다. " 리자드가 잘라 말했다. 엘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열렸다. "뭐· . 라고요?'" “필요없다고 했다. " "왜요.?'" “갖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숨이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목을 막아버린 숨결이 두려움으로 변해 엘의 가슴 밑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리자드가 그녀와 이어진 마지막 줄을 끊으려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리자드는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물건은 당분간 내가 갖고 있을게요.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곧바로 알려줘요." 엘은 고르지 못한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리자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엘은 허겁지겁 리자드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손으로 브레이슬릿을 감쌌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엘을 맞은 건 메이나의 수심 어린 목소리였다. "전하, 지금까지 어디 계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여러 번 전하를 찾으셨습니다. " "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모님이 날 찾으셨다고요?'" “예, 세 차례나 사람을보내시고, 한 번은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메이나가 우물쭈물하며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데요? 괜찮으니까 어서 해봐요." "제 생각이지만 황후 폐하께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어찌나 안색이 창백하신지‥‥꼭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 이,이런, 죄송합니다, 전하! 생각없이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괜찮아요, 메이나. 그것보다 빨리 이모님께 가봐야겠어요." 엘은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메이나가 황급히 외쳤다. "조심하세요, 전하!"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 아닐 테니까." 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복도를 걷는 그녀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메이나의 불안이 옮겨지기라도 했는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불길한 마음이 커져 갔다. 엘은 별일 아닐 거라는 말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왜 아직까지 아무 소식 없는 건가?' 의자에 앉아 손수건을 비틀며 문을 바라보던 쥬네비아가 시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시자마자 폐하께서 찾으신다는 말씀을 올려달라고 몇 번이나 얘길 해두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금방 전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폐하." "아니, 다시 한 번 사람을 보내보게. 아니, 아닐세, 내가 직접 가봐야겠네." "폐하!" 시녀장은 문으로 향하는 쥬네비아를 허둥대며 뒤따랐다. "폐하, 제가 엘리시엔 전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폐하께선 좀 누워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럴 생각 없네." 쥬네비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밖에서 시종과 시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쥬네비아는 문을 열어젖혔다. 검을 뽑아 든 자일스가 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니께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마체라타를 건드리시면 어머니라 해도 용서치 않겠다고!" 자일스의 초록빛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쥬네비아는 매달리듯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가는 시종과 시녀들의 모습이 불분명하게 시야를 스쳤다. "저, 전하.""고, 고정하십시오· 전하." 안으로 들어온 경비병 두 명이 자일스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렸다. 자일스가 돌발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경비병들의 가슴과 복부에 붉은선이 그어졌다. 영문을 몰라 하며 서로를 쳐다보던 두 경비병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쥬네비아가 새된 고함을 질렀다. “폐, 폐하‥‥‥ 겁에 질린 시녀장이 쥬네비아의 옷자락을 그러잡았다. 자일스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틀어쥐고 두 사람을 향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시녀장은 숨을 헐떡이며 안락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자일스‥‥ 난 네 어미다. " 쥬네비아는 목을 쥐어짜듯 힘겯게 말했다. "내가 먼저 어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어머니가 날 죽일 겁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체라타냐? 마체라타가 그런 말을 한 것이냐?'" “어머니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어머니를 죽여야 합니다. " 자일스가 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흐리멍덩하게 팽창된 동공을 발견한 순간 쥬네비아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 차려라, 자일스! 그 마녀가 널 홀린 것이다!" "마체라타를 건드리면 어머니라도 용서치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내가 먼저 어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어머니가 날 죽일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어머니를 죽여야 합니다. 어머니가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어머니를 죽여야 합니다. " 같은 말을 되풀이해 뇌까리던 자일스가 쥬네비아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자일스!"쥬 네비아는 비명처럼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멈춰 !" 뒤에서 강경한 외침이 들려왔다. 자일스가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있는 엘을 바라봤다. "검을 내려놔, 자일스. 그리고 뒤로 물러서." 엘은 신중하게 자일스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자일스가 문에 기대서 있는 쥬네비아에게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사색이 된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엘은 펄쩍 몸을 날렸다. 검 끝이 쥬네비아의 어깨를 스치는 찰나 한 덩어리가 된 엘과 자일스가 카펫 위를 굴렀다. 엘은 팔꿈치로 자일스를 밀쳤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반대쪽으로 던졌다. 분노에 차 괴성을 지르던 자일스가 엘의 복부를 걷어찼다. 엘은 고통스런 비명을 터뜨리며 몸을 반으로 접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어선 자일스가 쥬네비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쥬네비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하세요, 이모님! 어서요!" 엘은 급박하게 소리쳤다. 쥬네비아는 문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자일스가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엘은 배에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하고 자일스에게 달려들었다. 자일스가 오른팔로 그녀를 거칠게 후려쳤다. 엄청난 완력이 엘을 저만치 바닥으로 나굴게했다. 쥬네비아에게서 꼭꼭 목 졸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쥬네비아가 죽는다는 공포만이 엘을 덮쳐왔다. 엘은 눈앞에 보이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일스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며 그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몸을 움찔거리던 자일스가 천천히 엘을 돌아봤다. 일그러진 그의 입술에서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던 자일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청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시녀장이 의자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며 연달아 외마디 소리를 질러댔다. "자일스‥‥‥‥“ 쥬네비아는 손을 내밀어 자일스의 등에서 검을 뽑아냈다. "자일스 내 아들‥‥‥“ 쥬네비아의 목소리는 매우 연약했고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피를 막으려는 듯 자일스의 등을 보듬어 안았다. "이, 이모님‥‥‥‥“ 엘은 쥬네비아를 나지막이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어깨에 닿는 그녀의 손길을 쥬네비아가 사납게 밀쳐 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자일스를·. 왜 자일스, 내 아들을.....“ 쥬네비아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아잔을 빼앗아가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부족했습니까? 왜목숨까지‥‥ 리아잔을 빼앗더니‥‥ 이젠 목숨까지‥‥‥‥“ 엘은 쥬네비아에게서 등을 돌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문가에 서 있던 시종, 시녀,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길을 내어주었다. "왜 내 아들을 죽였습니까?“ 쥬네비아의 목쉰 절규가 엘의 가슴을 헤집었다. 이모님을 잃을까 봐 겁이 났어요. 이모님까지 잃게 될까 봐 너무 겁이 났어요. 엘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햇살이 너무강해‥‥ 눈이 시릴 만큼 ·그래서 그런 것뿐이야. 너무햇살이 강해서 가슴까지· . 시린 것뿐이야. 황족 사이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사건은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처리되었다. 쥬네비아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두 경비병들의 사체는 불에 태워졌고, 그들에게서 어머니를 구하려다 큰 부상을 당한 자일스는 어의관들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얘기는 그렇게 맞춰졌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사람들은 철저히 입막음을 강요당했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꾸며진 일그러진 얘기를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메이나조차 엘의 파리한 얼굴을 단지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탓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다행히 고비는 넘기셨다 합니다.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계신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러신 것 같다고 ......수석 어의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전하." 메이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앞으로 걷지 못하게 되실 가능성이 높다고‥‥ 그러니까 누워서만 지내게 되실 거라고‥‥ 그런 말씀도 하셨답니다. " 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충격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셨을 텐데‥‥ 힘드시겠지만 다 잊어버리고 편히 쉬십시오." 메이나는 걱정스레 엘을 살피다 코를 훌쩍이며 문을 나섰다. 엘은 어스름이 깔린 창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반쯤 내려진 커튼사이로 잿빛 구름에 가린 청담한 하늘이 보였다. 엘은 자일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가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에 잘됐다며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죄책감에 눈물지어야 할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애조 띤 메이나의 목소리가 자신과 상관없는 별세계의 얘기로만 들렸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자일스가누구인지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망 어린 쥬네비아의 외침도 깊숙이 묻혀져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안개 속으로 매몰되어갔다. 너무 깊이 떨어져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꼭 해야 될 일이 남아 있음을 깨달은 건 하늘에 온통 회청색 물이 들었을 때였다. 엘은 무감각한 세상이 자신의 모든 걸 잠식하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엘을 본 칼 베리만이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몸을 세웠다. 기우뚱해진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엘!" 엘은 부랴부랴 걸음을 옮기는 칼 베리만을 향해 미소 지었다.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칼 베리만." "아닙니다, 엘. 잘 오셨습니다. 오늘 일어난 사건은 전해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엘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얼마나 충격이 크셨겠습니까?“ 엘은 측은함이 담긴 칼 베리만의 시선을 피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제 대신 리자드한테 이걸 좀 전해주세요. " 엘은 들고 있던 상자를 칼 베리만에게 내밀었다. "이걸 대공께요? 왜 직접 전하지 않으시고‥‥‥‥“ 칼 베리만이 의아한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제가 내밀면 거절할 것 같아서요. 그 물건이에요, 칼 베리만." 엘은 담담하게 밝혔다. "그, 그러니까·. 이, 이게 바로· . 그거‥‥ 로군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칼 베리만이 심하게 더듬거렸다. "예, 사실은 얼마 전부터 갖고 있었는데‥‥ 칼 베리만께 말씀도 드리지 않았어요," 칼 베리만은 상자 뚜껑을 열고 떨리는 손끝으로 돌 조각을 쓸어보았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 그렇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공께, 어서 대공께 알려 드려야겠습니다! 이걸 보시면 아마 마음을 바꾸실 겁니다! 그런 끔찍한 생각도 잊어버리실 겁니다. !" 칼 베리만은 영문을 알 수 없어진 엘이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허둥지둥 문을 나섰다. 리자드가 좋아할까? 엘은 자신을 향해 물었다 그렇지 않을 거라는 답이 떠올랐다. 그런데 난 왜 저 물건을 리자드에게 주고 싶은 것일까? 그가 리아잔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엘은 어지러운 상념을 쫓기 위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브레이슬릿에 손을 얹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건 바로 그때였다. 굵은 빗방울이 땅에 부딪치듯 뚝뚝 끊어지는 소리. 거친 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쓸쓸한 울림을 발하는 소리. 엘은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한 채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냥 무시하고 넘겨 버릴 수도 있었지만 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에서 전해지는 설명하기 힘든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엘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벽 앞에 멈춰 신다. 소리는 분명히 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문은 보이지 않았다. 옆방에 누가 있는 건가? "거기 누구 있어요?“ 엘은 소리치며 벽을 두드렸다. 벽화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는 벽화를 떼어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 엘은 눈을 비빈 다음 다시 벽을 바라봤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벽 자체가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안개가 덮인 듯, 아니, 벽 자체가연기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희끄무레하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별안간 소리가 커졌다. 빗방울 소리도, 거친 바람 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의 울부짖음이었다. 엘은 무작정 소리가 들리는 벽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엘은 멈칫했다. 춥고 공허한 느낌이 전신을 엄습했다. 그녀는 버림받은 동굴처럼 싸늘한 방 중앙에 서 있었다. 가구는커녕 사소한 물건하나 놓여 있지 않은, 오직 사면의 벽으로만 이루어진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 한구석에 피투성이 여인이 앉아 있었다. 뒷골이 서늘해지며솜털이 쭈뼛쭈뼛 일어섰다. 엘은 용기를 내어 여인에게 접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무슨 일인가요?“ 여인이 느릿느릿 그녀를 돌아봤다. 엘은 눈을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초췌하고 해쓱한 얼굴,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인 얼굴의 여인은 엘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백작 부인!" 엘은 허둥대며 요아상 백작 부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팔을 건드리자 요아상이 흠칫하며 격렬하게 몸서리를 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이런 모습으로‥‥ 어딜 다치기라도 한 거예요?“ 초점없는 눈으로 엘을 바라보던 요아상이 어눌하게 속삭였다. "전하·. 엘리시안·. 전하신가요?'" “예, 그것보다 상처를 빨리 치료해야겠어요. 피를 많이 흘리신 것 같은데‥‥‥‥” 요아상이 갑작스레 엘의 손을 움켜잡았다. "전하, 폐하께 전해주십시오! 그날 밤 일은 폐하 잘못이 아니라고, 다 제가 한 것이라고 꼭 좀 전해주십시오!" "예, 알았어요. 그러니까 어서 상처부터‥‥‥‥" “제가 그랬습니다! 바로 제가 페르가몬 폐하를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그분의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습니다! 바로 제가 그랬습니다!" 엘의 온몸이 씨늘하게 얼어붙었다 요아상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에 매달렸다. "페르가몬 폐하가 너무나 미웠습니다! 쥬네비아 폐하를 버린 그분이, 쥬네비아 폐하를 눈물짓게 하는 그분이 너무 미웠습니다! 쥬네비아 폐하는 울고 계신데, 부인과 아기를 안고 행복해하는 그분이 죽이고 실을 만큼 증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요아상의 어조가 급속도로 낮아졌다. "헤르티아 폐하의 옷을 입고, 엘리시엔 전하를 품에 안은 채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과 아기를보기 위해 몸을숙이는 그분을·. 단검으로 찔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친정에 가신줄 알았던 헤르티아 폐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전 울부짖는 그분께 자객이 페르가몬 폐하를 헤치고 도망갔다고 둘러댔습니다. 전 그때까지 제 손에 단검이 들려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헤르티아 폐하께서 악귀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절 바라보셨습니다‥‥‥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요아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머니까지 살해한 건가요?“ 엘은 거칠게 속삭였다 요아상의 울음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머니를 살해한 다음,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이모님께 달려갔을거예요. 그리고 그럴듯한 말을 꾸며 이모님을 어머니 거처로 가시게 했을 테고요. 그때까지 어머니는 피를 흘리면서도 살아 계셨어요. 아마 어머니는 이모님께 진실을 알리고 싶어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이모님은 피투성이 방을 보자마자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다 생각하셨죠. " 엘은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 이후에 생긴 일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 시신 옆에 있었다던 불에 탄 사체 두 구. 그건 누구였나요? 왜 날 죽이지 않고 애꿎은 사람을 죽여 나인 것처럼 꾸며놓은 건가요? 왜 내 아버지가 저지른 것처럼 꾸며, 그분을 실성한 살인자로 만든 건가요? 말해 봐요! 말해 보라고요!" 엘은 난폭하게 요아상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쥬네비아 폐하·. 죄송합니다·. 쥬네비아 폐하 ‥‥‥‥“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요아상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공허한 음영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내 아버지가 친구를 죽여야 했던 거냐고요? 대체 왜‥‥‥‥" “그건 내가 말해 주지." 엘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칼 베리만이 그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낯선 위압감을 풍기며 철저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인자하고 다정한 웃음이 감돌던 입가엔 음울한 주름이 패어 있었고, 따뜻하게 빛나던 갈색 눈엔 오직 차디찬 냉기만이흐르고 있었다. "이곳을 찾아낼 줄은 몰랐다. 완벽하게 숨긴 줄만 알고 있었는데·과연 페르가몬의 딸은 다르구나." 엘은 얼어붙은 입술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칼· 베리만‥‥‥진짜·. 칼베리만‥‥이세요?'" “그래, 내가 바로 칼 베리만이다, 달의 아이야. 네 친구였던 적은 없지만 네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궁금해하는 걸 말해 주겠다. 헤르티아 황후가 이상하다는 요아상의 말을 듣고 그녀의 거처로 달려간사람은 쥬네비아 황후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으니까. 그때 쥬네비아 황후는 네 출생 기념 무도회에 참적하기 위해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난 그녀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아무튼 황후의 거처로 가보니 일이 내 계획대로 진행되어 있더구나. 한 가지만 빼놓고는.난 너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거든." 칼 베리만이 냉소를 지었다. 엘은 그에게 눈을 못 박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그런데 내 계획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는지, 아니면 페르가몬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는지 요아상이 우리에게 달려오기 직전 시녀 한 명을 시켜 널 데리고 도망치게 했다. 난 그걸 알자마자 후환을 없애기 위해 추적자들을 풀었고. 금방 잡을 줄만 알았지 시녀가 완벽하게 널 숨길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쨌든 네가 없어지자 널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난 약에 취해 잠들어 있는 네 유모와 며칠 전에 죽은 갓난아기의 시체를 불에 태웠다. 우습게도 그 때문에 오히려 일이 잘 풀리게 되더구나. 모두 페르가몬의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으니까. 불을 능숙하게 다루는 그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 엘은 몸을 일으켜 칼 베리만의 정면에 섰다. "왜 그런 짓을 한 건가요?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건가요?'" “페르가몬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칼 베리만이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히 답했다. "그래서 난 헤르티아 황후를 이용했다. 일고여덟 번쯤 악몽을 꾸게 한 다음 몇 마디 말로 부추겼더니 훌륭하게 날 도와주더구나. 황후는 페르가몬에게 계속 그가 두렵다고, 그의 힘이 무섭다고, 그걸 버릴 수 없느냐고 울며 매달렸다. " "어떤 꿈을 꾸게 했는데요?“ 엘은 빠르게 물었다. "페르가몬이 널 죽이는 꿈.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어린 딸을 산산이 터뜨려 죽이는 꿈을 꾸게 했다. 정말 놀랄 정도로 잘 먹혀들었지."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몸을 벽에 기댔다. 칼 베리만은 그녀의 핏기 가신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페르가몬도 사랑하는 부인의 계속되는 애원엔 손을 들고 말더구나. 페르가몬은 황후에게 네가 태어나면 그때 힘을 버리겠다는 약조를 해줬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지켜 네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힘을 봉인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봉인체에 새겨 넣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던 고대어를 사용해서 말이다. 덕분에 난 그걸 풀기 위해 꽤나 고생을 해야 했지." 엘은 눈을 뜨고 칼 베리만을 응시했다 분노도 증오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아픔 같은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버지가 왜 친구를 죽이게 되신 건가요?“ 칼 베리만이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내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대공의 부친을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게 바로 이유다" "그래서 내 아버지 손에 대신 검을 쥐어준 거로군요‥‥" “틀린 얘긴 아니지만 말처럼 쉽진 않았다. 페르가몬을 움직이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지. 페르가몬은 헤르티아 황후를 다루는 것보다 좀 더 조심스러워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내 자신이 먼저 그에게 당할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난 예언자로서의 내 명성을 이용했다. 난 헤르티아가 널 가졌다는 사실을 그녀보다 먼저 눈치 채고 페르가몬에게 곧 황후께서 수태를 하게 되실거라 말했다. 예상대로 페르가몬은 될 듯이 좋아했지.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기쁨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예언을 말해 줬다. '황녀께선 태어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실 겁니다, 폐하‘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아연실색한 페르가몬의 귀에 익히 잘 아는 이름 하나를 속삭였지. 그가 바로 황녀를 살해할 죽음의 사자라고 말이다. " 엘은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힘껏 틀어쥐었다. "그때 페르가몬의 얼굴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변했는지 넌 아마 모를 거다. " "그래서 아버지가 친구를‥‥ 리자드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신 거로군요‥‥ 절 위해서 " 엘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일이 그렇게 손쉽게 풀리진 않았다. 페르가몬은 친구를 죽이러 가는 대신 예언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분노를 터뜨렸으니까. 얼마나 길길이 날뛰는지, 난 나도 역시 그걸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알현실을 나와야 했다. 그 이후 난 예언에 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너무 과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길 즈음 네가 태어났다. 페르가몬은 기쁨에 잠겼지만, 그와 동시에 내 예언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나 힘을 잃어버린 뒤엔 더욱 그리했을 테고." 칼 베리만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듯한 웃음소리였다. "힘이란 게 그런 거다. 있을 땐 조금 편리한 것뿐이지만 없어지면 그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바꿔다. 별거 아니었던 것이 견디기 힘든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고. 난 페르가몬이 그런 상태에 빠졌을 때를 노려 다시 한 번 그에게 같은 예언을 말해 줬다. 틀림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랬더니 정말 내 계획대로 움직여 주더구나. 네 탄생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리기 하루 전, 페르가몬은 바로 그날 친구를 만나러 갔다. 검을 움켜쥔 채로 말이다. " 칼 베리만이 입을 다물었다. 순간 무덤처럼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정지된 시간을 깨운 건 요아상 백작 부인의 가녀린 신음 소리였다. 엘은 고개를 돌려 시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요아상을 바라봤다 "백작부인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어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칼 베리만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을 찾아냈기에 제법 쓸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줄 알았더니·.한 꺼풀 가려진 장막까지 벗겨내진 못했구나.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칼 베리만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역한 피비린내가 몰려들었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보는 붉은 방이 어떠냐?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말이다. " 엘은 숨을 헐떡이며 시뻘건 피로 뒤덮인 현실 속의 악몽을 둘러봤다. "네 악몽 속에 붉은 방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뜨끔할 만큼 놀랐다. 더군다나 네가 처음 그 꿈을 꾼 날과 내가 이 공간을 만든 때가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되니 감탄까지 하게 되더구나. 이건 내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넌 나와의 만남이 있었던 날 밤에 그 꿈을 꾸게 되었을 것이다. 원기를 숨긴다고 숨기지만 나도 일순 긴장을 풀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때 네가 느낀 원기가 꿈속의 붉은 방으로 나타났을거다. 어떠냐, 달의 아이야? 내 생각이 그럴듯하지 않느냐?“ "당신은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곳을‥‥‥“ 엘은 격렬하게 몸을 떨며 겹겹이 쌓여 있는 피투성이 머리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피로 물든 붉은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도 머지않아 붉은 방의 일원이 될 것이다. 저들처럼 눈을 부릅뜬채 영원히 허공만을 노려보게 되겠지. 너보다는 요아상이 먼저 그렇게 될 테지만 말이다. " 칼 베리만은 핏물에 반쯤 잠겨 있는 요아상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황후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마족이군요. 칼 베리만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었어요." "용케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 난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다. 이 공간도 내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고. 너무 오랫동안 마족의 기를 억누른 채 인간으로서 살았더니 힘이 점점 약해지더구나. " 칼 베리만이 피식 웃었다. "가끔은 내가 정말 인자하고 자애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 "그렇다면 내가 아는 칼 베리만도 완전한 허상은 아니었나요? 세상엔 황위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권력과 지위에 따라 행복의 양이 정해지는 건 아니라고 말해 준 제 친구는 지금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건가요?“ 칼 베리만의 갈색 눈동자에 미세한 동요가 나타났다. 하지만 엘이 알아채기도 전에 다시 차디차게 굳어졌다. "봉인체도 내 손에 들어왔고 그걸 풀 수 있는 열쇠 또한 내 수중에 있으니, 넌 이제 쓸모없어졌다. 한동안은 대공을 위해 널 곱게 내버려둘까 하는 생각도 가졌었다. 하지만 네가 내 정체는 물론 감춰두었던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이상 살려둘 수는 없다. " 칼 베리만이 별안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군, 한 가지를 생각지 못했다. 네 영혼의 상대‥‥ 네 영혼의 상대를 고려하면 당분간은 널 살려두어야겠구나."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하던 칼 베리만이 입속말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순간 엘의 눈앞에 주먹 두 개 크기만한 화염이 나타났다. "그게 당분간은 널 지켜줄 것이다 그 불이 꺼지기 전에 네가 미쳐버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정말 지독한 현실이군요. 악몽보다도 더 지독한‥‥‥‥“ 칼 베리만이 어둡게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는 모습을 감추기 직전 엘의 시선을 피하며 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엘." 제 90장 끝과 시작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거슬림 같은 것이 신경을 건드리자 루드비히는 훑어 보던 문서를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윤곽조차 희미한 대지 위엔 안개가 떠돌고 있었고, 서서히 흩어지는 밤 기운이 어둑한 물결을 그리며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음영의 흐름만이 느껴지는 고요함 속에 미동없이 서 있던 루드비히가 일순 눈썹을 찌푸렷다. “용건이 무어냐?” 루드비히의 물음이 끝나자 마자 곧 답변이 이어졌다. “인사말이나 드릴까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저의 주인이시자 모든 마족들의 주인이시여” 루드비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마신께서 내리신 명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명을 받들어 앞으로는 법황성하라는 존칭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널 뭐라 불러주면 좋겠느냐? 리아잔의 재상이라 하면 되겠느냐?” “전 카를 블리어드 베리만입니다. 성하. 괜찮으시다면 칼 베리만이라 불러주십시오” 루드비히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칼 베리만, 날 찾아온 용건을 말해 봐라.” “감시자의 보고를 받으셨을테니 성하께서도 저와 제 계획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성하를 찾아뵌 이유는 청을 하나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청이라고?” 루드비히가 귀찮다는 듯 짧게 반문했다. “예 성하.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청보다는 요구에 더 가깝겠지만, 제가 어찌 감히 성하께 요구라는 말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은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반짝이더니 루드비히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그려졌다. “리아잔을 손에 넣으려 하니 방해하지 말아라... 그런 요구인 거냐?‘ “그렇습니다. 성하” “불허한다. 리아잔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돌아가 늘 해오던 대로 재상 역에나 충실해라.” “성하께서 말씀하시는 리아잔의 주인은...” 칼 베리만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었다. “바로 달의아이겟지요. 다시 말하면 소중하디 소중한 영혼의 상대가 되겠고요” “계속 해봐라.” 칼 베리만은 자신의 말이 루드비히를 조금이라도 흔들어놓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어조엔 약간의 흥미만이 서려있을 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하” 우회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더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자 칼 베리만은 즉시 계획을 수정했다. “전 리아잔 제국을 원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손에 넣을 것입니다. 또 페르가몬의 힘을 얻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성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 힘에 페르가몬의 힘이 더해진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저의 바람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제 앞에 놓여 있는 걸림돌은 오직 성하 한 분 뿐이십니다. 전 그 걸림돌을 치우러 이곳에 온 것입니다.” 칼 베리만은 말을 끊었다. 긴장한 탓인지 금세 숨이 차 올랐다. 그는 동요를 감추며 서둘러 호흡을 조절했다. 그런 다음 자칫 잘못하면 목숨은 물론 모든 걸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극도로 위험한 얘길 꺼냈다. “달의 아이가 제 수중에 있습니다. 소중한 영혼의 상대를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움직이지 마십시오 성하, 즉, 제 계획을 막으려 하신다면 그 값은 엘이 대신 치르게 될 거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내가 하찮은 버러지 말 따위에 놀아날 줄 알았느냐? 이 자리에서 네 숨통을 끊어주마” 무표정하던 가면이 벗겨졌다. 루드비히의 은회색 눈동자 속에서 강렬하고도 무자비한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가 죽으면 엘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칼 베리만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루드비히가 그를 향해 치켜들었던 팔을 서서히 내렸다. “엘은 오직 저만이 열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아니, 성하시라면 수우러하게 문을 열수 있으실테지요. 하지만 그 공간의 위치는 쉽게 찾지 못하실 겁니다. 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공간 하나를 열면 또 다른 하나가 생성되게 손을 써놨습니다. 물론 성하시라면 모든 공간을 일시에 소멸시켜 버릴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중 어느 한 공간에 들어있을 달의아이까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원하는게 무엇이냐?‘ 루드비히가 낮고 거칠게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리아잔을 원하고 반드시 그걸 손에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옆엔 루벤스타인 대공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두가지입니다. 성하 첫째, 지금 이순간부터 리아잔 제국에 관련된 모든 일에 손을 떼십시오, 즉 어느 주가 리아잔을 갖든 영원히 관여하지 마시라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둘째, 저와 루벤스타인 대공께 그 어떤 형태의 위해도 가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만 약조해 주신다면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엘을 성하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요구를 받아들이마” 루드비히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수락하자 칼 베리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법황의 그 간단한 대답 하나에 그를 괴롭히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법황 앞에 나선 건 엘을 앞세우면 그의 바람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간단하게 실현되리라곤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 일로 칼 베리만은 엘이 법황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극명히 개달을 수 있었다. 돌아가면 우선 엘을 안전하고 은밀한 공간으로 옮겨야 하리라. 일이 잘못돼 그 아이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테니까 “저의 무례한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하” 칼 베리만의 조아린 머리 위로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네 모든 능력과 정성을 바쳐 엘을 보호해라. 만약 그녀를 다치게 한다면 너는 물론 루벤스타인과 네가 그토록 원하는 리아잔까지 가루로 만들어주마.” 루드비히의 말이 섬뜩한 칼날처럼 가슴을 베었다. 밀려드는 두려움이 칼 베리만의 얼굴에서 혈색을 모조리 빼앗아 버렸다. 마지막 남은 가느다란 숨결을 잘라 버리려는 듯 루드비히가 냉혹한 미소를 던졌다.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겠다.” 빠르고 가쁜 숨소리 사이로 쉭 하는 바람 소리가 파고 들었다. 주위를 유영하던 화염이 엘에게 달려드는 피투성이 머리를 번개같이 덮쳤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살갗이 타는 역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엘은 꼿꼿이 선 자세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미쳐 버리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를 노려보는 시선들을 막을 수 없었다. 붉은 방을 둘러싼 머리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엘이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들었다. 그럴때마다 불꽃은 맹렬히 날아다니며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화염은 이제 반 정도 크기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 작은 보호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면에 놓여 있는 요아상 백작 부인의 머리가 뼛골까지 시린 두려움으로 그 사실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머리들은 칼 베리만이 문을 닫자마자 굶주린 듯 이를 드러내며 넋이 나가있던 요아상을 덮쳤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머리만을 남겨둔 채 그녀의 몸을 뜯어먹어 버렸다. 끔찍한 장면이 뇌리를 가득 채우자 엘은 더욱 작게 몸을 웅크렸다. 어떻게 해서든 두려움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섬뜩한 공포는 더욱 온몸을 죄어올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피 웅덩이 속으로 주저않을 것만 같았다. 끈적끈적한 머리카락이 엘의 종아리를 스쳤다. 그녀는 미친듯이 다리를 흔들었다. 재미있다는 듯 사방에서 핏빛 눈들이 떠올랐다. 엘은 팔로 얼굴을 감싸며 치밀어 오르는 비명을 참고 또 참았다. 안으로 들어서던 칼 베리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리자드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대공, 이토록 이른 시간에 오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의자에 앉아 있던 리자드가 몸을 일으켰다. “별일 아니겠지만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들어 찾아뵈었습니다. 어제 리아잔의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칼 베리만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칼 베리만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을 받았다. “에, 대공, 자세히는 모르지만 기본적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 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멈칫했던 칼 베리만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어제저녁부터 기껏해야 오늘 새벽까지 모습이 안보이시는 건데 실종이라는 말을 붙이는건 좀 어울리지 않는군요.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대공” 리자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저녁부터 안 보인다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급소를 찌르는 질문에 칼 베리만은 일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알고 계시는 군요.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는 군요.” “아닙니다. 대공, 사실은 어제저녁 엘이 절 찾아오셨습니다. 요새 워낙 힘든 일을 여러번 겪어서 그러신지 많이 초췌해보이시더군요. 그래, 제가 염려를 드러냈더니 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엘이 안 보인다는 대공의 말씀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칼 베리만이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엘이 가실 만한 곳이라면 어디가 있을까... 혹시 법황 성하와 함게 계신 건 아닐까요? 두분이 꽤 가까운 사이신것 같던데...” 칼 베리만은 말끝을 흐리며 리자드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런 식으로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킬 아이가 아닙니다. 신변에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한게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지만...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마 제 말대로 어디 조용한 곳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계실 겁니다. 그것보다 대공!” 칼 베리만이 소리를 높이며 탁자에 두 손을 짚었다. “어제 대공과 통 연락이 안돼 말씀 못 드렸는데, 엘이 제게 그 봉인체를 주셨습니다.수수께기도 풀리고 봉인체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지금 당장이라도 봉인을 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대공? 전 아직도 조금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이제 드디어 대공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복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름을 버리시겠다느니 떠나시겠다느니 하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은 더 이상 꺼내지 마십시오.” 리자드는 무겁게 한숨 지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칼 베리만, 전 더 이상 복수도, 리아잔 제국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심장에 검이 박힌 채 피 토하며 돌아가신 아버님을 잊으신 겁니까? 아버님의 주검 앞에서 피로써 복수를 맹세하던 그 순간을 정녕 잊으신 겁니까? 믿었던 친구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아버님을 대공마저 외면하시려는 겁니까? ” 리자드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만 하십시오!” “왜입니까? 대공? 괴로우십니까? 아버님의 주검이 떠오르니 견딜 수 없이 괴로우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대공! 지금 대공의 행동은 아버님을 두 번 돌아가시게 하는 겁니다!” 격한 신음을 토해낸 리자드가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칼 베리만은 서둘러 쫓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대공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리아잔 제국이 대공의 손에 들어온단 말입니다!” 칼 베리만이 리자드의 팔을 틀어쥐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한껏 꾸민듯한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버지? 오랜만에... 이런 죄송합니다. 손님과 함께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칼 베리만은 매서운 눈초리로 마체라타를 노려봤다. 그에게 싱긋 미소 지어보인 마체라타가 리자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럴수가! 루벤스타인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그동안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인사 올리게 되었군요.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전하. 전 마체라타라 합니다.” “마체라타...” 리자드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섬광이 스쳐갔다. “저 여인의 말이 사실입니까? 저 마체라타라는 여인이 칼 베리만의...‘ “예, 제가 바로 제 아버지의 딸입니다.” 마체라타가 약삭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칼 베리만의 관자놀이에 경련이 일었다. “꺼져라.” 마체라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상하군요. 전 엘리시엔 전하께서 이곳에 계실 줄 알았는데...” 마체라타가 칼 베리만을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벌써 엘리시엔 전하를 없애신 겁니까?” 리자드는 숨을 훅 들이쉬었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칼 베리만의 팔을 으스러져라 움켜잡았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마체라타는 실성한 아이입니다! 대공 정말 저아이의 말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정말 제가 엘을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보십니까대공, 왜 절 그렇게 못믿으십니까?” 리자드가 천천히 칼 베리만의 팔을 놔주었다. “달변은 여전하시군요. 아버지 그 능란한 말솜씨로 대공 전하의 동생 분을 죽이신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마체라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칼 베리만이 그녀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힘껏 그녀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바닥에 쓰러진 마체라타가 화끈거리는 뺨에 손을 얹었다. “감히, 감히 네가! 네까짓 것 따위가!” 격노한 칼 베리만이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아버지” 마체라타는 칼 베리만과 시선을 맞추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떨리는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절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하십니까?” “내 대답은 이거다.” 거만하게 응수한 칼 베리만이 다시 마체라타의 뺨을 후려쳤다. 휘청하던 마체라타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녀는 힘없이 꺾여진 고개를 바로잡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아버지를 뵙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애잔한 속삭임만을 남긴채 마체라타의 모습이 사라졌다. 칼 베리만은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자드를 돌아봤다. “대공, 저아이의 말은 그냥 무시하십시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나온 헛소리일 뿐입니다.” 리자드는 굳은 얼굴로 칼 베리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레이먼은 티누스 숲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의 손에 죽었습니다. 제가 레이먼과 함께 티누스 숲에서 사냥을 하기로 약속한 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레이먼과 제가 티누스 숲으로 출발하려고 했을때 긴급 전문이 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전문 따위야 나중에 읽어도 충분했을텐데... 전 레이먼을 먼저 출발시키고 전문을 보러 갔습니다. 별 내용도 아닌 전문을 읽고 티누스 숲으로 갔을 때 레이먼이 어깨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의 부상을 경미하다 판단했기에 전 말에서 내려서지도 않은 채 숲 안쪽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를 추적했습니다. 하지만 자객은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레이먼에게 돌아왔을때... 그의 목이 반으로 잘라져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가지 전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괴로움에서 단 하루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리자드는 말을 멈추고 목까지 차 오른 거친 숨을 토해냈다. 칼 베리만에게 꽂히는 청회색 눈동자에 칠흑 같은 불길이 타올랐다. “칼 베리만께서 레이먼을 죽이신 겁니까?” “아닙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제발 한번만이라도 진실을 말씀해 달란말입니다! 전 이미 칼 베리만에 대한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혹이 듣기 좋은 말 몇마디로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원하는건 진실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칼 베리만이 레이먼을 죽이신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칼 베리만이 제 동생을 해치신 겁니까? 정말 제 동생을 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동생이 아닙니다! 제가 죽인건 대공의 동생이 아닙니다!” 칼 베리만이 격렬히 부르짖었다. “전 대공의 동생이 아닌 크리스티나의 피붙이를 없앤 것 뿐입니다! 대공의 어머니를 ..... 벨로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더러운 여자의 피가 흐르는 미천한 버러지 한 마리를 죽인거란 말입니다! 벨로즈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크리스티나와 테이론, 대공의 부친이 벨로즈를 죽음으로 몰아갔단 말입니다! 눈이 맞은 더러운 연놈이 벨로즈의 입에 독을 쏟아 부었단 말입니다!” 폭발할 듯한 격정으로 꽉 찬 침묵이 내리 덮였다. “어머니를 사랑하셨군요. 그래서 새어머니를 증오하셨고... 결국엔 레이먼까지 살해하게 되신 겁니다. 얼마 살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억눌러야했던 새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대신 레이먼에게 하신 거로군요” 리자드는 쓰디쓴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었습니다. 대공을 위해서였습니다. 레이먼같이 더러운 피가 흐르는 놈은 언젠가 대공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을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크기 전에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 동생에게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먼도 저도 똑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저 역시 칼 베리만이 증오하는 남자의 피붙이란 말입니다.” 리자드의 음울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대단하시군요. 증오심을 억누르고 지금까지 아버님의 친구행세를 해오셨다니...” 흠칫한 리자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페르가몬... 그를 이용하신겁니까? 그를 이용해 제 아버님께 복수를 하신 겁니까?” 칼 베리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벽은 허물어졌고 더 이상은 쏟아져 내리는 진실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더는 생기지 않았다. 비틀거리다 벽에 손을 짚은 리자드가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말했다. “페르가몬... 그가 아버님을 죽이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셨군요. 칼 베리만을 믿게 하기 위해.... 페르가몬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주기 위해.... 왜 페르가몬을 이용하신겁니까? 아버지께 완벽한 복수를 하고 싶으셨습니까? 그래서 친구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게 만든 것입니까?” “에, 그렇습니다. 완벽한 복수, 그게 바로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페르가몬을 선택한 두 번째 이유는 그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엄청난 힘, 그 힘과 리아잔이라는 최강의 권력을 대공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벨로즈의 아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벨로즈에게 힘이 있었다면 비참학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도 않았을테고, 그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벨로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를 잃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칼 베리만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랜 세월 억눌러 온, 쌓이고 쌓여 단단히 굳어버린 분노와 비통한 절망감이 치밀어 올랐다. “벨로즈는 제가 모든 걸 바쳐 사랑한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녀를 잃은 저에게 살아갈 힘을 준 건 오직 그녀의 아들과 미쳐 버릴 것 같은 복수심뿐이었습니다.” 칼 베리만은 호소하듯 리자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대공은 제 아들과 같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만약 제게 피를 나눈 아들이 있다 해도 대공만큼 소중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따님을 그토록 냉정하게 쫓아내신 겁니까?” 칼 베리만의 목줄기에 힘줄이 불룩 치솟았다. “마체라타 얘긴 꺼내지 마십시오! 그 아인 절 배신했습니다1 그런데도 전 곱게 살려 보내주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자비를 베풀었단 말입니다!” 애가 탄 칼 베리만이 리자드에게 바짝 다가섰다. “대공, 지금은 이러고 있을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일을 진행시켜야합니다. 약조를 하긴 했지만 법황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엘을 그에게.....” 리자드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이자 칼 베리만이 입을 다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 이외엔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대체 엘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만약 엘을 다치게 하셨다면 칼 베리만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붉은 방에 가둬놨습니다. 악몽 속에 처박아놨습니다! 지금쯤은 피웅덩이 속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실성해 붉은 피를 마시며 웃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개한 칼 베리만이 악다구니를 퍼붓듯 고함을 질러댔다. 리자드가 사납게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부글거리는 격분이 내부로 밀려들어 리자드를 사로잡았다. “제발 칼 베리만을 증오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칼 베리만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아온 저 스스로를 더 이상 증오하지 않도록 해달란 말입니다!” 거칠게 말을 뱉어낸 리자드가 칼 베리만을 놔주었다. “어서 문을 여십시오!” 칼 베리만은 마치 한순간 백 살은 더 먹은 사람처럼, 완전히 지쳐 버린 모습으로 리자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비척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가 짧은 주문을 외자 내실 한가운데 핏빛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자드는 지체없이 문을 열었다. 머리를 팔로 감싼 채 작게 웅크리고 있는 엘이 보였다. 리자드는 피웅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엘을 안아 올렸다. 밖으로 나온 그는 눈을 꼭 감고 있는 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볼을 기댔다. 긴 신음을 흘리던 엘이 눈을 번쩍 뜨더니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리자드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래며 바짝 끌어안았다. “리자드... 리자드예요? 그렇죠? 리자드맞죠?” 엘의 손톱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리자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엘은 자신을 감싼 따뜻한 온기가 덧없는 환상이 아니길 빌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리자드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엘은 본능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은 검은 대리석 단 위에 서 있었다. 단 아래로 높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여섯 개의 기둥이 보였고, 그 육중한 기둥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와 잇닿는 곳에 기괴한 문양을 새긴 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치 거대한 철옹성 같은 곳이었다. 리자드는 주위를 경계하며 엘을 내려주었다. “제가 의식을 위해 특별히 창조한 장소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대공?” 칼 베리만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이제 봉인을 풀 시간이 됐습니다.” 그의 어조는 매우 침착했다. “전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막상 힘을 갖게 되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만큼은 절 믿고 따라와주십시오 대공. 이 모든게 다 대공을 위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칼 베리만이 간곡히 말했다. “그건 칼 베리만의 독단과 독선이 빚은 오판일 뿐입니다. 칼 베리만께선 제가 아닌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일을 하시려는 겁니다. 칼 베리만께서 제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을 수도 있고, 절 친아들처럼 아끼셧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칼 베리만의 마음은 이미 더럽혀졌습니다. 칼 베리만에게 남은건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편협한 자기애(自己愛)일 뿐입니다.” 칼 베리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전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리자드가 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리자드가 붉은 빛에 감싸인 채 허공으로 치솟았다. 놀란 엘이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대공을 이대로 보내 드릴 순 없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는 듯 칼 베리만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절 억지로 잡아둘 순 있을지 몰라도 봉인을 풀게 만들진 못하실 겁니다!” 리자드는 사나운 광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칼 베리만을 노려봤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봉인은 제가 풀것입니다. 대공“ “정말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칼 베리만이 가시려 하는 곳은 길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칼 베리만!” 칼 베리만은 리자드의 외침을 무시하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투명한 빛과 함께 둘로 나눠진 봉인체가 모습을 보였다. “이제 그만 하세요, 칼 베리만, 제발 그만 하세요” 엘이 간절하게 말햇다. 그녀를 일별한 칼 베리만이 봉인체를 들어올렸다. “제발 그만 하시라고요!” 엘은 소리치며 칼 베리만의 팔을 잡았다. “방해하지 마라!” 칼 베리만 이 엘을 거칠게 팽개쳤다. 엘이 단 위로 넘어지자 리자드가 이를 악물었다. “절 끝까지 괴롭혔던 수수께끼, 기억나십니? 대공? 봉인을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칼 베리만 은 리자드에게 자신의 손을 펴 보였다. “바로 이것입니다. 대공, 이게 바로 열쇠였습니다.” 엘은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게도 칼 베리만 의 손가락에 후계자의 반지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반지에 눈길을 고정한 채 자신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반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반지... 후계자의 반지가 두 개였어 엘의 시선을 느낀 칼 베리만 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페르가몬은 자신의 힘을 딸에게 주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후계자의 반지를 봉인의 열쇠로 선택했을테고, 그걸 어린 네 목에 걸어주었던 거겠지. 하지만 후계자의 반지가 제삼자의 손에 들어가리란 생각은 미처 못했을 것이다. 너 역시 네가 갖고 있던 반지가 가짜일거란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기분이 어떠냐, 달의아이야?” 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칼 베리만 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곧바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칼 베리만 은 양손에 든 봉인체를 똑바로 잇댔다. 곧 그의 입술에서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가 무아지경에 빠진 듯 눈을 지긋이 감으며 고개를 쳐들자 봉인체의 갈라진 부분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강렬해진 빛이 봉인체 전체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커져 칼 베리만을 휘감았다. 돌연 칼 베리만이 비명을 터뜨렸다. 빛에 감싸인 채 몸부림치던 그가 봉인체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빛이 봉인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조각의 빛까지 삼켜 버린 봉인체가 다시 둘로 갈라졌다. “이, 이게 어떻게.... 어떻게된 일이야?왜 봉인이... " 망연히 중얼거리던 칼 베리만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시뻘건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칼 베리만!” 엘과 리자드가 동시에 외쳤다. 엘은 칼 베리만에게 뛰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으세요, 칼 베리만?” 발작적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던 칼 베리만이 어깨에 올려진 엘의 손을 움켜 잡았다. “그거였어, 바로 그거였어, 후계자의 반지... 후계자의 반지가 가짜였던 거야.” 엘을 노려보는 칼 베리만의 눈엔 오직 광기만이 가득했다. 섬뜩한 공포가 일자 엘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후계자의 반지, 후계자의 반지.를 내놔! 어서!” 엘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널 죽이고 후계자의 반지를 손에 넣아야겠구나” “칼 베리만!” 리자드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는 전신을 옭아매고 있는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격렬히 몸을 뒤틀었다. “후계자의 반지를 원하신다고요?” 엘은 목에서 반지를 낚아채 칼 베리만 앞에 보였다. “원하신다면 가지세요, 단 그전에 리자드를 풀어주세요 그리고 우릴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반지를 드리겠어요.” “그래 좋다.” 선뜻 대답한 칼 베리만이 반지를 집어 들었다. 엘에게 향하는 그의 눈길에 비웃음이 번졌다. “넌 보내주마. 하지만 대공은 안된다.” 엘은 입술을 양다물었다. 그리고 민첩하게 움직여 바닥에 떨어져 있던 봉인체를 잡았다. “난 이걸 칼 베리만께 드린게 아니예요.” 엘은 말을 끝내자마자 봉인체를 리자드에게 던졌다. 리자드가 팔을 뻗어 온기가 느껴지는 작은 돌 조각을 받아들었다. “이제 리자드를 풀어줄 수밖에 없으실 거예요” 칼 베리만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그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광기속으로 살기가 스며들었다. “감히 날... 날 가지고 놀다니... 널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주마!” 칼 베리만이 엘을 노려보며 짤막한 말을 토해냈다. 그 순간 엘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훌??? 몸을 날렸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엘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칼 베리만이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가 강렬하게 명멸하는 은빛 섬광을 엘에게 퍼부으려는 순간 속박에서 벗어난 리자드가 그를 덮쳤다. 통제력을 벗어난 빛줄기가 거대한 돌기둥을 산산조각 냈다. 기둥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엘은 그녀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육중한 파편들을 가까스로 피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칼 베리만의 하반신 전체가 으스러진 채 육중한 기둥 조각에 깔려 있었다. 엘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단을 뛰어올랐다. 눈깜짝 할 새 천장 전체로 균열이 번저 나갔다. 자잘한 돌가루와 함께 부서진 돌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리자드!” 엘은 절박하게 소리쳤다. 그녀를 휙 돌아본 리자드가 칼 베리만에게 몸을 굽혔다. 칼 베리만이 그의 손을 밀쳐냈다. “전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나가십시오 대공!” “그럴 순 없습니다!” “어서요 대공! 전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저까지 데리고 나가려 하시다간 대공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안됩니다. 칼 베리만! 안됩니다!” 리자드가 격렬히 부르짖었다. 칼 베리만의 얼굴에 심한 고통과 절망으로 뒤틀렸다. “어서 말 듣지 않고 뭐 하시는 겁니까? 엘까지 죽이고 싶으십니까? ” “칼 베리만...” 엘은 안타깝게 그를 불렀다. “엘... 대공을 부탁합니다.” 칼 베리만의 일그러진 볼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자드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고 엘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칼베리만을 등지고 뛰기 시작했다. 집채만한 돌 조각이 그들의 머리위로 곤두박질쳤다. 엘과 리자드는 몸을 굴려 가까스로 위험을 피했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연이어 석계덩어리 들이 내리꽂혔다. 엄청난 굉음이 귀청을 뚫을 듯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탁한 먼지가 시야를 막아버렸다. 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구 쪽을 살폈다. 힘껏 뛰면 서너 걸음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탈출구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오직 본능에 의지한 채 어렴풋한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몸을 가누기도 버거운 진동이 쉴틈 없이 그들을 뒤흔들었다. “엘!” 리자드가 버럭 소리쳤다. 엘은 휘청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돌무덤을 뛰어넘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을 때 리자드에게로 내리박히는 뾰족한 대리석 파편이 눈을 스쳤다. 엘은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부딪혔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괜찮아요?” 엘은 리자드에게서 몸을 떼며 황급히 물었다. 간단히 고개를 까닥여 보인 리자드가 일순 그녀를 거칠게 밀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리자드 머리 위로 석각이 내리덮쳤다. 그는 번개같이 몸을 옆으로 굴렸다. 하지만 거대한 파편덩어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다. 곤두박질친 돌 조각이 리자드의 오른쪽 다리를 짓이겼다. 충격으로 부서진 날카로운 석편들이 그의 몸 깊숙이 박혀들었다. 엘은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리자드의 다리를 덮친 파편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리자드가 고통스런 신음을 토해냈다. “가라! 어서 가!” 리자드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엘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안간힘을 써서 돌 조각을 옆으로 치웠다. “빨리 꺼지란 말이다!” 엘은 뿌리치려 하는 리자드의 팔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어깨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끌기 시작했다. “멍청아, 꺼지라고! 꺼지란 말이다!” “제길! 소리 지를 힘 있으면 어서 기기라도 해요!” 엘은 악을 쓰며 맞고함을 쳤다. “어리석고 한심한 석두 같으니! 넌 대체 머리에 뭐가 든거냐?” “어디 목 쉴때까지 욕을 해봐요!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튀어오르는 송곳 같은 파편들이 엘의 살갗을 스치며 쉴 새 없이 상철르 냈다. 하지만 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오직 리자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으스러진 그의 다리, 곳곳에서 쏟아지는 선혈, 이 악문 그의 신음 소리만이 그녀의 뇌리를 채우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리자드, 조금만 참아요 엘은 계속해서 같은 말으 되뇌었다. 코 끝에 맺힌 땀방울이 붉게 물든 리자드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까스로 출구를 빠져나온 그들을 맞은 건 놀랍게도 너른 초원이었다. 오직 햇빛과 바람, 나무와 들풀만이 존재하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였다. 엘은 리자드를 보드라워 보이는 풀밭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빠르게 말했다. “루드비히를 데리고 올게요! 루드비히가 리자드를 고쳐줄 거예요! 금방 올게요! 그러니? 아파도 조금만 참고 있어요!” 리자드가 브레이슬릿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지마라.” “이거놔요! 시간없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다... 가지마라” 엘은 검푸른빛으로 변한 리자드의 얼굴을, 치열한 고통의 흔적이 새겨진 그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주저앉았다. “고집불통 같으니... 그래요.. 알았어요” 엘은 속삭이며 리자드가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도록 그의 머리를 다리로 받쳐 주었다. “이상해요, 리자드를 평생동안 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 나도 그렇다...” 엘은 리자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미풍에 흔들리는 노란색 들꽃을 바라봤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리자들르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리자드가 조금 늦게 말을 받았다. “그,래....” “그런데 왜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리자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만이 귀에 스며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어지럽도록 아른거렸다. “난 리자드가... 죽어도... 울지 않을거ㅖ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거예요...” 엘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부에 와 닿는 시린 햇살, 눈앞에 펼쳐진 아득한 하늘, 귀로 스치는 구슬픈 바람 소리... 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리자드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사랑해요....” 엘은 숨죽여 속삭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쏟아지는 눈물이 그녀의 목을 타고 가슴 가득 오여들었다. 뒤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한발 늦었군요” 엘은 고개를 돌려 루드비히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에서 깊숙이 가라앉은 어조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라고요?” “역시 기억을 못하시는군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루드비히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엘은 지금과 똑같은 일을 과거에도 한 번 겪으셨습니다. 아니, 과거보다는 현재랄 말이 옳겠군요” 엘은 리자드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루드비히를 마주보고 섰다. “다시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과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루드비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대공께서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저와 영혼을 건 계약을 하셨습니다.” “영혼... 영혼을 건 계약....” 엘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대공의 바람을 이루어 드렸으니 이제 그의 영혼은 제 소유가 되겠군요” 영혼을 건 계약가 리자드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엘은 두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루드비히, 리자드의 영혼을 빼앗지 말아줘요... 부탁이에요. 그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엘은 루드비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 영혼을 드리겠어요. 저도 영혼을 건 계약을 원해요... 리자드와 같은 걸 원해요” “안됩니다.” 루드비히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손을 빼냈다. “루드비히” “대공의 영혼을 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루드비히!” 엘은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영혼을 건 계약은 오직 한번만 가능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영혼이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더군다나 과거로 열 번, 백 번 돌아간다 해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엘은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쟎아요”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존재들의 고통에도, 저마다의 절박한 사연에도 세상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운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루드비히의 어조는 강경하기만 했다. 하지만 엘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부탁해요 루드비히.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되면, 그땐 제 운명에 순응할게요 얌전히 따라갈게요. 그러니 나한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요. 마지막으로 과거를 바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리오를 찾고 싶어요.... 리자드를 잃고 싶지 않아요... 루드비히... 제발... 엘은 절절한 바람을 담아 루드비히를 쳐다봤다 그리고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난 운명을 바꿀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난 달의 아이니까요. 달은 매일매일 조금씩 모습을 바꾸쟎아요. 그러니까 나도 매일매일 조금씩 운명을 바꿀 수 있어요.“ 루드비히가 낮은 탄성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어거지는 처음 들어봅니다.” “어거지든 헛소리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루드비히, 부탁이예요 내게 기회를 줘요. 이제 울고 싶지 않아요... 이제 더는 울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루드비히는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시선으로 엘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할 수 없다는 말... 기억하십니까?” 엘의 어깨가 황량한 절망감에 짓눌려 힘없이 늘어졌다. “정말... 안되는 건가요?” “그 말을 어기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 엘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얼굴을 치켜든 엘이 숨죽여 물었다. “그럼... 들어주시는 거예요?” “너무 큰 기대는 갖지 마십시오. 그만큼 실망도, 슬픔도 커질 테니까 말입니다.” 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엔 이미 희망이 가득했다. 가슴 벅찬 희망이 그녀의 영혼 위로 날아올랐다. 루드비히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한숨을 흘렸다. “고마워요, 루드비히. 다시 돌아가면 루드비히를 만나는 순간 이렇게 말할게요.... ‘반가워요, 루드비히’라고요” 루드비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마 엘은 앞을 잘 보고 다니라는 퉁명스런 말만 남긴채 절 스쳐 지나가실 겁니다.” “아니예요, 난 루드비히를 기억할 거예요 어디 두고 보시라고요” 엘은 자신이 그를 잊어버릴 리 없다고 확신하며 씩씩하게 장담했다. “기억이 남으면 과거가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그 순간 모든 기억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세한 잔재까지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시간을 되돌린 저조차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글세, 두고 보시라니까요!” 엘의 자신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온다는 환희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루드비히의 말이 먹혀들 리 없었다.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루드비히가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에 괴이한 문양을 그리기 ㅅ ㅣ작했다.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갑자기 흩어져 있던 빛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원 모양을 이루었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결정하신 다음 이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엘은 부드럽게 물결치는 빛을 향해 나아갔다. 이상하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년느 자신의 운명과 연결된 통로 앞에 서서 루드비히를 돌아봤다. “리자드는 언제로 돌아가길 원했나요?” 씁쓰레한 미소를 짓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대공게선 생각보다 감상적인 분이시더군요 엘에 관한 얘기를 처음 들었던 때로 돌아가길 원하셨습니다.” 엘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스레 울고 싶어졌다. 울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 하는 여행인데도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오려 했다. 엘은 코를 훌쩍거린 다음 루드비히를 보며 밝게 웃었다. “또 만나요, 루드비히” 엘에게 다가온 루드비히가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마싸며 입을 맞췄다. “고된 여행을 무사히 마치시고 어서 제 곁으로 돌아오시길.....” 엘은 나직한 속삭임을 들으며 빛 속에 발을 디뎠다. 그녀는 가슴속에 단 하나의 소망을 담았다. 난 모든 일이 시작된 곳으로 가고 싶어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곳.... 리자드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에필로그 "다치셨습니까?' 루드비히는 복도 바닥에 넘어져 투덜거리는 소녀에게 정중히 물었다. "당연히 다쳤죠! 제대로 보지도 않고 복도를 걸으면 어떡합니까?' 소녀가 벌떡 일어서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웃음이 나오려 하자 루드비히는 재빨리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에게 보란 듯이 옷자락을 탁탁 털던 소녀가 눈을 흘기는가 싶더니 돌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천신인가 봐." 루드비히는 소리 내어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저 엷게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 순간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그랬군요! 물론 그렇겠죠. 제가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이라니! 너무 아름다워 넋이 나갔나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이라 해도 복도를 걸을 땐 주위를 살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소녀가 쩔쩔매며 말을 늘어놓았다. "제 말이 틀립니까?'" “물론 맞습니다. " 루드비히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소녀가 루드비히를 지나쳐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다리를 움직이던 소녀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를 향해 빙글 돌아섰다. "앞으로는 눈을 크게 뜨시고 주위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루드비히에게 따끔한 충고를 던진 소녀가 씩 웃어 보인 다음 짧은말을 덧붙였다. "잘생긴 사제님." 루드비히는 미소 지으며 답례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간단한 목례를 건넨 소녀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루드비히는 가볍게 흔들리는 검푸른 머리채를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책 표지를 들추자 어린아이같이 서툰 글씨체로 쓰여 있는 '알렉스 라는 이름이 보였다. 알렉스라 ‥‥‥ 루드비히는 소녀에게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웃음 떤 어조로 나지막이 속사였다. “반갑습니다,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