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마법이 되어 -1- 난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비슷한 내용의 중얼거림을 기분에 따라 흥얼거리고 다녔고, 언 제나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주위에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혼자서 키득 거리게 만들던 작은 유희거리는 언제부터인가 매번 뒤죽박죽이었던- 가사는 큰 차이 없었 지만 멜로디는 이게 그 노래였나할 정도로 - 모습을 탈피하고 완전한 하나의 노래가 되어 있었고, 슬픔,기쁨,외로움… 속에서도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날도 역시 마찬가지였 다. 수능에서 실망적인 점수를 기록한 난 재수생의 신세를 한탄하며 버스로 학원에서 집으 로 지친 몸을 실어나르는 도중이었다. 어느 덧 어둑어둑해진 밖이 입김으로 뿌옇게 흐려졌 다. 이렇게 추운 겨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나는 생각하고 있죠. 이 지겨운 생활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한 때는 빌어도 봤어요. 꿈에 사는 새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걸. 작게 뚫린 꿈이라 불리는 구멍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 보지만 수많은 꿈의 그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바로 나인걸 바람에 휩쓸리고 싶다고... 그 얼마나 바래왔을까... 구름에 몸을 띄어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너무 기뻐 눈물이 솟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게 닥쳐오는 건 꿈결같은 바람 대신 빙하의 파도 뿐인걸 현실의 이빨에 옥죄이고 쫓기여 죽을 힘을 다해 지느러미를 놀리겠지... 그 어딘가에라도 신이 있더라면, 제발 누군가 물어봐주길... 왜 나는 바람을 갈망할 수 밖에 없는... 등푸른... 생선이냐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죠?」 또 종점까지 와버린 모양이다. 졸아버린 건가. 박카스 한병이라도 한병 마셨으면 좋겠다. 힘들게 눈꺼풀을 들어올렸지만 촛점이 잘 잡히지 않은 난 다시 뒤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이봐요! 장난쳐요!?」 후우… 굉장히 성급한 아가씨군.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사람인가? 앙칼진 목소리를 들어보 건데 미인이야. 요즘 여인네들은 얼굴값을 하거든. 어쨌든 버스 안에서 밤을 새고 싶은 맘 은 절대로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상에 어긋남없이 눈 앞에는 얼굴이 벌개 진- 어떻게 보면 귀여운- 미소녀가 코뿔소 마냥 성난 숨소리를 내며 째려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버스가 아니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본 난 누워있던 곳이 버스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어떻게 된거지? 난 눈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걱정되는 소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참 없어보인다. 무슨 17세기 중세유럽에서나 입었을 옷을 입은 거지. 난 그녀가 어깨에 이고있 는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물이 가득… 촤아아아아악 - 아니, 정정하겠다. 소녀는 빈 물통을 마저 내 머리에 털어대고 소리쳤다. 「이제 잠 깼냐!? 어서 비켜!」 가만히 있다가 옆구리터진 샌드백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난 얼른 옆으로 비 켰고, 1초라도 늦었으면 불안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살기어린 눈길로 한차례 날 해 부하며 그녀는 옆을 지나쳤다. 무릎 위로 팔랑이는 푸른 치마가 내 바지를 스쳤다. 코스튬 플레이라도 하는 걸까? 흥미롭군. 난 게임이나 만화에서 여인들의 복장이 야릿한 것에 진 심으로 감사한다. 보라, 살랑이는 눈요기를… 흠흠, 계속 이러고 있다간 변태도 찍힐지도 모르겠군.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영화세트장인가?」 내가 누워있던 곳은 벽돌로 만든 다리였다.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주위로는 연록빛 잔디가 가지런히 솟아있었다. 소녀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고성 이 우뚝 서있었고 그 주위로 조밀조밀하게 집들이 굴뚝으로 연기를 피어올렸다. 눈을 감은 사이에 헐리웃 중세 영화 세트장에 와버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소녀와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아냐, 그럼 분명히 영어를 써야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의 머리색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갈색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지? 마을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난 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걷는다는 건 미친 것이겠지. 「저,저기 이 곳은 어디입니까?」 내가 불러세운 남자는 영화의 엑스트라같았다. 굉장히 의심스런 눈초리로 날 바라보던 그 는 퉁명스레 말했다. 「무슨 말이오? 어디냐니?」 「아, 그러니까 이 곳은 미국입니까? 아니면 한국의 영화세트장?」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그런 지명은 듣도보도 못했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르 겠지만, 여긴 〈엘시크 남부의 폴로즈〉라는 곳이오.」 엘시크!? 폴로즈!? 무슨 소리야? 나도 그런 지명은 듣도보도 못했다고. 내가 멍하니 서있 는 동안 남자는 힐끔힐끔 날 보고는 사라져버렸고, 그제서야 주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 다. 모두 날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 아무래도 상상도 못할 곳에 와버 린 것 같은데…!? 마을에서 뛰어나와 숲의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제서야 알 수 있 었다. 난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닌 곳에 있다는 것을… 바로 세일피어론아드라는 마법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2- 현대인 중에 진실로 어둠이라고 신성시되던 밤을 경험해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모르면 모 르되,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 시골을 제외한 도시의 내 또래 중에서는 극히 드물 것이다. 몸체에 이어진 손의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는 사람 하나없는 상상 속의 세계라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어느 새 어둠 속에 묻혀진지 오래 였다. 아마도 홀로 여행을 다녔던 경험이겠지. 「밤이 되니 제법 바람이 쌀쌀한걸」 하지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이 기분만 상쾌하게 했다. 나는 잠시동안 이 세계를 〈판타지 세계〉라고 지칭하기로 했다. 배경도 비슷하고 지구에는 없었던 곳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니 까. 나는 〈판타지 세계〉가 따뜻한 기후라는 것에 만족했다. 만약 시베리아같은 기후였다 면 달랑 오리털 잠바로 밤을 견디고 함께 얼음 고슴도치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거기… 누구죠?」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와 기척에 놀라 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불빛과 길게 늘어진 사람의 그림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 * * * * 「루안, 정말 괜찮겠어? 난 완전히 외부인인데…」 난 13살 정도 되어보이는 앳된 꼬마를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마냥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게 빵모자를 꾹 눌러쓴 아이는 웃음띈 입술로 말했다. 「전혀 괜찮치 않아요. 하지만 그런 곳에서 잤는 것을 내버려뒀다간 늑대에게 잡아먹힐 테 니까… 아셨으면 얌전히 따라오세요.」 부담과 불안감을 동시에 주는 아이의 한 팔에는 약초라고 쓰일 듯한 풀들이 가득 담겨있었 다. 어머니가 병에 앓아 누워계시다고 한다. 기특한 녀석이야. 늑대가 나올 거라면서 그 숲 을 횃불 하나만 들고 약초를 찾아다니다니… 「여기에요, 아저씨. 루안 지금 돌아왔어요. 아저씨도 들어가요.」 루안이 길게 소리지르며, 문을 열고 나를 집안으로 밀었다. 엉겹결에 떠밀려 신발을 벗은 내 등을 식은 땀이 타고흘렀다. 루안이 달려가 안긴 소녀의 미모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 다. 「어두워서 잘 구별이 안 가길래 비슷한 것은 모두 뜯어왔어. 그리고 이쪽은 오면서 사귄 친구야.」하며 소년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운명의 시간이구나. 「아,안녕하세요. 아,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당신은… 아까 그…」 「아저씨를 알아? 아저씬 〈아스틴〉에서 왔는데 일행이랑 떨어졌대…. 그래서 갈 곳이 없었나봐. 숲 속에서 혼자 앉아있길래, 늑대한테 물려가면 안되잖아. 내가 데려왔어.」하고 루안은 방긋 웃었다. 사실 루안의 말은 혼자서 추측하길래 몇번 끄덕이고 대충 건더기를 덪 붙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래. 아까는 물… 미안해요. 그런 줄 몰랐네요. 전 레이 라고 해요.」 「전 시… 즈…. 시즈! 시즈입니다.」 「시즈? 쿡쿡… 아저씨랑 안 어울려」하고 루안이 키득거렸다. 급조된 이름이라서 그렇 다. 한숨을 한번 내쉰 난 레이에게 물었다. 「집안 어른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아! 잊었었네요. 이리 오세요.」 루안의 말대로 방 안에서 앓아누운 여인이 침대에 앉아 내게 미소를 보냈다. 거실에서의 대화가 다 들렸던 모양이었다. 「아스틴에서 오셨다고요? 누추하지만 편히 쉬다가 가세요. 남편은 뱃사람이라 오래 있어 야 돌아오니 마음 편히 계셔도 되요.」 그래서 없었던 거로군. 선원이라면 시간을 오래 걸리지만 한번 항해를 다녀오면 많은 이익 을 얻기 때문에 루안의 집은 서민의 집치고는 힘들게 사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루안에게 말했다. 「루안, 시즈 씨를 2층방으로 안내해드리렴. 그리고 잘 때 씻는 거 잊지 말아.」 루안은 그 때까지도 모자조차 벗지 않고 있었다. 2층으로 안내해준 루안은 머리를 콩콩 두 들기더니 혀를 내밀고 말했다. 「여기가 아저씨 방이에요. 잘 자요. 아! 씻는 거 잊을 뻔했다.」 귀여운 아이로군. 나무계단을 통통 거리며 뛰어내려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난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했다. 친구들에게는 무정하다던가, 냉정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달이 정말 크군.」 불을 끄고 창을 열자 입에서는 바로 감탄이 나왔다. 지구에서의 달이 메츄리알이라면 내 눈에 선명하게 비쳐진 달은 달걀이라고 칭할 수 있었다.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삭 막한 방이었지만 지붕과 이어진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오히려 신비스런 느낌까 지 주고 있었다. 안경을 침대 머리맡에 던져버린 나는 창문틀에 몸을 걸치고 앉았다. 「평화롭군. 이게 판타지의 세계일까?」 내 상상 속의 판타지는 언제나 모험이 가득한 곳이었다. 불 뿜는 드래곤과 공포의 마왕, 용 기의 기사와 마법의 용사… 뭐 이대로도 좋았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판타지 세계로서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돌아갈 방법은… 후우, 골치 아프군. 마법이라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그러면 당장에 믿어버릴텐데.」 그러고는 멋모르는 아이처럼 허공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저어보았다. 바람이 손가락에 둘 둘 말리는 것 같다. 눈을 감고 나직히 중얼거렸다. 「바람아… 불어라」 화 - 악!! 우당탕탕!! 거꾸로 바닥에 쳐박힌 채 나는 손을 들여다 보았다. 분명히 대답이라도 하듯이 바람이 불 어닥쳤고 강렬한 밀림에 바닥에 쳐박혀버린 것이다. 「아,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루안의 다급한 목소리와 더불어 계단을 뛰어오르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저 흥분으로 땀 이 흥건해진 손을 바라보았을 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거 멋진데…!?」 주먹을 힘있게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 계속 지구에서의 옷을 입었다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므로 난 레나에게부탁해 그녀 아버지의 옷을 빌려입고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있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나니 식사하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식사는 조촐했지만 맛은 고급요리에 못지 않았다. 간소한 스프와 담백한 치즈를 바른 소밀빵 - 치즈가 별미였다 - 에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 한잔으로 마무리를 하자 배가 불러왔다. 뭐, 맛이 없었다고 해도 갑자기 쳐들어와 하룻밤 신세를 졌으니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루안의 어머니, 마일리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 밤에 잘 주무셨을지 모르겠네요. 아스틴 왕국에서 오셨다고요?」 「아! 예.」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우수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저 여행자일 뿐입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요.」 예. 믿을 수 없는 사정이지요. 이번에는 정말로 모르는 사이에 슬픈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 었다. 쪼르르 하고 다가온 루안이 내 손을 잡으면 커다란 두 눈동자에 가득 눈물을 글썽였 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자 어린 소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듯 우 물거리다가 헤헤 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마일리 부인의 질문은 머리 속을 얼려버리는데 충분했다. 잠이 들기 전까지 고민하던 것을 아침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마 일리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결정하지 못하셨으면, 떠날 때까지 저희 집에서 있으시는 게 어때요?」 「그,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나는 기뻐서 날뛸 것 같은 가슴과는 달리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잖아도 장작패기 같은 남자가 해주어야 할 일이 많거든요. 다른 사람들한 테 부탁하기도 뭐하고….」하고 그녀는 기대가 찬 눈빛을 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이용 가치가 있어서였군.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기에 난 부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호호. 그렇다면 지금 좀 해주세요. 땔깜이 모자르거든요. 루안, 시즈 씨를 안내해드리 렴.」 바로 써먹는 군. 다행인 건 내가 키는 작지만 힘은 강하다는 것 - 엄지손가락으로 팔굽혀 펴기 할 정도 - 이다.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흡!! 읍!」 퍼슥! 퍼슥! 역시 만만치 않다. 반 정도 밖에 자르지 않았는데도 어깨가 쿡쿡 아려오기 시작했다. 땀도 비오듯 쏟아져 이마를 한번 훔칠 때마다 소나기라도 내렸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내 모습을 구경거리라도 되는지 루안은 나무그늘에 앉아서 눈을 굴리며 바라보았다. 가끔 씩 불어오는 기분이 기분좋은지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무슨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녀의 팔에는 기타와 비슷한 악기가 안겨있었다. 호기심이 일어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입을 열 었다. 「루안, 그 악기는 네가 연주하는 거니?」 「음… 그랬으면 좋겠지만요. 아니에요, 이건 아버지의 악기에요. 〈넬피앙〉이라고 하는 건데… 음유시인이 쓰는 악기래요.」 자세히 보니 크기가 조금 작긴 했지만 기타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내가 주의깊게 바라보자 루안은 선뜻 내주고는 빙그레 웃었다. 마치 연주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난 간단한 로망스 를 치기 시작했다. 우수가 어린 선율이 잔잔히 손가락을 탄다. 그와 함께 공기도 서서히 날 감싸않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밤의 그 느낌이다. 바람이 날 안아주는 것 같은…. 마지막의 음을 끝으로 여운이 느릿느릿 사라지자 넋을 잃고 듣고있던 루안이 내 옷자락을 잡고 흔들 며 소리쳤다. 「대단해요! 마을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밖에 없었는데! 히잉 - 또 들려주세 요!」 얼마나 귀엽게 어리광을 부리는지 이런 친동생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 다. 한차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가락이 서서히 기타줄을 튕기기 시작한다.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 거렸죠. 흐르는 냇물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네... 노을빛 냇물위엔 예쁜 꽃모자 떠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슬픈 사량얘기....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 YeMin 내가 가장 좋아하고 편안해하던 노래였다. 내 목에서 기분 좋은 떨림과 함께 흘러나온 노 래는 곁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노래와 넬피앙의 선율은 흘러흘러 멀리 퍼져나갔다. 은은한 물결 속에 빠져든 상태로 느리고 편안하게 난 노래를 불렀다. 눈을 서서히 뜨자 몸을 감싸 던 바람은 아쉬운 듯 한차례 날 휘어감고는 사라져버렸다. 「와아… 대단한데!!」 「젊은이 노래 정말 멋지군!」 어느 새 사람이 이렇게 모여든 거지? 내 주위로 언제 모였는지 마을 사람들이 빙 - 둘러싸 고 - 어떤 사람은 누워서 턱을 괴고 있기 까지 했다 -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놀 란 얼굴로 밖으로 나온 마일리 부인과 레나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난 머리를 긁적이며 루안 을 힐끔 바라보았다.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루안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고 빙그레 미 소를 짓자, 무슨 일인지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아스틴 왕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길을 잃어서 한동안 우리집에서 머물기로 했어요.」하 고 마일리 부인이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였다. 「오오… 마법과 음악의 나라에서 왔다니, 노래를 잘 부를만 하구먼!!」 빵을 만들다가 왔는지 얼굴에 밀가루를 가득 묻힌 중년의 사내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가득 히 띄우며 내 어깨를 쳤다. 황소머리만한 손바닥이 주는 충격은 강렬하여 내가 얼굴을 찡그 리자 루안이 대신하여 그를 쏘아보았다. 찔끔한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날 일으켜 어깨동무를 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손을 치켜들고 크게 소리쳤다. 「자자… 오늘 밤!! 이 즐거운 음유시인을 맞이하는 파티를 엽시다!!」 「우와 - 」 그들의 환호에 나무에서 졸던 새들이 하늘을 메우며 날아올랐다. -4- 주위에서 인디언들의 축제처럼 사람들이 술을 권하며 떠들썩하게 웃어대고 그 가운데에선 모닥불이 슬프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캠프를 경험했을 때처럼 흥분하며, 집을 떠나 홀로 산에서 밤을 지샐 때의 설레임을 시선에 담아 하늘에 가득히 박혀있는 별들 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반짝임이 눈 안으로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았을 때의 가슴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그 때처럼 내 가슴은 설레임으로 떠질 것 같았다. 옆에서 춤을 추다 가 지쳐 내 어깨에 기댄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루안이 미소를 지은 채 졸고 있었다. 「아하하핫! 이리저리 끌려다녀서 피곤하겠군. 우리 마을 사람들이 좀 극성스럽거든. 그래 도 행복한 시달림이지?」하고 자칭 〈소밀빵의 마법사〉 이라잠 씨가 다가와 앉으며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을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미소로 답하고 힘있게 맥주병을 거꾸 로해서 그 안의 액체를 입 안에 부어넣었다. 멋진 자세와는 다르게 맥주는 코에 들이부어졌 고, 난 엄청난 통증과 함께 혓바닥이 뽑혀나올 만큼 심한 기침을 해야했다. 「아저씨, 괜찮아요?」 언제 졸음에서 도망쳤는지 걱정스런 눈빛으로 루안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옆에서는 이라 잠이 덩치하고는 다르게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잡으며 뒹굴고 있었다. 그는 사 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째려보자,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억지로 웃음을 참는 붉은 얼굴로 일 어섰다. 마법사 이라잠은 얌전히 앉았지만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다니… 내일 아침에는 빵을 겨자를 가득넣고 구어버릴테다〉하고 중얼거렸다. 난 아침은 스프만 먹어야겠다고 다 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극성스럽기보다는 다정한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말이죠.」 「하핫, 다들 벌써 200년을 대대로 함께 이어져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마을 사 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세. 적어도 한 명은 확실히 그렇지 않지.」 「케무사트우 씨의 얘기를 하시는 군요, 이라잠 씨.」하고 말을 걸어오는 이는 나보다 5 살 정도 많아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두어번 흔들었다. 「시즈 씨의 노래가 마을을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불행히도 전 도시에 일이 있어서 마을 을 나가있어서 듣지를 못했답니다. 다음에 꼭 들려주십시오. 개인적으로 푸짐하게 살테니 까요.」 「자일드, 자네 결혼식 때 시즈를 〈행복의 기원자〉로 쓰려는 거지?」 「이,이런! 들켜버렸군요.」하고 자일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행복의 기원자〉는 결혼식 때 행복과 축복을 기원하는 노래를 새로 맺어진 부부에게 불러주는 음유시인이라고 한다. 부르는데 꽤나 비용이 든다며 투덜거린 그는 얼굴을 굳혔다. 「케무사트우 씨는 오지 않았군요. 시즈 씨, 당신도 조심하세요.」 「뭐하는 사람인데, 두 분 다 그러십니까?」하고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이라잠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네. 그는 재산으로 따지면 엘시크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 일거야. 저기 엉성하지만 큰 건물이 보이지? 케무사트우 씨의 집이지. 대단한 구두쇠지. 저 집만 봐도 알 수 있네. 그는 자신의 집을 바닥높일 비용으로 만들어진 걸작의 건축물이라면 서 자랑을 하곤하지.」 이라잠의 손가락 끝부분으로 시선을 가져가니 골목으로 돌아가는 부분에 다른 집들에 비 해 월등히 컸지만 잘못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 보였다. 자일드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이라잠 씨의 빵집에서 쥐꼬리만한 수당을 받는 아르바이트생 이로시도 그처럼 돈을 모 은다면 금방 마을에서 부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걸.」 「쥐꼬리만큼이라니!! 난 분명히 그녀에게 일한만큼 충분히 수당을 주는 거라고!」 「부인할 걸 부인하세요. 그건 노동착취라고요.」하고 혀를 내밀어보인 입술을 한번 핥고 는 말을 이었다. 「케무사트우 씨는 고급 골동품상을 하고 있어.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물건을 가진 그 가 이런 시골에 사는 것은 물가가 싸기 때문이지. 그는 1달에 한번씩 도시에 가서 경매에 참가하고는 하는데 그 때의 마차값을 더하면, 그가 이런 시골에 생활하는 댓가로 보는 이익 은… 놀라지마! 쥐꼬리만한 수당을 받는 아르바이트생 이로시의 3시간 수당 밖에는 안 돼.」 이라잠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난 만나보지 못했지만 케 무사트우의 기가막힌 절약정신에 감탄했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가 구두쇠라는 이유로 다들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네. 난 우리 아들이 다쳤을 때, 흉터가 생길 것이 걱정이 된 나는 케무사트우 씨, 그 자식- 이 때 이라잠은 이를 갈았다 -이 좋은 약이 있다길래 무려 7크로운이나 주고 샀지. 집에 와서 아들의 얼굴에 발라보니 정말 이더군. 흉터가 조금도 남지 않더군. 딴에는 약값을 한다고 좋아했지.」 나는 〈그런데 왜?〉라고 말하려다가 옆에서 자일드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입을 굳게 다물 었다. 「나도 그 약을 샀지. 단 난 500 마일드에 말이야. 아! 자네는 엘시크의 화폐가치를 잘 모 르겠군. 간단하게 말해서 난 이라잠 씨가 산 비용의 1/14 로 산거지.」 옆에서 다시한번 이라잠이 이를 빠드득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주 급하면 그가 유용한 물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용 하게 되지. 그의 말은 확실하지.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머리 속에서 〈재밌겠지,재밌겠지? 한 번 해보는 거야!〉하고 외쳐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난 가방에서 넣어두었던 오리털 잠바를 꺼내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 다. 계단을 내려가자 마일리 부인은 루안이 가져온 약초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건강한 모습으로 분주하게 아침을 짓다가 미소를 내게 건넸다. 「어제는 즐거웠죠?」 「예. 부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난 그녀에게 내 머리 속을 휘저으며 재촉하는 한 마리 꼬마악마에 대해 설명을 했다. 마일리는 굉장히 재밌다는 듯 쿡쿡 거리더니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런 부탁이라면 들어드려야죠. 이리 오세요.」하고 그녀는 내게 귀족들이나 입을 만한 깨끗한 정장을 한번 꺼내주었다. 「남편이 청혼할 때 입었던 옷이에요. 어머! 많이 크네. 조금 줄여야겠네요.」 「죄송합니다.」하고 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부인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검지손 가락을 세우며 밝게 말했다. 「시즈! 면도를 하는 게 어때요? 목소리로 생각하는데 시즈는 굉장히 어린 것 같거든요.」 어리죠. 재수생이 되면서 한번도 깍지 않은 수염 때문에 30대 아저씨로 오해를 받기는 했 지만 난 분명히 20살이었다. 눈동자를 요리조리 돌려가면 생각하던 나는 그 쪽이 계획에 맞 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전하군.」하고 면도를 다 끝낸 후 아래턱을 쓱 문질러보았다. 맨질맨질했다. 머리도 기름-기름의 종류는 무시한다-을 발라 뒤로 싹 넘겨묶고 검은 정장을 입자, 그런대로 귀티 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멋져요. 남편이 청혼할 때보다 훨씬 나은데요!? 너희들은 어떠니?」하고 과분한 칭찬을 하며 마일리는 멀뚱히 내 얼굴을 바라보는 레나와 루안에게 물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루안 을 바라보자, 뭐가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써본다. 레나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저,저기 시,시즈의 나이,나이가?」 「나 20살인데…. 왜 그러시죠?」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내 외모가 평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30대가 20대 로 변신하니까 놀란 모양이군. 돌처럼 굳어버린 레나를 무시하고 손을 뻗어 루안의 머리칼 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루안이 입을 열었다. 「미,미안해요.」 「뭐가?」 「아,아저씨라고 불러서… 미안해요, 오빠.」 내가 대답없이 키득거리자, 그녀는 날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시한번 갈색 머리칼 을 쓰다듬어주고는 유쾌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음… 그냥은 용서 못하겠는 걸. 그 댓가로 오늘은 날 위해 희생해줘야겠어. 데이트하자, 루안. 부인…」 「아, 네. 루안 잘 다녀오렴. 호호. 시즈, 루안을 잘 부탁해요.」 「나,나 옷 갈아입고 올게.」 루안은 굉장히 당황했는지 넘어질 뻔하면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거 반응이 열렬해서 좋군. 마일리와 내가 크게 웃었고, 그제야 돌상태를 깨어난 레나 역시 심적충격을 비틀거리 는 걸음으로 나타내며 동생을 따라 걸어들어갔다. 흰색의 치마를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루안은 정말로 날 위해 하루를 희생하기로 마음 먹은 모양이었다. 손을 잡아끌며 마을에 대해 설명해주는 그녀는 즐거워보였다. 마치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루안, 미안한데 골동품점이 있지? 안내 좀 해줄래?」하고 이라잠 씨네 빵을 먹으며 말했 다. 빵을 굽는 냄새에 못이겨 그녀와 함께 이라잠씨 가게의 의자에 걸터앉은 것이다. 가볍 게 끄덕이는 루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내 눈에 초콜릿이 가득 발라진 빵이 들어왔다. 초콜릿을 매우 좋아하는 나는 볼 것도 없이 냉큼 집어들어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귀에 이라잠의 감탄에 찬 「걸렸군! 그거 내가 아침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이니 절대로 뱉어선 안돼. 게다가 값 으로 따져도 비싼 거라고. 겉에는 비싼 초콜렛을 가득 바른 거야. 게다가 겨자도 주먹만큼 들어갔거든.」 저 큰 주먹만큼 들어가다니…. 지금 쏟아지는 눈물은 지난 밤 그의 중얼거림을 망각했던 후회의 결정체로다. 그래도 비싸다는 말에 겁을 먹은 나는 빵을 모두 삼키는데 성공했다. 얼얼거리는 입을 바람을 들어마셔 식혀가며 케무사트우의 골동품 가게에 도착한 나는 루안 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전한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는 굳은 표정-뱃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기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을 짓고 오만스러운 자세로 들어가자 장부를 정리 하고 있던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눈에 의혹을 띄고 입을 열었다. 「이런 시골에!? 무슨 일로 오셨소?」 「당신의 이름을 들었소. 케무사트우 씨, 물건을 보는 눈이 뛰어다나길래 찾아왔소.」하고 난 준비해온 오리털 잠바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거칠게 올려놓았다. 그가 〈이것이 뭐 요?〉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주전자를 들어 물을 부 었다. 대부분의 오리털 잠바가 그렇듯 이것 역시 방수였고 물은 옷감을 적시지 못한 채 주 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던 힘없는 노인의 눈이 이채를 띄기 시작했고, 난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법의복인가?」하고 케무사트우가 중얼거리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것은 마법이 아니오. 이것은 고대의 의복이오.」 「고대의…」 「잘 보시오. 이런 옷감을 본적이 있으시오? 겉감의 튼튼함과 안감의 부드러움! 이것은 대 륙의 알려진 역사 이전의 존재했던 기술의 존재가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 정 도의 튼튼함이면 광산에서 100년간을 굴러다녀도 실밥하나 튿어지지 않을 것이오. 이 정도 의 부드러움이면 왕족이 입는 비단의 질감에도 떨어지지 않소.」 그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오리털 잠바를 세세히 살펴보았다. 잡아당겨도 보고 얼굴을 대 고 부벼보기도 했다. 난 그의 눈동자에 탐욕의 열기가 차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케무 사트우는 나와 잠바를 번갈아바라보더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앉으십시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냉정하게 눈을 빛냈고, 나 역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오만한 표정 을 지으며 쏘아보았다. 「8만 타로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사기의 명수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있던 나는 무조건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안된다니!! 8만 타로운이면…!!!」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후회가 됐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급히 오리털 잠바에 서 꺼내두었던 라이터를 손에 대고 가스를 내보냈다. 약하게 쥔 주먹에 가스가 차갑게 느껴 지는 순간, 나는 라이터에 불을 당겼고 바람을 일으켰다. 장난을 해본 사람을 알겠지만 제 대로 하면 사람 머리만한 불덩이가 나타났고 나의 의지에 의해 일어난 바람은 불을 사방으 로 퍼뜨렸다. 놀란 케무사트우를 차갑게 바라보며 난 나직하게 말했다. 「나와 같은 존재를 속이려하지 마십시오. 이것의 가치를 모를 내가 아닙니다. 제 연구비 용이 절실히 모자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팔지도 않았을 겁니다.」 「마,마법사!?」 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에게 500만 타로운을 뜯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수도를 부쉈다가 다시 건설할 정도의 돈이라니, 이거 너무 많이 뜯어낸 거 아닌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뭐 선심써서 라이터까지 주었으니 괜찮겠지. 가게를 나오 자 루안이 방긋 웃고는 팔에 매달렸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리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의 데이트를 계속했다.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백 만 타로운짜리 성신석이 다리를 쿡쿡 찔러댔지만 사기를 친 벌을 아주 무겁게 받는다고 생 각하면서 말이다. -5- 「맛있니?」 입 안의 음식물을 가득히 오물거리며 소녀는 연신 끄덕였다. 〈제법 숙녀처럼 꾸미고 왔는데 여기서 이미지 망가지 는 구나, 루안.〉하고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린- 크게 말한다면 루안은 분명히 귀족소녀처럼 얌전히 먹을 것 이 두려웠다 -난 고개를 돌려 주방에서 동전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1 타로운짜리 금화 하나 가 음식점의 전직원의 주방호출이라는 사태를 일으키다니…. 죄책감이 가슴을 메우는 듯 했다. 나의 슬픔에 찬 표정 을 보면서 루안은 불명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 안 드세요? 계속 히죽거리기만 하네.」 얼굴이 돌처럼 굳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피를 낸 장본인은 다시 음식으로 관심을 돌렸고, 내 굳어진 표정에 찔끔한 것은 음식점의 마스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고풍스럽게 기른 콧수염을 몇번 쓰다듬더니, 힘없이 다가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애처로운 분위기의 표정-고개를 돌려버리고만 싶었다-를 지 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저희 가게로서는 도저히 금화를 거슬러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라니, 케무사트우는 옷과 라이터에 500만 타로운이라는 금액을 선뜻- 협박이라는 첨가요소가 있었지만 - 내 놓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부자와 서민의 빈부차가 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10 타로운을 드릴테니… 이 소녀가 오면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음식을 주십시오.」 「예 - ? 가,감사합니다.」 코가 음식에 닿도록 콧수염 씨는 허리를 숙였다. 거스름돈이라는 악몽에 휩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 때문인지 그 는 한결 가벼운 손길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실례지만, 숙녀분의 성함이?」하고 마스터가 물었다. 그러나 루안은 입에 가득찬 스파게티를 씹느라 정신이 없었 다. 너무나 무관심한 모습에 심술이 일어난 나는 루안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고 풍선처럼 부푼 그녀의 볼에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제 약혼녀인 루안이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제 약혼녀가 불만스럽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달그락! 포크가 떨어지고 놀란 토끼눈으로 쳐다봐도 이미 늦은 일이다. 콧수염 씨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서자 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붉게 달아오른 토끼에게 말했다. 「루안, 다 먹었니?」 내 귀여운 약혼녀는 억지로 입에든 음식물을 삼키고 인형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냅킨으로 그녀의 입을 닦 아준 후, 손을 잡고 나갈 기미를 보이자 점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어디나 돈이라는 무기는 굉장하다는 생각 이 든다. 「그럼 나갈까요, 레이디?」 놀랍게도 루안은 정말 레이디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렇다고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 레이디에게 그윽 한 미소를 지어주며 느릿느릿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꼬마 레이디와 엉터리 기사가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산 위에 서 힘겹게 턱걸이를 하며 힘겨운 뻘겋게 달아오른 시각이었다. 마을을 두루두루 살펴보아 종이와 펜만 가져다주면 슥슥하고 지도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안은 집 안에 발을 들여놓고 얼마 안있어 잠이 들었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식사를 끝낸 후, 창 밖을 보니 마을에는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아 거리에는 적막함이 감돌았지만, 은은한 금빛 오오 라가 적막함 속에 한가닥 온기를 수놓고 있었다. 「이만 이 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루안과 레나가 잠든 것을 확인한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마일리에게 입을 열었다.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그녀는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가 오래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하지만 이렇게 일찍 떠나갈 줄은 몰랐군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 요?」 음성이 가늘고 힘이 없어 그녀가 진심으로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말을 했다가는 나 역시, 나약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대답없이 금화가 가득히 든 주머니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를 열어제낀 마일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케무사트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날 의 혹과 경악,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케무사트우 씨를 골탕먹인다고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는 데…. 너무나 예상 밖이에요. 그 계획에 이렇게 떠나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나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는 절 재워주신 보답입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하며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2일 전의 만남을 떠올 리면서…. 「제가 다리에 누워있는 것을 레나가 깨워주지 않았다면 전 지나가던 마차나 말에 깔려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숲 에서 자려할 때, 루안이 절 데려와 주지 않았다면 늑대밥이 되었겠죠. 저 두 소녀는 제게 생명을 구해준 천사나 다 름없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신다면 2번의 목숨값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받겠어요.」 한숨을 쉬며 그녀는 말했고, 난 그제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꼭 지금 떠나야겠나요? 내일 떠나더라도….」 마일리의 말에 나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루안의 얼굴이라도 보게 된다면 결심이 흐트러질 것 같 아 두려웠다. 아침에 정리해두었던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부인은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문 앞에 서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었어.」 그 날 밤, 이 세계에 와서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일기장을 폈다. 이곳의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물처럼 수놓아진 별빛을 바라보다가 생각하니 오히려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겉표지에 써있던 이름을 지웠다. 대신 그 자리에 〈시즈〉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기를 썼던 페이지의 다음 장을 넘겼 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마을, 폴포즈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리움이 담긴 커다란 필체로 한 페이지를 채워버렸다. 〈또 다른 고향〉이라고… -6- 세상을 감싸줄 것 같은 달빛도 잎을 넓힌 채 몸을 맞닿고 그들만의 행복함에 젖어있는 나 무들의 겉표면만 맴돌 뿐이었다. 고요 속에 잠들어있는 어둠이면서 숲 만이 가진 어둠은 어 딘지 모르게 슬픔에 요동치는 심해처럼 불안한 느낌을 자아냈다. 수도 제플린을 향하여 부 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우람한 근육의 사내도 역시 숲의 불안하도록 고요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쥐고있는 횃불의 몸부림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을 벗어나고자 힘이 부치는지 가끔 흰 연기를 치익치익 일으키며 꺼질 듯이 타고 있었다. 「누구이십니까?」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제 헤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키가 2m에 달하는 장 신인 그가 흠칫거리며 물러선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횃불은 앞으로 내밀며 살펴보니, 20살이 약간 넘어보이는 남자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단정해보이 는 외모에 입술은 호감을 주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는 귀족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매 우 허름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청년은 초가을에 입기에는 너무나도 두터워보이는 짙은 회색 바지를, 상의는 회색 셔츠에 갈색 조끼를 받쳐입었는데 옷마다 끝부분이 튿어진 실밥 으로 털보숭이를 이룰 정도였다. 가방과 음유시인들이 애용하는 악기, 넬피앙을 함께 둘러 맨 채, 땅을 뚫고나온 거대한 나무 뿌리에 고요히 앉아있는 모습은 귀없는 엘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거,거,거어기! 사람인가?」 「후훗…. 저를 향하여 말하는 것이 맞다면….」 청년은 헤모의 굵은 목소리가 물결처럼 떨리는 것이 우스운지 한층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숨을 놓은 헤모는 방금 전까지 몸을 감싸고 있던 두려움을 한꺼번에 떨쳐버리려는 듯 호 탕하게 웃으면 말했다. 「아하하하핫! 괜히 놀랐구만…. 모닥불이라도 켜놓고 앉아있지 좀 그러나? 젊은 사람이 유령흉내를 내다니, 이것 보라고! 내 심장이 신의 부름을 받은 것처럼 뛰고 있구만!」 「죄송합니다. 부싯돌이 없어서요….」하고 청년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는 다시 물었다. 「사제이신 모양이지요?」 「그렇다네. 자애로우신 〈레이모하〉의 천한 종, 헤모라고 하네.」 청년은 어둠조차 알게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엘시크의 국신(國神)인 레이모하를 섬기는 사제라면 적어도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권위있는 종, 헤모는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긁어모아 횃불로 불을 붙였다. 서서히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어떤가? 숲의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는 모닥불! 한 여름 밤의 낭만이 아닌가!」 「너무나 흔한 낭만이죠. 저는 〈시즈〉라고 합니다.」 「시즈! 참 재미있는 이름이로군. 자네, 〈시즈〉가 고대어로 무슨 뜻인지 아는가?」 청년는 고개를 저으며 궁금한 시선으로 헤모를 바라보았다. 사제는 그 시선에 만족했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시즈는 고대어로 〈마땅찮은〉이라는 뜻일세. 자네는 이름을 참 재미있게 지었어. 하하 하! 마땅찮은 시즈.」 시즈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의외로 그는 〈마땅찮은 시즈〉라는 말을 마음 에 들어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 근육질의 사제는 시즈의 감긴 눈을 바라보며 물었 다. 「장님인 것 같은데…. 어떻게 숲을 헤매고 있는 거지?」 「장님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청년의 감긴 눈꺼플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는 모닥불빛에 눈이 무셔 한 동안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호수처럼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는 숲의 암흑과 안정된 대치를 이루며 헤모를 바라보았다. 「왜 눈을 안 뜬거지?」하고 헤모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시즈는 겸연적으면서도 은 은한 미소를 띄웠다. 「눈이 부시니까요.」 헤모의 견고한 상체가 순간 비틀거렸다. 흥분한 그는 시즈에게 다가가 한 주먹 쥐어 박으 려고 했지만, 시즈의 다음 말은 그의 팔을 내리눌렀다. 시즈는 가방에서 고풍스런 책을 꺼 내여 펼치며 말했다. 「게다가 귀찮은 짐승들이 돌아다닙니다.」 「귀찮은 짐승? 그것이 눈을 뜨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동물이 밤에 안광을 내뿜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마주치게 되 거든요.」 「그렇다면 왜 내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말리지 않은 거지?」 헤모의 말에 시즈는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폴포즈 마을을 떠난 후에 한번도 펼치지 못했거든요. 성기사와 비교되는 성투사가 제 앞에 버티고 있는데, 뭐 어떻습니까.」 시즈가 폴포즈를 떠난지 4달 남짓, 그 동안 그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시즈가 폴포즈를 떠난 궁극적인 목적은 원래있던 세계와 현재 그가 발을 딛은 세상과의 연관성을 알기 위함, 그리고 자신이 〈판타지 세계〉라고 지칭하는 세계에서 살아갈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의 기반에는 자유를 얻은 청년의 폭발한 호기심이 깔렸었다. 〈어느 국가에나 모든 지식은 수도로 귀결되는 법이지.〉라는 누가 했을지도 모를 말을 절 대불변의 법칙인 양, 머리에 새긴 용감한 청년은 수도를 목적지로 삼고 기다긴 여행을 시작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절대적인 약점이 있었다. 초절정의 방향감각을 자랑하는 방향치라 는 점이 그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증오스러워하는 장소가 출구가 많은 지하철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즈에게 지도란 아래도 못 닦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청년이 믿는 것은 나침반과 튼튼한 체력이었으니, 왜소한 몸에 비해 야성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꼭 옆구리를 벌레가 뜯어먹은 것과 같은 모습을 한 나무들이 하나씩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시즈가 목검으로 1000번을 후려친 흔적이었다. 엘프들이 보았다면 롱 보우를 머리에 겨누고 쫓아올 일이었지만, 시즈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에서 배웠던 무술은 늑대들의 저녁식사 전 유희거리에 불과했고, 자신의 광택 뺀질나는 검이 늑대의 이쑤시개로 전락했을지 모를 경험 이후, 시즈의 신변보호를 위한 몸 부림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바람 또한, 입이 터져라 〈불어라!〉했지 만 고작 사람을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게 하는 세기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도에 도 착하면 질릴만큼 책을 읽는 거야.〉하던 생각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발이 닿 는 마을에서 영지의 치안대원이나 경비대원들을 붙잡고 검술을 배웠고, 장의사를 쫓아다니 면서 시체를 꿰매고 끌어안고하며 약초에 대한 지식들을 배워갔다. 현재의 장소까지 오면 서 4달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은 어쩌면 짧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시즈에게조차 분명 앞에 앉아있는 헤모라는 사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사제라는 그 는 거구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올 때까지 시즈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청년은 4달의 고 된 여행만큼이나 들은 풍문도 꽤나 쌓여있었고, 헤모가 그들 교단을 수호하기 위한 공포스 런 3대 전쟁용 전투집단의 일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헤모는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흠….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시즈 정도의 사내가 마땅찮아하는 짐승이 무엇인 가?」 「그들은 늑대입니다. 하지만 덩치는 사자만큼이나 큽니다.」 「케워크!! 케워크로군! 그것들이 쫓고 있다는 건가?」하고 헤모가 경악을 토해내자, 시즈 는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들고 있던 일기장을 내려놓으며 대신 그는 동방대륙 에서 흔히 쓰는 긴 예도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아니요. 쫓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쫓아와서 노리고 있죠.」 대답이라도 하듯 멀리 떨어진 수풀 사이로 섬뜩한 안광을 번들거리는 존재가 모습을 하나 씩 모습을 드러냈다. -7- 어둠이 놀란 생쥐처럼 흔들거리는 것과 함께 모습을 들어낸 3 마리의 케워크의 동체에 시 즈는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몇 번 자신을 목표로 하고 쫓아오는 것을 몇 번 보 았지만, 설마하니 현재 가까이서 보는 것처럼 거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헤모 사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늑대의 변종인 케워프는 한 아름 은 될만한 유선형 몸체를 가뿐하게 받치고 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푸른 인광을 줄줄 흘 려대며 이글거리는 시선은 시즈가 들고 있는 검을 향하자, 얼음보다 차가울 것 같은 이빨을 들어내며 크르릉거렸다. 동방 대륙, 그 곳에서도 햇살이 가장 먼저 비친다는 나라에서 건너 온 검은 검은 수실로 장식된 검붉은 검집이 인상적인 예도는 양날인 검에 비해 잘 부러지지 않았고 적당하게 휘어있어 찌르거나 벨 때 훨씬 치명적이었다. 「검은 멋진데, 잡은 손이 떨리니 영 불안하군.」하고 헤모는 힐끗 시즈를 쳐다보고는 퉁 명스럽게 말했다. 성투사였던 자신보다도 먼저 기척을 알아낸 시즈가 검을 잡은 채 떨고 있 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헤모는 모르고 있었다. 시즈는 청각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약간이지만 의지대로 바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노래를 바람에 실을 수 있듯이 먼 거리의 소리도 바람에 묶어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불안한 것은 떨고 있는 시즈 자신이었다. 아직도 그는 늑대와의 싸움에서 죽음의 공포를 잊지 못했던 것 이다. 아니 어쩌면 늑대의 공포는 극복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괴 수인 케워크의 공포에 질렸을지도. 「그런 말을 해봤자, 떨림이 멈추진 않을 것 같은데요.」하고 케워크의 살기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라도 저 소머리만한 발바닥에 얻어맞을 생각을 하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걸. 그러나 시즈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저 놈들은 우리가 지치는 걸 기다리고 있군. 시즈! 마땅찮지만 내가 두 마리를 맡겠어. 나머지 한 마리를 부탁하네.」 그렇게 말하는 근육질의 거인 신관은 떨기는 커녕, 투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과연…. 최강의 투사로군.」 어찌보면 별종들이었다. 인간같지 않은 인간과 늑대같지 않은 늑대의 싸움. 모닥불의 일렁 이는 그림자에 비춰진 그 모습은 전설에서나 나올 듯한 영웅과 괴수의 모습같았다. 발을 구 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고 바람을 가르는 발톱이 공기를 거칠게 찢어대자, 놀란 새들이 어두 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공포스럽고 경이로운 광경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한 야수의 포효 가 숲 속을 휘돌았다. 급히 돌아보니 남아있는 한 마리의 케워크는 자신을 무시한 것이 기 분이 나쁜지 성난 콧주름을 가득히 지으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엉겹결에 몸을 구 르며 피하자, 어둠을 가르는 5줄기의 섬광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퍽!하는 섬뜩한 소 리와 함께 시즈의 허리보다도 굵은 나무기둥이 두부처럼 뜯겨나갔다. 시즈는 자신이 천번 을 두들겨대는 나무기둥이 케워크가 한번 후려치는 것보다 못하자 기분이 처참했다. 야수 의 푸른 인광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헤모 가 보았더라면 놀라서 눈을 크게 뜰만큼이나 자연스럽고 깨끗한 움직임으로 시즈는 검을 뽑으며 기합을 질렀다. 「섬!」 검은 마치 검집에서 빛줄기가 뽑혀나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면서 케워크에게 그어졌다. 일명, 발도라고 불리는 그의 기술은 동방 검술의 대표적인 기술로 차원이 다른 검속을 자랑 했으므로 신기라 불렸다. 그저 검집에 의지하여 빠르게 검을 빼는 기술이라고 이해하기 쉬 웠지만, 검을 뽑는 속도와 손목, 어깨의 비틀림이 정확하게 맞아들어가야 하는 매우 고난도 의 기술이었다. 또한 그런 조합의 속도를 전체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요 하는 것이었다. 특히 예도는 검날의 길이만 1m 30cm 에 달하는 긴 검인데 비해 휘는 각도 가 매우 작아 어설픈 흉내를 냈다간 어깨만 크게 상할 뿐 그냥 휘두른 것과 다를 바가 없었 다. 동방에서도 도들이 발도에 맞게 휘어지는 동안, 유독 한 나라에서는 예도에 맞는 발도 술과 검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그 검술을 〈예도 검법〉 또는 〈예도 도예〉라고 불렀다. 예도 도예의 발도술은 검의 각도가 심한 다른 나라의 발도에 비해 전혀 속도가 뒤 지지 않았으며 파괴력 면에서는 훨씬 웃도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야수의 본능을 가진 케워크조차 어깨가 잘려나가는 것을 뒤늦게 느끼고 분노의 포효를 지 르며 달려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검신을 새끼손가락 아래로 오도록 잡은 시즈는 검을 휘두 른 반동으로 다리를 넓게 벌리며 주저 앉으며 팔을 편 상태로 손목을 뒤로 꺽어 검을 등 뒤 로 돌렸다. 〈복호세〉라고 불리는 예도 도예의 기본자세는 말 그대로 기회를 노리는 호랑 이처럼 뛰어오른 케워크를 노려보았다. 반동에 다시 반동, 스프링처럼 압축되었던 탄력이 폭발하며 시즈의 몸이 쏘아져나갔다. 날으는 제비를 가른다는 기술인 〈비연참〉의 힘을 실고 예도는 번개처럼 케워크의 아랫배를 훑고 지나갔다. 모닥불에 반짝이는 시뻘건 피가 보석처럼 풀들에게 쏟아졌지만 이미 시즈는 땅을 구르고 피한 후 였다. 「크아아아아아!!!」 「으헉!!」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헤모에게 고개를 돌리던 시즈는 등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천근처 럼 무거운 바위덩이가 등에 떨어진 느낌을 받으며 날아간 시즈는 나무에 머리를 받고 쓰러 졌다. 아끼던 안경이 부서지며 시즈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선혈에 얼굴이 적셔지 는 것을 느꼈다. 어른거리는 시선을 뒤로 돌리니, 배에서 피를 줄줄 흘려대는 거대한 괴수 가 비틀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죽만 베었었군. 흐흐. 재수없는 짐승같으니, 벼락이라도 떨어져라.」하며 시즈는 그답지 않게 이죽거렸다. 케워크의 거대한 앞발에 맞는 순간, 등뼈가 완전히 부서지 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이 레이모하의 뜻이라면!!」 뻐어억!하는 충격음에 귀가 얼얼했지만 정말 벼락이 떨어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반가울까. 거대한 물체가 시즈에게 다가서던 케워크에게 하늘에서 떨어져 충돌했다. 헤모가 다른 케 워크를 업어치기 하듯이 매쳐서 꽂아버린 것이다. 헤모의 엄청난 힘으로 인한 속도와 케워 크의 막대한 무게는 이미 뱃가죽이 너덜거려 허덕이던 짐승을 그 자리에서 절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시즈! 괜찮나?」하며 달려온 헤모는 상반신에 여러가닥의 핏빛 줄무니가 나있었다. 그 는 숨을 헐떡이는 시즈를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을 수가 없겠군. 지혈! 붕대나 천 없나?」 「흐헤헤헤. 늦었어요, 사제님. 목 아래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걱정말아! 느껴지게 해줄테니.」하고 외친 헤모는 정신조차 똑바로 가누지 못하는 청년 에 입에, 보랏빛의 가루를 붓고는, 물통을 처박았다. 시즈는 물도 가까스로 넘기고 힘이 없 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클러드낫〉이야.」 이미 헤모는 보랏빛 가루가 들어있던 주머니를 허리에 매고 어느 틈에 시즈의 검과 배낭, 넬피앙까지 묶어서 목에 걸고 있었다. 시즈는 갑자기 깨끗해진 머릿 속에 신기해하면서도 〈클러드낫〉이라는 약초에 대해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헤모 사제, 클러드낫이라는 약초는 처음 들어봅니다만…. 으악!? 으으으윽!!」 갑자기 말을 하다가 비명을 질러대는 병자에게 헤모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어조로 비명을 배경음악 삼아 말했다. 「당연하지. 클러드낫은 독초거든. 그것도 신경을 예민하게 한 상태에서 팔과 다리 끝에서 썩어들어가는 고문용 독초야. 흐려지는 정신을 되살려주는대는 끝내주는 효과가 있지.」 「제,젠장!! 당신! 죽여버리겠어!」 「그래. 닭 모가지라도 비틀 힘이 생기거든 도전을 받아주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시즈의 양손을 한대 묶고 입에는 수건을 물린 채 업고 그는 맹수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유쾌한 그의 어조와는 달리 황금빛 눈동자는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 차있 었다. 고통에 찬 시즈의 뜨거운 눈물이 어깨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중얼거렸다. 「조금만 참게…. 수도가 얼마 안 남았어.」 횃불 하나없는 어두운 숲이었지만 그는 눈에서 한가닥의 광휘를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겠다는 의지의 불꽃이었으며, 그의 의지에 보답하듯이 칠흙 같은 밤 하늘 아래서도 별을 따서 장식한 듯 화려한 빛에 반짝이는 거대한 하얀 거성이 한 사제의 눈물어린 눈동자에 비쳐오기 시작했다. -8- 멜도아 강은 대부분의 영토가 평원인 엘시크에 있어서 젖줄이나 다름없었다. 구불구불한 강의 지류가 실핏줄처럼 토지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며, 평원을 비옥한 농토로 탈바꿈시켰 다. 엘시크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멜도아를 신성시했으며, 수 많은 음유시인 들은 그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시로 기리곤 했다. 그런 멜도아와 노트르 평원을 중심으로 가 장 먼저 나라를 일으켰지만 많은 침략의 주요대상국이 되었던 엘시크는 산지가 거의 없어 방어하기에 매우 불리한 지형적 조건을 극복해야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불필요할 정도로 두텁고 높은 성벽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특히 수도인 제플론은 외성벽과 더불어 왕성 또한 거대하기로 유명했다. 또 벽돌 하나하나가 상아빛을 발하는 웅장하면서도 성스럽기까지 한 왕성을 가리켜 엘시크의 사람들은 자랑스러움을 담아서 〈백석 거성 베르니우스〉라고 지 어불렀다. 베르니우스는 자신의 몸체를 촉촉하게 적셔오는 달빛을 받으며 놀라 잠에서 깨어난 아이 처럼 우유빛을 발했다. 「크으으윽!!」하는 신음 소리가 제플론의 중앙광장에서 세워져있는 레이모하의 신전에서 끊이지 않고 있었다. 침상에 엎드려 연신 비명과도 같은 신음 소리를 토해내는 청년을 헤모 사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나!? 왜 이렇게 신관이 없는 거지?」 「죄송하지만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입니다. 침착하십시오, 헤모 사제님. 이제 곧 신관들 이 도착할 것입니다.」 빙그레 웃으며 달래는 사제의 얼굴이 그렇게 가증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의 멱살을 찢어지도록 잡아당긴 헤모는 살기어린 눈동자를 사제의 눈에 가까이 마주치며 거대한 바위 를 유리판에 끌고가는 듯한 쇳소리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당장 자고 있는 신관 중 신성술이 가능한 모든 녀석들을 깨워서 1 분 내로 끌고 와라! 지.금.당.장!!」 성투사의 화산같은 살기가 담긴 시선을 평범한 사제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을 열고 그를 던져버린 헤모는 벽에 기대며 주저앉아 버렸다. 전쟁에서는 적들은 개미처럼 뭉 개버리는 그의 팔과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오. 레이모하시여. 그는 지금 지옥에 가서도 느껴보지 못할 고통을 견지고 있습니다. 그 댓가로라도 시체가 되어도 시즈를 살려줘야 할 겁니다.」 헤모에게 내던져졌던 사제는 정말로 1분도 되지 않아서 10명이 넘는 신관들을 데리고 왔 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은 것으로 보아서 그가 울며불며 사정하고 다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으음…!」 침상 위의 널부러진 시즈를 본 신관들은 깊게 깔린 침음성을 내뱉았다. 차라리 죽는 나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등은 어떤 맹수의 공격을 받아서 맨손으로 뜯어낸 두부처럼 처참하게 뜯겨있었고 뼈는 조각조각나서 흩어져있었다. 온몸은 어떤 독으로 인한 중독증상으로 보랏 빛을 띄고 있었고, 그들이 지켜보는 순간에도 계속 손가락과 발가락은 검게 썩어 들어갔다. 신관들 중에 흰 수염을 깨끗하게 기른 노인의 손을 헤모는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하는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노년 의 신관은 인자한 미소를 따뜻하게 지으며 헤모의 어깨를 툭툭 하고 치고는 주위의 신관들 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3명씩 조를 나눈다. 한 조는 정화의 법을, 두번째 조는 치료의 법을, 마지막 조 는 생명의 법을 쓴다. 난 우선 흩어진 뼈와 내장을 맞추겠다.」 「크아아아악! 으으으으!!」 「허어! 반응이 너무 좋군. 헤모 사제, 이리 와서 환자의 어깨를 누르게. 절대로 움직이게 해선 안돼. 그리고 거기! 울지 말고 이리와서 다리 잡아. 그래 좋아. 시작한다.」 「다,당신들 모두 죽여버리겠어. 으아아악! 으헉흐헉! 크으아아아!」 「아! 깜빡 잊었군. 재갈 물려.」하자 신관 중 누군가가 신복을 대충 찢더니 시즈의 입을 벌리고 쑤셔넣었다. 아무래도 단잠을 깨운 보복이 아닌가 싶었다. 「헤모 사제, 이러는 원인을 아는가?」하고 물으면서도 노신관이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주름진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정신을 잃게 하지않기 위해 클러드낫을 썼습니다.」 「허허, 고통에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하군.」 헤모의 말에 신성술을 쓰는 신관들의 몸이 움찔했다. 앞에 쓰러져있는 청년이 느끼는 고통 이 얼마나 굉장한지 익히 들어왔던 것이다. 뼈를 맞추자, 두 신관이 얼른 다가와 등뼈에 치 료의 법과 생명의 법을 썼다. 등뼈는 이미 부서지는 순간, 신경이 끊겨서 치료시킨다고 해 도 움직일 수 없는 무생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생명의 법으로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장만 맞추면 되는 군. 이보시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참게나. 자 네는 고생이 크니 낙도 꽤나 클거야.」 「으으으으읍!」 아무리 좋은 말도 시즈에게는 들려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죽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의 눈 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헤모가 시즈의 얼굴에서 얼굴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 때 넋을 놓지만 않았어도….」 성투사인 그에게 케워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시즈가 걱정되었던 헤모는 상 처를 감수하면서 달려들어 한 마리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달려드는 다른 케워크의 두개골을 발꿈치로 찍어서 뭉개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보았다. 빛줄기와도 같은 섬광. 검이 아닌 빛만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다시 한번 섬광은 폭발하며 케워크의 배를 갈 랐다. 적은 동작이었지만 깨끗한 동작과 빛살과도 같은 검의 빠르기, 그리고 극도의 단조로 움이 구현해낸 검술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검술보다 화려하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그렇다고 넋을 잃다니!」 「그렇게 자괴심을 갖을 것 없네. 자네라고 해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야. 그리고 이 청년은 살아날 테니까.」 실컷 시즈의 뱃 속을 주물거리던 노신관이 피에 젖은 손을 꺼내며 처진 음성으로 주변 신 관들을 훑어보았다. 믿음섟인 그의 눈이 감기며 뒤로 물러섰다. 「부탁하네.」하는 그의 말과 동시에 시즈는 신관들의 손에서 내뿜어지는 오색의 빛깔에 휩싸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청년의 얼굴에 평온함이 돌아오고 그의 손발에 홍조가 일기 시작했다. 땀을 비처럼 흘려대는 신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고 동시에 신성술을 걷음과 동시에 빛이 사라졌다. 몇 몇의 신관들은 뒤로 물러서면서 동시에 중얼거렸다. 「이제는 자는 거야.」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신성술을 썼던 것이다. 우르르 하고 몰려가는 그 들의 얼굴에는 방금까지 치료했던 환자에 대한 걱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어이없는 표정 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헤모를 향해 노신관이 껄껄 웃으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들도 피곤해서 그러니 이해하게. 그리고 이 환자는 아직도 안정이 필요하네. 하루는 요양해야 될거야.」 끄덕이는 헤모의 시선은 이미 잠든 시즈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애처롭게 흘려낸 눈물도 인식하지 못한 채 시즈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묻고 싶군. 헤모 사제, 당신은 사람을 여러 번 죽여본 적이 있는 성투사가 아닌 가? 그런 자네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리한 방법까지 쓰다니…. 이해할 수 없군.」 헤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자한 눈빛을 띈 채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의지에 의해 일을 행했다고 해도 그 책임이 행한 자에게 없는 것은 아 닌 것처럼 말입니다. 전 전쟁이나 전투에서 교단을 수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라면 전 제가 지운 생명의 무게를 쓰러지는 이들에게 건 네야합니다.」 의지에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느낀 노신관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에 헤모 는 마주 미소지었다. 확신에 찬 미소를…. 「그렇지 않다면 전 제가 거두어드린 생명의 무게에 짓눌려 버릴 테니까요….」 -9- 「시즈…. 이제 그만 입 좀 다물게나. 그렇게 넋잃고 바라보니 내가 무안하잖아.」하고 2m 의 장신 사내는 주위를 보면서 안절부절했다. 신전을 찾은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정 확히는 침이라도 흘릴 듯 입을 헤 - 하고 벌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헤모, 내가 바라보는 건 그대가 아니라 백색 거성 베르니우스란 말입니다. 무안 하려면 베르니우스가 무안해야지요.」 갑자기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고 정색을 하면서 대답한 시즈는 곧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왕 성을 보며 다시 넋을 잃어버렸다. 무릎에 놓인 찻잔을 쏟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끔 햇살에 나긋해진 고양이처럼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능숙하게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은 20대의 청년이 아니라 60살은 먹은 노인처럼 보였다. 「이제 몸은 좀 어떤가?」 「파우텔 대승정님, 새벽에는 무례했습니다.」 이미 그들와 안면이 있었던 노신관은 헤모의 인사에 미소로 대답하며 턱끝으로 시즈를 가 리켰다. 시즈는 대승정이라는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며 찻잔을 안정된 자세로 받쳐든 채 만 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헤모는 기겁을 했고 파우텔은 고개를 두어번 졌더니,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저러나?」 「예? 예. 불행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방금 전에 깨어나서 계속 저 상태입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선 파우텔은 시즈가 놀라지 않게 어깨를 두들겼다. 스르르 하고 뱀이 고개 돌리는 듯이 시선이 노인을 향하자, 파우텔은 청년의 탈속한 듯한- 사실은 안경 이 없어서 눈이 잘 안보여 눈빛이 흐릿한 것이었다. - 시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지죠?」하고 대끔 던지는 한 마디, 온화하고 침착하기로 소문난 대승정은 자신을 보 자마자 무엇인지 모르지만 〈멋지죠?〉하고 내뱉는 한 마디에 당황하고 말았고, 다시 시즈 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헤모의 말에 따르면 지금에서야 왕성을 봤다는 말일텐데 그런 그는 지금 40년을 수도에서 살아온 대승정가 처음 베르니우 스를 본 사람인양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일, 파우텔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그렇군.」 「흠, 그러고 보니 깨어나서 아무것도 못 먹었군요. 헤모, 식당이 어디죠?」 「아아…. 따라와.」 〈그,그게 전부인가?〉하고 묻고 싶었지만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는 그 둘의 모습은 어느 새 건물 안을 들어서고 있었다. 파우텔 대승정은 눈을 크게 뜬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즈가 앉아있던 벤치에 털썩하고 힘없이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가,강적이군.」 시즈의 상세는 잠을 위해서, 죽을둥 살둥 신성력을 쏟아넣었던 신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3 일도 못되어 완치되었다. 시즈는 생글거리며 한 주먹의 금화를 내놓았고, 그의 허름한 옷차 림에서 금화가 나올 줄 몰랐던 신관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받아들였다. 「레이모하의 뜻에 따라 헛되지 않게 쓰겠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는 한 사제의 말에 시 즈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레이모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겁니다.」 그 말에 사제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지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시즈, 왕립도서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었지. 이것은 레이모하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신 분증이네.」 「저는 신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모하를 믿는 이들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형제라네. 그런데 이제 어디 로 갈 생각인가?」 「우선 세이탄에 자리를 잡을 생각입니다. 한 여행객의 얘길 들으니 그곳이 제법 살만한 모양이더군요. 헤모 사제님, 파우텔 대승정님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하며 시즈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헤모의 듬직한 장신을 껴안았다. 주위의 신관들이 감동스러 운 듯 웃음과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시즈는 눈가에 눈물을 담고 물러서며 말했다. 「이것은 특별히 사제님께 드리기 위해 로나린 신관께 특별히 부탁해서 탄 차(茶)입니 다.」하고 그는 옆에 서있던 여신관이 준비하고 있던 차를 받아서 내밀었다. 로나린 신관은 시즈가 헤모에게 다가가자, 감동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시즈님께서 그 차를 끓이는데 꽤 고생하셨어요. 전 끓이기만 했는 걸요.」 은은한 보랏빛이 도는 액체는 담담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찻잔을 열 자 풍기는 향기에 신관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었고, 헤모은 시즈와 차를 번갈아보며 쑥스러 운 웃음을 짓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니, 차는 음미하면서…!!」 「괜찮습니다. 마셔주시기만 해도 전 감사합니다.」 시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는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신전을 떠났다. 그가 가려는 곳은 제플론에서 10 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 세이탄으로 맞닿 아있는 멜라누 숲은 많은 호수가 곳곳을 장식하며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는 곳이었다. 혼잡한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고 경치까지 수려한 세이탄은 왕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별궁지로도 이름이 높아 마을의 상업 또한 상당히 발전한 축에 속했다. 시즈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입지조건이었다. 그가 두시간쯤 지나서 마차로 세이탄에 도착했을 무렵, 그가 떠나 온 신전에서는 엄청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신전을 떠나고 잠시 후…. 「끄아아아아아아악!!」 「헤모 사제!! 정신 차리게! 누,누가 좀 말려봐!!」 죽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건물을 부숴대는 헤모의 모습은 검푸른 빛을 띄고 있어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파우텔 대승정이 손짓발짓하며 신관들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도망가기 바쁠 뿐이었다. 「그는 성투사입니다.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요!」 「으아아아! 살려줘어어!!」 바닥을 구르고 벽을 부수고 분수대를 망쳐대는 그가 얌전해진 것은 수도에서 쉬고 있던 다 른 성투사들이 신전에 도착하고서 였다. 성투사 중에서도 특히 월등한 실력을 가진 헤모의 발광을 막아내는 것은 성투사들로서도 힘겨운 일이었고,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제압한 것이다. 땀을 흘리며 신관과 성투사들이 바라본 헤모의 손발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이건….」 「클러드낫이 아닌가! 게다가 과도복용이라니!」 성투사들이 놀라는 경악하는 동안, 파우텔 대승정은 멍하니 베르니우스를 바라보던 누군 가를 떠올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역시 〈강적〉이었어…. 「그러고보면 조금씩 마실 줄 알고 독초량을 좀 많이 넣었는데 그걸 다 마시다니…. 기분 이 새롭겠군. 발악을 하지 않을까?」하고 세이탄의 음식점에서 스프를 마시고 있던 시즈 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신전 수리비는 충분히 주었으니까….」 그 미소가 어찌나 순진하게 보이는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녀는 천사같다고 생각했다. -10- 「정말 이 곳에 집을 지을 생각이십니까?」 「네네. 경치가 무척 좋지요?」 「그것도 이 설계도면…을 따라서?」 「예. 안 되나요?」 미장이이자 명망있는 건설지휘자로 세이탄에서 소문있는 브라트니는 숲의 맑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즈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의 생글거리는 얼굴을 호수에 쳐박아버리고 싶은 기분을 억제하며 말했다. 「시즈군, 이 곳은 바로 앞에 있는 호수가 있어서 주위에 지하수가 흐르고 있을 겁니다. 그 냥 지상으로만 집을 짓는다고 하고 땅을 다진다고 해도 보통의 땅 위에 짓는 것보다 재료비 만 두 배는 더 들겁니다. 게다가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인부들이 꺼릴 것은 말할 것도 없습 니다.」 「그런가요?」하며 시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흐릿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신전 에서 부상은 고쳤지만 원래 나빴던 눈은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에 브라트니는 머리에서 연기가 솟을 것 같았다. 아프도록 쥐고 있는 주먹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지하 3층의 집을 짓겠다고요? 계단 한개의 깊이마다 보통 가 옥의 한층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거요. 인부들의 삯은? 아무도 당신의 공사를 하고 싶은 사 람이 없을 겁니다. 이것은 당신이나 우리나 명백한 손해가 아닐 수 없소.」 절박하게까지 외치는 그의 말에 시즈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이 맘에 꼭 들었 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집을 짓고 싶은 시즈는 안된다고만 외쳐대는 눈 앞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언어만이 나올 듯한 입술이었지만 시즈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힘이 많이 든다는 뜻일테니까….」 똑같은 입술에서 그렇게 다른 느낌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흠칫한 브라트니는 자 신의 아들만한 청년이 하는 다음 말에 놀라 턱이 아플만큼 벌어졌다. 「세이탄의 미장이와 목수, 나무꾼 등 이 공사와 약간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을 모두 사 겠습니다. 사람이 남는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에게 각자 직업의 평균의 2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주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 브라트니의 모습을 잘 살펴본다면 그의 염소수염이 덜덜 떨리고 있 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정하지만 허름한 옷차림에 평범한 여행자가 지니고 다닐 가방과 음유시인의 악기인 넬피앙, 검붉은 색상의 둔탁한 느낌을 주는 긴 검은 아무리 봐도 어떤 사람도 놀라게 할만한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한 중년 사내의 눈에는 지금까지의 어떤 이보다도 거대한 청년으로 보이고 있었다. 「지휘는 당신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계획대로만 해주신다면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 의 3배를 드리도록 하죠.」 「아,아? 아!? 아아!」 놀라서 혀가 굳어버린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염소 수염의 머리 속이 돌아갔다. 다른 사 람이 2배인데 자신에게는 그들의 3배라고 했으니 6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방금 전까지 아래로 늘어지려던 입이 이제는 옆으로 찢어지려고 했다. 시즈는 나이드신 분의 입이 혹사 당하는 것이 안쓰럽다고 느꼈고 〈다물게 해줘야 겠군.〉이라고 생각한 그는 부드러운 미 소를 지었다. 「하지만 조건을 드리죠. 완공까지 3주를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완공하지 못한다면…. 다 른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임금은 드리겠지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청년의 말은 어떻게 보면 모두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것보다 브라트니에게는 더 가혹한 말 이었다. 모두가 한달간 일한- 일하지 않더라도 - 댓가를 가지고 돌아가는데 혼자서만 한달 간 일해서 빈손….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다른 인부들이 모두 이 청 년에게 고용되었는데 혼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한 마디로 똑바로 못하면 굶어죽을 수 도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온화하게만 보이던 청년의 미소을 보는 그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단의 상자 를 열어버린 듯 했다. 브라트니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시즈의 미소는 더 욱 짙어졌다. 「이봐! 거기 미장이들 놀지마. 나무꾼들 나무 다 베었으면 땅이라도 파!」 공사가 시작된 후, 공사책임자를 맡게 된 명망있고 냉철하며 유능한 미장이 브라트니는 불 을 토하는 악귀처럼 인부들을 닦달했다. 어찌나 무섭게 인부들을 다루는지 세이탄의 모든 인부들은 그를 얼마 전 있었던 수도의 미친 성투사 소란의 주인공 헤모 사제와 비교할 정도 였다. 그에 비해서 소문이 무난했던 저택의 주인공은 들려오는 풍문과는 다르게 매우 온화 하고 순진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힘드신데 조금 쉬면서들 하세요.」하면서 차를 따라주는 청년의 옆에는 잠시라도 쉬는 시간만 되면 미장이, 목수할 것 없이 모여들어 브라트니에 대한 불만을 투덜투덜거렸고, 시 즈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차를 따라주면 기분이 좋아졌다가 브라트니의 악받친 고함소 리에 쫓겨 공사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인부들의 눈에는 그늘이 드리운 큰 바위 위에 단정히 앉아서 깊어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애수를 담은 채 호수를 바라보는 청년은 낡았지만 고 풍스러운 그림의 천사처럼 보였다. 「브라트니 씨도 차 좀 드시면서 하시지요.」 「아,아닙니다.」 인부들은 어째서 천사같은 시즈에게 악귀가 따로없는 브라트니 씨가 쩔쩔매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고 〈역시 악마는 천사한테 힘을 못하는 군.〉하 는 농담을 주절거렸다. 가끔 들려오는 말에 브라트니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지만…. 뭐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시즈군. 애인 있습니까?」 「하하, 저 같은 사람에게 애인이 있겠습니까?」 「그래? 우리 여식이 날 닮아서 아주 귀여워요. 어떻습니까? 한번 만나보지 않겠소?」 시즈는 구릿빛 피부를 땀으로 반짝이는 장년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귀엽다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지만 겉으로는 전혀 나타내지 않고 웃음을 띄며 물었다. 「그래요? 귀여운 따님의 나이가 어찌되는 되요?」 「헤럴드의 딸이 올해로 8살이었지, 아마?」하며 한 미장이 노인이 껄껄댔다. 헤럴드라는 장신의 사내는 노인을 노려보며 투덜댔다. 「8살이면 어떻소? 한 10년만 기다리면 미녀가 될 텐데….」 「헤럴드 씨. 전….」하며 시즈가 무언가 말하려하자 헤럴드는 아직 나이도 안찬 딸의 시 집에 불타는 의지로 말을 끊었다. 「자네가 급하다면 5년 있다가 보내줌세.」 「헤럴드 씨, 전 범죄는 싫습니다.」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가며 열을 올리는 그에게 시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손 을 내저었다. 청년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소문이 어느 새인가 예전과는 다르게 뒤바뀌는 동안, 저택이 완공되었다. 브라 트니가 생존을 조금이라도 빨리 확신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건설에 힘을 쏟은 덕택이었 다. 예정된 3주보다 5일이나 빨랐지만 그에게는 아슬아슬하기 그지 없게만 느껴졌다. 저택 을 지하 3층에서 지상 2층까지 돌아보고 시즈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생으로 축쳐진 어깨 를 두들기자 공사책임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날아드는 경험을 맛보았다. 「이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즈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지만 인부들은 삯이 너무 많았다며 자신들의 일이 아니면서 도 가구들을 옮겼다. 청년의 살림이나 가구는 매우 간소해서 인부들이나 마을 사람들의 예 상을 크게 벗어났다. 도리어 목수들은 터를 잡을 때 베었던 나무들로 부족하다 싶은 가구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도와보려는 시즈를 오히려 저택을 구경하러 온 마을 사람 들은 말리며 언제나 그가 앉아있던 바위에 억지로 앉혔다. 그 자리가 시즈에게 가장 잘 어 울린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바위 위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청년은 넬피앙 을 꺼내들고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넬피앙의 하나하나의 현에서 튀어나온 각각의 파동은 실이 이리저리 얽히며 옷을 짜듯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되어갔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 게 넬피앙의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며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음악과 일이 더해갈수록 멜라누 숲, 한 호수가에 지어진 아름다운 저택처럼 사람들 모두가 친구라는 길고도 거대한 성벽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11-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저택 앞의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낮은 온도의 호수가에 아침햇살이 비치면 그의 저택 근처는 완전히 안개의 세상을 이루곤 했다. 그 가운데 무심한 눈길을 호 수를 넘고 산을 넘고 어딘가의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빌리는 말을 걸면 죄를 받을 것 같아 살그머니 부탁받은 것을 바위 옆에 놓아두고 살금살금 뒤걸음질쳤다. 「무슨 일이죠?」 「으악!」 소년은 그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갑자기 질문을 하자, 놀라 발이 엇갈렸다. 털썩하고 엉 덩방아를 땅에 박자 눈물이 핑 돌았다. 바위에서 내려온 그는 쿡쿡하면서 웃음을 참으며 손 을 내밀었다. 얼굴을 미남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단정했고, 특히 그의 손은 허리에 찬 검이 장식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여자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예뻤다. 「빌리,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즈님, 저기 누나가 음식을 남게 만드셨다고 가져다 드리라고….」라고 말하 며 빌리는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는 손을 뻗어 빌리의 머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누나한테도 고맙다고 말해주세요.」 「네에.」 소년은 그의 미소에 아픔도 잊은 듯 밝게 대답하고는 손을 흔들면서 떠나갔다. 빌리가 떠 난 후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위 옆에 놓인 바구니를 열어본 시즈는 중얼거렸다. 「아침밥으로만 5바구니…. 고맙긴 한데 이걸 어떻게 다 먹지? 오늘도 역시 그 방법을 써 야 하려나?」 바구니의 음식을 이것저것 꺼내먹으면서 아침을 해결한 시즈는 자신의 바구니에 따로 음 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점심에 먹기로 하고…. 그럼 가볼까?」 시즈는 마을처녀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대부분은 저택이 완공되던 날,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왔을 때 그의 넬피앙 음률에 팬이 된 여인들이었다. 서로 모여 시즈를 대 화거리로 꺅꺅거리며 수다를 떨곤 했지만 시즈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자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처음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아직도 연출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가 컸 다. 아무래도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오! 시즈군, 오늘도 제플론에 가는건가? 지금 갓 구운 빵인데 먹으면서 가게나.」 「어머! 시즈 씨, 오늘도 그 옷인가요? 왕궁에 들락거리는 사람이… 좀 바꿔보는 게 어때 요?」 「시즈님, 오늘도 책이세요?」 그 외에는 다들 시즈가 주위를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미소만 봐도 기 분이 좋아지는 듯 하달까? 시즈는 마을에서 건실한 학자이자 젊은 현자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서제에 들어간 마을 촌장님조차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들에 질 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시즈가 엄청난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돈을 빌리러 올 때가 있었고, 이 고마운 청 년은 선뜻 돈을 내주곤 했던 것이다. 그보다도 마을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인기가 있는 것은 노을이 질 때쯤이면 바람을 타 고 들려오기 시작하는 시즈의 넬피앙 연주 때문이었다. 그 시간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일손 도 놓고 음악에 빠져들었고, 뛰어놀던 아이들도 한발 앞서 시즈가 넬피앙을 연주하는 바위 주위에 옹기종기 앉아서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며 얌전히 듣고 있는 것이다. 연주가 끝나 면 시즈는 아이들에게 달콤하게 구어진 쿠키- 물론 마을 처녀들이 준 것이었다. -를 나눠주 었다. 그럼 관객들은 쿠키를 토끼처럼 아껴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즈, 이제 오나? 오늘은 좀 늦었군 그래.」 제플론에 도착한 시즈가 찾은 곳은 세이탄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왕립도서관이었다. 왕립 도서관은 왕궁 안에 있었기 때문에 책을 절실히 원하는 청년은 왕궁의 정문을 통과해야 했 다. 문지기 병사들은 시즈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반겼다. 「오늘도 수고하시는 군요.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시죠.」 「아하하, 매번 고맙군, 그래.」문지기 병사인 모바낙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가 내미는 바구니를 받았다. 문지기들은 왕궁의 경비를 위해 밤에 교대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일자리로 나와야 했다. 경비병들의 절대적인 환대를 받으며 왕립 도서관에 들 어가자 그가 찾은 책은 우선 수학이었다. 한국에서 이과였던 시즈였다. 엘시크는 한국에 비 해 훨씬 수학적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었고, 엘시크에서 최고라고 칭송받는 수학자들이 쓴 책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음은 화학이었는데… 「아직 연금술이라고 불리는 시기여서 그런지, 화학과 물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군.」 그는 화학같은 경우는 한 때 경시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었고, 대학교 화학과정인 일반화학 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던 것이다.(사실 일반화학과 화학2는 깊이만 다를 뿐이지. 내용이 확 다른 것은 아니다.) 이렇듯 그는 엘시크 왕립도서관에서 대부분의 학문을 연구하는 동 안, 한 순간도 손을 떼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였다. 「세일피어론아드, 혼돈의 신과 순수의 신의 싸움에 의해 창조되고 지혜의 신에 의하여 조 화를 이루게 된 세계….」 시즈에게 원래의 세계와 세일피어론아드와의 관계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둘의 연관성은 머리카락만큼도 찾 을 수 없었다. 「…아무대도 없어.」하며 두 세계에 대한 연관성을 찾는 것을 포기한 시즈는 마지막으로 집어든 것은 한국에서는 연구하지 않는 신비의 학문이었다. 흥미를 떠나서 학자로서의 호 기심이 시즈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비의 학문에 대한 서적은 왕립 도서관 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그가 묻자, 왕궁 경비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왕궁 한 구석에 자리한 거대한 건물을 가르키며 말했다. 「마법에 대해 알고 싶으면 〈궁정마법원〉으로 가야지.」 -12- 보통 영지와 수도와의 차이점은 경비병들의 갑옷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 가 있는 영주라면 경비병들에게 보통 링 메일이라는 효율성이 높은 갑옷을 입혔다. 그들에 게 시즈의 눈 앞에서 눈알을 부라리고 있는 왕궁 내부의 경비병들이 입고있는 플레이트 메 일이라는 갑옷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산물이었다. 「못들었나? 이 곳은 궁정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할버드를 가지고 있는 중장보병 타입의 플레이트를 걸치고 있었는 데, 아침에 갑옷을 입을 때 고생을 한 모양인지 그에 비해서 관절을 편하게 고안한 필드 플 레이트 갑옷을 착용한 경비병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고, 할버드를 시즈에게 들이대는 자신 의 동료를 달랬다. 「하일로, 그만하게. 안에 다 들리겠어. 젊은 친구! 자네도 그만 돌아가게. 이 곳은 왕실의 허가를 받지 않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발도 들여놓을 수 없거든. 억울하더라도 지키지 않으 면 우리가 징벌을 받게 된다네.」 그들은 시즈가 생각하는 평범한 경비대가 아니었다. 왕실 직속의 병사 중, 실력있는 병사 들로만 이루어진 친위대로 평상시에는 왕궁을 수호하고, 전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궁정 기사단의 정예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럽지요?」 밖의 소리가 거슬렸는지 문에 열리며 서른 살이 약간 넘어보이는 갈색 머리의 여자가 머 리를 빼꼼 내밀었다. 「아…. 옛! 이 자가 궁정마법원 내로 들어가려고 해서….」 마법사와 기사의 지위체계는 확연히 달라서 작위가 아닌 계급으로 서로를 대하는 일은 매 우 드물었다. 마법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병사나 기사에 비해 그 수가 턱없이 적었으므로, 견습이라도 상당히 존중을 받았다. 게다가 서민이라고 해도 재능만 있으면 인정받아 귀족 으로 계급상승을 노릴 수 있었기에 빵집 아들, 과일가게 딸, 할 것 없이 커서 뭘 될래? 하고 물으면 마법사라고 대답하는 것이 부기지수였다. 그러나 그 재능이란 것이 가진 사람이 많 다면 마법사가 희귀하겠는가? 여마법사는 그의 말에 시즈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궁색한 옷차림에 눈살을 찌푸렸다.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오만스러운 자세로 시즈를 내려보았다. 「마법원에 무슨 볼 일이 있지?」 금실이 수놓아진 녹색 법복에 검푸른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살랑이는 밝은 갈색 머리칼 이 잘 어울리는 그녀를 보며 〈이게 바로 마법사구나.〉하고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표정 을 지으며 말했다. 「마법이란 학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하고 환하게 웃는 그를 여자는 어이없는 눈빛 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소리가 우렁차던 경비병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끌어내 주시겠어요?」 「들었지?」하며 어깨를 으쓱한 하일로가 붙잡으려는 손을 피하며 시즈가 소리쳤다.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이러는 건가!」 뒷걸음질치던 시즈는 등 뒤에서 비치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뜯 어봐도 괴팍해보이는 노인이 미간에 주름을 가득히 잡으며 노려보자, 여마법사는 찔끔했 다. 눈썹과 수염이 모두 백색을 띈 노인은 꼭 맞춘 것처럼 어울리는 흰색의 법복과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한 눈에도 그가 마법원의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평소에 인상대로 까다로웠던 모양인지 여마법사는 감히 노마법사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초지정을 이야기했다. 그 역시 기가 막힌 얼굴로 시즈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에 는 흥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법이라는 학문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그건 무슨 뜻이냐?」 시즈는 그 또한 자신을 내쫓을까봐 걱정하던 차에 자신의 생각을 들어보려는 의향을 비추 자, 벌떡 일어섰다. 「마법의 구현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모르는 학문, 마법에 대해서 알 고 싶습니다.」 「학문으로서의 마법….」 시즈의 말을 되새겨보던 노마법사, 헤트라임크는 〈누군가도 이런 말을 했었지.〉라고 중 얼거리며 어떤 의지로 물든 눈빛을 발하는 한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자 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소년이 비쳐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애로운 시선을 하고, 중얼거렸다. 「에밀키드 세이서스…. 나의 아들아….」 「예?」 「아,아니다! 너의 이름이 뭐지?」 갑자기 부드러워진 헤트라임크의 어조에 시즈는 의아스러웠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 답했다. 「시즈. 시즈라고 합니다.」 「평민인가? 의외로군. 뭐 상관없지. 메드린, 시즈를 마법서적을 볼 수 있게 관내 도서관 으로 데려다 주게. 내가 허락했다고 그래. 후우…. 난 그럼 와인이라도 한 잔 하고 와야겠 군.」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던 아들이 다시 한번 겹쳐보이자, 노인은 슬픔에 잠긴 눈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등을 돌린 채 왔던 길을 돌아가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시즈를 향해 말했다. 「시즈, 자네. 책을 보고나면 한번 날 찾아오게나. 내 이름은 〈헤트라임크 세이서스〉라 고 하지. 마법원에서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게야.」 대답 대신 시즈는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드린은 어안이 벙벙한 표 정을 짓고는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두 경 비병 사이를 지나쳐 시즈는 황급히 메드린을 쫓아 마법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13- 「저 사람이지? 마법을 학문으로 생각하고 연구하려고 한다는 사람이?」 「푸훗…. 말이 되는 소리야!? 재능이 없어서 억울하니까 책이라도 한번 훑어봐야 겠다는 일종의 오기겠지. 룬어나 할 수 있겠어?」 주위의 시선과 비웃음 섟인 속삭임도 책에 빠져버린 청년을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 아무 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탐독하고 있는 모습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없다면 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고요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의 주위만은 아무도 없는 그윽한 숲 속 같았다. 책을 들고 의자에 가서 앉는 시간조차 아까운 모양인지 아무데나 앉아서 읽어대는 그는 바 로 시즈였다. 「안녕하세요.」 시즈가 책에서 시선을 돌려보니 17세 정도의 소년과 소녀가 부드러운 갈색의 시선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동자 색 을 제외하고는 머리색깔이나, 외모 모두 달랐지만 묘하게도 쌍둥이같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시즈가 〈무슨 일인가요?〉라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갈색 머리의 소 년, 피르트는 청년의 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걸 모두다 보실 생각이세요?」 시즈가 옆을 보니, 어느 새 읽은 후 제 자리에 껴놓지 않은 책들이 앉은 그의 키가 넘도록 층을 이뤄서 언제 쓰러질지 위태위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책을 껴놓지 않아서 그들이 질 책하려한다고 생각한 그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읽은 것들 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들만 마저 읽고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그러세요…가 아니지. 이걸 다 읽었다고요? 모두?」 「정말이에요?」 미심쩍은 어조로 긴 청색의 머리를 드리우며 소녀가 물었다. 시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들은 상당한 독서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시즈도 겁을 먹을 정 도로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글보다 여백이 더 많아서 실제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마력의 운용같은 활용적인 서적이 아니라, 마법 의 총체적 이론을 정리해놓은 것이었기에 책마다 겹쳐지는 내용이 많았던 것이다. 「역시 헤트라임크 님의 제자라는 소문이 맞는가봐.」 피르트는 자신의 단짝인 소녀, 에리나를 잡아끌고 귀에다가 속삭였다. 시즈가 마법원에 들락거린지 1주일도 안되서 원내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한 수 많은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 다. 대부분 노마법사인 헤트라임크와의 관계설- 제자, 손자- 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마 법원의 원장과 동급, 아니면 이상이라는 권위자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즈는 마법원의 화제거리였다. 하지만 대상인 시즈는 하루종일 책만 읽다가 몇 가지를 노트에 적 어 돌아가는 둥의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왕궁 내 에서도 잘 모습을 비추지 않는 헤트라임크가 요 1주일 사이에 찾아오는 빈도가 부쩍 늘은 데다가 대부분 시즈가 독서하는 모습을 인자한 눈빛으로 눈여겨보고 몇 번 말을 나누고는 사라진다는 까닭으로, 평민이기는 하지만 감히 시즈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무슨 성과라도 있나?」 드래곤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언제 나타났는지 노마법사는 잘 보여주지 않아 희귀하기까 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즈는 답례로 미소를 지었지만 질문에 대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마법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현자라고 불리우는 마법사가 앞에 있는대도 앉은 채 대답하는 시즈를 보며 주위에서 수근 거렸지만, 정작 헤트라임크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무례한 청년의 앞에 털석 앉았다. 아직 소년으로 보일 정도로 순수함이 깃든 눈 앞의 청년이 짓는 미소은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 던 그의 아들을 연상시키게 만들었다. 〈그 녀석도 뭔가에 빠지면 국왕 폐하가 들이닥친다 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하는 회상이 떠올리며 그는 시즈가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 다. 「대마법사 〈메키드라히우〉의 마법론 저술!? 그것은 마법이론학에서 가장 난이한 수준 의 책이 아닌가? 1주일만에 그것을 이해할 수준이 되었다는 건가?」하고 헤트라임크는 경 악에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고, 목소리 또한 아무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수 준에 불과했다. 시즈는 이미 마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학문이 〈현자〉 또는 〈명사〉라고 불릴 수 있는 지경에 달해있었던 것이다. 헤트라임크는 놀라웠지만 그저 심 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마법이론학은 아무리 연구해봤자, 실제로 마법을 구현해보지 않은 이상 제대로 알 수 없을 걸.」 이 말은 사실 〈가르쳐줄테니까 어서 가르침을 달라고 해라.〉라는 노마법사의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마법원에서 수재라 하는 마법사들이 가르침을 청해도 못본 척 무시하던 그가 오히려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제자를 원 하는 마법사의 바램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년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산책이라도 같이 하시겠어요?」 「뭐,뭣? 아, 그,그러지.」 뜬금없는 산책이라는 말에 당황한 헤트라임크는 말을 더듬었다. 시즈는 비겁하게도 노마 법사를 존경과 경외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년, 소녀에게 서적의 정리를 부탁하고는 헤트라임크와 마법원을 나섰다. 길을 잃어버릴 만큼 넓은 왕궁의 정원을 걸으며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곳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서야 제가 마법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흠흠, 뭐…. 설마 그런 말을 하려고 나를 이렇게 거동하게 만든 건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몇 번한 노마법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청년과 있을 때는 자 신이 평상시의 냉정한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뭐 나쁘지는 않겠지.〉하고 중얼거린 그는 시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보아주십시오. 아니, 느껴주시면 되겠군요.」 언제나 미소만 지을 것 같던 남자의 진지함에 놀란 헤트라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 히 눈을 감는 시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런 모습에 지켜보던 노마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뭘 하려는 거지? 꼭 바람을 쐬는 기분좋은 여행객 같은 모습을 하고 말이야. 하긴 시원 한 바람이긴 하군. …바람이…! 빨라진다!?」 잔디도 힘겹게 흔들던 산들바람은 강렬한 돌풍으로 변해있었다. 나무가 비명을 지르며 꺽 여질 것 같은 바람 속에서 헤트라임크는 안간힘을 쓰고 몸을 가누며 시즈를 바라보았다. 중 심에 서있는 자,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회오리처럼 아래에서부터 말려든 질풍은 청년의 허름한 옷차림을 살짝거드리며 휘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그만해! 으악!」 노마법사의 말이 들었는지 시즈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 고 몸을 가누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던 헤트라임크는 평형을 이루던 힘이 사라지자 벌렁 넘 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황급히 달려온 시즈가 헐떡이는 헤트라임크을 일으켜주자, 숨을 거칠게 내쉬던 노인은 눈 을 부릎뜨고 시즈를 바라보았다. 경악이 넘치는 시선에는 알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연구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그것은 무엇인가? 주문조차 없었어. 게다가 그 범위, 주문이 없이 그런 거대한 마 법을 쓸 수 있다니, 자네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그들이 서있는 잔디는 어느 부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처럼 끝을 향하며 누워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시즈도 놀란 얼굴을 하며 말했다. 「예전보다 바람이 강해졌군요.」 「무슨 뜻인가?」하고 묻는 헤트라임크의 눈동자는 핏발까지 돋아있었다. 「이걸 보십시오.」하고 시즈가 내미는 것은 한 권의 얇은 책자였다. 두터운 표지조차 어 그러져 반쯤 뜯겨나간 오래된 서적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안에는 단, 한 페이지의 글만이 적 혀있었다. 알고 있습니까?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시오.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희로애락에 자유로운 바로 우리의 의지야말로 세계를 바꿀 신비한 마법이 되는 것입니다. 노래 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입니다. -14- 「의지가 곧 마법이라…. 설마….」 헤트라임크는 눈을 부릅떴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책을 잡은 채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시즈는 아주 절친한 친구를 보듯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미소지었다. 「그렇습니다. 방금 전 바람은 저의 의지입니다. 곧 마법이죠.」 「그럴리가…. 의지만으로 마법이 가능하다면 어째서 그런 사람이 이때껏 나오지 않은 것 인가?」 「아닙니다. 마법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저도 2명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분명 히 더 있을 겁니다.」 「후우…. 이 책의 저자와 자네 말인가?」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노마법사가 묻자 시즈는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지식한 노마법사는 도저히 손에 든 책의 말 을 신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 헤트라임크의 마음을 아는 시즈는 노인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의 마법을 쓰고 있습니다. 아주 미약할 뿐이지만요. 신념은 의지의 재료가 되고, 용기는 바로 의지의 발현입니다. 다만 거대한 자연에 미치는 힘이 작을 뿐입 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마법은 무엇인가? 의지만으로 마법이 가능하다면 어째서 마법의 이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인가? 마법이론은 수학의 총체라고 할 수 있네. 자네의 말대로라 면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의지는 구체화될 수록 잘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마법사가 외워야 하는 주문도 사실은 자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암흑의 심연 속에 타오르는 암흑의 불 꽃이여… 자취의 그림자초자 남지 않는 순수의 불꽃이여…〉」 「〈헬 파이어〉가 아닌가. 자네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노마법사가 긴장하며 뒤로 물러서자, 시즈는 피식하고 웃었다. 헤트라임크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헬 파이어〉는 9클래스 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만이 쓸 수 있는 절대적인 파 괴주문이었다.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헬 파이어는 소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는 이는 인간의 역사상 없었다. 인간의 역사표면으로 등장했던 몇몇의 드래곤조차도 그들 종족의 싸움을 제외하고는 쓰지 않았다. 헬 파이어는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생물을 죽 이기에는 너무나 좋은 칼이었다. 이론상으로만 남아있는 주문일 뿐이었다. 「아닙니다. 전 예를 들은 것 뿐입니다. 헬 파이어는 〈지옥의 불〉입니다. 암흑의 심연이 라는 것은 지옥을 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헬 파이어를 사용한다면 그 불이 지옥에서 직접 게이트라도 만들어 시전자의 손 앞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헬 파이어의 주 문은 지옥의 불만큼이나 뜨거운 불꽃이 나타나리라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죠.」 「네 말대로라면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도 되지 않는가?」 「소리를 내면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강한 의지를 위하여….」 노마법사는 고개를 무의식 중에 끄덕였다. 하지만 눈을 빛내며 곧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마나는 무엇인가? 실제로 마나는 모을 수가 있네.」 그 물음에 시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나라는 것은 자연의 에너지입니다. 제 생각에 모든 생물은 자신의 의지를 키움으로 인 해서 자연의 에너지 또한 이용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물건을 담는 용기에 우리의 의지를 비유하면 되겠지요.」 시즈의 말이 마치 망치가 되어 노마법사의 몸을 후려치는 것처럼 노인은 비틀거렸다. 그 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릎을 꿇으며 시즈를 올려다보았다. 「말해주게. 그 말대로라면 자네의 의지는 나의 마법에 뒤지지가 않네. 어떻게 그런 의지 를 가지게 되었나?」 「……언젠가 말씀 드려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줄은 몰랐군 요. 저 자신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다른 세상의 사람이란 것이 다르 겠죠.」하고 미소를 짓는 시즈의 얼굴은 슬프게만 보였다. 사실 시즈 자신도 어떻게 그의 의지에 마법이 구현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시즈의 대답에 헤트라임크는 눈 을 크게 뜨고 심장마비가 걸린 사람처럼 부들거리더니, 곧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자신 이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시즈의 얼굴에서 미소가 미소가 아니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시즈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시즈, 부탁이 있네.」 어찌나 손아귀의 힘이 강한지 얼굴을 찌푸린 채 시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트 라임크는 기원했다. 〈신이여, 내 아들을 돌려주시오.〉 「내 아들이 되어주게.」 「하지만….」하고 갑작스런 양자 제의에 시즈는 놀라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한 외로운 노인의 눈은 기원으로 매워져있었다. 「내게는 아들이 없네. 아니 없어졌지. 꼭 같은 집에서 살고,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은 아닐 세. 내게도 자네같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살게 해주게.」 뜬금없는 소리같았지만 시즈는 몰랐다. 노마법사에게 자신을 닮은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 외모가 아니라, 눈빛과 열정, 그리고 신념과 순수한 미소, 헤트라임크는 자신의 아들에 게서 보았던 모든 것을 눈 앞의 청년에게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정하고 있 었다. 하늘은 자신의 아들을 다시 돌려보낸 것이라고…. 마치 장성한 아들에게 어리광을 부 리는 듯한 그의 어조에 시즈는 은은한, 그리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아버지.」 -15- 멜란이라고 불리던 작은 마을에는 저녁 때면 모락모락하던 굴뚝의 흰 연기 대신에 붉은 혈향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을빛에 물든 것인지 아니면 원래 붉은 것인지 모를 액체가 비라도 내린 것처럼 마을 거리에 흘렀다. 「흐으… 흐으악! 시즈, 살려주게. 제발…!」 한 남자가 마치 목쉰 여자아이처럼 갸얇프게 울부짖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무리들, 도망 치려는 남자의 다리를 잡아찢으며 기쁨에 절은 입을 이죽거린다. 이리, 또는 늑대라고 불리 는 그것들은 마을을 인간 대신 채우고 있을 정도로 많았다. 80 마리는 족히 넘어보이는 녀 석들 중 일부는 몸부림치는 남자의 몸에 입을 처박고 싱싱한 먹이를 음미했다. 「별 것 아니다. 죽는 것은….」하고 나는 중얼거렸지만 몸은 쉴 새없이 떨렸다. 뛰어내려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커녕이고, 나무에서 떨어질 것이 두려워 굵은 나뭇가지를 꼭 붙들고 만 있었다. 내가 있는 위를 바라보는 늑대들이 몰려들었다. 녀석들은 나무에 죽죽 발톱자국 이 새겼지만 올라오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귓가에 쉴 새 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 지만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크르르르….」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죽는 것은 별 것 아니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외쳐대면서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녀석들은 마치 훈련받은 군인, 아니 그 이상의 전문적인 인간 사냥꾼같았다. 본능적으로 약한 여성과 아이들만 골라 먼저 습격한 놈들은 떼거지로 몰려 남자들에게 달려들었다. 필사적으로 대항했지만 팔뚝이 긴 핏줄기와 함께 부어올랐을 뿐이었다. 놈들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할 일은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녀석들의 이빨이 보이지 않는 곳만을 찾았다. 옆에서 사람이 늑대들에게 덮침 을 당하던 뜯겨먹히던, 내가 중요했다. 방금 전의 그 남자는 2주일 전, 그다지 높지 않은 절 벽에서 떨어진 나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주고 함께 있도록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은혜, 갚 지 못했다. 그는 죽어가면서 원망과 저주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었다. 「헉! 허억…. 헉!」 몇 마리째인가. 수십마리를 밴 것 같은 피로가 몰려들었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녀석들의 시체는 고작 4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쫓기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끈질길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 마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랄까. 한 놈이 다쳤던 발목을 물었다. 마치 다리의 은인을 배신한 댓가를 지불하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다리가 꺽인다. 등 뒤에 서 올라탄 녀석은 오른쪽 어깨를 물어버린 듯 난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예도를 떨 어뜨렸다. 이리떼들은 내 몸에 코를 처박고 싱싱한 먹이감에 감탄하면서 저 끔찍한 이빨로 조각조각 날 뜯어먹을 것이다. 닥치도 않은 이빨일테니, 지금껏 먹었던 인간의 찌꺼기가 상 당하겠군. 아마도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광견병에 걸려서 죽을지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를 구해보는 건데…. 달려들어보는 것인데…. 너무 늦었나?」하며 나는 왼손으로 예도를 잡았다. 오른쪽 어깨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내 어깨뼈는 개껌이 아니야!」 「쾍! 커커억!」 내 육체의 환상적인 맛에 취해있었던 것인지 피하지 못하고 턱이 꽤뚫린다. 그렇지, 그들 을 버려가면서까지 살았잖아. 지금 이렇게 죽으면 그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어. 「쿠엑!」 그러길래 과하면 독이라니까. 나무의 연두빛 잎새 사이로 푸르른 하늘이 엿보인다. 그래 날아볼까? 좋아. 날아보자고…. 「비천세….」하고 중얼거리며 새의 형상으로 검을 치켜들자. 앞에 달려드는 놈을 반으로 가르고 옆으로 달려드는 놈의 양다리를 날려버리자. 미련하게도 나는 땅에 머리를 처박아 가고 있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바람의 소리에 반가운 동족의 음성이 들리는 것은 착각일 까? 「아하하하…. 자네, 큰일날 뻔 했어. 내가 달려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 뻔했는가.」 「무슨 소리야! 내가 없었으면 소독도 못하고 열병으로 죽었을 거야. 소독이 뭐야, 아마 지 혈도 못했을 걸.」 「뭐야!? 이 허약한 녀석이!」 「내 말이 틀렸냐? 이 무식한 놈아!」 「죄송합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후음! 콜록!콜록!」 그제서야 자신들이 환자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두 청년은 머쓱한 표정으로 싸움 을 멈추었고, 그 중 덩치가 고릴라만큼이나 우람한 남자가 쾌활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긴 심벌튼 영지라네. 난 영지의 경비대장인 노리스라고 하고, 여기 이 친구는 경비대 전속 의사인….」 「츠바틴이라고 하네.」하고 소개를 하며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자신이 살아났다 는 것을 안 나는 세상이 떠나갈만큼 기뻤다. 그러나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 다. 억지로 힘겹게 미소를 지은 그는 고개를 꾸벅하고 노리스와 츠바틴에게 감사했다. 「우린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 이틀 전에 소문을 들으니, 몬티디런 숲의 멜란 마을이 완전히 쑥밭이 되었다지?」 「전 시즈라고 합니다, 쿨럭! 저도 거기서 오는 길입니다.」 내가 한 마을의 참사를 말하기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듣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은 흙 빛이 되어갔다. 「100 마리가량 되었다고? 그게 정말인가? 늑대가 그렇게 대규모로 움직인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니, 있네. 늑대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늑대는 늑대지.」 노리스의 말에 츠바틴이 고개를 지었다. 츠바틴은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잘 생각해보게. 그들의 털색은 무슨 색이었나?」 「붉은 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노을빛에 비친 것인줄 알았지만, 분명히 피처럼 붉은 늑대 였습니다.」 「알겠나?」하고 츠바틴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노리스는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침체된 목소리로 말했다. 「시즈의 말대로 〈티플〉이라면, 성의 기사들에게 알려야 겠군.」 그의 행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성주에게 시즈의 이야기를 알림과 동시에 마을 사람들 을 성 안으로 불러들였으며, 얼마 후 기사단이 출정했다. 몇일 후 난 침대에서 잠결에 티플 이라는 늑대의 변종을 한 마디로 남김없이 심벌튼 기사단이 말살시켜버렸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다. 「시즈. 시즈! 일어나라, 시즈 세이서스!!」 누가 날 흔드는 것 같다. 츠바틴인가? 눈꺼플 사이로 왠 노인이 보인다. 땀을 흘리며 내 몸을 열심히 흔들어대는 노인. 아…. 꿈이었군. 나는 양아버지 헤트라임크의 집에서 하룻밤 을 묵고 있었다. 내가 죽을까봐 굉장히 걱정하셨던 모양이군. 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괜찮습니다. 악몽을 꾼 것 뿐입니다.」 그 날 이후, 다시 웃게 되는 것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나는 또,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위해 악몽을 다시 이야기하는 수고를 더해야 했다. 그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며 미소를 지었다. 「일기로 쓴다면 한 편의 이야기가 되겠구나. 혹시 어쩌면 그 일 때문에 너의 살에 대한 의 지력이 더 강해진 것인지도 모르지.」 그 말에 난 쓴웃음을 지었다. 한 성직자와 만나던 날밤 숲 속에서 잃어버린 갈색의 일기장 때문이었다. 3년이 넘도록 쓰던 것이었는데, 너무나 아쉬웠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난다면….」 그 때도 나는 살아남을 겁니다. 죽음에서 내가 내버렸던 사람들, 그 생명의 시간까지도…. -16- 왠만한 귀족들도 사용하기 힘들다는 청광석이 중앙에 굳건히 박혀있는 홀의 중앙, 7인의 사람들이 대리석의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은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성으로 빛 나며 원탁의 중앙에 놓여있는 한 권의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참담하 기 그지 없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는 사람, 푸른 빛이 어려있는 애꿎은 청광석을 올 려다보며 침음성을 토하는 사람,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 모두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갈색 표지의 서적 한 권이 휘젖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 한숨들 좀 그만 뿜어대고 어서 고견들을 말해보시오.」 눈썹과 수염, 머리칼할 것 없이 새하얗게 흰 노인이 일어서며 가늘지만 힘있는 어조로 말 하며 원탁을 휘 - 둘러보았다. 그러자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장년의 남자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로우 베토리오 원장님, 저희 한숨이 무슨 드래곤의 브레스입니까? 한숨을 내뿜게….」 「드래곤의 브레스라면 쓸모라도 있겠네, 그려. 먼지 밖에 안날리는 것과 비교한 것을 고 맙게라도 여기게나. 그런 감사의 표시로, 피브드닌 자네가 먼저 생각을 말해보게.」 피브드닌은 괜히 나섰다고 생각하며 절망적인 얼굴로 힘겹게 일어섰다. 그는 잠시 〈골 썩히는 책〉을 노려보더니, 힘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7인 중 피브드닌 파우트시카가 먼저 부족한 생각을 말하겠습니 다. 우리의 머리를 좀먹고 있는 저 갈색의 책에 쓰여진 내용은 분명 소설입니다.」 「이메나 바르노가 고명하신 파우트시카님께 반박하겠습니다. 소설이라면 책에 쓰여진 〈나는 극한과 무한급수는 정말 질색이다. 연속과 미분의 관계도 내 머리 속을 조각조각내 서 우유에 타먹는 듯한 느낌만 든다. 이 빌어먹을 것을 왜 고등학생에게 가르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한국의 고교생 수준은 세계적이지 않은가. 그 세계적인 수준이 대학에서 놀고 먹으면서 깡그리 무너지니까 문제지만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미분, 극한은 마법사와 수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분야가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하는 고난도의 학문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작가의 나이는 분명 18 살, 당연한 것처럼 미분과 연속성의 관계를 읊어대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일기입니 다.」하고 2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여인이 준비해온 보고서를 들쳐보면서 말하자, 이번에 는 로우베토리오처럼 나이가 든 대머리의 노인이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나, 모프크 바르노는 딸의 생각과는 다르오. 작가의 나이가 18살에 미분과 연속성의 관 계를 읊어댄다는 것 자체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오. 본인은 상당한 연륜과 실력을 가진 학 자가 일기형식으로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 「좋아요, 소설이라고 쳐보죠.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비행기, 오토바이 등의 있을 수 없는 산물들에 대한 표현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요. 게다가 가끔씩 튀어나오는 미지의 학문, 특 히 연금술이라고 생각되는 〈화학〉은 현재 우리의 깊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요.」 「그래서 이메나님은 그것이 다른 세계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세요?」하고 금발의 엘프가 일어섰다. 그녀는 왕국의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엘프였다. 종족에 맞는 화려한 아름 다움을 간직한 그녀의 질문에 이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프 여인은 녹색의 에머랄드 빛 깔을 띤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분명 저 갈색의 책에 담겨진 내용은 이메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엄청난 것입니다. 저, 원탁의 한 엘프, 유레민트 하미렌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 엄청난 책을 쓴 지식인 이,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세일피어론아드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곳곳에서 침음성이 터져나왔다. 유레민트는 그들을 한 번 훑어본 후 다시 입 을 열었다. 「물론 그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 앞에서 달빛 아래 반딧불의 존재가 되겠 지요. 하지만, 만약 이메나님의 말씀처럼 다른 세계의 책이라면…. 전 생각만 해도 끔찍합 니다. 18살에 그런 엄청난 지식을…. 책에는 분명 고등학교 라는 교육기관 위에 대학이라는 상위교육기관이 더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저, 이메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 다. 그런 세계가 존재한는 것보다는 세일피어론아드에 초월적인 현자가 숨어있다고 보는 것이 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마법왕국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하고 검은 후드가 달린 로브를 걸 친 장년의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작은 키의 드워프가 일어서서 말했다. 「원탁의 한 드워프, 토루반 로쿠스가 말합니다. 그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습니다. 천년 전 의 마법제국에 대한 자료가 약간 남아있긴 하지만, 이 책의 내용과 부합되는 것은 없습니 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종이의 재질이 틀립니다. 이런 양질의 종이는… 세일피어론아드의 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를 연금술사들에게 맡겨 시간에 따른 종이 제 질의 변화 실험을 해본 결과, 서적이 만들어진지 오래 되었다고 해도 7년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말은 홀을 다시 침묵으로 끌어들였다.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미지의 서적에 대해 결 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로우 베토리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노인의 흰 눈썹 아래 빛나는 눈동자에 집중되었다. 「우선 이 책을 쓴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인 듯 하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것 은 그 작가는 이 시대를 바꿔놓은 대학자라는 사실과 소설이라고 했을 때 역사상 전례가 없 는 위대한 글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엘시크의 수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고 했지요? 이런 대학자라면 엘시크의 왕궁에서 알고 있지 않을까 싶소. 작가의 이름도 특이하고….」 노인의 웃음 띤 마지막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미소를 지었다. 로우는 대륙을 뒤흔들어놓 게 될 갈색의 책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책의 이름을 마지막 페이지의 글대로 〈또다른 고향〉으로 부르도록 하지 요. 난 즉시 〈지식의 법원〉의 사람들에게 사본을 만들도록 하겠소. 오랜 여행이 될지도 모르니, 우리 중 가장 젊은 피브드닌과 엘프인 유레민트님, 그리고 드워프인 토루반님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겠소이다.」 이름 불리워진 3인의 지식인이 로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피브드닌은 머리 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원장님. 〈또다른 고향〉을 가져온 상인이 댓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중 흥정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구요?」하고 로우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퉁명 스럽게 말했다. 나머지 6인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며 합창하듯 대답했다. 「로우 베토리오 원장님이십니다.」 「교활한 놈들….」하고 중얼거리며 로우는 쓰다듬던 수염을 뜯어버릴 듯이 움켜잡았다. -17- 궁정 마법원의 사람들은 논란에 휩싸였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것이 사실로 들어났던 것 이다. 헤트라임크가 언제나 구석에 쳐박혀 책만 읽던 청년을 원장 앞에서 소개할 때는 많은 연륜과 경험으로 왠만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았던 노마법사들까지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 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소. 내 아들인 〈시즈 세이서스〉요. 시즈, 인사드려라. 너의 공부에 도움이 되어주실 분들이다.」 시즈가 경직되지도,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자 노마법사들은 그 에게서 알 수 없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왕국 최고의 마법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떠나 서 청년에게서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오 랜기간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온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로티븐 궁정마법원장이 시즈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정말 재미있군. 마땅찮다는 〈시즈〉와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세이서스〉, 누 가 들으면 헤트라임크 자네 아들이 국가에 불만이라도 품은 줄 알겠어….」 「정말 그렇군, 어허헛」하고 그의 말에 마법사들이 박장대소했다. 하지만 헤트라임크는 갑자기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그렇겠지? 나도 걱정이네. 하지만 어쩌겠나!? 자기 이름이 맘에 든다는데…. 내가 성 을 바꾸던지 해야지, 휴우….」 모두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시즈는 약간 홍조를 띈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었 다. 양아버지의 집에서 좋은 옷으로 깔끔하게 갈아입은 그는 누가봐도 명문귀족의 자제였 다. 전형적으로 유약한 학자의 얼굴인 시즈는 단정한 옷차림과 외모가 잘 어울리는 데다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독특한 분위기는 하나의 그림과 같은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을 배우겠다고? 자네 아들은 이론만 공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로티븐이 궁금한 어조로 묻자 헤트라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는 마법을 학문으로써 연구 중이지. 그런데 역시 마법을 잘 이해하려면 마법을 사용 할 줄 알아야하지 않겠나?」 「당연한 것이지. 그래서 자네가 가르칠 생각인가?」 「허허…. 불행히도 난 이 녀석을 가르칠 능력이 안되네.」하며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고 개를 젓자, 앉아있던 노마법사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로티븐이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는 현재 활동하는 마법사 중, 엘시크에서 최고가 아닌가?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가르치지 못한다면 누가…. 서,설마! 이 청년이 7클래스 마스터보다….」 「그것은 아니라네. 하지만 비슷할 걸세. 내가 그 동안 가르친 주문만 기억하고 있다면 ….」 그의 말과 동시에 방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원장을 비롯한 마법사 들은 탐욕적인 시선으로 시즈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헤트라임크의 말대로라면 그저 독 특한 분위기를 가진 평범한 청년이라고 외견상 판단되는 시즈의 가치는 엘시크의 공작에 비해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에 시즈와 헤트라임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트 라임크가 시즈에게 자신이 직접 적은 주문책으로 마법을 가르친 것은 2달이 되지 않는 기 간이었다. 밤낮으로 열성을 다해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시즈는 세이탄의 저택에서 주문책 으로 공부를 하던 도중, 모르는 것이 생기면 그에게 찾아왔고 헤트라임크과 함께 차를 마시 며 담소를 하듯 설명을 들었고 하룻밤 정도 자고 가는 정도였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 일지도 몰랐다. 시즈에게는 마법의 이론이 필요없으니까, 주문이 어떤 의지를 나타내는 것 인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 의지와 신념인지만 이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도대체 이 곳에는 뭐하러 온거지? 배울 것이 없지 않나?」하고 원장이 의혹어린 음 성으로 묻자, 처음으로 시즈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고문(古文) 주문서〉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안돼. 볼 수 있다고 해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문자네. 읽을 수 없는 주문인 것을 어쩌 겠나?」 그렇게 말하며 로티븐은 시즈의 눈치를 흘깃거리면 살폈다. 어떻하면 그를 궁정마법원으 로 끌어드릴까 고민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국왕에게 주청을 드리면 되는 것이었지만, 〈마 땅찮은 영광〉이란 이름이 왕족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즈 입장에서 보 면 유용한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시즈가 궁정마법원의 일원이 된다면 고문 주문서는 안되더라도, 금지주문까지는 보여줄 수 있네.」 하지만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시즈가 원하는 것은 강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주문이 아니 었다. 주문의 언어가 그에게는 중요했다. 〈한국에서의 언어와 문자가 여기서도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연관이 있다.〉 그 증거를 찾는 것은 포기했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언제나 시즈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헤트라임크와 지내며 마법을 연구하던 중, 하루는 머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에서 시즈는 한 사진집을 봤던 기억이 있었다. 물의 결정에 대한 사진이었는데, 결정 은 한 가지도 같은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물컵에 〈죽음, 슬픔, 괴로움〉 같은 글을 써넣은 물의 결정은 마구 금이 가고 갈라져 있었고, 〈기쁨, 즐거움〉같은 글을 써넣은 물의 결정은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결정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문 자를 써넣어도 같다는 것이다. 〈언어 자체에도 의지가 깃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언어마다 차이가 있지는 않을 까?〉 시즈는 즉시 실험을 시작했다. 한 쌍의 화분을 사온 그는 양쪽에다가 〈죽음〉이라는 글 을 써넣었다. 하지만 하나는 문자의 역사가 오래된 〈엘시크의 문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만들어진지 300년도 채 되지 않는 〈실베니아의 문자〉. 결과는 확연히 나타났다. 놀 랍게도 엘시크의 〈죽음〉은 그 말대로 꽃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실베니아의 〈죽음〉은 식물이 시들거리는 정도였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시간과 함께 뜻에 포함된 의지를 축척한다.」 결론을 그렇게 내린 시즈가 찾은 것은 바로 고문의 주문서였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모 든 고문의 주문서는 궁정마법원에서 보관,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하고 헤트라임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틴으로 가는 수 밖에 ….」 「잠깐! 어째서인가? 시즈를 데리고 아스틴으로 가겠다고? 난 반대네.」 로티븐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시즈가 아스틴에서 아예 엉덩이를 붙일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헤트라임크는 20살이 갓 넘은 - 게다가 시즈는 깨끗한 외모로 동안이었다. - 시즈 가 7 클래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었을 때, 그의 성취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절대로 시즈를 엘시크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궁정 마법원장의 이름으로 마법사 헤트라임크 세이서스과 그 가족들의 출국을 금지하겠 소.」 「그러는 법이 어디있소!」 갑자기 방의 분위기가 파국으로 치달리자, 노마법사들은 깜짝 놀랐다. 엘시크 최고의 두 마법사가 다투는데 누가 겁을 내지 않겠는가. 로티븐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듯이 방 을 나가버렸고, 노마법사들도 헤트라임크의 눈치를 살피며 로티븐의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겁쟁이 노인네 같으니라고…. 시즈,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마법원을 그만 두고서라도….」 헤트라임크는 시즈가 분명 절대적인 마법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쩌면 먼저 죽은 친아들에게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그의 아들의 몸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나왔다. 시즈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의지와 신념을 가진 이상,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마법을 펼칠 테니까 요….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감이 어린 어조로 그렇게 양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8- 궁정 마법원장, 로티븐의 출국금지 명령으로 시즈는 세이탄의 저택에서 어느 때와 다름없 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고언어- 고문 -을 연구하지 못하자, 다른 과제를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세일피어론아드 각 국의 언어와 문자를 익히는 일이었다. 「음….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실베니아의 언어와 문자는 정말 익히기 어려워.」하고 시 즈는 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럴 것이 대부분의 나라는 엘시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문 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베니아만큼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마치 실베니아만 섬나라였다가 판 이동설처럼 대륙에 달라붙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실베니아는 사막국가이고, 사막의 주위로는 큰 산도 없었다. 있다면 론도루 산 정 도였지만, 판끼리 붙이쳐 만들어졌다기에는 너무 소규모였다. 「시즈 형, 아까부터 이상해요.」 책을 정리하던 13살 소년, 레소니는 시즈가 좁쌀을 씹듯이 입을 연신 오물거리며 중얼거 리는 것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년은 얼마 전부터 시즈의 저택에 서 청소 및 주방일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소녀들이 보내는 도시락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즈는 책을 보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서재는 한마디 도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즈도 남자인지라 여자와 단둘이 하루를 보내는 것은 위 험(?)했고, 때문에 집안일 잘하는 소년을 썼다. 부모를 여의고 레소니는 동생들과 살았기 때문에 집안일과 애보기에는 가히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가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 격도 착하고, 외모 또한 출중한 미소년인 레소니는 세이탄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웃들은 그 가족들을 돌아가며 돌보아 주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수는 없 었다. 그렇다고 거금을 그냥 줘버리기엔, 레소니를 비롯한 그 작은 가족들이 일하는 가치를 알 수 없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시즈는 자신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 수 있도록 방 하나를 내주었다. 「아…. 머리가 좀 아파서 말이야.」하고 시즈는 관자놀이를 양 엄지로 꾹꾹 눌러댔다. 작 은 손을 들어서 그의 이마를 짚어본 고개를 갸웃한 레소니는 시즈를 억지로 책상에서 일으 켜 거실로 내쫓으며 외쳤다. 「하루종일 책만 보니까 그렇죠. 좀 쉬어요!」 「자,잠깐! 레소니….」 「콰앙!」 소리가 요란하다. 필요이상으로 거칠게 문을 닫은 소년은 마치 시즈가 서재로 들어올까봐 두려워하는 사람같았다. 소년의 눈이 책상과 서재바닥을 향하는 순간, 그의 입은 그 두려움 의 정체를 드러냈다. 「도대체 어느 정도 늘어놔야지. 하루종일 치워도 끝이 없다니까…. 아침이나 저녁으로 책 을 읽는 시간을 제한하도록 해야겠어.」하며 누가 집주인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으며 푹 푹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집주인의 독서는 꼭 한평생 책도 못읽고 죽은 귀 신처럼 집착적이고 속사포같은 속도를 자랑했기 때문에 레소니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책상 주위는 시즈가 읽고 대충 쌓아둔 책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가 책들과 머리싸움 이 아닌 몸싸움을 하고 있을 때, 거실의 시즈 또한 힘겨워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서재에서 거실로 내몰리자 어느 새 달려든 레소니의 어린 가족들은 팔,다리에 붙어버렸고 시즈는 애들를 가진 몸을 힘겹게 움직이며, 찐득이들을 떼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 「무거워….」 「곧 내려갈게. 과자있는 곳을 알려주다면!」하며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7살의 소녀는 몸 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5명의 꼬마악마들의 대장격으로 시즈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안돼요. 너희들한테 과자를 주면 레소니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거든….」 말을 그렇게 했지만 청년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들은 목표달성이 가까워진 것을 예감하며 더욱더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역시 삶에 대한 투쟁심이 극도로 발달한 아 이들이야. 시즈는 아이들에 대한 칭찬인지, 무너지고 마는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 알 수 없 는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힘이 부쳐 「선반 위에 있어요.」 꼬마악마 한 마리가 떨어져나가더니, 의자를 딛고 선반 위를 뒤지고는 외친다. 「목표 발견.」 「좋아…. 시즈 오빠. 이제 사탕이 있는 곳만 말하면 오빠는 자유의 몸이야.」하며 대장악 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시즈도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얼굴은 전혀 말을 듣지 않고 어 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킬 뿐이었다. 결국 사탕이 있는 곳까지 모두 알아낸 악 마군단은 히히덕거리며 사탕과 과자바구니를 들고 저희네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집주인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들을 잔소리의 속사포를 떠올리며 절망에 젖어 거실바닥에 널부러졌다. 「시,시즈…? 무슨 일이야?」 굵직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누가 왔나보군. 시즈는 잔소리을 들을 절망감에 눈 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헤모 사제님이시군요. 오늘도 당했거든요.」하며 시즈는 꼬마들이 매달려 반쯤 흘러내 린 셔츠와 바지를 추스렸다. 그 모습에 장신의 헤모 사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넋나간 시 선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누가!?」하고 소리치는 그의 눈에 막 서재를 청소하고 기분좋은 콧코래를 부르 며 걸어나오는 레소니가 들어왔다. 명주실처럼 가는 금발이 가지런히 흘러내린 귀여운 얼 굴, 도톰하게 부푼 입술, 갸냛픈 목덜미와 흰 피부를 유심히 관찰하던 헤모는 시즈의 어깨 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좋겠네 그려. 나도 사제만 아니면 콱!(?)」하고 시즈의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아예 이 참에 가족으로 끌어드리는 것이 어떤가?」 「두,두통이….」 「어휴…. 들어가서 쉬라고 했잖아요. 그러길래 어지간히 하라니까….」하며 레소니는 짜 증과 걱정섟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왠일인지 거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홍조 를 띈 헤모에게 인사를 건넸다. 「헤모 사제님 오셨군요.」 「흠흠…. 그래.」 「무슨 일로…?」 「아! 잊고 있었군. 시즈, 왕성에서 부르신다. 어서 가자.」하고 헤모는 시즈의 축 늘어진 몸을 번쩍 일으켰다. 반쯤 감긴 눈으로 시즈가 물었다. 「왕성이라니? 누가 부르시는데요?」 「헤트라임크 님께서. 어서 가자.」 헤모는 얼마 전의 사소한 시즈의 장난으로 신성한 성투사에서 광투사로 불리워지게 되었 던 불쌍한 사제였다. 그는 다시 만난 시즈에게 원수를 갚아볼 생각으로 달려들지만, 불행히 도 시즈에게는 헤트라임크라는 희대의 대마법사가 보호자로 등극한 상태였다. 결국 전신화 상으로 동료사제들의 손길을 다시 한번 받아야 했고, 그 후 시즈의 진심어린 사과과 헤트라 임크의 불꽃어린 협박으로 눈물어린 용서를 해주어야 했던 헤모는 세이서스 부자의 연락병 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요? 무슨 일입니까?」 「나도 잘 몰라.」 「급하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레소니, 집 좀 부탁해요.」 레소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모와 시즈는 밖에서 준비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세이서 스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를 직접 보낸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급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시 즈는 마부를 재촉했다. -19- 「후작 각하! 도련님 오셨습니다! 사제님께서는 이 쪽으로 오시죠.」 「아, 예.」 해골같이 비쩍 마른 집사가 겉보기와는 다른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표정 을 지으며 헤트라임크가 방에서 걸어나왔다. 마법사의 로브가 아닌 평상복을 입은 헤트라 임크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 것도 잠시, 그는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시즈를 자신의 방 으로 잡아 끌었다. 헤모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집사를 따랐다. 「그 동안, 잘 지냈느냐?」 「예,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이런! 급하기도 하구나.」 「용서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다급하신 기색을 보이시길래….」하고 시즈가 고개를 숙이 자, 헤트라임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들을 의자에 앉게 한 후, 창 밖을 내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아스틴에서 3 명의 학자가 왕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이 너를 찾 고 있는 것 같다.」하며 그가 시즈의 얼굴은 힐끗 바라보았다. 청년은 약간 생각하는 것 같 았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듯 긴장스런 한숨을 내쉰 헤트 라임크는 처음의 만남부터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나타냈던 아들을 바라보았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국가 최고의 문학가들의 모임인 아스틴네글로드, 그 중에서도 최고 위원 7인 중 3인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망설이지 말고 말해보거라. 그들에 대해서 짐작가는 일이 있느냐?」 「제가 세일피어론아드에서 발을 딛어본 국가는 엘시크 밖에 없고, 아스틴 사람과는 대화 도 한번 나눠본 적 없습니다. 저 역시, 그들이 왜 저를 찾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저를 찾는 것입니까, 아버지?」 헤트라임크는 고민에 쌓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장본인이 모른다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마땅찮은 시즈〉라고 찾는 이를 지칭했다. 그런 이름 을 갖은 사람은 〈시즈 세이서스〉 밖에는 없다. 너에 대해서 왕성에서도 몇몇 아는 사람이 있으니, 분명히 불려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미리 불러서 물어본 것이다.」 「그리 큰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심려마십시오.」 시즈는 부모를 안심시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헤트라임크의 마음 속은 그 다지 간단하지 않았다. 1명이라도 방문하면 나라의 학자들이 난리법석을 피운다는 대학자 들이 3인이나 엘시크의 왕성을 찾은 것이다. 그런 국가적인 귀빈들은 〈시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절대적인 경의를 조심스럽게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갓 20세를 넘어 선 청년에게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헤트라임크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놓고 있었 다. 〈시즈는 현자라고 불릴만큼의 지식과 대마법사라고 지칭될 정도의 마법을 지니고 있다. 누구라고 해도 이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하고 스스로 마음을 놓고자 하면서도 혹시나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보호 해주리라는 생각을 굳게 지니는 시즈의 아버지였다. 「그래…. 내가 너무 걱정만 한 것 같구나. 요즘은 무엇을 공부하고 있지?」 「대륙 국가들의 언어와 문자를 익히고 있습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 구나.」하고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시즈를 자랑스러운 시선이었다. 빙긋 웃어보인 시즈는 헤트라임크의 곁으로 걸어와 창 밖으로 높이 솟은 왕성 의 첨탑을 향해 시선을 맞추고는 말했다. 「아버지,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가 아스틴으로 떠나는 것을 금지 당하자, 한 달도 채 되 기 전에 아스틴이 저에게 오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두렵습니다. 하나의 세상이 자신의 생각대로 너무나 쉽게 엮여져 간다는 것이….」 그 말에 헤트라임크는 빙긋 웃고는 집사를 불렀다. 「나는 내 아들이 대단한 지식과 마법, 그리고 앞으로의 예측력과 준비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꼭 필요한 준비를 너는 놓치고는 하더구나. 케츠타!!」 「예! 각하,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케츠타는 무엇 때문에….」 어리둥절하면서도 호기심어린 시즈은 이어진 헤트 라임크의 말에 얼굴을 굳혀야 했다. 「넌, 왕실예법에 대해서는 왕녀님의 고양이만큼도 모르지 않느냐. 소환될 때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을 것이다. 케츠타, 명문귀족가 집사의 명예를 걸고 시즈에게 완벽한 왕실예법을 가르치도록!」 헤트라임크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즈 세이서스는 2일 후 왕성으로 소환되었다. 헤트 라임크와 함께 입성한 그는 국왕 로타우노 앞에서 2일간 뼈빠지게 연습한 자세와 동작으로 누구나 감탄할만큼 고풍스럽게 예를 올렸다. 국왕의 양 옆에는 긴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 었고, 두 테이블의 의자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아스틴 의 귀빈을 비롯한 엘시크의 고위귀족들이 앉아있었다. 모두 비바랜 것같은 푸른 정장을 갖 춰입은 부자(父子)가 예를 올리자, 로타우노가 손을 들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궁정마법사 세이서스 후작, 그리고 시즈 세이서스 후작공자. 모두 일어 서십시오. 음… 그대가 요즘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세이서스 후작의 양자로군.」 「그렇습니다. 영명하신 국왕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마땅찮다는 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절도있는 청년이로군. 과연 명문인 세이서스가의 공 자에 손색이 없어.」하며 왕은 유심히 시즈를 살피더니,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는 한 국가 의 지배자다운 위엄있는 시선으로 옆에 앉아서 시즈와 헤트라임크를 주시하던 3인에게 시 선을 돌렸다.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여러분, 여러분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글쎄요. 두 분 중 누가 〈마땅찮은 시즈〉이십니까?」 3인 중 장년의 인간인 피브드닌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아스틴의 귀빈들은 모두 불 신의 찬 얼굴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시즈 세이서스 입니다.」 「그럴리가!!」 무미건조한 청년의 말에 고명한 학자, 피브드닌은 창백한 고함을 질렀다. 놀란 중인들을 무시하고 피브드닌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다! 너 같은 어린 녀석이 아닐 것이다!」 「무례하군.」하고 헤크라임크가 시즈의 앞으로 나섰다. 그가 손을 젓자, 피브드닌의 잔에 담긴 차가운 물이 솟아올라 피브드닌을 덮쳤다. 촤악 - 하는 소리와 함께 홀 안이 정적으로 가득찼다. 엘프 유레민트는 순간,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것에 놀 랐다. 마법종족인 자신도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눈 앞의 약간 괴팍스 러워 보인느 노인이 5클래스의 마법사인 그녀를 가볍게 뛰어넘는 말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일어서 피브드닌의 어깨를 잡고 속삭였다. 「어서 사과하세요.」 「…감정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후작 공자,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보다 왜 〈마땅찮은 시즈〉를 찾으시는지 듣고 싶습니다만….」 유레민트의 눈빛에 감탄이 서렸다. 눈 앞의 청년은 상대방이 무례하게 자신을 무시한 것 을 용서하면서도, 〈마땅찮은 시즈〉라는 인물과 자신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들어 피브드닌의 무례를 약간이나마 덮어주려고 하는 것이다. 「저희가 세이서스 백작 공자를 찾아온 까닭은 한 서적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 서적이 제플론 근처의 숲에서 발견되었는데, 한 상인의 사업경로에 따라 아스틴으로 건너 오게 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만큼 광대한 지식이 담겨져 있는 서적의 내용에 저희 아스 틴네글로드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래서 책표지에 남겨져있는 〈마땅찮은 시즈〉라는 하 나의 글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시즈는 자신이 틀림없이 하나의 책을 잃어버린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세일피어론아 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의 증거가 담긴 한 권의 갈색 책,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일기 장을 떠올리며 그는 입을 열었다. 「제가 그것의 주인이라면 어떻하시겠습니까?」 중인들은 대륙 최고의 대학자들이 긴장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말과 몸이 모두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만약, 정말로 이 청년이 우리가 찾던 대 학자라면….〉 초월한 존재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가누기 위해 노력하며 유레 민트는 말했다. 다른 세계의 지식이 아닌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약관의 청년이 그 지식의 소유자였다니…. 「아스틴으로 함께 가주십시오. 당신이 그 책의 소유주라는 것을 당신의 지식으로 증명해 주십시오.」 누구나 끌려들 것 같은 작은 미소를 지어보인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브드닌은 왠지 청년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시즈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자신의 지식으로 결과를 단정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피브드닌 을 향하는 시선이 좋을리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는 피브드닌과 유레민트의 가슴을 얼어붙 게 만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또다른 고향〉이라고 쓰여있다면 지식의 증명이고 뭐고 없을텐데…. 그 책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식인들의 고집이 느껴지는 군요.」 -20- 「그 전에, 폐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세이서스 후작 공자. 그대가 아스틴으로의 여정에 관한 것 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국왕은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이상하게도 마른 체구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 다. 대륙의 학문은 인도하는 주자는 고대부터 마법을 바탕으로 한 실용학문과, 전설 에서 이어지는 문학을 오랜 세월 다져온 아스틴, 그 중에서도 대륙 최대의 학문 연구기관인 아스틴 네글로드였다. 그에 비해 엘시크는 모든 분야에서 평균을 약간 웃도는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나, 건국 초기 때부터 대륙 최대의 학문기관과 비 교할 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문학가와 학자를 자주 배출했다. 그러나 요근래 에 들어서는 뛰어난 학자의 배출은 커녕, 군사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문이 뒷걸 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스틴 네글로드가 직접 모시러 올 학자의 출현은 국왕, 로타우노 벤치 에밀리오에게 큰 기쁨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세이서스가(家)의 출국금지 조치를 풀어주십시오. 현재 세이 서스가는 엘시크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시즈의 청을 상기된 표정으로 흥분까지하며 기대하던 로타우노는 이해할 수 없 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세이서스가는 후작가(家)가 아니오? 그런 세이서스가가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 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헌데, 난 그런 말을 전혀 듣지 못했소.」 일그러진 눈썹을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던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는 중요한 것이지 아니지. 나 엘시크의 모든 이를 대변하는 자, 로타우노 벤치 에밀리오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세이서스가에 대한 출금금지령 을 무효화하겠소.」 「폐하의 은혜가 끝이 없으십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며 시즈는 흘깃하고 로티븐 궁정마 법원장에게 눈을 돌렸다. 로티븐은 목이 타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물을 홀 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수행원으로는 얼마나 데려갈 생각이냐?」 연회가 끝나고 왕궁을 나온 세이서스 부자는 저택까지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며 이틀 뒤, 출발하게 될 아스틴으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행원은 아스틴의 현자들이 데려온 사람들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 말동무 로 헤모 사제에게 동행을 부탁할까 합니다.」 「그래. 그라면 믿을 만 하지. 짐꾼으로도 쓸만하고…. 하지만 그는 정신이 이상 해져 난동을 부린 적이 있다고 하더구나. 얼마 전에도 네게 달려들지 않았느냐? 내가 옆에 있지 않았다면 네 허약한 몸은 그 거대한 주먹에 맞아 단숨에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 「저는 헤모 사제께 생명을 구원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 나더라도 목숨을 구원받으면 구원받지, 그가 제를 위태롭게 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모가 난동을 부렸다는 대목에서 잠시 움찔한 시즈였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은은한 달빛 속에서 꿈결처럼 부드럽고 평화로운 미소으로 당황함을 가리는 청년 의 모습을 헤모가 보았더라면 그 가증스러움에 솜털까지 곤두섰을 것이다. 「그래…. 알았다. 그리고 예상이다만 아스틴의 그 두통을 사랑하는 7명의 학자 들은 너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뭐든 상관없지만 댓가는 확실하게 뜯어오 도록 해라.」 고개를 흔쾌히 아래위로 젓는 시즈의 모습은 아스틴 네글로드의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떠냐? 오늘은 밤새도록 술이나 마셔보는 것이? 그 동안 공부한 성과를 한번 보고 싶구나.」 「아버지, 아스틴에 못 가신다고 심술을 부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 내일, 다 음날 여행갈 차비를 해야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야 헤모 사제에게 맡기면 된다. 내가 집사에게 말을 전하도록 말해놓 으마. 후우…. 나도 여행삼아 함께 갈까 했는데, 그 놈의 노인네가 훼방을 놓다니 ….」 로티븐은 흰자위에 핏빨까지 내보이며 헤트라임크의 아스틴 행을 부득부득 말렸 던 것이다. 가족이 엘시크에 있으면 그나마 시즈가 아스틴에 엉덩이를 깔고 앉진 않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오늘의 술과, 내일의 헤모가 고생할 것을 비교하던 시즈의 머리 속에서 헤모가 밀린 모양이다. 〈내일 이후에 아버님을 다시 뵈려해도 한동안 못 뵐테니….〉하고 자신을 설득한 시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헤트라임크는 아들의 대답을 예 상하는 듯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시즈 자신은 극구 부인했지만 사실 그는 세이탄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내미는 애주가였던 것이다. 체력이 좋으면서도 간은 약 한 탓에 강한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맛이 좋다고 하는 와인이라면 한잔이라도 마시기 위해 눈을 뒤집고 사력을 다했고, 정치 암투에서나 사용될 계략과 모략을 그 한 잔의 술을 위해 쏟아붙고는 했다. 양아버지인 헤트라임크가 그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모두 원인이 있는 밑바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흠, 2일 후면 한동안 뵙지 못할 테니, 오늘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사제님께 미안해서 어쩌죠?」 「아스틴에 도착하면 이름있는 포도주라도 선물하면 되잖니.」 득도한 표정으로 시즈는 손바닥을 충돌시켰다. 헤트라임크의 눈에는 웬일인지 그날따라 깊이있게 보이던 시즈의 웃음가 싱겁고 멍청하게 비춰졌다. 〈단순한 면 이 있다니까…. 이런 녀석을 대학자라고 모셔가다니 아스틴 학계가 망할 날도 멀 지 않았군.〉하며 그의 입꼬리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고양이 어우르듯 시즈를 어우르는 노인의 말솜씨는 경험과 연륜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21-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국경지대입니다.」 한 수행원이 지평선 부근으로 미약하게 모습을 드러낸 산등선을 가르켰다. 국가 에서 귀빈으로 대접받는 사람들이기에 푹신한 방석까지 깔린 마차를 타고 있긴 했지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달련된 수행원들을 제외하고는 허덕 거려야 마땅할 연약한 학자 일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도 유약하기 짝 이 없는 평범한 학자의 유형이 끼어있었으니, 그는 힘겨운 감정을 함께 토로할 이도 없이 숨을 헐떡이는 아스틴 네 글로드 원탁의 7인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피브드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네요.」 마차 좌석의 맞은 편에 앉아 기분좋게 흔들림을 느끼고 있던 시즈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창백하게 굳어진 피브드닌은 산소가 부족한 것 처럼 팔다리를 허공으로 휘젖고 있었다. 엘시크는 기마이동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 다. 전국적으로 마차가 오가기에 알맞은 크기의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고, 덕분에 정 보의 이동이 타국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복잡하지 않은 영지는 육두마차의 사용이 가능했고 시즈들이 타고 있는 것 또한 육두마차였다. 「괘, 괜찮소. 이보시오, 마부. 이제 조금이란 것은 수치적으로 몇 시간 몇 분인지 알 수 있겠소?」 「4 시간하고도 차를 한 잔 끓여마실 시간 정도일 겁니다. 하하! 선생님은 정말 적 응을 못하시는 군요. 이제 흔들림이 익숙해질 것도 같은데….」 피브드닌도 자신의 형편없는 체력이 원망스러웠다. 눈 앞에 있는 청년 또한 출발 뒤 어느 정도 자신과 쓰러지는 보조를 맞춰왔지만 어느 새 적응하여 햇빛 쐬는 고 양이처럼 기분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피브드닌이 아스 틴의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마차의 흔들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리라고 일행은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레민트 님은 정말 기마실력이 뛰어나군요. 피곤한 기색 하나 안 보이니 말이에요. 종족의 특성입니까?」 멀미에 정신이 오락가락한 피브드닌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 것은 과묵한 드워프, 토루반이었다. 발이 마차바닥에 닿지 않아 심할 때는 뒤로 벌렁 넘어가기까지 하는 그 였지만, 전혀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 이 드워프라는 종족은 근육덩어리나 다름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 비하면 전투종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들의 무기는 힘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몸 의 근육에서 폭발하는 파워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고, 뛰어난 도약력 을 가졌기에 보통의 드워프라도 웬만한 병사를 당해낼 수 있는 것이다. 토루반 역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드워프답게 등에는 롱 소드를 메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엘프에게 저것은 다른 동물과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아. 게 다가 엘프들은 싫증도 잘 내지 않지. 저 상태로 1년을 있으라고 해도 미소가 입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그의 말대로 유레민트는 자꾸 부딪히는 바람에 날리는 금발을 넘기며 어머니의 품 에 안긴 듯 편안한 얼굴로 말의 갈기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흑마를 거칠게 몰아대는 헤모가 보였다. 「바람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아무 일 없이 이대로 쉐인넬까지 갔으면 좋겠군요 .」 「자네는 여행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상하군. 보통 미지의 장소를 가게 되면 모험심으로 들떠서 따분함을 못 참기 마련이던데…. 특히 자네 또래의 청년들은 무 슨 사건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곤 하지.」 토루반은 말을 하던 도중, 시즈의 애수에 빠져버린 표정를 보고 말을 닫았다. 세 상에 대한 호기심에 차있는 눈이 아니었다. 청년은 끝없이 빠져들 것 같은 눈동자로 떨어져 내리는 가을낙엽을 스 쳐보며 미소지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면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어린아이인 것 은 깨닫지 못한 채….」 그 때, 마부석에 앉아있던 한 수행원이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민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대학자 피브드닌은 팔,다리를 허공에 젓던 것을 멈추고 그저 경련을 일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안하오. 오늘 안에 국경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일행은 모닥불에 비친 미소를 지어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모두들 지쳐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피브드닌이 고맙기도 했다. 그 방법이 약간 민망했지 만 말이다.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토록 서둘렀던 것인지 계속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자, 멈추었다 가자는 말을 하는 것이 어쩌면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든 것에 관성을 가진 존재니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습니다. 이것 좀 드시죠.」 헤모가 내민 마른 고기는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피브드닌은 묵묵 히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의 차가운 가을바람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부모 의 가지에서 떨궈댔다. 「누구냐!?」 주점에서 호스트를 하면 어울릴 미청년 수행원이 갑자기 검을 빼어들고 수풀을 향 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을 느낀 일행이 모두 무기를 잡았다. '검을 잡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라는 편견을 가진 학자는 아무래도 피브드닌 혼자 같았다. 엘 프와 드워프는 무기를 굳게 쥐고 소리가 곳을 노려봤고, 시즈는 예도에 손을 얹은 채, 헤모는 너클을 쥔 채 작은 움 직임이라도 감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이런! 이렇게 마중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척보기에도 거친 용모를 가진 사내가 하나, 둘 씩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 작했다. 14~16명 정도되는 그들의 손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달빛을 받아 살벌하게 광채를 내는 무기가 들려있어 쉽게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산적인가? 마을에서 이렇게 가까운 지역에서 당당히 산적질을 하는 인간들이 있었 다니….」 어이가 없는 듯 헤모는 고개를 저었지만 산적들에게는 그가 겁을 먹은 것으로 보인 것 같았다. 산적질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녀도 직업의 영향인지 곰도 찔끔거릴 만큼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장 쓸만해보이는 놈이 덜덜 떠는 군, 그래. 다른 녀석들은 칼 잡기에는 손목부 터 불안해보이는데 얌전히 무기를 내려놓고 돈이 될 것은 조목조목 찾아서 내놓으 시지.」 시즈 일행은 〈그러는 너는 어떻고!?〉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16~17세 정도 될 것같은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텁텁한 목소리와 주위를 둘러싼 무기들의 예기에 긴장으로 찬 침만 삼켰다. 「한 마디로 돈이 될 것을 내놓으면 살려주겠다, 이말 입니까?」 「그… 그래!」 온천에서 들릴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에 소녀는 순간 당황했다. 엉겹결에 대답한 그녀가 말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자신보다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청년이 유원 지에 유람온 표정으로 꺼냈던 칼을 집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시,시즈! 뭐하는 거야!? 어서 칼 꺼내!」 시즈를 제외한 일행과 산적들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고, 헤모는 산적과 시즈를 번갈아 흘끔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시즈는 온화한 미소를 걸친 채 소녀 앞으로 걸 어나갔다. 「미안하지만 저희는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 금전적인 것과는 거리가 많습니 다.」 「거짓말! 너희가 타고 온 마차만 봐도 알 수 있어. 육두마차가 아무나 타는 것인 줄 알아? 잔말 말고 돈이 될 것을 내놔.」 눈에 힘을 주고 소리치는 소녀였지만 황당한 일을 겪은 나머지, 냉정이 풀어져 소 녀다운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급히 입을 막았지만, 시즈의 미소는 이미 짙어져 있었다. 「그것은 저희가 나라의 부름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차와 수행인들은 모 두 마법국가 아스틴의 소유죠. 저희를 함부로 공격했다간 이 곳에서 4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자리한 국경경비대 가 여러분을 토벌하러 달려올 것입니다.」 「흥…! 4 시간이면 우리는 너희를 죽이고 주변 마을로 숨어들 수 있어.」 「그럴까요?」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는 시즈의 모습은 소녀와 산적들을 불안하 게 만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청년은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 「그럼 이것은 어떻습니까? 지금 돈이 될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만들어드릴 수 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시즈는 주위의 사람들이 등 뒤로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가방에서 잉크와 얇은 백지의 책자를 꺼냈다. 「유레민트 님, 여기에 시를 한 구 써주시겠어요? 사인과 지장도!」 「유레민트? 아스틴 네글로드의 유레민트 하미렌님?」 산적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경악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유심히 유레민트를 살펴 보던 남자는 그녀가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즈는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다. 아무리 유명한 아스틴 네글로드라지만 서민들은 잘 모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글읽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 즈의 계획을 완성시켜주는 포석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아는 분이 계시는 군요. 유레민트 님의 친필 시라면 매니아들에게 어느 정 도의 가격으로 거래되는지도 아십니까?」 「값을 따질 수 없지….」 「알고 있군요. 그렇다면 왜 동료들에게 검을 내릴 것을 권하지 않습니까?」 그의 속삭임과도 같은 나직한 한 마디에 사람들은 무기를 든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절대적인 마법과 같은 그 목소리에…. -22- 「어!? 아주 상쾌한 향인걸! 이런 나무뿌리가 있었다니….」하고 헤모는 더덕처럼 생긴 나무뿌리를 와득 베어물었다. 다른 이들도 입 안을 가득히 채우는 청량함에 놀라 둥그레진 눈이 손에 든 나무뿌리를 향하고 있었다. 「〈만타라〉라고 하는 식물의 뿌리인데… 피로를 푸는데 매우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지. 우리처럼 재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놈들에게는 필수품이야.」 〈춤추는 칼〉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산적단 중 네모꼴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어 깨를 으쓱거리며 시즈 일행이 놔눠준 훈제 양고기를 씹어댔다. 오히려 그들은 시즈 일행이 불평하며 먹어대던 훈제 고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만타라〉? 이상하군요. 최고의 식물도감이라는 〈로코네스 식물 도감〉에서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식물 같은데…. 이런 멋진 식물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유레민트?」 이해할 수 없다는 피브드닌의 물음에 방금 전까지 사인공세에 시달리던 유레민트 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자신의 몫을 모두 목으로 넘기고 지켜보던 토 루반은 갑자기 껄껄거리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우핫핫핫! 피브드닌, 이 만타라가 멋지다고?」 「토루반!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이렇게 마음까지 상쾌하게 해주는 향과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멋지지 않습니까?」 피브드닌은 그가 비웃는 것 같아 불쾌한 어조로 반발했다. 그러자 토루반은 순간, 표정을 굳히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피브드닌, 자네는 30대 중반에 이르는 나이를 먹었고, 대륙 제일의 학자라는 칭 호를 가졌네만, 오히려 저기 앉은 산적 아가씨만도 못하군. 〈로코네스 식물 도감 〉은 만타라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 아닐세. 기재할 수가 없었지.」 컬컬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낮은 음성에 유레민트도 기다란 귀를 쫑긋 세 우고 귀를 귀울였다. 「이봐! 꼬마 아가씨! 여기 이 아저씨한테 만타라를 어떻게 얻는 것인지 알려줄 수 있겠니?」 드워프의 거친 음성에 산적 소녀, 메네이나는 씨익 웃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토루반에게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꼬마라니…! 난 난쟁이 아저씨보다 갑절은 크다고! 흥! 만타라에 대해서 모르면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이건 만투르라는 동물의 배설물이야. 만투 르의 고기와 피는 피로에 천적이라고 할 정도로 효과가 좋지만 돈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겠어? 만타라는 그 녀석의 엿같이 끈적끈적한 배설물을 뜯어 서 말린 거라고! 그러면 햇빛에 안에서 냄새와 함께 연기가 구멍을 뽕뽕 뚫고 솟아 오르지. 좀더 시간이 지나면 약간 푸석푸석한 나무뿌리처럼 변해.」 시즈와 헤모, 토루반을 제외한 수행원과 귀빈 일행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현상은 잉크가 물 속에서 퍼지듯 서서히 진행되었다. 토루반은 그 중에서도 창백하다못해 푸른 도마뱀 색깔을 하고 있는 피브드닌과 유레민트에게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멋진 식물이지?」 「우 - 웩!」하고 대답을 해보는 피브드닌이었지만, 창자를 뒤집어 탈탈 털어본다 고 해도 입 안과 가슴 속에 녹아든 불쾌한 청량감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주름이 생기려고 하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네모꼴〉의 남자를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식물의 뿌리라고 했잖소? 우 - 웩!」 「미안. 만투르는 원래 식물의 뿌리 밖에는 안 먹거든. 모양은 달라졌지만 틀림없는 식물의 뿌리라고…. 에이! 다른 동물 내장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뭐 어떻다고 그 러나? 조미료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되지.」 〈네모꼴〉은 쓴웃음을 지으며 만타라를 힘차게 물어뜯었다. 유레민트도 속이 이 상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피브드닌처럼 내장을 털어대는 것이 더욱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구역질을 참았다. 그녀는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시즈는 요리를 사랑하는 이 답게 새로 운 만타라 식용법으로 만타라를 구워서 먹고 있던 것이다. 토루반이 의아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보기와는 다르군. 귀족들이 만타라에 대해서 아는 일은 드문데…. 만타라 를 굽다니, 먹을 줄 아는 군.」 「전 귀족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는 평범한 서민이었죠.」하고 시즈는 김이 폴폴 솟아오르는 만타라를 손가락을 죽죽 찟어 입어넣었다. 「서민!?」 유레민트의 귀와 눈이 토끼처럼 쫑긋 서고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원탁에서 세 일피어론아드에 그런 현자가 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시즈와 같은 청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민이었는데,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니… 그녀 는 시즈의 지식에 대해서보다 인간 시즈에 관해 더 호기심이 일었다. 달아오른 엘 프의 눈이 심상치 않았지만 시즈는 모르는 척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전 세이서스가(家)의 양자이니까요.」 헤모는 미소를 짓고 있는 시즈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이모하의 가호 가 헤모 사제만은 비켜가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세이서스의 양자라니, 덕분에 자 신은 노예처럼 두 부자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의 강한 성투사지만 7 클래스 마스터인 헤트라임크가 뒤가 버티고 있는 시즈를 건들 수가 있겠는가. 「양자…!?」 토루반 또한 딱딱한 표정으로 넋을 잃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외모는 깨끗하여 순진하게 큰 도련님같은 그가 서민이었다니…. 시큰둥하니 불꽃만 바라보던 메네이 나가 시즈와 그의 가방을 번갈아 힐끔거리며 궁시렁댔다. 「그 말이 맞을 거야. 아까 가방을 슬쩍 뒤져봤는데 값 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약초로 보이는 풀만 가득하던데!? 귀족들은 물약을 쓰지 약초를 잘 정리해서 가지 고 다니지 않아. 그렇게 약초를 준비할 줄 아는 걸로 봐서 꽤 고생을 한 모양이지? 」 「글쎄요….」 시즈는 그 만이 알 수 있는 대답과 함께 그리움에 찬 검은 눈동자로 구름 사이에 미약하게 뿜어져 나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23- 「또 없어졌군. 노리스, 그 녀석 어디 갔는지 아나?」 「멍청할 정도로 세삼스러운 질문이군. 언제나 있을 곳에 있겠지.」 츠바틴은 덩치만 커다랗고 뇌는 비정상적으로 미발달한 -츠바틴의 생각으로-노리스 에게 멍청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목을 매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자살할 생각으 로 성벽으로 통하는 계단을 밞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그는 언제나 성벽에 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돌처럼 앉아 있었다. 바랜 돌색처럼 묽어진 듯한 검은 눈동자는 정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시선으로 멀리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츠바틴이 다가가 천천히 몸을 밀어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인형처럼 그가 앉아 있었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꺼플이 없었다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낮게 한숨을 내쉰 츠바틴은 약초 냄새가 코가 지릴 정도로 베인 손으로 청년의 어 깨를 짚었다. 시즈의 무미건조한 얼굴이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부드럽게 스르르 돌 려졌다. 「멜란에서 혼자 숨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네를 괴롭히는가?」 「그럴지도….」 「그렇다면 그냥 여기서 떨어져 버리면 되겠군.」 「그들을 희생시키며 살았습니다.」 「시즈, 너의 말은 핑계일 뿐이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알고 있을 텐데!? 마음 속 에 느끼는 것을 입에서 변조하려 하지 말아. 솔직하게 말하게. 자네 때문에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건가?」 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촛점없는 눈으로 츠바틴의 뒷편을 보던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핑계라는 것을…. 희생되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제가 살고 싶어서 였음을…. 그러고나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토록 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사람은 모두 자신을 먼저 위하는 거야. 멜란의 사람들도 자네와 마찬가지로 모두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지키지 못한 거지. 왜 그들이 너를 위해서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을 사람들의 죽음에 의미라도 부여해 주겠다는 거라면 이기적이라는 말 따위는 입에 붙일 자격도 없어. 휴우…. 그것이 아니라면 쓸모없는 자기비하에 빠진 것일테지. 하지만 그런 자기비하나 비판 따위는 아름답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해둬.」 「그 말은…?」하고 시즈는 힘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카롭고 명확한 빛을 발하 던 시선은 안경이 부서진 후, 더없이 감미로운 것으로 변해버렸기에 그런 행동은 귀엽게까지 보였다. 츠바틴은 키득 웃으며 겉옷을 벗어 시즈에게 걸쳐주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고민하는 네가 멍청이라는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난 방금 전에 노리스에게 멍청이라는 말을 들었지.」 그 후, 츠바틴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시즈를 말리려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결국 〈이런 사태를 예측 못한 내가 멍청이였어.〉하고 타협을 본 후에야 성벽을 내려온 그는 심벌튼 경비대실의 방바닥을 뒹굴거리고 있던 거구의 사내에게 말했다 「노리스, 심심하지? 시즈에게 검술이나 가르쳐.」 「엥? 무슨 소리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노리스가 묻자 츠바틴은 수염이 말끔하게 깍여 맨질 거리는 뺨을 쓰다듬으며 다른 한손으로 시즈를 가리켰다. ┌몸이 다 나았어. 이제 곧 떠나야 할텐데…. 저 상태로 보내는 것은 불안하지 않아? 다시 멜란과 같은 일이 생기면 언제 또 아무 성벽에나 올라가서 멀뚱히 앉아 있을지….」 시즈가 성벽에 앉아있던 모습이 보기에 굉장히 불안했었던지 노리스는 즉각 그의 거구만큼이나 거대한 검은 어깨에 맺다. ┌넌 이미 꽤나 재미있는 검술을 몸에 익히고 있는 것 같다. 난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과 임기응변식의 검술을 가르쳐주마.」 성격이 급한만큼 그의 검술 수업은 바로 시작되었다. 노리스와 시즈는 목검을 들고 대련식의 훈련을 했지만 겉보기에는 노리스가 일방적으로 시즈를 두들겨패는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맞는 것도 훈련이야. 아픔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살을 주고 뼈를 깍는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리스의 말 만큼이나 훈련은 혹독하여 티플들에게 쫓기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고되었다. 그러나 시즈의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너를 의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약사의 수준은 되도록 가르치겠다. 그저 죽어가는 사람조차도 자신의 탓으로 돌릴 것 같으니까. 그러면 네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줄어들 수 있을 거야. 혹시 정말로 너 때문에 죽는 사람이 한명 생길 때마다 이 의술로 100명의 사람을 구하면 되지 않겠나?」 수 많은 약초들을 일일히 외우는 것은 개미가 산의 바닥을 일일히 핥는 것과 별다 르지 않았다. 여행자는 약초를 몸에 많이 지니고 다닐 수 없었기에 츠바틴은 고작 약간의 효능이 있는 것이라면 잡초라도 가르쳤다. 그 마음을 알고 열심히 외어보려 는 시즈였지만, 인간인 이상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이 있다고 버리지 마. 사실 인간의 피도 다른 어떤 생물에게는 독이 돼. 어떤 것도 한 쪽을 보는 것은 그릇된 거야.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만 있는 게 아니라 육각형의 6면도, 8면체의 8면도 될 수 있다.」 「싸움은 인생에 있어서 순간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인생이 사라질 수도 있지. 그런 순간의 싸움을 이기려면 그에 맞는 찰나적인 힘의 폭발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폭발한 힘의 분출을 자연스럽게 공격과 방어에 내포시켜야 해. 시즈, 넌 체격적으로 나 같은 거구에게 이길 수 없어. 너의 검술 중에서 힘의 폭발이 두두러진 것은 발도술과 비연참, 비천세의 내려베기 등이다. 이것을 승부처로 발달시켜!」 「약은 절대로 과도하게 쓰면 안된다. 질병도 약에 적응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인간의 몸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계속 복용하면 몸은 포화가 되어버려. 그리고 포화를 넘어서면 해가 되어버리지.」 「힘의 폭발로 공격의 준비를 최소화해라. 검의 빠르기는 준비자세의 안정세와 속도가 기반이다.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공격의 타이밍을 자유자제로 조절할 수 있고, 상대의 방어에 혼란을 준다.」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지쳐버리는 훈련과 수업이었지만 시즈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성벽을 올라가 노을진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다. 어느 새 알 수 없던 촛점은 곱게 뭉쳐,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 보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 세 달이 되어갈 무렵 노리스와 츠바틴은 성벽에 고요하게 앉아있는 시즈에게서 불안감 대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애수에 빠져 든 채 잿빛의 날개를 접고 앉은 천사는 날개를 펴 두 은인을 끌어안는 듯한 편안함 이 담긴 미소로 그들에게 보답했다. -24- 「무슨 생각 하나요?」 갑자기 얼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 시즈가 눈을 뜨자, 모닥불에 곱게 물든 금발 을 살풋 드리운 채 유레민트는 호기심있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는 몇 십 년이 넘도록 살아온 엘프였지만, 커다란 연두빛 눈동자에 말똥거리는 순수 함은 시즈의 눈에 어리광쟁이 소녀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비쳤다. 소녀의 금발을 한 껏 쓰다듬고 싶다는 욕망을 싱긋 웃으며 억제한 시즈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엘프는 자존심이 굉장해서 인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던 모 양이네요. 유레민트 님을 보고 있으면 엘프라는 종족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아하하. 아니에요. 외모만이라면 엘프는 아름답지만 종족 자체가 아름답다고 하기 에는 부족해요.」하고 유레민트는 남자라면 안아주고 싶을 슬픈 표정을 짓자 〈춤추 는 칼〉의 메네이나를 제외한 대원(?)들은 이유없이 얼굴을 붉히고는 -모닥불에 비 친 착각일런지도 모르지만- 주먹으로 애꿎은 땅을 쿡쿡 쥐어 박았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거지.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더 소중한 것 을 바치는 바보들은 세상에 널려있지. 안 그런가, 바보들?」 구르는 돌처럼 묵묵한 음성을 내뱉은 토루반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을 들어내 아픈 주먹을 쓰다듬고 있는 바보들을 쓸어보고는 시즈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도 모든 것을 미학(美學)과 결부시켜 판단하는 건가?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본 것 같군.」 「저 역시 바보입니다. 하지만 엘프를 아름답다고 한 이유, 외모 또한 그 안에 들어 가거든요. 그들은 어떤 것과도 조화로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외모 또한 조화 로움의 한 부속품처럼 완벽해요.」 「그것은 아닙니다.」 피브드닌가 내장을 탈탈 털어내고 헬쓱한 안색으로 양고기를 씹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 앉았다. 「유레민트 님은 특별합니다. 보통 엘프들은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죠. 그들은 조화 로운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순수의 자존심은 인 간과 같은 다른 종족을 배척하죠.」 유레민트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종족이 고집하는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정치와 학문에 뛰어든 것도 그것을 타파해보 려는 심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래요. 우리 엘프들은 조화롭지 못해요. 어쩌면 가장 조화롭지 못한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이렇게 멸망해가고 있잖아요?」 실제로 엘프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강한 마법과 자연,정령 친화력 등 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비스러웠던 고대 종족으로 되어가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두 려움 때문이었다.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는 종족 엘프, 그들에게 자연을 이끄는 능력 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다른 종족들은 자신들의 변신과 함께 환경또한 바꾸어 가고 있었다. 엘프는 이미 모든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족이었기에 사실상 변 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종족을 두려워하고 시기했 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다채로운 형태의 진화를 보이는 인간을 혐오스러워까지 했다 . 엘프들은 인간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 바다의 섬으로 떠나갔다. 「엘프를 순수하다고 보았을 때, 가장 혼돈스런 존재는 인간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로인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일 겁니다.」 피브드닌은 힘있는 미소를 지었고, 곧 토루반에게 얻어맞아 짜증스런 울상을 지어 야 했다. 「왜 때리는 겁니까, 토루반? 제 나이가 벌써 30세을 넘었다고요. 젊은 사람들 앞에 서 그렇게 구박하시면 전 뭐가 됩니까?」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로군. 난 네가 기가막힐 정도로 뻔뻔스러운 말을 지껄 이기에 부끄러움 같은 것은 절대로 타지 않는 철면피인줄 알았다. 네 말대로 인간은 가장 혼돈스럽지만 그 안에서 혼돈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이 조화롭기 위해 다른 생물들에게 혼돈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 그렇기는 하지만….」 「뭐가 그렇기는 하지만이냐! 이 세상에 진정한 조화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정 한 아름다움 또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모닥불의 주위는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길을 잃고 헤매 는 소리만 애처롭게 들려왔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아 거구의 신관에 의해 바닥을 드 러냈다. 헤모는 종족의 슬픔을 간직한 엘프, 종족의 자부심을 간직한 인간, 그리고 대화에는 신경도 안 쓰고 열심히 고기를 먹어대는 메네이나를 쓴웃음을 지으며 쳐다 본 후 입을 열었다. 「과연 진정한 조화가 필요한 것일까? 이 사제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을…. 깨끗함을 가진 엘프, 불 같은 열정의 드워프, 다채롭고 화려한 인 간, 뿐 만 아니라 수십 개의 면을 가진 생물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변화의 아름 다움, 순수의 아름다움, 혼돈의 아름다움.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지 알 수 없을 거 야. 하핫! 이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군. 이러니 세상이 멋진 것이 아닐까?」 어색하게 웃는 헤모 사제의 미소가 잠깐이지만 성인(聖人)과 같다고 느낀 것은 착 각이 아닐 것이다. 그는 어딘가 푸석하면서도 눈이 내린 것같은 포근함을 풍기는 분 위기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드리고 커다란 손바닥으 로 시즈의 등을 퉁퉁 두들기며 책임을 넘겨보려고 노력했다. 「이 좋은 세상에서 만난 것 자체가 레이모하의 축복이 아닌가 싶군요. 기념을 하고 싶은데 뭔가가 없을까, 시즈?」 「보잘 것 없는 노래라도 된다면….」하고 시즈는 가방에서 넬피앙을 꺼내 품에 안 고 키득거렸다. 그가 미천한 음유시인들이나 쓰는 악기를 손에 잡자, 아스틴의 사람 들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이었다. 「쉿! 노래을 듣길 원한다면 조용히 해요.」하며 줄을 고르는 모습에 달빛이 비추자 ,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하는 분위기가 고요하게 피어나 사람들을 감싸안았다. 사방이 작은 음악회처럼 조용하게 부 드러운 눈으로 시즈는 약간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 희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넬피앙의 현을 건드리자, 넬피앙은 가녀린 떨림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음과 함께 피어나는 투명한 음성이 순수의 엘프, 열정의 드워프, 혼돈의 인간, 모두의 귀에 살며시 속삭였다. 달빛은 누구에게 비출까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면 알 수 있을까요? 모를테죠. 달의 감미로운 미소가... 그 고요하고도 싱그러운 미소가 당신을 향해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부끄러운가요? 그 과분하지만 충분치 못한 빛발을 받는 것이... 오... 아름다워요. 달빛의 오오라 쌓여 수줍음에 몸을 떠는 그대가... 바로 그대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인답니다. 그러니 울음을 멈춰요. 사랑스런 그대여... 연인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맑은 음성은 허공에 작은 울림을, 사람들의 마음 에 물방울같은 파문을, 그들의 얼굴에 달빛 일렁이는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시즈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한 음율에 늦가을 밤의 찬바람조차 따스한 햇살 속 아이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숲 속을 일렁였다. 정령에게 들려주는 자 장가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에 메네이나의 눈이 사르르 감기고, 뒤를 이어 유레민트, 그리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 속에 푹신한 침대에 기댄 것처럼 잠에 빠져들 어갔다. 잠시 후 노래를 마친 시즈는 잠들어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달빛과 같은 미소를 띄 고 투덜거렸다. 「모두 자면 보초는 내가 서라는 건가요?」 -25- 아무도 아침을 시작이라고 규정지은 바가 없지만 대부분의 인식 속에서 아침은 하 루의 시작이다. 밤은 12시를 기준으로 새벽의 밤과 저녁의 밤, 2 차례로 나뉘어 찾 아오건만 어느 책에나 하루는 하나의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다. 잣대를 변화시킴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고, 탄생과 멸망을 되풀이한다. 하지 만 그런 세상의 법칙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중에는 자신들을 멸망과 탄생으로 이끄는 변화를 경계하는 이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가 오고 있다는 건가? 바로 그가?」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한 힘과 함께 잔떨림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마주 앉은 상 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는 것이 이해가 서지 않았다. 한층 힘이 빠져버린 남자는 무거운 한숨을 몇 차례 내쉬고 물었다. 「그대는 〈그〉가 두렵지 않은가 보군?」 「두렵긴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제 머리를 만족시켜주는 몇 안되는 즐거움 이니까요. 비록 〈그〉가 몰고 올 바람과 그로인해 뿌리째 흔들릴 대륙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것〉들은 너무나 흥미로워요.」하고 상대는 어둠으로 드러난 입가에 미 소를 띄웠다. 남자는 그 미소로 인해 크나큰 손실을 가져올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 만 드러내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바로 〈그것〉 때문이겠지? 길고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미 일어났어야 할 흐름 …. 〈그〉로 인하여 흐름이 일어나게 되다면, 태동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을 거 야.」 「우리가 역사의 시간을 억눌러 온 것도 벌써 몇 천년이 지났어요. 사실 세일피어론 아드 자체가 몸부림을 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존재를 태어나게 했다는 것 은 정말 놀라워요.」 그 때, 암흑 그 자체처럼 검은 갑옷이 구석에서 걸어나왔다. 겉보기에 발 옮기기도 힘들만큼 무겁고 투박해보였지만 착용한 사람은 새털처럼 사뿐하게 걸음을 떼고 놓 았다. 이미 앉아있던 두 사람이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가슴이 짓눌릴 것 같은 숨기운을 뿜어대던 가면에서는 최창살같은 틈새를 지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오랜만이야. 나를 부르다니 의외이긴 해.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지?」 「물론이에요, 에레나. 그런 칙칙한 갑옷을 입고 아지랭이처럼 나타나는 것은 여전 하시네요. 당신같은 미인을 보지 못하는 정말 남자들이 안타까워요. 당신은 그 한가 지가 단점이라니까요.」 남자의 상대가 검지 손가락을 꼽아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싱글거렸다. 남자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고 곧 투덜거렸다. 「요즘 몸매도 안되는 귀족영양들은 몸을 드러내보려고 가슴이 푹푹 파인 것을 입던 데, 진정 미인은 불곰의 털가죽보다도 두꺼운 쇠를 둘러치고 있으니 시대를 잘못 타 고난 것이 슬플 뿐이야.」 「왜 나타나자 놀려대는 거지? 내가 둘의 대화를 들은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지. 그럼 되돌아 갈까?」 「그래도 저렇게 잘 토라지는 것은 여자라는 증거인 모양이야, 안 그런가?」 「하하! 그럼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남자는 에레나의 짜증스런 말투와 광폭한 기세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묻은 입가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수줍게 봐줄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일이야. 〈그〉의 팔을 자르고 눈을 판 후 혀를 뽑아줬으면 해.」 웃음섟인 말은 에레나의 난폭한 기세를 섬뜩할 정도로 가볍게 눌러버렸다. 검은 갑 옷은 어둠에 동화된 듯 어두운 침묵을 삼켰다. 그녀 또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 었고, 얼마나 위대한 사람 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이는 것보다는 간단하죠?」 「그래, 간단한 편이군.」 자신은 더욱 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꺼림찍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역사를 만들어온 이들이고, 세일피어론아드 를 지탱해온 이들이었기 때문에…. 「왜 아스틴으로 가려고 하지?」하고 토루반은 넌지시 질문과 시선을 동시에 던졌다 . 마치 탐색전이라도 하는 것 같은 눈초리에 시즈는 의아한 미소를 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코웃음을 치며 토루반은 자신의 수염 투성이 얼굴이 비치는 연못에 손을 쉬 지 않고 첨벙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의 이름,〈또 다른 고향〉이라고 쓰여진 마지막 페이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으로도 이미 증명은 충분하잖나? 난 네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아스틴으로 간다고 생 각되는데? 이름을 널리 알릴 생각으로 간다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 겠군. 네 놈이 그런 시덥잖은 이유에 휘말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시즈 또한 손을 참방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느끼는 것이었지만 토루반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자신에게 찬물 을 껴얹는 것처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피브드닌 또 한 고지식한 생각을 마땅찮았지만 지닌 지식은 단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고 유레민 트도 범인과는 다른 한차원 높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중에 서도 토루반은 특별했다. 어디에나 놓여있는 돌덩이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 가 활화산의 불꽃처럼 자신의 존재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시즈는 물론, 중인 들에게서 경외스러울 정도였다. 「제 마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아스틴은 마법왕국이니까 제가 현재 연구하 는 학문인 마법에 대한 궁금증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죠.」 「나는 자네의 양아버지가 고명한 마법사인 헤트라임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 정도의 대마법사를 아버지로 두었다면 굳이 아스틴으로의 먼 여행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토루반은 어깨를 으쓱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해보았지만 불행히도 작은 몸은 충분히 의미를 반영할만큼 큰 동작이 될 수가 없었다. 시즈의 눈에는 움찔! 하 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을 모르는 드워프의 현자는 드래곤이 욕정에 겨워 뜨거운 숨 을 내뿜는 것처럼 은밀하게 시즈의 귀에 속삭였다. 「네 녀석이 말하기를 꺼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좋다. 불꽃의 땅과 보석에 맹세코 비밀을 지킬겠다. 알려다오.」 드워프에게있어 불꽃의 땅이라 불리는 화산지대는 삶의 터전이었다. 화산 주위에서 발견되는 유황은 그들의 생활에 이용되는 에너지였고, 땅의 압력으로 많은 보석이 생성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대장장이와 건물 건축사로 유명했지만 사 실 그들은 어떤 것보다도 천부적인 보석세공사였다. 어떤 것보다도 단단한 원석들에 서 드워프들은 가치가 있을 보석을 추출해내고 그것을 깍고 다듬으니, 쇠를 추출하 고 다루는 것이나, 건물을 정교히 세공하는 것 따위는 한국인들이 맹물에 김치넣고 불 때워 김치국 끓이는 만큼이나 쉬웠던 것이다. 그제서야 진지한 표정이 된 시즈는 손에 들고 있던 어떤 물체를 단도로 다듬어 물 에 넣고 씻으면서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약속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다른 이들과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틀 리죠. 그 방식까지 묻지는 마세요. 헤모는 제가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으 로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그 기대에 부흥하진 못합니다. 그런 제게 필 요한 것은 제가 마법을 창언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아스틴의 고대 마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죠. 물론 현재로서도 어느 정도의 마법은 쓸 수 있지만….」 「정말 세상을 바꿀 말만 하는 군. 마법의 방식이 틀리다니, 체계가 들리다는 것은 현재의 마법이론을 부정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약간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요. 자아…. 이제 다 됐어요. 다른 분들이 기다리겠네 요. 어서 가죠.」 손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낸 시즈와 토루반은 함께 가져온 물체를 조심스럽게 품 에 안고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오는 것을 헤모가 눈을 부릅뜨고 무서 운 기세로 반기며 소리쳤다. 「야채 씻으러 간 놈들이 왜 이렇게 늦어!?」 시즈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낼름 내밀고 끌고 있는 스프에 씻어온 야채를 덤 석덤석 잘라넣었다. 스프는 함께 끓게될 이들의 방문이 즐거운지 보글보글하며 즐거 워 했다. -26- 「뭘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늦은 거야?」 2m 도 넘는 장신이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고 노려보는 것은 상당한 위압이었다. 헤 모는 엄지손가락으로 시즈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어깨 뒤를 가리키며 〈산적 들이 아우성치는 것을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하고 투덜거리면서도 요리를 담당한 사람답게 〈간이 맞았는지도 보게. 사람들이 많으니 이거 긴장되는 구만.〉하고 소근거렸다. 레이모하를 섬기는 사제들은 언제나 자신의 음식을 떠먹을 스푼을 지니고 다녔다. 어떻게 보면 거지근성을 들어내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레이모하의 사제들은 아 무 곳에 껴서 음식을 얻어먹을 만큼 배짱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고 한 편으로는 서 민들과 귀족 모두에게서 환영을 받을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낸 원인 중 원인 중 하 나였다. 그 배짱과 사교성을 거들어주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요리실력이었던 것 이다. 레이모하의 사제들은 왠만한 음식점 요리사만큼의 요리실력은 기본적으로 갖 추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 즉 어디에서나 멋진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ㄷ . 「엘프도 사냥할 필요가 있어?」 자신을 요리를 하도록 끌어드리려는 섬뜩한-게다가 크기까지 하다- 헤모의 손길을 가까스로 벗어난 시즈가 고개를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돌려보니 눈을 환기시켜 주는 두 여인과 소녀가 그늘진 나무 밑에서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생존을 하려면 사냥은 필수적이에요. 메네이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죠 ?」하고 유레민트는 새초롬한 시선에 호기심을 담고 그늘을 요리조리 굴러다니는 소 녀에게 물었다. 산적들답게 〈춤추는 칼〉의 사람들은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실력이 수행원들보다 월등했다. 그 중에서도 메네이나는 그들의 생계유지를 책임진 사람처럼 단도를 날렸 는데 그 실력은 엘프인 유레민트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숲의 종족, 엘프의 궁술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화살이 날아가 동물들의 급소에 정확히 꽂힐 때마다 메네이나를 제외한 〈춤추는 칼〉은 꼬리를 토끼마냥 동글동글하게 말고 나무 뒤에서 비애에 빠졌다. 「거기 아름다운 아가씨들, 식사하러 오시겠어요?」 일명 〈호스트〉로 알려진 수행원, 사론이 큰 소리로 웃으며 두 여인을 불렀다. 하 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두 아가씨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특히 메네이나는 입을 쉴 새 없이 놀리며 음식을 씹으면서도 완벽한 발음을 구사하는 신기를 보여주어 눈 길을 끌었다. 「난 엘프가 숲을 다치게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간다고 들었는 걸… 꿀꺽! 그리고 숲도 엘프가 원하면 들어준다고 해서- 우물우물 - 엘프가 〈나 토끼 먹고 싶 어〉하면 숲이 애 낳듯이 쑥쑥 주는 줄 알았는데?」 「우하하핫!」 토루반과 헤모가 자지러질 정도로 웃어재끼며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피드브닌과 시즈도 웃음을 참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레민트는 심각한- 남의 종족의 이해를 이렇게 시키다니- 표정으로 그들을 한번 흘겨주고 메네 이나에게 물었다. 「메네이나,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요?」 「응!? 아냐? 웃지마! 보를레스가 그랬단 말이야!」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메네이나 도 얼굴을 붉히고 곧 스프를 신경질적으로 들이마셨다. 처음 유레민트의 손을 잡고 눈물마저 흘려대던 〈춤추는 칼〉의 문학 산적은 움찔했다. 주위의 늑대를 방불케하 는 빛나는 시선에 그는 듬직한 신체를 조심조심 움츠려갔고, 유레민트는 한차례 한 숨을 땅이 꺼지도록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필요한 만큼만 사냥을 해요. 인간들처럼 어떤 종족을 멸종시킬만큼 아름다 움, 귀여움, 희귀성에 잡히지는 않는답니다. 숲의 동물들도 모두 자신들의 살아가는 것 이상의 사냥은 하지 않죠. 그것은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되는 거에요. 꼭 동물을 사냥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자연에 조화를 맞추는 행동은 아니랍니다.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요구와 행동가 바로 조화로 향하는 길이죠.」 언제 또 메네이나와 같은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춤추는 칼〉 사 람들은 진지한 안색으로 굳히며 귀를 기울였다. 유레민트가 숲 속에서 종족과 자연 간의 조화에 대한 문제를 처음으로 강의하는 이례적인 경험을 하는 도중, 갑자 기 그녀의 귓가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몇 마리가 아닌 꽤나 되는 숫자가 열을 맞추어달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변두리에 왠 말발굽 소리지? 급한 일이 있어 지나가는 것이겠지.〉하는 섵부 른 판단은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어놓는다. 갑자기 들어닥친 무장을 한 기마단 중 푸른 단장을 어깨에 수놓은 망토를 두른 중 년기사는 씨익 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을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안녕하신가, 〈춤추는 칼〉 여러분? 이거 생쥐처럼 잘 빠져나가더니 오늘은 왠일 로 얌전히 기다리고 계셨을까? 우리는 여러분에게 당했다는 상인들의 난리로 밤잠도 설치는데 거의 축제분위기로군. 〈제 12 국경치안 기사단〉 앞으로! 드디어 우리의 골머리 한구석을 파먹던 산적들을 소탕할 기회가 주어졌다.」 「우아아앗!」 어지간히 골이 아팠던 것일까. 국경치안 기사단은 환호에 가까운 기합을 지르며 〈춤추는 칼〉 무리를 노려보았다. 시즈 일행과 산적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사단이 기쁨이 내포한 살기를 마구마구 내뿜자, 어이없는 얼굴로 뜯다만 토끼고기를 떨어 뜨렸다. 보를레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망… 가야겠지?」 -27- 그들의 다리는 바람보다 빨리 움직였고 번개처럼 땅을 박찼다. 생존의 의지가 얼 마나 대단한 것인지 〈춤추는 칼〉의 도망자들은 처절하도록 확연히 보여줬다. 「왜 우리도 도망쳐야 하는 거지?」 피브드닌은 쏨살같이 헤모의 등에 업힌 채 가끔 부딪혀 오는 나뭇가지에 하나도 피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얻어맞으며 중얼거렸다. 헤모는 짐을 지고 달리는 판에 예 쁘지도, 그렇다고 귀엽지도 않은 30대 중반의 사내가 업혀 등에 턱수염난 얼굴을 징그럽게 비벼가며 바람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오물거리니 다닥다닥 소름 이 돋는 것이 한올한올 느껴졌다. 그래, 레이모하의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하자. 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사제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 헤모의 헌신적인 심정을 알 리 없는 일행은 발을 놀리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았다. 만약 들판이었다면 벌써 등에 칼이 꽂혔겠지만 다행히 숲에서는 말의 움직임 자유 로울 수가 없었고, 〈춤추는 칼〉은 이름 뿐이라도 명실공히 산적이었다. 그것도 국경 치안을 당담하는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산에 자리잡고 개미떼처럼 우글우글하 는 여타 산적들보다도 눈에 피발 - 잠을 못 자서-서게 만드는 존재인 그들은 나무 와 수풀을 달아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아스틴의 수행원들도 대부분 경호를 위해 무술이나 검술을 익혀 동작이 빨랐고, 엘프인 유레민트와 몸이 가벼운 네메이나는 땅을 침대밟듯 살풋살풋 짚는 것 같으 면서도 가장 앞에서 달려나갔다. 일행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 것은 토루반과 시즈였 다. 다리가 짧아 타인이 한 발을 내딛을 때, 다섯발은 쪼르르 달려야 할 드워프는 등에 무거운 배틀 엑스를 동여맨 것이 부담이 되지 않는 양 야생마처럼 힘차게 질 주하며 튕겨나갔고 시즈는 작고 유약해보이는 체격으로 일행을 고민시켰지만 곧 걱 정을 한순간에 놀라움으로 바꾸어놓았다. 물살 속에서 물고기가 유영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시즈의 동작은 아름답기까지 했고 어찌보면 한가로 워 돌아보는 이들은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만약 청년이 땀을 쉴 새 없이 흘리지 않았다면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했으리라. 「여전하군, 황홀할 정도의 체술. 흐르는 물은 한 없이 부드럽고 느려보이지만 눈 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빠르지.」 멧돼지처럼 돌진하면서도 장애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달리는 헤모는 그 와중에도 눈을 힐끗거리며 감탄을 토했다. 덕분에 등에서 파릿파릿하게 질린 피브드닌은 기 절하지 않는 자신의 정신력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헉! 헉! 모,모두 좀 쉽시다. 이제는 아마 놓쳤겠지?」하고 사론이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멈추는 순간, 「휘익- 퍽! 부르르르-」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산뜻하게 스치 지나갔고 「흐읍!」 하고 사론은 내쉬던 숨을 도로 들이키며 눈 앞에서 나무에 꽂힌 채 부들 거리는 화살과 박자를 맞추어 한 차례 부르르 떨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었 다. 「오늘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인데!?」 보를레스는 기가 질렸지만 다리의 속도는 느려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잡히면 그대로 천국향인 것이다. 산적이니 지옥행일지도 모르지. 쫓기는 편에서는 죽을 맛 이었지만 〈제 12 국경치안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이날이 바로 장날이었다. 얼마나 하룻밤의 깊고도 편안한 잠자리를 간절히 바라였던가. 신고와 고발로 말발굽이 닮아라 출동해도 흔적으로 남겨진 그들의 표식, 땅에 꽂힌 칼 한 자루만 외로이 남아 자신들의 무능을 비웃는 것 같았다. 주민들에게 시달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기사들에 대한 하늘의 보살핌인지 간밤에 〈바난 숲〉을 지나던 한 여행자가 숲에 켜진 모닥불과 한 떼의 인원을 수 상히 여기고 신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경계가 밤보다는 아침이 헤이할 것이라 여 겨 들이닥친 것이 적중한 것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막상 쫓는 기사들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 듯 〈이제는 편히 잘 수 있다.〉라는 환희에 넘쳐 입가에 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히죽되면 말을 몰아대는 이도 있 었다. 「이 말, 값이 상당할 것 같은 종마인데!? 이 놈들, 큰 것을 한탕한 모양이군.」 〈제 12 국경치안 기사단〉의 단장, 로트 바키더는 시즈 일행이 미처 신경쓰지 못 하고 내버려두었던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부하들이 토끼 사냥을 즐겁게 즐기고 있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옆의 마차 안에서 시즈 일행의 물품을 살펴보던 기사가 걸어나와 부복하고 말했다. 「꽤나 비싸게 받을 것 같은 서적과 골동품이 다수 있습니다.」 「어떤 상인인지 모르지만 억울하겠군. 이미 목숨을 잃었겠지? 쯧쯧! 성으로 가져 가게!」 「옛!」 마차에 실려있던 것은 제플론의 문인귀족들이 존경의 표시로 피브드닌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 때 피브드닌은 잊었던 물건들을 생각해내고 아까움에 눈물을 닫다가 다시 다가온 나뭇가지에 생채기가 났다. 마차가 성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로트 에게 부관이 굼금한 어조로 물었다. 「고작 20 - 30 명 정도의 산적퇴치에 제 12 사단의 기사들을 모두 동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로트는 미간을 찌푸리고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충분히 나설 필요가 있지. 그들을 얕보지 마라. 그들이 재빨리 일을 처리하고 도 망갈 수 있다는 것은….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지. 특히 보를레스라는 놈은….」 「메네이나 조심햇!」 흡!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메네이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이 잘려나갔다. 「보, 보를레스!?」 「도망쳐라. 잠시 후에 쫓아가마. 어서!」 갑자기 악귀같은 기세와 고함에 메네이나는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머리 속은 갑자 기 백지장이 되어 절대적인 명령을 들은 것처럼 무작정 달릴 뿐이었다. 소녀가 사 라지자, 보를레스는 적당하게 살이 빠진 롱소드를 꼬나잡고 한 기사를 노려보았다. 〈잡배의 자세가 아니다. 저것은 기사의 검술이야.〉 기사는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약간의 보호장비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텁텁 한 입맛을 다시며 그가 말에서 내리려는 순간, 「지금이닷!」하고 보를레스가 몸을 움직였다. 「비, 비겁하다」하고 외치려던 기사는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달려들어 검을 내지를 것 같던 보를레스는 그대로 내뺐던 것이다. 기사는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겁해서… 고맙다.」 -28- 「시즈 님! 어째서 저희까지 도망가야 하는 겁니까?」 사론은 끊어질 듯한 다리를 부여잡으며 옆에서 숨을 몰아쉬는 청년에게 물었다. 그 러자 다른 아스틴의 수행원과 네글로드도 궁금증을 얼굴에 완연히 드러냈고, 피브드 닌같은 경우는 그물친 듯 생채기가 난 얼굴을 서글픈 손길로 쓰다듬으며 청년을 째 려봤다. 「그래…. 나도 묻고 싶소, 시즈. 왜 우리까지 도망쳐야 하는 거요? 난 이제껏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소이다. 아스틴네글로드라고 밝히면 될 것을 왜!」 불만이 가득한 것 같군. 시즈는 기사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것을, 주위를 한번 휘이 둘러보며 살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수행원들은 흠칫했다. 평소의 시즈가 짓던 온화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표정은 얼음의 마법을 썼다고 착각할 정도로 차 갑고 딱딱했다. 「그렇다면 〈춤추는 칼〉의 사람들은? 당신의 말은 한마디로 우리는 상관없는 사람 들이니까, 기사들에게 산적들이 사냥당하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자!? 이 말입니까?」 냉담하게 몸을 후벼파는 비꼼에 피브드닌는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 러보니 〈춤추는 칼〉은 지쳐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 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에는 살기를 서슬푸르게 띈 눈빛도 섟여있어 그는 차 갑게 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저희가 이렇게 함께 도망친다고 해서 이들을 구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같이 도망치기만 할 뿐입니다. 개죽음이 될 뿐이라고요.」하고 가라앉은 사론의 말에 시즈는 힘겹지만 자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도울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유레민트님, 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시즈가 유레민트에게 무엇인가를 작게 속삭이자, 엘프는 귀를 움찔거리며 놀라 청 년을 희안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내 결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물론 마법 시전 자체라면 할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 후에 유지는 어떻게 하려고…?」 시즈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큰 원을 그렸다. 「모두 이 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들이 쫓아오기 전에 해야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군사운용에 대해서는 아스틴 네글로드 중, 날 둘 째가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데, 그들은 지금쯤이면 쫓기보다는 넓게 퍼져서 천천히 포위하고 있을 것이오. 그 후에 조여들겠지.」 「당연하지, 셋째가도 안되는 놈을 누가 둘째가라고 생각하겠어?」 「토루바아안!」 「어린애들처럼 말다툼하는 것은 그만하고 어서 원 안으로 들어오세욧!」 남자들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여자라는 것을 단순하게 증명하는 일이었다. 유레민트의 예쁜 입술에서 서슬 푸르게 튀어나온 고함에 남자들은 놀란 생쥐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듯 달려와 원 안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가 보면 여왕님과 똘마니들 이라고 착각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시즈에게는 그저 반가운 현상으로만 느 껴졌다. 「그럼 시작합니다.」하는 동시에 시즈는 눈을 감고 입술을 꽉 물었다. 피가 날 것 처럼 붉게 변한 입술에서 너무 작아 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의 몸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던 사람들은 눈을 천천히 뜨고는 의아해하고 있을 때 유레민트는 손을 높이 들어올리며 주문을 외쳤다. 「모든 것은 빛의 꿈, 나는 감추고 싶은 욕망에 빠져 빛의 파도에 휩쓸리니 꿈결의 파도 속에 숨겨지리라.」 나뭇가지로 그어진 선분에서는 새하얀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곧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챈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악! 내 몸이!」 「사라져간다….」 「좀 조용히 하게. 지금 투명화되는 것이 발견되면 말짱 헛짓이야. 왜 이렇게 도망 쳤다고 생각하나? 바로 이 마법을 시전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야!」 소란은 토루반의 근엄하고 무게있는 말로 진정궤도로 들어섰다. 일행이 모두 서로 를 보지 못하게 되자, 유레민트는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공간의 틈 속에… 빛의 틈 속에… 존재를 숨죽인 이여…. 내 눈은 빛의 장막을 뚫 고 그대를 보리니, 앞에 나타나리라.」 「오…! 보인다. 그런데 왜 자네는 거기에 엎드려있나?」 「당신이 밀쳤잖소!」 「그랬나? 하핫! 아무 것도 안 보여서 말이야. 뭔가 부딪히는 것 같았는데 너무 맥 없이 없어지길래 바람인가 했지.」 사론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렇다고 꿈쩍할 보를레스가 아니었다. 도 망치는 일행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챙긴 보를레스였지만 그는 뛰기 시작할 때의 모 습이나 현재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헤모는 주의깊은 시 선으로 그의 균형잡힌 체격을 노려보았다. 「이제 포위망을 뚫도록 하죠. 그들이 기사인 만큼 기척을 느낄 수 있을테니, 가장 빠르고 가볍게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싸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리고 피브드닌?」 시즈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춤추는 칼〉과 아스틴의 수행원들은 왜 마법을 펼친 유레민트 는 아무렇지도 않고 그가 힘들어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자코 얘기에 귀를 귀울였다. 「피브드닌 님이라면 알 수 있겠죠? 우리가 현 상황에서 그들의 허를 찔러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피브드닌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수행원들에게 뭔가를 요구했다. 지도를 받아 든 피브드닌은 그것을 펼쳐놓고 손으로 재어가며 몇 가지 계산을 하는 듯하더니 히 죽 웃었다. 「그 정도는 간단하지. 우리는 행운아들이라고. 다행히 이 숲은 성쪽을 향해 뻗어있 고 무작정 숲 속으로 도망친 우리 또한 성을 향하고 있어.」 「방향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걱정말게 내게 해시계가 있으니까, 현재 시간에 대한 해의 각도로 4방위를 알 수 있어. 우리는 앞으로 계속 가면 되는거야. 우리 마차를 수거해 가고 있는 놈들은 아 마도 경계가 허술할 거야. 설마 산적들이 기사단에게 토벌당하면서 뺏긴 물건을 되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아마도 느긋이 간다고 할 때, 빨라봤자 마차 의 속도는 시속 10km 정도? 우리가 자리를 떠난 시각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25km 정 도 밖에는 가지 못했을 거야. 예상 범위를 찾아보건데 여기서 여기 안에 콧노래를 부르며 가고 있겠지.」 이렇다 저렇다하지만 그는 역시 대륙 최고의 학자 중 하나였다. 수행원들과 산적들 은 감탄하며 피브드닌의 설명과 지도를 옮겨다니는 손가락에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신이 난 피브드닌의 눈이 흥미거리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우리 또한 성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이 범위와 떨어진 거리는 길어도 4km 가량 이야. 방금 같은 속도로 1시간만 뛴다면 잡을 수 있지. 마차와 말을 다시 되찾는다 면 엘시크를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지.」 「역시 대단하십니다.」하고 산적들이 그의 손을 철썩 잡았고 토루반과 유레민트도 감탄한 눈치였다. 「처음하는 뒤통수치기다. 흥분되는 걸.」 「결국 일일 산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 군.」 〈춤추는 칼〉과 아스틴 네글로드 일행은 서로 다른 감상을 내놓으며 키득거렸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 에서 그들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지만 그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대륙의 전설적인 7인의 학자 중 유일한 엘프, 유레민트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즐기게 되는 것 아닐까하는… -29- 「엉? 뭐지? 뭔가 지나간 것 같은데 작은 들짐승인가?」 「윌리브, 모하는 거야? 포위망이 벌어지잖아!」 「알았어!」 보를레스는 기사가 자신의 앞을 천천히 지나가자, 한숨을 내쉬며 발을 떼었 다. 그의 등에는 가얇은 체격의 청년이 하나 업혀있었다. 「시즈, 괜찮습니까?」 「아…. 예에….」 시즈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절대로 괜찮게 느껴지지 않는 그 대답에 보를레스는 뛰는 속도를 빨리했다. 일행들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 고 있었다. 함께 몰려다니면 기척을 쉽게 알아챌까봐 흩어졌다가 포위망을 뚫 고 모이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다가온 토루반과 유레민트가 걱정 스러운 눈초리로 시즈의 상태를 살폈다. 「이제 마법을 풀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죽겠어요….」 「아닙니다…. 마차까지는… 유지해야 되요….」 그렇게 말하며 시즈는 희미하게 웃음를 지었다. 투명하게 변한 동공, 그는 눈 이 보이지 않았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소리로 유레민트와 토루반이 있는 곳으 로 고개를 돌리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도 한 명도 아니고, 스무 명가량 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요.」 「유레민트, 그만하게. 저 녀석도 이미 알고 있어. 어차피 체력도 떨어져서 얼 마 견디지 못할거야.」 마법을 멀쩡한 유레민트가 멀쩡하고 시즈가 폐인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것이 었다. 유레민트는 그저 불을 당겨주었을 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시즈였기 때 문이다. 투명 마법과, 투시마법이 기본적인 마법이긴 했지만 대규모의 사람들에 게 시전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마나를 기본으로 했고, 유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불씨를 받아서 불을 피우 는 일이 어려운 것이 부싯돌에서 불꽃 튀기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들 모였군. 그러저나 시즈, 아주 예뻐졌군. 머리칼도 회색으로 멋지게 탈색 되었어.」 헤모는 유쾌하게 시즈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의 얼굴은 참담할 정도로 우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마찬가지였다. 포위망을 빠져나온 것은 기 뻤지만 한 청년의 망가진 모습은 그들의 마음을 바늘처럼 찔러댔다. 시즈는 나뭇가지로 원을 그은 후에 원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유레민트가 시전하는 마법을 유지시키는 의지를 불어넣었다. 그 후에 원을 지우며 마법에 걸 린 물체가 계속 유지되도록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저렇게 미소짓고 있지만 아마 죽을 지경일 거에요.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4클래스의 마법을 쉬지 않고 70번은 쓴 것과 동일하다고요.」 유레민트의 말에 〈춤추는 칼〉과 수행원들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는 지금 대마법사가 될 사람을 미리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모와 토루반은 그와는 다른 생각으로 긴장했다. 만약 그가 약속의 언 어를 찾게 되다면? 아마도 세일피어론아드에 다시 없을 마법사가 등장하게 될 것 이다. 세계정복을 꿈꾼다고 해도 지금 보를레스의 등에 축 늘어져 업혀있는 청년 을 당해낼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그런 멋진 생각을 하고 있는 놈이 이렇게 바보스러운 희 생을 자처해서 할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어서 갑시다. 빨리 마차를 되찾아야 시즈군도 쉴 수 있지 않겠소?」 해는 천천히 하늘 끝을 향해 솟아갔다. 늦가을의 바람이 따가운 햇살에 데워졌 지만 그들의 몸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분명히 지쳐버렸던 다리였는데 부드러운 바람에 스치며 회복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는 바람의 구름을 타고 다니는 불량스런 정령들이 있다던데… 이런 기분이라면 불량정령해도 좋겠 는 걸. 네메이나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자유로움에 몸을 맡기고 있었 다. 영원히 이렇게 달려가도 좋을만큼…. 「이번이 마지막 도적질이다….」 〈춤추는 칼〉의 〈네모꼴〉, 바크호가 기분좋은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산적들은 모두 달리는 중이었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따. 다들 순간적 으로 다리가 느려졌지만 바크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평범한 서민이었잖아? 그 재수없는 상인들에게 시달려 골탕을 먹 여보고자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재물에 정신팔린 이들을 욕하고 그들의 것을 빼 았는 동안에 우리도 재물의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난 그만 두겠어. 이제 충분해….」 「다들 비슷한 생각인 것 같은데?」 보를레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크호는 갑자기 쿡쿡하고 달리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전례없는 주법을 보였다. 「너희들은 정말 멍청이들이라니까….」 「너 역시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보를레스, 당신은 원래 우리같은 서민이 이나었 잖아. 자네도 이제 갈 길을 가야지.」 「아하하핫, 걱정말게. 따라갈 사람을 벌써 이렇게 붙잡아두었으니까.」 「아앗! 보를레스, 떨어뜨리지 말아요.」 갑자기 업고 있던 사내의 팔이 헐거워지자, 겁을 먹은 시즈는 그의 굵은 목을 꽉 붙잡고 매달렸다. 〈춤추는 칼〉의 사람들은 흥겨운 표정을 지으며 달리는 속도를 더했다. 헤모의 등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피브드닌은 언제나 냉철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저 모습이구나. 시즈 군은 저 모습을 보 기 위해서 희생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시즈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부딪혀오는 약간은 따뜻한 바람에 기분좋게 머리를 흔들며 촛점없는 눈동자로 활짝 웃고 있었다. 「네메이나도 따라가겠어.」 이제는 좀 힘이 부치는지 네메이나는 가끔 발을 헛딛고는 했지만 유레민트가 옆 에서 잡아줘 용케 떨어지지 않고 쫓으며 의지에 찬 어조로 힘차게 말했다. 수행 원들이 기가 막힌 시선으로 쳐다봤고,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산적질도 질렸었거든.」 그래그래, 누가 널 거역하겠어. 분명했다. 〈춤추는 칼〉 사람들이 짓고 있는 정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꿈으로 빛나는 그들의 눈에 한가롭게 들판 위를 굴러가는 마차가 하나 보 였다. 휘장이 화려한 고급 마차, 보를레스의 입가가 매력적으로 끌려 올라갔다. 우 리의 마지막 추억의 도적질이다. 「어디에서든 멋지게 한탕해보는 거지!」 그들의 발걸음을 막을 것이 세상엔 과연 존재할까? -30- 황혼이 구름에게 황홀한 무늬를 만들어주고 지평선에서 슬퍼할 때였다. 그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문턱에서 불어닥 치는 모래 섞인 바람에 더러워진 망토로 몸에 두르고 두터운 후드 사이로 밖을 볼 수 있을 눈만 간신히 내놓은 채 마차를 거칠게 몰아댔다. 마차를 끄는 4마리의 말은 지쳤는지 연신 고개를 푸들거렸고, 마차를 몰고 있는 사내들의 찡그린 눈에 멀리 마을이 들어왔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촘촘히 모인 집들을 향해 말을 재촉했다. 겉보기에 작은 마을이었지만 여관은 매우 컸고, 집들 뒤로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무 래도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것에 대한 방책인 모양이었고, 이런 기후가 매년 일어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마차가 마을 입구를 지나 여관 앞에 도착하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남자 중 사제복을 입은 거구의 사제가 황량한 거리와는 달리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건물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모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시군요.」 「축복을 받긴…. 노예 취급을 받고 있지요. 그나저나 사람이 많군요.」 「네. 갑자기 기후가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변해서 그렇습니다. 이 지방은 겨울이 오기 직전에 엘로고라토 사막의 모 래가 바람에 섞여와서 여행객의 발을 묶곤 하 지요.」 「호오…! 덕분에 재미가 쏠쏠하시겠구려?」 사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묻자 여관 주인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빈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하하핫!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로고라토의 전령〉오는 것은 아주 잠시 뿐입니다. 이제 멈출 시기 가 되었으니 걱정하실 것 없이 푹 쉬십시오. 그런데 〈엘로고라토의 전령〉을 뚫고 혼자서 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 다.」 주인은 진작부터 잔소한 근육까지 고루 발달된 거체에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착각을 하기는 했지만 칭찬은 한 사 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 인상을 좋게 보여주기 마련이다. 헤모는 기분이 좋아져 눈가에 주름이 가득히 잡힐 만큼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하하하! 장사를 아주 잘하시는 군. 미안하지만 나도 오늘처럼 끔찍한 모래바람을 뚫고 홀로 여행할 자신 은 없소. 일행이 꽤나 되니까 이 마을에라도 도착했지, 아니었으면 〈전령〉이 소식 전하기를 그칠 때까지 꼼짝도 못했을 겁니다. 이제 곧 들어올 거요. 마차를 보관소에 넣고 있지. 15명 가량 되니 테이블이 4개는 필요할 겁니다.」 끼 - 익.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헤모의 동료로 예상되는 한 떼의 사람들이 가게 안으로 우르르 들 이닥쳤다. 그들은 모두 모래로 회색이 되어버린 망토나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그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옷깃에서 모래가 떨어져 바닥을 청소해야 하는 점원들의 입술에서 한숨을 털어놓게 만들었다. 겉옷을 벗은 그들의 모습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보기 힘든 엘프와 드워프를 수행원으로 보이는 무사들이 호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평범해 보이는 인간 청년이었다. 엘프, 드워프 등 몇 사람과 함께 호위의 대상인 듯한 청년은 신기하게도 흰색의 머리칼이 목을 덮고 있었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 동자는 동공이 투명하여, 흰자위 안에 유리알을 박아 넣은 것 같은 이질감을 가져다주었다. 「다들! 여기입니다. 마스터, 우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부탁합니다.」하고 음식선정을 무책임하게 여관 주 인에게 맡겨버린 헤모는 시즈의 곁으로 다가가 여린 손을 잡아 자리로 이끌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청년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엇! 자리가 모자른데!?」 시즈를 부축하며 천천히 테이블로 돌아온 헤모는 이미 일행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남은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볼 때, 뒤에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던 사람이 그를 톡톡 건드렸다. 「괜찮으시면 합석하시지요.」 가슴 한 편을 시원하게 만드는 종소리처럼 맑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시즈는 서늘한 바람을 쐬는 것 같은 느낌에 투명한 시선을 돌려 음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아 -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레이모하의 보살핌이 그대에게…. 한데, 덥지 않으십니까? 후드가 정말 무겁게 보이 는 구려.」 언제나처럼 털털하고도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헤모는 의자도 찾지 못하는 시즈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 신도 의자에 앉는 순간, 「좀 덥긴 하군요.」라는 말과 함께 후드를 젖히는 사람을 보고, 흐물흐물하게 일렁이던, 멈 출 것 같지 않던 미소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에 후드에서 가려진 얼굴이 조금씩 드러남에 따 라 헤모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처, 처, 처, 천족?」 경악이 더듬더듬 섞인 사제의 중얼거림에 시끌벅적하던 주위는 싸늘할 만큼 침묵 의 주의를 보였다. 언제나 소란 스럽던 여관식당의 소음은 천천히 잦아들어 잠시 후에는 신전 안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적의 극치를 이루었다. 바라 보는 이를 신비감으로 도취시켜 버리는 미모, 그 아름다움은 도저히 현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한 종업원은 과격하게 혀를 깨물어 보고 비릿한 피 맛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천족?」 미인의 목소리가 청량하였다면 이번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쓰다듬는 온화한 음성이 테이블 위를 넘실거렸다. 눈이 보이지 않아 유일하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즈가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궁금 함을 토한 것이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림이라는 방식을 통해 단적으로 표현하 고 있었다. 「아니에요. 사제께서 착각을 하신 모양이에요.」하고 이제 스물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되는 여인은 천상의 미모에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보이는 걸까. 시즈 또한 그 만의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주점이 화원이 되어 버린 걸까?) 「하하핫. 천족으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우신 모양이군요.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 습니다.」 「아아…. 정말 나도 네가 불쌍해.」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어눌한 어조로 헤모가 중얼거렸다. -31- 식당은 곧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격의 여파는 쉽게 가시지 않는지 사람들은 가끔씩 미모의 여성을 힐끔거리며 숨을 죽였다. 「시력을 잃으신지 얼마되지 않았군요. 저런…. 어쩌다가….」 자신을 〈아릴〉이라고 간단하게 소개한 여인은 안쓰러움에 찬 금안(金眼)을 가 늘지만 선명하게 드리운 속눈썹으로 부끄러운 듯 반쯤 감추고 물었다. 그녀가 조 씩 움직일 때마다 가얇프고 흰 목덜미를 덮은 청은발은 거미줄처럼 가는 몸채를 부딪히며 사락거렸다. 잘 익은 사과처럼 봉긋 부푼 입술은 오물거릴 때마다 남성 들이 아찔함에 몸을 떨게 만들었다. 「제가 원래 장님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놀람과 궁금함으로 흔들렸다. 안경을 잃음으로 흐릿한 시 선을 가졌던 시즈는 눈동자와 머리칼이 색을 잃은 후, 무미한 미소와 어울리며 백치 또는 인형과 같은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허나 외모와는 달리 그의 음성 은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했다. 그런 이질적인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비밀 스러우면서도 강력한 존재감을 안겨주었다. 「당신은 동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주 위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급격하게 당황하는 모습은 어느 때나 침착한 장님들과 는 거리가 멀죠. 또, 당신은 겉보기에는 가늘지만 탄력있는 근육을 가졌군요. 하지만 힘을 내기는 커녕 자신의 몸을 곧추 세우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을 생각 하면 근육의 세기조차 조절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로 인해서 체력도 상당히 저하된 것 같고…. 뭐 이런 현상은 보통 오감 중에 어떤 것을 다쳤거나 잃었을 때 부적응 현상이죠. 어때요?」 「대단하십니다.」 시즈는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진심어린 칭찬을 건넸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안경의 흔적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상대에 대해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단한 여인이야. 한 눈에 타인의 몸상태를 파악하다니, 의사라면 당연하겠지 만….〉 아릴에게서 흘러나오는 바람을 느끼던 시즈는 그것이 부드럽다가도 맹수의 발 톱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향기를 가진 장미인가? 보이진 않았지만 식당의 원초적 분위기를 신전 예배당으로 바꿔버릴 정도의 외 모, 상대를 파악하는 능력, 아름다움과 향기를 동시에 가진 장미같은 여인이 있 다면 바로 멀어버린 눈 앞에 놓인 사람일 것이라고 시즈는 판단했다. 하지만…. 〈장미에 나비가 다가가지 않는 것은 가시를 알기보다 향기가 없기 때문이지. 향 기를 가진 장미는 위험하다.〉 위험이라는 경보가 울리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아릴이라는 여인은 섣불리 다가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을 느끼는 이는 아마도 자신 뿐일 것이다.〉라고 시즈는 생각했다. 모르 긴 몰라도 옆에서 헤모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음식을 먹는 것을 생각할 때, 미 모에 가린 무서움을 알아채는 이는 눈이 먼 자신 밖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잘못되었다는 것이 판정되었다. 식사를 끝낸 후, 침실에서 여장을 풀며 헤모에게 자신의 느낌을 말하자, 놀랍 게도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나 역시 아릴이라는 여인에게서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잘 갈무리된 투기를 읽었어. 투기를 느낄 수 없다고 해도 경계했을 걸세. 그런 미모로 혼자 다닌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호신방법이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지.」 「스프도 제대로 못 마실만큼 헬레레 -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그, 그거야… 워낙에 이, 이쁘니까…. 비, 빌어먹을! 레이모하여 - . 어찌하여 이 불쌍한 사제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지요 -.」 성투사 헤모의 전투적인 본능과 감각에 관해서 잠시마나 감탄을 금치 못했던 시 는 그와 같은 방 안에 여장을 풀어놓은 자신에 대하여 심각한 고찰을 할 필요성 을 느꼈다. 갑자기 창문을 열어젖히고 절규하는 헤모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시즈는 여관 굴뚝 에 올라가서 가슴을 퉁탕거리는 고릴라를 상상하고 오해받지 모른다는 생각에 복 도로 나와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방향에 대한 기억과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시즈는 뭔가 다리 에 걸린다는 것을 느꼈다. 「아깝다! 그대로 허리만 쭈 - 욱 폈으면 계단으로 굴러가는 걸 볼 수 있었을 텐 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네메이나?」 시즈는 계단에서 넘어져 이빨이 깨지는 바람에 망쳐버렸던 악몽같은 수능날을 떠 올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더듬거렸다. 네메이나는 히죽 웃으며 얼굴을 시즈의 눈 앞으로 바짝 가져다댔다. 「넌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바보같은 귀족이니까, 계단에서 구르는 것도 재밌게 보일 것 같았거든.」 「예?」 「바보구나? 네가 우리 〈춤추는 칼〉을 위해서만 희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 도는 나도 알아. 사절단으로의 〈아스틴 네글로드〉의 입장, 그들로서 타국의 기 사단을 건드는 것은 국가적인 마찰이 될 수 있잖아? 게다가 우리같은 산적의 편을 든다는 것은 〈춤추는 칼〉이 아스틴의 군사적인 전략적 도구라는 오해 또한 살 수 있지. 그렇다고 너희 신분을 밝힌다면 〈춤추는 칼〉을 도울 수 없었겠지, 너 같은 귀족이 우리를 도울려고 했다는 것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에에?」 「그렇다고 혼자서 다 짊어져버리는 멍청한 귀족에게 지배를 받아야한다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어떻게 보면 섬뜩하게까지 보이는, 속이 비칠 것 같은 시즈의 눈동자에서 더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무표정하니 어리둥 절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하는 그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눈의 시력은 좀 돌아왔어?」 「아! 아니요. 아직…. 하지만 곧 돌아올 겁니다. 헤모 사제께서 제 머리칼의 색 이 약간을 돌아왔다는 걸로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 「음…. 그럼 기회는 지금 밖에 없다는 뜻이네?」 「무슨…. 읍!?」 시즈는 갑자기 자신의 입술에 어떤 물체가 다가와 접촉하는 것에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불행히도 뒤에는 벽이 버티고 그의 뒷걸음질을 가로막았고, 그는 입술에 닿는 한없는 부드러운 느낌에 몸서리칠 수 밖에 없었다. 「네, 네메이나?」 「왜 그래? 너 키스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네? 네 입술이 굉장히 이뻐서 한번 만져 본 것 뿐이야. 그렇게 빨게 지다니 나까지 무안해지잖아.」 적응하기 힘든 짜증을 내고 들어가버리는 소녀의 뒷모습을 시즈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로 쫓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 그럼 손가락 하나에 흥분을 하다니… 나… 욕구불만일까?」 한편, 네메이나는… 「네메이나!?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얼굴이 빨갛다니, 혹시 열이라도 있는 거 아 니에요? 앗! 뜨겁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일행의 여행에 방해되고 싶지는 않겠죠? 누워요! 당. 장.」 울상을 지으며 눕는 소녀는 이 모든 것이 밖에서 반쯤 넋을 잃은 채 식당으로 걸 음을 옮기고 있는 청년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내일도 괴롭혀주겠어.」 「뭐라고요?」 「아, 아니에요!」 그 때, 갑자기 여관 안이 추워짐을 느끼며 몸서리침과 동시에 발을 헛딛을 뻔한 시즈는 무한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32- 「어이, 자네! 아까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단을 한걸음씩 내려가던 시즈는 헤모의 목소리만큼이나 굵직한 음성이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이런…. 허허, 상당히 경계심이 강하군. 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남자 장님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어. 단지, 자네의 걸음걸이로 2층이나 되는 식당까지 내려가 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판단되어 하는 소리지.」 희미하게 웃음기가 섟인 묵직한 음성의 언어를 이해한 시즈는 미간을 거칠게 찌푸렸다. 2층!? 현재 암벽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발을 내딛고 있거늘 그게 무슨 날 벼락같은 소리인가. 2층이면 눈먼 시즈에게 끝없는 태산이요,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푸르름과 설경을 순간순간 오가는 청년의 안색은 남자에게 인간의 몸에 대한 경의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할 수 없군. 내가 데려다주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시즈의 겨드랑이를 손으로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놀란 시즈가 뒤늦게 바둥거렸지만 다리가 허공을 헤매이는 것을 누굴 탓하리. 자신의 다리가 짧다는 것은 새롭게 이식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저항을 포기했다. 아마도 힘이 상당한 것으로 볼 때, 남자는 주먹이나 검을 꽤나 쓸 줄 아는 사람 인듯 했다. 남자는 축 늘어진 시즈를 가볍게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즈의 다리가 달랑거리며 허공에서 춤을 췄다. 「남자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어디에 쓰려는 건가? 남자는 자고로 무게가 있어야 지. 가벼운 남자는 내가 알기로 입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학자들 밖에 없어. 그 엄청난 나불거림은 어떻게 입술에 구멍이 뚫리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간다니까.」 〈그럼 내 입은 물에 둥둥 뜨겠군.〉하고 중얼댄 시즈는 남자의 말투로 볼 때 학자들에 대한 상당한 혐오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괜히 〈나 학자인데 요.〉라고 말했다간 던져질지도 몰라 얌전히 대롱대는 시즈. 식당, 주점에서 술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은 어깨 사이로 머리를 반쯤 파묻은 채 운반되어 오는 자그마한 청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핫핫핫! 이보게, 톰더. 자네 혹시 인형사로 취직했나?」 「어디서 그런 커다란 인형을 구한 거야? 우리 딸애가 보면 가지거 싶다고 조를 까봐 무서워지는 군.」 톰더는 쓴웃음을 지으며 볼에 불만을 가득히 부풀린 인형을 의자 위에 내려 놓았다. 「후훗, 정말로 끈만 달면 인형극이라도 할 수 있겠군요.」 「그 목소리는…. 아릴 씨? 아직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까?」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물씬 풍겨오는 술내음에 시즈는 질겁을 했다. 그는 술이 라면 물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료이긴 했지만 무조건적으로 음주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인형이 되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 아릴은 취기가 섟인 숨을 한껏 내쉬면서도 발음은 또렷하게 말했다. 술에 상당 히 강한 모양이군. 두 사람을 대비해 본다면 눈의 촛점이 잡히지 않은 시즈가 오 히려 취한 사람으로 보였다. 멍하니 자신의 뒷편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즈의 눈동 자에 아릴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전 왠만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수작 부릴 생각 말아요!」 그 때, 취한 걸음걸이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피브드닌이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 른 얼굴을 드리밀었다. 「이봐요, 아가씨. 장님에게 수작부리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이 취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히끅! 시즈 군, 이…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의 7인 중 하나인 고명하고 현명한 피브드닌이 생각할 때, 히끅!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여인을 유혹 하는 히끅! ,거엇은 무리가 있다고 보오.」 「피브드닌 님, 취하셨어요.」 사론이 당황하여 달려와 장년 주정뱅이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얼굴에 발갛게 홍 조를 띈 그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아릴을 열망에 찬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다 가 히죽이며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주륵주륵 끌고 가버렸다. 제 아무리 세계적 인 석학이자, 고명하고 현명한 피브드닌이었지만 그의 방어법은 어느 주정뱅이나 다름없는 테이블 잡고 늘어지기였고, 그 전통적인 방어법 또한 기사출신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애환이 깃든 비명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시즈는 과음에 대한 위험성을 절감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술에 대한 애완을 버릴지는 의문이었지만…. 「역시 학자들은 술을 마시면 안돼. 주둥이에 술이 들어가니, 더욱 가벼워지잖 아.」 톰더는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고, 시즈는 무의식 중에 동감을 표하는 자신에 대 해 화들짝 놀랐지만, 역시 그의 입술밀도에 대해서는 확실한 수가 없었다. 껄끄러 운 입맛을 다시며 시즈는 아릴이 앉아있으리라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 다. 「아릴 씨는 여자의 몸으로 혼자 여행을 다닌다면서요? 감탄했습니다.」 「그 쪽이야말로 눈도 불편한데 〈엘로고라토의 전령〉을 뚫고 여행을 하다니 대단해요.」 「하하하, 함께 여행하는 이들이 믿음직스러우니까요.」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톰더가 눈썹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방금 전 주정뱅이 학자가 자네의 동료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자네가 그런 동료를 이끌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이마 위로 구슬땀이 또르르 흘러간다. 급기야 톰더는 시즈의 저력(?)에 감탄하며 술을 권하기까지 했다. 피브드닌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일은 시즈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릴 씨, 제를 기다렸다고 하셨는데….」 「아! 그럼 잠깐 나갈까요?」 아릴은 술에 취했다는 것이 거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 시즈를 일으켰다. 그녀가 팔짱을 끼자 코끝에 향긋한 내음이 걸렸다. 어리둥절하여 당황한 채 끌려 나가는 시즈의 뒤로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여인 의 빠른 걸음에 비틀거리며 끌려갈 뿐이었다. -33- 마을을 〈엘로고라토의 전령〉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숲의 나무들도 알게 모르게 다가온 겨울의 기류에 잎을 하나씩 내려놓고 앙상한 가지는 피부를 찌르는 노래를 음밀하게 부르는 밤, 소녀의 천진함과 여인의 부드러움을 지닌 미소를 띄우며 아릴 은 춤을 추듯 시즈를 이끌었다. 「당신, 어지간히 경계심이 없군요? 내가 당신을 해칠 생각으로 불러냈는지도 모르 잖아요?」 「적어도 절 죽일 마음을 가진 이가 천족으로 오해받을 정도의 미인이라면 기억 속 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겁니다. 그리고 피브드닌이 들어간 이후로 제 일행이 없 었으니, 해칠 마음만 있었다면….」 허전해지는 팔의 공간을 느끼며 시즈는 말을 멈췄다. 부드럽게 감싸안았던 여인의 팔 대신 옷깃은 형체없는 바람에 나부꼈다. 걸음을 크게 딛으며 휘 - 돌아서서 아 릴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말을 틀렸어요. 당신은 겉으로는 동료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도 믿 지 않는 군요. 만약 내가 눈이 멀어 자신의 동료가 어디 앉아있는지도 모르는 청 년을 해치려고 했다면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검사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 에요.」 「몰랐습니다.」 「그럴 거에요. 덩치가 커도 눈매가 가늘하니 빛을 발하는 것이 무서운 사람이었어 요. 당신과 내가 함께 나왔으니, 안절부절하며 오랫동안 따라만 두었던 맥주을 들이키고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김이 다 빠져 맛은 시원한 맹물보다 못하겠지만 말이죠.」 덩치가 크고 눈매가 작은 검사라면 보를레스겠지. 어벙한 문학청년같으면서도 대단한 검술을 지니고 있는 남자, 〈춤추는 칼〉의 실질적인 두목이었던 그의 행 동에는 언제나 평민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절도가 담겨있었다. 전령은 나뭇가지에 매달아둔 채 날아온 바람은 애꿎은 청년의 은빛 머리칼을 해 집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라있던 걸까. 휘날리는 한올한올이 그의 물음을 부추 켰다. 「시즈의 눈, 과도한 마력을 사용한 댓가에 의한 부작용…. 맞죠?」 이미 소년을 지나 청년이 되어버린 그는 몸을 흠칫 떨었고, 아직 여인과 소녀의 경계에 서있는 아릴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응시했다. 몸을 움추린 시즈의 옷자락은 아직은 겨울 바람을 견딜 수 없는 어린 나뭇가지 처럼 나부꼈다. 「머리가 아픈거죠? 그렇죠?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한 것이랍니다.」 「아릴, 당신은 누구입니까? 무슨 이유로 내게 접근한 거죠?」 시즈는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시선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 숨기고 있는 나를 알아보는 이가 두렵다. 하 지만…. 참고 숨겨왔던 뇌의 격통은 한순간에 밀려왔고 그는 혼란에 쌓였다. 어느 새 소리없이 다가온 여인은 윤기를 잃어버린 채 누구에게나 비추는 달빛마저 거부 하는 은색의 실을 어루만졌다. 나긋한 꿈을 불러드릴 듯한 손길에 시즈는 피곤한 은회색 눈동자를 눈꺼플 사이로 조심스럽게 감췄다. 「이름을 부르며 누구냐고 묻다니,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대는 취하는 군요. 나 역시 그렇답니다. 시즈, 당신이 언젠가 빛을 찾으며 회색의 빛깔을 스쳐갈 것 같 다는 생각에 나는 그리움에 취한 것이겠죠.」 속삭임으로 작게 허공을 울린 그녀의 루비빛 입술에서는 천천히 물기가 묻어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를 묻기 전 그대를 알려줄 수 있나요. 그대의 이름이 아름답다면, 나를 부를 수 있는 그대의 입술에 입 맞출테니... 그대의 이름이 성스럽다면, 그리움에 한껏 취해 달려가 드릴게요. 그대여, 나의 사랑을 묻기 전에 당신을 보여주세요. 허공에 튕기는 물방울은 아픔을 이고 있는 청년의 머릿가도 두들겼다. 온갖 더 러움도 작게 물결치는 그 흐름에 휩싸이면 씻겨버릴 것 같은…, 그 향수(香水) 에 시즈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마를 움켜잡았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노래의 힘인가요?」 「음악은 고통을 잇게 해주는 힘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잠시 뿐이에요.」 「저는 마력을 가졌다는 노래가 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릴은 대답없이 시즈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사락거리는 소리에 리듬을 맞추 듯 입을 열었다. 「역시 그대는 이상해요. 그런 고통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있다니….」 「아릴 씨는 눈치채지 않았습니까. 제 동료들 또한 알고 있을 겁니다.」 「시즈의 고통에 대해서 말할 수 있던 것은 알아챘기 때문이 아니에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당신과 같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 지만 그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군요. 빛조차 받아드리지 않는 슬픈 눈동자를 뜨 고 있으면서….」 자신이 그녀에게 기대여 있다는 것에 시즈는 안도했다. 받쳐줄 것 없이 서있었 다면 여인의 말에 휘말려 슬픈 표정을 지어버렸을 것 같아서. 그는 아릴의 품에서 벗어나 어깨를 폈다. 「나는 빛을 거부하는 눈동자로 세상을 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마땅찮은 시 즈〉니까요. 수 천년동안 잠을 자다가 깨어나 늙음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 용의 덧 없는 불만이라고 할 지라도,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수천년의 세월보다도 더 머나먼 공간을 뛰어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 만 과연 어린 용은 수 천년의 세월을 가졌던 걸까, 아니면 잃어버렸던 걸까. 그의 눈동자는 꼿꼿히 아릴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바다처럼 촉촉한 미소를 띄 우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강풍에 몸을 힘겹게 가누었지만 시즈는 싸늘한 바람의 내침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부드러움에 몸을 맡기며 여관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달빛이 휘날 리는 머리칼에 스며들어 황금빛 잔영을 남겼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아릴은 첫눈이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걸어가세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부드러운 흐름 속에서도 향할 곳을 잃지 않는 냉정함을 가진 이여. 영원을 혼자 여행하는 아픔에 괴로워 하는 이여,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대의 아픔 속에서 꽃을 피우는 씨앗은 잠자고 있답니다. 당신의 부드러움에 취한 여행을 함께하며... 달을 보호하듯 무리진 빛의 장막은 밤을 감싸안은 여신이 목욕을 끝난 후의 포근 함을 나눠줄 것 따스한 물결에 쌓여 일렁였다. -34-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지나간 후 몰려온 구름은 몸의 일부분을 뿌리며 세상 을 하얗게 수놓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들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너도나 도 거리를 오가며 발자국을 찍는 모습은 하루 전의 삭막한 분위기의 마을이라고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토록 차가운데….」 시즈는 창에 턱을 괴고 앉아 간간이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았다. 조 금 전에 일어나서 일까.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 뼈 속까지 깊숙이 들어와 박 힌다. 「눈이 차가워.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 「내 눈에는 지금 세상은 앙금이 가라앉은 과일주스처럼 보이네요. 네메이나, 당 신은 어떻죠?」 「호오…. 정말 눈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지? 세상이 과일주스로 보인다니, 안 보 이는 것만 못하지만….」 그녀의 악의없는 비꼼에 시즈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는 개미에게 힘껏 물어뜯겨도 피식거리며 웃기 때문에 네메이나는 자신의 말이 시즈에게 별다른 감흥을 안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지으며 청년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 며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후우…. 그래, 네 말이 맞아. 곱디고운 흰색의 비단이 대지를 덮어버린 것만 같 아.」 가끔씩 구름조각은 몸을 날려 아직은 초점을 잡지 못한 회백색 눈을 하고 있는 청 년의 머리와 얼굴에 부딪혔다. 단발마의 냉기만을 전해준 채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액체를 손끝으로 훔치며 시즈는 중얼댔다. 「하지만 눈은 차가워요. 모든 것을 받아드릴 것처럼 포근한 듯 하지만 너무나 차가워요. 그 포근함에 취한 것들은 곧 얼어붙어 버리겠죠.」 「그건 눈이 태양을 받아드리지 못해서야. 눈의 여신, 샤오우는 추악함에 물든 대지를 감싸안을 만큼 사랑하지만, 대지가 추악하게 변하도록 만든 모든 생물에게 힘을 주는 근원적인 힘, 태양을 증오하니까…. 모든 것을 감싸길 원하면서 그 근 원은 거부하다니, 재미있지? 어쨌든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생물들에게 사랑으로 느껴질 수 없어.」 안쓰러운 눈꽃이 아닐 수 없구나. 시즈는 현재 자신의 눈동자는 흐릿한 백지로 보 이는 설원과 같은 빛깔로 다른 이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겉으로는 받아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받아드리지 않는…. 〈당신은 겉으로는 동료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도 믿지 않는군요.〉하고 아릴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 때, 나는 분명 어떻게 대답했지? 〈몰랐습니다.〉 그런지도 몰랐다. 나도 자신이 다른 이를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눈의 여 신, 샤오우도 자신이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끌어안고만 있다는 것을 알까? 시 즈는 입가에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비웃음이 서리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놀라워요, 네메이나. 전 네메이나가 그렇게 박식한 줄은 미쳐 눈치채지 못했어요.」 눈을 과장되게 뜨며 놀라는 그의 표정에 네메이나가 과연 속아줄지 알 수 없었지 만 칭찬에 의한 기쁨은 관찰력과 판단력을 흐리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한껏 키득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시즈를 밀치며 창틀로 몸을 쭈욱 내밀었 다. 입맛을 다시며 불길한 미소를 천진한 양 짓고 있는 것이 새로운 장난의 희생자 를발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오백년쯤 도를 닦은 이무기가 용이 되기 전에 짓는 마지막 웃음도 그녀처 럼 능글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즈는 전혀 상관없을 생각을 하며 누군지 모를 희생자를 위해 묵상으로 조의를 표했다. 자신도 그 조의대상에 들어가게 되리란 생각은 꿈에도 못한 채…. 「시즈, 잠깐만 손 좀 빌려줘.」 어리둥절하게 창틀로 끌려온 시즈는 네메이나가 자신의 팔을 붙잡아 올리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반항했다가는 더 참혹하면 참혹했지, 견디 기 쉬울 리 없는 장난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기에. 엄청난 힘으로 멀쩡한 창틀을 후려친 자신의 손이 아파왔지만 꾹 참고 견뎠다. 와르르르르. 지붕을 진동시키는 소리에 시즈의 안색은 백설로 마사지를 한 것처럼 창백해졌다. 그의 눈에는 희미하지만 폭포처럼 무엇인가 엄청난 기세로 떨어져내리 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흐으으아아악!」 「쿠왁!」 희생물들의 비명소리로 들어보건데, 앞의 경박한 비명소리는 피브드닌, 뒤의 간절 하지만 놀란 비명조차 힘찬 기세가 느껴지는 것은 드워프, 토루반이었다. 위에서 쏟아져내린 엄청난 눈덩이에 깔려버린 피브드닌은 물에 빠진 장님처럼 허우적거 리며 눈을 헤치고 나왔다. 하지만 토루반은 그러지못했다. 그야말로 어느 곳이 땅 이고 하늘인지 모른 채 팔다리를 뻗는 그를 묻은 눈이 약간씩 들썩이는 것을 본 피브드닌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동상이 걸리기 직전에 구출된 토루반은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를 노리는 어쌔신 이 일행을 쫓고있다는 생각에 마을을 떠나서도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몇 일간 밤 잠을 설쳤다. 눈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버린 최초이자, 최후의 드워프로 후세에 기록된 토루반은 천천히 충혈된 눈 앞에 그 신성한 자태를 드러낸 아스틴의 왕궁이 너무나 반가웠다. 왕궁의 첨탑과 지붕에 기묘한 모양세로 얹혀있는 눈들은 마른침이 넘어갈 정도 로꺼림직했지만…. 그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아스틴 네글로드의 서원과 학원, 회관들의 건물을 지 나치고 있을 때, 늙은 드워프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자객은 태평하게 낮잠에 빠져있었다. 그녀의 장난에 도저히 견디지 못한 남자들의 눈물어린 호소에 유레 민트가 네메이나에게 충고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희생자들은 유레민트가 작은 악동을 한 마디로 길들여 준 것에 감사해하면서도 궁금해마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 네메이나가 잠꼬대처럼 중얼댄다. 「미인은 잠꾸러기…. 냐아….」 -35- 「오랜만이로군, 용사여.」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어린 날의 소꼽친구처럼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눈웃음을 짓는 대신 시선은 긴장을 담은 채 상대의 빈틈을 찾느라 분주했고, 손에는 저 마다의 무기가 굳게 쥐어져 상대를 노리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암흑의 감옥 안에 갇혀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내 갑옷이 언제부터 죄인 가두는 감옥이 되었지? 의외로 곤란해 하는 군. 세일 피어론아드의 유일한 용사, 샤르아릴이여…. 아직도 불꽃을 찾고 있는 모양이지? 그가 없어서 나를 상대하기가 무서운가?」 창살을 연상시키는 흑가면에서 비웃음을 머금은 채 들러오는 물음에 청은발의 여인의 눈매가 새침하게 변했다. 남자들이 보았다면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달래 주고 만 싶은 향긋함이 엿보이는 여인의 상큼한 아미도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는 콧웃음 이상의 자극을 줄 수는 없었다.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면 녹이 떨어질 듯한 흑동색 건틀렛에 들려있는 거대한 검이 좌우로 천천히 옮겨가며 여인을 압박했다. 여인는 당장이라도 삐걱거리며 움직임이 멈춰버릴 듯한 물체가 얼마나 위험하고, 그 안에서 얼굴을 감춘 채 싸 늘한 시선만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검술은 어느 정도로 강대한지 잘 알고 있었 다. 찰나 하는 순간 놓쳐버리면 검은 갑옷이 치켜든 그레이트 소드는 무식한 무 게를 자랑하며 여인의 미려한 몸을 신선한 피가 흐르는 고깃덩이 두조각으로 만 들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첫눈으로 뒤덮인 대지를 박차고 흑색의 갑옷이 사자처럼 도약했다. 마치 어두 운 밤의 한 조각이 번개가 되어 하늘로 솟구치듯 거칠고 신속한 동작이었다. 샤르아릴이 헉 하고 놀라 숨을 들이켰고 갈기 대신 붉은 망토를 휘날리던 흑기 사는 노도와 같은 기세로 그레이트 소드를 내리꽂았다. 파우우우웅 - 검풍에 애꿎은 눈바닥만 밀가루 분말이 되어 떠오르며 안개를 형 성했다. 「기름칠은 자주하는 모양이네요, 바스티나.」 고철덩이가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샤르아릴은 식은 땀이 등줄 기를 소름끼치게 애무하는 것을 느꼈지만 억지로 참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고풍 스럽게 기른 머리칼을 묶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바우우우우우! 갑옷만큼이나 둔탁하니 보이는 그레이트 소드의 ,잘리지 않는 대 신 맞아 죽을 듯한 날이 그녀의 머리 위를 한뼘 사이로 지나쳤다. 기세 하나로도 적을 주저앉게 있는중이니까… 실제로 피하며 주저앉아버린 용사를 쫓아 바늘같 은 시선을 내리깔며 가면 안에서 바스티나라고 불린 이는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 었다. 「〈바스티너〉야. 남의 별칭을 바꿔서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어떻게 부르 나 상관이야 없지만 헥갈리니까. 그리고 오늘은 피칠을 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 아도 좋아.」 「미안하지만 그림 물감으로 피가 좋은지는 몰라도, 그랬다간 그 갑옷은 정말 고 철 미술품이 되어버릴 걸요.」 「네 머리칼로 다시 닦으면 되니까 괜찮아.」 「누가 빌려주기나 한대요? 그 등에 걸친 걸레짝으로 닦지 그래요? 「네 머리카락도 잠시 후면 걸레가 되어버릴 테니, 걱정마.」 검이 부딪혀 불꽃을 토해낸다면, 그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언어는 화산의 폭발을 방불케할 정도로 폭렬적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입에서 연기가 새어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바스티너의 그레이트 소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샤르아릴의 몸은 폭풍 속을 버티 는 여린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그 상태로는 반격하는 것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힘 들었다. 게다가 바스티너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쓸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틸 수 밖에 없었다. 「힘들어보이는 군. 역시 그가 없어서인가?」 「닥쳐욧!」 〈그〉를 거론할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역시 〈그〉를 아 직까지 찾고 있군. 몇 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을 암시하는 것이었기에 바스티너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자신의 공세를 힘들지만 잘 흘려내는 샤르아릴에게 내적으로나마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물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은 다하고 있었다. 용사들의 절대적으 로 강한 힘은 그들이 마법과 검술을 혼합, 화합하여 사용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었기에 바스티너는 끝없이 이어지는 원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검술을 펼쳐 마 법을 시전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공격을 언제든지 거둬드 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힘을 조절하는 그는 힘으로써 모두를 공격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전투방법으로서 최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몰론 그의 스타일에는 맞지 않았지만, 위력면에 있어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 다. 충분히 용사, 샤르아릴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거늘 예상을 완전히 뒤 엎어 버린 것이다. 마법마저 사용한다면 얼마나 강할 것인가. 〈오늘 죽여야만 한다!〉 강해진 적의 모습은 마음을 압박했다. 바스티너는 〈그〉를 떠올렸다. 압도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의 회상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그러나 신과도 대적할 수 있을 것 같던 이는 이제 없다. 〈끝낸다.〉 「그는 죽었어.」 「아니야! 아니라고!」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신 네가 죽었어. 전투 중에 쓸데없는 감정은 빈틈만 벌려놓을 뿐이지. 검은 번개가 어른거렸다. 경쾌한 금속성과 함께 용사의 왼손에 쥐어져있던 레이 피어가 허공으로 조각난 몸체를 튕겨보낸다. 멍하니, 피가 터져나오는 손을 바라 보는 샤르아릴의 옆구리로 그림자가 섬뜩하게 스며들었다. 바스티너의 검이 이제 껏없던 예기가 스물스물 흘리며 상하로 힘차게 그어졌다. 쿠와우우우우 - 대지를 붕괴시킬 듯한 검격에 땅이 공포에 질린 신음을 토했다. 검은 갑옷의 주 위에 쌓여있던 눈들은 검이 일으킬 바람에 떠올라 10m 밖으로 후퇴하는 모습은 정녕 인간이 아닌 무신처럼 보였다. 「약간의 틈이 있었던가?」 마지막 검을 내지를 때, 갑자기 모든 힘을 모아서 움직임에 찰나의 틈이 생겼던 것이다. 「멍청히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면서 여우처럼 잘도 빠져나갔군.」 칙칙한 음성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은 허공을 뒤덮었던 눈보라가 다시 가라앉으면 서였다. 백설처럼 차갑지만 맑은 목소리는 청량한 맥주같으면서도 와인의 달콤함 이 녹아있는 여성의 톤을 가지고 있었다. 「노르벨, 거기 있지?」 「아하핫, 알고 계셨습니까? 역시 암흑의 갑옷, 바스티너.」 「알아주십시오… 하고 기척을 뿌려댄 주제에, 실수를 아부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 도 너만이 할 수 있는 장기겠지. 어때, 쫓을 수 있지?」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무 위에서 내려온 청년은 피식, 자신에 찬 얼굴로 웃 었다. 「아마도요. 그 상태에서 마법을 시전했으니, 지금쯤 상당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 을 겁니다. 어쩌면 워프한 곳에서 머리를 휘어잡고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죠. 급박 해서 워프하는 곳도 정확히 이미지시키지 못했을 테니, 가까운 곳에 떨어졌겠죠. 그들의 공통점이 아니겠습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말이 두렵다는 것을 모르는 구나. 넌 모른다. 〈불꽃의 춤을 추는 자〉의 불완전한 공포를 경험한 나는 그들이 완전이라는 가능성이 남아두었 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 죽여야지요.」하고 노르벨은 잔영만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남은 바스티너는 검끝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흐아아악! 아파, 아파!」 〈엘로고라토의 전령〉들의 고향, 엘로고라토 사막. 그녀는 모래가 아름다운 머리칼 속으로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아픔을 호소하 고 있었다. 몸을 뒤틀 때마다 양손에서 흐르는 피는 모래 위에 그림을 남겼다. 한동안을 뒤척거려서야 정신을 지탱할 수 있게 된 여인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비척이며 일어섰다. 상큼하니 빛을 내던 머리칼은 어느 새인가 짙은 회색 으로 변해 윤기를 잃어버렸다. 「여,역시 아파. 하지만 이걸 견디지 않으면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어. 하지 만, 하지만, 아윽! 어떻게 시즈는 머리가 새하얗게 될 아픔을 견딜 수 있었지?」 문듯 아픔 속에서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시즈에 대한 경의가 솟아올랐다. 시즈들 이 향하고 있을 아스틴의 수도방향을 바라보던 시선은 불안함을 머금고 있었다. 「알려줘야해. 아스틴은 그들의 집결지야. 〈바람의 노래하는 이〉가 존재함을 알 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해….」 옷자락을 찟어 양손을 대충 싸맨 아릴은 정신을 날려버릴 듯한 고통의 발원지를 부여잡은 채 흐늘거리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36- 엘시크의 수도, 제플론이 고결하고 귀족적인 색태를 풍기는 반면, 〈벨루온〉은 서민적인 화려함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서민적이라고 해서 왕궁 대신 통나무 집이 대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분위기에서 좀더 활발하면서도 소박한 멋 이 다채롭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가? 삭막하니 짝이 없는 제플론보다야 벨루온이 훨씬 낫지 않나?」 피브드닌이 마차의 창 밖으로 거리를 분주하게 활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가 리키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거리에는 색색의 등이 걸려있었는데, 등불을 여러가지 색지에 감싸서 나무 위에 걸어둔 것이었다. 낮이었지만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니, 밤에는 얼마나 멋질지 여행객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의외로군요. 피브드닌이 성결스러운 제플론보다, 귀족들이 상스럽다고까지 비 하시키고는 하는 벨루온 더 좋아한다니…」 헤모의 눈에 피브드닌은 꽤나 고지식한 귀족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실제로 피브 드닌은 매우 고지식하다는 것을 그와 함께 행동해본 이들은 쉽게 태도와 말투, 생각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제플론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 분위기를 동경하기까지 했지. 지금 생 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처음 가자마자 목을 죄는 듯한 분위기에 숨 통이 막히더군. 너무 하나만 과도한 것이 잘못된 것은 문화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말하며 장년의 학자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고는 부끄러운지 겸연 쩍은 표정을 지었다. 광장과 거리같은 좁은 거리에서 4두 마차를 타고 지나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귀 족이나 상인이 아니면 잘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분수대를 지날 때는 사람들이 양 옆을 메우고 신기한 듯 시즈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엘프인 유레민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동경에 차 있었는데, 이유는 아무리 아스틴이 마법에 대한 투자로 인하여 엘프들과 교류가 빈번하고 학문과 마법의 교환으로 엘프들이 다른 곳보다 많이 오간다지만 서민들의 눈 앞에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태로 백마를 멋들어지게 타고 있는 유레민트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 르고 꽃을 던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보여주었다. 「유레민트 님…. 대단한 인기네요.」하고 시즈는 유레민트가 말에서 내려 어린 소녀의 꽃을 받아들고 미소짓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이미 머리의 색이 약간 흐르긴 했지만 흑발로 돌아와 있었고, 눈동자 또한 까만 빛깔로 순하디 순한 시 선을 보였다. 옆에서 흑백이 확연한 시즈의 호기심찬 눈동자를 바라보던 토루반은 이제는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시뻘건 눈을 껌뻑이며 입을 열었다. 「이 곳에서 엘프는 국가를 수호하는 기사적인 종족으로 대접받고 있으니까…. 아스틴은 엘프에 생활에 관대할 뿐 아니라, 따로 그들이 살 수 있는 숲과 대지를 분할해주기도 했지. 때문에 엘프들은 아스틴이 국가적으로 위험하거나, 무슨 곤 란한 일이 생기면 현자나, 마법사를 동원해서 도와주곤 했어. 국가홍보 차원에서도 순수와 조화의 종족인 엘프의 지원은 대단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스틴은 그들을 신성한 종족으로 숭배하고는 하지. 뭐, 귀족들이야 다용도 이용물 정도로 여기고 있지만….」 「그런 말해도 괜찮은 겁니까?」 헤모가 당황한 얼굴로 창 밖을 힐끔거렸다. 귀가 좋은 유레민트는 모두 들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토루반은 우습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들도 아스틴의 귀족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로 인해서 엘프들은 이익을 보면 봤지, 손해를 보지는 않아. 그렇다고 귀족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데로 엘프를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미 알고 있었던 피브드닌을 제외하고 마차 안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마차는 광장을 지나서 궁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국왕 폐하를 먼저 알현해야 합니까?」 국왕 알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막노동인지 엘시크를 떠나기 전, 과분할 정도로 깨달은 시즈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헤트라임크가 억지로 시켰던 예법훈련은 뼈가 녹아버릴 정도로 혹독했기 때문에 알현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격식은 그에게 상당한 부담요소였다. 「아니야. 네글로드의 자만으로 몸을 둘둘 싼 학자들은 현재 〈또다른 고향〉이 학문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가진 글이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까. 더욱이 네가 그것 의 주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을거야. 우선 원탁에서 코빠지게 우리를 기다리는 나머지 4인의 탁자장식물을 만나본 후에도 알현은 늦지 않아.」 토루반은 평소부터 인간 귀족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귀족 학자들은 개방된 사상과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 국가운영을 해나가 는 귀족들은 거의 소름끼칠 정도로 고지식하고 생각의 틀이 이미 규정되어 있어 실이 지나갈 틈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인간들 안에서 개방적인 드워프 현자가 자신의 지식을 펼쳐나가는 것조차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왕궁의 규모가 엄청나군요. 저 시설들에 쓰여진 건축기술과 수학 활용의 깊이는 제플론으로는 상대가 되질 않는 것 같네요. 수도 간의 차이가 이 토록 심하다니….」 벨루온의 규모는 엄청났다. 마법을 기초로 발달된 수학과 건축술은 독특하고 참 신한 디자인의 건축물들으로 왕궁 곳곳을 장식했고, 그것들은 건물의 주제, 또는 연구항목에 대한 이미지를 알맞게 표현하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벨루온이 최고라는 말의 또다른 수식어로 칭해지는 까닭을 눈에 드러내놓은 것 같아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압도된 시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곳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그를 초청한 것이다. 모르는 척 얌전히 엘시크 산골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피브드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왕궁에 있는 것은 각 분야의 최종결정 기관이나, 회의기구 뿐이야. 실제 연구 시설은 벨루온의 각 방위별로 나뉘어 일정한 범위의 연구단지를 형성하고 있지. 아! 이제 다 온 모양이군.」 마차는 둥근 돔같은 모양의 거대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이미 통보를 받은 네글 로드에서는 몇몇의 일부학자들와 시종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시즈들이 마차에 서 내리자 수행원들과 보를레스가 일행의 호위하는 형태를 이루며 주위를 둘러쌌 다. 「어서 오십시오. 〈마땅찮은 시즈〉. 원탁을 놀라게 하신 분이 뵈어서 영광입니 다.」 늙그수레한 학자가 학문하는 이들의 상징인 학사모를 쓰고 보를레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시즈 일행 중, 현자들을 놀라게 할만한 학식을 갖출 수 있는 나이의 사 람은 보를레스 밖에 없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피브드닌의 안색은 3일 쯤 알몸으로 빙혼의 왕국에 다녀온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했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특히 이름있는 무장이나, 학자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실례였다. 설사 처음보는 사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학자께서 겸손이 심하시군요. 저 같은 수행원에게 예를 취하시다니.」하고 노 인의 손을 잡아 두어번 흔든 그는 자연스럽게 시즈의 앞으로 상대를 이끌었다. 귀족들간의 상당한 접촉이 없이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 덕분 에 실례까지는 범하지 않게 된 학자는 안도와 함께 식은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옆을 힐끗 바라보니 피브드닌이 눈동자 속에 화산이 폭발하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제비뽑기에 걸 려 귀빈을 마중나오게 된 운명을 원망했다. 「모두 지쳤으니 원탁의 장식물들을 보는 것은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그들에게는 내가 직접 말하겠네. 편히 쉬고 내일 보기로 하지.」 토루반이 땅딸한 팔을 뻗어 시즈의 등을 두들겼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여행을 해온 그의 피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레민트와 피브드닌도 저택으로 그만 귀가하겠다며 시즈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메이나는 나와 함께 가자.」하고 유레민트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느라 정 신없는 소녀를 잡아끌었다. 「혹시 식사가 부실하거든 시즈 군, 내 저택으로 오게. 자네의 방향감각으로는 무리라고 여겨지지만 말이야.」하는 피브드닌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고 있었고 시 즈는 그 날 식사가 절대로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귀빈들에게 식사가 부실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피브드닌은 농담과는 거리가 있는 인 물이었다. 한 명씩 떠나가자,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학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귀빈들의 숙 소로 시즈, 보르레스, 헤모를 안내했다. 「쉴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해는 벨루온의 첨탑 끝에 걸려있었다. -37- 피브드닌의 불길한 암시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시즈는 간이 맞는 음식이 한 가지 도 없다는 것에 아스틴 인들의 음식취향 자체를 의심했다. 〈아스틴의 음식문화는 엽기적인 수준까지 발전했군.〉 극한에 넘어서면 초월한다는 말이 꼭 어울리는, 음식의 맛을 초월한 요리들에 적 응하는 것은 헤모와 보를레스 또한 무리였다. 하지만 식사를 주문하고 음식을 먹 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기에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새로운 형태로 미각을 자극하는 요리들에 대해 하나하나 감상을 토로해야 했다. 「혀가 맛을 보는 대신에 절규를 토하는 것 같군.」 헤모는 그렇게 얼얼하기까지한 입 안의 상태를 공표했고, 나머지 둘도 받아드릴 수 없는 충격에 자신을 내던진 것을 항의 하는 구강의 분노를 차디찬 맹물로 달 랬다. 「근데 보를레스 님은 기사였다면서요?」하고 물으며 시즈는 모른 척 수저를 내려 놓았다. 헤모와 보를레스가 불꽃 튀기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시즈는 꿋꿋하 게 견뎌냈다. 그는 입과 뱃 속을 아귀지옥으로 만들 도구를 잡고 싶지 않았다. 「예, 꽤 오래 전 이야기지요. 시즈 님은 이 곳, 벨루온을 보고 무엇을 느끼셨습니 까?」 「…….」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 후세 사람들은 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저명한 수학자이자, 전술연구가이며 동시에, 역 사가인 아버지의 뒤를 이은 마카호드 파우트시카 의 서적에서 찾아내고 동경을 금치못한다. 〈엘시크 중기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너무 안정되어 발전이 없었던 엘시크 사회를 마구 휘저었던 그는 서민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빌로아치 공작의 사위가문이자 기사가문인 헤더우그가(家)의 장남으로 장래를 촉망받는 기사였다고 한다. 「학문, 기술에 대한 연구와 개발은 어느 국가에서나 최우선시 되는 사항입니다. 벨 루온은 아스틴이 국가 발전의 의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문화화를 시키는데 성 공한 것을 드러낸 도시입니다. 세계 각국의 나라들도 아스틴 만큼 성공했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그 국가만의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개발하는 방향 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계속 개발해 나가 고 있지요. 사막의 나라, 볼케아스는 국토의 대부분인 사막을 개간하기 위해서 수로기술을 비 롯한 수계기술과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한 지하건설기술이…, 실베니아는 작고 수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답게 섬들을 잇는 대지계 마법과 수상건축기술이 독창적 으로 발달하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엘시크는 어느 것 하나 특정지을 만큼 독창적인 기술이나, 마법분야가 없어요. 레이모하의 은총이 충만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끔씩 튀어나오 는 대륙적인 학자들의 출현은 오히려 엘시크를 자만으로 몰아넣어 흐르지 않는 물 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만히데우그는 당시 엘시크 사회의 모순을 정확히 판단 하고 있었으며, 「그 때 제게 감명을 준 것이 유레민트 님의 〈원시사회 서민문화의 발전양성〉라 는 책이었죠. 유레민트 님은 거기에서 제도로 서민의 지위나 사회질서를 바꿀 지식 을 막더라도, 서민의 삶의 질이 발전되는 것은 오히려 뒷받쳐줘야 한다는 논설을 하셨지요. 결국 근본적으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서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의 바탕적 사고는 현명한 엘프, 유레민트 하미렌의 사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었. 실제로 보를레스는 유레민트의 추종자였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일 도 있었다고 하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저 세간에 전해오는 흥미로운 야화 일 뿐이다. - 물론 필자 또한 보를레스의 청혼을 유레민트가 어떻게 거절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 기사의 신분으로 평민의 각성을 요구해보지만 얼어붙은 엘시크 사회와, 이미 죽 어버린 서민, 신민의식에 절망한 보를레스는 귀족의 탈을 대던지고 산적으로 전 락하였으니, 필자는 폐단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가 한 현자를 내친 현상이라고 보고 싶다. 물론 그의 사상과 활동 자체는 엘시크의 전반적인 제도 개혁을 이끌 어냈지만,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엘시크는 아직도 중기의 문화와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태된 국가로 쇠퇴했을 것은 분명한 사 실이며,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가의 출현과 귀족들의 각성이야말로 보를레 스 로만히데우스가 이룬 거대한 업적이라고 필자는 단호하게 평할 수 있다.〉 「역시 엘시크는 돌이킬 수 없을만큼 썩어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안정된 사회를 움직일 생각, 아마 추호도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풍부하고 비옥한 토지, 인재 개발이 없이도 튀어나오는 세계적인 석학, 엘시크는 축복받은 국가이 아니라 신 이 인간의 본성을 시험하기 위한 실험국가일지도 모르지요. 축복은 도태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보를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놓았다. 그야말로 교묘한 타이밍이었 으므로 시즈와 헤모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안쓰러운 심정에 젖어있었다. 목 표를 달성한 보를레스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보를레스는 시즈들과 만나기 까지의 여정을 대충대충 늘어놓은 후, 씨익 웃으며 시즈에게 눈신호를 보냈다. 「솔직히 시즈 님이 제가 존경하는 유레민트 님을 비롯한 아스틴 네글로드의 초 청을 받을 정도의 고명한 학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말이죠.」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 시즈 자신의 책임이었다. 보 를레스는 벨루온에 들어서면서야 겉으로는 평범하게만 보이는 한 청년이 대륙의 석학들이 골머리를 싸매도록 만든 인물이라는 것에 놀랄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핫,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군요.」하며 청년은 의자에서 뱀이 허물벗듯 이 매끈한 움직임으로 일어섰다. 이미 눈신호로 예약이 되어있던 보를레스 또 한 그에 맞추어 몸을 일으켰고,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메이나가 유레민트 님의 저택에서 말썽이나 부리고 있지 않을런지 걱정이 되는 군요. 함께 가시겠습니까?」 「저 역시 식사 후가 무료함으로 가득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됐군요.」 자신의 존재는 잊은 듯이 친근한 웃음을 나누며 식당을 나가는 그들을 헤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저주스런 도구를 시종들은 한결같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는 얼마 전 제플론에서의 잊은 사건이 아련히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보랏빛 향기 속에 묻혀진 고문용 독약…. 아마 장담하건데 눈 앞에 놓인 요리들은 그에 못지 않 으리라. 딸그랑! 왜 이 놈의 접시는 이토록 맑은 목소리로 울리는 것이냐! 헤모는 절 규했다. 그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시종들과 주방장이 씨익하고 웃 었다. -38- 「하하하하핫! 그대들도 당한 모양이군.」 「피브드닌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두텁지만 부드럽게 보이는 가운을 걸친 장년 남자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알맞 게 말린 담배가루를 꺼냈다. 「하시겠소?」 밖에서와는 달리 저택의 주인은 위엄을 갖춘 음성으로 보를레스에게 물으며 멋드 러지게 구부러진 담배대를 건넸다. 「아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쓰진 않았지만 정이 들어서….」 「그렇군요. 그럼, 위나! 가져와요.」 보를레스는 시녀가 건네는 담배를 두 손으로 받으며 황공한 표정을 지었다. 왠만 귀족들은 감히 냄새도 맡지 못할 고급 담배였기 때문이다. 「하아, 이것 참! 노벨우잔산 이로군요.」 「하핫…! 걱정마십시오. 토루반의 창고에 가면 꽤 많은 편이니까.」 「토우반이요!?」 「그는 드워프들의 현자니까요. 노벨우잔은 드워프들의 도시 아닙니까. 가끔씩 토우반은 고향으로 여행을 하곤 할 때마다 등에 담배를 한아름씩 지고 옵니다.」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담뱃대를 열심히 빨고 있을 때, 시즈는 위나라고 불린 시녀 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피브드닌의 옆에 놓여있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은근슬쩍 그녀가 든 담배함으로 손을 뻗었다. 「안돼!」 찰싹! 하는 피부마찰음이 홀 안에 두 장년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놀란 집주인과 보를레스가 고개를 돌리자 위나는 도끼눈을 하고는 소 리를 빽 질렀다. 「글쎄, 이 시종녀석이 주인님께서 아끼시는 담배에 손을 뻗지 뭐에요!」 그들은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붉게 부어오른 손등을 쓰다듬 는 시즈의 모습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피브드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큭, 그, 그냥 주도록 해, 큭큭!」 「주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소년에게 담배를 권할 수 는 없어요!」 그녀는 한 마디할 때마다 시즈의 안색을 탈색시키는 능력을 지닌 듯 했다. 코방 귀를 흘리며 주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가증스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즈는 기필코 〈아저씨〉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으흠! 그래, 자네들같은 귀빈에게 그런 괴기스런 요리가 나왔는지 궁금하겠지?」 시즈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미약하게 끄덕이자 피브드닌은 담백한 담배를 쪼옥 빨 아드린 후 연기를 풀풀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요리를 전담하는 사람의 혀의 감각이 엉망이라서 그렇다네. 그녀는 시종장의 딸 인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요리와 음식을 연구했다더군. 하하하하…. 그러나 뭐 하 겠나. 그녀의 미각은 너무 강열한 음식들을 연구하는 동안 한계이상으로 혹사당해 서 이미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녀는 아직도 그런 자신을 깨닫지 못하 고 있지. 귀빈관의 시종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감추고 있으니까. 덕분에 자네들 같은 귀빈들과 손님들이 희생되는 거지.」 「미인인가 보군요?」 개인을 위해서 다수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 다수보다 우선, 또는 이상 가는 의미가 있다는 뜻이라고 판단하는 시즈였다. 「대단하군. 어떻게 알았지?」 「사람들이 이유없는 희생을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학자 피브드닌은 그렇게 말하는 청년이 무미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섬뜩하게 등을 타고 내리는 무언가를 착각이라고 치부하 고 그는 충동적으로 담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자네 말이 맞네. 엄청난 미인이지. 게다가 성격도 얼마 전에 내렸던 눈처럼 순 백하여 미움을 받을 수 없는 여인이야.」 「도대체 어느 정도의 미인이길래 귀빈들이 그런 오물덩어리를 먹고도 얌전히 있 는 것입니까?」 「세상에 그보다 미인은 존재하지 않을 걸세. 그녀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것이 세상 을 읽는 것보다 더 두렵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아! 지난 번에 〈엘로고라토의 전령〉과 함께 만났던 여인이라면 비견될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되는 군.」 「아릴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피브드닌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시즈는 생각에 빠졌다. 자신의 가슴을 들 뜨게 했던 음성과 노래, 그녀 앞에서 그의 노래는 물 먹은 솜처럼 힘없고 늘어진 것에 불과했다. 〈그것이 진짜 음유시인일까?〉 보를레스는 회상 속으로 비치는 아릴의 영상에 넋이 나간 듯 했다. 도대체 얼마나 미인일까? 외모에 그리 관심이 없는 시즈였지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는 것인가? 라던 누군가의 말이 모두의 머리 속에 위나의 음성과 함께 울렸다.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릴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요!?」 4부 - 꿈을 여행하는 이방인 -39- 천상의 천사라고 믿어졌던 아릴의 고결한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만 같 았다. 숲 속의 빛깔이라 착각되던 청하한 빛깔 대신 유리실로 느껴질 것 같은 은 발은 피로 엉켜 붉은 녹이 처덕거리는 수세미를 연상시켰다. 왼쪽 귀에서는 고막 이 터졌는지 그들을 보는 순간까지 붉은 체액이 흘렀다. 눈동자는 언제인가 시즈 가 경험했던 투명함이 옅게 깔린 회빛이 드리워 촛점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절 찾은 겁니까?」 〈당신을 찾아왔어요.〉라는 말에 시즈가 그녀를 부축하며 묻자, 여인은 긴장이 풀려 포근한 품에 몸을 묻었다. 청년의 낡고 고루한 옷에서는 풍기는 바람의 냄 새는 모든 이의 마음을 쓸어내리는 향기로운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이 흘린 바람의 냄새를 따라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릴은 피로에 한계를 느끼고 서서히 회백의 동그라미를 길 게 드리운 유리빛 눈썹 아래로 감추었다. * * * 「양팔이 모두 부러졌고, 왼쪽 고막이 완전히 터졌어요. 눈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 지만 예전의 시즈 정도는 아니지만 시력 자체가 급격한 충격으로 약해졌어요. 그 뿐이 아니에요. 턱도 돌 같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금이 갔고, 이빨에 혀가 찍혀서 1cm만 더 혀를 내민 상태였다면 앞부분은 사라지고 없었을 거에요.」 「참담하군. 고칠 수 있겠나?」 「물론이에요. 엘프의 의술과 마법을 뭘로 보는 거에요? 하지만 팔은 골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사용해서 신경이 많이 다쳤기 때문에 시 간이 좀 필요할 것 같고, 눈도 시력이 감퇴한 이유는 겉에서의 충격이아니라서 저 도 뭐라고 할 수가 없네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루반과 유레민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말하는 것에는 조 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레민트와 네메이나 두 숙녀는 청순한 이미지의 새하얀 드레스로 몸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피와 상처로 목욕을 한 여인의 모습에 치마가 더러워지는 것도 잊은 듯 했다. 「근데 아릴의 눈과 머리칼은 마치….」 네메이나는 피를 닦아낸 수건을 시녀에게 건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 구석 에는 어둠 속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외모는 너무나 평범했지만 그것은 그가 어둠 속에 녹아들게 만들어주는 바탕 이 되어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시즈 군, 자네는 아릴 님과 전부터 아는 사이였소?」 「그런 것 같습니다.」 시즈의 발언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숙소에서 음식이라고 불리지 못할 것들을 배 속 가득히 채우고 와, 방금 전 화장실을 구토물로 채워버릴 뻔한 헤모조차도…. 「헤모 사제께서도 놀라시는 것을 보니 제플론에 정착하기 전에 안면을 가졌던 모 양이군.」 간호차 온 이들이 무책임하게 시즈와 환자의 관계를 유추하고 있을 때, 아릴은 주위가 시끄러워진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으음…. 시즈 씨?」 「일어설 수 있습니까?」하는 시즈의 물음에 유레민트가 급히 대답했다. 「내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순수하기에 가장 조화로운 이여, 절 좀 일으 켜주시겠어요」 「전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약해요. 환자는 의사의 말을 듣는 것이 강 해질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아줘요.」 그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로 유레민트는 누군가를 달 래는 것에 능숙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대는 아릴의 어깨를 살며시 잡 아 일으킨 그녀는 아릴의 목 뒤로 투텁고 푹신한 쿠션을 받쳤다. 「시즈 님과 둘만 있고 있다면 나가드리겠어요.」 「괜찮아요. 여러분도 들어주셔야 해요. 시즈!?」 「듣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애뜻함이 담긴 시선을 띄고 시즈는 소리없이 다가 와있었다. 「아스틴은 위험해요.」 「아릴 당신과 관계된 일인가요?」 정곡이라는 단어로 시즈의 발언이 아릴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설명은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은 눈 앞의 청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지만, 단순한 한 마디만으로도 그가 상당한 예측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흠칫 한 그녀는경직된 움직임으로 허허롭지만 차가움과 예리함이 내포된 시즈의 시선을 피해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요. 우리와 관계된 일이죠. 내가 끝내지 못한 탓이에요. 당신은 왜 이제서야 나타난 건가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나 작아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시즈 일행을 이해시키기는 힘들었지만 가슴에 스며들만큼 애뜻함을 풍겼다. 하지만 냉정하 게 고개를 저어버리는 시즈는 은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릴, 당신을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알고 싶으니까요. 내 가 알기를 원하는 것들이 바로 이 아스틴에 있습니다. 나는 아스틴의 현인들 앞에 서서 〈마땅찮은 시즈〉를 표현해야 하고 〈또다른 고향〉을 찾아야 합니다.」 온화하면서도 또렷함이 함께 담긴 음성은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의 지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었다. 약간씩 떨리는 시즈의 어깨를 피브드닌은 힘있게 어루만졌다. 「시즈 군은 우리 앞에서 자신의 앎을 드러내겠지? 자네의 지식은 알고 있네만, 나는 대륙이 자네의 지식을 받아드릴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없네. 난 자네를 막겠 어. 하지만, 잊지는 말게. 시즈 군, 그대가 그르다는 것은 아니야. 자신감을 갖 도록 하게.」 「허허…. 피브드닌, 병주고 약 주는 행동만큼 뻔뻔한 것이 없지. 걱정말게나, 시 즈. 난 자네를 지지해. 대륙은 너무 안식에 빠져있어. 흐르지 않는 늪은 더 높은 하늘이 비치지 않아. 걱정하지 마시게, 아릴… 시즈는 자네의 걱정을 살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 자신도 멋지게 시즈의 반대편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분위기를 잡아보고 싶은 토 루반이었지만 종족의 전형적인 체형은 그 바램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마지막 남은 엘프의 현자는 아무 말없이 미소만 띄웠다. 「아릴 양을 간호하려면 제가 필요할 거에요. 네메이나와 함께 하룻밤 남은 방을 빌렸으면 해요. 허락해주시겠어요, 피브드닌?」 「물론입니다.」 「흠! 기왕이면 나도 여기서…」하고 헛기침을 섟어가며 멋적게 끼어들던 토루반을 피브드닌은 씨익 웃으며 말을 끊었다. 「이유없는 외박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텐데요, 토루반. 당신의 코거는 소리에 시달릴 것도 걱정되지만 우선 사적인 이유로 저희집에서 토루반을 재웠다간 몇 일 내로 로쿠스 부인이 제 저택을 난장판된 투우장으로 만들어버리실 겁니다.」 왠만한 남성들이 그런 말을 들어다면 쑥스러워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토루반 은 담담하게 후일을 기약할 따름이었다. 「자네가 결혼했을 때를 두고 보도록 하지.」 다음 날,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를 한창 눌러댈 시간에 후일 〈대륙의 여진〉이 라고 불리워질, 한권의 서적을 둘러싼 현자들의 담론은 막이 오른다. 4부 - 꿈을 여행하는 이방인 -40- 「시즈 씨는 괜찮을까요?」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의 홀에서 뻗어올라온 한 쌍의 둥 근 첨탑에 물끄러미 시선을 향한 채 아릴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양팔에 는 붕대가 똘똘 말려이었고 흐릿하긴 하지만 천 사이로 피가 비쳐 위험한 상처를 입었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피가 묻었던 몸을 씻은 아릴은 맑은 청색이 약간이 나마 되돌아온 머리칼이 등을 타고 내려와 다소곳이 침대를 덮고있어 가히 천상 의 존재로 착각시킬 성결하고도 청순한 모습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네메이나는 같은 여인으로써 자신이 초라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질 투가 나지는 않았다. 이미 아릴의 아름다움은 질투의 대상을 넘어서 단순히 감각 을 지나선 동경적인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녀와는 다른 의미로 한숨 을 깊게 내쉰 네메이나는 한껏 밝은 어조로 아릴를 토닥였다. 「당연하지. 아마 그 녀석을 해칠 마음을 먹은 사람은 골치 꽤나 썩을 걸.」 「그런데, 이건?」 「약이야.」 「저, 저기… 얼마 전에도 주지 않았어요?」 「응. 아릴이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기억력 좋네? 비몽사몽이었는데!? 먹기 싫어도 소용없어. 유레민트가 강제로 먹이라고 했거든.」 엘프들의 치료법은 죽지 않을 상처가 아니라면 대부분 약초를 활용하여 치료했 는데, 효과는 뛰어났지만 평상시라면 입조차 댈 수 없을만큼 약이 썼다. 그래서 환자들은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빈속에 술을 퍼먹은 것만큼 고통스런 속 쓰림을 쉴 새 없이 경험해야 했다. 유레민트의 치료법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붕대로 싸인 팔을 부들거리며 아릴은 입 안으로 목을 넘어가는 액체에 타는 듯 한 배를 부여잡으며 다짐했다. 팔을 부들거리는 것은 시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청광(靑光)이 내리치는 홀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시선이 가는 방향대 로 주위에 둘러진 대리석원탁에서는 눈을 붉히며 시즈의 삐져나온 머리카락이라 도 찾으려는지 대륙의 내노라하는 7명의 학자들은 예리한 시선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명하시며 마땅찮은 시즈 세이서스, 그대의 말을 종합해보면 〈또 다른 고향〉은 그대가 쓴 소설이며 그 지식은 자신이 바탕이다!? 그렇다면 복잡 하게 여겨지는 소설에서의 이계물에 대한 설명은 무엇이오? 너무나 실재적인 설 명이라서 묻고 싶구려.」 「하하하하!!」 벌써 3시간을 넘게 말이 오고갔다. 피브드닌은 미리 예고한 것처럼 시즈를 곤 란하게 만들만한 질문을 수없이 던져댔는데, 마치 사랑을 뺏은 연적을 몰아붙이 는 듯한 기세였다. 다른 학자들은 그에게서 쏟아지는 질문과 그것에 일일히 반 박과 답변을 하는 시즈에게 혀를 내돌리느라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이었다. 크게 웃어재낀 홀의 주인공은 앞에 놓여진 컵을 들어 목을 축일만큼의 물만 삼 킨 후 말했다. 「소설에 현실성은 허구성 이상의 요소입니다. 아무리 허구가 멋지고 환상적이 라고 해도 그것의 뒷받침에 현실로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이론, 그리고 전개 방식이 아니라면 낙서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물론 배경과 사건에 전제된 현실투 영을 지나쳐서 말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철학을 비롯한 학문으로서의 글을 벗어 나, 개인의 허구적인 상상력을 책으로 묶어낸다면, 그것은 팔리기 때문이겠죠. 뭐 물론 팔리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판매를 위해서 작자는 타인을 글로 끌어들이기 위한 많은 수단으로서의 기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허구를 진실 처럼 현혹시키는 기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군요. 나,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7인 중 로우 베토리오가 묻겠소. 그 말대로라면 그대, 시즈는 독자를 현혹시켜 끌어들이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 는 허구적 존재를 있는 양 설명했다는 것이오? 부품 하나하나로 나누어서…?」 흰 물감이 곱게 스며든 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워하며 자리에 앉는 노인과는 달리 벌떡 일어선 여인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럼 저도 묻고 싶습니다. 이미 자신의 고명한 지식을 보여주신 〈마땅찮은 시 즈〉님은 글에 기재한 극한과 무한 급수와 같은 수학도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표현하신 겁니까? 원탁의 인 중 이메나 바르노가 묻고 싶군요.」 붉게 얼굴에 열을 올리는 이메나 바르노의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의 말대로라면 대륙의 대표적인 현자들은 한낱 매출을 위한 표현을 사용한 소설 가에게 우롱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글로 표현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해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현혹시키고 이해시키는 서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극한과 무한급수, 연속 과 미분의 관계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과 함께 입에서는 침음성을 내뿜었다. 나이가 많아봐 야 고작 스물이 되어보이는, 아직은 소년의 티가 남아있는 청년이 홀 안을 걸어 들어와 중앙의 의자에 앉았을 때 얼마나 기묘한 기분에 시달렸는가. 어떤 분야에 서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받을 심정으로 만든 사람이 아 직 인생의 삼분지일(三分之一)도 겪지 못한 새파란 애송이라는 것을 깨닫고 토했 던 침음성에 이어서 두번째 침묵의 탄식이었다. 어둠이 깊게 깔린 채 굳은 모습으로 뻣뻣하게 일어서 토루반, 그는 다른 학자들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의지를 딛은 채 몸을 세웠다. 「화학이라고 표현된 연금술은 허구인가, 진실인가. 진실이라면 그대, 〈마땅찮 은 자〉는 글에 표현된 이론을 실험으로서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시즈는 자신이 과학을 공부했던 세계에 비하면, 아스틴이 아무리 대륙에서 제일가는 학문의 총괄 연구기관의 집합지라고 하더라도 실험기 구로 보나 재료로 보나 차이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밀한 기구가 아 닌 고교실험기구로는 일어나는 오차가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었고, 아스틴에서 비슷한 예를 경험하게 된다면 간단히 오차가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불확실한 이론으로 증명을 피해버리자는 것이 시즈의 계산 이었다. 「이제는 우물 속의 7인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하하하! 나 원탁의 7인 중 모 프크는 〈마땅찮은〉, 그대의 고명한 지식를 인정함과 동시에 감탄하오. 그대는 대륙의 현자들 앞에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속일만큼 세기적인 사기꾼으로 보이 는 않으니까. 앞으로 엘시크가 발전하는 것을 보면 그대의 가진 바가 얼마나 되 는지 알 수 있겠지.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소이다. 어린 나이, 작은 몸에 세 상을 뒤집을만한 지혜를 가진 자여, 그대는 그 앎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려하 오?」 푸른 빛을 받은 노인의 깔끔한 대머리는 섬뜩한 눈빛만큼이나 시린 그늘을 만들 고 있었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는 그 모습에서 시즈는 노인의 가벼운 어조와는 달리 베일듯한 예기를 느꼈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외모, 시골 귀족들이 입을만한 끝이 헤어진 옷차림새에서는 흐릿한 바람의 내음이 풍겼다. 빙그레 위 로 올라간 입꼬리에 현인들은 시선을 모았다. 「언제부터인가 계속 원해왔습니다. 항상, 원해왔던 것은 〈대신〉이 아닌 말이 었으니까요. 누구를 대신하는 것도 아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자신을 봐줄 세계를 찾아다녔지요.」 그래서 이 곳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로만 봐줄 수 있는 곳. 세일피어 론아드로…. 순간이지만 홀 안에 있던 장년과 중년, 노년, 여인은 눈 앞에 서있 는 어린 청년이 그들 누구의 세월보다 오랜 시간 속에 비바랜 풍경화처럼 회색빛 잔영으로 느껴졌다. 시즈의 미소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부드럽게 퍼져가는 온화한 바람이 되어 있었 다. 현인들은 기분좋은 병에 전염된 듯 눈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었다. 「아스틴네글로드, 이 원탁에 그대의 자리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마땅찮은 시즈〉의 자리를.」 로우 베토리오의 말과 함께 그들 모두가 일어섰다는 것은 자신 만의 세계를 가 진 청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시즈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스틴에 온 것은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을 완성해보고 싶어서 입 니다. 아직 자리를 갖을 생각은 없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아직 그가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 여주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강한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은 미소만 지을 뿐, 누 구도 그의 거절에 실망이나 화를 내는 이는 없었다. 로우 베토리오는 껄껄대고 크게 웃으며 걸어나와 시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자네의 세계을 만들 재료가 이 곳에 있다니 기쁘기만 하군. 바닥이 나도 좋으 니 얼마든지 퍼다주겠네.」 그의 느긋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는 시즈에 대한 청문회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글로드의 현자들은 걸어나와 악수를 청하며 싱글거릴 농 담과 덕담을 건넸다. 「그럼 〈또 다른 고향〉의 사본을 출판하는 것 정도는 아스틴에서 하지 않겠나 ?」 「나쁘지 않겠군요.」 「책이 나오면 아마 아스틴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걸요. 학자들이 자네의 발꿈치 를 잡고 늘어질테니까요.」 「그것은 좀 곤란한데요…」 「이러지 말고 허기라도 채우러 갑시다. 그나저나 시즈 군, 술은 할줄 아나? 내 아껴뒀던 것 좀 꺼내주지.」 그들이 나이에 맞지 않게 히히덕거리며 홀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분 좋은 웃음 이 얼굴 가득히 떠오른 가운데, 혼자 투덜거리는 이가 있었으니 열심히 발을 놀 리며 따라가는 드워프였다. 「왜 나와는 악수를 하지 않는 거지?」 시야 제한 범위에 걸린 것이 어찌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짧은 다리를 타고난 종족의 슬픔이었다. -41- 어둠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두 가지 중 한 요소이다. 나머지 하나인 빛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둠이 주는 안도감의 정체 에 대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이는 없다. 그런 미지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상상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두려움과 미지의 안도감을 가진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어둠, 그 안에서 그들이 있 었다. 「실패지? 자신있어 하던 것이 꿈결같이 느껴지는 군, 그래.」 남자는 경멸어린 어조에 비웃음을 심어 키득거렸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의 그림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불행히도…. 강했어. 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쫓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었지.」 「그대가 용사라고 불리는 이를 너무 얕본 것이겠지. 그녀는 적어도 대륙의 몸부림에서 튀어나온 존재 중 하나야. 그래…. 〈그〉의 흔적을 용사 주위에 서 발견할 수 있었나?」 묻는 남자의 음성에는 좀전의 키득임은 조각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숨어 격 동하는 긴장의 숨소리가 주위를 가득히 메웠다. 세인들이 용사라고 부르는 사 람조차 가벼운 담론 소재일 뿐,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이는 오직 〈그〉 밖 에 없었다. 「아니, 없었어. 그녀도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한 모양이던데…. 역시 죽은 것 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여인이 그가 안도의 중얼거림을 토해내는 것을 거들었다. 「그래요. 아직도 〈그〉의 신위는 잊을 수가 없어요. 신과 겨룰 정도라니…. 하지만 어째서 〈그〉는 마지막까지 그런 힘을 쓰지 않은 것일까요?」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리는 자신의 힘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것이 아 닐까? 뭐 어쨌든 가장 위험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는 것 같 아. 이제는 남은 둘만 남았군.」 말끔하게 면도된 턱을 쓰다듬으며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앞에는 한 청년이 부복해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서서히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 는지 어눌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여인은 한심스럽다는 어 조로 입을 열었다. 「전 설마 노르벨까지 실패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하하하하하하핫!」 「웃음으로 얼버무릴 생각말아요.」 푸른 머리에 갈색 눈동자, 이지적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웃음은 헤프기 그지 없었다. 흑색 건틀릿의 둔탁한 꿀밤을 한대 맞은 청년은 두 손을 모아쥐고 울 상을 지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막 지나간 여운으로 바람이 남았는지 사막에 남아 있어야할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고요.」 「게으름 피운 것이 아니고?」 「설마요, 에레나! 절 의심하는 겁니까? 아하하하하하하핫!」 남자와 여인은 어색하게 웃어제끼는 청년을 바라보며 함께 중얼거렸다. 절망 적이기까지한 한탄이었다. 「그 설마로군….」 수당이 없다는 말에 노르벨이 풀이 죽어 돌아간 뒤, 어두운 갑옷으로 몸을 감 싼 여인은 침침한 안색을 띄고 있는 남녀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가 없다면 용사 정도야 시간문제가 아닌가. 다들 왜 그렇게 걱정스러 운 표정이지?」 「법칙을 깨는 존재가 한 명 더 나타난 것 같아서요.」 여인은 그 싸늘하지만 정겨운 말투에 한없이 차가울 것 같은 금속을 뒤집어쓴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무거운 금속체가 움직이면서도 철컥이는 마찰 음이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이 그나마 에레나의 유일한 여성스러움이랄까. 흑가 면은 가볍게 다리를 옮겨 빈 의자에 앉았다. 「한 명이 더?」 짜증이 깊게 베인 귀찮아하는 그녀의 시니컬한 음성을 들으며 남자는 거칠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아마도 〈불꽃의 춤을 추는 이〉만큼이나 법칙에 위배되는 녀석이야.」 「호오…. 〈그〉와 동급이라고?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도 나타난 건가? 그 런데도 이렇게 조용히 있어도 되는거야?」 지나치는 듯한 어조였지만 에레나는 숨이 막힐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존재를 다시 상대해야 하다니, 끔찍하군. 가면으로 어떻게 변색됐을지 모 를 얼굴을 가린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물끄러미 불꽃에 시선을 던지고 있 던 남자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게 말이야, 학자야.」 「뭐?」 「학자라고요, 에레나. 그는 학자에요.」 「뭐야!? 그럼 별 거 아니잖아.」 「쉽게 말하는 군. 그저 학자인 자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향력은 현재까지의 어떤 누구보다도 광대하다. 게다가 이번 그자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아스틴네글로드와 접촉하는 것도 번개불이 떨어진 것처럼 끝내버렸다. 마치 견고했던 성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야. 녀석을 죽인다고 해도, 그의 책은 이미 사본이 만들어지기 시작 했으니…. 빌어먹을! 정말 마땅찮은 녀석이야.」 머리를 감싸쥐고 이를 갈아대는 것이 어지간히 고민인 모양이었다. 여인이 그 의 큰 손을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아니에요. 그 책은 그가 초월적인 지식과 학문을 지니고 있다는 증명적 인 서적 밖에는 되지 않은, 단지 소설책에 지나지 않아요. 실제로 세상을 바꿀 만한 지식은 마땅찮은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오지 않았잖아요? 그는 아마도 현실 을 바꿈으로써 그것을 내보일 생각인 것 같았어요.」 「녀석의 모국이 어디지?」 「엘시크에요.」 「최악인 동시에 그의 학문을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실험장이로군. 하지만 잘 됐어.」 엘시크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을 노인을 떠올리며 남자는 싸늘한 미소 를 지었다. 여인 역시 같은 인물을 떠올렸던 모양이지만 남자와는 달리 껄끄러 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음…. 그럼 난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다음부터는 왠만하면 자기 부하를 쓰라고! 괜히 바쁜 사람을 부르지 말고.」 암흑을 더욱 검게 물들이던 검은 갑옷이 서서히 사라져가자, 남자는 여인을 돌 아보며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부르면 꼭 온단 말야…. 안 그래?」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42- 겨울은 차가운 계절이었지만 그렇다고 햇빛이 서늘해진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쌓여있던 눈도 벨루온의 분주한 사람들의 왕래에 이리저리 차여 자취를 감췄다. 「네에!? 시즈 님께서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앉는 것을 거절하셨다고요? 어 째서!?」 「그거야, 내가 알겠나?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피브드닌은 곁의 나무와 머리를 번갈아 부여잡으며 발광에 가까운 몸부림으로 흥분 상태를 알려주는 장신의 사내에게서 민망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헤에…. 보를레스,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이라니?」 마침 점심 무렵이여서 네메이나는 벨루온에서 유명한 고급 음식점이 아닐까하 는 생각으로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의문을 토했다. 하지만 그녀를 힐끗 바라본 보를레스는 무정하게도(?) 호기심과 식욕에 찬 한 소녀의 시선을 무시 했다. 결국 몇 번의 물음 끝에 〈어째서 - !?〉라는 절규의 대답만 듣게된 네 메이나는 뾰로퉁한 표정으로 식식거렸고 보다못한 헤모가 끼어들어 대신 대답 했다. 「아스틴네글로드는 아스틴에서 가장 권위있는 학문 연구기관이야. 원탁은 그 중에서도 제일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앉아 회의하는 홀의 테이블을 말하는 거 지. 한 마디로 아스틴 최고의 학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상징이야. 유레민트와 토루반도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앉아있는 분들이지.」 네메이나는 몇 일전까지만 해도 함께 여행했던 이들이 뭔가 거창한 신분이었 다는 것에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하긴…. 그 때 그 기세는 뭔가 있는 놈 같았어.」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처음 시즈 일행 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낮고 고요하게 숲 안에 퍼지던 목소리, 은은한 미소 … 소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 후로 보 았던 시즈의 행태가 머리 속을 가득히 메웠던 것이다. 아침에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비틀거리다가 우물에 빠지고, 음식을 먹으며 걷 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손 에 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지 필사적으로 사수했었지. 게스츰하게 눈을 뜬 네메 이나는 찹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뛰어난 학자들은 죄다 그런가?」 ??세의 소녀가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그 고민대상인 시즈는 잡다한 생각- 물 론 자신의 일행 또한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은 잊은 채 독 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귀족적인 예풍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니면 그들 또한 국왕의 알현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이해하기 때문 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민했던 아스틴 국왕 알현은 지나칠 수 있었다. 네글로 드의 학자 중에서도 〈또 다른 고향〉과 시즈의 존재를 아는 이들이 매우 적었 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쨌든 시즈는 귀빈자격으로 왕궁을 활보하며 원 하는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목표했던 고문의 마법서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스틴 궁정 마법사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고대어문의 서적들이 보관된 서실을 열람할 수 있었고, 타국적의 사람들은 설사 왕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망한 시즈는 일찍이 포기하고 네글로드의 도서관에 틀어박혔 다. 「좀 비켜주지 않겠어?」 「예. …….」 「이봐, 언제 비킬거야?」 서서히 한기가 풍기는 음성에 놀란 시즈가 아쉬운 듯 책에서 눈길을 떼며 고 개를 들었다. 고급스런 비단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소년은 기가 막힌 듯이 시선을 내리깔 았다. 어디서 놀던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난뱅이티가 풀풀 나는 허름한 옷 차림을 걸친 시골귀족 청년은 그의 말을 당나귀가 홍당무 씹듯이 무시해버린 것도 모잘라 옷감만큼이나 허름한 눈빛으로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소이빨에 되새김질 되는 기분이 되어버린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몇 권의 책 을 짜증스럽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언제 비킬거얏!」 소란이 일자 주위에서는 몇몇 사람이 힐끗힐끗 곁눈질을 하며 지나갔고, 청 년은 그제서야 생각이 돌아가는지 멀뚱히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지?〉 시골 귀족청년의 정체에 호기심에 호기심이 일어난 소년은 멋적게 웃고 있는 그를 째려보면서 슬쩍 청년이 읽고있던 책을 살폈다. 「맙소사!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 「아아! 이거요? …저 쪽 책꽂이에서 찾아낸 건데, 서술방식과 풀이가 꽤 흥 미로워요. 혹시 찾으시던 책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푸른 눈동자를 모두 들어내고 노려보는 소년에게 두려움을 느낀 시즈는 머뭇머뭇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홱하니 청년에게서 책을 받아 펼쳐든 소년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트, 틀림없어!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수 많은 종족관점으로 나누어 설명했 을 뿐 아니라, 더욱이 고대어와 역사학을 바탕으로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어, 역사, 생물학을 통달하지 않은 자는 손도 대지 못한다는….」 주위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런 것은 이미 관심 밖이었 다. 침을 꿀꺽 삼키며 소년은 검푸른 머리를 쓸어넘겼다. 긴장된 표정으로 책과 시즈를 바라보던 그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지?」 「시즈라고 합니다. 시즈 세이서스.」 「마땅찮은(시즈) 영광(세이서스)!? 기묘한 이름이네.」 「아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앗!」 어설프게 웃어대던 시즈는 그제야 일행에 대한 생각이 일었던 모양이다. 갑 자기 호들갑을 떨며 몇 가지 책을 챙긴 그는 몇 번이나 넘어질 듯 기우뚱거 리며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아버린 소년은 허탈하게 손에 들린 책을 몇 번 더 펼쳐보다가 힘없이 자신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구지? 머릿 속에 청년의 허물없다 못해 멍청하게 보이는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아니! 데미노머 전하, 왠일로 그렇게 힘이 없지?」 친근하게 말을 걸며 어깨를 두들기는 갈색머리의 젊은 귀족은 소년이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렸던 형뻘의 친구였다. 소년은 자신보다 키가 한뼘은 큰 젊 은 귀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로훗, 아아…. 아무 것도 아니야. 혹시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을 취 미처럼 읽을 수 있는 18살짜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몰라.」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질문에 로훗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호탕하게 웃 어댄 그는 소년의 어깨를 텅텅 소리가 나도록 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나도 알고 있는 걸!」 「정말이야!? 누구지? 어서 말해봐!」 숨이 막히는대도 불구하고 소매를 늘어지도록 잡는 어린 왕자님을 가까스로 떼어내는데 성공한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전하잖아. 15살인데, 이미 역사학과 어학의 수준이 이미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라며? 앞으로 3년만 있으면 그 정도는 그림책 훑듯이 보지 않겠어?」 데미노머는 한순간에 긴장이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축 쳐진 어깨를 늘어 뜨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왕자는 심통난 노인네처럼 게슴츠레뜬 눈초리로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일그러진 시선을 선사했다. 로훗은 시녀들이 놀라 비 키는 것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역시…. 너무 티나는 아부였나?」 -43- 겨울만 아니었다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정원을 가로질러 거닐던 왕자는 문득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를 만났다. 평범한 사람에 비해 매우 짧은 그림자 를 드리운 상대는 드워프들의 전통적인 현자복장을 입고 있었다. 「토루반! 여행을 가셨다더니 돌아오셨군요?」 네글로드 원내에서도 시즈의 존재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그를 맞이하러 엘 시크를 방문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오랜만이오. 그 동안 성과는 좀 있었소?」 여타의 귀족 학자와는 달리 토루반은 궁정의 예를 따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드워프의 이름난 현자를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왕족들은 고심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왕족들은 그를 한 왕자의 스승으로 삼아버렸다. 스승은 곧 어버이나 다름없으니 왕자의 스승인 토루반은 궁정의 자잘한 예식은 무시 좋은, 신분을 갖게 된 것이다. 아스틴의 왕족으로서는 절치부심한 끝에 찾은 해결책이었다. 「별다른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총명한 왕자는 특별한 일이나, 고민이 아니면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 루반은 의아하면서도 기대가 섟인 심정으로 소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미 간을 미세하게 찌푸린 왕자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또래의 남자 중에 제 학식을 웃도는 이가 있습니까?」 무슨 질문인가하고 궁금해하던 토루반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우핫핫핫!」 「우, 웃지 말아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소리치는 데미노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웃 어대던 토루반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무슨 대단한 질문인가했더니…. 전하, 세상은 넓소이다. 당신의 학식이 나 이에 비해 이룬 성취가 크다는 것은 알지만, 그만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오.」 「인디움프스 몬스터생태학을 흘려보듯이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왕자가 주위의 칭찬공세에 물들어 그런 질문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토루반 은 갑자기 예까지 들면서 묻음에 이상함을 느꼈다.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 속 을 더듬어보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무리일거요. 하나도 아니고 3분야 이상의 학문이 현 최고급단계까지 이르지 않는 한은 읽을 수 없소. 왕자 전하 또한, 최고급단계에 이른 학문이 없잖소?」 「시즈 세이서스 라고 했습니다.」 「아, 글쎄! 시즈 세이서스고 뭐시고 간에…. 엣!? 뭐라고? 시즈 세이서스?」 데미노머가 침중한 얼굴로 내뱉은 한 마디는 호쾌하면서도 침착하기 그지 없 는 드워프의 현자를 망가뜨려 버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이 걱정될 정도로 부릅뜬 시선으로 반문하는 토루반이 의문의 청년을 알고 있는듯한 반응을 보이 자, 왕자는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토루반! 알고 계시군요? 그가 누구지요? 정말로 그 책을 가볍게 읽을만한 지 식을 지닌 것입니까?」 아침에 내린 서리가 아직 녹지 않은 채 뽀얗게 덮인 풀이 건조된 과자같은 소 리를 내며 소년의 발 밑에 깔렸다. 흥분하여 느껴지지 않던 바람이 차가움을 뿌리며 그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잠시 침묵이 내려깔렸던 정원에서 토루반은 왕자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아니오. 험험, 나는 모르는 사람이오.」 「토.루.반! 날 속일 생각 말아요!」 「알겠소. 말하지요. 내가 알고 있는 시즈 세이서스 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소.」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시겠군요?」 「그건 왜 묻지요?」 「당연히 만나보려고 그럽니다.」 토루반은 흥분에 반짝이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미 때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상점가에서 꼬치 노점상을 거의 점거하다시피 한 보를레스 와 네메이나를 모르는 척 피브드닌과 헤모는 담뱃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라, 보를레스. 저거 시즈 맞지?」 보를레스가 돌아보니, 중요한 살덩이는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작대기만 남아버린 네메이나의 꼬치가 가리키는 곳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시, 시즈!!!」 착각인가 하고 달려간 보를레스를 시즈는 코를 한 손을 부여잡고는 미소를 지으 며 맞았다. 「아하하… 하….」 「지금 웃고 있을 때입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버럭 화를 내는 보를레스를 따라온 일행들은 코피를 흘리는 시즈를 어이없는 시 선으로 바라보며 기가 막힌 듯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거 참, 해맑게도 웃는 군.」 - 피브드닌 「자학적 취미를 의심해볼만 하겠어.」 - 네메이나 「어떻게 된거야?」 시즈는 그나마 질문다운 질문을 한 헤모에게 들고 있던 책을 건네며 보를레스가 쥐고있던 꼬치를 가로챘다. 순간, 일그러진 두 남자를 무시하고 꼬치구이를 물끄 러미 주시하던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별 거 아니에요. 넘어졌는데 들고 있던 책에 코를 박았어요.」 보를레스는 흘깃 피브드닌을 끌어당겨 귀를 잡아늘리고는 섬뜩하도록 차가운 목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에 추천된 사람이 정말 맞소?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요.」 피브드닌는 유괴된 여자아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내가 추천하지 않았소오….」 -44- 「하지만 전하, 꼭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소?」 토루반의 음성에는 골치아픔을 절실히 나타내는 떨림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는 거리에서 10년은 굴러다닌 것 같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던 것이 다. 「토루반…. 그대는 드워프 제일의 현자이지만, 역시 창조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 는지 모르는 것이 있군요. 이래뵈도 난 유명인사란 말입니다. 유명인사는 어딜가 나 행동과 모습을 보이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유명인사가 아닌 모습이 되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전하는 왕족이 아니시오. 일개 학자를 만나러 직접 나올 것보다 시종 을 보내어….」 「토루반! 그대가 그런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대는 왕족이 아니라 폐 하께서 내리신 령을 무시해버릴 때도 있잖습니까. 첫인상과 그대의 친구라는 점 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려볼 때, 시즈라는 사람도 도망가버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어요.」 토루반은 말문이 막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소년은 어느 집 굴뚝에서 묻히고 나왔을 숱뎅이가 안면에 골고루 발라졌는지 확인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왜 저렇게 두리번거리죠? 미행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요?」 일행과 만난 후 음식점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한시도 쉬지 않고 두리번거 리는 시즈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왕자는 토루반에게 속삭였다. 「역시! 멍청한 것처럼 보이던 모습은 꾸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요, 토루 반?」 토루반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왕자를 내심 안쓰러워 혀를 찼다. 불쌍하게도 왕자 는 눈에 뭔가 씐 것이 틀림없어. 드워프의 현자는 어리숙한 소년 왕자보다 추적대 상의 행동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시즈는 예전부터 과자류에 대해서 광적으로 좋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물 론 술도 그러했지만 적어도 자제하고자 하는 노력은 보이곤 했다. 하지만 과자에 대해서는 모기장 만큼의 헐렁한 경계심도 없었다. 현재 안절부절하며 주의산만한 경계는 눈치채지도 못한 미행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언제 과자를 노리고 달려들지 모르는 네메이나를 향한 것임이 확실했다. 「눈치챈 것은 아닐 거요. 눈치를 채면 또 어떻소? 언제까지 숨어있을 장적이오?」 「흠흠, 걱정 마세요. 신중을 기하는 것 뿐이니까.」 한편 품에 앉은 과자봉지를 사수하고자 약간은 흐릿한 검은 색 눈동자를 뒤굴뒤 굴 돌리던 시즈의 귀에 멀리서 아릿하면서도 섬뜩한 괴성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네메이나와 보를레스가 지르는 음식쟁탈의 울부짖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즈는 생 각에 빠졌다. 수도자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채 과자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침묵의 늪에 빠져있던 그는 무언가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피브드닌! 전 먼저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연구할 것이 조금 있거든요.」 연구대상이 바나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과일첨부의 건조 과자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피브드닌,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며 끄덕였다. 「어디서든지 저렇게 학문을 우선시하니, 이름있는 학자로서 전혀 부담이 없군 그 래.」 나중, 그가 이 한 마디 때문에 평생도록 학자의 자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관 심한 학자였다는 혹평을 당하지만 그것은 오랜 후의 일이다. 떠밀 듯이 시즈를 보 낸 피브드닌은 헤모를 비롯한 일행들을 찾는 도중, 웬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의 두 인영을 발견했다. 그들은 매우 더러운 집시의 복장을 하고 골목 건물 귀퉁이에 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즈가 걸어가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 시즈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황급히 귀를 쫓는 것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문득 피브드닌의 머리 속에 애처로운 시선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메아리쳤다. 〈아스틴은 위험해요.〉 나지막한 그 말은 분명히 시즈를 가르켰다. 순간, 그는 자신이 이미 달리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귀족의 자존심인 품위는 어디있는지 생각도 않고 피브드닌은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곧 그는 벨루온이 거대하고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사실에 저주를 던져야 했다. 한편 마음껏 과자 맛을 조사,연구할 생각에 마음이 부푼 시즈는 부지런히 네글로 드의 귀빈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먹어치웠을 과자는 의외로 온전했다. 그 이유가 병석에 누워있는 아릴에게 나눠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일행이 안다면 얼마나 경악할까. 그가 아릴에 신경을 쓰는 것은 그녀의 절세적인 아름다 움 이전에 단손한 동질감이 앞서있었다. 눈이 멀었을 당시 자신의 증상에 대해 원 인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그녀에 대해 놀랐지만 더욱 놀란 거은 몇일 후 자신과 같 은 증세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였다. 그 때의 자신의 고통과 같은 아픔에 시달리는 여인, 그녀가 불러준 노래는 동질감 이상으로 시즈에게 동경에 가까운 감정까지 심어주었다. 아직은 아릴처럼 노래를 불러주기에는 부족하지만 당당하게 그녀 앞에서 부를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다짐을 하고 싱글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던 시즈는 왕궁에서부터 뒤를 밞아대는 몇몇의 인영들을 생각해내고 문득 멈춰섰다. 〈과자 때문에 잊고 있었ㄴ.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생각이지? 바람에 살기가 섟 여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저기…. 그만 나오시죠?」하고 어색하게 들려오는 시즈의 어조에 토루반은 허탈 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 무슨 생쇼였단 말인가. 「슬슬 불러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모습을 드러내려던 토루반과 데미노머는 갑자기 들려온 한기 가득한 음성에 숨을 죽였다. 스르륵. 언제부터인가 그 곳에 서있던 사람들처럼 두 남녀는 모습을 들어냈다. 마치 물 속에 녹아있던 결정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작은 미행자들과는 달리 시즈는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힐끗, 토루반이 숨은 방향을 슬쩍 바라보았던 청년 은 더러운 로브를 걸친 두 집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열심히 쫓아오셨으니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군 요.」 남녀 집시는 모두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키 가 작은 시즈는 올려다봐야 했다. 드리워진 후드의 앞자락 때문에 보이는 것은 입 가에 새겨진 비웃는 듯한 붉은 미소 밖에는 없었지만 옷과는 달리 흠하나 없는 피부는 그들이 상당한 신분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45- 「글쎄요, 전 그저 20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으로 추천된 이를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것을 대단한 용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만.」 그의 입술은 연인의 귀에 속닥이는 것처럼 약동했을 뿐이지만 약간 떨어져 있 는 시즈과 숨어있는 토루반들에게도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또렷한 음성으로 들려왔다. 냉소와 장난기가 동시에 녹아있어 어느 것이 진실된 감정인지 알아챌 수 가 없었다. 〈알 수 없기에 불안하다.〉 토루반의 머리 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무언가가 들어찼다. 약간이지 만 시즈가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볼 때, 그 또한 같은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미행을 했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군요.」 「후후…. 그렇게 경계할 것은 없습니다. 타인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이 꺼림 직하여 인적이 적은 곳까지 따라온 겁니다.」 굵고 힘이 있으면서도 깨끗하게 공기를 울리는 목소리로 볼 때, 남자는 그리 나 이가 들지 않았다고 시즈는 생각했다. 「난 경계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서 용건을 말해보시죠?」 「경계하고 있지 않다? 연장자의 경험을 얕보면 안됩니다. 그대가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지나온 경험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어요. 노인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고방식만 가지지 않았다면 세상 젊은이들보다는 노인들이 이끌어갔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 입니까?」 상대를 보고 있는 시간의 찰나가 흐를 수록 시즈는 불안감과 함께 두려움이 솟 았다. 남자의 어투, 행동, 풍기는 분위기까지 주위에 서 있는 작은 집벽보다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미소가 짙어질 때마다 시즈는 압박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침을 삼키는 그 에게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경쾌한 리듬으로 다가왔다. 「이제 한번만 더 침을 삼키면 6번째입니다. 물 대신 침을 마시고 사는 것은 아 니겠지요? 게다가 심장 박동수가 너무 빨라요. 아! 지금 심장이 순간 움찔했네요 . 내 말로 놀랐다면 사과하죠.」 그 말에 놀란 것은 토루반이었다. 검사들 중에는 상대의 신체 내부적인 구조를 해부한 것처럼 알 수 있는 감각을 가진 이들이 있고는 했다. 대부분 청각이나 촉 각이 특수하게 발달된 그들은 매우 극소수였고, 엄청난 수련을 쌓은 것과 동일한 뜻으로 해석할만큼 특출한 검사였다. 〈경우의 상황에서 내가 나서더라도 시즈는 죽는다.〉 현명한 노인이자, 자긍심 높은 드워프는 언제나 천으로 둘둘 말아 등 에 메고 있던 도끼의 손잡이를 잡으며 생각했다. 「……. 당신이 날 죽이고 싶다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뜻이군요. 일깨워주 셔서 감사합니다. 으음…. 이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저를 만나 하고 싶 은 말이 뭐죠?」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은 오히려 차분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던가. 시즈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특유의 온화한 미소 가 그의 얼굴에 살아나자, 남자는 놀랍다는 듯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잠시 말 을 잇지 못하던 남자의 후드 아래에서 입술이 빙그레 초승달처럼 구브러졌다. 「쿡쿡! 정말이군요. 놀라워요. 누구나 동경해 마지 않는 아스틴 네글로드의 원 탁을 거절한 사람다워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대는 곧 엘시크로 돌아가 그 방대 한 지식을 엘시크 사회전반에 적용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엘시크 가 고인 채 썩어가는 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고정된 귀족제도, 숨통을 막힌 채 그냥 살아가 는 서민들, 이미 보를레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엘시크의 앞날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난 묻고 싶습니다. 마땅찮은 이여…. 그대는 막힌 물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폐 단적인 귀족들을 뜯어고칠 것입니까, 백성들을 위한 직접적인 구제정책을 펼칠 것 입니까?」 「썩어가는 근본을 뜯어고치겠지요.」 「그 말은?」 「귀족을 부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왕족도.」 「!!」 숨어있던 두 인영의 눈이 토끼눈처럼 떠졌다. 경악에 어울리는 그 얼굴들의 눈 에는 핏빨까지 돋아있었다. 남자와 여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후드가 격렬하 게 흔들리는 것에 시즈는 만족했다. 남자는 흥분에 쌓여 몸을 부들거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았다. 「이거 예상 이상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마땅찮은 이〉로군요.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그대는 이름 그대로 인식되어버릴 겁니다. 나 역시 다 음 번에는…. 후후! 우리는 이만…. 손님이 더 계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작게 박수를 치고 가볍게 몸을 돌렸다. 군데군데 기운 더러운 로브가 찬란한 망토처럼 출렁거리며 남자를 따랐다. 여인 또한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았지만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지막한 여인의 아름다운 목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나면 죽음을 각오하세요.」 그들을 골목 귀통이가 삼켜버린 후에야 그 때까지의 긴장이 덩어리째 뭉친 한 숨은 내뿜으며 주저앉은 청년은 히히히 하고 웃었다. 「어서 나와요, 토루반.」 머쓱하니 망설이며 고개를 빼꼼이 내민 두 사내가 한심스러워 양미간을 꾹꾹 눌러댄 시즈, 미세하지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용건이 있으세요?」 귀빈관으로 걸어가며 토루반은 100 살은 연하인 청년에게 부끄러운지 데미노머 의 그림자에 숨어 헛기침만 해댔다. -46- 「후후훗!」 「그렇게 좋으신가요? 그 청년을 만난 후로 굉장히 유쾌하신 듯 해요.」 「하핫! 그렇게 보입니까?」 미식가들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진미를 실컷 먹은 후의 만족감과 흥분이랄까. 연신 피식, 후훗, 낄낄하고 번갈아대며 웃어대는 그를 여인은 조용히 따르며 곁 눈질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 대답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까?」 「질문 자체가 정답이 없어요. 엘시크는 썩어있는 물, 그리고 백성이나 귀족 모 이미 썩어있는 물에 적응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죠. 어느 쪽을 바꾸던지 나머지 는 반항하거나, 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그대는 정답이 없는 질 문을 한 겁니다.」 예지로 눈을 빛내며 여인이 대답하자, 남자는 바쁘게 걸어가는 도중에도 껄껄댔 다. 「아닙니다. 정답은 있습니다. 서민들을 바꾸는 것입니다. 귀족을 바꾸지 않는 한 엘시크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대답은 맞죠. 하지만 그 대가 말한 것 같은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또 서민들을 구제하는 정책 또한 귀 족들의 부담이 커질텐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리도 없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정책이라는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서민의 삶 을 직접 구제한다는 것은 기술의 실생활 도입만으로도 가능하지요. 물론 추상 적인 학문의 발전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그 성장은 느리겠지만 충분히 실생 활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 발전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시즈 라는 청년은 완전히 반대로 말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틀린 답이라고 해도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정답을 대신 할 수 있어요. 그는 신념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같습니다. 혼란이 올 겁니다. 아주 재미있는 운명의 장난처럼….」 사내는 눈을 찡긋해보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저, 정말 아까 그 남자가 한 말이 사실인가?」 토루반이 시즈를 미행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기로 하고 얼음과자 가게로 뇌물 을 준비하러 간 사이 왕자와 시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수로를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 조용히 흐르는 물을 보고 있었다. 「어떤 말을 가리키시는 것인지?」 「그대가 원탁으로 추대되었다는 것 말이야.」 〈마땅찮은 영광〉이라는 불손한(?) 이름과는 달리 시즈는 데미노머가 신분을 밝히자 매우 공손했다. 대답할 때조차 약간씩 머리를 앞으로 숙이는 것이 원탁 으로 추대된 이가 가질만한 프라이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겸손한 것 같다고 왕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공손하고 깨끗한 행동과는 다르게 말투는 매우 직선 적이어서 잘못 생각하면 비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살 정도였다. 「사실이긴 거절했습니다.」 「에? 정말루? 아스틴네글로드는 대륙적으로 알아주는 학문 연구기관이고, 원 탁의 7인이라고 하면 국제적인 현자로서 성공한거나 다름없어. 뭐…. 물론 일 많고 월급은 조금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하자만… …」 그 후에 말은 시즈의 머리 속에 접수되지 않았다. 돈은 많이 주고 일 적게 시 키는 곳이 청년의 희망직장이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후에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초 청하는 일이 있거든 철저히 거절하리라는 다짐을 꽉진 주먹으로 다부졌다. 「여기 얼음과자 사왔다. 이런 것을 먹다니 완전히 어린애로군.」 얼굴을 찡그리며 작은 산처럼 쌓여있는 맛나는 얼음과자를 내미는 조그마한 드 워프가 할 말이 아니었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시즈 자네, 시크에 돌아가면….」 「그것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토루반. 난 정치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 까요.」 「하지만 그대는 분명….」 「전하, 꼭 나라를 구하는 도구는 정치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게 지식을 사 회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를 물었지, 어떤 정치를 할 것이냐고 묻지는 않았 습니다.」 왕자의 푸른 눈동자에는 검무튀튀한 비늘색의 능구렁이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하늘을 약올리는 모습이 비췄다. 아직 젊은 놈인데도 불구하고 몇 천년은 묵은 녀석처럼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위엄스러웠다. 「멋진 말이로군. 그런데, 시즈? 아릴에게 가는 건가?」 「예, 과자 좀 가져다주려고….」 과자봉지를 잡은 상태로 품 속에 넣었던 손을 꺼낸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데 미노머도 야릇한 모습으로 뭉그러져있는 봉지 안에 과자는 부스러기가 되어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냥 맨몸으로 얼굴이라도 보러갑니다. 걱정이 되니까 문병이라도.」 멀쩡히 말했지만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고여 그의 상심을 대변해주었다. 비틀거리 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으며 걸어가는 시즈의 등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교환한 드워프 현자와 왕자는 뒤를 쫓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꼭 정치에 껴들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겠어요? 학문만 연구하 고 책이나 출판하면서 귀족들의 의식을 돌리는 식으로….」 「피브드닌처럼 말이지요?」 남자의 은근한 말에 여인은 화끈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가벼운 장난에 반응이 너무나 열렬하자 도리어 무안해진 사내는 갑자기 더워진 햇볕을 원망하며 땀을 연신 닦아대고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런 생각으로 대답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굉장히 영리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난 별을 보면서 모든 이의 운명은 대략 적으로는 점칠 수 있어요. 곧 별빛이 서로 얽혀 혼탁하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욱 불태워야 할 겁니다. 그 청년 은 빛날 겁니다. 자신을 태움으로써…. 후훗, 이러니까 재밌지 않겠습니까?」 양쪽 미행자 일행이 약간은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무렵,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장년의 사내는 골목길에 놓인 그릇에 작은 동전을 던졌다. 그리고 비굴하게도 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 저기 골목 밖으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47- 「우하하하핫! 뭐야? 골목길에서?」 골목길에서 헤매던 피브드닌을 주워온 것은 네메이나였다. 배를 움켜잡고 바닥 을 온통 뒹구르는 토루반은 방문이 열려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굴러갔다. 피 브드닌이 문을 닫자 가구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신음소리가 아련히 메아 리쳤다. 계단까지 굴러간 모양이다. 「고생 많으셨군요, 피브드닌.」 끼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방향치인 사내의 어깨를 토닥거리 며 잠시 시즈는 〈미행자 때문에 골목길로 들어가긴 했지만, 토루반들이 오지 않았다면 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까?〉하는 끔찍한 상상을 떠올려 보았다. 격동이 지나쳤는지 너무 세게 두들기고 만 시즈는 아파하는 동류를 거들떠도 보 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쓸쓸히 서있는 아릴에게 다가간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가루 밖에 남아있지 않은 봉지를 내밀었다. 「이건…. 무슨 가루인가요?」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충격에 잠시 난간에 기대여 몸을 가누던 시즈가 붉어 진 얼굴로 대답하려는 순간, 「이게 뭐야?」하고 봉지를 채가는 네메이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를레스가 슬그머니 껴들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미용가루 아니야? 물에 타서 몸에 바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것 말야.」 「정말!? 시즈, 아릴에게만 주다니 너무하는 것 아니야?」 시즈는 〈너는 아까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잖아 - !〉라고 말하려 했지만 네메 이나의 속사포같은 입술은 찰나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릴, 넌 더 이상 예뻐지면 죄악이야. 이건 내가 잘 쓸게. 후훗!」 혹시라도 뺏을라 자기방으로 도망쳐버린 그녀 뒷모습의 여운을 - 네메이나가 달 려가느라 쿵광거리는 진동의 여운 - 느끼던 아릴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쩌억 벌린 채 굳어버린 시즈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 가루는 피부를 좋아지게 하는 게 아닌가요?」 「좋아지겠지요. 어쨌든 과일로 만든 것이니까.」 〈단, 부작용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주의사항을 마음 속 으로 덧붙였다. 한동안 말이 없는 두 사람, 서늘한 바람이 불어 아릴의 가지런한 머리결을 흩 어 놓았고, 시즈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혼돈을 즐겼다. 사실 그들은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시즈는 앞을 볼 수 없었고, 다시 만났을 때는 아릴의 피투성이로 더러워진 모습을 보아야했다. 감상을 말하자면, 베란다에 서있는 여인은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위태하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미(美)를 풍기고 있었다. 천족이라고 말할만한 가치가 있군. (세일피어론아드에서 천족은 다름아닌 천사다.) 「몸은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요. 저와 같은 원인의 증세…. 맞죠? 하지만 회복 이 무척 빨라요. 난 2주일에 가까운 시간을 고생했는데….」 「마력 소모량이 차원을 달리 하니까요.」 입을 열면서 아릴은 애수에 찬 시선으로 멀리 서쪽 하늘 구름에 걸려있는 햇빛 의 끝자락을 잡았다.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날리는 머리카락의 간지럼을 즐기 던 청년이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릴의 팔을 잡았다. 「밖에 나갈까요?」 「에?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유레민트가 철벽처럼 지키고 있는걸요.」 「막히면 돌아가라는 법칙이 있지요. 하지만 걸어내려갈 수 없다면 뛰어내리라 는 법칙은 지금 만드는 게 좋겠군요.」 성투사 헤모도 놀란 움직임, 세찬 바람이라기 보다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줄 기 부드러운 바람처럼 가볍게 아릴을 안아들었다. 「흐읍!」 여인은 서늘한 공기를 급하게 들어마시며 엉겹결에 시즈를 끌어안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인 시즈는 망설임없이 3층 밖으로 몸을 날렸다. 「시, 시즈! 그녀는 환자란 말이에요!」 심상치 않은 동태에 예의주시하고 있던 유레민트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뒤를 쫓아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누군가 붙잡았다. 보를레스였다. 「아릴도 산책이 필요할 겁니다. 시즈도 대륙제일이라는 학식자이네, 설마 그녀 의 몸상태를 살피지 못할까요? 하루종일 아릴을 돌보느라 힘드셨을 텐데 한잔 하 면서 피로를 풀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겨울에는 그저 보드카가 최고죠.」 「엘프들은 속이 튼튼한 모양이군요. 내장이 타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들이 식당 겸 주점으로 내려가니, 토루반은 이미 테이블 하나를 차지앉아 구 른 속을 술로 달래고 있었다나? 「아릴 양이 말하셨던 저와 같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대 자신이 아니 었습니까?」 한편, 시즈는 아릴를 살짝 부축한 상태로 달아오른 몸을 어서 차가운 저녁기온이 식혀주길 바라고 있었다. 뛰어내릴 때는 멋졌으나, 착지가 불안정하여 발을 딛은 후 다시 엉덩방아를 찌었기 때문이다. 아릴은 충격을 받지 않았으나, 그의 멋진 이미지가 한순간 무너진 건 사실이다. 「쿡쿡…. 설마요. 머리에서부터 차이가 나잖아요? 아무리 자연의 음악을 만드는 자들이라고 해도, 당신처럼 무모한 마력을 쏟아붙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어요, 쿠훗!」 「자꾸 이상하게 웃지 좀 말아요!」 「미, 미안해요. 절대로 그 착지 때문에 웃는 게 아니에요. 그 때 시즈의 얼굴이 너무나 재밌어서….」 흰 붕대를 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아릴,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불만스런 표정을 짓다가 금새 미소를 띄는 시즈. 「왜 어울리지 않으십니까?」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왕자와 신관 또한 하늘 귀퉁이에 걸려있는 달빛을 맞고 있었다. 데미노머는 풍성하던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간간히 추위에 몸을 떨는 나 무에 기대었다. 「무슨 소리, 나도 이렇게 자유로움을 느껴본 적은 없어. 이게 즐기는 것이 아니 면 뭐지?」 실제로 왕자는 왕궁 밖을 나서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에 앉 은 이들이 3명이나 데미노머와 함께 있다는 말이 잠시의 자유를 허락받았지만 곧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면 너무나 안전하고 편안한 구속에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군. 우리 누님만큼이나 아름다워. 아릴이라고 했나? 용사 샤르아릴의 이름과 비슷하군. 하지만 용사가 저런 가냘픈 여인일 리는 없겠지만 ….」 「아스틴 왕국의 제 2 왕녀께서 빼어난 미모를 가지셨다고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 정말 아름다운 누님이시지. 단, 굉장한 괴짜성격을 가지고 계셔서 요즘 은 네글로드 귀빈관에서 취미로 요리를 하고 계신다더군요.」 「예? 귀빈관에서?」 「게다가 외모하고는 다르게 미각은 완전히 도마뱀 수준이라서, 누나가 만든 요리 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요리라고 할 수 없지. 그렇다고 왕녀가 만든 것을 맛없다 고 말했다가는 목이 날아가테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은 외국의 손님들에게 음식 을 내가는 모양이야. 누님은 쓸데없는 것에 철저한 사람이라서 다 먹은 접시에 남 은 요리를 검사하지. 거짓말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시종들은 그 남은 요 리를 다 먹어 치운다더군. 그 수고스러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아버지,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사례가 있으실 모양이야.」 왕자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그 날 음식의 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있는 것 같아 헤모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해는 이미 사라지고 푸른 달빛만이 비추는지라 왕자 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이 말은 비밀이네. 누님이 알면 왕궁이 날아가는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곤란해. 그래서 귀족 중에서도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몇 안돼.」 그 때 음식을 남길 마음으로 포크를 놓을 때마다 쏟아지던 처절한 살기, 이제서 헤모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죽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내뿜는 생존의 용기였 던 것이다. 「저도 먹어보았습니다만….」 「사제께서도? 죽을 뻔 했겠군.」 그들은 아릴과 시즈와는 다른 형태의 동료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48- 그 날 이후 시즈 일행은 평범한 관광객같이 조금은 편안한 여정을 지낼 수 있 었다. 실제로 아스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였던 〈또 다른 고향〉에 관한, 이 미 마무리된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여유가 생긴 그들은 삼삼오오 몇 명 씩 갈라져 관심사와 사정에 따라 원하는 일이나 취미로 시간을 보냈다. 헤모 사제는 전부터 궁금했던 타국에 대한 교단의 포교활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벨루온과, 그 주변 도시의 신전을 방문했다. 비밀결사단체나 다름없는 성 투사의 타국에 세워진 신전 방문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신전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신전 전사들의 훈련지도를 부탁했다. 시즈에게 끌려다닌 이후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헤모가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신관장의 손을 잡았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네메이나는 유레민트에게 아스틴의 글과 엘프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처음에 는 기초만 가르칠 생각이었던 유레민트는 그녀가 의외로 놀라운 암기력을 보이 며 솜이 물을 빨아들이 듯 지식을 흡수하자 가르치는 것에 재미를 느꼈는지 얼 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학문과 문학을 익히게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아릴에게서 갈취한 미용가루를 아껴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노력에 하늘은 감동하였는지 날이 갈수록 소녀는 갓 구운 케익처럼 뽀송뽀 송한 피부의 주인이 되어갔다. 유레민트가 점차 스승의 탈을 뒤집어쓰고 닦달하고 네메이나는 불평어린 신음 과 한숨을 토해내며 지내는 동안, 시즈 또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 고 있었다. 금속 공예나 보석 공예를 즐는 대부분의 드워프들과는 달리 토루반은 목공예 에 탁월함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감상한 시즈는 완전히 매료되어 그 날로 손에 나무토막과 날카로운 공예칼을 쥐고 살았다. 시즈는 토루반과 함께 데미노머 왕자의 수업에도 함께 참관했는데 또래의 이해해줄 학문친구가 없었 던 왕자는 스승의 수업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시즈와 토론하는 것을 매우 즐거 워했다. 드워프인 토루반은 수학의 응용에 대해서 특출하게 뛰어났는데 대부분 건축술 에 이용되기 때문이었다. 그를 지켜보면서 시즈는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아름답지 않지만, 다른 존재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창조하 는 종족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엘프를 동경하기보다 환경을 아름답 게 하므로 자신 또한 아름다울 수 있는 드워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루는 왕자가 귀빈관으로 시즈를 찾아 놀러왔는데 그 자리에서 요리에 전념 하고 있는 제 2 왕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데미노머의 누나라는 사실에 시즈는 놀라면서 왕녀의 취미생활에 대한 말을 주고 받았는데 이와 같았다. 「만약 드래곤의 왕국이 있었고 그들의 사절이 아스틴에 왔다면, 그 사절들조 차 전하의 요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흐뭇해진 왕녀는 팔목에 직접 차고 있던 팔찌를 끌러 시즈에게 내어주고는 〈맛은 충분하니까 이제 요리에 미(美)를 추구해야 하겠다〉는 말을 늘어놓으 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시종들이 매서운 눈초리를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었 다. 「정말 드래곤들이 미식가입니까?」하고 귀빈관 밖으로 나온 후 궁금해하던 보를레스가 물었고, 대답한 것은 데미노머 왕자였다. 「도마뱀 중에서는 대단한 미식가지요.」 보를레스는 또다시 시즈에게 미행이나 위험인물이 붙을 것을 대비하여 언제 나 함께 있었는데 유레민트를 동경할 정도로 학문에 어느 정도 길이 잡혔기 때문인지 토루반과 젊은 학자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즐거워했다. 학자들 이라고 해서 매우 철학적인 내용의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역설과 배꼽잡을 비 유와 묘사를 이용한 언어유희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아릴은 헤모의 소개를 통해 레이모하 신전의 성법술을 받았다. 이미 유레민 트의 엘프식로 부러진 뼈가 거의 붙어있던 양팔은 깨끗이 완쾌되었고 떠날 무 렵에는 눈도 보를레스와 검술대련을 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오늘로 마지막이군요.」 피브드닌의 저택에서 시즈 일행의 아스틴 마지막 연회가 열렸다. 사람이 많 지 않았기에 규모는 간소했지만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국가 비밀 회의라 도 있는 것으로 중인들은 오해할지도 모른다. 벽마다 타오르는 불과 천정에 매달려 그 빛을 이리저리 화려하게 반사시키는 수많은 광석과 유리들, 그 아 래는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이 늦는 걸?」 「원래 준비가 많은 종족이니까.」 퉁명스럽게 말을 하지만 눈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2층 계단의 휘장을 쏘아보는 게 다들 기대하는 눈치였다. 단 한명만 제외하고 말이다. 「헤모 사제는 사제가 된 것이 후회스럽죠?」 싱글대는 시즈의 시선을 피하며 헤모는 음식을 우걱우걱 입에 처넣었다. 시 즈는 누가 애주가 아니라고 할세라 한 손에는 잔, 다른 한 손에는 와인병을 들고 키들거렸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피브드닌 저택의 시녀, 위나가 드레스를 입고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뒤이어 유레민트와 네메이나, 아릴과 제 2 왕녀 루이란이 따라 계단을 내려왔 다. 하늘거리는 색색의 드레스자락, 여인들의 수줍은 듯한 미소에 남성들은 은 말을 잇었다. 멀뚱히 서있는 그들은 제치고 나선 시즈는 가볍고 단정한 동작으로 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살며시 아릴이 손을 얹자 부드럽고 유연한 걸음걸이로 그녀를 회장으로 인도하는 시즈. 그 때까지 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남정네들에 게 유레민트는 찬바람이 섟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곳에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은 많지만 숙녀를 에스코트할 줄 아는 신사는 레이서스 후작 공자 한분 밖에 없는 모양이군요.」 그제서야 정신이 버뜩 든 남자들은 앞으로 걸어가 여인들을 에스코드했고 연 회장은 천천히 화기애애해지기 시작했다. 「데미노머는 평범한 저녁식사보다 연회를 더 많이 겪었으면서도 그렇게 긴장 을 했나요?」 루이란이 고개를 갸웃하고 호기심어린 미소를 짓자, 그녀의 동생의 얼굴은 즉 각 화르륵 달아올랐다. 「시즈 군은 엘시크에 돌아가면 뭘 할 생각이오?」 잔을 붙이치며 사람들은 서로의 앞날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던졌다. 「고대문헌을 좀더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필요하다면 유적으로 여행도 가볼까 생각 중이고요.」 「하아…. 혹시 볼케아스 쪽으로 가게되면 미리 연락을 해주게. 난 고대유적 에 남겨진 벽화분석, 토루반은 유적의 건축술에 대한 연구로 그 쪽에 가 있을 테니….」 그 말에 번뜩 고개를 쳐든 데미노머, 도끼같은 눈동자를 토루반을 향해 내리 꽂았다. 「뭐에요? 토루반, 또 여행이라고요? 앞으로 몇 년간은 출국할 만한 일이 없 다고 하셨잖습니까?」 「아.핫.핫.핫.핫. 그, 그게 말이야…. 피브드닌이 꼬셨어, 꼬셨다고!」 「무슨 발뼘이십니까? 토루반! 분명히 고대건축기술을 조사할 유적에 고대경 재생활에 대한 벽화가 남아있다면서 함께 가자고 한 것이 누군데!」 「피브드닌, 이 못된 녀석! 네 녀석이 어미 뱃속에서 열심히 자고 있을 때, 내 가 네 어미 배를 쓰다듬어준 것을 잊었단 말이냐!」 「기억도 못하는데 뭘 잊는단 말입니까?」 「흐흐흐…. 토루반 제사(帝師), 믿어드릴테니 그렇게 흥분하지 마십시오. 다 만 거짓으로 판명되는 행동, 즉 출국에 대한 보고가 제게 들어온다면 당장 왕 족 불경죄로 다스리겠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파티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는 있는 법, 결국 구석에서 혼자 독하기로 유명한 루히마 주(酒)를 홀짝이며 가끔 피브드닌을 살기어린 눈동자 로 째려보는 늙은 드워프, 소외자가 하나 생성됐다 「아릴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아니에요. 저는 할 일이 있답니다.」 싱그럽게 찰랑이는 청은발에 보를레스는 아쉬운 듯 와인을 한모금 들이켰다. 해산물을 열심히 탐닉하던 시즈가 새우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며 넌지시 입 을 열었다. 「맞아요. 아릴은 〈그〉를 찾아야 해요. 빨리 찾길 기원하겠습니다, 아릴」 「고마워요, 시즈」 한편, 해산물에 와인만을 고집하는 시즈와는 달리 모든 음식을 뒤집어가며 맛을 보는 네메이나에게 데미노머가 망설이며 다가갔다. 「저, 저기…. 네메이나 양도 내일 떠나실 건가요?」 「흐음…. 글쎄, 그건 왜 묻죠, 전하?」 흑단같은 머리칼이 휘르르 소녀의 몸을 휘감고 팽그르 돌았다. 입을 오물거 리며 뒤돌아선 네메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얼굴을 왕자의 눈 앞에 들이 댔다. 「그, 그, 그게….」 「미용가루가 효과를 발휘한 덕인가?」 드레스 탓인지 은은한 불빛 탓인지 오늘따라 매혹적인 소녀로 돌변한 네메이 나와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는 소년을 바라보며 시즈가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 속에는 〈빛의 시각적 효과〉라는 책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떠올랐 다. 〈붉은 빛은 고기를 신선하게 보이게 하며, 촛불처럼 은은한 불빛은 사람들의 얼굴선을 희미하게 만들어 보다 미남미녀로 보이게 한다.〉 「역시 빛 때문이야.」 시즈는 고급의 와인에서 풍기는 달콤하고도 씁쓸하니 남는 향을 음미하며 결 론을 내렸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한 그는 온화한, 그리고 약간은 애수에 잠 간 미소를 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아니면 취했거나….」 그럴지도 몰라, 즐거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잊었던 가족을 떠올리고 말았으니 까…. 사람들도 취하고, 그들의 눈에 달도, 별도 취하는 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49- 「이제는 알고 계시겠지요? 아스틴과 엘시크를 가로막은 산맥, 두러크 산맥입니 다. 저 곳만 넘으면 이제는 엘시크입니다.」 「그래요. 아스틴에 오면서 힘들게 넘었던 곳이니까…. 사론도 고달프겠네요. 사 실 저희를 고국까지 데려다줄 의무는 없지 않았나요?」 「뭐 저 말고도 대부분 시즈 님과 헤모 사제를 수행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사론은 어깨를 움추린 채 말 위에 오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 기지개하듯 팔 을 쫘악 뻗어 굳어진 근육을 자극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춤추는 칼〉의 사람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농부인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미래는 다양하잖습니까?」 시즈의 반문에 마차에 타고 있던 헤모 사제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대답했 다. 「분야는 다르지만 다들 그들의 분야에서 열심히 세상을 훔치고 있겠지.」 「아무래도 보를레스 님만 뒤떨어진 것 같습니다.」 「하…. 그런 거 같군. 네메이나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보를레스는 슬쩍 지나쳐온 길을 돌아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보호 받아야 할 어린 새처럼 느껴지던 소녀가 내보였던 강한 의지의 여운이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 남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유레민트에게서 언어학과 생물학을 배우고 싶어. 보를레스는 시즈를 따라가도 록 해. 난 유레민트와 한동안 함께 살겠어.」 꼿꼿히 들린 턱,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소녀는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순간, 보를레스는 새장을 벗어난 한 마리 새를 떠올렸다. 그래, 이제 너의 마음에 따라 날고 싶단 말이지!? 좋아, 높게 날아보거라. 머리 를 천천히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소녀는 기분좋은 듯 뺨을 부볐다. 늘상 이리저 리 뻗혀있던 머리카락은 처음 본 사람이라면 예의바른 귀족집의 자녀로 보일만큼 깔끔하게 빗겨 윤기가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 「그럼…. 유레민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운 엘프, 약속을 지키는 엘프, 보를레스는 그 말이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길 바라며 등을 돌렸다. 「그런데 아릴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시즈, 자네는 알지?」 모두를 놀라게 했던 미모의 여성은 벨루온을 떠나고 그 날밤, 홀연히 사라져 버 린 것이다. 헤모는 유일하게 걱정하지 않던 무신경한 청년에게 물었지만 그도 역 시 고개를 저었다. 「전 천리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얼굴 을 후드로 가릴 수 있는 로브를 걸친 채 쉴 새없이 발걸음을 옮길 겁니다. 그리 고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두 알 수 있을 겁 니다.」 그들은 제각각의 생각을 하며 말에게 몸을 맡겼다. 긴 여정에 지쳐가는 일행을 가끔 불어온 바람이 위로했지만 끝없는 무료함에 몸은 추욱 늘어져 갔다. 「하아아암!」 누군가의 하품에 사람들은 전염이 되어가는지 저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따분함 을 고요하게 외쳐댔다. 분명히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올 때는 많은 만남과 힘든 사건을 지나친 길, 그러나 되돌아가는 길은 이별을 끝낸 이들의 조그만 갈 등도 없는 안전한 길. 「마을이군요. 오늘은 저기서 쉬어가도록 할까요?」 아담한 집들은 번성한 도시의 빽빽함과는 달리 듬성듬성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즈, 아직 한낮이오.」 얼굴을 찡그린 보를레스의 추궁에 시즈는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그의 눈동자에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노년같은 청년들이 들어왔 다. 보를레스는 도저히 강행군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끄덕이는 그의 고개에 수행원과 시즈는 환호성을 질렀다. 훈련과 수련으로 강한 체력을 가진 수행원 들은 단지 지루함에 힘들었지만 시즈는 이미 몇 일간의 여행으로 몸이 지쳐버 려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작은 마을에 집만큼 커다란 목책이라니….」 목책만큼이나 거대한 마을의 문을 지나며 시즈들은 의아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10여 명이나 되는 기사들과 마차가 들어오자 마을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창을 열고 고개를 빼꼼이 내민 아이들과 여인들, 일손을 멈추고 일 행을 응시하는 남자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다가와 마을사람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누추한 마을에 기사분들께서 왠일이십니까?」 「이 분은 엘시크의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시오. 아스틴의 명성높은 아스틴 네글로드에서 초청을 받아….」 「사론. 어려운 소개는 그만둬요. 노인장께서 이 마을에 촌장이십니까?」 「아, 예. 그러하옵니다.」 수행기사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눈 앞의 청년이 높은 귀족이라는 것을 안 노인은 고개를 아플만큼 꾸벅이며 대답했다. 귀족들에게는 익숙한 대 접이요,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시즈는 아무래도 그런 것들이 익숙치 않았다. 말에서 내려 가볍게 목례를 한 그는 온화한 어조로 공손하게 말했다. 「하루 묵어가고 싶은데 여관이 있습니까?」 「여관이 있긴 합니다만, 왜소하여 공자께서 묵으시기에 꺼림직하지 않으실지 걱정이 됩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깔깔해 듣기에 조금은 거슬렸지만 귀족 앞에서 위축됨이 없 이 시원스러웠다. 「저희는 숲이나 들에서 노숙을 할 때도 있습니다. 괜찮으니까 안내를 해주시 겠습니까?」 보통 서민들의 마을에 귀족들이 방문하면 마을은 피해가 막심하기 마련이었 다. 고급스러운 귀족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 마을이 입는 상처는 적지 않았 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시즈들의 방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시즈의 정중한 어투와 촌장을 대하는 태도는 마을 사람들의 불안감을 없애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덜어낼 수는 있었다. 수행원들은 아 직 권위주의에 물들지 않은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시즈처럼 공손하지는 않았지 만 정중했고 곧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경계를 하나 둘씩 풀기 시작했다. -50- 간밤에는 눈이 내려 세상을 수놓았고 아침 햇살이 흰 들판 위에 영롱히 비치는 가운데 시즈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몽롱한 표정으로 여관의 계단에 앉아 있었 다. 「좋은 아침이네요. 간밤에는 편안하셨나요?」 누구지? 그렇잖아도 깨어나기 힘든 아침에 꿈결같은 음성으로 속삭이는 것은… . 졸음을 떨치지 못한 모양세로 고개를 끄덕이자 감미로운 음성은 귀엽게 킥킥 거렸다. 「오랜 여행으로 아직도 피곤하신 것 같은데 좀더 주무세요.」 도리도리도리. 웃음 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빗자루 소리에 맞추어 시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개슴츠레하게 떠진 실눈 사이로 가냘픈 몸체의 여자가 빗자루질을 멈추고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살짝 미소를 띄운 눈은 촉촉히 호기심과 물기가 어려 영롱하니 희미한 빛이 아른거려 시즈는 작고 여려보이는 그녀가 눈물이 많은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많이 내렸어요. 어젯밤엔 함박눈이 내리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다웠는데 보셨나요?」 「아니요. 보지 못했습니다. 어제는 일찍 잠들어서….」 청년은 어제 저녁, 자신을 〈에레나〉라고 소개했던 여관의 마스코트(?)인 아 름다운 여종업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때, 〈아름답다〉라기보다는 〈귀엽다〉라는 생각이 첫인상으로 떠오를 정도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인은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않자, 물결처럼 검푸른 머리카락과 대조되도록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에레나」 「아, 예!」 「이름을 잘 불려보지 않은 모양이군요. 놀랄 것 없어요.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데 대답해주시겠어요?」 「물론이에요.」 「이 곳은 전쟁에 시달라고 있나요?」 「예? 무슨 말씀이세요?」 「전쟁에 휩쓸린 마을처럼 너무 크다고 생각되어서요.」 아직도 졸음을 깨지 못한 청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에레나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고서야 그가 무엇을 가르키고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조는 모습이 귀엽직한 귀족청년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통나무 방책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아…! 으음, 전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이해하기 힘들어서인지 졸음 때문인지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마을 촌장 의 집에서는 일단의 무리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번에 온 기사들은 꽤 좋은 사람들 같던데….」 「그래요. 어제 저녁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즐겁게 식사를 마치더군요. 소개를 하 는 것보니 상당히 거창한 신분의 귀족인 것 같은데 기사도를 제대로 아는 기사들 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은 시즈 일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 분 어제 도착한 기사들에게 좋은 인상은 받은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행원들이 권력주의가 난무하는 정치계나, 통상의 기사단에 귀속되지 않고 학자들을 호위하 는 임무를 가진 네글로드의 호위 기사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리는 더이상 용병이나 기사들을 불러올 재물이 남 아있지 않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모두 건장한 청년들이었고,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니까요.」 「문제는 그들이 갑작스런 의뢰를 받아드리겠냐는 것입니다.」 「호위하고 있다는 그 학자분께 부탁을 드려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제 첫인상 부터 매우 부드럽고, 태도도 공손하지 않았습니까.」 「흠흠, 그럼 촌장인 내가 직접 말씀드려보도록 하지.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없애야 돼.」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르 여관으로 몰려갈 무렵, 시즈 일행은 막 아침식사를 끝낸 상태였다. 그들은 시즈와 입구 계단에 함께 앉아 눈을 가지고 장난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흑진구 같이 동글동글 커다 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시즈의 농담아닌 농담에 함박웃음을 짓자, 허리까지 무거울 듯 덮힌 풍성한 감청빛 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리는 청순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시즈는 정말 빠르군. 언제 저런 미인을 사귄거지? 정말 마땅찮은 녀석이야.」 보를레스는 공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시즈를 털털한 친구처럼 대했는데,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지 식당의 남자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음식 을 구겨넣었다. 그 때 갑자기 시즈가 여관을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숙연하진 식당, 시즈는 영문 도 모른 체 빈 테이블에 앉았다. 촌장 노인이 뒤따라와 앉았고 에레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촌장님, 다시 말씀을 해보세요.」 「예. 저희 마을 사람들은 국경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숙박업과 그로 인한 부가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주수입은 저기 보이는 산의 늪지에서 나오는 버섯을 팔아서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전부터 버섯이 특별 할 정도로 많이 나오는 늪 근처에 괴물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괴물 때문에 버 섯을 캐러간 사람들이 계속 다쳐서 점점 마을이 궁핍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빈민촌이 되어버릴 겁니다. 제발 기사분들이 도와주십시오.」 창 밖에서 고개를 내민 채 마을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시즈의 붉은 입술을 긴장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촌장이 더욱 목을 꺽어 테이 블 위에 머리를 대자, 시즈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볼을 긁적이며 그는 사론과 수 행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라고 하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넵킨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사론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괴물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싸우란 말입니까?」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다, 다른 분들도….」 「저희도 사론의 생각과 같습니다. 정보가 없는 싸움은 개인적인 결투라도 무모 하다고 저희는 배웠습니다. 무모한 전투를 하는 것은 기사의 조건에 벗어나는 일이죠.」 실망한 촌장이 머리를 힘없이 떨궜다. 그런데 음식을 나르던 에레나가 갑자기 촌장과 시즈가 있는 테이블에 다가와 다소곳이 앉고 말했다. 「잠깐만요, 제가 알아요.」 「예? 아가씨께서?」 「에레나?」 이웃이던 촌장과 마을 사람들도 놀라는 가운데 에레나는 대수롭지 않은 미소를 띄우고 테이블 위의 물을 조금 마셨다. 「저도 얼마 전에 갑자기 돈이 필요해서 버섯을 캐러 갔었어요. 거기서 나무의 밑둥을 보았죠. 기둥은 잘려나간 나무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정말 컸어요. 뿌리 가 지네의 다리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는데 신기하게도 늪 주위의 일정이상 밖으 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죠. 안그랬다면 전 벌써 늪 속으로 가라 앉아있었을 테니까요.」 「후우…. 아마도 〈브로큰스도무〉인 것 같군요. 하지만 보통 나무 기둥 정도 의 크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처치해주실 겁니까?」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잠시 방 안에 들어가더니 무장을 하 고 나왔으니까….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보를레스가 어깨를 으 쓱하고 말했다. 「가끔은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일도 괜찮겠지. 모두들 안 그래?」 -51- 고운 흰색 비단의 바닥을 뚫고 발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게다가 두러크 산 맥에서 뻗어온 산줄기는 매우 가파르기 짝이 없어 한동안 체력운동을 소홀히 한 시즈는 수행원들을 쫓아가느라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쯧! 레이모하여…. 산 하나도 오르지 못하고 벌써 당신의 품을 찾아갈는 이가 있습니다. 시즈 자네, 숙녀인 에레나 양께 부끄럽지도 않나?」 헤모가 신을 찾아가며 놀려댔지만 시즈는 눈밭이 자신의 침대인양 드러누워 움 직일 줄 몰랐다. 에레나가 가져온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호흡을 안정시킨 그는 풍성한 털이 절대로 추울 것 같지 않은 모피 안에서 얼굴만 드러낸 여인을 보며 말했다. 「위험할 텐데…. 에레나,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후후훗…! 공자 님의 동료분들은 저보다 공자 님이 더 걱정스러운 모양이신데 요?」 「정답이야. 시즈, 위험할텐데…. 그 몸으로 오기부리지 말고 돌아가지 그래? 에레나 양이 이제와서 돌아가면 우리는 이 산에서 그 놈의 브로큰스도무를 찾느 냐고 몇 일동안 밤새워 헤매야할 걸.」 보를레스가 시즈의 말투를 흉내내며 빈정대자 수행원들도 입을 크게 벌리고 웃 어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시즈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받아넘겼지만 내심 제플 론에 도착하면 양아버지에게 보를레스 처분을 부탁드리리라고 마음 먹었다. 에레나는 스스럼없이 히히덕거리며 떠드는 기사들과 풀이 죽은 것을 애써 추스 리는 시즈의 대조적인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아니에요. 주위에 비해서 저기 정면에 보이는 숲이 굉장히 무성해보이죠? 바로 저 안에 늪이 있어요.」 「그럼 다 도착했었잖아!? 이제 에레나 양은 그만 돌아가세요.」 「세이서스 공자 님은 돌아가지 않고요?」 에레나가 시즈를 물고 늘어지자 뼉다귀도 아닌 장본인은 미간 사이를 종이짝처 럼 구겼다. 결국 시즈는 체력을 키울 것을 다짐하면서 그녀의 동행을 허락한다. 「어째서 이 곳만에 이렇게 풀이 무성한 겁니까?」 한 눈에 보기에도 잡초조차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키가 큰 것을 가리키며 사론 이 신기한 듯 묻자 에레나는 「그, 그건 저도 잘….」 「시즈 님은 아시겠습니까?」 아스틴 네글로드에 대해 경의를 품고 있는 한 수행원이 묻자 고명한 청년학자 주위 산세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멀리 구름보다도 높이 솟아있는 산등성 이를 가리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산 속에 움푹 들어간 분지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 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던 간에 공기는 저 높은 산들을 넘어서 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점점 추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죠, 에레나?」 「네, 여름에 마을이 따뜻하다고 간편한 옷을 입고 산에 올라오면 몹시 추워요.」 「예. 그와 마찬가지로 바람 또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가워지고, 반대 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올라갈 때의 기온의 변화량과 내려올 때의 기온변화량의 크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 차이와 이 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되지 않고 있다 는 것을 표현했고, 헤모 학생은 건방지게도 선생님에게 반말로 질문했다. 인자하 게도 선생님은 〈내, 너희의 우둔함을 아노라.〉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산의 모습을 가정해가며 설명을 계속했다. 「들어보세요. 올라갈 때는 기온이 조금씩 감소되고 내려올 때는 많이 증가된다 면 산을 넘어오기 전의 바람보다 넘은 후의 바람은 더 따뜻할 겁니다. 그렇다면 바람이 저 높은 산등성을 넘어서 도착한 여기의 바람은 주위보다 따뜻하다는 말 이죠. 그리고… 혹시 물의 나라인 실베니아에 가보신 분이 계십니까?」 보를레스는 머리가 팽팽 도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다른 손을 들었다. 「나무의 크기가 어떻던가요?」 「컸어. 바로 이곳처럼.」 「마찬가지입니다. 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것은 빛, 온도, 그리고 수분입니다. 빛이야 하늘에서 내리쬐니,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상관하지 맙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도는 방금 전 설명한 현상으로 다른 곳보다 따뜻하겠지 요? 수분은 늪이 있으니 당연히 충분할 겁니다.」 「그래서 여기가 따뜻했군요!?」 한 편의 강의에 사람들은 젊은 학자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들은 숲 속에 옹기 종기 모여서 눈망울을 반짝이며 가르침을 받는 어린 엘프들을 연상시켰다. 존경 과 경의가 살아숨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시즈는 머쓱해진 미소를 지으며 헛기 침을 연발했다. 「흠흠, 자아… 어서 나무괴물이나 퇴치하러 갑시다.」 # 「학자들이란 대단하군요.」 걸음을 옮기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에레나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즈가 설명한 것은 푄 현상으로 세일피어론아드의 학문으로는 밝힐 수 없는 미지의 현 상이었다. 만약, 토루반이나 피브드닌 같은 자연과학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자 가 한명이라도 끼어있었다면 그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로군.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늪 근처에 있을 거에요.」 「그러고보니… 에레나, 왜 몇 년이 되도록 괴물을 내버려둔 겁니까? 용병을 불 러서….」 「불렀어요. 8번 정도?」 「예?」 잠시였지만 사론의 절륜한 얼굴이 음식놓친 원숭이처럼 멍청하니 일그러지는 것 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일행 또한 그리 보기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에레나는 그 들의 얼굴에서 작은 경련이 일어나는 모습을 즐기듯이 바라보다가 싱긋하고 웃으 며 말했다. 「다들 자신있게 떠났지만 돌아온 용병은 없었죠.」 갑자기 나뭇가지를 스치며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음산한 지옥의 웃음소리처럼 생 각됐다. 침을 꿀꺽 삼키는 사론의 눈동자에 늪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이 비 췄다. 「모두 늪에서 떨어져!」 말과 동시에 늪의 피부가 거칠게 터져나가며 왠만한 사람의 허리만한 나무줄기가 보를레스를 덮쳐왔다. 「흐아아아압!」 사론의 경고에 대비하고 있던 사내는 장신의 힘을 과시하듯이 번개처럼 덮쳐오는 그것을 잘라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서서히 퇴치해야할 괴물, 브로큰스도무의 거체 가 늪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잠깐, 사론…. 보통 나무의 기둥 크기라는 게 저 놈의 줄기를 두고 한 말이었나 ?」 보를레스의 질문에 사론은 울 것 같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아, 아무래도 제가 본 책의 저자가 줄기만 본 모양입니다.」 -52- 브로큰스도무의 줄기 공격은 덩치와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시즈들을 압박해 왔다. 사람 허리만큼이나 굵은 두께가 속도있게 움직이는 것을 자르거나 타격을 입히는 것은 대단한 고수가 아니면 꿈도 못꾸는 일이었기에 보를레스와 헤모같 은 경험이 많은 실력자를 제외하고는 반격은 커녕, 급박하게 피하는 것에도 땀을 비오듯이 흘렸다. 「모두들 한 곳에 모여!」 한 수행원의 외침에 한 곳에 모인 기사들은 힘을 모아서 한 가지에 집중공격을 해서야 하나를 베어낼 수 있었다. 헤모와 보를레스도 몇 개의 잔가지를 잘라낸 후 지쳤는지 등을 서로에게 기댄 채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단숨에 달려가서 몸통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너무 굵어 검이 들어가다 부러져 버릴 텐데다가 무릎까지 쌓인 눈은 도망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헤모와 보를레스, 그리고 수행원들의 눈은 절망으로 채색되어 갔다. 「토루반은 여행을 많이 다녀보았으니까 몬스터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죠? 도 감에 보면 많은 몬스터에 대해서 설명이 나와있는데, 실제로 몬스터들을 만난다 면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할까요?」 막 수학에 관하여 수업을 시작한 토루반은 갑자기 데미노머가 수업내용과는 관 련이 없는 질문을 하자 당황했다.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왕자는 시즈가 읽 다가 내던지고간 〈인디움프스 몬스터 생태학〉을 보물이라도 되는 양 품에 꼭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토루반은 자리에 없으면 서도 자신의 수업을 방해하는 어리숙한 청년이 몬스터에게 맞아죽길 기원하면서 분필을 내려놓았다. 정신이 모험을 떠난 왕자에게 수업은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음…. 인디움프스의 생태학 시리즈는 정확한 편이지요.」 「오차가 있다는 뜻이군요?」 그건 수학 노트라고 울부짖고 싶었지만 이미 왕자는 들고 있던 공책을 펴고 생 태학용으로 바꿔버린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토루반은 자신이 혼자서 여행을 다니 는 동안 이 사춘기의 왕자는 얼마나 밖의 세상을 동경해왔을지 안쓰러웠다. 「우선 슬라임이 그렇소. 사람들은 슬라임을 초보 모험자의 사냥용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슬라임은 절대로 한 두 마리씩 다니는 일이 없소. 무리를 이루어서 다니 는 놈들은 평소에는 매우 느리지만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매우 재빠르게 상 대를 덮치오. 몸 전체에 독점액이 흐르는 슬라임의 몸체에 닿기만 해도 사람은 금 세 마비를 일으키기 때문에 공격을 당하면 매우 위험하지요.」 「슬라임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몬스터였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데미노머는 들고 있던 책 을 들추어봤다. 「아마 서적들에는 별 거 아닌 놈으로 나와 있겠지요. 심지어는 갖은 신화와 전 설에서도 용사들의 여행 초기의 실력향상을 위해 몸바쳐 헌신하는 몬스터로 전락 한 존재요. 슬라임 이외에도 〈포이실 앤트〉라는 놈이 있소. 사람의 팔뚝만한 놈으로 거대한 개미인데, 드래곤도 이 놈들이 있는 곳에는 둥지를 틀지 않는 놈 이오.」 「하지만… 신기하게도 분포 범위가 매우 극소수인데요?」 「재미있는 일이지만 거대 개미를 잡아먹는 천적이 있기 때문이지.」 「예? 드래곤도 피해가는 존재한테 천적이 있단 말입니까?」 「간단한 존재요. 바로 우리의 손톱보다 작은 개미들이지요. 몸집이 클수록 강하 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지요.」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책을 뒤지던 왕자는 한 페이지를 펴서 내밀었다. 「이 몬스터는 어떤가요?」 「브로큰스도무!? 전하는 이 몬스터가 강해보이오?」 「아닌가요? 아무래도 의외의 몬스터들이 실제로 강한 것 같아서 약해보이는 걸로 골랐는데요.」 헤헤헤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다시 페이지를 넘기는 데미노머의 팔을 잡고 책장 을 고정시킨 토루반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골랐소. 임디움프스의 서적의 몇가지 오류 중에 들어가는 녀석이오. 여 기보면 브로큰스도무는 한 아름의 기둥을 가진 나무가 몸통기둥이 잘려나가고 밑 둥만 남아있는 모습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오. 브로큰스도무는 아무 리 작은 것도 약 네 사람은 손을 맞잡아야 끌어안을 수 있을만큼 몸통이 거대하고 약간 남아있는 줄기만해도 사람 허리둘레에 달하는 데다가 뿌리줄기는 강철처럼 단단하지요. 주로 늪지나 온천 주위의 습기어린 지하동굴에 숨어있는데, 드워프들 은 수십명이 달려들어야 해치울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오.」 「대, 대단하군요. 약점 같은 것은 없나요?」 「불이다! 불! 시즈! 어서 불의 마법을 쓰게. 모든 식물의 약점은 불이야! 모두 시즈와 에레나 양을 보호해!」 줄기가 모두 부러져나간 브로큰스도무가 늪 속의 뿌리를 꺼내들고 공격을 해오자 전투력이 뛰어난 성투사도 속수무책이었다. 화급한 사제의 외침에 시즈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자 일행은 그와 에레나를 둘러싸고 필사적으로 몬스터의 공 격을 차단했다. 「물론 있지만….」 「혹시 불이 아닙니까? 식물들에게 불은 죽음의 상징이나 다름없잖아요?」 흥분해서 상기된 얼굴로 질문하는 왕자에게 드워프의 현자는 세상은 무조건 법 칙대로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일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약간이라도 지능이 있는 생물이라면 자기의 천적을 피하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 하기 마련이오. 브로큰스도무는 언제나 평소에 늪이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다 가 먹이를 공격하기 때문에 몸에는 항상 액체로 축축하오. 한번에 몸을 태워버릴 만한 고열이라면 모르지만 액체를 증발시킨 후에 지름이 3m나 되는 거체를 한순 간에 태워버릴 고열은 마법으로도 만들기 힘드오.」 「그럼 약점이 뭐지요?」 「차가운 물체요.」 토루반은 눈을 찡긋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노머는 자신이 생각한 약점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것인지라 입을 떡하니 벌리고 놀라움을 표시했고, 익살기 가득 한 조그만 현자는 열렬한 반응에 만족했다. 「어제 내린 눈같이 차가운 물질 말이오. 물론 액체로 덮힌 거체에 닿으면 눈은 녹아버리겠지만 액체의 온도는 분명 떨어질 거요. 브로큰스도무는 온도의 변화 에 극도로 민감해서 약간만 온도가 내려가도 몸이 마비가 되어버리고 심하면 얼 어죽어버리지요.」 「그대의 의지는 춤, 열기가 가득한 끝없는 변화의 동작에 매료된 존재는 그들 이 사라져가는지도 알지 못하더라! 타올라랏!」 시즈의 언어와 의지는 강렬한 염화가 되었다. 수행원들을 비롯한 일행은 환호성 을 질렀고, 거체의 나무괴물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몸에서 솟아난 형체없 는 붉은 것이 고통으로 죄어들자 시즈들은 도저히 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발버 둥쳤다. 미치면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다던가. 발광하듯 내지른 공격은 지금까지와는 차 원이 틀렸고, 보를레스는 뿌리를 능숙하게 막아내고도 힘에 못이겨 뒤로 날아가 바위와 부딪혔다. 나무괴물은 몸을 태우고 있는 불이 지금까지 상대해온 마법사 가 쏘아보낸 조그마한 불덩이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라고 깨닫고 발버둥치며 늪으로 육중한 거체를 던졌다. 「안돼! 막아!」 치익! 부그그그! 절대로 춤을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염화는 그저 늪의 물 몇방울 만 증발시키고 사그라들었다. 다시 늪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거칠 것 없이 시즈 일행에게 공격을 가했다. 「갈비뼈가 두개 부러졌습니다. 「빌어먹을! 어떻하면 좋지?」 방금 전, 기사로 지낸 생애에도 보지 못한 위력의 마법을 보여준 청년이 다친 옆 구리를 가차없이 주무르며 상태를 말하자 보를레스는 식은 땀이 등을 쓰다듬는 것 을 느끼면서 위태롭게 방어하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꺄아아아악!」 「에레나 양!」 사론들이 무거운 뿌리공격에 뒤로 넘어진 사이 붙잡혀버린 여인은 허리를 묶고 있는 두툼한 나무뿌리를 풀어보려고 발버둥쳤다. 가장 맛있어보이는 먹이를 잡았 다고 생각했는지 긴 줄기들이 바람에 나풀대는 모양으로 흐늘거렸다. 「안돼! 시, 싫어!」 거칠게 부러져버린 것처럼 생긴 나무의 윗둥이 쩌억 갈라져 입을 벌렸다. 부러진 흔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놈의 튀어나온 이빨이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여인은 다리와 팔을 마구 휘저었고 그 발은 근처에 있던 나무의 작은 나뭇가지를 건들였 다. 톡.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주먹만한 눈덩이가 브로큰스도무의 입 안으로 쏘옥 들 어갔고 순간이지만 흐늘거리던 움직임이 딱 하고 멈췄다. 시즈의 머리 속에 섬뜩 한 빛 한줄기가 스쳐지났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흐늘거리는 거체를 지나서 근처 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헤모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일까? 둘은 눈을 마주친 순간 태풍처럼 몸을 날렸다. 유연하면서도 바람처럼 빠른 움 직임으로 거대한 나무를 걷어찼고, 헤모가 뒤를 이어 맹호처럼 달려들어 강철같 은 어깨를 들이박았다. 「하아앗!」 다시 한번 헤모의 몸이 나무에 부딪혔고, 보들보들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먹이감 을 입에 넣으려는 나무괴물의 머리로 나무 높은 곳에 얹혀있던 방대한 양의 눈덩 이들이 쏟아져내렸다. 콰르르르륵! 「에스코트!」 시즈는 동산만큼 쌓여있는 눈덩이 위로 빼꼼히 빠져나온 커다란 나무뿌리로 다 가가 하얀 살결같은 눈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의 손을 잡아내렸다. 순식간에 일 어난 일에 멍한 펭귄처럼 서있던 남정네들은 손을 들어올리고 기쁨에 찬 환호성 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앗!」 콰르르르르릉! 그 때 마을에서 용사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촌장과 사람들은 보았다. 산 마루에 싸여있던 많은 눈이 용사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을 장소를 중심으로 흘러 내리는 것을…. -53- 엘시크와 아스틴을 가로지르는 두러크 산맥, 하늘에 닿을만큼 높이 솟은 땅의 근육들은 그 무성한 생명력의 가지를 이리저리 뻗히고 있다. 수많은 산맥의 지 류 중 하나에서 생산되는 많은 식물과 생물을 채취하며 살아가는 아담하고 소박 한 마을, 도틀킨 마을은 현재 축제가 한창이다. 「후우…. 정말 즐거워보이는 군.」 「이제 마을의 살림과 형편이 점점 나아질 테니까요.」 무엇이 우스운 걸까. 에레나는 키득키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이불로 돌돌 몸을 말고 갓 태어난 돼지새끼들마냥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모습 때문이 리라. 「따뜻한 커피 좀 더 가져올게요.」 주방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여인의 흰색 평상 드레스가 넘실거림이 눈에 남아 그 때의 악몽을 여실히 회상시켰다. 「시즈 님은 지금쯤 뭐하고 계실까?」 「후작 공자께서는 촌장님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감사인사를 받고 계실 겁니 다.」 카운터에 앉아서 무료하게 손톱을 깍고 있던 여관 주인의 대답에 돼지새끼들은 아쉬움과 억울함이 풍기는 한숨을 땅이 꺼질 듯 내리쉬었다. 그렇잖아도 벽난로 의 벽돌을 녹여버릴 듯 강열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신경질적으로 장작을 내던 지며 사론은 투덜거렸다. 「왜 시즈 님만 대접을 받는 거지?」 「이게 모두 너 때문이잖아! 네 녀석이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눈사태에 일어 났다구!」 「보를레스! 그건 오해라고요! 나보다 톰브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사론 군, 전능하신 레이모하께서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하세요. 눈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들었던 듣기싫게 울리는 날카로운 금속성마냥 귀를 파고 드는 음성은 분명 그대였어요.」 「사제 님, 전 억울합니다.」 「넌 억울할 것 없어. 사제 님과 난 빌어먹을 정도로 조용히 있었는데 부르지도 않은 눈들과 포옹한 눈뜬 생선꼴로 레이모하의 품에 안길 뻔했다고!」 「하하핫! 레이모하께서도 징그럽게 눈뜨고 얼어죽은 생선을 끌어안지는 않으실 겁니다.」 여관의 문이 벌컥 열리며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갑작스레 덮치자 돼지새끼들은 공포와 넘치는 동작으로 이불을 들어 열심히 방어해댔다. 자신들과는 달리 따스 한 혈색이 좔좔 흐르는 미소를 띄우고 에레나의 마중에 손에 입을 맞추어 답례 한 세이서스 후작 공자에게 헤모가 일그러진 음성으로 소리질렀다. 「레이모하께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게. 어째서 우리 중에서 자네만 멀쩡한 거 지?」 「아니!? 몸이 안 좋으신가보죠? 혈색은 붉으스름하니 아주 좋습니다만….」 동상으로 붉어진 피부가 더욱 빨갛게 열을 냈다. 살이 익어가메 발광하는 돼 지새끼들의 모습을 연상하며 시즈는 에레나가 익은 고기들을 위해 마련한 커피 의 은은한 향을 맡았다. 본격적인 식사 전의 향을 음미하듯이…. 「제가 아침에 산에 눈이 싸인 모습을 보아하니 균형이 완전히 일그러진 채 약간 의 진동만으로도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에 묻히더라도 냉기가 잘 침투하지 못하고 체온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두터운 겉옷보다는 얇은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었지요. 한 6겹 정도로 말입니다. 에레나도 아주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더군요. 아마도 이 곳의 사람들은 눈사태에 평소부터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그런! 어째서 우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건가?」 헤모와 함께 모닥불 앞에서 이빨을 다닥다닥 충돌시키는 기사들이 치를 떠는 모 습을 은근히 질기며 시즈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시즈는 용사로서 촌장의 칭송을 받았고 그로인해 밖에 몰려든 마을사람은 그의 웃음 하나하나에 환호했고 처녀들은 그림에서나 나올 듯한 용사의 은은한 미 소에 넋을 잃었다. 「그야 당연하잖습니까. 그대들이 5,6 겹으로 입으면 잘 싸우지를 못할 것이 아닙 니까? 핫핫핫!」 「치, 치, 치…」 「아니! 치사하다고요? 아마 제가 재빨리 눈 속에서 꺼내드리지 않았다면 처음으 로 레이모하가 내던지는 얼음 사제가 되셨을 겁니다. 후후훗!」 아아 왜 사람들은 저 혐오스런 웃음소리에 환호하는 것인가. 헤모 사제는 레이모 하가 자신을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식어버린 몸에 체온을 찾아줄 사람은 누구 일까. 믿었던 에레나마저 시즈의 에스코트를 받아 축제에 참가하러 나가버리고 기 사들과 사제는 갈 곳 없는 고아처럼 모닥불 앞에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를 위로했 다. 「괜찮겠어요?」 새침한 눈매로 올려다보는 여인의 물음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은 축제에 참가할 수 있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말썽이 생기는 것도 좋지 않고…. 조금 심했나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공자 님은 작은 것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 군요?」 약간은 안쓰러운 표정에 시즈는 당치도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작은 것이니까 짊어지려고 하는 거죠. 무거웠다면 아마도 내던지고 도망쳤을 거에요.」 눈을 찡긋하는 시즈의 옆얼굴 건너로 타오르는 축제의 불꽃이 토틀킨의 기쁨을 표현하며 힘차게 타오르는 것을 에레나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미소짓던 청년의 모습은 새하얀 눈에 그려진 황금색 배경과 함께 한 여인의 가슴 깊숙한 곳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뭐든지 알것 같은 젊은 학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여인의 각인은 후일 더욱 커다란 상처로 그녀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갈 것이라는 것도…. # 레소디는 더 이상 깨끗해질 수 없는 집 안에 광을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궁 에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헤트라임크의 이름으로 보내진 전서에는 곧 저택의 주인이 도착할 테니 준비를 하라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시즈는 저택을 떠 나며 그 동안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이 살림을 꾸려갈 충분한 양의 돈을 주었지 만 레소디는 조금도 쓰지 않았다. 매일같이 책으로 온 집안을 어질러대던 집주 인이 사라진 뒤로 그는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작은 동생들이 칭얼대고 장난을 쳐댔지만 허전한 마음 속은 채워지지 않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즈가 보던 책들을 들추어보기도 했지만 글자도 모르는 상태로서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새신랑의 귀가에 마음 설레는 신부처럼 허둥 지둥 집 안을 정리하다못해 꾸미기까지하며 레소디는 그가 돌아오면 글자를 가 르쳐달라고 하리라 다짐했다. 딸랑딸랑! 그가 왔다! 「어서 오세요!」 「시즈 선생님 계십니까? 존경스런 선생님을 뵈러 로빌기어스에서 달려왔습니 다! 아! 시즈 선생님의 부인되십니까? 선생님은 어디 계십니까?」 바라던 꿩은 어디가고 어디서 보지도 못한 메추라기란 말인가. 실망과 분노가 엇갈린 얼굴로 문이 부서질 정도로 닫은 레소디는 저택이 흔들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시즈 님은 안계세요! 그리고 난 남자라고욧!」 1시간 후… 딸랑! 딸랑! 「주인님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마땅찮은 시즈〉 선생님의 열렬한 추종자, 민소르 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고명한…」 콰당! 「안계세욧!」 2시간… 3시간… 1분 1초가 왜이리 긴 것인지 원망이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무 심하게 시간을 흘러간다. 딸랑! 딸랑! 「시즈 선생님 계십니까?」 정확히 12번째였다. 원하는 사람은 오지 않고 전혀 바라지도 않은 불청객들은 순진한 소년의 머리에 불을 이르켰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레소디는 김을 뿜어대지 않는 자신의 뇌에 내심 칭찬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안 계시다고 했잖아욧! 당장 꺼지지 못해욧!」 「에? 정말!?」 볼을 긁적이며 반문하는 청년을 올려다본 순간, 레소디의 머리 속에 가득찼던 열기는 순식간에 볼로 몰렸다. 달아오른 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의 볼을 추운 바깥을 여행하고 돌아온 손으로 어루만지며 시즈는 싱긋 미소지었다. 「들어갈까? 보를레스, 들어와요.」 「맞아죽지 않을까?」 「지금 서슬푸르게 저기서 눈을 빛내는 사람들과 친구하고 싶다면 들어오지 않 아도 좋아요.」 「흠…. 따뜻한 엽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그들이 미소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고명한 학자, 시즈 세이서 스를 만나기 위해 추위에 떨던 사람들은 의아한 어조로 의견을 교환했다. 「저 둘, 실베니아에서 왔다고 했지?」 「에? 무슨 소리야? 나는 아스틴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엘시크라고 들었어!」 그 날밤, 숲 속에서 황당한 분노에 몸을 떠는 수 많은 인간들이 울부짖었다. -54-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겨울의 막바지에 이르면 세일피어론아드는 눈, 비, 그리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을 쉴 새없이 돌려 보여준다. 새 해를 맞이하는 하늘의 축제였지만 인간들에게는 약간이지만 곤혹스럽 다. 언제나 그렇 듯이 시즈 후작 공자님은 오늘도 우산을 들고 나가라 는 충고를 걷어찬 댓가로 비를 흠뻑 맞고 겁에 질린 생쥐같은 꼴로 돌 아왔다. 「흥! 말을 듣지 않으셔서 그런 거니까, 이번엔 감기걸려도 감호해드 리지 않겠어요!」라고 볼을 부풀린 채 투덜대보지만 안색은 백지장처 럼 창백해져 보랏빛으로 물들어버린 입술과 함께 찰나도 가만있지 못 하고 오돌오돌 떨어대는 모습에 심술을 부릴래야 부릴 수가 없었다. 담요로 돌돌 몸을 말고 벽난로 앞에 누워 마을 처녀들이 구워온 쿠키 를 어린애처럼 바삭거리며 베어무는 그를 누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후작가라는 고급스런 신분치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상당 한 서민적 낭만을 간직한 듯한 주인님은 어쩌면 비를 맞는 것을 즐기 는 것 같기도 했다. 뒷처리로 몇 일 밤낮을 침대에 누워 쓰디쓴 약과 건더기 하나 없는 스프만 먹는 고생을 감당할 정도로 말이다. 결국 힘든 것은 이 저택에 시종인 나 뿐이지. 나의 악마같은 동생들 은 도와줄 생각을 하기는 커녕, 주인님을 도와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 드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세우고 있다. 으음… 그렇게 보면 주인님은 동생들의 정신수준과 비슷한지도 몰랐다. 어쨌든 엄청난 정신연령으로 근래에 들어 원리를 탐구분석하는 학자 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시즈 님은 하루하루를 추격에 시달렸고 가끔씩 은 납치도 되는 것 같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살아돌아오고 있다. 「주인님, 물수건 갈아드릴까요?」 급기야는 이렇게 비와 물수건에 이마를 적시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레소니에요? 앞치마가 잘 어울려요. 헤모 사제께서 〈아내가 필요없 겠다〉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레 소니가 애를 둘만 낳아줄래?」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상황과는 관련도 없는 농담을 해대는 사람이 세상을 분석함에 있어서 따를 이가 없는 학자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그 둔하기 짝이 없는 헤모 사제마저도 눈치를 챘는데….〉 시즈 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애매한 태도로 내 마음을 혼란시킨다. 알 아채지 못하는 게 내 자신의 색기(?)부족 때문이라면 곤란하지만 단순 한 주인님의 관찰력의 결함 때문이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물 론 나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들킨다고 이제와서 저택에서 내쫒지는 않겠지만 요렇게 감기에 걸려 헐떡이는 남자는 여성에게 노소를 불문 하고 지나치게 정중했다. 뭐, 평상시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대했지만 특히 여성에게는 다가서기가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양자 사이에 금을 굵게 쭉쭉 그어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태도가 내게 향한다고 생 각하면 소름이 끼치니까…. 다행히 그 것 하나만큼은 동생들도 철저하 게 신경쓰는 듯 하다. 그러니까 노골적인 프로포즈와도 다를 바 없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이다. 「둘다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솔직히 숨기고 있어도 이런 말을 들었는데 두근거리지 않을 수는 없 다. 물에 적셔 추운 집 밖에 널어둔 물수건을 서슴치 않고 시즈 님의 입에 쑤셔넣은 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뾰루퉁한 내 표정에 겁을 먹었는지 수습을 해보려고 주인님은 주춤 주춤 말을 이었다. 「저, 저기! 딸이어도 상관없는데….」 「보를레스 님! 보를레스 님!」 「뭐지?」 소년 앞의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는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사람 들을 위협할 수 있을 것이다. 장신인 그를 올려다보는 것은 키가 작 은 소년으로서 엄청난 피로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지만 부탁할 용건 을 생각하면 감수해야할 과정 중 하나였다. 「〈마땅찮은 시즈〉님의 호위기사이시죠? 지금 시즈 님을 만나뵈러 가는 건가요?」 새벽 하늘에 영롱히 빛나는 샛별처럼 소년은 기대감으로 동그랗게 부 푼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의 이름은 에밀레오 도플트. 궁정 학사원의 견습 학사로 현재 엘시크 남부의 나스트 지방의 귀족학교를 졸업하고 제플론의 명문 귀족 교육기관인 〈라이느 헨들리즈〉에 재학 중인 학 생이었다. 궁정 기사단의 일곱번째 기사단을 맡고 있는 아버지는 에밀레오 또 한 훌륭한 기사로 키울 생각이었지만 워낙 적성에 맞지 않아 금세 포 기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나 뿐인 아들에 대한 기대가 식은 것은 아니어서 나라를 바꿀 학사로 성장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형적인 귀족, 그리고 학사의 새하얀 피부와 소년의 가녀린 몸매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보를레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호위기사는 아니지만 비슷한 신세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아버지께서 알려주셨어요.」 「누구신지 물어도 되겠니?」 「아버지께서 제 7 궁정 기사단의 단장이세요.」 〈이 훈련장이 제 7 기사단의 훈련장이었나!?〉 시즈를 따라 제플론에 도착한 이후, 보를레스는 그야말로 무료함에 연속이었다. 치안 상태는 또 왜이리 좋은지 눈꼽만큼의 사건도 일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트라임크에게 부탁하여 기사단의 훈련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랄까. 적어도 기사였던만 큼 나태해져 약해지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도플트 백작 님의 자제셨군. 네 아버님의 신세는 잊지 않고 있다.」 「헤헤, 정말요? 그럼 시즈 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실망할 텐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엘시크가 낳은 현 최고의 현자이신데….」 「하하….」 〈마땅찮은 시즈〉의 모습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 다. 아스틴으로 가기 전에 왕을 배알하긴 했지만 귀족들은 시즈에게 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나 마법원을 제외한 왕궁의 출입은 극히 자제하는 시즈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나이 꽤나 먹은 노인이나, 절륜한 중년의 멋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착각하 고 있었다. 흰 수건이 구릿빛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에밀레오는 들뜬 어조로 물었다. 「요즘 시즈 님은 뭘 하고 계세요?」 「죽어가고 있어. 감기로….」 곧 보를레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어딘지도 모르는 시즈의 저택 으로 뛰어가려는 소년을 보며 농담을 자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55- 덜컹이는 진동 속의 침묵이 어색했던가. 보를레스는 마차 밖으로 지나쳐가는 황량한 겨울 벌판을 감상하는 소년에게 말을 걸어보기 로 했다. 「에밀레오는 시즈 님이 제플론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나?」 「네. 귀족들은 수도에서 벗어나는 일에 민감하니까요. 지방 귀족 과 중앙 귀족의 권력 차이는 상당하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뭐하 러 수도 밖에 저택을 짓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보를레스는 제플론의 복잡하고 권의적인 예식에 둘러쌓인 분위기 가 질색이라고 매일같이 투덜대면서도 잘만 살고 있는 괴팍스런 마 법사를 떠올렸다. 헤트라임크 세이서스, 시즈의 양아버지인 그는 냉정한 풍미를 느끼게 하는 외모와는 달리 꽤나 주책맞은 노인네로 마법 연구실의 복잡함과는 대조적으로 단조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궁정 마법원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앙에 몸을 담 지 않을 수 없다나? 물론 로티븐 아벨로티드 - 궁정마법원장 - 을 대면한 보를레스 역시 그 말에는 동감을 표하는 바였다. 탐욕에 찬 란히 타오르는 눈동자.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할 것없이 밑 바닥없는 욕구를 가진 로티븐을 내버려둔다면 그렇잖아도 썩어가는 엘시크의 폐기처분 기간이 상당히 앞당겨질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시즈 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모든 학인들의 존경을 받으실 거에요.」 「것도 그렇군.」 요 한달 간 자신의 발에 걷어차여 저택 밖로 튕겨져 나간 유약하 기 짝이 없는 학자들의 절규는 회상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엘시 크 전국에서 모여든 원하지 않은 추종자들을 피해 피신, 잠적까지 실행에 옮겨야 했고, 현재는 〈시즈 선생님은 방랑벽이 심하여 어 디에 계신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소문을 퍼뜨려 추적의 기세는 많이 잠잠해진 상태였고, 세이탄의 마을 사람들과 합동으로 〈시즈 존재 지우기 작전〉을 펼친 결과, 숲 속에 자리한 저택의 존재는 학인들의 머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다 왔군. 제플론에서 그렇게 멀지 않지? 여기서 부터는 걸어야야 해.」 「이 곳이 세이탄인가요? 태자 전하의 별궁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 만 대단히 아름답군요.」 하지만 〈마땅찮은 시즈〉같은 대문학가가 살기에는 서민들의 마 을은 적당치 않다고 에밀레오는 판단했다. 「여어, 보를레스. 보호대상은 어디에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자칭 빵의 마법사, 로플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시급을 적게 주기로 소문난 제과점의 주인이었다. 기름때가 묻어 울긋불긋한 색채를 자 아내는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가게 앞 의자에 앉아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감기에 걸려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걱정할 필요도 없지요. 그것보다 로플레, 제 걱정할 것 없습니다. 로플레야 말로 오븐을 잘 감시하는 게 어떻겠어요?」 「무슨 소리야? 나의 빵 익히는 시간 맞추는 것을 따라올 사람은 아 무도 없다고!」 「그럴까요?」 씨익 웃으며 보를레스는 〈이게 무슨 냄새일까?〉하는 표정으로 코 를 킁킁거렸다. 「호, 혹시 모르니까…. 저 놈의 오븐은 빌어먹게 잘 익어!」 투덜대며 가게로 모습을 감추는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에게 보를 레스는 키득이며 손을 흔들었다. 「이 타는 냄새의 주인공이 로플레의 사랑스런 빵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죠.」 뭐지? 이 천박한 말투는!? 에밀레오는 보를레스와 로플레가 주고 받는 대화를 들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보를레스, 어서 가요.」 「하아…. 참을 성이 없군. 학자들은 정신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체력적인 면에서도 끈기를 가져야 해. 너도 마찬가지야, 에밀레오. 아니면 평생 시즈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걸.」 금세 소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역시 시즈를 끌어드리는 것 이 즉효약이군. 보를레스는 그동안 학자들을 상대하면서 나름대로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여러가지 분야로 연구해둔 상태였기 때문 에 어린 꼬마 학자 하나 구워삼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제과점의 달콤한 냄새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의 걸음은 리드미컬 한 속도감으로 땅을 밀어냈고, 그렇잖아도 장신의 넓은 걸음걸이를 따라가기 힘들었던 에밀레오는 연신 달리기와 경보를 오가며 숨을 헐떡였다. 시즈의 저택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숲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 는데, 호수가에 맞물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쉽게 감탄을 내 놓게 만들었다. 「이곳이야. 아담하지? 이래뵈도 안은 꽤 넓다고!」 「굉장히 아름답네요. 정물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풍경화를 그린 듯 하달까?」 다리를 주무르면서 에밀레오는 주위 경관과 함께 자라난 것 같은 저택의 풍모에 넋을 잃었다. 「역시 모두가 흠모해 마지않는 〈마땅찮은 시즈〉가 직접 디자인 한 저택답지?」 아니나다를까 즉시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를 돋보기를 저택에 들이 대는 에밀리오를 돌아본 보를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초인종을 울렸 다. 딸랑딸랑하고 호수에 일어나는 파문과 함께 집 안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차 다가왔다. 「보를레스?」 별다른 마찰음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 뒤로 예쁘장한 얼굴이 빼 꼼 고개를 내밀었다. 음성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보를 레스가 눈을 부릅떴다. 「레소니, 무슨 일이야? 안색이 창백하잖아!?」 「보를레스, 시즈 님이 사라지셨어요. 과자를 굽고 잠시 아이들과 놀아주는 사이에….」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 보를레스는 소년이 라면 도저히 풍길 수 없는 애처로움을 뚝뚝 흘리는 레소니를 시즈 는 어떻게 남자로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순간 의심이 생겼지만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지워버렸다. 「어떻하죠? 또 납치되신 게 아닐까요?」 시즈는 얼마 전, 추종자들의 애원에 못이겨 엘시크 북부에 위치한 한 도시로 아무 말 없이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가 식은 땀을 흘리 며 열심히 레소니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훌쩍이던 소녀의 머리 속 에는 납치라는 이름의 범죄로 깊게 각인버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너무 오래 누워있다보니, 산책이라도 하고 싶 어서 나간 것일수도 있잖아. 외출할 때는 깔끔하게 차려입는 녀석이 이 추운 날씨에 가벼운 로브 하나만 걸치고 나갈리가…….」 「흐윽! 시즈 니임 -.」 「형아 운다.」 「에!? 형아 울어? 흐으앙!」 「으아아앙!」 보를레스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버린 자신의 주둥이에 손바닥 으로 찰싹찰싹하며 응징을 가했다. 하지만 이미 꼬마들까지 합세해 흘려대는 눈물은 저택의 거실 안에 또하나의 호수를 만들 지경이었 다. 「아앗! 레소니, 넬피앙도 없어졌는지 찾아봐줄래? 시즈가 산책 나 갔다면 아마도 함께 없어졌을 거야.」 끄덕인 레소니와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2층 층계를 오르는 행렬은 훌쩍이는 가운데서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정확히 맞췄다. 잠시 후 들려오는 레소니의 높은 톤 음성에 보를레스는 한숨을 내쉴 수 있었 다. 「넬피앙과 구워놓았던 과자도 없어요.」 -56- 「휴우…. 내 신세가 이게 뭐람?」 두둥실 떠가는 구름마저 나를 비웃는 구나. 한탄과 함께 정처없이 숲을 해메이면서 에밀레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투덜거리며 한숨을 푹푹 내뿜는 것 뿐이었다. 「하하핫! 그래서 말야…. 난 지금부터 시즈를 찾아야할 것 같아.」 「저도 함께….」 「그, 그건 안돼! 저기 문 앞에서 서슬퍼렇게 노려보는 여자애가 보이지? 시즈 님의 사모님이라고. 지금 남편이 실종됐다고 다그치 시는데 다리를 죽도록 놀려서 찾아다주지 않으면 나는 해고될지도 몰라.」 「그, 그렇군요.」 에밀레오가 허물을 수 십번을 벗는다고 해도 전력질주하는 기사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무리였다. 보를레스의 말이 뜻하는 바를 쉽게 이해한 소년은 땅 꺼지듯이 기대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함께 어깨 도 축 늘어졌다. 「아하하핫, 미안하게 됐네. 〈마땅찮은 시즈〉께 부탁을 드려서 정식으로 초대를 하도록 할게. 좀 이해해주게.」 그렇게 말한 후 쏨살같이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보를레스는 사라 져 버렸다. 결국 에밀레오는 홀로 인형처럼 터벅이며 숲을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나 같은 애송이를 대륙적인 학자가 만나줄 리가 없지.」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소년는 규칙적으로 발을 떼던 동작을 곧 멈 춰야 했다. 그의 귀에 미약하지만 맑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던 것이 다. 「숲 속에서 음악회라도 열린 걸까?」 실베니아와 아스틴의 변방 마을에서는 정기적으로 마을 음악회를 여는 일이 다반사였고, 엘시크 또한 수가 매우 적었지만 그런 마을 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을 보아두는 것도 공부가 되겠지….」 피식거린 중얼거림과는 다르게 그는 달렸다. 방금 전에 들려왔던 음색은 너무도 맑아 침울했던 마음 속을 가볍게 씻어내고 소년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헉! 헉!」 수풀을 제치는 에밀레오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꺄륵거리 며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난잡하게 딩구는 아이들 도, 어딘가를 향해 눈망울을 반짝이는 아이들도 크게 떠들어 허공 에서 춤추는 음률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웃고 떠들고 있지만 주위를 고요하게 만들어버리는 하나의 넬피앙 선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에밀레오는 고개와 눈동자를 돌려 맑은 음률의 근원을 찾아내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감긴 듯이 살짝 떠진 눈매로 아늑하니 먼 곳을 바라보 는 듯 했고, 흰 안개로 착각될 것같은 새하얀 로브에 싸여 바위에 앉아 그는 길고 가는 손가락이 넬피앙의 현을 튕기고 리듬에 맞추어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노래했다. 구름이 맑게 개인 어느 날, 꼬마는 여행을 떠났어요 발에는 나막신, 머리엔 밀집모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풀들이 춤을 추며 손짓하네요. 꼬마도 함께 춤춰요 꽃들은 향기로 노래하네요. 꼬마도 함께 노래를 부르죠. 라랄라 라랄라라라 라랄라라라 봄날의 싱그럼 속에… 귀를 귀울이는 것만으로 행복한 리듬에 빠져버릴 듯한 노래에 에 밀레오는 뛰노는 아이들 속에서 눈을 감았다. 웃음 소리와 겨울의 막바지에서 조금씩 솟아나는 풀잎향기…. 넬피앙과 더불어 노래하 는 〈소년〉 주위로 꽃이 만발하는 환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자아…. 한 줄로 서세요. 다 줄테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되요.」 음악이 끝난 후에도 에밀리오는 여운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소년〉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주고 새로 등장한 15 세 가량의 관객에게 걸어갔다. 관객은 송충이가 입 안으로 떨어지 길 기다리는 긴 손가락 원숭이처럼 입을 헤 - 약간 벌리고 멍하니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음!?」 시선을 느낀 에밀레오가 눈을 뜨자 소년은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 었다. 어쩐지 다리부근이 따끔거린다는 생각을 하는 그에게 소년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불개미들은 투쟁심이 대단해서 자신들의 집을 밞은 존재는 드래 곤이라고 해도 내버려두지 않아요.」 에밀레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내가 아침에 시뻘건 구두를 신고 나왔던가? 「으아아앗!」 몸을 구르고 발차기를 해봐도 개미들은 순식간에 허벅지를 지나 허리를 타올랐다. 개미들의 관능적인 애무에 에밀레오는 자극이 지 나친 모양인지, 연신 비명을 질러댔고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귀를 막았다. 「개미는 땅과 불의 생물이랍니다. 개미들을 피할려면 물로 들어가 는 게 좋을 거에요.」 소년의 말이 무섭게 계곡을 흐르던 냇가에서는 풍덩! 하고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수영하 는 사람의 몸이 약간 떨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소년과 아이들은 에 밀레오의 멋진 다이빙 솜씨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만 시간이 지나 도 떠오르지 않는 잠수 실력에는 의문과 걱정을 보냈지만……. -57- 「크윽!」 「상당히 따갑겠지만 붓기는 가라앉을 거에요.」 개미독에 부풀어오른 에밀레오의 다리는 꼬치구이에 꽂혀 검붉게 구어진 울퉁불퉁한 고기덩이를 연상케했다. 그렇다고 해서 먹음직 스러워 군침이 고일만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신기한지 절 규하는 에밀레오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쿡쿡 찔러보는데 정신 이 팔려 있었다. 「빌리, 부탁 좀 들어주겠어요? 저기 보이는 냇가에 가면 갈퀴처럼 생긴…. 으음, 아니에요. 제가 직접 다녀오죠. 대신 이 형이 아파 하니까 잘 보살펴주도록 해요.」 「네 - 」 활기찬 대답과 함께 서광이 비치는 눈동자. 에밀레오는 고양이에 게 맡겨진 생선의 기분을 부피가 늘어난 다리 곳곳으로 절실히 느 끼며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이런! 난 이 소년을 장난감으로 준 게 아니에요. 그나저나 굉장 히 아파하는 군요. ……」 「에밀레오, 에밀레오 도플트.」 「그래요. 에밀레오, 지금 바르려는 약초는 더 아플텐데 참아보도 록 하세요.」 한 움큼 쥐고 있는 온갖 풀들과, 비평과 신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에밀레오를 번갈아 쳐다보던 소년은 평평한 돌 위에 가져온 약초를 올려놓고 빻기 시작했다. 환자 다리에 골고루 뭉친 약초를 바르고 빵을 넣어왔던 바구니에서 무명천을 꺼내 깔끔하게 감는 과정까지 그의 손놀림은 능숙함을 넘어서 현란하기까지 했다. 「넌 누구지? 약사인가?」 의사와는 달리 약사는 큰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령층 이 낮았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약사소년은 과자가 자신의 명함이라도 되는양 에밀레오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당신은 귀족인 것 같은데 세이탄에는 무슨 일입니까?」 「사람을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마차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좀 부축 좀 해주겠어?」 「물론입니다.」 자기보다도 작은 소년이 부축한다고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에밀레오는 갑자기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에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한쪽 어깨를 받힌 소년의 가냘픈 어깨가 탄력적인 근육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에밀 레오는 의외의 황당함과 함께 안도했다. 「아름답지요?」 약사 소년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눈째림을 당한 에밀 레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가로 눈길을 돌리고 과자를 오물거리자 숲의 정경에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 소년이 물었 다. 「응. 왕자의 별궁이 자리잡을 만한 곳인걸. 아! 그리고 물어볼 것 이 있는데, 아까 네가 부른 노래는 누구의 곡이지? 간소하면서도 굉장히 편안한 노래던데!?」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만든 곡이거든요.」 겨울의 아쉬움과 봄날의 기대가 한데 어울어진 바람이 한 차례 두 소년의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흰 로브 때문인지 까만 윤기를 흘리 며 까마귀의 목덜미 깃털을 연상시키는 약사 소년의 긴 머리칼이 물결처럼 흔들리는 사이로 에밀레오의 놀라움에 찬 눈동자가 크게 빛났다. 「대단하잖아. 평민이 노래를 자작곡하다니, 게다가 조잡하긴 하지 만 충분히 듣기 좋은 곡을…….」 흑발의 소년은 에밀레오가 처음에는 간소하다고 하다가 평민이 만 들었다는 말에 조잡하다고 말을 교묘하게 바꾸자 귀에 거슬렸고 덧 남없이 갈무리된 눈썹이 급격하게 휘어졌다. 「글쎄요. 듣기 안좋은 노래도 귀족이나, 영웅의 곡이라면 간소하 고 평민의 곡은 괜찮은 곡도 조잡하다고 하는 귀족 자제분에게 듣 기에는 과분한 칭찬이 아닌가 모르겠군요.」 「뭐엇!? 이 팔 놔! 감히 평민 주제에 내게 설교를 하려는 거냐?」 「앗! 피르트, 찾았어. 저기 계셔!」 거칠게 팔을 뿌리치는 에밀레오와 갑자기 힘을 주고 있던 물체가 사라지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는 흑발 소년. 그리고 둘을 발견하 고 무슨 일인지 달려오는 갈색 머리의 소년과 소녀. 에밀레오는 갑 자기 숲 그림자 사이에서 나타난 두 소년소녀를 보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너희들은!?」 「에밀레오잖아! 여기에는 무슨 일로… 아하! 네 녀석도 시즈 님 을 만나뵈러 온 모양이구나?」 「피르트, 에리나. 너희들 시즈 님이 세이탄에 계신지 알고 있었 던 거냐?」 「물론이지. 나와 에리나는 시즈 님께서 아스틴 네글로드에 초청 받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 걸.」 두 귀족소년은 이전부터 가문끼리 긴밀한 교류를 주고 받아온 사 이였고, 아버지들은 같은 기사동료로 절친했기 때문에 아들인 둘 또한 친구의 관계였다. 그런 에밀레오가 죽마고우인 피르트의 약 혼녀인 에리나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굳게 손을 맞잡고 반가워하는 피르트와 에밀레오에게 미소를 짓던 에리 나는 먹구름이 가득히 낀 흑발 소년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 앞에 드러난 표정을 해석하자면 분명히 화가 난 듯했으나, 그 녀의 기억에 흑발 소년은 화를 내기는 커녕 기분이 나쁜 일도 웃 음으로 넘겨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뜻하지 못한 만남의 기쁨을 나누던 에밀레오가 소년에게 소리쳤다. 「흥! 이제 네 부축따위는 필요없다! 꺼져버렷! 다시 내 눈에 보 이면 그 때는 네 무례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는 곧 자신의 말이 에리나와 피르트의 피부에서 핏기가 사라지 는 현상을 초래하는 것에 신기함과 의아함을 함께 품어야 했다. 피 르트가 붉게 충혈된 눈빛을 한 채 에밀레오를 거칠게 흔들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얏!?」 「무슨 말이긴 저 녀석이 감히 내게 설교를 하려고 했다고, 감옥 에 쳐넣어버리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야…」 〈그 동안 피르트 녀석이 많이 순약해졌군.〉이라고 생각하며 퉁 명스러운 어조로 이어지던 에밀레오의 말은 에리나가 외치는 소리 와 함께 끊어져버렸다. 「기, 기다려주세요, 시즈 니임!」 경련어린 목젖의 여운과 함께 말이다. 이미 무례한 약사소년은 수풀 속으로 삼켜지고 있었다. -58- 「시즈 님, 시즈 님! 노여움을 푸세요. 분명히 에밀레오가 무슨 오 해를…….」 에리나가 울상을 지으며 팔을 잡았지만 시즈는 거침없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휙 돌아보고 에밀레오와 같은 장소에 있는 것 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자연스럽게 잡힌 손을 풀었다. 「난 화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에리나도 그만 돌아가세요.」 「그렇다면 어째서…!?」 「평민을 생각할 줄도 모르는 귀족에게 노여움을 품을 만큼 난 멍 청하지 않아요. 그런 족속들은 그냥 무시해버려야죠.」 세일피어론아드에 발을 딛기 전부터 민주주의의 암묵적인 특권계 층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가지고 있던 시즈였다. 귀족의 양자이긴 했지만 자신을 평민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있는 그는 에밀레오 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귀족이면서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는 군.」 갑작스레 들려온 굵직한 사내의 말에 시즈는 소스라치며 돌아섰다. 「꺄아아악!」 길게 솟구쳐 올라가는 비명. 괴한의 사내는 에리나의 고성에 신경 질적으로 뒷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두건으로 눈과 입을 제외한 얼굴을 신주단지 감싸듯이 감아놓은 괴한은 비명 소리을 들은 두 소 년이 달려오자 기절한 인질을 옆구리에 끼고 나무 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엄청난 도약력에 입이 벌어진 시즈와 두 소년을 흔들리는 나뭇 가지에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편안한 자세로 앉은 그는 깔 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짙은 녹색의 복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대가 〈마땅찮은 시즈〉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이를 돌려주십시오.」 만면에 당황한 기색을 띄고 시즈가 황급히 대답하자, 괴한은 눈썹 을 일그러뜨리더니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핫! 요즘 현인이라고 치부하는 자들이 그대를 진정한 현자 라고 하는 소문을 들었는데…….」 「원하는 게 뭡니까?」 괴한의 단홍빛 입술이 비스듬히 휘어졌다. 「그래도 제법 눈치는 있군. 하지만 아무에게나 할 말이면 이렇게 화 려한 등장을 연출할 필요는 없었겠지?」 「알겠습니다. 피르트, 보를레스를 불러오세요.」 「예? 하, 하지만…….」 「어서 가세요. 당신이 있는다고 별 도움은 되지 못합니다.」 피르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이 피가 나도록 꽉 쥐었지만 괴한은 〈 맞는 말이지.〉라고 말하는 얼굴로 고개를 리듬있게 끄덕거렸다. 피 르트가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저택으로 달려가자, 그는 에밀레오 를 가리켰다. 「저 소년은?」 「어차피 다른 곳으로 옮길 것 아닙니까?」 괴한은 갸우뚱거렸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에밀레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시즈는 에밀레오에게 말도 걸기가 싫었던 것 이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 한데 알고 있으면서도 아까 그 꼬마에게 동 료를 불러오게 시키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더 기다리면 보를레스가 올 겁니다. 그는 상당한 실력의 기사인데 이렇게 지체해도 괜찮습니까?」 「좋아. 〈마땅찮은 시즈〉여, 그 뛰어나다는 학식만큼 용기 또한 가 졌기를 바라오.」 「그렇다면 안 갑니다.」 「에!?」 「그 말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난 내 목숨과 다른 이 의 목숨을 바꿀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털썩 주저앉는 시즈는 잠시 후에는 아예 드러누워버렸다. 보통의 인 질극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해버린 괴한은 칼을 꺼내여 에리나의 목에 들이대며, 「이 소녀가 죽어도 좋소!?」 하고 위협했지만 시즈는,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내 목 숨과 꼭 바꾸고 싶다면 그냥 죽여보시지요.」 하고 뚱한 어조로 대꾸하면 풀밭을 딩굴거릴 뿐이었다. 괴한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에밀레오에게 시선을 주자, 시즈는 키득키득하고 비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내 목숨을 천만명의 다른 이의 목숨과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어이가 없는지 허허하고 웃어보인 사내는 한숨을 내뱉았다. 「시즈, 그대를 해칠 마음은 추호도 없소. 하지만 이 여자 아이라면 다 르지. 제기랄! 그대는 다루기가 드래곤 꼬리로 방울뱀 꼬리의 소리내는 것 만큼이나 힘들군.」 「호오, 가능하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오. 드래곤의 꼬리뼈를 발라 물렁뼈와 연골을 잘라낸 후에… 빌어먹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하핫, 그대는 참 친절한 사람같군요.」 「휴우……. 부탁이니 그냥 좀 따라오시오.」 투덜거리는 말투로 한탄어린 한숨을 내뱉으며 괴한은 나무 위로 몸 을 날리며 어떠냐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날다람쥐같은 움직임에 시즈 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휘파람과 함께 박수를 치며 감탄하자, 다 시 골치아픈 표정을 지어야 했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말에 소풍을 가는 듯이 두 사람,아니 세 사람 이 사라져갔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이를 가는 소년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59- 「꼬마도 함께 노래를 부르죠… 라랄라 라랄라라라…….」 괴한은 협박(?)을 당해 끌려가는 주제에 봄을 기다리는 꽃봉우 리를 들추어보며 콧노래까지 불러대는 젊은 학자의 행태에 산채 로 골을 파먹히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크으… 고명한 학자선생, 다른 것은 몰라도 노래는 제발 그만 둬 주겠소? 특히 〈라랄라 라랄라라라〉 부분이 반복될 때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이 귀여운 아가씨를 떨어뜨릴 것 같단 말이오.」 「저런!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곤란한 상황이군요. 그 소녀를 떨어 뜨리면 날 위협할 인질이 사라지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안간 힘을 내도록 해봐요. 젖 먹던 힘까지 낸다면 더 좋겠지요.」 학자들이 모두 이렇게 골치아픈 존재들이라면 다시는 그들을 건들지 않겠어. 괴한 사내는 한층 무겁게 느껴지는 에리나를 고 쳐 안으며 다짐했다. 하지만 〈마땅찮은 시즈〉라고 불리는 소 년 학자는 그가 노래를 방해하자 상당히 기분이 나빴는지 뒷짐 을 지고 있던 손을 풀고 심장 부위를 꼭꼭 누르며 퉁명스레 말 했다. 「게다가 그 부분이 사람들에게 아이들같은 동심으로 되돌려보 내는 회심적인 절정입니다. 그것이 싫다니, 슬프게도 그대는 순 수함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거에요. 가슴 속의 투명한 감정을 잘 떠올려보세요.」 「후우……. 빌어먹을!」 「맞아요.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은 빌어먹을 정도로 슬픈 일이 지요.」 괴한이 빌어먹을 정도로 슬퍼한다고 생각했는지 시즈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자꾸 골치를 썩히느니 당장 들 고 있던 물체를 내동댕이치고 시즈를 두들겨 기절시킨 후 대신 들쳐메어버릴까 하고 사내는 나직하게 말했다.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이군. 내가 이 꼬마를 죽인다고 해서 너를 못 데려가는 것은 아니야. 아까는 도망갈 수 있었을지 몰 라도 지금은 혼자라는 것을 알아야지.」 말을 끝맺자마자 그는 바람의 정령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 고 놀라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발이 딛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 어지자마자 나무는 엄청난 고통에 괴로워하는 병자처럼 격렬하 게 나선형으로 꼬여나갔다. 거대한 나무가 통째로 갈라지며 내는 소리는 마치 우뢰소리로 착각할 정도였다. 우지지지직하며 연쇄적으로 터져나가는 나무 조각들 사이로 어느 새인가 손을 뻗고 있는 소년의 미소는 은은 했지만 강렬한 전율을 풍겼다. 「그 소녀를 죽인다면 나를 데려갈 수 없어요. 생명줄을 잘 보 듬어 안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래야 할 것 같군. 그대가 그 힘을 다시 한번 사용할 수 있 다면 말이오.」 발 밑을 휘감았던 바람은 괴한이 아니라 그가 딛고 있던 나무 의 기둥을 노린 공격이었다. 진공의 칼날마저 일으키는 용권 - 회오리 -가 만약 자신을 목표로 시전했다면 부족 제일의 권술을 가진 그라고 해도 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전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당황할 수 밖에 없 었겠군. 고작 20살인 어린 아이가 사용한 능력이라고는 보기 어 려울 정도로 위력적이다.〉 한편, 시즈는 시즈대로 담담한 괴한의 대답에 내심 곤란한 심 정이었다. 무참히 조각난 나무의 파편을 보면서도 남의 집의 불 구경하는 듯한 여유로움이라니……. 게다가 복면의 사내는 얄밉 게도 그의 마법적 제약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했다. 〈무리를 한다면 한번 더 의지를 발현할 수 있겠지만 무리한 댓 가를 치르겠지.〉 백발이 되는 것을 넘어서 앞도 보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끔찍한 고통은 제발 사양하고 싶은 시즈였다. 만약 다른 괴한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즈는 해치지 않는다던 복면 사 내의 말을 믿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담소를 하면서 쉬었으니 그만 가도록 할까?」 「그러시죠.」 「…….」 「왜 그러십니까?」 사내가 몸을 날리다가 말고 되돌아서자 시즈는 무슨 일인가 하 여 물었다.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 뭔가가 보이는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그는 곧 사내의 질문에 얼굴이 구겨졌 다. 「그 꼬마가 쫓아오고 있군. 이대로 둔다면 숲에서 길을 잃어 버릴 거야. 괜찮겠어?」 에밀레오가 미행하는 기척이 복면 사내의 감각에 걸려든 것이 다. 자신의 의향을 묻는 질문에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시오.」 「그래도 유약하게 생긴 주제에 제법 숨을 줄 아는 군. 능력이 안 되면 멀리서 미행하는 게 정석이지.」 「귀족 자제라고 하더군요. 기사를 아버지로 둔 모양이지요.」 힐끔거리는 시선이 마치 비웃는 듯 하여 눈썹을 찡그리며 시즈 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복면 사내도 어설픈 미행자에게는 관 심이 없는지 나무 사이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멀리서 조심스럽게 뒤를 밟던 에밀레오에게는 갑자기 두 사람 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였다. 이름있는 기사 아버지에게 이론과 전술을 배운 덕에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있게 미행했지만 상대는 그보다 몇 단계 위의 존재였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어.」 기사의 아들로서의 오기? 학자로서의 자존심? 무엇이 그를 이 끄는 지는 상관없었다. 다만 〈마땅찮은 시즈〉라는 엘시크의 대학자가 납치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뿐. 소년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이였다. 그는 이미 학자 이전에 기사로 완성된 자였을지도 몰랐다. -60- 「그러게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엘시크 1000년 역사의 마 지막 현자라고 불리는 시즈 세이서스라고 누가 감히 납치를 했 겠어. 설마 납치를 한다고 해서 시즈가 그냥 납치를 당할 녀석 도 아니잖아.」 「우응?」 「그래그래. 정말이니까 제발 울음 좀 그쳐줘.」 이것이다. 〈마땅찮은 시즈〉의 저택에서 주인을 시즈라고 단 언할 수 없는 이유가……. 1시간 가량이나 주위를 낱낱이 살펴 보았으나 시즈의 종적을 찾지 못하자 끝내 레소니는 남자아이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서러움 가득한 눈물을 뚝뚝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의 작은 군대는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형을 가장한 누나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날 섬뜩한 눈초리로 노려보 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때였다. 이 얄미운 녀석이 나타난 것은. 레소니의 눈물 분수가 소강상태에 들어서고 있었는데 갑 자기 녀석이 들이닥치며 외친 것이다. 「크, 큰일났어요, 보를레스 님. 에리나가 괴한에게 납치됐어요! 시즈 님도 에레나를 인질로 협박한 괴한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 갔어요.」 정말 큰일이로군. 훌쩍이고 있던 레소니는 아예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그러진 입술과는 달리 축축이 젖은 눈빛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 후 아무래도 시즈의 곁에서 24시간 벗 어나지 못할 것 같군. 「내가 찾으러 가겠어요.」 굳은 결의로 뭉친 얼굴로 레소니는 요리칼을 잡았다. 그리고 난 한숨을 내쉬며 혼신의 힘을 다해 말렸다.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올 테니까 레소니는 제발 집에 있어.」 「그 말은 찾아오지 못하면 들어오지 않겠다는 뜻이죠?」 그래. 그래서 결국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난 얄궂은 운 명과도 같이 달려든 피르트에게 외쳤다. 「아직 멀었나?」 「조금 멀어요.」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주변을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게 당연하 지. 제발 내가 갈 때까지 무사히 있어라. # 「거의 다 왔소. 저기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오? 그 곳이 목적 지요.」 복면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지적해주는 곳을 볼 수 없었다. 헐 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바닥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산소고갈로 붉게 상기되었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시즈는 입을 열었다. 「학자들이 유약하다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습니까? 기껏 납치하 는 거라면 대상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오?」 그 말에 사내는 손가락을 내리고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녹색의 풀잎 향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물살 속에서 물고기의 움직임이 어떤지 아시오?」 「유연하겠지요. 빠르면서도….」 「내 아이가 그대의 움직임을 이렇게 평했소. 마치 물살을 타는 물고기처럼, 바람을 타는 새처럼, 학자 시즈의 동작은 자연적으 로 이상적인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그대의 아이가 누구기에 나를 알고 있단 말입니까?」 「곧 알게 될 거요. 어서 갑시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소.」 자신이 요주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스틴에서 〈또 다른 고향〉이 출간된 후의 일이었다. 이미 시즈는 아스틴에서 돌아와 느긋한, 일명 〈탱자탱자 라이 프〉을 즐기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야성적으로 뛰어 다니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혹시라도 레소니의 작은 군대들에게 쫓겨 다니는 움직임을 이상적인 동물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면 시즈는 상태 파악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아이를 둔 괴한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는 통나무로 간소하게 만든 작은 오두 막들이 상당히 널찍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여기저기에 자리에 있었다. 마을에서는 국제적인 귀빈의 방문을 알고 있었는지 중 앙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음… 여기가 어디죠? 당신은 누구에요?」 타이밍 좋게 목적지에 달해서야 깨어난 에리나가 주위를 두리 번거리다가 복면 사내에 귀에 대고 소리쳤다. 진공의 소용돌이 에도 꿈쩍하지 않던 괴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렸고 대신 시즈가 대답했다. 「에리나,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우린 납치를 당한 거 뿐이고, 에리나를 지고 있는 사람은 납치를 한 장본인이야. 그렇게 시끄 럽게 하면 다시 기절시켜서 어디론가 데려가버릴지도 모르니까 조금 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거야.」 대학자 시즈의 충고는 역시 씨가 잘 먹혀 들어갔다. 양갓집 규 수처럼 얌전해진 에리나의 모습에 복면의 사내는 시즈에게 존경 의 시선을 보내며 사람들의 무리로 걸음을 옮겼다. 「들꽃의 순수보다 벌새의 자유를 가진 인간이여, 어서 오시 게.」 무리에서 걸어나온 노인이 건넨 인사에 시즈는 그를 눈여겨 살 펴보았다. 흰 눈썹이 축 늘어져 신선을 상상하게 만드는 노인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풍성한 눈썹 아래 감춰진 날카로운 눈으 로 초청객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눈썹 옆으로 뾰족한 귀 가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길쭉하게 뻗어 나와있었다. 「거센 바람을 품고 자리를 지키는 갈대의 미덕을 피우는 엘프 여, 화려한 초대에 감사합니다.」 미소하는 시즈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장난기 가득 한 웃음소리로 히히힛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주의깊게 시즈를 살 피던 다른 엘프들이 「과연!」하고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 였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던 엘프의 노인은 시즈의 손을 잡고 거친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역시 그 아이가 격찬을 할 만하지 않은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니까. 이보게, 시즈 난 이 마을의 족장인 베이란트 라고 하네. 내가 그대를 초대했지. 아! 꼬마 숙녀 분도 잘 왔어. 비록 불청 객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 쪽으로 오시게.」 시즈와 에리나를 한 손에 한 명씩 잡고 리얼한 표정과 큰 동작 까지 곁들이며 호들갑스럽게 이끄는 모습은 매우 익살스러웠다. 숲의 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엘프에게 동경을 품고 있던 에리나 는 베이란트의 모습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보통 엘프들은 차분하고 냉정하지 않나요?」 「그런 편견은 잘못된 것이지. 그런 편견 때문에 대부분의 엘프 노인네들은 어울리지도 않는 분위기를 잡느라 골치가 썩어서 스 트레스성 질환으로 수명을 제대로 누리지를 못하는 거야.」 그에게 오래사는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사항인 듯 했다. 침중 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내뱉는 열기 가득찬 어조에 에리나 는 웃음을 터뜨렸다. 「족장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자네가 엘프인가? 족장이라고 부르게!? 이름은 장난으 로 가르쳐준 게 아니란 말이네.」 「죄송합니다, 베이란트. 말씀하는 것에서 의구심이 생겨서 그런 데요. 아까 저희들을 데려온 엘프도 그렇고, 그 아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하윌이 말해주지 않았나 보군. 몹쓸 엘프 같으니, 하윌! 이리 좀 와보게.」 하윌이라고 불린 엘프는 막 복면을 벗고 머리를 감고 있었는데 베이란트가 부르자 물이 묻은 금색의 머리칼을 닦지도 않고 걸 어왔다. 20대의 차가운 귀공자같은 외모를 하고 있는 그가 큰 키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오는 긴 금발을 흔들며 다가오자, 베 이란트는 하윌의 엉덩이를 탁탁 두들기며 웃어댔다. 「이보게, 하윌, 이보게 하윌, 어서 소개 좀 해보게나.」 소개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엉덩이가 두들기고 있을 듯한 족장 의 기세에 하윌은 마지못해하며 입을 열었다. 「하윌 노일핀우드 필레니언.」 「아스틴에 있는 유레민트 노일핀우드 필레니언의 아버지라네. 얼굴은 저래도 나이는 278살의 장로지. 아니! 시즈, 뭘 그리 놀 라나? 어서 들어가세.」 「예? 예.」 대답을 하면서도 시즈의 동공은 풀린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 다. 기계처럼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하윌은 얼얼해진 엉덩 이를 무심히 문질렀다. -61- 재능은 사람을 보고 찾아오지 않는다. 곳곳에 자리한 호수들로 보석처럼 햇살에 반짝이는 멜라누 숲, 깊숙한 곳에는 예전부터 희귀한 생물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렇기에 왕궁의 유희를 위한 사냥터에서 서민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온갖 식물과 물질의 채취 터로 각광을 받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는 멜라누 숲은 일부분에 미칠 뿐이었다. 누구는 전 설 속의 드래곤이 산다고 했고, 혹자는 엘프의 마을이 숲 어딘 가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전부 터 멜라누 숲에서 살아왔던 엘프들 일까? 시즈의 호기심은 곧 눈동자에 응집되어 흑요석의 반짝임처럼 아른거렸다. 「아냐, 아냐. 멜라누 숲에는 엘프가 살고 있지 않아. 우리 부족 은 이제 막 이동을 해온 것 뿐이니까.」 「예?」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봤네. 아니었다면 말고… ….」 시즈는 자신이 그렇게 티나는 표정을 지었나 하고 생각하며 얼 굴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베이란트 할아버지는 누구든 놀라게 하는 걸 즐기신다고요.」 「예……. 이런 일이 자주 있군요?」 「응! 아주 많이!」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는 거군!? 대단해. 인간으로 치면 10살 이 넘었을 엘프 소녀의 말에 그는 내심 혀르르 내둘렀다. 시즈 는 모르고 있었지만 베이란트는 노일핀우드 엘프들의 숨겨진 현 자였다. 수 많은 세월동안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상과 사람을 유 심히 관찰해오지 않았다면 쉽게 가질 수 없는 능력이었다. 물론 영혼의 눈가림을 푼다는 예지력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 지만 얻기는 더욱 어려웠으므로 시즈에게 베이란트의 굽은 뒷모 습에 참을 수 없는 흠모를 느꼈다. 「자아……! 여기가 내 집이야. 넓지?」 「네…에.」 「그, 그렇군요.」 시즈와 에리나가 간신히 대답하는 게 즐거운지 베이란트는 넓 은 방 안을 뛰어들어가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여전히 좁군. 몸이 부딪히는 게…….」 「무슨 소리인가, 하윌! 시즈와 꼬마아가씨는 넓다고 하지 않는 가. 자네랑 시즈 군이 몇 피트씩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에이 잉!」 「하, 하지만 베이란…….」 「됐네, 이 사람아! 내 집에 들어오기 싫거든 나가게나.」 그 말을 들은 하윌은 망설임없이 몸을 돌렸다. 시즈와 에리나 를 비롯한 다른 장로들도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베이란트의 눈 빛은 살벌함이 오리하르콘이 박힌 미스릴 검보다도 더 할 것 같 았다. 결국 그들은 넓긴 하지만 낮은 천장에 허리를 숙이고 안 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을 낮추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굴을 일그 러뜨리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엘프의 촌장은 손뼉을 치며 자랑 스럽게 말한 것이다. 「자자! 다들 앉게나. 이번에 테이블도 좀 내게 맞게 낮춰봤지. 아주 편안하네.」 시즈는 토루반이 봤으면 기뻐했을 듯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 다. 엘프 소년과 베이란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게 한 눈에 느껴졌지만 예리한 관찰력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일핀우드 엘프의 숨겨진 현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몸도 마음도 편안하니,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그 전에 특별한 손님에게 대접한 차를 가져오지.」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찬성했다. 그들은 넓고 편안하기 그지 없 는 베이란트의 집에서는 심정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 다. 하지만 오늘의 초대인원이 많아서인지 차를 준비하는 시간 이 꽤나 길었다. 지루했는지 함께 들어온 엘프 소녀- 아마도 베 이란트의 손녀가 아닌가 싶었다. -안절부절했다.. 「저기요……. 시즈는 유레민트 님을 만나봤지요?」 소녀의 물음에 시즈는 가볍게 끄덕였다. 하지만 소녀의 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떠신 분이세요? 분명히 아름답고 청순하고 가련하고 섹시한 미모에 자상하고 상냥하면서도 활발한 성격을 겸비하신 …(주절 주절)… 분이죠?」 「그, 그럼요!」 상당히 노골적인 표현으로 수식하는 군. 시즈는 그녀의 입에서 순식간에 쏟아져나오는 수식어의 완성사전을 인식, 해석하는 것 으로도 뇌가 포화상태에 이를 지경이었으므로 황급히 대답했다. 마치 상관에 명령에 대답하는 하급병사로 보일 정도였다. 「엘프들은 우상이 없다고 들었는데…….」 「전체적인 성향으로 개개인을 파악해서는 안되지. 유레민트는 훌륭한 노일핀우드의 엘프라네.. 그 아이가 인간과 어울리는 희 생을 하기는 했지만 성향이나, 그 심성이 바뀌지는 않았어. 덕분 에 우리도 편히 살아온거야.」 에리나가 유레민트의 엄청난 인기에 놀라는 동안 한 사람 앞에 하나의 찻잔을 놓은 베이란트는 엘프 소녀의 연보라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헌데… 그 아이가 너무 활약을 하는 바람에 엘프의 마을 역사 에 있어 유례없는 우상이 나와버렸단 말이야. 덕분에 어린 엘프 들이 인간들에 대한 경계심도 많이 사라졌어. 시즈 자네로서는 잘된 일이지. 만약 100년 전쯤에만 왔었어도, 자네는 꼬치에 꿰 어 불 속에 몸을 돌리는 도마뱀보다 더 잔인하게 죽었을 거 야.」 「핫하하! 그래도 베이란트가 있었으니 괜찮았을 겁니다.」 「그 친구가 아부도 수준급이로군. 내 오늘 자네를 불 속에 돌 리진 않을테니 걱정말게.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꼬마아 가씨에게는 별로 유익한 얘기가 아니야. 차도 마셨으니 니아레 와 함께 나가서 놀는 게 좋겠어. 혹시 아는 사람이 올지도 모르 니까…….」 「아니! 이런 깊은 숲 엘프의 마을에 무슨 아는 사람이 찾아 온…….」 에리나는 순간 언제나 붙어 다니던 소년이 떠올랐다. 찾아서 오지 않았을까? 시즈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재촉했다. 「베이란트의 말이 맞아요. 어서 가보세요. 쓸데없는 다툼이 될 지도 모릅니다.」 시즈의 그 말은 에리나의 왕자님이 아닌 자신의 수호자를 생각 하고 한 말이었다. 사려가 깊은 듯하면서도 극적인 상황에서는 뇌 속이 텅 비어버리는 보를레스를 모를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즈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여기란 말이지?」 「예!」 소년의 힘찬 대답에 보를레스는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을 바라보았다. 마을의 배치를 보건데 저런 식으로 집들을 짓는 종족은 대부분 엘프였다. 〈엘프들은 인간들의 눈에 띄기를 싫어할 텐데…….〉 그런데 인간의 마을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에서 보란 듯이 굴뚝연기를 피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보를레스 는 그것보다 더 고심해야 할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62-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9회 「예에에?」 「허허헛. 젊은 친구가 말귀가 어둡군. 엘프라면 귓병에 걸렸다 고 해도 들렸을 듯한 큰 소리였거늘……. 지금 이 곳, 즉 이 숲 을 엘프보호구역, 즉 인간들의 불가침 영역으로 만들어 달라 이 말일세.」 「자, 잠깐만요.」 쿠웅! 손을 내저으며 벌떡 일어선 시즈는 넓은(?) 건물의 구조 를 망각한 대가를 머리 정수리의 볼록한 혹으로 대신했다. 천장 에 부딪힌 머리를 감싸쥐고 고뇌하는 그의 모습에 베이란트는 박장대소했다. 「그대에 대한 소문을 듣기를 참으로 현인이라고 들었네만, 내 보기에는 굉장히 유쾌한 이로군. 꼭 광대를 보는 것 같지 않은 가.」 「크윽! 엘프 보호구역이라니요? 그걸 저보고 해달라는 말씀이 십니까?」 「그래.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유레민트가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어.」 시즈는 현재 만약 레소니가 봤다면 당장 침대 위에 눕힌 후 커 다란 얼음주머니를 이마에 얹혀 놓을만큼 골치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유레민트 님이 저를 어떻게 설명하신 거죠?」 베이란트는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양피지를 꺼내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설명은 무슨……. 그저 보고서 형식으로 국제 규격 크기에 맞 눈 양피지 가득히 자네의 외모와 성격, 특기 ,취미를 비롯하여 친우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 약점 등과 사용하는 마법의 특성 정도만 기록해놓았을 뿐이지.」 무서운 여자였군. 청순가련하게만 느껴지던 유레민트의 미소가 어쩐지 가증스럽고 섬뜩한, 마치 총각을 노리는 처녀귀신으로 시 즈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갔다. 베이란트는 멈추지 않고 인간청 년에게 일격을 가했다. 「오……. 여기에 보면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나, 의외 로 게을러 움직이는 걸 싫어하니 인질을 잡아서 협박을 하라고 쓰여있지 않나. 내 이래서 자네 뿐이 아니라, 저 꼬마 아가씨도 함께 데려오라고 한 게지.」 「협박이라면?」 「시즈, 자네는 엘프들이 성격이 좋다고 너무 되묻는 군. 말했잖 은가. 자네가 100년만 일찍 왔으면 도마뱀구이보다 처참하게 없 앴을 거라고. 뭐 지금이라고 못할 건 없지. 자네를 해친다면 귀 찮은 일이 많이 생기겠지만 자네 주위의 관계자들을 하나씩 도 마뱀으로 만드는 게 어려운 건 아니야. 아! 자네의 절대적인 마 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하윌이 말하길 이미 한번 사용한 것 같더군. 유레민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생각해볼 때, 다 시 그런 위력의 마법을 쓰면 후유증이 좀 오리라고 생각하네.」 엘프가 이렇게 위험한 종족이었나? 시즈는 들어온 바와 너무나 틀린 엘프, 그것도 그들의 인자한 현자의 모습에 차가워진 침만 목뒤로 넘기며 입술을 씹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꼭 가야할 갈림길에 섰다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인지 판단하는 생각과 고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시되는 조건은 고민할 시간이다. 누군가와 대화나 협상을 나눔에 있어서 시간을 끄는 것은 상대에게 넘어간 주도 권, 또는 흐름을 멈춤과 동시에 흐트러진 자신의 정신이나 마음 을 바로잡는 기본적인 활로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즈는 쉽게 손해를 보지 않는 화법을 알고 있는 이였다. 「시간이라… 주지. 단, 인간들이 이 마을에서 오르는 연기에 의 심을 품고 몰려오기 전에 생각을 마쳐주길 바라네. 다들 나가서 기다립시다.」 〈우선은 보를레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좋겠어.〉 그러면서도 시즈는 계략이라고 말할만한 생각을 떠올려보려 노 력했다. 장로들와 장년 엘프들이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때였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엘프가 급한 얼굴로……. 「촌장님! …우억! 와득!」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깨물었군.〉 한 눈에도 머리와 턱을 감싸쥐는 게 그가 피를 음미하고 있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눈물을 찔끔되던 엘프 청년은 안쓰러움과 재촉이 담긴 베이란트의 시선에 아픈 혀를 움직였다. 「아으… 치이자가 이으니다아. 잉강잉니다아.」 「침입자가! 하윌은 뭘하고 있었길래 인간이 침입하는 걸 놔두 었지?」 「하잉…….」 「그냥 직접 보는 게 낫겠군. 누가 로포브를 치료해주시게. 시즈, 그대의 일행이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시즈와 베이란트가 넓고 낮은 저택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기 다리고 있었는지 에리나가 시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시즈 님, 빨리요. 보를레스 님이!」 「역시 일행이 맞는 모양이군. 꼬마아가씨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도 다치진 않을 겁니다.」 자신을 대답하여 베이란트가 대답하자 시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의 눈에도 마을 정면의 공터에서 건장한 체 격의 두 남자가 격투를 벌이는 모습이 들어왔지만 그리 위험하 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보를레스가 그렇게 만만한 실력의 소유자는 아닐텐데……. 하 윌 씨가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베이란 트?」 「그가 권술을 익힌지 올해로 꼭 250년 되었다네.」 「강하군요.」 「그래. 강하지. 아마 대륙의 권술가 중 가장 강할 걸세.」 소년의 이름은 에밀레오. 그는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는 싸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쉬익쉬익하고 뱀처럼 검이 공중을 가르고 주먹이 공간을 때린다. 보를레스는 근위기사 중에 특출한 실력을 가진 그의 아버지가 인정할 정도의 실력자였는데도 날카 롭게 생긴 엘프 청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를 레스가 힘겨워했다. 처음에는 주먹과 발을 피하며 검을 내질렀지 만 점점 피하기보다는 막는 것에 치중했다. 한편, 보를레스는 엘프의 강렬한 공격이 그의 굵직한 팔둑에 와 부딪힐 때마다 뼈 속까지 저려옴에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이러다가는 검을 잡고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겠어.〉 초조해진 보를레스의 움직임이 경직과 함께 틈이 점점 늘어났 다. 섬광이 일 듯 거대한 검이 기합소리와 함게 곧게 뻗어 나갔 다. 이번에도 역시 가볍게 검면을 손바닥으로 쳐올리는 엘프.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온 거지?〉 그 엘프는 힘도 엄청나서 종족을 오거로 생각해보는 게 더욱 합당하게 인식될 것 같았다. 흥분해버린 보를레스는 자신이 그의 공격권 안에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윌의 주먹은 강철만큼이나 단단하여 서로 부딪힐 때마다 금속음이 거세게 울 려퍼졌다. 아마도 그의 몸을 보호하는 어떤 에너지가 있는 모양 이었다. 「헛!?」 갑자기 하윌의 움직임이 변했다. 주먹이 우쾌같은 파공성을 내 며 쏘아져오자 보를레스는 헛바람을 삼키면서 가까스로 막았지 만 연신 뒤로 강하게 밀리는 몸을 가눠야 했다. 비틀거리면서 그 는 하윌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봐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상대의 자세가 흐트러진 기회를 놓칠 리가 없 었다. 「자신이 있다는 건가?」 인간에게 오기가 있다는 건 마(魔)가 준 어리석음일까, 신이 준 또다른 능력일까? 보를레스에게 그런 건 어찌됐든 좋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오기와 자존심을 검술에 (+) 작용으로 만들 정신력 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아아압!」 후우우우웅! 인간은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감정에 치우친 존재였기에 하나 의 감정이 극도화가 되었을 때 일으키는 변수 또한 가장 크다. 하윌은 보를레스의 검에 실린 기운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 을 확연히 느꼈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마스터의 칭호를 얻는다는 건 의외의 변수에 대해서도 이미 통달하고 있다는 뜻이지.」 베이란트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보를레스의 복부를 주먹으 로 올려치는 하윌의 모습에 미소지었다. 「커어헉!」 보를레스는 고작(?) 한번 명치에 주먹이 슬쩍 파고든 것에 숨 이 막히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명치는 사람의 움직임을 무뎌지게 함은 물론 생명까지 뺏을 수 있는 급소 중에 급소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사들을 비롯한 검 사와, 뭇 전투가들에게 있어 더욱 단련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제법이군. 검술은 별 볼일 없지만……. 그걸 맞고 쓰러지지 않 다니, 맷집 하나는 氣를 두른 마스터 수준이로군.」 「쿨럭쿨럭! 치, 칭찬 고맙군, 쿨럭! 도대체 어떤 기술이지?」 「일어서라.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장에 힘이 미치지는 않았 군. 아니 회복력이 빠른 건가? 자네가 맞은 주먹은 氣로서 충격 의 표면적을 넓히는 기술이지. 명치에 맞았지만 상반신 전체에 충격이 흡수되었을 거다.」 보를레스는 어렸을 적 높은데서 떨어지거나 해서 가슴전체에 충격을 받았을 때 숨이 막혔던 것이 생각났다. 하윌은 가볍게 시 전했지만 아마도 대단한 기술이 틀림없으리라. 「어느 정도 경지의 권경이지?」 「기본적인 기술이지만 마지막 권경(卷境)이다.. 자아… 일어서 라.」 하윌은 끝을 봐야겠다는 어조로 말하며 힘줄이 돋은 주먹을 앞 으로 내밀었다. -63-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아마도 신의 투사인 성투사, 헤모가 온다고 해도 눈 앞의 이 엘프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보를레스는 절 망을 느꼈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엘프는 그의 몸 속에 주먹 을 꽂아넣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걸 확인하려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비치지 않을 것 같은 청년 엘프는 뒤이 어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며 물러섰다. 「멈춰주십시오.」 「시즈!」 보를레스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조그마한 청년이 시즈라는 걸 깨닫고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갈색 머리를 날리며 뛰어온 에 리나가 그를 부축했다. 「무사했군.」 「빨리 오셨군요. 뭐 그리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이 싱글거리며 다가온 베이란트가 박수를 쳤다. 「이런, 이런! 인질이 늘어버렸군. 이렇게 고마울 수가…….」 「거기 있는 꼬마도 나와라.」 「꼬마?」 하윌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에밀레오가 숨어있는 나무를 가리켰 고, 시즈는 그 곳에 빼꼼이 머리를 내미는 소년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보를레스, 저 소년은 왜 데려왔죠?」 「시즈, 정정해. 에밀레오가 날 데려온거라고.」 불굴의 장군인 듯 당당하게 외치는 보를레스. 가냘픈 여자아이 의 손에 부축되어 서있는 남자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 광에 눈이 아렸던가? 시즈는 한 손으로 눈을 감싸며 고개를 돌 렸다. 「베이란트, 냉수 한잔 주시겠습니까?」 「음……. 얼음도 띄워주지. 속이 많이 타겠구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시즈, 그대도 별 수 없겠군.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없는 말투로 한숨을 내쉬는 시즈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하고 때린 베이란트는 말했다. 「유레민트가 말하길 대륙에서 가장 특이하고, 가장 현명한 이 가 바로 그대라고 했네. 그런 자네, 〈시즈 세이서스〉가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 는가. 하지만 이건 하지 못할 일이 아닐세. 어쨌든 든든한 협력 자가 생겨서 기쁘구만. 오늘은 즐겁게 보내고 가게나.」 「그래도 저보다는 베이란트 님이 더 절박하실 텐데… 오히려 여유롭군요. 아니면 제게 맡기셨으니까 그러시는 겁니까?」 「헛헛헛.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니 더욱 든든하네, 그려.」 결국 시즈는 하윌에게 냉수를 한잔 더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우물가에 가있었다. ### 「주인님. 주인님. 촌장 님께서 오셨는데요.」 「…….」 몇 번의 노트를 해봐도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침 묵이 대답을 대신하자, 머쓱해진 소년은 겸연쩍게 볼을 긁적이 며 울상을 했다. 사실 소년은 남장을 한 소녀였기에 그녀의 눈 물 그렁거리는 얼굴은 뭍 남정네의 동정을 불러 일으키는 색기 와 애처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흠흠 해대던 노인은 오히려 미안한지 턱수염의 끝부분을 모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 었다. 「어허헛, 그렇게 울상짓지 말거라. 자꾸 그런 표정을 지으면 다 들 네가 숨길 걸 쉽게 알아챌 거야. 네 둔한 주인님 마저도 말 이다. 그러면 안되겠지? 오늘은 그냥 바둑이라도 한 일국 둘까 하고 왔을 뿐이야. 바쁘신 모양이니 다음에 오도록 함세. 이 노 인네가 왔다고만 전해주시게. 헛헛헛!」 노인은 껄걸 웃었지만 꽤나 실망했는지 그나마 처진 어깨를 탈 골로 착각될 정도로 축 늘어뜨리고 발길을 돌렸다. 「레소니 언니, 촌장 할아버지 어디 아파? 비틀거리네.」 「어휴… 그런 가봐. 앗! 피린,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쫓겨 나고 싶어?」 레소니의 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추위에 몸을 떠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는 일이 하 루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기에 피린은 당장 사색이 되어 다른 동생들 뒤로 숨어버렸다. 문제는 그들이 이 저택의 숙식여탈권을 시즈가 아닌 레소니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 이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 소년, 소녀들이 시즈를 가지고 놀 수 있겠는가. 「하여튼… 요즘 너무 투정이 늘었어. 이게 다 시즈 주인님 때 문이라니까…….」 겁에 질려 울먹이는 아이들을 달래놓은 레소니는 한숨을 내쉬 며 시즈의 서재 문을 열었다. 안의 모습은 그녀가 예상하던 모 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너질러진 책들과 그 안에 파묻혀 있 는 청년, 요 몇일동안 무슨 고민이 생겼는지 잠도 안자고 노심 초사하며 책을 살피더니 결국 오늘에야 쓰러진 모양이었다. 「결국 4 일만이네. 어디 보자. 〈중대 왕실에 대한 전설들〉이 라……. 지난 번에 보신 책 같은데 다시 읽으시는 건가?」 잠이 들고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의 손에는 아직도 책이 펼쳐 져 있었다. 살짝 들어 시즈가 보던 페이지에 손톱자국을 낸 후 레소니는 옆의 아직 보지 않은 듯한 책 위에 올려놓았다. 매우 게으른 그녀의 주인은 허락없이 책상위에 준비해둔 서적들을 치 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여 정리도 주의를 기울려야 했다. 촤아악! 「후우… 이 먼지!」 겨울 기운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 오자 잘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공중에서 춤추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지쳐잠든 청년을 감싸는 보석인 양 반짝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모습… 이런 망.가.진. 모습이 가장 어 울리시는 것 같아.」 갑자기 시즈는 코밑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이 거슬리는 듯 입가 를 씰룩였다. 망가진 모습이라고 레소니는 평했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즈는 분명 귀족적인 외모를 가 지고 있었다, 동방 용병들처럼 오목조목한 눈코입이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하얀피부는 그를 소년처럼 보였다. 그건 윤기조차 느 껴지지 않을 검은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깊은 듯하면서 도 공허한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면 누가 그를 20살의 청년이라 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에 레소니는 그의 주인님 얼굴에 눈을 바짝 가져갔다. 「귀여워……. 후훗.」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눈을 뜬다면 어떤 느낌일까? 레소니는 의문을 던지다가 갑자기 말똥거리며 그녀를 향한 광택 어린 두 개의 검은 동그라미에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았 다. 「레소니, 뭐해?」 「으아아아앗!」 그 때, 훌쩍임을 멈추고 주방에서 레소니가 숨겨놓은 사탕을 찾기에 여념이 없던 피린 외의 어린이들은 서재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지들! 일을 서두르자!」 「옙!」 한 편, 다시 서재. 시즈는 무너진 책더미 속에 깔려버린 레소니를 꺼낸 후 훌쩍이 는 그녀를 열심히 위로하고 있었다. 「레소니, 울지마아! 이 책 내가 모두 치우면 되잖아!」 -63- 사람을 움직이는 법(1) 아마도 신의 투사인 성투사, 헤모가 온다고 해도 눈 앞의 이 엘프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보를레스는 절 망을 느꼈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엘프는 그의 몸 속에 주먹 을 꽂아넣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걸 확인하려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비치지 않을 것 같은 청년 엘프는 뒤이 어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하며 물러섰다. 「멈춰주십시오.」 「시즈!」 보를레스는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조그마한 청년이 시즈라는 걸 깨닫고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갈색 머리를 날리며 뛰어온 에 리나가 그를 부축했다. 「무사했군.」 「빨리 오셨군요. 뭐 그리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이 싱글거리며 다가온 베이란트가 박수를 쳤다. 「이런, 이런! 인질이 늘어버렸군. 이렇게 고마울 수가…….」 「거기 있는 꼬마도 나와라.」 「꼬마?」 하윌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에밀레오가 숨어있는 나무를 가리켰 고, 시즈는 그 곳에 빼꼼이 머리를 내미는 소년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보를레스, 저 소년은 왜 데려왔죠?」 「시즈, 정정해. 에밀레오가 날 데려온거라고.」 불굴의 장군인 듯 당당하게 외치는 보를레스. 가냘픈 여자아이 의 손에 부축되어 서있는 남자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 광에 눈이 아렸던가? 시즈는 한 손으로 눈을 감싸며 고개를 돌 렸다. 「베이란트, 냉수 한잔 주시겠습니까?」 「음……. 얼음도 띄워주지. 속이 많이 타겠구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시즈, 그대도 별 수 없겠군.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겠지?」 「그렇겠지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없는 말투로 한숨을 내쉬는 시즈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하고 때린 베이란트는 말했다. 「유레민트가 말하길 대륙에서 가장 특이하고, 가장 현명한 이 가 바로 그대라고 했네. 그런 자네, 〈시즈 세이서스〉가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 는가. 하지만 이건 하지 못할 일이 아닐세. 어쨌든 든든한 협력 자가 생겨서 기쁘구만. 오늘은 즐겁게 보내고 가게나.」 「그래도 저보다는 베이란트 님이 더 절박하실 텐데… 오히려 여유롭군요. 아니면 제게 맡기셨으니까 그러시는 겁니까?」 「헛헛헛.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니 더욱 든든하네, 그려.」 결국 시즈는 하윌에게 냉수를 한잔 더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우물가에 가있었다. ### 「주인님. 주인님. 촌장 님께서 오셨는데요.」 「…….」 몇 번의 노트를 해봐도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침 묵이 대답을 대신하자, 머쓱해진 소년은 겸연쩍게 볼을 긁적이 며 울상을 했다. 사실 소년은 남장을 한 소녀였기에 그녀의 눈 물 그렁거리는 얼굴은 뭍 남정네의 동정을 불러 일으키는 색기 와 애처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흠흠 해대던 노인은 오히려 미안한지 턱수염의 끝부분을 모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 었다. 「어허헛, 그렇게 울상짓지 말거라. 자꾸 그런 표정을 지으면 다 들 네가 숨길 걸 쉽게 알아챌 거야. 네 둔한 주인님 마저도 말 이다. 그러면 안되겠지? 오늘은 그냥 바둑이라도 한 일국 둘까 하고 왔을 뿐이야. 바쁘신 모양이니 다음에 오도록 함세. 이 노 인네가 왔다고만 전해주시게. 헛헛헛!」 노인은 껄걸 웃었지만 꽤나 실망했는지 그나마 처진 어깨를 탈 골로 착각될 정도로 축 늘어뜨리고 발길을 돌렸다. 「레소니 언니, 촌장 할아버지 어디 아파? 비틀거리네.」 「어휴… 그런 가봐. 앗! 피린,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쫓겨 나고 싶어?」 레소니의 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추위에 몸을 떠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는 일이 하 루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기에 피린은 당장 사색이 되어 다른 동생들 뒤로 숨어버렸다. 문제는 그들이 이 저택의 숙식여탈권을 시즈가 아닌 레소니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 이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 소년, 소녀들이 시즈를 가지고 놀 수 있겠는가. 「하여튼… 요즘 너무 투정이 늘었어. 이게 다 시즈 주인님 때 문이라니까…….」 겁에 질려 울먹이는 아이들을 달래놓은 레소니는 한숨을 내쉬 며 시즈의 서재 문을 열었다. 안의 모습은 그녀가 예상하던 모 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너질러진 책들과 그 안에 파묻혀 있 는 청년, 요 몇일동안 무슨 고민이 생겼는지 잠도 안자고 노심 초사하며 책을 살피더니 결국 오늘에야 쓰러진 모양이었다. 「결국 4 일만이네. 어디 보자. 〈중대 왕실에 대한 전설들〉이 라……. 지난 번에 보신 책 같은데 다시 읽으시는 건가?」 잠이 들고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의 손에는 아직도 책이 펼쳐 져 있었다. 살짝 들어 시즈가 보던 페이지에 손톱자국을 낸 후 레소니는 옆의 아직 보지 않은 듯한 책 위에 올려놓았다. 매우 게으른 그녀의 주인은 허락없이 책상위에 준비해둔 서적들을 치 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여 정리도 주의를 기울려야 했다. 촤아악! 「후우… 이 먼지!」 겨울 기운이라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 오자 잘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공중에서 춤추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지쳐잠든 청년을 감싸는 보석인 양 반짝거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모습… 이런 망.가.진. 모습이 가장 어 울리시는 것 같아.」 갑자기 시즈는 코밑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이 거슬리는 듯 입가 를 씰룩였다. 망가진 모습이라고 레소니는 평했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즈는 분명 귀족적인 외모를 가 지고 있었다, 동방 용병들처럼 오목조목한 눈코입이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하얀피부는 그를 소년처럼 보였다. 그건 윤기조차 느 껴지지 않을 검은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깊은 듯하면서 도 공허한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면 누가 그를 20살의 청년이라 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에 레소니는 그의 주인님 얼굴에 눈을 바짝 가져갔다. 「귀여워……. 후훗.」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눈을 뜬다면 어떤 느낌일까? 레소니는 의문을 던지다가 갑자기 말똥거리며 그녀를 향한 광택 어린 두 개의 검은 동그라미에 의아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았 다. 「레소니, 뭐해?」 「으아아아앗!」 그 때, 훌쩍임을 멈추고 주방에서 레소니가 숨겨놓은 사탕을 찾기에 여념이 없던 피린 외의 어린이들은 서재쪽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동지들! 일을 서두르자!」 「옙!」 한 편, 다시 서재. 시즈는 무너진 책더미 속에 깔려버린 레소니를 꺼낸 후 훌쩍이 는 그녀를 열심히 위로하고 있었다. 「레소니, 울지마아! 이 책 내가 모두 치우면 되잖아!」 -64-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어때요?」 기대에 찬 레소니의 물음에 따라 아이들의 긴장어린 시선도 시 즈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시즈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 속에 담긴 무언가를 오물거리며 음미하다가 한 마디를 토했다. 「맛있는데!?」 「우와앗!」 그의 평가에 음식을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 그 모습을 만족스 럽게 지켜보며 시즈는 그윽한 음성으로 레소니에게 칭찬을 건넸 다. 「대단한 걸!? 정말 실력이 많이 늘었어.」 「헤헤……. 뭘요…….」 레소니는 행복하게 웃으며 스푼을 들었다. 그녀가 모두의 입에 맞는 요리를 하게 된 것은 요근래 들어서야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 동안 사람의 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희생된 많은 생물들의 억울한 넋이 지천을 메울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재료 인 하루기 -참새보다 조금 더 큰 조류로 탄력있는 살코기로 유 명하다 -는 무척이나 행복한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새 뭘 그렇게 찾고 계시는 거에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읽으셨던 책도 다시 펼치시는 것 같던데……. 」 「음…. 이거 하루기 가슴살이 특히 맛있는 걸. 한 접시 더 주겠 어?」 「네.」 「고마워요. 네가 생각한대로야. 얼마 전에 부탁 받은 일이 있는 데 그게 쉽지가 않아. 그렇다고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고…….」 그가 며칠간 잠도 못자고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히 심각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레소니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즈는 몇 번의 우물거림과 한 번의 목젖 턱걸이를 한 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 힘만으로는 역시 힘들 것 같아서 왕족을 끌어드 릴 생각인데 뭘로 유혹할지 생각하면서 자료를 조사하고 있어. 역시 왕족들은 권위라는 단어에 뇌세포가 반응하지 않을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왕족을 모독하 면 큰 벌을 받아요.」 「왕족 모독이라……. 그러고 보니 그것과 관련된 고대유물이 있던 것 같은데… 아! 그거야! 레소니 고마워요! 핫핫핫!」 뭔가 떠올랐는지 시즈는 레소니를 끌어안고 그답지 않은 호탕 한 웃음을 터뜨리며 뛰어나갔다. 「그럼 나 나갔다 올게!」 「네…에….」 아이들은 멍해져 버린 레소니의 눈앞에 스푼을 흔들었다. 그리 고 그녀의 증상에 대해서 피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눈이 풀렸어.」 # 격렬하게 춤추는 붉은 머리칼, 매끈하게 박동하는 근육을 타고 내리는 땀줄기. 아직도 살을 이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이었 건만, 그의 주위는 뜨거운 불꽃이 일렁이는 여름날 같았다. 드래 곤이었다면 브레스를 뿜어내는 듯한 기세로, 입에서 토해지는 기합은 대기를 흔들었다. 흔들린 대기는 다시 짙누르는 검의 압 력에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며 한줄기 비명을 남긴다. 짝짝짝! 「시즈로군.」 이미 멀리서 소년 정도의 무게를 가진 남자 기척을 느끼고 있 던 그는 얼굴을 돌리지 않고 박수의 장본인을 집어냈다. 폴짝하 고 바위에서 뛰어내린 시즈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단해요. 그 정도면 하윌이랑 다시 한번 대결한다면 볼만하 겠는데요!?」 「농담은 그만 두시지. 너야말로 꽤나 고심하는 듯 하더니, 뭔가 방법이 떠오른 모양이군. 꽤나 밝은 얼굴인 걸 보니…….」 「맞아요! 생각났죠. 그런데 어때요? 보를레스.」 「뭐가?」 「저랑 한번 해보시겠어요? 오랫동안 휘두르지 않아서 완전히 무뎌지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또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요. 게다가 이번 일을 하기 전에 보를레스를 좀 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 잠시동안 보를레스는 시즈가 검은 수실로 장식된 예도를 흔들 며 하는 말을 이해하느라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고민했다. 망설이는 어조로 떨떠름하게 입을 여는 보를레스는 꽤나 당황한 듯 했다. 「그거… 장식 아니었나?」 「여, 역시 그렇게 보였나보군요.」 휴우…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 시즈는 갑자기 눈을 빛냈다. 〈투기!〉 보를레스는 뒤로 한발짝 물러서며 검을 고쳐잡았다. 그는 시즈 의 투기에 연약해보이기만 하던 학자가 꽤나 뛰어난 검력을 지 녔으면서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검사라고 착각을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투기라는 것은 일종의 기세로 검을 잡지 않는 학자라고 해도 충분히 풍길 수 있는 강한 의지의 폭출이었다. 「그럼 봐주지 않겠어.」 「섬(閃)!!」 파앙!! 대답을 하듯이 검집을 차고 나오는 검광에 보를레스는 가까스 로 막아내며 애써 모았던 기합을 흩어지는 걸 느꼈다. 서둘러 뿌리치고 반격하려 했지만, 앞날만 서있고 칼등이 뭉툭한 몽둥 이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검의 일격은 고작 170cm 의 단신의 힘 으로 내질러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묵직했다. 그랬다. 인 간 하나의 무게는 절대로 무시할만한 게 아니었다. 단 일격으로 보를레스의 자존심에 화려한 금을 내버린 시즈는 언제나 곱게만 보였던 시선을 날카롭게 흘리며 검날을 돌렸다. 칼등을 보를레 스의 검과 맞댄 상태로 몸전체를 날리는 시즈의 검에는 살기마 저 풍기고 있었다. 「흐으으압!」 전력을 다해 밀쳐내는 보를레스. 등에 흐르는 땀이 차갑다는 것을 느낀 그는 찰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인식했다. 「시, 시즈? 왜 이런!?」 그의 경악성을 시즈는 키득하고 웃어넘기며 우람한 근육의 사 내가 밀쳐낸 힘을 반동삼아 회전했다. 갸갸갸갹. 소름끼치는 이 금속성은 보를레스의 검이 뒤로 밀렸다는 걸 뜻하는 것이다. 멈 출 줄을 모르는 시즈의 검에 보를레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동방 검법!〉 서방에서 해적들이 성행하면서 그들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던 검술을 〈서해검격〉이라고 한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강한 일격을 중요시하던 서해검격은 곧 육지 에서도 그 전통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강하게 검을 내려치고, 방패로 막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검술이 널리 퍼지면서 대륙에서 검은 둔탁하고, 무거운 형태로 발전했다. 그리고 용병검술의 원 조라고 불리는 〈동방검법〉이 약 540년 전 이 서방대륙을 밞았 다. 술을 넘어 법을, 법을 넘어 도를 추구한다는 동방의 검은 서 방의 검과는 달리 끝으로 갈수록 굵고 휘어진, 서방 대륙에 있 어 이질적인 검이었다. 그들의 기세는 한 마디로 파죽지세, 끊이 지 않는 빠름을 가진 그들의 검은 강하기만 한 서해검격을 철저 하게 유린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남긴 공포의 여운은 서방 의 검사들로 하여금 연구라는 과제로 몰아넣었다. 샴쉐르, 혹자 는 만곡도라는 하나의 금속물체는 인간에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 만곡도를 이루는 금속의 믿을 수 없는 탄력에 놀란 드워프는 축복이라는 이름의 미스릴과, 가장 완벽한 보석인 오 리하르콘을 발견할 200 년 후까지 땅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그 러나 검술은 드워프들이 금속의 차이를 극복한 이후로도 아직까 지 진전이 없었다. 다만 자신들이 가진 오답해결로 이루어진 검 술이 발전하여 일가를 이룰 뿐이었다. 500년이라는 시간 속에 이미 소수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동방 검법은 사라져버렸고 어중 간한 검술은 갑옷으로 둘러싼 서해검격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 리고 현재는 마지막 명백만이 남아 용병들에게 전해지는 하급 검술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만 하도록 하죠.」 결국 한번의 공격도 못한 보를레스에게 코웃음을 치며 시즈는 예도를 검집에 넣었다. 보를레스의 이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도대체 뭐지? 네가 어떻게 동방 검법을 알고 있는 거냐?」 「동방 검술이라… 그런 건 모릅니다. 보를레스, 당신에게는 공 격을 한번도 못했다는 것보다 검술의 이름이 중요한 모양이지 요? 어떻습니까? 당신의 검술에서의 약점을 발견하셨습니까?」 「…… 한번 더 상대해주겠나?」 진중한 그 말에 시즈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물집이 터져 피가 후줄근했다. 허탈하게 웃는 그의 숨이 헐떡이 고 있다는 걸 보를레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안 되겠는 걸요. 무리를 좀 해서 말이죠.」 -65-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고 해도 최소한 신체에 무리가 갈 정도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게 생물이었다. 하지만 몇 번 휘두 르지도 않았는데 피부가 찢어진 건 물론이고 살덩이마저 문드러 진 시즈의 손바닥은 자랑스러운 듯 손을 내민 청년이 생물인가 의심스럽게 만들 지경이었다. 「시즈……. 너…」 텅 빈 공간에서 수박에 모짜렐라 치즈를 발라먹은 생쥐만큼이 나 멍한 -내가 이걸 왜 먹었을까하는- 표정으로 보를레스의 입 술은 의문이 담긴 중얼거림이 토해졌다. 「그렇게 쳐다보실 필요 없어요. 이 정도로 하지 않았다면 당신 의 자존심을 깨뜨리기에는 부족했을 테니……. 후우… 자기 암 시와 근력 강화 주문까지 사용했더니 아주 머리가 피폐한 상태 에요. 이 정도로 한 덕분에 아마 깨달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근력강화 주문〉 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2서클의 기초 마법이었지만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마법 이었다. 하지만 세포 단위의 에너지 연소를 증가시켜 근력의 비 약적인 향상을 보이는 이 주문은 잘 애용되지 않았다. 부작용이 그 이유였는데 근력과 다름없이 세포단위로 느껴지는 -통감은 강약이 아니라 범위로 느껴진다- 고통과 근육의 무산소 상태로 일어나는 호흡곤란은 그야말로 지옥여행을 즐기는 기분을 만들 어주기 때문이었다. 슬슬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는지 미소를 짓 고 있는 시즈의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다. 「무엇을 말이지?」 동방 검법에 대한 연구는 쇠퇴했지만 그 흔적은 동방 검법의 동작 하나 모르는 보를레스의 검체에조차도 남아있었다. 두 손 으로 잡는 긴 손잡이가 그것이었는데, 동방 검법 이전에는 방패 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무거운 검도 한 손으로 들고 싸우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모두 짧은 손잡이였다. 검을 두손으로 잡는댜면 강한 서해검격에도 좋았지만, 그것은 변화와 빠르기를 중시하는 동방검법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세였 다. 「이, 이런! 제 자세를 보고 느끼지 못했단 말입니까? 검을 양손 으로 잡는 이유는 힘을 강하게 줄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보다 검의 변화를 수월하게 그리 고 빠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변화를 무시 한, 즉 검술로서의 완성도는 전혀없는 검을 쓰고 있어요.」 「하지만…….」 「기사들에게는 인정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그들은 무거운 갑옷에 방어를 대부분 맡기기에 일격으로 바위를 붕괴시 키는 당신의 검이 천적인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갑옷이 아닌 체술이 주방어법인 용병이나 권술가들에게는 완전히 거미줄의 걸린 메뚜기같은 존재로 취급될 게 뻔합니다. 어쩌면 메뚜기만 큼의 반항도 못할지도 모르지요.」 「핫핫핫…….」 헛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보를레스였다. 솔직히 자부심이 컸던 만큼 시즈의 말을 부정하고싶은 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그는 조금의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옆을 흐르는 시내만큼이나 끊김이 없던 검술이라는 감탄…. 시즈의 검술에서 서해검격의 약점을 발견한 의미이기도 했다. 「헉! 하, 하지만… 헉!」 「좀 쉬었다가 말하는 게 좋겠네.」 「흡! 괜찮습니다. 귀족적인 국가로 이름높은 엘시크인만큼 기사 의 검술인 서해검격을 쓰는 검사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자산 (資産)이 부족한 대부분의 변두리지역은 용병들만큼이나 체술이 발달했을 겁니다. 후우…. 용병국과 국토를 접한 국경지역은 특 히 심하겠지요. 전쟁에서 서해검격은 갑옷과 조화되어 말의 기 동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검술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를 레스는 개인의 격투를 해나가야 합니다. 하윌과의 결투처럼 말 입니다.」 「용병의 검술을 익히라는 거냐?」 「꼭 그렇게 볼 수는 없겠지요. 길을 찾는 건 본인의 몫입니다. 저는 당신이 갈림길에 서 있다는 걸 알려주었을 뿐이에요. 크윽! 어느 게 올바른 길인지 선택할 기회도 없이 하나의 길만 걸어가 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넌 그렇게 고통에 떠는 선택을 한 거냐? 아마도 너는 갈림길을 바라 볼 줄을 알아도 올바른 길을 찾기에는 글러먹은 게 틀림없어. 땀을 닦으려고 놔두었던 수건을 찢어 시즈의 손바닥에 묶으며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이 손바닥을 보니, 검이 충돌할 때의 충격도 견디지 못했다는 뜻인데 만약 내가 공격했다면 막 을 수 있었나?」 그 물음이 의외라고 생각했을까? 시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곧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불가능했겠죠.」 위태롭다. 경련마저 일으키며 짓고 있는 억지미소에서 보를레 스가 감지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무모한, 시즈 자신도 과거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느낄 수 없었던 변화였다.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게 근육만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즈 의 용기도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느낄 수 없을지라도……. 바로 이 때였을지 모른다. 보를레스가 영원히 시즈의 곁을 떠 날 수 없으리라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66-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검술은 또 언제 연구한 거야?」 보를레스는 등에 업혀있는 시즈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축 늘어진 시즈의 팔은 시계추 처럼 흔들렸다. 「연구라기보다 조사를 시작한 때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거 의 여행할 때, 만났던 검사에게 배웠던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는 대단한 검사이었던 듯 합니다. 그는 제가 익히고 있던, 실용 성이라고는 강아지 발바닥의 땀만큼도 없는 검술을 알려주었습 니다. 상황에 맞는 기술을 선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미 화려 하기 짝이 없는 검술에서 상황에 맞는 동작을 끄집어내는 건 그 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많아서가 아니라 없어서였어요. 그 추 려낸 게 방금 전의 것들입니다. 모두 당신에게 막히기는 했지 만……. 제게 있어서는 최고의 기술들이죠. 그리고 그 외 검술의 역사같은 설명은 고대사를 연구하다가 자연스레 알게 된 거죠. 그런데 아십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아실 리가 없죠. 제게 검을 가르쳐 주었던 그는 고작 변두리 영지의 이름없는 경비대장이었 을 뿐입니다.」 노리스와 츠바틴, 그들은 시즈가 세일피어론아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자 재산을 선사한 이들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들은 엘시크의 변두리 영지에 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아는 이들이 엘시크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자들이 또 없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이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보를레스. 〈새들은 저들끼리 지저 귀기에 바빠 엎드린 드래곤의 숨소리를 깨닫지 못한다.〉」 「물론이지. 대전결투의 위대한 승리자, 온클리드 파인트히 백작 이 한 말인데 기사출신인 내가 모른다면 말이 되나.」 보를레스는 시즈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들썩 이며 흥분했다. 기사로서 흠모해야할 능력에 관해 역사가과 전략가들은 기본적 으로 대전전투력과 돌진력을 꼽는다. 군대운용력과 카리스마 또 한 중요했지만, 대전전투력을 갖춘 인물이라면 카리스마는 유명 에 따라 붙을 수 있었고, 군대운용력 방면은 기사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전문가인 전략가들이 부대마다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어쨌든 그 대전전투력에서 후세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완벽한 기사였다고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온클리드 파인트 히 백작이었다. 「진정하십시오. 뜻도 알고 계십니까?」 「당시에 시대배경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역시 그 말뜻 그대로 범인들은 능력있는 자들이 숨어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능력에 과신하면서 세상 을 휘젖고 있다는 내용이지.」 「제대로 알고 계시는 군요.」 시즈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고는 다 먹고남은 피자 부스러기만큼 정도만 남아있어 그의 입에 귀를 대고 있는 보를레스조차 겨우 들을 수 있었다.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숨을 고른 시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혹자들은 반란세력을 의심한 온클리드 백작의 발언이 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31세의 젋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안 있어서 엘시크에는 발란이 일 어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저는 보를레스가 말한 뜻으로 해석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일지 모르지만 죽기 바로 전까지 온클리드는 대륙 전역을 떠돌았으니까요. 무엇이 그를 중앙에서 내몰았을까요? 반란세력? 아닐 겁니다. 그는 용병국과 의 전쟁을 통해 기사검술 이상의 검을 찾았다고 전 생각하는데 요.」 온클리드를 신봉하는 이들이 들었다면 당장 검에 몸이 두조각 이 되어버릴 망언이었지만 보를레스는 헐떡거리면서도 잘도 이 어지는 설명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감춰진 역사는 역사가 의 해석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시즈의 말 또한 감춰진 역사를 추리하는 것일테니 틀리다고 말할 수 없었다. 토독! 톡! 「비가 오는 군.」 어느 빗방울이 가장 먼저 떨어진 것일까? 비는 시작을 알 수 없었지만 점차 많은 수가 떨어졌다. 「봄비인가요? 올해 들어서 첫 번째…….」 겨울에 내리던 비에 비교할 때, 그리 차이나지 않는 온도일 것 이다. 어쩌면 봄이라는 단어가 같은 빗방울이지만 생물에게 온 기를 부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냉기에 잠을 자 던 나무와 풀이 비를 맞고 깨어나듯 시즈도 힘을 얻었는지 몸을 일으켰다. 「달콤해…….」 입술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혀로 핱은 시즈는 기분좋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어둡게 뭉글거리는 구름 사이로 하 늘 또한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하고 보를레스는 생각했다. 입에서는 생각과는 다른 퉁명스런 어조의 비웃음이 새어나왔지만 말이다. 「오기 전에 설탕물에 절인 훈제 바비큐라도 먹은 모양이지?」 「하루기 바비큐… 3 접시나 먹어치웠죠.」 「음…….」 그 후, 그들의 대화는 신경쓸 것 없는, 하루기 가슴살만큼의 영 양가도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저택 에 도착해 레소니의 잔소리를 듣기까지 계속됐다. 혹자가 보기 에는 아주 정다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들은 적극 부인하겠지만 말이다. -67- 사람을 움직이는 법 (1) 하루가 지나자 보슬거리던 빗줄기는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고 요했던 하늘은 천적을 눈앞에 둔 사자처럼 포효를 멈추지 않았 다. 바로 이런 날을 일컬어 동방에서는 용이 현신하여 구름 속에서 춤을 추는 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어둠으로 눈빛과 속삭임을 감춘 이들이 거대한 모략을 꾸미고 세상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한 떼의 사람들이 저 택 안에서 음산스런(?)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보게. 로플레! 좀 조용히 식기를 사용하라고! 그리고 곧 회 의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먹어대면 엘프 님들께 실례잖 소.」 「촌장 님도 참 기회를 모르십니다. 이렇게 맛좋은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건 평생이 오늘 한번일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작년 몰 케진 축제날의 축제도 이처럼 마을 여성들의 정성이 들어가지는 않았을 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기절정의 마을스타인 상냥하고 부드러 운 청년과 소년이 함께 부탁하는 일에 어떤 여성이 거부하겠는 가. 심지어는 나이 70의 할머니도 나서서 숨기고 있던 전통쿠키 제조법까지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체면을 자네의 입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다버리 라는 뜻인가!!!?」 「아, 아닙니다. 그만 먹지요, 그만 먹는다고요.」 〈도이키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촌장이라는 말을 대신 할만큼 자상한 노인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그 평가를 정정해야 했다. 그 들의 모습을 모고 있던 엘프의 족장이 너털웃음을 떠뜨렸다. 「세이탄의 촌장 님께서는 우리 존재에 적잖이 신경을 써주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허허헛. 하지만 괜찮습니다. 인간의 음식에 익 숙치 않은 이 늙은 엘프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 음식들은 매우 맛깔스러운 빛깔을 자아내고 있으니까……. 돌아갈 때 좀 얹혀 줬으면 싶을 정도외다.」 「그렇지요? 아! 역시 인간의 세월을 넘어서 사신 분답게 세대 의 격차 또한 뛰어넘으시는 군요. 이런 자리에서 너무 격식을 차려봤자 뭐가 좋겠습니까? 함께 분위기 흐트러뜨리고 좋게 이 야기하면 되지.」 「로플레!!」 「예예! 알았다고요. 조용히 할게요. 촌장 님은 저와 겨우 30년 차인데 200년 차도 더된 타종족보다도 절 이해못하시는 군요.」 골치가 아픈지 도이키 촌장은 머리를 감싸쥐고는 냅킨에 잔에 담겨있던 물을 붓고 이마에 얹었다. 「엘프 족장님, 음식이라면 시즈가 달라는 대로 줄테니 얼마든 지 가져가시구려.」 「허헛! 그럴까? 이 기회에 넉넉히 가져가야 겠군.」 그렇게 숲의 엘프와 인간들이 시즈의 재산을 갉아먹기 위한 모 의를 세우고 있을 때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두 명의 건장 체격 을 가진 남자가 걸어나왔다. 등에 바스타드 소드를 멘 용병과 세제복을 입은 자들이었는데, 사제의 키는 2m를 훌쩍 넘는 거대 한 신장이었고, 용병차림의 사내는 그보다는 작았지만 무사할 수 없는 체형이었다. 두 사내는 보를레스와 헤모로 먼저 그들을 들여보낸 것은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시즈의 의도가 담겨있었다. 거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눈째림은 순식간에 테이 블 위를 조용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윌은 코웃음을 쳤 지만……. 다시 한번 사람들의 이목이 두 남자가 들어온 문으로 쏠렸다. 레소니의 부축을 받으며 시즈가 걸어들어온 것이다. 갓난 아이 처럼 몸도 제대로 못가누고 비틀거리며 다가와 시즈는 의자에 앉았다. 「모두들 오랜만에 뵙는 군요.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의 미소는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편안해보였다. 몸은 그리 편안해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다 르게 베이란트는 키득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중에 제대로 지내지 못한 사람은 시즈 그대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하하하핫!」 「하윌 씨, 베이란트가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게 잘 보호해주세 요. 죄송하게도 베이란트의 다리에 맞는 의자를 준비하지 못했 답니다. 제가 보기에 떨어지면 최소 골절상은 입을 것 같아 보 이는 군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에 주위 사람들만 배꼽을 잡을 뿐이 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를 아는 이들이기 에 소란은 곧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여기 모이신 이유는 모두들 알고 있으실 겁니다. 멜라누 숲에 새로 이주한 엘프들의 지역을 국가보호차원에서 인간 통제구역 으로 만들고자 해서입니다. 하지만 해달라고 왕족들이 해줄 리 가 없기 때문에 세이탄 주민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고 촌장님께 서도 요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이런 일을 돕는 거야 당연하지요.」 「허허헛, 고맙구려.」 「두 분 친목도모는 그만하시고 얘기를 잘 들어주세요. 이제부 터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여 멜라누 숲의 깊숙한 지역을 인간 통제구역으로 만들어놓을 것인가 하는 음모의 전반을 설명하겠 습니다.」 「음모라…허허헛.」 「예! 음모입니다. 우선…… ………………」 4 시간 후, 「다 돌아갔군.」 「그렇네요.」 테이블에 남아있는 건 2 명의 남자뿐이었다. 열심히 접시를 나 르던 보를레스가 테이블을 광나게 닦고 있던 시즈에게 물었다. 「헤모도 돌아갔나?」 「아니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거에요.」 「정정해줘. 난 지금 다 끝냈으니까.」 시즈와 보를레스의 부러운 시선을 손에 묻은 물 털 듯 외면하 면 의자에 털썩 앉은 헤모는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아까처럼 복잡한 일을 꾸밀 수 있는 자네라면 이 마을 사람들을 끌어드리지 않고도 일을 처 리할 수 있지?」 헤모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시즈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세이탄 주민들을 끌여드렸는지 묻고 싶은 모양이군요. 간 단합니다. 엘프들의 마을을 인간에게서 법으로 격리시킨다고 해 도, 세이탄의 주민과 마찰이 없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왕 시작할 때 둘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단절이 아니라 교 류의 관계로 형성하여 혹시 마찰이 일어났을 시에는 분쟁이 아 니라 지금처럼 협력하여 풀어가도록 주민들을 끌어드린 겁니 다.」 번쩍! 콰르르릉! 음모의 밤(?)은 그렇게 지내가고 있었다. -68- 장점도 단점을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다. 한 소년이 궁정 도서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계단에 놓아둔 서적들은 그가 들기에는 힘겨워 보일 정도로 많았다. 이른 봄 만큼이나 도서관원이 이른 시간에 오는 게 아니었기에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푸른빛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등까지 내려 소년은 예전부터 천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머리는 총명하고 영 특했으며 운동신경과 반사신경 또한 놀라워 못하는 일이 없었 다. 기사들을 뛰어넘는 검술 실력에 뭍 학자들의 입을 벌려놓는 학식, 마음은 넓고 겸손하여 예법에 충실하니 〈천재 이상의 천 재〉- 천재들은 보통 오만한 성격을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라 는 소문에 어긋하지 않았다. 둔재마저도 영재로 만들어버리는 왕실의 혹독한 교육 탓이 한 몫 했겠지만 어쨌든 그는 왕가의 자랑이었다. 「전하, 아직 새벽바람이 차갑습니다. 책이야 후에 시종에게 건 네서 전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소년이 있었다. 약간 키가 작고 병약해 보이는 그도 역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입은 복장 또한 남색 학사의(衣)라 매우 어울렸다. 「괜찮아. 어제 밤에는 봄비도 내렸는걸. 곧 봄이 오는데 밤이 차갑다니 엄살로밖에는 보이지 않아. 겨울동안 이 시원한 새벽 공기도 쐬지 못했어. 로길드, 넌 그만 쉬어도 돼. 몸이 좋지 않 잖아. 예전부터…….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는 미명아래 신나게 부려먹고 있으니 이 정도는 봐줘야지.」 너울대는 두 푸른 머리는 가장자리가 새어오는 하늘을 물결인 양 착각토록 만들었다. 로길드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함께 있어주었으면 바라시는 군 요. 뭐, 할 수 없지요. 어릴 적 친구라는 이유로 이렇게 전하를 따라왔는데 몇 걸음 더 걷고 몇 시간 더 같이 있는다고 달라질 일이 있겠습니까?」 「아하하핫! 내가 어찌 로길드를 당하겠어.」 금실로 사자의 문양이 수놓아진 화려한 복장부터 웃음을 짓는 소년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못 당하겠다 는 제스처를 취하자 로길드는 학의(衣)의 넓은 소매로 입을 가 리며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여인에게나 어울릴 행동이었 지만 그는 묘하게 어울렸다. 「언제나 네 입심에는 두 손을 들고 마는 군. 과연 페노스톨멘 가의 후계자야. 나는 언제나 너의 지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묻기보다는 한탄하는 어조였다. 그에 로길드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항의했다. 「학문을 제외하면 무엇하나 전하께서 제게 양보하시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시면서 제 유일한 밑천까지 넘보시겠다니 참으로 염치도 없으시군요.」 억울한 듯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어 림없으니 꿈 깨시지.〉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 는 왕자이지만 또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당연하다는 듯 웃기만 했다. 「농담이야. 설마 로길드만한 인재가 또 세상에 있을 리 없잖 아?」 「칭찬이 과하시군요. 아스틴 네글로드의 명성은 절대로 허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을 움직이는 현 자들이 많고도 많습니다.」 「너처럼 말이지?」 「대상이 명확치 않으니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때? 〈마땅찮은 시즈〉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이 제는 아예 대륙을 뒤흔드는 인사가 된 사람…….」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를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저도 그 의 글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고향〉이라고 했죠. 감탄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페노스톨멘 가(家)는 엘시크의 건국 때부터 에도린 가(家)를 보 필해온 암흑의 책략가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언제부터인가 사 라져버렸고 현재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지만 로길드에게 는 페노스톨멘이라는 이름이 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 그였 기에 자만이라고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인정할 줄 모르는 로길 드를 놀라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가 그렇게 격찬하는 경우는 처음 보는 걸.」 「어쩌면 제 예상보다 더 특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는 것은 세일피어론아드에 아무리 많은 은자들이 있다해도 그 만한 인물은 한 시대에 둘 이상이 나타나지는 않을 겁니다. 갖고 싶으십니까?」 설명을 계속 이어하듯이 그는 질문했다. 열심히 듣고 있던 왕 자는 무심결에, 「응.」 망설임도 없이 말해버렸다. 잠깐 새벽 안개 속으로 침묵의 강 이 흘렀다.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오늘 친히 도서관에 오신 이유는 〈마 땅찮은 시즈〉를 만나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 아니야. 시종들이 피곤해하는 아침에 일을 시키는 게 왠지 미안해서…….」 「호오……. 시간날 때마다 모여서 팔굽혀펴기 대회를 여는 건 강하기 그지 없는 시종들은 아침에 피곤해 보이고 팔굽혀펴기는 최대 3개의 병약하기 짝이 없는 이 로길드는 별로 피곤해 보이 지 않더란 말입니까?」 은근한 어조 속에는 〈빨리 진실을 토로하시지.〉라는 협박성 짙은 메시지가 고농축으로 함축되어 있었다. -69- 왕자는 경박하기 짝이 없다하여 귀족이라면 불지 않는 휘파람 까지 어색하게 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무엇을 봤는지 고 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로길드를 툭툭 쳤다. 「로길드, 로길드. 방금 전 그 질문 시인하겠어. 그런데 〈마땅 찮은 시즈〉가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는다는 게 확실한 거겠 지?」 「역시 그러셨군요.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가 사람들과 마 주치기를 싫어해 이른 아침에 도서관을 들렸다가 간다는…….」 로길드는 왕자의 시선을 쫓던 눈이 도마뱀처럼 쭈욱 찢어지고 토끼처럼 둥실하게 떠지는 걸 느꼈다. 왕자가 탄성을 질렀다. 「드래곤도 제 말하면 꼬리를 살랑댄다더니 과연 말이 무섭 군.」 그들은 멀리에서 직선과는 거리가 멀게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 에 혀를 찼다. 간단한 수(繡) 하나도 놓여있지 않은 칙칙한 빛깔 의- 처음에는 깨끗했을 테지만 -원색 복장에서부터 상상하고 있 던 세기의 현자에 짜자작하고 금이 가고 있었다. 침을 삼킨 왕 자가 중얼거렸다.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 있던 현자에 어느 정도 배 합될 거라 생각했는데, 소문과 너무나 딱 들어맞는 군.」 「〈마땅찮은 시즈〉를 알아보는 방법은 예지에 빛나는 현안(賢 眼)이 아니라 허수아비에게나 입혀놓을 옷차림새라니……. 완전 히 베라쥬- 엘시크의 변두리 시골마을 중 하나 -에서 막 수도구 경을 하러 온 시골뜨기 학자같지 않은가.」 「전하, 허수아비라니 너무 하신 게 아닐까요? 그래도 구김은 핀 모양입니다.」 보통은 귀족을 보아오면서 그들은 허술한 옷차림에 긴장하기는 처음이었다. 로길드는 〈이렇게 상대를 긴장시키는 방법도 있었 군.〉하고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새로운 긴장기법에 경탄했다. 마치 잠자다 막 일어난 퓨마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청년은 한 손에는 뭔가 들었는지 묵직해보이는 바구니와 다른 손에는 연 금술용품 사전만큼이나 거대한 책을 펼쳐들고 있었는데 자신이 걷 는지 책을 읽는지 구별을 못하는 듯 잠깐씩 걸음을 멈췄다가 다 시 눈을 껌뻑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보다 먼저 와있는 사람 들을 보자 의외라 생각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그는 계단에 앉았다. 「혹시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가 아니십니까?」 물은 소년은 남색 학의(衣)의 로길드였다. 양손을 앞으로 공손 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게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이 얼마나 긴장을 불러일으 키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중함에 청년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잘못 짚었나하여 실망하려는 두 소 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절 알고 계신 두 분께서는 누구신지…….」 「이 문양을 보고도 모르겠소?」 왕자가 가슴을 펴자 포효하는 사자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시즈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황금 사자가 에도린 왕가의 상징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 만 이 왕국에는 왕가의 상징을 사용할 남자가 여섯이나 됩니다. 게다가 하나의 문장으로 둘의 신분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그는 왕자에 대해 물은 게 아니라 로길드의 신분도 함 께 물었다는 걸 상기한 왕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는 달리 로길드는 소매로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입가를 가리 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시즈가 차림새와는 반대로 엄청나게 꼼 꼼하다고 느끼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우스웠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한 자신의 모습 때문이라 생각한 왕자의 째려봄에 눈을 꼭 감으며 웃음을 삼킨 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후후……. 여기 이 분은 제 4 왕자이신 리페른 전하이십니다. 전 그 시종인 로길드 페노스톨멘 입니다. 고명하신 현자, 〈마땅 찮은 시즈님〉을 뵈여 영광입니다.」 「예. 저도 고명하신 하인, 페노스톨멘 님과 리페른 전하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고명한 하인 페노스톨멘, 그 말을 들으며 로길드는 시즈가 자 신의 가문에 알고 있다는 걸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과거 엘시 크 초기에 암흑 속에서 묵묵히 왕가를 돕는 페노스톨멘들의 활 약을 아스틴의 학자들은 비꼬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고명 한 하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들의 능력을 언제 나 당하기만 한 아스틴 학자들의 불만과 시기가 함축되어 있었 다. 「이른 아침에 전하께서 도서관에 납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 까?」 시즈는 꽤나 궁금한 듯 여운만 남을 정도로 살짝 미소를 지었 다. 안개처럼 은은함이 풍겼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놓을 뻔한 로 길드는 고개를 흔들며 옆구리를 꼬집었다. 〈두려운 이. 옛 전략가와 외교가들은 무표정한 자들을 주의하 라 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웃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무엇인가? 같이 있는 사람들 모두를 웃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전하께서 저러한 미소를 띄우실 수만 있다면 이런 위험한 이와 만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어린 소년이었지만 가문의 교육은 그를 20년 묵은 사기꾼보다 더 머리를 잘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왕자는 아니 었다. 아무리 천재라는 명성이 붙었다지만 그것은 배우는데 한 해서 천재라는 것이다. 임기응변과 사태를 파악, 해결하는 힘은 경험이 없이는 힘든 게 당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리페른은 이미 긴장이 완전히 풀어졌는지 마냥 좋은 표정으로 싱글싱글거리며 친한 친구에게 대하듯 밝게 말했다. -70- 「시즈, 그대는 신흥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 고 있는데 정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도서관도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나 들리고… 몇몇 귀족들이 한번 만나 보고싶어 상사병까지 걸렸다 하더이다.」 「글쎄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그리 반갑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난 그대처럼 피할 정도까지는 아니오. 하지만 역시 궁중의례 나 조회를 귀찮아하지.」 「혹시 오늘 저녁에 있을 무도회에 참석하실 겁니까?」 「당연히 하겠지요. 밉살스럽기는 하나, 동생의 생일인데……. 혹시 그대도?」 「예. 아하하하……. 너무 숨기만 하면 원로귀족 분들의 미움을 산다는 아버님의 충고가 계셔서 말입니다.」 「역시 대마법사 세이서스 후작이군요. 그 분 말씀이 옳습니다. 그대가 몸을 사리면 〈유명해졌다고 비싼 몸 행세하려고 하는 구나.〉하고 못마땅해할 가능성이 다분하죠. 원로귀족들은 속이 자기 밥그릇보다도 작답니다. 그대가 이해하세요.」 상당히 귀가 간지러울 말이었다. 현재 귀를 후비고 있을 그들 이 들었다면 펄펄 뛰었겠지만 한산한 궁정 도서관 주위로는 아 침노래에 정신이 없는 새들만 있을 뿐이었다. 누가 듣는다고 해 도 장본인이 아닌데 어쩌겠는가. 오히려 왕족을 모함한 죄로 옥 에 갇힐 수도 있었다. 「아하하하. 괜찮습니다. 오늘 밤에 있을 무도회가 지루하시면 저와 정원에서 와인이나 함께 하시죠?」 「그러는 게 좋겠군요. 로길드, 어때?」 「나쁘지 않겠네요.」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합시다,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 오늘 이 곳에 온 건 그대를 만나 보고자해서 였는데 절대로 후 회는 없을 것 같소.」 리페른의 말이 끝나자 로길드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둘은 왕궁 깊은 곳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일어서서 배웅을 했 던 시즈는 계단에 다시 앉으며 책을 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 얼거렸다. 「귀족들의 그릇이 곧 나라의 그릇이란 걸 모르는 천재왕자 라……. 보를레스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할만하군. 하지만 페노스 톨멘가… 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어쨌든 다행이야. 무려 사흘이나 기다리고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이긴 하지만 무 도회에 맞출 수는 있게 됐어……. 만약 오늘이 아니라 내일 왔 다면 난 울어버렸을 거라고. 대신 뜻밖의 수확을 얻었으니까. 고 명한 하인의 맥이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알면 난리나겠군. 어리긴 해도 위험한 아이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겠 는 걸.」 〈어쨌든 1 단계는 성공이군.〉이라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 천천히 떠오른 햇살은 시원스럽게 왕궁 외벽의 복도를 들이닥 쳤다. 굳건히 서있는 기둥에 어둡게 잘려나간 빛자락을 가로지 르며 화려한 사자문양 옷차림의 키가 큰 소년은 온통 푸른색일 색으로 치장한 작은 소년에게 말했다. 「로길드, 그를 직접 만나니 어때?」 「예상 이상입니다. 제 성을 밝힌 게 실수같아요. 저희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놀라운 걸…….」 「위험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요. 제 2 별궁- 제 2 왕자의 거처 -에 퍼진 소문과 그의 명성으로 볼 때 아침이라 지만 그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좀……. 전하! 조 심하세요.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은 그저 뜻만으로 해석해 서는 안 되요.」 「그가 날 어떤 수단으로든 이용하려 한다는 뜻이야? 걱정할 거 없어. 네 말대로라면 날 노리고 접근했다는 뜻일진데 설마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원하는 것만 빼가지는 않겠지. 내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거고 말야. 난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로길드는 걱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표정을 푼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그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죠?」 「아주 편안한 인물로 느껴지던데 푹신한 침대같다고 할까? 그 래서 더 두렵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께서 전하가 그에게 완전히 녹아버린 게 아닌가하여…….」 넓은 리페른의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쫓아가며 로길드 는 어지간히 걱정했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길드의 말에 서 느껴지는 어감이 이상했는지 리페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녹다니 내가 무슨 사탕인 줄 알아? 하지만 흐물해진 것 같긴 해. 하마터면 본론을 꺼낼 뻔했다고. 잘 생각해보면 나눈 대화는 몇 마디에 지나지 않은데 몇 시간동안 즐겁게 담소를 나눈 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열심히 수련한 근육이 물러진 게 아닐까 몸을 꾹꾹 눌러 보았다. 어제 저녁에 과일주스를 많이 마시고 자서인지 배가 푹 푹 들어갔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에게 로길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민거리를 모두 털어 놔 버렸을 거에요. 주위에 감시하는 이들이 수도없이 깔려있던 말던 말이죠. 상으로 돌아가면 시종장님께 부탁하여 각종 과일 로 만든 주스를 드릴게요. 좋아하시죠?」 「아! 미안……. 그건 좀 사양하고 싶어. 돌아가면 윗몸 일으키 기라도 해야겠어.」 -71- 장점도 단점을 만드는 조건이 될 수 있다. 천천히 봄의 기운이 새싹과 꽃봉오리로 들뜨기 시작하는 오후, 세이서스가의 사람들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유는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서 생각하도록 하자. 「준비는 다 끝났나? 치플 집사.」 「죄송합니다, 주인님. 도련님께서 막 도착하셔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아 너무 신경쓰지 말게.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아직 점심 때가 아닌가. 연회는 저녁이네. 천천히 하라고들 이르게.」 「예.」 「그나저나 시즈 녀석이 웬일로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 「허허허! 왕자님의 탄신일이 아니십니까. 중요한 날인만큼 참석 하지 않으면 주인님께 누가 된다고 생각하신 걸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워낙에 싫어해서야 말이지. 도대체 나도 무 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헛허허! 어련히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인님, 도련님께 서 오시면 의논할 게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아! 이번에 새로 개발한 마법에 대한 연구서! 잊고 있었어. 나도 나이는 못 속인다니까. 고맙네, 집사.」 한동안 못 보았던 아들을 보아서인지 헤트라임크는 정신이 없 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의 흥분은 귀족들이 모이는 연회에 함께 참석하기에 더했다.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던 아들녀석인가. 때문에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나가지 않던 궁중행사에 요근래에 들어서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자랑할 인파를 넉넉히 확보해둔 아버지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윗층으로 올라가는 그를 보며 치 플은 다 빠지고 뒤쪽에 약간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불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보다 두 살 어리시지 않습니까.」 헤트라임크가 연구문서를 가지러 2층 방으로 향하고 있을 시 간, 3층의 또 다른 방에서는 시즈 일행이 낑낑대고 있었다. 「아니! 난 연회에 별로 참석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수행원으 로 연회장 앞까지만 같이 갈 뿐인데 왜 귀찮은 옷을 입히는 거 야!?」 「보를레스 님, 연회 때는 수행원도 정장을 착용하셔야 되요. 그 렇지 않으면 주인님께서 눈총을 받으신다고요.」 「아니, 난 궁전 안에……」 「주인님께 직접 말씀드리세요.」 「…….」 시녀의 마지막 한 마디는 멧돼지같이 발광을 하던 보를레스를 얌전한 두더지처럼 만들었다. 일찌감치 준비를 끝낸 시즈는 키 득거리며 그윽한 향이 은은히 피어나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검 은 색깔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역시 왜소해 보이는 것은 싫었나 보다. 어지간히 싫어하던 흰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취향과는 달리 밝은 빛깔은 유난히 흰 그 의 피부와 깨끗한 외모에 꼭 들어맞아 멀찍이 서서 시녀에게 몸 을 맡기고 있던 레소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도 역시 남자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에 입던 옷과는 달리 몸에 꼭맞게 입히는지라 여성특유의 유려한 몸매는 알듯말 듯 드러났다. 준비를 도와주는 시녀는 그녀보다 3살 많았는데 레소니와 성격이 맞는 활발한 여인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동생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레소니에게만 들리는 아주 작은 목소 리였다. 「남자 정장이라니, 아직도 시즈 님은 알아채시지 못한 모양이 네.」 「으…응.」 「이 기회에 정체가 밝혀지도록 입혀줄까?」 「시, 싫어! 그만둬.」 「어머! 애는 장난이었어. 과민반응 보이기는……. 그나저나 시 즈 님은 세상을 많이 아신다는 학자신데 이런 방면으로는 왜 그 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우리 귀여운 레소니랑 같이 사는데 내가 시즈 님 같으면 콱!」 「어, 언니…….」 호들갑을 떠는 시녀와는 달리 레소니는 혹시 들은 사람이 있나 하여 주위를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마주쳤다. 시즈의 눈과……. 들으셨을까? 주위에 서있는 사람들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일만 하고 있었다. 들렸을 리가 없어. 하지만 주인님의 표정이 들리신 것 같아! 발을 동동 구르던 그녀에게 시즈는 고개를 갸우뚱하더 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레소니는 품고있던 생각은 모두 날려버리고 새빨개진 얼굴을 숙여 감추어야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내 차림에 뭐가 잘못된 점이라도? 몸수색을 해보던 시 즈는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 잠시 눈을 멈췄다. 그의 손이 은밀 하게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아래가 열렸었군.〉 갑자기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시즈. 여기 있느냐?」 「예.」 「잘 되었구나. 여기 이걸 좀 보거라. 요즘 들어 각광을 받기 시 작한 공간계 주문인데… 시전해보니 아무래도 결계가 불안한 것 같구나.」 「일종의 필드 결계로군요. 재미있는 마법인데요!? 점점 범위를 확장시키는 개방식이라…….」 아들의 칭찬에 헤트라임크는 기분이 좋았다. 냉정한 성품과는 다른 함박웃음을 헤벌죽하게 입가에 들이고는 손가락으로 요목 조목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그래. 게다가 이 부분을 보라고. 3클래스의 마법사가 3명 만 있으면 펼칠 수 있어. 하지만 적은 동원인원과 이 결계의 위 력은 정반대라고! 처음에는 1 써클의 마력구로도 종이장처럼 뚫 리지만 일단 안정기에 들어가면 3, 4서클의 파이어볼은 마법사 단이 오지 않는 한 문제도 아니야!」 「안정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탈이지만 말이죠?」 「그래. 정확하게 찝어내는군.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무려 10시 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아마 전쟁용이나 대규모 전투용으로 쓰이면 맞을 거야. 제플론의 결계에 비하면 별 필요없지만 마법 사가 적은 변방의 성을 수비할 때는 아주 유용한 거지.」 시즈는 〈흠…〉하는 소리와 함께 눈에 이채를 띄고 헤트라임 크의 연구서를 살펴보았다. 나이차가 심하기는 했지만 흰색의 정장을 입은 아들과 역시 백색의 법의를 입은 아버지가 함께 사 이좋게 앉아 한권의 책을 서로의 무릎 사이에 놓고 있는 모습은 꽤나 보기 좋았다. 평화롭게 느껴지는 그들만의 풍경에 미소를 짓고 있던 레소니는 문득 억울해졌다. 저토록 총명하신 주인님 인데… 왜 그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그녀는 그것에 안심하면서 도 마음 한켠으로는 섭섭했다. -72- 「로안파운 백작가의 로안파운 부부십니다.」 연회는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연회장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와 호기심으로 웅성거렸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군데군데 모 여있는 이들의 관심사는 오늘의 축하대상인 네 번째 왕자이 아닌 전혀 다른 대상에게 쏠려있었다. 원로 귀족에서부터… 「그의 인지도는 글을 읽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마법사 세이서 스 후작을 훨씬 능가하더군요.」 「그것 참 대단한 일이오. 어서 보고 싶구료.」 귀족 영양과 부인들… 「매우 매력적인 청년이라는 소문 들었지요?」 「젊은 나이에 아스틴 네글로드의 원탁으로 초청되었다잖아요. 언변과 문장이 아주 매혹적이겠죠?」 「말을 마세요. 제 남편이 그 사람 책을 읽고는 완전히 신도가 되어버렸다니까요!」 「그런데 지금 어디 계시죠?」 그 질문에 붉은 레이스의 여인은 골치아픈 표정을 지었다. 「너무 흥분해서 화장실에서 식히고 있을 걸요.」 연회장 사이사이로 여인들의 꺄르륵 웃는 소리가 간간이 맴돌 고 연회는 막을 열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중앙, 지방할 것없 이 모여든 이들은 이제껏 없었던 성대한 연회와 무도회가 될 것 을 예상케 했다. 「정말 대단해. 그 한 사람의 이름이 왕명을 능가하는 군. 저 사 람은 케진 자작이 아닌가. 아바마마가 불러도 오지 않더니만…… . 맞지? 로길드.」 「예, 전하. 몸이 너무나 병약하여 년간에 한번 열리는 무도회에 도 불참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니 아주 건장하시구만.」 왕좌의 커튼 뒤에서 보고 있던 두 소년은 과연 이 인파가 아침 에 만났던 시골촌뜨기 같았던 청년의 이름에서 비롯된 사태라는 데 동의를 표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의 위엄을 능가하는 위명,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은 그 〈위명〉을 대신하고도 남음 이 있었다. 「조심해야 합니다, 리페른 전하. 〈마땅찮은 시즈〉를 노리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의 지지를 얻는다는 건 현재 이 나라를 얻는다는 말과 비교해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문제는 왕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시즈 님이죠.」 「무슨 뜻이지?」 「제가 보기에 시즈 님이 전하께 접근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 니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그가 먼저 접근했다는 것은 뭔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에 관심이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아닙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이름만으로 국정 을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히 다른 뭔가가 있습니다. 분명 다른 왕자분들은 그에게 이용당할 겁니다. 어쩌면 전하를 이용 하기 위해 그들은 먼저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 든 조심하십시오.」 리페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토닥여주었지만 로기드는 그 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보이는 위력만으로도 이 미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른다. 과연 속셈이 뭐지? 시즈 세이서 스! 마땅찮은 이여……. 그 때였다. 방명록을 작성하는 시종의 음성이 벼락처럼 들려온 것은……. 「세이서스 후작가의 헤트라임크 후작 각하와 시즈 세이서스 후 작 공자이십니다.」 우둑! 우둑! 우두두둑! 여기저기서 목돌아가는 마찰음이 요란스럽게 울려퍼지는 가운 데 대전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몇몇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야 말로 천차만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들이었는데, 좌측부터 온통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 약간 나사가 빠져보이는 듯한 청년, 여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미소년과, 2m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들이 들어오자 홀 안은 싸늘한 기류가 흐르 는 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해졌고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소근거렸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시즈 세이서스 공자, 괴팍하기 그지 없 는 친구의 둘도 없는 아들이 아니야. 아스틴에 처음보고 다시 보기게 이렇게 어렵다니 몸값 좀 올른 모양이네?」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의 주름진 몸보다야 원래부터 비쌌지! 허허… 오랜만이네. 시즈 군.」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말을 걸어온 이들은 궁정마법원의 원로 마법사들이었다.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띄우면서 다가온 그들 덕에 웃음이 터지자 홀 안은 금새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홀 안의 사람들은 시즈가 동안을 간직한 청년이라는 것에 놀람 을 금치 못했다. 「〈마땅찮은 시즈〉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사내는 녹색의 화려한 레이스 셔츠에 금 실과 홍실로 멋지게 장식한 옷차림을 한 30대 중반의 귀족이었 다.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시즈를 만났다는 것에 감격 했는지 존대를 하고 있었다.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난 신세계를 보았소이다. 신 세계를! 존경합니다. 〈영광스런 이〉여…….」 난데없는 격찬과 신봉적인 눈빛. 시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신도가 있었다니… 멀리에서 붉은 레이스의 드 레스를 입은 여인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보를레스와 헤트라임크 도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시즈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우렁찬 음성이 대전이 울려퍼졌 다.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 그리고 왕자 전하분들께서 드십니 다!」 대전의 양 옆에 서둘러 가지런히 정열하는 귀족들. 걸음을 옮 기며 시즈는 고맙다는 미소를 시종에게 씨익 하고 지어보냈다. -73- 어느 왕조나 마찬가지 듯 엘시크의 왕가도 자손들이 풍성했다. 시종의 신호를 기점으로 국왕과 함께 들어서기 시작한 왕족들 은 가히 마법사단 1개 소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양 옆에 늘어선 왕자들의 눈동자는 빛나지 않는 게 없어 충실한 영재교 육의 흔적을 알 수 있었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국왕 로타우노가 앞으로 나섰 다. 「오늘은 이 찬란한 왕국의 4 번째 왕자가 이 세상에 나온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쁨을 그대들과 나누고자 하니 즐겁게 즐기도록 합시다.」 「끝없는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제 4 왕자, 미젠 전하께서는 앞으로 나오시어 뭍 귀족들의 축 하와 축복을 받으십시오.」 미젠 왕자는 12살쯤 되어 소년이었으나 걸음걸이는 자부심과 오만으로 뭉쳐있는 게 느껴졌다. 그의 레이모하의 대사제의 축 복을 필두로 귀족들의 선물이 이어졌다. 모든 귀족들이 축하의 말을 끝내고 자리로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왕이 물었다. 「왕자여, 너의 생일을 맞이하니 나 역시 네가 태어나던 날의 감동이 떠올라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 귀족들의 축복과 축하를 받았으니 이제 나만 남았구나. 내게 원하는 게 있느냐?」 「예, 있습니다. 아바마마」 앳된 티가 새싹처럼 피어나는 음성이었지만 소년의 어조는 훈 련이 잘된 군인처럼 곧고 딱딱했다. 무릎을 꿇은 아들을 자애롭 게 내려보던 로타우노가 손을 들었다. 「일어서거라. 원하는 게 무엇이냐? 금은보화를 원하느냐?」 소년이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검과 갑옷을 원하느냐?」 「황공하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예술품이렸다?」 「아닙니다, 아바마마. 저의 바램은 저를 보좌하고 이끌어줄 모 사를 소개받는 것입니다.」 귀족과 왕자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저마다 독특한 표정 을 지었으며 특히 리페른의 표정은 화난 오거를 연상시킬만큼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통렬한 일격이라고 해야겠군.」 로길드는 커튼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왕자가 말하는 모사가 누굴 뜻하는지 홀 안의 사람들은 거의 짐작하고 있었다. 「호오! 모사를? 왕자가 점찍어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합니다, 아바마마. 제가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보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구성물 하나하 나에까지 뻗여있는 작가의 손길과 곳곳에 배어있는 지식. 실제 로 그 세계를 사는 듯한 고뇌는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까지 걸 어가고 있었으며 독특한 철학이 담겨있었습니다. 게다가 현재까 지의 소설의 형식을 뒤바꿔놓는 일기형식은 마치 다른 세상의 일기장이 세일피어론아드에 떡하고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오오……. 나 역시 미젠 왕자가 책을 좋아한다는 거 익히 알 고 있었다. 그래, 네게 그토록 감동을 주었다는 책의 작가는 누 구인고?」 이쯤 했는데 당황하지 않으면 시즈는 사람도 아니었다. 콧노래 를 부르며 길을 가던 중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랄까. 아 까 녹새 레이스 셔츠의 귀족에 이은 두 번째 크리티컬 데미지였 다. 왕자의 손가락은 포물선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고 귀족들 은 시선은 그보다 먼저 시즈의 어이없는 얼굴에 도착해 있었다. 「〈마땅찮은 시즈〉,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입니다.」 침음성이 홀 안을 맴돌았다. 국왕으로서는 아들의 요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껄걸 웃다가 벌떡 일어서서 크게 외쳤다.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는 앞으로 나오도록!」 「예, 폐하. 시즈 세이서스 대령했습니다.」 국왕과 미젠 왕자의 흐뭇한 시선이 시즈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 어 내렸다. 시즈는 껍질이 발랑까져 튀겨지기를 기다리는 생닭 마냥 몸을 움추렸다. 「그대를 미젠의 국사- 왕자의 스승 -로 임명하려 한다. 작위도 없는 그대에게 매우 파격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다. 혹시 이견 이 있는가?」 국왕이 이견을 물은 이유는 시즈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게 그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자세하게 대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생각해보라. 〈마땅찮은 영광〉. 이 대륙을 움직이는 젊은 현자는 왕실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음을 이름 으로 미리 밝히고 있는지도 몰랐기에 국왕은 조심스러웠다. 시즈는 절대로 정치판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특히 나이 20에 매일같이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 그는 중립에 서있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머릿 속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라도 말이 다. 시즈가 망설이고 있자 리페른이 앞으로 나섰다. 「아바마마, 오늘이 미젠의 생일이기는 하나, 작위도 없는 젊은 학자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왕실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 다. 하오며 궁정 학사원을 무시하는 처사이니 삼가 재선을 간합 니다.」 로타우노가 머리를 헤집어보니 그 말 또한 틀리지 않았다. 전 통의 격식에 심취한 엘시크의 노학자들이 아니던가. 자신들도 겨우 오를 자리에 이제 고작 20살 청년이 어깨를 같이 하여 앉 는다?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국왕은 고심했다.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셋째 왕자가 나서서 미젠을 옹호하려 했다. 하지 만 그를 첫째 왕자가 막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동생 에게 트헨리 왕자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궁정 학사원은 이미 〈시즈 세이서스〉의 손안에 있다. 궁정 학사들을 존중하여 말했으나 그는 시즈를 무시하였기에 궁중학 사들은 지지의 미소보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릴 것이다. 하며, 시즈 또한 마음이 돌아설테니 리페른의 언사는 득은 없는, 실이다. 우리가 리페른을 두려워하여 힘을 모았지만 시즈는 한 사람에게 끌어주기에는 너무 큰 존재가 아닌가. 리페른의 말로 인하여 우리는 부담없이 그를 뒤로 밀쳐낼 수 있다.」 트헨리의 분석은 틀림이 없었다. 시즈가 궁정 학사원에 등록되 어 있지는 않았고, 학사원에는 자존심 강한 노학사들이 사원의 흐름을 잡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시즈의 글에 매료된 상태였고, 젊은 학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리페른은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로길드가 숨어있는 검은 커튼이 구겨졌다. -74- 귀족들 사이도 몇몇은 승리의 미소를, 몇몇은 패배의 쓴잔을 마 신 듯한 찌푸림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트헨리 와 비슷한 분석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알아내 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게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일이었다. 그들 은 안타깝게도 시즈의 마음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상당히 상반된 자리에 놓여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시즈가 리페른 에게 전하는 미소가 비웃음이라고 판단하며 내심 좋아했다. 리페른은 리페른대로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여 긴장이 뒤섟 인 침을 목 뒤로 넘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그는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리페른의 눈짓에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금새 눈치를 챘다. 한 귀족이 나섰다. 「폐하……. 소신 시호트 역시 리페른 전하께서 옳게 판단하여 말씀드렸다 생각됩니다. 소신도 〈마땅찮은 시즈〉라는 젊은 현 자를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사오나 그렇다하여 법도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호트가 시즈를 존경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시즈에게 첫 번째 크리티컬 데미지를 날린 화려한 녹색 셔 츠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 었고 가장 기가 막혀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 〈아까는 존경스러운 이를 만나는 게 너무나 흥분되어 화장실에 서 나오지를 못하던 사람이 왜저래?〉 뭘 잘못 먹은 듯한 좌중의 표정에 관계없이 국왕 로타우노의 머리 속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열망에 젖은 미젠, 굳은 의지에 빛나는 리페른, 웬지 모를 떨고 있는 시호트와 뭐가 그 리 좋은지 히죽거리는 첫째, 셋째 왕자들. 모두 한번씩 훑어본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국왕이 결정했다는 걸 눈치챈 모두는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 엘시크의 국왕 로타우노가 생각하기에 리페른 왕자와 시 호트 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즈 세이서스 후작 공자 를 국사로 삼는다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미젠도 모두의 말을 들었으니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예. 아바마마.」 그러나 못내 아쉬운 얼굴의 아들이 안쓰러운 모양이다. 이제 는 소년의 티가 나는 아들을 번쩍 안아올린 국왕은 미안한 웃음 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그 대신에 내 반지를 주마. 얼마 전 세 상을 떠난 트볼리온 궁정 수석 마법사가 내게 주었던 것이란다. 3클래스의 마법을 하루에 5번 사용할 수 있는 반지란다. 네가 마법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트볼리온은 헤트라임크 이전의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들었던 사 람이었다. 얼마 전이라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20년도 더 전이었다. 오늘로서 겨우 13살이 된 미젠에게 20년 전의 대마법사는 전설 처럼 여겨졌다. 그제서야 그는 아직은 어린 소년인 걸 나타내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홀 안의 사람들도 그 웃음에 마음이 편해진 듯 했다. 시즈도 그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물 증정이 끝났습니다. 엘시크를 지탱해 주시는 귀족 여러 분, 즐거운 연회를 즐기십시다. 악사들은 음악을, 시종들은 음식 을! 와주신 여러분에게 대접하시오.」 왈츠가 홀 안에 울려 퍼지고 중앙에서는 남녀가 짝을 맞춰 춤 을 추었다. 레소니는 샹들레이가 부딪혀 산산히 퍼지는 불빛 아 래서 춤을 추는 광경에 취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 다. 그녀는 접시에 수많은 음식을 산처럼 쌓아놓고 걸신처럼 먹 어대는 시즈에게 뚱한 눈초리를 돌렸다. 아무래도 무리겠지? 〈난 어차피 춤도 출줄 모르잖아. 게다가〉 한숨을 내쉰 레소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채 시즈 뒤에 고정된 자세로 서있는 자신을 인식했다. 귀족은 가문당 한 사람의 시종 과 호위를 데려올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음식은 지급되지 않았 다. 마을에서도 그랬었지만 시즈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 기가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의 신비로운 분위기와는 다른 걸신같은 분위기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놀라운 방어 술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치렁치렁한 옷을 걸치고서도 우락부락한 근육이 느껴지 는 사람이 시즈에게 다가섰다. 아니 시즈가 아니라 그의 시선은 보를레스를 향하고 있었다. 망설임을 반복하던 남자의 수염 둘 러진 입술이 벌어졌다. 「혹시 자네,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 아닌가?」 「그렇습니다. 클라우 장군님.」 「하하핫! 기사단을 나와서 뭘 하고 있나했더니……. 세이서스가 의 호위를 맡고 있었나? 하긴 책을 좋아하던 자네라면 어울리기 도 하는 군.」 어깨를 투닥거리는 힘이 엄청난지 엄청난 장신이 보를레스의 상반신이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그는 호기심을 담고 바라보는 시즈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륙을 흔들리게 한 〈마땅찮은 시즈〉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 오. 난 클라우 토지벨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신세를 졌던 분입니다. 궁정 기사단 제 2 단 장을 맡고 계셨지요. 후작의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귀족들 사이에 있었기에 시즈를 향한 보를레스의 어조는 굉장 히 조심스러웠다. 세이서스가의 젊은 현자 눈에 이채가 발했다. 궁정기사단은 16 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번호는 강함의 순 위를 말함과 일치했다. 한 마디로 눈 앞의 사내는 이 왕국에서 2번째로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 키가 큰 것도 아닌데, 대단하군.〉 「저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보를레스 옛 귀인이신 듯 한데 만 나 뵙고 오세요.」 「하지만……」 「그렇지만…….」 보를레스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은은하게 떠오른 시즈의 미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매혹이라는 단어의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면 눈 앞의 미소라고 그는 말할지도 몰 랐다. 「알겠습니다.」 -75- 파티가 무르익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술에 취해가고 있을 무렵 이었다. 레소니는 시즈가 와인을 조금씩 홀짝거리는 모습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를 기다리시 는 거지? 그러고 보면 생전 가기싫어 하시던 궁전 연회에를 다 나가겠다는 말을 다 하지를 않나……. 혹시 마음에 드는 귀족 아가씨라도 생긴 거 아니야? 「여기 계셨군요, 시즈 님.」 휙 하고 돌아가는 레소니의 불타는 눈동자. 안타깝게도(?) 그 눈빛에 찔끔한 것은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귀족 여인이 아니 라 리페른, 엘시크의 두 번째 왕자였다. 그와 시즈와의 전후 사 정을 알리 없는 레소니는 〈아까 주인님을 무시했던 그 왕자잖 아.〉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을 어째서 주인님은, 「리페른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며 맞이하는 걸까? 레소니는 입술을 쏙 내밀고 시즈가 건네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시종이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걸 알 고 있는 그녀는 극구 사양했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다면서 시즈 가 억지로 권한 술잔이었다. 「이분은?」 「제 시종인 레소니 라고 합니다.」 리페른은 왕자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술잔만 홀짝거리는 예의없 는 시종이 서민 중에서도 아주 미천한 서민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색기가 흐르는 거지?〉 와인으로 붉으스럼하게 달아오른 레소니의 흰 얼굴은 왈츠가 끝나고 이어지는 은은한 음악 속에서 더욱 유혹적이었다. 하지 만 연회장에 시녀가 들어올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뭐하러 굳이 여자를 남장을 시켜 들어오겠는가. 쓸데없는 잡념이라 판단한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시즈 님 가시죠. 약속대로 정원에서 와인을 함께 마시기로 했 잖습니까? 로길드가 지금쯤 자리를 마련해두었을 겁니다.」 「예? 하핫……. 저는 그저 정원을 와인 한 잔과 함께 산책이라 도 하자는 뜻이었는데 번거롭게 자리를 마련하셨다니. 이거 가 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술기운 때문일까? 시즈는 평소보다 더 은은하고 부드러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요전 미젠 왕자의 웃음과 비슷했지만 그의 미 소는 즐겁게 하기보다는 편안히 가라앉히는 힘을 가지고 있었 다. 「레소니, 미안하지만 나는 전하와 함께 정원에 가 있을게요. 아 버님께 가 계세요.」 도리질을 치며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보를레스와 마찬 가지로 시즈의 미소를 거역할 힘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헤 트라임크의 뒤에 가서 한숨을 내쉬는 소녀. 목덜미에 갑자기 뜨 뜻한 기체가 들이박힌 대마법사는 화들짝 놀랐다. 「읏? 아니, 레소니 아니냐. 시즈는 어디에 가고?」 레소니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왕자와 함께 정 원으로 향하는 시즈를 가리켰다.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이는 헤트라임크.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그는 레소니가 내 뿜는 한숨의 원인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호오……. 시즈가 널 내버려두고 간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이번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소녀. 놀란 헤트라임크가 살 펴보니 이미 그녀의 입김에 술기운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지 아 니한가. 그녀는 와인 한잔에 쉽게 취하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시즈, 이녀석. 연회장에서 하인에게 술을 주다니!〉 평소였으면 벌써 꾸짖으며 집으로 돌려보냈을 테지만 레소니에 대해서는 시즈를 비롯한 그의 저택 하녀들의 이야기를 엿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울먹이고 있지 않은가. 다그쳐서 엉엉 울어버리면 그것만큼 망신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헤트라임크 세 이서스, 이 시대 엘시크의 대마법사는 처녀에 가까운 아이 달래 기를 시작했다. 「후우……. 레소니, 여기 앉으렴. 이걸 먹으면서 기분 좀 풀려 무나. 요것도 맛있단다. 시즈가 좋아하는 여성상이라도 말해줄 까?」 그녀의 눈물이 단숨에 그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76- 「이제는 완전히 봄이군요. 밤바람도 시원하지, 차갑지가 않습니 다.」 기분을 약간 들뜨게 할 정도의 서늘한 바람이 소년과 청년의 머리를 흔들어 놓았다. 이제는 묶어놓을만큼 길어진 머리. 시즈 는 게으른 성격에 머리가 어떻게 자라던 내버려두었지만 봄의 바람에 눈을 찌르게 되자 저택에 돌아가면 짧게 잘라버릴 것을 다짐했다. 「예…….」 알게 모르게 힘이 없는 대답. 리페른은 연회장에서의 국사 문제 때문에 젊은 대현자의 기분에 거슬렸을까봐 자신이 없었다. 그래 서 따뜻한 시즈의 미소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우선 그곳으로 데려가자.〉 〈그곳〉은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정원 사가 미술작품처럼 가꿔놓은 관상수에 가려 발견하기가 쉽지 않 았다. 로길드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전하, 시즈님. 일찍 오셨군요. 좀더 연회를 즐기시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쪽으로…….」 그가 안내한 장소에는 잔디 위로 검은 비단이 깔려있었고, 갖가 지의 고급 와인과 간단한 먹을거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리페른과 시즈가 잔을 부딪혔다. 「아까 제 발언으로 인해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과 와인을 홀짝임, 둘을 반복하는 왕자의 말은 곧 막혔다. 음미하며 마셔야할 와인을 시즈가 갑자기 한번에 와락 목 뒤로 넘겨버린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미는 청년. 원 래는 로길드가 따라주어야 하지만 그는 왕자에게 잔을 내밀고 있었다. 무례함이 돋보이는 행동이었지만 로길드는 당연한 듯 보 고만 있었고 리페른 역시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시즈는 와인의 향만 맡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 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신경쓰지 않습니다.」 로길드와 리페른은 그 말에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둘은 제대 로 늑대를 피한 것이다. 다른 왕자들이 방해를 했다면 어찌됐을 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리페른들이 호랑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보고만 있었던 게 아닌가. 더욱이 중요한 것은 시즈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은 넷째 왕자의 국사가 될 마음이 거 의 없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말과 현재까지 리페른에 게 접근하는 행동을 살펴볼 때, 이 현명한 학자는 자신들의 편에 서있는 게 틀림없었다. 「감사합니다. 시즈 님, 아까 보셨다시피 왕궁의 기류가 격돌하 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저를 도와 강국 엘시크를 재건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침에 물으셨을 때와 저의 대답은 같습니 다.」 「그러시다면 저도 더 이상 청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앞의 대답과 같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니다. 로길드, 설명 좀 해주겠어?」 말을 바로바로 끊어버리는 시즈의 어조는 꽤나 귀찮아 하는 듯 해 리페른은 말을 이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분위기의 환기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행동만으로도 분위기의 환기는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리페른 전하께서는 다섯째 왕자전하 를 제외한 다른 모든 왕자분들과 왕위의 패권을 두고 서로를 견 제하는 상태입니다. 리페른 전하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시다고 해도 다른 왕자분들 또한 수재라는 말을 듣는 실력자들이십니다. 이대로 평수를 유지하다가는 일대 다수의 단점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일대 다수의 단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간단한 논리였다. 머리수 가 많은 게 이긴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에서나 옳은 선택을 한 이들이 언제나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틀린 선택을 굳건 히 믿은 다수에 의해 묵살 또는 매장 당하거나 제거 당했다. 그 리고 시대는 다수의 편을 들었다. 웬지 다수의 말이 맞게 들리는 게 인간의 심리다. 지금은 평수를 이루는 왕자들의 견제지만, 많 은 모함이 이어지고 이어질수록 리페른은 고립되고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러기 전에 그는 뭔가 다른 기반을 마련하여 앞서나가 야만 했다. -77- 「시즈 님이시라면 아실 겁니다. 엘시크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계속된 폐단과 모순적인 제도가 너무 귀족들에게만 몰입되어 버렸습니다. 귀족국가라는 명칭은 이제 절대로 장점이나, 칭찬 이 아닙니다. 경멸과 비웃음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 상태에서 엘시크를 일으킬 수 있는, 그리고 바꿀 수 있는 분은 리페른 전하 외에 없습니다.」 「그 말은 제가 전하의 곁에 서라는 말과 무엇이 틀립니까? 아 마 필요로 하시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뒤의 거대한 학자들의 지지일겁니다. 하지만 저는 학자들과 별 관계를 쌓은 일도 없습 니다.」 사람들은 정곡을 찔리면 주춤하기 마련이다. 그러자 이제는 다 시 리페른이 나섰다. 「시즈 후작 공자가 내 편에 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묻겠습니다. 어찌하면 제가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리페른은 그리 절실하게 왕좌를 원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극성스럽게 부추키는 로길드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낭 만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용을 보면 누가 용을 그냥 두겠는 가.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은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매일같이 달려 드는 자객들과의 착실한 검술 연습은 절대로 면역성이 생기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권력 다툼에 합류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가다가는 신경쇠약 으로 요절할 듯했다. 결국 그는 폭발하고 만다. 〈왕위 다툼에 참여하지 않고도 이런 견제와 감사에 시달릴 바 에야 차라리 왕위를 노리며 당당하게 당하겠다.〉 다른 이들의 과도한 주의가 오히려 막강한 적 하나를 불려버린 셈이었다. 원인이야 어떻든 왕위에 마음을 잡은 리페른은 뛰어난 능력을 발판 삼아 착실히 다른 경쟁자들을 괴롭혔다. 어찌 보면 보복일지도 몰랐지만 이 역시도 골치아픈 문제를 만들게 된다.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왕자들까지 견제를 시작했고, 심 지어는 아예 의기투합을 해버린 것이다. 아마 로길드가 없었다면 벌써 왕위 포기 선언을 해버렸을지 몰랐다. 하지만 역시 견제에 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리페른 그는 뭔가 다른 힘이 절실 했다. 시즈는 작위도 없는 일개 학자인 자신에게 맞지 않을 질문이 날아오자 꽤나 당황했다. 좀더 돌려서 물을 줄 알았는데……. 그 만큼 궁지에 몰렸단 뜻 일테지. 〈이런 이들을 이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자신감이 없었다.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전하께서는 〈리미뇌〉이라는 이름을 가진 홀에 대해서 아십니까?」 「아니, 난 모르겠소. 로길드, 알고 있나?」 「고대의 성물 중에 하나인데, 예로부터 대륙의 왕을 뜻하는 상 징물입니다.」 「대륙의 왕?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한 게 있었다면 진작에 유명해졌을 게 아닌가? 어째서 알려지지 않은 거지?」 왕자는 모르면 모르되 어느 것에서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영재 교육의 표본이었다. 하물며 왕실에 대한 유물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왕실 자제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방어구이자 무기였다. 그 런 리페른이 모른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유 물이라는 뜻이었다. 「로길드, 혹시 알고 있어?」 로길드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따. 왜 시즈가 잊혀진 유물에 대해 거론하는지 그 저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로길드!」 「예, 전하. 〈리미뇌 홀〉은 고대 지배자들의 후계자가 왕이 되 기 전에 반드시 가져야 했던 성물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봉인되었습니다.」 「봉인되었다? 로길드가 말하는 게 시즈 님께서 말씀하신 존재 와 같은 것인가요?」 「글쎄요.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미뇌의 존재와 실제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시즈 또한 책으로 알아내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증언으로 확신을 얻었 다. 그런데 페노스톨멘가의 어린 소년은 마치 당연히 알고 있었 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모두 다 알지는 않겠지. 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비밀……. 엘프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것은 분명 비밀이었다. 시 즈가 보아온 어떠한 책에도 그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 다. 그렇기에 영악한 흉내를 내려하는 청년은 〈같다고도, 다르 다고도〉라는 모순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78- 사람을 움직이는 법 (2) 하지만 로길드와 리페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의 관점에서 같 으면 같은 것이다. 다르다는 게 포함되면 그것은 이미 같은 게 아니었다. 로길드가 푸른 눈썹을 찌푸렸다. 「리미뇌 홀이 봉인된 이유는 홀을 가진 자에게는 매혹적이라고 도 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잠깐 입을 멈췄다. 매혹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 눈 앞의 젊은 학자에게서 풍기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에서였다. 그러나 마법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미 소……. 로길드는 머리 속의 망상이라 치부하고 지워버렸다. 리 페른 역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었다. 〈내 자신은 과연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존재일까? 그리 고 이 젊은 학자는 어느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존재일까?〉 소년의 오기와 호승심이랄까. 시즈는 왕자의 눈에서 자신을 향 한 불길이 솟아오른다고 느꼈다. 정확한지는 은근한 어조로 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이 있으십니까? 나는 리미뇌의 봉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제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시즈 님, 무엄하군요. 당신은 신하의 신분입니다. 그런 데 왕실을 위한 일에 조건을 달아놓겠다니요.」 사전공작이었다. 칼자루를 시즈가 쥐고 있는 이상 조건을 들어 주지 않고 답을 받아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조건의 난이도(?) 를 약간이나마 경감시킬 수는 있을 공작이었다. 시즈가 알고 있 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리미뇌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차피 해야만 합니 다.」 「그렇다면 말씀하십시오.」 「전하께서는 다스리는 자로서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분쟁 도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도 말입니다. 전하께서 리미뇌를 찾으 실 때는 우선 멜라누 숲의 엘프들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세이탄의 별궁이 있는 장소가 아닙니까? 멜라누 숲 속에 엘프 들이 있단 말입니까?」 「제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명상에 잠겨 앉아 있으면 하루가 다 가도록 조용했는데 근래에 들어 아주 시끄럽 습니다.」 「시끄럽다니요? 그게 엘프들과 무슨 연관이…….」 「마을 사람들과 다툼이 있거든요. 하지만 리미뇌를 찾기 위해 서는 엘프들의 안내와 마법이 꼭 필요합니다. 봉인된 유물인만 큼 수호자적인 몬스터들이 많으니까요.」 〈이해하기 어렵군. 다툼이 있는데 현자라고 불리는 이가 그냥 두었단 말인가?〉 의문을 품는 왕자의 귀에 로길드의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전하, 시즈 님은 전하를 시험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지배자로 서, 통치자로서 말입니다.」 리페른은 시즈의 눈을 통해 마음을 보려는 듯 안광을 더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눈처럼 검디검으면서도 바랜 천처럼 튀튀 한 광택을 내는 청년의 눈은 빛나지 않기에 깊이를 느낄 수도 없었다. 「왕자는 총명하다고 할지라도 아직 술수에 익숙하지 않다. 과 연 이를 이용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정원에서 연회장으로 걸어가며 시즈는 가책을 느끼는 양심에 대해 물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이 곳에 오면서부터 가장 친근한 존재를 꼽으라면 마음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보다, 가슴 깊숙히 스며들어오는 달빛이었다. 시원한 바람 속에서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참으로 부러운 이 였다. 〈저 달에 비할 때, 과연 나는 잘 하고 있는 건가?〉 근래에 들어서 자신이 너무 자만에 빠져버린 게 아닌가하여 가 슴이 조여왔다. 내심 자신의 계획에 빠져드는 천재들을 보며 비 웃었다. 시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증오했던 이들의 모습과 닮아 가고 있는 자신은 생각할수록 끔찍했다. 「나를 증오하고 싶지는 않아…….」 -79- 「세이서스 후작 각하, 시즈 님께서는?」 「리페른 전하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고 하더군.」 아무리 시즈라지만, 걱정이 되는 보를레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 밖으로 걸음 을 옮겼다. 뒤에서 헤트라임크가 그 어떤 절규를 부르짖는다고 해도 그는 시즈를 찾는 일이 바빴다. 「이보게! 레소니를 더 보살펴야 한단 말인가!?」 정원은 조용했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대는 누구지?」 보를레스는 다가오는 두 소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세이서스가의 수행원으로 참가한 보를레스라고 합니다, 리페른 전하.」 「역시 세이서스가는 다르군. 수행원조차 이렇게 뛰어나다니……. 안 그래, 로길드?」 「예. 전하의 말씀 그대로이십니다.」 「후훗! 〈마땅찮은 이〉께서는 이 길을 따라서 쭉 가다보면 계실 겁니다. 그럼 이 만…….」 얘기는 잘된 모양이로군. 역시 시즈라는 생각과 함께 그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리고 왕자가 알려준 곳으로 달렸다. 「역시 왕궁의 정원은 쓸데없이 커.」 훈련을 받을 후에 헤맨 후로 그의 머리 속에는 이 정원에 대한 감상이 별로 좋지 않게 남 아있었다. 오랜만의 재회 또한 그다지 기억을 바꿔놓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치 정처없 이 떠도는 나그네처럼 보를레스는 걸었다. 「시즈…….」 찾고자 하는 이를 찾을 수 있었던 곳은 왕자가 말해준 방향에서 상당히 벗어나 위치한 분수였다. 뭐하고 있냐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뗄 수 없었고 입은 떨어지지 않았 다. 마음 속에서 다가가면 안된다고 올가미처럼 다리를 묶고 있었다. 슬퍼하는 듯, 괴로 워하는 듯 알 수 없는 얼굴에 매달린 입가는 자조적인 웃음을 띤 채 모든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포물선을 내며 얆은 막으로 떨어지는 물줄기의 소리가 눈물의 떨 굼같았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깍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 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만 하나 남았네. 두고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 소리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없이... 〈신해철 - 민물장어의 꿈〉 〈그리워하는 건가, 고향을?〉 물소리는 반주가 되어 시즈의 노래를 감싸고 작게 퍼져 나갔다. 시즈는 양자라고 했고, 헤트라임크조차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들은 보를 레스였다. 낮고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음색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시즈의 고향 이 그 또한 보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면 시즈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 다. 이렇게 아무도 몰래 향수를 노래하는 걸까? 「보를레스, 그만 나오세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나는 당혹감 가득찬 보를레스의 얼굴에 시즈는 피식하 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고 있었나?」 「예. 저를 감싸는 바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으니까요.」 「저, 저기 말이야. 넌 돌아갈건가?」 보를레스가 머뭇거리며 내뱉은 물음에 시즈는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부른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아! 그거요?」 「그래. 그거!」 잠시 생각을 하던 시즈는 보를레스의 물음이 꽤나 즐거운 듯 했다. 오해였을까? 왠지 바 래보는 보를레스였다. 약간은 서글픔을 흘리며 시즈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제가 돌아갈 곳은 당신과 레소니가 기다리는 저의 저택 뿐입니다. 단지 조금 취해서 흥취에 보른 노래일 뿐이에요.」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게 아니었지만 보를레스는 안도했다. 겨우 찾은, 따라가야 할 이를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따라가겠지만……. 불안했다. 그렇기에 미안한 표정으 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내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 레소니가 술에 취한 것같던데, 어서 가보는 게 좋겠 어.」 「예.」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두 청년……. 그 뒤로는 바람이 남아 시즈가 흘리고 간 노래를 메 아리처럼 되내였다.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없이... 미련없이... 하지만... 그대는 심장이 터지도록 울고 웃지 않았답니다... -80- 다시 한 번 엘시크 전역에 봄비가 부슬부슬 땅을 적시고 있을 때 세이탄 별궁의 관리자, 멜로운은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받는다. 아침과 점심, 해가 중천에 다르기 이전에 리페 른 왕자가 별궁을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보통 왕족들은 방문하기 2, 3일 전에 통보를 했고, 또한 당연하다고 여겼던 멜로운은 현재 시녀와 시종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닦달하 며 화풀이를 했다. "여기 구석에 먼지가 남아있잖아! 이 곳 담당 누군데 일을 이따위로 해! 당장 걸레로 안 훔쳐!?" 한편 희미하게 윤곽이 잡힌 세이탄 별궁의 전경을 감탄이 서린 시선으로 리페른은 바라 보고 있었다. 도로가 잘 닦인 수도의 길을 벗어나 들어선 평평하지 않은 산길, 제플론커 녕 언제나 왕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였다. 느릿느릿하지만 깊고 높게 출렁이는 흔들거 림은 기분 좋게 자신을 대지의 심장부로 이끌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세이탄은 아름답군요." "과연,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가는 마을이라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세이탄은 아름다운 별궁이 있는 곳이라는 별명보다 '마땅찮은 시즈'가 은 거하는 곳으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는 시즈의 이름을 따서 '시즈 세이탄(마땅찮 은 세이탄)'으로 부르는 게 어떻겠냐는 짓궂은 농담을 내놓았을 정도였다. 로길드는 리페른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흠칫했다. 그 또한 시즈의 영향 력 안에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시즈는 이번 여행에 동참을 한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리페른을 시험하는 게 아닐까하는 로길드의 의심에 묶여있던 매듭을 풀어주었고 그의 주군에게 주의, 또 주의를 확실하게 당부하게 만들었다. '리미뇌 홀'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윤곽이 잡히지 않는 존재였으나 시즈라는 당대의 명사는 눈앞에서 그들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지지는 고대의 어떤 유물에 뒤지지 않 을 만큼 거대하다. 감탄에 젖어있는 리페른을 바라보며 로길드는 그가 자신이 탄복했을 때의 총명함과 판단력을 보여주기를 기원했다. 이번 탐사에는 상황판단이 뛰어난 기사와 새파란 신참을 비롯하여 노련한 도굴범까지 끼어있었다. 훈련을 받은 후 처음 임무가 왕자를 호위하는 수행이라는데 긴장한 신참 기 사들은 가까워진 별궁의 아름다움에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련한 기사와 도굴범과 는 다르게 뻣뻣하게 굳어진 기마 자세로 골렘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별궁에 다다르자 백색찬란한 성벽에 비친 아침햇살 뒤로 나팔소리가 꼬리를 늘 어뜨리며 울려 퍼졌다. 끼릭끼릭하고 쇠사슬 풀리는 소리이 시간과 함께 움직였고 계속 될 것 같은 거대한 성문의 내려짐은 땅과 굉음을 일으키며 마찰함으로 끝을 맺었다. 굉 음에 놀란 말을 기사들이 진정시켰고 성에서 넉살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중년 사내가 두 손을 감싸쥐고 걸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리페른 제 2 왕자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깊이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 사내에게 리페른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죄송합니다. 통보도 하지 않아서 당황했겠군요?" "별말씀을‥. 언제나 별궁을 관리하는 게 이 곳의 모든 이들이 가진 소임입니다. 저희들 도 살아가는 곳이니 만큼 애정이 없겠습니까? 언제라도 오셔도 괜찮습니다." 그야말로 천(千)의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의 창 밖으로 몰래 보고 있던 한 시녀와 시 종는 과연 아래에서 사근사근한 미소와 동작을 보여주고 있는 중년 사내가 방금 전까지 복도 벽에 걸려있던 액자의 먼자에 광분하던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성안에서 심적 으로 절규하고 있는 사람들에 아랑곳없이 중년사내 멜로운은 상냥한 미소로 왕자일행에 게 다가갔다. "어서 드시지요. 음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봄이 되어 세이탄이 아주 아름다울 시기입니다. 전하께서 아주 시간을 잘 맞추어 별궁을 방문하신 거지요." "아닙니다, 멜로운 별궁 시종장. 전하께서는 식사만 하시고 바로 출발하실 것입니다." "예?" 고작 16세 가량의 소년이 한 말에 멜로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식사할 곳으로 왕자일행을 안내하며 듣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호오‥. 고대 마법물을 찾으러 탐사를 하신다고요?" "예. 그런데 요즘 세이탄은 어떻습니까? 꽤나 시끄럽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시끄럽지요. 이 숲에는 예전부터 엘프들이 살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자꾸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주민들에게 화가 난 모양이더군요." "정말이었군." 나이에 맞지 않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로길드와 리페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멜 로운은 자신이 헛소문의 전도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가끔씩 마을 에 물건을 사러간 별궁의 시종, 시녀들이 해준 이야기를 믿고 - 약간 과장하여 - 말한 게 죄라면 죄랄까? 사실 별궁 사람들만 오면 체스를 두고 있다가도 일어서서 검술연습 을 해대는 세이탄과 엘프 청년들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엘프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겠군요."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리페른은 곧 멜로운이 거칠게 손을 휘저으며 하는 말에 적이 안 심했다. "아닙니다, 전하. 얼마 전부터 '마땅찮은 시즈'님이 나서주신 덕에 웬만큼 분위기도 진정 되었습니다. 다만‥ 시즈 님이라고 해도 분쟁을 원천 봉쇄할 제도적인 힘을 가지고 계시 지 않기 때문에‥." '그렇군. 그래서 내게 부탁을 한 게로군.' "대단하군요. 시즈 님은‥. 훌륭하게 될 떡잎을 시험해봄과 동시에 끼어 들지 않고 분쟁 을 해결하려 전하를 끌어드리다니 말입니다. 저였다면 직접 권력을 움직였을 텐데 말입 니다." 현재 로길드가 느끼는 감정은 완전한 승복이었다. 이런 분쟁해결을 위해 정계에 발을 들 여놓는다면 주위의 반대귀족들도 방해할 기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시즈, 그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적인 자 에게 승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이 아니라면 감탄도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이 정치계 와 전쟁의 암투였다. "그렇다면 식사를 하신 후 시즈 님을 만나시겠군요. 그러시다면 먼저 시즈 님의 저택에 통보를 해놓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한 편, 시즈는 다가온 계획의 마지막 실행을 위해 분주하기 이를 때 없었다. 방금 전 왔 다간 별궁 전령사의 말대로라면 곧 멋진 연극을 실행해야 했다. "아니야, 아니야. 너무 움츠려 들었잖아. 그래가지고는 '이건 연극입니다. 알아 차려주세 요.'라고 말하는 격이라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당신의 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아니, 그럼 하지 않겠다는 건가? 어차피 해야 할 게 아닌가." 하윌은 처음 만났을 때는 죽자살자 날뛰던 보를레스가 겁먹은 달팽이처럼 우물쭈물거리 자 어이가 없었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보를레스가 겁을 먹고 있는 이유는 살기가 아니 라 유레민트의 양친이기 때문임을‥. 현재도 보를레스의 마음 속에는 호승심이 가득가 득 넘쳐나고 있었지만 하윌의 단아한 얼굴 뒤로 자꾸만 유레민트의 향긋한(?) 미소가 아 른거렸다. '젠장! 유레민트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벌써 땅바닥을 기었을 거라구. 딸래미 잘 둔 것 에 감사해야 할거야.' 라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딸래미 잘 둔 것은 인정하겠지만 -주장을 머리 속으로 채워 놓으며 토라진 어조로 소리쳤다. "해요. 한다구요!" "남자 녀석이 토라지긴‥. 그래가지고 누가 딸을 줄지 내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흐아아아압!" 갑자기 보를레스의 검이 소드 마스터에 가까운 투기를 뿜기 시작했다. 옆에서 다른 이들 을 토닥이던 시즈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단순하긴‥." -81- "시즈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도착했군. 준비가 제대로 되었을까?' 불안한 심정은 시즈의 얼굴에 눈곱만큼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왕자의 옆에 부복해있는 촌장을 힐끗거리니 주름진 눈가에 억지로 윙크를 보낸다. 내심 광소(狂笑)하며 시즈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이미 연극은 시작되어 있었다. 숲과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 마치 전쟁을 방불케 했 고,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로 귀가 따가웠다. "저의 힘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역시, 언변 하나로 불만을 언제까지나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며 시즈는 불타오르는 가옥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리페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기사들에게 돌격을 명할 생각인 듯 했다. "기사들은 들으라." "저, 전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무슨 일인가? 로길드. 지금은 급해. 마을이 불타고 있다. 사람들이 죽고 있어." "그 날 해드린 말을 잊으셨습니까? 통치자는 언제나 중심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로길드의 말에 불만인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이자 총명한 주 군인 리페른은 무언가를 회상했다. 현재까지 로길드의 말을 따라 틀린 결정을 한 일이 몇이나 있었던가. 다시 한번 로길드가 소리쳤다. "전하께서는 인간만을 통치하실 겁니까?" "! ‥고맙다, 로길드. 너로 인하여 오늘도 하나의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어. 기사들 은 우선 저들의 싸움을 말리라. 서로 떨어뜨려 상처입지 않게 해." 그의 외침이 의외였을까? 기사들은 무엄하게도 소리치는 왕자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뭐하고 있는 건가?" 다시 한번 소리치고 나서야 기사들은 왠지 밝게 느껴지는 음성으로 대답하며 말을 움직 였다. 과연 말을 타고 몰아쳐 가는 기사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추호의 망설임 없 이 엘프와 마을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그 활약에 싸움은 순식간에 식어갔다. 하지 만 그 대단한 기사들의 검과 창으로도 하나의 결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 격렬하 게 싸우고 있는 두 사내를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어찌된 일인가? 막을 수가 없다니‥. 대륙 최강이라는 궁정 기사단의 실력은 그저 허명 (虛名)이었나?" 혀를 차며 기사들을 제치고 놀랍다는 실력자들의 싸움에 가까이 다가간 리페른은 금새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신의 검사가 휘두르는 검은 기둥둘레가 한 아름은 될만한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을 일으켰고, 검풍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공격하는 엘프가 내딛는 걸음에 서 들려오는 굉음은 멀리서 바라보는 이들의 고막을 아프게 했다. 검술에서도 약간의 견 식과 경험이 있던 리페른은 아예 입이 쩍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저, 저, 저, 저 사람들은 뭐, 뭐야?" 입을 다물 수 없는 건 시즈도 마찬가지였다. 골치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올리며 그는 머 리 속으로 절규했다. '시늉만 하라고 했지. 누가 정말로 싸우라고 했어!? 내가 미친다니까!' 아침부터 기미가 보이더니 이제는 아예 불이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보를레스는 하윌에 대한 걱정이 아예 증오로 바꿔버렸는지 살기어린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하윌은 죽지 않 은 만큼만 부러뜨릴 생각으로 급소를 치고 박았다. "흥, 그 동안 실력이 조금 늘었군. 어디서 동방 검법을 배운 모양이지?" "솔직히 말하시지. 내 검을 피하기 힘들다고 말이야!" "인간들은 착각을 진실로 오해해서 탈이야. 이번에는 그 맷집에 구멍이 뚫리게 해주지." "나야말로 그 자존심을 반으로 갈라주겠어." 그 때였다. 숲 속에서 사람몸통 만한 화염구가 날아온 것은‥. 족히 반경 3m 안의 생물 을 폭사시킬만한 화염구는 도저히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내를 기겁하게 만들 었고 개가 꼬리 감추듯 숨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파이어볼! 저 정도면 가히 2써클 이상이로군." 2써클의 파이어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말은 숲 속에 3 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있 다는 말이었다. 긴장에 물든 기사들과 왕자에게 시즈가 말했다. "자아‥. 갑시다. 저와 함께라면 마법을 난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숲 속은 조용했다. 그들이 다가가자 숲 속에서 한 무리의 젊은 엘프들과 그 중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던 늙은 엘프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협상은 결렬되었소. 시즈 세이서스. 그대의 별명처럼 나 역시 그대가 마땅치 않으니 그 만 돌아가시오. 그 동안의 노력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보내주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 을 거요."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과연 숲 속의 온화한 귀족이라 불리는 엘프에게서 나오는지 의심스러웠다. 연극이라지만 시즈도 흠칫거릴 지경이었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해? 서커스단 출신이라도 되는 거야?' "베이란트, 흥분하지 말아요. 당신들, 엘프의 바램을 들어줄 사람을 데려왔으니까‥. 엘 시크 제 2 왕자이신 리페른 전하입니다." "내가 리페른이오." 엘프들이 화살을 겨누는 상황이었지만 소년은 가슴을 폈다. 자신은 한 국가의 왕자였기 에 절대로 움츠려서는 안됐다. 고작 17 세 정도의 소년이 왕자라며 앞으로 나서자 베이 란트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자신 있는 소년의 모습에 이채를 띄었다. "재밌군, 재밌어. 시즈,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 작은 전하께서 우리의 바램을 들어준다는 말인가?" "그렇소. 내가 들어줄 수 있소. 엘프 노인장, 그대는 엘프들의 삶의 장소에 인간들이 들 어오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소. 맞소?" "그렇습니다. 인간의 왕자여‥." "들어주겠소. 하지만 그 전에 조건이 있소." "무엇이오? 할 수 있는 조건이길 바라겠소." -82- 어두워진 숲을 몇 자루의 횃불에 의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너무나 불안한 존재였다. 하윌의 귀뜸을 받은 시즈가 리 페른에게 다가왔다. "전하, 하윌 씨가 여기서 우선 노숙을 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모두들 여기에 짐을 풀고 노숙 준비를 하도록!"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품위 있게 앉으려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안도감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몇 걸음 지나서 검으로 자르고 발로 밟아야 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진 숲에서 말을 이용한 편한 여행은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왕자를 제외 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침낭과 식량을 지고 있기에 그 피로감은 더 했다. "어때요?" 모두가 골아 떨어진 후 보초를 자청한 시즈는 마치 하늘과 대화라도 나누듯 허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작은 음성도 선천적으로 뛰어난 청각을 타고난 엘프에게는 생생히 들렸다. 뒤척거리며 하윌은 잠꼬대처럼 대답했다. "영역을 중요시하는 건 모든 종족이 동일하지. 이 곳은 그들의 영역 한복판이야. 지금쯤 타 종족의 냄새를 맡고 흥 분했을 걸." 그 또한 매우 작게 말했지만 시즈는 바람으로 흩어지는 음성의 조각까지 모아서 들을 수 있었다. 점점 바람은 그에 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친구로서 그를 선택한 듯 했다. 친구는 멀리서 움직이는 한 떼의 저돌적인 종족 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들은 하윌의 말처럼 흥분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에 든 무언가로 땅이나 나무를 후려 갈겨 찢어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오크로군요. 처음부터 조금 거친 상대는 힘들텐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시즈는 기사들과 리페른들을 깨웠다. 보를레스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숙련 된 기사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무리가 위협을 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마치 신호처럼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화답하듯 들려왔고 왕자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온다. 왼쪽!" 하윌의 외침과 동시에 수풀을 뚫고 검은 물체들이 튀어 나왔다. 무게 있게 보이는 몸체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게 달 려드는 그것들은 영원한 드워프의 숙적, 오크였다. 말도 없고 숨을 곳은 많은 숲 속은 준비된 그들의 함정이나 마찬 가지였다. 오랜 훈련으로 전투에 숙련된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부상과 사망이 잇달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시즈는 벌써 등에 도끼가 꽂힐 뻔하며 보를레스의 도움에 무사하게 버텼다. "휴우‥. 물러났나?" 아무런 소득도 없는 소모전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오크들은 서서히 공격을 거두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한 기 사의 안도에 모두들 긴장을 풀려 하자 더부룩한 수염장식을 한 장년 기사가 소리쳤다. "모두들, 긴장을 풀지 마라. 오크는 소규모 전투에서 효과적인 전투방법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규칙을 가지고 공격을 할 줄 아는 종족이야." 그는 이번 탐사의 부대장- 대장은 왕자 -로 리페른이 특별히 선별한 하스폰티안 남작이었다. 궁정 기사단이 아니라 왕성의 경비대장 중인 남작은 궁정 기사단의 노련한 단장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가 아닌 경비를 주로 했기 때문에 자객을 상대함에 있어서나 암투(暗鬪)같은 소규모 전투에 강 했고, 뭍 종족들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다들 전하와 현자 님을 보호하라. 원을 만들어 주위를 경계하라." "나도 싸울 수 있습니다." 두 마리의 오크에게 과다출혈로 인한 경련현상을 알려준 리페른은 자신감이 생겼다. 수행원과 호위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나서는 그에게, 아니 모두에게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팍! 팍!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액체, 그리고 썩는 계란을 코에 들이댄 듯한 악취가 일행을 감쌌다. "쿨럭! 쿨럭! 뭐지 이 악취는?" "'트폴캬야'입니다. 큰일이군요." 돌이나 화살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일행이었으나 로길드는 차라리 거대한 바위였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 다. 어둠 속에서도 쉽게 알아챌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진 소년의 말에 시즈가 탄식을 내뿜었다. "이게 '트폴캬야'인가? 하윌, 이 주변에 씻을 수 있는 물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주변에는 없다." "트폴캬야!? 로길드 무슨 뜻이야? 너와 시즈 님 모두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지?" "전하께서는 오크들이 왜 굳이 공격을 하지 않은 채 냄새만 묻여 놓고 돌아갔는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 그제서야 리페른과 기사들도 눈치를 챘다. 미간 사이에 정확한 스트레이트 한 방을 먹었는지 리페른이 한 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이 냄새를 씻어낼 때까지는 추격을 피할 수 없는 건가?"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타 종족, 특히 고블린 들도 이 썩은 열매를 사용합니다. 한 마디로 이 냄새는 그들의 먹이라는 뜻이지요. 이 냄새의 의미에 대해서는 뭇 짐승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저희는 이 숲의 먹이가 된 겁니다." '숲의 먹이가 되다.' 오크의 무서운 기습을 받고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 그들은 로길드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속에 섬뜩 하게 파고드는 걸 느꼈다. "전하, 이번 탐사는 아무래도 제대로 준비를 하여 돌아오는 게‥." "이대로 전진한다." "예?"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그대들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탐사에서 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한다면 모든 귀족이 비웃는다. 아직 희생자도 없지 않은가. 좀더 자신을 믿기로 하자.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아니 라며 누가 하겠는가?" 왕자의 짧은 연설은 금방 분위기를 바꿔 놓았지만 하스폰티안은 어둠에 가리고 있던 얼굴을 찌푸렸다. '전하께서는 첫 전투에서의 불안을 떨친 후 자신감에 취하셨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나 전략가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기 마련이며, 그 실수의 대다수가 처음의 전투나 전쟁을 치른 후다. 이 결정이 후의 전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련한 기사장교의 생각대로 왕자는 자신감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뛰어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그에 휘둘리지 않는 왕자였지만 처음으로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적을 물리쳤다는 의미는 소년을 들뜨게 만들었다. "전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얼마나 먼저 몸을 씻느냐에 생사가 걸려 있습니다. 숲의 귀족이신 분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합니다. 앞장 서 주십시오. 저희가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최대한 빨리 가주십시오." "좋소." 기사들이 짐을 꾸리자 하윌은 바람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수풀이나 나뭇가지들도 그 움직임을 막기는 힘들었다. 그 뒤를 기사들과 시즈들이 뒤따랐다. 기사들은 관절부근을 제외한 갑옷의 판넬을 대부분 떼어내 들고 있던 짐과 함께 지고 있었다. 로길드는 젊은 기사가 등에 업고 달렸고 왕자는 제법 쌓아둔 체력이 있는지 잘 따라왔다. 시즈는 여전히 누구나 감탄한 만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하윌을 뒤를 보를레스와 함께 가장 먼저 뒤쫓았다. 근래의 보를레 스와의 훈련 때문인지 가벼운 동작이 대부분 돌아온 듯 했다. 하지만‥. "으앗!" 쿵! "함정이다!" 갑자기 꺼져버린 땅 속에서 보를레스와 시즈가 땅에 부딪힌 등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기사로서 숙련된 이들이라지 만 숲의 어둠은 거의 사물의 윤곽에 대한 파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간단한 함정조차 삶과 죽음을 갈라놓을지 모르는 공포였다. "고블린의 함정‥. 호랑이를 피하여 늑대 둥지에 들어왔군." "괜찮아요? 보를레스." 시즈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대로 몸으로 뭉개버린 보를레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살을 더 찌워야 겠군. 남자가 그렇게 무게가 없어서야‥." "하핫! 다치진 않은 모양이군요. 어서 갑시다. 이 함정을 고블린이 설치했다면 고블린들의 둥지가 가까이 있을 겁니 다." "이미 늦었어. 바위나 나무에 몸을 숨겨!" 하윌이 소리치자마자 수풀에서 돌멩이가 무더기로 날아왔다. "끽! 끼익!" "캬아악" "빌어먹을!" 보를레스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물거리며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고블린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 만 거대한 검을 사용하는 그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부상이었다. 단번에 그의 연극을 눈치챈 하윌이 눈썹을 찌푸렸 다.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이군. 얌전히 뒤에 숨어있어." "웃기지 마쇼! 이 정도는 멀쩡한 상태나 마찬가지요." 말과 동시에 보를레스는 고블린 하나를 발로 차올려 바스타드 소드로 후려쳐 버렸다. 기괴한 비명과 함께 날아가 바위에 참담하게 뭉개져버리는 동족의 시체에 고블린들이 광분했다. "마치 원숭이와 싸우는 것 같군." 어둠을 방패로 달려드는 것은 오크보다 고블린이 훨씬 고단수였다. 투덜거리면서도 탐사단 일행은 점점 뒤로 몰리 며 한 곳으로 몰려갔다. 어느 새 서로 등이 닿자 하스폰티안이 외쳤다. "흩어져라. 붙으면 투석의 목표에 된다. 흩어져!"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돌무더기가 날아왔고 빨리 뛰기 위해서 갑옷을 벗었던 기사들은 어둠 속에서 피하지 못하고 몸 여기저기에 얻어맞았다. "크윽!" 보통 인간의 어린아이 정도의 크기인 고블린이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장난 같은 돌팔매는 무시할만한 게 아니었다. 머리에 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가능성이 농후했고 바짝 붙어있는 기사들로서는 방어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기도 힘 들었다. "절 내려주세요. 마법을 쓰겠습니다." "로길드 서둘러!" '마법사였나? 그래서 마법사를 따로 데려오지 않는 거였군.'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로길드는 재빠르게 주문의 영창을 끝낸 상태였다. "바람의 장막은 대지를 감싸고 그 부드러움에 새들이 날던 것을 멈추리라." 입술의 움직임이 끝나자 로길드에게서 시작된 대기의 진동은 일행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천히 안정되는 진동 속에 서 숲 속을 헤매던 밤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기가 하나의 막을 경계로 단절된 것 같았다. "바람의 장막이다." "끼이이익!" 던진 돌멩이들이 목표에 맞기도 전에 튕겨져 나오자 고블린들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작전을 짜는지 웅성거리는 동안 갑자기 고블린들의 뒤가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꾸웨에에엑!" "오크들이 고블린을 공격했소. 어서 빠져나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으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오크의 습격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아마도 오크들은 탐사단 에게 뭍어있던 냄새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하윌을 선두로 리페른과 시즈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 빨리!" 토끼는 이미 빠져나갔는지 모르는 늑대들과 호랑이는 서로를 물어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후로도 고블린과 오크들의 집요한 추격은 계속 됐다. 처음에는 서로 다투던 몬스터들이었으나 먹이감이 충분하 다는 것에 서로 합작을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함께 탐사단을 압박해갔다. 하지만 그보다 하이에나를 이끌고 다니는 놀은 피하기 힘든 존재였다. 하이에나의 귀신같은 코가 짜릿한 냄새를 풀 풀 풍겨대는 리페른 일행을 찾아낸다는 것은 그 하이에나가 감기에 걸렸다는 뜻일 테니까‥. 게다가 오크나 고블린 처럼 작지도 않았다. 150cm는 될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피드는 어둠 속에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무사히 피할 수 있었지만 만약 참담할 정도로 나쁜 놀의 시력이 보통 인간만큼만 되었다면 벌써 그들의 둥지에서 하이에나 의 간식거리가 되어있었을지 몰랐다. 아침이 밝아오고 해가 떠올랐다가 다시 산등성이 넘어로 숨을 무렵에서야 그들은 씻을 수 있는 호수를 발견했다. "무, 물이다!" '물에 씻으면 그 지겨운 놈들도 더 이상 쫓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에 모두 왕자, 기사 할 것 없이 체면도, 기사도도 잊은 채 물로 뛰어들었다. # "젠장! 이 놈의 마누라가 모포는 왜 한 장만 챙겨넣은 거야." 남작의 직위에 있어서 감히 내뱉기 힘든 단어- 마누라 -를 자연스레 툭툭 던졌 지만 주위에서는 말뜻을 인식하지 못하는지 모포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부러움을 벌어진 입에 한껏 달고 있었다. 사 실 두꺼운 철판으로 겨울에도 조금만 움직이면 온통 후끈해질 기사들은 대부분 모포를 비롯한 노숙장비를 챙겨오지 않았다. 그게 이리도 크나큰 실수로 가슴속에 아름질 줄이야. 현재 그들은 신나게 물에 담갔던 몸을 나긋나긋한 봄바람 속에 섞여있는 겨울의 여운에서 지키기 위해 땅바닥을 뒹 구르며 흙에 부비적거렸다. 온몸이 덜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거리는 충격음을 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건포냄새가 조 금씩 풍기는 짐을 꼭 끌어안으며 추위를 달랬다. "모닥불이라도‥." "안돼요. 불을 켜게 되면 오크들이나 고블린은 더욱 쉽게 우리를 알아챌 겁니다. 놈들은 불을 두려워하는 짐승이 아 니에요." 고개는 끄덕였지만 내심 자신을 원망하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돌아눕는 젊은 기사를 시즈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미안합니다.'라고 중얼거렸지만 과연 진실로 미안해하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스스로에게 생겼다. 미안해한다지만 나 는 그래도 정한 길을 모두를 희생시키며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내심의 사과조차 사실은 그저 자신을 위로하 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지. '원래 난 이런 놈이야. 이런 냉정한 놈이었어.'하고 색다른 위로를 청해보는 시즈였다. "리미뇌‥." 로길드에 눈에 비춰진 고대 문자는 며칠동안 꿈에서 바래왔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3글자의 단어 가 흘러나오자 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 중에는 봄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마치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뛰었다. 기사들은 1년 간 훈련장에서 뛰어야할 양을 일주일 사이에 모두 뛰어버린 듯 했다. 리페른과 로길드의 깨끗하던 피부도 긁히고 찔려 상처투성이였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이 동굴 안에‥." "예. 당신이 원하는 게 있습니다." "이 지겹게 뛰는 일도 이제 막바지에 이른 겁니까?" 동굴은 전설 속의 마법물이 감춰놓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한 모습이었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는 걷 는 게 지루한지 길게 고개를 내밀어 먼저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동굴은 점점 좁아져 기어 갈 정도로 작아졌다. '이 좁은 동굴 안에 과연 '리미뢰 홀'이 존재할까?' 그런 의문처럼 작은 동굴은 아주 길게 이어져있었다. 이러다가 막혀버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리페른의 머리 속을 가득히 채웠다. 막혀버린다면? 그렇다면 뒤로 기어서 나가야 한다. 아까 전 둘로 갈라진 길에서 반대편으로 가야했 던 게 아닐까? 동굴이 어깨를 조여왔다. 작은 자신에게 이 정도니 몸집이 큰 기사들은 아예 포복을 하고 기어오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고 한숨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뒤에서는 나를 계속 따라오고 있는 걸까?' '이젠 믿을 수밖에 없군. 믿을 수밖에 없다면‥ 철저히 믿자. 불안한 건 나 뿐 만이 아닐 테니까.' 굴은 더욱 좁아졌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리페른을 고민시키는 의문처럼‥. '사실 국가를 이끈다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 아니었을까? 국민은 국왕을 믿는다. 하지만 국왕은 누굴 믿는단 말인 가? 신? 스스로를? 아니야. 통치자가 믿는 것은 어쩌면 국민이겠지. 그래야 하겠지. 그래야 좁은 통로를 믿고 기어 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많은 이들을 믿는다? 그리고 믿게 한다? 나는 현재 20 명 남짓 사람들도 믿지 못하 고 있다. 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오는 이들을 믿지 못하고 있지. 속임수, 암수는 사실 국민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는 불필요하지 않은가. 우선 내 주위의 사람들을 믿고 그들이 나를 믿게 하자.' 그 때, 서광은 그에게 비추고 있었다. 물소리도 들렸다. "빛이다!" 좁은 동굴은 끝나있었다. 궁전의 홀만큼이나 넓고 곳곳에는 아래위로 석순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었다. 벽에는 돌이 흘러내린 듯한 무늬는 횃불에 붉게 변색되었다. "다들 꽤나 불안했지요?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어서 갑시다." 울려서일까? 좀더 부드러워진, 그러면서도 왠지 끌려 들어가는 어감이 리페른의 음성에서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시 즈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다.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는 의아하게 바라보던 로길드에게 바로 곁에 서 있던 보를레스와 시즈의 속삭임이 들렸다. "뭔가 달라졌군. 어때?" "사람을 더 생각하게 하는 것은 빛보다 어둠이죠. 그리고 편함보다 불쾌함이고 즐거움보다 슬픔, 고독과 외로움입니 다. 좋은 환경에서도 생각은 발전할 수 있지만 나쁜 환경에서 깨달은 만큼 절실하게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리페른 전하는 괜찮은 국왕이 될 듯 합니다." -83- 부복한 상태로 몇 백 미터를 기어온 기사들의 팔뚝과 무릎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물로 씻어낸 상처에 시즈가 간단 한 약초와 물약을 섞어 바르자 아픔이 상당한지 눈을 감고 부르르 떨었다. 가끔은 키가 작은 게 도움이 될 때도 있 다는 생각을 해보는 시즈였다. "그나저나 저 앞의 낭떠러지는 어떻게 건너지요?" 어깨가 약간 부어오른 리페른은 앞을 가로지른 대지의 균열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 는 없지 않은가. 가장 먼저 치료를 끝낸 하스폰티안 남작이 걸어와 눈대중으로 낭떠러지의 폭을 재더니 말했다. "이 곳은 제법 굵직한 석순이 많습니다. 여러 개를 잘라서 발을 딛을 다리를 만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은 의견이라 판단한 리페른은 기사들을 시켜 굵직한 석순을 잘랐다. "괜찮을까요?" 그 모습을 보며 로길드가 걱정스럽게 시즈에게 물었다. 그러나 시즈는 마땅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살펴보 기만 했다. 쿵! ‥팍! 실패였다. 석순은 사람들의 무게를 지탱해줄 수 있는 단단함을 지녔지만 건너편으로 쓰러질 때 스스로의 무게를 견 딜 탄력은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눈썹을 찌푸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윌, 당신이라면 건너편으로 뛸 수 있습니까?" 균열은 적어도 10m는 되어 보였고, 사람이 뛰어넘을 폭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할 수 있다." "정말입니까?" "단,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행이 서 있는 쪽이 건너편보다 높았다. 낮은 쪽에서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게 그 반대의 상황과 차이가 얼마나 심할지는 뻔했다. 리페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설마 탐사단이라는 명목으로 밧줄도 하나 가지오지 않았겠습니까." 기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여러 개의 밧줄을 하나로 굵게 꼬았다. 어찌나 두꺼운지 어깨에 짊어진 하윌 이 그 무게로 뛸 수 있을 것조차 뛰지 못할 듯 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파앗! 새를 연상시키는 점프. 양팔을 벌리고 양다리를 가슴에 딱 붙이고 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그는 날고 있었다. 공기 를 가르는 빠르기가 정지되어 있는 걸로 착각될 정도로 안정된 동작. 착지는 마치 땅이 솜처럼 푹신한 듯 자연스러웠다. 그저 일어섰다가 앉는 것처럼‥. 그러나 이어지는 기사들을 향한 비웃는 듯한 비릿한 미소. 보를레스를 비롯한 검을 든 이들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뭔가 끊어졌 다. "흐아아아아압!" "으라차찻!" 우두두두두! 갑자기 눈을 뜬 채 달리기 시작하는 보를레스를 선두로 기사들이 죄다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버팔 로의 돌진을 연상시키며 말릴 틈도 없이 그들은 모두 낭떠러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억!" "이런! 모두 멈춰!" 철푸덕! 퍼우억! 하윌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떠올린 채 자신의 주위에 폭탄- 불발탄 -처럼 떨어져 내리는 이들을 바 라보았다. 10m를 날아와서 패대기를 쳤으니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플 만도 하건만 보를레스를 위시한 모든 기사들 은 하윌을 향해 그가 지었던 것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국 시즈는 타박상에 필요한 약초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곁을 머물던 바람도 흥분해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퍼억! "으억! 왜 때리십니까? 단장님." "그래서 불만이냐? 이놈들아! 이게 무슨 추태냐? 시즈님과 리페른 전하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 하지만!" "이 놈들이 그래도!" 퍽! "하스폰티안 각하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래도 전하를 호위하는 자부심이 있어 호승심이 있다는 것은 기사로서 즐 거운 일이 아닙니까?" "보를레스 님도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오! 시즈 님이 얼마나 심려하셨을지 아시오?" 그 말에 보를레스는 약간이지만 떫은감을 씹은 표정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뒤로 돌린 그는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는 시즈에게 물었다. 손목이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걱정하셨습니까?" 그 물음에 시즈는 살짝 여자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하하핫! 설.마.요. 보를레스 님의 실력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요. 그런 제가 어.찌. 걱.정. 따.위.를. 했겠습니까? 그.렇.죠?" 힘을 주어 끊어 말하는 부분마다 보를레스는 붕대에 손이 질식사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각한 조임을 당해야 했다. 고통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는 바보처럼 웃었다. "흐흐흐. 보셨죠?" 멀리서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리페른은 감탄한 어조로 로길드에게 말했다. "대단하지 않아. 저 두 사람‥. 시즈 님도 대단하지만 보를레스라고 하는 사람도 대단하군. 사실 10m나 되는 길이를 뛰어넘을 생각을 하다니‥. 하윌 님이야 몸이 가벼운 엘프라서 그렇다고 쳐도 인간이 말이야. 덕분에 기사들까지 불 이 붙은 것 같아." "예. 그렇습니다." 로길드는 맞장구치면서도 머리 속을 한 순간 스치고 치나간 의혹을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 도저히 불가능한 거리다. 아무리 호기가 동하여 능력 이상의 잠재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역시 미지의 존재 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히 뒤에서 불어온 바람.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 순간 떨어지는 기사들의 몸을 받쳐줄 만큼 묵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굴까? 시즈 세이서스? 하스폰티안?' -84- "로길드, 이리 와서 붕대 좀 감아줘요. 빨리 하고 일어서야 하니까‥." "아, 예." 로길드, 왕국 엘시크의 1500년 역사의 그림자를 지켜온 페노스톨멘가의 소년 후계자에 눈에 비친 현자 시즈 세이서 스는 눈에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멀었으며 거대했다. '포션과 약초를 병행하는 일은 1류 약사들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상생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사람은 마치 당연한 양 포션에 빻은 약초를 섞는다. 게다가 약초에는 약간의 마나까지 포함되어 있다.' 약초에 마나를 넣어 효과를 높이는 방법은 엘프들의 전유물이라고 로길드는 알고 있었다. 인간들 중에서 그 방법을 실행하는 자는 매우 극소수라고‥. '이 사람의 지식은 어디까지일까? 혹시 본가의 도서실에 배치된 서적보다 더 방대한 지식을 가졌을까?' 하지만 로길드가 배제하고 있는 게 있었다. 시즈는 자신이 행하는 치료법에 대한 부작용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 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말은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무식하면 용감하다'였다. 치료와 함께 짧았던 치료를 끝내고 일어섰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굴의 끝자락을 보며 하스폰티안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깊은 굴은 처음 보는군요." "아마도 피곤한데다가 고생을 심하게 하여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겁니다." 언제까지나 시간을 치체할 수는 없었다. 석순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약간의 여유를 간격으로 똑똑 시간을 재고 있었다. 게다가 동굴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비축된 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동굴에서 나가야 했다. "갈림길이로군. 어느 쪽으로 가지요? 흩어져서 찾아보겠소?" "어느 쪽이든 전하께서 가지 않으시면 헛고생입니다. 차라리 흩어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에서 바람이 느껴진다는 하윌의 말에 따르기로 한 이들은 어느 순간 바닥을 채우고 있는 곤충들에게 기겁을 했다. "펜실바니카!" 시즈의 기억 속에 현존하는 곤충 중 가장 원시적인 종류에 속하는 녀석들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식성과 어떤 상황 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과 번식력을 지닌 최강의 존재였다. 게다가 시즈의 발 앞에서 기묘한 냄새를 풍겨 대는 녀석들은 집안에서 머리를 짓눌러 뭉개버릴 수 있었던 것들과는 다르게 손바닥만큼이나 컸다. 이 정도의 녀석 들이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사이로 발만 들여놓으면 순식간에 뼈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뭘 먹고 이 안에 이렇게 살아있었던 거지?" 어딜 봐도 먹이는 있지 않을 동굴. 시즈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주얼거렸다. 뒤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던 보 를레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질문이나 하고 있다니‥. 어떻게 하면 저걸 쫓아낼지 생각해봐." 펜실바니카들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아무래도 횃불 때문인 듯 했다. 만약 익숙해진다면 오랜만에 맡게된 먹이 냄새를 놓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윌, 바람이 이쪽에서 느껴졌다고 했죠? 지금은 어때요?" 하윌은 좀더 감각을 극대화하려는지 정신을 집중했다. "틀림없어. 가까운 곳에 바깥과 통하는 곳이 있다. 어딘가로 공기가 들어오고 있어." "전하, 들으셨겠지만‥. 아무래도 곤충의 강을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 리페른은 아무 대답없이 불빛에 비친 검은 물결을 향해 비위상한 시선을 던졌다. 그 표정은 마치 '꼭 해야 하나?'라 고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시즈는 쓰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짧은 기간동안 리페른은 확연히 변해있었다. 좀더 남자다워졌다고 할까. 나직한 어조에 시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 었다. 리페른의 음성에서 의견을 드러냄의 부담을 삭혀주는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의견을 듣게 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겠지. 시즈는 우글거리는 곤충들을 옆에 두고도 즐거웠다. 그의 은은한 목소리가 동굴을 서서히 퍼졌 다. "걸어서 건너야지요." "예엣!?" 찰나 동굴이 쩌렁하게 울렸다. 펜실바니카도 음파에 움찔했는지 순간 들려오던 마찰음이 죽어버렸다. 기사들의 얼굴 은 마치 방금 전에 쏟아놓은 소변을 오렌지 주스로 착각하고 마신 사람들처럼 싯누렇게 변했다. 그런 그들을 대표 하여 하스폰티안 남작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걸어서 건너다니‥. 펜실바니카는 뼈도 남기지 않고 코춧 가루 단위로 해서 우리를 먹어치울 거요. 아마 맷돌에 인간을 갈아서 물에 타 마신다고 해도 저 녀석들에게 먹히는 것보다는 남는 게 있을 겁니다." "방법을 말해주십시오. '마땅찮은 시즈'" 리페른는 날카롭게 시즈를 쏘아보았다. 그의 판단에도 시즈의 말은 어처구니없었다. 그가 부른 명칭은 별명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그가 현재 느끼는 감정을 읊은 것인지도 몰랐다. 시즈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아하하핫 하고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합니다. 횃불로 필요없는 물건을 태운 후 그 재를 몸에 바르고 걸어서 지나가면 되는 거죠. 쪼오오끔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도 방법이 없어요." 시즈는 말이 끝나고 부담스러웠던 시선들에 살기가 비릿하게 풍겨 나오는 걸 느꼈다. 그의 등을 식은땀이 유혹적으 로 쓰다듬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로길드가 시즈에게 묻자 사람들은 절망을 느꼈다. 그나마 일행 중에서 시즈와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학식을 가진 유일한 소년이 아니었던가. 그가 저렇게 물었으니‥. "물론 뒤로 돌아서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리미뇌 홀을 포기할 생각이십니까?" 결국 이들은 식량을 비롯하여 침낭과 옷- 속옷도 - 등 불에 타는 대부분의 탐사장비를 태우고 그 재를 물에 타서 몸에 발랐다. 시즈의 말이 맞다면 이 재 냄새가 그들을 지켜줄 것이다. "제가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스폰티안이 먼저 앞장서고 그 뒤를 하윌이 따랐다. 뛰어난 기사와 권술가인 두 사람이었지만 조그만 미물들 앞에 서 긴장하고 있는 게 얼굴에 그윽하게 나타났다. 그들이 발을 내딛는 자리는 물결이 거두어지듯이 싸악하고 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먼저 간 놈이 있으면 뒤떨어지 는 놈도 있는 법. 와드득! 밟고 싶지 않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벌레들을 밟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짓뭉개진 시체의 주인이 그것들은 방금 전 까지 함께 몸을 비비던 친구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즈의 말대로 그것은 두 사람 의 발이 지나고 난 후였다. "빨리 걷지 마세요." 뒤에서 시즈의 얄미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어찌 느린 걸음이라는 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지 당장 돌아가 서 펜실바니카 속으로 던져주고 싶었다. '환경의 암흑은 마음의 암흑일지니‥.' 교육환경가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발끝으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와 닿았다. '이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툭! 흠칫! 하스폰티안은 탐사단장의 직위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마 부근에서 무언가가 배를 끌면 기어가는 감 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참고 견뎠다. 그리고 끝을 보았다. "후우‥. 다왔군." 드래곤의 트림만큼이나 깊고 무거운 숨을 뱉어낸 하스폰티안은 밝게 웃으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어서 건너오십시오." 하지만 건너올 이들은 괜찮은 것도 그리 탐탁하지 않은지 눈을 질끔 감는 인원이 꽤 됐다. 한 명, 두 명 건너가고 시즈와 보를레스만이 남았다. 먼저 건너간 사람들은 '이미 재앙은 끝났다'라는 표정으로 손짓을 하고 있었다. "시즈 님, 보를레스 님, 뭐하십니까?" "모두들 이걸 생각해보셨나요? 돌아올 때는 재가 모두 흩날리고 또 냄새도 사라졌을 겁니다. 어떻게 건너시겠습니 까?" "무, 무슨 뜻입니까?" "펜실바니카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럼 원하는 것을 얻으시길‥." 얘기를 끝낸 시즈는 짐 속에서 악기 하나를 꺼냈다. 넬피앙이라고 불리는 서민의 악기는 언제부터인가 그가 아끼는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시즈 님. 무, 무슨!?" "서, 설마‥." 넬피앙의 현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보를레스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시즈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고 함께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릴 적 들었던 동화같은 전설을 연상시켰지만 전설의 마지막을 떠올리는 순간 로길드와 리페른은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안돼!!" # "리페른, 그리고 로길드도 잘 들어요.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랍니다." 롤젠미아누 왕비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기대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아이에게 잠을 안겨줄 듯한 나긋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때는 '로치큐'라는 몬스터가 극성을 부릴 시기였어요. 로치큐는 펜실바니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더 포악한 성향과 강한 이빨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로치큐가 어찌나 많은지 곳곳에 없는 곳이 없었어요. 곡식창고를 열 어보면 식량 대신 로치큐들이 우글우글 몰려나올 정도였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로치큐는 그래도 사라 지지 않았어요. 굶어죽는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그들의 먹이가 되어줬으니까요. 썩은 동물의 시체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족에게 극심한 악종 질병을 가져다주었어요." 롤젠미아누 왕비는 목이 말랐던지 탁자에 준비되어 있던 컵을 들었다. 혀와 입안을 축이고 난 그녀는 다음 이야기 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는 표정의 두 소년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보다도 사람들은 로치큐를 두려워했답니다. 작고 두려운 생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사람들 은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어요. 그 때 몇 사람이 그들을 퇴치하겠다고 나섰지요. 그들은 당시 가장 이름 있는 음유 시인 4 명이었어요." - 무서울 게 없는 로치큐이지만 불에는 약합니다. 어떻게든 불로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없앨 수 있습니다. - 우리도 해보았소. 하지만 놈들은 아무리 푸짐한 먹이를 미끼로 유인한다고 해도 불씨라도 있는 곳에는 절대로 다 가가지 않소. "그 곳에 모여있던 사람 중 한 사내가 그렇게 절규하자 모두들 절망에 어린 표정을 지었답니다. 그 때 4 명의 음유 시인 중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음유시인, 왕국 제일의 음유술사입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음유술사가 뭐죠?" 리페른이 묻자 왕비는 잠자코 듣고 있던 소년에게 질문을 돌렸다. "로길드는 알고 있나요?" "예, 전하. 고대의 음유시인들 중에는 음악으로 마법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을 통틀어서 음유술사라고 합니다." "리페른, 로길드의 말 잘 들었지요? 이야기를 계속 할게요. 왕국 제일의 음유시인이자 음유술사인 그는 말을 이었어 요." - 저 광활한 안티품 평원 가운데에서 노래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 냄새를 가득히 풍기는 민트액으로 훈제시킨 고기덩이를 놔두세요. 몰려든 로치큐를 우리가 음악으로 묶어놓을 테니 그 사이에 평원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불을 지르세요. 로치큐는 채소와 곡식은 먹어도 마른 밀 줄기를 없애지는 않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에 찬성했고 안티품 평원 중앙에는 민트로 훈제된 몰도리카- 소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코끼 리 정도다 -고기로 사방을 가득 메웠답니다. 그리고 4 명의 음유시인들은 노래를 시작했어요. 작고 포악한 손님들을 초대하는 유혹의 노래는 민트향을 안아든 몰도리카의 냄새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갔답니다. ‥‥" - 슬슬 몰려드는 군. 이제 조금 있으면 불도 솟아오를 겁니다. 슬슬 빠져나가도록 합시다. - 먼저 가세요. 전 좀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 제 말을 들으세요. '불꽃의 춤을 추는 이'여‥. 제가 떠나면 움직이던 바람이 사라져버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불 의 행로는 알 수 없어요. 도리어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겁니다. 로치큐보다 더 악몽스러운 재앙이 될지도 몰라요. - 하지만‥! - '파도의 악보를 지닌 이'여‥. 부탁합니다. - 꼭 이래야 할까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 번식이 강한 벌레들입니다. 하나라도 살려둘 수는 없잖아요? 불길이 조여들고 있습니다. 어서 가세요. '땅의 고동 을 밟는 분'‥. 혹시라도 불꽃이 폭주하거든 막아주십시오. 세상의 마지막 힘인 불이라고 해도 바람이 없는 이상 그 리 힘을 펴진 못할 겁니다. "마지막 한 명의 음유시인을 놔두고 그들은 슬퍼하며 안티품 평원에서 도망쳤답니다. 사람들은 솟아오른 불꽃에 타 죽어갈 로치큐를 생각하고 축제를 열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모습은 슬픔에 젖어있던 한 음유술사의 분노를 일으켰 지요." - 어찌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대들을 위해 자신을 태우고 있거늘!! "그의 분노는 새로운 불꽃이 되어 세상을 태우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음유시인이 그에게 말했지요." - 그 분께서는 결코 현명한 사람들을 위해 죽은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겁니다. 이해하 십시오. 그의 뜻을 저버릴 생각인가요? - 빌어먹을! "두 음유시인에게 설득 당하자 그는 주위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펑펑 울기 시작했지요. 아직도 불꽃은 평원을 태우 며 중심을 향해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도 평원 속, 노래를 부르고 있을 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울부짖었 어요." - 불꽃이 바람 없이 방향을 정할 수 없듯이 나 역시 그대 없이 방향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절규와는 관계없이 불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의 절규에 맞추어 더욱 강하게 타올랐지요." - 바람이‥. - 멈췄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불이 잦아진 후에 한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른 곳에는 로치큐가 타고남은 재만 가득했답니다. 그 재는 땅에 있어 매우 이로운 영양을 지닌 것이었죠. 그 이후로 밀과 보리만 키우던 안티품 평원은 광대한 쌀 농 장으로 바뀌었답니다." "어마마마, 혹시 그건‥." "그래요. 지금으로부터 몇 천년 전, 현재의 엘시크를 지탱해주는 중앙 평원 엘크릴스에 내려오는 전설이에요. 전설 에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았던 음유시인이 불렀던 노래가 내려오지요. 정말 아름다운 노래에요." 왕비가 자장가처럼 불러주었던 노랫소리. 하지만 더 가슴을 채워오는 노랫소리. 본능에 몸을 맡긴 그대들. 내, 노래에 몸을 맡기고 부릅니다. 어서 와 축제를 벌이세. 어서 와 축제를 벌이세. 갈색 갑옷 속에 숨겨놓은 얇고 투명한 날개를 펴고. 어서 날아와 축제를 벌이세 하고 부릅니다. 춤을 추며 이성을 믿는 이들에게 말해주세요. 본능의 반역을 두려워하라고 스쳐 지나는 듯한 유혹에 찾아온 이들이여‥ 황금빛 들녘이 새빨간 와인처럼 물들 때 우리는 떠나갑시다. 유혹의 빛깔에 물들어‥ 좀더 나직한, 하지만 좀더 매혹적인 음성‥ 멍하니 불빛이 동굴 저 편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있던 리페른은 어째서 그 노래가 지금 들려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 펜실바니카가 물결치듯 움직이는지, 왜 시즈와 보를레스를 쫓아가는지‥. "설마‥ '바람을 노래하는 이!?'" 믿을 수 없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에 찬 얼굴로 로길드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신에 찬 눈동자는 검은 물결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감히 시선을 떼지 못했고 멍한 귀는 너무나 은은한 청년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면 아까의 바람에 대한 의혹도 풀린다. 그러나 더 이상 나타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런 존재라고‥.'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쳐 로길드의 눈동자와 함께 돌아가고 있던 생각을 멈췄다. "자아‥. 어서 갑시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요?" 동굴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펜실바니카의 이동에도 덤덤하게 말을 던진 사람은 바로 엘프, 하윌이었다. 딸, 유레민 트가 그토록 격찬했던 청년이었다. 살아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 어 즐거운 미소가 입가에 새겨졌다. "하윌 님의 말이 맞군요. 어서 갑시다. 시즈 님은 맡겠다고 했지, 희생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우린 빨리 리미뇌 홀을 찾아야 합니다." "바람이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고 있소." 그가 가리키는 곳에서 빛이 보였다. 모두들 기대를 품고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러나 왜 희망과는 다르게 눈에서 는 눈물이 솟는가‥. -85- "이봐, 이봐! 소문 들었나?" "무슨?" "리페른 전하께서 이번 훈련에 참여하신다고 하더군." "우하하핫! 자네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인가? 리페른 전하께서는 지난 번 고대유물 탐사에서 돌아오신 후 몸이 낫는 대로 훈련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셨어." "아직은 보호받아야 할 왕자님이 아니신가. 무엇 때문에 힘든 훈련에!?" "전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자신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좀더 강해야 한다고. 그 뿐만이 아니네. 재미 있는 소식이 또 있지." "무엇인가?" "마법은 완전히 그만 두겠다고 했다네." "허허 마법은 또 왜?" "철저히 보호받고 싶다는 거야. 마법과 검술을 함께 익히는 일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 대신 자신을 가르칠 마법서적과 마법선생으로 하여금 궁정마법원의 견습생들을 철저히 가르쳐 자신의 개인 마법사로 예 약한다 하더군." "대단하시군. 어쨌든 난 왕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만족하네." 4 시간 후‥ 한 주점‥ "자네, 자네 보았나? 리페른 전하께서 내게 웃어주셨어!" "참나 그냥 한 번 웃어줬다고 그리 난리인가? 난 전하의 손을 잡아일으켜드렸다고." "뭣이!? 그런 불경한 짓을 했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일으켜 달라고 하셨다고!" "어쨌든‥ 귀족들의 오만한 웃음과 같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으음‥ 동감이야. 그 가식없는 웃음‥ 만약 주군을 택할 수 있다면 리페른 전하를 택하겠네." "넌 안돼! 나 같이 실력자만 전하를 보필할 수 있다고!" 성내에서 일고 있는 작은 파문은 조금씩 그 원호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파문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허허허헛! 그래. 당했단 말이지? 네가 꼼짝없이 당하다니 과연 시즈라는 청년은 대단한 모양이구나." "예." 당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어휘였지만 소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현(現) 페 노스톨멘 가문의 가주이자, 소년의 할아버지인 크레오드 페노스톨멘은 메추리 알만큼이나 커다란 보석이 박힌 양손 의 반지를 서로 마찰시키며 물었다. "그래. 네 주군은 뭐라고 하시냐?" "분명히 '리미뇌 홀'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허허허헛!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정말로 얻으셨군. 정말로 얻었어." "할아버지는 이미 '리미뇌 홀'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계셨군요." 로길드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크레오드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장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낸 그는 삐진 듯 하면서도 흘깃흘깃 호기심을 품고 훔쳐보는 손자에게 건넸다. 마치 준비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의 아한 표정을 짓는 로길드에게 크레오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이 두 권을 본 적이 있느냐?" "물론이죠.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적어도 이 방 안의 책은 모두 읽었습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제대로 보지를 않았구나?" "할아버지께서 절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운이 나빴던가, 아니면 피곤했나 보구나. 327 페이지를 펴보거라." 불만스러웠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책을 펴서 천천히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 다시 크레오드가 말했 다. "고대에는 성인식을 치를 때 어떻게 한다고 나와있지?" "개미집 위에 서있게 한다고 쓰여있습니다. 꼭 개미집이 아니더라도 징그러운 벌레 위를 걷는다던지‥!" "이제 약간 뭔가 깨달았느냐? 이제 다음 책의 88 페이지를 펴보거라. 펜실바니카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다. 하지 만‥. 그 페이지는 볼 필요가 없다. 두 장 더 넘기거라. 뭐가 있지?" "‥‥." "리미뇌라는 벌레는 펜실바니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색깔을 제외하고는 확연히 생김새를 구별할 수 있단다. 게다 가 그 놈들은 잡식성이기는 하지만 자기보다 큰 동물은 절대로 건들지 않아. 어두워서 잘 구별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이 맞자면 아마 처음에 누가 '펜실바니카'라고 인식시켰을 거다." "그러고보니 시즈 님이‥." 그러고 보니 시즈 님은 가장 뒤에 서있었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펜실바니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 로길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마도 열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울먹이는 손자의 푸른 머리칼을 부드럽 게 쓰다듬으며 크레오드는 다정하게 말했다. "15살이나 먹은 녀석이 어찌하여 운단 말이냐? 억울하겠지만 그게 너와 그의 차이를 명백히 말해주는 게다. 그저 잔꾀일지 모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공백이 될 수 있는지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누군가 를 보필하는 책사에게 있어서 임기응변의 잔꾀는 체계적인 작전보다 더 중요하다. '페노스톨멘'이라는 이름이 현재 까지 엘시크 왕가의 수호신처럼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뜻하지 않은 위기를 재치있게 넘긴 선조들의 잔꾀 와 임기응변이야. 결국 그 청년은 가벼운 잔꾀로 왕자를 우롱하고 사람들을 속였지만 원하는 걸 모두 얻었다. 꾀로 가장 거대한 힘, 왕가의 권력을 움직여 엘프들의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만들었지. 기억해두렴‥ 미래를 이끌 페노스 톨멘의 작은 가주여‥. 네 앞에는 그 청년이 있다는 걸." "예!" 흐르는 눈물과는 관련없이 힘찬 대답. 크레오드는 자만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를 손자를 처참하게 뭉개준 시즈라는 청년에 대해 일종의 감사를 보냈다. '자네 덕분에 앞으로도 페노스톨멘이라는 이름은 건재하겠어.' # "‥‥." 보고서를 받아든 여인의 손은 간질 환자처럼 심각한 경련을 일으켰다. 새하얀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그 녀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색시처럼 아름다웠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쓰윽 훑어보는 눈빛 은 수 백년 묵은 여우보다도 날카로웠다. 요염하도록 붉은 입술이 살며시 열리며 분노어린 미소가 그어졌다. "풋! 자아‥ 어서들 말씀해보세요. 이 보고서에 쓰여진 게 무슨 뜻이죠?" 꿀꺽꿀꺽. 아무도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물을 들이킬 뿐.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모습을 중앙에 모습을 몇 번 들어내지도 않았고 정계에는 손톱 부스러기도 들여놓지 않았 는데 어째서 그에게 인사를 가는 귀족들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게다가 뇌물 추정액 좀 보세요. 이대로 며칠만 가면 손가락을 꼽을 대부호가 될 지경이에요. 귀족도 아닌 이가 왜 이토록 궁정 조회에서 거론되어야 한단 말이죠? 그는 실제 정계에 활동하는 게 아니니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 않았어요? 어서들 말해봐욧!" 히스테릭한 비명처럼 여인이 다그쳤지만 대답하는 간 부은 인간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까까지 입술에 대고 있던 빈잔을 떼지 않고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러다간 감봉될지도 몰라.' 곧 정년을 앞둔 한 노인은 심히 걱정스러운 예측이었다. 어젯밤 점성술로 점친 '무지하게도 나쁜 운수'가 정확히 들 어맞은 것이다. 역시 춤추는 거지의 카드가 나왔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입맛을 다시며 일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모아지는 게 느껴졌다. "워낙 한 권의 책으로 인한 여파가 크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고 여파가 수그러들 면 귀족들의 경향도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 리페른 왕자까지 그를 추종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오? 그와 리페른이 함께 리미뇌 홀을 얻었다 는 소문에 귀족들이 리페른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리페른까지 그를 두둔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그를 정치권력으로 견제한단 말이죠? 생각은 하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나이가 드셔서 판단력이 떨어지신 모양이네요. 오늘 이후로 집에서 편히 쉬세욧!" 점괘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혼이 빠져버린 듯 힘없이 앉는 노인에게서 관심을 잃어버린 여인이 소 리를 질렀다. "모함, 자객 등등! 수단을 가리지 말고 그를 죽여요." "저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스니다만‥." "뭐죠?" "그는 출국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도망간 듯 싶습니다." 어이가 없는지 입을 쩌억 벌려 아름다운 외모를 망가뜨리는 여인이었다. - 인형이길 원치 않는 인형의 노래. 실베니아 남서부 항구도시 낭아플, 남국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해안에는 거친 뱃사람만큼이나 건장한 체격에 검붉은 피부를 가진 20대 후반의 청년이 고독을 씹으며 앉아있었다. 청아한 바다와 그 위를 쓰다듬는 새하얀 포말 과는 동떨어지는 듯한 풍경이었으나 청년의 귀족적이면서도 야성적인- 새하얀 셔츠를 반쯤 풀어헤쳐 입고 있었다 -복장은 충분히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눈감아줄 만 했다. 굵직굵직한 근육과 깨끗한 차림새를 볼 때 기사가 아닐까 하는 예사을 하게 만드는 그는 굵고 짙은 눈썹 아래로 예기를 발하는 눈동자를 수평선 끝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 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감청빛깔의 파도가 그가 앉은 바위를 몇 번이나 치는지 세워보던 청년은 멀리 아스틴에서 오는 커다란 범선을 발견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왔군." 범선은 적어도 100여명은 태울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선착장에서 5m 이상의 선채를 올려다보면 절로 위압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하지만 실베니아의 선박들은 그보다 더 거대한 규모도 많았다. 그렇기에 해상왕국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만. 선채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던 청년은 막 갑판으로 얼굴을 보인 소년에게 환호했다. 검은 모 자를 균형있게 머리에 쓰고 있는 소년은 웬만한 여인도 따라오기 힘들만큼 귀여운 용모의 주인공이었다. 곧 청년을 발견한 소년도 밝게 웃으며 모자를 벗어들어 흔들었다. "하하핫! 어서와, 레소니.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뭐가 잘못 되었는 줄 알았잖아." "헤헤‥. 보를레스 오랜만이에요. 후작 각하께서 챙겨주시는 물건이 꽤나 많아서요." "흐으‥. 척 보기에도 꽤나 무거워 보이는 걸." "들어 주신다니 고마워요. 역시 주인님은 대단하세요. 예측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거든요. 말씀하신대로 80만 타로운 을 가져왔어요." "너무 많이 가져온 거 아니야?" "후후‥. 괜찮아요. 주인님을 추종하는 귀족들이 가져온 물품의 금액이 딱 그 정도거든요." "하하하‥. 어이가 없군. 탐사 후에 정치 물결에 휩쓸리게 될지 모른다고 동굴에서 나온 후 바로 이리로 출국을 해 버리다니‥. 정말 누가 시즈를 예측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세이서스가의 호위와 시종이었다. 이국의 항구 부두에서 보를레스와 감동의 재회를 나눈 레소니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부른 장본인을 찾았다. "시즈는 여기 없어." "또 책이겠지요?" 다 알아요라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레소니에게 보를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는 슬슬 궁금함을 가 지고 올려다보고 있는 레소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납치됐어." 순식간에 치켜 올라가는 소녀의 눈썹과 불이 켜지는 쌍심지. 그녀의 입에서 비명처럼 짧지만 긴 한 마디가 튀어나 왔다. "또요―?" -86- 지금으로부터 3 시간 전, 시즈는 야자수의 그늘이 진 해변가에 앉아 시원하게 얼음을 띄운 레몬 즙을 마시며 엘시 크에서 가져온 모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따뜻한 기후에 나른해진 눈은 감겨왔고 손에서는 힘이 빠졌다. 그 리고 행복하게 자고 일어나 보니‥.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이야.' 어떤 미화를 시켜도 칙칙한 색깔의 감옥과 잔잔한 물결 소리가 들려오던 해변과는 비슷할래야 비슷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의 따사로운 햇볕은 어디 갔는지 10평 남짓한 공간 한 구석에 놓여진 촛불이 태양을 대신하고 있었다. 시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끌려온 거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둘러싼 20명 남짓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애잔한 슬픔을 훌쩍임으로 대변하고 있는 15세에서 18세까지의 소년, 소녀들은 천연의 색기를 솔솔 풍기는 미소녀, 미소년 들이 아닌가. 상황을 생각해볼 때 분명 이것은‥. '인신매매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나마 깨끗한 옷을 사서 입었다지만‥. '아무래도 날 납치해온 사람이 꽤나 혼 좀 나겠는 걸.' 그를 생각해서 라도 어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심하는 시즈였다. "으음! 도리가 없군. 도리가 없어."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카이젤은 훌쩍임 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조그마한 절규에 고개를 들었다. 18살 정도의 청년이 무얼 그렇게 고민하는지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 그는 나처럼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방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불안과 두려움에 젖어있는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납치를 당했다는데 대한 당황이나 위화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 멍청하게 징징 짜고 있는 녀석들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심하다고나 할까? 오늘 갑자기 감옥의 문이 열린다 싶어 새로운 매 물동료가 들어오나 했는데 던져진 것은 잠에 골아 떨어진 사내였다. '아무래도 저렇게 자연스러운 것은‥.' 납치에 익숙하거나 바보겠지. 하지만 납치에는 절.대.로. 익숙할 것 같지 않은 얼굴, 지금도 왜 잡혀왔는지 매매단 놈들의 취향을 의심해 볼만한 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고개를 젖던 나는 막 얼굴을 들던 바보와 정확하게 눈을 마 주쳤다. 배시시. '윽!' 찰나였지만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공간 속에 빠진 듯 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청년이 띄운 미소는 납치를 당한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던 나의 가슴에 작지 않은 파도를 일으켰다. 잠시동안 넋을 잃었던 나는 개미가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먹이를 끌고 가는데 놀란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나빠져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잔잔한 미소를 짓다니 분명 엄청난 바보가 틀림없어."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훌쩍대는 멍청한 녀석들은 그 바보 주위로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신기하기 그지없 는 상황이었기에 주의하여 살핀 나는 기가 막힌 사실을 발견했다. '공기가 다르다.' 틈이라고는 없는 감옥 안에서 그의 주위로 따사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물로 앞이 보일지 모르는 울보 녀석들 도 무의식중에 어디가 편안한지는 느끼는지 청년에게 조금씩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답지 않게 붉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군." 청년은 주먹으로 남은 손바닥을 탁 치고서야 포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라!?" 이 넓은 공간에서 자기 주위만 북적거리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내가 웃음을 참는 사이 청년이 당황하자 그의 주위 에 흐르던 바람이 사라져버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설마 나와 같은 정령사인가?' 가장 무난한 답이었지만 난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령의 냄새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 는 녀석이군.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로웠다. # '이거 곤란하군.' 정말이었다. 현자, '마땅찮은 이'라고 불린 이후로 이토록 곤란에 처해본 일이 드물었다. 미행도 당해보고, 인질극을 통한 협박까지 받아보았지만 현재의 황당함에 비할 수는 없었다. 깜짝 졸고 있는 사이에 납치를 당하다니‥. 레소니 가 알면 또 잔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급한 일은 좀 전부터 매우 지척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울음소리를 그치게 하는 일이었다. 돈이 되는 아이들인 만큼 우는 정도로 그 귀여움과 미모가 애처로움을 배가시키 고 있었지만 15 여명에 가까운 소녀들이 한꺼번에 울고 있으니 소음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포위된 채로 보고 있으려니 왠지 내가 울린 듯한 죄책감이 가슴에 아렸다. "저, 저기‥. 애들아? 울지 말아요‥." "으― 앙!" 크흑! 나도 울고 싶잖아. 소녀들은 내 목소리가 슬픔과 두려움을 복받치게 하는 매개체라도 되는지 감옥이 떠나갈 정도로 더욱 크게 울어댔다. 그나마 소년들은 무뚝뚝하게 감정을 억제하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대부분 긴장을 감추 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숨과 함께 억지로 웃고 있는 입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야 그 꼬마악마- 레소니의 동생들 -에게서 벗어났나 했더니 이런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천사처럼 아름다운 아이 들이라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악마들에 비해서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난 눈물을 머 금고 꼬마악마들을 재울 때처럼 손톱으로 바닥을 톡톡치며 머리 속을 헤집었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 (시점 변화) 후훗. 역시 곤란해 보이는 군. 그는 청년의 티를 내고 있지만 소년의 허물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 하니 자신보다 한 두 살 적은 소녀들을 달래는 게 익숙할 리가 없었다. 안절부절하면서도 어색하게 미소를 띄운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지만 난 별로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얌전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울음 바다 속에서 계속 있어야 한다니 끔찍해!' 다시 무릎에 머리를 파묻으려는데 그가 재미있는 행동을 시작했다. 톡톡! 톡톡톡! 물론 시끄러운 소음들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청년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들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주의를 끌려는 건가? 꽤 괜찮은 생각이지만 울음에 가려 들리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마치 울음소리를 감상하기라도 하는 양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청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울음소 리를 그치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건지 입가에 천천히 미소까지 어리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지?' "‥‥." 뭐라고 한 걸까? 그가 오른쪽에 앉아있던 소녀의 귀에 대고 입을 오물거리자 소녀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의아하게 청년을 바라보았다. 살짝 윙크를 한 청년은 다시 왼쪽의 소녀와 뒤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똑같이 무슨 말을 속삭였 다. 그러면서도 바닥을 두들기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어느 새 울고 있던 소녀들의 어깨를 톡톡 하고 두들기고 있었고 점점 청년의 주위로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소녀들이 훌쩍임을 멈추고 그의 속삭임같은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쯤 되어서야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노래하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수정 구슬 닦아주기. 아침 일찍 일어나 하얀 우유 한 잔씩 마시기 레몬 사탕은 하루에 세 개 자기 전엔 꼭 이 닦기. 잊지 말아요. 떠나는 그대를 위해 새로운 바람이 부네요. 이제 그대 작은 빗자루를 들어 저 파란 하늘을 날아올라요. 두려워 말고 생각해봐. 그 어떤 마법보다도 신비롭던 우리의 맨 처음 그 밤 빛나던 약속! 난 믿고 기다릴게요. 그대 내게 돌아오는 그 날 그 땐 다시 시작해봐요. 멋진 세상 새로운 날들을‥. 〈코나 - 마녀, 여행을 떠나다〉 귀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잘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주아주 느릿느릿하 게 톡톡거리는 손가락 박자에 정신이 빼앗기도록‥. 하지만 약간 높은 톤의 목소리는 노래에 밝은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짐에 따라 부드러움 청년의 음성은 밀폐된 공간의 벽에 튕겨 은은하게 울렸다. 마치 꿈결에 서 들려오는 것처럼‥. 톡톡톡. 눈을 감고 안락한 평온감에 빠져있던 나는 갑자기 무릎을 건드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톡톡톡‥ 톡톡톡‥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데 놀랐지만‥. 감옥 안의 소년, 소녀들은 서로의 몸을 손가락을 살짝살짝 다독거리며 자신들을 달래고 있다는 사실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납치를 당한 매물의 두려움이 아니라 봄날에 소풍을 나온 어린 아이들처럼 편안해 보였다. 또 다시 청년에게서는 정령의 냄새도 없었지만 바람이 흘러나왔다. 살짝 머금은 미소가 그 어떤 미인의 얼굴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87- "그런 놈은 왜 잡아온 거야?" 해적 루이스타의 일원, 클프는 선장이자 두목인 모리골드 루이스타의 호된 질책을 받아야 했다. 방금 전에 납치해온 녀석이 매물이라기 보다는 고객의 인상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일그러진 두목의 눈썹을 살피며 애처로운 표정 을 지어 봤지만 수많은 미소년, 소녀들을 팔아먹으며 단련된 두목의 악마같은 심성은 한 치의 망설임없이 클프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크억! 쿨럭! 저, 저도 일부러 데려온 게 아니라고요. 두목!" 배를 움켜지고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 클프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모리골드는 코웃음을 치며 부하 를 바로 짓밟았다. "한 컵의 우유는 충분히 몇 동이의 물을 흐리게 할 수 있는 법. 가자!" 그는 과감하게 매물의 전체적인 평가를 낮추는 오염원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부를 안겨다줄 아름다운 매물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검문과 그 외의 사태를 대비하여 부두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지하감옥에 숨 겨놓고 있었다. 결코 멀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귀찮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런 헛걸음마저 하게 만들다니 돌아오면 더욱 늘씬 두들겨 주마.' 투덜거리며 감옥 안으로 들어선 모리골드는 지하를 은근히 메우고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홀려버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감시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그가 묻자 감시원들이 악몽에서 깨어난 표정으 로 벌떡 일어섰다. "헉! 두목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 신경쓸 게 아닙니다, 두목. 사내 녀석 하나가 우는 여자애들을 달래 주려고 노래를 불러주는 모양입니다." "호오‥. 노래라‥ 좋지! 누군지 한 번 볼까?" 재주는 상품의 가치를 한 단계 높여주는 부가가치나 다름없었기에 모리골드는 금새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감옥으로 다가갔다. '어느 놈이 돈을 더 가져다줄 짓을 하고 있나?'라는 노예상인적인 심사가 낀 시선이 문 위에 작게 뚫린 철창을 지나 감옥 안으로 향했다. "음‥!" 침음성과 함께 그는 입맛을 다셨다. 좀더 매물들을 바라보던 그는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클프를 달래려면 애 좀 먹겠군. 흠, 돌멩이가 진주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한 편, 보를레스와 레소니는 이미 방을 잡고 있던 여관에 짐을 푹고 치안관서로 달려온 상태였다. 도시의 치안을 담 당하는 관서라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아마‥도 말야‥. 해적‥단의 짓일 게 분명해‥. 요즘에 인신매매에‥ 재미를 붙였다 더군." 투실투실 흔들리는 살덩이에 맞춰 치안 서장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말도 흔들렸다. 사내의 어조는 그야말로 '아! 방 금 전에 점심을 먹고 왔지.'라고 말하는 듯 하여 마침 안절부절하던 보를레스의 신경을 밑바닥부터 샅샅이 긁어놓 았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 보를레스가 타오르는 눈동자로 서장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치안 서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어찌 쉽게 할 수 있소? 재미를 붙였다니!? 인신매매가 어린애 장난입니까?" "그렇게 흥분할 거 없소. 나 역시 처음 이 곳에 부임했을 때는 당신처럼 매일같이 화를 내며 흥분했다오. 하지만 그 런다고 해서 해적들의 꼬랑지도 발견할 수 없었지. 그들에 대한 정보만 잡히면 바람보다 더 빠르게 달려가 놈들을 소탕할거요." "정보가 들어오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소? 쥐가 곡식을 먹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밤에 먹으면 식량이 바닥나도 상관없다는 자세로군요." "후우‥ 나는 분명히 정보를 수집한다고 말했소. 그런데 마치 놀고 있는 사람 마냥 취급하다니 날 모욕하는 게요? 그대가 기사 출신이라기에 참고 있지만 더 이상 모욕적으로 나온다면 심성이 너그러운 나도 묵과할 수 없소. 당장 감옥에 처넣기 전에 나가보시오!" 쾅! 치안관서를 박차고 나온 보를레스는 넘치는 울분을 멀쩡히 서있는 소츠 나무에 쏟아부었다. "젠장!" "보를레스 참아요. 이런다고 주인님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레소니는 겁먹은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며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삭이고 있는 보를레스의 팔을 꼭 잡았다. 몇 번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쉰 보를레스는 이내 팔의 힘을 풀며 레소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 고맙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지?" "헤헤‥. 보통은 도둑 길드로 가서 정보를 얻는 게 정석이 아닐까요?" "으음. 모르는 소리란다. 서민이나 상인이 정보를 얻기에 도둑 길드가 최적의 장소이긴 해도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 고 있지는 못해. 정보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다. 정보를 가진 자는 지배자가 될 수 있어. 현재는 귀족들보다 많 은 정보를 가진 단체는 거의 없다." "거의 없다는 뜻은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래봤자 종교 집단 정도야. 그들이 일반인에게 정보를 빌려줄 리가 없지." "음. 하지만 방금 전 치안관서에서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숨기는 거겠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할 수 없잖냐. 직접 정보를 수집해보는 수밖에‥. 레이모하의 신관들은 속이 좁아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지. 그 덩 치 큰 사제라도 있었으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텐데‥. 하다 못해 헤트라임크 님이라도‥."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엘시크에 있지 않은가. 연락을 취한다고 해도 이 곳에 도착하려면 며칠은 걸릴 게 틀림없었다. 그 때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레소니가 뭐가 떠올랐는지 얼굴에 활기를 띄고 달리기 시작했다. "레소니, 왜 그래?" 그녀가 달려간 곳은 짐을 풀어둔 여관방이었다.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보를레스에게 레소니는 손바닥만한 거울 을 꺼내 내밀었다. "거울이잖아. 이걸 뭘 어쩌라는 거야?" "헤헤 이건 보통 거울이 아니라고요. 떠나기 전에 헤트라임크 님이 주신 것이에요. 무슨 일이 있으면 즉각 연락하라 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이게 그 화상전송 거울인가?" 레소니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마녀들의 수정구슬을 대신하여 개발된 것으로 얼마 전 헤트라임크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물건이었다. 둥근 구체의 빛 굴절도과 보석 특유의 마나 집합력을 무시하고 거울에 화상을 전송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기에 이 마법발명품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레소니에게 주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니, 누구에게 주더라도- 최대 권력자인 국왕을 제외하고는 - 문제가 될지 몰랐다. 그 이유는‥. "이건 마법 협회에 아직 등록하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사이에 등록하신 건가?" 엘시크에서도 발표가 되지 않은 제품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신경 쓸 레소니가 아니었다. 철저히 보를레 스의 말을 무시한 그녀는 거울 가장자리에 부착된 검은 띠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상전송 거울, 정식명칭 '이뷰' 중에서도 레소니의 거울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 이미 마나가 포함된 고가(高價)의 물건이었고 마나는 사람의 체온에 반응하여 활동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녀를 생각해서 제조한 게 틀림없었다. 그토록 수고 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보를레스의 물음은 잠시 후 거울 화면에서 나타난 헤트라임크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두 사람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약간의 부담을 덜고 있을 쯤, "그들은 갔나? 사우론." "예! 서장님." "귀찮은 녀석이었어. 기사 출신이라고 했지? 루이스타에게 전해라. 날파리가 뛰어들었다고. 우리는 끼여들지 않을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예!" 철컥! 문 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고요한 방. 서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루이스타가 헌상한 고급 백포도주를 높이 치켜들었다. "후훗! 어린애 장난이라‥. 맞아. 장난이지.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간단한 장난에 눈감아주는 정도로 안정된 노후를! 이런 말하기에는 난 아직 젊은가? 그렇다면 혹시 모를 당뇨의 대비를 위해! 건배‥." 흔들린 술잔이 허공과 건배를 한 후 서장의 입으로 다가갔다. 잔에 굴절된 일렁이는 그의 미소는 어딘지 퇴폐적이 었다. # "18세 정도의 단정한 인상을 가진 청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모리골드에게도 사우론의 무뚝뚝한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욱 싸늘하게 말을 내뱉고 그는 나가버렸다. "분명히 서장 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기사 출신의 파리가 끼여들어서 우리는 간섭할 수 없으니 알아서 처리 하라는 전언이다. 그럼 난‥." "빌어먹을! 그 녀석이겠지? 애물단지로군 그래." 물론 하는 사업이 사업인 만큼 현재와 같은 경우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 신비한 미소, 전설에서나 나올 듯한 분위기, 그리고 기사 출신의 호위병. 왠지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온몸 을 휘감았다. "클프. 가서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와라." "두목, 좀 전에도 보고 왔는데요. 보나마나 서로 끌어안고 훌쩍대고 있을 거에요." "말대꾸하지 말고 당장 다녀와!" 결국 또 얻어터지는 클프였다. -88- 감옥 안은 조용했다. 게다가 따뜻한 바람마저 불고 있으니 잠도 오겠지. 난 속 편하게 골아 떨어진 녀석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나약하기 짝이 없어." 척 보기에도 곱게 키워졌을 인상이었다. 특히 한 명을 제외한 소년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부호의 귀하신 아들들이겠 지. 그러나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유약하고 심약하기 짝이 없는 귀족과 부호들의 자제가 아니라 어디서 굴러먹었는 지 전직이 보모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청년이었다. "앗!" 그 새 보모가 어디 간 거지? "안녕?" "우와아아앗!" "쉿! 다들 깨겠어요. 당신은 이름이 뭐죠?" "정말 태평한 녀석들이로군. 언제 팔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쿨쿨 대다니‥." 난 놀라서 소리를 냈다는데 느낀 어색함을 감추고자 투덜거렸다. 어느 새 내 옆으로 달라붙은 거지? 난 너처럼 뜨 끈뜨끈한 바람이 나오진 않는다고.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는 우선 자기를 소개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는 위험하다. 난 분명히 배워왔고 그렇기에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는 그를 향한 어조는 거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한 번 듣기에도 경계심에 물든 말투에 놀라 순둥이 같이 눈을 크게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 속에 서있는 것처럼 안락함과 두려움을 동반시키는 눈동자였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난 시즈 세이서스 라고 합니다." "시즈?" 짐짓 근래에 화재가 되었던 인물의 이름이 떠올랐다. '마땅찮은 시즈'. 아마 50년간은 대륙의 역사가와 문학가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게 없지.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다. 시즈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남자가 아닐까 추측해보는 거지. 뭐 실제로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이들이 꽤나 된다고는 하지만 직접 본 사람은 거의 만무하다고 봐도 된다고 했다. '설마‥.' 난 금세 가능성이 티끌만큼이나 희박한 생각은 몇 번 걷어찬 후 묵살시켰다. 아무리 맞춰보려고 해도 대륙 최고의 문학가와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어대는 청년과는 도.저.히. 대치가 되지 않는다. "카이젤, 카이젤 파엘라스. 질문이 있는데 곧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싱글벙글하는 이유가 뭐지?"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았으니까요." "그게 뭐지?" "여기서 나가면 되죠. 방금 전까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가 막 찾았거든요." "찾았다고? 이 곳에서 나갈 방법을?" 내심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그도 이런 내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했던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 역시 잡혀있는 게 그리 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예가 되는 걸 반기지도 않는다. 나름대로 탈출할 방법을 강 구해보았지만 벽은 감옥답게 두껍다. 설사 벽을 부순다고 해도 밖은 지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이‥." "예. 감시원을 끌어들여 제압하고 탈출하는 것뿐이죠."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난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슨, 소설인 줄 아는 거냐? 흥! 아픈 척하거나 천장에 매달려 없는 것처럼 보여 유인하려고 했겠지? 소용없어. 그 런 방법은 벌써 몇 세기 전부서 사용해서 이제는 지겹기까지 하다고. 오히려 경계심만 부추일 걸." 나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시즈는 할 말을 잊었는지 멍한 표정을 잠시 짓고 있었다. "핫핫핫!" "뭐가 우스운 거야?" "아뇨아뇨. 우습지 않습니다. 풋!" 빌어먹을 우스워하고 있잖아. 이빨을 갈아대는 나의 머리에 쓰다듬던 시즈는 설탕이 물에 녹는 듯한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냉정할 줄 알았는데 사실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군요? 걱정말아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 른 방법이니까." "누가 불안해한다는 거얏! 어서 그 방법이나 말해봐." "그 전에 나도 카이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정령사인가요?" "‥어떻게 알았지?"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지만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덕분에 내 의구심만 커져간다. 분명 정령의 기척 은 일말의 먼지만큼도 들어내지 않았는데‥. "카이젤이라면 도와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계획을 설명해줄게요. 그 전에‥." 시즈는 잠을 퍼 자고 있던 멍청한 녀석들을 살살 흔들어 깨웠다. 나였다면 발로 밟아서 깨웠을 텐데. 그는 계획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마법사에요. 그리고 카이젤은 정령사. 그러니까 우리를 좀 믿고 따라줬으면 해요.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겠죠?" 그들은 미소년 특유의 크고 동글동글한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동경을 담은 채 시즈와 날 보며 연신 끄덕였다. 이거 부담스럽네. 한 차례 그들의 찰랑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준 시즈는 마치 강아지를 다루는 조련사같다는 느낌을 받 았다. 무서운 놈. 내가 노려보니 그는 약간은 섬짓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서 시작합시다. 기회가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는 벽면을 따라서 넓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며 노래를 시작했다. 한 걸음! 방금 전의 과거가 쫓아오네요. 두 걸음! 멀어졌지만 잡을 수 있네요. 세 걸음! 이제는 손 뻗어도 잡지 못해요. 네 걸음! 점점 멀리 희미하네요. 가다보니 소리만 여운처럼 남긴 채 사라졌어요. 나는 그가 공기 속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 힘들어 눈을 비볐다. 다른 녀석들도 노래에 취해 그가 언제 사라졌는지 파악하지 못해 멍한 표정이었다. "그가 오고 있어요." 흠칫! 유령처럼 귀에다가 속삭이지 말라고! 나는 돋는 소름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고 소녀들을 깨웠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유령의 오폐라를 시작한다." # "어이 이봐. 졸지 말라고!" "어?, 엉!? 뭐야‥ 클프잖아. 어차피 여기는 지하고 벽도 두꺼워. 게다가 문도 철문이라고. 걱정할 거 없어." "시끄러워! 어서 일어나!" "참나. 괜히 짜증이군." 그 때였다. 갑자기 감옥 속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꺄아아아악!" 지하였고 밀폐된 감옥에서 지른 비명이었기에 그 크기와 섬짓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클프가 달려가 철 문을 열려하자 감시하던 사내가 그를 잡았다. "기다려. 수작일거야." "수작?" "그래. 우리를 끌어들여서 쓰러뜨린 후에 탈출하려는 거지."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상품에 손실이 생기면 두목한테 혼난다구." "그러니까 신중해야지." 빈틈이 없군.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카이젤은 내심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걸 걸려들 수밖에 없을 걸.' 감시원의 말을 들은 클프는 눈에 의심을 가득 담고 창살 사이로 눈을 들이대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유, 유령이에요." "이 세상에 유령이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라면 몰라도‥. 하지만 여기는 지하야. 유령이 있을 리가‥! 그 녀석 어디 갔지?" 클프는 자신을 하루종일 두목의 샌드백으로 만들어버린 대상이 사라졌다는데 경악했다.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려 하자 감시원이 말했다. "천장이나 벽에 붙어있을지 몰라. 우선 문에 붙어있는 녀석들 물러나서 벽으로 붙어!"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감시원은 철문을 발로 차서 열어버렸다. 문과 벽이 부딪치는 굉음이 울리고 반응을 살펴본 그는 클프와 함께 등을 맞대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과 벽을 샅샅이 둘러본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었다. "어디 갔지? 정말 없잖아." "으아아아악! 저리가저리가!" 털썩. 갑자기 한 소년이 팔 다리를 휘젓더니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이 정도 되니까 아무리 겁없는 해적이라지만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저러는 거야!?" 그가 발작하듯이 소리치자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은머리의 소년이 중얼거렸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바다의 유령에 대한 전설이 있지. 20세 정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음유시인이었는데 영주가 자신의 개인 악사로 삼으려 했지. 하지만 음유시인은 거절했고 폭군이었던 영주는 그대로 악사를 해변 바위 의 밑 깊숙이 넣고 닫아버렸지. 그 유령은 가끔 노래를 부르러 뭍으로 올라오지만 바위 속에 들어가면 그 정체를 들어낸다고 하더군. '바위 속은 어둡고 축축해서 따뜻한 인간의 영혼을 뺏아간다고 하지.' 흐흐흐 이제 우리는 유령 의 먹이가 된 거야." 그러며 절망적이고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년은 바로 카이젤이었다. 싸늘한 미적 용모를 자랑하는 그가 허탈 하게 웃어대자 사각형의 방에 울린 메아리 속에서 두 해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때였다. 클프의 귓가에 작고 나직 한 속삭임이 들려온 것은‥. "따뜻해‥." 그리고 뭔가 자신을 끌어안는 듯한‥. "흐아아아악! 저리가! 저리가! 저리가!" "크, 클프!" 밖으로 뛰쳐나간 클프를 따라 나가려던 감시원은 무언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 "억! 우욱! 크윽!" 복부에 두 방, 숙여진 턱에 강렬한 어퍼컷.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감시원의 다리를 소년들이 붙잡았다. 관성은 무시할 수 없는 법. 등과 바닥이 통렬한 강도 비교를 한 후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그를 소녀들이 덮쳤다. 아 무리 힘이 없는 사춘기의 소녀들이라지만 10 명 이상이 안간힘을 다해 누르자 건장한 그의 팔이 부러질 정도였다. 그는 볼 수 있었다. 허탈하게 웃고 있던 소년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잔인한 미소를 띄우고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 를 들고 다가오는 모습을‥. 그대로 그는 정신을 잃었다. -89- 혼비백산하여 클프는 그저 운명을 다리에 맡기고 절벽 뒤에 정박해있는 루이스타 호로 내달렸다. 하지만 루이스타 호도 그에게 있어 그리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주진 못했다. 어느 틈에 배에서 행패를 부려대기 시작한 두 사내 덕에 배도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고 모리골드는 곤혹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납치해간 시즈를 내놓아라!" "헛소리 마라. 단 두 놈이 뭘 하겠다는 거냐!? 얘들아, 쳐라!" 하지만 그들은 두 놈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호쾌하게 날아가 바다에 빠지고 바닥을 구르는 부하들을 보며 모리골드는 우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돼지 꼬리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놈들아! 30 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고작 둘을 못 이기다니! 이게 무슨 창피 란 말이냐!?" 말은 그리 하면서도 그는 감히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맘은 싸그리 사라진 상태였다. '기사 출신의 사내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저 괴물같은 사제는 또 무어란 말인가?' 그들을 괴롭히는 두 사내는 모두 강했지만 그 중에서도 흰 사제복을 입은 거인은 마치 투신이 강림한 듯 했다. 단 단하기로 유명한 해적의 방패가 푹푹 우그러지는 게 지난번의 무기와 방어구를 대량 주문한 대장간이 의심스러웠 다. 하지만 모리골드는 의문의 사제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울분이 치솟았다. 앞으로 두세 건만 더 하고 손을 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망칠 수는 없지. "에잇! 뭣들 하는 거냐? 활을 쏴라. 활을!" 아무리 뛰어난 검사와 투사라지만 근거리에서 겨냥된 수많은 화살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는 법. 모리골드는 승리의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감히 해적 루이스타에게 덤벼들다니, 그것도 단 둘이서 말이야. 그래도 제법이었어. 나의 재치가 아니 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몰라. 그냥 죽이기는 아깝군. 어때? 나의 재치와 너희들의 무력! 힘을 모은다면 이런 시시껄렁한 노예매매가 아니라 실베니아 동남부 해안을 지배할 수 있어." "‥‥." 절벽에 숨어 내려다보던 레소니는 포위를 당한 두 사람의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했다. 혹시 도와줄 사 람이라도 없을까? 연신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한 때 시즈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 작은 돌멩이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굉장히 위력적이에요. ‥그런데‥ 레소니는 왜 무거운 장식품들을 저 높 은 책장 위에 자꾸만 올려두는 거얏? 아무리 집안의 미관을 위해서라지만 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쓸데없는 것까지 떠올려버린 레소니는 빨래털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양손에 엄지 손가락만한 돌멩이를 잔뜩 쥐고 던져대기 시작했다. "으악! 이건 또 뭐야?" 절벽의 높이는 무려 15미터는 되었기에 돌멩이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제대로 머리에 맞은 해적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바로 의식불명에 이어 경련, 그리고 사망으로 이어졌다. 돌이 위험한 것은 헤모와 보를레스도 마찬가지였 다. 보를레스는 검으로 돌을 쳐내며 해적들을 공격했고 헤모는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피하면 서 해적들을 때려 눕혔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게 쉽지가 않았다. 검이라면 몰라도 활로 쏟아지는 돌멩이를 막을 수 는 없었다. 그렇다고 검을 들어 막자니 보를레스와 헤모에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닻을 올려라! 조타수는 방향타를 잡아라. 뭍에서 떨어진다. 아니, 내가 잡겠다. 넌 가서 싸워!" 그 때였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거세게 울리며 절벽을 돌아 한 떼의 기사들이 나타나 배를 쫓았다. 그 중에서 20 후반의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사내가 외쳤다. "서장이 모두 자백했다.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고 항복해라!" "빌어먹을!" 배가 서서히 뭍에서 떨어지고 있었지만 말이 달려오는 속도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배가 뭍에서 약간 벗어난 후 모 리골드가 뒤를 돌아보니 이미 기사들은 말을 버리고 배에 오른 상태였다.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정식으로 검을 익히 고 검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기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몇 명의 해적들이 순식간에 검에 찔려 배면을 피로 물들였다. 핏발이 돋은 모리골드의 뇌리에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스쳐갔다. 그는 방향타를 놓아버리고 검을 빼들어 싸움에 끼어들었다. 얼핏보면 생각없는 사생결단이라고 생각할 모습이었고 기사들도 해적의 두목이 이성을 상실했 다고 판단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회심의 미소는 해적들에게 돌아갔다. 실베니아는 섬들 의 왕국이라 불릴 만큼 자잘한 섬이 많았고 낭아플에 들이치는 바닷물도 섬들 사이를 돌고 돌아 들어오는 격류들이 많았다. 그런 곳에서 방향타가 제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배의 상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뻔했다. "으하하하핫! 지금이다! 놈들은 다 합쳐봐야 고작 열 댓명이 고작이다 모두 물 속으로 처넣어버려!" 기사들이 검과 함께 산다면 해적들은 바다의 파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배가 격랑에 좌지우지되고 있다지 만 그들의 동작에는 그렇게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아무리 무거운 갑옷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 이라지만 뒤집힐 듯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 배 위에서는 중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파도는 철갑과 사람을 동시에 뒤흔들었지만 사람은 관성이 더해진 철갑에 무게 속에서 허우적댔다. 달려드는 해적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것은 고사하고 서있지도 못했다. 풍덩! 풍덩! 두목의 말대로 둘, 셋씩 몰려든 해적들은 기사들을 바다에 던져버렸고 실베니아 특유의 거친 파도와 무거운 갑옷 때문에 땅의 영광인 기사들은 바다의 제물이 되어갔다. 풍덩거리는 소리가 많아졌고 제대로 해적을 쓰러뜨리는 사 람은 몇 사람 남지 않았다. 헤모가 싸우고 있던 상대의 목을 꺽으며 보를레스에게 소리쳤다. "보를레스,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게." "헤모 사제, 그럼 부탁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보를레스는 검과 걸치고 있던 하드웨어를 벗어 내던지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기사들의 갑옷을 벗 기기 위해서는 전직 기사였던 보를레스가 유리했다. 균형감각을 무시하는 배 안이었지만 가히 권술의 극의(極意)- 마스터-에 오른 보를레스에게 큰 방해일 수 없었다. 육중한 체중이 엄청난 속도와 함께 육박하는 위력은 공포스러 웠다. 모리골드의 전술이 기사들에게는 큰 효과를 발휘했지만 헤모에게는 그리 신통치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를 막 을 수 있는 방법은 활 뿐인데 아무리 흔들림에 익숙한 해적이라도 정확히 겨냥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헤모 는 보를레스가 벗어놓은 하드웨어를 방패 겸 무기로 활은 막고 해적은 후려치는 엄청난 전술을 선보였다. "으아악!" 비명과 파도 소리가 난무하는 속에서 기사들을 이끌던 펠리언은 망연자실했다. 고작 3, 40명 정도의 소규모 해적 소 탕 정도는 잘 훈련된 10 명의 기사면 충분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니, 5명쯤만 나서고 나머지는 응원만 해도 가볍게 소탕을 끝내리라 생각했다. 물론 틀린 결정이 아니었다. 땅 위에서 싸웠다면 말이다. "결정적인 판단미스였어. 도련님께서 힘들게 빠져나와 알려 주셨는데, 면목이 없군. 게다가 공주님에게도‥." 마지막 한 마디는 거의 울상에 가까웠기에 그를 몰아붙이던 해적들은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역겹다는 얼굴이 었다. 의외인 것은 먼저 와서 루이스타 호를 들쑤시고 있던 두 사내의 활약이었다. 특히 사내 복장의 거인은 그가 육지에서 상대하라고 해도 절대로 거부할, 일말의 승산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검을 버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구하러 물로 뛰어든 청년도 대단한 실력자였다. '게다가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 보였을 뿐이야. 내 또래 중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군.' 적과 같은 편을 동시에 경악시키는 존재인 헤모 사제는 레소니가 연락했을 때 마침 헤트라임크와 다과(茶菓)를 나 누던 참이었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셔보려 했지만 아들 걱정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헤트라임크는 7 써클의 마나를 모두 사용하여 즉석에서 그를 실베니아로 보내버렸다. 레소니의 거울은 이미지 전송을 위하여 자연적으로 좌표를 나타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헤모는 당장 낭아플의 레이모하 신전으로 달려가 신관 들을 협박했다. 성투사 중에서도 수위를 달리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정보를 알아낸 일행은 당장 루이스타 호로 달려온 것이다. 만약 시즈에게 무슨 일이 생겨 헤트라임크가 분노한다면 정말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인신매매라니‥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평소라면 여분의 힘을 남겨주었을 사제였지만 분노한 그는 전장을 누비던 잔혹함에 눈을 뜬 상태였다. 사정없이 박 히는 주먹과 발에 해적들은 쓰러져 일어나는 자가 드물었다. 주위에서 해적들이 사라져갈 무렵,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플레이트를 걸친 채로 저런 움직임이라니‥." 이 흔들림 속에서 청년은 불안하게 비틀거리고 수세에 몰리면서도 3 명의 적을 맞아서 상대하고 있었다. 저 정도라 면 안정된 뭍에서는 보를레스를 뛰어넘는 실력을 지녔으리라. 처음 보를레스의 실력을 보았을 때도 헤모는 내심 놀 랐다. '그런데 그 이상이라니‥.' 하지만 청년은 현재 위기였다. 중얼거리며 탄복한 헤모는 곧 청년 기사를 둘러싸고 있는 3 명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뒤늦게 그들이 뒤를 돌아섰지만 이미 코앞까지 주먹이 도착한 상태였다. "헉헉! 고맙습니다. 사제님. 대단하시군요." "자네야말로 젊은 나이에 탁월한 실력을 가졌군. 여기는 대충 정리가 된 듯하니 어서 가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 게." "예?" "납치된 사람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나?" 헤모는 청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펠리언의 말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납치된 소년들과 소녀들이라면 다른 곳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즈라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모두 탈출하 였고, 저희는 마지막으로 해적들을 소탕하러 온 겁니다." "시즈가!? 하하하. 그렇다면 굳이 불청객을 자처하면서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그럼 저 아래 친구들을 구해야겠 는데‥." 다행히 보를레스의 수영실력은 격류의 파도 속에서도 빛을 발한 덕분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물귀신같은 갑옷을 벗고 수면에 떠있었다. 다만 헤모는 전신 플레이트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기에 조금은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갑옷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어구, 사람을 생명을 구할 수 없다면 일푼의 가치 도 없었다. 펠리언은 자신의 부하들 중에 물고기 밥이 된 이들이 없다는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모두 바다를 사랑하는 실베니아의 기사들입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곧 도련님께서 오실 겁니다. 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멀리 떨어진 절벽에는 거대한 돛의 그림자가 비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기를 하고 있었던 듯한 범선은 사람으로 치면 뚱뚱하여 군선이 아니라 상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그 규모는 웅장하리 만큼 컸다. "이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희는 해적 소탕은 고사하고 바다 속에 수장되었을 겁니다. 능히 일당백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입니다." 펠리언의 격찬에 카이젤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막 자신의 상선에 오른 두 명의 사내와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카 이젤은 비록 펠리언의 직접적인 주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적수가 없다고 풍문이 나도는 젊은 기사의 자존심 정도 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장신들 가운데서도 한 치의 위축도 없어 보이는 금발의 미소년이야말로 이들 일행의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마법사겠지? "반갑습니다. 카이젤 파엘라스라고 합니다. 펠리언 님의 격찬이 대단하군요." "저희도 반가워요. 여기 이 분은 헤모 사제님, 또 여기는 보를레스님이십니다." 카이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답변을 한 사람은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추측했던 레소니였다. 무표정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해적이 보았다면 함께 감옥에 있었을지도 몰랐을 금발의 소년이 이들 일행의 대표자라 고 내심 규정내렸다. "일행의 실력이 모두 뛰어나 든든하겠군요. 묶인 곳이 없다면 저희 상회로 모셔갈까 했더니만 안타깝게 되었습니 다." 카이젤의 농담 아닌 농담에 레소니는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하지만 곧 보를레스를 쏘아보며 말했 다. "글쎄요. 단둘이 있었으면서 보호할 대상도 잃어 버리는지라 별로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답니다." 또르르‥. 때를 맞추어 보를레스의 뺨에서는 바닷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느 쪽이든 보를레스 는 더할 나위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헤모가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레소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납치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되돌려보내야 할 텐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준 뒤 제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생 각이니까." "낭아플에 기거하시는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제 아버님은 밀체 지방의 소규모 상회를 운영하시고 계시죠. 이 곳은 오랜 고객이 계시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저희가 한 명 정도는 부담을 덜어주고 싶네요. 시즈라는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약간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카이젤의 얼굴은 기묘했다. 입술은 웃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눈썹이 찌푸려진 표정. 냉랭한 미소년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사그러졌다. 겁을 먹은 레소니가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시즈님께서 폐라도 끼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폐는 무슨‥.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만‥." "다만?" "의외라고 할까요." 확실히 의외였다. 잠깐이지만 화산폭발처럼 거센 헤모의 전투를 관전할 수 있었던 카이젤은 그 천진난만해 보이는 마법사가 이들과 어울릴 지 잠시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정말 예상외야. 어이가 없군.' 상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거래할 사람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자신도 아버지에 못지 않게 상화에 수 익을 가져다주는 거래를 해내고 있는 만큼 사람을 보는데 있어 좋은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카이젤은 이맛살 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데린 공녀님과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예!? 공주님께서 오셨습니까? 옥체도 안 좋으신 분이 옥체를 보존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건만! 공주 니이이임!" 시즈의 행방을 찾았다는데 기쁨을 표하려는 것도 잠시 레소니들은 갑자기 비명에 가깝게 부르짖으며 선실로 뛰어들 어가는 펠리언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방금 전까지의 기사로서의 무게있던 시선과 자세, 그리고 똑바른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그가 들어간 방향을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레소니 일행에게 카이젤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 다. "조, 좀 주인애착증상이 심한 사람이거든요." 한 차례 남국의 시원한 파도가 갑자기 북극의 얼음조각으로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한 사람의 등장으 로 레소니들의 충격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 있었다. "여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흑발의 청년을 보자마자 레소니가 번개처럼 달려가 안기는 걸 보며 헤모 와 보를레스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의 미소에서는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만약 찾지 못했다면 레소니의 등쌀에 시달려 제 명에 죽지 못했을 것이다. "히잉‥ 주인님." 누가 애처롭게 훌쩍이며 청년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절정의 실력을 가진 투사와 검사에게 식은땀을 흘리게 할 위인으로 볼까. 자물쇠처럼 꼭 잡고 있는 레소니의 금발을 쓰다듬으며 시즈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네. 미안해요‥." 부비부비부비. 레소니가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가로젓자 꽤나 간지러웠다. 밀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시즈는 할 수 없이 더 깊이 그녀를 안았다. 그런데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하고 계속 안겨있고 싶은 듯 한‥. "레소니!?" 시즈가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레소니는 항상 가슴을 압박하던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오느냐고 동여매는 걸 잊었던 것이다. 시즈는 확인이라도 하는 듯 몇 번이나 안았다가 놓았다가 하더니 눈썹을 살 짝 찌푸리고 말했다. "그 사이에 살이 쪘군요? 감촉이 나쁘지는 않지만‥. 으윽!" 시즈는 발이 뭉개지는 느낌에 고통을 호소했지만 레소니는 뾰로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발에 힘을 주었다. "레, 레소니, 남자는 약간 살이 쪄도 보기 좋아‥ 으윽!" -90- "간단히 말하도록 하지. 나는 그대들이 데린을 수행해주었으면 하네." 역시 카이젤의 말에 이끌려 데인 공녀의 초청에 응한 것에 후회를 시작하는 시즈 일행이었다. 필레언의 격찬에 감탄한 데인은 해적을 소탕하는데 있어 막대한 공적을 세웠다는 이유로 시즈들을 그녀의 성으로 초청했다. 자유로 운 여행을 원하는 시즈는 거절하려 했지만 카이젤의 근심 어린 귓속말은 시 즈가 데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감사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공녀는 외동딸로 곱게만 커서 누가 자기의 말을 안들으면 난리를 칠 거야 . 얌전히 응하는 게 좋다고. 나도 집으로 가고 싶지만 아무 말 없이 가는 거라고." 그의 말대로 라면 식사 정도만 하고 시즈들은 자유로운 여행과 관광을 즐기 는 신세가 됐어야 하는데 하도너 킬유시 공작은 그들을 놓아주고 싶은 마음 이 조금도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에서는 아에 폭탄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시즈는 애초의 계획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 리치며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 "용병이 아니더라도 수행해줄 수는 있지 않은가. 공작인 내가 이렇게 부탁 해도 안되겠는가." "저희는 한가로운 관광을 목적으로 실베니아를 방문했지, 수행원이나 용병 노릇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냉정하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죄송합니다." 그들의 단호한 거절에 공작은 무척 실망했다. 그의 계획에 있어서 이들 이 외의 적임자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강제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 닌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소. 편히 쉬었다가 가시오. 나는 일이 있어 먼저‥."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어찌 바로 잡을 수는 없는 노릇. 공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모습을 감추자 카이젤이 공작의 뒤를 따라 들어갔고 이가 빠진 듯 자리가 빈 테이블 주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 다녔다. 하지만 먹는 데 있어서 분위기를 가릴 보를레스와 헤모가 아니었다. 금새 그들의 게걸스 러움은 다시 차가운 바람을 날려버렸다. 미식가임을 자처하는 시즈는 많은 양 먹기보다는 여러 가지 음식을 음미했다. 입 주위를 냅킨으로 닦아낸 그 는 데린에게 물었다. "실베니아는 밤에 열리는 시장이 마치 축제를 보는 듯 화려하다고 들었습 니다만‥. 낭아플에서도 볼 수 있나요?" "마법사 님께서는 낭아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군요. 낭아플은 실베니아 남서부에서는 가장 독특하고 화려한 야시장이 열리는 곳이랍니다. 밤 8시부 터 준비하여 9시면 슬슬 볼 수 있지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마침 겨울이 가고 새해가 오는 걸 맞아서 불꽃 무도회도 열린답니다." "아니, 공주 님― 어찌 위험한 야밤에!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필레언, 지난 번에 의사한테 가보라고 했었지요?" "흑흑! 공주 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그리 생각해주시다니, 하오나 공주 님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휴우‥. 식사가 끝나면 시녀들과 시종들은 손님들의 준비를 도와 드리세 요. 아! 그리고 레소니는 제 방으로 좀 와주세요." "예?" 레소니가 어리둥절하여 눈을 큭 뜨자 데린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단둘이 할 얘기가 있거든요." "공주님! 아무리 소년이라지만 남자입니다. 한 방에서 밀담이라뇨‥!!" 증상이 심하다. 필레언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심정은 불쌍함과 안쓰러움이 었다. # "저어‥ 공녀님!?" "어머, 왔군요. 레소니. 거기에 앉으세요." 데린은 시녀들이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방긋 웃으며 레소니를 반겼다. 그녀는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갈색의 곱슬머리였지만 윤 기가 돌아서 반짝이니 귀족의 딸이라기보다는 나무꾼처럼 야성미가 풍겼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앉아있는 레소니를 바라보던 데린은 키득 거리면서 물었다. "남자들도 모두 준비하고 있을 텐데 레소니도 이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 어요?" "예? 아니 저, 전!" "리에느. 아까 찾아두었던 드레스 좀 가져오세요. 난 이제 끝났으니까 모 두들 레소니를 좀 도와줘요." 레소니가 말릴 새도 없었다. 여인들을 옷을 벗기는데(?) 능숙했고 입히는 것도 또한 순식간이었다. '어머! 피부가 참 곱네요.' 등의 칭찬을 늘어놓 으며 온몸을 주물러대는 그녀들의 손길에 레소니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 다. "저, 저기!" "레소니‥ 오늘은 나한테 맡겨요. 남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깔깔하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는 레소니 의 되뇌임은 서서히 묻혀 사라졌다. 한 시간 후, "레소니는 공녀 님과 함께 갈아입는 건가?" 헤모는 중얼거리며 시즈를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과 보를레스는 이미 레소 니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시즈는 의심하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지. 현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청년이었다. 한숨을 내쉬는 사제의 옆 에서 푸른색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펠리언는 왠일인지 완전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혼자 있는 방에 남자를 부르시다니‥." 과대망상증까지 의심해봐야 할 상황이다. 헤모는 정작 신경쓰이는 시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현재 회색일색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 드디어." 과연 공녀는 아름다웠다. 모두 입을 벌리며 감탄을 늘어놓았지만 실제로 놀 란 사건은 그 뒤였다. 실처럼 가는 금발이 살짝 어깨를 수놓고 우유가 묻어 난 듯 새하얀 피부, 청초하면서도 유혹적인 소녀의 모습에 남자들은 신음했 다. 카이젤 같은 경우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고 보를레스도 눈에 핏발이 솟을 때까지 비벼댔다. "설마 레소니?"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들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데린은 의미심장한 표정 을 레소니에게 보였다. 레소니도 싫지는 않은지 홍조를 띈 얼굴의 입가가 살풋 미소를 실었다. 하지만 둘의 예상을 빗나가게 한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시즈였다. 누구보다도 놀람을 기대했던 시즈는 그저 두 여인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그럼 기대하던 구경을 할 수 있겠군요." 낭아플의 야시장는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시장으로써가 아니라 야제, 즉 '밤의 제사와 축제'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 "신사와 숙녀 분들께서는 불꽃의 무도회에 참가하시는 군요. 양쪽 다 아주 훤칠하십니다." 무슨 거래든지 칭찬은 말문을 트기에 가장 좋은 접근법. 시즈는 주머니를 털어서 척 보기에도 궁색한 여인에게 작지만 예쁜 무늬가 수놓아진 부채를 샀다.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돈을 가져왔어야 할 레소니가 아무 것도 주지 않았기에 현재 그에게는 전부인 액수였다. '보통 때 같으면 내게 달라고 하셨을 텐데 쳐다보지도 않으시다니 ‥ 화가 나신 거야. 내가 여자라서 화가 나신 거야.' 레소니는 그렇게 생각하자 서글퍼져 몰래 눈물을 훔쳤다. 카이젤이 다가와 우울한 소녀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그의 뛰어난 용모와 언변 으로도 레소니는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데린의 뒤만 따라갈 뿐이었다. "귀족들도 '야제'에 참가하는 군요?" 시즈는 부채를 팔던 여인이 귀족 일행에게 망설임없이 말을 걸던 걸 떠올리 며 말했다. 펠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축제니까요. 야제에서는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함께 춤 을 춥니다." "그러고 보니 펠리언 님, 지난번 야제에서 함께 춤추던 여자는 어떻게 되 었나요? 아주 귀엽던데‥." 펠리언의 펴진 어깨가 쪼그라들었다. '레소니와 펠리언 님을 같이 놔두면 아주 멋진 커플이 되겠군. 실의에 빠 진 커플.' 헤모는 두 사람이 정말로 어울리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레소니에 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우울해하는 거야?" "모두에게 미안해요." "뭐가?" 그녀는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연하게 노란빛이 포함된 백 색의 드레스를 당장 벗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레소니는 조그맣게 토로했다. "제가 여자라는 걸 숨겨서 다들 화가 난 거죠?" "아하하하‥. 레소니, 네가 여자아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어. 어색해하 는 이유는 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지." 만약 헤모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를 대답이었다. 레소니는 다들 화가 나지 않았다는데 기뻐 고개를 들려다가 시즈를 보고 얼 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혹시 시즈 님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글세‥. 저 영악한 녀석의 반응으로 볼 때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럼 저택에서 남자이기 위한 나의 노력들을 시즈 님께서는 보고 뭐라고 생 각하셨던 거지? 더욱 고개를 들기가 어려워진 레소니, 헤모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저게 바로 밤의 꽃이라고 불리는 '나메트라에'랍니다. 사실은 버섯의 일종인데 밤이 되면 푸른빛을 내뿜지요. 야제의 바다에서 여인에게 춤을 청 할 때는 꼭 저 나메트라에를 건네야 해요." 공녀는 기둥도 몇 아름은 되고 가지도 셀 수 없이 뻗어있는 나무의 위를 가 리키며 설명했다. 그녀의 말대로 나무는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점등으로 전 설 속의 보석 나무처럼 보였다. 시즈 일행이 황홀하여 고개를 내리지 못하 고 있으니 데린는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다. 공녀는 레소니의 옷자락에 손가 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어떤 마법사는 나메트라에를 마법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어요. 그 래서인지 '나메트라에'에는 얽힌 전설이 있는데 사랑하는 두 남녀가 나메 트라에를 가운데에 두고 함께 입김을 불면 붉은 사랑이 결정이 되어 떨어진 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영원히 맺어준다죠?." 마지막 한 마디는 아주 작아서 스칠 정도로 가까웠던 레소니만 들을 수 있 었다. "없으면 해변으로 갈 수 없다니‥. 그럼 저 나무에 올라가서 꺾어와야 한 다는 말입니까?" 보를레스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상한지 볼을 긁적였다. 데린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면서 다른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는 더욱 무안 해졌다. 그들의 시선이 향해있는 곳의 남자는 붙임성있게 외치고 있었다. "자아‥. 야제의 필수품, 밤의 꽃 나메트라에 팝니다! 아니, 거기 멋진 귀 족 분들! 아무리 고위직이라도 나메트라에 없이는 불꽃의 무도회에서 춤을 출 수 없어요!" "저기 얼마죠?" "2 마일드 입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해도 모두 여인과 춤은 추고 싶었는지 버섯 달린 가지를 샀다. 돈이 없는 시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 에게 펠리언이 말했다. "그대는 춤을 추지 않을거요?" "그래야 할 듯 합니다."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었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니 말이 됩니까? 자자, 내 가 빌 려주겠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구경을 하는 걸로 충분해요." 그의 거절에 안달이 난 사람은 레소니였다. 입술을 깨물며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연신 고개를 젓고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차림을 했는데!' 그냥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구상과 현실에서의 실현은 다른 차원의 현상 이나 다름없었다. "후훗. 헤모 사제 님께서도 춤을 추시게요?" "공녀 님, 사제라고 인생을 즐기지 말란 법 없지요. 노래와 춤은 신을 찬 양하기 위한 한 형태의 제사이기도 하답니다." 제법 뻔뻔스레 말을 하면서도 헤모는 약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해변에 다다랐다. 이미 사람들이 몰려와서 북적댔다 . "이거 잘못하면 사람 잃어 버리겠네. 공녀 님 제 손을 잡으시죠." "고마워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소니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역시 정신이 산만했는지 마주 오던 사람에게 부딪쳐 이리저리 비틀댔다. "괜찮니?" "예‥ 주인님. ‥!" 반사적으로 입술을 뚫고 나온 호칭에 그녀 자신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즈 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안고 있었다. 레소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는 평 소보다는 어색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이리저리 떨어졌는지 일행이 보이지 않자 시즈는 걱정보다는 안심한 표정으로 레소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리고 이거‥ 갖으렴. 널 주려고 산 거니까." "아까 그 부채‥. 그럼‥."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채는 분명 시즈가 주머니를 털어 산 물건이었다. '왜 돈을 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으려는 레소니의 심사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시즈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그냥 너에게 줄 물건인데 너에게 돈을 받아서 살수는 없잖아." "쿡쿡! 그래봤자 어차피 주인님의 돈이잖아요." 어두운 밤길에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즈는 목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쑥스러워 머리칼을 내려 얼굴을 가려버리는 청년이 귀엽게 느껴져 레소니는 그의 팔을 꼭 껴안았다. 그 때, 다른 일행은‥ "시즈 님과 레소니만 없어졌군요." "걱정마세요. 둘이 같이 있는 걸 보았답니다." "공녀께서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두 분 다 어린애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후훗." 의미심장한 그녀의 웃음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카이젤이 혼자 시무룩해지기는 했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헤모 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이런 기도를 했다. "레이모하여‥. 그에게 용기를. 선(?)을 넘을 용기를!" 힘이 있는 기도였다. # "달이 머리 위에 있다는 게 믿어져?" "?"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레소니에게 시즈는 해변 수평선까 지 그어져 있는 달빛의 선을 가리켰다. "그냥 보기만 해도 수평선에서 빛이 오고 있다고 느껴지잖아? 저 멀리에서 부터 달은 선을 긋고 있는 거지. 더 이상한 건 어디로 걷던 간에 나에게로 긋고 있어. 하지만 재미있지? 달은 누구에게나 비치고 어디에나 빛을 베푸 는데 왜 자신에게만 오는 걸로 보이지?" 레소니로서는 어렵기만 한 문제였다. 그가 이렇게 바닷가를 걷는 상황에서 도 그런 문제를 질문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그녀는 시즈를 자신 앞으 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흥! 자‥ 보세요. 제게는 달빛이 주인님께 그어지는 걸로 보이는 걸요." "‥‥." 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소니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뜸한 바위 뒤로 왔을 때 그는 말했다. "레소니‥. 사람의 물건이라면 다른 이에게 양보해도 되지만 땅과 바람과 물, 그리고 자연이 주는 걸 양보하면 안돼. 그것은 곧 생명을 양보하는 거 니까‥." 파도 소리가 맞장구를 쳐주었기 때문일까? 레소니는 청년의 목소리가 너무 나 슬프게 느껴지자 울컥했다. "나, 난 주인님, 시즈 님이라면 내 생명을 줘도 좋아요." "‥‥." "‥?" 그 말을 할까봐 두려웠다.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시 떠오른다. 무력했던 나의 삶 속에서 사라진 이들‥. 그들은 팔이 뜯기고 다리가 먹히는 상황에 서 내게 도망가라 소리쳤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살아달라고 했다. "너도 그렇게 떠날 건가?" 레소니는 청년이 입술을 움직이는 걸 보았지만 소리가 작아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들어 바라보자 시즈는 억지 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아니다. 파도치는 소리에 잠시 취했어. 왠만하면 주인님이라고는 호칭은 쓰지 말았으면 한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끄덕. "그럼 시즈 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 그러니까‥ 제가 여자라는 걸 언제부터‥?" 소녀는 부끄러운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에?" 실제로 시즈는 게을러서 문제지, 요리 솜씨나 청소에 있어서는 레소니보다 도 월등한 실력이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절대로 굶어서 죽지 않을 그였다. "그럼!?" "쓸쓸해서 가족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제플론에 계시지만 수도는 조용하지 않고‥ 그렇다고 바쁘신 분이니 모셔올 수도 없고‥ 너희가 와서 난 즐거 웠어. 그걸로 됐지 않니?" "하, 하지만‥ 다른 언니들한테는‥." "그래. 여자라서 안 된다고 했지. 그냥 핑계였을 뿐이야. 그러고 보니 레 소니의 나이도 14살이구나. 처음 왔을 때하고는 많이 달라졌어." "달라지다니요?" "여자다워졌어." 화악‥. '그럼 내가 이제껏 해왔던 노력은 뭐지?'라고 절규하면서도 그녀 는 시즈의 한 마디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런 곳에도 '나메트라에'가 있구나. 버섯 주제에 소금물을 맞으면서도 살아가다니‥. 어쩌면 나트륨 성분을 변화시켜서 이런 빛을 내는 걸까?" 막 크기 시작한 어린 나뭇가지가 레소니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을 알알이 밝 혔다. 시즈는 가장 나메트라에가 많은 가지를 꺽어 레소니에게 주며 말했다 .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메트라에는 동물로서 생각할 때는 기생충이나 다름 없지. 다른 이의 잇속을 빼앗아 빛을 내는 귀족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가지 를 꺽어 화려함이 반감되기는 해도 나무가 크는데는 더 도움이 될 거야." 얘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푸르스름한 빛깔이 혐오스러웠다. 입술을 삐죽 이 내밀며 눈썹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며 시즈가 속삭였다. "여러 가지로 말을 돌리며 건네기는 했지만 그걸 버리면 안돼. 난 지금 네 게 춤을 신청한 거니까‥." "네." 레소니가 금세 홍조를 띠며 기뻐했다. "그럼 그만 갈까?" "저, 저기 그 전에‥." 시즈는 갑자기 레소니가 나메트라에를 내밀자 의아해하다가 곧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꼭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미소였지만 달빛처럼 은은하여 레소니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입김을 불면 되는 거지?" 끄덕끄덕. '동생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시즈는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정을 다잡아보려고 했지만 물결에 튕긴 은근한 달무리가 묻어난 레소니는 마치 바다의 요정 같았다. 눈을 감고 나메트라 메를 향해 입김을 불려는 순간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읍!" 놀라 밀치려고 했지만 찌를 듯한 긴 속눈썹은 수줍게 떨리며 시즈의 팔에서 힘을 떨구게 만들었다. 어깨에 두었던 손을 등뒤로 둘러 품에 안으니 소녀 가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촉촉하고 부드 럽운 입술의 감촉 뒤로 이어지는 혀의 얽힘에 아예 혼이 하얗게 새어버린 그가 입술을 떼려 했지만 레소니는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그리고 레소니가 입술을 떼며 달아오른 입김을 내뿜는 순간 둘은 볼 수 있 었다. "아‥!" 붉은 설광(雪光 :눈빛)이 허공에서 흘러내린다. 어둠 속에서 그 빛깔은 황 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시즈는 품에 안겨있는 소녀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 "어때요? 붉은 포자가 떨어져 내리죠?" "정말이군. 신기한 걸." 헤모를 비롯한 보를레스는 붉은 포자가 떨어지는 나메트라에가 재밌다는 듯 흔들어보였다. 펠리언은 그냥 입김을 불어보지만 푸른 포자만 떨어지자 이 상하다는 듯이 데린에게 물었다. "공주 님, 어째서 숨을 오랫동안 멈추고 있다가 내뱉어야 붉은 포자가 떨 어지는 겁니까?" "아무래도 온도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 연금술사가 연구를 하려고 나메트라에를 여름까지 키웠는데 날씨가 아주 따뜻해지자 붉은 포자 를 떨어졌다네요." "그게 사랑과 무슨 관계입니까?" "어머나‥ 보를레스 모르시는 군요. 사랑의 방식 중에는 숨을 멈춰야 하는 게 있답니다. 호호홋!" "역시 공주 님! 박식하기 그지 없으시군요. 이 펠리언 감격했습니다." 그야말로 엽기발랄한 공주와 기사였다. 그렇게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이들 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시즈와 레소니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훗. 레소니의 나메트라에도 빨간 게 아주 예쁘네요. 그렇죠? 시즈 님. " "네. 헤헤헤." "‥‥." 발랄하게 대답하는 레소니와는 달리 시즈는 쭈뻣거리기만 했다. 레소니가 푸른 눈동자로 바라볼 때마다 뭐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돌리는 그를 보며 보 를레스는 혀를 찼다. 헤모가 다가와 쑥스러워하는 시즈의 까마귀털 같은 머 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을 한다는 걸 그리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자네가 아무리 고명한 학식을 가진 현자라지만 나이가 어린 만큼 인간의 감정을 알 수는 없는 노 릇이야." "예‥예에‥."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아직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소녀에게 과연 잘한 짓 일까? 게다가 붉게 변한 나메트라에는 소녀에게 깨지지 않을 꿈을 주게 된 듯했다. 죄책감, 그리고 당했다는(?) 무안함이 시즈의 얼굴을 물들였다. "혹시나 아름다운 빗깔의 버섯 때문에 그리 힘들어하는 건가? 그렇다면 걱 정하지 말도록 하게.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전설과 그에 얽힌 보물들이 있 다지만 어떤 것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보다 진실되지는 못하니까‥ . 자네가 레소니를 좋아한다면 그걸로 된 거지." "‥‥ 고맙습니다. 헤모 사제." "뭘‥.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7살 연하는 범죄야‥." 천천히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모닥불 주위로 둘러서서 춤 을 추기 시작했다. 저 마다들의 허리에 걸린 밤의 꽃은 푸르고 붉은 빛깔을 파도가 치는 해변가에 흩날렸다. # "정말인가? 정말 수행에 도움을 주겠단 말이지?" 공작은 껄걸 웃으며 키 작은 시즈의 어깨를 잡고 어린아이가 인형에게 장난 치듯이 흔들었다. 이러다간 뼈들이 몽땅 탈골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낀 시즈가 서둘러 대답했다. "예에에에‥. 도와드리이일 테니이이 이 소오온 조오옴‥." "앗! 미안하군. 워낙에 기뻐서 말일세. 어째서 그렇게 마음을 바꾸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공녀께서 워낙 풍류에 밝으신지라 여행하는 기분으로 함께 하면 즐거울 듯 합니다." 진심일까? 공작은 시즈의 미소 끝에 달린 경련이 의심스러웠지만 아무렴 어 떤가?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자진하여 수행하여 주겠다는데‥. 웃음을 멈추 지 못하는 공작의 모습이 시즈의 회상 속에 누군가와 겹쳐져갔다. "고맙네 그려. 흐흐흐흐흣." - 후후후후훗. 정말 안 되나요? - 공녀 전하,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 - 그렇군요. 할 수 없지요, '마땅찮은 이'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 !! 에? - 실베니아를 얕보지 마세요. 얼마 전 엘시크의 세계적인 명사 '마땅찮은 시즈'가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 정도의 정보는 수집된 상태입니다. 그런 상 태에서 시기도 적절하게 동명인이 나타났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요? - 설마 저 같이 어린 사람과 세계적인 명사를 비교하십니까? - 비교 못할 것도 없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는 의외로 젊은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그런 세계적인 명사가‥. - 명사가? - 7 살 연하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나면 어떨까요? - 에엑!? 그, 그게‥.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제게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명사인 시즈보다는 마 법사 시즈니까요. 어쨌든 소문이 남으로 해서 당신이 곤란한 건 마찬가지일 걸요. '시즈 사칭죄'에 걸릴지도? 저야 당신과 세계적인 명사의 이름 때 문에 헥갈렸다고 하면 되는 거고요. - 여, 영악하시군요. - 여자는 원래 영악한 법이랍니다. 그대도 척 보니까 잡혀살 것 같은데 미 리미리 레소니의 비위를 맞춰놓도록 하세요. - 고, 고맙군요. - 후후후후훗. 어쨌든 수행에 대한 건은 받아주시는 걸로 알겠어요. 그 때 시즈는 죽은지 3년 만에 되살아난 좀비처럼 상태가 나쁜 걸음걸이로 걸어나와 문을 닫다가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리치 상태가 되어버렸다. - 호호호호홋. 진짜 명사 시즈 였나보네. 의외의 수확인 걸. 때때로 써먹어 야지. 그렇게 되어 그들은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 실베니아는 육지보다 바다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해상국가였다. 그러니 교통도 육로보다는 해상로가 발달되어 있었다. 배는 바람을 돛에 실기만 하면 되니 순풍만 온다면 편하기 그지없었으나 바다는 신들이 태어 났다는 혼돈의 기운을 하늘에게서 받아들인 곳이었다. "휴우‥. 바람도 바람이지만 격랑이 심하네." "해안선이 복잡하니 더욱 그러하겠죠. 이런 바다는 언제 소용돌이가 생길 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정도니까 갑자기 격랑이 이는 정도는 양호하다고 봐야죠." 시즈와 보를레스는 선원들을 도와 갑판을 열심히 걸레질하다가 배가 흔들리 자 난간을 잡고 힘겹게 버텼다. "그 해적들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예. 대단합니다." 익숙하다는 듯 폴짝폴짝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선원들이 둘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새 냉수라도 맞고 속차리라는 듯 뱃전에 튕긴 바닷 물을 몽땅 뒤집어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토록 심한 요동 속에서 멀미라도 안 하는 게 어디겠습니까?" "그렇지‥ 휴우‥." 이들이 이토록 겸양하게 만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이미 멀 미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시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워 서 멀미와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생각났는지 보를레스가 시즈에게 말했 다. "그나저나 요동이 심해졌으니 레소니가 힘들어하겠군. 이런 심한 격랑은 일어날 기후가 아니라는데 왜 이러는지‥." "예. 그래서 막 들어가 볼 참입니다." "벌써부터 잡혀 사는 건가?" "놀리지 마시죠." 보를레스는 즉각즉각 반응 상태로 변모한 채 선실로 들어가는 청년을 놀리 는 게 버릇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너무 재밌어." "보를레스 님! 물이 쏟아져서 다시 닦아야 되요." 지나가던 선원의 말이었다. # "보, 보지 마요." 레소니는 방금 전에도 토액질을 하여 냄새가 심하게 나는 게 부끄러워서 시 즈를 자꾸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요동에 비틀대다가 밀쳐대려던 청 년의 품안으로 안겨버렸으니 그야말로 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니?" "‥‥." 시즈는 물어놓고 후회했다. 멀미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걸 알면서 그 렇게 묻다니‥. 내보낼 걸 모두 내보내고 배속이 아픈지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는 말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요. 괜찮아지면 해달라는 걸 뭐든지 해줄 테니까." "정말이죠? 시즈." 그녀의 청년에 대한 호칭은 어느 새 '님'이 사라지고 없었다. 시즈로서는 익숙하지 않는 호칭이 사라진데서 기뻐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걸로 놀려 대기에 바빴다. 레소니는 안쓰러움이 풍기는 시즈의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러면 마법을 알려주세요." "마법‥." "나도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안 될까요? 시즈." "‥가르쳐 줄게. 내가 잘 가르칠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레소니가 너무 힘들어하니 뭍에 도착할 때까지는 잠을 자두는 게 좋겠어."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걸요."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게." 그러고 청년은 어린 연인의 귀가 간지럽도록 작고 부드러운 노래를 불러주 었다. "무슨 일이죠?" 레소니에게 의연 중 마법을 걸어 잠을 재워놓은 시즈가 갑판으로 나오니 모 두들 당황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시즈가 이유를 묻자 헤모 사제가 황 급히 대답했다. "바다뱀이다." 선원들은 모두 저마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배에 타고 있던 어떤 기 사들보다도‥. 무려 3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뱀이 바위를 둘둘 말고 노 려보는 모습에 어찌 저토록 대항할 생각을 할까? 웜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다뱀을 처음 본 시즈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다. 그런데 왜?" "바다에서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저희는 바다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반면에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대항할 용기도 누구보다 정확 합니다. 대항할 존재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대항하는 것은 만용이지만 알고 대항하려는 것은 용기입니다." "알고 대항하는 게 용기다." "보를레스‥." 뒤를 돌아보니 보를레스가 작살은 하나 던져주었다. 엉겹결에 받아든 시즈 에게 보를레스는 작살의 끝 부분이 날카로운지 손가락으로 가늠해보며 말했 다. "드래곤 슬레이어 만이 용사가 아니지.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를 용사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 바다에서는 태풍과 수많은 물결 속의 생물들과 싸우는 뱃사람이 최고의 용사다. 오늘 하루는 용 잡는 용사가 아닐지라도 바다의 용사들을 돕는 갑판 청소원이닷!" 고함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보를레스 갑판 청소원. 충각을 딛고 다른 선원들 과 함께 작살을 힘차게 던졌다. 몇 개는 바다뱀의 몸에 꽂히고 더러는 바다 에 떨어졌다. 꽂힌 작살은 밧줄을 풀었고 꽂히지 않는 작살을 잡아당겨 다 시 던졌다. 하지만 바다뱀은 무려 30 미터에 가까운 끝을 알 수 없는 거신 이였다. 부르르 하고 몸을 털자 대부분의 작살이 빠져버렸고 오히려 화만 돋아 격랑의 물결을 타고 쏨살같이 배로 다가왔다. "눈을 향해서 작살을 던져!" "온다! 하나! 둘! 세에엣!?" 멋지게 구호를 맞췄으나 던질 수 없었다. 던지려는 순간 바닷뱀이 수면 아 래로 잠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작살의 충격으로 도망간 건가?'하고 한 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시즈가 소리쳤다. "다들 조심해요! 꼬리로 내려치려는 겁니다!" 만약 바다뱀이 사람이 연극하듯이 기술의 이름을 일일이 말해준다면 아마도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바다뱀류 시간차 공격!" 어쨌든 간에 안심하고 있던 조타수는 키를 돌려보았지만 높이 치켜들어진 꼬리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다의 신이 철퇴를 내리치듯이 10 미터의 기다란 채찍이 바람을 가르며 쇄도했다. "화염의 정령이여, 타오르는 불꽃을!" 퍼억, 퍼엉, 퍼억! 위기일발의 순간에 사람의 몸통만한 화구가 날아가 바다 뱀과 부딪혔다. 그 몸에 비하면 작은 부위였겠지만 피부와 살이 탄다는 것 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바닷뱀은 공격을 잊고 바다 깊이 들어가 익은 꼬리를 식혔다. 사람들은 화구를 날린 카이젤에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고 카이젤은 언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바다에서 살아왔다는 녀석들이!!! 그렇게 넋을 멍하니 놓다니! 조타수 어 서 빠져나가지 않고 뭐해! 다른 선원들은 돛을 관리하면서 주의를 경계해. " 카이젤 파엘라스이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했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어느 뱃 사람보다도 노련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파엘라스 가(家)는 바 다를 이용하는 상인이었고 그 후손인 카이젤 또한 그러했기에 가능한 사실 이었다.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이나 자연적인 재해로 인하여 무역이 실패 하면 큰 금전적 손해와 신용을 잃게 되는 파엘라스는 조금 더 안전한 해상 로 개발과 바다의 변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정령사를 자산을 투자하여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해상 무역만으로 세계 10대 상회 안에 들어가 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소년의 충고는 옳은 것이었고 사람들은 나이어린 사람의 명령이라고 바른 행동을 거부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선박의 가장 자리로 다가가 주의를 경계하는 선원 하나가 외쳤다. "기포를 주시해. 기포가 많이 올라오는 곳이 놈이 숨은 장소요. 올라오는 순간 작살을 던져!" 돛을 당기고 방향타를 돌리고 작살을 던지는 그들에게는 신분이 높고 높음 따위는 이미 파도에게 삼켜진지 오래였다. "여기다. 올라온다!" 바다뱀은 바다의 생물이라지만 물고기처럼 아가미로 숨을 쉬지는 못했다. 고개를 내민 녀석에게 선원들은 무더기로 작살을 선사했다. 놈이 아픔에 발 버둥쳤다. "쿠와아아아아아." 그 거체에 부딪인 바위마다 박살이 나고 바다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뱀의 몸부림에 일어난 파도는 배와 씨름을 할 듯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쿵쿵하고 배가 울리기 시작하자 카이젤과 선원들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선실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놈이 배 밑바닥에 부딪치고 있 어!" '안돼. 레소니!' 뛰어들어간 시즈는 마법으로 레소니를 재워두었다는데 후회했다. 이미 무릎 까지 물이 차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뱀과의 충돌로 배가 망가지지는 않 았지만 이음새가 약간씩 벌어지면서 해수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레소니가 누워있는 침대는 물에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바다에게 그녀를 줄 수 없다는 듯 꼭 안은 시즈는 마법을 풀었다. "레소니, 일어나요." "시, 시즈 님, 아니 시즈. 무슨 일이에요?" "나가서 얘기할게요. 다른 사람들도 데리고 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선실에는 레소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병색이 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피폐하진 레소니를 데리고 나가자 갑판에서 카이젤과 선원들이 바다뱀과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저건‥." "임리얼 이라고 하는 바다뱀이야. 나이를 많이 먹으면 길이가 무려 50미터 에 달하는 엄청난 괴물이지. 크기로만 봤을 때는 드래곤보다도 커." "공녀 님이셨군요. 레소니를 부탁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카이젤의 정령을 부리는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임리 얼도 살을 태우는 아픔에 익숙해지자 거침없이 공격을 해댔다. 좌아아악! 원래 독사 중에는 독침을 뿜어내는 일종이 있었다. 그러나 바다뱀은 물을 빨아들여 엄청난 압력으로 쏘아보대는 그야말로 물대포였다. 만약 그대로 맞았다가는 배가 벌집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흐아아압!" 아무도 어찌할 바를 모르자 헤모가 보를레스의 검을 빌려 쥐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충돌했다. 물줄기가 폭발하듯 헤모의 좌우로 갈라졌다. 그 충격이 대단했는지 헤모의 육중한 몸이 거세게 날아가 갑판에 충돌했다. "기절하셨어요." 헤모의 상태를 살펴본 시즈가 알리자 배 위의 얼굴들이 참담하게 일그러졌 다. 하지만 물대포를 그대로 맞은 헤모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라는 걸 기사들은 알지 못했다. 마치 온몸을 망치로 두들기는 고통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동물과 몬스터는 분위기에 민감한 법. 임리얼은 금새 먹이 들의 사기가 줄어들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멍청한 표정 을 짓고 있던 구리색 피부의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적당히 구워진 게 맛 도 좋을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잡아먹혔다. 그러나 소리치는 남자도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는지 이미 그의 발버둥은 절망에 물들었다. 시즈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거대한 바람의 의지여‥. 한 줄기 흐름에 모여진 힘을 부여하여 검이 되 어라!" 카이젤은 정령의 기를 무시하고 시즈 앞에 모여드는 바람의 기세에 거친 숨 을 들이켰다. 적어도 마나를 사용하여 바람을 움직였다면 정령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에 젖은 눈빛을 하고 있는 청년의 마법은 주위를 찢을 듯한 바람을 모으고 있는데도 자신의 정령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떨고만 있었다? '저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다 .' 시즈가 임리얼의 목을 향해 손가락을 그었다. 콰과과과과. 바다뱀의 거대한 꼬리가 내려치던 소리와 비교했을 때 더하면 더했지 뒤지 지 않을 파공성이었다. 데린과 레소니처럼 뒤에 숨어있던 여인들은 그 소리 만으로도 피부가 뜯겨나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임리얼도 위험을 느꼈는지 급히 물 속으로 숨으려고 했지만 무언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걸 느꼈다. 그 가는 눈에도 비쳤을 것이다. 두 손을 모아 인 (印)을 맺고 있는 소년이 가증스럽게도 웃고 있었다. 인(印)을 사용한 정령 술은 구언(口言) 계약보다 한층 정확한 거래의 계약이었기에 강력했다. 거 대한 뱀은 분노에 쌓여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어느 순간 우는 것도 할 수 없었다. 허전했으니까‥. 길고 매끈했던 몸매‥ 가 그리워졌지 만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풍덩! 사람보다도 더 커다란 머리가 십수미터 위에서 떨어지자 바다에는 파문이 일어나며 생물들의 삶이 교차됨에서 희생된 죽음을 슬퍼했다. 그래서인지 파문의 원은 고요하게 퍼져나갔다. "아무래도 그 바다뱀의 움직임 때문에 격랑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훨씬 잔잔해졌네요." 레소니로서는 저주하고 싶은 대화였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속을 흔들어놓는 요동이 계속 느껴지는데 훨씬 나아졌다니‥. 훌쩍이는 그녀를 보듬어 안은 시즈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뭍에 도착할 거야." 확실히 배 밑바닥에서 물이 계속 새어 들어왔고 이미 1/4 가량이 물 속에 잠긴 상태였다. 그래서 현재 그들은 가까운 뭍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없어요. 이 곳에 격랑이 치는 게 섬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 람은 높은 섬에 걸리기 때문에 오히려 불지 않아요. 이래가지고 가라앉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카이젤 군의 마법으로도 힘들까요?" 펠리언이 기대에 찬 눈으로 카이젤을 바라보았으나 냉정한 미소년은 냉랭하 게 고개를 저었다. "지속적으로는 힘들어. 약간 바람이라면 몰라도 상위 정령이 아닌 이상은 배를 움직일 정도의 강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불게 하는 게 쉽지 않아. 아마 상위 정령이라고 해도 몇 십분 동안 불게 한다는 것은 무리일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한 이는 시즈였다. 레소니의 고통을 이어받았음인지 약간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그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 마법사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사라도 지속적인 바람은‥." "시즈, 안돼. 그랬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카이젤의 설명과 다시 깨어난 헤모의 만류가 있었지만 시즈는 눈을 뜨지 않 았다. 그의 결심이 굳은지 안 공녀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어차피 뭍에 닿지 못하면 수장되는 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시즈는 강한 마법으로 정신력을 소비한 상태입니다. 당신은 강대한 마법을 쓰고 난 후의 후유증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시즈를 말려야 합니다." "헤모 사제, 지금은 공녀의 말을 따라야 해요. 시즈가 우리에게 중요한 존 재이지만‥." "자네는 모르네. 지난번에는 시력을 잃어버리는 걸로 끝났지만 그게 시사 하는 바는 적은 게 아니야. 시력과 두발의 색은 생명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 적인 확인법이야. 시즈는 자신의 생명을 깍아내고 있는 거라고!" "이미 마법이 시전됐어요." 카이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름 을 향했다. 더 없이 빨리 이동하는 구름‥. "이 주위의 대기 자체가 변하고 있어." 선원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들도 변화무쌍하다는 바다에서 살아왔 지만 이토록 쉽게 기후가 변하는 걸 보지 못했던 것이다. 데린이 일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마법사 님께서 바람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돌아갈 겁니다. 바다를 이기고 우리는 살아가는 실베니아의 국민입니다. 바다를 두 려워하되 물러서는 것은 바다의 국민이 아닙니다." 그녀의 연설은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과 함께 배의 사람들을 응원하 고 있었다. 돛을 당기고 지위하는 이들의 동작에 힘이 들어가고 용기가 피 어났다. 바다는 우리의 삶. 포기하지 않는 인생의 표현 우리의 끝없는 투쟁 누가 막을 수 있느냐. 저 파도가 막을지라도 돛자락에는 풍운의 꿈을! 뱃머리에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사방이 갈림길이지만 조타수의 가슴에는 망설임이 없고 뱃사람의 팔에는 웅지가 가득하다! 돛을 당겨 바람을 타고 바다를 뛰어넘는다 누가 시작을 했을까? 어딘가에서 시작된 노래는 힘있는 그들의 움직임에 맞 추어 모두가 함께 부르고 있었고 그 소리는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에 어울려 수평선까지 울려 퍼졌다. # "그래!? 벌써 누가 처리해버렸다고?" "예." "그래서 부검을 해보았나?" "3 명 가량을 잡아먹은 후 바로 목이 잘렸습니다." "목을 잘랐다? 드래곤과 같은 금강의 비늘은 아니지만 살이 질기기는 고래 힘 줄보다 더한 녀석인데 목을 잘랐다?" "틀림없습니다. 작두로 벼를 자른 듯 단면이 깨끗했습니다." "소드 마스터라도 있는 건가? 펠리언이라는 녀석은 강하기는 하지만 그에 비하면 아직은 멀었는데‥. 조사가 잘못된 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사단에 의하면 대기가 변했답니다." "대기가?" "예. 보통의 이상기후를 뛰어넘는 세찬 바람이 끊임없이‥. 알고 계시겠지 만 그 곳은 지형 때문에 바람이 강하게 불기 힘듭니다." "‥내가 가봐야 겠다." "하, 하지만 주군." "아마도 귀인이 있는 모양이다." "주군께 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하핫. 나의 귀인이라기 보다는 대륙의 귀인이지. 옛날부터 춤을 추고 싶 어하는 이가 있었고 악보를 그리는 이가 있었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박 자를 맞춰보는 이가 있었지. 그러나 불행히도 가장 중요한 한 존재가 없었 다." "‥‥." "아무래도 마지막 한 사람이 나타난 듯 하다. 그러니 어찌 귀인이 아닐 수 있겠나?" "하면‥?" "그래. 내가 가서 봐야지. 진정 그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노래하는 이'인지‥." "그럼 차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고작 공녀의 마중이라고 하여 걸림돌 치우는데 소홀히 했 는데 이거 실례였겠군. 그리고 그들을 빨리 쫓으라고 해라. 겨우 800살 먹 은 임리얼 한 마리에 대기를 바꿀 이유는 없어. 아마도 배에 문제가 일어났 을 게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만남을 기대하보도록 하지.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군." "자네는 역시 빠르군. 그런데 이제 밖으로 나가니까 호칭을 바꾸도록 하게 . 시선이 따가워서 말이야." "예. 드로안 남작 각하." # "그런데 공녀께서 찾아가신다는 젠티아 드로안 남작은 어떤 사람이길래 공 작가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겁니까?" 귀족이었던 보를레스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을 찾기 위 한 가장 쉬운 방법, 답을 아는 이에게 물었다. "그 전에 시즈 님의 상세는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시력이 약간 떨어지고 머리색깔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부작용 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더군요. 게다가 레소니가 옆에서 열심히 간호를 해주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저도 시즈 님께서 대마법사이실 줄은 짐작도 못했답니다." 솔직히 누가 막 나이 20을 넘은 청년이 그런 광범위한 마법을 쓸 수 있을라 고 생각했겠는가. 하지만 무리였던 것은 확실한지 얼마 전에 쓰러져 버렸다 . 안색이 백지장이 되어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도 마법을 중지않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주군으로 섬기기에는 아주 불안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해상을 순찰 중이던 경비대가 웬일인지 멀리까지 순찰을 나와 발견 해주었다는 것이다. 대단한 운이 아닐 수 없었다. 실베니아의 해상경비대는 모종의 사고와 해적들과의 충돌들을 대비해서 마력석을 부착하고 있었는데 앞옆으로 여러 개의 흡수석에서 물을 흡수하여 배 후미의 마력석에서 강하 게 배출시켜 출력을 얻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극소수의 해상경 비대만 부착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덕분에 선원 들도 쉬면서 경비대의 배에 끌려서 항구로 가고 있었다. "드로안 남작 님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예. 저도 한 때는 귀족이었던 적이 있어서 남작이 영족과 맺어지기가 얼 마나 힘들지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공녀께서 아무리 약혼자라지만 남작을 보러 직접 행차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통 남작이라면 그렇죠. 남작이라는 직위가 뜻하는 바를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직위로서의 남작은 지방 백작이라는 뜻이죠." 보를레스는 '누구를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하듯 자신만만하게 어깨 를 으쓱했다. 그의 제스처가 재밌었는지 데린은 풋 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 리며 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뜻은요?" "실력자라는 뜻이죠. ‥핫! 그렇다면‥." "그래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귀족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예. 옛? 그럼 의심하셨다는 말씀입니까?" 데린은 품위에 어긋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려는지 주먹을 꼭 쥐고 쿡쿡 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보를레스 님의 어디에 귀족의 품위와 기품이 존재한다는 거죠? " "잘 보면 보일지도 모르죠." "한 평생동안 봐도 보일지 의심스럽군." "헤모 사제‥." 억울한 보를레스의 항의를 무시하며 헤모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데 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드로안 남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저도 좀 알고 싶군요." "사제 님께서는 짐작되는 사람이라도 계신가보죠?" 헤모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그리 좋은 기억을 동반한 인물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쳤다. 경비대가 빠르게 배를 끌고 있어 맞바람이 심하여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데린이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다만 그 분에 대한 소문이 무성 해서 많이 들었죠. 동경하고 있어요." 양손을 꼭 쥐고 눈을 반짝거리는 게 여인은 진심인 듯 했다. "그 분은 30대 초반의 카리스마가 가득한 미남자라고 하셨어요. 물론 들리 는 소문이지만, 설마 뜸금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있었던 '세이하츠 전투'에서 유례없는 전공을 세우고 소녀를 비롯한 수많 은 여인의 가슴을 울리시며 실베니아 기사들의 귀감이 되신 그 분을 일컬어 ‥." " '값싼 남작.'" 그녀의 말을 이어받은 것은 섬뜩하게도(?) 펠리언이었다. 그는 공녀의 손을 맞잡은 채- 사실 굉장히 무엄한 행동이었다. -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를 높여 '값싼 남작'을 칭송했다. "귀감이죠. 귀감이십니다. 이 시대,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이시며 전설이신 최고, 최강의 검사이시죠. 그 분의 검술은 그야말로 신기이며 예술입니다. 가시는 곳마다 영광이며 밟으시는(?) 적마다 무릎을 꿇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드래곤을 잡아다가 구워먹었다는 소문도 있으며, 그 유 명한 레이모하 교단을 3대 수호 집단 중 하나인 신성 투사단의 정예 3명을 단독으로 막아내셨지요. 그 뿐입니까? 전술은 그야말로 신이 운명을 점지해 주시듯 맞아떨어지는 지라 그 분 휘하의 기사들은 처음에 남작께서 쪽집게 점성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두 번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께서는 실베니아의 시기많은 귀 족들의 모함에 정계에서 물러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저 몸값 싼 기사일 뿐이니 나라에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만인의 귀감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폭풍우가 쓸고 가는 듯한 칭송. 거의 하나의 대서사시였다. 보를레스 는 대단하다는 듯 감탄한 표정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그거 외우고 있던 거냐? 아니면 즉석에서 읊은 거냐?" 그러나‥ 손을 맞잡은 공녀와 청년 기사는 마치 생생한 이미지를 보고 있는 지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먼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펠리언의 찬송가 를 듣던 헤모도 주먹을 꽉 쥐며 눈쌀을 찌푸린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피가 고여 함께 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을‥. "바로 저 배인가? 에취!" "각하, 감기 걸리셨습니까?" "무슨 소리, 여기는 실베니아라고 무슨 얼음의 왕국인 줄 아나? 이거 참 귀도 간지럽군." "후벼드릴까요?" "‥‥싹 나았네. 그대는 아무래도 말에 마법이 되는 힘을 가진 모양이야. " "감사합니다." 젠티아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부하도 골치아프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아무래도 처음 나서자마자 바다뱀을 비롯하여 배가 파손되는 등의 희생을 치룬 게 액땜이 되었는지 항해는 순조로웠다. 시즈도 피로를 회복했고, 레 소니도 항구에서 제조된 특제 멀미약을 먹은 덕에 즐겁게 항해를 즐길 수 있었다. 재난 후에는 사람들이 뭉친다는 말대로 선원들과 일행은 가까워져 서인지 한층 시끄러웠다. 게다가 새로 배의 수리 등의 일로 머물렀던 발베 트 해상경비서에서는 공녀의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믿음직한 수행원을 붙여 주었는데 젠드라는 이름의 이 사람 또한 펠리언에 버금가는 수다쟁이였다. "아하하하! 그래서 말이죠. 저 회색 갈매기 떼가 머리 위로 지나가면 선원 들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어요. 농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메뚜기 떼처럼 선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죠. 지금도 갈매기 떼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 보여요? 배설물이 갑판에 떨어지는 게 장난이 아니죠. 게다가 운 이 안 좋아서 몸의 한 부분을 회색 갈매기의 배설 물감을 시험할 도화지로 빌려주게 된다면 어디서 목욕을 하겠어요? 그렇죠, 그렇죠?" "남자가 저렇게 수다를 떨어대다니‥. 저런 사람은 질색이야." 데린이 얼굴을 찌푸리자 레소니도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데 린과는 다른 의미에서 였다. "공녀 전하, 하지만 펠리언 님도 비슷하지 않나요?" "호호호‥. 무슨 말이에요. 레소니 양, 지금 제가 질색이라고 한 것은 사 랑할 사람으로써의 자격으로 말한 거에요. 펠리언 님이야 저를 호위하는 기 사로서 보고 있지 남자로서 보고 있지는 않답니다. 어차피 저를 보호해주는 기사이신데 괜히 남자로서의 단점을 찾아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좋아할 사람은 틀린 거에요. 게다가 저 남자는 벌써 30대라고요! 물론 얼굴은 그 런데로 준수해 보이지만‥." 그렇구나. 레소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젠드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열심 히 듣고 있었는데 지루한지 자기 취향대로 뱃여행을 즐기는 사람들과는 달 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왜 난 시즈 님의 단점이 보이지 않지?' 볼 한 구석을 긁적이던 그녀는 자신이 갑자기 바보가 된 게 아닐까 라는 의 혹이 들었다. 이게 다 그 때 입맞춤을 한 다음부터야‥. '앗! 상기해버렸다.' "박식하시군요." 그의 웃음을 보며 젠드는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내가 수다쟁이라고 생각할 때도 되지 않았냐? 내가 지치겠다. ' 하지만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생각했을 때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성격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스하게 감싸안는 미소가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청 년‥. 피식‥ 귀여운 녀석이로군. "하하핫.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런데 자네 이름이 시즈라고 했지? 정말 성격이 마음에 드는 군.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은 좀 괜찮나?" "예." "그래! 바로 그거야. 남자라면 그래야지. 쓱 보니 연인도 있더구만‥." 쿡쿡! 시즈가 어쩔 줄을 모르는 이유는 절대로 그가 옆구리를 찌르는 게 간 지러워서가 아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20대의 외모를 한 채 40대의 말투 를 가진 사람한테서는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이성을 유혹하는 호르몬 이 아니라 동질성이 느껴졌다. 젠드가 시즈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른 손으 로 바다 멀리를 가리켰다. "저게 뭐 같나?" "뭐가요?" 둘의 사이로 조그마한 소녀가 끼어 들었다. 레소니였다. 아무래도 시즈가 능글맞은 사기꾼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들어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젠 드는 껄걸 웃으며 더욱 시즈를 놀렸다. "꼬마 연인께서 벌써 미래의 낭군 관리를 시작하셨군." 그러나 레소니의 귀여운 얼굴이 눈을 칼날처럼 가늘어지자 곧 웃음을 멈추 고 말했다. "흠흠‥. 저기 말이야. 저게 뭐냐고 물어보던 거야." 그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레소니는 놀라다 못해 비명을 지르고 말았 다. 새까만 선이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져있었고 계속 배를 향해서 오고 있 었다. 레소니는 생애에서 두 번째로 바다를 본 것이었고 처음 배에 몸을 실 은 경험은 간단하게 국경선만 넘는 단거리였다. 현재 심한 배멀리의 경험과 바다뱀의 습격으로 인해 바다의 무서움에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시, 시즈‥. 또 바닷뱀! 어떻해에‥. 아까보다 훨씬 커." 아예 시즈의 품에 고개를 묻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가 과연 방금 전의 나 젠티아 드로안도 움찔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던 녀석이란 말인 가? 젠드가 박장대소를 하다못해 숨이 막혀 켁켁 대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빼꼼이 머리를 들어보는 레소니. 하지만 뱃전에 가까워져 있는 검은 띠에 다시 흠칫하고 시즈의 품에 들어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기만 했다. "얼마 전에 임리얼의 습격을 받아서 그럴 겁니다." "그렇군. 이거 미안한 걸. 그런데 시즈 자네는 무섭지 않은 건가?" "글쎄요‥." 젠드는 한 쌍의 연인이 부두여 안고 바들대는 상상에 기대했지만 웃기만 하 는 시즈를 보고 금방 포기했다. "쳇! 뱃사내도 아닌 주제에 잘도 알고 있군. 이봐요. 꼬마아가씨, 무서워 할 필요 없어. 저 광범위한 띠는 바다뱀이 아니라 정어리 떼니까 말이야." "정어리 떼요?" "그래, 크기가 작은 물고기지. 워낙 수가 많아서 그래." "뭐에욧! 숙녀를 놀리다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젠드는 걷어차인 정갱이를 감싸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레소니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크으‥. 정말 아프네.' 바다의 밤은 숲처럼 달빛이 내리비추는 게 방해받지 않았지만 어두운 암흑 의 출렁임 때문인지 좀더 음산했다. 헤모는 뱃전에 기대서 초인적인 시력도 닿지 않는 수평선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는 옆에 누군가 갑자기 앉는 기척을 느끼고 흠칫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내 안정을 되찾고 굳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멋진 등장이었네,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 '젠드'라니 여전히 작 명센스가 끝내주는 군." "사제께서는 어떻고요? 헤라즈 모히튼 사제님.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지인(知人)처럼 말하고 있었다. 젠드는 헤모가 기대있 는 뱃전 바로 옆에 앉았다. "그래. 그 능글맞은 표정을 보니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는 필요없을 거라 고 생각했네. 후우‥ 그 전쟁으로부터 7년이 흘렀군." "그렇군요. 담배 한 대 피시겠습니까?" "아니, 두 대만 주게." "이거 좋은 건데‥." 피식. 젠드는 품에서 꺼낸 담배는 왕족이나 필 수 있는 최고급 담배였지만 헤모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었다. 두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물자 젠드는 손 가락을 튕겼다. 화륵! "후우우‥." 둘은 같지만 반대편의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1년하고도 8 개월에 달하는 시간을 두려워했던 숙적이 이제는 평화로운 항해의 바다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래. 어떤가? 그 때 이후, 전설이 된 영웅이 되어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쟁‥ 그 참혹함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가 영웅 과 패잔병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 우리는 모두 전쟁이라는 불화의 적을 막지 못한 패배자들이야‥. 이런! 이 담배 맛은 좋은데 너무 금방이군. 한 대 더 주게." "‥비싼 거라니까요. 여기 있습니다. 이제 끝입니다." 젠드는 한 개비만 꺼내고 혹시라도 더 달랄까봐 담배상자를 품에 재빨리 집 어넣었다. 그 담배를 입에 물며 헤모가 중얼거렸다. "남작, 남작. 그대가 정말 째째하구려. 그대는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이 아 니오?" 그러면서 사제는 지나간 하늘 저편에서 시선을 돌려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 지는 별빛을 투박한 눈매에 담았다. "괜히 '값싼 남작'이라고 불리는 줄 아십니까?" 그러면서 젠드 역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렇게 살아왔던 그들은 지금 같은 배에 타고 같은 하 늘을 보고 있었다. -91- # - 개념 규정의 불규칙성 아무런 존재의 기척도 없이 그저 출렁이기만 하는 광활한 검은 액체. 누가 그 안으로는 무한한 존재들이 생명의 빛 을 뿜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시즈가 소환한 작은 빛덩이에 바다 안이 들여다보이자 레소니 는 눈을 함박같이 크게 뜨며 감탄사를 입에 물었다. "와아아! 이게 다 뭐죠?" "바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보석이며 사람으로 치자면 붉은 피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플랑크톤이지." "너무 아름다워요." 별들이 하늘을 고요히 수놓고 있다면 바다에는 플랑크톤이 있었다. 투명하게 바다와 동화되어 있지만 어둠과 빛을 동시에 부여하면 플랑크톤은 빛을 낸다. 그 모습이 꿈결처럼 황홀하다는 것은 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 었다. 감격해버린 레소니는 발끝을 들어 시즈의 목을 팔을 감고 속삭였다. "이 새벽에 부른 이유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군요?" "아하하‥ 미안해. 꼭 플랑크톤의 행진 때문은 아니었어. 레소니, 기억나지 않나요? 얼마 전에 멀미에 시달릴 때 했 던 약속." "음‥." 레소니는 솔직히 멀미에 시달릴 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약속을 떠올리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아! 마법! 마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죠?"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때는 좀 쑥스러워서 말이죠. 이른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니요, 아니요. 어서 가르쳐 줘요." 소매의 옷길을 꼭 쥐고 보채는 게 마치 어미새에게 먹이를 재촉하는 아기새 같았다. 시즈는 기대에 부푼 소녀의 머 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킨 후 말했다. "내 교육 방식은 확연히 다를 거에요." "네, 선생님." 순풍을 타고 항해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야할 길은 대륙의 최남단에서 실베니아의 최북단에 이르는 머나먼 거 리였다. 무려 대륙을 종단하는 길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인 만큼 하루, 이틀이 소비될 여정이 아니었기에 레소니가 마법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요. 물방울을 증발시킨 후에 한 곳에 모아서 구름을 만들어보세요." "네." 레소니는 현재 보를레스가 갑판을 청소하다가 엎지른 물의 상태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마법이라는 신비 로운 광경을 구경하는 선원들로 붐볐다. 신경이 쓰일만도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레소니는 당연하다는 듯 마법을 조절하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레소니, 넌 할 수 있어. 왓! 된다, 된다." 구경을 하는 이들 중에는 열렬하게 레소니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내가 방금 전에 물 을 엎지른 장본인이었다. 보를레스는 보기에도 민망하게 갑판에 광을 내던 걸레를 깃발처럼 흔들며 환호했다. 집중 력이 뛰어난 레소니라도 거슬리는 신경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소리를 질렀다. "보를레스! 좀 조용히 못 해욧! 모두들! 자꾸 떠들면 입술을 뻐끔거리는데만 도 움되는 생선 주둥이로 바꿔버리겠어욧!" 바다의 괴수, 임리얼의 포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바다의 사나이들은 금새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들려오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들을 한 번 째려본 레소니는 다시 바닥의 물에 정신을 쏟았 다. 서서히 자취를 지워가기 시작하는 물방울들. 동시에 레소니의 가슴 높이 부근에는 안개처럼 뭉게뭉게한 기체들이 희미하게 모이고 있었다. 바닥의 물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즈는 가볍게 박수를 치고 다음 과제를 주문했다. "이제 그걸 바다 쪽으로 이동시키세요." 선원들은 레소니가 마법을 익히는 광경이 그저 신기하게 여길 뿐이었지만 정령사인 카이젤은 아니었다. 벌떡 일어 나서 상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을 실행하는 시즈에게 물었다. "아무리 이해할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군. 레소니가 하고 있는 마법은 비록 범위는 턱없이 작기는 하지만 분 명 날씨 조절마법의 종류 중에 하나인 것 같은데‥. 틀렸나?" "맞아요." "알고 있으면서 왜!?" 아니라면 지나치려고 했지만 카이젤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시즈에게 분노를 느꼈다. 날씨 조절마법은 무려 5 클래스 의 마법 중에서도 가장 시전이 어려운 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하는 카이젤을 젠드는 어깨를 토닥거리며 진정 시켰다. 그리고 시즈에게 말했다. "나도 예전에 마법을 공부해보려고 노력해본 경험이 있지. 그래서 카이젤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있네. 어떻게 초입자에게 5클래스 마법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되기 전에 어서 중지하게." 그의 진지한 충고에도 시즈는 오히려 싱글거리며 되물었다. "왜 잘못되는데요?" 젠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마음을 바로 잡고 설명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괜히 마법사들이 클래스라는 간격을 나누어 놓았겠나? 자네는 물 위에 모래 피라미드르 쌓고 있 는 것이나 다름 엇네."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마법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르답니다. 저는 마법을 수학과 같은 학문의 부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많은 분류의 학문 중에서도 마법은 매우 많은 학문의 총화에요. 학문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고‥ 사람들은 구분할 수 없 는 걸 구분하고 있답니다. 덧셈과 뺄셈. 이 두 가지를 어느 게 높은 등급이고 어느 게 낮은 등급인지 구분할 수 있 을까요? 학문을 꿈으로 삼은 이들의 요람, 그 중에서도 명문이라고 불리는 케이치얀 학원에서는 외국어를 가르칠 때 우선 아스틴 어를 가르치고 그 다음 실베니아 어를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2학년에서 배우 는 아스틴 어에 비해 4학년에서 배우는 실베니아 어가 언어적인 난이도가 높은 걸까요?" "그것은 아니겠지." "인간은 학문 등을 이해하기 쉽게 개념을 나눠놓고 스스로 그 구분에 갇혀 버렸습니다. 인정해야만 해요. 어떤 이는 기하학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 거고 어떤 이는 함수를 좋아하는 이가 있는 겁니다. '넌 쉬운 함수를 못하는데 어떻 게 기하학을 할 수 있겠느냐?'라는 규정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요. 어떤 사람은 4학년 때 배우는 실 베니아 어가 아스틴 어에 비해서 익히기 쉬울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가장 기초적인 과정을 배제하고 다음 단계로 나갈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수많은 수학공식도 덧셈과 뺄셈에서 정리할 수 있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 다. 거의 끝없는 식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네의 교육 방식을 알만하군. 한 마디로 마법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굳이 단계별로 익힐 필요 가 없다는 말이군." "그렇죠." 잠시 생각해보던 젠드, '값싼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누구도 보지 못했던 존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단해. 몇 천년동안 내려오는 마법의 철칙을 한 순간에 부숴버리는 군. 하지만 생각해보게. 자네 말대로라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군. 어째서 2 클래스의 마법사는 3써클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은 마법의 이해이지 사용이 아닙니다. 그래도 제 생각을 알려드리죠. 간단하게 말해서 능력 부족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수학의 공식은 끝까지 해석해가면 덧셈과 뺄셈만 남아버릴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이가 엄청나게 길겠죠. 공식을 이해할 수 있는 부호로 정리하는 게 마법의 이해라면 정리되기는 했어도 엄청 나게 많은 계산을 해내는 게 바로 능력입니다. 그게 마법을 시전하는데 있어서의 써클이죠. 마법은 총체적인 학문입 니다. 학문은 개념이 기초가 됩니다. 그런 개념에 단계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개념을 응용- 마법의 시전 - 은 이해력과 계산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기에 뛰어넘기 힘든 단계처럼 인식되는 겁니다. 세상을 가득히 채운 것은 마나mana이고 마나는 생명과 의지의 힘입니다. 모든 생물은 세상에 퍼진 마나를 이용하여 살아갑니다. 자기 근육에 힘을 주듯이 사용하고 있죠. 그리고 근육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굵어지고 강해지듯, 마나도 이용하려고 하면 할수 록 그 양이 많아집니다. 발전양상이 더없이 느릴 뿐이죠." 침묵. 허탈한 미소를 띄고 있는 젠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원들. '역시 대단해'라는 얼굴의 보를레스, 헤모, 데 린, 레소니 등의 지인들. "대단하군. 그렇다면 지금 레소니는 굳이 날씨 조절마법을 연습하는 건가?" "마법은 자연의 단편적인 한 부분을 만들어내는 것. 그렇다면 자연 전체를 만들어내고 움직일 수 있는 훈련이야말 로 마법을 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핫핫핫핫핫!" 젠드, 젠티아 드로안은 지혜에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청년 속에서 '그'와 같은 힘을 보았다. 놀랍다. '그 녀석과 비슷한 녀석은 다시는 세상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아릴은 아직도 녀석을 찾아다니겠군.' "대단해. 할 말이 없네. 레소니의 진도가 기대되는 걸!" 카이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직도 의식 한 편에 시즈=바보라는 공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정신 적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선실로 들어가 젠드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자 계단에 서있던 헤모가 물었다. "실성했나보지? 그래‥ 궁금해하던 시즈에 대한 감상은?" "만족했습니다. 과연‥.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저 시즈라는 친구는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잃게 할겁니다. 세상의 법칙은 공평하니까요. 그 때‥ 당신이 시즈를 보호해주십시오." "‥‥걱정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교단과 싸우게 된다고 해도?" 움찔! 헤모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부들거리는 팔이 불안감에 휩싸였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말이 없어진 헤모를 뒤로하고 젠드는 자기에게 배속된 방으로 걸어갔다. # 7번의 밤이 지나고 4번째 아침이 왔다. 이미 정박해있는 배들을 비롯하여 희끗희끗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커다란 선박 정비소가 아헨 항구의 발전된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도착한 건가요?" "그래. 바로 이 곳이 실베니아 최북단의 항구 아헨이지. 용병국과 국경과 영해를 맞대고 있기 때문에 군사항구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야. 여기서 건조되는 군함은 대륙에서 품질을 인정해주지." 보를레스는 전(煎) 기사출신답게 군사적인 내용을 줄줄이 읊어댔지만 레소니는 그런 말에 대해서는 신경쓸 일푼의 가치도 부여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는 지옥같던 바다의 여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져 한가롭고 평화롭다고 느 낄만 할 때 항해가 끝나자 아쉬웠다. 4일에 달하는 기간동안 그녀는 많은 마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1써클의 마법을 익힌 것이다. 사실 1 써클의 마법은 조금만 생각하면 시전도 가능할 정도로 쉬웠다. 인지가 있 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자연상에 퍼져있는 마나를 1써클 가량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랬다면 갑자기 뚝 떨어졌다고 할 정도로 어느 것과도 연관을 찾기 힘든 마법을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단, 요정 이라고 불리는 엘프는 마법을 익히는데 있어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자연을 이해하고 순응할 줄 안 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론으로만 따지자면 대마법사 헤트라임크도 혀를 내두를 강사, 시즈가 있는데 3일 안에 1 써클을 익히는 게 대수겠는가. 오히려 느린 감조차 있었다. 마법이 학문의 총체인 만큼 기초를 이해하는데 레소니는 엄청난 노력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대가로 그녀는 바닷물로 만들어진 주먹만한 물방울이 허공에 둥실둥실 띄워 애완동물 대신 가지고 다니며 즐거워했다. 배가 선착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에 쌓여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많은 물품과 짐들을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은 정 들었던 선원들과의 작별을 끝내고 육지를 밞았다. "낭아플도 시장이 엄청나게 컸는데 여기도 뒤떨어지지 않는 군." "낭아플이 남부의 대표적인 무역항이라면 아헨도 북부를 대표하는 항구니까요. 군사항이나 다름없지만 각 나라에서 많은 물품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소란이 조금 일어난 것 같은데‥." 귀가 밝은 헤모가 손가락으로 마을 어귀를 짚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사람들이 도망치는데?" "전쟁이라뇨. 다른 도시라면 모르지만 항구에서 실베니아와 격돌하는 전투라니 어느 나라의 바보라도 그런 가망없 는 짓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걸요." 말을 하는 사이에 소란은 그들이 서있는 곳까지 번져왔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상인과 마을 사람들이 소란의 원인 을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몬스터들이다―!" "타이밍도 좋군." "어서 가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뭐하는 거에욧!" 불구경하는 양 빈정되는(?)- 누굴? -젠드에게 데린은 몬스터들을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귀족의 영양께서 마치 시골 아낙처럼 소리를 지르다니 남편이 되실 젠티아 남작 님이 걱정스럽 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촐짝거리는 가장에게 누가 시집갈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요." 헤모는 자기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젠드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케워크로군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거대한 늑대들. 헤모도 처음 만남을 회상하는지 시즈와 눈이 마주쳤다. 시즈가 예도를 뽑자 펠 리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장식품이 아니었습니까?" "설마 요리사가 스푼를 들고 다니면 음식을 먹기 위해서냐고 물으실 건가요? 이 곳을 부탁합니다." 헤모와 시즈는 보조를 맞추며 뛰어나갔다. '당신은 왜 안 가요?'라고 묻는 듯한 레소니의 시선에 보를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여기서 펠리언과 함께 숙녀 분들을 지켜야지. 게다가 저 둘의 옛 추억을 떠올리는데 굳이 끼여들고 싶지 않거 든." "?" 어리둥절한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보를레스는 팔짱을 낀 채 정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이거 엄청난 숫자인데?" 무려 20 마리에 가까운 숫자였다. 기존의 늑대들과는 달리 케워크는 대규모 군집 생활을 하기 않는다고 알려져 있 었으니 헤모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아마도 저기 솟은 산에서 내려온 것 같네요. 혹시 드래곤이라도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등을 맞댄 시즈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산줄기를 힐끗대며 말했다. 그들은 시즈가 빠르게 케워크에게 부상 을 입혀 동작의 속도를 줄여놓으면 헤모가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시즈에게는 케워크의 두꺼운 근육과 뼈를 단번에 가를 힘이 없었고 헤모는 케워크가 가진 야수의 감각과 운동신경 때문에 힘들었기 때문 에 둘의 보조는 정확하면서도 그들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저 사람 대단한데요?" 헤모의 묵직한 일격을 마지막으로 주위의 케워크를 처리한 후 카이젤과 젠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시즈는 주방에 서 주방장이 무 썰 듯이 케워크를 썰어대는 젠드를 보고 도와줄 생각은 버린 채 박수를 쳤다. 현란한 검광이 낮인 데도 찬란하게 이리저리 뻗여나가는데 사람들도 서커스를 보는 기분으로 2층 창문을 열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묘기같은 칼부림, 카이젤 쪽은 불꽃이 날아다니고 물이 솟는 등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니까." "안면이 있었군요?" "별로 놀라지 않는 군." "그야 처음 헤모 사제가 젠드 씨를 봤을 때, 꺼리는 듯 하더군요. 젠드 씨는 외모도 준수한 편인데 모든 사람을 평 등하게 생각하는 사제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꺼릴 리가 없지요." 아예 주변 건물에 기대서 이야기를 시작한 그들이었지만 케워크는 오직 젠드만이 생명보존에 있어 가장 경시할 수 없는 적이라고 그에게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이젤이 맡았던 놈들도 모두 젠드에게 달려들자 정령사 소년은 흘 러내린 땀을 훔치며 시즈들이 쉬는 곳으로 와서 함께 기댔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헤모 사제, 그러고도 사제요?" "으음‥ 아침이나 먹으러 갈까?" 마침 배고팠던 청년과 소년이었다. 헤모는 '아침 시간 내로 처리를 끝내고 오게나.'라는 말을 젠드에게 남기고 공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거.침.없.이 떼었다. # 아헨의 영주가 만류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젠티아 드로안이 기거한다는 흑색거성, 글로디프리아를 향해서 떠 났다. 따돌림을 받았다고 투덜대던 젠드가 영주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인수했다는 걸 알기에 미안해서 있을 수가 없었다. 데린은 뇌물횡령이라는 이유로 젠드를 '불량공무원'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비교대상은 '값싼 남작'이었다. "젠드! 이제 글로디프리아에 가면 말투를 비롯하여 행동을 조심히 해요. 드로안 남작께서 당신같이 무례한 사람을 수행원으로 함께 다니는 날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당연히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님으로 보시지 않겠습니까?" "뭐에욧?" "전하, 참으세요. 젠드 님도 그만 좀 하세요." 레소니가 얼른 말렸지만 공녀는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머리가 썩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면 남작님께 말씀드려서 저 불량공무원을 당장 퇴출시켜버리겠어.'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수행원의 신분이었기에 말을 타고 마차의 소란을 음악삼아 봄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초원을 바라보던 시즈는 으 깨를 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말이야?" 보를레스의 물음에 시즈는 덜렁대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공주와 말다툼에 여념이 없는 젠드를 턱으로 가르켰다. 말의 속도를 늦춰 보를레스가 그와 나란하게 말을 몰자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한 검술가였어요. 권법으로 치자면 하윌 님의 수준? 그 이상?" "마스터의 수준이라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를 보고 보를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마스터라는 말은 서방검술과 는 관계를 두고 있지 않았다. 호신술에 있어서 동방의 유술, 무술, 검술 등처럼 체계적이며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발전을 멈출 수밖에 없는 부류라는 게 전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시작점이라는 동방에서도 어느 정도가 마스터다 라고 정확히 규정짓지 못했다. 사람 가운데 비교하여 타인을 훨씬 뛰어넘는, 그게 경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한 사람을 마스터라고 칭할 뿐이었다. 아마도 200년이 넘는 시간을 무술과 지내온 하윌은 분명 최고의 경지에 달한 마스터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30대 정도의 젠드가 그 이상이라니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펠리언도 그렇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꼬이는 것 같군.' 분명 펠리언도 마스터라고 말하기에는 거리가 있지만 자신과 비교하여 떨어지는 실력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고작 경비대에 근무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군. 적어도 기사라면 대단한 대접을 받았을 텐데‥." "그렇죠? 뭔가 숨기는 게 있어요." "혹시 너무 촐랑대는 성격 때문에 기사단에서 받아주지 않은 게 아닐까?" '맞는 말일지도 몰라.' 시즈는 어린애를 놀리듯 공녀를 향해 에베베 하고 혀를 내미는 불경한 짓거리에 정신이 팔린 젠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곧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일행은 글로디프리아에서 2일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초원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노숙을 준비했다. 여인들을 제외하 고는 포근하게 깔려있는 잔디로 만족할 모양인지 별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아헨에서 준비 해두었던 고기를 수프에 넣으며 펠리언이 꺼낸 말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사전에 그저 여행에서 있을 몬스터이나 산적들의 습격에서 보호하는 거라고 여겼던 시즈 일행은 음식을 먹던 것을 멈추고 되물었다. 데린은 냉정하게 얼굴을 굳이고 착 가라앉은 어투로 말했다. "그대들을 속여서 미안해요. 이 여행은 그냥 제가 약혼자를 보기 위한 싱거운 이유가 목적이 아니에요. 현재 실베니 아 중앙에서는 공작들 간의 권력이 충돌하고 있어요. 상대인 케스터 공작은 무엄하게도 저희 가문을 밀어내고 실베 니아를 좌지우지할 헛된 망상을 꾸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궁정 기사단 이상의 군사력과 모든 영족과 비교 하여 그 이상의 명성을 가지신 '값싼 남작'님을 끌어드리기로 하신 거죠. 그래서 약혼녀인 제가 직접 가는 것이고 요." "그렇다면 지금 공격이 시작될 거라는 소리는 케스터 공작 전하께서 공녀 전하가 글로디프리아로 가는 행로를 막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허탈하게 웃는 시즈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기껏 엘시크의 권력 다툼을 피해서 타국으로 왔건만 또다른 권력 분 쟁의 그물 속에 그는 발을 들여놓고 만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시즈의 팔을 레소니가 꼭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이 동행을 거절한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지는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힘이 곡 필요했어요. 용서해 줘요. 흑‥." 그러고 공녀는 여자의 최대 무기라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의 가식적인 웃음과 눈물에 대해서 지겹 도록 봐왔던 보를레스와 카이젤, 그리고 헤모는 내심 코웃음쳤다. 시즈도 동료들과 생각이 별반다르지 않은 모양이 다. 하늘을 올려다 보며 키득거리던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미안하다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희는 그만 갈라지도록 하죠." "안되욧! 제발 부탁이에요. 저를 도와주세요." "가문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공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게다가 눈물 을 흘린 행동은 귀족들의 가식을 끔찍해하던 그들의 기분만 망쳐놓았을 뿐이었다. '쳇! 이들이라면 죽더라도 가문의 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끌고 왔더니만‥.' 자연스럽게 눈물을 훔친 그녀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순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바라보며 시즈 를 잡기 위한 최후의 카드를 내놓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저희는 시즈, 그대의 힘이 꼭 필요해요. 거절한다면‥." 레소니는 갑자기 차가워진 데린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대신하여 울까봐 걱정됐었는데 차가운 땀이 등을 쓰다듬으며 순진한 소녀를 만류했다. '그 때의 협박을 또 써먹을 생각이군.' 코를 살짝 만들이며 코웃음을 감춘 시즈는 자신만만하게 협박을 해오는 여인이 불쌍해졌다. 고귀하다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더러운 종기들이 아닐까?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두렵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요? 당신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레소니는 아닐 텐데요."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군요. 난 시즈입니다." 정확히는 '난 마땅찮은 시즈입니다.'였지만 청년은 귀찮은 부분을 생략했다. 눈앞의 영악한 여인이라면 이 말뜻을 이해하겠지. 그 예상대로 데린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댔다. 설마하니 정말로 대륙의 명사겠느냐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수가 바닥나자 그녀는 거침없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필요함을 위해서는 신발조차도 핥을 수 있는 용기를‥. 집안의 가훈을 그녀는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달라는 만큼 포상하겠습니다." "달라는 만큼이라‥ 시즈 도와주지 그래? 공녀 전하께서 무릎까지 꿇고 빌고 계시잖아. 잊었어? 아직 젠.티아 드.로 안 남작이 남아있다고! 그에게서도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얼핏 들으면 돈에 눈이 멀은 젠드가 하기에 딱 알맞은 말이었다. 그러나 시즈는 진지하게 어조로 어떤 부분을 강조 하여 말하는 그의 말이 뭔가 의미심장한 여운이 담겨있는 것을 느꼈다. 사실 시즈는 누군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하 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심성과 젠티아의 의미심장한 눈빛. 고개를 돌려 헤모의 의사를 묻자, 그는 놀랍게도 시 즈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젠드를 턱으로 가리킨 후 손으로 허락을 표시했다. '헤모는 젠드와 안면이 있다고 했지. 헤모와 인연을 갖었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닐 것이다.' 설마 지금 찾아가는 사람이라고는 시즈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엄청난 검술 실력과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어투와 행동. 청년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번만입니다." "고마워요. 시즈 님. 이번 일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큰 포상을‥." '나를 무릎 꿇게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주지.' 그녀는 입과 마음이 따로 노는 여인이었다. 그런 공녀를 보며 젠드는 물고있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여자군." 담배연기는 아무도 모르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새의 모양으로 변하여 북서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아침의 햇볕은 간밤의 바람으로 새파랗게 질린 풀잎들을 녹여주었고 촉촉한 연녹의 빛깔은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보를레스는 곧 이런 아름다운 곳이 피로 더러워질 게 안타까웠다. 그의 눈에는 잠시 후 격전의 상대가 되어줄 병사들이 들어왔다. 젠드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 생한다. 평소의 시즈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귀족들의 모략에 숨겨진 그들의 참모습을 알고 흥분한 거겠지. 어쩌면‥.' 자신 또한 흥분하고 있었다. 싸우게 될 이들의 피가 하늘로 솟아오를 것을 예상하면서. '난 시즈처럼 연약하지 않다.' 그는 닥쳐올 싸움과 피와, 비명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전원! 공격!" 까마득히 몰려든다.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았지만 시즈들은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보를레스과 젠드는 이빨과 검을 드러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데린은 계획대로 되어간다는 생각에 웃음을 띄고 있었고 앞으 로 일어날 일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오직 레소니 뿐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기마병. 초원에서는 당연한 공격술이었다. 시즈가 손을 들어올렸다. 듣는 것만으로 냉기가 스며드는 무미건조한 음 성이 그으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초로부터 존재했던 파괴하는 자여. 파괴하기에 창조하는 자여‥. 그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위해 생명을 먹으리 니 가져간 대가에 대한 또다른 파괴를 부르리라‥." 그가 긴 주문을 영창하는 걸 본 일이 없던 헤모와 보를레스는 수백의 병사들보다도 시즈 위로 형성된 거대한 불꽃 의 고리에 긴장했다. 반경이 무려 5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고리가 공중에서 타오르며 소용돌이치는 광경에 겁을 먹 은 것은 돌진해 오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둘씩 걸음을 멈추는 말, 그리고 사람들. "이 녀석들! 당장 돌진하지 않고 뭐하는 거냐!? 저 따위 마법에 겁을 먹다니!" 대장인 듯한 기사 하나가 손짓발짓을 하며 고함을 쳐댔지만 인간도 동물인 법. 모두들 본능적으로 불꽃의 고리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느끼고 있는 듯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겁을 먹고 있던 레소니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말발굽 소리에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즈를 돌아보는 순간, 흠칫했다. 시즈는 울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죽일 듯이 달려오던 이들이 죽음에 공포를 멈춰버렸다.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멈추었다. 자기 생명의 소중함은 지키려 하면서 타인의 생명은 장난감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슬펐다. 그들이‥ 그리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자신이‥. 불꽃이 더욱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이. "그만해라. 시즈." 그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묵직한 손바닥에 고개를 돌렸다. 젠드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제껏 보아왔 던 능글맞고 교활한 게 아니었다. 부드러움이 강한 빛을 감싸안고 있는 갈색 눈동자. 미소를 지으며 젠드는 말을 이 었다. "시즈, 넌 바람이지 불꽃이 아니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람의 노래이지. 불꽃의 춤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 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여. 분노를 가라앉히게. 인간은 고정된 잣대에 묶여있지 않아. 칭찬도, 질책도 할 수 없는 존재 자체가 인간이야. 아니 생명이라는 존재일지도 모르지. 어떤 것을 희생시키고 살아가는 것. 그게 인간이지. 물 도, 대지도, 불꽃에 휘말렸지만 그대만은 영원히 바람이기를 바라네. 그대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은 가. 언제까지 생명의 단편을 보고만 있을 건가?" 그렇게 말하고 젠드는 크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대지가 화답했다. 쿠르르르르르‥ 그에게서 시작된 작은 진동은 바다 저편에서 시작된 작은 파도가 해일이 되어가듯 커졌고 시즈들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말에서 떨어지고 넘어지는 등의 광경을 연출했다. 그제서야 시즈는 깨달았다. 사내에게서 느꼈던 동질감. 그러나 아직도 마법 시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시즈를 보고 젠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소니, 잠깐만 이리 와볼래?" "에?" 머뭇거리며 레소니가 다가오자 젠드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턱을 괴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 도련님께서 저 사람들을 싸그리 죽이고 싶은 모양이야. 그래서 말인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어떻게?" 레소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누군가를 향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시즈에게 두려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녀에게 젠드 가 무슨 말을 속닥였다. 잠시 사과처럼 붉어진 그녀였으나 이내 결심에 찬 얼굴로 주먹을 꼭 쥐고 시즈에게 다가갔 다. "시즈‥ 미안해요." "읍!?" 폴짝 뛰어 시즈의 목에 매달려 눈을 꼭 감고 입을 맞추는 레소니. 당황한 시즈가 엉겁결에 그녀를 껴안자 주위에 서있던 이들은 볼을 긁적이는 등의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젠드는 키득거리다가 서서히 검을 뽑았다. 멀리 동쪽에서 떠오르는 눈부신 햇빛이 그의 검에 튕기며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마치 전설에나 나올 듯한 모습과 광경에 초원에 서있던 이들은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엄숙하고도 위압감이 넘치는 음성이 초록색 평원에 퍼졌다. 따스한 빛살과 함께‥. "나 '대지의 고동을, 소리를 듣는 자' 젠티아 드로안이 검을 들어 명하니 '검은 요새' 글로디프리아의 수호자들은 명을 받으라!" "예―엣!" 연약한 풀들이 흔들리고 땅이 울리는 굉음처럼 그들이 대답했다. 언덕 등성이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보라색 예복의 기사들은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부터 검을 들어올렸다. 찬란한 검광들, 그것들은 모두 가운데에서 고요하게 젠티아가 들어올린 검을 향했다.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검의 빛이 모이자 그의 검은 마치 신화 속의 용사에게만 내려 진다는 빛의 검처럼 타올랐다. 고요하게 명령을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젠티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좀만 늦었으면 나 죽었다." 검들이 흔들렸다. "손님들이 오셨는데 청소가 안되었구나. 쓰레기는 싹 치워라. 공격!" "우와아아앗!" "빌어먹을! 당황하지 마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 대장이 외쳤으나 보랏빛의 망토를 휘날리며 몰아치기 시작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꽃잎이 봉오리로 돌아가는 장면처 럼 화려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은 100 여명 정도였으나 포위선을 한치의 흐트림도 없이 유지하 면서 달려오자 포위당한 군사들은 겁에 질려버렸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전투를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먹 이를 향한 듯한 눈빛으로 달려오는 이들은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백장의 꽃잎." 기사치고는 순약하기 그지없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글로디프리아가 엘시크와 용병국, 카로안의 사이에서도 당당히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는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익장도 보였다. 시즈 일행은 그저 멍하니 보라색 물결이 함성과 함께 자신들을 노리고 있던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걸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시즈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레소니를 살며시 내려놓고 젠티아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 푸른 대지가 피로 물들겠지? "젠드 님‥. 아니, '값싼 남작' 각하." "말씀하시죠. '마땅찮은 시즈'님." "저들을 죽이지는 말아주십시오."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시즈에게 한 방 먹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젠티아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현실에 눌 리는 어린 청년의 어깨를 짚은 젠티아는 말했다. "이제야 바람으로 돌아온 듯하군. 저길 보게.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오죽하면 꽃잎 이라는 별명을 붙였겠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지‥." "저희들에게 그런 이상한 이름을 지어주신 것은 남작 님이 아니십니까?" 보를레스와 펠리언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흠칫하고 놀라 물러섰다. 헤모만큼이나 거대한 장신의 사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들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와있었다. "하하핫. 소개하도록 하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 자작이네." "안녕하십니까. 남작 님의 수발을 들어드리고 있는 마크렌서 라고 합니다. 귀인이 오셨다고 하여 마중을 나왔습니 다." 데린은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말싸움으로 지내왔던 무례한 사내가 실베니아 최고의 영웅, '값싼 남작'이라니‥. 하지만 마크렌서 자작의 '귀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앞으로 나서 공손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데린 킬유시라고 합니다." "아! 아버님이 혹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십니까? 남작님의 약혼녀라고 하시던‥." "예." 약간 수줍은 듯 눈을 내리 깔아보는 그녀였으나 이미 젠티아는 볼짱 다 본 상태였다.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는 젠 티아 때문에 펠리언을 제외한 이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돌려야 했다.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는 공녀 를 바라보던 토클레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시즈 앞에 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귀인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마땅찮은 이', 대륙의 현자시여‥." "아!? 예, 예에. 저, 저도 영광입니다." 설마 공녀를 무시하고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시즈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을 더듬거렸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토클레우스는 일어서며 말했다. "각하의 말씀대로 굉장히 귀여운 분이시군요." 당황한 시즈는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다가 아예 씨뻘겋게 달궈진 철처럼 되어버렸다. -92- "오늘은 축제다!" 간단했다. 글로디프리아에서의 축제는. 젠티아에게서 나온 한 마디에 분주 하게 움직이는 성안의 사람들을 보며 일행은 어이없음이 무엇인지 각별하게 맛볼 수 있었다. "각하, 제발 예복을 입어주십시오." "난 미남이라서 평복으로도 남작의 티가 풀풀 풍기니 걱정말게." 울상을 지으며 시종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쫓아다녔지만 젠티아가 누구인가 . 대륙 최고의 기사, '값싼 남작'이 아니던가. 생쥐처럼 빠져나가 자취를 감춰버린 성주를 찾기 위해 시종장은 어제점심쯤에 성주와 함께 도착한 귀 빈들의 방을 두들겼다. "죄송합니다. 성주 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요. 오지 않으셨습니다." 찰칵. 문을 걸어 잠근 후에야 옷장에서 얼굴을 내미는 '값싼 남작'. 그는 성주에게 제대로 옷을 제대로 입히고 싶어하는 시종장의 노력을 이렇게 평 가했다. "후우‥ 고맙다, 시즈. 덕분에 시종장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제서야 헛기침을 하면서 성주의 위엄을 차리는 젠티아였지만 전혀 어울리 지 않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성주 님!" "으아아아악!" 비명이 복도 저 편으로 사라져간다. 자신의 성에서 시종장에게 쫓겨다니며 비명을 지르는 성주. 막 세수를 하고 나온 헤모는 중얼거렸다. "그 당시 성투사들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냉혈한처럼 피를 몰고 다니던 젠 티아 드로안이 이토록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건을 건네주는 시즈에게 말했다. "시즈, 잊지 말게. 사람은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은 단편적이야.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면 진실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네. 그 러니‥ 우리가 움직여서 바라보세." "알겠습니다‥." # 축제는 기사들뿐이 아니라 성의 주민들, 그리고 아침에 '백장의 꽃잎'들에 게 얻어터졌던 병사들까지 모두 즐거워했다. 검집으로 얻어맞기는 했지만 힘이 대단한 기사들이었기에 병사들은 몇 군데의 골절상은 가벼운 부상이었 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들을 치료하고 격려하자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 다. 사실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축제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지만 시즈는 그 모습이 시끄럽게 즐기는 축제보 다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과 푸짐한 음식들. 그 날 치고 박고 싸웠던 이들도 서로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춤을 추고 서로에게 술잔을 건넸다. "성주 님의 연사가 있겠습니다." 잠시 나팔 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젠티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약간 쑥스러운 지 헛기침을 몇 번 해댄 그들의 성주는 크게 소리쳤다. "즐겁습니까?" "옛!" "그럼 나도 껴주시오." "하하하하핫!" 그게 다였다. 시종장과 토클레우스가 그게 무슨 연사냐고 머리를 감싸쥐고 절규했지만 젠티아는 웃음으로 때울 뿐이었다. "자자! 다들 내려가서 즐기자고!" 인간은 어쩌면 더럽고 추악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어울리고 있지 않은가. 나도 인간이다. 이렇게 어울리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고 있지 않은가. 시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이어서‥ 다행이야.' # "어찌하시겠습니까?" 펠리언은 걱정스런 어조로 데린 공녀에게 물었다. 축제가 끝나가지만 데린 은 약혼자 앞에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누가 그런 불량잡배같은 사람이 '값싼 남작'이라고 생각했겠어. 그나저나 그 앞에서 천방지축처럼 굴어댔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 "모르겠어요." 계략이라는 것은 속임수에 필요한 비밀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무리 영악 한 공주라도 젠티아는 그녀의 진면목을 확연히 알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굴리던 데린은 중얼거렸다. "유혹하는 수밖에‥." "천사조차 능가하는 공주님의 찬란한 미모라면 제아무리 냉혈한이라도‥." 데린은 위로인지 찬사인지 알 수 없는 펠리언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저었 다. "오늘 계획이 실패하던, 성공하던 간에‥ 펠리언은 꼭 의사랑 상담 좀 해요 ." "예! 공주 전하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의사라고 고칠 수 있을까? 왁자지껄한 성안은 검은 요새라는 별명이 주는 분위기하고는 조금도 동질감 이 들지 않았다. 데린은 젠티아를 찾아다니다가 그가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가 없어 끝내 지나가던 시녀에게 물었다. "드로안 남작께서는 어디에 계시죠?" "성주 님께서는 한 시간쯤 전에 시즈 님과 성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시즈 님과?" 다른 일행들은 연회장이나 거리에서 즐기고 있던데 그 둘만? 데린의 뇌리에 토클레우스의 한 마디가 내리쳤다. '각하의 말씀대로 굉장히 귀여운 분이시군요.' 실제로 귀엽다고 해도 성인 남자끼리의 사용할 말이었을까? "서, 설마‥." 그녀는 섵부른 추측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입술을 손으로 막은 채 다른 손으 로 치마자락을 잡고 성벽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질주라고 할 수 있는 빠르기였다. "정말‥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젠티아는 잔은 흔들어 안의 푸른 액체를 찰랑거리게 만들었다. 겨냥하듯 한 눈을 감고 일렁이고 굴절되는 잔을 시즈에게 건네며 말했다. "인간이 인간을 본다는 것은 이런 수많은 흔들림과 굴절 속에서니까‥. 누 가 자기 자신은 바위처럼 묵직하게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군요." 잔을 통해서 보이는 젠티아의 얼굴은 여러 가지였다. 고통스러운, 기쁜, 능 글맞은, 우는. 이 가운데 무엇이 그의 진정한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창! 잔이 부딪이는 소리가 경쾌했다. 젠티아의 갈색 눈동자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시즈는 전부터 가 지고 있던 의문에 대해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 그냥 당신이 왠지 모르게 친근합니다. 마, 마치 가족!?" 이상하게 생각한 가능성이 다분한 내용이었다. 질문하는 시즈도 그걸 모르 지는 않았기에 긁적이며 쑥스러움을 감췄다. 글로디프리아의 젊은 성주는 대답을 하기 전에 술잔을 비웠다. '푸른 바닷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베니 아의 대표적인 술은 상당히 씁쓸하면서도 끝맛이 깔끔한 특이한 술이었다. "후‥ 좋군. 혹시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나?"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면‥ 오래 전 펜실바니카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던 4명의 음유술사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그래. 잘 아는 군. 그게 너야." "예?" "표정이 멋지군." 현재 시즈의 표정을 멋지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은 대륙의 전인구를 들어 1명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 정도로 충격을 먹은 시즈의 얼굴은 차마 묘사 하기 불쌍한 수준이었다. 젠티아의 칭찬이 타인에게는 욕이라는 걸 그 동안 의 여행으로 충분히 습득하고 있던 시즈였다. 얼른 진지한 모습으로 돌변하 자 젠티아는 아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잔에 '푸른 바닷물'을 따라 들이 켰다. "아릴을 만나지 못했나?" "아릴 님이요?" "만났군. 그래. 그 아이가 바로 '바다의 악보를 그리는 이'다. 들어봤겠지? " "예." "그리고 내가 '대지의 고동, 노래를 듣는 자'지." 시즈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의 인물과 얼굴을 마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전설 속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술이 마시고 싶은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한 젠티아가 그의 잔에 넘치도록 '푸른 바닷물' 을 따랐다. "그‥ 그만!" "어허! 남자가!" "그거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마시라고 만든 게 아니겠나?" 헤모가 들었으면 목을 조르며 내동댕이칠 말이었지만 젠티아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시즈는 내심 탄복했다. 시즈도 술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했기에 비싼 술을 마다하지 는 않았다. 곧 얼굴이 달아오르도록 마신 그는 몸을 흐늘거리게 만드는 취 기에 들떠 풀쩍 뛰어 성벽 난간에 앉았다. 매우 위험했지만 그 자리에서 자 살할 정도로 정신이 엉망이지는 않았고 포근한 바람이 그를 감싸안아 취기 를 약간은 씻어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을 부리는 군." "그런가요? 이 곳에 와서 많은 것을 얻었지요. 그리고 잃기도 했고요. 하지 만 모든 게 사라져도 바람과 저 달만은 저와 함께 해줄 겁니다." "느끼고 있는 건가? 역시 대륙이 인정하는 현자 '마땅찮은 시즈'로다!" "큭큭큭‥ 그래서인지 저를 마땅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시즈는 자조적인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시니컬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의 목소리는 느릿한 곡조를 만들어갔다. 저편 하늘로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들이칠 게 두려워 창문을 닫아보지만 가슴속에 내리는 빗줄기는 누가 막을 수 있을지 흐르고 흘러 넘치고 방울이 되어 흘러내리네. 오 보석같은 슬픔이여 그대는 나를 상쾌하게 쓰다듬는 작은 새소리지만 바닥에 남겨진 먼지들은 쌓이고 쌓여 투명하길 원하는 내 마음을 변색시키네. 그만 내버려두라고 외쳐보지만 빛나는 슬픔을 가져갈 때까지 끊임없이 내 심장에 연장을 대고 파 내려가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갑자기 벅차 오르는 슬픔에 춤을 멈추고 눈가를 훔 쳤다. 맑고도 청아한 음성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름다웠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안타까움도 포함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성벽을 바라보기만 하자 젠티아는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시즈의 노래에 놀랐지만 축제의 분위기가 장례식처럼 변해버리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시즈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바로 우렁찬 노래가 글로디프리아에 울려 퍼졌다 . 별들은 고요한 시선에 여인의 가슴은 설레이고 달은 내민 빛의 손바닥은 사나이의 용기를 어루만진다. 밤은 아름다운 춤을 청하는 시간 사내여 무릎을 꿇고 고백하라 푸른 바다보다도 넓고 깊은 그대의 사랑을! 밤은 수줍은 미소를 감추는 시간 여인이여 손을 내밀어 허락하라 어둠 속에서 태양처럼 따스이 그대를 감싸줄 사랑을! 사내의 힘있는 발걸음! 내딛는 곳곳마다 타오르는 열정을! 여인의 흩날리는 원피스. 휘도는 순간마다 풍겨나는 순정을! 짙은 회색 빛깔의 구름을 사라지고 투명한 밤은 우리를 축복하네. 시즈처럼 깨끗하지도 청아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투박하기만 했지만 그 투 박함은 노래에 젠티아 특유의 익살스러움을 잘 느끼게 했다. 그 와중에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불협화음은 슬픔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웃음 을 되돌려놓았다. 무심결에 따라가는 선율, 피어오르는 미소, 축제는 다시 시작되었다. 활기가 오른 축제를 잠시 지켜보던 젠티아는 반쯤 눈이 감긴 채 히끅거리고 있는 시즈를 감싸안아 난간에서 내려놓았다. 시즈는 키가 작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의 품에 꼭 맞았다. "좀더 먹어야 겠군. 아직 2, 3년 정도는 더 자랄 수 있을 거야." "꺄악! 뭐, 뭐하는 거에욧!" 젠티아는 갑자기 시즈가 여자처럼 비명을 지르자 눈을 의심했다. 내가 남자 라고 생각했던 게 여자였단 말인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여성의 음성이 들 리자 젠티아는 계단 방향이 그 발원지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당장 떨어지지 못해욧!" "시끄러워‥." 잠깐 졸았던 시즈가 여자의 비명에 깨어나 젠티아를 밀치고 계단으로 걸음 을 옮겼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려왔지만 그리고 히끅거리는 소리 는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하하‥ 오늘 못한 이야기는 내일 해야겠군." "무슨 얘기인데요?" 도끼눈을 치켜 뜬 여인은 바로 데린이었다. 젠티아는 그 예의 능글맞은 표 정으로 그녀를 이제서야 봤다는 듯 놀라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오호‥ 무례한 사람을 약혼자로 두신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 님 아니십니까 . 여기는 무슨 일이신가요?" 그가 놀라는 게 아니라 놀리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데린이었다. 입을 삐쭉인 데린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와 젠티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짜악! "정말 끝까지 무례하군요. 아무리 그대가 '값싼 남작'이라지만!" "괜히 '값싼 남작'이 아닙니다만 공녀 전하‥." 젠티아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면서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화 가 머리끝까지 침투한 데린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삼류잡배라고 해도 약혼녀한테 이러지는 않아요." 그럼 약혼녀는 약혼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된다는 건가? 젠티아는 그렇 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데린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을 보고 얌전히 인 형처럼 흔들렸다. 얼마나 흔들었을까? 머리 속이 죽이 되지 않았을지 걱정 하는 젠티아에게 한껏 화가 풀린 데린은 도도하게 말했다. "나 당신을 유혹하러 왔어요." "‥‥." 쿨럭. 막 '푸른 바닷물'을 들이키려던 젠티아는 여인의 얼굴에 물고 있던 액체를 뿜어버리고 말았다. 데린은 축축한 물방울이 맺혀있는 머리칼을 닦 지도 않고 부들부들 떨어댔다. 젠티아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걸 느끼게 만든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딱 붙은 붉은 드레스로 드러난 육감적인 몸매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두근거릴 만큼 매혹적이었고 풍성하니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은 술방울이 촉촉하게(?) 맺혀 달빛에 반짝였다.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의 라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던 젠티아는 여인의 피부가 얼마 나 새하얀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 이 무뢰한!" 이번에는 맞을 수 없지. 데린의 가는 팔은 도도한 성격과는 달리 가냘픈 여 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늘고 깨끗하게 솟아오른 아미와 화가 나 살짝 깨문 붉은 입술. 젠티아는 변태 아저씨같은 미소를 지워버렸다. 데린은 잡 힌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치다가 고요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시선에 흠칫 놀랐다. '뭐, 뭐야? 그 눈빛은?' 갑자기 드레스선이 깊게 파인 가슴을 가리고 싶어지는 거지? 왜 그의 눈길 을 받아내기가 힘들지? 오기를 내여 발끈하고 고개를 든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가득히 자신을 담은 갈색의 눈동자에 화끈하고 볼이 달아오르 는 걸 느끼고 눈을 내리깔았다. 젠티아는 그녀를 잡아당기며 귀에 은은하게 울리도록 속삭였다. "날 유혹하겠다고 했지?"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이미 늦었어." "아! 앗!" "쉿!" 데린은 목덜미에 느껴지기 시작한 감촉에 도망치려고 했지만 젠티아는 놓아 주지 않았다. 몸을 섬짓섬짓하게 만드는 감각이 입술에 닿을 때까지는 그녀 는 눈을 꼭 감고 장난꾸러기 약혼자에게 매달렸다. 숨쉬기가 곤란해 때쯤 되어서야 입술을 뗀 젠티아는 의외라는 듯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유혹한다고 하길래 기대했는데‥ 완전 초보군!" 데린의 하이힐이 젠티아의 발등을 찍었다. 한 남자의 능글맞은 비명이 글로 디프리아의 성벽에 울려퍼졌다. 그로부터 5일 후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과 공녀 데린 킬유시의 결혼식 이 거행됐다. 그 때까지 시즈는 레소니에게 여러 가지 마법을 가르치며 시 간을 보냈는데 하루도 우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알려주는 대륙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불안한 기운을‥. 그리고 그 기 운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뺏어가 리라는 걸. '또 다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맡고 싶지는 않다.' 결혼식이 끝나고 젠티아는 그에게 말했다. "자네는 곧 능력에 완전히 눈을 뜨겠군. 미리 말해두겠지만 눈을 뜰 때는 고통이 따를 것이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기를 바라네. '바람을 노 래하는 이여'. 그대를 믿네.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라겠네. 자네 의 힘이 불러온 불행이니 그 힘으로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엘시크에서는 시즈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세 이서스가(家)가 반란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들통나 헤트라임크가 곧 처형된 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주었던 존재들을 다시 빼앗기 시작했다. 시즈는 통곡했다. 3권 24 악장 청년, (자신의)생명의 무게를 알게 되다. 초원는 며칠 사이에 여기저기로 들꽃이 피어 있어 바람에 하늘거렸다. 여느 때 같으면 잠시 멈춰서서 향기라도 맡 아보고 싶었을 레소니였지만 지금은 눈길조차도 마차 밖으로 줄 수 없었다. "시즈‥ 헤트라임크 님은 괜찮을 거에요." "그, 그럴까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시즈였지만 그 헬쓱한 미소가 단순한 근육작용으로 인한 억지스런 표정이라는 걸 부인할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마차의 진동과는 상관없이 그의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기를 끌어안 듯 안고 있 는 레소니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즈의 슬픔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듬은 팔에 힘을 주었다. 시즈는 미쳐 날뛰지 않는 자신이 경외스러웠다. 만약 젠티아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벌써 그랬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참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했다. '난 알고 있었다.' - 난 묻고 싶습니다. 마땅찮은 이여…. 그대는 막힌 물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 폐단적인 귀족들을 뜯어고칠 것입니 까, 백성들을 위한 직접적인 구제정책을 펼칠 것 입니까? - 썩어가는 근본을 뜯어고치겠지요. - 그 말은? - 귀족을 부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왕족도. - 이거 예상 이상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마땅찮은 이〉로군요. 하지만 기억해 두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그대는 이 름 그대로 인식되어버릴 겁니다. 이미 그들은 시즈에게 경고하였다. 몇 번이고 깨물어 검게 변색된 입술이었지만 흰 이빨은 주저없이 파고들었다. 언 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적의 어린 시선들. 일어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엎드린 자리를 기대와 시기의 흙으로 채워 나갔다. '아마도 왕자를 끌어드린 리미뇌 홀에 대한 일은 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눈에는 내 가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 비쳤을 테지.' 그러나 설마하니 전혀 상관도 없는 헤트라임크를 끌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대마법사로서의 헤트라임 크를 믿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입지나 권력에 대해 바퀴벌레보다 예민하게 반응했고 드래곤보다 포악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 그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지. - 특별한 관계라니요?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젠티아. 잠시 뜸을 드린 젠티아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연기의 빛깔처럼 비바랜 회색의 역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으로부터 20000여년 전, 대륙에는 아주 발달된 문명이 자리했었다고 한다. 과학문명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하늘 을 나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고 바다 속을 탐험할 수 있는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학자들은 대부분은 전 설에나 나오는 허구이며 현실성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지만 우리는 과학문명이 있었다는 걸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고대 문명의 잔재이니까. 자신들을 '역사의 고리'라고 부르는 그들은 과학문명의 멸망에 대해 의구성을 가졌다. 추측하기에 아마도 '역사의 고리'는 과학문명의 후손이기보다는 과학문명을 찬양하고 부흥시키려고 했던 이들의 후손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찬란했던 고대문명의 멸망에 대한 원인으로 한 가지 종착점을 꼽는데 성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문명.' 그들은 누구보다도 찬양하던 문명을 연구하여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 과학문명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도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 문명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을 망설인다. 우선 그들이 행한 것은 자신들의 연구 바 탕이 되었던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멸망으로 다가가지 않도록 고대 문명의 역사 속에 서 가장 안정된 시기를 되풀이한다. 마치 고리를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15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즈, 아무리 지식이 얕은 역사학자에게 물어봐도 15000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게 아니다. 예상일 뿐이지만 아마도 고대 문명이 찬란했지만 이토록 긴 역사를 지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륙을 지배하는 '역사의 고리'일지라 도 시간과 함께 발전해가는 생명의 진화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될 기미를 보이면 즉시 그 원인을 박멸했다. 어떤 때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녀석들은 그 잔혹 하고도 저주받을 행위를 '신성한 회귀'라고 지칭했다. '네가 알고 있는 펜실바니카 또한 그들이 만들어낸 존재다.' 아무리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그들의 행위는 만행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대 했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모든 생물들이 진화를 거듭했지만 오직 인간만이 만 년이 넘는 세월을 상태로 보냈다. 생태 계는, 아니 세일피어론아드 자체는 그런 인간을 인정하지 못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이유니 까. 제일 먼저 '역사의 고리'와 맞선 이는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였다. 그가 나타날 당시, '역사의 고리'는 '신성한 회 귀'를 발동하고 있었다. 노래를 듣는 자답게 사람들의 고통과 듣던 그는 '역사의 고리'와 맞서 싸우지만 실패한다. 그리하여 그는 죽고 대지의 의지는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의 검에 숨어서 새로운 때를 기다린다. 그 검이 바로 내 손에 들린 이 녀석이야. '성음검(聖音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러다가 '대지의 노래를 듣는 자'에게도 동료가 생긴다. 언제나 패배를 하면서도 맞설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는 기 쁜 일이었지. 동료는 당시에 개혁을 꿈꾸던 레이모하 교단의 작은 일파였어. 하지만 총교단은 '역사의 고리', 그 자 체였지. 개혁파는 멸망하기 직전 그들의 모든 신성력으로 쏟아서 성수 병 하나를 만들어내고 물의 의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성수 병을 맡긴다. '그게 바로 '바다의 악보를 그리는 이'의 탄생이었지. 물의 의지는 그 성수 병, 이플리샤에 들어있어. 지금은 아릴이 가지고 있지.' 신성력과 물의 의지를 함께 가진 이의 힘은 그야말로 끝없이 넓고 깊은 바다처럼 거대하여 처음으로 '신성한 회귀' 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고리'가 내보인 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물의 악보를 그리는 이'가 강하 기는 했지만 파괴적이지는 못했고 음유술사들은 다시 한번 패하고 만다. '다음은 '불꽃의 춤을 추는 이'지? 간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컬컬하군.' 솔직히 말해서 음유술사 중 최고의 말썽꾸러기라고 할 수 있지. 탄생도 특이했다고 하더군. 원래 불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물론 부싯돌 긁어대면 불씨가 튀기고 나무가 번개를 맞으면 그 열로 불이 붙기는 하지만 불 이라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자연과 어울려 나타난다고는 보기 어렵다. 불이라는 존재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그렇듯 '불꽃의 춤을 추는 이' 역시 인간의 금지된 실험에서 태어난다. 사실 그는 두 음유술사를 막기 위해 '역사의 고리'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역사의 고리'에서 도망쳐 나온 불꽃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불이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어지듯이 등장할 때마다 점점 강해졌다. 어떻게 전승되 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의 의지는 내가 알기로 전승되지 않는다. 시대마다 불의 의지는 계속 남아있던 걸로 봐서 그들이 직접 전승시키는 모양인데 그 내용은 알 수 없지. 어쨌든 대지와 물, 두 의지의 음유술사와 불의 음유술사가 3번째 만났을 때는 '불꽃의 춤을 추는 이'는 이미 두 술사의 힘을 훨씬 능가해버린 상태였지. 그러나 술사의 힘은 자신이 띄는 의지와 연관된 것. 언젠가 불꽃을 태우는 연소물이 사라지면 꺼지게 되겠지.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불 안해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과정이었는지 모르지만 존재 자체에 불의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언제인가부터 너 무나 강대해진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거의 힘을 쓰지 않았다.그런 꺼져가는 불의 의지를 되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바람의 존재지. 바로 너, 바람을 노래하는 이.'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언제부터 존재했고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존재가 드러낸 게 2 번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펜실바니카 사건이었다. 그리고 시즈, 네가 두 번째지. 우리의 이름이 나타내듯이 악보를 그리고 노래를 듣고 춤을 추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이가 없으면 불가능하듯이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음유술사들에게 가장 완벽한 기회였다. 그러나 전설대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지. 이 처럼 우리 음유술사들, 일명 '음향의 축제'과 '역사의 고리'는 가히 100 세기에 달하는 세월을 투쟁하며 흘러왔다. 그리고 지금 다시 세계는 '마땅찮은 시즈'의 등장으로 인하여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이'로서의 시즈가 아니라 마땅찮은 자로서의 너를 없애려고 한 거야. 바람의 등장은 스치듯이 빨리 지나갔 기 때문에 그 능력은 나도 알 수 없다. 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듯 가장 광범위하고 토네이도처럼 자연이 일으키 는 최고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밖에는. 진정한 바람의 의지를 깨달아라. 절대로 광풍이 되어서는 안돼. 온 화한 봄바람처럼 귓가를 스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을 수 있는 그런 바람이 너의 의지이길 빌겠다. 미안합니다. 젠티아, 난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 * "저 분은 그 유명한 대마법사라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어쩌다 저렇게 되신 건지‥." "역적 모의에 가담했다더군. 아스틴의 밀정과 손을 잡았대."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은 한 기사의 고함 소리에 밀쳐 넘어지면서도 발길을 떼지 않았다. "비켜라. 죄인을 형장으로 후송 중이다!" 그 구경꾼들 사이에는 시즈 일행도 끼여있었다. 부르르 하고 가슴을 뚫고 나오려는 분노를 힘겹게 가라앉히면서 시 즈는 끌려가는 헤트라임크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시즈‥. 시즈!" "네‥." 몇 번이나 불러야 대답할 정도로 멍해진 정신을 가지고도 시즈의 대답은 너무나 차분했다. 도리어 흠칫하고 놀란 보를레스가 말했다. 보를레스의 시선은 헤트라임크가 아니라 그 뒤로 후송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구경꾼들의 얘기를 듣자니 헤트라임크 님 뒤의 사람들은 랑쉐르 백작가의 사람들 같다. 저들도 아마 무고한 이들 일거야." "그렇겠지요." 젠티아의 이야기를 빌려보자면 그들은 역사의 후면을 100 세기동안 지배했고 반항의 역사는 가차없이 삭제시켰다. 그들에게 인간은 역사라는 한 편의 예술품을 만드는 붓일 뿐인가? 랑쉐르 백작가는 제플론 내에서 사병이 많기로 유명했다. '나 하나 때문에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구나. 왕가는 죄없는 사람을 하나 죽이는 김에 귀찮은 사병력 을 가지고 있던 백작가도 함께 삭제하는 것이군.' 철저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절대로 존경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었다. 이윽고 후송이 '모욕의 광장'에 들어서자 기사 들은 헤트라임크를 비롯한 백작가의 인물들을 뒷무릎을 걷어찼다.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전(前) 귀족 에게는, 누명을 쓴 이들로서는 엄청난 모욕이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야유와 함께 쏟아지는 썩은 계란, 쓰레기. 멀찍이 떨어진 기사들은 그걸 보면서 키득거렸다. 서민들에게나 기사들에 게나 대마법사라는 지고한 자리의 주인이 무릎을 꿇고 오물 세례를 받는다는 게 삶에 있어서 상당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레소니가 고개를 돌리고 보를레스가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시즈는 잠자코 손을 내밀어 만류했다. 그의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모든 상황을 받아드리는 듯, 아니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듯 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시 즈는 가슴 속 깊이 새겨 넣었다. 누군가를 향한 차가운 증오와 함께‥. "어마마마, 꼭 이렇게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인가요, 폐하? 그들은 역적이에요. 명백한 증인으로써 아스틴의 밀정도 잡혔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학자들이 확실한 조사를 원할 겁니다. '마땅찮은 이'라는 이름을 레이모하 의 기도문 대신 웅얼대며 다닐 정도로 그들은 시즈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모함이나 계략이라는 게 후일 드러나면 이 왕가는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없애야지요. 리페른‥. 어미의 말을 잘 들어요. 난 사랑스러운 리페른에게 흠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 아요. 시즈라는 인물은 좋게보든 나쁘게 보든 왕권을 위협할 존재에요." "‥‥." 리페른은 갑작스럽게 변해가는 왕궁의 정세를 어디서부터 짚어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승 하한 국왕. 이유는 아스틴의 자객. 시즈라는 이름을 등뒤에 업고 있던 리페른은 신흥 귀족들과 학자들의 대대적인 지지로 가볍게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이 되는 순간 깨달았다. 이 나라의 절대적인 지배자는 따로 있었다 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또한 그 절대적인 세력의 일원이라는 것을‥. 리페른의 착잡한 마음을 모르는 롤젠미아누 왕 비는 마냥 사랑스러운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 시간, 제플론의 지하감옥. 두 사내와 한 명의 소년이 한 사람이 눕기도 힘든 독방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설마 그대가 밀정의 역할을 자처할 줄이야." 왕족들이나 입는 최고급 비단으로 온몸을 둘둘 말고 서있는 노인이 눈을 한 번 크게 떠 보이며 즐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인의 곁에는 15,6세쯤 되어 보이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어딘가 겁을 먹은 듯 긴장된 표정으로 나무조각처 럼 서있었다. "글쎄요. 며칠간 고되기야 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방법을 생각해낸 것은 그대가 아닙 니까? 페노스톨멘가(家)의 가주, 크레오드 페노스톨멘 자작." 벽에 기댄 사내는 상당한 고문을 받았는지 허름한 죄수복이 피로 얼룩지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쩍쩍 갈라져 있었 는데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양 담담했다. "그래도 설마 아스틴네글로드의 7 번째 은자라는 그대가 이런 모욕과 고문을 자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애송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선입견을 바꿔야 겠군." "이제라도 바꿔주니 고맙구려, 쳇. 그런데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걱정말게. 일말의 차질도 없네." 크레오드가 자신있게 말했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감옥을 둘러싼 돌들에 엄지의 긴 손톱을 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과연 계획대로 될지 설마 같은 고리의 일원을 잘라버리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대로 처형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로군. 걱정말게. 계획대로 될 거야. 헤트라임크가 처형당하기 직전 그의 아들은 나서서 구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럼 그 때 관심을 도망치는 세이서스 부자에게 돌림과 동시에 자네를 아스틴으로 책임지고 빼돌리겠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아스틴네글로드에 한동안 몸을 담다보니 그들의 규약이 머리 속에 배어들었나 봅니다. '페노 스톨멘과는 거래하지 말라.' 아스틴네글로드의 규약 중에 하나지요."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재현을 예견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네. 무엇하러 아군을 없앤다는 말인가?" 얌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년의 팔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크레오드가 인자한 표정으로 손자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로길드."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할아버지." "하하핫. 손자가 긴장한 모양이군요." 껄껄대며 감옷을 웃음으로 채우는 두 사람을 보며 페노스톨멘가의 어린 후계자는 말하려던 것을 망설였다. 아니, 그 냥 넘어가기로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시즈 세이서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군. 뭐‥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지 요, 시즈 님. 당신에게는 빚을 진 게 있으니까‥.' 엘시크는 짧은 시간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역적을 도모한 죄인, 헤트라임크에 대한 마지막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납시겠습니다." 보를레스는 무표정하게 걸어나오는 국왕의 모습이 낯익은 소년과 닮았다는데 경악했다. 젊은 국왕은 천천히 단상 위에 올라서자 주위의 웅성임이 서서히 멎어들었다. "마지막 재판을 시행하도록 하겠소. 우선 나 리페른은 엘시크 에도린 왕가의 28번째 국왕으로써 정의에 어긋나지 않은 판결을 내릴 것이오." 기사들이 검을 들어 국왕의 판결이 곧 정의임을 시사하고 자리에 앉자 죄인이라고 명명된 이들이 끌려나왔다. 잠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그들의 온몸이 질척질척하고 더러운 오물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서 폐하를 보라." '마지막 재판'이라는 것은 이미 처형이 정해진 죄인들의 죄를 대중 앞에 시사하고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판결에 대 한 정당성을 얻기 위한 자리였다. 그렇기에 죄인들은 어떤 누구라도 죽기 전에 신분을 초월하여 국왕의 얼굴을 대 면할 수 있었다. "블테인 랑쉐르 백작. 그대는 아바마마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아스틴과 결탁하여 자객을 보내여 끝내 아바마마를 살 해했다. 이에 랑쉐르라는 성을 거두고 죽음을 대신 내린다. 이의있는가?" "폐하! 저는 결단코 결백합니다. 모함입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이의가 있는 모양이군. 증인을 부르라." 병사들은 준비하고 있던 증인을 거칠게 끌어내어 결백을 주장하는 백작 앞에 내던졌다. 날카로운 눈매에 얇은 입술 을 가진 사내는 방금 전까지도 고문을 받았는지 살이 뭉텅이째 터져 있었다. "그는 폐하를 살해한 자객으로 왕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근위기사단에게 붙잡혔다. 블테인, 안면이 있지 않은가?" "레이모하에 맹세코 없습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그러나 증인은 다른 모양이네." 리페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증인의 옆에 있던 병사가 창으로 증인의 턱을 들어올리고 물었다. "네게 국왕 폐하의 살해를 청부한 자가 이자가 맞는가?" "트, 틀림없습니다." "이, 이녀석!! 언제 나를 봤다고 그런 망언을 해대느냐―!!" "조용히 햇!" 블테인이 벌떡 일어서 증인을 죽일 듯이 달려들자 병사가 그를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땅바닥을 뒹굴던 블테인은 헤 트라임크와 눈을 마주쳤다. 희대의 대마법사라고 불렸던 노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 알 수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모략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억울하여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가솔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 흙 속에 눈물을 묻은 그는 자세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슬픈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 하다못해 사랑하는 딸만이라도 살아주었으면‥. 리페른이 바라본 헤트라임크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호수였다. 죽음을 앞에 두고 형장에 꿇어앉았는 데도 마치 흔들의자에 몸을 실은 듯 했다. '저게 바로 초월자의 눈빛인가?' 연설이 입안을 헛돈다.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옆에서 탐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는 롤젠미아누, 그의 어머니를 실 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대, 헤트라임크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졌으면서도 국왕을 살해했다‥. 엘시크 마법사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써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대의 세이서스라는 성을 거두고 역시 죽음을 내린다. 이의있는가?" "없소. 난 다만 속해있는 단체의 명에 따랐을 뿐이오." "!" 기사들이 벌떡 일어서고 군중이 술렁였다. 그의 말은 배후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귀족들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놀라 워하는 게 당연했다. 헤트라임크는 시선을 리페른에게서 증인으로 나온 사내에게 옮기며 미소를 지었다. "기억하시오. 우리의 이름은 '역사의 고리'‥.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는 없소. 대륙은 모두 우리의 눈 아래 있소. 으하하하핫!" 그의 광소가 형장에 메아리쳤다. 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레오드 페노스톨멘이 무심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과연‥ 죽을 때도 그냥 죽진 않는 군." "죄가 만천하에 밝혀졌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죄인들의 목을 쳐라!" 순간 광폭한 회오리가 형장에 몰아쳤다. 사람이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쓰러질 강풍이었다. 죄인들을 지키다가 몰아 친 바람에 뒷걸음질치던 병사들은 복부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 기사가 실눈을 뜨고 외쳤다. "죄인들이 도망간다!" "아버지!" 시즈는 마법으로 단숨에 사람들을 속박하던 쇠사슬을 끊어버렸다. 너무 쉽게 끊어진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바람이 승천하는 비룡처럼 꿈틀거리며 가로막은 군중들을 밀 어내자 시즈들은 헤트라임크와 랑쉐르 가의 사람들을 보호하며 형장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기사들의 외침이 그들의 뒤를 쫓았다. "잡아랏!"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사방이 포위된 상태였지만 시즈는 외쳤다. 사람들이 장식품이라고 치부할 정도로 깨끗했던 그의 검은 이미 검붉은 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왕을 살해한 죄인이 처형되는 처형장인데 경비가 가만히 있겠는가. 수 천명의 병사 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둘러쌌다. 일행의 주위로 눈에 보이는 인원만 천 여명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닿 기만 해도 살갗이 베어지는 바람의 벽 때문에 섣불리 일행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만하거라. 아들아‥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맙구나. "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시즈는 절규하듯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헤트라임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자하게 미소를 띠고 헤트라임크는 허공에 글씨를 써나갔고 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빛이 뿜어 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동어를 외치기만 하면 주문이 시전될 것이다.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말하듯 입을 앙다물고 도리질을 치는 아들의 은백색 머리를 주름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 으며 그 감촉을 기억한 헤트라임크는 말했다. "다 큰 녀석이 눈물이라니‥. 그러고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안됩니다. 이곳을 뚫고 나가겠습니다."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시즈의 볼을 타고 눈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가 포위병들의 무리로 뛰쳐나가려고 하자 헤트라임크가 보를레스에게 눈짓을 했다. 퍼―억! 바람의 벽안에 있어서인지 더욱 크게 울리는 충격음이 퍼지며 시즈가 비틀거렸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그는 이미 너덜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헤트라임크는 정신을 잃지 않고 노려보는 시즈가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랑쉐르 백작. 이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갈 수 있소. 누구를 보내겠소?" 블테인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그는 헤트라임크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야지요. 아리에, 행복하거라." 아리에는 얼마 전 18살의 생일을 맞은 소녀였다. 그녀는 얼굴의 근육이 굳어버린 것인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가 족들을 끌어안으며 인사를 끝내고 레소니의 곁으로 가는 그녀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즈의 정신이 혼미해짐에 따라 바람의 장벽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헤트라임크가 부드러운 어조로 보를레스 와 레소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보를레스, 시즈을 지켜주게." "걱정 마십시오." "레소니‥.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겠지?." "흐흑‥ 네‥." "그럼 잘 가거라. 아들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보를레스를 뿌리치고 입술에서 터져 나온 피를 떨구며 시즈는 희미하게 보이는 헤트라임크를 향하여 무거워진 다리 를 움직였다. 창백해진 안색에 투명한 눈동자, 자신보다도 더 하얗게 세어진 머리칼의 아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트 라임크는 조금은 덜어주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시즈의 손가락이 옷깃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 다. "염원하는 그 곳으로‥ '텔레포트.'"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헤트라임크를 비롯한 랑쉐르의 사람들이 서있 었다. 바람의 장벽이 사라지자 빗발치는 화살이 하늘을 수놓는다. 비오는 곳 저 편에서 마법서적응로 보이는 책을 품에 안은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오‥. 에빌드, 기다리고 있었느냐? 내가 곧 가마. 묻은 흙은 모두 씻고 갈 테니 기다리거라." 헤트라임크는 빗줄기가 더러워진 몸은 시원하게 씻어주길 바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혈우(血雨)가 내렸다. * * * "그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니! 이런 오차가 있나!" "크레오드 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실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사내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위로하자 노인은 만면에 이채를 띠고 물었다. "실수라는 것은 만회할 수 있다는 것. 자네는 복안이 있는 모양이군." "이런 위대한 페노스톨멘 가의 가주께서도 나이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크레오드는 자존심이 쥐에게 파 먹히는 것 같았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쓸데없는 오기만 불러일으키는 자존심 수백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내 어찌 젊은 현자의 신지식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어서 말을 해보게." 그쯤 되자 사내는 냉소하며 입술을 한 번 핥고는 머리 속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헤트라임크는 솔직히 그는 살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 "그는 '역사의 고리'를 움직이던 인물이네. 우리는 서로마다 제약이 있지 않은가. 아마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하하핫.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그런 비참한 죽음 을 택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사내가 껄껄대고 웃자 크레오드는 그가 자신을 비웃는 하여 기분이 심히 나빴다. 화가 난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시즈가 도망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잘 아시는 군요. 시즈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인 시즈를 위해서 헤트라임크는 그대로 죽고 끝내겠습니까? 인간은 자손에게 뭔가를 남기는 법이지요. 그리고 헤트라임크는 '역사의 고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입 니다. 아마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게 줄 게 많겠지요." "과연‥. 그럼 숨박꼭질이 되겠군. 후후후‥." * * * - 잘 가거라. 아들아. "안돼―엣! 헉?" 벌떡 일어난 풍경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방호 마법이 걸려있는 갈색 침대보를 걷어내고 일어서자 문가에 서있던 한 사내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케‥케츠타?" 그는 시즈에게 궁중예법을 가르켰던 세이서스가의 시종이었다. 창 문을 열어보니 봄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이곳은 어디죠?" "주인님. 무슨 헛소리를 하고 계신 겁니까? 열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면 악몽이라도?" 그렇게 말하며 케츠타는 시즈의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갸웃한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악몽을 꾼 모양이에요‥. 악몽‥." 꿈이라고 생각되는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젖던 시즈의 눈에 거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비친 누군가 의 투명한 눈동자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빌어먹을, 날 시험한 겁니까? 케츠타. 그러고 보니 호칭이 도련님에서 주인님으로 바뀌었으니 시험은 아닌가?" "‥‥." "다들 어디에 있지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일행은 한가롭게도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즈의 모습이 보이자 그들은 벌떡 일어섰다. "괜찮은 건가?" 보를레스의 물음은 '부작용은 없는 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평생의 주군으로 삼은 이가 이런 고난에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시즈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리에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리는 군요. 아리에 양." '백작 영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시즈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리에는 몇 십분 전과는 너무나 다른 청년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아랑곳없이 시즈는 건조한 시선을 케츠 타에게 돌렸다. 흰자위 위에 유리구슬이 박혀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가 스칠 때마다 사람들은 냉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다. "케츠타, 이 곳은 아직 위험한데 아버지께서 이리 보내셨다는 것은 무슨 안배가 있다는 뜻 같군요." "물론입니다. 역시 '바람은 노래하시는 분'. 주인님께서는 도련님의 거론이 있지 않다면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을 멀리 피신시켜 평범하게‥." "닥치고 내놔요!" 샹들리에 수십 개가 불빛을 반사하듯 시즈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 로 막고 있었으나 언제 불길이 얼음을 뚫고 나와 폭발할지 몰랐다. 케츠타가 건넨 것은 한 장의 편지였다. 받아든 시즈는 보지도 않고 코푼 휴지를 휴지통에 넣듯이 주머니에 구겨 넣고 일행에게 말했다. "어서 갑시다. 등잔 밑이 어둡기는 하지만 불꽃이 흔들리면 '그들'의 촛대는 등잔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케츠타, 비 밀문 있겠지요? 어서 안내해주십시오." 그의 말대로 궁정기사단이 들이닥친 것은 보를레스들이 나간 후 마시고 있던 차의 온기가 다 식지도 않은 때였다. 한 기사가 차에 손가락을 담가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멀리 가지 못했다. 수색대는 10 마리의 개로 집안을 수색하고 나머지는 저택 둘레에서부터 점점 범위를 펼치며 수 색을 개시한다.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유능한 상관이 있다는 것은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지만 시즈들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불행이었 다. 비밀통로를 통하여 밖으로 나오자마자 컹컹 짙는 개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믿을 것은 다리뿐. 케츠타 가 그 자리에 멈추어 두 자루의 시미터를 뽑으며 시즈에게 말했다. "전 뒷처리를 하고 가겠습니다. 제플론을 나가서 성문의 남서쪽에 숲이 있습니다. 그 곳에 용병국으로 갈 수 있는 마법진이 있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빌어먹을!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으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네가 이 편지를 보게 되는 날,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헛헛헛‥ 내가 생각해도 너무 상투적인 편지인사말이로 구나. 얼마나 도망쳤을까? 발이 떨어진 곳마다 화살이 박혔고 말발굽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봄의 기운으로 한층 푸르러진 숲도 시선에 잡혔다. 사실 나는 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아주기를 바랬기에 이 편지를 쓸 것인가 에 대해 매우 망설였단다. 그러나 나는 쓰고 말았고 너는 보고 말았으니 과연 운명이라는 게 세상에는 존재하지도 모르겠구나. 푹! 왼쪽 겨드랑이가 따끔하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수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궁수들은 가장 중요한 인물인 나를 집중사 격을 하고 있었다. 냉소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람이란 점차 강해지는 것. 갑자기 생성된 바람은 화살의 빠 르기를 조금 약화시켰을 뿐 막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왼팔을 들어 막자 뼈를 관통하는 기분 나쁜 감각이 신 경계를 쑤셨다. 그러나 뛰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뛰는 속도를 늦추었다. 일년 전 가을, 한 청년을 보았을 때 40년 전 '역사의 고리'의 일원으로써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죽은 에빌트의 얼굴 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무저갱처럼 깊은 지하 깊숙이 묻어두었던 금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단다. 그러나 착각이었어.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을 잠식해버릴 듯한 슬픔과 그리움이었다. 허공의 뜬구름처럼 고요하여 인식도 못하던 감정들이 시즈라는 청년과의 만남으로 자극을 받아 화산처럼 솟아났지. '제발 여자들을 목표로 삼지 않기를‥.' 나가 내심 외친 바램을 들었는지 기사들은 모두 나를 향해 달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이다. 식인귀처럼 생명을 먹 고 살아왔는데, 아버지의 목숨도 먹었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픽픽 하는 석궁 소리가 나의 귓가에 울렸다. 이제는 뇌가 왼팔을 방패대용이라고 인식했는지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 막았다.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새롭 게 솟아나는 핏줄기가 바닥을 적실 뿐. 처음 내게 마법을 보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난 네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 내 마음을 깨달았을 때, 이런 이별이 찾아올 순간도 어렴풋이 바라볼 수 있었다. 힘들어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그렇군. 바로 내 뒤까지 쫓아왔었군. 그러나 난 죽지 않아. 몇 걸음만 더 가면 숲이고 나는 살 수 있다. 생명을 먹어가며 유지해온 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어. 수풀을 뛰어넘기만 하면 돼.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굉장히 차가운, 너무나 차가워서 마치 뜨겁게 느껴지는 그런 무언가가 내 등을 훑고 지나갔다. 털썩! 땅바닥에 구른다기보다는 물 속에서 회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죽는가보군. 광기에 물든 얼굴로 달려오는 기사가 보인다. 검에 묻어있는 붉은 액체는 내 피가 틀림없어 보인다. 젠 티아, 역겨워서라도 저런 인간을 용서할 수 없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잠시만, 죽기 전에 한 번만 광풍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단다. 아들아. 네 녀석이 비록 여기저기 납치되어서 걱정시키는 못된 자식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에빌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네 녀석 만한 손자를 가지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 아이도 시즈라는 기묘한 이 름을 가진 청년만큼 사랑스럽지는 않았을 게다. 압축된 바람의 의지가 손안에 느껴졌다. 양팔을 내밀기만 하면 눈앞의 기사는 갈가리 찢겨서 사라질 것이다. 아마 나와 함께 가겠지. 기사가 힘차게 휘둘러지는 검이 보였다. 끝이야. "시―즈!" 누가 날 부르지? 레소니? ‥아‥잠깐! 안‥돼! 멈춰어‥! 넌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아들아. 네가 나에게 주었던 시간은 신이 또다시 100년이라는 인생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행복, 자체가 되었단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나 깨지 않을 꿈이길 바랬단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흩날리는 핏줄기‥ 형제를 알아볼 수 없이 조각난 인간의 살들와 함께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 "아‥? 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이 때부터다. 그는 증오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생명을 먹이는 사랑을‥. * * * 어깨에서 반대편 옆구리까지를 가로지르는 검상과 이쑤시개를 잔뜩 꽂아놓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왼쪽 팔. 보를레스 가 상의를 벗긴 시즈의 상반신 처참했다.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마에서는 나무라도 태우는지 뜨 거워서 파상풍이 몸의 저항력을 이기고 득세하기 시작했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었다. "흐흐흐‥. 보를레스, 난 죽지 않습니다. 나는‥ 쿨럭. 절대로 죽을 수 없어요." "알고 있어. 넌 죽을 수 없지. 암! 죽을 수 없어." 누구에게 답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상처를 싸매보는 보를레스의 얼굴에는 절망이 떠올라있었다. "그래가지고는 소용없네." 동굴 속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는 보를레스의 눈동자에 반가운 얼굴이 묻어났다. "헤모 사제! 어디 있었습니까?" 헤모는 제플론으로 돌아온 뒤에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었다. 신전에 보고없이 실베니아에 갔었기 때문에 시즈 들은 그가 신전에 한동안의 보고를 하러 갔다고 생각했다. "보를레스! 가면 안돼!" 당장 달려가 얼싸안으려는 보를레스를 막은 것은 시즈의 피를 토하는 음성이었다. 의아한 보를레스가 멈춰있자 시 즈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벽을 짚고 일어섰다. "후후‥ 그대도 나의 이 괴물같은 목숨을 가지러 왔습니까? 교단의 명령이겠군요." "‥‥." "그럴 리가! 정말입니까?" 헤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를레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어차피 내가 살려주었던 목숨이니, 내가 가져가겠네." 아무리 주제를 모르는 보를레스였지만 눈앞에 거신처럼 서있는 사제의 무서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헤모, 아니 성투사 헤라즈 모히튼가 살기 뻗아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쳐졌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숲이로군요. 당신과 처음 만난 곳. 그 때 내 생명을 구해주었지요? 후후‥ 와서 가져가 십시오." "시, 시즈! 안돼!" 보를레스가 막아보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헤모는 그를 스쳐 시즈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고속이동술인가?' 주먹을 들어올린 헤모를 가로막은 것은 바로 아리에였다. 눈을 꼭 감은 채 팔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 보던 헤라즈는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우하하하핫! 그렇군. 시즈 네 녀석은 참 운도 좋은 녀석이구나. 레소니에 이어서는 이 아가씨인가? 이렇게 한 명씩 너를 가리고 죽어주는 구나!" "보고 있었으면서 모른 채 했단 말인가!?" 분노를 참지 못한 보를레스가 얼굴을 붉히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개도 돌리지 않은 헤라즈의 맨손에 잡혀버렸 다. 자신의 손에 잡힌 금속체가 무엇인지 상관없는지 한동안 주물대던 성투사는 비웃음에 가득한 표정으로 시즈에 게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시즈. 그러고도 '마땅찮은 이'라는 광오한 이름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천둥이 그러할까. 아리에는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켰지만 절대로 비켜서지 않았다. 그 때 시 즈가 희미하게 말했다. "아리에, 비켜요.." "그래! 그래야지!" 더 이상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헤라즈는 아리에를 보를레스에게 내던져버렸다. 귀족 출신의 소녀를 조심스럽게 받아 내려놓은 보를레스는 헤라즈의 악력 속에서 더 이상 검이 아니게 된 물체를 버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검도 통하지 않았는데 맨몸이 통하겠는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를 아리에가 달려가 잡아주었다. "하하하핫! 아주 좋은 동지애로군. 그렇지 않나? 시즈. 그 동지애 덕분에 너는 이렇게 살아남았잖아?" "내 목숨은 언제 가져갈 거요?" 시즈는 이미 모든 것을 헤라즈에게 내맡기고 포기한 듯 싶었다. "그래. 잘 가거라. 레이모하의 축복이 있길‥." "바람이여‥." 주먹을 들어올린 헤라즈는 시즈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마치 이교도의 기도문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불안한 느낌이었 다. 그리고 바람이 자신을 휘감는 걸 느낀 그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움직였다. 촤악! 그가 있던 자리에 몇 줄기의 피가 소용돌이치는 자국이 남겨졌다. 고속이동술로 피했는데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 는지 오른쪽 팔에는 수십 개의 검이 스치고 간 듯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아직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 건가?" 헤라즈는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스친 위력으로만 볼 때 그 자리에서 손을 내질렀다면 시즈의 머리가 박살나기 전에 그가 고기산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냥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게 레소니를 산산조각 내버린 바람이라고‥.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앞의 물음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습니다." "!" 원하던 시즈의 대답을 들은 헤라즈는 어린애에게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얼굴을 가 린 채 큭큭대더니 점점 크게 웃어댔다. "우하하하핫!" 보를레스와 아리에는 알 리가 없었다. 아니, 시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네가 지금 한 대답‥은 내가 너를 구하면서 했던 말이었지. 그런데 내가 한 의미는 타인의 생명이 가지는 무 게였다. 그런데 넌 자신의 생명이 가지는 무게란 말이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큭큭큭‥. 아주 재미있는 대답이구나. 매우 만족스럽군. 받아라. 성투사들에게도 한 달에 한 번 밖에는 지급되지 않 는 치료물약이다. 트롤의 피와 신관 수십 명의 신성력을 응축시킨 것이니 상처가 바로 낫는 것은 물론이고 왠만한 독도 해독할 수 있을 거다. 파상풍 따위는 말할 것도 없지. 그 정도로 네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으면 교단에 공이라 도 하나 추가하려고 했더니 오늘은 관둬야 겠군. 너희가 찾는 마법진은 남쪽으로 좀더 내려가야 된다. 수풀에 가려 져있더군. 내가 표시를 했으니까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치가 다 떨리는군요." 다른 사내에게 업혀 도망가면서도 시즈는 헤라즈를 갈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쏘아봤다.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 자 헤라즈는 키득거리면서 중얼댔다. "시즈, 생명의 무게를 안다면 좀더 강해지게나. 타인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을만큼‥." 25 악장 붉은 산양과 푸른 물병. 후세의 역사가들이 '봄의 혈사'라고 이름 붙인 사건으로부터 1 여년의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었다. 많은 '혈사'들에 비해볼 때 '봄의 혈사'는 뿌려진 피는 매우 적었지만 그로 인한 엘시크의 피해는 막대했다. 세이서스 라는 성(姓)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은 마법과 학문에서 대륙을 움직이던 두 별을 동시에 잃음을 뜻했다. 엘시크의 학문과 마법이 막대한 피를 흘린 것이다. 이를 수혈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녀석들‥. 또 살아남았다며?" "그래! 덕분에 괜찮은 건수는 죄다 놈들한테 돌아간다고! 우리는 남은 거나 해먹는 거지. 솔직히 겨울이랑 봄의 의 뢰들은 좀 힘드냐?" "그 놈들은 상금 리스트 1위인 주제에 그런 것까지 싹쓸이하잖아. 전생에 돈 못 만져보고 죽었나? 그런데 여기 음 식 끝내주는 군." "그러고 보니 정말 좋군. 고기가 쫄깃쫄깃한 게 탄력이 있는데!?" 여름이 오면 용병국의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늦겨울과 초봄에는 식량란으로 인하여 잠시 중단되었던 분쟁이나 전쟁 의 막이 다시 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배가 슬슬 불러오면 인간은 욕망을 부풀려 분쟁을 만들었다. 이런 본능적인 광경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뿐만 아니라 용병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즐기는 용병 식당에서도 볼 수 있었다. 값싼 용병식당치고는 고급 고기가 나온다는 걸 눈치챈 두 용병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이봐! 여기 요리사 누구야!?" 용병들은 대부분은 빵빵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한다. 그러니 단 두명의 용병이었지만 이들이 난동을 부릴 듯 하자 식당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은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이쁘장한 웨이트리스를 원했으나 아쉽게도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그 음성이 젊은 두 용병만큼이나 우렁차서 그들은 움찔했으나 곧 눈을 부라리고 소리쳤다. "이거 음식을 어떻게 하는 거요? 머리카락이 들어가 있잖아!" "내 거에도 들어가 있어! 만든 요리사 불러와!" 그들이 음식에서 꺼낸 머리카락을 유심히 살펴보던 노인은 씨익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둘에게 속삭였다. "음식이 맛있어서 돈 안내고 한 번 더 드시려는 군?" '헉! 어떻게?' "우리 식당이 재료가 값에 비해서 매우 고급이지. 게다가 요리는 수준급이라서 그런 손님들이 꽤 있지요. 난동을 부 리지 않겠다면 한 그릇 더 드리겠소." 상당히 유혹적인 제의였으나 용병으로서의 오기가 있는 법. 어찌 돈 없어서 수작 부릴려고 했다고 인정하겠는가. 오 히려 그들은 소리를 더욱 높였다.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머리카락이 들어갔다니까! 요리사 나오라고 해!" "반어터, 무슨 일로 이렇게 시끄러워요?" 그들의 난동에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놀랍게도 웨이트리스로서의 희망사 항을 꼭 맞춘 미소녀였다. 서서히 소녀에서 여인으로 탈바꿈을 하는 과도기(?)에 들어선 그녀는 미녀로서의 색기와 미소녀로서의 앳된 순수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목덜미과 귀를 조금씩 덮 어 귀여움을 배가시켰고, 동그랗고 무표정한 눈매 안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는 물기가 살짝 배인 입술과 함께 잘 익은 사과를 연상시켰다. "무슨 일이세요?" 요리사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용병 둘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 여기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소. 흠흠." "어디 봐요. 으음‥. 이건 제 머리카락이 아닌데요. 갈색인데다가 곱슬 머리에요. 전 검은 생머리인걸요." "열을 받아서 탈색과 구브러지는 작용이 일어난 거요. 오징어 쪼그러드는 것처럼." "아저씨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허리에 양손을 턱 올리며 쏘아보는 모습은 투박한 용병들에게 있어 애교일 뿐 그리 위협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두 용병의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주문했던 요리는 차가운 육수와 고기를 곁들인 국수였다. 둘은 자신의 논리성이 투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안 통하자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막 의자를 집어들어서‥ 끼익‥. "아아 배고프다. 시즈, 뭐 먹을래?" "‥양념 안된 베이컨." "반어터! 들었죠? 양념 안된 베이컨이래요. 난 간장에 하루종일 조린 베이컨!" "‥‥."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매우 대조적인 모습의 두 사람은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조용한 식당의 분위기를 느끼고 의아 하게 원인지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막 들어온 두 사람 중에서 키도 작고 생김새도 곱상한 청년이었다. 그는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회색의 긴팔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찌나 냉랭한지 절대로 더워 보이지 않았다. 게다 가 막 눈이 내린 듯한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수정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 청년은 외모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리에가 왜 주방에서 나와 있습니까?" 자세히 들어보면 그리 낮고 굵은 목소리도 아니었고 오히려 여자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에 정중한 어투였다. 그런 데도 난동을 부리고 있던 두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움추러드는 걸 느꼈다. "아! 시즈, 보를레스! 언제 도착한 거에요?" "방금 전에 도착했지. 그런데 저 두 사람은 뭐하는 거야? 의자를 옮기는 중인가?" "‥‥." 이번에 물어온 사내는 덩치가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음성과 어조에서 풍겨나는 느낌은 작은 청년의 정반대였다. "아하하하. 네. 여기에 내려놓을 생각이었죠. 그럼 주인장, 그리고 요리사 아가씨. 많이 파시오." 그렇게 난동을 포기하고 의자를 내려놓은 사내는 동료의 팔을 끌고 재빨리 식당 밖으로 나갔다. "왜 도망치듯 나오는 거야?" "그 녀석들이야." "그 녀석들이라니?" "그 녀석들 말이야. 의뢰 순위 리스트와 상금 리스트를 동시에 거머쥐고 있는‥." "우리 장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그?" "그래. 그룹명 '세이서스'. 별명은 '노래하는 두꺼비와 침묵하는 개구리.'" "‥‥." "어서 가자." 난동을 부리던 두 용병이 비루먹은 말의 흉내를 내며 사라지자 식당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막 들어온 두 사내는 엘시크에서 도망쳐 나온 보를레스와 시즈였고 여자 종업원은 백작 영애였던 아리에였다. 당시 시즈는 다른 사람들 의 생명을 희생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무력감을, 보를레스도 역시 마지막에 헤라즈에게서 느낀 무력감을 느꼈 다. 공통의 과제를 찾은 그들은 미친 듯이 힘을 쏟고 기술을 수련할 장소를 찾아다녔다. 온몸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그들의 이름은 용병국 서부의 용병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제 거리가 되어버렸다. "미안한데 아까 못 들었거든. 주문이 뭐였죠?" "‥‥. "난 간장에 푹 조린 베이컨. 시즈는 양념없이 구운 베이컨." "시즈는 점점 싱겁게 먹네?" 주문서에 식단을 적는 아리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냐하면 짜게 먹는 사람보다 싱겁게 먹는 사람은 미각이 매우 까다로워서 취향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맞아, 맞아. 본인의 말로는 본래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라는데 이렇게 본래의 맛을 찾다가는 아예 날생선과 날고기 를 달라고 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아." "보를레스는 편리해요. 이렇게 짜게 먹다가는 곧 음식 대신 소금만 한 부대 가져다주면 될 것 같거든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기다려요." 오랜만에 두 사람을 봐서 기분이 좋은 아리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생명의 무게. 용병이라는 직업으로 1년을 살면서 시즈의 머리 속을 괴롭히던 문제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 서 그는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나 때문에 희생된 이들의 생명은 무척 값지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난 부담감을 가졌지. 나의 생명만큼이나 귀 중하기에 그들을 위하여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적병의 목을 날리고 목 숨을 갈랐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에 대한 댓가로 내 생명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해 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보다 우선인 것이다. 그렇 기에 나는 적병의 목을 주저없이 자른 거지. 그의 생명보다 나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목 숨을 머리면서 남겨놓은 편지의 그 말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 말 때문에 점점 내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시즈, 이제는 마법을 안 쓰는 모양이지. 천천히 마법사라기보다는 용병의 티가 나." 끄덕. '혹시 내가 레소니에게 느꼈던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대신 죽을 만큼 좋아하는 감정이었나?' "그런데도 아직은 학자의 본능이 남아있나봐? 그렇게 어디서나 생각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혹시 싸울 때도 생 각하면서 싸우니?" 끄덕. "아유! 제발 말 좀 해봐. 요즘 머리가 너무 길어지지 않았어? 등까지 내려오네. 내가 잘라줄까? 면도도 해야겠다." 끄덕. 거의 10일만에 시즈와 단둘이 외출을 하게 된 아리에는 설렘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이것저것을 질문했지만 곧 포 기하고 말았다. 용병국에 도착한 이후로 그녀와 시즈는 마치 인격을 맞바꾸기라도 한 것 같았다. 쾌활하면서도 온화 한 성격은 시즈에게서 아리에에게로. 무심하고 냉랭한 성격은 아리에에게서 시즈에게로. 그렇지 않아도 투명한 눈동 자와 은백의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같지 않은데 행동마저 인형과 비슷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가 어딜 가든지 잘 따라다니고 시키는 것도 잘했다. 시키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큭큭큭!" 멀리서 곤혹스러워하는 아리에를 보고 있던 보를레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벽에 손을 기댄 채 키득거렸다. 그러나 제 3자의 관점에서 보면 키가 커다란 남자가 벽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은 간질의 초기 증상과 틀림없었 다. 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남자들은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시즈와 매일같이 있어서 익숙해졌지만 자주 있지 않는 아리에는 이해하기가 좀 힘들 걸.' 보를레스의 경험으로 볼 때 예전과 다름없이 성격은 친절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흘려듣는 법이 없었다. 다만 겉으 로 드러나는 감정표현이 없을 뿐이었다. 말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에게 '기초마법학의 법칙들을 열거해 봐.'라고 말하면 아마도 밤이 새도록 주절대고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필요 이하의 대답에 있어서는 입을 여는 걸 피했다. '문제는 아리에의 질문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거지. 큭큭.' 그나저나 이대로 가다가는 반어터가 사겠다는 맛있는 저녁을 거절하고 미행을 하는 까닭이 없어질 게 분명했다. '할 수 없지. 내가 나서주는 수밖에.' 보를레스는 바닥의 손가락만한 돌멩이를 주어서 힘껏 던졌다. 그의 칼 던지기 실력이 용병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었 기 때문에 빗나갈 일은 전혀 없었다. 시즈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보를레스는 깊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시즈, 왜 그래?" 아리에는 두리번거리면서 걸어가던 중 갑자기 손을 잡고 있던 시즈가 멈추자 뒤로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고 물었다. 시즈는 한 쪽 눈을 약간 찡그리고 귀 뒤에 대고 있던 손을 보여주었다. "앗! 피잖아!? 괜찮아?" 도리도리. 그는 솔직했다. 아리에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뒤졌지만 붕대와 상처에 바를 약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피가 아 리에의 판단능력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시즈는 손을 꼭 잡고 보를레스가 돌 을 던졌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 시즈는 아리에의 손을 놓았다. "여기보다는 어서 의사한테‥. 아!" 아리에는 시즈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 빛을 보고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빛나는 손을 상처에 가져다대 고 시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상처치료‥." 피가 멎자 아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그녀가 생각하는 사이 시즈는 다시 인 형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또 그 표정이 되어버렸네." 끄덕. 이제는 아예 오기가 나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아리에는 눈을 작게 뜨고 말했다. "시즈, 저녁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얼굴 좀 풀어." 끄덕.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끄덕. 아리에의 질문들은 그렇게도 가치가 없는 것밖에 없었을까? 그녀는 20번이 넘는 질문을 하면서 시즈에게서 끄덕임 이외의 대답을 받을 수가 없었다. 포기를 해버린 아리에는 중얼거렸다. "휴우‥. 그렇게 죽어버린 사람들이 중요한 거야? 가끔은 함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웃어줘도 되잖아‥." 멀리서 숨어서보고 있던 보를레스는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말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시즈에게 변화를 일이킨 것은 아리에였지만 보를레스와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시즈의 미소를 처음으로 보기 때문에 더 했다. 창백한 피부에 살짝 늘어난 붉은 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뤘고 원래보다 약간 크게 뜬 눈동 자 속에서 차가움은 사라지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한 몽환적인 미소.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듯 하던 미소는 찰나에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에는 한동안 술에 취한 듯 멍 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19세 소녀? 여인?은 볼을 붉히고 다시 시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또르르. 그녀의 시선을 피해 굴러다니는 수정. 결국은 얌전히 아리에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아리에가 물었다. "시즈, 키스해줄까?" 그녀의 어조가 말의 내용과는 달리 굉장히 쾌활하여 누구라도 장난이라는 걸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시즈는 아무래 도 무리였던 모양이다. 꽤나 고민하는지 눈을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눈동자가 데굴거리는 게 오히려 장난친 아리에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싶었을 때, 끄덕. "에? 정말?" 그녀는 대답 대신에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고 싶어 자신도 약간 벌린 아리에는 순식간에 입안에 들어와 얽히기 시작한 혀의 감촉에 정신이 없었다. 숨어있던 보를레스도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볼 정도로 진한 입맞춤이었다 "뭐, 뭐야!?" 입술을 뗀 수줍음이라는 감정을 떨치기 위해 아리에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크게 소리쳤다. 손으로 입가를 훔친 그녀는 그런 격렬한 입맞춤 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나쁘지 않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할 수 있는 시즈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놓고 갈수는 없는 현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시즈의 손을 꼭 잡았다. * * * 용병국은 이름대로 용병들을 사고 파는 곳 있었지만 상당한 국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용병국의 국왕을 비롯 한 지배세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용병들의 나라에 무슨 토지가 필요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필요하다'였다. 물 론 농경지라기보다는 도망자들의 자유지대로서 말이다. 용병은 분쟁이 없으면 망하는 직업인만큼 국가산업으로는 그 위험도가 컸다. 그렇기에 용병국은 용병산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즉시 농업 체제와 어업체제로 국가산업 을 잠시 이전하는 간교한 술책을 보였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변칙적인 국가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기본 자신은 바로 토지였다. 용병국은 자국 내에서 저지른 범죄만 아니라면 자유인이었다. 즉 타국에서라면 살인을 하던 반역을 하였든 간에 용병국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자유지대였다. 그렇다면 자유지대가 좀 넓어야 도망자들이 쉽 게 도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용병국의 국민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타국에 서는 범죄를 저지르고 용병국으로 도망가는 짓을 반복하는 치사하고도 야비한 죄인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용병국은 몇 개의 통로를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공격경로를 예측하기가 쉬웠다. 그 말은 곧 방 어하기가 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산을 넘자니 선악전투에서는 용병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용병이라는 직업이 신분과 종족을 상관하지 않는 것이라 인간 외의 종족들의 도움도 대단했다. 그렇다고 상습적인 범죄자를 처단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용병국은 법적으로 청부살인을 허용했기 때 문이다. 그렇다‥. 청부살인은 합법이다‥. "991 992 993 994‥ 1000타로운. 정확하게 지난 달 수익은‥." "왜그래? 시즈. 뭐가 문제라도 있어? 자세하게 말해봐." "어제 야시장에서 정확히 자정에 아리에한테 수정 목걸이를 하나 사줬는데 지난 달 지출로 넣어야 할까요?" "아니, 이번 달 지출로 넣어. 그런데 자정까지 함께 있었다면 그 후에는 뭐했는데?" "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에‥읍!" "보를레스‥. 순진한 시즈에게 뭘 묻는 거죠?" "핫핫핫! 아리에 왜 요리 준비를 하다말고 나왔어?" "호호홋! 갑자기 오한이 일어나서 말이죠―. 시즈한테 수작부리지 마요!" 이렇게 시즈와 보를레스는 아침 일찍부터 반어터의 용병 식당에 앉아서 이번에 해결할 때 사용한 물품 등의 소비와 보상금의 수입으로 인한 한 달의 수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즈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당신들이 바로 세이서스 입니까?" 그들의 움직임은 실로 번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접수되는 즉시 빗자루 대용이 되어 테이블 위를 쓰는 오른팔과 반짝이는 쓰레기를 담는 갈색 주머니. 무표정한 시즈의 얼굴은 혹시 모를 의혹의 조각도 남기지 않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보통 자신들의 그룹명을 부르는 사람들은 의뢰를 부탁하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고객을 대하는 보를레 스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고 말투는 싹싹했다. "여기 앉으시죠. 저희가 세이서스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고객은 찜통같은 여름에 천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을 모두 가린 여인이었다. '사막의 나라에서 온 건가?' "젊군요‥." 여인의 목소리와 눈매로 볼 때 그녀는 20대 초반에서 중반이었다. 의뢰를 받는데 왜 고객의 나이를 예측하냐고 물 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용병은 의뢰의 내용을 듣고 의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뢰인의 나이는 큰 상 관이 없었지만 보를레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돈! 이었다. "못 미더우시면 다른 곳에 가서 의뢰를 하십시오." "아니에요. 그대들이 분명 서부 제일의 용병, 세이서스라면 꼭 부탁드릴게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살인청 부입니다." "살인청부는 용병국에서는 흔한 일거리입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시죠?" 흔하기만 한가? 일의 난이도에 비해서 사례금도 많아서 편하게 부자되는 일거리였다. 솔직히 먼 이국 땅에서 전쟁 에 참여하고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그게 저기‥." "아니면 혹시 청부금이 부족하신 것 아닙니까?" 흠칫하고 놀란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찌푸린 보를레스가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설마 몸이라도 팔겠다는 심산으로 오셨다면 그만 두십시오. 저희는 노예매매 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다시 흠칫하는 여인은 아마도 거짓말을 못할 체질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아차린 보를레스 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됩니다. 다른 용병들도 있으니 길드에 가서 알아보세요. 다른 용병들도 먹고 살아야할 게 아닙니까?" 만약 서부 용병 길드의 길드원들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가슴을 내리치다가 죽을 소리였지만 그는 태연스러웠다. 여 인은 보를레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흑‥ 제발 부탁드려요. 제발‥ 흑흑‥." 막 주방의 준비를 끝낸 아리에가 나와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천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이 보를레스를 잡고 흐느끼 고 있었다. 신파극에나 어울릴 장면이었으나 곧 식당이 문을 열 시간이었기에 아리에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보를레스, 왜 여자를 울리는 거에요?" 여인에게 아리에는 한 줄기 찬란한 광휘 속에 서있는 구원의 여신이었다. 아무리 눈치를 보아도 눈앞의 우람한 사 내는 돈을 가져오지 않는 한은 부탁을 수락할 것 같지 않았고 처음부터 이때까지 무표정한 청년은 자신의 눈물로 움직일 감정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고속이동술에 비견될 정도로 빠르게 아리에에게 매달린 그녀는 더욱 애절하게 울음소리를 높였다. 아리에는 감정이 동했다기 보다는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백작 영애라는 게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의자를 시즈 옆에 놓고 털썩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다른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디 의뢰 내용이나 자세하게 말해봐요. 나도 세이서스의 일원이니까." "아리에, 아무거나 다 받아주면 수익이 남지를 않는다구." "보를레스, 좀 조용히 해요. 그래도 의뢰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여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사막의 왕국 남부의 초원 지대에서 산양을 키우던 유목민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그녀 가족의 거주지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그녀는 거주지로 데려와서 남자를 치료했다. 그가 깨어난 후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자는 사막의 왕국에서 살인누명을 쓰고 용병국으로 도망을 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남자의 상처를 돌봐주던 여인은 그와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어느 날 그녀에게 한 가지 청을 한다. "내 비록 지금은 누명을 쓰고 쫓기는 몸이지만 용병국에서 부자가 된 후 언젠가는 그대를 데려가겠소. 그러나 나에 게는 용병국에 도착한다고 해도 사업을 할 자금이 없소. 그대는 내게 꿈을 주었으니 희망 또한 내게 주시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눈에는 그 무엇도 남자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의 눈을 속여 그녀는 초원의 대부분을 팔아 그의 사업자금으로 내어준다. 부모가 크게 분노하고 집안은 크게 몰락했지만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며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 이 지났다. 3년이 되던 작년에 용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남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저는 깨달은 거죠. 속았다는 걸‥."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세이서스 사람 들이 의뢰에 대한 승낙을 하기를 기다렸다. "좋아요. 의뢰를 받아드리죠." "하지만! 아리에!" "뭐에욧! 보를레스!" 보를레스가 반대라는 의사를 밝히듯 벌떡 일어섰지만 아리에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쏘아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여인이 살인을 의뢰한 자의 이름은 프레페오. 큰 키에 적갈색의 머리와 품위있는 콧수염을 가진 절륜한 외모의 31 세 사내라고 했다. 그러나 용병 길드의 정보통들을 활용해봐도 30대 초반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일에 진척이 없자 보를레스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달 적자가 엄청나게 크겠군. 그 여자는 줄 돈도 없다고 했는데‥." "자꾸 궁시렁 거릴래요? 보를레스와 시즈가 용병을 하는 이유는 돈이 아니라 힘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 러기 위해서 경험이 필요했거요. 이제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만큼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죠?" 대답은 '아니오'였다. 1년 간의 용병일로 강해지기는 했으나 하윌이나 헤라즈처럼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에 비 하면 세발의 피였다. 할 말이 궁해진 보를레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시즈, 무슨 좋은 방법 없니? 대륙의 현자라고 불렸던 너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수염은 기르느냐 자르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이미지를 확연히 변화시키지요. 특히 길렀을 경우는‥ 그 차이가 심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시즈는 투명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수염을 잘라야 겠지요." 다음 날 용병 길드에는 아주 특이한 의뢰가 접수되었다. - 적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A 사이즈의 바구니로 부피를 계산하여 한 바구니 당 10 타로운씩 지급한다. 의뢰문을 보고 난 용병들의 반응은 가지가지 였다. 10 타로운이면 반어터의 용병식당에서 3개월은 먹을 수 있는 금 액이었기에 '돈 벌기 쉬워졌다.'라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의뢰인은 분명 대머리 갑부일 것이다.'라는 추측 을 조심스레 내놓는 이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적갈색 머리의 소유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적갈 색 머리카락을 가져오는 용병이 없어지자 아리에는 시즈에게 물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구별이 쉬울 테니 다시 정보를 수집해야지요." 그렇게 해서 용병길드의 정보통들도 특이한 의뢰를 받게 되었다. - 문서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30대 초반인 조사하라. 모든 정보 수집이 끝났을 때 세이서스는 여인의 의뢰에 맞아떨어지는 남자를 찾을 수 있었다. 조사된 사람 중에서 4년 전 사막의 나라에서 도망쳐온 남자는 1 명밖에 없었다. "우와‥. 집이 굉장히 크군." 무려 5층은 되어 보이는 저택을 바라보며 보를레스가 감탄사를 토했다. 용병들 중에는 재산이 많아도 거대한 저택 에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끼어들어 흙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었고 굳이 좋은 침대와 자신을 보호해줄 저택은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갑부라면 호위로 용병을 꽤나 두었을 거야. 그것도 실력있는 놈들로‥." 보를레스는 한 장의 보고서를 훑어보며 이번 의뢰를 해결하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보고서 에는 바클로시크 라는 대상인에 대한 설명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클로시크의 저택 2층을 지키고 있던 용병, 쿠엔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아니, 기척이라기보다는 바람이라는 표 현이 맞을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온몸을 슥하고 훑고 지나가는 느낌.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는 바람이 불어온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시즈가 그렇게 말하고 계단으로 올라가 버렸다. 따라가려는 아리에를 만류하며 보를레스가 말 했다. "기다려. 녀석은 실력자야. 남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을지 몰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나도 이제 내 목숨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요." "글세‥." 혓바닥을 내밀어 보인 아리에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시즈가 사라진 방향을 힐끔힐끔 거렸다. 그 시간, 쿠엔은 자객과 대적하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객은 별빛과 같은 색깔의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진 청 년이었는데 섬뜩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벌써 소리쳐서 위험을 알려야 했 지만 만약 신경을 풀어버리는 순간 실처럼 잡고 있던 청년의 기운을 놓쳐버릴게 분명했다. '그럼 난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쿠엔은 목덜미에 느껴지는 예기에 고개를 숙였다. ‥‥ 놀랍게도 소리나 기척이 없는 것은 자 객뿐이 아니었다. 그의 검 또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왼쪽!' 분명히 느껴졌다. 손에 힘을 주어 내지르니 하지만 곧 그는 목젖을 베어오는 자객의 모습을 보며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왼쪽으로 느껴졌던 것은 검집이었다. 바클로시크는 그 날따라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날 꿈을 꾸길 그 여자가 자신을 찾아오는 꿈이었던 것 이다. 무서운 여인‥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3 명의 인영이 들어왔다. 그들 중 장신의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살인 청부를 받고 왔소." "나는 상인으로써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누구의 의뢰를 받고 오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사내는 코웃음치며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사병들이 이토록 많은 거요?" 바클로시크의 사병들은 하나같이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이 3인 이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숨겨진 비밀을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사막의 왕국에서 유목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초원이었지만 나는 사는데 큰 무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굉장히 20세쯤 먹은 젊은 여인이 찾아와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붉은 산양을 한 마리을 가지고 있는데 능력 또한 겉모습만큼이나 대단하답니다. 풀을 뜯어먹을 때 침을 흘리 는데 그 침에 식물에게만 미치는 재생능력이 있어 산양이 먹은 자리는 하루만에 풀이 다시 솟는 답니다. 그 풀은 자생력이 뛰어나서 사막도 다시 초원으로 만들어주지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내게 나의 좁은 초원보다 수십배는 큰 초원을 보여주었지요. 그것을 본 나는 욕심이 났서 말 했습니다. "그 산양이 그렇게 좋다면 나에게도 좀 빌려주시오. 당신은 이미 충분할만치의 넓은 초원을 가지고 있잖소." 그러자 여인은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넓은 초원을 갖게 되면 댓가를 갚아야 합니다."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기분에 휩싸인 나는 당장 돌아와서 내 초원의 풀을 붉은 산양에게 먹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왠일입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산양이 픽하고 쓰러지더니 죽어버린 것입니다. 저로서는 안절부절못하여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나타나서 붉은 산양이 죽은 책임을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의 소중한 산양을 죽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을 대신하여 당신의 초원은 나의 소유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그런 식으로 초원을 조금씩 넓혀왔던 것입니다. 나는 전부터 알고 있던 마법사에게 찾아 가서 하소연을 했지요.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질이 나쁜 마녀임에 틀림이 없군. 아마도 그 붉은 산양은 마법에 걸린 양이 틀림없네. 내가 자네의 땅 을 되찾아줄 방법은 없지만 그녀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네." 마법사는 나에게 푸른 색깔의 물병과 붉은 루비 3개를 주며 말했지요. "이 물병에 든 액체를 손 끝에 묻혀 그녀의 초원과 가장 가까운 사막에 손가락만한 막대기를 그리면 그 자리에서 초원이 만들어질 겁니다." 과연 그 말대로 했더니 초원이 만들어 졌습니다. 하루는 갑자기 사막에 생겨난 초원의 모습에 의아했는지 그 마녀 가 찾아왔지요. "당신은 지난번에 나에게서 붉은 양을 빼앗아간 분이시군요. 그런데 갑자기 사막에 왠 조화인가요?" 나는 마법사의 조언대로 시치미를 떼고 말했습니다. "어느 마법사께서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이 물병을 주셨답니다. 이 물병의 물은 어디에나 생기를 불어넣어 사막 을 초원으로 만들고 초원을 숲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녀가 뭔가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시범을 보이듯 계속 막대기를 그려나갔지요. 속아넘어간 마녀가 내게 말했습니 다. "나는 꿈이 있는데 넓은 초원 사이에 숲이 들어가길 바래요. 그래서 그러니까 그대의 물병을 잠시 빌려주지 않겠어 요?" 난 망설이지 않고 물병을 빌려주었지요. 그녀는 자신의 초원 여기저기에 그 물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물 에는 한 가지 마법이 더 걸려 있었는데 사막에 바르면 초원이 되지만 초원에 바르면 다시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는 마법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3일 한정이었죠. 잠시 후 자신의 초원이 사막으로 변하자 그녀가 길길이 뛰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물은 엉터리에요. 나의 초원이 죄다 사막이 되었으니 어떻게 할 거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물 때문이라면 내 목숨을 주겠소. 그대는 사막이 되어버린 당신의 땅을 주시오." 제의를 승낙한 그녀를 데리고 나는 원래부터 사막이었던 곳으로 갔지요. 그리고 처음에 했던대로 막대기를 그리자 사막은 초원으로 변했습니다. 나는 약속대로 초원을 얻었지만 그 마녀가 언제 날 위협할까봐 잠을 자지 못했습니 다.. 그래서 초원을 팔고 용병국으로 넘어온 것이지요. 사막의 왕국에서 초원은 토지 중에 가장 비싼 곳이기 때문에 초원을 판돈으로 난 이렇게 대부호가 될 수 있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세이서스는 어이가 없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시즈가 바클로시크에게 물었다. "혹시 아직도 푸른 병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바클로시크는 목걸이처럼 줄에 묶어 놓았던 푸른 병을 끌러 시즈에게 건넸다. 시즈가 살펴보니 푸른 병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시즈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당했군요." "무슨 일입니까?" 인형처럼 표정을 고정할 것 같던 시즈가 눈썹을 찌푸리자 방안의 모든 이들은 불안해졌다. 바클로시크의 물음에 그 는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박쥐가 창에 붙어있다가 날아갔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거에요." "그렇다면?" "당신을 노리는 게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아리에와 보를레스가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마법사!" # 서둘러야 했다. 바클로시크의 이야기에서 마법사가 직접 말했듯이 마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면 죽게 될 것이니까. 예전에는 프레페오라는 이름이었던 대상인은 5000 타로운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그들에게 주면서 마법사를 보호하고 마녀를 살해할 것을 청부했다. "그녀가 마녀라면 빗자루를 타고 떠났을 거야. 지금가도 늦지 않았을까?" 아리에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보를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면 늦는 거지. 아직 늦지는 않았어. 시즈, 지난번의 그 방법을 좀 쓰자." 끄덕. 시즈가 눈을 감고 마법의 의지를 모으자 주위에서 바람이 몰려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바람의 벽을 제외하고는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보지 못한 아리에는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더 강해졌군. 마법을 쓰기도 전에 이 정도라니‥." 날이 갈수록 시즈의 바람과 마법은 힘을 더해갔다. 어떤 때는 함께 있는 보를레스도 겁이 날 정도였다. "근육은 고래심줄보다 질기니 끊어짐을 모르네. 바람의 자유를 잠시 그대에게 부여하니 세상에 그대보다 빠를 자가 없어라." 주문을 영창하는 시즈의 두 눈은 밤하늘의 별을 차곡히 빻아넣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의 주문이 끝나자 마차는 그 야말로 번개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26 악장 사람들은 각성이라는 말로 새로운 가능성을 표현한다. 머리 위의 어두운 위압감을 사방으로 흩뿌리던 검은 요새, 글로디프리아도 밤의 고요함 속에서는 휴식을 취하는 것 일까.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평온함이 감돌았다. 요새 안은 어둠이 성을 품은 것인지 성이 어둠을 품었는지 구별할 수 없이 어두웠다. 그런 한 치 앞의 사물도 구별가지 않는 밤의 장막을 헤치고 누군가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데린, 먼저 자도록 해. 난 아무래도 확인해야할 문서가 많이 남아있어서 조금 늦게 자리에 누울 것 같군." "괜찮아요. 그 문서들은 이번 내전에 대한 것들이겠지요? 피로에 좋다는 이실진을 우려낸 차랍니다. 마시면서 하세 요. 여기 과자도 있어요." 자상한 정이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은은히 감도는 목소리에 데린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혼전에는 행동에서 나 말투에서나 무례하고 무정하게만 느껴지던 사람이 이제 그녀에게 있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가 되었다. 그런 사랑스런 이가 눈가에 그늘이 질 정도로 피곤해 하늘 걸 조금도 덜어줄 수 없는 게 미안했다. 더 욱이 남편의 책상 위에 놓은 많은 문서들의 상당수는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이 짙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 고마워. 이거 아내가 생기니 호강하는 걸. 핫핫." "놀리지 말아요." 얼굴이 빨갛게 된 아내가 노려보자 젠티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홀짝거렸다. 일년 전 천방지축에 완벽한 안하무 인의 자세까지 완비하였던 여인이 바로 데린이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청혼에 못 이겨 '이 여자 라면 함께 평생을 살아도 심심하지는 않겠군.'이라는 생각에 냉큼 결혼을 해버렸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생각하면 ' 이 좋은 걸 왜 진작 안 했을까?'라는 한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결혼은 자유로부터의 구속이다.'라는 외침들이 의외로 많이 쏟아지는 것으로 봐서 결혼 자체가 좋다기 보다는‥. '내가 아내를 잘 만난 거지. 이제는 장인어른이 되돌려 달래도 안 준다.' 갑자기 탐욕의 기운을 주렁주렁 매달고 젠티아가 시선을 집중하자 데린은 그나마 붉기만 했던 얼굴이 더욱 시뻘겋 게 달아오르며 고온의 열기까지 방출했다. 혹시라도 더욱 뜨거워지면 까맣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녀는 서둘 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젠티아!? 그나저나 해결책이라도 있는 건가요?" "으음‥ 그렇지. 솔직히 다루고 계신 두 공작께서는 분명 옳은 말씀들을 하고 계시지. 둘 다 옳으니 양보하기도 힘 들겠고 양보를 못하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하고 젠티아는 안타까움으로 혼탁한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실베니아에 있어 그들은 유능했고 필요한 존재였다. 그런데 내정에 있어서 국가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서로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으니 나라가 흔들리는 게 당연했다. 젠티아도 어떻게도 말리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약간이라도 어느 쪽의 편을 들면 다른 공작의 입지가 확연히 줄어들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 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낀 그는 이실린 차를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각하! 아이킨입니다." "들어와." "아! 부인께서 계셨군요." "후훗‥ 안녕하세요? 아이킨. 반가워요." 아이킨은 이제 나이 열네 살인 홍안으로 입고 있는 붉은 색 집배원 복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곱슬 곱슬한 금발에 주근깨가 자잘하게 난 얼굴이 아무래도 해츨링 저리 가라 할 만큼 개구쟁이 같았지만 소년은 성숙한 입냄새(?)가 풍기는 어투를 사용했다. "금슬이 좋으시군요. 각하의 뽀얀 볼이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하지만 데린이 생각하기를 젠티아의 진정한 후계자는 소년이 아닐까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잖은 어조로 말하면서 어떻게 저런 능글맞은 표정을 지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그래. 고맙구나, 아이킨.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지? 네가 붙어있지 않으니 일은 끝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각하. 조금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던데요." "귀찮은 일‥!? 그건 됐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그 녀석의 일상사지." 쇠붙이처럼 널려있는 사건들을 시즈가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걸 알고 있는 젠티아는 별 거 아니야! 하고 손을 휘 휘 저었다. 곤란한 표정을 아이킨은 지어 보였지만 곧 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상관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각하께서 말씀하신 그‥ ‥‥‥." "뭐엇!? 시즈의 머리칼이 은색?" 누가 들을 세라 데린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던 아이킨은 젠티아의 비명과 다름없는 외침에 머리를 감 싸쥐었다. 화가 난 소년은 가까이 있는 찻잔을 집어들어 꿀꺽꿀꺽 삼켜버리고는 말했다. "각하, 저한테는 중대한 사항이니 발설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셔지 않습니까?" "여기는 자네와 나, 그리고 내 사랑스런 아내 밖에 없는데 무슨 걱정인가. 그리고 자네가 방금 전에 마신 거 내 꺼 야." "토해드릴까요?" "‥그냥 소화하게. 그건 그렇고, 이제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단 말이지?" "그런 것 같더군요. 얼마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제하던 마법을 요즘은 가볍게 쓰고 있습니다." '봄의 혈사'가 일어난 지 1년, 그 동안 젠티아가 이 작은 밀정의 눈을 통해 시즈를 간접적이나마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국으로 도망간 이후 얼마나 그가 고통스러워했던가. 소년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머리가 얌전히 갈색이라는데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을 정도였다. "그래‥. 놀랍군. 벌써‥ 그 자리에 와 있다니 알았다. 보고할 내용은 그게 다 인가?" "예, 각하." "잠깐‥. 그런데 왜 자꾸 남의 걸 집어먹는 거야?" "뱉어드릴까요?" "‥‥." 아이킨이 혀를 내밀고 정확치 않은 발음으로 묻자 젠티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을 찌르는 억울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펜대가 부러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됐어. 삼켜."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각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소년은 어딘가 승리한 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나가고 나자 데린은 남은 과자를 입에 넣으며 암울한 시선을 보고서에 던지는 젠티아를 보듬어 안고서 위로해야 했다. "그런데 젠티아." "응?"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뭔데!? 나 졸려." "시즈님의 머리카락이 은백색이 되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무슨 중요한 사항이죠?" "일종의 각성이지. 전에 말했지? 우리 네 사람에 대해서‥." "네. 불, 대지, 물, 그리고 바람." "그래. 우리는 자신이 가진 의지에 맞추어 눈동자의 색과 머리색이 바뀌지. 나의 머리카락이 토지의 갈색인 것처 럼‥. 만지지맛!" "신기한 걸요‥ 싫어요?" "아니. 그래서 불은 검붉은 머리, 물은 청은색, 그리고 바람은 은색의 빛깔을 띠지. 그런데 문제는 현재 각성한 음유 술사는 나 밖에 없어." "흐음‥." "보통은 어떤 심적인 충격과 깨달음 같은 계기가 있어야 하지. 물의 의지를 가진 아릴 같은 경우는 나와 불인 '그 녀석'이 너무 감싸줘서 겉은 각성 같지만 속은 전혀 아니야. 그래서 조금이라도 한계를 넘어서면 무리가 오겠지. 그 리고 불은‥ 각성했지. 하지만 각성했다고 보기 어려워. 불은 바람이 없는 한 완전한 불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아마 '그 녀석'이 시즈를 만난다면 몰라도 아니면 영원히 힘들겠지. 마지막으로 시즈는‥ 가장 짧은 시간동안 많은 파도와 폭풍을 지났으니‥ 바람이 각성한 거지." "‥‥." "데린? ‥데린? ‥‥ 자잖아‥." 그는 그렇게 허탈해 했다. * * * * * 삼인 일조의 용병단, 세이서스가 어두운 밤의 경계와 용병국의 국경을 넘어 사막의 왕국, 볼케아스로 향하고 드로안 부부가 침대에서 잠을 청할 무렵, 세이서스의 의뢰인이자 의뢰대상이기도 한 여인은 이미 지팡이로 목적지에 도달 해 있었다. 흰모래의 대지 위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물처럼 마법사의 유르트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여인의 눈은 불을 뿜었다. 허공을 스치는 그녀의 기척을 들은 것일까. 스르륵하고 문이 열렸다. 사람이 직접 열지 않았다는데 사물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주인이 마법사인 게 틀림없었다. 듣기만 해도 상당히 오랜 시간에 노출되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목소 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소. 들어오시오, 파마리나." "‥‥." "어서 들어오시오.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구려." 밖으로 몇 마리의 낙타와 산양이 매어져 있는 유르트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햇볕을 방어하기 위해 펠트를 비롯한 밝은 수직물로 짜여져 있었다. 파마리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수학자나 연금술사들이 좋아할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히 채워진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 합사장식 양탄자는 별다른 모피를 덮지 않아도 따스함과 안락함을 제공할 게 틀림없었다. 여인이 눈을 힐끔거리며 실내의 물품들을 살피자 방금 전까지 실을 뽑고 있었는지 돌아가던 물레를 멈추고 노인이 말했다. "허허‥ 뭐가 그리 신기하오?" "당신같은 마법사의 유르트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게 신기하군요." "그럼 마도구로 가득히 채워놓았을 줄 알았소?" "뭐‥ 좋아요. 남의 유르트 속 내부사정까지 신경쓸만큼 나도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아크로프디, 당신은 내가 찾아오는 걸 기다렸다고 했으니 왜 찾아왔는지도 알고 있겠군요." "물론이오. 그대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점성술사니까 말이오."하고 노인은 품에서 몇 장의 카드를 꺼냈다. 지나온 세월을 황금빛으로 도금한 이빨을 내보이며 씨익 웃는 모습이 마치 '어디 점을 한 번 보시겠소?'하 고 묻는 듯 했다. 그러나 파마리나는 만면에 가득히 비웃음과 경계심을 드러내고 지팡이를 내밀었다. 옅게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와야 할 자단목의 지팡이에서는 향기 대신 푸른 안개를 내뿜었다. 노인이 기겁을 하여 피하자 안개는 카드와 함께 물레를 삼키고 함께 자취를 감췄다. "쓸데없는 짓 말아요, 아크로프디. 여우보다도 그대가 뇌를 굴리는데 능숙하다는 걸 스승님한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어요. 당신은 스승님을 피해 도망 다닌 주제에 스승님이 돌아가시자 그녀의 제자인 나의 일을 방해하는 건가요?" "허허‥ 어째서 그대는 그대의 스승이 죽자마자 내게 방해받을 짓을 하는 건가? 어허허‥ 헛!" 껄껄대며 웃으려던 아크로프디는 여인의 지팡이에서 토해진 한 줄기 번개를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파마리나가 눈에 힙을 주고 쏘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장난치지 말아요! 난 스승님보다 강해요. 당신이 날 방해하고도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정도로 마음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어차피 내가 거둬야 할 업보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쉽게 죽어줄 수는 없소. 더 이상 나의 친구 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대처럼 악독한 마녀에 의해 희생당하면 곤란합니다." "호호호. 바보 같군요. 당신의 친구는 이미 내가 청부한 자객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어요." 천둥이 유르트의 천을 뚫고 둘의 귀에까지 와 닿았다. 아마도 밖은 비가 오고 있으리라. 아크로프디는 다시 품에서 카드를 꺼내며 미소지었다. "벌써 잊은 모양이구려. 나는 미래를 조금 훔쳐볼 줄 안다오. 그들은 어느 게 옳은 선택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 오. 새로운 손님들이 오기 전에 그대를 제압하겠소."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네 장의 카드를 던졌다. 표면에 푸른빛이 감도는 게 칼과 같은 예기를 품은 마력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확신한 파마리나는 지팡이에 걸려있는 부양의 힘을 이용하여 뒤로 멀찍이 피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채 조금 떠있는 모습이 마치 여인의 강대한 마력을 과시하는 듯 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이들은 보통 자신의 미래는 볼 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정답이에요. 당신은 그들이 오기 전에 죽을 테니까‥." 지상에서 번개가 천상으로 솟구쳤다. 숲은 초원으로, 초원은 사막으로. 용병단 세이서스는 마차가 부서지지 않은 게 천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칠 게 말을 재촉했다. 조금 전부터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빗발이 내리치기 시작하자 쓰러질 것 같던 더위는 사라지고 온 몸이 아릴 듯이 추워졌다. 아무리 의뢰로 인한 많은 역경으로 단련된 시즈와 보를레스였지만 이토록 갑작스런 기온 변화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여름 내륙 지방에서 입는 의복 - 보를레스의 경우는 반팔이다. -을 재주껏 여며며 코를 훌쩍이는 작태가 너무나 처량하여 의뢰 수락을 적극 주장한 아리에는 미안한 마음을 샘솟았다. "모두 미안해. 내 잘못이야."하고 아리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뢰가 힘들다는 것은 둘째치고 죄도 없는 무고한 이를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불필요하고 위험한지 절감했 다. "아니야. 꼭 해결해야할 의뢰였어. 대상이 반대이긴 했지만‥. 용병 상금 리스트 서부 지구 최고의 세이서스 다운 선택이었어. 쿨럭!" 보를레스의 말은 만약 마지막의 기침만 없었다면 위로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아리에는 완전히 풀이 죽 어버렸고 연신 콧물만 훔치던 시즈는 뭐가 생각났는지 품에서 구슬을 세 개 꺼냈다. 보기만 해도 청량함을 느끼게 만드는 푸른색의 자그마한 구체는 안에 무슨 액체가 들어있는지 흔들 때 찰랑거리는 감각이 손끝에 남겼다. "바클로시크 씨에게 마법사가 주었다는 거지? 무슨 물건이야?"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하면서도 보를레스가 뒤를 돌아보며 묻자 시즈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빗줄기 사이 로 유난히 격돌하는 번개의 집합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막은 비가 오지 않기에 사막이 되어버린 토지. 어찌 보면 사막은 비가 올 때 그 본연의 푸름으로 장식할 수 있는 땅으로 조금이나마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갈라진 땅의 조각들은 비와 함께 도착한 방문자를 환영하듯 그들의 발걸음에 까칠한 축복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있던 다른 방문자는 새로운 이들이 영 꺼림칙했다. 그러니 말투 또한 고울 리가 없었다. "당신들, 의뢰는 잘 처리했나요? 수락한 의뢰를 처리하지 못한 것은 아니겠죠? 서부 최고의 용병단, 『세이서스.』" "우리가 처리하지 못하는 의뢰는 거의 없소. 당신이야말로 각오했으리라고 믿소. 살인청부의 의뢰내역이 거짓일 시 에는‥" "거짓일 시에는? 거짓일 시에는 어쩌겠다는 거죠?" 여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깔고 보를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모래 언덕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래에 서있는 보를레스들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의외로 열 받는군.'이라고 생각하며 보를레스는 검을 뽑아 여 인을 겨누고 외쳤다. "용병의 철칙을 무시했으니 그 대가는 검이 말해줄 거요. 마녀, 파마리나." "호호호호! 아크로프다도 날 당해내지 못했는데 감히 당신들 따위가 날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어리석군 요. 난 힘이 없어서 당신들에게 의뢰를 맡겼던 게 아니에요. 냄새를 맡은 일은 당연히 사람보다 개가 잘하지 않겠어 요?" 그녀가 자신만만한 것은 당연했다. 숙적이라고 생각했던 아크로프다가 시즈의 품에서 마지막 남은 숨을 힘겹게 들 이키고 있었으니까. 가슴을 들썩이던 노인은 얼굴에 부딪히던 빗줄기가 뜸해지자 눈을 힘겹게 떴다. 희미하게 보이 는 은발의 머리카락과 수정의 동공. 사막처럼 메마른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오오‥ 그대가 바로 예정된 바람이구려. 예언의 증표, 예언의 시선! 이 아크로프다는 그대의 방문에, 함께 찾아온 죽음마저 환영하고 싶을 지경이오." 시즈는 늙은 마법사의 대부분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흰 수염과 얼굴의 곳곳을 장식하 고 있는 주름, 그리고 마법사라는 사실이 헤트라임크를 떠올리게 했다. "아크로프다님. 이걸 기억하십니까? 바클로시크 씨는 당신에게서 받았다고 했습니다." 시즈가 푸른 구슬을 꺼내자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쥐었다. 확인의 일종인지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구슬을 흔들어 보고는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랜 지기를 본 사람처럼 말이다. "이 구슬은 『생명의 구슬』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왕국을 모두 녹지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작은 오아시스 정도는 만들어줄 겁니다.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막의 작은 물웅덩이는 밀림의 큰 늪지만큼이나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탐내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특히‥." "생명의 구슬을 당장 내놧!" 파마리나의 고함 덕분에 아크로프다는 한 마디 정도의 힘겨운 입술 노동은 덜 수 있었다. 그러나 파마리나의 행동 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불기둥이 생성되었고 그것은 점차 뱀의 형상을 띄고 줄기 를 꼬며 허공을 기어왔다. 놀란 세이서스들이 뒤로 물러서며 피할 준비를 하자 아크로프다가 시즈에게 말했다. "마족의 힘도, 신의 힘도, 생물에게는 생명에 미치는 힘이오. 생명의 구슬을 내밀어 방어해보십시오." 다시 시즈가 구슬을 건네 받아 하나를 내미니 먹이를 노리던 불꽃의 뱀이 감히 덤비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두 개를 내밀자 반대로 위협을 받는지 움직임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구슬도 함께 내밀자 그물에 묶인 것처 럼 꼼짝도 못하고 발버둥치더니 소멸됐다. "감히!" 마법이 효과도 없이 사라지자 파마리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불의 뱀'은 상당한 마력을 요하는 마법이 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격을 못하자 보를레스가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모래 때문에 그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통 여인의 운동신경을 가진 파마니아에게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특출한 실력의 마녀고 마법사나 마녀들의 필수품인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에 비행 마법을 거는 게 마녀들의 특기가 아니겠는가? 잽싸게 지팡이에 올라타고 멀찍이 비켜버리자 보를레스는 애꿎은 모래바닥만 신경질적으로 후 려치고 얼굴을 찌푸렸다. "후후후‥. 내 지팡이를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지팡이야, 저 애송이에게 혼을 좀 내주렴." 주인이 명령을 하자 지팡이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를레스에게 돌진했다. 마치 일류 전사의 움직임을 기억에 담고 있 는 듯 지팡이는 순식간에 보를레스의 검을 수 번이나 두들겼다. 보를레스로서는 도대체 어디에 눈이 달렸는지 조각 조각 분해를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실력으로는 일류가 아닌가. 지팡이는 몇 번 공격을 해보고 효과 가 없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기회를 노렸다. 여자 마법사들의 특징 중 하나가 사물에 마력을 부여하면서도 다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마녀'라고 이름 붙여진 여인들은 그 능력이 더 했다. 자식을 보는 듯 한 흐뭇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바라보던 파마리나는 한 손을 하늘로 다른 손을 땅으로 향하고 주문을 외웠다. 타는 듯한 시선이 시즈에게로 옮겨온 걸 보니 목표가 아크로프다인 모양이었다. "마법에 『생명의 구슬』이 망가지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죠?" 아리에의 질문에 노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상처로 인하여 힘이 거의 남지 않는 그는 입을 여는 것도 힘겨웠다. 어 떻게든 시즈가 치료를 해보려고 했으나 체력이 없는 대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파마리나는 주문의 영창을 끝냈는지 벌리고 있던 두 팔을 모아서 양손으로 인(印)을 만들고 내밀었다. "마(魔)의 일곱 계단 중 둘째 계위를 지배하는 황금의 수렁이여‥. 공멸(共滅)의 계약서를 앞에 마련하고 생명의 한 조각을 마치며 비오니 계약의 증거로서 힘을 보여 대답하소서." 예로부터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마녀가 특히 배척을 받아온 것에는 그들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도 포 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데몬demon의 힘』은 다른 말로 '초월적인 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이름이란 사물의 본질과 의지를 나타내며 자체만으로도 대상을 평가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알고 있는 시즈는 마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파마리나의 마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강대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겪어보지 않으면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 그는 마녀의 수인(手印)이 그린 허공의 원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검은 기운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법을 모르는 아리에조차 무심결에 침을 목젖 뒤로 넘기며 긴장했지만 시즈의 손가락 사이에 껴있는 세 개의 작은 구체를 힐끔거리며 두려움이 들이친 가슴을 달 랬다. '하지만 『생명의 구슬』로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시즈는 구슬로는 파마리나의 마법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지 않다면 소용도 없는 짓에 파마리나가 괜히 마력을 소비하는 것일 테니까. "아리에, 아크로프다 님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요." 주위의 공기가 멈추는 듯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지만 힘을 가진 게 바로 시즈의 목소리였다. 더욱이 말이 적어진 현 재에 이르러서는 그 위력(?)이 더욱 강해져 아리에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노마법사를 안 고 뒤로 물러섰다. 아리에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아서 파마리나의 마법원에서는 검은 기운이 강렬한 기세로 시즈 에게 퍼부어졌다. 구름의 이동을 연상시키듯 느린 듯하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시즈도 눈을 빛내며 바람의 의지 중 분노를 소환했다. "혼돈으로의 회귀를 돕는 바람이여‥." 그 힘은 태풍만큼이나 거대했으나 그 범위는 키 작은 청년의 양손이 그리고 있는 작은 원에 불과했으니 그 위력 또 한 상상할 수 없었다. 시즈의 마법은 파마리나의 그것과는 달리 엄청난 압력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검은 기운 과 충돌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폭발의 충격으로 마법의 시전자들은 뒤로 튕겨 날아갔지만 여운은 무지막지한 상태를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밀고 당기는 두 힘의 격돌은 천공과 대지를 비롯한 공간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어느 한 쪽이 강했다면 모르지만 겨루고 있는 두 힘은 거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공간이 일그러질 지경이었지만 시전자들은 마법을 감히 거두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굉음을 내며 겨루는 힘들이 집중 폭격을 받아 흔적도 남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러기 에 재빨리 일어나 마력을 쏟아 부으며 상대에게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눈이 제대로 붙어있는 사람 이라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검은 기운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 다는 것을. 아크로프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세일피어론아드가 선택한 존재 중의 하나가 마력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파마리나가 초월한 존재, 마녀이기는 했지만 어젯밤 그가 예지한 존재는 그보다 몇 단계나 높은 전설 속의 음유술사였다. 그것도 세일피어론아드의 역사를 들추어 겨우 한 번 나타났던‥. 지금 전설 속의 음유술사는 정신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지 어딘가를 자꾸 힐끔거리며 마녀와 맞서고 있었다. 파마리나는 조금씩 시즈가 조금씩 밀려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용병 주제에 이런 하이클래스 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이제‥' "끝이야앗!" "정답!" 굵직한 남자의 음성과 함께 번재가 마구 떨어지는 듯한 마법의 굉음 속에서도 뇌리를 울리는 격타음. 퍼억!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 소리가 자신의 뺨에서 들려온다는데 파마리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곧이어 전신 피부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비에 젖은 사막의 모래를 온 몸에 바르는 여인의 눈에 양쪽으로 나눠진 지팡이가 들어왔다. 마법사 청년에게만 신 경을 쓴 걸 후회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후였다. '그, 그랬었군. 귀인은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동료와 타이밍을 맞출 시기를 기다리며 마녀의 정신을 빼 놓기 위해 일부러 밀리는 척 하고 있었던 게야." 아크로프다가 내심 감탄을 늘어놓는 사이 시즈는 마법의 뒤처리를 했다. 보를레스의 공격으로 파마리나가 마법에 대한 제어력을 잃을 것을 미리 계산하고 있던 그는 혼돈의 바람을 약하게 하는 동시에 방향을 돌려놓았다. 힘이란 약할 때 방향을 틀기 쉬운 법, 그의 생각대로 혼돈의 바람은 뒤로 조금씩 밀리면서 검은 기운의 방향을 틀어놓았고 그 둘은 유성운(流星雲)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늘로 사라져갔다. "쿠, 쿨럭! 쿨럭!" "시즈!" 싸움은 이겼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크로프다의 상세가 너무나 심하여 신전에서 가공된 토롤 혈액 가공품 이 아니면 회복되기가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시즈가 치료 마법과 약초로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하여 피는 많이 멎었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비로 인하여 떨어진 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노인이 부들부들 떨어 졌다. 그나마 시즈와 보를레스가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 덮어주었지만 여름옷이 뭐그리 추위를 막아주겠는가. 아크 로프다는 아래 위의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말했다. "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귀인이여.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 나는 이미 그대를 보았을 때 사신 마저 환영할 마음을 품고 있었소."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보를레스가 고개를 저으며 시즈를 바라보니 그는 『생명의 구슬』을 노인에게 사용하려는지 구슬 하나를 꺼내고 있 었다. 아크로프다가 씨익 하고 억지로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난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는 몸. 살아나도 몇 년이나 더 세상을 유희하겠소? 내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시겠소?" 그의 얼굴이 너무 간절하여 시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노마법사는 하하하 하고 어울리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생명의 구슬』이 마녀에게 들어가게 되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들이 마족과 계약하는 조건 중 하나 가 생명이오. 생명은 그 크기를 따지지 않고 지고함이 말할 수 없소. 그러니 이 구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많은 생 명을 살릴 수도 있기에 마왕과도 거래를 할 수 있는 무서운 물건이 될 수 있소. 사실 이것은 고대의 어느 마족이 나의 선조와의 내기에서 진 대가로 준 구슬이라고 하오. 나는 이 불모지인 사막에 생명의 숨을 조금이나마 불어넣 기 위해 모래의 바다를 끊임없이 돌아다녔소. 제 아무리 『생명의 구슬』이지만 그 힘을 조금씩이나마 보충하지 못 하는 곳에서는 그리 효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소. 그러나 난 적당한 장소를 찾기 전에 마녀에게 구슬의 존재를 들키게 되었고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다녔지. 도망 다니는 와중에서도 드디어 찾아냈소이다. 불모 지에 작은 생명의 보충지를 만들 수 있는 장소를‥. 하늘의 도움인지 마녀는 죽고 말았소. 물론 파마리나라는 더욱 제자가 대를 이었지만 그녀의 스승은 죽기 직전에 『생명의 구슬』에 대해 알려주었으니 나는 그로 인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마녀 사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 그러나 파마리나는 영악함이 스승을 능가했소. 저 여인은 사람들의 녹 지를 빼앗아가며 날 찾았지. 그리고 어느 날, 바클로시크가 날 찾아왔소. 그에게 얘기를 듣고 나는 구슬을 맡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소. 그 당시에도 나는 제법 미래를 엿볼 수 있었기에 언젠가 다시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으리라 믿 었거든. 그리고 이렇게 그대들과 함께 찾아왔소. 나의 숙원‥ 그 마지막은 그대들이 장식해주구려. '바람을 노래하 는 이'와 그 동료들. 난 영광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끝났군. 이제 이 여인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데려가는 게 어떨까요? 함부로 죽일 수는 없고 그냥 놔두면 또 어떤 악행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거기다가 이번 의뢰에 대한 대금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하‥ 그렇군." 손뼉을 쳐가며 맞장구를 치는 둘의 눈빛은 탐욕에 일그러진 짐승,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나타냈다. 파마리나가 공포 에 질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온몸은 꽁꽁 묵인 상태. 얌전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마부석에 오른 보를레스가 시즈를 불렀다. "시즈,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 끄덕. 돌아서는 시즈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가 마차에 오르자 보를레스는 말에게 채찍을 내리쳤 다. 서서히 움직이는 마차의 흔들림과 함께 노을도 함께 기우뚱거렸다. 비가 온 직후이기 때문일까? 왠지 맑게 보이 는 노을의 하늘 아래로 불모지에 마지막 낙원처럼 남겨진 자그마한 숲이 더욱 싱그러운 듯이 느껴지는 것은‥. 27 악장 천사도 악마도 날개로 하늘을 난다. "푸우‥. 역시 북쪽은 다르군. 아무리 해가 저물고 있다지만 무슨 놈의 여름 바람이 이토록 매섭지?" 건조한 사막의 저녁 바람. 기온의 일교차가 보통 4∼50℃를 웃도는 대륙의 머리.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세일피 어론아드는 발열과 흡열이 뛰어난 대머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시즈, 이제 그만해. 곧 마을이 보일 거야." 터번을 걷자 흑단 같은 머리칼에 엿보였다. 아니, 비단이라고 해도 그토록 신비롭게 검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까 만 색의 머리칼이었다. 군데군데 모래가 묻어있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윤기의 반짝임은 맑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했다. 만면에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아리에는 들썩거리는 마차를 열심히 기어 시즈에게 다가갔다. 푸른빛 이 감도는 투명한 유리. 누구라도 청년의 눈동자를 본다면 특이함보다는 경이로움에 놀랄 것이다. 사막과 같은 회색 머리칼은 그가 입고 있는 회색 자켓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청년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지 해가 지는 모습을 물끄 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리에에게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과 같이 방금 전과는 다른 강렬한 모래바 람이 마차를 강타했다. 꽁꽁 묶인 채로 시즈를 주시하고 있던 파마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사막의 대기 자체를 조절할 정도라니‥. 그것도 무려 2시간이나. 그런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 왜 이런 용병단이나 하고 있는 거지?" 파마리나가 용병단 세이서스와 함께 사막을 지나온 시간도 6일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녀가 봐왔던 이들의 모습은 비천한 싸움꾼이라고 생각했던 용병의 이미지를 산산이 부셔버렸다. 특히 외모부터 사람 같지 않은 은발의 청년이 발휘하는 마법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혼돈의 의지를 담고 있는 세일피어론아드의 조각, 사막의 바람 자체를 움직이 다니‥. 고작 몇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 몇 시간이 몇 십 년 후에 태풍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몸의 포승을 풀고 주문을 외우는 시간을 갖게 된다고 해도 이들의 손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도 좋았다. 게 다가 지팡이나 빗자루도 없는 상태. 번개처럼 빠른 저 사내의 검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파마리나의 시선이 옮겨진 대상인 보를레스는 그녀와는 다른 이유로 걱정스러웠다. 아리에의 말대로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사막 도시'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고도의 높낮이가 크게는 170m에 달하는 모래 동산은 사방을 막고 아 무 것도 보여줄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사막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도시. 광활한 사장(沙場)만큼이나 웅장한 느낌 을 자아낸다는 '로트스'. 파마리나를 제압한 후 세이서스들은 주위의 오아시스에 자리한 작은 마을에서 사막을 건너 기에 알맞은 옷을 구입했다. 국경을 넘어 용병국으로 돌아가기보다 사막 도시, 로트스로 향하는 게 더 가까웠기 때 문이다. 물론 '사막의 보석(로트스)'을 보고 싶다는 아리에의 열망 어린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주방일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인지 더욱 극성스러웠다. 그러나 역시 쏟아지는 모래들과 햇볕, 그리고 갈증에 그녀는 후회를 하 고 말았다.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참지 못한 시즈는 결국 한 여인을 위하여 세일피어론아드의 대기가 움직이는 속도 를 늦춰버렸다. '말들도 지쳤어. 이래서는 앞으로 한 시간도 더 못 간다.' 고문에 가까운 채찍질에 말들이 뛰쳐나가는 것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그는 어서 도시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게 되 길 바랬다. "저, 저기 뭔가 보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일행의 불행을 원하는 파마리나조차 아리에의 말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정도로 지루함이 지난 후였다. 붉은 석양이 어둠에 밀려가는 하늘 아래로 보이는 도시. 고대에는 석양을 마왕의 뿔을 지나는 태양의 잔재라고 생 각하였다는 말처럼 붉은 반사광으로 채색된 도시의 모습은 인간을 유혹하는 보석이었다. 그 유혹에 말려든 자들에 는 세이서스라는 용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이야. 시즈가 마법을 오래 사용해서 녹초가 되었었는데‥." 이봐, 이봐. 녹초가 된 것은 시즈만 아니라고! 보를레스와 파마리나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아리에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그리 정정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들이 마차를 세우고 들어간 곳은 여행자들의 집합장소인 여관이었다. 그러나 뭔가 달랐다. '용의 숨결을 뚫고'라는 용맹스러운 이름이 붙은 간판부터 말이다. "뭐야!? 이 곳은!?"하고 파마리나도 얼굴을 찌푸리며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온통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 전용 여관이라고나 할까요? 길드에서 운영하고 있죠." 큰 도시에 위치한 용병 길드에서는 의뢰 거리를 기다리는 용병들의 숙소를 제공하는 곳이 몇몇 있었다. 도시에서도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말썽의 소지가 있는 용병들을 모아놓으면 사고(?)의 위험성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자랑스러운 어조로 아리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하자 파마리나는 정말 끔찍한 장소에 끌려왔다는 걸 직감했다. 아마도 독약이 가득한 장소에 감금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심각한 냄새(땀냄새)가 건물 안을 완전히 채우지는 못할 것 이다. 같은 여자인 아리에가 이런 냄새를 참을 수 있다는 게 기묘하고도 신비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럼 난 길드에 이번 결과를 보고하고 갈게. 먼저 가 있도록 해." 보를레스가 보고한다는 내용은 의뢰로 인한 대금과 일이 끝나 의뢰가 비어있다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설사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해도 보고하는 게 길드에 속한 자들로서의 규칙이었다. 그가 길드 업무소가 있는 윗층으로 올라가자 여인들은 시즈와 함께 숙소가 자리한 지하로 내려갔다.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한 사막에서 유일하게 기온 변동이 적 은 지하는 뜨거운 햇볕과 얼음장같은 달빛 아래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보금자리였다. 벽에는 어떤 짐승 의 몸을 덮었던 작은 가죽들이 실로 이어져 걸려있었다. 침대는 방 양쪽의 벽이 불쑥 뛰어나온- 일부러 깍지 않은 듯 했다. -돌 위에 쿠션과 이불을 올려놓은 것이었다. 모래뿐인 사막에서 어떻게 돌을 구할 수 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사막에서 모래를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암석이 풍화된 흔적인 것이다. 피곤했는지 눕자마자 곤히 잠들어버린 시즈를 잠깐 살펴보다가 문을 닫은 아리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허리춤에 서 단도를 꺼내 등뒤로 던졌다. 파바박! 하는 소리는 실제로는 작았다. 그러나 귀밑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스친 파마 리나의 입장에서는 천둥같은 굉음으로 느껴졌다. "남자들이 없는 걸 틈타 도망갈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 실제로 그녀는 아리에를 쓰러뜨리고 도망을 가려고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리에는 도신(刀 身)의 1/3이나 박혔던 단도를 가볍게 뽑아 흔들며 동그란 입술과 눈,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여인에게 찡긋하고 눈웃음을 지었다. 파마리나의 입장에서는 왠지 한기가 스며들 듯한 미소였다.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눈 앞의 조그 만 계집애조차도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한 편 보를레스는 길드에 넘길 보고서를 열심히 기입하고 있었다. 아무리 시즈가 바람을 약화시켰다지만 마부석에 서 모래 바람을 직접 받으며 말을 몰아가는 것은 상당한 피로를 요했다. 돌아갈 때는 마부를 한 명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펜대를 놀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건들며 말을 걸어왔다. "어이! 자네가 바로 용병국 서부의 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다는 용병단 세이서스의 '두꺼비'인가?" 굵직한 음성은 전혀 힘을 주어 말한 듯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저절로 고개를 돌려지게 하는, 체력이 매우 뛰어남을 알려주는 음성이었다. "그렇소. 그런데 어떻게 알았소? 우리는 이 곳에 오늘 처음 왔소." 사내는 보를레스에게는 미치는 신장은 아니었지만 근육이 매우 발달하여 오히려 더 거대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볼케아스의 전사들이 애용하는 만곡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그의 우람한 체격 때문에 매우 어울리지 않았 다. 그러나 보를레스는 어색한-전사로서- 그에게서 자신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무용(武勇)이 잠재되어 있음을 직감 했다. 근육이 굵다는 것은 순간적인 파괴력, 그것은 검의 속도와도 관계가 있다. 게다가 무거움 물건보다 가벼운 물 건이 휘두르기 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걸 생각할 때 사내의 검이 상당한 빠르기 일 것이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검으로는 어느 정도 휘둘러서는 저런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하던 보를레스의 중얼거림은 사내가 대답하자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내 일행 중에 용병국에서 온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그 쪽에서 자네들이 엄청나게 유명하다고 하더군. 내 이름은 '토실흐덴'라고 하네. 이 주변에서는 한 가닥 하지." "무슨‥ 용건이라도 있소?" "물론이지! 용건이 없다면 왜 접근했겠나? 어떤가, 자네? 나랑 한 번 겨뤄보지 않겠나?"하고 토실흐덴은 피식 웃었 다. 마치 '자네 참 귀엽게 생겼군.'하는 말투여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는 건드리면 침이 흘러내릴 때까지 멍하게 있을 듯한 보를레스의 모습을 재밌어하며 '난 먼저 나가서 있을 테니 나오게.'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밖은 완전히 어둠이 깔린 상태였다. 길드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밝혀놓은 횃불 옆에 방금 전의 황당한 사내가 서있 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절대로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왜 내려왔나?'라는 생각이 보를레스의 뇌리를 스 쳤다. 조금 전에 로트스의 용병 리스트를 보던 그의 눈동자에 맨 윗자리에 자리한 토실흐덴이라는 이름이 비쳤던 것이다. 개인 용병으로서는 제일 강하다는 뜻과 동일했다. "뭐하는 거지? 어서 검을 뽑아." 내심 울상을 짓고 있는 보를레스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로트스 제일의 용병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 단한 승부욕을 가진 모양이었다. 재촉을 하는 토실흐덴의 주위로는 구경꾼들이 미리 예고된 결투를 보기 위해 원을 이루고 있었다. 멋지게 검을 뽑지 않는다면 관중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히 메울 정도로 기 대에 휩싸인 눈동자들‥ 저주스러웠다. 그러나 강한 자에 대한 호승심이 강한 것은 보를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검집을 빠져 나오는 특유의 마찰음에 관 중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보를레스가 뛰어올랐고 검과 칼이 부딪었다. "뭐 하는 거야?"하고 소란스러워진 여관의 분위기에 지상으로 올라온 아리에는 달이 몸체를 들어 낸 시간에 시끄러 운 소음을 일으키는 장본인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일행이라는데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새 또 문제를 만들다니, 어쩔 수 없다니까!" 짜증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린 아리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딱딱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막의 모래밭에서 눕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녀와 달리 파마리나는 보를레스의 싸움이 흥미로운지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그극! 횃불과 달빛, 그리고 별빛만이 밤을 밝히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듯 불똥이 흩날렸다. 보를레스는 다리를 한 껏 벌리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비록 토실흐덴이 쉽게 피해버렸지만 바닥에서 쉬고 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떠오 르는 부가적인 공격이 득을 보았다. 물러서는 로트스 제일의 용병에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두께 가 4cm나 되고 검신의 길이만 1.3m가 넘는 육중한 검이 낙뢰처럼 떨어지자 토실흐덴은 당황했다. 막자니 바스타드 소드에 비하면 어린애처럼 작은 만곡도가 충격을 견딜지 의문이었고, 피하자면 방금 전처럼 모래가 일어나 시야를 가릴 텐데 그렇게 되면 승기를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검이 큰 걸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할 수 없군!' 토실흐덴이 택한 방법은 막기였다.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이 보기에도 그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보 를레스는 자신의 검이 토실흐덴의 만곡도와 부딪히는 순간 묘한 느낌에 움찔했다. 마치 물에 손을 천천히 넣는 느 낌이랄까. 아마도 상대는 자신의 공격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며 충격을 완벽하게 완화시키는 게 분명했다. '과연‥. 왼손잡이 검사답군.'하고 보를레스는 중얼거렸다. 토실흐덴이 칼을 꺼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는 왼손잡이 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대하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세상에 오른손잡이들이 많으니 왼손잡이는 그리 힘들게 없었 지만. 게다가 왼손을 잘 사용하는 이들은 왠지 모르게 정교했다. 힘의 사용이나 움직임에 있어서도 전혀 쓸모없을 듯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빠뜨리는 일도 허다했다. "체구에 걸맞게 대단한 힘이군.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어." 무릎이 바닥에 닿고 허리가 굽어질 때까지도 보를레스의 검에 위력이 살아있자 토실흐덴은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 만 하다가 반으로 쪼개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검등을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빼자 칼이 보를레스의 공격 을 이기지 못하고 기울어졌다. 두 무기가 긁기는 소리는 바스타드가 만곡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인 동시에 토실 흐덴이 보를레스에게 파고드는 소리이기도 했다. "걸렸어!"하고 누군가 외쳤다. 밤에는 음파가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작게 말해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잘 들린다. 덕분에 뒷줄에서 구경하던 관중들도 누가 소리쳤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쿠당! 하고 토실흐덴이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승패를 알게 된 관중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찰나였지만 모두에 게 숨을 들이키게 만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크으! 대단하군, 대단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면을 강타하는 짜릿함이라니!"하고 토실흐덴은 메조키스트의 취 향을 의심케하는 말을 내뱉으며 코피를 훔쳤다. 바스타드 소드의 공격 범위를 완전히 재끼고 만곡도를 뻗는 순간, 보를레스가 검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놓고 팔꿈치로 얼굴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복부를 걷어차는 강 렬한 공격으로 그는 데굴데굴 굴러버렸다. "누가 할 소리를‥ 욱!" 보를레스의 말이 '나도 메조키스트야'라는 동질적인 대답일 거라고 착각하는 이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그의 손질 잘된 하드웨어가 옆구리 부분이 완전히 잘라져 있었다. 물론 만곡도가 워낙 날카로운 칼이기도 했지만 안면을 공격 당해 공격력이 급감했는데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절단된 것이다. 보를레스의 옆구리도 피부가 길게 베어져 피가 흘 러나왔다. "이제 그만 하도록 하지. 자네가 대단한 실력인 걸 충분히 경험했네."하며 토실흐덴이 손을 내밀었다. 보를레스도 악 수를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고맙소. 당신이야말로 대단한 실력이오. 그렇다면 이제 본래의 용건을 말해 주시겠소?" "좋아. 간단하게 말하지. 난, 아니 우리 일행은 어떤 의뢰를 맡게 되었네.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하지." 긴장이 풀려버린 보를레스였다. 얼마 전 용병단 '케이소'는 무려 일만 타로운이라는 엄청난 금액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로트스 최고의 용병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은 그들로서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의뢰자가 『풍암의 바다』에서 왔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풍암의 바다』에 위치한 고대 의 유적이었으나, 삭막함이 가득한 최악의 모래바다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열성적인 고고학자조차 포기하는 유적이 었다. 게다가 일설에 따르면 유적 안에는 알려지지 않은 몬스터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어쩌면 드래곤의 안식처일 수 도 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과 불모의 유적을 개척했다는 명예는 너무나도 색정적인 유 혹이었다. "흐음‥ 결국 한 마디로 의뢰가 어려우니 파티가 되어 달라는 말이군요?" 아리에가 고명한 학자처럼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묻자 토실흐덴은 고개를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삼십대 중 반의 나이에도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대며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그래! 자네들이야말로 적임자지. 듣자하니 자네들은 남들이 마다하는 어려운 의뢰를 주로 맡는다더군. 이 의뢰는 많은 돈이 걸렸어. 일만 타로운이면 아무리 헤프게 써도 일 년은 마음 편히 먹고 놀 수 있다고." 그러나 세이서스의 사람들은 꽤나 금액에 대한 욕망이 그처럼 깊지 않았다. 예도를 손질하는 시즈와 그에게 자기 칼의 손질까지 맡기는 보를레스. '하긴‥ 일만 타로운이라는 금액이 대단하기는 하다.' 실제로 용병국 서부의 리스트를 쥐고 있는 세이서스도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금액은 일천 타로운 정도였다. 그 것 도 아주 열심히 뛰어야 가능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에에게 토실흐덴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나보군. 이쁘게 생긴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도 밝군. 흐 흐‥ 어때? 아저씨랑 친하게 지낼까?" "토실흐덴 씨. 그녀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보를레스가 충고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토실흐덴은 온몸을 엄습하는 살기에 아리에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누구지?'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살기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싱글거리는 보를레스, 새침하게 째려보는 아리에, 무심하게 검을 손질하는 시즈, 그런 시즈를 유심히 바라보는 파마 리나. 분명 이들 중 한 사람일 게 분명했다. 토실흐덴의 입가에 뭔가 즐거운 미소가 피어났다. "이견이 없다면 손을 잡는 걸로 결정났다고 믿겠네. 재미있는 여행이 되겠어.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걸세. 그 때 내 일행도 소개해주도록 하지." 듀쿠스는 몇 시간 전부터 마누라 바가지 긁듯이 속을 뒤집어놓는 30대 중반의 사내 때문에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두들겼다. "이봐요, 할아범. 할아범이 아니라면 누가 '풍암의 바다'를 안내하겠소? 좀 도와주시구려. 제발, 부디, 기필코! 아! 기 필코는 아닌가?" 이렇게 떼를 쓰는 사람을 누가 로트스 최고의 용병단 중 하나라는 케이소의 단장이라는 토실흐덴이라고 생각하겠는 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눈치를 살피는 근육질의 남성에게 내일 모레면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병앓이를 할 것 같은 노인은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아. 아침부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동반자살 하자고 졸라대는 거냐!? 옷 벗고 사막에 나가서 땡볕에 누 워있기만 해도 잘 익어서 죽을 텐데 왜 하필 '풍암의 바다'를 간다고 나를 사지(死地)로 끌어드리는 게냐!" "할아범이 길 안내만 제대로 하면 사지가 아닌 보석의 대지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의뢰대금이 얼마인지 아 십니까? 무려 일만 타로운이라고요! 언제까지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살 겁니까?" 뭐라고 하던 간에 듀쿠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막의 무서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불모지이나, 불모지 가 아닌 땅, 사막. 모래와, 바위 밑에서 살아 숨쉬는 수많은 생물과 도처에 숨어있는 몬스터. 적응의 천재라는 인간 조차 발을 붙이지 못한 곳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들의 힘은 강했다. "자네는 '풍암의 바다'가 가진 무서움을 모르지 않나. 그만 하고 돌아가게."하고 노인은 뒤로 돌아누웠다. 등 건너편 으로 토실흐덴이 씩씩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듀쿠스는 눈을 감았다. 그 날의 처참한 전경이 눈에 아른거렸 다. 겨우겨우 살아서 도망치며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으리'하고 다짐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러나 그가 사막으로 떠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방에서 문을 열고 빠끔히 내다보는 어린 소녀. 듀쿠스가 양팔을 벌리자 그녀는 달려와 폴짝 안기고는 할아버지의 안개 낀 얼굴을 눈물을 글썽이며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 가야 돼? 안 갈 거지? 나 혼자 두고 가지마." "걱정 말거라. 이토록 귀여운 손녀를 버리고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 "어때?" "말도 말라고. 얼마나 완고한지‥. 꿈쩍도 안 하더군." 의자를 꺼내 털썩 앉은 토실흐덴은 어깨를 으쓱하며 실패를 보고했다. "꼭 그 사람이어야 하는 건가요?"하는 아리에의 물음에 용병단, 케이소의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보를레 스는 듀쿠스라는 길 안내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될 정도로 '풍암의 바다'라는 곳이 위험하다는 뜻이군요." 무미하면서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세이서스와 케이소의 시선을 한꺼번에 돌아갔다. 보를레스와 아리에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듯 흔들렸다. 토실흐덴의 좌측에 앉아있던 남자가 껄껄대며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칼이 불꽃을 연상시키는 그는 올해로 25살인 쿠라마스였다. "하도 말을 안 해서 벙어리인 줄 알았군.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무서운 곳이지.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는 거야. 승리 라는 것은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곳을 정복하는 것을 뜻하는 거라고!" "문제는 정복하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패배가 놓여 있다는 것이고요?" 차가운 얼음으로 뽑아낸 듯한 머리카락 아래로 입술 끝에 살짝 당겨졌다. 쿠라마스는 무감각한 인형같은 청년이 자 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자자‥. 그만하게. 자네, 시즈라고 했지? 우리도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네. 그러나 용병이란 어차피 죽음을 염 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네. 그렇다고 언제 죽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도 살아가는 자체로 소중함을 느끼 고 있네. 그래서 조금이라도 뛰어난 사람을 끌어드리려고 노력하는 거지." 끄덕. 시즈는 수긍했는지 입을 다물고 평소의 침묵하는 개구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케이소는 세이서스에 대한 소 문이 상당 부분 잘못되었다는 걸 실제로 그들을 만나서야 알았다. 어디에 은발을 가진 개구리가 있단 말인가. 시즈 의 외모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눈동자와 머리칼은 그에게 신비함을 부여하기 충분했다. 나직하게 흘러나 오는 목소리는 청년이 가진 신비감 이상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 두 마디를 했을 뿐인데 테이블 위를 하늘 거리는 침묵의 냉기가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뛰어나다는 안내원을 끌어드릴 겁니까? 보를레스가 콧등을 긁적이며 묻자 케이소의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서 용병단, 케이소에 대해 설명 을 하자면 이들은 모두 6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파티였다. 진(陣)을 이루어서 소 대 다수(小 對 多數)로 싸우는데 능숙했다. 마법사나, 사제처럼 비싼(?) 인원은 없었지만 그들이 던지는 도끼와 창은 백 걸음이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목표에 꽂혔고, 용병으로 잔뼈가 굵다는 걸 증명하듯이 웬만한 독초와 그에 대한 해독, 그리고 상처에 좋 은 약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았다.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키틀볼이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다시 가서 말해보지.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 노인네의 변덕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내가 가장 쉬울 걸세." "부탁합니다, 키틀볼. 일만 타로운을 위하여‥!" 그 구호에 별다른 이유 없이 웃음이 나오는 시즈였다. "이제는 자네까지 왔군. 다른 녀석들은 '풍암의 바다'의 무서움에 대해 모른다고 쳐도 자네는 뭐지? 혹시 망령이라 도 든 겐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겠지? 천사든 악마든 간에 날개가 없으면 하늘조차 날 수 없네. 자네 가 귀여운 손녀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앞으로 남은 얼마의 세월을 곁에 있는 것일까? 이대로 라면 자네는 만족스러 운 여생의 끝을 맛볼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사랑스러운 핑계거리는 자네를 떠나 시작해야 할 때 무슨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난단 말인가. 행복하게 죽어 무엇을 남기겠나? 그럴 바에야 목숨을 걸고 손녀에게 목숨을 달아주게 인간들 에게 있어 무엇이 날개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럼 기다리겠네." 과연 인간은 날개를 가질 수 있는가? 결론은 '없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날개'라고 불리는 것은 많다. 돈, 권력, 명 예 등‥. 듀쿠스는 일어서서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망난 노인네 때문에 들떠버린 마음속을 가라앉힐 필 요가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 알맞을 듯한 작은 공터에 와서야 발을 멈춘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쯤에서 놀고 있겠지?"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듀쿠스의 눈동자가 놀람과, 분노로 한꺼번에 부풀었다. 바 닥을 뒹굴며 울고 있는 작은 소녀와 그녀를 거리낌없이 걷어차는 사내, 그 남자는 훈제 바비큐를 장사하는 남자로 듀쿠스와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소녀를 공처럼 멀리 걷어낸 남자는 더러운 쓰레기를 걷어찼다는 듯이 침을 뱉 으며 소리쳤다. "우리 애랑 놀지 말라고 했지? 거지같은 게 어디서 우리 아들한테 빌붙어서 먹을 걸 얻어내는 거야? 하는 짓과 모 습이 조금도 다르지 않잖아. 에이, 더러운 것. 퉤!" 주위에서는 그런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울고 있는 소녀에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오면 피하는 이가 있을지언정. 분노하지 말자. 각오하지 않았던가. 노인의 얼마 있지도 않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깨문 입 술에서는 짭짤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의 힘없는 어깨가, 등허리가 눈에 비친 상황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혼이 사라진 발걸음으로 말이다. 얼마 후, 오두막으로 손녀 녀석이 돌아왔다. 부어오른 뺨이 보기 흉하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녀석은 듀쿠스에게 오 늘 즐겁게 놀았다는 양 떠벌리기 시작했다. 보통 때라면 몰라도 이미 모두 알아버린 그녀의 할아버지에게는 그녀의 멈칫거림조차 말을 만들어내기 위한 어색함으로 느껴졌다. 그 날 저녁, 듀쿠스는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스러운 '핑계거리'를 부탁하고 용병길드로 향했다. 시즈들이 케이소와 함께 의뢰를 받아드린 이유는 상당히 의외적인 경우였다. 유일한 안내원마저 두려워하는 사지 (死地)에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현재는 그 이유가 생겨버렸다. "사론! 너는 사론이 아닌가?" "보를레스 님!"하고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청년은 분명 시즈과 피브드닌들을 아스틴네글로드까지 호위했던 수행 원 중 하나인 사론이었다. 아예 얼싸안아버린 보를레스와 사론을 향해 쿠라마스가 물었다. "아는 사이였나 보군요?"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는 함께 아스틴네글로드와‥." 당연하다는 어조로 대답을 하던 사론의 입술과 혀가 갑자기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을 테이블에 앉아있는 은발 의 인형을 가리키며 소리를 높였다. "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입니까?" 선수를 쳐버린 시즈.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하자 사론은 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올 이름을 꺼린다 는 걸 알아채고 혀를 있는 힘껏 꺾었다. "전에 아스틴에서 본 일이 있지요? 그 때 보를레스 님과 함께 뛰어난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그의 얼버무리는 솜씨는 뛰어났는지 케이소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다. 아리에와 파마리나가 세이서스의 일원- 파 마리나는 말도 안된다고 거부하려 했지만 아리에가 단도로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자 곧 조용히 받아드렸다 -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사론에게 보를레스가 물었다. "자네는 토루반과 피브드닌을 수행하지 않았나? 이 사막의 왕국에는 무슨 일이지?" "말도 마십시오. 두 분께서는 모르셨습니까? 피브드닌 님, 토루반 님은 함께 유적 탐사연구를 나오셨습니다. 볼케아 스의 유적들을 돌아보며 연구를 하던 중에‥. 결국 가서는 안 되는 곳까지 탐사 방향을 향한 겁니다." "모두 살아 계시겠지? 하긴 죽을 사람들도 아니지. 피해는?" 갑자기 사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가 혼자서 왔다는 점- 수행기사는 죽는 한이 있어 도 수행 대상을 버리는 걸 가장 큰 수치로 생각한다. -과 입고 왔다는 옷이 넝마처럼 피폐해진 걸 볼 때 꽤나 심각 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아는 계십니다‥. 천정을 무너뜨려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았으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안에 있을 수는 없었습 니다. 물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가지고 있던 마법도구를 활용하여 몬스터들의 주위를 끄는 사이에 저 혼자 서 도움을 청하러 탈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거 시급했잖아. 어이! 토실흐덴, 바로 출발합시다. 다들 준비는 미리 해뒀겠지요?" "보를레스, 진정하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듀쿠스가 없이 '풍암의 바다'에 간다는 것은 승산이 없네." 바로 그 때였다. '용의 숨결을 뚫고'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길드 안으로 들어온 노인은 시끌벅적한 식당의 테이 블들을 둘러보다가 세이서스와 케이소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키틀볼 앞에 멈춰선 노인은 모자를 벗어 테이 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말이 맞았네, 키틀볼. 날개를 찾으러 가겠네." 그렇게 또 다른 여행의 길은 막을 올리고 있었다. 28악장 모래알 사이로 흐르는 사막의 의지 장비가 구비된 두 용병단은 밤을 시작으로 하여 길을 떠났다. 얼마 전 시즈들이 로트스에 들어올 때는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밤의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지만 장비가 갖춰진 후에는 오히려 시원한 밤이 낮보다 걸음을 옮기기 좋았다. 게다가 케이소들의 신임이 헛되지 않았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듀쿠스의 인도능력은 뛰어나 지칠 때쯤이면 오아시스에 도착하게 되어 시즈들은 감탄했고 한편으로는 왜소한 몸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노인을 믿게 됐다. "사론,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토루반들이 얼마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마도 앞으로 나흘 정도일 겁니다. 벌써 제가 로트스에 도착하는데 사흘이라는 시간을 소요했으니까요. 떠나오기 전에 견딜 수 있는 수량이 딱 열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생겼을지 알 수가 없으니‥."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사막에서 섣불리 뛰거나 서두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오히려 가장 수분의 소모가 적은 속도로 오랫동안 가는 게 더 중요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세." 듀쿠스가 쉴 장소로 제시한 곳은 바로 바위 밑이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막은 모래보다는 건조한 바위로 이루어 진 지형이었다. 둔탁하게 튀어오른 바위들이 모를 들어고 기괴한 모습으로 예술품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아마도 이 때만은 듀쿠스도 그 동안의 사고 없는 여행으로 방심을 했었던 모양이다. 철저한 준비도 무의미해지는 상황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법. 사막에서는 더욱 빈번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취리리리리리리릭!" "흐억!" "방울뱀이다. 움직이지 마!" 쿠라마스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케이소의 실력 좋은 검사, 마필트는 종아리에 이빨을 박고 매달린 방울뱀에 게 몸서리치며 검을 내리쳤다. 사실 어느 동물이나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게 약육강식의 철칙 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받았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마필트는 위협하는 소리에 버둥대다가 방울뱀을 반대로 위협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신의 반토막이 사라진 후에도 그의 다리를 물고 놓지 않는 뱀의 머리를 칼로 찢어버린 쿠라마스가 얼른 여분의 천으로 상처의 독이 타고 올라갈 예정 부위를 꽁꽁 묶었다. "참아!" 사막에서 부싯돌로 쇠를 달구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쿠라마스는 단도를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모래에 날을 파 묻었다가 꺼냈다.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게 손을 댔다가는 데여 버릴 것 같았지만 그는 망설임없이 마필트의 환부에 가져다 댔다. "크으으으윽!" 생피부와 살이 한꺼번에 십자형으로 갈라지는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일 게 분명했다. 아리에는 이를 악 물고 고통을 참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치료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곧 그는 쿠라마스가 검은 색의 금속 을 꺼내자 기겁을 했다. 빛을 반사하는 보통의 금속색과는 달리 검은 색의 철을 햇볕이 내리치는 사막 한 가운데 올려놓으면‥. "취익!"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 쿠라마스는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다. "치이이이익!" "흐아아악"하고 사내의 비명과 함께 살타는 냄새가 구역질나게 허공에 퍼졌다. 다들 얼굴을 찡그리고 치료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독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입으로 독을 빨아내는 단순한 방법도 있었지만 빨아내는 쪽이 만약 입 안에 충치나 작은 상처라도 있으면 즉사해버릴 수도 있었다. "자네의 비명소리는 언제 들어도 우렁차군, 마필드. 갓 태어난 아이들이 본받았으면 할 정도야."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 걸." "당연하지. 칭찬이라고 생각했냐?"하고 쿠라마스는 코를 벌렁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두 동강이 나 있는 뱀을 들어서 보자기에 넣으며 말했다. "이 놈에게 체력을 뺏겼으니 다시 돌려받아야지. 푹 고아서 먹으면 어느 정도 기운이 될 거다." 그들이 하는 양을 뒤에서 보고 있던 듀쿠스는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막을 건널 때는 앞으로 나가는데 만 신경을 집중하는 게 제일이다. 흥분을 한다든지 깜짝 놀란다면 그것은 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 투명한 눈동자의 청년을 빼놓고는 대부분 수분조절로 골치 아프겠군.'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정말 신기한 자였다. 방울뱀의 위협과 용병들의 소란에도 그는 사막의 저 편을 바라보며- 노 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의 주위는 다른 차원 같다고나 할까? '어느 멍청한 족속들은 은발을 신비롭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다. 내가 장담하건데 신들은 모두 검은머리 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든 빛을 받아 드릴 수 있는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지. 은빛은‥ 가장 순수한 빛깔일지는 몰라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저주의 빛깔이다. 저 모든 생물의 근원적인 힘인 태양 빛을 거부하지 않는가.' 그러나 청년은 모든 것을 거부해야할 모습에 한 가닥 포근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다른 것을 거부하는 연극을 하 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자 신경이 쓰였던 걸까? 그는 듀큐스에게 눈짓을 하며 손가락으로 아까 전부터 바라보던 사막의 끝자락을 가리켰다. 지평선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로트스 제일의 안내원이라는 듀쿠스가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래 폭풍이 밀려온다! 바위 뒤로 숨어!" 작지만 수를 셀 수 없는 암기가 일행이 숨어있는 바위에 마구 부딪힌 것은 그가 외친 후로부터 수십 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30분이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모르는 그 기세에 아리에가 시즈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는 거지?" "이 바람이 사그라들려면 앞으로 이틀은 더 있어야 할겁니다. 우리가 로트스에 도착할 때 아무리 태양이 없었다지 만 너무 추웠습니다. 이유는 이 곳이 대륙 북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기온이었던 모양입니다. 바람은‥. 환경의 법칙에 충실하니까요." 뜨거운 장소에서 차가운 곳으로 불어 가는 게 바람이었다. 그 의지를 알고 있는 시즈는 이 바람이 자신이 조절하는 한도를 넘어선 위대한 대륙의 의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걱정이 되는 토루반들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그 의지를 거슬렀을 것이다. "앞으로 1시간 후부터 바람이 그나마 약해질 겁니다. 그 때 떠나기로 합시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자신있는 목소리로 단언할 수 있는지 아무도 묻는 이는 없었다. 사막에서는 불안하게 정확성을 따지기보다는 단순한 행운로 주사위의 패를 정하더라도 자신있는 결단이 중요했다. "그럼 떠납시다." 다리를 다친 마필드였지만 누구도 부축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버둥거리는 말과 낙타를 안정시키고 올라탄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차를 가했다. 어차피 낙타와 말에게 먹일 풀을 싣고 사막을 다니지는 않는다. 한계점에 다 다르면 두 헌신적인 동물들을 내버리고 일행은 냉정하게 떠나버릴 것이었으므로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부려먹어야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아리에의 낙타의 거체가 모래 속에 자취를 녹여버린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여 자남자 할 것 없이 자신의 두 발로 모래를 헤치며 걷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하루는 낙타들이 견뎌주어야 했는데 모래 바람의 피해는 컸다. 파마리나는 겨우 몇 시간밖에 걷지 않았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들기며 지팡이 를 잘라버린 보를레스를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반나절하고도 세 시간에 이른 강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시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지 독해서 다른 이들이 더위에 흘리는 땀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소. 유사를 밟게 되면 큰일이니까." 듀쿠스가 말하길 유사(流砂)는 밞은 존재를 모두 끌어들여 죽이는 사막 최고의 생명 탐욕자라고 했다. 유사의 움직 임이 심한 낮을 피해 밤에 가는 게 좋다고 결정한 듀쿠스에게 시즈가 다가가 말했다. "듀쿠스, 강행합니다." 듀쿠스를 제외하더라도 세이서스를 제외한 사막의 민족들이 찬성할 리가 없었다. 파마리나마저도 '저런 미친놈이 있는 파티에 들어오다니 나도 명줄이 다했어.'라고 중얼댔을 정도였으니까. "자네는 유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아는가?" "유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두렵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이없는 어조로 물어오는 키틀볼에게 시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한번 입이 열릴 때마다 시 즈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어째서지?"하며 보를레스가 앞으로 나섰다. 사론의 얼굴에도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시즈는 아스틴네글로드조 차도 한 걸음 양보했던 대륙의 현자, '마땅찮은 이'. 그의 말에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고 함께 여행했던 이들은 믿었 다. 아리에는 모래에 가슴까지 파묻힌 채 힘겹게 앞으로 전진했다. '하여튼 저 사람을 만난 후로는 편할 날이 없다니까‥.' 내심 그녀는 시즈를 바라보며 투덜거렸지만 불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조가 쾌활했다. 17년의 가까운 세월을 목 욕물과 향수를 제외한 액체는 몸에 대어본 적도 없이 지내왔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의 안락함이랄까? 그녀는 너 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가문이 몰락하고 시즈와 보를레스를 따라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간신의 반란으로 피신하는 공주님의 환상을 머리 속에 품고 있던 걸 기억해내고는 아리에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 후 다가온 현 실은 환상처럼 로망스적인 게 아니었다. 보를레스와 시즈는 힘을 기르기 위해 매일같이 싸움과 전쟁을 찾아다녔고 자신을 구하러 와줄 왕자를 기다리던 그녀에게 달려든 것들은 우락부락한 용병들과 그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 가 붙은 접시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주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던 얼굴, 즉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빼 어난 미모는 납치, 강간, 성추행 등 반갑지 않은 현상을 초래했고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도 아리에는 자연스럽게 강 해졌다. 일 년 전의 그녀를 알던 이를 대면한다면 분명 그 사람은 신의 은총이라면서 놀라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부터 안락함에 빠져있던 때보다 즐겁게 느껴졌다. "정말 빠지지 않는 군요." 어렵게 모래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아리에는 누가 여유 있게 감탄할 수 있는지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사론의 말투 에 서린 감정을 모두들 표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 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매 한가지였다. 그들을 대표하듯 듀쿠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고 있는 시 즈에게 물었다. "어떻게 빠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나? 나는 사막을 종횡무진하고 다닌 많은 이들의 전설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중 에 유사를 타고 사막을 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네. 어떤 이라도 유사를 어떻게 피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사 람이 대부분이었지. 전설 속의 이들조차 골치를 썩혀야 했던 문제를 어이없게 풀어버리다니‥." 그렇게 어이없는 청년은 대답없이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어떻게 이계의 지식을 이 해하겠는가.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는 비슷한 것이라도 경험한 사람과 전혀 모르던 이에 따라서 천지의 차이만큼이 나 구별된다. 유사(流砂)에 대한 인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즈가 왔던 이계에서도 유사는 문학작품에 널리 유포하는 미신을 낳게 한 존재였다. 볼케아스와 사막의 건설기술자들은 유사가 특별한 형태의 모래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모래가 지표의 간극수(間隙水)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과 동물이 빠진다면 그 속 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지만 모래와 물이 함께 섟여있는 밀도가 인체나 동물의 몸보다 크기 때문에 몸 표면 아래로 는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몸부림을 치게 되면 평행을 잃게 되므로 빠져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깊은 물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가 유사에 빠져서 얌전히 빠져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모두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두려움에 질려 발버둥을 쳤고 누구하나 유사의 비밀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 결과, 유사는 생명을 빼 앗는 사막의 의지로서 인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의심이라는 감정로 눈매를 더욱 찢어가며 노려보는 이들의 대한 답변을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시즈는 대답했다. "전에 한 번 빠져보았습니다. 발버둥치기가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더니 멈추더군요." "‥‥." 이 기가 막힌 대답에 시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다시 한번 잘못 박혀 버렸다. '미친 놈'이라고 확고하게. 유사지대를 건너 용병단 일행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 산맥지대를 지났다. 바람만 불어도 떨어질 듯한 거대 한 바위들이 작은 연결점으로 버티고 묘기를 부리는 아슬아슬한 곳이었다. 그 덕에 아리에는 바위산에서 돌 부스러 기가 떨어질 때마다 놀란 가슴을 움켜지고 시즈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24세의 나이동안 마법에 취해 애인 하 나 없었던 파마리나는 눈꼴이 사나워 닭살이 돋은 피부를 슥슥 문질렀다. 마녀라는 것은 때로는 마족과의 계약을 비롯하여 잘못된 마법의 부작용 등으로 의외의 일과 대면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에 도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과 냉정함을 강요받았는데 파마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해!" 마필드는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람 몸통 만한 바위를 보고는 달려가려다가 다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소 리만 크게 질렀다. 아직은 그의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사막에서 살아남은 방울뱀의 독은 그만큼 신 경에 치명적이었다. 그의 외침에 위를 올려다본 파마리나는 코웃음쳤다. 이런 돌멩이 따위가 날 어떻게 하겠어? "허공에서 뭉쳐진 공기의 망치!" 보통의 마법사라면 주문을 외울 새도 없이 뭉게져 버렸을 것이나 파마리나는 마녀였다. 뛰어난 재능으로 선택받은 여인답게 그녀의 이죽거림이 끝나자마자 바위는 산산조각 났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어떻하오!?"하고 부서진 바위의 파편에 머리를 맞을 뻔한 쿠라마스가 소리쳤으나 파마리나 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찡그리며 맞받아쳤다. "그럼 어떤 식으로 처리하라는 거죠? 떨어지는 바위를 아무에게도 튀기지 않게 내가 몸으로 감싸안으라는 건가요?" "저 여자가! 그러고도 동료라고 할 수 있어?" "언제 내가 당신의 동료라고 했죠?" '난 이 파티에도 억지로 끌려온 거라고!'하고 외치려던 파마리나는 한기(寒氣)가 풍기는 시즈의 투명한 눈동자와, 굳건히 검의 손잡이를 잡은 보를레스의 손과, 장난치듯 단도를 돌리는 아리에의 미소에 의도한 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짜증을 부리듯 뒤로 돌아서자 키틀볼이 나서서 말했다. "그만 하시오. 여기는 단결한다고 해도 살아가기 힘든 사막이오. 쿠라마스, 레이디께서는 고의로 자네에 돌의 파편 을 튀긴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상황에서 방어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압출된 고깃덩이가 됐을 거야. 그리고 파마리나 라고 했소? 그대도 알아두시오. 우리가 임시적으로 뭉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여행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 으니 동료나 다름없소. 조금은 동료들을 배려해주었으면 좋겠구려." 그는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위험하군. 방금 전 같은 바위가 이 곳에서는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내리잖아." 사람들은 씁씁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보를레스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리번대며 암석의 산을 빠져나가는 그들. 돌산 위에서 서두르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검은 후드 위에 흰색의 큰 천을 받쳐입은 그는 전통적인 볼케아스식 사제의 모습을 한 그는 사라져 가는 보를레스들을 쫓아 몸을 날렸다. 시즈의 말대로 모래바람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던 돌의 산을 벗 어나자 일행은 마치 바다 속에서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들이 걷고 있는 사막이 바로 '풍암의 사 막'이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저것은?" "저게 바로 '풍암'이지. 보통 버섯바위라고도 불린다네." 보를레스가 보고 탄성을 지른 존재는 사막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바위였다.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지면에 닿는 부 분부터 풍화 침식되어 그 별명처럼 버섯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경(寄經)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나 듀쿠스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십 년 전의 참혹한 회상이 눈앞을 가렸다. 그 때, 시즈가 손을 들어 서 사람들의 걸음을 만류하며 말했다. "멈추세요. 위험합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자 주위를 둘러보던 키틀볼이 동조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들 물러서라. 그의 말이 맞다. 주위에 동물의 뼈가 이상하리 만치 많지 않은가!" 듀쿠스는 분명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러 개의 풍암 중 흔들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피로운웜피스‥." 보를레스는 듀쿠스의 중얼거림이 뜻하는 것이 지금 땅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지렁이(?)가 아니길 빌고도 빌 었다. '피로운웜피스'라는 몬스터에 대해 인디움프스 생태학은 아래와 같이 기재하고 있다. 사막에 사는 거대 몬스터. 바위가 많은 지역에서 땅 속에 몸을 숨긴 채 먹이가 올 것을 기다린다고 한다. 길이가 무려 30 미터에 육박하는 초대형 괴물인 피로운웜피스는 바다뱀이 육지로 올라온 후 진화한 게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으나 진실은 알 수 없다. 메뚜기, 전갈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낙타까지 잡아먹는 폭식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피로운웜피스는 목격한-목격 은 했지만 살아온 사람이 드물다-사람이 드물어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사막의 암석지반 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 직이는 걸로 보아 엄청난 힘과, 단단한 거죽을 가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대면했을 시에는 검이나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무기로는 상처를 내기가 힘들 것이다. 마법도 이 괴물이 어떤 내성 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단,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모든 생물의 약점인 눈일 것이다. 사막인들에게 드래곤만큼이나 포악하고 두려운 몬스터로 알려진 피로운웜피스. 바위 암반이 무슨 늪지대인양 놈은 머리를 박았다가 뺏다가 하면서 지렁이들 특유의 움직임으로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시즈는 중얼거렸다. "지식을 가진 이들은 그 지식의 벽에 막혔다는 걸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몬스터로군." 기괴하게도 피로운웜피스는 눈이 없었던 것이다. 느린 듯 보이면서도 빠른 게 마치 썰물이 술렁거리며 밀려드는 듯 한 그 움직임에 보이는 것은 커다랗게 벌려진 입이었다. 이빨을 없었지만 몸 전체가 근육인 듯한 녀석에게 물렸다 가는 그 압력으로 질겅질겅 씹혀서 껌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수, 숨어!" 쿠라마스는 외치고 도망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있는 것이라고는 바위뿐이지만 피 로운웜피스가 덮쳐오는 모습은 마치 바위가 종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마필드도 바람처 럼 몸을 날렸다. 죽음 앞에서 나아가는 다리의 부상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뭐 이렇게 빨라!?"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쇄도해온 괴물의 입을 바라본 순간, 죽음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입을 악물고 만곡도를 빼어든 펄쩍 뛰어올랐다. 빠캉! 하고 두 물체의 충돌이 소리로 터져 오르자 도망치던 용병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리에는 차라리 뒤 로 돌아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그녀와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마필드를 휘감기 시작한 거대한 지렁이의 모습이었다. "으악! 으아아아아악! 으아‥ 앗‥ 쿠억‥."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도 허무한 것인가? 이로써 한 사람의 존재는 걸어다니던 생물에서 거대한 지렁이의 뱃속에서 녹기만을 기다리는 영양분이 되어 버렸다. 비위가 약한 아리에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등을 두들기 며 달래줄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죽어버린 자보다 살아있는 자가 중요하다. 그 말에 맞게 시즈는 뒤도 돌아보 지 않은 채 아리에의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고 파마리나를 안은 보를레스와, 케이소의 사람들이 처질 세라 뒤 를 따랐다. 다시 암석의 산으로 되돌아오게 된 그들은 허무하지만 안도한 한숨을 희미하게 내뱉었다. 보를레스의 목에 꼬옥 매 달려 있던 파마리나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괴물의 몸을 덥고 있는 각질은 아무래도 뱀의 비늘과 성분이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 말은?"하고 시즈가 반문했다. 위기에 몰린 상태에서도 무미한 느낌의 간단명료한 어조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파 마리나가 대답했다. "뱀의 비늘과 같다면‥ 이게 효과가 있을 거 에요." 그녀가 내민 주머니에는 흰색의 반투명한 가루가 수북히 들어있었는데 시즈가 보아하니 붕산의 종류 같았다. 눈썹 을 살짝 찌푸리는 그에게 파마리나가 덧붙였다. "야영이나 노숙을 할 때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붕산가루의 일종이지만 그 강도가 20배는 강해요. 아무리 두꺼운 비 늘이라도 단숨에 녹아버릴 거에요." "‥‥." 시즈는 대답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챈 파마리나가 쳇! 하고 투덜거 렸다. "의심하지 말아요. 인간에게는 쓰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인간에게 큰 해가 없는 붕산이라지만 그녀가 내어준 종류의 강도라면 아마 염산만큼의 끔찍한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인간에게 그러한데 비늘에 미치는 효과는 거대할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땅의 진동이 전해지며 암석 산에서 굵직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놈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엄청난 몸에 겨우 인간 한 명으로는 부족했겠지. 피로운웜피스는 낙타처럼 한번에 많이 먹고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되지는 특이한 넘들이었다. 아마도 꽤나 굶주렸을 것이다. 그런 놈이 오랜만에 차려진 잔치상을 포기할 리가 없었 다. "보를레스! 암석 산에 올라가서 이 가루를 뿌리십시오. 그 뒤는 저와 파마리나가 하겠습니다." "알았어!" 용병들은 산을 잘 탄다. 나무꾼이나 사냥꾼처럼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싸움으로 단련된 체력과 근력, 그 리고 발 밑의 지면이 어떤 상태이건 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보를레스가 바위를 붙잡고 암벽을 타고 올라가자 시즈의 투명한 시선이 케이소의 남자들에게서 멈췄다. 토실흐덴이 나서서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되지?" "미끼가 되어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시즈가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의 입은 가차없었다. 케이소의 단원들이 얼굴을 잔뜩 얼굴을 찌푸렸고 쿠라마스가 나서서 외쳤다. "우리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고 너희들은 그 사이에 도망갈 생각인가?" "그만해! 쿠라마스.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는 동료다, 알고 있겠지? 시즈." "물론입니다."하고 끄덕인 시즈는 보를레스가 올라간 암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붕산을 공중에 뿌리기 전에 신호를 할겁니다. 그럼 일제히 물러서 주십시오. 그리고! 눈이 없다는 것은 냄새 로 먹이를 찾는다는 말과 같을 겁니다. 빨리 움직인다면 놈을 혼란시킬 수 있을 거에요." "알겠네. 그럼 부탁하네. 아가씨도‥ 부탁하오." 진중하기 그지 없는 그의 말에 '내가 왜 이 사람들을 도와야하지?'하고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있던 파마리나는 얼 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소 단원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오랫동안 사막을 함께 쓸고(?) 다녔던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루루루루루" "녀석이 우릴 찾고 있군. 그럼 흩어지자." 토실흐덴의 눈빛을 신호로 그들이 흩어지자마자 땅에서 피로운웜피스가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고개를 내민 주 변의 지변이 완전히 파열되는 걸 본 케이소들은 자신들이 저런 놈의 미끼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에 무의식적으로 신 께 기도를 올렸다. "신이여, 불공평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하는 거야?" 죽어버리는 것은 미끼가 되는 것으로서는 성공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더 없는 실패라는 걸 아는 그들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이며 피로운웜피스의 주위를 맴돌았다. 시즈의 말대로 거대한 지렁이는 후각으로 먹이가 있는 곳을 알아채는지 주위에서 온통 먹이의 냄새가 몰렸다, 흩어 졌다, 하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냄새로 어지럼증을 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놈은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뇌용량은 한없이 부족한지 무작정 냄새를 따라서 머리를 처박았다. 그 무식함은 오히려 득이었다. 왜냐하면 다 른 남자들에 비해 움직임이 느리고 하체의 버티는 힘이 부족한 아리에가 지반이 흔들리자 비틀댔기 때문이다. 피로 운웜피스가 본능대로 달려든 것은 자명한 일.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달려드는 거대한 지렁이의 위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누군가 아리에를 밀쳤다. "멍청히 서있지마!" 정면으로 피로운웜피스에게 뛰어든 자는 바로 토실흐덴이었다. 그의 건장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만곡도를 대단한 속도로 밀고 피로운웜피스에게 짓겨 들었다. 그 역시 굵기의 지름이 사람 정도인 지렁이에게 섬짓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눈은 화산만큼이나 투지의 빛이 쏟아졌다. '비록 용병의 마구잡이식 검술이나 난 지금껏 함께 살아온 내 검술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이런 지렁이 따위에게 밀릴 정도의 약한 자부심이 아니다!' 그런 자부심의 검에게서 위기를 느꼈던 것일까? 피로운웜피스는 그 거대한 몸과 두꺼운 갑옷을 둘렀으면서도 덮쳐 가던 아리에를 포기하고 토실흐덴에게 맞섰다. 가볍게 귓가를 울리는 타격음 속에 묵직한 마찰음이 섟여있는 게 분 명 토실흐덴의 검이 피로운웜피스의 거죽에 흠짐을 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겨우 용기가 생긴 키틀볼도 성인 남자의 몸통만큼 육중한 도끼 날을 내리쳤다. '손가락 만할 때는 머리털 하나도 건들지 못하는 지렁이도 저렇게 거대해지면 무서운 존재일 수밖에 없군. 결국 육 체의 차이로군.' 시즈는 그들의 격투를 멀리에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인간의 두뇌가 발전하고 새로운 지식들이 개발된다고 해도 개인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사실 신체를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작은아이들의 싸움은 그렇다하여도 어른들의 주먹다짐, 수많은 제도와 규율를 만들어놓은 인간 사회에서 그 육체를 이용한 힘 겨루기가 어찌하여 통용 되는가. '주먹이 법보다 빠르다'는 말 역시 틀리지 않은 말일 것이다. 그런 신체적인, 신경적인 능력이 본능으로 살 아가는 동물이나, 곤충에게 인간이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육체적인 능력에서 떨어질지는 몰라도 우리 에게는 기술, 두뇌가 있다.'라고 외쳐대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말하는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난 지식인들이 무식하다고 말하는 그 힘을 길러온 것이다.' 시즈는 자잘한 근육까지 힘을 조절할 수 있는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록 체질상으로 우락부락할 정도는 아 니었지만 그가 원하는 힘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시즈! 조심해!" 자기식대로의 근육적인(?) 철학에 빠져있던 시즈는 전투 중에 한 눈을 팔면 목숨을 잃는 것은 손안에 들어있는 잠 자리의 날개를 뜯어내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은 인식했다. 물론 일년동안 겪은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이미 알고 있 었지만 눈앞에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사막의 모래를 녹이는 녹색의 액체를 바라본다면 한층 새롭게 인식될 것이다. 피로운웜피스는 외부 신체적으로 거대하다는 장점을 이용한 근접 공격 외에도 침을 뱉어대는 원거리 공격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다른 모래를 녹일 정도의 산을 몸에 지니고 있을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요액(尿液)은 다른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으니까. 자신에게 득이 되는 존재가 다른 이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이 세상에 널리고도 널린 일이었다. 다른 이 같으면 호들갑을 떨면서 뒤로 물러섰겠지만 시즈는 그저 무심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경계를 표할 뿐이었 다. 피로운웜피스는 오늘따라 강력하게 부딪혀 오는 먹이들의 저항에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먹이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로스트 최고의 용병이라고 인정받는 케이소였다. 한 군데만 집중적으로 노리며 달려들던 그들은 갑작스런 피로운웜피스의 독액 공격을 노련하게 피하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구릿빛 피부가 잘 익은 살덩이를 가진 먹이의 반항은 거세어 콜리언(집게의 크기가 1.5m에 달하고 꼬리까지의 길이는 5m에 이르는 거대한 전갈. 사막 암산의 골짜기에서 서식한다.)의 집게 공격에도 흠집이 나지 않는 비늘이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갔다. 피로운웜피스는 뒤로 물러서며 다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 순간, "자아! 모두 비켜요!"하고 보를레스가 발을 구르며 손을 흔들었다. 혹시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봐 몸으로 표현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은 파마리나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육감적인 표현방법이야." 키틀볼이 손에 들었던 두 개의 커다란 도끼 중 하나를 던지고 마지막으로 물러서며 외쳤다. "됐어! 비밀무기를 살포하라고!" 보를레스의 행동은 시즈의 설명과는 조금 틀렸다. 아예 주머니 채로 암벽 아래로 강하게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뛰어났다. 피로운웜피스의 몸 중간 부근에서 퍼엉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 했다. "쿠워워워워!" 몸이 타들어 가는 걸 느끼며 피로운웜피스가 발버둥치자 그 몸에 충돌한 돌산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보를레스 는 엎드려 주위의 튀어나온 물체를 꽉 잡고 시즈와 파마리나가 마법을 발동시키기를 기다렸다. 시작은 긴 주문의 영창을 마치고 발현만을 기다리고 있던 파마리나였다. "'그대'라고 표현되는 존재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멈춰질지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피로운웜피스의 발광이 쥐죽은 것처럼 멈춰버렸다. 몸이 녹아가면서도 부들부들 떨며 애달픈 비명만 질러댔다. 파마리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즈를 재촉했다. "어서 해요! 워낙 힘이 엄청난 녀석이라서 얼마 못 버틴다고요." "끊임없이 이어져있는 이에게‥ 내 옆에 함께 있는 이를 붙잡고 부탁하나니 멀리 있는 그대여 내 부름을 들으시오. 나의 뜻대로 잠시 그대는 따라주시오‥!" 처음 싸웠을 때부터 느꼈지만 시즈가 마법을 구현할 때 움직이는 마나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 범위는 사막 전체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여서 바로 옆에 있던 파마리나는 그 거대한 존재감에 마른침을 계속 삼 켰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공기가, 바람이 시즈의 청을 수락하고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소리였다. 케이소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싸웠던 존재의 주위의 공기가 멈춰버렸다는 것을 가만히 떠있는 모래와 붕산가루로 알 수 있었다. 공기 중의 불순물들은 잠시 멈 춰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다가 시즈의 의지에 따라서 피로운웜피스의 비늘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름다 움의 다음 과정은 끔찍함으로 나타났다. 공기가 차단되었기에 들려오던 비명소리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조금씩 날리 게 하는 저녁의 사막, 암산에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지름이 10m나 되는 광대한 토네이도가 일어났다. 공기가 자연적 으로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대한 힘 중에서도 막강한 힘이었다. 곧 아우성이 사라지면서 거대한 존재가 토네이도 속에 완전히 갇혀버리자 파마리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자신의 통제에 반발하던 존재보다 옆에서 느껴지던 엄 청난 위압감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위압감을 안겨준 존재는 보통의 마법사라면 탈진하여 몇 일 밤낮을 쉬어야할 마법을 사용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만 몇 번 고를 뿐이었다. '정말 불공평해.' 그게 현재 그녀의 머리 속을 채우는 생각이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솟구치던 토네이도는 주위의 흩어졌던 붕산가루만이 아니라 거대한 바위까지도 빨아들였다. 붕 산을 피하여 도망갔던 케이소들과, 암벽 위에 있던 보를레스는 바위틈으로 몸을 껴놓고 잡아당기는 바람의 세력과 전투를 벌어야 했다. "꺄아아아아악!" 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풍압에 못 이겨 아리에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듀쿠스가 팔을 잡고 있었지만 그 는 키틀볼처럼 싸움으로 단련된 완력과 악력을 가지지는 못했으므로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다가 손을 놓고 말았다. 바람 속에서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아리에가 바람에 휩쓸렸다. 시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동료들이 바람에 휩쓸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었었다. 다만 그들이 견뎌주리 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한 신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땅 속에 박혀있는 피로운웜피스의 신체를 모두 끌 어내지 못한 상태로 아쉬운 심정을 감추며 의지를 누그러뜨렸다. 토네이도의 강렬하고도 우아한 자태가 붕괴되자 막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아리에는 공중에 붕하고 떠있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공중에서 빨리 움직 일 때보다 몸 안의 진공상태를 느낄 때 한 순간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아리에 또한 인간인지라 공포스러운 감각이 얌전히 지나갈 리는 없었다. 다시 한 번 강렬한 비명이 허공을 수놓으려는 순간, 보를레스가 날쌔게 그녀를 받아들었다. 그것으로 아리에가 보를레스가 엎드려 있던 암산의 정상부근까지 떠올랐다는 설명은 불필요하리라. 암 벽의 돌출부를 발로 차며 낙하 속도를 줄이는 보를레스는 한 마리의 새가 천천히 착륙을 시도하듯 여유 있었다. "쿠르르르르‥" 그러나 독약이나 다름없는 붕산이 비늘 사이마다 스며들고 몸을 동강내버릴 듯한 토네이도에 휘말려서도 생명의 끈 을 놓지 않은 생물체의 끈질긴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허파의 폐포까지 긴장으로 곤두서게 만드 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보를레스는 다급해졌다. 아리에를 왼손으로 옮긴 그는 힘겹게- 바스타드 소드는 검신 이 길어 허리를 돌리지 않고 뽑기는 어렵다 -검을 빼어들었다. 고통에 작은 꿈틀거림만을 보이고 있지만 다시 발광 이라도 했다가는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단숨에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피로운웜피스도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 르는 한 종속인 이상 본능은 녀석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결정짓게 하는 광범위한 조건이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살 기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휘익― !" 그 휘파람은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에는 너무나 고성(高聲)이라 언 듯 느끼기에는 토네이도의 남은 기세로 일어나는 바람의 소리가 아닌가 싶었지만 피로운웜피스의 민첩한 반응은 그것이 일종의 신호라는 걸 암시시켰다. 꼬불꼬불한 미로에서도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시즈였다. 사방이 모래와 바위밖에 없는 사막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미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끌어낼 기회를 찾고 있던 그는 외침의 음성이 많아야 14 세 소년 정도로 예상보다 훨씬 어리다는데 눈썹을 찡그렸다. 달려오던 이들도 놀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위험하기로 이름이 대륙에서 손을 꼽는 '풍암의바다'라는 걸 짚어볼 때 과연 이 장 소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게 만들 앳된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 나쁜 놈들아! 웜피스를 공격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정당방위야.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라고. 한 명은 벌써 잡아먹혔어."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막 부족에게 널리 퍼져있는 소레인 교의 전통적인 사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사막의 왕국, 볼케이스에서는 대륙에 가장 널리 퍼진 레이모하와 함께 예로부터 '모래와 구성'을 맡고 있는 여신, 실러오나를 섬겼는데 그녀는 '지나친 실러오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신이었다. 그러나 소레인 교는 함부 로 사제를 맞아들이지 않는다. 땅이 사막의 햇발을 받아 이리저리 갈라치고 다시 홍수에 축축해지기를 반복하는 것 과 같은 인생을 겪어야 진실로 신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소레인 교의 사제들은 메마른 사막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어쨌든 예의 이유로 소레인 교의 사제 중에 어린 사 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알려진 바로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사막의 여러 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듀쿠스의 머리 속에도 저토록 간소하기 짝이 없다못해 구질구질하기까지 한 복장은 소레인 교의 사제들 만이 입을 수 있게 허용된 법의가 틀림없었다. 잠시 사막의 모래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가득히 메웠다. 보를레스의 말에 소년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미간 을 찌푸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더듬거리다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럴 리가!? 난 다만 겁을 줘서 쫓아 보내라고 했어. 당신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지난번에도 사막의 의지가 담겨있는 인형을 훔치러 왔잖아! 웜피스가 내 말을 어길 리가 없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웜피스, 이 사람들을 혼내줘!" 소년의 명령에 충실히 피로운웜피스는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아무도 명령이 나왔던 입에서 비명도 터질 줄은 생각하 기 못했다. "아아아아아악!" 피로운웜피스가 입을 들이댄 대상은 소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비 자세를 하고 준비하고 있던 토실흐덴이 박차 고 검을 휘둘렀다. 푸욱! 단단했던 갑주가 녹아버린 녀석의 몸에 토실흐덴의 검이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단단한 보호벽이 없어도 두께 가 웬만한 곰 다섯 마리의 허리를 묶어 놓았을 정도로 굵었기에 박히기만 했을 뿐 자를 수가 없었다. 지척에서 거 대한 몸체가 발버둥치자 용병 일행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물러서 있으세요."하고 음성이 모두의 귀를 스쳤다. 언 듯 들어서 '오늘 아침 따온 이 다과 좀 들어보세요.'하는 아 낙의 친절처럼 온화한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가져간 이들은 놀라움을 참을 수 없었다. 용병국 서부 제일의 용병들, 세이서스의 '침묵하는 개구리' 시즈의 허공을 나는 모습은 잠시 바람이 사라져 부유하는 모래 속에서 단아한 아름 다움마저 감돌았다. 그 목소리와 광경에 이어진 것은 앞의 두 가지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머리 부근이 사라진 거대한 지렁이 몸에서 녹색의 채액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이 어찌 아름다움과 인연이 있겠는가. 있다고 말할 수 있 는 사람은 그 취향을 깊숙이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시즈의 공격은 애벌레가 갑자기 벌로 변해 독침을 쏜 것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털썩! "허억! 헉! 헉! 왜!? 왜에!?" 피로운웜피스가 무섭게 보인 것은 소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끝없는 암흑이 감춰진 입은 공포와 함께 그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잠깐동안 긴장이 풀려버린 소년이 털썩하고 땅바닥에 엉덩이를 깔며 멈췄던 숨을 급히 내뿜었다. 현기(賢氣)대신 눈매를 흐르는 눈물, 생명의 위험을 벗어난 안도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구심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변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도를 검집에 집어넣으며 시즈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검 형식과 비슷해 '고조예도'라는 이름 을 가진 그의 검은 한 방울의 채액도 남김없이 모래로 떨군 채 흑색의 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엄청난 움직임을 보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 그에게 용병 일행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멍하니 땅만 쳐다 보는 소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사실 피로운웜피스는 사막에서 죽은 동물의 사체를 주식으로 하므로 생물(生物)은 건드는 법이 없었으나 소년의 말 대로 침입해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동안, 싱싱한 피 맛을 알게 됐다. 따스하면서 약간 달착지근한 혈향에 빠져 본 래의 식성을 잊게 된 녀석은 끝내 자신의 친구조차 먹이로 착각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더욱이 붕산의 영향으로 엉 망이 된 감각기관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에게서는 방금 전의 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니?"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리에가 다가가 살짝 보듬어 안았지만 한 마디 물음 외에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시즈 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동물은 그 습성을 갑자기 벗어나면 적응하면서도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이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 피로운웜피스 또한, 그렇지 않았나 싶군요.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생피을 선호하게 된 겁니다. 그대는 멀리서 신호를 보내니 상황 을 알기 힘들었을 겁니다. 사람을 완전히 삼켜버린다면 그야말로 감쪽같겠지요. 어쨌든 가장 진화적이고 적응적이라 는 인간조차 원래의 습관이나 습성을 바꾸면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 본능에 충실한 다른 생물이 그리 되었으니‥. 그대가 사람을 해치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이 진실이고, 피로운웜피스가 생물을 먹지 않는다는 게 진실입니다‥. 그 러나 진실은 상황에 따라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랍니다. 진실의 변화는 예측하기 힘들고 그대에게는 그대의 진실이 옳은 것이었으니 그만 슬퍼하십시오. 그보다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알려주었으면 좋겠군요." 다 좋았지만 역시 용건을 놓치지 않는 시즈였다. 어찌 보면 냉혹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누구도 대답을 듣는 것을 막지 않지 않았다. 아리에도 소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달랬다. "말해주지 않을래? 우리를 왜 공격했지?" "여러분은 '인형' 때문에 오신 분들이 아닌 겁니까?" 이미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냉정함을 되찾은 소년이었다. 자신을 '블이세미트 케이론'이라고 소개한 그는 대답 대 신 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자 얼굴을 찌푸리며 시즈에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긴 머리칼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래의 빛깔을 띤 머리칼을 가진 그라면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 다.(제법 눈치가 빠른 소년이다.) 소년의 기대를 청년은 저버리지 않았다.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러울 정도로 눈 앞에 서있는 이들의 여행경과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된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이거 제가 완전히 오해를 한 모양이네요." "이제 우리를 공격한 이유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방금 전의 말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군요." 소년은 공감하는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후드 사이로 시야를 어지럽게 하는 모래가 성가셔서 우선은 이야기할 장소로 일행을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한 행동이 죄송해서라도 당연히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그 전에 저를 따라오세요. 여기는 대화하기에 좋은 장 소가 아니잖아요?" 소년은 방금 전까지 일행에게 적의를 불태웠던 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활달했다. 가벼운 윙크로 '블리세미 트 케이론'이라는 이름에 밝은 이미지를 부여한 그는 황량한 바람에 올라탄 듯한 발걸음으로 용병 일행을 이끌었 다. "이제 다 왔어요. 바로 저 곳이에요." "대화 열 번만 하면 '풍암의 사막'을 횡단하겠군." "뭐 힘드셨다면 죄송해요‥." 블리세미트는 입가에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불만스러운 보를레스를 피했다. 소년은 어린 나이와 그에 따른 이익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표정에 겉도는 가식의 티를 숨길 수는 없었으나 그게 은근히 마음의 옆구리를 파고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하며 보를레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블리세미트가 말한 유적은 공교롭게도 시즈들 이 목적에 두고 있던 곳과 동일한 듯 싶었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유적은 광활한 사막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언 듯 봐서는 고대부터 사막에 분포하는 피라미드 형식의 건물이었는데 구성하는 벽돌의 색깔이 적색 을 띠어 가까이 가 본다면 노을이 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벽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아 피라미드의 빗면 이 뒤죽박죽하여 어린아이가 나무토막으로 장난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조잡하다 말할 수 있으리. 시즈는 유적에 다가갈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의 만들어놓은 위대함에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벽돌의 불규칙 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유적의 겉면을 휘휘 싸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이 나타난다. 거대한 붉은 뱀을 향해 주위에 즐비한 선인장들은 경배하고 있는 게 보였다. 듀쿠스를 필두로 한 이방인들은 허락 받지 않 은 방문에도 선인장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허리를 구부려서 말이다. "여기가 바로 항간에 몇 백년 동안 소문으로만 내려오던 '붉은 뱀의 사원'인가? 대륙에서 가장 보기 힘들다는 전설 의 유적‥." "전 매일 지겹도록 보는 걸요. 다루기 힘든 몬스터가 제법 많고 주위에는 유사가 잔뜩 있기는 하지만 못 찾을 정도 는 아니라고요." 못 찾을 정도였다. 시즈라는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 있었기에 유사를 건넜지만, 아니었다면 하루 이상의 시간은 더 지체되었을 게 뻔했다. '결과는 단 하나의 조건이 변함으로 수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아리에는 귀족 시절 가정교사에게 배웠던 말을 떠올렸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유사에 대하여 시즈는 '빠져 죽는다.' 를 '죽지 않는다'로 바꿔놓은 것뿐이었지만 갈증 속에서 보내는 사막에서의 한 두 시간이 생명의 모래시계라는 걸 생각하면 결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컸다. 토실흐덴은 지나가는 길에 선인장을 툭툭 차보며 혀도 찼다. "신기한 걸!? 선인장이 유적을 향해 줄기를 구부리고 있다니, 마치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는 해바라기 같잖아. 아니, 허리까지 구브렸으니 그보다 더한가? 키틀볼, 이런 광경을 본 적 있어요?" "아니, 나도 처음이구먼‥.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관심이 온통 선인장에게 쏠려 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들의 엉덩이를 듀쿠스가 걷어차며 재촉했다.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리를 바닥에 박아 선인장을 만들어쥬랴? 빨리 가지 못해!?" 29장 선인장의 성지 해가 모래 언덕 너머에서 긴 머리칼을 하늘에 걸친 시간, 자칭 드워프 제일의 현자이자 대륙 학식의 금자탑 아스틴 네글로드의 일곱 현인 중 한 명인 토루반은 한 쪽 무릎을 꿇어 자신에게 키를 맞춘 청년을 살짝 끌어안았다가 놓고 주름진 노안(老眼)으로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세이서스가에 닥친 사건에 대해 듣긴 했지만‥ 변했군‥. 아주 슬픈 변신이야‥." 빙그레 미소를 짓는 시즈의 모습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 하면서도 달랐다. 용병이 된 후의 모습만 알고 있는 아리에 과 토실흐덴 일행에게는 그의 입가가 약간이나마 미소의 형태를 띄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눈꺼풀을 뒤집어서 시신경 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로 시즈의 미소는 귀했지만. 보를레스는 약간이나마 그가 예전의 웃음을 찾았다는 데 기뻐했다. "또 다시 은발이 되어버렸군. 괜찮은 건가? 자네, 전에는 고통에 힘겨워했는데‥. 행동을 보니 눈동자도 투명해졌을 뿐 시력을 잃지는 않았군." 초췌하진 자신들의 몸에 학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젊은 친우(親友)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반가움과 같이 찾아온 슬픔에 피브드닌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 보던 사론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론, 자네 덕에 우리가 사는 군. 역시 아스틴 최고의 수행기사야." "별말씀을요. 시즈님이 아니셨다면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또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방법으로 온 모양이군." "특이하다면 특이하죠. 유사를 몸으로 건넜으니 말입니다." "오‥ 유사를!" 역시 그들은 학자인지 사막의 늪이라고 불리는 유사를 어떻게 건넜는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사론은 상황의 이해를 원하는 또 다른 눈동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아‥ 토루반님, 이 쪽이 바로 의뢰를 수락한 용병들입니다." "그런가? '풍암의 바다'가 천혜(天惠)의 위험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뢰를 받아들이다니‥. 사막의 용병이라면 더 욱 오기 어렵거늘, 그 용기에 감탄하며 또한 감사하네." "하하하! 우리는 다만 의뢰에 걸린 막대한 금액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무모한 용병일 뿐입니다. 대학자께서 칭찬하 실 게 아닙니다." 웬만큼 수양이 된 사람이라면 욕설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심어린 칭찬은 아무리 현인이라고 해도 가볍 게 지나치지 못하고 마음의 한 구석을 내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천한 직업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용병, 토 실흐덴이 칭찬을 의연하게 받아넘기자 토루반은 더욱 감탄했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토실흐덴의 뒤에 서 있던 키틀볼이 물었다. "시즈와 안면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보아하니 지금은 용병이 된 모양이구려."하고 피브드닌이 말했다. 대학자에게 물었는데 초췌한 꼴에 가늘고 얍삽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대신 대답하자 키틀볼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조용히 경청하는 것에 그 또한 존경받는 학자라는 걸 알고 내심 놀라며 공손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이서스 용병단은 용병국 서부 제일의 실력자들 중 손을 꼽는 수에 들어갑니다" "시즈는 학자인 시절에도 대단했다오. '마땅찮은 시즈'라면 대륙의 학자들 가운데 모르는 이가 드물었을 정도지." 피브드닌의 말에 키틀볼은 노골적으로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땅찮은 시즈'. 그 이름으로 하여 대륙의 중심을 차지한 나라가 얼마나 흔들렸던가. 학자들은 몇 세기에 나올 만 한 신인(神人)을 무참히 제거해버린 당국의 처세에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으니 그나마 세상의 여러 소문에 민감한 용병들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경악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찬바람이 이는 모래벌판에 내버려두기가 못했 는지 블리세미트와 같은 사제복의 남자가 안으로 이들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반가워하시는 기분은 알겠으나 밖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손님들을 밖에 세워두는 것은 실러오나님의 도리에 어긋납니다." "자아‥ 이 술을 한 잔 드십시오. 이 곳은 '풍암의 바다'는 대륙 북방에 자리하고 있기에 밤이 되면 툰드라의 횡포 가 몸 속 깊이 스며든답니다." 사제가 권하는 술을 매우 쓰고 취향이 독특했다. 몸의 수분이 물보다 술로 되어있을지 모른다는 종족, 드워프 토루 반조차도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잔을 내려놓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통 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금계(禁戒)에 금주 (禁酒)를 넣고 있었고 소레인 교단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레인 교의 신자인 쿠라마스는 명색이 사제라는 남자를 눈썹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술맛 때문이라고 생각한 남자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무 술이 독한 모양이군요. 하지만 전갈의 피로 만든 롤큰(술의 이름)은 몸의 체온을 올려주는데 아주 좋은 효과 를 가지고 있으니 약간이라도 마시는 게 이 밤을 좀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요. 시가로는 13 타로운에 가까운 엄 청난 고가품(高價品)이지만 외부에서 오신 분들은 툰드라의 밤에 적응하시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내놓는 것이랍 니다." 번쩍! 역시 용병은 돈에 반응하는가? 금세 쿠라마스의 시선은 존경으로 가득 차 버렸고 실러오나께 '이토록 친절한 사제를 보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하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다. 취기로 인해 얼굴이 대추 빛으로 얼큰하게 달아오른 토루반이 짧은 팔을 내밀어 롤큰의 병을 잡았다. 일명 '병나발 의 초래'를 전개할만한 눈빛과 동작이었기에 사제의 눈가가 경련으로 방정을 떨었지만 눈치없는 드워프는 주먹을 꽈악 쥐어 보이며 값진 주향(酒香)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무언가 술과 더불어 그의 과장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는 기 분좋은 요인이 있을 법도 한데‥. "허허헛! 내 생애에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로군. 죽은 줄만 알았던 현우(賢友)를 다시 찾게 되고‥ 400년에 가까 운 일생을 살면서 말로만 들었던 '사막의 신부'를 보게 될 줄이야." 토루반은 무려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건량 몇 개로 굶주린 배를 달래는 고달픈 일을 겪었으면서도 친인과의,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에 대한 반가움에 모두 잊어 버렸다. "사막의 신부요!?" 사제복의 남자는 소처럼 검고 커다란 눈을 굴리며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는 걸 시인하듯 볼을 긁적였다. '붉은 뱀의 사원' 내에서 바깥 세상의 소식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있다면 술에 은근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쏨 살같은 남자의 방어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던 블리세미트가 유일할 것이다. "에크라이 사제님, 바깥 사람들은 저희를 그렇게 부르나봐요." "그런 것 같구나. 그런데 블리세미트‥ 왜 네 손에 잔이 쥐어져 있는 거지? 분명 붉은 색이 연하게 감도는 액체는 롤큰이 아닌가 싶은데‥?" "아이‥ 사제님도‥. 이건 피가 떨어져서 그래요. 여기 보라고요." 시즈들이 전투할 때 일으킨 토네이도로 날아온 돌멩이에 약간 살갗이 벌어졌던 걸 에크라이에게 자랑스럽게 내밀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소년의 붉은 입술에서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을 때 에크라이는 실수를 통감했지만 이 미 넘어가 버린 술을 블리세미트의 목을 쥐고 토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사막의 신부' 또는 '사막의 사제'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의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간에 은밀한 자들로 인식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사막 한 복판에서 실러오나를 믿는 사제들의 집단으로, 현재 공인된 교단에서는 잊혀 져버린 고행- 신체적인 것 뿐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까지 행했는데 진정으로 신을 믿기 위해 사막에 몸을 던진 자들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사막의 신부'들이 가진 신앙의 힘은 대단하여 신성력은 모든 종단을 통 틀어 따라올 사제들이 없다고 알려졌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80년 전, 대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신성력을 가졌던 성 자 일로진스도 '사막의 신부'라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마법사나 정령술사들에게 있어서도 '사막의 신부'들은 입술에 서 떨어지지 않는 화제거리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생명력이 전무하다 싶은-다른 지역에 비해-사막의 생태계와 친 화력을 키워왔기에 자연 친화력 또한 대단했기 때문이다. 단식 등의 고행을 하기에 신체는 말랐지만 사원의 모든 이들이 짓는 미소는 봄바람처럼 따스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러웠다. 술이 몇 잔 오가고 그릇이 비워져갈 무렵, 이 평화로운 사제의 작은 일원 블리세미트는 시즈들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소년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 에크라이는 점점 얼굴빛이 어두워져 갔다. 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우리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검은 갑옷들이 가을은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 않 게 아름다웠던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사막의 모래 위로 지저분한 말발굽자국을 남기면 달려왔지요. 악적들의 검술 실력은 어린 저로서는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지만 만곡도를 약간이나마 다룰 줄 알기에 그들이 휘둘러대는 커다란 검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있었어요. 하루라도 신의 경건함을 잊지 않고 살아온 사제님들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 가 쏟아지고 그 피는 매일같이 청소하던 사원의 바닥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았어요. "사막의 의지를 담은 인형을 내놓아라." 이게 잔혹스러운 행각을 벌인 악적들이 사원을 쳐들어온 목적이었지요. 여기서 우선은 '인형'에 대해 알려 드릴게 요. 저희 사원에는 보를레스님의 팔뚝만한 돌인형이 있어요. 일종의 골렘인데 설마 팔뚝만한 크기로 산을 들어올리 는 괴력을 바란 것은 아니겠지요? 전설에 말하기를 '사막의 의지를 품고 있다는 인형'은 고대에 이 곳이 사막이 되 어버리기 전의 문자와 마법을 담고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고 했어요. 볼케이스 최고의 고문연구가였던 파일스렐루는 수도, 카글의 왕립 도서관에서 한 고서를 해석하고 서적의 예언을 발표하기를 '저‥ 사막의 한복판, 바람이 날카로 운 쓰다듬은 곳에는 붉은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붉은 뱀은 작고 귀여운 인형이 가진 수 만년 전의 지식이 세상으 로 나가는 것을 위해 막고 있지만 흰 모래 바닥이 검은 물결에 가려지고 성스러운 피가 뱀의 몸을 적시면 인형은 눈을 뜰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맞죠, 에크라이 사제님? 이 순간 소년의 표정은 '나 잘했죠?'하고 칭찬해달라는 강아지를 닮아있었기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에크라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소년의 말을 받으면서 웃음은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웃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요. 지금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저희가 가진 믿음의 힘은 미천한 것이나 실러오나께서는 제 몸 하나를 지킬 능력 정도는 충분히 부여하셨기에 '그들'을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사원에서는 아무런 욕심 없이 실러오나를 경배하며 함께 친애하던 함께 존경했던 이들을 일곱이나 사막 저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저희는 고행이라는 수행과 생명력이라고는 없는 사막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신에게 향하는 참된 길을 찾고 있지만 또 다른 임무가 있습니다. 블리세미트의 말대로 수 만년을 이어온,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되는‥. 하지만 지금 약속이, 금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토루반님의 일행을 몬스터들로 하여금 위협한 것도 혹 시 있을지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휩쓸고 간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 문에 저희는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후 에크라이 사제는 토루반과 피브드닌 일행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괜찮다는 표현으로 토루 반들이 손을 좌우로 흔들 때 다시 블리세미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에크라이 사제님이 사과할 정도는 아니에요. 솔직히 크라인 대사제님께서도 사람이 찾아온 것은 100년동안 처음 보 았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한 달만에 두 번이나 왔으니 같은 무리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그들은 자신들이 야말로 세일피어론아드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며 시간마저도 손에 쥐고 있는 '원의 힘'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어 요. 수많은 기사가 휘두르는 검과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진 술사들의 마법이 실러오나의 힘만을 믿는 저에게 공포를 줄 정도였다고요. "원의 힘?"라는 말이 시즈는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되묻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블리세미트는 눈을 작게 떠서 그 날을 회상하듯 말했다. "그래요. '역사의 고리'라고 말했어." * * * "노르벨. 노르벨!" "그렇게 연신 부르짖지 않아도 제 귀는 뚫려있답니다. 무슨 일이죠, 바스티너?" 노르벨 플루타사는 푸른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어울리는 이지적인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허벌죽하게 벌어진 입가는 안타깝게도 그런 장점을 눈곱만큼도 살리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철걱철걱하고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검은 갑옷을 입은 자가 걸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어나는 모래가 갑옷의 무게를 암묵 적으로 말해주었지만 착용자는 가벼운 비단을 몸에 걸친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지? 그래봤자 우리가 내일 아침이면 쓸어버릴 녀석들이잖아." "바스티너‥ 저들은 소레인 교단의 전설 중에 하나인 '사막의 신부'라고요. 일주일 전에도 된통 당했지 않습니까." 하고 푸념을 털어놓으며 노르벨은 망원경을 바스티너에게 건넸다. 동방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신기한 물품인 망원경 은 1km 전방의 상황을 바스티너의 눈알에 정확하게 구현했다. "그거야 이상하게도 저 사원에서는 마법의 위력이 절반이하로 반감되어 버리니까 그렇지. 아니었다면 벌써 싸움은 끝났을 걸. 그런데 저들은 누구지? 우리말고도 '인형'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나?" "설마요. 그랬다면 사제들이 저렇게 살갑게 대할 리가 없죠." "어쨌든 사제들과 친하다면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들은 아니겠군. ‥!!" 중얼거리던 바스티너의 커다란 눈동자-가면 속의 눈을 보이지 않았지만 망원경 렌즈로 커다랗게 확대된 눈동자-는 한 인영을 향한 후 급속하게 동공을 확대했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 속에 잡스러운 영상을 도려낸 바스티너는 다시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저‥ 저‥ 저 사람은 설마‥." "왜 그래요, 바스티너? 점심을 잘못 먹은 게 이제야 탈이 난 거에요?" 부들부들 떨어대는 검은 갑옷을 향해 노르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그의 생각에는 두꺼운 갑 옷을 벗고 일을 본다는 게 너무나 힘든 고역일 듯 했다. "호, 혹시 노르벨‥ 저 흰 머리의 남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어?" "흰머리의?" 늙은 드워프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는, 부드러운 미소가 마치 산들바람같은 이‥. 놀라운 것을 본 사람처럼 노 르벨은 발작적으로 일어서며 외쳤다. "헉! 저 사람!!!" "노르벨, 알고 있어? 누구지?" "저 사람, 왜 저렇게 특이하게 생겼데요? 머리가 왜 저래!" 쾅! 노르벨의 머리가 분명 미스릴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며 바스티너는 몸을 돌렸다. 분명히 '그'였어‥. ― 공자님은 작은 것도 혼자서 짊어지려고 하는군요. ― 작은 것이니까 짊어지려고 하는 거죠. 무거운 것이었다면 당장 내던지고 도망쳤을 겁니다. 모닥불에 비친 온화한 미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잡던 새하얀 손가락. 떠올릴 때마다 무심결의 행복을 가져다주었 던 '그'‥. 옆에 있던 자는 분명 추위에 보들보들 떨던, 이름이 보를레스인가 하는 청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단순한 귀족 청년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꽤나 위세 높은 집안의 자제이며 뛰어난 마법사였으면서도 겸손했 던 태도가 인상에 남았던 사람이이지만 고작 브로큰 스도무 하나도 생물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겨우 이길 정도였을 뿐이다. 그 실력에서 전설적인 불모지이자 위험지역인 '풍암의 바다'에 올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노르벨 또한 놀라고 있었다. 그의 뇌를 공포스럽게 자극하는 존재는 바스티너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놀라는 이유는 완전히 틀렸다. '은백색의 빛나는 머리칼‥. 마치 음유술사들이 의지를 과도하게 운용했을 때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후유증 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백은의 머리칼을 가진 존재는‥ 바람을 노래하 는 이 밖에 없다.' 동그랗게 오무라져 있던 입술이 얇게 펴지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뭐 상관없지. 죽이면 되니까. 정말로 '원의 힘'로서도 두려워하는 그라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겠군. 쿡쿡‥." 한 사람의 살기어린, 또 한 사람의 애수어린 설레임 속에 노을은 사막의 검은 장막에 밀려나가고 있었다. * * * "그 말씀대로라면 저희에게 그 인형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에크라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피브드닌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다시 물었다. "그대들이 수 만년을 수호해온 물건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 언약을 저희들로 하여금 깨게 만들려는 겁니까?" "핫하하‥ 수호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아하니 시즈님과 보를레스님도 '역사의 고리'라는 무리에 대해 뭔가 아 시는 듯 하군요. 그렇다면 얼마나 강한 지도 아실 겁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인형'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 아니므로 한 번에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막을 자신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적을 막을 수가 없기에 업을 저희에게 맡긴다는 뜻입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포기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도와드리겠소이다. 실러오나의 힘을 믿으시겠죠?" 물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피브드닌의 격렬한 대답은 에크라이가 바랬던 반응이었던 것이다. 에크라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청년은 분명‥ '바람을 노래하는 이‥. 그것도 각성 직전인 음유술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주 오래 전부터 '붉은 뱀의 사원'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사원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전설이었다는 네 명의 사 람들 중에서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인형'과 특별한 인연이 맞닿아있었다. "뜨거운 사막의 열이 넘쳐날 때 태고적부터 있던 약속을 지키러 바람이 오리니 그에게 과도한 열을 맡기고 사막은 다시 평안해지리라. 실러오나의 말씀대로 일어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의 중얼거림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신을 향한 기도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편안한 숙식의 장소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원이 막노동의 공사장으로 변화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무너져있던 벽을 보수하며 보를레스는 숨을 투덜거리듯 푸르르하고 내뱉었다. 상큼한 주향과 함께 퍼진 샹들리에의 불빛과 찰 랑이는 술잔 대신 한 치 앞도 구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지하 깊숙한 곳에서 파낸 흙을 사원에 벽에 바르는 것 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진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대한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의 장소를 찾거나 만드는 것은 약간이나마 고등생물에게는 당연한 것. '역사의 고리'의 힘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보를레스로서 는 현재 두께의 세네배는 굵게 벽을 쌓아도 안심이 되지 않았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하지만 블리 세미트라는 이름의 꼬마 파트너는 정말이지 귀찮은 상대였다. 아래로 손을 내밀 때마다 바구니에 진흙을 퍼 담아주 는 것이 소년의 담당이었는데 그는 그대로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작은 입을 쉬지 않고 쫑알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뇌의 반을 가득 채운 보를레스에게 소년은 도와주기보다는 나머지 뇌를 콕콕 찔러대는 존재에 더 가까웠다. '이것은 마치 수컷을 짊어지고 집을 짓는 거위벌레- 거위벌레는 알을 낳을 때 풀잎으로 집을 짓고 그 안에 산란을 하는데 암컷이 수컷을 업고 집을 만든다- 같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주방으로 달려가 양고기 스튜를 내놓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는 힘없이 외쳤다. "블리세미트. 여기 흙이 다 떨어졌어." '어째서지?' 한 때는 붉은 색의 진흙이 들어있었던 바구니를 양팔에 하나씩 끼고 흔들면서도 소년은 입을 삐죽거렸다. 앞으로 20년만 더 있었다면 사원의 원장이 되었을 블리세미트였다. 사원에는 20명 가량의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처 음부터 신을 경배하여 사제가 된 이들이 없었고 소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사제들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아이가 태어나겠는가. 그럼에도 명맥을 이어온 이유는 일종의 입양이었다. 블리세미트 같은 경우는 사막의 대상(大商)이었던 듯하다고 에크라이는 말한 일이 있었다. 노적단에게 습격 당해 모두 죽고 혼자 버려진 그를 에크라이가 데려온 것이다. 지금은 태어나서부터 '오오‥ 찬양하는 실러오 나시여‥.'라고 중얼대는 사제들만 보고 성장하는 은밀한 세뇌교육을 받아서인지 부모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 았다. 블리세미트가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사제들이 정을 쏟아 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막을 배경으로 한 에크라이의 간단하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깨달음의 가르침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는 삭막한 자연은 불 과 열 네 살의 소년을 생명이라는 의미에 누구보다 다가간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똑같은 방울뱀도 숲보다 사막에서 많이 꼬리를 흔든다.' 설마 방울뱀의 꼬리 흔들기를 강아지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위의 말은 '사막의 신부'들 이 필수 지참하고 있는 초대 '사막의 신부'들의 명언집에 수록된 문장으로 실제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블리세미트 는 굳건하게 믿었다. 확인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사막의 짐승들은 생물적인 천적이외에 또 다른 적이 있다. 바로 태 양이다.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이 수분 부족에 힘겨워하듯 그들도 수분의 소모를 막기 위해, 또 살인적인 광선을 피 하여 그들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천적이 함께 들어온다면 꼼짝없이 죽은목숨이 될 수밖에 없었음으로 동물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탈출구를 만들고, 돌로 입구를 막고, 독액을 뿜고 위협할 방법을 개발한다. 그리 고 살아남은 것이 바로 현재의 동물들. 인간의 세상은 불공평함으로 가득히 메워져있다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으니 살아남은 이들은 뛰어난 어쌔신이나 무사들도 놀라워할 육체적 능력과 현자들의 지혜도 따르지 못한 본능의 힘을 부여받은 것이다. 다른 상태계에서는 은근히 이루어지는 과정이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되는 사막은 사제들이 자연을 어떤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사막의 신부'들은 그런 자연을 이해하고 인정하였기에 친화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말을 하기 전부터 그들과 살아온 블리세미트는 아무런 걸림돌 없이 순수하게 당 연한 사실로 자연을 받아드렸고 웜피스같은 몬스터들과도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소년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인형'을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지만 어제 첫 대면을 한 이들에게 보인다 니‥. "확실히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기는 해‥." 자신보다도 무려 수배나 거대한 생물을 상대하여 도리어 궁지로 몰아넣던 검술. 생명이 살아가기에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인 사막에서 '사막의 신부'들은 육체적인 단련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검술이라면 블 리세미트의 작은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었으나 바위도 자를 것 같은 토실흐덴의 화려한 검술과 키틀볼의 풍차를 연 상시키던 배틀엑스는 멀리서 지겨보고 있었는데도 무서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장 인상이 깊었던 사람은 용모도 특이한 시즈라는 마법사였다. 대기의 유동이 빠른 사막에서 실러오나의 분노라고 불릴 정도로 가차없고 무시무시한 힘의 상징인 토네이도를 인간의 힘으로 불러냈으니 얼마나 거대한 존재로 비쳤겠는가. 저런 이들이라면 여느 모험 담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여행을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하‥ 나도 그들처럼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그랬다면 좋을 텐데‥." 우연일까? 그 중얼거림과 함께 유성하나가 소년의 머리위를 스친 것은? "벽의 보수는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한데 시즈는 저기서 뭐하는 겁니까?" 토실흐덴은 건물의 공사일을 마무리 지은 후 뭉친 어깨의 근육을 풀며 밖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무리 뛰어난 용 병이자 마법사이고 또한, 전설적인 학자였지만 남들 일할 때 놀고만 있는 시즈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차를 들고 준비하고 있던 에크라이 사제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주변의 선인장들이 사원을 향해 구부러져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생각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역시 학자라는 건가?"하고 토실흐덴은 에크라이가 건넨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정도의 마법과 검술에도 모잘 라서 전설적인 학자라‥ 괜찮은 동업자라고 생각했는데 잘하면 끝내주는 고객이 될 수도 있겠군. 차 맛이 꽤나 마 음에 들었다. 입술에 남은 향마저 음미하려는지 그는 혀를 낼름거렸다. 그 때, 시즈는 경배하듯 허리를 굽힌 채 사원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선인장들에 대한 심각한 고찰에 빠져있었다. 간단한 호기심이었다면 그가 이토록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즈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아리에 가 에크라이가 준 찻잔을 두 개 나란히 쟁반 위에 받쳐들고 다가왔다. 용병의 식당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흙 담으로 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사원의 벽에서도 차는 작은 찰랑임 이상의 흔들림이 없었다. "시즈, 이것 좀 마시면서 생각해." "고마워요." 희미하지만 가는 미소를 띠고 있는 시즈는 너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도 쉽게 열 리지 않던 그의 마음이 옛 친구들을 만남으로 풀려버렸다는데 가슴이 쓰렸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아리에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내며 묻자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말똥거리며 바라보는 그녀가 귀여워 어 깨를 잡고 끌어당긴 시즈는 깜짝 놀라 도망치려는 품안의 소녀에게 속삭였다. "이 곳은 말 그대로 성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곳이에요." "에?" 반항을 해보려던 그녀였으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전신을 흠칫하며 가느다랗게 반문했다. 저항이 사 그라든게 마음에 들었을까? 한층 짙은 미소로 아리에를 내려다보며 시즈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그대의 의지는 춤, 열기가 가득한 끝없는 변화의 동작!" 그의 손에서,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나의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열기가 엄 청났지만 아리에는 곧 그 뜨거움이 가셔버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은 선인장의 결계에요."하고 시즈는 중얼거렸다. "뭐, 뭐야!?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그렇게 화내지 말라고. 당신은 마법을 쓰는 마녀잖아. 그 성격에서 보아하니 세이서스에서 당신을 잡기 전까지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을까 싶어서 말야. 뭐 지금이야 아무 것도 못하는 계집에 불과하지만." 전부터 파마리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쿠라마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빈정댄 것이다. 마녀들은 냉정한 성격을 가 지고 있지만 예외도 있다. 게다가 성격과는 다르게 그들은 생각은 극단적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한 번 당해보시지! 생명을 잠식하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검이여! 빛을 삼키는 입 을 벌려라!" 쿠라마스는 쓸데없이 입을 놀린 것을 후회했다. 파마리나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속 좁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지난 시간 속에 과거로 녹아들 뿐. 그에게 날아오는 검은 기운의 검기(劍氣)를 막 아줄 수는 없었다. 그저 눈만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기만 할 때 스르륵‥하고 허무하게 검은 기운은 사라져버렸다. 쿠라마스의 입술이 섬뜩간 곡선이 되어 파마리나의 시선에 들이 박혔다. "선인장의 결계?" 어렸을 때부터 읽은 책으로 인해 마법에 대한 약간의 견식이 있는 아리에는 결계라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 리조리 눈동자가 굴러다니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즈는 말했다. "그래요. 참 신기한 곳입니다. 설마 선인장을 이런 식으로 이용했을 줄이야. 아마 그 곳에서도 생각지 못할 일이군 요." 시즈는 일 년간 많은 전쟁터와 유적을 돌아다녔고 이세계의 지식까지 가진 자였다. 그는 생각하길 세일피어론아드 의 지식으로는 이 유적의 수수께끼를 절대 풀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시즈가 멍하게 중얼거리기만 하자 아리에는 아예 팔을 풀기를 포기하고 반대로 파고 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꼼지락거리며 아예 자리를 잡은 그녀는 시즈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재촉했다. "뭔데 그래?" "아마 이해하기 힘들 거에요." 스윽! "말해드리죠." 시즈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도록 만든 것은 어느 새 뽑혀나와 그의 목 경동맥에 몸을 부벼대고 있는 단 검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허깨비인양 사라져버렸고 아리에는 헤헤거리며 웃어댔다. ‥무서운 여자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사원에서는 굉장히 강력한 힘의 파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에도 치명적일 정도의 거센 파도와 같아요." "에!? 그럼 어서 여기를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마도 괜찮을 겁니다. 이 곳은 선인장들이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제 생각에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양의 선 인장은 인위적으로 심어진 게 틀림없습니다. 선인장이 파장의 먹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사한 거지요. 한 마디로 선인장의 결계는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원에 잠재된 어떤 힘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하 지만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에요. 마법은 자연에서 기존된 것. 인위의 결계와 자연을 벗어난 힘의 파장은 마법 의 힘을 절반이하로 축소시키고 있는 거에요. 알겠나요? 이 힘의 근원은 사원 내에 있는‥ ‥‥‥" 선인장은 전자파를 흡수하는 성질과 전자기파가 발생되는 지점을 향해 쉬어지며 자라는 성질이 있다. 시즈는 사원 안에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전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물체 또는 무언가가 존재하리라고 예상했다. 어 쩌면 '인형'이라는 게 바로 그것인지도 몰랐다. 아리에는 얘기가 진행될수록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시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귀족의 배움에 대한 오기가 남아서 칼을 들고 대답을 재촉했지만 시즈는 역시 전설적인 학자답 게 그 지식이 어디서 듣지도 못한 단어와 언어까지 난무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들이 앉아있는 난간을 향해 보를레스가 창문에서 외쳤다. "어이! 아리에, 시즈‥ 이리 좀 와봐! 야식으로 타르바칸 스프를 만들려고 하는데 간을 어느 정도로 맞춰야 할지 모 르겠어." "아! 보를레스! 일은 다 끝냈어요? 아리에, 그럼 가죠." "응‥." "훗‥ 이해 가지 않는 걸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뭐라고! 내가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 사람의 작은 투닥거림이 난간에서 잊혀져갈 때 달은 또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달의 기억에 그는 이 시간이 되면 사원의 난간 어두운 구석에 앉아서 명상에 잠겨있는 노인이었다. 이름이 크라인 데위르였던가? 사원에서 유일 하게 대사제라는 칭호를 얻은 자였다. '사막의 신부'들은 서로가 동등한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에 대사제라는 칭호 는 사실 없었다. 다만 그의 깨달음이 크기에 어느 사이에 사제들은 그를 대사제라고 칭할 뿐. 타칭 대사제 크라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즈들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허허‥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까봐‥라‥. 숙녀분께서 자존심이 너무나 강하군. 그로 인해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걸. 그나저나 실러오나여‥ 그는 정말로 예정된 노래를 이어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사 원에 몸을 담은 지 60년에 걸쳐 알아낸 사실은 단 하루만에 알아내다니‥ 더욱이 뒤에 이어진 들어보지 못한 지식 들은 나도 이해할 수 없었어. 고작 20세 정도의 나이에 어디서 그런 지식을 머리에 담았을까." 전자파니 뭐니 하는 명칭을 크라인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리에처럼 억지로 이해하려기 보다는 시즈라는 인물의 대단함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전환시켜 머리 속에 인식시켰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크라인은 주름진 입을 오물거 렸다. "이것 참‥. 실러오나여‥. 당신 외의 다른 존재에게 믿음을 가지게 된 이 몸을 용서하시길‥." 그가 노망난 노인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을 때 아리에는‥. "소금이 큰 스푼으로 아홉 스푼은 되어야 돼."하며 타르바칸 스프에 소금을 부어대고 있었다. 마치 소금죽을 만드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보를레스를 비롯한 입을 가진 존재들은 등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말렸다. 그러나 아리에는 요지 부동이었고 그녀의 자존심이 빛을 발했다. "타르바칸은 아주아주 느끼한 기름이 있는 동물이라고 옛날에 책에서 본 일이 있어. 요리서에는 적어도 아홉 스푼 은 넣어줘야 알맞은 간이 된다고 쓰여있었다고!" 잠시 후‥. "으엑! 화, 화장실!" "아, 안돼. 보를레스! 문 열어! 내가 먼저야!" "아앗! 키틀볼‥ 바닥에다 토하지 말아요! 원장실은 내가 치워야 된다고요!" "우웩! 에크라이‥ 사제라는 사람이 어린 양의 고통을 화장실에서만 풀게 할 속셈이시오? 우웩!" 그들이 잠잠해진 것은 두 시간 후‥. 붉게 달아오른 사내들의 눈을 피하여 배당받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리에 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신 중얼대고 있었다. "그래요‥ 시즈의 이야기도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 타르바칸 고기에 대해서도 제대로 몰라요. 모른다고 하면 무시하 려고 하니까 그런 거라고요‥. 히잉‥!" 옆방에서 멍든 눈 주변을 문지르며 책을 읽고 있던 파마리나가 투덜거렸다. "저 녀석은 또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녀가 읽고 있는 책장의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친 자존심이란 섣부른 판단과 만용을 부르는 지름길.' 30 악장 시간 속에 사라진 눈물조차 우리의 삶 속에‥. 촉촉하도록 아름다운 여름도 가고 있다. 무성하게 열대수의 그늘 속에서 야자 열매에 베토리 나무 줄기로 빨대를 만들어 꼽고 쪽쪽 빨아대며 늘씬한 여인들에 몸매에 시선을 던지는 일이야말로 남자의 로망이 아니겠는가? 이 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남자들은 당장 가랑이 사이에 달려있는 살덩이를 당장 떼어버려라. 남자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살덩이 또한 서지 못하는 임포와 다를 바가 없으니‥. 물론 예외는 있다. 그 존재들은 바 로‥. "후우‥ 남작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언제부터 남작님의 집무실이 개인 욕실로 이전했습니까!? 게다가 욕실 안이 이게 뭐예요? 방안에 야자수를 들여놓다니요!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어린 소년들이다. 아직 어미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덕에 볼이 뽀얀 저 녀석은 용병국으로 시즈를 주시하 기 위해 보낸 아이킨. 주근깨와 개구쟁이 같은 외모를 볼 때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다. "아아! 아이킨‥. 벌써 돌아온 거야? 넌 아직 어려서 이해할 수 없어. 용병국에 가서 그들과 지내다보면 좀더 남자 들의 로망에 대해서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남작님‥ 욕실에 열대수를 가져다놓고 그 아래서 달랑 반바지만 걸치고 있는 게 남자의 로망이라면 전 사양하겠어 요." "자네는 너무 하는 군. 내가 집무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주군이 집무의 피로에 시달리다못해 과로로 세상에 뜨기를 바라는 것을 아닐 테지? 이 뜨거운 여름이 다 가도록 난 이 검둥이 성벽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했어. 더욱이 지난 번 스트레스를 풀어주던 과자를 누.군.가 먹어치운 후에 나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져 들 지경이 되어 버렸다고." 후훗. 그러기에 누가 남의 간식을 먹어 치우랬냐? 나는 하나의 빚도 잊지 않고 받아내는 값싼 남작이란 말이다. 솔 직히 말해서 아이킨은 남.자의.로.망.도 이해 못하는 꼬맹이인 주제에 말은 어찌나 잘하는지 상대하기 곤란했기 때문 에 난 눈을 부릅뜨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과연‥ 내 심기를 눈치챘는지 아이킨은 입술을 삐죽인 후 입을 다물었다. "젠티아‥? 누가 왔나요?" "으음‥ 데린. 아이킨이 용병국에서 돌아왔으니 얼음을 넣은 야자 열매 하나 부탁해." "네에에‥. 조금만 기다려요." 아아 나긋나긋한 목소리. 내 비록 해변에는 가지 못할지라도 해변의 바닷바람만큼이나 날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존 재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겠어? 곧이어 휘장을 걷고 걸어나오는 데린의 모습에 아이킨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비틀거렸다. 암암! 비틀거릴 만큼 멋진 모습이지. 살짝 물방울이 걸려있는 머리칼, 어깨의 선을 드러 낸 검은 색 셔츠조끼는 그녀의 매끈한 몸매에 달라붙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살포시 미 소짓는 붉은 입술과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눈웃음에 나는 살아가고 있지 않겠는가? "자아‥ 여기요. 아이킨,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고요? 여기 간편한 음료 한 잔 하세요." "그, 그러죠‥. 하아‥ 이제는 공녀님까지‥."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아이킨은 모르지만 젠티아가 얼마 전에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다고요. 그래서 뭘 해주면 좋을까해서 물어보니 이걸 간절히 바라시더라고요. 만족해요? 여보." 일부러 쪽 소리가 나도록 나와 입을 맞춘 그녀는 싱글거리며 내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황홀함 뒤 아 쉬움이 입술 표현을 쓰다듬고 있을 때 아이킨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그나마 일은 하시니 제가 뭐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제가 맡았던 시즈님의 행적에 대해서 말씀드 리지요." 자신감이 넘치던 아이킨의 목소리가 왠지 떨려나왔다. 설마 놓친 건가? 저 작은 소년이 나이에 맞지 않는 지식과 성숙한 사고방식보다 뛰어난 게 바로 추적술이었다. "놓쳐버렸나?" "그렇다기 보다는‥." 역시‥. 전설적인 어쌔신 일가, '플로먼'들에 비교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킨이 놓쳤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시 즈라는 녀석은 음유술사 중 가장 은밀한 자라고 꼽히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실로 바람을 연상시키는 그 행실 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지. 나는 조용히 아이킨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볼케이스의 사막 중심지로 향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옅들은 바로 예상해볼 때 아무래도 '풍암의 바다'가 목 적지인 듯 했습니다." "하하하‥ '풍암의 바다'?" "풍암의 바다라면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절지(絶地) 중에 하나가 아닌가요? 시즈님이 거기에 가셨다고요?" 확실히 풍암의 바다라면 따라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나는 안타까운 감정으로 넘실거리는 마음을 베토리 나무 줄기 를 쪼옥 빨아 야자액으로 달랬다. "이거 큰일이군. 그 친구들의 힘이 필요할 텐데‥." "벌써요?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까?" "으음‥ 뭐 이미 일어났어도 당연한 시간이지. 곧 준비를 해야 할거야. 내전은 나라를 갉아먹는 쓸모 없는 행위니 까‥."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데린이 나와 맺어진 것은 그녀의 아버지 킬유시 공작은 글로디프리아의 군사력과 사 돈을 맺기 위해서였으니까. 나를 바라보는 데린의 시선에서 물기가 느껴진다. 욕실의 목욕물보다는 좀더 끈끈한 물 기가 말이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걸리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걱정 말아요."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여인의 손을 꼭 잡았다. * * * "그들이 언제쯤 올까요?" 에크라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사제라고 불리며 별의 움직임으로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는 사원의 유일한 존재에 게 물었다. 그 존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샛별만이 남아있는 새벽하늘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미 예언되었던 바람이 우리 곁에 불고 있지 않나. 그런데 또 다른 예언이 언제 올지를 묻는 겐가?" 토루반들과 시즈 일행를 비롯한 용병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대사제는 '현재라도 그들이 쳐들어올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피브드닌이 나섰다. "아마도 저녁때가 될 겁니다. 사제들과 보를레스의 말을 들어보자면 '역사의 고리'는 대부분 유목 민족이 아닌 이민 족들 같더군요. 그렇다면 광열하는 태양이 있는 시간은 그들에게 싸움이 끝난 후든, 시작하든 꺼릴 수밖에 없는 시 간일 겁니다. 공성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에 시간의 필요함을 저들이라고 모르지는 않겠습니까? 그들은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에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는 흐릿한 눈빛에 숨겨진 예지를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판관이 재판을 선고할 때와 같이. 혹시나 아니라 면 사원으로서는 커다란 타격을 입겠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칼로 끊는 듯한 '대학자'의 의견에 마음의 불안을 조금 이나마 잊어버렸다. '불안은 어떤 정의를 내리지 못했을 때 크게 마음을 차지한다.' 피브드닌은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위와 같이 수학공식처럼 규정을 내려두는 학자였고 자신의 방식에 충실했다. 다른 학자들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개미만큼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모두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공식은 의 외로 잘 들어맞았다. 새우처럼 한 가닥의 굵직한 수염을 양쪽으로 기른, 약간은 치사한 인상을 주는 학자는 외모에 맞게 잔꾀라고 칭할 수 있는 부분이 뛰어났다. 잔꾀는 임기응변, 상황파악. 그는 상황을 파악함에 따라 대다수와 소 수를 구분할 줄 아는 이였다. 아스틴 네글로드 원탁의 칠 인인 피브드닌의 이름은 결코 작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은 이름에, 명칭에, 어이없도록 쉽게 현혹된다.' 인간들에게만 있는 특성-요즘 들어서 그가 가장 많이 이용해먹는 특성-이라고 피브드닌은 규정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서는 아무리해도 믿음이 안 가던 그의 얼굴은 아스틴 네글로드라는 명칭 하나에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외모로 탈바꿈했다. 그와 같은 얼굴이 아스틴 네글로드에 두 세 명만 더 존재했더라면 '현자는 치사한 인상을 풍긴다.'라고 소문이 날지도 모를 정도로 인간의 마음은 하늘거리기 그지없었다. "그럼 밤을 기다리도록 하죠. 모두들 질릴 정도의 휴식으로 몸을 풀어주십시오. 우리는 이 곳을 지켜야 합니다. 그 리고 학자들께서는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에크라이가 안내한 장소는 사원의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토루반, 시즈, 블리세미트, 파마리 나, 피브드닌이 그의 뒤를 따랐다. '크으‥ 예상은 했지만 내려갈수록 온몸이 떨려온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 숨어있길래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숨 이 가빠지는 걸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가슴속에 메아리쳤다. 따라오겠다고 고집 피우는 아리에를 지상에 두 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라면 그녀는 피브드닌처럼 축 늘어진 파김치가 되어 버릴 테니까. "다들 괜찮습니까? 나는 왠지 알 수 없지만 머리가 아픈 게 참기가 힘들군요." 사원 지하에 퍼져있는 힘은 외부에서 압박을 하는 게 아니라 내부를 진탕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아니 끊임없이 흔 들어대고 있었다. 내장뿐이 아니라 뇌 속까지. "피브드닌께서는 체력이 약하시군요. 이제까지 여기에서 쓰러지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할 수 없군요. 좀 더 내려가 면 쓸려고 했는데‥." 볼을 긁적거린 에크라이는 손가락으로 행위 예술을 하듯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입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입술 에서는 기도문의 한 종류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가 맺고 있는 수인(手印)은 마법, 그 중에서도 마녀들의 부류가 많 이 사용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제가 수인을 맺다니 처음 보는 군. 여기 사제들은 마법도 사용하나?" "정말입니까?" 머리 속이 엉망인 피브드닌이었지만 호기심은 참을 수 없었나보다. 그만큼 성신(聖神)을 믿는 교단에서 마법은 금단 이었고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현재는 마법이 자연을 수행하는 방법으로써 자리잡았지만 마나의 사용법을 몰라 악 마의 마나를 빌어 왔을 때-지금은 이런 이들을 일컬어 흑마법사라고 부르며 금기시한다-에는 마법은 사람들의 두 려움과 참살 대상이었다. 질문했던 사람들을 비롯한 이들은 금세 자신들을 둘러싸는 청량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빙그레하고 에크라이가 부드러운 어조로 파마리나에게 대답했다. "악마나 마법도 사실은 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지요. 교리에 어긋남을 부여하는 이론이 많기에 금단 으로 치부하는 것일 뿐 신앙에는 아무런 위배되지 않는답니다. 뭐 가끔씩 악마를 믿는다면서 나오는 사람들이 문제 가 아니겠습니까?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수인이 마나의 운용을 위한, 또는 악마와의 계약을 위한 매개체나 문 자라고들 하는데 저희들도 비슷합니다. 단결하면서도 신앙을 내보이는 문장, 단어! 그게 바로 수인으로 변화된 거죠. 그러니 저희라고 쓰지 말란 법은 없지요, 핫핫핫." 그가 호탕하게 웃어버리자 파마리나는 무슨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처럼 씩씩거렸다. '적어도 무언가를 연구하는 이들인 만큼 그 분야에서 말로 밀린다는 게 기분 나쁜 걸까? 약간 유치한걸!?' 그러면서도 블리세미트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 * * "뭐지? 저들은? 저게 바로 '원의 힘'이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차가워지고 있는 날씨에 보를레스는 식은땀마저 등을 쓰다듬자 소름이 돋았다. 적어도 50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의 기사들이 사원을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의 윤곽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근 육이 부르르 떨려오는 게 기사들의 위압감이 대단했다. '말도 안돼. 이런 기세는 엘시크의 궁정기사단, 500명이 모두 모인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 거야.' 그의 물음에 사원의 사제 중에서 유일하게 외눈 안경을 쓴 페리실브라는 사제는 긴장도 안 되는 모양인지 뒷머리만 긁적였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저것보다 더 많았어요. 오죽하면 저희들이 일곱 명이나 죽었겠습니까." 믿을 수가 없군. 일곱 명.이.나 라니‥. 보를레스의 생각에는 아무리 해도 조사가 잘못 쓰인 것 같았다. 그만큼 사제 들의 무위가 뛰어나고 믿음직스러워해야 했지만 말이다. '원의 힘'들이 적은 인원이고 그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 였던 페리실브가 '저 정도야 가볍지, 가벼워.'하고 입이 찢어져 있던 시간도 길지 않았다. 토실흐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툭툭 건드렸다. "저, 저기 혹시 지난번에도 저 정도였나요?" "오‥ 실러오나여‥." 페리실브는 신을 찾을 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번에 왔던 '원의 힘'은 100명이 되어 보이지는 않 았다. 그러나 사원 주위를 빼곡이 둘러싼 이들은 아무리 낮게 세어도 100여명은 가뿐하게 넘었다. "어떻게 저 많은 수의 기사가 사막을 넘어올 수 있었던 거지?" 듀쿠스는 기사들이 두렵기보다는 누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건넌 사막을 앞동산 놀이터인양 서있는 그들이 얄미워 견 딜 수가 없었다. "노르벨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지?" "핫핫핫‥. 바스티너 저기 사원 난간에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 좀 보라고요. '말도 안돼!'라고 외치는 듯한 저 표정을 보니 지난번에 물러서야만 했던 전투의 아픔이 싹 가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요!" "별로 좋지 않은 취미로군. 남의 놀란 얼굴에 쾌감을 느끼다니‥." 자세가 한치도 벗어남이 없이 고정된 채 바스티너는 피식하고 웃었다. 노르벨은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 손가락을 까 딱거리며 말했다. "그럼 누가 놀라는데 쾌감을 느낄 건데요? 저들과 우리는 적이라고요. 쯧쯧쯧, 적의 슬픔은 나의 기쁨. 명언 정도는 알아두세요. 이쪽의 인원에 많이 놀란 모양이네. 우하하하하! '풍암의 바다'에 150여명이 말을 타고 도착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테지! 암! 그렇고 말고!" "추해‥." 거의 발광하다시피 웃어대는 노르벨에게서 바스티너는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가면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역 겨운 표정을 짓고 있을 지도 몰랐다. 가끔씩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노르벨이라지만 실력 하나만은 바스티너도 불만이 없었다. 전설적인 어쌔 신 집단, 플로먼 중에서도 특출하다는 실력자였다는 그의 추적술과 은신술, 정보 수집은 타의추종을 불허했고 그보 다도 더 뛰어난 게 본업인 암살. 노르벨은 암살이 잔꾀를 많이 써야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노르벨이라 는 어쌔신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의 뇌가 어떤 구조로 생겨먹었길래 기발한 착상들을 해낼 수 있는지 신비로움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살기를 만연하게 뿌릴 줄 아는-물론 뿌릴 줄만 아는 것은 아니다.-기사들을 가득히 끌고 온 방법은 솔 직히 말해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간단하게 하나하나씩 마법으로 이동시켜버린 것이다. "추하다니요! 저의 멋들어진 웃음소리와 포즈에 그런 감평을 지어내는 분은 당신이 유일할 겁니다. 주점에 가면 아 가씨들이 껌뻑 죽는 호탕함을 추하다니‥ 제가 이번에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아십니까? 흐윽‥ 정말 너무해 요‥." 마지막의 애처로운 한 마디는 싸늘한 표정으로 묵묵하게 사원을 쏘아보며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150여명의 기 사들에게 오돌도돌한 소름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릴 게 않았다. 이동마법은 간단하지만 장거리를 이동할 시에는 필수조건을 필요시하는데 마법진이 그것이었다. 이동할 장소에 마 법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유치한 짓을 해야했지만 문제는 '풍암의 바다'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뛰어난 전사나 기사도 그럴진데 마법사는 말할 가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법진을 그렸던 것일까? 영 특하게도 노르벨은 어이없을 기발함과 초인이라고 불리우는 체력적 조건을 갖춘 인간-그 덕분에 많이 부려먹는다고 본인은 자주 투덜거린다.-이었다. 한 마디로 몸으로 직접 뛰었다는 뜻이다. 어쌔신은 암살자이며, 은신자이고, 또 뛰 어난 투사이기도 하다. 은신과 암살은 어떤 상태, 어떤 지역에 있든 간에 몸을 적응시켜 오래 버틸 수 있는 기술이 필수였다. 그러나 '풍암의 바다'는 악마가 살고 있다는 장소다웠다. 특히 바다라고 불릴 만큼 주위를 둘러싼 유사를 피해서 '붉은 뱀의 사원'까지 도착하는 것은 노르벨에게 '이번 일 끝나면 사표 쓴다!'라는 결심을 부추키는 요인으 로 작용될만큼 힘들었다. 결국 플로먼의 일인이었고 어쌔신으로써 최고라고 불리울 수 있는 노르벨은 유사를 만나 지 않았는데 반도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구조를 알 수 없는 뇌는 빛을 발했다. "도대체 왜 부른거요!?" "무, 물을‥" 이 더듬거리는 한 마디가 임무에 불타올라 제일 먼저 이동한 마법사가 그에게서 들은 한 마디였다. 게다가 얘기와 는 다르게 마법진이 그려진 곳에는 사원은커녕 '풍암의 바다'의 상징물이라는 풍암도 눈 씻고 찾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껏 물과 음식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한 노르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쏘아보는 마법사를 향해 손바닥 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법시약 다 썼다. 하나 더 주고 가라." 그가 내미는 손을 보며 결국 마법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게 보통 시약인 줄 아시오!? 150명을 옮길 수 있는 마법매개의 진을 그리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시약이란 말 이오! 그거면 이쪽 '원의 신비' 사람들이 4개월 동안 쓸 연구비를 모두 쏟아부어서 겨우 3개를 만들었는데!!" 물론 한번의 이동으로 150명을 옮길 수 있는 마법진을 그릴 시약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전세계는 대규모 침투가 성 행하게 됨은 물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마법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약은 물론 마법사 역시 역사상 전무했고 앞으로도 전무할 것이다. 마법사가 목에 피를 토하듯 주장하는 시약은 위의 방법보다는 약간(?) 부담스러운 방식이었지만 대단한 발명이었다. 보통 마법진이 지워지지만 않는다면 오랜 세월 그 기능을 유지하는 이유는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여 매개로서의 마 나를 보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보충력에는 하루마다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 다. 만약 마법사의 능력이 뛰어나 마법진에 마나를 많이 주입시킨다고 해도 150여명의 인원을 견뎌내려면 7클레스 이상의 마나를 주입해두어야 했다. 그렇기에 '역사의 고리'에서 마법 연구 및 마법사 육성을 담당하는 '고리의 신비 '에서는 단기간에 많은 인원의 전송을 마칠 수 있는 마법진을, 그것도 마법에 대해 물으면 식은땀이나 흘리며 볼을 긁어댈 인물이 그릴 수 있도록 시약을 만들었고 엄청나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몸을 꼬아대며 절규하는 마법사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노르벨은 코를 후벼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고난도의 기술을 보이며 드러누워 버렸다. 마법사가 다리를 굴르며 애꿎 은 모래에 분풀이를 해대고 돌아가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결국 받아낸 시약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걸 포함해서 두 개나 남았단 말이지? 흠‥ 조금 여유있게 가도 되겠군." 마법사가 들었으면 멱살을 쥐고 흔들어냈을 말이었다. 힘겨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노르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옆에서 바라보는 마법사들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 지만‥. 그래도 상관이나 다름없는, 뛰어난 자였으니 다가가서 그의 상념을 깨워주어야 했다. "해가 넘어갔습니다. 슬슬 공격을 시작하죠." 남자는 로진스라는 이름의 마법사였다. 특이하게도 눈썹만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자였는데 덕분에 눈썹만 강조되어 마치 싸움닭같은 인상을 느끼게 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노르벨은 바닥을 뒹굴며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이번에는 그 도 엄숙하게 대답했다. 시기도 시기였지만 그보다도 로진스는 '고리의 신비'를 관장하는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의 주군과 동급인 존재 앞에서 장난스러운 노르벨도 진지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기사 여러분, 들으세요. 우리들의 전언입니다. '제군들이여‥ 우리들의 시간 이 영원하기를, 우리의 역사가 영원하기를!' 이상입니다. 열심히 싸워주세요." "와아아아! 영원의 시간! 영원의 역사! 영원히 끊임없는 고리를 위해!" 커다란 구호와 함께 그들을 사원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온다!" 긴장감에 굳어진 얼굴로 키틀볼이 배틀엑스을 더욱 꽉 쥐고 중얼거렸지만 사원의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자는 듯 고요 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생하게 들렸다. "막아랏!" "한 녀석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돼!" 토실흐덴과 페실라브의 외침은 무의미했다. 모두들 150명의 기사를 막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 으니까. ‥전쟁은 시작되었다. * * * "도대체 저 놈들의 신성력은 끝이 없군." 노르벨은 상처를 입는 즉시 신성력으로 피를 멈추고 체력회복까지 하면서 덤벼드는 사제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벌 써 1시간이 넘도록 150명이 공격을 퍼부었건만 사제들은 마치 불사신 같았다. '크윽! '인형'의 정체에 대해 알면서도 소레인 교단이 건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 너무나 강하다. 기사들의 갑옷을 파괴할 공격술만 없다뿐이지. 거의 일당백이다.' 처음 공격했을 때는 사원은 평화로웠기 때문에 먹혔던 것이다. 현재처럼 방어준비를 최대한 갖추지 않았었다. 50여 명이 말발굽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사제 한두 사람에게 검을 꽂아댔으니 사원 사람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으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니 오늘 이 정도로 버티는 것도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신성력이 끝이 있을 리가 없다. 곧 바닥을 들어내겠지. 그 때까지 기사들을 상하게 할 능력자는 거의 없다.' 노르벨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그는 잠깐 사이에 흰 머리의 사내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노르벨의 얼굴이 소란스러운 사원 한 구석에 향하는 순간, 동방의 귀신(鬼神)처럼 일그러졌다. "하앗!" 찰나의 시간동안에도 검들은 몇 번이나 조우하며 날카로운 충돌음을 공중에 산산이 흩뿌렸다. "저 사람은‥." 보를레스라는 이름이었나? 아니 보들레스? 시즈님 옆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그 때는 느끼지 못했었는데 검 술이 정말 뛰어나‥. '원의 힘'을 상대로 하여 일대 삼사로 싸울 수 있다니 저 정도면 어느 나라의 궁정기사단에 들 어가서 말단 기사단이라고 하나 맡을 수 있을 정도겠지?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를 호위하는 사람이 강하 다는 것에 미소를 짓는 날 들키지 않아도 좋을 테니‥. "으악!" 보를레스의 검은 '원의 힘'이 입고 있는 중장갑옷을 자를 수는 없었지만 뼈 째 부러뜨릴 수 있는 힘이 담겨있었다. 갑옷을 입은 상태로 뼈가 부러지면 뭉개진 갑옷와 뼈에 신경이 자극을 받아 고통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 면 토실흐덴의 검보다도 능률적이었다. 아리에는 싸우겠다고 발을 굴렀으나 기사들의 굉장한 무력에 질려 듀크스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지만 쿠라마스와 키틀볼도 만만한 용병은 아니었다. 로트스 최고의 용병들, 그들은 노련한 케이 소(방울뱀)였던 것이다. "도대체 저 녀석들은 뭐지? 저런 실력자들이 있었나?" 언제나 유쾌하게 살고 싶은 노르벨은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요인들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 경이었다. 사제들만으로도 귀찮은데 저 날파리들도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말벌 정도를 파리로 착각한 게 아 닌가 싶었다. 그를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분명 용병의 차림새였다. 용병이 정규 기사 수명의 검을 막아가 며 반대로 반격을 가하고 중장갑옷을 베어 넘긴다? 그런 존재들이라면 진작에 이름이 알려졌을 게 분명했다. 무명 의 존재에게 당한다 할 시면 그의 주군이 할 말은 딱 한 마디 밖에 없었다. "돌았냐? 나가 죽어라." 게다가 정작 그에게 긴장을 가져다주었던 존재는 그 신비로운 은발의 실타래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없지‥ 이미 일당 이상으로 일하기는 했지만‥.' "크아아아악!" "이래가지고는 한 푼도 못 받고 욕만 더럽게 먹겠군. 바스티너!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몰려드는 기사들을 서너 명씩 상대하던 보를레스는 점점 힘이 붙였지만 그 때마다 사제들이 체력을 회복시키는 성 법술을 시전했기 때문에 고되지만 어렵사리 헤쳐 나갔다. 용병이 된 이후 횟수를 세기도 힘들었던 전투를 겪으며 그는 마스터라고 해도 부족치 않을 경지였다. 시즈에게서 동방검법의 묘를 배운 후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검을 지탱하는 서해검격은 이미 극에 도달했다고 말해도 부족치 않았다. 동방 검법이 술(術)이 아 니라 법(法)이라고 칭하는 원인은 바로 초식이라는 정해진-동방 검법의 달인은 초식을 잊는다지만 세일피어론아드 에는 고차원적인 동방 검법의 이론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다-검로(劍路)에 있었다. 서해검격에는 물의 흐름같이 자 연스러운 검술은 없었지만 상대의 공격을 읽는 예측력에 그 힘이 있었다. 일종의 경험을 믿는 모험이라고 해도 좋 았지만 모험이라는 불안한 단어와는 다르게 그의 검은 완성된 풍미를 느끼게 했다. 아마도 레이모하의 가증스러운 사제, 헤라즈를 만난다고 해도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보를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 르자 눈에 불꽃이 일었고 강하게 기사 하나를 걷어찼다. '뭐야!? 겁이라도 먹었나?' 적은 분명 정규 훈련을 받은 기사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전통적인 기사도를 아는. 한 명에게 여럿이 떼를 지어 공격 하는 게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일대일은 결투에서나 쓰이는 방법이었다. 전쟁에서는 뒤 에서 등을 찌르건 가랑이를 걷어차건 비겁한 게 정당화되는 사건이고 현재는 전쟁 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사도란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를 뜻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곧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물길이 갈라지듯 검은 갑옷의 기 사들이 양 옆으로 물러서고 그 사이를 묵직한 느낌을 주는 암묵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걸어나왔다. 기사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이 다른 기사들을 밀어내는 듯 했다. 흑철갑 안의 눈은 잠시 보를레스를 눈여겨봤다. 맹수가 먹이를 사냥하기 전의 빛깔만이 어둠 속에서 발산됐다. 다른 사람들도 싸움을 멈춘 채 바스티너와 보를레스의 전투에 주의를 집중하게 만들 정도 두 사람의 투기는 팽팽했다. 살 에리는 투기와 살기가 눈에 보인다면 아마도 사원만큼 거대한 문어처럼 생겼을 거라고 파마리나는 생각했다. 기긱‥ 철컥! 바스티너의 무릎이 살짝 굽어지며 무게가 앞으로 쏠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검은 표범처럼 돌진하는 바스티너의 그림자를 접하고 공포에 질려버렸겠지만 보를레스는 약간 움찔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작은 찰나의 멈칫 거림을 지나칠 만큼 바스티너는 무르지 않았다. 0도 이하로 내려간 툰드라의 기온 속에 묵철갑옷은 하얀 입김을 증 기기관처럼 내뿜으며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검을 내리꽂았다. 금속끼리의 충돌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 큼 쾅하고 굉음이 울리며 보를레스는 뒤로 몇 미터나 밀려났다. 과격한 소리를 신호로 동시에 침묵이 감돌았던 사 원은 다시 사투의 소음 속으로 갇혀들었다. "우와아아아앗!"하고 검은 물결은 다시 휘몰아쳤다. 이차 격돌. 이번에는 만만치 않으리라고 토실흐덴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산보 나온 사람처럼 실실 웃어대다니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오랜 용병 생활로 다듬어져온 본능적인 위험센서는 미치광 이 같은 사내가 지금까지 만난 적수 중 가장 조심해야할 상대라는 걸 가리켰기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하하하핫‥.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빌어먹을 음성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드러운 듯하지만 착 깔린 목젖의 떨림 밑바탕을 채우고 있는 냉기에 온몸 이 떨려왔다. 시즈의 목소리는 어찌 들으면 냉혹하지만 잘 들으면 온화한 기운과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이 풍겨난 다. 그런데 푸른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의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청년의 목소리는 그의 괘도를 반대로 돌리고 있었 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토실흐덴은 말했다. "뭐‥?" "긴장할 필요 없다고요. 어차피 느낄 새도 없을 테니까‥." 스륵‥하고 청년의 모습이 사라져버리자 토실흐덴은 당황했다. 모습만 사라졌다면 모르되 살기와 기척까지 완전히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요오오‥." 발 밑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검을 거꾸로 잡고 급히 아래를 찔렀다. 귓가에 맴도는 음성은 그치질 않았 다. 주위를 살피던 토실흐덴은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림자 속에서 헤실헤실 웃고 있는 표 정이 느껴졌다. "꼭 뱀에 놀란 여자아이 같군요. 당신처럼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요." "넌 도대체 뭐야? 꼭! 꼭! 뱀파이어‥." 샤앗! 말을 끝맺지도 않은 순간 날아온 검광은 반짝하고 빛나며 떨어지는 유성의 속도와 비교해도 되짐이 없었다. 토실흐덴이 목의 근육을 비명을 지르도록 억지로 고개를 꺾었지만 왼쪽 뺨이 화끈거렸다. "미안하지만 날 몬스터 취급하지 마세요. 기분이 언짢군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호랑이처럼 코 주름을 잔뜩 찡그리며 그는 검이 날아온 방향을 쏘아보았다. "오른쪽‥이었나?" "정답! 하지만 목이 베어진 다음에는 알아봤자 소용없답니다." "어쌔신의 움직임‥ 그러나 넌 볼케이스의 사람이 아닌 게로군." "싸움에서 출신을 알 필요가 있는 건가요?" "글세‥ 어쌔신은 원래 볼케이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어쌔신을 상대하는 방법도 볼케이스를 따를 나라가 없 지." "훗‥ 해보세요. 재미있겠군요." 어쌔신 특유의 움직임으로 달빛의 그림자을 이용하여 토실흐덴의 사각 속에 교묘히 피해있던 푸른 머리는 서서히 피어나는 상대의 살기에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 눈이 완전히 잘못된 모양이야. 저런 자를 가볍게 보다니. 한 번에 끝냈어야 했는데‥ 귀찮게 됐군.' 볼케이스의 검사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독특한 검술을 가졌다. 동방 검술에 가깝지만 보다 실전에 뛰어난 검술이었 는데 '페라 검술'이라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페라 검술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볼케이스의 '사람'이다. 사막의 나라는 실러오나를 모시는 완전한 신성국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잡다한 민족들이 모여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소레인 의 독신한 신자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광적인 이들도 다분했다. 용병이나 어쌔신 등 검에 종사하는 이들은 광적인 신앙이 더한 이들이 많아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생각하면 죄다 앞에 성(聖)이라는 글자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붙여지는 다른 이름이 있으니‥. "실러오나여‥ 제 스스로 용자(勇者)가 되기를 간청하오니‥." 용기를 가진 자, 용자.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오히려 죽음의 갈림길에 걸려있다는 실러오나의 포도주를 마시기를 바란다. 적이라고 규정지은 상대에게는 잔혹할 정도의 살심(殺心)을 가지고 일말의 동정도 남겨두지 않는다. 검의 빠르기는 동방의 무사와 같고 잔혹함은 어쌔신과 같으며 날카로운 투기는 기사들을 웃돈다. 용자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도전자는 시험을 겪는다. 전설에 나오는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라는 둥의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더 간단하고 어찌 보면 더 위험하다. 볼케이스의 전국 각지에는 '암광의 시험대'가 있는데 그 정 체는 검은 색의 커다란 바위다. 사람들은 바위를 깎아서 침대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도전자는 해가 뜰 때 에 맞추어 돌 위에 눕는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바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 아주 편한 시험 이라고 보이지 않는가? 신앙이 투철한 볼케이스의 국민들은 너도나도 시험에 도전해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용자 라고 불리게 되는 이들은 백 중 하나씩 나와도 과도한 용자의 배출이라고 비리를 캘 지경이었다. 낮 동안 계속 노릇노릇하게 육체가 구워지는 고통을 참는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이제 용자들의 무서운 특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들은 의지에 따라서 고통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레이모하의 교단에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자, 성녀라는 말을 붙이며 칭송했지만 실러오나의 교단에서는 용자라는 이름 하에 당연한 일 로 치부했다. 용자들의 의지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너무나 강렬한 신앙은 일종의 암시를 낳게 되는데 암시의 결과를 노르벨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투기‥. 너무나도 노골적인 살기‥ 이게 바로 용자라는 녀석들인가? 게다가 근육이‥ 저 상태에서 더 부풀 고 있어‥." "목소리가 들린다.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청년이여‥." 토실흐덴의 몸이 잠시 움츠러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섬유는 사내의 몸을 총알처럼 쏘아보냈다. 아마도 인간의 움직임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움직임일 것이다. '바스티너에 뒤지지 않는 위세‥.' 정면으로 맞서면 검과 몸이 동시에 분단되어 버린다. 노르벨은 사원의 기둥 뒤로 피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를 비웃 는지 만곡도는 그 얆은 칼날로 기둥까지 자르며 날아왔다. 땅바닥에 온몸을 부벼가며 가까스로 몸이 양단되는 걸 피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아름의 돌기둥까지 베어버린 괴물 같은 사내는 아직 멀었다는 듯 투기가 피우며 천 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숨을 가다듬던 노르벨이 입술을 핥으며 키득거렸다. "재밌어‥ 재밌어‥."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둘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암흑의 감옥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걸친 후로 이 정도까지 견딘 이가 몇이나 되었던가. 한쪽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눈에 투지(鬪志)를 잃지 않은 청년이 대륙의 명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브로큰스도무에게 쩔쩔 매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걸‥.' 예전의 어설펐던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는 완숙함이 바스티너에게 전력을 다해 싸워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했다. 과 거는 상관없었다. 뛰어난 검사를 싸울 수 있다는데 가슴이 설레였다. '하지만 죽여버리면 그가 슬퍼하겠지? 아깝지만 인형을 찾고 '사막의 신부들'을 없애라는 게 명령이었으니까‥. 방 해하지 못할 정도로만 상대해줄까?' 반면 보를레스는 연신 휘몰아쳐 오는 바스티너가 잠시 공격을 멈추자 뒤로 물러나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겨우 수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 반격다운 반격도 하지 못했는데 수십 번의 전투를 치른 듯 숨이 가쁘고 땀이 쏟아졌다. 묵 빛 갑옷의 기사의 공격은 하나같이 허를 찌르는 요소들, 막기는 했지만 엄청난 파워에 팔 전체에 경련이 일었다. "또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지?" 억울했다. 왜 나는 이토록 많은 괴물들을 만나야 하는 거지? 적어도 대륙 최강의 용병국 카로안 서부에서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노래하는 두꺼비' 보를레스였다. 한데 지금 상황을 보고 누가 그를 최고의 용병이라고 생각하겠는 가.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상대가 암흑의 갑옷, 바스티너를 입은 기사라는 걸 알기 전에는 말이다. 이제 어느 정도는 최강이라는 이름에 웬만큼 근접했다고 자부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난 저자의 연습상대도 안 된다. 그 녀석들이라면 가능할까?' 날카로운 인상의 엘프와, 인상이 부드러운 건장한 사제의 얼굴이 머리 속에 스쳤다. 그러나 곧 사제의 얼굴에 잔혹 한 미소가 깃들자 보를레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질 수 없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굴욕감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나는 걸어갈 것이고 그 자리에 서있지는 않을 것 이다." "좋은 말이야‥. 그 때를 기약하기로 하지." 보를레스가 다시 일어서자 바스티너는 앞으로도 즐거울 긴장감을 가져다줄 사내에게 암흑의 무구이자 방어구로서 최강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알고 있나? 어둠은 암흑 속에서 수없이 폭발하고 있다는 걸‥." '어두운데 알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머리 앞에 도달한 그림자를 보며 보를레스는 입을 벌린 후 다물지를 못했다. 바스티너의 가면에서 다시 흰 입김이 푸욱 뿜어져 나왔다. "모른다면 막을 수 없겠군." 보를레스는 눈을 부릅떴다. 동체 시력이 발달한 그의 눈에 바스티너가 내뻗은 묵색의 검이 통나무처럼 굵어져 갔다. 너무나 빠른 공격에 한 줄기 굵은 암흑줄기처럼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모두 공격일 리가 없다. 나머지는 잔상‥ 몸에 닿는 것은 결국 똑같은 검이다. 난 묵빛의 그레이트 소드를 하나만 막으면 된다. 하지만‥.' 몸통을 모두 가리는 암흑 속에서 과연 어느 게 폭발하는 검인가. 바스티너의 말대로 보를레스는 막을 수 없었다. 하 나를 막을 수 없다면 모두 막을 수 없다. 그는 약간은(?) 굵직한 바늘이 상반신을 무수히 침범하는 걸 느꼈다. 정신 이 혼미해졌다. "보를레스‥!" 상반신 전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청년을 토실흐덴을 안타깝게 소리쳐 불렀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정도로 내가 가볍게 느껴졌나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노르벨은 '난 무서운 적이에요.'라고 말하듯 은근히 다가와 옆구리에 순식간에 세 자 루의 단검을 찔러 넣었다.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당했다는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전투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보를레스와 토실흐덴이 패하자 사제들의 비명이 사원에 하나 둘씩 터졌다. 노르벨의 미소처럼 옆구리에서 퍼 져나가는 피가 역겨웠다. "대장, 도망칩시다." 성급하게 보를레스에게 다가가다가 기사의 일격을 맞고 어깨에 피를 흘리며 외쳤다. 보를레스의 검상(檢詳)은 신기 하게도 급소를 모두 벗어나 사제가 얼른 성법술을 시전하자 목숨에 지장을 없었다. 그러나 '원의 힘' 기사들이 퍼붓 는 공격은 강도는 점점 거세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저항도 제대도 못하고 단체로 실러오나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지 경이었다. 용병이라는 족속들은 제대로 저항하다가 죽느니 차라리 기회만 된다면 저항을 못해도 목숨을 살려 도망 치는 사람들이었다. 쿠라마스의 한 마디는 싸움의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걸 뜻했다. "안돼! 사제들을 어찌하고 떠나단 말인가‥?" "대장, 미쳤소? 우리가 언제 남 죽는 걸 따졌습니까?" "그러나‥." "먼저 가십시오‥." 보를레스의 치료하며 페리실브가 입을 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약간 겸연쩍은 듯 시선을 돌리며 정신을 잃은 보를 레스를 쿠라마스에게 건네고 말했다. "저희는 이 사원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른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곳이야말로 저희가 선택한, 실러오나에게 가기 전의 유일한 고향입니다." "들었죠? 대장 갑시다!" "건물 중앙의 계단으로 내려가십시오. 길은 외길입니다.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인형'의 힘으로부터 당신들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럼 부디 실러오나의 가호가‥!" 그는 목에 걸고 있던 고대 소레인 교의 상징, 실러오나의 문양을 벗어서 키틀볼의 목에 걸어주었다. 수염이 가득 난 노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모양이 날 리가 없었지만 키틀볼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문양을 꼭 쥐었다. 도망치는 용병들을 쫓을까하고 노르벨은 생각했으나 곧 마음을 바꿨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진군을 막을 수 없었 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기가 오른 기사들에게 치명적인 급소를 맞고 성법술을 쓸 기회도 없이 죽어가는 사제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쫓지 마라. 우선은 사제들을 그들의 신에게 보내준 후에 따라가도 늦지 않는다."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페라실브는 볼을 긁적거리다가 손을 높이 들었다. 신호였는지 사제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무미건조한 바스티너의 음성에는 의혹으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페라실브는 사제답게 친절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실러오나께서 왜 '지나친 실러오나'라고 불리시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사제들은 무엇이 즐거운지 저마다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마지막 그들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봉인을 해둔 겁니까?" 벌써 두 시간째 봉인만 풀고 있다는데 지친 피브드닌이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아마 침입자가 '인형'이라는 물건을 훔치려 온다고 해도 봉인을 푸는데 지쳐 쓰러지고 말리라. 그 때였다. 쿠르르르릉!― 그들이 있는 지하 10미터의 방까지 들려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 흠칫한 에크라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다 되었습니다. 이 '인형'입니다." 시즈에게 인형을 건넨 그는 조용히 계단 입구로 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그가 내뱉는 흐느낌에 가까운 작은 중얼거 림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가시오‥ 형제들이여‥ 우리의 염원이 끝을 다해 가고 있소‥. 나도 곧 가리다‥ 늦게 온다고 실러오나의 포 도주를 모두 마셔 버리지는 않겠지요?" "빌어먹을 사제놈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화낼 것 없소. 그들의 능력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뛰어났을 뿐이니까." "나는 그런 것 따위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임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일 뿐이오." 노르벨은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절윤한 얼굴이 추하게 보일 정도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분만 태울 수는 없는 일, 걸음을 옮기는 게 급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빌어먹을 사제 놈을 한 명 더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아주 나 이를 지긋이 먹은 이였다. 쿠르르르르릉― "도대체 뭐야!? 아까부터 이 소리는‥!" '대사제께서도 가셨군‥. 그 분께서는 포도주라면 통째 가져다놔도 모질라는 분인데‥.' 몇 번이나 굉음이 들려오자 에크라이도 이제는 담담해졌다.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블리세미트의 연한 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인형을 둘러싸고 쑥덕거림을 멈추지 않는 학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피브드닌, 이런 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내 생애에 이런 문자는 처음 보는 군. 마치 그림을 그린 듯한‥." "예. 요상하기 그지없는 문자로군요. 게다가 왜 이리도 복잡한 겁니까? 이런 기괴한 문자를 익혔던 나라의 학자들은 정말 존경받을만 했겠는데요." 대륙 최고의 학자들은 문자를 해석할 수 없자 얼굴의 주름살을 찌푸려 인형에 쓰여있는 문자처럼 만들려고 노력하 는 모양이었다. 남은 희망이라고는 '마땅찮은 시즈'. 그가 '또 다른 고향'을 표현했을 때처럼 처럼 '또 다른 언어'를 읽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燕子‥ 進上‥.(인연이 닿은 자에게 올립니다.)" "아니! 시즈, 이 문자에 대해 아는 건가?" "저도 잘은 모릅니다." "잘은? 잘은은 무슨 잘은 인가! 읽을 수만 있다는 게 어디인데‥. 어서 계속 해보게." 토루반은 희망이었을 뿐 설마 그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손바닥으로 어깨를‥, 아니 닿지 않는 관계로 엉덩이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시즈가 인형과 그 주위를 유심히 살펴 보다가 기괴한 문자, 지구에서는 한문(漢文)이라고 불렸을 문자가 일종의 주술적인 언령의 역할로 쓰여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다면‥. 인형을 움직이게 할만한 장치가 없나요?"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발동원이 있을 텐데‥. 학자들은 바닥을 기어다니며 뭔가 튀어나온 바닥이나 들어간 벽을 만지고 쓰다듬고 돌려보기까지 했으나 석실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을 때, 계단에서 우 당탕하고 케이소의 용병들과 파마리나가 내려왔다. "사제들은 어찌 되셨나?"라는 질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들을 살짝 감싸 안아주며 에크라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모두 가고 싶은 곳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리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혹시 페라실브 사제께서 '이실리스의 펜던트'를 주셨습니까?" "여기 있네. 이걸 말씀하시는 게지?" 마지막으로 페라실브가 도망치는 케이소들에게 건넨 목걸이. 에크라이에게 건네기 전 힘있게 쥐어 보인 키틀볼은 말했다. "그들은 사제가 아니었네. 진정한 용자였어‥." "하하하‥. 지금쯤 실러오나의 만찬을 드시느라 정신이 없어 듣지 못 하시는 게 안타깝군요. 아마 듣게 된다면 사제 들께서는 적극 부인하실 겁니다." 벌써부터 에크라이는 애수에 빠진다는 게 어색했지만 잠시 오랜 지우(知友)이자, 동료이고 스승이었던 이들과의 지 난날을 되새겨 보았다. 살아가기 힘든 사막이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얼마나 행복했었나. 이제는 모두 떠나고 나도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아‥. 블리세미트, 받으세요. 이제 그대의 것입니다.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을 나타내는 '이실리스의 펜던트'에 요. 펜던트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원래 신성력의 두 배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러나 그대도 이 펜 던트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대는 펜던트의 능력보다 의미를 소중히 하세요." "에‥?" 등을 거칠게 돌리는 그 때문에 정신이 번쩍 띄었다. 블리세미트는 총명한 소년이었다. 원장의 증표는 다른 사제에게 잠시 맡길 수는 있어도 현(現) 원장이 사망하지 않는 한 후계에게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크라이의 행동은 과연 무엇인가. '잡아야 해.' 가슴이 꽉꽉 막히고 목이 매어왔다. 가지 말라고 소리를 쳐야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쫓아 가려던 소년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충격이 목을 내리치는 걸 느끼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고맙습니다." "사제님께서도 가셔야 합니까?" "블리세미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사제로서는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 곳을 벗어나면 꽤 혼란을 겪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믿겠습니다." 순한 양 같은 눈동자가 두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살기도 투기도 그렇다고 적의도 아니었지만 석실 안의 사람 들은 부드러운 사제의 시선에 압도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터벅터벅터벅터벅‥ 발걸음이 사라질 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시즈는 석실이 암울함에 침몰되어 가는 속에서 힘든 현실을 해결할 수 있 는 열쇠를 '인형'이라고 보았다. '인형에는 '태엽 장치가 없지만 찾아보라.'고 써있다. 없지만 '찾아보라?'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잘 생각해보자. 이 말 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태엽 장치는 없다. 여기에서 발동장치는 잊자. 그리고 찾아보라는 것은 발동 장치 가 아니므로 인형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맞나? ‥크으, 도저히 모르겠다.' 모를 때는 묻고 찾는다. 시즈를 있게 한 원동력인 성격은 또 한번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토루반, 피브드닌. 혹시 '태엽 장치는 없지만 찾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그 말은 드워프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말로 유명하지. 발동 장치가 없다는 뜻은 그 말대로 발동 장치가 없다는 뜻 이네. 그러나 찾아보라고 했으니 뭔가 장치가 있다는 뜻이고. 이 말은 태엽이 필요없다는 뜻이니 인형은 이미 움직 이고 있다는 뜻일세. 그러나 찾아보라는 것은 우리의 눈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지." "알고 있는가? '암흑 속에서 어둠은 수없이 폭발하고 있다는 걸.' 쿨럭!" "보를레스‥ 깨어나셨습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죠?" 블리세미트와 나란히 누워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자 토실흐덴과 쿠라마스가 옆에서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보를레스는 자신의 깨어남보다 방금 전 말에 관심을 보이는 시즈의 눈동자를 보며 '이 놈은 천성 이 학자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아까 기사단의 대장인가 하는 놈이 한 말이지. 큰 존재에 가려진 작은 존재의 움직임은 눈치채기 어렵다는 거지. 아니 아예 알 수 없다고 봐도 되겠군." "그렇다면‥ 수수께끼가 풀리는 군요." "나도 알겠군. 자네의 생각은 이미 인형이 움직이고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발동 장치가 필요 없고!?" "그렇습니다. 문제는 더 큰 존재가 무엇인가지만 이미 그것도 알았습니다." 인형에 쓰여있는 대로 연자(燕子)가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즈는 자신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붉은 뱀의 사 원'의 구조는 이세계의 지식에 따라 만들어진 세일피어론아드의 유물이라고 확신했다. '이세계의 문자'와 '이세계의 지식'‥ 이 둘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두운 하늘의 찡그림에서 비롯된 눈부신 윙크‥. 누구나 전율할 끝없는 고통의 속삭임을 부여하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유혹적이며 공포스러운 주문. 파마리나는 시즈의 양손에 모여드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느꼈 다. 수없이 박동하면서 순간순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파괴적인 마나로 구현될 마법은 그녀가 알고 있는 한 하나 밖 에는 없었다. "‥라이트닝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번개는 빛으로 구성된 에너지. 강렬한 전자기를 띄는 형체를 규정지을 수 없는 존재를 시즈는 무 자비하게도 어린애의 손놀림으로 만든 듯한 토기 인형에 퍼부어 댔다. "시, 시즈‥ 인형이 망가지겠어. 그만해!" 피브드닌의 말리는 외침을 무시하고 눈뜰 수 없는 빛의 광란(狂亂)은 멈추지 않았다. 겨우 눈꺼풀을 열고도 사물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피브드닌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동공이 흰자를 삼켜버릴 것 같은 그의 눈동자를 향해 속박에 서 풀려난 인형은 인사를 건넸다. ―흐음. 그 친구 참 멍청하게 생겼군.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커졌어. 이런 현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건 경악, 놀람, 공포 등의 극적인 감정을 맛보았을 때지. 물론 나의 등장 연출이 빛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지. 게다 가 촌스럽기 짝이 없는 흙 장식들이 떨어져간 대다가 예언되었던 친구의 번개 영향으로 전신에 흐르는 광택은 그야 말로 계란을 깨고 튀어나온 어여쁜 병아리가 아니겠나? 생김새는 병아리와 비교하여 눈곱 하나만큼도 비슷하지 않았지만 조잘대는 게 꼭 삐악거리는 듯 해서 아리에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암울했던 석실의 분위기가 새싹 피어나는 봄날처럼 훈훈해졌다. ―아가씨가 아주 미인이군. 내가 비록 이만 년 전에 속박의 인을 받고 갇혀있었지만 눈 하나만은 확실하지. 아가씨 는 이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손꼽히는 미인이 틀림없어. "이봐.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파마리나가 허리를 쑥 내밀었다. 아담 사이즈인 아리에에 비해 그녀는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 다. 철상(鐵像)의 반응을 예상해보던 사람들은 상(像)의 대답에 박장대소했다. ―훗‥! 이봐, 내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설마하니 유혹할 심산인가? 안타깝게도 인간 남자의 영역까 지 빼앗고 싶은 맘은 없어. 파마리나의 마법지식으로 볼 때 철상은 일종의 아이언골렘에 준하는 유물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골렘에 고대인간 등의 세람류(드래곤들은 호비트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엘프, 인간, 드워프, 스칼프가 그 안에 속한다.)나 요정족의 영 혼을 잠재된 종류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검과 같은 종류도 영혼이 들어가면 성 검, 마검, 영검들 여러 가지 수식어들이 붙으면서 칭송의 대상이 되는데 철인형 주제에 움직이면서 말까지 하다 니‥. 아마 고대의 어떤 골렘 유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탐욕의 혀가 파마리나의 뇌를 간 질이고 있을 때, 토루반은 토루반대로 드워프의 기술로도 흉내낼 수 없을 듯한 철인형의 구조에 대해서 고민을 거 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면 영원히 수다떨기를 멈추지 않을까봐 걱정이 된 시즈는 입김을 불어 철상의 주의를 돌리고 말 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대를 속박하고 있던 자기력을 봉인함으로써 이제 마법의 힘이 사원 내에서 원래의 위력을 발 휘하게 되었소. 우리는 쫓기고 있고, 나는 물을 게 많습니다." ―그래. 말해주지. 전승 속에 기록된 자여‥. 내 이 만년 동안 그대같은 외모는 처음 보는 군. 내가 돌 속에 갇혀있 었지만 눈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그 동안 사원을 다녀간 이들의 얼굴 정도는 견식할 수 있었지. "다시 말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노려보는 눈동자가 섬뜩하군. 마치 광학유리를 넣은 듯한‥ "전승을 이어받은 자로서 명령한다. 네가 여기 남은 이유가 무엇이고 나에게 전할 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원하는 질문이 무엇일지는 알고 있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시간이 없는 듯하니 정답을 말해주도 록 하지. 난 이만 년 전 최고의 주술사라고 불리던 아플로이크 라는 이름의 작자와 마법사 토그체드롤에 의해 만들어졌다. 혹자는 영혼을 집어넣은 게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가진 것은 아플로이크라는 인물과 멍청하니 자기 이름 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제, 두 사람의 기억뿐이다. 임무는 단순한 연자(燕子)에게 약속의 언어와 그에 따른 의지의 마법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지금처럼 되었냐고? 성급하게 묻지 말고 기다리라고. 우선 아플로이크에 대해 서 설명하도록 하지. 아플로이크는 사막 소수 민족의 주술사였다. 사막민족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래뿐인 대지에서 선인장이나 풍란같이 영양성 제로의 식물이 아닌 벼나 콩 같은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나 사막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배고픔과 목 마름으로 죽어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 시피 이만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는 이였다. 영겁의 시간이 지나가도 그는 모래 속에서 생명 력이 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절망했다. 끝없는 시간 속에서 굶주려할 후손들을 생각하니 신이라는 족속들을 모두 저주하고 싶었다. 그 때 한 토그체드롤이라는 마법사가 아플로이크에게 접근했다. 그가 속한 단체는 '역사의 고리'라는 암중에 세일피 어론아드의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신비한 녀석들이었다. 특히 토그체드롤은 능력이 아플로이크에 뒤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후일 '음유술사'라는 '역사의 고리'의 방해자들이 출현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일피어론아 드의 의지에 의해 태어날 '음유술사'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연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파멸을 위한 존재를 만들어내고 또 존재에게 약속의 언어를 부여하기로 하려고 아플로이크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이만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기 능을 연장해날 수 있는 골렘의 주술을 가진 사람은 아플로이크 뿐이었으니까. 사막 민족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절 망으로 끝내는 원망과 저주로 변해가던 불쌍한 주술가는 이미 별의 정기(精氣)를 짚던 총기(聰氣)를 잃은 지 오래였 다. 광기만으로 '파멸의 춤을 추는 이'가 가진 힘이 절정이 될 시기를 찾아낸 아플로이크는 주술력으로 내 몸에 약 속의 언어를 새겼다. 전승 속에 기록된 자여, 그대가 과연 연자가 틀림없다면 약속의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언어. 간단한 하나의 발음만으로도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또 의미 로서 사용되었던 언어. 시간의 흐름 속에 드래곤의 용언을 능가하는 창조력과 파괴력을 가진 힘의 상징으로 신어 (神語), 아스트랄과 비교할 수 있는 금지된 의지의 조각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을 몸 에 새긴 채 시간 속에서 뜬 눈으로 연자를 기다렸다. 단 한 가지 아플로이크는 총기를 잃었기 때문인지 그답지 않 은 실수를 했는데 바로 '파멸의 춤을 추는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지. 바로 전승될 인형, 바로 나에 대해서는 미래를 보지 않았던 거지. 어쨌든 이천 년이 흘렀다. 고대 문명은 흔적도 없이 망해버렸지만 그 시대의 학자와 마법사들은 바퀴벌레보다도 끔 찍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성한 회귀'를 원하는 '역사의 고리'는 그들을 한 수 웃도는 살충력(殺蟲力)을 보 였다. 암중의 힘에 대응할 수 있었던 단체는 오직 대중의 힘을 모은 종교들뿐이었다. 하지만 시도는 소용없었다. 모 를 리 없겠지? 이 주위는 나를 봉인하는 자기장의 힘으로 인간은 들어올 수 없다. 혹시 있다면 '파멸의 존재'나 '음 유술사' 정도겠지. 그렇기에 '역사의 고리'에서도 신경 쓰지 않았었지. 그러나 아주 우연스럽게 소레인 교단의 한 사제에 의하여 아플로이크가 내다보았던 미래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내 기억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제는 자기 이름을 언제나 모른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 이름을 찾겠다고 신을 섬기고 있던 웃기는 녀석이었다. 신성력이라고는 사막의 모래 속에서 소금을 찾아내는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던 녀 석은 소레인 교단에서 파견된 조사단에 속해 있었다. 성법술도 못 쓰는 녀석이었는데 아마도 짐꾼으로 끌려온 모양 이었다. 역시 주변에서 몰아닥치는 자기폭풍에 휩쓸려 모두 정신이상을 일으켜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지만 유일하게 멍청한 사제만 살아남았다. 어쩌면 더 이상 이상해질 구석이 없는 뇌를 가져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유를 생각 하던 그는 자신을 보호하듯이 서있는 선인장을 보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인장은 자기폭풍을 막아내는 작용을 한다고 규정지은 사제는 주위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어떻게 살았냐고? 인간의 힘은 무한한 법이다. 이 말로 대충 알겠지?-멀리서부터 선인장을 하나씩 심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선인장 심기를 끝내고 사원 안 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생명이라는데 대하여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인지 마지막에 이르러서 생명의 파멸을 원했 던 아플로이크의 주술에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몸에 쓰여진 약속의 언어를 해석해내지. 녀석은 바로 문자 연구가였으며 유적 탐사 학자 출신이었던 거다. 그것도 아주 고명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래서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조사단에 포함되었던 거지. 내 몸에 남겨져있던 문자가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될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달은 그는 사원 전체를 정화시키고 사 람들을 하나 둘씩 끌어들여 자신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도와준다. 그게 바로 이 사원의 시초야. 아플로이크가 절망 했던 사막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듯 했다. 최고의 주술사라던 아플로이 크의 주술력을 상회하는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을 줄줄이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멍청한 사제는 죽기 전에 동 료들에게 나를 '파멸의 존재'가 아닌 '순환 속의 자유와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에게 전하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모든 신성력을 내게 주입시켜 아플로이크의 저주 섞인 저주를 정화시키지. 덕분에 난 자아에 눈을 떴거지. ‥‥벌써 헤어질 시간이구나. 내 힘이 다 되었어. 사실 사람을 만나면 그들처럼 수다를 떨어대고 싶었다. 그 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이‥만 년‥동안 기다‥리며‥ 존‥재‥해‥야‥할 이‥유‥를‥ 더‥ 부‥여어‥어‥ 할‥테에‥니이이‥. * * * 한 편 시즈가 인형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무렵, 에크라이 원장과 크라인 대사제는 토혈을 해가면서 '원의 힘'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모래처럼 백색 빛의 알갱이가 하늘까지 솟구치며 거대한 장 벽을 만들어 '원의 힘'들은 사원 안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했다. 노르벨은 발을 동동 굴러대며 지금까지 죽인 모든 이들에게 쏟았던 것보다 더 지독한 살기로 두 사제를 쏘아봤고 '고리의 신비'를 관장하는 로진스는 무미한 표 정으로 묵묵히 서있었다. 로진스는 비록 기괴한 힘의 파장 때문에 마법을 제대로 쓸 수 없었지만 지하에서 거대한 양의 마나가 유동하고 있다는데 앞으로 반전을 일으킬 무언가가 일어나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파직! 그리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어떤 반응보다도 로진스는 반가웠다. 마법을 방해하던 힘의 장막이 걷어졌기 때문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마나의 느낌이 반가웠다. "시간끌기는 끝이다!" 로진스의 손짓을 신호로 7명이나 되는 '고리의 신비'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력을 발출했다. 결계(結界)나 결막(結膜) 은 반대 속성으로 깨는 게 원칙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한 마력이나 신성력의 크기로 부숴야 했다. 마법사 중에 는 감춰진 마나의 구조를 파악하여 작은 마나로도 결계를 해체한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희대의 인재들만이 가능했다. 게다가 로진스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방법보다는 힘으로 눌러버리는데 자신이 있었다. 신성력과 마력. 두 상반된 에너지가 부딪혔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마법사들의 몸이 흔들렸고 두 사제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며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는 사실이 충돌과 힘의 우위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피로 물든 수염을 치켜들고 다시 손을 모으는 대사제를 향해 로진스는 말했다. 에크라이는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이 미 기절한 상태였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저희를 방해하던 힘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십니까." 각혈이 내장이 상한 징조라면 토혈은 죽음의 징조였다. 하지만 대사제는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힘을 쓸 수 있다는데 기쁘오? 나도 기쁘오. 그가 예정되었던 사람이었다는 게‥ 곧 우리의 염원이 이뤄진다는 게‥. 그렇기에 좀 더 그대들을 막아야 겠소." "그러시다면‥." 마법사들이 한발자국씩 걸어나오자 로진스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다른 목적을 가졌을 뿐이지 철천지원수도 아니지 않은가. 하늘을 향해 뻗은 손위에서 작은 구체가 스파크를 내며 부피를 늘려갔 다. 무려 어린 아이만큼이나 커진 구체를 누가 라이트닝의 구체라고 생각할까. 마법사들의 얼굴에서 존경심과 동경 을 느껴졌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쉴 시간은 내가 결정하네." 자신만만하던 로진스는 노사제의 신성력이 아직도 굳건한 바위처럼 끄덕도 하지 않고 견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과연 어디까지 견딜까하며 마력의 세기를 점점 강화했다. 그러나 노사제는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면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오뚝이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진스는 입술을 꽉 물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마력에도 죽어갈 듯한 노인이 버텨내자 자존심에 상처 를 받은 것이다. 물론 좀더 시간이 지나면 부상을 입은 크라인은 쓰러지겠지만 이미 승패의 결과는 버젓이 가슴을 괴롭힐 게 뻔했다. 감탄을 숨기지 않고 로진스는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졌습니다." 크라인의 얼굴에 창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때 로진스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겼습니다!" 동시에 손을 쓰지 않던 마법사들은 저마다의 마법을 시전 했다. 타들어 가는 사제의 복장에 크라인은 중얼거렸다. "기도만 하고도 만족했던 사람들 중에 나는 싸움이라는 멋진 경험으로 삶을 마무리하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낫구 나. 녀석들이 포도주를 남겨놓아야 할 텐데‥. 이런이런‥ 자네도 함께 가도록 하세. 설마 20년 전 '이실리스의 펜 던트'를 달라고 조르던 꼬마가 죽음의 순간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으음 따뜻하군‥." 쓰러져 가는 불길을 노르벨은 신경도 쓰지 않고 뛰어넘었다. 그 뒤를 바로 따르는 철컥임은 바스티너였다. 그는 몸 을 운신하는 실력이 뛰어나기에 철컥이는 소리가 가벼웠지만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덜컥거리는 소리가 계단을 가득 채워 완전히 소음이었다. 계단 끝에 방이 여러 개 일까봐 걱정스러웠지만 모퉁이로 몸을 들이 넣자 그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득거렸 다. 목표가 눈 앞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되찾았을 뿐 아니라 한 층 느끼해진 노르벨의 미소에 기분, 아니 속까지 상 한 것은 토실흐덴이었다. 시즈를 제외한 사람들은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사원을 빠져나갔고 그가 마지막이었던 게 재수가 없다면 없는 것이다. "사제들은?" "지금쯤 실러오나가 환영의 잿가루를 뿌려대고 있을 겁니다." 흔쾌히 대답한 노르벨은 한 가닥의 투명한 시선이 지긋이 짓고 있는 표정에 의아했다. 시즈는 도저히 궁지에 몰린 사람이 떠올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약간의 슬픔과 안타까움, 사제들에게 향해지는 감정일 텐데 어찌하여 내 몸이 떨 려오는 거지. 바스티너나 로진스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 라며 시즈를 노려보았다. 곧 시즈가 들고 있는 철인형을 발견한 노르벨이 소리쳤다. "사막의 의지가 담긴 인형!" "필요하신 가요?" "내놔라!" 휘익. 엥? 내놓으라고 정말로 내놓는단 말인가? 받아들고도 믿을 수 없던 노르벨은 인형을 로진스에게 들이밀었다. '고리 의 신비'의 수장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마나나 주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시즈는 냉소했다. 하긴 그들이 이세계의 지식에 대해 알 리가 없겠지. 인형을 봉인하는 존재이자 인형이 놓여있던 돌은 사실 커다란 자석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제조된 전자석이었다. 아마도 번개의 마법을 이용하여 강력한 전자기파를 발산하는 자석으로 변성된 듯 했다. 인형 은 원래 발동장치가 필요 없었고 전자기가 보충되는 한 영원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겉은 돌이면서도 안이 쇠 로 만들어져있으니 꼼짝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인형은 에너지원에 봉인 당해 있었던 것이다.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존재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동일하다니 이율배반적인 지혜에 시즈는 그저 혀를 내둘렀다. 그 전자석을 시 즈가 또 다시 더 강한 전자력을 지닌 번개 마법으로 자성을 없애버려 인형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자기장도 사라졌고 에너지원은 끊겨 버렸다. 결국 철상은 이야기를 다 마치고 입술을 열지 못했다. "혹시 아시오?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바스티너는 부드러운 시즈의 목소리에서 오래 전 '그'와 같은 기운을 느꼈다. 너무나도 두려웠던 이에게서 느껴지던 위압감이었고 자신을 억누르는 공포였다. 갑옷 '바스티너' 안에서는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안전하다던 법칙을 단숨에 깨뜨렸던 '불꽃의 춤을 추던 이'. 그에 비견되리라고 느껴지는 힘이 유일하게 가슴 속에 파고든 상대에게서 느껴지 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저마다의 걱정과 공포 등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즈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니까?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공포에 얼어버린 이들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진스는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쓸모없어진 인형을 내팽기치고 절규하다시피 그가 외쳤다. "나가라! 여기 있으면‥." "노래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 입니다!" "죽는다! 나가라! 개죽음이 싫으면 뛰어라!" 땅이 울고 있었다. 바닥을 덮은 벽돌이 우릉대며 들썩거렸고 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래를 마친 시즈가 손을 들며 외쳤다. "나는 노래합니다. 말(言)에 신념과 의지를 담아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존재를 향한 분노를! 破(파)! 나의 적의요! 분노의 표현입니다!" 이만 년 동안 한 주술사의 지나친 사랑의 저주가 무너지고 있었다. 시즈는 한 사내의 지나친 사랑의 결과를 그가 사랑했던 민족들이 죽어서 떠 안아야 했다는 사실의 잔혹함에 가슴이 아려왔다. 가만히 그는 찌부러져 버려진 채 건너 편 구석에 떨어진 인형을 떨어지는 모래 사이로 바라보았다. 똑똑‥ 모래 위에 물방울이 자국을 남겼다. "아플로이크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의지. 얼마나 많은 눈물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였는지 저는 모릅니다. 미래의 절망을 아는 이의 슬픔을 모릅니다. 이제 가져가겠습니다. 그대의 수많은 바램 중에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버렸을 눈물에 담겼을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이뤄드리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저를 바람이라고 말하는군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이름을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대의 지나친 사랑이 비록 저주로 남았다지만 다시 나누면 생명을 포근히 감싸안는 사랑이 되겠지요?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눈물을 옮기여 비처럼 뿌릴 겁니다. 시간 속에 묻혀버린 눈물이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천천히 유리 눈동자가 돌아서고 머리칼이 그 여운을 쓰다듬고 지나쳐 통로로 사라져갔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 께 철인형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놓여있던 자리로 비틀거리며 기어올라간 인형은 시즈가 나간 자리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처음의 능수능란한 말투도, 그렇다고 에너지가 떨어져 더듬거리던 말투도 아닌 온화한 음성이었 다. "나의 의지를 전승한 자여‥.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지요. 사막의 절망에 빠져 이 금속의 몸에 인정이라고는 없는 저주스러운 의지를 집어넣었지요. 그리고 파멸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천 년의 시간이 흘러서 만난 사제 의 이름은 '크실로브라스(후회하기에)'이었다오. 얼마나 우스운 일이오. 절망했던 세상이 걱정스러워 '저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사랑'이라니‥. 그럴 거라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저주했단 말이오? 그랬다오. 그래서 나는 돌아온 나 자신을 '멍청한 사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거요‥.' 표정이 정교하지 않는 철의 얼굴이었지만 왠지 미소를 짓는다고 느껴진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 사내의 사막을 향한 '지나친 사랑'은 이만 년의 방황을 마치고 모래 속에서, 사막 속에서 눈을 감았다. 31장 휴식의 시간이 되면 떠오르는 회상. 딸랑. 딸랑. 구슬이 떨어지는 소리냐고 묻는다면 사내는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를 지우고 질문한 사람의 뒤통수를 후 려 갈겨버릴 것이다. 감히 비교해야할 물건을 비교해야지. 투명도가 0에 가까운 유리구슬이라고 해도 타로운이라는 금전 단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으흐흐흐흐‥. 오천 타로운이야 오천 타로운! 대장 보라구!" "흐흐‥ 일이 년은 죽도록 일해야 벌 수 있는 양이었는데!" 한 달에 일천 타로운에 가까이 버는 용병들-세이서스-이 있다고는 하지만 용병왕국 카로안에서도 각 지역의 리스 트를 잡고 있는 아주아주 극소수였다. 식비며 용병길드에 정규적으로 지불하는 정보료(情報料). 더 정확하고 중요한 정보는 따로 돈을 내야했고 장비를 마련하고 수선하다보면 그들도 한 달에 순이익이 500 타로운 정도라고 보는 게 옳았다. 금화를 품에 안고 던지고 비벼대던 토실흐덴은 문득 발광해야할 인원이 한 명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쿠라마스. 할아범은 어디 간거야?" "그 나이 때도 친구가 있는 법이 아니겠소? 듀쿠스에게 간다고 합디다. 크아‥ 좋구나! 물렁하니 날 행복하게 만드 는 금화여어‥." 나이가 지긋한 두 노인은 로트스를 '사막의 보석'으로 만들어준 푸른 물길의 흐름, 실로나레이(여신의 사랑)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로트스에서 시작된 실로나레이의 물길은 점점 강줄기가 되어 동쪽으로 흐르고 볼케이스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도시를 먹여 살리는, 그야말로 실러오나의 사랑이었다. 학자들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우기(雨期) 때 퍼부어진 빗줄기는 지하수가 되어 모래 밑과 바위틈을 흐르다가 로트스의 서쪽에 모이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시작이 된다는 것. 어쨌든 한 사람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촌로(村老)라면 다른 쪽은 젊은이처럼 눈이 형형이 빛나 노익장의 기세를 풍기는 그들은 듀쿠스와 키틀볼로 일생일대 최고의 모험이라고 자부할만한 의뢰가 끝난 후 처음으로 여유로운 산책 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키틀볼의 날카롭고 과격한 눈매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전처럼 늑대 이빨을 연 상시키던 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없이 수로를 따라 걷던 듀크스가 문득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옳았어‥. 날개를 갖아야 진정 하늘을 나는 천사더군." 키틀볼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타인이 보았다면 차라리 무표정한 게 사교생활에 순탄하리라 생각할 듯 했지만 듀쿠 스는 알 수 있었다. 생사의 구름다리를 몇 번이나 함께 걸었던 친우가 나잇살은 먹은 주제에 어린 아이가 칭찬 받 았을 때처럼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저 상태에서 몸까지 비비꼰다면 진정 엽기적이겠군.' 키틀볼은 듀크스가 닭살스러움에 몸을 움츠리는 게 나이를 먹어서 그런 줄로 착각하고 지나간 세월에 쓸려 내려간 젊음과 추억에 물끄러미 수로의 흘러가는 물결로 눈을 돌렸다. "흠흠. 그래‥ 어땠나? 자네의 꼬마천사에게 날개를 건넸겠지?" "후우‥. 몰랐어. 그토록 바라고 있었는지. 그 아이가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었는지. 할애비로서 부끄럽군." 다리의 관절 마디가 시큰하고 어깨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듀쿠스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얼굴빛이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서지 절대로 불안이나, 걱정으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샹들리에의 조명 대신 달빛 아래서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만큼 그는 기분이 좋게 손녀를 맡겨놓았던 친구, 맨덜슨의 저택으로 향했다. 거짓을 조금 보태서 사실을 말하자면 맨덜슨의 저택은 저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통나무집이었다. 그나마 로트스에 기거하는 친구 중에서는 얼마 안 되게 굶어죽을 걱정 않고 생활했다. "맨덜슨! 내가 왔네‥. 듀쿠스가 돌아왔다네." 듀쿠스가 힘차게 문을 두들이며 외치자 안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뭔가 넘어지는 소리와 와장창 깨져 나가는 소리. 삐걱하고 문이 열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저녁 식사 중이었나 보군. 그런데 왜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인가?" "그, 그래. 자네 정말 유령 아닌가? 난 자네가 '풍암의 바다'에 가겠다고 했을 때, 하늘 나라가 그리운 줄 알았다네. 하하하! 그런데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다니! 실러오나의 보살핌이 틀림없네." "후후‥. 나도 믿기지 않네. 그런데 테레미아가 보이지 않는 걸. 설마 무슨 일이 생긴‥." 듀쿠스가 어깨를 잡고 다그치자 맨덜슨은 시선을 피하며 미안한 감정을 띄우며 말했다. "걱정 말게. 착한 아이야. 아무 일 없다네. 다만 자네가 말없이 떠난 후 부탁대로 내가 데려오기는 했지 않나. 헌데 자네를 기다리느라 잘 먹지를 않네." "하아‥ 이 친구야.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면 어떻게 하나. 난 테레미아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에끼. 자네야말로 손녀를 걱정시키지 말게. 지금쯤 아마 자네 집에 쪼그리고 있을 거야. 잠깐만 기다리게." "되었네. 내 집이었던 곳인데 내 발로 못 찾아갈까봐 그러나? 테레미아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작별 인사라도 하 고 싶나? 아! 그리고 이건 손녀를 보살펴준 보답이네." 웃옷을 걸치며 뛰쳐나오려는 맨덜슨을 만류한 듀쿠스는 자신이 진정 부자라고 생각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진정 한 친구들이 있었으니‥. 용병들의 암묵적인 감사 표시 방법대로 문턱을 두 번 두들인 그는 금화가 든 주먹만한 주 머니를 발 밑에 놓아두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등뒤에서 시끌벅적한 비명 소리가 연발했다. "금화에요. 금화!" "저, 정말이었어. 듀쿠스가 정말로 '풍암의 바다'에서 살아온 거라고! 그 날의 동료들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할 꼬‥." 듀쿠스는 약간은 빠른 걸음걸이로 숨가쁘게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가난에 신음하는 골목, 그 중에서도 시궁창에 가 까운 구석에 허름한 집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오두막이 자리하고 있다. 두께는 무술을 수련한다고 떼를 부리는 열 살짜리 꼬마가 사용한 송판보다 얇은 썩은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밀자 부스러기가 투둑하고 떨어졌다. '어디 있을까?' 어릴 적 잠자리를 잡기 위해 발소리를 죽일 때처럼 듀쿠스는 숨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한 달 정도를 떠 나있었을 뿐이었는데 10년을 타지에 있다가 돌아온 것 같이 낯설었다. 저건 식사를 하던 테이블, 다리가 다 떨어져 나가고 가운데 하나만 남아서 밥을 먹을 때는 한 손으로 테이블을 잡아야 했지. 또 저건 담요를 보관할 자리가 없 어서 땅을 파서 만들었던 담요자리. 그러나 실상 중요한 테레미아가 보이지 않자 듀쿠스는 조바심이 났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담요자리로 다가가 담요를 들추었다.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는데도 담요에 먼지가 없었 기 때문이었는데 과연 그가 찾던 소녀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테레미아‥ 내 사랑스러운 천사‥ 할아버지가 왔단다. 네게 달아줄 날개를 가지고 돌아왔어‥. 어서 눈을 떠보 렴‥." 테레미아는 잠결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고 헤∼하고 입을 벌였다.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아봤어. 누가 이토록, 포근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지? "우웅‥." 부스스하게 일어난 테레미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애로운 표정의 노인을 향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행동은 이미 그가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역시, 할아버지였어. 돌아온 거야?" "그래.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구나." 듀쿠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있어준 손녀를 본 것만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라는 듯 할아버 지를 끌어안은 테레미아는 뺨을 부비며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다시 테레미아의 곁으로 와줬잖아." 그대로는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나 성숙해진 모습에 듀쿠스는 안타까웠지만 우선 소녀를 일으켰다. 어린 아이 는 어린 아이다워야 한다. 날개를 달아주면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될 거다. "테레미아‥. 그래. 어서 가자구나." "어디로?" "어디긴‥ 집으로 가야지 않겠니?" 테레미아는 잠시 할아버지가 노망이 든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무슨 소리에요?'라고 반문할지 망설였지만 곧 그 녀는 노안(老眼)이 보름달처럼 맑다는 걸 깨닫고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이사를 가는 걸까?' 할아버지는 사막의 길 안내자로 이름은 높았지만 호신(護身)에 있어서는 장정들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테 레미아가 '또 장정들에게 집 자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으신 모양이구나.'하고 시무룩하게 있을 때, 듀쿠스가 손 가락을 까닥였다. "테레미아. 어째서 시무룩한 거니? 어서 이리 오렴." "아이∼ 시무룩하다니요. 어두워서 잘못 보신 거에요. 전 할아버지가 돌아오셔서 기분이 좋은 걸요. 게다가 집이 기 대대기도 하고‥." 허둥지둥 밝게 지어 보이며 팔에 매달렸지만 듀쿠스가 어린 손녀의 슬픔을 눈치챈 후였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실망할 필요 없을 거란다.' "이 녀석! 나이는 11살이나 되어 가지고 어리광을 부리다니!" "베∼ 11살이니까 어리광이죠."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두 노소(老小)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기보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즐겁게 떠들며 밤 산책을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듀쿠스는 웃어대고 입을 몇 번 놀리는 사이-그의 관점에서-에 손녀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 있을 곳에 도착했고 다리를 멈췄다. 테레미아는 갑자기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자 그의 시선을 따라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듀쿠스가 보고 있는 건물은 저택이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턱없이 높아 오를 수 없는 산과 같았다. 그런 집을 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듀쿠스의 낌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곧 다 리를 그리로 옮기는 할아버지가 노망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하,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테레미아?" 테레미아는 익숙하게 열쇠를 꺼내어 문을 따는 듀쿠스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할아버지는 그동안 도둑질을 수련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테레미아가 불안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듀쿠스는 집 안 벽에 걸려있는 촛대에 불은 붙 이고 뒤를 돌아섰다. "언제까지 밖에 있을 거니? '집'에 들어오지 않고?" "설마‥. 정말로?" 그래봤자 이층 정도의 높이를 가진, 덤으로 삼층에는 조그마한 다락방을 곁들인 웬만큼 여유있게 사는 서민들에게 는 평범한 집이었지만 테레미아는 마치 공주님이 산다는 궁전에 온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하기에 바빴 다. 그리고 이런 곳에 산다는 게 자신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저기 할아버지의 친구 분은?" "허허, 테레미아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는 집이라니까. 우리 집이야. 그리고‥ 이리 와보거라." 그가 테레미아를 이끌고 간 곳은 3층의 자그마한 다락방이었다. "네 방이란다." 사실 2층의 커다란 방을 줄 수도 있었지만 테레미아가 작고 아담한 장소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게 취미라는 걸 아는 듀쿠스의 배려였다. 그러나 손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너털웃음을 지으 며 듀쿠스는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손녀에게 그동안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시간이 유사를 건너고 '사막의 신부'들을 만나고 '역사의 고리'와의 전투를 지나 무너지던 '붉은 뱀의 사원'을 되돌아보았을 때 테레미아의 눈가에서는 맺혔던 눈물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랬군. 잘 되었어‥. 지금은 즐겁게 놀고 있겠구만." "아니라네. 보통 때라면 놀러나갈 시간이지만, 지금은 더 관심을 끄는 존재가 들어와서 말이야‥ 그 녀석에게 신경 쓰느냐고 할애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네." "그게 무슨 말인가?" "허허허‥ 그 녀석 있지 않나. 마지막 남은 꼬마 사제‥ 벌서 실의에 빠져있는 게 일주일이 넘었지 않은가? 세이서 스 용병단은 어디에 좀 다녀올 생각인지 나에게 녀석을 맡겼다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휴‥ 고집쟁이!" 발을 굴러대며 분을 참지 못하는 소녀는 듀쿠스의 사랑스러운 천사, 테레미아였다. 할아버지가 보았다면 눈이 휘둥 그레질 과격한 표정을 만면 가득히 드러내고 그녀는 투덜대고 있었다. 천사같은 소녀에게 이처럼 불쾌감을 초래한 원인은 어제 갑자기 들이닥친 소년 때문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봐야 그녀보다 세 살 이상 차이가 나지 않을 소년 은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짊어진 듯 암울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댔다. 말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 다. 화를 내며 억지로 먹여야 입을 벌릴 정도였다. "어쩔 수 없잖니? 블리세미트는 사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는 걸. 테레미아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슬프겠어?" "알아요. 슬프다는 건‥ 하지만 저렇게 슬픔에만 빠져있지는 않을 거에요.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다 죽고 혼자 살아 남았다고 해도 그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게 진정 죽은 이들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거야?' 아리에는 인생을 꽤나 맛본 노인들이나 해댈 말을 고작 11살 난 계집애가 주절거리자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하늘 이여, 왜 제 주위에는 이토록 애늙은이들 밖에 없는 겁니까? 제발 나이에 맞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아하하. 그, 그래? 그, 그런데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거니?" "죽이에요. 전갈의 살과 타르바칸의 살을 삶은 다음 아주 잘게 썰어서 밀죽에 섞는 거죠. 워낙 먹으려고 하지 않으 니 어쩔 수 없잖아요. 죽으로라도 밀어 넣어야죠. 입을 찢어서라도‥ 흐흐흐." 테레미아는 블리세미트가 침묵의 도가니를 만들고 있을 이층 방의 바닥을 올려다보며 섬뜩한 의지를 불태웠다. 의 미심장한 웃음소리에 마녀인 파마리아조차 움찔했고 아리에는 블리세미트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쿵쿵쿵쿵쿵! 계단을 올라갈 때부터 기선을 제압하는 테레미아. 그러나 문을 힘껏 열어젖힌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 창가에 걸터앉 은 소년의 어깨와 손가락에 앉아있던 새들이 푸드득하고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루기 힘들던 블리세미트가 기분이 상해 얼굴을 찡그리자 반대로 기선을 제압 당한 테레미아였지만 금세 전세(戰勢)(?)를 가다듬 고 쟁반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 너 때문에 힘들게 만든 죽이야." "언제 희생해달라고 말한 적 있나?" 블리세미트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나 때문에'라는 한 마디가 머리 속을 떠돌며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 었다. 그런데 테레미아에게 직접적으로 똑같은 소리를 듣자 가슴속이 터져 들어갔다. "다른 사람의 희생은 지겨워!" 쨍그랑―! 고막을 찌르는 소리와 함께 자기(瓷器)의 파편이 나뒹굴었다.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블리세미트가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정도의 상황은 예상 범위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다음 상황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 바보야!" 퍼억! 그렇다. 테레미아가 듀쿠스에게 숨기고 키워왔던 동네 싸움꾼의 실력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소리. 멀리서 지켜 보던 두 여인의 시선이 블리세미트의 복부에 꽂혀있는 한 소녀의 무지막지한 발꿈치에서 멈췄다. 소년과 소녀의 사 이로 뛰어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테레미아는 귀곡성처럼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널 위해서 희생을 한다는 건 그만큼 네가 약하고 힘이 없다는 뜻이야. 넌 나 같이 연약하고(?) 가련한 (?) 여자애가 희생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녀석이라고! 약해서 동정을 받았으면 얌전히 처먹기나 할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너 같은 계집애가 뭘 알아!?" "뭘 알긴‥? 네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까지 죽은 사람인양 행동하며 어리광을 부려대고 있다는 걸 알지. 게다가 15살이나 먹은, 그것도 사제복을 뒤집어쓴 남자가 할 말이 없으니까 남녀 차별의 논리시비(論理是非) 상 절대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4살이나 어린 여자를 눌러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테레미아‥ 그만 하렴." 아리에는 새파랗게 질려버린 블리세미트를 보다못해 테레미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왜 그래욧!?'하는 눈초리 로 테레미아가 쏘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너무 잔혹해. 블리세미트는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테레미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판단하고 정의를 내려버릴 수는 없단다." "그, 그렇지만!" "그만해. 블리세미트도 곧 실의에서 벗어날 거야. 티격대는 너희 둘을 보니까 나와 시즈가 다투던 때가 생각나." 아리에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일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현재의 블리세미트는 일년 전의 시즈를 닮아있었다. 그 때 잠자코 지켜보던 파마리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상상할 수 없는 마법력을 가진 시즈는 무엇이나 연구의 대상이었다. 솔직히 마법과는 관련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너와 시즈는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야? 너 정도의 여자에게 그 얼음장같은 남자가 무엇 때문에 마음 을 열었지?" "너 정도의? 무슨 뜻이죠? 파마리나." 으쓱하고 마녀는 대답을 회피했다. 허리춤을 뒤적이며 단검을 찾던 아리에는 불타는 듯한 테레미아의 눈동자에 등 뒤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 때, 시즈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었어. 밥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지. 그렇다고 블리세미트처럼 막무가내로 음식을 내던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정중하기 그지없었지. 하지만 그가 예의를 지켰다고 해서 다가가기가 쉬웠던 것은 아니야. 더 힘들다고 해야 옳았지. 블리세미트같이 '먹기 싫어!'라고 소리치며 음식을 내동댕이치면 빌 미를 삼아서 얘기를 걸 수도 있었지만‥ "저리 치워 주시겠습니까?" 이게 바로 그의 말투였거든.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당시에는 훨씬 싸늘해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반경 안 에만 들어가도 온몸이 으스스하게 되어버린 달까? 분명한 것은 얘기를 걸 시비를 주지 않아서 잠자코 지켜볼 수밖 에 없었어. 그리고 내가 시즈의 곁에 다가갈 수 있었을 때는 이미 탈진으로 목숨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가 된 후였지. 그는 처 음 기절하고 3일이 지나서 정신을 차렸는데 언제나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켰어. 작은 반지나 돌멩이 같은 물체가 주 위를 항상 떠다녔지. 나는 그가 바람으로 장난을 치며 기분을 풀려고 노력하는 줄 알았지. 시즈는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금세 알아야 했지.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보를 레스가 버럭하고 화를 냈거든. 그는 이미 혼자서 용병일을 하고 있었어. 먹고살아야 하잖아. 어쨌든 여관에 들어온 보를레스는 쌩쌩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시즈를 보고 소리쳤지. "너! 도대체 뭘 한 거야!? 왜 저렇게 되도록 놔뒀어! 기절을 시켜서라도 말렸어야지." "무슨 말이죠?" 조금 민망했어. 알고 보니 시즈는 자기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던 거야. 솔직히 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게 마법을 쓰 면 당연한 건 줄 알았지. 파마리나! 웃지 마세요. 시즈는 처음 보았을 때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였어. 까마귀꽁지깃 털처럼 아주 까매서 맑은 밤하늘로 장식한 듯 했었다고. 그런데 마법을 쓰니까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눈동 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져서 마법사는 다 그런 줄 알았지. 나중에 들어보니 그게 바로 마나를 과다로 사용하여 나 타나는 부작용으로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야. "그래서요? 내가 방안에 들어가 봤자 소용없어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고요."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사과하고 싶지 않았어. 나 역시 너무나 변해버린 현실에 힘이 들었으니까. 보를레스 가 시즈에게 다가갔지만 거부는 더 강렬해서 살의까지 풍겼어. "시즈‥ 언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일 거냐? 하늘에서 널 내려다보고 있을 레소니와 헤트라임크님께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그 이름을 한 번만 더 꺼낸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그만 나가주십시오." 결국 시즈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실명(失明)했고 고통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어. 죄책감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거부해버린 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테레미아는 시즈가 블리세미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는 심적 상처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 다. 그녀는 볼리세미트에게 날카롭운 시선을 쏘아보내며 '잘 들어. 너만 소중한 이을 유일한 자가 아니야.'라고 압박 을 넣는 듯했다. "보를레스의 말대로라면 시즈의 아버지는 대마법사였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역사의 고리'에게 어떤 금제를 받고 있었던 듯해. 그는 시즈가 '역사의 고리'에게 쫓기지 않도록 피할 수 있던 죽음을 받아드린 거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너무나도 약했다. 뿌려지는 선혈(鮮血)과 인체의 파견을 보며 당시의 아리에는 절실하게 느꼈다. 그 아래서 하늘이 무너져 버리는 표정의 청년, 머리카락도 얼굴빛도 백지장처럼 변한 그는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지는 절규‥. 그 때였는지 모른다. 부모의 죽음에도 담담하던 아리에의 마음 속에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자신의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였지. 실수였다고는 하지만 시즈의 마법에 그녀는 손가락의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어." 시간은 몇 일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즈가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눈물을 흘릴 때마다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내 자신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어. 시즈도 점차 울부짖는 횟수가 줄어들었지. 익숙해진 거 야. 그는 자신의 아픔에‥ 나는 그의 슬픔에‥. "시즈? 입을 좀 벌려봐. 아침에는 잘 먹더니‥." 더 이상 고통에 겨운 비명으로 인해 여관 주인 아저씨의 질책을 받지 않았지만 시즈의 머리카락과 눈의 빛깔은 두 번 다시 검은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어. 의사는 실명된 눈은 영양을 잘 섭취하면 회복되리라고 말했지만 그 것도 쉽 지 않았어. 시즈는 엘시크에서 도망칠 때 왼팔에 많은 화살이 박혀서 두 달 동안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는 작은 행동 도 힘들었으니까. 한 마디로 그는 내가 곁에 없다면 식사도 할 수 없었어. "아아‥ 몸과 정신이 상처받은 남자를 보살피는 여인‥ 앞이 보이는 사랑이야기야‥." "파마리나!" "아리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네요." "자꾸 그러면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흥!" 파마리나와 테레미아의 이중공세(二中攻勢)에 아리에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삐쭉거렸다. 킥킥거리 며 테레미아가 아리에를 흔들었다. "이제 안 놀릴 게요. 아리에 어서 이야기를 계속해요. 블리세미트가 보고 있다고요‥." 마지막 한 마디는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기 때문에 아리에 이외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귀를 토끼가 쫑긋거리듯 살짝 떨렸다. 토라진 듯 테레미아를 피하는 척 하면서 블리세미트를 곁눈질했다. 분명히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는지 아리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흔들어대는 테레미아에게 못 이기는 척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는 내가 먹여주는 것도 얼마지 않아 익숙해졌는지 아무런 반항없이 받아먹기 시작했지. 문제는 눈의 시력이 돌아 왔는데도 혼자서 먹지를 않는 거야. 시즈는 완전히 어린 아이 같았어. 하지만 가끔씩 먼 곳을 보며 슬픈 미소를 짓 는 모습은 날개를 잃고 소리없이 오열하는 천사를 보는 듯 했어. 어느 게 진짜 시즈 세이서스인지 알 수가 없어 고 심하는 사이에‥ 그래, 파마리나의 말대로 나는 수프를 흘릴까 조심스레 떠 먹이고 보듬어 안아야 잠이 드는 커다 란 아이로 마음이 가득 차버렸어. "시즈‥ 오늘은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그의 일과는 자고 먹고 창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지. 하루는 시즈에게 바람을 쬐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거부 하는 걸 달래서 겨우 데리고 나갔어. "시즈? 시즈‥. 그냥 산책을 하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불안해?"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어. 우리가 머물던 도시 아무루는 용병국 서부의 중심 도시였고 당연히 용병은 까 마득히 많았지. 지나다니는 사람 중 절반이 용병일 지경이었어. 힘이 있는 자들 중에는 난봉꾼도 많은 법, 그 날은 운이 안 좋았는지 그들의 집게발에 걸려들고 만 거지. 사람도 없이 한적한 숲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두 명의 남자가 앞을 막고 훑어보더군. "호오‥ 아가씨? 이쁜 얼굴에 꼬마랑 붙어다니니 얼마나 슬프겠어. 우리가 시간 내서 놀아줄 테니까 이리 오라고. 척 보니 이제 여자가 될 시기인데 오늘 밤 부드럽게 해줄게." 정말이지 역겨운 놈들이었어. 지금 같았으면 당장 온몸을 단검 꽂이로 써버렸겠지만 당시에는 힘이 없었지. "난 당신들한테 관심 없어요. 그러니 길을 가게 비켜주겠어요?" "핫핫핫! 밤까지 기다리기 힘든 모양인데!?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여자로 만들어주지‥."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잘 생긴 미남이라고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그들은 더욱이 생태학적으로 인간이라기보다 오크 나 오거에 가까운 외모였어. 그런 놈들한테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안길 수야 없는 노릇이지. 절대로 말야. "그럼 시즈한테는 괜찮고? 어머머! 아리에 양, 짐∼승∼" "파, 파마리나. 웃는 게 왜 그래요? 그, 그리고 애들 있는데서 이상한 얘기는 그만둬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 네가 보듬어 안지 않으면 잠들지 않는다며? 만약 그에게 약간의 흑심이라도 있었다면 벌∼써‥ 흐흐흐."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온 쇠처럼 달아오른 채 아리에는 겨우 목소리를 내여 소리쳤지만 파마리나는 전혀 움츠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테레미아는 음흉한 미소-11세의 음흉한 미소라니‥ 끔찍했다-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다∼ 아니까 걱정 마. 블리세미트도 다 알고 있을 거야. 그나저나 아리에∼ 열 아홉 살이나 먹어서 귀엽 긴∼" 안타깝게도 추측은 빗나갔다. 소년은 정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사막에서 남자들과 자랐으니 그런 걸 알려줄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리에는 왠지 다행스러웠다. 블 리세미트마저 테레미아나 파마리나처럼 반응해버린다면 정말로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헛기침을 해가 며 당황함을 약간이나마 무마시킨 그녀는 입맛을 다셔대는 두 여자에게 말을 이어 들려줘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녀석들은 날 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귓가에 발정난 개가 숨을 몰아쉬는 듯한 숨소리가 들리는데 정말 죽고 만 싶었지. 시즈는 이미 적의를 느끼고 있었던 데다 나까지 소리를 지르자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그의 이미지 와는 다른 광폭하고 짐승같은 기세로 말이야. 허약하게 보였던 시즈가 빠르고 강하게 달려들자 그들은 당황한 눈치 였어. 하지만 역시 용병이었는지 반대로 순식간에 시즈를 제압해버렸지. 우두두둑! "그, 그만 둬!" "으아아아아아악!" 그렇지 않아도 고정되어 있던 왼팔이 가차없이 부러져 흐느적거렸고 웬만한 아픔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시즈는 숲 조차 소름끼칠 비명을 질렀어. "뭐, 뭐 하는 거야!? 그만 둬! 그를 그냥 놔두라고옷!" "흐흐‥ 가만히 있어. 리키! 그 녀석을 완전히 보내버리라고. 이 여자가 다른 생각할 수 없게!" "좋았어." 시즈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랬듯이 나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 난 발버둥쳤어. 그런 녀석들한테 당하는 것이나, 시즈가 다친다는 것이나 둘 다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만 용납할 수 없으면 뭐해. 내게는 힘이 없었는 걸. "가만히 있지 못해!?" 짜악! 팔을 잡고 있던 남자는 심하게 반항하는 내게 뺨을 때렸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어오르는 게 어스름하게 느 껴졌지만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어. 멈추는 순간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이 계집이!" 짜악! 고개가 돌아갔지만 나는 독설을 퍼부었지. "퉤! 너 같은 녀석들한테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어." 짜악! 역시 남자의 힘은 강하더군. 겨우 세 대 맞았는데 눈물이 나고 입에서는 피맛이 났지. 하지만 그게 바로 그들 의 실수였던 거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던 시즈의 투명한 망막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한 방울의 피가 맺히자 새 파란 한광(寒光)을 들어냈어. 뚫어지게 핏방울을 주시하던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흐느적거리는 팔과 자신을 억 누르고 있는 리키라는 사내를 바라보았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현재의 상황을 가름해보는 듯한 무미하고도 냉정한 시선에 나는 곧 무언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으로 등은 땀으로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빨갛게 부어있는 내 뺨과 턱 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다가 말했지.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엥!? 지금 이 꼬맹이가 뭐라고 주절대는 거야?" "하하핫! 못들었나, 리키? '비켜주시겠습니까?'라는데!? 으하하!" 시즈는 비웃는 사내들을 무시하고 하던 말을 독백처럼 담담하게 이었어. "당신들은 용병이군요. 싸움에서의 부상은 당연한 일이겠군요. 당신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결과이니 원망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어!? 자, 잠깐! 지금 튀어 오른 저건?" "눈이 나쁘시군요. 당신의 팔입니다." 사내는 자신이 팔이 잘려나간 후에도 믿지 못하고 한동안 멍청한 얼굴이었지. 하지만‥. "역시 하나로는 감각이 일깨워지지 않는 겁니까? 그렇다면‥." "으아아아아아아악!" 다른 팔도 잘려나가니 확실하게 비명을 지르더군. 나를 잡고 있는 남자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느껴졌어. 자신들 이 깔봤던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는데 동료의 팔이 난도질을 당해버린 것이다. 외팔 이도 부러워진 사내를 발로 걷어차고 일어서는 시즈를 향해 그는 말했어. "마, 마법사? 그렇지만 마법사라면 주문을‥." "뭐‥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죠. 범법 행위에 대한 형벌이 제법 가혹하다는 소리를 듣는 용병국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그대들처럼 말입니다. 아리에를 놓아주세요. 그렇다면 놓아드리지요." 쥐와 고양이 역할은 이제 바뀌었지. 역할의 변화에 용병은 당황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분별력을 잃 을 정도로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는지 동료를 짊어지고 도망쳤어. "‥‥." "괜찮습니까, 아리에?" 그리고 시즈는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작게 말했어. "미안합니다. 나의 생명의 무게를 안다고 하면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다니‥ 아리에 당신에게 안 좋은 모습만 계 속 보였군요." "시, 시즈?" 끄덕‥. 그래. 이때부터였지. 그가 입을 열기보다는 작은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사작한 것은. "나 역시 당시에는 시즈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막강한 마법사인지는 몰랐기 때문에 얼어있었 어. 하지만 실수였어. 때문에 그 후로 시즈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는 일을 반복해 야 했지. 조금 힘들었어. 흐음‥ 말을 하다보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말해버린 거지? 나도 참‥." "참 귀엽지. 하하핫‥." 파마리나는 아리에를 놀리는 재미에 중독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이제는 당하지 않겠다는 듯 아리에는 짐직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쨌든 난 그가 이후로 약한 모습을 보인 일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누구나 힘든 일은 있고 소중한 이는 떠 나게 되겠지. 그게 바로 사람들이 사는 일이니까. 하지만 소중한 이를 잃는다고 하여 자기 자신까지 잃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블리세미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리에는 파마리나와 테레미아를 이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괜찮을 거야." "암‥ 괜찮겠지. 아리에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파마리나 이제 그만 좀 해요." "그나저나 테레미아, 아리에를 사랑에 빠지게 한 남자는 어디 갔는지 아니?" "보를레스랑 함께 의사한테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아리에는 그 날의 이야기를 후회했다. 이 두 여인은 평생토록 자신을 놀려먹을 사람들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또 어쩌자고 마법을 사용한 거요? 마법으로 하여금 생명력을 유동시켜 당신의 왼팔을 지탱시키고 있다는 걸! 이것 보시오.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 유동시켜야 할 생명력이 멈춰버린단 말이오. 도대체 얼마나 마법을 써댔는지 모르지 만 벌써 근육의 조합이 뒤틀리고 있소." "미안합니다. 하지만 쓰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습니다." 사내는 아리에를 제외하고 시즈가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유일한 이였다. 이유는? 원래 인간은 약점이 잡히면 약해지 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는 사내대로 자기이 시즈에게 약하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골치를 썩어 들어가게 하는 녀석이지.' 그의 기억이 일 년 전으로 역류에 올라갔다. "이보시오! 당신이 의사(醫師) 토슬레요?" "그렇네만‥?" 서부 용병들의 집합지에서 그는 꽤나 이름있는 의사였다. 일거리가 상처나는 사람들이 가득하니 벌이도 제법, 아니 무진장 짭짤했다. 서른 세 살의 노총각이었지만 결혼할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일이 너무 바쁘 다보니 그 쪽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뿐. 하루는 신장이 2미터나 되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 다. 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상처‥ 두 개? 세 개? 밖에는 보이지 않는, 한 마디로 돈줄 안 될 고객을 향해 눈을 부 라렸다. 그러나‥ "나 따라오시오!" "하하하‥ 이보시게.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여기를 뜨면 어떻게 하겠나? 다 자기 본분에 충실해야 하 는 거라고." "그 본분이래봤자 사람 치료하는 일이잖소. 날 따라가는 것은 출장치료니 그야말로 의사의 본분이오. 알았으면 어서 따라오시오." "자, 잠깐! 치료용 가방은 가져가야 하지 않소!" 청년은 난폭했으며 작은 눈매는 더 이상 움츠러들 수 없을 만큼 작게 토슬레를 쏘아보고 있었다. 알았다고 말한 일 도 없었지만 목덜미를 잡고 무작정 들쳐 없었다. 납치된(?) 의사 토슬레가 끌려간 곳은 음식 맛이 유명한 반어터의 용병 여관이었다. 이층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토슬레는 만나본 환자 중에서 가장 말 안 듣 는 환자를 대면하게 된다. 시즈이라는 이름은 평범한 케이스인 그는 첫 인상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헉! 이건‥!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이 지경이요!?" 토슬레는 의사의 본능대로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눈앞의 청년을 살리느니 그나마 움직이는 좀비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게 쉬우리라고. 화살이 가시 돋은 듯 무수히 박혀있는 왼팔과 척추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검상. 하지만 척추가 빗나갔다 뿐이지 오른쪽 어깨에서 골반에 이르기까지 양단을 내놓은 상처가 가벼울 리가 없었다. 이건 살릴 수 없다는 걸 의사인 토슬레가 모를 리 없었다. 잔혹한 사람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와 18세 정도의 여인에게 이를 갈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를 치료하는 것만큼 의사에게 끔찍한 주문은 없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입에 '의사의 본분'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내였다. 환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시체라고 본다 면 의사라는 이름을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가망이 희박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소. 하지만 진정 당신이 실력이 있는 의사고, 이게 있다면 가능할거요." "이게 뭐요?" "리오스라는 최고급 치료 물약과 생명수 에릭사. 그럼 부탁하겠소." "뭐요? 에릭사?" 에릭사? 그게 어디 애 이름인가? 에릭사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목숨을 드러낸 일은 단 한번. 190년 전 기사, 롤지스 탄타뉴가 약혼녀인 아스틴의 왕녀, 마시넬를 위해 드래곤과 싸워 가져왔으나 자신은 힘겨운 전투의 휴우증으로 목 숨을 잃고 말았다는 전설을 낳은 성약(聖藥)이 아니던가. "이 사내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오? 그러나 이 물약이 진정 무한한 생명력의 상징 에릭사라면 살리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오. 다만 왼쪽 팔은 내 의술로는 완전히 고칠 수가 없소. 완전히 벌집이 되어 버렸소. 아마 신의 (神醫) 펠트 산의 엘프 장로가 직접 온다고 해도 무리일거요. 에릭사가 성약이라고는 하나 무한한 생명력을 보충해 주는 것이지 구멍이 송송 뚫린 근육과 뼈를 이어주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소. 물약으로 과연 원상복구 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소. 그렇게 알고 나가주시오. 치료를 시작할 테니." 보를레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가치가 있다. 시즈는. 마지막 세이서스가의 유산‥ 성약(聖藥) 에릭사. 세이서스가의 저택에서 도망칠 때 헤트라임크가 부탁했다며 최후의 하인이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건넨 물건. 에릭사가 있으니 시간에 쫓기지는 않아서 좋았다. 천국으로 초고속 전송(傳送)되려는 영혼도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 면 붙들어놓을 수 있었으니까. 가장 시급한 일은 어깨부터 양단된 상처보다 영원히 거추장스러운 부속품으로 변해버릴지 모를 왼팔이었다. 우선 에릭사를 한 모금 정도 먹이자 청년의 몸은 연분홍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팔에 있는 화살들을‥. 흠, 엘시크 궁정 기사단의 화살이군. 기사도는 빌어먹을 만큼도 없는 화살." 기사라는 말은 처바르고 있으니 독은 바르지 않았지만 중간 부분에 구리를 살짝 도금에 두었다. 혹자는 겉멋 든 엘 시크 기사들의 폼잡기로 착각하지만 구리는 인체 속에서 독이다. 조금한 구리가 벗겨져 인체에 남거나 하면 그 부 분을 좀 먹기 시작하기 때문에 당장 뽑아내는 게 그나마 살길이 있는 편이다. 단도를 든 토슬레는 재빠르게 화살의 양끝을 다르고 뽑아냈다. 청년은 이미 정신을 잃어 신경 선을 핥아대는 고통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살이 가지런히 쌓이자 넓은 그릇 위에 시즈의 팔을 올려놓고 에릭사를 붓기 시작했다. 동방 의학에서는 잠재된 생명력을 '기(氣)'라고 표현하는데 기(氣)는 성질이 강함이 약함을 가져가는 경우, 약함이 강함에게 나눠 받는다는 모순적인 성질로 알려졌다. 마나mana와는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는 세일피어론아드의 학자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동 방의 학자들이 내세우는 기(氣)의 이론은 현실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 끔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법. "에릭사는 그릇이 약하다. 그러므로 좀더 강한 그릇인 인간의 몸으로 흡수될 거야." 그게 아니라면 다시 받아서 써야 했으므로 아래에 쟁반을 받혔으나 분홍 빛깔이 새어나오면 나올까 에릭사는 한 방 울도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쾌재를 부르며 물약을 들이부은 토슬레는 스펀지같은 시즈의 팔을 주물거렸다. 조금이 라도 물약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선홍색 피가 주르륵하고 흘러나와 보는 사람의 얼굴에게 심하게는 구토증 상을 가져올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아‥ 무슨 굽기 전의 고기를 양념에 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후우‥ 역시 강기(强氣)에 속하는 에릭사가 약기(弱氣)에 속하는 리오스를 흡수했군. 어떻게 보면 간편하기도 하군. 상처를 봉하는 것도 아니고. 고름 을 짜낼 필요도 없으니‥." 그러나 이보다 더 긴장되는 치료가 있었던가. 점점 주무르는 사이 팔이 아물어 가는 걸 보며 한숨을 놓은 토플레는 등의 검상(劍傷)을 벌리고 남은 에릭사를 콸콸 부었다. 상해버린 내장에까지 에릭사가 흡수되어야 했으니까. 입으로 마시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곳으로 흡수되는 양이 많다. 치료할 때는 치료할 부위의 회복력을 최상으 로 만들어두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리오스를 붓자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를 보며 긴장이 풀린 토플레는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힘들게 하는 군." "자넨 정말이지 힘들게 하는 사람이야." 일 년 전에는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든 토플레는 코에 주름을 잡아가며 중얼거렸다. 이러 니 담배를 놓을 수가 없다니까‥. 무겁게 느껴지는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간 토플레는 담배 맛이 씁쓸한 입맛을 달 래주기를 바라며 힘껏 빨았다. 담담하게 듣고 있던 시즈는 기계 팔을 점검하는 로봇처럼 왼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 며 상태를 시험해보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입니까?" "후우‥ 앞으로 10년, 빠르면 5년이네. 전에 말했듯이 자네의 왼팔이 에릭사의 생명의 흐름이 유통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는 거지. 한 시라도 유통이 끊기면 계속 데미지는 축적될 걸세. 만약 이번처럼 마법을 계속 쓰면‥ 당 장에라도 멈춰버릴지 몰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단료는‥?" "이 타로운만 내게. 사실 진단으로 이 타로운은 턱없이 비싸지만‥ 자네는 수 천만 타로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싼 거지." 시즈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금화를 두 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잽싸게 낚아챈 토플레는 문을 밀치는 그를 씨익하고 웃으며 배웅했다. "잘 가게. 다른 건 몰라도 자네는 계산이 정확해서 좋아." 철컥.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토플레는 아무래도 돈을 세어볼 작정인 듯 했다. 케이소 용병단의 사람들 과 같은 취미를 가졌다고 해서 그리 꺼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리를 피해주고 싶어지는 게 시즈만의 심리 일까, 사람의 심리일까? 기다리고 있던 보를레스가 다가오면 물었다. "어때? 괜찮데!?" "예. 그래서 제가 이 정도 가지고는 별 영향도 가지 않는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아하하하하, 그렇군. 다행이야." 자주 볼 수 없던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시즈의 모습이 어쩐지 불안해 보였지만 보를레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토플레 씨도 대단하군. 골치 아프다, 골치 아프다 하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면서 아무루에서 여기까지 자네의 상태를 보러 와주지를 않나?"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토플레는 시즈가 아니라 타로운의 금화를 보기 위해서라는 게 천리길을 마다않는다 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금화를 벌 수 있는 용병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진단료로 선듯 내놓을 정도의 용병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긴 그는 의사로서의 본분이라기보다는 돈에 대한 욕구가 더 깊은 사람이지. 그나저나 진단료로 몇 타로운 씩 떼 어먹히다니 그렇게 떼어먹힐 수 있는 우리도 참 대단해." '그렇게 되기까지 그러고 보면 일 년 동안은 참 바쁘게 살았군.' 서부 용병의 집합지라는 아무루에서 리스트를 차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대단해. 언제 그렇게 실력이 향상된 거야?" 보를레스는 주위에 널려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가 동굴 서쪽을 처리하는 동안 나머지 삼면(三 面)을 시즈 혼자서 모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뭇잎으로 예도의 피를 닦으며 시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은 그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었다. "에릭사의 힘인가?" 아마도. 대답하지 않고 머리와 목만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시즈는 긍정을 나타냈다. 보약을 섭취하면 몸이 좋아진다 는 것은 당연했다. 시즈는 죽을 사람도 살린다는 성약으로 포도주로 고기 절이듯 몸을 절여댄 사람인데 그 이상의 효과는 당연했다. 전에는 보를레스를 위협할 수 있는 속도- 그것도 예전의 보를레스와 당시의 보를레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 마디로 그 때는 약한 보를레스 -로 공격만 해도 손바닥의 거죽이 온통 벗겨지고 숨이 가빠했으나 용병 일을 시작한 후에는 오른팔만으로 보를레스의 양팔에 버금가는 힘을 보이고 있었다. 근육도 그리 없는 호리호리한 팔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보를레스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부분은 힘이 아니었다. 힘이 특출한 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시즈가 양팔을 모 두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 힘에 놀랄 수도 있었겠지만 왼팔로 강한 힘을 주는 것은 토플레가 눈을 부릅뜰 금기사 항. 그렇다면 어디일까? 하나의 오작동 없이 돌아가는 두 다리, 그리고 1m 밖의 책표지도 읽지 못하던 두 눈. "한 마리 남았습니다." 스륵. 전광석화라는 느낌이 바로 그럴까. 좋아진 시력으로 수풀에 숨어있는 고블린를 포착하자마자 모습이 모래성 무너지듯 사라지는 듯한 현상은 아마도 잔상을 일으킬 정도에 조금 못미치는 속도를 뜻하는 게 분명했다. 보를레스 이 동체시력으로도 정신을 집중해야 잡아낼 수 있는 빠르기로 시즈는 이미 고블린의 앞에 육박해 있었다. "키엑!?" 예전의 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은 여전했다. 목표에게 다다르자 빙그르르 돌아 뒤로 돌아간 그의 자연스러움에 고 블린은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시즈는 오크의 등을 향해 주저없이 의뢰의 성공을 알리는 예도를 내뻗었다. "커억! 쿠륵! 쿠르르륵!" 고블린가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전율이 인다고 할까. 시즈는 '보기보다 빠르다'라는 말 그 자체였다. 보 통 검사들에게 검의 빠르기는 물론 중요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피해 후면이나 측면을 잡아내는 것이야말로 승패를 좌우하는 최고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측면이나 후면을 잡아내려면 상대가 등만 돌리면 되는 속도보다 빨리 긴 동선 을 따라 움직여야 했으므로 같은 수준의 검사들은 대부분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해검술은 철저한 정면 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적의 측면과 후면을 잡을 수 있는 이가. 동방도예(東方銳 刀)와 함께 전해진다는 움직임, '보법'이라고 보를레스는 추측했다. "하아‥ 생각보다 시간이 적게 걸렸어. 돌아가면 시원하게 샤워나 하자고. 시즈!? 왜 그래?" 백은발의 청년은 방금 전 죽인 고블린에게서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는지 시체를 미심쩍게 내려다보았다. 보를레스 가 다가가려 하자 손을 들어 다가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린 시즈.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의 문이 풀렸는지 눈을 번쩍 떴다. 투명한 눈동자가 훤히 보일 정도로 눈매가 커진 게 분명 놀란 모습이었다. "보를레스, 도망칩시다." 운이 나쁘다면 아주! 무지! 엄청나게 나쁜 날이었다. 시즈는 설마하니 바람이 일러주는 경고가 자연의 혼돈으로 인 한 오차이기를 바랬으나 고블린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갈색의 빛깔은 꿈이 아니라는 듯 시즈의 몸을 긴장으 로 꼬집었다. "무슨 일이야? 왜 도망쳐야 하는 건데?" 그래도 시즈가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보를레스는 질문을 하면서도 발은 열심히 시즈의 뒤를 따르 고 있었다. 그가 과연 이토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니 방금 전의 갈색 빛깔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가 현재 전 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고 덕분에 자신은 따라가기 힘들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시즈를 이토록 다급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물음은 잠시 후에 풀렸다. "쿠아아아아아!" "뭐, 뭐야!?" 산 전체가 울리는 포효. 보를레스는 순간 눈앞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귀에 균형을 조절하는 기관이 있어서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었다. 단순하게 대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단순한 내용이 얼마나 두려움을 끼치는 일인지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히모스입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요." 그러나 사람의 심리는 하지 말라면 더욱 욕망에 자극을 받는다.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를 욕망에 뒤를 돌아본 보를 레스. 인간에게는 또 다른 심리가 있는데‥ '충고를 무시했다가 후회만 한다.' "쿠아아아아아!" 보통 베히모스가 일어나면 산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조금 과장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후일 살아 돌아온 보를레스 역시 '베히모스가 어땠소?'라는 질문에 '산이 움직이는 듯 했어.'라고 대답했다는 걸 알아두자. 산만하지 않은 덩치 라고는 해도 한 사람 정도는 가볍게 삼켜버리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을 크기였다. 돌로 만든 정교한 모형이라고 착 각할 듯한 표범은 거대한 몸체를 날 듯이 달려오면서도 겉보기로 느껴지는 거친 질감과는 다리게 쿵쿵거리는 소리 도 없었다. 드래곤에게 대항하기 위한 성수, '천둥의 유니콘', '불꽃의 피닉스', 그리고 '수호의 베헤모스'만으로도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하건데 저 발에 살∼포시 밞히며 보를레스는 그 자리 에서 육포가 되어버리리라. 인간의 멍청한 습관적인 심리에 따라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죽을 지도 모를 상황인지 분별 도 못하는지 농담을 해대기 시작했다. "시즈, 시즈, 자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군. 뒤를 한 번 쳐다보라고! 단숨에 속도가 배는 빨라질 거야. 머리 속에 하얗게 비어져 버리는 게 문제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으음‥ 그 때는 정말 죽을 뻔했지. 너 역시 기억나지? 베헤모스한테 쫓길 때 말야." "아아 그 때‥ 고생했습니다. 묵묵히 다리를 놀려도 살아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옆의 누가 소리를 빽빽 지 르면서 베헤모스를 약올려대서‥." 시즈는 말끝을 흐렸다. 그 날의 끔찍한 광경이 다시 머리 속에 가득 차는 듯 했다. 호탕하게, 그러나 약간의 찔리는 구석이 있지 가식적으로 웃어대며 보를레스는 시즈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핫‥. 난 그래도 재주껏 베헤모스와 대화를 해보려고 그런 거라고." "과연 누가 그렇게 동의할지 의심스럽군요. 아마도 당시에 열받아서 절규하듯 포효하던 베헤모스는 절대로 동의하 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피브드닌에게 변설(辨說)에 대해 좀 배워 두지 그러십니까?" "관두겠어. 차라리 베헤모스한테 오해를 받아서 밟혀죽고 말지. 그런데 토루반 일행은 어디 간 거지? 사론도 안 보 이는데?" "글쎄요‥. 그나저나 저는 편지가 왔나 좀 보고 오겠습니다. 유적에 가기 전에 편지를 보내두었거든요." 대륙에는 여러 길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집배원들의 길드는 대단히 광범하고 친밀했다. 발로 여기저기 뛰어다 니는 사람인 만큼 발이 넓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주민들은 편지를 주고 받는데 아주 편했 다. 편지나 연락을 받을 주소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고 해도 길드에 보고만 해놓으면 설사 직장 출장을 갔더라도 현지에서 받아볼 수 있었다. "그 곳이냐?" 네 녀석이 편지를 보낼 곳이라면 한 곳 밖에는 없지. 보를레스의 물음에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 히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보를레스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기운차게 말했다. "후우‥ 저 녀석 폴로즈의 아이들은 도대체 언제 잊을 거지? 이제 토루반이나 찾으러 가볼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노을이 지고 있군. 피브드닌, 그만 일어서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크윽!"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괜찮아. 괜찮아. 사론 자네는 우리를 구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때는 하늘 한켠이 어둑해지고 있는 저녁, 실로나레이 강변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토루반은 기운이 빠져 초췌한 얼 굴로 입을 열었다. 피브드닌은 약간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분을 삭히는 게 역력히 분명했다. 그 옆에서 사론이 연 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토루반! 그러나 일 만 타로운은 저희의 이번 유적조사 원조금이 아닙니까. 아무런 성과도 없는데 뭐라고 학회에 변 명을 할 겁니까?" "그 대신 우리가 살아 돌아왔지 않은가. 게다가 일 년 전 엘시크의 세이서스 후작이 처형당할 때 언급했던 '역사의 고리'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알았고‥. 자네가 이렇게 투덜거릴 수 있게 살아남았으니 만족하게. 강물을 보고 있자니 별 생각이 다 떠오르는 군. '평화로운 때가 되면 추억이 떠오른다'더니 위험한 사건을 겪어서인지 옛 생각이 떠오르 네. 그리고 협회에서의 발표 내용은 걱정하지 말게." 무슨 대책이라도 있는 것일까? 피브드닌은 잔머리 잘 돌아가는 드워프의 현자가 자신만만한 만큼 좋은 해결책을 가 지고 있기를 바랬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토루반은 씨익하고 웃었다. "블리세미트의 그 목걸이가 있지 않나! 이름이‥" "이실리스의 펜던트." "그래. 그거야. 이실리스의 펜던트는 사막의 신부들의 유물이자, 붉은 뱀의 사원의 원장을 뜻하는 상징물이 아닌가! 그걸 연구하면 변명할 정도의 성과는 나오지 않겠나?" "그, 그렇군요!" "그렇지? 아하하하하하‥ 하아‥." "하아‥." "하아‥." 그렇게 학자들의 밤은 찾아오고 있었다. 가난한 밤이‥. 32 악장 이상은 작은 목표를 이루어갈 때 숨겨졌던 얼굴을 조금씩 드러낸다. '낙엽이 떨어질 때 왜 우리는 들뜨게 되는가. 슬플 수도, 그리울 수도, 수학으로도 풀 수 없는 난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의 방황에‥.' 어제 방탕하게 술을 마시던 청년도 오늘이 되면 시인으로 만드는 가을은 대륙 중부에서 낙엽을 날려대고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는 신비의 계절이라지만 시즈는 가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의 공황에 빠져버 리면 정말 허무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떨쳐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아직도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하려면 반나절은 더 있어야 합니다. 가는 길에 잠시 휴식을 취할 여관에 말을 묶게 되면 좀 더 걸리겠지요." 시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절대로 마차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존재를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바람. 서늘한 바람은 시즈를 또 다른 감정으로 들뜨게 했다. 슬픔에 짓든 기억보다 그냥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형체도 갖추지 않은 친구들이었지만 자신에게 하늘을 나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조용히 눈을 감는 시즈를 보며 사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시즈가 혼자 마차를 모는 자신 때문에 마부석에 계속 있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리 들어가 라고 추천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아리에는 몸 구석구석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마차 안의 긴장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잠이 들어있었다. 쌕쌕거 리며 자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운 보를레스였다. 현(現) 사태의 장본인들은 절대로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고 -안하 고-서로를 쏘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 하루는 찢어 죽일 듯한 눈빛으로 보낸 이들이었다. 드디어 피브드닌이 말문을 열었다. "토플레, 네 녀석이 여기에 있는 거지?" "훗,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속 좁은 피브드닌. 요즘 제법 이름을 날리는 모양이던데, 그렇다 고 내게 '녀석'이라는 상스러운 호칭을 쓰다니 아스틴네글로드도 한물 간 모양이군." "토루반. 고개 끄덕이지 마세요. 당신도 아스틴네글로드가 아닙니까? 토플레, 이 돈벌레야. 넌 카로안 용병국에서 기 생하고 있었지 않느냐! 난 네 녀석에게 기생 당하고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공포에 질린다는 표정으로 피브드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옆에 앉아있던 블리세미트조차 함께 떨릴 정도로 격렬한 경련(?)이었다. 토플레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불길한 미소을 짓는 입술에서는 비비꼬인 표현들이 폭 주하기 시작했다. "하핫! 피브드닌‥ 나도 눈이 있다네. 적어도 나올 게 약간이라도 있어야 기생을 하는 법이지. 내 토플레 피루스의 여섯 자를 걸고 확신하고 예언하건데 피브드닌 자네는 쪼들리게 살아갈 운명이라고. 돈이 있을 턱이 없지, 으하하하 핫! 연구자금이나 매일 날려먹지 않나?" 흠칫! 토루반과 피브드닌의 움직임이 순간 경직됐다. 굳어진 얼굴피부를 억지로 풀어내려 노력하는 피브드닌이 안쓰 러웠는지 토플레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시즈를 따라다니는 거야? 글로디프리아는 아스틴네글로드와는 정반대 방향이란 거 모르나?" "여, 연구할 게 있어서 따라다니는 거야." 피브드닌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서 블리세미트가 만지작거리는 '이실리스의 펜던트'를 힐끔거렸다. 역시 신세가 처량 하게 느껴진 걸까? 한숨을 내쉰 그는 높아졌던 억양을 힘없이 죽였다. "자네는 웬일로 힘든 여행길에 오른 거지?" "나야 시즈의 전속 의사지. 그의 몸은 내가 아니면 진단할 수가 없어. 시즈는 몸을 함부로 써대서 내가 아주 고생이 라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즈는 함부로 몸을 굴리고 토플레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진단만 해도 타로운의 금화를 받을 수 있는 몸인데 일찍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독한 심보를 알 리가 없는 블리세미트는 토플레 가 실러오나가 내려주신 이 시대의 진정한 의사라고 인식해버렸다. 이후로 서로에게 틈틈이 심리공략전을 펼치던 두 사람은 이내 곧 지쳤는지 잠들어버렸고 마차 안은 평화로워졌다. "그런데 글로디프리아라니‥ 도대체 무슨 일로 '값싼 남작'이 시즈를 부르는 건가?" 토루반은 조용해진 마차 안의 침묵이 싫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서 엉덩이로 충격 을 모두 감수해야 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라도 하며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고 싶었 다. "아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상당히 급한 모양입니다. 편지를 보시겠습니까?" "흠흠‥ 그래도 괜찮겠나? 어디!" 토루반은 대륙에 이름 높은 음유시인이자 검사이며 또한 서민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젠티아 드로안이 어떤 글로 다급함을 표현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편지를 펼쳤다. "허허‥ 긴장하게 만드는 군." 편지는 기밀 문서라도 되는 양 몇 겹으로 접어져 있었다. 토루반은 편지의 종이재질에 금단현상이라도 있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 번 두 번씩 펼쳤다. 보았다! 그리고 굳었다! 편지의 내용은 딱 세 글자로 요약정리가 가능했다. 허무감에 잠긴 목소리로 토루반은 더듬거리며 읽었다. "당‥장‥ 와‥." "하하하! 급하다는 게 글자 수에서부터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이게 실베니아 최고의 음유시인 중 한 명이라는 젠티아 드로안의 편지란 말인가? 가, 간단한 안부인사조차 없 지 않은가!" "그렇게 절규하실 필요 없습니다. 글을 쓸 시간도 촉박할 정도로 다급했을 수도 있어요." 과연 젠티아가 그럴 사람일까? 타인들에게 '값싼 남작'이라는 별난 호칭으로 불리며 욕실을 집무실로 쓰던 그는 현 재 무얼하고 있을까? "각하! 정말 이러실 겁니까? 킬유시 공작께서는 지금 당신의 결정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하‥ 펠리언, 오늘따라 그대답지 않게 성급하군.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지 말고 자리에 앉게. 적어도 내일까지는 기다려야 할거야." "각하!" 이 친구야. 난 검사라 귀가 굉장히 좋다고.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 그렇게 크게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지만 젠티아 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펠리언의 급한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는 펠리언 이 가지고 온 킬유시 공작의 전언대로 행동할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젠티아가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펠 리언은 다시 언성을 높였다. "각하, 유흥에 빠진 왕족입니다. 지금 곧 실베니아 최고의 축제가 일어날 시기를 맞아서 그들은 먹고 마실 준비로 여념이 없습니다. 남작께서 한 마디만 해주신다면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값싼 남작'의 한 마디는 실베니아 국민을 대변하는 대륙에서 가장 비싼 한 마디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만 하세요, 펠리언. 정말 당신답지 않군요." "데린 공주 전하‥." "펠리언‥ 난 이제 공주가 아니에요.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주겠어요?" "그래도 킬유시 공작 전하의 따님이십니다. 공작의 영애은 공주. 어찌 불경하게 낮추어 부르겠습니까." 데린의 아미가 꿈틀하고 올라갔다. 펠리언이 은근히 젠티아의 작위가 낮다고 비꼬는 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틀리지 않았다. 펠리언은 겨우 남작 주제에 강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유로 공작의 행동을 통제하고 말을 번복하게 만드는 젠티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지만‥. 화를 내려는 데린을 젠티아가 말렸다. "그만 해요, 데린. 그는 기사요.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울 수 있도록 움직이는 기사. 더 이상 당신의 호위기사로 생각하지 말아요." "하지만 펠리언은 젠티아를‥." "후우‥ 데린‥!?" "네에‥." 아직 소녀 때의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던 데린은 젠티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 조용히 이름 을 부르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일 년 전의 데린만 생각하고 있던 펠리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젠티아는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요." "네에‥." 고개를 숙이고 젠티아의 옆에 앉은 데린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책상에 놓여있는 오렌지의 껍질을 먹기 좋게 까기 시작했다. 한 차례 그녀의 허리를 살짝 안았다가 놓은 젠티아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자니 못하고 굳어있는 펠리언에 게 말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들겼다. "아!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킬유시 전하께서는 명분을 완벽하게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 나는 것입니다." "펠리언‥. 한 가지만 묻지. 자네는 전쟁이 과연 이 나라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해서라면‥." "흐음‥ 그렇다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의 말에 펠리언과 데린이 동시에 흠칫했다. 그러나 데린은 곧 말없이 오렌지에 다시 손을 뻗었고 젠티아를 톡톡 건드리며 먹기 좋게 까진 오렌지 알맹이를 건넸다. 잠시 말문이 막혀있던 펠리언은 오렌지를 낼름 받아먹는 젠티아 의 긴장기 없던 행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비공식적이라고는 하나 공작의 사자(使者)를 맞는 태도란 말인가. "전하께서 실망하시겠지요. 뭐 사실 명분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 전력 상으로 밀리시는 게 아닙니다. 설마 장인을 치시지는 않겠지요?" "글세‥." "그럼 그렇게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아아‥ 곧 결정을 해서 사자를 보내도록 하겠네." 조용히 문을 닫고 펠리언은 방을 나왔다. 정말이지 '값싼 남작' 젠티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험 한 자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실베니아를 실제로 지배하는 자. 그리고 그녀의 남편. "변하셨더군‥ 하하핫." 얼마 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데린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어이없는,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궁정기사라고 는 하지만 공주를 넘볼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냈는데 웃으며 더욱 웃으면서. 그러나 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곁에 앉아있을 남자를 질투하는 자신을 당장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원인이 나 결론은 하나였다. "내게는 권력이 없다." 글로디프리아를 나선 펠리언의 발걸음은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그리고 그는 시작된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모으 고 훗날 실베니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괜찮을까요?" "으음‥ 미안해요, 데린. 아무래도 실베니아는 한바탕 폭풍이 몰아닥칠 모양이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젠티아의 음성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에 데린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눈을 꼭 감았다. 젠티아의 굳건한 팔이 부드럽게 그녀를 감쌌다. 그 날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내렸다. "비가 내립니다. 사론, 서둘러주세요." "예?" 이슬도 안맺혔는데 무슨 비? 사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즈를 돌아본 순간 마차 바퀴가 작은 바위에 부딪혔다. 쿵! 하고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마차가 약간 날아올랐다가 쿵하고 다시 떨어졌다. 이중으로 충격을 받은 마차 안에서 비명과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억! 으악!" "크으‥ 사론! 마차 좀 똑바로 햇! 토루반, 괜찮아요?" "‥‥."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리가 짧은 토루반은 말도 못할 정도로 타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사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고 시즈는 볼을 긁적거렸다. 다시 마차 안이 조용해졌을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동쪽 1km 앞에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점점 불어오던 찬바람이 약해지는 걸로 보아서 약간이지만 따뜻한 기 류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속도가 빠르진 않으니 보슬비 정도겠지만 상당히 금방 멈추지는 않을 거 에요." 그의 설명을 들은 사론은 피브드닌의 호통을 들을 때보다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시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 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역시 학자들은 알 수 없는 말만 한다니까.'하고 되뇌이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피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즈의 말대로 뜨거워진 얼굴을 서서히 식혀주는 보슬비였다.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지 만 또 알아듣기 힘든 대화가 될까봐 겁이 난 그는 잠시 보류해두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여관이 바로 코앞이거든요. 마차를 묶고 비가 그칠 때까지 쉬어가도록 되요." 여관은 국경지대였으므로 제법 규모가 컸다.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시키고 쉬고 있을 무렵, 식당 안의 공기는 시즈 에게 옆의 남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가져다 주었다. "알고 있나? 곧 반란이 일어날 거라는 군." "호오‥ 반란이 말인가? 하긴‥ 요즘 왕궁은 하루에 한 번씩 연회를 연다고 하던데‥ 국가 재정이 바닥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겠어. 그래. 누가 주동‥할 것 같은가?" "글세‥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반란이 일어나면 백 장의 꽃잎이 끼어 들지 않겠느냐라는 소문이 있다네." "백 장의 꽃잎이? 그들은 '값싼 남작' 수하의 기사단이 아닌가? 확실히 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지만 '값싼 남작'은 절대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자라고 알고 있는데‥." "헛소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실베니아의 중앙 귀족들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어. 이런 말이 있 잖나. '값싼 남작'의 한 마디는 서민들을 대변하는 가장 큰 한 마디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음식이 나온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아리에가 시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시즈? 음식 나왔어.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멍해?"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긴‥ 시즈가 하는 생각은 온통 별 거 아니면서 어려운 생각뿐이지." "보를레스는 생각하는 게 없으니까 그렇죠." 당황해서 성급히 먹기 시작하는 시즈에게 보를레스가 키득거렸고 아리에는 그런 보를레스을 쏘아댔다. 보를레스가 울상이 되어 입술을 내밀고 수프를 주어 담자 다른 사람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즈는 귀의 신경은 바로 뒤의 속삭임을 향하고 있었다. "흠‥ 뭐야! 옆 테이블 시끄럽게. 어쨌든 실베니아 중앙의 귀족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인가? 타국 사 람들까지 빤히 듣고 있는데‥." "에끼! 이 사람아! 원래 정보는 자국이 더 듣기 힘들 수도 있는 거라고.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막기 때 문이지. 물론 그 나라에 있는 사람만큼 많은 정보를 타국인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나쁜 정보는 더 밝을 수도 있다네." "호오‥ 한 마디로 주동자가 실베니아의 정모망을 쥐고 있다고 보면 되겠군." "그렇지. 재미있게 되었어. 소문이 사실이든 허무맹랑한 어린아이의 지껄임이었든 간에 실베니아가 시끄러워 질 거 야." * * * "어디‥ 변명 좀 들어볼까?" 사내의 단아한 미소가 노르벨을 향했다. '붉은 뱀의 사원'에 대한 일의 결과를 보고하려고 했던 노르벨은 조용히 입 을 다물고 쥐 죽은 듯 구석의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가 예상하기에 사내의 손에 들려있는 글씨 빽빽한 종 이는 이번 임무에 대한 보고서였다. 이유는 사내의 눈가가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탐정 노르 벨, 그런 추리력과 현재까지 남자를 보아온 경험으로 몸을 움츠리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대 충 방어 준비를 한 그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영 시원찮게‥." "결계가 쳐져있었다는 군." "바스티너가 게으름을 피웠‥." "보를레스라는 청년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던데?" 사람이란 여러 명이 다른 이야기를 할 때 누구의 말을 믿을까? 그 말에 대해 사내는 명백하게 규정지을 수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전적과 경험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내는 회상하기만 하면 되는 계산을 끝내고 임무를 실패 한 수하에 대한 징벌을 실시했다. "도대체 뭘 한 거야! '고리의 신비' 수장이 함께 갔다고 해도 계획의 책임자는 네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다른 사람 의 실수로 징벌을 회피하려고 하다니!" "자, 잠깐!" "뭐야? 또 다른 변명이라도 있나?" "잘못했어요오∼." 용서 대신 날아온 것은 사람 머리만한 마력구였다. 유성처럼 꼬리를 끌며 폭사되는 마나 덩어리는 노르벨의 허리 근처를 스치더니 벽에 부딪혔다. "감히 피해!?" 그 다음에는 한 개가 아니었다. 사내의 분노에 따라 발동된 다섯 개의 마력구가 노르벨이 잃어 버렸던 엄마라도 되 는 양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비명을 지르며 피하는 노르벨. 그는 절대로 방안을 족히 한달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만들어놓는 마력구에 맞고 의사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명탐정 노르벨도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으니. 피하면 피할수록 사내의 이마에서는 핏줄이 두들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떨어진 다과를 준비해 돌아가던 여인은 복도 저 편의 방에서 폭발음과 불꽃이 터져 나오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뛰어가니 방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보수 기간은 1 개월이 아니라 3, 4개월로 다시 잡아졌다. 한 쪽 벽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이다. 구석에서 노르벨이 오른쪽 팔과 다리가 그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제 대로 맞았다가는 명백한 사망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여인은 노르벨에게 다가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덮어주고 화로 식식거리는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답지 않아요. 지나간 일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대비를 하는 것에 비해 한 치의 영 양가도 없다고 말한 사람이 그대가 아니었나요?" 사내는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돌아서서 헛기침을 두 어번하고 자리에 앉았다. 책상을 뒤적거린 그는 치 료 물약을 꺼내 노르벨에게 던져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군.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 흠흠, 현재 실베니아에서 또 다른 계획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대륙이 고리의 힘에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땅의 고동을 밟는 이'가 있는 실베니 아는 그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야.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나타난 이상 그는 천천히 엎드려있던 땅에서 몸을 일으킬 걸세. 그걸 막기 위해서는 이게 마지막 기회야. 아니라면 또 음유술사들과 역사의 고리는 대륙을 분쟁 속으로 몰아 가겠지. 그럴 수는 없네. 부탁이니 막아주게." 노르벨은 아직도 부들거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좋아!'하고 쾌활하게 손뼉을 치며 그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건넸다. "사실은 이번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면 주려고 했지만‥. 뭐 지금까지 일을 해온 대가라고 생각하고 받게나." 묵직한 주머니, 형태로 보아서 분명히 화폐가 분명했다. 역사를 움직인다는 자가 동화를 보아서 건넬 리는 없고 은 화도 약간 부족ㅏ다. 역시 금화일 것이다. 감격하여 부복(俯伏)한 노르벨을 여인이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바래요. 이미 로진스님이 가 계시고‥ 엘시크에서 꼬마도 원조를 갔다고 하더군요. 둘과 협력 하면 윰유술사 하나 정도는 문제없을 거 에요." * * * - 산들이 붉게 물들고 잎이 떨어지고 눈에 잠식되어도 청솔만은 변하지 않으리. 동방에서 소나무를 칭송하는 불변 성이었다. 그러나 서방에도 자연은 아니지만 불변의 모습을 가지고 우두커니 고고한 현흑(玄黑)빛을 발하는 성이 있 으니 이름하여 '글로디프리아'. "보를레스, 시인인 척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요." 파마리나의 질책으로 안으로 쫓겨 들어간 보를레스는 갑자기 누군가 덥썩 안는 걸 느끼고 흠칫했다. '이 느낌은‥ 이 느낌은‥.' 절대로 남자가 아니다. 시즈처럼 자그마한 녀석이라면 몰라도 장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남자라면 돋는 닭살을 하루종일 긁어야할 만큼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일어나는 게 당연. 망설임 속에서 상대를 확인한 보를레스는 오늘 하루의 운명을 원망했다. "오랜만이군, 보를레스." "나, 남작 각하아‥."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는 게 그리 반가워 보이지 않는 걸. 넌 다르겠지? '마땅찮은 시즈∼.' 키 좀 컸나했더니 여전 히 아담하군. 그리고‥ 아리에 양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지? 귀여운 아가씨로군." 시즈와 아리에가 나란히 인사를 건넸고 젠티아의 시선은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는 손님들에게 넘어갔다. 흥미로움으 로 물든 그의 눈동자에 사람들은 점차 움츠러 들기 시작했다. "하하하‥ 특이한 조합이 아닐 수 없군. 어서 오십시오. 마녀 파마리나 양과 아스틴네글로드의 여러분, 그리고‥." 그는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둘이나 있다는 걸 알고 말을 흐렸다. 그러자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우며 토플레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수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계시는 드로안 남작 각하. 시즈의 전속의사인 토플레라고 합니다. 그의 건 강을 책임지기 위하여 머나먼 이국까지 다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하핫‥. 그것만으로도 진정한 의사로서 충분하겠군. 그럼 마지막 한 사람‥ 그대는 누군가요?" "전 블리세미트라고 합니다. 사제입니다." 한 손으로 가슴의 펜던트를 꼭 쥐고 소년이 말했고 보를레스가 소년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랑스럽게 말을 더했다. "붉은 뱀의 사원장님이시죠." 과거 여행으로 견문이 넓었던 젠티아는 그제야 소년의 복장이 고대 소레인 교단의 사제복이라는 걸 알아챘다.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블리세미트의 손에 입을 맞춘 그는 탄식했다. "아아‥ 사원의 불행은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밝히고 있던 동료들의 죽음에 저 또한 애도를 표하 고 싶군요." 아무리 고대 소레인의 사제라고 해도 고작 열 다섯의 소년이었다. 젠티아는 블리세미트에게 입을 맞춘 게 아니라 ' 역사의 고리'와의 싸움으로 죽어간 '사막의 신부'들에게 존경의 입맞춤을 받친 것이다. "감사합니다, 남작 각하. 그들이 포도주에 취해서 답변하지 못할 게 조금 안타깝네요. 각하의 위명에 대해서 여기까 지 오는 동안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만 암울한 색의 성안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 못하더군 요." "하하하‥ 이 쪽은 나의 친구이자, 동료이지만 부하라고 우겨대는 마크렌서 자작이지." "각하! 저는 우겨대는 게 아니라 당연한 정론을 펴고 있는 겁니다. 20 년이나 곁에 있었는데 주군으로 언제쯤 받아 주실 겁니까?" "이 사람아. 20 년이나 곁에 있었으니까 겨우 부하 따위로 둘 수가 없는 거라니까. 제발 그만 좀 조르게." 덩치 큰 토클레우스가 젠티아에게 매달리는 광경은 보기에 미화적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에 시즈와 보를레스를 제외한 이들은 대단한 인물(?)을 만났다고 굳어있던 몸을 조금이나마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 었다. 그들이 웃음을 참고 있는데 쿡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바탕에 검은 무늬로 장식된 드레스를 걸친 아 름다운 여인이 다가와서 시즈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검은 요새를 다스리는 두 어린애들이랍니다. 오랜만이에요, 대륙 제일의 명사, 시즈 세이서스. 아! 아스틴네글로드 의 원탁에 앉아있는 분들도 대륙 최고세요." "그가 대륙 제일의 명사라는 사실은 여기 있는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으니 옳은 말을 꺼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 "감사합니다. 아스틴의 국사(國師), 토루반." 눈처럼 흰 피부에 피어난 붉은 머리카락은 당장이라도 꺽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매혹적이라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걸 느꼈다. 특히 아리에는 여인의 시즈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치챈 걸까? 그녀는 갑자기 여인이 넌 지시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자 당황했다. "그대가 바로‥ 아리에 양이로군요.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아, 아니에요. 아름다운 걸로 말하자면‥ 으음‥." "전 데린이라고 해요. 아리에 양은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자신이 얼마나 미인인지. 아! 파마리나 양도 미인이세 요." 그 때, 토클레우스와의 실랑이가 막 끝난 젠티아가 다가와 데린의 허리를 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그래도 내게는 그대가 제일 아름답소, 데린." "무, 무슨 짓이에요!? 사람들 앞에서! 이 능글맞은 아저씨야!" "제대로 소개하지.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 데린 킬유시. 침 흘리고 손 내밀어도 절대로 못 내 놓는다오." 과연 가을인가? 시즈는 그렇지 않아도 능글맞았던 '값싼 남작'이 가을을 맞아 더욱 닭살스럽게 한층 발전한 걸 느 꼈다. 사람들은 분명 가을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누가 가을을 쓸쓸하고 건조한 계절이라고 했던가. 기름기로 흐늘흐늘한 계절이 틀림없거늘‥.' 그렇지 않아도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가을하늘은 더 이상 시즈의 머리 속에서 높고 청량한 하늘로 기억되기 보 다 버터 구이로 녹아 내리는 하늘이라고 개정되었다. "으음! 손님들을 이렇게 세워둬서는 곤란하지. 우선은 식사를 하자고. 그리고 축제를 즐겨야지!" "각하! 일주일 전에도 심심하다고 축제를‥." "오오‥ 토클레우스. 손님들이 오셨는데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나의 친우이자 세기의 명사, 시즈 세이서스와 대 륙최고의 현자들인 아스틴네글로드의 일행들이 오셨는데!" 눈에 화염을 일으키며 격분하는 젠티아 드로안. 글로디프리아의 주민들은 성주님이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에 냉철하 기 이를 때 없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송하지만‥. 블리세미트는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었다. '당신들은 속고 있어엇!' "그렇군요. 각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 막무가내 성주를 누가 말릴 것인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현재 시즈와 함께 온 소녀를 어떻게 꾸밀까 고민 중이었다. 과연 취미생활이 고상한 부부였다. 토클레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리들 따라오도록. 저녁때인데 식사를 해야지." "젠티아, 전 아리에에게 옷을 좀 입혀서‥ 호호홋‥." "아아‥ 그대의 취미는 뭍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지‥." "이제 그만 좀 해욧!" 지고무상한 남편의 권위가 복부에 꽂힌 한 방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후일 아리에 작(作)의 '능글맞은 남 편 길들이기.' 간행의 기미를 예견하는 작은 힌트였지만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고통스럽게 기침을 토해내는 젠티아 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는 여자들의 손을 꼭 쥐고 드레스가 가득할 방으로 도망쳤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자네들도 알아두게. '아내한테 얻어맞는 한 방은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밑거름이다.' 쿨∼럭! 하, 하지만 웬만하면 아내는 펀치력을 시험해보고 고르게나." 절대로 괜찮지 않군. 시즈는 은근히 아리에가 걱정됐다. 데린에게 무얼 배워서 올지‥. '복부근육을 강화해야 겠어.'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아픈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선 젠티아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시즈 일행을 안내했다. "이 드레스가 잘 어울릴 거야. 파마리나 좀 도와줄래요?" "아‥ 응." 왜 시녀들을 시키지 않냐고 묻는다면 데린은 '취미 생활이에요.'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녀는 성을 방문하는 여자 손님들을 꾸며서 남자들을 놀라게 하는 걸 즐겼다. 일종의 여자들만의 특권이랄까? 식사나 파티에서 좀더 높은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미리 쳐놓는 일종의 미끼였지만 혹시 알아채는 남자들이 있다고 해도 어쩔 것인가? 알아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유혹이 시작되었는데‥. "다행이에요." "예?" "레소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난 죽은 이보다는 살아있는 시즈를 걱정했답니다. 젠티아는 그가 자신을 능 가하는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과대평가해도 난 잘 알아요. 시즈는 굉장히 순약한 성격이라는 걸. 그래서 이번에 굉장히 기대했답니다. 그가 쓰러지지 않게 옆에 있어준 여인에 대해서‥." "‥‥" 파마리나는 아리에가 조금씩 떨고 있다고 느꼈다. 아마도 데린의 이어질 말에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역시 시즈는 복 받은 녀석이야. 이렇게 귀여운 여자의 맘을 뺏다니‥.' 아니나 다를까 파마리나의 생각대로 데린은 격찬을 늘어놓았다. 그것도 꺄∼하는 기분좋은 비명과 함께. "그렇데‥ 꺄∼ 설마하니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물론 예전의 레소니도 아름다웠지만, 그 애 는 어렸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시즈는 참 여자 운이 많은 남자에요. 어쨌든 아리에는 시즈한테는 과분하다고요." "아, 아니에요." "아니라뇨? 뭐가요?" 아리에는 급히 입을 막았으나 데린은 이미 장난기 어린 눈동자로 반짝이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반사광이 무색할 정 도였다. 파마리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 여자도 남편에 절대로 뒤지지 않아‥.' 대륙에 이처럼 죽이 맞는 부부가 또 존재할까? 그녀는 골치가 아파왔다. 그들의 조상이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아 이가 다시 커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여 태어난 아이들은 끔찍할 정도로 무에 가까운 확률이다. 거 기에서 다시 그 아이들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추리와 다시 인구에 따른 비슷한 성격의 남녀가 만날 확 률. '크으‥ 거의 불가능하군.'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과 정의는 수학적이나 연금술사적인 사고로는 내릴 수 없는 것. 사실은 얼마나 간단한 이야 기인지 결혼해보지 못한 이는 알지 못하리라. '부부는 닮아간다. 서로를 진정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늦는 걸‥." 침중한 얼굴로 젠티아는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드레스 룸에서 무슨 일을 당했으리라는 심려는 없었지만 기다리는 손님들의 배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습니다. 남자들을 기다리게 하는 권리는 신이 부여한 여성들의 특권이니까요." "후후훗‥ 역시 토클레우스는 매너가 있다니까‥. 자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소개할게요. 우선 파마리나." 예로부터 마녀들은 사람을 유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유는 마족과 계약할 때 일부는 몸을 계약조건 으로 걸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인데 파마리나는 마족과 계약한 마녀는 아니었지만 하게 된다면 아마 마족이 거절 하지는 못할 것이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검푸른 머리와 냉랭히 바다 물결처럼 청색 눈동자. 쏠리는 눈빛에 시장바 닥에 고등어가 된 기분을 느낀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폭렬 마법이라도 써댈 기세로 그녀가 소리쳤다. "여자가 드레스 입은 거 첨 봐!?" "파마리나가 아름다워서 그런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말아요." 입술을 내밀고 불만을 표시하던 파마리나가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서 자리에 앉자 데린은 이어서 손뼉 을 쳤다. "다음은 아리에. 시즈, 기대하세요." "데, 데린‥. 그러지 말아요." 여인은 옷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운 카멜레온이라고 했던가?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고 설사 카멜레온이 꽤나 징 그럽다고는 해도 표현 자체로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여자는 변신의 천재라는 것이다. 아리에가 입은 드레 스는 데린처럼 화려하지도 파마리나처럼 깊게 파여 유혹적이지도 않았다. 가벼워 보이는 백색의 단조로운 드레스였 지만 그보다 그녀의 진정한 미(美)를 표현할 수 있는 의상이었다. 그럼에도 아리에의 겁먹은 표정과 조심스러운 발 걸음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남성들의 가슴을 자극했다. 인간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 는 토루반조차 멍하니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남자들의 눈을 잠시 멀게 만들어버린 소녀는 이미 여인의 자리에 다가 서 그 자체만으로도 유혹적이었다. 그녀는 발을 한 걸음씩 옮겨 시즈의 옆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넌지시 곁눈질로 살피는 그녀 때문에 시즈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흠흠‥ 다들 아무리 음식이 맛있게 보인다고 해도 침을 흘리시면 곤란합니다. 오죽 배가 고프셨으면 저럴까? 젠티 아, 식사는요?" 자신의 남편조차도 넋이 나가자 데린은 새침한 표정으로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니 후벼팠다고 하는 표현이 어 울릴 것이다. 잠시 젠티아의 표정이 오만가지로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익숙하기 때문인지 그는 손을 내밀며 손님 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자아‥ 드십시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다. 시즈는 일 년 전의 추억과 현재가 겹쳐 보였다.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고 그의 옆자리에도 다른 이가 앉아있었지만 그녀가 떠오른다는 게 왠지 우스웠다. '잊어도 되는 걸까?' "시즈, 안 먹어?" "아, 아니에요. 먹을 겁니다. 아리에도 맛있게 먹어요." "으응‥. 요즘 생각이 많아졌네. 특히 식사할 때‥." "그, 그게‥."하고 시즈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앵두처럼 빠알갛고 물기어린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아픈 게 아니야?" 접시의 수프보다도 달콤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말을 더듬거리는 시즈의 모습은 아리에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이었 기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말똥거렸다. 토루반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우하하하핫. 설마하니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 앞에서도 떳떳이 자신의 생각을 외치던 명사, '마땅찮은 시즈'가 쑥 스러워서 말을 더듬거릴 줄이야." 아리에는 그제야 시즈가 얼굴이 토마토 소스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걸 알았다. 불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이 다. 덩달아 붉어지는 얼굴이 된 그들에게 젠티아는 잔을 들어서 외쳤다. "홍조를 띈 두 사람을 위해!"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은 일주일에도 놀았다고 하는데 지칠 줄도 몰랐다. 젠티아의 간단명료한 축제의사가 끝나자 마자 먹고 마시기 시작했는데 토클레우스는 '저들의 단순함이 이 곳을 지탱하고 있지 않은가.'하면서 이해할 수 없 다는 듯 술을 들이켰다. "춤을 춰본 건 정말 오래간만이야." "즐겁나요?" 시즈의 눈동자는 맑은 밤이면 달빛을 받아서 금빛으로 물든다. 정말로 수정이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리 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2 년은 되었을 거야. 하지만 왕궁의 무도회와는 전혀 다른 걸. 이게 훨씬 마음에 들어." 젠티아와 데린이 일행을 이끌고 올라가서 무도회장이라고 소개한 곳은 어이없게도 성의 옥상이었다. 하지만 텁텁한 빛깔을 내는 바닥이 궁전의 대리석바닥보다도 훨씬 고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빛 때문일까? 아니면 달빛? 춤을 추 다보면 돌아가는 수많은 별빛에 넋을 잃게 된다. 성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축제의 음악소리가 아주 가녀 리게 들려오지만 춤을 추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음악이었다. 대신 사랑하는 이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은가. "이 성은 정말 이상해." 아리에는 시즈의 어깨너머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젠티아의 시종과 시녀들은 물론 마구간에 서 말을 돌보던 사람들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아마도 불쾌해했을지도 몰랐다. '용병들과 생활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면‥.' 시즈도 변했다지만 그녀 역시 변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성격을 줘버린 것처럼‥. 예전의 서로와 닮아있었다. "저기 시즈? 레소니를 생각해?" 허리를 감싼 시즈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그녀도 더욱 시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잊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어. 나를 레소니로 생각하는 게 아니지? 아리에로 사랑하는 거지?"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눈물로 빛을 발한다. 잠시 멈춰서 시즈는 아리에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 고 시즈의 옷자락에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닦았다. 망설이는 듯한 청년의 음성이 귀를 두드렸다. "난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또 레소니를 대신하여 그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인지도. 그냥 뭐랄 까‥. 그녀에게 해줬던 것은 레소니만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춤을 추고 있잖아요? 꽤 쑥스럽 다고요. 그리고 지난번에는 입을 맞추기도 했고‥.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역시 감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이 두근 거림을 잊었다가 후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를 위해 죽은 이들을 위해서 난 그들의 몫까지 자신있게 살아갈 거 니까요." "어쩐지 궤변 같은데‥." "뭐 어떻습니까. 세상은 궤변으로 가득차고 궤변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경쾌한 왈츠였다. "그래‥. 헤모가 자네들을 공격했군." 젠티아는 거칠게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헤라즈입니다." 보를레스는 예전에는 동료였고 현재는 마지막 적수인 성투사에게 굉장한 적의를 드러냈다. 일 년 전의 굴욕감은 생 각할 때마다 그를 투지와 살기로 감싸안았다. 그가 이빨을 드러내자 즐기던 사람들이 팽배하진 살기에 움찔하고 놀 라며 주위를 살폈다. 맹수가 노려보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토클레우스가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걸 본 젠티아는 호오∼하고 감탄했다. '이 친구도 엄청나게 성장했군. 하지만‥.' "자네도 강해졌군. 하지만 아직 그에게 미치지는 못해."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된통 깨졌으니까요. 칠흑처럼 검고 둔탁해 보이는 갑옷과 검을 가진 자였습니다." "호오‥ 정말로 '역사의 고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군. 그는 바스티너라고 하지. 사람을 일컬는 게 아니라 갑 옷을 듯하네. 보통 어둠의 감옥이라고 하지. 어떻게? 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지만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갑옷 이야. 입는 것만으로 오리하르콘이 박힌 검이 아닌 이상은 흠집도 내기 힘들 존재가 탄생하지." 젠티아는 뭐가 생각났는지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혀 우스운 얘기를 듣지 못한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젠티아는 난간에 기대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번 전승자가 아마 여자라는 소문이 있더군." "소문!?" "정보의 바다를 달리는 자들에게는 소문이야. 일반인들에게는 극비지. 용사를 능가한다는 힘을 가진 바스티너가 여 자라‥. 알려지면 파란이 일 걸." "이미 일고 있는데요." 블리세미트는 성벽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보를레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한 마디 덫붙였다. "어서 말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 곳 성벽은 특별히 단단한 돌로 만들어졌지. 흠집도 가지 않을 걸세. 어쨌든 이쯤에서 자네들을 부른 이 유를 말하기로 하지." 젠티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잡자 사람들도 모두 긴장했다. 아리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미 내려 가고 없었다. "아마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야. 곧 반란이 일어날 걸세. 주동자는 나의 장인어른!" !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토루반들이 침음성을 삼키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젠티아는 '암 그래야지'라는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은 실력파지. 그리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지.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서민들은 반대하는 이보다 축가를 부르는 이가 더 많을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현재의 반란을 부축이는 무리가 있는데 '역사의 고리'라 면 어떻게 하겠나?" '역사의 고리'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시즈의 주먹에는 땀이 찼다. 불리워질 때마다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단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피를 불러가며 일을 하는 걸까. "그래서 뭘 해야 하죠?" "간단하네. 이 편지를 가지고 킬유시 공작께 가게. '역사의 고리' 역시 날 주목하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번 반란의 목적이 날 제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 그들은 방해꾼을 보낼테니 알아서 처리하고. 꼭 전하의 반란을 막을 필요 는 없네." "편지가 공작께 가져가면 되는 겁니까?" "그래. 내일 당장 이 곳에서 동쪽으로 떠나게. 대륙의 끝으로 가면 밀체 지방이 있어. 거기에 우리의 원조자가 있지. 아마 시즈는 안면이 있는 사람일 거야. 그럼 부탁하네." "노르벨, 얼굴에 기운이 없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조용해서 좋은 걸." 바스티너는 고요한 하늘빛이 멋지다는 둥 하면서 노르벨의 속을 긁었다. 바득바득 이를 가는 노르벨이었지만 어쩌 겠는가. 바스티너의 갑옷에 흠집을 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어, 언젠가는‥.' 그가 주먹을 쥐고 다짐을 할 때 한 소년이 다가왔다. 감청색의 물결같은 머리칼을 길게 휘날리며 다가온 소년은 방 긋 웃으며 노르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이 바로 뛰어난 일처리로 유명한 노르벨 씨죠?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쁩니다." '뛰어난', '유명한' 암울했던 노르벨의 마음 속에 두 수식어로 인해 밝게 빛났다. 소년의 손을 마구 흔들다 못해 끌 어안은 그는 껄껄대며 말했다. "아아‥. 뛰어나거나 유명하다는 건 헛소문이지만 내가 노르벨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 그대가 바로 엘시크의 천재 라는 로길드로군, 과연 눈에서 총기가 흘러! 이번에 잘해보자고!" 단순하군. 옆에서 보고 있던 로진스는 소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비웃음으로 꼬아져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과연‥ 내 이름과 비슷한 만큼 제법 실력은 있나보군.' "도련님 어찌하여 그에게 말을 거셨습니까?" 로길드를 수행하는 기사가 물었다. 가문의 수장이 말하기를 노르벨은 주의해야 할 상대 중 하나라고 누누이 일렀던 것이다. 그런데 소년은 겁 없이도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접근했으니 후일의 행방이 미지의 방향이었다. "바크호‥ 걱정 말아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 것뿐이니까.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생각은 없어요. 바탕에 할아버 지의 말을 깔고 생각해보았을 때 노르벨이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무섭죠.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다니‥." "솔직히 전 도련님께서 이번 계획에 자진해서 참여하신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간단해요. 그가 올 테니까요. 시즈 세이서스, 그가 말입니다. 경애하는 '마땅찮은 이'를 보고 싶어요." 하늘은 푸르고 그 아래로 배 한 척이 유유하게 파도를 넘었다. 돛에는 뫼비우스의 띠가 그려져 있었다.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1) 가을‥ 대륙의 중부지방은 이 계절이 되면 어디에서나 광범위하게 찾아오는 엘로그라토의 전령을 만날 수 있다. 지 역마다 약간의 강약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약간씩은 모래바람을 맞는다. 사람들은 지평선 건너에서 찾아온 추운 겨울의 상징으로 여기기에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역시 눈에 들어가면 따갑 고, 그래서 앞을 보기 어렵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후우‥ 속 썩이는 바람이구나. 이래서는 돛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알 수 없는 게 꼭 그 사람 같군." 이제 막 청년의 티가 나기 시작하는 흑발의 미소년은 모래 바람에도 불구하고 선착장의 화물에 걸터앉아 흰수염고 래 두 마리는 합쳐놓은 만큼 거대한 배를 점검하는 선원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청색의 고급스러운 천이 돋 보이는 상인 복장을 입은 그는 한 손에 어떤 사항이 가득 적혀있는 양피지와 배를 번갈아 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곧 드로안 남작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이 올텐데‥ 요즘 너무 부리신단 말야."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얼굴은 기대에 차있었다. 젠티아가 '능력 좋은 친구들이니까 함께 여행을 해보는 게 장가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라고 말했으니 아마도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젠티아는 상관으로이나 성주로서는 관대해도 인물을 보는 시점에 있어는 꽤나 깐깐한 인물이니‥. 생각에 잠겨있는 그에게 선원 복장의 한 사내가 뛰어왔다. "파엘라스 님. 길드에 웬 사람들이 이번에 떠날 배를 찾는다면서 왔습니다만‥." "으음‥ 왔군." 소년은 양피지를 다시 훑어본 후 심호흡을 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약간 홍조를 띄운 얼굴을 진지하 게 굳히며 말했다. "가지." 동방에서 들여오는 호피와 사슴의 머리가 우아하게(?) 장식된 방은 누가 봐도 호화스러웠다. 젠티아의 말대로 밀체 지방에 도착한 시즈 일행은 긴장 속에서 엄청난 갑부일 게 분명한 원조자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말소리가 들 려왔다. "그들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지. 네가 말하던 사람들이 틀림없는 모양이더군." 보를레스는 수염을 기른 현자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연륜의 상인인 줄 알았던 원조자의 인상이 깨어지는 걸 느꼈다. 음성이 스물도 넘지 않은 앳된 티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라니‥. "엇!?" "윽!?" 그래도 일행을 따라 원조자에 대한 인사를 하려고 일어선 보를레스, 그는 막 문을 젖히고 들어온 상대와 눈을 마주 치고 기묘한 발성을 시도했다. 일행이 그들의 침묵을 의아하게 여길 때, 시즈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손을 내 밀었다. "오랜만이군요. 카이젤 파엘라스." "음‥." 카이젤은 대답 대신 침음성을 내뱉으며 시즈가 내민 손을 잡았다. 보를레스가 일어서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다가왔다. "설마하니 그 때 함께 여행하던 꼬맹이일 줄이야."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굳건하던 산 정상이 화산처럼 폭발하듯 소년은 울컥했다. 파마리나가 옆에서 키득거리며 지켜보다가 끼어 들었다. "꼬맹이잖아." 여기서 밝히지만 파마리나는 키가 컸다. 아리에는 물론이고 시즈도 그녀보다 작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여움을 배가시키도록 작은 키를 가진 미소년은 그녀를 올려봐야 했다. 상대를 씹어먹을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카 이젤을 처음 일행을 안내했던 사내가 말렸다. "그만하지. 오랜만에 만난 동료인 듯한데 완전히 원수처럼 느껴지잖아." 그러고 보니 첫 대면인 사람이 더욱 많은데 실례를 했군. 카이젤은 실수를 깨닫고 시종을 불렀다. "식사를 준비해 두도록. 손님들께서 먼길을 오시느라 시장하실 테니." 잠시 후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즈 일행이 소개를 마치자. 카이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심란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토록 다양한 사람들의 파티는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아스틴네글로드에, 배척을 받 는 마녀, 고대 소레인 교단의 '사막의 신부'와 왠지 신용할 수 없는 의사까지. 그만큼 이번 사태가 중요하다는, 실제 와는 상관없는 추리를 해버린 카이젤은 모험이 즐겁겠다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배는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당금 실베니아의 사태가 시급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전혀." 도리도리도리. 착 가라앉은 어조로 분위기를 맞추던 소년의 입에서 별안간 푸웃하고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 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듯한 표정들이 양옆으로 번갈아가는 동작에 대하여 '드로안 남작은 뭘 한거지?'라고 묻 고 싶었다. "우리는 서신을 킬유시 공작께 전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현재의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모릅니다." "후우‥ 그렇다면 잘 들어보시죠." 카이젤의 설명에 따르면 실베니아는 언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일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나마 방아쇠를 쥔 손가락을 제어할 수 있는 드로안 남작이 나서지 않고 있어서 늦춰지고 있다지만 그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만으로 셀베이나의 고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피를 내서라도 짜내야 할 상황에 와 있었다. "나도 드로안 남작의 생각은 읽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반란, 아니 혁명에 동의의 표를 던지고 싶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믿어봐야지요. 민중의 귀족이라는 그를‥. 값싸다지만 가장 소중한 귀족인 그를 말입니다." 보를레스는 갑자기 젠티아가 부러워졌다. 또 실베니아의 서민들도 부러웠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자가 있다‥ 믿어주 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 그의 갈색 눈동자가 시즈의 서늘한 머리카락을 향했다.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지만 그는 날 믿고 있을까?' 그와 여행과 모험을,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함께 선택한지도 벌써 1년하고 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확신 못했다. 그러나 좀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 어떻든 간에 자신은 그를 마음 속의 주군의 성좌(星座)에 올려 놓은 지 오래였다. "보를레스, 보를레스!" "으‥ 응!?" "들으셨습니까?" 쏘아보는 카이젤의 입가에 송곳니가 살기가 맺히자 보를레스는 섬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밀체 지방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송곳니가 많이 발달했는데 때문에 늑대인간의 후예가 아닌가라는 설까지 나돌았다. "흠흠‥ 그래서 실베니아는 불씨가 떨어지면 폭발하는 상황에 와있는 겁니다." "하지만 드로안 남작을 무시하고도 내란(內亂)을 일으킨다면 그의 서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오히려 불씨만 떨어 뜨리는 게 아니겠소?" "과연‥ 아스틴네글로드의 현자이십니다. 저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전략의 예상을 무시 할 만큼 드로안 남작을 믿는 거지요. 이번에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예정은 내일 바로 출발이니 준비를 해주십시 오."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2) 대륙의 중앙 엘시크, 수도에서 남서부로 한 달가량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영지, 심벌튼에는 이미 갑옷에 온통 광택이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헝겊으로 문지르는 걸 멈추지 않는 사내가 있었다. 얼굴에는 듬성듬성 난 수염에 고릴 라처럼 거대한 덩치와는 다르게 갑옷을 매만지는 손길은 섬세한 그에게 뜨거운 김이 솟는 컵이 내밀어졌다. "어제 새벽에 밀체 지방에 심어둔 밀정에게서 재미있는 정보가 들어왔어.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있다는군." "음‥." 잠시 손질을 멈춘 사내가 컵을 받자 이번에는 나뭇잎을 빻은 가루통이 내밀어졌다. 알아서 양을 조절하라는 뜻 같 았다. "됐어. 음‥ 좋군. 난 물을 데운 것만으로 충분해." "언제 봐도 취향이 특이하군." "음‥ 그래서?" "그래서라니‥ 전에 '고리의 신비'에서 알려주기를 '마땅찮은 시즈'가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 하지 않았나? 즉 우리의 상대가 나타났다는 거지." 털썩하고 의자에 차를 건넨 또 다른 사내가 엉덩이를 깔았다. 대체적으로 밝은 색상의 의복으로 맞춰 입은 모습이 깔끔하게 느껴지는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어조가 쾌활했다. "어지간히 지루했나보군. 지난번 '풍암의 사막'에서는 동료들이 패퇴(敗退)를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덕분 에 수장인 나한테만 위에서 조잘거리지 않나." "이보게, 노리스. '고리의 신비'의 수장이라면 충분히 책사의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가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나라고 별 수 있었겠나? 아마도 그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우리를 직무 유기라는 이유로 판 것뿐 이라고."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기사단의 행동을 결정짓는 녀석이 저런 말이나 해대다니‥. 뭐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군." "갈 텐가?" "음‥. 이 곳도 꽤나 정들었지만 할 수 없지." 노리스가 갑옷을 착용하다가 보니 밝은 옷의 사내는 여장(旅裝)을 챙기다말고 무슨 생각에 빠져있었다. 가끔씩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친구의 버릇 같은 행동이었지만 호기심을 참을 수는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자네, 그 녀석을 잊었냐? 2년 전쯤 우리를 상당히 골 썩혔던 꼬마. 이름이 시즈라고 했었지? 생각이 나서 하는 말 이지만 평범한 청년은 아니었어." "나도 잘 기억하고 있지. 망연자실했던 친구. 설마‥." 둘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아하하하하하!"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게 만들면 뒤통수 골수만 뽑아놓을 테다." "내가 할 소리야." 아침이었다. 그들이 열어젖히는 문소리에 놀란 새가 푸드득하고 도망친 것은‥. 시즈는 아직 엘시크의 작은 마을에 서 진정한 전쟁을 예고하는 시작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 * * "우웨에에에에엑!" "웁! 우웨에에엑!" "쿨럭! 쿨럭!" 참 보기 민망한 광경이었다. 걸쭉한‥ 액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고체도 아닌 것이 배 전방향에서 바다에 출렁출 렁 빠져드는 모습은. 그걸 아래서 받아먹는 물고기들은 소화시킬 것도 없는 완벽한 영양물질에 환호하며 파티를 열 지경이었지만 위에서 보는 이나 토해내는 사람은 고역이었다. "차, 차라리! 우웨에에에엑! 마, 마차를 타고 가아‥ 우웨에에엑!" "토액질에 전념하시지요." 카이젤은 코를 찌르는 냄새에도 불구하고 토루반을 들어올려 배 난간에 부축하고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커다란 파 도가 한번씩 뱃전을 때릴 때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묘한 색상의 물질을 뿜어냄과 동시에 말을 해대는 토루반의 모습은 절대로 추천하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그는 간단한 충고를 건네고 힘차게 등을 두들겼다. 그래서일까? 토루반 은 이중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듯 했다. "서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하긴 하군요." 전멸이었다. 시즈의 일행 중에 태연하게 여행을 하는 사람은 지팡이에 앉아있는 파마리나가 유일했다. 시즈는 아리 에를 토닥이면서도 안색이 창백했고 보를레스 또한 뱃 속의 내용물이 오르락 내리락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블리세미 트 같은 경우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지 '오‥ 실러오나시여‥. 저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이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들도 땅의 종족인 드워프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땅에서 발이 떨어지면 힘들어하는 게 드워프였지만 아스 틴에서 국사(國師)를 맡았던 토루반은 마차를 제법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땅에서 떨어져도 참을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배와 육지와는 엄연히 다르거늘. 정신도 못 차리는 토루반의 옆에서는 피브드닌과 토플 레가 사이좋게 서로의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의사 같으니. 의사라는 녀석이 다른 사람들 치료는 못할망정 배멀미에 죽어가고 있다니! 우웨에에에 엑!" "네 녀석이나 잘해, 쿨럭! 옷에 묻었잖아.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람이 토액이나 옷에 묻히는 건가? 설마 냄새 풍기는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어쩌면 그들은 서로가 상대에게 멀미를 더욱 유발하는 존재가 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육지에서 온 일행은 뱃사람들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배멀미를 해댔지만 그 정도로 현재의 바다는 들쑥날쑥이었 다. 선단을 이끌고 해상 무역을 이끌기 시작한 카이젤도 경험하기 힘든 바다였다. 조금만 더 심하다면 폭풍이라고 지칭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몇 일은 더 가야할 터인데‥ 이래서야‥. 도대체 각하는 무엇 때문에 뱃길로 가라고 하신 거지?"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3) "믿을 수 있겠소?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가능할까 요?" 지도를 흘러내리는 로길드의 손가락을 따라 사람들의 눈이 이동했다. 그것들은 모두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만족스 러운 반응에 박수를 쳐 능숙하게 주의를 모은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서북 방향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고려할 때 음유술사의 일행이 배를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혹시라도 모르지. 그들이 예측을 뒤엎고 뱃길을 선택할지‥." "일행 중에 드워프가 있다고 하더군요." 로진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뱃사람들조차 꺼리는 강풍이 바다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하물며 드워프는 인간처럼 배에 발을 들여놓는 것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종족이었고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배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유리와 쇠를 긁어대는 듯한 음성이 묵빛의 철투 속에서 흘러나왔다. 자리하는 존재감만으로 사방을 압도하는 바스 티너였다. 그는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학자이며 지략가라고 지칭되는 이들의 결론을 듣고 행동에 옮길지 아닐지 생각하고 싶었다. 어두운 투구 속에서 발산되는 눈빛은 마치 밤에 사람들을 놀래키는 귀신불같아 로 길드는 찔끔하고 대답을 서둘렀다. "어쩌면 정말로 바다를 통해 남부(南部)로 향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마땅찮 은 시즈'나 아스틴네글로드의 현자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자신들의 상태일 테니 말입니다. 유인책이 아 니라면 그들이 어째서 이런 행로를 택했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이런 바람 속에서 바다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왠지 자신없는 어조의 로길드가 자리에 앉음을 끝으로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음유술사들은 세일피어론아드 자체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유리한 조건은 수(數) 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상대가 뿔뿔이 흩어져있을 때 머리를 총동원하여 각개격파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적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로길드는 머리를 감싸쥐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시즈 세이서스."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임종을 맞이한 자처럼 힘이 없었다. 그가 건강하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토루반임을 염두에 둘 때 위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배멀미 속에서 탈수(脫水)와 탈진의 과정을 넘어 탈 혼(脫魂)을 상태에 도달해있었다.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지친 것은 다들 마찬가지였다. 시즈는 그렇지 않아도 희던 얼굴이 은은하게 푸른 빛깔이 감돌아 애처롭기까지 했다. 바다에 익숙한 카이젤도 고통스러운 안색을 감추지 못하고 힘든 기색으로 말했다. "목적지인 낭아플까지는 아직도 일주일은 십여 일은 넘게 남았지." 그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지 카이젤은 고개를 숙였다. 알고 보니 토액질의 기미가 있어서였지만. "아직 멀었군요.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고생을 해야겠습니다." "잠깐! 각하께서는 배를 타고 낭아플로 가라고 하셨지만 꼭 배를 이용하라고는 말하지 않으셨어.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사정을 아신다면 분명‥." 카이젤은 희미한 시즈의 미소에 말을 멈추었다. 미간 사이를 찌푸리며 그는 물었다. "알고 있나? 그 생각을?" 일행은 그 순간에도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토해주기에 바쁘면서도 제법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며 시즈의 대답을 재촉 했다. 어쩌면 삶의 투쟁심까지 섟여있을 듯한 시선에 청년은 어설프게 웃었다. 대답을 듣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 일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내란(內亂)에 '역사의 고리'가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겠죠? 그들의 정보망은 대륙 전체의 쥐구 멍까지 통해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글로디프리아에서 마지막 밤, 저는 남작님께 말했습니다." -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눈을 어떻게 피할지‥. 젠티아는 보셨습니까? 좀 전에 날아오르던 검은 비둘기를? - 훗‥ 나도 모르겠군. 자네가 어떻게 그 조류의 종류까지 구별했는지‥. 전에는 눈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은 데‥. - 장난치지 마시죠. -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는 군. 현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말이야. 간단하지 않은가? 누군가 의 예측을 벗어나고 싶으면 그 누군가의 예상에 벗어나는 짓을 하면 되는 거야. - 어떤 식으로 말인가? - 자네는 자필한 소설에서는 그리도 기상천외한 생각들을 해놓고선도 이런 때는 머리를 돌릴 줄 모른단 말인가? 기상천외라는 말은 간단한 거야. 내 손에 잡히는 이 허공과 저기 먼 하늘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면 기상 천외란 무엇이겠는가? 내 손에 잡히지만 않는다면 기상천외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지.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그들의 생각에서 약간만 비켜나게 해보게. 혹시 아는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조금일지 몰라도 상대방이 느끼기에는 거대 한 압력으로 느껴질 걸지 말이야. "무슨 뜻인지?" 토플레는 그를 비롯한 일행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기에 금화를 세어갈 때처럼 진지했다. 대답을 한 사람은 죽어가 던 토루반이었다. "현재의 진행은 눈을 피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행동이라는 뜻이라네, 쿨럭! 시즈, 말해보게. 자네들의 생각이 무엇인 지." 드워프 최고의 현자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게 토루반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 듯 했다. 다만 자신의 예상이 맞지 않기 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시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피브드닌이 토하다말 고 얼굴을 들었다. "이미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육지로 나가는 일 뿐이야. 혹시라도 편안한 상황이었다면 모 르지만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어." "맞는 말이지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는 '역사의 고리'까지도‥." 모두가 심상치 않게 올라가는 시즈의 입꼬리를 따라서 불안도가 상승했다. 점점 그가 내뱉을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싶었다. "맞아요. 그런 겁니다. 우리는 견딜 수 없어야 할 고통에 앞으로도 많은 시간 시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피브드닌이라면 어디에 매복을 두겠습니까?" 어느 새 가져온 걸까? 카이젤이 펼쳐든 지도의 어느 부분을 피브드닌은 손가락으로 하나 둘씩 찍어나갔다. 대륙의 동부와 낭아플의 주위였다. "아마도 우리가 육지로 이동수단을 바꿀 거라 예측되는 대륙 동부의 요충지와 항구 낭아플의 항구지점인 남부지점 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도중하차라는 예상을 뒤엎고 낭아플, 아니 낭아플을 넘어서‥." 시즈는 힘있게 낭아플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마을을 가리켰다. "이 곳까지는 가서 육지에 발을 딛어야 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힘든,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았다. 절망하는 토루반의 어깨를 두들기며 시즈는 말했다. "가끔은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걸어갈 때도 있는 게 아닐까요? 토루반께서는 고작 종족의 특성에 묶이실 겁니까?"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4) "우엑!" 제법 호기있게 마음을 가다듬은 시즈들이었지만 그 호기가 뱃속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아리에와 토플레를 비 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멀미에 익숙해질 무렵- 그나마 전에 비해 심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끝내는 시즈와 카이 젤이 구토 그룹에 끼어 들면서 선체는 바람을 이겨내려는 선원들의 고함과 시즈 일행의 구토음과 함께 항해를 계속 하게 되었다. "말은 좋았지만 직접 경험하게 되니 나머지 일주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하군요." "낭아플이 일주일이야. 네가 지적한 마을까지는 심여일 이상 걸린다고." 고민에 빠져있던 시즈는 옆에 와 앉는 카이젤의 한 마디에 두 손을 들어버렸다. "드로안 남작님이 생각하셨다는 방법이라는 게 정말이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즈. 주군을 갈아치우리라 카이젤이 생각할 때였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동공이 범위 를 확장했다. "무슨 일이에요? 카이젤." 카이젤의 얼굴에서 놀라움 외에도 두려움과 경계를 감지하고 시즈가 벌떡 일어섰다. 예도를 급히 뽑아 카이젤의 시 선이 향하는 곳을 향해 전투자세를 잡는 그의 머리 속은 낭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리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바다 본연의 위험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어.' "잠깐, 잠깐! 그 칼 좀 치워 줘. 무서워서 올라갈 수가 없잖아." 바다 속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믿겠는가? 시즈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출처까지 정확하게 고개를 빠끔 히 내밀었으니까 말이다. 배 난간에 매달리는 게 힘든지 잔뜩 주름이 진 출처를 보고 카이젤이 중얼거렸다. "머메이드? 인어인가?" 전설 속의 이름 높은 상인들이 겪었다는 모험담에나 등장하는 인어. 특히 노래로 선원을 유혹한다는 소문을 가진 종족인 세이렌이나 머메이드의 음성은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명확하고 깨끗했다. 숲의 마법 종족이 엘프라면 인어는 물의 마법 종족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등장 또한 매우 화려했다. 휘날리는 물보라는 모래바람이 물어닥치는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도 옷으로 변하며 배에 발을 딛는 인어를 감쌌다. 카이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 는 종족이 얼마나 포악하고 악독한지를 아는 그들은 폭풍이 일 때가 아니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일이 드물 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청색의 머리에서 물을 털은 소녀를 향해 카이젤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넌 인어가 아닌가?" "‥‥뭐에요? 당신은 보고도 모르는 건가요? 다시 한 번 꼬리를 보여드릴까요?" 은근히 흰 피부를 노출시키는 흰색의 잠옷차림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지만 발끈하여 발을 굴러대는 성격은 영 아니 었다. 스물 살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그녀는 누구나 혹할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에 물갈퀴 같은 귀만 아니라면 귀 엽다고 봐줄 수는 있었다. 무언해진 카이젤을 대신하여 시즈가 얼른 말했다. "그의 말은 어째서 당신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냐는 뜻입니다. 보통 인어들은 인간들에게 모습을 잘 보이지 않 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자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고개를 휙 돌렸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이 고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흥! 난 피가 까맣다는 인간과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단순히 말을 나누더라도 정령의 기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피를 가진 인간이 좋다고." 시즈가 살펴본 소녀는 인어답게 신기했다. 마법으로 창조한 옷감은 물이 변한 것인데도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 다. 그나마 토루반이나 유레민트로 이종족(異種族)에 대해 익숙해진 시즈였지만 귀의 물갈퀴에는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봐! 인간.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시즈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섰다. 피가 검다니 멋진 주입교육이 아닐 수 없군. "그만해. 그가 풀이한 그대로야. 왜 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거지?" "인어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성체가 되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에요. 별다른 위험이 없는 한 누구 도 성체의 일을 간섭할 수 없어요." 인어는 혀를 길게 내밀었다. 약올리려는 의도 같았지만 불쌍히도 그녀의 모습은 악의적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귀 여웠다. 굳어버린 카이젤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시즈가 다시 나섰다. "내가 책에서 읽기로는 인어의 성체를 알아보는 방법은 꼬리 끝에 황금색 비늘이라더군요. 인간으로 변화하면 왼쪽 엄지발가락이 황금색‥." 그의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눈이 자연스럽게 인어 소녀의 몸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방금 전에 토 한 주제에 입맛까지 다셔대는 카이젤은 소녀에게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자, 잠깐! 다가오지 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만둬!" "훗‥." 잔인하게도 카이젤은 아직 소녀의 감성을 지니고 있을 여인의 치마를 들추는 행위를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발을 꼬며 감추려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은색이야. 아직 성인은 아니로군. 자아‥ 무리에서 걱정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 "싫어! 부탁이야. 난 육지로 나가고 싶다고. 이런 바람이 아니면 수면으로 나올 수도 없고, 또 폭풍 속에 항해를 하는 바보같은 인간들이 또 있을 리도 없어. 게다가 정령의 냄새까지 나는 사람도 있는 걸!" "웬지 기분이 나쁜데‥." "그렇죠?"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5) 그들은 현재의 감정뿐이 아니라 불청객의 부탁에 대한 대답까지 모은 듯 했다. 그러나 그 때였다. 철썩! "윽!" 갑자기 밀려온 큰 파도에 선체가 흔들거리자 그들은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결과는 지금까지와 같았다. "우웩!" "아하! 당신들, 바다에 익숙하지 못한 거군요." "아, 아니얏! 우욱!"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 시즈와 카이젤은 가장 비위가 강한 편에 속했으니까. 재미있다는 듯 두 사람을 구 경하던 인어 소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박수를 치고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이러면 어때요? 당신들이 날 육지로 데려다준다면 나는 마법을 사용해서 이 배가 흔들리지 않고 육지 에 도달하게 해주겠어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우웩!" "이봐. 그러다가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바다에서 탈수를 겪게 되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지?" "이봐요. 인어라고 너무 얕보지 말아요. 우리도 독서같은 문화 생활은 즐긴다고요." 그녀는 시즈와 카이젤에게 말투까지 철저히 구별하며 반박하고 답변했다. 두 인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매슥거리는 복부를 기준으로 볼 때 그녀의 제안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그 러나 일행이 해야하는 일은 관광업이 아니었다. 또 그녀가 인어라는 게 알려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밝히고 덤벼들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죠? 앗!" 밖이 소란스럽자 선실에서 쉬고 있던 아리에와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에도 인어 소녀의 흰 피부는 잘 보여서 아리에는 놀란 음성을 냈다. "흠‥. 인어로군. 게다가 아주 순수한‥. 게다가‥ 음‥ 아직 성(性)이 확정되지 않았어." 인어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예상도 못했지만 무엇보다 바다 수면을 타고 흐르는 빙하처럼 냉기 가 흘렀기 때문이다. 옷자락을 움켜쥐고 소녀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은 마녀(魔女)로군요. 그것도 아주 강한‥. 어머니가 마녀의 곁에는 가지 말라고 했어요." "당연하지. 너희들은 우리들의 실험 재료거든." 피식 웃는 파마리나의 미소가 소녀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는 미지수다. 다만 카이젤의 팔을 잡고 그 뒤로 몸을 숨겼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사악한 마녀는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두고 탐색하는 맹수처럼 부들부들 떨어대는 소녀 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특히 인어 중에서도 희귀한 양성체는 말이야.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고 해." "나, 나, 나, 그만 갈래요." 그녀는 바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토플레가 그녀를 굳건히 붙잡았으니까. 눈은 마치 그 주위가 밝아올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소녀, 아니 소녀처럼 보이는 인어가 양성체다라는 말이로군. 호오‥ 호오‥." "놔줘요!" 인어 소녀는 후회했다. 난간에 서있던 두 사람의 기운만 느꼈을 뿐, 선실 안에서 그녀를 실험재료로 생각하는 마녀 와 의사가 버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눈물마저 글썽이는 소녀에게 마음이 흔들린 아리에가 사악한 인간들을 밀치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만 해요.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텐데‥ 완전히 '인간은 인어의 원수야'라고 가르칠 셈인 가요?" "그래그래. 그만들 하게. 배에 올라온 손님이 아닌가." "토루반‥ 들어가서 더 쉬고 계시지 왜 나오셨습니까?" "아니야. 누워있어도 어차피 흔들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네. 그나저나 세람류 중에 바다의 종족을 만나는 건 오 랜만이로군. 반갑네, 인어 아가씨. 하지만 곧 헤어져야 겠군. 토플레, 어서 놔주지 않고 뭐 하는 거요? 회라도 뜰 생 각인가?" 토플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회라도 떠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인어의 고기는 그야말로 황금의 가치라 지 않는가. 비늘은 장식품이며 심장은 불로장수의 힘이 있다고 한다. 그의 눈에 인어 소녀의 몸은 금덩이로 비추고 있었다. 손을 싹싹 비비며 토루반에게 다가간 의사는 배멀미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득히 심 어 말을 건넸다. "인어는 바다를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순수하기로 이름높은 양성의 인어는 그 힘이 뛰어나 이 고물같 은 배의 승선감을 아스틴네글로드의 고급 마차의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인어들과 안면도 있 으시니 양해를 구하고‥." 토루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차도 그에게는 불편했지만 그래도 폭풍 속에서 요동하는 배보다는 수 백배는 나 았다. 토루반의 기대를 눈치챈 토플레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인어들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육지 정도까지만 가서 놓아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괴 롭히는 사막의 전령은 그 때까지도 세차게 몰아대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다에 놓아주기만 하면 누구도 그녀를 잡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그냥 편안한 승선감을 위해!" '위해!'라고 토루반은 함께 외칠 뻔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표정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선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동안의 위액이 목을 망가뜨려놓았기 때문이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이지?" "레스난 호린." "이 친구들이 자네를 강제로 잡았을 리는 없고‥ 무슨 일로 이 배에 오른 건가?" 레스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헬쓱한 드워프 노인은 이야기가 통한 것 같았고 드워프는 인간처럼 인어를 먹지 도, 팔지도 않는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목소리는 최대한 흔들리 게, 그야말로 애처로워 고개를 돌리도록 그녀는 육지로 가고 싶은 감정을 토로했다. 잘빠진 미녀(?)가 자신의 키에 허리 정도인 난쟁이에게 안겨 우는 모습은 정말 심금을 긁어놓았다. 체력이 다 빠져버린 토루반으로서는 그녀의 무 게는 가빴다. "걱정 말거라. 우리가 너를 데리고 가주마. 그, 그런데 좀 떨어지거라." 바람으로 인해 귀가 밝은 시즈는 토플레와 토루반의 밀담을 듣고 있었다. 설마하니 토루반이 실행에 옮기리라고 생 각지도 못했는데‥ 시즈는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그만두었다. 토루반은 삶을 향한 절실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토루반의 배멀미 없는 안락한 바다여행이라는 바램은 순조롭게 이루어져갔다. 그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선실 속에 울리는 웃음소리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선원들도 현재의 상황이 돛을 조종하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아하하핫! 과연 대단하군. 인어의 마력이란‥. 세람류를 통틀어서 마력이 가장 강한 종족은 인어라더니‥ 틀린 말 이 아니었어." 레스난은 울상이었다. 바람이 너무 강하여 동물들로 하여금 배를 고정시키거나 끄는 것 정도로는 배의 요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북극 중에서도 심연의 바다에 산다는 백색 고래의 아가미 가루에 바닷물을 섞어서 후― 하고 불었다. 인어 소녀의 손에서 일어난 거품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배를 완전히 감쌌고 그녀의 울음이 배인 주문 에 따라 배는 수면으로 파고들었다. 수면 아래는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백 색 고래의 아가미 가루는 드래곤에 비례하는 수명이 다한 지 하루 내에 꺼내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보물 중에 보물 이었다. '괜찮아. 육지로 나가는 댓가라면 이 정도는 싼 거지.' "이거 먹어볼래?"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은 아리에였다. 비록 하루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누군든지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닌 이였다. 처음에는 경계했던 레스난도 아리에가 자주 건네는 빵과 과자에 결국 넘어가 버렸다. "딱딱해." "그래?" "하지만 맛있어." 아리에는 알지 못했다. 새 친구가 얼마나 많은 위험 속에 갖혀있는지를‥. 그저 토루반과 토플레와 파마리나의 열변 (熱辯)에 시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제압 당했다는 것만 눈치챘을 뿐이다. 설마하니 그들이 귀여운 레스난을 가르 고 잘라서 굽고 삶은 후 먹고 바를 생각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 때까지도 토루반의 소박한(?) 바램은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33 악장 상식을 무시할 정도의 믿음으로 (6) "그만둬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 에요." 아리에는 귓가를 찌르는 악에 마친 외침에 잠이 깼다. 멀미를 느끼지 않으니 지금까지는 지쳐서 정신을 끈을 놓았 던 것과는 다르게 포근한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달콤한 꿈을 누가 깨웠는지 궁금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 다. "무슨 일이야?" "아리에? 왜 더 자지 않고 나왔어요? 피곤했을 텐데‥." "밖이 소란스러워서. 잠이 안 와." 소동의 범인이 아닌데도 시즈는 미안한지 아리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여 그가 잠의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고 아리에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인어의 무리가 레스난을 찾으러 온 모양이에요. 지금 토루반, 토플레들과 대화 중이에요." 웃으면서 전하는 시즈의 말과는 달리 아리에의 눈에는 전혀 그들이 대화한다고 보이지 않았다. 귀가 아플 만큼 소 리를 지르는 인어들과 그 가운데서 도끼까지 빼든 토루반을 어떻게 오붓한 대화의 일종으로 판단하겠는가. 그녀는 시즈의 시력이 좋아졌는지 의심이 생겼다. 한 편, 토루반은 도무지 얘기가 통하지 않는 인어무리들에게 짜증이 솟기 시작했다. 토플레는 지치지도 않고 설득을 계속했고 레스난은 부모로 보이는 인어에게 육지로 가고 싶은 욕망을 호소했지만 인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드워프 사상 유례없이 온화한 심성과 냉철한 이성을 지닌 토루반이었지만 며칠 간의 멀미는 이미 드워프의 본성으 로 돌려놓은지 오래였다. 도끼를 빼어든 그는 옆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인어 소녀(?)를 끌어당겼다. "너부터 조용히 좀 해! 그리고 당신들도! 자아‥ 이 꼬마가 다치는 게 보기 싫으면 어서 비켜. 딸래미, 아니 어쨌든 자식이 날도 안 선 도끼날에 회쳐지는 게 보기 싫으면 어서!" 무기를 잘 다루는 드워프의 입장에서 날이 안 섰다는 말이 나오지 인어들의 눈에는 도끼는 얼음장보다도 차가울 듯 한 날을 시퍼렇게 세우고 있었다. 레스난도 갑작스럽게 목에 느껴진 섬뜩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다는 고요해졌다. 가끔씩 부드럽게 지나가는 어류들만이 시간이 멈춰있지 않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럴수록 토루반 의 배틀엑스를 쥔 손을 힘을 더해갔고 레스난은 애절한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배를 막았던 인어들은 하나 둘씩 비켜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돌고래들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듣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올 듯이 애절했다. "흑‥ 흑흑." "그만 울게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다리를 붙잡는 갈고리를 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게." 그렇게 말했지만 토루반은 일행과 자신의 평안을 위해 그녀를 희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자 죄책감이 들었다. 아스틴 네글로드, 대륙에서도 현자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있는 걸까라는 자괴심이 그를 괴롭혔다. 어쩌면 레스난이 울음 을 멈추지 않아서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끝내 그녀가 울음을 멈추기보다는 대성통곡을 하자 토루반은 시무룩해져 선실로 들어가버렸다. 카이젤이 얼굴을 찌푸리고 레스난에게 걸어왔다. "그렇게 슬프다면 돌아가라. 이제는 배멀미보다 네 울음 소리가 더 견디기 힘들다. 그렇게 슬퍼할 거라면 왜 육지를 그리워했지? 돌아가면 될 게 아닌가. 어서 돌아가 버려라." 등을 돌리는 그의 눈에 시즈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마 그 또한 카이젤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레스난이 상처를 입을까봐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젠티아의 말로는 제법 냉정해졌다고 하더니, 나약한 심성이 그대로군. 그 특유의 바보 같은 분위기는 없어졌지 만‥.' 감정을 알 수 없는 유리 눈동자 때문인지도 몰랐다. 현자라고 이름 높았을 때보다 현재가 오히려 현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시즈?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카이젤이 모습을 감춘 후 아리에가 물었다. "카이젤의 말이 재미가 있어서요. 누구에게나 하는 말이니까요. 고통스럽고, 슬프고 견디기 힘들면 돌아가라. 누구에 게나 통용되는 말이죠. 상식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 오기를 부리는 모양이에요. 저 렇게 말이죠." '저렇게'라는 대명사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어, 레스난이라는 것은 아리에도 쉽게 알았다. 때는 밤이었다. 어둡 게 일렁이는 바다 속에서 올려다보는 별빛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살구꽃 같은 밤, 또 한 사람이 상식을 무시하면서 일어서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생물은 누구나 조금씩은 상식을 무시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지도 모릅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1) 뜻하지 않게(?) 넘실대는 파도 아래로 바다구경을 바친 그들은 아무도 없는 절벽의 땅에 발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이는 육지는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음에 레스난은 실망했지만 차갑게 불어온 밤바람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한류(寒流)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인식했다. '여기는 육지구나‥.' 원래대로라면 도착하자마자 푸른 들판에 몸을 뒹굴며 환호성을 지를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생각은 시차 로 인하여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은 되야 할 듯 싶었다. "과연‥ 남쪽은 따뜻한 걸. 음‥ 아닌가?" 보를레스는 상쾌한 듯 가슴을 피다가 오들거리는 레스난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깊은 바다에서 살던 그녀는 육지 의 심한 기온 차에 대항할 면역성이 없었다.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주자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레스난. 그녀는 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어주는 보를레스가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군. 혹시 배에서 지도를 가져왔소?" "여기 있습니다." 피브드닌의 말에 준비성 좋은 사론이 얼른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사방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들은 지도 주위에 앉 았다. 역시 지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실베니아의 사람인 카이젤이었다. "수도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이 상태에서 북쪽으로 곧장 올라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대도시라고 할 수 있는 낭아플에서 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죠." "그냥 마을에서는 마차가 안되나?" "실베니아는 엘시크 육상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왕복하여 이 주일에 가까운 거리를 태워다주려 하겠습 니까?" 레스난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회의보다는 타오르는 불꽃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녀의 어머니 는 말하기를 불꽃은 육지에만 허락된 축복이며 동시에 저주라고 말했다. 생물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 불을 인간은 개발하였으며 그로 인해 고작 원숭이의 진화류를 뛰어넘어 영장이라는 자리에 도달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힘의 춤에 순진한 어린 인어는 푹 빠져 눈을 떼지 않았고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갔다. "안돼!" "???"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토록 예쁜 것에 닿는 것을 왜 맞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막은 손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레스난이 먼저 고개를 돌려야 했다. 상대는 냉랭한 눈빛의 카이젤이었으니까. 회의는 끝났는지 사람들은 하 나 둘씩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에 잠겨있었다. 입이 뾰죽해진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이쁜데‥." "바다에서는 예쁘면 무조건 손을 들이대는 모양이지?" 투덜거림조차 허락하지 않는 카이젤이었다. 일행은 카이젤이 제시한 방법 중 곧장 수도, 펴온으로 올라가는 방향을 택했다. 가장 신이 난 건 토루반이었다. 사 흘동안 쉬지 않고 걸어서 대부분 녹초가 되었건만 그는 폴짝폴짝 뛰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견실한 세일피어론아드의 밑받침. 이 발이 닿는 자리마다 천년 만년 굳건하니 절벽에 해일이 몰아친들 물러섬이 있을 소냐. 혹시나 지진이 일어난들 멀미는 느껴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지상의 축복이로다. "토루반, 말은 안했지만 처절했었군." 자리에 주저앉으며 토플레는 중얼거렸다. 등을 비롯하여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좀 쉬었다가 갑시다. 아무리 '역사의 고리'인지 뭔지가 두렵다지만 너무 강행군이야." "하하핫. 겨우 그 정도의 녹초가 되다니 역시 의사들이란 연약하기 짝이 없군. 자기 몸 간수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 을 치료한다니 모순이야." "이봐. 고명하신 학자선생. 자네의 떨리는 다리나 어떻게 주체를 해주시지." 토플레가 가리킨 다리를 피브드닌은 연신 주물렀다. 토루반을 따라다니면서 제법 근육이 생긴 다리였지만 사흘을 쉬지 않고 걸은 것은 무리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이제껏 처음 육지를 밟은 레스난에 비하면 자신은 강철처럼 튼튼하다고.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요." 아리에는 레스난의 다리를 토닥거리며 물었다. 물론 대답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화난 멍게처럼 탱탱하 게 부풀어 있었으니까. "아직도 남은 거리는 온 것보다 많아. 이 정도에 주저앉으면 안돼. 사정을 봐주는 것도 어느 정도라고." 말도 안돼. 레스난은 냉정한 카이젤의 말에 울상을 지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막 생겨난 다리가 과도한 운동으로 파 열지경이었는데 그는 사정을 봐준 거라는 기가 막힌 주장을 펴는 것이다. 피브드닌이 거친 숨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요즘 상인은 다리에 철이라도 박아 넣었나? 왜 저렇게 쌩쌩해." "젊어서 그런 거야." "그럼 저 사람은?" 토플레는 피브드닌의 손가락이 다리를 구르며 이상한 동작을 연발하는 토루반을 가리키자 답변을 잃었다. 과연 점 잖던 드워프의 현자는 어딜 갔는가. 시선을 느꼈는지 토루반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소곳이(?) 가까운 바위에 걸터 앉았다. 체력이 약한 이들이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사론은 지도를 펼쳐 놓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4km만 더 가면 츠키롤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작지만 대륙 지도에 표시되었을 정도면 휴식할 장소 정도는 있을 겁니다. 들으시겠습니까?" 일행의 과반수가 찬성의 환호를 외쳤다. 보를레스와 카이젤이 투덜대고 불만을 표시하자 '강하다면 약한 사람도 생 각할 줄 알아야 하나의 일행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라며 토루반이 엉덩이를 두들겨댔다. * * * "아무래도 그대의 예상은 틀린 듯 하오." "그렇군요. 인정합니다. 역시 '마땅찮은 시즈'와 아스틴네글로드의 생각을 따라잡는데 저로서는 무리였나봅니다." "너무 그렇게 자학하지 마시오.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이 아니오.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이니‥" 고개를 숙인 로길드를 로진스는 위로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감에도 소년은 그리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틀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가슴을 펴며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음의 계략을 짜봅시다. 이미 빗나간 화살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오히려 해맑은 웃음에 위로한 로진스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옆자리의 노르벨이 입을 열었다. "'고리의 신비' 수장께서 무안해하시잖아. 예의상 좀더 시무룩해보라고. 아니면 뭔가 사과의 표시가‥." 어쩔 수 없군. 그의 혀가 낼름거리는 걸 잠시 지켜보던 로길드는 푸른 눈동자를 긴 속눈썹으로 살짝 가리며 미소지 었다. "이런‥. 이번 임무가 끝나면 펴온의 고급 음식점에서 주머니를 털겠습니다. "좋았어. 회의를 진행하라고. 로길드가 혹시나 틀린 생각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난 다 눈감아줄 자신이 되어있어." "저기‥ 그럼 오히려 곤란합니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노르벨님께서 무슨 생각이 있으신 듯 하군요."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2) 노르벨은 '괜찮아, 괜찮아'하고 얼른 회의를 진행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예상이 빗나갔 다는 게 큰 걱정거리는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인즉 일명 전략가라고 칭해지는 이들은 전쟁이나 자잘한 전투, 그리고 암투에서 실패를 예측을 하기 위한 과정으로 두기 때문이다. 로길드의 밝은 표정도 그들과 같지 않다면 나 올 수 없다는 걸 자리의 앉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제 소년이 제대로 된 전략가인지 그리고 계략가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탐색하는 눈초리를 웃음으로 받아넘긴 로길드는 지도를 지휘봉으로 하나하나 짚어 설명을 시작했다. "그들이 강풍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동부 해안에 내렸다면 저희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박멸되었을 게 분 명합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만 그들은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혹시나라 는 말에 대해 대비를 해두는 법이겠지요. 아마도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기사와 병사를 분포시킨 사항에 의 문을 가진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들의 행로가 우리 눈을 벗어났다는 말은 대 륙 동부은 우선 제외해야겠지요. 그리고 낭아플의 항구와 마차의 감시에서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 남은 길은 둘 뿐 입니다. 걷고 뛰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늘을 날아가는 것. 상식이라는 것은 착오가 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죠. 상식 중에서도 당연하다고 지칭되는 부분을 두 번이나 벗어난다면 저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지. 음유술사들이 아무리 인간 같지 않다지만‥." 바스티너의 중얼거림은 작았지만 모두의 귀까지 끊이지 않고 도착했다. 그러자 건너편의 노르벨이 이죽거렸다. "나는 당신이 더 인간 같지 않습니다만‥." "칭찬 고맙군." 그들의 대화를 듣던 로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좌중이 잠잠해지자 로길드는 말을 계속했다. "그들은 걷거나 뛰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로진스님은 휘하의 마법사들과 먼저 수도로 가주십시오. 그들은 걸음이 우리의 눈에 걸리지는 않지만 느리다는 약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수도에서 최단거리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겠지요. 그 진행방향으로 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온천이 유명한 츠키롤의 반경 30km 내에 와있을 겁니 다. '원의 힘'이 도착할 때까지 그들의 발을 조금씩 늦춰주십시오. 막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큰 피해만 남길 뿐이니 까요." "너무 나와 수하들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하‥ 설마요. 좀더 확실한 승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들었을까? 로진스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번져나갔다. 단, 바스티너만 빼고. * * * "크으‥ 시원하다‥." "정말입니까, 토루반?" 바다에서는 완전히 굴러다니는 드럼통이었던 토루반이었으나 현재는 무척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양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를 받친 채 다리를 꼬고 배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는 그에게 피브드닌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첨벙하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 "으음‥ 과연 여기 온천은 좋군요. 유명한 값을 하는 모양입니다. 아주 시원하군요." "그렇지? 흐흐 오랜만에 유황냄새 풍기는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구만‥." 흐뭇한 웃음을 흘려대던 토루반은 아직도 발을 슬쩍 담그며 머뭇거리고 있는 피브드닌과 블리세미트를 슬쩍 올려다 보았다. "뭐하나? 들어오지 않고?" "뜨겁지 않습니까?" "에잉― 그렇게 소심하다니 남자들이 아닌가."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나이를 먹은 노인들은 피부가 두껍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헛된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저길 보게나." 블리세미트는 수건 한 장으로 가린 모습 자체가 부끄러운 모양인지 피브드닌이 움직이다가 건드린 것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토루반이 가리키는 뜨거운 김이 서린 곳 깊숙한 자리에 그가 있었다. 블리세미트의 입에서 한숨처럼 한 이 름이 흘러나왔다. "시즈 님‥." 뿌연 색의 김과 머리카락이 은근히 감싸는 그의 얼굴은 술에 취한 듯 약간 홍조를 띈 채 탈속한 듯한 느낌을 주었 다. 무척 익숙한 것처럼 수건을 머리 위에 올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긴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새하얀 빛깔이었다. "머리까지 기니 꼭 여자아이 같군. 어때? 시즈는 충분히 젊지? 저 녀석 의 얼굴이 뜨거운 인두에 지져지는 듯한 표정이냐? 내가 보기에는 흔들의자에 앉은 것 같구먼‥. 자아‥ 증거는 보 여주었으니 어서 들어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루반은 블리세미트의 발을 잡아당겼다. '으앗!'하는 소리에 이어 풍덩하고 웅덩이에 파문이 일어났다. 힛힛힛하고 웃어대는 드워프가 부러웠는지 토플레는 곧바로 피브드닌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똑같은 상 황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아악!" 어느 비명이 이토록 처절할 수 있단 말인가. 갸냘픈 여인의 비명이 아니라는 데서 남다르게 소름끼치기는 했지만 누군가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듯한 비명이었다. 멀리 건너의 탈의실에서 나와 물에 몸을 담그던 보를레스와 사론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시즈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아마도‥." 하고 시즈가 미소지었다. 온천물이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데 아주 적당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3) "끄아아아아아아악!" "저게 무슨 소리지?" 막 물에 몸을 담그려던 아리에는 멀리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몸을 얼른 물 속으로 숨겼다. "걱정할 것 없어. 여기는 산지가 아니라서 몬스터들이 있을 리가 없어. 아마 남자들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야. 그 나 이들을 먹어서는‥." 파마리나가 수건을 두른 채 빗자루를 타고 아리에 옆에 발을 담갔다. 정말이지 편리한 빗자루였다. "안 뜨거워?" "아, 네. 적당해요. 레스난은요?" "아? 벌써 들어갔는데!? 어디있지?" "여기요." 파마리나는 바로 아래에서 레스난이 머리를 불쑥 내밀자 놀라 뒤로 벌렁 넘어갔다. 풍덩하고 잠시의 고요가 있은 후 그녀는 이빨을 갈아대며 일어섰다. "후후후‥." "죄, 죄송해요." "어차피 몸에 좋은 온천까지 왔는데 이 기회에 인어고기로 몸보신까지 하고 말테닷!"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멀리 떨어져있어서인지 그 소리를 길게 메아리쳤다. 무슨 일인가하여 시즈가 벌떡 일어섰지만 보를레스는 그를 잡 았다. "걱정말라고. 이런 곳이면 여자들은 장난을 치기 마련이지. 쯧쯧 나이들이 몇인데‥. 그런데 시즈‥." "‥‥." 시즈는 순간 숨을 멈췄다. 보를레스의 분위기가 검을 겨눴을 때처럼 진지했기 때문이다. 보를레스는 손을 놓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론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보기보다 건실한데‥." "예. 놀랍습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시즈는 귀가 좋았다. 바람을 이용한 게 아니라 에릭사로 몸을 회복시킨 후 근육을 비롯한 감각기관의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인간의 몸에서 향상되어 봤자 인간이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훈련 등을 통하여 강화 되는 것은 몇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심장, 폐의 기관과 신경계, 근육계, 감각계가 모두 향상되었을 때의 능력은 보 통 인간의 몇 배에 달한다. 그게 시즈가 연약한 몸을 가지고서도 보를레스 등의 검사들에 비견, 아니 이상 가는 힘 을 발휘하는 이유였다. 어쨌든 보를레스와 사론의 밀어(密語)(?)를 듣게 된 시즈는 얼굴이 온천에 오래 있어 탈진한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보를레스는 그가 들을 걸 알고서 속삭인 게 틀림없었다.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부른 보를레스는 화를 내는 시즈를 휙 돌아보았다. "뭐야!? 들었냐? 하하‥ 칭찬이야 칭찬. 왜소한 것보다야 건실한 게 좋지. 그래야 아리에와‥." 시즈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지 잠수를 해버렸고 보를레스와 사론은 껄껄대기 시작했다. 토루반들은 물 밖으로 내 놓은 머리만 돌려서 그 쪽을 쳐다봤다. "재미있는 일이 있는가보군. 그나저나 온천은 오랜만이야. 피로가 풀리는 걸‥." 토루반은 오래 걸어서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자 말끝을 느긋하게 흐렸다. 그러나 온천이 처음인 블리세미트는 피로 가 풀리는 느낌도 꺼림직한지 안팎을 들락거렸다. 그게 뜨거움을 참고 있는 피브드닌으로써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 었나보다. "블리세미트 사제. 좀 한 군데 가만히 있으시오. 정신이 사납소." "허허‥ 익숙치않아 그렇지. 나이가 있는 자네가 참게." "토루반은 바다에는 질색하면서 같은 물인 온천에는 오히려 활개를 치시는 겁니까? 매우 익숙하신 듯 싶군요." 피브드닌은 토루반이 온천에 빠져 허우적대기라도 하면 좋을 것처럼 투덜거렸다. 그의 음성이 불만에 차있다는 걸 알아챈 토루반은 더욱 약올리려는지 키득거렸다. "미안하지만 익숙한 게 당연하지. 드워프들은 땅을 파며 살아가는 종족이네. 그리고 보석과 유황을 캐지. 유황이 있 는 곳은 대부분 화산이고, 화산에서는 온천이 성하기 마련이야. 우리는 광산에서 일하고 노곤해진 육체를 온천에 담 가 다음 날이 기약하는 게 습관화 되어있다네." "고향에 온 느낌이겠군요." "그래. 현재 쫓기고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까요? 아무리 이런 작은 휴식이 그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미화시키긴 했지만, 역시 불안하군요." "믿어봐야지. '마땅찮은 이'의 생각을‥." 토루반들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자들은 열심히 서로에게 물을 튕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역시 몸의 동작이 가 장 날쌔고 자연스러운 아리에의 빠르기에 당하지 못하는지 나머지 소녀와 여인은 얼굴을 찌푸리고 허우적거렸다. "으윽! 아리에 너무 잘해요!" "후훗, 능력이야, 능력!" "그, 그렇다면!" 레스난의 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리에와 파마리나가 손을 멈춘 사이 그녀는 물 밖으로 드러낸 꼬리지 느러미를 흔들며 빙긋 미소지었다. 그리고‥. 파악! 촤아아아아아아악! 사람 높이까지 일어나는 파도가 온천에서 일었다. "콜록!콜록!" 물에서 어떻게 인어를 당할 수 있으리.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몰아쳐오는 물살에 속수무책으로 물을 먹었다. 그렇다.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어들이 물 속에서 살아가니 괜찮겠지만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숨쉬기 곤란할 정도였다. 그리고 파마리나가 끝내 폭발했다. "이 꼬마 생선! 가만두지 않겠어! 창조의 물이여‥ 심연의 물이여‥ 나의 의지에 따라 손가락이 가리킨 이를 멸하 랏!" 나선형으로 꼬이며 파마리나의 양손을 따라 솟구치는 물줄기. 상당한 회전에도 불구하고 물이 튀지 않는 게 맞으면 큰 안마효과를 줄 게 분명했다. 레스난은 움찔했다.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듣던 미소가 파마리나의 입가에 흐르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녀의 미소'였다. "자, 잠깐만요. 그렇다고 마법까지 쓰다니‥. 끼악! 끼아아아아아악!" 적의 추적으로부터의 잠깐의 휴식. 휴식의 하루는 레스난의 비명에 묻혀 지나가고 있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4) 아침이라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정의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정의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달리 말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고 가끔은 사람들의 사정과 습관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면 습관에 의해 굳어진 아침과 사정에 의 해 필요해진 아침이 충돌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알아보도록 하자. "레스난! 일어나요! 레스난!" "우우‥ 아리에? 왜 그래요?"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레스난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창 밖이 어두캄캄했다. 깊은 물 속에서 생활하면 시간이 적은 빛에도 신체적으로 민감해져 신체리듬을 만들기 때문에 그녀는 몸의 상태를 거부하지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푹 박았다. 그러자 아리에 의 다그침이 그 뒤를 따라 베개의 가려진 그녀의 귀에 파고들었다. 레스난은 반항을 시작했다. "아침 아니에요. 하늘이 까매요. 아침 아니에요. 밤이에요." "그래서‥ 못 일어나겠다는 건가요?" 아리에는 엉덩이를 세우고 이불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아닌 소녀를 어찌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일어난 눈동자를 보아하니 눈이 풀려있는 게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할 듯 싶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파마리나를 부르는 수밖에‥." 벌떡. 동양의 좀비라는 강시를 연상케 하는 동작으로 레스난은 몸을 일으켰다. 보를레스가 보았다면 그녀의 움직임 이야말로 고속 이동술의 시초라는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를 정도의 빠르기였다. "자, 잠깐만요. 아리에 일어났어요. 레스난 일어났어요." 역시 어제의 마법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수면에 배를 뒤집고 기절했었던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우선 파마리나에게 서 안전 거리를 확보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아마도 마녀들이 마음만 먹으면 인어들을 실험재료로 써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어기적어기적하며 세수를 한 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별빛이 총총하여 아침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만 이 미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감히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다. 갓난아이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녀에게 시즈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저희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서요. 그게 끝나면 당신의 여행을 도와드리기로 하겠습 니다. 그 때까지만 좀 참아주세요." "흥! 말은 누가 못해?" 레스난은 이상하게도 아리에의 연인인 시즈가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거나 부드러운 목소 리를 들을 참이면 몸의 신경들이 위험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른다. 시즈에게 서 풍겨오는 존재감은 고대 세람류의 종족들이 숭배했던 자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다가설 수 없었고 다가오는 것조차도 그녀는 무서웠다. 마녀 파마리나보다도‥. 레스난은 자신도 모르게 블리세미트와 카이젤이 있는 곳에 붙어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시즈는 피브드닌에게 물었다. 아직 모습이 모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피브드닌, 사론과 보를레스가 안 보이는데‥." "글세‥ 늦을 사람들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그 때였다. 보를레스가 꼬리를 불에 데인 강아지처럼 부리나케 달려온 것은. 뛰어오면서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지 손과 표정에 허둥거림이 역력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작 도착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이 차 헥헥거렸다. 한심 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토루반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그리고 사론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지?" "대형 마차가 있습니다. 수도까지 갈 수 있는 마차가 말이죠. 제대로 된 도로가 없어서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걷어 서 가기보다는 훨씬 무난합니다. 지금 사론이 길드에서 운삯을 흥정하고 있어요. 불경기라서 할인도 가능하다는 군 요." 그의 말이 계속 진행될수록 토루반의 얼굴은 점점 침울해져 갔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은데‥."하고 말끝을 흐리는 토루반은 어쩌면 '걸어서 가자.'고 항변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러나 환호하며 보를레스의 뒤를 따라나선 이들은 중에는 자신들의 시야를 낮춰 토루반에게 아무도 신경을 기울이 지 않았다. "휴우‥ 그래. 옛날부터 조상들이 키가 큰 종족들은 상종 못할 것들이라고 종종 그랬었지. 옳은 말이었어." 투덜대면서도 토루반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일행을 쫓았다. 보통 기사들하면 융통성없는 자부심으로 뇌부터 심장의 조직까지 하나하나 뭉쳐져 상업적인 기질이라고는 전무하다 시피 했지만 그 안에서 사론은 제외였다. 몇 번 이야기를 건네 보았던 카이젤이 입맛을 다실 - 결코 이상한 의미가 아니다 - 정도로 흥정 수완이 탁월하여 웬만한 장사꾼도 그에게서는 큰 이익을 얻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즉, 장사를 해서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보를레스가 일행을 끌고 올 쯤하여 이미 마부와의 얘기를 마치고 기다리던 사론은 보를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소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였다. "무슨 사내가 그리도 해맑게 웃는 거야?" 가장 먼저 달려온 파마리나가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겸연쩍게 머리를 긁는 사론의 모습은 눈을 빛 내며 장사꾼들을 제압하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저토록 해맑은 모습이 흥정에서 상당한 (+)작용을 이 루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차는 컸다. 제법 사람이 되는 시즈 일행이 전부 올랐는대도 자리가 남을 만큼. "이거 아무래도 꼭 농장에서 짚을 나르던 마차 같군." "어때? 호화롭지 않지만 감지덕지지." 불만스러운 듯 찡그리는 피브드닌에게 토플레가 독침 쏘듯이 내뱉었다. 확실히 귀하신 학자분이었던 사람들의 마음 에는 차지 않는 마차였다. 그러나 짚단을 듬뿍 깔아 오랫동안 앉아있어도 그리 불편하지 않을 듯 싶었다. 막 마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두 명의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올라탔다. "어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이것 보라고. 내가 아침은 조금만 먹으라고 했잖아. 가다가 휴게장소가 있다고 했잖아." "놓치지 않았으니 됐잖아. 난 배고픈 것은 못참는다고." 시즈는 그 새로운 사내들을 보는 순간 흠칫했다. 안면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두 사내 중 하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얼른 외면하는 시즈. 그의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흰 복장의 가운 을 입은 사내, 즉 츠바틴은 내심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저 녀석 이상한 외모 주제에 남자를 보고 얼굴이 벌게졌어. 설마‥ 말로만 듣던‥!?' 그리고 그는 더욱 자세히 시력을 키웠다. 시즈는 그가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동안 주위의 일행은 한동안 같은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 누고 있었다. "엘시크에서 온 노리스라고 합니다." "검사시군요. 검이 매우 좋아 보입니다. 전 보를레스라고 합니다." "하핫, 눈이 좋으시군요. 검집에 녹칠을 해놓아서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데‥." "저도 검사니까요."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차가 시끄럽도록 떠들었다. 여자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 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노리스와 보를레스 어느 쪽도 그런 데 신경을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만하면 혀의 물기도 모두 말라버렸으리라 생각될 쯤 노리스는 불편해보이는 인상을 유지한 츠바틴을 툭툭 건드렸다. "이봐. 왜 그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이미지가 좋지 않다고." "노리스, 노리스. 저 녀석 말이야." "저 특이한 머리카락을 가진 친구 말이야? 왜? 해부용으로 갖고 싶나?"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틀림없어 저 녀석은 분명 변태라고! 그것도 남색이 틀림없어!" '정말인가?'하고 노리스는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츠바틴에게 한 마디 했다.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나기 때문에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노리스는 다시 보를레스와의 검 재질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자신의 진지한 의견이 묵살 당한 츠 바틴은 배신감이 가슴 속에 사무쳤다. '어떻게 해서든 내 의견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말 테다.'하고 그는 꿇어져라 시즈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변태'라 고 규정지은 사내의 얼굴이 가끔씩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들던 청년과 겹쳐지는 걸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시즈의 곁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츠바틴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시즈를 향해 손을 뻗자 움찔했다. 동시에 보를레 스와 사론 등의 검사들은 경악했다. 둘러가며 쓸어봐도 유약하게만 보이는 사내가 기척도 없이 시즈을 꽉 안아버렸 기 때문이다. 놀라 경계를 발동한 그들은 츠바틴이 하는 말을 듣고 곧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 "살아있었군. 그토록 작게만 보이던 녀석이‥ 살아있었어. 하하핫." 그가 자신을 기억해내자 시즈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노 리스가 츠바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봐, 자네. 갑자기 남색으로 취향을 바꾼 건가?" "이 바보야. 모르겠나? 시즈야. 이 녀석은 시즈라고. 손에서 놓아버리면 죽을 것 같던 그 약한 녀석이야. 하하핫!" "정말인가?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오랜만입니다, 노리스." 노리스의 몸이 경직했다. 자신의 호통을 들으며 '녀석'이 힘이 없는 표정에서도 검술의 요점을 물어오던 음성이었 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커져갔다. "하하하‥. 그렇군. 츠바틴, 지난번에는 별 거 아닌 듯 말하더니 무슨 수십 년 만에 아들 놈 상봉한 것처럼 껴안아 대는 건가? 어차피 걱정할 필요 없었던 녀석이었어. 그나저나 멋지게 성장했군. 여전과는 다른 생명력이 넘치는 게 보인다." "감사합니다." 칭찬이 수줍은 듯 시즈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즐겁게 노리스는 껄껄거렸다.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았어. 하하하핫!"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5)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지요?" 로길드는 보고서에 붉은 글씨로 줄이 쳐져있는 이름들을 가리켰다. 그의 뒤에서 노르벨이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대 답했다. "아! 그 아저씨들. '원의 힘' 총수들이야. 로길드도 알아둬야 할 걸. 사실 '원의 힘'이라는 무리는 고리의 단체 중 전 체적으로 따졌을 때 가장 파괴력이 약하지. 하지만 그 붉은 줄의 아저씨들이 없었을 때의 얘기라고. 특히 츠바틴이 라고 불리는 아저씨는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로진스 씨 같은 마법사가 아니라 전술의 마법사야. 전법들이 신 출귀몰해서 그야말로 상대는 '원의 힘'의 기사들이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지." "대단하군요." "그럼! 대단하고 말고. 자네나, 로진스와는 달리 그는 출신이 불확정하기 때문에 더욱 놀랍지. 그리고 노리스라고 하 는 아저씨는 고리 최강의 전사 중에 한 명이야." "최강이라‥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인데 바스티너님은 소속이 어떻게 되시는 거죠?" "부대장이다." "예?" 갑자기 들린 퉁명스럽고 차가운 대답. 바스티너는 붙어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멀리 떨어져 걷고 있었음으로 로길 드는 그의 귀는 얼마나 밝은 것일지 계산을 해보았다. "바스티너는 '원의 힘'의 부대장이야." "누가 더 강하죠?" 반짝이는 호기심의 눈동자는 그가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의외라는 듯 피식하고 실소를 머금 었던 노르벨은 혹시나 귀를 세우고 있을 바스티너를 힐끗 돌아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었어." ------------------ "저 녀석 누구지? 강하잖아." 그 때 나는 바스티너를 처음 보았지. 아니 모두들 처음 보았을 거야. 당시에도 바스티너는 칠흙같은 감옷을 입고 있 었지. 주위까지 어둑어둑한 느낌을 주는 게 멀리서 보면 마치 진흙을 아무렇게나 몸에 바른 듯 했어. 보다시피 성격 이 거지같잖아? 그 때라고 다를 게 없었지. "크윽! 억!" 내가 막 잠에 깨어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검집 째로 상대를 후려갈기는 중이었지. -------------- "저기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다는 듯 로길드가 말을 잘랐다. 노르벨은 기분이 상한 듯 이마를 약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 다. "노르벨이 어디서 잤길래 고개를 들자마자 그런 걸 본 거죠?" "지붕."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여름에는 노른하게 온몸을 구워준다고." --------------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시비가 붙었나봐. 상대는 '원의 힘'에서 그 래도 제법 한가닥한다고 알려진 실력자였는데 막 들어온 신참이 화려한 갑옷에 분위기 잡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하지만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거지. 바스티너는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두들겼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봐준 거지. 요즘 같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거야. 하지만 안면이 없는 데 사람들이 알 리가 있나. "이 자식. 너무 심하잖아!? 이상한 갑옷을 믿고 그러는 거냐? 단숨에 부숴주지." 새로운 상대는 근육을 자랑하는 덩치에 거대한 칼을 들고 소리쳤어. 바스티너의 철투구에서 하연 김이 뿜어져 나왔 지. 아마도 코웃음이었을 거야. 잠시 후 그 덩치는 연병장 구석에 처박혀서 피 거품을 물었지. 바스티너는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약하군. 대륙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헛소문이었나? 이런 약한 녀석들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지." 말이 중얼거렸다는 거지. 솔직히 다 들렸어. 그리고 시작됐지. 바스티너 일인 대 '원의 힘' 기사들의 격돌이. 바스티너는 대단했어. 동시에 찔러오는 3개의 검을 갑옷으로 받았는데 몸을 살짝 돌려서 긁히는 정도의 충격만 그 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더군. 그 정도야 등 긁어주는 밖에는 안 되지. 내가 이제껏 많은 기사들의 갑옷 운용법을 보 았지만 그토록 능숙하게 사용하는 자는 바스티너만한 기사는 보지 못했어. 검사들이 검을 사용하는 것처럼 갑옷을 사용하는 직업이 따로 있는 듯 했지. 좌측의 사내에게 번개처럼 파고들어서 그대로 어깨 보호대로 그의 턱을 올리 면서 남은 두 명의 검을 검으로 막았어. 사내들은 미소지었어. 아무리 바스티너가 강하다고 해도 그들은 훈련에 인 색하지 않았으므로 힘으로 둘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지. 바스티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보았지. 그 비릿 한 미소가 기운으로 퍼지는 걸‥. 아마 정면으로 검을 맞댄 친구들은 소름이 돋았을 거야. 바스티너는 오른손은 검 손잡이에 왼손은 검집 중간으로 잡고 손 사이로 검을 막고 있었는데 검집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오른 손목 위에 얹으며 몸을 회전시켰어. 놀라운 광경이었지. 두 사내의 검은 검집을 내리꽂았고 바스티너는 빠져나간 거야. 그리고 결과는 그 때까지 패배자들과 같았지. 잠시지만 '원의 힘' 구성원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어. 하지만 곧 그들은 진 형을 만들어서 바스티너를 압박했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바스티너였지만 뛰어난 기사 수십 명에게는 당할 수 없 었지. 그를 쇠사슬로 묶었을 때였어. "무슨 일이야?" 정말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였어. 약간 둔해 보인다고 할까? 달려와서 사정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손바 닥을 다른 주먹으로 내리치고는 말했다. "간단하잖아. 신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윗옷을 벗었는데 누가 잡아끌었어. 뒤로 끌려가다못해 번쩍 들려진 그는 뒤로 휙 하고 날아갔 지. 던진 사람은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보이는 청년이었어. 청년은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던진 사내를 받은 사람 들에게 외쳤어. "츠바틴, 그 주정뱅이 좀 숙소에 데려다 놔." 그리고 바스티너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온 청년은 바로 털썩 주저 앉아서 분한 김을 뿜어대는 바스티너에게 말했어. "방금 전 주정뱅이의 말 들었지? 동의해?" "뭘 말인가?" 쇠를 갈리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음성에도 청년은 씨익 웃기만 했어. "자네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면 명령을 듣겠냐는 말이야." "어디에 있나?" "여기에 있잖아. 이름은 노리스이라고 해." 넉살 좋게 웃는 노리스를 바스티너는 말없이 바라보았어.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지. 역시 말만 중얼거렸다는 거지. "멍청이로군." "뭐!? 이 자식이 좋게 봐 줄려고 했더니! 야. 그 놈 사슬 당장 끊어." 참 성격파악하기 쉽더군. 그는 자기 영역에서 다른 곰의 오줌 냄새라도 맡은 불곰 마냥 길길이 날뛰었지. 바스티너 와는 불과 얼음 같은 성격의 차이더군. 그렇지만 싸움에 임하자 그의 동작은 물처럼 부드럽고 번개처럼 빨랐어. 선 공은 바스티너였지. 깡! 이라기보다는 쾅에 가까운 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어. 멀리서 듣고 있던 내 귓가가 울릴 정도로 컸지. 노리 스가 바스티너의 공격을 받아낸 거야. "제법이군." "크으‥ 너야말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라니 다른 녀석들이 애먹을만 하군. 이건 사람의 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강한 걸." 난 그 때 어이없는 의문이 들더군. 사람의 힘이 아닌 공격을 받아낸 사람의 근력은 뭐지? 여하튼 추리를 해볼 시간 도 없이 노리스의 반격이 시작됐어. 그의 검술은 용병들이나 쓴다는 동방의 검법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바스티너의 패도적인 검격은 조금도 노리스의 몸에 스치질 못했어. 오히려 공격한 바스티너가 자세를 못 잡고 뒤로 물러나거나 앞으로 기울어져 노리스에게 타격을 허용했지. 그렇다고 바스티너도 약하진 않았어. 그 상황에서도 최대한 갑옷을 이용하여 공격을 흘려보내더군. 계속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가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어. 하지만 공 격이 통하지 않는 걸 알자 노리스는 고개를 젖히고 바스티너의 검을 간발의 차로 피하면서 동시에 검을 놓은 손으 로 바스티너의 손목을 잡았어. 그리고 고릴라같은 몸집 주제에 원숭이처럼 부드럽게 바스티너의 팔에 몸을 얹고 회 전력을 실어서 돌려버렸지. ------------- 로길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요." "그래. 덕분에 바스티너는 몇 주일은 요양을 하고 '원의 힘'의 일원이 되었지." 직접 목격할 수는 없었지만 노르벨의 말로도 로길드는 충분히 붉은 줄의 사람들이 놀라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왕실의 보조역이자 참모역인 그에게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는 일이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 에도 중요한 두 사람에 대해 그가 빠뜨린 이유는 노리스와 츠바틴은 잠적한지 8년이 넘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한 차례 쓰다듬은 로길드는 붉은 글씨 위에 한 번 더 별 을 그리고 잉크병의 뚜껑을 닫았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6)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관리하시던 영지를 떠나오셨습니까?" 덜컹거리는 시골마차는 차분한 시즈의 목소리도 덜렁거리게 만들었다. 그가 알기로 노리스와 츠바틴은 심벌튼에서 뼈를 묻히고 살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엘시크에서 멀다면 굉장한 거리인데 말입니다." "아아‥ 빚을 갚으러 왔지. 빛을 갚을 사람이 있거든." 그런 이들이 세상으로 몸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찌 보면 평화로움을 망가뜨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오래 전의 일이신데 복수할 생각이십니까? "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싸워온 적이거든. 언젠가 시즈도 숙적이라는 사람이나 무리를 만나게 될 거야. 하긴 시즈라면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지도 모르지." "벌써 만들었는 걸요." "허허, 인기도 좋군. 도대체 누구야? 시즈의 숙적을 자처한 바보 같은 놈은‥." 그렇다. 노리스는 모르고 있었다. 그 바보에 이미 자신이 속해있다는 것을. 꿈에도‥. 그와 다르게 츠바틴은 상대해 야 할 숙적에 대해 고심 중이었다. 마차의 진동이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지워놓아서 골치가 아팠지만‥. 그의 마음 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무엇 때문이지?' 전술가로서의 예감일지 모른다. 시즈를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이런 느낌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적군의 총수이나 참모들인데 그들은 모두 내게 죽었지. 그런데 왜 시즈에게 서‥. 이름이 같아서 그럴 거야. 이름이 같아서‥.' 츠바틴은 '마땅찮은 시즈'가 로길드와 겨루고 있거나 낭아플에서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로를 생 각할 때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시즈, 마땅찮은 이에 대해 들었나?" "아아‥ 대륙의 현자라는 분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전 학문에 뜻이 없어서‥. 그래도 워낙 유명한 분인지라 여행 중에 들으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의 전직은 인형극이 아니었을까?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어이없는 눈초리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언제 저토록 능청 스럽게 변한 걸까. 이것은 아스틴네글로드들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시즈는 생각을 말함에 있어 정돈되고 논리적이었 으며 지혜가 많았지만 능청스럽지는 않았다. 아마도 값싼 남작과의 교류가 그를 흐려놓은 것이라 아리에는 짐작했 다. '그 성에는 다시는 가지 않을 테다. 시즈는 약간은 바보 같은 게 매력인데‥ 나중에 다루기도 좋고‥. 차라리 냉정 한 게 나아. 능청스러운 시즈라니‥.' 내심 눈물을 흘리는 아리에였다. 그런 심중을 알리 없는 시즈의 능글맞은 연기에 츠바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만났던 당시만 하더라도 시즈는 백치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속을 수밖에. "갑자기 왠 '마땅찮은 이'를?" "아‥ 네 이름과 같아서 물어본 거야." "설마 절 마땅찮은 시즈라고 생각하신 것은 아니겠죠? 하하핫." "그럴 리가 있겠나? 하하핫!" 어색해 보이는 웃음. 시즈는 양쪽에서 째려보는 여인들과 학자들의 눈빛에 얘기의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숙적을 만드신 겁니까?" "흐음‥ 만들기보다는 상대가 숙적이 되었다는 게 옳겠지.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거야." 츠바틴은 긴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츠바틴의 머리 속에 악몽처럼 자리잡고 있는 사건은‥. 그와 노리스는 세계의 평화 를 어그러뜨리는 어떤 집단에 대항하고 있었다. -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 과연 어느 쪽이 옳은 판단을 하고 있 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맹신하며 일어설 뿐. 맹신, 광신도처럼 변해갔다. 그렇지 않았다 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와의 전투를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 날 연병장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전 날, 훈련을 혹독하게 시킨다는 노리스의 강화 프로그램을 전원 완수 했기 때문이다. 노리스는 꽤나 호탕하게 한 턱 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기대가 대단했다. 이윽고 그가 츠바 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연병장에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을 봤나. 평소에는 지르지도 않던 환호성을." "자네의 교육 탓이지 않은가." 그들은 고작 20대 중반에 대륙 최강이라고 불리는 군단의 수장이 되었다. 연병장에는 그들보다 많게는 30세가 많은 이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젊은 대장과 참모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지 않았다. 나이들은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어 린애처럼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여간 징그럽지 않았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 노리스는 입을 열었다. "제군들, 안타깝게도 그대들이 원하는 휴식은 없을 것 같다." "우 ― !!" "무섭군." 터져 나오는 원성에 츠바틴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것은 거의 살기 수준이다. 역시 노리스가 무사들을 길들인 것은 실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돈이었던가. "조용히! 오늘 우리 기사단은 정식으로 출병을 요청 받았다. 장소는 실베니아 남부의 페를로이트 섬이다." "‥‥." 웅성웅성. 맨 앞줄의 사내가 엉거주춤하게 걸어나왔다. "정말입니까?" 불만스럽다기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이 속한 단체 에서 기사단은 사실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체에서 마법사를 우대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단체의 마 법사들은 거의 천재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어서 기사들의 일도 도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 에 오죽하면 마법사들이 그들의 이름을 일컬어 써커스라고 말하겠는가. 마법사들은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이라고 발뼘했지만 놀림이라는 것을 기사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식 출병 요청을 받은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 위의 건장한 사내를 주시했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싸울 수 있다. 가검- 날을 갈지 않은 검-이 아니라 진검을 쓰면서 싸우는 거다." "오‥오오‥ 우와아아아앗!" 첫 출전의 흥분은 목적지인 페를로이트 섬에 도착해서도 이어졌다. 숲에 진영을 잡은 그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모닥불 둘레로 앉아서 웅성거렸다. "츠바틴, 어떻게 생각하나?" "무얼 말이야?" 노리스는 말없이 츠바틴을 꿇어지게 쳐다보았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7) 의미 있는 침묵이 츠바틴에게 압박감을 주었으리라. 한동안 면도를 못해 꺼칠한 턱을 씁쓸하게 쓰다듬으며 츠바틴 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갑자기 우리를 출병시켰는지 묻고 싶은 거겠지? 간단하게 말하지. 아마도 우리는 희생양일 거야." "희생양!?" "그 날 회의에서 원로들의 얼굴을 봤어? 종말의 날이라도 되는 양 불안한 모습.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좌지우지하 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하지만 페를로이트 섬의 수정동굴에 숨어있는 유니콘을 잡아오라는 게 그리 어려운 것일까? 아! 물론, 성체(成體) 라면 모르겠지만 아직 어리고 고리의 신비에서 오래전부터 관리하여 족쇄에 묶여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재미있는 것은 유니콘의 피를 가공한 성약(聖藥)이 에릭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거지. 어떤 이유 로든 우리가 유니콘을 갖고 돌려주었을 때 그들로서는 그로인한 이익을 상당 부분 우리에게 나눠줘야 할 텐데 왜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을까? 그건 분명히‥." "분명히!?"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을 거야." 노리스는 말 끝을 흐리는 츠바틴을 재촉했다. 이제까지 그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떠돌아다졌지만 이토록 불안한 예 측을 하는 츠바틴은 기억에 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활로를 뚫었던 지인(知人)이다. '솔직히 이번 임무가 너무나 알 수 없기는 하다.' 섬에 들어서면서 였다. 노리스가 임무에 의심을 갖은 것은‥. 너무 쉽다라는 이유가 아니었다. 갑자기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섬 어딘가에 건들여서는 안될 무언가가 숨쉬고 있는 게 오랜 전장의 육감는 공포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게다가, '군대 전체가 이상할 정도로 들떠있다.' 첫 임무라 흥분해서? 아니다. 기사들은 느끼고 있었다. 불안한 무언가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떨치려 웅성되는 것 이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예감 때문에 돌아설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임무에는 드래곤처 럼 승산 없는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작은 유니콘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저 돌아가면 웃음거리가 된다. 처음 출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어. 부딪혀보는 수밖에. 임무의 내용이 진실이기를 하늘에 맡기고." 재미있지 않은가. 몇 년 동안 단련을 하며 싸울 날만 기다려왔던 무사, 기사들이 절대적인 상부의 명령을 의심하며 떨고 있었다. 그러나 미약하기 짝이 없는 예감을 무시한 댓가가 지독한 참사로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떤 무리 내에 서 절대적인 신용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이상하군." "그 말 좀 그만하게. 이제 거의 다 왔어. 귀찮은 숲도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없지 않은가. 마을이 없어. 이토록 거대한 섬에 마을 하나도 볼 수 없다니‥. 그것도 마을 사람들의 흔적이 요 몇 년간에 갑자기 사라진 거야. 전에는 살았었다고. 돌아가야 해. 이 곳은 위험하다고!" 울 듯한 표정으로 소매를 붙잡은 츠바틴을 노리스는 건틀릿 째로 후려갈겼다. 갑작스런 수뇌들의 다툼에 주위가 침 묵하고 주시했다. "이 멍청아! 우리는 검사고, 기사며, 모험가다. 부딪히기도 전에 꼬리를 말지 않는다. 이제 어린애 같은 투정은 그만 둬." "후회할 거다." "‥‥." "후회할 거라고! 노리스, 넌 후회할 거야." "바스티너! 저 녀석을 끌어내라! 나중에 되돌아 올 때 풀어줄 테니 나무로 창살이라도 만들어서 식량과 함께 가둬두 도록!" 부대는 대장과 참모의 의아한 싸움에 혼란스러웠지만 정작 땅을 파 만든 구덩이에 참모를 던져 넣은 바스티너는 무 표정했다. 바스티너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노리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할건가? 뒤는 언제나 열려있다." 바스티너의 착용자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암흑의 갑옷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리스는 말할 가치 도 없다는 듯 주먹을 쥐고 말했다. "간다." 츠바틴을 가둔 곳에서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숲이 사라지자 널찍한 공터 건너에 서있는 암벽에 거대한 공혈(孔穴) 이 자리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바스티너가 말했다. "누군가 있다." 여느 때라면 '아! 누군가 있구나.'하고 지나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츠바틴이 말하기를 마을은 없고 그 곳은 깊은 숲 속을 지난 후에 나온 공터였다. 긴장한 노리스의 눈이 빛났다. "어린애들이잖아!?" 천천히 걸음을 옮긴 무리의 눈에도 사람의 윤곽이 잡혔을 때 진영 맨 앞의 청년이 중얼거렸다. 두 명의 소년이 동 굴 앞에 서있었다. 흑백의 명암을 갈라놓듯 한 소년은 16세 정도의 나이에 아무렇게나 자란 검붉은 머리칼이 인상 적이었고 옆에서 그 소매를 붙잡고 겁먹은 사슴 같은 눈동자의 소년은 이슬로 뭉친 듯한 은백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었다. 중성적인 착각을 일으키는 두 소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걷던 발이 마비된 것처럼 멈춰 설 지경이 었다. 흑적색의 머리칼을 지나 백색의 소년을 향하던 그의 눈이 잠시 멈칫했다. '저 머리칼 사이로 튀어나와 보이는 건 뭐지?' "뿔이다!" '그렇군. 뿔이야.'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백색의 소년이 유니콘의 변신체라는 걸 알자 그들은 바빠졌다. 성체가 아닐지라 도 유니콘은 선천적인 번개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긴장을 돋궈줄 존재로서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앞의 소년은? '역시 유니콘이겠지. 그보다 약간 더 나이 먹은‥.' 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뿔이 보일 정도의 서툰 변신은 어린 유니콘이나 하는 것일 테니까. 아마도 두 유니콘은 자 신들과 난폭한 앙탈(?)을 부려 그 동안 억눌러왔던 전투본능을 달래줄 것이다. 과분할 정도로. "내가 먼저다!" "이봐, 죽이면 안된다고!" 참지 못한 두 명의 검사가 명령도 듣지 않고 뛰어나갔다. 명령도 필요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 상과는 달리 노리스는 외쳤다. "자, 잠깐! 가면 안돼!" 흑적발의 소년이 살짝 미소 짓는다고 느낀 순간 노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바로 이 녀석이다. 이 녀 석이 그 공포의 존재다. 뛰어가던 부하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노리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 "걱정마십시오. 유니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저희들을 한 번에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은 대장이 말을 주저하는 게 자신들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했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는 대장이었 다. 피식하고 멋진 웃음을 날리며 그들이 다시 몸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헉!?" 그 중 한 명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소년의 그림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해보니 해는 그의 등에서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이 드리워 어둡게 보이는 소년의 옷과 머리칼에 놀라 반대로 착각한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그 에게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절 치는 속도가 빨라져도 여유로운 소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 고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소년이 팔을 뻗었다. 34 악장 반갑지 않은 재회 (8) "헉!?" 그 중 한 명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소년의 그림자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잘 생각해보니 해는 그의 등에서 비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림자이 드리워 어둡게 보이는 소년의 옷과 머리칼에 놀라 반대로 착각한 것이다. 뒷걸음질치는 그 에게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절 치는 속도가 빨라져도 여유로운 소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 고 소년이 천천히 팔을 뻗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손에 몸을 가져다댄 느낌처럼 손끝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작은 불꽃이 일었다. 화르르르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아아악!" "‥‥." 공허한 침묵이 허공을 가득히 매웠다. 노리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 속에 통 잡히지 않았다. 죽었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 저토록 허무한 죽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죽었다'보다는 '사라졌다'라는 표현이 어울 릴 듯 불꽃으로 화해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이 지우개를 가지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운다면 지금과 같지 않을까? 전율이 솟았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다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한 번 움직인 몸을 멈출 생각이 없었 다. "흐악! 흐으아아아악!" 다시 한 번의 절규. 달려가던 두 명 중 남은 하나였다. 태운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솜뭉치 같은 엶은 불구름(火 雲)이 한 사람의 사라진 자리를 채우듯 수놓아질 뿐이었다. 비명이 없다면 스스로 빠져들고만 싶은 따뜻함과 포근 함이 느껴지는 화운(火雲)이었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이 서있었다. 한 인간이 화(化)한 작은 불꽃들이 흩날리는 속에 서 미소를 짓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눈을 멀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노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공격해!"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소년의 살해법에 그 대상이 될 걸 생각하면 끔찍했지만 원래 무사들은 죽 음을 앞에 두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두 명의 동료를 죽인 정도로 겁을 먹지는 않았다. 생명을 단숨에 앗을 정도의 실력자는 그들 내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하앗!" 먼저 누구는 찔렀다. 정돈된 자세에서 깔끔한 속도가 위협적인 검을 소년은 손에 들고 있던 긴 지팡이로 가볍게 막 았다. 지팡이는 곧고 육각형의 몸체로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온통 음각되어 있었으나 무술가들이 사용하는 봉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뭐라고 부를지 애매했다. 하지만 그 애매함은 그만큼 여러 가지에 유용할 수 잇다는 가 능성을 담고 있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검을 걷어내며 지팡이를 돌려 상대를 후려갈겼다. 작은 몸에서 나온 힘이라고 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맞은 청년은 투구에서 피를 나풀거리며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돌아가라. 더 이상은 나도 멈출 수 없다." 공허한 음성은 분명 경고였다. 하지만 수많은 감정도 흔적 없이 깔끔하게 갈무리된 청량한 음성은 물러서게 하기보 다는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정말 주제를 모르는 구나! 겨우 몇 명 쓰러뜨린 정도로 우리에게 겁을 주려는 거냐?" "그렇다면 모두 죽여야 주제가 맞는 사람이 되겠군?" '으아아아악! 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노리스가 보기에는 건들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어린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자신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함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들은 몰랐다. "나의 의지는 불꽃‥. 홍염의 춤을 추는 존재가 친구들에게 청하노니‥." 안전한 거리를 확인하는 듯 은발 소년을 힐끗 쳐다본 흑발의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주문의 영창을 시작했다. 단아 한 흑빛의 옷과 망토가 마구 마나의 기류(氣流)에 주체를 못하고 휘날렸다. "마법을 쓰려고 한다!" 대(對) 마법사 전법은 마법사라는 존재와 신체의 무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생긴 이래로 잡다한 방법들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기사들이 사용하는 방법만큼 통속적이고 대중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은 없다. 여러 가지 수식어를 제외 하고 단순하게 주문 다 외우기 전에 때려눕히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의 역사에서 그 위력을 자랑하는 방법을 펼치기 위해 검을 뽑은 기사들은 갑옷- 대부분 링 메일이나 체인 메일이다 -을 철렁거리며 밀물처럼 밀어 닥쳤다. "나의 춤에 영롱한 광휘로 잠시나마 발맞춰주오." 그러나 소년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비웃음과 함께 떨치는 손가락 사이에서는 무엇이든 태울 듯한 홍염이 용 솟음쳤다. 그 모습은 그대로 휩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사들은 언제부터인가 공포에 질려 검을 내지 르고 있었다. 기합인지 절규인지 판단할 수 없는 울부짖음와 함께. 노리스는 소년이 춤을 추듯 움직일 때마다 뿌려 지는 불꽃의 잔가지에 휩쓸려 버리는 기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을 자 신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리라는 게 그의 인생이었다. 노리스 뿐이겠는가? 기사들은 검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고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한기를 품고 휘둘러지는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면 당연 히 피를 쏟으며 베어 지는 게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설사 아니라고 해도 기사들의 기(氣)를 품은 검에 손을 가져다대고 멀쩡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검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눈앞에서. 처음 소년의 몸에 검이 닿으면 "베었다!"하고 환성을 지르던 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닿은 검이 불꽃으로 화 (化)해 허공으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을 놀리듯 소년은 유연한 체술로 검을 가볍게 뛰어넘고 부드럽게 구 르며 손을 떨치고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잔혹스러운 춤을‥. "악몽이야." 노리스는 중얼거렸다. 검을 잡을 힘이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홀린 듯 싸우는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들, 기사는 어리석으니까.' 첫 출전을 위해 잘 갈아놓았던 검의 광택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옆을 보니 바스티너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노리스와 보조를 맞춰 공격해볼 생각인 듯 싶었다. '좋겠지.'하고 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두 사람의 협공이었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당해낼 자가 없을 것 이다. 단, 눈앞의 상대가 그 예외라는 게 안타까웠지만. 자신과 싸울 때 팔이 꺽이는 와중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바 스티너였지만 그 역시 긴장이 되는지 흰 숨이 뿜어져나오는 횟수가 평소보다 늘어있었다. "그럼 간다! 모두 비켜라!" 물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듯 기사들이 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동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라면 어떻게 해주리라 믿는 것이다. "흐압! 어디 내 검도 태워봐라." 달려가는 다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노리스의 전력(全力)은 그만큼 뛰어났다. 순간적으로 춤을 추는 소년 앞 에 도달한 그는 높이 쳐들었던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쿠아아아! 파공성이 먼저 소년을 덮쳤다. 블레이드를 휘둘러도 나기 힘든 굉음이 롱소드의 검압(劍壓)으로 일어나자 무표정하 던 소년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물끄러미 검을 바라보던 그는 검이 몸에 닿기 직전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공중 제비를 돌아 공격을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때 뒤에서 막 도착한 바스티너 가 검을 뿌렸다. 노리스와는 달리 거체의 검이었지만 속도는 뒤지지 않았다. 공중에 뜬 소년는 피할 방법이 없었으 므로 바스티너의 검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크윽!" 마법을 외울 시간조차 없는 상황에서 소년은 침착하게 지팡이로 몸을 보호했다. 바스티너의 공격이 닿는 순간 폭풍 에 휘말린 듯한 충격이 그의 온몸을 흔들었다. 방어는 했지만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간 작은 몸이 암벽 에 부딪히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대단하군." 쇠를 갈아넣는 듯한 음성이 감탄과 아쉬움에 차있었다. 뛰어난 검사도 꼼짝없이 당할 공격이었는데 막힌 것이다. 하 지만 소년이 튕겨나간 속도로 볼 때 암벽에 충돌한 타격이 작지 않았을 게 분명했고 공격이 먹힌다는 걸 안 것으로 성과는 충분했다. 오히려 바스티너는 노리스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노리스의 속도는 그로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굴욕감에 빠져든 것이다. "저럴 수가‥. 말도 안돼." 노리스는 그와는 다른 감정에 빠져있었다. 가냘픈 체구로 봐서 그대로 절명하거나 기절했어야 옳을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기계처럼 목을 양쪽으로 젖혀보며 성능(?)을 감식한 소년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노리스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꽤 무서운 공격이었다. 내 차례인가?" '넌 더 이상 무섭지 않아도 돼!' 내심 소리친 노리스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던지며 동시에 팔다리를 웅크리고 굴렀다. 서있던 방향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게 가만히 있었다면 당장 통구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 전체에서 식은땀이 온천 솟구치듯 흘러내렸다.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 인간은 발밑에 위험이 느껴지면 전후(前後)보다는 양 옆으로 피하는 게 편하지. 그렇 다면 확률은 1/2인데‥ 당신은 운이 나쁘군. 아니, 내가 운이 좋을 걸까?" 운이 좋은 게 어느 쪽이든 노리스는 무조건 굴렀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발걸음이 급속히 접근하는 걸로 볼 때 바스티너가 곧 달려와 도와주리라 믿었다. 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아서 소년이 바스티너를 상대하는 사이에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과 반격이 서너 번 교차하자 바스티너는 밀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딛은 발끝에서는 불기둥이 솟고 휘젓는 손에서는 불의 날개가 춤을 췄으니 상대하기 곤란함을 보기만 해도 알았다. "호오‥ 너는 상당히 재밌는 걸 입고 있네. 미크릴의 갑옷이라니‥. 의지도 가지고 있어. 갑옷 안이 궁금하군. 미크 릴의 갑옷을 입고서 고작 이런 위력이라니 이해가 안 가. 혹시 평범한 여자가 아닐까?" 움찔! 농담으로 던져본 말인데 정말로 바스티너의 동작에 틈이 드러났다. 소년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정말로 벗겨볼까?'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공격당할까 당황한 바스티너가 크게 검을 횡으로 휘둘렀지만 소년은 그 자리 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묘한 갑옷의 소유자가 자세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전투에서 상대가 당황했다고 선뜻 공격하면 진정한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한 번 더 기다려 기회가 손에 쥐어질 때 까지 끌어당기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보통의 검사가 찔러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바스티너는 자세가 무너졌으므로 소년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매끄럽 게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걸 바라보면서도 대응하지 못했다. 곧 옆구리 쪽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폭음이 일어났다. 콰앙! "꺄아아아아아악!" 34 악장 수많은 가지의 기억, 같은 시간의 줄기를 타고 흐르네.(9) 어떤 충격도 막아낼 듯하던 검은 갑옷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날아오는 바스티너를 받으며 노리스는 어안이 벙 벙했다. 소년의 말을 듣고 설마 했는데 투구가 벗겨진 바스티너의 얼굴은 10대 소녀의 앳된 얼굴이었던 것이다. 이 런 꼬마가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이끌었다면 누가 믿을까. "역시 여자였나? 어떻게 평범한 여자가 바스티너의 주인이 됐지? 역대 바스티너들이 봤다면 혀를 차겠는 걸." 네 녀석이 너무 강한 것뿐이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의 붉은 눈동자에 혈기와 광기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은 노리스의 입술은 솜씨놓은 재봉사가 꿰매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즐 기듯 지켜보던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길래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나. 무시하고 덤비기에 이번에는 좀 저항을 하겠구나 싶었는데 실망인 걸. 어쨌든 처음에 말했듯이 내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너희들을 모두 죽여야 겠지?" 그는 불꽃이 일렁이는 양손으로 겹쳐 수인(手印)을 만들고 작게 주문을 웅얼거렸다. 이제까지 주문없이 간단한 몸동 작 하나로 사람을 흔적없이 소멸시켰던 소년이다. 눈을 감고 주문의 영창에 집중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할 주문일지 노리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츠바틴, 난 먼저 간다. 대충 살다가 쫓아오거라.'하고 중얼거리는 노 리스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주문을 멈추라고!" 오랜 지우(知友)의 음성이었다. 절망을 경험한 직후이기 때문인지 노리스는 만면에 놀라움을 띄고 그의 이름을 외쳤 다. "츠바틴!" "그렇게 반가울 것 없어, 노리스. 날 땅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다니‥. 잘못해서 아사(餓死)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어쨌든 그에 대한 잘못은 좀 있다가 따지기로 하고 우선 협상을 해야겠지? 조그만 친구." 소년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은 이내 칼날처럼 변해 은발의 소년을 날카롭게 노려보 았다. 시선을 받은 상대는 뭔가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린 체 적흑발의 소년이 츠바틴 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그가 내세울 조건은 하나 밖에 없었고 소년은 무서운 존재였지만 약속을 어 길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츠바틴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빌어먹을! 노리스 녀석, 정말 올라가기 힘들게 만들었잖아!" 땅 구덩이 속에 츠바틴이 기어나온 것은 노리스가 떠나고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튀어나온 돌로는 2.5m에 달하는 구덩이를 기어올라온다는 게 쉽지 않았으므로 벽 중간 중간에 손에 돌을 쥐고 딛을 수 있게 작은 패임을 만들었다. 덕분에 그의 손은 올라오다가 다시 떨어져 생긴 상처로 엉망이 된 다리와 함께 피투성이였다. "정말로 죽여버릴 생각을 갖은 건 아니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와 다투며 살아온 게 근 이십 년의 세월이 아니던가. 어쩌다가는 저 녀석 없어졌으면 좋겠어라 는 생각이 날 때도 있는 법이다. "멍청해서 뒷생각을 하지 않았겠군."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츠바틴은 노리스가 갔을 방향을 노려보았다. 화광(火光)이 하늘까지 치솟는 모습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꺼림직했던 임무, 그 원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자 그는 끔찍한 상상에 몸을 떨었다. "설마 벌써 시체가 되진 않았겠지? 조금만 기다려라." 힘도 없는 자신이 가봤자 무엇을 하겠냐만은 웬지 꼭 가야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 놈의 목숨이 걸려서인지 무 척이나 예민해진 감이었다. 마침 내 노리스가 있는 공터에 도착한 츠바틴, 그가 나무 수풀을 막 젓히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공터 가운데서 춤을 추는 소년과 그가 뻗을 때마다 불씨가 되어 흩어지는 기사들의 광경이었다. "괴, 괴물이로구나. 혹시 마족이 아닐까?" 소년이 쓰는 마법은 그가 속해있는 집단에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불씨로 변하게 만 들다니 오래 전 천족(天族)의 적수였다는 마족(魔族)도 저보다는 무섭진 않을 것이다. 처음 집단에 들어왔을 때 이 미 무리원이었던 친구와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로진스라는 이름으로 당시 마법을 연구하는 분야 에서는 젊은 인재라고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지금은 마법 왕국이라는 아스틴에서 근무 중이라고 한 걸 들은 기억이 났다. ― 헬 파이어? 그게 이번에 자네가 연구해야 할 마법인 모양이지? ― 그래. 9 써클이라는 절대의 경지에 도달해야 주문이나 한 번 외워볼 수 있다는 주문이지. 솔직히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이름부터 '지옥의 불'이니 민간에도 소문으로는 은근히 전해지는 마법의 이름이었 다. 어느 낡은 서점에 가면 그 주문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츠바틴이 껄걸 웃으며 로진스의 어깨를 두들겼 다. ― 그거라면 나도 좀 알지. 저기 제플론 시내 중심에 낡은 서점이 있지 않나? 거기 구석탱이에 보면 페르미안 마법 서 시리즈, 그 서민들 중에 가끔 마법에 꿈을 키우느니 어쩌니 하는 친구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보는 책. ― 페르미안 시리즈 중에 고급편에 들어있는 헬 파이어 주문을 보았나? ― 아하하하‥. 그래, 그 주문서 말야. 자네 동료들하고 있을 때 '그런 마법원의 강아지나 보는 주문서'라고 비하했 던 그 거 말일세.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적혀있는 주문이 정말로 가능한 줄 알던데!? 아아‥ 나도 처음에는 가능한 줄 알았지. ― 가능해. ― 그럼 가능하지. 가능하고 말‥ 예? ― 그 주문은 진짜일세. ― 하, 하지만 헬 파이어는 9 써클의 주문 중에서도 유일하게 10써클에 대응하는 파괴력을 지렸다는 마법이 아닌가. 그래서 익히는 게 금지된 금기 주문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잡고 있는 걸 익히 알고 있는데‥. 아하하, 이 사람이 내 가 마법을 잘 모른다고 놀리는 게로군. ― 놀리는 게 아니야. 그 주문이 금기 주문 헬 파이어의 주문이 분명해. 페르미안 시리즈 중에서는 웬일인가 할 정 도로 오자 하나없이 완벽하지. ― 놀라운 일이군. 그렇다면 누군가 8 클래스의 벽만 넘어선다면 헬 파이어가 세상에 구현되는 게 아닌가. ― 그럴 수는 없다네. 안타깝게도‥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라고 해야 하나? 현재 전해지는 헬 파이어의 주문을 분 석하면 넓은 지역에 강렬한 폭발, 드래곤의 피부도 찢겨나갈 파괴력을 지닌 마법으로 판명됐어. 드래곤의 피부도 찢겨나갈 파괴력인데 다행스럽다니 잠시 츠바틴은 오랜 친구의 뇌가 마법의 성취 부진으로 인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을 추리해보았다. 그가 얘기를 들은 체 만 체 하는데도 로진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자 기가 빠진 듯 암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헬 파이어의 어원은 '지옥의 불'. 현재의 헬 파이어가 위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폭발력이지. 불 자체의 뜨 거움 때문이 아니야. 뜨거움 자체로만 본다면 더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는 화염계 마법이 7 써클의 분류 중에도 몇 있다네. 내가 왜 현재, 현재, 하는지 의심스럽겠지? 전설에 의하면 '지옥의 불'은 마계에서 고문용으로 쓰여진다 고 하지. 연금술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은 생물은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강도(强度)가 아니라 범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네. 만약 인간의 최단위 구성 하나하나에 작은 불씨를 놓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 끔찍하군. ― 그래. 그게 지옥의 불, 헬 파이어의 진짜 모습이네.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에 불씨를 소환시키는 거야. 드워프들이 미스릴이나 오르하르콘을 녹일 때처럼 뜨거울 불길도 필요없지. 불꽃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만으로도 세포는 충 분히 타버릴 테니까. 그래. 헬 파이어를 죽지 않은 이승에서 당한다면 그 자는 불씨가 되어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지. 드래곤이라 할 지라도 불씨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저게 바로‥. 진정한 헬 파이어?" 은은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져가는 생명의 불씨들이 그를 다시 현실로 이끌었다. 서둘러 츠바틴은 노리스를 찾았다. 다행히 얌전히(?) 있었는지 죽지 않고 허여멀건하게 탈색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는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저, 저, 저 멍청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검을 뽑아들고 노리스가 소년에게 달려들자 츠바틴은 이마를 탁탁 쳤다. 저 무대포 성격에 부 하들을 잃고서 조용히 물러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처럼 노리스는 불씨로 화하 진 않았다. 소년이 꺼림직한 듯 슬쩍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왜지?'하고 고민하던 그는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이 밝게 빛났다. "그래. 상대의 온몸 구석구석에 동일한 불의 기운을 심을 려면,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저 소년은 손을 가져다 대는 행위는 그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함이 틀림없다. 하지만 노리스와 바스티너의 검이 빨라서 마나를 검에 넣기도 전에 베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선거지!" 주먹을 꽉 쥔 그는 여유있게 눈을 돌렸다. 소년의 체술이 뛰어났지만 몸을 사용하는 분야에서는 대륙 최고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닌 노리스였다. 바스티너까지 가세해있지 않은가. 이제는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찌하면, 어찌하면 살 수 있지? 저 소년의 약점은‥? 역시 저 것 밖에 없겠지? 위험하지만‥ 모두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츠바틴아, 조금만 용기를 내자." 노리스와 바스티너의 막강함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장난치듯이 200명의 1/4에 달하는 기사들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 소년이다. 9 써클의 마법을 밥먹듯이 사용하는데 8써클이라고 사용하지 못하겠는가. 여러 가지 마법을 혼용한 다면 이 공터에서 어떤 결과가 서있을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츠바틴의 발이 빨라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긴 비명소리, 검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바스티너가 허공을 날았다. 비명 소리가 특이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스티너가 쓰러진 이상 노리스가 얼마나 버틸지 계산해봤자 몇 초의 차이 뿐일 테니. 츠바틴이 노리는 상대는 순백의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서있는 유니콘 소년이었다. 유니콘은 무표정했지만 미친 듯이 사람들을 죽이는 소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픔을 미약하게 내비쳤다. 역시 성수(聖獸)답게 생명을 사랑하는 건가? 꼴사납군. 솔직히 검붉은 소년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하다.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퇴치 하고 있는 것이니까. 단지 완전 말살이라는 행동이 당하고 있는 츠바틴들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느껴졌을 뿐이지. 성수라는 생물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동정이다. 그렇게 츠바틴은 생각했다. "윽!" '이런! 다 틀렸군. 들켜버렸어‥.' 빛깔마저 희미한 눈동자가 작은 기척을 느끼고 그를 향하자 츠바틴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유니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게 잡힌 유니콘 소년. '어떻게 된 거지?' 저항도 없이 자신의 팔에 잡힌 채 소년이 인형처럼 저항도 없자 오히려 츠바틴이 의아했다. 그 때 유니콘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뭐하지? 이러다가 당신 일행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그런 동정 따위는 필요없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츠바틴에게는 유니콘을 빼고는 흑적발의 소년에게 서 노리스를 구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마법사 소년은 손으로 주문의 인(印)을 만들며 주문을 영창하고 있 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주문을 멈추라고!" 츠바틴이 크게 외치자 소년은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췄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유니콘이 인질로 잡혀 당황한 기색 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던 장난(?) - 조금 과격한 불장난 -을 멈춰 불만스러운 어린애처럼 얼굴을 찌푸렸을 뿐이다. "츠바틴!" "그렇게 반가울 것 없어, 노리스. 날 땅 구덩이에 버려두고 가다니‥. 잘못해서 아사(餓死)라도 당하면 어쩔 거야? 어쨌든 그에 대한 잘못은 좀 있다가 따지기로 하고 우선 협상을 해야겠지? 조그만 친구." 날카로운 조그만 친구의 시선이 내가 잡고 있는 소년의 회색 눈동자에 쏘아졌다. 화가 나니까 마치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흑적발의 소년은 아직도 공포를 얼굴에서 지운 채 떨어대며 바라보는 장년들을 한 차례 쓰윽 훑어봤다. 그리고 기절한 바스티너와 그녀를 안고 있는 노리스까지 돌아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았어. 조그만 친구, 자네 말이 통하는 군." "난 조그맣지 않아." "하하핫!" 노리스가 갑자기 웃어 재꼈다. 사실 웃기긴 했다. 지금 작지 않다고 주장하는 소년의 키는 츠바틴 손에 잡혀있는 은 발의 소년보다 작았다. 그리고 츠바틴에 비하면 은발 소년은 작았고 또 츠바틴은 노리스에 비하면 역시 작았다. 노 리스의 웃음에 검붉은 소년은 지금까지의 표정 중 가장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렸고 츠바틴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얼른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를 살려 보내주는 거야. 물론 죽어버린 멍청이까지 살려줄 필요는 없어.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녀석들만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면 된다고." "앞으로도?" "아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츠바틴은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지?" 자고로 인질의 효과라는 것은 1회 사용으로 만족하는 게 가장 올바른 사용법이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다시 만나면 조그만 친구,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난 작지 않아." --------------------------- "그렇게 우리는 페를로이트 섬을 빠져 나왔지. 우리 기사단의 인원은 들어갈 때는 200여 명이었지만 나올 때는 140 여명이었어. 60여명이 한 소년에게 몰살을 당해버린 거지." "그 소년도 대단하지만 그에 대항했던 흑기사 - 바스티너 -와 노리스님 도 대단하군요." "아니, 놀이감밖에 되지 않았어. 나중에 다시 상면하니 그 소년은 우리 집단과는 같이 하늘을 볼 수 없는 존재였지. 그 후로 몇 년을 싸웠어."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지 노리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복수라는 것은‥." "그래. 그 녀석과 관련된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야. 집단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하지만, 죽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짐작하네." 그리고 노리스와 츠바틴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세차게 몰아져왔다. 잠시 후 몰아칠 사건을 먼저 예고하듯이‥. 그 바람에 모두가 탄 마차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35 악장 만남은 불행인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 (1) 시즈 일행이 온천에서 피로를 풀고 있을 무렵, 실베니아 서남부 카마 영지, 론리 호수의 거대한 저택. "쿨럭! 쿨럭! 집사! 쿨럭!" 비가 와서인지 그 날 따라 몸이 더욱 결리고 시렸다. 두꺼운 이불을 몇 겹이나 덥고서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 는 인물은 실베니아의 궁정 마법사로 유명한 마나이츠 페르베이안이었다. 늦가을의 심한 일교차(日較差)를 견디지 못하고 늙은 몸으로 맞은 감기는 그에게 초췌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게 만들었다. 좋은 옷으로 몸을 감쌌다 뿐이 지 주름살에 감기로 인한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그를 예전, 엘시크의 헤트라임크, 실베니아의 마나이츠라고 칭 송받던 마법사라 생각하겠는가.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군.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말이 명언(名言)이었어'하고 중얼거렸지만 내심 아직은 삶의 미 련이 남았는지 이불을 끌어당기며 노인은 소리를 높였다. "집사아―! 넬피엘! 넬피엘, 어디있나? 쿨럭! 쿨럭!" 마나이츠가 몇 번을 부르자 방 밖 복도에서 누군가 허둥지둥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애타게 부르던 집사 일 것이다. 이윽고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작은 키의 소년이 뛰어들어왔다. 불타는 듯한 검붉은 색이 인상적인 머리 카락을 가진 그는 여인이 남장을 한 것처럼 깨끗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소녀적인 외모는 가뜩이나 작은 키와 합 산(合算)되어 소년의 체격을 더욱 왜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가 그나마 남자라 는 인상을 조금 더해주기는 했지만 색기(色氣)까지 덤으로 부여해주는 덕에 위압감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목소리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흩어짐이 없이 곧은 음색은 평온함과 함께 왠지 차가움을 느끼게 만들었 다. 아들들도 분가(分家)하고 집사와 하인들도 좀더 권력에 야심을 갖는 그들을 따라 출세의 길로 저택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서 넬피엘이라는 착살하고 성실한 집사의 발굴을 마나이츠는 올해의 쾌거(快擧) 중에 다섯 손가락에 꼽 았다. 그만큼 넬피엘의 저택 관리 수완은 뛰어났다. 물론 처음에는 실수도 많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넬피 엘은 잘못된 것을 고치는 속도가 다른 이들보다 빨랐다. 덕분에 언제나 어지러웠던 마나이츠의 방도 깔끔하게 정돈 된 게 아니겠는가. "자네가 우리 집에 있은 지도 벌써 반년이지? 집안 일을 하는 게 제법 숙련되었더군. 달라졌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찬란한 미모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창고 정리만 해도 제법 근육이 붙어야 할 텐데 여전히 여 자아이 같지 않은가." 머리만 길었다면 미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넬피엘의 나이가 올해로 28살이라는 게 마나이츠는 반년이 지나 도록 믿어지지 않았다. 근육도 얼마 없는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웬만한 장정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라 처음 에는 에릭사와 같은 영약이라도 복용하지 않았나 싶어 몇 방울의 피로 실험을 해보았지만 평인(平人)의 것과 다름 이 없다는 걸 알고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깊어졌다 뿐이지 어떻게 의문을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현재는 그 때의 관심 덕인지 넬피엘이라는 청년이 아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놀림으로 기분 상했는지 넬피엘은 얼굴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세상을 이해할 만큼 살아온 노인은 지금 의 반응이 어리숙한 청년이 부끄러워하는 반응이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싱글벙글한 웃음을 연신 지우지 못하는 노인의 얼굴에 넬피엘의 입술은 점점 삐죽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얼른 마나이츠는 손을 끄덕여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런, 이런‥. 기껏 불러놓고 넋을 놓다니‥ 역시 자네의 얼굴은 매혹적인 힘이 있어." "주인님‥. 흘러내린 콧물은 닦으시고 말씀하시는 게 좀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예 이제는 포기를 했는지 넬피엘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해두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흐응! 고맙군. 자네의 판단능력은 언제나 정확하기 이를 때 없어." "별 말씀." "자네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야." "손수건 빌려드린 대가로는 과한 칭찬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피엘은 전혀 칭찬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나이츠는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숙 이자 씨익 웃었다. "눈치가 빨라서 더욱 맘에 들어.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요즘 이 나라에 바람이 불고 있어."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바쁜 시기입니다.." 넬피엘이 당연하다는 뜻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노인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내 말은 그게 아닐세. 난 왕실의 일에서 손을 뗀 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가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제법 점성술에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며칠 전에 별 자리가 이상한 징조를 보이길래 카드를 뒤집어봐도 여전히 불길하기 짝이 없 어. 매일 밤 다시 시도해봐도 마찬가지야." "왜 이렇게 주인님의 감기가 오래가나 했더니만‥ 밤 바람도 차가운 때 창문을 열고 별 보고 점을 치셨기 때문이셨 습니까? 오늘 당장 목수를 불러서 창문을 잠정 폐쇄하겠습니다." "아, 아니, 네, 넬피엘‥." "집사는 주인님께서 병에 걸리셨거나 위중하실 때 그에 위험이 되는 행위를 막을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넬피엘이 창틀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펼치고 집사 일정의 스케쥴을 변경했다. '이 친구는 너무 성실하단 말이야.'하 고 마나이츠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네, 좋아. 자네 생각대로 하게. 그 전에 내 본론을 마저 들어야지?" "말씀하십시오." "내 처음 볼 때부터 자네의 능력을 눈치챘네. 넬피엘 자네는 5클레스에 육박하는 마법사라는 걸 말이야. 그 나이를 생각할 때 감히 근접할 수도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는데 자네의 외모만큼이나 경탄하네. 떠돌이 하인 생활이나 하면 서 그 정도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부인할 것 없네. 나도 아주 우연찮게 알게 됐으니까. 아마도 국가의 눈을 벗어난 마법사 중에서 자네의 실 력은 수위를 차지하겠지? 그러니 부탁할 게 있네." "하명하십시오." "허허, 이 사람아‥. 부탁이래도‥. 당장 수도로 가주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조사해서 내게 알려줬으면 하 네. 해줄 수 있겠지." 노인의 눈동자는 마치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처럼 인자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넬피엘의 무언은 곧 그가 부탁을 수락했다는 걸 말했다. 마나이츠는 빙긋이 웃으며 편히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결코 과한 칭찬이 아니야. 자네를 만난 것은 내 생애에서 몇 번을 꼽을 정도로 얼마 없었던 행운이야." * * * "하하하‥ 어쨌든 노리스님이 같이 한다면 도적들에게 당한 염려는 놓아도 되겠군요. 이런 걸 행운이라고 말하는 거겠죠?" "보를레스, 너무 추켜세우지 말라고. 이 친구는 추켜세우는 만큼 고개를 버젓이 쳐드니까." "하하하하!" 바람이 세차게 마차를 때렸지만 의기투합한 이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들은 시끄럽게 조잘대는 남자- 그것 도 말 묵묵하다고 알려진 검사들 -들을 피해 구석으로 피해 생각에 잠겨있거나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잠이 들었고 시 즈를 비롯한 학자들은 엘로고라토의 전령이 지나갈 시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마차의 요동이 멎었다. "무슨 일이지? 요르몬 씨!?" "‥‥."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은 일행이 각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자 마차 안은 침 묵이 팽배해졌다. 블리세미트와 토플레가 조용히 여자들을 깨우는 사이 보를레스가 마차 뒷칸에 바람이 들이닥치지 않게 가려놓았던 천을 거두었다. "조심해!" 시즈의 고함 소리에 보를레스는 기겁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시즈가 고함을 지르게 만든 원인, 지척까지 날아온 불 덩어리 때문이었다. "흐읍!" 검을 뽑을 시간도 없었다. 보를레스는 검의 옆면으로 불덩어리를 강하게 후려졌다. 불덩이는 속이 은은히 비치는 게 불꽃 그 자체였기 때문에 검으로 베어도 없앨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강렬한 풍압에 불덩이가 행태를 일그러뜨리며 흩어졌다. 푸화아아아악! 하지만 이미 지척에서 와있던 불덩이라 흩어지는 불꽃이 모두 온도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서 보를레스의 옷과 머리 카락은 심하게 그슬였고 피부가 드러난 상태에서 불덩이와 가까웠던 손 부분은 화상을 피할 수 없었다.. "윽!" 블리세미트가 얼른 다가와 신성 주문을 외웠고 일행은 마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보를레스가 막아냈지만 만약 마차 안에서 화염계 주문을 맞는다면 피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꺄악―!" 마부였던 오르몬은 이미 심장 부근이 허공에 드러나 있었다. 강력한 마력구(魔力球)에 당했다는 눈썰미가 있는 사람 들은 한 눈에 알아챘다. 처참하게 죽어있는 말과 마부의 모습에 레스난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 카이젤이 얼 굴을 찌푸리고 짜증을 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레스난에게 있어 인간들 중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게 카이젤이었다. 그러나 카이젤은 여자들이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예절은 그의 예절 교범에서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녀에게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레스난을 약 먹은 쥐새 끼처럼 얌전하게 만드는 카이젤은 정령을 이용해서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산길을 달리고 있었으므로 주위는 온통 수풀로 가득했다. 하지만 카이젤보다 먼저 노리스가 말했다. "전방 50m 정도에 50 여명 정도의 무리가 있다. 느껴지는 기운은 검사들보다는 마법사들이 많군. 그리고 양 옆에 도‥ 미세하지만 살기가 느껴진다." "‥‥." 50m라면 마법사들이 공격하기에 최상의 거리 조건이었다. 그리고 양쪽 숲에서 느껴진다는 살기는 어쌔신일 가능성 이 컸다. 어떻게 해야할지 일행이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멀리 있던 무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을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들 무리 중에서 한 소년이 나와서 손을 흔들고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시즈 세이서스." 35 악장 만남은 불행인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 (2) "자네는 누구지?" 생글생글 웃는 소년의 모습에 시즈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자 토루반은 소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뒷짐을 진 채 작은 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그만 몸에서 오우거도 물러서게 할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스틴네글로드의 드워프 현자시군요. 전 엘시크의 페노스톨멘가의 로길드 라고 합니다." "흐음‥ 고명한‥." "예. 왕실의 고명한 시종‥ 페노스톨멘입니다."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건가? 페노스톨멘가는 왠만해서는 엘시크를 떠나지 않는다고 들었네만." "왠만한 일이 생겨서 이렇게 떠나왔습니다." 로길드는 시즈의 일행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동자가 보를레스 뒤에 이르러 의아한 빛깔을 드러냈 다. "이상하군요. 저희 정보에 없는 두 분이신 듯한데‥." "글세‥ 나는 자네를 알 것 같군." 노리스와 츠바틴은 뭔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미 로길드를 비롯한 마법사 무리가 다가올 때부터 그들의 정 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고길드의 옆에 붙어있는 '고리의 신비'의 수장, 로진스는 츠바틴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었다. 두 사람은 현재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 왜 시즈들의 앞을 막았는지 의아했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시즈의 반응으로 쉽게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 쪽은 친인(親人)이요,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이었다. 그 때 로진스가 로길드에게 다가서서 귓속말을 건넸다. "재미있게 되었소. 저들이 바로 노리스와 츠바틴이오.. "어째서 시즈님 일행과 함께 있는 거지요? 두 분께서는 저들이 우리의 공격 대상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모르고 있는 것 같소. 아마도‥." 로길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토루반들과 시즈들은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에 더욱 긴장했다. 그들이 주고 받고 있는 내용에 따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투가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힐끔 시즈와 노리스를 바라본 로길드는 로진스에게 말을 이었다. "시즈님과도 안면이 있는 듯 한데요. 아주 절친할 정도로‥." "옛날부터 진정한 기사들은 전투를 위해 가족까지 죽인다고 했지. 걱정마시오. 공(公)을 위해 정(情)을 버릴 줄 아는 인물들이오. 두 사람을 만난 게 불행이었다는 걸 저들은 모를 거요." "그렇게 되기를 빌어야겠지요. 솔직히 저들이 나서주지 않고 모른 체만 해준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며 로길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고개를 들었다. "과연 '마땅찮은 시즈'라는 이름을 헛되지 않군요. 저는 당신을 또 놓쳤 으니 말입니다." 시즈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놓쳤다 해도 시즈들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길을 막혀버렸으니 두 사람의 머리 싸움은 로길드가 승리한 것이다. 여유를 가진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솔직히 시즈님의 일행이 너무 늦어서 또 놓친 게 아닌가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온천에서 피로라도 풀고 오신 모 양이지요?" "그렇습니다. 시차를 착각하게 하여 스스로 길을 비키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참을성이 그렇게 좋을 줄은 몰랐지요." "하하하하!" 시즈가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짓자 로길드는 소년답지 않게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제가 그렇게 운이 좋은지 몰랐습니다. 시즈님을 따라잡기 위해서 저희는 낭아플에서 대로를 통해 달려와야 했지만 엘로고라토의 전령 때문에 속력을 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어제 도착을 했지요.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늦었기에 엘로고라토의 전령과의 만남을 저주하고 있었는데‥ 하하핫. 이제 보니 행운이었군요." "‥‥." "이제 슬슬 시작하기로 할까요? 저희의 만남은 가벼운 말로 끝날 게 아니니까요." 로길드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서 마법사들이 시전한 화염과 바람의 마법을 시즈들에게 쏟아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시즈 측도 마찬가지였다. 블리세미트의 손이 합쳐지는 순간 거대한 신성 방어막이 일행을 보호했고 카이젤의 곁에서는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마리나의 손에 들린 빗자루는 번 개를 맞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며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강렬한 라이트닝을 분출했다.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로구나, 로길드. 각오해라!" "보를레스, 오랜만에 보았는데 안색이 수척해져서 매우 안타깝군요. 그렇다고 해도 설마 저처럼 연약한 학자를 핍박 하셔야 되겠습니까? 당신의 상대는 이쪽입니다." 로길드가 한 걸음 물러서자 그의 뒤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사내가 걸어나왔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였는데 체격은 보를레스와 비슷했다. "오랜만이군, 보를레스.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의 재회는 생각지도 못 했는 걸." 사내는 검을 단숨에 뽑았다. 장년 남자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바스타드 소드를 단숨에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검에 숙련되었다는 암시였으므로 보를레스도 검을 뽑아 정면을 겨누고 정신을 집중하다가 상대가 자신을 아는 듯 하자 검 끝을 약간 내렸다. 후드 속에서 사내의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멍청한 놈!" 번개가 일 듯 검이 잔상을 뿌리며 보를레스의 목 앞에 와있었다. 막을 준비도 할 수 없었던 보를레스는 있는 힘껏 허리를 뒤로 젖혔다. 목 언저리를 불로 지지는 듯 뜨거운 느낌이 뇌까지 번졌지만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 었다. 사내가 보를레스의 시선이 어긋난 걸 기회로 하여 번쩍 처들고 뛰어올랐다. 콰―앙!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푹 파이며 흙이 하늘로 치솟았다. "보를레스!" 토플레가 달려가려 했을 때 파마리나가 그를 막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하지 않았으니까." 마법의 충돌음 때문에 귀가 멍멍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흙먼지가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금속이 부딪히는 소 리가 작지만 들려왔다. 안개처럼 퍼진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 드러났다. 장검을 가지고서도 두 검사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인지 충돌로 인한 불꽃이 불꽃놀이를 연상케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방금 전의 기습 과 일격으로 상당한 부상을 입었는지 목과 어깨에서 피를 흘렸다. "그 동안 실력이 늘기는 늘었군.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에 쓰러 졌을 텐데‥." "네 녀석은 도대체 누구냐?" "글세, 누굴까?" 사내가 쓰는 검법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잔인한 방식이었다. 기사들을 많이 상대했던 보를레스로서는 용병들의 검술 로 이렇게 강한 이를 만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보를레스가 기억하지 못하자 실망했는지 더욱 힘을 주 어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정말 잊은 모양이군." "누구냐니까!" 콰악! 두 검이 서로 맞물렸다. 힘겨루기에 이를 악문 상태에서 일그러진 음성으로 사내가 말했다. "보를레스, 멋진 한 탕이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크윽!" "하지만 아직도 내가 힘은 더 세." "하앗!" 떨어지는 순간 보를레스는 상대의 발을 밟았다. 정정당당한 기사들이라면 쓰지 않을 편법. 그 정도로 보를레스는 육 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내가 어쩔 줄을 모를 찰나 보를레스의 검이 사내의 미간을 갈랐다. 스르르르륵‥. 사내는 의아했다. 눈 사이를 가른 검광은 분명 자신을 가르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머리에서 흘러내리 는 느낌은 피가 아니었다. 후드가 흘러내리는 걸 안 사내는 이죽거렸다. "어리석군, 보를레스. 어리석어. 지금 날 죽였다면 좋았을 거야. 자네나 나나 말이야." "‥‥어, 어째서!"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잊었나? '현재를 살아가기에 우리는 미래를 장식할 수 있지.'하고 우리가 외쳤던 말들을‥. 하지만 우리의 현재가 꼭 같은 미래를 바라는 것은 아니잖아?" "어째서냐? 바크호!" "이봐, 보를레스 그렇게 놀란 표정 짖지 말라고. 자네가 바라는 미래가 나와 다르다고 해도 인정하고 있어. 그러니 까 이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는 거라고! 자네가 원하는 미래를 향한 믿음은 한낱 과거를 함께 해온 사람에게 묶일 정도였나?" 그렇게 말하며 과거, '춤추는 칼'의 대장 네모꼴 바크호는 검을 어깨에 수직이 되게 세워 공격 자세를 취했다.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 따위는 버려도 좋다는 건가? 그렇다면 사람들의 만남은 대부분 불행이라고 봐야겠군. 어차 피 버릴 과거일 테니까 말이야." 정면을 베어오는 검을 강하게 쳐낸 후 가슴을 찌르며 보를레스가 반문했다. 그의 분노마저도 느껴졌으므로 공격도 만만할 리가 없었다. 오른쪽 어깨를 젖히며 피한 바크호는 연달아 찔러오는 검을 피해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우하핫! 난 자네와의 만남이 불행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현재 이렇게 싸우고 있을 지라도 말이야. 우리의 현재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지. 묻겠네. 자네는 과거를 위해서 미래를 미루겠나,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젖혀두겠나?" "모순적일 질문은 하지도 마라!"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이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찮은 도적떼라도 그들의 대장이었던 자였다. 실력으로 대장을 뽑았을 게 당연했고 바크호의 실력이 보를레스를 상회하는 것도 당연했다. 바크호는 보를레스의 향상된 실력에 내심 놀랐지만 그만큼 투지도 불타올랐다. "내가 속한 '고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문과도 같지!" "크으윽!" 보를레스의 어깨에서 피 분수가 터졌다. 이미 당한 부상이 동작에 적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지장을 주었고 결국 검에 깊이 찔리고 만 것이다. 검을 겨누며 바크호가 말했다. "항복해라. 그러면 우리의 만남은 행운이 될 거다." "운의 확률을 네 맘대로 정하지 마랏!"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고지식한 기사 양반!" 오기로 일어선 보를레스였지만 몸이 정상이었어도 힘든 상대였을 바크호를 부상당한 몸으로 견디기는 힘든 게 당연 했다. 바크호는 뒤로 밀리며 상처만 늘어가는 보를레스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죽이진 않겠지만 앞으로 검은 쓰기 힘들 거다." 파앙! 바크호는 공격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무언가 무형의 힘이 그의 검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힘의 원인 을 바라본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후퇴했다. "이런 구원군인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구원군을 둬서 행복하겠어." "잔소리말고 덤빌 테면 덤벼." "사양하겠어. 마녀에게 혼자서 대항할 만큼 난 멍청하지 않다고." 무형의 힘으로 보를레스를 보호한 자는 파마리나였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한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보를레스를 부축했다. "바보같이‥. 뭐하는 거야? 어서 일어서." "미안하군 그래." "블리세미트! 블리세미트! 어서 와서 이 녀석을 치료해!" 파마리나도 치료할 수 있었지만 마녀의 치료는 사람에게 귀찮은 부작용 - 간지럽다거나 식욕이 사라지는 등의 -이 따랐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블리세미트는 다른 일행들을 보호하는 것도 바빠서 고개도 돌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가 봐드릴게요." "네가?" 파마리나가 놀란 이유는 나선 사람이 바로 레스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어들은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마력을 지 니고 있다지만 레스난은 성체(成體)가 아니기에 그 능력이 별 볼일 없다고 여긴 것이다. 파마리나가 무시하는 듯 하 자 레스난이 입을 삐죽거리고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 "뭐에요? 도와주려고 했더니. 싫으면 관둬요." "할 수 있다면 어서 치료해! 전력(戰力)이 부족하면 모두 죽을 판이야. 다들 쓰러지면 인어라고 인간들이 그냥 둘 것 같아? 아래는 허리 아래는 회를 쳐 먹고 위는 노리개로 쓸 걸." 파마리나가 담담하게 말하는 내용에 레스난은 뼛속까지 섬짓하게 저려왔다. 휙 돌아선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알았어요. 치료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협박은 하지 말아요. 듣기만 해도 겁이 난다고요." 그러게 말하고 레스난은 허리춤의 물통을 세워 손바닥에 물을 쏟고는 그 물에 입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서서히 물 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여‥. 작은 물방울 하나에 숨쉬는 수많은 생명의 힘이여‥ 그 숨의 조각들을 조금만 나누어주세요." 레스난은 주문을 마치고 빛나는 물을 보를레스의 상처에 부었다. 그러자 상처에 눈부신 광체가 서리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보를레스는 감탄했다. 빛과 함께 상처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해. 고마워." "좋아하지 말아요. 협박 좋아하는 마녀만 아니었어도‥." 그 협박 좋아하는 마녀는 레스난에게 보를레스를 맡긴 채 로진스와 겨루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마녀라지 만 상대는 '고리의 신비'를 담당하는 수장, 로진스. 그의 마력은 주문의 영창이 간단하고 위력적인 파마리나를 오히 려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푸른 마력에 파마리나는 뼛속의 마력까지도 뽑아서 가까스로 대항 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마녀 아가씨. 당신은 마법이 아직 설익었어." "호호홋! 어디 잘 구워진 마법 좀 보여주시죠." "그러지!" 로진스가 수인(手印)을 만들어 변화시킴에 따라 화염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화려한 문양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영창이 시작됨에 따라 점점 강열하게 타오르던 불길은 새의 형상을 띠어갔다. ―끼이이이익! 불새가 날개를 펼치자 그 길이는 5m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로진스의 불새는 괴성을 질 렀는데 마치 맹수가 포효하는 듯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했다. 그처럼 화려하고 위압적인 마법을 본 적 없던 이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고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파마리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주머니를 꺼 내어 안의 가루를 바닥에 힘차게 뿌렸다. 그리고 땅 위에 마법의 문양을 그렸다. "확실히 잘 익었군요. 하지만 과연 이것도 익을까요?" 그러자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일어났다. 식물이 자라듯이 바닥에서 돌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확연히 구 분할 수 있는 머리와 팔, 다리. 6m에 이르는 거인의 형상을 가진 그것은 골렘이었다. 하지만 파마리나의 마법은 끝 난 게 아니었다. 보를레스를 돌보고 있는 레스난에게 달려가 주특기인 협박을 개시했다. "당장 저 골렘을 얼려버려! 할 수 있지?" "예?" "얼려버리라고!" "하지만 그러면 못 움직일 텐 데요!" "그 꼬리를 싱싱한 저녁 회감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어서 해! 네 마법 정도로 못 움직일 내 골렘이 아니란 말이 야!" 그 정도까지 가자 레스난도 자존심에 불길이 일었다. 그녀는 '어디 두고 보자.'하고 목에 걸고 있던 조개 목걸이에 서 조개 껍질을 하나 빼어 쥔 채로 손을 합장(合掌)했다. 푸른빛이 새오나오자 물통의 물을 살짝 뿌리고 골렘에게 던졌다. 불새가 골렘을 덮치는 순간과 레스난이 조개껍질을 던진 시간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불새의 부리가 골렘 에 닿는 순간 골렘은 엄청난 속도로 얼어붙었다. 어찌나 얼음이 굵게 맺혔는지 골렘은 전보다 절반은 더 커 보였다. 파마리나와 로진스의 얼굴이 동시에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승리자는 레스난이었다. '어떠냐?'하고 우쭐되는 것 같은 레스난의 얼굴에 파마리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영창했다. 투두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관절부위에서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히스테릭하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녀가 외쳤다. "아하하하핫! 어디 이것도 구워 보시죠!" 스톤골렘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된 아이스 골렘은 불새의 어깨죽지를 내려치듯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불새도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불길이 골렘의 얼음을 녹이며 주위의 나무에도 옮겨 붙었다. 로진스는 어이가 없었다. 돌 에 얼음을 씌워서 불에 대항하다니 바위 자체로도 불에 대항하는데는 모자라지 않았는데 얼음이라니 마력은 확연하 게 그가 우세했지만 방식에서 완전히 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공격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 동안에 골 렘은 바닥을 쿵쾅거리며 달려와 자신과 마법사들의 태반을 뭉개버릴 테니까. 혼신의 마력을 다 기울리고 있을 때 로길드가 손가락으로 골렘과 불새가 엉킨 곳을 가리켰다. "자유로움에도 지친 이들이여, 잠시 나의 이름으로 정해진 길을 따라 속박의 걸음을 걸어가다오." 주문과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래바람이 심했는데 로길드의 주문까지 합쳐지니 그 위력은 더욱 강했다. 그러자 바람에 맞춰 불새도 불길을 일제히 뿜어냈다. 바람에 실려 불꽃의 공격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카이 젤이 정령술로 바람을 일으켜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점점 밀려오는 불길에 시즈가 중얼거렸다. "나의 의지는 마법, 세상을 움직이는 마법이 되리라‥." 그 소리는 작았지만 노리스는 훈련으로 인해 발달된 청각으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츠바틴과 함께 어찌할지 모 르던 그는 그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주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람이‥." "‥멈췄다." 소름이 돋았다. 실감한 것이다. 시즈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음유술사였다. 적이었다‥. 그의 이빨이 드러나며 눈에 살기가 맺히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3) "바람이 분다." 깔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 휘날렸지만 넬피엘은 그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바람이 이처럼 개구 쟁이처럼 예측도 못 하게 찾아왔다는 걸 그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바람'을 찾아 떠나고 싶었지만 그가 '바람'을 찾는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그의 타는 의지도 깔끔하게 꺼버릴 수 있는, 사랑스러운 물의 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치 아플 거야." 게다가 귀찮은 '대지의 기사'은 넬피엘을 발견하는 즉시 '역사의 고리'와의 싸움으로 끌어드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리지 않다." 지금은 분위기, 사상, 감정 등에 휘말리던 넬피엘이 아니었다. 그가 발하는 힘은 인간들과 어울리기에는 허락되지 않은 정도의 것이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멀리 왕성이 있을 수도를 바라보는 넬피엘의 눈동자에는 애수(哀愁)가 가득 했다. 툭! "넬피엘!? 자네, 백작님의 심부름으로 수도에 간다고 하더니 왜 가다가 말고 멍하니 서서 폼을 잡는 건가?" "에!? 파켄스 씨. 요즘 일은 잘 되십니까?" "에이‥ 별로야.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어째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가. 덕분에 사람들이 돈을 쓰려고 하지를 않아. 꽁꽁 숨겨놓는 분위기가 커지고 있어." 넬피엘은 힐끔 서있는 장소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수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쳤고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 다. "후훗! 이거 위험하겠는데요. 빨리 갔다 와야겠어요." "어, 그, 그래. 어서 가봐." 어색하게 파켄스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신경쓸 틈이 없다고 판단한 넬피엘은 걸음을 재촉했다. "저 친구는 여전히 사람을 녹아나게 만드는 군." 그 날, 식지 않는 얼굴빛으로 집에 들어간 파켄스는 부인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으며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 편 몇 시간 후, 넬피엘은 길을 가다가 말고 다시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곳은 마나이츠의 저택이 자리한 마을에 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의 침묵을 참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는데 슬쩍 보아도 험상궂은 인상을 가장 사내였 다. "이봐, 젊은이. 이제 고민하고 어서 결정을 하라고. 동행세를 내고 여기를 지나갈 건지 아니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건지‥." 아무래도 사내는 소년이 금전적인 문제로 고민한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넬피엘은 전혀 그를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서쪽인가? 바람이 모여드는 곳은?' "이봐, 젊은이. 어서 결정을 하라니까." "좀 조용히 해보세요." "뭐!?" 사내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넬피엘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얼마면 될까요?" "‥‥." "이백? 삼백? 오백이면 되겠죠? 요즘은 물가가 안 좋으니까. 그럼 이만. 휙. 돈주머니를 던져주고 넬피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자 사내는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수풀 속에서 걸어나온 사내의 동료가 주머니를 열어보더니 말했다. "대단하군. 정확하게 오백이야." 넬피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는 다른 음유술사들을 꺼리면서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 대해서만큼은 호기심 을 참지 못했다. 불꽃의 업을 지녔던 존재들이 몇 천년을 기다렸기 때문일까. 그는 소리없이 공간 자체를 넘어서 이 동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느낌이 들었다. 나무 위에 앉아서 마나의 막으로 기척을 막은 그는 살짝 고개를 빼밀고 사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호오‥. 저 친구들은‥." 잊을 수가 없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적으로서 시간을 공유해왔으나 그래도 몇 년이라는 시간동안 얼굴을 맞댔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흠, 노리스와 츠바틴이 왜 저 쪽에 가있는 거지? '역사의 고리'를 탈퇴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뭐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넬피엘은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했다. 곧 있어 그가 기대하는 구경거리가 펼쳐졌다. 마법사 무리 측에서 공격을 시작 한 것이다. 상대도 가만히 당할 리는 없었으므로 반격을 개시했고 선두의 전투가 전체로 확산되면서 숲은 마법의 빛과 검들의 충돌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과연 싸움구경은 재밌었다. 넬피엘이 가진 소멸의 의지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두 무리는 부 상자 없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땀이 일어날 정도였다. 보를레스라는 사내와 바크호라는 남자 는 서로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검을 휘두르는 게 척 보아도 꽤나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젠티아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 수준들이군.' 그런데로가 아니라 두 검사의 실력은 분명 상위급이었다. 주위 수풀에 숨어있는 어쌔신들이 껴들지 못할 정도로. 다 만 넬피엘의 눈이 특이할 뿐이었다. 하품을 하면서 그는 크고 둥근 눈동자를 뒤굴뒤굴 굴렸다. 애초에 관심 대상이 었던 '바람을 노래하는 이'를 감지해보았지만 대상의 의지만 느껴질 뿐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래가지고는 도와줄 수도 없는데‥. 그냥 가버릴까?' 그나마 넬피엘의 흥미를 자극하던 검사들의 싸움은 바크호의 우세로 점점 보를레스는 방어에 급급했다. 자고로 싸 움은 치고 박고가 제격이지, 한 쪽에 일방적이라면 그저 구타에 지나지 않았다. 보를레스의 패배에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살벌하게 달려왔는데 넬피엘은 이미 여인이 마녀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주위에서 밀 집되어야 할 마나가 그녀에게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전 그와 상대했던 마법사, 로진스에 뒤지지 않 는 마력이 느껴졌으니 마계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녀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특이한 그룹 인원들인 걸!?' 어렵지 않게 눈에 보이는 마녀와 드워프, 그리고 막 보를레스를 치료하기 시작한 소녀는 인어였다. 몇 년전 '역사의 고리'와 겨루며 수많은 종족과 상종한 넬피엘이었지만 인어는 육지의 종족에 대해 극심한 혐오증에 시달리고 있는 정신병자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천적이라는 인간,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생체실험 정신을 갖추고 있는 마녀와 함께 다니고 있다니‥. '아무래도 봉인에 갖혀있는 동안 세상이 꽤 변했나!? 책이라도 읽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 넬피엘. 그는 곧 자기만큼이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로진스 의 불꽃 튀기는 마법에 혀를 찼다. "쯧쯧‥. 저 기술은 아직도 변함이 없군. 상투적이고 구식인데다가 화력(火力)에 비해 효율도 없어서 구질구질하기 까지 하군." 넬피엘이 졸린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만약 로진스가 들었다면 당장 달려와 나무 째로 바비큐를 만들었을 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법사은 고지식한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말은 정답이어서 로진스의 마법은 아 직도 마법사들에게 전설처럼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환호성과 경탄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까 말이다. 그에 맞서는 마법은 골렘과 동결마법이라는 평범한 종류의 주문이었지만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녀와 인어가 힘을 함치자 효과는 몇 배의 상승작용을 가져와 불새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넬피엘이 추구하는 개성이 넘치 는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했고 넬피엘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탐색하듯 두 여 인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주시했다. 동시에 파마리나와 레스난의 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들이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출신의 두 여인은 그들만의 독특한 마나 분야(?)에서는 일가견을 자연적으로 쌓고 있었기에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대륙의 5대 마법사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비의 고리'의 수장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힘겨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로진스가 마력(魔力)을 높이고 마법사들이 바람은 일으키자 넬피엘은 쓴웃음을 지 었다. 사자가 여우를 잡는데 늑대까지 사자를 도우니 어떻게 상대가 되겠는가. 보기만 해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 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정령술로 바람을 일으켰지만 밀리기 시작한 마력의 전세(戰勢)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새카맣게 타버릴 두 여인이 넬피엘의 뇌리 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상상이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의 바 람이 막혀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들의 숲 전체를 감싸안고 대기(大氣)조차도 벗어나지 않는 거대한 의지에‥. "뭐, 뭐야!? 이건?" 마나에 친근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압박감, 특히 의지에 민감한 음유술사는 이를 악물고 경악성을 토했다. '불 꽃의 소멸'이라는 의지가 가장 파괴적이라고는 하나 바람만큼 거대하고 광범위할 수는 없었다. 넬피엘로서는 처음 으로 느껴보는 존재감에 잠시나마 몸을 떨었다. '저 사람인가? 녀석과 싸운 이후 이런 존재감은 처음이군. 하긴 녀석은 세일피어론아드의 생물이라고 볼 수 없었으 니까.' 흥미로움으로 넬피엘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는 넬피엘의 의지에 노리스가 무언가 색다른 심적 변화를 겪고 있 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가늠 하는 듯 두리번거리는 노리스의 눈동자. 그의 이빨이 서 서히 드러나는 순간, 넬피엘은 미소지었다. '어느 쪽이지? 저 남자의 검 끝이 향하는 방향은?' 곧 정해질 것이다. 그리고 검 끝은 망설이지 않고 적이 된 상대를 베겠지. 서서히 노리스의 손이 검자루를 잡아갔 다. * * * "츠바틴, 혹시 내가 자네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더라도 용서하길 바란다." 검은 뽑은 노리스는 혹시나 츠바틴이 반대를 할 게 두려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츠바틴의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그는 피식 웃었다. 노리스의 옆에서 걸어가며 츠바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훗! 네 덜떨어진 생각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고." "그럼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아아아앗!" 노리스의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상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해 눈이 커지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쇄기를 박듯이 노리스가 외쳤다. "죽어라! 음유술사여! '바람을 노래하는 이' 시즈 세이서스!"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4) "츠바틴, 혹시 내가 자네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더라도 용서하길 바란다." 검은 뽑은 노리스는 혹시나 츠바틴이 반대를 할 게 두려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츠바틴의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그는 피식 웃었다. 노리스의 옆에서 걸어가며 츠바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훗! 네 덜떨어진 생각 정도는 예측하고 있다고." "그럼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아아아앗!" 노리스의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상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해 눈이 커지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쇄기를 박듯이 노리스가 외쳤다. "죽어라! 음유술사여! '바람을 노래하는 이' 시즈 세이서스!" 완전한 허점이었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로길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시즈의 표정, 어찌 보면 노리스는 로길드 일생 의 목표를 가볍게 해낸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려고 할 때 전부터 노리스와 츠바틴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존 재가 있었다. 캉! "꺄악!" "아리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노리스의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아리에였다. 노리스의 공격이 워낙 강해 바로 검을 놓치고 뒤로 튕겼지만 그로 인해 시즈가 피할 틈이 생겼다. 옆으로 급히 몸을 굴리는 시즈. 그러나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노리스에 이어서 민첩하게 다가온 츠바틴은 막 일어서며 자세를 잡는 시즈에게 한 움큼의 가루를 뿌렸다. "크윽!" 바람의 의지를 일으키고 있던 시즈는 바람에 실려서 날아온 가루를 흡입하고 가슴을 움켜잡았다. 노리스의 검을 바 람의 장벽으로 막으려고 했는데 츠바틴은 그 예측을 뛰어넘어 바람에 잘 퍼지는 독약의 가루를 뿌린 것이다. 황급 히 바람을 멈췄지만 이미 독은 몸에 영향을 미쳐 눈앞이 어지럽기 시작했다. "호오‥. 저런 방법이 있었군. 풍향을 가늠해서 바람에 휩쓸리는 존재로 공격하다니‥." 츠바틴의 공격에 로길드가 경탄했다. 옆에서 파마리나와 마력을 겨루던 로진스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 친구 로서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츠바틴의 전투술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어째서!?" 시즈는 독에 당한 것보다 노리스와 츠바틴에게 공격을 당했다는데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행복 하게 만들어주던 이들이었는데‥. 그렇다고 망연자실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뒤로 구른 아리에의 무사를 살피며 그 가 반문하자 노리스는 고소를 짓고 검을 바로 잡았다. "나도 그렇게 묻고 싶구나, 시즈. 설마하니 네가 '마땅찮은 시즈'이며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냐고? 내가 복수하길 원한다는 사람에 대해 말했었지? 그가 '불꽃의 춤을 추는 이'라면!? 이제 이해가 가나? 죽어! 나, '원의 힘'의 사령관 노리스가 널 죽이겠다." 노리스의 검에 어린 살기(殺氣)는 진짜였다. 피하지 않으면 두 쪽이 날 기운이 시즈를 덮쳤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 가 다시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검을 막는 긴 할버드가 없었다면. "뭐 하는 거냐? 시즈, 어서 일어나!" 작은 키에 보통인간보다도 기다란 할버드를 힘차게 휘둘러 노리스를 뒤로 물러서게 한 토루반은 얼굴을 한껏 찌푸 렸다. 겨우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저려왔다. 한 편, 노리스는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아리에 에게 막혔을 때처럼 망설이고 내려친 게 아니었다. 다시 아리에가 막았다면 그녀가 가진 두 자루의 망고슈가 드워 프가 만든 명품이라고 해도 단숨에 두 쪽이 났을 것이다. 물론 드워프가 힘이 강하긴 하지만 체격도 작다. 무게감이 있는 노리스의 일격을 막아낸 것도 아니고 완전히 튕겨냈으니 그가 놀랄 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공격하 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달랐다. '도대체 저 할버드는 뭐지?' 긴 몸체, 거대한 날. 보통의 할버드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솜씨 좋은 드워프는 커다란 무기를 나누어서 들고 다니 다가 위험해지면 조립해서 쓴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므로 당황스럽진 않았다. 다만 몸체 끝부분에 달려있는 원통의 물체가 신경쓰였다. "츠바틴, 뭔지 알겠나?" "글세, 암기 종류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측면으로 상대하는 게 좋을 거야." "측면이라‥. 예상외의 복병이군." 실력자들의 싸움에서 얼마나 피하는 시간을 단축하고 상대의 허점을 노리느냐가 승부의 갈림길임을 생각할 때 정면 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약점이었다. "복병이라니, 우리가 할 소리군. 어서 덤비게. 설마 겁을 내는 건가?" "웃기는 군." 노리스가 발끈하여 공격을 시작하자 얼마 되지 않아 토루반은 위기에 몰렸다. 조금만 방어가 늦으면 토루반의 짧은 목이 떨어질 찰나, 츠바틴이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노리스는 방심하여 토루반의 할버드 가 정면을 향했다는 걸 주의하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극적인 상황이 계속되면 냉정할 수 없는 법이지." "노리스, 피해!" 눈앞이 번쩍했고 귀에는 츠바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를 악물고 구르는 순간 복부에 강한 충격이 왔다. "커억!" 마법사들도 싸울 생각을 않고 토루반을 멍하니 주시했다. 키득키득하고 전설에 나오는 마왕처럼 웃어대는 토루반의 할버드, 그 중에서도 몸체에 달려있던 원통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무럭무럭 솟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토루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발을 가리켰다. "흐흐흐. 어때? 내 짧은 다리로도 이 정도의 발차기는 충분하지." "쿨럭! 쿨럭! 드워프들의 힘은 역시 무섭군." 보통 타격력의 차이는 무게와 속도, 그리고 길이다. 짧디 짧은 드워프의 다리에서 인간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노리스의 복부를 넘어서 내장에까지 타격을 입힐 타격력과 속도라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짐작이 가능했 다. 하지만 정말로 드워프의 무서운 점은 바로 도구를 개발하는 기술. "그게 바로 화염의 칼날이로군." "맞았어. 드워프들이 집안에 하나씩 숨겨두었다는 화염의 칼날이지."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5) 예로부터 신화나 영웅의 전기에는 전설적인 무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제조자는 대부분 드워프다. 아직까지도 드워프의 무기들은 동방의 무기를 제외하고는 서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그러나 세간에 그들의 예술 품(?)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있었는데 전설에서 나오는 불을 뿜고 우레를 부르는 마법 무구들은 절대로 드워프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무기에 마법사들이 주문을 주입시긴 게 있기는 하지만 드워프는 마법을 모르 는 종족이었다. 아니, 모르기보다는 무시했다. 인간처럼 이익을 계산할 줄 아는 존재라면 좋은 기술이나 능력을 받 아드리는 게 당연했으니 드워프들이 마법을 익히지 않는데는 그에 뒤지지 않는, 오히려 압도하는 기술이나 능력을 가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금속과 보석을 다루는 기술도 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드워프들을 지키는데는 부족 함이 있을 것이다.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정말 굉장하군요."하고 로길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들의 최대 무기는 바로 화 약이었다. 발명한 동방에서조차 사용하기를 금지하고 있다는 화약은 서방에서는 대부분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강철과의 싸움으로 동방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드워프들만이 화약의 개발기술을 훔쳐낼 수 있었는데 그들 역시도 화약의 발전이 미칠 영향이 두려워 사용을 극히 제한했다. 작은 사용범위 중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화 염의 칼날이라고 불리는 원통이었는데 바로 현재 토루반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긴 장대나 무기에 달아 사용하는 것 으로 화염방사기라고 볼 수 있었는데 50cm 정도의 불꽃 중심이 눈이 부신 밝은 빛을 띄는 걸 생각할 때 얼마나 뜨 거울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 편, 할버드의 원통에서 토해지는 불줄기에 노리스는 연신 뒤로 물러서기 바빴다. 불줄기는 어떻게 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피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폭염(暴炎). 멀찍이 피 하는데도 노리스의 머리카락은 이미 불에 그을렸고 상반신은 온통 화상 투성이었다. 아마도 토루반의 검술 실력에 맞춰 빠르게 휘둘러지는 불줄기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게 분명했다. "화염의 칼날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요. 바크호, 다시 나서주셔야 겠는데요." 로길드의 여유 있는 모습이 바크호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노리스와 함께 협공을 한다고 해 도 화염의 칼날을 지닌 드워프에게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바크호의 고민을 짐작이라도 하듯 로길드는 말을 이었다. "싸워서 이겨달라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끌어주었으면 하는 거에요. 드워프의 현자가 사용하는 게 화약이라면 '화 염의 칼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러다가는 '원의 힘' 수장이 '역사의 고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생을 마감해버리겠군요." 그의 말대로 바크호는 토루반의 후방에 서서 화염 줄기가 계속 노리스에게 몰아치지 않도록 서서히 압박했다. 자존 심이 상했는지 노리스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츠바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하는 데 열중했다. 그 옆에서는 아직도 아이스 고렘과 불새가 힘을 겨루고 있었는데 시즈가 바람의 원조를 멈추자 마법사들의 힘에 의 해 불새의 불이 거세게 골렘의 얼음을 녹여댔다. 치이이익! "크윽! 밀리겠어." "이미 밀리고 있어." 악에 바친 파마리나의 외침에 카이젤이 무미하게 대꾸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들의 대조되는 표정과 말을 주고 받는 모습들은 익살스런 연극을 보는 듯 하여 레스난은 키득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자 파마리나가 손으로 종이 구 기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생선이, 지금 죽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오냐!? 당장 보를레스 갔다버리고 달려와서 도우란 말야!" "아, 알았어요." 레스난이 낑낑거리며 보를레스를 끌고 시즈와 아리에의 곁으로 가는 모습은 마치 애완용 강아지가 커다란 투견(鬪 犬)을 끌고 가는 듯했다. 혼신의 힘으로 바둥거려 겨우 보를레스를 옮기는데 성공한 그녀는 한 쪽 눈을 감은 채 입 술이 파랗게 변색되어 있는 시즈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말투가 공손하게 변한 이유는 방금 전 대기(大氣)를 움직이던 의지의 마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거 대하여 거역할 수 없을 정도의 의지. 만약 시즈가 그녀에게 의지를 담아 명령한다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의심스 러웠다. "별로 괜찮지 않은 듯 하군요."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여전히 담담하기는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중독되자마자 손끝이 보랏빛을 내기 시작했다. 공 기 중으로 흡입해서 이 정도의 증세를 나타내는 독분(毒紛)이라면 극약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즈의 입에서 독기 운 서린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후후‥ 처참하군." "시즈‥." 아리에가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탐스러운 흑발을 그의 볼에 부비며 위로하는 것 이 시즈로서는 눈앞이 가리워지는 어둠에서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고개를 드니 바크호와 노리 스를 불꽃의 칼날로 위협하는 토루반이 보였고 그 뒤의 심각한 얼굴의 츠바틴도 보였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로 길드도 보였다. 누구는 시즈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였고, 어느 누구는 도움을 받았던 이였다. 잠시지만 생사(生死)를 함께 하던 사람 은 그를 자신을 죽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곤두세웠고 생명의 은인(恩人)들은 검광(劍光)과 독을 뿌렸다. 그래도 증오 가 일지 않았다. 다만 자조의 웃음만 나올 뿐. '그런 것이었습니까? 썩어빠진 사회의 근본을 부숴 버린다는 게‥. 세상을 바꾼다는 의지는 이토록 힘겨운 것이었 습니까? 은인(恩人)이 검을 겨누고 지인(知人)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내가 그토록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시즈!?" 시즈의 기색이 이상했는지 아리에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불안한 시선을 쳐다봤다.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시즈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역시 난 '마땅찮은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군요. 가요, 아리에." "에!? 어디로?" "이들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시즈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사람은 로길드 뿐이었다. 눈동자가 풀린 걸로 보아서 중독된 게 분명했는데 무언가 를 하려는 듯 제법 힘차게 몸을 일으키자 그는 긴장했다.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그 주의에 귀를 기 울일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 없군. 내가 나서야 하나?' 로길드는 몸이 약한 주제에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그렇게 뛰어난 수준도 아닌지라 지금 그 가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간단한 마력탄이었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다 끼어있는 반지의 증폭력을 한꺼번에 사용 한다면 충분히 독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즈를 상처 입히기 충분했다. 파마리나, 카이젤, 레스난이 힘을 합쳐 겨우 로진스를 막아내고 있는 것에 비해 토루반은 두 명의 실력자를 상대로 몰아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그의 속마음은 다른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이러다가는 이 놈들을 해치우기 전에 화약이 모두 떨어져버리겠어.' 아마도 상대가 '화염의 칼날'에 대해 파악했다고 생각됐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화상을 입으면서 억지로 견디지 않을 것이다. 땀이 등을 매끄럽게 쓰다듬었다. 할버드에서 쏟아지는 폭염(暴炎) 때문이 아니다. 식은땀이었다. 화약 이 다하면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막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누군가 옆으로 접근하는 걸 느끼고 불을 뿌리려는 토루반. 그러나 이미 상대는 그의 어 깨를 짚고 있었다. "토루반. 이제 되었습니다." "시즈. 무슨 소리인가?" 납득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크게 높이면서도 토루반은 할버드를 거둔 상태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바위가 내리누르 는 듯한 존재감.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들어갔을 때 온몸으로 수압을 받는 것 같은 무게가 귀여운 소녀에게 부축되 어 가까스로 서있는 청년에게서 느껴졌다. 싸움을 멈춘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긴장된 눈초리로 시 즈를 주시할 뿐. 시즈는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함께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나의 바램이 누군가는 좋지 않게 받아드리리라고 생각했 지만 현실은 그 이상이군요. 어쩌면 나는 이 곳에 오지 않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한숨, 그리고 그는 입을 벌려 소리를 높였다. 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삶이 너무 조용해... 내가 살아있긴 한 걸까... 아무 일 없겠지... 또 오늘 하루도... 모두들 그런 상상을 할까..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지개를 펴다가... 날개가 돋아나... 다들 사는 대로 따라서 산다는 게 난 정말 싫었거든... 항상 꿈꿔왔던 바램은 나의 작은 노래로 세상을 말하는 것... 함께 해준 친구들과... 꿈을 믿는 사람들과..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어... 움츠렸던 너의 어제... 불안하던 너의 미래... 오늘만은 활짝 펴보는 거야... 눈에 보여지는 것들만 쫓으면서 사는 건 싫었거든 항상 꿈꿔왔던 바램은 나의 작은 맘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 웃고 있는 사람들과 울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눈물 흘리고 싶어 쌓여있던 걱정들과 지루했던 한숨들도 이제 모두 날려 버리는 거야 - 신승훈 〈비상(飛上)〉 35악장 만남은 불행일 확률이 클까, 행운일 확률이 클까?(6) 경쾌한 노래였다. 그러나 시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화려한 거미줄에 걸려 지쳐버린 곤충의 미약한 요동처럼 작은 떨림의 느낌이 베어 나오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들었던 이도, 주문을 외우던 이도 가만히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 청년의 꿈을 바라는 노래, 그리고 희망과는 다른 현실에 안타까워하는 목소리. 시즈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깃털처럼 은백의 빛깔이었기 때문일까? 노 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깃털을 잡지 못하고 우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 피브드닌은 노래와 함께 풍겨오는 따스한 바람에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들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하지만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은 없다. 그렇게 볼 때 수많은 꿈과 수많은 희 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은 불행이 아닐까?' 그의 귓가에 시즈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건 작은 절규였다. '윽! 몸이! 모두가 노래에 빠져있을 때 로길드는 발 밑이 허전해지자 깜짝 놀라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잡히는 것은 없 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아무리 목청에 힘을 줘도 소리가 나지 않았 다. '침묵의 주문인가? 헌데 어떻게 시즈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지?' 마법사들과 숲에 숨어있던 인원까지 합치면 100여명에 가까웠지만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래를 부를 뿐이었 다. 곤란했다. 허공에서는 운신(運身)하기도 힘들어 검사는 균형잡기에 바빴고 마법사들은 주문도 외우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문을 외울 수 없다고 마법을 쓰지 못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어쩌면‥ 하는 마음에 반지에 응축 해두었던 마나의 힘. 이것이라면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바위도 뚫을 정도는 될 것이다. 힘준다고 더 강한 마력탄도 아니었지만 로길드는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서 시즈 를 겨냥했다. 웅 ― 소리는 없었다. 오직 고막을 울리는 파공의 울림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는데 열중하고 있는 시즈 바로 앞에 순식 간에 도달했다. 그러나, ‥. 로길드가 기대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없었던 것처럼 마력의 구체는 시즈의 머리 앞에 이르러 비누방울이 터 지듯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뜬 '역사의 고리'들. 시즈는 방금 전 자신에게 무 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이상(理想)은 모두와 함께 걸어가는 게 아니라 모두를 물리치고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허나‥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있는 이유가 '마땅찮은 이'가 되기 위해서라면 정말 로 '마땅찮은' 존재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즈 일행의 모습은 천천히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로진스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남은 검사들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발에 닿는 게 없어 그저 허우적대는 걸로 보였다.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흘러 시즈들이 사라지고 한 시간이 되어서야 허공에서 풀려난 로길드는 츠바틴에게 다가가 물었다. 멍하니 시즈가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던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데리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공중에서 떨어질 때 착지를 잘못하여 다리가 삐거나 부러진 마법사들을 가리켰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쓱 훑은 츠바틴은 떨어질 때 엉덩이를 찌었는지 마사지에 열중하고 있는 로진스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길래 마법사들, 운동이나 좀 시키지!" "말은 쉽지. 다들 주문 연구하기도 바쁜 몸이라고!" "이봐, 이봐. 츠바틴, 로진스. 다툴 시간 있으면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나 도와주지 그래!?" 방금 전 츠바틴은 자신이 눈동자에 품었던 것을 노리스의 표정에서 발견하고 얼굴이 시뻘게졌다. 로진스도 다를 바 가 없었다. 10 년 전에는 이 검 밖에 모르는 친구의 무식함을 흉보곤 했는데 그 상대에게 한심하게 보이다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후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티격대며 마법사들에게 다가가는 츠바틴을 바라보던 노리스는 공기 속으로 사라졌던 사람들 이 있을 숲 건너 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츠바틴‥ 무리하는 군. 그리고‥ 나 역시‥.' 그가 검을 휘둘렀을 때 시즈의 눈동자가 아직도 뇌리를 떠돌았다. '왜?' '어째서?'라는 의문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던 눈빛. 모른 척, 당연하게 검을 휘둘렀던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마지막 시즈의 결연한 표정이 떠오르자 그 는 약간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잘 된 거야.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서로가 믿는 곳을 향해 나아가기를 주저할 테니까." 중얼거린 노리스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러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길드였다. 노리스 일행이 시즈를 공격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엿들었던 것이다. "배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나저나 누구였지? 나의 마력탄을 막아낸 자는‥. 분명히 시즈님은 아니었다. 도 대체 누구였을까. 침묵의 마법에 의해 주문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나의 마력탄은 반지의 증폭으로 인 하여 5써클에 달하는 파괴력을 가진 상태였는데 쉽게 막아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마법을 무효화하면서 5써클의 마력을 막아낼 수 있는 자!? 제발 나의 예상이 맞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 군."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1) 대륙 중북부에만 존재한다는 계절, 가을. 그 가을의 단풍은 소문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때가 지나서 그럴 것이다. 이 미 가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기온은 차가웠고 바람은 매서웠다. 겨울이 다가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숲 의 동물들은 벌써 두꺼운 털옷으로 갈아입은 채 눈이 내릴 때를 대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날 내리는 것은 눈이 아니었다. 롤크 산 중턱의 회색 느티나무에서 보금자리를 차린 다람쥐는 생전 경험 하기 힘든 광경을 본 자신을 의심했다. 올해 가을은 저장고가 가득 찼는지라 내년 봄까지, 아니 여름까지 늦잠을 잔 다고 해도 먹이 걱정은 없었기에 특별히 새하얀 눈을 보고 겨울잠에 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기다리던 눈 대신 거대한 물체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들은 가지각색의 괴상한 소리마저 포함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으악!" 나무에서 도토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칙-다람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법칙이다 -을 괴물체들이라고 거스를 수는 없었다. 몇몇은 다람쥐의 동족이라고 할만큼 날렵하게 착지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괴상한 소리 를 내지르며 떨어지는 물체일수록 바닥에 강렬하게 엉덩이를 들이박았는데 뒹굴뒹굴 구르며 부딪힌 곳을 문질러대 는 게 매우 추해 보였다. 특히 까치 꼬리 깃털처럼 가느다란 수염을 코밑에 달고 있는 두 마리는 거친 경련까지 일 으켰는데 그 모습에 다람쥐는 너무 잠을 안 자 헛것을 본았다는 자괴심마저 갖을 정도였다. 그 후로 회색 느티나무 의 다람쥐는 잘 시간을 꼬박꼬박 지키는 착한 다람쥐(?)가 되었다. "으아아‥." 정말이지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아팠다. 볼일 보는 아낙처럼 엉덩이를 까고 앉은 토플레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 약(秘藥)을 물에 고아서 조심스럽게 환부에 발랐다. 엄청나게 쓰리고 아픈 게 마치 동요에서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 아 있을 때 느꼈을 뜨거움이 연상됐다. 멀리서 그 신음 소리를 듣고 있던 피브드닌은 있는 친구 놈이라고 나이값도 못하는 소리나 지르고 있는 토플레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삐걱거리는 관절 하나 없이 멀쩡했다. 참고로 떨어질 때의 토플레와 피브드닌 은 제법 가까웠다. 다만 팔길이의 문제랄까. 토플레가 닿지 않은 파마리나의 지팡이에 허우적거리던 피브드닌의 손 이 닿았다는 게 현 사태의 이유였다. 덕분에 승합용 지팡이가 되어버린 파마리나의 지팡이는 현재 과도한 출력으로 비실거리는 상태였다. "그러지 말고 블리세미트한테 치료를 받지 그래? 매우 추해." "그랬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 꼬마 사제는 지금 시즈를 치료하느라 바빠. 그 츠바틴이라는 빌어먹을 매복자가 뿌린 독이 시즈가 바람을 움직이던 차에 흡입되어서 기관지가 심하게 중독되었어." "그, 그런데 네 녀석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어서 가서 시즈를 봐줘야 할 게 아니야?" "이미 보고 왔어.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고. 다만 약효가 독기(毒氣)와 싸울 때 시즈의 생명력이 급속히 감소되기 때문에 꼬마사제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토플레는 다시 고약을 바르는데 열중했다. '그래도 역시 의사는 의사인 모양이군.' 그래도 역시 못 볼 것은 못 볼 것인 모양이다. 피브드닌은 수풀에서 끙끙대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 시즈가 있는 곳 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미 다른 이들도 시즈의 상세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운데서는 블리세미트의 성력(聖力)에 의한 초록빛 광채가 무지개처럼 둥글게 반원을 만들며 맴돌았다. "상태는 어때?" "저야 뭐 원래 튼튼하지 않습니까? 하하핫!" "자네말고 시즈 말이야. 자네는 상관도 안 하네." 냉정한 그의 어투에 보를레스는 가슴에 깊은 상처를 얻고 말았다.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며 슬픈 표정을 지은 사 내는 중얼댔다. "쳇, 다들 난 관심도 없군. 나도 부상자라고." "뭐라고 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다들 저렇게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말이죠." 다들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즈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블리세미트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다. 보통은 성력 (聖力)으로 인한 생명술을 행할 때 인간은 새로운 기운을 받아드리기 보다는 배척하는데 시즈는 오히려 마꾸 끌어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기와 약효과 싸우는 그 부가재료이기 때문인가보다 하고 힘을 쏟고 있었지만 사실은 시즈의 몸에 산재되어있는 에릭사의 기운 때문이었다. 사실 생명력으로 치자면 시즈는 독과 토플레의 치료약이 평 생 몸 속에서 싸운다고 해도 끄덕 없었다. 다만 기(氣)나 마나mana는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강력 한 에릭사의 기운에 블리세미트의 성력이 휩쓸려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를 알 리가 없는 소년은 생명에 대한 애착 이 강한 사제답게 혼신을 다해 생명술을 행했다. 보통 생명술은 환부에서 약한 성광(聖光)이 이는 정도다. 그런데 시즈와 블리세미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녹색 광체는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물론 필요 없는 노력이었지만‥. "이제 거의 되었습니다. 약간의 독기운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곧 회복될 거에요." 잠시 후 숨을 거칠게 내쉬며 시즈로부터 떨어진 블리세미트의 여린 어깨를 토루반은 껄껄 웃으며 두들겼다. "허허헛. 블리세미트,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좀 도와주시지 그랬어요?" "자네는 신의 축복을 넘치게 받는 사제가 아닌가. 우리는 나눠줄 만큼 넘치게 받지는 못했거든. 하하하. 게다가 시 즈는 여기서 죽을 놈이면 예전에 죽었을 거라고."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불안했던 토루반. 피식 웃으며 시즈의 곁을 떠날 줄 모르는 아리에를 바라보았다. 그 녀는 얼마나 몸을 졸였는지 아직까지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이미 독으로 안색이 처참할 만큼 썩은 빛을 발 하던 시즈는 착지를 하자마자 비틀거리더니 곧 기절해버렸고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가. 물끄러미 제 색깔이 돌아온 청년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에을 토루반이 팔꿉치로 쿡쿡 찔렀다. "걱정마. 중독은 거의 나았으니까. 저 붉은 입술에 언제든지 입을 맞춰도 상관없어.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토루반!? 난 그냥‥." "자자‥ 내가 다 안다니까. 많이 무서웠지, 아리에? 연인의 입이 시퍼렇게 변하면 왠지 껄끄러울 거야." "그게 아니라고요!" 아리에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자 토루반은 더욱 재미를 붙이고 놀려대기 시작했 다. 거기에 파마리나까지 가세하자 그녀는 귀는 물론이고 목까지 빨게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게 아니긴‥ 평소에 얼마나 닭살스럽게 구는지. 남자가 없어서 이렇게 서러울 줄 누가 알았겠어." "파마리나, 남자가 없다니! 난 남자로 안 보인단 말입니까? 이 근육이! 멋진 상체근육이 안보입니까?" "보를레스, 붕대감긴 근육은 별로 매력이 없어." "윽!"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건 사투를 했다는 걸 잊은 걸까? 그들은 금새 서로를 잡고 농담을 건네며 웃어댔다. 잠시 후, 깨어난 시즈는 눈을 뜨자마자 눈물을 일렁이며 품에 안겨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리에의 행동에 어리둥절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리에." "훌쩍! 훌쩍!" 토루반과 파마리나의 합동공격을 아리에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려보는 시즈의 눈길을 피해서 사람들은 고 개를 돌렸다. 그 중 몇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크게 투덜거렸다. "마누라가 보고 싶군." "남자를 찾아야 돼, 남자를‥." "쳇! 나같은 남자도 드물다고!"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2) 그런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으니 바로 인어인 레스난이었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육지의 종족들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무슨 붕어 아가미도 아니고 저렇게 쉴 새 없이 뻐끔거린담. 레스난은 그보다 유일하게 자신의 관심을 끄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녀는 현재 수풀에 숨어서 몰 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청색 머리카락은 녹색의 풀잎에 가려져 은신(隱身)하기에 편리했지만 상대는 어떻게 알았는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뭘 보는 거야? 남자 소변(小便)보는 거 처음봐?" "아! 네. 처음 봐요."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의 기세에 카이젤은 일보다가 쓰러질 뻔한 위기상황을 겨우 넘겼다. 바지를 추스르며 뒤를 돌 아보니 레스난의 금색 눈동자는 호기심에 찬 고양이처럼 말똥말똥 그를 향해 있었다. 아무리 이종족이고 양성체라 지만 그 모습은 아름다운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제 막 청년에 들어서고 있는 카이젤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 다. "왜 따라오는 거야?" "그야‥. 저기‥ 따라가면 안 되는 거 에요?" 자꾸 발소리가 계속 뒤를 쫓으니까 짜증을 내며 소리쳤지만 레스난이 반문하자 카이젤은 할 말이 없었다. 조용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된 레스난은 이제는 아예 카이젤의 옆에서 함께 걸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 에요?" "‥‥." "어디 가는 거냐고요!?" 카이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는지 어떤 질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레스난은 정말로 붕어가 숨차서 아가미 뻐끔일 때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어디 가는 거 에요?" 수십 번을 늘어놓았을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카이젤은 실토했다. "사냥하러 가는 거야." "사냥!?" "그래. 아까 마차에 다 두고 와서 먹을 게 없다고. 다들 향락(?)에 정신이 없는데 나라도 먹을 걸 구해와야 하지 않 겠어?" "음‥ 좋아요! 나도 도울 게요." 카이젤이 '안 도와줘도 되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인어인 레스난의 귀에 와 닿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풀벌레 소리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카이젤이 골 아파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냥에 '도움'이라는 단어가 무성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아니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스난은 물통에서 뽑아낸 물방울로 화살을 만들어서 토끼를 비롯하여 꿩을 몇 마리씩이나 잡았는데 카이젤은 무안하게도 아 무 것도 잡지 못했다. 결국 식식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진 그는 그 때까지도 히히덕거리며 농담 건네기에 바쁘던 다 른 일행을 기쁘게 만드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이거‥ 멧돼지잖아!? 그것도 이렇게 큰 놈을 잡아오다니‥ 이런 놈들은 워낙 빨라서 도망치면 잡기도 힘들텐데‥. 게다가 꿩과 토끼까지 가지가지야!" "흥‥." 콧날을 한껏 세우며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표정을 짓는 카이젤. 그러나 누가 알리요. 그가 레스난에게지지 않기 위해 서 바람의 정령으로 멧돼지를 탐색하고 땅의 정령으로 멧돼지의 공격을 막고 물의 정령으로 물대포를 쏘아대는 노 력을 했다는 것을‥. 그러나 자기를 이기기 위해서 카이젤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걸 아는 걸까? 레스난은 사람 만한 멧돼지를 잡아오 는 그를 반짝이는 눈망울로 주시했고 이제는 아예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고기가 구워지자마자 재빨리 들어서 카이젤에게 바치는 것이다. 보고 있던 파마리나가 한마디했다. "여기 눈꼴사나운 커플 하나 더 있었군." "예?" "한쪽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것에 약간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하지만 파마리나는 곧 그녀를 놀리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레스난은 그저 큰 눈을 껌뻑이며 무슨 얘기하는 건가요?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스난은 일행 중에 유일하게 정령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잘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미지의 것이었다. 오히려 레스난을 놀리자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리에였다. 정말이지 놀리는 기분이 살아나게 하는 여자였다. 불안한 기색인 그녀의 옆에서는 시즈가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눈을 감자 서서 히 바람이 일어나며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겨울밤이라서 그의 따스한 기운이 섞인 바람은 일행에게 계속 유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낳았지만 시즈는 알 리가 없었다. 바람이 사그라들고 눈을 뜬 시즈는 태양의 옷자락만 남아 있는 하늘 아래의 나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오십시오." 시즈가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마법사들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바람을 일으켰을 때였다. 바람은 그에게 동질적이면서도 극히 이질적인 존재가 근접해있음을 알렸다. 그것은 정말로 어느 순간 느껴진 것이라 시즈는 당황 했었다. 지금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바람을 퍼뜨리니 이번에도 역시 상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일행은 시즈와 눈빛과 표정까지 비슷해져 그가 시선을 고정한 곳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늦가을의 붉게 타오르는 노을에 나무들마저도 붉게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가만히 서있는 사람 또한 붉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3) "예!? 마나이츠 페르베이안 님이요?" 카이젤은 물론이고 토루반과 피브드닌, 심지어는 토플레까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나이츠라면 예전 살아있던 엘 시크의 헤트라임크와 함께 대륙에서 가장 유명했던 대마법사가 아니던가. 특히 실베니아인(人)인 카이젤은 눈에 가 득했던 경계심을 경애(敬愛)로 돌변시키고 열성적으로 되물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이 붉은 색이 은은히 감도는 검은 정장을 입은 노인이‥. 솔직히 말해서 길게난 수염을 쓰다듬으 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노인이 입은 복장은 꼭 어느 귀족 가(家)의 집사들이나 입는 의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즈가 저렇게 말을 하는데‥. "반갑습니다. 아까 전에는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 다. 그 마력탄은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빙긋. ‥‥. 어색했다. 노마법사, 마나이츠가 지은 미소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천진난만, 아니 상큼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 큼 신선한 것이어서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시즈들은 침묵으로 그를 주시했고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장본인 은 서둘러 말했다. "아하하‥ 비겁한 암습을 봐줄 수 없었을 뿐이라고. 아하하‥ 아하하!"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 시즈는 '잠시 착각을 했었나보다.'하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분명히 나무 아래서 그가 보았던 사람은 매우 젊고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게다가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노을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이다 라고 말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한 마디로 눈을 의심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 마나이츠에게 실례라고 느꼈으므로 시즈는 회상을 정지시켰다. 한 편, 마나이츠, 아니 넬피엘은 무척이나 곤란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약간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을 가볍게 찾아낸 이 청년. '과연 바람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군. 이제까지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출현한 적이 없어서 그 능력에 대해서 는 전승되어진 내 기억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나저나 곤란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본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할 듯 싶어-혹시나 젠티아나 아릴을 만났다면 그로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어릴 테니까- 주인님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연극이 서 툴렀다. 그것도, 무척이나. "자네들을 찾는데 꽤나 고생했지. 텔레포트치고 그렇게 깔끔한 이동은 처음이더군. 마나의 흐트러짐조차 없다니‥.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거야." 그의 말에 아스틴 네글로드의 학자들은 얼굴이 어두컴컴해졌다. 마나이츠가 신성력으로 위치를 파악했다면 로진스 라고 못할 리가 없었다. 일행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노마법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그들은 쫓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쫓을 수 있었지만 쫓지 않았어. 게다가 높은 공중에서 떨어져서 부상 을 당한 마법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치료에도 바빴고." "다행이군요. "그런데 시즈라고 했나, 젊은이?" "예. 그렇습니다." 마나이츠는 물끄러미 그를 살펴보다가 다짜고짜 옷을 벗겼다. "으악!" "가만히 있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마나이츠의 눈동자는 무언가 욕망에 타오르는 듯한‥이라는 것은 옆에서 보고 있던 아리에의 착각이었고 그는 시즈의 심장 부근에 손을 잠시 대었다가 떼고 일어섰다. "어떤가?" "‥‥. 괜찮은데요? 상쾌해졌어요." "어떻게 여독(餘毒)을 없앤 거죠?" 신성력으로도 소용없었고 토플레도 완전히 해독할 수 없었던 독을 가볍게 없애자 호기심을 표한 사람은 블리세미트 였다. 그의 시선에는 호승심마저 보였는데 토플레에 이어서 치료사로서 라이벌이 하나 더 등장했다고 판단했기 때 문이다. 역시‥ 어린애였다.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마나이츠가 답변했다. "간단하지. 몸 속에서 여독이 남아있는 부위를 찾아서 독기운만 태워버린 거야." "예?" 블리세미트는 '그게 간단하다고요?'하고 소리를 높일 뻔했다. 하지만 상대가 세간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라는걸 주위의 반응으로 알았으므로 말을 조심했다. 사막의 사원에서만 살았던 순진한 소년은 대륙의 실정이나 사 람들의 생활 그리고 소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대마법사의 소문으로 손가락을 까딱이면 산이 뒤집어지고 트롤이 개구리로 변하며 독수리가 메뚜기로 변한다고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는 개구리가 되기 싫었으므로 입 을 조심했다. 그러자 마나이츠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전까지는 기운차게 입을 열던 소년이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 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대마법사께서는 이런 곳에서 뭘 하시고 계셨소?" "당신은?" "난 토루반, 이쪽은 피브드닌이라고 한다오. 아스틴 네글로드에서 머리를 썩히고 있지." "아‥ 고명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던‥. 하하하! 200세가 넘으셨다고 들었는데 정정하시군요." "내 생각에는 대마법사께서 더 정정하신 듯 하오. 그 웃음소리도 그렇고‥." 토루반은 늙어서까지 상큼한(?) 미소를 간직한 노마법사에게 질투를 은근히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알 리가 없는 장본인은 연극의 서투름에 지례 겁을 먹고 있었으므로 전혀 다른 의미로 날카롭게 찔렸다. 찔끔한 넬 피엘은 얼굴에 당황한 경련이 이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입을 과장되게 벌리고 말했다. "아하하하하핫! 그렇습니까? 아! 질문에 대답을 안했군요. 요즘 펴온의 왕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 저택 주 변마저도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그래서 한 번 시찰을 나온 거지요." "다행이군요. 요즘 마나이츠님께서 몸이 불편하다고 소문이 쫙 퍼져서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애도(?)를 미리(?) 표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뵈니‥.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낯익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왼쪽 눈썹이 찡그려지는 걸로 보아서 그리 친근하게 느꼈던 사람은 아닌 듯 했다. 고개를 돌리자 흑발을 어깨까지 기르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소년이 보였다.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아까운 모습. 그 자를 보자 넬피엘은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저 자가 여기 있다니‥. 정령을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본 모습으로 나타났으면 큰 일 날 뻔했 군. 주인님이 저자를 어떻게 불렀더라‥.'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4) '저 노인네가 왠일로 저렇게 얌전하지? 다른 때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게다가 저 복장은 어디로 많이 보았는 데‥ 기억이 안 나는 군.' "자네는 값싼 남작의 식량보급원이 아닌가. 카이젤 자네가 이 곳에 있다는 말은 값싼 남작이 자네들과 관련되어 있 다는 뜻인가?" "관련이 아니라 우리는 각하의 명령을 받들어서 수도로 향하는 중입니다." 넬피엘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어쩌면 이들은 근래 실베니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기미와 직접적으로 관 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까?" "기밀입니다."하고 카이젤은 밀봉된 편지를 품에서 꺼내서 마나이츠의 앞에 한 번 흔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물며 제가 이것을 귀하에게 전할 때까지 뜯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마나이츠님께서 꼭 궁금해하신다 면 편지를 보게 될 때 같이 있으셔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마나이츠님은 수석 궁정 마법사니까 말입니다. 그 런 이유로 저희 사정을 이해해주시면 좋겠군요." '교활한 놈.' 넬피엘은 평소 마나이츠가 왜 이 소년을 가르쳐서 위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젤은 젠티 아의 명령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뜯을 때 있지 않기라도 한 다면 어물쩍 넘어갈 게 분명했다. 한 마디로 동행하며 보호해달라는 말이 아닌가. "좋아. 그 편지가 요즘 일련의 심상치 않은 소문과 관계가 있을 것 같고‥ 자네들을 따라다니는 게 다른 소식도 취 하기 쉬울 듯 하군." '계약 성립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이젤. 보통 마나이츠하면 얼마나 괴팍한지 도통 생각의 축을 예측할 수가 없는 늙은이였다. 그 날따라 왜 이리 고분고분한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따지다가는 될 밥도 죽이 될지 몰랐다. "자아‥ 든든한 보호자도 생겼으니 다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해봅시다." * * * "어여쁜 집사가 들어왔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만, 어찌하여 당신만 외로이 계시는 겁니까?" "어여쁜 아내를 데려와서 할 소리인가?" "안타깝게도 전 아내를 약올리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약올리는 겁니다, 마나이츠." "으드드득!" 마나이츠는 나아가던 감기에 몸살이 겹쳐서 재발(再發)하는 걸 느꼈다. 오한이 일며 저절로 이가 갈리고 손에서 땀 이, 머리에서는 열이 솟았다. 그런 그를 모른 척하면서 젠티아는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데린에게 말했다. "영지 내에서는 백작 각하의 심신(心身)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축제마저 준비하고 있던데‥ 이거 취소해야 될 듯 싶 군요. 이렇게 안좋다니. 데린, 가서 물수건 좀 차갑게 적셔와줘." "알았어요." 남작 부인이 직접 수건을 들고 방을 나서려고 하자 당황한 사람은 시녀들이었다. "남작부인,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온 김에 물수건이라도 적셔가야지 백작 각하의 병간호를 했다는 말이라도 듣지 않겠어요." '게다가 남편도 따로 할 말이 있는 듯 하고‥.' 그녀는 영악한 여인이었다. 어떤 기밀도 숨기지 않는 남편이 꺼릴 내용은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을 것뿐이었 으므로, 이해하고 자리를 비킨 것이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를 짓는 데린의 모습은 정말이지 천사같았다. 사라져 가는 그녀의 등을 넋을 놓고 바라보 던 두 남자. 젠티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부럽죠?" "네 놈한테는 과분해." 피식. 퉁명스러운 마나이츠의 대꾸에 젠티아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 쪽 눈을 상큼하게(!) 감으며 말했다. "이미 제 꺼 랍니다. 첫날밤 치른 지 꽤 됐어요. 후‥ 귀여웠죠." "이 능글맞은 놈아! 뭐 하러 온 거야?" 병든 노인의 악받친 소리를 들으면서도 젠티아는 능청스러웠다. 싱글거리던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채 고 입을 열었다. 고맙게도 데린이 하인과 시녀들을 잘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문 밖에서 젠티아가 말하는 걸 듣고 얼굴을 붉힌 채 거실로 도망쳐버렸다. 당황한 그녀를 쫓아 시녀들도 문 주위에서 떨어졌으니 어찌 보면 좋 은(?) 결과였다. - "이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요? 그러면 뭐 합니까? 알고 있다고 흔들리는 나라가 망치로 두드린 것처럼 제 자리를 찾습니까?" "집사를 보냈다." "예?" "집사를 보냈다고!" 젠티아는 어이가 없었다. 나라가 흔들리는데 고작 집사 한 사람을 보내서 어쩌자는 건가. 마나이츠는 보았다. '값싼 남작'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진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뒤로 돌아서서 돌리는 손 가락을. 분명히 손가락은 귀 옆 3cm 지점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나아아암작!!!" "아, 예. 말씀하십시오, 각하." "지금 뭔 짓 했나?" "설마 각하께서는 제가 각하를 치매든 노인네로 생각하는 망발을 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분명히 말 하건데 전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씨익‥. '누, 누구라도 좋으니 저 놈 좀 끌어내줘.' "자네는 지금 문병을 온 건가, 아니면 감기에 두통까지 추가를 시켜서 나를 저 세상으로 보낼 생각인가?" "그러길래 누가 중요한 일에 농담을 늘어놓으라고 했습니까?" "넬피엘을 내보낸 게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가? 안타깝게도 그의 능력은 출중하네." "넬피엘이든 누구든‥. ‥‥넬피엘?" '아차!' 마나이츠는 뇌리를 스치던 넬피엘의 당부에 자신이 실수한 것을 자책했다. -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로 제 이름을 부리지 말아주십시오. 전 집사입니다. 그렇게만 불러주세요. 이유는 후에 말 씀드리겠습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전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 젠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넬피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의 성은 무엇이지요?" "하하하하핫! 자네 귀가 어두운 모양이군. 넬피엘이라니‥ 내 아무리 늙었다지만 발음마저 안 될까. 네이피엘이라고 했네, 네이피엘." 제법 능청스럽게 여유를 부려보는 마나이츠였지만 젠티아는 가을을 기름덩어리 계절로 바꿔 놓을 만큼 능글맞은 사 내였다. 오죽하면 구렁이도 그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예의를 지키기 위해 혀를 낼름거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글 로디프리아에 퍼져있겠는가. 한 때, 글로디프리아에서는 그들의 영주를 '구렁이 영주'라고 부르는 이들도 허다했다. 데린은 남편을 경박하게 부르는 서민들의 태도에 불쾌함을 나타냈고, 젠티아는 그녀를 달랬으나 결국 사랑스러운 아내의 투정에 못 이겼는지 소문의 근원지인 길드의 길드장들을 불렀다. 그들을 보면서 간단한 훈교를 한 젠티아는 불만스러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띄운 얼굴로 혀를 내밀러 입술을 아주 천천히 핥았다. 스으으윽. 그 날로 소문은 없어졌다. '넬피엘이 이런 곳에 있을 리는 없지만 어쩐지 수상스럽군.' "그 네이피엘이라는 친구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그럼! 내 제자들보다 낫다네. 아마도 길드나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 중 그와 비견될 사람은 손에 꼽을 거 야." "그 정도입니까?" 비등록 마법사의 수위는 보통 5∼6의 클래스였다. 예전 편지에서 마나이츠가 집사의 미모를 자랑한 걸 염두에 둘 때 그는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5클래스의 마법사다? 그것도 비등록? '조사가 필요하겠군.' "그렇다면 그것은 되었군요. 제가 찾은 이유는 백작 각하의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입니다." 진지한 어조의 젠티아.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위압 감이 있었다. 마나이츠도 김장감을 가지고 귀를 기울렸다. 한 편, 데린은 일도 보지 않으면서 화장실에 있었는데 얼굴이 상기된 상태로 입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나 이제 다시는 여기 못 와.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젠티아,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찌그러진 냄비뚜껑‥." 밖에서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남작 부인을 걱정하여 시녀들이 떠나지를 못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5) 어느 국가든 수도는 발달한다. 진리라고 정의될 만큼 대부분의 역사와 국가는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실베니아의 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시장은 발전도를 보기에 아주 알맞았다. 물론 놀기에도 좋았고‥. 해상무역이 발달한 실베니아인 만큼 수도에는 엘시크나 아스틴에서 보지 못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우와아아아아‥." "입 다물어, 블리세미트. 침 흐른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물품이 부족한 사막의 사원에서 자라온 어린 사제가 무자비할 정도로 사람이 분비는 광경을 구경이나 했던 가? 카이젤의 파마리나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곳곳에서는 맛좋은 냄새가 풍겼고 거 리에는 휘황찬란한 물건부터 자잘한 소도구까지 걸려있고 바닥에 깔려있었다. 발에 밟히지나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 었다. "블리세미트‥. 내가 여기서 입을 다물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해. 시골에서 올라온 만큼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 만, 여기서는 어디쯤가서 입을 벌리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 촌놈인지 판단이 가능하다고." "그 말은 이 정도는 약과라는 뜻인가요?" "그래. 여기서 촌놈으로 찍히게 되면 물건 살 때 바가지를 톡톡히 써야 돼. 적어도 저 사람들처럼 대처하는 게 좋겠 지." 블리세미트의 시선이 카이젤의 손가락을 타고 서서히 뻗어나간 자리, 토루반은 감상하듯이 주변을 졸린 눈동자로 훑어보고 있었다. "건물들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있군. 멋만 부렸잖아." 그 옆의 피브드닌. "게다가 부린 멋도 어중간해서 엘시크가 훨씬 자연스럽고 고풍스러워. 이건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촌동네로군." '아하‥ 저렇게 해야 하는 구나.' 블리세미트가 고개를 열성적으로 끄덕일 때 카이젤은 가리켰던 손가락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도가 너 무 지나쳐! 서둘러 아스틴네글로드의 건방짐을 배우려고 눈에 힘을 준 소년 사제의 어깨를 잡은 그는 힘을 주어서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냥, 마음대로 해!" 그러나 잠시 후 카이젤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쓰러질 듯한 표정을 취했다. 어린 아이처럼 뛰어 노는 저 두 사람 을 어찌 표현해야 된단 말인가. 블리세미트는 어린애라고 봐주자.-카이젤은 그보다 두 살 많다.- 그러나 레스난은 20세에 가까운 성인이다. "와아‥ 저거 맛있겠다." "냄새도 맛있을 것 같아요." 반짝반짝반짝반짝‥한 눈망울이 물주(物主) 카이젤-상단(商團)의 후계자인 그는 명실상부한 갑부다-를 향하자 물주,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툭! 하고 사론의 손바닥에 놓이는 묵직한 주머니. "저 두 사람에게 맡겼다가는 사탕 하나를 사고 모두 날아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사론이 저 꼬마들을 보살펴줘." "그러지."(오오, 작가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왔던 사론) 잠시 후‥. 오물오물오물오물‥. 주르르륵‥. "맛있어!"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은 한이 컸던가.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은 오징어 꼬치를 입에 문 채 서로를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파마리나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새로 나온 신파극인가?" "확실히 파마리나가 나서서 호객 행위를 한다면 수입도 짭짤하겠어." "나야 능력도 좋으니까. 보를레스, 당신은 광대가 어울리겠군. 멋진 연기를 위해서 내가 붕산 가루로 경단을 만들어 주지." "내가 그걸 먹고 죽는 연기를 하기를 원하는 거야?" "아니, 죽기를 원하는 거야." "날 바퀴벌레나 뱀으로 아는 모양이군." "역시 아니야. 비슷한 종류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일행에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왁자지껄하다. 저마다의 할 일이 생각난 이들은 무리를 나누었다. "그럼 동쪽 성문에 있는 '백상어의 휴식처'로 오라고. 적어도 저녁 때까지!" 아리에는 눈치 있는 일행에게 감사했다. 피브드닌이 그녀와 시즈 단 둘의 무리에 끼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파마리 나의 '그러니까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하지?'라는 핀잔-그녀는 다 듣고 말았다.-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아 리에는 연인-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과 오붓한 오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즈. 시즈는 내게서 떨어지는 즉시 미아가 되어버릴 테니까 절대로 떨어지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요." 믿음을 주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이 끝나고 난 직 후 갑자기 그의 시선이 골 목 어느 지점을 향하고‥. "‥‥게 구이‥." "시즈! 내가 떨어지지 말라고 한지 아직 10초도 지나지 않았어." "미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못 드는 시즈. 아리에는 한숨을 내쉬며 거의 팔을 꽉 잡아 팔짱을 꼈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6) 그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싫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모습은 눈동자에 추억에 어린 회상을 가져오고 그 기억에 묻힌 이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게 서글플 뿐. 펴온에서는 서비스가 좋기로 꽤 이름 있는 여관, 백상어의 휴식처에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아올라 굴뚝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63세의 나이 를 먹은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몸놀림이었지만, 그의 속내용은 28세의 생생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표연하게 긴 수염을 날리며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높은 곳을 좋아하는 군." "드워프들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던 모양이군요." "글세‥ 선조들 중에는 그런 드워프들이 많았다고 했지.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어. 그 중에서도 드워프들은 말이 야‥. 곡괭이로 땅을 파던 때가 아니야. 동방에서 가져온 화약을 이용해서 쾅! 쾅!하는 소음과 함께 땅을 뚫지. 하늘 높이 솟는 건물을 만들고 다른 종족들로부터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양식을 사고‥." 넬피엘은 피식하고 웃었다. 벌써 몇 세대(世代)의 벽을 넘어서 살아온 이였다. 그리고 자신은 몇 천년을 이어온 존 재‥. "과연 '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둘은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까지. 하지만 시간 의 흐름‥ 역사의 흐름. 끝없이 흘러야 할 것들, 그렇기에 그에 대한 고민도 끝이 없을 것이다. "위에 계신 여러분, 다들 왔으니까 저녁 식사하러 내려가요."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걸 넬피엘은 아리에의 목소리로 깨달았다. 대부분의 여관이 그렇듯 '백상어의 휴식처'도 식당이 갖춰져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려던 일행은 뭔가 특별한 요리를 기대하고 있던 두 어린애-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의 부루퉁한 표정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카이젤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몸 을 돌리자 그들의 얼굴은 한꺼번에 밝아졌다. 암탉을 따르는 병어리들처럼 쫄랑쫄랑 카이젤의 뒤에 얼른 달라붙는 둘. "그러니까 말이죠. 아까 전부터 봐둔 게 있었어요. 맛있을 것 같다고요. 제가 안내할게요." "이미 알고 있어. 너희들이 아까 타르바칸의 바비큐을 먹고 싶어서 기웃거리는 걸 봤거든." * * * 밤. 비가 오려는지 까맣게 맑아야할 하늘은 회색 빛이 자욱하게 묻어났다. "밖은 비가 내리나?" "아닙니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추워졌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중년의 사내는 창가로 걸어가 몸을 기댔다. 약간 고개를 기울인 시선에 창문 밖으로 눈이 쌓 여 가는 게 엿보였다. "겨울이군. 곧 신민들이 어려울 시기야‥. 이런 시기에 내전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지금이 적기(適期)입니다. 궁정은 축제에 정신이 팔려 유흥만 일삼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지금 신민들이 전하를 탓하고 욕하더라도 후에는 칭송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난 그들을 이롭게 해줄 테니까. 실패는 하지 않는다. 난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거든." "설사 당신이 역적이라고 해도 전 전하를 칭송할 겁니다." "고맙군, 펠리언‥." 펠리언은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영원한 충성의 맹세의 확인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 본 사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아이를 '값싼 남작'에게 보낸 것을 용서하겠나?" "저, 전하! 그 얘기는 말아주십시오. 저에게는 넘볼 수 없는‥ 분입니다." "허허‥. 자네의 능력은 절대로 드로안 남작의 아래가 아니지. 검술은 좀 뒤쳐질지 모르지만‥." 삐걱‥. 창문을 열자 나풀거리던 눈송이가 방안으로 들 어왔다. 내리는 눈 때문일까? 중년 사내의 머리카락은 새어진 빛깔이 더욱 많게 보이는 것은‥. "지금쯤 드로안 남작, 젠티아의 사절이 올 때가 되었군. 지난 번 자네가 갔을 때의 엉터리 대답이 아니라‥ 그의 진 심을 가지고 올 거야." "예? 그렇다면 지난 번 남작의 대답은 본심이 아니었단 겁니까?" "‥본심이겠지. 그는 현명한 자야. 인내(忍耐)를 가지고 있고 기회를 알아볼 줄도 알지. 서서히 이 나라를 바꿔 나갈 생각일 거야. 과연 내 사위라고 봐야겠지." "‥‥." 말이 없는 펠리언. 중년의 사내, 하도너 킬유시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 동안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저 청년은 질투 를 벗어나는 정신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데린은 남작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지.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 를 킬유시 공작은 입에 담았다. "난 알고 있네. 그가 내 앞길을 막을 것이라는 것을‥. 내 딸이 그에게 있든‥ 그 에게 없든 말이지.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알고 있지만 정말 고마워. 그렇기에 데린을 그에게 보낸 거라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 사위의 힘은 강력하지. 내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지만 그의 능력을 나는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야. 어쩌면 나는 호승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이기던, 내가 이기던 내 딸은 살아남는다 는 사실이야. 자식만은 소중히 하고 싶은 게 어버이의 마음 아니겠나‥."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7) 이기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딸애는 원망하겠지. 그러나 젠티아는 전략가이자 기사로만이 아닌 사위이자 남 편으로서도 마음에 드는 남자였다.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기회를 보느라 '값싼 남작'은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심하다고도‥ 신중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로바메트 공작인데 그는 현명하지만 진취적이지를 못해.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을 유지하려고 할거야. 그렇 기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인재를 만들어야 해. 아니면 내가 그 인재가 되던가." "전하‥." "걱정 말게. 죽더라도 자네들에게 힘은 주고 갈 테니까. 내가 내란을 일으키면 드로안 남작은 날 진압하기 위해 궁 정에 몸을 들이밀 수밖에 없을 거야. 진압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진압된다고 해도 그는 권력을 움켜질 수 있을 거 야. 궁정으로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이 생겼을 테니‥. 중앙에 들어간 이상 남작의 걸음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없을 거야. 설사 로바메트 공작이라도 말이야‥. 적어도 내 사위이니 만큼 내 바램 정도는 이뤄주겠지. 비록 과정이 다르 다고는 하지만‥." 그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킬유시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드로안 남작님의 편지를 가지고 오셨다고 하는데요. 들여보낼까요?" "왔군. 정중하게 맞이하게." "예‥ 알겠습니다." * * * "킬유시 공작은 대단한 인물이에요." 중앙에 놓인 커다란 수정구슬은 '역사의 고리'가 300년을 과속 배양하여 키워낸 것이었다. 그 안에는 킬유시 공작의 방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킬유시는 모르겠지만 그의 방 샹들리에의 정 가운데 수정은 '역사의 고리'에서 애용하는 화상전송용이었다. "과연‥ 그렇군. 우리는 뒷받침을 한다기보다는, 할 수밖에 없도록 끌려든 느낌마저 들 정도니‥. 쩝! 제대로 조사를 안 하고 뛰어드니까 상대에 대한 파악도 못하지. 도대체 누가 추진한 일이야?" "나." 로진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츠바틴은 씨익하고 웃고 노리스에게 말했다. "끌어내서 눈 속에 처박아." "아직 처박힐 만큼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어." "그럼 우물에라도 처박아." 로진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서 산산이 부서져 가는 것을 무시하며 츠바틴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테이블 주 위에 앉아있는 이들이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그의 뒤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툭툭! 노리스는 그 사이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다가 문득 몰려든 시선에 씨익-하고 웃어주었다. 부르르르‥. 저절로 몸이 떨려오는 걸 느끼며 로길드는 깨달았다. 어째서 '원의 힘'이라는 단체가 완벽한 협동과 초월적인 단체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지. "그 사이에 눈송이가 많이 불었어. 잠깐 사이에 이렇게 쌓였다니‥." "자네 어깨가 듬직해서 눈도 앉기가 편한 모양이지. 그나저나 첫 눈치고 그렇게 많이 내린다니‥. 순순히 로진스가 우물로 들어가던가?" "설마‥. 뒷 모가지를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던져버렸지." "쯧쯧‥ 어딘가 부러졌겠군." 로진스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게다가 몇 군데 부러졌다고 해도 부대에 있는 치료술사들이라면 금방 정상으로 돌려 놓을 수 있었기에 츠바틴과 노리스는 과격한 장난(?)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츠바틴 같은 경우 는 다른 지휘부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재 무리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신비의 고리' 수장을 매장해버리는 수단- 어쩌면 개인적인 불만이 포함되었는지도 모른다-을 쓴 것이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츠바틴의 말 한 마디에 모두들 경청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를 역사상에서 삭제하는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를 쫓는데 신경 쓰기보다는 실베니 아의 내란(內亂)을 조정하는데 신경을 써야한다. 여러 군데 신경을 쓰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지. 그 예가 바로 저 우 물 속에 처박힌 마법사다. 킬유시 공작을 과소 평가하다니 공작이라는 직위가 혈통만으로 주어지는 부산물(副産物) 로 알고 있는 건가? 로길드!" "예, 예!" 어조에 긴장이 가득했지만 소년은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연약해보이는 주제에 괜찮은 녀석이군.'하고 미소를 지은 츠바틴은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로길드의 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는 말했다. "우리는 역사상으로 함부로 들어 나서는 안 되는 걸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래뵈도 저도 유명하다고요. 함부로 들어 나서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하하‥. 그렇다면 말이 필요 없지. 그렇다면 주의해야 할 사람은 노르벨인데‥." 그렇게 말하며 츠바틴은 흘깃, 구석에서 턱을 괴고 졸고 있는 노르벨에게 시선을 던졌다. 츠바틴이 물이라도 가져와 서 끼얹어야 할까 고민에 빠지려 할 때 천막-'역사의 고리'는 대부분 노숙을 한다-의 입구가 촤악하고 열리며 사람 머리 만한 물덩이가 노리스에게 날아들었다. 스르르릉. 전혀 당황함이 없이 노리스는 검을 뽑았다. 검이 뱀처럼 빠져나오는 게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정지되었다고 느낀 순간 검극(劍極)에 달한 검사에게서 뿜어진 위압감이 천막 안을 휘감았다. 노 르벨의 눈동자가 떠진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의 각막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날아오던 물덩이는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느릿하게 느껴지는 노리스의 검을 따라서 공중에서 방향을 바 꾼 것이다. 그 방향은 바로 노르벨의 정면이었다. "윽!" 가까스로 피하는 노르벨. 노리스가 해보인 동작은 동방 검법의 극한(極限)에 달한 이들만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츠 바틴은 박수를 쳤다. 짝짝짝! "멋진 공방이로군. 자네의 공격도 멋졌어, 로진스." 좌중(座中)은 얼떨결에 그를 따라 박수를 쳤고 고개를 물덩이가 날아온 입구 쪽으로 돌렸다. 식식거리는 로진스가 멋진 남색의 망토에서 물을 짜내며 들어서고 있었다. 츠바틴이 혀를 차고 말했다. "안 부러졌군." 안타까움이 찌든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에게 시선을 준 시간은 잠시였다. 노르벨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물을 뿌려준 로진스에게 감사하게, 노르벨. 아니었다면 함께 우물에 처박혀야 했을 테니까." "츠바티이인‥!" 로진스가 이를 갈았지만 츠바틴은 가볍게 무시했다. "노르벨, 로길드와 함께 조사해줄 사람이 있네. 이 사람의 행로(行路)에 따라서 '값싼 남작'의 운명이 달렸다고도 할 수 있지. 킬유시 공작은 그가 자연스럽게 남작의 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야. 우리는 그 모를 일을 예측 못하게 바꿔야 하는 거지." "그 사람이 누굽니까?" "로바메트 공작."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8) 시즈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일행도 한꺼번에 공작에 대한 예를 취했다. "되었네. 뭔 사절들이 이렇게 많은지‥." 말 그래도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에 하도너 킬유시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뒤에서 따라 내려온 펠리언 이 시즈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로군요. 마땅찮은 시즈. 살아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마땅찮은!?" 킬유시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다. 누가 마땅찮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겠는가. 하지만 의외는 있었다. 그것도 대륙에서도 제일가는 현인의 기관이라는 아스틴 네글로드의 학자들도 놀람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다는 현자(賢者)의 이름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세이서스 가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공작의 시선에 시즈는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내가 보장하지요. 그는 '또 다른 고향'의 저자인 '마땅찮은 시즈'입니다." 앞으로 나선 이는 피브드닌이었다. 그는 제법 귀족으로써의 풍채가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공작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보장할 수 있는 그대는 누구요? 복장을 보아하니 아스틴의 학사의(學士衣)같은데‥." "전 아스틴 네글로드의 피브드닌 파우트시카라고 합니다. 원탁의 일곱 자리 중 말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이군요, 파우트시카 씨. 그렇다면 저 작은 분은 드워프의 현자로 유명한 토루반 님이시군." "만나서 반갑소. 토루반이오." 토루반이 손을 내밀자 킬유시는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잡기 위해서 허리를 숙여야 했던 것이다. 인사를 끝낸 시즈 일행을 킬유시는 식당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전하‥ 왜?" "내 방은 느낌이 안 좋거든. 사람의 느낌이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꼭 무시할 필요는 없지." 긴 테이블 위에는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이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시종들은 많은 음식들을 능숙하게 테이블 구석구석까지 채워갔다. "맛있게 드시오." "네!" 동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소년 소녀의 목소리. 반짝이는 눈동자는 샛별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허겁지겁 먹어대는 그들을 보면서 킬유시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군요. 오는 동안 뭐라도 먹이지 그러셨소?" 순간 예의를 갖춰 음식을 씹고 있던 카이젤의 입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났지만 사람들은 실수로 알고 넘어갔다. 그 러나 카이젤은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이 요리하기 직전의 음식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그렇게 먹어 놓고선‥.' 그런 생각은 킬유시 공작의 말에 끊어졌다. 식사를 끝난 공작은 시즈에게 입을 열었다. "값싼 남작의 전갈을 가져왔겠지? 슬슬 보고 싶구려." "여기 있습니다." 말아져있던 양피지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공작의 눈앞에 펼쳐졌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있던 두 청소년조차 식기 에서 손을 놓을 정도로 침묵이 킬유시의 갈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피식― "역시 그렇군. 내 사위야. 하하하하!" 시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젠티아가 말하길 분명 킬유시 공작은 반란을,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공작은 저렇게도 웃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웃음은 조금이나마 허탈해보였다. 내심 깊은 곳에 드로안 남작 이 자신과 뜻을 함께 해주면 좋았으리라.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애매한 웃음을 한동안 토해낸 그는 문득 눈을 날카 롭게 빛내고 시즈 일행을 바라보았다. '분명 사절이라면 보통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이들을 이렇게 보냈다는 것은‥.' 아마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어린 소년, 소녀부터 수 백살의 드워프에 이 르기까지 평범하지가 않았다. "이들을 동쪽 성곽의 방으로 데려다주게. 편히 쉬었다가 가도 좋을 것이야. 그럼 난 생각해볼게 있어서‥." ‥‥터벅터벅터벅! "여자 분들은 이 곳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럼 수고하도록 해요." 탐스러운 흑백이 휘르르 돌며 살짝 미소지었다. 예전 귀족의 영애였기에 여유있게 인사한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아 도 아름답던 아리에가 웃음을 보이자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던 시종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에 문을 닫은 아리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먼저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몸을 부벼대고 있던 레스난이 물었다. "왜 그래?" "역시 사람은 인상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나봐." "무슨 일인데 그래?" "시종이 몸살이라도 걸쳤는지 몸을 부르르 떨잖아. 날씨가 추워서 감기에 걸린 모양인데 저렇게 일을 시키다니‥. 공작님 인상은 참 좋아보였는데‥."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9) "재미있는 사람들이군‥. 펠리언, 자네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던데!?" "예. 이미 안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시즈 세이서스가 살아있었다니‥." "엘시크의 늙은이들이 악에 바칠 일이군." 킬유시 공작은 평범하지 않은 사절들이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창고에서 꺼내온 와인이 졸졸 소리를 내며 그의 잔에 고였다. 향기를 음미하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로바메트에게 보내야겠어." "값싼 남작과 로바메트가 손을 잡게 하시려는 겁니까?" 펠리언은 걱정스러웠다. 값싼 남작이나 로바메트 공작 모두 개인의 힘과 지략만 두고 보더라도 대륙을 좌지우지하 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려하다니‥. 펠리언이 근심을 얼굴에 그대로 들어내자 킬유시 공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이 사람아‥. 이왕 싸울 것이라면 진짜 멋지게 싸우고 싶은 게 남자라고. 설마 기사들이나 검사들만 호 승심이 있는 줄 알았나? 나 같은 정치가나 전략가도 승부에 대한 집착은 있어." "하지만‥." "걱정 말라니까. 뒷 배경을 알 수 없긴 해도 나를 지원하는 '역사의 고리'는 내게 두 사람을 상대하고도 남을 힘을 줄 테니까. 대여료 없이 말이야. 그런데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나?" 킬유시는 하인에게 묻자 지목을 받은 하인은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거렸다. "아, 그게‥."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한 방에 모여서 술판을 벌였습니다." "뭐?" 펠리언은 경악성을 토했고 킬유시는 문득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그들은 즐거운 이들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행 동에 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있다.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음에 그는 얼굴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 펠리언에게 말했다. "안내해주게. 내가 가봐야겠군." "아, 예." "참, 그 전에 들려야 할 곳이 있군." "그럼 어디로 먼저‥?" "술 창고!" 시즈들(시즈, 사론, 블리세미트, 카이젤)의 방은 어느 새 옆방에서 찾아온 토루반들(토루반, 피브드닌, 보를레스, 토 플레)과 아리에들(아리에, 파마리나, 레스난)으로 북적거렸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남자들과 파마리나는 그 날, 킬유 시 공작의 반응에 대한 추리로 입이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그들 옆에는 꼭 한 병씩의 술이 놓여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말까지 나온 거지?" "아아‥ 공작 전하께 전갈을 전했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피브드닌이 공작의 표정에 대해 말을 꺼냈잖아요." "솔직히 속을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이잖나." "그건 다음에 생각하고 우선은 앞으로의 일정이나 결정해요." 파마리나는 주문을 외울 때를 제외하고는 참을성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본래 성격일지도 몰랐다. 토라진 표정을 짓다가 하품을 쩍쩍해대는 게 그 증거일지도‥. 그 모습에 킥킥거리던 보를레스가 그녀의 눈째림을 받고 사래가 걸 려 콜록댔다. "콜록! 벌써 정했다고." "언제!?" "그렇게 열내지마. 여자들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벌써 30분전에 들어 왔다고. 그러니 벌써 얘기가 끝나고 도 남지." "그렇게 어떻게 하기로 했죠?" 보를레스가 생각할 때 파마리나는 따분한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힘들게 느껴질 만도 한 여행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도 계획을 짤 때는 마치 모험을 꿈꾸는 귀족 아가씨처럼 얼굴을 잔뜩 붉히고 흥분했다. 술에 취해서였는지도 모르 겠다. 이렇게 생각해버렸으니까. '귀여워‥.' 그러나 그는 곧 내심을 부정했다. 그의 웃는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파마리나가 물고 있던 술병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걸 가볍게 받아서 마시며 보를레스는 자신이 많이 취했다고 기정 해버렸다. 화를 내는 모습까지 귀엽게 느껴졌으 니까. "저‥. 시즈는 어디 갔죠?" 그녀가 얼굴이 붉어진 것은 반병이나 되는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즈 이 녀석은 어느 새 내뺀 거야?" "좀 전에 밖으로 나가던데요?" 졸리운 지 레스난과 서로 기댄 채 가장 맛있던 요리에 대한 토론을 벌이던 블리세미트가 대답하자마자 문이 열렸 다. "여기 있습니다. 화장실에 좀 다녀왔어요." "얼마 마시지도 않은 녀석이 벌써부터‥." 그렇다보니 내일 화장실 사정이 궁금해지는 사내.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는 자, 남자의 이름은 피브드 닌이었다. 그는 토플레를 돌아보고 물었다. "새벽 몇 시쯤에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빌 것 같나?" "글세‥ 아마 지금 먹은 술이 소화되면 우선 가볍게 방광을 쓸어내릴 것이란 말야‥ 그리고 나서‥‥." 역시 그들은 친구였다. 자기 멋대로들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즈는 문을 두들기면서 말했다. "다들 제가 누굴 데려왔는지 보세요." "화장실에 갔던 녀석이 누굴 데려오다니‥ 왠지 끔직한 상상이 드는 소리구나." "그런 소리 말아요, 토루반." 주의가 집중된 순간을 타 시즈는 문을 활짝 열었다. 다리가 보이고 약간 내밀어진 배가 보이고 얼굴이 보이는 순간,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경직했다. "즐거운 모양이군. 그런데‥." 굳은 표정의 킬유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 안을 한 번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 긴장한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온 고급술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혹시 술이 모자르지는 않나?" 킬유시 공작은 붙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병사(病死)한 뒤로 술을 될 수 있는 한 줄이고 일에 몰두했지만 예전에는 그럴 듯한 애주가였다는 걸 그가 가져온 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코칼리아! 오! 좋은 술이야." 코르크 마개를 뽑아내자 방에 한 가득 퍼지는 주향(酒香), 토루반은 코를 벌름거리며 감탄했다. 그리고 열기(?)에 찬 눈동자로 킬유시 공작에게 술을 권했다. "자아‥ 주인이 우선 한 잔 받으시오." 그러나 킬유시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둥절한 토루반에게 그는 말했다. "이왕 술을 마실 거라면 비좁은 방보다는 성벽에 자리를 마련하고 마시도록 합시다." "공작께서 젊은 시절 많이 놀아보셨구만‥."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드워프, 킬유시는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성벽에 올라가면 수도의 왕궁이 보인다. 보통은 왕실의 위엄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수도의 성. 물론 수도라고 보기에는 외곽이었지만 킬유시 공작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주는 것이다. 성벽은 전 날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빛나고 있었다. 눈을 치우고 가죽을 바닥에 깔아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세를 잡고 앉았다. 킬유시 공작이 토루반의 한 잔을 호쾌하게 넘기자 보를레스와 사론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다음은 토루반님이 이어서 드시죠?" "좋지. 젊은이에게 질 수 있나?" 킬유시 공작은 벌써 중년이었지만 한 인간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토루반이 그렇게 말하자 정말 젊 은이가 된 느낌이었다. 공손하게 술을 따르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토루반이 말했다. "으음‥ 술 따르는 예의도 좋고‥.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모범이야." "하하하. 이런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꺼낸 사람은 보를레스였지만 시선이 집중된 사람은 시즈였다. 보를레스는 아리에와 기대고 앉았던 시 즈를 아플 정도로 때리며 노래를 재촉했다. 킬유시가 호기심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마땅찮은 시즈'의 노래라니 영광이로군." "공작께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의 노래는 그리 마땅찮지 않으니. 적어도 '값싼 남작'의 인정을 받을 수준이라오." "호오‥?" '값싼 남작'은 기사로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음유시인으로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수하들은 전투가 있기 전에 '값싼 남작'의 노래를 들으면 필승불패(必勝不敗)한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가실 정도니 그의 노래 실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헌데 그런 사람의 인정을 받다니‥ 킬유시 공작과 사람들은 기대 에 찬 눈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걸‥.' 한 차례 머리를 긁적이던 시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노래를 부를까 고민하던 시즈는 결심했 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으며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옆에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쳐다보자 씩 하고 억지스런 미소 를 보였다. 그리고 술이 쏟아질 정도로 잔을 하늘로 들며 외쳤다. 자! 이제 잔을 높이 들고 다 함께 노래를 불러요!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행동이었기에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이해했다. 조금 전에 무리할 정 도로 한 꺼번에 술을 마셔댄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 비워요. 가뿐 세상을‥. 오늘만은 그대의 날이죠. 자! 채워요. 마음 가득히‥. 뜨거운 젊음을 느껴봐요. 거친 파도 같은 세상이 거품처럼 흩어져‥. 또 다른 미래가 열릴 거에요. 새로운 그대의 시작을 위하여! 자! 이제 잔을 높이 들고 그대의 행복을 빌어요. 그대 곁에 내가 있어요. 우리 모두 함께 있어요. <카니발 - '축배'> 술기운에 원조를 얻어 힘찬 음성, 그러면서도 약간 꼬부러진 음성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가슴 이 벅차는 걸 느꼈다. 시즈의 노래 속에 함축된 기운이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몰랐다. 끝나는 노래 박자 에 맞춰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고 웃어댔다. "헌데 이 중에서 가장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킬유시는 이런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가벼운 질문에 가벼운 대답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눈은 그게 아 니었던 것이다. 적의라고도 착각할만한 호승심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드워프, 검사, 학자, 그리고 여자(파마리나). 말 할 가치도 없다는 듯 토루반이 술잔을 가볍게 비우고 말했다. "인간이 드워프를 당할 수 있을 리가 있나."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지요." 36 악장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물어라. (10) 결코 그들이 마시는 술은 맥주가 아니었다. 한 병에 1 타로운에 가까운 고급 술, 코칼리아였다. 헌데 아예 병째 잡 고 입에 들이 붙다니‥. 킬유시는 겉으로 웃고 있었지만 내심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블리세미트와 레스난까지 술을 홀짝거렸는데 블리세미트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뭍사람들은 소년이 사막의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독한 술을 자주 먹은 덕에 주량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상 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한 계를 넘어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밤을 새어 마셔도 지치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기세는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수그러들었다. 그 이유는 역시 과음 에 힘을 얻은 수면욕구 때문이었다.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벌써 시종들에게 업혀서 방으로 옮겨진지 오래였고 이제 는 슬슬 남자들도 들려 방으로 내려가고 잇었다. 처음 방문한 공작의 성에서 잠이 들어버릴 만큼 마신 걸로 볼 때 무례할 정도로 신나게 퍼마신 파티는 그들의 기억 속에 즐거웠을 꿈으로 남을 것이다. "질문이 있습니다, 토루반. 드워프의 현자여‥." 과연 드워프가 술에 강한 것은 종족적인 능력이었나 보다. 하인들에게 업히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는 토루반 에게 킬유시는 말을 걸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서민들도 있지만 당신이나, 피브드닌님 등은 귀족이 아닙니 까. 그런데 왜?" "간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권력에 관심이 없어. 그래서 또한 권력에 묶이지도 않는 거야. 생각해보게. 바다가 일렁이 는 이유를 아는가?" "학자들에 의하면 달이 끌어당겨서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다면 생각해보게. 달이 하늘 위를 도는 이유를 바다가 모르고 있겠나?" "모를 수 없겠지요.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기에 달은 세일피어론아드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 서로 끌어당기지. 자아‥. 권력과 주위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은 달이요, 자유는 바다라네. 달이 없다면, 바다 는 달의 힘에 묶일 일이 없을 거야. 공작의 마음에서 달을 없애보는 게 어떤가? 바다의 일렁임처럼 주위 시선에 흔 들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 "바다가 일렁이는 이유는 달에게 묻게나. 허허허허‥. 아, 그리고 오늘 코칼리아는 정말 일품이었네." 휘어지다 못해 꼬부라지는 음성으로 말한 토루반은 멍하니 앉아서 달을 바라보는 킬유시 공작을 뒤로 한 채 기분좋 은 웃음을 남기며 짧은 걸음을 느긋하게 옮겼다. 문득 성벽의 어둑한 곳에 인기척이 느껴서 바라보니 시즈가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토루반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즈가 찔끔했다. "밤바람에 감기 걸릴지 모르지 적당히하고 내려와." 끄덕. 시즈의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긍정을 표했을 때 이미 토루반은 발자국 소리만 남기고 계단을 내려 가는 중이었다. 무엇 때문에 시즈가 찔끔했던 걸까? 사람들이 다 내려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갔어?" "그런 것 같군요." 그의 어깨 뒤로 아리에가 빼곰이 얼굴을 내밀었다. 술을 제법 마신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람들 의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너무 마실까 두려워진 시즈가 자리를 벗어나자 아리에가 얼른 쫓아온 것이다. 물론 시즈 도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는 것은 사양하는 편이었다. "음헤헤헤‥." 그에 비해 아리에는 술에 대한 저항력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조금 시간이 지나자 취기가 올라서 혀가 비틀린 듯 웃 으며 비틀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팔을 잡아주자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시즈는 꼭 안아줄 수밖에. 솔직히‥ 싫진 않았다. 방에서 짐을 정리하는 동안 몸을 씻었는지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겼고 기대는 얼 굴은 보들보들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여성의 몸체에서 느껴지는 나긋나긋한 감촉에 시즈는 어쩔 줄 몰랐다. '도대체 이렇게 취한 주제에 왜 따라온 거야!?' "으음‥!?" 그가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나보다. 아리에가 고개를 들고 몽롱한 시선으로 시즈를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던 시즈에게 가슴의 고동소리가 저절로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심호흡을 몇 번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리에는 위태위태한 모습이 귀엽고 유혹적이었다. "아리에, 그만 들어가서 자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싫어." "아, 아리에‥. 감기 걸릴 지도 몰라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시즈랑 있는 게 좋단 말이야. 시즈는 내가 싫은 거야? 싫은 거지? 흑‥. 훌쩍!" 아리에는 시즈의 팔을 뿌리치고 휘청거리면서도 훌쩍거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눈물이 어둠 속에서 달 빛을 튕긴 것은 허공이었지만 파문이 일어난 것은 시즈의 마음이었다. "아, 아리에‥." "히잉‥. 알고 있어‥. 끅! 네 마음 속에 아직도 레소니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사라지 지 않는 영상이라는 걸 난 인정하고 있어‥. 하지만‥ 이건 너무 비참해! 넌 네게 입을 맞췄잖아. 좋아한다고 말해 줬잖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망설였던 걸까?' 시즈는 자신 있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울먹이는 아리에의 흐릿한 눈동자가 보이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 아리에가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악! 아파!" "미, 미안!" 당황한 시즈가 팔에 힘을 빼고 뿌리칠 기회가 되었지만 아리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눈물이 흐르는 볼을 그의 어 깨에 부벼가며‥. "‥‥."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깨의 느껴지는 아리에의 숨결은 술 때문인지 뜨거웠고 시즈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갑자기 왜 격정적으로 돌변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아리에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않나‥ 불안해할지도 몰라‥ 하지만 꼭 오늘밤에‥ 해야할 말이 있어. 약한 모습, 미안해도‥ 술김에 하는 말이라 생각지는 마‥. 언제나‥ 네 앞에 서면 준비했었던 말도 왜 난 반대로 말해놓고‥ 돌아서 후회하는지‥.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침이 밝아오면 널 품에 안고 사랑한다, 말할게‥. 시즈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긴장을 해버렸다. 직접적인 고백이 부끄러웠던 걸까? 보통 때처럼 그의 음성은 매 끄럽지 않았고 더듬거렸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부르다가 고개를 들어 아리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놀람이 자리했던 그 자리에 향기로운 미소가 그윽하게 피어있었다. 시즈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노래했다. 자꾸‥ 왜 웃기만 하는 거니‥? 농담처럼 들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린애 보듯 날 바라보기만 하니? 언제나 네 앞에 서면 준비했었던 말도 왜 난 반대로 말해놓고‥ 돌아서 후회하는지‥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못 미더워도‥. 아무에게나 늘 이런 얘기하는 그런 사람은 아냐. 너만큼이나 나도 참 어색해‥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자꾸만 아까부터 했던 말 또 해 미안해. 하지만 오늘 밤 난 모두 다 말할 거야. 이렇게 널 사랑해‥. 어설픈 나의 말이 촌스럽고 미더워도 그냥 하는 말이 아냐‥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한 번 널 품에 안고 사랑한다 말할게. 널 사랑해‥! 이렇게 널 사랑해‥. <전람회 - 취중진담> 잦아드는 목소리에 아리에가 살짝 고개를 젖혀 시즈를 바라보니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해보는 청년. 아리에는 잠시 짖궂은 미소를 띄우고 그를 노려보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를 꽉 하고 꼬집었다. 안절부절하는 청년의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지만 그녀는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입술에서 따 스한 느낌을 받았다. 점점 강하게 안아오는 시즈의 팔을 느끼면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술기운을 교환했다. 잠시 후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의 몸에 기대고 있을 때, 아리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후우‥. 내가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저 단정한 외모를 가진 것뿐이고 조그만 키에 고백도 어 눌하고 키스까지 서툴러." 빙긋‥. 시즈는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아리에는 마음 속이 꿰뚫린 것처럼 얼굴이 붉어 졌다. 그녀는 토라진 듯 달을 보면서 말했다. "칫! 몰라! 나도‥. 달에게 물어보지 뭐‥. 내 마음의 일렁임을 달은 알고 있을지 모르니까‥."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1) 아침, 겨울의 아침은 이불 속으로 영원히 살고 싶을 만큼 추웠지만 그만큼 상쾌하고 맑았다. 창문을 열고 새소리에 맞춰 길게 기지개를 폈을 때였다. "당장 문닫지 못해!? 추워죽겠는데 무슨 짓이야?"하는 카이젤의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가볍게 윙크를 하며 웃음을 날리는 시즈. 카이젤은 잠시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어제 술을 너무 마셨군. 아직도 취해있다니‥." 그리고는 그는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불은 파고들수록 멀어졌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벌떡 드니 시즈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일어날 시간이랍니다, 카이젤." 그 순간에도 그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니 카이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킨 그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시즈에게 베개를 던져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때마침 붉은 커튼이 창가의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시즈는 잠시 멍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치 눈앞에서 불꽃 이 피어나는 착각일어 났던 것이다. '우리 방 커튼이 붉은 색이었나?' 화들짝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어느 새 창턱에 앉은 사내는 입을 열었다. "간밤에 잘 주무셨나? 오랜만이지?" 차가운 아침 기온에는 어울리지 않는 빨간 빛깔의 망토. 얼마 전의 집사들이 즐겨입는 차분한-집사들은 대부분 예 의를 강조하기 위해 아주 단조로운 복장을 선호한다-정장보다는 훨씬 마법사적인 분위기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계열의 옷차림은 흰 수염이 길게 난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을 모습이었다. "마나이츠님이시군요. "아침이 지났는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군. 여기는 공작가인데‥ 시간을 못 맞추면 실례야." 그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소녀가 뛰어들었다. 순백의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금발의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소녀는 카이젤에게 달려들었다. 기겁을 하면서도 반항을 못하는 소년과 그 위에 올라탄 소녀, 레스난. 약간(?) 기괴 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포즈로 레스난은 발버둥치는 카이젤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며 징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파마리나가 날 내쫓았어요. 위로해줘요, 카이젤." "저, 저리가아!" 소년의 절규에 걷어차여 침대 옆으로 굴러 떨어진 레스난이 훌쩍거렸다. 하지만 카이젤은 일푼의 관심도 두지 않고 마나이츠의 탈을 쓴 넬피엘을 쏘아보았다. "마법 학도 시절부터 연구실을 수면실로 알았다는 마나이츠님께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요?" 넬피엘은 다시금 찔끔하고 말았다. 확실히 마나이츠는 일찍 일어나는 시간이 드물었다. 해가 한창 떠올라야 깨어나 는 것도 그가 억지로 깨워서 일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집사라는 이유로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 였지만‥. "저, 적어도! 남의 집에 와서는 식사시간 정도는 맞춘단 말이다!" 그 사이 징징대던 레스난은 이런 소란 속에서도 침대가 실러오나의 품 인양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잠들어있는 블 리세미트를 보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블리세미트의 이불로 파고들었다. 포근했다‥. 레스난의 입 장에서는‥. '응‥ 이건 뭐지?' 단, 블리세미트의 입장은 달랐다. 찬바람을 피해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서야 안도한 그를 어떤 무언가가 다리에서부 터 쓰다듬으며(?)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음!? 응! 앗! 아흑!" 서로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어대던 마나이츠와 카이젤은 갑자기 귓가를 자극하는 묘한 신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 들이 다음 순간 살기 대신 땀을 흘려야 했다. 이불 위로 얼굴만 내놓은 채 울먹이는 어린 사제와 침대 중간쯤에서 꼬물거리며 올라가고 있는 물체. 마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발버둥치는 듯한 형상을 띄고 있는 물체를 블리세미트 는 감히 쳐다보기도 무서운지 눈을 꼭 감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카이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불을 들쳤다. 비밀(?)에 쌓였던 물체가 들어 났다. 블리세미트를 묘하게 자극하던 것 은 레스난의 긴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그걸 모르는 블리세미트는 기도하듯이 중얼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돼요. 전 이 한 몸, 실러오나에게 바친 경건한 성직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 일어났는지 구석에서 사론이 웃음을 참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오늘은 너희들이 마음대로는 안돼!" 카이젤의 단호한 말에 블리세미트와 레스난은 시무룩해졌다. 그런 둘의 머리를 강렬하게 내리치며 사론은 씨익 웃 었다. "대신 오늘은 옷을 사잖냐?" "아욱! 사람의 삶에 있어서 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신의 축복으로 춥지 않고, 배를 만족시키면서 살 수 있다면‥." 사론은 손을 들어 경건한 성직자의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들. 블리세미트는 한숨 을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제외하도록 하죠‥." 마녀인 파마리나도 기대에 찬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일행을 살펴보다가 블리세미트 는 뭔가 부족함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시즈님과 아리에님은 왜 안오신 거죠?" "아리에가 감기에 걸렸거든‥. 사실 오늘 옷을 사러 가는 이유도 그녀의 전처를 밟지 않기 위해서지‥." '난 모두 다 알지롱‥.'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나쳐 가는 난쟁이 노인. 토루반이었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2) "미안해요. 내가 어제 너무 늦게까지 잡고 있어서‥." "음‥ 아냐. 내가 허약해서‥ 엣취!" 그렇기 보다는 옷을 너무 얇게 입은 게 이유일 것이다. 시즈야 언제나 날씨가 춥건 덥건 꽤 두껍게- 여름에도 긴 코트를 입을 정도다 -무장을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직 가을에 맞춘 의복이었던 것이다. 아리에도 그 대상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데 눈까지 내린 밤을 새벽까지 지새웠으니‥. 과연 무엇이 그녀에게 추위마저 이겨내게 만들었을까?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 "시원해‥." 아리에는 와 닿은 시즈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얼굴을 부볐다. 잠깐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던 시즈는 이마에서 손을 멈췄다. "물수건을 새로 갈아오는 게 좋겠는걸." "괜찮아‥. 네 손이 더 차가우니까. 그것보다 좀 가까이 와 줘." 병자가 왜 그리 힘이 쎈 건지‥. 어쩌면 시즈가 반항하지 못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의구심에 젖어 다가온 그의 눈동자는 말똥말똥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게 재미있는지 흥미롭게 구경하던 아리에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시즈의 입술을 급습했다. "으음‥." 피살자(?)에게서 들려오는 깊은 신음‥ 그것은 매우 농밀한 직격탄일 게 분명했다. 그렇잖아도 감기의 열기로 붉었 던 아리에는 홍당무가 된 얼굴을 띄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감기 예방약이야." 그러게 말하고 그녀는 수줍음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으로 숨겼다. 시즈만 달아오른 입술의 열기를 식힐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할 뿐. 눈만 이불 밖으로 들어낸 아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나이츠님은 다시 나가신 거야?" "으‥응. 아무래도 껄끄러운 모양이에요." "에? 누가?" 문득 시즈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참 순진한 듯 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마도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마나이츠님은 어제 뭘 하다가 오신 겁니까?" "적어도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졌는데 잘 곳이 없겠어?" 뒤에서 이죽거리는 카이젤을 넬피엘은 영혼까지 태워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제의 마나이츠가 저 녀석한테 이렇 게 시달렸는데 아직 살려두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 주인의 성품을 의심해보는 넬피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카이젤은 겁 없이 덤비는 이유는 이미 마나이츠에게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악에 받쳤기 때문이었다. "허허‥. 저 썩어빠진 녀석 말대로 마법사가 아닌가. 당연히 궁정의 마법사들을 만나고 왔지." 억지로 웃는 기색이 분명했다. 마나이츠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에서 위험한 감각을 전달받은 토플레는 보를 레스에게 슬쩍 신호를 보냈다. 미세한 눈신호를 눈치챈 보를레스가 조용히 카이젤의 목에 팔을 걸어 골목길로 사라 져갔다. 잠시 후 다음 골목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카이젤은 매우 온순해져 있었다. 무슨 이유일지 모르지만 그가 다리를 절고 있는 걸 본 피브드닌은 고개를 저으면서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사려는가보지?"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거리에 걸려있는 옷과 옷감을 만져보고 볼에 비벼보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자 마나이츠가 물었 다. 솔직히 두 여인의 의견이래봤자 '꺄‥아. 부드럽다.' '색깔 곱다아‥.'하는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꽤 나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는 걸로 보였다. 현재 '과연 여자들은 여자군. 옷감에 대한 이해가 역시‥.'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귀가 시즈처럼 좋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마녀와 인어에 대한 환상이 확 깨는 군요." 피식 웃으며 사론이 말했다. 토플레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군. 저 깔끔한 검은 로브를 입은 미모의 여인은 모기 눈알을 수집하 는 마녀고‥. 그 옆에 늘씬한 다리의 활달한 느낌을 주는 소녀는 사실 비늘이 잔뜩 있는 꼬리를 가진 인어라고‥." "그랬다가는 마녀 사냥을 계획하는 흑마법사로 혼쭐이 날 걸." "저 두 사람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 마나이츠의 음성에는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두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겠군." 아마도 토루반은 처음부터 그런 상황이 될 줄 예측하고 있었던 듯 하다. 과연 드워프의 현자‥라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일어날 장면은 그리 즐길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블리세미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두 여인에게 걸어갔다. 토플레의 대꾸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될지 내기하실래요?"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3) "무슨 내기인가?" 뒤에서 일행일지 모르는 사람들의 쑥덕임이 들렸지만 남자들은 상관없었다. 지금 옷을 고르는 여인들은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 옷감도 아닌 평범한 옷의 진열장에서 꺅꺅하고 소리를 질러대 는 게 분명 시골- 확실히 레스난의 경우는 시골도 아주 심각한 시골이라고 봐야하니 틀린 생각은 아니다-처녀들이 수도 구경을 하러 온 게 분명했다. 일행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 수도에서 갈고 닦은 자신들의 매너와 기름을 잘 발라 고소하게(?) 구워낸 말솜씨를 당하겠는가. "이봐요. 아가씨들‥. 펴온은 처음이로군?" 외모로 따지자면 제법 여자 꽤나 울렸게나 싶은 금발의 청년은 한쪽 눈을 찡긋하고 말했다. 뒤에 있는 두 명의 젊 은이는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요‥."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금발이 길게 내려앉은 소녀가 검은 머리카락의 날카로운 여인의 등뒤로 숨으며 대답했다. '흐흐‥ 부끄러워 그러는가보군.' 이쯤되면 착각도 유분수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레스난이 그를 피한 이유는 일행 이외의 인간에게는 절대로 익숙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사내가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레스난 역시 반쪽 이긴 하지만 생선이 자랑하는 육감(六感)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파마리나 역시 위험을 느낀 것은 마찬가지였 다. 생선의 육감은 아닐지라도 주위에서 하는 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리는 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놈한테 걸리다니 또 괜찮은 처녀 하나 버리는 구나‥." "저런 놈은 그 곳에 악성종양이나 생겨야 되는데‥!" 그러나 금발의 청년 뒤의 사내들이 한 번 주위를 훑어보자 곧 조용해졌다. 능숙하게 벽에 팔을 기대고 모션을 잡은 금발 청년은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고 말했다. "아름다우신 두 아가씨들만 거리를 떠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도시를 안내해주지." "필요 없어." '음, 튕기는 군. 강렬해. 사냥하는 재미가 나는 군.' "그런 소리 말아요, 아가씨. 둘이서만 있다보면 심심할 테니까 우리가 즐겁게 해주려는 거야. 원한다면 이런 싸구려 옷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것도 얼마든지 사주지."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일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험용으로도 쓸 수 없을 종자-눈 동자가 흐릿하면 재료의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옷자락을 꼭 잡고 있는 레스난을 이 끌고 귀찮은 존재를 피해 나오려는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던 두 사내가 길을 막았다. 제법 덩치가 큰 게 주먹 좀 쓰게 생긴 둘은 이 주변에서 시비 걸리기를 피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렇게 피할 것 없다니까‥. 이성끼리 섞여서 쓸쓸함을 좀 달래보자 이거야." "그만 두시죠." '쳇! 남자가 있었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앳된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린 사내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16세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 어느 신전의 견습생이라도 되는지 신관들의 복장을 입고 허리에 양 주 먹을 꼭 쥐어 올린 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섭다기보다는 귀엽기만 했다. "꼬마, 넌 뭐야? 어른들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단다." "전 소레인 교단의 사제입니다. 어른이든 어린애든 해서는 안될 짓을 당신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만 두세요." "신관이 꿈이라면! 포교나 잘 하라고!" 건장한 사내 중 갈색의 가죽옷을 입은 자가 대끔 주먹을 내뻗었다. 보통 신관이었다면 꼼짝없이 눈에 퍼런 멍이 들 었을 것이다. 하지만 블리세미트는 마지막 '사막의 신부'였다.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사원 가까이에 산재하는 몬스 터들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게 호신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공격하는 팔과 방어하는 팔이 교차하는 소리가 울렸다. 꿀의 냄새에는 벌레가 꼬이듯 사람들이 많고 먹을 게 있는- 시장- 곳에서 의례 볼 수 있는 건달이라고 생각했던 사론과 보를레스는 긴장했다. 전투에 전문인 그들이 볼 때 가 죽 옷의 남자가 지른 주먹은 제대로 가격당하면 목숨도 뺏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뒤에서 아직까지 여인들이 건달 을 어떻게 처리할지 내기를 걸고 있는 토루반과 토플레가 한심스러웠다. 그들은 여자들이 마법을 써서 건달을 혼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마법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아니, 마녀 인 파마리나라면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더 문제였다. '블리세미트의 격투술이 뒤떨어지진 않는다. 다만, 힘에서 너무 차이가 나‥.' 보를레스의 걱정과는 달리 블리세미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내의 공격을 넘겨버렸다. 마치 앞의 금발 사내가 폼 잡고 머리카락 넘기듯이 가볍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뱀의 사원'에서는 격투술을 사람보다 힘이 비교도 할 수 없는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어서 소년에게 사내의 공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격을 흘 리는 기본 방법은 공격의 방향을 틀어주는 것이다. 타악! 날아오는 주먹 아래 손목을 밀어 공격을 빗나가게 한 블리세미트는 펄쩍 뛰어오르며 발끝으로 가죽옷의 턱을 노렸 다. 깔끔한 동작. 턱과 목이 만나는 부분은 급소 중에 하나로 날카로운 발차기가 성공했을 경우 사내는 기절할 수도 있었다. '막는 것은 늦었어.'하고 급히 고개를 트는 사내. 얼굴을 스치는 소년의 공격에 사람들은 아쉬움이 내포된 탄성을 질렀다. 분노한 가죽옷 사내가 외쳤다. "이 녀석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사실 처음부터 봐준 적이 없었다. 다만 소년이 공중에서 운신(運身)의 곤란으로 방어하기 힘들다는 상태가 되자 기 세를 올리기 위해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로 느끼질 정도로 사내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공 격의 준비자세를 취하는 그는 더없이 신중했다. 생각 이외로 뛰어난 격투술을 가진 소년 신관의 발이 땅에 닿는 순 간을 노리고 있었다. 피한다면 넘어질 테고 막는다면 힘의 차이로 뼈가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결론이 그의 머리 속에 서 공격할 타이밍을 조심스레 잡아갔다. "지금이닷!" 빠직! 가까스로 두 팔을 겹치는 블리세미트.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4) 그릇 안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김이 되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안을 스푼은 유람하는 배처럼 이 리저리 휘젓다가 살며시 내용물을 들어올렸다. 감기 열 때문에 더욱 빨간 입술은 오물거리며 잠시 기다렸다. 어느 정도 김이 잦아들자 입은 천천히 벌어지고 그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스푼.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것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후우‥ 뜨거워." 식힌다고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성급했던 모양이다. 지켜보던 시즈가 얼른 물을 건넸다. "조심해요." "음, 괜찮아. 맛있는 걸." 식욕을 느낀다는 것은 회복의 징조였다. 기쁜 마음을 가미한 채 물끄러미 시선을 떼지 않는 시즈에게 아리에는 불 만을 토로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먹을 수가 없어." "아! 미안해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시즈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에 놓아둔 물수건을 가져오려는 것이다. 겨울 이 다 된 만큼 물이 든 용기에 수건을 넣어 밖에 놓아두면 쉽게 차가운 기운을 잡아올 수 있었다. "배가 고팠나요?" "헤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았잖아." 아리에가 금방 빈 용기를 내밀자 시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이마에 수건을 얹혔다. 눈 동자가 시릴 정도의 차가움에 아리에는 부르르 떨었다. "다들 옷을 사러 갔지? 나도 새옷을 사고 싶은데‥." "몸이 낫게 되면 밤에라도 저와 같이 나가죠. 펴온은 수도라서 밤 늦게까지 장이 열려있을 겁니다." "그럴까?" 삐진 얼굴로 입을 삐죽이다가 시즈의 말에 금새 반색을 하며 좋아하는 게 완전히 어린애였다. '보모가 된 기분인 걸‥.' 어린애는 보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빙그레 웃음을 보이자 마냥 좋아서 헤헤거렸다. "그런데 걱정이야. 이 사람들이 말썽이나 안 피울지‥. 우리 일행이 어느 정도 괴짜들이어야지. 제대로 된 사람이라 고는 사론 밖에 없으니‥. 블리세미트는 아직 어린애고‥." "걱정 말아요. 혹시나 싸움이 벌어진다고 해도 군대하고도 견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게다가 마나이츠님도 계시잖 아요." "지난번처럼 블리세미트와 레스난만 먹을 걸 찾아서 떨어지게 되면 큰일이잖아." 그녀의 말에 시즈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아리에가 말한 상황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는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역시 걱정 없어요. 적어도 '사막의 신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격투 기술 정도는 익히고 있을 거 에요. 아리에, 기억 안 나요? 전날 보았던 '사막의 신부'들이 싸우던 모습이? 블리세미트는 강하답니다." "꺄악! 블리세미트!" 보를레스의 예측대로 부딪힌 양측의 힘 차이는 엄청났다. 소년이 바닥에 부딪히고서도 몇 바퀴나 땅을 구르자 기대 감 반, 불암감 반으로 지켜보던 파마리나는 얼굴을 찌푸렸고 그녀의 등 뒤로 레스난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묻었 다. 장난이나 치고 있던 토루반과 토플레도 어느 새 눈을 차갑게 빛내고 있었다. "아직 아니다." 당장 뛰어나가려는 사론을 보를레스가 말렸다. 블리세미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윽!" 블리세미트는 손목을 돌려보며 팔의 상태를 점검했다. 상당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뼈에 이상이 있거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뭐지? 착각인가?" '뼈가 부딪히는 느낌이 적었다. 닿는 순간 물속에서 움직이는 듯, 아니 끈끈한 꿀 속에서 움직이는 듯 했어.' 뭉클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그의 주먹을 완충시켰다. 그는 소름끼칠 정도로 분명히 남아있는 감각의 흔적을 고 개를 저으며 착각으로 치부했다. "그냥 놔둬도 될까요?" 침을 꿀꺽 삼킨 사론이 보를레스에게 물었다. "아마도 괜찮을 걸세." 하지만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마나이츠는 손가락을 블리세미트의 팔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걸 보라고. 팔 주변이 다른 곳보다 뿌옇게 보이지? 저것은 신성력이 발휘되었었다는 증거야. 아마도 신성력으로 결계를 만들어서 덧씌웠겠지. 저 아이는 전설로만 일컬어지는 '사막의 신부'로군." "결계요?" 사론은 물론 보를레스조차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아는 결계라면 무언가를 보호하거나 봉인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었다. 하지만 확실히 노마법사가 가리킨 블리세미트의 팔뚝에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나이츠가 말을 이었다. "사막의 신부들은 사막이라는 불모지와 더불어 강한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서 신성력을 그냥 사용하기보다 결계로 형성시켜 몸의 부위를 보호했다고 하더군. 옛 문서에서는 멋대로 '성투결계'라고 이름을 붙여 놨더군. 그러니까 저 사제는 '사막의 신부'겠지. 미약한 결계지만 저 정도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 거야." "성투결계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사막의 신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은 성투사들이 사용하는 신성강화법과는 다 른 종류입니까?" 묻는 보를레스의 얼굴이 암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헤모라는 이름으로 친구가 되었고 헤라즈라는 이 름으로 적이되었던 성투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분명 그는 맨손으로 칼도 받아냈었지‥. 그의 기세가 험상궂어진 걸 느낀 마나이츠가 흘깃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성투사라고 일컬어지는 신성 전투집단은 사실 고대 소레인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현재는 레이모하의 성투사 밖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하지만 일당백이라고 일컬어지는 성투사의 신성강화법은 안타깝게도 저 꼬마가 쓰는 방 법을 흉내내기 위한 편법일 뿐이야. 뭐 그 종류대로 발전이 되었다지만 성투결계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 성투결 계는 엄청난 신성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내거든. 저 꼬마만 보아도 신성력 자체만으로는 대주교, 아니 교황과도 겨룰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저토록 미약한 결계를 형성한다면 말 다한 거지. 그래서 사용한다면 '사막의 신부'라고 판단된다네." 말을 주고받는 사이 소년 사제와 사내는 다시 공격과 방어를 교환하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발차기를 작은 키를 이 용하여 피한 블리세미트는 빠르게 달려들어 발로 사내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한 번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 는 급소는 아니었지만 몸통은 피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맞았을 때 아프지 않을 리 가 없었다. 가죽옷의 사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블리세미트가 그의 발뒤 꿈치를 차올리고 그 기세로 회전하면서 지면에 닿아있는 다른 발을 걸었다. 쿵! 가죽옷의 사내는 정신이 없었지만 다음 순간 위기가 온다는 걸 지금까지의 전투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제빨리 옆 으로 구르자 그가 있던 자리에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 사제의 발이 떨어졌다. "우‥!"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의 야유를 보낸 이유는 가죽옷과 한 패인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소년을 공격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런 야유에 신경쓸 건달들인가. 아예 한 층 더 나아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는 그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뭐야? 넌." "당신은 내가 상대하지." 사론은 강하게 사내의 손목을 비틀었다. 비명을 지르며 단도를 떨어뜨린 건달 사내는 남은 손을 번쩍 들어서 머리 를 때리려 할 때 사론의 주먹이 그의 복부 깊숙이 파고 들었다. "크윽!" "이 정도로 하지‥." 두 건달들이 바닥에 누웠는데도 금발의 청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빙긋이 웃더니 파마리나를 보고 물었 다. "동료들입니까?" 끄덕. "대단한 동료들을 두셨군요. 본심이 아니게 무례를 끼친 것 같습니다. 다음에 뵈었을 때 다시 사과하도록 하죠." 청년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조용히 비켜섰다. 그리고 두 건달들마저 그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추자 그들은 블리세미 트에게 몰려들었다. "어이‥ 신관님. 주먹이 대단하던데!" "무슨 소리야? 발차기가 더 대단했다고!" "그렇게 싸움을 잘해서 신관 맞나? 혹시 성투사 지망생 아니야?" 극성스러워진 사람들 때문에 블리세미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한 편, 뒤에서는 피브드닌이 잔인한 미소를 지 으며 토루반과 토플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아‥. 1 타로운씩 줘요. 또 내기가 있으면 하자고. 언제든지 환영하죠. 후후후훗‥." '역시 도박은 수학이야!'라고 내심 중얼거려보는 피브드닌이었다.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5) "그런 일이 있었어? 대단해, 블리세미트." "시, 실러오나를 모시는 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 소년이 과연 여자들을 희롱하던 건달들과 맞서 싸우던 열혈 사제가 맞는 걸까. 그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보를레스가 낄낄거렸다. "이 녀석, 그런 재미없는 말이나 하다니‥." "보를레스, 무서워서 숨어있던 주제에‥." "무슨 소리야!?" 다 알고 있다는 듯 파마리나가 코웃음쳤다. 그녀야 원래 냉소적이니 이해했지만 보를레스가 참을 수 없는 게 있었 다. '정말일까?'하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레스난의 순진한 얼굴. 보를레스로서는 한 인어가 정말로 자신을 겁쟁이로 확정 짓기 전에 열심히 부정해야 했다. "아! 레스난, 옷은 많이 샀어?" 도리도리. 그 질문을 기다린 모양인지 레스난은 얼른-순식간의 돌변이었다.- 울먹거리며 파마리나를 가리켰다. "아니, 파마리나가‥."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아리에. 글쎄‥ 레스난이 무슨 무도회를 가는지 드레스를 몇 벌이나 살려고 하잖아. 우리는 어차피 여행을 떠나야하는데 말야‥. 그래서 내가 깔끔한 여행복을 골라줬지. 때가 타지 않는 남색으로 말야!" "전혀 로멘틱하지 않은 색이란 말야!" 결국 레스난은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만약 그 때 카이젤이‥ "감기 옮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리저리 삐쭉거리며 들쑥날쑥하던 그녀의 입술은 카이젤이 귤을 권함 으로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레스난의 울음 경보에서 벗어난 파마리나는 눈을 반짝이면서 아리에에게 말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리에, 아침에는 열이 펄펄 끓었었는데 많이 좋아졌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간호는 헌신적 이야‥. 어떻게 했길래 벌써 완쾌에 가까운 거야?" 그녀는 조용히 서있던 시즈에게 화살을 돌렸다. "시즈, 말해보라고. 누른 거야? 만진 거야? 핥은 거야?" "쿨럭! 쿨럭! 쿨럭!" 제법 온유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시즈로서는 치명타였다. 사론의 주먹이 복부에 꽂혔던 사내처럼 그는 기침 과 함께 차를 내뿜었다. 그리고 눈물마저 맺힌 얼굴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파마리나, 핥다뇨‥. 처음에 수프의 양이 많아서 아리에가 남긴 걸 먹기는 했지만 접시를 핥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토루반은 창틀에 서 밖을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곤란해보이는 시즈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쓰지 말게. 아까 블리세미트의 소동이 끝나고 간 주점에서 사람들이 술을 준 모양이야." "도대체 몇 잔이나 마셨길래‥." "얼마 안 마셨어. 혼자서 한 세 병정도‥. 그 정도면 기 분이 상승되기에는 충분하지. 그나저나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군." 그 정도면 충분을 넘어서 기분이 하늘이라도 날았다가 속을 버려서 땅에 처박힐 정도의 양이었다. 시즈는 토루반도 취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아리에 옷은 사지 않았어. 미안해." "아, 아니야. 곧 시즈와 사러 나갈 거니까." 그러면서 아리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에 여자라고는 셋 뿐이었는데 그 셋이 나란히 어두운 색상의 여행 복을 입고 걸어간다면‥. 그녀는 끔찍한 상상을 고개를 저어서 날려보냈다. 하지만 파마리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리에‥ 혹시 일부러 아픈 척 했던 거야?" 마녀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아리에는 말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아리에, 시장에 다녀올 거면 일찍 다녀오는 게 좋을 거야. 아까처럼 건달들이 낮에도 활보하는 걸 보면 밤에는 더 심할 테니까." "블리세미트와 사론이 혼을 내줬다면서요‥." 피브드닌은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청년이 마음에 걸려. 그게 임기응변이었는지 다른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생각하나 상대하기 곤 란한 녀석임은 분명해. 그리고 아까 마지막에‥ 한 말‥."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시즈가 함께 가니까." "뭐 그렇기는 하겠지만‥." 피브드닌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콧수염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가라앉으려는 조짐을 보이는 방안의 분위기. 토루반은 방구석에서 졸고 있는 토플레의 옆구리를 발로 꾹꾹 찔렀다. "토플레, 마나이츠 못 봤나?" "몰라요. 또 궁정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곳에 갔겠죠." "우리가 껄끄러운 걸까? 쩝, 그리고 자네 졸리면 우리 방에 가서 자라고." "쳇! 여자들이랑 좀 같이 자볼까 했더니!" 토플레의 투덜거림. 파마리나는 친절한 어조에 살기를 집어넣고 물었다.. "제가 방으로 보내 드릴까요?" "흥! 난 육체파라고!" 토플레가 나간 뒤 잠시 후 계단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체파가 발을 헛딛어 넘어지는 소리였다. 한 편, 피브드닌을 불안하게 만드는 주범. 금발의 청년은 어두운 골목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까워. 정말 미인들이었는데‥." "그 꼬마와 기사만 아니었어도‥." "조용히 해. 어쨌든 네 녀석들이 그들에게 당해서 그런 거 아닌가? 엣취! 젠장! 눈이 내리기 시작하잖아!" "‥‥." 그는 발을 구르며 후회했다. 소년 사제 혼자였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제압을 해버릴 것을. 어리다고 얕본 댓가 였다. 게다가 기사는 정식 수업을 받은 듯 그조차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 때 낮의 가죽옷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페스튼!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건 듯 것 같아. 그 녀석들은 마나이츠 공작의 성으로 들어가더라고. 공작의 손님이 모양이야." "가족인가?" "거기서 일하는 잡부한테 물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던데!? 다른 귀족의 전갈을 가져다준 심부름꾼들이래. 기사들은 호위고." "제법. 중요했던 문서였나보지? 그래도 기사로 보이는 녀석은 고작 두 명에 불과해. 아아‥ 그 꼬마 신관도 있었지. 뭐, 상관없어. 애들을 불러모았겠지?" 다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론에게 복부를 맞았던 자로 주먹에 박쥐 날개 형상의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못 되도 스물은 돼. 곧 있으면 오겠지." "그래야지. 5 타로운이나 주었는데. 애 하나 보내서 놈들이 언제 나올지 감시하라고 해." 페스튼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낼름거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불러모은 건달들은 수 도의 암흑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무리들이었다. "응!?" 그 때 그의 눈동자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빛났다. 먹 이를 아래위로 감식해본 금발 청년은 감탄을 토했다. "호오‥ 오늘은 운이 좋군. 저런 미인이 또‥.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정말 감질맛나게 생겼군." 그는 두 사내에게 무언가 작게 지시를 내렸다. 알겠다며 그들이 사라지고 페스튼은 사냥을 위해 골목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사냥감은 검은 흑발이 어깨를 은근히 덮었고 쌓인 눈빛에 비쳐 얼굴은 달빛처럼 하얀 여인 이었다. 털이 풍성한 동물의 모피를 걸친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따라오는 청년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유∼! 시즈, 빨리 좀 와!"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6) 아리에는 감기가 아직 다 낳지도 않은 주제에 눈이 온다고 잔뜩 들떠 있었다. 한 두 번 해보는 게 아니었지만 시즈 와의 외출은 언제나 설레었다. 느그적느그적 다가온 시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춥지 않나요? 감기가 낫지 않았잖아요. 내일 낮에 사러가도 괜찮을 거에요." "아냐아냐아냐! 괜찮아. 다 나았어" 병아리가 날개 퍼덕이듯이 양손을 휘젓던 아리에는 쪼르르 시즈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시즈의 키가 작아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행복한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둘이 어떤 커플보다도 잘 맞는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 다. 물론 반(反)하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어이, 아가씨. 아름다우시군요. 아무래도 옆의 남자보다는 제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십니까?" 시장의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지점이었다.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나온 금발의 청년은 다짜고짜 길지도 않은 아리 에의 머리카락 향기를 맡으면서 말했다. 잠시 아리에는 굳었다. 그리고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꺼지지 못해?" "엥!?" 페스튼은 갑자기 터져나오는 그녀의 살기에 흠칫하고 물러섰다. 시즈가 옆에서 킥킥대고 있었다. 아리에는 일 년이 나 무식하고 포악한 용병들과 어울린 여인이었다. 그 동안 시즈와 보를레스에게 짐이 되지 않게 부단한 노력을 한 덕에 그녀의 단검술은 날아가는 새도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더니 과연 그러하군요." "알면 꺼져." "그러나 가시를 무서워한다면 꽃을 꺽을 수 없지요." 금발 청년이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 아리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여자 꽤나 울릴 미남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징그맞은 변태로만 보일 뿐이다. 변태가 손을 들자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낮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페스튼은 한 번에 나무를 찍 어 쓰러뜨리는 방법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난 머리가 좋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사내는 왜 아리에 옆의 청년이 싱글거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가씨, 조용히 우리랑 가자고. 잘 해준다니까. 이런 프로포즈하는 사람도 없어." "그리 재미없군요." 웃고 있던 청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 작은 동작은 오묘해서 흑발 소녀를 페스튼의 시야에서 완전 히 가려버렸다. 청년은 키가 무척 작았는 대도 말이다. 불안감을 애써 감춘 페스튼은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이 두 남녀를 조여들었다. "싸우자는 뜻입니까, 이건?" "무슨 소리를‥ 우리는 그저 자네에게 과분해 보이는 그 숙녀 분을 인도 받으려고 하는 거야." "아리에, 인도 되고 싶나요?" "내가 미쳤어?" 아리에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귀를 막고 있던 시즈는 씩 웃었다. "들었죠?" "후후‥ 글쎄. 우리는 귀가 나빠서‥. 혹시 자네가 인질로 잡고 있는지도 모르잖나." 시즈는 무기를 가져오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상대는 적어도 스물이 넘어보였고 그 안에서 아리에를 지키면서 싸울려면‥. 퍽! "어딜 만지는 거야!?" 충분하겠군. 아리에의 발차기가 한 사내의 코에 정확하게 작렬하자 시즈의 걱정은 저 멀리 달빛에 섞여 스러져버렸 다. 그리고 순식간에 뻗어간 그의 주먹이 오른쪽에서 각목을 내리치려고 다가오던 남자의 옆구리에 박혔다. "끄아아악!"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는 길게 비명을 터뜨렸다. 그것을 신호로 싸움꾼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시즈와 아리에는 등을 맞대고 때리고 차고 밟아버렸다. 특히 건달들이 무기를 쓰기 시작하자 발휘된 아리 에의 단검술은 화려했다. 바로 앞에서 당하는 남자 같은 경우는 검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허리끈이 풀려 당황하는 순간 시즈의 발이 그의 턱을 걷어올렸다. 에릭사를 마신 후 육체적인 능력이 가히 초인에 가까운 시 즈였다. 바로 기절해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직도 저의 인질을 데려가실 요양이 있으십니까?" 페스튼의 눈가는 마치 찢어진 거미줄처럼 주름이 져있었다. 나무에 기대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조용히 윗옷을 벗 고 자세를 잡았다. 시즈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 추운 날씨에‥.' 상대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는 그를 아리에가 만류했다. 혀를 쏙 내민 그녀의 주위로는 싸움의 열기로 인해 김 이 솟아났고 공작이 빌려준 양털 모피는 바닥에서 눈과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모피를 주워 올려 눈을 털어 낸 시 즈는 아리에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이쪽 인질이 상대해겠어." 페스난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 적어도 신사요. 여자를 상대하진‥." 팍!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식은땀이 흘렀다. 기대고 있던 나무에 꽂힌 단검이 자신을 겨냥했더라면 과연 피할 수 있 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그의 근육이 긴장으로 수축됐다. "신사치고는 말이 너무 많아." "좋소. 그쪽 친구가 끼어 들지 않는다면‥." "걱정마. 시즈는 남자니까." 그녀는 건달들을 앞세워 둘을 제압하려한 페스튼을 비꼬는 것이다. 금발 청년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거칠게 가 죽 장갑을 끼고 그 위에 암렛을 착용했다. "시작해볼까."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7) 오랜만에 자유. 청년을 묶어 두었던 것은 자신의 결심이었고 그런 족쇄를 풀어헤친 그의 느긋함은 자세에서도 드러 났다. 더구나 지금 몸을 눕히고 있는 지붕은 제법 금전적 여유가 있는지 굴뚝 주위까지 뜨끈뜨근했고 청년의 마음 을 더욱 풀어놓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조금만 주의하여 살펴본다면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붉은 모발이 무척 화려했지만 단정하 게 정리되어 있었고 붉은 빛이 묘하게 감도는 흑색의 복장은 깔끔함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다만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포즈와 장소가 문제겠지만‥.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가 향한 곳은 조용해야 할 밤인데도 불구하고 소리가 요란했다. "제법이군." 역시 싸움 구경은 재미있었다. 게다가 여자와 남자가 막상막하로 싸우는 턱에 흥미는 몇 배에 달했다. "윽!" 가까스로 사내의 주먹을 피한 여인이 뒤로 물러서자 넬피엘은 내심 중얼거렸다. '맞으면 아프겠군.' 남자는 맨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장갑은 손가락 마디와 손등에 철판이 붙어 있었다. 특히 손등의 철판은 두꺼워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여인이 휘두르는 단검 정도는 가볍게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인의 단검은 무시할 게 못됐다.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 시즈는 그녀의 연인이었기 때문에 위험 하다면 뛰어들텐데 그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니까. 그만큼 여인, 아리에의 공격은 매서웠다. "귀족집 숙녀가 익힐 기술이 아닌데‥." 어찌보면 조잡하게 느껴지는 게 단검술이었지만, 접근해서 싸울 때 그 변화무쌍함과 쾌속함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물론 격투술도 마찬가지였다. 검이 빠른 것과 주먹이 빠른 것은 아무래도 강도와 날카로움에서 차이가 있었다. 넬피 엘은 언제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소녀와 아리에를 비교해보았다. "그 녀석이 훨씬 강하겠지만 저 여인은 속성으로 익힌 듯 하니까‥ 비슷하다고 봐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치솟았다. '아릴‥.'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정말로 그녀를 찾아갈 지도 몰랐다. 넬피엘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라졌다.' 시즈는 넬피엘이 있던 지붕 위를 흘깃 쳐다보았다. 자신처럼 바람의 표연함도 아니었다. 마치 불꽃이 사그라들다가 한 순간에 꺼져버리 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바람의 감각으로 주위에서 그의 기운이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는 걸 알 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영악한 계집!" 페스튼은 오늘 하루는 행운이 아니라 불운의 날이라는 걸 점쳤다. 연약할 것만 같은 눈 앞의 미소녀는 번개처럼 검 을 찔리오는 걸로도 모자라 거둬갈 때도 손끝으로 회전을 시키며 시야를 혼란시키고 그의 주먹이 가는 길을 차단했 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이제는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리 건달 짓이나 하고 있다고 해도 솜털도 안 가신 소녀에게 밀린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맴돌자 아리에는 문득 불안감에 동작이 움츠러들었다. 바앗!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다. 허리 밑을 쓸어 오는 발차기 공격에 아리에는 위로 뛰어올랐다. 단검술로 접근전을 구사하 고 있었던 그녀로서는 단 하나의 회피술이었다. 그 순간 뒤에 서있던 시즈가 움찔했다. 모든 일에는 정직한 행동만 상수(上數)가 아니다. 결투에서도 마찬 가지인지라 전략과는 다른 속임수가 필요했다. 작은 행동의 기색, 큰 과장의 동작 등 또는 실제로 공격하는 듯하면서도 힘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 타격을 입히지 않고 다음 공격을 위한 자세를 잡거나 상대를 중요한 공격으로 끌어들였다. 동방의 무술가들은 이런 속임수를 '허 초'라고 하였는데 이런 수법에 능한 자들로는 당연 무술가나 무투가였지만 그보다도 뛰어난 자들은 어느 도시에나 암흑 세계를 주름잡는 도둑과 건달들이었다. 특히 뒷골목의 물을 좀 먹었다하는 이들은 도망치기 위한 속임수를 따 로 준비하고 있어 그 표정과 기세에 휘말린 상대는 건달이 악독하게 함께 죽으려 한다고 착각하여 물러설 정도였 다. 항간에서는 그 순간 공격한다면 건달들의 주먹도 단순히 무시할 게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만약 그들의 공격이 무투가들 이상의 파괴력만 담겨있다면 말이다. "속임수 였나?" 사내가 재빠르게 공격자세를 잡고 빠르게 접근하자 아리에는 경악성을 토했다.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어 물러설 수 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빨라!" 용병들이 행하는 임기응변을 수없이 보아온지라 아리에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 사내의 공격범위에 들어오지 않은 그녀는 좌검(左劍)을 번개같이 내리그었다. 페스튼이 그대로 전진한다면 검에 맞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 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을 뿐이다. "악!"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가 검을 손으로 잡아버릴 줄은‥. 검이 팍하고 살을 파고들며 피가 튀었지만 뼈를 자르진 못했다. 공중에 뜬 자세에서는 무게를 실을 수 없었고 건틀렛의 가죽도 보호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게 톡톡히 발 휘했기 때문이다. "속임수라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순진한 아가씨!" 그는 손에 피가 흐르는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다. 제대로 된 일격을 위해서 손에 생채기 난 정도는 애들 장난이 라고 여기는 것이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공중에서 아리에의 몸이 속절없이 기울어졌다. "흐압!" 그 순간, 아리에는 공포를 느꼈다. 드러난 이빨, 불을 뿜어내는 듯한 기합 소리, 맹수같은 눈빛. 그녀는 눈을 꼭 감 았다. "시즈으으으으!" 37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시를 쓴다면...(8) 팡!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뱃가죽이 터지는 소리일거야. 내장이 얼굴을 내밀었겠지? 얼마나 흉할까. 이런 저런 생 각이 아리에의 머릿속을 질주했다. 찰나가 영겁안 듯한 침묵. 그녀의 감각은 뭔가 빠져있는 조건을 감지했다. '그런데 안 아프네.' 용기를 가지고 힘겹게 눈을 뜨는 아리에. 그녀의 시야에 쏘아져 들어온 것은 한 손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시즈였다. 그의 다른 손은 금발 사내의 주먹을 정확하게 막고 있었는데 그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목표했던 복부가 아니었다. 페스튼은 싸움을 중단시킨 청년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 보았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아리에는 무서움에 시즈의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이 말을 듣자 화가 나기는 했다. 적어도 귀족일 때부터 넘쳐나던 자존심이었으니까. 그 자존심은 용병이 된 후 그녀 가 남자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성장하게 만든 밑기둥이었다. "그녀는 아직 하나의 검이 남아있었다." "아마 당신의 공격을 아리에가 남은 단검으로 막았다고 해도 하나의 단검으로는 상처라면 몰라도 공격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전 그녀가 제 손바닥처럼 터져 나간다면 지금처럼 냉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협박이냐?" "설명입니다." 아리에는 시즈의 설명을 영상으로 떠올려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도 좀전의 상상처럼 뱃가죽이 터진 채 내장 들이 흐물흐물 흘러나왔을 지도 몰랐다. 시즈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찢어진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진 손바닥이 피로 후줄근했다. "쳇! 재미없군. 시시해." 잡아먹을 듯이 그를 쳐다보던 페스튼은 휙하고 몸을 돌렸다. 꼬리를 똘똘 말아버리고 연인 뒤에 숨은 여자를 보자 투기(鬪氣)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어이, 여자. 다음부터는 얌전히 그 남자 품속에 숨어나 있으라고. 그 실력으로는 흉한 꼴밖에 못 당해." 보통 사자의 탈을 쓴 늑대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시즈가 느낀 페스튼의 모습은 늑대의 탈을 쓴 사자였다. 사자에게 물린 시즈의 손을 아리에는 천을 찢어 싸매고는 중얼거렸다. "저 남자의 말대로 할까?" "그렇다면 저로서는 편하겠지요. 꽤 큰 주머니를 마련해서 넣어 품고 다닐까요? 하하핫" "흥! 뭐라고?" "윽!" 아리에는 시즈의 손을 감싼 천을 힘껏 조이고 아픔에 온몸을 부르르 떠는 시즈를 확 밀쳐냈다. 자존심이 고개를 든 것이다. "두고 봐. 시즈가 내 품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래도 저로서는 편하겠네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세상에는 사자의 탈을 쓴 늑대도 있지만 늑대의 탈 쓰고 먹이를 유인하는 사자도 있는 법입니다. 강한 자에게 지혜가 있다면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겠지요. 이게 그 증거가 되겠구 요." 시즈는 욱신거리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돌아가면 토플레에게 제법 잔소리를 들을 상처였다. 양털 모피를 아리에에 게 둘러주고 그는 중얼거렸다.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상처에요." 다음 날, "그냥 흑색 거성으로 돌아갈 텐가?" "그렇습니다." 킬유시는 시즈 일행에게 로바메트 공작을 만나보라고 하였으나 시즈는 거절했다. 전운(戰運)이 감돌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흥청망청한 귀족의 수도에서 어서 떠나고 싶었다. "다음에 볼 때는 술잔 대신 검을 부딪히겠지." 보를레스의 말에 펠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상대는 당신이 아니야." "글세‥." 그렇게 시즈들은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펴온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 곳은 화려한 축제의 도 시가 아니었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1) 환기(環期) 4672년, 대륙 동남부의 국가, 실베니아. 나무들이 막 봉오리를 맺을 무렵, 킬유시 공작은 북동부 귀족들 의 동의를 얻어 방탕한 궁정타도를 천명(闡明)했다. 엘시크에서 일어났던 '봄의 혈사'와 더불어 46 세기의 봄을 장식 할 '봄의 반란'이었다. '봄의 혈사'가 일어난 지 정확히 2년 후였고 '마땅찮은 시즈'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였다. "설마하니 실베니아 사상 가장 성대한 축제가 시작되던 날 반란을 일으키고 케임성을 함락시킬 줄이야."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사내는 들고 있던 술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가장 신민(臣民)의 고혈을 뽑아낸 축제겠지. 어쨌든 중앙 귀족들이 한 방 먹었겠어." 사내의 친구인지 맞장구를 치면서 술을 따른 남자는 멀리 수도에 있을 귀족들의 머리 속을 가늠하고 있었다. "축제라면 누구나 풀어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허허‥ 킬유시 공작이 일어났으니 다음은 '값싼 남작'이겠지. 과연 그가 왕가에 충성할 것인가, 아니면 장인을 따 라서 반란에 협력할 것인가. 정말 옆에서 보기만 한다면 재미있는 상황인데 말야." "문제는 우리가 그 전쟁에 징용된다는 게 문제겠지." "그러니까 술이나 마시자고. 전쟁에서 죽으면 마시지도 못 하잖아." 실베니아는 어느 주점이나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킬유시 공작의 반란가 화제가 되어 떠들썩했다. 어떤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어떤 이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호기(呼氣)에 젖어 전쟁을 기대했다. 또한 다 른 나라에서는 전략가들이 이번 반란의 승패와 그 이후, 대륙의 정세를 예측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반군은 현재 케임 성을 함락시키고 남하(南下)하여 수도에서 북쪽 피케이스 강의 북쪽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예 정보다 빠른 것은 북부의 주민들이 반군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값싼 남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젠티아 남작이 그들에게 가담할 것을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더욱‥." "그만! 그만해!" "폐하!" "시끄럽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땅! 따르르르‥.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라겔 파이론 3세가 내리친 주먹에 테이블 위의 은잔이 엎어져 바닥을 굴렀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진정하게 되었는가? 이 나라에서 뛰어나다는 인물들이 바로 그대들 아닌가. 그래서 나라를 이끄는 귀족들이 된 게 아닌가? 그런데 역적 하나 막을 인물이 없다니! 아~예 이제부터는 역적들만 데려다가 정치를 시키면 자네들 모두보다 낫겠구만!" "폐하,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뭐가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게야? 킬유시 공작을 능력을 의심하고 물러나게 주청한 사람들은 그대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의심받는 능력보다는 나아야지? 헐뜯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그 능력이 뛰어나여' 막지 못하겠다는 소리만 지껄이는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그 놈의 망극, 망극, 내가 벌써 어제부터 수 십 번은 들은 것 같다. 망극(罔極)하다는 소리 조금만 더 들었다가는 망국(亡國)하겠구나." 마지막으로 '망극'을 입에 담았던 로시오 백작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국왕이 정사(政事)에 소홀할 틈을 타 세금을 신나게 갈취한 귀족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러할 수 있는 이유는 요즘 신흥 권력 세력의 동맹에 들었기 때문 이리라. 신흥 세력층은 강력하게 킬유시 공작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니 지금 국왕의 말에 그럴 듯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회의실의 문을 열고 한 중년 사내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푸른 정장에 금색 수실이 구블구블 수놓아져 화려함 과 단정함을 동시에 풍기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국왕의 얼굴은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오! 로바메트 경."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오. 그대도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왔겠지? 다른 말은 필요없소. 특히 망극하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이 상황을 타계할 고견이 없다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로바메트의 얼굴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국왕 주위에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미소 는 비웃음이었다. 천천히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우선 제 자리 좀 주시지요. 좀 오래 걸릴 듯 싶습니다." "로시오 경. 자리 좀 비켜 주게. 자네는 집에 가서 쉬어도 좋아." 황당한 표정을 로시오는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이어진 국왕의 호통에 그는 맹수에 놀란 사슴처럼 벌떡 일어 나 모자를 쓰고 황급히 인사하며 회의실을 도망치듯 나갔다. "제법 끈기 있게 킬유시 공작을 모함하길래 뭔가 믿는 게 있나 했더니만, 내 실수로군." 그러면서 파이론 3세는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떨고 있는 신흥 권력 세력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로바 메트의 눈에서는 비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국왕을 너무 얕봤어. 역사는 폭군들을 매우 우둔하게 표현해놨지만 사실 폭군들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닌 이상 매 우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군주들이다. 다만 흥국성세(興國成歲)의 시기에 휩쓸려 긴장이 풀어지고 많은 유혹을 받아들 이는 것에 중독 되었을 뿐이지.' 보통 생활이 어려우면 부지런해지고 순탄하면 게을러지는 게 사람 성격이다. 넓게 세상을 보아도 마찬가지니, 어지 러우면 영웅이 나고 평화롭다면 건달이 난다. 국왕이라고 인간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모습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하나의 상황만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귀족들은 그걸 모른 것이다. 그리고 로바메트는 국왕의 다른 면을 시험하기 위한 운(韻)을 띄웠고 국왕은 로시오 백작을 내쫓았다. 만족스러운 확인 작업을 마친 그는 자리에 앉았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2) "폐하께서는 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킬유시 공작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뭐라고!?" 발끈한 것은 국왕이 아니라 기사들이었다. 전시(戰時)상황이었기 때문에 갑옷을 입고 앉아있던 그들은 철컥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파이론 3세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앉아라. 틀린 말도 아니니까." "큭!" "자아, 계속 해보시오. 설마 그게 끝은 아니겠지?" 파이론 3세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로바메트를 보고 있었다. 타국의 전략가들은 실베니아를 가리켜 '수도에는 장미 향기가 그윽하고 창공에는 푸른 매가 감시의 눈을 뜨고 날아다니며 변방에서는 거대한 흑기사가 버티고 있다.'고 하 였다. 여기서 장미 향기는 정치에 능한 로바메트 공작을, 푸른 매는 귀신같은 전략가 킬유시 공작을, 그리고 거대한 꽃잎의 기사는 흑거성 글로디프리아의 드로안 남작을 뜻한다. 그러나 국왕이 신용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킬유시 공작을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은 이 궁성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란 말인가? 막아낼 수 있는 자가!" "젠티아 드로안. '값싼 남작'입니다." "하지만 그는 킬유시의 사위가 아닌가." 파이론 3세는 이번만큼은 로바메트가 착각을 했다고 판단했다. 두통이 나는지 머리를 손으로 받친 그에게 로바메트 는 한 번 더 말했다. "드로안 경은 기사입니다. 현재 국왕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처가에 대한 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겁니 다. 그를 불러야 합니다. 지금 부른다면 폐하께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때 콧수염을 양 옆으로 고아하게 기른 장년의 귀족이 일어섰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근래에 들어 권력을 잡은 신흥 세력의 중추역활을 하고 있는 자였다. "폐하, 제가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다." "해보게, 코츠드 백작." "드로안 경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를 펴온에 불러들이는 것은 늑대가 무서워 사자를 모 셔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전부터 그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칭되었음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음‥." 두통이 심해져왔다. 확실히 변방에서 대륙 최고의 정예를 가진 '값싼 남작'을 주의했던 게 사실이고, 제거하려고도 했다. 만약 그가 궁성에 들어온다면 강력한 군사력과 민심을 바탕으로 실권을 잡을 것이고 그 위세는 왕마저 능가 할 가능성이 컸다. 고민에 빠진 왕에게 로바메트가 말했다. "그런 그가 킬유시에게 협력하게 된다면 이 반란은 절대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소식이 들리거든 저 는 폐하께 왕좌를 포기하라고 말씀드리겠지요." "무, 무엄하다!" 한 노기사가 벌떡 일어서서 검을 뽑았다. 파공성과 함께 로바메트는 목에 닿은 검날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파이 론 3세가 손을 저었다. "존기어 경. 검을 거두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폐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기사들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신단 말씀입니까?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반도(反 跳) 하도너 킬유시를 잡아다가 무릎을 꿀리겠습니다." 파이론 3세는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로바메트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보시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 가망은 미약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는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존기어는 그의 코웃음에서 자신을 얕본다는 걸 느끼고 살기를 띄웠다. "좋아. 존기어 경을 믿기로 하겠네. 중앙군의 모든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지. 필요하다면 궁정 기사단의 출 진도‥." 반란을 진압하는데 궁정 기사단이 출전한 일은 매우 드물었다. 기사단 한 두명의 기사가 중앙군을 이끌고 출전해도 완승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만큼 궁정 기사단의 투입을 허락한다는 사실은 킬유시 공작의 반란과 그에서 퍼진 파장 이 거대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파장이 가장 영향을 미칠 곳은 바로 실베니아 북서부에 위치한 거성 글로디프리아였다. * * * 태풍의 눈이 하도너 킬유시라면 그에 비견되는 게 바로 글로디프리아여다. 글로디프리아의 회의실에서는 가운데 원 의 공간을 둔 테이블에 4 인 이 앉아있었다. "존기어‥. 노기사께서 나섰군요." 젠티아의 말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것은 마치 내기돈을 경마를 바라보는 듯하여 여유가 느껴졌다. 토루반이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존기어라면 용병왕조차도 칭찬했던 용맹한 기사가 아닌가?" "그렇지만 용병왕이 정말로 곤란해했던 것은 킬유시 공작의 전략이었지요. 그는 존기어의 검술 이상은 칭찬한 일 이 없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는 거의 순수한 학문의 연구를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의 전술에 대한 연구는 미비했다. 이는 마 법의 발달도 원인이었다. 그래서 7인의 현자 중에서 전략에 관한 한 피브드닌을 따라을 이는 없다시피 했다. 토루반 이 입을 다물고 젠티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존기어를 잡을 수 있을만한 전사나 기사가 반란군에는 부족해. 궁정 기사단만 해도 뛰어나 지 않은 기사가 없어요." 보랏빛 망토를 걸치고 조각상처럼 앉아있는 그에게서 고아한 기세가 풍겼다. 다만 능글능글한 미소가 상당히 그 고 아함에 불안함을 선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아하다는 표현의 그의 옆에 앉아있는 마크렌서 자작에게 더욱 어울릴 것이다. "남작께서는 장인을 너무 과소 평가 하시는 군요. 킬유시 공작이 그 정도의 위인이었다면 전 각하의 부름은 신경 쓰지도 않고 가까운 호수에서 낚시나 즐기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존기어에게 토벌되는 반군을 예상하며 각하께 애처로운 아내를 위로하길 권하겠죠."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 사이로 보이는 웃음에 젠티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랐다. "어이어이, 위험한 말이군. 명령 불복이라니. 그 말은 반군에 비장의 수라도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숨겨진 무기나, 무인(武人)이라도?" "없어도 됩니다, 각하. 그게 킬유시 공작의 무서운 점이죠." "혹시‥ 그의 카리스마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과연 아스틴네글로드의 젊은 학자다우십니다, 피브드닌. 정답이에요. 하지만 하나가 빠졌습니다. 바로 현재 나라의 실정이죠. 예로부터 편안하면 게을러지고, 어려우면 부지런해지는 게 인간입니다. 어려울수록 인물이 나오는 법이죠. 이 나라는 현재 귀족들은 편안하고 서민들은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심각하다고 할 수준이지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뛰어난 학자와 기사인 만큼 금방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서민 중에는 기회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킬유시 공작의 반란은 적절한 기회로 비춰지겠죠. 그에 비해서 귀족들은 게을러졌습니다. 이번에 존기어 경으로 하여금 반란군과 겨룬다는 것은 일종의 발악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각하를 수도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내가 수도로 입성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거야 킬유시 공작의 능력에 달렸겠지.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서민들의 변수도 포함되겠지만‥." 토루반의 마무리였다.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가 제법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다. 종이들을 모은 마크렌서 자작이 말 했다. "골치 아픈 전쟁이 되겠군요." "그렇군. 헌데 시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갔나?" 모두들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때 서류 정리가 늦어 이제서야테이블 위에서 뛰어내린 토루반이 말했다. "연병장에 있던 모양이더군. 기사들이 훈련하는 걸 구경하는 것 같아."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3) "하앗!" "크윽!" 사론은 상대의 검이 마치 소용돌이 같다고 느꼈다. 검이 마치 넝쿨에 엉킨 듯 끌려들었고 끝내는 허공으로 치솟았 다. 촤아아아아악! "졌습니다." 목에 닿아있는 검 끝을 바라보며 그는 허탈하게 말했다. 피식하고 보를레스가 웃었다. "역시 힘에서 밀리는 듯 하군. 기술에서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팔굽혀펴기 양을 늘려 보는 게 어떤가?" "후우‥ 그래야 겠어요." 축 처진 어깨로 사론이 연병장 둘레에 쳐져있는 계단에 앉았다. 그러자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위로했 다. "사론, 너무 실망하지 마. 저 인간, 힘 빼면 남는 것도 없는 위인이라고. 풀이 죽을 필요 없어." "그럴까요?" 한숨과 함께 사론이 되묻자 상대는 그의 어깨를 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보 를레스가 기가 막혀하며 말했다. "뭐가 그럴까요야? 파마리나, 이상한 위로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틀린 말했어?" "그걸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느니 차라리 레스난이 자진해서 네 실험도구가 되었다는 말을 믿겠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혓바닥들. 토플레는 저 둘의 혀를 당장 수술로 묶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귀를 막았다. '무료로 하라고 해도 서슴치 않을텐데‥.' 옆에서는 블리세미트가 방금 전 보를레스의 운검(運劍)을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 전 펴온에서 건달들과의 격돌 후 그는 대륙은 '붉은 뱀의 사원'과는 다른 충돌이 많다는 건 인식했다. 그리고 말과 믿음으로는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권술에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때 파마리나와의 말싸움에 반쯤 지쳐버린 보를레스가 시즈를 향해 외쳤다. "시즈, 네 차례야. 한 번 붙어보자고." "괜찮겠어요?" 무리한 혀의 운동으로 숨을 헐떡이는 보를레스가 시즈는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나보다. 보를레스는 얼굴을 약간 붉히 고 소리쳤다. "당연하잖아. 어서 덤비기나 하라고." "흥!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버려라." 파마리나가 레스난의 옆 자리에 앉으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보를레스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아직 검을 뽑지 않고 있는 시즈를 향해 말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다가 지고 나서 불평을 하려거든 파마리나에게 하도록 해. 끝까지 내가 질 수 없게 만드는 소리 나 해대는 사람이니까." "그럼 파마리나는 보를레스의 '승리의 여신'이네요?" 눈치 없는 레스난이 파마리나에게 강한 꿀밤을 맞고 그걸 신호로 시즈와 보를레스의 검이 부딪혔다. "호오‥. 서둘러 오길 잘했군. 이런 재밌는 구경거리가 시작되었을 줄이야." 털썩하고 젠티아가 사론 옆에 엉덩이를 깔았다. "데린님께 잔소리 들으시는 거 아닙니까? 예복 같은데‥." "나의 착한 아내가 이 정도 일로 잔소리를 할 리가 없지. 그건 그렇고 저 쪽 여자들은 벌써 자리를 잡은 듯 싶군. 시즈를 응원할 생각인가? 그럼 여기는 보를레스 응원 측인가?" "그렇게 되겠군요." "나, 난 아니에요." 질색을 하며 벌떡 일어서는 카이젤을 토플레가 덥썩 잡아 어깨동무했다. "어허‥. 설마 여자들한테 인기 좀 있다고 배신을 하려는 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도로 앉은 카이젤. 피식하고 그에게 웃음을 짓던 젠티아는 옆에서 들려온 응원에 귀를 막았다. "어이! 보를레스! 시즈 같은 꼬맹이한테 지면 망신이야. 망신!" '그렇다면 우린 당신에게 절대로 질 수 없겠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응원소리의 토루반을 보면서 젠티아는 내심 중얼거렸다. 레스난과 파마리나가 난쟁이 노인 을 째려보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게 '저건 응원이 아니라 야유야'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쐐애애애액! 응원이 도움이 되던, 되지 않던 보를레스의 검은 시즈에게 빠르게 쇄도했다. 그러나 시즈는 토루반의 응원 소리에 날아오던 검의 날카로움이 순간 감소되는 걸 느꼈다. 까아아앙! 찌릿! 찌릿! 한 전류가 보를레스의 팔을 습격했다. 그의 힘을 가볍게 튕겨낼 정도로 에릭사를 흡수한 시즈의 힘은 엄청났다. "끝내주는 군. 한 팔인데 저런 파워라면 양팔이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토플레가 어이가 없는 듯 중얼거렸다. 기가 막힌 감정은 사론이 더 했다. 190 cm의 장신과 잘 단련된 근육에서 넘 쳐나오는 보를레스의 힘은 자신으로써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이었다. 그런데 근육도 얼마 없는 팔, 하.나.로 우위를 점하다니. 침을 꿀꺽 삼킨 그는 토플레의 옷자락을 붙잡고 속삭였다. "시즈 님께 사용하고 남은 에릭사가 한 방울도 없는 겁니까?" "없어. 한 방울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사론이었다. 보를레스와 시즈가 싸우는 걸 보고 있던 젠티아도 한 마디 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저 근육에서는 있을 수 없는 힘이군. 게다가 저 빠르기. 몸 전체를 고속으로 움직이는 빠르 기만 따졌을 때 나보다도 뛰어나다."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는 각하보다 말입니까?" 피브드닌이 경악을 참다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고 젠티아의 말에 놀람을 감추 지 못했고 여자인 아리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마리나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저 아저씨가 그렇게 대단한 검사인가?" "물론이에요. 파마리나는 마녀니까 아마도 꺼림직한 상대로는 성투사나 성기사겠죠? '값싼 남작'이라는 이름은 예 전 성투사와 성기사의 수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유명해진 거에요." "헤에‥. 그 신의 이름으로 정체를 가린 악마들에게 이겼다고? 하지만 지금 그가 자기보다 시즈가 더 빠르다고 했 잖아."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젠티아가 말했다. "마녀 아가씨. 속도만 빠르다고 전투에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물론 유리한 승리의 조건은 되어주겠지만. 참 고로 나보다 운신의 속도가 빠른 걸로 치면 실베니아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어. 저 둘의 싸움을 잘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빠르기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중의 시선은 시즈와 보를레스의 검으로 집중되었다. 가가가가각! 시즈가 보를레스보다 우위에 있는 조건은 운신(運身)만이 아니었다. 검의 속도도 훨씬 뛰어났다. 그래서 보를레스로 서는 공격을 위한 타이밍을 잡는 것도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나마 한 손이라 공격의 연환이 예전보다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두 손이었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의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은 현재 구경하는 검사들의 머리 속을 한꺼번에 괴롭히는 생각이었다. 현재는 그런 일 은 일어날 가망이 없었지만. 그러나 보를레스는 꽤 많은 싸움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경우에 대한 대처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둘의 싸움은 금속음이 몇 번이 지나면서도 승패는 보일 기미조차 없었다. 시즈의 해동도예(海東刀藝)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날카로워졌지만 보를레스의 집중력은 단 하나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즈가 바 람과 같다면 보를레스는 바위였다. 바람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바위. 시즈가 검날이 뒤로 가게 바꿔잡자 보를레스는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비연참이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4) 보를레스는 시즈의 비연참이 어떠한 각도로 공격해 들어올지 계산했다. 피브드닌의 수학적인 계산보다도 그는 자신 의 감이 말해주는 계산을 믿었다. 그리고 계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옆구리 부근에 작은 허점을 만들어주었다. 샤악! 다른 검사의 양손에 허락된 힘을 한 손으로 폭출시키는 시즈의 예도는 파공성부터가 달랐다. 날카로운 칼에 종이가 베어지는 듯한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섬칫하게 만들었다. 보를레스의 검이 지르는 파공성이 지워질 정도 로. '빠, 빨라!' 보를레스는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면서도 시즈의 검세로 인한 압박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검을, 그것도 자신은 양손으로 정면 베기를 시도했기 때문에 훨씬 빨라야 할 텐데 느리다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쾅! 도저히 금속끼리의 충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멀리서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 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게다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부딪힌 두 검 사이에서 불꽃이 번쩍하고 튀어 올라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누가 이겼지?' 화아아악! 하는 검풍의 모래를 날리며 시야를 가린 지 잠시 후 사론은 눈을 부릅떴다. 공격했던 시즈의 예도가 보를 레스의 검에 완벽하게 막혀있었는데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부들부들하고 두 검의 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연참은 순간적인 힘과 속도를 극대화시키는 기술. 일단 막힌 이상 보를레스의 양손에서 지속적으로 나오 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하아아아앗!" 스프링처럼 튕겨지는 시즈의 오른팔. 보를레스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가 댔다. "체스 메이트." "제가 졌습니다." 짝짝짝짝!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본 두 사람은 얼굴이 붉어졌다. 연병장에서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몽땅 모여 들어있 었던 것이다. 유난히 뚜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내려온 젠티아가 말했다. "좋은 승부였다. 모두들 잘 봤겠지? 이들에게 뒤쳐져서야 과연 대륙 최고의 정예 기사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알아서들 하라고!" "옛!" 우렁찬 대답. 휙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피브드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실력 상승을 위해 겨룬 것은 보를레스와 시즈인데 그에 대한 이익은 저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군." "그래. 판결은‥ 승자 '값싼 남작'." 그 때였다. 헐레벌떡 한 소년이 뛰어와서 젠티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일련의 사태에 모두들 소년과 젠 티아를 주시했고 젠티아는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아킨?" 붉은 집배원 복장의 소년, 아이킨. 그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존기어가 패배했습니다." * * * "도대체 저 놈은 누구야? 저런 기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당황하지 마라, 부관. 그렇지 않아도 본군의 진영이 거의 무너지려고 한다. 부관마저 그런다면 누가 군사를 통솔 하겠나?" "예, 옛! 알겠습니다." "저 애송이는 내가 상대하지." 불같은 상관이었다. 젊은 부관은 존기어가 말을 달려나가는 걸 보고도 감히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군을 통 솔하는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좌군과 우군은 물러서라. 중앙으로 몰리지 마라! 사단장들은 어서 진형을 다시 갖춰라!" 사단장들이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효과가 있는지 무너지던 진형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앞에서 내리치는 검을 막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군사들이 진영을 찾아가는데 신경을 쓰겠는가. "무슨 꼴이란 말인가. 고작 애송이 하나를 잡지 못하여!" 존기어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사자처럼 휘날리며 말을 재촉했다. 승리할 수 있다고 예상했던 일전(一戰)을 엉망으로 만든 주범은 이 순간 또 하나의 기사를 저승으로 보내고 있었다. 분노의 일성(一聲)이 터져 나오며 그는 검을 내리 쳤다. "애송아! 내 검도 받아봐라!" "머리 정리나 하고 오라고. 늙은이!" 페스튼은 이미 존기어가 말을 달려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보통 병사들과는 다른 거대 한 기세가 멀리에서부터 풍겨 나왔던 것이다.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뭐 이렇게 힘이 좋아?' 말의 속도가 배가(倍加)된 존기어의 검은 페스튼의 창을 활처럼 휘게 만들었다. 부러질 듯한 상황에서도 페스튼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가 익힌 건달패들의 싸움법은 기세에서 밀리면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숨을 가득 들이마신 그 가 한 번 기합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압!" 가까스로 튕겨지는 그레이트 소드. 하지만 페스튼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존기어는 말에서 내리며 페스튼을 탐색 하듯 노려보았다. 어딜 봐도 기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말단 병사의 복장에 들고 있는 창 역시 보병들에게 기본 적으로 지급되는 창이 틀림없었다. "수 만 명의 군대 속에서 호랑이처럼 날뛰는 게 기사도 아니고 말단 병사였다니. 자네 이름이 뭔가?" "페스튼. 성은 없소." "허허허‥." 존기어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도 아니오, 그렇다고 몰락 기사 가문의 후손도 아니다. 성도 없는 천민(賤 民)이 이름높은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진형을 무너뜨렸으며 끝내 군단장과 겨룬다? '기가 막히는군. 이게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자네, 반군이 아니라 우리 군으로 오는 게 어떤가? 그대라면 내가 폐하께 주청을 드려 기사의 직위를 주지." "하하하! 안타깝게도 난 이미 선약이 있소. 당신의 목을 가기로 한 약속이 말이야!"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자네를 살려둘 수는 없지." 페스튼은 자신있게 가슴을 폈지만 심장은 쪼그라들고 있었다. 말에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존기어는 2m도 넘는 엄청난 거신(巨身)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만한 그레이트 소드도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이다. '온몸이 중장갑이다. 다른 곳은 쳐봤자 소용도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머리를 부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무슨 수로? 2m보다도 높은 곳에 달려있는 머리를 치기 위해서는 상대의 공격범위 안으로 접근해야 했다. 이번에는 말에 탄 게 아니라서 두 손으로 휘두를 텐데 파워는 몰라도 속도는 방금 전 가까스로 막아낸 검격보다 훨 씬 빠를 것임이 분명했다. "망설인다면 내가 가도록 하지." 뒤에서 얼쩡거리는 적군 두 명을 한꺼번에 양단하고 존기어는 분수처럼 치솟다가 떨어지는 피비 속에서 페스튼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지하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화산 같은 살기와 투기에 페스튼의 정신은 바늘의 끝처럼 날카로 워졌다. 한 순간의 방심은 그의 죽음과 직결될 것이다. "핫!" 쐐애애액! 우선은 창의 긴 리치를 이용하여 견제를 한다. 페스튼은 자신이 주먹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무투가의 형식이었기 때문에 근거리 전투가들이 가장 곤란해하는 상태의 전투도 잘 알고 있었다. '창이 무슨 활처럼 날아드는 거냐?' 중장갑을 입은 이상 존기어는 확실히 페스튼보다 둔했다. 청년의 창이 목을 스치자 강한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머 리카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페스튼의 예상처럼 그는 상대의 전법에 아주 곤혹스러웠다. 가까이 들어가려고 하면 창으로 빠르게 여러 군대의 방위를 점해 거리를 떨어뜨리고 강한 찌르기로 일격을 노린다. 점점 노기사는 초조해졌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5)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진형은 무너지고 있다. 킬유시라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그렇다고 여기서 애송이 를 놓친다면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페스튼은 긴장했지만 전황(戰況)에 대해서는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적의 대장을 잡고 있는 것 만으로도 반군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을 테니까.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고 해도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끌 어놔야 했다 '그래. 더 성급하게. 좀 더 과격하게 들어와라. 간발의 차로 피하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게 되면 나의 전진이 시작되 는 거다.' 그의 생각대로 존기어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페스튼의 눈이 동굴 속에서 먹이의 움직 임을 살피는 박쥐의 초음파처럼 세밀하게 기회를 노렸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지금이야!' 존기어는 기다리다 못해 몸의 상처를 감수하고 돌격해왔다. 맹수같은 기세로 먹이를 덮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기세. 페스튼은 침착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던졌다! "흐아아아아압!" 존기어는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미소를 짓길래 긴장은 했지만 던지다니? 게다가 전력으로 던진 게 분명했다. 전쟁 에서 투창도 아니고 대창을 던져버리다니 무슨 행위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창을 피하는 게 문제였다. 달려나 가는 순간 지척에서 명치를 향해 창이 쏘아졌다. 서있는 상태였다면 모르되 달려나가는 중이었다. 그는 한 쪽 무릎 을 꿇으며 그레이트 소드를 땅에 박아 전진을 멈췄다. 파캉! 어깨의 철 홀더가 박살이 났고 피가 쏟아졌다.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자 금발의 미청년이 찡긋하고 윙크를 했 다. 그의 팔이 접혀진 채 힘을 폭발시킬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를 위하여, 장갑도 새로 샀다고.' 반짝! 가죽 갑옷을 입은 주제에 손에는 강철 건틀릿을 끼고 있었다. 건틀릿의 표면이 봄햇살을 받아서 광택이 줄줄 흐르 는 순간이 존기어에게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자, 잠깐‥." 콰직! 콰직! 퍽! 퍽! 퍽! 쇠가 뭉게지는 소리에 이어서 두부가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고 병사들이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싸움을 멈추고 돌아보았을 때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건틀렛을 높이 올려졌다.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페스튼?" "아는 사람인가, 시즈?" "글쎄요. 안다고 해야 할까요?"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 달 전 펴온에서 건달들은 그 금발의 청년을 향해 페스튼라고 불렀지.' "흠흠, 어쨌든 이 사람의 출신이 매우 흥미로워요. 성(姓)도 없는 고아인데다가 건달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건달이 면서도 도둑 길드나 건달 조직 같은 곳에 몸을 담지 않았으면서도 꽤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얼굴도 미남이고 바람둥이 기질도 있어서 여자가 제법 꼬이는 형 같더라고요" 마지막 문장에서 아이킨은 웃는 건지 찌푸린 건지 분간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챈 파마리나가 물었 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부러워서요." 파마리나는 후 하고 입김을 분 주먹을 직각으로 세워 아이킨의 머리에 꽂아버렸다. 비명이 둥근 회의장을 채웠다. "악!" "왜 때려요?" "네가 바라는 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축복을 해준 거야. 싫다면 저주를 내려주는 방법도 있지." 아이킨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대들지는 않았다. 마녀의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파마리나, 보고 중이에요." 무거운 어조로 젠티아가 파마리나를 말렸다. 힘을 얻은 아이킨이 입을 베―하고 내밀었다. "아이킨, 계속해라." "예, 각하. 키는 180cm 이상, 추정 몸무게는 74~80kg. 신체 특징은 긴 금발과 팔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길어요. 심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싸우다가 한 대 맞으면 '아! 이 사람이구나'하실 거에요." "음‥. 수고했다. 마무리가 석연찮지만‥." 젠티아가 머리를 툭툭 쓰다듬자 소년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젠티아는 웃 음이 나왔다. 쓰다듬는 손에 아이킨이 파마리나에게 맞아 혹이 난 게 입체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차례군요. 아! 피브드닌님도 현재는 엄연히 저희의 전략관이시니 일어나주시지요. 저 혼자 분석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흠흠. 그래야 겠군요." 뒤에서 토루반과 토플레가 휘파람을 불려 환성을 보냈다. "야아‥ 일개 학자 피브드닌, 출세했구만~." 딱딱! "자!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반군이 중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지도 를 봐주시죠." 마크렌서 자작은 지휘봉으로 테이블의 모서리를 때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선 두 군대의 병력입니다. 킬유시 공작이 이끄는 반군은 약 6만, 그리고 존기어가 이끌었던 중앙군은 정확히 보 급병을 포함하여 8만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피브드닌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일개 보병이 대장을 베었다는 사실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킬유시 공작의 전술은 매우 뛰어나서 페스튼의 등장 이 없었다고 해도 승리했을 겁니다. 물론 그의 등장으로 압도적이긴 했지만요. 여기를 보세요. 두 군대가 싸움에 돌 입한 직후의 진형도(陣形圖)입니다. 그리고 이게 30분 후의 진형입니다. 어떻습니까?" "반군이 3 부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좌측은 천재기사라고 불리는 펠리언 라카스. 우측은 킬유시 공작 자신이 맡았 습니다. 그리고 풍운아(風雲兒) 페스튼이 속해있던 중(中)군은 북동의 귀족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중군이 상대의 진 격을 막고 양쪽의 군단은 상대가 중군을 포위할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양측의 반군은 중앙 진압군의 양측 을 파고들던 방향을 처음 반군이 진군하던 쪽으로 틀었습니다. 그러면서 북동 귀족들의 중군은 뒤로 조금씩 후퇴했 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전투의 긴장감을 느끼는지 마크렌서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토루반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겠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냈겠습니까?" 양쪽을 압박하는 적군. 지휘관은 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으로 중앙돌파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방향으 로 나눠진 반군은 같은 시간동안 전투에 참여하는 수가 많았고 중앙군은 뒤가 놀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반군의 중군이 천천히 후퇴를 하자 진압군의 진형은 점점 길어졌고 양옆의 군대가 기승을 부려 반으로 뚝 하고 잘라졌다. 만약 보통 기사들처럼 존기어가 후방에 있었다면 전투는 막상막하의 상태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상 전방에서 직접 적을 맞아싸웠고 나눠진 후방을 지휘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 목숨마저 보병에게 잃고 말았 으니 진압군은 패배가 마지막 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루반과 그 외에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이 침음성을 토하는 이유는 수가 부족하면서도 진압군 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린 킬유시와 펠리언의 지휘능력이었다. 이는 상대보다 몇 배는 뛰어난 정예가 있어도 힘든 일 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눈동자가 젠티아를 향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신임이 흘렀다. 그것을 아는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는 씩 웃으며 한 마디 덪붙였다. "물론 드로안 남작께서는 가능하시겠지만요." "너무 추켜세우지 말아줘." "하하하하."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6) 젠티아의 익살스러운 어조에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오자 피브드닌도 빙그레 웃었다. 정말이지 마크렌서 자 작, 토클레우스와 젠티아는 짝짝궁이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압도적인 지휘능력에 긴장했던 기사들의 마음을 순식간 에 풀어버리다니. 물론 그것은 이 두 사람의 지휘능력 또한 킬유시 공작에 뒤지지 않는다는 기본 조건이 깔려있기 에 가능하리라. '글로디프리아와 맞닿아있는 게 아스틴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마법사들이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궁정 마법사단을 거느린 중앙군에 비하면 역시 밀릴 테니까요. 저 같았어도 아꼈을 겁니다. 소수의 마법 사단을 운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피브드닌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인계해주자 피브드닌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 그의 버릇 이기도 했다. "현재로 워낙 마법사의 숫자와 질(質)에서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별다른 운용은 없을 겁니다. 그저 각 방위에서 특 별히 밀리는 쪽을 지원하는 수준이겠지요." "이제 곧 부르겠군. 폐하께서 언제쯤 부르실지 계산이 가능하오? 피브드닌. 준비를 해야할 테니." "아무래도 일주일 정도면 전갈이 올 겁니다." "좋아. 그러면 오늘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지요." 젠티아가 박수를 짝짝하고 쳐 회의가 끝났음을 신호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저마다의 자료를 들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피브드닌에게 자세한 일정의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젠티아에게 시즈가 다가왔다. "젠티아,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는 일은 어떻게 되었죠?" "그 사람이라니?" 시즈의 말에 젠티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물쭈물하며 시즈가 대답했다. "마나이츠 님을 사칭하고 저희와 같이 다녔던 인물 말입니다." "아아‥. 그 친구." 홀 안의 공기가 수심(水深) 수십 미터에 들어온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시즈 일행은 모두 그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 해하고 있었다. 막 글로디프리아에 돌아와서 젠티아를 만났을 때 그가 이제껏 대마법사 마나이츠와 있었다는 말에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는 마나이츠 씨의 집사라더군." "예? 집사요? 집사가 시즈의 힘을 뛰어넘는 마법을 발휘했다는 겁니까?" "그래. 왜냐하면 그는 강하거든. 아마도 대륙에서 가장 강할 걸. 시즈는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우리하고 역사적으 로 친분이 있는 자니까. 이름은 넬피엘 세로스. 다 늙어가는 주제에 마나이츠 씨는 왜 숨기려고 하는지‥ 쯧쯧. 그 래봤자 내 손아귀거늘." '느, 능구렁이.' 파마리나를 비롯한 시즈 일행은 근근히 성내에서 들을 수 있던 젠티아의 별명에 대해 통감했다. 지금 낄낄대며 좋 아하는 젠티아는 분명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 구렁이였다. "넬피엘 세로스라면‥." "영원히 춤을 추고 있는 녀석이지." 시즈는 고민에 빠졌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마저 나타났다면 4 대 음유술사들이 모두 출현했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썹 사이에 수심(愁心)이 깃들었다. '역사의 고리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그리고‥ 데린은 괜찮아요?"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에는 시선을 돌려서 젠티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린은 언제나 명랑하고 상냥한 여인으로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펴온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내를 걱정해주는 게 고마운 것일까? 젠티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친정에 갔지." * * * "오늘로 마지막이로구나." 하도너 킬유시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의 머리카락을, 만지면 다칠 위험한 물건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죄송해요." 데린 킬유시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도너의 뒤에서 펠리언이 무표정하게 그녀 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 남편이나 잘 보호하렴." "젠티아는 강해요. 아버지라고 해도 이길 수 없을 걸요." "이래서 딸래미는 키워봤자 시집 보내면 다 소용없다니까. 허허‥." 부녀(父女)는 말없이 마주 보았다. "미안하구나. 이런 애비가 되어서‥. 네게 힘겨운 선택을 하게 만들다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데린은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구슬처럼 또르르 조금씩 흘러내리던 눈물은 어느 새 걷잡을 수 없이 펑펑 쏟아졌 다. 손수건보다는 그저 어깨를 그녀의 눈가에 대어주며 하도너는 웃었다. "내 딸이 다 컸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울기나 하는 어린애였구나. 시집을 너무 일찍 보낸 모양이야." 대답 대신 데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요 한 달 동안 네가 와줘서 즐거웠다. 혹시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후회가 없구나.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줘서 고맙다. 그럼 이만 떠나렴." 데린은 한 달에 가까운 기간동안 시녀들 대신 아버지를 시중들었다. 아침 일찍 정성스레 세수를 씻기는 것에서 차 를 끓이고 간단한 간식을 준비했다. 마을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아버지나 딸이나 서로를 알게 된지 20년의 시간 동안 경험하지 못한 한 달이었다. 그렇기에 하도너는 미소를 지으며 딸을 떠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모든 신들의 축복을‥. 흑!"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반군 대장 킬유시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 망설 임이나 슬픔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히려 추상같은 호령을 시작했던 것이다. 페스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가 값싼 남작의 아내라면 왜 인질로 잡지 않는 거지? 게다가 자신의 딸이라면서‥." "전하는 기사시다. 기사가 뭔지 모른다면 조용히 있어." 펠리언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얼마 전 존기어를 죽이고 공(功)을 세운 금발의 청년은 반란군에서 기사의 직위 를 인정받고 용병대의 대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 그가 존기어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펠리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셋으로 나누어진 부대 중에 중군의 최전방이 가장 위험했던 것이다. 자신이라고 해도 죽을 각오로 돌격하는 8만의 군사 앞에서 무사하리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튼은 천재 기사라고 불리 는 그가 인정하는 또 다른 천재였다 하지만 건달이었다는 출신이 행동과 말투에서 풍겨났기 때문에 펠리언으로써는 상대하기 언짢았다. 가시가 잔뜩 돋은 그의 대답에 페스튼은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난 기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그리고 멀어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비웃었다. "하지만 싸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지. 전쟁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볼 때 킬유시 공작은 필승의 전략을 하나 놓친 거지."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7) "정말이지. 일주일을 못 버티는 군." 실베니아를 감싸안을 지혜를 가졌다는 로바메트는 고심했지만 더 이상 방도가 없었다. 존기어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지리멸렬(支離滅裂)해버린 중앙군. 궁정기사단만 데려갔다면 그렇게 어이없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도 아니 고 보병 하나를 뚫지 못하다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솔직히 자신이 나서서 중앙군과 궁정기사단을 비롯한 근위기사단까지 총동원한다면 승산은 있었다. 적어도 '푸른 매' 킬유시와 쌍벽을 이룬다는 로바메트였으니까. 그러나 그로 인해 실베니아라는 국가가 받게 되는 상처는 끔찍하 다고도 말해도 좋았다. 내전만큼 쓸모없는 싸움도 없다는 게 로바메트의 지론(至論)이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이겼나보이. 킬유시‥." 킬유시 공작은 이런 자신의 심리마저도 꿰뚫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경쟁자이자 친구. 마지막까지 부담감을 안 겨주는, 한 마디로 존경스러운 상대를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 집사." "부르셨나요? 전하." "넌 누구지? 새로 온 시녀인가? 어서 길틴 집사를 불러오거라." "길틴 집사님께서는 잠시 공자(公子)님께 불러가셔습니다." 새로 들어왔으리라는 예측을 하게 만드는 시녀는 이제 고작 17세 정도였다. 좋은 사내랑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꿈 을 꿔야할 소녀였다. 저 정도의 미모라면 충분할 것이다. 아마도 쪼들리는 집안 살림에 결국 남의 저택에서 걸레질 이나 해야하는 신세가 되었겠지.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고개를 저은 로바메트는 손을 까딱여서 시녀에게 나가라는 표시를 보냈다. "어서 물러가고 길틴 집사에게 왕궁으로 갈 채비를 서두르라 했다고 전하거라." "혹시 반란군의 승리로 인하여 값싼 남작에게 도움을 청해야하기 때문인가요?" 로바메트 공작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은 채로 경련했다. 진압군의 패배소식을 방금 전에 받았지만 민간(民間)에는 철저하게 소문이 도는 걸 막을 시기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녀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넌 누구냐?" "호호‥. 이번에 새로 시녀가 된 에즈민이라고 하는 걸요." "자객이냐?" "어머머머‥. 절 믿지 못하시는 군요? 너무해요! 뭐 전직이 자객이긴 했지만‥." "원하는 게 뭐지?" 로바메트의 질문에 소녀는 새빨간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 를 담았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는 도저히 17세의 앳된 소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책상에 엉덩 이를 걸친 그녀는 긴장으로 흰수염을 떨고 있는 중년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평화를 위한 약간의 혼란이랄까요‥." "서둘러라." "옛!" 마부는 평소와는 달리 로바메트의 어조가 거칠다고 느꼈지만 요즘 집무로 피곤해서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래서 조금 의 움직임도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대재상의 눈에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이런 수까지 써야하다니‥." 멀어져가는 마차를 창문으로 바라보며 노르벨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시녀옷을 입은 소녀가 혀를 삐죽하게 내밀고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부탁해놓고선 이제 와서 그러기야?" "미안, 미안. 하지만 너도 이제 일원(一員)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왠만하면 내 나이에 맞는 일을 시켜 달라고. 오빠라는 사람이 여동생한테 이상한 거나 시키고 말야!" "미안." "흥! 알면 됐어." 대리석의 우유빛 색채를 밟고 걸음을 옮긴 로바메트는 힘차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폐하. 아직 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용병왕조차도 칭찬했던 기사가 패했네. 고작 보병에게 말이야. 그대가 뛰어나다고 인정하지만 그들은 차원이 틀 려. 킬유시 공작은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었던 거야." '가증스럽군.' 국왕 파이론 3세는 완전히 체념한 듯 눈물마저 글썽거렸지만 로바메트는 속지 않았다. 늙은 여우같은 국왕은 킬유 시 공작을 추켜세우고 포기한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기사들에게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역겹지만 넘어가 줘야겠지.' "소신이 아무리 능력이 없다고 하나, 킬유시 공작과 자웅을 결할 정도의 지략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 중앙군 전 부와, 궁정 기사단을 운용할 권한을!" "오오‥ 그대의 충정에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뜻대로 하게." 귀족들은 연극의 명 연기자였다. * * * 아리에와 파마리나는 힐끔힐끔 데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둘의 심정을 아는지 옆에서는 레스난이 데린이 과일을 깍아서 던지는 즉시 덥썩덥썩 받아먹었고 데린은 천진난만한 모습의 레스난이 마냥 귀여운지 바라보는 눈길에 웃음 이 떠나질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모두 조심해서 대해주길 바래.' 그답지 않게 시무룩하던 젠티아. 두 여인은 그가 돌아서면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들어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그 러니 데린의 미소가 마음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방패로 보여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데린은 쥐가 고양이 눈치 살 피듯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는 아리에와 파마리나의 행동에서 자신의 장난꾸러기 남편이 또 무슨 장난을 쳤는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왜 먹지 않고 있어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아, 아니에요." "걱정이 있는 것 같은데요?" 자애롭게 바라보는 데린의 모습이 아리에는 너무나 안쓰러웠다. 당장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둘러댔다. "아직까지 수도에서 부름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러고 보니‥." 데린도 과일을 깍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 일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지?' 그녀의 예상대로 회의실 안은 분분을 넘어서 아니라 모두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머리에 개미가 집이라도 지었는 지 다들 끙끙거리던 기사와 학들. 몇 사람은 두뇌의 한계를 느꼈는지 애꿎은 테이블에 두개골 망치질을 해댔다. "휴우‥. 이해할 수가 없군. 그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 저돌적이었나?" 젠티아를 비롯한 회의장의 사람들은 쉴 틈도 없이 몰려오는 격전의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일주일 동안 벌써 12회의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분명 내전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원하리라 생각했거늘‥." 계산 착오였다. 젠티아는 머리를 잡고 흔들며 자책했다. "성격이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럽습니다." 그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이제껏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자 모두들 고개를 들어서 귀 를 기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땅찮은 시즈'. 2년 전까지만 해도 대륙의 학자들이 오매불망하여 칭송하던 젊 은 현자였다 "사람의 생각은 원치 않아도 바뀔 때가 있습니다." "어떤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요." 서로를 바라보는 시즈와 젠티아. 두 음유술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의 고리'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자네들이 한 번 더 펴온에 다녀와 줘야겠어." "배후를 알아낸다고 해도 시간이 맞춰질까요?" "마법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거야. 게다가 좋은 마법사도 알고 있으니까 그에게 부탁해보자고." "좋았어! 또 모험이다!" 마녀라는 이름 자체가 꿈 많은 소년, 소녀들의 모험에 등장하는 척살대상인 주제에 파마리나는 입을 귀까지 늘어뜨 리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8) "이번에는 시즈와 나만 간다." "예!?" "가, 각하!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로바메트 공작이 각하께 도움도 청하지 않은 채 출정했다는 말은 즉, 각하도 반 란군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수도에 갔다가 발각된다면 즉시 반란의 죄상을 물을 겁니다." 눈에 핏발까지 서가며 열변을 토하는 토클레우스였지만 젠티아는 막무가내였다. 심지어는 데린마저도 그의 옹고집 을 당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안해, 데린. 나의 숙명이야."라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막겠는가. 그 동안 음유술사의 숙명에 대해서 남편에게 들 었던 데린인지라 슬픈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조심하세요." 그러나 시즈와 젠티아를 더욱 곤란에 빠트리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아리에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시즈에게 매달 려있는 그녀의 모습에 젊은 기사들은 왠지 아파오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이 정도니 젠티아라고 해도 감히 건 들 수도 없는 것이다. "아리에‥." 시즈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아리에는 놔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다못한 데린이 다가갔지만 파마리나가 고개 를 지으며 그녀를 말렸다. 아리에는 마치 인형이 없으면 잠들지 못하는 소녀처럼 유리같은 눈동자를 가진 인형을 더욱 꼭 안았다. 몽클한 여인의 느낌. 아직 귀여운 소녀의 얼굴인 아리에였지만 포근한 감촉에 시즈는 화르륵 달아 올랐다. '휴우‥ 여자한테 저토록 휘둘려서야.' 한숨이 나오는 젠티아였다. 시즈 자신의 속성처럼 바람둥이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쑥맥의 기질은 벗어줬으면 싶 었다. '역사의 고리'는 아무리 작은 약점도 풍선처럼 부풀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인물들의 모임이니까. 안되겠다 싶 은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천천히 얘기하고 나오게." 사람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동안 시즈는 마치 대장간에서 달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대장장이의 망치질처럼 그의 내부를 두들겼다. "아리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고 시즈는 작게 아리에를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녀. 시즈가 떼어 내려 하자 안 간힘을 쓰며 매달렸다. 서서히 시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음! 시, 시즈?" 아리에는 놀란 토끼처럼 목을 움츠렸다. 부드러운 시즈의 손길에 목과 귓가에 닿을 때마다 너무나 간지러웠다. 도망 가려는 그녀를 이번에는 시즈가 반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아! 앙! 그, 그만‥. 하, 하지 마아‥." 간지러움에 움직이질 못하는 아리에에게 시즈는 말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자꾸 사람들 있는 곳에서 투정부를 거에요?" "하지만! 정말 난 같이 가면 안돼?" 그 말에 시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마음을 모두 들켜버린 아리에는 부끄러움 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시즈는 살포시 안아주며 말했다. "금방 올게요." "아, 알았어." 시즈는 시무룩해진 아리에의 하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시즈의 품에 안기면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 이었다. 연인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시즈의 주위에는 언제나 포근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에 취해버린 아리에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젠티아가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설마‥.' "걸어가실 생각이십니까?" "마법으로 간다고 했잖아. 마법사를 찾을 때까지는 발로 뛰는 게 좋아." 길을 떠나는 그들 뒤에서 사람들이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 중에서 아리에의 축복은 가히 압권이었다. "남작님한테 못된 것 배우지 말고 돌아와!" 여기저기 봄의 흔적이 피어나고 있는 산길. 상쾌한 풀잎의 향기를 맡으며 시즈가 물었다. "그 마법사가 누구죠? 상당히 믿고 계신 것 같은데‥." "아‥. 우리의 숙적이자 영원한 동료." "그렇다면 우리는 마나이츠 씨의 영지로 가야겠군요?" "그렇지. 역시 '마땅찮은 시즈'." "뭐가 그렇지, 입니까? 여기서 거기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도 반나절은 꼬박 걸리는 거리라고요!" "그러니까‥ 뛰자고." 하드레더를 입은 20대 후반의 청년과 팔과 다리에 보호대만 한 아직은 소년의 티가 남은 은발의 청년이 산길을 달 리고 있었다. 어쩌면 죽지 못해 달려나가는 듯한 모습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보았다면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둘 다 이를 악물고 뒤에서 뭐가 쫓아오는 거처럼 달리고 있었으니 뒤는 텅 비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 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주위 시선을 의식한 모습이었다. 전 마을까지는 천천히 조깅하는 정도였으나 하드레 더를 입고 양손을 가슴에 붙인 채 뛰는 모습에 사람들은 구경거리 마냥 시선을 집중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 람의 외모는 단정하기 짝이 없는 귀공자 풍이어서 더욱 신기한 광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 이제 좀 쉬었다가 가지요." 에릭사를 복용한 후 보를레스도 따르지 못한 체력이었다. 그런 그가 오기로 뒤를 쫓았지만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버렸는지 완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시즈를 내려보며 젠티아도 털썩 엉덩이를 깔았다. "역시. 에릭사를 마신 후에 무리한 일이 없는 모양이로군." "무슨 뜻입니까?" "네 근육 말이다. 날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그의 물음에 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러했으니까. 현재는 완전히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리여리한 체 격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근육이 없다고 해도 그를 이길 정도의 힘을 가 진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용병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보를레스도 전력을 다해야 가까스로 막 아낼 정도였으니까. "에릭사의 무한한 생명력이 있는 한 넌 근육이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틀렸다. 생물에게 있어 서 생명력의 표출, 그 중에서도 힘이라는 종류는 근육을 통해서 발출(發出)되는 거지. 한마디로 통로라는 뜻이야. 그 런데 에릭사라는 에너지의 효율이 높다보니까 자네는 통로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거야. 즉 근육이 피로를 느낄 만큼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거지. 에릭사로 인하여 효율이 높은 에너지를 얻은 것은 자네에게 아주 커다란 가능 성이야. 하지만 그대로 만족한다면 자네는 영원히 보를레스에게 이길 수 없어. 토플레에게 들으니 왼팔 때문에 마법 을 사용하는 것을 제약받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더 만들어야지." '왜 이 사람을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라고 부르는지 알겠군.' 엄청난 카리스마였다. 그가 앉아있는 평범한 바위가 더없이 높아 보였다. 저절로 끄덕여지는 내 것이 아닌 듯한 모 가지와 머리. '누가 글로디프리아가 값싼 남작을 키웠다고 말하던가. 이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곧 거성이고,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은 정예의 기사단이다.' "그것 때문에 마차를 마다하신 겁니까?" "뭐 그런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지. 알고 싶은 게 있었거든. 얼마 전 마나이츠를 만나 뵈러 왔을 때 한 가지 소문을 들었지." "무슨 소문입니까?" 젠티아는 미소했다. 데린이 은근히 말해줬지만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둘만 있으니 확연히 느껴졌다. - 시즈는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이제 분노의 바람이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거에요. '그렇군. 당신의 말이 옳았어. 아리에에게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군. 그랬다가는 당신에게 얻어터질 테지?' 상상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시즈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 마나이츠님이 건강이 안 좋아져 자신의 영지를 돌보지 못하자 산적들이 들끓기 시작한 모양이야. 그런데 이 놈들이 영악해서 마나이츠에게 소식을 전할지도 모르는 귀족이나 대부호는 건들지 않고 힘없는 서민이나 품팔이나 하는 상인들을 노린다더군." "악질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힘겹게 다리로 걸어가는 걸 택한 거지. 어차피 넬피엘을 만나면 하면 수 도까지 가는 건 금방이야. 그럼 또 뛰어볼까. 넌 다른 사람보다 수십 배는 체력 회복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꾀 부릴 생각 마." 다시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그들은 소문의 진상을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그들은 산적 들의 눈에도 특이하게 띄었던 것이다. 38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9) 팍팍! 파바박! 숲에서 날아온 화살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와 동료들. "어이! 두 놈. 여행자 같은데 그렇게 급하게 달릴 필요가 있나? 우리랑 조용히 대화나 하다가 가자구." "아이구~ 선생님. 저희는 카마 영지에 살고 있는데 잠시 여행을 나왔다가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편지를 받고 급 히 가는 길입니다." 그가 얼마 전 시즈에게 카리스마 가득한 기사로 망막에 남았던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 을 꿇고 머리를 수없이 조아리는 게 몇 번을 확인해도 산적에게 겁을 먹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니 어쩌겠는가. 내 특별히 차를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그냥 가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때 산적들이 둘을 놓아주었다면 젠티아도 이들과 대화할 가치가 있다고 보고 검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걸 음을 옮기려는 젠티아와 시즈의 앞을 거대한 참마도가 가로막았다. "어허, 그래도 통행세는 내고 가야지. 한 사람당 10 크로운 씩 20 크로운만 내도록 하게." "아니, 나으리이이이! 집에는 돈이 없습니다. 이 돈으로는 어머님의 약을 해드려야 합니다." 젠티아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잡고 뒤로 물러서며 애원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처음에 두 사람 의 용모가 귀공자풍이라 내심 경계했던 산적들은 이제 완전히 둘을 카마 영지에 사는 평버만 형제라고 믿어버렸다. "그렇게 돈이 없으면 살림가지라도 팔아서 마련하면 될 게 아닌가. 자네는 어머님이 편찮다고 하시는데 살림이 문 제인가? 가서 집이라도 팔게. 그 전에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를 지날 통행세를 내야할 게 아닌가. 어머니가 위독하시 다면 어서 통행세를 내고 가봐야지!" 나무 위에 앉아있던 궁수들이 그의 연설에 맞장구를 치며 웃어댔다. 그러나 그들은 젠티아의 겁먹은 눈동자가 어느 새 분노의 광망을 띄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 할 수 없군. 소문이 맞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래그래. 우리가 없기를 바랬겠지? 하지만 우리도 살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당신들은 아무래도 실베니아 사람들이 아닌 것 같군." "호오‥ 카로안에서 귀족을 죽여버렸거든. 하하하핫!" 시즈는 긴장했다. 카로안은 용병국가. 귀족이라면 실력있는 기사- 카로안은 기사도 용병에 가깝다-를 호위로 두고 있었을 것인데 주겼다니. 그러나 젠티아는 망설임이 없었다. "윽?" 이상한 낌새에 막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길게 늘어진 은빛의 실은 사내의 검을 교묘히 지나쳐 목을 스쳤다. 얼음처 럼 차갑다는 감각을 느꼈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거지? 눈앞이 어두워진다. 왜 이러지?' 시즈는 보고 있는 입장에서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빛의 실타래. "살인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정신을 차린 궁수들이 활을 쐈다. "뭐하는 거냐? 시즈! 오른쪽 숲을 맡아라." 보통 기사들은 갑옷을 입은 채로 움직이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은 거의 기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젠티아의 검은 철저한 살인의 검이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온 빛의 실이 붉게 물들 때마다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30명에 달하는 인원을 전멸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분. 일검도 막는 자가 없었다. "호오‥ 벌써 다 없앤 건가? 역시 움직임 자체는 나보다 훨씬 빨라." 간편한 체조거리도 안 되었는지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숲에서 젠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가 묻어있는 것은 오직 검신 뿐이었다. 그것도 한 번 털자 한 방울 남지 않았다. "아닙니다."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젠티아의 말대로 움직임이 빨라서라기보다는 사람이 없었다. 표적이 도망갈 것을 대비해서 배치해두었던 두 세명의 궁수가 고작이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득 의문이 생긴 시즈가 말했다. "방금 전 그 은색의 실은 뭐지요?" "기(氣). 동방의 검법을 익힌 너라면 익숙한 단어일지도 모르겠군." 검기란 말인가? 시즈는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 사내라면 시즈와 보를레스가 한꺼번에 덤빈다고 해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대륙 3 대 기사라는 말은 괜히 들러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의지마저 없어지지는 않 았다. 이미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보았으니까 누구에게서라도 남아있는 존재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야 했다. 그 런 그의 생각을 눈치챈 것일까? 젠티아가 말했다. "자아! 그럼 또 뛰어볼까? 시합하자고!" 도망쳐야 했다. 놈들이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병이 든 주인님이 발설을 한 모양이다. 아니, 발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인간은 분명히 알아챌 수 있을만큼 능구렁이를 속에 키우고 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에 호기심에 만난 '바람을 노래하는 이'까지 함께 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그래. 도망치는 거야. 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자신에게 암시를 건 소년은 방문을 열었다. 그의 극진한 간호로 상당히 몸 상태가 호전된 마나이츠가 미소 를 띄고 반겼다. "오! 넬피엘, 무슨 일이냐? 얼굴에 근심이 서렸구나. 할 말이라도 있느냐?" "예. 죄송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만 일이 생겨서 집사 일을 그만 둬야 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마나이츠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과격한 반응에 넬피엘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마나이츠는 더욱 격분했다. '저토록 귀여운 녀석이 나가려고 하다니. 이 때까지 그런 기색조차 없었는데. 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무슨 일이냐? 누가 널 괴롭힌 게냐? 집사라는 이유로? 누구냐? 당장 끌어내서 모가지를 베어 버릴 테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보거라." 서슬 같은 마나이츠의 기세에 넬피엘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희대의 음유술사 넬피엘 세로스. 그는 어쩌면 노인네의 투정에 집사 생활에서 탈피를 하지 못하는 지도 몰랐다. 마나이츠가 넬피엘의 이상한 기색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폭풍같은 등장이 있었으니‥. 우당당당탕! "드, 드로안 남작님! 무슨 일로‥ 으악! 그렇게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워, 난 바쁘다고!" 젠티아는 하인들의 만류도 무시한 채 문을 왈칵 열어재꼈다. 그리고 멈칫, 굳어버렸다. 묵묵히 뒤를 따라온 시즈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방으로 들이밀려는 순간,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악!" 돼지의 목을 딸 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것도 매우 늙은 돼지였다. 잠시 후‥. "남작이나 된 녀석이 예의도 모르냐?" "닳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솔직히 그 나이면 봐줄 눈도 없어서 서러울 텐데 내가 눈 희생한 걸 고맙게 여기진 않을 지 언정‥. 그나마 시즈의 눈이 오염되는 걸 막아서 다행이었어." "흥! 고마워할 것도 많군. 너 혹시 시즈군에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라는 소리 자주 듣지 않나?" '윽! 늙은 너구리. 쪽집개로군.' 찰나적으로 흠칫한 젠티아였지만 겉으로는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마나이츠, 사람들은 나에게 배울 게 많은 영웅이라고 칭송하고들 하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한다고 그러십니까?" "엣취!" 봄날에 일교차에 감기가 걸렸던가. 시즈는 재채기를 한 후 젠티아의 날카로운 눈빛 공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네'라고 얘기할 뻔했던 것이다. 마나이츠는 의심스럽게 표정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반란에 대한 건은 지난번에 얘기한 듯 싶은데 말야."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로바메트가 직접 나섰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 네 놈과 네 장인이 골머리를 썩을 걸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하더 군." 스르르르릉‥. "농담이야. 검 집어넣으라고. 어쨌든 어떤 상황이 되든 간에 난 어느 한 편에도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지원밖 에는 해줄 수가 없어." "알고 있습니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힘겨운 일 시킬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시죠." "그럼 대체 뭐야?"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어조에 화가 났는지 이불을 끌어당기던 마나이츠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 던 젠티아의 손에 눌려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혀 버리는 마나이츠. 그의 귀에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신의 귀여운 집사를 좀 빌려주셔야 겠습니다." "뭐, 뭐라고!?" 소리를 치려고 했다. 호통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목에 닿는 금속이 명을 재촉하지 말라고 차갑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마나이츠가 새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거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아무래도 녀석이 순순히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안 그러냐? 넬피엘. 널 귀여워 해주는 주인님의 목숨이 아 깝다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야. 곧 가실 주인님인데 적어도 편히 보내드려야지. 나 같은 불한당 손에 가시게 해야 되겠나?" 마나이츠는 그제서야 넬피엘이 평상시와는 다른 기색으로 안절부절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분노로 일었지만 소 용없었다. 입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젠티아는 대륙 최고의 검사였다. 주문이라고 생각되는 단어가 귀에 들리는 순간 자신의 목은 몸통과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검을 든 이상 젠티아는 농담이나 해대는 능글맞은 귀족이 아니었다. 누 구보다도 냉정하게 목표한 바를 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고. 마나이츠는 내심 그에게 마구 욕을 해댔지만 젠티아는 들리지도 않는데 신경쓸 필요가 없었으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오‥. 이 사람이 죽어도 되는 모양이군. 난 넬피엘 자네가 내 성격에 대해서 약간은 파악을 하고 있을 줄 알았 는데‥." 한 치 한 치. 젠티아의 검은 예리함을 자랑하기라도 하는지 마나이츠의 주름진 목을 파고 들었다. 그에 따라 조금씩 베어 나오기 시작한 핏줄기가 어느 새 마나이츠의 옷 앞섬을 완전히 적셨다. "성주가 되어서 조금은 머리가 좋아졌나 했더니, 여전히 멍청하군." 시즈는 흠칫했다. 방 전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 굉장히 앳되다고 생각되는 음성은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 밑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뱀처럼 시즈의 몸을 타고 오르는 불꽃. 하지만 저택 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젠티아의 언질을 받았던 시즈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유술사 제일의 힘을 가졌다는 존재와의 작은 격돌에 기쁨으로 흥분했을 정도였다. 발에서 뜨거움이 느껴졌을 때 그는 양손을 펼쳤다. 양팔에서 모아진 바람의 의지가 눈깜짝할 사이에 시즈를 중심으 로 소용돌이쳤고 불꽃은 천조각이 가위에 짤리듯 찢어졌다. "크윽!" 허를 찔린 신음소리를 듣자 젠티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거렸다. "큭큭! 이봐, 넬피엘. 난 성주가 되기 전부터 머리가 많.이. 좋았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바람을 노래하는 이'와 '대 지의 고동을 밞는 이'를 동시에 상대 못하지. 아니,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전에 인질이 죽겠지만." "빌어먹을!" 육두문자와 함께 방 한 구석에 화르륵하고 불꽃이 피어나더니 천천히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적색의 머리가 카락과 같은 일색(一色)의 정장.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입고 있다면 굉장히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었겠지만 소년에게 있어서는 그저 평범한 옷가지 중에 하나라고 느껴졌다. 이유는 소년 자체로서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넬피엘이 나타나자 젠티아의 미소는 더욱 살아났다. "여전히 예쁘군요, 넬피엘 양!" "원하는 게 뭐지?" 누구라도 부러워할 그의 미모는 그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콤플렉스였다. 만약 인질만 아니었다면 젠티아에게 헬 파 이어를 시전했을 표정으로 넬피엘은 물었다. 사실 시즈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방금 전 찢어발겼던 불꽃도 흩어지면서 그에게 그을림을 남겼다. 게다가 모습을 드 러낸 이후 분노로 일그러진 살기가 방 안에 가득 차자 마치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 가장 강한 음유술사의 분노 하고 있는데도 젠티아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어쩌면 가장 굳건한 대지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지.' "너무하잖아. 넬피엘, 넌 우리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착각하지마." "아릴한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움찔! 젠티아는 시즈조차 두려움에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잘도 웃어댔다. 그것은 상대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 는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하하하핫! 마나이츠,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마나이츠는 기절할 것 같이 놀랐다. 앞섬을 적시고 있던 피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고급의 환영마법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라면 눈앞에 보이는 젠티아의 마법실력은 가히 절세적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놀 라기는 넬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눈썹을 잠시 찌푸리는 정도로 끝났을 뿐이다. 젠티아의 계략에 빠져서 당황 한 나머지 속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시즈는 호탕하게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킨 젠티아에게 존경의 미소룰 보냈다. 사실 젠티아의 마법실력은 그리 뛰어 난 편이 아니었다. 좋게 봐줘야 고작 3 써클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검에서 풍기는 살기는 사람들을 혼란으로 빠뜨려 자신들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마법으로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 어찌 놀랍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왜 이런 연극을 했는지 알려드리죠. 마나이츠님도 들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마나이츠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젠티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놈아, 듣고 싶지 않다! 네 녀석은 정말로 내 모가지를 베어버릴려고 했지? 그 살기는 진심이었어!" "그러길 바라십니까?" 젠티아는 혀를 낼름 핥으며 손을 검자루로 뻗었다. 금새 조용해지는 노마법사. 씨익 웃어준 능구렁이는 넬피엘을 찾 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수도로 가야겠다는 건가? 로바메트 공작가 변심(變心)하게 된 배후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로바메트 공작의 능력은 가히 놀랍습니다. 아무리 궁정 기사단과 근위 기사단의 일부까지 동원했다지 만 존기어마저 한 번에 패배시킨 반란군에 맞설 정도니까요." '그러는 반란군에게 맞서려는 네놈은?'이라고 말하려던 마나이츠는 고개를 저었다. 저 기고만장한 놈을 더 이상 추 켜올렸다가는 국왕이 되겠다고 날뛸지 몰랐다. "하지만 공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있네. 굳이 넬피엘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아, 마나이츠님은 모르시겠지만 넬피엘은 이미 8년 전에 저와 함께 여행을 다닌 일이 있습니다. 그 때도 그의 능력은 가히 궁극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궁극?" "아마도 마나이츠님의 마법에 뒤지진 않을 겁니다." "뭐라고?!" 마나이츠는 놀라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아직 30도 되지 않은 넬피엘이다. 그런데 8 클래스에 도달한 그에게 뒤지지 않다니. 그런 재능을 지닌 자는 마법이 세일피어론아드에 전해진 이후 인간의 역사에는 없다. 넬피엘로서는 곤혹스 러웠다. 자신의 능력이 새간에 알려지면 귀찮은 일들이 많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더욱 젠티아의 계략에서 벗 어나기 힘들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나마 분쟁의 소굴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더만‥. 하지만‥.' 아릴, 그 꼬마가 보고 싶기도 했다. 젠티아는 마나이츠를 설득하기보다 놀리는데 더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마나이츠를 툭툭치 더니 시즈를 가르키며 말했다. "참고로 저 친구도 넬피엘과 동급입니다." "‥‥." 이제는 대답도 없었다. 입이 벌어진 채 움직일 줄 모르는 그를 조용히 뉘여준 젠티아는 넬피엘에게 말했다. "자아‥ 어떻게 하겠는가? '불꽃의 춤을 추는 이'여‥." 넬피엘은 생각했다. 젠티아를 보았고 마나이츠를 보았고 다시 시즈를 보았을 때 그의 눈은 이채를 띄었다. 예전에 확인하고 다시 보는 바람의 음유술사. 물끄러미 시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넬피엘은 입을 열었다. "젠티아, 기억하나? 내가 했던 질문을? 난 당신의 대답을 아직 기억하고 있지."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일들이 빗방울처럼 그의 머리 속에 쏟아졌다. "물론이야." "확인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거야." 환한 미소. 시즈로서는 처음 보는 젠티아의 온화한 미소였다. 작은 소년의 몸을 아주 절친한 친구처럼 꼭 안은 그는 중얼거렸다. "살아서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신에게 감사한다. 그런데‥." "???" "여전히 말랐군, 넬피엘 양! 여전히 '꽃'이야." 카마 영지의 사람들은 영주의 성 한 쪽 귀퉁이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는 걸 보며 마나이츠가 새로운 연금술이라고 실험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젠티아, 불꽃도 음유술사의 자격이 있는 걸까?" "글쎄‥." "그리고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백치의 자폐증을 가진 바보일까? 아니면 4000년의 망령일까?" "글쎄‥."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괴물일까.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 주제에 나의 기억은 나 자신을 음유술사라고 말하고 있 는 걸까." "무슨 소리야? 넌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난 부른 적 없어." "하하하핫! 바보로군. 어쩌면 너 자신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설명해봐." 달려드는데 목숨을 건듯한 소년을 겨우 떼어낸 청년은 킥킥댔지만 아무래도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게다가 귀.찮.았. 다. 결국 그는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에게 책임을 넘기기로 했다. "음‥.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힘들어." "그, 그럼 누가‥." "아! 어쩌면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면 알려줄 지도 몰라." "‥ '바람을 노래하는 이'?" "큭큭!" 넬피엘은 의아한 눈초리로 징그럽다는 듯 젠티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젠티아는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오히려 검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시즈를 향해 은근한 설렘을 내포하고 있는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말했다. "순진한 녀석‥." 39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2)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심각해." 수도 펴온는 황폐했다. 반란군이 쳐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고민하던 시즈는 금새 알 수 있었 다. 쾅! "아, 안 되요! 그건 저희가 한 달 동안 연명할‥." 여자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그녀가 매달려있던 다리의 주인에게 거칠게 복부를 걷어차였기 때문이다. "시끄러워. 난 난민(難民)이야. 내란을 피해서 겨우겨우 살아 수도에 왔는데 먹을 게 없다니 말이나 돼? 그러니까 좀 나눠달라고!" "제, 제발‥. 제가 굶는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에게만 이라도 인정을 베풀어주세요. 선생님! 제발‥." 언제부터 강도가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었을까. 여인은 바닥을 기어서 사내의 다리에 다시 매달려 애원했 다. 집 안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사내의 악귀같은 눈빛도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잠시 뿐. 자신의 배고픔을 무시하고 빵을 양보할 정도로 인정이 움직인 정도는 크지 않았다. 퍽! "아악!" 아예 이번에는 다시 매달리게 하지 못할 심산인지 완전히 여자를 마구 걷어차고 밟아댔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여인은 남자의 다리에서 손을 놓지 않고 매달렸다. 예전의 시즈라면 지금 같은 광경에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 만 용병이 되어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모습이 자연스러운 전란(戰亂)의 부분이라는 걸 깨닫은 지금은 이 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죽을 때까지 내버려둘 수는 없었음으로 젠티아는 남자의 손을 잡고 말렸다. "그만 두십시오. 사람을 죽일 생각입니까?" "이미 동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 "그렇다고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돈을 줄테니 그 빵은 이 여자에게‥." 젠티아가 내민 손을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자는 가만히 그를 탐색하듯이 바라보더니 비웃었다. "호오‥ 당신은 수도에 지금 온 거로군. 그것도 전란이 없는 곳에서 온 게 틀림없어. 안 그렇다면 지금 돈이 아무 런 가치가 없다는 걸 알 리가 있나. 하하핫.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때 돌아가도록 하시오. 이곳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니까." 그는 껄걸 웃더니 빵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여인과 그녀의 아이들이 한 달을 연명할 식량이라고 말한 그 양은 빵 대 여섯 개 정도였다. 배부르게 먹는다 치면 고작 사오일도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한꺼번에 다 먹어 치웠다.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에 토할 것처럼 구역질을 몇 번했으나 입을 막고 꿋꿋이 참았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 리고 바라보는 젠티아들을 향해 말했다. "흐흐흐‥ 몸에 지니고 있으면 습격 당하기 일쑤라서 말이야." 빵이 사내의 입 속으로 모두 자취를 감춰버리자 여인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울부짖으며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이 나쁜!" 아무리 그녀가 이를 갈며 공격한다고 해도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가차없이 사내가 주먹으로 때리자 곧 기절해버렸다. "그만 하시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시즈가 외쳤다. 그렇지만 그 의 외모는 나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사내는 주먹을 그치지 않았다. "그만 하랬잖아!" 슉! 분노가 깃든 바람의 칼날이 시즈의 몸 주위로 넘실거렸다. "으아아악!" 바람의 칼날에 땅마저 깊게 패였고 건물 지붕이 들썩거렸다. 그제야 사내는 공포에 질렸고 도망쳐 버렸다. "시즈 그만해! 사람을 살리려고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저 사람도 평범한 서민 중 한 사람이었을 거다." "전쟁이 죄인이지" 시즈를 말리는 젠티아를 스치며 넬피엘이 중얼거렸다. 전쟁이 멎질 않는 한, 혼자의 힘으로는 혼란을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음유술사라고 하더라도. 시즈는 허탈함에 주저앉았다. 그의 주위는 땅부터 건물까지 완전히 난도질되어 있었다. 괜찮은 것은 젠티아와 넬피엘이 서있던 자리 뿐. "왕궁에서는 뭘 하기에 수도를 이토록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겁니까?" 시즈의 물음에 젠티아는 고소(苦笑)했다. 전쟁은 언제나 서민에게 잔인하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킬유 시나 로바메트나, 젠티아는 빨리 내란(內亂)을 끝내려 했다. 킬유시가 어려운 봄에 전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두 사 람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로바메트는 일어섰다. 킬유시와 그 휘하의 기사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로바메트의 지혜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반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 야 한다. 그 동안 실베니아를 지탱했던 힘줄은 모두 끊겨 결국 나라는 짚으로 이루어진 허수아비가 되어 버릴 것이다. "치안을 유지할 군사력이 없겠지.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최소한의 왕궁을 수비할 인원을 제외하고는 근위기사단까 지 출정했을 정도니까.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과 그 안에서 새로 생겨나는 난민. 이들을 왕궁은 제어할 수 없을 거 다." "바보 같은 왕실이군." 펴온은 전쟁의 휩싸인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골목에서는 비명이 가득했고 폭력, 살인, 강간까지도 성행했다. 여자들은 조용히 지하실에서 몸을 숨겼고 밖을 나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근육이 울둥불퉁하거나 무기를 휴대한 남자들이 다였다. "우선 로바메트 공작가를 들려야 해." "공작가를요? 공작 본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근위 기사단과 함께 있을 공작을 어떻게 만나냐? 아무리 음유술사라지만 그들은 국가 제일의 기사들이야. 적어도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지‥ 잠깐!" 젠티아의 머리가 풍차처럼 휘리릭 돌았다. 그리고 애써 시선을 피하려는 넬피엘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래곤을 능가하는 놈이 있었지." "난 힘을 사용하기 싫어. 더욱이 불꽃의 춤은‥." "불꽃의 춤을 추지 않아도 넌 충분히 강하잖아. 드래곤들조차 네 이름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어." 결국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정치판에 휩쓸리며 살아온 젠티아의 언변을 그로써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다. "좋았어. 그에게 가자!" 호기스럽게 외치는 건 젠티아 뿐이었다. 목적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는 시즈는 말은 안했지만 굳어있었고 넬피 엘은 귀찮은 사건에 휘말린 게 짜증스러웠다. 중얼중얼하고 주문을 외운 넬피엘은 신경질적으로 발동어(發動語)를 외쳤다. "염원하는 그 곳으로! 텔레포트!" ‥ "윽! 매스꺼워." "어쩔 수 없어. 좌표도 정해지지 않을 곳을 머리 속으로 계산해서 이동하느라 마나가 약간 파란(波瀾)을 일으켜서 그래." 마법사라고 지칭되는 사람이 넬피엘의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 좌표로 공간을 뛰어넘는다 면 공간의 틈에 갖혀버릴 수 있기 때문에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들도 고개를 휘휘 젓는 짓이었다. 젠티아도 모르 지는 않았다. 그렇게 꼬투리를 잡지 않는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젠티아는 쑤셔오는 머 리 한쪽을 문지르며 말했다. "잠깐, 넬피엘. 도대체 좌표를 어디로 계산한 거야?" "젠티아 당신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얽혀 싸우는 자리로 왔을 뿐이야." 챙! 채챙!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쿨럭! 쿨럭!" 심상치 않은 배경음. 젠티아는 당당하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넬피엘을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렇다고 전쟁터 한 복판으로 오냐?!" "조심해요!" 어느 쪽의 군사도 아닌 그들은 반란군과 진압군의 협공을 받았다. 시즈가 잠시 동안 막고 있었지만 혼자서 모두를 가로막을 수는 없는 노릇, 몇 명이 티격대고 있는 청년과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 "시끄럿! 대화를 할 수가 없잖아!" 스르릉! 이를 갈던 젠티아가 짜증스럽게 검을 휘두르자 검풍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덕분에 그들을 공격하려 던 자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어서 텔레포트하라고!" 결과를 얘기하자면 그 후로 3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그들은 안전하게 전쟁을 관전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했다. 그 대가로 처음에는 속이 울렁이는 정도였던 젠티아는 수풀 속에서 토액질을 해댔다. "우웨에에에엑! 넬피엘,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생각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겠다. 그게 아무리 헛된 망상일지라도!" 시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게 수 천년을 내려온 동료들이란 말인가? 역사의 고리와 만난다고 해도 저토록 티격 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검과 마법이 날아다니겠지만. "그나저나 이번에도 '역사의 고리'가 관련되었을까요?" "당연하지!" "아마도‥." 두 사람의 자신있는 확신은 지금까지 수많이 시달린 경험에서 나오는 추리였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던 말은 세일피어론아드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자네들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니까." 푸른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한 눈에도 자유로움에 취해있는 듯한 청년이었다. 나무에서 다리를 흔들거리던 그는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노르벨‥. 오랜만이군. 많이 컸잖아? 어린애였는데‥." "그 쪽도 마찬가지. 아저씨 다 됐군, '대지의 고동을 밟는 이'여‥. 새로운 인원이 첨가된 것 같은데?" "‥드디어 찾았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 그 때 이가 갈리는 듯 소름끼치는 음성이 진동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음성에 담겨진 의미는 노르벨을 더욱 긴장시 켰다. "파멸의 음유술사?" 긍정 대신 넬피엘의 유혹적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안아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지만 노르벨에게 는 지옥의 망자(亡者)가 울부짖는 것보다 더욱 공포스러웠다. "이거 동창회에 온 기분이군." 수풀 속에서 사자 같은 기세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두 사람, 노리스와 바스티너에게 반가운 듯 젠티아가 손을 흔들 었다. 방금 전의 이를 가는 목소리는 노리스였다. 그러나 살기와 복수심에 차있는 그의 눈동자도 넬피엘은 전혀 위 협이라고도 느껴지지 않는지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을 느끼려고 눈을 감고 있던 시즈가 입을 열었 다. "아직도 세 명 정도가 남았어요." "라고 하는 군. 나머지도 얼굴을 보여주겠어?" "얼마든지. 츠바틴의 말이 옳았군."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이유를 대자면 마법사는 기사보다 스스로 연출하기가 쉽다고 할까. "로진스, 축하하네. '신비의 고리' 수장이 되었다면서?" "역사의 고리가 해체할 때가 다가왔나보군. 내가 음유술사한테 취임 축하를 받다니." "그리고 꼬마 친구는 신참인가?" 젠티아의 시선이 로진스 옆으로 푸른 머리의 소년에게 옮겨갔다. 시험을 할 요양으로 살짝 살기를 가미한 눈빛을 가볍게 소년은 머리카락을 넘기는 동작으로 보내버렸다. "로길드 페노스톨멘이라고 합니다. '값싼 남작'을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이쪽은 제 호위인 바크호라고 하지요." "그렇군. 크레오드 노인네의 핏줄인가?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나보군. 귀찮은 호위까지 거느리고 다니는 걸 보 면‥." 로길드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관심은 시즈 세이서스였다. 일생의 목표로 삼은 이. 그는 대륙 최고의 기사 와 마법사들에게 둘러 싸여서도 담담하게 서있다. "이번에는 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고민을 소홀히 하신 것 같습니다, 시즈님. 세 번이나 텔레포트를 하다니. 그 정도의 마나가 몇 번이나 요동을 치면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아챌 겁니다. 게다가‥." "넬피엘 군의 마법은 너무나 강력해서 알아채기가 쉬워." 로진스의 부연설명을 끝으로 로길드는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젠티아가 증오스러운 눈으로 넬피엘을 후벼팠음은 말 할 것도 없다. 한 편, 바스티너의 갑옷을 입은 에레나는 폭풍같이 몰아치는 넬피엘의 기세에 몸을 떨어가면서도 시즈를 힐끔거리 고 있었다. 그런 중에‥. "오늘도 바스티너는 여전히 말이 없군. 얘기를 듣자하니 주인이 바뀌었다던데, 솔직히 나와는 만난 적이 없잖아요? 소문에는 미인이라는‥." 하고 눈을 반짝이며 젠티아가 말을 걸었으니 흠칫하고 놀랄 수밖에. 그러나 그런 반응에 다른 사람들이 되려 경악 했다. 그들의 머릿 속에는 같은 생각이 소용돌이가 되어 몰아쳤다. '저 철갑괴물이 놀라다니‥. 설마 정말로 미인이란 말인가?' 잠시 정신 공황에 빠진 음유술사들와 역사의 고리들. 그들은 제각기 바스티너의 반응을 추리했다. 그런 공황이 깬 것은 넬피엘의 맑으면서도 무감각한 목소리였다. "지루해. 얼굴보고 끝낼 거면 그만 가봐도 되나?" 그 한 마디에 침묵은 공황으로써의 침묵이 아니라 긴장이 원인인 침묵으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로진스의 영창에서 재빠르게 튀어나온 나뭇잎들의 공격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젠티아와 노르벨의 얼굴에서는 장난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투지에 살기가 끈끈하게 들러붙어 검과 함께 몰아칠 뿐. 로진스의 나뭇잎 마법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기류를 따라서 흐르는 나뭇잎을 피하기도 곤란했 을뿐더러 그냥 나뭇잎도 아니었다. 닿으면 폭발하는 폭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걸 젠티아 같은 경우는 가볍게 피하다가 머리카락이 잔뜩 그을리고서야 깨달았다. "조, 조심해!" 시즈와 넬피엘에게 소리친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드로안 가문의 보검인 성음검(聖音劍)이 바람을 가르면 서 긴 노래를 불렀고 그와 함께 은빛의 실을 뽑아냈다. 그물처럼 잔상의 광선을 남긴 젠티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 다. 콰아아앙!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들이 힘차게 요동쳤다. 허공의 바다에 힘찬 파도가 일 정도로. 폭발로 일어난 바람에 넬피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픈 마법이로군." 그러면서도 그는 가장 간편하게 나뭇잎을 처리했다. 손을 가볍게 뻗자 앞에서 불의 벽이 나타났는데 사람의 키만한 불벽은 거대한 해일처럼 팔랑이는 물고기를 삼켜버렸다. '꽤 고심해서 만들어낸 마법이었는데‥.' 파이어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화염계, 또 하나는 폭렬계이다. 화염계는 그저 태울 뿐이고, 폭렬계는 폭발하는데. 그의 나뭇잎 폭발 마법은 폭렬계 라고 할 수 있었다. 폭렬계의 파이어볼은 상당히 고난이도이기 때문에 저(低)단계의 마법사는 공같은 매개체를 사용하여 파이어볼을 만들어냈다. 로진스는 이와 같은 매개체를 이용한 파 이어볼을 나뭇잎에 대입한 것이다. 그 말은 나뭇잎 하나 하나가 파이어볼이라는 뜻이었음으로 굉장한 마력이 소모 되었다. 그러니까 넬피엘의 간편한 방어에 쓴웃음이 나는 것이다. "크윽!" 그러나 젠티아도 고전을 치뤘 듯이 시즈도 피하기에 정신이 없는 모습에서 조금 위안을 받았다. 왠만한 바람은 기 류를 사이를 타고 흐르는 나뭇잎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기가 갈라짐에 따라서 파고 들어왔기 때문에 시즈 로서는 무리를 하여 바람의 칼날로 폭발 범위 밖에서 베는 게 전부였다. 로길드는 넋을 잃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음유술사들의 마법과 검술은 이야기 속에서 전해지던 모습 그대로였다. 전 설이 재현되었다고나 할까. 어린 그로서는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날리는 불씨 속에서 얼음 같은 표정으로 검은 눈을 빛내는 '불꽃의 춤을 추는 이', 길게 허공에 늘어뜨린 빛의 실자 락 속에서 은근하게 미소를 내보이는 '대지의 고동을 밟는 이'. 그리고‥. 바람의 비단을 휘감은 채 은색의 머리카락 을 휘날리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 "뭐 하는 거야? 어서 마법을 써!" 수 십 개의 나뭇잎을 날려보낸 로진스이 기진맥진하여 소리쳤다. 그제서야 로길드는 날아오는 거대한 불덩이의 열 기를 느꼈다. "마르지 않는 생명의 창조자이자 보호자여!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 나를 지켜다오!" 파~웅! 물기가 번들거리는 방어막과 넬피엘이 날린 불덩이가 충돌했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은 채 물기와 맞서는 걸 보니 화염계의 파이어볼이었다. 하지만 그 열기가 타(他) 마법사가 펼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피해!" 로진스가 급히 그를 잡고 옆으로 뛰었다. 화르르르르르륵! 불덩이가 땅에 부딪히며 바닥을 쓸었다. 겨우 피한 로진스와 로길드는 뒤로 돌아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경 2m의 모래가 그을려 흰 김을 뿜어냈다. 만약 그 안에 있었다면 숯덩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흐압!" 넬피엘의 마법은 너무 파괴적이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순식간에 열세가 되어버릴 게 뻔했기 때문에 노리스는 전력을 다해서 검을 내리쳤다. 슈앙! 하고 공간 자체를 자를 듯한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약간 얼굴이 찌푸려진 넬피엘을 보고 노리스는 자신만만하 게 말했다. "어떤가? 그 동안 실력이 약간 늘었지?" 약간이 아니었다. 젠티아마저도 그 기세에 뒤를 돌아볼 정도의 검이었다. 다시 공격할는 그의 검을 젠티아가 막아섰 다. "넬피엘, 이 자는 내가 상대하지." "비켜!" 카앙! 옆구리를 단숨에 갈라 버리려는 검을 막자 손이 저렸다. 정말 대단해졌군. 솔직히 예전에 노리스와 검을 나눴 을 무렵의 젠티아는 애송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검으로 말하자면 누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는 데. 그의 입술 끝 부분이 말려 올라갔다. "음!" 가가가가각! 젠티아가 띄워 보낸 빛의 실에 검이 스칠 때마다 푸른 불꽃이 튀었다. 노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대륙 최고의 검사라고 불리는 자의 검이란 말인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 즐기는 듯 허공에서 춤추는 실은 분명히 '검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즈에게 동방 검법 의 요체를 전수한 노리스로서도 처음 보는 식의 검기였다. 어떻게 검기로 실을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허공에 날리 는 검기의 실이라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와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상대할 실력은 있었다. '과연‥.' 점점 노리스의 검이 빨라졌다. 게다가 젠티아의 성음검과 부딪힐 때마다 흰 연기가 팍 하고 터져 나왔다. 호흡을 곤 란하게 만들 정도로 연기는 아니었지만 젠티아는 알고 있었다. 그 연기야말로 동방의 무술이나 검법을 연마한 자들 이 기를 공격에 내포시켰을 때 드러나는 '경'의 증거였다. 검을 맞았다가는 당장에 두 쪽이 되리라. 그의 눈이 점점 가늘게 빛났다. "‥‥." 시즈는 의아했다.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했던 바스티너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검을 뽑지 않는 것이다. 공격할 상대가 하지를 않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그리고 서서히 검은 갑옷의 기세가 일어났다. 보를레스도 이길 수 없던 상 대였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여 바람의 의지도 동원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즈의 검집에서 강렬한 번개가 튀어나왔다. 바스티너는 막아냈지만 그 안에 내포된 힘에 놀랐다. 순간적인 파괴력 으로 치자면 노리스의 에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버티는 것은 바보짓이다. 손목을 비틀며 뒤로 물러서자 허리 한 치 앞으로 예도가 지나갔다. 이제는 시즈가 당황할 차례였다. 이제까지 이토록 쉽게 발도술을 방 어한 자가 없었다. 검을 높이 치켜드는 자세가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하지만 밀릴 수는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절망의 갑옷이라고 불리는 '바스티너'라 해도. "크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앙! 빠득! 이빨이 금이 가고 피가 줄줄 흘렀다. '무리에요.' 에레나-바스티너는 공격을 하면서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시즈의 왼팔이 불구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용하 면 할수록 진짜로 불구가 될 날이 빨리 다가온다는 것도. 사실 방금 전 내려치기는 자신으로써는 그렇게 강한 공격 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팔을 다 써서 겨우 막아내니 걱정이 온천수 솟듯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게 사랑하는 이와 싸워야 하는 괴로움이구나.' 그렇다고 역사의 고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전대(前隊)가 그랬듯이 당장 죽임을 당하고 바스티너를 뺏길 게 불 보 듯 뻔했다. 한숨을 내뿜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기가 오른 입김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무리를 했기 때문일까. 바스티너의 연이은 공격에도 시즈는 잘 버텨가고 있었다. "안돼죠. 당신은 날 상대해야 되요." 넬피엘이 위태위태한 시즈를 돕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그림자가 갑자기 기괴한 모습으로 일그러지며 낄낄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령이라면서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넬피엘에게서는 코웃음밖에 볼 수 없었다. "후‥. 그림자. 플로먼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이글거리던 그림자의 웃음이 가볍게 날아갔다. 한순간에 벌어진 틈. 넬피엘이 놓칠 리가 없었다. 두 손을 모아 인을 만들어 뻗으며 외쳤다. "炎暴!" 그의 그림자 공략법은 매우 간단했다.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것이었으니까. 넬피엘의 전방위 지면에서 작은 화산이 폭발하듯 불꽃이 터져 나왔다. "으악!" '아픔의 비명이 아니다.' 화염이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고 확신한 넬피엘은 경악성이 들린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노르벨에 비하여 뒤지지 않는 빠르기. 커다랗게 눈이 부푼 노르벨이 급히 몸을 젖혔지만 생각보다 넬피엘의 공격범위는 길었다. '어, 어떻게?' "크아아아아아악!" 양팔을 겹쳐서 막았지만 우득거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악다문 이로 내장에서 솟구쳐온 핏물이 튀어나왔다. 아픔을 참아보려고 애를 쓰는 노르벨의 시야가 점점 작아졌다. '이번엔 제대로 맞았군.' 타격을 방어하던 힘이 묵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축 처져버린 노르벨. 그렇다고 넬피엘은 봐주는 성격이 아니었 다. 원조를 위해 달려오는 바크호를 힐끗 바라본 그는 다시 한번 노르벨을 후려쳤다.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 아온 노르벨을 바크호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서며 잡아냈다. "현자의 검‥." 노르벨은 궁금해하던 리치의 수수께끼는 하나의 지팡이였다. 로진스가 '현자의 검'이라고 지칭하며 두려워하는 넬피 엘의 무기는 검이라기보다는 육각형의 얇은 몸을 자랑하는 봉에 가까웠던 것이다. 뭘로 만들었는지 봉신은 투명했 고 깨알같은 글씨가 가득히 적혀 마법무기라는 걸 어린애도 알 수 있었다. "넬피엘 세로스는 공간의 결계 속에 무기를 감추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쓰지. 그는 마법뿐이 아니라 육탄전에도 강해." 한 마디로 노르벨에게 달려들면서 공간 결계 속에서 무기를 꺼냈다는 뜻이 된다. 바크호로서는 식은땀을 흘리는 방 법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말은 들었지만 진정한 괴물이군.' 로길드도 침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간 결계를 만들려면 적어도 드래곤 이상의 마력을 가진 존재여야 했기 때문 이다. '정말 저런 존재를 상대로 할아버지는 승리를 거뒀단 말인가?' 사실 바크호와 노르벨, 로진스와 로길드가 상대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공격도 하기 전에 노르벨이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막막했다. 오히려 걸레처럼 변한 그가 죽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잖은가." 의기를 다잡으며 로진스가 손을 겹쳐 하늘로 뻗었다. 몸에서 강렬한 마나가 마구 피어올랐다. 적어도 7써클 이상의 마나. 쉴 새없이 입을 웅얼대는 모습이 엄숙했다. 그 모습에서 넬피엘은 추리했다. '마법이 완성되면 골치 아프다.' 자신은 몰라도 젠티아나 시즈는 궁극에 가까운 마법을 방어할 방법이 없다시피 했다. 그로써는 다급해졌다. "불꽃이여‥. 화염이여‥. 나의 의지여‥." 손날로 허공을 가르자 이글거리는 화염의 칼날이 생성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현자의 검을 내리치자 똑같은 화염의 칼날이지만 훨씬 거대한 칼날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곤란해‥.' 바크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화염도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겠지만 열기로 온몸이 그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기 전에 두 번째 화염도가 덮치면 검풍으로 갈라낸다고 해도 두 열기가 겹쳐 자신은 상당한 화상을 타 격을 감수하게 된다. 정말이지 신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입맞추고 싶은 입술과 사랑하고 싶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미소년은 마법이 강할 뿐 아니라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크호, 이걸 받아!" 상대의 생각과 바크호의 곤란함을 금방 눈치챈 로길드가 작은 단검을 던졌다. 화려한 금장식과 보석으로 수놓아진, 첫 눈에도 값이 무척 나갈 듯한 단검이었다. 소년은 던지고 다급하게 외쳤다. "물의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검이야!" 감사하다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롱소르도 화염을 갈라내자마자 두 번째 화염이 덮쳐왔다. 우선은 검풍을 일으켰고 바로 뒤를 이어 물의 단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이익! 갈라진 화염의 칼날과 물줄기가 부딪히며 수증기가 자욱하게 일 어났다. 그 때 로진스가 외쳤다. "모두 물러섯! 내 주위로!" 사전에 계획했던지 노리스들은 재빨랐다. 다만 바스티너가 머뭇거렸는데 노리스가 걷어차자 금새 시즈에게서 떨어 졌다. 그들의 계획을 안 것은 하늘에서 우르르릉하는 소리가 들린 후였다. "넬피엘! 텔레포트를!" "모이기나 해!" 로진스는 다급한 음유술사들을 보면서 냉소했다. '츠바틴이 계획한 전술인데 쉽게 빠져나가게 만들 수는 없지.' "떨어져라. 천상의 검이여!"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이미 모아진 먹구름에서 거대한 낙뢰가 떨어졌다. 잘 지어진 저택하나는 통째로 삼켜버릴 거대한 벼락이었다. 글로 디프리아에서도 동남쪽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걸 목격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헉! 헉!" 라이트닝 같은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초대형 라이트닝이랄까. 사람을 죽이는 정도는 라이트닝도 충 분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낭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음유술사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에. 로진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가 가라앉고 노리스들이 경계를 하며 시선을 집중했다. 침묵의 바람처럼 폐허의 공간을 쓸어갔다. 안도의 한숨과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 지어졌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그들의 뒤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콰릉! 깡! 쨍그랑! "데린? 아리에? 둘 다 왜 그래?" "미, 미끌어졌어요." "저도." 글로디프리아에서는 식사 중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천둥소리에 놀랐다고 생각한 피브드닌이 밖을 바라보고 중얼 거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봄하늘에 왠 날벼락이지?" "저, 전 그만 먹겠어요." "저도 그만 일어설게요." 두 여인 모두 얼굴이 살짝 질려있었다.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왜들 저러지?"하고 레스난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토플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장(戰場)에 연인과 남편을 보낸 이들의 공통점이겠지." 그 말대로 두 여인은 한 방에 앉아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아리에도 걱정으로 잠이 안 오지?" 탐스럽게 등을 덥기 시작한 흑발이 아래위로 가볍게 찰랑거렸다. "둘이 수도로 간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어. 아마도 그 거대한 번개가 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 "네에‥." 아리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깊어가는 근심에 피부마저 거칠어진 그녀의 모습은 날개를 잃은 천사처럼 애처로 웠다. 그녀를 안아 위로하던 데린은 무언가 결심한 듯 싶었다. "아리에, 역시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에?" "우리가 그들을 찾으러 가야겠어." "예?" 아리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결심한 데린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두 사람을 찾으러 가야한다고." "하, 하지만 사람들은 허락하지 않을 거에요. 다들 반대할 거라고요. 저라면 몰라도 데린은 전혀 자신을 지킬 수 없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아리에. 호호홋. 방법이 있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해." 아리에는 데린이 젠티아의 아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음 날. 글로디프리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화장실에도 안계십니다!" "주방에도, 다락에도 안 계십니다." "다른 여자 분들도!" 남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침묵했다. 이게 과연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여자들만 시장으로 쇼핑을 즐기러 간 것일까? 하지만 시장에서는 그들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 미인들이 뭉쳐다닌다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데 없다는 것은‥. "설마?" 불길한 생각에 빠져버린 토클레우스. 그 때 한 시종이 뛰어왔다. "남작 부인의 방에서 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가로채듯 펼쳐든 토클레우스. 눈이 왔다갔다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그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있소?" 너무 늦는 남자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마중을 나가보렵니다. 파마리나와 레스난의 마법실력이 뛰어나니 크게 염려하지 마세요. 아! 블리세미트도 데려갈게요. 데린 드로안 "허허허‥." 남자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오직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젠티아가 없는 동안 글로디프리아의 전권을 위임 하고 있던 마크렌서 자작-토클레우스였다. 여인들이 두 사람을 찾는다면 모르지만 무슨 변이라도 당한다면 젠티아 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지금 웃을 때입니까? 기사단을 모두 성밖을 샅샅이!" 안절부절한 그의 말하기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변방을 감시하던 전령이 뛰어들었다. "마크렌서 자작 각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야? 왠만한 것은 대충 알아서 해? 남작 부인께서 행방불명 되신 일보다 급한 게 무어란 말이냐?" "용병왕을 선두로 한 군대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토클레우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세상에!" * * * "폐하, 아무래도 거짓 정보일 듯 싶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제하던 '값싼 남작'이 죽다니‥." "글세.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일 경우에는 기회가 아닐 수 없네. 한 번 시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밀정에 따 르면 그가 한 달 전부터 두문불출하고 있다더군. 그는 성내와 영지를 자주 시찰하는 인물인데 한 달 동안 전혀 움 직임이 없다니 이상하지 않나? 게다가 실베니아는 지금 반란으로 인한 내전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워. 그런데도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야"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유인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방의 전술에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는 게 있으니 말 입니다. '값싼 남작'으로써는 내전에 군대를 보내기 전에 저희의 군사가 신경쓰일 겁니다. 그래서 우선 유인을 해서 격파해 후방의 위협을 격파하고 여유있게 내전에 간섭하려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시는 게 좋겠죠." 젊은 재상의 충고에 용병왕 자크는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카로안을 보우하려는지 나타난 청년의 지략은 가히 전장 의 푸른 매 킬유시 공작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 나이는 자신의 아들 뻘이었기 때문에 자크로서는 더욱 총애했다. 그 의 미소를 보기가 황송한 재상, 바르스젠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곧 글로디프리아에서 군대를 보내올 겁니다. 우리는 그 진형을 보기 좋은 곳에 진을 만드십시오." "그렇게 하지. 만약 젠티아 드로안이 없다면‥. 재미있을 거야. 매 번 그와 마크렌서 자작의 짝을 이룬 작전에 당 하지 않았나. 물론 자네가 있으니 이제는 해볼만 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있는 흑색 거성과 싸우는 것은 너무 국력을 낭비하는 일이지. 그가 없다면 글로디프리아는 그저 약간 두꺼운 성곽일 뿐이야." * * * 젠티아에 그의 부인, 데린마저 실종된 글로디프리아에서는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웅성이는 회의장을 검집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조용히 시킨 토클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마녀 파마리나와 인어 레스난의 마법도 뛰어나지만 아리에의 검술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니까. 우선은 용병국과의 전쟁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용병왕 자신이 직접 왔습니다. 그 군대를 남작님 없이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니어도 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이 성을 내주고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글로디프리 아를 한 번 뺏긴다면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때, 피브드닌이 일어섰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며 걸음으로 주의를 끈 그는 말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아마도 용병왕은 정말로 싸울 생각이 아닐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싸울 생각이 아니라니." "제 생각일 뿐입니다. 한 번 들어주십시오." 홀의 중앙에 선 그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시선이 돌아가자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마음에 드는 분위기를 단숨에 만들어낸 피브드닌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용병왕은 킬유시 공작의 뒤를 이어j 등장한 '값싼 남작'에게 많은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둘은 가히 숙적 이라고 할 정도이며 천적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지요. 제가 용병왕이라면 아무리 실베니아가 내란에 휩싸여있다고 해도 군사의 이동이 없는 글로디프리아에 쳐들어오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들의 움직임은 탐색이라는 뜻이군요? 실베니아의 내전을 틈탄‥." "예. 그리고 남작님의 근황을 의심한 것도 있겠죠." "확실히 남작님은 밖을 잘 돌아다니시기 때문에‥. 한 달이나 시찰이 없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합니다." 기사들과 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플레도 '아스틴네글로드에 먹칠하지는 않겠군.'하고 턱을 긁적거렸다. "아마도 적은 군사로 부딪히면서 용병왕은 남작님의 부재를 진형을 비롯한 군대의 운용, 계략 등으로 확인하려고 들겠지요." "누가 남작님을 흉내내주셔야 겠군요. 보를레스님이 해주셔야 겠습니다. 다행히 보를레스님도 갈색 머리카락이 아 닙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토루반이 말했다. "문제가 있다. 용병왕 자크는 매우 호전적이라고 들었다. 진의 운용으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는 광장히 극 단적인 방법으로 젠티아의 부재를 확인하려고 들지 모른다." "극단적인 방법이라면?" "결투겠지." 산 넘어 산이었다. "그를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백 장의 꽃잎들 중에서도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남작 각하께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명예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남작님은 대륙 3대 기사라고 불릴만큼 강하다. 그런 기사가 결투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 음은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어." 토루반의 문제 제기에 사람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는 토클레우스. "할 수 없죠. 보를레스님. 좀 고생을 해주셔야 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보를레스님을 적어도 젠티아 님 수준으로 키워내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자작." "안 되면 되도록 만들어! 약, 사기, 뭐든지 상관없다. 용병왕과 검을 부딪혔을 때 '아! 값싼 남작이구나!'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라고!" "기, 기간은?"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남자들의 입이 쫙 벌어졌다. 일주일동안 만들 수 있다면 젠티아를 괴물이라고 칭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무슨 수라도‥. 그리고 그 무슨 수의 중심이 된 보를레스는 울상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39악장 1화 아래에서는 땅을 물들이며 잔혹한 고함과 비명이 오고 가도 하늘을 유유히 유랑하는 구름은 평화롭게만 보인다. 실 베니아의 북부 지방은 내전으로 인하여 제대로 남아나는 마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화가 되었다. 그 가운데, 전 쟁터의 군사들보다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쪽으로 옮겨요. 저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어이, 실이 모자라. 실을 가져와! 없으면 옷이라도 다시 풀어서 가져오라고! 살가죽이 뜯어졌는데 그깟 옷이 문제 야?" "당연하잖아요! 난 여자라고요! 속옷도 못 입었는데 어떻게 옷을 찢으라는 거얏!?" 완패.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사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환자를 보며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난 저 녀석을 남자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젠티아, 농담할 시간 없어요." 젠티아를 완패시킨 여인은 재미있게도 투명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 의 피부가 약간의 티라도 있었다면 끔찍하도록 이질적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스럽게만 보이는 모습에 사 람들은 자리를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어쩔 수 없잖아, 시즈. 전쟁으로 황폐한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실은 찾기 힘들어." "그럼 할 수 없죠." 시즈라고 불린 여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올 듯한 미소에 사람들이 넋을 잃은 사이 그녀는 치렁치 렁한 옷의 끝자락을 잘라냈다. "이걸 쓰세요." "고마워. 확실히 검은 색보다는 네 흰옷이 났지. 게다가 솔직히 넬피엘, 저 녀석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옷의 실 도 호들갑을 꿈틀될까 걱정이 돼." 퍽! "속옷도 입지 않은 여자한테 옷을 찢어 달라니, 옷 벗어달라는 변태같은 소리를 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네." 젠티아의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와 닿았다. 주범은 방금 전 그를 완패시켰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허리에 얹은 양 주먹 중 하나에서 뿌연 김이 새어나오는 걸로 볼 때 범행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얼굴을 맞대는 둘의 친근한(?) 모습에 시즈는 소매로 입을 살며시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두 사람이라니까요." "어딜 봐서!" 아마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달 전 실종되었던 음유술사들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여장까지 한 채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걸까?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보다는 전쟁 자체를 빨리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을 텐데‥.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쯤 로바메트를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예측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학자보다도 미소년 집사가 더욱 신용이 가는 지도 몰랐다. 분명하게 딱딱 끊어 지는 말투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 전에도 들었던 말투다. 무지막지한 번개를 몸으로 쬐던 날에도 말이다. 번개가 효과적인 공격일 수 있는 것은 엄청 난 파괴력이 이유기도 하지만, 보다 분명한 이유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빛의 속도를 피한단 말인 가. 하지만 불가능을 실현해낸 두 사람은 시즈의 눈앞에서 버젓이 티격대고 있었다. 우선 강렬한 뇌격을 받아낸 것은 젠티아의 검. 보통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음검(聖音劍)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검은 젠티아가 쏟아 부운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폭뢰(爆雷)에 맞섰다. 맞섰다고 해봤자 찰나적인 시간이 었지만 빛이 번쩍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번개의 위력을 생각할 때 그 방어 효과는 원래 숯이 되는 결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넬피엘의 텔레포트. 결국 그들은 번개 불에 알맞게 구워 진 채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젠티아는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넬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장 쳐들어가자는 젠티아를 그는 차분하게 꿇어앉혔다. "피부만 그을린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보군. 다음에는 분명히 뼛속까지 까맣게 타버릴 거야. 몇 번을 해도 상 관없어. 수 백번의 매일같이 당신이 자랑했던 사랑스러운 아내도 새까만 뼈를 가지고는 당신을 구별해 낼 수 없을 걸." "데린이라면 가능해!" 별로 중요하지 않는 확신을 당당하게 외치는 젠티아. 시즈와 넬피엘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하고 머리를 맞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사의 고리'의 눈을 피해 로바메트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여 나온 결론은‥. "변장밖에 없어." "하지만 갑자기 접근한다면 의심을 받을 겁니다. 그들이 먼저 접근하도록 해야 해요." "변장은 어떤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가장 진부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여장." 어쨌든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넬피엘 같은 경우는 그냥 내버려둬도 미소녀라고 꼽히는 이들보다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시즈는 투명하 실루엣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남성적인 모습을 살포시 감춰주었다. 하지 만. "나는‥." "당신은 능글맞은 중년." 젠티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시즈는 눈을 반짝거리며 넬피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젠티아는 시장에서 구입한 분장도구로 주름을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달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성격. 여자로 분장 한다고 해도 여자답지 못하다면 금새 들켜 버릴 것이다. 시즈는 차분한 성격이었음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무뚝뚝한 넬피엘이라면‥. 이 문제를 넬피엘은 최강의 음유술사답게 간단하게(?) 해결해버렸다. 자기자신에게 성격 변조의 마법을 걸어버린 것 이다. 그것도 자신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주문으로 다른 사람이 주문의 해제어를 소리내서 말해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해제어라는 것은‥. "어이, 변태."‥였다. 시즈같은 경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겨우겨우 말했지만 젠티아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다. 이번 에도 역시 그가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해제어를 말하자 넬피엘의 생글거리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반격했다. "무슨 일이지, 치한?" "그 동안 생각해봤는데 로바메트도 너의 성격 변조 주문과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아마도‥."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섟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시즈가 둘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넬피엘의 주문 같은 경우는 상대가 주문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허락해야 되요. 아니라면 깊게 걸리지 않 을 거에요." "역사의 고리가 가까이 있으니까 매일같이 걸어대는 게 아닐까?" "설마, 그들이 그토록 계획을 허약하게 꾸밀까요?" "젠티아라면 그렇게 꾸밀 걸."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이키는 넬피엘의 말에 젠티아는 허약한 전략이나 꾸미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초라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듯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람과 불꽃의 음유술사를 훔 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기가 다 끝났을까? 시즈는 문득 고개를 들고 젠티아에게 물었다. "아, 괜찮을까요?" "뭐가?" "글로디프리아 말입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 기사단들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도 아니고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들도 함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라면‥." "걱정이라면?" 갸웃하고 바라보는 시즈의 은실같은 머리카락을 젠티아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헤집었다. 입이 쭉 찢어지며 웃 는 모습이 방금 전의 근심이 섟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설마‥. 데린이‥ 그럴 리는 없겠지.' "자, 그만들 쉬고 환자들이나 보자. 우리가 민심을 얻게 되면, 민중의 뜻이라는 명분이 극히 부족한 진압군은 우리 를 불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5권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 아래에서는 땅을 물들이며 잔혹한 고함과 비명이 오고 가도 하늘을 유유히 유랑하는 구름은 평화롭게만 보인다. 실 베니아의 북부 지방은 내전으로 인하여 제대로 남아나는 마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황폐화가 되었다. 그 가운데, 전 쟁터의 군사들보다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 쪽으로 옮겨요. 저 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어이, 실이 모자라. 실을 가져와! 없으면 옷이라도 다시 풀어서 가져오라고! 살가죽이 뜯어졌는데 그깟 옷이 문제 야?" "당연하잖아요! 난 여자라고요! 속옷도 못 입었는데 어떻게 옷을 찢으라는 거얏!?" 완패.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사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절망적인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환자를 보며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난 저 녀석을 남자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젠티아, 농담할 시간 없어요." 젠티아를 완패시킨 여인은 재미있게도 투명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 의 피부가 약간의 티라도 있었다면 끔찍하도록 이질적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스럽게만 보이는 모습에 사 람들은 자리를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어쩔 수 없잖아, 시즈. 전쟁으로 황폐한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실은 찾기 힘들어." "그럼 할 수 없죠." 시즈라고 불린 여인은 살짝 미소지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올 듯한 미소에 사람들이 넋을 잃은 사이 그녀는 치렁치 렁한 옷의 끝자락을 잘라냈다. "이걸 쓰세요." "고마워. 확실히 검은 색보다는 네 흰옷이 났지. 게다가 솔직히 넬피엘, 저 녀석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옷의 실도 호들갑을 꿈틀될까 걱정이 돼." 퍽! "속옷도 입지 않은 여자한테 옷을 찢어 달라니, 옷 벗어달라는 변태같은 소리를 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네." 젠티아의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와 닿았다. 주범은 방금 전 그를 완패시켰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허리에 얹은 양 주먹 중 하나에서 뿌연 김이 새어나오는 걸로 볼 때 범행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얼굴을 맞대는 둘의 친근한(?) 모습에 시즈는 소매로 입을 살며시 가리고 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두 사람이라니까요." "어딜 봐서!" 아마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달 전 실종되었던 음유술사들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여장까지 한 채로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정신을 팔고 있는 걸까?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막기보다는 전쟁 자체를 빨리 끝내야 하는 의무가 있을 텐데‥.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쯤 로바메트를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예측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학자보다도 미소년 집사가 더욱 신용이 가는 지도 몰랐다. 분명하게 딱딱 끊어 지는 말투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 전에도 들었던 말투다. 무지막지한 번개를 몸으로 쬐던 날에도 말이다. 번개가 효과적인 공격일 수 있는 것은 엄청 난 파괴력이 이유기도 하지만, 보다 분명한 이유는.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빛의 속도를 피한단 말인 가. 하지만 불가능을 실현해낸 두 사람은 시즈의 눈앞에서 버젓이 티격대고 있었다. 우선 강렬한 뇌격을 받아낸 것은 젠티아의 검. 보통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성음검(聖音劍)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검은 젠티아가 쏟아 부운 기운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폭뢰(爆雷)에 맞섰다. 맞섰다고 해봤자 찰나적인 시간이 었지만 빛이 번쩍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번개의 위력을 생각할 때 그 방어 효과는 원래 숯이 되는 결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넬피엘의 텔레포트. 결국 그들은 번개 불에 알맞게 구워 진 채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젠티아는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넬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당장 쳐들어가자는 젠티아를 그는 차분하게 꿇어앉혔다. "피부만 그을린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나 보군. 다음에는 분명히 뼛속까지 까맣게 타버릴 거야. 몇 번을 해도 상관 없어. 수 백번의 매일같이 당신이 자랑했던 사랑스러운 아내도 새까만 뼈를 가지고는 당신을 구별해 낼 수 없을 걸." "데린이라면 가능해!" 별로 중요하지 않는 확신을 당당하게 외치는 젠티아. 시즈와 넬피엘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기로 하고 머리를 맞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역사의 고리'의 눈을 피해 로바메트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여 나온 결론은‥. "변장밖에 없어." "하지만 갑자기 접근한다면 의심을 받을 겁니다. 그들이 먼저 접근하도록 해야 해요." "변장은 어떤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가장 진부적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여장." 어쨌든 두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넬피엘 같은 경우는 그냥 내버려둬도 미소녀라고 꼽히는 이들보다도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시즈는 투명하 실루엣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남성적인 모습을 살포시 감춰주었다. 하지 만. "나는‥." "당신은 능글맞은 중년." 젠티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시즈는 눈을 반짝거리며 넬피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젠티아는 시장에서 구입한 분장도구로 주름을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달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성격. 여자로 분장 한다고 해도 여자답지 못하다면 금새 들켜 버릴 것이다. 시즈는 차분한 성격이었음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무뚝뚝한 넬피엘이라면‥. 이 문제를 넬피엘은 최강의 음유술사답게 간단하게(?) 해결해버렸다. 자기자신에게 성격 변조의 마법을 걸어버린 것 이다. 그것도 자신이 풀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주문으로 다른 사람이 주문의 해제어를 소리내서 말해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해제어라는 것은‥. "어이, 변태."‥였다. 시즈같은 경우는 얼굴을 붉히면서 겨우겨우 말했지만 젠티아같은 경우는 자연스러웠다. 이번에 도 역시 그가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해제어를 말하자 넬피엘의 생글거리던 얼굴이 엄청난 속도로 굳어버 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반격했다. "무슨 일이지, 치한?" "그 동안 생각해봤는데 로바메트도 너의 성격 변조 주문과 비슷한 종류의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아마도‥."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섟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시즈가 둘에게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넬피엘의 주문 같은 경우는 상대가 주문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허락해야 되요. 아니라면 깊게 걸리지 않을 거에요." "역사의 고리가 가까이 있으니까 매일같이 걸어대는 게 아닐까?" "설마, 그들이 그토록 계획을 허약하게 꾸밀까요?" "젠티아라면 그렇게 꾸밀 걸." 피식 웃으며 커피를 들이키는 넬피엘의 말에 젠티아는 허약한 전략이나 꾸미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초라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듯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람과 불꽃의 음유술사를 훔 쳐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기가 다 끝났을까? 시즈는 문득 고개를 들고 젠티아에게 물었다. "아, 괜찮을까요?" "뭐가?" "글로디프리아 말입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내 기사단들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도 아니고 아스틴 네글로드의 현자들도 함께 있으니까. 다만 걱정이라면‥." "걱정이라면?" 갸웃하고 바라보는 시즈의 은실같은 머리카락을 젠티아는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헤집었다. 입이 쭉 찢어지며 웃 는 모습이 방금 전의 근심이 섟인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설마‥. 데린이‥ 그럴 리는 없겠지.' "자, 그만들 쉬고 환자들이나 보자. 우리가 민심을 얻게 되면, 민중의 뜻이라는 명분이 극히 부족한 진압군은 우리 를 불러드리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젠티아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을 무렵, 데린은 그럴 리 있는 행로를 따라서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리에, 조금 천천히 가. 레스난이 힘들어하고 있어." 데린의 말에 아리에가 말을 천천히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도 길게 자란 푸른 머리카락가 흩날리 는 걸 정리할 여유도 없이 기진맥진한 소녀가 들어왔다. "혹시 지금 너무 빨랐나요?" "글세‥. 엘프나 드워프도 다른 동물을 타지 못한다고 하잖아. 인어도 그런 게 아닐까?" "어쨌든 이대로는 무리인 것 같아요. 배도 고팠는데 점심이나 먹으면서 쉬도록 하죠?" 귀족들의 영애답지 않도록 거칠게 아리에와 데린은 엉덩이를 털썩 깔았다. 며칠간의 경험으로 인해 파마리나는 자 연스럽게 공중에 걸려있는 지팡이에 묶어 두었던 짐을 풀렀다. 마법이 조금 깃들어있는지 그녀의 보자기는 내용물 을 축소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제법 커다란 냄비가 모습을 드러냈고 데린은 환호하며 글로디프리아의 주방 에서 가져온 조미료와 재료들을 꺼냈다. "이제 좀 괜찮죠?" 한 편, 블리세미트는 자주 어울리던 레스난의 창백한 안색이 안쓰러웠는지 신성력을 품은 손으로 등을 두들기고 있 었다. 인어 소녀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의 약손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깔깔거리는 웃 음소리와 함께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킁킁거리는 그녀의 안색은 확연하게 호전되고 있었다. 그걸 모를 수 밖에 없 는 블리세미트는 자신의 손이 효험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레스난을 잡아서 음식 가까이로 이끌었다. "아무리 아파도 절대로 음식을 거르진 않는 군. 원래 인어들은 그렇게 대식가(大食家)야?" 방금 전까지 멀미에 뒤집히던 내장을 레스난은 음식물로 가볍게 눌러버렸다. 그러니 위에 같은 물음이 나올 수밖에. 대답할 시간도 아까운지 레스난은 입이 우물거리는 속도와 같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인어들은 보통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이 먹어요. 아이를 낳야 되잖아요." "우리도 여자가 아이를 낳아." "저희는 한 번에 쌍둥이로 낳는다고요." "넌 아직 성년이 아니잖아, 꼬마 생선." "다람쥐는 겨울이 되고 나서 식량을 모으나요?" "마, 많이 먹으렴." 먹는 것을 걸고서는 가히 아스틴네글로드에 버금가는 말발을 자랑하는 레스난. 파마리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증거로 레스난의 그릇에 한 국자의 수프를 더 부어주었다. 부스럭! "누구냐?" 일 년에 가까운 용병 생활로 여자들만 있을 때의 위험함을 알고 있는 아리에는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 문에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기척은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수풀이 흔들거렸다. "아하하‥. 이거 미안하군, 아가씨들. 며칠간 먹지도 못하고 여행을 했더니 쓰러질 것 같아. 혹시 먹을 게 있다면 좀 나눠줬으면 하는데?"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아리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첫눈에도 사내는 며칠이나 굶은 게 아니라 현재 열심히 음식을 집 어넣고 있는 레스난보다도 얼굴빛이 좋았기 때문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하하하‥. 수작이라니." "요즘 내전으로 인해서 도적들이 늘어 극성이라던데. 그 축인가?" "허허허‥." 사내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제 딴에는 기척을 죽인 걸음인데도 여리게만 보이는 여인은 쉽게 알아챘고 여행자라는 말도 도저히 믿을 기세가 아니었다. 평소 때 같았으면 이쯤에서 허탕으로 간주하고 돌아섰겠 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남자가 하나 껴있기는 하지만 여자라고 봐줄 만큼 곱상하니까. 나머지는 후‥.' "그만 생각하고 돌아가시지." "그러지 말고 조금만‥." 파파파팍! 옆에서 지켜보는 데린이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아리에의 서슬은 시퍼렇게 쏘아졌고 급기야는 사내의 발 앞에 몇 자 루의 단검을 수놓았다. 토끼눈처럼 거대해진 사내의 눈동자를 겨냥하며 그녀는 말했다. "다음에는 그 눈이야. 그만 꺼져." "히이이이익!" 그는 일을 도모할 의지는 있었지만 능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줄행랑을 치는 사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데린이 물었 다. "괜찮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데‥. 그렇게 단정지을 필요는 없잔아." "데린, 여자끼리 다닐 때는 조심해야 되요. 아무리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쳐도 여자는 인격 적으로 약점이 있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은 미리 없애야 해요." "그래도 정말 여행객이면‥." 우물거리는 젊은 귀족 부인의 모습. 아리에는 잠시 자신이 시즈와 만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 빠졌다. 그녀가 말없이 있자 파마리나가 데린에게 대신 대답했다. "아까 그 놈은 며칠 굶은 안색이 아니야. 방금 전까지 뭔가를 먹었을 걸."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 "말할 때 이빨에 민트 가루가 껴있었거든." 데린은 할 말이 없어졌다. 언제 그런 것까지 봤단 말인가. 그녀는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마녀들은 눈도 좋아." "네가 안 좋은 거야." 데린과 파마리나는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성에서도 친구같았다. 물론 위와 같은 대화를 친구같다고 봤을 때 하는 얘기다. 아리에는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피브드닌과 토플레를 떠올리게 하는 이들을 달랬다. 다행히도 그들의 분 을 풀 수 있는 존재가 다가와있었다. "저길 좀 봐요. 방금 전 그 남자가 같은 일행이라도 데려왔나 본데요?" "아가씨들, 그리고 꼬맹이. 오랜만이야.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 사내는 평소보다도 많이 모여든 동료들의 지원에 가슴이 든든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 한 것밖에 없었다. "전설에 나올 듯한 여자들이 지나간다. 방해물도 없어!" 그만큼 경쟁자가 많아지겠지만 그만큼 성공률은 향상된다. 그러나 그의 흐뭇한 미소가 곧 망가져버릴 줄 누가 알았 겠는가. 머리카락이 풀풀 날리는 파마리나와 역겨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스난을 주시하고 있던 블리세미트는 알았을 지도 모른다. 후일 글로디프리아의 친구들이 모인 만찬에서 붉은 뱀의 사원을 부활시킨 대사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 현했다. - 그들의 모습은 넘치기 직전의 용암같았지. 반대로 도적들은 용암이 온천인 줄 알고 뛰어들려는 관광객처럼 보였 고. 어쨌든 여기서 결과는 이미 나와있는 것이다. 용암에 뛰어든 관광객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는‥. 우선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관광객들을 향해서 파마리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날 갖고 싶거든 이 친구를 쓰러뜨리고 와용∼ 호홍∼" 쿠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머리가 툭 튀어나오는 순간, 도적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마, 마법사다!" 혼란에 빠진 그들을, 불러보았던 사내는 일깨웠다. "당황하지마! 그래봤자 여자들과 꼬마야! 저 것만 부수면 신나게 즐길 수 있다고!" 잠시동안 도적들은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곧 골렘의 주먹이 바닥에 깊은 구덩이를 남길 정도로 내 리 꽂히자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욕망보다는 가까이 다가온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도망쳐!" "도대체가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볼 줄 모르는 군요. 역시 인간은 추악한 존재야.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 르게 만드네요." 뒤를 막아선 존재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었다. 백옥의 조각처럼 흰 손가락에서 마치 손톱이 늘어나는 듯한 착 각과 함께 얼음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여, 여기도 마법사야!" 마법 왕국 아스틴 정도나 되지 않는 이상 평민들이 제대로 된 마법사를 구경한다는 것은 화살로 달을 사냥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 거의 모든 마법사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마법서와 자금의 유혹에 갖혀 살았고 그 외는 은거하여 연구에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용병 중에 활동하는 사람에 일부는 마법사라는 직함을 사용했지만 3 클래스만 되어도 극진한 대접을 받는 용병계라 는 사실에 주목할 때 이름 구실 하는 마법사는 극소수였다. 이 정도면 세간에서 마법사가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한 명도 아닌 두 명. 도적들은 처음 사냥감 정보를 물어왔던 사내를 원한이 가득한 눈초리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전설의 나올 것 같은 여자들이 아니라 전설의 마법사들이었잖아.' 처음의 사내는 전혀 원한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기에 바빴고 다른 이들도 사내을 노려보고만 있기에는 그들 의 모습은 너무나 소중했다. 시즈들과 함께 다니느라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 여인은 잔혹하기로 이름 높은 마녀였고 다른 소녀는 인간이라면 끔 찍하게 싫어하는 인어였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얘기로만 알고 있었지 엄청난 실력의 마법이 펼쳐지자 데린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중년 의 남자가 피를 흘리며 넘어지자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왜? 난 죽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레스난도 파마리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치고 있던 도적들은 섬짓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생 각을 읽은 블리세미트는 약간 미소로 보기 어려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저들은 여자라면 질겁하겠군." 남자라면 신이 준 욕망에 따라 여자에게 호감을 갖는 게 당연한 섭리이지만 어린 사제는 잠시나마 그들에게서 신의 섭리조차 무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데린은 인어와 마녀를 말리고 있었다. "그만 해. 이들이 아무리 도적이고 우리를 해치려고 했다지만 너희가 죽일 권리는 없어." "맞아. 권리는 없지. 하지만 힘은 있는 걸!? 저들 역시 자신들의 힘을 믿고 우리를 해칠 권리 없이 덤벼든 게 아니 겠어? 우리가 힘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들의 노리개가 되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을 걸." 파마리나의 비릿한 웃음에 대린은 실감했다. 왜 사람들이 이 여인을 '마녀'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지. 하지만 이 자 리에는 마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는 그만 두십시오. 인간은 짐승이 아닙니다." "아니라는 보장이 있었나?"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는 소(小)사제였으나 인어의 물음에 금새 굳어졌다. 레스난은 '인간 따위는 짐승에게 우월감 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어조는 날카로웠다. 물끄러미 레스난과 파마리나를 바라보던 블리세미 트는 눈을 작게 뜨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미소. 앳되어 붉기만 한 입술을 열어 소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적어도 사자는 배가 부를 때 사냥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부족 한 존재가 인간이기에 인간은 신에게 기대는 지도 모르죠. 잊지 마세요, 파마리나. 당신도 인간이라는 걸요." "지금 전도(傳道)하는 거야?" "설마요. 인간은 부족한 생물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레스난도요. 당신은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의 추 악한 면을 따르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인어들은 필요 이상의 살생을 일삼는 종족으로써 꼬리만 아니라면 인간과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 침묵은 그렇게 사람들의 가슴속을 메워갔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을 메워가는 의미는 침묵만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의미가 차 오른 사람들은 블리세미트와 말을 나누던 두 여인뿐이 아니었다. 털썩! 털썩! 무거움을 견딜 수 없었던가. 아리에들을 습격했던 도적들은 천천히 무릎을 꿇어가고 있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 "죄송합니다. 전쟁 때문에 몰려든 군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먹을 것이라도 얻어보려 도적 행세를 하게 되었는 데, 오히려 농사 지을 때보다 세 끼를 잘 먹게 되자 심성까지 도적처럼 물들었나 봅니다." "전쟁 중인데 이 곳을 지나가는 상인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아마도 물가가 올라버린 수도나, 북동 지방에서 한 몫 벌어보려는 사람들이겠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리에는 데린의 말을 듣고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상인들이지요." 이를 갈며 도적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수도 주변에 살던 소작농이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도적질 자체에 취미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안쓰럽게 그들을 바라보던 데린은 어서 전쟁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위험한 시기에 무슨 일로 수도로 향하시는지‥. 그 곳은 전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걱정없어. 우린 힘이 있으니까." 사내는 쓴웃음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몸소 그 힘을 체험해 보았는니 허튼 소리를 한 게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곧 그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님들께서 전쟁이 금방 끝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노력해볼게요."하고 대답하는 데린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젠티아를 어서 찾아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위와 같은 고민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정쟁은 다른 때와는 달리 여자 영웅들이 많이 나타나는 군요." "그런가요?" "여러분들은 변방에서 오셨으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내란이 일어난 주변에서는 제법 들려오는 소문이 있어요. 전장에 왠 여인들이 나타나서 부상자들을 치료한다고 하더군요. 은발에 투명한 눈동자를 가졌다는 여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聖女)라고 부르고 있어요." '은발에 투명한 눈동자?' 아리에의 가냘픈 모가지가 사내에게로 부러질 것처럼 우격다짐으로 휘릭 돌아갔다. 그는 갑자기 서슬이 푸른 시선 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손을 마구 저었다. "무, 물론 여러분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아리에는 그런 아부에 관심이 없었다. 사내를 지나친 그녀는 데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데린도 그 미소의 의 미를 알았음으로 이지(理智)의 빛나는 눈동자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어떻하지? 젠티아. 찾아버렸어요. 각오하고 있어요." 부르르르! "무슨 일이에요? 젠티아." "아냐, 그냥 오한이‥." "꺄르르륵! 아직 겨울 기운이 남는 모양이네요. 조심하세요. 다 늙으신 몸에 무리하시면 안되요오∼." 넬피엘의 방긋방긋한 미색에 젠티아는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 지만 저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안색이 한층 창백해진 그는 넬피엘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다가오자 얼른 물러섰 다. "나,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서 환자들이나 봐줘." "그럴게요. 젠티아 혹시 아프면 말해요. 제가 아주 상냥∼하게 봐드릴 테니까요. 호호호호홋‥." 웃음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며 젠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하군." '과연 저 녀석의 진면목을 알고도 사람들은 성녀라고 말할지 궁금해. 그에 비해서 이 쪽은‥.'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지만 이곳은 전장이고 적진이었다. 긴장을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느낀 바람 같은 기척은 역시 시즈였다. "젠티아‥." "시즈‥." 이 은발의 소녀는 정말이지 남자였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리 심하다할 정도로 무서운 넬피엘의 환영 마법이 첨가되 었다지만 특이한 빛깔의 눈동자와 머리칼은 청년을 하나의 여인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더욱이 평상시의 부드러운 어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되어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젠티아의 심금조차 흔들 정도였다.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마는 젠티아. '이, 이 놈들 너무 잘 어울려‥. 하, 하지만 난 데린, 당신 밖에 없다오. 날 믿어주오오오오.' "믿을 수 없어요." "엥?" "넬피엘이 예전에 마나이츠 님의 행세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저런 모습은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 그런 얘기였나?" "그럼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아무 것도 아니야." 멀리서 환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즈는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급한 중에도 할 말은 남아있었는지 다급 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용병국 카로안이 글로디프리아를 쳐들어왔다고 하던데요. 이미 한 번 맞붙은 모양이지만 큰 걱정은 없는 모양이에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어제밤에 넬피엘이 마나이츠님께 다녀와서 말해주던 걸요!?" "나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야‥ 걱정할까봐!"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시즈는 찡긋 윙크했고 젠티아는 다시 한번 정신적인 타격을 받으며 비틀거렸다. 머리를 잡 고 생각하던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이 놈들. 분명히 번갈아 가면서 날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해!' 그러나 분해하던 것도 잠깐, 젠티아는 진지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용병국에서 쳐들어왔다면 용병왕이 직접 왔겠군. 내가 없다는 정보가 세어나간 건가?" 천천히 끝이 올라가는 입술. 무슨 일인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젠티아는 키득거렸다. "그렇다면 오산이야, 용병왕이여‥. 내가 없어도 글로디프리아는 강하지. 암! 내가 용병왕의 입장이라고 해도 글로디 프리아를 점령할 수는 없을 거야."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3) 거대한 흑색 거성. 특이하게도 북서쪽을 향해 지어진 성을 보고 사람들은 '흑기사는 제플론을 노려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글로디프리아라고 이름 붙여진 성을 건축했던 장본인이 망명왔던 엘시크의 왕족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 충 분히 일리가 있었다. 어떤 자는 글로디프리아가 터무니없이 거대한 이유를, 높고 높게 쌓아올린 탑에서 고향을 바라보기 위한 왕족의 열 망 때문이라고도 한다. 웃으려고 하는 말이니 만큼 그에 신경 쓰는 이들이라고는 없었지만 예전, 엘시크에서는 농담 같은 소문을 트집잡고 글로디프리아의 상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실베니아의 대마법사 마나이츠는 엘시크 중 심에 조그마한 돌멩이로 아이들이 해변에 모래성을 짓듯 자갈로 개집 만한 성을 만들어놓고 말했다. '내가 이 곳에 성을 만들었으니 제플론은 나의 영지다.' 그리고 가신(家臣)들을 마법으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엘시크에서 당황했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국왕이 직접 나서 실베니아에 사과를 하고 헤트라임크가 마니이츠를 설득하여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얽힌 이야기가 많은 성이지만, 엘시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글로디프리아를 불만스럽게 바 라보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했다. 지나치게 높게 지어진 성벽은 경비기사가 올라가다가 지칠 지경이었지 만 그 대신에 적군의 활이 제대로 닿지가 않았다. 닿는다고 해도 힘이 다 떨어져버린 화살이라 병사들이 쉽게 방패 로 막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성벽의 궁수들이 시위만 놓아도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위협을 넘어섰 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마법의 중흥이 시작된 이후 성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개발되었고 타국에서 공격의 희망을 가질 때였다. 이제는 '값싼 남작'이라는 희대의 기사가 턱하니 나타났던 것이다. 그 후로 타국에게는 절망스러운 성이 되어버린 글로디프리아. 지금 그 곳에는 파란이 일고 있었다. "허억! 허억!" "이제 고작 180 바퀴입니다. 벌써 지친 겁니까?" "아, 아직 멀었어!" "좋아요. 그럼 약간 속력을 올려줘요. 남작님이셨다면 아마 2시간도 다 안 되서 200바퀴를 채우고 샤워를 하고 계실 겁니다." 전부터 거론했지만 보를레스는 오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젠티아 드로안이 현 시대 최고의 기사라고는 해도 그는 이렇게 무참한 비교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숨이 목까지 차다못해 아예 호흡이 곤란했고 다리가 움직이고 있 는지 감각도 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오래 전 전설 중에는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와 소식을 알리고 죽어버리고 만 어이없 는 전령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를레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망설임을 눈치챈 걸까? 섬세한 세공품을 살피는 드워프같이 날카롭게 바라보던 토클레우스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연습하다가 죽는다는 것은 참 꼴불견이겠지. 죽을 걱정이 되신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프로젝트를 중단하도록 할 테 니‥. 솔직히 남작 각하를 일주일만에 따라잡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지만 그건 가능성이지. 실제는 추측보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헉! 헉!" 토클레우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점점 느려지던 보를레스의 다리가 다시 원래 속도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어지간히 호승심과 오기가 있는 인물이군. 왜 각하께서 이렇게 약한 친구를 높게 평가하나 했더니 확실히 맞는 말 이야. 하지만 그 정도 오기로도 부족해. 그래가지고는 각하는 커녕 글로디프리아 100명 중 서열 50번째도 당해낼 수 없어.' 이제까지 젠티아와 함께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대했고 그들을 다루는 법을 습득하고 있는 자작, 토클레우스 마크렌 서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보를레스의 오기를 향상시킬 인물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보를레스 님, 헤라즈라는 성투사와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요?" 멈칫. 갑자기 보를레스는 멈췄다. 갑자기 봄을 지나 여름의 살 태우는 햇빛처럼 그의 눈은 분노로 차있었다. "그 인간의 이름을 내 앞에서 꺼내지 마시오." 달리다가 급히 멈췄기 때문에 호흡곤란은 심할 텐데 어조는 분노가 차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하지 만 토클레우스는 능청맞게 그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인물이라서 말이오. 듣자하니 배신당했다고 했던 것 같소만‥?" "‥지금 나를 화나게 해서 얻을 게 뭡니까?" "하하하! 화나게 할 생각 없소. 다만‥ 당신이 손.끝.도. 대지 못했던 성투사 헤라즈. 그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뿐이 오." "‥‥." 으득. 지금 들리는 소리가 이빨 가는 소리가 틀림없다면 보를레스는 훈련을 끝내고 치과에 가야할지도 모른다. 분함 으로 가득한 그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장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신(武神)같은 자도 남작님을 당해내진 못했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문득 보를레스가 바라보니 토클레우스는 풍채좋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진지한 목소리로 보를레스가 물었다. "정말 이 일주일을 견뎌낸다면‥." "그에게 맥없이 지지는 않을 겁니다." "!!!" 이제 겨우 이틀. 아직도 닷새라는 기간이 남아있었다. '정말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가능하지 않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순간적으로 피식하고 새어나온 웃음. 자신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토클레우스에게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선 스무 바퀴를 다 돌도록 하죠." 다시 뛰기 시작하는 보를레스. 의지가 높다고 몸 상태가 완전히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헐떡이는 숨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는 모습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쉬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불타오른 오기와 호승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토클레우스는 중얼거렸다. "앞으로의 훈련에서 어느 쪽인지 증명되겠지."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4) 3일. 보를레스를 젠티아 수준의 검사로 만드는데 동원된 사람은 '백장의 꽃잎'이라 이름 붙여진 기사단의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전시(戰時)인 현재 기사로서 하는 일이 꽤 많았기 때문에 번갈아 가면서 보를레스를 코치했는데 그 훈련내 용은 상당히 평범하면서도 색다른 것이었다. "이제 달리기는 어느 정도 되었군." 말한 20대 중반의 기사는 겉보기에는 체격이 작았지만 엄연히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세심히 보를레스의 달리기를 살핀 그는 검을 들어 던져주고 말을 이었다. "이걸 받아. 아직 날을 갈지 않은 검이다." "휘두르기를 하는 겁니까?" 그동안의 훈련에서도 휘두르기는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항목 중 하나였다. 말할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에 아무렇지 도 않은 듯 검을 휘두르는 보를레스를 기사는 만류했다. "멈춰. 그런 시시한 휘두르기는 이제 하지 않는다." "시시한?"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언제나 시시한 휘두르기로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청 년 기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기본이지만 지금부터 할 것이 좀더 네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끄덕.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보를레스. "네 생각대로 휘두르는 기본은 같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건을 달겠다. 예를 들면 1초에 두 번 휘두르기." 그리고 기사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나 쓰는 메트로놈(metronome)을 꺼냈다. 1분에 40번에서 240번까지 시계추 처럼 막대가 왔다갔다하며 음악의 정확한 속도를 알려주는 기계였다. 태엽을 감아서 사용하는 이 기계는 과학이 가 장 발달한 볼케아스의 수도에서만 만들어지는 제품이었으나 가장 소비하는 곳은 마법과 음악의 나라인 아스틴이었 다. 막대의 속도를 1분에 60번으로 맞춘 기사는 검을 들어서 자세를 잡고 빠르게 검을 내리쳤다. 츅! 츅! "이렇게 1초의 두 번 휘두른다. 휘두르는 각도는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 왠만하면 여러 각도로 휘둘렀으면 좋겠 군." 츅! 츅! "이렇게 말입니까?" 적어도 보를레스는 기사의 왕국, 엘시크의 기사단장에게 인정받은 솜씨였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 게 해내는 그에게 청년기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하는 군. 그렇게 10분 휘두른다." 가볍게 생각했던 보를레스의 예상을 뛰어넘어버린 한 마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2초 동안 5번 휘두른다. 역시 그렇게 10 분." 그냥 몇 천 번 내려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훈련을 하고 30분도 안 되서 뻗어버린 보를레스를 청년기사는 세차 게 걷어찼다. 그리고 이를 갈면서 노려보는 시선을 빙긋이 웃음으로 받으며 말했다. "아직 쉬면 곤란해. 연병장을 10바퀴 돌고 와서 다시 10분동안 휘두른다." 이것이 아침의 훈련이었다. 점심때는 3시간에 걸쳐서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덮어버린 육체적인 피로 와 정신적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더 풀어주느라 난리법석이었다. 보를레스는 시끄러운 그들의 모습에 오히려 정신적 인 스트레스가 쌓일 지경이었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해가 뉘엿뉘엿한 모습을 보일 때면 기사들과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의 종류도 달리기, 검 대련, 맨손 대련 등 가지가지라 어떻게 보면 일대 다수의 운동회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히 저녁 식사시간만 되면 100여명의 기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서 대련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단, 그 장관 속에서 죽어 가는 남자 가 자신이라는 게 보를레스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거기서는 피했어야 했는데‥." 목검으로 얻어맞아 붉게 불어져 나온 옆구리를 매만지며 보를레스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냥 상대 없이 휘두르기 만 하던 것에 비하면 대련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써도 만점이었다. 자기가 더 얻어맞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 정도만 해줘도 충분합니다. 이제 겨우 3일이오. 찰나에 휘두르는 방식을 배우자마자 실전에 쓰다니‥. 대단하다 는 말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요." "하지만 4일 밖에 남지 않았어요. 오늘이 지나면 3일인데‥.." 막 대련을 끝낸 여운 때문에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도 보를레스는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상대였던 기사도 꽤 힘겨 웠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자네는 너무 마크렌서 자작의 능력을 모르는 군. 그는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충분히 한 달이라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흐음‥." 생각하는 그의 몸체의 꼭대기, 즉 머리. 그보다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있으니 바로 시간조차 초월한 사 무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컬어지는 토클레우스 마크렌서 자작이다. 그는 아침까지 보를레스를 코치했던 기사에게 연 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만족스러웠다. "그 정도인가?" "지금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는 머리로 배우는 것은 평범하지만 몸의 습득 속도는 놀랍습니다. 게다가 힘든 연습을 즐길 수 있는 심성이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가보군. 즐거워 보여, 멜첼." 말하며 토클레우스는 빙그레 웃었다. 멜첼은 20대 초반 중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기사인 동시에 까다로운 성 격으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한테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보를레스는. "그런데 그들의 동정은 어떻습니까?" "걱정 말게. 용병왕이라는 친구는 겁쟁이거든. 남작 각하 덕분이기는 하지만. 실패를 의외로 염두에 두는 사람이라 서 우리가 대응하지 않는다고 쉽게 들어오진 못할 거야." "그럴까요?" "그럼. 이런 말이 있다네." "???" 궁금한 표정을 완연하게 드러낸 멜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토클레우스는 용병왕의 군대가 군집해있을 플로키 산을 바라보았다.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영리한 자가 신중하기는 쉽지만 그만큼 결정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들이 더욱 영리해지고 신중해지도록 하면 되겠군요?" 끄덕.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5) "신중해야 돼!"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에요?" 가만히 앉아서 환자들에 대한 약초를 정리하던 젠티아가 외치는 한 마디에 시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걸치고 있던 앞치마는 환자들의 피로 인하여 꽤 더럽혀졌지만 그녀(?)- 이제는 젠티아마저 헥갈리고 있다 -의 신비로운 분 위기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젠티아는 약초를 쓸 수 없는 부분을 골라내느라 칼을 들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하지만 시즈가 다가오자 얼굴을 붉히고 손을 얼른 등 뒤로 감췄는데 하지만 외모하고는 다르게 시 즈의 생체능력은 가히 엘프와 드워프를 함쳐 놓아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상상할 수 없는 동체 시력으로 포착 한 젠티아의 손가락에는 붕대가 마디마다 가득했다. 배시시‥. 젠티아는 시즈가 살포시 웃는 모습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손을 다친 거에요?" "아, 아니야!" "손을 다쳤어? 젠티아가? 뭘 하다가?" 정말 놀랍다는 듯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오자 젠티아는 다시 한 번 흠칫했다. 요즘 들어서 그가 가장 끔직스러워 하는 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시즈는 반겼다. "넬피엘!" "꺄아∼. 시즈, 근데 무슨 일이야? 젠티아를 상처 입힐려면 성투사가 10명 이상은 덤벼들어야 하는데‥." "그게‥." 시즈는 말을 흐리며 젠티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내. 저 사내가 과연 세 일피어론아드 중앙 동부를 호령하고 있는 글로디프리아의 성주 '값싼 남작'일지 의심스러웠다. 체면까지 내버리고 그의 애원이 있었지만 시즈는 그리 대단한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리를 하다가 손을 벤 모양이에요." "뭐!?" "‥‥." 세 사람이 침묵에 빠지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넬피엘은 검을 사용함에 있어서 대륙 최고라는 자가 요리하 다가 식칼에 손을 베었다는 사실에 어이없음을 느끼고 말이 없었고, 젠티아는 부끄러움에, 시즈는 갑자기 조용해진 두 사람을 긴장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꺄하하하하하하핫! 요리를 하다가! 요리를 하다가!" "우, 웃지마! 어‥, 이! 변태야!" "불가항력이야." 젠티아도 모르게 튀어나온 해제어에 역시 전과 같이 무서운 속도도 굳어버리는 넬피엘의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본 래 성격으로 돌아왔어도 웃음은 참기 힘든지 입가의 근육은 실룩이고 있었다. "검을 다시 배워야겠군, 젠티아. 이번에는 당신의 성음검 대신에 식칼을 잡고 해야겠지만‥ 후후‥. 왠만하면 네 사 랑스러운 아내에게 배워두라고. 그래야 사랑받지." "크윽!" "어쨌든 난 바쁘다. 저 쪽에서 다리 부러진 놈이 아프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거든. 아직 6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 는데 왜 저리 난리인지. " - 내 모습이 무엇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하네. 내 성격이 무엇인지도 난 기억하지 못하네‥. "그래서 가봐야 되요! 얼마나 아플까∼!" 호들갑을 떨며 사라지는 넬피엘. 그 때였다. 젠티아들의 간호를 도와주는 사내가 안색이 변해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임시 병원에서는 시즈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알려주지도 않았기 때문이지만 사람들은 시즈를 성녀님, 또는 그냥 아가씨라고 불렀다. "중앙군이, 로바메트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 막 뼈를 맞추던 넬피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긴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였지만 그 사례의 대상은 엄청난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는 사태도 몰고왔다. "크아아아아악!" "괜찮을까요? 비명이 엄청났는데‥." "호호홋! 괜찮아요. 멀쩡하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와 같이 넬피엘, 젠티아, 시즈의 머리 속에는 같은 말 한 마디가 가득 찼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시즈 일행을 병사들은 무릎을 꿇리려 했지만 로바메트는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백성들을 보살핀 자들이다. 귀족들이 할 일을 대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곳에서만큼은 귀족으로 대접해야지." "감사합니다." 심하게 구부러져 듣기 싫은 목소리. 중년 사내의 연기를 할 때의 평소 젠티아의 음성이었다. 사람들은 귀를 막느냐 고 그의 목소리가 약간은 부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넘겨버린다. 중년 사내와 함께 다른 두 여인도 고개를 숙였다. "으음‥." 로바메트는 미소를 지었다. "두 여인 모두 아름답군. 게다가 심성까지 아름다우니 내 아들놈한테 소개하고 싶을 정도야." "과찬이십니다." 수줍은 듯 소녀들(?)은 얼굴을 붉히고 미소지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심장이 떨려왔지만 정체 를 아는 젠티아는 기가 막힐 뿐이다. 게다가 역사의 고리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얼른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 불러주셔서 영광이기는 하오나 저희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용건을 빨리 말씀‥." "전하께 무슨 무례냐!?" 재빠르게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가 창대로 젠티아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우욱!" 앞으로 털썩 쓰러진 젠티아, 그는 무슨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똑똑하고 피가 새어나왔다. "아, 아저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발끈하고 넬피엘이 붉은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외쳤다. 그래봤자 안아주고 싶은 마음만 유발시킬 정도 밖에는 항 의가 되지 않았지만 로바메트는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자 날카롭게 타오르는 그의 눈빛에 넬 피엘은 도리어 움츠러들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6) "기사 님, 그대가 다리 하나가 잘려 저 곳에 누워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피를 흘리면서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중년 의사를 보면서 로바메트는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자가 의사라니‥. 아깝군. 저런 친구가 실베니아 중앙에 있었다면 나라가 이렇게‥.' 하지만 그런 내심과는 달리 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신나서 날뛰는 것은 젠티아를 후려쳤던 기사 뿐. "이 녀석이 그래도! 그냥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군." 퍽! 젠티아의 복부 깊숙이 박히는 발. 젠티아는 바닥을 구르며 신음성을 토했다. "크윽!" "그만하게. 그는 의사로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야!" 로바메트는 잠시 생각에 빠졌던 것을 자책했다. 눈앞의 의사같은 인물이 자신과 실베니아에는 매우 필요했다. 그런 사람을 저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그는 벌떡 일어섰다. 앉아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로바메트는 일어서니 엄청난 거구 였다. 처음 보았다면 그가 정치가라기보다는 기사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짝! 기사의 얼굴이 뒤통수만 보일만큼 완전히 돌아갔다. 하긴 2m가 넘는 거구의 거대한 손바닥에 맞았으니 당연했다. 기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뺨을 대린 로바메트는 손수 쓰러져있던 젠티아를 일으켰다. 젠티아가 그의 눈에서 광망같 은 불빛을 봤다고 느낀 순간 로바메트는 고개를 정중하게 숙였다. "내가 이렇게 사과하네. 너무 궁의 예법에 길들여진 친구니까 자네가 이해해주게." "아, 예." 의사행세를 하고 있지만 젠티아는 귀족, 공작이나 되는 자가 평민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 고 있었다. 눈이 부릅떠진 모습이 그는 정말로 놀라고 있었다. '장인 어른과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로바메트는 거구를 움직여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시즈에게 다가갔다. 신비로운 은발과 유리알 같은 눈동자‥.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정말 마음 속까지 비춰내는 듯한 눈동자로군. 내 마음이 그 눈동자처럼 투명하다면 좋겠지만‥." "과찬이십니다. 전하‥." "후후‥. 어쨌든 그대들을 부른 본론을 말하도록 하지. 그대들이 아무리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다지만 이 곳은 전 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병사들을 시켜 호위하고자 함일세." "하오나‥ 그러시지 않아도‥." "아니야.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은 내전일세. 한 국가의 국민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있는, 필요없는 전쟁이야. 난 그대들이 적아(摘芽)를 가리지 않고 이 나라의 백성을 보살피는 것에 감사하네. 사실은 우리 귀족과 기사들이 해 야할 일인데‥." "아닙니다‥." "우리의 일을 대신, 아니 더 뛰어나게 수행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네. 부디 내치지 말아주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군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품을 가져다가 써도 좋네." 엉겹결에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은 좀더 튕기다가 못 이기듯 허락해야 하는데 젠티아는 내심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바메트는 그런 시즈의 어리숙한 행복이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의심스러운 지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면서 그를 새심히 살펴보았다. 귀족들이 기본적으로 소리없이 걷는 법을 익한다는 걸 염두에 둘 때 현재 공작은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 때 귀족을 삶을 잠시 누렸던 시 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그의 발소리에 자신의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은발은 그렇다고 쳐도 유리 눈동자라‥ 정말 특이해. 성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야. 실례지만 아가씨의 이름이?" "네? 아, 아, 저‥." 시즈로서는 용건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물어오자 뼛속까지 당 황해버린 그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표정들과 이름, 생각을 모두 잊어버리고 허둥거렸다. 그러자 의아스러운 시선과 표정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얼굴이 빨개진 시즈는 겨우겨우 한 가지 이름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 아리에‥. 아리에 랑쉐르입니다." 겨우 이름을 말하는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기사들을 비롯한 남자들은 가슴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저렇게 순 진하다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로바메트는 순진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좋아요. 아리에 랑쉐르‥ 성그러운 그대의 마음과 이름,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여, 영광입니다." "아! 물론 붉은 머리 아가씨도!" 무사히 로바메트 공작과의 대담을 마치고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 그들의 등에는 한결같이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휴우‥."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뿜는 그들을 향해 천막의 입구를 지기고 있던 병사 사내가 작게 웃었다. "공작님은 언제나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시죠. 여러분도 당하신 모양이군요." "예,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하지만 좋은 분이랍니다. 일개 병사인 저조차도 쉽게 느낄 수 있지요. 이번 내전도 자신의 책임인양 미안해하시는 전하십니다. '값싼 남작'님도 백성을 위하기로 소문난 분이지만, 로바메트 공작님도 만만치 않으시죠."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 젠티아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다. 로바메트의 인덕이 뛰어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 게 직접 만나니‥. '정권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나라를 위해서 그렇다지만‥. 하지만 그 런 자가 왜!?' 젠티아는 주위를 살피며 두 소녀를 아무도 없는 숲으로 데려가자 넬피엘이 그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자 못참고 결국 한 마디를 하고야 마는 중년 의사. "어이! 변태!" 번쩍! 언제나 생글생글 웃던 소녀 넬피엘은 저 한 마디만 나오면 이름이라도 부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휘―하고 솟 아오른 마력의 바람에 휘날리고 번쩍거리는 빛을 눈에서 뿜어낸다. 젠티아가 '전격 변신!'이라고 칭하는 변화는 아 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본래 인격으로 변화를 마친 넬피엘.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여 젠티아의 부름에 의문을 표시했다. "?" "어땠어? 주문에 걸린 것 같아?" "지금은 풀렸어." "넬피엘, 네 녀석 말고 로바메트 공작 말이다." 그 말에 넬피엘은 젠티아에게 꿀밤을 맞으면서 무거운 분위기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긴장으로 성격이 급해진 젠 티아는 닦달을 했다. "이봐! 주문에 걸렸는지 않았는지만 말하면 되는데 뭘 그리 고민하는 거야?" "걸렸어. 걸렸는데‥." 뭔가 여운이 남는 대답이었다. 그의 말에 따라서 로바메트에 대한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젠티아와 시즈는 조용히 기다렸다. "너무 자연스러워." "자연스럽다고?" "그래. 마치 자기가 바랬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도 너처럼 스스로 주문을 받았단 말이야?" "그건 알 수 없지. 협박을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원해서 주문을 받아드렸는지‥. 아니라면‥ 상대의 마법이 그 의 의지를 완전히 뭉개버릴 정도로 강력하다거나‥." 젠티아와 시즈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말살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사는 현재까지 출현하지 않 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시즈가 물었다. "저기‥ 넬피엘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살포시 눈치를 살피며 물어오는 모습에 넬피엘은 빙긋 웃음이 솟았다. 자신이 주문을 걸었지만 시즈는 정말 소녀의 모습이 어울렸다. 명주실처럼 흘러내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흝어뜨리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정.도.라.면. 가능하지."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7) 로바메트 공작의 막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인(巨人)인 로바메트의 앞에는 한 사내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를 향해서 로바메트 공작이 물었다. "그대가 걱정한 사람들인가?"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배를 걷어차일 때도 중년의 의사는 검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나약했다. "여자들의 얼굴이 비슷하기는 하더군. 하지만‥ 놈들은 역사의 고리가 이 진영에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아. 무모할 정도로 자기를 들어낼 필요가 없어." 사내는 아직도 한 쪽 뺨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지 차분하게 의사의 모습을 회상했다. 악을 바 락바락 지르며 덤벼들 것 같은 모습. 뭔가 마음 속으로 걸린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그렇기도 하군. 헌데‥." "헌데?" 물끄러미‥ 로바메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여자들도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나?" "이 곳이지?" 검다하기 보다는 푸르다는 표현이 어울릴 맑은 밤이었다. 흐릿한 잔영(殘影)의 도움을 얻어 모습을 가린 채 데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 곳 어딘가에 시즈가‥." 용병으로써 몇 번의 내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아리에는 대답하는 도중에도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산적들에 게 얻은 정보대로 성녀(聖女)가 머문다는 병영까지 무사하게 오기까지 그녀의 심혈(心血)에 가까운 노력이 깔려있었 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 성녀가 시즈가 틀림없을까?" 데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았을 때 시즈는 분위기가 신비롭기는 했지만 여자로 보일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니 넬피엘의 존재를 모르는 일행으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틀림없어." 잠자고 있던 파마리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평생의 적수라도 맞이한 듯 긴장하여 이마에서 등까지 식은땀 투성 이였다.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여 다가가는 블리세미트에게 고개를 저은 파마리나는 시즈를 비롯한 젠티아들 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막사를 노려보았다. "난 세상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진짜 마녀야. 그래서 느낄 수 있다고! 대기 자체를 휘어잡고 있는 강대한 기운 을‥." "들어가죠." 결심을 한 여인들과 한 소년이 시즈들이 쉬고 있는 천막을 향해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던 넬피엘이 움찔하고 눈을 뜨자 젠티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 다가온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한 둘인가?" 넬피엘은 대답 대신 날카롭게 젠티아를 째려보았다. '그런 말뜻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라는 의미의 행동에는 살 기가 엉성하게 갈무리되었기에 젠티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을 고쳤다. "하하하‥. 그렇게 볼 필요 없잖아. 저 발걸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내가 마중가도록 하지." "저도 함께 가도록 하지요." 시즈가 빙그레 웃었다. 땅의 음유술사인 젠티아가 땅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고동으로 상대를 알아채듯 그도 친근한 사람에게서 불어오는 바람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쳇. 전장에 여자들이나 데려오는 건가?" "아릴은 전장을 안 돌았을 것 같나? 널 찾기 위해서 그 아이는 세상의 오지(奧地)라는 오지는 다 돌아다녔다. 너처 럼 오랫동안 여자를 혼자 놔두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야." "‥‥. 알았으니까 나가봐." 신경쓰이지 않는 듯 넬피엘은 다시금 명상에 빠졌지만 젠티아는 잠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눈을 감은 것은 흔들리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런 넬피엘을 보며 젠티아의 머리 속에는 어딘가를 추억과 함께 떠돌며 넬피엘을 찾고 있을 소녀를 떠올렸다. '둘 다 고생이구나‥.' 넬피엘, 아릴. 불과 물의 음유술사. 그래서 이렇게 이루어지기 힘든지도 몰랐다. "그럼 우리는 나갔다가 오지." 젠티아와 시즈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무렵, 갑자기 넬피엘의 윤곽이 어둠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넬피엘이 사라졌다면 사내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 걸어나왔다고 할까.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지 못하고 넘치는 왈칵 하고 튀어나온 사내는 주위를 신경질적으로 살폈다. "확실히 의심스럽군. 모두! 방금 전에 나간 의사와 성녀를 쫓아라." 사내는 로바메트 직속의 정보 수집과 암살을 주일로 하는 부대를 이끄는 자였다. 물론 역사의 고리 영향도 받고 있 었지만‥. 이번에 성녀 일행에 대한 의혹을 드러낸 쪽이 역사의 고리가 아닌 로바메트라는데 의아심이 들었는데 왜 그가 실베니아를 좌지우지하는 공작인지 알게 된 느낌이었다. "‥‥."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군기(軍氣)가 빠졌다는 생각을 하며 막사의 천을 걷고 나온 순간 그는 온몸이 서늘해졌다. '없다. 아무런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거의 10명에 가깝게 데려왔던 대원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대원들이 사내을 속일 정도로 능력이 좋은 어쌔신이었다면 이때껏 대장이라는 지위를 그가 맡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은 길지 않았다. 의심을 만들어낸 원흉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달빛 아래 휘날리는 검붉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지그시 사내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 "넌‥." 희미한 표정. 그러나 분명한 게 있었다. 붉은 입술이 그리는 곡선은 미소였다. 아름답지만 도망치고 싶을 만큼 섬뜩 한 살기를 담은‥. '뭐야? 방금 전 막사 안에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하늘을 뒤덮는 듯한 엄청난 존재감. 세상을 메운 어둠까지 적발의 소녀가 내뿜는 살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후 들후들 떨려오는 하반신에 그 최상위에 얹혀있는 머리는 빨리 판단을 내렸다. '도망쳐야해!'라고. 타탓! 보통 때라면 작은 기척이라고 느꼈던 소리였다. 하지만 현재 사내는 '내가 박차는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하 고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그를 유령처럼 따라잡은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사내가 검자루를 잡는 순간. 화르르륵! 하고 상대는 양손에서 사람 머리 만한 불꽃을 피어 올리더니 손뼉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부딪쳤다. 불꽃은 산산이 조각났지만 그로 인해 갑자기 밝아진 섬광은 사내는 시야를 가렸다. "크아아악!" "‥‥. 시즈, 젠티아. 둘다 멀었군. 연인의 기척을 알아보되 적의 기척을 모르다니‥." 자신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불씨들을 잠시 바라보던 넬피엘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뭔가 그리운 것을 생각하는 듯 애수에 찬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8) "데린, 피해요!" 아리에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이미 화살을 장착한 채 데린의 미간을 겨냥한 석궁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채비만을 남겨두고 있었으니까. "핫!" 그러나 데린의 입장에서는 늦었다고 해도 몸이 재빠른 블리세미트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쩜 아리에는 데린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람처럼 블리세미트는 석궁을 쥐고 있는 상대의 팔 을 향해 발차기를 시도했다. 화악!하고 발보다 바람이 먼저 사내의 팔꿈치를 엄습했다. 하지만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사내. 복면으로 가린 모습에서 수상함이 마구마구 풍겨 나왔다. "뒤를 조심해." 이번에는 파마리나의 외침이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파마리나가 쏘아보낸 마법의 화살에 꿰여 털썩하고 쓰러지는 복면인이 보였다. "도대체 왜 나만 노리는 거야!" 화가 나서 데린이 오리처럼 꽥하고 소리질렀다. 그 순간, 아리에는 잠시 복면인들이 빙그레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젤 약하잖아.' "데린, 네가 젤 약해빠져서 그래." 파마리나는 데린의 가슴에 침 튀기는 못을 박으며 나무를 축으로 휙 돌았다. 그녀의 남겨진 그림자에 단도들이 후 두둑하고 와서 박혔다. '갑자기 공격을 해오다니‥. 이유가 뭐지?' 블리세미트는 데린을 붙잡고 땅바닥을 굴러 복면인의 검을 피하면서 내심 의문을 던졌다. 자신들이 수상하기는 했 지만 이토록 다짜고짜 공격을 할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옷이 참 더러워 지겠는 걸! 젠티아님을 만난다고 데린님, 꽤나 단장을 하셨더만‥. 헛!' 보통 방심은 실수를 부른다고 한다. 그 말은 틀린 게 아니지만 방심의 댓가인 실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목숨이 될지도 모르는 실수의 댓가였다. 땅을 구르고 나자 앞뒤에서 복면인들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방심하지 않았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옷이 더러워지더라도 한 번 더 구를 걸 하는 후회와 함께 두 개의 검이 내려치고 옆을 갈라왔다. "약간 다치더라도 참아주세요, 데린님." 허락은 별로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발로 데린을 걷어찬 블리세미트는 신성력을 양팔에 집중했다. 안개처럼 흰색 의 기운이 팔뚝에서 피어올랐다. 방어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보편적인 것 중에는 공격을 하나하나 막으려고 하는 것과 공격을 사전에 공격이 아니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 제대로 배운 무투가라면 두 방법을 한꺼번에 사용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래야 효율성이 높고 일대 다수와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리세미트는 제.대.로. 교육받은 대로 뒤의 공격을 피하면서 앞의 복면인을 향해 다이빙하듯 몸을 날렸다. '공격은 타이밍이다! 방어도 타이밍이다!' 예상을 벗어난 움직임은 타이밍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든다. 블리세미트는 두 팔을 교차시켜 그대로 내리치고 있는 검에 밀어붙였다. 촥! 피가 튀었다. 하지만 팔이 잘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이밍을 제외하고서라도 마지막 '사막의 신부'가 발휘한 성투결계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블리세미트가 불만스러워할 정도로‥. '성투결계를 잘랐어‥.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지?' 이제 겨우 두 세명을 쓰러뜨렸을 뿐 아직도 몇 명이나 남아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일행은 한 곳으로 몰리 고 있었다. 아리에가 위기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 데린은 다른 세 사람의 가운데 껴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였다. "흐아아악!" "윽!" ‥‥ "으억!" 짧은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소리. 당하는 상대가 약간의 반항을 하는지 시끄러운 인기척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그 것도 찰나. "큭! 으‥." 곧 비명과 신음이 뒤를 이었다. 블리세미트는 갑자기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군에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 리 여자고, 자신이 어리기는 하지만 아리에는 단검의 명수고, 자신은 성투결계까지 익힌 성직자, 게다가 희대의 마 법사인 마녀까지 있었다. 그런 자신들을 위기로 몰아넣던 복면인들을 1분 정도의 시간에 10 명 이상 죽여버렸다. 적 인지 아군인지 확실하지 않으니 공포심이 마음을 채우는 게 당연했다. "앗!" 아리에는 뭔가를 발견한 듯 탄성을 질렀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은색의 실타래.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 "크아아아악!" "시즈!?" 그녀는 달려갔다. 옆에서 단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머리 속에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은색의 물결만 이 가득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은발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눈동자.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여자!?" 함께 달려가던 사람들은 죄다 굳어버렸다.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모습의 소녀.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에가 기대했던 시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그들의 반응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저, 저기‥." 목소리도 영낙없는 소녀의 목소리. 그것도 뼈까지 녹을 듯한 나긋나긋함이 솔솔 풍겼다. 헤∼하고 벌어지는 블리세 미트의 입. 파마리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조용히 무리하고 있는 소년의 턱을 닫아주었다. "주‥ 죽어라." 모두가 돌이 되어버린 그 자리. 아직 살아있는 복면인이 침묵을 깼다. 석궁은 어느 새 은발의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 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9) 팍! 팍! 팍! "윽! 윽! 컥!"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등에 3발의 화살이 와서 박힌 까닭이다. 부르르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팔은 털썩하고 땅에 떨궈졌다. "바보 녀석. 전장에서 방심하면 다가오는 것은 죽음 뿐이야." 수풀을 헤치고 풀잎을 털면서 걸어나온 사내. 데린은 그의 목소리에 왈칵 눈물을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가까이 다가온 젠티아의 모습에 그녀는 대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게 뭐에요?" 어떻게 변장을 했는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주름살.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머리카락. 것도 모자라서 온몸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서슬이 푸른 그녀의 어조에 젠티아는 시무룩했다. "소리 없이 죽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도대체 뭐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리는 방법 없었어요?" "그렇다고 성을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뛰쳐나오도록 마크렌서가 나뒀단 말야? 내 돌아가면 당장!" "됐어요. 그나저나 저 소녀는 누구죠? 설마‥ 바람을 핀 건 아니겠죠?" 새침하게 날카로워진 데린의 시선. 움찔하는 시즈를 바라보며 젠티아는 껄걸 웃었다. "저 녀석, 시즈잖아." "에!?" 동그랗게 떠진 눈. 누구 눈이 가장 클까? 정답은 아리에였다. 주위의 반응에 완전히 주룩이 든 시즈의 은발을 젠티 아는 한껏 흐트러뜨렸다. "잘 어울리지? 넬피엘이 마법을 써서 좀 여자처럼 만들어놨지. 하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여장이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넬피엘!? 그 사람이 시즈를 저 모양으로 만든 건가요? 당신도? 도대체 누구죠?" 스윽! "내가 넬피엘이다." 블리세미트는 언제 솟았는지 모르는 존재가 등뒤에서 목소리를 내자 깜짝 놀랐다. 뒤에는 자신과 키가 비슷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담담한 눈으로 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동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다. 로바메트가 눈치를 챘어." "역시 그렇군요. 이 복면인들은 아리에들을 저희 동료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시즈의 말을 들은 젠티아는 쓰러져있는 한 복면인의 두건을 벗겼다. "이 놈이 대장인가?" 그는 마지막까지 죽지 않았던 자였다. 눈을 부릅뜬 채 시즈가 있던 방향을 노려보는 모습이 섬뜩했다. 유심히 시체 를 바라보던 젠티아가 혀를 찼다. "쯧쯧‥." "아는 자입니까?" "기억 안나? '공작님은 언제나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시죠. 여러분도 당하신 모양이군요.'" "아!" 시즈의 뇌리에 로바메트의 막사를 지키던 상냥한 인상의 병사가 스쳤다. 충격을 받은 듯 시즈가 말을 잊지 못하자 젠티아는 어깨를 두들겼다. "전쟁과 정치의 음모는 더 치밀해.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으면 안되지." "토론은 그만하고 움직여야 해. 시간이 없다. 로바메트가 눈치를 챘지만 역사의 고리는 움직이지 않을 걸로 보아서 정보의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전에 우선 시즈의 모습부터 원래대로 돌려줘요." 아리에가 입을 삐죽거리며 넬피엘에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자신보다도 아름답게 보이는 시즈의 모습이 불만스러웠 으리라. 순간이지만 넬피엘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닮았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아담한 입술이 옛날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던 소녀와 겹쳐 보였다. "그러지. ‥빛이여‥. 장난스러운 춤을 멈춰라‥." 파아아앗! 넬피엘의 주문에 시즈는 빛에 휩싸였다. 볼록했던 가슴은 사라졌고 여성스러운 몸매도 마르긴 했지만 원래의 남성 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입술의 붉기가 조금 옅어졌고 순진한 느낌이 나던 커다란 눈은 평범하지만 현기가 도는 눈이 되었다. 그 과정을 아리에는 뭐 하나 빼놓은 게 없는지 감시하듯 바라보았다. "근데 왜 머리카락은 그대로지요?" "그건 머리카락을 빨리 자라게 한 것 뿐이다. 원래는 생명력을 좀 사용하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는 마법인데 에 릭사로 생명력이 무한한 괴물한테는 얼마든지 써도 괜찮다." 아리에는 어줍잖은 미소를 짓는 '괴물'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곤란해한다고 생각한 시즈가 말했다. "넬피엘, 머리가 기니까 상당히 거추장스러운데 좀 깔끔하게 해줘요. 젠티아 정도로‥." "뜻대로. 염(炎)!!" 넬피엘의 간결한 단발성과 함께 시즈의 머리카락에서는 불이 피어 오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놀라서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보통 머리카락은 불에 타면 보기 흉한 그을음과 함께 끝부분이 뭉칠 텐데 시즈의 머리는 깔끔했다. 약간 덥수룩하기는 하지만 이발사가 자른 것처럼 깔끔한 솜씨에 시즈는 감탄했 다. "대단하군요. 넬피엘이 이발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블리세미트는 산뜻한 시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붉은 뱀의 사원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머 리를 다듬지 않아서 뒷통수의 머리카락 이리 삐쭉 저리 삐죽 목을 찔러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칭찬이 싫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넬피엘을 젠티아는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헬 파이어를 이발하는데 사용하다니 마법사들이 알면 당장 이발사가 되고 싶겠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어서 가자." "잠깐만요." 출발을 다시 훼방놓는 목소리에 넬피엘은 짜증이 났다. "뭐야?" "아‥ 그게 당신, 남자죠? 원래 모습으로 안 돌아갈 건가요?" 넬피엘의 얼굴이 급속도로 찌그러졌다. 시즈와 젠티아를 제외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은 자신을 약간 괴 상한 취미를 가진 청년으로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대답하기도 싫다는 양 그는 버럭하고 뒤로 돌아서 뚜벅뚜벅 걸음 을 옮겼다. 어리둥절한 일행에게 젠티아는 낄낄대며 말했다. "저 녀석은 저게 원래 모습이야." 일행은 출발하는데 좀더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아리에들이 완전히 굳어버렸으니까.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10) 로바베트의 막사 주위는 수많은 병사들이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경계하고 있었다. 어찌나 삼엄한지 보통 바늘이라 면 몰라도 사람만한 바늘로는 들어가는 틈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무 뒤에서 쑤서볼 틈을 찾던 바늘 중 가장 커다란 것이 말했다. "이거야 원‥. 이래가지고는 쉽게 들어가기는 무리겠는 걸." "어렵게 들어갈 수 있을 지도 의심스러운데요!?" "음‥. 우선 여자들과 어린애는 남아있어." 그 말의 대상들은 반발했다. "여자라고 차별하는 건가요?" "어린애라는 말 취소해주십시오." 아리에의 눈이 날카로워졌고, 블리세미트는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폈다. 젠티아와 두 사람의 대결양상을 종결시킨 자는 넬피엘이었다. "시끄러워." 그의 담담한 한 마디는 엄청나게 두꺼운 자물쇠라도 달아주는 양 아리에와 블리세미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여자, 어린애라고 차별하는 게 아니다. 너희가 약하니까 차별하는 거야. 죽기 싫으면 젠티아가 시키는 대로 해." 사실 넬피엘은 목소리는 젠티아, 심지어는 시즈의 목소리보다도 가늘다. 하지만 망설임이나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 었다. 차갑게 얼어붙는 음성은 상대의 입술을 무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할 말이 남아있다면 넬피엘은 지그 시 노려본다. 그러면 그가 원하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 알았어요." 아리에는 구원을 청하듯 파마리나를 돌아보았지만 무서울 것 없다는 마녀는 넬피엘에게서 은연중 풍겨 나오는 마력 에 기가 질린 상태였다. 물론 시즈와 젠티아도 굉장했지만 그들은 마나mama에 가까운 상태로 상대를 편안하게 만 들어주는 에너지였다. 그에 비해서 이 가시돋힌 미소년은 공포를 조장하는 마력(魔力)이었다. 파마리나마저 바들바들 떨고 있자 아리에는 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시즈가 다가와 살며시 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돌아올게." "응‥." "젠티아, 이번에도 연락두절이면 난 자살해버릴 줄 알아요." "아하하핫‥! 제발 그것만은 그만 둬. 내가 돌아와서 사랑스런 아내가 없으면 나도 자살해버릴지 몰라." 재회가 얼마나 되지 않았는데 다시 떨어져야 하자 아리에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한 달 동안 얼마나 마음이 망가 졌는지 또 다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그만 간다. 여자들은 수도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 정도가면 폐가가 있다. 거기서 기다려라.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데린은 이때껏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들 중에는 뛰어난 기사도 있고 전략가도 있고, 거짓말쟁이도 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확실하게 믿음을 주는 음성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의심은 허용치 않을 만큼 확고한 의지가 입 술에서 풍겨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귀엽게 생긴 입술에서‥.' 아리에와 데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넬피엘은 몸을 날렸고 바로 뒤를 이어 젠티아가, 그 리고 마지막으로 걱정스럽게 아리에를 바라보던 시즈가 등을 돌렸다. 그들이 멀어져 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리세미트가 걸음을 떼지 못하는 데린에게 말했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우리는 그가 말한 폐가로 가서 준비를 하자." 우선 검은 색으로 온 몸을 감싼 넬피엘 외 두 사람은 두건이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잘 고정을 하고 주위를 살폈다. 막사 사이마다 두 세 사람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젠티아가 검을 소리나지 않게 뽑자 시즈가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바람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의지에 따라서 등뒤의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제대로 말뚝을 박아놓지 않은 막사의 천이 펄럭이며 솟아올랐고 막사 꼭대기에 달린 깃발도 쉬지 않고 몸을 털어댔다. "이거 참! 갑자기 왠 돌풍이지? 큭!" 가느다란 은빛의 실. 병사는 천막에서 흩날린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려는 순간 은실은 먹이를 찾은 뱀처럼 사내의 심장으로 파고 들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는 귀가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신음소리를 놓치지 않았던 주의력은 그에게 있어서 불행을 암시했다. "허억!" 여자아이처럼 희고 가냘픈 팔이 병사의 고개를 고정시켰다.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모아야 했지만 가느다란 손가락 은 깊숙이 들어와 턱을 잡았다. 빠직! 우두두둑! 아래턱을 빼는 게 먼저였고 그 다음이 위턱을 잡고 목을 돌려버린 순서였다. 뼈 소리만 냈을 뿐 사내는 비명도 지 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부러지는 소리가 약간 컸지만 병사들은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와 착각할 것이다. "소멸의 의지여‥ 나의 손 안에서 피어나라." 먼지도 없이 시체의 흔적을 없앤 넬피엘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 은 팍!하고 사라졌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1) "이상하군. 분명히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는 자리에 뒤늦게 나타난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고개를 갸우뚱거리 는 그에게 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온 동료가 말했다. "착각이라니까." "‥그런가? 그런데 여기 담당은 어디갔지?" "볼 일이라도 해결하러 갔겠지. 자네가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어. 어서 가서 모닥불이나 쬐자고. 요즘 날씨는 낮에는 더워도 밤에는 으스스하다니까. 이런 곳에서 감기라도 걸렸다가는 전장에서 화살받이로 이용될 게 뻔해." "흠‥."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면서도 화살받이라는 말에 혹시나 걸릴지 모를 감기를 모닥불로 쫓아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동료의 말을 따랐다. 그들의 인기척이 멀리 사라지자 옆의 천막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고 낮은 목소리가 뒤엉키더니 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젠티아가 굴러 나왔다. "윽! 무, 무슨 짓이야?" "달라붙지마. 징그러워." "징그러운 것은 너라고. 그 얼굴에 남자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꿈틀. 넬피엘의 뚜렷한 눈썹이 한순간 지렁이처러 꿈틀거렸다. 그에게서 생명위험의 징조를 발견한 젠티아는 얼른 시즈의 뒤로 붙었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가 '바람의 노래를 부르는 이'에게 약한 것은 당연지사. 그의 예상대로 분을 억 지로 삯인 넬피엘은 자신과 시즈에게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리는 소년. 소외당한 젠티아가 황급히 물었다. "자, 잠깐! 나는!?" "능력껏!" 쉬익! 어둠 속에서는 시야에 잡히지도 않을 빠르기로 넬피엘은 움직였다. 시즈도 엘릭사의 생명력을 기본 삼아 처지지 않 고 뒤를 따랐다. 넬피엘이 시전한 경량화 마법은 예전 보를레스와의 대련에서 그가 사용했던 것과 비교해 몸에 부 담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헉! 헉! 같이 가!" 몸의 능력만으로 마법까지 걸고 있는 두 사람의 뒤에 바짝 붙어있는 젠티아. 왜 그가 대륙 제일의 기사라고 불리는 지 시즈는 실감했다. "여기다." 순식간이었다. 낮에 보았던 로바메트의 막사에 도착한 것은. "헥헥! 날 죽여라." 핏발까지 돋은 젠티아의 눈빛을 가볍게 외면하며 넬피엘은 시즈에게 말했다. "너무 쉽군. 녀석들도 없어." 끄덕. 이제는 옛 친구들을 만남으로 해서 많이 없어졌지만 시즈의 끄덕이는 버릇은 여전했다. 투명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 달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다. 이름높은 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뇌도 일국(一國)의 수장(首將)에 대한 호위가 너무 허술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이 진영 안에 없다." 무슨 소리냐는 듯 넬피엘이 젠티아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숨을 안정시켰는지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값싼 남작'은 땅을 발로 차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바스티너 같은 이질적인 기척은 멀리서도 알 수 있지. 하지만 느낄 수 없어." "기척을 숨길 줄 아는 게 아닐까요?" "글쎄. 나무 위에라도 올라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땅을 밞고 있는 한 적어도 내게서 벗어날 수는 없어. 자연은 이질 적인 것에 민감하지." "그렇다면 지금 막사 안에 있는 사람이 로바메트가 확실한가?"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와 비슷한 몸체를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이 곳의 병사들 중에도 얼마든 지 있겠지." "그렇다면 넌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군." "어이어이! 어떻게 말이 그렇게 해석되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넬피엘은 젠티아를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그가 무슨 말을 물을지 이미 알고 있는 시즈는 대답했다. "숨소리는 자고 있는 자가 분명해요. 매우 고르고 얕습니다. 숙련된 무투가나 기사가 숨을 죽인다고 해도 이토록 자 연스럽기는 힘듭니다." "그렇군. 어쨌든 확인해야 한다. 저 앞의 경비는 귀찮을지 모르니 내가 죽인다. 그 사이 들어가라. 빠르게." "제가 하지요. 소리가 나면 곤란하니까요." "할 수 있겠나?" 시즈는 피식 웃었다. 용병일을 하면서 사람을 한 두 번 죽인 게 아니었다. 살인기술의 종류만 따질 때 넬피엘은 그 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를 찌를 것 같이 기다란 예도는 믿음직한 동반자였다. 스륵! 신호는 필요없었다. 시즈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젠티아와 넬피엘의 모습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바람이여‥. 길을 비키라. 나의 의지가 나아갈 길을‥.' "핫!" 막사의 입구에 서있던 두 경비병은 시즈가 내는 작은 기합성을 들었다. 그러나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몸이 마음대로 따르지 않았다. '어라! 저 친구의 팔에 난 흉터는 나와 똑같군.' 동류의식을 느낀 사람에게 말도 한 번 걸어보지 못하고 피식 미소지으며 그는 죽어갔다. 사내의 몸은 목이 떨어져 나간 후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쓰러졌다. 옆의 경비병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한 번에 목이 잘렸으니까. "후우‥." 시즈는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검이 지나갈 공간을 바람의 의지로 하여금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진공상태에서 물질 의 에너지는 저항없이 100%를 발휘하게 되고 시즈의 검은 강철도 가볍게 벨 수 있는 빠르기를 가지게 된다. 막을 수 없는 절대의 검술이었다. 이와 같은 무서운 힘이 시즈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중요했으므로 내색하지 않고 막사로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위험해!"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2) 젠티아는 안겨 바닥을 뒹굴면서도 시즈는 의아했다. 그는 아무런 공격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서있던 자리에는 작은 입새처럼 생긴 암기가 대여섯 개나 박혀있었다. 통상적으로 생물이 움직이게 되면 공기에 파장이 일어나는 게 당연했다. 전투에 대한 경험이 미천했던 시즈가 뛰어 난 용병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이점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주위에 펼쳐진 바람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없었다. 더욱이 암기가 공기를 가른다면 당연히 파공(破空)이 일게 분명했는데도 말이다. "조심해라. 기척을 느낄 수가 없어. 게다가 발의 고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젠티아는 이마에서 뺨으로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어떤 자이기에 마법과 검술에 있어 최고라 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토록 궁지로 몰아넣을까. 어둠은 암습자에게 있어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어둠의 암습자는 넬피엘이나 젠티아 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자가 분명했다. 시즈의 판단에 잡히는 자들은 한 부 류 뿐이었다. '역사의 고리인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쉽게 느꼈다. 가만히 있는 대도 공격이 없는 걸로 보아서 상대의 목적은 자신들을 제압하기보다는 시간을 끄는 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성급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현재 젠티아는 상대가 공격할 때의 미세한 살기를 감지했고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이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즈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눈동자는 주위를 쉴 새 없이 돌아보고 혀는 침이 말라 까칠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강하게 강타했을 때 빠르게 젠티아에게 다가가갔다. "젠티아, 넬피엘과 나가요!" 젠티아는 의아했지만 시즈의 말대로 넬피엘을 잡고 몸을 날렸다. 연약해 보이는 은발의 청년은 적어도 바람의 음유 술사였다. 게다가 현자로서 이름 높던 '마땅찮은 시즈'. 무슨 방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젠티아가 몸을 날리는 순간 믿음직스러운 바람의 음유술사는 강한 기합성을 발했다. 동시에 그의 주위에서 세찬 강 풍이 일어났다. '그쪽에서 바람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거슬리게 바람을 내보내겠어!' 시즈는 해동도예의 발도법에 따라 번개같이 예도를 뺐다. 그 속도에 검집이 벌의 날개처럼 우웅하고 진동했다. 캉! 캉! 핑그르르하고 공중에서 손가락만한 단도가 돌고 있었다. 그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말해준다. 이미 젠티아와 넬피엘은 바람에 떠오른 천막의 틈을 통해 나간 상태. 시즈는 꺼릴 게 없었다. "크윽!" 바람의 칼날이 막사를 온통 난도질했다. "거기냐?" 빠르기로 치자면 누구한테라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시즈였다. 그는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목표에게 다가섰다. "과연 시즈 세이서스. 만만치 않군."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자 시즈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밤에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부끄럽잖아." 검과 암기가 교차하는 삶과 죽음에 갈림길에서 이렇게 농담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사람. 노르벨이 아니라면 누가 그 러겠는가. 넬피엘이 휘둘렀던 현자의 검에 맞아 완전히 묵사발이 되었던 그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시즈가 섭섭 할 만큼. 노르벨은 얻어맞았던 한 달 전이 생생히 떠오르는지 몸을 비비꼬며 말했다. "아아‥. 세로스 씨가 날린 일격은 내 몸 깊숙이, 뼛속까지 각인되었어. 이번에 보답을 해주고 싶었는데‥." 매저키스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살기로 가득 찬 눈빛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몸 떨리는 한기에 대응할 생각하지 않 고 시즈는 신중하게 숨을 골랐다. 노르벨과 대결해본 일은 없지만 잠시나마 젠티아와 넬피엘을 잡아둔 것으로도 그 능력은 자신을 능가하리라 생각했다. 노르벨은 시즈의 전투 태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넬피엘들이 떠난 방향으로 한 눈을 팔았다. 시즈로서는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유인? 아니면 허점?' 만약 시즈가 노르벨이 머리 속이 정신이상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산만하다는 걸 알았다면 당장 공격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는 고민할 바에야 노르벨과 진지하게 싸우는 쪽을 택했다. "엄청난 투기로군. 얼마 전까지 학자였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서 그런가?" "‥‥." "할 수 없지 세로스씨한테는 다음 번에 빚을 갚기로 할까? 너랑 노는 것도 그리 심심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 아‥ 시작하자고! 암습이 아니라 검을 다루는 자로서, 제대로!" 눈과 눈이 마주보고 검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구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달은 밝았다. 상대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까지 확인이 될 정도로. 시즈의 동공은 터질 듯이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을 따라서 철렁거렸다. 그에 비해 노르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 그저 무심해 보 였다. 긴장에 견디지 못한 시즈의 호흡이 한 번 어긋났다. 그 때문일까? 눈에 안개가 낀 것처럼 그는 노르벨의 모습이 흐 릿해졌다고 느꼈다. '놓쳤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시즈는 바닥을 굴렀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 은발의 실들이 허공에 깃털 처럼 풀풀 날렸다. 위기 후에는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투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 번의 위기 뒤에는 보통 또 한 번의 위기가 오기 마련이다. 콰앙! 검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이토록 거대하고 묵직할까. 시즈는 소리만큼이나 거대하고 묵직한 충격에 손이 저렸다. "잘 막았어. 칭찬해주지." 노르벨의 칭찬을 시즈는 받아드렸다. 왜냐하면 막지 못했다면 그의 하반신은 상반신과 영원히 이별해야 했기 때문 이다. 두 번째 공격이 막히자 노르벨은 아무 미련없이 뒤로 물러섰다. "한 호흡이 늦었는데도 막아내다니‥. 진지하게 해볼만하군." 그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급속히 다가왔다. "거기에서 뭘 하는 거, 컥!" 촤악! 사내는 불쌍하게도 한 마디의 말조차 끝맺지 못했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 쓱했다. "이런! 김 빠지네. '마땅찮은 시즈.' 자리를 옮기지. 여기에서는 마음껏 싸울 수가 없겠어."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3) 넬피엘은 곤란함을 느꼈다. 시즈의 도움으로 막사 안에서 탈출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로바메트를 찾는단 말인가. 능 구렁이 같은 로바메트는 음유술사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함정을 만들어 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벌써 이 곳 을 벗어났겠지. "넬피엘, 따라와." "어디로 가는 거야?" 젠티아는 대답도 없이 움직였다. 그는 부대의 참모가 쉬는 막사를 찾아 다짜고짜 들어갔다. "허억! 당신 누구야?" 대답이 없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 다만 여러 가지 구타음이 터졌고 가끔씩 관절기도 쓰는지 뼛소리도 요란했다. 그 런 와중에도 입은 막았는지 신음 소리는 크지 않았다. 잠시 후 손을 툭툭 털고 나온 젠티아를 보며 넬피엘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화풀이냐?" "난 엄연하게 고문을 한 거야. 그리고 로바메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지. 그는 수도로 향했어. 이런 건 군사일에 통달한 내게 맞기라고!" "고문!?" "대답하기 싫어진다." "전장을 그대로 놔두고 자신만 몸을 피했다?" "현재 중앙군을 지탱하는 사람은 오직 로바메트 뿐이야. 조심하는 게 당연하지." "네 말이 맞다면 그는 지금 피난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데린과의 약속 장소로 달려가던 젠티아의 다리가 우뚝 섰다. 그리고 서슬 푸르게 뒤로 돌아서며 고함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피난 준비를 한다고!? 로바메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 그는 네가 생각했던 사람과 다르지 않나. 암시 때문에 로바메트가 정상이 아님은 네가 더 잘 알 거다. 그는 군량이 부족한 북부, 반란군에 비해 식량이 풍부한 남부를 차지하고 있어. 처음부터 항복했다면 몰라도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시간을 끈다. 그게 로바메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다." 젠티아는 다급해졌다. 모르면 모르되 소멸의 불꽃과 함께 전승된 '불꽃의 춤을 추는 이'의 지식은 학자로서의 시즈 세이서스에 떨어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가 아무리 넬피엘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래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실베니아는 그 피해를 회복하는데 향후 10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그 동안에 용병국에서 기회를 틈나 공격한다면 저항은 무모한 선택일 뿐이다. 어서 막아야 돼." 후두둑! 노르벨이 한 번 팔을 털자 암기가 마구 쏟아졌다. 사람의 몸에 그토록 많은 암기가 들어갈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 이었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군. 보통 때라면 벌써 죽여버렸을 텐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암습했다면‥." "전 피할 수 없겠죠." 시즈가 순순히 인정하자 노르벨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하하하하하! 사람 한 번 좋군. 흐흐! 그럼 아까의 흥분되었던 대결을 다시 이어볼까?" "‥‥." 우웅! 투기에 공명하듯 검집이 울며 예도가 빠져나왔다. 그러나 검은 얼마가지 못하고 막혔다. 노르벨의 브로드 소 드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검신이 넓어서 예도의 강한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더욱이 노르벨의 빠른 대응으로 끝 까지 시즈의 공격이 펼쳐지지 않은 영향도 있었다. "너무 공격이 정형화되어 있어. 맨날 같은 공격을 하나?" "후우‥." 시즈는 숨을 길게 내뿜었다. 이렇게 실력 차가 분명한 상대를 맞이해서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둘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오직 상대의 눈과 검을 주시했다. 시즈는 오른손잡이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두르는 검이 훨씬 빠르고 강했다. 노르벨은 곰의 앞발이 후려치는 듯한 충격에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시즈의 발움직임은 그런 노르벨을 금새 따라잡았고 예도의 사정 거리 이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핏기가 노르벨의 안색에서 사라졌다. "이, 이 노오오옴!" 위기에 몰리자 살기가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강해졌다. 노르벨은 방심했던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격이라도 놓치면 그는 황천행 지팡이에 올라야 했기에 필사적이었다. 한 편 시즈는 점점 신중해졌다. 노르벨은 빨랐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와 몸의 움직임을 떼어놓고 살펴본다면 시즈는 어느 것 하나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는 변수의 오차를 줄이는 싸움이다. 시즈의 힘이 폭발적으로 발휘되 는 해동도예는 노르벨의 다음 움직임을 봉쇄하고도 남는 파괴력이 있었다. 상대가 자세를 가다듬을 동안에 이미 시 즈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때문에 현재 노르벨의 속도는 본실력의 절반 정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사적인 노르벨의 방어는 조금씩 반격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열세에서 벗어나기에는 부족했다. '즐겁다?' 시즈는 갑자기 솟아오른 감정에 내심 당황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주륵주륵 땀이 흘러내렸다. 에릭 사를 복용한 이후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물론 노르벨은 강했다.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가끔씩 허를 찌르는 공격을 해오는 그에게 방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상하군. 몸이 상쾌하다. 그리고 이 긴장‥ 신중함이 즐겁다?' 춤이라도 추듯 시즈의 자세가 하늘거렸다. 스르르 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느리게 느껴지는 시즈의 움직임은 뚜 렷한 잔영을 남기고 노르벨에게 파고들었다. "크윽!" 이번 공격은 비천세. 검끝이 머리 중앙에서 하늘로 향하고 검을 내리치는 일격필살의 자세다. 그러나 그만큼 허점도 많았다. 보통 일격필살의 자세들은 공격의 방향이 고정되어버린다는 허점이 있었던 것이다. '기, 기회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4) 노르벨의 생각은 그가 옆으로 재빠르게 피함으로 1차는 성공했지만 그 후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놀랍게도 시즈는 비천세의 자세 그대로 옆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어, 어떻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검이 휘둘러졌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노르벨은 미간에 차갑게 식히는 검풍을 느꼈다. "크아아아아아아앗!" 푸욱! ‥‥. 시즈는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버린 노르벨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의 검에 맺혀있던 붉디붉은 핏물이 또륵 하고 떨어져 내렸다. 흘러내리는 양이 많아졌지만 시즈는 검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정지해있었다. "암기는 없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검에 흐르는 것은 시즈의 선혈이었다. 어깨에는 깊숙하게 단도가 박혀있었는데 그는 망설이지 않고 뽑았다. 촤아악! 피가 왈칵왈칵 넘치며 바닥을 적셨다. "난 원래 무기가 두 개야. 적어도 던지지는 않았잖아." 노르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멀리 떨어진 브로드 소드가 두 조각이 나있었다. 검이 잘리는 순간을 틈나 시즈의 어깨에 단도를 박지 않았다면 자신도 양단되어 버렸을 것이다. 양심이 찔리긴 했다. 아주 약.간. "어쨌거나 그런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군." "감춘 게 아닙니다. 어쩌다가 보니까 나온 거지‥." 단도로 시즈의 공격을 무마시키긴 했지만 노르벨도 무사하진 못했다. 부러진 브로드 소드의 조각은 그의 이마에 긴 칼자국을 남겼고 시즈는 왼쪽 팔에 단도가 박혀도 포기하지 않고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땅에 부딪힐 때 중심을 제 대로 잡지 못하고 머리부터 부딪혔다. 눈앞이 팽글팽글 도는 것을 노르벨은 간신히 견디고 일어선 것이다. "이대로는 둘 다 힘들 것 같군. 승부는 다음 번으로 미루기로 하지." 비틀비틀 주정뱅이 걸음으로 사라지는 노르벨. 과연 이번에는 살아서 다시 시즈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지 의문시되 는 모습이었다. "허억!" 그가 사라지자 털썩하고 주저 앉은 시즈. 그 역시 출혈과다로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단도를 뽑은 것은 과시용이 었다. 아무리 생명력이 무한하다지만 그것도 피가 없으면 소용없는 것. 쓰러지는 시즈의 손가락은 한 가닥 바람을 쏘아보냈다. "네? 없었다고요?" "그래. 실패야. 공작이 이렇게 치사하게!" "치사한 게 아니라 당연한 행동이다." 넬피엘의 한 마디에 젠티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데린에게 안겼다. 귀엽다는 듯 데린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곧 헤∼하고 웃어버리는 '값싼 남작'. 파마리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값.싼. 남작이로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수도로 갈 수밖에. 로바메트의 뜻대로 이루어지면 실베니아는 무너진다." 구름은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시즈가 오는 대로 다시 출발한다." "시즈는 무사할까요?" 아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빙그레하고 넬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람의 음유술사다. 당대 최고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마법을 쓰지 못해요." "뭣!?" "그게 정말인가?" 젠티아와 시즈는 경악했다. 그렇다면 그가 일으켰던 바람은 무엇이란 말인가? 울상이 되어 아리에는 말을 이었다. "그는 왼팔을 다친 후 에릭사에서 얻은 생명력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 힘은 마나에 의존하는데 마법을 사용하느 라 마나를 움직이게 되면 왼팔을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넬피엘!" "모두 날 잡고 서라!" 다급하게 이어지는 넬피엘의 텔레포트 주문. 그 후 시즈의 구원 요청이 담긴 바람을 느낀 것은 아리에들이 그를 찾 은 지 30여 분이 지난 후였다. "이런, 이런‥.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렸군." 사내는 바닥에 널부러진 청년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아직 변사체 신세가 될 생각은 없는지 청년이 꿈틀댔다. "여전히 생명력 하나는 바퀴벌레 뺨친다니까. 어이! 노리스, 이 놈 살아있는데?" "그냥 죽여버려. 기껏 다 죽어 가는 거 살려놓으니까 혼자 싸우다가 또 반죽음이 되어서 오다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스틴의 '그'가 이 녀석을 아낀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빚진 것도 있으니까." 츠바틴이 지혈을 한 노르벨의 머리를 노리스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한 방 두들겼다. '기껏 지혈한 거 다시 솟게 만들래?'라는 핀잔에 얌전히 노르벨을 짊어진 그는 물었다. "음유술사들은 역시 수도로 향하겠지?" "로바메트에게 한 가지 수단 밖에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들이야. 물론 그걸 우리도 알기에 그들이 대응할 방법 또한 하나 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 "시즈가 골탕을 좀 먹겠는 걸!?" "이런! 이런! 시즈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마음 약해지니까." 그들의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노르벨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노리스? 여기는 어딥니까?" "츠바틴, 노르벨이 일어났는데?" "다시 재워." 퍽! '두, 두고 봅시다.'라고 중얼거리며 노르벨은 다시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5) "안되요." "돼!" "안되요." "된다고! 돼! 된다니까!" "도대체 얼마나 저러고 있을 생각이지?" 젠티아는 바위에 턱을 괴고 앉아서 시즈와 아리에의 대결양상을 지켜보다가 한숨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벌써 30 분 가까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저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아리에는 울그락붉으락하는 얼굴빛에 따라서 억양까지 변해, 보는 사람으로 인해 심심함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즈는 그녀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무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인형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보통은 질릴 만도 하것만, 아리에는 그런 시즈를 상대로 한 발 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 "위험해요." "안 위험해!" "위험해요." '저래가지고는 끝이 안 나겠군.' 젠티아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데린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무릎을 내주었다. 평상시라면 넬피엘이라도 나서서 사태를 종결시키겠지만 넬피엘은 시즈의 상처를 치료하고 무슨 볼일이 있는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보다못한 파 마리나가 나섰다. "아리에, 그만 둬. 저 녀석 얼굴을 보라고. 도저히 들어줄 것 같지가 않잖아." "하, 하지만!" "만약 보통 때였으면 이 정도에서 벌써 져줬을 거야." 아리에는 울상을 지으며 힐끗 시즈를 훔쳐보았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쌩생 불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 도 소용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리에, 용병으로써의 일과 이것은 틀려요. 용병일이라면 우리가 위험하면 돈을 안 받고 실패했다고 길드에 올리기 만 하면 되요. 하지만 이것은 실패해서는 안되는 일이에요. 그러기에 실패하지 않을 사람들만 가야 하는 거죠. 이해 해줘요." 예전에는 시즈가 진지하게 말할 때는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투명한 눈동자에 조금만 물기가 돌아도 반사광이 은은히 비쳐서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래도 기다리는 건 힘들어." 두 사람은 다시 애처로움으로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누가 더 상대의 심금을 흔들 것인가. "‥‥." "제발‥." 드디어 남자들의 약점이자 여인들의 필살기인 눈물이 서서히 선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어디론가 사 라졌던 넬피엘이 나타났다. 농부들이 사용하는 마차를 가지고. "마차를 구해왔어, 젠티아." "오. 고맙군." "시즈와 아리에는 지금 뭘하는 거지?" "사랑놀음이지. 암! 좋은 때야." "당신도 그렇게 나쁜 때 같지는 않아." 넬피엘은 데린의 무릎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대답하는 젠티아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가 다가옴에 따라서 마력 에 민감한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선 상태였다. 그 모습에 넬피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깜빡잊었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시즈, 무슨 일이지? 젠티아의 말이 맞다고 해도 빨리 해결해줬으면 좋겠어. 갈 길이 바쁘잖아?" "들었죠, 아리에?" "들었겠지, 시즈?" "또 시작이군."하고 젠티아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의문이 담긴 넬피엘의 눈짓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대답했다. 발단은 글로디프리아의 위기로부터 시작됐다. 젠티아가 로바메트의 정보를 캐러 참모의 막사에 들어갔을 때, 원했던 정보 외에도 그와 관련이 깊은 정보가 있었 다. 그것은 바로 글로디프리아와 용병국 사이에 고착된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용병국의 군사들과, 참전 기사들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었는데 젠티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젠티아는 고민 끝에 말했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봐야겠어. 시즈와 넬피엘은 계획대로 해줘." "그러지." 끄덕. 넬피엘의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시즈는 입을 열었다. "여자들과 블리세미트도 데려가세요." "그러지." 여기서 아리에가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즈와 함게 가는 뜻을 밝혔다. 그에 대해 시즈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이 대결양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얘기를 들은 넬피엘은 힘 빠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연인들의 싸움에 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도 눈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난 아무래도 미움을 받고 살 운명인가 보군.' "그만해. 약하면 데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이름도 그렇지만 아리에는 아릴과 닮았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이 넬피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녀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까봐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 도 그의 정이 뚝뚝 끊어지는 말투는 여전해서 아리에는 금새 시무룩하니 주저앉았다. "또 시즈가 달래느라 고생하겠네." 젠티아는 편안한 데린의 무릎에서 히죽하고 웃으며 중얼거렸다. 파마리나는 눈꼴이 사나워 거칠게 코웃음쳤다. "저도 가겠습니다." 블리세미트의 한 마디는 현 상태를 완전히 파국으로 이끌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젠티아는 지끈지끈한 머리에 데 린의 손을 올려놓고 문지르며 물었다. "넌 또 왜?" "전 약하지 않아요." "그럼 저 녀석의 일격이라도 막아봐." 젠티아의 손가락이 넬피엘을 향했고 블리세미트는 투지가 가득한 눈으로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넬피엘이 바라본 어린 사제의 눈동자는 정의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성직자의 사명감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전쟁을 끝내고 싶겠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시즈가 말했다. "아리에, 넬피엘의 일격이라도 막아보세요." 그에 비해서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는 사랑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 그녀는 허리춤의 망고슈를 양손에 뽑아들며 블리세미트의 옆에 섰다. 젠티아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게 되는 불꽃의 시험이군." "불꽃의 시험? 저게 바로?" "파마리나, 불꽃의 시험이라니?" 레스난은 물음에 파마리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꽃의 시험은 오래 전부터 전설로만 알 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극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불꽃은 옛날부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 사람들은 용기를 상징할 때 불을 말하지. 하지만 불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마법사들 뿐이야. 하지만 그들도 소멸의 힘을 시험할 때 사용할만큼 능력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기껏해봐야 환각의 불이 고작이었지. 그러나 전설 중에는 불을 시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마법사가 있었지." "사막의 나라의 유명한 기사, 마그반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도망치고 있을 때의 일이지. 한 마법사가 도망치고 있던 그의 실력을 시험하려 했지. 마그반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 시험을 통과했고 마법사는 그를 용병국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지." 레스난은 의아했다. 자신이 있었던 육지의 전설적인 기사와 마법사들의 이야기에는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 이다. 불만스러운 그녀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파마리나는 다시 젠티아의 말을 가로챘다. "마그반은 당시의 시험을 말할 때 불꽃의 시험이라는 말을 썼어. 불꽃을 이겨야 한다고 했지." "불꽃을 이긴다?" "어쨌거나 불꽃을 시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현재 넬피엘 밖에는 없을 거다." '그럴 지도‥.' 파마리나가 느끼기에도 넬피엘은 과분할 만큼 강했다. 그가 하는 시험이라면 전설로 남을 정도로 어려울 것이다. "그럼 시작한다." 화르르륵! 넬피엘은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쉬지 않고 나오며 허공에 흔적을 남겼는데 그 것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놈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그 입에서는 새로운 불을 내뿜었다. "과연‥. 시험자는 뱀인가?" 불과 마찬가지로 뱀 역시 인간들은 두려워했고 숭배했다. 아직도 뱀은 악(惡)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존재, 지혜로운 존재 등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넬피엘이 만들어낸 불의 뱀은 '불꽃의 시험'이라는 의미가 맞을 것이 다. "둘이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죽을 것 같으면 일찍 포기해라. 걱정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넬피엘은 불뱀을 던졌다. 그가 얼마나 그림을 꼬아서 그렸는지 불뱀의 길이는 10m에 달했다. 한바탕 바닥을 구른 뱀은 정말로 뱀의 영혼이라도 들어갔는지 꽈리를 둘둘 꼬며 불꽃의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넬피엘, 예전에 마그반이 시험을 받았을 때도 뱀이었어?" "아니, 그 때는 불두꺼비." 파마리나가 느낀 불뱀의 존재감은 아리에가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 때 젠티아와 넬피엘의 대화를 듣자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그럼 이번에는 왜 뱀으로?" "아아‥ 두 사람을 데려가기 귀찮거든. 그러니까 한꺼번에 덤비도록. 빨리 끝나게." 블리세미트는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와 말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상대는 세일피어론아드 최고의 마법사. 넬피엘의 오만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마음을 신중하게 가다듬자 이제껏 주먹만을 감쌌던 흰 아지랑이가 온몸에서 줄줄 피어올랐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블리세미트는 쏨살같이 튀어나갔다. 아리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뱀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하 리라. 그런데 아리에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불뱀의 머리부근에 다가섰다. "이얏!" 그러나 빠르기로 하자면 아리에를 당할 수 없다. 그녀의 단검은 번개같으니까. 블리세미트가 주먹을 내밀기도 전에 번쩍하는 섬광이 뱀의 허리를 싹둑 잘랐다. 어떠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아리에는 곧 굳어버렸다. 그녀의 망고슈가 지나갔던 자리는 번져오른 불길로 다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공격은 소용이 없을 듯 하군." "마그반은 물리적인 공격으로 이겼다." 코웃음치는 넬피엘의 말에 (코)웃음거리가 된 젠티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그반은 불을 벨 줄 아는 기사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죠? 그는 몇 백년 전의 기사잖아요." 레스난은 바다 속에서 읽었던 책의 인물이라면 꿈속에서나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상만이 가능할 인물을 넬피엘은 마치 만났던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불꽃은 전승된다고 하더니 혹시 기억도‥?" "전승? 그대로 전해진다는 뜻인가요?" "맞아. 불꽃은 스스로 피어오르기 힘들지. 옮겨 붙을 뿐‥." 시즈는 왠지 젠티아의 음성이 '불꽃의 춤을 추는 이'들을 안타까워한다고 느꼈다. '착각인가? 젠티아에게 듣기로 불꽃은 4000년의 업을 이었다고 했다. 기억까지 전승되었다면 어떻게 넬피엘의 정신 은 4000년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시즈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불뱀을 상대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은 블리세미트와 아리에가 주춤거리자 넬피엘이 짜증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불처럼. 그러자 불뱀은 그의 분노에 힘을 받은 듯 더욱 활활 타오르며 거대해 졌다. 아리에들에게 어서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망설이는 아리에. 그러나 블리세미트는 아니었다. '사막의 사제'들에게 있어 고난은 실러오나에게 바치는 위스키나 다름없었다. 그의 주위에는 안개를 방불케할 정도로 짙은 아지랑이가 가득해졌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6) "대단하군. 저 녀석의 마음은 끔찍할 만큼 실러오나의 것이다.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길 만 도 한데‥ 오히려 더 강해졌어. 데린, 잘 봐둬. 우리는 앞으로 만들어질 또 하나의 전설을 보고 있는지도 몰라. '세 일피어론다으의 성자, 블리세미트‥ 불꽃의 시험을 받다.'라는 전설을‥." 불의 뱀이 거대한 신체의 끝인 꼬리를 들어서 내려쳤다. 아리에와 블리세미트는 양쪽으로 갈라지며 피했고 바닥에 부딪힌 꼬리는 불꽃을 흩날렸다. 블리세미트는 사막에서의 뱀은 바닥에 배가 닿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땅을 박찼다. 화르르륵. 하지만 오판이었다. 불의 뱀은 입에서 하나 가득한 불꽃을 확하고 내뱉었던 것이다. 블리세미트는 성투결계의 힘을 모아서 막아냈지만 감히 더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넬피엘을 향해 소리쳤다. "저 놈은 뱀이 아닙니까! 왜 불을 뿜는 거죠?" "사막에 살았으면서 뱀이 독액을 내뿜는 것도 모르냐? 저 놈은 불뱀이니 불을 내뿜는 게 당연하지." 기가 막힌 블리세미트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로 그럴 것이 뱀이 독액을 내뿜기는 했지만 눈이나 상처가 아닌 이상은 큰 피해를 미치지 못했다. 즉 불처럼 파괴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의 뱀은 꼬리를 휘둘렀고 블리세미트는 간신히 옆구리의 타격을 막고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리에는 뱀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으므로 블리세미트처럼 몸이 굳어지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뱀의 습성을 상대에게 적용하기보다 불의 성격을 적용했다. 무엇인지 품에서 한 주머니의 흰 가루를 꺼낸 그녀는 물을 섞어 검 의 표면에 바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레스난에게 아크로나의 껍질 분말을 얻어두길 잘했어.' 아크로나는 조개류의 하나로 껍질이 고밀도 석회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궁에서는 조개껍질 가루를 물에 엷게 개 어서 불이 났을 때 사용하는데 서민들은 잘 모르는 방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크로나는 바다 깊은 곳에서만 서식 하여 왕궁에서도 급할 때만 사용하는 조개였는데 그 속살의 맛도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리에는 혹시나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여 레스난에게 얻어두었던 것이다. 연금술사들은 조개껍질이 물과 닿으면 나오는 기체가 소화(消火)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기체의 이름을 소화기 (불을 끄는 기체)라고 이름지었다. 아리에는 망고슈가 아닌 시미터에 아크로나의 껍질을 말랐는데 조금이라도 소화 기가 많이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적중해서 불의 뱀은 소화기가 몸에 닿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배시시하고 웃으며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리에. 파마리나는 그녀가 마녀의 소질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순진 한 웃음 속에 가득히 풍겨 나오는 요기(妖氣)는 천부적이었다. "그녀는 현명하군." 젠티아의 말에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를 골탕 먹일 때만 아니라면 아리에의 영악함은 분명 장점이었다. "얍!" 빠른 그녀의 시미터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소화기는 불의 뱀을 괴롭혔다. 하지만 재생하는 시간을 느리게 할 뿐 결정타를 줄 수는 없었다. 아리에는 화가 나서 불뱀을 마구 난도질했다. 흩어질 듯 흩어질 듯 하면서도 불씨 는 꺼지지 않는다. 그 때 블리세미트가 달려와서 높이 점프했다. "아리에, 비켜요." 소년은 낙하속도를 주먹에 담아서 뱀의 정수리에 꽂았다. 아리에의 소화기로 약해진 덕에 아예 불꽃은 둘로 갈라졌 다. 하지만 다시 합쳐지려는 불꽃. 블리세미트는 주먹을 땅에 박은 채로 강하게 신성력을 내뿜었다. "끝났군." 산산조각난 불씨들이 신성력에 맥을 못추고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젠티아는 중얼거렸다. 말은 없었지만 시즈의 눈 동자에도 생기가 도는 게 많이 걱정했던 모양이다. "헉헉! 어때요?" 블리세미트는 한번에 격출한 신성력으로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고 물었다. 그만큼 성투결계라는,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혹사시키는 전투법이 어렵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에 뒤질 새라 아리에도 따라서 외쳤다.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죠?"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는 되겠군. 왜 죽고 싶어서 안달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젠티아는 투덜거리는 넬피엘의 어깨에 손을 대고 껄껄대고 웃었다. "고집만큼의 실력은 되지 어쩔 수 없잖아. 그럼 한 시가 급하니 난 출발하겠네. 로바메트 쪽을 부탁하지, 시즈."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시즈를 젠티아는 히죽 웃으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시즈가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젠티아는 그 런 표정이 맘에 드는지 낄낄대며 돌아설 뿐이었다. "살아 돌아오라고. 나 없다고 죽지말고." 마차에 올라탄 레스난과 데린이 손을 흔들었다. 레스난은 가장 친했던 아리에와 블리세미트,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눈물마저 글썽였다. "설마 두 사람이 다치진 않겠지?" "시즈가 지켜 줄거야." 온화한 목소리로 레스난을 달래던 데린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서 한번 정도는 자신의 말을 비꼬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레스난, 파마리나 봤니?" 레스난의 금발이 설레설레 흔들렸다. 아리에는 머리 속에 마녀의 웃음이 메아리치는 것을 느끼고 손으로 천천히 이 마를 문질렀다. "그만 나오세요, 파마리나." "젠장. 속일 수가 없군." 장난치다가 걸린 아이처럼 뒤통수를 거칠게 긁적이며 파마리나가 나타나자 시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 에 파마리나가 다그치듯 말했다. "뭐야!? 난 적어도 저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는 강하다고." "인정하지. 더 이상 티격거리는 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가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나로서는 편하겠어. 가자고. 우리 도 마차를 구해야지." 말을 마치자마자 넬피엘은 걸음을 옮겼다. 파마리나와 블리세미트, 아리에는 서로를 마주보다가 씨익하고 웃음을 나 누고 그의 뒤를 따랐다. 시즈만 한숨을 내쉬며 서있을 뿐이었다. 시즈들을 실은 마차가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에 도착한 것은 이틀 후였다. 사람들은 이미 떠났고 남아있는 자들은 기사들이나 병사들, 그리고 용병. 얼마 전 보았지만 그보다도 더욱 황폐해진 모습에 시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떠났군요. 과연 로바메트는 남아있을까요?" "기사들이 남아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좋겠지." 만약 남아있는 사람이 로바메트라면 그는 정말 효웅이라고 시즈는 느꼈다. 모두 떠난 자리를 로바메트가 지키고 있 다면 그에 대한 믿음은 왕실에서나, 서민들이나 대단할 것이다. "마녀, 점을 칠 수 있겠지? 어느 쪽에 그가 있을지‥." "시즈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역사의 고리는 음유술사의 기운에 민감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파마리나는 물병을 기울였다. 냉동마법으로 차갑게 보존한 피였다. 주르륵하고 바닥에 떨어진 핏자 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신성한 생명의 기운에 기하여 물으니 내가 가진 수수께끼에 대답하라." 무게있는 주문의 영창에 따라 바닥의 피는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제인 블리세미트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파마리나가 쓰는 피는 닭피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심한 듯 지켜 보았다. "동남쪽이에요." 로바메트의 저택은 대부분의 공작들과는 달리 매우, 아주 매우 간소했다. 킬유시 공작의 거대한 성과는 다르게 그는 여느 부유한 중산층 정도의 저택이었기 때문에 시즈는 더욱 놀랐다. "그는 청렴결백하군요." 블리세미트는 저택이 작아서 놀라워하기는 처음이었다. 흑색 거성 글로디프리아를 보았을 때만큼이나 입이 벌어진 그를 향해 시즈는 작게 미소했다. "글쎄요. 저택이 작으면 경비하기 쉬운 이점도 있답니다." "맞는 말이야. 어떻게 잠입해야할지 모르겠군." 넬피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통의 물을 마법으로 차갑게 해서 들이켰다. 로바메트 공작은 현 실베니아의 현실에서 기사단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경호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토록 저택이 작다면 보호하는 자들은 꾸역꾸역 뭉쳐있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저런 집에는 숨어들 곳도 없다. 궁전이라면 비밀통로나, 지하통로나, 환기구 등으로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택은 굴뚝 하나로 충분할 만큼 아담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7) 시즈는 침착하게 바람이 전해주는 저택 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미심쩍음이 가득했다. '없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택의 잠입은 의외로 쉬울 것이다. 시즈는 알 수 있었다. '함정인가?' 막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넬피엘이나 젠티아조차도 기척을 느낄 수 없던 노르벨은 정말 강적이었다. 이번에도 그 런 상대가 숨어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쓸데없는 말로 긴장을 풀어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경호하는 기사들이 너무 약한 것 같은데?" 파마리나는 피, 즉 생명력에 민감했다. 그녀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생명력의 강약을 판단할 수 있었다. 기사로 친다면 생명력이 강할수록 뛰어난 실력의 검사일 게 당연했다.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열심히 바람의 이야기를 듣던 시즈가 대끔 한 마디를 꺼냈다. "비밀통로?" "이런 저택에는 비밀통로가 있기 마련이죠. 혹시나 했는데 '바람의 눈'에 통로로 의심되는 장소가 있는 듯합니다." 일행은 싱글거리는 시즈를 보며 '괴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역시 다른 '괴물'이라고 불리는 넬피엘 또 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것이 '바람을 노래하는 이'는 출연빈도가 극히 적었고 그 능력에 대해서는 같은 음유술사조 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도 모르고 '괴물'은 그저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어둡군." 파마리나의 한 마디가 무섭게 넬피엘의 손은 화륵하고 한 덩이의 불꽃을 피어 올렸다. 아리에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경비병들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이 곳에는 경비병이 없어요. 비밀통로는 그 말처럼 비밀스러운 곳이죠. 이 곳을 알고 있는 것은 공작 자신이나, 그 의 측근들 밖에는 없을 거에요." "시즈도 있잖아." 시즈의 대답에 아리에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시즈의 얼굴은 불꽃을 옮겨놓은 것처럼 붉어졌다. "여기가 끝입니다." 블리세미트는 어딘가에 있을 출구를 열심히 찾았다. 열정적으로 벽을 더듬고 있는 그를 넬피엘은 툭툭 치고 말했다. "뭐해?" "뭐 하다뇨‥. 출구를‥." 블리세미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거렸다. 이미 다른 일행은 천장에 뚫려있는 통로로 몸을 집어놓고 있었 기 때문이다. "네가 마지막 남은 '사막의 사제'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붉은 뱀의 사원'을 일으키겠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블리세미트는 넬피엘이 '사막의 사제'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착각이었을까. 냉혹하게만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온화해보인다고 소년은 느꼈다. 넬피엘은 주문을 외워 그를 공중으로 떠올리고 자신도 천장의 통로로 몸을 밀어넣으며 대답했다. "이제까지 사원을 나왔던 '사막의 사제'들은 다 그랬어. 에크라이도, 크라인 대사제도." 블리세미트는 아까 전 젠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이 나약하게만 보이는 소년이 정말로 4000년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 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언제나 바깥세상을 무섭게만 가르쳤던 에크라이를 떠올리며 순진했던 사제는 이를 갈았다. "처음에는 미래에 '붉은 뱀의 사원장'이 될 사제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지. 사원장이라는 직위는 쉬운 게 아니니 까. 하지만 알고 보니 단순한 방랑벽이더군." "실러오나의 뜻이 아닐까요?" 어린 사제의 대답에 넬피엘은 한 방 맞았다는 듯 아찔한 얼굴을 했다. "누가 녀석들의 뒤를 잊지 않는 달까봐, 비슷한 소리만 해대는 군." 그리고 곧 키득키득 웃으며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행의 예상과는 달리 공작의 경비는 적었다. 밀집되어 방어하는 인원이 막을 경우 모두 죽여버릴려고 했던 넬피엘 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블리세미트나 시즈의 공격으로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기에 불만은 없 었지만 못내 못마땅한 듯 했다. "츠바틴이 무슨 수를 부린 듯 하군." "확실히 이건 공작 저택을 경비하는 인원으로는 너무 부족하군요." 구석으로 옮겨지는 경비병을 바라보며 아리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쉬워도 쉽다고 생각할 수가 없으니‥.' "어쨌든 우리의 선택은 하나 뿐입니다." 시즈는 로바메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토록 경호가 허술하다면 로바메트 는 이미 수도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병사들은 아직 남아있는 중요문서를 옮기기 위함이다. "네 놈들은 누구냐?" 경비병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복부에 강대한 충격을 받고 기절한 채 바닥을 굴렀다. 시즈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소란이냐?" "로바메트 공작?" "그래. 내가 실베니아의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이다. 그렇게 묻는 그대는 누구인가?" "시즈 세이서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일행이죠."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당당한 공작의 모습에 시즈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다. "시즈 세이서스라면, 엘시크의 젊은 현자로 이름 높았던 자가 아닌가. '마땅찮은 이'라는 특이한 이름 때문에 더욱 유명했지. 하지만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습니다." "헤트라임크의 마법으로 살아남았군." 정곡을 찔린 시즈가 움찔하고 놀라자 로바메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세상에는 죽은 자라고 알려진 사람이 왠일로 날 찾아왔는가. 설마 마땅찮다는 이름처럼 세상에 미움을 가지 고 귀신이 되어 돌아왔는가? 그러고 보니 전장에서의 성녀는 자네의 변장한 모습이었군. 약간이지만 윤곽이 남아있 어. 그 특이한 색의 머리카락도 마법인가? '마땅찮은 이'는 까마귀 깃털같은 흑발이라고 들은 일이 있는데."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는 모양이야. 뭐, 괜찮아. 매력적인 눈동자와 은발이네." 시즈는 상대가 말로 시간을 끌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로바메트는 이름만큼 뛰어난 정치가였 고 그의 혓바닥은 질 좋은 기름을 듬뿍 바른 듯 했다. 참지 못하고 넬피엘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당신이 내전을 멈춰주기를 바라고 있다. 내전은 국가에 있어서 소득이 없어. 서민들은 고통받고 국토는 피 폐해질 것이다. 지금 북쪽의 용병국은 벌써부터 군사를 움직이고 있어." "무슨 소리인가? 소득이 없다니. 이 내전은 반란이 주축이 된 것이네. 자네는 킬유시 공작에게 가서도 똑같은 소리 를 했는가? 그렇다면 내 아무 말하지 않지. 하지만 이와 같은 반란을 그냥 두면 왕권은 땅에 처박힐 것이다." "왕권은 나중에라도 세울 수 있지만 나라가 한 번 기울면 다시 일으키기는 힘듭니다. 왕권이 먼저입니까, 국가가 먼 저입니까?" "그래서 항복하는 말인가? 내가 항복하면 이 나라는 세기에 한 번씩은 왕권이 바뀔 거야. 혼란의 전장이 되버릴 테 지." 로바메트는 흥분한 듯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시즈의, 어찌보면 감정이 없는 듯 투명한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유리눈동자가 그 시선을 피한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그는 목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정신을 끈 을 놓았다. 뒤에서 블리세미트가 손을 들고 서있었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다가는 밤을 새도 끝이 없겠네요. 우선 제 정신으로 되돌리고 얘기를 재개해보죠."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블리세미트는 기절한 공작을 파마리나의 지팡이에 걸쳤다. 둥둥 떠있는 마녀의 지팡이가 천천히 파마리나의 주문에 따라서 움직였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8) "크악! 이 놈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비명과 고함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시즈는 꽤나 멀리 떨어졌다고 할 수 있는 호수가에 아리에와 자리를 잡았지만 바람은 원하지도 않는 소리를 가져다주었다. "아직도 들려?" 아리에는 안쓰러운 듯 시즈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지만 이런 때만큼은 그리 갖고 싶지 않았다. 고개 를 끄덕이며 시즈는 뒤로 돌아섰다. "끝난 겁니까?" "아직‥." 힘이 빠진 걸음으로 블리세미트가 다가와 시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암시에 걸린 게 아닌가요?" 시즈들의 판단이 틀렸나 싶어 아리에가 물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블리세미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표정은 그리 다행스러워 보이지 않았지만. "파마리나는 아무래도 암시는 걱정했던 만큼 강력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그를 스스로 암시로 몰아넣을 무언가가 있었겠군요." 시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암시, 또는 최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넬피엘 정도의 마도사라고 했다. 함께 다니면서 보았던 '불꽃의 춤을 추는 이'의 능력을 상기시킨 시즈는 끔찍했던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최면 주문을 받겠어?" "그렇다면 협박의 요소가 있다는데 아리에도 의견을 공유하시겠군요." "아마도. 내가 어떻게 뛰어난 성직자, 마법사, 마녀, 그리고 학자의 의견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겠어?" 문득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리에는 씁쓸하게 대답하며 돌멩이를 호수에 던졌다. 퐁당! 돌이 갈라놓았던 자리에 다시 물이 차며 서로 충돌하는 음색은 밤에 듣기에 제법 운치가 있었다. 그 운치에 휩쓸렸 는지 블리세미트도 덩달아 돌을 던졌다. "그래서 암시를 풀 수 없다고 했습니까?" "아니요. 파마리나는 적어도 넬피엘의 마력을 빌리면 얼마든지 풀 수 있다고 했어요. 다만 휴우증이 남아서 공작님 이 심한 두통을 느낄 거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협박의 원인만 제거하면 회복된다고 했어요." 시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마리나와 넬피엘은 손꼽히는 마법의 사용자들이었다. 게다가 교황을 압도하는 신 성력의 소유자, 그리고 용병국 서부 리스트에서 최고위를 달리던 자신과 아리에까지. 생각해보면 당해낼 자들이 없 는 무적의 멤버였다. '그런 상대들을 오히려 압도하는 역사의 고리. 이 단체의 능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지금도 자신들은 그들의 술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시즈는 판단했다.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역사의 고리는 주 위의 모든 사건을 이용했다. 그들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음유술사들과 그 동료들이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지만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행사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물론 토루반과, 피브드닌이 있었지만 이 곳 은 실베니아지, 아스틴이 아니었다. 아스틴이었다해도 당해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역사의 고리가 미치 는 손길은 세일피어론아드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있다. "파마리나, 어떻게 됐어요?" 아리에의 외침은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시즈의 상념에 파동을 일으켰다. 지친 얼굴을 하고 걸어오는 파마리나가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여 아리에와 블리세미트는 저절로 손이 그녀를 부축했다. 손에 느껴진 그녀의 감촉은 그야말로 땀투성이. 암시를 풀기 위해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는 게 쉽게 느껴졌다. "너 어서 가봐. 네가 할 일이 생겼어." 블리세미트의 손을 슬쩍 뿌리친 파마리나는 아직 넬피엘과 로바메트가 남아있는 나무집을 가리켰다. 할 일이 생겼 다는 말에 반색하며 순진한 사제가 달려가자 파마리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성직자와 마법사는 연구하고 신봉하 는 대상의 차이로 인해 끊이지 않고 다툼을 일삼았다. 파마리나는 마법의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성직자들을 쫓기도 했고 반대로 쫓기기도 했다. 아무리 블리세미트가 어리고 순진한 사제였지만, 또 '사막의 사제'들 자체가 마법을 배 타하지 않는다지만 거부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성직자들처럼 멸시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블리세미트의 특출한 신성력을 볼 때면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 는 경쟁심에 휩싸였다. 그렇기에 파마리나는 블리세미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넬피엘은요?" "최면은 깨졌지만 마력을 사용해서 억지로 깬 거라 휴우증이 커. 게다가 상대의 마법이 워낙에 지독한 종류거든. 그 는 지금 붕괴되는 공작의 정신마저 마력으로 막고 있어." "큰일이군요. 어서 가봐야겠어요." "그만 둬. 그럴 필요가 눈꼽만큼도 없어. 넬피엘, 그 사람은 돋보기로 피부를 관찰하면 분명히 비늘이 있을 거야. 사 람의 모습을 한 용이 틀림없다고. 괴.물.이야." 넬피엘의 거대한 마력을 정면으로 맡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아무리 적의가 없다지만 그의 마력은 마치 폭염 같 았다. 파마리나는 몸 안에 힘이 넘쳐날수록 마력을 조절해야 하는 정신력이 태양에 다가간 양초처럼 줄어들었다. '도대체 그의 정신력은 어느 정도인 거야?' 마녀로서 그녀는 상당한 정신수양을 쌓았다고 자신했었다. 적어도 자신의 나이 대에서는 천재라고 불렸다. 더욱 파 마리나를 할 말 없게 만드는 사실은 넬피엘은 그런 엄청난 마력을 쏟고도 지친 기색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마녀 역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었으며 그녀들을 가리키 는 수식어는 많고도 많았다. 한 마디로 그 모든 표현을 해보자면 '특별'했다. 그러나 시즈 일행과 어울리면서 조금은 평범해졌다. 아니, 그녀 자신이 그렇게 느꼈다. '특별하다고 좋을 게 없지.' 보통 마녀의 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데 그녀가 그렇듯 그녀의 어머니 또한 뛰어난 마녀였다. 하지만 뛰어난 마 법과 주문도 아이를 키우는데 그리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진 못했다. 어머니의 마법은 빛의 향연으로 파마리나의 시 각을 즐겁게 해주는 게 전부였다.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천부적인 마녀의 핏줄도 싫증을 빨리 냈다. 어린 파 마리나는 초원에 나가서 또래들과 뛰어 놀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은 퀘퀘한 냄새로 가득한 지하 실뿐이었다. 그 곳에서 파마리나는 특.별.한. 마녀들의 물약을 만들고 특.별.한. 마녀들의 주문과 서적으로 세월을 보 냈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시즈들과 어울리면서 다른 이들과 같다는 평 범한 동질감이, 지난 세월의 특별한 나날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흐음‥." 파마리나는 진정한 괴물 중에 하나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즈를 물끄러미 보았다. 때묻지 않은 눈동자-겉모습으로 는-가 의아함을 담고 일렁이는 모습은 상당히 깨끗하게 느껴진다. 이런 눈동자를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괴물-젠티아, 넬피엘-들과 비교할 때 상대의 심장를 납작한 쥐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감은 없었다. 아니, 있기 는 했지만 그의 것은 포근하게 감싸안는 듯 했다. 레스난처럼 본능적인 감각이 발달되었다면 모르지만 외모와 분위기에 치중해 사람을 판단하는 인간들은 시즈를 나 약한 청년 학자로 생각하리라. 갑자기 그가 얄미워졌다. "도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엄청난 마나가 생기는 거야?" "으으으으으!" 시즈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죽을상을 썼지만 볼을 잡아당기는 파마리나의 손은 조금도 사정을 봐줄 기미가 없었다. 우스꽝스럽게 늘어난 시즈의 볼. 아리에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파마리나는 무섭게 노려보는 아리에의 시선에, 투덜투덜거리더니 야유하는 시늉을 하며 시즈에게서 떨어졌다. "쳇! 그냥 장난한 걸 가지고. 누가 연인 아니랄까봐. 우- 우-." 아리에는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장난인데 어떻게 이토록 검붉은 색이 나올 수가 있는가. 처음에 재밌다 고 웃어댔던 과거가 미안했는지 아리에는 시즈의 눈치를 보았다. "시즈, 그리고 당신들. 들어와." "주문을 완전히 파해했나요?" "대충. 그런데 시즈 당신 얼굴이 잘 익었군. 조금만 더 익으면 시꺼멓게 썩지 않을까 싶어. 블리세미트, 여기 환자 한 명 추가다." 블리세미트는 휴우증으로 두통을 호소하는 로바메트의 고통을 완화시키고 있었다. 볼이 시뻘겋게 부어있는 시즈를 보는 순간 그는 놀라서 당장 뛰어왔다. "시즈,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치료나 해줘요." 한숨을 쉬며 시즈는 대답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19)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문을 닫자 로바메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다 모였다. 이제 로바메트 당신이 스스로 최면을 받아드려야 했던 이유를 말해줄 차례야." "물론 말해주지. 그런데 정말로 다섯 명뿐인가? 너무하구먼‥. 이런 일을 맡았을 만큼 정예들이겠지만. 이 나라가 아무리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해도 다섯한테 지휘관을 납치 당하게 하다니 내 돌아가면 기사단 녀석들의 물 젖은 소 가죽 마냥 처진 군기를 바로 잡아주지. 이 녀석들을 그냥! 윽!" "공작 전하, 화를 내면 좋지 않습니다. 아직 전하의 휴우증은 건재합니다. 전 그저 고통을 완화시키는 게 전부에요." 블리세미트의 손에서 푸른 청광이 은은하게 뿜어지자 통증에 얼굴을 점령되어가던 로바메트는 본래의 안색을 되찾 았다. "음, 그래. 조심하지. 고맙네. 그런데 자네의 신성력은 정말 맑은 푸른색인 걸. 신성력은 사제의 믿음과 덕에 따라서 맑은 빛깔을 낸다던데‥ 아직 어린 친구가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로바메트는 공작이라는 작위가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이유는 충분했다. 자신의 체통없는 말투가 거북한 듯한 표정을 짓는 다섯의 남녀가 가진 능력 때문이었다. 공작을 납치한다는 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게다가 여행을 가던 것도 아니고 저택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로바메트였다. 지난 번, 암시를 걸었던 요사스런 소녀와는 상황이 틀렸다. 당시에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최면에 걸렸다고 기억 자체가 달라지거나 없어지진 않았다. 다만 성격이 조금 변조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그의 호위조치는 지금 생각 해도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전시에 지휘관에 대한 호위는 그야말로 국왕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국왕과 전쟁에 투입된 이외의 기사단이 그 주 위에 몰려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작해야 20세 정도가 될 듯한 검은 복장의 여인이 최고령자로 생각되는 무 리는 자신을 납치하고도 그럴 듯한 상처하나 없었다. '이들이라면 날 도와줄 수 있다.' 로바메트는 자신과 국가의 위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조력자들에 대한 기대가 엇갈렸던 것이다. 그게 이토록 흥분 해서 호들갑을 멈추지 않고 터져 나오는 이유였다. 유리같이 투명한 눈동자의 시즈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납치가 아니라 구출이라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즈의 어조는 딱딱했지만 목소리가 온화하고 나긋해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지. 그 전에 물을 것이 있어. 나를 구출하라는 것은 누구의 명령이지?" "젠티아 드로안 남작입니다." "값싼 남작. 그의 명령이란 말인가? 대단하군. 자네들 같은 수하를 두다니‥." "정정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다. 아니, 애원이 어울리겠군." 검으면서도 붉은 빛깔을 은은하게 들어내는 머리카락의 소년이 대신 대답했다. 지난 번 성녀 일행에서 보았을 때와 는 다르게 무척이나 날카로운 눈매였다. "애원!? 값싼 남작이 애원?" 머리통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작은 성직자 한 명도 대사제 급 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대사제만 하더라도 자신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의 신분인 걸 감안할 때 시즈 일 행 개개인의 신분은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했다. 그렇기에 남작의 수하라면 자신의 말도 따를 공산이 크다고 좋아했던 로바메트는 적이 실망했다. 그런 마음을 달래 주듯 시즈에게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그의 부하가 아니거든요. 친구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죠." "친구라고? 분명 대륙을 뒤흔들던 학자, '마땅찮은 시즈'라면 '값싼 남작'과 어울리는 군."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시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용병일 뿐입니다. 이제 슬슬 말해주십시오. 전하를 최면에 빠지게 한 원인이 뭡니까? 이유가 없다면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로바메트는 대답을 하려 입을 열다말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고통이 이는 것이다. 그 모션에는 고통뿐이 아니 라, 고민의 의미도 섞여있었다. "내 아들이야.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이 그들에게 있네. 국가와 나를 놓고 비중을 두라면 당연히 국가를 선택했을 거야. 하지만 자식 놈은‥ 그럴 수가 없더군. 혈육으로 협박을 당하자 이토록 무력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네. 다른 생각없이 그 소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소녀?" 시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역사의 고리 구성원에는 여자가 없었다. 바스티너는 갑옷을 벗을 리가 없었고 또, 소녀라고 불릴 만큼 어린 여자는 더욱이 없었다. 넬피엘을 흘끔 바라보자 그 역시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적이 출현한 것을 걱정할 때 로바메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넬피엘." "남작이 애원했다고 했나? 나도 이렇게 애원하지. 제발 내 아들을 구해주게." 실베니아 최고 귀족은 그렇게 바닥에 부릎을 꿇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머리를 땅에 댄 채로 시즈들의 말을 기다렸 다. 이 과격한 행위에 넬피엘조차 혀가 굳었는지 침묵했다. 저벅. 거의 무의식적으로 시즈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로바메트에게서 예전 헤트라임크와 같은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아 버지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운이었다. "일어서세요. 그러시지 않아도 저희가 구할 겁니다." 시즈는 부드럽게 말하며 로바메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굴하다면 한없이 비굴하게 느껴질 행동을 했으면서도 일 어서는 로바메트의 눈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빛나고 있었다. 2년 전, 시즈는 자신을 텔레포트 시킬 적의 헤트라임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의식도 혼미했지만 그보다는 눈물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양아버지도 저런 눈을 했었겠지.' 시즈는 로바메트를 일으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헤트라임크가 보고 싶었다. * * * "호호홋! 오라버니, 아― 하세요." "아―." 덥썩! 냠냠 꿀꺽! "역시 내 동생이야. 간단한 수프 하나도 남들과 다르군." "과찬이에요. 오라버니." 로진스는 괜히 문병 왔다고 내심 중얼거렸다. 소심한 그의 성격상 문병을 가지 않으면 노르벨이 섭섭해할 지도 모 른다는 불안감에 찾아왔건만. 병자 남매는 너무나도 대범했다. 즉 문병온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신들의 세 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로진스가 조용히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수프가 바닥에 엎질러졌다. 털썩! "끄으으윽! 아악!" 노르벨은 어이가 없었다. 병자는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수프를 먹여주던 동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가. 하지 만 대상이 아끼는 여동생이었기에 황당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에즈민! 무슨 일이냐? 로진스!" 가장 질병과 약에 박식한 츠바틴은 실베니아 동북부로 모종의 협약을 위해 떠난 상태였다. 에즈민이 대답 대신 거 품을 물자 노르벨은 로진스를 마구 불러댔다. 마법사는 순수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박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문이 튕겼군." 달려온 로진스가 황급히 에즈민을 일으켰다. 마법을 걸어 소녀의 몸 상태를 살펴본 그는 그녀의 마나가 완전히 흐 트러졌다는 걸 알았다. "무슨 뜻이오?" "주문이 더 강대한 힘의 영향으로 튕겨졌어." "날 바보로 아는 거요? 에즈민은 나한테 수프를 먹여주는 외의 행동은 없었소. 그렇다는 것은 전에 걸었던 주문이 튕겼다는 말인데 이미 걸린 마법을 튕겨낼 정도의 마력을 가진 이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바보 취급을 받지." "뭣!?"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에즈민이었다. 새침한 표정을 짓으며 입가에 흘러내린 구토물을 닦아낸 그녀는 말 했다.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들이라면 주문을 튕겨내고도 남아요." "그런가?" 노르벨은 마법과는 관련이 없었다. 때문에 음유술사들이 가진 마나가 얼마나 광대하고 거대한지 느낄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걸로 그들이 로바메트에게 접근했다는 걸 알겠군요." "음‥. 츠바틴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군. 역시 츠바틴 녀석은 대단해. 이런 미로의 계획을 짜다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마지막 암시가 남았잖아요!? 호호홋!" "하하하핫!" 병실에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르벨이 중얼거렸다. "뭐, 뭐야 대체‥."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0) "도대체 왜 일까?" 넬피엘들은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이 일러준 대로 그의 아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저택의 지하감옥 입구에 들어와 있 었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시즈는 고개를 저으며 벽에 기대섰다. 기운이 빠진 듯 흘러나오는 물음은 넬피엘들의 다리를 잡기에 충분했다. 시즈의 추상적인 물음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같은 의문이 뇌리를 계속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넬피엘이 전부였다. "어쩔 수 없다.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에게 길은 하나 뿐이라고."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미끼를 통해 적을 불러들였을 때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비병조차 세워두질 않았어요." 언제나 온화하게 미소를 짓던 시즈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짜증을 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누군가 앉아있었을 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들이 앉아있었던 게 분명한 이 탁자의 먼지는 지하감옥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과 부합되지 않아요. 다른 부분에는 있는 손쓸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이 탁자에는 없습니다." 넬피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는 뛰어난 통찰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고, 궤를 달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아마도 저 탁자를 놓아둔 까닭은 우리가 알아내 주기를 바랬던 거로군.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나는 것 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야.' 이런 일은 벌써 몇 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츠바틴은 이쪽의 움직임을 눈감고서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 해서 시즈 일행은 알면서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점점 우리는 실행하는 행동력을 잃어갈 거다. 어떤 게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될 거야. 이미 시즈는 걸려들었 어. 나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순간만큼은 자신에게 긴 시간이 물려 내려온 게 다행이기도 했다. 적어도 그 시간에 포함된 여유까지도 넬피 엘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시즈, 녀석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가 아니다. 바로 역사가 멈춰있도록 붙들어놓는 것이지. 우리는 목적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지나쳐야 할 과정이 된 거야. 우리는 지금 그들의 목적과 상관없는 자리에 와 있다고 보면 된 다." "‥그들이 쓸데없는 행동으로 우리를 미로로 보냈다는 뜻인가요?" 블리세미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음성은 지하에서 울리듯 일행의 마음 속에서도 웅웅 울렸다. 넬피엘은 고개를 저 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한 걸음 늦었기에 문이 닫혔다는 거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보다 빨리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고리를 없애버리면 되지." 시즈는 머리를 숙였다. 음유술사는 악당이 아니다. 적어도 정의를 표명한다면 보복도, 선공도 힘들다. 게다가 결정적 으로 시즈는 성격적으로 온화했다. 보복, 공격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 물음은 실베니아를 구하고 나서 생각하기로 하자. 우리는 뛰어들어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게 불길 속이라도. 우리는 강하지 않은가." 시즈는 걸음을 옮기는 넬피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넬피엘의 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나도 조금은 걸음에 힘을 주자. 조금은 당당해지자. 그게 끌려가는 걸음이라고 해도‥.' 보통 한 사람이 강해진다면 다른 사람도 강해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게 바로 동료였다. 시즈는 이 세상에서 가 장 믿음직한 동료의 등을 바라보며 가슴을 폈다. "파세닌! 당신이 파세닌 로바메트요?" "그, 그렇소. 당신들은 누구요‥." 예상은 했지만 일행이 목표했던 존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영양실조라는 것만 제외하면 양호한 상태였다. 시즈들 은 기뻐했다. 아무리 역사의 고리의 참모, 츠바틴의 손에서 놀아다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한 아버지에게 귀중한 보 물을 찾아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순수한 기쁨조차도 츠바틴에게 이용당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파세닌! 파세닌! 대답하거라." "아버지이십니까?" 로바메트는 아들을 보자 호들갑을 떨었지만 시즈들은 파세닌이 겨우 영양실조라는 걸 알고 있었음으로 웃음을 지었 다. 로바메트의 아들은 오늘 저녁식사만 제대로 먹어도 어느 정도는 회복될 것이다. '둘만 있게 해줄까?'라는 생각을 다들 자리를 피하려할 때였다. "크윽!" "아버지‥." 아버지가 아들을 껴안는 순간 로바메트의 등뒤로 왈칵하고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혼비백산한 블리세미트가 번개같 이 달려들어 파세닌을 걷어찼다. 힘없이 뒤로 넘어질 듯 하던 파세닌은 땅에 손을 집고 한바퀴를 돌아서 착지했다. 거친 움직임이 마치 야수를 연상케 했다.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 파직파직하며 전극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파세닌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위로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거야?" "최면 마법이에요." 블리세미트가 파세닌의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를 피하며 외쳤다. "크윽!" "정신차리세요, 전하. 파마리나 도와줘요." 파마리나가 재빨리 마법을 방어하는 공간 마법을 펼쳐 번개를 튕겨냈다. "이, 이게 어떻게‥. 쿨럭!" "말하지 마십시오, 전하." 내장의 절반이 번개에 감전되어 타들어 있었지만 로바메트는 그보다 심적인 충격이 더한 것 같았다. 피를 토해나면 서도 블리세미트를 뿌리치며 파세닌을 돌아보려고 했다. 그의 아들은 충혈된 눈으로 두 음유술사를 노려보며 대치 하고 있었다. "마법에 걸린 거에요." "다치지 않게 잡을 수 있겠지? 자네들의 실력이라면?" 블리세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전투능력에 있는 한 누구보다도 강한 넬피엘과 시즈였다. 고작 마법의 반 지 하나로는 그들의 털끝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2) '하지만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진 사람한테 저런 반사신경이라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파세닌을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게 무리였을 거라고 블리세미트는 생각했다. "크아아아악!" 파세닌은 고통스러운 고함을 질러대며 시즈와 넬피엘에게 반지의 번개를 마구 분출했다. 보통 마법무구의 장점은 주문의 영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법에 통달한 두 사람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피하기에 바빴다. "시즈, 빨리 제압해요!" 아리에는 주의 깊게 파세닌의 모습을 눈여겨보다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외쳤다. 원래 심상치 않았지 만 그의 얼굴에는 점점 힘줄이 불거지며 흉측하게 변해가는 게 아리에의 말이 아니어도 시즈는 긴장했다. "다가갈 수가 없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넬피엘이 피하는 것을 그만 두고 허공에 마법의 원을 그려 현자의 검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번개를 하나하나 튕겨내기 시작했다. 넬피엘이 휘두르는 순간 남겨지는 붉은 빛의 잔재는 마법의 힘이 담겨져 있는 지 그의 앞에 가볍게 원을 그리는 동작만으로도 황금빛은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으악! 이쪽으로 튕겨내지마!" 파마리나가 비명을 질렀지만 넬피엘은 그냥 뒤를 힐끔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천천히 앞으로 발을 옮기는 넬피엘을 피해 파세닌은 뒷걸음질했다. "조금만 더 빨리!" 파세닌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자 시즈와 넬피엘을 제외한 일행은 손에 땀을 쥐었다. 무표정한 넬피엘도 눈썹을 찌푸렸다. "크악! 크아악!" "알았어! 저 반지는 사용자의 생명력을 격발시켜서 마법으로 변조시키는 거야. 빨리 중단시키지 않으면 생명력이 고 갈되서 손쓸 수가 없어!" 파마리나가 급하게 외친 순간 이미 로바메트의 아들은 꿈에서나 나오는 악귀처럼 온몸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형상이 되어있었다. 곧 온몸이 터져 버릴 파세닌의 모습을 상상하며 파마리나는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피비가 내리는 끔찍한 상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파세닌의 몸이 한계에 달해 경직되자 바람을 타고 그의 옆으로 뛰어든 시즈가 순식간에 반지 낀 손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털썩! "파마리나, 어서 지혈을!" "네, 네!" 파세닌은 그를 조종하고 있던 반지가 몸에서 떨어지자 쓰러졌고 시즈가 외치는 소리에 파마리나가 다급히 달려왔 다. 마녀들의 뛰어난 지혈제가 팔에 뿌려졌고 재빨리 오두막으로 옮겨지자 블리세미트가 생명술을 시작했다. 로바메트가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나무집 밖으로 나오는 블리세미트와 파마리나가 지친 표정으로 걸어나오자 그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어떤가?" "괜찮습니다. 팔도 잘린 단면이 깨끗하고 파마리나의 약이 워낙 뛰어나서 한 달 정도면 나을 겁니다." 시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팔을 잘랐다지만 아무래도 찔리는 게 없지는 않았다. 다치게 하지 않 고 제압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점이 있네. 자네들은 내가 마법에 걸린 것은 눈치를 챘으면서 내 아들 놈에 대해서는 눈치 채지 못했나?" "전하의 성격은 드로안 남작이 알고 있었기에 눈치챌 수 있었던 겁니다. 공자 전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니 이상한 점도 느낄 수 없었지요." "그게 아니야, 블리세미트." 파마리나는 그토록 마법에 뛰어난 넬피엘이 최면 마법의 잔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진실을 꺼냈다. 역사의 고리는 처 음부터 파세닌으로 하여금 로바메트를 죽일 생각이었다. 파세닌의 암시는 아마도 로바메트의 음성을 듣는 순간 풀 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로바메트 일가의 두 사람을 일시에 죽이는 일거양득을 얻으려고 했겠지. 만약 대사 제 이상의 치료능력을 가진 블리세미트가 없었다면 그들의 계획은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허허‥ 나도 앞으로 할 일이 만만치 않지만 그들과 싸워야 할 자네들이 더 걱정이로군." 시즈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로바메트의 어조는 마치 자기들을 칭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 개를 돌린 그는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아리에는요?" "옆에서 간호하고 있어. 전하도 들어가 보세요. 이제 곧 깨어날 겁니다." "그, 그러지!" "블리세미트, 괜찮아? 쉬는 게 좋겠어." 파마리나의 염려스러운 음성을 듣고 나서야 시즈는 블리세미트가 기진맥진했다는 걸 알았다. 거의 탈진하다시피 헐 떡이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신성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만 했다. 로바메트의 앞에서는 그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려 고 정신력으로 몸을 지탱했던 것이다. "좀 쉬어요. 바보 같이 순수한 사제." 어느 새 다가왔는지 시즈가 블리세미트의 시야를 손으로 가렸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어린 사제는 암흑의 평온함에 정신이 함몰되어가는 걸 느꼈다. "그만 둬. 번갈아 가면서 누울 셈이야?" 따뜻하지만 그러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바람이 블리세미트를 감싸안자 파마리나가 투덜댔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런데 들어가봐야 되지 않아?" "예?" "파세닌이라는 남자, 씻겨보니 꽤 미남이던데? 생긴 게 바람둥이 기질이 넘쳐나는 것 같더라고. 뭐 그렇지 않아도 아리에 정도라면 다들 탐낼 걸." "하하‥." 시즈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용병 식당에서 있으면서 아리에는 남자들의 찝쩍거림을 상당히 받았었다. 물론 그녀의 손에서 날아간 단도가 그들의 정신상태를 간호해주었지만 가끔 상대가 수로 밀고 나올 때는 시즈와 보 를레스도 가세했다. 연약하게 보여도 여장부인 아리에였다. 시즈는 자신의 연인보다는 혹시나 그녀를 귀찮게 할지도 모를 불쌍한 남자를 걱정하며 말끝을 흐렸다. "설마요‥." 40 악장 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 다면‥. (22) 복면을 한 그들이 자신에게 알아내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 파이얼 로바메 트 공작의 약점을 대라는 것이었다. 답 없는 질문을 해대는 그들에게 얼마나 어이없이 고문을 당해야 했는가. '겉으로는 웃는 탈을 쓴 냉혈한한테 약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알았으면 얼른 말했을 거라고!' 어쨌거나 지금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어린 아이 숨결처럼 부드러웠다. 마치 고문을 당하던 게 꿈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잠시 동안 파세닌은 정말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에라고 자신을 밝힌 여인은 꿈 속에서도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방금 전에 머리를 감고 온 듯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가녀리게 덮었고 눈동자는 태초부터 가장 깨 끗하다는 유니콘의 혈정(血晶)처럼 맑은 붉은 색이었다. 흘러내린 검은 두발로 더욱 희어보이는 목덜미는 만지기만 해도 흰 빛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수건에 물이 마를 때마다 밖에 나가서 차가운 물로 적혀왔는데 파세닌은 힐끔 보았다. 그리고 만족했다. 그녀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었다. 키가 조금 작기는 했지만 한 팔에 잡힐 것 같은 허리는 오히려 불지도 않는 바람에 그녀를 흔들리게 한만큼 가냘퍼 보였다. '크읏! 고문 끝에 낙이로구나! 이런 미녀를 보내주시다니. 레이모하여, 감사하나이다.' 속담마저 마음대로 바꿔버린 그의 머리에는 간호하는 여인과 환자와의 로망스가 둥둥 떠다녔다. 파세닌은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아픈 주제에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의 등받이에 기대고 앉았다. 아리에라는 여인 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놀라서 달려올 것이다. "어머! 안 되요. 아직 일어나면!" 하고. 예상대로 다가오자 그는 기분 좋게 아리에의 손길을 받으며 다시 누웠다. "일어나셨군요. 로바메트 전하를 불러올게요." 파세닌은 보통 때 수도에서 여자들을 꼬실 때처럼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 려 하는 아리에의 손목을 잡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딴 노인네는 없어도 됩니다. 그저 우리 둘만‥켁!" 퍼억! "뭐라고!? 이런 불효 막심한 놈을 보았나!!" "허억∼! 아버지!" "얼어죽을 아버지냐!? 언제는 그딴 노인네라더니!" "아하하하‥. 아버지도 늙으셔서 벌써 귀가 어두워지신 모양입니다." 퍼억! "오냐! 이렇게 어두워진 내 귀에 네 녀석의 '그딴 노인네'가 얼마나 명확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아버지, 난 환자에요." 로바메트는 아들의 걱정으로 안절부절했던 것이 뇌리에서 싸그리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환자라는 말에 씩씩거리며 내뻗던 주먹을 멈췄지만 파세닌을 갈아먹지 못해 안타까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화가 나서 말도 제대로 잊지 못 했다. "게다가 널 구해준 아리에 양한테 대체 무슨 실례냐?" "실례라뇨? 아버지께서 오해를 하시는 겁니다. 다른 여자들처럼 가볍게 사귈 생각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아리에 양에게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쿠웩!" "그게 실례가 아니고 뭐냐? 상대의 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아리에 양은 정인(情人)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교제 신 청을 하는 게 어딜 봐서 예의 있는 놈이 할 짓이란 말이더냐?" "정인이 있든 말든, ‥자, 잠깐 뭐라고요? 정인? 정말입니까? 아리에." 아리에는 대답 대신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홍조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파세닌에게는 더 없이 절망스럽게 느껴 졌다. 실망한 아들을 보자 화낼 기운도 없는지 로바메트는 조용히 말했다. "네 나이가 벌써 24살이다. 그만 하면 방탕한 생활도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 파세닌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진지한 아버지의 말에 그가 마음깊이 뉘우친다고 생각한 로바메트는 고개를 끄덕였 다. 이제 네 녀석도 제 자리를 잡아가는 구나. 하지만 파세닌의 시선은 아버지가 아니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는 아리에를 향하고 있었다. '이미 임자가 있다니‥ 이럴 수는 없어‥.' 로바메트는 아들의 눈물이 정말 진실한 슬픔의 눈물이라고 느꼈다. 그 날밤, 모닥불이 그려주는 불 그림자를 받으며 일행은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아직 건강을 되찾지 못한 파세닌은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본인도 나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절망에 빠진 듯 싶었다. 일행은 모두 그가 빨리 쾌차하기를 빌었다. "전하께서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는 우선은 다시 글로디프리아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 용병국에서 아마 글로디프리아를 압박하고 있었지?" "어찌 됐던 간에 저희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도 우선은 글로디프리아로 가야할 것 같네. 자네들의 말대로라면 '역사의 고리'라는 녀석들은 내가 방해되었기에 죽일려고 했겠지. 그런데 내가 살아 돌아가면 날 그만 두겠나? 자네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놈들인데 군기빠진 기사들로는 상대할 수 없지. 그리고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머리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시즈를 비롯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모닥불의 불꽃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넬피엘이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나 모르니 지금 출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귀찮은 눈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야. 로바메트 당신, 아들 도 그저 영양실조일 뿐이니까 뉘여서 가면 상관없겠지?" "그러면 될 거요. 그럼 출발하기로 합시다." 공작은 파세닌을 데리러가면서 넬피엘을 힐끔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15세 정도로 보이는 연약한 소녀같은 얼굴이었 지만 그가 28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말로 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서는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공작인 자신이 그에게 반말을 들어도 거부감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런 시선을 알고 있는 넬피엘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가 불꽃을 가지고 논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법사로 서의 능력은 로바메트 공작으로 하여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곱상한 외모와 날카 로운 성격으로 인한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 넬피엘이 고안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조차도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바로 파세닌 로바메트였다. 이 남자는 아버지의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온 순간 외마디 경악성을 냈다. "앗!" 사람들은 모닥불 때문인지 그의 눈이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동자의 방향이 넬피엘에게로 향한 걸 알아 챈 순간 로바메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놈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를 주기 전에 파 세닌은 멀쩡한 사람-정신만 빼고-처럼 넬피엘에게 다가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짧았지만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소녀-라고 생각되는-는 아름다웠으니까. 커다란 눈 동자는 소녀가 얼마나 순수하게(?) 자라왔을지 파세닌은 가슴깊이 감동했다. 약간 어려 보이는 그를 망설이게 했지 만 약간만 더 키우면 충분한 것이다. 파세닌은 그가 장담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오‥ 레이디‥." "난 남자야." "예, 당신은 나‥암자‥." 그 말에 파세닌이 말을 더듬거렸고, 넬피엘은 서슴없이 그의 손을 끌어 자신의 사타구니에 가져다대고 씨익 웃었다. "맞지?" 결정타였다‥. 파세닌은 충격으로 머리에 열을 대피며 며칠동안 끙끙 앓았다. 그는 가끔 넬피엘의 것을 만졌던 손등을 물어뜯으면 서 헛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내, 내 손은 저주받았어‥." 41악장 1화 시즈들과 로바메트 일행이 글로디프리아로 막 마차를 몰기 시작할 무렵, 젠티아들은 이미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상 태였다. "이제 슬슬 보이는 군. 검은 거인의 모습이‥." 보통 인간을 초월한 시력으로 거인의 두 어깨에 펄럭이는 드로안의 깃발이 펄럭이는 걸 본 젠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그의 부하들은 글로디프리아를 잘 지켜낸 것이다. "성에 연락을 해놓았죠?" "슬슬 마중 나올 때가 되었어. 아! 저기 누가 오는 군." 젠티아는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사들이 잔뜩 마중을 나올 줄 알았는데 단 한 명, 집배원 복장의 소년이었다. "아이킨? 아직 용병국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건가?" 헐레벌떡하여 달려온 아이킨은 말에서 내려 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 말을 타시고 포시킨으로 가십시오. 마크렌서 자작이 각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차는 제가 몰고 갈 테니, 어 서!" "데린! 먼저 성에‥." "다녀와요, 젠티아. 먼저 가서 목욕물 데워 놓을 게요." 마중을 받아야할 때 배웅을 받게 된 젠티아는 아이킨이 말할 포시킨으로 향했다. 포시킨은 글로디프리아의 정면에 있는 산턱으로 펴온 성을 감싸고 있는 롤크 산에서 뻗어나온 한 줄기였다. 포시킨을 확보했다면 용병국의 군대가 그의 영지 깊숙이 들어왔다고 봐도 좋았다. 젠티아가 마크렌서 자작의 진영에 막 도착했을 때 기사들과 군사들은 이미 전쟁터로 나간 상태였다. 아마도 포시킨 중간의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적과 맞붙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짜 고짜 기사들이 회의하는 막사로 들어갔다. "토클레우스! 전쟁 상황을 보고 하도록!" "각하!" 그의 모습에 기사들이 벌떡 일어섰다. 대부분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러 나간 터라 안에는 몇 명의 참모격 기사들 밖 에 없었다. 연락을 받은 마크렌서 자작이 만면에 놀라움과 기쁨을 띄고 달려왔다. "오, 레이모하여‥ 그대는 우리를 버리지 않는 군요. 각하, 조금 늦었지만 잘 오셨습니다. 당장 갑옷을 입고 적들에 게 얼굴을 보여주십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얼굴을? 토클레우스, 우선 전쟁 상황부터‥." "어서요! 이봐! 빨리 갑옷 준비해와!" "자, 잠깐!? 전쟁상황을‥." 마크렌서 자작은 상관의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 인형놀이 하듯 젠티아에게 갑옷을 입혔다. 이유도 모른 체 그에게 떠밀려 군사들 앞에 섰다. 처음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명, 두 명‥ 젠티아의 얼굴을 보자 점점 군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앗!" 마크렌서 자작이 그 함성의 뒤를 이어서 외쳤다. "다들, 불안했을 것이다! 한 마디만 하겠다. 모두 각하의 계략이다!" "우와아아아앗!" "각하, 검을 들어주십시오. 전장에 있는 백 장의 꽃잎들에게‥ 아니 백 한 장의 꽃잎들에게 힘을 줘야 합니다." 젠티아는 백 명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낼 때처럼 검에 기운을 가했다. 웅―하는 소리와 함께 성음검 특유의 울림 이 강하게 하늘로 퍼졌다. 보통 진영은 군사들이 싸우는 상황을 보기 쉽게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잠시 싸움을 멈춘 양측의 군사들이 햇빛을 받 아 반짝이는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소리도 들었다. 때를 맞춰 토클레우스 자작이 깃발을 든 군사들에게 기를 흔들 라고 소리쳤다. "공격이다!" 계획이 되어있었는지 구릉에 숨어있던 글로디프리아의 군대가 양옆에서 카로안의 군사들에게 몰려들었다. "협공이다! '값싼 남작'의 계략이었어. 퇴각! 퇴각하라!" 젠티아는 잠시 용병국의 기사들이 그토록 겁쟁이였나 생각해보았다. 그의 기억에 그들은 협공을 당한다고 물러설 군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자신과 몇 번이나 싸운 이들이 아닌가. 설마 자신의 얼굴을 봤다고 물러가겠는가? '토클레우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리둥절한 심정에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크렌서 자작을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크렌서 자작은 모른 척 무시했다.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며 그는 외쳤다. "총공격이다! 검을 들고 이 땅을 밟은 자의 최후를!" "최후를!"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글로디프리아군. 그들의 뒤를 따라 가는 젠티아에게 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값싼 남작인가?" "카로안의 국왕 폐하시군요." "이번엔 진짜군. 일부러 가짜를 세워서 끌어드리다니‥ 이번에는 내가 졌네." "네?" "모른 척해도 이제와 무슨 소용이 있으리! 하지만 다음 번에는 이 치욕을 꼭 갚아주겠네!" 카로안군은 패배했다. 실베니아 국경 밖으로 멀리 물러나서 다시 국경을 넘보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은 모르지만 젠티아에게는 너무도 싱거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얼굴 보여주고 군사들 뒤를 따라간 게 전부였다. 그가 막사 안에서 승전보고를 받고 있을 때 한 기사가 터벅터벅 들어왔다. 격전을 치렀는지 갑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는데 그를 보고 젠티아는 벌떡 일어섰다. "보를레스! 그건 내 갑옷이잖아? 내가 가장 아끼는 걸." 오랜만에 본 주제에 대끔 하는 소리가 갑옷타령이라니. '이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니까.'하고 웃으며 보를레스는 갑옷을 벗었다. 하나를 벗고 뒤집을 때마다 땀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주르륵 쏟아지는 그의 국물에 젠티아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돼, 됐어. 그냥 자네 주지." "감사합니다." 보를레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 동안 동고동락했던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젠티아는 깨끗하게 썼을지 모르지만 그가 사용하는 동안 갑옷은 이 곳 저 곳 찌그러지고 흠집이 가득해졌다. 한 달 정도만에 애인에게 정을 쏟듯 마음을 빼 앗겨버린 것이다. "고생했나보군." "예, 보를레스가 가장 고생했지요. 정말 죽을 고생이었을 겁니다." "하하‥. 대단하군. 무슨 일이었는데?" "각하를 흉내냈죠." "그게 죽을 고생할 정도의 일이야?" "정상이 비정상을 흉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농담입니다." 마크렌서 자작은 명백하게 젠티아를 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젠티아는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를 정상적이라고 보는 사람은 기껏해야 데린 킬유시 정도였다. 얼굴이 굳은 젠티아에게 마크렌서는 보를레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 친구가 자크 왕을 거의 삼십 여분이나 상대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자크 왕을?" 자크는 카로안의 국왕으로 대륙 3대 검사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지금쯤 열심히 꽁무리를 빼고 있을 그를 생각 하며 젠티아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를레스를 주목했다. "내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하·하·하! 물론이죠, 각하.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신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게다가 한 달 전에는 남작 부인께서도‥." 마크렌서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떠오르는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젠티아는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느꼈지만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억지로 활기차게 말했다. "그, 그래! 보를레스가 많은 활약을 했어. 오늘 저녁식사 때 좀더 자세하게 말해주게. 피곤할 텐데 다들 쉬어야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등을 돌리는 젠티아를 보며 보를레스와 마크렌서 자작은 회심의 미소를 교환했다. 41악장 2화 얘기를 시작한 것은 멜첼이었다. 그의 입에서 술술 과거의 일들이 다시 흘러나오자 보를레스는 흠칫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멜첼이 얼마나 보를레스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보를레스는 기본이 잘 되어 있는 검사입니다. 남작님처럼 화려한 검기(劍技)보다는 철저한 훈련으로 완벽한 서해검 격을 다지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보를레스는 확연히 달라졌다. 검을 2초동안 검을 9번 휘둘렀고 단번에 휘두를 때는 1초에 5~6번 휘둘렀다. 사실 그는 엘시크의 궁정기사들도 인정하는 검술의 소유자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육체적인 재능이 있는 보를레스는 금방 뛰어난 실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재능을 키울 기간은 다른 기사들보다 훨씬 적었다. 산적, 용병 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의 장점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크호도 보를레스의 장단점을 집 어낼만큼 큰 차이의 실력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의 검술은 향상된다기보다는 다양해졌다. 그런데 글로디프리아에는 그의 검술을 고쳐줄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멜첼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멜첼은 예전에 보를레스와 시즈가 검을 나누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동방검법의 이해로 그는 동작을 끊김없이 이어갔지만 멜첼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무조건 동작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동방검법도 무조건 부드럽지 않다. 동방인들의 검이 빠를 때는 번개보다도 빠르지. 너 역시 빠르다. 네가 제대로 검을 내리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야. 그런 데 동작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힘을 억지로 줄이다니 바보짓이다. 시즈님이 아무리 성약을 먹고 힘이 대단해졌다지만 검술에 있어서 한 팔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구나 다름 없다. 내가 시즈를 상대했다면 1분 이내로 제압했을 거다." 보를레스는 처음에는 멜첼이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과장해 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변화했다. 그 시작은 우선 자신이 변하면서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를레스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 다. 1초에 2번을 휘두르며 힘겨워했던 보를레스는 2초에 9번을 휘두르면서 30분을 견뎌냈다. 반시간, 그 안에 상대 는 16000여 번의 검을 막아야 할 것이다. 그 원리는 힘의 배분에 있었다. 메트로놈이 초마다 딸깍거리는 소리에 맞 춰서 그의 검은 잠시 쉬었다가 폭발적으로 내리그어졌다. 이런 그도 '값싼 남작'의 기사단, 백 장의 꽃잎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크읏!" "수고하셨습니다." 저녁만 되면 손톱만큼 얇아진 달의 끝 부분처럼 뾰족한 검 끝이 보를레스의 턱을 간질였다. 패자는 이유를 모르겠 다는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명히 검의 속도는 자신이 빨랐지만 상대는 가볍게 그의 검이 이어질 방향을 끊어버 렸다. 멜첼은 동방검법에서처럼 힘을 줄이지 말라고 했지만 보를레스는 그러지 않고는 이기지 못한다고 역설했다. "그게 앞으로 네가 풀어야할 과제다. 힌트는 이미 수없이 주었다."라고 멜첼은 웃었다. 보를레스가 검술에 대한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크렌서 자작도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다른 것이었지만 그에 비하면 보를레스의 고민은 속 편한 것이라 말해도 좋았다. "카로안군이 공격한 시기는 너무도 적절해‥. 아무리 내란의 시기라지만 남작께서 아직 성에 남아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카로안군이었다면 반란군으로 인해 다급한 실베니아 중앙에서 각하를 불렀을 때 공격했을 거야." 책상에는 젠티아가 여행-이라고 마크렌서는 생각했다.-을 떠남으로 해서 넘겨진 수많은 서류들이 차곡히 쌓여 처리 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서류처리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구 겨져 나뒹구는 종이도 많았다. 탕! 마크렌서 자작은 가볍게 책상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화가 난다고 새게 두들겼다가 부서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 다. "역시 카로운군은 남작님의 부재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아침 일찍 피브드닌과 얘기해봐야겠어." 책상 앞의 창문을 열자 금색 달빛이 쏟아져 들었다. 그는 달빛을 맞으며 보기만 해도 나른하게 기지개를 폈다. "끄으으으으!" 콰당! 기사가 기지개를 펴다가 의지와 함께 넘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마크렌서 자작의 정신 체계는 혹사당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내라도 있으면 창문을 닫고 이불을 덮어줄 텐데‥. 노총각은 서러운 것이다. "푸에―취!" "자작, 괜찮소? 감기가 심하게 들린 모양이구려?" "어젯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바람에‥." "저런. 여름이 되려면 아직도 한 달은 남았습니다. 시간을 내서 토플레에게 가보시오." "그래야겠소. 콜록! 콜록! 그보다 어서 계속 하시오." 피브드닌은 안쓰러운 듯 혀를 찼다. 마크렌서는 피브드닌을 재촉하며 다섯 번째 손수건을 꺼냈다. 그래도 자연스럽 게 어울리는 게 그 동안 꽤나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자작의 생각대로 카로안군은 남작님이 안 계시다는 정보를 얻었지만 신뢰하지는 않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벌써 밀고 들어왔겠지. 아마도 정보 수집의 출처가 정상적이지 않은 모양이오." "그 말은 보를레스가 각하의 흉내를 제대로만 내준다면?" "의외로 이 전쟁은 쉽게 끝날지도 모르오." 마크렌서 자작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아마도 보를레스는 벌썩 연병장을 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군요. 그런데 부탁한 것은 다 됐소?" "지금 토루반이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아!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오. 예전부터 우리에게 협력하는 뛰어난 마법사가 한 분 계시오." 41악장 3화 "뭐야? 귀가 왜 이렇게 간지러워?" 마나이츠는 귓바퀴를 벅벅 긁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물지 않는 거야?" 게다가 단조로운 생활이 날이 갈수록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지난 번 생전 걸리지 않던 감기를 앓고 난 이후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로는 더욱 심했다. 그나마의 취미이던 낚시조차 제대로 되지 않자 그는 짜증을 냈다. "악악악!" 낚시대를 마구 휘둘러대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모습이 실패한 낚시광의 말로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마나이츠는 낚 시광이 아니라 마법사였다. 파웅―!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호수는 폭발하듯 가운데 수면이 솟아오르며 터졌다. 다른 마법사들이었다면 쓸데없는 짓 으로 마나를 낭비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으로 마나를 낭비할 정도로 마나이츠는 무료했다. 짝짝짝! "과연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세일피어론아드 제일의 마법사답군요." "누구냐?" 무료함에 지쳤던 노마법사는 긴장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상대는 뛰어난 마법사나, 기사가 틀림없었다. "헌데‥ 그렇게 마력을 낭비하느니 저희한테 그 마력을 투자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토클레우스‥." 제의에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도 잠시였다. 제의 상대는 그가 가장 귀찮아하는 젠티아의 족속이었으니까. 마나 이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만 두게. 귀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나? '값싼 남작'이 날 부려먹다 못해 이제는 그 부하까지 날 부려먹으려고 하 는 군." 만약 마크렌서 자작이 찾아올 것을 알았다면 그는 쥐고 있던 낚시대를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 나 대륙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고 알려진 마나이츠라고 해도 지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는 원수까지도 설득한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언변가였 다. "제가 보기에 백작님께서 무료해하시는 것 같아 제의를 해본 것입니다. 구미가 당기지 않으십니까? 낚시만으로는 백작님의 무료함을 해결할 수 없을 텐데요‥." "흐음‥." 자존심을 세우고 싶지 않았다. 마크렌서의 잘 돌아가는 혓바닥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마나이츠의 상황은 그러했기 에. 수염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쓰윽 흩은 마나이츠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말을 돌리지 말게. 자네가 나한테 시킬 일은 뭐지?" "카로안 군이 쳐들어왔다는 걸 아십니까?" "뭐!? 카로안 군이?" "이미 글로디프리아 전방 3km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래도 남작 각하께서 부재 중인 걸 알아챈 모양이 에요. 자크 카로안 왕까지 나선 대규모의 군대입니다." 마나이츠는 심각하게 이마의 주름살을 늘리며 손짓으로 설명을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국가의 내란(內亂)이 다 른 국가가 침략하기에 좋은 기회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카로안군이 벌써 행동을 개시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것이다. "저희 성에 아스틴네글로드의 국사, 토루반님이 와 계십니다. '드워프의 현자'죠." "안다. 그가 글로디프리아에 있다고?" "이번에 시즈 세이서스님이 젠티아님과 함께 수도로 떠난 것을 아시죠?" "물론이지." 마나이츠는 이를 갈았다. 젠티아는 수도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등에 칼을 겨누고 저주와 같은 협박으로 넬피엘을 끌고(?) 갔던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마크렌서는 뭔가 이상한 기색을 느꼈지만 모른척 했다. "이번에 시즈님이 오실 때 일행으로 함께 오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헤트라임크의 양자 녀석이 왔었지. 학자로서 이름이 있다고 하더니 제법 유명세 타는 인물들과 사귀 는 군." "하하‥. 시즈님도 한 유명세하시는 분입니다. 어쨌든 '드워프의 현자'께서는 전쟁을 대비하여 마법갑옷을 만드실 생각입니다." "하나만?" "예." 마나이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에서 불리한데 고작 하나의 갑옷으로 그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 인가? 전설 속에나 나오는 무구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아무리 드워프의 현자라지만 전설의 무구와 동급인 마법갑 옷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도움이 있더라도. 글로디프리아에는 마법사가 없지 않다. 그 중에는 꽤 실력이 있는 자도 있다. 적어도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지점이었 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어려운 계획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나이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크렌서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녀석들이 꾸미는 일은 재미있을 거야. 자작의 곧은 눈빛은 노마법사에게도 젊음을 조금이나마 돌려주었다. 마나이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 했다. "가보자고." 한 편, 보를레스는 정식으로 임무를 받았다. 멜첼은 '이것도 훈련이다.'라는 조건을 달면서 적군을 한 명 잡아오라고 말했다. 카로안군의 정보를 얻은 출처가 그들로서 신뢰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병사를 잡아오라는 말이오? 카로안 군의 진영에 가서? 죽으라는 말이 아니오?" "이것도 훈련이다. 지금의 자네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 보를레스는 말없이 멜첼을 바라보았다. 십여 일 동안 멜첼이 시켰던 가혹한 훈련도 큰 불평 없이 따라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훈련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많이 무리가 있었다. 다시 한 번 항의를 하려는 그에 게 멜첼은 비릿한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흐흐‥ 겁나나?" 보를레스는 '하겠소!'라고 외쳐버렸다. 41악장 4화 멜첼은 사람을 비웃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직 검술을 완성하지 못했으니까.'라는 걱정에 휩싸여 있던 보를레스가 단숨에 불타오를 정도로. "우선은 그 걸음부터 고쳐야겠어." 멜첼은 보를레스의 걸음걸이가 기사의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는 빠르지만 무게감있게 발을 놀린다. 하지만 그가 정 찰 및 적군 포획에 있어서 '도둑발'을 추천했다. "빠르고 가볍게. 발이 땅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시키고 움직여야 해요" 그는 잠시 후 교대했는데 상대는 거리 춤꾼이었다. 보를레스와 동갑내기라는 그는 손뼉을 짝짝 치며 리듬을 돋궜다. "짝! 짝! 짜자작! 더 빠르게 경쾌하게!" 탭댄스를 춘다는 그의 발에 움직임을 맞추려고 보를레스는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도 힘에 묶여있 었다. 마치 고릴라가 침팬지 흉내를 내는 듯 했다. 미세하지만 탄력있게 튀고 있는 탭댄스의 빠르기를 따라가려면 한동안 노력해야할 것 같았다. "할 수 있겠지?" "충분합니다." "할 수 없다면 그만 두게." '병 주고 약 주기는‥.' 다음 날, 마크렌서 자작의 자상하고 배려 깊은 말에 보를레스는 내심 투덜거렸다. 아직 검술의 요체도 파악하지 못 한 상태에서 적진에 잠입을 명령한 최종 결정자가 틀림없이 마크렌서 자작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며 춤을 춘 덕에 그의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렸다. 물끄러미 부들거리는 그 의 다리로 향하는 마크렌서의 시선. 보를레스는 이를 악물고 다리의 경련을 멈췄다.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는 순간 이 채를 띠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짓했다. "그럼 가보게, 보를레스. 건투를 비네." "예." 찰칵. 터벅터벅터벅‥. "멜첼, 어떤가?" "위험하지는 않겠지?" "하하하! 적진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잖습니까." "음‥.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어렵게 말한 것도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비꼬지 말아주십시오. 각하의 날카로운 혀는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듭니다." "칭찬으로 들어두겠네. 보고나 하게." "보를레스의 성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멜첼은 싱글벙글 웃었다. 잔혹한 깐깐함이 표현될 정도로 무표정한 그가 이토록 실없이 웃는다는 것은 주목할만했 다. 이미 그동안의 보고를 통해서 보를레스가 상상을 초월하며 빨리 성장하고 있다고 들어온 마크렌서는 마음을 놓 았다. "만약 그가 방어를 읽는 힘만 갖는다면‥. 아마 전 그에게 5분도 견디지 못할 겁니다." "지금은 갖추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아직 이번 임무는 위험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어요. 오늘부터는 군사들의 간단한 진형 훈련으로 다들 바쁘지 않습니까. 연습 상대로 적군보다 좋은 것 은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따라갈 테니까 너무 염려 마십시오." "흐음‥ 그렇게 해주게. 재능 있는 인재를 쉽게 잃을 수야 없지. 아! 근데 말이야‥." "예?" "자네, 젠티아 님한테도 5분은 견디지 않나?" "3분입니다." 마크렌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멜첼이 '싱겁게'하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고 나가자 그는 순식간에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나도 3분 정도인데‥. 멜첼 녀석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어버린 거야? 나도 노력해야 겠는 걸‥."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보를레스는 수풀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기어다닌다고는 해도 땅에 닿아있는 것은 발 끝과 손 뿐. 옆에 함께 있는 멜첼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네 발 짐승이라고 해도 믿어질만큼 신속하고 소리없이 움직 였다. "여기서부터는 위험지역이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 "그러니까 적군 한 명만 잡아오면 되는 거요?" "그래. 일단은‥." 보를레스는 멜첼의 마지막 한 마디, '일단은‥.'이라는 단어와 함께 말이 흐려지는 게 왠지 불안했다. 하지만 '일단 은' 지시대로 움직였다. 하루만에 배워서인지 몰라도 '도둑발'은 검술보다 익히기 어려웠다.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아서 빨리 이동하면 기척 이 적군에게 잡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는 주의를 세밀히 살피며 조심조심 움직였다. '식사 배급 시간인가 보군‥.' 보를레스는 풀숲에 숨어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식사 배급시간이라면 분명히 곧 휴식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적어 도 용병 일을 하면서 몇 번 전쟁에 참가했을 때 비슷한 종류의 일은 몇 번 맡았기 때문에 식사 후 병사들이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기척이 없으면서도 빠른 시즈가 함께였지만‥. '누구를 잡아갈까?' 보를레스는 고민했다. 카로안군의 식사 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내장도 조금씩 요동을 쳤다. '크으‥ 잘못하면 들키겠군.' 시간이 좀 걸리리라 생각한 그는 아예 배를 깔고 누웠다. 기회는 일찍 왔다. 많이 먹은 탓인지 아니면 타국이라서 소화가 안 되는지 복부를 움켜쥐고 숲으로 뛰어들어가는 병사가 있었던 것이다. 보를레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습격을 당하게 되면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보를레스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혼자서 도망 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태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그는 병사의 숨소리도 들릴만큼 접근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크윽‥! 냄새 한 번 엄청나군." 소화가 안 된 배설물은 냄새가 정말 심하다. 제대로 숙성된 것의 고아한 냄새가 그리워졌다. 병사의 배는 부드득! 부드득! 하는, 도저히 인간의 배설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고함을 지르며 위로 먹었던 것을 죄다 토해냈다. "휴우‥." 저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음성인가. 아마도 병사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단, 뒤에서 보를레스가 코를 막고 째려보는 것을 알지 못할 게 지옥의 귀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퍽! 퍽퍽! 팍팍팍! 우선 한 사람이 카로안 군의 진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보를레스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매일 카로안에서는 한 명씩 병사들이 자취를 감췄다. 병사들 사 이에서는 카로안군을 잡아가는 귀신이 있다고 했고 2m 정도 되는 괴물이 실종된 병사들을 잡아먹고 있는 것을 보 았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카로안 군은 밤을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진영을 이탈하는 사람들 이 생겨났다. 이쯤 되자 지휘관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울분에 찬 어조로 자크 왕이 호통을 쳤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문으로 나도는 존재 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하자 자크 왕은 한층 노성(怒聲)을 높였다. "이렇게 되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물 맞은 불씨처럼 없어질 게 아닌가? 무슨 수를 써보라!" "폐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바르스젠." "폐하는 충분히 미남이십니다. 진정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젊은 재상은 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그가 웃으며 농담하듯 말하자 자크 왕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자 신이 기사들 앞에서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네. 너무 흥분했군. 하지만 자네들도 현재의 사태를 알고 있겠지?" "예!" 자크 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왕이었기에 광폭한 면을 가지고서도 신하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다. 그의 사과에 지휘관들은 웃음을 참으며 크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크왕은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그 동안 받은 스트레 스로 주름살이 나이에 비해 많아 절대 미남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기사들이 보기에는 매력적인 카리스마라고 말할 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이 흉터의 카리스마든 내면에서 우러러 나오는 본연의 카리스마든 간에 자크 왕에게 사람 들은 끌렸다. "우선은 경비를 강화하도록. 용변을 볼 때는 몰려가도록 하고, 밤에는 경비를 세 배로 늘려라." "폐하, 경비를 모두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바스트젠." "경비를 강화한다면 소문의 괴물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침체된 사기를 되돌리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그로 인한 피로도 또한 대단합니다. 함정을 놔서 소문의 괴물을 잡아야 합니다." "재상의 말은 한 군대만 경비를 허술하게 해야 한다는 말 이렸다?" "한 군대 밖에 없다면 의심하고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두 세 군대는 둬야겠군." "역시 영민하십니다." 과장 섞인 칭찬에 자크는 껄껄 웃었다. 바스트젠은 젊은 재상답지 않게 능숙했다. 심지어는 아부까지 말이다. 기분 이 좋아진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장소의 결정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경비를 소홀히 한다면 그 말은 인원은 적어도 실력이 있는 배치해야 할 터인 데‥ 킬튼!" "예! 폐하." "이시므!" "예! 폐하, 하명하십시오." "자네들이 수고해줘야겠어. 재상, 내 시위들을 빌려주지. 계획이 성공하길 빌겠네." 용병왕의 시위들은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개인적인 전투에 있어서는 기사들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었 기에 재상은 용병왕의 처사에 감사하고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자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쉬쉬 흔들며 막사를 나갔다. "자아‥ 그럼 우리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봅시다." 카로안 군 지휘부의 심상찮은 움직임. 이것을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이 이빨을 들 어내고 입을 벌리고 있는 줄 모르고 '손님'은 식사 배급시간에 어김없이 동쪽 수풀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41악장 5화 일주일간 적군을 포획하면서 보를레스의 '도둑발'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다리의 빠르기가 그를 가르치던 거리 춤 꾼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수를 연발할 정도가 되어있었다. 보를레스가 '도둑발'을 완성한 의미는 컸다. 기사로서 만약 실패하거나 벌이가 시원치 않을 경우, 부업을 가질 수 있는 밑천을 마련했다는 뜻도 됐다. 그런 부소득(?)과 상관없이 보를레스는 카로안 병사를 잡아오는 임무에 재미를 붙였다. 카로안 진영에서 자신에 대 한 소문이 멋지게 퍼진 것을 알게 이후로는 마치 귀신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끌려온 카로안 병사 는 고문을 받는 대신 검술 연구로 심혈을 불태우는 보를레스의 연습상대가 되어야 했다. 일종의 인간 샌드백. 나무 검은 들었지만 빗발처럼 쏟아지는 보를레스의 검을 막는다는 것은 검술에 뛰어난 조예가 없는 그들로서는 무리였 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공격을 해보는 보를레스의 연구를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애를 쓰며 도와주는 모습 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생체실험의 잔인도에 맞먹는 이 연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시간 정도면‥.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겠습니다. 그만 해주십시오." "조금만 더 하면 안 될까?" 오히려 보를레스가 진심으로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강한 기사들만 상대해서 깨닫기 힘들었던 그의 장점들 이 나약한(?) 연습상대를 구타해대면서 조금씩 깨우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윽! 흐어어어엉∼." 하지만 포로가 울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겠다. '남자가 꼴사납게!'라는 둥의 말로 달래려 했지만 포로들 은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었다. 더 이상 맞아서 불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쳇! 할 수 없지. 내일은 좀더 맷집이 있는 녀석으로 잡아오는 수밖에." 구타가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자 포로는 천천히 정신을 잃어갔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에 비치는 사내는 카로안 진영 에 나도는 소문의 악마가 투덜대고 있었다. 포로들을 구타하면서 보를르스는 인간이 무의식중에 규칙을 만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떤 존 재나 동작에서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신나게 맞던 연습상대가 어느 순간부터 한 둘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전투에 익숙한 기사들이라면 순간적으로 공격의 규칙을 찾아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이 너무나 쉽게 그의 검을 막아내던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용병 생활을 하 며 전투에서 싸우던 일을 떠올린 보를레스는 그 또한 상대의 공격을 타이밍을 찾아서 끊을 때가 있었음을 상기하고 흥분했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또다른 고민에 빠져버렸다. 실마리는 찾았으니 해결방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위에서 인간이 만든 다는 규칙은 타이밍, 리듬이다. 막무가내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생각 없는 공격은 효율도 없었고 숙련된 검사들한 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검술이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만의 규칙이면서 남들은 타이밍을 잡아내기 힘든 리듬을 찾 아야 했다. 그렇기에 보를레스는 새로운 연습상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좀 튼튼한 놈으로‥.' 위의 중얼거림 같은 포로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정말로 필요할 때 얻기 힘들다.'라는 말처럼 카로안 진영은 갑자기 경비가 삼엄해져 있었다. 소문이 지휘관의 귀에 들어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보를레스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빠르게 돌아가며 방어가 소홀할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가 와있는 것을 아는지 카로안 병사들은 오늘은 또 누가 끌려갈지 혹시 나 대상이 될까봐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손에 든 수프가 제대로 목으로 넘어갈까 심히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쓸만한 녀석은 진영 중심에 있을 텐데 너무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단 말이야‥." 네 발 짐승처럼 양손을 땅에 대고 그는 치즈를 향해 달려가는 생쥐같았다. 하지만 생쥐들은 치즈를 가지러 가기 전 에 주위를 살펴본다. 보를레스는 '도둑발'을 이용해서 단숨에 나무를 기어올랐다. 덩치는 곰만한 주제에 쥐새끼 흉 내를 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에게 있어서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용병으로 숲에서 싸울 때 주위 관찰 을 게을리 하면 주어지는 것은 죽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다. 좋은 습관은 혹시나 있을 실수를 줄인다. 독수리처럼 카로안 군의 경비 상태를 살펴보던 보를레스의 눈이 흥미로움 으로 빛을 발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이다. 균일하게 퍼져있는 경비병들이 어느 시점에 있어서는 '일부러' 라고 느껴질 만큼 부자연스럽게 들어가지 않는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보를레스가 몇 명의 포로를 포획한 지점이었 다. 그 곳에는 슬쩍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사내들이 긴장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고 서 있었다. '함정이네. 속셈이 뻔히 보인다, 보여!' "흐흐흐‥." 보를레스는 카로안 군을 골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늦봄,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갈 시간. 푸른 하늘이지만 서서히 윤곽을 보이는 백색의 달이 곧 있을 밤의 방문을 알리 고 있었다. '어서 와라‥.' 이시므는 손에 닿는 위치에 검을 내려놓고 털썩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용병왕의 150여 명의 시위 중에 약한 축에 속했다. 체격이 작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체의 우세가 승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얕볼 사람이 아니었다. 국민의 16% 가량이 용병인 카로안국, 그 안에서 국 왕의 시위라는 것은 날고 긴다는 수많은 용병들 가운데서도 한 차원 높은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일 것이다.'라고 이시므는 흉수의 생각을 예측했다. 이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위에서 말했다 시피 다른 함정을 맡고 있는 자들에 비해서 가장 작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무에 기대앉은 것은 먼저 흉수를 유인하 려는 생각에서였다. 입은 불침번을 서는 평범한 병사들처럼 피곤에 지친 한숨을 내뱉었지만 정신은 언제일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 칼끝처럼 곤두섰다. 투르륵! 무언가로 인해 돌이 움직이는 소리. 이시므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벌써 다리는 약간 구브러진 채 상대 의 선공을 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드디어 왔구나! 어디냐?' 휘익―! 파공성이 귓가에 스쳤다. 황급히 몸을 굴렸다. 그러나 피했다고 생각하며 일어선 순간, 그의 다리에 퍽! 하 고 충격을 주었다. '돌멩이‥?' 의아했다. 암기 종류였다면 그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물론 돌멩이도 충분히 암기라 말할 수 있었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쇠붙이들과는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우선 속도가 달랐다. 그 차이는 미세했지만 뛰어난 어 쌔신이나 검사들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결정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 단도만 하더라도 날카로워 공기저항이 적고 검신 끝부분에 무게중심이 실려있어 방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피하기 힘 들었다. 아니, 파공성이 적어 피할 생각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암기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어긋난다. 적어도 단검류 정도는 전쟁에서 잠입 및 정찰에 기본적으로 구비되는 게 상식이었 다. 당연히 있어야할 무기가 없다면 군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암기 가 아닌 돌멩이를 주워던진 이유는? 답을 추리해감에 따라서 이시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결론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날 놀리는 건가?" 실력있는 용병들은 자존심이 대단하다. 상대의 유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자존심이 상하다못해 썩 는 느낌이었다. 용병왕을 따라서 전장을 쏘다닌 지 수 년, 이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한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모두 그의 검을 맞고 땅 속 깊이 묻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불타는 눈동자가 돌이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 41악장 6화 '어서 와라‥.' 이시므는 손에 닿는 위치에 검을 내려놓고 털썩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용병왕의 150여 명의 시위 중에 약한 축에 속했다. 체격이 작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체의 우세가 승부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얕볼 사람이 아니었다. 국민의 16% 가량이 용병인 카로안국, 그 안에서 국 왕의 시위라는 것은 날고 긴다는 수많은 용병들 가운데서도 한 차원 높은 실력자라는 의미였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일 것이다.'라고 이시므는 흉수의 생각을 예측했다. 이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위에서 말했다 시피 다른 함정을 맡고 있는 자들에 비해서 가장 작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무에 기대앉은 것은 먼저 흉수를 유인하 려는 생각에서였다. 입은 불침번을 서는 평범한 병사들처럼 피곤에 지친 한숨을 내뱉었지만 정신은 언제일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 칼끝처럼 곤두섰다. 투르륵! 무언가로 인해 돌이 움직이는 소리. 이시므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벌써 다리는 약간 구브러진 채 상대 의 선공을 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드디어 왔구나! 어디냐?' 휘익―! 파공성이 귓가에 스쳤다. 황급히 몸을 굴렸다. 그러나 피했다고 생각하며 일어선 순간, 그의 다리에 퍽! 하 고 충격을 주었다. '돌멩이‥?' 의아했다. 암기 종류였다면 그는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물론 돌멩이도 충분히 암기라 말할 수 있었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쇠붙이들과는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우선 속도가 달랐다. 그 차이는 미세했지만 뛰어난 어 쌔신이나 검사들의 대결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결정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 단도만 하더라도 날카로워 공기저항이 적고 검신 끝부분에 무게중심이 실려있어 방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피하기 힘 들었다. 아니, 파공성이 적어 피할 생각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암기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어긋난다. 적어도 단검류 정도는 전쟁에서 잠입 및 정찰에 기본적으로 구비되는 게 상식이었 다. 당연히 있어야할 무기가 없다면 군인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암기 가 아닌 돌멩이를 주워던진 이유는? 답을 추리해감에 따라서 이시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결론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날 놀리는 건가?" 실력있는 용병들은 자존심이 대단하다. 상대의 유희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자존심이 상하다못해 썩 는 느낌이었다. 용병왕을 따라서 전장을 쏘다닌 지 수 년, 이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한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모두 그의 검을 맞고 땅 속 깊이 묻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불타는 눈동자가 돌이 날아온 방향을 향했다. "거기냐?" 숨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이시므는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의 보를레스를 유인하려 했던 냉정함을 유지했더라면 자신 의 위치는 드러났지만 아직 상대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는 그가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쉭―! 퍽! 정강이에 날아온 돌이 아픔을 선사하자 그나마 있던 이성은 산산조각났다. "흐아아아압!" 보를레스는 돌 몇 대 맞았다고 광분해서 고함을 질러대는 이시므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놀리는 건가라니‥. 어떻게 내 배려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보를레스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그의 입장에서는 보다 싱싱한(?) 포획물을 원했던 것이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약간의 타격을 주면 상대를 심적으로 궁지에 몰아 기습할 계획이었다. 뭐 과정은 어떻든 무슨 소용인가? 이시므는 보를레스의 예상을 깨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흥분은 보를레스의 검을 막는데 불리(不利)한 조건이 될 것이다. 보를레스가 원했던 결과였다. 보를레스에게 부담스러운 보초병들도 숲 속 깊이까지는 쫓아오지 못한다. 진영을 지켜야 되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포획 대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시므는 진영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도망가던 보를레스가 그의 다 리가 멈칫거린다 싶으면 뒤돌아서 돌을 던져댔던 것이다. '이 정도면 됐어.' "이봐, 너무 흥분한 거 아니야?" 카로안 진영에서 충분히 멀어졌음을 확인하자 보를레스는 도망을 멈추고 대끔 한 마디를 뱉었다. "네 놈을 잡아가 포상을 두둑하게 받을 거라 생각하니 기쁨에 흥분이 멈추질 않는다." 이시므는 뒤늦게 이탈을 깨달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혼자 대적해도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변태냐? 하긴‥ 나도 네 녀석을 잡아가서‥ 므흐흐흐." 보를레스는 '두들겨 패고 놀 것을 생각하면'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하지만 이시므는 방금 전의 소름끼치는 웃음만으 로도 보를레스가 막강한 사내임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끌려간 병사들이 불쌍해졌다. "어디 해봐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를레스가 그의 정면에 육박했다. 거구임에도 속도는 병사들 사이에 괴물이라고 소문나기 충분할 만큼 빨랐다. 이 정도로 어두운 숲 속에서 움직인다면 어지간한 동체시력이 아닌 한은 흐릿한 잔영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내미는 만곡도에 보를레스는 공격을 다급히 멈췄다. 정확하게 목줄기를 향하고 있는 공격은 어린아이의 손 에 들린 것 같았지만 그가 공격을 하는 타이밍보다 한 치 앞서있었다. 이시므는 보를레스가 거구이며 속도가 빠르 다는 것만으로 방향과 동작을 바꾸기 어렵다는 단점을 순간적으로 발견할 것이다. 이시므의 추측은 가벼운 찌르기였고 보를레스는 난감했다. 피할 수는 있었다. 상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 해서는 속도를 내며 준비했던 위력적인 검격은 포기해야했다. 한 편, 이시므의 만곡도에 담긴 의미는 공격이 아니라 견제였고 보를레스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것만으로 그의 찌르 기는 성공이었다. 그럴 바에야 보를레스는 반격하지 않고 찌르기를 피하는데 초점을 조정했다. 그러나 그 또한 오산이었다. 다음 순간 만곡도의 움직임이 빠르게 변화했던 것이다. 이시므가 목을 찌르기 위해 옆 으로 누웠던 날을 아래로 향하며 빛살처럼 내리그었다. "크윽!" "얕았군. 하지만 다음에도 피할 수 있을까?" 보를레스의 상의는 금새 피로 물들었다. 옆구리 부근의 가죽만 베었지만 피가 보인다는 사실로도 두 대결자의 기세 는 확연히 달라진다. 그는 지금 이시므의 기세에 완전히 몰리고 있었다. 그래도 천운이 따라준 상황이다. 만약 '도 둑발'을 익히지 않았다면 벌써 이시므는 흉수의 목을 베어들고 진영으로 돌아갔을 테고 남은 몸뚱이는 까마귀밥 신 세가 되는 미래가 펼쳐졌을 것이다. '돌아가면 멜첼에게 감사의 술 한잔이라도 건네야 겠는 걸‥.'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처음 공격의 맥을 가볍게 끊어놓는 수법으로도 오늘의 포획 대 상은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에 뒤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챙! "왜 그러지? 방금 전까지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갔나?" 용병의 검술에는 동방검법의 흐름이 섞여있다. 이시므의 느렸다가 빨라지는 공격은 그와 궤를 같이 했다. "핫!" 이시므가 다시 만곡도를 찔렀다. 이번에는 아주 빨랐다. 심혈을 기울여서 막으려는 보를레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헉!"하고 보를레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상대의 만곡도가 갑자기 느려진 것이다. 그가 당황할 때 만곡도가 파공성을 내며 쏘아졌다. "으윽!" "잘 피하는 걸. 이미 도망칠 때 알아봤지만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군." 이번에도 도둑발의 도움으로 겨우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곤란했다. 타이밍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 록 자잘한 상처는 많아졌고 옆구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오늘은 일진이 나쁜 걸‥." 보를레스는 아마도 가슴에 구멍이 잔뜩 났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서 이시므는 지금까지 정강이에 돌을 맞아 멍이 든 게 전부였다. 천천히 보를레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어떻게야 하지?' 고민을 하던 보를레스의 허리를 이시므가 베어왔다. 검을 막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만곡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허리에 서 다리로. 가까스로 피한 보를레스, 뇌리에 멜첼의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힌트는 수없이 주었다. '혹시‥. 어쩌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가능성을 실험해보기에 이시므는 매우 적당한 상대였다. 오히려 지나친 감이 있을 정도로‥. 처음 선공을 했을 때처럼 거구가 맹수처럼 돌진했다. 이시므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공격을 제대로 막지도 못하면서 치명타는 요리조리 피하는 보를레스의 움직임 에 이제는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이제는 공격을 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상대를 처리하는데 그의 검법은 안성맞춤 이었다. "크하하핫! 자포자기 한 거냐? 이번에는 피하게 두지 않겠다!" 샥! 섬광 같은 찌르기. 보를레스는 망설였다. 이시므의 검에는 견제가 아닌 살기가 담겨있었다. '지지 않는다!' 상대의 검을 묶어두려는 듯 보를레스의 동공이 커졌다. 만곡도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 잠깐! 다시 말해봐." 저녁 식사를 마치고 멜첼과 기분좋게 다과를 나누고 있던 마크렌서 자작의 얼굴이 씹고 있던 사과에 이빨 자국 나 듯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카로안 진영에 심어두었던 밀정에게서의 연락 때문이었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서 멜첼에 게 소리를 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함정이라니!? 보를레스에 대해서는 걱정없다고 했지 않았나!" "설마 이렇게 빨리 대처를 할 줄은‥." 퍽! "아‥욱!" "당장 뛰어가! 가서 구해오라고. 그를 잃어버렸다가는 남작 각하를 볼 면목이 없어진다. 그리고 시즈님에게도!" 멜첼은 마크렌서 자작이 던진 책 모서리에 얻어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황급히 뛰었다. 자신의 검을 챙길 시간도 없 었다. 그는 달려가며 성의 보초병 무기를 강탈했다. "다녀와서 돌려주겠다!" "그럼 전 뭘로 성을 지킵니까?" "높은 의기와 정신으로!" 멜첼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진 후 그 병사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투덜거렸다. "그랬다간 칼 맞아죽기 쉽상입니다." 성을 벗어난 멜첼은 조금도 쉬지 않고 카로안군의 진영을 향해 달렸다. 41악장 7화 "무사한 건가? 헉, 헉!"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멜첼.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뛰어오다니 무사하오?" 보를레스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는 이미 멜첼이 뒤늦게 달려온 이유가 카로안 군의 함정에 대한 정보 때문임을 '무사한 건가.'라는 한 마디로 알아챈 상태였다. "마크렌서 자작의 명령으로 왔을 뿐이야.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멜첼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걱정이 되어서' 뛰어왔다고 하면 정말 남사스러울 것이다. 그 표정이 어색해서 보를레 승게는 우스꼬아스럽게만 느껴졌다. 웃음을 참고 있는 보를레스에게 멜첼은 애써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 포획물인가?" "으음, 튼튼한 놈으로 골랐지. 모두, 그대 덕분이야. 힌트를 알아챘거든. 아슬아슬했어." '위험했다는 소리로군.' 멜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척 보기에도 보를레스의 상의는 완전히 피로 염색을 한 상태였다. 특히 옆구 리의 상처는 빨리 지혈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느껴졌다. 멜첼이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 . "왜 지혈하지 않았지?" "그럴 시간이 없었어. 그나저나 멜첼, 부탁 좀 합시다." "뭘!?" 대답 대신 보를레스는 털썩 쓰러졌다. 살펴보니 기절해있었다. 멜첼의 등뒤로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토플레로부터 출혈과다라는 판명을 받은 보를레스가 깨어난 시간은 2일 후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무엇보다 포획 물을 확인했다. "이번 포획물은 잘 있습니까?" "잘 먹여놓았네. 멜첼이 말하길 자네가 더 이상 자신에게 훈련받을 필요가 있는지 알려줄 중요한 실험 대상이라더 군." "으샤!" 보를레스는 몸을 일으켰다. 출혈과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소보다 가뿐한 것이 치료마법이 행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관절을 슬슬 털고 비틀어보며 상태를 점검해본 보를레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럼 보여드리죠." "자네, 이시므라고 했지?" "그렇소." 연병장으로 끌려나온 이시므. 그는 초긴장상태였다. 보통 이런 확 트인 공간에서 포승줄을 풀어줄 때는 도망가게 하 고 뒤에서 화살을 마구 쏴서 누구의 활이 제대로 맞았냐는 둥의 내기 놀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얗게 질려있는 이시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마크렌서 자작은 웃으며 긴 막대기 여러 개를 모아 묶어둔 뭉치를 던졌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시므에게 말했다. "그 중에서 쓸만한 것을 고르게. 상대의 나무칼이 좋아서 졌다는 말을 하지말고." "무슨 뜻이오?" "자네를 잡아온 사내와 목검 대련을 시키겠어. 그를 이긴다면 풀어 주겠네." '정말인가?'하고 이시므는 생각했다. 기껏 잡아온 포로에게 기회를 주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손해볼 것은 없었음으로 그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나무 막대기를 골랐다. "보를레스, 자네도 골라." 보를레스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쥐었다. 기사들이 정정당당한 대결이 있도록 다 비슷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실력이었다. 두 사람이 나무 검을 들고 마주서자 기사들이 긴장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어이어이! 시작해라!" "보를레스, 가볍게 끝내버리라고!" 이시므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번 숲에서 보를레스에게 당한 것은 순전히 방심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본래 실력을 숨겨 두었을지도‥.' 그의 뇌리에 잠시 그 때의 기억이 지나쳤다. "크아아앗!"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만곡도의 칼날이 휘릭하고 돌았다. 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휘청! 보를레스가 돌에 걸렸는지 비틀거린 것이다. 이시므는 입을 쩍 벌리고 허공을 지나가는 자신의 검을 지켜보았다. 그 리고 그의 복부에 보를레스가 넘어지면서 내지른 주먹이 꽂혔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 분명히 이 몸집만 큰 사내는 당시의 승리를 실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시므는 보를레스를 노려보면서 입 을 열었다. "정말로 이 자를 쓰러뜨린다면‥." "내 이름은 '토클레우스 마크렌서'다. 글로디프리아의 영예로운 기사다." 그의 말에는 글로디프리아의 명예를 걸겠다는 약속의 뜻도 있었지만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그토록 영예롭다고 자부하는 의미도 있었다. "어쨌든‥ 좋다!" 이시므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보를레스가 신중하게 검을 대각선으로 들어 막아내고 찌르기를 시도했고 이시므는 만세하듯 팔을 들며 피했다. 그리고 검을 정면으로 내밀어 빠르게 돌진하려는 보를레스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보통 기사들의 대련 시에 사용되는 목검은 기름에 끊인 나무로 만든다. 그래야 질겨서 도중에 부러지는 사고가 없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쇠덩이인 진검보다는 단단하지 않아서 두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검을 부딪히지 않았 다. 상대의 검이 부러진다면 모르지만 자신의 검이 부러지는 게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될 수 있는 한'이었다. 둘은 진검 승부나 다름없는 결투를 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도 필요했던 것이 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갈색 줄기. 이시므는 결국 목검을 들어 막았다. 딱! "공격하지 않아서는 날 이길 수 없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보를레스의 빈정거리는 소리에 이시므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공격 을 피하면서 보를레스의 움직임을 숲에서와 비교하고 있었다. 자신의 패배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보를레스가 실력 을 숨겼던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이시므는 정면으로 돌진했다. 숲에서 보를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강하게 검끝을 찔렀다. "윽!" 끝이 뭉툭한 목검이지만 맞으면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가 상반신을 숙이며 피하자 이시므는 찔러가던 검의 방 향을 바꿔 그대로 내리그었다. 보를레스의 옆구리에 커다란 자상을 남겼던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빨랐다. 하지만 검이 어깨를 내려칠 찰나 보를레스의 몸이 흔들렸다. '빗나갔다!' 이시므는 재빠르게 상대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방금 전 그 움직임이 상대가 의도한 것이라면 간격을 제압하기 가 상당히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고속이동술인가?" "비슷하지만 틀립니다. 고속이동술은 한 방향인데다 방향을 도중에 바꾸기 힘듭니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방금 전 정 면으로 움직이다가 뒤로 이동했어요." "간격이 자유자재라는 뜻인가? 상대가 골치 아프겠군." 이시므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며 보를레스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사실 숲에서 당한 상처 때문에 어떻게든 골려주 고 싶었던 것이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쏘냐. 이제는 두들겨주는 것만 남았다. 보를레스는 아래에서 위로 검을 쓸어 올렸다. 상대가 피했지만 그는 다리를 멈추지 않고 달려가며 연속으로 검을 내리쳤다. 탁! 딱! 딱! 땀을 흘리며 가까스로 막고 있는 이시므를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숲에서 싸울 당시에 그는 상 대의 불규칙한 리듬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급소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도둑발' 때문이었다. 사실 멜첼의 힌트는 검의 속도와 리듬이었다. 자신만의 리듬을 암호처럼 알아채기 힘들게 만들어낸다면 그의 빠른 검을 막을 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한 가지를 추가했다. 바로, 간격이었다. 그에게는 간격을 지배할 수 있는 도둑발이 있었던 것이다. 도둑발의 빠른 움직임은 한 순간의 찰나에도 몸 전체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발을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서 몸을 이동시키는 거리는 고작 몇 cm에 불과했지만 종이 한 장의 두께로 승부를 겨루는 검사들에게 그 차이는 컸 다. 간격과 타이밍을 지배한다. 어찌 보면 단순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검 이론. 파앗! "크윽!" "보를레스 승!" 젠티아 드로안과 더불어 '세일피어론아드의 양대 검사'로 일컬어지는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의 독자적인 검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후일, 젠티아 드로안은 보를레스의 무식할 듯한 돌진검술을 보고 '담력 검술'이라고 칭한다. 41악장 8화 "카로안 군의 발이 묶여있다고요?" 지금쯤 격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보를레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난 번의 자네가 카로안의 병사들을 포획했던 행동이 그들의 사기 저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 그래서 자네를 잡으려고 함정까지 파두었는데 그 또한 실패했으니‥."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의 수는 글로디프리아의 군사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많지 않습니까?" 보를레스도 물론 사기(士氣)가 전쟁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로안 군의 숫자는 충분히 모자른 사기의 차이를 채우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마크렌서 자작이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글로디프리아는 지금까지 수많은 카로안군의 공격을 막아냈어. 대부분이 군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지. 이 거대한 성벽을 보게. 보통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 삼 만 명의 군사가 필요하다고 하지. 그러나 글로디프리아의 성벽을 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의 배인 육 만도 모자를 걸세. 하물며 뒤는 절벽이요, 앞은 골짜기지. 아무리 용병 왕이 뛰어나고 대군(大軍)이라고 해도 함부로 올 수는 없어." "그렇다면 이쪽에서 공격하는 게 격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할거야." 학사의(學士衣)의 피브드닌이 발코니로 걸어나갔다. 그에 따라 보를레스와 토클레우스도 걸음을 발코니로 움직였다. "하지만 드로안 남작이 없다는 소문이 확인되면 카로안 군의 사기는 용기로 돌변할 거야. 그렇게 될 시에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곧 실베니아의 내란(內亂) 소용돌이에 휘말릴 글로디프리아야. 될 수 있는 한 피해를 줄여야 해." "저는 지금 남작님께 얼마나 근접한 겁니까?" "자네가 지금보다 세 배 이상은 강해져야 할거야." 이시므를 꺽은 후 자신감이 생긴 보를레스. 그는 마크렌서 자작의 말에 순식간에 어깨가 축 쳐져버렸다. 솔직히 단 시일에 키울 수 있는 실력으로는 지금의 성과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은 아무리 호승심을 자극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좌절하는 보를레스와는 달리 피브드닌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젠티아 드로안을 우상화하 고 있다. 그래서 말의 반 정도는 과장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 마크렌서 자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가 ' 값싼 남작'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남작님과 함께 대륙 3대 검사라고 칭해지는 용병왕도 마찬가지로 강할 것이 아닌가. 지금의 보를레스로 는 이길 수 없어." "방법이 있습니다. 토루반님께 부탁을 해놓았죠. 지금쯤 완성이 되었을 겁니다. 보러 가실까요?" 땅! 땅!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대장간, 마크렌서는 용광로의 화광(火光)만으로도 뜨거워 들어 가지도 못하고 소리쳤다. "토루반 님! 토클레우스입니다. 부탁드린 게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알고 싶어 왔습니다." "흠흠, 왔는가?" 대장간 안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토루반이 아니라, 노마법사 마나이츠였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법의는 어디로 갔는 지 그는 아예 윗통을 벗어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거대한 대야에 받아두었던 찬물에 적 혀 몸을 문지른 그는 대장간 앞에 마련된 테이블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네가 부탁한 것은 오늘 아침에 모두 끝냈네. 그런데 금속이 조금 남아서 검을 만들고 있어." "금속이 남다니 이상하군요. 남작님의 갑옷을 녹여서 똑같은 갑옷을 만드는 게 아닙니까?" 마크렌서가 말한 '방법'이 밝혀졌다. 보를레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작님이 말씀하신 방법이 갑옷이었습니까? 용병왕의 검 앞에서 갑옷이 효과가 있을까요?" "걱정말게. 보통 갑옷이라면 마법사인 내가 왜 여기 있겠는가. 벌써 마법사들과 주문 해독이나 하고 있지‥." "마법 갑옷입니까?" 뒤에서 잠자코 있던 피브드닌이 물었다. 신의 장인이라는 드워프와 8 클래스의 마법사가 함께 제조했다면 단순한 갑옷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어떤 갑옷일지 궁금했다. 마법 왕국 아스틴에서는 마법사들이 많은 만큼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무기나 방어구도 많았지만 대부분이 전투에서는 쓸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어두운 곳에서 빛 을 내는 야광 검 같은 것. 대륙 제일의 마법사들도 전설의 무기와 같은 무구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마나이츠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고 웃었다. "그렇지. 적어도 착용자의 능력을 두 배 이상은 증폭시켜줄 거야. 인간이 마법을 끼어넣은 갑옷 중에서는 수위의 것 이라고 할 만하지. 암! 그리고 금속이 남은 이유는 어차피 보를레스는 갑옷의 원래 목적인 방어보다는 상징일 뿐이 지 않나. 게다가 마법의 효과가 금속으로 잘 침투하기 위해서 얇게 했지." "무슨 마법을 첨가했길래‥." "흐흐흐흐‥. 그건 비밀이야. 입으면 알게 되니까." 보를레스는 마법의 갑옷이라고 하자 역사의 고리의 바스티너가 떠올랐다. 철컹거리며 거대한 흑색의 검을 휘두르며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갑옷과 자신이 비슷해질까 싶자 섬뜩하고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강해진다는 게 싫지는 않았 다. "어어‥ 왔군. 자작, 자네가 부탁한 것은 다 끝냈어. 우리 드워프들에게는 천직이지만 늙어서 하려니 힘들구먼‥." "오늘밤에 괜찮은 명주(名酒)를 뜯겠습니다." "흐흐흐‥ 그렇다면야 불만 없지. 그리고 보를레스, 금속이 조금 남아서 말이야. 검을 만들어보았네. 쓸만할 거야." 토루반은 방금 전에 작업이 막 끝나서 아직도 뜨거운 느낌이 남아있는 검을 가져왔다. 바스터드 소드 정도의 길이 지만 두께는 롱소드도 안 되어 보이는, 사람에 빗대어 보자면 마른 남자 같은 검이었다. "대단하군요." 하지만 보를레스는 검에서 힘을 느꼈다. 검의 힘을 좌우하는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검이 돋보 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날카로움이었다. 그의 감탄에 토루반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가볍지? 하지만 미스릴이 섞여서 그레이트소드와 부딪힌다고 해도 부러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네. 가벼움 과 강도, 우리 드워프는 진정한 투사지. 자네가 수련하는 걸 보고 어떤 무기가 어울릴지는 금새 알았네." "고맙습니다. 이 검이라면‥."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저기 준비되어 있는 갑옷까지 입는다면 세 배는 장담하지. 어떤가?" 마크렌서 자작은 하루종일 침이 마르도록 토루반과, 마나이츠를 칭찬했다. 이미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의 찬사를 받는 두 사람이었지만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좋은 법. 보를레스가 따르는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이제는 젠티아 드로안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가정한 피브드닌은 '이제 무리한 전술은 구상 안 해도 되 겠군.'하고 좋아했고 기사들은 성공해버린 '보를레스 육성 프로젝트.'에 부러움을 표했다. 그러나 멜첼의 '하하, 내 얼마든지 훈련시켜 주지.'라는 말과 진지한 눈빛에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식사가 끝날 무렵, 마크렌서 자작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작 각하께서 계실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전쟁이 기다려지기는 처음이군." 41악장 9화 이윽고 카로안 군이 움직였다. 그들의 거대한 진형이 통째로 이동하는 것을 고산의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피브 드닌이 무거운 침음성을 내뱉었다. "대단하군요. 2, 3일 만에 침몰했던 사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다니‥. 과연 용병왕입니다. 무슨 수를 썼을지 궁금하군 요." "글쎄‥.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요. 저쪽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충분히 준비를 끝냈습니다. 임시 남작님도 계시 고‥." 그렇게 말하며 마크렌서 자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그러나 피브드닌은 카로안 군의 위세가 자못 마음에 걸렸다. "자작께서 보시기에는 저들의 군세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보고에 따르면 약 육 만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글로디프리아의 병사는 기껏 해봐야 1만 4천인데 괜찮을까요?" "이거 전략을 짜주셔야 할 분이 이렇게 자신감이 없으시면 기사들이 어떻게 믿고 싸우겠습니까? 이 정도의 지형과 우리 군의 용맹이라면 충분합니다. 용병국의 군사들은 개인 전투에서 뛰어날지 모르지만 진형에는 약합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춘 군사들을 뚫기는 어려울 겁니다. 가장 효과적인 전술만 일러주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그러자 피브드닌은 고개를 끄덕이고 골짜기와 절벽의 지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양군의 격돌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때, 보를레스는 오랜만에 입어보는 정규 기사갑옷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에 입으니 힘든 걸‥." "무게는 어떤가?" 가벼웠다. 보를레스는 갑옷을 입은 채로 폴짝 뛰어보았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몸은 통통 튀는 것 같 았다. 주위의 기사들도 놀랍다는 듯이 '오오!'하고 탄성을 질렀다. "굉장히 가벼운데요?" "글쎄‥ 건틀릿을 벗어보게." 보를레스는 토루반의 말대로 건틀릿을 벗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서서 마나이츠가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었다. "멜첼, 자네가 한 번 들어보지." "큭!" 멜첼은 보를레스가 던진 건틀렛을 받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고 보를레스한테 고함을 쳤다. "이렇게 무거운 것을 세게 던지면 어떻하나? 관절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다른 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멜첼도 곧 자신의 말에서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는지 문제가 되는 건틀릿의 무게 를 다시 감지해보았다. 하지만 다를 바 없이 무거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멜첼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마나이츠님께 묻게. 마법을 주입한 건 그 쪽이니까." 그 말에 기사들의 열망 어린 시선이 마나이츠에게 쏟아졌다. 잠자코 앉아있던 노마법사가 못이기겠다는 듯 일어섰 다. 솔직히 그는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할 시간이 아니겠는가. "하하핫! 그대들의 지식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뛰어나니 내 알려주지 않을 수가 없군. 건틀렛의 안을 보게." 멜첼은 갑자기 설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돋았으나 그랬다가는 괴팍한 노마법사의 마법에 무사할 리가 없었 다. 안을 살펴본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뭔가 이상한 문자들이 잔뜩 있는데 꼭 그림 같습니다. 작은 문자들이 모여서 선을 이루고 다시 뭔가 그림을 이루 고 있는 것 같은데요. 주문입니까?" "잘 봤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무거운 장갑은 건틀렛 뿐이야. 나머지는 자네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비해 훨씬 가볍지. 그리고 갑옷에는 기본적으로 힘을 강하게 하는 것과 몸을 가볍게 하는, 두 종류의 마법이 걸려있네." 기사들은 호오∼하고 탄성을 질렀지만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던 젊은 마법사 중 한 사람이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근력강화의 마법이나, 중량감소의 마법이나 모두 기본적인 클래스의 주문이 아닙니까? 대마법사께서는 아 까 인간이 만든 마법 갑옷 중에서서 수위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2 종류의 2클래스가 내 포된 갑옷은 많지는 않지만 꽤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하‥. 역시 마법사답군. 자네가 묻지 않았다면 정말 이 나라의 젊은 마법사들에게 실망했을 거야. 아까 멜첼이 보았던 문자와 그림이 바로 해답일세. 혹시 '마나의 길'이라도 들어봤나?" 질문을 했던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의 길'이라면 왠만한 마법사들은 저(低) 클래스라고해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 말뜻대로 마나가 지나는 길이라는 뜻으로 자연상에는 마나가 균등하게 퍼져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나 가 밀집되어 이동하는 길이 있다는 있다. '마나의 길'을 가장 알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성장인데 마법사들은 늦봄부 터 초여름까지 식물이 활발하게 성장할 시기만 되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이 무기력한 증상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 것을 유추했다. 그리고 이렇게 예상되는 '마나의 길'을 임시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한 여인이 개발하는데 그녀가 바로 세일피어론아 드 인류 마법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 페르미안 유스테리아다. 뛰어난 수학자라도 중간에 헥갈릴 복잡한 수식 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마나의 길'은 그리는데 쏟아 붓는 마력 또한 엄청나서 왠만한 마법사는 도중에 나가떨어져 버린다. "옛날부터 전설의 무기들에는 무기의 힘을 상징하는 보석이 박혀있거나 문자가 새겨져 있지. '힘의 문자' 또는 '령 (靈)의 문자'라고 하는데 단, 한 문장으로 되어있거나 심할 때는 한 글자로 되어있어 해독하기가 불가능하지. 재미 있는 사실은 이 문자가 바로 마나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지. 난 그래서 그와 비슷한 효과라도 내기 위해서 는 '마나의 길'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에헴!" "그렇다면 이 문자들의 그림이 바로 '마나의 길'입니까?" "그렇지. 드워프의 현자이신 토루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기사들이 갑옷을 움직이는데 힘이 필요한 부분과 아닌 부분을 나누었다. 그래서 마나의 길로 하여금 힘이 필요한 부분으로 마나가 이동하도록 만들었지. 관절과, 손 끝, 발 끝은 마나가 마지막으로 집결되는 부위야. 보를레스 한 번 발가락에 힘을 줘서 땅을 굴러보게." 보를레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들어 바닥을 힘껏 찼다. 파앙! "우와!" 움푹 패어버렸다. 마나이츠는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인체 상으로 근육이 많이 있는 부분을 통해서 마나가 흐르게 했지. 사실 착용자 육체가 한계이상 으로 혹사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야. 게다가 중량감소의 주문은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약하지만 자네들 같 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느낌은 전투의 상승세를 타게 해주는데 충분할 거야." 보를레스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멜첼이 다가와서 그의 갑옷을 툭툭 건드렸다. 다른 기사들도 하나 둘씩 모여서 보를레스(?)를 마구 만져대기 시작했다. "그, 그만해! 거긴 만지지마!" 그 때 적군의 상황을 살피러 갔던 마크렌서 자작과 피브드닌이 돌아왔다. 마크렌서는 한 데 엉켜있는 기사들을 보 고 말했다. "저게 뭐하는 거죠?" "다, 우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겠나?" 토루반의 대답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를레스가 지르는 비명은 결코 기쁨의 비명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멜첼의 설명을 들은 마크렌서는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 갑옷도 만들어달라고 할 걸 하고 생 각한 걸까. 어쨌든 그는 수고한 토루반과 마나이츠의 어깨를 두들겼다. "대단하십니다." "내가 뭐랬나? 세 배는 강해진다니까." "보를레스, 그만 일어나게. 적군이 진군하기 시작했어." "예?" 우정 범벅이 된 보를레스는 의외로 힘차게 일어났다. 자신의 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손을 펴고 내 려다보고 있는 그에게 토루반이 소리쳤다. "어서 안 오고 뭐하나?" "토루반, 이거 정말 굉장한데요?" "만족스러운 모양이지? 어서 가서 시험가동하고 오라고!" 41악장 10화 "핫!" 챙! 체앵! "끄아아아아악!" "비켜라, 비켜!" "완전히 독무대로군. 남작님 좀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멜첼의 농담을 뒤로하고 보를레스는 창을 찌르는 병사의 가슴에 한 발 먼저 검을 꽂았다가 번개같이 뽑았다. 촤악― 검을 따라 한 줄기의 붉은 액체가 길게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피하지도 않고 달려드는 장정의 목을 잘랐다. "네 녀석이 이름 높은 '값싼 남작'이냐? 목을 잘라 그 명예를 내가 이어주겠다." 보를레스가 무차별로 카로안군을 학살(?)해대자 글로디프리아군은 용기 백배하여 상대를 밀어붙였다. 그것을 보다못 한 용병기사-용병국 중앙기사들을 일컬는 이름-하나가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보를레스를 나뒹굴게 하 던 바스티너의 흑검보다도 커서 위압감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러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름이나 말하고 덤벼라." 지금이라면 바스티너도 이길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의 길'을 따라서 손가락으로 힘이 몰리는 게 느껴 졌다. 맨손으로 돌 깨는 차력사를 하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으리라. 한 번에 용병기사의 대검을 향해 9번의 검격을 날렸다. "윽!" 대검의 용병기사는 두꺼운 검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손이 덜덜하고 떨리며 저렸다.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다음을 방어하는 움직임이 느려졌다. 틈을 노리지 않고 보를레스의 검이 사내를 마구 난도질했다. "으아악!" "고기를 다지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거람." 옆에서 싸우던 백장의 꽃잎 중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반대편에서는 사람이 누울 수도 있을 정도로 큰 전차의 의자에 앉아있던 용병왕 자크가 뒤로 밀리기 시작한 전세를 가늠하고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기사가 누군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에는 드로안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가 열심히 날뛰고 있었음으로 바르스젠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젠티아 드로안이 아닙니까?" 자크는 이 때까지 몇 번이나 글로디프리아를 공략한 바가 있기 때문에 '값싼 남작'과는 안면이 꽤 있었다. 헌데 그 가 드로안 가의 갑옷을 입은 기사를 보고 누구냐고 묻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어도 바르스젠의 정보에는 드로 안 가의 사람으로는 젠티아와, 그의 아내 데린 밖에 없었다. 젠티아는 신흥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검의 빠르기는 비슷하지만 남작의 검은 절도가 있으면서도 화려하다. 저것은 거의 막무가내가 아닌가." "하지만 백 장의 꽃잎들이 그의 손짓에 따라서 진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백 장의 꽃잎은 젠티아 드로안을 주공으로 둔 자들입니다. 실베니아의 국왕이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습니다." "흐음‥. 그것도 그렇군." 바르스젠은 국왕을 설득시켜 성급한 판단을 막았지만 그 역시도 혼란스러웠다. 이미 젠티아 드로안이 부재중이라는 정보가 눈앞의 상황과 맞물려 좌충우돌을 일으켰다. '값싼 남작이 정말로 없어서 다른 대역을 세운 걸까? 아니야, 정말로 남작이 자신이 부재중이라는 거짓정보를 퍼뜨 렸다면 조심성을 기하고 있는 카로안군을 끌어드리기 위해서 가짜를, 아니 가짜인 척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저 정도라니‥ 젠티아 드로안 이외의 저 정도의 실력자가 실베니아에 있었나?" 바르스젠의 상념은 자크의 한 감탄 어린 한 마디로 멈췄다. 앞을 보니 방금 전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자 카로안 군 4인의 어깨에서 동시에 가깝게 피가 솟았다. "드로안 남작이 연기를 하는 거라면 정말 그는 대단한 자야. 하지만 가짜라면 대륙 3대 검사라는 명칭을 4대 검사 로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는 걸." "백 장의 꽃잎 중에 누군가가 변장을 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마법사들에게 일러 보라색 망토를 걸친 기사들의 수를 계산하라고 해라." "‥‥99명입니다." 마법사의 보고에 바르스젠이 탄성을 질렀다. "앗! 그렇다면 바로 저 기사는 백 장의 꽃 잎 중 누구인가겠군요?"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저들의 지휘관‥이 보이나? 그가 바로 토클레우스 마크렌서 백 장의 꽃잎 중 첫 번째 잎이지. 저 기사는 백 장의 꽃잎이 아니다." 자크는 심각해졌다. 카로안군은 파죽지세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을 가져오라. 내가 직접 간다. 백오십 시위 중 오십은 공작을 비롯한 지휘부와 마법사들을 호위하고 나머지는 나 를 따르라!" 기세도 우렁차게 용병왕과 그의 시위들이 전투에 끼어 들자 일방적이던 흐름이 서서히 카로안군으로 역류하기 시작 했다. "네 이놈, 내가 바로 카로안의 왕, 자크다. 드로안 남작의 흉내를 내는 네 놈은 누구냐?" "‥‥." 보를레스는 대답은 하지 않고 자크의 시미터를 막았다. 마치 호랑이가 할퀴는 것처럼 검풍이 일어났지만 재빨리 뒤 로 물러서며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옆에서 멜첼이 외쳤다. "퇴각이다!" "멈춰라. 비겁하게 도망이라니! 네가 용맹한 젠티아 드로안이라면 내 검을 받아라!" 상대가 한 번의 검을 받고 무시를 하듯 등을 돌리자 자크는 분노하여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던졌다. 쇄액하는 소리 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시미터가 쏘아졌다. 날아오는 용병왕의 시미터는 보통 용병시장에서 유통되는 것보다 굵고 길었다. 보를레스는 내심 긴장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시미터를 바라보다가 검을 들었다. 토루반이 '제뷔키어'라 고 이름 붙인 검이 반짝인다고 느낀 찰나 차캉!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의 파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모두가 멍하니 허공에 반짝이는 빛의 향연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니 보를레스가 시 미터의 파편을 하나씩 쳐내어 추격하려는 카로안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때문에 병사들은 겁을 먹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보를레스는 산산조각나고 남은 마지막 시미터의 손잡이를 용 병왕에게 휙 하고 던져주었다. 망토를 휘날리며 그가 글로디프리아군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카로안군의 어깨를 짓눌렀다. 41악장 11화 그로부터 6일이 지나도록 글로디프리아군은 카로안군을 14 번이나 공격했다가 뒤로 물러서는 행동을 반복했다. 카 로안군의 용병들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글로디프리아의 괴롭힘으로 피로도 쌓여갔지만 또 언제 공격해 올지 몰라 밤에는 작은 소리에도 잠을 설쳤다. 그리고 하나 둘씩 병사들과, 용병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재상, 지휘관들이 적극적인 진격을 주장하고 있어. 나 역시 그렇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용병왕 자크가 '값싼 남작' 을 두려워하여 진격을 미룬다는 말까지 있네." "폐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벌써 전투가 개시된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실 베니아는 내란(內亂)에 휘말려 있습니다. 헌데 이틀 전 저녁, 공작 파이얼 로바메트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정 보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내게는 왜 알려주지 않았나?" "일을 함에는 조이고 푸는 조절이 잘 되야 합니다. 지금처럼 조급할 때 푸는 게 냉철한 판단을 하게 합니다. 어제 아침에 수도의 정찰병에게서 보고를 받았습니다." 자크는 쫙 편 손바닥을 다른 손의 주먹으로 탁하고 내리쳤다. 바르스젠의 행사는 왕의 권력을 침해하는 수준이었지 만 이제껏 틀린 바가 없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자크의 감탄을 자아냈다. 슬쩍 미소를 띄우며 바르스 젠이 말을 이었다. "실베니아의 독수리를 견제할 수 있는 중앙의 전략가는 로바메트 뿐입니다. 앞으로 십 여일, 빠르면 삼 사일만에 펴 온은 함락될 겁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젠티아 드로안이 이 곳에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글로디프리아를 내어주더라도 수도로 갈 수 밖에요. 그렇게 생각할 때 만약 저들의 전법은 우리 군대를 상대로는 효과가 있지만 실 베니아 전체를 놓고 생각할 때는 악수(惡手)입니다. '값싼 남작'이 그럴 리가 없지요."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드로안 남작은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앞으로 3일 내로 카로안 군대를 격파하고 중앙으로 군사를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다면?" 바르스젠은 심호흡을 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한 마디가 나왔다. "드로안 남작의 부재가 확실합니다. 그는 이미 중앙으로 떠났을 겁니다. 그리고 중앙의 기사단으로 킬유시 공작을 상대하겠죠. 그 남자라면 할 수 있겠죠. 그 동안에 글로디프리아의 기사들은 여유있게 카로안군을 격파하고 합류, 또는 뒤에서 반군을 협공한다라는 계획일 겁니다." 고이신 바르스젠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만약 젠티아가 글로디프리아에 있었다면 오히려 그를 감당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모르는 게 있었다. 바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 젠티아가 중앙으로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바르스젠은 실베니아의 이번 내란(內亂)을 명전략가의 야심에서 나온 단순한 반란으로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후일, 평생동안 이 날의 패인을 바르스젠은 풀지 못한다. 다음 날 해가 올라왔다가 산등성이로 사라지고 다시 떠올랐을 때 용병왕 자크는 시미터를 번쩍 들고 명령을 내린 다. "진격한다. 지휘관들은 먼저 앞장을 서고 뒤로 물러날 생각은 버려라. 오늘 승부를 결정짓겠다." 카로안의 진영에서 시작된 말발굽소리와 함성이 땅을 뒤덮으며 검은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마주나온 글로디프리아 의 병사들이 방패를 내밀었다. 군대가 처음 부딪힐 때 검을 휘두르는 건 바보짓이다. 어지간한 거검이 아니면 수십 명의 몰려든 방패의 무게를 막아낼 수도 없다. "갑자기 거세졌어." 보를레스는 요번 전투보다 카로안군의 공격이 강해졌다고 느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백 장의 꽃잎들도 난색을 지으며 상대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뒤로 밀리지 마라!"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끼어든 마크렌서 자작이 고함을 쳤다. 상대는 총공격을 하고 있었다. 매복과 함정도 접전일 때 효과적인 것이다.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매복도 함정도 소용없다. "오늘이야말로 네 녀석의 정체를 밝혀주마." 이번에도 어김없이 보를레스에게 자크왕의 시미터는 날아들었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그 동안 몇 번의 격돌로 익숙 해진 보를레스는 가볍게 쳐냈다. 하지만 속임수였는지 뒤를 이은 공격이 더욱 빠르게 짓겨 들었다. 창! 파악! 창! 창! 창! 한 호흡만에 그들은 벌써 수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내가 더 빨라!' 보를레스는 자신만의 검술로 자크왕을 뒤로 몰아붙였다. 자크 왕은 상대 기사의 몸에서 아홉 줄기의 빛줄기가 한꺼 번에 쏟아져 내리는 착각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기세였다. 보를레스는 아직 일격을 가하는 중이었지만 다져진 그 의 검기가 앞으로의 검격을 미리 준비하여 일어난 것이다. 보통 검사라면 보지 못했겠지만 자크왕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로 꼽히는 이였다. 때문에 눈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착각의 현상에 당황했다. "질 수 없지!"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용병왕 자크. 용병국에서 당할 자가 없으며 1:1의 전투에서는 패배가 없다는 용병들의 우상 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검을 뿌렸다. "크윽!" 신음을 터뜨린 사람은 자크였지만 뒤로 물러난 쪽은 보를레스였다. 왼팔의 완갑 바깥에 날카로운 검의 흔적이 나있 었다. 자크는 공격할 때 어쩔 수 없이 겹쳐지는 손목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물론 그 댓가로 상반신은 어 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다리는 아니라서 허벅지 부근에 커다란 자상을 입고 말았지만. 어쨌든 자크는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데 만족했다. "워낙 빨라서 모두 막는 것은 무리겠지만 동시 공격조차 무리인 것은 아니군. 그렇다면 해볼만 하지." 만약 다른 국가의 왕이었다면 허벅지의 부상에 호들갑을 떨고 뒤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크는 용맹한 용 병들의 왕, 기본적으로 승부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와 보라고!" '이번에는 더 빠르게!' 마음을 굳게 잡은 보를레스가 호랑이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가 검을 들고 내려칠 간격을 좁힐 때 자크가 미소 를 지으며 시미터로 허공을 십자로 베고는 뒤로 물러섰다. '멈출 수가 없어!' 보를레스는 용병왕이 방금 전과 같이 동시 공격을 해오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더 빠른 일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돌진하던 중이었다. 뒤늦게 자크왕이 남긴 허공의 십자가 이상한 기운을 품었다고 느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부딪힐 수밖에!' "크아아아아!" 괴수와 같은 기합을 내며 보를레스는 일검을 내리쳤다. 콰아아! 그극! 그극! 팔이 찌릿찌릿하며, 찢어진 검의 기세가 갑옷을 할퀴고 가는 게 느껴졌다. 보를레스는 눈살을 찡그리며 자크왕의 다 음 일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자크 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네‥. 정말로 드로안 남작이 아니군. 남작이라면 자신의 기술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어쨌든 재밌었네. 하 지만 이제 끝낼 시간이야." 자크는 귀고리를 빼어 공중으로 휙 던졌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이 펼쳐졌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르스젠이 병사에게 신호를 하여 깃발을 흔들었고 카로안군의 지위관들은 검을 높이 들어 인정사정없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물러서지 않는다. 카로안군! 돌격하라! 흑색거성에 닿을 때까지 돌격하라!" 슈우‥ 콰앙! 마법사들도 나섰다. 카로안군이 전력을 다한다는 증거였다. 마크렌서 자작은 이미 전세가 굳어졌음을 알고 입을 악 물었다. 글로디프리아군에 후퇴의 고동소리가 울려퍼졌다. 41악장 12화 "너무 빠릅니다. 이러다가는 후퇴한다고 해도 뒤에서부터 먹혀 들어갈 거에요!" "할 수 없어. 우선은 포시킨의 평원까지 후퇴하는 수밖에. 멜첼, 좌군으로. 말리온, 우군으로. 계획대로 후퇴한다." 글로디프리아군은 2 시간 정도의 공방전 끝에 뿔뿔이 흩어지며 후퇴했다. 포시킨 평원에서 흩어진 병사가 합류하고 다시 부대를 제정비했지만 돌아온 자들은 원래 있던 수의 삼분(三分)의 일도 안 됐다. 백 장의 꽃잎 중에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카로안군의 피해도 많았지만 어차피 4배의 차이가 있는 군사력이었다. "피해가 너무 막대하군요.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용병왕을 잘 막아냈더라면‥." 죄책감에 맥없이 앉아있는 보를레스의 어깨를 마크렌서 자작이 강하게 두들겼다. "자네는 기대 이상으로 잘했어. 모두 예견되었던 일이네.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 "예견되었다고요?" 보를레스의 놀란 반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브드닌, 정말 대단한 자야. 나도 설마 카로안군이 이토록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할 줄은 미처 몰랐네."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군의 후방이 시끄러워졌다. 한 기사가 달려와 말했다. "카마의 마나이츠 페르베이안님께서 일 만 명의 군사와 200여명의 마법사를 이끌고 오셨습니다." "하핫‥! 내가 조금 늦었나?" "아닙니다, 백작님. 때맞춰 오셨습니다. 이렇게 카마영지의 도움까지 청해서 죄송합니다." 가뭄의 비처럼 달려온 카마군의 지휘관들과 마나이츠에게 마크렌서 자작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특히 마 나이츠는 대마법사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그의 요청으로 불려온 마법사들의 지원은 엄청난 도움일 될 게 분명했 다. 그러나 마나이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젖었다. "에이‥. 됐어. 카로안군의 규모는 대국가전과도 비교할만해. 그걸 글로디프리아 혼자서만 막아낸다는 것은 다른 영 지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나이츠의 주름살진 얼굴이 술에 취한 듯 붉어서 보를레스는 그가 토클레우스의 감사에 쑥스 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멀뚱히 보고 있던 보를레스에게 어느 새 다가왔는지 토루반이 물었다. "보를레스." "아! 토루반, 덕분에 용병왕 자크에게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밀리지 않았는데 갑옷 꼴이 그게 뭔가?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손을 봐눠야겠네." 갑옷을 벗은 보를레스는 심하게 놀랐다. 그는 조금 상처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옷은 찢어지다시피 했던 것이 다. 건틀릿마저 내려놓자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거 왜 이러죠? 갑자기 온몸이‥." "마나이츠가 신경 써서 '마나의 길'을 그린 덕에 근육의 한계를 넘지는 않았겠지만 혹사당한 것은 마찬가지야. 지금 잠시라도 쉬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미스릴이 들어간 갑옷이라고 해도 생물이 품고 있는 가장 창조적이고 가 장 파괴적인 기운을 당해낼 수는 없어. 검기는 왠만하면 피하도록 하게. 이번에는 갑옷에서 끝났지만 다음에는 치명 상을 입을 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보를레스를 막사로 들여보낸 토루반은 갑옷을 들고 사라졌고, 마나이츠는 마크렌서에게 물었다. "피브드닌의 말처럼 정말로 카로안군의 진군이 조급해졌나?" "조급하다기보다는 승리를 확신한 듯한 모습입니다. 앞으로 30분이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허허‥ 용케도 이런 작전을 생각해냈군. 좁은 골짜기에서 일만오천의 군사로 육만의 카로안군을 막아 주변 영지의 군사들이 도착할 시간을 번다. 그런 후 불리하면 후퇴하되 뒤로 후퇴하면 카로안군의 돌격에 휘말려 전멸할 가능성 이 있기 때문에 골짜기에서 평원으로 나오는 즉시 양옆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골짜기에서 돌격했던 카로안군은 벌 어진 군사들의 진형을 재정비해야 하지. 그 사이에 양옆의 군사들도 정비를 하고 중앙에서는 타영지의 원군과 합류 하여 협공한다라‥. 그런데 과연 카로안군이 양옆으로 갈라진 패잔병들을 쫓지 않을까?" "아마도 그들의 진군 속도를 줄이지는 않을 겁니다. 거대한 글로디프리아의 성도 그들에게 보일 겁니다. 흥분하겠 죠. 조금만 더 오면 성을 공략할 수 있는데 시간을 들여 패잔병을 쫓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죠." 마크렌서 자작, 아니 피브드닌의 생각대로 카로안군은 패잔병을 감지했지만 그 수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무시하고 진군을 계속했다. 그 소식을 들은 마크렌서 자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나이츠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계속 퇴각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승리의 깃발을 올릴 때가 왔습니다." "너무 좋아하는 군.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지?" 농담같은 마나이츠의 질문에 토클레우스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 군사들의 지휘권을 자네에게 맡기지. 난 후방에서 마법사들을 이끌고 지원에만 신경쓰도록 하겠어. 전방에서 날 뛰다가 일찍 죽고 싶지 않네." 육십 세가 넘었는데도 얼마나 더 살고 싶어서 저러는지‥. 토클레우스는 카마군 지휘관들의 자존심이 상할까하여 물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글로디프리아의 '값싼 남작'의 심복으로 알려진 마크렌서 자작은 뛰어난 지휘관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매일 같이 그 들의 용맹을 들었던 주변 영지의 기사들은 우상으로 여길 지경이었다. 수염 털털하게 난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망울 에 토클레우스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2막을 시작해보죠." 카로안군의 모습이 초원의 지평선 부근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 때, 글로디프리아에서 달려온 전령이 어찌나 급한지 넘어지듯 엎드려 부복을 하고 말했다. 그의 음성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자작 각하, 드로안 남작께서 오셨습니다." 41악장 13화 "정말인가? 지금 어디에 계시지?" "막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아이킨이 마중을 나갔습니다. 이 곳으로 곧 오실 겁니다." "하하‥. 알았다. 군사들에게는 아직 알리지 마라. 귀관들도 마찬가지요." 기사들은 마크렌서의 당부에 의문이 깊었지만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으면 카로안과 다시 한 번 격돌 해야 하는데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할 위험이 있었다. 전투 전에 군기(軍紀)가 흐트러지는 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한 다. "각하, 카로안군이 전방 700m까지‥." "알았다. 자아‥. 마지막 정비와 함께 우리도 돌격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밀리지 마라!" "옛!"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부대마다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이 오가고 군사들은 무기를 나르고 착용하느라 난리다. 빠른 퇴각을 위해서 무기를 내던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봐야겠군. 마사지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토플레." "흠‥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를레스가 손을 뒤로 흔들어대며 막사를 나가자 토플레는 얼른 짐을 꾸렸다. 당장 글로디프리아로 갈 생각이었다. 전장에 있다가 운이 좋지 않으면 목이 떨어지게 될 게 두려웠다. "암암! 걱정 안 해. 내 목숨 건질 생각만 해도 바쁜데 남의 걱정할 시간이 어디있겠나." 토루반이 준 갑옷을 입자 보를레스는 다시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껄껄 웃으며 그는 검을 휘둘러보았다. "힘이 솟는 이 기분! 정말 중독되겠는데요?" "이번에는 조심하라고. 갑옷의 안까지 상처가 나서 '마나의 길'이 손상을 받으면 네 근육이 받는 부담이 더욱 커질 거야." "괜찮아요. 맨몸으로 싸워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말은 잘 하는 군. 죽지 말게." "돌아와서 술이나 한 잔 하도록 하죠. 토클레우스가 뜯기로 한 거 나도 줘야 되요." 힘차게 말을 달려나가는 보를레스를 바라보며 토루반은 고개를 저었다. "미리 토클레우스한테 받아내서 숨겨둬야 겠어." 한 편, 군을 정비하자마자 저돌적으로 달려온 카로안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글로디프리아군을 격파했는 데 조금 전보다 더욱 수가 불어난 게 눈으로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양군의 전방은 격돌하고 있었다. 용병왕은 머리로 고민하기보다 힘줄이 돋은 팔로 시미 터를 꺼내어 달려드는 병사를 양분해버리고 외쳤다. "싸워라! 조금 수가 늘었다지만 '값싼 남작'이 없는 글로디프리아의 군대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허수아비의 검을 받아봐라!"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젖을 겨냥하는 검을 시미터가 댓 번이나 막아냈다. 묵직하면서도 섬광처럼 빠른 연속 검격. 용 병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있었지. 이번에는 그 투구를 벗겨주마!" "쉽게는 당하지 않는다." 말은 그리 했지만 보를레스는 금새 힘겨워지는 걸 느꼈다. '피로가 누적된 건가?' 숨을 깊이 들어 마시며 그는 피로를 날리기 위해 기합을 터뜨렸다. "하압!" "좋아! 투지가 대단하군." 그러나 이내 문제가 자신이 아니라 상대한테 있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세일피어론아드의 3대 검사로 꼽히는 용병왕 이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막고 공격하는 단순한 검로(劍路)의 시미터가 허공을 춤추는 나비처럼 요란스럽게 날아왔다. '제뷔키어'가 번개처럼 막아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시미터에 번번히 반격할 기회를 찾지 못했 다. '말을 타고 있으니 도둑발을 쓸 수도 없고‥.' 그극! 왼쪽 어깨부근에 시미터가 스쳤다. 용병왕의 검술은 나비처럼 팔랑거렸지만 검에 실린 무게는 마치 멧돼지 같았다. 그러니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로 몇 번을 내리쳐도 금새 방향을 바꾸며 베어오는 것이다. '여러 번 쳐서 안 된다면!' 슈웅! 보를레스는 고삐를 버리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우레같은 소리를 파공성으로 곁들이며 '제뷔키어'가 시미터에게 부딪혔다. 탕! "약하군." 그러나 용병왕은 잠시 멈칫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격을 재개했다. '윽! 저 요란스러운 검술의 타이밍을 도저히 잡기가 힘들다. 어떻게든 리듬을 찾아야돼.' 뒤로 물러서던 보를레스는 호흡을 서서히 시미터의 변화에 맞췄다. 검이 뒤집어질 때 숨을 내쉬고 허공에서 요동을 칠 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변화에 용병왕은 흥미로워졌다. '이 녀석은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군. 위험한 녀석이야. 여기서 죽여야 한다. 적어도 팔 하나 정도는 잘라놔야 해.' "후우‥." 용병왕의 팔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어졌고 그 때에 맞춰 보를레스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마나의 길'을 통해서 손가락 끝으로 마력의 힘과 함께 또다른, 자신만의 기운도 느껴졌다. 그것을 응축시키고 응축시켜 터뜨렸다. 팔의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콰앙! "크아아아아!" "이― 애송이이―!" 쾅! 두 번의 폭음이 이어졌다. 첫 번째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다음은 두 검사의 기운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마 법사들의 마법처럼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보를레스와 자크는 뒤로 튕겨 나갔다. 털썩. 온몸이 쑤시듯이 아파왔다. 아무래도 '마나의 길'이 손상된 모양이었다. '이거 돌아가면 또 토루반의 잔소리를 듣겠는 걸.' 그런데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통증이 문제가 아니라 팔, 다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움직여주는 게 없었다. 철컹거리는 갑옷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용병왕인가? 제법 잘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보를레스, 괜찮나?" "메, 멜첼‥?" "하하, 정신이 없군." 멜첼은 완전히 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보를레스가 용병왕을 상대하는 동안 다른 기사들도 몇 배나 많은 카로안 군을 상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했으니까. 그의 부축을 받아서 일어나면서 보를레스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 다. "왜지? 카로안군이 퇴각하는 것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눈까지는 다치지 않은 모양이군." "어떻게 된 겁니까?" "각하께서 돌아오셨다." 카로안군은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후퇴하는 카로안 군사들 속에서 말 위에 우두커니 앉아서 있는 사내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당한 건가? 이봐, 돌아가기 전에 자네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사내는 바로 용병왕이었다. 글로디프리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퇴각하게 되자 아쉬운지 영 힘이 없어 보였다. 보 를레스는 힘겹게 투구를 벗었다. 방금 전의 격돌로 투구의 면갑도 괴물의 형상처럼 상처가 가득했다. "보를레스,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라고 합니다, 폐하." "잊지 않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폐하." * * * "그렇게 된 겁니다." "대단하군. 지금 몸은 좀 괜찮은 건가?" 입을 동그랗게 만들며 놀라움을 표시하는 젠티아. 그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익살스러워서 보를레스는 웃음을 참 고 말했다. "지금 먹고 오늘 밤 푹 쉬면 괜찮겠죠." "그나저나 내 갑옷을 녹여서 마법의 갑옷을 만들다니‥ 토루반, 역시 드워프의 현자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마나이츠 님 역시 대마법사라는 말이 허명은 아니었군요. '마나의길'을 그려넣다니‥." "에헴‥." 두 노인네가 헛기침을 해대며 킬킬거렸다. 은근히 성격이 맞는 두 사람이다. "피브드닌도 고마워요. 덕분에 글로디프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중앙으로 갈 준비를 합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젠티아는 건배하듯 스프를 후루룩 마셔버렸다. 이틀 날, 해가 따사로이 비출 무렵‥ "꼭 이렇게 가셔야 합니까?" 보를레스의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적어도 시즈의 얼굴 정도는 보고 가셔야‥." "괜찮아. 여유가 생기면 직접 찾아오겠지. 그럼‥ 남작, 끝까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중에 떠나는 우리는 용서해주 시게." 젠티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토루반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갚지도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에 적(籍)을 둔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실베니아를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스틴 내부(內部)에서 그리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젠티아로서는 그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갚지 못하다니 마크렌서 자작의 세인라커 한 병으로 빚 청산은 끝났네. 그래도 부족하다면 아스틴에 왔을 때 한 병 더 가져오게나." "몇 병인들 못 가져가겠습니까?" 토루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보를레스에게 다가갔다. "그 갑옷을 손질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얼마 없을 거야. 조심하기 바라네." "예." 아침에 토루반은 보를레스의 갑옷에서 드로안의 문장을 없애고 대신 히데우그 가문의 문양을 넣었다. 보를레스는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내가 아스틴에 도착했을 때는 새로운 검사의 탄생을 대륙 사람들이 알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토루반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아직도 어기적거리며 인사를 끝맺지 못한 피브드닌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타지 못하겠냐?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도 아니고, 토클레우스가 네 연인이라도 되는 거냐?" "하핫‥ 어서 가십시오. 많이 배웠습니다." "저야말로 할 말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 뒤로 글로디프리아의 거대한 성체가 보였다. 검은 거인에게도 인사를 하며 피브드닌은 마차의 문을 닫았다. '난 지식으로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전쟁을 보며‥ 지식은 활용할 때 달라지며, 그 활용이 성공하도록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 "다음에 또 보자고, 친구!" 마지막으로 먼 산길의 바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드는 토플레의 모습을 보고 우정의 소중함도 알았다. 그를 먼 곳까지 데려다준 사람으로 예측되는 노마법사, 마나이츠가 옆에서 토루반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있 었다. 그 길로 아스틴네글로드로 돌아간 피브드닌은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을 뿐 아니라 실용과의 연계에도 힘써 훗날 아 스틴네글로드 제일의 학자로 명실공히 자리잡게 된다. 42악장 1화 환기(環期) 4672년 5월 24일 아침.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이 떠나고 3일 후, 시즈들이 도착했다.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은 그들의 귀환에 기뻐했지만 금새 경악에 목젖을 떨어야했다. 잠옷을 입은 상태로 마중을 나왔던 젠티아는 다시 뛰어들어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나와서 시즈의 뒤에 잠자코 서있는 노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로바메트 공작 전하‥. 이렇게 오시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드로안 남작‥. 예의는 되었네. 잠옷이 잘 어울리던데 왜 갈아입고 온 건가? 하트 무늬 잠옷‥ 세간에서 값싼 남작 은 괴짜라더니 오늘 그 진가를 보게 되었군." "우하하하핫!" 공작 앞에서 낄낄대고 웃을 수 있는 배짱을 가진 것은 오직 마나이츠 뿐이었다. 그의 작위는 고작(?) 백작이었지만 대마법사라는 또다른 지위를 염두에 둘 때 그의 권위는 공작 이상인 것이다. 그것을 말리지도 못하고 젠티아는 한 숨을 내쉬었고 마나이츠는 복수는 이 때다 하여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추태입니다." "네, 넬피엘?" "다녀왔습니다." 음성의 주인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공손히 인사를 하자 마나이츠의 입이 함박만해졌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넬피엘이 었다. 비록 넬피엘 자신은 집사로서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마저도 귀엽게 보이는 마나이츠, 눈에 뭔가 씌어도 단단히 씌워진 것이다. 하지만 가득히 벌어진 사람은 그 뿐이 아니었다. 토클레우스를 비롯한 글로디프리아 의 기사들은 음성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을 부릅뜬 채로 굳어버렸다. "저렇게 생길 수도 있단 말인가?" 데린, 아리에, 레스난 등의 미인들로 상당히 눈이 높아졌다고 자부하던 기사들 중 누군가 누군가의 중얼거림. 그 때 아리에를 힐끔거리던 로바메트의 아들, 파세닌이 손가락을 꼽으며 강의하는 교수처럼 말했다. "주의하세요. 넬피엘은‥ 남자입니다." "으악!" "세, 세상에‥." 마크렌서 자작, 카로안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놀라서 혀를 찼다. 어떤 사람은 비명을 지 르기도 했다. 그런 반응을 뒤로하고 넬피엘이 젠티아에게 말했다. "성으로 들어가는 게 예의가 아닌가?" "그렇군. 공작 전하, 들어가시죠." "흠흠‥ 그러지." 로바메트는 돌이 되어버린 마크렌서 자작의 어깨를 툭툭치고 어서 극복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젠티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파세닌도 아리에에게 바짝 붙어서 시즈를 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군요. 역사의 고리가‥." "자네도 그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어쩔 수 없는 앙숙이죠. 저와 시즈는 동료라서‥. 자주 부딪히게 됩니다." 로바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전에 시즈들에게 들은 바가 있는 이야기였다. "하면‥ 킬유시 공작께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현재 중앙을 장악한 게 '역사의 고리'라면 장인어른의 반란은 허무한 결과를 낳을 뿐이죠." "음‥. 어쨌든 시즈님과 넬피엘님 덕분에 우리 로바메트 부자가 목숨을 건졌네. 어떻게 해서든 은혜를 갚도록 하겠 네. 그런데 아들 녀석은 험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여전히 철이 없군." "하하‥. 토클레우스, 공작 공자께서는 뭘 하고 계시지?" "그, 그게‥." 마크렌서 자작이 말끝을 흐리는 걸 듣고 로바메트 공작은 벌써부터 미리 머리를 감싸쥐며 골치를 앑을 준비를 했고 젠티아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귀를 기울였다. "좀 전에 보니‥ 시즈님께 결투신청을 하신 모양입니다." "하아‥." "힘드시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로바메트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 시각, 연병장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내가 무서운 거냐?" 마을에 내려가서 그새 갑옷을 사 입었는지 파세닌이 금속성을 요란스럽게 내며 소리쳤다. 한 편, 나무그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시즈는 자못 곤란한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책을 읽던 도중 따귀를 맞고 결투를 신청 받은 것이다. 처음부터 씩씩대며 파세닌이 다가왔지만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붉게 부푼 볼을 문지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사건의 발단은 파세닌이 아리에에게 멋지게 보일 양으로 글로디프리아의 시장에서 갑옷을 사오던 중에 발생했다. 글로디프리아는 전시(戰時)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상품(上品)을 구한 파세닌은 자신의 모습에 감탄할 아리에를 상상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흠흠‥ 혹시 아리에 양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나?" "지금 연병장에 계실 거에요. 아마 시즈님과 같이 계시지 않을까요?" 파세닌이 지나가는 시녀들을 잡고 말을 묻자 그녀들은 궁전의 인기가수를 만난 귀족여인들처럼 얼굴을 붉히고 대답 했다. "뭐라고!? 그 이상한 녀석과?" 희어멀건한 머리카락에 잘 언 동태의 눈을 하고 있는 청년. 파세닌은 왜 아리에가 시즈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뛰어가려고 코너를 돌았을 때 연병장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각했다. 다시 물어보려고 걸음을 멈췄 을 때 방금 전 시녀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다. "흥! 시즈님같이 상냥한 분이 이상하다니. 저 남자가 바로 이번에 아리에님의 뒤를 졸졸 따라서 왔다는 로바메트 공 작의 아들이라면서? 시즈님께 팔을 잘리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더니 정말이잖아." "얘, 누가 들을라." "흥! 누가 들으면 어때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시녀는 걸음을 빨리하여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벽에 등을 붙인 채 듣고 있던 파세닌 은 잠시 시녀의 말을 되새김질해보았다. '팔이 잘리다니? 그러고 보니 공포스러운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목격했을 때 팔목이 붕대에 감겨있었다. 블리세미 트라는 꼬마 사제는 내가 어쩌다가 다친 거냐는 말에 웃기만 할 뿐 말해주지 않았지.' "설마 그 녀석이 내 팔을 잘랐던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41악장 2화 "그 녀석이 감히 내 팔을 잘랐던 거야? 용서하지 않겠어!" 그리고 파세닌은 당장 달려갔다. 하지만 금새 지나가던 또다른 시종에게 연병장의 위치를 물어야 했다. 시즈는 시녀의 말대로 연병장에 있었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여름이나 다름없는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서 그는 책장을 넘겼다. 바람이 불어오자 반짝이며 흩날리는 청년의 은발에 옆에 앉아 과일을 깍고 있던 아리에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치 시즈의 주위에만 눈발이 날리는 듯 했기 했다. 약간 쓸쓸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편 안한 모습에 다른 이들마저 평화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얏!" "베었군요? 피가 나잖아‥." 역시 과일의 껍질을 벗기던 데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에의 손을 잡았다. 레스난이 얼른 피나는 부위를 핥고 주문을 외우자 흘러나오던 피가 멈췄다. 놀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정시키며 데린이 약하게 꾸짖었다. "그러길래 뭘 그리 넋을 놓고 있어요?" "괜찮아요." "무슨 소리에요!?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아리에는 용병 생활로 상처에 익숙했지만 데린은 아니었다.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무시하고 아리에는 과일을 깍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즈를 힐끗 훔쳐보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파마리나는 과일을 깍는데는 정말 소질이 없나봐." 데린은 파마리나가 껍질을 알맹이보다 더 두툼하게 깍는 것을 꼬집어 말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파마 리나 또한 고심하고 있었다. 얌전히 과일 씻기로 업종을 바꾸는 파마리나를 보고 레스난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인어의 마력으로 차가운 물을 생성하여 컵에 채우고 있었다. "내가 만든 특제보존제를 넣어주겠어. 이 더운 여름이 10번은 다시 찾아와도 썩지 않도록! 꺄하하하하하!" 파마리나는 어쩔 수 없이 마녀인 모양이다. 그녀가 과일에 이상한 가루를 뿌리려는 것을 아리에와 데린이 가까스로 막았을 때 청명한 음성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시끄럽군. 거기 마녀 좀 조용히 못하겠어?" 시즈 뒤에서 나무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넬피엘이 여자들이 꺅꺅대는 소리에 일어난 것이다. 그가 신경질을 내자 꿈틀대는 거대한 마력에 파마리나와 레스난이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 때 시즈가 깨어난 넬피 엘이 반가운 듯 말했다. "넬피엘, 일어났군요? 이 마법원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서 묻고 싶었는데‥." 밝게 웃으며 시즈가 머리가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넬피엘은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데 린은 그걸 보고 불꽃이 바람에게 약하다는 젠티아의 말을 떠올렸다. 머리를 맞댄 두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스 난이 중얼거렸다. "그림 된다‥." 성안을 해매다가 연병장에 막 도착한 파세닌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에게 있어 웬수 같은 두 남자. 괴상하게만 보이는 그들을 보며 여자들인 얼굴에 붉은 홍조를 살풋이 띄우고 넋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세닌은 번뜩하고 시장의 무기점에서 산 장검을 빼내며 외쳤다. "나, 파세닌 로바메트. 로바메트 공작가의 명예를 담아 시즈 세이서스에게 결투를 청한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겹다는 얼굴로 넬피엘이 중얼거렸다. 파세닌도 소녀보다도 더욱 소녀같은 이 소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글로디프리아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확인했기 때문에 자존심에 흠집은 났지만 오직 시즈를 노려보고 서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즈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음으로 담담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파세닌은 시녀에게 들었던 내용을 생각할수록 분한 지 씩씩대며 말했다. "잘렸던 내 팔의 원수를 갚겠다." "당신의 팔은‥ 읍!" 사정을 말해주려고 한 아리에의 입은 파마리나의 손에 의해 방해를 받고 말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항의하려는 아리 에의 귀에 파마리나가 속삭였다. "시즈는 자극이 좀 필요해. 경쟁자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걸음일 걸." "그래도 이건‥." 파마리나의 눈에는 살기등등하게 검을 빼든 파세닌이 자극(?)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즈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는 달려와서 따귀를 올려붙였다. 짝 "파세닌, 뭐 하는 거 에요?" 아리에가 벌떡 일어나서 따지자 질투에 눈먼 남자는 더욱 성이 나서 크게 말했다. "여자의 뒤에 숨어있을 건가?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시즈는 멍하니 있었다. 따귀를 때릴 정도로 완고한 결투 신청을 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천천히 투명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고 그는 일어섰다. "결투를 받아드리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빨리 검이나 뽑아라." 시즈는 훈련을 하고 있던 한 기사의 검을 빌리고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영광이라는 말을 연발했다. 연습 시에 쓰는 검으로 아직 날을 갈지 않은 가검이었지만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시즈의 배려도 파세닌의 눈에는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네 녀석의 희여멀건한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해주마." "후우‥ 시작하십시오." 파세닌이 자세를 잡자 멜첼은 휘파람을 냈다. '호오‥ 기본은 되어 있는 걸!? 적어도 호랑이의 자식이라는 건가?' 갑옷을 입고서도 동작이 가벼웠다. 파세닌이 장검을 휘두르자 시즈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피했다. 멈추지 않고 다 가가서 검을 세 번 더 휘두르는 파세닌. 그렇지만 수많은 강적을 상대했던 시즈는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그리고 몸 을 튕겨 파세닌을 스치며 몸을 돌려 검을 내리쳤다. 따악! "크윽!" 피하지 못했다. 파세닌은 아버지가 공작인 덕에 뛰어난 기사들로부터 교육을 받기는 해지만 시즈는 기사들도 놀라 는 뛰어난 체술의 소유자. 걷는 듯 하면서도 뛰고 있고 뛰는 듯 하면서도 걷는 듯한 동작의 묘는 한 번 봐서는 쉽 게 잡을 수 없었다. 42악장 3화 따악! "크윽!" 피하지 못했다. 파세닌은 아버지가 공작인 덕에 뛰어난 기사들로부터 교육을 받기는 해지만 시즈는 기사들도 놀라 는 뛰어난 체술의 소유자. 걷는 듯 하면서도 뛰고 있고 뛰는 듯 하면서도 걷는 듯한 동작의 묘는 한 번 봐서는 쉽 게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즈의 오묘한 움직임에도 파세닌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패배를 인정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흠모하는 아리에양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걸로 그만입니까?" 시즈는 그답지 않게 비꼬는 말투로 파세닌을 조롱했다. 귀신처럼 뒤로 돌아가 상대의 어깨를 짚기도 했고 턱을 툭 툭 치기도 했다. 오랜만의 독서를 방해받아서 잔뜩 화가 난 것이다. 게다가 뺨까지 얻어맞았으니. 파세닌이 자신을 얕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헉, 헉, 헉!" 어느 새 날이 저물 때까지 몇 시간이 흘렀지만 파세닌은 시즈의 옷깃도 건들이지 못했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안쓰러 울 정도로 숨을 헐떡이던 그는 결국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파세닌의 몸을 툭툭 걷어찬 시즈는 그가 기절했음을 알자 시녀들에게 데려가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너무 심하지 않았어? 그래도 공작의 아들이야." "그래서요? 가서 고개라도 땅에 박고 빌고 올까요?" 아리에의 말에 시즈는 차갑게 반문하고는 책을 잡았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 아리에가 눈을 크게 떴고 황급히 데린 이 말했다. "너무 하잖아, 시즈. 아리에는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가요? 파세닌님이 제게 시비를 자꾸 거는 이유는 아리에가 확실히 않아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말한 시즈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책에 열중했다. "아리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시즈가 더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서 아, 아마도‥ 그럴거야." 레스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과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시즈를 떠올리고 말을 더듬었다. 그들은 현재 파세닌의 방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즈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리에로서는 그가 심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파마리나가 고개 를 저었다. "하지만 시즈의 말도 배제할 수는 없어. 레스난은 그동안 함께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글로디프리아에 도착할 때 까지 시즈가 연인임을 확실하게 표현하지 못한 아리에에게도 잘못은 있어. 파세닌이 얼마나 달라붙었니? 그 때 확 실하게 말해줬으면 그도 추근거리지 않았을 거야." 그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냉기가 푸르던 시즈의 눈동자가 떠 돌고 있었다. "시즈, 질투하는 건가?" 여자들이 떠나고 넬피엘이 묻자 시즈는 책에 머리를 파묻듯이 들이댔다. 그러나 넬피엘은 이미 보았다. 흰 피부가 붉게 물든 것을‥. 시즈는 표정이나, 안색의 변화가 드물었지만 피부가 희여 변화가 일어났을 때 쉽게 알아챌 수 있 었다. 키득거리며 넬피엘은 뒤로 고개를 젖혔다. "질투를 하기보다는 확실하게 말하는 게 어때? 여자를 상처 입히는 질투보다는 진실하게 질투를 표현하는 게 더 좋 을지도 몰라. 화풀이를 하려다가 화풀이 상대가 되어버리다니‥. 불쌍한‥." 위 넬피엘의 수식어에 이어질 대상은 현재 감격한 상태였다. 시즈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아리에 가 문병 온 것이다. "으윽!" 불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비트는 걸 보며 아리에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할 때 토플레가 코웃음을 쳤다. 파 세닌은 단순한 탈진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오‥ 아리에 양. 이렇게 와주시다니‥." "팔은 이제 괜찮나요?" "팔이요? 아‥ 그것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이 파세닌 로바메트! 감격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저한테 아무 것도 아니죠." 파세닌이 아리에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흐느끼는 모습에 레스난은 다리에 비늘이 마구 일어서는 걸 느꼈다. 어떻게 그걸 견디는지 의아스럽게도 직격으로 보고 있는 아리에의 입가에는 미소마저 떠올라있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사실 파세닌의 팔에 대해서 저도 책임이 있거든요." "에?" 갑자기 파세닌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금새 눈망울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요. 이해합니다. 앞으로 함께 할 반려자의 상처에 책임감을 갖다니! 오오! 그대는 제게 있어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천생연분(天生緣分)입니다." "그, 그게‥." 제 무덤을 파고만 아리에. 그녀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 파세닌이 자신에게 가진 연모의 정을 이용해서 시 즈가 그의 팔을 자른 것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했었는데‥. 당황하는 그녀를 파마리나와 레스난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모른 척 외면했다. 파세닌은 그게 여자들이 눈치있게 시선을 피해 자리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아리에를 와락하고 안았다. "악! 무슨 짓이에요?" 아리에는 기겁을 하여 그를 밀쳤다. 파세닌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요. 다들 알아서 자리를 피해줄 겁니다." 뒤에 서있는 소녀와 여인은 기가 막혔다. 오죽하면 레스난이 그토록 싫어하는 마녀의 귀에 소근될 지경이었다. "어머‥. 인간은 눈치가 빠른 걸로 유명한 종족인데‥ 가끔 돌연변이가 있다더니 정말이로군요?" "저건 돌연변이가 아니라 환자야. 토플레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토플레의 입은 약간 삐뚤어져 크게 벌어져 있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이정도 였으리라고 는 생각하지 못하여 충격이 큰 듯 싶었다. 다시 끌어안으려고 하는 파세닌을 밀치고 아리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파마리나의 말대로 확실히 하는 게 좋 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게 아니에요. 난 이미 시즈에게‥." 아리에는 본인 앞에서 하기 힘들었던 고백을 다른 사람 앞에서 털어놓게 되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결국 '마 음을 허락했어요.'라고는 도저히 하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아리에의 절대적인 실수였다. 파 세닌은 특기처럼 빠르게 오해의 늪에 빠져들었고,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는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갑옷 을 입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그럴까?'하고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아리에 등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 네 이놈! 감히 아리에 양의 순결한 몸을 덥치다니!! 용서 못한다아아!" "휴우‥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 미리 시즈에게 소식을 알려서 쓸데없는 소란을 피하도록 해야겠어." 아리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난기로 빛나는 파마리나의 눈동자를 보았다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는 종이에 몇 자를 적어서 잘 날도록 종이새를 접어서 날렸다. 한 편, 넬피엘에게 질투보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라는 넬피엘의 충고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에 여념이 없 었다. 그 때 날아온 종이새가 그의 이마를 쪼았다. "윽! 뭐지?" 성을 보니 파마리나가 손짓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리에가-쓸데없는 말로 불화를 좌초했다는 자책감으로-눈물 을 글썽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며 종이새를 펴본 시즈는 움찔했고 주위에 차가운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넬피엘은 뭐 때문에 시즈가 그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힐끔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파세 닌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왔을 때 시즈는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손짓을 하자 방에 놓아두었던 시즈의 예도 가 마력에 이끌려서 날아와 잡혔다. 태양보다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망설임없이 진검을 빼드는 시즈를 보고 아리에는 파마리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물었다. "도대체 파마리나, 뭐라고 적은 거야?" "말했잖아. 시즈는 약간의 자극이 필요하다니까." "그래도 이런 건 필요없어어어!" 넬피엘은 팔랑팔랑하고 떨어지는 종이를 잡았다. 호기심 어린 소년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적힌 내용을 읽은 그는 피식 하고 웃으며 도로 누웠다. 휙 하고 던져버리는 종이새는 이와같은 글씨를 품고 있었다. '시즈. 파세닌이 강.제.로. 아리에를 끌.어.안.았.어!'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아리에가 있는 방의 건너편 창문에서 젠티아가 낄낄대고 웃었다. 로바메트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정상이 없군." 42악장 4화 글로디프리아의 활기도 얼마가지 못했다. 곧 있어 들려온 '반란군의 수도 점령'이라는 소식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 으로 그들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드로안 남작, 아직도 반군에서는 연락은 없는가?" "죄송합니다." 젠티아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로바메트 공작이 말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엇인가." 글로디프리아의 회의장은 온통 침통한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분위기 파악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파세닌도 아리 에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조용히 있을 정도였다. 그의 몸은 여기저기가 붕대로 둘둘 감겨있었다. "변심한 거야." 넬피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젠티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닥쳐라, 넬피엘. 그럴 분이 아니야. 함부로 혓바닥을 놀렸다가는 너라고 해도 가만 놔두지 않겠어." 기운이 담긴 목소리에 촛불이 꺼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넬피엘은 코웃음 쳤지만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도 젠티 아가 가장 고심하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군요." 시즈가 결론을 짓자 모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젠티아의 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가 집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힘들게 의지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 렸다. "들어와요." "젠티아‥." 그녀는 "데린‥."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걸까요?" 데린은 젠티아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녀의 몸이 떨려오는 것에서 울음을 참고 있음을 안 젠티아는 꼭 끌 어안으며 달랬다. "괜찮을 거야. 암‥. 실베니아의 푸른 독수리를 누가 어떻게 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젠티아 또한 깊은 탄식을 참고 있었다. "미안해요. 당신도 힘드실 텐데‥." "무슨 소리야. 언제든지 말해요. 데린에게 빌려줄 가슴은 마련되어 있으니까." 그 때, 그의 귀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들렸다. 수련을 통해서 발달한 오감은 엘프를 뛰어넘을 정도였기 때문에 성의 뒷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란도 놓치지 않았다. "데린, 잠시 나갔다가 올게. 뒷문을 경비하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 "다녀오세요." 데린은 눈물이 동글동글 맺혀서도 밝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춘 젠티아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겨진 데린의 턱을 따라서 또르르 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글쎄! 안 된다니까! 지금은 전시(戰時)라서 신분을 확인할 수 없으면 무슨 소리를 해도 안돼!" "이보게. 제발 부탁이네. 드로안 남작의 얼굴을 한 번만 보게 해주게. 아니면 드로안 부인의 얼굴이라도 된다네." 경기병에 매달려 애원을 하는 사람은 4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사내였다. 어디서 신나게 굴렀는지 오물까지도 붙어 있는 검은 로브 위에는 군데군데 핏자국마저 보이고 있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심상치 않은 자인 것만큼은 틀림없 었다. 병사의 표정이 완고해지자 사내의 애원도 처절해졌다. "제발 부탁하네. 내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지. 내 나이가 자네의 아버지 정도는 될 거야. 그래도 이렇게 고개를 숙이 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경비병은 동료에게 임무를 잠시 맡기고 젠티아를 기사들을 부르러 갈려고 했다. "거기 무슨 일이지?" "각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갑자기 젠티아가 늦은 시간에 나오자 경비병은 경례를 하고 말했다. "이 남자가 영주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여‥." "그래?" 반문하며 젠티아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악취마저 나는 사내에게서 어쩐지 불길한 냄새도 함께 풍겼다. 얼굴이 보일 만큼 다가섰을 때 중년 사내의 눈이 독수리처럼 빛났다. "네 이노오오옴! 젠티아 드로안!" 젠티아는 사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무술이나 검술을 오래 수련한 달인은 상대의 기운만 가지고도 그가 악인인지, 선인인지를 알기도 했고 심지어는 몸의 상태까지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의 기운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폭발할 시점을 기다리는 듯 했던 것이다. "죽어라!" 겉모습에 쓰러질 듯한 사내로 보기에는 눈부신 빠르기였다. 그러나 괜히 젠티아가 대륙 삼대 검사겠는가? 가볍게 피한 그는 사내의 팔을 잡아서 팔목을 꺽었다. 그러자 들고 있던 단검이 툭 떨어졌고 젠티아가 다시 한 번 메쳐버 리자 바닥에 낙법도 못하고 부딪혀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영주님, 저, 전 이 남자가 하도 애원을 해서‥." 경비병이 변명을 했지만 젠티아는 듣고 있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벗기자 그의 얼굴은 놀람 으로 마구 색칠됐다. 아직까지도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사내에게 젠티아는 큰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가서 의사들을 오라고 해! 기사들도 부르고!" "예? 예!" 두 경비병이 부리나케 달려가고 젠티아는 중년의 사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사내를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장인어른‥ 무슨 일을 당하신 겁니까?" 그렇다. 중년의 사내는 바로 하도너 킬유시 공작이었다. 처참한 몰골이 되어 글로디프리아를 찾아온 킬유시 공작. 그는 왜 젠티아를 죽이려고 했을까. 젠티아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성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 데린과 아리에, 그리고 시즈가 동시에 달려왔다. 데린 은 젠티아의 팔에 안겨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서 비틀거렸다. "아, 아버지‥. 아버지!" "진정해요, 데린." 42악장 5화 ‥‥ 잠시 후,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데린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와서 물었다. "아버지는 어떠신가요?" 막 치료를 끝낸 토플레는 준비되어 있던 대아의 물에 손을 닦았다. 시커먼 피가 투명한 물을 변색시켰다. 옆에 놓여 있는 쟁반에는 화살의 촉을 비롯하여 썩기 시작한 살점과 치료도구가 놓여있었다. 시녀에게 부탁하여 그것들을 치 우게 한 토플레는 꽤 시간이 걸린 시술로 몸이 쑤시는지 몸을 뒤틀며 자리에 앉았다. "화살촉이 깊이 박혀있어서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할 뻔했습니다. 동작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화살대를 잘라내셨던 듯 합니다. 그걸 제외하면 큰 부상은 없습니다. 다만 자잘한 상처들이 더러운 무언가로 오염되어서 썩기 시작했더군 요. 그래서 썩은 살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과다하게 움직여서 탈진상태입니다. 참고로 전의 파세닌 님의 탈진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블리세미트의 강한 신성력으로 생명의 술을 받는다 해도 꼬박 하루는 움직이지 못 할 겁니다." "고마워요, 토플레." "뭘요, 부인. 저도 기쁩니다." 눈을 찡긋하고 토플레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데린은 침대에 푹 잠겨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 킬유시 공작의 손을 꼭 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너무나 잠잠했기 때문이다. 막 토플레에게 소식을 듣고 밖에서 들어온 파마리나는 갑자기 경직했다. "파마리나?" 아리에가 의아함이 담긴 어조로 그녀를 불렀지만 이미 데린에게 다가서 있었다. 파마리나는 데린을 거칠게 잡아당 겼다. "떨어져." "왜 이러는 거야?" "네 아버지는 마법에 걸려있어. 아리에, 당장 가서 마법사들을 불러와." 시즈는 이미 문 밖에 있었다. 넬피엘은 아직도 마나이츠의 옆방에서 골아 떨어져 있었지만‥. 마나이츠가 잠옷에 가 벼운 웃옷을 입고 넬피엘과 함께 달려왔을 때, 먼저 들어온 시즈는 눈을 감고 킬유시 공작의 마나를 감지하는 중이 었다. 그에게서 퍼져나간 바람이 킬유시 공작을 휘감았고 공작의 몸이 공중으로 조금씩 떠올랐다. "대단하군. 순수한 마나만으로 사람을 띄우다니‥." 젊은 청년이 가지고 있는 마나의 양에 마나이츠는 감탄했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젠티아에게 그의 수준에 대해 서 들은 바가 있는데다가 넬피엘도 청년 이상의 수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지가 끝나자 킬유시 공작의 몸 은 침대에 다시 내려앉았고 데린은 흐트러진 하도너의 머리와 이불을 잘 정리해주었다. "파마리나가 말한 대로 최면 마법이나, 암시에 빠져있습니다." 시즈의 말에 따라서 파마리나의 콧대가 위로 촥 올라갔다. 그러나 피식 웃은 시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불완전한 암시입니다. 술사가 시전을 중단했거나 도중에 어떤 방해를 받았거나 피시전자가 거부를 했거 나‥." 그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시즈 좀 도와다오. 하암 ." 넬피엘은 로바메트 때처럼 마력으로 암시를 깨뜨리려고 했다. 불완전한데다가 본인이 거부하는 암시라면 억지로 깬 다고 해서 별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설명했다. "간단해. 비정상적인 마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 마나의 흐름을 깨는 거지. 마나의 흔적이 남으면 부작용이 생기니 까. 흔적을 남기지 않을 정도의 강한 마력으로 없애버려야 해." 그렇게 말하고 넬피엘은 멀뚱히 시즈를 바라만 보았다. 시즈도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투명한 목소리로 난폭하게 소리쳤다. "빨리 하라고!" 즉 도와달라는 것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시즈는 넬피엘의 말대로 하기 위해 마나를 일으 켰다. 휘잉하고 방의 창문들이 모두 열리며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마치 만나서 반갑다는 듯 시즈의 주위를 빙글 빙글 돌았다. 회색빛의 잠옷 때문일까? 날리는 은발에 눈을 살짝 감은 그의 모습은 바람의 정령을 마주한 듯 했다. 이윽고 충분한 바람의 마나가 모이자 바람의 신은 명령을 내렸다. 바람의 마나가 하도너의 신체를 감쌌다. "으윽!" 하도너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리자 데린은 불안했지만 젠티아가 어깨를 꼭 잡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이내 바람의 마나는 하도너의 몸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마나를 쓸고 나왔다. 넬피엘의 파괴적인 마력은 다른 마나를 아예 소멸시켜 버리지만 시즈의 것은 아니었다. 힘을 나눠주거나 힘을 덜어가서 균형을 맞춰주고 불필요한 것은 쓸 고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바람은 맞으면 맞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환자인 하도너 킬유시 또한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는 좀 전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시즈." 데린의 감사에 시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또한 부름에 기꺼이 와준 바람에게 감 사를 내심 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바람을 쐬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을 맞고 나면 그는 딴 사람처럼 변했다. 은발이 흘날려서인지 모르지만 지금도 좀전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우리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시즈와 아리에를 비롯하여 글로디프리아의 기사와, 손님들은 드로안 부부에게 축하를 전하고 돌아갔다. 단, 참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만 빼고. 젠티아가 마크렌서를 잡고 말했던 것이다. "자네도 킬유시 공작께서 이곳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반군의 실태에 대해서 예측이 있을 거야. 참모부들을 불러. 당 장 회의를 해줘. 나도 잠시 후에 가겠어. 장인어른이 일어나셨을 때 우리는 모든 경우에 대한 준비를 끝내놓아야 해." 젠티아의 눈은 방금전까지 데린을 달래던 자상한 눈이 아니었다. 기사로서, 그리고 전장에서 이름높은 '값싼 남작' 으로서 유성과 같은 빛을 내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크렌서 자작은 그의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카로안군의 침략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비하면 해일 전의 파도였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토클레 우스 마크렌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42악장 6화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아. 나는 오히려 자네들의 모습에 안심했어. 아직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킬유시 공작은 회의장에 앉아서 고민으로 죽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글로디프리아의 기사와 참모들을 보면서 뭐 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뜨자마자 힘든 몸을 부축하여 데려온 곳이 회의장이라는 사실에 처음 에는 놀랐지만 기사들이 논의하고 있는 내용에는 더욱 놀랐다. 자신이 반란군을 떠난 이유와, 그 파장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될 듯 싶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는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시즈는 고개를 간단히 숙였다. 그리고 로바메트 공작도 보였다.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시즈, 떠나지 않았군. 로바메트 공작, 그대가 납치되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있었군요. 이거 희망이 점점 늘어나는 걸." "아버지, 이제 말해주세요. 반란군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휠체어 뒤에 서있던 데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킬유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무 재촉하지 말려무나. 솔직히 말해서 회상하기 싫거든." 회의장의 모두가 침묵 속에 빠져서 그의 이야기가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예전부터 실베니아의 국정에 개입하는 단체가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베니아가 위태로워지는 게 그 단체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이 나라의 귀족들이 잘못되었던 거지. 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릇된 선택이었던 거야. 나는 이제껏 많은 전쟁외교와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니었지. 로바메트 공작은 믿을 수 없게도 국력소모를 마다하면서 반군에 대항했 어. 젠티아 자네도 부르지 않고‥. 나는 당황했지. 그래도 시작한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란(內亂)의 장기화를 걱 정하고 있을 때, 로바메트 공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네. 안도하고 기다렸지. '궁에서 젠티아를 부를 것이다.' 하고. 이틀쯤 지났을 거야, 그 날 밤, 펠리언과 페이튼이 왜 펴온을 점령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지. 나는 이유를 설명 했고, 둘은 납득하지 못했네. '전하께서 애초에 세우셨던 계획은 모두 어긋났습니다. 이제는 직접 나라를 바꿔야 합 니다.'하고 소리치더군. 그 때, 녀석들이 들이닥쳤어." "역사의 고리입니까?" "그래. 자네도 알고 있군. 처음부터 국정에 은근히 개입하던 바로 그 단체였지. 어떤 어쌔신도 그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거야. 소리없이 잠입하여 보초병들을 바닥에 눕혀버렸지. 공포스러웠지. 어둠을 바른 듯한 갑옷의 기사는 펠리 언과 페이튼이 함께 덤벼도 당해낼 수 없었다면 믿겠나?" "충분히 믿습니다. 바스티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바스티너? 바스티너라고? 어둠의 감옥이라고 불리는 미크릴의 갑옷을 말하는 건가?" 킬유시 공작이 되묻자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킬유시 공작은 놀라워하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파멸의 열쇠 중에 하나였군. 어쨌든 바스티너의 활약으로 난 저항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 어. 그리고 묶여서 그들의 비밀 막사에 있는데 작은 소녀가 들어오더군.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을 천진난만한 얼굴의 귀여운 용모를 지닌 소녀였지." "호, 혹시 암시를 걸지 않았나?" 로바메트 공작이 다급히 묻자 킬유시 공작은 오히려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어떻게 알았지? 자네 말대로 소녀는 나에게 최면 마법을 걸어서 암시를 주입시키려고 했네. 그런데 펠리언 이 밧줄에 묶인 채로 뛰어들어오며 소녀를 밀치고 날 도망치게 했어. 난 필사적으로 달리고 숨었네. 화살이 박혔는 지도 몰랐어. 나무에 줄을 매고 늪으로 뛰어들었네. 아! 봄이라 농부들이 쌓아둔 거름더미는 녀석들의 눈을 피하기 좋더군." 젠티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킬유시 공작이 경비병이랑 실랑이를 할 때 불쾌하게 풍겼던 악취는 바로 동물의 분뇨(糞尿)였다. 데린은 아버지의 고생에 눈을 훔쳤다. 그러나 젠티아는 웃으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고맙네. 하지만 내 계획은 실패했어. 실베니아를 더욱 어지럽히고 말았네." "그것은 공작 전하의 실수가 아닙니다. 로바메트 공작께서는 암시에 걸려 계셨습니다. 전하께 암시를 걸었던 그 소 녀가 바로 술사였지요." "그게 사실인가? 파이얼." 로바메트 공작은 멋쩍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자네는 대단한 거야, 하도너. 암시에 걸렸으면서도 도망을 치다니‥." "완벽하게 걸리지는 않았으니까." "후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쯤 반군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아! 자네는 모 르겠지!? 반군이 수도를 점령했네." 킬유시 공작은 휠체어의 팔걸이가 부서질 정도로 꽉 잡았다. 빠득하고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로바메트는 그 의 힘줄 돋은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말했다. "자책하지 말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야." "맞습니다, 전하. 저희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킬유시 공작은 회의장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좋은 눈빛이군.' 다들 투지에 불타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미래라도 이들이라면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킬유시 공작은 믿 었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들을 믿고 최악의 가상을 해보지." "감사합니다." "역사의 고리는 아무래도 개혁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 즉 실베니아의 변화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실 베니아를 새롭게 만들려는 사람들이지. 역사의 고리는 자네들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어. 내가 '역사의 고리'라고 치 고 자네들을 제거하고 싶다고 친다면‥. 반군으로 수도를 점령한 후에 항복하겠지." "예? 항복한다고요?" "명목상의 항복이지. 그들은 정권을 잡을 거야. 뒤에서 국왕을 조종해서 귀찮은 방해물을 없앤다. 수도로 부르는 거 야. 군사들은 제외하고 자네들만‥. 죄를 물어서 부르면 군사를 일으킬지 모르니까 중대한 회의나, 연회를 열지도 몰라. 귀족들은 국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혹시 또 모르죠. 우리 망나니 남작님이라면‥." 어느 기사의 한 마디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확실히 '값싼 남작'이라면 국왕의 연회나 부름도 무시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국왕의 허락 하에 불참의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오라는 어명이라면 거역할 수 없 었다. "하지만 정말로 반란군이 그런 행동을 할까요? 너무 비관적인 예측이 아닙니까?" "마크렌서 자작, 나는 자네가 뛰어난 전략가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 킬유시 공작의 뒤를 이을 전략가라면서 사람 들의 칭찬이 대단하더군. 하지만 '적'이라는 것은 말일세‥. '나'에게 비관적으로 움직인다네." 킬유시 공작이 막 말을 맺었을 때였다. 회의장의 문을 병사가 노크하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영주님, 수도 펴온에서 국왕 폐하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 모두가 경악하여 토끼눈을 뜨고 킬유시 공작을 주목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킬유시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나." '전장의 푸른 독수리'는 허명이 아니었다. 42악장 7화 …중략 반란군의 봉기(蜂起)와 카로안군의 침략이라는 안팎의 위기으로 인해 본국은 존망(存亡)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단결과 지혜로 실베니아는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그 중에서도 반란군의 괴수, 파이얼 로바메트의 꾀임에 빠졌던 반란군을 실베니아의 충성스런 군대로 되찾은 펠리언 라카스와, 카로안 육만군을 격퇴해낸 글로디프리아의 젠티아 드로안 남작을 특히 치하하는 바이다. 그리고 자국(自國)의 위기 를 극복하기 위해 힘써준 모든 신민(臣民)에게 감사한다.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실베니아의 되찾은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고자하니 이 글을 읽는 경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주기 바란다. 끝에 찍혀있는 국왕의 인장처럼 젠티아의 가슴에도 선명하게 걱정이 찍혔다. "펠리언이 다음 꼭두각시로 점찍혔군요." "그게 문제입니까?" "그럼?" 마크렌서 자작의 물음에 젠티아는 징그럽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대체가 이 사람은‥.' 젠티아는 문제의 파악이 끝나고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논의(論議) 중심을 옮기려고 하기 일쑤였다. 마크렌서 자작은 혹시나 하여 물어보았다. "설마 혼자서 가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당연히 안 가지, 하하핫. 내 귀여운 시즈를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어?" 고아한 인상의 시즈가 떫은 감 씹은 듯한 표정을 변했다. 파마리나는 옆에 있는 아리에의 옆구리를 툭치며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저 사람은 위험해." 아리에는 말없이 데린을 째려봤고 데린은 섬뜩하여 젠티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윽! 이런! 임자가 있었군. 그렇다면‥." 살살 돌아가는 젠티아의 눈동자. 광채가 돌아나며 비춰질 때마다 사람들은 몸서러질치며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그 의 시선이 멈춘 곳에 있던 사람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난 너 싫다." "나도 너 싫어. 그냥 한 번 쳐다본 거야. 생긴 건 귀여운 주제에 말투는 왜 그 지경인 거야."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심적인 충격을 먹었던 모양인지 젠티아는 구석에 쪼그리고 박혀버렸다. 데린이 어깨를 안으며 달랬고 사람들은 웃었지만 마크렌서 자작은 아니었다. 그는 웃음이 나오는 분위기를 깨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결국 시즈님 일행과 넬피엘님만 동반하고 수도로 가시겠다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궁전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작 각하뿐이지 않습니까?" "시즈도 있어." "그렇다고는 하나‥." "그만 하게, 마크렌서 자작." 마크렌서 자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킬유시 공작이 제동(制動)을 걸었다. "자네는 지금 글로디프리아의 군대로 수도로 가고 싶겠지. 그러나 옳은 방법이 아니야. 내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 는 거지. 게다가 그들은 반란군이야. 반란군이 중앙에 항복한다는 의미가 뭔지 아나? 사람들은 민심이 왕실로 돌아 섰다고 생각할 거야. 지금 군사를 일으킨다면 '값싼 남작'의 명성이 있다고 해도 소용없네.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지금까지 드로안 남작이 쌓았던 명성은 물거품이 되어버려." "이상한 소문?" "뭐‥ 예를 들면 불안한 시국을 타고 '값싼 남작'이 정국(政局)을 잡으려고 한다거나, 왕이 되려고 한다거나‥." "그게 말이 됩니까?" "진정해, 토클레우스." 냉정한 마크렌서 자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분노한 그를 젠티아는 진정시켰다. 킬유시 공작은 냉철하기로 유명한 마크렌서 자작이 흥분하는 이유가 주군에 대한 신뢰와 충성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부러운 심정이었다. '나도 그대 같은 가신(家臣)이 있었다면‥.' 마크렌서 자작은 역시 뛰어난 자였다. 그는 금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 킬유시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 고 용서를 빌었다. 킬유시 공작은 손을 저으며 사과를 받지 않았다. "괜찮아. 사과할 것 없네. 자네의 반응을 보니 오히려 기쁘기만 하군. 하지만 그렇게 남작을 마음으로는 믿으면서 실제로는 왜 믿질 못하나?" "그, 그건‥." "걱정 말게. '값싼 남작'은 뛰어난 사람이야. 게다가 대륙의 현자로 손을 꼽던 '마땅찮은 시즈'가 그의 옆에 있네. 뭐가 걱정인가?" 그의 칭찬에 시즈의 얼굴은 붉으스레 달아올랐다. 그에 비해 젠티아는 점점 콧대를 올리다가 데린에게 발을 밟혔지 만. 결국 마크렌서 자작은 승복했다. 그리고 왕궁으로 떠나는 일행은 다음과 같았다. 젠티아, 시즈, 넬피엘, 아리에, 파마리나, 레스난, 보를레스. '사막의 사제' 블리세미트는 젠티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서 토플레님과 부상자들을 좀더 돌보고 가겠습니다." 어린 마음과 사제로서의 자애로움이 상처 입은 자들을 떠나지 못하게 잡는 모양이었다. 토플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사의 자애로움이라기보다는 위험한 곳에는 가기 싫은 듯 했다. 마크렌서 자작이 먼저 떠나는 이들에게 말했 다. "블리세미트님도 저희와 함께 갈 것입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글로디프리아의 '백장의 꽃잎'과 킬유시 공작, 로바메트 공작과 그의 아들 파세닌 로바메트는 나중에 은밀히 움직이 기로 했다. 그런데 파세닌은 극구 반대했다. "나도 먼저 가겠습니다." "너무 위험하다."라고 말리는 로바메트 공작을 뿌리치고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납치되셨으니 제가 가는 것만으로 드로안 남작께는 상당한 힘이 될 겁니다." "그건 사실이군요. 확실히 로바메트 공작이 아니셨다면 예전에 킬유시 공작께서 수도를 점령했을 테니까요." 이리하여‥ 젠티아 일행에는 파세닌이 추가되어 8인이 되었다. 떠나기 전에 블리세미트는 그에게 한 가지 충고를 했다. "시즈님께 시비 걸지 마세요. 이제는 제가 치료를 해드릴 수 없으니까 잘못 맞으면 몇 달은 고생해야 되요." 42악장 8화 자상한 소년 사제의 당부도 파세닌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한 모양이다. 파세닌은 글로디프리아에서 벗어난 지 한 시간도 못 되어 아리에에게 추근댔다. "아리에 양‥ 저걸 보십시오. 파릇파릇 피어났던 새싹들이 서서히 이제는 새끼새가 날개를 펴듯이 자라는 계절이 왔습니다. 그대와 나의 사랑도 이제 싹을 틔우는 단계를 지나서 열매를 맺을 계절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스릉― 창 밖을 보고 있던 젠티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시즈, 마차 안에서 검을 뽑지 말아 줘." 그럼에도 마차는 한 두 번 기우뚱거리면서 수도를 향해 잘도 달렸다. 펴온과 글로디프리아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중간에 거대한 산맥, 롤크가 끼어있어 상당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즈 일행은 급할수 록 돌아가라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강행돌파를 시도했다. "으아악!" 엄청난 진동에 파세닌의 엉덩이는 벌에게 쏘인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마차가 가끔 높이 튕길 때마다 신나게 괴성을 지르는 젠티아는 인간이 아니기에 제외 했지만 아리에를 비롯한 여자들까지 지나치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고 있었다. '왜 나만 꼴사나운 비명을 질러야 하는 거지?' 그 배경에는 시즈가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시즈는 바람의 마나로 사람들에게 포근한 쿠션을 선사했던 것이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사정을 알고 있는 아리에는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노릇도 아닌지라 밖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마차가 멈춘 것은 해가 서산 뒤로 넘어간 후였다. 여름의 입구에 들어서서 겨울의 낮길이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파세닌의 엉덩이를 진물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마차에서 걸어나오는 파세닌에게 파마리나 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파세닌, 어디 아파요? 증상을 말해보세요. 약이라도 드릴 테니‥." "아, 아닙니다."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모두들 혀를 찼지만 아무도 위로를 건네는 이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사람도 시즈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테니‥. 그래서 자고로 시비도 골라서 걸어야 하는 법이다. "이거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 수프가 끓을 때를 기다리던 보를레스는 투덜거리면서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쥐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졸고 있던 넬피엘까지 하품을 하면서 일어섰고 레스난는 아리에의 뒤로 몸을 숨겼다. "크르르륵‥." "몬스터로군. 수도 주변에는 기사단들이 자주 치안을 유지해서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야. 롤크 산은 충분히 깊으니까. 어딘가에 숨어있었겠지. 한동안 기사단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서서히 모습을 들어낸 거고‥." 담배 연기를 풀풀 풍기며 젠티아가 말했고 파마리나가 얼굴을 찌푸리고 손을 흔들며 담배 연기를 피하며 엄포를 놓 았다. "당장 담뱃불 꺼요. 안 그러면 데린에게 말해버리겠어." "그 동안 못 피었다고‥. 좀 봐줄 수 없어? 파마리나." "절대로 못 봐줘요." "쳇! 이거 스트레스 쌓이는 걸." 나이에 안 맞게 입을 삐쭉거리며 젠티아는 담배를 뭉갰다. 거칠게 검을 뽑는 모습에서 그의 분노를 몬스터들이 처 절히 받게 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트롤‥." 젠티아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트롤이라니. 그것도 여덟 마리나 됐다. 난폭하기로 유명한데다가 숙련된 용병이 라도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두 세 마리만 되어도 롤크 산 주변의 사람들이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여덟 마리가 한꺼번에 출몰했다는 사실은 실제로 20 마리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소식이 펴온의 기사단에게 들어가지 않 았을 리가 없으니‥. 젠티아가 한탄할 수밖에. '도대체 얼마나 썩어버린 건가?' 실망한 젠티아를 비웃듯이 트롤이 입을 벌리고 침을 좔좔 흘렸다. 이빨 사이에 피묻은 사람의 옷자락이 끼어있는 걸로 볼 때 가까운 때에 식인(食人)을 한 게 틀림없었다. 내란(內亂)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온 수도 주변의 주민들이 그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이거 어려운데!?" "뭐가?" 잘려도 다시 재생되는 트롤의 능력에 보를레스가 나름대로 고전할 때 파마리나가 반문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보를레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트롤의 처리를 끝낸 상태였던 것이다. 넬피엘은 주위에 재를 날리며 다시 코를 골고 있었고 젠티아는 난도질한 트롤의 시체에서 체액을 짜내느라 바빴다. 파마리나는 아리에가 트롤에게 꽂은 단검에 번개를 떨어뜨려 트롤을 먹기 좋게 구워버리고 레스난과 함께 수프가 끓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예도에 혹시나 피가 묻었나하여 살펴보고 있던 시즈가 갑자기 소리쳤다. "파세닌! 그는 어딜 갔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데‥." 말을 한 파마리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시즈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수풀을 뚫고 달렸다. 그가 죽는다면 자 신 때문이라고 시즈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바람의 쿠션을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다면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은백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려가는 시즈의 모습은 한줄기 바람을 연상시켰다. 지나가는 자리에는 뒤를 놓칠 세라 바람이 뒤따르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크륵! 크왁!" 보통 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 시즈는 놓치지 않고 방향을 바꿨다. 42악장 9화 "이 놈들! 저리 꺼지지 못해?" 트롤 두 마리는 파세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바로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치웠을 것이나 좀 전에도 폭식을 했기 때문에 이번 먹이는 운동을 하여 소화를 시킨 후에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파세닌은 그 의 검술이 위협적이라 트롤이 접근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퍼억! "으아악!" 장난을 치고 있다고 해도 트롤은 무서웠다. 한 녀석의 장난 같은 손짓에 나무에는 거대한 손톱 자국이 남았고 땅은 깊게 파였다. 어떻게 보면 파세닌은 용하게도 트롤의 장난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이 멀쩡하기만 했더라면‥." 누가 보고 있지도 않은데 파세닌은 체면 차리는 소리를 해댔다. 엉덩이가 조금 욱씬거리는 게 그토록 전투에 불리 하단 말인가. 조금 불리할 지도 모르지만‥. 파세닌의 중얼거림을 막 도착한 시즈는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몸이 정상적이었을 때는 과연 어떤 핑계를 대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가 위급했음으로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마침 트롤들은 제법 파세닌이 장단을 맞춰주자 좀더 스릴있는 게임을 즐기려고 장난의 속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당 황한 파세닌이 앞으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가까스로 피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손에 쥐고 있던 검이 지팡이 역할을 하면서 트롤의 발을 쿡 찍어버리고 말았다. "크르르르‥." 트롤은 지금까지의 즐거운 음성(?) 대신에 으르렁거렸다. 무릎까지 늘어난 팔 근육이 힘줄이 돋으며 파세닌의 몸통 만한 나무몽둥이가 위로 번쩍 들렸다. 3m 가까이에서 떨어져내리는 몽둥이를 맞으면 파세닌은 스치기만 해도 골로 갈게 분명했다. "으흐흐흐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파세닌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 때 천둥소리가 몸 전체를 때렸고 그는 눈을 꼭 감았 다. 콰르릉! '정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구나! 다른 사람들이랑 떨어져서 트롤에게 잡아먹히다니‥.' 뚝! 뚝! 뚝! '뭐지? 이 액체는‥.' 뭔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파세닌은 용기를 가지고 눈을 부들거리며 떴다. "쿠륵! 캬아아아악!" 그 순간, 파세닌의 눈동자에는 두 마리의 트롤이 종이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서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이 들어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중심에는 그가 극도로 싫어하던 한 인물이 고요히 서있었다. 파세닌의 얼굴에 떨어졌던 액체 는 트롤의 혈액이었다. 그래서인지 묻은 부위가 따끔거렸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표정에서 시즈가 이유를 눈치채 고 품에서 손수건을 건넸다. "고맙소." 파세닌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목숨을 구해주었으니까. 그의 감사에 시즈는 기쁜 듯 은은하게 미소 를 지었다. 아주 잠시였다. 파세닌이 시즈의 미소를 직면(直面)한 것은‥. 그러나 그는 자신이 꽤 오랜 시간 넋을 잃 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은발의 청년이 가진 미소는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파세닌은 뇌리에 파고든 미소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흠흠! 이제 막 본래 실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참이었지만." 끝까지 지지 않으려는 그의 외침에 시즈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돌아온 둘을 사람들은 반겼지만 음식은 반기지 않았다. 결국 시즈와 파세닌은 사이좋게 건포를 씹어야 했다. "내일 점심이면 펴온에 도착할 텐데 뭔가 준비를 안 해도 될까요?" "무슨 준비?" 보를레스의 말에 젠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보를레스가 다시 말했다. "킬유시 공작께서 말씀하시길 매복을 하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준비할 수가 없지 않은가. 연회에 무기를 소장하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근위기사단 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면 돼. 시즈와, 나, 그리고 넬피엘의 마법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니까." "마법이라고요? 남작님께서도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보를레스만 입을 쩍 벌린 게 아니었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아리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파마리나도 고개를 돌리고 의아해했다. 그럴 것이 그녀도 젠티아에게서 마력으로써의 마나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젠티아는 기분이 상했는지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시하지 말라고. 나도 전설의 음유술사 중 한 사람이야." "무시해도 좋아." 뒤의 말은 넬피엘의 발언이었다. 젠티아는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의 표정을 지었지만 넬피엘의 다음 말을 듣 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마법이라고 해봤자, 환영 마법 정도잖나. 물리력을 가진 마법은 대지의 마법이 고작이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보를레스는 풀이 죽은 젠티아를 한 번 보고 떨떠름한 어조로 넬피엘에게 물었다. 넬피엘은 레스난과 파마리나를 가 리켰다. "젠티아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가 둘이나 있다. 인어와 마녀라면 충분하지. 게다가 젠티아라면 검이 아니라고 해도 위협적인 기사다." "나는 어떻게 할까요?" "보를레스라고 했나?" 장신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넬피엘은 그가 등에 지고 있는 갑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법이 걸려있군. 꽤 뛰어난 자가 만들었어. 자연스럽게 마나가 흐르다니‥." 넬피엘은 보를레스의 활약상이 화제였던 저녁 식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즉, 한 번 보고 그의 갑옷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과연 대마법사 마나이츠도 인정하는 마법사라고 보를레스가 생각할 때 넬피엘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갑옷을 입고 정문을 열어라." "저는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물어본 사람은 파세닌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않던 넬피엘은 반짝거리며 재 촉하는 파세닌의 눈빛을 견디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 "죽지만 마라." "에?" 사실 넬피엘에게 파세닌은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어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방금 전, 그가 흠모하 는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열성적으로 목숨을 구했으니 쉽게 죽일 수는 없어서 그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아리에?" "네?" "그대는 파세닌을 보호해." 아리에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검의 날을 손질하는데 열중했다. 토루반이 있었다면 직접 해주었을 테지만 아스틴으로 떠나고 없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해야 했다. 다들 넬피엘의 결정에 만족할 때 불복하는 이가 있었으니 파세닌 한 사람이었다. 넬피엘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 한 파세닌은 이를 갈며 물었다. "왜 저에게만 그런 지시를 내리는 겁니까?" 넬피엘은 달라붙어 따지는 그가 귀찮았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리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을래?" "아뇨." 그 날밤, 파세닌은 서럽게 울었다. 42악장 10화 예정대로 다음날 도착한 펴온은 내란(內亂)이 끝난 뒤로 벌써 활기를 띄고 있었다. 상인들도 가게의 문을 열기 시작 했고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에서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복구하느라 분주했다. "우선 저희 저택으로 가시죠." 펴온에 대해서 가장 익숙한 파세닌이 안내한 곳은 시즈에게는 낯익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그 때는 비밀통로로 몰래 들어갔었는데 이번에는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도련니이임!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주인님께서, 주인님게서 실종 되셨습니다." "도첼 집사. 난 어제 아침까지 아버지와 지겹도록 얼굴을 보다 왔어. 그것보다 중요한 손님들이 오셨으니까 방으로 안내를 해드리도록." 하인들은, 특히 집사는 파세닌의 말에 갈피를 못 잡는 듯 했다. '네, 네?'하면서 되풀이 묻는 걸 보니까 역시 집사는 젊고 냉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시즈의 머리 속을 감돌았다. 시선이 은근히 넬피엘에게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러고 보니 일행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 것 같았다. "이 분은 젠티아 드로안. 글로디프리아의 성주이시자 '값싼 남작'으로 유명한 기사시지. 그리고 저기 은발에 얼어죽 은 동태눈을 한 친구는 시즈 세이서스라고 예전에 '마땅찮은 시즈'라고 불렸던 사람이야." 공작가의 집사라면 절대로 모자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왠만한 학자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했다. 그들의 머 리는 귀족들의 인명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첼 집사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재는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을만큼 당혹스러웠다. 공작은 실종되었고 오랫동안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공작의 아들이 데려온 사 람은 대륙 삼대 기사로 유명한 젠티아 드로안과 역시 그에 비견되는 젊은 학자 시즈 세이서스라니‥. '마땅찮은 시 즈'라면 엘시크에서 세이서스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들었지만 파세닌과 젠티아이라는 인물들 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외모로만 봐도 범상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파세닌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집사는 자신의 생각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련님은 뛰어난 분이셨어. 값싼 남작과 마땅찮은 시즈라니‥. 이래서 주인님께서도 내버려두셨던 거야. 다 알고 계셨던 거야.' "어,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차는 어디에 두면 되겠습니까?" "그냥 거기에 두시면 시종들을 시켜 마굿간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도첼은 마부라고 생각했던 이조차 엄청난 거구이자 이제는 놀라기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로바메트 공작 저택의 사람들은 바빠졌다. 시장에서 저녁 식사에 쓸 고기와 야채를 사고 팔뚝을 걷어붙 이고 집안을 깨끗하게 광냈다. 노력에 보답을 하듯 귀한 손님들은 저녁 식사 때 방에서 나와서 반짝이는 바닥. 몇 시간 전까지는 칙칙하게만 보이 던 샹들리에의 찬란한 반사광에 맛깔스런 빛깔의 거위구이. 배가 고팠던 던지 사람들은 비만이라고도 볼 수 있는 거위가 냄새를 풍긴지 5분도 못되어서 뼈만 남겨버렸다. 그와 같은 성과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젠티아가 쩝쩝대며 입을 열었다. "연회는 적어도 내일 저녁이니까, 오늘과 내일은 가볍게 즐기자고." "아니, 젠티아. 내일이면 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텐데 가볍게 즐기자고요?" "그럼 다른 방법 있어?" 보를레스는 으르렁대는 젠티아의 시선을 가볍게 받으며 헤죽 웃었다. "당연히‥ 찐하게 즐겨야죠." 그들이 찐하게 논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아리에‥ 나갈래요?" 시즈의 데이트 신청에 아리에보다도 열정적인 표정을 지은 사람은 파마리나와 파세닌이었다. 두 사람은 표정은 정 말이지 대조되었는데 파마리나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고 파세닌은 완전히 일그러져서 야수를 연상케 하는 얼 굴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쓸 새도 없이 얼굴이 붉어져버린 아리에는 고개를 가까스로 끄덕였다. "이런‥ 갑자기 데린이 보고 싶네‥." "남작님께서 먼저 즐기자고 하셨잖아요?" "‥그럼 다른 방법 있어?" 이번에도 날아오는 대답은 같았고 보를레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포크를 젠티아에게 겨누고 말했 다. "상대나 해주시죠." "흐흐‥." 젠티아는 나이프를 흔들며 답했다. "후회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여 일행은 크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밖으로 나가는 부류와 저택에 있는 부류. 시즈와 아리에는 즐거운 데 이트. 파마리나는 시즈들의 연애 진도(?)를 훔쳐보기 위해, 파세닌은 방해하기 위해 검은 로브를 둘러쓰고 그들의 뒤를 잠행(潛行)하며 따랐다. 젠티아와 보를레스는 포크‥가 아니라 검을 들고 대련을 하기 위해 저택의 뒤뜰로 향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스난은 앵두 같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눈을 말똥거리고 '뭘 할까∼?'하고 생각에 잠겼 다. 그리고 집사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커다란 욕조에 물 좀 받아주시겠어요?" "갑옷을 입는 게 어때?" "그럴려고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보를레스가 말끝을 흐리자 젠티아는 의문을 품은 표정을 지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보를레스는 갑옷을 가리켰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마 이들이 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다들 배꼽을 잡았을 것이다. 적의 갑옷을 정성스레 입혀주는 손길. 낑 낑대며 갑옷을 입은 보를레스의 머리통을 젠티아는 강하게 두들겼다. "보를레스, 기사의 검술을 익혔다는 사람이 이토록 가벼운 갑옷은 혼자서 입지도 못하다니‥." 확실히 보를레스의 갑옷은 전신에 가까운 부위를 감싸지만 그럼에도 다른 전신갑옷에 비하여 입기가 편한 종류였 다. 미스릴도 무게를 덜어주었지만 두께도 얇았고 드워프들은 작은 부분에도 섬세해서 팔목이나 어깨 등의 관절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보를레스는 꿀밤에도 엄살을 떨었다. "윽! 젠티아, 치사하게 시작도 안 했는데 공격입니까?" "시작을 했으면 막았다는 거야?" "물론이지요."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를 뽑는 것과 동시에 보를레스도 성음검(聲音劍)으로 자세를 잡았다. "갑니다!" "얼마든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성음검과 제뷔키어. 날카롭게 허공을 찢어발기는 검과는 다르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왜 히죽히죽 웃어대는 거야? 보를레스, 방금 전의 꿀밤맞고 실성한 거냐?" "남작님의 표정은 뭐 다른 줄 아십니까?" 42악장 12화 넬피엘이 이유없이 시즈에게 동질감을 보이듯이 젠티아 또한 검사로서의 동질감을 보를레스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불쑥 성장해버린 그의 실력은 젠티아도 흥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 다. 하지만 칭찬하기에는 입이 간지러운 지라 젠티아는 검을 돌려서 보를레스의 검을 쳐내고 말했다. "갑옷이 좋긴 좋군." 보를레스는 대답하기는커녕 숨도 돌릴 시간도 없었다. 용병왕의 시미터까지 막아낸 그의 속도와 도둑발도 값싼 남 작의 검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마치 멜첼에게 처음 훈련받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9 - 2 - 4 - 1 로 간다!' 보를레스는 리듬을 정했다. 상대의 타이밍을 깨뜨리고 흐름을 돌리기 위하여 처음에는 빠르게 아홉 번을 휘두른다. 그 후에는 불규칙한 공격으로 방어의 맥을 끊어놓을 계획이었다. "아다다다다다다!" 한 번에 아홉 번을 휘두르는 것은 보를레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찰나같은 순간에 근육의 힘을 약즙 짜내듯이 짜내야 했다. 카가가가각! 그러나 한 호흡이 넘어갔을 때 그는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공격으로만 봐도 젠티아의 검은 보를 레스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할 정도였다. 헐떡거리는 보를레스와는 달리 젠티아는 여유롭게도 빙그 레 웃으며 말했다. "그 갑옷은 뛰어나기는 하지만 역시 근육의 힘을 증폭시키기 때문에 피로는 더욱 빨리 오는 모양이야. 내가 보를레 스, 자네였다면 그렇게 힘을 빼기보다는 방어를 하면서 기회를 노렸을 거야. 뭐 지금은 소용없지만‥." 젠티아의 말처럼 보를레스는 속도와 힘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다만 방법을 잘못 선택했을 뿐이었다. 사실 젠티아의 입장에서도 보를레스만큼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젠티아는 보를레스가 용병왕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 을 보였음을 알았기에 당연하게 생각했고 보를레스는 위와 같은 실력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용병왕과는 달리 젠티 아가 틈을 보이지 않으니까 당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용병왕과의 결투에서 용병왕이 처음 부터 지금의 젠티아처럼 신중했더라면 보를레스는 결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임을‥. 결국은 마음가짐의 차이인 것이다. "진 사람이 마을에 가서 맥주 사오기로 하지." "가, 갑자기 그런 게 어, 어딨습니까?" "이기면 되는 게 아닌가? 마법의 갑옷까지 입었으면서!" 저택에서 시내까지는 30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맥주라면‥ 저택 안에도 있지 않은가? 그런대도 사오라는 것은 간단한 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양어깨에 한 통씩은 져야 함이 분명할 것이다. "아까 전에 집사한테 물어보니 맥주가 떨어진 모양이더라고. 적어도 세 통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추측이 끝나고 확신이 서자 보를레스의 검이 빨라졌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검을 폭우처럼 쏟아 붓자 젠 티아도 기세에 밀려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를 위협하는 보를레스의 검에서는 희미한 빛깔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오‥. 이제는 검에서까지 기운이 뻗여 나온단 말인가?" "크아아아악!" 기합이 아니라 비명에 가까운 보를레스의 고함소리. 젠티아는 검을 막는 타이밍이 자꾸 어긋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확대됐다. '그럴 리가‥ 난 1초에 열 번의 검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런데 막는 타이밍이 어긋나다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보를레스가 그렇게 검을 내리쳐대면서도 규칙적인 보폭으로 한 걸음씩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약간의 실수라도 한다면 당장 머리가 쪼개져버릴 텐데. 젠티아는 용기가 바탕이 되었는지 아니면 무모함인지, 알 수 없는 보를레스의 검술에 혀를 찼다. "그야말로 '담력 검술'이로구나." 젠티아 또한 '도둑발'을 익히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숙달되어 있었고 보를레스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 럽고 빨랐다. 하지만 보를레스처럼 자기보다 실력이 위인 상대의 검에 다가서지는 않았다. 아니, 없었다. 그의 검술 은 위험을 감수하는 힘의 검보다는 뛰어난 기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보를레스의 담력검에 견딜 수 없게 되자 젠티아는 천천히 그만의 기교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음!" 우선 보를레스와 동시에 검을 내리쳤다. 속도가 약간 느린 성음검은 제뷔키어의 검등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막 아래 에서 위로 방향이 바꾼 보를레스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충격이었다. 부르르‥. 손목에서 어깨까지 타고 오르는 진동. 제뷔키어는 간신히 바닥에 떨궈지는 신세를 면했지만 분위기는 금 새 반전됐다. 현란한 검술에 보를레스는 왔던 걸음 다시 정신 없이 물러섰고 젠티아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툭툭 스치는 듯 가볍게 부딪히는 성음검에 제뷔키어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도르르르 떨어댔다. "어떻게 된 건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모양인데?" "크윽!" '실수였어. 걸음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제뷔키어의 속도가 너무 뛰어나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자 젠티아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보를레스의 걸음으로 타이밍을 대신한 것이다. "이제 슬슬 끝내기로 하지. 너무 힘 빼면 내일 힘들어." 게다가 그도 슬슬 숨이 차고 있었다. "어디 받아봐. 정신을 검에 집중하면 가능할 거야." 젠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성음검이 우웅하고 소리를 내며 은색의 섬광을 뿜어냈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지 는 흔적. 보를레스는 그것을 어딘가에서 경험한 일이 있었다. '이건가?' 예전 용병왕이 흉내냈던 젠티아의 기술. 보를레스의 검에 서려있는 흐미한 광채와 비슷한 종류의 에너지라고 추측 되는 기운. 그러나 용병왕의 것보다 가늘었고 보를레스의 것보다 선명했다. 그렇다. 마치 성음검은 거미처럼 은색의 실을 뽑아내고 있었다. "하아아아!" 보를레스도 뒤질 수 없다는 듯 기합성을 발(發)하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제뷔키어에서도 강렬한 빛살이 쏟아졌고 때맞춰 보를레스는 혼신의 힘으로 내리쳤다. 콰릉! 콰드드드드득! 두 기운이 충돌할 때 터진 소리와 빛이 얼마나 크고 강렬했는지 멀리 마을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도 마을에 서는 젠티아들이 있는 곳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폭뢰! 폭뢰가 떨어졌어요!" 어쨌든 두 사람의 화려한 승부의 결과는 보를레스가 제뷔키어를 떨구는 것으로 끝났다. 제뷔키어가 그의 손을 떠나 땅에 푹하니 박혀있는 것에 비해 성음검이 허공에 남겨둔 은색의 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투구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벗으며 보를레스는 대자로 누웠다. "대체 그건 뭡니까?" "비밀이야. 내 밑천을 거덜낼 수야 없지. 하지만 대단해. 날 이정도까지 밀어붙이다니‥." "마법의 갑옷까지 입었잖습니까. 다음에 또 부탁합니다." "아아‥ 사양하겠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거든." 값싼 남작, 젠티아 드로안. 광풍의 검사, 보를레스 로만히데우그. 세일피어론아드 사상 최고의 검사로 대표되는 두 사람이 대결을 펼쳤다는 사실은 어떤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 다. 그러나 보를레스가 젠티아에게 시비(?)를 걸며 자주 대결을 신청했다고 알려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값싼 남작이 광풍의 검사보다 조금 우위의 실력을 가지지 않았나 추측하곤 한다. 42악장 12화 젠티아들이 녹초가 되어있을 무렵, 아리에는 시즈와의 데이트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따라서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조금 쉬면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사람들이 열심히 복구에 열을 올리는 모습 을 지켜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보통 때와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그래도 아리에는 좋았다. 이 순간만큼 시즈가 자신 만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 팔을 꼭 잡고 있자 시즈는 약간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곤란해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밝게 웃으며 걷 고 있는 아리에를 거리를 지나던 남자들과 상인들은 힐끔힐끔 쳐다봤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소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이다. "시즈, 나 저거 먹고 싶은데‥." 그녀는 뭔가를 발견하고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을 반짝이면서 찻집 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차가운 과일 쥬스'라고 크게 붙어 있었는데 6월이 되었으니 슬슬 팔리기 시작할 시기였다. 옆으로는 밖에 마련된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삼 삼오오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도 아리에는 그 중에 한 꼬마 여자아이가 마시고 있는 과일 쥬스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가니 귀엽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달려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 빈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웨이트리스의 안내를 거절하고 구석 자리로 들 어가서 앉은 그들은 사막의 나라 사람들처럼 머리를 두건으로 둘둘 말아 눈만 빼놓고는 내놓은 게 없었다. 아리에 가 그들을 보고 쿡쿡하고 웃었다. "후훗‥. 시즈, 저 사람들은 음식을 어떻게 먹을까?" "글쎄요. 아무래도 두건을 벗고 먹지 않을까요?" "‥‥." 순간적으로 아리에는 시즈의 대답에 생각했다. '정말이지 재미없는 남자야.' 그러나 시즈는 아리에의 질문에 신경쓸 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한 장의 메뉴판. 아리에는 실베니아 의 문자를 몰랐기 때문에 그가 주문을 하기로 했는데‥. '뭐, 뭐 이렇게 이상한 이름들이 많은 거야?' 음식이나 음료의 이름은 천차만별, 가지수도 수없이 많고 가게에 따라서 새로 개발한 종류도 있었다. 그러니 기껏해 야 놀아본 경험이라고는 낭아플에서 단 한 번이 전부인 그에게 메뉴판은 해독하기 어려운 고대문자의 석판 같았다. "시즈‥ 뭐해? 주문하지 않고!?" 삐질‥ 삐질‥. "저, 저기 아리에?" "응!? 시즈, 더워? 왠 식은땀이지!?" 눈치가 둔한 쪽은 아리에도 마찬가지. 주문을 기다리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시즈의 곤란함을 눈치채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손님, 주문하시기 힘드시면 제가 골라드릴까요?" "그, 그래주시겠습니까? 도대체 과일 쥬스 메뉴가 뭔가요?" "여기 있습니다. '아키시델몬'은 오렌지즙이고요, '라키하이나'는 사과, '도르크조니'는 포도, 그 아래로는 코코넛, 파 인애플, 딸기, 바나나가 있습니다." 시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파인애플이랑 사과로 주세요. "다른 것은 뭐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과자도 주세요." 아리에는 어린아이처럼 생글거리며 주문했다. 웨이트리스도 같이 생글거렸다. "계란과자가 있고요, 초콜렛이 첨가된 과자가 있습니다." "네? 초콜렛이 있어요? 초콜렛으로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어쩐지 어울리는 두 소녀. 웨이트리스가 주문 받은 음료와 과자를 가져다놓고 사라졌고 아리에는 우선 파인애플 쥬 스를 한모금 들이켰다. "맛있다! 과자도 맛있어!" 시즈는 대답하는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은 힐끔힐끔 주머니 속의 돈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있었 다. 과자는 일, 이 백년 전만 해도 부유층의 산물이었다. 원료가 되는 설탕이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 기저기에서 사탕수수를 키우고 도시에는 제과공장도 많이 생겨났고 값도 이제는 서민들이 즐길 수 있을만큼 인하되 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를 위협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초콜렛. 본래는 쓴맛의 음료지만 사람들은 바닐라를 첨가했다. 요즘에 와 서는 설탕을 적당량 넣었는데 그 맛에 실베니아의 왕족들은 완전히 매료되었던 적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제조자들 이외에는 제조 과정을 알지 못하도록 함구령이 붙어 있는 초콜렛. 오직 실베니아에서만, 국가 예산을 위하여 제조되고 있었다. 현재 방탕한 실베니아의 국정낭비를 충당할 수 있는 것 도 모두 초콜렛이 해외의 왕족들에게 엄청난 수요로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실베니아의 여인들이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싸간다는 초콜렛의 값이 적을 리 없었다. '초콜렛을 찻집에서 팔다니, 역시 수도인가?' 감탄을 해보려 했지만 한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아리에의 모습이 시즈의 기분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탄의 저택 앞에 엄청난 금액의 금화를 묻어두었었지‥.' 순간 시즈의 뇌리에 2년 전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호수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저택, 저녁때면 자신이 부르던 노래와 과자를 먹기 위해 달려오던 아이들. 집에 돌아오면 해맑게 그를 맞이하던 레소니, 가끔씩 헛기침을 하며 책을 들고 찾아오던 헤트라임크. '돌아‥갈까?' 그와 비슷한 향수를 아리에 또한 느끼고 있었다. 그녀 또한 초콜렛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금전 감각이 전무하다시피 한 시즈보다는 용병단 세이서스의 재무당담이었던 그녀가 부담감이 더 컸다. 봄의 혈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부족할 것 없는 랑쉐르 백작가의 영애였다. 꽤나 세력있는 가문이었기에 주변 영지 사이에서는 왕족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랑쉐르 백작가. 그런 가문의 권세도 어린 아리에 랑쉐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제가 없었던 그녀는 외로움에 언제나 무방비 상태였고 조금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보기 위 해 많은 가정교사를 불렀다. 여자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은 쌓여갔지만 그녀가 정작 바랬던 것은 얻지 못했다. 언제나 우울함에 잠겨 아리에는 무표정해져갔고 아버지인 블테인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가끔씩 왕족들의 음료인 초콜렛을 사다주었다. '아버지‥. 천국에 가셨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서민의 눈으로 바라본 귀족들은 그리 착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다른 서민들 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넓은 들판 푸른 잔디가 끝없이 깔려있는 자연의 카페트 위에 예술품같이 세워진 성곽. 위로는 랑쉐르가의 깃발이 휘날리고 아래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연기가 솟아나는‥ 그리운 곳. '돌아‥ 갈까?' 시즈와 아리에. 아픈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으이구! 대체 언제까지 저럴 거지?" 구석에서 한 여인이 쥬스의 빨대를 쭈욱 빨다가 짜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시즈들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얼굴을 둘둘 싸맸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은 구석에 들어와서 두건을 벗자 그 정체를 환히 드러냈는데 파마리나와 파 세닌이었다. 아리에의 미소에 꿈에 취한 듯 파세닌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넋이 나간 상태였고 그나마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 는 파마리나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 시즈들의 데이트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을 줄 알고 따라왔는데 아주아주 평범하다니!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엄청나게 초초해하 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서 도와주는 수밖에.' 물고 있던 빨대를 손가락에 쥔 파마리나는 마법봉을 휘두르듯 가볍게 원을 그렸다. "꺅! 시즈!" 들려오는 아리에의 상쾌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마법으로 시즈가 마시던 쥬스를 엎어 버린 것이다. 회상에 빠져있느라 멍하게 있었던 시즈는 피하지 못하고 옷을 사과즙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아리에가 다가가서 더러워진 옷을 닦아주면서‥ 눈을 마주치고‥ 그대로‥. 뒤는 상상 에 맡긴다. 마녀의 집에 있는 책이라고 해봤자 뭐겠는가? 마법서가 아니라면 삼류 로망스가 전부였다. 파마리나는 어릴 때부터 쭉― 그런 종류를 봐온 턱에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소금물에 절여진 것처럼 일그러졌다. 마침 테이블을 지나가던 웨이트리스가 자신이 건드린 것인줄로 착각하고 당황하면서 시즈에게로 다가간 것이다. 그 모습에 파마리나는 당황했다. "안돼! 넌 아니야! 네가 아니라고!" 연신 사과를 하며 아리에의 역할을 대신해버리는 웨이트리스. 끝까지 대신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방해임은 확실했 다. 파마리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나 정작 방해를 받은 아리에는 물끄러미 시즈의 곤혹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시즈의 옷을 새로 사자." "네?" 이내 시즈의 어깨가 절망한 사람처럼 축 처졌다. 여자들의 쇼핑이 얼마나 지루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격 급한 남자들에게 있어서 고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방긋 웃으며 팔짱을 끼는 아리에의 얼굴이 너무나도 귀여운 것을‥.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고 두 연인이 가게 밖으로 나간 후, 파마리나들도 일어섰다. 아직도 파세닌은 아리에가 보여준 미소에 넋 이 빠져 헤롱거리고 있었다. 파마리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씨익 웃으며 남은 쥬스에 마법의 가루를 탔다. "내 계획을 방해하다니 어디 혼 좀 나라지." 파마리나 일행이 나가고 웨이트리스는 거의 마시지 않은 쥬스를 바라보며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거의 마시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마시지 않았잖아? 참나, 음식 귀한 줄 모르는 손님이네‥." 그리고 손을 뻗어 쥬스잔을 잡고‥. 파마리나는 뒤에서 들려온 비명과 아우성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후‥ 기분이 좀 풀린다." 43악장 1화 환기(環期) 4762년 6월 3일. 실베니아의 수도, 펴온의 궁전은 밤이 늦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서로에 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고상한 걸음걸이로 걸었으며 남자들은 턱을 위로 쳐들고 자신있게 서있었다. "시작되었나?" 왕궁의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 서쪽의 성곽 구석에 석상처럼 앉아있던 검은 그림자가 걸걸한 금속성으로 말했다. "시작되었습니다. 실베니아 최고의 축제가‥." "이번에는 바보같이 나서지 않는 게 좋아, 노르벨." "가끔은 단독범행도 있어야 재미가 있는 겁니다. 이해 좀 해주시죠, 바스티너." 바스티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노르벨은 주절거리는 입을 조절하지 못하고 법의를 입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요? 로진스. 음유시인들이 왔나요?" "그래‥. 대기(大氣)가 통째로 움직이고 있어. 느껴지지 않나? 그 뿐만이 아니야. 저 불꽃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 들의 제왕을 반기듯이 말이야. 흐흐흐흐‥흐하하하핫!" 노르벨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는 가끔 마법사길드를 염탐하는 어쌔신 친구들에게 광적인 마법사를 조심하라는 충고 를 들은 바가 있음으로 얼른 로진스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광적인 마법사'는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빡―! "이제 좀 조용하군." "그래도 괜찮을까요? 노리스," "시끄러운 것보다 낫잖아. 시작할 때되면 깨우라고." "내가 말입니까?" "그럼 누가할까?" 이를 내보이며 노리스가 위협을 하자 노르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럴 일은 보통 가장 작은 로길드의 차지였 지만 그는 현재 없었다. 바크호도 소년 주군을 따라서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에휴‥. 로길드는 무슨 일로 엘시크로 돌아간 겁니까? 츠바틴에게 물어봤죠?" "글쎄‥. 그의 조부(祖父)가 위독하다고 하더군." "로길드의 할아버지라면 크레오드 페노스놀멘 자작이지요? 실질적으로 '역사의 고리'를 이끌던 사람인데‥ 안타깝 군요." "글쎄‥." "그 놈의 글쎄 좀 그만해요." "그러지." "정말이지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뿐이라니까. 아아‥ 로길드 어서 돌아와서 너의 귀여운 미소를 내게 보여다오." 자신은 정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노르벨의 한탄이었다. 그는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기 싫던지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 사내는 정말이지 컸다. 노리스보다도 한 뼘 이상은 큰 것 같았다. 이 정도의 거 구라면 백곰과 힘을 겨뤄 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노르벨은 생각했다. "2년 만의 제외가 되겠군요, 당신과는‥. 설마하니 레이모하 교단에서 당신을 보낼 줄이야. 정말 인연이 깊어요." 사내는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방해를 받지 얼굴을 찌푸렸다. "좀 닥쳐주겠나? 명상이 방해가 되는 군." "그래십시오. 명상이라‥ 레이모하의 성투사들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상대의 명복을 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보군 요." "정말이지‥ 시끄럽군." 화가 난 그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노르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일련의 동작은 빠르지 않았지만 워낙 거 구이기 때문인지 노르벨은 피하지 못하고 잡히고 말았다. 여인들이 애완용 고양이를 드는 것처럼 사내는 가볍게 힘 을 주었고 노르벨의 발은 고양이 꼬리처럼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켁켁! 그만 놔줘요!" "귀찮게 말 걸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래요. 케엑! 약속할 테니까‥ 노리스, 나 좀 살려줘‥. "사제, 그만 하시오. 당신은 교황의 명령으로 우리를 돕기 위해 온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지 않소?" "흥!" 사제라고 불린 자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노르벨은 구석으로 내동댕이쳐진 후에도 한동안 호흡곤란으로 거 친 기침을 토했다. 이내 기침이 잦아들자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투덜거렸다. "다들 난폭해." "너만 조용히 있으면 되잖나." "알았더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에즈민처럼 시종 행세를 하는 건데‥." 한숨을 내쉬고 노르벨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뭔가 깔리는 게 있었다. 잘 보니 노리스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로 진스. 비킬까 고민하던 그는 코웃음을 치고 다리를 쭉 폈다. "아‥ 편하다‥." "윽! 불편해!" "좀 참아요, 파마리나. 그렇게 치마를 걷고 걸으면 어떻해요?" "에구‥. 시어머니가 따로 없네. 그렇지만 안그러면 넘어질 것 같단 말야." 파마리나는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아무리 궁전에 들어간다지만, 아무리 최고의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들을 먹기 위해 서라지만 정말이지 허리 꽉 조이는 코르셋은 끔찍했다. 이래가지고 뱃 속에 잘 들어갈지 고민이었다. '조금 먹는 게 왜 숙녀의 미덕인가 했더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살이라도 빼둘 걸. 난 역시 펑퍼짐한 옷이 좋다구. 때깔도 검은 게 좋아. 이건 너무 화려하잖아.' 그녀와는 달리 아리에는 털을 다듬은 백조처럼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후에 연회장에서 일어날 전투를 대비하 여 너플거리지 않고 깔끔한 종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깨끗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연회가 열리는 홀의 문이 열리자 귀족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에 달린 청광석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실베니아 궁 전의 사치도를 대신 평가해주고 있었다. 긴 테이블에는 촛불이 켜져서 이미 준비된 음식들은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 였다. 당장 뛰어가서 앉으려는 파마리나를 만류하고 돌아온 아리에가 무심결 몸을 떨었다. 주위에 삼엄하게 지키고 선 근위병들이 보였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지도‥.' 그 때 누군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옆을 돌아보니 시즈가 불빛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은근 히 쑥스러움이 많은 청년. 아리에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43악장 2화 "국왕 폐하께서 연회의 시작을 알리시겠습니다." "허허‥ 마음껏 즐기시오."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간단명료하게 연회를 시작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 처진 어깨를 추스르며 그는 뒤 에 시립하고 있는 한 기사를 연신 힐끔거렸다. 마치 기사의 눈치를 보듯이. "저 사람은‥." 젠티아는 포도주의 첫잔을 비우다말고 예리하게 기사를 노려봤다. 근위병들이 들고 있는 것들보다도 훨씬 길어 사 람의 키를 훌쩍 넘겨버리는 거대한 창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기사. 그에 대해서는 젠티아 뿐이 아니라 시즈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흔들리며 좌중에 깔렸고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펠리언 라카스‥." 그러나 시종장의 손뼉과 함께 시작된 음악소리는 좌중의 긴장을 금새 가려버렸다. 연회답게 시끌벅적해지는 홀 안 으로 사람들이 한 둘 씩 들어서고 남녀가 손을 잡은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즈, 아리에와 한 곡 추고 오지 그러나?" "그, 그러나?" "걱장 말아. 지금 공격한다면 왕실의 위엄은 이미 사라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마도 연회의 열기가 잦아들 무렵에 시작될 거야. 그러니까 즐겨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젠티아는 또 한 잔 걸쳤다. 넬피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키득거리며 변명했다. "오, 넬피엘‥. 그런 눈은 그만둬. 그렇게 귀여운 표정을 짓다니, 이 술은 포도주라고. 포도주 한 잔이면 체온 상승! 두 잔이면 흥분도 상승, 감각도 좋아지고, 통증 완화되고 싸울 때 술은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자네도 동방에 여행 을 다녀왔으니 알고 있지 않나? 동방에는 술 마시고 싸운다는 투술, 취권(醉卷)도 있어. 그리고 말야‥" 넬피엘은 분명히 젠티아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저렇게나 말이 많으니‥. 술 깨는 데는 안주가 필수라는 말을 마나이 츠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는 칠면조 다리를 쭉 찢어서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젠티아의 입에 쑤셔 넣었다. "시즈‥. 왜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는 거야?" "그, 그게‥." "바보같이‥ 말해봐." "저, 저기‥ 이번에 실베니아를 떠나게 되면 나와 함께 세이탄으로 가지 않겠어요?" "세이탄?" "나의 고향입니다. 아직도 저택이 남아있을 거 에요. 보, 보여줄게요. 아침이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와, 새가 지 저귀는 숲‥. 내가 노래를 부르던 바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 망설인 건가?' 의아했다. 그러나 지나치도록 붉은 청년의 얼굴. 시선을 피하면서도 대답을 은근히, 아니 엄청나게 바라고 있는 모 습에 아리에는 깨달았다. 청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동시에 그녀의 얼굴도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그 때 곡이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가 경쾌했다면 이제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리에는 시즈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으음‥. 나도 보고 싶어. 아름다운 저택의 창으로 보이는 너와, 아침이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가를 걷는 네 모 습, 그리고 바위 위에 앉아서 내게 노래를 불러줄 너가‥." 시즈의 눈동자가 서서히 그녀의 것과 마주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 아리에는 발끝을 들어 순식간에 시즈에 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인 후 자리로 걸어 들어왔다.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던 파마리나가 닭다리를 뜯다말고 말했다. "아리에, 그 이상 달아오르면 타버릴 것 같아. 가서 좀 씻고 오지 그래?" 그녀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걸신들린 듯이 먹어대고 있는 파마리나의 뭐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걸 까? 한 남자가 펜과 종이를 내밀며 여걸신(女乞神)에게 말했다. "당신은 변장한 어릿광대로군요.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묘기에요. 여기에 싸인 한 장 부탁합니 다." 시간이 흐르고 연회의 흥분이 조금씩 사그라들 때 시종장이 외쳤다. "이제‥ 국왕 폐하께서 표창을 하시겠습니다." "오늘은 참 예외적인 것 같소. 보통 때라면 표창이나 치하를 먼저 하고 연회를 시작했을 텐데‥. 이해해주길 바라 오. 그 어느 때보다 국가적 위기를 물리쳐준 영웅들에게 확실한 감사를 하기 위해서니까. 우선 펠리언 라카스, 앞으 로 나오게." "예! 폐하." "음‥ 창은 두고 오게나." 국왕의 말에 홀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펠리언은 창을 들고 와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던 것이다. 파이론 3세 는 엄숙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펠리언이 다시 와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그는 무게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 펠리언 라카스. 반란으로부터 이 국가, 이 왕실을 구해준 점을 치하하여 백작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고 근위 기사단장에 임명하니 앞으로는 짐의 곁에서 나라를 지켜주도록." 파격적인 작위 상승에 귀족들은 논란에 휩싸였지만 잠깐이었다. 충분히 펠리언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들도 판단한 것이다. 이윽고 젠티아의 차례가 되었다. 파이론 3세는 젠티아를 부르려다가 말고 그의 옆에 있는 여러 명을 보고 궁금하여 물었다. "아까부터 내가 눈 여겨 보았는데 드로안 남작, 그대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요? 아무래도 범상치가 않구료. 소 개를 해주겠소?" 젠티아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과연 폐하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우선 이쪽의 붉은 머리는 넬피엘 세로스라고 합니다. 마법사 마나이츠 페르베이 안 백작의 마지막 제자이며 그의 스승 스스로 자신보다 낫다고 칭한 천재입니다." "호오‥. 정말인가?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데‥." "저래 보여도 28살입니다." 조금이라도 마법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귀족들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들의 눈이 이채를 발하고 있는 이유는 젠티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붉은 머리의 귀여운 청년이야말로 장차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앞 으로 잘 보여야 하는 상대가 아니겠는가. 파이론 3세는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은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곧 크게 웃고 말했다. "과연‥. 그대, 넬피엘 세로스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대마법사 페르베이안 백작의 제자답게 아주 총명해보이는 구나. 앞으로 정진하여 정말로 스승을 능가하길 바란다. 하하하‥ 곧 실베니아에서 제 2의 페르미안 유스테리아가 탄생하겠구나." 페르미안 유스테리아. 인류 마법 사상 최고의 마법사. 국왕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난 칭찬이었지만 넬피엘은 어 여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렸다. 그러자 펠리언이 고함을 쳤다. "감히! 폐하께서 칭찬을 하셨는데 감사를 안할 망정 기분이 나쁘단 말인가?" "하하하하하하!" 더욱 무례하게도 옆의 젠티아는 크게 웃어댔다. 실성했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는 웃음을 멈추고 파이론 3세에게 말 했다. "하하‥ 폐하, 용서하십시오. 넬피엘은 남자입니다." "뭐라고!?" 파이론 3세을 비롯한 사람들은 넬피엘이 마나이츠를 능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놀란 것 같았다. 심지어 는 호랑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펠리언조차 입을 쩍 벌릴 정도였으니까. "허허허‥ 저 얼굴이 남자라니‥." 헛웃음을 지으며 파이론 3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그렇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군. 이해하네." 펠리언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를 때까지도 귀족들은 웅성거렸다. 그와 더불어 넬피엘의 얼굴도 급속도로 무표 정해져 갔다. "조용히! 폐하의 말씀이 아직 끝나지 않으셨다!" "아아‥ 괜찮아, 펠리언. 근위대장이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사람들을 압박할 필요는 없네. 그래, 젠티아. 그 옆 의 사람도 소개해주게. 그 청년도 보통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은발이라니 정말 특이하지 않은가." "잘 보셨습니다. 이 친구의 은발은 충격을 받아서 머리의 색깔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주 까맸습니다." 누군가는 혀를 찼다. 그 귀족은 연금술사였는데 사람의 머리가 희어질려면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아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반짝거릴 정도로 백색으로 희어졌으니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바로 시즈 세이서스, 엘시크 최고의, 아니 대륙 최고의 학자라고 일컬어졌던 '마땅찮은 시즈.'입니다." "‥‥." 좌중은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중에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파이론 3세가 눈을 껌뻑댔다. "정말인가?" 그의 어조는 지금까지 어떤 때보다도 신중했다. "틀림없습니다. 시즈는 엘시크에서 유명했던 봄의 혈사가 일어나기 전에 글로디프리아를 찾은 일이 있습니다. 아마, 새로운 기사단장님도 안면이 있으실 겁니다." "사실입니다. 저도 안면이 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시즈님." 묻기도 전에 펠리언은 미소를 지으며 시즈에게 인사 건넸다. 시즈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파이론 3세의 시선이 시즈와 넬피엘을 살펴보다가 파세닌에 이르러서 멈췄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자네는 파세닌이 아닌가!? 짐을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로바메트 공작은 무슨 염치로 아들을 연회에 보냈단 말인 가?" "진정하십시오, 폐하. 로바메트 공작께서는 실종되신 것입니다. 만약 그 분께서 없으셨다면 킬유시 공작에 의해 수 도는 순식간에 점령되었을 겁니다." 시즈 일행도 국왕이 갑자기 화를 낼 줄은 몰랐다. 당황한 젠티아가 황급히 말했다. 그러자 파이론 3세는 눈을 가늘 게 뜨더니 냉소하며 젠티아를 가리켰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젠티아 드로안, 그대가 로바메트 공작과 킬유시 공작을 짜고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다는 것을! 여봐라! 저들을 잡아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병들이 창을 꼬나잡고 달려들었다. 젠티아는 그 중 한 명의 창을 빼앗아서 다 른 병사를 막으며 외쳤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근위병들은 모두 저들을 모두 잡지 않고 무엇하느냐!" 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괜히 싸움에 휘말렸다가 목이 날아가는 것이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을 그들은 확실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문이라는 문은 근위병들이 막고 서 있었다. 43악장 3화 화르륵―! "흐아아아악!" "마법사, 마법사를 막아!" "궁사들은 뭘 하느냐!" 넬피엘의 불꽃에 달려들지 못하고 근위기사는 궁사들을 재촉했다. 그러자 2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무차별 로 활을 쏴댔다. "바람이여‥." 하지만 시즈의 바람은 화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에게 한 남자가 껄껄 웃어대며 달려들었다. "하핫!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부웅! 남자의 주먹은 무섭도록 빨랐다. 시즈는 뒤로 피했지만 그의 권에 일어난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겨우 몸을 추스린 시즈가 바라보니 사내는 아리에에게 윙크를 하고 있었다. "안녕! 그러기에 나랑 사귀자고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지." "페스튼‥." 국왕은 슬슬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려고 하다가 펠리언을 바라보았다. 펠리언이 페스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가 바로 페스튼입니다. 저와 함께 킬유시 공작을 암살했습니다. 이번에 저 반도들을 퇴치하는데 성공한다면 그에게도 작위를 주십시오." "그러지. 두 번이나 이 나라를 구해주었는데 뭘 못하겠나?" 일부러 펠리언은 소리를 내서 말하고 있었다. 페스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며 진각이 좀전과는 딴판으로 강해졌 다. 아리에는 근위기사를 맞아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날렵하다고 해도 정식으로 검을 연마한 근위기 사한테는 상대하기에 있어서 한참 부족했다. 파마리나가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아리에에게 소리쳤다. "피해!" 아리에가 드레스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을 구르며 벗어나자 파마리나가 그린 마법의 원에서 불기 둥이 콰륵 쏟아져나왔다. 눈이 없는 불기둥은 진로에 있던 엉뚱한 귀족들까지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그러나 마법사 를 그냥 놔두면 더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근위기사들은 교육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기사도고 뭐고 없이 두 세 명의 기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자 그녀는 당장 앉았던 나무 의자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부쉈다. "자아‥ 나의 종들아. 저들을 물리쳐다오." 그리고 주문을 외우자 나무 조각들이 근위기사들의 검과 부딪혔다. 하지만 나무, 얼마 버디지 못했다. 그녀는 젠티 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젠티아, 아무 거나 좀 던져봐요." "좋아!" 쐐액! "히익!" 쏨살같이 날아온 창에 파마리나는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그토록 난폭하게 던지다니 피하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그 녀가 주먹을 불끈 쥐고 불만을 토하려는 순간 뒤에서 피가 쏟아졌다. 돌아보니 창에 검을 치켜든 기사의 머리에 꽂 혀있었다. 갑자기 젠티아가 고마워졌다. "잉크까지 마련해주다니‥." 보통 피는 마녀들에게 '생명의 잉크'라고 불려졌다. 파마리나는 병사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창대에 주문을 그렸 다. 그리고 나무조각들 때처럼 외치자 창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면서 근위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세 개를 더 올리자 그녀는 다른 데 정신을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 편, 창을 파마리나한테 던진 젠티아는 기척도 없이 다가온 기사가 휘두른 검에 허벅지를 베었다. 깊은 상처는 아 니었지만 상대의 실력에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이를 악 문 그의 입에서 흑색의 갑옷을 입은 상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바스티너‥." "여기가 네 무덤이다! 젠티아 드로안." 바스티너를 주축으로 펠리언의 뒤에 있는 문에서는 역사의 고리들이 튀어나왔다. 노르벨, 노리스, 머리에 혹을 달고 있는 로진스. 동시에 창문이 깨지면서 흰 갑옷을 입은 기사가 뛰어들었다. 바스티너와는 대조적인 색깔로 중무장한 그는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기다리다가 지칠 뻔했지. 받으라고 모두!" 보를레스는 한 보따리의 무기를 공중에 던져버렸다. 알아서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시즈들이 모두 무기를 갖고 근위기사, 그리고 역사의 고리와 대치했다. 그런데 싸움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 찬 보를 레스의 두 눈에 가득히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2m를 가볍게 넘어가는 거구에 터져 버릴 듯한 근육. 그림자 사이 에서 서서히 모습을 들어낸 그를 향해 보를레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헤에‥ 라즈으으!!" "잠깐! 보를레스, 그만 둬요." "왜냐? 왜 막는 거냐? 시즈!" 보를레스는 자신의 목을 겨눈 예도의 주인에게 진의(眞意)를 물었다. "지금 이라면 보를레스는 분명 질 겁니다." "내가 진다고!?"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네. 저 성투사는 시즈가 맡도록 해." 젠티아의 말에 보를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헤라즈에게 갚을 빚이 많은 사람은 바로 시즈였으니까. "헤모 사제님‥." "시즈, 이제는 생명의 무게를 구할 수 있겠나?"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말해보게." 헤라즈의 말투는 꼭 애원하는 듯 간곡했다.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모하께 물어보십시오." 발검의 자세를 취하며 시즈가 입을 다물자 헤라즈도 주먹을 꾹 쥐고 싸울 태세를 했다. 어찌 보면 곰과 여우의 싸 움 같았다. 귀족 군중 사이에서도 시즈를 염려하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헤라즈는 처음 시즈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은은한 미소를 짓는 시즈를 엘프로 착각했었다. 그 때 보여주었던 한 줄기의 검광은 집채만한 케워크를 갈라 버렸다. 헤라즈라고 해서 그 섬광에 갈라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정말 달라졌구나, 시즈.' 은백의 머리, 투명한 눈동자.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야! 시즈,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 마음을 바로 잡은 헤라즈에게서 강렬한 힘이 뻗여 나왔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의 기운. 그러나 시즈는 엄청난 기운이 헤라즈 주위에 일렁이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담담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음유술사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상대할 정도가 아니라 제압까지도 가능하다고 시즈는 믿었다. 아니, 마 법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고 해도 충분히 검에 자신이 있었다. 헤라즈 또한 시즈에게서 풍겨나오는 기세에 감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바람의 마력만이 아니었다. 검 사 자체로서의 시즈가 막강한 투기로 헤라즈 마음 속 깊은 곳의 무사를 깨웠다. 무사는 재촉했다. 어서 겨뤄보라고. "섬(閃)!" 이를 악문 시즈의 일검이 터져 나왔다. 예도가 어찌나 빠르게 빠져나오는지 우우웅하고 검집이 진동을 했다. 검이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비어지면서 생기는 압력으로 떨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동하는 것은 검집 뿐이 아니었다. 떵! "우으윽!" 헤라즈의 거구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의 눈이 종전의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부풀었다. 몸이 허공으로 뜬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팔, 팔의 뼈가 부서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 성투사들의 건틀렛과 완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고들 한다. 그 이유는 성투사에게만 허락된 격투술, 신성강화법 에 있었다. 신성력에 의해 푸른색으로 달아오른 완갑은 전설의 보석 오리하르콘에 비할 수 있는 강도를 가졌다. 뿐 만 아니라 신성력은 성투사 자신의 몸에도 영향을 미쳐서 자체로서 축복을 받는 것과 같고 상처가 나도 바로 치료 가 된다. 그런데도 아픔이 전해진 것이다. '진동인가?' 부딪힐 때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그냥 보기에는 한 번 부딪힌 것처럼 보이지만 예도는 완갑을 한 순간동안 수 백 번을 때린 것이다. 헤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좋아.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보여주지. 흡!" 43악장 4화 몸을 움츠리고 헤라즈가 정신과 신체의 힘을 모두 끌어 모으자 잠깐이지만 홀 안의 공기 자체가 희미하게 흔들렸 다. 그리고 주체하지 못하는 신성력과 기(氣)가 동시에 터지듯이 뿜어졌다. 기운이라는 것은 일반인은 보기 어렵다. 숙련된 무사들에게는 눈에 보이듯이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헤라즈에게서 불거져 나온 기운은 무술이나 검술에 대 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귀족의 여인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유형화되어 있었다. "예전보다 몇 배나 강해졌어. 시즈, 조심해라!" "당신이나 걱정할 시간이야." 젠티아가 한 눈을 판 사이 창 하나가 소용돌이치듯 회전을 하면서 옆구리를 찔렀다. 검면에 손바닥을 대고 창을 막 으며 우아하게 몸을 돌린 그는 번개같이 검을 뿌렸다. 카앙! "펠리언‥." "예전부터 실베니아 최고의 기사는 젠티아 드로안이라고 그랬지. 하지만 아니야! 오늘 이후로는 내가 최강이다!" 그렇게 말하고 펠리언은 창을 세차게 돌려 성음검을 튕겨 내고 회전력을 이용하여 젠티아의 몸을 쓸어 갔다. 홀 안은 이제 무도회장은 이미 난장판으로 전투장이 되어 버렸다. 시즈들을 공격한 공격에 맞고 죽어가는 귀족들. 그들을 보며 페스튼은 히죽거렸다. "멍청한 놈들‥. 난 당신이 저들과 같지 않다고 믿고 있지." "나도 똑같아." "뭐라고!?" "나도 똑같다고!" 아리에는 말이 끝나자마자 테이블을 밟고 펄쩍 뛰어 올랐다. 드레스 치마가 활짝 펴지며 그녀의 백옥같은 다리가 들어나자 페스튼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과연‥ 아름답군. 잠깐 가지고 놀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페스튼의 눈동자는 광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리에는 발 차기를 할 것 같은 모션을 취하 면서 허리 뒤로 감추고 있던 단검 2개를 던졌다. 쒜액!하고 파공성이 일었지만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페스튼이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스튼이 중앙군 의 기사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갑옷을 녹여서 새로 만든 두꺼운 강철 글러브에 부딪힌 단검들이 바닥에 나뒹굴렀 다. 몸을 한 차례 훑어보며 페스튼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아리에의 온몸에는 소름들이 빠득빠득 솟아올랐다. 마치 벌레들이 단체로 몸위를 기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만은 꼭! 죽여버리겠어." "후후후‥ 당신만은 꼭! 더럽혀주지." 파세닌은 설마하니 이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누구하나 강해 보이고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었 다. 아리에마저도 위험한 상황. 그는 싸울 것을 결심했다. "내 상대는 누구냐? 어서 나와라!" "아하하핫! 주위에 많잖아요!" 투지에 불타는 사내의 귓가에 들려온 음성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천진난만했다. 그러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터 에 어린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는 테이블 밑에서 혀를 내밀고 키득키득 웃고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피가 튀고 비명이 산적한 연회장에서 웃고 있다니 파세닌은 여기에서 우선은 의심을 해보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소 녀의 당장에라도 안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킬 미색 때문에 그는 홀린 듯이 테이블 밑으로 파고들었다. 식탁보로 가려진 테이블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사물을 관철할 수 없지는 않았다. 파세닌은 꿈에 나올 것 같이 귀여운 소녀에 게 다짜고짜 안았다. "넌, 시녀로구나!" "예에‥." 소녀는 파세닌이 갑작스럽게 안아버리자 당황했는지 부끄러운 듯 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 스러운지 파세닌은 몸을 비비꼬며 물었다. "후후‥ 귀여운 아이로구나. 이름이 뭐지?" "에즈민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름마저도 귀엽구나. 마치 꿈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미소녀로구나." "공자님과 저는 정말로 만났습니다." "꿈속에서 말이냐? 흐흐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즈민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자 꽃이 피어나는 듯 했다. 덕분에 파세닌은 이 소녀야말로 오래 전 자신을 고문하 고 암시를 걸었던 사람임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저‥ 바보!" 파세닌이 겁쟁이처럼 테이블 아래로 숨어버리자 파마리나는 간단하게 외마디 감상을 외쳤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테 이블 아래에서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만약 봤다면 당장 통닭처럼 만들어 버렸겠지만. "초연의 혼돈, 마지막 절벽에서 울부짖는 성조여‥. 붉은 안개구름을 해치고 나와 네 울음소리를 들려다오!" ―꾸에에엑! 입을 오물오물 쉴 새도 없이 움직이며 주문을 외는 파마리나가 서있는 자리에서 거대한 마법원이 만들어졌다. 그리 고 손을 펼쳐들자 외마디 언령을 외치자 마법원에서는 빛기둥이 솟아오르며 한 마리 괴조가 등장했다. "고라키하드! 발스크의 애완동물인가?" 법칙을 관장하는 레이모하가 지혜의 신 위즈의 오른손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파멸의 신 발스크. 발스크의 이 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마녀나 마법사들의 입에는 꼭 한 번은 등장하는 주연배우였다. 하지만 발스크 가 거론되는 주문은 대부분이 금지주문이었다. 파멸의 신에게 하사 받는 힘이 얼마나 강대하겠는가. 피닉스가 불의 성조(聖鳥)라면 고라키하드는 마조(魔鳥)였다. 고동색의 흉측한 날개를 편 마조의 울음소리에 기운이 약한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마녀는 마녀인가보군.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그렇게 말하는 로진스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진공의 칼날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갈 때 마다 사람들은 십 여명씩 마구잡이로 쓰러졌으니까. 원래 마법사는 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말이다. 고라키하드는 사실 소환자인 파마리나도 제어하기 힘든 마수였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마법사는 '역사의 고리'에 서 마법을 담당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의 머리 속에 있는 주문을 나열하면 하루 종일이 걸려도 모자를 것 이다. 하지만 파마리나가 무리한 만큼 고라키하드는 다행스럽게도 로진스에게 위협을 주는 모양이었다. 꽤나 곤란한 표정 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파마리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녀가 마법사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마녀는 주문을 영창함에 있어서 마법사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 다. 한 마디로 마녀들은 축복받은 마법사였다. 그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파마리나가 밀린다면 이것은 마녀의 자 존심 문제였다. 그러나 파마리나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로진스가 곤란해하는 이유는 달랐던 것이다. '어떤 녀석을 소환할까? 그래, 괴조에 어울리는 녀석이라면‥.' "흐흐흐! 영원히 찾아오는 밤의 사냥꾼이여‥. 그대의 화살이 향할 곳, 여기에 마련되었으니‥" "마, 말도 안돼! 당신이 그 주문을 알 리가 없어!" 파마리나는 로진스가 주문만 듣고도 소환하려는 대상을 알아챘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고라키하드라는 카드 는 잘못 꺼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와라! 그대의 사냥터에!" 수인(手印)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로진스의 몸에서 피어오른 마력이 뭉쳐지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홀의 천장 까지 닫는 거대한 키의 거인. 거인은 막 날아 오르려는 고라키하드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등에 멘 활을 풀어서 겨 누었다. 밤의 사냥꾼, 이로카스는 전설에서 동물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다녔다는 마족이었다. 꼭 그는 밤에만 나타났는데 사냥감으로 마수건 성수건 가리지를 않았다. 결국 드래곤들을 사냥하다가 반대로 붙잡혔고 드래곤들의 지배자는 이 로카스를 하늘의 별자리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사냥꾼을 보자 고라키하드는 크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묵광의 기운을 입으로 모았다. 이로카스는 희미하게 그런 사 냥감을 비웃으며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쿠아아아아! 고라키하드의 브레스와 이로카스의 화살이 맞붙딪히고 그대로 왕궁은 날아가버렸다. 콰아아앙! 43악장 5화 왕궁에서 들려온 천지를 흔드는 폭음소리. 수도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중앙기사대를 모두 제압한 글로디프리아 군의 사령관, 마크렌서 자작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지금 소리를 들으셨지요?" "귀머거리도 들었을 거야." 킬유시 공작은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그는 아직도 휠체어에 탄 상태였다. 로바메트 공작은 궁전에 있을 아들 놈을 생각하고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당장 궁전으로 가야하는 게 아닌가?" "진정하게, 로바메트. 젠티아가 우리에게 맡긴 일은 그게 아니야. 궁전의 일은 알아서 잘 할 걸세. 자네도 그만 아들 을 믿지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 내 아들인 자네 사위처럼 그렇게 괴물인 줄 알아? 앙! 이럴 줄 알았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보내는 게 아니었어." 길길이 날뛰는 로바메트 공작을 보며 킬유시 공작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온화한 성격이라고 알려졌는지 궁금했다. 그의 옆에는 데린이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는데 그녀 또한 방금 전의 폭음으로 돌아올 사람을 걱정하는 게 분명했 다. 빙그레 웃으며 킬유시 공작은 데린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로바메트 공작이 말했듯이 네 남편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검사가 아니냐?" "그럼 전 인간하고 결혼한 게 아니란 말씀이에요?" 아버지의 말에 데린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밝게 농담을 꺼냈다. 하하하 하 고 함께 웃어준 마크렌서 자작은 뒤에서 얌전히 보고 있는 레스난과 블리세미트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궁전의 열전이 워낙 치열한 듯 하니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이쪽은 이미 펴온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블리세미트는 레스난의 손을 잡고 막사를 나갔다. 그들도 시즈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국왕을 어떻게 잡을지 생각해봅시다." "그러지. 마크렌서 자작, 자네가 생각하기에 국왕의 도주로는 어떠한가?" 이내 그들은 신중해졌다. 사실상 이번 승패가 달려있는 임무는 그들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티아가 죽음 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가한 것은 역사의 고리와 중앙기사단의 실질적인 힘인 근위기사들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어서 가자." "좀 천천히 가!" 레스난은 뛰다가 힘이 든 지 털썩 주저앉았다. 블리세미트도 숨이 차도록 뛰어왔는데 레스난이 어떻게 견딜 수 있 을까? 그녀의 상황을 다른 때라면 이해했겠지만 궁전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폭음과 빛은 블리세미트를 재촉하고 있 었다. "자! 어때?" 자구책으로 그는 레스난의 다리에 회복술과 생명술을 썼다. 뛰어난 신성력에 레스난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 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진작 좀 해주지." "알았으니까 어서 뛰어!" 블리세미트는 현재 신성력을 될 수 있는 한 써서는 안된다는 어떤 예감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도 왕궁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으아― 완전히 난장판이네." 레스난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린 궁전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을 예상했는데 저래가지고는 바다 속에서 가라앉은 고대의 궁전과 다른 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바다 속의 궁전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그것으 그나마 지붕이라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서 다가갔다. "블리세미트, 레스난!" "아리에!" 레스난은 페스튼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는 아리에를 보고 크게 소리쳤다. 손가락을 뻗어서 인어의 주문을 외우자 얼 음화살이 우수수 페스튼을 향해서 날아갔다. "아차아차! 새로운 여인이 온 건가? 이건 또 무슨 인연이야? 하하핫!" 페스튼은 얼음화살을 피하고 나서 레스난과 블리세미트를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갖고 싶어했던 여자가 모두 찾아오다니‥. 역시 신은 내 편이라니까." "신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 꼬마 사제, 너한테도 빚이 있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리에와 페스튼은 여기저기가 화상으로 엉망이었다. 아마도 방금 전의 폭발에 의해 그들도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 다. 그러나 몸놀림이 날렵하여 피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쓰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팔이 날아간 사람도 있었고 아예 상반신이 없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런대도 이렇게 싸움은 계속 되고 있다니‥.' 아리에는 레스난에 맡겨두고 그는 시즈들을 찾았다. "크아아아앗!" 흑기사와 백기사. 두 갑옷의 색깔만큼이나 두 기사의 검술도 달랐다. 바스티너는 어떻게든 자신을 막아내고 있는 자 가 젠티아말고도 또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대체 넌 누구인가?' "보를레스라고 하지." "보를레스라면 용병왕을 맞아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하는 기사‥. 그게 너란 말이냐?" "그 뿐만이 아니지. 너랑도 이미 한 번 싸운 일이 있다고. 사막에서의 일전 잊어버렸나?' "사막에서?" 바스티너는 잠시 검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때의 꼴사납던 검사로군." "하하하‥ 그 때는 나였지만 이번에 꼴사납게 패배하는 자는 바로 너다, 바스티너!" 제뷔키어가 제비처럼 바스티너가 들고있는 흑색의 검을 때렸다. 그러나 검이 두꺼워서인지 바스티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레이트 소드를 방패로 밀고 나가면서 휘둘렀다. "으랏차!" 보를레스는 제뷔키어를 믿었다. 적어도 토루반이 부러지게 만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대장장이한테 말 하면 맞아죽을 생각이었다. 바스터드 소드보다도 굵기가 얇은 검으로 그레이트 소드랑 맞대결을 한다니‥. 하지만 보를레스는 슬슬 기운을 조절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검을 감도는 빛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 제뷔키어는 바스티 너의 힘 앞에서도 빌리지 않았다. "조금 힘은 늘었군. 흠!"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스티너의 가벼운 기합에 보를레스는 뒤로 달리기를 하듯이 밀리기 시작했다. "어이! 어어어어어어어―!" "바보 같군. 좀더 제대로 덤비는 게 어때?" 바위에 걸려 뒤로 아예 넘어가 버린 보를레스에게 바스티너는 시시하다는 듯이 뒤로 돌아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 은 보를레스가 '담력검술'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죽어보자!" 좀전과는 속도 자체가 틀린 공격이 들어오자 바스티너도 진지해졌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거대한 검을 한 바퀴 천 천히 돌렸다. 카가가강! "뭐야!?" 보를레스는 검을 다 휘두르기도 전에 자세가 흐트러지며 옆으로 굴러야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바스티너가 말했다. "넌 아예 화경에 대해서 모르는 거냐?" "화경?" 들어본 기억이 났다. 예전에 시즈에게서 동방검법의 묘(妙)에 대해서 조금 배울 때 시즈는 화경이라는 말을 자주 섰 다. "그래‥. 그거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주제에 보를레스의 공격은 다를 바가 없었다. 코웃음을 치면서 바스티너는 다시 한 번 화경을 전개했다. 휘익하고 돌아가는 거대한 검. 그리고 휘말리는‥? 바스티너는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휘말리지 않았다.' 화경이라고 함은 상대의 공격의 속도를 옆이나 뒤로 받아서 공격 방향을 서서히 돌려 튕겨 내는 방어술이었다. 그 러기 위해서는 검이 원을 이루면서 회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상대의 힘에 반발하지 않는 유일한 동작이었 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를레스의 공격이 바스티너의 원운동에 휘말리지 않았다. 검이 닿지 않고 되돌아간 것이다. "화경이라는 것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할 수 없지. 모든 방어와 공격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보를레스는 입을 함박만큼 벌리며 크게 기합을 넣었다. "하압!" 제뷔키어가 보를레스에게 받은 기운을 빛내며 바스티너의 머리를 향해서 돌격했다. 바스티너가 옆으로 피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제뷔키어는 바스티너의 투구를 정확하게 때렸다. 콰직! "꺄악!" 갈라진 투구가 바닥을 구르며 튀어나온 소리는 애절한 여인의 비명이었다. 넘치듯이 너풀너풀 흘러나온 감청색 머 리카락 사이로 눈물어린 여인의 눈물이 옅보이자 보를레스는 마무리를 할 생각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저기‥!" "죽여버리겠어!" 바스티너, 아니 에레나는 흑검을 들어 올려 보를레스를 광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공격에 힘도 없었고 허점 투성이 었다. 그냥 슬쩍 검을 집어넣기만 해도 심장이 꿰인 채 죽어 버릴 게 분명했다. '정말 방금 전의 바스티너가 이 여인인가?' 보를레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감청색 머리카락에 귀여운 얼굴은 분명히 낯에도 익었다.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엘시크로 돌아오는 도중에 잠시 쉬었던 마을에서‥. "에레나?" "닥쳐! 난 바스티너야! 바스티너라고!" 에레나는 히스테릭하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보를레스의 공격에 머리를 맞고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워진 게 분명 했다. 블리세미트는 당황스러워하는 보를레스가 위험하다고까지는 생각되지 않았음으로 지나쳤다. 달려가던 그의 눈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게 들어왔다. 얼른 달려가서 일으킨 그녀는 파마리나였다. "파마리나, 괜찮아요?" 그녀는 마법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저기 화상으로 흉측하게 변해있는 상처를 블 리세미트는 빨리 치료했다. "휴우‥ 빨리 와서 다행이었어. 조금만 늦었다면‥." 파마리나의 티 없는 얼굴는 영원히 일그러져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 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파마리나, 정신 차려요." "으하하하핫! 성직자가 마녀를 안고 있다니, 특이한 광경이로구나." "당신은‥!" 붉은 뱀의 사원을 부숴버린 장본인 중 한 사람 로진스를 보자 블리세미트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샘솟았다. 이빨을 가는 그를 보며 로진스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로진스!" "꼬맹아, 너같은 어린애의 입에 올려질 만큼 내 이름은 가벼운 게 아니다." 로진스는 웃음만 멈추고 가늘게 뜬눈으로 증오에 불타는 어린 사제를 내려다보았다. 파마리나가 화상을 입은 만큼 그 또한 무사한 게 아니었다. 머리는 온통 그을려서 꼬질꼬질했고 법의도 가장자리는 찢어지고 상처에서 나온 피에 물들어서 엉망이었다. 그는 서있기도 힘이 든지 비틀거렸지만 입을 중얼거릴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암흑 가득한 구덩이에 피어있는 불꽃의 강이여‥. 여기에 나타나‥ 으윽!" 로진스는 주문을 맺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파마리나의 지팡이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그는 쓰러졌다. "너 바보냐‥?" 블리세미트는 파마리나의 음성에 따라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주먹이 보였다. "윽! 왜 때리는 겁니까?"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파마리나는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로진스에게도 질 수 없었지만 이 녀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블리세미트에게 소리쳤다. "방금 전에 로진스가 외우던 주문은 용암을 불러 일으키는 주문이었다고! 그걸 다 외우도록 놔두면 어쩌려고 그 래?" "죄, 죄송해요." "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보도록 해." "하, 하지만‥." "어서!" 파마리나의 소름끼치는 고함에 블리세미트는 화들짝 놀라서 뛰어갔다. 안그랬다가는 마법으로 얻어 맞을 것만 같았 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파마리나는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조용히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난장판 구석에서 울려퍼졌다. 43악장 6화 아까 전까지 홀이 있던 곳에서는 아직도 싸움이 한창이었다. 다들 여기저기가 피투성이에 엉망진창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들의 전투는 여전히 격렬했다. "크앗!" 헤라즈에게서 이미 완갑은 날아간지 오래였다. 피로 얼룩진 손으로 망치질하듯 시즈를 내리쳤다. 지친 쪽은 어느 쪽 이나 마찬가지. 시즈는 옆으로 굴렀다. 에릭사에서 넘쳐나는 에너지가 받쳐줄 수 있을 정도의 한계를 지난 지 오래 였다. 체력이 남아있었다면 가볍게 피했을 시즈가 바닥을 구른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의 오른족 눈 위는 길게 찢어져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헤라즈는 계속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시즈를 공격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할 수는 없었다. 시즈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휘두르는 동방예도에서는 바람의 마나가 섞여서 신성강화법이고 뭐고 간에 완전히 잘라버리는 진공의 검기가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빠르고 무거운 헤라즈가 급소 부위마다 내지르는 강력한 주먹에 맞았다간 시 즈는 숨 한 번도 더 못 쉬고 절명이었다. 헤라즈도 시즈의 진공 검기를 막아내던 완갑이 부서진 이후로는 신성강화법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두 사람의 검기와 권이 펼쳐질 때마다 모래바람과 굉음이 자욱하게 피어났다. "나는 지지 않는다! 나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생명이 날 지탱하고 있어! 나는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다! 시즈, 너는 과연 알고 있는가? 너의 목숨이 내가 지고 있는 생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아!" 그의 절규가 섞인 주먹은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앙! 쾅! 시즈는 검을 휘두를 시간도 없이 뒤로 연신 쫓겼다. 물결처럼 부드러운 그의 움직임도 이미 헤라즈는 파악한 후였 기 때문에 공격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다시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 더 이상 피할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위기일발의 순간! 시즈의 투명한 눈에 헤라즈의 주먹이 가득 차 올랐다. 푸른 신성력을 눈이 시리도록 머금고 있는 힘의 덩어리. 시즈는 뒤로 펄쩍 뛰며 주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앗! 진공의 검파가 일어났다. 그러나 헤라즈는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힘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쾅! 힘의 우세가 누가 쓰러지는가로 판가름난다고 친다면 둘의 대결은 시즈의 패배였다. 그는 쓰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 지고 있던 벽을 부수고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 "컥! 쿨럭! 쿨럭!" 시즈는 고통스러움에 땅을 마구 구르며 피를 쏟았다. 피에는 하얀 내장의 조각마저도 섞여있었다. 한동안 몸부림치 던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땅의 손을 집다가 다시 넘어졌다. "크‥." 양손의 손가락이 기괴하게 비틀려져 있었다. 땅을 집을 수도 없을 만큼. 시즈는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라즈는 주먹에 박혀있는 동방예도를 뽑아서 던졌다. 동방예도는 충돌할 때의 강도를 감당하 지 못했는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은 예도의 손잡이가 있는 자리 옆에 나뒹굴렀다. 진공검기는 허공을 가를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헤라즈의 주먹에는 영향을 입힐 수 없었다. 대신에 헤라즈 의 전신에는 진공의 소용돌이로 인한 상처가 쉴 새 없이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승부는 끝난 것 같군. 또 하나의 생명을 지게 되는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말게, 시즈. 자네말고도 내가 지어야 할 무 게는 아주 무거워서 자네의 생명을 지게 되어도 별 차이가 안 날 테니까." 그 말이 그의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즈는 농담으로 생각하는지 빙그레 웃었다. "죽음을 두고 웃을 수 있다니‥. 성투사로서의 예의로 고통 없이 보내주마." 헤라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즈는 천천히 자신의 검이 떨어진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헤라즈가 던진 검 날의 잡았다. 손가락이 죄다 부러진 상태였음으로 손바닥을 벌리고 양 손목으로 잡았다. "오시죠, 헤모 사제. 레이모하의 충실한 종이여‥. 제 생명의 무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시즈는 헤라즈를 불렀다. 광폭한 곰처럼 달려온 거구의 성투사는 피가 줄줄 흘러 내리는 주먹을 다시 한 번 쥐었다. "그래. 레이모하의 곁으로 보내주마! 시즈!" 콰릉! 헤라즈의 주먹이 공기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 소리만으로 시즈는 날아가 버릴 것 같이 서있었다.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한 눈동자만이 상대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왼팔이라면 그 어떤 공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때는 막 블리세미트가 막 도착한 시간이었다. 시즈가 피를 닦은 걸레 같은 꼴로 헤라즈에게 마지막 저항을 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러나 검도 제대로 쥘 수 없는 몸으로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소년은 놀라서 외쳤다. "시즈님! 안돼에에!" 그러나 너무 늦은 후의 일이었다. 사정없이 시즈의 왼팔을 뭉게 버린 헤라즈의 주먹은 목표의 엽구리에 정확하게 박혔다. 날아가는 시즈의 모습이 마치 끈이 풀려버린 연처럼 자유롭게 보였다. 블리세미트는 다람쥐처럼 달려가서 떨어지는 그를 잡았다. 파마리나 때와는 차원이 틀린 상처에 소년 사제는 시즈 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즈님! 시즈님!" "크윽! 쿨럭!" "시즈님!" "브, 블리세미트‥. 왔군요‥. 조, 좀‥ 일으켜‥ 주겠어‥요?" 죽어 가는 사람의 청은 거절을 못하는 법이다. 블리세미트가 조심스럽게 일으키자 시즈는 부러진 뼈들로 인하여 신 경이 자극 받고 고통스러워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헤, 헤모 사제‥님." 은백의 머리마저 피로 변색된 시즈가 부른 상대는 선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듣고 있지 않 던, 듣고 있던 시즈는 이미 피로 눈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피를 쿨록쿨록 뿜으면서도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 쿨럭! 있습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 세‥ 했으면서도 또! 생겨버 렸습니다‥ 쿨럭쿨럭! 하, 하지만 그렇기에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헤, 헤모 사제님‥. 죽은 자‥들은, 콜록! 사랑을 나‥눌 수 없‥고 우정‥을 나눌 치, 친‥구조차 없습니다. 진‥정 으로 마음을 짓누르는 흥분과 상처르을‥ 그들은‥ 느낄 수 어, 없습니다‥. 죽은 자의 생명과‥ 살아있는 자의‥ 생명은 틀립니다‥. 저는 장담할 수 이, 있‥습니다. 헤, 헤모 사제님‥을 묶고 있는 수많은 생명의 잔재보다 제가 가‥진 생명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제 생명은 사랑과 우정으로 인해 무겁습니다‥." "‥‥." 헤라즈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호랑이처럼 험상궂던 그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블리세미트 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보였으니까. "시즈, 그는‥." "됐습니다. 말하지 말아주세요." 시즈 또한 알고 있었다. 왼팔이 헤라즈의 공격을 막아내며 잠시나마 시간을 번 순간 그는 바람의 의지를 일으켰다. 공중에서 빙글빙글하고 드릴처럼 회전하는 검날. 팔과 옆구리가 일그러지는 고통 속에서 시즈의 발은 예도 뒷부분을 정확하게 밀었다. 발끝 으로 검이 사람을 베는 감각이 전해지자 그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블리세미트가 열성적으로 신성력을 쏟아 부은 덕분인지 시즈는 혼자의 힘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눈물이 흐르자 피 도 씻겨나가 천천히 시야가 보이고 있었다. "시즈, 아직은 안됩니다." 블리세미트의 만류에도 시즈는 멈추지 않았다. 왼팔을 덜렁거리며 걸음을 계속한 그는 헤라즈를 은은한 미소를 지 으며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헤라즈가 짓고 있는 표정과 비슷했다. 둘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미소로 서로를 대하 고 있었다. "헤모‥. 나도, 나도 말입니다. 헤모처럼 다른 사람을 죽이고 얻은 생명의 무게가 있습니다. 하, 하지만 이토록 무겁 게 느껴지기는, 이토록 힘들기는‥." 고개를 젓는 시즈는 말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피와 함께 흘러나오는 눈물을‥. "블리세미트‥ 부탁합니다. 기도를‥." 소년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에 꽂혀있는 예도의 반조각을 뽑아내자 한 줄기의 핏줄기가 그의 사제복을 적혔 다. 동시에 헤라즈는 무너졌다. 조심스럽게 받은 블리세미트는 거대한 몸을 천천히 눕혔다. 그리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신들이여‥." 기도가 끝났을 때 시즈의 입에서는 한숨처럼 작은 음률이 흘러나왔다. 그대여‥ 생명의 무게에 눌린 자여‥. 당신을 받쳐주는 사랑을 왜 알지 못했나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를 알았던 나는 슬프기만 합니다. 그대여‥ 순수하여 고통스러웠던 사람이여‥. 이제 그만 무거워하지 말아요.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가볍게‥ 쾌활한 웃음을 짓듯 가볍게‥. 하늘을 나는 그대의 모습을 그린 답니다‥. 43악장 7화 성에는 글르디프리아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의 고리는 이미 싸움의 방향이 패배로 기울었다는 걸 알고 하나 둘씩 쓰러진 사람을 짊어진 채 사라져 갔다. 벽에 기대여 몸을 지탱한 젠티아가 비슷한 상태의 펠리언에게 말했다. "펠리언. 그만 포기해. 이미 끝났다." "그런 것 같군." 젠티아는 승자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만 두게. 자네는 충분히 했어. 설마하니 대륙에 내가 전력으로 싸워서 죽일 수 없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자네, 역사의 고리에게 세뇌 당한 게 아니지?" "그렇소. 오히려 그들을 이용했지.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곤 했소. '기사라면 마지막 뜻을 위하여 힘을 숨겨라.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이 마지막 뜻이었어.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냈는데도‥ 하하하! 당신의 말대로야. 끝난 거지." 그렇게 말하고 펠리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에서 데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티아‥!" "데린!" 그녀에게 달려가려던 젠티아는 슬쩍 펠리언을 바라보았다. 펠리언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휙휙 흔들며 말했다. "어서 가보시오."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죽기는 싫으니 도망가야겠지." "그렇군. 그럼‥ 잘 가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젠티아는 데린에게 달려갔다. 어이가 없어진 펠리언은 맥이 풀려 너털웃음만 세어 나왔다. "하하‥ 역적한테 잘 가라면서 손을 흔들다니 정말이지‥." 그는 일어나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젠티아에게 이미 언질을 받아서일까? 아무도 반란의 주동자가 걸어가는데 잡 지 않았다. 사라지는 펠리언을 바라보며 데린은 한 번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 그녀는 웃으며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겼다. 다른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블리세미트는 피투성이가 된 시즈를 부축하면서 들어섰는데 이미 레스난과 함께 도착해있던 아리에는 그가 죽기라도 한 듯이 달려들었다. "시즈!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블리세미트가 치료술을 행해준 덕에‥." 보를레스는 시체처럼 눈을 뜨지 않는 파마리나를 어깨에 지고 왔다.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코 고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젠티아는 데린을 안고 로바메크 공작에게 말했다. 로바메트 공작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 대답했다. "우리의 생각대로 국왕 폐하 역시 암시에 걸려있었네. 지금 마나이츠님께서 주문을 파해하고 계시네. 지금쯤 다 되 었을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나이츠가 국왕과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고 파이 론 3세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페르베이안 백작에게 들었네. 킬유시 공작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도. 사건이 이 정도까지 되었는데 무엇을 탓하겠는가. 모두 짐의 부덕이라 생각하고 있네‥." "황공하옵니다." 파이론 3세는 왕궁을 박살내놓은 사람들을 면죄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격한 젠티아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로바메트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시즈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혹시 내 아들놈을 보지 못했나?" "이 사람을 찾는 거에요?" 그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한 소녀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천사처럼 귀여운 용모로 살짝 미소를 지 었다. 로바메트는 그녀를 본 기억이 났다. 이를 갈면서 그는 검을 빼어들었다. "이 요물!" 에즈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암시와 최면 마법을 걸었던 장본인.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가오지 말아요.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파세닌!" 그녀의 발 밑에는 20대 정도의 청년이 발가벗겨진 채 업드려 있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의 등은 온통 칼자국으 로 가득했다. 로바메트는 궁전만큼이나 난장판이 된 아들의 모습에 어찌할 줄 몰랐다. 에즈민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귀여운 표정으로 고민을 하는 듯 했다. "오늘은 저희가 진 것 같아요. 노리스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희 오빠도 그렇게 말했으니‥. 할 수 없죠." "그렇다면 어서 그를 내놔라." 젠티아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에즈민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은 싫은데요." "그럼 뭘 원하는 거냐!?" "어머! 무서워요. 제가 겁을 먹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면 어쩌죠?" 에즈민의 하이힐은 정확하게 파세닌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만약 마음을 먹고 힘을 준다면 목뼈가 남아나지 않음을 깨달은 젠티아는 분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침묵 상태가 된 장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에즈민은 깔깔대며 웃었다. 땅그랑. "이건 뭔가?" 로바메트는 에즈민이 단검을 던진 의미를 물었다. "국왕을 찌르세요. 그럼 당신의 아들을 풀어드리죠. 그 안에는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 독이 있어요. 꼬마 사제의 뛰 어난 신성력이라고 해도 살릴 수 없을 걸요." 파이론 3세와 파세닌을 번갈아 보기를 몇 번‥. 로바메트 공작은 망설이듯 부들거리는 손으로 단검을 잡았다. 독이 고루 발라져있는지 보랏빛이 은은히 검신에 돌고 있는 단검. 참담한 모습이 되어있는 아들. 그리고 이 나라의 국왕이자 그의 주군인 파이론 3세. 로바메트 공작은 천천히 파이론 3세에게 다가갔다. 국왕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로바메트, 미안하네. 그대의 기대에 난 언제나 미치지 못했지. 나의 아들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가 되도록 도와주 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 앞으로 뛰어난 군주가 되어주시면 됩니다. 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가 남기는 마지막 시를 봐주십시오." '무슨 말인가?'하고 파이론 3세가 생각할 때 로바메트 공작은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잘랐다. 툭 하고 떨어지는 한 마디 신체의 일부. 아픔과 동시에 독이 퍼져감을 느꼈지만 로바메트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단검을 에즈민에게 던졌다. "무슨 짓이죠? 아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녀의 말도 로바메트 공작은 염두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파이론 3세를 보고 말했다. "폐하는 예전부터 절 오른팔이라고 말하시곤 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아직도 그대는 나의 오른팔이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폐하께서 소신을 팔이 아니라 손가락 중 하나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봐주십시오." 로바메트 공작은 독으로 인해 시커멓게 변한 피로 그나마 깨끗하게 보이는 테이블 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저 허공의 크기를 알 수 없는 구름성 같이 거대한 뜻을‥.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저 바다의 몰아치는 파도처럼 끝없는 열정으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시를 쓴다면‥. 영원히 기억될 노래를 남기리라. 끝없이 기억될 의미를‥ 로바메트 공작은 시를 끝맺지 못하고 엎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이‥!" 파세닌은 목을 짓누르는 무게를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사실 에즈민은 로바메트 공작이 죽음을 결심하고 손가 락을 잘랐을 때부터 파세닌이 인질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알고 도망친 상태였다. 하지만 파세닌은 그것 따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달려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들고 흔들며 그는 오직 울부짖을 뿐이었다. "아버지‥." * * * 실베니아의 공작, 파이얼 로바메트의 장례식이 환기(環期) 4762년 6월 5일에 있었다. 당시의 전략가들과 정치가들은 입을 모아서 그가 숨질 때 실베니아에서 피어나기를 기다리던 꽃들은 모든 향기를 잃었다고 말했다. 실베니아의 국왕 잉그리겔 파이론 3세는 반란 세력에게 오히려 절을 하고 그 동안의 폭정에 대해 용서를 빌었고 반 란군들과 신민들 또한 감격하여 함께 절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 진정으로 국가의 위협이 되는 세력으로 '역사의 고리'를 규정하여 다른 국가에도 그 존재의 위험성을 알렸다. 실베니아가 국가적인 위험을 겪으면서 몇몇 사람이 부각되었다. 젠티아 드로안은 글로디프리아에서 소속을 중앙으 로 옮기면서 '값싼 남작'에서 '비싼 남작'이 되었다. 용병왕을 맡아서 밀리지 않고 싸운 보를레스는 용병국에서 '광풍의 검사'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또 마법사 들 중에서는 새로운 주자로 마나이츠 페르베이안의 마지막 제자인 '넬피엘 세로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최대의 이슈는 뭐니뭐니 해도 '마땅찮은 시즈'가 살아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엘시크에서는 학자들이 반란 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왕궁 앞에 모여서 시즈 세이서스의 직위 복귀를 상소(上訴)했다. 그동안 학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는 세이어스가(家)의 반란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떠났군." 젠티아는 성 위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데린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하긴 둘이 되어서 좋긴 하다!" "흠흠!" 뒤에서 킬유시 공작이 헛기침을 해댔다. 시즈와 아리에, 보를레스는 다시 그들의 나라인 엘시크로 돌아갔다. 엘시크의 학자 뿐 아니라 아스틴 네글로드 등 여러 학문기관에서 넣는 압력을 결국 왕실은 받아들인 것이다. 레스난 또한 그들을 따라나섰다. 글로디프리아의 재정을 상단의 300%라는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며 도왔던 카이젤은 실베니아의 재무담당 부서에 정 식으로 임명되었다. 마크렌서 자작은 좋은 재정자원이 없어졌다고 입맛을 다시며 '백 장의 꽃잎'과 함께 글로디프리 아로 돌아갔다. 넬피엘은 마나이츠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무엇을 찾느냐는 젠티아의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안하는 걸로 보 아서는 뻔했다. 게다가 마나이츠가 제자 며느리를 찾느다고 했으니. 파마리나는 특이하게도 성직자인 블리세미트와 파티를 짰다. 둘은 아무래도 아스틴으로 가서 토루반과 피브드닌의 연구를 도울 생각인 듯 했다. 파세닌 로바메트는 국가에서 아버지의 작위를 그대로 물려주었지만 거절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소문에는 반란의 주동자인 펠리언를 찾아서 그에게 창술을 배운다고 했다. 마지막은 바로 페스튼이었다. 레스난과 아리에에게 제압 당했던 그는 반란의 죄를 '역사의 고리'에 의한 세뇌 때문 으로 규정하고 사작의 작위와 중앙 기사단의 군기담당감사관이 되었다. 이름뿐인 귀족이었지만 기사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대만족이었다. 국왕에게 작위를 받는 자리에서 페스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작 이랬음 오죽 좋아!?" 그러자 국왕인 파이론 3세도 웃으며 말했다. "진작은 아니라도 이렇게 되었으니 오죽 좋은가!" 천장이 없는 왕궁의 홀로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44악장 1화 엘시크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노르트 평원을 가로지르다보면 에메랄드를 뿌려놓은 것처럼 푸른 멜도아 강이 구 불구불 흐른다. 멜도아 강의 뱃사공과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보면 제플론 주변에서는 하나 뿐인 나무의 밀집지, 멜라 누 산이 여름의 태양 빛을 가득 머금은 생명의 빛깔로 환영한다. 소년처럼 조그만 청년은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가볍게 동산에 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에 은색의 머리카락과 왼 쪽 소매가 격렬하게 나부꼈다. 뒤를 쫓아오던 여인이 숨이 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즈‥. 좀 천천히 가‥." "아리에, 그만 둬. 저 녀석 지금쯤 마음이 들떠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걸‥." 여인의 뒤에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왼쪽 어깨가 아파서 끙끙거렸는데‥." 못내 걱정을 덜 수 없는지 여인은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청년의 펄럭이는 왼쪽 소매가 자꾸만 신경에 걸렸 다. 그러나 거구의 사내는 팔짱만 낀 채 동산 위에서 팔딱거리며 웃어대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에, 빨리 와요! 내 저택이 보인다고요!" 고향의 바람은 왠지 모르게 시원하다. 나무 사이로 호수를 넘어 보이는 푸른 지붕의 아름다운 저택을 바라보며 시 즈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저게 시즈의 저택?" 직접 실물을 보자 아리에도 좀 전까지의 걱정은 까맣게 잊고 우두커니 서서 물었다. 궁전도 아닌 자그마한 저택의 아름다움에 취하다니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주변의 나무들과 호수들이 어우러져 멜라누 산이 거대한 궁 전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상한데? 오랫동안 주인 없이 방치되었던 저택 주위가 너무 깨끗해." 저택 앞까지 도착한 일행 중 보를레스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을 바라보니 시즈도 이상한 기 색이 역력했지만 그와는 뭔가 달랐다. '레소니‥.' 막 문을 열면 낑낑대며 집안을 치우다가 땀을 훔치며 그녀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들어가 보죠." 찰칵! 문은 기름이라도 칠한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스르르 뒤로 나타나는 저택의 거실. 시즈는 멍하니 넋 을 잃을 만큼 모든 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지막 날 그가 마시고 나갔던 찻잔마저도 탁자 위에 그 대로 놓여있었다. 먼지마저도 쌓이지 않은 게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시즈는 무심결에 옆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시즈?" "후우‥." 붉은 눈을 깜빡이며 물어오는 아리에의 모습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반응에 퍼뜩 놀라서 되물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왜 금발의 소녀 대신에 검은 단발머리 여인의 모습에 안심할 것일까? 갑자기 뚫어져라 시즈가 바라보자 아리에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불안한 듯 흔들리면서도 언제나 자신이 그려져 있는 검은 동공, 바람에 날릴 듯 애처로운 허리에 당당하게 꽂혀있 는 단검들.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도 옆을 떠나지 않았던 여인과의 시간들이 떠오르자 시즈는 의문 대신 미소 를 품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행동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저벅저벅하고 걸어간 그는 1년 반 전,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 아, 들었던 찻잔을 들었다. 막 내온 듯 김이 폴폴 솟는 허브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그는 말했다. "좋은 환영 인사로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2층에서 한 남자가 절제된 걸음걸이로 걸어 내려왔다. 어떤 귀족들보다도 더욱 귀족 같은 모습의 사내는 시즈의 기 억 속에 단 한 명뿐이었다. "지키고 있어준 건가요? 케츠타." "저 뿐만이 아닙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2층 난간 위로 눈이 말똥거리는 머리들이 송송 튀어나왔다. 그들은 무섭게(?) 변한 시즈의 모습 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달려와서 안겼다. "주인님!" "피린? 피린인가요?" 레소니를 빼어 닮은 소녀가 마지막으로 안기는 순간 시즈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물었다. 그 천방지축이던 꼬마악마가 이렇게 크다니‥. 소녀에게 2년이라는 시간은 꽤나 길었던 모양이었다. "응. 제플론의 높은 사람이 와서 주인님이 돌아올 거라고 말해줬어. 히히‥ 주인님이랑 오빠가 없는 동안 우리는 계 속 저택을 치우며 기다렸어."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피린은 눈을 꼭 감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시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금발을 헤 집어놓자 피린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피린이 오빠라고 지칭하는 인물은 틀림없이 레소니일 거라고 생각하자 시즈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문을 열기 전가지의 시즈였다면 분명히 레소니의 거론을 망설였을 것이다. 그 러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린‥. 레소니는‥." "아, 알고 있어. 헤모 사제님께서 오셨다 가셨거든. 오빠가 죽었다니 믿기지는 않지만 주인님을 감싸고 죽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오빠는 정말 주인님을 좋아했거든." 피린이 고개를 떨구고 슬픈 기색을 보이자 그녀를 따르는 꼬마들도 우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피린은 눈물이 완전히 닦이지 않은 눈을 들고 밝게 웃더니 시즈를 잡아끌었다. "자자‥ 어서 가자고, 주인님. 다들 기다리고 있어." 시즈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용히 그들이 하는대로 놔두었다. 이윽고 거실의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움찔했다. 식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던 것이다. 세이탄의 촌장 할아버지, 브라트니를 비롯한 미장이들, 기 대에 찬 눈을 빛내고 있는 여인들과 사내들, 마법원의 수련생인 피르트와 에리나.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하는 생각에 시즈는 잠시 굳어버렸다. 그 때, 우두커니 입구에 서있는 그를 누군가 강하게 밀었다. "어서 들어가라고! 내가 만들어온 따끈따끈한 빵이 식어버리기 전에." "로플레‥." 자칭 빵의 마법사 로플레는 두툼한 이빨을 보이고 웃었다. 그가 오늘을 위해 어젯밤 밤을 새며 밀가루를 빚었다는 하얀 증거가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었다. 로플레는 시즈와 아리에, 보를레스를 테이블의 가운데 앉혔다. 그리고 건배 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 미성년자인 피린 앞의 포도주잔을 뺏아들고 외쳤다. "자아‥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 건배!"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입에 댔을 때 피린은 울상을 지으며 쥬스를 마셨다. 44악장 2화 "아직도 그대로군요." 앞뜰의 땅에서 네 개의 성신석을 꺼낸 시즈는 허리에 메어있던 주머니를 끌렀다. 또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백만 타로운의 가치를 지닌 돌멩이가 그 안으로 굴러들었다. "시즈, 마치 떠날 사람같아." 의아한 표정으로 아리에가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아이처럼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모 습이 귀엽게 느껴져 시즈는 하나 남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온화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피부를 흐른다. 예전이었다면 반대였을 상황, 시즈는 실베니아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변화했다. 처음에는 팔을 잃은 충격 때문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는 연인의 변화에 예민하다고 하지 않는가. 아리에는 시즈의 변화가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임을 알고 있었다. 젠티아는 시즈가 좀더 진정한 바람의 음유술사가 되어간다고 말했지만 아리에는 오히려 불안했다. '바람은 잡을 수 없는 존재‥.' 시즈가 어디론가 떠나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이탄으로 돌아온 이후 많은 학자 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고 갔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즈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에?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야. 시즈, 왜 지금까지는 그냥 두었던 성신석을 꺼내는 거야?" "간단해요‥. 이제는 필요해졌으니까요." 그는 이해할 수 없자 삐친 표정을 짓는 아리에를 손가락으로 달래며 말을 이었다. "바람이 전해주고 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의 이야기를‥. 곧 있으면 알게 될 거에요. 사람들이 올 테니까요." 시즈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예언처럼 그가 말한 다음 날, 제플론에서는 사람을 보내왔던 것이다. 사절의 자 격으로 찾아온 자는 시즈에게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세이서스 후작 각하‥." "시호트 자작 각하, 난 작위를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살풋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즈는 단호하게 말했고 시호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마땅찮은 이'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이 쪽이 더 어울리는 군요." 녹색의 정장을 즐겨 입어 녹색의 자작이라고 불리는 그는 동경하고 선망했던 '마땅찮은 시즈'와의 재회에 진심으로 기뻐하는지 온통 웃음꽃이었다. "아리에, 보를레스를 좀 불러 주시겠어요? 그리고 수도로 갈 차비를 해주세요. 옷은 모두 검은 옷으로‥." 시호트 자작이 성의 전갈을 알리기도 전에 시즈가 아리에에게 말했다. 물론 사절이 왔으니 성으로 와달라는 뜻이겠 지만 시호트는 한순간 유리 같이 투명한 눈동자 깊은 곳에서 시즈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이 변하셨군요." "그런가요? 팔이 하나만 없어도 겉보기에 달라진다고들 하더군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은은하게 퍼지는 미소를 보면서 시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가 아니었다. 전의 시즈는 형태를 갖추고 있던, 물 병에 갖혀 있던 물이라고 치면 지금의 시즈는 바다를 대하는 듯 했다. 어디에도 있으면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그래, 이 사람은 바람 같다.' "우리는 이제 그를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레이모하의 곁에서‥." 장내는 침묵의 도가니였다. 입을 열고 있는 사람은 오직 사제 뿐,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두 손을 꼭 쥐고 사자(死 者)를 위한 기도에 열중했다. 로바메트 공작의 죽음에 이어 환기(環期) 4762년을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해로 자리 매김 시킨 크레오드 페노스톨멘 자작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로바메트 공작이 죽은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막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얼마 전까지 흉폭한 마법과 뒷통수를 치 는 전략으로 그들을 괴롭히던 소년, 로길드 페노스톨멘이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서있었던 것이다.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위로를 보냈고 둘은 마치 사전에 계획이라도 짰던 모양인지 몇 마디를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어딜 봐서도 조문객과 유가족의 모습이었다. '누가 저걸 보고 얼마 전까지 검을 겨누고 싸우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 관이 매장될 때까지 시즈는 로길드의 곁에 서서 걸었다. 로길드가 쉬지 않고 중얼대는 말을 듣고 고개를 연신 끄덕 이며 가끔씩 위로의 말을 했다. '가식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로길드의 마음은 꼬아져있던 실이 풀리듯 풀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즈는 진심으 로 그를 위로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윽고 주니퍼 가지가 태워지고 조문객들을 대표하여 엘시크의 국왕 리페른 에도린이 한 송이의 장미를 페노스톨멘 자작의 가슴에 살며시 놓아두자 관의 뚜껑이 닫혔다. 한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원한을 떠나서 왠지 모를 슬픔이 찾아온다. 관이 지하로 숨고 흙이 위를 덮 었을 때야 로길드의 푸른 눈동자는 한 줄기 가는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나는 '역사의 고리'와 잡았던 손을 놓겠습니다." 밤이 되어 장례의식이 끝나고 조문객들도 모두 돌아갈 무렵, 로길드는 입을 열었다. 의문을 갖을만도 하것만 시즈는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궁금해 못 참겠다는 표정의 아리에와 보를레스를 생각해서인지 로길드 는 말을 이었다. "소중했던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군요. 이렇게 사라질 거면서 할아 버지는 역사라는, 개인으로써는 느껴지지도 않을 굴레를 생각하면 자신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걸까요?" 소년의 질문은 처음부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는 답을 가지고 있는 듯 했으니까. 그걸 알기에 시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 때였다. "세이서스 경." "폐하!" 경악성을 지른 것은 보를레스였다. 이미 갔으리라고 생각했던 국왕이 수풀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니‥. 백색거성 베르니우스의 시종과 기사들이 지금쯤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선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눈치챘는지 리페른은 눈썹 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렇게 하라고 알려준 것은 로길드야. 그렇지 않았다면 시종들의 족쇄같은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알려준 걸까? 일국의 국왕 전신에는 흙과 풀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어린애를 돌보는 어른처 럼 로길드는 그의 몸에서 흙을 털어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폐하,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로길드. 어서 가서 쉬어." 조문객들을 일일이 상대했던 로길드는 리페른의 허락이 떨어지자 피곤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 보던 리페른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들도 앉게. 할 얘기가 조금 길어질 듯 하니까." "황공하옵니다." 시즈 일행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신경에 거슬렸는지 리페른은 말했 다. "그냥 편히 앉으라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시즈의 온화한 말투는 완곡했지만 행동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를 연상시켰다. 말릴 사이도 없이 시즈는 털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당황했지만 할 수 없이 쭈뼛거리며 다리를 펴고 앉았다. "시호트 자작의 이야기를 들었네. 그는 '마땅찮은 시즈는 현자의 눈으로 모든 것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 만 약 시즈, 그대의 예전 모습을 회상하면 반신반의하네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 "약간 고생한 흔적이 몸에 남아서 그런가봅니다." "머리칼이 희어지고 팔이 잘린 정도에 약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곤란하네. 나 같이 평범한 고민은 바보같이 느 껴지지 않나."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타인들의 눈에는 둘다 비슷한 미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아 니었다. '부담스럽다.' 리페른은 눈동자처럼 시릴 정도로 순수한 시즈의 미소가 부러웠다. 그는 시즈에 대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자의든 아니든 간에 헤트라임크의 목은 리페른의 명령에 따라서 잘렸다. 헤트라임크 뿐인가? 사라진 시즈의 팔도 당시부터 이어온 휴우증의 결과였다. 그런데도 밝게 웃고 있다. 역사가들이 '봄의 혈사'라고 이름 붙였던 일을 시즈는 잊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던지 시 즈의 정신적 수양은 범인을 뛰어 넘었다고 판단되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국왕이라는 위치의 운명이 소년에게 참 으로 뻔뻔스러운 말을 하도록 시켰으니까. "시즈, 이 나라를 떠나주게." "‥‥." 생글생글 웃던 리페른이 꺼낸 한 마디. 머리 속에서 해석을 마치자 보를레스는 벌떡 일어났다. 검을 뽑지 않은 것은 모국의 지배자에게 남은 마지막 충의와 예의일 것이다. "당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보를레스‥. 실베니아에서 광풍의 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더군. 축하하네." "시끄러워! 당신은 내 말에 대답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썩어빠진 엘시크의 근위기사단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상 황은 다르지 않을 거야!" 이래서 무식한 사람은 화나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보를레스는 당장이라도 리페른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으르렁거 렸고 시즈는 말릴 생각도 않고 조용히 리페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아리에만 괜히 보를레스를 데려왔다는 후회 로 식은땀을 흘렸다. "대답하지, 광풍의 검사. 내 대답은 '아니다.'야. 나는 세이서스 경에게 부탁할 자격이 없지. 하지만 해야만 해. 세이 서스 경이라면 내 입장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경을 주축으로 한 귀족들과 왕권을 옹호하는 귀족들의 세력 다툼 이 시작되려 한다면 믿겠는가?" "시즈가 권력 다툼 따위에 눈이나 깜짝할 것 같아?"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귀족들은 속이 좁지. 언제나 거지보다도 불안에 떨어대지. 그렇기에 경의 존재가 내게는 부담스러운 거네."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거죠?" 보를레스의 질문에 대한 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리에가 물었다. "역시 귀족들과 학자들이 반발할 테니까." "어떻게 보면 치사하군요." "인정한다. 자아‥ '마땅찮은 시즈', 그대도 대답을 해라." 시즈는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잖아도 북쪽으로 떠나볼까 생각했습니다. 이미 엘시크에는 뜻을 버렸으니까요." 44악장 3화 촤아아∼ 소나기‥ 멀리서부터 비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소나기다. 때문에 비를 맞기 싫으면 여행자들도 열심히 뛰는 게 좋다. "헉헉!" 세 명의 여행자들은 나무 밑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서 젖먹던 힘을 다해서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에 몹시 지쳐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즈. 소나기라는 말은 안 했잖아." "아리에, 어쩔 수 없어요. 소나기가 몰려올 경우에는 비를 품은 바람이 늦게 불어오기 시작해서 제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비구름이 머리 위까지 몰려온 상태라고요." 시즈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리에는 쳇쳇거리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즈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비를 닦으며 그들을 지켜보던 보를레스가 구원에 나섰다. "아리에, 여름철에는 비가 왔다고 하면 장마가 아니면 소나기라고." "나도 알아!" "아는데 왜‥. 아! 세이탄 사람들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와서 화를 내는 거로군. 아니, 그렇게 떠나야 했던 시즈가 걱 정 되서?" "아니야!" 부정은 했지만 아리에의 얼굴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솔직히 시즈가 세이탄에서 나가지 않 으려고만 했다면 국왕도 그를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항의도 없이 짐을 싸들고 나오다니‥. 못마땅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시즈가 수건을 내밀었다. "그보다 어서 비부터 좀 닦아요." "앞으로 마을이 보일 때까지는 닦나 안닦나 똑같아." "걱정 말아요. 앞으로 한 시간만 더 걸으면 마을이 보일 테니까요." "흥!"하고 무시하는 듯 하면서도 아리에는 거칠게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하지만 화난 표정마저도 시즈에게는 색다 르게 보였다. 물기에 젖어 맑은 반사광을 띈 검은 머리카락이 물방울들과 하얀 피부를 흘러내리자 그는 어느 사이 에 넋을 잃고 아리에를 바라보았다. 저게 바로 콩깍지가 씐 인간들의 말로가 아니겠는가. 보를레스가 히죽 웃고는 중얼거렸다. "홀려도 단단히 홀렸군." "보를레스,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니야." 칼날 같은 아리에의 눈초리에 보를레스는 당황한 손짓으로 부인했다. 도대체 여자같은 면이라고는 날이 갈수록 사 라져가는 그녀의 어디가 좋다고 시즈는 꿈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걸까? 보를레스는 땀인지 빗물인지 차게만 느껴지 는 등을 나무에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물기를 거의 닦아낸 아리에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나 온화해서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 이다. 오래된 경험으로 누구의 짓인지 알고 있는 그녀는 주동자의 배려에 고마움보다는 심술이 돋았다. "흥! 이렇게 한다고 해서 시즈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네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시즈는 순순히 긍정했다. 심술을 부리는 아리에가 그에게는 귀엽게만 보였다. 그러자 시즈의 귀여운 그녀는 갑자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돌변해서 말했다. "노래 불러줘." "하아‥ 원래부터 목적은 그거였군." "오랫동안 못 들었는 걸. 듣고 싶지 않으면 보를레스는 다른 곳으로 가버려." "다른 곳으로‥?" 보를레스는 주위를 휭 둘러보았다. 어딜 보아도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포기하고 아리에에게 항 복을 표했다. "난 조용히 있을게." 아리에는 이렇게 일행에서의 절대자라는 위치를 공고히 했다. "시즈, 넬피앙을 연주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무리겠죠." 짐에서 꺼낸 넬피앙을 다리에 올려놓고 시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따랑∼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따랑∼ 계절을 적시는 비가 내려‥. 이리저리 분주한 거리‥. 슬슬 걷기로 했어. 그냥 맞아보려고‥. 니가 좋아했던 비잖아‥. 잊을 만 하면 또 넌 어느새‥. 추억 속에 나를 떠밀고‥. 이젠 포기해야지 너를 지운다는 건‥. 내내 소용없었잖아. 시간이 흐르면 다 잊혀지는 빗물에 떠가는 약속들‥. 우린 왜 다시는 만나진 말자는 약속 그것만 지키며 살아가나 추억은 추억으로 머물 때 아름답다 믿어왔지만 후회하게 된대도 이런 비오는 날엔 너와 다시 걷고 싶어 - 유리상자, 비오는 날엔 - 슬픈 듯 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조가 한 번씩 튕겨지는 넬피앙의 맑은 소리를 감싸며 빗소리에 섞이자 두 명밖에 없 는 청취자의 마음 속까지 비가 내렸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비를 맞고 싶은, 아니 이미 맞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에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에서 생각했다. '시즈와 함께라면 비를 맞아도 후회하지 않아.' 벌떡 일어서서 그녀는 비를 향해 뛰어나갔다. 화를 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녀의 연인은 팔을 잃고 자신의 나라 에서 외면당했어도 저렇게 웃고 있는데‥. 아리에는 비가 시즈의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크게 외쳤다. "시즈, 우리 악단을 만들자! 악단의 이름은! '실리미엔 에이아!'" "실리미엔 에이아?" 보를레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반문했다. 뜻이 어떻게 보면 정말이지 광오했기 때문이다. '실리미엔 에이아', '마땅찮 은 이'의 뜻을 가진 시즈의 이름처럼 고대어인 그것의 뜻은 바로‥. "그래! 유혹하는 여신과 같이‥!" "흐음‥ 좋군. 재미있겠어." "그렇지?" 확실히‥. 감미로운 시즈의 목소리에 맞춰 하늘하늘하는 춤을 추는 아리에의 모습은 유혹하는 여신 같았다. 곧 보를 레스도 비속의 댄스를 시작하면서 유혹이라기보다는 광란하는 남녀처럼 보였지만. 45악장 1화 대륙 남쪽에서는 반란과 위대한 귀족의 죽음 등, 시끄러운 일들이 빈번할 동안 북쪽은 조용하다. 이유라고 치면 북 적거리는 도시가 적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란 많이 모일수록 불협화음을 내는 존재들이니까. 그렇다고 하여 인간 자체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얼마든지 아름다운 음률로 노래할 수 있 는 자들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자네, 자네들었나?" "뭘 말이야?" "실리미엔 에이아가 옆에 로지 마을있지? 거기에 왔다더군." "요즘 들어서 이름 높은 음유악단을 말하는 건가?" "그래! 자네도 소문을 들은 모양이로군." "그 악단의 이름처럼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춤을 춘다지? 유혹하는 여신처럼 말이야." 외팔이 청년의 단음 연주는 화려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와 겹쳐지면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운 배경음으로 되어 준다. 신비로운 은색의 머리카락처럼 청량하고 그 투명한 눈동자처럼 맑은 목소리. 그는 책을 읽는 듯하면서도 박자를 주어 나직하게 말하는 어조가 마음을 흔들어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저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넬피앙 을 튕기는 청년의 선율에 묶여버린 여신일까‥ 소녀는 기다란 옷자락을 흘리며 표홀한 춤을 춘다. "와아!" 텅빈 들판을 무대로 삼고 시작했던 공연이 끝났을 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박수를 치면서 그들은 노래와 춤에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어요. 다음에도 또 오겠죠?" "정말이지 여신이 현신한 것 같았어!" 어떤 노인네는 죽기 전에 여신을 보았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초원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악단은 사람이 없는 자리 에서 공연을 하기로 유명했다. 어느 자들은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노래를 들은 사 람들은 말한다. "실리미엔 에이아는 한 사람을 두고 공연하는 거야. 한 사람만을 위해서 말이야." 척 보기에는 뭍 여행자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은 어느 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 다고 한다. 그렇기에 실리미엔 에이아의 공연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연 뿐이라고 소문은 전했다. 돈이 많은 귀 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음유악단을 무슨 수로 초청할까. 한 음유악단의 소문은 천천히 초원의 구름을 따라서 사막의 나라, 볼케이스로 퍼져나갔다. * * * "시즈, 그 쪽에 있는 수건 좀 줄래?" "음‥. 여기요." 한바탕 춤을 춘 후에 아리에는 언제나 목욕을 한다. 그 때의 반경 100m 안에 들어올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이는 오 직 시즈 뿐. 시즈도 시중을 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을 모두 닦은 그녀가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띄고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아직도 춤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였다. "보를레스는 다음 마을을 어디로 정했대?" "아뇨. 한동안 여기에 머물 생각이던데요."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그랬잖아!?" "음식이 제일 맛있데요." 시즈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리에를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시즈의 장난에 순간 아리에는 당황하여 비틀거렸지만 이내 춤을 출 때의 유연한 몸짓으로 균형을 바로 잡고 눈을 세웠다. "치사하게!" 시즈가 미소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아리에는 바로 반격했다. 밀고 당기고를 반복하며 깔깔대고 있을 때, 굵직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시즈, 로지의 촌장님께서 닭구이를 직접 사주신다는데 안 갈 거야?" "아! 가요!" 보를레스의 말은 시즈의 잘 잡힌 균형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기회를 노린 아리에의 밀침에 열심히 그녀를 끌어당기 고 있던 시즈는 뒤로 발랑 넘어졌다. 풍덩! "하하하핫! 시즈, 여자한테 지다니 꼴불견이야." 보를레스가 웃음만 남기고 사라졌을 때, 아리에가 손을 내밀고 새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즈, 솔직히 말해. 날 속일 생각하지 말고‥. 보를레스가 여기서 머물 생각을 한 이유가 뭐지?" "헤헤헷‥. 제가 그러자고 했죠." "닭구이의 유혹에 넘어갔구나?" 그제서야 시즈는 아리에가 내심을 모두 꿰뚫고 있었음을 깨닫고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먼저 걸어가는 보를레스 가 중얼거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저 놈, 완전히 공처가되겠네." 그 날 이후로 시즈 일행은 로지 마을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별빛조차 길을 잃는다는 '별의 미궁'이 가까웠기 때 문에 실리미엔 에이아의 소문이 퍼져도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이 맛있다는 이유가 첫 번 째였다. 촌장에게 닭구이를 대접받은 이후 잠시 머물 생각이었던 보를레스와 아리에도 아예 자리를 잡기로 마음을 굳였을 정도였으니‥. 여러 가지 힘든 사건을 겪었기 때문인지 모두가 사람들이 뜸한 별의 미궁 근처에 집을 지었다. 로지 마을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시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원래 방향치라서, 굳이 별의 미궁이 아니더라도 길을 잃습니다." 지상에는 바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었고 별의 미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치기의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하는 숲도 시즈에게는 다른 숲이나 다를 바 없었다. 숲에 가득하다는 몬스터들도 보를레스가 있었기에 문제없었다. 광풍의 검사로 대륙에 이름을 떨친 그에게 있어서 좋은 연습상대만 되어줬을 뿐. 가끔 그가 감당하기 힘든 무리일 때는 시즈와 아리에도 가담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들의 집은 별의 미궁에 있어서 성역이나 다름없는 자리로 굳어버렸다. 45악장 2화 "보를레스 씨, 시즈씨까지 오다니 놀랍군요." "볼란 할아버지의 닭굽는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겠죠." "허헛! 시즈군, 이 노인네의 요리를 인정해주다니 특별히 넙쩍 다리를 주지." 시즈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평소에 시즈는 왠만하여 마을로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서 뭔가를 만들며 꾸물쩍거리다가 한 번씩 실험을 해보러 나오는 게 다였다. 이번에도 역시 요리의 음미라는 이유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퀴 달린 의자는 뭔가? 특이하게 생겼군." "자전거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뭔가를 실험하러 나온 게군." 볼란은 서운하면서도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즈가 가끔씩 들고 나오는 물건들은 그로서는 본 적이 없는 신기한 것들로서 가끔씩 실리미엔 에이아의 노래를 듣기 위해 찾는 방문객들도 감탄하는 좋은 관광상품이 되어 주었기 때 문이다. 이번 것은 사람만큼이나 커서 관광상품으로는 부적절했지만 반대로 호기심도 자극했다. 볼란 외에도 보를레스와 아 리에도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에 시즈는 빙그레 웃으면서 자전거에 올라탔다. 페달에 발을 놓고 힘을 주자 서서히 앞으로 굴러가는 바퀴를 보며 볼란과 보를레스는 점점 커지는 입을 주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오오‥. 간다, 간다!" 한 5m를 갔을까? 시즈는 문득 자전거를 멈췄을 때, 그들은 한결같이 원성을 내뿜었다. "아니, 잘 가는데 왜?" "엉덩이가 아파요. 역시 고무나무를 구할 수 없어서 타이어를 만들지 못했더니‥." "안장에다가 쿠션을 넣어보는 건 어때?" 어느 새인가 시즈보다도 더욱 자전거에 열을 올리는 아리에와, 볼란. 보를레스는 그들을 가리 키며 시즈에게 말했 다. "연장을 직접 쥐어 줘도 저렇게 말할 지 의문이로군." 하지만 노인과 여인의 의견은 참조되어 3, 4일이 지나서 다시 마을에 나왔을 때, 시즈는 자전거를 탄 상태였다. 빠 른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걸어가는 것보다야 편하고 나아서 그가 자전거를 타고 나갈 때면 언제나 뒤에서 아리 에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했다. 시즈에게 있어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의 애절한 표정은, 자전거에 안장을 하 나 더 달아놓고야 말았다. "꺄하‥." 덜컹거림은 오히려 즐거움이었을까. 아리에는 시즈의 등에 매달려 어린아이처럼 웃어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재미 있게 보여 로지 마을의 아이들은 시즈가 지나갈 때면 태워달라고 졸라댔고 아리에는 울상을 지으며 비켜줘야 했다. 물론 그녀를 달래는 것은 시즈의 몫이었다. "맨날 아리에 양을 달래느라 고생하지 말고 아이들 것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떤가?" 촌장의 말에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제동(璪)장치가 없어서요. 내리막길에서 타기라도 하면 매우 위험합니다." "타지 않게 주의를 주면 되지." "말은 모든 행동의 책임을 질 수 없는 법이죠." 시즈는 빙그레 웃었고 볼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의 웃음과 다를 바 없이 청년의 웃음은 헤프 지만 파고 들어갈 곳 없이 강한 의지를 따로 품고 있었다. 평화롭게, 아주 평화롭게 생활하던 것도 좋지 않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 법, 하루는 쓸쓸하게 마을거리를 거닐고 있 는 보를레스를 불러 볼란이 말을 걸었다. "자네는 왜 혼자서 궁상을 떨고 있나? 외로우면 인연을 찾는 게 어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혹시 로지의 처녀인가?" 볼란은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얼마 전에 습격해온 몬스터 무리를 베어버리는 보를레스의 검술은 마을의 처 녀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이다. 별의 미궁에서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은 로지 마을에서는 그만큼 강한 남자가 인 기였다. 촌장의 입장에서도 볼란은 보를레스 같은 검술가가 있다면 로지 마을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었 다. "아닙니다. 그녀는 아스틴에 있지요." "아스틴에? 국경 너머에 있다고 하니 그리워 할 만도 하겠군. 만난 지 얼마나 되었나?" 보를레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모르겠습니다.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 전이었던 것 같군요. 하지만 그녀가 바로 옆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다가갈 수 있을지 걱정디 됩니다." "허허허‥. 뛰어난 검사인 그대가 다가갈 수조차 없다니 누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군." "저도 그래서 안도가 됩니다." 애수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웠던가. 보를레스는 처진 어깨를 하고 다시 시즈와 아리에가 기다리는 나무오두막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청년 하나가 경사라도 났는지 춤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달려왔다. "이보게, 안딜. 무슨 일인데 흥분하다가 쓰러질 지경인가?" "보를레스 씨, 보를레스 씨‥. 실리미엔 에이아의 노래를 들을려고 아스틴에서 손님이 왔어요." "네네, 오늘 공연은 저녁 때라고 전해주세요." "보를레스 씨, 그런데 손님이 시즈님과 보를레스님을 아시는 듯 했는데요? 메네이나라는 소녀와 유레민트라는 엘프 아가씨가‥." 안딜은 갑자기 광채를 띄는 보를레스가 땅에서 솟아난 듯이 눈앞으로 돌아오자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보를레스는 힘을 주어 말했다. "어디에 있어!?" ‥안딜은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액체에 하체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이 걸어왔던 방향을 가리켰 다. 그리고 보를레스가 사라졌을 때, 울먹였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45악장 3화 보를레스는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축 처져 걸어가던 이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울 지 경이었다. 그가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아스틴에서 왔다는 사절 일행 모두가 새로운 인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를레스!" "네메이나?" 왠 아름다운 소녀 하나가 달려오며 이름을 부르자 보를레스는 의아했다. 엉겁결에 생각나는 이름을 외치기는 했지 만 기억 속의 '네메이나'는 지금의 소녀처럼 우아하지도 기풍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부정도 하지 않고 달려 와 긍정하듯 그의 품에 안겼다. "보를레스, 많이 컸네?" "역활이 바뀐 것 같지 않아?" 반문하면서 보를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말괄량이 네메이나가 이렇게 어여쁜 숙녀로 변신을 하다니‥. 천천히 걸어오는 유레민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보를레스." "아, 그, 그렇군요. 여, 여전히 아, 아름답습니다." 더듬더듬, 완전히 토마토처럼 변해서 손짓발짓하는, 기이한 보를레스의 모습에 네메이나는 뭔가 알았다는 듯 이채를 발했다. 다가오던 유레민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 엘프니까요. 그런데 어디 몸이 편찮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보를레스는 혹시‥." 생글거리며 입을 여는 네메이나. 보를레스는 순간 불길한 예상에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어, 어서 가시죠. 시즈가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하지만 음악회는 저녁때라고 하던 걸요!?" "아, 아, 네. 그, 그러면 그, 그, 그, 그 때 보죠." 뻣뻣하게 보를레스는 몸을 돌렸다. 굳은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사내를 바라보며 유레민트는 네메이나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네메이나는 이유를 아나요?" "훗‥. 글쎄요." 귀족집 소녀처럼 고아하게 차려입은 그녀였지만 눈웃음만은 산적 시절, 그대로였다. 만약 그녀의 웃음을 보았다면 보를레스는 몸서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고 유레민트만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네메이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옷, 옷, 옷!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마을을 벗어나서 숨이 차도록 오두막으로 달려온 보를레스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옷장을 뒤져가며 난리법석을 떨었 다. 검술을 수련할 때처럼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으며 거울에 포즈를 잡아보는 그를 보며 아리에는 시즈에게 물었다. "보를레스가 왜 저러지?" "하하, 그에게도 떠나갔던 봄이 오려나보지요." "흠‥." 턱을 한 번 쓰다듬은 아리에는 갑자기 장난기를 가득히 얼굴에 띄우고 보를레스에게 걸어갔다. "보를레스, 옷을 고르는 모양인데 내가 골라줄까요?" "괜찮아! 나도 할 수 있다고!" "그래요? 혹시 여자한테 잘 보일 거면 같은 여자가 골라주는 게 나을텐데‥." 보를레스는 역시 아리에의 꾀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 아리에는 한 때 귀족이기도 했으니까. 기풍 있는 옷차림을 골라줄 거야.'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은 판단을 했었는지 후회했다. 아리에는 들고 나온 옷을 보를레스에게 입히고 말했다. "아주 좋아! 보를레스한테는 이런 옷이 제일 잘 어울려요. 여자들도 맥을 못출 걸." "저, 정말로 여자는 이런 옷을 좋아해?" "물론이지.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아니면 몰라요." 손가락을 꼽고 진지하게 말하는 아리에와는 달리 나무 밑에 앉아서 연주할 곡목을 고르고 있던 시즈는 웃음을 참느 라 아주 고생인 눈치였다. 끅끅대며 대며 언덕을 굴러가는 시즈를 무시하는 아리에의 진중한 표정에 보를레스는 다 시 한 번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이윽고, 공연 시간이 되어 호객꾼을 맞고 있는 보를레스가 나타날 시간이 되자 로지 마을의 사람들은 슬슬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귀족 방문객 중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유레민트 일행이었다. 행여라도 무슨 실례 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큰 벌을 받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보를레스가 어두운 나무 사이에서 보를레스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풋하고 웃음을 토했고 잠시 후에는 깔깔대고 웃어댔다. 네메이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수풀쪽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나간 듯 했고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사람은 유레민트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 또한 재미가 있는지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우하하하핫! 그게 뭐야? 보를레스! 입을 옷이 없어서 팬더의 복장이라니!" 사람들이 웃어대는데도 비롯하고 보를레스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전의 보를레스의 인형 같은 걸음은 상상이 가지 않는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가면이나 분장은 얼굴을 가려준다는 이유로 또다른 성격을 이끌어 낸다. 팬더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보를레스는 우렁차게 말했다. "그럼 실리미엔 에이아의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멋진 목소리군."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유레민트를 수행하고 온 귀족 기사나 수행원들도 감탄했다. 하지만 끝에는 작은 피식거 림이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게 더 우껴. 푸후후훗!" 웃음을 무슨 행진곡으로 아는 걸까? 보를레스는 유레민트에게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유레민트님, 이름높은 학자이자 숲의 귀족인 그대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이 우스꽝스러운 삐에로에게 주시겠습니 까?" "물론이지요." 사람들은 모두 고결한 유레민트의 손이 팬더의 두툼한 팔을 잡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안 어울리는 커플이 있다니! 그러나 엘프는 주위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 종족이었고 유레민트는 특히 그랬다. 그녀는 사람들에 게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나온 보를레스의 팔에게서 무척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온몸을 기댔 다. 몽클몽클한 유레민트의 감촉에 보를레스는 내심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와아아아앗!' 사람들을 뒤에 두고 팬더 한 마리가 별의 미궁으로 걸어 들어간다. 얼굴이 붉어진 그대, 그대의 이름은 '핑크 팬더.' 45악장 4화 사실 보를레스도 별의 미궁에 잘못 발을 딛으면 헤맬 수밖에 없다. 그가 자연스럽게(?) 뒤뚱거리며 길을 안내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볼을 쓰다듬는 따스한 바람이 숨어있었다. '고맙다, 시즈.' 사람들은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갈수록 두려워졌다. 음악회가 열릴 때마다 방문하는 마을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렇기에 그들은 앞사람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달라붙었다. "밀지 마!" "하지만 뒤에서 미는 걸요." 소란스러운 것도 잠깐이었다. 보를레스가 거대한 덩치를 휙 돌리며 겁을 줬던 것이다. "별의 미궁에서 떠들면 몬스터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 곳의 몬스터들은 매우 크죠. 왠만한 기사들도 당하지 못 해요." "흥! 네가 제대로 된 기사들을 보지 못해서 그렇겠지." 발끈한 유레민트의 수행기사가 말했다. 그는 귀족 출신의 기사였는데 미모의 엘프 학자, 유레민트를 좋아하여 출신 에도 불구하고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보도듣도 못한 팬더 한 마리가 나타나서 그가 꿈에서조차 흠모하 는 유레민트의 흰 손을 덥썩 잡은 것이다. 분노할 만 했다. 옆에서 기사의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인형 옷이나 뒤집어쓴 광대가 진짜 검사를 보았겠어?" 만약 그들이 글로디프리아에서 제뷔키어를 들고 싸우던 보를레스를 보았다면 당장에 바늘을 들어서 자신의 입을 꿰 매 버렸을 것이다. 낄낄대고 웃어대는 두 기사들과 수행원을 흘깃 보며 보를레스는 생각했다. '저들은 나의 모든 것을 아니지만 한 가지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규정을 해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진실된 모습은 얼마나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부정적인 모습보다 결코 많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함부로 판 단하지 않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가 기분이 나빠한다고 느꼈을까? 그의 주름살을 목격한 유레민트는 커다란 나무 뿌리를 뛰어넘으며 지나 가는 말투로 말했다. "별의 미궁은 옛날부터 유명하죠. 사막은 생명이 살 수 없어 불모지가 되었지만 별의 미궁은 생명의 활동이 너무 활발해서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저희 엘프들도 원래부터 이 곳에서 살던 자들이 아니라 면 들어오기를 꺼린다는 숲이에요. 보를레스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길 바래요." "하하핫! 유레민트님, 저희들을 믿으십시오." "예! 유레민트님, 적어도 발마즈님은 아스틴 궁정 기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기사입니다. 걱정마십시오. 하하핫!"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숲을 따라서 메아리쳤다. 하하핫! 하하핫! 쿠하하핫! 쿠라라라! 쿠롸롸롸!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굵고 흉폭하게 들려오는 메아리에 기사들을 비롯한 일행은 흠칫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보를레스가 말했다. "이런‥. 고케이소트의 잠을 깨운 모양이군요." "고케이소트? 고케이소트라면 전설상에 남아있는 호랑이잖아요? 크기만 5m에 달한다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입 니까?" "호랑이뿐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메뚜기도 사람보다 큽니다. 주위의 나무들을 보시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아스틴에서 온 손님들은 이상한치 만큼 굵은 나무뿌리에서 천천히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그들은 곧 얼마 나 위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알았다. 어두운 데다가 앞만 보며 몰랐던 나무의 높이는 지켜든 등불의 빛이 닿 지도 않을 만큼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껄껄대던 입이 굳어버린 기사들을 보고 보를레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기사님들의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면 고케이소트는 절대로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요." "그, 그렇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는 게 안전하지 않은가! 유레민트님을 위험한 곳으로 모실 수는 없어." 발마즈가 다급하게 말했다. 누가 위험한 사태를 유발시켰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보를레스는 어둠에 비웃음을 숨기 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도 별의 미궁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팬더 복장의 멱살 부분이 찢어질 듯 늘어났다. 하지만 가죽일 뿐 보를레스는 바위처럼 서서 발마즈를 노려보았다. 가죽이 상할라 팬더가 손을 툭 치자 발마즈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섰지만 이미 망신살은 뻗 칠 대로 뻗친 후, 그는 다시 소리쳤다. "이 광대 녀석을 그냥!" "쉿!" 유레민트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바람소리를 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발마즈를 노려보며 입에 손가락을 댔다. 등불의 빛에 걸려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늘어지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보를레스는 유레민트의 귀에 대고 쉴 새 없이 소근댔다. 발마즈는 이가 갈릴 지경이었지만 워낙 시선이 많았음으로 잠자코 분노를 억눌렀다. '두고 보자! 이 팬더 녀석! 기회만 되면 아주 회를 쳐주마!' 발마즈 마음 속의 외침을 보를레스가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알겠나요?'하고 유레민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바람을 따라가라는 말인가요? 약간 따뜻한 기운의?" "유레민트는 엘프니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유레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를레스가 속삭여 알려준 바람의 기운은 조금만 주의하면 잡아내기는 쉬웠다. "그럼 보를레스님은요?" "전 흉폭한 고양이 한 마리를 잠재우고 와야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더 자야할 시간이니까요." "조심하세요." 보를레스는 물끄러미 유레민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엘프로는 아스틴네글로드에서 유일하게 현자의 이름을 가 지고 있는 여성의 동공은 헤아리 없을 만큼 깊었다. 다만 그나마 그가 기뻤던 것은 그녀의 깊은 심연 속에서 걱정 이라는 감정이 일렁거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여러분은 유레민트님을 따라서 가주십시오." "도망치려는 거냐?" 못마땅한 눈초리로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를 주시하던 발마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장검이 빼들려 있었다. '저런, 저런‥.' 로지 마을 사람들의 안색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이유가 뭐든 간에 귀족이나 기사의 심기를 거슬려놓고 사지가 무사 하기는 힘들었다. 특히나 발마즈는 그들이 보기에도 보를레스에게 시비를 걸기 위한 틈을 잡고 있었다. 로지 주변에 서는 보를레스가 몬스터를 잡으며 명성을 떨쳤다고 해도 마법 왕궁의 정예 기사들을 당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서 빌어야 해‥.'라는 주위의 시선을 배반하고 보를레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 걸음씩 걸어가 발마즈 앞에 섰다. "네가 지금 날 비웃는 거냐?" 번쩍 치켜든 발마즈의 장검이 가소롭게 빛났다. 분노로 가닥가닥 끊겨있는 동작이 보를레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냉큼 날아든 보를레스의 수도(手刀)가 그의 목을 강타했다. "크윽!" "참으로 귀찮은 기사나리군." "죽고 싶은 거냐?" "어서 유레민트님이나 따라가십시오. 기사나리들, 별의미궁은 귀족들이라고 길을 따로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유레민트와 로지 사람들은 벌써 꽁무니만 보이고 있었다. 발마즈는 서둘러 뒤따라가며 뒤를 보고 한 마디 하는 것 을 잊지 않았다. "두고 보자!" 그들마저도 사라지자 보를레스는 낄낄대고 웃었다. "시즈 녀석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 본 것뿐인데 정말 효과가 좋군. 그런데 시즈는 언제나 '전 정중하게 말하는 건데 요.'라는 우끼는 주장을 한다니까. 괜히 마땅찮은 사람으로 소문난 줄 아나."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웃음을 멈춘 그는 조용히 팬더 복장에 숨겨져 있던 제뷔키어를 빼들었 다. 고케이소트의 잠을 깨운 이상 부딪이지 않고서는 저택까지 갈 수 없었다. 차라리 뒤에 남아서 뒤처리를 하는 방 향이 애꿎은 피해가 없으리라. 자신 있게 자세를 잡은 보를레스였지만 어둠 속에서 광채의 개수를 세고 볼을 긁적였다. "한 마리가 아닌가? 도대체 몇 마리를 깨운 거야?" 45악장 5화 한 입에 거구의 보를레스를 삼킬 수 있는 고케이소트는 상대하기 어려운 동물이었다. 적어도 별의 미궁에 자리를 잡을 무렵, 보를레스는 고케이소트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 절절맸다. 보를레스의 담력검술은 인간의 리듬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호랑이의 순간적인 순발력과 파괴력은 인간에 비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는 적. 어.도.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재 보를레스의 실력은 실베니아에서의 그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크와‥!" 가장 앞에 있던 한 마리는 포효를 마치기 전에 이미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방금 전의 일격은 바위도 말끔하게 반으로 갈라놓을 검이었으니 호랑이 머리가 단단해봤자 소용없었다. 먹이감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움직이는 기척 이 느껴졌을 때 이미 동료가 죽어버리자 다른 한 녀석은 당황했다. 먹이사슬의 관계가 바뀌었는지 보를레스가 고케이소트에게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기척을 느꼈을 때는 옆구리 근처 에 긴 자상이 남은 후였다. 동물 본연의 감각이 없었다면 허리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잘라졌을 것이다. "크르르‥." 꽁무니를 감추는 게 좋다. 고케이소트는 땅으로 피한 즉시 나무 뒤로 피했다. "안되지! 네가 돌아가면 무리가 단체로 몰려올 수도 있거든." 제뷔키어에서 흰색의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그리고 고케이소트가 숨은 나무 앞에 보를레스가 도착했을 때 아지랑이 는 눈부시게 달아오르며 제뷔키어를 감쌌다. "하앗!" 소리는 없었지만 검광이 남았다.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는 섬광이 앞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양 나무를 통과해서 길 게 뻗어나갔다. "흠, 아직 부족해. 이래서는 젠티아의 사일린-검기술(劍氣術)-을 뚫을 수 없어." 그의 눈에는 거대하기만 나무가 검을 든 젠티아로 보였던 모양이다. 상대로 취급받지 못한 고케이소트는 이미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보를레스, 늦었군요. 걱정했습니다." "이런‥. 내가 언제부터 시즈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못미더웠지?" "그럼 언제 미더운 적은 있었습니까?" 확실히 시즈의 말투는 은근히 마땅찮은 기운을 풍긴다. 보를레스는 숲에서 했던 흉내가 원조의 반도 따르지 못했음 을 깨달으며 이를 갈았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보를레스가 없는데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엥!?" 그 때, 분장을 끝낸 아리에가 천사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흰옷에 안이 비치는 흰 가운을 입을 그녀의 아 름다운 모습에 시즈가 미소를 지었다. "보를레스, 왔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 아리에는 손에 색다른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입으면 제법 우스꽝스럽게 보일 복장에 보를레스는 턱을 쓰다듬 으며 물었다. "그걸 입을 거야? 색다른 복장이네. 특별한 손님이 오셔서 그런가?" "아니, 입을 게 아니라 입힐 건데‥." 왠지 불길한 한 마디였다. 아리에는 삐에로의 복장을 보를레스에게 건네며 덫붙였다. "어서 입어. 특별한 손님이 오셨잖아!?" 보를레스의 눈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시즈 일행이 사는 나무 오두막의 뒷문은 등장무대로 하기에 딱 알맞다. 원래 목적도 무대용이었으니까. 커다란 뒷문 에 조금 밀리며 울긋불긋한 복장과 화장을 한 거구의 삐에로가 빠져나왔을 때, 앉아있던 관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네메이나는 사내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부들거렸다. 유레민트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숙녀의 몸가짐을 단정히 가꾼 그녀였지만 과거 함께 지냈던 보를레스의 망가진 모습은 참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대체 그게 뭐야?" 보를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하면 그는 완전히 삐에로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무언가를 되기 위해 집중 하는 정신은 검술에 있어서도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삐에로가 덩치에 안맞게 낑낑대며 문을 열자 다시 한 번 폭소가 일었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은백의 머리를 날리며 나타난 시즈와, 백색의 옷을 입은 흑발의 소녀가 등장하 자 좌중은 바람소리도 없이 고요해졌다. 디리링‥. 바위 위에 오른 시즈가 넬피앙을 건드릴 때마다 아리에는 그의 손가락에 반응하듯이 산들산들 춤췄다. 때로는 인형 처럼‥ 때로는 바람냄새 풍기며 흔들리는 잔디의 한 가닥처럼‥. 유레민트는 손등으로 네메이나의 턱에 문질렀다. 손에는 손수건이 걸려있었다. "침 흘리지 말아요, 네메이나." "아!" 아리에의 춤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은 여운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동결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삐에로였다. 허리춤에서 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을 꺼낸 삐에로는 검을 하늘 높이 지켜들고 과장된 움직임으로 춤을 췄다. "와하하하핫! 완전히 뒤뚱뒤뚱이로군. 저렇게 웃긴 칼춤은 처음이야!" "조용히 있어!" "아니, 왜 그러십니까? 발마즈님. 혹시 삐에로가 무례했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셨던 게 아직도 앙금이 남으신 모 양이군요. 잠시 후에 저희들이 나서서 혼을 내주겠습니다." 발마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삐에로를 바라보았다. 과장되었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검술이 이 어지고 있음을 알아챈 기사는 오직 그 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보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삐에로의 검술은 상승의 기술이었다. '저 칼춤 앞에서 난 한 호흡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과장되었던 삐에로의 춤도 시즈의 넬피앙 곡조가 부드럽게 바뀜에 따라서 변화했다. 물결치듯 날쌔면서도 한없이 부드럽다. 검 끝을 따라 가다보면 동선의 화려함에 넋을 잃는다. 네메이나는 얼른 손수건을 유레민트에게 내밀었다. "유레민트, 침 닦아요." "아!? 네!? 아! 네." 뒤늦게 놀라 화들짝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는 유레민트의 얼굴은 때이른 단풍처럼 붉었다. 45악장 행복에 고용됐습니다. 6화 "약혼‥? 그것도 왕자와‥?" 삐에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유레민트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금 전에 침을 흘린 이후에는 조심하려고 무척이나 애썼는데‥. 그 날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네메이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삐에로에게 보냈다. 하지만 삐에로는 미소의 의미를 절대 알아채지 못했다. 자신의 물음에 대한 무언의 긍정이라고 판단한 그는 한 마 디를 더했다. "어떤 왕자인지 불쌍하군." "네메이나는 현재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계열에 들어온 상태에요. 배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요. 곧 학자들 사이 에서도 인정을 받을 거에요. 물론 마땅찮은 시즈 정도는 될 수 없겠지만‥." "유레민트님께서 후견인으로 있는 이상 왕자의 배필로 손색이 없겠군요." 시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3년 전, 산적 노릇을 하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의 앞에 앉아있었다. "데미노머는 실리미엔 에이아를 왕궁으로 불러오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오지 않을 것 같더군요. 아니었다면 이런 시 골에 자리를 잡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용케도 찾아왔군요." "마음 속에 남아있는 미련을 지우고 싶더라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네메이나가 대답했다. 털털한 모습이 예전의 그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 껴졌다. 배시시 웃는 아리에에게 눈을 향한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잘 지워진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을 로지로 데려다준 이후에도 그들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아서 밤을 지샜다. 누군가는 자장가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다른 이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새벽이 밝아오고 아스틴의 일행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아리에는 하품을 길게 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지 시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저것 좀 봐. 아핫!" "우, 웃지 말라고!" 아리에가 재밌어 하는 것은 바로 보를레스였다. 삐에로의 품이 그리도 포근할 걸까? 그의 양옆에는 네메이나와 유 레민트, 두 여인이 편안한 표정으로 기댄 채 잠들어있었다. 가운데서 보를레스는 어쩌지도 못한 채 자세를 뻣뻣하게 고정하고 행복하다면 행복한 경련을 눈가에 일으켰다. 아침은 분주했다. 하지만 학자의 눈을 빠뜨리겠는가. 유레민트는 창고에 있던 자전거를 발견하고 호기심에 차서 물 었다. "이건 뭐죠? 안장과 바퀴가 있는 거로 봐서 타고 다니는 것 같은데‥." 대답 대신 시즈는 보를레스에게 그녀를 태우고 집 앞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동그랗게 뜬눈으로 유레민트는 귀를 쫑 긋거리며 환호성을 작게 흘렸다. "와아‥." "조금 불편하지 않았나요? 원래는 저와 아리에가 타려고 만들어 둔 거라‥. 저희 다리가 좀 짧잖아요." "아니에요. 신기한 발상이군요. 페달을 밟아서 바퀴를 움직이다니‥." "운동도 되고 좋지요." 다른 이들도 흥미로웠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전거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시즈는 그들이 한 번 타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말을 타는 것과 자전거는 틀리다. 기사들도 중심을 못 잡아서 쓰러지기를 반복했 다. 오히려 조심성이 깊은 여자들이 금방 배웠다. "토루반이 전에 이런 말을 하신 적 있어요. '언젠가 시즈가 재미있는 걸 만들거야. 그러기 위해서 목제 다듬는 법을 가르쳤으니까.'라고 하셨는데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선견지명이네요." 아리에의 말과 함께 여인들은 꺄르르 웃었다. 그에 비해서 한 번도 제대로 중심을 잡아보지 못한 남자들은 수풀 쪽 에서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발로 땅을 조금씩 밀어보고 있었다. "하루동안 잘 지냈어요. 가슴 떨리는 노래와 황홀해지는 춤, 그리고 행복해지는 웃음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리미엔 에이아!" 유레민트가 내미는 손을 보를레스가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잡았다. 그녀의 얼굴도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고개 를 숙인 보를레스는 보지 못했다. 그 때, 시즈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유레민트." "예?" "학자라는 일은 즐거우십니까?" "묻는 이유가 뭔가요?" 유레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묻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당신이 쾌활하게 웃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3년 전에도 말이죠‥. 하지만 어제는 보았던 것 같 습니다." "그, 그랬나요?" 아스틴네글로드 최고의 언변가 중 그녀가 말을 더듬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보는 시즈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리미엔 에이아에 한 사람이 부족해서요‥. 알다시피 제가 한 팔이 없지 않습니까? 넬피앙을 연주해줄 사람이 필 요해요." 그제서 유레민트를 비롯한 아스틴 사람들은 시즈가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유레민트를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 다. 기사단은 슬그머니 비웃었다. 아스틴네글로드에서도 일곱 현자로 이름높은 유레민트다. 겨우 방랑악단 사이에 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즈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금발의 머리카락에 길게 솟아오른 귀를 가진 여인의 넬피앙이 아니라면‥ 춤을 추지 않을 것 같네요." 말을 끝내고 나서 시즈는 보를레스에게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유레민트가 조용히 돌아섰다. "정말인가요? 삐에로." "아, 예, 예!" 아리에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탄했다. '아, 예, 예.'라니 게다가 반쯤 굽힌 허리와 들지도 못하는 고개. 뒤돌 아선 유레민트와 보를레스의 모습은 한 마디로 주인과 시종 같았다. 유레민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요." "그, 그렇습니까?" 이제는 어깨까지 처진 보를레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구름을 바라보는 눈으 로‥. 그 때, 갑자기 빙글 돌아서며 유레민트가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오랫동안 여행할 때는 적어도 아스틴네글로드에 보고를 해둬야 하거든요." 그 때까지도 보를레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스틴의 기사들이 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고 시즈와 아리에가 왜 키득거리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꽉 잡아 고정하고 유레민트가 입술을 삐죽거 렸다. "말하는데 외면하는 게 어딨나요? 대신에 돌아오면 자전거 뒤에 꼭 태워줘야 해요." "예! 하하하‥ 하하하핫!" 보를레스의 웃음소리는 통쾌하게 컸다. 별의 미궁 나무들이 흔들거릴 정도였다. 실리미엔 에이아과 로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스틴에서 왔던 이들은 다시 아스틴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아스틴 국경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온 이들이 있었다.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있던 청년은 네메이나의 눈에 매우 익은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활짝 펴서 인사하며 말했다. "다녀왔어?" "응!" "이제 나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시즈에 비하면 데미노머, 넌 아직도 어린애라고!" "또 그 소리네." 만나자마자 티격태격 싸우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레민트에게 한 필의 말이 다가왔다. 콧수염을 화려하 게 키운 남자, 피브드닌이었다. "다녀왔나?" "그래요. 다녀왔죠. 하지만 다시 가봐야 되요. 피브드닌님이 좀 아스틴네글로드에 보고 해주세요. 유레민트는 한동안 실리미엔 에이아를 따라다니겠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간단해요. 고용됐거든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삐에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유레민트는 말머리를 돌렸다. 승마 실력을 뽐내듯이 순식간에 지평선 넘어로 사라져 버리는 그녀를 보며 피브드닌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렇게 서둘러 가다니‥ 좋은 직장인가보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화 "므헤헤헤‥." 유레민트가 온 이후로 보를레스의 입가에서는 멍청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장작을 패는 주제에 히죽거리는 모습 이라니 물을 길어서 나르던 아리에가 대끔 한 마디를 내던졌다. "바보‥." "므헤헤헤‥!" 그런다고 행복감이 사라지리‥. 아리에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보를레스의 상태이상을 부추 킨 장본인이 얼른 대야를 받아들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찮아요. 그보다도 아이는 어때요?" 실리미엔 에이아의 오두막에는 유레민트가 영입됨에 따라서 당연히 하나의 방에 더 생겨났다. 하지만 그녀의 방에 는 침대가 둘 있었다. 그 자리가 보를레스의 침대였다면 그가 오죽 좋아했을까. 안타깝게도 유레민트의 치료를 받기 위한 환자들의 자리였다. 엘프는 예전부터 약초를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소문은 금방 퍼졌다. 오늘의 환자는 친구들과 뛰어 놀다가 넘 어져 무릎이 길게 찢겨있는 소년이었다. 울 듯하면서도 용케 참고 있는 것은 모두 유레민트의 공(功)이었다. "자아‥ 안 아플 거 에요. 조금만 참으면 되요." "저기, 요정님. 괜찮을까요?" 가장 호들갑스러운 사람은 아이의 어머니였다. 아리에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을 다해가며 진땀 을 뺐다. 약초를 으깨어 바르고 붕대를 싸맨 유레민트가 일어날 때까지 아리에의 고초는 계속됐다. "괜찮을 거 에요. 별로 크게 다친 게 아니거든요."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에요?' 내심 아리에는 절규했지만 상냥한 인상의 유레민트한테 감히 대놓고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그저 소리 죽여 눈 물을 흘릴 뿐이지. 문제는 그 후였다. 일이 있은 후부터 로지 마을의 사람들은 다치기만 하면 신전이나 약사에게 가지 않고 유레민트 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돈을 받지 않는 유레민트의 배려였지만 옆마을의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은 화가 난 신전에서 실리미엔 에이아를 찾아서 로지 마을로 찾아왔다. "당신이 사람들을 치료해준다는 엘프입니까? 실력이 레이모하의 권능보다도 뛰어나다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눈꼬리가 축 처져 인상이 온화해 보이는 젊은 신관은 보기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외쳤다. "어떻게 신보다 뛰어나겠습니까?" 유레민트가 황송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현자고 치료사라고 해도 신에 비교될 수는 없었다. 신 에 비교된다는 것은 반은 칭찬이었지만 반은 무서운 위협이기도 했다. 레이모하의 치료 신관이 보기에 실리미엔 에이아는 범상치가 않았다. 여인들은 아름답고 사내들은 특이하다. 솔직히 시비를 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전의 수입과 관련된 일이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환자는, 신도보다 도 민감한 사항이었다. "신전의 환자가 그리 말했소. 레이모하의 권능이 의심을 받게 생겼으니 어찌 하겠소?" "진료를 조금만 싸게 해준다면 레이모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습니다만‥." 자전거에 탄 채로 지켜보던 시즈가 말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빈 소매가 흔들렸다. "감히 외팔이가 어디라고 껴드는 거냐?" 신관을 따라온 신전 무사가 검을 빼 들이댔다. 하지만 시즈의 반경 1m 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청명한 금속음을 내 며 튕겨 나갔다. 챙! "자비로워야 할 신전의 무사가 바로 검을 빼들면 안 되지‥." 보를레스가 무미한 표정으로 신전 무사를 가로막았다. 거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신전 무사는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칼바람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아리에도 말없이 양손에 단검을 쥐었 다.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치료신관은 얼른 말리면서도 내심 이를 갈았다. 시골에서 노래나 부르며 살아간다는 음유시인들 사이에 검술을 하 는 이가 있다니 완전히 계산착오였다. 거구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봐서 신전기사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승산이 없었 다. "대사제께서는‥." "유레민트입니다." "흠흠‥ 유레민트님이 신전을 한 번 방문해주셨으면 하십니다. 보잘 것 없는 제 생각입니다만, 치료술을 비교하실 생각이실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할까요?" "보여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우매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적어도 내일까지는 방문해주셨으면 합니다." 유레민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신관은 돌아갔다. 그가 말한 신전이 있는 언덕을 바라보던 아리에가 입을 열었 다. "그냥 오두막에서 나오지 않으면 저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잖아!?" "가보죠." "시즈!" 보를레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즈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선 시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 덕였다. "괜찮을 겁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시즈에게서 흘러나오는 바람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그들은 접하면 접할수록 편안해졌다. 그리고 믿음이 갔다. 그 는 불안해하는 보를레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난 소중한 사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2화 레이모하 교단이 따로 전투집단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소레인 교단은 전투가 일어나면 사제들까지도 투사로 변했 다. 게다가 사막민족은 기본적으로 용사 사상이 숨쉬고 있어 죽인다고 해도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교를 그냥 두지 않는 배타적인 레이모하 교단도 소레인 교단만큼은 건들일 수 없었다. 명성이 전하듯 신전은 무척이나 삼엄했다. 요전에 얼굴을 익혔던 치료신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리 에는 들어설수록 소름이 돋았다. 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정말 거대하군. 소레인의 신전은 보통‥." 검소했다. 볼케이스는 레이모하의 엘시크처럼 자원이 풍족한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 해왔기에 소레인의 뿌리가 깊고 넓게 퍼졌던 것이다. 보를레스는 지금 들어서는 신전의 긴 복도만 봐도 로지의 신전은 소레인, 아니 볼케이스의 모습과 상반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를 맡았는지 치료신관은 약간 얼굴을 굳혔다. "전의 신전이 너무 낡았었습니다. 온통 냄새가 나고 손님이 앉을 만한 자리에는 물이 고여있었죠." 이윽고 대전에 도착했다. 족히 100여명이 들어찰 대전은 휘황찬란한 양탄자가 깔려있었다. 아리에는 양탄자에서 부 드러움보다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바늘방석을 깔아둔 것처럼 불편했다. 옆에 서있던 시즈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오셨군." 안에는 신도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30여명 모여있었다. 그리고 대전 가장자리마다 신전 무사가, 대사제의 뒤로는 신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보를레스가 긴장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치 심판의 장이라도 열린 것 같군." "어서 오십시오. 실리미엔 에이아, 여러분." 연락을 받았는지 단상 위에 서있는 사내가 양손을 펼치고 그들을 맞이했다. 치료신관이 걸어나가 무릎을 꿇고 말했 다. "대신관님의 부르심대로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러가 있으세요." 대신관은 고작 40대 정도로 보일 만큼 젊었다. 실제로 젊은 나이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 어나오고 볼이 쏙 들어간 걸로 볼 때, 사제복 뒤로 숨겨진 그의 몸은 부지깽이를 연상시킬 마른 몸이라고 추측됐다. 부지깽이 대신관은 실리미엔 에이아를 단상 위로 불렀다. "여신의 유혹만큼이나 달콤한 노래와 춤을 보인다는 실리미엔 에이아. 그 명성이 나오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유레민트와 아리에의 미모를 보고 얘기한 것이다. 아리에는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욕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내심 칼을 꽂고 싶었지만 겉으로 미소를 띄우고 답변했다. "지나친 칭찬이 부담스럽습니다." 피식 웃은 부지깽이는 몸을 신도들 쪽으로 휙 돌렸다. 본론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실리미엔 에이아가 음유악단이니 노래를 들어야겠지만 오늘은 예외입니다. 그대들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 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부터 실러오나의 권능이 실리미엔의 치료술에 뒤진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소?" "몰랐습니다." "우∼!" 갑자기 신도들이 야유를 보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신전의 동상들처럼 싸늘했다. "몰랐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한 번 시험을 해보고 싶었소. 그대들의 치료술이 얼마나 뛰어난 지 말이오." 부지깽이의 손짓에 한 사람이 실려 나왔다. 연신 신음을 터뜨리는 사내를 가리키며 부지깽이는 말했다. "아침에 실려온 환자지. 다리가 아픈 모양인데‥. 그대들이 고쳐줬으면 해." 환자라고 지칭한 사내를 유레민트는 다가가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사내가 가짜로 만들어진 환자라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리의 모양은 부러진 것도 뼈가 빠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접질린 정도로 신전에 비싼 돈을 내고 치료를 받을 리는 없을 것이다. 헌데 왜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나오는가. 환자라는 사내는 무척이나 연기력이 부족했다. 아마도 보를레스였다면 훌륭히 환자력을 해냈을 텐데‥. 보를레스를 힐끔 쳐다본 유레민트는 시즈에게 다가갔다. "시즈님도 알 수 있죠?" "환자가 엄살을 떨고 있다는 것 말입니까?" "역시 눈치채셨군요." 시즈는 눈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까닥하며 답변을 대신했다. 유레민트는 그가 어째서 여유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했 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꾀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엘프의 약지식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멀뚱히 서있는 유레민트를 부지깽이가 재촉했다. "치료해보시오. 왜 그렇게 서있지? 설마 치료할 수 없다는 건 아니겠지?" 대신관은 비웃음을 자랑이라도 되는 양 짓고 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유레민트의 온화한 마음에서도 오기가 치 솟았다. 꺽어 버리고 싶다.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들었다. 긴 금발이 철렁이며 내리 앉을 때 그녀는 걸어나갔다. "많이 아픈가요?" "아파! 아파! 날 도와주시오." "다리의 어디가 아픈가요?" "모두, 다리가 모두 아파." 유레민트가 손가락을 뻗어서 다리를 만졌다. 그러자 곧바로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 "이런 정말 많이 아프신 모양이네요." 사내의 눈빛에서 멸시의 눈초리를 유레민트는 보았다. 그에 대응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손에 힘을 가했다. 우두두둑! "으악! 으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등이 새우등처럼 꺽였고 입에서는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놀란 신도들이 야유를 멈췄다. 유레민트의 가냘픈 손가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갔다. 우둑! 과드드득! "으악!" "뭐 하는 거야?"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신전의 무사와 기사들이 유레민트에게 창을 들이댔다. 하지만 더 빠른 사람들이 있었다. "치료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치료신관이 언급했었지만 실리미엔 에이아의 몸놀림은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은발 청년의 소매와 머리 카락은 바람이 없는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관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마법사인가‥? 잘못 건들인 게 아닌지 걱정되는 군.' 마법사는 괴팍하다. 겉보기에는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우선 유레민트라는 엘프만 봐도 만만치 않을 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덩치가 큰 검사와 단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여인 등 이들은 균형 잡힌 모험 파티의 전형을 이루고 있었다. 운도 없지. 내심 쯧쯧하고 혀를 찼다. 다시 한 번 시즈가 입을 열었다. "치료하는 중입니다. 창을 거둬 주십시오. 저희에게 환자를 맡겼다면 끝까지 봐주십시오, 대신관님." 은은한 미소는 시즈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느끼게 하는 표정에서 대신관은 절대적인 위험을 느꼈다. "내 다리, 내 다리!" "남자가 엄살이 심하군요." 유레민트는 은근히 사내에게 속삭였다. 아픔을 나눌 듯이 끌어안고 은밀히 속삭이는 모습은 보를레스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내가 손을 잡으면 당장 일어서세요." "하지만 당신이 내 다리를‥." "더 치료해 드릴 수도 있답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방긋 웃는 모습은 사내에게만 살인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유레민트의 손이 사내의 팔을 잡고 끌어 올렸을 때, 신도들을 비롯한 신관들의 눈은 경악에 물들었다. 벌떡 일어난 사내가 눈물어린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 서진다. 내 다리! 부러진 줄 알았는데‥." 유레민트가 시즈들을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아리에와 보를레스는 씨익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쑥 올렸다.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난 생으로 불구가 될 뻔했어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사제님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치료신관이 사내와 거친 단독면담을 하고 있을 때, 실리미엔 사람들은 대신관과 비밀스런 이야기를 진행 중이었다. "치료비를 받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우선적으로는 내가 나섰지만, 신전 말고도 많은 약사들이 당신들을 질시하고 해하려 할거요. 실리미엔이라 는 이름은 예전부터 아름다운 노래로 유명했으니 어쩌면 대륙 전체에 퍼질지도 모르지. 그러면 평민들은 짐을 싸들 고 병을 고치기 위해 그대들을 찾겠지요." "‥‥." "그대들이 무료로 치료를 한다는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오. 다만, 치료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 바라오." "신전도 포함되는 사항인가요?" 유레민트의 물음에 대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불쑥 시즈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하시오." "우리는 곧 여기를 떠날 겁니다." "뭐!?" 시즈의 얘기는 보를레스와 아리에도 들은 바가 없었음으로 모두 반문했다. 시즈는 돌아가서 이유를 알려준다고 말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단, 치료비를 조금만 싸게 받아주십시오. 적어도 다른 대륙에서 저희를 찾아올 여행비보다는 싸게 말입니다." 대신관은 잠시 고민했다. 아마도 돈을 계산하고 있는 거겠지. 보를레스는 역겨움에 당장이라도 성스러운 신전을 나 가고 싶었다. 이윽고 대신관은 한 신관을 불러서 몇 마디를 전달했다. "자아‥ 그대의 말대로 했소." "우리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선 실리미엔 에이아를 데리고 왔던 신관이 밖으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시즈 일행은 제각기 의미를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보를레스는 수풀 사이에 돌을 휙 던지고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숨어서 기다릴 거 없지. 자랑스러운 신관 기사, 여러분." "눈치를 못 챘다면 편안히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길 양쪽에서 10여명 가까이의 신전 기사들이 걸어나왔다. 보를레스가 던진 돌을 맞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는 기사를 선두로 한꺼번에 검을 빼들었다. "여자들은 다치지 않게 해. 뒷맛을 봐야하니까." "그럼 알지! 남자들은 죽여버려!" 진지한 작전회의를 마친 기사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방심은 없었다. 대전에서의 몸놀림으로 충분히 위협적인 존 재임을 알아뒀으니까. 특히 은발의 청년이 마법사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전해졌기에 그들의 공세는 우선적으로 시즈 에게 몰렸다. "내가 가장 쉬워 보입니까?" 멋쩍게 긁적이는 시즈의 옷자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조금만 내밀면 그의 머리에 검을 꽂을 텐데, 하면서도 기 사들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뒤로 밀리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뒤로 가서 구경이나 할까요?" 아리에가 유레민트를 잡아끌었다. "아, 네." 그녀의 손에 매달린 인형처럼 유레민트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유레민트에게는 시즈가 제대로 마법을 쓰는 광경이 처음이었다. 보를레스는 일찍이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일행이 마법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시즈의 미소는 더 가늘어졌다. 솔직히 신전에서 건물과 신관들을 죄다 하 늘 높이 날려버리고 싶었다. 어딘가에 풀어버릴 욕망을 참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너무나도 고마웠다. 신이 난 그를 보며 보를레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인데!? 아리에, 좀 더 뒤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죠. 유레민트도 어서 뒤로 오세요." "저, 저기‥. 저건‥." "보면 몰라요? 마법을 쓰고 있어요. 시즈의 마법은 광범위하니까 조심해야 되요." "마법‥!?"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며 유레민트는 반문했다. 영창도 하지 않았고, 드래곤들의 용언에도 빠질 수 없다는 시동어 도 없었다. 마치 시즈가 원하자 바람이 일어난 것처럼‥. 아리에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레민트는 마법의 종족이라면서 왜 몰라요? 저건 의지의 마법이라고요." "의지의 마법!? 그런 마법은 없어요." "뭐라고요!?"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서로를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보를레스가 그 때, 신음성에 가까운 음성으로 작 게 외쳤다. "시작한다. 조심해!" 시즈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날 좀 도와주겠어? 아무래도 혼을 내줘야 할 것 같다. 저 의복을 벗겨버려." 뻗어 나간 바람의 주먹이 한 기사의 몸통을 때렸다. 당장에 옆구리의 갑옷이 찌그러졌다. 어떤 바람은 칼날을 담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느낀 순간에 갑옷 전신에는 칼로 수십 번을 긁어놓은 듯 흠집이 났고, 두 번 쓸고 지나가자 길게 상처가 났다. 그리고 세 번 지나가자 기사들은 붕 떠서 수풀에 처박혔다. "후우‥. 대신관님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을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고 말해줘요." 얼마 전까지 갑옷이라고 불렸던 쇠의 집결체는 걸레처럼 찢어진 상태였다. 기사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 둥지둥 기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보를레스가 물었다.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왜 그냥 보낸 거지? 저들은 신전의 기사들이야. 타락천사나 다를 바 없다고." "저들은 신전 기사가 아니에요. 신전의 전사나 무사라면 몰라도 기사가 되려면 소레인 교단의 시험을 받아야 해요. 용자를 숭배하는 나라의 종교에요. 기사를 뽑는 시험이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신전 기사는 무척 귀할 텐 데 이런 벽지에 10여명이 넘는 신전 기사가 있을 턱이 없죠. 저들은 단순한 용병이에요." "그렇구나. 그런데 시즈." 방금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상쾌한 표정을 짓는 시즈에게 아리에는 손가락을 꼽으며 물었다. "꼭 떠날 필요가 있어? 마치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사람같아." "계획하고 있었어요. 북쪽으로 떠날 계획을‥." "북쪽이라면 빙하의 대지를 말하는 건가요?" 유레민트는 안색을 달리하며 물었다. 별의 미궁만큼이나 오지로 꼽히는 빙하의 대지는 결코 길을 잃어서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춥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엇 때문에 빙하의 대지까지 가야할까, 생각하는 유레민트는 곧 시즈의 한 마디에 수긍했다. "색다른 곳일 거 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즐겁지 않나요?" "재미있겠군." 보를레스는 단순하게 시즈의 마수에 걸려들고‥. "추워 죽을 것 같은데 뭐가 재밌어?" 아리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가장 눈을 빛낸다. 그렇다면 유레민트는? "후우‥. 고용된 몸이 뭘 가리겠어요!?"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한 달여만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3화 촤라라라라라….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두 개의 바퀴 위에 앉아서 느긋이 나아가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선사했다. 식사 를 하기 위해서인지 잠시 멈춰서 짐을 푸는 그들에게 멀리서 신기한 눈망울을 반짝이던 목동이 다가왔다. "아저씨, 아저씨. 어디로 가십니까?" 목동이 물음을 던진 상대는 대끔 눈썹부터 찡그렸다. 보를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장신의 사내는 목동의 호칭이 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목동은 첫눈에도 무척이나 어렸으니 커다란 숨을 내쉬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보를레스의 나이, 향년 27세.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면 분명 목동 만한 아이도 있기 충 분했다. "우린 북쪽으로 간단다." 분노를 잠재우려 노력하는 보를레스의 모습이 위급해 보였는지 얼른 앞을 막아선 유레민트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긴 금발이 향긋한 공기를 뿌리며 코앞을 수놓자 어린 목동의 얼굴이 약간 홍조를 띄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누나, 저 건 뭐지요? 마차는 아닌 것 같은데요. 처음 봐요." "자전거라고 하지. 내가 만들었으니 처음 볼 수밖에." 목동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워낙 자전거라는 물체에 심취해 타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지 않은 게 이유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면 쉽게 다가서지 못했을 테니까. 백은 머리카락과 투명한 눈동자,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질감을 용케 품고 있는 청년이었다. "만든 거라고요?" 반문한 그에게 청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북쪽은 여기가 끝이에요. 저기 보이는 강 뒤로 보이는 하얀 땅은 전부 얼음으로 덮여있거든요." "그래, 우리는 흰땅으로 갈 거야." "얼어죽을 거 에요. 정말 춥다고요. 에스키모라도 되지 않는 한은‥." "괜찮아." 물끄러미 바라보자 청년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의 결정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얼음의 정령처럼 보이게 했다. 그 때, 잠자코 있던 보를레스가 투덜거리며 시즈의 말을 끊었다. "괜찮지 않아. 너라면 몰라도! 우리는 무척이나 춥다고." 착각일까!? 사내의 투덜거림과 동시에 은발의 청년 주위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살풋 웃음을 띄운 입 가를 가리며 유레민트가 목동 소년에게 물었다. "이 주변에 마을이 있나요?" "제가 사는 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좀 안내해줄래요?" 목동 소년의 마을에서 시즈들은 두꺼운 양털 외투를 몇 별이나 샀다. 북부 볼케아스의 바람은 매우 사나워서 시즈 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속살을 건드렸던 것이다. 거대한 장신에 양털에 몇 겹으로 둘러싸이자 보를레스는 금 새 북극곰으로 돌변했다. "확실히 보를레스는 곰 종류야." "뭐라고!?" 아리에의 말에 보를레스가 발끈했다. 유레민트가 팔에 매달려 말했다. "잘 어울린다는 뜻이에요." "그, 그런 거야?" 유레민트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보를레스는 정말로 믿어버렸다. 아리에는 그가 정말로 곰이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키득거렸다. 목동 소년의 배웅을 받으며 보를레스와 시즈는 열심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푸르렀던 초원의 풀이 자취를 감추 고 흰 서리와 눈의 흔적만이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추위를 타지 않았다 "대륙을 흐르는 바다‥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문제는 새로이 나타났다. 목동 소년이 거론했던 지평선의 강은 그들의 상상보다도 훨신 폭이 넓었다. 보를레스가 시 즈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유레민트도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즈‥." 어두워진 시즈의 얼굴. 아리에는 차가운 손을 시즈의 양털 속으로 넣어 은발이 삐져 나온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무 심각해지지 마." "후후‥." 아리에의 귀여운 행동에 얼어붙었던 머리 속에 풀렸는지 시즈는 훈훈하게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할 수 없군요. 여기서 쉬었다가 갈까요?" '대륙을 흐르는 바다'라는 뜻으로 '우클자인'강은 폭이나 길이에서 대륙의 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얼음의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들이 육중한 본체를 숨긴 채 동동 떠다녔다. "그러니까 역사의 고리가 저 빙하의 대륙에서 시작했다는 거야?" "세이서스 가에 내려오는 문서에 따르면‥ 새하얀 대륙의 중심에 역사를 잡고 있는 둥근 고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특이하군요. 이 곳만 해도 사람이 살기에는 추운데 저 얼음의 대지에서 문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조직이 숨쉬고 있 다니‥." 역사의 고리가 국제적으로 드러난 것은 세이서스 일가의 침몰인 '봄의 혈사' 때였다. 당시에 헤트라임크가 외쳤던 단체의 이름이 후일, 실베니아 내전의 배후라고 알려지면서 유레민트를 비롯한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의 관심도 은근히 쏠렸다. 그러나 관심뿐. 아무 것도 알려진 바가 없는 역사의 고리. 그 본거지를 알게 된 유레민트는 흥분했 다. 얼굴이 붉어져 주먹을 불끈 쥔 그녀에게 아리에가 말했다. "유레민트, 수프 쏟아져요."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시즈는 우클자인 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수면에 떠있는 얼음들을. 그리고 조용 히 보를레스에게 말했다. "얼음의 배를 만들어야겠어요."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4화 시즈는 보를레스와 함께 강변으로 밀려온 얼음을 끌어올렸다. 얼음의 배라니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즈의 계획은 언제나 기상천외했다. 이번에도 믿어보는 수밖에. "너무 크군요. 보를레스, 자를 수 있겠어요?"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시즈가 묻자 보를레스는 단순하게도 금방 달아올랐다. 찬 바람 속에서 투덜대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옷을 벗어 던지고 상반신을 드러낸 보를레스는 제뷔키어를 잡고 우뚝 섰다. "멋져요. 보를레스." "으헤헤헤‥." 천군만마를 제압할 기상을 엿보이던 그의 모습도 유레민트의 칭찬에는 맥을 못 추는가. 머리를 긁적이던 보를레스 는 아리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안색을 굳히고 검을 들었다. "이 정도 얼음은 말이야‥. 가! 뿐! 하다고!" 츄악! 사람만한 얼음을 베어낸다는 것은 검술가들에게 최고의 경지로 통했다. 즉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광풍의 검 사'라는 이름으로 대륙 3대 검사의 뒤를 잇는 유망주로 떠오른 보를레스는 단숨에 얼음을 잘라냈다. 우쭐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시즈가 스쳐지나갔다. "음‥. 아주 잘 잘라졌군요. 대단해요." "왜, 왠지 당한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보를레스의 의문을 뒤로 한 채 시즈는 뜨거운 바람을 이용해서 얼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점차 배의 모습을 드러내는 얼음을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눈을 반짝이며 주시했다. "이만 하면 됐나?" 그럴 듯하게 되었나 싶자 이번에는 차가운 바람을 불러 다시 얼음을 얼렸다. "이거 미끌어지지 않을까 모르겠군." 보를레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로 오르던 아리에가 뒤로 벌렁 뒤집어졌다. 시즈의 손이 굳건히 뒤를 받치지 않 았다면 큰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얼굴이 새 빨개진 아리에는 시즈의 팔을 꼭 부여잡고 위로 올랐다. "고, 고마워." 보를레스는 유레민트도 손을 잡고 오르길 내심 바랬지만 엘프의 날렵한 동작은 트집잡을 곳 한 점 없이 가볍게 배 위로 안착했다. "그런데 돛이나 노가 없잖아?" "돛이야 만들면 되잖아요?" 천연덕스럽게 시즈가 말하자 보를레스의 몸에는 흠칫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당장에 손 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옷을 벗어서 돗을 만들자는 거라면 절대로 거부하겠어. 이 추운 날씨에 옷을 벗었다가‥." "아까 윗통을 벗은 보를레스는 정말 멋졌습니다. 그렇죠? 유레민트." 넌지시 던지는 시즈의 물음에 유레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보를레스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핫! 그냥 노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어디에 노를 만들 나무가 있다는 거야?" 아리에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나무는커녕 갈대로 보이지 않았다. "배가 얼음이니 노도 얼음으로 하죠." 시즈가 손을 강물에 손을 담갔다가 꺼내자 그 궤적을 따라서 물이 이끌려나오며 노의 모양으로 얼어붙었다. 유레민 트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저런 마법은 들어본 일이 없어.' 시즈는 왼팔을 잘라낸 이후,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할 일이 없었다. 조용히 생각만 해도 의지의 마력이 용솟음치며 온몸을 휘감았다. "차갑잖아." "그럼 옷을 벗어요." 노를 건네받은 보를레스는 잠시 투덜거렸지만 이어진 아리에의 핀잔에 얌전히 물살을 헤쳤다. 시즈도 함께 노를 젖 자 얼음의 배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음의 노가 녹을 때면 시즈는 다시 물에서 새로운 노를 꺼냈다. "시즈, 물에서 바로 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배도 만들 수 있지 않았어?" 문득 의문이 솟은 보를레스가 물었다. "글쎄요‥." 시즈는 알 수 없는 대답으로 흐릿한 여운을 남기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강물의 빙산처럼 희미한 미소 속으로 거 대한 의미가 숨겨졌을 듯해 보를레스는 못마땅했다. "노는 형태가 복잡하지 않지만 배는 복잡하죠. 만들려면 심력이 제법 소모되거든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즈가 설명했다. 그제서야 보를레스는 크게 웃어대며 시즈의 은발에 손을 넣고 마구 휘저 었다. "하하하핫! 진작 말을 하지." "차갑습니다, 보를레스." 얼음을 잡던 손이니 얼얼할 만큼 차가울 수밖에. 더 이상 얼음을 잡고 있다가는 동상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에 두 남자의 동작은 힘차고 빨랐다. "조금만 더 힘내요." 아리에는 약간이라도 힘이 되려는지 손으로 차가운 강물을 저으며 외쳤다. "으라차! 으으으으라차!" 멀게만 느껴지던 건너편도 슬슬 다가왔다. 하지만 배는 곧 멈춰야 했다. 그들이 육지라고 생각했던 곳은‥. "이거 얼음이잖아. 강이 얼어붙은 거야." 그러고 보니 열심히 힘을 쓰던 두 사람은 느끼지 못했지만 여인들은 갑자기 새어드는 차가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나마 양털이 보온을 충실히 해준 덕에 당장 동태신세는 면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죠." "얼음이 아래로 꺼져버리는 거 아니야?" "이 상태로 더 이상 나갈 수도 없잖습니까!?" 할 수 없이 얼음 위를 위태롭기 시작한 일행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더해가던 보를레스의 야 성적인 본능에 무언가 걸렸다. 콰직! 뒤를 돌아본 시즈의 안색도 얼음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들이 타고온 배가 부딪힌 곳부터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 이다. 서로의 얼굴을 한 차례 바라본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뛰어! 뛰어!" 그들의 뒤를 먹이를 발견한 북극곰처럼 얼음의 이빨이 쫓았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5화 하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그 충격에 얼음이 갈라지고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뇌리에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이 미 다리가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앗!" "아리에!" 흙이 엿보이는 육지에 거의 도달했을 쯤이었다. 사실 얼음을 달린다는 게 얼마나 위태로운가. 지금까지 넘어지지 않 고 달려온 것도 용한 일이었고, 행운이었다. 그런데 행운이 다했는지 아리에는 시즈의 손을 놓치며 바닥에 미끄러졌 다. 균열은 입을 벌려 아리에를 낼름 삼켜버렸고 시즈도 따라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떻하죠?" "시즈라면 아리에를 구해서 나올 겁니다. 아니, 어쩌면 아리에가 시즈를 구해서 나올 지도 모르지. 우리까지 떨어지 면 짐만 될 뿐이니까!" 육지에 다다른 그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까마득하게 깔려있던 얼음이 부서지는 광경은 마치 대지가 무너지는 듯 했다. 쿠르르르르‥. 보를레스의 기대대로 시즈는 아리에를 안아 들고 물에서 걸어나왔다. 매우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레민트가 얼 른 아리에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얗던 피부가 백옥처럼 창백해져 아리에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물에 빠졌을 때, 차가움에 놀라서 다리에 쥐가 난 모양입니다." "마을에 들렸을 때 모포를 많이 가져온 게 다행이었어. 아리에의 옷을 갈아 입혀야 하니까 모두 눈 돌려요." 유레민트의 날카로운 말에 시즈와 보를레스는 얼굴을 붉히고 돌아섰다. 물이 뚝뚝 흐르는 시즈를 보며 보를레스가 말했다. "너도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짧게 몸을 떠는 게 시즈는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참기보다는 추위를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는 떨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몸을 긴장을 풀면 떨지 않는다. 추위에 저항하기 위해 떨리는 것이니‥. 그러나 작은 저항을 포기하여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하여 그의 몸이 얼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더욱 위험할 것이다. 그 만큼 그 에게 아리에가 소중하다는 의미였다. 시즈는 떠는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에서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을 겁니다. 이토록 추운 곳이니 말이죠." 옷을 바꿔 입은 아리에를 등에 업고 시즈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의 대지에서 전신이 물에 젖은 이상 정신을 잃은 상태로는 20분도 견디지 못했기에 시즈는 무척이나 급했다. 옷을 적신 강물이 땀으로 착각될 정도로 허둥거렸 다. 온통 얼음과 눈으로 덮인 세계 그 안에도 안식처는 분명히 있었다. 우클자인 강에서 북쪽으로 이백여 걸음을 옮겨 넘은 언덕 아래로 투명한 도시가 보였다. 시즈 일행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음의 성, 타이즈벡." 타이즈벡. 얼음의 대지에서 유일하게 대륙 사람들에게 알려진 마을이자, 도시였다. 여기저기가 색다른 생선과 고기 를 교환하느라 사람들이 붐볐다. 그 중에는 어린애도 있었고 젊은이 들이 태반이었다. "그래, 물에 빠졌단 말이지. 어서 이쪽으로 오시게." 몇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이방인의 방문에 장년의 사내는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아리에의 모습을 슬쩍 바라본 그는 얼음 속에서 상당한 연륜을 쌓은 탓인지 금새 두꺼운 담요와 곰의 가죽을 내어주었다. "자아, 한 잔씩 들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한 잔의 푸른 색 액체를 권했는데 향긋하면서도 코를 찌르는 냄새로 볼 때 독한 술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리에의 몸 주위에 공기를 아주 느릿하게 돌리고 있던 시즈에게도 사내는 직접 술잔을 가지고 갔다. "자네도 마시고, 그 아가씨가 깨어나면 한 잔 주게. 많이 마실 필요는 없어." '카일이드'라는 이름의 푸른 술은 붉은 뱀의 사원에서 사제들이 마시는 전갈의 독술, 롤큰에 비할 만큼 독했다. 하 지만 혀끝에 짜릿하게 감도는 맛이 감미로워 보를레스는 다시 한 잔을 찾으려 했다. "그만 두게. 카일이드는 중독성이 있어. 내가 준 양이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양이네. 더 이상은 과할 뿐이야." 사내가 말했을 때는 이미 보를레스의 입에 카일이드의 술병이 거꾸로 꽂힌 후였다. 유레민트는 순식간에 나자빠진 보를레스를 몇 번 깨워보다가 포기했다. 아리에는 2시간이나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하지만 감기는 피할 수 없었고, 그녀가 깨어난 뒤 쓰러진 시즈와 함께 사이좋게 자리에 눕게 됐다. 과분한 대접에 유레민트와 보를레스는 어쩔 줄 몰라했지만 사내는 신경쓰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륙에 존재한다는 숲의 엘프님." "제 이름은 유레민트에요." "네, 유레민트. 전 르베븐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이토록 유레민트에게 정중했던 이유는 얼음 밖에 없는 곳에서는 숲을 동경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무를 키울 수 있다는 엘프는 그들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나무가 필요하다고요?" "나무가 아니라도 먹을 수 있는 풀이 부족합니다." 르베븐은 뛰어난 사냥꾼인 동시에 얼음의 도시의 유일한 약사이기도 했다. 그는 어쩌다가 대륙에서 온 이방인을 만 나서 그들의 서적을 보고 작은 관심을 가진 게 인연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약사로 내몬 근본적인 원인은 얼음의 대지에는 불치병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20세까지는 신체 능력이 좋던 청년들이 20대 후반이 가까워지면 급속히 늙 고 허약해짐이 바로 그것이다. 관절이 약해지고 잔병이 많아지며 후일은 작은 감기에 걸려서 사망한다. "그래서 노인은 보이지 않았던 거군요." 아리에의 중얼거림에 르베븐은 쓴웃음을 지었다. 타이즈벡에서 40대에 가까운 르베븐은 신선이나 다름없는 나이였 다. 사람들은 그저 그를 특이한 체질이라고 보았지만 장본인은 오히려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얼음 사이에서 가냘프게 살아있는 식물들을 보면 뜯어서 씹곤 했는데 그것을 바로 해답이라 보고 있었다. 유레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들이 약과 의술에 뛰어나다고 해도 얼음의 대지에서 일어나는 질병까지 알기에 는 부족했다. 그 때, 뜨거운 이마를 짚고 몸을 일으킨 시즈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관절의 병은 풀을 먹어야 치료되는 게 맞을 테니까요." "확실한가?" 르베븐의 기대에 찬 확인에 시즈는 미소만 지었다. 솔직히 그도 확실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지식일 뿐, 실제 로 얼음만 있는 대지에 온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머쩍은 그의 미소를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르베븐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유레민트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제가 마을에 작은 나무를 하나 심어두었습니다. 거기에 엘프님의, 유레민트님의 힘으로 숲의 축복을 조금이라도 내려주십시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6화 유레민트는 당황했다. 숲의 축복을 내린다고 하여 나무가 얼음의 대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르베븐은 엘프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유레민트를 정령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만 정령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에 가장 철저했다. 그렇다고 거부를 단언할 수도 없었다. 매일 백설의 폭풍과 싸우며 강인해진 르베븐의 눈동자도 이 순간에는 애처롭 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렇게 하세요, 유레민트." 힘겹게 다가온 시즈가 르베븐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라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텐데, 내심 유레민트는 한숨만 쉬 었다. '시즈에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유레민트는 '마땅찮은 이'로서의 시즈를 신뢰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르베븐이 일행을 안내한 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조용히 침음성을 발했다. 벽이 검게 칠해진 사각의 방, 모서리에는 커다란 양초가 세워져 불을 밝히고 있었고 안은 온통 후끈거렸다.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일행은 당장이라도 옷을 내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바닥을 덮고 있는 식물들이었다. 분명히 식물들은 옅지만 푸른 빛깔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지만 역시 환경 탓인지 잎이 시들시들했다. 시즈는 탄성을 질렀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성과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잎이 없어. 이래가지고는‥." "어때요? 유레민트." 유레민트는 이미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같은 표정으로 식물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뿌리가 제대로 박히긴 했는지 걱 정되고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시즈의 목소리가 한 쪽 귀로 들어와 반대편 귀로 빠져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기형아 같은 식물들로 가득했다. "뿌리를 굳게 박고 일어서요. 세일피어론아드을 지키는 가장 약하고 강한 생명체여‥." 흰 손가락이 잎과 줄기를 살짝살짝 건드릴 때마다 식물들은 연분홍의 빛을 냈다. "미숙했던 정령들이 성숙해지고 있어요." "시즈, 네 눈에는 정령이 보여?" "아니, 추측이죠." 보를레스의 말에 시즈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시즈는 인상이라는 전혀 다른 행동이나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는 아리에가 이해되지 않았다. 유레민트의 손길을 받은 식물들은 눈에 띄게 푸른 빛깔을 띄기 시작했다. 큰일을 치렀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비틀거 리며 일어섰다.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행위는 엘프들에게도 정신적인 피로를 가져다준다. 보를레스가 굳건히 잡아주 자 베시시 웃는 얼굴이 창백했다. 식물들의 상태는 르베븐에게 아주 이상적인 선물이 되었다. 차를 끓일 때도, 순록의 가죽을 손질할 때도 웃음이 헤 프게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우스웠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아리에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일행을 대할 때는 헤프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리에가 회복될 때까지 유레민트는 몇 차례나 식물들을 찾아가 정 령을 다독였다. 사실 르베븐은 시즈가 아리에보다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몸을 불로 구워 준다고 해도 몸의 체온이 제대로 돌아오기 힘든 상태였던 시즈는 고작 몇 시간만에 멀쩡해진 것이다. 죽어있는 팔조차 생명을 부여했던 게 성약(聖藥), 에릭사의 묘용이었다. 팔이 사라진 지금 시즈의 생명력은 불치병 조차 자체의 저항력으로 이겨낼 정도였다. "괴물. 넌 인간이 아니야." 보를레스의 농담 반, 진담 반에 시즈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횃불의 붉은 빛을 그대로 받아드린 수 정 같은 눈동자를 보며 누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자신할까. 불안한 심정을 알아차린 듯 식은땀을 흘리던 아리에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자네들, 얼음의 대지에는 무슨 일이지? 몰라도 상관이야 없지만 궁금하군. 설마 여름인 대륙이 싫어서 사 시사철 추운 곳으로 이사를 왔나?" "유적을 찾아왔습니다. 저희는 학자거든요." 나무의 정령들을 유레민트가 힘을 주듯이 아리에에게 힘을 받은 시즈가 르베븐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르베븐은 미심쩍은 어조로 반문했다. "저 덩치가 학자란 말인가?" 그의 반문은 보를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자라면 하루종일 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보를레스의 덩치 와 근육은 아무리 불량 학생이라고 해도 만들어질 만한 게 아니었다. 쿡, 하고 웃음을 작게 터뜨리며 시즈가 대답했 다. "그는 호위입니다. 저희를 보호해주고 있죠. 얼음의 대륙은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흐음‥. 그렇군. 유적을 탐사하러 왔다라‥." "혹시 이 아는 유적이라도‥." "자네, 혹시 대륙에서 얼음의 대지에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나?" "들어본 일은 없습니다. 단지 어떤 서적에서 찾았을 뿐이죠." 갑자기 르베븐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볼을 긁적이며 르베븐은 이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 었다. "나도 한 번 들었을 뿐인, 유적의 존재를 자네처럼 젊은이가 알다니 신기하군, 그래. 혹시 대륙에서는 대단한 학자 로 이름을 떨쳤나?" 반은 맞았지만 시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냉큼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은 르베븐이 지도를 가져왔다. "이건 내가 20년 전에 집에 머물렀던 대륙인에게 맡아두었던 지도야. 그들도 자네들처럼 유적을 찾는 이들이었지. 다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그건 혹시‥." "그래! 학자라서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그들은 여기에 자신들이 찾는 유적가 어디쯤이라고 예측을 해놓았지. 시즈, 자네의 생각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선구자들의 생각도 한 번 보면 나쁘지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대륙에는 얼음의 대지에 대한 지도마저 없는 실정이었다. 아주 고대에 그려져 내려오던 그림 몇 장이 남아있었지만 자원도 없는 대지를 그려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륙의 지도도 완전히 그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르베븐의 말대로라면 시즈보다 먼저 얼음의 대지를 밟았던 자는 엄청난 부자였거나 뛰어난 학자라고 보는 게 옳았 다. 망설이지 않고 지도를 펼친 그의 투명한 동공에 흐릿하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함께 고개를 들이민 유레민트가 중얼거렸다. "정중앙이군요." "가능할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를레스와 아리에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리에는 참고 조용히 들었지만 보를레스에게 그 정도 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설명을 좀 해달라고." "자네는 바보인가?" "르베븐까지 왜 그러십니까?" "이 얼음의 대지 한 가운데 인간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르베븐의 질책에 깨달은 사람은 아리에였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아! 하고 외쳤다. 보를레스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물이 없군요. 게다가 동물도 적겠죠. 사람이 살 여건이 되지 않아요." "병난 아리에 아가씨가 멀쩡한 보를레스보다 낫군." 보를레스가 이를 갈았지만 르베븐은 완벽하게 무시했다. 그에게 시즈가 물었다. "이 지도를 가지고 있던 학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아마도‥ '미첼‥드나헤'라고 했을 거야." "미헬 드나에!" "그래! 미헬 드나에였어! 엘프님께서 아시는 군." 브베븐은 자신이 알아냈다는 듯 기뻐했다. 시즈가 유레민트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를 아십니까?" "네. 물론이죠.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는 20년 전에 실종된 아스틴네글로 드의 현자에요. 지금은 미헬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종자들에 의해 아스틴네글로드의 일곱 번째 은자라고 불리 고 있죠."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7화 유레민트는 잊었던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얼굴이 밝았다. 하지만 잠시였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지도는 제 생각과도 맞아떨어집니다." 역사의 고리는 대륙의 어떤 단체보다도 뛰어난 마법사와 학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오지에서도 살 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어쩌면 오지일수록 그들에게는 정체를 숨긴다는 이유로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로 갈 생각인가?" "예. 가야지요." "그럴 거면 그 양털모피는 버리고 가게." "옷을 버리고 가라니, 누굴 얼어 죽일 말씀이시오?" 발끈하여 보를레스가 소리쳤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쳤다. 양털은 일행에게 얼음의 대지를 헤치고 나갈 하나 뿐인 보루였다. 침착하게 시즈가 이유를 물었다. "다른 방안이 있습니까? 보를레스의 말대로 양털은 매우 중요한 방한복입니다." "허허‥. 양털 따위를 믿고 얼음의 대지, 중심을 향해 가겠다고? 그건 미친 짓이야. 이 양털을 내게 주게. 난 자네들 에게 순록과 물개의 가죽을 주지. 양가죽보다 백 배는 나을 걸." 그리고 르베븐은 자신 있어 하는 물개의 가죽을 내놓았다. 한 번 쓱 쓰다듬은 아리에가 경탄했다. "와아‥. 굉장히 부드러운 데요?" "하지만 털은 별로 풍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순록도 마찬가지에요." 보를레스의 말에 뒤늦게 꺼내온 순록가죽을 만져본 시즈가 르베븐을 올려다보았다. 르베븐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양털은 꼬불꼬불 엉키지만 순록과 물개는 아니거든. 촘촘한 털이 가득해서 안까지 물이 스며들지 않지. 반대로 양 털은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을 빨아드려서 더욱 춥게 된다고. 사실 제일 좋은 것은 해달의 가죽이지. 그런데 해달은 뭍에 올라오지를 않기 때문에 잡기가 너무 어려워. 그러니 이걸로 만족하게." "감사합니다. 저희는 전혀 몰랐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환경이란 그 곳에서 적응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턱대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지." 르베븐이 결코 대륙의 학자들에 처질 현자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음성에는 무게가 있었고 경험에서 나온 깊이가 있었다. 손가락을 꼽으며 다시 입을 연 르베븐은 일행이 얼음의 대지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중앙에 가면 혹시나 에스키모들을 만날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극히 주의하게. 여자들은 혹시 그들에게 붙들린다 면 그냥 혀를 깨물고 죽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드문 얼음의 대지에서 에스키모들은 안전한 종족 번식을 위해 타 종족의 씨를 받지. 여자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 몇 번이고 다른 종족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르베븐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식인을 하기도 해. 잔인하고 호전적이지. 고기를 먹는 자들이 호전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얼 음의 대지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은 대부분 기름기가 많지. 에스키모들은 식인으로 에벌레 등에서나 얻을 수 있는 성 분을 얻는 모양이야." '단백질이군.' 시즈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유가 어떻든 식인이라는 결과는 같은 인간으로써 혐오스러웠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지 얼굴을 편 사람은 유레민트에 불과했다. 엘프들은 인간이라는 타종족의 습성도 인정하고, 심지어는 오크들의 종 족습성도 인정하는 이들이다. 에스키모들의 식인이라는 습성 또한, 그들의 문화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유레민트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르베븐이 한 마디 했다. "어쩌면 엘프님을 보면 다들 좋아서 잔치를 벌릴 지도 모르지요. 엘프의 고기는 용의 피처럼 심신에 좋다고 하니 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방 대륙의 무사들이 세일피어론아드를 공격해왔을 때, 식성이 풍부한 그들은 걸어다니는 돼 지, 오크에 경탄했고, 순수한 육체를 가졌다는 엘프에 반해서 그들을 생으로 잡아먹기도 했다. 소문은 과장되어 엘 프의 고기를 먹으면 불사의 육체를 갖게 된다고까지 나돌았다. 당시의 일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나 할머니에게서 얼마나 끔직했던 과거인지 들었던 유레민트는 금 새 시즈들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려 뜨렸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르베븐은 껄껄대며 말했다. "보를레스가 있으니 걱정이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해골을 머리에 쓴 여자가 이끄는 에스키모를 만나거든 조심하게. 해골을 머리에 쓴 여자는 바로, 콜로마녀야. 매우 위험한 주술사지. 그들은 분홍빛 눈이 내리면 나타난다고들 하더 군. 난 지금까지 본 일이 없지만 말야. 하하하핫!" 시즈 일행은 완전히 침묵했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지만 얼음의 대지는 추위 이외도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너 무나 많았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8화 르베븐이 정성껏 손질해준 순록의 가죽을 입은 보를레스는 무척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유레민트와 아리에도 놀라움 을 감추지 못하고 얼음바닥을 뒹굴며 장난을 쳤다. 추위는 더 이상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르베븐은 옷 이외에도 간단하게 세울 수 있는 천막을 제공했다. 일행은 그 안에서 서로를 껴안고 자며 얼음의 대지 중심을 향해 전진했다. 물론 보를레스는 아리에를 안지 못했다. 그 전에 눈발 날리는 시즈의 눈빛에 얼어죽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흠모하는 유레민트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조금씩 눈과 얼음의 땅에 익숙해졌다. 르베븐이 주의시켰던 가죽 손질도 밤이면 가벼운 일과 처럼 이어졌다. 손질을 안 하면 털들이 엉켜 가죽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죽 손질이랑 의외로 시간이 많 이 걸리는 일이었다. 다행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가죽이 남아있어 두 사람이 사냥을 나가면 나머지는 가죽을 손 질했다. "시즈, 잘 보라고. 오늘은 내가 끝내주는 낚시 솜씨를 보여주지." "하하핫!" 시즈는 거침없이 웃었다. 얼음의 대지에서 육지는 대부분 섬이었다. 무수히 많은 섬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바닷물이 얼어서 거대한 대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찾으면 얼음 아래로 물고기들이 지나가는 낚시터를 찾을 수 있다. 단, 얼음을 깨는 게 꽤나 어렵다. 보를레스는 희대의 바스터드 소드라고 할 수 있는 제뷔키어를 얼음 깨는 데 사용했다. 팍! 팍! 팍! 팍! "으야아아아아압!" 용병왕을 상대하던 현란한 검술이 얼음을 향해 쏟아진다. 수북히 쌓인 얼음가루는 당장에 산을 이뤘다. 그리고 그것 을 발로 꾹꾹 밟아서 의자 모양을 만들었다. 낚시대는 그리 길 필요가 없었다. 얼음 아래로 실을 늘어뜨리기만 하면 되니까. 제뷔키어는 곧 낚시대로 변모했다. 얼음의 대지에는 육식성 물고기가 많았다. 어제 잡았던 백곰의 살조각은 꽈악 얼려져있었지만 물에 들어가는 즉시 굳어있는 피를 풀어놓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낚시대를 늘어뜨린 보를레스는 인생의 마지막을 여유롭게 장식할 늙은이의 유희거리를 보는 듯 했다. 시즈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음의 절벽가로 왔다. 절벽에는 수많은 새들이 둥지를 짓고 살았다. 그는 오늘의 별미로 새고기를 준비할 심산이었다. 무리가 많은 새들은 조심해서 잡아야 한다. 잘못하면 단체로 덤벼들기도 한다. 얼음의 대지에 서식하는 무리들답게 새들도 매우 난폭했다. "바람이여‥. 나의 부름이 지금 있으니, 그 뜻을 따라 불어주세요." 손을 뻗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응축되어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오자 바로 준비했던 바람을 폭사시켰다. 퍼득퍼득! 갈매기는 갑자기 자신을 감싼 이상기류에 당황하며 날개를 퍼덕거렸지만 아무런 소용없었다. 이상기류는 실처럼 날 개의 깃털까지 하나하나 옭아맸다. "좋아." 품 안으로 정확하게 떨어진 갈매기의 목뼈를 바로 부러뜨린 시즈는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 다. 좋은 답례를 받았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이 눈발처럼 휘날렸다. "보를레스. 어때요?" 시즈가 돌아올 때까지도 보를레스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성과가 없었는지 지루함과 짜증스러움이 가득한 그 얼굴 을 한 손이 일그러뜨리며 받치고 있었다. 키득거리며 갈매기를 잡고 있는 그가 못 마땅한 보를레스가 벌떡 일어섰 다. "제길! 웃지 마! 낚시란 안 잡힐 때도 있는 거라고!" "보를레스!" "왜!? 내가 잘못 말했어!?" "그게 아닙니다. 저걸 보세요." 시즈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보를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땅이, 분홍색이잖아?" "빨리 가봐야겠어요." 그들의 천막이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보를레스와 시즈는 있는 힘을 다해서 달렸다. 천막이 가까워지자 그들의 몸에 천천히 눈발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분명히 붉은 색의 눈이었다. "언제부터 내린 겁니까?" "모, 모르겠어. 난 계속 낚싯줄만 바라보고 있었단 말이야." 시즈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냉정하게 보이던 수정의 눈동자가 분노의 불길을 태워댔다. 유레민트와 아리에가 있어 야 할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설(赤雪)이 시즈를 주위로 빙글빙글 돌면서 그를 약올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시즈, 진정해.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당장 여자들을 찾아야 해!" "후우‥." 보를레스가 손을 저으며 시즈를 말렸다. 당황할 때 동료가 있음은 이렇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시즈는 눈을 감고 정 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내 의지를 따라라. 바람이여!" "크윽!" 강한 의지의 발현로 인한 바람에 보를레스는 뒤로 쓰러질 뻔한 몸을 가눴다. 잠시 후 시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저 쪽입니다." "가자!" 두 사람의 인영을 눈이 휘감는다 싶더니 사라져버렸다. 그 정도로 보를레스와 시즈는 빠르게 움직였다. 이글거리는 불빛. 에스키모는 대륙인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증거였다. 얼음의 대지에서 불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이 나 다름없으니까.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견하기에도 거대한 얼음집 가운데에 그들을 두고 에스키모의 사내들은 매우 기쁜 표정을 지으며 술과 음식을 먹 고 있었다. 그들이 왜 기뻐하는지는 르베븐을 통해서 자세히 들었던 두 여인이었기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는 알지 없었다. 다만, 분홍빛 눈과 함께 에스키모들이 몰려왔을 때, 아리에는 검을 들고 유레민트 는 마법을 일으켰다. 하지만 해골을 머리에 쓰고 온몸을 검게 칠한 여인이 이상한 주문을 중얼중얼 외는 순간 머리 에서는 현기증이 일었고, 별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주술이라면 시즈와 보를레스 두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길지 걱정이 일었다. 하지만 그보 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에스키모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남자가 오지 않는다는 가정이었다. 영원하길 바랬던 에스키모들의 식사시간이 거의 끝나간다. 한 여인이 다가와서 아리에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몸에 붉은 색의 액체를 바르기 시작했다. 유레민트도 마찬가지. 에스키모의 사내들이 욕망에 흥건해진 눈빛으로 바라본 다.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붉은 액체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 순간 근육에 들어있던 힘이 빠져 나가고 팔 다리가 풀렸다. 아리에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으로 있는 힘껏 외쳤다. "시즈!"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9화 어디선가 돌풍이 천막을 통째로 쓰러뜨릴 듯 불어댔다. 에스키모들이 평생을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바람이었다. 당황한 해골의 마녀가 땅에 머리를 박으며 중얼중얼 그들의 신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바람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자는 따로 있었다. "아리에‥." 얼음의 대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리에는 온몸을 나긋하게 만드는 따스함을 느꼈다. 긴 장이 풀어져 천천히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의 몸을 옷과 가죽으로 둘둘 말아서 안아든 이는 시즈였다. 얼음처럼 차 갑고 투명한 눈동자, 그는 듣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얼려버릴 목소리를 냈다. "보를레스, 갑시다." "그래! 많이 기다렸지요? 유레민트." "조금 늦었어요." 유레민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붙잡은 보를레스의 손끝으로 그녀의 등에 흘러내린 땀이 축축하게 다가왔다. 비 장한 표정으로 보를레스가 물었다. "아무 일 없었죠?" 무슨 일이 있었다면 보를레스는 제뷔키어에 걸고 에스키모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해 버릴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유레민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키모들이 두 눈을 멀뚱히 뜨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보를레스와 시즈는 담담하게 움직였다. 그 때, 에스키 모의 마녀가 앞을 가로막았다. 보를레스와 시즈가 우뚝 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유레민트는 긴장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두 사내에게 말했다. "그녀를 조심하세요. 그녀의 주술은 르베븐의 말처럼 만만한 게 아니에요." "분홍색 눈발의 장난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유레민트. 그 정도라면 이미 시즈가 간파하고 있으니까." "예?" 유레민트는 반문했지만 시즈의 입가가 비웃음에 가깝게 말려 올라간 것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해골 마녀는 눈을 크게 떴다, 작게 떴다 하면서 시즈를 노려보았다. 인간에게서 색이라는 것을 한꺼플 벗겨낸 듯한 시즈의 외모 는 에스키모인들에게도 암적인 두려움을 선사했다. 숨을 죽이고 은백의 정령의 눈치를 살필 때, 바람에 날린 돌맹이 하나가 정령의 뺨에 살짝 상처를 냈다. 주루룩하고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에스키모들은 고개를 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피다. 인간이다!" "인간이야, 인간!" 그들의 용기는 해골의 마녀가 양손을 들고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면서 극대화됐다. "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에스키모 하나를 발로 걷어찬 뒤 보를레스는 시즈의 옆으로 와 섰다. 현재 시즈의 분노가 극에 치닿고 있음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몇 초 후 에스키모들에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알고 있는 그는 불행 한 미래를 예측한 예언자처럼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모두 비켯!" 콰르르르! 창은 원래 끝이 날카로워 바람이나 공기를 효과적으로 가를 수 있다. 한 에스키모는 던진 창이 가다가 떨어지는 것 도 아니고, 반대로 되돌아오자 기겁을 했다. 천막은 시즈의 은발이 날리며 생성된 보이지 않는 칼날에 산산조각 났 다. 같은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붕 떠서 뒤로 날아갔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시즈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토막난 생선처럼 잘린 팔 다리가 얼음 위에서 펄떡였다. 보를레스는 은근히 눈썹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열 받았군. 하지만 당신들 잘못이라고.' "유레민트, 우리는 먼저 가죠." "하, 하지만 저대로 놔두면 에스키모들은 모두 죽어버릴 거에요." "어쩔 수 없어요. 시즈를 화나게 했으니. 그가 부리는 바람을 얕보면 안 되요. 바람은 충분히 파괴자가 될 수 있거 든요." "보를레스라면 말릴 수 있잖아요." "그렇기야 하지만‥." "그렇다면 어서 말려요!" 유레민트는 에스키모들의 행동을 단지 그들의 습성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 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시즈를 말릴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시즈!" "여기서 멀어지십시오. 나는 저들을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돌아온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를 보고 시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말리러 왔다는 것을. 멀리서 그를 본 유레민트는 금새 기가 질렸다. 시즈가 얼마나 강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지 강한 압력으로 얼음에 죽죽 균열이 가 고 있었다. "시즈, 그만둬요. 그들의 문화에요. 어쩔 수 없다고요." "어쩔 수 없다면 그 문화를 없애버리겠습니다." "이 곳은 그들의 대지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얼음의 대지에 적응한 자들이고요.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은 얼음의 대지에서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생긴 당연한 문화애요. 우리가 얼음의 대지에 침범한 이상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달라도 이해해야 되요." 시즈는 이를 갈며 유레민트와 해골의 마녀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에스키모들은 본능적으로 구 원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머리를 얼음에 마구 박아가며 용서를 비는 그들은 시즈를 신과 다름없는 존재로 착각했다. 백설의 머리카락, 얼음 같은 눈동자‥ 얼음의 대지를 다스리는 신의 여인을 건들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용서를 비는 에스키모를 보며 분노했던 시즈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좋아요." "휴우‥. 고마워요, 시즈." 바람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시즈가 돌아서자 유레민트는 안도의 한숨을 흘려보냈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그녀 는 내심 눈물이라도 펑펑 쏟을 지경이었다. 보를레스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유레민트의 앞인지라 제법 허세를 떨었지만 정말로 맞선다면 목숨을 몇 개나 감춰뒀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속사정도 모른 채 시즈는 아리에를 꽉 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0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꼭 역사의 고리를 찾아야 해?" 깨어난 아리에가 다짜고짜 내뱉은 물음이었다. 시즈와 보를레스가 제 때 온 덕에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아리에는 반쯤 지쳐있었다. 그녀의 눈은 제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흥건했다. "미안, 잠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얼음의 위로 비죽이 튀어나온 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즈를 맡았다. 그는 털썩 앉아서 전혀 밤이라고 느껴 지지 않는 백야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왜 굳이 그들을 찾으려고 하는가.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원한일까? 나를 못 살게 구는 게 귀찮아서? 역사를 뜻대로 바꾸려 하는 그들이 싫어서?' 어느 것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고민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데리고 올까요?" "그만둬요, 유레민트. 어차피 목표 없는 걸음은 언젠가 방향을 잃게 되니까." "하지만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어요. 움직이지도 않고 저러고 있다고요. 이 곳에서는 한 시간만 움직임을 멈춰도 차 가운 한기에 온몸은 동상에 걸려버릴 거에요." "흐음‥." 모포를 덮은 아리에가 몸을 웅크린 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시즈를 데려올 만 한 사람은 아리에 밖에 없었지만 그녀 또한 시즈와 다를 바 없으니 막막했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얼음의 대지에는 더욱 차갑게 눈이 내렸다. 대륙과는 다르게 펑펑 쏟아지는 눈이 얼마나 쌓였을까. 저벅저벅‥. 보를레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즈에게 다가갔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눈의 퍼석거림이 시간이 꽤나 지났음을 간 접적으로 전해주었다. 그의 기척을 느꼈지만 시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에 눈과 얼음이 내려앉은 모습은 진실로 눈의 정령이 강림한 듯 했다. 보를레스는 얼음 조각같은 청년의 어깨에 쌓인 눈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그만 들어가서 몸을 녹여라. 더 이상은 자해일 뿐이야." "‥‥." "바보 같은 놈!" 대답도 없이 멍한 시즈의 얼굴에 보를레스의 거대한 주먹이 작열했다. 뻐억! 뜨거운 마찰음이 시즈를 눈바닥에 데굴데굴 굴렸다. 보를레스는 시즈를 때린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지금 네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내 주먹을 주체할 수가 없다. 대륙을 좌지우지하며 일들을 처리해가던 넌 어디 로 간 거냐? 이 찬 바람에 얼어버린 거냐? 너 자신의 명칭을 잊었나? 마땅찮은 이여!" "‥보를레스." 멱살을 잡아 올려 한 방을 더 먹여주려 할 때, 시즈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보를레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 다. "뭐냐!?" "당신은 왜 날 따라온 겁니까? 이 목적도 확실하지 않은 길을‥." "네 녀석이니까 따라왔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나도 왜 이 길을 가야할지, 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즈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내 잘못이 다.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은‥. 하지만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그냥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좋아. 가거라. 나도 그 뒤를 따르지." "‥‥." "가끔은 목적 없이 방황해도 좋아. 너 자신만 생각하면서 길을 간데도. 나는 널 지켜볼 자신이 있다. 몇 번 상처 입 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 "그 이유가 뭡니까?" 암울한 표정의 시즈가 묻자 보를레스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왜 저 녀석을 위해 이토록 헌신적일까. 언젠가 보를레 스는 시즈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라고 하여, 이토록 마음이 끌릴까? 내심 천천히 떠오른 답에 보를레스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등을 돌리고 겸연쩍은 어조로 대답했다. "친구‥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친구‥?" 시즈는 자신만 들을 수 있게 반문해보았다. '친구.' 세일피어론아드에 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 중에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나. '동료.'라는 이 름으로 함께 했던 이들. 시즈는 친구라는 말에 특이한 감정이 들었다. 허전했던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느낌이었 다. 쑥스러워 등을 돌린 보를레스,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서 따스한 기운이 한 줄기 섞여있음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맞 바람에 몸을 맡기고 절벽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새들은 자유로운 날개 짓을 하며 말이 없는 내 마음을 아는지 작은 내 모습 위로‥ 날아가네‥. 다가가면 멀어지는 사람들, 사랑하는 그대마저 떠‥난 밤이 오는 노을 아래 서 있는 나는 홀로 이렇게 울고 있네‥.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고 싶지만 나의 곁에 다가와준 내 친구는 힘이 들어도 꿈을 찾고 있었지. 어떤 날은 버려진 나를 위해서‥. 이제 나의 꿈들을 찾아 떠나야겠어. 그 누구나 새로운 많은 날이 있잖아. 나의 꿈을 찾아서 다시 노래할 거야. 언제까지 변하지 않는 나의 친구와‥. 노래가‥ 끝나가는 내 곁에‥ 나를 보는 친구가‥ 있‥네‥. <블루 - 친구를 위해> 가슴이 따뜻해졌다. 보를레스는 등을 돌렸다. 시즈는 그 옛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매혹적은 미소를 은은하게 짓고 있었다. "‥‥." 멀리서 둘을 엿보던 아리에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보를레스보다도 믿어주지 못했다. 흐느끼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며 유레민트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리에. 그들은 이제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친구에요. 당신은 앞으로 시즈와 함께 해야할 연인이 고‥. 믿음이란 어떻게 믿어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앞으로 어떻게 믿어주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죠." 소리 죽여 울며 아리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1화 "대충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하루가 지나 시즈는 수척하지만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일행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답이 될까 의문이 갑니다." "대체 뭔데 그러는 거야?"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고 하지요." "시즈가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뜻인가요?" 유레민트가 믿기 어렵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즈는 헤트라임크의 양자로 세상에 알려진 만큼 그 출생에 대해 서는 의문투성이였다. 그런 그가 보이는 것은 모두 얼음뿐인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건가? 시즈의 머리카락와 눈동자 를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판단에 시즈가 놀라서 양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에요? 나의 출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음유술사에 대해 그러는 거죠. 젠티아는 세일피어론아드 자체가 부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역사의 고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음유술사들의 탄생을 말하는 거군요."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가 이 곳에 온 이유‥." "무슨 뜻인가요?" "전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모습에서 동방인이라는 사실은 엿볼 수 있어요. 하지만 동방인이라고 해서 꼭 동방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 잖아요." 유레민트는 시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시즈에게 그저 미소만 떠올릴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바라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시즈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따라오실 겁니까?" "난, 간다." 보를레스가 일어섰다. "전 고용된 몸이니‥." 유레민트도 일어섰다. 일어선 이들은 모두, 앉아있는 한 사람을 응시했다. 기대에 물든 눈빛, 아리에는 부담을 느꼈 지만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마디를 하는 대신에 폴짝 뛰어 시즈의 품에 안겼다. 혀를 내밀고 헤헤하고 웃는 그 녀를 보자 일행은 긴장이 주룩 빠져버렸다. 흐물흐물해진 손짓을 하며 시즈가 말했다. "가, 갑시다!" 어쨌든 에스키모들과의 다툼이 있은 후로 시즈는 아리에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아리에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아리에는 말투가 어린애 다루듯 시시콜콜하여 가끔씩 시즈는 공처가가 될 미래를 미리 경험해야 했다. "네 말대로라면 거의 다 온 게 아닌가?" 그들이 다시 길을 떠난 지 알 수 없었다. 설원은 밤마저도 낮처럼 밝았으니까. 밤낮을 구별할 수 없는 현상은 일행 에게 더욱 피로를 안겨주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짜증을 물리쳐가며 일행은 눈을 헤치고 얼음을 미끄러져 갔다. 이윽고 어느 날, 보를레스 의 물음에 시즈는 대답 대신에 짐에서 나침반을 꺼내서 던졌다. 휘익―하고 날아간 나침반이 먼저 보를레스가 언급한 곳에 떨어졌다. 그리고 시즈와 일행은 한 걸음, 한 걸음을 긴 장과 피로에 찌든 다리로 다가갔다. 면도도 제대로 못해 턱수염에 얼음이 잔뜩 단 보를레스와 시즈는 눈사람을 방 불케 했다. 빙글빙글 돌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 보를레스는 헛것을 보았나, 눈을 비볐다. 시즈가 말하길 얼음의 대지 중앙에 서는 나침반이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돌 거라고 했던 것이다. 유레민트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버텨오며 찾지 못하면 시즈를 반 죽도록 패대기를 치리라 결심했는데‥. 나침반은 놀 랍게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다. 마치 길 잃은 미아를 보는 듯 했다. "에효∼." "드디어 도착했군요. 설마 세일피어론아드에 나침반이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곳이 존재할 줄이야. 이건 새로운 발견 이 될 거에요." 아리에는 주저앉았지만 유레민트는 지치지도 않았는지 열의에 찬 음성으로 새로운 발견을 찬미했다. 반짝거리는 녹 색의 눈동자에 새로운 별자리가 생겨났나 착각할 정도였다. 물통을 돌려 목을 축인 시즈는 말했다. "이 주위 어딘가에 역사의 고리가 세력을 키워온 은거지가 있을 겁니다." 기운이 솟았다. 방금 전까지 어디에 숨었을지 코빼기도 안보이던 기운이 콸콸 쏟아졌다. 시즈의 일행은 모두 일어나 서 사방으로 퍼졌다.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다. 그 때, 아리에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아리에!" 에스키모와 같은 전례가 일어났나? 다급하게 보를레스와 시즈 등 일행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아리에는 상처 머리카 락 하나 사라진 것 없이 멀쩡했다. 그녀는 다만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고개를 돌리는 사람마다 굳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은 대체 무얼 본 것일까? 그것은 햇빛에 반짝이는 얼음 의 도시였다. 기뻐했어야 할 상황이 아니냐고? 다음 시즈의 중얼거림을 들어보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저것은‥ 타이즈벡!" "우리는 얼음의 대륙을‥ 한 바퀴 돌았다는 건가?" 그렇다. 너무나 눈에 익다는 게 문제였다. 허탈해진 그들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걸고 보를레스는 시즈가 들 고 있는 나침반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나침반이 계속 돌고 있는 거지?" "그것은‥." "타이즈벡이 얼음의 대지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지."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 또한 귀에 익었다. 고개를 든 그들의 시야에 장년의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를 보며 유레 민트는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르베븐‥." "유레민트, 실망이야. 네가 날 못 알아볼 줄이야. 역시 얼음의 반사광에 진실을 보는 눈이 어두워 진 거야?" 유레민트가 르베븐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일행 또한 그렇게 보았던 사내는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변했다. 주름살이 주룩한 늙은이가 되기도 했고 멀쑥한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섰을 때 유레민트는 망연히 중얼 거렸다. "미헬 드나헤‥." "예!?" 일제히 놀란 얼굴을 하는 일행. 그리고 미소를 짓는 르베븐 아니, 미헬 드나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건 넸다. "바람을 노래하는 이와 일행 여러분, 반갑소. 역사의 고리의 80번째 수장인 나, 미헬 드나헤가 인사를 드리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2화 사내는 일행이 알고 있었던 르베븐과 외모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풍기는 이미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유레민트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게 무슨‥." 말을 잇지 못하는 시즈. 그의 일행을 휘이 돌아보고 미헬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꽤나 고생들을 하신 모양이군. 갑시다. 역사의 고리가 태어난 곳이자, 아직도 숨쉬고 있는 '환원의 도시', 프르즈를 소개해 주겠소." "이게 누구 때문인데‥." "하하, 어쨌든 죽지는 않았잖소." 손으로 안내하는 모습이 자못 정중했다. 이러니, 먼저 시비를 걸 수도 없었다. 헛기침을 하며 보를레스는 미헬을 지 나쳐 걸었다. 시즈는 미헬의 옆에서 걸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한 쪽 팔에는 아리에가 잔뜩 긴장해서 매 달려있었다. "타이즈벡이 얼음의 대지, 정중앙이라니‥ 대체 무슨 뜻입니까?" "말한 그대로요. 그 나침반이 증거가 아니겠소? 하긴‥ 궁금할 테니 설명해 주리다. 그 전에 내가 하나 묻지요. 시 즈, 그대는 지도가 내 집에 있다는 사실에서 뭔가 의심점을 발견하지 않았소?" "‥하기는 했습니다. 위험한 여행을 떠난 이가 어째서 지도를 가져가지 않았나‥." "왜 그 때의 의심을 무시한 거요?"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지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설마‥하고 의심을 지웠지요." "하하‥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그대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로군." 미헬은 껄껄대고 웃었다. 그의 집에 지도가 있었던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유적을 찾아서 떠났던 미헬은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암중에서 대륙을 조종하던 역사의 고리도. 필요 없는 지도를 집안 구석에 박아두는 건 당 연했다. 한동안 웃어댄 그는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좋아. 시즈, 그대가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주지. 그대들이 타이즈벡, 아니 프르즈에 왔을 때, 난 무척 놀라고 당황했 소. 다행히 당신 일행은 추위로 인한 위기에 처해 있었지. 그로 인해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파악하는 능력이 무뎌진 거요. 아니라면 아스틴네글로드 최고의 현자와 그 이상 간다고 전해지는 '마땅찮은 이'가 의심이 생겨도 넘 어갈까?" "‥음‥." "특히 유레민트의 동행은 뒤통수를 맞는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약간의 빛을 움직일 줄 알지. 인간은 빛에 따라서 이미지가 확연히 바뀌니까. 그대들이 처음 도착한 날, 추위로 인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나는 당신들에게 르베븐이라는 존재를 입력시켰소. 매우 성공적이었어. 유레민트는 냉정해진 후에도 날 알아보지 못 했으니까. 르베븐이라는 존재가 미헬의 이미지를 은근히 가렸기 때문일 테지." 시즈 일행은 말을 잃었다. 그들은 르베븐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푼의 부자연스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게 자신 들의 실수였다니‥. 시즈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 때, 무사히 강을 건너서 냉정한 상태였다고 속았을 거야.' 침중한 그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헬은 미소를 지었다. "내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대들이 두려울 것은 없었소. 난 그대들이 음유술사 일행이라는 사실을 잊기로 했소. 실제로 내가 고민했던 것을 부탁하기도 했고 차를 마시면서 아주 즐거웠어. 그대들이 떠날 때, 양털 대신 순록의 가 죽을 준 것도 순전히 호의였소. 그것은 알아주시오. 아! 왜 타이즈벡이 프르즈인지를 물었소? 인간은 나쁜 버릇이 있다오. 한 번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버 리면 가상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확인하는 일은 드물지. 그대들은 모두 이 곳은 얼음의 대지, 가장자리라고 정의를 내렸소. 그대들이 호되게 당했던 강 때문이겠지만. 그게 실수였지. 만약 나침반을 한 번이라도 꺼내봤다면 목적지에 이미 도착했음을 알았을 거요. 난 어떻게라도 당신 일행이 나침반을 꺼내지 않게 해야 했지. 모험으로 지도를 건네준 거요. 시즈, 그대에게 달린 일이었지. 의외로 그대는 그냥 넘어가더군. 그리고 지도를 믿었지. 난 확신했소. 지도를 믿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나침반을 꺼내지 않을 거라고. 내 말이 틀렸소?" "정확합니다." "마땅찮은 시즈라면 고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오!? 생각해보오. 그대는 헤트라임크의 고서적에서 프르즈의 존재를 알았겠지. 역사의 고리가 창립된 지 몇 천년이 흘렀소. 그 동안 이 얼음 의 대지가 지금의 모습이었을 것 같소?" "그렇군요." 시즈는 뇌리에서 뭘 놓쳤는지 깨달았다. 예전에 얼음의 대지는 정말 거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일피어론아드 전체 가 얼음의 대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읽었던 서적에 근거하면 서적이 쓰여졌을 때의 얼음의 대지는 현재의 두 배가량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즈는 프르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놀랐다. "아니!" 타이즈벡이라고 일컬었던 도시는 없었다. 무지개의 색으로 빛나는 도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울 을 이용한 반사작용으로 여기저기에서 쏟아진 빛은 얼음으로 지어진 건물을 하나하나 찬란하게 변모시켰다. 희안하 고도 화려한 광경에 발이 묶인 시즈들을 미헬은 재촉했다. "어서 들어갑시다. 이게 바로 프르즈가 신비하다고 전해지는 이유요. 우리는 이것을 빛의 장막이라고 부르지. 안에 서는 무지개 빛으로 찬란하지만 멀리서는 이 도시가 보이지 않을 거요." 변한 것은 건물 뿐이 아니었다. 사냥꾼의 복장을 하고 있던 남자들은 푸른 로브를 걸치고 여인들은 머리에 긴 모자 를 썼다. 손가락에는 마법을 강화시키는 반지가 주렁주렁했고 눈에는 현기가 흘렀다. 시즈는 들고 있던 나침반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늘은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대가 마땅찮은 시즈? 생각보다 훨씬 젊군." 역사의 고리는 시즈가 생각했던 원수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시즈가 자신들이 싸워오던 음유술 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몰려와서 허락하지도 않은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시즈는 상황에 적응을 못하고 조용히 몸을 내맡길 때, 미헬은 학자들과 마법사들을 제쳤다. "이보라고. 당황하지 않나. 그는 우리를 해치우러 왔을 텐데‥." "아하하! 그렇지. 미안하네." '그렇지, 미안하네.'라니‥. 유레민트는 암중 보를레스에게 역사의 고리에 대해 들었던 것과 차이가 많아 혼란스러웠 다. 보를레스는 이게 그들의 정신 공격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상당한 성공적인 충격을 선사했다. 썩은 나 무토막처럼 서있는 그들을 이끌고 미헬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오색으로 찬찬한 집이었지만 그 안은 예전에 보 았던 르바븐의 집과 같았다. "혼란스럽겠지? 이해하고 있소. 그대들이 어려워하는 현실에 대해 조금 설명해주자면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 오."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니까 그대들이 살아있지요. 난 충분히 독을 넣어서 당신들을 죽일 수 있었소. 내 집에서 차 마신 게 한 두 번이오? 게다가 저들을 얕보지 마시오. 나도 그대들의 소문을 들었고, 또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 지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저들 중에 대부분은 6클래스를 넘어가는 마법사가 대부분이고 10명 이상이 8클래스 마 스터에 도달했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대륙에서는 한 국가에 8클래스가 둘이 없어서 난리인데, 한 마을에 10명 이상이 살고 있다 니. 유레민트는 엄청난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미헬이 더 대단해 보였다. 시즈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하여 적이 아닌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 오." "그러지요. 지금 대륙에 있는 역사의 고리와 여기 프르즈에 있는 역사의 고리는 과거는 함께 했지만 현재와 미래를 함께 하지는 않소." "그 말은 다르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미헬은 벽에 걸려있던 순록 머리 박제에서 왼쪽 뿔을 비틀었다. 한 쪽 벽에서 기이한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뿜어지 더니 벽이 스르르 사라졌다. 먼저 들어가서 손짓을 하며 미헬이 설명했다. "이 것도 역시 빛을 이용한 마법이지요. 실제로 사용되는 양은 매우 적어서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거요."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3화 불빛에 붉게 달아오른 얼음 계단은 일행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정을 박은 신발을 신고 있다고 해도 엉거 주춤할 수밖에 없는 시즈들의 자세에 미헬은 웃음을 참아가며 벽에 만들어져 있는 불길에 불씨를 넣었다. 얼어있던 기름이 녹으며 금새 통로는 밝아졌다. "조심하시오." "말하지 않아도 그러고 있소." 보를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이름까지 드높은 검사가 되었지만 외치는 기세와는 달리 그의 다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계단은 무척 길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태라서 얼마나 내려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3, 4층 깊이는 되어 보였다. "얼음 속에 있는 지하의 도시라‥." 유레민트는 아스틴네글로드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프르즈의 지하 연구 설비에 놀랐다. 그녀도 처음 보는 신기한 기 구들과 기계들이 주위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그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다는 듯 연구실은 천정에 달린 광석들을 빛냈다. "윽!" 눈을 뜨자 주위를 둘러본 보를레스는 얼굴을 꼬집어보았다. 상당히 아팠다. 꿈은 아니라는 뜻인데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방금 전까지 삭막한 기계와 약품으로 가득했던 연구실은 어느 새 초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잎새는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이것도 마법이오?" "그렇소. 비슷한 마법이오. 인간이라는 것은 눈으로 인식을 하게 되면 느낌조차도 바꾸게 되지요. 그만큼 눈에서 뇌 로 전달되는 영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암시라고 할 수 있소. 실재와는 다른 영상이라고 해도 인간은 진실이라고 인 식하게 되면 몸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반응하오." 미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몸이 뒤로 날릴 것 같은, 돌풍이었다. "으아아앗!" 시즈 일행은 붕 떠올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깨진 듯이 아팠다. 아리에는 눈물이 반쯤 흘러 나온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이것도 환상인 거야?" "그렇소. 미헬은 어느 새인가 하늘에서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고대 이전의 세일피어론아드를 알고 있소. 사실 역사의 고리는 당시의 문명을 조사하던 고대 마법사의 모임이오. 역사에 따르면 멀고먼 공간을 넘어서 세일피어론아드로 이주해온 이들은 수많은 빛들의 조작으로 진실인 지 허위인지 알 수 없는 영상에 현혹되고 누구나 파멸의 불꽃을 사용하는 위대한 문명을 가지고 끝내 멸망하고 말 았소. 아무리 발전을 한다고 해도 멸망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게 역사를 잡고 있었던 이유입니까?" "그렇소. 고대의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은 오랜 연구 끝에 인간의 문명에서 가장 안정된 시점으로 지금의 것을 집었 소.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과학기술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마법이 있소. 마법이라면 이상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 잠깐 맘을 멈춘 미헬은 힐끔 시즈를 내려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대자가 나타났소. 그들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역사의 조정이 자유의 억압이라고 생각했고 자연 자체를 움직이는 강대한 힘으로 역사의 조정을 거부했지. 그들은 모두 특이한 자연의 친화력과 뛰어난 의지를 가지고 있었 는데 자신들이 사라진 후에는 역사의 고리에 대항할 존재들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고, 한 가지 생각을 짜냈소. '우리와 같은 힘을 가진 이들을 음유술사라는 이름 하에 묶자. 그들의 사명을 역사의 자유 해방이라고 정의하자.' 모두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소. 어떻게 보면 노래가 자연에 가장 친화적인 접속 수단이라고도 하 기 때문이더군. 어쨌든 음유술사라고 자신들을 정의한 이들은 자신들의 후계자를 찾아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지.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오." 역사의 고리의 수장에 의하여 그들의 호적수였던 '음유술사'의 탄생 비화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야기에 빠져든 일행,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시즈는 미헬을 다그쳤다. "단, 한 사람? 그게 누구입니까?"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소. 그는 후예를 만들지 못했소. 세상이 넓다지만 그들처럼 뛰어난 의지와 자연친화력을 가진 이가 우글거리지는 않소. 때문에 음유술사 중에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극히 적은 것이오. 사실 지금도 세일피어론아 드에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음유술사가 몇이 있을지 알 수 없소. 물론 바람의 음유술사 중에서 그대보다 강한 자가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미헬의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한 뉘앙스를 남겨두었기에 시즈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미헬은 그가 묻기를 기다 렸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 책‥. 기억하시오?" "그것은‥." "또다른 고향이로군요!" 시즈보다 먼저 대답한 사람은 유레민트였다. 기이하게 흥분한 그녀를 보고 시즈와 미헬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 지만 아랑곳없이 유레민트는 주먹마저 불끈 쥐고 소리쳤다. "일기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소설이에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기계들과 세상, 진정한 환상의 세계가 담 겨있는‥." "하하하하‥." 시즈는 유레민트가 그토록 '또 다른 고향'에 취한 추종자였는지 몰랐다. 열성적으로 설명을 하던 그녀는 이내 주위 의 시선을 알고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낄낄 웃으며 보를레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 다. 미헬도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의 무표정한 인형 같던 유레민트에게 이런 모습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군요. 재미있네요." "헤에‥." 아리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유레민트는 은근히 어벙한 행동을 자주 저질렀다. 다른 곳에서 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행동한다는 뜻이었는데 한 번 보고 싶었다. "자자! 유레민트,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드리지요." 잠시 흩어졌던 주의를 모으기 위해 미헬이 박수를 쳤다. "이 '또 다른 고향'에서 당신처럼 뛰어난 현자마저 경탄시켰던 기계 문명은 '마땅찮은 이'가 창조한 게 아닙니다. 훨씬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지요." "에?" "바로‥ 고대 이전의 지고(至古)시대에 말입니다." "‥‥."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기이한 기류가 그들 사이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때, 유레민트가 조용 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시즈 세이서스는 아마도‥ 지고인일 겁니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4화 "정말이야? 시즈." 보를레스가 당장에 시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묵묵하게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고향'은 시즈의 일기로군요." 유레민트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있는 세계였다니, 그리고 그 곳에서 살던 인간이었다니‥. 미헬은 ' 또 다른 고향'을 쓱 훑어보고 충격에 빠져있는 그들을 깨웠다. "시즈, 그대가 우리의 생각대로 수많은 시간을 넘어서 왔다면‥. 당신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에는 세일피어론아드 사 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의지가 담겨있을 거요. 바람을 부르면 바람이 불고 파도를 부르면 파도가 이는‥." 무슨 말인지 알만 했다. 일찍이 시즈도 알고 있었던 내용이니까. 말이라는 것은 시간과 사용하는 사람에 구애받는 의지의 전달 수단이다. 시즈의 말에는 그가 넘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의미였다. 즉 그가 '아무개야. 안 녕?'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곧 수 천년 간 '아무개야. 안녕?'이라고 울려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소. 물론 예상보다 너무 빠르기는 했지만요. 만약 시 즈, 그대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방법도 알려줄 수 있소." "돌아갈 수 있는 방법?" "그렇소.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오. 개인으로서 세일피어론아드를 대변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네 사람이 모두 모인 다면 말이오. 네 사람의 음유술사가 모여서‥." "그만! 그만해요!" 그 때, 아리에가 소리를 지르며 미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시즈에게 말했다. "시즈, 혹시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아리에‥." 시즈는 손을 뻗어서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리에는 어깨를 움츠리고 뒷걸음질쳤다. '이 곳에 그토록 오고 했던 이유가 바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보며 시즈는 어쩔 줄 몰랐다. 유레민트가 다가가서 아리에 를 안고 달랬다. 머리를 쓰다듬고 무슨 내용을 속삭이는 유레민트에게 내심 감사를 전하며 시즈는 미헬에게 얼굴을 돌렸다. "계속 해보십시오." "흐음‥. 음유술사들이 모여서 그들의 의지로 그대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를 원한다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요." "으음‥. 이상하군요.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이 어떻게 음유시인의 비사마저 알고 있는 겁니까?"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시즈는 의심난 내용을 물었다. 미헬은 대답하지 않고 초원의 빛을 조작해서 다시 연구실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 앞으로 가서 마력을 주입한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씨를 써나갔다. 그러자 얼음의 벽은 또다시 울긋불긋하게 변화하더니 이상한 글씨를 잔뜩 수놓았다. "주술 방식으로 된 입력기요. 빛의 마력으로 문자를 만들 수 있음을 이용했지. 이 것만 해도 천년 이전에 만들어진 거요. 두 세 번 정도 다시 입력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우리에게는 3개의 입력기가 있소. 번갈아 가며 사용하면 어떤 사실도 소실하지 않지." 시즈는 어쩌면 이들이 얼음 속에 은거지를 만든 이유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을 이용할 수 있는 최적 의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내가 묻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걱정 마시오. 숨기지 않을 테니까. 우리가 음유술사의 일을 잘 아는 이유는 간단하오. 사실 음유술사는 네 명이 아 니라는 거요. 다섯 명이오.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빛의 음유술사,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라오. 그의 후손은 역사의 고리와 뜻을 같이 했지요. 사실 역사의 고리에서 이토록 빛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에게 있지만. 사실 땅과 바람, 물과 빛 등은 오래 전부터 역사의 고리가 연구해온 것들이었소. 그래서 불이라는 또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냈소." "실패했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무슨 소리를‥. 우리가 실수한 게 있다면 너무나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거요. 불꽃의 춤을 추는 이는 너무나도 불꽃 을 닮았지. 정말로 불꽃의 삶을 살았고, 계속 그렇게 전승해갔소.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오." 그렇게 말하며 미헬은 감상에 찼다. 그는 아주 오래 전 불꽃의 춤을 추는 이를 본 일이 있었다. 그 화려함에 넋이 나가서 눈을 뗄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시즈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애 같기도 하고 누구보다 현인 같은 넬피엘에게 해줄 이야기가 생긴 듯 싶었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왜 역사의 고리가 둘로 갈라진 겁니까?" "음유술사들이 밖에서 싸우기 이전부터 역사의 고리 구성원들은 수많은 토론을 했소. 어떤 때는 며칠 밤, 며칠 낮을 하기도 했소. 어느 정도로 역사의 흐름을 규제하는 게 좋을 것인가? 성스러운 회귀 같은 일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 가? 라는 등의 토론이었소. 그런 조취는 당시에 고리를 휘어잡고 있던 세력가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소. 그리고 지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나친 간섭은 배제하고 싶소. 이제까지 수많은 제재 속에서도 발전해 가는 것은 좀더 잘 살 고 싶다는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에서 흘러왔소. 우리는 멸망으로 향할 때가 아니라면 이런 자연적인 흐름은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소. 벌써 20년 전의 일이요." "그렇다면 지금 대륙에 있는 이들은 대체‥." "말했지 않소!? 토론을 해왔다고. 우리가 여기에 남아있다면 그들이야 당연히 찬성파가 아니겠소?" "찬성이라고요?" "그렇소. 바로 성스러운 회귀라는 규제 방법의 찬성자들이오. 그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바로 보이지 않는 혁명이 라고 알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부탁할 게 있소. 바람을 노래하는 이여‥." "말씀하십시오." 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있을 때는 얍삽하게 보이던 인상도 천천히 현자의 풍모가 느껴졌다. 사람의 시선이라는 것은 정말 신기한 것이다. 갑자기 정중해진 시즈의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헬은 말했다. "그들이 나갈 때 가지고 한 가지 약품을 가지고 나갔소. 바로 '몽충(夢蟲)'이라는 거요. 과거에 썼던 로치큐라는 곤 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험한 물건이오. 바로 꿈을 뜯어먹기 벌레, 그것이오. 게다가 끔찍한 속도로 번식을 하기 때문에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 막을 수 없소." "몽충‥? 그렇다면 회귀가 끝난 후에 어찌하려고‥." "후후‥. 그건 최후의 물품이오. 인간이 문명의 무게에 짓눌려 멸명하려 할 때, 사용하려는 거요. 꿈을 꾸는 이가 없 다면 몽충은 사라질 테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왜 역사의 고리에서는 가만히 있는 겁니까?" "말했지 않소? 우리는 필요 이상의 간섭은 배제하기로 했소." "그게 필요 이상의 간섭이란 말이오?" 보를레스가 소리를 높였지만 미헬은 귀가 막혔는지 웃기만 했다. "프르즈 밖의 일은 우리가 간섭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게다가 밖으로 나가기도 꽤나 귀찮고 말이오. 이럴 때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음유술사를 부려먹어야 하지 않겠소?" 시즈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능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웃고 있었다. 얼음 속에 생으로 호석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치밀어 올랐지만 시즈와 보를레스는 부르르 몸을 떠는 것 만으로 참았다. 46악장 바람은 태어난 곳을 향해 돈다. 15화 "그럼 부탁하겠소. 몽충을 가져간 사람은 유레민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오. 그 자 역시 아스틴네글로드의 은자 중 한 사람이니까. 내가 일곱 번째 은자라면 그는 6번째 은자요. 검은 로브의 학자를 아시오?" "검은 로브라면‥ 한 사람 밖에 없지요." 신사들은 검은 색을 즐겨 입지만 연회 때 정도의 일이었다. 보통 학자들은 밝은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다. 어두운 색은 사람을 정돈되게 보이지만 작게 만들고 밝은 색은 활발하고 크게 보이게 만든다. 학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발 표함에 있어서 의상의 색상은 분명하게 존재감을 표현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또 자신이 중요시하는 사상을 뜻하기 도 했다. 유레민트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라스 도르지아. 다른 이들은 어두우면 움츠려져 보인다지만 그는 아니에요. 오히려 그 어두움으로 좌중을 압도하 죠. 하지만 학식은 대단해요." 당연할 것이다. 역사의 고리에서 둘로 나눠진 한 파벌의 우두머리이니 말이다. 실베니아에서의 일을 끝으로 그들과 의 싸움이 막을 내리는가 싶었더니 이런 복병이 남았을 줄은 몰랐다. 한숨을 내쉬며 시즈는 보를레스를 보고 미소 를 지었다. "아무래도 한 건이 남은 모양이군요." 미소가 처량하게 느껴져 보를레스는 그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겼다. 어느 정도 아리에는 진정이 됐는지 허리에 양손 을 얹고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그럼 어서 가죠. 시즈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 보내줘야 하지 않겠어요?" '화났군.' '화났어.' '화나버렸네.' 생각은 비슷했지만 사내들의 표정은 저마다 달랐다. 미헬은 흥미로움을 입가에 잔뜩 떠올리고 있었고, 보를레스는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시즈는 눈동자에서부터 미안함을 무럭무럭 흘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난 가지 않을 건데‥." "가지 않다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별로‥." 돌아가고 싶었다면 예전부터 갈 방법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겠지. 내가 이상한 걸까? 하고 생각하는 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에는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정말이야?" 마치 고양이가 상대를 탐색하는 듯한 눈치여서 시즈는 그녀를 폭삭 끌어안고 안심시켰다. "안 갈 겁니다." "정말이지‥." "또 울렸다‥." 보를레스는 큰손으로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즈는 당황해서 물러섰지만 아리에는 허리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얼굴을 시즈의 어깨에 묻은 채 고개를 흔드는 걸 보니 콧물까지 묻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하‥. 좋을 때로군요." "미헬 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보를레스, 미헬님은 50세가 넘었어요." "뭐, 뭐라고요!? 전에는 30세가 넘었을 뿐이라고‥." 유레민트의 말에 보를레스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미헬은 어디를 봐도 30대 중반으로 보일 뿐이었다. 피식하고 웃으며 무적의 동안은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오." "당신, 정말이지‥ 뻔뻔하군." "하하하핫! 칭찬으로 듣겠소." "시즈! 어서 떠나자. 여기에 더 있다가는 울화통으로 죽어버릴 거야." "저런‥. 광풍의 검사가 죽다니‥. 보를레스 씨가 죽는다면 당장에 얼음 속에 생생하게 보관해서 관광객에게 사업을 펼쳐도 되겠군요." 턱을 쓰다듬는 미헬은 진지했다. 아래 위로 훑어보는 시선에 능구렁이가 이제는 몸을 휘감고 있다고 생각한 보를레 스는 뒷걸음질을 치며 시즈를 재촉했다. 준비를 하고 떠나려 하는 그들에게 역사의 고리 마법사들은 갖가지 선물을 하기도 했다. 미헬의 말에 따르면 로치큐 사건은 역사의 고리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일이었는데 당시의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목숨을 희생하여 막았기 때문에 바람의 음유술사는 좋게들 생각한다는 것이다. 만약 땅의 고동을 밟는 이가 왔다면 당장에 죽여버렸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마지막으로 해줄 말이 있소. 아주 중요한 사항이오. 그라스를 상대할 때 조심하라는 거요." "그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게 아니오. 그는 음유술사들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오. 최강이라고 알려진 넬피엘 이상으로 말이오." "음유술사들 중에서‥?" 시즈는 미헬의 말에서 컬컬하게 걸리는 부분을 반문으로 걸러냈다. 음산한 기운이 미헬의 말 한 마디에 걸려있었다. 그의 질문에 그제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일행도 미헬을 응시했다. "아까 말했잖소. 음유술사는 네 명이 아니라고 말이오. 한 명이 더 남아있소. 그라스는 그대들을 제외한 유일한 음 유술사,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오. 그대들이 그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 연구실에서 당황했던 정도가 아니라 환상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시오." 휘잉― 미헬의 말이 끝나자 프르즈는 오색찬란한 빛을 거두고 예의 평범한 얼음의 도시로 돌아갔다. 얼음을 한 번 쓸고 다 가오는 바람은 차가웠고 사람이 사라진 거리는 삭막했다. 잠시 주위를 훑어본 시즈 일행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1화 뚜벅뚜벅‥. 긴 복도를 걷고 있는 사내의 검은 로브가 바닥에 끌렸다. 이글거리는 불꽃에 의해 처진 그림자에게 더욱 어두운 카 리스마를 선사 받은 사내는 방문 앞에 서더니 노크도 없이 철컥 문을 열었다. 방의 주인인가 싶었지만 이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밖은 어때?" 30대 중반의 초췌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방금 들어온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 물었다. 듣는 것만으로 몸이 눌 리는 기분을 주는 목소리로 사내가 대답했다. "실베니아의 발표로 인해 들떠 있다. 역사의 고리를 찾기 위해서 국가들이 암중에 협력하고 있어. 일종의 위기라고 할 수 있지. 그래봤자 우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빌어먹을 음유술사들이 움직인다면 알 수 없지." "그들은 다들 휴식에 들어간 듯 싶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야." "누구인데 그러나?" "마땅찮은 친구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골치가 아플 것 같았는데‥." "자네의 나쁜 예감은 언제나 딱 맞아떨어지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남자가 웃어댔다. "별로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로군. 바스티너와 로진스는 어때?" "말도 말게. 에레나는 바스티너의 투구가 잘라지면서 빛을 보고 말았어. 마법사들의 말로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타격 을 받았을 거라더군. 마법사들이 기억을 없애서 먼 시골로 보내놨네. 그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로진스는 여전 히 광적이야. 음유술사 일행과 함께 있던 마녀에게 어이없게 패했던 게 마음에 남았던지 마법연구에 미쳐있네." "가장 팔팔한 사람은 에즈민인가?" "그 남매 자체가 난리지. 노르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고 투정부리고 있어." "무슨 투정!?" "밥투정을 부리더군." "여전히 특이하군. 그나저나 자네는 어떤가? 츠바틴. 자네가 실패하리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어." 츠바틴은 대답하기에 앞서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답답한 얘기를 했더니 마음 속도 답답해졌다. 시원한 바람이 흘러 들어오자 상쾌했다. "나라고 해서 꼭 승리하는 전략을 짜내는 것만은 아니네. 피브드닌인가하는 친구한테 한 방 먹었어. 아스틴네글로드 의 이름이 괜히 높은 게 아니야." "상대에 대한 감탄은 그만하지. 우리는 지금 곤란해. 꼬리는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나라별로 역사의 고리에 대해 촉 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거야. 우리가 뜻을 펼치기 힘들어졌어. 얼음 속에서 머리마저 얼어붙은 늙은이들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어. 이제 방법은 하나 뿐이야." "몽충인가!? 남은 수단은‥. 다른 이들이 반대할 거야. 노리스를 비롯하여, 노르벨 남매도 말야‥." "흥! 그런 뇌까지 근육으로 된 사람들까지 신경 쓸 거 없어. 그들은 우리의 숭고한 뜻을 알지 못하네. 날 알아주는 이는 오직 츠바틴 그대 뿐이야." 말을 끝낸 사내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듯 했다. 그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 서 유일한 빛이라고나 할까‥.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츠바틴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라스‥. 난‥." "그렇게 어려워할 거 없어. 난 자네를 믿으니까. 그럼 쉬도록 하게. 다음에 다시 들리도록 하지." "차도 대접하지 못했는데‥." "됐네, 이 사람아. 그럼 가보겠어." 찰칵. 아스틴 제일의 인테리어 전문가, 랑드라 보이제가 만든 고급 문이 깔끔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 밖으로 들 려오던 기척이 사라져갔다. 미간을 손가락을 꾹꾹 누르고 한숨을 쉰 츠바틴은 방구석에 정리된 커튼 뭉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노리스." "당연한 게 아닌가. 막아야지. 우리는 결코 멸망을 위해 싸워오지 않았어." 커튼 뒤에서 건장한 장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리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간단하게 말하지 말게. 그라스는 보통 남자가 아니야." "그래도 마찬가지야.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내가 싸우는 이유는 멸망을 위해서가 아니야. 역사의 고리를 도 운 이유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지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바로 살아가기 위해서야." 거대한 바위처럼 노리스의 의지는 굳건했다. 츠바틴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괜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가 존경하고 아끼는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군. 내가 잘못 생각했었나보네. 바보 같군." "누가 자네를 바보라고 했나? 가장 현명한 내 친구여‥." 노리스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츠바틴은 힘을 줘서 손을 잡았다. 그 악수는 노리스의 의지에 뒤지지 않을만큼 굳건했다. "시즈에게 연락을 해야겠어. 녀석이라면 그라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야." "재미없군. 츠바틴도 재미없는 친구가 됐어." 불만섞인 말을 나직하게 내뱉으며 그라스는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어두컴컴한 곳이 좋았다. '빛나는 무 대의 주인'이라는 정반대의 별명을 가진 주제에 말이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철문을 거칠게 열고 닫은 그는 감옥 같은 방 한가운데 놓여진 의자에 털썩 하고 몸을 묻었다. "왜요? 츠바틴이 반대하던가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방안, 목소리는 달콤하게 그라스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휴 식을 거슬리지 않기 위한 그녀의 배려임을 알고 있는 그리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반대는 하지 않더군. 하지만 꺼림직한 표정이었어. 아무래도 날 따라주는 것은 에즈민 뿐인가?" "호호‥. 저 뿐이라서 싫으신가요?" "글세‥ 멸망으로 향하는 길에 동반자는 적으나 많으나 상관없지." "그렇군요. 후후훗." 어느 새 그라스의 무릎 위에는 한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라스가 팔을 뻗어서 부르자 단숨에 나타난 것이다. 무서운 빠르기에 그라스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지, 대단하군. 암살가로서의 재능은 노르벨보다 더 하다더니‥." "어떻게 오라버니를 이기겠어요." 그라스의 손이 소녀의 미묘한 부위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그녀를 몸을 조금씩 꼬아서 피했다. 하지만 반항은 더욱 요염하게만 보였다. 달아오른 그라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짐승처럼 에즈민을 만져댔다. 작은 신음소리와 거친 숨 소리가 방안을 채워나갔다.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2화 "제길!" 노르벨은 벽에 뚫어놓았던 구멍에서 눈을 뗐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 앉은 그는 견딜 수 없다는 주독에 걸린 주정뱅이처럼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에즈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달아오른 신음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에즈민은 노르벨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오히려 그의 시선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틀어졌던 걸까‥?' 플로먼의 저택에 들어섰을 때라고 노르벨은 확신했다. 굶주림에 지쳐서 세상에서 쫓기듯 도망친 암살자의 세상, 그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고 알려진 일족은 노르벨에게 천부적인 재능을 찾아냈다. 굶주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여동생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간 그 는 미친 듯이 수련에 열중했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누구라도 해도 죽일 수 있는 암살자가 되었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찾아간 여동생의 방. 창문 밖에서 들여다본 그 곳에는 작은 소녀가 한 남자의 배 아래 깔려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분노에 일그러진 눈동자가 불을 뿜을 때, 고통어린 여동생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 오빠, 날 구해줘. 난 싫어. 아파. 구해줘.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시선을 통해서 들려왔다. 손톱이 살로 파고들고 입가를 따라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노르 벨은 나설 수 없었다. 에즈민을 올라타고 있는 이는 바로 플로먼의 가주였기 때문이다. 노르벨이 강하다지만 가주는 전설적인 강자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게 잘못이었어. 당장 뛰어들었어야 했어.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할 지라도‥." 더욱 수련으로 몸을 혹사시킨 노르벨이 가주를 죽일 자신을 갖고 돌아온 것은 일 년이 지난날이었다. 일 년 전처럼 동생의 방을 찾아갔다. 더욱 아름답게 변해있는 에즈민‥ 하지만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는 인형이 되어있었다. ― 당장 구해주마. 에즈민‥.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알았다. 가주의 목에는 단도가 깊숙이 박혀있음을. 쾌락에 빠졌다지만 살기를 느낄 사이도 없이 에즈민이 번개같은 손속을 날린 것이다. 노르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가 상상보다 훨씬 끔찍했을 에 즈민의 시간들을‥. 그게 한 번의 칼질에 담겨있었다. 멍하니 서있는 그를 향해 에즈민은 매혹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 오라버니도 절 안고 싶어서 오셨나요? 피 묻은 알몸으로 안기는 여동생을 노르벨은 넋이 나가서 끌어안았다. "다시는 널 혼자 있게 하지 않겠어!"라고 결심했지만 에즈민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몸이 살아 갈 수 있는 무기임을 알게 된 에즈민의 삶을 더 이상 막을 권리가 노르벨에게는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괴 로워할 뿐‥. "그래‥. 에즈민,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해주마. 그게 만약 이 세상의 파멸이라고 할 지라도‥. 넌 내가 싸우는 이유 니까‥." 흐느낌과 숨소리‥. 어느 것이 자기 것일지 분간할 수 없어진 노르벨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앉아있던 공간에서 빠 져나갔다. "‥‥." "에즈민‥?" "미안해요, 그리스. 기분이 영 아니네요." "무슨 일이지?" 그리스의 물음에 에즈민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노르벨이 숨어있던 벽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그리스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기분을 안 좋게 했나?" "미안. 다음에 계속해요." 서둘러 옷을 걸친 에즈민은 그리스를 달래기 위해 요염한 표정으로 윙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벗어 나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웃기지마. 날 위하는 척 하는 세상 따윈 필요없어. 다 없애 버릴 거야." 신경질적으로 걸어가던 에즈민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췄다. 쉬익하는 바람 소리만 남아서 사람이 잠시 전 존재했음 을 알려주었다. "로진스. 아직도 패배의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그리스‥. 무슨 일이지? 난 바쁘다." 새로운 주문의 수식을 배열하느라 정신 없는 마법사는 발걸음만으로 상대를 알아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저 으며 자리를 비켜달라는 표현을 하는 그를 검은 로브의 그리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보게. 그렇게 내쫓을 것까지는 없잖아." "특별히 할 말이라도 있나?" "몽충을 쓰려고 하네. 협력해주겠지?" 당장 로진스의 얼굴은 굳어졌다.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시선이 빙글 돌며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몽충을 쓰다니?" "어쩔 수 없어. 자네들도 패배하고‥. 각국의 첩보기관은 암중에 우리를 압박하고 있네." "자, 잠깐! 난 패배하지 않았어. 마녀의 지팡이에 얻어먹은 것은 마법사의 육체를 가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날 보호하는 기사도 없었어. 그리스‥ 자네 혹시‥ 에즈민의 암시에 걸렸나?" "날 뭘로 보고하는 말이야? 자네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계획대로 진행할 거야. 그럼 멸망의 날이나 기다리 라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그리스는 벌컥 화를 냈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래, 날 믿어주는 사람은 에즈민 밖에 없어. 아까는 무슨 일인지 기분이 안좋았지만 얼마 후면 다시 아름다운 육체를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스 는 힘이 솟았다. 문을 닫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로진스는 한탄했다. "바보 같은‥. 자네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계집아이는 100년을 묵은 마녀보다도 위험하다고‥. 이럴 때가 아 니지. 츠바틴을 만나러 가야겠어." 마법 연구 따위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세상이 남아있어야 진리도 있는 법이다. 주문을 다급하게 외우고 사라 지며 그는 말했다. "마법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말겠어. 난 천재라고.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로진스의 저택과 츠바틴의 저택에는 서로 마법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유령처럼 스륵하고 나타난 그를 향해 노리 스가 빈정거렸다. "연구에 빠져있다던 사람이 무슨 일이지?" "너와 장난할 시간이 없다. 츠바틴 보고 나오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네." 방문을 열고 츠바틴이 들어왔다. 방주인이 왜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건지 의아한 로진스가 물었다. "기다렸다면서 왜 밖에 있었던 거야?"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어. 마법 통로가 있다는 사실도 말야‥." "꽤나 다급해 보이는데?" "그 쪽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한 츠바틴과 마법에 빠진 미치광이, 로진스가 다급해할 만한 조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스를 막아야 해." "하지만 무슨 수로?" 그들은 상대에게 무슨 수가 있기를 바랬던 모양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내는 고개를 젖히며 동시에 중얼거렸 다. "모르겠어." "우선은 바람을 노래하는 이에게 연락을 취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노리스의 말에 로진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뭔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게 틀림없었다. 로진스는 언성을 높여서 소리쳤 다. "이제까지 싸우던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자네들은 자존심이 있는 건가?" "자존심 따지다가 꿈꾸는 생물은 모두 사라질 텐데‥? 몽충이 살포되었을 때 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바람을 노래 하는 이 밖에 없어." "‥내가 연락하지." 둘의 대화가 어린애 말싸움 같아서 노리스는 키득하고 웃었다. 그걸 놓칠 세라 츠바틴이 말했다. "지금 웃을 때야?" "웃지 못할 것도 없네. 자네들이 협력하는 모습에서 희망이 보여서 웃은 것뿐이니까. 그나저나 '번식자'는 누가 될 까?" 47악장 멸망을 향한 발걸음 3화 파릇파릇하게 자라다 못해 아주 풍성해진 나무들. 열매마저 탐스러운 그것들을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입맛을 다셨다. "이야‥. 잠깐 얼음의 대지에 가있는 동안 대륙은 확연히 달라졌군." "그러게. 이렇게 덥다니 탈진해 버리겠어." 맞장구친 아리에는 얼굴을 찡그리고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계속 닦았다. 얼음 속에 있다가 와서 인지 더욱 뜨 겁게 느껴지는 날씨에 그녀는 조숙함이고 뭐고 몽땅 내던졌다. 옷자락을 펄럭여 바람을 집어넣자 은근하게 내보이 는 속살에 시즈는 얼굴이 보를레스가 탐내는 열매들처럼 붉어졌다. "아리에, 시즈가 곤란해 하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너무 더운 걸‥. 유레민트는 덥지 않나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죠?" "덥긴 하네요." 태연하다는 것은 행동을 가리키는 것뿐이었다. 아리에는 유레민트를 놀리고 있었다. 긴 금발을 틀어 올린 유레민트 도 땀을 뻘뻘 흘렸던 것이다. 숲의 종족이라는 그녀마저 이토록 더위를 타다니 심각했다. 평상시라면 시즈가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시즈의 바람에 익숙해지면 더운 날씨나 추운 날 씨에 대한 면역력이 떨어진다. 시즈는 왠만해서는 바람을 불게 하지 않았다. "시즈는 안 더운 모양이야." 얼굴이 붉어졌지만 시즈는 웬만해서 땀을 흘리지 않았다. 그의 백은빛 머리카락은 햇빛을 대부분 반사해버리기 때 문에 검은머리의 아리에보다는 더위를 덜 탔다. 바람이 그를 좋아해서인지 은은하게 주위를 감돌며 더운 공기로부 터 보호했다. 덕분에 곁에 있는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그가 반사하는 햇빛으로 더욱 더워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마을이 보이는 군요. 시원하게 맥주라도 마시고 가죠." 얼음의 대지를 떠나온 지 십여 일, 시즈들은 아스틴의 영토를 밟았다. 높게 솟은 럴크 산맥의 등줄기를 따라가며 마 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기에 멀리 보이는 연기는 오랜만에 휴식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여행을 하시는가 보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뭘 드시겠습니까? 미리 추천을 해드리자면 여 기는 버섯의 명산으로 꼽히는 지역인 만큼 버섯 구이와 수프가 아주 일품입니다. 구이는 토끼 고기에 버무려서 향 긋함과 알싸함을 느낄 수 있고 수프도 역시 달콤함과 향긋함을 함께 느낄 수 있죠." 일행이 들어서자마자 친절한 미소와 민첩한 안내 후, 바로 주문을 받기 시작하는 주인장은 척 보기에도 상당한 베 테랑이었다. 이런 산골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외부인에게서 이득을 얻는 게 실제적인 수입임을 잘 알고 있 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눈을 가늘게 째려보는 손님들은 변모된 주인장의 모습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극성스러운 친절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앉은 시즈 일행. 배고픔에 정신 없는 보를레스만 신난 어조 로 주인의 말을 받아쳤다. "이거 제대로 걸렸군. 오랜만에 배 좀 호강을 시키겠어. 주인장이 추천하셨는데 안 먹어볼 수 있나! 믿고 주문하지 요." "하하‥. 탁월하신 선택이군요. 그렇다면 술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이왕 추천하신 김에 주인장이 마지막까지 장식을 해주시구려." "그러시다면 남자 분들께는 칼칼한 맛이 뛰어난 칼시아를 드리죠. 칼시아 잎을 짜서 나온 액을 숙성시켜 만든 것으 로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린 맛은 맥주보다도 입과 목을 시원하게 축여줍니다. 그리고 숙녀 분들께는‥." "저희도 칼시아로 주세요.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시원한 게 마시고 싶네요." 아리에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왜요? 여자는 마시면 안 되는 술인가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좀 독합니다." "괜찮아요. 오늘은 이 마을에서 자고 갈 생각이니까. 그렇지? 시즈." 아까부터 눈길을 끌었던 은발의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할 때는 얼음처럼 차갑게 보이던 그가 미소 를 짓자 얼음이 단숨에 녹아 내렸다. 주인은 남자였지만 은은하게 감도는 청년의 미소에 매료되었다. 왠지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주무신다면 음식은 조금 싸게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관도 합니까?" "물론이죠. 방이 작기는 하지만 며칠 지내기에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하! 횡재했군. 시즈, 오늘은 좀 많이 먹어도 되지? 먹고 푹 쉬자!" 보를레스는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행인 시즈가 엄청난 부자였지만 돈을 쓸만한 곳으로 는 돌아다닌 일이 드물어 편한 여행을 해보지 못했다. 뒤늦은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하죠. 그럼 부탁합니다." 시즈는 웃으며 타로운짜리 금화를 주인의 손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눈매가 갈라질 정도로 커진 주인이 손을 부들부 들 떨었다. 산골에서 금화를 본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벼, 별말씀을‥. 주, 주방장!" 후다닥하고 달려간 주인은 칼시아를 가져다주고 카운터에 앉아서 금화를 문질러도 보고 물어보도 보고 심지어는 핥 아도 보며 황홀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신기하다는 듯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함께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쳐다본 유레민트는 사람들의 순진한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타로운 금화를 선뜻 꺼내다니 시즈는 부자군요. 하긴‥ 일기장 하나로 번 돈도 엄청날 테니‥." "이건 일기장으로 번 돈이 아니에요." 이미 다른 세계에서의 이방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숨길 것은 없었다. 시즈는 다섯 개의 성신석을 얻게 된 배 경을 말해주었다. 아스틴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외투가 시즈의 소유물임을 알자 일행은 모두 즐거워했다. "제가 횡재를 한 거죠, 뭐." "그건 아니에요, 시즈. 횡재를 한 쪽은 저희 박물관이죠." 싱글싱글 웃으며 유레민트가 말했다. "전에 미헬씨가 말했잖아요. 시즈는 지고인이라고‥. 그렇다면 시즈의 외투는 적어도 고대의 물건을 넘어선다는 뜻 인데 값으로 어떻게 따질 수 있겠어요?" "그렇군요. 이거 너무 싸게 받은 게 아닐까요?" "하하하하핫!" 오랜만에 그들은 신나게 웃어댔다. 음식은 맛이 좋았고 주인이 추천한 칼시아 주는 시원하면서도 적당한 취기를 선 사했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4화 "아니, 얼음의 대지에 다녀왔다고요? 그것 참! 이제 보니 대단한 모험가들이셨군. 하긴 그렇지 않다면 타로운 금화 를 덜렁 내놓을 배짱이 있을 리가 없지. 나도 젊었을 때는 꽤나 이름 날리는 모험가였지. 세일피어론아드 6대 금지 를 마음껏 나다니는 모험가 말이야‥." 새로운 손님들이 돈 많고 성격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달려왔다. 한 평생 보기 힘들다는 미녀 가 둘이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은발의 가냘픈 청년과 우람한 검사가 있다는 소문에 여자들도 우르르 몰려 왔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딜 가나 입담꾼이 있는 법. 산골 대장간이라 곡괭이나 만들 줄 안다는 50대 중년 사내는 손짓 발짓을 다하며 의심이 다분히 가는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멀리 떨어져서 술을 마시는 주인이 중얼거렸다. "저 친구, 버릇 또 나왔군."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시즈와 아리에, 유레민트와 보를레스는 즐거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주 그들에게서 본전 을 빼기로 작정을 했는지 술을 권하느라 난리였고 술에 약한 여인들은 벌써 탐스럽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리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는 유레민트는요? 아하하핫! 얼굴이 사과 같아요." 어딘가 나사가 빠져버린 듯한 웃음소리로 아리에가 놀리자 유레민트는 입술이 한 자나 튀어나왔다. 평상시라면 온 화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쳤을 그녀지만 술의 능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리에야 말로 빨갛다고요! 사과가 아니라 다 익은 딸기 같이 빨게요." 술잔을 막 부딪히고 입으로 칼리스를 털어 넣은 보를레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시즈에게 속삭였다. "정말 어이없는 내용으로 다투는 군." "그렇군요." "뭐라고요?" 그들이 술이 취해서 목소리가 컸는지 아니면 두 여인이 술에 취해 청각이 예민해진 건지 유레민트와 아리에는 벌떡 일어섰다. 천방지축이 된 두 여인을 보며 사람들은 재밌다는 듯 박수를 쳤다. 그 중에 나이 먹은 아주머니는 두 사 람에게 충고를 했다. "여자는 술을 마신 날에는 남자를 조심해야 돼. 혹시 저 두 남자가 못미덥거든 우리 집에 와요. 편히 재워줄 테니 까."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 없다고요!" "속단은 금물이에요. 남자란 속에 늑대가 스무 마리쯤 들어서 언제 여자를 잡아먹을지 기회를 노리는 동물이니까." 아리에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소리치자 아주머니는 더욱 걱정스러워 하며 말했다. 여자라면 '늑대'라는 동물에 대해 어릴 때부터 주의를 받고 자란다. 무심결에 아리에는 시즈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길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떠는 시즈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는 충고한 아주머니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요. 시즈는 그럴 마음이, 아니 그럴 배짱이 없는 남자라고요. 늑대라고 다 똑같겠어요? 가끔 이빨 안 난 늑대도 나오는 법이죠." "보를레스, 칭찬으로 안 들리는 건 제 귀가 이상해서 일까요?" 시즈는 묘한 기분에 보를레스의 귀에 속삭였다. 보를레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닐 걸. 내 귀에도 좋게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두 남자가 한탄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리에와 유레민트는 이상한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날 남자를 내버려두는 것은 여자가 할 행동이 아니지!" "저기, 아리에. 뭔가 바뀐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유레민트. 이런 날은 약간 바뀌어도 괜찮아." 힐끔‥. 아리에를 쳐다본 시즈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나, 오늘 위험한 거죠?" "괜찮을 거야‥." 보를레스는 한숨을 쉬며 시즈를 안심시켰다. 정말이지 역할이 많이 바뀐 듯 싶었다. 난장판이 되어 즐기던 밤도 늦 어서 다들 테이블에서 골아 떨어지고 시즈와 보를레스는 누군가 건들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으음‥." "자네들, 일행을 방으로 데려가지 않고 뭐하는 건가? 남자들이 되었으면 여자를 책임을 져야지. 누가 엎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예. 감사합니다." 보를레스가 겨우 눈을 떠서 바라보니 아리에와 유레민트에게 남자는 늑대라고 열변을 토하던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미묘한 웃음을 얼굴이 띄우고 시즈와 보를레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좋은 밤 되라우! 아까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마. 밤에는 밤의 역사가 있는 법이지. 오호호호홋‥." 남편을 들쳐메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 시즈는 진정 무서운 여자는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축 늘어진 아리에를 안아든 시즈는 먼저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다. "방이 어디죠?" "2층으로 올라가서 오른족으로 두 번째." 계단을 올라가서 방을 찾은 시즈가 침대에 아리에를 뉘이며 빙긋 웃었다. 음냐하고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이 귀여 웠다. 뒤를 돌아서려고 할 때,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휘익! 하고 인기척이 강하게 났고 시즈는 막 방안으로 들어서려던 보를레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쾅! 철컥! 어느 새 그의 시야는 어둡게 가려졌다. 하지만 빛을 삼키는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아리에를 본 것 같았다. "시즈!" 닫혀버린 문밖에서 한 차례 당황한 보를레스는 현실을 깨달았다. 잠시 후 턱을 쓰다듬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 돌았다. "저 녀석, 정말로 당하는 거 아니야? 아리에 녀석, 불안했나 보군. 뭐‥ 나야 나쁘지 않아‥ 흐흐흐‥." 품에 안겨서 입술을 오물거리고 자는 유레민트를 환상에 빠진 듯 바라보며 보를레스는 남자들의 방으로 예정됐던 곳으로 들어갔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5화 "꺄아아아아아악!" 깊은 밤은 곧 설익은 해와 함께 아침을 몰고 왔다. 시즈는 갑자기 들려온 비명이 너무나도 가깝다는 느낌에 고요하 게 감겨있던 눈을 바로 떴다. 투명한 동공에 초점이 잡히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시즈는 무 슨 일인지 울먹이는 아리에를 보고 무심결에 달래기 시작했다. "아리에,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지?'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즈는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런데‥ 아리에가 왜 여기에 있죠?" "뭐야!?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오크! 오우거! 트롤! 이런 녀석한테 당하다니‥." 그녀의 얘기에서 묘한 여운이 날림을 느낀 시즈는 방을 휘익 둘러보았다. "분명히 우리 바‥아앙이‥ 아니네." 멍한 음성. 속옷만 입고 얼굴을 붉힌 채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아리에가 묘한 상상을 재촉했다. 그는 휘둥 그레진 눈을 돌려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철컥철컥! "무슨 일이야! 시즈."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을 열어재끼고 들어온 보를레스가 돌처럼 심각한 얼굴로 다그쳤다. 그리고 발가벗다 싶은 남 녀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후다닥 다가온 그는 시즈의 어깨를 잡으며 흐늘흐늘 일렁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좋은 밤이었나? 친구." "보를레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무슨 소리긴‥. 난 지금 상황을 보고 추리한 내용으로 축하를 건넬 뿐이야."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보를레스." "글세‥. 너랑 다를 바 없지." "그, 그런데 왜‥." 문이 열린 걸 보고 유레민트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보를레스가 먼저 와 있는 걸 보고 미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자 보를레스도 넋 나간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고, 상황을 이해 못한 아리에와 시즈만 얼굴에 곤혹스러움 을 가득 드러냈다. "아리에, 일어났어요?" "으응‥. 유레민트, 얼굴이 빨게요." "괘, 괜찮아요. 남자분들, 아리에도 옷 좀 입어야 하니까 고개를 돌려주시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를레스와 시즈는 아예 뒤돌아서 있었다. 시퍼렇게 뜬 아리에의 두 눈이 빛나고 있는데 어찌 훔쳐볼 생각을 할까? 그 때, 옷을 입은 아리에가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으음‥." "아리에? 왜 그래요? 아픈가요?" 유레민트가 살펴보니 아리에는 하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 문득 든 생각에 유레민트는 시즈를 노려보았다. "처음이었을 게 분명한데 조심했어야죠!" '대, 대체 뭘!?' 시즈는 어깨를 으쓱하며 결백을 증명해보려 노력했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앉아있던 옆자리에 작게 묻어있는 핏자국 을 발견했던 것이다. 약간 흩어진 핏자국은 상당히 격렬한 움직임 중에 떨어진 게 분명했다. 시즈는 어깨를 축 늘어 뜨렸다. 이쯤 되자 아리에도 그에게 다가섰다. 보를레스와 유레민트는 먼저 내려간다며 사라져버렸고 바짝 들이댄 검은 눈 동자에 당황한 시즈가 비췄다. "그렇게 싫어? 나랑 이런 관계가 된 게‥." "시, 싫지는 않아요. 그저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아리에한테도 미안하고‥." 시선을 피한 창백한 얼굴 가득히 붉은 기운이 돌았다. 후훗하고 웃으며 아리에는 그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네가 좋으니까." 포근한 감촉이 시즈를 감쌌다. 그가 부른 바람 속에 있을 때만큼 상냥하고 부드러운 느낌. 시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아리에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베시시 웃는 아리에와 함께 식당으 로 내려가며 시즈는 슬쩍 물어보았다. "근데‥ 아리에. 어제 일 기억나요?" "아니, 하나도."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시즈는 볼을 긁적거렸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지난밤의 시간, 잠시 돌아가 보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 아리에!" "흐흐흐흐‥." 어둠 속으로 보이는 그림자의 음흉한 웃음소리. 소름이 돋아난 팔을 잡고 뒷걸음질치는 시즈를 그림자는 재빠른 움 직임으로 어깨를 잡아 눌렀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신비롭게 빛나는 은발이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머리카락이 예뻐‥. 눈동자도 호수 같아." 남색의 하늘과 푸른 달이 담긴 투명한 눈동자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리에의 뜨거운 입김이 콧 끝에 닿았다. 그토 록 술을 마셔댔는데도 좋은 냄새가 향긋하게 감돌았다. 시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입김이 흘러나오는 주체가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으악!" 퍽! 다급하게 일어난 시즈의 코가 아리에의 이마에 직격했다. 비명을 지르며 코를 부여잡은 손가락 사이로 흐른 액체가 침대보에 똑똑 떨어졌다. "괜찮아?" "수건 좀 줘요." 코를 꼭 누르고 있자 이내 피는 멎었다. 그러자 아리에는 다시 시즈에게 엉겨붙었다. 술을 먹어서인지 반항하기 힘 들었다. 어쩌면 반항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당했구나(?) 싶었을 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살 짝 눈을 뜨자 안긴 상태로 아리에가 잠이 들어있었다. "하.하.하.하‥. 에휴∼." 이토록 고생을 시키다니 아리에는 절실했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코를 간질이는지 움 찔거리는 모습이 고양이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을 살며시 치워주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덥칠까‥?" 시즈도 남자인데 욕망이 없을까. 촉촉하게 붉은 입술과 옷깃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우유빛 살결을 슬며시 흘낏거린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돼! 안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욕망을 떨쳐버린 그는 달아오른 눈길을 여름밤을 시원하게 비추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 둠에 가려 반쪽이 되어버린 둥근 달. 네 나머지는 어디에 있나? 사실 붙어있지만 어둠에 가려, 빛에 가려 보지 못하 고 있나? 하얀 꿈을 꾸고 있네 어디인지도 모른 채 어둔 세상은 모두 잠들고 나의 숨소리뿐 난 취해 가는데 깨워주는 사람은 없네 몸을 뒤척여 너를 부르네 소리도 없는 나의 슬픈 노래는 까만 허공을 채우고 울먹이는 날 위해 무심한 밤은 다시 나를 재우고 눈물로 젖은 내 술잔 속엔 나의 웃음이 또 한숨이 출렁이는 달빛에 흘러가네 날 깨어줘 네가 없는 꿈속은 싫어 아무도 없는 하얀 꿈속에 너를 한없이 부르네 루루루.... 〈전람회 - 꿈속에서〉 "루루루‥ 루‥." 더 이상 달빛의 쓰다듬에 견딜 수 없었을까. 시즈는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작은 숨소리만 가득히 방안에 채워갔다. 잠시 후‥. "더워어‥!"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난 아리에는 스륵스륵 잘도 옷을 벗어던졌다. 흘깃 옆을 바라보니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역시 내가 좀 취했나봐‥. 유레민트의 금발이 은발로 보이다니‥. 으음‥." 그녀가 이불 속을 파고들며 이 날의 사건은 시즈의 노래처럼 조용히 꿈 속으로 사라져갔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6화 "찾았다! 아스틴에 있었군. 우하하하핫!" 자리에서 일어난 로진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광소를 터뜨렸다. 테이블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던 츠바틴이 한심하다 는 듯이 중얼댔다. "3 일이나 아무 것도 안 먹었으면서 소리칠 기운이 있다니‥. 마법사들은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다더니 이유 없는 소문은 없는 법이지." "3 일? 내 명상이 그렇게 오래 되었다고?" "그래. 자네 명상 시간은 그리 관심 없어. 그들을 찾았다고 했지?" 솔직히 로진스는 무의식중에 명상시간이 늘어났다는 걸 두고두고 자랑할 생각이었다. 마법사들에게 명상시간의 집 중은 마나의 축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번에 끊어버리다니 츠바틴은 정말 얄미운 자였다. "벨루온에서 그리 멀지않아. 럴크 산맥 주변이야. 왠일인지 모르겠군." "얼마 전, 그들이 얼음의 대지로 향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었지. 만약 늙은이들을 만났다면 몽충에 대해 알게 되었을 거다." "곧 일어날지 모를 성스러운 회귀를 막으려는 거군. 이거 얘기가 쉬울 지도 모르겠어." "아니야. 그들은 우리를 보통 경계하는 게 아니니까. 이쪽에서 완전히 털어놓지 않는 한 마음을 열지 않을 거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장 가야지." 츠바틴은 얘기를 하면서 채비를 차렸다. 허름한 옷과 끝이 헤어진 로브를 걸치자 행인으로 지나칠 평범한 사내가 나타났다. 머리를 대충 털어 자연스럽게 만든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후드를 쓰면 오히려 시선이 몰린다. "나, 나도 갈 거야. 몽충은 자네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몽충은 마법의 산물이었다. 로진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그 때, 문을 열고 노리스가 들어왔다. "로진스, 자네는 우선 밥이라도 먹는 게 좋을 걸." "맞아. 3 일이나 굶었으니 100m도 못 가서 쓰러질 거야." "필요 없는 물건(?)은 산매장이 최고지." 짓궂은 농담을 하며 노리스는 음식물 꾸러미를 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로진스가 깨어날 거라고 예상을 했던 모양 이다. 인간의 집중력은 아무리 좋다해도 체력에 기인하기 때문에 3일 이상은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코웃음을 치고 로진스는 음식을 마구 먹어댔다. 닭다리를 뜯어먹는 모습이 뼈까지 삼킬 듯 했다. 단 10여분만에 상당한 양의 음식물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로진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럼 가볼까‥." "자네들 먼저 가있어. 쫓아가도록 하지. 난 할 일이 남았어." 손을 휘휘 저으며 노리스가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 미세하게 엿보이는 불안감에 츠바틴이 눈썹을 찡그리며 뭔가 말 을 하려고 했지만 노리스가 고개를 젓자 알았다는 듯 돌아섰다. 분위기 파악에는 요령이 없는 로진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천천히 가도록 하지. 노리스가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내가 그렇게 어린애로 보이나?" "어린애는 아니지만, 방향치는 마법으로도 못 고치는 불치병이잖아." 마법사들은 괴짜다. 어떤 면으로는 괴팍한 늙은이 같고 어떻게 보면 어린애 같기도 하다. 로진스는 마법에 미칠 때 는 도저히 건들 수 없는 사람이지만 행동과 말투는 멋모르는 소년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이 건물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창밖으로 바라보던 노리스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나오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게 아니었나?" "역시 노리스로군요. 솔직히 당신에게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테이블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플로먼들은 그림자 숨기라는 기술에 매우 능 했다. 이 기술은 사람들이 많을 때는 아주 뛰어난 무도가도 기척을 찾기 힘들었다. 그림자의 주인이 만든 기척이라 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플로먼 중에서도 엘리트에 가까운 노르벨의 그림자 숨기야 말할 것도 없었다. 노르벨은 털썩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깔았다. 몸에는 힘이 없어 보였지만 은연중에 예리함이 풀풀 날렸다. 그것이 살기임을 모르지 않는 노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어쌔신의 순간 속도는 하나 하나가 검술가의 발도술을 능가한다. 잠시의 방심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요. 노리스의 말대로 난 얘기를 전하러 왔을 뿐이니까." "뭐지?" "난 그리스의 편입니다." "그리스가 아니라, 에즈민의 편이겠지." "훗‥."하고 노르벨은 미소를 지었다. 잔혹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미소에서 노리스는 역린(逆鱗)을 건드렸음을 깨달 았다. 몸이 떨릴 정도의 살기가 방 전체에 팽배했다. 암살자들은 살기를 숨기는데 능숙하다. 무도가들은 기(氣)를 내 보내고 거둬드리는 행위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어렵다고 말한다. 살기도 기에 종류임에 틀림이 없었다. 노 르벨이 숨기지 않고 내뿜는 살기는 노리스를 압도할 지경이었다. '진정한 괴물이 숨어있었군.' 내심 침을 삼키며 노리스를 이를 불끈 물었다. 어쩌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유술사들 과 싸우면서도 들지 않던 가정이 떠오르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는 듯하던 노르벨. 그의 나사 가 채워진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꽤나 단단하게 채워졌어.' 노리스는 무의식중에 검으로 손이 갔다. 손가락이 검 끝에 닿으려 할 때, 숨이 막히던 살기가 사라졌다. "아아‥ 죄송. 대화를 할려고 와서 이게 무슨 꼴인지‥. 누구의 편이든 간에 당신들과는 적입니다. 알겠지요? 난 방 금 전에 들은 내용을 그대로 그리스에게 전할 겁니다." "특이하군. 먼저 보고를 해야 정상이야." "역사의 고리 중에 정상이 있습니까?" "나 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당신은 정상일 수가 없는 겁니다." 시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어댄 노르벨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일피어론아드가 어찌 되건 난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힌트를 드리죠. 츠바틴 과 로진스에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지금처럼 말인가?" 노리스는 이를 갈며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뒤늦게 깨달았다. 노르벨은 가장 위협이 되는 자신을 츠바틴과 로진스에 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이다. 지금쯤 두 사람은 노르벨의 수하에 의해 곤란한 상황이 되어 있겠지. 다리가 빨라 졌다. 그렇기에 그는 뒤에서 노르벨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경고일 뿐입니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7화 츠바틴과 로진스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히 산길을 따라서 갔겠지. 마법사나 학자나 걸음걸이 가 느긋하기는 매한가지일 테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고, 암습자들 또한 사람이 많은 벨루온에서 공격하기는 꺼렸 을 테니 빨리 간다면 아직 무사할 거라고 노리스는 판단했다. 그의 예상이 맞았던 걸까? 츠바틴과 로진스는 무척이나 건강한 모습으로 산 너머의 강가에 앉아있었다.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진스가 말했다. "노리스! 생각보다 빨리 왔잖아!" "그렇게 숨이 차게 뛰어올 필요 없었는데‥." 싱글싱글하고 츠바틴도 중얼거렸다. 노리스는 '내가 왜 이런 놈들 때문에 뛰어야 하는 거지?'하고 한탄했지만 이내 세일피어론아드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고 내심 다그쳤다. 말을 들어보니 지크 강을 건너기 위해 뱃사공을 기다리 는 중이라고 했다. 노리스가 집중해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암습자의 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리스! 노리스! 뭘 하느라 그렇게 정신이 없나?" "아!? 미안하군.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저길 보라고‥. 배가 오고 있어." 츠바틴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있는 지크 강의 나루터는 동부에서 벨루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음으로 배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강폭도 엄청나게 넓어서 작은 배로는 손님들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상선에 가까운 거대한 배가 나루터에 천천히 다가왔다. 배가 나루터에 옆구리를 붙이고 사람들이 모두 내리자 츠바틴들은 갑판에 올랐다.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원래 수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저녁에야 많아지므로 신경쓰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이상한 놈들은 없는 것 같군.' "노리스." 츠바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를 툭쳤다. 의아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왜 그렇게 굳어있는 거야? 마치 죽을 장소를 찾아온 사람 같잖아." "으음‥. 아니야." "혹시 시즈를 찾아가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러나?" 노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까지 적으로 지냈다고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전쟁터에서 적과 친구는 시시때때로 바뀌니 말이다. 전투의 경험이 많은 노리스의 얼굴가죽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두꺼웠다. "츠바틴, 자네 같으면 암습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암습!? 글쎄, 시장 같은 곳이겠지." "보는 눈이 적은 곳에서 한다면?" "역시 산이나 바닷가, 아니면 배도 좋겠지. 한정된 공간이니 사방이 막혀있거든. 승객이 문제겠지만‥." "그렇군." 눈매가 가늘어지며 노리스는 검을 잡았다. 성스러운 회귀를 시작하려는 자들이다. 승객 몇 명이 걸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노리스들을 사냥하기 위해 좋은 도구일 뿐이었다. 심각한 표정에서 낌새를 눈치챘는지 츠바틴이 팔꿈치로 로진스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이 중에 몇 명은 암살자일 것이다.' 그러나 노리스는 곧 암살자를 가려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을 향해 돌아선 승객이 모두 품에서 단도와 칼을 비롯한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하하‥. 그렇군. 전체가 암살자라면 승객을 죽이지 않아도 되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하늘을 찌르는 살기에 당황한 로진스가 뒷걸음질 쳤다. 앞을 주시하며 노리스가 대답했다. "노르벨이야. 노르벨의 복병이다." "그 녀석이 왜!? 아! 그렇군." 로진스는 소리를 길게 지르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에즈민에 대한 노르벨의 집착은 진정한 남매(?)애를 넘어섰으 니까. 커다란 덩치 뒤로 츠바틴과 로진스를 밀어내고 노리스가 말했다. "로진스! 어떻게든 저쪽 강변으로 갈 수 있나?" "이봐, 이 넓은 지크 강을 무슨 수로 건너라는 거야. 아직 반도 못 왔다고!" "어떻게든 해봐. 이대로는 내가 힘들어. 자네들이 있으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내가 마법을 쓰면‥." "저들은 대부분 암살자야. 그것도 아주 뛰어난‥. 노르벨이 동원했다면 플로먼들이다." 그 말에 공기가 바뀌었다. 플로먼과 플로먼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플로먼이라는 어쌔신은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협력하여 목표를 암살하지 않는다. 단, 예외는 있었다. 문제는 예외를 목표로 움직일 때의 플로먼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분담해서 상대를 공략한다. 10인 이상이 나선 공략에서 그들은 100%의 성공률을 자랑했다. 플로먼이라는 이름이 드높아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플로먼이라고 해도 마법을 어쩌지는 못 하잖아!?" 츠바틴이 로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처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암살의 대상은 꼭 검사가 아니다. 플로먼의 의뢰대상에는 검사보다도 마법사가 많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마법사를 공격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 지만 플로먼들이라면 어디서든지 마법사를 죽일 수 있다. "마법이라고 해서 완벽한 방어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각종 마법마다 약점이 남아있지. 게다가 시전자의 집중력이 나 주의에 상당한 비중이 있어서 내가 신경쓰지 않는 곳이라면 마법의 세기도 약하게 전개돼." "그렇다면‥. 도망쳐야 겠군." "하지만 무슨 수로?" 수면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 암살자들은 수영에도 능하다. 수면과 마법의 반발력을 이용하는 방법도 힘들다. 단도와 활이 그냥 있겠는가? 암살자의 주무기인데. 여러 가지를 계산하던 츠바틴은 한 가지를 꼽았다. "수중으로 가야겠군. 로진스, 가장 압력이 강한 주문을 영창해주겠나?"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걱정 마. 노리스는 그리 쉽게 밀리지 않을 테니까. 안 그런가?" "무리한 부탁이야." 노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검을 뽑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드는 어쎄신들. 그는 침착하게 검을 하나하나 쳐냈 다. 뒤에서 중얼대는 로진스의 영창이 들렸다. 츠바틴에게 영감이 떠올랐다면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믿음은 확신을 주고 확신은 힘을 준다. 노리스의 힘이 검끝까지 피어올랐다. "욱!" 어쌔신들이 움찔거리고 멈칫했다. 그러나 잠시였을 뿐이다. 체계적으로 닦아온 합격술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들은 공격하는 부위도 계획적으로 검의 동선이 가장 긴 방향을 택해서 공격했다. 그러니 방어가 힘든 게 당연했다. "으윽! 아직 멀었어?" 한 명의 어쌔신도 무섭고 십여 명만 해도 공포스럽다. 하지만 배 안에 탄 사람들이 모두 어쌔신인데 어쩌겠는가. 다 급한 노리스의 외침에도 츠바틴은 담담히 대꾸했다. "조금만 더 버텨." 츠바틴은 힘이 없었다. 아마 어쌔신의 일격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어떻게 대답하건 간에 노리스에게 달려있는 책임 이었기에 그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다. "크윽!" 무려 일곱 개의 암기를 동시에 쳐낸 노리스가 신음을 터뜨렸다. 왼쪽 어깨 깊숙이 박힌 단도가 붉게 빛났다. 그 때, 로진스의 손에서 모인 마력이 주문의 영창으로 안정화되면서 준비를 끝냈다. "지금이다!" 츠바틴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노리스는 두 사람을 양팔에 잡고 물로 뛰어내렸다. 칼을 집어넣을 새도 없었다. 뒤 로 칼이 수두룩하게 날아왔다. 풍덩! 세 명의 무게가 한꺼번에 떨어지자 상당한 깊이까지 들어갔다. 어느 정도가 되었다 싶자 로진스가 입을 쩍 벌리고 공기방울을 뱉었다. 꾸르르륵! 그러자 손에서 강한 압력이 폭사됐다. 반발력은 대단해서 살이 쏠릴 정도의 속도로 그들은 쏘아져나갔다. 위에서 수 면위로 드러나길 기다리는 이들에게 한 어쌔신이 명령했다. "그만 둬. 돌아가자." "옛!? 하지만‥." "우리는 그냥 위협을 하라는 명령만 들었다. 그 이상할 필요없다." 말을 끝낸 그는 모자를 쓰고 상인의 옷을 걸쳤다. 주름진 웃음을 짓는 그는 영락없는 과일장사였다. 수군수군‥. 그 들이 탄 배는 여느 배나 다름없이 건너편을 향해 유유히 흘러갔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8화 재물이 있는 자에게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행운마저 넘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상인들은 위험을 감수하기 마련이 고 부자들은 호위를 둔다. 만약 돈은 많고 만만해 보인다면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틀 전에 묶었던 마을에서 이어졌던 기분이 싸그리 불쾌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보를레스는 정면의 건달을 노 려보았다. "어쭈!? 노려봐? 그래! 싸움 좀 한다 이거지? 키 좀 크고, 칼 좀 찼다 이거지?" 뱁새처럼 가느다란 눈을 가진 건달은 거만하게 고개를 15도 각도로 올리고 한쪽 다리를 달달거렸다. 그의 뒤에는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있었으니 거만할 만도 했다. "하.하.하‥." 하지만 상대를 잘못 가렸다. 허탈하게 웃는 보를레스의 눈에는 어이없게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지경에 이를 게 한 장본인이면서 테이블의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시즈와 아리에가 얄미웠다. "유레민트, 여기는 음식을 잘하지 않는데도 비싸네요." "아, 아리에‥." 태연하게 아리에가 말하자 유레민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보를레스는 먼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뭔가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이 놈들이 겁을 집어삼켰나. 왜 이래? 너희들 죽고 싶어?" 이제는 단도까지 빼들고 협박이다. 왜 이런 일이 있어났는지 알고 싶다면 시즈가 음식을 시키기 전으로 돌아가 보 면 된다.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낼 때, 투명한 보석 하나가 또르륵 떨어졌다. 엄지손가락만한 보석은 종류가 무 엇이라고 해도 상당한 값이 분명했기에 음식점의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행색은 고루해 보이기까지 한 청년이 그런 부자라니‥. 그들의 놀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땅을 구르는 보석을 잽싸게 잡아챈 단발머리의 아 름다운 여인은 그것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 살펴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성신석이라는 거지? 정말로 결정에 별들이 숨어있는 것 같네." 어두운 방안에서 성신석에 빛을 비추면 우주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 정도로 반짝인다는 뜻이다. 안에 또 다른 우주가 들어있다는 보석, 성신석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벌떡 일어서서 다가왔다. 손톱만 해도 몇 만의 가치를 가진 성신석이다. 엄지손가락이라면 판단할 수 없는 값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 글쎄‥. 우리가 사업을 하는데 자금이 많이 쪼달려. 그래서 그런데 원조 좀 해주지." 첫눈에 껄렁함과 협박성이 두드러진 말투였다. 보를레스가 천천히 거구를 일으켜 그들을 내려다보며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수가 많이 붙었으니 뭐가 무섭겠는가. 아무리 장사라고 해도 한 번에 열 사람을 상대할 수는 없다. 상대가 검사라고 해도 이들은 산에서 자라 상당한 근력과 싸움실력을 가졌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식사 를 하고 있는 청년은 아무리 잘 봐줘도 계집애나 다를 바 없이 허약해 보였고, 옆의 계집들은 뛰어난 미모를 가졌 으니 허약하다고 판단이 됐다. 산에서는 그저 우락부락해야 힘이 쎈 게 당연한 이치였다. "어이, 청년. 어서 말리라고. 저들은 이 주변에서 소문난 망나니들이야. 어지간한 무사는 힘을 못쓰고 당한다고." 음식점의 주인이 살금살금 다가와 시즈에게 귓속말을 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저 사람은 어지간한 무사가 아니거든요." "어허‥. 위험하다니까. 저 망나니들은 보통 악독한 게 아니야. 큰 코를 다치고 나서는 이미 늦어요." 다시 한 번 얘기했지만 시즈의 웃는 얼굴에서 주인은 그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혀를 쯧쯧차며 돌아선 그는 종업원이 그들 옆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카운터 안으로 데려가며 중얼거렸다. "저런, 저런‥. 누가 청년을 위해 그런 말 한 줄 아나‥. 아름다운 여인들이 위험하니까 그런 거라고." "이야아앗!" 맨 앞에서 시비를 거는 사내가 첫 번째였다. 보를레스는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서 던져버렸다. 기합처럼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건달 사내는 구석에 처박혔다. 그의 허리 대신에 테이블 하나가 쿠션 역할로 부서져 나갔다. 건달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나서 꽥꽥 외치는 걸 보니 차라리 건달의 허리가 부서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그 녀석, 죽여버려!" "바닥에 팽기칠 걸 그랬군." "저 아까운 테이블‥." 식당의 주인도 보를레스의 중얼거림에 은유적으로 동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우성을 떠는 것은 뱁새눈 밖에 없었 다. 뒤의 건달들은 어디서 검을 수련한 이들처럼 천천히 보를레스를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특이하군.' 보를레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산골의 건달들이 어떻게 철장검을 가지고 있는 걸까. 맨 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등에 찬 검이 묵빛이 흐르는 게 강철이 틀림없었다. '주변 부호의 용병이라도 되는 건가?' 눈썹부터 호랑이처럼 거칠게 뻗어 있어 외모만으로 카리스마가 흘렀다. 하지만 카리스마에서는 보를레스도 만만치 않다. 숨은 하나 가득 들어 마시고 어깨로 앞에 있는 사내를 단숨에 들이박았다. "윽!?" 뒤에 있던 무리가 힘을 합해서 사내를 잡았다. 하지만 보를레스의 담력검술은 엄청난 돌진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 다. 뒤에서 자세를 잡고 있던 두목까지 그 힘을 당하지 못하고 뒤로 벌렁 뒹굴었다. 뒤를 돌아보고 눈을 찡긋하는 보를레스, 유레민트의 눈에는 제법 멋지게 보였는지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었 다. 아리에가 입은 손으로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힘 하나는 무식하게 강하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리에 역시 보를레스의 기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뒤에 있기에 여유있게 농담 을 주절댈 수 있는 것이다. 땅을 구른 건달들이 올려다 본 보를레스는 더욱 거대했다. 발악을 하듯 두 사내가 한꺼 번에 검을 내질렀다. "흐음‥." 동시에 보를레스도 한 발을 쿡 벌리며 제뷔키어를 발검했다. 가는 금속성이 퍼지고 두 개의 검 조각이 허공으로 튕 겨 올랐다. 보를레스의 큰 발이 두 사내의 가슴에 차례로 작렬했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군." "강하군." 우두머리로 보이는 호랑이 눈썹이 앞으로 건달들을 재치고 나왔다. 아무래도 직접 상대를 해야 되겠다고 판단한 모 양이었다. 확실히 성신석이나 되는 거물인데 호위가 거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 로 성신석은 귀한 물품이었다. 스륵! 호랑이 눈썹은 펄쩍 뛰어올라 등의 바스터드 소드를 뽑아 내리쳤다. 빛이 번쩍하고 일어날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다. 건달들은 주먹을 꽉 쥐고 탄성을 질렀고 음식점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도 감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보를레스는 웃 기지도 않는다는 묵묵한 표정으로 제뷔키어를 견고하게 들어 막았다. 캉! 힘에 겨운 듯 처지는 제뷔키어를 보며 호랑이 눈썹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무게까지 실린 공격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강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사람만한 바위도 두쪽으로 가른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내 일 그러졌다.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9화 힘에 겨운 듯 처지는 제뷔키어를 보며 호랑이 눈썹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무게까지 실린 공격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강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사람만한 바위도 두쪽으로 가른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내 일 그러졌다. 보를레스는 무표정하게 공격을 튕겨냈다. 잠시 밀린 것처럼 보인 것은 손목과 손아귀에 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상대가 힘을 주는 타이밍을 약간이나마 어긋나게 할 수 있었다. 반대로 허공에서 내려와서 허공으로 다시 떠올려진 호랑이 눈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완전히 휘어있었다. 그가 땅 에 떨어지기 전에 보를레스는 제뷔키어를 집어넣고 주먹을 옆구리에 꽂아주었다. "우선 한 방!" "끄윽!" 손목까지는 파고 든 것 같았다. 낭패스럽게 바닥을 구른 건달 두목은 내장이 진탕됨도 모자라서 내용물이 울컥 올 라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속 편하게 토하기에는 보를레스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한 방 더!" "쿨럭!"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 유레민트가 눈살을 찌푸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시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무도가들은 '건강한 육체에 좋은 정신이 깃든다.'라고 반은 틀리죠. 건강한 육체에는 좋은 정신만 깃드는 게 아닙니다. 나쁜 정신도 깊숙이 틀어박힐 수 있죠. 그런 사람은 건강하지 않게 되면 좋은 정신으로 되돌아옵니 다." "잔인한 대답이군요." 식사하는 걸 방해받아서인지 시즈는 무척 냉정하게 대답했다. 유레민트는 옆에서 아리에가 고개를 작게 흔드는 걸 보았다.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신호였다. "저 청년, 대단하군. 저 많은 건달들을 혼자서 해치우다니." 시즈는 가게 주인의 말을 가볍게 끄덕여 건너뛰고 심심풀이를 끝냈다는 표정으로 앉는 보를레스에게 말했다. "어때요?" "이 주변에 용병대나, 경비대라도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잔뜩 몰려들 것 같으니까 그만 마을을 떠나자." "흐음‥. 그러죠." 시즈들은 서둘러서 마을을 떠났다. 산적이건 용병대건 간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다. 그들 이 막 모습을 감췄을 때, 보를레스의 예측처럼 호랑이 눈썹이 다른 일행을 이끌고 우르르 음식점을 처들어왔다. "젠장! 튀었군." 그들이 실망을 하면서 음식점에 화풀이를 하고 있는데 세 명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초라한 행색인 그들은 척 보기에도 로브를 걸친 마법사와, 책을 옆구리에 낀 학자, 그리고 검을 차고 있는 검사의 특이한 구성이었다. 그 들은 행패를 부리는 건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중에서 어깨가 떡하니 벌어진 사내가 걸어와서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식사를 하는 곳에서 이게 무슨 행패냐? 어서 나갓! 너희들 같은 놈들 때문에 칼을 찬 무사들이 욕을 먹지 않는가!" "이건 또 뭐야?" 호랑이 눈썹 패거리들은 꿩 대신 닭이라도 잡을 심산인지 이제는 엉뚱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다부지게 이를 갈더니 그는 기합을 질렀다. "어디 혼이 좀 나야겠구나! 못된 녀석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점 안은 먼지가 가득했다. 사내가 건달패를 두들기며 일어난 먼지 들이었다. 그는 도망치는 호랑이 눈썹의 뒷머리를 발로 차서 밟아버리고 마법사에게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이 쪽으로 온 게 맞는 거야?" "틀림없어. 방금 전에 왔다 갔겠지." 마법사와 검사가 다툴 기미를 보이자 학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을 말렸다. "허허, 이보게들‥. 주인장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겠나. 이보시오, 주인장. 오늘 혹시 은발머리의 청년 일행이 여기를 지나가지 않았소?" "아! 그 청년들이라면 방금 전에 떠났습니다. 조금만 빨리 오셨으면 만나셨을 텐데요‥. 혹시 일행이십니까?" "아니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되겠지."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남기고 그들은 떠났다. 주인으로써는 갑작스레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건달들을 쫓아준 검사 일행이 고마운지 문밖에서 고개를 꾸벅이며 배웅을 했다. "방금 전에 떠났다니‥. 어서 쫓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 말은 또 뛰어야 한다는 건가?" "이보게, 츠바틴. 그만 투덜거리라고." 건달들을 혼내준 사람은 바로 지크 강에서 뛰어들었던 노리스였고 옆의 두사람은 일행인 츠바틴과 로진스였다. 서 둘러 왔기에 꽤나 지쳐있던 츠바틴은 한숨을 푹 쉬었지만 일은 끝내고 쉬는 게 진정한 휴식임을 알고 있기에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왜 그래? 시즈." 문득 시즈가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보를레스가 이유를 물었다. "아, 누가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아서요." "바람이 알려준 건가?" 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그 녀석들이 쫓아오는 모양이군. 뭐 상관없잖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 교육을 다시 시켜주지." 이번에는 시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에요. 제법 익숙한‥." 익숙하다지만 친근한 느낌은 아니었다. 시즈는 그들을 만나야할지 아니면 피해야 할지 고민했다. "몇 명인데?" 코를 자극하는 향기에 시즈는 고개를 들었다. 뺨을 간질이는 것은 아리에의 머리카락이었다. "세 명입니다." "군대도 아니고 세 명이라면 만나도 괜찮을 거야. 그들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우리를 찾는 거겠지." "흐음‥." 시즈는 나무 그늘에서 일행을 부르는 것으로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약간은 더위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땀이 철철 흐르는 참에 유레민트와 아리에는 환호성을 작게 터뜨리고 그늘로 뛰어들었다. "여름에는 과일이 있어서 좋아." 마을에서 산딸기를 바닥에 널어놓고 아리에는 마냥 생글거렸다. 뜨거운 햇살은 그들을 견딜 수 없이 힘들게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하기도 했다. 시즈는 바람이 불게 일행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왔지?" "거의 다 왔습니다. 곧 보일 겁니다." 말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시즈가 움찔하고 눈을 빛냈다. 다들 그의 시선을 따라서 머리를 돌렸다. "저들은‥." 보를레스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시즈의 음성이 그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앉아요. 저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요." 노르벨이라면 몰라도, 노리스는 싸울 때도 시즈에 대한 배려로 정직하게 살기를 뿌렸다. 내가 널 공격할 테니 방어 를 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살기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시즈의 말에 보를레스와 아리에는 앉아있었지만 말대로 좌불안석(坐不安席), 긴장으로 꿈지럭거렸다. "오랜만이로군요." "그렇군." 시즈와 노리스는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일까 빙그레 웃은 그들. 시즈는 손을 내밀고 자리를 권했 다. "앉으시죠." "고맙네." "흠흠‥." 노리스와 츠바틴은 시즈에 대해 잘 알고 있다지만 로진스는 아니었다. 그는 오직 싸워온 기억 밖에 없었기에 보를 레스와 아리에처럼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게 말이야‥." 츠바틴이 우물쭈물했다. 이제까지 싸우다가 '이제 우리는 친구다.'라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노리스는 다짜고 짜 털어놓았다. "내가 말하지. 몽충에 대해 알고 있겠지?" "‥프르즈에서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회귀를 막고 싶네." 노리스는 다급하다면 다급해보였다. 그는 노르벨의 각오를 보았다. 그가 내뿜던 기세도‥. 만약 정면대결을 했다 해 도 물러섰을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단칼에 자르듯 말을 꺼낸 것이다. 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은 했는데 행동을 못 하다니 이상하군요." "의심을 하는 군. 우리도 어쩔 수 없네." 한숨을 쉬는 츠바틴은 고개를 떨궜다. 문득 시즈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게 미헬이 언급했던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뗐다. 진실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상대의 마음에 대한 좋은 시험거리였 다.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장소가 너무 탁 트였어." "아무도 없습니다만‥." 시즈가 말했지만 노리스는 여전히 불안했다. 노르벨 정도의 어쌔신이라면 공기 속에서도 기척을 녹아들 게 만든다. "플로먼들은 몸이 바람에 걸리지 않지." "그렇군요." 어렴풋이 노르벨과의 대결을 떠올린 시즈는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숲으로 들어가죠." "숲으로!?" 평지에서는 모습을 숨기기는 어렵지만 기척을 숨기기는 쉽다. 숲에서는 그 반대였다. 시즈는 숲에서 바람의 시력이 증가한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에게 생각이 있음을 안 유레민트가 말했다. "그러죠. 숲이 더 시원하겠네요." 감미로운 음성이 전해준 '시원하다.'라는 말에서 바닥에 깔려있는 의미를 츠바틴은 느꼈다. 반대하려는 노리스의 팔 을 잡고 그는 말했다. "마을보다 숲이 나을 거야. 그녀는 엘프야." 츠바틴이 유레민트의 뾰족한 귀를 가리켰다. 쫑긋거리는 게 토끼 귀처럼 귀여웠다. 엘프가 있다면 숲은 집보다 더 안전하다. 말뜻을 이해한 노리스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밤이 찾아올 때까지 그들은 숲 속을 계속 걸었다. 식물들이 풍기는 청량한 기운이 더위를 흡수했다. 벌레가 제법 많 았지만 유레민트가 간단한 주문을 중얼거리자 다가오지 않았다. 무작정 걷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벨루온을 향해서 걷고 있었다. 그 와중에 시즈는 전신으로 전해 지는 바람의 눈을 이용해 주위를 계속 살폈다. 걸으면서 미행자가 있나 검사를 하는 것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숲에 서 걷게 되면 주의를 분산시키기 힘들기에 보행자는 주위를 경계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있는 미행자들은 방심을 하기 마련이었다. 작은 공터에 모포를 깔고 자리를 마련한 일행은 가운데 모닥불을 폈다. 음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로는 양이 모 자른다 싶었는지 두 개의 모닥불 위에는 각각 냄비와 고기가 올려졌다. 부글부글 끊는 소리와 고기 기름이 지글거 리는 소리가 아우러지며 군침 흐르게 했다. "시즈, 자네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음유술사들은 모두 대단하지." 아리에가 건네준 찌개를 받아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츠바틴이 입을 열었다. 여름에는 뜨거운 찌개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모두들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자네들 몇몇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는 수십 명이 모이곤 했지. 우리는 그것을 비겁하게 생각하지 않아. 음유술사는 인간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지." "하지만 인간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역사의 고리와 밀고 당기며 몇 천년을 내려온 게 아니겠나. 본론을 말하겠네‥. 몽충에 대해 알고 있으니 얘기는 쉬울 거야. 몽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라는 자는 음유술사일세.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라고 들어보 았나?" 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군. 우리는 그가 두렵네. 사실 지금 자네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그의 마법에 의한 환상이 아 닐지 의심이 가네‥." 츠바틴은 스푼을 든 부들부들 떨었다. 노리스와 로진스 또한 침중한 표정이었다.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우 리'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시즈 일행은 우선 한 가지를 알았다. '빛나는 무대의 주인.'은 환상을 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잠자코 있는 그들을 향해 로진스가 입을 열었다. "환상이 별 거냐 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얕볼 게 아니야. 역사의 고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빛에 대해서 연구했지. 그 결과 빛이 사물을 만든다는 결론에 도달했네. 본질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빛을 통해서 물질을 보고 있어. 그리 고 인식을 하지. 그 인식에 따라서 우리의 몸은 반응하지." "환상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두렵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군요. 눈에 달리 표현된다고 해도 본 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보를레스의 말에 로진스는 피식 웃었다. "만약에 환상이 진실이라 믿게 되는 암시에 걸린다면 어쩌겠는가?" 로진스는 패기에 넘치던 청년이 말을 못하는 것을 보고 웃었다. "우리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거야. 누가 꿈과 현실을 실제로 구분하겠나. 어쩌면 우리의 현실과 꿈, 전부가 다른 누군가의 기나긴 꿈의 일부일지도 모르는데‥." 그의 말을 노리스가 이었다. "암시에 따라서 인간은 매우 효과적으로 반응하네. 알고 있겠지만 시술가가 자신의 손가락을 불덩이라고 암시에 걸 린 자에게 가져다대면 그 자는 화상을 입지. 암시는 즉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또다른 시선을 강제로 부린다고 할 수 있네. 만약 인간은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시선으로 모두 환상을 볼 경우 어떻게 반응한다고 생각하나?" 허탈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에 일행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 결과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노리스 일행의 설명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와 같은 음유술사, 시즈 또한 마찬 가지였다. 어떻게 대응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암시에 걸리지 않을 방법은 없나요?" 오랜 침묵 끝에 유레민트가 물었다. "간단한 방법이 있네.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력에 따라서 암시에 잘 걸리는 이가 있고 잘 거리지 않는 이가 있지. 즉 자기 의지력에 달린 거야. 그리스의 암시를 의지로 깨뜨릴 수 있는 자라면‥." "방법은 간단하지. 하지만 그는 음유술사야. 그보다 강한 의지와 강하기는커녕 비슷한 의지를 가진 자는 세일피어론 아드를 통틀어서 네 명에 불과하네. 환상 중에 암시를 이겨내는 것은 아주 힘들지. 음유술사들이라고 해도‥." 어쨌든 음유술사 정도가 되야 상대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시즈는 그처럼 상대가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 랐다. 그리고 노리스는 말했다. "그 뿐이 아니야. 노르벨, 에즈민 남매도 무시할 수 없어. 특히 노르벨은 정말 강하다. 광풍의 검사가 정면 대결을 한다고 해도 승부는 미지수지." 노리스는 광풍의 검사가 보를레스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백색의 갑옷을 입은 보를레스를 뜻하는 것 이다.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요. 전 노르벨과 겨뤄본 일이 있습니다. 노리스에게도 부담스럽단 말입니까?" "다들 숨기는 게 하나 정도는 있네. 다만 그는 숨긴 게 많을 뿐이지. 누구나 싸우는 이유를 가지고 있네. 하지만 노 르벨은 아니었어. 그리고 이제 이유가 생겼네." "무게가 달라졌겠군‥." 보를레스가 고기를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검사는 검에 의미를 담길 좋아한다. 보통 의미없이 검을 잡는 이가 드물 기도 했지만 의미가 담긴 검은 강하기 때문이다. 시즈를 비롯한 여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노리스의 말에 서 노르벨이 충분히 강해졌다는 것을 받아드렸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진스가 하라는 듯 손바닥을 까닥였다. 시즈는 참고 있던 질문을 내뱉었다. "그리스는 지금이라도 몽충을 퍼뜨릴 수 있지 않나요? 성스러운 회귀를 계획했다면 당장‥." "시즈, 이 사람아. 모든 일이 그리 쉽다면 얼마나 세상이 망가졌겠는가. 몽충은 꿈을 먹는 존재야. 꿈을 먹고 크기에 번식자라는 꿈 제공자가 필요하네. 만약 번식자가 행복한 꿈만 꾼다면 몽충은 해가 되지 않아. 하지만 끔찍한 꿈만 먹고 자란다면 퍼져서 다른 이들의 눈에 끔찍한 현실을 불러일으킬 거야." "몽충이 자라는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리고 번식자는 누가‥." "알 수 없어. 아마도 그리스 자신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무척이나 자신감 없는 싸움이 되겠군요."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시즈는 하늘을 보며 중얼댔다. "그나마 오늘 찌개가 맛있는 게 다행이네요. 자신있게 스푼이 가니‥." 47악장 슬픔이 흐르고 나야 눈물이 흐른다. 10화 "어떻게 됐지?" "당신이 말한 그대로 했소." 노르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주보고 있던 청년은 그 미소의 이면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도대 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약속은 지키겠지요?" "플로먼의 단검은 틀림없이 돌려준다.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주도록 하지." 노르벨은 품에서 고풍스런 문양의 칼집에 갇혀있는 짧은 검을 꺼냈다. 그 순간 청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니오. 우리는 의뢰가 끝난 후에 받아도 늦지 않소." 검은 보자기로 둘둘 말아놓은 듯한 사내는 현 플로먼의 가주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가진 권위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것은 '플로먼의 단검'이라고 지칭되는 가주들의 권위를 상장하는 신물이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도 난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어쌔신으로써 정정당당하게 전(前) 가주를 암살했으니까. 언제나 가주의 아이들은 플로먼 중에서도 특수한 약과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제껏 플로먼의 단검이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간 일이 없었 다. "그럼 그렇게 하지." 막 꺼냈던 단검을 노르벨은 다시 집어넣었다. '어차피 단검을 손에 넣으면 날 제거하겠지.' 노르벨은 플로먼의 가주가 왜 여유를 부리는지 내다보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곧 단검 하나에 권력을 걸고 경쟁한 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게 될 시간이 찾아올 테니‥. "아! 그것은 알아보았나?" "그리스에 대한 정보 말이오?" 가주는 몇 장의 문서를 건넸다. 노르벨의 눈이 문서 표면에 쓰여진 글자를 훑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무척이나 평범하군." "역시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었나 보군요. 실베니아 남부 소즈누 지방에서 출생. 6세에 상인인 부친을 따라서 아스틴 으로 이주. 한 마법사의 눈에 띄어 13세부터 마법을 배우기 시작. 그 뒤로도‥마법사의 일생에서 특별한 인연을 얻 지는 않았군요." 뭔가 알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노르벨은 소득이 없자 실망했다. 플로먼 가주는 문서를 하나하나 넘기더니 흥 미롭다는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특별한 인연이 있군요." "뭐지?" "역사의 고리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 "날 놀리나?" 노르벨은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게 그의 정보를 궁금해하는 거요?" 반대편에 털썩 앉아서 플로먼 가주가 물었다. "간단해. 그에게서 싸워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없었으니까." "미치광이 일수도 있잖소." "무엇인가에 이유없이 미치는 자를 난 보지 못했다." 세일피어론아드 자체를 없애면서 이루려고 하는 광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말로 미치광이 광대 노릇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의지가 있다면 의지를 만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싸우는 내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이건 아닐까요?" 귀가 흘깃하여 돌아본 그는 이내 플로먼 가주가 놀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눈웃음을 치며 가리킨 곳에는 '여자 관계'에 대해 나와있었는데 '애인, 에즈민.'이라고 쓰여있었던 것이다. 콧주름이 사자의 것처럼 잔뜩 흔들렸다. '굉장하군.' 플로먼 가주는 전신을 떨게 만드는 살기를 즐겼다. 이 정도의 살기를 낼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 노릇 인가. 번쩍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자는 실제로 플로먼 역사상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플로먼의 성을 가진 이로써는 전혀 웃기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웃었다. 어쌔신도 무예를 익힌 이상 무도가다. 강한 자를 좋아하는 성향은 마찬가지였다. "내 동생은 아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뜨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노르벨이 몸을 돌렸다. 암살자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흥분하는 자는 진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문서를 챙기고 플로먼 가주는 방문을 나섰다. 바로 정보를 수집하러 떠날 것이다. 노르벨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적어도 의뢰에 있어서 플로먼들은 철저하다. 의뢰비는 노르벨이 플로먼으로써 모았던 돈이다. 많다면 많았지, 적다 고 말할 수 없는 액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르벨은 어떤 이유로든 확실한 아군을 만들어 두었다고 확신했다. "오라버니‥." 생각에 빠져있던 노르벨은 퍼뜩 놀랐다. 싱그럽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동생의 것이 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방긋 웃고 있는 에즈민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생글거렸다. "어쩐 일이냐?" "뭐 하나 싶어서 왔어요." 노르벨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피하자 에즈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장난이라는 것은 그에 대한 반응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실망하게 되는 법이었다. 노르벨이 내심 놀란 심장을 다스리고 있음을 안다면 그녀는 꽤나 기뻐하리라. '아무리 생각에 빠져있었다고 하지만‥.' 자신을 뛰어넘는 재능. 노르벨은 플로먼 가주가 에즈민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 기 히죽거리자 에즈민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번식자를 찾았느냐?" 에즈민은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운 그녀는 능숙하게 노르벨에게 건넸다. "예전부터 있었는데요. 뭐‥." 위태로운 웃음. 썩어버린 징검다리를 건너는 자의 기분이 이럴까. 노르벨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끝내 해야겠니?" "그럼 오라버니가 해주실 건가요?" "그래. 차라리 내가 하마." "안 되요. 이미‥." 고양이 발처럼 우아한 손동작으로 자기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에즈민은 헤헤 거렸다. 노르벨이 멍해지는 순간이었 다.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선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 그리스!" 그리스의 휴식 공간인 지하 독방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노르벨은 어둠 속에서도 시퍼런 눈빛을 내며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노르벨‥. 왠 호들갑?"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사내. 그는 혼자 방안에 있으면서도 검은 로브를 벗어놓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서 자 단짝처럼 바닥에 닿아있던 로브도 일어섰다. 횃불에 비친 그의 표정에는 휴식을 방해한 손님에 대한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화가 난 노르벨이 그따위 것에 아랑곳 할 리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그리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영문을 모르겠군." "에즈민에게 몽충을 번식시켰지 않나!?" "아아‥! 에즈민이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군. 오빠인 자네가 몰랐다니 의외로군." 그리스는 말을 하며 노르벨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꿈쩍도 하지 않자 눈썹을 찡그렸다. "이 팔을 놓아주겠나?" "‥‥당장‥!"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대는 노르벨의 음성에 그리스는 귀를 가져다댔다. "당장! 몽충을 해소시켜!" "안돼. 그녀의 바램인데 오빠라도 지나친 간섭이 아닌가?" "이 녀서어어억!" 노르벨이 고함을 지르며 그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손에는 시퍼런 칼날을 세운 검을 들고서‥. 그리스는 우습다는 듯 손을 튕겼다. 스걱! 검이 워낙 빨라서일까? 그리스의 팔이 팔뚝부터 뭉떵 잘려나갔다. 그리고 반대팔, 양 다리를 차례차례 잘라버린 노 르벨은 다시 소리쳤다.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크흐흐흐흣!" 팔 다리가 잘린 주제에 그리스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안돼." 번쩍 들리는 그의 얼굴, 붉은 광망이 엿보였다. 흠칫 놀란 노르벨이 뒤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니‥. 피도 나오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스의 토막난 몸이 검게 흐물거리더니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되어 입을 쩌억 벌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화, 환상이야! 환상이다!" 그나마 그리스가 환술가였음을 알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노르벨은 당장에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몰랐으 니‥. "환상이라고!? 확신하나?" 괴물은 흐물거리는 자태를 뽐내며 노르벨에게 은근하게 속삭였다. 촉수 같은 것을 뻗어내어 그를 후려갈겼다. "으윽! 아프지 않다!" 촉수를 막아낸 왼팔이 떨어질 듯 고통을 호소했지만 노르벨은 잠깐 신음을 냈을 뿐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즉 시 그는 그리스가 마련한 '빛나는 무대'의 등장객이 되어 버릴 것이다. 처참한 엑스트라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 다. "그렇다면‥." 어쌔신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짧은 찰나에 여러군데 타격을 입고 노르벨은 바닥에 쓰러졌다. 신음소 리가 돋아났다. "크으으‥. 이따위‥ 것!" "그만 하지." 차가운 목소리에 검은 괴물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궁지로 몰아세웠던 존재가 간단하게 사라지자 노르벨은 이를 빠 드득 갈았다.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서있는 그리스가 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봐." 상처 입은 부위를 감싸쥐고 노르벨은 등을 돌렸다. 말로도 안 되고 무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데 있어봐야 달라질 게 없었다. 힘없이 걸어나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그리스는 말했다. "흠‥. 그래도 남매라는 건가?" "그저 가식일 뿐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다리를 꼬아 올리고 의자에 몸을 실은 에즈민이 코웃음쳤다. "언제부터 있었지? 전혀 몰랐군." 노르벨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 그리스는 에즈민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에즈민의 잠행(潛行)이 뛰어났지만 한 편으로는 정신을 분산시킬 수 없을만큼 노르벨이 강한 의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기도 했다. "혈연마저 가식이라니‥. 비약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노르벨은 널 진심으로 위하는 것 같은데‥." "호호‥. 날 사랑하는 건 진심이겠죠. 다만 그 사랑 자체가 가식이라는 거에요. 생명을 잃는 게 두려워서 참는 게 사랑이라면 없는 게 낫죠." 에즈민의 부드러운 입술은 망설임 없이 딱딱하고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수 년 전의 밤 과 다를 바 없는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날, 고통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마주쳤던 노르벨의 눈동자이 그리스를 쏘아보던 지금과 같았다면 그녀는 노르 벨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48악장 꿈들의 전쟁 1화 노르벨은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부상을 진찰한 의사가 얼른 팔에 부목을 댔다. '부러졌나?' 환상에는 강도가 필요 없다. 인간의 몸은 자신의 생각에 예민하니까. 그만큼 의지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 주는 것이지만‥. 암시에 걸리면 몸이 얼마나 빠르고, 힘이 강하고 등의 조건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한다. "정말이지 상대하기 싫은 녀석이야." 예전부터 소문이 매우 무성했던 그리스, 솔직히 한 번 맞붙어보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결국은 소문뿐이 아니었음 을 알았다. 댓가를 상당히 지불했어도 정작 위험할 때 필요한 정보였다. "하아‥.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그래, 에즈민. 마음대로 해봐라. 정말로 원한다면 절망의 꿈에서 깨지 않게 도와 줄 테니‥." 검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사람의 손에 들려 수많은 피를 보는 마력의 도구인 검‥. 혹 자는 모든 도구는 사용하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손에 무엇이 들렸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존재다. 즉, 검이란 생물에게 상처를 입히고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로 이미 마력의 도구였다. 그 도구들이 강하게 부딪혔다. 창! 캉! "흐음‥." 노리스는 강하게 부딪혀 오는 보를레스의 검을 하나 하나씩 쳐냈다. '크윽! 완전히 괴물이로군.' 반격 없이 그저 방어만 했다. 그런데도 보를레스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손아귀가 찌릿대며 아파왔다. 이제까지 수 많은 강적들과 싸우고 또 겨뤄왔던 그였다. 광풍의 검사라는 멋들어진 별명이야말로 그의 검이 지나왔던 길을 알려 주는 좋은 예였다. 그러나 담력검술을 완성시킨 후로 자부했던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지금껏 싸워왔던 누구보다도 쉽게 노리스는 제뷔키어를 방어했다. 걷어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툭툭 쳐낼 때 마다 보를레스의 몸 전체가 휘청거렸으니‥. 촤르륵! 챙! 제뷔키어가 뒤로 튕겨 나가고 보를레스의 하반신에 허점이 드러났다. 멀리서 지켜보던 유레민트가 눈을 꼭 감고 다 음 순간 일어난 상황을 외면했다. "읍!" "호오‥." 츠바틴과 로진스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살그머니 유레민트가 눈을 떴다. 그녀가 우려했던 상황과는 반대로 보를 레스는 멋지게 노리스의 검을 막아냈다. 팔이 부들거리기는 했지만 방어를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지 그의 얼굴 에는 미약한 미소마저 감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로진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검술에 걸신들린 사람 같군.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그리도 좋은가?" "그러는 자네는 어떤가? 저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을 죽이지만 자네는 광범위하게 죽이지 않나?" "마법을 살인기술 따위와 비교하지 말라고! 마법은 우주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야!" "학문!? 언제부터 학문이 그렇게 난폭해졌지?" "두 분 다 그만하시죠." 보를레스와 노리스와는 달리 입으로 다투는 두 사람을 지나쳐가며 시즈가 조용히 말했다. 보기에 민망하다고 느꼈 을까? 두 장년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검술에 빠진 것 같아. 저 두 사람." 아리에의 말에 시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는 투로 아리에는 말을 이었다. "노리스님도 특이하지. 어떻게 대련을 하면서 벨루온까지 걸어가자고 할 수 있지?" "뼛속까지 검사인가 봅니다." 벌써 6일째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때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들려오는 검의 소리에 아리에는 해탈의 지경에 이르렀다. '검소리와 새소리는 모두 마음에 달렸으니‥.'하고 중얼대자 유레민트가 키득대고 웃었다. 엘프의 눈에도 벅찬 여정 을 하루종일 검과 대화를 나누는 검사들은 경이롭게 보였다. 한 편, 안내를 책임지고 있는 츠바틴은 지도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되겠지만 평범한 지도도 그의 손에 붙들리니 특별해졌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또!?" "이 부근에 서적을 숨겨둔 동굴이 있어." 다른 이들은 몽충이 번식해서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전에 막아야한다고 했지만 츠바틴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싸 울 지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움직였다가는 허무한 결과를 낳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뇌가 가진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그를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도에서 역사의 고리가 자료를 숨겨두었던 곳 을 감촉같이 찾아내는 것이다. 필요할 듯 싶어 예전에 기억을 했다고 말했지만 오는 길에만 10여 군데의 자료실을 들춰보았다. 노리스는 '아마 세일피어론아드 전역을 꿰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대륙 최고의 학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으음‥. 여기도 있군. 이 것 좀 보라고, 시즈." "같은 내용입니다." 서고에 들어가면 적어도 두 세시간은 소비해야 했다. 수많은 책과 문서더미에서 몽충에 대한 자료를 찾는다는 것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연구자료였기 때문에 퇴치 방법이나 방어방법을 찾기는 백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 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대륙 최고의 학자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 리 없었다. 아스틴네글로드, 원탁의 칠인으로 꼽히는 유레민트, 그 녀는 눈부신 속도로 자료를 정리했다. 츠바틴과 로진스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으니 어느 정도 책을 빨리 본다 자 부하던 시즈는 어린애 수준에 불과했다. 성과는 있었다. 몽충의 정보를 상당 부분 알게 된 것이다. 감염자를 악몽에 시달리게 하여 꿈과 현실의 구분을 갈라놓는다. 꿈의 현상을 실제라고 믿게 된 감염자는 그 의지 에 따라 빨리는 하루에서 늦게는 한 달 여의 시간을 둘 뿐 모두 사망한다. 일종의 끝없는 고문이나 다름없기 때문 이다. 꿈을 현실이라 인정하고 의식을 놓아버리는 순간 생명을 잃게 된다. 또 몽충이 부화되는데는 번식자의 꿈을 한 달 이상 먹고 자라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 달 동안이라는 거군." "그 기간을 믿는 수밖에." 감염자의 의식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퍼지는 게 바로 몽충의 무서운 번식력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몽충에 대한 소 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부화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지금쯤 번식자의 몸에서 몽충이 꿈틀댈지도 모르고, 아 직도 번식자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최악의 상황으로 고려하는 게 어떨 때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역시 없습니다. 없애는 방법이‥." "흠‥. 이걸 보게." "이것은‥." 츠바틴이 내민 한 장의 쪽지‥. 로진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뇌했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뭔데 그래요?" 시즈와 유레민트가 즉각 달라붙었다. "별 거 아니야. 만약, 몽충은 희망의 꿈을 먹고, 절망의 꿈을 배설하지. 그래봤자 꿈은 인간의 의식이니까 꿈과 현실 을 구분시킬 수 있다면‥." "그 말은 그리스의 암시와 같다는 것 아닙니까? 음유술사나 대항이 가능한 암시를 무슨 수로‥." 방법을 찾았다는 말에 땀에 흠뻑 젖어 달려온 보를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물씬 풍겨오는 땀냄새에 얼굴을 찌푸 리고 로진스가 고개를 저었다. "몽충은 음유술사의 의지를 가진 게 아니야. 말했지 않나, 몽충은 희망의 꿈을 먹고 절망의 꿈을 배설한다고. 몽충 의 양분은 즉, 인간의 꿈이지. 그 꿈은 누구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인간의 의식이라는 거군. 가능성이 있겠어." 노리스마저 들어오자 서고는 완전히 코를 찌르는 냄새에 가득 찼다. 노리스는 왜, 학자들이 대답을 안 하는지 물었 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없이 조용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맑은 공기가 코에 닿을 쯤에야 숨을 몰아쉬는 이들. 그제서 야 상황을 이해한 노리스와 보를레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땀냄새 정도로 호들갑인가?" "자기 냄새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당장 서고에서 나오지 않으면 아마, 그 곳의 자료들이 썩어버릴 거야." "비약이 심하오." 기분이 상했는지 보를레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때, 두 검사의 머리에 모포가 한 덩어리씩 날아왔다. 멀리서 아 리에가 조용히 말했다. "기분 상해하지 말고 씻고 오면 되잖아요. 솔직히 하루 이틀 안 씻었어요?" "그렇군." 남자가 말할 때와 여자가 말할 때는 이렇게 다른 것이다. 로진스가 말할 때는 오히려 투덜대던 두 사람은 아리에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얌전히 냇가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아리에는 허리에 양손을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밤하 늘에 별빛 같은 윤기가 흐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하여간 못 말려." 48악장 꿈들의 전쟁 2화 적이 같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이렇게 가까워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행 사이에 막고 있던 묘한 거리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를레스와 노리스는 말만 안했지 사제지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검을 겨누겠지?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복잡한가? 뭐가 단순하고 복잡한지 시즈는 더 이상 구별하기를 그만 두었다. 인간이라는 생물을 분석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일이면 벨루온이로군." "네." 은근슬쩍 츠바틴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정말 멋진 달이야." "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달을 참 좋아했지. 우리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 넋이 나간 주제에 밤이면 성벽에 올라가서 달 을 바라봤으니까." "‥네." 별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츠바틴은 만족했는지 함께 달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들썩한 뒤를 돌아보고 다시 말을 꺼냈다. "보를레스라는 친구. 괜찮은 사람이야." "네‥." "내일이면 사람들이 모두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그는 대담하니까요." 츠바틴은 껄껄대고 웃었다. 어찌 보면 부러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허탈한 음성이 입술을 뚫 고 새어 나왔다. "노리스와 난, 노예였다." "두 사람이 말입니까?" 50여 년 전, 대륙 전체에서 성행하던 노예사업은 우선 엘프와 연합한 아스틴에서부터 점차 사라졌다. 능욕적 노예로 각광을 받던 게 바로 엘프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사막의 나라, 볼케아스에서만 아직도 노예 사업은 대대적으로 이 루어졌다. 때문에 각 국의 부호나 귀족들은 몰래, 볼케아스에서 노예를 사오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실제 노예였다는 것은 놀라웠다. 시즈의 경악 섞인 반문에 츠바틴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노예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끌려왔다고 들었지. 우리는 말을 배울 때부터 철저하 게 노예 교육을 받았다. 주인님은 신이고 다른 사람은 인간이고 노예는 가축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당시에는 그게 하늘이 정한 법칙으로 믿었다."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억울함이 없었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손과 발 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힘들다는 이유로 눈물도 흘렸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눈물 따위는 여자들에게나 통용되는 방 법임을 알았다. 그들의 눈에서 물빛이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행동이 느려지면 채찍은 날아왔다. 그래도 그들은 부근의 노예 중에서는 선택받은 존재였다. 주인이 무척이나 부유했던 그들은 헛간에서 염소들과 섞 여서 잠을 잤고 배가 고프면 염소젖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다른 노예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가혹한 일을 하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노예로 팔려온 한 엘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불모의 땅을 건너 남쪽에는 노예가 없는 땅이 있단다. 난 그 곳에 있었어. 언젠가 꼭 돌아갈 거야.' 거짓말이라고 치부했다. 그렇다. 절망에 지친 미친 엘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뇌리에 맴돌기에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찌르는 주인의 비명소리가 울러 퍼지고 그 자리에는 츠바틴이 서있었다. 채찍 자국으로 장식된 너덜너덜한 등 가죽을 돌린 채 그는 양손을 피로 물들인 상태였다. 손에는 곡괭이가 부러졌던 조각인지 뾰족한 금속이 들려서 그 끝에는 피에 찌든 내장 조각이 걸려있었다. 노리스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츠바틴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멍하게 서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쫓아왔지만 선천적으로 신체가 뛰어난 노리스는 야수처럼 빨랐다. 결국, 그들은 몸 여기저기에 화살을 꽂은 채로 탈출에 성공했다. "츠바틴, 츠바틴! 이 바보같은 녀석아.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주인을 해치다니!" "노리스, 노리스! 이 바보같은 녀석아.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주인을 해친 노예를 구하다니, 죽는 사람은 나로 충분 했어." 갈 곳이 없었다. 주인의 가족은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그들을 잡기에 핏발을 세웠다. 결국 그들은 쫓겨서쫓겨서 사막 으로 나갔다. 아무 것도 없는 모래의 땅에서 츠바틴은 말했다. "기억해!? 노리스. 그 엘프의 말 말이야. 불모의 땅을 건너 남쪽, 노예가 없는 땅이 있다고 했지‥." "불모의 땅을 건널 수 있을 리가 없어." 어렷을 때부터 교육받았던 노예의 지식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볼케이스의 노예상인은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도 록 사막이 죽음의 땅으로 가르쳤다. 주인 없는 노예가 사막을 건너면 유하의 요괴가 찾아와 낮에는 굽고, 밤에는 얼 린다고 했다.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굽고 얼린 노예를 요괴는 먹어치우고 그 자리에 뼈만 남긴다고 했다. 고작 10세를 간신히 넘어선 소년들이었다. 낙타의 뼈를 보고 츠바틴는 절망했다. "저 낙타도 주인 없는 노예였을 거야." "그런 소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사막을 건널지 생각해봐." "낙타도 못 건너고 뼈만 남았으니까 하는 말이야." 츠바틴의 말은 옳았다. 능숙한 모험가라고 해도 사막을 맨몸으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낙타 하나에 여 러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모래 속에 박힌 발을 빼내지 못하고 꼬꾸라졌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폭우인 사막의 비 는 금새 강을 만들고 세차게 흘렀다. 우연은 또 하나의 행운을 낳았다. 강이 생겼으니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은 식수가 넘쳐서 어깨가 무거울 지경이 아니라면 강변을 따라서 움직였던 것이 다. 두 소년은 그 곳에서 용병국으로 가는 상인 집단을 만났다. "노예가 없는 나라!? 하하핫! 재미있구나." 마차 안에서 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은 행렬을 책임진 대상(大商)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 말에 괜시리 쑥스러워 진 노리스가 츠바틴을 쏘아붙였다. "그 것 보라고! 미치광이 엘프가 한 말을 믿다니!" "너도 믿었잖아!?" 티격태격 싸우는 그들을 보고 한참을 웃은 대상(大商)은 말했다. "미치광이 엘프라‥. 아직도 노예 산업이 번성하고 있다더니‥. 이 정도로 철저했었구나. 그래‥. 저걸 보려무나." 대상은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차를 가린 천을 거뒀다. 두 마리의 낙타 머리 위로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지평선 끝으로 서서히 보이는 푸른 빛깔의 대지가 신비롭게 눈에 들어왔다. 두 소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미치광이 엘프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상은 감격에 젖은 두 사람에게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단다. '불모의 땅을 건너서 북쪽으로 노예를 사고 파는 땅이 있다네.'라고‥." 그는 소년들에게 지도를 보여주고 각 나라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실베니아 사람이라고 말했 다. 대상은 모든 면에서 친절했지만 소년들이 주인을 죽였다는 말에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츠바틴과 노리스 의 상처에서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한 그는 지도의 동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카로안에서 내리는 게 좋겠구나. 이 곳은 용병국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용병이라는 직업은 적어도 네게는 맞을 듯 싶구나." 마지막 한 마디는 노리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침, 그의 행렬을 지켜주는 용병은 카로안 출신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은 그에게서 카로안이라는 나라와 용병이라는 것에 대해서 듣고 배웠다. "용병은 청부사업을 한다. 사람들의 의뢰를 해결해주고 수고비를 받는 거지. 그 의뢰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도, 또 보호해야 하는 것도 있다. 어떤 때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기도 하지. 매우 위험한 직업이야. 하지만 자유롭지." '자유롭다.'라는 말이 노리스와 츠바틴의 온몸을 강타했다. 실제로 카로안은 두 소년이 꿈꾸던 모험의 땅이었다. 천성적으로 건장한 육체와 야성적인 전투 센스를 가지고 있던 노리스는 몇 년 사이에 용병들 사이에서 빠르게 부상 (浮上)했다. 몇몇의 이름 있는 용병단에서 그를 데려가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노리스는 재정관리에는 수완이 없 었다. 츠바틴은 노리스가 벌어온 돈을 가지고 용병활동에 필요한 장비나 물품을 샀지만 여러 가지 책을 샀다. 외모가 단 정했던 그는 노예 시절, 주인의 시중을 들기 일쑤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둬야 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한 그 는 며칠 밤이 지나도록 책만 붙잡고 있기도 했다. 카로안 왕실의 경비대 서기가 된 츠바틴은 탁월한 업무능력을 받아서 조금씩 승진했고 그 뒤를 이어서 노리스가 경 비대에 들어왔다.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노리스는 금방 검술을 인정받았다. 다시 몇 년이 흘러서 또 다른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역사의 고리'라는 단체에서의 유혹이었다. '원의 힘'이라고 지 칭되는 그들은 한 때 '자유'라는 이름에 이끌렸던 그들을 '최강'이라는 단어로 유혹했다. 단순한 이유였지만 수년과 용병과 부대끼며 노리스와 츠바틴의 의식은 변화되어 있었다. 강한 집단에 들어가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의 고리에 몸을 담았다. 역사를 유지한다는 허울좋은 이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서 검을 내지르다가 정이 쌓인 이들을 잃 고 다시 그 복수에 눈이 멀었다. "이유 따위를 신경 쓰면서 살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나 바빴다." 츠바틴은 낮게 말했지만 힘이 있었다. 삶 자체가 부정할 수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 했다. 돌아보니 시즈가 은은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미소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츠바틴은 알지 못했다. 혹시 나 달을 쳐다보느라 듣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삶조차도 잃고자 한다면 나는 아깝다." 48악장 꿈들의 전쟁 3화 "여전히 화려하군요." 시즈는 예전에 보았던 벨루온의 모습을 기억했다. 제플론이 고상함과 귀족들의 색으로 화려하다면 벨루온은 서민들 의 활발한 멋으로 아름다웠다. 유레민트는 자신이 칭찬을 받은 듯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시즈는 예전에 벨루온에 왔었지요."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시간은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가 감탄했던 '색지의 등'은 어김없이 아리에를 홀려놓았다. 몽롱하게 변한 눈동자를 되돌리는데는 꽤나 많은 시간 이 필요했다. 벨루온은 이것저것으로 가리지 않고 한 여인을 경탄으로 유도했다. "시즈, 저것 좀 봐." 아리에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주위의 허공을 찔러댔고 시즈는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를 작게 미소를 피우고 바라보았다. "우선은 피브드닌의 저택으로 가도록 하죠." 지금까지는 여유를 부렸지만 벨루온에 들어온 이상 시간이 없었다. 사람의 시선이 많은 수도에서 이미 그리스는 그 들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르벨이라는 희대의 어쌔신이 있었으니까. 유레민트는 구경에 정신이 없는 아리에 의 팔을 억지로 끌었다. "유레민트, 힘이 왜 이렇게 쎄요오오∼" "후훗‥. 아리에는 연약해서 시즈의 사랑을 받을 거에요." "조금만 더 보고∼" 건너편 골목으로 돌아가며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오래간만이야." "네, 오랜만입니다." 시즈와 피브드닌은 무척 간단하게 재회를 표현했다. 너무나 간단해서 보를레스는 '그걸로 끝이야?'라고 중얼댔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사할 때 서로의 표정과 눈을 통해 상당 한 대화를 오고 갔다. "츠바틴씨와 노리스씨도 오랜만입니다. 반갑군요." "반갑습니다." "유레민트도 제법 모험가처럼 변했어." "그런데 피브드닌, 왜 그렇게 위엄을 차리고 있죠?" 콧수염을 가다듬으며 중후한 미소를 담고 있던 피브드닌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유레민트답게 정곡을 날 카롭게 찌른 것이다. 그는 주위를 촉새눈을 뜨고 살피더니 주위의 사람들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위나가 시집을 곧 시집을 가야 되는데, 내가 위엄 있게 보이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안 선다는 군."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 일행을 피브드닌은 콧수염을 가다듬으며 거실로 안내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20대 가량의 시 녀가 다가와서 다소곳이 차를 준비했다. 시즈도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피브드닌의 당돌한 시녀, 위나였다. "이제는 저도 노벨우잔산을 펴도 되겠지요?" "아직까지 벼르고 있었나보군. 위나, 저 친구를 기억하나?" 시즈는 예전에 왔을 때, 담배를 피려다가 위나에게 손등을 맞은 일이 있었다. 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 을 살폈다. "아!" 그녀가 시즈를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보를레스를 가리키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하하, 오랜만입니다." "시종을 바꾸셨나봐요?" 위나의 말에 보를레스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집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바닥을 굴렀을 정도로 거침없이 웃었다. 그러자 위나는 당황하여 시즈를 유심히 살폈다. "그 때의 시종!" 기대했던 소리가 터져 나오자 시즈는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노리스와 츠바틴마저 웃고 있는 상황이 은근히 거슬렸다. 아리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올렸다. "시종이라니‥. 무례하군요." "예!? 하지만‥." 아스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인은 제 2 왕녀였다. 지금은 결혼하여 후작 부인이 되었지만, 이름높은 그녀의 미모 를 바라본 일이 있는 위나는 지금 화를 내며 일어선 여인 또한 그에 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인의 말 에 그녀는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위나는 조심스레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겁먹은 생쥐처럼 보들보들 떠는 그녀를 위해 피 브드닌이 대신 변명을 했다. "아리에, 너무 화내지 말라고. 모두 시즈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탓이니까." "제 옷차림이 어디가 어떻다는 겁니까?" "시즈, 왼쪽 소매와 바지 뜯어졌고요, 주머니의 실밥이 새어나왔네요. 그리고‥" 웃는 얼굴로 하나하나를 찔러대는 유레민트의 친절에 시즈는 고개를 떨궜다. "어쨌든‥. 위나도 이제 배웠겠지? 외모만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는 게 얼마나 섣부른 짓인지?" "예‥에." 시무룩하게 위나가 대답했다. 안쓰러워 보였는지 노리스가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기운 없을 것은 없어요. 희대의 대학자로 꼽혔던 '마땅찮은 시즈.'를 시종이라고 부른 사람은 그대밖에 없 으니까. 아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마땅찮은 시즈‥요!?" 한 때, 죽었다고 알려진 엘시크 최고의 대학자, 시즈 세이서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위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당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녀를 달랜 것은 다름아닌 아리에였다. 화를 냈으면서 곧 웃으며 달래다니 그녀의 심성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 분이 많았다. 큰 벌이라도 받을까봐 훌쩍대는 시녀를 돌려보내고 시즈는 여유롭게 노벨우잔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새 아리에의 불타는 눈빛에 밀려서 몇 모금 빨아보지도 못한 채 내려놓았지만‥. "흐음‥. 세일피어론아드 자체의 문제로군. 음유술사와 역사의 고리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말이야. 내 당장 사람들한 테 연락을 하겠네." 대략의 이야기를 들은 피브드닌은 바로 펜을 휘갈겨서 한 장의 편지를 썼다. 한 명의 시종에게 그것을 전한 그는 쇼파에 전신을 기대고 말했다. "이제 기다려보자고. 예상 의외의 지원군이 올지도 모르니까." 피브드닌의 암시는 잘 맞는 편이었다. 시즈는 예상을 깨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반가움을 나타냈다. "파마리나, 블리세미트!" "난 작다고 보이지도 않는 건가?" "설마요, 토루반. 주인공은 가장 나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주인공이 아니란 소리군." 토루반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뒤에 서있는 주인공을 소개시켰다. 드워프의 억센 팔에 이끌려 한 청년이 엉거주춤하 게 들어왔다. 시즈는 어리숙한 모습이 남아있는 그가 어렴풋이 인상에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데미노머 전하!?" "오, 오랜만이군, 시즈 세이서스." "왜 오신 거죠?" "아! 미안." 바로 뒤돌아서는 그를 피브드닌은 얼른 붙잡았다.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그를 향해 토루반은 낄낄거리며 말했 다. "첫날밤은 잘 치뤘으면서 왕자는 아직도 어린애야." "국사(國師)!" 뛰어난 현자답게(?) 토루반은 데미노머를 단숨에 되돌렸다. 벌게진 얼굴로 왕자는 뚜벅뚜벅 걸어와 토루반의 옆에 섰다. "난 이제 국사의 직위는 벗었어. 언제까지 날 국사라고 부를 거요!? 왕자." "천진하다는 것도 일종의 장점이죠." 유레민트가 빙긋이 웃었다. 다른 왕자들은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가 셋이나 모여있는 자리에서 감히 투정을 부리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데미노머는 학자들의 애정을 꽤나 받았다. "데미노머 전하는 내가 불렀네. 이번에는 국가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니까." "네메이나의 눈치를 봐가면서 왔다고요. 한밤에 빠져나오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 "벌써부터 아내의 눈치를 본단 말인가? 그 스승의 제자가 아니랄까봐 토루반을 꼭 닮아가는 군." 토루반이 인상을 팍 썼지만 피브드닌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츠바틴과 로 진스가 현(現) 상황을 설명했다. 몽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들은 사람들은 경악에 빠져들었다. "언제 부화가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까?" 가장 정의감에 불타오른 것은 데미노머 왕자였다. 신혼이 몇 개월 되지 않아 요즘 매우 달콤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데 그런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는 자들이 있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빨리 잡아야지요! 내 당장 폐하께 말씀을 드려서!" "좀 잠자코 있어." 토루반이 풀쩍 뛰어올라 호들갑스러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데미노머 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리스의 은신처에 대해서는 노리스와 츠바틴이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짰다. 피브드닌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 로 두 사람의 전략은 뛰어나서 개미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듯 싶었다. 하지만 자신 있어야 할 장본인들은 조금도 긴 장을 풀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도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움직이도록 합시다."라는 말과 함께 피브드닌의 저택에서는 불이 꺼졌다. 이윽고 더위를 식히러 나왔던 가족들도 들어가고 거리는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 그 때, 은밀히 움직이는 한 떼의 무 리가 있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아주 정확하게 발걸음을 맞췄다. 수 많은 인물에게서 나는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 을 정도였다. 벨루온의 변두리에서 한 성을 둘러싼 무리들. 구름에 가렸던 달이 얼굴을 드러내면서 무리들을 천천히 비췄다. 은백의 갑옷과 투구가 달빛아래 찬란히 빛나고 붉 은 망토가 여름 밤바람에 느긋하게 흔들렸다. 망토의 중앙에는 검과 깃털의 모양이 교차되어 수놓아져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아스틴 근위기사단이었다. 통칭, '피닉스의 깃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사 왕국, 엘시크나 용병국, 카로안에서도 인정하는 최강의 무사집단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진열을 맞춘 그들 사이로 데미노머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시즈와 노리스를 비롯한 일행과 아스틴네글로드의 학자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데미노머가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내리자 피닉스의 깃털들은 한꺼번에 고함을 질렀다. "성스러운 정화의 검을!" 차례차례 저택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시즈는 어쩌면 이번 일이 쉽게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내 깨져버렸다. 쨍그랑! 집안 물품 중 뭔가가 박살이 나고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어우러졌다. 집안으로 들어갔던 기사들이 속속 밖으로 튀어 나오더니 소리쳤다. "들어가지 마라! 암살자가 숨어있다!" "암살자!?" "노르벨인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십은 넘었습니다." 아스틴네글로드의 은자로 불리는 그리스의 저택은 상당히 컸다. 지상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4층은 되어 보였다. 대 저택는 암살자에게 살인을 위한 천혜의 지역이었다. 제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근위기사단도 순식간에 두 명이 목숨 을 잃었다. "이십!? 노르벨이 플로먼을 움직였군." "플로먼이라면 어쌔인의 종가(宗家)라고 불리는 자들 말입니까?" 노리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데미노머는 입술을 줄끈 물었다. 피브드닌의 저택에서 역사의 고리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도 아스틴네글로드의 원탁 중 3인과 시즈 세이서스가 들이닥쳐 하는 말에 위기를 느꼈는지 근위기사단마저 보내주었다. 아스틴 최고 기사들의 지원으로 잘 풀리던 상황 은 다시 골치아픈 변수에 휘말렸다. "그래도 방법이 없어." "두 명이 짝을 지어서 등을 맞대고 전진하도록 하십시오." 용병술에 있어서는 노리스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의 말에 근위기사단장은 쾌재를 불렀다. "그 방법이 있군요. 당황해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장에 명령에 따라서 기사들은 두 명씩 등을 맞대고 긴장 어린 걸음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마치 게가 옆으 로 걷는 듯한 우스운 모습이었지만 보는 이들도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플로먼이 제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을 가지고 있다지만 앞만 보고 방어하는 기사들을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실제로 저택 안에서는 몇 번 충돌음이 들려왔 지만 비명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통로가 확보되었습니다." "좋아! 가자." 노리스를 선두로 시즈 일행이 일렬로 복도를 따라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벽 양쪽에 서서 수상한 기색을 감시했다. 이미 몇몇의 플로먼은 잡혀서 바닥에 뉘여 있기도 했다. "지하 통로가 있을 거야." "연구실입니까?" "아니야. 그의 방이지." "집주인이 방을 지하에 두다니 이상한 취미군요." 얘기를 하면서 그들은 주위를 조심조심 살폈다. 어쌔신이 숨어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날아간다. 시즈의 바 람으로도 기척을 잡을 수 없는 암살자, 플로먼. 방심은 금물이었다. 끼익‥. 오래된 건물의 것처럼 문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중앙에는 한 사내가 뒷짐을 쥔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 다. "많이도 왔군." "노르벨‥." 로진스가 날카로운 소리로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일러주었다. 음성의 주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다들 무슨 볼일로 남의 저택에 침입하셨는지?" "몽충을 회수하기 위해서 왔다." "그렇다면 이미 늦었소. 로진스, 당신이라면 알겠지!? 곧 부화를 앞두고 있으니 이제 막을 수 없어." 마치 원망하는 듯한 어조로 노르벨은 시즈들을 비웃었다. "그나저나 마법의 미치광이 로진스라면 나와 함게 세계의 파멸을 즐길 줄 알았는데‥. 서글프군요." "노르벨, 비켜! 우리는 그리스를 막아야 해!" "돌아가십시오, 츠바틴. 이미 몽충은 번식자에게 심어진 지 오래입니다. 부화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번식자의 꿈을 멈출 수 있다면‥." "피햇!" 말을 하던 츠바틴을 노리스가 번개같이 붙잡고 날았다. 파팍!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는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 노 르벨이 짐짓 놀란 듯 박수를 쳤다. "놀랍군요.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나의 암기를 피하다니, 과연 노리스입니다." 사실 노리스는 암기를 보고 피한 게 아니었다. 다만 츠바틴이 말하던 도중 노르벨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자 반 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식은땀이 주륵하고 등을 타고 흘렀다. "크흐흐흐‥." 고개를 떨군 채 노르벨은 흐느끼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까지 악몽 같은 삶을 살아온 아이입니다. 그녀의 오빠로서 뭐 하나 지켜준 게 없지요. 그런데‥. 이제는 마지 막으로 꾸는 꿈조차도 빼앗으라고!?" "크윽!" 살을 에이는 살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보를레스는 전날 노리스가 말했던 게 거짓이 아니었음을 통감했다. 이 정도 라면 살기만으로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역적, 역사의 고리로구나!" 멋 모르는 한 기사가 노르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는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까분 자가 어떤 결과를 맞 이하는지를 사람들에게 생생한 장면으로 가르쳐주고 난자되었다. 노르벨의 앞에서 잠시 멈칫한다 싶더니 수십 개로 몸이 나뉘어 벽에 달라붙은 것이다. 파마리나조차 얼굴을 찡그렸고 아리에는 아예 시즈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그들에게 히죽 웃어주며 노르벨은 방금 전 기사를 조각낸 단검 칼날을 옷에 닦았다. "난 여동생이 마지막 꿈을 꾸는 시간만큼은 지켜줄 생각이오." 일행은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배짱 좋은 보를레스조차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아니, 오히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르벨은 달려오던 기사를 강철 갑옷까지 통째로 잘라놓았다. 몸통만 수십 개로 분해된 걸로 볼 때, 잠깐동안 몇 번 휘두른 정도가 아닐 것이다. '빠르다!' 보를레스도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내리친다면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 뿐, 노르벨처럼 연속 해서 내리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분명했다. 스르릉‥. "첫 번째 주자는 노리스로군요. 좋아요. 모두 상대해드리죠. 하지만 내 뒤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단도를 머리에 박고 싶지 않다면." 스르릉‥. "호오‥. 보를레스, 광풍의 검사도 함께 나서는 겁니까?" "당신에게는 못이길 것 같으니까. 나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보를레스는 노리스와 나란히 서서 제뷔키어를 곧추세웠다. 노리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실제로 노르벨을 이길 자신 이 없었다. 그도 묵묵히 검을 바로 잡았다. 희대의 두 검사가 동시에 검을 겨눴지만 노르벨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 그는 양손에 단도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저건‥. 황혼의 송곳니‥." 보통의 단도보다 긴 노르벨의 것을 보고 츠바틴이 침음성을 냈다. '황혼의 송곳니'라고 하면 붉은 검날을 가진 단도 한 쌍이 세트로 짧은 무기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설상의 무기에 속하는 보물이었다. "그래봤자 한 손은 느릴 게 분명해." "맞습니다." 노르벨은 순순히 츠바틴의 말에 긍정의 대답을 했다. 다음 순간 그는 시즈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을 덫붙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왼손 잡이랍니다." "이거 골치가 아프겠는데요‥." 방금 전 기사를 베어버린 손은 오른손이었다. 강한 자를 만난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보를레스와 노리스는 동시에 이 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더니 쾅하고 땅을 박차며 검을 내질렀다. 촤라라라‥. '거, 거짓이 아니었군.' 보를레스의 담력검술이 강하다면 노리스의 검은 동방의 검법을 전승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無限)의 검이었다. 두 검술이 한꺼번에 공격을 하는데도 노르벨은 시종 여유를 부렸다. 방어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얕보였 다고 생각한 보를레스가 화륵 분노를 태웠다. "감히!" "윽!"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노르벨은 상당히 힘겨웠다. 한 사람씩 상대를 한다면 보를레스나 노리스는 그의 상대 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치니 덧셈을 초월한 듯 싶었다. 그것은 보를레스나 노리스의 검술이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타격이 쌓여 가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은 그는 틈을 노려 뒤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보를레스에게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먼저 죽어줘야겠어!" "실례합니다." 노르벨이 움직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둘 사이에 껴든 사람이 있었다. 시즈는 상황에도 맞지 않게 음식점 여종업원 마냥 방긋 미소를 띄우고 노르벨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내쳤다. 시즈의 가벼운 손동작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노르벨이 아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양손의 검을 최대 한 빨리 허공에 그은 후 뒤로 물러났다. 파앙! "막았어!" 굉음이 터지며 바람의 칼날이 산산조각 났다. "미스릴조차 베어버리는 바람의 검이라고 해도, 진공의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장소가 한정되었다는 조건도 노르벨에게 유리했다. 그는 단도였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장검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노리스와 보를레스가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다. 시즈도 마찬가지였다. 밖이었다면 폭풍이라도 일으킬 수 있 겠지만 집안에서는 무리였다. "광풍의 검사도, 마땅찮은 이도! 다들 별 거 아니군." 방이 울려라 노르벨이 광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츠바틴이 노리스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벽이 빈 것 같아. 아무래도 방이 이어진 모양인데, 로진스가 마법을 써야 하니까 시간을 끌어주게." 슬쩍 돌아보자 로진스가 눈을 감고 열심히 주문을 중얼대고 있었다. 영창이 끝날 때까지 노르벨에게 들켜서는 안 되겠지. 노리스가 바로 검으로 바닥을 후려갈겼다. "크합!" 엄청난 힘이 지면에 쏟아지자 갈라진 돌덩이가 잔뜩 떠올랐다. 노리스는 그것들을 검집으로 후려갈겼다. 노르벨은 그것을 받아치기보다 전부 피했다. 워낙 빨리 날아오는 암기라서 당황한 사람이라면 쳐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갈라진 돌을 고스란히 맞았을 것이다. "이런 것은 통하지 않아. 응!?" "통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검을 높이 치켜든 채 노리스가 중얼거렸다. 서있는 모습이 거인처럼 거대하게 느껴졌지만 검이 무거운 듯 힘겨워 보였다. "붕(崩)!" 동방검법에는 수많은 검의 기예(技藝)가 있다. 노리스는 기인(奇人)을 만나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붕검 만큼은 자신 이 없었다. 그러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붕검이라고 하면 자르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붕(崩)의 기운이 노르벨의 온몸을 옥죄였다.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방안은 불리한 조건이 되어있었다. 노르벨이 발악하듯이 '황혼의 송곳니'를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앗!" 지켜보는 사람들은 수십 개의 단도가 노리스의 검을 막는 환영을 보았다. 그래도 검은 묵묵히 떨어져 내렸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노르벨과 노리스, 공수 양쪽 다 이마에서 땀을 주룩주룩 흘려댔다. 보는 이들도 손에 땀을 쥐는 광경이었다. 노리스의 눈가가 흠칫했다. 동시에 노르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단도의 환영이 검을 밀치고 노리스를 덥쳤 다. "크으악!" "노리스!" 보를레스가 달려갔으나 노리스는 한 팔을 잃어버린 후였다. 침통한 표정의 노리스를 내려다보며 노르벨은 한숨을 푹 쉬었다. "과연, 대단하군. 노리스, 당신의 검만 뛰어났더라면‥ 상황은 반대가 되었을 거요." 잘려나간 팔에 들린 검이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붕검으로서의 압력과 '황혼의 송곳니'가 초당 수십 번을 쳐대는 충격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모두 비켜!" 다들 침울해 할 때, 로진스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미리 신호를 받았던 시즈와 보를레스가 로진스의 뒤로 물러섰다. "소멸을 원하는 붉은 섬광!" 콰르르르릉! 로진스의 영창을 따라 화광(火光)이 노르벨을 삼켰다. 화광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벽 자체를 뚫고 나갔다. 어 디까지 나가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엄청난 파괴력에 로진스는 스스로 놀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찾아낸 금지주문인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 걸‥." "이 멍청아! 이런 광범위한 마법을 쓰다니 건물더미에 매장되고 싶어서 그래?" 로진스의 목을 틀어쥐고 츠바틴이 소리쳤다. 그는 벽을 부술 마법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설마 지하를 지탱하는 기둥 을 죄다 부숴버리는 마법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서 갑시다." "아직‥은 안돼‥." 연기에 쌓여서 비틀대는 인영이 남아있었다. 벽이 죄다 뚫려버렸는대도 노르벨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몰골은 처참해서 온몸은 시뻘겋게 그을렸고 붉은 단도는 시커멓게 변해서 흰 김을 흘려댔다. 아직도 지글지글 살점이 타들 어 갔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자세를 취했다. 탈진하다시피 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은 의지에 시즈들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노르벨‥. 그만 물러서. 자네는 잘 싸웠네." 그 때, 노르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서 옆에 섰다. 바로 플로먼의 가주가 계약을 마치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도 아스틴의 인물이란 인물이 모인 무리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노르벨이 너무나 강한 것이다.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노르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 크억!" "그렇다면 죽게." 망설임없이 플로먼은 노르벨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희생자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공이 벌어졌다. 천천히 쓰러지는 그를 내려다보며 플로먼이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했지. 몽충이라‥. 계약자의 비밀을 캐지 않는다지만‥ 이건 예외야. 갑시다, 여러분. 몽충이 부화되는 걸 막아야지요." "‥‥." "뭐 하는 거요!? 세일피어론아드가 멸망하는 걸보고 있을 셈이오?" 다그침이 있어서야 일행은 방을 나섰다. 그래도 다들 뭔가 석연찮게 노르벨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발을 떼었다. "크윽!" "조금만 참으세요." 블리세미트가 응급처치를 한 덕에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지만 노리스는 꽤나 상심했다. 검을 쓰던 팔이 잘렸으니 검 사로서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는 웃었다. 위로를 하는 보를레스에게 호기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자네한테는 안 져." "다행이군요." 로진스의 마법 덕에 지하는 통로가 아니라 아예 홀이 되어있었다. 그을리고 녹아내린 흔적은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어느 지점에 가서 부자연스럽게 끊겨있었다. 무엇이 막고 있길래 마법의 에너지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한 것일까? 의 문은 금방 풀렸다. 검은 로브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 그가 길을 막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 가만히 서있었을 뿐이었지만 주변은 도 저히 지나갈 수 없는 공간으로 보였다. 뒤로는 상아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한 여인이 누워있었다. "그리스!" "오랜만이군, 츠바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로진스와 노리스가 아닌가. 노리스는 어쩌다가 팔이 없어진 거지? 참 불 쌍하게 됐구만‥. 쯧쯧‥!"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 그리스, 비켜라." "시간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몽충이 부화하기까지는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네." "몇 시간!?" 로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몇 시간이라니‥. 하루밤만 더 자고 왔다면 세일피어론아드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스는 눈을 찡긋하고 그를 놀렸다. "너무 많이 남았지? 그러니까 그 시간동안 나와 놀아주는 게 어떤가?" "장난치지 마!" 제뷔키어를 번개같이 빼들고 보를레스가 소리쳤다. 로진스의 등뒤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튀어나와서 순식간에 그리스의 지척에 다다랐다. "호오‥ 빠르군. 자네가 바로 광풍의 검사인가?" 그리스의 손가락이 푸른색으로 변한다 싶더니 마력구가 발사됐다. 빛의 궤적을 남기고 날아오는 마법의 에너지를 무시하고 달려들며 보를레스가 외쳤다. "환상이다!" 콰앙! 그러나 당당하게 몸을 들이댔던 그는 당당하게 바닥을 굴렀다. "컥!" 아무런 방어도 없이 들이댄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블리세미트가 그를 부축하고 신성력을 사용해 치료했다. 한심 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리스가 말했다. "내 특기에 대해서 들었군. 하지만 처음부터 밑천을 사용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 마력구에 달려들다니 바보 같군. 다음은 누구지? 한 번에 나가떨어지니 재미가 없어." "‥상대해주지." 하고 두 사람이 계획이라도 짠 듯 동시에 나섰다. 파마리나와 로진스는 걸어나오다가 서로의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박장대소하고 소리쳤다. "마법사와 마녀! 좋은 그룹이야." "쳇! 마녀 따위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지마!" "나한테 진 주제에 뭐라고 떠드는 거야?" "잠깐 방심했을 뿐이라고!" 으르렁대는 그들을 그리스는 절대 그룹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오해를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서야 공격을 시 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그는 기가 막혔다. "마녀 따위가 흉내도 못낼 마법을 보여주지." "내가 할 소리라고!" "어둠의 구름에 쌓여 감춰진 위대한 힘이여! 끝없이 오래된 의지를 빌려 원하니‥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강림 하라!" "생명의 술로 만들어진 빙혈(氷血)의 창! 생명을 가진 것들 중 막을 것이 없어라!" 로진스의 양손에 눈부신 전극이 끊임없이 지직대며 뭉쳐지더니 하나의 구(球)를 이루었다. 그에 뒤질 세라 파마리나 가 손가락을 물어 흘러나온 피가 창의 형태로 변했다. 두 사람은 두고 보자는 듯 상대를 째려보더니 동시에 마법의 결정체를 던졌다. "흐음‥." 타투는 모습은 어린애 같지만 마법에 담긴 힘만큼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그리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우선 그는 반지를 빼서 던졌다. 이 간단한 행위에 로진스의 라이트닝 볼은 콰릉 하는 소리를 끝으로 금속에 흡수됐다. 금속이 막강한 전기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기는 했으나 그리스에게는 털끝하나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뒤에 이어 그는 손가락을 물어 흐르는 피로 허공에 글씨를 썼다. "피는 피와 친하다." '벽'이라는 글씨였다. 피로 만들어진 창은 그리스가 만든 글자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파마리나의 혈창은 조금 이라도 닿으면 몸속의 피가 엉겨붙는 무서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리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간단하군. 이번엔 내 차례야. 내 뒤를 잘 봐. 이게 뭘로 보이나?" "개!?"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파마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개 한 마리가 그리스의 뒤에서 귀여운 얼굴로 혀를 낼름거렸다. "보면 안돼!" 암시임을 눈치챈 츠바틴이 소리쳤지만 너무 늦었다. 파마리나의 눈에서 개는 천천히 사납고 거대한 늑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홀 안이 온통 경악성과 신음성으로 가득찼다. 암시에 걸린 이들의 눈에 개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황소 만 한 늑대가 되어있었다. "이런!" 벌써 근위기사 몇은 몸에서 피를 뿜어댔다. "어찌 된 거지?" 그나마 아리에는 시즈가 팔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렸기에 무사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신음과 비명을 지 르며 피를 토하고 살이 갈라지는 광경이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웠다. "호오‥. 과연 음유술사라는 건가? 분명히 암시의 매개체를 보았는데도 걸려들지 않다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 두 힘든 모양인데 어떻하지?" 상처를 입은 보를레스와 노리스도 환상을 보는 듯 신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시즈가 츠바틴을 향해서 말했다. "암시를 없앨 방법이 없습니까?" "시전자가 푸는 방법, 그리고 시전자 자체를 없애는 방법. 두 가지야." 말을 듣자마자 시즈는 달려나갔다. 그리스가 손가락으로 이상한 모양의 수인을 만드는 게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제 바람의 칼날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 땅이 불쑥 솟았다. "핫!" 대끔 시즈는 바닥을 향해 손날을 내리그었다. 손을 따라서 일으켜진 바람이 땅을 강타하면 솟아나던 바위를 그대로 박살냈다. "마염의 사자!" 자세가 흐트러진 그를 흑사자가 덥쳤다. 그리스의 주문으로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암흑의 사자였다. 푸른 화염 입김 을 죽죽 뿜어내는 게 소름끼치는 모습이었지만 시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들어서 그 중 한 마리한테만 바람의 공 격을 퍼부었다. "현혹되지 않는 군." 그 동안 멀리 떨어진 그리스가 사태를 관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특기인 환상과 마법의 혼합이 깨졌지만 그는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흡족한 얼굴로 시즈가 말했다.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지금 확실히 알았어. 바람을 노래하는 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의지를 가지고 있군." "그렇다면 포기하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지?" "그만 비켜주십시오." "이런‥. 뭔가 착각하나본데‥. 나에 대해서 츠바틴이 말해주지 않던가? 나는 '빛나는 무대의 주인'이지. 바람을 노 래하는 이여, 그대를 내 무대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지. 연극의 이름은 '방황'이네." 말이 끝남과 시즈 주위의 광경이 어른거리더니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바닥까지도 녹아서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닥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에 다행이었다. 아니 었다면 암시로 인해 끝없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당황한 시즈의 귀로 그리스의 음성이 들렸다. "그대가 바람을 노래하듯, 나는 빛으로 무대를 만드네." "환상이‥." "안타깝게도 이것은 환상이 아니야. 사물이 빛의 색 중에서 무엇을 반사함으로 따라 인간의 눈이 그 색을 받아드리 는 거지. 나는 빛과 의지를 동조하는 음유술사. 사물에 어떤 색을 덫씌울지도 내 마음 대로지." "크윽!" "눈을 감은 건가? 좋은 생각이야." 어차피 보이는 걸 믿을 수 없다면 눈을 감는 게 현혹되지 않는다. 시즈는 눈을 감고 방안의 사물을 느꼈다. 방안 공 기가 시즈의 의지를 따라서 움직이며 대신 사물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바람의 힘을 사용한다라‥. 그것만으로는‥ 내 빛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시즈는 바람의 의지를 총동원하여 그리스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날렸다. 바람의 칼날과 돌풍, 소용돌이가 쏟 아지는 압력으로 인해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사물을 내게 보이지 않게 했다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시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스가 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보이도록 빛을 조정했을 것 이다.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주 잠시였지만 시즈의 눈에 사물이 정확하게 보였다. 당황한 그리스의 눈동자 동공 까지. 그 안에는 단숨에 돌진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파바박! 시즈의 손바닥에 압축되어 있던 회오리가 그리스의 복부에서 소용돌이쳤다. 하나의 토네이도가 주먹 정도로 모아져 뿜어진 압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으아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며 환상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제 정신을 차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들은 이내 상황을 깨달 았다. "환상과 암시였군. 시즈, 네가 그를 죽였나?" 피를 줄줄 흘렸지만 보를레스는 생기가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으니 생기가 넘치 는 게 당연했다. 시즈는 그리스가 산산조각나며 터져버린 피의 홍수로 아예 목욕을 했다. 아리에가 수건으로 닦아주 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어 거절하고 제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여야 하는 겁니까?"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하다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세일피어론아드를 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떨떠름하게 다들 보를레스를 째려보았다. "왜 접니까? 다른 사람이 찔러도 되잖아요!" "잠자코 검이나 들어." 착 가라앉은 노리스의 음성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뷔키어를 들었다. 성스러운 은의 금속, 미스릴로 만들어진 제뷔키어를 비겁한 일격에 사용하다니 서글펐다. 검끝을 에즈민의 가슴을 겨누고 세운 채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 노 리스가 다시 소리쳤다. "빨리 죽여! 세일피어론아드에서 꿈이 없어지길 바라는 거냐?" "하, 하지만! 검이 더 이상 내려가질 않아요! 뭐에 막힌 듯이!" "뭐!? 설마‥ 으억!" 로진스가 보를레스를 밀치고 제단에 손을 짚자마자 신음소리를 터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로진스!" 뚝뚝!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물들였다. 그의 환부에 삐죽 튀어나온 것은 '황혼의 송곳니.'였다. "에‥즈민에게 손대지마!" "아직 살아있었군." "예, 예전에 에릭사를 훔쳐 마신 일이 있었지. 그 영향이다." 아무리 성약, 에릭사의 생명력을 가졌다고 해도 노르벨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로진스를 공격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리스가 에즈민에게 펼쳐놓은 방어의 주문을 풀 수 있는 자는 로 진스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동생의 꿈을 방해할 자는 없어‥." 히죽하고 웃으며 노르벨은 완전히 눈을 감았다. "제기랄! 로진스, 눈을 떠라!" "파마리나, 방법이 없겠습니까?"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로진스를 잡고 노리스와 츠바틴이 절규했고 시즈는 암울한 어조로 파마리나를 다그쳤다. 그 러나 파마리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방식의 주문이에요. 아마도 이 제단 자체가 파괴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보호받고 있는데‥. 주문의 매 개체를 파괴해야 해요." 매개체를 찾기 쉬운 곳에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버렸을 지도 모른다. 시즈가 바람의 의지를 사용하고, 보를레스가 제뷔키어의 날이 빠지도록 내리쳐도 소용없었다. 아스틴 왕궁에서 궁정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었지만 제단의 방어주술을 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환기(環期) 4762년의 초가을‥. 아스틴의 수도, 제플론에서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어서 거대한 폭발 이 일어났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모든 이에게 보였을 정도로 눈부신 섬광, 잠시 태양이 제플론에 내려앉은 듯 했다. 그렇게 가을의 꿈은 찾아왔다. 49악장 노래는 마법이 되어 제플론에 태양이 떨어졌다고 착각한 날밤, 한 노인은 꿈을 꿨다. 하늘에서 태양의 피처럼 붉은 내리고 그걸 맞은 사 람들의 몸이 썩어 가는 꿈이었다. 다음 날, 꿈은 실현되었다. "으아아악!" "내 손이‥! 내 손이 썩어가고 있어‥." 실베니아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던 한 청년은 사람들의 이빨이 모두 썩어서 그들의 이빨을 뽑아주며 떼돈을 버는 꿈을 꾸웠다. 다음 날, 병원에 충치를 치료하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치료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빨도 모두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곳은 강둑이 터지고, 때아닌 해일이 해변을 덮쳤다. 평화롭던 산골에 갑자기 몬스터 무리가 수도 없이 밀려들었다. 하루 전, 마을의 한 아이는 용사놀이를 하던 꿈을 꿨 다. 드래곤이 둥지를 벗어나서 도시를 파괴하고 어디선가 마왕이 나타났다. 모두들, 꿈을 두려워했다. 상상도 하지말고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공포심은 그들에게 또 다른 꿈을 만들어주었다. 망연자실‥. 현재 시즈의 상황이 그러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죽었다? 아니다. 모두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코마저 골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괴로운 듯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 다는 것이다. "아리에‥. 일어나 봐요. 일어나요." "으음‥." 시즈는 아리에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만을 흘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에즈민 이 빛으로 화해 사라진 날로부터 4일이 지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을 자고 있었다. 몽충의 악몽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는지 손가락이 천 천히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시커멓게 썩겠지만 그보다 먼저 아사할 가능성이 컸다. "어, 어떻게 하면‥." 시즈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움을 청하러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를 제외하고 세상은 모두 침묵에 빠져있었다. 하루가 또 지나갔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다시 하루가‥. 시즈는 미친 듯이 츠바틴과 들췄던 역사의 고리 자료를 다시 뒤졌다. 한 자라도 빠질까봐 그의 눈은 뻘건 핏발이 서있었다. 뒤로 잔뜩 산을 이룬 문서들은 이미 그의 시선이 지나간 것들이었다. "없어! 없어! 없다고!" 비틀비틀‥. 문서더미 속을 빠져나와 지도를 펼쳤다. "다음이 마지막인가?" 깨끗한 빛을 잃고 흐릿하게 변한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저토록 하늘은 맑지만 꿈속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하늘을 보고 있을까? 발걸음을 옮길 때, 거대한 고동처럼 땅이 울었다. 콰르릉! "윽! 뭐지!?" 일주일에 가깝도록 먹지도, 자지도 못한 시즈는 탈진상태였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에릭사의 기운이었다. 비틀거리다가 엉덩이를 거칠게 바닥에 부딪히고 데굴데굴 굴렀다. "시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호쾌하면서도 무거운 음성. 시즈는 귀에 익다는 사실보다는 자신말고도 잠들지 않은 이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고 개를 번쩍 들었다. 짜악!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힘줄이 불쑥 돋은 팔이 굳게 시즈의 회색 옷깃을 쥐고 들어올렸다. "제, 젠티아." "멍청한 녀석!" 땅에 시즈를 패대기친 젠티아는 역사의 고리의 자료실을 슬쩍 쳐다봤다. "그래도 포기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하지만‥." 퍼억! "쿨럭!" "방법을 잘못 택했어." 전력을 다해 때린 모양이었다. 시즈는 들어간 것도 없는 위의 애꿎은 소화액만 토해냈다. 젠티아는 먼길을 와서인지 망토며, 머리며 완전히 먼지 투성이였다. 깔끔하던 갈색의 머리 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벨루온에 다녀오는 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겠더군. 그렇다면 당장 내게 왔어야 하지 않나!? 내 가 그렇게 못미더워 보였느냐?" "그게 아닙니다. 젠티아, 날 제외하고는 모두 잠이 들었다고 생각을‥. 쿨럭!" "한 마디로 내가 이상한 꿈의 주술에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는 소리잖냐." 이죽거리며 주먹을 한 방 더 시즈의 옆구리에 박아준 젠티아는 품에서 몇 개의 음식을 던졌다. "먹어라. 그래가지고는 네가 먼저 죽겠구나." "이것은‥." "오다가 주웠다." 말이 주웠다지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가져왔을 것이다. 도둑질을 가릴 시간이 없었다. 우선은 살고 봐야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선 지금 상황에 대해서 좀 알려다오." 시즈는 우선 중요한 상황만 간추려 그에게 말했다. 듣고난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구나." 글로디프리아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젠티아는 영문을 몰랐음으로 당황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서 쪽에서 보였던 빛과 관계가 있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길을 떠나온 것이다. 꿈을 꾸는 생물은 죄다 잠 이 들었기에 직접 걷고 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빛이 일어날 때 진동의 발원지를 땅으로부터 느꼈다 는 사실이다. 벨루온에 도착해보니 발원지에는 역사의 고리와 시즈 일행이 뒤섞여 누워있었다. 절대로 혼숙 여관은 아니었으니 잠자는 주술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젠티아는 땅의 고동으로 시즈의 기척을 찾았다. 모두 잠들어서 땅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시즈가 전부일 것이다. 예상대로 그는 남쪽 멀리에서 한 기척 을 발견했고 서둘러 달려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역사의 고리 일원들도 방법이 없다고 했던 몽충의 처치법을 젠티아가 알고 있다니. 시즈는 신에게 감사했다. 눈물마 저 글썽거리는 그를 데리고 젠티아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네!?" "땅의 고동을 따라서 걷고 있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즈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음유술사들이 모두 그렇듯 젠티아의 능력도 범상한 것은 아니라 는 믿음으로. 꼬박 하루를 걸어서 젠티아는 멈췄다. 그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졌던 시즈는 강행군이었다. 털썩 주저 앉은 그는 젠티아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하라는 뜻입니까? 여기는 바닷가잖습니까?" "고동을 따라서 오기는 했는데‥." "바닷가에서 뭘 하냐고요!" "정말 시끄럽군. 넌 바람을 노래하는 이니까 당연히 노래를 해야지." "네!?" "저걸 봐라." 젠티아는 손가락을 들어서 바다를 가리켰다. 푸른 물결이 철렁대며 모래사장을 쓰는 걸 힐끔 바라본 시즈는 퉁명스 레 말했다. "바다잖아요! 바다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누가 들어준답니까?" "바보녀석아. 네 말대로 몽충이라는 것은 감염자의 꿈을 악몽으로 변화시킨다면. 그건 즉 자기 자신의 의지와 싸워 야 된다는 뜻이다. 네 노래에는 사람들에게 기운을 주는 힘이 있어." "그렇지만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악보가 눈앞에 있지 않느냐." "악보요?" 시즈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젠티아는 바다를 보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쿵! 쿵! 처음에는 무작정 구르는 것처럼 느껴지던 젠티아의 다리에는 어떤 박자가 숨겨져 있음을 이내 시즈는 깨달았다. 그 도 천천히 젠티아와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악보‥." 조그맣게 중얼대는 시즈의 말에 젠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것이 바로‥ 파도의 악보다." "그렇다면‥." "아릴이야. 아릴이 파도의 악보를 그리고 있는 거지." 확실히 파도는 인정한 간격을 두고 정확하게 시즈의 발을 적셨다. 뜨거운 태양을 한 순간 잊을 만큼 시원했다. 머리 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시즈의 눈동자가 한결 맑아졌다. "대충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다행이군. 그것도 못 알아본다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다." "이제 맞는 것은 사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군요." "뭐지?" 젠티아는 우선 주먹을 쥐어 보이며 물었다. "이 파도에서는 곡을 느낄 수 있지만 박자가 너무 어렵습니다.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 "흐음‥. 내가 도와주지." 젠티아는 성음검을 검집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검집에 조금 바닷물을 채우고 다시 검을 반쯤 검집에 집어넣었다. "원래 바닷물로 하면 검에 좋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시간이 없지." 바위에 걸터앉아서 무릎에 성음검을 올려놓고 젠티아는 품에 있던 단검으로 성음검의 검집을 살짝 때렸다. 우웅‥. 맑은 종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넓게 퍼져 나왔다. 때를 같이하여 젠티아는 반쯤 뽑았던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우우웅‥. "소리가‥." "이게 바로 성음검의 정체지" 검을 어느 정도 뽑고 있느냐에 따라서 울림의 소리가 틀렸다. 이로써 무기가 하나의 악기로 변모된 것이다. 젠티아는 살짝살짝 단검으로 검집을 치며 파도의 악보를 따라 성음검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울림이 시즈의 가슴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검의 노래를 음미하던 시즈도 입을 벌렸다.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나요 스러져 가는 의식이 무겁게 느껴졌나요. 구름에 스며드는 바람처럼 그대의 마음 속을 유영할 수 있다면 슬픈 꿈, 아픈 꿈 함께 꿀 텐데‥. 같은 희망을 꿀 수 없어도 노래할 수는 있답니다. 작게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을 불어도 좋아요. 그대 숨소리의 또 다른 발견에 날아갈 듯 상쾌할 테니‥. 미소를 지어봐요. 기쁨의 선율이 펼쳐질 테니‥. 이제 그만 일어나 노래하고 춤을 추어요. 너무나 낡아버린 악보를 펼치고 어딘가 망가져 버린 악기를 들고서. 그래도 함께라면 아름답게 느껴지겠죠. 시즈의 노래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맑은 호수 같았다. 부르는 자신조차 이미 온통 젖었는지 그는 입가에 은 은하게 청량한 미소를 내보였다. 발끝에 닿는 바다의 리듬에 맞춰서 은백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청년은 바람을 노래하는 이였다. 그의 노래는 바람처럼 세일피어론다 전역으로 서서히 불었다. 엘로고라토의 전령에 섞여 귓가를 때렸고, 별의 미궁을 따라서 메아리치다가 글로디프리아의 성안을 맴돌기도 했다. "노래 소리‥." "그가 바람을 노래하기 시작했군요. 파도의 생명이 깃든 악보를 따라서‥." "그래. 젠티아가 도와주었겠지. 그는 성질이 급해서 당장에 달려갔을 테니까." 검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중얼거리자 물에서 참방대던 여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닷물로 머리카락을 만든 건지 윤기가 흐르는 청은발의 머리카락을 한 번 휘젖자 묻어있던 물이 촤륵하고 흩어졌다. 그리고는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소년에게 안겼다. "저, 저기‥! 아릴!" "왜요!?" 갸웃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에 소년의 얼굴은 단숨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은 못하고 더듬거렸다. "아, 아냐‥." "후훗‥. 넬피엘, 바람을 노래하는 이가 노래를 시작했으니 춤을 추려고 그러는 거죠?" "으‥응!" 키득키득 웃으며 여인은 그에게서 떨어지려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했다. "키스해주면 떨어질게요." "엑!?" 안절부절한 소년의 마음을 무시한 채 여인은 냉큼 눈을 감았다. 뾰족이 내밀어진 입술이 유혹적이었다. 세상의 멸망 이 닥쳐왔는데 애정행각이나 벌이고 있다니, 젠티아가 보았다면 성음검을 휘둘러댈 모습이었다. 쪽! 부들부들 떨며 소년의 입술이 여인의 것에 닿자 여인은 방긋 웃으며 멀리 떨어졌다. 손까지 흔들며 격려하는 그녀 는, 인간이 모두 멸망하던 말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직도 홍조가 그대로 남은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바람을 따라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꽃의 춤을 추는 이들이 4000년에 걸쳐서 기다렸던 바람의 노래였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대기 전체에 노래가 퍼져있다. 이게 바람을 노래하는 이의 진실된 능력인가?" 바람의 상쾌함과 한 청년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온다. 파도의 악보를 보고 대지의 고동에 맞추어 불러진 바람의 노래가 소년의 팔을 들어올린다. 그와 때를 맞추어 손이 올라가고 손가락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의 춤이 시작되었다. 소년은 전신에서 터져 버릴 듯한 빛을 거세게 내뿜고 열을 토해냈다. 반대편인 세일피어론아드의 서쪽 끝에서도 보 일 환한 불빛이었다. "불꽃의 춤도 시작되었군." 젠티아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초신성처럼 밝게 빛나는 동쪽의 불을 보았다. 멀리 있어서인지 그저 반짝이는 정도였 지만 노래에 따라서 밝았다가 조금 어두워졌다가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바다나, 큰 호수에 가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등대로군.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등대‥." 불꽃은 생명력의 상징과도 같다. 소년의 춤은 활기와 용기를 뜻하며 움직임의 아름다움마저도 표현했다. 일종의 기 원인 동시에 의지인 것이다. 생명의 기원인 바다의 악보‥. 생명의 맥박을 전하는 땅의 고동‥. 그리고 생명을 퍼뜨리는 바람의 노래‥. 용기와 활기를 확인하는 불꽃의 춤. 이로써 음유술사들의 의지가 하나를 위해, 모두를 향해 울려 퍼졌다.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고 춤을 춰라.' 노래는 강력한 마법보다도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닿았다. 문득 눈물로 얼룩진 눈가가 부르르 떨리더니 한 소녀가 발딱 일어났다. 머리 속에는 아직도 악몽이 떠돌았지만 귓 가에 흘려든 노랫소리는 가슴까지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는 창밖을 보았다. "와아‥!" 멀리, 아주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춤을 추듯이 타오르는 불꽃은 아주 큰 모닥불처럼도 보였다. 불꽃은 소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불꽃은 소녀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악몽마저도 소멸시킬 수 있었다. 넋을 잃고 불꽃을 바라보던 소녀는 바람에 섞인 노래를 흥얼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크고 따스한 손 이 올려졌다. "아빠‥."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걸 봐요, 아빠. 아주 큰 불꽃놀이를 하나봐." "그렇구나. 아주 예쁜 걸‥!" 하나둘 일어난 사람들이 악몽을 잊고 불꽃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바람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 기저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춤을 추는 이들도 생겼다. 대륙에서 노래를 계속 커져갔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는 마치 세일피어론아드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 았다. 대지도, 바다도, 바람도, 심지어는 작은 새들과, 생명이 타오르는 모든 것들도. 어느 덧, 노래가 끝나고 동쪽 저 편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질 때, 차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알고 있습니까? 의지가 바로 마법이라는 것을? 힘들게 외워서 주절대는 주문도 사실은 그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그대는 아십니까? 세상에서 마법에 가장 유리한 종족은‥ 엘프도, 드워프도, 드래곤도 아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감정에 풍부하고 희노애락에 자유로운 바로 우리의 의지야말로 세계를 바꿀 신비한 마법이 되는 것입니다. 노래하십시오. 그대의 의지와 신념에 숲이 울고 바다가 춤을 추도록‥.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마법은 이미 구현되었음을‥. 50악장 아직은 남은 이야기 제플론의 별장이라고 불리는 세이탄, 작지만 풍요로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숲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저택 앞에는 많 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검사, 학자, 마법사, 마녀 등 다양한 모습들이었다. "시즈‥. 꼭 가야 하나요?" 아릴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서글픈 빛이 떠오른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아쉽고 슬픈 빛이 가득하여 울 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았다. 떠나는 이는 조용히 말했다. "바람이 말하고 있어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그런 말 따위는 듣지 말라고!" 보를레스가 투덜대며 소리쳤다. 엘시크를 뜻하는 빛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 그는 근위 기사가 된 후에도 험한 입버 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러나 시즈의 고집을 알고 있는 젠티아는 어깨를 짚어주며 격려했다. "잘 가라. 널 잊지 못할 거다. 시즈." "젠장! 이렇게 떠나다니 정말 끝까지 마땅찮은 녀석이로군." 술을 하도 마셔서 얼굴이 시뻘게진 토루반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술병을 내던졌다. "저런저런! 비싼 술을‥." 끝까지 돈을 밝히는 토플레. 파마리나가 그의 복부에 강렬한 일격을 선사했다. 블리세미크한테 틈틈이 배웠던 무투 술인 만큼 토플레의 안색을 달리하게 할 충격이었다. 벌렁 엎어진 그를 발로 꾹꾹 밟으며 파마리나는 아리에를 위 로했다. "잡아야 하지 않아?"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걱정 말라고! 저런 녀석 따위는 하룻밤만에 잊게 해줄 테니까!" 페스튼은 소리 높여 외쳤다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았다. 어설프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에를 레스난은 꼭 안아주었다. "자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니 슬프군." 노리스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검술은 더 이상 펼칠 수 없었지만 츠바틴은 노리스가 지닌 검술의 경험과 이론을 책으로 펼쳐냈다. 이제는 기사가 된 광풍의 검사마저 정식으로 스승으로 섬기는 노리스의 검술서는 젊은 기사와 용병들에게 제일의 지침서로 정평이 난 상태였다. "그나저나 돌아올 수 있는 건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 좀 하지마!" "궁금하잖아!" 물론 절친한 친구이자 앙숙인 츠바틴과 어린애같은 다툼을 벌이는 것은 여전했다. 시즈는 양손으로 그들의 손을 꼭 잡은 후 한 차례 힘찬 포옹을 했다. 넬피엘은 아무 말 없이 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와 그의 인사는 그게 끝이었다. 오늘이 오기 전날 밤, 미헬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입으로만 노래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유술사란 사실 조금 의지가 강한 자들일 뿐이지요. 꿈을 꾸며 살아 가는 이들은 모두, 음유술사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노래를 하고 있어요. 시간과 더불어 말이죠." 블리세미트는 끝내 붉은 뱀의 사원을 다시 재건했다. 소레인 교단에 정식 계승자로 인정을 받고 지원금을 타낸 것 이다. 교단 내의 암수를 견뎌내는데는 남몰래 파마리나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의 꽁수는 소레인 교단 의 늙은이들도 감히 예측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확실한 문제는 남아있었는데 사막에서의 지겨운 고행을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젠티아는 요즘 마크랜서 자작과 보를레스를 피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남작에서 후작이 한 단계 작위가 상승한 후 더욱 쌓인 일을 팽기치고 데린과 놀러 다녔으니 마크랜서 자작의 추격을 받는 것이야 당연했다. 보를레스가 그를 쫓는 이유는 대련을 위해서였다. 시도 때도 없이 대련을 하자고 졸라대니 젠티아로서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만 보이면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어쩌면 시즈가 떠난 후에 바로 대련을 신청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젠티아는 짐을 풀지도 않고 있었다. "시간이 됐어요." 달의 상태를 살펴보던 유레민트가 말했다. 그녀와 피브드닌은 달이 대륙에 가장 가까워졌을 때, 세일피어론아드의 의지가 가장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시간은 바로 밤 12시. 신데랄라의 마법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준비를 합시다." 흔들리는 눈동자들이 시즈를 주시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시즈는 말했다. "그 동안 즐거웠습니다." "난 별로 안 즐거웠어. 힘들기만 했다고." "다시 돌아오려면 늙기 전에 오라고. 아리에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기 전에!" 수많은 인사에 감정이 교차했다. 시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억에 두려는 듯 아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표정, 옷차림, 돌아갔을 때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아리에도 눈을 감았다. 넬피엘, 젠티아, 아릴의 몸에서 의지의 빛이 시즈를 감쌌다. 그리고 원래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중 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한 줄기 남아있을 뿐이었다. ‥ "하아‥." 보를레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터뜨렸다.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던 친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모였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들 바람의 향기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흐윽! 흑!" 아리에는 열심히 눈물을 훔쳤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가 이제 와서 왜 이런담!? 바보같이‥.' 마음을 다시 잡으려고 해도 서럽다는 생각이 밀쳐 올라왔다. 여인들이 그녀를 감싸고 위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투명한 빛깔의 시선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눈물에 담아버린 별의 외로움 몰랐던 슬픔을 알았답니다. 코 끝에 맴돌던 향기는 없어지고 시리게 매몰찬 바람이 남아있네요. 덧없는 그리움은 필요 없어요. 의미 없이 잊혀지긴 싫으니까요. 홀로 견딜 수 없는 기억의 순간을 돌려주세요. 하염없이 달을 바라보다 달을 닮아버린 그 시선으로 돌아봐 줘요. 아무리 작게 속삭여도 귓속에 메아리치는 곳에 있어주세요. 내밀면 손에 잡혀 안으면 안길 수 있게 돌아와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애처로운 목소리에 보를레스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노래를 불러. 그러면 나아지겠지.' 코끝이 아릿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러다가는 남자체면에 눈물을 보일지도 모른다. 훌쩍. 콧물을 들이키고 슬 쩍 소매에 눈가를 비볐을 때, 그는 눈알을 뽑아서 물에 헹굴 생각을 할 정도로 눈을 의심했다. 턱이 빠질 것처럼 입 을 쫘악 벌리며 그는 소리쳤다. "시즈!" 아리에는 눈을 번쩍 떴다. 뚝뚝 흐르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사라질 때 의 모습 그대로의 시즈가 서있었다. 조금 달라진 거라고는 사라질 때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지금은 볼을 긁적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리에가 불렀군요. 그 노래‥. 들렸습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은 젠티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핫! 그렇군. 그런 거야!"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데린이 물었다. 젠티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번쩍거리는 안광에 젠 티아는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앞을 가리고 말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음유술사들의 의지, 세일피어론아드의 의지보다‥. 한 여인의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고 깊다는 뜻이겠지." "그 말은‥." "아리에게 미움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시즈는 세일피어론아드를 떠날 수 없다는 거다! 우하하하핫!" 통쾌하다는 듯 젠티아는 웃어 재꼈다. 사실 그로서도 아름다운 여인이 슬퍼하는 일을 감행한다는 게 기분 좋지 않 았다. 시즈가 보내기 싫을만큼 마음에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시즈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했다. "그럼 전, 세일피어론아드의 포로가 된 건가요?" "바보 녀석! 사랑의 포로는 좋은 거야." "그럼 젠티아도 포로인가요?" "그럴 리가! 내가 포로일 리가 있나!?" 그 말을 끝으로 젠티아는 데린에게 끌려갔다. 수풀 속에서 구타음이 들려오는 걸 가리키며 파마리나는 피식 웃었다. "저 인간은 노예야. 본받지는 말아." 초상집같던 분위기는 갑자기 축제처럼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었고 마을에서는 술과 음식을 무작정 가져와 서 제공했다. 부자인 집주인이 떠나지 않았으니 값을 제공해줄 거라는 소리에 시즈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나저나 시즈, 고향에 돌아간 기분은 어땠어?" "가다가 돌아왔습니다만‥." 계획이 중단되었지만 사람들은 기뻐하기만 했다. 슬퍼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페스튼이었다. 아쉬움 에 세이탄의 다른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토루반은 술을 퍼붓는 이유가 달라졌다. "우하하하핫! 어떤가? 시즈. 오늘 달빛은?" "환영하는 것 같군요." 밤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저택 앞은 밝았다. 시즈의 말처럼 달이 환영의 빛을 뿌려준 덕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힘차게 술잔을 부딪혔다.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 <에필로그> "그렇게 얘기는 끝을 맺는단다." "그럴 듯한 얘기로군요." "그렇지?" 창 밖을 바라보며 무심한 듯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은근히 동공 안쪽에는 기대가 숨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어나서 걸어보렴." "안 될 거에요." "노력해보렴." "선생님은 몰라요! 제 심정이 어떤지!" 소년은 화를 내고 소리쳤다. 하루라도 휠체어에서 벗어나기를 바래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다니고 싶 다는 소원은 모두 휠체어에 앉아서였다. 자신의 발이 땅에 닿기보다는 바퀴가 굴렀다. "어서 나가요! 꼴 보기도 싫다고요!" "그래그래. 미안하구나." 소년이 진정하지 못하고 난리를 치자 용기를 주려다가 실패한 사내는 당황하여 일어섰다. 담당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선 그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특이하게도 사내의 머리카락은 눈부신 은빛을 띄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도 머릿결이 상한다고 주저하는 탈색을 30대의 장년 사내가 돈을 들여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덕분에 흰 가운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보 였다.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달까? 그가 얘기하는 환상 속의 이야기는 정말로 일어난 것 같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내가 나간 방문을 힐끔 바라본 소년은 입을 삐죽거리며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뛰어 노 는 아이들. 뒤룩뒤룩 눈을 굴려보던 소년의 귀여운 입술이 벌어졌다. ‥‥. 밖에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의사는 무슨 일인지 히죽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서 궁금한 듯 그를 째려보는 수많은 간호사와 의사가 보였다. "아하하핫!"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복도로 사라지는 사내가 다음 날 다시 병실을 찾아갔을 때, 소년은 물었다. 홍조마저 띄고 있는 게 꽤나 용기를 낸 모습이었다. "노래를 가르쳐주세요." "그래‥. 그래. 가르쳐주지. 가르쳐주고 말고‥."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그에게 소년은 궁금한 게 생겼는지 다시 물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래, 뭐지?" "이야기 속에서 시즈는 현실에서 갔다고 했잖아요?" "그렇단다." "지금 이 곳에 살고 있나요?" "물론이란다. 있고 말고."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 "왜? 만나고 싶니?" "네." "그렇다면 말해주마‥. 후후‥. 시즈는 말이다. 바로‥" ‥당신입니다‥. 외전 세일피어론아드 신화. 내 이름은 가어르드. 신들 사이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전에 만든 세계에 '세일피어론아드'라는 이 름을 붙인 것도 이 몸이시지. 고작 2천억 년 정도의 찰나같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머리카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동안 가지고 논 게 꽤 정이 들었다. 참고로 위의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신들은 분위기 상의 문제를 들먹거리며 머리를 기르고 있어 인연도 만들기 쉽다. 그래서인지 발스크를 제외한 신들 은 서로에 대해 친목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왜 발스크만 따돌렸냐고? ‥ 그는 대머리다. 처음 세일피어론아드를 만들기 전, 신족들이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은 거대한 카오스, 혼돈 덩어리였다. 처음도 끝도 없고 뭐라고 정의내릴 수도 없는 존재를 지켜보는 게 신들의 일과였다. 아마도 수 천억년은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 자 지루해졌다. 결국 참을성이 없는 알르난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혼돈 덩어리를 한웅큼씩 뜯어내 이리저리 내던졌다. 자칭 순수함 의 화신이라고 우겨대는 녀석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끔찍스런 결백증 환자인 알르난이다. 녀석이 땡강을 부 리기 시작하자 세상이 온통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신들은 귀찮기만 한 어린애를 따돌리고 있던 발스크를 협박하 여 돌보도록 시켰다. 알르난은 심각한 결백증 때문인지 발스크의 깨끗한 대머리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털이 하나라 도 보이면 뽑아댔는데 그렇잖아도 수 억년에 한 가닥이 날락말락하는 발스크로서는 정신적으로 대단히 고통스러운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몇 십억년 만에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째질 듯한 비명으로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 오리하르콘 같은 머리카락!" "헤헤헤. 발스크, 이제 깨끗해졌어." "내 머리카락‥ 흑흑흑‥." 얼마나 원통했는지 발스크는 보기만에도 슬퍼질 정도로 흐느끼며 울어댔는데 그 눈물에는 발스크 특유의 기운인, 파멸의 힘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알르난은 발스크가 운다고 봐줄 신인가? 그가 쫓아다니자 발스크가 도망가며 흘 린 눈물이 알르난이 뜯어놓은 혼돈 덩어리에 떨어졌고 그 안에 포함된 파멸의 기운은 혼돈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혼돈을 지워버리고 순수하게 된 덩어리는 다들 신기해했다. 이게 바로 후의 세일피어론아드다. 신들은 카오스를 거 들떠보지도 않고 세일피어론아드 앞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렇게 또 수천억년이 지났다. 신들은 다시 혼돈으로 관심을 바꿨지만 단 한 명의 신은 달랐다. 그는 후에 대지의 신이라고 불리게 될 녀석으로 이름은 지아스였는데 언젠가 순수하기만 세일피어론아드가 뭔가 변화를 보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또 수천억년이 지났다. 아무리 참을성이 좋은 지아스였지만 더 이상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화가 난 그는 세일피어론아드를 힘껏 걷어찼는데 그 충격으로 세일피어론아드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뒤늦은 변화였으나 지아스를 달래기에는 모자랐다. 이 난폭한 신은 떡 두들기듯이 세일피어론아드를 밟아놓고 혼돈을 보러 가버렸다. 그러나 세일피어론아드는 그가 가버린 후에도 변화를 계속했다. 여기저기 뚫린 구멍으로 채액을 쏟기 시작한 것이 다. 뜨겁고도 끈끈한 붉은 액체는 세일피어론아드의 표면을 모두 덮어버렸고 천천히 굳어갔다. 지아스의 여동생인 여신 지아는 세일피어론아드보다는 지아스의 행동- 세일피어론아드를 차고 놀던 -이 흥미로웠다. 그녀는 뜨거운 세 일피어론아드를 식힌 후에 오라비가 하던 것처럼 힘껏 걷어찼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딱딱했다. 끈끈했던 붉은 액체가 굳으면서 엄청난 경도를 자랑했던 것이다. 아픔을 참지 못한 지아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어댔 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세일피어론아드를 다른 누구에게 뺏기기 싫은지 꼭 끌어안고 흐느꼈는데 그 눈물이 세일피 어론아드의 골짜기 사이를 모두 채우고도 남았다. 이제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울보가 바로 바다의 여신이다. 덕분에 바다는 짜다. 세일피어론아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신의 행위 때문이었다. 그는 테쿠르 라는 이 름의 신이었는데 어찌나 목욕을 안 하는지 반경 수 천킬로 미터에만 가도 코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테쿠르는 어 느 날 온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가능성이 전무한 결심을 하게 되는데 어떤 도구로 밀어봐도 때가 밀리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방법으로 세일피어론아드를 사용했는데 세일피어론아드는 축축한 물기가 있으면서도 딱딱하고 울퉁불퉁하여 때를 밀기에 최적의 도구였다. 나무 껍질 벗기듯 떨어져 나가는 때들이 어찌나 공포스러웠는지 신들 은 혼돈의 덩어리 뒤에 숨어서 그의 목욕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 더러운 놈이 바로 변화와 병마의 신이다. 대부분의 때가 혼돈 속으로 흘러 들어갔지만 세일피어론아드에는 약간 남아있었다. 테쿠르의 이름답게 약간의 때는 병균과 악성 바이러스 덩어리였다. 이 놈들이 따스한 바다에서 진화를 계속하여 플랑크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명 의 기초를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테쿠르의 때들이 혼돈에서 겨우 동화되었을 쯤 신들이 나와보니 세일피어론아드는 이미 초록빛깔의 숲과 푸른 바다를 형성하고 크고 작은 동물들이 산과 바다를 활보했다.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 다. 우리는 또 한동안 그것을 구경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알르난은 자신이 만든 세일피어론아드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는 세일피어 론아드를 처음 혼돈 덩어리에서 떼어낸 게 자신이기에 자기 것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해댔다. 하지만 신들은 이미 세일피어론아드를 지켜보는데 모두 관심이 쏠린 상태라 알르난의 땡깡도 소용이 없었다. 화가 난 그는 자신의 창조 물인 엘프를 시켜서 세계의 중심에 순수의 신전을 세운다. 신전은 신이 영향력을 전할 수 있는 통로. 당시의 세일피 어론아드는 신의 힘에 대한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결백증 환자의 영향력은 전세계에 미친다. 진화했던 모든 생 물들이 순수했던 초기단계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신들이 그 신전을 부수려고 했지만 이미 세일피어론아드는 알르난의 영향력 안에 들어서 다른 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달려가 발스크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발스크의 의지인 파멸은 단일 의지로서는 신 들이 태어난 혼돈에 제일 근접한 힘으로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신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 나씩 뽑아주며 그를 혼자 따돌리지 않을 맹세했다. 과연 발스크는 강했다. 그는 막 이빨 사이를 쑤시고 있던 이쑤시개를 순수의 신전 한가운데 꽂아버렸다. 그러자 순 수의 힘과 파멸의 힘이 뒤엉켜 영향력을 잃어버렸고 신들은 그 틈을 타서 신전과 이쑤시개를 없애버린다. 그 후로 따돌림을 당한 신은 알르난이었다. - 엘프의 장. 가장 먼저 창조된 엘프는 바로 결백증 환자인 알르난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세일피어론아드의 많은 생물을 보고 있 던 알르난은 자기의 의지가 담긴 생물을 그 가운데 놓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 그 호기심 때문 에 신들은 저마다의 의지가 담긴 생물을 모두 창조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알르난은 만드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몇 천년의 세월을 고생한 끝에 자신의 결백증을 담은 생물 을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후에 엘프라고 불리게 될 무척 깔끔한 척하는 존재가 태어난다. 알르난은 어린애였기에 자 신이 자랑스러운 장난감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다들 칭찬하고 축하해주기를 바랬는데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 는 발스크 이후에 다른 이의 머리칼을 뽑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거역하면‥ 안 된다. 다들 모여서 그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걸 축하해주었지만 그 새로운 생명에게 축복을 부여하는 이는 없었다. 알 르난의 극성 때문에 다들 기분이 좋은 상태로 온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놀기 좋아하는 '셀오리아'는 엘프의 순 수함을 노래하여 알르난에게 아부를 떤다. 기분이 좋아진 알르난은 그 날 불렀던 노래의 악보에 자신의 힘을 부여 하고 엘프에게 전해준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악보' 중의 하나 '순수한 악장'이다. 이 날, 셀오리아가 악보를 찾 지 않은 것은 단순히 게을러서였다. 이 빈둥대기 좋아하는 여자는 노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 일명, 놀보 였다. 그녀가 바로 후일 '유혹과 유흥의 여신'이라고 불리게 된다. 정말 이름은 잘 지었다. - 드워프와 드래곤의 장. 늘씬늘씬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엘프는 신들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나 단 한 명의 신만은 제외였다. 바로 세일피어론 아드를 마구 걷어찬 대지의 신 '지아스'였다. 그는 알르난과는 다르게 정교한 작업을 좋아하여 예술품이나 기구를 많이 만들었는데 예술품을 보는 눈과 인간들을 보는 눈은 정반대다. 그 때라고 다를 게 있나? 다들 엘프가 귀엽다고 난리였지만 지아스는 혼자 불만스러웠다. 그 당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면‥. "저게 어디가 아름답다는 거지? 팔과 다리는 유약하기 짝이 없고 가는 척주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절대로 효 율적일 것 같지 않아. 뼈가 통뼈인가하면 그것도 아니고, 근육이 많은가하면 그것도 아니야. 그런데 몸까지 길어서 앉았다 일어섰다하는 동선도 길쭉길쭉하니 그야말로 생기기는 더럽게 못생긴 게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신체적으로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생물을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드워프다. 엘프의 절반도 안 오는 키에 우룩부룩한 근육, 두꺼운 허리! 그야말로 지아스의 이상형이었지만 다른 신들에게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드워프들에게는 특별한 능력가 있었는데 창조를 닮아서인지 아름답고 정교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아스는 자기가 만든 물건은 절대로 남에게 주지 않는 고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들은 드 워프들이 건네준 뇌물에 홀짝 넘어간다. 결국 드워프는 세일피어론아드가 생긴 이래 유례없이 모든 신의 축복을 받 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만든 녀석의 기운이 워낙에 많이 남아있어서인지 원래의 성향에서 별로 변한 게 없다. 그 후로 자극을 받은 신들은 저마다의 의지를 담은 생물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부지런한 놈들 가운데는 게으른 놈 도 존재하는 법. 귀찮은 일을 하기보다는 공짜로 성과를 올리기를 원하는 신도 존재했다. 당연히 대머리 발스크였다. 힘으로 셀오리아를 협박한 발스크는 '멸망의 서곡'이라는 악보를 얻어내고 그 안에 자신의 의지를 심어 세일피어론 아드로 흘려보낸다. 그는 못생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강한 의지를 품기에 드워프가 제격이라고 여겼기에 악보는 그 대로 드워프에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보석을 파는데 정신이 팔려 악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멀리 내 던져버린다. 그 다음 '멸망의 서곡'을 존재는 우습게도 도마뱀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곱 가지의 선명한 색깔을 가진 도마뱀들 은 뱀만큼이나 교활한 존재였다. 그들은 악보에 적힌 데로 '멸망의 서곡'을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춤이 끝 날 때쯤 되자 그들의 발걸음에 땅이 흔들렸고 숨에 불꽃이 새어나왔다. 머리 속에는 엘프들이 꿈에 그리며 연구하 던 마법의 절대경지가 심어졌고 비늘은 독수리의 부리로 수백만번을 찍혀도 흠짓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 다. 이들이 바로 드래곤이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7마리의 드래곤 중에 2 마리만이 암컷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마리 가 행복한 가정을 꾸릴 때 남은 세 드래곤은 30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눈물을 머금고 고독 속에 보내야 했다. - 인간의 장 인간은 누가 만들었다고 하기가 곤란한 존재다. 많은 신들이 엘프처럼 아름답고, 드워프처럼 유능한 창조물을 만들 기 위해 노력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 전 발스크의-드워프를 자신의 창조물화 시키려던- 모략이 있 은 후로는 알르난과 지아스가 공동으로 성명서를 냈기 때문이다. "남의 것 가지고 이상한지 하면 머리털 다 뽑는다." 여기서의 이상한 짓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최후의 방법은 능력껏 만드는 것 뿐. 알르난과 지아스, 그리고 발스크를 제외한 신들은 결국 능력을 모으기로 결정한다. 아예 분배를 해버린 것이다. "머리는 '태양과 까마귀의 써헤그', 팔은 '달과 토끼의 셀룬', 다리는‥ ‥‥" 그런 식으로 가장 자신 있는 부위를 맡자 각자에 대한 부담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모두 담당했던 부분이 만들 어지자 한 군데 모아서 짜집기를 한다. 짜집기 담당은 '물의 여신 지아'였다. 이처럼 많은 신들의 합동작업으로 만 들어진 게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참여인원이 너무나 많았고 부분별로 나누어져 있는지라 누구의 창조물이 라고 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리하여 셀오리아가 인간을 축복할 때 노래를 부르고 악보를 만들기를 곡의 이름을 '불안한 자유'라고 한다. - 이 이야기는 레이모하의 신전에서 낮잠을 자던 중 꾸웠던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내용이 다. 날 믿어라. 끝